원시인은 살아있다.
윤수천
원시인 소동
학교에 원시인이 나타났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소문이 나돌기 기작한 것은 겨울
방학을 보름 앞돈 토요일 아침이었다.
어제 저녁 숙직을 했던 안영모 선생님이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이다.
거의 12시가 되어 갈 무렵, 학교 안을 둘러보기 위해 손전등을 켜 들고 마악 숙직실을 나서려
고 할 때였다고 한다. 과학실 쪽에서 온몸에 털이 난 사람이 후닥닥 튀어 나오더니 황급히 뒷산
으로 달아나더라는 것이었다.
안영모 선생님은 그 사람이 원시인이 틀림없다고 했다.
“틀림없는 원시인이었어요! 온몸에 털이 난 것도 그랬고, 두발로 걷는 것도 우리와 똑같었어
요.”
안영모 선생님은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오전 내내 상기된 얼굴로 늘어놓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생님들은 안영모 선생님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껄껄껄 웃으며 안영모 선생님을 노려댔다.
“안 선생, 뭣에 단단히 홀렸던 게 아니오? 요즘 같은 세상에 원시인이라니?”
이렇게 코방귀를 뀌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선생님은,
“예끼, 거짓말두! 원시인이 나타난 게 아니라 개나 늑대를 잘못 보았겠지.”
하고 무질러 버리기도 했다.
운동장만한 이마를 가진 교장 선생님은 아예 안영모 선생님을 교장실로 불러 들여
점잖게 꾸짓기까지 했다.
“이거 봐요, 안 선생! 거 쓰데없는 소문 좀 퍼뜨리지 말아요. 원시인이 우리 학교에
나타났다니 대체 그게 곧이나 들리는 말이요? 그렇잖아도 학교 뒤가 산이라고 저녁때면 아이들이
무섭다고 하는데....”
교장 선생님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학교 뒷산은 우람한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대낮에도 어둠침침한 게
무섬증이 일었다.
거기에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내리면 도깨비들이 산꼭대기에 모여 돌팜매질을 한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뒷산’하면 다들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런 소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저녁때만 되면 정말 뒷산 쪽에선 돌멩이 떨어지는소리가 들리곤 했다.
안영모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고 나왔다는 소문과 함께 원시인
출현은 삽시간에 학교 안에 퍼져 나갔다.
원시인을 본 사람이 ‘생물학 박사’로 통하는 안영모 선생님이라는 것이 우리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안영모 선생님이 보셨대! 그사람은 몸에 털이 수북이나고 우리처럼 두 발로 걸었대!”
“그래, 맞아! 생물학 박사님이 보셨다면 틀림없을 거야. 원시인이 틀림없어!”
“앤 무슨 말을 하니? 그래, 정말로 원시인이 있단 말이니? 선생님이 잘못 보신
거라구.”
우리들은 수업 시간에도 원시인 이야기로 흥분을 했다. 도서실에서 빌려 온 원시인에 관한 책
을 펼쳐 놓고 토론까지 벌였다.
원시인이 있다느니, 원시인은 없다느니 해 가며 두 편으로 갈라져 목청들을 높였던
것이다.
이런 다투은 우리 삼총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동훈이는 이 세상 어딘가에
원시인이 아직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반면에, 안경을 낀 성치는 원시인은 없다고
했다.
이래서 그 날 오후 우리 삼총사들은 원시인을 보았다는 안영모 선생님의 하숙방을
찾아갔다. 박사님은 우리들이 올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맞아 주었다.
“선생님, 정말로 원시인이 있어요?”
우리들은 인사도 생략한 채 다짜고짜로 그것부터 물었다.
“너희들도 나를 의심하는 거냐?”
안영모 선생님은 몹시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50만 년 전의 원시인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원숭이라면 또
몰라도 말예요..”
“엄격히 따지자면 원숭이도 우리 인간과 같은 계열이란다. 이런 것들을 가리며
영장류라고 하지. 원숭이들은 대단히 발달한 뇌와 잘 움직이는 손가락을 가지고 있거든.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원숭이가 아니라 틀림없는 원시인이었어.“
안영모 선생님은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들이 마셨다고 후-- 하고 길게 내뿜었다.
담배 연기가 구름을 이루며 달려간 벽에 원시인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은 벌써 몇 해째
나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그림이기도 했다.
벽의 원시인은 지금 두 발로 우뚝 일어섯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막 떼어 놓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얼굴을 약간 위로 쳐든 것을 보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 원시인은 먼 길을 가려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들의 눈을 잡아 끄는 것은 원시인의 긴 팔과 슬픔을 띠고 있는 눈빛이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두 팔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반면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은 어딘가 슬픔을 띠고 있어서 퍽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선생님께서 보셨다는 그 사람이 혹시 고릴라가 아닐까요? 만화책에서 봤는데 고릴라랑 원시인
은 모습이 비슷하던데요.”
내년이면 중학교에 갈 녀석이 무슨 만화책이냐고 할까 봐 나는 말을 하고 나서도 목을 움츠렸
다. 그러나 안영모 선생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그럴지도 모르지, 고릴라와 원시인은 비슷한 점이 많으니까.”하고 말했다.
“선생님, 원시인이든 고릴라든 말예요, 왜 하필이면 우리 학교에 나타났을까요? 그리고 뒷산으로
달아났다면 어디로 갔을까요?”
이번에는 성치가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글쎄다, 선생님도 그걸 모르겠다. 뭣 하러 우리 학교엘 찾아왔는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다.”
“혹시 먹을 것을 찾으러 왔던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원시인이 우리 학교를 식당으로 잘못알았을지도 모르니까.”
식당이란 말데 우리 셋은 소리내어 웃었다.
“선생님, 저는 그런 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어요.”
나는 그림 속의 원시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냐?”
안영모 선생님은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보셨다는 털사람이 만약 원시인이 틀림없다면 말예요, 그 원시인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게 궁금해요.”
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 그러자 안영모 선생님은,
“선생님도 창옥이와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도
많으니까 그 문제는 일단 수수께끼로 남겨 두자. 단지 너희들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젯밤 선ㄴ생님이 이 눈으로 똑똑히 원시인을 봤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으로는 뒷산으로 달아난 원시인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어떠냐? 내일 아침 뒷산 쪽을 탐색해 볼까 하는데 너희들도 함께 가지 않겠니?”
하고 우리들에게 물었다.
우린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원시인의 숨소리를 들었다. 학교 뒷산 쪽에서, 마을
회관에서, 그런가 하면 농협 창고가 있는 공터에서.... 원시인의 숨소리는 그렇게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물론 이것은 나의 착각에 의한 것이었지만,
‘원시인은 살아 있다!’
나는 점차 이상한 기분으로 빠져 들어갔다.
50만 년 전의 원시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그렇다면 과연 그 원시인은 어떻게 살아 왔는가?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가? 그리고 더욱 굼금한 것은,
다른 원시인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진화를 했는데 이 원시인만이 50만 년 전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대체 어찌된 노릇인가? 이 원시인은 진화를 거부했단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자니 안영모 선생님의 하숙방에 걸려있는 원시인이 머리 속에서
자꾸 맴돌았다.
그와 함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긴 팔과 슬픈 바ㅊ을 띤 원시인의 눈빛도 아른거렸다.
그 날 밤 내내 원시인의 숨소리는 그렇게 여러 군데서 들려 왔다.
사라진 음식물
이튼날 안영모 선생님과 함께 뒷산을 탐색하던 우리는 동굴 안에서 참으로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누군가 먹다 만 듯한 생선 찌꺼기와 통조림이 여러 개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원시인이닷!”
우리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놀라 소릴 질렀다.
쇠기둥에 받혔을 때처럼 갑자기 머리가 띵해 왔다.
우리들이 놀람과 경이에 차서 장승처럼 서 있을 동안 안영모 선생님은 허리를 구부리고 널려
있는 음식물 찌꺼기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틀림없다! 원시인이 아니고서는 이런 날고기를 먹을 리가 없다!”
안영모 선생님은 통조림 한 개를 들고 일어서더니 우리들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좀 봐라! 뚜껑을 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구나.”
그러고 보니 정말이지 통조림통엔 여러 개의 이빨 자국이나 있었다. 다른 통조림 역시 마찬가
지였다.
“이제야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 원시인은 어느 상점에선가 통조림을 훔쳐 이 동굴까지 가져왔
을 것이고, 이빨고 뚜껑을 열려고 했던 게 틀림없다.”
“선생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원시인이 어떻게 이 통조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매상에 의문을 가지고 덤비는 성치가 이번에도 제일 먼저 나서며 물었다.
“그야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원시인의 후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발달해
있을 테니까. 마치 개미나 두더지 같은 동물들이 지각의 변화를 예측해 내는 능력에
비긴다고나 할까? 아무튼 원시인은 이 통조림이 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 동굴까지 가지고
왔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뚜껑을 여는 데는 실패했어.”
안영모 선생님은 통조림통에 나 있는 원시인의 이빨 자국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그 때 동훈이가 안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선생님, 저기 좀 보세요! 나뭇잎더미예요. 원시인이 나뭇잎을 긁어 모아 놓았어요!”
정말 어둠침침한 한쪽 구석에 나뭇잎더미가 쌍여 있는게 보였다.
“그렇구나, 원시인의 잠자리다!”
안영모 선생님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그렇다면 원시인은 지금쯤 어디 있을까요? 어디론가 달아난 게 아닐까요.”
동훈이는 원시인의 거취가 자못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먼 곳으로 달아나기라도
했다면 어쩌나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것은 성치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자!”
선생님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원시인이 이 동굴 안에서 기거한다는 사실은 일단 우리 넷만 아는 일로 해 두자.
그래야만 원시인이 안전할 수가 있다. 약속할 수 있겠지?”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됐다. 이제 모두 이 동굴을 나가자.”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을 재촉했다.
“선생님, 원시인을 한 번 보고 갔으면 좋겠어요. 멀리서라도 말이에요.”
나는 흥분을 삭이며 말했다.
“그럴 테지. 그러나 오늘은 이 통조림통과 나뭇잎더미만으로 만족하자. 원시인의
거처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수확이잖니? 그리고 말이다, 원시인이 우리들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도 실은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안영모 선생님은 마치 행방이 불명되었던 친구를 찾기나 한 둣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 원시인이 멀리 도망이라도 갔으면 어떡하지요?“
“그럴 리 없다. 이 동굴 근처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들이 어서 이 곳을 떠나길 기다리고 있을 거
야. 원시인들은 현대인을 보면 두려운 나머지 몸을 피할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연구 논문에도
나와 있지. 이 점은 고릴라도 마찬가지란다. 우리들은 예로부터
고릴라를 사나운 동물로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면 고릴라만큼 순한 동물도 없다.
고릴라는 생명을 위협 받을 때말고는 싸우기보다 오히려 도망치는 편을 택하는
평화주의자란다.”
우리들은 조심스레 동굴을 나와 산을 내려갔다.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 사이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눈골의 초겨울 눈은 언제나 그렇게 내린다. 나비가 춤을추듯 사뿐사뿐 내려온다.
그러다가 한 번 제대로 내렸다 하면 그 때부터는 무지한 폭설이다. 무릎이 빠지는 것은 예사이고
허리까지 빠지는 경우도 생긴다. 강원도의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강원도에서도 눈골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마을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눈골이다. 쏟아졌다 하면 며칠은 거침없이 퍼붓기도 한다.
이렇게 내린 눈은 눈골을 시작으로 해서 강원도의 모든것을 꼼짝 못 하게 가둬 놓는다. 길이
란 길은 통행이 불가능해지고, 산짐승들은 먹이를 찾지 못해 마을로 내려오거나 굶어 죽기도 한
다. 그래서 어른들은 우리들과는 달리 폭설이 내리는 겨울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긴다.
동굴 안에서 한 약속대로 우리 삼총사들은 통조림과 나뭇잎더미의 비밀을 입 밖에 내지 않았
다.
안영모 선생님이 보았다는 털사람이 원시인인지 뭔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지만 비밀을 지킴으로
써 그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대신 우리는 원시인의 식사가 될 만한 것들을 뒷산 바위나 나뭇가지에 걸어 주었다. 통조림은
뚜껑을 반쯤 딴 후 다시 닫아 놓았다.
다음날 오후, 우리들은 다시 뒷산에 가 보았다.
“그대로 있잖아?”
동훈이가 통조림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더 기다려 보자!”
우리들은 산을 내려와 교무실로 갔다.
안영모 선생님은 마침 퇴근을 하려는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제 그대로예요.”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번의 제안은 내가 내놓은 것이었다.
“더 기다려 봐라. 원시인이 어제의 일로 단단히 겁을 먹은 모양이다. 정 배가 고프면 슬슬 거
동을 하겠지.”
“선생님, 원시인이 멀리 도망을 간 건 아닐까요?”
“그걸 낸들 알 수가 있나. 그러니까 기다려 보자는 게 아니냐?”
안영모 선생님은 그러고 나더니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나가 봐야겠다. 너희들은 더 있다가 갈 거냐?”
안영모 선생님의 말에 우린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머뭇머뭇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을 남겨 놓은 채, 교무실을 나가버렸다.
“오늘은 박사님이 이상해 보인다, 그렇지?”
성치가 한 마디 했다.
“바쁜 일이 있으시댔잖아.”
“혹시 서울에서 단발 머리 선생님이 오신 건 아닐까?”
단발 머리 선생님이란 안영모 선생님의 약혼자를 말했다.
대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는데 늘 단발 머리를 하고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야 모르지, 대학교는 방학을 일찍 한다니까. 그건 그렇고 성치야, 넌 어른들의 일에 왜 그리
관심이 많니?”
동훈이가 핀잔을 주었다.
“박사님을 존경하니까 그렇지. 그런데 얘들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그렇잖
니?”
성치가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렸다.
“뭐가?”
“우리생물학 박사님의 어디가 좋다고 단발 머리 선생님이 쏙 빠지셨을까?”
“이젠 그게 궁금하니?”
“그렇잖아? 늘 푸석푸석한 머리에다 무릎이 나온 바지만 입으시구. 그런데도 단발 머리 선생님
이 깜빡 죽이니 말이야.”
성치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듯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렸다.
“너희들 그걸 이제까지 몰랐구나.”
나는 점잖게 성치와 동훈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고로 여자란 말이지, 모성애를 지니고 있다 이 말씀이야. 그래서 불쌍한 것을 보면 도와 주
고 싶어하고, 뭔가모자란다 싶으면 채워 주고 싶어하는 게 여자라 이 말이다.
고로, 단발 머리 선생님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반면에 허술한 점이 많은 박사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말씀이지.“
나의 말에 성치와 동훈이는 허리를 쥐고 웃었다.
“야아, 이제 보니 창옥이 너도 박사 다 됐구나. 언제 그런 걸 다 배웠니?”
동훈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이지 뭘.”
나는 팔짱을 낀 채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동훈이와 성치는 그런 나를 보더니 또 한번 배를 쥐고 웃었다.
“자,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그런데 박사님께서 보셨다는 털북숭이가 정말로
원시인일까?”
한참이나 배를 쥐고 난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글쎄....?”
동훈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음날 오후, 뒷산에 올라갔던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통조림과 과일, 채소 등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었다.
“히야, 드디어 다녀가셨다! 배가 몹시 고팠던 모양이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져갔다!”
우리들은 무슨 큰 일이나 해낸 듯이 껑충껑충 뛰었다.
“야, 안영모 선생님은 역시 박사님이다. 쪽집게처럼 맞췄잖아?”
우리는 동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마을로 내려가 상점에서 통조림과 과일 등을 사가지고 다시 뒷산으로
올라갔다.
“이거 원시인 아저씨 밥값도 꽤 드는데.... 이러다간 며칠 안 가 저금통이
바닥나겠다.”
나뭇가지 위에다 통조림을 올려놓으며 동훈이가 말했다.
“정말, 우리 저금통이 바닥나면 어떡하지? 원시인 아저씨를 굶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성치가 걱정을 했다.
“원시인 돕기 운동을 벌이자!”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나는 농담삼아 한 말이었느데, 성치와 동훈이는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와, 이번 겨울 방학엔 마지막 방학답게 아주 멋진 추억거리를 만들자!”
동훈이가 연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떤 방밥이 좋을까?”
성치가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동훈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게시판 사건
“원시인 아저씨가 우리 학교에 나타난 것도 따지고 보면 인연이라고 생가되지 않니?
그래서 말인데, 원시인 아저씨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면 어떨까?”
동훈이는 자기의 생각이 어떠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돈을 모으는 일은 자칫 오해를 살지도 모르니까
통조림이나 과일 같은 것을 직접 가져오도록 하자. 아무튼 이 문제는 박사님과 먼저
의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니?”
“참, 그러고 보니 통조림이 없어진 것도 말씀 안 드렸잖아!”
“그렇구나, 정말!”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소리쳤다.
“어서 가서 보고를 드리자!”
우리들은 쏜살같이 산을 내려가 들판을 가로질러 뛰었다.
서서히 어둠이 동네로 모여들고 있었다. 간간이 개가 짖는 소리도 났다. 마을의
저녁은 언제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굴뚝에서 나는 저녁 연기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들은 동네 입구로 들어섰다. 뛰어오느라 다들 숨이차서 헉헉댔다. 안영모
선생님이 하숙하고 있는 집은 동네어서도 맨 끄트머리에 있었다.
"학교에 계시는 건 아닐까?“
성치가 숨찬 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우리는 교무실에 들려 보지 않고 온 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설마 여태까지 되근을 안 하셨을라고. 참, 너희들 어제 단발 머리 선생님이 다녀가신 거 모르
지?”
동훈이가 목소리를 낮춰 가지고 말했다. 단발 머리 선생님은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언제나
들른 그 날로 올라가곤 한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박사님이 어제 허둥대신 건 단발 머리 선생님이 오셨기
때문이었어.”
성치의 말에 동훈이와 나는 별 까닭도 없이 키득거렸다.
박사님과 단발 머리 선생님 얘기만 나오면 왜 그런 웃음이 나오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더라. 배웅을 나가시는 박사님 얼굴을 보니까 잔뜩 화가 나 있던데.
단발 머리 선생님도 그렇고.“
“싸우셨나?”
성치의 말에 우리들은 아까보다 더 크게 키득거렸다.
“어른들도 싸움을 하니?”
동훈이가 핀잔을 주었다.
“너희들 잘 모르는구나. 어른둘은 우리들보다 더 잘 싸운다?”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싸움 말이야.”
나는 수수께끼를 내듯 말했다.
“그게 뭔데?”
“사랑 싸움.”
우리들은 우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안영모 선생님의 하숙방은 잠겨 있었다. 아직까지도 교무실에 계신 게 틀림없었다.
좀더 기다려 보자느니, 학교로 가자느니 해 가며 실랑이를 벌이는데 저벅저벅 구두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었구나. 들어가지 않고 뭣들 하고 있어?”
안영모 선생님이었다.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내 정신 좀 보아라!”
안영모 선생님은 급히 주머니ㄹ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어서
들어가라는 듯 방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선생님, 뒷산에 놓았던 통조림과 과일들이 없어진 거 아세요?”
“그래애?”
“깨끗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다시 그 자리에다 밥상을 차려 놓고 왔는걸요.”
동훈이가 말했다.
“그랬구나? 아주 큰일들을 했구나. 자,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안영모 선생님은 코치가 선수를 감싸안듯 팔을 벌려 우리들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래, 깨끗이 없어졌더란 말이지?”
방문을 닫으면서 안영모 선생님은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물었다.
“네, 통조림이랑 과일이랑 몽땅 가져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나는 벽면의 원시인을 바라보며 안영모 선생님이 보셨다는 원시인도 저렇게 생겼을까 생각했
다.
“뭐냐?”
“사실은 원시인 아저씨의 밥값이 걱정이에요. 며칠이라면 모르겠는데 앞으로 계속
원시인 아저씨의 식사를 마련하려면 아무래도 저희들 힘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저희들이 의논을 했는데 원시인 아저씨 돕기 운동을 벌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 문
제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의 물음에 안영모 선생님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기특한 생각이다. 너희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안영모 선생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들은 학교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붙였다.
어린이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며칠 전 우리 하교를 방문해 준 원시인 아저씨를 돕고자 합니다.
생선 통조림도 좋고, 과일이나 빵도 좋습니다. 그러나 빵이나 우유 같은 것은 신선한 것이 아
니면 원시인 아저씨가 배탈이 날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것을 가져올 때에는 만든 날짜를 꼭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
친구들의 협조를 부탁합니다.
알리는 사람: 6학년 1반 박성치, 서동훈, 윤창옥
“야, 이거 우리가 갑자기 무슨 유명 인사라도 된 것 같은데.”
동훈이가 게시판을 쳐다보녀 낄낄거렸다.
“아이들이 이 글을 보고 나서 뭐라고 할까?”
성치는 그게 궁금하다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기다려 보자. 좋은 일을 하자는 거니까 성과가 있겠지, 안 그러니?”
나는 성치와 동훈이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런데 오전이 채 가기도 전에 우리들은 이 일로 교장실로 불려 가고 말았다.
우리들이 교장실 문을 열었을 때 교장 선생님은 눈을 잔뜩 부라린 채, 들어서는 우리 셋을 뚫
어져라고 바라보았다.
“내 너희들인 줄 알았다. 평소에도 셋이서 꼭 붙어다니는걸 여러 번 내 눈으로 봤단
말이다.“
교장 선생님은 머리카락도 없는 이마를 몇 번 쓸어 넘기더니 내 앞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가 윤창옥, 맞지?”
“네.”
교장 선생님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왼편으로 움직였다.
“넌 박성치고?”
“네.”
“저는 서동훈입니다.”
동훈이가 묻지도 않은 자기 이름을 대었다.
교장 선생님의 눈꼬리가 또 한번 확 치켜 올라갔다.
“햐, 요놈 봐라. 무슨 칭찬받을 일이나 한 듯이 당당하구나. 그래, 게시판에다 통조림 가져오라
고 써서 붙인 건 너희들이 틀림없지?”
“네, 틀림없습니다.”
내가 대답을 했다.
“누구한테 허락 받고 붙였지?”
“그건....”
안영모 선생님 이름을 댈까 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난 번에도 원시인을 봤다는 일로 해서 안영모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에게 단단히
꾸중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안영모 선생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번엔
정말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말을 해 보아라!”
나는 교장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어서 말을 해 보라니까!”
“학교 게시판은 저희들이 보라고 만든 판입니다.”
“그래서?”
“굳이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눈이 황소 눈만큼이나 커졌다.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네, 저도 창옥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 사생대회도 그랬고, 문예반 행사 때도 그랬
습니다. 선생님의 허락을 안 받고 붙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동훈이가 끼어들었다.
“허허, 듣던 대로 맹랑한 놈들이군!”
교장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찼다.
“그 때하고 지금하고 어떻게 같다는 생각이 드나? 사생대회나 문예반 해사 같은 건
수업의 연장이라 학교에서 허락을 해 주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붙인 것은 학생들에게
물건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바꿔 말을 하자면 돈을 걷겠다는 얘기가 된다. 돈 걷는 일을 너희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냐?”
교장 선생님은 참으로 맹랑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교장 선생님, 이것은 원시인 아저씨를 돕자는 일입니다. 원시인 아저씨를 굶길 수는
없지 않겠어요?”
“원시인 아저씨라? 마치 너희들의 아저씨라도 된다는 말투로구나. 아무튼 좋다. 게시판 사건은
교무 회의에서 결정이 날 때까지는 보류다. 그건 그렇고, 이 맹랑한 녀석들아!”
교장 선생님은 자리에에서 벌떡 이러나더니 뒷짐을 지고 장가를 왔다갔다했다.
그러더니 불쑥,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시인이 있다고 믿느냐?”
하고 물었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껌벅였다.
“왜 대답을 못하지?”
교장 선생님은 걸음을 딱 멈춘 채, 우리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재미있는 조사
“원시인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안영모 선생님의 말을 믿는다, 이 말이냐?”
“그것말고 또 있습니다.”
나의 말에 교장 선생님은 놀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뒷산에 놓아둔 통조림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동굴 안의 나뭇잎더미와 통조림통의 이빨주국은 말하지 않았다.
“그게 원시인의 짓이라는 말이냐?”
교장 선생님은 갑자기 허허허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너희들, 나를 바보로 만들 셈이냐?’ 하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알았다, 그만들 나가 보아라.”
이윽고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나가도 좋다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교무 회의에서 통과가 될까?”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동훈이와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
우리들의 입에서는 자신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원시인 아저씨를 돕자는 제안이 교무 회의에서 통과되기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우리들에겐 참으로 이상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설문지 한 장씩이
배부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반에만 배부된 것이 아니라 전교생에게
돌려진 설문지였다.
설문지의 내용은 모두 다석개의 항으로 되어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자 함. 아래 항을 읽고 솔직이 답하여 주기 바람.
* 어린이 여러분은 원시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 있다. 나. 없다. 다. 잘 모르겠다.
* 어린이 여러분은 원시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 무섭다. 나. 무섭지 않다.
* 원시인은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가.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그렇지 않다.
다. 모르겠다.
* 만약 원시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 동물원에 넣어 많은 사람이 구경할 수 있게 하겠다.
나. 원시인에게 살 집을 지어 주고 함께 지내겠다.
다. 그 때 가 보아야 알겠다.
* 원시인이 여러분에게 친구가 되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 좋은 친구가 되겠다.
나. 싫다고 거절하겠다.
다. 생각해 보아야겠다.
설문지 내용을 본 우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학교에 입학한 이래 이렇게
재미있는 문제지를 받아 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신바람이 나서 문제지에 답을 써넣었다.
“우리들의 시험지에도 이런 문제만 들어 있으면 좋겠다!”
“정말, 이런 문제면 나도 우등생이 될 수 있어.”
우리들은 교실이 떠나갈 듯 소리를 쳤다.
“그런데 얘들아, 오늘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갑자기 이런 문제지를 다 돌리고.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사건이다!”
“맞다, 사건 중에서도 대형 사건이다! 호랑이 교장 선생님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우리들은 계속 떠들어댔다.
며칠 후, 학교 게시판에는 지난 번의 설문에 대한 결과가 밭어 있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와 있었다.
*지난 번 실시했던 원시인에 관한 설문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음.
1.
* 원시인이 있다고 대답한 어린이...396명
* 원시인이 없다고 대답한 어린이...146명
*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어린이...171명
2.
* 원시인이 무섭다고 대답한 어린이...56명
* 원시인이 무섭지 않다고 대답한 어린이...657명
3.
* 원시인은 현대인을 무서워한다고 대답한 어린이...342명
*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어린이...103명
* 모르겠다고 대답한 어린이...268명
4.
* 원시인을 동물원에 넣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 어린이...43명
* 살 집을 지어 주고고 함께 지내겠다고 대답한 어린이...601명
* 그 때 가 보아야 알겠다고 대답한 어린이...69명
5.
* 원시인과 좋은 친구가 되겠다고 대답한 어린이...539명
* 싫다고 거절한 어린이...25명
*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대답한 어린이...149명
그 날 저녁 우리 삼총사들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선생님의 하숙방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물론 설문 결과를 놓고 벌인 토론이었다. 그리고 토론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많은 어린이들은 이 지구상 어딘가에 아직도 원시인이 살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원시인에 대한 공포감보다는 친구로서 지내고 싶어한다. 또한 원시인이
나타난다면 살 집을 지어 주고 함께 지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원시인의 입장에서 본 어린이들의 생각이다. 원시인은
현대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원시인이
현대인을 무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안영모 선생님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사실 이번 조사는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께 특별히 부탁을 해서 실시한 것이었다.”
라고 털어 놓았다.
“대강 짐작은 했어요, 선생님.”
내가 말했다.
사실, 박사님이 아니고서는 그런 이색적인 설문지를 만드실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만약 이번에 실시했던 조사를 어른들에게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음..., 아주 재미있는 질문이다. 여기 마침 좋은 자료가 있다.”
안영모 선생님은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누렇게 바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선생님이 대학 시절에 심심풀이로 조사한 자료다. 크게 믿을 만한 건 못 되지만 이번의
조사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게다.”
그리고 나서 안영모 선생님은 노트를 넘겼다.
“여기 있구나. 대학생 백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다. 한번 읽어 보겠니?”
“네.”
우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영모 선생님이 건네준 노트를 받아 들었다.
원시인에 관한 대학생 100인의 대답.
* 당신은 원시인이 생존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 생존하고 있다...2명
나. 생존하지 않는다...91명
다. 모르겠다...7명
* 원시인은 현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가. 두려워할 것이다...83명
나. 친근하게 생각할 것이다...5명
다. 모르겠다...12명
* 당신의 이웃에 원시인이 나타난다면?
가. 연구 기관에 넘겨 연구 자료로 만들겠다...31명
나. 동물원으로 안내하겠다...47명
다. 숙소를 마련해서 이웃에 살게 하겠다...3명
라. 그 때 가 보아야 알겠다...19명
* 만약 당신이 원시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를 만든다면?
가. 공포 영화를 만들겠다...66명
나. 코미디 영화를 만들겠다...18명
다. 생각해 보아야겠다...16명
* 당신은 원시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 될 수 있다...5명
나. 어렵다고 본다...83명
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12명
노트를 보고 난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내용이 아주 재미있었다.
“너희들의 설문 결과와 이 노트의 내용과 어떤 차이점을 느꼈지?”
노트를 서럽 속에 넣으며 안영모 선생님이 물었다.
“저는 이런 것을 느꼈어요. 우리들은 원시인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생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고고 있지 않아요. 원시인이 있다고 믿지도 않고.”
성치는 그런 것들이 궁금한 모양이었따.
“저는 대학생들에게 실말했어요. 원시인을 원숭이나 무슨 짐승처럼 생각하고 있잖아요? 연구
기관에 보낸다는 것도 그렇고, 동물원에 보내겠다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어요. 원시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어요?”
동훈이는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불빛 탓인지 몹시 호가 난 둣이 보였다.
“창옥이 넌?”
안영모 선생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성치나 동훈이의 의견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원시인을 아저씨나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는
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아요. 단 한 가지 생각만은 같았어요. 우리들이나 어른들
모두가 원시인이 인간들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생각은 같았어요.”
우리들 말을 듣고 난 안영모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야기들이다. 뒷산의 원시인이 방금 너희들이 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안영모 선생님은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뽑아 들었다.
초록색의 표지에 ‘영장류 연구’란 글씨가 금색으로 씌어 있었다.
그 책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번 단발 머리
선생님이 이 곳을 다니러 왔을때, 서울에서 사 들고 온 게 틀림없었다.
“눈도 내리고 하니 우리 오늘 밤은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며 보내는 게 어떻겠니?”
안양모 선생님은 우리들 앞으로 무릎을 당겨 앉으며 말했다.
“네, 좋아요 션생님. 이왕이면 지금 꺼내신 영중류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세요. 저희들은 영장류
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나무 많거든요.”
우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사님을 쳐다보았다.
밖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밤은 깊어 갔다.
눈 위의 발자국
그 날 밤 우리들은 박사님의 하숙방에서 잤다. 다음날이 일요일이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안영모 선생님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영장류란 무엇인가? 또한 그 출발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흔히 사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유인원은 언제 나타났으며, 그 진화 과정은 어떠했는가?
안영모 선생님의 말은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한 신선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비록 몇백만 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 당장 일어난 것처럼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안영모 선생님의 이야기 솜씨가 우리들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놀랍다는 것을 안
것도 그 날 밤이었다.
안영모 선생님은 마치 동화 구연 대회에 나간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과 동작을 해
보이며 처음서부터 끝까지 우리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 몸 안에는 지금도 원숭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은 한 번에 아기를 한 명씩 낳지? 이것은 원숭이나 유인원도 마찬가
지다. 원숭이가 언제부터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다만 나무 위의 생
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한 마리의 새끼를 낳게 되었다고 본다. 나무
위에서 한 마리의 새끼를 낳게 되었다고 본다. 나무위에서생활을 하려면 많은 새끼를
기르기는 힘들기 때문이지. 또 언제 갑작스러운 위험을 당하여 달아나게 될지도
모르고.... 이러한 출산 양식과 함께 어미 원숭이와 어린 원숭이 사이에 볼 수 있는
특수한 모성애 역시 우리 인간과 나무나도 비슷해. 너희들도 경험을 해서 알 것이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품에 있거나 등에 업혔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원숭이 새끼들이 자기 어미의 배에 매달리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
나, 너희들이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것 역시 원숭이들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어. 원숭이들이 나무와 나무사이를 건너 뛰거나 가지에 매달려
놀던 장난들이 너희들의 많은 놀이를 탄생시킨 셈이지. 그런데 그렇게 장난이
심한 너희들도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되면 어릴 때 가졌던 그 장난기는 자기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말지. 그러다가 세월이 더 흘러 나이가 많아지면 쓸쓸해지고
고독해지지. 알고 보년 인간의 이런 쓸쓸함이나 고독감은 원숭이게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 증
거로 ‘숲사람’이란 별명을 가진 오랑우탄의 구슬픈 표정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오랑우탕이
란 원숭이의 일종인데 다른 유인원과 비교하여 볼 때 거의 베일에 싸여 있는 신비의 동물이야.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선생님 어떤 까닭인데요?”
동훈이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들이 사는 장소는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정글 속인데다가 아주 겁이 많기 때문이다. 재미
있는 것은 오랑우탄은 어릴 때는 아주 행동적이며 놀기를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면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 왜 오랑우탄이 턱수염을 기르고 고독한 생활을 하는가는 아직
수수께끼다. 야생 상태의 생화이 좀더 광범위하게 연구되어야만 알게 될 문제인데, 어디 너희들
이 한 번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보지 않겠느냐?”
나는 안양모 선생님의 말을 듣는 동안 줄곧 벽면의 원시인을 바라보았다. 박사님이
벽에다 원시인 그림을 사시 사철 걸어 놓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우리들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박사님이 우리들에게 ‘이제 그만
자자.’ 라고 하지 않았으면 꼬박 밤을 새웠을 것이다.
밤새 내린 눈은 우리들의 발목 위까지 쌓여 있었다. 염치도 좋게 우리들은 아침까지
먹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성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새벽녘에 박사님이 보이시지 않더라.”
성치는 잠자리를 옮기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지난 번 수학 여향 때도 밤새도록 보초를 섰다고 투덜거렸다.
“화장실에 갔다오셨겠지. 박사님은 항상 소화제를 가방속데 넣고 다니는 분이잖아.
그런데 너희들 어떻게 할 거니?”
동훈이가 성치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학교 뒷산에 가 보자는 뜻이었다.
"가 보자!“
우리들은 출발선을 떠난 육상 선수처럼 일제히 내닫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신바람이
나서, 푹푹 빠지는 눈에 신발이 젖는 것도 잊고 말았다.
“군대 가면 매일 아침 이렇게 달리기를 한대.”
동훈이가 뛰어가면서 말했따. 동훈이의 큰형은 육군 장교로 군대에 가 있다.
지난 가을 밥풀띠기 한대를 달고 왔다갔다.
동훈이는 큰형처럼 장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렇게 뛰는 걸 구보라고 핸ㄴ대. 너희들도 알아 두어라.”
동훈이가 성치와 나를 향해 소리를 쳤다.
“하나 둘 셋 넷, 구보 중에 노래한다! 노래는 ‘진짜사나이’, 시---작!”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가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우리들은 ‘진짜 사나이’를 반복해서 세 번을 불렀다. 나중에는 모두 숨이 차서
노래를 하는 건지 악을 쓰는 건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우리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헉헉대며 가쁜 숨을 토해내었다. 숨을 돌린 후
과학실을 돌아서 뒷산 길을 따라 올라갔다.
뒷산에는 눈이 더 겊게 쌓여 있었다. 발목이 아니라 무릎까지 빠져 들었다.
우리들은 훈련을 받는 유격대원처럼 계속 산을 올라갔다.
쌍둥이바위가 저만치서 보였다.
“발자국이닷!”
나는 쌍둥이바뒤 위쪽을 쳐다보다 말고 놀라 소리를 쳤다.
눈 위에 선명한 발자국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구두나 운동화 자국이 아니라 맨발자국
이었다.
“원시인이닷!”
이번에는 성치와 동훈이가 소리를 쳤다.
우리들은 뛰어서 쌍둥이바위 위로 올라갔다.
틀림없었다. 발자국은 어른들의 발 크기만 했다. 발가락도 다섯 개였다. 단지
발바닥이 유난이 넓었다.
“사진기를 가지고 올 걸 그랬다.”
동훈이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성치야, 네가 스케치를 좀 해 주겠니?”
나의 말에 동훈이가 찬성을 했다.
“그래, 스케치를 하면 되겠다. 성치야, 네가 실력 좀 발휘해!”
성치가 그림을 잘 구린다는 것은 반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알아 주었다. 사생
대회 때면 언제나 1등을 하였다.
우리는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도 성치의 주머니에서 찢어진 숙제장 한 장이
나왔다.
"연필이 없잖아?"
"여기 있다."
나는 윗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성치에게 주었다. 그 볼펜은 지난 여름 안성
고모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거였다.
성치는 종이 위에다 원시인의 발주국을 스케치해 나갔다. 역시 성치의 실력은 알아
주어야 한다.
성치는 본이라도 뜨듯 사시간에 원시인의 발자국을 그렸다. 크기도 거의 비슷했고,
모양은 더욱 똑같았다.
스케치가 다 끝났을 때 우리들은 바위와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통조림과 과일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원시인 아저씨가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치? 이렇게 눈이 내렸는데도 여기까지 내려왔
으니."
동훈이는 씨익 웃더니,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라고 제안을 했다.
"괘찮을까?"
성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지 눈을 찡그렸다.
"원시인 아저씨를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다른곳으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걱정 마. 발자국이 어디로 갔는지 그것만 살펴보고 내려가자.
우리들은 동훈이의 제의대로 발자국의 행방만 확인하고 내려가기로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
다.
눈이 내려서 발을 옮길 때마다 정강이까지 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우리들은 발자국을 따라 잣나무 사이를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헤치고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새들이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푸드득 날아가는 바람에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쏟아져 내리기도 하였다.
"동굴이다!"
앞장을 서서 올라가던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나즈막히 소리를 쳤다.
틀림없었다. 발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져 올라가더니 위쪽의 동국 앞에서 끊ㅎ어져 있다.
원시인이 동굴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셈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내려가는 길에서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으로 연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들 저금통이 금세 바
닥이 나겠다. 그렇다고 원시인 아저씨를 굶길 수는 없고."
발자국을 찾아라
이튿날, 우리들은 성치가 스케치한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의 놀람은 대단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이, 입을 헤 벌리고
들여다보는 아이, 손뼉을 치는 아이.... 그런가 하면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에다 자기의 발을 가
져다 대어 보는 아이도 있었다.
"원시인 아저씨의 발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굉장히 크구나."
"실제로 보면 더 크대."
아이들은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들여다보며 한 마디씩 하거나 직접 눈으로 본 듯이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교실에다 붙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교문 게시판에 붙이자
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난 번의 사건도 있고 해서 교실에다 붙이기로 한 것이다.
대신 종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각 반에 돌렸다.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전시함. 관람을 원하는 어린이는 6학년 1반 교실로 오기
바람.
쪽지를 돌린 지 10분이 채 됐을까말까 한데 우리 교실은 몰려든 아이들로 터져 나갈 것 같았
다. 교실만이 아니라 복도까지도 줄을 서서 아우성이었다.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들은 자기 교실로 가려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달려왔고, 급기야 이 광경은 교장 선생님의 눈에까지
띄고 말았다.
교장 선생님은 큰 기침 소리와 함께 아이들을 비집고 교실로 들어와 학습판에서 그림을 떼더니
홱 돌아섰다.
"이 그림 임자는 교장실로 와!"
그리고는 저벅저벅 교장실로 와!"
그리고는 저벅저벅 교장실로 가 버렸다.
나와 성치, 동훈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
또 생긴 것이다.
"다녀올게."
성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어."
동훈이가 나서는 것을 보다 말고 나도 한 마디 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우리 모두 함께 가자.
나와 성치, 동훈이는 복도를 지나 교장실을 향해 걸었다.
복도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길을 비켜 주며 우리 셋을 향애 박수를 쳐 주었다.
"기 죽지 말고 힘 내!"
누군가 우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동훈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들이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교장 선생님은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말고 또
누가 있겠냐?' 하는 얼굴로 우리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 앞으로 가서 부동 자세를 취했다.
"이게 대체 뭐냐?"
교장 선생님은 교실에서 떼어 온 종이를 흔들었다.
"원시인 아저씨의 발입니다."
동훈이가 눈을 껌벅이며 대답했다.
“어느 책에서 보고 그렸지?”
“책에서 보고 그린 게 아닙니다.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보고 그대로 본을 뜬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대답을 했다.
“창옥이, 네가?”
이번에는 내가 대답을 했다.
“창옥이 네가?”
“아닙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성치입니다.”
나의 말에 성치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보였다.
“장소가 어디냐? 거짓말하면 못 써!”
교장 선생님은 눈을 잔뜩 부라리고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학교 뒷산입니다.”
“어디 가 보자! 만약 너희들이 거짓말을 했다면 단단히 혼이 나는 줄 알아라.”
교장 선생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서 앞장을 서라는 듯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저희를 따라오세요.”
우리는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교장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몰려와 있던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나오는 우리를 보더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우리는 과학실을 돌아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은 무릎까지 차올라 왔다.
“한참 올라가야 돼냐?”
교장 선생님이 바짓가랑이를 양말 속으로 넣으면서 물었다.
“쌍둥이바위까진 가셔야 해요.”
“그렇게나? 암튼 가 보자.”
교장 선생님은 푹푹 빠지는 눈 속을 부지런히 뒤쫓아왔다.
그 때 성치가,
“창옥아, 큰일인데....”
하며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나도 난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눈이 왔다는 걸 깜박 잊었다.”
동훈이도 걱정이 된다는 듯 말했다.
“왜들 그러냐? 무슨 일이 있냐?”
저만치 뒤쳐져 올라오던 교장 선생님이 소릴 쳤다.
“교장 선생님, 안 되겠어요!”
나는 교장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뭐라고?”
“밤새 눈이 또 내려서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내 그럴 줄 알았다.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이 날 것 같다, 그런 말이지?”
교장 선생님은 숨이 찬지 헉헉대는 소리를 했다.
“교장 선생님, 그런 게 아닙니다. 밤새 눈이 왔기 때문에 확인하기가 어렵게 됐다는
말입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나는 숨찬 얼굴로 올라오고 있는 교장 선생님을 향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입니다, 교장 선생님. 정 못 믿으시겠으면 눈 속을 헤쳐서라도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동훈이가 조금 빈청대는 투로 말을 하고는 나와 성치를 향해 눈을 찔끔했다. 정
미심쩍으면 손수 확인을 해 보시라는 듯이....
“요 녀석들 봐라! 원시인의 발자국은 너희들이 찾아야지, 왜 교장인 내가 찾아야 되냐?”
뒤쫓아 올라온 교장 선생님은 숨이 찬 것도 잊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지금부터 십 분 안에 발자국을 찾아 내라. 십 분 안에 못 찾으면 너희들
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교장 선생님은 눈을 부라리고 우리들을 쏘아보았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이 난처하게 되어 간다는 느낌이었다.
“찾아보자.”
동훈이가 나즈막히 말했다. 딴은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우리는 서둘러 쌍둥이바위 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눈을 헤쳐 가며 원시인 아저씨의 발주
국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들이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본 게 어제
오전이었는 데다 그 뒤에도 눈이 두 뼘 이상은 족히 더 내렸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통 알수가
없었다.
게다가 설혹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대로 남아 있으리란 보장
또한 없지 않은가?
“뭣들 하고 있어? 오 분 남았다!”
저만치 아래서 교장 선생님이 외쳤다.
“에이, 눈 때문에 다 틀렸다. 창옥아, 발자국 대신 동굴을 보여 드리면 어떻겠니?”
동훈이가 눈을 헤집다 말고 말했다.
“그건 안 돼! 그랬다간 원시인 아저씨의 잠자리마저도 안 남아날 거야.”
나의 말에 성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교장 선생님 성미에 그러고도 남을 거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니?”
동훈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하는 수 없지. 못 찾겠다고 하자!”
나는 오히려 그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치와 동훈이도 더 이상 찾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래, 원시인의 발자국은 찾았냐?”
교장 선생님이 우리들을 향해 물었다.
“못 찾겠습니다.”
내가 시무룩히 대답을 하자 교장 선생님은,
“내 그럴 줄 알았다. 애초부터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눈 때문에 찾지 못할 뿐입니다.”
동훈이가 발끈해서 말했다.
교장 선생님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너희들 셋은 학교에 닿는 대로 운동장 열 바퀴를 돈다! 거짓말을 한 벌이다, 알았냐?”
교장 선생님의 말에, 우리는 ‘사실은 그게 아닌데....’ 하며 눈을 껌벅껌벅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 성치, 동훈이는 교장 선생님의지시대로 학교 운동장 열 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런데 헉헉대며 운동장을 도는 우리 셋을 향해 아이들은 교실 유리창에 매달려 응원을 보내기
도 하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개중에느,
‘야, 너희 오늘 깨소금 맛 좀 보는구나!’
하는 듯이 웃고 떠드는 아이들도 있고 해서 우리들은 슬며시 부아가 치밀기도 하였다.
아무튼 우리 셋은 원시인 아저씨의 발자국을 찾지 못한 죄로 교장 선생님이 지켜 보는 가운데
입에서 단내가 물씬 나도록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뜻밖의 후원자
겨울 방학이 다가오는데도 학교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안영모 선생님의 이야기로는, 그간 교무 회의에서 두 차례나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했지만 그 때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교장 선생님이 완강하게 반대를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
첫째는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원시인이라고 믿는 그 자체가 비과학적인 일이며, 두 번
째는 학생들이 모금을 한다는 것도 비교육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교장 선생님은 ‘비과학적인 것’과 ‘비교육적인 것’을 내세워 우리들의 건의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교장 선생님의 이러한 와강한 반대와는 대조적이로 원시인에 대한 아이들
의 관심은 날로 더해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들이 은밀한 방법으로 원시인의 식
량을 조달한다는 이야기까지 퍼져 있었다.
오직 교장 선생님만이 모르는 척하고 반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을 볼 낯이 없구나. 그래도 나는 너희들을 돕는다고 했는데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으
니. 심지어 지난 번 실시했던 설문 조사 결과까지 내어 보이며 원시인에 대한
너희들의 순수한 사랑을 호소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 뭐냐?”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의 건의를 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마치 자기 탓이라도 된다는
듯 미안해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처음에는 다 그렇게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란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아라. 무슨 좋은 수가 있겠지.”
그리고 난 나흘 뒤였다. 겨울 방학을 꼭 사흘 앞둔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갔을 때 웬 등기 우편물이 배달되어 있었다. 내 앞으로 온
우편물이었다. 보낸 사람은 ‘예쁜이’라고 되어 있었다.
‘예쁜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 급히 봉투를 뜯었다.
그 때, 빳빳한 것이 방바닥으로 팔랑팔랑 떨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그것을 집어
들었다.
‘50,000원’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소액환이었다.
‘누가 보낸 걸까?’
봉투 속을 들여다보던 나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오빠들이 하는 일을 돕고 싶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어요. 우체국에 가서 돈으로 바꿔 통조림과 과일을 사도록 하세요. 이 돈이면 아마 원시인
아저씨가 겨울 동안 잡수실 통조림 값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내가 누구인가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오빠들의 용기와 아름다운 마음이 좋아서 그저
돕고 싶었을 뿐이에요. 예쁜이
‘누구일까?’
오빠라고 한 것을 보면 돈을 보낸 아이는 여자 아이가 틀림없었다. 거기에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의 행동을 샅샅이 알고 있는 아이가 틀림없다.
나는 소액환과 편지를 집어 넣은 뒤 성치와 동훈이를 찾아갔다.
“그러면 그렇지, 문은 두드려야 열린다고 하더니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구나!”
동훈이는 소액환을 흔들어 보이며 좋아했다.
“창옥아,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도 될까? 누가 보낸 줄도 모르고....”
성치가 이번에는 또 그것이 걱정되는지 눈을 껌벅였다.
나는 소액환과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너희들과 함께 박사님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박사님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거든.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나의 제의에 동훈이와 성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그런데 창옥아, 누군지 정말 모르겠니?”
동훈이는 고개를 갸욱뚱했다.
“경자? 혜숙이? 순희? 자옥이?”
동훈이가 여자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 둘 늘어놓았지만 얘다 싶은 아이는 없었다.
“아무튼 고마운 아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보내 주다니. 이제는 교장 선생님께 애걸
복걸할 필요도 없어졌따.”
동훈이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캥거루처럼 껑출껑충 뛰었다. 그 때문에 나와
성치는 박사님의 하숙집에 닿을 때까지 킥킥대며 걸어야만 했다.
박사님은 마침 두꺼운 책을 펴 놓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는 중이었다. 우리가 들고 온 소액
환과 편지를 들여다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너희들에게 후원자가 나타났구나, 축하한다!”
안영모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님, 이 돈을 써도 괜찮을까요? 그것을 의논 드리러 왔어요.”
나는 소액환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편지에 충분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 않니? 어떤 아
인지는 모르지만 참 고마운 아이구나.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은 걸 보니 마음씨는 더욱 고울 것
같다.”
안영모 선생님의 말에 동훈이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나더니,
“창옥이를 좋아하는 아인가 봐요.”했다.
그 바람에 방 안은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요란한 웃음 때문에 우리들은 밖의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우리는 그제야 박에 누가 온 것을 알았다.
문을 열었을 때, 토방에는 뜻밖에도 단발 머리 선생님이 서 있었다.
“무슨 중대한 회의라도 하는 모양이지요?”
단발 머리 선생님은 허리를 굽혀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들어가도 좋은지 아닌지를 살피는 눈치였다.
“어서와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백 교수에게 좋은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까 했는데.”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우리들은 일어선 채로 단발 머리 선생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서동훈입니다.”
“박성치입니다.”
“윤창옥입니다.”
“알고 있어요. 삼총사들이 모두 모였군요. 우리 안 선생님이 말씀을 여간 많이
하셔야지요. 밖에서 들으니까 웃음 소리가 나무 행복하게 들려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어요.”
단발 머리 선생님은 오똑한 콧날에서 풍기는 첫인상과는 달리 매우 상냥했다.
“원시인 아저씨의 식량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동훈이가 나서며 의젓하게 대답을 했다.
“아, 들었어요. 학교에 나타났다는 그 원시인 말이지요.”
방 안으로 들어선 단발 머리 선생님은 몹시 궁금한 얼굴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네, 그런데 마침 오늘 어떤 여자 아이가 성금을 보내 주었어요. 선생님과 의논을 한
것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번에는 내가 나서며 말했다.
“말해 보아요.”
“원시인들도 음악이나 그림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단발 머리 선생님은 잠시 생각을 하고 나더니,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하다 못해 지능이 더 낮은 동물들도 얼마든지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어떤 학자가 이런 실험을 해 보았대요. 쥐 두마리를 각각 다른 방에 넣고 한 방에
는 아름다운 음악을 매일 틀어 주고, 다른 방의 쥐에게는 미리 녹음해 둔
난폭한 음을 틀어 주었어요. 그랬더니 아주 재미있는 반응이 일어났어요.”
“어떤 반응인데요?”
성치가 안경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자란 쥐는 양순한 행동을 보인 반면에 난폭한 음을 들으며
자란 쥐는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적이고 포악하게 행동했어요. 그래서 학자는 음악이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들에게까지도 깊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대요.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하자는 그림으로 이런 실험을 해 보았어요. 원숭이에게 두 장의
그림을 가져다 주었는데 한 장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이었고, 다른 한 장은 구도며 색감 등이
제대로 된 그림이었대요. 그랬더니 원숭이는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대로 된 그림을 들여다보며 좋아하더래요. 그 학자는 인간들만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지요.”
“그래, 그건 백 교수의 말이 맞는다. 동물들에게도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감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있지.”
한 번 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듯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어서 말씀해 주세요, 어떤 이야기인데요?”
나는 호기심이 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원 연구에 젊음을 바친 분으로 아드리언 코들런드란 교수가 있지. 그 교수는 어느 날 한
마리의 원숭이가 조용히 앉아 십오 분이나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을 관찰했단다. 노을이 바알갛
게 피어 올랐다가 차차로 어두워지기까지 서쪽 하늘을 꼼짝 않고
쳐다보더라는 거야. 물론 교수가 조금은 낭만적으로 말한 부분도 있었겠지. 그러나
저녁놀의 아름다움에 엄숙한 기분이 되든가 또는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인간만이라고 생가한
다면 그것은 지나친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창옥이는 그런 걸 백교수한테 묻는 거지?
“
안영모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원시인 아저씨에게 그림책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그림책이라는 말에 방 안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림책을?”
“네, 원시인 아저씨의 심심함을 덜어 주고 싶어요. 웬지 저는 원시인 아저씨가 외로울 것 같아
요. 그래서 그림책을 보내기로 했어요. 아마 그림책은 원시인 아저씨께 보내는 첫번째 선물이
될 거예요.”
나의 말에 샘이 나는지 동훈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저도 원시인 아저씨에게 선물을 보내겠어요.”
하고 말했다.
“어떤 선물인데요?”
담발 머리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동훈이를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생각해 보겠어요.”
동훈이가 머리를 긁적이는 바람에 방 안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정말 재미있는 학생들이에요.”
단발 며리 선생님은 연방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단발 머리 선생님은,
“그러고 보니 사흘만 있으면 여러분도 방학이네요. 그래, 다들 방학 계획은 세웠어요?”
하며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기만 하였다.
“특별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습니다. 마지막 방학이고 하니 국민 학교에서 보낸 시간들을 조용
히 뒤돌아볼까 생각합니다. 저희들에겐 여러 모로 뜻깊은 날들이었으니까요.”
나의 대답을 듣고 있던 동훈이와 성치가 ‘어쭈, 제법인데!’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안영모 선생님은 무슨 뜻인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계획이에요. 그래, 창옥인 지난 육 년을 돌아볼 때 어떤 느낌이 들어요?”
단발 머리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모든 일을 좀더 열심히 할 것 그랬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첫눈이 내렸을 때무터 나도 모르게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 후회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예요. 어른들도 마찬가지지요. 다만 그것을 자기가
알고 새로운 각오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예요. 동훈이는 지금까지의 학교 생활에서 어떤 일이
제일 기억에 남나요?”
단발 머리 선생님은 이번에는 동훈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는요, 국민 학교 사학년 여름 방학 때, 창옥이, 성치와 함께 참외 서리하다 들켜서
발가벗고 원두막에서 벌을 섰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동훈이의 말에 방 안은 또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왜 발가벗고 벌을 섰지요?”
담발 머리 선생님은 말을 하고 나서도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처음엔 팬티만은 입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낮에 온 비 때문에 땅이 축축하지
뭐겠어요. 그래서 옷을 버릴까 봐 발가벗기로 했지요. 울타리 밑으로 살슴살슴
기어들어가 참외를 따 놓고 실컷 먹는 중인데 그만 원두막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하하하...., 하하하....!”
“호호호..., 호호호....!”
동훈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성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젠 네 차례라는 듯이....
“그래요, 성치도 한 마디 해 봐요.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지요?”
단발 머리 선생님의 말에 성치는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저는 지난 가을 학예획에서 동시를 낭송했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성치는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성치는 이담에 시인이 되고 싶대요.”
동훈이가 단발 머리 선생님의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어머, 그래요? 그래서 성치에게서 시인 냄새가 났군요.”
“시인 냄새는 어떤 냄새인데요?”
동훈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말 못 해요.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요.”
“그럼 저와 창옥이 냄새도 좀 맡아 주세요.”
동훈이의 말에 단발 머리 선생님은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아, 아녜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동훈이와 창옥이의 꿈도 얘길 해 줘야
지요. 어서요.”
다발 머리 선생님이 재촉을 했다.
나와 동훈이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훈이가 입을 열었다.
“창옥이는 학자가 꿈이에요. 학자 가운데서도 옛날의 유물이나 유적을 연구하는 학자
말예요.”
“고고학자 말이군요. 창옥이는 아주 귀한 꿈을 가지고 있네요. 동훈이는요?”
“저는 장교가 되고 싶어요. 훌륭한 장교가 되려면 체력도 튼튼해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데 저는 공부가 꼬래비라서 큰일이에요.”
평소의 동훈이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해서 다들 웃고 말았다.
“듣고 보니 모두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있군요. 열심히 노력해서 꼭 이루도록 하세요.”
단발 머리 선생님은 그 날 막차를 타고 눈골을 떠났다.
우리들은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나갈까 하다가 두 분에게 호젓한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
핑계를 대고 도중에서 떨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잘 한 일이 되고 말았다.
왜냐 하면 다음날 박사님을 만났을 때, 박사님은 우리들에게,
“어제 보나ㅣ 너희들 눈치 한 번 빠르더구나.”
하며 은근히 고맙다는 인사를 했던 것이다.
어둠 속의 원시인
겨울 방학이 되었다. 우리들에게 있어 여섯 번째의 방학이자 마지막 방학이기도 했다.
방학이 되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바빴다.
원시인 아저씨의 식량을 준비해야 하고 그림책이나 장난감을 구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내가 제안한 것이었고, 장난감은 동훈이의 생각이었다.
굴 속에서 외롭게 지낼 원시인 아저씨를 위해 3,4일 간격으로 준비하였다. 우리들의
선물이 원시인 아저씨 마음에 들었는지 통조림이 없어지는 날이면 그것들도 예외없이
없어지곤 하였다.
이런 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겪은 실망은 적잖았다.
특히 어른들로부터 받은 실망은 매우 컸다. 때때로 어른들은 우리들을 정신이 좀
어떻게 된 녀석들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만화가게 할아버지만 해도 처음부터 그렇게 몰아붙이기만 했던 것이다.
“뭐라고? 아니, 이 녀석들이.... 난데없이 원시인이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이번에는
원시인에게 만화를 보낸다고? 만화가게 십 년 만에 너희 같은 녀석들은 처음 본다.
아무래도 너희들의 머리가 어떻게 되 게 틀림없어.”
만화가게 할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완구점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우리들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물건을 팔기는커녕
들어서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가라고 내몰았다.
어른들의 이 같은 모습 속에서 우리들은 어른들과 우리들사이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이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왜 그렇지? 우리들 마음을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않으니 말이야.”
동훈이의 불만처럼 우리들이 만나 본 어른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뭔가 딱딱하게 굳어진 것들만 쥐고 있다는 느김이었다.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날아가 버린
지
점토처럼. 그래서 더이상 어떤 모양도 만들어 낼 수 없을 때처럼.
우리들은 의논 끝에 원시인 아저씨에 대해 더 이상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하였다. 어른
들
의 세계 속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원시인을 괜히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해서 필요한 물건을 삭도, 나머지는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물건을 얻기로 했다.
우리가 생각을 이렇게 고쳐 먹은 데에는 언젠가 박사님이 원시인 이야기를 하던 끝에,
“지금 생각하니까 그 날 밤 원시인이 우리 학교를 찾아온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무언가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싶어서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너희들처럼 철봉틀에 매달리고 싶었거나, 미끄럼이나 그네를 타고 싶어서 왔을지도
모르지. 얼마전 백 교수가 우리에게 말한 대로 다른 동물도 어느 정도의 감각은 가지고 있어
서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생활을 하려는 것처럼, 원시인도 같은 이유에서 학교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하고 부언했듯이, 우리에게 재미있는 것이면 틀림없이 원시인 아저씨에게도 재미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것저것 찾아다녔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장만한 우리들의 선물은 그런대로 다양한 편이었다. 그림책이나
만화책도 여러 종류가 되었고, 장난감은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부터 어른들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것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그것들은 돈을 주고 사기도 했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얻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장난감을 얻으려고 찾아가면 동네어른들은,
“갑자기 장난감을 내놓으라니 무슨 일이 있니?”
“너희들 나이거 몇 살인데 장난감 타령을 해?”
“요즘도 장난감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이 있니?”
하고 한 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동네 어른들은 수선을 피우며 돌아다니는 우리들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집 안에 있는 장
난감들을 한두 가지씩 주는 데는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
“원시인 아저ㅆ가 정말로 이런 장난감을 좋아할까?”
자루를 둘러메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난 성치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너는 지난 번에 원시인 아저씨가 숫자놀이판 가져간 걸 잊었니?”
성치의 말에 동훈이는 며칠 전 쌍둥이바위에 올려놓았던 숫자놀이판이 없어진 사실을 상기시켰
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원시인 아저씨를 본 사람이 없잖아.”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져가는 모양이지.”
“정말 그럴까?”
“박사님 말씀을 그렇게 못 믿겠니? 원시인 아저씨는 사람의 눈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을 한다고 말씀하셨잖아?”
“그렇다면 오늘 밤이라도 한 번 지켜 보지 않을래? 내눈으로 원시인 아저씨를 똑똑히 보고 싶
어.”
성치가 오랜만에 적극적인 제의를 하고 나섰다.
“보초를 서자는 말이지? 원시인 아저씨가 나타나나, 안나타나나? 좋다, 하루나 이틀 밤쯤 못 새
울라고? 네 생각은 어떠니?”
동훈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너희들, 설마 도중에 후회를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다짐이라도 하듯 되묻자 동훈이는,
“난 자신있지만 성치가 어떨는지, 괜찮겠니?”
하고 성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 너희들에게 부담을 주진 않을 테니까.”
성치가 자신있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사실은 나도 그 점이 늘 궁금했어.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오늘 밤이좋겠다.”
동훈이가 나서며 말했다.
“원시인 아저씨가 오늘 밤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할 수 없지. 내일 밤도 보초를 서는 수밖에.”
“원시인 아저씨가 나타날 때까지 밤을 새우자,이 말이지?”
“그래!”
그 날 밤 우리들은 두터운 옷으로 완전 무장을 한 뒤 쌍둥이바위에서 얼마쯤 떨어진
방공호에 몸을 숨겼다.
그에 앞서 우리들은 박사님을 찾아가 정식으로 우리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안영모
선생님은,
“야, 이걸 어쩌지?”
하며 우리와 함께 행동 못 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안영모 선생님은 그 날 밤 안으로
끝내야 할 급한 논문이 있다면서 너희들이나 다녀오라며 퍽 서운해하였던 것이다.
겨울 밤이라고 하지만 다행이 기온은 푸근한 편이었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내일은 또 눈
이
내릴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어쩜 그 때문에 푸근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은 차츰 내려갔다. 우리들은 잠바에 달린 모자를 얼굴
위까지 뒤집어쓰거나 목도리를 둘러 추위를 막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동훈이가 제 삼촌에게서 빌려 온 야광시계를 들여다보며 나즈막히 속삭였다.
“몇 시나 되었니?”
성치는 추위에 약한지 달달 떨고 있었다.
“아홉 시 십오 분.”
“겨우?”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는 듯 성치가 놀랐다.
나도 그랬다. 한 시간도 더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계를 쳐다보면 고작해야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거 헛고생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훈이가 조금씩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성치는 아무 말도 없이 달달 떨기만 했다.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 갔다. 도깨비들이 돌팔매질을
하는지 이따끔씩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좀 으스스하다, 그치?”
동훈이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무섭니?”
내 말에 동훈이는,
“천만에! 느낌이 좀 그렇다는 말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어.”
하고 펄쩍 뛰었따. 그 바람에 나와 성치는 킥킥 웃음이 나왔다.
동훈이에 비하면 오히려 성치가 담력이 커 보였다. 추위에 약한 게 흠이지만 성치는 무서움
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 시야.”
동훈이가 손목을 쳐다보며 시간이 되게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럴 때 박사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성치가 한 마디 했다.
“누가 아니라니, 하필이면 오늘 밤처럼 중요한 때 일이 있을 게 뭐람.”
솔직히 말해서 나도 동훈이의 생각과 같았다. 박사님만 계셨더라면 시간도 훨씬 잘
가고 든든했을 것이다.
그 때였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분명 그것은 눈을 밟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검은 물체
하나가 위쪽에서 나타나더니 쌍둥이바위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것이었다.
‘원시인 아저씨닷!’
틀림없었다. 어둠 속에 드러난 물체는 틀림없이 원시인 아저씨였다. 온몸이
털투성이였다.
우리들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원시인 아저씨는 쌍둥이바위까지 오더니 허리를 구부려 매우 익숙한 동작으로 통조림을
들고 일어섰다.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번이는 잣나무 가지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우리들이 건너 마을 피아노집에서 얻어 온 탬버린이었다.
원시인 아저씨는 신기한지 탬버린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챙 하는 소리가 나
자
재미있다는 듯 점점 세게 흔들었다.
챙챙챙...챙챙챙...
“후후후후.”
갑자기 원시인 아저씨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들어 보는 원시인 아저씨의 웃음소리였다.
“히히히.”
원시인 아저씨가 웃는 것을 본 동훈이가 바보처럼 저도 히히히 웃어 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원시인 아저씨에게 들키고 말았다.
“흐흐흥?”
탬버린을 흔들다 멈춘 원시인 아저씨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통조림과 탬버린을 옆에
끼고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동훈이가 멋쩍은 듯 말했다.
나는 알밤이라도 한 대 먹여 줄까 하다가 참기로 했다. 대신,
“너 군대 가서 장교가 될 생각은 하지 말아라. 오늘 밤 보니 겁쟁이고, 행동은 왜
그렇게 경망스럽니? 이제 그만 내려가자.”
하고 말했다.
우리들은 멋쩍어하는 동훈이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갔다.
몸을 웅크린 채 부지런히 박사님의 하숙방을 향해 걸었다.
원시인 마을
“어떻게 됐냐?”
잔뜩 웅크린 채 들어서는 우리들을 박사님은 몹시 기다렸다는 덧이 궁금한 얼굴로
물어 보았다.
그 때까지 논문을 쓴 탓인지 안영모 선생님의 얼굴은 부시시한 게 몹시 피곤해 보였다.
“틀림없이 원시인이었어요, 선생님.”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선생님. 온몸이 털투성이였어요. 바로 저 그림속의 원시인처럼 말예요.”
조금 전까지 잔뜩 풀이 죽었던 동훈이가 이번에는 생기를 되찾아 떠들었다.
“그래, 정말로 통조림을 가지고 가던?”
“통조림뿐만 아녜요. 탬버린도 가지고 갔는걸요.”
“탬버린이라니?”
안영모 선생님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시인 아저씨에게 악기를 주어 음악이 무언가 가르쳐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며칠 전,
건너 마을 피아노 집에서 얻어 온 탬버린을 잣나무 가지에다 걸어 놓았지 뭐겠어요.
그랬더니 원시인 아저씨가 좋아라 하고 가져가더라구요. 그런데 원시인 아저씨는
탬버린이 신기했던 모양이에요. 흔들 때마다 소리가 나니까 어깨춤을 추지 않겠어요?”
“그런데 동훈이 때문에 산통이 다 깨졌어요.”
성치가 내 말을 가로채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안영모 선생님의 말에 동훈이는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긁적였다.
“원시인 아저씨가 웃어서 저도 따라 웃고 말았어요, 선생님.”
“그래서 성치가 산통이 깨졌다고 했구나.”
“말씀 마세요. 저희들도 놀랐지만 원시인 아저씨가 더 놀랐을 거예요. 글쎄 통조림과
탬버린을 챙겨 가지고 냅다 달아나지 않겠어요?“
나의 말에 동훈이는 또! 하고 눈을 흘겼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무튼 고생들 했다. 그래 원시인을 본 기분은 어떠냐?”
안영모 선생님은 피곤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저는 원시인 아저씨를 본 순간, 동네 아저씨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성치가 먼저 대답을 했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더욱이 탬버린을 흔들며 웃을 때는 제 동생 경훈이와
똑같았어요.”
이번에는 동훈이가 대답을 했다.
“창옥이 너는 무슨 생각을 했니?”
안영모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저는 웬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어요. 현대 문명인들 속에서 외톨이가 되어 혼자서
지내고 있는 아저씨가 불쌍하게 느껴졌어요. 선생님, 원시인 아저씨의 고향은 어딜까요.”
나는 그 때 박사님이 벽의 원시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원시인 마을에서 왔겠지.”
박사님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원시인 마을이라니요? 그런 곳이 있어요, 선생님?”
“있다고 본다. 아니 원시인의 마을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 단지 우리들이 그 곳이
어딘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안영모 서냉님의 말은 우리들을 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렇다면 원시인 아저씨는 왜 그 곳을 빠져 나와 혼자서 뒷산에 계실까요? 다른
원시인들과 함께 살지 않는 건 왜일까요?“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어쩌면 원시인 마을에서 죄를 지어 쫓겨났을지도 모르고.”
원시인 아저씨를 본 순간,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다.
“뭐냐?”
“선생님의 말씀대로 원시인 마을이 있다면 말예요, 그 원시인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지금도 스렵 생활을 할까요?”
나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곤란했던지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현대의 문명을 거부했다면 천상 그 방법밖에 더 있겠니?”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 대답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현대의 문명을 거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요? 원시인들이 거부했다는 말인가요?”
나는 점점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훈이와 성치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안영모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원시인들이 자기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은 문명화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마을이 있지, 청학동이라고.”
“네, 들어 봤어요 선생님. 청학동 사람들은 지금도 바지 저고리에 머리를 길게 땋고
짚신을 신는다면서요?“
“그래, 창옥이 말대로 청학동에 사는 사람들은 옛날 자기네들 생활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지. 현대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사회를 지금도 고집하고 있는 거야.
원시인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들 역시 어딘가에서 현대와는 전혀 다른 삶
을
고집하며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안영모 선생님의 설명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게 들렸다.
“선생님, 저는 통 이해할 수가 없어요. 청학동 사람들이나 원시인들이 편리한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힘들게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요.”
이번에는 동훈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였다.
안영모 선생님은 좀 피곤한 얼굴로 우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재미라는 것이 꼭 좋은 집에서 잠자고,
좋은 음식을 먹고, 값비싼 옷을 입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란다. 행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지. 이런 풍요로운 물질들이 편리한 생활을 보장해 주긴 하겠지만 반드시 재미나 행
복
을 가져다 준다고는 할 수 없지.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의 순수한 감정이나
인간 관계가 물질로 인하여 망가뜨려지는 경우가 있지.”
그 날 밤 우리들은 박사님의 하숙방에서 잠을 잤다.
긴 시간을 원시인 마을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까닭인지 나는 원시인 마을에 간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동훈이, 성치와 함께 원시인 마을에 가있었다.
어떻게 원시인 마을까지 갔는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은
원시인 마을 학교에서 초대장을 받은 것과 우리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개들이 끄는
썰매가 도착했던 기억밖에는.
아무튼 우리들은 원시인 마을에서 우리 또래의 아이들과 공부도 하고 놀이도 하며 함께 지냈는
데 갑자기 어른 원시인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우리들과 노는 아이들을 마구
나무라는 것이 아니가?
문명 사회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놀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들과 함께 놀면 이상한 냄
새
가 몸에 배고 큰 병을 얻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곧 우리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맏게 되었다. 그 남새는 기름 냄새, 화약 냄
새,
살충제 냄새.... 그런 냄새들이었다. 그러네 우리가 더 놀란 것은 우리의 손이 닿는 것마다 모
두
생기를 잃고 시들어 버리지 않는가? 꽃도 그렇고, 풀도 그렇고, 나무들도
그랬다.
우리는 나무너무 놀라 뒷걸음질치며 허둥거리다가 잠이 깨었고, 그제야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선생님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창옥인 꿈에서나마 원시인 마을엘 다녀왔구나. 아무튼 축하한다. 그래 선생님은
빼놓고 너희들끼리 다녀왔단 말이지? 고얀 녀석들!”
이라고 해서 모두들 웃고 말았다.
“그런데 선생님, 꿈이지만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들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도 그렇고,
손에 닿는 것마다 시드는 것도 그렇고.”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안영모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이상할 것 없단다. 문명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후각으로 우리들 몸에 냄새를 맡아 보면 우
리
가 느끼지 못하는 냄새를 맡을 수도 있지 않겠니? 자동차에서 나는 기름 냄새라든가 매연이 너
희들 몸 어딘가에 배어 있을 법도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지구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
은
전쟁의 화약 내음이 너희들 몸 어딘가에 덕지덕지 묻었을 법도 하고. 안 그러냐?”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그것뿐이냐? 우리가 먹는 곡식이나 채소류, 과일에까지 해충을 없앤다고 살충제를 과
다
하게 사용하여 사람들의 생명에까지 위협을 주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 아니겠니? 그러니 창
옥이가 꿈 이야기를 하니까는 어는 책에선가 읽은 인디언 추장의 글이
생각나는구나. 그 인디언 추장은 백인들에게 이런 경고의 편지를 보냈단다.“
“어떤 내용의 편지인데요?”
“들어 보거라. ‘우리들이 당신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신들의 피부가 희다거나,
당신들이 우리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거나,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당신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신들의 발길이 한 번 닿은 땅에서는 자연
과
동물들이 생기를 잃고 병이 들거나 죽어 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인디언 추장은 백인들이 무질서하게 저지르는 문명의 오염을 그렇게 경고했던
이다. 너희들, 그 인디언 추장의 말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니?”
안영모 선생님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잠시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네 타는 원시인
며칠이 지난 저녁이었다. 우리들은 밤참을 준비해 들고 학교로 갔다.
숙직인 안영모 선생님을 즐겁게 해 드릴 요량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박사님은 마침
교무실 난로 곁에서 책을 읽고 있다고 웬일이냐는 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들이 준비해 간 밤참은 고작 찐고구마와 콩엿이었다. 그러나 안영모 선생님은
보자기 속을 들춰 보고 나더니 손뼉이라도 칠 듯이 기뻐했다.
“야, 이건 찐고구마 아니냐? 이건 또 콩엿이고! 너희들 덕분에 오늘 밤은 별미를 먹게
됐구나.”
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가져가서는 후후 불어 가며 껍질을 벗기는 것이었다.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동훈이가 자기 집 고구마라는 것을 은근히 비치며 말했다.
“맛있어 보이는구나. 너희들도 어서 한 개씩 집으렴.”
안영모 선생님은 자기 혼자만 먹는 게 미안한 듯 우리들에게도 권했다.
우리는 고구마를 한 개씩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가져온 고구마를 보니 문득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가져온 고구마를 보니 문
득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겨울이 오면 우리들은 내무반 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곤 했단다. 고구마가 익는 동안 각각 돌아가며 자기 고향 이야기를 하곤 했지.
그러다가 창 밖을 내다보면 눈이 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안영모 선생님은 옛 추억이 되살아나는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오늘 밤처럼 말씀이죠?”
나는 창 밖을 내다보고 나서 박사님을 쳐다보았다.
창 밖엔 눈이 날리고 있었다.
안영모 선생님은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다가,
“그래, 오늘 밤처럼 말이다. 오늘은 꼭 백령도의 겨울 밤같구나.”
하고 말했다.
“선생님, 백령도라면 소청도와 대청도가 있는 휴전선 쪽의 섬 말이죠?”
언젠가 어린이 신문에 실린 백령도 어린이 서울 초청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나는
백령도란 말에 귀가 번쩍 틔었다.
“그렇단다, 백령도는 서해안에서 휴전선고 제일 가까운 섬이지. 인천에서 정기 여객선이 운행되
고 있지만 우리들은 군용 비행기로 다녔단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비행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닷물이 빠지면 비행기가 해안에 내리게 돼 있지.
이를테면 자연적으로 생긴 활주로라고나 할까?”
“선생님, 해안이 그렇게 단단해요?”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렸다.
“단단하고말고. 육중한 비행기가 내려도 자전거 바퀴 자국 정도밖에 나지 않는단다.
그러고 보면 자연이란 참 신비스럽기 그지없지. 한 번 빠졌다 하면 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깊은 늪이 있는가 하면 비행기가 내려도 끄떡없는 백령도 같은
해안도 있으니까.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오랜 세월 풍랑에 침식다한 바위들이 바닷물에 발을
담
그고 삐죽삐죽 서 있는 것을 보다 보면 마치 백령도란 섬이 어떤 전설 속의
거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단다.”
안영모 선생님은 콩엿을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넣은 조개탄에 불이 붙었는지 난로의 몸뚱아리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원시인 마을이 정말 있을까요? 있다면 그 곳은 어디쯤일까요?”
성치가 두 손으로 탁을 괸 채 어둠뿐인 창 박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글쎄.... 어디쯤일까? 우리들의 발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는 것만은 확실한데....”
안영모 선생님은 도리어 우리들을 쳐다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곳이 어디냔 말씀예요? 선생님도 정말 고르세요?”
동훈이의 말에 안영모 선생님은 껄껄껄 웃었다.
“동훈이는 마치 선생님이 원시인 마을을 숨겨 둔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무튼 우리들이 노력
해
서 찾아보자꾸나. 원시인 마을도 찾아보고, 공룡 나라도 찾아보고....”
“공룡 나라라니요, 선생님? 그런 나라도 있어요?”
나는 처음 듣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나뿐이 아니라 성치와 동훈이도 놀란 얼굴을 해 가지고 박사님을 쳐다보았다.
“응, 리 와인담이란 외국 작가가 쓴 동화 속에 나오는 나라란다. 공룡의 시대가 끝났을 때,
이
지구 위에 살던 공룡들은 모두 자기 나라로 날아가게 돼 있었지. 그런데 시퍼런 바다를 본 겁
쟁
이 공룡 하나가 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몸을 도마뱀만하게 움츠러뜨려 가지고
돌벽 틈에 숨어 살게 되었지.”
“그래서요, 선생님?”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소녀의 눈에 띄게 되고, 겁쟁이 공룡은 소녀의 방에 숨어 살게
된단다. 그 날부터 소녀는 밤마다 공룡으로부터 신비하고도 이상한 공룡 나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지. 어떠냐? 아주 재미있는 동화 아니냐?”
이야기를 마친 박사님은 빙그레 웃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재미있어요, 선생님. 그런데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 주세요?”
나의 말에 안영모 선생님은 개구장이 같은 웃음을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이 너무 원시인 마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모양이다.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 순찰
시간이 지났나 보다. 선생님이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올 테니, 너희들은 그 동안 재미난 이야
기나 하고 있거라.”
안영모 선생님은 잠바를 껴입은 뒤 손전등을 들고 일어섰다.
“저희들도 함께 돌면 안 되나요?”
우리들이 일어설 채비를 하자 안영모 선생님은,
“너희들은 여기 있거라. 난롯불이나 잘 보고....”
하고는 교무실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우리는 어미닭한테서 꾸중을 들은 병아리들처럼 엉거주춤 서 버렸다.
“우리들이 따라나서면 순찰 도는 데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
동훈이가 입을 삐죽하는 바람에 나와 성치는 웃고 말았다.
“선생님의 일은 선생님 혼자서 하시겠다는 거겠지.”
내가 말했다.
우리들은 잠자코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들 이상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 때 나는 갑자기 교무실이 한 척의 배가 되어 망망한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이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들은 운동장 서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후후후..., 후후후!”
그 소리는 원시인 아저씨의 웃음소리였다.
“원시인 아저씨닷!”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밖엔 여전히 눈발이 듬성듬성 날리
고
있었다.
“저기닷!”
동훈이가 서쪽 운동장 구석에 있는 놀이터를 가리켰다.
원시인 아져씨가 그네를 타고 앉아 몸을 아뒤로 흔들면서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장난스럽게 몸을 흔드는 모습이 마치
개
구장이 같았다.
“히야, 이건 백만 불짜리다. 우리 셋이서만 보기는 아까운데.”
동훈이가 입을 헤 벌린 채 말했다.
“우리, 원시인 아저씨한테 가 보지 않을래?”
내가 뜻밖의 제의를 하고 나섰다.
“원시인 아저씨에겐 지금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 오죽 외로우면 이 밤중에 놀이터까지 왔
겠
니? 우리가 가서 친구가 되어 드리자!”
나의 말에 성치와 동훈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떻다.
“괜찮을까?”
“어떨려고? 원시인 아저씨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자.”
나는 미심쩍어하는 성치와 동훈이를 이끌고 교무실문을 나섰다.
우리들은 복도를 지나 화단 쪽으로 내려갔다.
“후후후...! 후후후!”
원시인 아저씨는 여전히 그네를 타고 앉은 채 기분이 좋은지 눈발이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흐흐흥?”
하더니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는게 보였다.
우리는 가까이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저것 봐!”
동훈이가 나즈막히 속삭였다.
아니나다를까 원시인 아저씨는 우리를 보더니, 급히 몸을 돌려 과학실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거 봐, 실패했잖아!”
동훈이가 나를 흘깃 쳐다보며 핀잔을 주었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원시인 아저씨가 우리들을 나쁜 사람들로 보았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급히 달아
날
필요가 있었겠니?”
성치가 말했다.
“원시인들은 현대인들을 두려워한다잖아? 박사님 말씀을 잊었니?”
동훈이의 말에 나는 눈발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이건 비극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겠나. 원시인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달아날 건 아저씨의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면 눈구의 잘못이라고 해야지?”
성치가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야. 우리들이 그렇게 만들었어!”
“야, 창옥아. 그 공자님 같은 말씀 그만하고 어서 교무실로 가자. 오늘 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였다는 것만 알고.”
동훈이가 재촉을 했다.
우리들은 복도를 지나 교무실로 갔다. 순찰을 나갔던 안영모 선생님은 돌아와 있었다.
“교무실을 비워 놓고 다들 어디를 갔다오는 거냐?”
안영모 선생님은 원시인 아저씨의 출현을 전혀 모르는 낯빛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세요.”
동훈이가 안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
“원시인 아저씨가 놀다 가셨단 말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원시인 아저씨가 놀다 가다니.”
안영모 선생님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놀이터에 원시인 아저씨가 나타나서 그네를 타다 갔어요. 저희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달아나 버리질 않겠어요?”
내가 조금 전에 있었던 사건을 들려 주자 안영모 선생님은,
“허허 참, 좋은 기회를 놓쳤구나. 양호실에 잠시 들렀다 나왔더니 그 사이에 그런 사건이 있었구
나. 하필이면 선생님이 왜 요 때 순찰을 나갔는지 모르겠구나.”
하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 날 밤 우리들은 학교 숙직실에서 잠을 잤다. 우리들은 몹시 피곤했던지 늦은
아침에야 눈을 떴다. 잠자리를 옮기면 잠을 설치는 성치까지도 잠을 달디달게 잤는지
상쾌한 얼굴이었다.
또 한 사람의 셍떽쥐베리
마을로 내려온 우리들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어젯밤에 원시인 아저씨를 본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시인 아저씨가 학교 놀이터에 나타나 그네를 타고 갔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눈골
아이들에게 퍼졌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종 부러운 눈으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저녁때쯤해서 나도는 소문을 모아 보니 원시인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비약해 있었다.
원시인 아저씨가 그네타기는 말할 것도 없고 철봉돌기며 미끄럼타기에도 선수라는 소문이었
다. 거기에다 달음박질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나 빠른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는 얘기였다.
그 소문을 들은 우리들은 배를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의 말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동안 콩이 물에 불어 커지듯이 그렇게 불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저녁이었다. 우리들은 눈골 아이들이 학교로 몰려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오늘 밤에도
원시인 아저씨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몰려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원시인 아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께였다.
우리들이 원시인 아저씨의 식량을 준비해 가지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는데 눈골
아잉들 대여섯 명이 쌍둥이바위 쪽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범태, 완표, 남수의 얼굴이 었
었
다.
“너희들 어디 갔다오는 거니?”
동훈이가 소리를 질러서 물었다.
그러자 앞장을 서서 내려오던 범태가,
“동굴에!”
하고 대답했다.
“거긴 뭣 하러 갔니? 가지 말라고 했잖아!”
동훈이가 소리를 꽥 질렀다.
“원시인 아저씨가 정말로 동굴 속에 사는지 보러 갔단 말이야.”
“뭐라구? 원시인 아저씨를 봤어?”
“없던데, 그래서 동굴만 들여다보고 왔지 뭐.”
범태는 서운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범태 말대로 동굴 속엔 한 발짝도 들어가지 않았어.”
남수는 우리들이 뭐라고 할까 봐 지레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원시인 아저씨가 왜 안 보이지? 너희들도 모르니?”
범태가 우리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빈 통조림 깡통들만 여기저기 뒹굴고 있던데?”
완표도 궁금한 듯 말했다.
“나뭇잎더미도 보았겠지?”
듣고 있던 동훈이가 나서며 물었다.
“동굴 안 쪽에 있던 나뭇잎더미 말이지? 봤어. 그런데 왜 나뭇잎을 긁어모아 놓았지?”
“그게 원시인 아저씨의 잠자리란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원시인
아저씨는 현대인들을 몹시 두려워하니까 아주 조심을 해야 한단 말이야. 방금도 너희들이 올
라
오는 것을 보고 어디론가 몸을 피했을 거야. 그러니 다시는 이 동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 알았지?”
동훈이가 명령이라도 하듯 말했다.
나와 성치는 동훈이의 그런 행동을 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원시인 아저씨를 생각하는 동훈
이
의 마음이 너무도 지극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시인 아저씨를 보았다는 그 이유 하
나
만으로 아이들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하는 것도 그랬다.
“알았어, 다음부턴 주의할게.”
병태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그러는 병태의 꼴이 우스워 성치와 나는 또 웃고 말았다.
눈골 아이들은 우리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면 산을 내려갔다.
우리는 아이들이 다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 가져온 먹을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통조림은 뚜껑을 반쯤 딴 후, 쌍둥이바위 밑에다 놓았다. 그래야만 눈이 내려도 괜찮을 것이
다.
사과 두 개는 나뭇가지 위에다 올려놓았다.
우리들이 그 일을 얼추 끝냈을 무렵 뜻밖에도 아래쪽으로부터 안영모 선생님이 모습을 나타냈
다.
“야아, 너희들 수고가 많구나.”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를 보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수고랄 것까지야 뭐 있겠어요. 저희들이 해야 할 것인걸요, 안 그러니?”
동훈이가 성치와 나를 쳐다보며 눈 하나를 찔끔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모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하다, 장해. 오늘처럼 너희들이 장하게 보인 날도 없구나. 이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희들처럼 인류애를 발휘했다면 세상은 벌써 지상 낙원이 되었을 게다. 안
그러냐?”
안영모 선생님의 말에 우리는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선생님?”
나는 동굴 쪽을 흘낏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왜 그러느냐?”
“원시인 아저씨가 낮엔 동굴에 안 계시는 것 같아요. 밤에만 찾아와 잠을 자나 봐요.
방금도 눈골 아이들이 올라갔다 왔는데 안 보이더래요.”
나의 말에 선생님은,
“음, 올라오다 본 아이들 말이구나? 하기야 창옥이 말이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니 뭐라고 말은 못 하겠다. 왜, 창옥인 그게 궁금하니?“
하고 물었다.
“네.”
나는 가만히 대답했다.
그 때 멀리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휴전선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가끔
군용 비행기들이 지나가곤 한다.
그 대,
“너희들, 혹시 셍떽쥐베리란 작가를 아니?”
안영모 선생님이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믄요, 선생님. 어린 왕자를 쓴 사람 안녜요?”
나는 지난 여름 방학 때 누나한테서 그 책을 빌려 읽었다. 좀 어렵긴 했지만 다 읽고
났을 땐 이상한 설렘이 가슴을 쳤다.
“옳지, 창옥이가 읽었구나. 창옥이는 셍떽쥐베리란 작가에 대해 알고 있겠구나?”
“네, 조금은요. 조종사에다 소설을 썼던 작가 아녜요?”
“그래, 창옥이 말대로 셍떽쥐베리는 아주 특이한 작가란다. 조종사로 활약하는 동안
몸소 겪었던 일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아름다운 작품을 여러 편이나 남겼단다. 그런
데
말이다, 셍떽쥐베리에 관해서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단다.”
비행기 소리가 사라졌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또 비행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저 비행기는 정찰을 나온 비행기임에 틀림없다.
“선생님, 비행을 하다 실종된 사건 말씀이지요?”
“어린 왕자”뒷장엔 셍떽쥐베리의 일생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맨 끝에는 비행을 하러 나갔
다
가 귀환하지 않은 것으로 돼 있었다.
“그래 맞다. 셍떽쥐베리는 어느 여름날 아침 출격을 나간 뒤 기지에 돌아오지 않았다. 비행할
수 있는 휘발류의 양은 한 시간 분량뿐이었지.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셍떽쥐베리한테 사고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급작스런 기류에 휘말려 추락을 했거나 독일 정찰
기
에게 격추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말이다, 선생님은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냐?”
“어떤 생각인데요?”
“셍떽쥐베리는 결코 사고를 당한 게 아니란 생각.”
“선생님, 그렇다면 왜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지요?”
“이건 선생님 생각인데, 셍떽쥐베리는 그 날 비행을 하던 중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을
찾지 않았나 싶단 말이지. 그래서 그 곳에 내려가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곳이 어
딘지는 나도 모르지만.... 사막 속에 있는지, 정글 속인지 아니면 어느
섬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곳이라는 것밖에는.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학교에 원시인이 처음 나타났을 때, 나는 엉뚱하게도 셍떽쥐베리를
떠올렸단다.“
안영모 선생님은 산을 내려가며 그런 말을 했다.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원시인 아저씨와 셍떽쥐베리....’
나는 자꾸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눈골에 나타난 사냥꾼
그 날 밤부터 내린 눈을 사흘이나 퍼부었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눈골뿐만 아니라 강원도 전체에 폭설이 내린 것이다.
허리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서 우리는 눈 속을 헤쳐가며 음식물을 동굴 근처까지 가져가야
했다. 그 때마다 다들 한두 번씩은 눈 속에 빠지거나 넘어지곤 했던데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치가 가장 많이 넘어졌다. 세 번짼가 네번째 넘어졌을 땐 안경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한쪽 알이 빠져 달아나는 사고까지 생겼다.
이 때문에 성치는 당분간 한쪽 알밖에 없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되었
다. 그런 성치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웃음이 나오곤 하였다.
단발 머리 선생님이 왔다가 눈 때문에 이틀이나 머물다간 것도 그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
다. 단발 머리 선생님은 우리 집 사랑채에서 이틀 밤을 자고 갔다. 어머니는 지난 가을에 장만
해 놓았던 새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는 등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이것을 본 우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자 어머니는, 두 사람이 약혼을 한 사이긴 하지만 아직
결
혼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따로 자는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단발 머리 선생님이 박사님과 함께 서울로 떠난 다음날 오후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성치와 동훈이가 헐레벌떡 우리 집으로 뛰어왔다.
“야, 창옥아, 큰일났어!”
“무슨 일인데 그러니?”
나는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동훈이와 성치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읍내에서 사냥끈이 이리로 오고 있어. 원시인 아저씨를 잡으려고!”
“원시인 아저씨를?”
“그렇다니까! 어쩌면 좋지? 박사님도 없는데.”
“확실한 거야?”
“우리 삼촌이 보았대, 지금 삼거리 주막에 있다는 거야.”
삼거리 주막이라면 여기서 한 오 리쯤 떨어진 곳이다.
“우리 삼촌이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서울에서 왔다면서 사냥꾼이 들어도더라는 거
야.
그러면서 대뜸 원시인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래. 그런데 주막 할머니가 눈치도
없이 고주알미주알 다 알려 주었대. 얼마 전에 원시인이 학교에 나타났다는 말까지
했다니, 정말 답답한 할머니야.”
“그 할머니는 원래 그래. 담배 한 갑만 사 주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할머니야.
지난 여름에 너희들도 봤지? 여치 장수들이 왔을 때 담배 몇 갑 받고 마을 안에 있는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망가뜨리게 한 것도 주막 할머니야.”
성치가 끼어들며 한 마디 거들었다.
“혼자 왔대?”
내가 동훈이에게 물었다.
“혼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원시인 아저씨를 잡아서 동물원에 팔겠다고 하더래. 그러면 곰 한
마리 잡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나 봐.”
동훈이는 화가 치미는지 식식거리며,
“창옥아, 어떡하니? 조금 있으면 사냥꾼이 들이닥칠 텐데.”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 성치와 동훈이를 향해,
“어서 원시인 아저씨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자.”
하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성치와 동훈이도 따라 나서며 찬성했다.
“뒷산 동굴로 가자!”
우리는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눈 속을 뛰기 시작했다.
동네를 벗어나 학교를 향해 내달았다. 다행히도 동네 청년들이 엊저녁부터 길을 대강 뚫어
놓
았기 때문에 뛰는 데는 그렇게 힘이 들지 않았다.
“원시인 아저씨를 어떻게 피신시키지?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성치는 한쪽 알밖에 없는 안경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손짓 발짓 다 해야지 뭐. 지금 이 마당에 말이 문제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로 의사 소통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짓 발짓 있는 대로 해 가며 설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안 돼면 셋이서 무조건 원시인 아저씨를 끌고 나와 뒷산이 아닌 다른 돗으로
피신부터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과학실을 지나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통행이 없던 뒷산은
허리까지 눈이 쌓여 있어서 우리는 허우적거리며 산을 올라야 했다.
숨이 점점 턱까지 차 올랐지만 우리는 기를 쓰고 올라갔다. 원시인 아저씨를 붙잡히게 할
수
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잣나무 사이를 한참이나 헤집고 올라가자 쌍둥이바위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쌍둥이바위를 돌아 동굴까지 부지런히 기어 올라갔다.
“어?”
동굴을 들여다본 우리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원시인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굴 속엔 빈 통조림통과 장난감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더 안쪽엔 나뭇잎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눈이 휘둥그래진 동훈이가 성치와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올라오는 걸 보고, 원시인 아저씨가 미리 피신을 했나?”
성치가 자기의 추측이 맞을 것이라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와 원시인 아저씨가 숨을 만한 곳을 살펴보았지만 원시인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잣나무 숲 어딘가에 몸을 깊숙이 숨겼거나 아니면 멀리 피신을 한 게 틀림없었다.
“동굴 속에 있는 것들을 빨리 치우자!”
나는 성치와 동훈이를 향해 소릴 쳤다.
“원시인 아저씨가 동굴 속에 있었다는 흔적을 없애야해!”
우리는 굴 속으로 들어가 빈 통조림통과 장난감들을 들고 나와 눈 속에다 묻었다.
“창옥아, 나뭇잎더미도 없애야지?”
성치가 소리를 쳤다.
“나뭇잎더미도 없애!”
우리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동굴 속을 한참이나 드나들었다.
“창옥아, 이리 좀 와 봐! 사냥꾼이 이리로 올라오고 있어!”
나뭇잎더미를 안고 나갔던 동훈이가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와 성치는 거의 동시에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학교 울타리를 빠져 나와 뒷산을 막 올
라
오고 있는 사냥꾼의 모습이 보였다.
“자, 빨리빨리 서두리자!”
우리들은 나머지 나뭇잎더미를 내려 눈 속에 묻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
“올라왔던 길로 도로 내려가자.”
내가 말했다.
“사냥꾼과 마주치지 않을까?”
나는 성치와 동훈이를 데리고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쌍둥이바위를 코앞에 두고 그만 사냥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사냥꾼은
우리들을 쳐다보더니 흠칫 놀랐다.
“너희들 이 동네에 사니? 어디 갔다 오는 길이지?”
사냥꾼은 목이 아픈지 컥컥거리면서 우리 셋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휴, 원시인을 놓쳤지 뭐예요. 조금만 빨랐으면 잡을 수가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저씨는 이 눈 속에 어딜 올라가세요?”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물어 보았다.
“그러냐? 실은 나도 원시인을 잡으러 왔다. 얘들아, 원시인이 어느 쪽으로 달아났지? 너희들
은 봐서 알 텐데?”
“저 쪽 길로 달아났으니, 너구리산으로 갔을 것 같아요.”
나는 뒷산과는 방향이 전혀 다른 너구리산을 가리켰다. 너구리산은 치악산과 이어지는 월
씬
높고 험한 산이었다.
사냥꾼은 몹시 난처한 얼굴로 또 컥컥거렸다.
“틀림없니?”
“그렇게 믿지 못하겠으면 아저씨가 직접 찾아보세요. 그럼 저희들은 먼저 내려가요.”
“아니다, 나도 내려가야겠다. 저 쪽 산이라면 굳이 이 쪽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지.”
사냥꾼은 몇 번 컥컥대더니 우리 뒤를 따라왔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성치와 동훈이는 아주 제법인데 하는
얼굴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희들 나를 너구리산까지 안내 좀 해 주지 안겠니? 내 원시인을 잡으면 한턱 톡톡히 쓰겠
다.
”
사냥꾼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그만두겠어요.”
“아니, 왜 그러니?”
“저 너구리산이 얼마나 험한데요. 그런 험한 곳에서 펄펄 날듯이 뛰어다니는 원시인을 어떻
게
잡겠어요?”
내 말에 동훈이는 거짓말을 참 기막히게 한다는 듯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원시인이 그렇게 빨리 달리더냐?”
“말씀 마세요. 육상 선ㄴ수도 그렇게 빠르지 않을 거예요. 마치 바람을 가르듯이
달려가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한 걸음이 멀리뛰기 선수가 뛰는 것처럼 굉장하던데요.”
내가 생각해도 거짓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산 채로 잡나?”
혼잣말을 하고 난 사냥꾼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섰다.
“안 되겠다, 너희들 먼저 내려가거라.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허탕을 치더라도 산 속이나 한 바
퀴 둘러보고 가야겠다.”
사냥꾼의 말에 우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시인 아저씨가 위험하다
마을로 내려온 우리는 뒷산의 일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사냥꾼이 원시인 아저씨를 본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어서 날이 저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눈치를 보니 성치나 동훈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서 날이 어두워져 원시인 아저씨가 활동하기가 자유로웠으면 하는 눈치들이었다.
제아무리 사냥꾼이 길목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밤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그냥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날이 저물어 마음이 놓인다 싶을 때였다. 학교 뒷산 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관솔불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학교 뒷산을 향
해
줄달음쳤다.
우리들은 경운기가 지나간 길을 따라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갔다. 달은 없었지만
사방에 쌓인 눈 때문에 길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뒷산 울타리를 빠져 나가자 갑자기 빽빽한 잣나무들이 성벽처
럼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쌍둥이바위 주변에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모여 관송불을 들고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쌍둥이바위 주변만이 아니라 바위 위쪽과 저편 골짜기 쪽에서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어요?”
나는 맨 뒤쪽에서 관솔불을 들고 서성대는 아저씨를 붙잡고 물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덕수 아저씨였다.
“여긴 뭣 하러 왔냐? 꼬마들은 집으로 가는 게 좋아.”
덕수 아저씨는 우리를 보더니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무슨 일인지 물어 보았잖아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데 그러느냐? 너희들은 원시인을 잡는 데 방해만 된대두!”
“네엣?”
나는 원시인이라는 말에 놀라 소릴 쳤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아저씨. 방금 무슨 말을 하셨지요?”
이번에는 동훈이가 나서서 물어 보았다.
“원시인을 잡아 주면 쌀 열 가마니를 준다고 했다. 왜 너희들도 돈 생각이 나니?”
“그게 누구지요? 쌀을 주겠다는 사람이.”
“누구긴 누구냐? 서울에서 내려오신 분이 그렇게 약속했지.”
나는 덕수 아저씨와 같이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냥꾼 말씀이지요? 그런데 그 아저씨 지금 어디 있어요?”
“허허, 너희들 꽤나 성가시게 구는구나. 정 만나고 싶다면, 저 위쪽으로 올라갔다.”
마침 관솔불을 든 청년을 앞세우고 사냥꾼이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냥꾼의 오른쪽 어깨엔 엽총이 메어 있었다.
“아저씨!”
나는 앞으로 다가서며 사냥꾼을 불렀다.
“너희들이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사냥꾼은 우리를 보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원시인이 너구리산으로 달아났다는 말을 너희들이 했을 때, 나는 원시인이 다시 이
곳으로 올 줄 알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제 집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거든.“
사냥꾼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또 코를 킁킁거렸다.
“아저씨, 원시인 아저씨를 잡아서는 안돼요!”
나는 단호하게 맞섰다.
사냥꾼은 나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원시인이 너희들 아저씨라도 된다는 말이냐?”
“원시인 아저씨도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나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사냥꾼을 쏘아보았다.
“원시인도 인간이라구? 그게 무슨 상관이니. 난 산에 오래 살아서 그런 건 잘 모른다. 단지 원
시인을 잡아 가면 동물원에서 돈을 많이 준다는 사실밖에.”
그 때 위쪽으로부터 ‘와와’ 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원시인이닷!”
갑자기 관솔불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사냥꾼이 눈 속을 헤집고 허겁지겁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뒤를 따라
뛰어갔다.
그 때,
“저 쪽이닷!”
하는 소리가 또 들렸다.
관솔불들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 순간, 우리들은 보았다. 잣나무 사이를 쏜살같이 빠져 달아나는 원시인 아저씨를. 그 뒤
를
관솔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뒤쫓고 있었다.
“오, 하느님!”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느님을 불렀다.
교회도 나가지 않는 내가 그 순간 하느님을 찾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원시인 아저씨와 마을 사람들은 이제 능선 나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관솔불에서 나오
는
불빛과 ‘와와’하는 사람들의 함성만이 들려 왔다.
“창옥아, 우리도 가 보자!”
동훈이가 멍하니 서 있는 나의 등을 떠밀었다.
그 때야 우리는 성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을 뒤쫓아간 게 틀림없었다. 동훈이와 나는 눈 속을 헤집고 능선을 향해
뛰었다.
능선을 막 오르려고 할 때,
“원시인을 놓쳤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우왕자왕했기 때문
에
어둠 속에서 마치 관솔불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동훈이와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앙옥아!”
짐작한 대로 미리 와 있던 성치가 우리를 보았는지 뛰어왔다.
“어떻게 된 거니?”
내가 묻자, 성치는 동훈이와 나를 좀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후유, 나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너희들도 그랬지?”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시인 아저씨는 정말로 무사할까?”
나는 무엇보다 원시인 아저씨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걱정 마, 내가 똑똑히 봤어. 저편 골짜기로 달아나는데 굉장히 빠르던데, 너희들도
봤다면 깜짝 놀랐을 거야.”
“산에서만 살아서 산을 잘 타나 보다.”
동훈이가 말했다.
“저기 봐, 마을 사람들이 산을 내려간다.”
성치가 저편 아래쪽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은 산을 내려가며 계속해서 뭐라고 지껄여댔다.
아마 원시인 아저씨를 놓친 것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날 발 우리들은 동훈이네 골방으로 숨어 들어가 잠을 잤는데 동훈이네 큰누나가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잤을 것이다.
“어제 저녁에 무슨 짓들을 하고 다녔길래 그렇게 깨워도 일어날 줄 모르니?”
동훈이 큰누나는 피곤해하는 우리를 향해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우물에 나가 대강 얼굴만 문지르고 들어와 아침을 먹었다. 어제 저녁 산을
오르내리느라 허기가 졌던지 밥맛이 꿀맛 같았다.
게눈 감추듯 밥을 한 그릇씩 비우고 난 우리는 고양이 걸음으로 동훈이네 집을 빠져
나왔다.
동훈이네 큰누나로부터 또 싫은 소리를 한 마디 들을 것 같아서 그랬다기보다는 어제 저녁 이
후의 일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을 바지 주머니 깊숙이 찌르고 길가의 눈덩이들을 발로 툭툭 차면서 마을
회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 회관에 나가면 동네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소문은 모두 들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배가게 앞을 막 지나려고 할 때 건너 마을에 사는 침쟁이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 할어버지는 침술 면허증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침술에 관해서만은 오래 전부터 아주 용
하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를 찾는 환자들이 하루에도 두서너 명은 되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우리가 꾸벅 인사를 하자 침쟁이 할아버지는,
“오냐, 잘들 지냈냐? 방학 때도 여전히 셋이서 붙어 다니는구나.”
하며 빙그레 웃었다.
“할아버지, 어딜 다녀가시는 길이세요?”
“응, 너희 선생님 발목에다 침 좀 놔 주고 간다.”
선생님이라는 말에 우리는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저희 선생님은 그저께 서울 가셨는데요.”
내가 대답하자, 침쟁이 할아버지는,
“어젯밤에 오셨다더라. 그런데 발목을 심하게 삐셨더구나.”
하고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요?”
우리는 마을 회관으로 가려던 걸음을 안영모 선생님의 하숙방으로 돌렸다.
우리가 방문을 열었을 때, 안영모 선생님은 누운 채로 어서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리는 선생님 곁으로 다가앉았다.
“어쩐 일이세요, 선생님? 많이 다치셨어요?”
내가 묻자, 안영모 선생님은 웃으면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버스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뎠을 뿐이야.”
라고 했다.
“일 주일 후에 오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지난번에 작성한 논문을 빠뜨리고 갔지 뭐냐. 모레까지 제출을 해야 하는데.”
안영모 선생님은 ‘모레’란 말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선생님, 어젯밤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을 알고 계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안영모 선생님은 전혀 뜩밖이라는 얼굴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목격자
“선생님, 글쎄 서울에서 온 사냥꾼의 꾐에 빠진 마을 사람들이 원시인 아저씨를 잡겠다고 나
섰
지 뭐겠어요. 그바람에 뒷산이 발칵 뒤집혔어요. 다행히도 원시인 아저씨가
달음박질이 빨랐으니 망정이지 까딱했으면 붙잡힐 뻔했어요.”
“그러니? 그래서 어떻게 됐지?”
안영모 선생님은 눈이 휘둥그래져 몸을 일으켰다.
우리들은 박사님 앞에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했다. 안영모 선생님은 시종 놀란
얼
굴을 지으며 들었다.
“하마터면 선량한 너희들의 아저씨가 동물원으로 갈 뻔했구나. 무사히 탈출했다니
아무튼 다행이다.“
안영모 선생님은 적이 안심이라는 투로 말했다.
박사님은 다음날 오후에 서울로 떠났다.
우리는 박사님의 가방을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다 드렸다.
절뚝거리며 버스에 오른 박사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 뒤,
“닷새 후에 다시 만나자!”
하며 소릴 질렀다.
우리는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서울에서 온 사냥꾼은 사흘이나 더 머문 뒤에 눈골을 떠났다. 뒷산에 사람을 풀어서
날마다 보초를 세워 봤지만 원시인 아저씨는커녕 개미 한 마리 나타날 기미조차 안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철수를 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서 뛰었다.
“깨소금 맛이다!”
동훈이가 춤을 추듯 엉덩이를 흔들며 소릴 질렀다. 동훈이는 기분이 좋으면 엉덩이를 흔드
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별명이 ‘인디언’이다.
“잘 됐지 뭐, 돈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은 톡톡히 값을 치뤄야 해!”
여간해서는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성치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잘못한 것 같다. 이왕이면 며칠 더 머물다 떠나게 할걸. 한 열흘쯤 말이지. 그랬다면 경비
도
훨씬 많이 들었을 텐데, 안 그러니?”
동훈이가 말했다.
“너희들 그 사냥꾼이 폭삭 망하길 바라는구나?”
나의 말에 동훈이와 성치는 배를 쥐고 웃었다.
“그런데 얘들아, 원시인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걸까?”
성치가 나와 동훈이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정말, 어떻게 된 걸까?”
동훈이도 궁금한 얼굴을 했다.
“내 생각인데 다시는 우리 마을에 안 나타날 것 같다.”
나는 쓸쓸히 말했다.
“그래, 창옥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처럼 푸대접을 해서 내쫓았으니 다시 오시겠니?”
성치는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어른들은 모두 바보들이야!”
동훈이가 화가 난 얼굴로 소릴 쳤다.
“어른들은 왜 돈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지 모르겠어.”
동훈이의 말에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서울에서 온 사냥꾼도 나쁘지만 쌀 열 가마니에 정신이 팔려 원시인 아저씨를 잡겠다고 나섰던
동네 어른들도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든 잘 지내신다면 좋겠다.”
내가 말했다.
“나도 그래. 생각 같아서는 우리 마을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했는데.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서. 그런데 원시인 아저씨는 왜 혼자서 살까? 차라리 원시인 마을로
돌아가지않고.”
동훈이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눈이 또 오려나 봐?”
성치가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늘이 잿빛으로 나즈막히 내려앉은 것으로 봐서 눈이 또 내릴 것 같았다.
“눈이 내리면 먹을 것을 구하기가 더 어려울 텐데.”
성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원시인 아저씨가 어디 있는 줄 알아야 식사도 갖다 드리지.”
나도 걱정이 되었다.
“혹시 배가 고프면 다시 여기로 오시지 않을까?”
성치의 말에 동훈이가 반색을 했다.
“그래, 성치 말대로 다시 오실지도 몰라. 꼭 오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성치의 말이 적중하길 바랬다.
그 날 오후, 우리들은 뒷산으로 올라가 나뭇가지 위에다 통조림이랑 과일을 늘어놓고
내려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먹을 것을 놓고 온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우리들이 뒷산에 올라갔을 때 통조림과 과일들은 그대로였다.
혹시나 해서 원시인 아저씨가 기거하던 동국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다시 돌아온 흔적은 그 어디
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원시인 아저씨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안영모 선생님이 돌아오기로 한 날 아침 나절이었다.
용칠이네 집 복실이가 웬 털모자를 물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으응?”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자였다.
쫓아가 복실이가 물고 있는 털모자를 빼앗았다.
“아니, 이건?”
나는 소스라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털모자가 아니라 가발이었다. 여자들이나 쓰는 가
발!
그런데 그 가발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아니, 그렇다며?”
누가 내 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내려친 느낌이었다.
나는 가발을 움켜쥔 채 동훈이네 집으로 내달렸다.
“동훈아, 빨리 나와!”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그렇게 서두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훈이는 놀란 얼굴로
뛰쳐나왔다.
성치네 집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성치는 연방 눈을 껌벅였다.
“가 보면 알아!”
나는 성치와 동훈이를 데리고 안영모 선생님의 하숙집으로 뛰어갔다.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마침 용칠이 어머니가 나오다가 기겁을 해서 물러섰다.
“아이구, 깜짝이야! 선생님은 서울서 아직 안 오셨다.”
나는 용칠이 어머니 앞에 손부터 내밀었다.
“열쇠를 좀 주세요.”
“왜 무슨 일이 있니? 열쇠를 달라고 하게.”
“네, 뭘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어서 좀 주세요. 잠깐이면 돼요.”
성치와 동훈이는 아까부터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눈만 휘둥그래 뜨고 나만 쳐다보고 서 있었
다.
용칠이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열쇠를 건네주었다.
“옜다, 선생님한테 꾸중이나 안 들으려는지 모르겠다.”
용칠이 어머니가 한 마디 덧붇였다.
나는 열쇠를 집어넣어 자물쇠를 땃다. 그리고는 방문을 확 열어제쳤다.
벽면의 원시인이 무례한 침입자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엔 한없이
고독하고 쓸쓸한 빛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두 팔을 벌려 원시인을 끌어안듯 그림을 내렸다.
그러자 작은 문이 나타났다.
“앗!”
나보다도 성치와 동훈이가 먼저 소릴 쳤다.
나는 문고리를 벗겼다. 손을 집어 넣어, 부드러운 촉감의 잿빛 외투 한 벌을 끄집어
내었다. 원시인이 입고 있던 바로 그 털옷이었다.
털옷에 이어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수염도 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우리들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머릿속의 신경들이 곤두박질치고 뭐가 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원시인은 박사님이었다!’
우리는 하마터면 모두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토방에 박사님이 와 있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안영모 선생님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희들, 이 원시인 아저씨가 돌아왔는데도 반갑다는 인사도 안 할 참이냐?”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도저히 인사를 할
기
분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우리를 향해 박사님이 말했다.
“너희들 기분은 내가 잘 안다. 이 선생님한테서 뭔가 잔뜩 배반을 당한 기분이지,
그렇지?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야.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추억거리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꾸민 연극이었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어떠냐,
이래도 이 선생님한테 배반을 당했다는 기분이 드냐?“
선생님의 그 말은 이상하게도 우리들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추억과 전설
우리들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본 안영모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너희들에게 이제야 고백하지만 실은 그 동안 원시인 노릇하는라고 고생깨나 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 보자. 선생님이 원시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안영모 선생님이 우리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선생님을 본 목격자가 있었어요.”
“그게 누구지?”
“용칠이네 집 복실이였어요.”
“복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안영모 선생님은 눈을 크게 떳다.
“복실이가 가발을 물고 다녔어요.”
“앗차, 내 정신 좀 보아라!”
안영모 선생님은 크게 낭패를 당한 사람처럼 말했다.
“선생님, 그렇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원시인의 흔적이 모두 선생님이 꾸민 연극이었다는 말씀
인
가요?”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안영모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그래서 고생깨나 했다는 거 아니겠니. 너희들처럼 영리한 녀석들을 속이려고 하니 너
무 힘이 들었어. 너희들과 함께 뒷산을 탐색하기로 한 그 날 밤 동굴을 찾아가
통조림과 나뭇잎더미를 가져다 놓은 것에서부터 나의 고행은 시작되었지 뭐냐.”
안영모 선생님은 ‘고생’ 대신에 ‘고행’이란 말을 썼다.
우리들은 쿡쿡 웃음을 삼켰다.
“선생님,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요.”
내가 나서서 물었다.
“뭐냐? 말해 보아라.”
“통조림과 나뭇잎더미는 그렇다고 해요. 통조림통의 이빨 자국은 어떻게 된 것이지요? 그리
고
눈 위에 선명히 나있던 원시인의 발자국은 어떻게 된 일이고요? 그리고 또
있어요. 선생님은 달음박질이 빠르지 않은데, 그 날 밤의 원시인은 너무나 빨랐어요.
그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지요?”
나의 물음에 안영모 선생님은 빙그레 웃고 나더니 다락을 열고 무엇인가 종이에 싼
것을 꺼냈다.
종이 속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틀니였다. 이가 없는 노인들이 이 대신 사용하는
틀니였던 것이다.
“어떠냐? 통조림통의 이빨 자국은 이것으로 설명이 되었겠지? 그리고 여기 또 있다.”
안영모 선생님은 마치 마술사가 물건을 한 가지씩 끄집어내듯 이번에는 다락에서
보자기에 싼 것을 꺼냈다. 보자기속에서는 털신 한 켤레가 나왔다.
“이것은 내가 직접 만든 털신이다. 발가락까지 들어가도록 만들었지 그래야만 원시인의 발
모
양을 흉내낼 수 있거든. 세 번째 질문이 뭐더라? 아 참, 그렇지! 달음박질
문제였지? 그런데 실은 나도 그 점에 대해서만은 의문을 갖고 있다. 그 날 밤의 내
달음박질엔 나 스스로도 놀랐으니까.“
“무슨 뜻이지요, 선생님?”
나도 안영모 선생님을 향해 묻지 않을수 없었다.
“그 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너희들은 아마 잘 모를거야.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단다. 너희들이 차려 놓은 식사를 깨끗이 비워 놓기 위해 뒷산을 올라갔던 나
는
사냥꾼이 풀어 놓은 정찰꾼의 눈에 띄질 않았겠냐? 관솔불을 든 사람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올라오더구나. 무전기로 연락을 했던 모양이야. 다급한 김에 동굴 속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그 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그 가운
데 몇 사람이 동굴 속으로 들어왔을 때는 아찔했지. 그 때는 앞뒤 가릴 수
없었어. 무조건 뛰었지. 어느 방향으로 뛰었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아. 골짜기에
다다라서야 포위방을 벗어난 줄 알았다. 발목이 시큰거린다는 것도 그 때야 깨달았단다.“
안영모 선생님은 지금도 식은땀이 나는지 이마를 어루만졌다.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간 우리들이 눈치챌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들이 학교 뒷산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선생님께서는 급한 노문이 있다고
하셨지요. 또 등기 우편물 사건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성이 있었어요. 그리고 찐고구마와 콩엿을
싸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던 날 밤에 있었던 원시인의 출현도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의 함정이었어요. 저희들은 그 함정에 보기좋게 걸려들었고요.“
나는 성치와 동훈이를 쳐다보았다. 그 애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들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왕 털어놓은 김에 선생님의 실수도 밝혀야겠구나. 원시인의 후각이 발달했다는
얘기는 선생님의 실수였다. 원시인들은 후각에 있어서만은 거의 퇴보 상태였으니까.“
안영모 선생님은 실수가 멋쩍은 듯 웃었다.
우리들도 따라 웃었다.
“선생님, 저도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번에는 성치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말해 보렴.”
“선생님께서 보여 주셨던 대학생들의 설문 조사 말예요. 그 조사는 실제 있었던
일인가요?”
“물론이고말고. 왜? 그것까지 의심이 나니?”
안영모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껄껄껄 웃었다.
“그렇잖아요, 선생님. 연극을 하도 그럴 듯하게 꾸미셔서 말예요.”
“믿어 둬라. 선생님은 말이지, 대학 시절부터 원시인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단다. 아니, 원시인뿐만 아니었지. 고릴라나 원숭이 같은 영장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단다.”
안영모 선생님은 창문 너머로 펼쳐진 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연국도 모두 끝이 났구나. 어떠냐? 너희들 모두 멋들어진 연극을 했다는 생각이 들
지
않냐?”
선생님은 큰 짐이라도 벗어 놓은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우리들의 눈엔
오히려 더욱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
나는 아까부터 꼭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뭐냐?”
“하필이면 왜 원시인 연극을 꾸미셨어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은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선생님은 말이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단다. 앞으로 올 미래의 시간만큼이나 우리들이 살아온
과거의 시간들도 중요하다고 말이야. 돌을 깍아 도끼를 만들고 바위에다 물고기의 형상을 새
기
던 문명 이전의 인류의 삶도 분명 위대했다고 말이지. 너희들도 한 번 상상해 보렴. 인간이 최
초로 두 발로 대지 위에 섰을 때의 그 환희와 감격이 어떠했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향해 인공 위성을 쏘아올린 감격보다도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안영모 선생님의 눈빛이 점점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용암의 분출
광
경이 생각났다.
“내가 이번에 연극을 꾸민 것도 실은 어느 정도 너희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놀람을
선물하고 싶어서였지. 그리고 그 선물은 어느 정도 너희들의 마음에 흡족함을 주었다고 생각
한
다. 비록 며칠 만이라도 원시인을 너희들의 아저씨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 아니
겠
니?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가더라도 지금의 기분을 잊지 말아라. 아니 고등 학교, 대학교를 거쳐
사회에 나가더라도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라.“
우리들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안양모 선생님에게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
가
예리한 조각칼이 되어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건 아주 중대한 일인데, 너희들 나와 이것 하나 약속하지 않겠니?”
안영모 선생님은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말씀하세요, 선생님.”
“우리들의 연극을 비밀하 하자! 우리 네 사람만 아느 일로 말이야. 아니구나, 다섯
사람이구나. 너희들에게 성금을 보내 주었던 예쁜이가 있구나.“
“참, 그게 누구예요, 선생님?”
“아, 단발 머리 선생님!”
나는 반가움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떼, 약속할 수 있겠니?”
안영모 선생님은 마치 큰 음모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나는 말을 하고 나서 금방 후회를 했다. 이미 박사님의 큰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보다도 안영모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골에 원시인의 전설을 만들자는 생각이다. 아니, 우리 설촌 국민 학교에 영원한 원시인의 전
설을 남기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약속하겠어요, 선생님.”
나의 대답에 성치와 동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우리 학교의 전설을 위해서!”
안영모 선생님은 원시인의 털옷과 털신을 주섬주섬 보자기에 쌌다.
“이왕이면 학교 뒷산으로 가자!”
안영모 선생님은 보따리를 들고 일어섰다.
“선생님, 그 곳에는 왜요?”
성치가 따라 일어서며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들의 성스러운 입설식을 가져야 할 게 아니냐?”
“입설식이 뭔데요?”
“입설식이란 전설을 창조하는 의식이다. 아직은 국어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안영모 선생님의 말에 우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선생님.”
나는 안영모 선생님의 손에서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우리들은 하숙방을 나와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눈을 뒤집어쓴 잣나무들이 성스러운 우리들의 입설식을 환영이라도 하듯 열을 지어
맞아 주었다.
나는 쌍둥이바위 위에다 보자기를 풀었다. 안영모 선생님이 천천히 성냥불을 갔다
대었다. 불길과 함께 연기가 솟아 올랐다. 전설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들의 여섯 번째 겨울 방학이자 마지막 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곧이어 개학이 되었고,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식은 산골 학교답게 아주 조촐하게
치러졌다.
매사에 꼼꼼하고 자디잘았던 교장 선생님도 이 날만은 벗겨진 이마만큼이나 탁 트인 음성으로
‘더 넓고 큰 바다로 나가거라.’라는 말을 해서 우리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다들 심한 독감에 걸리기라도 한 듯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졸업식 노래를 부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뜻밖에도 우리 삼총사를 기다리는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예쁜이가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찾아온 것이었다.
“여로분의 졸업을 축하해요!”
단발 머리 선생님은 꽃다발 한 개씩을 우리들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고맙습니다.”
우리들은 난생 처음 받아 보는 꽃다발을 꼬옥 끌어안았다.
뒤이어 안영모 선생님이 껑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희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안영모 선생님은 우리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의 손이 보기보다 훨씬 크고 우악스럽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때였다.
원시인의 후손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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