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여러 모습
이기백
머리말
농업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벼농사의 시작
농토의 면적을 재는 법
물과 농사
농사에 필요한 일들
조선후기 농업의 발달
현대의 농업
수공업
사회의 발전과 쇠로 만든 무기, 농기구의 사용
문화가 발달하면서 정교해진 세공품
제조하는 일의 세분화와 장이 일의 전문화
관청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상업
교역의 시작
시전상업과 특권상인
육의전과 5일장
상평통보의 사용과 자유상인들의 성장
근대 상업의 시작
교통
배와 말, 마차의 이용
수레와 가마의 이용
통일 신라와 발해의 교통
고려의 교통
조선의 교통
현대의 교통, 자동차, 자전거, 기차, 배, 비행기
통신
봉수제도
우역제도
새 제도의 채용
오늘의 발전
과학기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과학과 종교의 차이
천문학과 역학의 발달
새로운 과학 문명의 도입
신분제도
사회적 지위의 세습
엄격한 신분제도로서의 골품제
반을 중심으로 짜여진 신분제도
양반과 상민
신분의 변동과 신분제도의 폐지
정치제도
정치제도의 발생
통일된 정치조직의 성립
전제정치와 정치제도
고려의 귀족정치
조선시대의 정치제도
민주주의 정치제도
농촌
촌락공동체
보다 많은 생산과 보다 많은 세금--촌적의 자세한 작성
자영농이 농촌의 주인이 되도록
광작의 시행과 상업 작물의 재배--농촌의 활기
굶주림과 슬픔으로 가득한 농촌
농촌의 새로운 변화
도시
지배의 중심지--도시의 처음
금성--사치와 향락의 도시
교역의 중심--개경
정치, 경제, 문화의 도시--한양
국제도시로서의 발돋움--서울
성곽과 무기
신석기 시대의 무기
빈번한 전쟁과 무기
성곽의 축조
무기의 발달
대외항쟁
중국과의 항쟁
일본과의 항쟁
3^3456,1^운동의 횃불
국토
마을과 고을
국토의 싹
국토의 테두리
국토의 완성
국토의 분단
가옥
동굴의 이용
움집의 등장
움집의 지상가옥화
온돌과 목조가옥의 등장
기와집과 초가집
남녀 사이의 생활 공간의 엄격한 구분
서양식 건축의 도입
무덤
구덩무덤과 돌무지 무덤
고인돌과 돌널무덤
널무덤과 독무덤의 유행
석총과 토총
적석목곽묘의 등장
횡혈식 석실분의 유행
고려와 조선의 왕릉
회격묘와 회 바른 목관묘
의복
바지와 저고리의 등장
치마와 두루마기의 착용
삼국시대 관리들의 공복 제정
통일신라와 발해의 의복
고려시대의 의복
목면의 등장과 전통양식의 성립
개화기 이후의 한복과 양복의 혼용
명절
추수감사제와 기풍제
계절적인 명절
불교적인 명절
현대의 명절들
사원
불교의 수용과 사원의 건립
사원의 3종류:석굴사원, 평지사원, 산지사원
사원의 구조와 건물 배치
불탑의 변천
금당의 명칭 및 불상의 변천
학교
신석기시대의 교육기관
삼국시대의 학교
고려시대의 학교
조선시대의 학교
근대식 학교
책(문자, 인쇄)
한자의 사용과 인쇄술의 시작
목판인쇄술의 발달과 팔만대장경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다
한글창제와 다양한 책의 간행
근대식 인쇄술의 도입
문학
신화에서 비롯된 주술의 노래
향가의 유행
한시를 잘 지은 고려 귀족들
다양해진 시문들
한글소설의 등장
귀족문학에서 서민문학으로
현대문학
음악, 무용, 연극
신석기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와 발해의 공연예술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의 음악, 무용, 연극
미술
신석기시대의 미술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미술
삼국시대의 미술
통일신라와 발해의 미술
고려시대의 미술
조선시대의 미술
근대의 미술
농업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사람들은 처음 자기들이 먹을 식량을 제 손으로 생산할 줄 몰랐다. 자연 속에서 절로 자라난
식물의 열매를 주워 오거나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먹을 뿐이었다. 이러한 것을 채집이라고 한다.
먹는 것은 어디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배를 충분히 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손으로 먹을 것을 생산해 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농업은 그
결과로 발달하게 되었다.
농업은 처음 여자들이 시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남자들이 사냥을 하러
나간 뒤 집에 남은 여자들이 뜰에 버린 열매의 싹이 돋아나서 자라는 것을 보고 시험삼아
해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 성과가 좋은 것을 보고 남자들도 사냥보다 농사를 본격적으로
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농업이 처음 사작되기는 신석기시대 마지막 무렵부터였다.
그 시대의 집자리 같은데서 기장이나 피라고 생각되는 곡식의 낟알이 발견되고 있어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들은 돌로 만든 괭이로 땅을 일구어서 곡식을 심었으며 거둬들인 곡식은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먹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이때에는 밭농사는 하였으나 아직 논농사는 할
줄 몰랐다.
벼농사의 시작
논농사가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원래 벼는 남쪽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었는데 이것이 점점 북쪽으로 번져와서 우리나라에도 전파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쓰인 농구로서 현재 알려진 중요한 것이 돌괭이와 돌칼인 것이다.
돌괭이는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돌칼은 반달모양을 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벼이삭을 자르는
것이었다. 돌칼의 등에 구멍을 하나 혹은 둘을 뚫고 거기에 가죽끈 같은 것을 하나 끼워서
돌칼을 쥔 손을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돌칼을 가지고는 이삭을 한 번에 하나씩밖에 자를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추수작업은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튼 이천 몇백년 전의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논에 벼를 심어 쌀밥을 먹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기 현재
하루라도 없어서는 못사는 쌀은 역사가 무척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
농업기술은 또 한 번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우선 괭이도 철로 만들어 썼으나 또 보습도
사용하였다. 보습은 다듬어낸 나무자루 한쪽에 끼워서 따비를 만들어 사람이 밭이나 논을 갈기도
하고 혹은 이를 쟁기에 붙여서 소로 하여금 땅을 갈게 하는 기구였다. 삽이나 괭이보다 더 크고
따라서 땅을 더 깊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땅을 깊이 갈면 그만큼 농작물의 뿌리가 급히 박혀서
곡식은 더 잘 자라게 되고 수확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는 것보다 더
많은 논밭을 짧은 시간 내에 갈 수가 있게 되므로 한 집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나게 되었다.
넓은 면적에서 풍성하게 자라난 곡식을 추수하는 데 있어서도 새 농구를
사용하게 되었다. 돌칼 대신에 철로 만든 낫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때의 낫은 거의 현재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서 이삭 하나씩이 아니라 여러 대의 벼줄기를 한 손으로 거머쥐고 다른 손에
쥔 낫으로 베어내곤 하게 되었다. 추수를 해 들이는 것도 그만큼 쉽게 된 셈이다. 이미
삼국시대에는 이러한 농사법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농토의 면적을 재는 법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 논밭의 면적을 재는 방법인데 그 표준이
추수해서 거둬들이는 곡식의 양에 있다. 즉 추수할 때 한 손으로 쥐고 낫으로 자를 만한 양을 한
줌이라고 하였다. 백 줌의 볏대는 이를 한 단으로 묶었고 열 단은 지게로 한 짐이 되었다. 그리고
백 짐을 한 목이라고 하였는데 한 목의 곡식을 거둬들일 만한 논밭의 면적도 또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땅의 면적을 재는 기본단위인 결은 이렇게 해서 산출된 것이다.
그런데 땅이 기름지고 여윈데 따라서 수확량에 차이가 있었으므로 세종대왕은 이것을
조정하려고 한일이 있기도 했다. 현재 한 결이 얼마 정도 넓이의 땅인지 자세히 모르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대략 이십섬 가량의 벼를 생산하는 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땅에 뿌리는 종곡의 양을 기준으로 해서 한마지기 두마지기라고 재기도 했고
또 하루에 땅을 갈 수 있는 면적을 기준으로 하루갈이 이틀갈이 하는 식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물과 농사
논농사를 하는 데는 물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빗물이 논농사에 넉넉할 만큼 항상 충분히 내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퍽 오랜 옛날부터 저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같은 저수지라도 흐르는 시냇물을 막아서 물을 고이게 하기도 하고 혹은
평지를 깊게 파헤쳐서 땅밑으로부터 솟아나는 물을 고이게 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나라에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이러한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다.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있는 전라도 김제의 벽골제는 그 대표적인 것인데 김제라는 이름도 이 저수지가 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대개 제라는 글자가 붙은 지방에는 그러한 저수지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다.
기계가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라 저수지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논에 물을 댈 수 있으리만큼 충분한 저수지가 만들어지지는 못하였다. 훨씬 뒤에까지 논농사에
필요한 물은 빗물이나 혹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의존하였다. 산골짜기에서는 흔히 일년
내내 쉬지 않고 졸졸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있어서 그런 곳에 논을 풀면 흉년을 모르는 훌륭한
논농사가 가능하였다. 따라서 빗물에 의존하는 평지의 논보다 산골짜기의 논이 더 좋고 값도
비쌌다.
농사에 필요한 일들
위에서 말한 것으로 대개 짐작을 하였을 것이지만 농사에 중요한 것은 봄에 논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그 곡식이 자랄 수 있도록 물을 공급하고 그리고 가을에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이다.
논밭을 갈자니 쟁기가 필요하고 물을 대자니 저수지가 필요하고 추수를 하자니 낫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가장 일찍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땅은 갈아서
일구어만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논바닥을 고르게 만드는 써레라든가 흙을 부수어서
부드럽게 만드는 미리깨 같은 것이 보조 농구로 쓰여졌다. 또 논밭에서 베어 온 곡식의 낟알을
뜯어내기 위해 도리깨나 그네 등이 필요했고 낟알의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절구나 연자매 혹은
물레방아가 필요하였다. 연자매는 소나 말의 힘으로 곡식을 찧는 것이고 물레방아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물의 힘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밖에 또 필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들을 뽑아주는 일이었다. 잡초들은 곡식이 지리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빼앗아 먹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손으로 뽑아주거나 하였을 것이지만 뒤에는 이를
위하여 호미를 사용하게 되었다. 호미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었다. 같은 땅에 같은 해 여러번 계속해서
곡식을 심으면 땅의 양분을 모두 빨아먹게 되므로 곡식은 자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땅을 쉬어야만 했다. 이 애로를 극복하는 길은 물론
비료를 주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비료를 주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세종대왕 때 만든 농사직설이라는 책에는 인분, 우마분, 녹비 등을 쓰는 것이 좋다고 적혀 있다.
인분을 담아 나르는 데는 모양이 북과 같이 생긴 장군이라고 부르는 통을 이용하였다. 하여튼 이
비료의 사용은 해마다 농사를 쉬지 않고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농업의 발달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 왔다고 하겠다.
조선후기 농업의 발달
우리나라 농업은 이렇게 쉴 사이 없이 발달해 왔으나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커다란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게 된 것이다. 이앙법이란 모판을 따로 만들어서
씨를 뿌려 모를 길러 가지고 적당히 모가 자란 다음에 이를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었다. 이니
고려 말기인 14세기에도 이러한 이앙법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였던 것이다.
이앙법이 발달하게 되면 대부분의 논은 초여름까지도 비워두게 되므로 그
사이를 이용하여 보리농사를 할 수 있었다. 즉 그 전 해에 보리를 심어서 초여름에 추수를
하고 그리고 다시 물로 옮겨 심어서 벼농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모작은 같은 땅에서
한 번에 두 번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므로 식량을 크게 증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모작을 하게 되면 그
전보다도 더 수리문제가 중요해졌다. 왜 그런가 하면 이앙을 해야 할 적절한 시기에 물이 없으면
한해의 농사는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때에 저수지를 과거보다도 더 많이 만들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제언사라는 관청을 따로 만들어서 저수지를 만들고 수리하는 일들을
맡아보게 하였다. 또 농민들은 저수지를 공동으로 수리하는 목적으로 계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18세기에는 전국에 저수지 수가 6천이나 되었다고 한다.
물은 논보다 깊은
곳에 있어야 이것을 논에 끌어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이 논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경우도 많은 것이며 이런 경우에는 사람의 힘으로 이를 높은 곳으로 퍼 올려서 써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내게 되었다. 하나는 네모난 나무통 양쪽에 두
개의 끈을 달고 양편으로 갈라선 두 사람이 그 끈을 쥐고 물을 퍼 올리는 두레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배모양의 길쭉한 나무통을 만들어서 이것을 삼각추같이 얽어서 세워 논
나무에 끈으로 매달아 그 한쪽의 쥘 대를 손으로 쥐고 물을 퍼 올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매우 힘이 드는 고된 노동인데 비해 그 성과는 그리 크지가 못하였다. 그래서 지식이 넓은
사람들 중에서는 중국에서 쓰는 수차를 이용하기를 권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에도 그런
분이 있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중국의 문명에 밝은 북학자들 중에 더욱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수차는 물레방아 바퀴와 같은 것을 발로 밟아 돌려서 밑의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었으므로 비교적
피로함이 없이 많은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의 농업
19세기말에 가서 우리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섭을 가지게 되면서 농업도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배워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의 침략에 의하여 그 식민지가 되게 되었다.
이때에 일본은 자기 나라를 공업 국가고 발전시키고 그 대신 자기 나라에서 모자라는 식량을
우리나라에서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우리나라 농업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저수지도 만들고 기술도 개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나라를 위한 것이지
우리나라를 의한 것은 아니었다. 식량은 약간 증산이 되기는 하였으나 증산된 것의 몇 배나 되는
쌀을 우리나라로부터 가져갔던 것이다.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가져갔다면 그들의 야욕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을 먹이기 위하여 만주에서 조,
수수, 콩 등의 잡곡을 들여 왔다. 우리나라 농민이 땀 흘려 만든 쌀은 저희들이 먹고 우리에게는
잡곡을 먹게 하였던 것이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농업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뚤은 논두렁을 바로잡아 일하기에 편하도록 농지를 정리하였다. 많은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었고 그래도 비가 안 와 모자라는 물은 지하수를 개발하여 이에 대비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또 많은 화학비료 공장이 세워져서 스스로 비료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닐 하우스를 이용하여 쌀 농사 이외에 각종 야채나 과일을 재배할 수 있게도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농업을 키우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로 인하여 쌀의 수입이 개방됨으로 해서 농업 기술의 발전은 더욱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수공업
사회의 발전과 쇠로 만든 무기, 농기구의 사용
돌이나 나무, 광석과 같은 자연물을 사람의 힘으로 본래 모습을 변경시켜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공업이다. 오늘날은 기계를 부려서 생산을 하지만 과거에는 손이나 간단한
기구를 부려서 생산을 하지만 과거에는 손이나 간단한 기구를 써서 물품을 생산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수공업이라 불렀다. 수공업은 주문을 받아서 많은 수의 물품을 만들어 내는데 그
일에 매달려서 밥벌이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장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러한 것을 내용으로 하는 수공업은 나라를 이룬 뒤에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 나라가
생겨나기는 3천년 전쯤부터인데 이 때에 처음으로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몇 백년 뒤에 보다 단단한 철을 사용하게 되었다. 청동이나 철로 칼이나 창 따위의
물건도 만들고 철로써는 괭이나 보습 또는 낫과 같은 농기구도 만들었다. 구리를 사용하여서는
말방울이나 멍에 또는 거울 따위도 만들었다. 오늘날 쇠붙이 도구를 만들었던 거푸집(용범)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청동이나 철로 만든 기구들은 세력이 강한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독점되어 그들의 권력을
다지고 재부를 넓히고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되었다. 수공업은 지배 계층에 의하여 그들의 의도에
따라서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졌다. 나무나 돌로 만든 간단한 기구는 지배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수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삼국시대가 되고 또 통일신라에 이르러 수공업은 더욱 발전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오늘날 군 정도 크기의 성읍 국가에서 처음 출발하여 그보다
규모가 큰 연맹 왕국을 거쳐서 성장한 나라들이었다. 삼국의 성장은 온갖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고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보다 견고하고 더 날카로운 철제무기들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크게 뒷받침 한 것이 수공업이었다. 또 철로 만든
농기구에 의지하여 농사짓는 일이 보다 보편화되었다. 특히 가축의 힘으로 땅을 깊이 많이
갈아서 수확을 늘렸다. 신라시대에 소가 땅갈이에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보습이 달린
쟁기의 수요가 그만큼 늘어 났다는 뜻이 된다. 수공업자들은 더 많은 철제 농기구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가 발달하면서 정교해진 세공품
한편 삼국시대 이후가 되면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들이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일 필요가 있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노력도 커졌다. 자연히 건축, 공예, 미술품 따위의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전문적인 장이들이 여기에 관여하게 되었다. 신라의 옛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여러
부장품들 가운데에는 금으로 만든 관, 띠, 귀고리, 가락지, 팔찌라든가 유리, 구슬 같은 지극히
아름다운 세공품들이 있었는데 그 구석구석에 수공업자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이다.
불국사 석굴암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석탑이나 불상 그리고 범종들도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생활과 관련있는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가령 가죽으로 물품을 만들거나
비단으로 옷감을 짓거나 하는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순금제품 같은 것을
만드는 수공업은 나라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서 운영되었다. 다른 수공업도 나라의 운영에
맡겨져서 나라의 수요를 우선적으로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가령 신라의 경우에는 가죽제품의
제조를 맡는 피전 삼베 제품을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마전 비단 제품의 일을 맡는 면전 따위와
같은 관청이 있었다. 일반 민간인들의 주문을 받아서 생산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리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조하는 일의 세분화와 장이 일의 전문화
나라에서 주도하는 수공업이 중요하기는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수공업을 관장하는
관청들이 분야에 따라 두어졌다. 분야는 더욱 광범위하여졌고 이에 따라서 일을 주관하는 관청의
수도 많았다. 예를 들면 건축이나 토목공사를 맡는 선공시 무기를 제조하는 군기시 왕족의
의복을 제조하는 장복서 귀족층이 사용하는 각종 장식품을 제조하는 공조서 철물이나 세공품을
만드는 장야서 등 많은 관청이 있었다.
각 관청에는 물품을 만들어내는 장이들이 전속되어
있었다. 그들의 일은 세분화 전문화되었다. 그들은 국가에서 녹봉을 받고 일년에 300일 이상
관청에 나가 있어야 했다. 그들처럼 전문적이거나 전업적이지는 않았지만 소라는 특수한
행정구역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장이가 있어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물품을
생산하거나 제조하였다. 그들은 전문분야에 따라서 금 은 구리 철 석탄 등의 광물을 캐기도
하였고 종이 기와 도자기 등을 제조하기도 하였으며 소금 먹 따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들은
녹봉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품을 마음대로 판매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관청에 소속된 장이들은 공장 안에도 기록되었다.
한편 그러한 명부에 이름이 올려져 있어도 자유로운 장이들이 따로 있었다. 그들도 전업적인
장이들로서 1년에 일정 기간 수요품의 생산과 제조에 징발되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주로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아서 물품을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일반 수공업
제품이 필요한 경우에는 일반인들은 대개 스스로 만들어 썼다. 그래서 자유로운 장이들의 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관청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비중이 컸던 것은 나라에서 주도하는 수공업이었다. 고려시대의 특수한
행정구역인 소가 없어졌다. 당연히 소에 있던 장이들을 물품생산에 동원하는 일도 없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장이들은 역시 공장 안에 등록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관련관청에 일정한 수씩
전속시켰다. 가령 군기감에는 640여명을 소속시켜 무기를 만들게 하였고 상의원에는 590여명을
소속시켜 의류를 제조케 하였다. 그리고 사옹원에는 380여명이 소속되어 자기를 제조하였고
조지서에는 91명의 공장이 소속되어 종이의 제조에 종사하였다. 지방의 감영 등에도 장이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공장 안에 등록된 경공장은 2800명 지방의 외공장은 3500명이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관청에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는 1년 중 일정기간만 관청의
제조일에 동원된 이들도 있었다. 좀더 자유로웠던 그들은 일반인의 주문을 받아서 물품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인의 소요는 대부분 새로이 등장하게 된 사사로운 장이들에
의하여 충족되기에 이르렀다. 사사로운 장이들은 양반들의 사치품을 생산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일반 생활 필수품을 제조하여 시장에 팔았다. 예컨대 놋그릇이라든가 갓 또는 가죽신 따위가
그러한 물품들이다. 가내 수공업도 번성하였다. 옷감을 짜는 일이 특히 그러하였다. 비단이나
삼베 또는 모시로 짜는 일도 행하여졌다. 그런데 목면을 제배하게 되면서 무면을 짜는 면직업이
크게 유행하여 가내수공업의 주류를 이루어갔다. 또 농촌에는 농업도 겸하면서 농기구를
제조하는 야장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나라에서 주도하는 수공업이 크게 쇠퇴하게 된다.
물론 무기라든가 왕실에서 쓰는 자기의 제조는 늦게까지 나라에서 주도하는 수공업으로
남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정조 임금 때에 오면 나라에서 가지고 있던 공장 안마저 폐지되어
장이들은 모두가 사사로운 수공업자로 독립하였다. 자유롭게 주문을 받아서 물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그들은 대개가 상인들로부터 자금과 원료를 공급받았다. 그 대신 그들은 제품을 그
상인에게만 판매하였다. 그러나 수공업자 가운데에는 자신의 자본을 가지고 장이나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유기는 안성에서 많이
제조되었는데 그것을 만드는 수공업자들은 생산품을 장이 서는 날 상인들에게 판매하였다.
농촌에서는 본래 농민들이 자신의 수요에 맞추어 생산하는 일이 흔하였다. 직물과 같은
수공업품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점차 농민 가운데서도 수공업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개항 이후에 우리 나라의 수공업은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기계의 힘으로 물품을
대량으로 제조, 생산하는 기계공업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여러 공장들이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정부에 의하여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을 관장하는 여러 관청들도 생겨났다. 고종 때 근대식
무기를 제고하는 기기국,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 방직을 위한 직조국 등의 관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대한제국시대부터는 민간인들이 공업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이 주로 관심을 가진 부문은 방직공업이었다. 김성수가
1919년에 시작한 경성방직과 1920년 이후에 활기를 띤 평양의 메리야스공업과 고무공업은
두드러진 예였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민간인들에 의한 공업이 순조롭지가
못하였다. 대신 일본인들에 의한 공업은 발전하여 갔다. 특히 1930년대에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군수품이 필요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우리 나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여기서 조달하고자 하였다. 자연히 화학공업을 비롯한 중공업에 대한 일본인의 투자가
많아졌다.
그에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산업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은 점차 줄어갔다. 대신 공업이
중시되었다. 1939년에 농산액은 42%로 줄었고, 공산액은 39%로 늘었다. 여기에 광산액 6% 까지
포함시키면 광공업이 농업을 앞지르는 결과가 되었다.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1942년에
공장노동자의 수는 52만 이었고 광산노동자는 22 만을 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못하였다. 거의 태반이 하루 12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을 하였으며, 그럼에도 임금은
일본인의 반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았으나 곧 6.25 전란을 겪으면서, 우리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이 모색되었다. 특히 1960년 대 이후 공업 중심의 경제개발
정책들이 계획적으로
줄기차게 추진되었다. 많은 공장들이 전국 각 처에 세워졌다. 대규모 공업 단지들이 여기저기에
건설되었다. 외국의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고 국내의 값싼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점점
부가가치가 높은 공산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도 손색이 없는
공업국으로 부상하였다. 첨단과학의 대명사인 반도체에서부터 좋은 자동차까지 고급제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 생산은 세계에서 6번째로 꼽히는 생산국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은 정부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 우리의 오래된 수공업의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값싸게 노동을 제공하여 온 우리 노동자들의 헌신적, 희생적
기여였다. 저인금은 제품의 가격을 낮추는 데 도움을 주었고, 낮은 물품 가격은 국제시장에서
우리 제품이 잘 팔릴 수 있게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러나 저임금은 많은 노동자들의
생활을 궁색한 것으로 묶어 두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상업
교역의 시작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씨족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진 공동체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스스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필요로
하면서도 만들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다른 공동체로부터 그것을 들여오고 대신
다른 물품을 주었다. 가령 육지 안에서 소금을 구할 수 없는 경우라든가 석기를 만들 석재가
구하여지지 않는다든가 하면 다른 물품을 주고 그것을 교역하여 왔다. 말하자면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철이 교환의 수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는 포나 곡식이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그 뒤 삼국시대에서나 통일신라시대에도
그러했는데 철 대신 금이나 은이 귀족들 사이에 간혹 교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신라의
소지왕 때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품을 유통케 한 조치가 있었는데 관청에서
주도하여 서울 중심의 상업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를 통하여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시전상업과 특권상인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였다. 산업이 전에 비하여 발전하게
되고 유통도 전보다 활발하여졌기 때문이다. 고려 성종 15년(996)에 처음으로 철전이 만들어졌고
숙종 때에는 은 1근이 은병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보조화폐로 해동통보룰 만들었다.
그러나 화폐가
널리 유통되어 쓰이지는 못하였다. 고려의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번창하였다. 시전이란 본래
도회지에 있는 가게라는 뜻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 받기 위하여 서울과 서경 등의 일정한 지역에 개설한 상설점포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도회지 사람들의 생활품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도 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상점을 나라에서 빌려 받고 일정한 세를 내었다. 정부에서는 경시서를 두어서 시전을 감독하게
하였다.
개경과 서경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상업이 상설점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데 비하여
농촌의 상업은 그리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일 왕복거리에 있는 교통 중심지에 일정한 날마다
장이 서서 사람들이 물품을 가지고 와서 필요한 것을 주로 포로 값을 치루고 서로 사고 팔았다.
장에서는 농민과 소생산자들 말고도 장 사이를 순회하며 장사를 하는 비교적 전업적인 상인인
행상이 있었다. 간혹 은병이 상용되는 일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금속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
육의전과 5일장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시전상업이 중요하였다.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점포를 상인들이
임대하였는데 서울의 경우 종로를 중심으로 한 도로변에 시전이 있었다. 각기 비단 무명 명주
모시 종이 어물의 여섯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상품을 독점해서 팔
수 있는 특권을 누린 대신 관부의 수요품을 나라에 바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런 부담이
없는 영세한 시전도 있었고 또 몇 군데 장시가 열리기도 하였지만 활발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시골에는 상설시장이 없었다. 대신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이 있었는데
대체로 5일마다 열렸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장과 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행상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세공품이라는 농수산품같은 것을 이고 지고 다녀서 보부상이라고
불리어졌다. 상품의 유통이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와 같았는데 그러므로 가령
저화라든가 조선통보라든가 또는 전폐라든가 하는 화폐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중요한 교환수단은 여전히 포였다.
상평통보의 사용과 자유상인들의 성장
상업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가 되어서였다. 고려시대 이래 화폐가 간헐적으로
주조되기도 하였지만, 유동이 잘 되지를 않았었다. 그런데 숙종 때부터 상평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하게 되면서도 마침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그만큼 상품의 유통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업이 발달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은 예로부터 농민들의 특산물을 받아서 조달하여 왔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서 농민들은 특산물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대동미라는 명목의
미곡을 바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 쌀을 공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주고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게
하였다. 그러한 공인들은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면서 독점적인 도매상인인 도고로 성장
하여 갔다.
공인뿐만 아니라 도고로 성장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서울의 시전상인들도 특정상품을 독점하여
판매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도매상인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한편
사사로운 상인들의 활동도 두드러져서 상업활동의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서울상인들과
개성상인들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 때에는 국제무역도 활발하여졌다. 의주의 상인들은
청나라, 동래의 상인들은 일본과 각기 사사롭게 교역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에는 여기저기서 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큰 시장들도 들어서게 되었다.
본래는 특정한 물품을 판매하는 권리를 시전상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다른 상인들이 상점을 낼
수가 없었다. 시전상인들에게는 그들의 상업활동을 금지시킬 권한이 주어졌었다. 그런데 그런
권한이 영조 때 오면 없어지게 되었다.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서울에는 동대문, 종로, 청파동 일대에 커다란 장이 서서 번창하였다.
여기에는 나라의 각종 산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된 외국상품도 거래되었다.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도 활기를 띠었다. 주로 5일장이었는데, 18세기에 전국에는
1천여 이르는 장이 있었다. 개중에는 대구의 약령시처럼 봄, 가을에 열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 큰
장은 거의 상설시장으로까지 발전하여 가는 것도 있었다. 또 여기에는 보부상을 상대로 하는
도매상인으로서 객주나 여각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도매업은 물론이고 창고업, 운송업, 여관업과
은행업까지 겸하여 지방의 상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근대 상업의 시작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외국상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상업활동을 하자 종래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객주, 여각 등은 상사회사를 조직하고, 보부상은 보부상단을
조직하여 외국상인과 대항하면서 자신들의 활로를 개척하였다. 그들 가운데 객주들은 서구적인
상거래 방법에 적응하면서 근대적인 상인으로 성장하여 갔다. 그들은 근대적인 객주조합도
만들었는데, 뒤에 한성상업회의소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한국상인들의 성장도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커다란 장애를 받았다. 상업활동이 활발하기 위해서는 자금의 유통이
원할하여야 하였지만, 일본이 한국의 금융을 장악하고 지배하면서 한국상인들의 상업활동은 더욱
불리해졌다.
일본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서야 한국인에 의한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업의 발달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온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이 때부터 국제시장에
제품을 내다 파는 국제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부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의 주요 목적은 공업제품을 생산하여 국내의 수요를 채우고
나아가 다른 나라에 수출하기 위함이었다. 1950년대에도 수출이 있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대단히
미약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수출품이 광석이나 해산물같이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는 주로 경공업제품들을,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중공업제품들을 국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요즈음에는 첨단산업에 해당하는 분야의 제품도 수출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더욱
고가품이 되므로 이익이 그만큼 많이 생기는 것들이다. 사업이 우리의 경제력을 지탱하는 데
대단히 큰 힘이 되고 있고, 또 국제무역이 우리 상업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교통
오늘날과 같은 지형과 기후에서 우리 만족의 형성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북방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동해 왔을 것인데, 이들이 이동해 온 경로가 곧
문화의 유입로이며 교통로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냥 등으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으나, 화살촉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흑요석과 같은 것은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므로 그것을 물물교환을 통해 구하였다.
당시에 이미 씨족 사이의 왕래와 물건의 교역을 위한 교통로가 생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통수단이 별달리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이 직접 걸어다니며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배와 말, 마차의 이용
그러다가 청동기 문화가 수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배와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바위에 새겨졌을 암각화에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하는 장면이 들어 있음에서도 이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말이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청동으로 만든 말
모양의 드리개(패식) 같은 당시의 유물이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또한 부여,
고구려, 동예 등의 말이 중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정도로 유명하였고, 남쪽의
변한, 진한에서도 널리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마차가 등장하였다. 말의 입에 물리는 철로 만든 재갈뿐만
아니라 멍에 등 수레를 말에 연결하는 거여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말과
마차를 타고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일부 지배층만의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은 부여에서는 가라고
불리었는데, 이들이 주관한 사출도라는, 왕경을 중심으로 한 동, 서, 남, 북 사방에 짜여진
행정구역이 있었음은 당시에 중앙으로 집중되는 교통망을 갖추어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인 지방 통치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문자 그대로 영토를 널리 개척하여 유명한데, 그의 능에 세워진 비문에
일생 동안 넓힌 것이 성이 64, 촌이 1400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에 성과 촌을 중심으로
하여 너른 지역을 중앙에서 통치할 수 있도록 도로망은 물론이고 지배체제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상황은 신라, 백제의 경우도 거의 같았다. 신라는 이미 소지와
9년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공공도로이었을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서 왕경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리의 왕래에 편의를 제공해
주는 우역이 설치되었을 뿐아니라, 이것을 거점으로 교통망이 국가에서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통망을 토대로 삼국이 모두 중앙과 지방을 행정 구획으로 구분하였다. 교통의
중심지인 왕경은 신라의 경우 줄곧 금에 두었으나 고구려는 압록강가의 국내성에서 대동강가의
평양성으로, 백제는 한강가의 위례성에서 금강을 거쳐 사비성으로 각각 옮겼는데, 이 왕경을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모두 5부로, 신라에서는 6부로 나누었다. 그리고 지방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 서, 남, 북 등의 방위를 가리키는 명칭을 취하여 각각 5부와 5방, 신라가 상, 하 등의
여러 주를 두어 통치조직을 갖출 수가 있었다.
수레와 가마의 이용
이러한 삼국시대에는 교통수단으로 말은 물론이고 여전히 마차와 배가 사용되었으며 이외에
우차, 수레도 활용되었다. 말은 신라의 기마형토기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종종 그 예가
찾아지며, 배의 형태는 주형토기뿐만 아니라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에서 발굴된 당시 실물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차, 우차, 수레 등의 실물 모습은 고구려의 쌍영총과 덕흥리
고분벽화에 보인다. 또한 가마도 이 때에 이용되었는데, 고구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남녀가
각각 호화로운 가마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의 기와에, 바퀴 달린 연이라 해서
좌우에 구슬로 꿰어 만든 발이 늘어져 있는 왕이 타던 가마와 비슷한 게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여러 종류의 가마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는 엄격한
귀족사회였으므로, 교통수단 역시 신분에 따라 사용 범위에 차별이 있었다.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수레에 있어 그에 사용되는 나무의 종류, 깔방석의 꾸미개, 말의 치장 정도 등이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에게 각각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가에서 이같이 엄격하게 교통수단의 사용 범위를 규제하고 있었기에, 이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신라에서는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세분화되었다. 당시가 정복사업을 추진해 가던 때로
모든 체제가 군사 중심이었으므로 오늘날의 국방부와 같은 병부에서 관할하던 것을, 육지의 것은
승부에서, 해상의 것은 선부에서 각각 나누어 맡도록 한 것인데, 이는 격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교통부와 해운항만청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교통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서는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였으며, 그 밑에는 군, 현 등의
조직을 두어 전국에 대한 통치를 정비하였다. 왕경인 금성은 마치 바둑판과 같이 도로를 구획
정리하였으며, 소경은 왕경이 동쪽에 치우쳐져 있음을 보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을 것인데,
신문왕 때에는 이러한 지리적 취약성을 극복하고 왕권의 강화를 꾀하기 위해서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려고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한편 발해의 수도의 상경은 당의 장안성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외성을 두른 중앙의 북편에
내성을 쌓고 그 안에 궁전을 두었으며, 내성의 남문에서 외성의 남문까지를 연결하는 주작
대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반듯반듯하게 구획정리를 하였다. 그리고 이 상경을 중심으로 동경,
서경, 남경 및 중경의 5경을 설치하였을 뿐더러 이 밖에도 중요한 도시를 사방에 건설하여
15부라 일컬었고, 외국과 연결되는 5도라는 교통망이 정비되었다.
당시에 신라와 발해는 모두 당으로부터 문화적 선진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기
원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교역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 때의 교역은 대개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산동반도의 등지를 거쳐서 행해졌는데, 여기에는 신라와 발해의 사신이 머무는 신라관과
발해관이 각각 두어졌다. 특히 신라는 이 신라관을 중심으로 신라방이라고 불리는 신라인의
거류지가 생기고 그들을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라는 행정기관까지 설치되었다
신라 중에서도 청해진에 세력 근거지를 둔 장보고는 해상 무역 활동을 크게 벌여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청해진 소속이었을 배의 실물이 바로1984년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되어 이
무렵의 배가 어떤 구조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장보고가 이끌고
청해진은 애초에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와 해안에 설치된 군진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고려의 교통
고려는 건국 후 성종 현종 때를 거치면서 교통망이 정비되어 전국을 남쪽은 5도로 북방의
국경지대는 동계, 북계의 양계로 나누고 중요 거점에 3경 5도호부 12목이라는 행정구역을 두어
각각 연결하였으며 그 밑에 군, 현, 진 등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행정조직을 활용하여 전국에
분포된 252개의 역을 개경을 중심으로 22개의 역도로 연결하여 출장 중인 관리들에게 말과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외에도 육로에는 도로변에 숙박소인 관, 정자를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게 했을 정이 있었고 해안에는 포, 강가나 하천가에는 배를 타고 건너가도록
나루터(진, 도)가 있어 교통망을 연결시켜 주었다.
이같이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으면서 농업 기술이 향상되고 수공업이 발달하여 개경에는 경시,
지방의 교통요지에는 향시가 형성되었다. 이를 통하여 고려는 송과 활발히 무역하였는데 송을
거쳐 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선이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에 출입하여 당시 국제 적인 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개경의 시가지가 이 부근까지 뻗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국경 지대인 양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거둔 조세를 선박을 이용해 수도인 개경으로
운반하는 조운이 실시되어 이 일을 담당하는 기관인 조창이 13개(처음에는 12개)나 있었다. 이
조창은 해로와 수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서해, 남해 연안과 한강 연안에 설치되었는데 각
조창에는 조운에 동원되는 배 즉 조선으로 해로를 이용할 경우 최고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이라 불리는 배가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최고 200석을 운송할 수 있는 평저선이
확보되어 있었다.
조선의 교통
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도를 한양(오늘의 서울)으로 옮기고 지방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 목, 군, 현 등을 이루었다. 한양부(뒤에는 한성부)는 왕궁인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중심으로
숭례문(남), 숙정문(북), 돈의문(서), 홍인문(동)등 4대문 안의 시가지가 가로, 세로로 짜여졌으며
창덕궁의 돈화문을 기점으로 해서 숭례문과 홍인문을 통하여 전국이 연결되도록 도로망이
마련되었다.
각 도로변에는 출장 중인 관리들에게 말을 제공하여 통신문 전달에 편의를 주기 위한
역참 외에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게 하기 위해 원이라는 것을 세웠다. 조선 초기 전국에는 40개의 역도,
535개의 역에는 약5380필의 말이 마련되었고 원이 약 1200여 개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까지 장호원, 퇴계원 등에서와 같이 교통 요지의 지명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 거의 폐지되었다. 그 대신에
점사라는 것이 생겨 관리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민간 여행자들도 묵을 수가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관리들이 품계에 따라 수레나 마차를 타는 데에 차등이 주어지는
교여제라는 게 실시되었는데 예컨데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는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만이 탈 수 있고 가마를 타고 대궐의 문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삼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뿐이었다.
조선에서도 여전히 해안에는 포, 강이나 하천에는 나루터가 있어 교통을 원할히 하였다. 포와
진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각각, 일본의 사신이 드나들던 부산포 등과 노량진을 들 수 있다.
노량진은 상류의 한강진, 하류의 양화진과 함께 한강의 나루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길목이어서
군대가 주둔하기 위한 진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던 곳이었다.
한편 전국 토지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원할히 한양까지 관청의 배로 실어 나르는 관선
조운이 15세기에 전비되어 연해안에 공진창 등 4개의 조창, 수로 연안에 가홍창 등 5개 조창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조운에서 하는 부역을 기피하여 남에게 대신
젊어지게 하거나 포로 내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 더 이상 정상적인 운영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때부터는 종전의 관선이 아닌, 개인적으로 배를 소유하고 있던 사선인들이
자율적으로 이익 추구의 영업을 하는 이른바 민간선운업의 성장이 뚜렷하였다. 이후 17세기에는
특히 세곡운송 분야에서 운임을 받고 배를 빌려주는 임운업이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종전에 포로 내게 하던 공납을 크게 한 가지 즉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운송량의 증대, 노동력을 임금을 주고 고용하는 임노동의 대두 등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천에는 징검다리 혹은 외나무다리, 돌다리 등이 설치되었으며, 강에는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물에 띄워 놓은 뜬다리가 가설되기도 하였다. 특히 정조 때에는 한강에다 배다리를
놓았는데,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하고는 주교사라는 기구까지
설치하면서 400내지 500척의 크고 작은 배들을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어 그 위로 행차를 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이 밖에 바다에서의 난파 사고를 막기 위해 평소에 위험한 지역인 서산
안흥량과 강화수로의 손돌항 일대에 운하를 만들려는 계획이 고려시대에 이어 시도되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말았다.
현대의 교통, 자동차, 자전거, 기차, 배, 비행기
우리 나라에 승용차가 들어온 것은 1903년 고종의 전용 승용차로 미국산의,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큰 가솔린 자동차가 도입된 것이 그 시초였다. 이 무렵에 두 바퀴 위에 가마와 같은
것을 만들어 사람이 앞에서 끄는 인력거도 들어왔는데, 주로 상류층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1905년
일제는 통감부설치 이후 전국의 주요 도로를 고치거나 새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는 이를
'신작로'라 부르며 선전하였지만, 이는 취로 사업을 통한 민심의 회유와 침략을 위한 군사작전
준비에 불과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영업용 승용차와 노선버스가 등장한 것은 1912년이었으며, 오늘날처럼
영업용 승용차를 '택시'라고 부른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였다. 부품을 조립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손으로 직접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55년 시발자동차회사가 설립되어
'첫걸음'이란 뜻이 담긴 지프형의 시발차를 내놓으면서도부터였다. 1962년에 이르러 비로소
도로운송사업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고, 1968년에는 경인고속도로, 1969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각각 개통되었으며, 이어 각지에 많은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자전거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구한말의 개화파 인사였던
윤치호가 미국에서 가지고 들어왔다. 1905년에 제정된 가로관리규칙에 야간에 불을 켜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보아, 이 무렵에는 상당히 많은 자전거가 보급되었던 것 같다.
자전거가 급속도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20년에 이르러서였다. 엄복동이 자전거 대회에서
연이어 일본인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자 그렇지 않아도 3.1운동이 좌절되어 시름에
젖어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크나큰 위안이 되었기에 그러하였다.
전차는 1899년 4월 서울시에서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승차 인원 40명의 8대가 운행되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 이후 전차는 우리 나라 최초의 도시 대중 교통 수단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 오다가 1968년 11월 철거되었으며 그 대신 도시의 교통난을 줄이기 위해 지하철이
건설되었는데 서울에서는 1974년에 부산에서는 1988년에 개통되어 도시 교통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기차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부설된 것은 1899년의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의 경인 철도였다.
이에 따라서 1900년 7월에는 한강에 처음으로 철교가 놓이게 되었으며 1905년에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오늘날 기차는 그 속도가 빨라져 편리한 교통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지만 현재 고속전철이 건설 중이어서 철도의 중요성은 더 커질 전망이다. 자동차,
기차 등의 새로운 교통수단이 들어오고 이에 따라 철교가 놓이고 도로망이 갖추어지게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는 강이나 큰 하천을 건너는 데에 배가 적지 않이 이용되었다. 다만 규모가 작은
재래식 배가 대부분이어서 영세성을 면치 못하다가, 197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해운과 조선
공업이 급진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수출의 증가와 무역량의 증대에 짝하여 윈유를
실어 나르는 대규모의 유조선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대형 선박들을 독자적으로 건조하여
수출하게 됨으로써, 1980년대 이래 현재 우리 나라는 세계 굴지의 조선국 및 선박수출국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비행기가 운행된 것은 1913년 일본군에 의해서였고 그 직후
미국인에 의한 곡예 비행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우리 국민에게 비행기에 대한 호기심을 높였던
것은 1920년대에 한국인 최초로 비행 면허시험을 따낸 안창남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개최된
비행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자전거에서의 엄복동과 함께 우리 나라 국민에게 긍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쳐다보니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라는 동요가 유행할
정도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1948년 10월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대한민국항공사(kna)가
출범하여 경비행기 3대로 비행기 운항을 시작하였으나 경영 악화로 도산하였고 이후 정부에서는
국영 항공사의 설립을 추진하여 1962년 6월에는 대한항공공사(kal)가 설립되었으나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다가, 1969년 9월 민영화되면서 대한항공(kal)이 출범한 이후에야 대형 제트기가
국내선에 취항하기에 이르렀고, 근자에는 아시아나 항공이 설립되었다. 현재 이 양대 항공회사는
국내와 국제 노선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통신
봉수제도
아직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먼 곳에서 서로 연락하는 방법으로 봉수라는 것이 있었다.
봉은 횃불을 말하고, 수는 연기를 말하는 것인데,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횃불을 켜서 먼
곳으로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었다.
이 통신법이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가야에서는 이미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가야의 첫 임금인 수로왕 때에 왕은 신하들을 시켜서 왕비가 오는
것을 마중 나가게 하였더니, 왕비가 탄 배가 나타난 것을 보고 신하들은 횃불을 올려서 왕궁으로
연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봉수제도는 아마 계속해서 이용되었을 것이지만 고려 때에 가서 더욱 발달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면 자세한 봉수제도의 규정이 만들어져서, 전국 각지에서 일정한 길을 따라
서울로 봉수가 통하도록 되어 있었다.
봉수는 횃불을 올려서 연락하는 것이므로 자세한 내용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저 미리 약속한
것을 일정한 방법으로 알려 줄 수 있을 뿐이어서, 일종의 신호 통신이라고 하겠다. 대개는 국방에
관한 일을 전하였는데, 적국의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루에
한 번씩 정한 시간에 횃불이 하나 오르는 것은 무사하다는 신호였으나, 그 밖의 시간에 봉수가
여럿 오르는 것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즉, 적군이 나타나면 횃불 둘을 올리고, 적군이
국경 가까이 오면 셋을, 국경을 범하면 넷을, 접전을 하면 다섯을 올리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또 봉수를 올리는 장소는 미리 만들어서 사람을 배치해 두어야 했다. 그래서 중요한 길을 다섯
개 만들어서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로부터 전해 오게 되어 있었다.
이 다섯 길은 모두 서울의 남산에 와 닿으며 남산에는 다섯 개의 봉수 자리가 만들어져서, 그
자리에 의해서 어느 방면에 적군이 쳐들어 왔는지 일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먼 곳에라도 아침에서 저녁까지면 서울까지 연락이 닿았으므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으나, 많은 봉수 자리에 사람이 늘 지켜 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나중에는
점점 실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다.
우역제도
위의 봉수만으로 통신이 완전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의 통신을 하려면, 글로 쓴 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가져다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으로 생긴 우역제도는
오늘날의 우편제도와 같은 통신 방법이라고 하겠다. 단지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우역제도는 신라 때에 이미 실시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일정한 우역의
통로가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는 더욱 발달하여, 서울 개경에서 지방으로 뻗어난
우역의 길이 22개나 있었고, 역의 수는 모두 252개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 제도가 대체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역은 큰 길을 따라 설치된 것은 규모가 크고, 작은 길에 있는 것은 규모가
작게 마련이었다.
역에는 일정한 인원이 배치되어 일을 보는데, 그 맡은 일이란 결국 말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나 함부로 탈 수는 없고, 나라의 명령을 받고 말을 탈 수 있도록 된 사람에
한 한하였다. 말을 탈 수 있도록 하는 증거물이 마패라는 것이었는데,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의 수가 둥근 마패의 한편에 새겨져 있었다.
이같이 우역제도에 말이 필요하였으므로, 이 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적지 않게 노력하였고,
공무 이외에 이를 함부로 이용할 수 없게 하였다. 하여튼 이 우역제도는 기차가 달리기 전까지는
가장 중요한 통신 기관 및 수송 기관이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그 역이라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새 제도의 채용
1896년 이후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명과 접하게 되면서부터 체신제도는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서양 문명의 도입을 부르짖는 젊은 개화파 사람들에 의하여 새로운 제도의
채용이 추진되었다.
우선 우편 제도를 보면, 개화파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일봄 및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이 이를 주장하여 1884년에 우정국이 설치되어 새로운 우편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우정국 개국 기념 만찬회를 계기로 김옥균 등이 정변을 일으켜 실패하자, 우정국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6년에 가서 우체국이 설치되어 우편 사무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전신사업도 추진되었다.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이 일본에 시찰을 가서 크게 놀란 것의
하나가 전신이었던 것은 그 당시 사정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전신 시설을 가설하기 전에 중국의 청나라가 1885년에 인천. 서울. 의주를 연락하는 전신시설을
가설하여 우리 나라와 청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였다. 이것은 청이 우리 나라에 정치적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신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도 1888년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전신 시설을 가설하였는데, 이 선은
일본과 연락되었다. 또 한편, 1891년에는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전선이 가설되었다. 이것은
장차 두만강까지 뻗쳐 북쪽 러시아와 연결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다 우리 나라 정부에서 가설한
것이었으나 당시의 외교적 정세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전화는 1898년에 궁성과 정부의 각 부처간을 위시해서, 멀리 인천에까지 이르는
전화시설이 갖추어져 통화가 시작되었다. 이어 개성, 평양, 수원 등지로 확장되어 갔는데, 이것은
시내 전화보다도 시외 전화가 주된 것이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모두 새 체신제도의 발달을 말하여 주는 것이나, 1904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침입해 들어와 이들을 모두 접수하고 그들의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통감부를 설치한 뒤에는 거기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에 모두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셈이다.
오늘의 발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체신 사업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 체신부가 독립하여 전적으로 이 사업을 맡고 각종 시설을 개선하여 왔다.
6.25전란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휴전과 더불어 다시 복구,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체신사업은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인 규모로 발전하여, 세계 여러 나라와 빠른
통신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정부가 필요한 통신을 할 때만 이용할 뿐이던
것이 이제는 온 국민이 이용하는 시설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통신 수단이 기계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향상되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만큼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학기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연히 거기에 큰
관심이 쏠리게 되고, 드디어는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지게 되는 예가 허다하게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인 발명의 두뇌가 특히 발달한 민족이 있어서, 그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많은 발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을 옳게 이해한 것이 못된다.
자기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내서 이를 고쳐 가려는 노력을 한 민족들은 새로운
많은 발명을 하게 된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룩된 높은 지식의 수준이 밑받침되어서 더욱 새로운
발명이 쉽게 되는 것뿐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민족이 우수한 과학적 발명을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편이든 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우리 나라의 과학 발달의 역사를 잘 살펴서, 어째서 그러한 상태가 되었나
하는 정화한 원인을 캐어 보고, 거기서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을 얻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
처음 옛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적인 지식은 소박한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서 얻어진
것들이었다. 수백 년이고 오랜동안, 같은 현상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연 현상 속에서
하나의 법칙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과학의 시초였던 것이다.
가령 동예에서는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의 별빛을 보고 그 해에 풍년이 들겠다든가 흉년이
들겠다든가 하는 것을 점쳤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어떤 기상 조건으로 인하여 별빛에 일어나는
변화를 관측하고, 그로 말미암아서 금년에는 비가 많이 올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내고, 따라서
풍년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늘 들어맞는 판단은
아니었겠지만, 또 노상 전부가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해버릴 수도 없지 않나 한다. 농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비가 풍부하게 내려서 풍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므로, 일 년의 농사를
미리 짐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몇 십 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의 오랜 관찰의 결과로 이들 서툰
천문가들은 그들대로의 어떤 결론을 얻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 가족이 병을 앓아 죽으면 지금껏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어떤 전염병에 결려 죽었을 경우 남은 가족들에게도 전염이 되어 다 죽게 되므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도 오랜 경험에 비추어 어떤 과학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산에서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같은 것을 가져다 먹고 병을 고치는 일도
경험에 의한 지식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때에는 아직 과학이 종교의 세계에서 독립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흔히 이러한
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종교적인 신앙의 이름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새해에 별빛을
보고 풍년과 흉년을 가리는 일은 아마 무당들의 일이었음 직하다. 그러나 때론 자연의
관찰에서 얻은 결론과는 상관이 없는 일들도 있었다. 가령 부여에서 전쟁에 나가기 전에, 소를
죽여서 그 발굽을 보고 전쟁에 이기겠다든가 지겠다든가 하는 것을 점쳤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크게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종교적 제약을 벗어나서,
순전히 자연 현상의 관찰에 의하여 사실을 알아내는 과학적인 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 시대가 되어서도 이러한 점이 좀처럼 청산되지 않았다. 천문학이 크게 발달하여
하늘의 별이나 달, 해에 대한 관찰이 더욱 정확해지기는 하였다. 신라에서는 아름다운 첨성대를
쌓아서 천문 관측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첨성대는 모두 27층으로서, 아래 12층과 위 12층의
중간에 3층의 네모진 입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365개로 되어 있다.
이러한 숫자들은 일년이 12달, 365일인 것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용의주도한 계획
아래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은, 그들의 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
사실상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일식이나 그 밖의 천문 관계 기록들은, 그들이 직접 관찰하여
적어 놓은 정확한 기사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당시의 천문 관측들은 퍽 종교적 색채를 띄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천문 현상은 하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자연 현상에 이상한 일들을 나타나게 한다고 믿었다. 그 결과 부여에서는 왕이 내쫓기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이 아니라 오늘날의 국무 총리와 같은 중시가 파면이 되곤 하였다. 이 때, 사람들이 천문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주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 농업과도 관계를 가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거기에 나타나는 하늘의 뜻이 더 중요시 되었다. 그들의 관심이 이러할진대, 이에 대한 관찰은
일식이라든가 하는 실제 생활과 관계가 먼 일에 도리어 신경을 쓰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병을 고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는 일이 많았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뿐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인 탈을 벗고, 자연을 순전히 현상으로 관찰하여, 그 속에서 발견된 법칙을
실제 생활과 연결시키게 되어야만 과학이 발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천문학과 역학의 발달
그러나 실제 생활의 개선을 위하여 과학 기술을 이용하는 것도 일찍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성을 쌓는 데에는 물리학적 원리가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경주의 남산에는
신라 때의 성이 있는데, 그 성을 쌓은 것을 기록한 비석이 여러개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그 성이
3년 이내에 무너지면 쌓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는다고 쓰여 있다. 성을 잘 쌓기 위한 연구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건축에서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탑을 쌓는데는 수학을 이용한
세밀한 설계도가 마련된 뒤에, 이에 따라서 지어졌다는 증거가 있다. 석굴암의 내부 구조가
돔(위가 둥글게 된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 밖에 농업을 위하여 농구를 개량하고, 저수지를 쌓고, 보다 나은 옷을 만들기 위하여 목면을
재배하는 등의 기술의 향상도 있었다. 학문을 하는데 필요한 책을 만들기 위한 인쇄술이
목판에서 금속활자로 발전하는 것도 크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여러 가지에
대하여서는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이런 발전 과정 속에서 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천문학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세종은 전국 각지에 명하여 농업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늙은 농부들로부터 농사짓는 방법을
알아서 보고하게 하였다. 이 보고에 입각해서 농사직설이라는 농업에 관한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는 비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닌 데다가, 더구나 봄에 그러하여서,
농사에 지장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여름에는 장마가 져서 농작물을 해치고 집을 무너뜨리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봄에는 흔히 기우제를 행하여 비가 오기를 빌곤 하였다. 이러한
기우제를 맡아 주관하는 자는 무당들로서, 물론 비과학적인 일이요, 노력과 시간과 재물을 소비한
뿐이었다. 혹은 불교의 절에서 기우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승려들이 불경을 읽으면서
거리를 걸어다니며 비가 오기를 빌기도 하였다. 비과학적인 점은 무당과 마찬가지였다.
유학자들이 위 둘은 모두 그르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정치를 잘 하면 기후가 고르게 되고 비도
제때 내린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도 역시 비과학적인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보다도 필요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비가 내리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이에 대비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즉, 과학적 조사가 우선 필요하였다. 이에 착안한
세종대왕은 그의 24년(1442)에 세계에서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우량을 재었던 것이다. 측우기는
서울 뿐 아니라 지방 각 도에 설치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은 서양보다도 200년이나 앞선
일이며, 오늘날 측우기를 발명한 날이(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한 편
홍수가 났을 때에 물이 얼마나 느는가 측량하기 위한 청계천에 측수주를 세우기도 하고 언덕의
바위에 양수표를 새겨 놓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은 또 많은 천문 관측의 기계를 제조하여, 이로 말미암은 관측의 결과를
가지고 달력을 고치고 시간을 재는 등 실제 생활에도 이용하였다. 즉 천문 관측 기계로
간의를 만들고 또 천체를 모방하여 해, 달, 별 등의 자리를 알아볼 수 있게 한 혼천의,
해시계인 일영, 물시계인 자격루 등도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역서를 만들어서 달력을
정확하게 쓰도록 힘썼다.
뿐아니라 의학에도 힘을 기울여 이의 발달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하였지만, 원래 의학은 원시적인 무격 신앙이나 불교와 같은 종교와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의학이 순전히 과학으로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대부분 중국의학에 의존해 왔으므로
독자적인 발전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세종 때에 우리 나라 고유의 향약 조사와 활용을
활발히 추진시켜 향약집성방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였던 것이다. 그 뒤 성종 때에는
그것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여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세종은 의학에
관한 방대한 백과전서로 의방유취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은 이후, 우리 나라 의학이 크게 발전하여, 동의보감과 같은 내용이
정밀하면서도 요령을 얻은 훌륭한 의학 서적이 출판되기도 하고, 또 임진왜란 때, 왜적의 시체를
해부하여 인체의 내부를 자세히 조사한 특이한 의학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새로운 과학 문명의 도입
서양의 과학 기술이 들어오기는 인조 9년(1631)에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얻어 가지고 온 때부터이다. 이로부터 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새
역법을 연구하여 효종 때부터는 드디어 이를 행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인간 생활의 현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하고 개선하려는 실학이라는 학문이
일어나고부터는 서양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그들 중에는 홍대용과 같이 지구가 돌아간다는 지전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박제거와
같이 종두를 실험하여 성공하고 이에 관한 책을 지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은
기중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이를 수원성을 쌓는데 실제 이용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차례로 조약을 맺어 그들과 직접 접촉함에 이르러서 서양의 과학 문명은 더욱 많이
들어왔다. 전신, 전화, 전등이 가설되고, 철도가 놓여 기차가 다니게 되고, 서울에는
전차도 통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과학 문명의 도입은 대개가 외국인들이 외국 기술자를 데려다가 만든
것들이어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우리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도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된
셈이다.
신분제도
사회적 지위의 세습
청동기 시대 이후, 원시적인 공동체 사회가 사회적인 분화작용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의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생겨났다. 이렇게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개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적인 생산 관계에서 그 지위가 다를 때에는 지위라는 말을 쓰고, 사회적인
면에서 지위가 다를 때에는 신분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적인 지위란 혈통에
따라서 세습되는 사회적 권리와 의무에 따라 정하여졌다. 또 그 권리와 의무의 내용은
법률, 관습, 불문률로 규정되었다. 그러한 규정들이 사회적으로 일정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체계화되어 있을 때에는 신분제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분제도는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만 존재한 것이었다.
신분적으로 권리나 특권은 가장 많은데 의무와 제약은 가장 적은 경우는 귀한 사람들로서
귀족이 대표적이다. 한편 그 반대인 사람들은 천한 사람들로서 노비들이 대표적이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신분적으로 중간급 신분층을 이루었다. 이들은 흔히 양인으로 불리워졌는데 일반
농민들이 대표적이었다. 국가가 만들어진 성읍국가 단계에서는 신분은 있었겠지만, 그 내용은 잘
알 수가 없다. 연맹 왕국 단계에 오면 귀족은 물론이고 노비제도도 존재하였다. 고조선이나
부여의 법률에도 그와 관련이 있는 언급이 보인다. 그들 중간에는 양인으로 볼 수 있는 신분층이
보인다.
엄격한 신분제도로서의 골품제
신분제도가 크게 발달한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였다. 특히 신라는 삼국시대부터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이르기까지 골품제라고 하는 독특하고도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다. 골품에는
성골, 진골의 두 골과 육두품으로부터 일두품에 이르는 여섯 두품이 있었다. 성골은 김씨 왕족
가운데에서도 왕이 될 자격을 가진 최고의 골품이었지만 뒤에는 없어졌다. 진골도 김씨
왕족이었지만 왕이 될 자격은 없었는데, 성골이 없어진 뒤에는 왕위에 나아갔다.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은 일반 귀족이었고, 삼, 이, 일두품은 뒤에는 소멸되었는데 일반
평민층이었다.
골품은 개인적 정치적 출세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특권과 제약을
규정하였다. 신분이동은 용납되지 않았다. 특히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진골은 왕족과 왕비족이 중심이 되었는데,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최고의
귀족이었다. 일반 귀족 가운데는 육두품이 진골 다음가는 특권을 가졌는데, 특히 통일신라 말기에
가서는 눈에 띄게 정치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골품제도에는 노비가 빠져 있고, 일반 평민에
관하여서도 자세하지가 않다.
반을 중심으로 짜여진 신분제도
하급 신분계층까지를 포함하여 신분제도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시기는
고려시대부터이다. 귀족으로 문관직에 나가는 문반, 무관직에 나가는 무반이 있고, 궁중직을 맡는
남반이 있었다. 문무 양반이 중요했는데, 특히 문반이 최고의 귀족이었다. 귀족 아래로는 양인이
있었는데, 상급 양인의 대표적 계층은 지방 관아에서 행정의 실무를 맡고 있던 향리와 군인직을
세습하는 군반이었다. 그 밑에는 일반 군, 현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있었다. 좀 격이 떨어지는
행정단위인 향, 소,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 군현인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공장과 상인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양인으로서 가장 낮은 위치에는 떠돌아 다니면서 유기를 만들어 파는
양수척이 있었다. 양인이 못 되는 사람들로는 천인이 있었는데, 노비가 대표적이었다. 노비는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가장 낮은 신분층이었다.
5품 이상의 관직자에게는 아들에게 자동적으로 관직에 나가는 음서 제도도 운영되었는데, 그
혜택은 주로 문반과 무반들에게 거의 독점되었다. 무반은 3품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특히
문반에게 유리하였다. 고려의 신분은 세습되어야 하였고 이 원칙이 엄격하기는 하였지만, 신분
사이의 이동이 아주 막혀 있지는 않았다. 가령 향리의 자제도 과거시험을 치러서 중앙의 관리가
될 수 있었고, 일반 농민은 말할 것도 없고, 노비들까지도 군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또, 군인도
공을 세우면 무반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분사이의 이동은 무신란이 일어난 뒤의
후기사회에 가면 더욱 눈에 띄는 일이 되었다.
양반과 상민
조선은 양반이 관리가 되어 주도하는 양방사회였으므로, 그들을 위주로 한 신분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양반은 귀족이었는데, 그 가운데 문반이 가장 지위가 높았다. 그 다음이
무반이었다. 그리고 서얼의 자손은 양반이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커다란 제약이 있었다.
양반 밑으로 중인 신분이 있었다. 의관, 역관 등 기술관이 그러하였다. 중인과 비슷한
위치에 하급 관리인 서리, 군교도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상민이라고 널리 불리어진
양인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계층이 일반 농민, 상인, 공장들이었다. 양인이기는
하지만 천시되는 부류의 사람도 있었다. 도살업 따위에 종사하는 백정이나 순회극단인 광대,
원시 종교의 전통을 이은 무당 등이 그러하였다. 신분 구조의 바닥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천민이었는데, 노비가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신분세습의 원칙은 여전히 강하였지만, 신분 이동도 과거에 비하여 크게 일어났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에 비하여 훨씬 중요하였다. 또 고려시대에
양민이면서 천시되었던 향, 소, 부곡인도 사라졌다.
신분의 변동과 신분제도의 폐지
신분이동은 17세기 이후부터 더욱 크고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소수의 노론 가문들이 정권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19세기에 와서는 안동 김씨처럼 한 가문이 왕의 외척으로 정권을
오로지하는 예까지 나타났다. 양방들 가운데 정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몰락하였다. 그들은
사노비를 거느릴 처지조차 못 될 정도가 되었으므로 사노비의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공노비는
군역이나 군공을 통하여 또는 납속을 통하여서 양인이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순조
원년(1810)에는 정부가 공노비를 아예 양인으로 해방하기에 이르렀다. 또, 양인농민도 부농이
되어 마침내 양반의 신분을 얻는 경우까지 있었다. 서얼의 차별대우도 크게 완화되어 갔으며
중인들도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갔다.
요컨대, 17세기 이후가 되면 양반의 대다수는 지위가 낮아져 갔으며, 아래 신분층 사람들로서
위로 신분상승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져 갔다. 이것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1894년에 이르러 갑오경장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신분제도의 철폐에는 우리 나라가 만민이 평등한 근대사회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치제도
정치제도의 발생
신석기 시대의 씨족사회에서는 씨족원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씨족 전체에 관한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이렇다 할 정치제도가 없었다. 대체로 부족을 단위로 하는 성읍국가가
생긴 뒤에, 그 지배자는 자기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몇 명의 관리를 두지 않았나 한다.
이것이 정치제도의 싹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여러 성읍국가들이 서로 연합해서 연맹왕국을 조직하게 되면서 정치조직은 약간 복잡하여졌다.
그것은 각 성읍극가의 조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한편 그들 전체를 통할하는
왕(연맹장) 밑에도 그들과 거의 마찬가지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은
밖으로 연맹왕국
전체를 대표하기는 하였으나, 안에서 강한 지배력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성읍국가들의 지배자들이
모여서 왕을 갈자느니 혹은 죽이자느니 하는 일도 있을 지경이었다.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 고구려(초기), 삼한 등은 다 이러한 정치조직을 가진 나라들이다.
통일된 정치조직의 성립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삼국시대가 되면 이렇게 여러 나라로
갈라졌던 정치 조직은 청산되었다.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 왕의 밑에 있는 귀족이 되었으며,
그들에게는 독자적인 관리를 둘 권리가 없어졌다. 즉 왕을 최고의 정치적 책임자로 하고 그 밑에
귀족 출신의 관리들이 배열되는 일원적인 정치조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는 같은 귀족들이라도 핏줄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므로 원래 핏줄이 좋은 집안이면 높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만, 그렇지가 못하면 절대로
높은 벼슬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제도를 신라에서는 골품제도라고 불렀는데, 고구려나 백제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제도에 의하면 나라의 중요한 일은 결국 핏줄이 좋은 귀족들만이 맡아서 처리하는
결과가 되었다. 가령 신라에서는 화백이라고 부르는 회의기관이 있어서 여기서 왕위의
계승이라든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라든지, 종교적인 중대한 일을 결정하였는데, 이
화백회의에는 가장 핏줄이 좋은 진골 귀족들만이 참석할 수가 있었다. 즉 정치의 실권은 진골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골은 왕족인 김씨와 박씨였으므로, 극히 좁은 범위의 사람들만이
정치의 실권에 참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전제정치와 정치제도
통일신라시대에 왕은 귀족이 세력을 누르고 더욱 전제 군주로서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화백회의의 힘은 자연히 약해지게 되었다. 그 대신 왕은 자기 밑에 여러 정부 기관을 두어서
자기의 명령을 받들어 이를 실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여러 정부 가관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집사부였다. 집사부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기관을 모두 거느리는 것이었으므로, 그 장관인 중시는 비록 관직의 지위는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보다 낮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국무총리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중시는 3년마다 교대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또 어떤 정치적인 잘못이 있었을 때에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전제적인 정치제도는 약 100년 가량 지속되었는데, 귀족들의 불만을 사서 반란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또 왕도 자주 죽임을 당하는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일어난 세력가들이 드디어는 신라를 타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발해는 3성.6부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국왕과의 친근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이는 정당성의
대내상이 행정기구의 최고위를 점유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그 정치가 전제주의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전제주의적이었다는 측면에서 신라와 같다고 하였으나,
신라가 전통적인 여러 관부를 그대로 두고 이를 총관하는 집사부를 설치함으로서 만족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아마도 발해는 유교적으로 분식된 명칭을 지닌 정연한 정치제도를 채택함으로써,
통치조직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귀족정치
고려는 지방에서 일어난 여러 정치가들이 힘을 뭉쳐서, 신라 말기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신라시대에 비기면 훨씬 많은 여러 지방 출신의 귀족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귀족은 유교의 사상에 입각한 이상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즉 왕의 권위를
존중하여 일정한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게 하지만, 동시에 왕은 귀족들의 의견을 들어서 정치를
해 나가기를 원했다. 고려의 정치제도는 이러한 원칙 위에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는 중국의 정치제도를 많이 참고하여 자신의 정치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표면상의
제도만을 보면 중국 특히 당나라와 송나라의 것과 비슷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에는 고려가
원한 것이 자기 나라 현실에 맞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운영은 퍽 다른 점이
많았다.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제도는 3성이었다.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에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많은 제상들이 모여
있었으며, 이들이 여러 행정기관들을 나누어서 맡아 주관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의 잘못한 일들을
고치도록 충고하기도 하였다. 3성과 아울러 중요한 것은 충추원이었는데, 이곳은 왕의 비서실과
같은 구실을 했다. 이 두 기관은 이렇게 일을 나누어 맡을 뿐 아니라, 고위 관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여 중요한 국가의 일들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정치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신들이었고, 무신들은 낮추어 다루어져 왔다. 그래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쥔 뒤에는 그들의 중요 기관인 중방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다가 최씨가
정권을 쥐고는 자기 집에 정방이니 도방이니 하는 것들을 두어 정치적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조선시대의 정치제도
조선시대가 되면 양반이라고 흔히 불리는 귀족의 수가 더 늘어 이에 따라서 양반 귀족들의
정치적 진출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때에는 아버지가 중간 이상의 관리이면 아들도 절로
관리가 되었지만, 이제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등용케 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제도를 퍽 행정적인 체계가 짜인 것으로 만들었다. 고려시대의 중요하던
3성은, 이때에 의정부로 고쳐졌는데, 재상의 수와 함께 중요성도 줄어들었다. 그 대신
고려시대에 3성의 강한 통제를 받던 6부의 후신인 6조가 실권을 쥐게 되었다. 중추원은
승정원이라고 고쳐지고 그 기능도 축소되었다. 이렇게 정치제도가 귀족들의 회의 중심이기보다
행정적인 기구 중심으로 개편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행정기구를 제약하는 기구도 있었다. 왕의 잘못을 고치도록 충고하는
사간원이 독립하였고, 관리들의 잘못을 적발하는 사헌부가 있었고, 그리고 홍문관이라는 학자들의
연구소가 있어서 왕에게 직접 정치에 관한 건의를 하였다. 이 셋을 합쳐서 3사라고 하였는데, 이
3사는 행정기구인 의정부 및 6조와 맞먹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
19세기 말에 서양과 접촉이 시작되면서 외교 관계도 복잡해지고 과학 문명도 받아들이게 되어,
정치제도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기구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이 변화에 지나지 않았으며,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독립협회가 조직되면서, 국민의 의사를 반영시키는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필요한 것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한 때는 정부가 독립협회에서 추천한 의원으로 조직될 오늘의 국회와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원치 않아서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켜 이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처음 실시되기는 3.1 운동 직후에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였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독립을 이룩하기에 이르러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현실적인 것으로 되었다. 3권 분립의 원리에 입각하여,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가 각기
독립하여 그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여 가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독재정치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점차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북한에서는 아직껏 독재 정치의 제약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장차
민주주의를 키워 나갈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농촌
촌락공동체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농업이 산업의 으뜸이었다. 그렇게 되자 농민들은 농경지
근처에 정착하여
살아야 했다. 밭이나 논에서 해마다 잡곡이나 벼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촌락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농경에 있어서 촌락 공동체의 구실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비록
자영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농사짓는 데 있어서 서로가 일손을 돕거나, 농기구나 축력을 서로
빌리거나 또는 수리시설을 공동으로 설치, 유지, 운영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국가에 조세를 내고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급자족하면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보통 사람들로서 신분적으로 대체로 양인이었다. 이러한 농민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생산하고 납세하고 생활하면서 살아가는 곳이 촌락이었으며 이 촌락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촌락은 농촌의 기본을 이루는 지역 단위이면서 동시에 사회단위였다. 이
점은 사회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 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다 많은 생산과 보다 많은 세금--촌적의 자세한 작성
그러나 농촌의 모습이 언제나 한결같지는 않았다. 처음 농민들이 사용한 농기구는 간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돌쟁기를 가지고 밭을 갈았다. 그 뒤에는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밭을 가는
쇠쟁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지증왕(500-514) 때의 우경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여 준다.
그 결과로 깊은 밭갈이가 시작되었으며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소와 쟁기나 노비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빈부의 차이가 커지면서 농민들은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농민이면서 농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부유한 농민은 더욱 많은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본시부터 부유한 귀족들의 토지소유도 확대되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서는 농경에 가축을 이용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신라의 4개 촌락에
관한 문서에 따르면 농가가 모두 43호인데, 농가 한 호당 소. 말이 평균 2-3마리나 되었다.
가축의 배설물을 써서 지력을 높일 수 있었다. 가래의 사용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지력의
회복이 더욱 빨라졌다. 이제 농지는 쉬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통일신라말이 되면 평지에서는
해마다 곡식을 갈아먹게 되었다. 토지의 생산력이 많아지고 커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농민들의 생활이 전부다 나아지고 농촌에 활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농민에 대한
지배와 수취는 그만큼 더 커졌다.
국가의 농민지배는 촌락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다. 촌락은 약 10호 가량으로 구성된
자연촌락을 기준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 몇 개의 촌락을 관할한 것이 촌주가 되었다. 국가는 이
촌주를 통하여 총락민을 지배하였다. 촌락의 호수, 인구수, 우마수, 토지면적,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수 따위를 3년마다 파악하여 촌락의 장적을 작성하였다. 나이에 따라서 인구는 6개
연령층으로 파악하였고, 호는 노동력과 생산력을 고려하여 9등급으로 나누었다. 촌락을 통하여
생산물이나 노동력의 수취와 농민들의 지배를 철저히 하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되자 생산력은
증대되어 더 부유해진 농민들이 있었지만, 반대로 더 가난해진 농민도 있었다. 성덕왕 때 정전을
주었다는 것도 토지를 잃은 농민들을 주로 염두에 둔 시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시책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진행되면서 힘없는 농민들은 더욱
전락하여 갔다. 농촌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통일신라 말에 가까워 오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 농촌의 평화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유랑하는 농민들이 도둑이
되거나 반란군이 되자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농촌이 평화와 안정이 되살아 난 것은 고려의
건국 뒤였다.
자영농이 농촌의 주인이 되도록
고려정부는 수취를 줄이고 귀족층의 대토지 소유를 막도록 조치를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농민들도 개간에 힘썼다. 특히 산전의 개간에 열심이었다. 정부에서는 그럴 경우에 세금을
면제하거나 낮추어 주었다. 농법도 개량되었다.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일도 보편화되면서
농경지의 지력이 보강되어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고려말이 되면 산전도 점차 쉬게 하지 않고 늘
경작하게 했다. 그러나 단위면적의 소출이 늘어나면서 부유한 사람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졌다. 그래서 고려 후기 이후가 되면 귀족들의 토지 소유는 점차 증가하여 말기에 가까워
올수록 그 정도는 보다 심각하여져 갔다. 무전 농민들이 속출했다. 그들의 대다수는 남의 토지를
갈아 먹었지만 일부는 유랑민이 되기도 했다.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그 몫의 많은 부분이
귀족들에게 돌아가고 농촌에 남겨진 것은 농민들의 굶주림과 한숨과 절망뿐이었다.
조선 정부는 귀족들에게 대토지 소유에 압박을 가하면서 자영농의 육성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들은 자기의 논을 가족노동으로 경작하여 국가에 세금을 내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농민이었다. 조선 초기의 농촌은 이들 자영농민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안정되었다. 정부에서는
농법의 개량에도 열심이었다. 종래까지는 밭농사를 위주로 한 중국의 농법이 참고가 되었지만,
우리의 현실은 논농사가 주여서 새로운 농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농업 관행을 조사하여
바탕으로 삼고 중국 농서를 참작하여 새로운 농서인 농사직설을 간행했다.
광작의 시행과 상업 작물의 재배--농촌의 활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을 연이어 치르자 조선의 농촌은 황폐해져 갔다. 농업인구는
줄고 농경지도 전쟁터로 변한 나머지 쓸모가 없어진 땅들이 많아졌다. 농촌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부에서는 새로운 농법을 보급시켰다. 이앙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따라서 이모작이 보편화되어 갔다. 논에서 벼를 거두고도 그 자리에 다시 이어서
보리를 재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새로운 농법은 적은 노동력을 가지고도 농사가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농업 생산력이 커지고, 농민들의 소득은 증대되었다.
정부에서는 세제를 바꾸어 농민들의 부담을 덜고 불편함을 없애 주었다. 전세를 낮추고,
대동법과 균역법을 시행한 것이 그러한 조치이다. 농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어왔던 특산물의
납부와 군역의 부담을 생산이 늘어난 토지에 세금으로 부과하여 면제하거나 줄여 주었다. 이것은
대토지 소유자에게는 불편한 것이지만, 소토지를 경작하는 보다 많은 농민들에게는 유리한
것들이었다. 농민의 생산의욕은 고취되었다. 농업 경영상의 변화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경영이
확대되어 한 사람의 농민이 더 많은 토지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것을 광작이라고 부른다. 광작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상업작물을 키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장에 내다 팔아 영리를
얻기 위하여 농업을 하는 일이 흔하게 되었다.
굶주림과 슬픔으로 가득한 농촌
이러한 변화는 농업과 농민과 농촌을 위하여 활기를 찾게 하는 현상이었다. 농민은 소작인이라
하더라도 도지권이라 하여 소작지에 대한 경작권을 장기간 누릴 수 있었으며, 그
권리를 자유롭게
매매, 양도, 상속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소작인도 소작지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터지기 작아지거나 아예 토지를 잃어버리는 농민들이 날로 증가했다. 이러한
농민들은 농업이나 광업에서의 임노동자가 되거나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서 국가의 수취도 여러 불법적인 방법으로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농촌은
피폐되어 갔고, 사회불안이 고조되었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나, 말에 일어난
동학 농민의 항쟁은 그러한 농촌의 피폐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자, 우리 나라 농촌은 굶주린 농민들과 한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펼쳐서 일본인 대지주를 증가시켰고 바대로 한국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언제 소작권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1930년 순수한
자작농은 18%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소작인은 47%나 되었다. 농촌에 사는 농민들의 반이 토지가
없어서 남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자작농이라고 해도 워낙 토지가 적어서 남의
토지를 겸하여 소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수는 31%나 되었다. 반 이상의 농민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벗겨서 부족한 식량을 매웠다. 많은 이들은 농촌을 떠나 만주나 일본으로
이민하였다.
농촌의 새로운 변화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농지 개혁을 통해 대지주가 사라지게 되었고, 많은 소작인들도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농촌의 소득증대를 위한 정부의 여러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농촌에서의 굶주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상공업 우선 정책의
결과로 많은 공장이 들어서고 회사가 만들어지면서 농민들은 점차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쪽으로
자 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농현상이 현저해지면서 농촌의 인구는 줄어갔다. 공장이나 회사가
도회지에 있어 농촌인구는 도회지로 몰리기 시작했다. 농민의 수는 오늘날 전체 인구의
15%이하로 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농촌의 모습은 앞으로 다시 한 번 더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국내 농산물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을 거의 수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값싼 노동력을
사용하거나 고도의 기계화로 생산된 훨씬 싼 쌀을 포함한 여려 농산물이 수입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에서 살아남을 상용작물이 아니고서는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농촌 모습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전망이다.
도시
지배의 중심지--도시의 처음
우리 사회에서 돌을 곱게 다듬어 연장으로 사용하던 시대는 원시공동체사회였다. 사람들은
서로 평등하여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반대로 지배를 받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것을 독점하고 생산된 몫을 더 많이 차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들의 여러 관계가 법으로 정해지고 제도로 굳어지면서 국가가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나누어지고, 빈부의 차이가 있게 되고, 신분이 생겨나면서
국가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배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생산을
맡았다. 이 때의 생산은 농업에서의 그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체로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에, 지배자들은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면서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일을 했다. 그들이 사는 곳이 도시의 형태로 이해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도시에는 정치를 하는 지배자들과 그의 가족들만 살지는 않았다. 노비처럼 그들에게
노역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주거나 주선하여 주는
수공업자나 상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술적인 수요를 충족시켜 주는 그림을 그리는 이나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실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더불어 사는 도시였다. 그런 속에서
생활의 편의와 질서를 위하여 관청이나 주거지가 일정한 곳에 설정되어야 하고 도로가 있어야
하고 하수도 시설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도시는 국가가 생겨나면서부터 생겨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처음 국가인
성읍국가도 흙으로 성을 쌓거나 나무를 엮어서 울을 만들거나 해서 지배자들이 머무는 곳이
따로 있었다. 다만 그곳은 도시라는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러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살면서 어느 정도
도시의 풍모를 보이게 된 것은 삼국 시대 세 나라의 서울부터일 것이다.
금성--사치와 향락의 도시
삼국시대의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잘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서울에 대하여서는 약간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 도시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소지왕 때(479__500) 우편역마제가 마련되고
서울에 시장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서울로 통하는 전국적인 도로망이 갖추어지고 전국의 산물이
서울로 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장은 그러한 물품들이 교역된 곳으로 점포들이 있어서 상업
활동이 늘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의 서울은 6부로 나뉘어졌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모두 5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신라의 서울인 금성은 더욱 정비되고 번성했다. 행정구역은 6부 밑에 방과
리로 나뉘어졌다. 금성은 인구가 17만 호가 넘는다고 전해올 정도로 대도시였다. 금성은 진골
귀족들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금성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단히 큰 권세를
누렸으며 매우 부유했다. 고관대작의 집이면 수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그곳에는
금입택이라고 불린
귀족들의 대저택이 거의 40채 가까운 수가 있었다. 과장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금서의 집은
모두 기와를 얹었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하였고, 또 노랫소리가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들은 국내의 산물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외국에서 수입된 진기한 물건들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령 페르시아나 캄보디아에서 나는 모직물이나 수마트라에서 나는
향료까지도 쓸 수 있었다. 이러한 구매가 모두 금성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음은 물론인데, 이로써
그 시장의 번창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금성 이외에도 충주, 원주, 김해, 청주, 남원
등 소경이 두어진 곳이 어느 정도 도시로 발달했을 것이다.
한편 발해에서도 정연한 왕경의 규모가 발견되어 그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교역의 중심--개경
고려시대에도 귀족들은 서울에 몰려 있었다. 서울인 개경은 도시로서 발달했다. 귀족들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이 모여 살았다. 권력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사람도 많았다.
개경은 10만 호의 인구를 포용하는 커다란 도시였다. 개경은 5부로 나뉘고 그 밑에는 35방이
있었으며 방 아래에는 많은 수의 리로 세분되었다. 개경은 궁성을 비롯하여 여러 관청과 많은
사원 그리고 귀족들의 호화로운 주택들이 중심이 되어 웅장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귀족이 아닌 많은 일반 사람들은 반대로 가난하여 오늘날의 달동네와 같은 높은 지대에
겨우 비바람을 가리는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붙어 살았다.
개경에는 시전이라고 불리는 큰 상점들이 있어서 도시 사람들의 생활품을 판매했다. 시전은
시내 중심가에 길게 연이어 설치해 놓은 점포인데 각 점포의 문에 가게 이름을 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 밖에도 개경에는 일정한 장소에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시장이 따로 있었다. 일반
도시인은 수요가 그리 크지 않을 터이지만, 귀족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국내의 산물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해 온 물품들의 수요도 컸다. 서경 같은 곳도
도시로서 발전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의 도시--한양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는 한양이었다. 도시는 처음부터 성읍이라고 불릴 만큼 성을
쌓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수도인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양은 대략 17km에 이르는
성을 쌓고 네 개의 큰 문과 작은 문을 각각 두었다. 성 안에 궁궐과 종묘와 관아들이 들어서고,
도로를 내고 시장을 개설했다. 행정적으로는 고려에서와 마찬가지로 5부로 나누고 다시 방으로
세분했다. 전국에 미치는 도로망이 갖추어졌다. 한강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바다도 멀지 않아
수로도 잘 개발되어 있었다. 거두어 들이는 수취물이나 기타 교역을 위한 화물들이 육, 수로를
통해 들어왔다. 서울은 정치, 경제, 문화의 도시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가 되어서는 특히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양의 도시로서의 면모는 더욱
뚜렷하여졌다. 지금까지 국가에서 주도하던 수공업과 상업이 민간주도로 변하면서 보다 자유롭게
제작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양에 종로. 동대문. 청파동에 커다란 자유시장이
발달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실학자 가운데에는 상공업의 이익이 나라의 부와 연결이 될 수
있다는 점, 양반 귀족들도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한양의 상인들로서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부를 누리는 이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개화기가 되면서 새로운 상거래를 배우면서 새로운 상인으로 거듭났다. 이들이
한양의 길거리를 더욱 활기 있게 만들어 주었음은 말 할 나위도 없다.
국제도시로서의 발돋움--서울
조선이 개항을 하면서 서울의 면모는 크게 변하게 되었다. 서구의 문명시설이 서울 거리에
등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거리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전신, 전차, 전등이 등장하였고 철도가
놓였다. 우편사무가 시작되었다. 서구식 건물이 하나 둘씩 세워지게 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서울의 근대화는 더욱 진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인과 일본의 편의와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값진 고적들을 하나하나 허물어 갔다. 경복궁의 일부를 허물고
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이라든지 서대문을 없애 버린 것이라든지가 모두 그런 예이다.
오늘날 서울은 지난 100년 사이에 엄청난 규모로 팽창했다. 19세기 말 대략 20만의 인구가
해방될 무렵에는 90만이 되었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110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인구뿐만 아니라 면적에 있어서도 서울의 확장은 놀라움을 줄 정도이다. 본래의 서울인 사대문
안에 청와대를 비롯해 주요 관공서가 있고, 여전히 동대문. 남대문 시장이 붐비고 있지만, 그
지역은 이제 서울 전체 면적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정치. 상업. 금융.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자리는 더욱 견고해졌다.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국제적으로도 각 분야에 있어 서울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
성곽과 무기
우리나라에서 성곽과 무기는 어떻게 발달해 왔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조상들이 어떤
방법으로 전쟁을 해 왔는가. 인류의 가장 불행한 일 중의 하나가 전쟁이겠지만, 그러나 이 전쟁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있어 왔다. 더구나 밖으로부터 다른 민족이 침범해 오는 경우에는
민족을 스스로 지켜 나가기 위해 튼튼한 성을 쌓고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서 이와 대항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무기
우리 조상들은 신석기시대에 전쟁을 위하여 무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사냥을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 그런 것들 중에서도 활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나무를 휘어서 만들었던 활은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화살촉만은 돌을 다듬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흔히 발견되고 있다.
활뿐만 아니라 돌로 칼을 만들어 쓰기도 하고, 또 돌을 둥글게 하거나 여러 모로 삐져 나오게 한
이상한 도끼를 만들어 손잡이를 끼고 잡고는 휘둘러 짐승을 때려 잡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마을마다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자기네 마을에
속해 있는 일정한 경계선 안에서 구했다. 그러나 때로는 경계선을 넘어 다른 마을 안에서 사냥을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쫓아가던 노루가 경계선을 넘어 달아나면 그것이 아까워 계속
따라가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난의 나라 국경을 침범하는 것과 같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다른 마을로부터 항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에 적당한 배상을 해주지
않으면 두 마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사냥에 쓰이던 활이나 칼, 도끼
같은 것이 전쟁을 위하여 쓰여지게 되었다.
빈번한 전쟁과 무기
B.C. 10세기 경으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구리를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구리만으로는
너무 무르기
때문에 구리에 주석을 섞어 단단한 청동기를 만들어 썼으므로 우리는 이 시대를 청동기 시대라
부른다. 청동을 가지고 가장 많이 만든 것이 무기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
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것은 검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는 청동검은 현재에도 무기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날카롭고 단단하게 만든 무기였다. 이때에도 활을 사용했는데, 화살촉은
숫돌에 갈아 더욱 날카롭게 만들 줄 알았다.
청동으로 만든 우수한 무기를 쓰는 족은 석기밖에 쓸 줄 모르는 다른 족을 정복해 그들의
땅을 넓혀갔다. 그리고 사냥을 하거나 혹은 농사를 짓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다른 족을 정복해
땅을 넓히고 사람도 부려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쇠를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무기는 철제로 바뀌고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 무렵에
우리 조상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말을 탄 기병이 보병보다 훨씬 전쟁에
유리했음은 분명해, 이 기병을 가진 군대가 각지를 휩쓸게 되었다. 고구려는 그러한 민족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점점 영토를 넓혀서 큰 제국을 건설하는 데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고구려보다 조금 뒤져서 백제와 신라가 일어나서 서로 겨루는 삼국시대가 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삼국시대란 전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땅을 뺏고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을 타고 활을 메고 칼을 찬 군인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나 신라의 토기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삼국시대 대표적인 군인의 모습이다.
성곽의 축조
쳐들어 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는 방어에 유리한 장소에 성곽을 쌓아 군대를 머물게
하여 지키는
것이 보통이다. 산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지키기에 편하고 적이 쳐들어 오기에 불편한 곳은 높은
산이므로 대개 성은 산 위에 쌓곤 했다. 그러나 무작정 아무 산이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산 위에 어느 정도 넓은 골짜기가 이어서 군대가 머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는 물이 있어야
한다. 산 위에서 물을 구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므로 이것은 무척 어려운 조건이 된다.
아무튼 좋은 샘이 있어 물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적의 포위 속에서 몇 달이고 군대가
견디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군인들이 먹을 양식은 미리 산성에 축조해둔 창고 안에 저장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준비가 갖추어진 산성에서는 적은 군대로서도 능히 몇 배의
적과 싸워 이겨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 나라의 국경지대에 있는 적당한 산에는
여기저기에서 아직도 이런 산성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의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
실패한 안시성이라든가, 고구려의 장군 온달이 신라를 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
아단산성(서울의 광나루에 있는 뒷산의 산성)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국경지대뿐만 아니라, 삼국의 서울에도 각기 이러한 산성이 있었다. 가령 고구려의 서울인
집안에는 산성자 산성이 있고, 백제의 서울이었던 서울 송파에는 남한 산성이 있고,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에는 남산성, 명활산성, 선도산성 등 둘레의 산에 여러 산성이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서울을 지키는 산성들이며, 위급할 때에는 왕이 그리로 들어가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는 산성 이외에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성을 중심으로 강이나
언덕을 끼고 도성을 쌓기도 했다. 이같이 서울에는 두 가지 성격의 성을 쌓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돼 있었다.
무기의 발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나라가 태평하여 졌다. 나라 안.밖에서 평화가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 바다를 통해 당나라에 해적이 드나들면서 신라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신라는 해군을 만들 필요를 느꼈는데, 장보고가 청해진에 건설한 1만 명의
해군은 황제의 왕자로서 해상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보고가 만든 군함의 모습을 현재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북진정책을 썼고, 그 결과 새로 개척한 압록강과 원산만 일대에 많은
성을 쌓아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 이들 여러 성은 동시에 국방의 일선이기도 하여서, 거란, 금,
몽고 등의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는 일선의 방어진지를 이루고 있었다. 강감찬이 거란의 대군을
전멸시키고 박서가 몽고에 끝까지 대항하여 유명한 귀주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한편 고려에는 해적의 침입도 있었다. 동해안 일대에 출몰한 동여진이나, 고려 말기에 각지를
침범한 일본의 왜구가 그것이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고,
과선이라고 하는 우수한 군함을 만들었다.
과선은 뱃머리에 쇠로 만든 삐죽한 물건을 만들어 놓아 적의 배와 부딪쳐서 그것을
부수어 침몰하게 하는 것이었다. 장수는 배 위의 높은 망루에 앉아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무선이 주장해 만든 것이 화포였다. 화약이 폭발하는 힘을 이용해
화살을 쏘아 보내는 법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왜구의 배를 불질러 버릴 목적으로 만든 것이 이
때의 화포였다. 이 화포는 조선시대에 더욱 발달해 여진을 내쫓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화포는
우선 쏠 때 굉장한 폭음을 내므로, 적은 그 소리만 들어도 놀라 도망치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이를 무척 중요시했으며, 그 기술이 남의 나라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조선시대의 침략자로서는 또 일본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임진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이 때 우리 나라는 백년이 넘도록 평화가 계속돼 군비를 소홀히 한 관계로
육군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해군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북선은 배 위를 거북이 잔등같이 덮어서 적의 탄환을 피하는 동시에, 이 편은
안에서 자유로이 공격할 수 있는 편리한 군함이었다. 이순신은 훌륭한 장군으로서, 거북선이
없어도 잘 싸워 이겼지만, 또 이러한 우수한 군함을 만든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서울인 한양에 산줄기를 따라 도성을 쌓아 서울을 방어하려 했다. 또 서울
부근에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같은 튼튼한 산성을 쌓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도 했다. 먼저
남한산성은 16대 인조 때 새로 쌓았는데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이 침입했을 때
임금은 몸을
피하고 버티어 싸운 곳이다. 이 산성의 둘레는 20리에 달해 4개의 문이 있고 세곳에 화포를
장치했다. 그리고 성 안 요소에 절을 짓고 승병을 배치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 했다. 그리고
북한산성은 그 후 19대 숙종 37년(1711)에 쌓았는데 그 높이가 18척, 두께가 9척이며 둘레가
20리로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그 후, 이 두 개의 산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이 무너졌는데,
오늘날 이 성터를 찾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곳을 가보나 성이 밑으로부터 허물어진 곳은 한
군데도 없음을 볼 때 얼마나 튼튼히 쌓아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허물어지면 세우고, 허물어지면
또 세우고 하던 성곽의 오랜 역사 속에서, 옛 조상들의 국방에 대한 굳은 의지가 가파른
산등성이를 줄달음치며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외항쟁
중국과의 항쟁
옛날의 전쟁에는 오늘날과 같은 무서운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나,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침략자들은 정복한 땅을 자기네 영토로 만들고, 사람을 붙잡아 종으로 부려먹으려 했다. 그러므로
전쟁은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건 결사적인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대규모의 침략을 해 온 것은 중국의 민족이었다. 기원전 4,5세기 무렵에
중국의 연나라는 요하를 넘어 우리 나라로 쳐들어오려 하였다. 이 때 우리 나라의 고조선은
평양을 서울로 하고 요하를 국경선으로 삼아 중국과 대항해 굽히지 않았고, 심지어는 연나라로
쳐들어 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고조선을 보고 교만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사정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그 뒤에 중국은 전국시대라 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다가 결국은 한나라로 통일되었다. 그 사이
위만이 고조선의 왕을 내쫓고 위만조선을 건설했다. 위씨조선은 고조선의 땅뿐 아니라 둘레의
여러 족속들을 정복해 영토를 넓혀 퍽 강한 나라를 건설하고, 중국의 한나라와 적대하여 왔다.
이에 한나라 무제의 침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위만의 손자 우만은 1년 동안이나
버티었으나, 일부 반역자들이 성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나라가 만하게 되었다(기원전108)
이민족의 침략에 패해 나라가 망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 땅에 4군을 두어 다스렸다. 그런데 4군은 한강 북쪽에 한정되었고, 그것도
3군은 없어지거나 혹은 옮겨가고, 오직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 민족의 반항을 받아 그리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대신 낙랑군을 사이에 두고 멀리
북쪽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옥저, 예, 삼한 등의 많은 나라들이 서서, 낙랑군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성장하고 정리되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우리 나라에 대하여 침략의 야심을 가진 중요한 나라는 역시 중국이었다. 그리고
이 중국과 싸운 것은 육지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내고(서기 313)
요하까지 국경선을 확장해 옛날 고조선의 땅을 모두 차지했다. 이같이 강한 나라가 방파제와
같이 있어서, 수나라 양제나 당나라 태종의 공격을 잘 막아 주었던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이나
안시성이 침략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만일 이때에
고구려가 졌더라면 중국은 백제나 신라까지를 합쳐서 모두 식민지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구려의 승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 패한 당은 우리 나라를 침략할 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 때에 백제의 침략에
허덕이던 신라가 당에 동맹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당은 신라와 손잡아 먼저 백제를 친 뒤, 이어
고구려도 멸하고 끝내는 우리 나라 전부를 자기네 영토로 만들려고 하였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왕과 장관들을 위시해 수만 명의 백성을 포로로 붙잡아 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의 관리와 군대가 와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뿐아니라 신라까지도
당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우선 백제의 땅에서는 각지에 부흥군이 일어나서 당군을
괴롭혔다. 거의 전국이 이 부흥군의 손에 들어가고 당군은 겨우 한두 군데 성에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고 옷이 헤져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었다. 이에 당은 백제의 왕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인심을 수습하고, 신라와 대등한 위치를 허락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여, 붙잡간 고구려의 왕을 다시 돌려보내어
유민을 돌보게 하였다. 이같이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고
거센 것이었다.
한편,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당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심지어는 고구려의
부흥군을 도와서 당군과 싸우게도 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반항에 놀란 당은
대군을 보내 신라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군는 이를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격파하였다.
이제 신라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3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통일시대의
신라가 이룩한 찬란한 문화는 이같은 정치적 독립의 터전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과의 항쟁
이렇게 북방민족과의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의 일본과의 항쟁도 있었다.
일본은 섬나라였고, 망망한 태평양을 앞에 끼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나라들과
접촉하기 이전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늘 우리 나라의 도움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욕구를 정상적인 외교 경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해적 행위로
충족시키려 하곤 하였다. 고려 말에 우리 나라에 침입해 온 왜구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또 임진왜란도 그와 비숫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은 전후 7년 동안이나 계속된 대 전쟁이었다. 이때 우리 나라는 200년
동안의 평화에 젖어서 국방을 소홀히 한 때문에 적군이 온 나라를 휩쓸어 건물과
인명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 것이 극히 드물어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책이나 종과 같이 그들이 탐내던 문화재도 많이 가져갔다. 그런데도 정부군은 이와
대항해 싸울 수가 없었다. 오직 이순신 장군이 거느린 해군이 일본 해군을 각처에서
쳐부수어 그들의 작전을 교란시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육상에서는 지방의 농민으로 구성된 의병을 유학자들이 거느리고 적군과 싸워
그들을 괴롭혔다. 이들은 무기도 변변치 않아서 때로는 몇 백 명씩 죽는 일도 있었다.
각지에 있는 의총이라는 것은 그들의 무덤인 것이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강토와
가족을 적군의 독한 이빨에서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우리 나라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일본군은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일본의 요구로 국교가 회복되어 통신사가 다니게 되었는데, 일본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여러 침략전쟁도 민족의 발전을 방해하는 위험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제국주의 정책을 써서 침략을 시작하게 되면서 위험은 더욱
커졌다. 아프리카나 인도나 월남이나 또 중국에 대한 같은 수법으로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정치의 실권을 빼앗고, 경제적인 착취를 하려 드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민족을 말살하려 들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험을 부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 대한 이러한 침략에 앞장선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한 발
앞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서 부국강병 정책을 쓰더니 약소국의 침략에
있어서도 그 본을 떠서, 침략의 손을 우리 나라에 먼저 펴 왔었다. 189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 벌써 속임수와 위협으로 우리 나라를 넘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공사관이
설치되자 이는 정치적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고, 개항장에 와 사는 상인들은 가난한 농민들을
상대로 폭리를 노려 땅까지도 빼앗는 형편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청의 힘을
빌리는 고식적인 방법을 써서 도리어 그 간섭을 초래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과감히 들고 일어난 것이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뭉쳐서, 정치의 개혁을 부르짖는 동시에 일본세력을 축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전봉준이 거느린 동학군은 처음 정부군을 무찌르고 승리하였으며,
일본군과도 싸웠으나, 근대식 무기와 훈련을 갖춘 일본군을 대항해 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청세력이 일본군에게 몰려나고 난 후에 우리 나라 정부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그 침략을
물리치고자 했다. 일본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친러 주동의 주동 인물이라고 생각한 민비를
시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와도 전쟁을 벌여 그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곧 군대를 동원하여 궁성을 에워싸고 저희들
멋대로 외무대신의 인장을 가져다 보호조약에 날인시켰다. 고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불법적인 조약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강제로 밀고 나갔다. 민영환을
위시한 많은 분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이때였다. 또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어 세계에 보호조약에의 무효를 호소한 것도
이 직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국왕이나 정부의 반항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의의가 큰 것은 국민 운동이었다.
국민들 중에서 서양의 새 지식을 배운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라든가 대한자강회와 같은
정치단체를 조직해 민주주의 실천, 독립의 쟁탈, 경제적 발전 등을 강조하였다. 또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등 여러 신문을 발행해 일본의 침략을 반항하는 언론 활동을
폈다. 한편 새로운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많이 만들어서 국민의 지식을 개발해 국가의
힘을 길러 침략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라는
노래가 유행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의병이 각지에 일어났다. 처음 의병은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뒤에는 우리 나라의
군대들도 이에 가담해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우리 나라 의병 총수는 14만, 일본군과
싸운 횟수는 3천에 달했다고 한다. 한때는 전국의 의병들이 총연합해서 서울로 쳐들어올 계획을
세우기까지 할 정도였다.
3.1운동의 횃불
그러나 1910년에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자로 합병하여 그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모든 단체나 신문을 없애고 학교를 대폭 줄였다. 일체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된 것이다.
이러한 강압 정책을 밀고 가기 위해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의 업무를 담당케 할 정도였다. 이에
많은 이병들이 만주로 옮겨갔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비의 태반이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 경비에
사용될 지경이었다.
온갖 방법으로 우리 국민의 반항 운동을 억누른 뒤에, 일본은 그들의 마음대로 정치를 했다.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그들의 대부분을 소작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풀뿌리와
나무뿌리로 연명하는 농민의 수가 전체의 반이나 되었다. 어업, 광업, 운수업, 금융기관 등은
모두 일본인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본에 의한 산업은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고난 속을 헤매일 때에,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의 소리가
둘리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온 국민이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어난 것이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세 종교단체가 주동이 되어
일을 시작했으나, 곧 민족 전체의 운동으로 번져 갔다. 종교나 직업이나 계급이나
연령이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국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독립을 외친 것이었다. 맨주먹으로
일본의 군대와 대항해 싸운 것이기 때문에 독립을 되찾는 당면의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그 영향은 컸다.
첫째로 이 결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사령부가 되었다. 둘째로 세계의 모든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간절한 소원을 널리 알려주었다. 셋째로 일본은
그들의 정책을 표면상으로나마 완화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
몰렸다.
이 뒤에는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등 치열한 반항운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1937년에 중국을 침략하고, 1941년에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는, 우리 민족에 대한 학대도 더욱 심해져서, 말과 글조차도 못쓰게 하는
민족말살정책을 썼다. 그러한 이런 속에서도 혹은 암살사건이나 폭탄 사건으로 혹은 경제적인
반항운동등으로 끈질긴 반항을 꾀하였다. 또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을
조직해 연합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항복함과 동시에 민족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민족이 일본이 압박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찾게 된 것은 연합국의 덕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 민족의 치열한 민족 운동이 없었더라면
연합군이 결코 우리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독립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땀으로 지켜져 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깊히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국토
마을과 고을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씨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이 씨족은 조그마한 마을을 단위로 하는
것이었다. 신라에서 여섯 마을 촌장들이 모여서 회의하였다는 여섯 마을은 그러한 것이었다. 이
마을은 비록 작은 것이긴 하였지만 그런 대로 그들이 사는 일정한 지역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어서 이웃 마을과는 독립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은
함부로 침범할 수가 없었으며, 만일 그것을 침범하면 배상을 해야 했다.
뒤에 이들 씨족은 몇 개가 모여서 부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여러 마을을 합친 하나의 고을이었다. 이 고을은 마을보다 컸으며, 또 자연히 고을과 고을
사이에 경계선이 마을과 마을 사이의 경계선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국가라는 것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국토라는 것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같은 계통의 말과 문화를 가진 여러 부족들이 널리 흩어져서 살고 있다가, 이들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 되었으므로, 그들이 흩어져 살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에는, 장차 우리 나라의 국토가 될
대체적인 테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국토의 싹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대체로 부족을 단위로 하는 작은 국가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을 보통
성읍국가라고 부르고 있다. 그 성읍국가들이 여럿 모여서 연맹을 맺고 그들 전체의 왕을
추대하여 보다 큰 단위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이를 연맹왕국이라 부른다. 이 연맹왕국이
형성되면서부터 국토는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 연맹을 맺은 모든 성읍국가들이
차지하는 지역은 연맹왕국의 국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연맹왕국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이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고 전하는데, 혹은 만주의 요하 유역이었다고도 한다. 이에 가담한
성읍국가들은 평안도 일대와 남만주의 요동반도에까지 걸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고 중국과 서로 힘을 겨루고 있었다. 이 고조선의 둘레에도 이와 비슷한 몇 개의
연맹왕국이 있었으니, 송화강 유역의 부여, 압록강 유역의 예, 동해안 원산만 지역의 임둔, 예성강
유역의 진번, 한강 이남의 진국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고조선만큼 떨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고조선은 중국의 침략을 받아 경계선을 축소하여 가더니, 위만이 왕이 되면서 다시
힘을 밖으로 뻗어 둘레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 여러 나라가 중국과
교통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에 중국의 한나라 무제는 위만의 고조선을 쳐서 그 옛 땅에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여러 세력들은 이에 자극을 받아 힘을 더욱 뭉쳐서 중국의 4군 중에서
3군을 내몰았다. 그리고 새로운 연맹왕국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한강 이남 지역의 삼한, 그리고 동해안 지역의 옥저와 동예였다.
이렇게 여러 연맹왕국들이 차지한 지역은 멀리 북만주의 넓은 들에서부터 한반도의 남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나라의 국토가 대체적인 테두리를 잡기
시작하는 시초였던 것이다.
국토의 테두리
자기 나라의 땅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이를 더 크게 확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여 심한 전쟁을
하던 시대가 삼국시대였다. 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국토라는 것이
분명히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자주 하였으므로 그 승패에 따라 각 나라의 영토에는 변화가 일어나곤 하였다. 처음
고구려의 세력이 강하여, 중국의 세력을 만주와 반도에서 몰아냈으나, 백제의 힘도 강하여서
근초고왕 때에는 남으로 마한을 멸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쳐서 크게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에 부여를 멸망시키고 백제를 쳐서 만주의 대부분과 반도의 한강
유역까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신라의 진흥왕이 쳐올라가서 한강 유역과 동해안의
함흥평야까지를 점령하였다. 그런가 하면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를 쳐서 낙동강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진 일퇴하여 변화가 많았으나, 결국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백제의 온 땅과 고구려의 남부를 차지하였다. 이 때 신라가 차지한 곳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이었다.
그런데, 이 때 발해가 송화강 유역에 나라를 세워서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
우리 나라는 남과 북에 두 나라가 있는 남북국시대였던 셈이다.
이같이 삼국시대나 남북국시대는 나라가 하나가 아니었으므로, 우리 민족 전체의 국토는
이들을 모두 합친 것이라고 할밖에 없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합쳐서 우리의 국토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어느 한 나라의 영토만을 우리의 국토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토의 완성
신라 말기에 후백제와 태봉이 독립하여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내란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다가 결국 고려가 온 나라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발해는 거란에게 망하고, 그 유민들은 고려에 와서 신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이제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고려가 물려받은 영토는 원래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고려는 스스로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라고 일컬으며,
옛날 고구려의 땅을 모두 차지하려고 북진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래서 건국 초기부터 북쪽
국경지대에 많은 성을 쌓고 남쪽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여 땅을 넓혀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북진정책은 거란의 세력에 부딪치게 되어 이 결과 두 나라 사이에는 여러 차례
큰 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고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북진정책을 버리지는 않았다. 서희
같은 이는 거란의 장수를 만나,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로서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여, 압록강까지의 땅을 담판으로 얻어 오기도 하였다. 고려는
여기에다 여섯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냈는데, 이것이 강동 6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북쪽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원산만까지 쌓은 천리장성은 곧 고려의 북쪽 국경선이었다.
한편 함경도 지방에는 여진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도적질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윤관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고 9성을 쌓은 일이 있었다. 이 때 얻은 땅은 뒤에 모두
돌려주기는 하였으나, 고려 북진정책의 강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기 최영의 요동 정벌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고려의 뒤를 이어 건국한 근세 조선에 이르러서 비로소 우리 나라의 국토는 완성되었다.
초기의 여러 왕들이 모두 북방 개척에 노력하였으나, 특히 세종 때에 김종서로 하여금 두만강
방면의 여진 사람들을 강 밖으로 몰아내고 거기에 6진을 설치해서 지키게 하였다. 또 압록강
방면에서는 4군을 설치해서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오늘날의 우리 국토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국토의 분단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고 이를 경계로 남에는 미군이 들어오고 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오더니, 이는 어느 사이에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화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6.25전란이
일어나게 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현재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토의 분단이 가져오는 민족적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이나 국제적인 지위의 향상에 모두 지장을 받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당면한 큰 숙제의 하나가 이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가옥
동굴의 이용
사람이 우리 나라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로, 이 때에는 눈, 비와 바람을 피하며,
추위를 막고, 사나운 짐승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굴이나 비스듬히 거대하게
서 있는 바위 밑의 그늘에 살았다. 구석기인의 뼈가 불을 지폈던 흔적인 화덕자리(노지) 곁에서
그들이 잡아 요리해 먹었을 동물의 뼈와 함께 동굴 속에서 발견됨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동굴을 찾아 그 속에서 주로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평지에서는 새로운
동굴을 찾아 이동 이동 중이거나, 혹은 식량을 채집하기 위해 살고 있는 동굴로부터 멀리까지
나갔거나, 맘모스 같은 몸집이 큰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여러 무리가 한데 어울려 임시로 거처할
때, 햇빛이 잘 비치고 식수 구하기가 쉬운 강이나 연못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것 같다.
이럴 경우 땅 위에 오늘날 텐트를 칠 때와 같이 구멍을 파서 막대기를 세워 그 끝을 묶고서는
위에 동물의 가죽을 덮은 후 그 밑자락을 냇돌을 주워다 놓은 천막식의 집을 지었던 것이다.
움집의 등장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동굴에 여전히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물었고, 대체로 물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수혈주거). 초기의 움집은 대개 둥글거나 혹은 이에 가까운 네모진
모양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걸쳐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풀이나
나뭇가지를 이용해 이엉을 덮어 만든 것이었다. 크기는 직경이 6미터 정도의 것이 보통이고
깊이는 60센티미터 정도였다. 바닥은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흙을 깔고 굳게
다졌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길쭉한 냇가의 돌을 돌리거나 진흙으로 냇돌과 같이 만들어 돌린
위에 화덕을 만들었다. 불을 지펴 추위를 덜고 또 취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 화덕자리 옆에는
저장구덩이(저장혈)가 있어 취사를 위한 곡식이나 도구들을 넣어 두는 데 이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출입구는 움집 안에 한두 단의 계단을 만들거나 움집 바깥으로 경사지고 만들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목재를 이용해 발디딤을 만들어 이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움집은 서울
암사동의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군데에 여럿이 모여 있었으므로 이 당시에는 취락을 이루고
집단생활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후기에 가면 움집은 공간이 약간 넓어지고, 평면 모양이 네 변의 길이가 동일한 정방형 혹은
두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보다 긴 장방형으로 변하였으며 화덕자리는 한 쪽으로
치우쳐서 설치되었다. 많은 경우 바닥에는 출입구 가까이에 야외용의 석기들이 널려 있고, 화덕
부근의 집 한 쪽에는 토기나 숫돌(간돌)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출입구 가까이에는 남성들이
거처하고 집 안쪽에서는 여성들이 사림을 했던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움집의 지상가옥화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 사람들은 주로 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를 앞에 둔 언덕진 곳, 즉
구릉지대에 흙과 냇돌로 다져 조성한 토성 부근에서 읍락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이는
청동기인의 식생활이 농경에 크게 힘입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지만, 주거형태는 여전히
마찬가지로 움집이었다. 같은 움집이긴 했어도 신석기시대의 것과는 모습이 달리 발전되고
있었다. 움집 안에는 꼭 화덕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화덕이 움집의 가운데에 설치되는 일이 거의
없이 꼭 한쪽으로 치우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움집의 평면이 거의가 장방형으로
원형이거나 정방형의 것은 극히 적어지고, 깊이는 50 내지 60 센티미터의 것이 많으나 30
센티미터 미만의 얕은 것도 있으며 기둥은 수직 구멍에다가 납작한 돌을 깔고 세워 원시적이지만
받침돌(초석)을 이용하였으므로 지상가옥에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기둥 배치에 있어서도 새로운 양식이 등장한다. 장방형인 움집 내부의 긴 변에 평행하게
기둥이 세 줄 또는 네 줄로 된 경우가 나타나는데, 중앙의 일 열 외에 그 양 옆에다가 다시 한
두 줄씩의 기둥을 세웠던 것이다. 이것은 중앙의 기둥에 들보를 얹어 연결하고 이 들보 위에
용마루를 받들게 하여 보다 견고하게 집을 지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칸막이의 흔적이
있는 유적도 있는데, 청동기의 사용으로 국가가 형성되어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공간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농경생활로 별도의 저장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잇다. 그리고
전에 비해 집자리가 밀집하여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취락의 규모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때의 집자리 중에는 화재를 입은 것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불의 사용이
잦아지면서 실수에 의한 화재로 말미암은 경우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불태워진 경우가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온돌과 목조가옥의 등장
철기가 수용될 무렵 가옥도 훨씬 발전된 모습을 띠었다. 당시의 유적에서는 움집에다가 바닥
일부를 진흙으로 단단하게 다져 놓은 상태에서 냇돌을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덮은 화덕자리와
함께 판자나 흙판을 이용해 터널형으로 만들어 연통과 굴뚝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이 발견되는데,
이는 난방을 위한 온돌 장치를 갖추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같은 움집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형태가 여럿 있었다. 북방지역에서는 추위가 심한 경우에
이를 덜기 위하여 땅을 깊이 파서 움집을 짓기도 하였다. 이럴 경우에는 깊을수록 귀하다고
했다 한다. 또 한강 이남의 지역에서는 움집에다가 땅에는 닿지 않을 정도로 낮은 초가 지붕을
만들었음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 때에는 또 철로 만든 칼이나 도끼를 사용하여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지사에
목조가옥을 짓고 살기도 하였는데,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지은 귀틀집(누목식 주거)이나 여름
한철의 원두막같이 집의 바닥이 높게 되어 있는 나무집(고상식 주거)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지배층의 집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지배층의 경우는 지붕에 기와를 올리고 나무를 깎고 다듬어
홈과 촉(요철)을 만들어서 짜 올리는, 매우 발달된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에 살았다.
기와집과 초가집
삼국시대에 이르면 가옥은 사회의 발전에 짝하여 더욱 고도로 발달하게 된다. 고구려의 경우
일반 가옥은 띠와 풀로 엮어 만든 초가에 온돌을 장치한 것이었고, 왕궁이나 귀족의 집, 관청
건물, 사찰들만이 기와 지붕이었으며, 왕궁이나 귀족의 집에서는 평상 즉 마룻바닥 위에서 많이
생활하였던 것 같고, 그 밖에 부엌, 창고, 고깃간, 외양간, 차고 등이 기능에 따라 별도의 건물로
지어졌다. 이들의 구조는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려 짜 맞춘 목조가구식 구조였다. 당시의
국왕이나 귀족의 무덤이었을 고분의 벽면에 그려진 그림 즉 벽화나 집모양의 토기 등을 통해,
당시 가옥의 형태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생생하게 그 모습을 잘 알 수가 있다.
백제와 신라의 가옥은 실물이 전혀 전해지지 않으므로 잘 알기 어려우나, 각기 문화의 특성에
따라 약간의 특색이 있었겠지만 고구려와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특히 신분에 따라 차등이 있게 가옥의 규모나 장식, 설비의 정도가 각기 제한되어
있었음이 특기할 만하다. 제한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방의 크기와 기와, 재목, 장식, 계단, 담장,
문, 마굿간, 병풍, 평상 등으로 나뉘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 주고 있어서, 당시의 가옥의
규모와 외형, 장식에 관하여 알 수 잇다. 예를 들면 진골은 실의 길이와 넓이가 약
724센티미터(24척)를 넘지 못하고, 육두품은 약 545센티미터(18척)를, 사두품과 평민은 약
455센티미터(15척)를 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고려의 가옥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그것과 거의 유사했으리라 생각된다. 가옥이
세워지면 상당 기간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고, 정권이나 혹은 왕조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곧
가옥의 구조가 갑자기 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기록들을 참조하더라도 당시
지배층의 가옥은 역시 기와집으로, 고구려에서처럼 평상에서 주로 생활하였음에 비해 일반
가옥은 여전히 초가집이었으며, 온돌이 일반화되어 거의 전국적으로 온돌장치가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한편 고려에서도 일찍부터 신라에서와 같이 신분에 따라 가옥의 규모나 외형에 대하여 차등을
두어 제한하는 규정, 이른바 가사제도가 있었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재력 있고 세력 있는
자들이 앞다투어 큰 집을 지으려 해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였다. 또 산이 적은 곳에는 높은 집을
짓고 산이 많은 곳에서는 낮은 집을 짓는 것이 옳은데, 우리 나라는 산이 많으므로 높은 집을
짓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단층 가옥만을 짓고 2층 건물은 짓지 말도록 국가적으로
권장하였음을 미루어 대체로 단층 가옥이 많이 세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사대부들이 그 집안 조상들의 신주를 모셔 좋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 가옥의 일부에 건축되기도
하였다.
남녀 사이의 생활 공간의 엄격한 구분
조선시대의 가옥은 고려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양식을 거의 그대로 이으면서 발전되어 갔다.
다만 조선에 들어와서 달라진 점은, 대가족제가 됨에 따라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면서 가옥의
규모가 커졌으며, 유교의 남녀 차별 의식과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꺼리는
이른바 내외법의
영향으로 별채가 지어진다는 것이었다. 중인과 양반의 중상류층 가옥에서는 여성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로 구분되었고, 심지어 화장실마저도 따로 있어 각기 내측과 외측을
두었다. 더욱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맏아들인 장자의 위치가 확고해짐에 따라 사랑채도 가장의
큰 사랑과 장자의 작은 사랑으로 나뉘어졌다. 다만 서민들의 일반 가옥에서는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인해 남성이 기거하는 사랑방과 여성이 쓰는 안방으로 구분될 뿐이다.
조선에서도 신분의 차이에 따라 대지의 넓이, 가옥의 규모와 장식에 차등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보면 가옥의 크기가 대군의 집은 60간, 군과 공주의 집은 50간, 그리고 일반 민가는 10간을 넘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를 넘어서는 경우가 빈번하여서, 일반
민가도 99간까지는 허용되기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가옥의 평면은 기후 조건이 다름으로 인하여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안방과 대청 그리고 부엌의 세 가지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평면의 모양이
달랐던 것이다. 그 모양은 다음의 "삽도" 조선시대 각 지방 가옥의 평면도와 같다.
조선 말기 특히 개화기에 들어오면 사회의 변화에 힘입어 개화에 일찍이 눈뜨고 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중인층이 신분의 차이에 따른 가옥 규모의 제한 규정을 의식하지 않고 집을 지었다. 특히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에서 신분제도의 철폐가 공포된 후로 가령 종래에는 양반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솟을대문을 자신들의 집에 만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오히려 양반집에서는 양반
체면이 손상되었다 하여 반대로 솟을대문을 평대문으로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서양식 건축의 도입
외국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서양인과 일본인의 거주가 늘어나, 그
이후로는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서양식 건축은 1884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벽돌을 쌓아올리고 외벽은 석회로 칠한 이층집에 붉은 기와를 얹은 것이었다. 이 같은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시멘트, 유리, 콘크리트 등의 새로운 자재들이 점차 보급되었고,
또한 난방이 스팀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거주로 일본식 주택도
늘어갔으며, 이의 영향으로 1930년부터는 일본식 주택에 온돌을 넣은 이른바 개량주택이
건축되었다. 이 개량주택은 현관, 욕식, 화장실이 집 안에 함께 있는 구조로 전통 가옥과는 큰
차이를 보인 것이었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를 쉽게 하기 위해 연립주택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6.25전란을 거치면서 만주, 일본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도시 특히 서울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주택난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이를
해소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는 이른바 민영주택을 여러 곳에 건설하였고,
주택과 상가가 복합적으로 있는 상가주택도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초부터는 정부에서
매년 표준설계도를 만들어 이를 시공함으로써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여성들의 살림살이를
편하게 하기 위해 거실과 부엌을 선 채로 서로 통하여 다닐 수 있는 입식으로 권장하여 서서히
전통 가옥의 내부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붕에 슬레이트를 올려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부터는 서울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아파트의 건립이 이루어져서
대단위의 아파트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농촌의 경우는 여전히 주택
개량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전국적으로 개선되기에
이르렀다.
무덤
무덤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묻은 곳으로서 한자로는 묘 혹은 분묘라 하며, 옛날에 만들어진
무덤을 가리킬 때 옛 무덤이란 뜻의 한자로 고분이란 말이 쓰인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 통틀어 묘제라 한다.
구덩무덤과 돌무지무덤
사람이 살던 곳이나 그 근처에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죽은 뒤 묻힌 무덤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저 세상으로 생을 연장한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구석기 시대에도 무덤은 있었을 테지만 지금까지 이 때의
무덤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이웃 나라들의 경우, 구석기 시대의 동굴 안에서 땅을 파고
묻은 구덩무덤(토장묘)의 예가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우리 나라도 동굴에서 사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 같은 구덩무덤이 구체적으로 찾아지기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부터다. 물가에서 혹은 동굴
속에서 발을 뻗게 하고 몸을 수평으로 눕힌 펴묻이(신전장)의 형태로 시체가 발견된다. 무덤이
만들어진 곳이 꼭 물가가 아니더라도 구덩무덤 중에는 냇가의 돌(냇돌)을 가져다가 시체 주위를
돌린 형식도 보이는데,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주로 물가 생활을 했음이 반영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외에 당시의 묘제로 돌무지무덤((적)석총)도 있다. 이것은 구덩이를 파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대신 돌을 쌓은 것이다. 이 돌무지는 시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평균
기온이 낮은 북방지역에서 널리 행해졌고, 크기가 사람의 평균키보다 약간 작거나 아주 작고
높이가 낮은 것으로 보아, 사람의 몸을 구부려서 묻은 굴장인 듯 하다.
이 시대의 유적 중에는 시체 셋이 수레바퀴식(방사선) 모양으로 발을 중앙으로 모으고 누워
있고, 그 옆에 빗살무늬토기, 돌로 만든 화살촉(석촉) 등이 놓여 있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염병 등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죽자 살던 곳을 무덤으로 하고 새집으로 이사한 듯하다. 후대의
기록에 병이 생기거나 사람이 죽으면 살던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었다고 한 게 바로 이 같은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고인돌과 돌널무덤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지석묘)과 돌널무덤(석관묘)이 지배적이었다. 고인돌은 전국
각지에서 널리 발견되며, 탁자식과 기반식 등이 있다.
널판같이 편평하게 생긴 판석 네 개로 네모지게 짠 위에 널따란 덮개돌(개석)을 올려 놓아
마치 탁자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탁자식이라 이름 붙여진 고인돌은, 한강 북쪽에 많이 분포되어
북방식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시체를 지하에 두고 그 위에 작은 돌이나 돌무지(적석)로 지탱한
뒤 덮개돌을 올려 놓아 바둑판과 같이 생긴 고인돌은 기반식이라 하며, 한강 남쪽에 많이
분포되어 있어 남방식이라고도 이름이 붙여진다. 이 밖에 전혀 받침돌이 없어 덮개돌을 시체
묻은 위에 직접 올려 놓은 고인돌도 있는데, 형태가 탁자식, 코드표와는 다르다고 해서 이를 변형
혹은 개석만 있다고 하여 개석식이라 한다. 이것은 북방식이 크게 간략해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의 밑에 시체와 함께 묻어준 부장품으로서는
간돌검(마제석검)이 흔히 발견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서양악기인
비파 모양의 동검(비파형 동검)이 출토되기도 한다.
그리고 돌널무덤은 땅 속에 널찍한 돌로 상자 모양의 널(관)을 만든 것으로, 그 생김새가 돌로
짠 상자 같은 무덤이라 하여 석상분 또는 석관묘라고도 불린다. 이 같은 돌널무덤은 너비가
넓어지고 지상화하여 북방식 고인돌이 되고, 한편으로는 남방식 고인돌의 지하구조로 되었을
것이라 짐작되고 있다. 돌널무덤의 형태는 머리 쪽이 넓고 발 쪽이 좁아지는 게 특징이며, 길이가
1미터로 짧은 것이 있어 시베리아, 중국에서와 같이 대체로 몸을 구부려 묻은 굴장이 행해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네 벽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된 것은 주로 한강 이남에 분포하고,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형식은 황해도, 평안도 등 한강 이북의 서북지방에 모여 있어 대조를 보인다.
이 밖에 청동기시대의 고분으로는 돌덧널무덤(석곽분)도 들 수 있다. 이는 석관묘가 널판같이
생긴 판석으로 되어 있던 것과는 달리, 냇가에 흔한 덩어리 돌들로만 쌓았거나 또는 판석과
덩어리돌을 섞어서 덧널(곽)을 만들고, 그 속에 나무로 된 널(관)을 넣어 말하자면 이중으로 된
널을 만든 것으로 시체는 발을 뻗고 몸을 수평으로 눕힌 펴묻이(신전장)로 묻혔다. 이것이
발전하여 뒷날 삼국시대의 기본적 분묘 형식으로 자리를 굳히기에 이른다.
널무덤과 독무덤의 유행
철기가 수용된 이후에는 무덤도 역시 변화하게 되는데, 널무덤(토광묘곽묘)과 독무덤(옹관묘)이
유행하였다. 널무덤은 길이 3미터, 너비 1미터 정도의 흙구덩이에 나무로 덧널을 짜서 넣고 그
안에 한 사람 또는 부부를 같이 묻는 것으로 많은 청동기와 철기가 부장품으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지배층의 차지였을 것이다. 이것이 후에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발전한
것이라 믿어진다.
독무덤은 두 개나 세 개의 항아리를 맞붙여서 널로 사용한 것이었다. 여기에 쓰인 항아리의
크기가 60 센티미터 정도의 것이 많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어린 아이의 시체를 묻기 위한 게
대부분이었다고 여겨지지만, 항아리는 짐승이나 나무 뿌리 따위에 의한 널의 파괴를 막을 수
잇고 또 어름을 눕혀서 넣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 때로는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지역에 따라서는
정상적인 죽음의 성인을 위해서도 쓰여지게 되었던 것 같다.
한편 최근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경남 의창 다호리의 널무덤에서 함께 나온 철로 만든
농기구와 청동으로 만든 칼 그리고 붓 등은 이미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하고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이 시기의 높은 문화수준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석총과 토총
고구려의 고분에는 석총과 토총의 두 종류가 있다. 석총은 초기의 간단한 돌무지(적석총)가
발전된 것으로, 땅 위에 냇가의 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중심부를 편평하게 만든 뒤 판석으로
돌방(석실)을 만들어 널을 안에 넣고는 다시 그 위에 단을 만들어 피라미드 모양으로 돌을 쌓아
올린 형식의 분묘로서 태왕릉과 장군총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토총은 돌로 널방을 만든 위에 흙을 덮어서 산봉우리와 같은 모습의 봉분을 만든
것으로, 이 같은 겉모양으로 해서 봉토분이라 불리기도 하며 쌍영총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에
속한다. 이 고구려 토총의 널방에 있는 벽과 모줄임천장 등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주목받고
있는데, 이 모줄임천장은 돌로 된 널방(현실)의 귀퉁이 위에 한두 단의 받침돌을 밑에서는
삼각형으로 보이도록 내밀어 쌓기를 하여 귀를 죽여 천장을 좁혀 올라간 다음 맨 위에 판석을 한
장 덮은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이다.
백제의 고분도 크게 보아서는 석총과 토총으로 나눌 수 있다. 다만 백제는 수도를 한성(오늘의
성루)에서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옮겨 갔으므로 이에 따라 주된 무덤 양식도 지역에 따라
변화되었다. 초기의 것은 석총으로 고구려와 같이 피라미드 모양의 기단이 있는 것이며, 실물이
현재 서울 석촌동에 남아 있다. 이는 백제 초기의 기록에 국왕의 분묘를 물가에서 큰 돌을
주워다가 덧널을 만들어 묻었다고 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백제의 토총(봉토분)은 내부 구조에 따라 돌방무덤(석실분), 널무덤(토광목곽묘),
벽돌무덤(전축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오늘날의 서울 지방에는 초기의 석총과 함께 한글의
'ㄱ'자처럼 생긴 돌방무덤이 얕은 구릉의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가락동에 남아 있는 게
대표적이다. 이 무덤은 구조상으로 뿐만 아니라 부부를 같이 묻었다는 점에서도 고구려 계통이다.
이외에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널무덤이 독무덤을 동반하고 있음을 빼놓을 수가 없다.
또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돌무지무덤은 없어지고, 'ㄱ'자형 및 장방형의 돌방무덤이
유행하며, 새로이 벽돌무덤이 만들어졌다. 이 무덤은 벽돌(전)을 터널형으로 쌓아 널을 옆으로
넣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외부는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으므로 횡혈식 토총이라고
분류되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남제, 양 등과 빈번한 교류 관계를 맺음에 따라 그곳의 양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현재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송산리
6호분에서는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은 벽화가 그려져 있어, 중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백제의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후 사비시대에는 웅진에서
유행했던 돌방무덤이 여전히 이어져 만들어졌다. 이 때의 것으로는 벽화까지 그려져 있던
능산리의 것이 제일 유명하다.
적석목곽묘의 등장
신라에서는 널무덤(토광목곽묘)과 함께 돌널무덤(석관묘)이 기본묘제였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네 벽을 돌로 쌓은 돌널무덤은 고인돌 이래의 전통으로서, 처음에는 시체를 위에서 내려 넣은
수혈식이었다가 크기가 커지면서 벽이 높아져 붕괴의 우려가 있으므로 후에는 천장에 판석을
덮어 널을 수평으로 넣을 수 있도록 한 횡구식으로 발전되었다.
이 돌널무덤과 널무덤이 합쳐져 생겼을 신라 초기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은, 이 시대의
특징적 고분으로서 지하에 광을 파고 상자형의 나무로 만든 널을 내려 넣고 냇가의 돌을 둥글게
쌓고 다시 흙을 덮어 산봉우리처럼 만든 것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오늘날의 경주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귀족들의 무덤이었다. 이를 발굴해 들어가 보면 땅을 수직으로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돌을 쌓았다고 하여 수혈식 적석총이라고도 한다. 이 무덤은 나무널 주위와 그 위에 돌을 촘촘히
쌓았기 때문에 후대에 행해진 도굴에도 잘 견디어 냈으며 한 번 만들어지면 나중에 부부
사이라도 같이 묻을 수가 없는 한 사람의 묘로서, 풍부한 부장품이 넣어져 있음이 특색이다.
금관, 금귀고리, 금가락지, 금팔지 등 순금의 제품을 비롯한 화려한 것을 같이 많이 묻어
주었는데, 금관은 신라 문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금관총, 천마총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기 위해 처음에는 시체가 묻힌 널 옆에 따로 작은 널을 만들다가
얼마 안 가서는 시체 옆에 같이 묻어 주게 되었다. 부부를 같이 묻으려면 먼저 만든 것 바로
옆에 또 하나의 봉분을 만들어 마치 표주박 같은 모습의 쌍분(또는 표형분)형식을 취해야 했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묻을 때에는 여러 개의 목곽을 배치하여 하나의 봉분으로 하였는데, 때로는
순장을 행하여 같이 묻기도 했으며, 어린 아이의 시체를 옹관을 사용하여 곁에 묻은 예도 있다.
횡혈식 석실분의 유행
이후 법흥왕 무렵부터 점차 널을 수평으로 넣을 수 있도록 돌방(석실)을 만든 횡혈식 석실분이
시작되었고, 통일 후에는 이것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 석실분은 대개 남쪽에 입구가 있고
평지에서 무덤 속에 이르는 널길(연도)이 앞 벽의 한쪽에 몰리거나 중앙에 있으며,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사각형의 석실 즉 널방(현실)이 있는 형태이다. 널방의 벽은 바닥으로부터 사람의 키에
가까울 정도까지 수직을 이루나, 그 위로는 점점 좁아지고 천장을 덮개돌로 덮었다. 벽면이나
천장에는 모두 석회를 발랐으며, 그 위에 색채를 칠하기도 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석실에
쉽게 같이 묻을 수가 있으므로 부부 사이는 합장을 하여, 오늘날 발굴해 보면 바닥에는 두 개의
널받침(관대)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분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붕괴나 동물들의 침해를 막아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에
돌을 다듬어 두른 것이다. 이를 둘레돌(호석)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쥐(자), 소(축), 범(인) 등의
12종류의 동물이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의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 12지신상의 호석이 있는
가장 대표적인 분묘는 성덕왕릉과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으로, 이 왕릉의 주변에는 문신, 무신
그리고 사자를 돌에 조각하여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같이 12지신, 사자 그리고 문신과 무신의
모습을 이들 분묘 곁에 돌로 새겨 놓은 것은, 이 분묘의 주인인 국왕이 이들로부터 호위를 받아
영혼이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는 의미였을 것이며, 이는 곧 살아 있을 때에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왕으로서의 막강한 권위 즉 당시 국왕들의 전제왕권의 행사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시체를 불에 태운 후 남은 뼈를 묻는 화장이 7세기 중엽 어간에
시작되고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문무왕이 자신의 화장을 유언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이후
효성왕 등 여러 국왕이 연이어 화장을 유언하고 있으므로 8세기에는 더욱 유행한 것 같다.
문무왕의 경우 유언대로 화장을 한 경주 동쪽 해변의 바위(오늘의 대왕암)에 이른바 수중릉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외에는 화장을 한 유골을 특별히 만들어진 뼈단지 즉 골호를 넣어 땅에
묻었다. 골호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유골을 밀폐할 수 있는 뚜껑이 반드시 있고, 또 그릇과 뚜껑에
구멍 뚫린 고리꼭지를 달아 끈으로 묶을 수 있도록 한 게 전형적이었다. 그리고 국왕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화장을 흔히 하였음을, 많은 골호가 경주 지방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알 수가
있겠다. 이같이 당시에 화장이 널리 행해진 것은 승려들의 다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
불교의 성행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또한 발해의 고분도 대개 남쪽에 입구를 가진 횡혈식 석실분으로, 규모가 큰 것이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이 큰 석실분은 현실과 연도를 갖추고 있으며 천장은 고구려식의 모줄임천장이고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다. 벽은 잘 다듬은 돌로 쌓고 때로는 그 위에 석회를 발랐으며 그 석회
바른 벽에다가 벽화를 그린 것도 있다. 근자에 그 묘에 묻힌 사람의 일생을 돌에 새겨 넣은
묘지의 발견으로 그 무덤의 주인공이 각각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임을 입증할 수 있게
된 분묘들이, 각각 발해의 첫 왕경이었던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고분군과 화룡의
용두산고분군에서 발굴되어 모두 규모가 큰 횡혈식 석실분의 구조로 되어 있음이 조사되었다.
이로써 큰 석실분이 당시 국왕이나 공주 등의 상류 귀족들의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규모가 작은 석실분은 현실이 작고 연도가 짧으며 심지어 연도가 없기도 하다. 현실을
쌓은 돌도 다듬지 않은 것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석회를 바르지도 않고 천장도 크기가 작을수록
몇 개의 판석을 덮은 게 보통이다. 이는 하급 귀족들의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밖에 석곽분도
일부 있는데, 이것은 하급관리들의 무덤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그리고 발해의 석실분은 크기의
차이에 관계없이 고구려의 석실분과 그 짜임새가 같으므로 발해의 무덤이 고구려의 무덤을
계승하였음이 입증된다. 이는 발해인의 대부분이 고구려인의 후손인 데서 생긴 결과였고, 큰
석실분의 천장이 고구려와 동일한 모줄임천장인 것은 곧 발해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이었기에
그러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와 조선의 왕릉
고려가 새로이 개창되고 난 후에도 묘제는 쉽사리 바뀌지 않고 여전히 횡혈식 석실분, 석관묘
그리고 토광묘 등이 사용되었다. 왕릉의 경우도 신라와 같이 내부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하고
외부는 흙으로 봉분을 만들어 덮은 형태이며, 봉토의 아래쪽도 호석을 두르고 12 지신상을
조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무덤 정면에는 석상이, 그 좌우에는 망주석이 마주보도록 되어 있으며, 그 앞에 한 단
낮아진 제 2단에는 장명등, 제3단에는 문신석과 무신석을 각 한 쌍씩 배치하고, 그 앞 광장에는
건물의 구조가 한자의 '정'자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정자각이 건립된 게 고려의
특색이었다. 이 같은 왕릉의 형태는 오늘날 조선시대의 왕릉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고려시대 왕릉의 구조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고려 왕릉이
조선 왕릉의 모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왕릉의 내부는 연도가 없는
석실분으로 바닥에는 벽돌을 깔고 중앙에는 널받침(관대)을 만들었으며 벽은 돌로 하여 그
표면에 회칠을 하고, 천장에는 별자리를 그린 성신도를 네 벽에는 4신도와 12지신상을 각각
그렸다.
또한 고려시대의 석실분 중에는 봉토 주위를 편평하게 다듬은 돌을 써서 정사각의 방형으로
돌린 방형분이 있는데, 이 형식은 석탑의 밑받침(기단)에서 착안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 같은
특수형의 고분이 남쪽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또 부장품으로 때로는 고려청자가 나왔음으로 보아
지방에 거주하던 귀족들의 것이라 짐작된다. 이외에도 석관묘, 토광묘가 있는데, 귀족 등이
화장을 했을 경우에는 석관묘를 썼으며, 일반 국민들은 여느 때에도 그러하듯이 토광묘에 묻히는
게 일반적이었다.
회격묘와 회 바른 목관묘
조선시대 초기의 왕릉은 능의 남쪽 전면에 그 능의 주인의 일생에 관해 적은 묘지를 묻는
것이라든가 하는 점에서는 고려시대의 것과 차이가 거의 없다. 단지 현실의 입구 바로 옆에
조그만 석곽을 만들어 현실에 다 들어가지 못한 부장품을 넣어 두게끔 한 경우도 있음이 다를
뿐이다.
그러던 것이 세조의 유언에 따라 그의 광릉(1467년 조성:오늘날 경기도 포천군 소재)부터는
구덩이를 파고 아래에 석회, 황토, 고운 모래로써 다지고 널을 내린 다음 네 벽과 위도 석회 등을
다져서 쌓는 이른바 회격 방식의 묘로 변하였고 호석도 없어졌다. 이 회격묘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각각 독립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단릉 형식, 서로 가까이에 있는 쌍릉 형식, 그리고 같은 능역이면서 언덕을 달리하는
소위 동원이강 형식 등이 서로 병행되었으나, 세종의 영릉(오늘날 경기도 여주군 소재)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이 채택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의 봉분 안에 부부 각자의 현실을 만드는 이른바
일봉분 쌍현실의 합장 형식으로 이후의 왕릉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는
일반에서도 갑자기 유행하였다. 한편 초기의 세력가 중에는 석곽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토광을 파고 판석으로 된 석곽을 만든 뒤 그 속에 목곽을 넣은 형태였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무덤으로는 왕릉의 회격묘를 축소하고 간략화한 회를 바른 목곽묘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 역시 흙구덩이에 묻는다는 점에서 토광묘이며 이후 지금까지도 봉분을 어떻게
조성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도
산간벽지나 섬지방 일부에서는 초분이라 하여 시체를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 몇 년간 두었다가
뼈만 남게 되면 후에 이를 수습하여 묻는 풍습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한 가문의 여러 세대가 같은 지역에 묘를 쓰는 이른바 족분이 성리학 전파 영향 특히
선조의 제사를 강조하는 "주자가례"의 보급으로 이미 고려 말부터 행해졌고 이후 조선사회에서도
친족공동묘가 일반적이었으나, 일제시대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고 또 화장터(화장장)가 설치되어
이후 영향을 끼쳤다. 해방 후 기독교가 급격히 성행하면서 외국인 선교사의 묘를 본떠 봉분이
종전의 높은 원형에서 낮은 장방형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생겨 오늘에 이른다. 한편 불교의
영향과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화장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납골당이란
이름의 유골 보관소에 공동으로 보관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의복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선사 시대에 입었던 의복은 실물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게 없다. 특히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의복과 관련된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 더더구나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밝혀 주는 인류학의 연구성과를 통해서 볼 때 나무의 잎과
껍질 그리고 동물의 가죽이나 털로 몸을 가리고 추위로부터 보호했으리라 짐작되므로, 이
시기에도 원시적이긴 하나 이와 비슷한 의복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것은 이렇다 하더라도 신석기시대 유물 중에는 의복에 관련된 것이 여러 개 있어
그나마 이를 통해 당시의 의복에 관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당시의 뼈바늘(골침)과
가락바퀴(방추차) 등이 바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뼈바늘을 써서 짐승의 가죽을
꿰매어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뒤에는 돌을 원형으로 깎아서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는 불에 구워 만든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짐승의 털이나 삼베(마) 등의 재료로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기도 하였다. 뼈바늘은 꿰매는 재봉용, 가락바퀴는 천을 짜는 방직용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도구를 이용해서 옷을 만들어 입고는, 동물의 어금니, 조개껍질, 구슬로 만든
꾸미개(장신구)를 달고 다니기도 하였다.
바지와 저고리의 등장
청동기 문화가 수용된 후 우리 나라에는 최초의 국가인 성읍국가가 곳곳에 형성되어 사회가
크게 발전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옷을 짓는 방법도 발전하여 의복도
변화되기에 이른다. 실물이 전해지진 않지만, 이런 변화는 당시의 유물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청동기 유물 중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농사짓는 모습이 주조된 방패 모양의 이른바
농경문의기에는 두 사람이 보이는데, 성인 남성은 상투를 틀고 미혼 남성은 머리를 풀어 헤친
소위 피발 모습으로 바지(고)와 저고리(유)를 입고 있음이 어렴풋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때에 이미 바지와 저고리를 지어 입은 것은, 바늘의 분화로 가능하였을 성싶다. 종래의
골침이 가늘고 짧은 세형침, 굵고 긴 대형침으로 분화되었는데, 세형침은 가락바퀴를 이용해 짠
천을 가는 실로 꿰매는 바늘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대형침은 굵은 실을 꿰어서 동물의 가죽이나
여러 겹의 천을 꿰매는 바늘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이에 따라 상의는 저고리, 하의는 바지로
만들어 입을 수가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후 기원전 4세기 무렵 철기문화가 수용되면서 사회가 또 한 차례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성읍국가들이 연합해서 하나의 커다란 연맹체를 이루어 연맹왕국이 형성되는데, 이 같은 사회
발전에 짝하여 의복 역시 한 단계 발전을 이루게 된다. 재료면에서는 닥나무 실로 짠 면포를
위시해서,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쳐서 명주실을 만들어 이로써 짠 비단(견), 그리고 여러 가지
실을 섞어 짠 겸포 등을 생산하여 의복에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재료로 만든 저고리는
앞쪽을 터서 고름이나 단추 없이 여미도록 되어 있는 전개합임식(카프탄식)으로 자락이 길게
허리 아래로 드리운 것이었으며, 바지는 가랑이의 통이 좁고 몸에 붙도록 된 착수지체형이었다.
이외에 겉에 두루마기(포)를 걸치거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물의 흰 가죽이나 검은 가죽으로
두루마기와 같이 만든 구의를 곁들여 입기도 하였다. 그 밖에 당시의 저고리가 잠그지 않고 단지
여미도록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꾸미개로는 그 위에 둘렀을 동물 모양의 허리띠 장식(동물형
대구)이 활용되었다.
치마와 두루마기의 착용
삼국시대의 의복은 당시의 기록에 보면 서로 같았다고 하므로 공통점이 많았을 것인데, 실물은
전혀 발굴되지 않으나 고구려의 고분 벽화 등에 보이는 사람들의 의복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당시 의복의 기본 양식은 창동기시대와 같아서 역시 남녀 모두 상의로는 저고리, 하의로는
바지를 입는 소위 유고제였다가 남성은 다만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 그대로였지만 여자는
치마(상: 또는 군)를 입는 유상제(혹은 유군제)로 옮아갔다. 그리고 의복의 양식이 무엇이었건
거의 예외없이 저고리의 깃, 소매 등에 다른 천이나 동물의 털로 띠처럼 선을 돌리고 저고리의
양쪽을 터서 그 자락을 같이 여미는 형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성은 저고리와 바지, 여성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는 전형적인 우리 나라의 의복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남성의 경우 신분, 연령의 차별 없이 처음에는 소매가 좁고 길이가 긴 저고리(장유)와 가랑이의
통이 좁은 바지(세고)를 입는 이른바 장유세고제의 의복을 착용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의 경우
특히 말을 탈 때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이후에는 점차 귀족층에서만 소매가 길고
자락이 긴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는 장유광고제로 변천하였고, 그외의 계층에서는 여전히
장유세고제를 답습하였다. 다만 남성의 경우에 공통적으로 저고리를 여밀 때 왼쪽 자락이 오른쪽
자락을 밑으로 하여 덮도록 하는 좌임식이 많았다.
이 같은 일반형과는 달리, 고구려 고분벽화 중 통구 삼실총의 힘이 센 것을 과시하는 듯한
장사의 그림에서는, 저고리는 자락이 길면서도 소매가 좁고 짧아서 두 팔을 드러내고 바지는
훗날의 잠방이와 같이 길이가 짧아 무릎을 드러낸 모습이 찾아진다. 이는 특수형이었다고
보이는데, 이 벽화에 보이는 장사의 활동복이거나, 혹은 덕흥리 고분벽화의 소가 끄는 수레 그림
중 소를 끌고 있는 남자의 경우같이 힘든 일을 할 때 입는 노동복이 아니었을까 짐작되고 있다.
여성의 경우도 처음에는 장유세고의 의복을 입다가 점차 저고리와 자락이 길고 폭이 넓은
치마(상: 혹은 군)를 입게 되었다. 치마는 평상시에 입는 상과 예복으로 입었던 군으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또 속에 입는 속치마(내상)와 겉에 입는 겉치마(표상)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외에 아래와 위가 연결된 내리닫이 옷(통의)도 입은 예가 찾아지기도 하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으로 예불할 때 입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또한 이 시대에는 두루마기를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계층이 입기 시작하였다. 삼국 모두
처음에는 국왕의 복장으로 채택되었다가 점차 귀족들도 입게 되고,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보편화되어 귀족들 외에도 평민 남녀들까지 입게 되었다. 물론 신분에 따른 차이는 있었다.
국왕이나 귀족은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대수형포)를,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중드는 여인이
그러하였듯이 신분이 낮은 사람은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착수형포)를 입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분이 높고 낮음에 따라 형태의 차이가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예복이어서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삼국시대 신라의 직물로는 천마총(155호분) 출토 유물 중에서 발견된
평직의 마직물 등이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관리들의 공복 제정
한편 삼국시대의 의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리들의 공복이다. 신라에서는 법흥왕 때
공복을 색깔로 구분하여서 관등에 따라 자색(자주색), 비색(비취색), 청색, 황색(황토색) 네 가지로
달리하여 입도록 하였고, 백제의 고이왕 때에는 자, 비, 청의 세 가지로 달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의복의 색깔을 구분하여 관등에 따라 다르게 입도록 하였음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확립되고 왕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료체계가 성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신라의 경우 이채롭게도 관리가 관청에서 조회할 때는 공복을 입고, 퇴근 후에는 편한
복장을 입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이럴 때 편한 복장이라 함은 전통적인 바지와 저고리
차림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전통적인 바지, 저고리를 신분에 어울리게 입고
지내며, 관청엣 조회할 때에만 공복을 입었다고 하겠다. 물론 이 같은 의복 생활의 모습은 비단
신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도 거의 같았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꾸미개로는 관모, 허리띠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실제의 예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띠(대)를
둘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관모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원시적인 형태의 것을 썼으리라 추측되지만, 삼국시대에는 절풍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절풍은 변형이라 하여 삼각형의 고깔 모양을 한 모자로, 고구려에서는 여기에 새의
깃털을 꽂아 조우관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고, 신라에서는 자작나무(백화) 껍질로 만들었다 하여
백화수피변형모라 하는 게 사용되었다. 백제의 경우는 양 나라에 간 사신의 모습을 그곳 사람이
그려 놓은 직공도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관모의 윗 부분은 희미해져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고위 관직자들은 관에 은화을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런 장식이리라
여겨지는데, 검은 테두리에서 두 개의 끈이 옆에 달려 턱 밑에서 매어져 있음이 이채롭다. 그리고
국왕 및 귀족들이 금으로 된 금관을 사용하였음이 이 시대 의복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허리띠는 신분에 따라 재질과 모양에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삼베나 비단 종류로 만들어
별도의 장식이 필요치 않은 포백대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귀족은 폭이 넓은 광폭대를 서민은
폭이 좁은 세폭대를 사용하였고, 천민이었을 시종과 같은 사람은 이들과는 전혀 달리 실을
꼬아서 만든 사승대를 하였다. 백제에서는 이 허리띠의 색깔을 관등에 따라 자, 조(검정색), 적,
청, 황, 백의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들의 공복에 쓰도록 하게끔 세분화되어 있었고,
신라에서는 금속장식을 이에 더하여 사용하였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과대는, 굽은 옥(곡옥),
금으로 만든 물고기, 칼 같은 물건들을 달아 맬 수 있는 요패가 17개나 달려 있을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다. 그만큼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와 견주어 과대의 장식을 한층 발달시켰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의복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의복은 대체로 저고리, 바지 등 고유 양식의 것 그대로였다. 이
때의 의복에 대해서는 흥덕왕 9년(834)에 신분에 따라 사용이 금지된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져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심지어 남녀의 속옷(내의)의 재질에 대해서까지 금기 사항이 정해져
있었는데, 남성의 경우 진골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이 가해져 있지 않으나 평민의 경우 명주로
짠 견포만을 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가 그만큼 철저하게 왕족
중심의 귀족사회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또한 의복이 오늘날의 우리가 보더라도 사치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발달하여 화려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종전의 고유한 의복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 때에는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를 맺으면서
그 영향으로 새로운 의복도 등장하게 된다. 관리들이 입는 둥근 깃 형태의 두루마기(포)인 단령,
남녀가 모두 입었던 소매가 짧은 반비 등이 그런 것에 속한다. 그리고 남성들은 진골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머리를 감싸는 관모인 복두를 쓰게 되었으며, 여성들은 목 뒤에서 가슴 앞까지
길게 드리우는 일종의 목도리인 표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발해의 경우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의복을 입었는지 잘 알기 어렵지만, 다만 관리들은
공복을 입었는데 자주색(자), 비취색(비), 옅은 비취색(천비), 녹색(녹) 등 네 가지 색깔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함이 주목된다.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이었으므로, 일상생활면에서는
고구려의 것을 거의 그대로 입었고, 공복 역시 고구려의 것을 토대로 당나라의 것을 받아들여서
나름대로 정하였던 것 같다.
고려시대의 의복
고려시대가 되어도 당시의 기록에 처음에는 신라의 의복을 그대로 입었다고 함으로 미루어,
다른 것보다도 평상복의 경우에는 고유의 의복인 저고리, 바지, 치마 그리고 두루마기 등을
종전과 다름없이 입었다고 여겨진다. 단지 바지와 두루마기만 형태와 옷감의 재질면에서 몇 가지
변화가 생긴다. 바지로는 앞선 시기에는 없던 고려시대의 고유한 형태로 어깨끈이 달린 비단
바지인 백주고, 훗날의 여자 고쟁이(단속곳)와 같은 저상 등이 있었으며, 두루마기의 경우 모시가
옷감으로 일반화됨에 따라 흰 모시로 짠 백저포를 남녀 모두 신분의 높고 낮음에 차이가 없이
입게 되었다.
이외에 여러 종류의 직물이 의복의 제작에 활용되었음이 문헌 기록에 보이는데, 문양을 놓아
짠 문라와 문사가 많이 전해진다. 특히 은과 동사를 넣어 짠 화려한 직금이나 페르시아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이는 위금은 당시 귀족들의 호사스런 의복의 모습을 잘 전해준다고 하겠다.
관리들의 공복의 경우는 광종 11년(960)에 새로운 공복제도를 정함으로써 신라의 것과는
다르게 바뀌게 된다. 관리들을 네 부류로 나누어 색깔이 각기 자주색(자), 붉은색(단), 비취색(비),
녹색(녹)으로 된 공복을 입혔던 것이다. 이는 광종 자신이 국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굳게 다져
왕권을 강화하였기에 행해질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국왕의 의복이 세분되었는데, 조정에서 입는 조복이 황색으로 된
두루마기였다고 함이 특이하다. 황색은 중국에서는 자신들의 유일한 황제인 천자만이 취할 수
있는 색깔이어서 일반에게는 금지될 정도였는데, 고려의 국왕이 이 색깔을 띤 의복을 입었다고
함은 곧 자주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같은 황색의 조복을 입게 된 것은, 광종 때에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광덕, 준풍이라는 연호를 채택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몽고의 침입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던 고려가, 무인정권의
집권자들이 농민들의 지지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면서 민란이 빈발하고 이에 결국 몰락하여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수도를 되돌리게 되면서 몽고에 대한 항쟁을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원의 간섭을 받게 되고 그 영향으로 몽고 사람들의 풍속을 쫓는 이른바 몽고풍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의복도 변화가 생겨났다. 몽고가 원이라 칭하게 된 후 그 황실의 사위(부마)로서
처음으로 고려의 국왕이 된 충렬왕은 이미 세자였을 당시에 원에 다녀오면서, 머리 둘레는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을 남겨 땋아 늘인 이른바 개체변발을 하고 원의 의복을 입었으며,
즉위하고는 곧 몽고풍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가 이를 따른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여전히 전통적인 의복을 입었다.
다만 원나라 사람들과 친하여 개인적 이득을 꾀하려는 친원파 세력들이 앞다투어 몽고풍을
따를 뿐이었다. 당시에 원으로부터 직접 들어온 의복으로는, 무늬가 있는 비단 옷감으로 만든
두루마기인 탑자포와, 한 가지 색으로 위, 아래가 연결되어 있어 일명 일색복이라고도 하는 질손
등이 있었다. 이 밖에 꾸미개로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변발과 함께 들어온 댕기,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물의 털을 이용하여 만든 조바위 등이 그러하다고 여겨진다.
원이 한족의 명의 흥기로 인하여 북방으로 쫓겨가는 원, 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1351∼1374)은 자신이 원 황실의 부마였음에도 불구하고 즉위하자마자 원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자주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그 맨 처음이 몽고풍을 폐지하고 의복 등을
예전의 것으로 입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몽고풍이 사라지고 고유의 의복이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관리들로 하여금 관등의 차이 없이 왕을 배알할 때에는 반드시
갓(입자)을 쓰게 하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공민왕 이후 외교정책이 명나라로 기울더니 조선이 들어서고 나서는 더욱 확고히 친명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의복에도 명나라의 영향이 미치게 되는데, 국왕과 관리 등의 의복에서
그러하였다. 조정에서 집무할 때 입는 상복으로, 국왕은 앞뒤에 금으로 둥그렇게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을 만들어 붙인 곤룡포를 입고 관의 꼭대기에 턱이 져서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며 뒤에
날개 같은 뿔이 두 개 달려 있도록 검은 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든 익선관을 썼다. 그리고
관리들은 매우 엷고 고와서 가벼운 명주실로 만든 모자인 사모를 쓰고, 앞뒤에 상징적인 무늬를
수놓은 흉배가 달린, 깃이 둥그런 단령포를 입게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외의 일반 서민들은
고집스럽다고 할 정도로 전통 의복인 바지와 저고리 등을 입었다.
목면의 등장과 전통양식의 성립
특히 고려 말에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하여 무명이 중요한 의복의 재료로 등장하고 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보급됨으로써 의복에 있어 커다란 발전이 있게 된다. 종전에는
모시(저포), 명주 등이 있었긴 하지만 이것은 귀족들이 사용하는 고급이었고, 일반의 의복
재료로는 삼베가 주가 되어 왔다. 이런 가운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 면포의 등장이야말로
의복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한복의
전통양식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의 평상복은 신분에 따라 구별이 있었다. 양반은 평소에, 소매가 짧으면서 양
겨드랑이 아래의 길(몸체와 소매가 갈라지는 지점인 진동 밑)에 덧대어 재봉하는 삼각형의
무(당)가 없이 아래가 갈라진 소창의와 두루마기(주의)를 입다가 외출할 때에는 넓은 소매가 달린
대창의(중치막이라고도 한다)나 도포를 걸쳤다. 도포는 대창의와 같이 넓은 소매에 4폭인데, 말을
탈 때 편하게 하고 또 몸체 뒷편의 길이 무와 연결되는 허리부터 중심이 터져 있으므로 하의가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자락의 천 즉 전삼이 달려 있는 게 특징이었다. 한편 서민은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있다가 외출이나 행사가 있을 때 소창의나 두루마기를 덧입었다. 그리고 비 올
때에는 짚이나 풀로 저고리 길이보다 길게 하여 상의에 걸치는 도롱이를 입었다.
이 때의 저고리는 종전과는 달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튀어나온 듯 한 목판깃이 나타나고 품이
넓어졌으며 고름이 달리게 된다. 그리고 바지는 통이 넓은 바지와 통이 좁은 바지로 나뉘는데,
넓은 바지를 입을 때는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매고 발목을 대님으로 묶도록 되었으며, 통이
좁은 바지는 주로 일을 할 때에 입었다. 또한 저고리와 바지를 만드는 천이 계절에 따라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갖추어 입는 방식도 달라졌다. 여름에는 삼베, 모시로 지어 저고리 밑에
등거리, 적삼, 잠방이 같은 것을 받쳐 입었고, 봄, 가을에는 모시를 겹으로 다듬어 지어 입었으며
겨울에는 솜을 얇게 누빈 누비옷을 입었다.
그리고 두루마기 역시 초기에는 길이가 종아리에 오게 지어졌으며 소매가 좁고 품이 넓은
데다가 직선형의 목판깃을 달았던 것이, 동그란 모양의 동그래깃이 되고 무와 옷고름이 첨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착하였다. 이 두루마기는 옷 전체가 휘돌다 다 막힌 것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아무리 더운 여름철이라 하더라도 맨저고리, 바지차림으로는 다닐 수 없고 이를 꼭
입고 외출하는 게 예의였다. 두루마기 역시 계절에 따라 옷감과 만드는 방법이 달랐다. 여름에는
모시홑단으로, 봄과 가을에는 목면으로, 겨울에는 누비거나 솜을 두어 만든 것을 입었던 것이다.
한편 여성들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적삼, 치마, 단속곳, 바지, 속속곳, 다리속곳이었다. 초기의
저고리는 등 길이가 허리 밑까지 왔고, 소매 길이는 손등을 덮을 정도였으나 섶, 끝동이 넓었다.
중, 후기에는 점차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으며, 깃 너비도 매우 좁아지고 섶, 끝동,
동정도 좁아져 저고리 전체가 작아졌다. 그러다가 말기가 되면 저고리의 길이가 아주 짧아져
겨드랑이 살을 가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가리개용 허리띠가 등장했고 또 가슴을 누르기 위해
베로 만든 졸잇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른바 저고리 삼작이라 하여 속적삼, 속저고리,
저고리를 겹쳐 입는 게 예의였는데, 속적삼은 모시적삼이라는 여름 겉옷을 탄생시키는 재미있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한 여성들의 치마는 속옷을 입고 일고여덟 겹으로 겹쳐 입어 둔부를 부풀려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된다. 속옷은 치마 밑에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단속곳을 차례로 입었으며, 많은 속옷을
덮기 위해 치마의 폭이 넓어졌고, 이러한 폭이 넓은 치마는 조선 후기에 특히 유행하였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거친 이후 사회가 변함에 따라 의복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전란 중에 국왕과 관리들이 모두 융복 즉 군복으로 입었던 철릭(첩니: 혹은 천익으로 표기되나
관용적으로 '철릭'이라 함)이 그대로 평상복으로 자리잡은 게 그 대표적 예였다. 철릭은 상하가
붙어 있는 형태로, 치마 부분에 잔주름이나 넓은 주름이 잡혀 있는 것으로 신분의 구별 없이
남녀 모두가 입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병자호란 이후의 관복과 관련하여 하나 특이한 것은,
중국에는 청나라가 들어서서 청나라의 관복으로 개편되었으나 우리 나라는 이와 상관없이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그대로 입었다는 점이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이 한때 청을 쳐올라가려는 북벌을 계획한 일이 있었고, 또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사림들이 오랑캐인 청과 달리 우리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우월하다고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데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개화기 이후의 한복과 양복의 혼용
서양 문물이 수용되면서 의복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함을 적극 주장했던 개화파들의 주장이 정부에 의한
의복제도의 개혁에도 반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복부터 바뀌게 된다. 모든 관리들이 넓은
소매(광수)가 아닌 좁은 소매(착수)가 달린 검은 색 단령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복으로는 두루마기의 일종으로 소매가 달린 주의를 입도록 되었다. 이어서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때 반포된 문관복장식에서도 역시 의제개혁을 하여 왕궁에 출입할 때의 통상복으로
흑색의 주의에다가, 소매가 없고 양 옆이 터져 활동하기에 편리한 답호를 입도록 하였다. 또한
이듬해(1895) 명성왕후 민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당한 이른바 을미사변 직후 추진된 급진적
개혁에서는 머리털을 자르라고 하는 단발령을 내리고 공사 예복으로 주의만 입도록 함으로써,
상투머리와 땋은 머리를 잘라 망건과 댕기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관복, 사복 가릴 것 없이
모두 주의만 착용하게끔 되었다.
양복의 착용도 이 때에 군복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재래의 군복이 육군복장규칙에 의하여
구미식 군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어서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그 광무 4년(1900)에는
문관복장규칙이 반포되어 비로소 문관의 예복까지 양복을 입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수천 년간
내려오던 한복문화가 한복, 양복의 혼합문화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개화기에도 일반 남성들은 종전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한복을 입었다. 하지만 종전과 달리
새로이 마고자와 조끼가 등장하였다. 마고자(마괘라고도 쓴다)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추위를 덜기 위한 것이어서 후에는 여성용 마고자까지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조끼는 애초에
우리의 한복에는 없었던 것인데, 양복의 조끼에서 본떠 온 것이다.
한편 개화기 여성의 의복도 외국 선교사들의 양장으로부터 자극을 받게 된다. 원래 한복은 위,
아래를 각기 다른 색으로 만들어 입은 것이었으나, 서양 선교사들의 양장 원피스를 본떠 위,
아래를 같은 색으로 입는 방법이 이즈음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두루마기가 한말
이후 여성의 외출이 잦아지면서 여성복으로 애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성단체와 언론기관에서 한복이 비활동적임을 들어, 종전에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데에 사용되었던 장옷(쓰개치마)의 폐지와 함께 한복을 개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복개량운동을 적극 추진함에 따라 1905년경부터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과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긴 저고리와 함께 통치마를 입을 것이 권장되었다. 1910년대에는 치마의 허리끈이
종전에 가슴을 조이던 것에서 어깨허리로 개량됨으로써 발목이 드러나는 짧은 통치마를
본격적으로 착용하였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짧은 저고리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짧은
길이의 양장이 유행하면서 통치마의 길이도 무릎선에 이를 정도로 짧아졌다.
개량한복의 전파와 함께 1920년대에는 단발머리가, 1930년대에는 퍼머머리가 유행하였는데,
양장 차림의 여성이 주로 하였지만 전통적인 한복 차림에도 흔히 하였다. 또 짚신, 미투리 등
각종 재래식 신발은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복에 착용되었지만 1920년대에 고무신이
나오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구두가 양장에는 물론 개량한복에도 착용되었다. 구두에는
양말을 신는 게 격식이 맞는 것이지만 버선을 신고 구두를 신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코트가
나오고부터는 양장에는 물론 한복에도 두루마기 대신 코트를 착용하곤 하였다.
현재는 남성의 경우 양복을 입는 게 대체로 일반화되기에 이르고, 여성의 경우도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교육의 기회도 확대되면서 자연히 양장을 착용하는 인구가 늘어갔으며, 196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의 경우 일상복으로 양장을 많이 입고 한복은 점차 예복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오늘날에는 여러 형태의 의복을 심지어 남녀의 성 구별이 없이 입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의복
문화가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명절
추수감사제와 기풍제
만일 명절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은 퍽 쓸쓸하여질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제철을 따라
돌아오는 명절을 즐거운 기분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명절은 그저 즐거운
공휴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에 비하면 옛날의 명절은 지금보다 훨씬 그때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즐거운 공휴일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마련하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게는 사냥에서 많은 짐승을 잡아오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이 사냥에 따르는 종교적 의식이 행해지고, 그것을 행하는
명절이 지켜졌을 것이다. 사냥이 가장 잘 되는 시기는 겨울이며, 따라서 음력 12월에 잔치를
베풀어 사냥이 잘 되도록 하느님께 기도 드리지 않았나 한다. 그 흔적은 부여 나라에서 영고라는
명절이 음력 12월에 있었다는 데에서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것들과 직접 관련되는 명절은 농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음력
10월의 추수감사제였다.
음력10월이면 농사의 추수가 모두 끝나서 경제적인 풍요함을 즐길 수 있는 때였다. 그러므로
이를 감사하는 축제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10월제 등은
모두 그러한 것이었다. 이 때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귀천의 차별 없이 밤낮으로
술과 음식과 노래와 춤으로 즐거운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노래와 춤은 그저 즐거워서 부르고
추는 것이기보다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종교적인 의식의 절차이기도 하였다. 삼한에서는 수십
명이 한데 어울려서 손발을 맞추어 가며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여럿이
함께 어울려서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강강수월래 같은 노래와 춤은 이런 오랜 옛날로부터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 10월의 추수감사제는 일 년 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명절이었던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다. 지금도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개천절이 10월인 것도 이러한 옛 명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10월뿐 아니라, 5월에도 이와 비슷한 명절이 있었다. 5월에는 씨를 뿌리고 난 뒤이므로, 일
년의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게 해 달라고 비는 기풍제였다. 추수감사제 못지 않게 즐겁고
중요한 명절이었던 것이다.
이 5월 기풍제를 신라에는 수리라고 불렀는데, 뒤에는 중국의 말을 빌어 단오라고 하여 5월
5일을 지키게 되었다. 이 단오가 중국의 굴원이라는 지사가 죽은 날을 기념한다는 전설은 뒤에
덧붙은 이야기이고, 그 기원은 우리 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날에는 여러 가지
놀이를 하여 흥겹게 지냈던 것인데, 고려 때에는 격구, 편쌈, 그네 등을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씨름, 그네, 탈춤 등을 즐겼다.
농업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또 별을 보고 그해에 풍년이 들것인지 어떤지를 점치는 습관이
있었다. 이 풍속은 이미 동예 때부터 있었으나 언제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
일년의 시초인 정월이었을 것이고, 정월 중에서도 둥근 달이 뜨는 보름이 아니었나 한다.
지금까지도 정월 보름날에 달이 떠오르는 모양을 보고, 그 해의 풍흉과 화복을 미리 판단하는
습관이 있는데,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습관일 것이다.
이렇게 농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농업이 잘 되기를 빌고 또 추수한 뒤에 이를 감사드리는 등,
경제적인 생활과 관계를 가진 종교적 의식이 행해지는 때가 곧 명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농업사회였으므로 이러한 명절들도 지금까지 대체로 지켜져 내려온
셈이다. 그러는 동안에 농업뿐 아니라 일년의 운수를 점치고 액을 막는 여러 행사들이 여기에
덧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0월의 추수감사제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뒤에 음력 8월 15일의 추석으로
바뀌고 말았다.
추석을 명절로 지키게 된 시초는 신라 때였다. 이 때에는 추석을 가위라 하였는데, 그 이름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신라 때 추석날에 남자들은 활쏘기를 하였고, 여자들은 길쌈 내기를
하였다. 길쌈 내기는 서울 안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7월 15일부터 한달 동안 길쌈을 하게
하고, 8월 15일에 그 성적을 보아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지는 편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하고 춤과 노래로써 즐겁게 해주기도 하였는데, 특히 회소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한다.
하여간 이 추석은 신라에서는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었으며, 새 곡식을 거둬들여 신께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제였던 것이다. 이 날에는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 먹었는데, 유명한
음악가인 백결 선생은 집이 가난하여 떡을 만들 수 없어 악기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스스로
위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10월에 행하는 추수감사제가 어째서 신라 때에 8월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으나, 신라가 북쪽 나라와 싸워 크게 이긴 것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 추석은 현재에도 우리 나라의 가장 큰 명절로 지켜지고 있다.
계절적인 명절
농업과 관계되는 것 이외의 명절을 보면 묵은해가 지고 새해가 오는 때의 명절이 또한
중요시되었다. 우선 동지는 일 년 중 가장 밤이 길고 낮이 짧은 때이며, 동지가 지나면 다시 낮이
길어져서 따뜻한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때인 것이다. 그래서 이 날 천문을 맡아보는
관상감에서는 새 달력을 만들어 바치곤 하였다. 민간에서는 이 날 팥죽을 쑤어 먹는 습관이
오래 전부터 행해져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 동짓날에 죽은 사람이 역귀가 되었는데, 그 역귀가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동짓날 팥죽을 먹고 역귀를 쫓는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밤이나 겨울이나 어두운
것이나 추운 것은 모두 악한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였던 만큼, 이 역귀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동짓날에 그를 쫓는 무슨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을 법하다. 서양의 크리스마스는 예수가 탄생한
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 동지와 관계가 있으며, 동지가 지난 사흘 뒤의 날을 크게 즐겁게
지내는 크리스마스는 우리 나라의 옛 풍속과도 서로 통하는 것이다.
한 해의 맨 마지막 날인 제석도 그냥 보낼 수 없는 날이었다. 이 섣달 그믐날에는 궁궐
안에서는 구나라 하여 무당을 시켜 악귀를 내쫓는 굿을 하였다. 묵은해의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한 악귀를 일년의 마지막 날에 내쫓고 새해를 깨끗이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이날,
마루 방이나 부엌 뒷간까지 불을 환히 켜서 낮같이 하고 졸지 않고 새우며 새해를 맞이하는
습관이 있었다. 귀신은 밝은 불빛을 싫어하므로 이것 역시 악귀를 내쫓는 뜻에서였다.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 된다고 하여 어린애들까지 졸음을 참고 밤을 새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새면 새해 설날이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차례를 지냈다. 그리고 어린애들은 때때옷을
입고, 한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여 새해의 행복을 빌었다. 또 새해 아침에는
흰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금년에는 과거에 합격을 했다든지
돈을 모았다든지 하는 말을 주고받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하였다. 과거형의 동사를 써서 일녀의
행복을 서로 빌었던 것이다. 설날에서 보름까지는 명절 기분에 들떠 있는 것이 보통이며, 여러
가지 놀이들을 하게 되는 데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을 가장 흔히 하였다.
정월 보름은 일년 중에서 처음으로 달이 둥근 날이라, 연초의 명절이 절정에 달하는
기분이었다. 옛날부터 이 날에 일년 농사 의 풍흉을 점쳤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년의 운수들을 점치거나 행운을 빌거나 하였다. 그런 일들 중에서, 조선시대의 답교가
가장 유명하였다. 답교란 것은 다리를 밟는 것으로서, 그리하면 일년내 액을 막을 수 있다고도
하고,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도 하여 양반이나 평민 할 것 없이 이것을 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종로에서 보신각의 저녁 종소리를 듣고 청계천의 여러 다리로 가서 이를 왕래하여
마지않았는데, 대개 열두 번을 다니며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하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 날 밤
호두 은행 잣 땅콩 등을 먹으면 일년 동안 태평무사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정월 보름 명절의 유래에 대하여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때에 정월 15일에
소지왕이란 임금이 어디를 갔었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다가, 쥐가 사람 말을 하며 이 까마귀
가는 곳을 따라가라고 하였다. 왕이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 보게 하였더니, 도중에 두
돼지가 싸우는 것을 보고 이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까마귀는 간 곳이 없어졌다. 이에 길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길 옆 못속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관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일 것이요 한 사람이란 임금일 것이니 떼어 보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래서 떼어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거문고 갑을 쏘라"고 씌여 있었다. 이에 왕이 궁중에
들어가서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승려가 공주와 함께 그 속에 들어가서 음모를 하고 있었다. 이에
정월 15일에는 찬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의 남산 동쪽에 가면 아직도
서출지라고 하여 늙은이가 나와 글을 바쳤다는 못이 남아 있다. 이 전설도 뒤에 생겨난 것이어서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왕의 생명을 구할 정도로 중요한 점이 이 정월 보름에
행해졌다는 전설로서는 퍽 재미있다고 하겠다.
불교적인 명절
이상에서 말한 농업이나 해가 바뀌는 것에 따르는 명절 이외에 불교가 들어온 뒤에 널리 퍼진
명절들도 있었다. 우선 4월 8일은 석가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는 명절이라서, 서양의 크리스마스에
비길 즐거운 명절이었다. 이 날에는 도시나 산골짜기의 절들에서는 수없이 많은 등불을 매달아
휘황찬란하게 하였고, 거리에도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등대를 세우고 여러 모양의 장식등을
주렁주렁 달아 아름다운 광경을 이루었다. 이 파일은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명절이기도 하여
가정에서는 어린이의 수효나 연령에 맞추어 등불을 달았고 또 갖가지 장난감을 선물로 사
주었으므로 거리에는 장난감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곤 하였던 것이다.
또 연등은 처음 정월 보름에 행하다가 뒤에 2월 보름으로 바뀌었는데, 문자 그대로 등불을
휘황찬란하게 켜 놓고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역대 임금들에게 예배한 후 각종 음악과 놀이와
술도 즐기는 것이었다. 이 연등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두 명절로 지켰다. 또 팔관은
11월15일에 행하는데 격구를 하는 구정에 자리를 베풀고, 임금이 나와 식을 거행한 뒤 역시 각종
음악과 놀이를 하였다. 이 두 명절은 그 명칭이 불교에서 따 온 것이고 또 그 영향이 있긴
하지만, 우리 나라의 고유한 풍속도 이에 섞여 있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 빌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여러 신을 즐겁게 하여 나라의 평안과 번영을 비는 의식을 행하는 명절이었던
것이다.
현대의 명절들
말하자면 명절은 이와 같이 농사가 잘 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인간
생활의 행복을 하느님에게 비는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날로서 지켜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의식에는 지금 보면 미신적인 것들이 섞여 있어서 점점 현대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또 현대생활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고쳐져서 행해지는 것도 생겨나게 되었다.
예컨대, 양력 설날에 세배를 다닌다든지, 또 추석이 공휴일로 지켜지고 있는 따위가 그것이다.
혹은 3.1절이나 8.15 같은 민족적인 기념일이 새로 명절로 생겨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와 같이
기독교와 관계되는 명절이 지켜지기도 하게 되었다. 여하간 현대의 생활에 알맞는 명절들을
즐겁게 보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의 하나라고 하겠다.
사원
불교의 사원이란, 승려들이 불상과 불탑을 모시고 살면서 불도를 닦고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곳을 말한다. 때로는 가람, 사찰, 정사라 부르기도 하고 순 우리말로는 절이라고 한다.
사원의 어원은 인도의 옛날 말인 범어의 Samgharama로, 이를 발음에 가깝도록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승가람마)인데, 이를 줄여서 가람(혹은 승가람)이라 하므로 사원을 가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이라 할 때의 '찰'은 원래 범어로 사원의 영역을 표시하는 깃발 혹은
깃대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찰이란 명칭은 사원의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해 절 마당에 배의
돛대와 같이 높은 장대를 세우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불교의 수용과 사원의 건립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의 일이었다. 삼국 중에서도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방의 고구려에 가장 먼저 불교가 들어왔다. 소수림왕 2년(372) 중국의 전진에서
온 승려 순도에 의해 불상과 불경이 전해졌으며, 소수림왕 4년(374)에는 승려 아도가 오자, 그
다음해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 각각 아도와 순도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 세워진
초문사와 이불란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지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가
바다를 건너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이 때 국왕은 그를 맞아 궁성 안에 모시고 예를 갖추어
받들며 다음해에는 한산에 불사를 이룩하고 10인을 승려가 되게 하였다. 이로써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백제에서의 최초의 사원이, 불교가 수용되자마자 한산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신라의 경우, 눌지마립간(417__458)때에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가 일선군(오늘의 경북
선산군) 모례의 집에 잠복하여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려고 힘썼지만 박해 속에 끝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양의 사신인 승려 원표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졌던 것이다. 그 후
법흥왕은 불교의 수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그 결과 법흥왕 14년
이차돈이 순교하게 되었다. 천경림을 베고 그 터에 흥륜사를 창건하려는 데에 귀족들이 반대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차돈은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귀족들과의
타협이 이루어져 흥륜사 창건 사업이 재개됨으로써 결국 신라에서도 법흥왕 22년에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불교 공인 과정에 비추어 보면 시라 최초의 사원은 지방은 모례의
집, 왕도에서는 흥륜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세 나라 모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선봉적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음이 특징이다.
신라의 경우 그것이 더욱 뚜렷한데,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공인을 강행한 것은 국왕과 그
측근세력이었다. 이같이 왕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히 지지 발전하게 된 것은 왕권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적합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귀족세력과의
타협 없이는 불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 역시
신라의 경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사상체계로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고 하겠다.
사원의 3종류:석굴사원, 평지사원, 산지사원
사원은 어느 곳에 자리잡았느냐에 따라 석굴사원, 평지사원, 산지사원 셋으로 나눠진다.
석굴사원은 암석으로 된 석굴을 이용하여 법당을 만든 것이고, 평지사원은 나라의 왕도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평지에 건립된 것이며, 산지사원은 개인의 조용한 수행을 위해 지방의 깊은
산과 계곡에 자리잡은 것이다.
석굴사원의 양식은 대체로 3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자연석굴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불상을
그 석굴의 벽면에 새긴 것으로, 경주신선사석굴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자연의 암벽을 굴착하여
인공을 가한 후 그 속에 따로이 불상을 마련하고 그 앞에 법당을 둔 것으로, 군위삼존석굴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셋째는 인공으로 만든 석굴 안에 불상을 봉안하고 그 앞에
법당을 둔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경주 석굴암이 이를 대표한다.
평지사원은 왕도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 영역에 걸쳐 형성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므로 매우
대중적인 불교를 형성하였다. 고구려 것으로는 평양 동명왕릉 앞의 정릉사지, 평양 처암리의
금강사지, 백제 것으로는 공주 반죽 동의 대통사지, 부여의 정림사지, 신라 것으로는 경주
흥륜사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경주 불국사 등이 대표적이다.
산지 사원은 삼국시대에도 이미 신라의 부석사 등이 조성되었지만, 신라 말 고려초에 선종이
유행함에 따라 개인의 참선을 위해 자연히 복잡한 도시보다는 조용한 산간을 찾게 되면서 이른바
선종 9산으로 성립되어 더욱 산지가람이 많아졌다. 선종 9산, 소재 사원, 위치, 개창자 등을 표로
작성하여 제시하여 보이면 다음과 같다.
"신라말 고려초의 선종 9산"
9산--소재사원--위치--개창자
가지산--보림사--전남장흥군가지산--도의
실상산--실상사--전북남원군지리산--홍척
동리산--태안사--전남곡성군--혜철
봉림산--봉림사--경남창원군--현욱
사자산--흥녕사--강원영월군--도윤
사굴산--굴산사--강원강릉군오대산--범일
성주산--성주사--충남보령군--무염
희양산--봉암사--경북문경군--도현
수미산--광조사--황해해주군수양산--이엄
선종은 복잡한 교리를 떠나 개인의 참선을 통하여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감을
강조하였다. 그래야만 각자의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여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므로 자연히 조용한 산간을 찾게 되면서 선종 9산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선종의 개인주의적 경향이,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에 반항하여 일어난
호족들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이들이 제공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종과 호족과는 밀착되었다. 가령 사굴산파는 명주(오늘의 강릉) 호족인 김순식의
후원을 받았으며, 수미산파는 송악호족인 왕건과 관계가 깊었던 것이다. 자연히 선종 9산은 모두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의 산지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 9산은 오늘날과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한 때에도 찾아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은 산지에
위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원의 구조와 건물 배치
사원의 2대 중심은 불탑과 불상이다. 이를 줄여서 흔히 탑상이라 하는데,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 사찰과 탑의 건립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면서 '탑상편'이라 했음이 이를 말해 준다
하겠다. 불탑은 부처나 이름난 승려의 시체를 화장(불가에서는 이를 다비라 한다)하고 남은 유골
곧 사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이를 모신 집을
불전 혹은 금당이라 한다. 금당이라고 함은 인도에서 부처를 금빛 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금인이라 한 데에서 파생되어 그를 형상화하여 모신 집이라 하여 그렇게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원의 중심은 건축물 자체로 보자면 금당(불전)과 불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줄여서 흔히 당탑가람이라고 한다.
물론 가람에는 이러한 당탑 이외에도 여러 가지 건물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절은 흔히
칠당가람이라고 불린다. 가람이 기본적으로 금당 외에도 설법 등을 행하는 강당, 승려들이
정진하는 승당, 부엌과 창고인 주고(또는 후원이라고도 한다), 욕실, 화장실인 동사, 사원의
입구인 산문 등으로 구성된다고 하여 그러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원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금당과 불탑이다.
따라서 가람 배치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도 자연히 금당과 탑에 기준을 두게 된다. 첫째, 탑이
금당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식 가람 배치이다. 백제의 것이었던 부여의 금강사지나
정림사지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두 탑이 금당의 동쪽과 서쪽으로
대칭하여 세워지면
쌍탑식 가람 배치라 하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가람 배치로 서,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유명한 불국사가 대표적이다. 셋째, 탑이 하나에 금당이 셋일 경우에는 일탑산금당식 가람배치라
하며 정릉사지 등 고구려의 절터는 거의 다 이런 배치를 하고 있고, 경주 황룡사의 경우도
여기에
속한다.
불탑의 변천
불탑은 탑파, 탑, 부도, 사리탑이라고도 하며, 범어의 스투파와 남방불교의 불경
용어인 파리어의
투파에서 유래했다.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스투파는 공을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형태로 흙과
돌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 후 차츰 형태상의 변화를 보여 기원 후 4세기 초 무렵 중국에서는
여러층의 누각형식의 탑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이러한 형태의 탑에서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자연히 누각 형식의 것이고, 따라서 나무로 된
목탑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을 통하여 초기의 사원에 세워진 탑들은 모두 목조였으며, 그 기본 평면이 다만
팔각이거나 또는 사각의 방형이라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목탑으로 팔각형인 것은
고구려의 평양 청암리 금강사지에서, 방형의 것은 백제의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사원은 모두 탑이 1기씩이었으므로 이런 유형의 가람을 1탑식 가람이라 한다.
목탑은 그 규모와 높이를 마음먹은 대로 하여 건물처럼 세련되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공이 많이 들고 불에 약하여 쉽게 소멸되는 단점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견고하며 일단 완성된 뒤에는 별반 손질이 필요치 않은 석재, 특히 우리나라 곳곳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질 좋은 흰색의 화강암에 주목한 듯하다. 그리하여 목탑을 모범으로 하여 석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석탑의 건립은 삼국 중에서 가장 목조건축술이 뛰어났던 백제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시기는 대략 600년경으로 최초의 것은 미륵사지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미륵사의 탑은 목조탑을
충실하게 본떠서, 나무 대신 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탑을 동방에서 으뜸가는 석탑이라고 극찬하였을 정도이다. 이 무렵에
신라에서도 석재를 이용하여 탑이 만들어졌는데, 오늘날 실물이 전해져 주목되는 것은
선덕여왕3년(634)에 낙성된 분황사 3층석탑이다. 이 탑은 안산암을 벽돌과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자라서 쌓아 올린 석탑으로 석탑이긴 하나 그 양식은 벽돌탑을 따랐으므로 흔히 모전석탑이라
불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왕은 재위시에 당나라 군대와 왜병을 물리치기 위해서 각각
사천왕사와 감은사를 지으려 했는데, 이는 당시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호국신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문무왕 19년(679)에 완성된 사천왕사에는 2기의 목탑이 세워져
있어, 종래의 1탑식 가람에서 2탑식 가람으로 변화한 시기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감은사의 탑은 3층석탑으로 2기가 마주 보고 서 있는데 현재 실물이 거의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신라 통일 후부터 유행한 쌍탑 가람의 으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라 석탑의 모범이 되는
이른바 전형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감은사탑에서 나타난 2층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된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국사 3층석탑에서 극치를 이룬다. 석가탑은 기단과
탑신부의 비율이 잘 조화를 이루어 신라 석탑 중 가장 세련된 탑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형과는 다른 형태를 띠어 특수형이라 할 수 있는 석탑으로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전남 구례군 화엄사의 3층사자석탑이 있다. 다보탑은 2층 기단 위에 8각형의 사리탑을 올려 놓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어 몇 층인지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3층사자석탑은 기단부의 네
귀퉁이에 4마리의 돌사자를 만들어 놓은 것이 퍽 안정되고 균형 있게 만들어 졌다. 대체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일반형이건 특수형이건간에 안정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전제왕권하에서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는 귀족적 취향에 부응하는 현상이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신라 하대의 석탑은 기단 폭이 좁아지고 탑의 크기가 작아지며, 기단이나 탑신에 불상,
12지신상, 사천왕상 등을 새긴 장식이 강조되어 섬세하긴 하나 약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석탑
양식을 취하여 귀족들이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세운 원탑이 유행함이 주목된다.
문성왕을 위한 경주 창림사의 3층석탑, 민애왕을 위한 대구 동화사의 3층석탑 등이 이런 예에
속한다. 당시에 전개된 빈번한 왕위쟁탈전 속에서 귀족들이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서 이 같은
원탑을 세웠던 것이다.
신라 하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선종의 유행으로 산지가람이 늘어나면서 선승들의 사리탑인
부도가 유행한다는 점이다. 선종은 복잡한 교리를 가르침이 없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소위
이심전심이라 하여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통하여 깨우치는 것이었으므로, 스승과 제자의
계승관계가 중요시되었고, 이로 인해서 선종 9산의 각 파에서는 스승이 죽은 뒤에 자신들의
산문을 상징하는 그의 유골을 존중하여 부도를 많이 세운 것 같다. 형식은 8각형의, 연꽃이
새겨진 받침 위에 기와 지붕 위 건물을 올린 소위 8각원당형이 기본으로 쌍봉사 철감선사탑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부도와 함께 그 옆에는 선사의 행적을 적은 탑비가 조성되기 마련이었는데 충주
월광사의 원랑선사탑비와 같이 뛰어난 게 많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탑비를 바치고 있는
돌거북이(귀부)에 새겨져 있는 소용돌이치는 듯한 물결무늬는 격동적으로 되어 있고, 탑비의
맨 상단에
올려져 있는 조각인 비수는 외형상 통일적인 형태보다는 끝이 삐죽삐죽 바깥으로 내뻗은
다극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 마치 당시에 여기저기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움직이고 있던
호족들의 활동상을 연상케 하며 이 시대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고려 초기의 석탑은 신라의 것을 계승한 것이지만 오히려 퇴화한 느낌이고 한층 지역적인
특색을 나타내며 왕도가 개경이었으므로 석탑의 중심지가 중부 이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형적인
고려탑은 이 지역에서 찾아진다. 현종 때 세운 개풍의 현화사 7층탑이 대표적으로 신라의 예리한
직선미보다는 둥근 맛이 나는 아담한 것으로 고려 귀족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편 이
시기에는 송의 영향을 받은 6각 또는 8각 다층탑이 출현하기도 하였는데 평창 월정사의 8각
9층탑이 그러하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충목왕 때에 만들어진 개풍의 경천사탑이 있다. 이는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평면이 한문의 '아'자 형으로 된 3단의 기단 위에 3층의 '아'자형 탑신과
7층의 방형탑신이 얽힌 특이한 형태로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뒷날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원각사탑의 모범이 되었다. 석부도는 화려하던 전기의 것으로부터 석종형식의 소박한
것으로 변하였는데 여주 신륵사의 보제사리 석종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 석종의 형식은 조선
시대의 부도의 선구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초기에는 앞선 시대의 전통을 이은 석탑으로 원각사탑과 같은 것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나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원 내의 대규모 공사가 어려워져 법당과 불상만
조성될 뿐 석탑은 더 이상 건립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앞 시대의 전통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 같은 동향은 후기에도 여전하였는데 다만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이 조선 후기에
재건된 국내유일의 목탑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금당의 명칭 및 불상의 변천
사원에 따라 주된 예배의 대상이 되는 부처 즉 주존불이 다르고 그를 모신 금당의 명칭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불을 모시면 대웅전, 비로자나불이 주존불이면 대적광전,
비로전이라 하고, 아미타불인 경우 극락전, 무량수전이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부처를
모셨느냐에 따라서 금당의 명칭이 달라질 만큼 사원에서는 불상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불상은 좁은 의미로는 부처의 존상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는 아직 성불을
못했지만 성불의 뜻을 품고 수행을 거듭하고 있는 보살상이나 부처의 제자로 공양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나한상 등 여러 형태의 보살상까지 모두 포함한다. 다만 보살상의 경우는
단독으로 예배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불상의 양 옆에서 시중드는 협시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불상과 보살상은 입은 옷과 장식 등에서도 차이가 있다. 불상은 법의를 걸치고
장식이 없는 데에 비해 보살상은 상체는 옷을 걸치지 않고 어깨에 숄과 같은 천을 둘렀을 뿐이며
목걸이나 팔찌 등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 불상이 곧 만들어졌다. 서울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네모난 받침 위에 두 다리를 포개고 앉은 가부좌의 자세로 두
손을 참선할 때처럼 모은 선정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후 삼국시대 즉 6세기 초의 초기불상들도 대체로 이같은 양식의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불상의 중앙에 석가, 양 옆에 보살상을 새긴 삼존형식이 많아진다는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신라의 경우는 삼존상이 대형화되었음이 주목되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경주의 황룡사에 대단한 규모의 장육금동삼존불상이 주조되었다고 함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 불상을 받쳤던 커다란 돌로 된 대좌가 남아 있음을 통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같은 삼존형식이면서도 부조로 조각한 석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서산군
운산면의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대표적인데, 조각 수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티없이 웃는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이 시대에는 특히 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반가사유상이란 의자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다리 위에 얹어놓은 반가좌형태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일컫는데 미륵보살로 여겨진다.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서면 신체의 비례가 균형 있게 잡힌 서 있는 모습의 관음상이 많이
만들어지며, 전반적으로 불상이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삼존불상에서와 같이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지며 전면뿐 아니라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정성을 들인
입체조각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 같은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법의의 표현이 부드러워서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 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 형의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지는 모습을 띠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들은 대부분 결가부좌하고, 손모양은 촉지인을 하고 있는 게 널리
유행하였는데, 석굴암의 본존상이 대표적인 것이다. 촉지인이란 항마촉지인이 정식 명칭으로,
오른손은 땅을 짚어 지신에게 부처가 마귀의 군대를 물리쳤음을 증명하는 자세로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 이 시대의 보살상은 앞선 시대보다 좀더 화려한
장식을 하고 몸의 자세도 정면 자세에서 벗어나 허리를 약간 비틀면서 자연스럽게 서 있어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동적인 자세로 바뀐다.
신라 하대가 되면 금동상이 줄어들고 반면에 석조상이나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선종의
유행으로 비로자나불이 주존불로 많이 조성되었는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일체라는 뜻을
나타내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지권인을 하였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시대에는 앞선 신라 하대에 유행하던 철불이 여전히 만들어지는 한편
금동상도 만들어지고,
또한 거대한 마애 또는 원조의 석불상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각 부분의 균형은 불완전하지만 이
시대 초기의 거작으로 들 만한 것으로는, 논산의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이
있다. 또한 ㅎ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으로는 부석사여래좌상이 시라 이래의 오랜 수법을 이어받고 있는 국내 최대의
아미타여래소조상으로서 거대한 광배(부처의 신성함을 표시하기 위해 불상을 만들 때 부처의
머리와 몸 주변에 불꽃 모양을 새겨 장식한 것)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이른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조선의 불교는
쇠퇴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불상의 양식도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조 때에는 부교
진흥의 기운이 일시적으로나마 있어서 이에 영향을 받아 경기 고양의 수종사 금동보살
반가상이나 강원 평창의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과 같은 우수작이 나타났다. 임진왜란 이후
근자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불상은 대부분 머리부분이 크고 신체의 묘사도 형식적이며 조각
기법도 뒤떨어져 투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
신석기시대의 교육기관
우리 나라 학교의 시초는 언제였을까? 아마 모두들 고구려의 태학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러나 비록 학교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젊은 소년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기관은 그
이전부터도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런 석을 보통 미성년집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에서는 20세가 되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씨족원으로서 선거권도 가지고,
무기를 갖고 전쟁에 나갈 자격도 가지고, 또 결혼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가 되기
전에는 미성년으로 다루어졌으며, 뒤에 씨족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일정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교육의 내용은 씨족사회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라든가, 무기를
다루는 방법이라든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세가 되면 과연 그가 씨족원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시험하였다.
이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씨족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기관의 전통이 삼국시대에 내려와서 고구려의 경당이나 신라의 화랑도가 되었다.
이 둘은 모두 20세 이전의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 소년들을 모아서 교육시켰음이
공통된 점이다. 또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고, 전투에
용감하게 임하는 등의 도의교육을 하는 것이 같았다. 그리고 활 쏘고 말 타는 무술을 단련하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경당은 촌락마다 있고 화랑도는 서울에 있었으며, 이에 따라 경당에서는
일반 국민을 화랑도에서는 주로 귀족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차이가 있었다.
삼국시대의 학교
유교를 가르치는 학교가 우리 나라에 처음 설치된 것은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의
일이었다. 이때에 서울에 태학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아마 백제에서도 이즈음에는 이와 비슷한
학교가 있었음 직하다. 백제의 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유교를 가르친 사실이 많은 것으로써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신라는 이 두 나라보다 뒤져서 유교를 가르치는 하교가 설립되었다. 즉 통일 뒤인 신문왕
2년(682)에 처음으로 국학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때에 그 이름을 태학이라고 고쳤다. 이
태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의 그림을 중국에서 얻어다가 걸어 놓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세 과로 구분해서 가르쳤는데, '논어'와 '효경'은 세 과에서 모두 꼭 가르치는
필수과목이었다. '논어'는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고, '효경'은
유교의 근본 도덕인 효도를 가르치는 책이어서 모두 극히 존중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
적당한 유교의 경전들을 과에 따라 나누어 가르치게 하였다. 입학 자격은 귀족들에 한하였고,
연령은 15세에서 30세까지였다. 수학 연한은 9년을 넘더라도 계속 재학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 중에는 이 태학에 만족하지 않고, 멀리 당나라의 국학에 유학하여 배우는
자도 있었다. 최치원 같은 사람은 그 대표적이 예라고 할 것이다. 그는 12살에 당에 가서 공부를
하여 거기서 과거에 급제를 하고 관리가 되었다가 뒤에 귀국하였던 것이다. 최치원뿐 아니라
국비나 사비로 당에 유학한 신라의 학생수는 수백 명에 달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학교
고려 때에 이르러서 학교의 규모는 더욱 정비되었다. 문치주의를 내세운 고려의 성종 같은
분이 특히 교육에 대단한 열성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서울에 국자감이라는 종합대학을 설치하고,
서울에 사는 귀족들뿐 아니라 지방의 세력 있는 가문의 자제들도 서울에 데려다 교육시켰다.
성종은 학문을 배워서 관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출세에 유리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국자감 안에는 여러 단과대학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다 유교의
경전을 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다만 입학하는 자격이 달라서 벼슬이 높고 낮은 데 따라 그
자제들이 입학하는 학교가 달랐다. 이때는 귀족사회여서 민주주의적인 생각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일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이 밖에 법률이나 산수 같은 것을 가르치는 기술 교육 기관도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 중요시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지방의 세력 있는 집안의 자제들도 서울에 올라와 국자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늘어갔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학자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관청에서 교육을 하였으나 뒤에는 독립된 학교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를 향학이라고 하였다.
이들 국립 교육 기관은 결국 나라의 정치를 담당할 관리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뒤에 최충과 같은 대학자들이 사립학교를 열어서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하게 되자,
젊은 학생들이 이리로 모여들게 되었다. 또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시험관이어서 최충의
구재학당 등 유명한 것이 열 둘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 12도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교
고려시대에도 과거시험이 있었지만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즉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벼슬을 할 수가 있었다. 음서라는 제도가 있어 아버지가 어느 정도만 높은 벼슬을 하면 아들은
자동적으로 벼슬은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가 되면 그러한 특권이 점점
줄어들고 반대로 과거시험의 중요성이 더 커졌던 것이다. 과거시험이 중요한 만큼 그 시험
준비를 위한 학교 교육도 더 중요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려서 7, 8세가 되면 서당에 가서 '천자문'에서부터 시작해서 한문을 주로
배웠다. 오늘날의 국민학교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5, 6세가 되면 서울에서는 사학에 가소
지방에서는 향교에 갔는데, 오늘날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를 마치면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서,
공자 이하 여러 성현을 모시는 문묘인 대성전을 위시해서 기숙사 강당 등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이 가장 정상적인 교육 과정이었으나 과거시험을 보는 자격이 학교 교육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하여튼 위의 교육 기관을 통해서 유교와 문학을 배운 사람들이 관리가 되어 나라의
정치를 담당하였다.
이외에 천문이라든가, 의학이라든가, 또 법률이니 수학이니 외국어니 하는 것들은 잡학이라고
하여 그리 중요시하지를 않았다. 우선 양반보다 지체가 낮은 중인의 자제들이 이를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이를 교육하는 학교가 따로 없고 그런 기술을 필요로 하는 관청에서 이를
담당하였다. 오늘날의 우리의 생각과는 퍽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에 사화니 당쟁이니 하여 사회가 어수선하게 되자 정치에 싫증이 난 훌륭한 학자들이
지방에 내려가서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자기 일생의 업으로 하는 학자들이 늘어갔다. 이들이
세운 사립학교를 서원이라고 하였는데, 이 서원은 전국에 수백이나 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이황이 세운 도산서원 같은 것을 들 수가 있다.
이 서원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는 방법보다는 인간과 우주의 근본을 파헤쳐 본다는
순수한 유교 철학을 주로 교육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깊은 유교 학문이 서원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국가에서도 이들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서 책도 주고 토지도 주고 하였다. 그
결과 사회적인 영향력이 커져서, 뒤에는 정치에도 간섭을 하고 국가의 경제도 좀먹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대원군이 정치 개혁을 할 때에 이 서원을 탄압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근대식 학교
19세기 말에 서양의 세력이 미쳐오게 되자, 우리 나라도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식의 보급은 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새로운 교육 기관을 필요로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육영공원과 연무공원을 세워서 미국인을
교사로 초빙해다가 하나는 학문을 가르치고 하나는 군사를 교육하게 하였다. 그리고
외국인들과의 접촉에 외국어가 필요하므로 각종 외국어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립학교들은 학문의 내용은 달라졌으나 교육의 목적은 관리의 양성에 있었다.
이 때 학생들은 갓 쓰고 담뱃대 물고 종을 거느리고 학교에 다니곤 하였다. 학교의 성적은
나빠도 자기 집의 세력을 믿고 좋은 관직을 얻으려는 일도 있어서 골치를 썩히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 성과가 그리 좋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민간에서 생겨난 사립학교들이 오히려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크게 번성하였다. 이러한
사립학교는 처음 배재, 이화, 경신 등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우리 나라의 뜻있는 분들이 '배우는 것이 힘이다'라는 신념에서 애국적인 구국운동의
하나로서 학교를 많이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학교는 서울에 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번지어서 전국에는 3000에 이르는 많은 학교가 섰다.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같은 것이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 단지 학문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토론회나
웅변대회 같은 것을 자주 열어서 민족정신의 앙양에 이바지하였다. 또 운동회를 열어 청년의
의기를 돋우기도 하였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라는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창가가
크게 유행한 것도 이 때였다. 비록 학교의 시설 등은 보잘것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일반 국민의 교육열이 크게 왕성하던 시대였다.
1910년에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뒤에 이러한 사립학교들을 거의 대부분
폐교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이 학교들이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국민학교 정도의 교육을 장려해서 일본말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여기서 그들의 심부름꾼을 길러내려고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청년들은 국내에서 채 배우지 못한 학문을 해외에 유학하여 배워 오는
수가 많았다. 그들은 혹은 일본으로 가고 혹은 미국으로 갔던 것이다. 이렇게 배워온 새로운
학문으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발전시킬 방도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엄마 안되는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3.1운동이나 광주 학생 운동 같은 커다란 민족 운동이 모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에 의하여 억제 당하였던 교육열은 1945년의 해방과 더불어 다시 크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교들이 새로 서서 교육은 크게 보급되었다. 물론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가로놓여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을 해결하고 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발전시키려는 국민의 노력이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책(문자, 인쇄)
한자의 사용과 인쇄술의 시작
사람은 말은 할 줄 안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동물과는 달랐지만,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어 쓰게
된 것은 몇 천년 전부터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철기문화와 함께 한자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곧 책을 만들게 되지는 않았다. 문자 말고도, 종이나 천이 필요하고 또 먹과 붓이
필요하였다. 나라에서 편찬사업을 펴게 되면서 여러가지 책이 만들어졌을 것이지만, 특히
역사책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초기에 '유기' 100권을 지은 바 있고 뒤에 이것을
줄여서 '신집'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또 백제에서는 '서기'를 펴내고 신라에서는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붓으로 쓴 것인지 목판에 새겨서 인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역사를 비롯한 전기가 많이 간행되었고, 유교와 불교의 경전 따위도 책으로
많이 만들어 내곤 하였다. 같은 책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사정 때문에 목판인쇄술이 발전하였다.
석가탑에서 발견된 이때의 '다라니경'은 목판인쇄물로서 현존하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인쇄술은 글자를 새겨놓은 판 위에 먹이나 잉크를 발라서 종이나 천에 박아 내어 많은 복제를
만드는 기술이다. 우리 나라의 인쇄술은 목판인쇄술에서 시작되었다. 목판을 사용하여 책을
만드는 방식은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쇄에 있어서 중요하였다. 그런데 목판인쇄물의
제본이 처음에는 대체로 두루마리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권자본이라 한다. '다라니경'도
그러하여서 12장의 책장을 서로 이어서 평상시에는 말아 두었다가 읽을 때에는 풀어서 펴볼 수
있게 하였다.
목판인쇄술의 발달과 팔만대장경
고려시대가 되면 각종 책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그래서 초기부터 도서관 시설을 두고 책을
두루 수집. 보관하였다. 수만 권의 진기한 책들이 보관되어 있어서 송나라에서조차 구하여 가는
정도였다. 특히 불경의 전집에 해당하는 '대장경'을 찍어내기에 이른 것은 목판인쇄에 의한 서적
간행의 높은 수준을 말한다. 대장경의 조판은 거란의 침입을 막으려는 염원에서 이루어졌는데
몽고군의 침입 때 경판이 불타 없어졌다. 그 뒤 '고려대장경'을 다시 조판하였다. 현재 해인사에
그 경판 팔만여 매가 남아 있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강화도에 피난 가 있는 동안에
만들어졌는데도, 이것은 내용이 정확하고 글씨체가 아름다우며 목판의 제작이 정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의천은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의 것은 물론이고 송, 요, 일본 등에서
구해 온 논, 소들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속장경'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다
고려의 인쇄술은 더욱 발달하여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내게 되었다. 목판은 동일한 인쇄물을 많이 찍어내는 데는 편리하였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책을 적은 부수씩 인쇄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들어야 하므로 목판인쇄로는 불편하였다. 여기에는
활판인쇄가 보다 효과적이었다. 소수의 귀족들이 보다 많은 종류의 책들을 원하고 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활판인쇄는 이러한 여건 속에서 개발된 것이다. 활자에는 목활자, 토활자
등도 있었지만 금속활자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고종 21년(1234)에 '상정고금예문' 50권을 28부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 어느 때부터인가 금속활자를 쓰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고려 말에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금속활자본이다.
책의 제본방식도 고려시대에 와서 읽기 편한 방향으로 개선되었다. 두루마리의 형태는 여전히
많았지만, 그것을 개선한 절첩본이 등장하였다. 절첩본은 책장을 이러 붙인 점에서는
두루마리에서의 경우와 같았지만, 책장을 일정한 크기로 접어서 마치 병풍처럼 만들고 앞면과
뒷면에 표지를 붙여서 접어가며 볼 수 있게 한 책이었다. 고려 말이 되면 절첩본을 좀 개선한
제본방식도 나오게 되었는데, 더 중요한 변화는 포배장본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먼저
제본할 책장에서 글자가 있는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하고 가운데를 바르게 접어 포개고 책장 끝
부분에 구멍을 뚫어서 끈으로 묶은 다음 한자의 표지로 책의 앞면과 등과 뒷면을 덮어 싸서 만든
책이다. 이후 제본하는 방법이 이렇게 발달하면서 책이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쉽게 연상하는
조선시대의 여러 책들의 모습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한글창제와 다양한 책의 간행
조선시대에 와서는 갖가지 종류의 책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책의 간행을 주도한 것은 국가였다.
정부로서는 건국을 정당화할 필요도 있었고, 또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면서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갖추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여러 관련 연구기관도 세워졌다. 집현전이나
홍문관이 그러한 예이다. 여기에 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들이 두어졌다. 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연구의 결과들은 속속 책으로 간행되었다. 그 책들은 주로 한자로 되어 있었지만, 한글로 찍어낸
것들도 있었다. 세종 때 한글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 때까지 우수한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많은 책들을 간행하여 왔지만, 모두가 한자로
쓰여진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자를 써도 뜻으로 읽히는 것이나
발음으로 읽히는 것을 가려서 우리말을 기록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였다. 이두나 향찰 또는
구결이 그러한 예이다. 이 가운데 특히 이두가 보편적이었는데, 그것은 뜻으로 읽히는 한자를
가지고 문법의 형태를 보충해서 글의 뜻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맞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우리의 문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일반 상민들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양반사회의 체제에 보다 잘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세종이 일부 유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들고자 한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그는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를 거듭하게 하여 세종 25년(1443)에
드디어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세종은 정음청을 설치하고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라든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따위를 한글로 간행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두고 많은
불교의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또한 '삼강행실도' 와 같은 유교 도덕을 강조하는
책이 한글로 지어져서 일반 상민들에게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농민에게 읽히기 위한
농업기술에 관한 책이라든가 비밀에 부치고 싶은 군사에 관한 책 따위도 한글로 지어
간행하였다.
한글이 만들어져 쓰이게 됨에 따라서 보다 넓은 분야에 걸친 더욱 체계적인 지식들을 훨씬
많은 계층에게까지 책을 통하여 전파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다시 조선의
인쇄술을 발전으로 이끌고 갔다. 많은 종류의 책을 간행하기 위하여 금속활자가 대량으로
주조되었다.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활자를 만들었다. 세종은 인쇄할 때 줄이 잘 맞고
보다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활자를 정교하게 다시 주조하였다.
조선 후기가 되어서도 역대 왕들이 활자를 계속 만들어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가령 현종
때에는 5만이 넘는 청동활자를 만들어 역대 실록을 인쇄하였고, 영, 정조 때에는 87만여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대량 인쇄하였다. 민간에서도 서원이나 개인이 금속활자를 만들어 족보 문집
등을 인쇄하는 일이 흔히 눈에 띄게 되었다.
조선시대가 되어서는 책을 제본하는 기술도 발전하였다. 포배장본에서는 한 장의 표지로 책의
앞과 뒤 그리고 등을 덮어 쌌지만 이제는 두 장의 표지를 가지고 앞과 뒤에 하나씩 대게 되었고,
또 구멍을 뚫어 끈으로 튼튼하게 꿰매어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제본방식을 선장이라고도 하고
철장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의 책들은 대부분 이렇게 제본된 책들이었다.
근대식 인쇄술의 도입
개화기에는 근대식 인쇄기술이 외국에서 들어왔다 1883년에 박문국을 두고 일본인을 채용하여
'한성순보'을 발간하게 되었다. 1885년에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하여 배제학당이 설립되고, 여기에
인쇄부를 두어 한글활자와 영문활자를 주조하여 '성경'을 간행하였다. 1896년 서재필이 국문과
영문으로 '독립신문'을 낼 때도 여기서 발간하였다. 그 뒤 한국인이 주관하는 인쇄소가 많이
생겨나 여러 책들을 발간하게 되었다. 특히 개화기에는 국민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각종 계몽서가
간행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이 때부터 오늘날과 같은 양장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통제로 말미암아 위축되었던 책의 출판은 해방과 더불어 봇물이 터지듯이
성하게 되었다. 특히 최근부터는 책의 출판도 컴퓨터의 힘을 입게 되었다. 그 결과 출판이 어느
때보다도 빨라지고 쉬워졌다. 한편으로는 인쇄된 책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씨디롬(CD-ROM)을 이용하여 엄청나게 많은 내용의
지식을 한 장의 컴퓨터 디스켓에 담아서 읽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로 우리
국민을 넓은 정보와 깊은 지식을 얻는 것이 더욱 쉬워졌다.
문학
신화에서 비롯된 주술의 노래
문학작품은 본래 실제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지어낸 것이고, 지어낸
이야기이므로 사실과 다르지만, 되도록이면 그럴듯해야 하므로 실제 일어난 일들이 소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품이 완전한 사실일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부가
허구일 수도 없는 것이다. 형식에 있어서는 글의 짜임새를 중시하는 산문과 윤율을 중시하는
시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요컨데 산문이건 시문이건 어느 형식으로건 인간들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문학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문학은 처음부터 그러한 작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글로 쓰여지기
시작하거나 작품에 사람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뒤의 일이었다. 처음 나온 것은
구전문학으로서의 신화였다. 신화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노래도 있었다.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여러 왕국에 제천의식이 있어 왔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라든가 삼한의
기풍제 등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제의에서 자리를 함께 한 것이 신화였다.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것이 시가와 춤이었다.
신화는 본래 신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시가에
자연이나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만 사람들과도 연관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랫동안
제사장을 통하여 또는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입으로 전해져 오던 신화는 그 안에 있는 시가와
함께 문자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글로써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시대가 되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문학에 있어서 두드러진 것은 시문이었다. 시문 중에서도 종교적인 성격을 띤
주술적인 노래가 세력이 가장 컸다. 예컨데, 가야에서 널리 불렸던 구지가가 있다. 구지가는
수로신화 속에 보이는데, 거북의 머리가 나타나듯이 신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주술적인 노래이다.
향가의 유행
이러한 주가는 신라에서 향가로 발전하였다. 향가는 주로 화랑이나 승려들이 지은 주원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원시적인 주가들이 서서히 불교적인 것으로 변하여 갔다. 향가는
통일신라시대가 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많은 작가가 나와 많은 작품들이 지어졌다. 진성여왕
때에는 '삼대목'이라는 향가를 모은 책이 나왔다. 향가는 처음 4구체로 되어 있었으나 뒤에는
10구체의 정형시로서 형태가 완성되었다. 내용에 있어서는 국가의 평안을 빌거나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거나 죽은자를 추모하여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정시의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한시를 잘 지은 고려 귀족들
향가는 고려 초에도 지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것은 한문학이었다. 문학
가운데에서도 시가 중시되었다. 문신들은 매달 시를 지어 임금에게 바치는 일이 상례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귀족들에게는 한시가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 좋은 시를 빠른 시간 안에 짓는
일이 중요하게 여겼다. 학생들을 시험할 때도 초에 금을 그어 놓고는 그 곳까지 타 내려가는
동안 운에 맞추어 누가 아름다운 시를 빨리 짓는지를 알아보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귀족들의
일상생활 안에는 늘 한시가 있게 마련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시문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산문도 발달하였다. 박인량의 '수이전'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이나 일반적인 경험 세계와는 다른 차원에서 마련된 이야기들이 지어졌다. 이 점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신화와도 통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화와는 달리 역사성이 현저하여진
이야기도 있으며, 그런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기쁨이나 재미를 주려는 목적에서 쓰여지기도
하였다. 앞의 이야기는 전설로 불리어질 수 있고 뒤의 이야기는 설화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전설이나 설화는 그만큼 신화가 지닌 신성함에서 멀어져 세속적인 것에 가까워져 갔다. 고려
후기가 되면서는 특히 설화문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예컨대 돈을 의인화한 임춘의 '공방전',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 등이 있었다. 몽고의 침략과 간섭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장편의
서사시로서 나타난 이규보의 '동명왕편'도 이 시대의 작품이었다.
다양해진 시문들
고려 말에서부터 시문이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사대부 사이에서 경기체가가
유행하였다. 그것은 한문체이면서도 전통을 살린 새로운 형식이었다. 그 뒤 조선 중기에는
이것 대신 가사가 발달하였다. 그런가 하면 민중들 사이에서는 '청산별곡'과 같은 장가가
유행하였다. 장가는 민요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가요들이었다. 여기에는 민중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발전한 시문은 시조였다. 시조는 문무
양반귀족의 필수적 교양이 되었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가지게 되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였다.
윤선도가 시조작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산중신곡' 가운데 있는 '오우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글소설의 등장
17, 8세기 이후가 되면서는 시문보다는 산문이 두드러졌다. 이미 조선 전기에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와 같은 설화문학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17, 8세기에는 무엇보다도 소설의 발전이 크게
눈에 띄었다. 한문으로 쓰여진 소설들이 많이 지어졌다. '양반전', '허생전'등 여러 소설을 지은
박지원은 대표적인 작가였다. 한문으로 쓰여진 단편소설들을 모은 책들도 나왔다. 그러나 소설
가운데에서도 한글로 쓰여진 것들이 이 무렵에 많이 간행되었다는 것이 가장 주목되는 일이다.
작가도 독자도 점차 양반으로부터 하급신분 출신으로 변하여 갔다. 그에 따라서 소설의 내용도
그 변화에 걸맞게 되었다.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양반 중심의 엄격한 유교 도덕에 대한
불만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연중에 흔히 표출되어 나타났다. 사회소설이 '홍길동전', 권선징악의
소설에 해당하는 '심청전', '흥부전', 군담소설인 '임경업전' 등이 널리 읽혔다. 그러나
가장 인기가
있던 것은 애정소설이었다. '옥루몽', '숙향전', '춘향전'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가운데 '춘향전'은
당시 최고의 소설이었다. 17.8세기에는 종래 양반 중심의 시조도 변하였다. 작가들이 점차
하급신분 출신으로 바뀌어 갔다. 형식도 장시로 변하였다. 묘사는 사실성을 띠었다.
귀족문학에서 서민문학으로
19세기에 와서는 서얼, 중인, 서리와 같은 하급신분층이 문학에 접근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17.8세기에도 그러하였지만 이때 와서는 하급신분 출신 문인들이 시사를 조직하여
문학활동을 폈는데 시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풍자시인 김삿갓(김병연)이 많은 시를 지은
것도 이때였다. 그들은 모두 전통적인 성리학적 문학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영감, 개성,
자유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이즈음 문학에서 가장 주목이 가는 것은 판소리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광대가 청중을 상대로 장편의 줄거리를 창으로 부르는 것인데, 이렇게
연출되는 판소리 사설은 이 무렵에 와서 고소설을 창곡으로 만들어 썼고, 12마당으로
정리되었다. 이 사설의 정리에서 공이 있었던 이는 신재효였고, 명창으로는 송홍록과 모흥갑 등이
꼽혔다. 판소리의 사설에는 양반에 대한 풍자가 들어 있었고, 일반 상민들은 청중이 되어 이것을
즐기게 되었다.
현대문학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문학의 세계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서구의
근대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20세기 초에 오면 신문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문학은 소설과 시에 있어서 모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현대문학을 지향하게 되었다.
소설은 1906년에 이인직의 '혈의 누'가 발표되어 신소설시대를 열더니 1917년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함에 미쳐서는 본격적으로 현대소설에 다가서게 되었다. 그러나 소설이 종래 계몽과 설교를
위한 문학에서, 하나의 독립된 예술로서의 현대문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19년 '창조'를 필두로 많은 문학 동인지가 만들어졌다. 김동인은 '감자'등의
작품에서 인간들의 굶주림이나 탐욕 등을 그대로 묘사하여 자연주의 문학으로 이름을 얻었고,
염상섭은 '삼대' 같은 작품에서 당시의 현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 문학을 이룩하였다.
시는 기독교에서의 찬송가를 표본으로 삼아 창가를 짓다가 1908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자유스러운 형식의 신시가 나옴에 미쳐서 현대문학에 접근하였다. 1922년에
'백조'를 위시하여 여러 동인지들이 만들어짐에 따라서 시인들의 활동도 활발하여졌다. 이상화
김소월 등도 이때부터 활약하게 된 시인이었다.
소설이건 시건 이제 문학은 하나의 예술로서 단단한 자리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중엽에는 이러한 문학을 병약한 감상의 예술로 보면서 새로운 경향을 보인 문학도 등장하였다.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문학이 그것이다. 신경향파문학이 대표적이었는데, 이것은 1925년
프로예술가연맹을 결성하여 프로문학으로 진전되었다. 프로문학에 대항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문학도 등장하였다. 1926년에 일어난 국민문학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병기의 시조 현대화
노력도 그 일환이었다.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한용운은 이와 관련하여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시인이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문학을 정치세계로부터 옹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3년
김기림이 주도하여 일어난 모더니즘 운동도 그러한 예이다. 1939년 이태준, 정지용 등이 참여하여
'문장'이 발행되면서 이 경향에 속하는 문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 결과 순수문학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 순수문학은 해방 뒤에도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지만, 한편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경향도 크게 일어나고 있다.
음악, 무용, 연극
신석기시대
원시공동체사회의 사람들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신을 맞아들이고 불행을 가져오는 악신을
물리치기 위해 주술을 하곤 했는데, 이럴 때마다 이를 주관하는 주술사는 의식을 행하였고,
이러한 의식에서는 노래와 춤이 늘 함께 행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봄의 기풍제나 추수 끝에 풍년에 감사하는 가을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종교적인 축제에서 노래와
춤은 필수적이었다.
마한에서는 이 때 밤낮으로 중국의 민간 춤인 탁무와 비슷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은 십여 명씩 어울려서 발로 땅을 높게 혹은 낮게 밟으면서 손발을 박자에 맞추어
움직였다고 한다. 이러한 춤과 노래는 고구려의 동맹에서도 행하여졌을 것이며, 그 밖에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 축제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노래와 춤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으로,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이며 씨족사회 이래의 전통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쓰이던 악기의 실물로는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두만강 서포항 유적지에서 발굴된
뼈로 만든 적이 있으며, 이 밖에 당시의 기록에 보이는 바로는 변한과 진한에 오늘날의 거문고와
비슷하게 생겼을 슬과 같은 것이 있었다.
삼국시대
주술적인 노래인 주가는 이후에도 여전히 불려졌던 것 같다. 가야의 '구지가'와 같은 데에서 그
예를 찾을 수가 있다. '구지가'는 일종의 신을 맞이하는 노래로, 가야의 역사에 관한 기록인
'가락국기'에 의하면 이 구지가의 형성이 수로왕의 등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노래 역시 종교적이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같은 유형의 음악으로는, 팔월 한가윗날 길쌈을 하면서 여성들이 춤을 추며 불렀다는
신라의 '회소곡' 등도 들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이러한 주가가 향가로 발전하였는데,
향가는 주로 화랑이나 승려들에 의해 지어졌으므로 불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음이
특기할 만하다. 화랑도가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함은, 이 때의 음악과 무용 역시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의 악기로서는 긴 통을 이용하여 불어서 음을 내는 관악기, 줄을 타서 연주하는 현악기,
나무, 가죽, 쇠붙이 따위로 만든 것을 두드려 소리를 나게 하는 타악기를 합하여 수십 종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서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당시에 사용되던 악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경우 특히 고분벽화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다. 횡취(오늘의 젓대처럼 가로로 빗잡고
부는 종적의 일종), 장소(오늘의 단소나 퉁소처럼 세로로 잡고 부는 종적의 하나), 피리 등의
관악기와, 거문고, 오현비파, 완함(보름달같이 둥근 몸통에 긴 목을 지닌 현악기의 일종) 등의
현악기가 벽화의 그림에 보인다.
이 같이 장소나 완함과 같은 중국의 악기와 횡적, 오현비파, 피리 등의 서역 악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높은 수준이었으므로 고구려의 음악이 '고려기'라 하여, 중국 수, 당의 조정에서 각각
연주되던 칠부기와 십부기에 당당히 참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만든 것이었다. 왕산악은 그 악곡으로 100여 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뒤에는 신라로 전해져 훗날 옥보고와 같은 대가를 낳았다.
백제의 음악에 관하여는 기록이 적어서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일본에 노래 부르는 악공, 악기
연주자인 악사 그리고 악기를 전한 사실로 보아 고구려에 못지 않게 발달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백제만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 지와 같은 악기는 중국의 남조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이는 고구려의 '고려기'에 쓰인 악기들이 북조의 그것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과는
서로 대조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백제가 중국 남조의 음악을 수용하였던 예는 백제 사람
미마지가 만조의 하나인 오나라의 가악무를 배워 일본에 전하였던 데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가야의 가야금도 유명한데, 우륵에 의하여 진흥왕 때에 신라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이
가야금이 신라의 유일한 악기로서 신라의 음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 후 진흥왕이 거칠부로
하여금 한강 유역을 공격하게 할 때 낭성에 가서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시켰다고 하는데, 아마도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뜻에서였던 것 같으므로, 당시의 음악이
여전히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소리를 흉내낸 의성에 의해 어떤
힘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은 듯싶은 백결선생의 떡방아소리를 흉내낸 대악 같은 것도 이러한
음악의 기능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한편 우륵은 진흥왕의 명으로 계고에게 가야금을, 법지에게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 춤을 각각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가야금 음악은 악기 노래 춤의
셋으로 구성된 악 가 무의 종합적인 공연예술로 이해된다. 이런 양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별로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공연예술
통일신라의 음악은 악기가 다양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신라의 음악은 원래
가야금 한 가지를 쓰고 있었음에 비해, 통일시대에 이르러서 고구려와 백제의 악기들을 받아들여
가야금, 거문고,(현금)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 등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3현과 3죽은 종전부터 이미 전해지던 이른바 향악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비파를 향비파라고 함은, 통일과 함께 수용된 고구려의 오현비파를 뒤에 들어온
당비파와 구별하기 위해 신라 하대에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여러 악기로 합주되는 향악은 가야금 하나로 연주되던 시대와 비교하여 악기의 편성이
대단히 풍부하여진 셈이었다. 이로 인하여 정치적 통일뿐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신라가 토착
향악에 고구려, 백제의 향악까지 원만히 융합하여 수용함으로써 향악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향악과는 달리 당으로부터 받아들인 당악이 통일 직후에 군대가 행진할 때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고취악에서부터 서서히 수용되어, 진골과 6두품의 귀족사회 중심으로 음악
담당기관인 음성서에서 제공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하대에 비로소 정착되었다. 대고와 박판과
같은 당나라로부터 들어온 당악기는 대체로 궁중의식에서, 그리고 당비파와 횡적 등은 주로
불교의식의 반주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교의식에서는 범패라는 노래도 널리 불리었다.
당시의 무용은, 향악에 맞추어서 추는 것으로서, 처용무 상염무 등이 있었다. 처용무는
처용설화와 관련된 것인데, 궁성에서 악귀를 내쫓기 위한 의식인 나례에서 행해지던
가면무이었다. 상염무는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춘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악귀를 내쫓는 목적을 지닌 가면무였을 것이다. 그리고 원효가 소성거사라 자칭하고 포교를
위하여 곁들인 불교적인 춤으로서, 그 노래는 민간 포교를 위한 거사 소리의 시초가 되는 것인
듯하다. 이 밖에 음악이 곁들인 가면무가 많이 있었으며,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 이란 시에는
'금환'이라 하여 약 7개의 공을 양 손으로 던지고 받는 놀이를 다룬 것 등 신나는 장면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발해의 음악은 고구려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고 당악을 수용하여 신라에 비해 크게 손색이
없었다. 발해악 역시 삼국시대와 같이 음악뿐만 아니라 무용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으로, 이와
관련된 행정만을 담당하도록 태상시라는 기관이 설치될 만큼 활발하였다. 멸망 후에도 뛰어난
음악과 춤을 발해의 유민들이 전승시켜, 송나라에서는 고구려 이래로 연주하던 거문고를
발해금이라 불렀고, 금나라에서는 발해의 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무용수를 발해교방이라
이름 붙일 정도였다.
고려시대
고려의 음악으로는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향악과 당악, 그리고 송으로부터 새로이
수입된 아악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향악과 당악은 궁중의 연회에서 주로 연주되던
음악이었다.
향악은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으므로 악기에 있어서도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 대고, 박의 악기 편성을 보였고, 장구가 뒤에 곁들여졌음이 새로울 뿐이었다. 궁중
연회에서는 향악인 '정읍'이나 '동동' 등을 반주음악으로 하여 무용 즉 향악무가 펼쳐지기
마련이었으며, 춤추다가 도중에 노래 부르는 가사 즉 창사가 우리말로 되어 있음이 특징이었다.
이 향악은 궁중 연호를 할 때 오른쪽(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우방악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에
대해 당악은 왼쪽(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서 좌방악이라 하였다.
이 때의 당악은 통일신라시대에 수용된 당나라의 음악뿐 아니라 고려 초에 들어온 송나라
음악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퉁소(여덟 개의 구멍을 지닌
세로로 잡고 부는 관악기), 아쟁(거문고처럼 가로로 뉘어 놓고 연주하는 7줄의 현악기의 일종),
방향(오늘날의 양악기 실로폰처럼 철판이나 돌을 나란히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서 치는
타악기) 등이 있다. 궁중 연회에서는 당악인 '포구락' 등을 연주하며 춤과 노래를
즐기곤 하였는데,
포구락은 여기들이 춤을 추면서 포구문에 공을 던져 넣으면서 노는 형태로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당악에서는, 향악과 비교해 여기가 무용수들을 무대로
이끌고 나온다는 점뿐만 아니라 춤을 추다가 도중에 부르는 창사가 순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아악은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되는 음악으로, 편종 편경 과 같은 특이한
악기들을 댓돌 위에 펼쳐 놓고서 연주하는 등가악기와 댓돌 아래의 뜰에 나열해서 연주하는
헌가악기로 편성하여 연주하였다. 이러한 아악이 고려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2세기 예종 때로,
원래의 명칭은 대성아악이었다. 이 아악을 수용하면서 이에 수반되는 의식무용인 일무와 그 밖의
의관, 무의 악복 등도 함께 들여왔다.
이 밖에 국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에는 고취악이 연주되었으며, 당시의 종합공연예술로는
기악과 잡기가 있었다. 기악과 잡기는 노래, 탈춤 외에 땅재주, 줄타기, 접시돌리기 등 여러 가지
놀이를 하므로 각각 기악잡희, 백희가무로 불리었다. 이것들은 창우, 재인이란 명칭의 연주자에
의해, 등불을 밝히고 국가의 태평을 기원하는 불교행사인 연등회와 국가적인 규모로 치르는
제사의식인 팔관회, 궁성에서 악귀를 내쫓기 위한 나례 등의 궁중의식에서 공연되었다.
고려 후기의 음악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아악기가 손실되고 악공이 흩어져 아악의 계승이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궁중의 의식음악이 위축되었음에 반해 민간음악이 성하였음이
특징이었다. 특히 충렬왕 때에는 노래와 춤을 잘하는 관비와 무당을 뽑아 궁중에 두었으므로
민간의 속악이 궁중에서도 유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의 향악에서 주목되는 바는,
여러 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어 몇 개의 절로 나뉘는 이른바 유절형식의
별곡의 등장이라 하겠다. 이 때에 신흥사대부가 지은 별곡으로는 '한림별곡'이나 안축의
'관동별곡'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서민층은 속요를 바탕으로 그들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가요인 장가를 불렀는데, '청산별곡', '가시리', '정읍사', '동동' 등이 있다. 특히
'청산별곡'에는 농토를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의 애절함이, 그리고 '가시리' 등에는
남녀 사이의 끊는 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 장가는 그 가사가 다듬어져서 궁중의 연회
같은 데서 흔히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어졌으며, 상류층의 향락을 위한
노래로 발전하여 갔다.
조선시대
유교에서는 예와 악으로써 정치를 행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조선 건국 초부터 이 같은 유교의
정치 이념을 실현하려는 신흥사대부들의 노력은 이 시대의 음악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우선 음악의 정리에 큰 진전을 보였다. 세종 때가 특히 그러하였다. 세종 자신은 향악을
악보에 적기 위해 정간보를 발명하였는데, 이 정간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세종실록'악보는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악보 둥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이 때 박연은 아악의 정리에 힘을 기울여 아악기의 조율을 위한 율관 제작을
시도하였으며, 아울러 악서의 간행도 주장하였다. 그 뒤에 결국 성종24년(1493)에 아악, 당악,
향악의 3부로 나누어서 악률로부터 그 실제의 응용에 이르기까지를 그림과 함께 설명한
'악학궤범' 이 나와 조선시대 궁정음악이 집대성되었다.
한편 음악에 맞추어 부를 노래로 고려의 악가나 민간의 속요들이 널리 수집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대신 많은 새로운 악장이 지어졌다. 이
악장들은 새 왕조를 창건한 사대부들의 승리를 축하하는 정중하고 엄숙한 것들이었다. 정도전이
지은 '신도가'나 정인지 등이 지은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취하여 '봉래의'라는 소위 신악이
창작되기에 이른다. '봉래의'는 '여민락' 등 3곡으로 구성된 춤곡으로, 이 중 '여민락'은
'용비어천가'의 수장, 2장, 3장, 4장, 졸장의 한문 가사를 국왕의 행차를 위해 쓰이는
고취악에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 음악의 특징으로는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등을 거치면서 국가에서 행하는
의식음악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궁중 연회 때에 향악과 당악이 한데 섞여 연주하게 됨으로써
향악과 당악의 구별이 없어져 당악의 향악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변주곡이 등장함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서민 음악에서 판소리와 기악독주곡 형식인 가야금산조가 등장한 것이 이 시대 음악의
특징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판소리의 등장이다.
판소리는 광대가 청중을 상대로 장편의 줄거리를 말(아니리)가 소리로 엮어 부르는 것이었다.
판소리가 발생한 것은 약간 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이 성하기는 19세기의 일이었으며,
송흥록, 모홍갑 등 명창이 나와서 판소리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렇게 판소리로 연출되는
사설은 고소설들을 이용하여 창곡화하였으며, 12마당으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이 판소리 사설의
정리에 공이 큰 인물은 신재효이다. 그는 말귀를 실감나게 고쳐서 독자적인 창의를 나타냈다.
한편 12마다의 판소리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춘향가'의 대본엔 이본이 가장 많은데, 이는
판소리가 여러 사람에 의해서 집대성되었으며, 여러 명창들이 각기 고유한 창작 즉 더늠을
첨가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극음악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이
판소리 사설에는 양반에 대한 풍자가 많이 들어 있어서, 창하는 광대나 듣는 상민들로 하여금
사회적 모순에 대한 울분을 토로케 하였다.
또 평민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예로서는 탈춤이 있었다. 춤과 노래와 사설이 섞여 진행되는
탈춤은 향리 집단의 주도하에 읍의 제의를 배경으로 발전한 것이다. 극중의 사설에는 대개
양반을 희롱하고 풍자하는 대목들이 끼어 있게 마련이고, 청중은 평민 대중이었으므로 이것은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탈춤이 평민들에게 인기를 얻은 것은 바로 이러한 풍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탈춤은 대개 비직업적인 연예자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나, 한편으로는
남사당이라는 직업적인 유랑 연예인들에 의해서 전승되기도 하였는데, 남사당은 탈춤 이외에
농악, 꼭두각시놀음, 줄타기, 땅재주, 대접돌리기 등의 놀음도 하였다.
현대의 음악, 무용, 연극
조선 후기에 홍대용,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청나라에 가서 오르간 등을 직접 보고
돌아와 이를 소개함으로써, 서양음악이 우리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들어온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치고,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어 행진곡을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 해서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러한 서양음악의 준말인 양악의 대칭으로, 우리 나라의 음악이란
의미를 지닌 국악이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국악은 이즈음 악사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등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악의 침체와는 대조적으로 민속악은 창극이 등장하고 산조가 성행함으로써
발전되었다. 여러 사람이 배역에 의해 나누어 부르는 분창이 이루어지면서 판소리의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 창극은 협률사와 원각사라는 극장의 개설과 함께 폭넓은 청중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산조에는 현행 가야금산조의 시조로 알려진 김창조 이래 명인들에 의하여 여러 유파가
형성되고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피리산조 등이 잇달아 나타났던 것이다.
이후 국악은 1909년 조선정악전습소에 조선악과를 설치하고는 이를 중심으로 전수를 꾀하는
등의 노력이 있음에도 명맥을 유지할 뿐이더니, 해방을 맞이한 이후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설치되고 1955년에 국악사양성소가 부설됨으로써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기관들을
위시해서 국립창극단(1962년 창단),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1965년 설립) 등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통음악의 발전을 꾀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한편 양악의 수용 이후
창작음악이 활발하게 발표되어, '학도가'를 비롯하여 민요풍 노래인 '태평가'등이 등장하였다.
1909년 조선정악전습소가 탄생하면서 조선악과와 함께 설치된 서양악과를 통하여 홍난파 등의
작곡가가 배출되기에 이르렀고, 이어 현제명 등이 꾸준히 작곡 발표를 하였다.
종래의 전통무용을 토대로 일제시대에 무대예술로 발전시킨 이른바 신무용이 등장하였다.
1930년대 초반부터 전통무용의 아름다움을 가미한 창작무용을 발표한 대표적 무용가는
최승희였다. 그녀는 주로 외국공연을 통해 '초립동', '화랑의 춤' 등을 발표하여 크게 호응을
받음으로써 명성을 얻었으며, 조택원 역시 '춘향조곡', '부여회상곡'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신무용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08년 극장 원각사에서 창극을 공연하면서 재래의 판소리보다 새롭다 하여 신연극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인직의 '은세계'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서울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게 됨에 따라 감상주의적인 신파극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어 기세를 떨쳐, 이 창극운동은
지방으로 밀려나면서 신파극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1910년대에는 신파극이
풍미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하여 신파극도 급속히 쇠퇴하였다. 반면에
1920년대 초부터는
근대문예를 공부한 김우진을 비롯한 해외유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서구근대극을 받아들여
사실주의적인 연극을 시도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어 조선배우학교와 극단 토월회가
생겨날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유치진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신극운동단체인 극예술연구회가 등장하여
'토막'이나 '소'와 같은 저항적 내용을 담은 극을 공연하면서 서구근대극 수용을 통한
신극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신극운동은 몰락하고 상업극인 신파극이 재차 흥하여
신파 전용극장인 동양극장이 생겨나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등을 공연하여 대중적인 호황을
누렸다. 이에 유치진 등도 대중적 성향의 극단인 현대극장을 발족시켜 대항하였다.
해방이 되고 전개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그대로 역극계에 미쳐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그러다가 미군정하에서 이해랑, 김동원 등이 극예술협의회를 만들어 소위 민족극정립을
부르짖었다. 곧이어 1950년에 국립극장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그 전속으로 들어가 신협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점차 연극을 즐기는 관객의 수가 늘어나면서, 극단과
소극장이 많이 생겨나 지방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
미술
신석기시대의 미술
구석기인들은 돌이나 뼈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 넣거나 이를 목에 걸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이나 죽은 사람들의 영혼의 평안을 빌고 혹은 사냥, 채집이 잘 되기를 바라는 자신들의
소망을 나타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석기시대의 미술품으로는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가 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상징물이 이
토기는, 약간 배가 부른 'V'자 형 모양의 토기 표면에 평행의 빗금을 엇갈리게 그어서 장식을
한 것이다. 가지런한 선은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서로 대칭을 이루고 통일된 조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직선적인 무늬는 농경이 시작된 이후 곡선적인 것으로
발전되고 선을 꺾어 돌리는 번개무늬도 나타내게 된다. 번개무늬는 하늘의 번개를 나타낸 것으로,
이 무늬를 토기에 그린 것은 농경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자연 현상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나타낸 것일 듯하다.
이외에 조각품으로는 퍽 사실적인 기법으로 조각된 동물 토우, 흙으로 빚어 만든 작은 안면상,
조개에 입과 눈을 뚫어 놓은 패면, 허리가 가늘고 도톰한 가슴을 표현하여 여성을 나타낸 것으로
믿어지는 흙으로 빚은 인물토상 등 여러 종류의 것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들 조각품들도 모두
식량의 풍요를 빌거나 몹쓸 귀신을 내쫓기 위한 종교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짐작된다.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미술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예술적인 활동 역시 발전하게 된다. 청동기 중에는 그 모양이나
장식에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많다. 정밀한 기하문을 장식한
청동거울, 동물이나 농사짓는 모습을 조각해 넣은 방패 모양의 의기, 새나 말의 조각을 붙이거나
혹은 쌍방울을 붙인 칼자루 장식, 말이나 범의 모양을 한 띠고리, 말이나 사슴머리 모양을 한
드리개 등 다양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동물조각은 사실적이며, 선을 그린 무늬는 기하문이란
특징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칼자루 장식이나 동물모양의 띠고리 등은 정치적
지배자들의 실용품에
부착되어 그들의 정치적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던 것이었고, 그 밖에는 천군을 위시한
제사장들이 의식을 행하는 데에 썼을 의기들과 관련이 많다. 이 밖에도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조각으로는 사람이나 돼지모양을 한 몇 개의 토우를 들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에 만들어진
토기로는 민무늬토기(무문토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미술품 중 가장 주목되는 바는 바위에 그림을 그려 놓은
암각화이다. 고래, 거북 등의 물고기와 사슴, 범, 곰 등의 짐승과 사람이 그려져 있고, 사냥하는
장면이나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하고 있는 장면들이 있다(울주 반구대 암각화). 그리고
동심원이나 십자형(고령 양전동 암각화), 삼각형(울주 천진리 암각화) 등의 도안 무늬에 동물의
그림이 곁들여 있기도 하다. 동물의 그림은 대개 쌍으로 그려져 있으며 심지어 생식 활동을
상징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풍요한 생산을 빌기 위한 것이며, 사냥이나 고기잡이의 그림은
성공적인 결과가 있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한
듯한데, 이는 다른 농업사회에서와 같이 태양숭배가 행해졌음을 나타내 주며 아울러 풍요를 비는
뜻에서 새겨 놓았을 것이다.
한편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은 철로 만든 검,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검, 창
등의 무기이다. 특히 서양 악기인 비파처럼 배가 불룩하게 생긴 비파형동검으로부터 발전한
날카로운 세형동검과 청동과는 주위의 민족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자적인 양식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철로 만든 것으로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 말을 탈 때 디디고 올라가는 등자와
청동으로 만든 방울 등 마의 치장에 쓰이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당시 지배층의 것으로, 금속
무기로 무장을 하고 말이나 마차를 타며 위세를 부리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게 해
주는데, 정교한 문양에 꼭지가 달린 다뉴세문경 같은 것들이 그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 이 시대의 대표적 토기로는 견고한 중국식 회색토기를 들 수 있다.
삼국시대의 미술
삼국시대의 미술품은 소박하고 사실적이면서도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불교의 발전과 함께 사상적 내용이 풍부해지고 제작기술이 고도화됨에 따라 높은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삼국이 모두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형성되고
발전되면서 누린 사회적 성장이 미술 분야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고구려는 지상건축물을 나기고 있지 않으나, 고분을 통해 그 모습을 헤아릴 수 있다.
쌍영총에서 널방(현실) 입구에 서 있는 팔각형의 쌍으로 된 기둥이나, 그림에 보이는 기둥
위의 들보, 마룻대인 동량 그리고 동량을 괴는 재목인 두공 등은 목조건축 중심이었던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엿보게 해준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이 하나도 없지만,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술이 발달한 것은
백제였다. 이런 사실은 호사스런 궁실과 누각을 비롯하여 왕흥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을 지은
기록이 보일 뿐만 아니라 목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석탑 양식으로 발전시킨 최초의 석탑
미륵사지탑의 조성 역시 백제에서 이루어졌던 데에서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도 백제 사람인 아비지가 건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신라 건축물의 예술성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지닌 천문 관측을 휘한 첨성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조각가로는 양지라는 승려가 있어서, 뛰어난 예술성의 불상, 신비로운
장수(신장) 모습의 조각, 아름다운 문양의 벽돌과 기와 등을 많이 만들어 유명하다.
이 시대의 회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고구려 고분의 벽화이다. 흙무덤(토총)의 널방과 천장 등에
그려진 이것은 그들의 사상, 풍속 등을 나타내는 다양한 제재로 하여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벽화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우현리 대묘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이다. 백제에도 고구려로부터의 영향으로
고분벽화가 그려졌는데, 공주 송산리 전축분과 부여 능산리의 것이 제일 유명하다. 신라에서
유행했던, 널방을 갖지 않는 수혈식 적석총은 냇가의 돌을 쌓아 올린 것이므로 신라는
고분벽화를 남기고 있지 않다. 그러나 천마총에서 마구에 그린 천마도가 나옴으로써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부장품은 도굴로 인해 남아 전해지는 게 거의 없지만, 백제의 경우엔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에서 금관의 장식(금관식) 등 우수한 공예품이 나왔고, 최근 부여 능산리에서는
조형미가 뛰어나 동양의 향로 중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높이 64cm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발굴되어 백제의 뛰어난 미술 수준을 드러내었다. 가장 많은 부장품이 전해져 당시의 공예
수준을 잘 알 수 있는 것은 신라의 경우이다. 금관을 위시한 순금으로 된 신발(금리), 띠(금대),
귀고리(금이당) 등을 비롯해서 구슬, 유리 등 화려한 것이 많다. 특히 금관은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으며, 신라 특유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미술
통일신라의 미술은, 삼국시대의 소박한 티를 벗고 높은 미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무르익은 기교를 토대로 이상적인 조화의 미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이 같은 특징을 대표적으로
잘 드러내 보인 것이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라고 하겠다.
또한 범종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것은 평창의 상원사종(성덕왕 24년,
725)이지만, 제일 유명한 것은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 혜공왕 7년, 771)이다. 이 종은 현존하는
최대의 종일 뿐더러 그 모양과 구름을 타고 나는 듯한 여인의 모습(비천상)이나 연꽃 모양의
문양(연화문) 등이 아름다워 유명한 것이다. 이 밖에도 돌로 만든 등(석등), 기와(와당) 등에
우수한 것이 많이 있다.
서예는 여러 사찰에 남아 있는 비문을 비롯해서 화엄경을 돌에 베껴 쓴 화엄사의 석경 등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다. 당시의 명필로는 김생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필체는 중국
사람조차도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왕희지의 것으로 잘못 알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오히려
왕희지의 글씨보다 더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평가될 정도이다. 한편 신라 하대에 많이
만들어진 탑비에 새겨진 글들은 당시 서예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구양순체로 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명 등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발해의 미술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불상이 대부분이다. 석불과 함께 흙을 빚어서
만든 소조불이 많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들에게서 보이는 부드러운 얼굴
표정이나 좁고 가파른 어깨 등은 고구려 불상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발해의
조각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작품으로는 정혜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석사자상이 있다.
입을 딱 벌리고 앞발로 버티고 앉아 있는 이 돌사자는 몸 밖으로 표출되는 힘, 단단한 근육 등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밖에 기와(와당)의 연꽃무늬 등도 고구려적인 색채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석등,
귀신 얼굴의 기와(귀면와), 지붕 용마루 양 끝에 세우는 치미의 조각 솜씨도 또한 힘차고 뛰어난
것이다. 금속공예도 발해 나름의 특성을 지니며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길림성 화룡현에서 출토된 금동으로 만든 띠(과대)는 정방형의 과를 16개 연결하여 푸른 옥을
박아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미술
고려 귀족들의 대표적인 미술품은 청자이다. 청자는 그릇 모양을 만든 태토 위에 1__3%
정도의 철분이 섞인 장석유를 바르고 구우면 이 철분이 불꽃(환원염)에 의해서 제일 산화철이
되어 청자색으로 되는 것인데, 이것이 엷은 피막이 아니라 무한한 깊이의 청자색으로 보이는
것은 유 속에 무수히 생긴 작은 기포에 의한 난반사작용 때문이라 한다. 고려의 청자는 원래
송나라 자기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중국 사람들도 고려의 자기가 천하 제일이라고
할 만큼 우수한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 청자의 우수한 점은 첫째 아름다운 빛깔에서 찾을 수 있다. 황록색이나 황갈색의 것도
있으나, 비색의 것이 특히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다. 다음으로 형태의 조화로움이 우수하다고
꼽는다. 병, 항아리, 향로, 주전자, 연적, 필통, 화병 등 다양한 형태가 여러 가지 덧붙인 장식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향로, 주전자, 연적 같은 것들은 국화, 연꽃, 석류,
원앙, 토끼, 원숭이 등 여러 가지 동식물을 본떠 만들어 탐스러움과 귀여움을 더하고 있다.
셋째는 문양의 아름다움을 들어야겠다. 처음에는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겼으나, 뒤에는 자기가 채
마르지 않았을 때 표면에 여러 무늬를 파고 그 속을 백토로 메꾸어 일단 초벌구이한 다음 다시
청자유를 바르고 굽는 상감법을 이용하여 문양을 만들었는데, 이는 고려 청자만이 갖는 독특한
기법이었다. 이러한 문양에는 모란, 국화, 포도 등 갖가지가 있었다. 고려 청자는 형태와 색깔과
문양이 한데 어울려서 세련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실용품이기보다는
사치품이었으므로 섬세하면서도 연약한 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청자 이외에도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는 은상감향로, 정병(선잔병), 촛대, 거울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귀족들이 사용하던 물건들로 그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하는 아름다운 미술품이다.
서예로는 문종 때의 유신, 인종 때의 탄연, 고종 때의 최이, 최우가 유명하며 신라의 김생과
함께 탁월한 경지에 오른 글씨를 쓴다고 하여 신품사현이라 일컬어진다. 고려 전기의 서예는
통일 신라의 뒤를 이어 간결한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고려 말에는 원의 우아한
조맹부체(송설체)가 들어와 조선시대의 서체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중기 이후의 것들이다. 그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은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만들어졌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다. 이들은 기둥과 지붕 사이에
설치되어 지붕의 무게를 받쳐 주는 공포를 모두 기둥 위에만 주는 주심포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위, 아래에 비해 중간을 굵게 한 배흘림(엔타시스) 기둥, 3중으로 맵시
있게 겹쳐진 공포 등이 특색이며, 전체적으로 무게 있는 모습을 띤 한국 목조건물의 대표적인
것이다. 이밖에 고려 말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부석사의 조사당, 덕산 수덕사의 대웅전 등이
있다.
고려에서는 회화도 상당히 성하였다. 앞선 시기에는 회화가 실용적인 기능에 치우쳐 자연
화공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여기에서 벗어나 순수한 감상을 위해서도
제작됨으로써 귀족들로부터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화가의 층이 넓어지고 또한 그림 소재도 인물화
위주가 아닌 산수화 및 화조화, 묵죽 등 문인 취향의 것으로 다양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고려시대 최고의 화원인 이녕은 인종 재위시(1122__1146)에 사신을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송의
휘종으로부터 높은 평가와 후한 대접을 받아 실력을 중국에까지 떨쳤는데, 그가 그린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는 현재 전해지진 않으나 우리 나라 회화사에서 우리의 산천을
그대로 주제로 표현한 실경산수화의 태동을 말해주는 대표작이라 믿어진다. 그이 아들 이광필도
이름이 높아 고려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였다. 그가 명종의 명을 받아 그린
"소상팔경도"는 문신들의 시들이 곁들여져 있는 것으로 12세기 후반에 이미 시화를 함께 하는
풍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지만, 이 작품도 현재 남아 있지 않아 못내 아쉽다.
고려 후기의 회화는 점점 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낭만적으로 되어 갔다는 특색이 있다.
사군자도 등이 유행하고 특히 묵죽화가 많이 그려진 것은 이를 말해 준다. 신흥사대부들의 풍류
생활에서 우러나온 결과로서, 이규보나 이제현 등이 시화일치론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러한 경향의
소산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산수인물화 등 각종 인물화가 기록과 작품
실물을 통해 확인되는데, 특히 초상화가 전성을 이루었다. 왕궁이나 절, 능묘에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려서 봉안하는 진전의 유행에 따라 왕족 및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화원만이 아니라 문인이나 국왕도 직접 그렸을 정도였다. 공민왕 같은
이는 신하들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초상화로는 "안향상"을 들 수 있다. 또한 산수인물화는 산수를 배경으로 인물을 그린
것인데, 이제현의 "기마도강도"가 남아 있으며,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는 "천산수렵도"는 대표적
그림이다.
이 시대의 회화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불교 회화가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는 사실이다. 주로 14세기의 것들이 오늘날 남아 전하는데, 불교 경전을
금이나 은가루로 베껴 쓰는 사경을 하면서 이에 곁들여 그린 불화의 형태이다. 혜허가 그린
"수월관음도"(양유관음도)는 왼편을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유연한 자세, 가늘고 긴
부드러운 팔과 손 등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 불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 것으로, 극도의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주제면에서는 서방 극락의 주제자인 아미타상 등이 주를 이루고,
묘법연화경변상도, 화엄경변상도, 미륵하생도 등이 많이 그려졌는데, 이는 현세보다는 내세의
안락을 더 추구하던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이밖에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천왕상도", 수덕사의 벽화 "수화도" 등도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미술
조선시대 미술에서 당시의 양반 사대부나 일반 서민들의 미적 감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백자이다. 간결하나 넉넉하고 담담하며, 순수하면서 또한 소박한 백자의 모양과 색깔은 이 시대의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층의 정서를 대변해 주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분청이라 하여 고려 청자가 퇴화한 것과 같은 회청색의 자기가 생산되었다. 그러던 것이 원나라
말기부터 중국에서 일어난 중국 백자의 영향의 받아 유에 깊이가 있는 견실한 백자가
만들어지면서, 고려 자기의 곡선적인 형태를 벗어나서 소박하고 직선적인 형태로 변하였다. 이
백자는 조선인들에 의해 가장 존중된 기본적인 자기로서, 유색이 설백, 유백인 순백자로 깊은
사발, 편평한 접시 등 보기에 안정감이 있는 실용적인 것이 많았다.
이후 청화백자가 발달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흰색의 태토(백토)로 그릇 모양을 만들고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그린 다음 그 위에 철분이 적은 순백의 유약을 씌워 구워낸 것으로, 고운 푸른
색의 무늬가 특징이다. 세조 때(15세기 중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것은 생산의 중심이
광주의 관요였는데, 초기에는 회희청이란 청색 안료를 중국에서 수입해 온 관계로 극히 귀하였고,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정조(1776__1800) 때에 국산의 안료가 본격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청화백자가 크게 발달하여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국가 기관인
도화서의 화원들이 광주요의 분원으로 매년 궁중에서 쓰일 그릇에 그림을 그리러 왔다가는
민간용에도 그림을 그려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푸른색만을 써서 산수, 화조, 초목 등 자연물을
슬쩍 그려서 구운 이 청화백자는 여러 색을 사용한 중국이나 일본의 채색 도자기와는 아주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한편 청화백자가 값이 비싸고 또 민간에서는 사용이 금지되기도 하자
일반 민간용으로 백자에다가 자연 산화철인 철사로 도안을 그려 넣은 철화 자기가 많이 만들어져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양반들은 미술을 틈틈이 취미 삼아 하는 여기로 즐겨, 회화면에서는
문인화로 불리는 수묵화를 유행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의 화가로서 이름 있는 세종 때의
강희안(1417__1464)이 이런 사람이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산수화와 초상화가 유행하였다.
산수화는 현실에 존재하진 않는 이상적인 자연을 나타낸 것으로, 대체로 북송 곽희의 화풍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그 구도를 화면 한 쪽에 편중되게 하는 등
독창적인 양식을 형성하였음도 또한 주목된다. 산수화 다음으로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양반들이 자신들의 영달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상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도화원(후에는 도화서로 개칭)이 설치된 이후에는 여기에서 배출된 화원들이 뛰어난 그림 솜씨를
발휘하였다. 화원들은 궁중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모사, 풍경의 사생,
그리고 초상화 제작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그림 그리는 일에 참여하였고, 양반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초상화나 그들의 취미에 맞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최대의
화가라고 지칭되는 세종 때의 안견이나 최경, 중종 때의 이상좌가 모두 이러한 화원 출신이었다.
안견은 안평대군(1418__1453)의 비호를 받으면서 안평대군 소장의 명품들을 깊이 연구해 여러
대가의 화법을 종합함으로써 대성하였으며, 특히 산수화에서 탁월하여 "몽유도원도"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최경은 당대 인물화의 제 1인자로 유명하고, 이상좌는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그림 재주가 빼어났기에 도화서의 화원이 될 수 있었는데, 산수와 인물에 모두
능하였다.
조선 후기가 되면 새로운 경향이 뚜렷해진다. 종래와 같이 단지 중국의 화보를 모범으로 하여
이상향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보는 우리의 자연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진경산수화와 세상의 일상생활을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그린 풍속화(일명 속화)가 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숙종--영조(18세기) 때의 정선이었다. 그는 중국의
그림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구도를 개발하여 바위산이 많은 우리 나라의 자연을 강렬한
묵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주변의 경관을 화폭에 담았고, 특히
금강산과 서울 근교의 명소를 많이 그렸는데, 걸작으로는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있다.
이에 비하여 같은 진경산수화라도 영조, 정조(18세기) 때의 화가 김홍도는 나무, 산, 물 등을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서 정선과는 대조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총석정도"가 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의 발달은, 이 때에 팽배하였던 민족의식과 지도 제작의
활성화 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되고 있다.
한편 풍속화는 초기 단계에 윤두서, 조영석 등의 사대부 화가들이 그리기 시작하여 그 기초를
다져주었다. 윤두서의 "채애도"는 봄날 두 명의 여인이 밋밋한 산비탈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
장면을 정감있게 그린 것이며, 조영석의 "새참"은 고된 농사일을 하다가 새참을 맛있게 드는
농부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활짝 꽃피운 풍속화의
대가로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가장 유명한데 이들은 모두 화원임이 주목된다. 김홍도는 산수,
신선, 화훼 등을 다 잘 그렸으나 특히 풍속화로 보다 이름을 떨쳤다. 그는 처음에는 병풍에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그리다가 나중에는 화첩에 산수 배경 없이 그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이
풍속화로 보다 이름을 떨쳤다. 그는 처음에는 병풍에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그리다가 나중에는
화첩에 산수 배경 없이 그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의 풍속화로 대표작인 "풍속화첩"에는 밭 가는
광경, 추수하는 모양, 대장간의 풍경 등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상 풍속이 주로 소재가 되었는데,
특히 "무악"과 "씨름"이 명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홍도와 같은 경향을 지닌 풍속화를 그린
화가로는 김득신이 있다. 다만 그는 김홍도보다 대체로 좀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선을 구사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윤복은 같은 풍속화라도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인물
풍속화를 주로 그렷다. 그의 대표작은 "미인도"와 "풍속화첩"인데, 화첩 속에는 빨래하는 부인들,
술 파는 여자, 희롱하는 난봉꾼 등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장면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월하정인"에서는 늦은 밤 담 모퉁이에서 이루어진 남녀 한 쌍의 애틋한 만남을 진솔하고
능숙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풍속화의 유행은 양반의 유교주의에 대한 예술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었다.
한편 18세기 이후에는 "십장생도", "호작도" 등 다양한 주제의 민화가 활발하게 그려져다.
이러한 민화들은 18세기 이후 농업생산의 증대, 수공업의 발달 등 경제적 성장에 따른
서민대중의 회화에 대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흔히 제작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19세기가 되면 김정희를 대표로 하는 문인화가 당대를 휩쓸었다.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에 그린 대표작 "세한도"에 나타난 것은 우리 나라의 진경산수가 아닌 고차원의 이념적
세계였다 추운 겨울을 지나 보아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늘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사람도 역경을 겪어 보아야 지조를 알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의
영향은 조희룡을 필두로 하여 허련 등 대부분이 중인 출신인 화가 및 화원들에게 미쳤다.
흥선대원군(이하응)의 "난초"도 문인화로서 그 경향을 같이 한다. 이러한 문인화의 경향은 양반
문인들뿐 아니라 화원들의 세계에까지 번져 가서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세도정치하의 혼탁한
풍조에 대한 문인으로서의 반항이 이러한 경향을 낳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말에는 흔히 초기의 안견, 후기의 정선,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장승업이 유명하다. 그는 고아로서 어깨 너머로 배운 그림 솜씨가 인정되어 화원으로
발탁된 천재 화가였다. 마음에 맞지 않으면 누구의 명이라도 붓을 들지 않았다는 그는 다양한
주제를 자유분방하게 표현하였는데, "호취도", "삼인문년도"에서 능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서예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려 말기 이래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매끈하고 세련된 송설체가
유행하였으며, 안평대군이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초서에 능한 양사언과 해서로 유명한
한호(한석봉)와 이광사도 명필이었다. 후기에는 종래의 고루한 폐풍을 일소하고 새로운 서풍이
생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금석학의 대가 김정희였다. 그는, 조선의 서예가들을 '필법만을
따지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개탄하면서 옛 명필들의 필적을 연구하여 이를 종합해서 패기에
넘치는 서체를 이룩하였던 것인데, 이를 보통 추사체라 부르고 있다. 한편 궁체라 하는 한글
서체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글이 갖는 곡선을 질서정연하게 정렬하여 구성한 것이다.
후기에는 목공예도 또한 크게 발달하였다. 장롱, 궤, 경대, 문갑, 탁자, 책상, 소반 등의 여러
가지 가구를 나무 무늬의 아름다움을 살려서 만든 이 목공예품들은 소박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 대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죽공예, 쇠뿔을 얇게 깎아 펴서 그
한 쪽 면에 채색하여 그림을 그린 뒤 뒤집어 나무에 붙여 장식하는 화각공예품, 구리줄(동선)을
꼬아 문양의 선을 이루고 빛이 고운 작은 자개를 칼로 끊고 갈아내어 문양에 맞게 집어넣은 뒤에
칠을 한 나전칠기 등에도 훌륭한 것들이 많다.
근대의 미술
전통 회화의 전통을 이어 근대 회화에 그 맥을 연결시킨 것은 1911년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원으로서 설립된 서화미술회였다. 그 뒤 독자적인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 화단을 빛낸
인물은 이상범, 변관식 등이었다. 이들은 각기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림들을 드린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서양화 기법을 받아들인 이른바 양화는 1910년대에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고 돌아온
화가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일제시대에 활약한 화가로는 도상봉, 이인성
등이 있다. 해방 이후에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의 작품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이중섭은
"황소" 연작, "물 속에서 물고기와 노는 애들", "소와 새와 게" 등의 대표적 작품에서
보여준 선으로 묘사하는 선묘법을 통하여 깊은 내면적 세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 또
박수근은 "소와 아이들", "나무" 등에서 우리 나라 농촌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절제된
구도와 뛰어난 공간 구성으로 한국적 정취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김환기의 대표작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인데, 여기에는 거시의 세계에서 본 군상이 추상적인
형상 속에 표현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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