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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도원] 떠도는 생태학

by Casey,Riley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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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도는 생태학

이도원


    제1부 물과 땅 그리고 삶

  세상살이는 모두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흐름은 물과 땅과 하늘 그리고
생명의 길을 연결한다. 삶의 긴 역사에서 유유한 정보의 흐름은 물질, 에너지의
흐름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아웅다웅 사는 우리네 삶들도 따지고 보면 흐름의
방향을 어디로 유도할 것인지 힘쓰는 모습일 뿐이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삶은
흐름의 가닥을 잡는 일이다. 
    글을 시작하며

  1995 년 '여름 생태학교'(주) 뒤풀이에서 해양 생태학자 유신재 박사는 내가
과학적인 사실을 아무 데나 비유하고 과학과 문학을 혼돈하는 위험한 수준에 와
있다고 충고했다. 그의 비판을 이해했지만 대꾸할 말도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언젠가 내 상상을 기반으로 한 편의 서사시를 쓰고 싶은 욕심으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위 세속적인 학문과 생활에 쫓겨 잠들어 있지만 한때
내 황당한 상상은 이러했다.
  * (주) '여름 생태학교'는 한국생태학연구회 소속 회원 20 명이 매년 여름 방학
동안에 가지는 작은 프로그램이다. 생태학 후속 세대를 키울 계획으로 회원 각자가
가르치는 대학원생에게 다른 회원들을 통하여 생태학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할
목적으로 치르는 행사이기도 하다. 1993 년 처음으로 경기도 광릉 수목원에서
시작했으며, 두 번째, 세 번째 모임은 각각 강원대학교 봉명 연습림과 공해
수련원(강원도 양양 소재)에서 가졌다. 강의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연구실에서 모인
다양한 학생들과 기성 연구원들 사이에 정보를 교환하고 사귐의 기회를 제공하여
참여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글은 그 때 강의 내용을 정리해 두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작했다가 부피가 불어 따로 소개하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
  지구상의 생물 활동은 어느 우주인의 실험 과정이 아닐까? 우주인들은 어느 날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의문을 가졌을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동식물을 기르고
미생물을 배양하며 관찰하듯이 그들은 지구라는 배양기에 실험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부질없는 한량의 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시간, 에너지, 돈이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긴 진화의 과정을 관찰하고, 분석과 기록을 하며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느 날 우주인은 실험을 끝낼 것이다. 인류 문명이 우주인 자신의 실험을 시작한
시점에 도달했을 때가 바로 실험의 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시점에 오더라도
다음 방향이 달라질지 모른다는 의문을 가지면 실험은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험 산물이며 대상인 인간들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거나, 실험을 하고 있는
우주인 자신들에게 대들 정도가 되면 더 이상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물질적,
문명적 쓰레기로 인해 세상이 무질서로 치닫는 경우는 인류가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며, 언어 통일과 컴퓨터, 정보 고속도로를 통한 정보 소통의 효율성으로
인류가 고도의 문명을 이룩할 경우는 또 다른 상황이다. 어느 쪽이든 모두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 인류가 우주인과 타협할 여지가 있는 이상
희망은 없지 않다(주)
  * (주) 이 마지막 상상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바벨탑 얘기가 시사하는 교훈과
맥을 같이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혼자만의 상상이었는데, 나중에 어디선가 비슷한
내용을 본 적도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와 관련된 이런 저런 상상은 모두 기존의 기타 귀동냥한 얘기에 기반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부질없는 상상들을 모아 한 편의 서사시로 발전시킬 가능성에 대해서는
스스로 회의를 가진다. 지구의 생물이 출현하는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이르는 과정을
표현하자면, 그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이는 끝없이 방대할 수밖에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절충할 수 있는 적당한 틀을 잡는 데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이러한 허망한 생각들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조금씩 잃어 가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내 모든 지식을 하나의 틀 속으로 집어넣어
보고 싶은 소망만은 아직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나 자신의 성향과 한계 때문에 이 글은 비유와 은유 투성이다(주). 이러한
비유와 은유는 내 학문 영역 밖의 사람들과 말길을 트며 사유의 연장을 도모하는
방편으로써 사용되었다.
  * (주) 설명에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나로서는 이 행위에 대하여 나름대로 답변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거의 다 마련했을 무렵, "비유나 유추의 본질은 모든 분석적,
비판적 사고의 연장이자 확대인 것이다. 비유가 없다면 문학은 불모지로 변하고,
과학과 철학은 거의 존재할 수 없으며,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연대기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라는 글귀를 찾았다(김동광 옮김, '기술의 진화', 서울: 까지, 1996). 신의
의도를 추론하기 위해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지는 않지만(이정우 옮김,
'생명의 논리, 유전의 역사', 서울: 민음사, 1994, 44쪽) 적어도 비유와 은유를 통해
연장되는 사유를 즐긴다.
  그러기에 여기 실린 글은 분명히 과학적으로 온전하지 않다. 적지 않은 부분이
과학적 사실과 문헌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표현 양식과 사유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상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던지는 주장 중 일부는 실험적인
검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생각은 검정 과정에서 잘못된 것으로 판정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람의 생각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일부 주장은 처음부터 빈틈이 없어야
하고, 일부 주장은 느슨하여 다른 사람들이 건드려 볼 여지가 있어야 한다. 때로
소나무의 고고함보다 참나무의 느슨함이 성숙한 사회의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주).
  * (주) 소나무와 참나무의 비유는 제2부의 '낙엽은 자원이다'와 제5부의 '생태계
발달'에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내용들은 느슨하여 다른 사람들이 시험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과학이 과학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으며, 과학적 착상이 연구실 안에서만
일어나서도 안 된다. 과학적 행위가 삶의 일부일진대 일상적인 삶으로 녹아 들지
못하면 과학은 영원히 삶을 겉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의 많은
착상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비롯되며, 소위 과학적이라는 사실들은 내 삶과 연결될
때 흥미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내 생활에서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의 구분을 어렵게 만드는
폐단을 낳기도 하지만 때로 일을 바로 즐거움으로 연결하는 장점도 있다. 그렇다고
이 글이 나 자신의 과학과 문학적인 속성을 충분히 융화시켰다는 뜻은 아니다. 내게
굳이 문학적인 행위가 있다면 일기를 쓰는 정도이기에 '문학적인 속성'이라는 말을
쓰기조차 쑥스럽다. 그러나 언젠가 그럴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혼자서
습작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내 모든 행위가 긴 과정의 일부가 아니라 영원한
습작으로 끝날 것 같지만^5,5,5^. 그러나 이런 은유를 통해서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해 주는 착상, 가설, 검정 및 표현 방법의 도출을 즐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흐름 속의 삶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잃는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도 있는 법이다. (중략) 얻어도 거만해지지 않고 잃어도
우울해지지 않는 경지에 달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다만
득실을 따지는 기분에 스스로 좌우되지 않도록 할 따름이다(신영복 옮김, '사람아
아, 사람아' 중에서).

  해가 바뀌면 그 동안 인연을 맺어 오던 학생 중 일부가 떠나고 또 새로운
신입생이 온다. 나는 서 있는데 학생들의 흐름이 강물처럼 지나쳐 간다. 학생들은
주위에 머무는 동안에 무언가를 배우는 이상으로 내게 새로운 정보를 안겨 준다.
좋은 정보를 얻어 잘 가공하는 잠재력을 가진 학생들은 오랫동안 머물도록 잡아
두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나는 안다. 우리 모두 양질의 정보를 읽어 내고 잘
가공하여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면 자신이 속한 학문 세계에 의해서 선택되지 못하고
사라져 가야 한다는 것을.
  마치 작금의 자연 세계가 진화 과정을 통해서 선택된 생물들이 자아내고 있는
상황이듯이, 현존하는 학문 세계는 학문 역사를 통해서 선택된 학풍들이 연출하고
있는 장이며, 이러한 작용^5,23^반작용은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과정에서
선택되는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사람을 매개로 하는 학풍 또는 학문 체계다. 어쩌면
인류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장구히 흘러가는 긴 정보 역사가 거치는 징검다리일지도
모른다.
  징검다리를 지나고 나면 우리의 내면이 은연중에 달라져 있듯, 사람을 통과한
정보는 예전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징검다리를 지난 사람마다 내면의 달라짐이
다양하듯이 인간의 징검다리를 통과한 정보마다 변화되는 폭은 서로 다르다. 그런
정보 가닥들이 모여 인류 문화를 이루며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강물은 끊임없이 위로부터 와서 아래로 흘러간다. 우리는 이 귀한 물을 잡아 두고
싶어서 댐을 만들어 가두기도 한다. 그런다고 물을 영원히 잡아 둘 수는 없지만
그래도 떠남을 좀더 느리게 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자원들 중 한 곳에 영원히 머무는 경우는 없다. 완급이
있을 뿐 일정 기간 머무르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변형된다. 민음사 대표
박맹호 님은 "출판을 통해서 이룩하는 일이란 사람들보다 더 빨리 흩어지는 말을,
말보다도 더 빨리 흘러가는 생각을 우리 곁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라고 했다(주). 이와 같이 귀중하면서도 덧없이 사러져 가는 자원일수록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려면 더 큰 힘을 기울여야 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속성이 있는
정보와 물을 비롯하여, 영원하지 않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국제 사회에서 선택되지 못하고 사라져 가야 한다.
  * (주) '서울대학교동창회보' 제211 호, 1995 년 10월 1일.
  햇빛은 하늘로부터 나무 곁으로 왔다가는 떠난다. 나무는 이 흘러가는 햇빛
자원을 잠깐이라도 잡아 두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생태계가 나무를
빌어 그런 욕망을 실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 햇빛 자신이 거기에
머물고 싶어 나무가 열심히 자신을 잡아 두도록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무와 생태계는 햇빛을 잡아 두지 않으면 본질을 상실하므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효율성을 도모한다. 동시에 나무는 햇빛을 잡는 데 필수적인
영양소들도 잡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나무는 마냥 흘러가는 햇빛과 영양소들을
광합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보유하기 쉬운 형태인 에너지와 물질로 바꾼다. 이렇게
바뀐 에너지와 영양소의 혼합물인 유기물들을 잎과 줄기 그리고 뿌리라는 댐에다
가두어 둔다. 마치 가두어진 물이 증발로 침투를 통해서 댐으로부터 빠져나가듯이
성장 기간에 잠깐 가두어졌던 유기물들은 가을이면 다시 흘러가려고 몸부림친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러 가지 수단으로 증발과 누수를 막듯이 나무도 영양소의
흐름을 막을 수단들을 강구한다. 봄이 되어 나뭇잎들이 썩으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영양소들이 분비된다. 그러면 눈이 녹거나 비가 내려서 생긴 유출수가
영양소를 떠메고 갈 작업을 한다. 나무도 이에 대응해서 유실되는 자원을 잡아
두려는 노력들을 계속한다. 떠남과 잡음의 끊임없는 투쟁은 자연의 속성이다.
그러나 성숙한 자연은 그러한 투쟁을 상쇄하는 협동으로 화해의 길을 도모하고
있다. 
    노곡천의 시궁창

  1982 년 봄, 석사학위 논문 준비로 인한 고민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겠지만 공부가 어설펐던 탓에 논문 주제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아콩카과 Aconcagua 제2 캠프에서 고민했던 주제인 '새마을 운동의
생태학적 이해'는 형태를 꾸미기에 너무 벅찬 작업이라 이미 포기했다(주). 그러던
중 어떤 계기가 있었던지 이제는 기억조차 없지만, 하천을 따라 걸으면 시각적인
서열이 생길 것이며 그 서열은 경관 지표 또는 식생 지표와 연관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그 생각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 하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 (주) 1981 년 1월 서울대학교 문리대 산악회원으로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등반대에 참가했을 때 나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과정 학생이었다. 그 당시
캠프에 혼자 남을 때면, 귀국 후 학위논문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고민거리였다.
  마침 서울대학교 식물학과 식물분류학 연구실에 들락거리던 중이라 경기도
광주군에 소재한 태화산의 서울대학교 중부 연습림으로 계획된 춘계 식물 채집에
참여하게 되었다. 식물 채집 행사에 따라 태화산을 오른 다음날, 혼자서 광주군
도척면 상림리의 연습림 연구에서부터 노곡천을 따라 실촌면 곤지암리까지 걸었다.
그렇게 하여 노곡천 일부 구간은 내 최초의 연구 대상이 되어 그 해 봄 여러 번
대면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곤지암에 있는 한 고등학교 하수구 아래에서 내
공부의 시작을 예고하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 그림 1-1
  그림설명: 노곡천의 위치.
  학교의 담은 노곡천에 바투 붙어 있었다. 담벼락 바로 아래 물길이 닿는 곳에는
침식을 막기 위한 돌망태가 놓여 있었다. 돌망태 틈에는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찌꺼기가 쌓여 있고 바로 그 위에만 고마리와 소리쟁이가 무성했다. 더러운
시궁창에 식물이 더욱 왕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에서 한 가지 상상이 발원했다.
식물들이 더러운 물에서 자라면 더러운 물질을 취하리라.
  * 그림 1-2.
  그림설명: 하수구 아래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고마리와 소리쟁이(주).
  * (주)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곤지암리 광주동중^5,23^상고교 하수구. 1982 년
5월 촬영.
  사실 식물은 더러움을 조장하는 유기물을 직접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과정에 대한 유추는 나중에 수정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물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들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식물을 이용하여 물을
정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때 나는 석사학위 논문에 원래 주제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엉성하게 표현해 놓았다.

  범람원에서 추천할 수 있는 토지 이용은 농업, 수림, 레크리에이션 활동 등을
포함하는 오픈 스페이스다. 범람원에 적합한 토지 이용으로 농업, 옥외 레크리에이션
등을 들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도작(벼 도, 지을 작), 원예, 양어 등에 의한 생산,
실험 수생 동물원, 온실, 습지 식물원, 야초원(들 야, 풀 초, 동산 원)에 의한 자연
학습 및 교화, 운동, 자연 방임적인 동물 사육 광장, 낚시 등의 레크리에이션, 휴식
광장, 감상을 위한 경관 등의 목적으로 이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중략)
  범람원에서 생산성 위주로 토지 이용을 할 때는 자연적인 비옥성을 이용하는 데
그치고 인공 비료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 비료는 이웃하는 강물에 곧바로 흘러들어
유기질 오염을 초래하고 수중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표현으로서, 생산자를 직접 이용하는 방법(이를테면 벼, 보리 등 곡물을
재배하는 따위)보다 소비자를 이용하는 방법(이를테면 초지를 형성하고 그 풀을
가축의 사료로 하여 나오는 고기를 이용하는 일)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곡물
재배는 홍수의 피해를 피하기 어렵고 아무래도 비료 사용이 따르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람원에 적합한 생산자로서 습지 식생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뒷받침되길
바라며 본 연구에서는 고마리와 소리쟁이의 생태적, 생리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그 까닭은 고마리와 소리쟁이가 우리 나라 자연 습지의 도처에 자생하며
특히 하수가 배출되는 장소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범람원에서 이런 식물을 이용하는 것은 첫째 유기질 오염원을 생산을 이용할 수
있는 이중 효과가 있고, 둘째 하상 및 제방의 침식을 방지하며, 셋째 양용 및
식용으로 이용하는 외에 가축의 사료나 퇴비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노곡천의 하상 식물을 관찰하며 오르내리는 동안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에도 흔히 우리 나라 제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돌망태로 제방 침식을
막는 공사를 해두었다. 돌망태 아래 끝에서부터 하상은 폭이 1 미터 정도 수평을
이루고 있었고, 거기를 지나서는 다시 단을 이루어 내 키보다 더 낮은 곳으로
이어졌다. 제방을 만들 때는 돌망태 아래 위치까지 하상이 쌓여 있었지만 제방 설치
이후 거기서부터 다시 사람의 키를 넘는 깊이로 침식되어 떠내려 간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겼을까? 하도(강 하, 길 도)를 직선화하고 수로를 좁힌 공사로
인해 홍수가 나면 당연히 좁은 지역으로 물이 모여 유속이 빨라지고, 유속이
빨라지니 운동 에너지가 증가하는 것이다. 흔히 교과서에서 정의하듯이 에너지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모든 에너지는 적절한 일을 찾지 못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좁은 지역에 모인 에너지는 더 큰 힘으로 하천 바닥을
긁어 내려 가고 말았다. 이것은 어쩌면 힘이 남아도는 청소년들에게 적당한
배출처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 힘을 불량한 행동으로 풀게 되는 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 힘을 적절하게 쓰도록 유도하는 것만이 하천을 다스리고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이끄는 좋은 방법이다.
  * 그림 1-3.
  그림설명: 제방과 하상의 침식(주).
  * (주)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 지금 노곡천과 중부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약간 하류에 있는 지역. 1982 년 5월 촬영.
  노곡천에서 잘려 나간 자갈과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일부는 가까운 웅덩이를 메웠을 것이고, 일부는 곤지암에서 만나는
곤지암천을 거쳐 경안천으로 이동하고 필경엔 팔당호까지 여행했는지도 모른다. 
    땅 거죽의 상처

  노곡천과의 인연은 땅 표면에 나타나는 침식 현상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의 발길 닿는 곳은 어디에서든 잘려 나가는 토양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안천 상류에 위치한 어떤 대학의 운동장은 비가 한 번 지나가면
곳곳에서 패인 모습을 드러냈다. 1 년이면 한 번씩 가는 용인 공원 묘지에서는 어느
날 무덤들이 홍수에 씻겨 뒤섞인 모습도 나타났다. 언젠가 경북 영일군 청하면에
소재한 기청산 수목원의 이삼우 선생님 인도로 천령산(경북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
소재. 해발 775 미터)을 오른 적이 있는데, 어느 펄프 회사가 종이 원료를 얻기
위해 참나무를 잘라 가면서 만든 임도(수풀 림, 길 도)에도 아픈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강원도 평창군의 아름답던 가리왕산 옆구리를 잘라 만든 임도에도 어김없이
흉한 침식이 더해졌다.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 가는 길에는 방문객의 발길에 짓밟힌
땅이 빗물에 패어서 나무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백두 대간을 따라 걷는
동안 대관령 목장의 큰길에 깊이 1 미터가 넘는 도랑이 패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희방사에서 소백산을 오르는 길에 더욱 처참했다. 자연을 찾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은 우리 나라 산 곳의 땅에 생채기를 만들어 놓았다. 폭우와 바람이
심한 한라산 등산로의 모습은 그 상처가 너무도 깊어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씻겨
간 흙은 모두 어디로 가 있을까?
  * 그림 1-4.
  그림설명: 침식현상: #1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청계리 천령산(1993 년 5월 16일
촬영), #2 제주도 한라산 영실에서 윗세 오름 길(1993 년 7월 13일 촬영), #3 전남
강진 다산 초당 가는 길(1994 년 2월 28일 촬영).
  미국 땅 옐로스톤 공원의 타워 폭포 부근에도 침식은 골칫덩어리인 모양이다.
방문객들의 발길에 긁힌 땅바닥을 감싸고 침식을 줄이기 위한 푯말을 붙여 놓고
있었다.
  * 그림 1-5.
  그림설명: 방문객이 많은 보도의 침식을 감소하기 위한 배려. 미국 옐로스톤 공원
타워 폭포 진입로에서 1994 년 8월 3일 촬영.
  환경과 정보 분야에 높은 식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미국 부통령 고어도 토양
침식에서 처음으로 환경 문제를 인식했다(주)
  * (주) 이창주 옮김, '위기의 지구', 도서출판 삶과 꿈(1994).

  나의 소년 시절에는 미국 곳곳의 목초지에 도랑이 생겨 비가 오면 자연히 더 깊게
패었고, 물이 넘치면 표토를 훑어 버려 강을 흙탕물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상은 오늘날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테네시 주 남서부의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항구 도시 멤피스의 표토(표면 표, 흙 토)는 지금도 시간당 8에이커(약 3 만
2000 제곱미터)가 유실되고 있으며 미시시피 강은 미국중부의 농장에서 수백만
톤의 표토를 영원히 앗아갔다. 지난날 아이오와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평균
41센티미터 두께의 토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 두께가 반으로
줄어들었고 그 대부분이 멕시코 만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나는 농민들이 왜 아이들에게 도랑이 커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지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던 중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단기간의 이익을 위하여 토지를 임대한 사람들이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도랑이 생기고 그것이 크게 깊게 패면 다른 토지를 개간하면 된다. 도랑이 또
생겨도 개간할 토지가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을 하면 단기간의
승부에서는 틀림없이 지고 만다.

  특별히 마지막 글귀의 의미에 깊이 공감한다. 지금 세계는 단기간의 승부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본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살아 생전 모두 이루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장기전의 승리는 어떤 철학으로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 선택받을 수 있는
행위를 창출할 판단의 근거는 무엇일까?
  충북대학교 환경공학과 이상일 교수의 인내로 찾아간 충북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
구봉산 계곡의 청석돌 채석장은 또 다른 생채기를 안고 있었다. 채석장의 토양은
산도가 매우 높아 폐하 pH 3.7 정도였다(주). 긴 세월 동안 식물로 덮여 가던
그곳에 한때 채석장이 들어섰다. 채석 행위로 노출된 곳에 비가 내리자 땅 위로
흘러가는 빗물(지표 유출수)의 산도는 흔히 우려하는 산성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했다. 산도가 높은 물은 토양에 함유되어 있는 금속류를 잔뜩 용해시켰다.
이 빗물이 하류로 흐르는 동안 산도가 낮은 강물과 만났는데 그 곳에서는 물이
섞이는 과정에서 채석장 물의 산도는 희석되었다. 산도가 줄어드니 잔뜩 녹아 있던
금속류는 하상에 침전되었다. 내북면 이원리부터, 보청천 바닥에 침전된 금속의 도포
모습을 맨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도포된 강바닥에서는 물벌레들이 숨을 쉬지
못하여 사라졌고, 물벌레를 먹어야 살 수 있던 물고기도 사라졌다.
  * (주) 청석돌 채석장 땅 속에는 황철석과 같은 황화 광물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채석 행위로 인해 황철광이 공기와 물에 노출되면 다음과 같은 반응으로
황산이 생성된다.
  2^124,15,234,23^ ^26^ 7^135,23^ ^26^ 2^125,23,135^ ^25,135^
2^124,15,234,135,256^ ^26^ 2^125,23,234,135,256^.
  이 결과 생성된 황산은 자연수의 산도를 높여 흔히 폐하 3--4의 강한 산성수가
된다. 비가 올 때 이 지역을 흐르는 산성 광산 배수(떠밀 배, 물 수)는 채석장
폐기물이나 폐석더미에 포함된 중금속을 용해시켜 금속 함유량이 높은 물이 된다.
산성 광산 배수가 중화되면 과포화 상태가 되어 산화철이 바닥에 침전되어 주위가
시뻘겋게 변한다.
  * 그림 1-6
  그림설명: 채석장에서 발생한 강한 산성수에 용해되었던 금속류가 중성물을 만나
하상에 침전된 광경.(주)
  * (주) 충북 보은군 내북면 이원리에서 1990 년 8월 촬영.
  1992 년 가을 가톨릭대학교 생물학과 조도순 교수와 함께 소백산에 갔다가
일부러 그 채석장을 다시 들렀는데 그 때는 채석 작업이 중단되어 보청천의 바닥이
옛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나 철수한 사람들이 파헤쳤던 땅에 꽂아 둔
나무들은 비참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아마도 흉해진 땅에 다시 나무를 심어야
하는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그 곳은 식물 살기에 어렵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은 채 애꿎은 묘목만 심어 놓고 간 듯했다. 나무가 살 수 없는 땅에 묘목을 심어
두고 떠나간 사람들은 하지 않음만 못한 행동으로 살생을 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육지에서 수계(물 수, 둘레 계)로 물질이 이동하는 현상은 땅을 거처로 하여
살아가는 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손실이다. 논이나 밭에서 영양소들이
떠나가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원의 손실이며 생산성 저하의 원인이 된다. 영양소
유실에 대응하여 농부는 매년 논밭에 비료를 주어야 한다. 비료를 주는 행위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을 들여야 하고 인력이나 동력을 소모해야 한다.
  이 경우 영양소 유실은 용존상으로뿐만 아니라 흙 알갱이에 흡착된 상태로도
일어난다. 따라서 침식으로 토양을 잃으면 영양소도 잃게 되는 것이다. 표 1-1의
자료를 기준으로 할 때 논이나 밭에서 점토 1 킬로그램을 유실하면 대략 인 3그램,
칼륨 25그램, 칼슘 34그램을 잃게 된다. 물론 토양 입자들에는 질소 같은 여러 다른
영양소들도 안착되어 있다.
  * 표 1-1: 온대 다습 지역 토양의 모래, 미사, 점토 분리물에 포함된 인, 칼륨,
칼슘의 농도.

  모래: 인(0.05%), 칼륨(1.4%), 칼슘(2.5%)
  미사: 인(0.10%), 칼륨(2.0%), 칼슘(3.4%)
  점토: 인(0.30%), 칼륨(2.5%), 칼슘(3.4%)
  * 자료: Brady(1990)
  반면에 이러한 영양소 자원은 물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선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물의 양이 과도하면 바람직하지 않다. 부영양화로 독성 조류들이 번성하게 되고
유기물 생산이 늘어나서 물이 썩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썩으면서 산소를 소모하고
혐기성 분해 산물을 생산하여 언짢은 냄새를 풍기게 된다.
  지표 유출수와 강물에 실려 떠내려 가는 흙 알갱이는 속도가 느린 강이나
저수지에 이르면 침전된다. 그러면 본래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에 토사가
저장되어 저수지의 기능이 감소된다.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손해되는
일이다. 저수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준설을 해야 한다. 준설이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들여야 하고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에너지를 얻자면 화석 연료를
태우거나 원자력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만큼 또 우리 환경을 오염시키게 된다.
  이러한 모습들을 대하면서 내 상상은 학문의 세계를 넘어 지금은 일그러져 있는
땅과 초목의 아름다웠던 옛 사랑을 읽는다.
  태초에 태양과 하늘 그리고 땅과 물이 있었다. 그 중 유독 태양이
장난꾸러기였다. 햇빛을 내리쬐는 태양은 때로는 자신만의 힘으로 때로는 바람을
이용하여 땅을 아주 조금씩 하늘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물은 그저 조용히 한 곳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태양이 가만 두지 않았다. 태양은 물을 하늘과 땅으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때마다 물은 혼자서 다니기가 심심하여 땅의
일부를 친구 삼아 낮은 곳으로 동반했다. 남아 있는 땅은 자신의 일부가 이렇게
어디론가 베여나가는 것이 싫었다. 마냥 와서 일부를 떼어 가는 태양 빛과 물이
원망스럽기도 하여 함께 붙들어 둘 궁리를 했다. 땅은 물과 땅을 보유할 장치를
여러 가지 시도했다. 시도를 거듭한 끝에 스스로 옷을 입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 줄
깨달았다. 후세에 사람들이 그것을 이름하여 땅옷(지피)이라고 했다. 태양과 물을
잡아 두는 데는 땅옷이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땅옷이 출현하면서 태양은 장난의 전략을 바꾸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물을 매개로
땅과 다투고 한편으로는 땅과 화해해야 했다. 물은 땅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일부를
땅에 남겨 놓고, 일부는 본래 속성대로 저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바다로 바다로
여행을 계속했다. 그것은 바로 땅과 물 그리고 태양이 화합하여 공동 사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땅은 더욱 다양한 땅옷을 이루어 갔다. 태양도, 물도, 하늘도 땅이
좋은 옷을 마련해 가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좋은 친구였다. 그와 함께 거기서
어우러져 살아가도 좋을 착하고 다양한 땅옷의 친구들이 생겨났다. 그 친구들
중에는 자기 마음먹은 대로 옮겨 갈 수 있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항시
그러하듯이 모든 것이 공동 사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친구들 중에는 난폭한
녀석들도 나타났다. 때로는 잘 어우러져 놀던 착하디착한 친구들의 갑자기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 사람이라는 친구가 가장 말썽꾸리기였다. 한동안 잘 어울려 지내다가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더구나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땅옷을
벗겨 버리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그 재주를 개발하고부터는
스스로 더 이상 땅옷의 따뜻한 친구이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땅옷이 점점 잘려
나가 친구들은 서로 헤어져야 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만큼 물도 제 멋대로
땅을 잘라 가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화합이 미덕이던 공동 사회는 다시 퇴행하기
시작했다. 땅과 땅옷은 이 불화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 수 없어 안타까웠다.
  지금은 기실 사람들이 까불고 있지만 실제로는 태양이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매체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상상도 언뜻 해본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땅 거죽
변화에서 거의 대부분 힘은 태양 에너지에서 비롯되었고, 사람들의 활동도 화석
연료라는 과거에 저장된 태양 에너지에 의해서 대부분 수행되고 있다.
  이상의 동화도 신화도 아닌 애매한 글의 상징성은 아래 글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전달될 것이다. 바라건대, 이 글 읽기가 끝나면서 그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증가할 것이다. 그 이해의 증감은 바로 글의 전달성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리라.
  땅옷은 그 뜻대로 지피(땅 지, 가죽 피)라고 할 수 있는데 식피(식생 식, 가죽
피)라는 단어와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가진다. 전자가 땅을 감싸고 있는 옷 같다는
뜻이라면 후자는 식물로 된 옷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마치 우리
피부가 몸의 내부를 보호하고 옷이 몸뚱아리를 감싸고 있듯이 땅옷은 땅을 감싸서
보호한다. 이런 땅옷이 벗겨져 나가거나 허술해지면 땅은 물이나 바람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그것을 우리는 침식 또는 풍식이라 한다.
  땅옷은 흙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곳에 자리하고 있는 영양소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한다. 여기서는 땅의 성분이 떨어져 가는 상황을 편의상 눈에 쉽게
인식되는 토양 유실 중심으로 소개하지만, 물에 녹아서 흘러가는 용존 상태의 영양
물질도 땅옷이 잡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이 잡아 주는
과정을 통해서 땅옷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미생물들의 질서를 가지고 영양소를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보호한다. 
    어우러진 풀과 나무

  요즈음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학생들과 함께 점봉산 기슭에 간다. 점봉산은
설악의 남쪽에 자리하여 일명 남설악이라 불린다.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미시령,
마등령,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설악 북주능을 타고 내린 백두 대간이 대청에서
서쪽으로 달리다 한계령에서 다시 남하한다. 그 백두 대간이 점봉산을 만나고
나서는 이제 동쪽으로 낮게 내려가 단목령을 지난 다음 제 방향을 잡아 북암령,
조침령으로 이어진다.
  점봉산은 어디서 접근해서 아름답다. 그러나 김재규가 공병대를 이끌고 길을 튼
44번 국도 덕분으로 입구까지 접근이 쉬워진, 오색 부근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는
어디로 가든 경사가 급해서 제법 힘들다. 겨울 산행에서 하산길로 택하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엉덩이를 깔고 앉아 썰매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오면 즐겁다.
귀둔 곰배골에서 곰배령으로 이어지는 노정도 가팔라서 걷기가 힘들지만 겨울
산행이 아니면 권해 볼 만한 등산길이다. 곰배령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백두
대간보다 오히려 높이 뻗어 있어 멀리 보이는 대청봉과 함께 주변 전망이 좋고,
가파르지 않아서 숨가쁘게 오르지 않아도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한계령에다 차를
세워 놓고 백두 대간을 따라 남하하는 길은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심해 힘든 반면에
변화가 많아서 좋다.
  * 그림 1-7.
  그림설명: 점봉산의 위치도.
  백두 대간에 싸여 이는 진동 계곡 깊숙이까지 차로 올라가서 산행을 시작하면
경사가 완만하여 어디로 가든 걷기가 쉽다. 그러나 현리에서 방동을 거쳐 30
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는 길은 한동안 비포장이었으므로 발길이 뜸했던 곳이다.
  한계령에서 속초로 향하다가 오색을 지나 논화리에서 56번 국도로 홍천 가는 길을
잡는 것도 한 가지 접근 방법이다. 여유가 있으면 신림사지를 구경하고 서림에서
백두 대간을 타고 올라 조침령을 넘으면 진동 계곡이다. 이처럼 진동 계곡으로
들어오는 길은 험하여 지금까지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현리와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1993 년에 확장과 포장 공사가 시작되어 몇
년을 끌더니만 이제 제법 진행되어 수월하게 갈 수 있다. 거기다가 백두 대간에
구멍을 뚫어 동쪽에 위치한 남대천 물을 서쪽으로 퍼올리는 양수 발전소 공사도
찻길을 넓히고 다듬어서 사람의 길을 트고 있다.
  필경 이 행사들은 남아 있는 아름다운 강산에 무자비한 인간의 발길을 더하게
하리라. 유네스코가 지정한 자연보전 지구이자 산림청이 지정한 천연 보호림에서
행해지는 외지인의 멧돼지 사냥은 아무리 보아도 납득되지 않는 행위지만 2--3 년
전에 일어났던,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요즈음에 길이 좋아져 봄나물 뜯기를
겸하는 산행이 해마다 늘어나서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느 날
산악회에서 함께 산을 타던 후배가 직장 동료 30 명을 끌고 점봉산으로 봄나물 뜯기
산행을 하겠다기에 간곡히 말린 적도 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망치려고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아무래도 이제는 그 곳을 천연
보호림으로 지정한 산림청이 나서야 할 때다. 생계를 보장하는 의미에서라도 지역
주민들의 오랜 사업은 허용하고 외지인 한량들의 행위를 막는 감시권을 주면
어떨까.
  양수 발전소 위치를 지나 4 킬로미터 정도 터덜거리며 단목령을 향해 오르면 더
이상은 자동차로 갈 수 없다. 여기가 삼거리라는 곳이다. 삼거리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강선리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방법과 너른이 계곡이나 단목령을 거쳐 백두 대간을 따라 북상하는 방법이 있다.
다만 백두 대간을 따라 오르는 길은 지형이 희한하여 길을 잘못 들기 십상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제법 산꾼이라는 사람들이 백두 대간을 종주한답시고 표식기를 붙여
놓았는데 잘못된 것이 많으니 믿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가든 4월 말과 5월 중순까지 삼거리에서 점봉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가의 풍경은 감미롭다. 큰 나무에 잎이 나기 전, 임상(수풀 림, 바탕 상)을 수놓은
봄꽃들은 금수 강산이 남아 있는 모습이랄까. 3월 초면 복수초를 시작으로 노루귀,
엘레지, 바람꽃, 한계령풀이 어우러져 땅을 덮는다. 그러나 큰 나무에서 잎이 나기
시작하면 황홀하던 꽃들은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짧은 시기에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이 봄꽃들은 무슨 조화일까.
  5월 중순 큰 나무들에서 새싹이 돋기 시작하면 임상의 봄꽃들은 화려한 시대를
마감한다. 5월 초의 황홀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의 눈에는 조금 투박하고 억세
보이는 다른 식물들의 봄꽃들을 밀어 낸다. 공간과 햇빛을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먼저 온 세대가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른 봄에
한 세대를 마치는 식물들은 뒤이어 오는 식물들과 삶의 시기를 달리함으로써
나름대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세대가 정보를 가공하여 다음
세대의 발판으로 물려 주듯이 먼저 온 식물은 따라올 식물을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이리라.
  작은 봄풀들은 이른 봄 큰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기 전에 눈 녹은 물이 흐르는
데서 한 발 앞서 영양소들을 포착한다. 그 영양소를 이용하여 광합성을 하고 열매를
맺고 어우러짐으로써 보유하고 있던 영양소들을 다음 식물들에게 물려 준다. 그렇게
하여 그 지역 전체는 영양소 보유력과 이용 효율을 높인다. 서로 다른 시기에
영양소를 흡수함으로써 눈이나 빗물에 씻겨 가는 영양소의 양을 줄이고, 또
영양소를 돌려가며 사용함으로써 영양소 단위 무게당 지역의 광합성량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지금의 현상은 그와 같이 주어진 지역에서 효율적인
요소들이 살아 남아 이루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덧없는
봄풀과 큰 나무들이 어우러져 땅의 영양소 보유력을 한바탕 돋구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물이 스스로 존속하고 자손을 퍼뜨리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구에서
사용되는 실질적인 에너지는 대부분 태양으로부터 공급된다. 따라서 태양이
심심풀이로 방사 에너지를 내뿜어 지구를 가지고 논다고 볼 수 있는 한편,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생명 활동을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원시인들이 태양신을 섬긴 이면에는 이런 위대함을 은연중에 알고 있던
까닭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에너지의 99 퍼센트 이상은 생명
활동에 직접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열로 손실되거나 증산(무리 증 흩을
산)으로 소모되어 생명 활동을 간접적으로 돕고 있다. 단지 1 퍼센트가량이 식물의
광합성에 포착되어 화학적 에너지로 저장된다.
  이와 같이 지구상에서 식물이 맡고 있는 주요 기능은 광합성으로 화학적 에너지를
담는 유기물의 생산이다. 광합성은 식물이 에너지를 이용하여 하늘과 땅으로부터
물질을 얻어 가공하는 일이다. 식물은 태양 에너지를 모든 생물이 쓸 수 있는
형태로 바꾸기 위해 이산화탄소와 물, 영양소를 섞어서 유기물을 만든다. 또는
대기의 이산화탄소, 땅 위의 물과 영양소를 잘 섞어서 자신의 창작물을 내어 놓는데
거기에 필요한 것이 태양 에너지며, 그 과정이 광합성이다.
  식물이 이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자연 선택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살아 남아 우리 눈에 보이는
식물들은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서 에너지, 이산화탄소, 물, 기타 영양소를 포함하는
자원 보유 능력을 제대로 구축한 생물로 보아도 좋다. 그 결과 땅 위에 존재하는
식물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필요한 영양소를 보유하는 한 가지 이상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주). 필요한 자원들이 저 멀리로 흘러가서 바다로 가거나 날아서 공기로
도망가고 나면 그것을 되찾는 데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생물들의 온갖 노력을 동원하여 영양소를 잡아 두는 모습은 자연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 (주) 이도원(1994).
  이를테면 식물은 흘러가는 물에 포함된 흙 알갱이를 가라앉히고 거기에 녹아 있는
영양소들을 미생물과 합심하에 빨아들다. 어떤 나무들은 겨울 동안 마른 나뭇잎을
달고 있으면서 낙엽이 멀리 가는 것을 예방하기도 한다. 임상에 자라는 작은 나무와
풀들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큰 나무가 싹을 틔우기 전에 임상의 작은
식물들은 낙엽을 붙잡아 두고 용존 영양소를 재빨리 빨아들여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고서 잎과 열매를 키우는 자원으로 사용한다. 큰 나무가 뒤늦게 잎을 내면 그
작은 풀들은 자진하여 영양소 보유 임무를 물려 준다. 더 큰 나무는 죽어 가는
풀에서 방출되는 영양소들을 이용한다.
  식물의 죽은 가지는, 떨어져 바람에 날리거나 물에 실려 가는 낙엽을 잡아 두는
일을 하기도 한다. 누가 염두에 둘까. 그 작고 큰 가지의 주검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미생물이, 흘러가는 물에서 영양소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식물은 또한 미생물 뿐만
아니라 작은 동물들의 삶도 북돋워서 영양 물질을 잡는데 일조를 하게 한다. 그렇게
크고 작은 나무들과 미생물, 동물이 어우러져 영양소를 이용하는 것이 결국은
광합성에 의한 일차 생산과 생태계 운영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작용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기만, 경쟁과 협동이라는 시행 착오를 거치며
개개의 생물 또는 그 이상의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 선택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때로 식물은 다른 생물들과 어우러져 생태계의 영양소 보유력을 고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집단 선택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서양 과학자들은 하찮은 생물들의
협동 체계를 목적론적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자연 선택이 어느 수준에 작용하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어우러진 삶이 생태계의 영양소
보유와 운명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모습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자아내는 영양소 보유 작용에
대한 개인적인 기술은 아직 검정되지 않은 가설도 포함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따라 보기 1) 학문 선택과 정보 농도

  학문 선택이란 개인이 전공 분야를 선택하는 과정과 학문 세계가 적자(쫓을 적,
놈 자)를 선택하는 과정의 상호 작용으로 학계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하나의 조어다.
  우리가 속해 있는 학문 세계는 처음엔 구성 요소의 엉성한 모임으로 이루어지지만
성숙해질수록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돈독한 체계가 된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존 구성원이 제외되고 또 새로운 구성원이 영입되는
과정의 결과다. 흔히 개인 각자가 자신이 속할 학문 세계를 선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개인의 선택을 유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학문 세계가 창출한다. 따라서
개인이 자신의 분야를 선택하는 과정과 학문 세계가 적자를 선택하는 과정의 상호
작용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올바른 선택을 이루지 못하면 학문 세계 그 자체가
도태될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다윈의 자연 선택 natural selection 에 빗대어 학문
선택 scholastic selection 이라 한다(주).
  * (주) 이 글을 쓰던 중 읽은 엘드리지 Eldredge 의 책 Dominion(1995)에서
문화 선택 cultural selection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보다 더
늦게 접하게 된 도킨스 Dawkins 의 The Selfish Gene(1976)에서는 '연장된
표현형'과 '밈 meme'이라는 개념으로 문화 선택의 길을 설명하고 있다(도킨스가
나중에 개정한 책은 홍영남 교수가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제목으로 옮겼으며,
한영수가 옮긴 '이기적인 유전자란 무엇인가'(1991)라는 일본학자의 책에서도
도킨스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생물 정보에 적용되는 자연
선택의 논리를 비생물 정보의 진화 과정에 적용하고 있는 점에서 학문 선택은 문화
선택의 한 부분이다. 더 나중에 이런 논의는 인류학자에 의해서 깊숙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Durham, 1991).
  이 학문 선택은 학자와 학계의 작용^5,23^반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계를
대표하는 것은 먼저 소위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학회다. 개인은 이 학회에서
평가받는다. 따라서 학회가 상위 개념인 학문 세계의 흐름과 하위 개념은 회원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도태된다. 이 때는 개인과 학회가 속해
있는 더 높은 수준의 체계인 일반 사회도 학회와 개인을 평가, 선택할 것임에
틀림없다.
  자연 세계의 역동성은 물질적인 반응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학문 세계의
역동성은 정보의 반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질적인 반응이 물질과 물질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듯이 신정보 산출에는 하위 수준의 정보와 정보의 만남이 필요
조건이다. 무작위적인 운동에 기반하는 물질과 물질의 만남은 주어진 공간에 포함된
물질의 양이 많을수록 그 확률이 높다. 비록 정보와 정보의 반응이 무작위적인
이동과 무관할 수 있다해도, 주어진 정보 공간에서 정보의 양이 많을수록 그리고
정보의 이동이 많을수록 서로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제 생화학적 반응 속도가
기질 농도에 비례하듯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정보 농도 information
concentration 또는 정보 밀도 information density 에 비례할 수 있다. 이러한
유추에서, 물질의 농도를 용질무게 ^456,34^ 용액부피로 정의하듯이 정보 농도는
관여되는 정보의 크기 ^456,34^ 문제의 크기로 정의된다. 해결해야 될 문제의
크기는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개인 또는 집단이 임의로 설정하는 반면에 사용할
정보의 크기는 관여하는 사람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정보 농도의 증가는 새로운 정보 산출에 필요 조건이지만 필요 충분 조건은
아니다. 정보와 정보가 만나 반응하기 위해서는 활성화 에너지와 활성화 정보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모든 가공 또는 변화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려면 초기의 활성화 에너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보 반응이
일어나려면 활성화 정보가 필요하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활성화 정보가 혹시 다른
곳에서 정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내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지 않은 막연한
개념임을 밝혀 둔다.
  학문 세계에는 당연히 집단 선택 group selection (주)이 존재한다. 더구나 환경
문제와 같이 복합적인 난제가 대두되면 집단 선택이 발휘될 가능성이 더욱
짙어진다. 개인이 가진 정보 무게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정보 농도의 증가는 필경
여러 사람의 정보를 모아 무게를 키우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밖에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다.
  * (주) 때로 개체 individual 가 아니라 개체군 population 수준에 작용하는 자연
선택을 집단 선택이라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는 개체군 선택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릴 것이라 본다.
  학문 선택은 정보와 정보의 만남을 원활하게 하고, 동시에 활성화 에너지와
활성화 정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기에 학문
상호간의 협력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 집단이 선택되는 방향으로 역사는
진행되지 않을까. 다만 정보와 정보의 만남이 점점 물리적인 공간의 종속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정보를 지배하는 원리가 물질 원리와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따라 보기 2) 집단 선택과 생태계 수준의 진화는 가능한가

  고전적인 다윈의 자연 선택은 다만 개체의 유전될 수 있는 표현형에 작용한다(주).
반면에 상호 교배를 하지 않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생물들이 밀접한 생태적 관계를
가지고 자연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경우를 공진화 coevolution 라 한다. 또한
공진화의 범위 이상에서 작동하여 직접적으로 상리 공생을 하지 않는 생물 집단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집단 선택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개체 또는 개체군
수준에서만 자연 선택이 작용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집단
선택을 긍정하는 편에 서 있다.
  * (주) Pianka(1994).
  도킨스 Dawkins 는 그의 '이기적인 유전자'(주)에서 자연 선택의 단위를
유전자에 두고, 많은 현상이 개체 선택보다는 유전자 선택에 의해서 더 잘 설명되며
집단 선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화를 모르는 것이라고 간단히 취급해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해석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유전자 선택이 있다면,
도킨스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책의 앞 부분에서 유전자가 출현하기 전 일어난 화학적
진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의 진화 과정에 다른 분자 선택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 (주) Dawkins(1976). 원제 'The Selfish Gene'을 '이기적인 유전자'라 옮기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적절하며, 저자 도킨스와 의도했던 바와 같이 독자를 끌 수
있는 도발성과 자극성은 있지만 도킨스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도킨스는 몇 세대를 거쳐서 계속될 수 있는 염색체의 작은 일부를 'selfish
gene'으로 정의하고 있으니 여기에는 '고집스런 유전자'라는 뜻도 포함된다. 아직
또는 고집이 자기 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이기적인 내면에서 나왔다고 보면 도킨스의
정의는 절묘하다.
  이를테면 뉴클레오티드는 당연히 선택되어 유전자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생명의 구성 요소로서 선택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경쟁자 중 하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지금도 유전자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면
뉴클레오티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분자 전쟁의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작은 단위들의 전쟁과 자연 선택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큰 단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생명의 진화 과정에는 오직 전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합의 장도 분명
존재했으리라 믿는다(주). 이를테면 어떤 요소는 생존 전쟁에서 힘들이지 않고 살아
남았을 것이며 어떤 것은 평화로운 타협 과정으로 살아 남았을 것이다. 살아남거나
자연 선택된 개체는 선택된 유전자들이 고도의 공생 관계를 이룸으로써 지속될 수
있었다. 유전자들은 공생으로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를 이루고, 이 세포 기관들은
다시 다른 세포 기관들과 공생으로 개체를 이루었다. 아무튼 뉴클레오티드가
생명체의 구성 요소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것을 밀어낼 어떤 경쟁자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 생명의 역사에 다른 경쟁자가 영원히 없으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 (주) 다윈의 시대에는 군소 기업들의 경쟁이 만연했던 사회였으며, 그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 선택의 논리 안에 경쟁을 전제로 하는 상황을 이끌었다는 글을
읽었다. 마찬가지로 타협과 협동의 사회로 가는 성숙한 사회에 와 있는 오늘날,
경쟁을 넘어 공생의 원리를 생태학에 적용하는 것은 자연 선택과 문학 선택이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또 다른 보기일 것이다.
  이렇게 분자들의 전쟁에서 선택된 뉴클레오티드는 유전자를 이루었고, 그
유전자들이 모여 더 상위의 생명 단위를, 나아가 그 단위들은 보다 더 큰 단위를
이루고 있다. 이 경우 모든 단위에는 자연 선택의 손길이 뻗치고 있지만 단위가
클수록 선택의 힘이 약화된다. 이것은 작은 단위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결합력
bond strength 이 큰 단위 사이의 그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주). 자연 과학적인
측면에서 관계의 강약 또는 연결성은 결합손의 에너지 크기로 규정하지만, 문학적인
측면까지 고려할 때는 두 단위 사이에 흐르는 물질과 정보의 양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다른 개념에 의한 측정 방법도 기대해 볼 만하다.
  * (주) Allen and Hoekstra(1992), 29쪽.
  아무튼 내 육신의 세포와 세포의 관계는, 상위 단위라고 할 수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계보다 강한 결합력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다른
한국 사람들과 가지는 상호 관계는 내가 일본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보다 더 강하다.
  이런 까닭에 상위 단위 사이의 관계일수록 상대적으로 떼어놓기 쉽다. 이것은
상위의 큰 단위들은 하위의 구성 단위보다 자신의 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자연 선택이 각 단위에 작용할 때, 작은 단위일수록 강한 힘을
미치지 않으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또한 이는 작은 단위일수록 고유성이 큰
반면 큰 단위일수록 융통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통성이 크다는 말은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은 지니고 있을지언정 일부 바뀔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에 내 세포의 운명은 나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나 자신 또한 내가
속한 사회와 지구의 운명에 무관할 수 없다. 이것은 상위 단위들이 하위 단위들을
자연 선택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하나의 보기다.
  그러기에 각기 다른 생명의 단위에 작용하고 있는 자연 선택의 힘은 각 수준에
맞추어 서로 다른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 유전자 선택이나 개체 선택 그리고 집단
선택은 각각의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할 개념이지, 진화를 설명하는 데 어느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차원을 유전자나 생물 개체에 맞추는 경우에
집단 선택은 상대적으로 작용력이 약하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거나 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해 무시해도 좋을 때가 있다.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 선택 가능성을 아^36^예 무시해버리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지나친 주장이다. 오히려 각기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연
선택력의 특성을 규명하고 진화 과정을 조명해 보면 새로운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
  이제 집단 선택의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보기를
살펴보자.
  식물과 동물은 복잡한 상호 작용을 하고 있어 때로 이 작용이 무너지면 둘 모두
사멸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무가 죽음으로써 그 나무의 씨를 먹고살고 또 씨의
발아를 용이하게 하는 상리 공생 관계의 도도새 Raphus cucullatus 도 따라서
사멸한 경우가 바로 그 보기다. 거꾸로 도도새가 멸종됨으로써 도도새에 의존하여
번식하던 나무가 사멸될 위험에 빠졌다는 보고도 있다(주1). 도도새는 몸무게가 약
23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타조보다 조금 큰 새였다. 그들이 살고 있던 섬에는
천적이 될만한 포유류가 단 한 마리도 없었고 그래서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했기
때문에 바보라는 뜻의 '도도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살던 천혜의
보금자리에 16세기 초 인간이 발을 딛음으로써, 발견된 지 2백 년 만에 지구상에서
멸종된 도도새는 지금은 그 모습의 그림과 함께 유럽의 박물관에 두개의 머리와
부러진 다리, 그리고 많지 않은 골격만 남아 있다(주2).
  * (주1) Temple(1977).
  * (주2) 손순창의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새 도도'에서.
  이와 같이 두 종의 밀접한 진화를 다루는 경우는 공진화의 보기다. 이는 한 종의
도태(주1)가 다른 종의 도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하나의 핵심적인 종이 생물 군집의 형성에 지대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경우 그 종을
핵심종 keystone species(주2)라 한다. 이 핵심종의 개념은 한 종의 도태가 소속된
군집을 바꿈으로써 다른 종을 도태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개념이다.
  * (주1) 'natural selection'은 과거에 자연 도태로 번역되다가 지금은 자연
선택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선택 selection for 또는
도태 selection against 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 (주2) 핵심종은 원래 먹이 사슬을 이루는 영양 단계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육식
동물이 군집 형성에 미치는 강한 영향을 강조하기 위하여 1969 년 페인 Paine 이
처음 도입했지만, 영양 단계가 아닌 상호 작용을 통해서 서식지를 바꾸는 초식 동물,
피식자, 상리 공생자, 숙주 또는 생물종에 적용하기도 한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멘지 Menge 등(1994)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혼자서 피식자의 분포, 수도, 조성,
크기, 다양성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군집 구조 유형을 결정하는 포식자를 핵심
포식자 keystone predator 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강한 상호 작용은 한 핵심
포식자의 도태가 다른 생물의 선택 또는 도태에 영향을 주는 과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집단 선택의 여지를 말하고 있다.
  또한 생물 다양성을 주장하는 마음 이면에는 집단 선택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시대에 공존하는 생물이 인류가 자연 선택되는 데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걱정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생물 다양성의 가치를 경제적, 심미적, 환경적, 윤리적 측면으로 나누어 따져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양한 생물들의 공존이 인류의 삶에 공헌한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의 바탕에는 아마도 공존하는 생물들과 함께 인류도 선택될 것이라는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여 실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 보기 3) 생태계의 정보

  생태계의 구성 요소인 생물계에 관한 중요한 정보는 유전자에 들어 있다. 물론
생태학에서 다루는 모든 내용도 정보에 포함된다. 동물 생태학의 한 분야인 동
생태학은 학습을 통해서 세대 사이에 전달되는 정보를 다루고 있지만 유전정보에
비해서 아직 연구된 내용이 빈약하다. 우리가 교육의 의의를 이해하는 만큼, 유전
정보와 다른 형태의 정보가 생태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지금의 어떤 생태계에서 모든 유전자를 남기고 생명 활동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몇 년 후 남겨 둔 모든 유전자가 발현된다고
하더라도 소위 야생성을 상실한 생물 요소들로는 생태계의 복원을 결코 달성할 수
없거나 요원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인공 부화된 천연기념물 재두루미가 민통선 부근에 방생된 지
3일 만인 1995 년 2월 23일, 생존 기능의 약화로 트럭에 받혀 죽은 경우는 이러한
예측을 뒷받침한다(주1). 미국 뉴멕시코 주에 있는 보스크 델 아파치 보전 구역에서
캐나다두루미 sandhill crane 의 둥우리에 미국흰두루미 whooping crane 의 알을
추가로 넣어 부화시킨 실험적인 보전 전략도 좋은 사례가 된다. 미국흰두루미는
건강하게 자라 어미새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수컷과 짝을 이루어 자신의 새끼를
키우지는 못했다(주2). 새끼를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를 자신의 어미로부터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흰두루미의 고유한 비전(비밀할 비, 전할
전)이,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한부류 같은 캐나다두루미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미국흰두루미의 아기 키우기 비전을 알아내서 다음 세대의 전달하는 것은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 (주1) '조선일보', 이규태코너, 1995 년 2월 26일자.
  * (주2) Primack(1995).
  이와 같이 야생성을 유지한 세대와 세대 사이의 정보 전달과 그 정보를 활용하기
위한 훈련 과정이 보전되지 않으면 생태계 기능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물 다양성 보전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생태계 보전을 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유전자와 생물종 보전만으로는 정보 전달과 가공, 이용을 위한
훈련 과정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와 관련된 원리는 아직 생태계 현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다만 에너지와 물질의 보존 법칙은
성립하지만 정보 보존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면 내가 가진
사과(물질의 일종) 하나와 지식(정보의 일종)을 두 사람 이상이 공유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사과는 그 일부를 할애해야 하므로 나누어야 하지만 지식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정보는 공유하는 과정에서 증폭될 수 있다. 또한 인간 문명에
작용하는 에너지 형태의 대부분은 이동을 할 때 물질의 이동을 동반해야 하므로
문제를 야기하는 반면, 정보 이동은 반드시 물질이 매개하지만 동반하지 않아도
일어난다.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의 증폭 특성과 함께 물질을 반드시 동반하지
않아도 되는 이동 특성은 물질과 에너지에 기반한 기존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또한 머지않은 장래에 정보 원리를 확립하고 그
원리를 이용하여 생태계 현상을 구명하고자 하는 정보 생태학이 출현할 것이라
예상한다. 
    (따라 보기 4) 육상 생태계와 수중 생태계

  육상 생태계와 수중 생태계는 생태 원리가 공통으로 운용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광합성을 하는 식물은 육상에 고착되어 있고 크기가 크며
상대적으로 수명이 긴 반면, 수중에서는 일부 대형 조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착되어 있지 않아 떠돌아다니는 경향이 있으며 크기도 매우 작고 수명이 짧다(주).
이러한 차이는 육상과 수중의 서로 다른 물리적인 환경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된다. 육상에서는 공기가 물처럼 식물을 지탱하는 힘을 제공하지 않기에 식물
스스로 목질부(나무 목, 바탕 질, 나눌 부)를 생산해야 하는 반면, 물은 높은
부력으로 인해 식물체를 받쳐 주는 조직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오히려 물이 요동될
때는 그러한 조직이 큰 식물체를 훼손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긴 진화 역사를
통해서 두 환경이 선택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단면이다.
  * (주) Pianka(1994), 77쪽.
  생물체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부피에 대한 표면적 비는 작아진다.
생물체가 외부와 반응하는 통로는 표면에 있기 때문에 환경 또는 다른 생물과의
정보 교환은 표면적이 클수록 커진다. 반면에 부피가 늘어나면 외부와의 교류가
적어지는 반면에 자신의 고유한 기질을 보유하는 경향은 증대한다. 따라서 부피에
대한 표면적 비가 작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닫힌 계'가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이것은 내부에 포함된 물질과 정보를 보유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식물은 광합성의 수행과 함께 육상의 물질 보유 기작에
중요한 수단이 된다. 반면에 수중의 플랑크톤은 크기가 작은 '열린 계'로서 물질의
흡수와 방출이 상대적으로 빨라서 단위 무게당 광합성 속도가 육상 식물보다 훨씬
빠르지만 작은 크기 때문에 물질 보유체로서의 기능은 그다지 높지 않다. 이로부터
물의 부력을 이용해 큰 몸집을 지탱할 수 있는 수중의 동물들이, 상대적으로 큰
물질 보유 기작을 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육상에서는 식물과
낙엽을 포함한 토양 유기물이 상대적으로 큰 생물량을 차지하지만 바다에서는
동물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표 1-2 참조). 이러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육상 생태계에서는 식물이 광합성을 위한 살림살이를 대부분 꾸려 가는 반면에,
수중 생태계에서는 광합성의 직접적인 과정은 플랑크톤이 맡고 간접 기간 산업인
영양소 보유는 동물이 맡는 역할 분담이 진행되어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표 1-2. 육상 및 수중 생태계의 생산성 비교(주1)
    표면적(10^45,3456,124,356,126,13,134^)
  육상: 145
  수중: 365
  육상: 수중 = 1:2.5
    대략 부피(주2) (10^45,3456,124,146,356,13,134^)
  육상: 14.5
  수중: 1445
  육상:수중 = 1:99
    순일차 생산성(10^3456,124,146,356,13,134^)
  육상: 110.5
  수중: 59.5
  육상:수중 = 1:0.54
    동물 생산(10^3456,124^ 톤 ^456,34^ (년)
  육상: 867
  수중: 3067
  육상: 수중 = 1:3.54
  (주1) 자료: Whittaker(1975).
  (주2) 육상 서식지의 평균 깊이는 100 미터로 가정하고 평균 수심은 4000 미터를
기준으로 추정했다.
  한편 식물과 토양 유기물은 영양소에 대한 탄소 비가 높은 반면에 동물의 몸은
영양소에 대한 탄소 비가 낮다. 이는 육상에서 식물체가 탄소 보유고라면 동물과
미생물은 영양소 보유에 상대적으로 큰 공헌을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나아가
순일차 생산량 중에서 동물 생산으로 전환되는 바를 보면 육상에서는 0.8
퍼센트이며 바다에서는 5.2 퍼센트가 된다. 이는 육지와 비교하면 바다의 전체
생물량 중에서 탄소를 제외한 영양소의 비중이 바다에서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 가지 대립 가설로 설명해 볼 수 있다. 가설 1은 두 생태계에
나타나는 생물체의 영양소에 대한 탄소비와 동물의 동화율의 차이는 단지 바다와
육지의 물리적인 차이가 초래한 것이며, 영양소는 선택 작용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가설 2는 주변 환경에서 공급되는 원소들에 비례하여 생물체의
구성비가 조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가정하여, 육지보다 바다의 영양소 공급이
원활하다고 보는 유추다.
  한편 더 귀한 자원을 보유하는 능력이 뛰어난 생물계가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고
가정하면 육상에서는 에너지를 담는 탄소 보유가 생물 활동에 주요 인자인 반면에,
바다에서는 영양소 보유가 생물 활동에 더 큰 제약 인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 3을
유추할 수 있다.
  아직 이 가설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찾아내지 못하고 있지만, 육상의 영양소
보유 능력이 발달하면 할수록 바다의 생산성은 양영소에 의해서 제한될 가능성이
커진다. 어쩌면 인간의 교란이 없던 오래 전 옛날에는 땅의 영양소 보유 기작이
충분히 발휘되고 더 많은 영양소들이 육상 생물체에 축적되어, 바다의 영양소 결핍
현상은 오늘날보다 심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땅의 영양소 보유 기작이
인간의 간섭으로 무너지면서 수계를 부영양화시키고 있으니 땅과 바다의 긴 역할
분담에 금이 가고 있는 꼴이다. 
    제2부 땅에서 바라보고

  갑자기 웬 낙엽 타령일까? 낙엽은 나무의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하나의 매듭이다.
그 매듭은 보다 큰 삶의 흐름을 이어 주는 고리다. 이 고리의 제자리는 어디일까?
인간이라는 생명이 이 땅에 나타날 때까지 묵묵히 준비를 해 온 낙엽의 자리를
찾아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여름 뙤약 볕에서 할 일을 마치고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 본연의 모습은 고귀하다못해 나는 숙연하게 한다.
    낙엽은 자원이다.

    단풍잎

  너무 오래 살아 마침내
  산 채로 죽어가기 시작한다
  눈빛이 사그라들고
  코가 문드러지고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오고
  입가에 구더기가 생기고
  내장은 모두 썩어버렸다
  하반신은 말할 것도 없다
  죽을 건더기조차 남지 않았다
  호적에서 지워버릴 이름만 남겨놓고
  이제 땅속으로 잦아들거나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큰 나무 그림자 남겨놓고 미련 없이
  훌쩍 떨어져내리는 단풍잎
  못내 부러워하며
                    (김광규)

  뒹구는 낙엽을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관찰 대상으로 삼은
시기는 강산이 바뀌는 세월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 년 7개월가량 다니던 직장을 무작정 떠나 1980 년 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
입학하는 것을 계기로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마땅치
않았다. 그 해 겨울 서울대학교 문리대 산악회 졸업생 자격으로 남미 아콩카과
등반에 참여하게 된 것도 잡히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려 했던 것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떠도는 가운데 대학원 공부에도 충실하지 못한 채 훌쩍 시간이 흘렀다.
석사학위를 받아도 오라는 곳이 없었고 앞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1983 년 여름
처자를 남겨 둔 채 혼자 유학을 감행한 행위는 지금 돌이켜 보면 불안한 길
찾기였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유학 첫 학기는 내 경우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
힘들었던 첫 학기가 마지막으로 지나가던 날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말 고사를
끝내고 버지니아 공대가 위치한 작은 읍 블랙스버그를 거의 떠나서, 주변이
여지없이 을씨년스런 때였다.
  기말 고사가 끝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는 생화학 시험이 배정되어 있었다.
생화학은 대학 3 학년 때 막연히 즐겼던 과목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팽개쳐
둔데다가 내가 속한 환경 프로그램에서는 그 과목을 듣는 사람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영어 탓에 물어 볼 동료마저 마땅히 없어 그 학기 내내 고생을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힘들었던 시험을 마친 다음 허탈감을 안고 갈 곳 없이
캠퍼스를 거닐며 마음을 삭여야 했다. 그러다 문득 내 눈은 낙엽들이 걸려 있는
작은 떡갈나무 군락과 한 그루 소나무 아래에 머물렀다. 소나무 아래에는 넓은 잎이
쌓여 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나무 아래에는 낙엽을 잡아 줄 만한 작은
나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림 2-1.
  그림설명: 참나무와 소나무 아래에 낙엽이 쌓여 있는 모습(주).
  * (주)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스버그에 있는 버지니아 공대 캠퍼스에서 1983 년
12월 촬영.
  소나무 아래에서는 다른 식물들의 잘 자라지 못한다. 때로 고고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듯이, 고고한 소나무는 하찮은
식물들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는다. 소나무는 다른 식물들이 싫어하는 물질을
분비하는데 이런 현상을 타감 작용 allelopathy 이라 한다. 소나무에는 이런 타감
작용이 분명한 반면에 참나무류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소나무의 타감 작용이
분명한 까닭은 자신의 잎이 침엽이라 바람에 날려 갈 염려가 없어, 굳이 낙엽을
잡아 줄 동료가 없어도 되는 상황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참나무가 다른 사람들과 인생을 의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나무는 오로지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여럿이 모여 자료를 공유하고 토론을
즐기는 친구가 참나무의 속성을 가졌다면, 혼자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친구는 소나무와 비슷하다. 고고한 소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선망하던 나무이기는
하지만 고고함만이 인간 사회의 필요 충분 조건은 아니다. 사회가 성숙할수록
난제는 쌓여 가고 난제가 쌓이면 쌓일수록 독불 장군식이 아닌, 어우러져 대처해
가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반면 이처럼 어우러져 사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고고함 또한 그 성숙한 사회가 있게 하는 필수적인 밑거름임에는
분명하다(주).
  * (주) 이 비유는 제5부의 '생태계의 발달'에서 다루는 내용과 관계가 있다.
천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연 생태계의 발달에서, 긴 세월 동안 외부적인 교란이
없으면 소나무 숲은 참나무 숲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제 어떤 요인이 침엽수와 활엽수의 진화를 초래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하나는 타감 작용을 강하게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타감 작용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침엽수는 바람에 날려 가기 어려운 잎 모양 때문에 굳이 다른 식물을
통해서 잎의 손실을 막지 않아도 되는 전략을 지님으로써, 자연에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었다(주). 그러나 나는 아직 소나무의 잎 모양이 타감 작용의 유무를
선택하는 데 기여한 정도를 확인할 만한 실험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비난받아야 할 부분은 나무를 인간처럼 취급하는 점이 아니라, 바로 비유를
통해 만든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정해 내지 못하는 점이다.
  * (주) 선택과 관련하여, 왜 이 땅에 세계화라는 이름과 함께 영어가 만연하는가
하는 엉뚱한 의문을 제기해 본다.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선택되는 현상을 많이
보았기에, 우리의 인간 세계가 그런 사람을 선택할 것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세상을 온통 영어색으로 물들이는 쪽으로 잘못 가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에 나는 동조하지 못한다. 잘못된 세계화로 인해 세계어가 한글을
밀어 낸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만^5,5,5^.
  안데스 산맥 깊숙이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선택될 리
없다. 그 곳에 선택될 사람은 아마도 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와 같이
어떤 땅에서는 소나무의 전력이 선택되고 어떤 땅에서는 참나무의 전략이 선택된다.
물론 그 선택은 한가지 재주에 기반하지 않고 종합적인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부분의 차이가 큰 기여도를 발휘할 수 있다.
아무튼 지금 존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재주와 행위를 바탕으로 선택된
대상이다. 무엇이 존재하게 하는 것일까?
  아무튼 하찮은 낙엽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러했다. 
    봄에 지는 낙엽

  매년 12월 25일이면 산우(뫼 산, 친할 우)들과 함께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운악산에 간다. 그 곳에는 1973 년 그 날 빙폭을 타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산우 심상전 군과 권오준 군의 추모비가 있기 때문이다.
  1993 년 12월 24일 금요일에는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귀가한 것으로 기억된다.
마침 대성리에서 있을 모임에 현진오 가족과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의 퇴근을
기다려야 했다. 시내 도로가 온통 막혀 퇴근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우리는 전화
연락을 한 뒤에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그리고 원당 시장에서 몇 가지 물품을
사고는 7시경 과천으로 향했다. 봉천동에 있는 아파트에서 과천까지 한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남부순환 도로도 막혀 있었다. 저녁을 함께 하고 출발한 시각은
아마도 9시경이었으리라, 대성리 통나무집에 도착했을 때는 11시에 육박해 있었다.
  산악회에서 동료 의식을 다진 80 년대 학번들의 오랜만에 많이 참석해서 비교적
화목한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 모임이 매양 그러하듯 산악 회원인
남자들 그리고 아내들, 애들 세 무리가 끼리끼리 노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 비교적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셈이었다. 술을 마시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아마도 12시가 넘어서 쌓인 피곤탓에 먼저 잠들어야 했다. 새벽 5시경 현진오의
높은 목소리에 잠이 깼다. 얘기의 내용에는 나에 대한 것도 들어 있었다. 잠이 깨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동참했다가 한두 시간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현진오는 국립공원 관리에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해서 내가
침묵하고 있는 점에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현장에서 부딪치는 과정 중
쌓인 울분을 그렇게 토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은 사실 내 뒷전에 있었다.
  쏠려오는 요구들이 실상 내 관심사와 거리가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름대로 사태를 직시하고자 노력하지만 아직 내 전공과 거리가 있는
문제들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그의 감정적인 표현이 백번 옳기는 하지만 이 세상을
짊어지고 갈 능력이 내게는 없다. 더구나 지나간 학기까지 강의와 피로에 밀려 내
공부도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산적한 일들을 보면 아플 틈도 없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하고
있던 공부가 자연 보호와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번 학기 들어서 이래저래 그런 일에
연유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그러나 나 자신을 제대로 세울 때까지 남들의
비난에 성급한 대응일랑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때는 그의 감정에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5시 넘어서 잠든 후배들이 많았기에 아침 시간은 비교적 길었다. 대충 밥을
해먹고 11시가 넘어서 대성리를 떠났다. 일부는 먼저 서울로 돌아가고 대부분의
가족은 운악산 빙폭으로 향했다.
  아마도 계곡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12시 30분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애들을
데리고 길을 오르며 주변을 살폈다. 중간에 문득 계곡을 내려다보니 근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풍경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능선을 기준으로 왼쪽 사면의 참나무
군락들은 모두 빛이 바랜 잎들을 달고 있었다.
  대부분의 낙엽수는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군다. 낙엽은 잎이라는 공장에서, 투자하는
만큼 에너지의 양이 충분히 생산되지 않을 경우 조업 중단이 발생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던 잎이 영양소 공급이 신통하지 않자 일시적으로
공장 문을 닫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기에 가을이면 낙엽수의 잎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는  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겨울에도 내내 잎을 달고 있는 낙엽수의 모습을 본적이 없는가? 다음에
겨울 산행을 하면 그런 모습을 눈여겨보라. 다른 나무들과 비슷한 시기에 잎의
색깔이 변하기는 해도 겨우내 잎을 달고 있는 나무가 갈색을 띠고 우리 산을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참나무와 일부 단풍나무에 그런 경향이 있다. 또한
좀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만, 큰 나무보다 작은 나무가 그리고 바위투성이 산이나
건조하고 메마른 산의 능선부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참나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인e. 내가 관찰하는 관악산의 참나무는 가을에 색이 변한 잎을 겨우내 달고
있다가 만물이 태동하는 이른 봄이면 일시에 떨군다.
  * 그림 2-2.
  그림설명: 색이 바랜 잎을 봄까지 달고 있는 참나무. 1997 년 3월 16일(주).
  * (주)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소재한 관악산에서.
  왜 그럴까? 대부분의 나무들과 달리, 빛이 바래 광합성이라는 본래 기능을
수행하지도 못하는 잎을 겨우내 달고 있는 생존 전략이 자연 선택될 수 있었던 데는
무언가 예쁜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나무가 선택될 수 있었던
장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낙엽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소를 재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아닐까.
  겨울에 잎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이 땅의 강한 북서풍에 모두 날려 가지 쉽다.
반면에 봄에 떨어진 잎의 경우 멀리 도망가기 전에 이미 미생물의 활동이 시작되어
곧장 그것을 분해하므로 식물은 방출되는 영양소를 왕성하게 흡수하여 재활용할 수
있는 이득이 있다. 바람이 세고 경사가 급하며 바위투성이라 토양 영양소가
풍부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전략을 가진 나무가 선택될 확률이 높을 수
있다. 실제로 계곡에 비해 수분과 영양소가 척박하여 화강암투성이인 관악산의
능선부와 남사면에서 그런 나무들의 많이 보이는 것은 내 가정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벼락치기 공부를 한 수험생의 심리를 엿본다. 그는 시험
당일까지 머리 속에 든 예상 문제들의 답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머리 속에 간직하다가 필요할 때 풀어 놓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으리라.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깊은 우려가 그의 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으리라.
  1996 년 3월 대만의 임업연구원 유역 관리부에서 연구하는 킹 박사가 내게
들렀다. 임업연구원 신준환 박사의 안내로 우리는 관릉수목원을 함께 방문했다.
소리봉 가는 길 양쪽의 숲에서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여전히 잎을 달고 있었다. 나는
그 현상에 의문을 제기했고 킹 박사는 자신의 해석을 보탰다. 거울에 잎을 달고
있으면 아마도 잎 아래에서 새로이 돋아날 새싹을 보호하는 데도 이득이 될 것
같단다. 
    조릿대와 관중

  이상하게도 점봉산 연구지 부근에서는 남사면 일부 지역에만 조릿대가 서식하고
있다. 북사면에서는 가끔 있다고 하더라도 세력이 무척 약하다. 가을에 일년생
초본들은 빛이 바래고 이울지만 조릿대는 오히려 푸른빛을 더한다. 왜 점봉산의
조릿대는 남사면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는 것일까?
  1997 년 3월 24일 내 연구실에 들렀던 일본 기후 대학의 니시무라 박사는
대부분의 식물이 여름에 광합성을 왕성하게 진행시키는 반면에 일본의 조릿대는
오히려 그 때에 호흡으로 소비하는 양이 광합성으로 생산하는 양보다 많다고
말했다. 대신에 나무들의 활동이 약한 봄과 가을에 여름 동안 소비한 물질을
보충하니 독특한 전략인 셈이다. 아마도 여름에 무성한 잎으로 빛을 차단하는
나무와 다투지 않고 지역을 공유하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아울러 조릿대는 자기와
이웃을 위해 지역의 영양소 운명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1993 년 10월 23일 오후 2시경 점봉산 연구지에 도착하니 북사면은
10센티미터도 넘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이 없는 남사면에서 낙엽의 이동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정 높이를 따라 일직선으로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두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조릿대가 있는 곳과 없는 곳에 쌓여 있던 낙엽의 상대적인
이동거리를 비교해 볼 요량이었다.
  이듬해 봄 페인트가 묻은 낙엽들의 위치를 확인했지만 이미 염료가 탈색되어 찾기
어려웠다. 시사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던 실패를 바탕으로 그 대안을 찾았다.
나는 1994 년 11월과 12월, 2 회에 걸쳐서 남북사면의 한 곳에 색종이와 함께
페인트로 표시한 낙엽을 모아 두었다. 역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동 거리와 방향을
확인하여 조릿대의 낙엽 포착 정도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1995 년 5월 흩어진 색종이와 낙엽들의 위치를 확인한 후 지난번에 놓아 둔 곳을
원점으로 하여 좌표상에 표시를 해 보았다. 남북사면에서 조릿대가 없는 곳에
두었던 색종이와 낙엽은 특히 산정 방향으로 이동했지만 조릿대가 있는 곳의 낙엽은
전혀 이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릿대가 낙엽 이동을 방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동시에 남북사면의 조릿대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 각 세
곳, 그리고 북사면의 세 곳으로부터 가로^5,23^세로 각 50cm 지역에 축적된
낙엽량을 채취하여 무게를 달아 보았다.

  * 표 2-1. 임상의 지역에 따른 낙엽 축적량의 비교(건중량 g^34,126,356,134^)
취재장소
    북사면(n = 3)
  1995 년 5월 28일: 1076. z9(^26,35^69.6)(주)
    남사면, 조릿대 없는 지역(n = 3)
  1995 년 2월 18일: 215.9(^26,35^144.6)
  1995 년 5월 28일: 38.9(^26,35^10.7)(주)
    남사면, 조릿대 있는 지역(n = 3)
  1995 년 2월 18일: 441.3(^26,35^37.3)
  1995 년 5월 28일: 415.5(^26,35^72.1)
  * (주) 습기가 있는 상태로 시료의 무게를 잰 다음 오븐에서 말리는 동안
소실시켰기 때문에, 마침 측정해 두었던 세 지역의 토양 수분 함량이 낙엽의 수분
함량과 비례한다고 가정하여 추정한 건중량이다.
  이 지역의 연간 낙엽 생산량은 대략 1제곱미터당 360g 가량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자료는 남사면의 조릿대가 없는 지역에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날려
조릿대가 있는 지역과 북사면으로 이동하여 축적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그렇게 이동하는 낙엽들을 보았기에 우리는 실험 결과를 인정한다.
  * 그림 2-3.
  그림설명: 조릿대 밭에 있는 낙엽(주)
  * (주) 점봉산에서 1997 년 4월 19일 촬영.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시 상상을 한다. 그 곳의 조릿대는 큰 나무 입장에서 보면
영양소에 대한 경쟁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조릿대는 자기가 필요한 양
이상으로 낙엽을 매개로 하여 영양소를 포착하는 공헌을 하지 않을까. 이 포착은
극히 우연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지역의 영양소 보유 능력을 증진시키고
있다. 물론 그렇게 포착된 낙엽에 함유되어 있는 에너지는 그 곳의 벌레들과 벌레를
먹는 새들의 먹이 기반이 될 수밖에 없다.
  온대 지방 삼림의 경우 연간 순일차 생산성의 약 25 퍼센트가 낙엽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니(주) 이는 행동학자들을 매료시키는 화려한 동물의 몸짓 중 반의
반은 낙엽에 포함된 에너지의 농축으로부터 유래된다는 말이다.
  * (주) Woodwell and Whittaker(1968).
  가톨릭대 생물학과 조도순 교수는 서울대학교 식물학과 2 년 후배이자, 함께
생태학을 공부하는 인연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전에는 서로 학문적인 접촉을 가질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연락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연구지를 공유하게
된 것은 점봉산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그러니까 1993 년 가을 학기에 조
교수는 서울대학교 생물학과에서 군집 생태학 강의를 했다. 나는 생태계의 구조적인
측면에 취약하기 때문에 나와 접촉을 자주 하는 학생들에게 조 교수의 강의를
듣도록 권했다. 아마도 일곱 명 정도 되는 환경대학원 학생들이 조도순 교수의
강의에 참여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군집 생태학 강의에 흥미를 느끼고서 거기서
다루어진 내용들을 점심 식사 때나 술자리에서 화제로 삼아 내게 전달했다. 그의
시험 문제 중 점봉산의 관중(주)에 대한 내용은 학생들과 내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 (주) 관중은 면마과(고사리과)의 일종이다. 이 식물을 조도순 교수는
'나도히초미'로 식별했지만, '이창복 도감'(1979)에 의하면 나도히초미는 남쪽 섬에
자라는 상록성 고사리로 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이 식물의 학명은 필자가 아직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
  생장기의 관중은 줄기를 나열하여 마치 반쯤 접은 우산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가을 생장이 끝나면 하단의 지지력을 잃은 줄기들이 그대로 땅에
누워, 수평으로 펴놓은 우산대 모양을 한 채 겨울을 난다. 조 교수는 그러한 독특한
과정이 식물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지를 물었다. 일부 학생들은 줄기가 서 있지 않고
누움으로써 공기와의 접촉이 적어지고 추위에 견디기 쉬우며, 또 초겨울에 줄어든
햇빛을 받는 면적이 늘어날 수 있다는 등 나름대로의 추측으로 분분한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아직 조 교수가 어떤 정답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그에게도 마땅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조 교수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부터는
점봉산에 갈 때마다 관중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 그림 2-4.
  그림설명: 가을과 초겨울의 관중 모습(주)
  * (주)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소재 점봉산에서.
  나아가 그 동안 염두에 두고 있던 주제와 결부시키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 누워
있는 관중의 줄기 아래에는 더 많은 낙엽들이 쌓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더
많은 낙엽을 잡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생장 기간 동안 삿갓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배열은 마치 통발처럼 그 곳으로 떨어진 낙엽과 작은 가지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구조다. 그렇다면 생장 기간에 포착했던 중앙의 낙엽이 줄기
밑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있는가? 그해 가을 나는 지극히 간단한 실험을 구상했다.
색종이를 관중 줄기 배열의 중앙부에 두고 나서 겨울 동안 어떻게 이동하는지
살펴본 것이다. 관중 줄기 아래와 줄기가 없는 부분에 쌓이는 낙엽의 양도 비교해
보았다.
  * 그림 2-5.
  그림설명: 고사리의 일종인 부착 식물에 갇힌 낙엽(주).
  * (주) 대만 복산에서 1995 년 4월 8일 촬영.
  1995 년 4월 국민대 김은식 교수, 전북대 이병훈 교수, 한남대 고성철 교수와
함께 국제 장기 생태 연구망 형성을 위해 대만에 갔을 때 매일 300 명의 입장객만
허용된다는 식물원이 있는 복산(복 복, 뫼 산)에서 관중의 경우와 비슷한 모습을
목격했다. 무성의 탓에 식물의 이름을 알아 오지 못했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는데,
나무 위에 부착되어 자라는 경향이 있는 어떤 상록수에서 거의 유사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식물의 관중과 다른 점은, 잎을 눕혔다가는 낙엽을 모두 잃고
말 처지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록수라서 살아 있는 동안은 우산을 뒤집어 놓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속에 갇힌 낙엽으로부터 영양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실험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어서 1995 년 9월 23일 점봉산에서 곧장 실행에
옮겼다. 아직 관중은 줄기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하나씩 몸을 눕힐
것이었다. 북사면과 계곡에 있는 관중을 다섯 그루씩 택하여 중앙부에 색종이를
비치해 두었다. 10월 13일에 가 보니 계곡에 있는 관중들은 여전히 줄기를 세우고
있고 줄기 가운데 놓아 둔 색종이 위에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색종이를
비치했던 북사면의 관중 다섯 그루 중에서 두 그루는 한두 줄기가 넘어진 상태로
가운데 쌓인 낙엽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고 세 그루는 누워 있었다. 줄기가 넘어진
관중 중 한 그루에는 색종이가 조금 흩어져 있었지만 두 그루의 줄기 아래에는
색종이가 가볍게 눌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막연한 추측이 사실대로 나타난
모습이었다.
  관중의 줄기가 낙엽을 감지하는 기작을 가지고 있어서 줄기가 누울 때 일부러 그
위에 쓰러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결과는 분명히 관중이 10--13개의
줄기를 원형으로 나열하여 통발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떨어진 낙엽을 주변에 붙들어
놓는 현상이다. 그 과정이 관중의 주변에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낙엽 축적을
초래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축적된 낙엽이 분해되는 동안 방출되는 영양소는
관중에 의해서 활용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더군다나 관중이 차지하고 있는
북사면 전체에서는 낙엽으로 매개되는 영양소 이동이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만큼 지역의 영양소 보유력은 관중으로 인해 증대된다.
  그 날 처음으로 관중 한 포기의 줄기 수와 길이, 줄기들의 모여 이루는 하부
원형과 상부 원형의 지름을 측정했다. 관중은 80--90센티미터 길이의 줄기
9--13개가 원형으로 배열되어 그 전체 모습이 뒤집어 놓은 삿갓과 같다. 줄기가
배열된 하부 지름은 8--10센티미터이며, 줄기의 끝이 이루는 원형의 지름은 대략
110--120센티미터다. 하부 원형 안에는 다음해에 나올 여린 새싹들이 양손을 모아
안으로 구부린 손가락처럼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관중의
중심부에 쌓여 있는 낙엽량을 수거하여 무게를 달아 두도록 부탁했다. 내년 봄에는
관중 주변의 1제곱미터에 쌓이는 낙엽량을 다른 지역의 낙엽 축적량과 비교해 보고,
여건이 허락하면 줄기 전부가 눕는 과정과 모습을 비디오로 관찰해 볼 작정이다.
  줄기가 쓰러지기 전에 관중 한 그루가 잡는 낙엽은 평균 27그램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줄기의 중앙에 잡히는 양만 나타낸 것이므로 줄기가 비탈을 타고 흘러내리는
낙엽을 가로막고 있는 양까지 고려하면 그 역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1996 년 4월 11일 15 대 국회의원선거를 마치고, 오후 늦게 1 학년 학생 두 명을
포함하여 여섯 명이 점봉산으로 향했다. 겨울 동안에도 한 달에 한 번씩 산으로
들어갔지만 가벼운 관찰로 끝났기에 점봉산 연구는 봄날과 함께 다시 풀렸다.
북사면에는 여전히 잔설이 50여 센티미터 두께로 남아 있었지만 대지의 숨결(토양
호흡)과 영양소, 효소 활동을 측정하는 학생들의 작업을 돕는 한편 관중에 대한
관찰도 계속했다.
  겨우내 깊이 1 미터가 넘는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관중은 눈이 녹은 곳에서는
여전히 초록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관중의 중앙부에 남아 있는 낙엽을 긁어 내고
보니 썩은 낙엽이 거의 흙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마치 벌레의
똥처럼 지금 1 밀리미터 이하의 새까만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올봄 새싹이
나올 중앙부에 남아 있던 낙엽을 벌레들이 먹고 남겨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지름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관중 중앙부의 세계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생 관계를
상상한다. 관중은 낙엽을 모으고, 벌레는 낙엽을 먹고 똥을 배설하여 비가 오면
영양소가 녹아날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영양소를 기반으로, 땅이 풀리면
식물이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그냥 우연으로만
생기는 것일까. 긴 세월 동안 자연이 익힌 지혜일까. 자연의 목적 의식을 거부하는
분들에게, 그것이 자연 선택된 일시적인 현상일망정 결과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관중의 삶에서 애절한 부모 사랑을 본다. 쌈지 돈을 아껴서 미욱한 아들에게
무언가 남기시려는 부모님의 처절한 삶을 본다. 더 이상 벌이를 할 수 없는 가을엔
스스로 몸을 눕혀 낙엽을 포착하고, 그 낙엽으로 벌레들을 꼬여 들인다. 벌레는
낙엽을 삭이고, 삭은 낙엽에서 나오는 영양소는 당연히 이른 봄 어린 관중이 크는
데 빠질 수 없는 자원이다. 
    암벽 위의 잡풀

  1993 년 4월 25일 일요일에는 서울문리대 산악회에서 인연을 맺은 이동훈,
강돈구, 서영배, 강태민과 함께 인수봉 설교길을 올랐다. 오르는 동안 봄꽃과
생태학적 현상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산행은 연구실 주변에서
쌓이는 한주일의 피곤을 지울 수 있어서 언제나 좋다.
  이 날 설교길 등반에서는 문득 벼랑에서 살아가는 작은 낙엽수의 처절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거기에도 아름다운 협동으로 난관을 극복해 가는 광경이
있었다. 낙엽수 주변에는 거의 어김없이 잡풀들이 함께 한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의 산행에서는 낙엽이 잡풀들에 잡혀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다. 이 낙엽
또한 잡풀이 없으면 날아가고 없으리라. 이 잡풀들이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빗물에
포함된 척박한 영양소를 흡수하는 과정을 나는 여태껏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림 2-6.
  그림설명: 인수봉 암벽에 걸린 관목, 잡풀 그리고 낙엽(주).
  * (주) 서울시 북한산 인수봉 설교길에서 1993 년 4월 25일 촬영.
  조금씩 자연에 눈떠 가는 내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은 연구실이 있는 건물
주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그 곳에서도 빨간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다행히 화단 둘레를 따라 회양목을 줄지어 심어 두어서 가을과 겨울이면
낙엽이 갇혀 있는 형상이 연출된다. 목련 아래 심어 둔 철쭉들이 목련 잎을 잡아
두고 있는 모습이 완연하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큰 나무와 작은 나무의 협동을
연출시킨 아름다운 풍경이다.
  * 그림 2-7.
  그림설명: #1 회양목 울타리에 잡히는 단풍나무 낙엽, #2 목련나무 아래서 낙엽을
보유하고 있는 철쭉(주).
  * (주) 서울대학교 15 동 건물 주변에서 1994 년 11월 19일 촬영. 이 어우러짐은
신축 공사로 사라졌지만 그와 비슷한 풍경을 우리 주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이왕이면 도회지의 녹지에서 많이 일어나게 할 경우에 우리에게
돌아올 이득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먼저 낙엽이 녹지에 남아 있는 만큼 가을과
겨울에 미화원 아저씨가 쓸어 모아 만들어 놓을 폐기물량이 줄어든다. 녹지에 남아
낙엽은 봄과 여름 동안 썩어서 토양으로 되돌아간다. 썩은 낙엽이 공급하는
영양소는 수목의 생장에 공헌하며 유기물 함량을 높여 토양을 푸석푸석하게 한다.
낙엽이 쌓여 생긴 부식토는 흔히 공사장에서 파헤쳐진 토양보다 색이 까맣고 입자가
가늘어 부드럽다. 토양이 푸석푸석한 유기질 토양의 입자들 사이에는 공극이 많아
빗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기 쉽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물이 많으니, 점차 고갈되고
있는 도시의 지하수를 충원할 수 있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물이 많은 만큼 비가 오는 동안 늘어나기 마련인 지표
유출수의 양이 줄어들고, 큰 강으로 몰려드는 물의 양이 적어져서 홍수 피해도
그만큼 적어진다. 이처럼 낙엽이 썩어 지표 유출수의 양을 줄이는 것은 숲이 많으면
홍수 피해가 줄어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저 눈에 띄는 것들을 관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제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처지이니 작은 나무나 풀, 죽은 나뭇가지들이 비탈에서 낙엽
보유에 얼마만큼 이바지하는지 궁금해진다.
  내가 사는 서울대 교수 아파트에서 연구실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20분이면
족하다. 여름에 뜨거운 햇살이 방해하고 겨울에 눈길이 사람을 성가시게 하면 나는
걷기를 포기한다. 가을이라도 바쁜 일로 차를 타고 연구실을 나오기 시작하다가
타성이 생겨 버린다. 1995 년 9월 21일, 가을 날씨가 되었건만 여름 타성이 그대로
붙어 있던 바쁜 출근 모습을 드디어 벗고 오랜만에 걸어서 연구실에 나왔다.
  걷는 것은, 밀린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가 되어 여러모로 좋건만 바쁜 삶이 걸음을
허용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검도를 시작하고부터는, 아침마다 관악산을
두 시간 남짓 오르면서 가졌던 정리 시간을 빼앗긴 면도 있다. 아무튼 지난 한 해
동안 바쁜 움직임 때문에 미루어지고 있던 착상들을 정리할 기회가 생겼다.
  그 날 아침 걷는 동안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이왕지사 매달 점봉산을 다니며
관찰과 실험을 도모할진대 가벼운 마음으로(다른 실험에 비해서 시간을 많이
요구하지 않을 것이므로) 조릿대와 관중 그리고 떨어진 나뭇가지들이 자아내는 낙엽
포착량을 정량하는 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
  걸으면서 정리한 내 의문과 간략한 실험 방법에 대해, 점봉산을 함께 다니는
학생들과 의논한 끝에 조릿대, 관중, 죽어 떨어진 나뭇가지가 있는 연구지 비탈에
일정량의 색종이와 함께 색소를 뿌린 낙엽을 비치하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위치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 간단한 실험은 조릿대, 관중, 나뭇가지에 의해서 이동이
저지되는 낙엽의 양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한 이듬해 봄에 그 지역에
축적되어 있는 단위 면적당 낙엽량을 비교하면 일정 지역의 낙엽 보유량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삼림에서 낙엽은 내가 가볍게 생각해 오던 것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점봉산
연구지에서 연간 떨어지는 낙엽량은 1제곱미터당 360그램 정도 된다. 이 낙엽의
에너지량은 그램당 4.7 킬로칼로리다. 에너지 질의 문제를 고려해야 되겠지만
1.5제곱미터에서 생산되는 낙엽의 에너지량은 우리 성인들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열량에 해당한다. 사실 삼림 전체에서 생산되는 유기물은 대부분 삼림을 근거로
살아가는 생물들을 낙엽을 통해서 먹여 살린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장난 같은 실험 뒷면으로는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의 양을
정량하고 그 낙엽들이 비바람에 씻겨 이동하여 임상에서 제자리를 찾는 다음의 낙엽
분포 양상을 그릴 상상을 하고 있었다. 바람과 중력에 의한 낙엽 이동 방향과
임상의 존재물들이 그 이동에 미치는 영향들을 고려하여 도면에 낙엽 분포 양태를
그림으로 표현해 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모형으로 기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중 마침
임업연구원 신준환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 메인 대학 삼림 생태계학과의 매콰이어
Douglas A. Maguire 박사의 한국 방문 일정에 잠깐 동행했다(주). 내 생각을
말했더니 그는 재미있는 발상이라며 관심을 표현했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그는 거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며 지질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해 주었다. 다행히 몇 개월 후 지질학과 이강근 교수가 미국에 갈 일이 있어 이
소프트웨어를 구입해 두었지만 아직은 검토를 기다리는 상태다. 학생들마저
시답잖게 바라보는 이 장난 같은 실험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립될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낙엽의 중요성은 전에 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 (주) 매콰이어 박사는 나중에 오레곤 주립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상의 낙엽 분포 유형을 기술하고 거기에 물의 흐름을 보탠 다음, 어느 만큼
낙엽이 하천을 따라 흘러가며 그 낙엽을 기반으로 어느 만큼의 물벌레가 살아가고
또 그 물벌레를 먹이로 어느 만큼의 물고기가 생성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농경지를 근거로 살아가는 쥐 같은 귀찮은 동물들이 물벌레를
먹음으로써 하루 주변의 농작물을 덜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낙엽을
기반으로 작은 동물들이 창궐하여 농작물 훼손을 유발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내 상상은 이렇게 작은 일들에 매여 가고 있다. 크게 보아서 점봉산 자연
보전 지구의 연간 일차 생산성은 어느 정도며, 그 중 얼마가 낙엽으로 먹이 사슬을
따라 이동하며, 그 낙엽은 어느 정도 야생 동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또한 어느
정도의 낙엽이 물에 사는 동물의 먹이로 공헌되는 것일까? 이런 양의 정량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떨어진 나뭇가지

  지금은 스웨덴의 한 호수에서 먹이 그물 문제와 관련된 이론적 연구를 하고 있는
강신규 군을 따라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무갑산을 간 적이 있다. 그는 처음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유역의 토지 이용과 하천의 수질 관계를 정량화하는 모형을
구상했다. 물은 땅에서 시작되니 땅의 자연적인 모습과 인간이 바꾸어 놓은 토지
이용에 따라 물의 양과 질도 달라질 것은 자명한 것으로 보고 그 인과 관계를
정량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볼 대상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며 마땅한 곳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무갑리 유역도 그런 고려
대상 중 하나였다.
  때는 1994 년 1월 27일이라 겨울이 한창이었다. 강신규 군의 차로 오전 9시
30분에 서울대를 출발하여 11시에 경기도 광주군 무갑리의 건국대학교 연습림
관리소 앞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부터 축산 단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농촌 소유역의
물질 입출력을 고려한 수질의 모형 구축과 측정을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다가 치더라도 그 날의 목적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겨울 산행이었다.
연습림 부지를 마주하고 무갑산 정상을 향해 눈 쌓인 비탈길을 오르는 산행을
시작했다. 길이 비교적 가팔라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바쁠 것 없이 사진을 찍으며
느릿느릿 산을 올랐다. 느린 걸음에 새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 쌓인
비탈에서 죽은 나뭇가지들의 역할이 분명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떨어진 나뭇가지는 경사진 곳곳에서 낙엽의 흐름을 저지하는 작은 댐을 만든다.
이러한 모습은 항상 물이 흐르고 있는 작은 개천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쌓이는 나뭇가지와 낙엽을 기반으로 나타나는 생태적인 특성이 하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를 흔히 유기 쇄설물 댐 debris dam 이라 부른다. 그렇게
축적된 나뭇가지와 낙엽은 생물의 서식처가 될 뿐 아니라 생물의 먹이가 된다.
더구나 이들은 독특한 성분을 기반으로, 강물에 녹아 떠내려가는 영양소를 긁어모을
수 있다.
  * 그림 2-8.
  그림설명: #1 떨어진 나뭇가지가 작은 댐을 이루어 낙엽의 이동을 막고 있는
모습. 왼쪽 아래의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은 나뭇가지에 걸려 쌓인 낙엽의 깊이를
나타낸다. #2 죽어 쓰러진 통나무 부근에 쌓이는 낙엽량이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주).
  * (주) 경기도 광주군 무갑리 무갑산에서 1994 년 1월 27일, 강원도 인제군
기리면 진동리 점봉산에서 1997 년 4월 19일에 각각 촬영.
  그 이후 죽어 넘어진 나무가 낙엽의 흐름을 막고 있는 모습은 여러 곳에서
관찰되었다. 바람이 심한 비탈에서 삶을 꾸려가는 나무들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낙엽 유실로 인해 척박해지는 토양 문제가 분명 골칫거리다. 점봉산에서도 죽은
나무와 그 주변에 쌓이는 낙엽이 한바탕 어우러짐으로써 난국에 대처하고 있다.
      ------------
    미생물의 식생활도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가 조잡한 음식을 주로 먹는 경우에는 영양소의 균형이 맞지 않아 건강상에
문제가 생긴다. 이럴 때는 흔히 그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물을 먹거나 약국에서
비타민 등을 구입하여 복용함으로써 대사 활동에 적당한 균형을 이룬다. 미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죽은 나뭇가지는 세균이나 곰팡이 또는 작은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감미로운
수액이나 낙엽 등과는 질이 매우 다른 먹이 자원이다. 미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질소나 인에 비해서 나뭇가지는 유기 탄소의 함량이 높다. 따라서
나뭇가지는 대사 활동이 요구하는 영양소의 균형이 맞지 않으므로 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생물은 주변에서 부족한 성분을 끌어와야 한다. 이 경우 미생물들은
토양수나 빗물에 녹아 있는 영양소를 왕성하게 섭취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생존 전략을 구축한다. 따라서 죽은 나뭇가지 주변을 지나는 빗물에 포함된
영양소들을 미생물에 의해서 소비된다. 결과적으로, 죽은 나뭇가지는 낙엽을 쌓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모여드는 미생물의 영양소 흡수를 도와 땅의 영양소 보유
작용에 공헌한다. 육지에서 영양소 유실이 감소되면 주변 수계로 들어가는 영양소
양이 적어질 것이니 수자원의 부영양화를 방지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언젠가 이런
기작까지 포함하여 유역의 영양소 유실을 계산하는 컴퓨터 모형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서울 근교의 고도 578 미터인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 비교적 가파르다는 것을
새삼 인식했다. 12시 30분 정상에 도착하여 내려다보이 얼어붙은 팔당호에 쌓인
눈이 흰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 
    미물인들 가만 있을까?

  1987 년 1월부터 정확히 2 년 2개월 동안 미국 조지아 대학교 생태학 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했었다. 점심 시간에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동안, 누군가가
자신의 외국 여행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것도 우리들에게는 유익한 정보 통로였다.
전자 레인지와 가스 레인지가 비치되어 있는 연구소 내의 간단한 부엌은 점심
시간에 근무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부담스럽지 않은 정보 교환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1991 년 초 두 달 동안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으로 스웨덴의 작은 도시 우메오에
머무는 동안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8시에 출근하는 교수, 직원, 대학원생들은
오전 9시와 오후 3시가 되면 연구소의 간이 부엌에 모여 30분 가량 커피를 마시며
얘기들을 나누었다. 물론 점심 시간에도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그
부엌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편안한 정보교환의 장을 마련했다. 격의 없는 만남으로
서로의 아이디어와 애로의 교환을 돕는 그런 공간의 중요성을 왜 일찍 몰랐을까?
  부엌은 원활한 정보 소통을 위한 공간이다. 교수, 대학원생, 직원들은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부담 없는 만남을 통해서 생각을 교환하고 협조의 길을 넓혀 연구의
질을 높인다. 왜 우리 대학은 그런 문호를 이끌 공간에 대해서는 인색한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내 많은 생각들은 조지아 대학의 연구원 생활동안 정리되었다. 미국
대학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하도 세미나가 많아서 그에 관심을 두다 보면 세미나만
찾아다녀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느 날인가, 해양의 미생물 먹이 그물이라는 개념 제시로 생태학계에 꽤 알려진
포메로이 Pomeroy 박사의 지도를 받는 인도인 학생 보페 Bope 의 박사학위 논문
발표가 있었다. 해양은 내 학문 분야와 거리가 멀지만, 새로운 것을 들어 보는
그곳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그 발표에도 참여했다. 그 때 들은 대부분의
내용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착상을 얻었다.
  논문의 주제는 해양 미생물의 기능에 관한 것이었다. 해양 미생물은 끈적끈적한
물질들은 분비하여 떠돌아다니는 입자를 뭉치게 하는데, 그 이유를 묻는 데서
연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미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물질 분비는 막대한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으면 그 과정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면 자연 선택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
체계들이 선택되어 지금도 연출되는 것은 무언가 미생물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편익
때문이 아닐까? 미생물들은 그렇게 입단(쌀알 립, 둥글 단)을 형성함으로써
떠돌아다니는 물질들을 효율적으로 포착하여 이용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보페가 찾아낸 해답이었다.
  그 당시 나는 영양소 순환과 토양 미생물의 관계를 규명해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마침 세균과 곰팡이의 역할을 분화해 보기 위해서 토양 배양 실험을 하던
중이었다. 그 학생의 발견이 문득 토양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토양 중의 모래, 미사, 점토 같은 알갱이는 뭉쳐서 입단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입단 형성 과정에서 미생물의 분비물은 작은 알갱이를 뭉치는 데서 빠뜨릴 수
없는 접착제 기능을 한다. 입단이 형성되면 입단 내부의 엉성한 부위에 젖어든 물과
영양소들이 보관되기 쉽다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토양 입단 형성은
물과 영양소의 보유량을 높이는 한 가지 기작이다'라는 가설을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 날 발표자의 가설을 해양에서 토양으로 옮겨온 일종의 전용이니 내 공헌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튼 이 착상을 기반으로, 토양 배양에서 입단 형성과 물의 보유력 관계에 대한
가설 검정을 조금 이행할 수 있었다. 영양소 부분은 여건이 허용되지 않아 나중에
발표한 글 한 귀퉁이에 가설로서 처리하고 말았다.
  귀국한 지 2 년 정도 지나서 조지아 대학교 생태학 연구소의 토양 생태학 그룹이
미국과학재단(NSF)으로부터 대규모의 연구비를 받았다는 내용이 실린 소식지를
들었다. 그들의 가설은 '토양 입단 형성은 영양소 보유력을 앙양한다'였다. 내가 그
가설을 제안하는 발표를 할 때 눈을 반짝이던 연구 책임자 헨드릭스 Paul Hendrix
박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 사람이 번다는
격이 아닌가. 속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럴 이유도 없다. 어차피 그 착상은 다른
사람의 발표에서 비롯됐고, 가설 검정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부족했다.
원석을 채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채굴된 원석을 가공하는 사람도 있어야 보석이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분명하다.
  미생물들은 특히 체적에 비해서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흘러가는 물 속의
영양소를 흡수하는 속도가 식물의 뿌리에 비해 훨씬 빠르다. 그래서 삼림 훼손으로
식물이 기능을 잃을 때는 왕성한 미생물의 흡수 활동이 일시적으로 영양소 유실을
방지한다. 이때 미생물의 활동 기반이 되는 에너지원은 낙엽과 떨어진 나뭇가지,
남아 있는 나무 등걸과 뿌리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식물이 나타나면 미생물은
보유하고 있던 많은 양의 영양소들을 나누어 준다. 사실 이 나눔은 미생물 입장에서
보면 투자다. 자기 스스로 유기물이라는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니 식물로 하여금
대신 사업을 하도록 돕는 셈이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거나 작고 게을러 보인다고 해서 홀대해서는 안 된다.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몰라서 나오는 이야기다. 옆길로 돌아오는 혜택을
보지 못하는 짧은 생각 때문이다. 동시대에 존재하는 사물은 긴 공진화의 역사 끝에
나타나는 인연의 결과다. 이 땅엔 다만 가까운 것을 먼저 선택하는 우선 순위가
있을 뿐, 무시되어도 좋은 것은 없다. 진정한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깨우쳐 가는
과정이 우리의 공부다. 아니면 우선 순위란 어리석은 인간의 잣대에나 올라 있을 뿐
정녕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공부로 이룰 마지막 깨침일지도 모른다. 
    (따라 보기 5) 흐름과 순환이라는 개념

  생태학에서 흔히 에너지는 흐르고 물질은 순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개념의 의미 또는 배경을 물레방아에 의해서 물의 위치 에너지가 기계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물레방아를 돌리기 위해서 물은 위에서부터 흘러와서 아래로 흘러간다. 이러한
물의 흐름에 수반되어 있는 중요한 물리적 과정은 물 분자들이 가진 위치 에너지의
변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리를 바꿈으로써 물 분자들이 가지고 있던 위치
에너지는 손실된다. 그 손실된 에너지는 어디로 갈까? 그 중 일부는 물레방아와
연결되어 있는 기구로 전달되고 나머지 부분은 엔트로피로 흩어진다. 이 때
물레방아는 물이 지닌 에너지를 전달받기 위해서 물받이라는 부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물받이들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재이용된다.
물레방아의 물받이가 끊임없이 재사용되면서 하는 일이란 물의 위치 에너지를 기계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이 때 물은 흐르고 물레방아는 돈다. 또는 물레방아의
물받이는 순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일치 생산자라고 불리는 생물들에 의해서 태양 에너지가
광합성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태양 에너지는 마치 물레방아 위로 흘러가고 있는
물처럼, 생물권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처럼 광합성
기관은 계속해서 재사용되고 있다. 물론 광합성 작용을 하는 기관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물질이 재사용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서 물질은 에너지를 잠정적으로 담을 수 있는 용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물레방아의 작용과 일치 생산자들의 광합성 작용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으로 인해 에너지의 흐름과 물질의 재사용 또는 순환이라는 개념의 사용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 일단 물레방아에 의해 전환된 기계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 것이며,
광합성에 의해 합성된 화학적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과정 또한
물레방아에 의해서 전환된 에너지는 물리적인 기계들을 거쳐서 옮겨 가고, 광합성된
에너지는 생물체의 기관들, 더 나아가 먹고 먹히는 관계를 거쳐 다른 생물종들로
흘러가고 있는 점에서 유사하다. 동시에 그런 에너지 흐름의 매체로서 물질들이
끊임없이 재사용된다는 점에서 또한 비슷하다. 사실 광합성으로부터 먹고 먹히는
관계가 수행되는 에너지 흐름의 경로에서는, 모두 물질로 이루어진 기관들의
재사용과 함께 그 기관들의 생성, 소멸 과정을 통하여 구성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사용된다는 점에서 물질이 순환한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물질의 순환이라는 말은 에너지가 흘러가는 행로에서 물질이
재사용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는 어떤 원소들이 그것의 위치를
생태계의 생물적, 무생물적 구성 요소로 옮겨 다니면서 재사용한다고 하는 데서
나온 개념이다. 물질이 한 위치를 고수하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하나의
기계로서 재사용되는 것은 에너지 흐름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볼 때는 순환이다.
반면에 생태계 구성 요소를 옮겨 다니긴 하지만 결국 그 범위 안에서 쳇바퀴 돌듯
돌아다닌다는 점에서는 물질의 순환과 약간 구별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들 순환은
모두 재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며, 흐름에 대한 상대적인 용어로 쓰인다.

    제3부 물가에 서서

  "졸졸졸 시냇물아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강은 물이 가는 길고 긴 여로의 한 부분이다. 가는 그 길이 빠르고 단조로울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그래서는 재미가 없다. 가는 길에 쉼터도 있어야 하고 정을
주고받을 벗도 있어야 좋다. 시냇물의 졸졸거림과 강물의 출렁거림을 받아 주는
벗은 이웃한 땅과 뭇 생물이다. 그 벗을 사람들은 제멋대로 갈라 놓으려 한다. 슬픈
일이다.
    흐르는 강물따라

  내 고향 마을 앞으로는 하천이 하나 흐르고 있다. 따로 이름을 가질 정도도
아니라 강이라 하기에는 너무 작고 시냇물이라고 부르기에는 큰 편이다. 지금도
가끔 찾아가곤 한다. 이 하천이 내 삶과 의식 안으로 들어온 때는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내 정신은 그 곳에서 나고 또한 굵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여름에 홍수가 나면 이 하천은 때로 학교와 집을 갈라 놓는 커다란
문젯거리였다.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 아침에 삿갓을 쓰고 책보자기를 싸들고 나가
보면 다리가 떠내려 없어진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면 어린 발로 건널 수
있는 위치를 찾아 상류로 건네 주던 고등학생들의 등은 넓고 푸근했다.
  그 맑은 물 속에서 번득이던 은어의 빠른 몸놀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것은
물이 맑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밝은 추억이다. 그 곳은 여름날의 좋은
놀이터이기도 했다. 소 먹이기가 바로 내 일이라 자갈밭 틈틈이 끼어 있는 풀에
소들을 맡겨 놓고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땡볕을 잊곤 했다.
  대학생이 되었어도 겨울 방학 동안 그 하천은 정신적인 안식처였다. 심하게 춥지
않던 남녘땅 날씨라 자갈로 덮인 하천은 오후 5시면 내 산보길이 되었다. 그 때
나는 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물음을 가지곤 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강은 언제나 내 의식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의식에서는 강물 자체보다 오히려 그 바깥 부분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어린 날의 삶에서 언제나 내 발길이 닿던 물가의 땅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인지 지금도 큰 강보다는 작은 시내를, 강물
자체보다는 물에 맞닿아 있는 언저리 땅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
  수원지에서 시작하여 하구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나타나는 생태학적인 변화는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을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강이 감성적인 대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2 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때다.
그 당시 나는 조경학에서 언급되고 있던 시각적인 연속변화 sequence 개념을,
하천을 따라 나타나는 어떤 변화 유형과 연계시켜 볼 궁리를 했다. 그러나 변화는
하천 주변에 남아 있는 땅의 식생에서 인식될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이는 그런
생각을 구체화시켜 볼 대상으로 노곡천의 상림리에서 곤지암리까지 살펴보는
인연으로 발전했다.
  나중에 하천 생태학 강의를 들으며 하천 연속성 river continuum 은 1980 년대
초 미국의 하천 생태학계에서 획기적인 개념으로 등장했음을 알았다(주). 하천을
공부하던 미국의 학자들은 나보다 먼저 하천을 하나의 체계로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 개념이 제안된 이후 비로소 생태자들은 하천과 유역 지역의 특성을
연결해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 (주) 벤노트 Vannote 등(1980)은 하천 크기와 함께 상류와 하천 구간 자체
그리고 주변에서 유입되는 굵거나 가는 유기 쇄설물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출현하는 물벌레의 수도 abundance 와 활동도 하천을 따라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변한다는 개념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지형 평형 geomorphic equilibrium 을
가정하는 이 가설은 부분적으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지형 비평형 과정 때문에
현장 실험에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가설 검정과 정령화 과정에서
많은 다른 연구들을 유발함으로써 하천 생태학의 발전에 공헌했다(Malanson,
1993).
  아무튼 나는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이러한 하천의 체계적인 측면을
막연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수원지에서 하구까지 내려가는 동안
경사가 점점 완만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 그림 3-1.
  그림설명: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의 하천 경사(주)
  * (주) 안수한(1995), 51쪽.
  이 그림과 관련하여, 버지니아 공대에서 강의와 논문 심사 과정을 통해 내게
처음으로 수리 수문학을 소개해 주었던 대만 출신의 쿠오 Chin Y. Kuo 박사의
비유는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얘기를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원지 가까운 곳의 물길은 경사가
급하다. 따라서 그 곳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나 물에 운반되는 돌, 자갈 등은
속도가 있고 힘차다. 움직이는 힘이 있는 만큼 주변과 부딪치고 깨져서 모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웃한 돌이나 자갈은 모를 지워 나간다. 하류로
가면 갈수록 그 길의 경사는 완만해지며 자갈과 모래가 굴러가는 속도는 느리다. 이
곳의 자갈이나 모래는 이미 다듬어져 모가 없고 둥글둥글하다.
  쿠오 박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젊은 나이에는 힘이 있고 자기가 최고인 듯
생각하여 여기저기 부딪쳐서 모가 나지만 나이가 드는 동안에 그 충돌 과정을
통해서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또 힘도 줄어들어 완만해지는 우리 인생의 모습과
같다고 했다. 이처럼 하천을 하나의 계로 보면 상류에서 하류로 이어지는 동안
나타나는 수문학적, 생태학적 변화를 인간의 성숙도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조지아 대학교의 오덤 Eugene P. Odum 선생이 생태계의 발달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인생의 노정과 비유하는 점과 비슷하다. 하천, 인생 노정, 생태계의 발달
과정에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를 퍼내는 소산 구조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역을 계로 보면 하천은 유역 안에서 본질적으로 젊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젊은 속성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힘과 변화라 생각한다. 사실
변화는 힘이 배태시키는 다른 측면이기는 하지만 젊음의 특징임에 틀림없다. 특히
우리 나라의 강은 여름마다 홍수로 인해 수량과 지형 변화가 심하고 흐르는 물이
있어 에너지가 침전된다. 물과 인접한 강변엔 물과 영양소 및 태양 에너지가 가장
풍부하기에 단위 면적당 광합성이 왕성하게 일어나서, 생물이 일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또한 풍부하다. 그러기에 하천은 젊음의 속성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젊음을 잘 다스려서 넘치는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청소년
선도다. 청소년 선도는 어른의 지혜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어려운 노릇이기는
하지만 혈기 왕성한 젊은이의 마음과 육신을 이해하는 어른만이 젊은이를 제대로
선도할 수 있듯이, 하천의 변화 무쌍한 속성은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만이 조화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젊은 지역은 유역에서 에너지의 주요 원천이다. 생각해 보면
유역에서 하천의 위치도 그렇다. 그러나 에너지 원천이 에너지 수용처와 잘
조화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긴다. 하천을 심한 공법으로 다스리는 행위는 젊음의
혈기를 막무가내로 억누르는 것과 같으니 갈등으로 이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만다.
  강은 위에서부터 아래를 향해 하나의 유형으로 나타난다. 인간들은 이 변화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하천을 기반으로 하는 물고기나 하천변을 서식처로 하는
동물들도 이 변화를 즐기지 않을까? 물의 흐름과 직교하여 하천변의 자투리땅을
보면 그 곳은 전환 지역 transformation area 이다. 그러나 유역에서 하천이 놓인
자리와 수원지에서 하구까지의 변화를 고려하면 하천변은 중요한 생물의 통로
corridor 가 된다. 생물은 하천을 따라 이동하고, 또는 하천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변화를 즐기며 하천을 즐겨 찾는다. 더구나 거기에는 생존에 필수적인 물 그리고
바람과 빛이 있어 좋은 곳이다. 그 곳은 식물이 자라 생산성이 높으므로 먹이가
풍부하며 또한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나타낸다. 충분한 강폭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면 그 강변에 형성된 숲들은 여러 생물의 중요한 안식처가 되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하천변은 더 이상 인간이 독점할 지역이 아니다. 어쩌면 다른
생물들과 공유해야 할 마지막 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국토가 좁아진 우리는
그 땅의 깊숙한 부분까지 탈취하고 둑을 쌓아 하천의 영역을 축소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그 곳을 다듬고 시멘트를 발라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보호를 한답시고 더 많은 시멘트를 발라 숨통을
막고 있다.
  * 그림 3-2.
  그림설명: 시멘트로 나누어진 물길과 강 언저리(주).
  * (주)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장리 운산교와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도림천에서 1994 년 1월 31일과 1993 년 11월 26일에 각각 촬영. 
    강터와 개펄

  서산과 당진을 잇는 32번 국도에는 운산교(구름 운, 뫼 산, 다리 교)가 놓여 있다.
1994 년 1월 31일에 가족과 함께 개심사를 둘러본 다음 귀경길에 운산교를 건넜다.
물가를 살피는 버릇 때문에 다른 좌우로 정돈된 강바닥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 곳은
수량이 많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강터를 골라서 시멘트로 수로와 경계를 나누고서
잔디를 심어 놓았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이라 잔디밭은 불태워져 있었다. 다리
가까이 있는 땅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돌아다니다 보면, 물과 격리된 강터를 수없이 볼 수 있다. 시골에서는 그런
곳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 때로 아름다운 경관을 보태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강터는
쓸모 없는 땅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도회지로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강터가 불쌍하기만 하다.
  시멘트로 숨통을 조여 버린 강터의 처참한 모습은 한강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한국의 저질스러운 군사 문화는 한강변에서 극명하게 노출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은 어떻게 감출 수도 없는 솔직한 우리 마음의 표현이다. 때로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서울 젊은이의 감성이 한강변 시멘트 경관에서 연출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몰린 우리네 정서를 안타까워한다. 강물의 더러움이 배경에
나타나지 않아 쓰임새가 있는지 몰라도 아무래도 내게는 '아니올시다'다.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연출가는 아마 나보다 더 답답하겠지.
  언젠가 유럽 사람들처럼 강터의 흉측스러운 시멘트 조각을 떼어 내는 광경이 이
땅에서도 기필코 연출되겠지. 어떤 분은 더 이상 그들을 흉내내지 말고 좀더
연구하고 따진 다음 뜯어내든지 그냥 두든지 하자고 했다. 그러나 기필코 강은
자연의 모습으로 접근할 것이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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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없이 바다와 물을 가꾸는 머슴, 개펄
  개펄의 매립은 자연적인 생산 장소를 인공적인 생산의 장소로 전환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우리는 매립된 땅에서 발생할 작물의 직접 생산에 눈멀어 있다. 세계의
생태계 중에서 자연 습지는 일차 생산성이 높은 곳이다. 그 곳은 높은 지역에서
쓸려 온 영양소들이 쌓이며, 물과 햇빛이 방해 없이 공급되어 광합성이 왕성하게
일어나므로 일차 생산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 곳에서 광합성으로 생산된 유기물은 벌레와 새 그리고 물고기를 기른다.
남아도는 유기물이 넘쳐 바다로 흘러가면 바다의 종속 영양 생물들을 보육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에서 잡히는 많은 양의 조개나 물고기가 개펄에서 자연 생산된
유기물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다. 습지의 개펄을
없앰으로써 물고기의 먹이가 감소되며, 그 결과 어획고가 줄어드는 관계를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강터나 개펄과 같은 자연 습지 매립은 공유
재산을 사유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 그림 3-3.
  그림설명: 생태계 유형에 따른 연평균 일차 생산량 비교(주).
  * (주) 이도원 등(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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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와 미꾸라지의 공생
  이러한 행위는 강터의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하는 것인 만큼, 수계의 영양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지사 식물을
물가에 키워 수자원 부영영화 감소를 도모할 바엔 식용 식물을 이용하면 이중의
효과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94 년 2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은 안창우군은 미나리를 대상으로 실험해 보기로 했다. 식물은
어쩔 수 없이 동물과 상호 관계를 형성하므로 다시 식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미꾸라지를 실험에 포함시켰다.
  지금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실험실은 실험실이라고 하기에 창피할 수준이지만
그 당시는 더욱 열악했다. 우리 학생들의 농담에 의하면 이 곳은 17, 18세기 무렵
러시아의 한 실험실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며, 환경대학원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하면서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박현정씨는 자신의 고등학교 실험실만도
못하다고 했다. 내 스스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겠지만 우리의 착상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 필수적인 실험실이 세계의 대학원 중 가장 열악한 상태에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외국 손님이 왔을 때 우리 실험실을 보여
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안창우군의 실험은 우리 실험실에서 실현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인연이 있던 한국외국어대학교 환경학과 실험실의 공간을 여름
방학 동안 빌려서 사용하게 되었다.
  안군의 실험이 막바지에 이른 1993 년 9월 18일, 비로소 그의 실험을 살펴볼 수
있었다. 미꾸라지를 넣은 실험 수조는 모두 흙탕물이었다. 미꾸라지가 돌아다니며
구정물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물을 휘저어 공기와 접촉하는 부위를 넓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를 더욱 감격시킨 것은 안군의 실험을 하던 미꾸라지를 창가에
둔 항아리에 잠시 넣어 두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미꾸라지는 항아리에 있던
장구벌레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 우연한 행위는 모기가 논이나 물가에 알을
슬어 부화하는 동안 물고기들이 수많은 애벌레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식시켰다. 모르는 중에 우리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자연 현상의 하나다.
  습지는 육상 생태계에 비해 토양의 공기 유통이 원활하지 않은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특히 유기물이 많은 곳에서는 산화 반응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지
못하여, 혐기성으로 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토양이나 퇴적토가 혐기성이 되면
산소 대신 질산염이 전자 수용체로 작용하며, 부산물로
아산화질소(^356,1345,23,135^)와 질소 가스가 방출된다(주). 이와 같이 혐기성
과정에서는 탈질 작용을 통해서 질소가 대기로 방출되므로 수자원의 질소 부영양화
경향이 경감된다. 그러나 탈질 작용 동안 발생하는 아산화질소는 온실 효과를
일으키는 기체라 지구 온난화에 기여할 위험성이 숨어 있다.
  * (주) 탈질 작용은 산소가 부족한 물이나 토양에서 질산염이나 아질산염이
미생물 활동으로 환원되어 질소 산화물이나 질소 기체로 변형되는 과정이다.
  인 화합물의 경우 혐기성 상태에서 토양 입자로부터 방출되는 경향이 있다.
방출된 인은 물에 녹아서 하류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한 인을 잡아 두려면 상수원에
이르기 전에 식물이나 미생물에 의해 흡수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산소 공급을 통해
산화 반응으로 전환시키면 퇴적물이 산화성이 되어 인의 흡착 능력이 고양된다.
산화형 철(^356,124,15,,26,26,26^)이 환원형의 철(^356,124,15,26,26^)보다 인
화합물에 대해 흡착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은 하류에 연, 미나리, 고마리를 키우면서 동시에 미꾸라지, 메기 등
운동성이 활발한 물고기를 양식하면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식물이 영양소를
흡수하여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제안한 것처럼 식물에 흡수된 영양소는
식물을 베어 내거나 먹이 사슬 과정을 통해서 제거하면 부영양화의 경감에 공헌할
수 있다. 또한 운동성이 강한 물고기는 물을 폭기시킴으로써 공기와 접촉을
조장하여 용존 산소 농도를 높이게 된다.
  다방에 흔히 있는 어항을 가만히 보면 거품이 일고 있는데 이것은 물과 공기를
접촉시켜 용존 산소를 높이는 노력인바 물고기의 움직임은 물을 출렁거리게 하여
공기와의 접촉을 자극한다. 물고기의 강력한 운동은 동시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며, 그 때 사용되는 에너지는 물의 유기물 산화에 의해서 공급된다. 따라서
이렇게 처리된 물은 상대적으로 생물학적 산소 소모량이 낮을 것이다. 더욱이
미꾸라지와 같은 물고기는 장구벌레를 먹어치워 우리가 모르는 중에 해충을
방제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정리해 보면 표 3-1과 같다. 이 표에 포함되는 일부 먹이 사슬
과정은 다음 절의 내용에서 부연되는 부분도 있음을 밝혀둔다.

  * 표 3-1. 상류 환원지와 하류 산화지의 연결로 기대되는 수질 정화 효과.
    상류: 환원반응
  #1 탈질 작용으로 질소 제거, 유기물과 토양 입자로부터 인의 탈리 등의
기대효과.
    하류: 산화반응
  #1 물고기: 물리적 운동으로 산화 반응 조성, 물리적 운동으로 유기물 분해 촉진.
  #2 식물: 인 흡수 ^25,135^ 초식 먹이 사슬.
  #3 미생물: 인 흡수 ^25,135^ 용존 유기물 ^25,135^ 미생물 먹이 사실.
  #4 퇴적토: 인 흡수 ^25,135^ 식물 흡수 ^25,135^ 먹이 사슬 ^25,135^ 새,
장구벌레 등의 포식으로 해충 방제, 애벌레 우화에 의해 육지로 이동 등의 기대효과.

    물이 얕게 머무는 땅, 습지

  처음 습지다운 습지를 구경한 것은 1987 년 가을 조지아 대학에 머물 때였다.
  생태학 연구소에서 패튼 Bernard C. Patten 박사의 체계 생태학을 청강하던
나는 그가 계획한 습지 답사에 동행했다. 조지아 주와 플로리다 주에 걸쳐 있는
거대한 습지 오키퍼노키 Okefenokee 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물길을 따라 작은
보트로 둘러보았지만 별로 감동은 받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 까닭을 미루어 보면
지나치게 큰 땅이라 진면목을 알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내가 더욱
무식했던 탓이다.
  * 그림 3-4.
  그림설명: 오키퍼노키 습지의 일부 경관(주)
  * (주) 미국 조지아 주의 오키퍼노키 습지에서 1987 년 11월 촬영.
  우리 땅의 습지에 대한 관심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대학생 시절,
지금은 양정고등학교 교장이 되신 엄규백 교수님의 육수 생태학 연구실에서
장자못으로 조사하러 나가는 일들을 막연히 바라본 것이 처음인 것 같다. 장자못은
언젠가 매립되어 우리 주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고 들었다.
  남들이 강원도 대암산의 용늪과 경남 울산의 무제치 늪과 같은 희귀한 고산
습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나는 강가의 자투리 땅에서 맴돌았다. 아마도 그러한
편협한 여정은 노곡천 시궁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수구 물에 자라는
고마리와 소리쟁이에 매료된 탓에, 습지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 듯싶다.
  그러나 흐르는 물을 따라 걸으면서도 먼 발치로 얕은 물에 잠긴 습지를 은근히
바라보았던 모양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습지는 내 강의 주제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습지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 내게 강의를 들은 학생 서너 명이
남의 실험을 빌려 지극히 규모가 작은 습지의 모의 실험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에도 현장을 한 번씩 들여다보는 정도의 성의밖엔 없었다.
  강의 자료에 자주 등장하던 습지 연구의 주인공 미치 William J. Mistsch
박사에게 몇 번이나 추파를 던졌는데 그는 가끔 답을 주는 때도 있었지만 대개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1995 년 10월 덴마크의 요르겐센 Sven Erik
Jorgesen 박사가 우연한 인연으로 내 연구실에 들렀다. 우리는 미치와 요르겐센
박사의 공동 저서인 생태 공학 책을 이미 읽은 터라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마침 안창우군이 미치 박사 아래에서 박사 과정 연구를 하고 싶어 애태우던 중이라
우리는 요르겐센 박사와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안군의 뜻을 얘기했다. 그 때 나눈
얘기들을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대충 이러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습지와 생태 공학을 공부할 작정이지요. 사실은 미나리와 미꾸라지를 포함하는
지극히 간단한 장치로 몇 가지 흥미 있는 실험을 했어요."
  "이를테면 어떤 것들인데?"
  안군과 나는 워낙 소규모 실험이라 어설픈 의문만 남겼지만 대충 미꾸라지가
미나리 생산을 촉진하는 것 같고, 장구벌레를 먹어서 생물학적 방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그것이 바로 생태 공학이야. 논문을 보여 줄 수 있겠어? 사실은 빌(미치 박사의
약칭)이 일 주일 후 내게 오기로 되어 있어."
  그렇게 해서 안군의 논문을 요르겐센 손에 쥐어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열흘 후
미치 박사의 전자우편 연락이 날아왔다. "나는 당신 학생이던 안군을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가르치고 싶다. 이번 여름 올랭탱지 습지를 방문하는 절차도 준비해
두겠다."
  이런 과정이 인연이 되어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올랭탱지 강 인공 습지를 찾은
것이 1996 년 7월 15일이었다. 미국 생태학회에서 점봉산에서 본 결과들을
발표하러 가는 길에 미치 박사가 자랑하는 세계 최초의 인공 습지 장기 연구 단지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 4주일을 머물며 미치 박사가 펼치는 습지 생태학
단기 과정에 참여하면서 습지의 중요성과 생태학, 인공 습지를 조성할 때 필요한
유의 사항 등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습지에 관한 그 동안의 생각들을 정리하여
원고를 만들었다(주).
  * (주) Lee(1996, 1997)
  물이 얕게 머무는 내륙의 습지를 대체로 주변 지역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다.
위치가 낮기 때문에 흐르는 물이나 바람과 함께 주변의 찌꺼기가 몰려든다. 또한
생물 활동에 필수적인 햇살과 물 그리고 먹이가 풍부하니 온갖 생물들이 머물렀다
가기를 좋아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습지는 몰려든 잡동사니들을 다양한
생물자원으로 전환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 땅이다.
  흔히 오염 물질 정화 기능을 강조하여 습지를 자연의 콩팥이라 한다. 마치 우리
몸의 콩팥이 오줌과 함께 빠져나가는 당분과 영양소를 걸러 주듯이 습지는 땅에서
수자원으로 흘러드는 부유 물질, 영양소, 농약과 같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걸러 주는
마지막 관문이다. 거기에 식물이 자라기 시작하면 여러 물질들이 몰려들어 쌓이는데,
식물은 그 잡동사니를 동물 및 미생물과 어우러져 가공하여 생물 다원으로
전환한다. 그리하여 습지는 오염 질의 소멸처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들의
생산처이며, 오염 물질을 생물 자원으로 바꾸는 전환처다. 결과적으로 습지를
통과하는 물은 깨끗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1994 년 3월부터 가동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올랭탱지 강 습지
연구 공원에서는 2.5에이커(약 1 헥타르) 면적의 인공 습지 두 개를 콩팥 모양으로
이웃시켜 놓았다. 이 습지의 운영과 장기 연구를 맡고 있는 그 대학의 1995 년
보고서는, 습지를 잃으면 생물 다양성 유지, 홍수 방지, 수자원 정화 능력을
상실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의 인공 습지는 가동 첫해에 유입수보다
유출수의 용존 산소가 43 퍼센트 증가되었으며, 탁도는 66 퍼센트 감소되었다. 1 년
동안 습지 1제곱미터당 질소는 79--83g, 인은 6g이 제거되었다. 1996 년 전까지
주변 지역으로 찾아오는 새도 120종으로 늘었는데 이는 습지 조성 후 8 퍼센트
증가한 것이다.
  * 그림 3-5
  그림설명: 오하이오 주립대학 캠퍼스 안에 설치되어 있는 올랭탱지 강 습지 조성
직후의 원경(위)과 현장 사진(아래)(주). 원경 사진 중의 오른쪽 습지 가운데에 걸쳐
있는 선들은 습지를 교란하지 않고 관찰과 시료 채취를 할 수 있도록 만든 긴
다리로서 지금은 왼쪽 습지에도 설치되어 있다.
  * (주)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1995 년 '습지 연구단지 보고서'의 표지 사진과
현지에서 1996 년 7월 31일 촬영한 사진.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국제 기구들이 새로운 습지를 만들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학술원은 2010 년까지 미국에만 1000 만 에이커(4 만
468제곱킬로미터)의 습지를 복원하거나 새로 만들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남한
땅의 반이 좀 못 되는 면적이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참가한 습지 조성 단기 과정은 주정부의 교통부 직원과
습지 건립 대행 회사 직원, 학생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교통부 직원은 도로 건설로
습지를 훼손할 때 그에 상응하는 면적의 새로운 습지를 만들어야 하는 미국의 법에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공사로 인해 자연 습지를 메워야 할
경우에 법은 그에 상응하는 면적이 새로운 습지를 만들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 두 배 이상을 만들어야 공사가 허가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습지 조성 대행 회사가 설립되고 있어 전문 지식을 갖춘 직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반면에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뒤쳐진 것을 걱정하느라고 빠르고 큰 것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작은 땅에 사는 것이 아쉬워 땅을 다투며 살았다. 그런 마음
때문에 대형 댐을 만들어 습지를 영원히 물에 잠기게 하고, 대규모 매립 작업으로
습지를 덮어 버렸다. 이름마저 잊혀진 민물 못과 강가의 물 먹은 땅들을 포함하여
을숙도, 천수만, 새만금의 습지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제5공화국은 한강터에 남아
있던 습지에 시멘트를 부어 마지막 숨통을 죄어 버렸고 지금도 그 잘못은 전국
곳곳에서 멈출 줄 모르는 관성으로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고철환 교수와 부산 대학교 생물학과 주기재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1980 년부터 지금까지 956제곱킬로미터의 갯벌이 매립되었거나 매립
중이며, 1983 년 이후 낙동강 일원에서만 467 만 평(대략 15제곱킬로미터)의
습지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민물 습지들은 기록되지도 않은 채 사라졌다.
  그 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존경의 대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자. 그러나
이제는 그 잘못을 멈추어야 할 때다. 우리도 이제는 습지를 더욱 많이 만들어야
한다. 우선은 필요하고 손쉬운 곳부터 시작하자. 땅값이 싼 농가의 하수구와 축산
폐수가 흘러넘치는 곳에 작은 못과 습지를 곁들이면 물과 영양소를 잡아 둘 수
있다. 2차 처리된 생활 하수들이 습지를 거쳐 가도록 해 놓으면 값비싼 처리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 3차 처리를 대신할 수도 있다. 폐광의 녹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큰
웅덩이를 만들어 물이 멈추어 가게만 해도 자연 정화 기능은 더욱 크게 발휘한다.
  커다란 저수지로 물이 흘러드는 골골마다 목책 혹은 돌그물을 설치하거나 작은
댐을 만들어 두면 토사가 걸러져 저수지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그런 곳은 오염물질을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습지가 되어 미소지을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과도도 있겠지만 이미 없애 버린 습지의 복원도 검토해야 한다.
강터의 시멘트를 떼어 내고 습지로 되돌려야 한다. 지금 돈이 들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이익일 것이 분명하다.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키기만도 힘든
마당에 잃어버린 땅을 되찾자는 주장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처지가 이해되기는
하지만 지나친 길은 되돌아가는 것이 지당하다(이 글은 '한겨레신문' 1997 년 1월
16일자에 실렸던 시평을 다시 고친 것이다. 위에서 제안한 곳에 습지를 만들 경우에
나타날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강터의 식생 지대

  날씨가 좋은 날이면 낙성대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비교적 걸을
만하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생각이 여물 여지를 가지기 위해 그 길을 걷곤 한다.
그 때는 강물의 흐름이 느린 곳에서 물질이 머물듯이, 느린 발걸음에 맞추어 때로
괜찮은 생각이 머물기를 희망하면서 그리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기에 시선과 마음이
길을 곧장 따르지 않고 때로 옆길로 새는 것은 의도하는 바다.
  교수 아파트에서 나오면 서서히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서울대 뒷문 수위실과
기숙사 앞을 지나면 새로 단장한 보도가 있다. 보도 옆으로 잔디밭이 깔려 있고
위로는 나무들이 자라는 작은 산으로 곧장 이어진다. 5월 중순 어느 날 아침 포장
보도와 만나는 잔디밭에 곰팡이처럼 얽혀 있는 하얀 꽃가루가 눈에 들어온다. 차도
건너 저편에는 은사시나무가 예닐곱 그루 서 있다. 그 곳에서 시작된 꽃가루가 왜
하필이면 길 건너 이쪽으로 몰려와 멈추는 것일까? 조금 더 오르니 이울어져 떨어진
벚꽃 꼭지가 보도를 이웃한 풀밭 변두리에 소복하게 모여 있다.
  * 그림 3-6.
  그림설명: 보도와 풀밭이 만나는 곳에 모여 있는 벚꽃 꼭지와 철쭉 꽃잎, 그리고
은사시나무 꽃가루(주).
  * (주) 서울대학교 후문 진입로에서 1997 년 5월 10일 촬영.
  아하! 가장자리는 '받게 receiver'가 아니면 '주게 donor'로구나. 그러기에
변두리는 본질적으로 집적거림을 받는 곳이구나. 자고로 변방은 편안하지 않은
곳이다. 경계를 가로질러 물질과 에너지, 정보가 들락거리고 있으므로 변화가 심하고
한시도 안정될 날이 없는 곳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하고 무엇엔가 휩싸여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는 곳이다. 그러기에 변방은 모험과
변화를 즐기는 힘찬 젊은이들의 장소다. 그 곳은 바로 젊음은 속성을 움켜쥐고 있는
장소다. 그 곳에는 그에 걸맞은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또 강한 움직임을 누그러뜨릴
경관(주)과 문화가 있어야 보는 사람에게 편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곳에 머물거나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 (주) 이 책 앞 부분에서는 경관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시각적인 의미만을
생각해도 좋았지만, 여기서부터는 생태계보다 더 큰 생태적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제5부의 '생태계를 넘어서 경관 생태학으로'에서 더욱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보도 옆 잔디밭에 꽃가루와 꽃 꼭지를 쌓이게 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탕의
거칠기다. 도로는 원래 차와 사람의 흐름을 순조롭게 하는 것이 기본 바람이다.
차도상의 물류정체(물건 물, 흐를 류, 머물 정, 머물 체)는 도로가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다. 그러기에 자동차 통행을 방해하고 발길에 걸리는 거친 돌출부는 거슬린다.
그러나 길에는 때로 차와 사람이 머무르기 좋은 마디가 있어 흐름의 완급을 연결할
필요가 있다.
  하천의 수로는 물이 흐르는 곳이다. 하천 수로에는 때로는 흐름의 완급이 있다.
여울에서는 빠르고 웅덩이(못 소)에서는 느리다. 흐름이 느린 곳에서는 물질이
정체한다. 물도 머물고 물이 안고 있는 물질도 그 곳에 머문다. 머물기에, 옆으로
위로 아래로 새어 나갈 여지가 비교적 높다. 수로에서 물질이 머물 여지가 있는 또
다른 곳은 강변이다. 강물과 주변 땅이 만나는 그 곳이 지닌 바탕의 거칠기는 들고
나는 물질의 속도를 제어한다. 물질을 잔뜩 안고 흐르는 물의 주변 거칠기가 크면
클수록 물은 힘들다. 힘이 들면 놓고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강변에는 물질이
쌓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기에 강변은 적당히 거칠 필요가 있다.
  수로의 가장자리가 만나는 강변을 인위적으로 포장하는 재료는 상대적으로 더
거칠다. 물이 빨리 흐르기를 바라는 급한 인간의 마음과 잘 부합되는 물질이기에
그것은 당연하다. 반면에 강변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는 식물은 그런 인공 재료보다
더 거친 바탕을 만든다. 식물은 거칠기 때문에 물의 흐름을 방해한다. 물의 흐름이
느린 곳에서 물질은 머무른다.
  하천변을 따라 나타나는 좁은 습지는 거친 바탕과 독특한 생태적 특징으로 인해
토지 이용에서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그 곳에는 때로는 물에 잠기고
때로 공기 중에 노출되는 범람원이 있다. 또한 수변 서식처들은 길쭉한 띠 모양으로,
전체 크기에 대한 가장자리의 비율이 매우 크며 본질적으로 전이대(변할 전, 이동할
이, 띠 대)의 성격을 가진다. 이들은 기능적인 생태계로서, 매우 풍부한 에너지와
영양소, 생물적 상호 작용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하천변 식생 지대가 그에 이웃한 물과 땅으로부터 물질을 받아서
변환시키고, 다시 이웃한 물, 땅, 대기 중으로 주는 과정을 살펴보면 표 3-2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표 3-2. 하천변 습지에서 일어나는 수중 성분의 포획 변환 기작
    성분: 부유물질
  포획 및 전환 기작: 침적 ^456,34^ 여과
    성분: 산소소모물질
  포획 및 전환 기작: 미생물 분해, 침적
    성분: 병원균
  포획 및 전환 기작: 침적 ^456,34^ 여과, 자연 사멸, 식물에 의한 항생 물질 분비.
    성분: 질소
  포획 및 전환 기작: 질산화 작용, 탈질 작용, 식물과 미생물 흡수, 암모니아 휘산.
    성분: 인
  포획 및 전환 기작: 침적, 토양 흡착, 식물과 미생물 흡수.
  * 자료: Brix(1993) 수정.

  수변과 습지를 이웃하여 흐르는 물에는 흙 알갱이를 포함한 부유 물질과 물에
녹아 있는 용존 물질이 들어 있다. 특히 부유하거나 녹아 있는 유기물은 미생물에
의해서 분해될 때 산소를 소모하여 생화학적 산소요구량 biochemical oxygen
demand 을 높인다. 이러한 물질은 수변 식생 지대에서 유수 에너지가 감소되면
침적되거나 식물 줄기 사이를 지나면서 여과된다.
  수변 생태계는 수자원에 포함된 병원균을 제거한다. 부유 병원균을 침전시키며,
자외선이나 고등 식물 뿌리에서 분비된 항생 물질이 병원균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물에 포함된 유기 질소는 무기화되고 암모니아 형태로 휘산되거나, 식물에 의해서
흡수 또는 탈질되는 과정을 통해 제거된다. 하천과 주변 습지 사이에 존엄하는
20--50 미터의 다소 좁은 폭의 전이 지대에서는 탈질 작용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특히 하천변 식생 지대는 유속이 느려 물의 체류 시간이 길며 용존성 유기물이 많이
공급되는 혐기성 조건이므로 최소한 50 퍼센트 이상 제거된다.
  초지보다 포플러 숲으로 이루어진 하천변 생태계에서 지하수에 존재하는 질소를
제거하는 효과가 더 큰 경우도 있고(주1) 반대로 탈질 작용이 교목대보다 초지에서
우세하며 지하수에서 유입되는 질산염보다 더 많은 양의 질소를 제거하는 경우도
있다(주2). 아무튼 하천변이나 작은 연못의 초본으로 이루어진 습지는 탈질 작용에
의해 폐수에 포함된 질소를 제거하는 주요한 곳임에 틀림없다.
  * (주1) Haycock 등(1993).
  * (주2) Lowrance 등(1995)
  하천변 식생 지대의 경우 물 속의 입자에 흡착되어 있는 인은 입자가 침적될 때
제거되고, 용존 상태의 인은 토양 표면에 흡착되거나 식물에 흡수되어 제거된다.
그러나 인은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양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질소에 비해서 제거
효율이 뛰어나지 못하고 계절적인 영향도 많이 받는다.
  인은 호기성 상태에서는 주로 무기 성분(점토, 철)이 풍부한 토양 표면층에
결합되고, 상부 지역에서 침식된 인의 경우는 식생에 의한 유속 감소로 축적되거나
용존인의 경우는 식생에 의해 흡수됨으로써 부동화(아닐 부, 움직인 동, 될 화,
immobilization) 된다(주). 하지만 범람으로 토양이 침수되어 혐기성 조건이 형성될
때에는 쉽게 용출된다. 결국 인 제거에서는 표면 거칠기로 부유 물질을 침전시키고
침전물을 불포화된 호기성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주) 부동화란 물에 녹아서 이동하기 쉬운 형태의 영양소가 물리화학적
흡착이나 미생물 흡수로 유동이 어려워지는 것을 말한다.
  하천변 습지에서 질소와 인은 모두 수면의 변동 빈도와 기간, 호기성층과
혐기성층의 상대적인 두께, 물의 체류 시간(즉, 물이 통과하는 동안 영양 물질과
습지 생태계의 접촉 시간), 습지에 도달하는 영양물질의 부하량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습지를 이용한 처리 선례에서 볼 때 두 영양 원소의 제거 용량은 그
부하량에 반비례하고 물의 체류 시간에 비례한다고 알려져 있다. 상부 지역과
관련하여 자연적인 습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자료와 장기
연구가 필요하다.
  * 그림 3-7.
  그림설명: 하천변 식생 지대의 수리학적, 생태학적 특징 구분(주).
  * (주) Mitsch and Grosselink(1993) 수정.
  이렇게 상류로부터 그리고 육지로부터 물리적인 힘에 밀려 온 물질은 하천변 식생
지대에 쌓인다. 세월이 가면서 쌓이는 물질은 늘어간다. 이렇게 머무는 물질은
어디로 가며, 어떤 힘으로 옮겨가는 것일까?
  그 곳에 쌓인 물질의 일부는 물에 떠내려가고, 일부는 앞서본 바와 같이 하늘로
날아가고, 일부는 식물의 흡수와 광합성으로 형질이 변한다. 물이 닿는 하천변은
물질이 쌓이는 만큼 생산성이 높다. 그런 과정에서 하천변은 물질의 소멸처가
아니면 공급처이며 본질적으로 전환자다. 자연 하천변은 모든 생물의 대사에
필수적인 물과 유기물이 풍부하다. 광합성 산물은 식물의 형태로 저장되어 거친
표면을 만들고 새와 야생 동물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위에서 떠내려와서 걸린
유기 쇄설물과 함께 벌레들의 먹이가 된다. 따라서 식생이 있는 자연 하천변은 야생
동물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모인 곳이다.
  생산된 유기물은 다양한 먹이 사슬 경로를 따라 전달되거나 생물 이동이라는 힘에
의해 육지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곤충들은 물에 사는 무척추
동물로 애벌레 시절을 보내며 먹이 사슬의 한 고리가 된다. 새들은 이 애벌레들을
먹고는 숲 속에 가서 쉬며 배설하여 물질을 땅으로 보낸다. 또한 물에 살던
애벌레들은 곤충으로 탈바꿈하여 날아오름으로써 몸에 담긴 영양소를 육지로 되돌려
보낸다. 나뭇가지들이 있는 더러운 물가에 특히 거미줄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가?
거미는 하루살이나 각다귀가 더러운 물에서 날개돋이(익화: 깃 익, 될 화)하여
떠오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쌓이는 영양소를 위로 퍼올리는 자연의 힘을 상상해 보라. 그
힘이 없으면 우리 물은 더욱 부영양화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물과 물가에 모인
영양소를 퍼올려 자연 정화를 하고 있는 힘에 감사하자. 조경가는 이 전환과 이동을
북돋우는 자연의 힘을 배척하지 않도록 환경 설계를 궁리해야 한다(주). 생태학자는
땅이 물에 주는 선물과 그에 대한 물의 보답이 어떤 원리와 경로를 따라
이루어지는지 발굴해야 한다.
  * (주) 이 글은 '환경과 조경' 100 호(1996 년 8월 발행)에 '하천변 식생 지대의
생태적 특성과 기능'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수정한 것이다.

    식생 완충대

  나는 1983 년 여름부터 미국 버지니아 공대 환경 학 및 공학 프로그램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1981 년 초 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최고봉 아콩카과 산 등정을 목적으로 아르헨티나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그것도 빌린 돈으로 작은 녹음기를 하나 샀다. 그렇게
해서영어를 구로 듣는 연습이 처음 시작되었으니 내 영어 듣기 실력은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실토는 그 무렵 내가 미국 유학이라는 돌파구 찾기를
시행했지만 떠도는 정보를 포착할 수 있는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 당시 버지니아 광대 환경 과학 및 공학 프로그램에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세미나 한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 나와 대면한 그 프로그램의 과장은 그 세미나를
수강하라고 권유했다. 그 때 어떻게 의사를 전달했는지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나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세미나를 선택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와서 들으라고 재차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강의는 매 학기마다
수강을 신청할 수 있으며 매주 졸업생의 논문 결과나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을
초청하여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매주 세미나를 마치면 고수와 학생들이 학과의 여러 가지 소식을 교환하는 자리를
가졌다. 나는 지금 우리 대학의 프로그램은 왜 이런 시간에 인색한지 궁금해하고
있다. 어차피 공부란 정보를 캐고 또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일진대 통속적인 전달
매체에 매여 있는 우리 교육 프로그램의 유연하지 못함이 조금은 안쓰럽다.
강의실에 매달려 있는 지금의 정보 전달 체계에 싫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직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얘기가 어긋나는 것 같지도 하지만, 나는 "공부는 관념이
아닌 행위이며, 그 행위는 현실적으로 인간의 형성을 지향한다"(주)는 김용옥 선생의
표현에 깊이 공감한다.
  * (주) 김용옥(1994).
  * 그림 3-8.
  그림설명: 미국 동부의 전형적인 식생 완충대 모습(주).
  * (주)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1985 년 봄에 촬영.
      ------------
    난생 처음으로 연구팀에 참여하다.
  어느 날 세미나가 끝난 자리에서, 나중에 지도 교수가 된 세라드 Joseph H.
Sherrard 교수는 자기가 새로 진행할 세 가지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처음 내가 그
프로그램에 갔을 때 그는 안식년으로 스페인에 가 있었고 당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강의실에서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내 엉성한 정보 포착 장치는
대부분의 말을 모두 흘려 버리고 'vegetative buffer strip'라는 단어만 새겨들었다.
  세미나가 끝난 직후 그를 방문하여 일을 해보고 싶다는 뜻을 표현했다. 마침
영문으로 만들어 놓은 10쪽 가량의 석사학위 논문 요약과 첫 학기에 버지니아 공대
캠퍼스 안에 있는 참나무와 잣나무 아래의 토양 영양 상태를 비교하는 실험으로
열심히 작성해 두었던 보고서가 서툰 영어 표현을 충분히 보충했다. 그는 그 일이
농업 공학과에 있는 딜라해 Theo A. Dillaha 교수와 함께 하는 것이니 다음 주일에
같이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는 그 날의 면담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나는 식생 완충대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것이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컴퓨터와 모형에 겁을 먹어 실험 연구만을
구상하고 있던 나에게 두 지도 교수는 모형 구축을 강요하다시피 떠맡긴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 동안 담쌓고 있던 일과 인연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 매우 힘들지만
이것은 결국 새로운 경험으로 발전하여 학생과 지도 교수 모두에게 좋은 결실을
맺었다.
  두 지도 교수가 논문 작성과 관련된 학과목 수강을 몇 개 권유하여, 수리학을
전공하던 쿠오 박사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울러 자율성도 허용되어 내 스스로
생물학과 웹스터 Jack R. Webster 박사의 생태계 모형과 산림학과 버거 James A.
Burger 박사의 삼림 토양학 강의를 듣고 그 분들을 논문 심사 위원으로 모셔
도움을 받은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 과정에서, 막연히 겁내던 대상인 모형과 체계
분석의 속성 그리고 토양학에 대한 내용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내 고집대로 실험
공부에만 치중했다면 모형과 체계 분석은 영원히 동경으로만 남을 뻔했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지난날의 두 분 지도 교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식생 완충대란 특성이 다른 두 지역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쪽의 특성을 완충해
주는 지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소음이 심한 지역과 주택지 사이에 숲을
형성하여 주택지의 소음 공해를 줄인다면 그 방음림은 식생 완충 지대가 된다.
바람이 불어오는 지역을 마주하여 바람의 세기를 완충해 주는 경우도 다른 보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살펴보면 완충 지대는 오염 물질이 발생하는 지역과 수자원 사이에
위치하여 수자원 오염 정도를 완충하는 곳을 의미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하천변
습지의 물질 포획 기작은 육상의 식생 지대에서도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적용된다. 그런 까닭으로 오염된 지표 유출수(주)와 지하수가 식생 여과대를
통과하면 부유 물질, 질소^5,23^인 등의 영양소, 병원균, 농약 등의 농도가
감소되므로 오염완충 기능을 갖게 된다.
  * (주) 지표 유출수란 비가 오는 동안 그 빗물이 수목이나 거친 표면에 차단
interception 또는 보유 retention 되거나 대기로 증발산 transpiration 되고
토양으로 침투 infiltration 된 다음 남아서 땅 위로 흐르는 것을 말한다. 흔히
비오는 날에 보는 바와 같이 일시적으로 지표면 위로 흐르는 물을 뜻한다.
  그런 까닭으로 1980 년대 초 미국의 토양보존 협회는 버지니아 주를 중심으로
농부들에게 밭의 아래 부분에 잔디밭을 형성하여 토양 유실을 방지하고 수자원을
보호하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이미 밭으로 된 땅에 잔디를 심는 일은 경작 면적의
감소를 감수해야 하는 결정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면적을 식생 완충대로 바꿀
것인가는 중요한 숙제였다.
      ------------
    식생 완충대의 효력
  이런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흔히 실험적으로 식생 완충대의 폭을 여러 가지
설정하고 그 효력을 관찰하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실험하자면 지나치게 긴 시간과 인력, 예산이 필요하다.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계산이다. 다만 계산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조금은 복잡한 수식과 컴퓨터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 과정을 우리는 컴퓨터 모형 구축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계산 결과는 그 과정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어느 곳에서
실수가 나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기에 계산 과정이 맞는지를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식생 완충대의 영양소 보유 능력을 살펴보기 위해 수문학^5,23^생물학적
요소를 고려한 컴퓨터 모형을 구축하고 모형이 잘 맞는지 검증하기 위해 실험지를
마련했다(주). 그림 3-9와 같이 경사지의 땅을 함석으로 구획하여 지표상의 물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했다. 경사지의 위 부분에 위치한 땅은 갈아엎고, 아래 부분에는
길이가 다른 잔디밭을 만들었다. 실험지에 비가 내리면 경사지 위 부분의 노출된
땅에서 발생하는 흙탕물이 잔디밭을 통해서 흐르게 된다. 흘러내린 지표 유출수는
구획된 맨 아래 부분의 함석으로 된 도랑에 모여 수도관을 통해 흐르게 하고, 그
수도관 최하단에 유량계를 설치하여 지표 유출수의 양을 측정했다.
  * (주) Lee 등(1989) 이도원(1994).
  * 그림 3-9.
  그림설명: 식색 완충대의 물질 보유 능력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지의 개념도(주).
  * (주) Lee 등(1989)
  실험지를 마련한 다음 스프링쿨러를 이용하여 한 시간 동안 인공적인 비(강우량
50mm / ^hr)를 뿌리고 땅 위로 흐르는 빗물(지표 유출수)의 양은 자동 측정기로
측정했다. 흔히 경험하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 초기에는 물이 땅 위로 흐르지
않는다. 한동안은 빗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땅 속으로 침투하는 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땅 위로 흐르는 지표 유수의 발생 시기가 지연되고 양도 적어질
것은 당연하다.
  그림 3-10의 수문 곡선(물 수, 글 문, 굽을 곡, 선 선, hydrograph)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험지에서는 잔디밭이 길수록 지표 유출수가 발생하기까지 지연되는
시간도 길었다. 잔디밭에 축적된 유기물로 인해 토양이 푸석푸석하고, 뿌리가 뻗어
생긴 통로로 더 많은 물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유역에 잘 형성된 숲의
면적이 넓으면 많은 물이 토양과 지하수로 스며들어 홍수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주).
  * (주) 잎의 면적이 넓은 숲의 경우에는 토양으로 물이 스며들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의 물이 살아 있는 잎과 낙엽 표면에 묻어서 땅 위로 흘러가는 물의 양을 크게
줄인다.
  * 그림 3-10.
  그림설명: 잔디밭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수문 곡선비교(주).
  * (주) Lee 등(1989).
  수질을 알아보기 위해, 수도관 끝으로 흘러나가는 물을 3분 마다 채취하여 부유
물질 농도와 부유 물질에 흡착된 인 농도, 물에 녹아 있는 인 농도를 실험실에서
분석하여 물에 씻겨 나간 양을 계산했다. 결과를 요약하면 표 3-3과 같다.

  * 표 3-3. 한 시간 동안 강우와 함께 실험지에서 유출된 부유 물질과 입자상
인산염, 용존 인산염의 양(주)
  잔디밭 길이(0.0m): 부유물질(23.5kg), 입자상 인산염(22.2g), 용존
인산염(113.7mg).
  잔디밭 길이(4.6m): 부유물질(10.4kg), 입자상 인산염(10.3g), 용존
인산염(233.3mg).
  잔디밭 길이(9.1m): 부유물질(6.7kg), 입자상 인산염(4.6g), 용존
인산염(383.1mg).
  * (주) Lee 등(1989).
  흘러가는 지표 유출수로부터 많은 양의 부유 물질과 인산염이 잔디밭에
축적되었기 때문에 잔디밭을 통과한 물의 부유 물질과 입자상 인산염 농도는 낮다.
또한 유실되는 부유 물질에는 대략 0.1 퍼센트(예를 들면 22.2g / 23.5kg ^16^
100)의 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유실되는 인 중에서 용존 인산염이 차지하는 비율이
5--8% 정도 되었다.
  특이한 것은 잔디밭이 길수록 용존 인산염의 유출이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잔디밭을 흘러가는 지표 유출수의 용존 인산염 농도는 지표 유출수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는 높았다가 차츰 감소했으며 나중엔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이런
결과를 종합해 보면 잔디밭에서는 인산염의 포착이 대부분 입자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부유 물질과 부유 물질에 흡착되어 있는 인은
잔디밭에서 포착되고, 그 포착된 입자상 인의 적은 양이 잔디밭에 의해서 쉽게 녹는
형태로 변해 있다가 지표 유출수 발생 초기에 씻겨 나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잔디의 활동으로 생성된 유기물들이 토양에 흡착되어 있던 인 화합물을 물에 잘
녹게 만드는 작용인 유동화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결과는 하찮아 보이는
잔디밭이 부유 물질과 영양소를 포착하여 축적하는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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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 이후의 생각들
  땅에 있는 물질은 물리적인 작용으로 인해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결국 물과 영양소는 낮은 곳으로 이른다. 보기에 따라 이것은 높은 곳에
위치한 땅이 낮은 곳에 베푸는 선물일 수도 있다. 그 낮은 곳에는 물이 먼저 이르니,
땅으로부터 흐르는 영양소는 땅이 물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를테면 땅의 선물이
전혀 없는 물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물고기가 살 수 없으므로 그런 경우에는 알맞은
선물이 필요하다. 반면에 강물과 호수의 부영양화는 땅이 베푼 지나친 선물 공세에
물이 버거워하는 모습이다. 누구나 지나친 하사금에는 부담감을 느낀다. 식생
완충대는 땅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지나친 땅의 선물을 조절해 주는 마지막
관문이다.
  어느 날 내 관심사를 아는 학생이 조선 영조 36 년 (1760 년)에 하천 관리를
주업무로 설치되었던 주천사의 절목에 포함된 내용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주).
한문을 제대로 모르는 나는 이화여대 중문학과 정재서 교수의 도움으로 그 뜻을
헤아렸다. 그 일부를 보니 "매년 봄, 가을과 우기에 갯버들과 수양버들 그리고 주로
양지에서 자라는 잡목을 제방과 틈이 난 곳에 여러 그루 옮겨다 심어 오랫동안
자라게 하며 유지하는 곳으로 삼는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식생 완충대의 기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조상들의 선견 지명을 엿보는 기분이다.
  * (주) 주천사의 업무는 손정목의 책(1977)에서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식생 완충대에 대한 경험 때문에 어느 날 무덤의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마침
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풍수의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관련 자료를 부탁하여 그림을
구해보았더니 마을과 무덤의 중간에는 숲이 있었다. 옛사람의 지혜가 이미 식생
완충대의 효력에 이르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신에서 분비되는 영양소는
지하수를 따라 아래로 흐른다. 무덤과 마을의 우물 사이에는 자연 식생 완충대가
있어서 영양소는 우물에 이르기 전에 숲의 식물과 미생물에 의해서 흡수된다. 결국
우물물은 식생 완충대에 의해서 영양소 오염이 방지되고 있는 것이다. 청개구리는
강가에 자리한 엄마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울었다지만 청개구리의 불효는 경우에
따라 물을 더럽히는 행위로도 비난받을 수 있었다.
  * 그림 3-11.
  그림설명: 무덤과 마을 사이의 수목대(주)
  * (주) 강선중(1984).
  이제 이 땅에서 무덤의 위치는 의미를 잃어 가고 있다. 좁은 땅에 난립하는
아파트군을 닮았는지 산을 깎아 무덤 아파트를 조성하고 있다. 1981 년 1월 19일
남미 아콩카과 등반에서 조난당한 고 김용환 선배가 누워 계신 용인공원에서 그
험악한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다.
  * 그림 3-12.
  그림설명: 좁은 땅에 무덤이 늘어 아파트군을 닮아 가는 공동묘지(주).
  * (주)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용인공원에서 1994 년 1월 16일 촬영.
  1960 년 이후 우리 나라 수질이 점점 악화되고 있는 주원인은 비점(몹쓸 비,
더러울 비)오염원의 방제에 대한 국가적 전략의 부족이다. 그러한 전략에는 농경지,
공사장, 도시 지역의 토지 이용 조절을 통해서 영양소 유실과 토양 침식을 감소하는
방안도 포함되어야 한다. 지표수와 지하수로 씻겨 가는 영양소나 토양 물질의 양은,
과도한 시비(더할 시, 거름 비)를 억제하고 식물이 비료 성분을 왕성하게 흡수하는
시기에 비료를 뿌리며 윤작에 의한 자연적인 질소 고정을 통해서 질소 공급을
유도하고 오염원과 수자원 사이에 위치하는 수변 생태계를 보강하며 식생 완충대를
설치하는 등의 노력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따로 보기 6) 노인과 젊은이가 주고받는 아름다움

  대가족을 들여다보면 노숙한 어른과 장년 그리고 사춘기에서 어린이에 이르는
여러 나이의 사람이 어우러져 산다. 장년은 어린이와 노인을 물질적으로 부양하고,
노년기의 세대는 경험으로 축적된 정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어린이와 사춘기에 이르는 나이의 젊은이에게는 변화 그 자체가 속성인 반면에
노숙한 어른은 정신적^5,23^물질적으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제 발달 단계가 다른 세 가지 생태계가 이웃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지금
막 천이를 시작하는 생태계는 인간 세계의 어린아이처럼 물질을 쌓아 갈 생물
수단이 부족하다. 그러다가 주변의 장년기와 성숙기에 있는 생태계로부터 생물
수단이 전달됨으로써, 정보와 정보 가공에 필요한 물질을 조금씩 축적하기 시작한다.
장년기에 있는 생태계는 변화가 많고 외부 자극에 능동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생태계의 부의 척도인 생물 정보를 쌓아 가는 반면에 성숙한 생태계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장년기 사람의 경우는 생산한 것이 남아서 넘치고 노인은 그것들을
수용하여 소화시킬 여지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웃한 젊은 생태계는 물질을 주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성숙한 생태계는 받는 경향이 있을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일찍이 스페인의 저명한 생태학자 마가레프 Ramont Margalef 가
내건 가설이지만 아직 검정된 바 없다.
  이것은 벌이가 좋은 젊은이들이 나이 든 어른을 부양하는 것과 같다. 물질이
쌓이는 속도는 젊은 생태계에서 더 크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면에
늙으신 부친이 지난날 경험으로 축적한 정보를 아들에게 제공하듯이, 성숙한
생태계도 물질을 부양하는 젊은 생태계에서 무엇인가 보답하지 않을까? 나는 아마도
그 보답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의 정보일 것으로 가상한다. 요컨대 젊은
생태계는 물질의 '주게'이며 정보의 '받게'이고, 성숙한 생태계는 정보의 '주게'인
반면에 물질의 '받게'가 아닐까? 그러나 내가 던지는 이 가설을 건드려 보기에는
생태계의 정보라는 개념이 아직도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추측하건대 동물은 조금 위험하더라도 에너지가 넘쳐 새싹과 유기물 생산이
왕성한 젊은 생태계에서 먹이를 찾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긴 세월 어느덧
가고, 집 찾아 돌아가는 작은 새"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어
조용한 곳에서 밤의 안식을 도모하지 않을까? 마치 하루의 일과를 끝낸 어린이,
아빠와 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집에 모여 조용하고 차분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듯이 동물은 중요한 삶의 방편을 성숙한 생태계에서 전수하는지도 모른다. 
    제4부 다시 땅으로 돌아와서

  이 땅에 살며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어설픈 모습들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인연이다.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뒹굴고 있는 낙엽은 정녕
행복하지 않으리라. 불타다 남은 생명의 씨도 할 일은 있고,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어린 나무와 키 작은 풀도 자기 몫이 있을 것이다. 옛 조상이 짜 두셨던 큰 그림을
보며, 또한 남의 땅에 남아 있는 정겨운 모습을 본다.
    도시에 살며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집이 많고 차가 많은 곳이 바로 도시일까?
그렇다면 사람과 집, 차가 얼마나 많아야 도시일까?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 함께 계시는 황기원 교수는 도시가 책과 같다고 했다.
정보란 흩어져 있는 것보다 모여 있는 편이 실천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정보가 모여 책을 이루며 또한 정보가 모여 힘을 발휘하기 위해 도시를 이루니
도시와 책은 유사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책은 갖가지 생각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보다 한데 모아 놓는 것이 더
이롭다고 하여 만들어진 문화다. 마찬가지로 도시(도읍 도, 살 시)라는 글자 또한
뜯어 보면 그와 같은 뜻이니, 사람들이 뿔뿔이 떨어져 사는 것보다는 한데 모여
사는 것이 더 이롭다고 하여 만들어진 문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산다는 것과
서로 나눈다는 것은 책과 도시가 존재하는 목적이고 이유다(주).
  * (주) 황기원(1995).

  그러면 시골은 무엇일까? 사람과 집, 차가 적다는 점에서 시골은 도시와
구별된다. 또한 정보가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시골은 도시와 대비된다.
따라서 정보의 양과 질은 도시와 시골을 나눌 수 있는 잣대가 될 것 같다.
  나는 인간 활동에 직접적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소비가 생산에 비해 많은 곳을
도시라 정의한다(주). 대조적으로 시골은 도시와 비교할 때, 생산된 에너지를 쓰고도
남아 도시에 제공하는 곳이다. 유기물의 생산과 소비 과정은 도시와 시골에서 함께
일어나고 있다. 다만 시골에서는 유기물 생산량이, 도시에서는 그것의 소비량이
상대적으로 우세하다는 말이다.
  * (주) 석유나 석탄 같은 화석 연료는 고대에 광합성으로 생산된 유기물이 변형된
것이다.
  사람과 집, 차를 모으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정보를 농축시키기 위해서는 에너지
소비가 수반되어야 하기에, 시골에서 생산된 에너지는 도시로 몰려 농축된다. 그
농축된 에너지가 도시의 정보를 가공하며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거의 대부분 물질을 매개로 일어난다.
  도시마다 시골을 의지하는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에너지 수급 측면만 고려하면
도시는 시골을 파먹고 사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다. 다만 기생충이 숙주를
쓰러뜨리면 자신도 결국 쓰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구책을 찾는다면 공생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아니면 도시가 지속 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안에
시골의 기능을 충분히 안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골을 대표하는 것은 광합성을
하는 나무와 풀이니 곧 자연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는 허황된 꿈이다. 그러한 구호 아래
진행되는 운동은 도시가 시골에서 지고 있는 일방적이고 지나친 신세를 조금 줄이는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도시를 시골과 연계하여 유지하려는 긍정적인 면모도 있다.
  지속 가능성은 시간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조화를 의미하며, 공간적으로 주체와
이웃과의 조화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따라서 무엇보다 도시의 지속성을
도시라는 계 안에서 해결하려는 태도는 도시와 시골의 관계에서 함의되는 공생성을
아우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어설픈 접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라는 외침보다는 조화로운 도시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지만 왠지
구태 의연하여 매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지속성은 도시라는 하나의
계와 그것의 환경인 시골이 조화를 이룰 때만 가능함은 분명하다. 동시에 도시는
시골의 환경이므로 도시와 시골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 놓인다.
      ------------
    도시 유지 에너지는 시골이 공급한다.
  만유 인력과 블랙홀같이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물질은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확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닫힌 계에서 물질 엔트로피는 결국 최대에 이르게 된다"는
조르제스쿠뢰겐 Georgescu-Roegen의 말은 이런 현상을 의미한다(주). 그러므로
도시에 모인 인구와 정보의 경우에도 농도가 낮은 곳으로 확산하려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한 요소들이 도시로부터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유지
에너지가 끊임없이 공급되어야한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 (주) Georgescu-Roegen(1977).
  시골에서 전기와 식량 등의 형태로 생성되어 도시로 지원되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는 도시 유지 에너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골에서는 생산된 유기물이
넘쳐서 도시로 흐른다. 시골이 제공하는 일차 생산물은 도시에서 소비되며 에너지를
제공하고 쓰레기, 이산화탄소, 물을 생산한다. 이와 같이 도시의 정보는 일차
생산물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가공된다. 그렇게 가공된
정보가 넘쳐 흐르면 시골로 확산된다.
  다른 한편 적절한 양의 도시 쓰레기와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은 시골의 생산
활동에 필수적인 원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와 시골은 공생하고 있다. 그러나
주고받는 관계가 지나치면 서로가 부담스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 도시의 똥을
사와서 논밭에 뿌린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시골도 막대해진 도시의 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느 시골도 도시의 똥인 생활 쓰레기와 방사능 폐기물을
받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도시 문제는 도시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도시에
먹이를 공급하고 똥을 받아가는 시골과 함께 살지 않으면 도시의 존립할 수 없다.
작은 아들이 분가해 나가듯 도시는 시골이라는 본가에서 분가했다. 행정 구역상
군에서 읍이나 시로 승격되는 것은 비대해지는 체계를 피해 가는 분가의 한 형태다.
그러나 분가는 완전히 등을 돌리는 대립보다는 협력을 전제로 할 때 아름답다.
분가하여 잘 사는 작은아들은 부모를 모시며 허덕이는 큰아들과 나눔을 가질 때
아름답다.
  이제 도시는 시골과 서로 끌어안고 한곳에 오손도손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분가를 한 후 밖에서 분가를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미
도시는 후자를 택했으나 분가한 도시에서는 시골의 살림살이를 완전히 버릴 수
없다.
  * 그림 4-1.
  그림설명: 시골과 도시의 공생 관계(주)
  * (주) Odum and Odum(1981)의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림 4-1에서 보는 것처럼 도시와 시골의 공생 관계를 매개하는 필수 원소에
초점을 맞추면 이는 물질 순환 과정으로 표현된다. 순환 과정의 일부를 도시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시골은 식탁과 폐기물 처리장 기능을 동시에 제공해주는 고마운
준재다. 문제는 시골이 도시의 기능 수행에 필요한 음식물(에너지원)을 공급하며
도시가 만들어 놓은 배설물을 처리해 주는데도 도시가 그 시골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에 걸맞는 보살핌을 베풀지 않을 때 나타난다.
  우리가 식탁과 화장실을 돌보아야 생활이 영위되듯이, 도시가 시골을 돌보지
않으면 공생 관계는 무너지고 자신도 병들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시골이 도시를
생각하지 않으면 느린 걸음을 각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생물권은 도시와 시골이
가지는 기능을 안배해 그들의 공생관계를 유지해야만 적당한 속도로 발전하는
안전을 계속 누릴 수 있다.
      ------------
    도시의 낙엽
  갈잎나무의 노래

  갈잎나무 그림자들 가을이 깊어
  갈수록 흐려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뭇잎들
  이제는 나무에 매달리지 않고
  한 개도 남지 않고
  떨어지나 울긋불긋
  흩날리며 미련 없이 낮은 곳으로
  내리는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도 이제는 훌쩍 떠나고 싶지만
  아스팔트 위에는 싫고
  산골짝이나 들판에 쌓이고 싶은
  마음 남았으니 아직도
  나뭇잎처럼 되기는 멀었다
  갈잎나무처럼 살기는 틀렸다.
                  (김광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앞길에 있는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두 가지 슬픈 모습을
던져 준다. 우선 은행잎의 색이 변하기도 전에 공연히 열매를 생산한 나무는 뭇
사람들로부터 고초를 겪는다. 공공의 자산을 남들이 먼저 가져갈세라 이 사람 저
사람 달려들어 나무를 두들겨서는 열매를 갈취해 간다. 또한 가을이 더욱 무르익어
겨울로 접근하는 10월 말이면 노란 잎들이 한껏 자태를 자랑하고 나서 낙엽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낙엽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시멘트 바닥에 뒹굴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때로 그냥 방치된 낙엽은 행인의 발길에
밟혀 가루가 된다. 도시의 낙엽은 진토된다 하더라도, 처음 왔던 흙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가련한 운명을 타고났다. 부서진 가루는 언젠가 조금씩 물에 떠내려가거나
하늘로 날아간다.
  * 그림 4-2
  그림설명: 가을이면 아스팔트 위에서 갈 속을 몰라 헤매는 낙엽(주).
  * (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7 동 교수아파트 앞길에서 1996 년 10월 29일 촬영.
  이 무렵 새벽 5시 30분경, 낙성대길에는 거의 매일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움직임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면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묵묵히 빗질을 하고
있는 환경 미화원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아침마다 쌓인 낙엽을 쓸어 내야 하는 그
분들의 고초를 실제로는 겪지 않기에 다만 일부만 느낀다.
  그런데 왜 도시의 모든 낙엽은 쓸어 내거나 운반하거나 태워야 하는 것일까?
운반하자니 차량이 필요하고, 차량을 움직이자니 화석 연료를 태워 동시에 공기를
더럽혀야 한다. 거두어들인 낙엽은 그냥 두자니 쓰레기가 되고 태우자니 다시
공기를 더럽힌다. 더구나 낙엽을 태움으로써, 땅으로 돌아가야 할 영양소들을 하늘로
날려 보내니 세월이 흐르면서 토양은 점점 척박해진다. 그런 과정으로 척박해진
비원(비밀할 비, 나라동산 원)의 토양에는 개선 처방으로 비료를 주도록 했다니 그
또한 한심하다. 1995 년 가을 어느 날, 쓰러진 나무 껍질을 뒤져 벌레를 찾기 위해
점봉산행에 동행했던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최재천 교수는 낙엽을 쓸어 내어
척박해진 토양에 비료를 뿌리는 관리 방법은 음식을 빼앗고 나서 링거 액 주사로
영양소를 주입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다.
  뿌려진 비료는 식물이 흡수하여 필경 낙엽이 되고 낙엽은 분해되더라도 토양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므로, 그 비료는 결국 강이나 하늘로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 비료를
구하기 위해 힘쓰고 돈을 들이려니 국민의 세금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하루빨리
물과 공기를 망가뜨리기 위해서 세금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주).
  * (주) 생각해 보기: 세계 각국 도시에서 주민의 낙엽에 대한 인식, 단위 면적당
낙엽 생산량, 낙엽 처리 방법과 비용, 낙엽 쓰레기의 생산량을 비교하시오. 처리
방법에 따른 토양 유기물 함량과 지하수 충원량을 비교할 수 있는 컴퓨터 모의가
가능할까?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인지 몰라도 이제는 그런 관행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큰
나무 아래에 키가 작은 관목들을 허용함으로써, 떠돌아다니는 낙엽을 최대한 그
숲에서 머물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 그림 4-3
  그림설명: 큰 나무와 가로수주변의 서로 다른 모습(주). #1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의상대 부근, #2 서울시 관악구 봉천7 동 낙성대길, #3 미국 샌프란시스코,
#4 일본 동경 이케부쿠로 역 부근.
  * (주) #1 1997 년 6월 16일, #2 1995 년 11월 19일, #3 1996 년 8월 17일, #4
1997 년 5월 15일에 각각 촬영.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도심의 모든 가로수는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들도
작은 풀들과 어울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겨울이면 우리 나라 곳곳에서 머리 잘린 가로수를 본다. 자연의 생산과 인간의
필요성이 서로 맞게 궁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가로가 황량하던
시기에는 하루빨리 자라는 나무가 매력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나친 생산으로
비대해진 나무는 성가신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때로는 줄지어 서 있는 전신주와
경쟁하고 때로는 비바람에 쓰러져 길을 막는다. 하지만 가로수가 크게 자라 쓰러질
염려가 있다면 이제 잘 자라지 않는 나무로 바꾸는 방안도 조금씩 생각해 보자.
누군가는 가로수를 베어 내는 예산을 쓰지 않으면 다음 해에 배당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자행된다고도 말했는데 설마 그러기까지야 할까?
  * 그림 4-4.
  그림설명: 머리 잘린 가로수들(주). #1 충북 옥천^5,23^보은을 잇는 37 도로, #2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남부순환도로, #3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 2리, #4
경기도 양평균 양서면 양수리.
  * (주) #1 1994 년 2월 11일, #2 1996 년 4월 2일, #3 1997 년 5월 3일, #4
1997 년 6월 1일에 각각 촬영.
  이제 도시를 계획하고 설계하시는 분들은 좀더 많은 낙엽들이 토양으로
되돌아가도록 배려하면 좋겠다. 그것이 비록 내가 사는 땅으로 성가신 벌레를
불러오더라도 또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있을 것이다. 낙엽이 썩어서 토양에
보태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토양 미물들은 공기를 더욱 정화하는데
공헌한다. 그렇게 하여 토양이 더욱 푸석푸석해지면 더 많은 빗물들이 땅 속으로
스며들 수 있다. 땅 속으로 더 많은 빗물이 스며들므로 비가 오면 가로로 넘치는
빗물이 줄어들고 점점 더 고갈되어 가는 지하수를 충원하는 데에 공헌할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면 천덕꾸러기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환경 오염이다. 그러기에 나뭇잎들은 분명 자기가 가야 할 올바른 장소로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도회지의 나무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살 위치에 놓이지도 못할
뿐더러 한 뼘 허용된 땅마저 몸으로 경험할 수 없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어우러져 낙엽을 포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가로수가 서
있는 곳에서는 연출될 수는 없을까?
  아울러 나무와 나뭇잎이 영양소를 잡아 두고 분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주변 녹지들의 상대적인 위치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 지금 도시에서는 공원이나
도로의 중앙 분리대 등 녹지가 있는 곳이 이웃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비가 오면 발생하는 지표 유출수가 도로를 거쳐 곧장 배수구로
들어간다. 지표 유출수에는 인간과 자동차들이 만든 매연 강하물(떨어질 강, 아래
하, 물건 물) 등의 오염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식생 지대에서 여과될 경로가
생략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땅 위의 식생 지대가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무시되고 도시 하천을 비롯한 수계는 오염물들을 도맡아 처리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도시의 지표 유출수가 식생 지대를 거쳐서 하수구로 갈 수 있도록 앞으로 조경
설계에서 좀더 많은 녹지 공간을 낮은 곳에 두자. 그러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까닭에 보다 많은 빗물이 식생 지대를 통과하게 될 것이다. 빗물이 배수구로
들어가지 전에 식생 지대에서 여과되므로 주변 하천의 수질이 어느 정도 향상될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동시에 땅 속으로 침투할 수 있는 수량을 증가시켜 지하수
충원과 도시 지역의 홍수 감소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또한 더 많은 영양소들이
보유되기 때문에 녹지의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안의 일부로 도로의 중앙 분리대, 가로수 등의 위치를 도로보다
낮게 위치시키기 전에, 설계 기준과 관리 비용 등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한
비용^5,23^편익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불탄 숲과 논둑(주)

  * (주) 이 글은 1996 년 4월 23일 강원도 고성에서 우리 나라 기록에 남은 가장
큰불이 난 이후에 '한겨레신문'에 투고한 내용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4월은 일년 중 가장 건조한 기간인 탓에 산불의 발생 빈도가 매우
높다. 아니나 다를까? 1996 년 4월 23일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대략
3800 헥타르 면적의 좋은 숲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산불로
인해서 몇 십 년 만에 맞은 가장 큰 피해 면적이라고 한다. 예방했어야 할 인재임에
분명하지만 지나간 일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는 뒤따라올 후유증이 무엇이며, 아픈 상처를 하루빨리 아물게 할 방책을
찾아야 할 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산불이 수없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산불의 영향과 사후 관리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에 대해서는 고려한 적도 지원한
적도 없다. 따라서 지금은 다른 나라의 연구 결과들로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
    불탄 숲에는 생명의 씨는 있다.
  산불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93 년 2월
한국생태학연구회를 처음 시작할 무렵이었다. 회원들이 공동으로 연구할 후보
주제로 산화(뫼 산, 불 화) 생태학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 때 비로소 화재 역사와
연구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는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과 접촉하여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나중에 옐로스톤 학습원을 방문하는 인연으로 발전했다.
  그 해 4월 경남 포항시 인근에서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가 보았다.
산불로 땅이 노출된 지역에서는 불에 타고 남은 큰 나무들을 베어 내어 땅이
침식되고 있는 모습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 때까지 익힌 내 지식에 의하면 죽은
나무를 베어 내고 어린 나무를 심는 것은 그다지 칭찬할 것이 못 되었다.
  * 그림 4-5
  그림설명: 포항시 부근 삼림(위)과 미국 옐로스톤 공원(아래)에서 산불이 난 다음
나타난 경관의 비교(주).
  * (주) 경북 포항시 인근의 산불은 1993 년 4월 사람의 실수로 발화했으며 1993
년 5월 15일 촬영했다. 옐로스톤 공원의 경우는 1988 년 봄에 자연 발화하여 10월
초에 진화되었으며 1994 년 8월 7일 촬영했다.
  자연은 앞 세대가 이룩한 터전 위에서 다음 길을 일구어 간다. 앞 세대의 유전적,
문화적 정보는 유전자와 생리적, 생태적 과정을 통해 전달되며 앞 세대가 만들어
놓은 유기물은 다음 세대들의 재생에 중요한 바탕이 된다. 소위 말하는 퇴비와 유기
농법은 이런 유기물에 의존한다. 불에 타다 남은 나무일망정 그것은 유기물이다.
앞서 언급한 낙엽과 형태, 기능 및 작용 시간이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는 만큼 이는
낙엽과 함께 다른 시간 규모 안에서 자신이 속한 생태계에 공헌하는 귀중한
자원이다.
  이상하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불에 타다 남은 유기물을 베어 내고 어린 나무를
심는다. 그 베어낸 나무를 어디에다 쓰는 것일까? 그것이 도회지로 가면 폐기물이
되거나 소각되어 또 다시 물과 공기를 더럽히지는 않을까? 그 죽은 나무들은 이미
손상되기는 했지만 땅을 보호하는 옷의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다. 떨어진 옷마저
벗겨 내면 땅은 더 쉽게 침식되고, 숲의 재생은 더디어진다. 더구나 나무를 베어
내고 처리하는 과정은 분명히 국민의 귀중한 세금을 낭비하게 할 것이다. 베어낸
나무를 이러한 인위적 비용과 자연 손실을 보상하는 이상으로 유용하게 쓰는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산에 있는 풀과 나무가 하는 일은 광합성이다. 광합성은 풀과 나무가
땅으로부터는 물과 영양소를, 공기로부터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태양 에너지로써
잘 가공해 유기물을 만드는 과정이다. 따라서 풀과 나무는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인 물과 영양소를 자신의 주변에 확보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 탁월한 재주는 동물과 미생물이 함께 어울릴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
  산불은 이러한 식물, 동물, 미생물을 삼림 생태계로부터 추출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생물상의 변화로 인해 지역의 수문과 생물적, 지질적, 화학적 과정에 변화가
뒤따를 것은 당연하다. 이를테면 불은 숲의 수분 보유력을 손상시킨다. 1974 년
캐나다 온타리오 북동부에서 산불이 난 지역은 주변의 불타지 않은 지역에 비해
유량이 69 퍼센트가량 증가했다. 유량이 증가하면 당연히 유출 에너지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침식되는 토양과 씻겨 나가는 영양소의 양이 극도로 증가한다. 더구나
유기물 요소에 잘 저장되어 있는 영양소들은 불에 의해 분해되고, 영양소를
보유하는 창고 구실을 하는 토양, 식물, 동물, 미생물의 영양소 보유 기능이 모두
엄청나게 취약해진다.
  산이 잃어버리는 토사와 영양소는 어디로 갈까? 불타는 동안은 대부분 하늘로
날아가고, 화재가 멈춘 이후부터는 주변 하천이나 저수지, 지하수로 가는 길밖에
없다. 이것으로 산불이 공기를 오염시키고 또 주변 수자원을 부영양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하류의 수로와 저수 용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홍수도
우려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불타 버린 산 자체만을 지나치게
아쉬워하고 이웃 수계에 나타날 악영향에 대해서는 대처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산불로 땅옷을 태워 버린 곳을 짓밟는 일은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행위에 비유될
수 있다. 따라서 산화 지역에서 나무를 베어 내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벌목
작업은 토양을 손상시키며, 그에 따라 토양과 영양소 유실량을 증가시킨다. 타고
남은 식물에는 유기 탄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기 탄소를 기반으로
억척스러운 미생물들이 영양소를 왕성하게 빨아들일 것이다. 몸의 크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표면적이 넓은 미생물은 영양소 흡수 속도가 식물 뿌리보다 훨씬
빠르다. 따라서 미생물은 훼손된 생태계에서 새로운 식물이 정착하기 전에 영양소를
보유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첨병이 된다. 풀과 유목이 자라고 불타다 남은 나무
그루터기의 양이 줄어들면, 한꺼번에 늘어났던 미생물들은 차츰 죽음을 맞게 된다.
그 때 죽은 미생물은 고농도의 질소와 인 등 영양소를 방출하여 새로 자라는 식물
성장에 바탕이 된다.
  특히 장마철이 오기 전에 새로운 싹이 나오는 과정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산화
지역 토양에도 타다 남은 풀과 나무의 씨앗이 있다. 산불에 의한 상처는 남아 있는
씨앗과 주변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씨앗으로 치유될 것이다. 씨앗이 움트는 바탕은
토양의 영양소와 수분이다. 따라서 토양과 영양소가 주변 수계로 유실되는 양을
최대한 감소시킬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러한 방안으로서 물길이 지나칠 산기슭 낮은 곳을 따라 짚을 뿌리거나 짚단을
쌓아 두는 처방이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불탄
묘지에 짚을 뿌리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경우 시각적인 효과도 물론 있겠지만
수분과 영양소 유실을 방지하는 효과가 더욱 중요하다. 계곡의 물길을 따라 톱밥과
모래를 섞어 넣은 자루나 주머니로 작은 댐을 쌓는 것도 하나의 처방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짚과 톱밥은 상대적으로 유기 탄소 함유량이 높다. 미생물들은 이 유기
탄소를 기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면서, 빗물에 씻겨 가는 영양소를 흡수할
것임에 틀림없다.
  불탄 지역의 나무를 베어 낸 모습에 회의를 느낀다. 관할 지역에서 산불이 난
귀중한 산림 자원을 태웠으니 아마도 관련 기관의 공무원은 문책을 받았으리라.
이제 그 공무원은 무언가 가시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으리라.
그래서인지 일부 지역에서는 불탄 나무들을 베어 말끔히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이제 나무를 베어 내느라고 인력과 예산을 사용한 점과, 베어 낸 나무로 인해
줄어든 편익을 비교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걱정스러운 것은 불타 베어진
나무가 도회지로 내려오면 일부는 목재로 사용되겠지만 불에 그슬린 많은 부분은
폐기물로 전환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불에 타다 남은 나무들은 우선 보기도 흉하고 화제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주민들의 정서를 자극하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유기물이므로 현장에서는 불탄 산림이
복원되는 데 한몫 할 것이다. 생태계에서 축적된 유기물은 우리 생활의 보험이나
저축과 같아서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을 때 완충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1988 년 불탄 옐로스톤 공원의 나무들은 그 완충
작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리라.
  베어 낸 나무를 운반하고 새로운 유목을 심기 위해 산불 지역에 기구나 사람을
들이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 묘목을 심어야 한다면 산기슭에 짚단과 톱밥
주머니를 비치하는 것으로 국한하는 것이 좋다. 벌목과 나무 심는 작업은 토양을
교란시켜 침식을 증대시킬 염려가 있다. 묘목은 천이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성장력 빠른 수종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빨리 자라는 식물은 그만큼 영양
물질 흡수 속도가 빠르다. 미생물의 영양소 흡수 속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수계로
유실되는 영양소를 포획하여 보유하는 능력은 성장이 느린 식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산불 발생은 올해만의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껏 남의
나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상황을 예상해 보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산불이 난 이후의 현명한 대처 방안을 찾기 위한 종합적인 연구를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적어도, 고려될 수 있는 관리 방안 하나하나에 대한 연구 검토가
필요하다. 산림의 식생과 야생 동식물, 토양 기능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 삼림과
주변 수계의 수문, 하천과 호수의 수질과 생물상의 변화, 대기로 날아가는 기체
상태의 물질량을 측정하는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최선의
관리 방안은 그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사람의 실책으로 일어나는 산불은 물론 예방 조처를 강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산불을 완벽하게 예방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다만 10 년 후 또 다시 산불이 났을 때,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는 어떻게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연구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산림청과 환경부 관련 연구기관 그리고 학계가 공동으로 연구를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 산불은 산에서 일어나지만 주변 지역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적어도 학자들이 여러 가지 관리 방안의 실효성을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배려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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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우는 일이 과연 좋을까?
  겨울에 시골길을 가다 보면 태워진 논둑이나 강둑을 흔히 목격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에 정월 대보름이면 달집을 짓고 잔디밭을 태우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언젠가 서울에서 갈대밭을 태우는 행사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무성한 갈대밭은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은폐 효과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했다.
  * 그림 4-6.
  그림설명: 겨울에 태워진 하천 주변의 모습(주).
  * (주)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노곡천에서 1997 년 3월 21일 촬영.
  논둑이나 강둑 태우기는 어쩌면 하나의 타성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농부들은
풀섶에 깃들여 겨울을 나는 해충 알들을 없앨 생각으로 논두렁을 태우는 것이리라.
어쩌면 이러한 관행은 과거에는 이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행위들에 대한 생태학적인 비교를 실행하여 득실을 따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시대가 달라졌다.
  태움은 해충을 선택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로운 생물까지도
무자비하게 해치운다. 음력 정월 첫 쥐날에 쥐를 쫓는다 하여 논둑이나 밭둑에 놓는
쥐불도 때와 곳에 따라 해충보다는 거미와 같은 해충의 천적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더구나 만물이 태동하기 전인 이른 봄에 비가 올 경우, 불탄 지역에서는 더 많은
영양소가 빗물에 씻겨서 강물로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다. 풀이나 나무들은
영양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재가 되면 물에 녹는 물질들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미 부영양화가 진척되어 있는 주변 수자원에 더욱 많은
영양소를 보태게 된다. 마치 배부른 애에게 떡을 더 먹이는 꼴이다.
  물론 불태움은 식물로 이루어진 땅옷의 기능을 약하게 하여 더 많은 토사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 토사는 영양소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양소를 수계에
옮겨 놓는다. 이러한 작용들은 모두 수계의 부영양화를 더욱 촉진시킬 것이다. 또한
토사들은 하류에 있는 호수를 메우는 데도 한몫 하리라.
  그렇다면 이제 논둑과 하천변을 태우는 일을 재고해 볼 때가 아닌가? 과거에는
태움이 바람직했더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는 실험은 간단하다. 풀밭의 일부에서 태운 경우와 태우지 않는 경우에 나타나는
토양의 물리화학적 특성, 미소 동물과 거미를 포함하는 동물상, 지표 유출수와
지하수의 특성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당연하게 진행되고 있는 불놀이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용^5,23^편익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특히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미국 아리조나 주에서 불태운 경우와
태우지 않는 경우를 비교한 실험 내용을 보면 태움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 표 4-1. 미국 아리조나 주의 동남부 두 지역에서 1987 년 가을, 1988 년 봄과
가을에 큰키벼와 식물을 태우고 인공비를 뿌린 다음 발생한 지표 유출수, 토사
유출량, 지표 유출수 발생 지연시간을, 태우지 않은 경우와 비교한 자료.

    지표유출수(mm)
  산타리타 지역 그냥 둠: 1987 년 2.42(1.24), 1988 년 1.91(0.50)
  산타리타 지역 불태움: 1987 년 1.56(1.03), 1988 년 20.9(2.7)
  엠파이어 지역 그냥 둠: 1987 년 13.9(4.2), 1988 년 10.2(2.6)
  엠파이어 지역 불태움: 1987 년 19.8(4.5), 1988 년 26.9(2.7)

    토사유출량(kg/ha)
  산타리타 지역 그냥 둠: 1987 년 20.5(16.1), 1988 년 26.5(7.4)
  산타리타 지역 불태움: 1987 년 29.1(13.1), 1988 년 392(83)
  엠파이어 지역 그냥 둠: 1987 년 162(59), 1988 년 133(33)
  엠파이어 지역 불태움: 1987 년 292(63), 1988 년 591(83)

  지표유출수 발생 지연 시간(분)
  산타리타 지역 그냥 둠: 1987 년 16.5(8.7), 1988 년 13.3(4.5)
  산타리타 지역 불태움: 1987 년 16.3(8.7), 1988 년 5.8(0.6)
  엠파이어 지역 그냥 둠: 1987 년 6.3(3.6), 1988 년 10.2(5.8)
  엠파이어 지역 불태움: 1987 년 5.0(3.9), 1988 년 5.0(0.6)
  * 자료: Emmerich 와 Cox(1994)에서 '가을 부분' 발췌. 
    숲에 닿은 손길

  산을 잘라 맥을 끊고 동물의 통로를 없애는 행위는 우리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못된 나라들이 은근히 바라고 있는 바가 아닐까? 국민대 김은식 교수의 의문은 내게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 생각하는 임학과 출신이라서 나와
다른 시각을 보이곤 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녹지 자연도 등급 8은 사람이 가꾼
2차림이라는 이유 때문에 보존대상이 될 수 없다는 우리 나라 규정에 대한 이의
제기 등 순수 과학에서 출발한 내가 귀담아들어야 할 지적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숲이 가꾸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사람의 손이 닿는다고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만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두기만 해도 좋은 숲이 많이 있다.
때로 선의에서 시작한 숲 가꾸기가 엉뚱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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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는 손길
  1995 년 5월 11일 한국 생물다양성 협의회의 준비로 국립공원 심포지엄이 열리기
전에 계명대학교 김종원 교수의 인도로 북한산 자연 탐방을 했다. 인수봉을
바라보며 참나무 아래 심어 둔 잣나무 유목이 김 교수의 표적이 되었다. '천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바라보면, 잣나무와 같이 햇빛을 좋아하는 양수(양지 양, 나무 수)는
참나무와 같이 그늘에서 잘 견디는 음수(그늘 양, 나무 수) 아래에서 자랄 수 없다.
그렇다면 참나무 아래 자리잡은 잣나무의 신세가 참 처량하다.
  * 그림 4-7.
  그림설명: 참나무 아래 심은 잣나무의 모습(주)
  * (주) 서울시 관악구 봉천7 동 관악산에서 1996 년 11월 3일 촬영.
컬러슬라이드로 찍은 북한산과 국망봉 사진을 흑백으로 전환할 경우 형태가
분명하지 않아서 관악산에서 찍은 것으로 대치했다.
  그런 자연의 섭리는 아랑곳없이, 식목일에는 그래야 한다는 관행 때문에 그 날
나무를 심었다는 자부심을 가졌을 분이 연출한 상황이다. 돌이켜 보니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 있는 국망봉에서도 그런 현상을 이미 보았다. 1993 년 8월 28일
일기를 뒤져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침 7시 30분경 경원대 최정권 교수,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조교인
이양주씨와 함께 이동면으로 향했다. 10시경 국망봉 기슭에 있는 김봉일 선배
산장에 도착했다. 휴양림 조성을 위해서 내게 자문을 구한다는 전화가 몇 번
있었지만 내 자신은 그다지 아는 바도 없고 바쁘기도 해 미루어 오던 터에 최
교수가 관심을 보여서 계획한 여행이었다. 근래에 체력이 떨어진 터라 산행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최 교수 또한 전날 밤샘으로 지쳐있던 밤샘으로 산행을
느릿느릿 진행하며 주변을 대충 둘러보았다. 식생보다 요사이 그냥 사진을 찍어
두는 대상인 버섯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던 점이 다행이었다.
  하산 길에 참나무 아래 심어 둔 잣나무를 보고 이는 인간의 무지를 보여 주고
있으니 자료와 연구 대상으로 할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곳에도 산허리를
가로질러 뱀길을 막고 있는 그물들이 무자비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을 오르내리는 속성이 있는 뱀은 산중턱에 설치된 그물에 이르면 더 나아가지
못해 땅꾼의 희생물이 되는 광경을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바 있다.

  곧 김은식 교수의 보충 설명이 있었다. 우리 나라 자연 보전법에는 녹지 자연도 8
등급은 개발이 허용되지만 9 등급의 숲은 개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
등급과 9 등급의 구분은 조림한 곳이냐 자연림이냐는 기준에 의한다. 김 교수는
사람이 나무를 심어 조성한 인공림은 아무리 양호해도 보존 대상에서 제외되는
획일성을 지적했다. 역시 임학을 전공한 김은식 교수로서는 잘 가꾼 숲보다
자연림이 더 낫다는 판단 기준이 그다지 달가울 수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이런 규정 때문에, 참나무 아래 심은 잣나무가 혹시라도 살아 남게 되면
그 숲은 인공림으로 판정되어 개발해도 좋은 땅으로 탈바꿈한다. 일부러 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잘 조성된 숲을 굳이 개발할 의향이라면 그 곳에 나무를 심으면
된다. 심은 나무가 잘 자라면 녹지 자연도 등급 기준에 의해서 등급 7로 매겨질
것이기에 적당한 시기에 개발해도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헐벗은 산이 안타까워 식목일을 지정하고 나무 심기를 독려하던
타성이 이제 재고될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녹화 사업을 위해 산에
나무 심기를 장려할 시기는 지났다. 나무를 심어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 정비
작업이라는 과시적인 미명 때문에 오히려 삭막한 풍경으로 변한 강변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 앞을 흐르던 개울 주변에는 좋은 숲이 있었다. 아마도 그
숲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를 걸러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른들은 숲의 외부를 '숲 밖'이라 불러 은근히 멀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멀리 떨어진 학교를 가기 위해 숲 밖으로 나갔던 우리들은
돌아오다가 그 곳에 이르면 한시름 놓아도 좋은 길목으로 알았다. 그 곳은 여름이면
그늘을 놓아 10리 길에 지친 어린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가을날이면 노란 팽나무
열매가 어린 마음을 유혹했다. 김종원 교수 말대로 평지의 팽나무가 자연숲의
흔적이라기보다 심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면, 우리 조상들은 언제 그 곳에 나무를
심었을까? 앞의 '식생 완충대'에서 언급했던 영조 때의 준천사와 관계 있는 경관이
아닐까?
  전국 곳곳의 강둑에 있던 나무들은 어느 사이 시나브로 잘려 나가고 시멘트로
덮여 버려 그 경관이 매우 을씨년스럽다. 이제 준천사에 새겨진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 삭막해진 물가의 옛 모습을 되찾자. 이제 강둑에 나무를 심자. 4월 5일이면
나무를 심고 사진을 찍어 자랑할 필요가 있는 분들은 왜 식목장소로 아직도 산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강변에 심어야 할 나무는 그곳의 생태에 맞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는 먼저 우리 강변에 서서 물을 깨끗하게 하고 새와 물고기를
불러모으는 잠재 식생을 규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금은 퇴색된 식목일이란 이름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식목일은
지난날 헐벗은 산을 녹화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지만 지금은 나무심기가 성숙하여
구태가 난다. 더구나 심은 다음의 가꾸기라는 뜻도 빠져 있고, '나무 목'자가
강조됨으로써 키 작은 식물을 잡목과 잡풀로 경시하는 경향을 낳았다. 숲은 큰
나무를 심는 것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작은 관목과 풀이 함께 어우러질 때 크고
작은 동물과 미생물이 모여 생물 다양성을 이룬다. 이제 시대에 걸맞는 숲 가꾸기의
날을 기릴 만한 멋진 이름을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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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듬는 손길
  겨울을 넘기고 나면 도시 녹지가 다듬어지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저 깔끔하게
만드는 데 익숙해진 손길을 받아 잔가지와 함께 큰 나무 아래에서 자라는 작은 키의
관목이나 풀들이 잘려 나간다. 그러나 큰 나무를 키워 목재를 생산하는 일이 목적이
아닐 경우에는 작은 가지와 식물을 잘라 내는 것은 그다지 칭찬할 일이 못 된다.
잡목과 잡풀로 불리는 어린 생명들도 제자리에 놓여 있으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한다.
  식물 자체가 이미 탄소를 간직하고 있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때다. 우리 도시에서
잘리는 잡풀과 잡목의 양이 어느 정도이며,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탄소는 어느
정도인가?
  땅 위에 촘촘하게 자라는 작은 나무와 풀은 비가 올 때 흐르는 물길을 더디게
한다. 물길이 더디어지는 만큼 더 많은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보충한다. 흐르는 물의 힘과 양이 줄어드니, 씻겨 가는 토사 유실량을 감소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것은 숲의 토양과 주변 수자원을 동시에 보호한다.
  * 그림 4-8.
  그림설명: 일본 도시 공원에서 곤충의 먹이와 서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일부러
쌓아 둔 나뭇단(주).
  * (주) 일본 동경 강동구 대도 소송천회원(큰 대, 섬 도, 작을 소, 소나무 송, 내
천, 모을 회, 동산 원)에서 1997 년 5월 15일 촬영.
  잡목과 잡풀은 동물들의 깃들이는 서식처를 제공한다. 줄기가 많은 작은 나무들과
풀은 바람에 떠도는 낙엽을 붙잡은 데에 큰 나무가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그 낙엽들은 벌레들의 먹이가 되고, 벌레는 또한 새들과 네 발 달린
짐승들의 먹이가 된다. 그런 동물들이 쏟아 놓은 배설물은 풀과 나무가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고, 먹다 남긴 물질과 함께 썩어서 토양에 유기물을 보탠다.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묘한 순환과 협동 과정이다.
  * 그림 4-9.
  그림설명: 큰 나무 아래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와 풀을 잘라 내어 낙엽이 흘러내린
모습(주).
  * (주) 서울대학교 안에서 1997 년 4월 24일 촬영.
  가지, 잡목, 잡풀을 잘라 내면 식물체에 포함된 영양소들이 없어지므로 그 곳의
땅은 세월이 갈수록 척박해진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언젠가 비료를 뿌릴 것이므로
또한 국민의 귀중한 세금을 낭비하고 주변 수계의 부양영화까지 조장하게 될 것이
뻔하다. 무엇보다 잡목으로 분류되는 하층 식물들은 잘린 후에 태워져서
이산화탄소와 대기 오염 물질 또는 쓰레기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숲이 특정한 목재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면, 숲이 쏘다녀야 될 놀이 공간이
아니라면, 그저 손길이 덜 간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중요한 자연 자원을
쓸데없이 잘라서 폐기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설혹 사람들에게 귀찮고 보기
싫다고 하더라도 도시의 모든 숲이 말끔하게 다듬어져야 할 까닭은 없다. 
    남의 땅 영국에서

  백두 대간을 산행하기 전인 1994 년 7월에 한 달간 영국의 하펜든 Harpenden 에
머룰 기회가 있었다. 하펜든은 런던 북쪽 교외에서 기차로 45분 정도 거리에 있다.
그 곳을 찾은 것은 1843 년에 세계 최초로 설립된 농업생태계 연구소로 유명한
로섬스테드 연구소 Rothamsted Experimental Station 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비료 효과를 알아보는 시험장을 관리하면서 매년 토양을 채취^5,23^보관하여, 100
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토양들을 보유하고 있다.
  * 그림 4-10.
  그림설명: 영국 하펜든에 있는 장기 농업연구 시험장 전경과 작물 생장에 미치는
비료 효과의 장기 비교(주): #1 시험장 전경, #2 질소, 인산, 칼륨, 마그네슘 공급,
#3 인산, 칼륨, 마그네슘만 공급, #3은 질소 비료를 전혀 주지 않아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 (주) #1은 로섬스테드 시험장 안내서 표지에서 인용, #2와 #3은 영국 하펜든에
있는 시험장에서 1994 년 7월 22일 촬영.
  그 곳에 머무는 동안 로열쇼를 보러 갔다. 그 해에는 로열쇼가 하펜든으로부터
자동차로 꼭 1시간 30분 걸리는 영국 중서부의 작은 읍인 버밍엄과 코펜트리
부근에서 열렸다.
  로열쇼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귀한 행사라 좋은 관광거리였다. 과학적인
전시물도 내 관심을 끄는 것들이 있어서 좋았다. 농부는 자신의 생산품을 전시하고,
대학 교수는 자신의 연구 성과품을 내걸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연구
성과품이 상아탑 안에서 잠들고 있는 반면에 영국에서는 교수와 현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어울릴 수 있는 문화가 있음이 엿보였다.
      ------------
    생울타리를 만들자.
  어떤 교수의 간단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철조망 주변에 생울타리를 곁들이면
생물 다양성을 높일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생울타리는 야생
동물이 사람을 피해서 이동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표
4-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들의 입장에서는 먹이가 있는 경작지로 가는 길에
울타리가 있다면 일시적인 은신처로 삼을 수 있다.
  * 그림 4-11.
  그림설명: 생울타리를 권장하는 영국 로열쇼의 전시품(주).
  * (주) 영국 중서부 코벤트리 부근 로열쇼에서 1994 년 7월 6일 촬영.
  * 표 4-2. 서식지 사이 새들의 월별 이동수. 괄호 안의 숫자는 매월, 그리고 합계
수준으로 전체 이동에 대한 백분율을 나타낸다.

  5월: 숲^36^울타리(121, 58.2%), 숲^36^밭(16, 7.7%), 울타리^36^밭(71, 34.1%)
  6월: 숲^36^울타리(100, 52.4%), 숲^36^밭(18, 9.4%), 울타리^36^밭(73, 38.2%)
  7월: 숲^36^울타리(64, 80.0%), 숲^36^밭(2, 2.5%), 울타리^36^밭(14, 17.5%)
  8월: 숲^36^울타리(130, 88.4%), 숲^36^밭(6, 4.1%), 울타리^36^밭(11, 7.5%)
  9월: 숲^36^울타리(291, 78.6%), 숲^36^밭(24, 7.3%), 울타리^36^밭(12, 3.7%)
  10월: 숲^36^울타리(66, 78.6%), 숲^36^밭(3, 3.5%), 울타리^36^밭(15, 17.9%)
  합계: 숲^36^울타리(772, 74.4%), 숲^36^밭(69, 6.7%), 울타리^36^밭(196, 18.9%)
  * 자료: Wegner and Merriam(1979).
  돌이켜 보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남녘 땅에서도 아름다운 생울타리의 풍경이
있었다. 생울타리 속을 누비며 지저귀던 새소리도 정겨웠다. 동백나무와 탱자나무가
내 고향의 생울타리 소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생울타리는 어느새 살벌한
시멘트 담장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시멘트 담장 위에 깨진 유리병 조각들을 박아서
더욱 살벌한 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요사이 그런 모습이나마 줄어든 것은
다행이다. 어제는 벌레와 새들의 입장에서 울타리와 시멘트 담장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있을까? 감히 말하건대 이 땅에 모든 시멘트 담장을 허물고
생울타리를 복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일어난다면 더 이상 환경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골프장 유감
  런던 교외의 농촌 풍경에서 보았듯이 잉글랜드 지방의 경관에서는 꼬리를 잇는
생울타리가 우리 나라보다 훨씬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로열쇼의 전시품은 아마도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림 4-12는 또한 굳이 불도저로 땅을 잘라 내지 않아도 골프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형을 보여 주고 있다. 양치기들의 심심풀이 공치기놀이에서
골프가 발전되었다는데, 그런 지형에서는 당연하지 않았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대부분의 미국 대학이 소유하고 있는 골프장도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림 4-12.
  그림설명: 영국 웨일스 지방의 농촌 풍경(주).
  * (주) 영국 웨일스 지방의 작은 도시 크류와 방고르를 잇는 철로 주변 풍경으로
1994 년 7월 21일 촬영.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필요 이상의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 수려한 산수를
훼손하고 있다. 이를 지형에 맞지 않는 놀음에 우리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끊임없는 사대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월나라의 경국지색
서시(서녘 서, 베풀 시)의 찡그림이 매력적이라 뭇 여인이 흉내내어 찡그렸다 하여
효빈(본받을 효, 눈살찌푸릴 빈, 주)이라는 단어가 생겼다더니 자신의 처지를 되새겨
보지 않고 남을 따르기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속성이런가?
  * (주) 효빈이란 코를 찡그린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골프장을 이 땅에서 무조건 추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나침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을 자제하면 좋겠다는 얘기다. 골프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골프장 건립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가난한 집에서 사랑이 지나쳐, 아이가 울
때마다 장난감을 사 주는 일은 집안과 아이를 모두 망치는 짓이다.
  무엇보다 토지 이용에서 골프장이 적합한가의 여부는 그것이 주변 지역과 얼마나
잘 조화하고 있느냐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 골프장이 주변
지역에서 발생하는 오염원을 완충하는 역할도 할 수 있는데 스웨덴에서는 심지어
오수처리 수단으로 이용한 사례도 있다(주). 골프장 식물이 오수에 포함된 물과
물질들을 기반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주) 이도원(1994).
  모든 환경 문제는 주변 지역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거나 잘못된
토지의 이용과 관리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골프장을 에워싸고 있는 경관 요소의
바탕이 무엇이며, 골프장이 그 바탕에 적절하게 자리잡았느냐에 따라 골프장의 토지
이용 적합성 여부가 판정되어야할 것이다. 이를테면 경관 바탕이 농경지인 경우와
삼림인 경우는 골프장의 지화학적, 생물적, 미적 요소의 생성처와 소비처로서의
기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와 같이 골프장이 밀집하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비판해야 한다. 한 호수에 영양소가 과도하게 쌓이면 부영양화 문제가
발생하듯이, 한 지역에 골프장이 밀집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골프장 난립이 우리네 지형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라면 스키장 난립은 우리
기호를 무시하고 무조건 따르는 사대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전라도 땅에서는
덕유산 국립공원을 깔아뭉개어 스키장을 건립했다. 눈이 많은 곳이 아니니 사람, 돈,
에너지, 시간을 들여 눈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뿐이면 좋겠다.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서 화석 연료를 태우는데도 그에 따르는 환경 훼손을 연결시켜 볼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무엇보다 그러고 나니 강원도 땅에서는 발왕산에 스키장을
건립하지 못할 사유를 대라고 한다. 돈에 눈이 어두워 못된 짓을 따라 하려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덕유산 국립공원 안에 스키장을 두는 처사로 관련
부처는 이미 발목이 잡혀 버렸다(주).
  * (주) 과도한 스키장 건립에 따르는 문제점은 내가 먼저 본 것이 아니다. 계명대
생물학과 김종원 교수가 먼저 언급한 부분은 지금쯤 많은 분들이 공감하면서도 정책
과정에서는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덕유산과 발왕산이
무너질 때까지 부끄럽게도 나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논리로 충분히 무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6 년 1월 1일 노융희 교수님 댁을 들렀을 때 내 무능을 가만히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직 행동으로 옮길 만큼 학문적으로 단단하지 못하다. 과연
얼마나 공부를 해야 내 목소리에 자신이 담기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본질적으로 소심한 것일까? 용기 있는 자만이 때와 시기를 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과연 대규모 목장과 수입 사료에 의존하는 축산이 우리 땅 우리
기후에 맞는 처사인지를 따져 봐야 마땅하다. 사료를 사서 소를 치는 것은
상대적으로 긴 먹이 사슬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에너지 낭비가 발생하므로 차라리
소고기를 사먹는 것이 인류의 에너지 사용 효율면에서 훨씬 경제적일 수 있다.
에너지가 농축된 소고기 대신 희석된 사료를 사서 들여오니 본질적으로 축산이라는
농축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기후에 맞지 않는 목장과 사료
구입을 전제로 한 축산업은 필경 오염을 불어오므로 이제 재고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목장은 이 땅에서 그다지 환영할 경관이 아니다(주). 남을
흉내내기를 고집하기 전에 경제적^5,23^문화적^5,23^정서적인 측면에서 차분히 따져
볼 마음의 여유는 없는가?
  * (주) 이 말은 정부의 장려 정책을 충실히 따라온 우리 나라 축산농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규모 목장과 다량의 사료 수입에 의존하는 축산에
대한 반성의 여지를 가지고 이러한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까지
고려하여 현명한 대안을 생각해 보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관령의 남쪽 닭목재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이제 골프장과 스키장, 목장이 속하는
수계에는 자체 수질 검사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 나라 환경 관련법에서는
좁은 공간에 국한되어 있는 공장의 폐수에 대해서는 수질 측정 의무 조항을 두면서
더 큰 환경재를 사용하고 있는 골프고 목장의 방류수는 규제하지 않는 것일까?
  이 땅에 골프장, 스키장, 목장을 허용하는 한은 그에 관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을
자아내기 위해 합리적인 접근이 시급하다. 바로 그것을 위한 직접적인 준비를
현장에서 수집된 자료를 판단 근거로 제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골프장 관리자는
적어도 다음 사항들을 장기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여 주민의 불신을 줄여 가도록
노력해야 활 것이다. 측정 대상으로 우선 생각나는 항목은 비가 올 때 발생하는
지표 유출수의 양과 질 그리고 주변 수계의 물리화학적^5,23^생물학적 특성 변화다.
좀더 나아가 토양 영양상태, 식물 및 토양 동물과 미생물상 및 활동, 토양 호흡 및
기체 발생량도 측정해 두면 골프장이 주는 생태학적 득실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분석 없이는 골프장과 스키장 그리고 목장의 수혜를 받는 사람과
환경 보호를 내세우는 사람들 사이의 괴리가 영원히 좁혀질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자료들의 축적만이 앞으로 골프장과 스키장 건립에 대한 합리적 환경 영양 평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변 자연 환경의 질이 악화된다면 골프장과 스키장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모든 계(system)는 자신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유지비를 투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놀이 공간은 결국 주변 자연을 이용하고 또 그것의 존재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주변 자연에 유지비용을 제공해야 마땅하다. 주변을 관리하고 질을
유지하는 것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사업의 영속성을 위한 조치다. 그렇지만
돈을 겨냥하는 측정 대행업제를 통한 환경 감시는 돈을 제공하는 골프장과 유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신력 있는 비영리 기구가 환경 장기 조사를 맡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땅 줄기

  대학 시절부터 나의 심신을 키워 준 서울문리대 산악회에서는 1994 년 4월부터
10월까지 백두 대간 산행을 계획했다. 산행을 시작할 무렵 나는 '한국의 생물
다양성 2000'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작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보관하고 있는 정보를 짧은 기간에 한자리에 모으는
작업이었다. 일을 주관하셨던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김계중 교수가 마침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환경대학원에 연구실을 가졌던 인연으로 나도 한 가지 임무를 맡았다.
내 임무란 김 교수를 도와 여러 사람과의 연락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짜증스러울 정도로 쇄도하는 전화와 팩스를 통해 몰려오는 정보를 정리하는 일로 그
해 봄의 산행은 뒷전으로 밀렸다.
  1 학기가 끝나자마자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연구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점은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숙제로 남겨 두었던
미국 옐로스톤 야외 강좌 참여도 실행했다. 8월 초 귀국하고 나니 백두 대간 산행을
기획했던 김일명 선배는 남북으로 대관령의 한두 구간을 내게 맡겼다.
  8월 27일, 출발하는 날부터 개성적인 산꾼들의 엉뚱한 행동으로 예사롭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서울을 떠날 때는 교통 사고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공응대 선배,
강돈구 산우와 함께였다.
  8월 28일 일요일은 아침 5기 40분에 여관 아저씨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강돈구 박사와 소주 두 병을 나누어 마신 것이 좀 과한 모양이었다.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6시 10분에 구산 간이 휴게소에서 백두 대간 보전협의회에 소속된
두 분을 만났다. 공 선배가 지난 여름 백두 대간의 남쪽 구간을 산행할 때 만난
분들이라고 했다. 그 중 여자분은 산행에 동참하고  남자분은 닭목재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고개 위엔 성황당이 있었지만 이미 시멘트 문화가
침입하여 향토적인 운치를 느끼게 하기는커녕 차라리 비애감을 안겨 주었다. 성황당
가까이 있는 숲의 참나무 주변에서 토양을 채취했다. 토양은 잘 발달되어 있었다.
  산행 시작 지점인 닭목재를 출발할 때는 오전 7시 40분이었다. 닭목재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백두 대간의 오른쪽 비탈은 목장 부지로 선정되어 철조망이 깔려
있었다. 한 시간을 걷자 다시 능선 양 옆으로 목장이 나타났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길도 두 번을 건넜다. 목장을 벗어나기 전 백두 대간을 따라 약 200--300 미터의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공 선배는 목장을 만들어 고기를 먹을 것이냐 숲을 남겨 맑은 물을 마실 것이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숲이 목장으로 바뀌어 가는 것에 대해 애통해 하셨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꺼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목장과 골프장 주변 수계에
대한 장기적인 수질 측정을 의무화하는 규정을 만들지 않는지 마음속으로만
끙끙거렸을 뿐이다.
  산행이 계속되는 동안 빗살은 더욱 굵어졌다. 옷들은 이미 흠뻑 젖었다. 10시
40분에 고루포기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 동안 비는 더 심해졌다. 대충 사진을 몇 장
찍고는 11시에 다시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 때부터 내가 지고 왔던 무거운 짐을
강 박사가 맡고 지도는 내가 잡았다. 20분가량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루포기 산정으로부터 갈림길까지의 거리가 지도로 예측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나타났던 것이다. 나침반의 방향이 너무도 달라서 잘못된 것 같다고 몇번
말해도 공 선배는 잘 가고 있다고 맞섰다. 실랑이 중에 강 박사가 지도를
확인하더니 대뜸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 5분 정도 되돌아가 길을 찾았다.
  백두 대간을 잇는 길이 뚜렷하지 않은 편이라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지 않으면
쉽게 놓칠 수 있지만, 조금만 주의했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길을
놓치기 쉬운 곳이 중간중간 몇 군데 있었지만 먼저 간 산행 팀들의 표식기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을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개에 이른 뒤부터 지도상으로는 방향이 뚜렷한 것 같았다. 그 때까지의
진행속도로 보아 2시 30분 정도면 대관령에 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우중(비 우, 가운데 중)에 마땅히 앉을 자리도 없어 대충 간식을
먹으며, 점심 식사는 목적지인 대관령에서 하기로 했다. 주변에 길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버섯을 찍으며 20분가량 휴식을 취했다. 이제 강 박사는 무겁다며 다시 내게
짐을 맡기고 길잡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길을 잘못 들었다. 안개와 비가 가시어
삼양목장이 보인다며 원경을 즐긴 것이 바로 잘못이었다. 강 박사가 숙련된
길잡이라 방심을 한 탓에 왕복 한 시간 넘게 헛걸음을 한 셈이다. 앞서 잘못
들어섰던 내리막길을 갈 때는 힘든 줄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짐이 무게를
더했다. 1시 10분경 방향을 제대로 잡은 다음 점심을 들었다. 아마도 2시경 다시
길을 출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3시 20분경에 능경봉에 도착했다. 10분 동안
휴식을 취하고 능경봉을 출발했다. 능경봉부터 대관령까지는 오로지 내리막길이라
4시 10분에 고속도로 건설 기념탑 앞에서 산행을 종료하는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 때 다시 소나기가 시작되었다. 1주일 후 다시 대관령에서 산행이
이어졌다. 9월 3일 오후 서울을 떠나 횡계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용평에 숙소를
잡았다. 저녁 11시경 이홍규 선배와 서영배 박사는 진고개산장에 차를 옮겨 놓기
위해서 떠났다. 나는 밥을 짓고 김밥을 20개 정도 말았다. 뒷처리는 서 박사에게
맡겨 놓고 1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에는 5시 30분에 일어났다. 짐을 대충 꾸리고 횡계에서
북어국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7시 30분에 대관령을 출발했다. 북으로 향하는
길 왼편에는 거대한 목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나라에 갇힌 서러움이 큰 것에
대한 컴플렉스를 낳아, 이 땅에 맞지 않는 토지 이용들이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경사지를 깎아 잠든 찻길에는 곳곳에 깊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회갑 기념으로
남한의 백두 대간 전 구간을 산행하는 데 참여했던 공 선배의 말씀을 빌리면 백두
대간을 지나온 발길발길마다 목장이나 채석장으로 인해 성한 곳이 거의 없다고
한다.
  매봉을 겨냥하고 산행을 계속했지만 아뿔사, 2시에 소황병산에 도착하고 말았다.
서 박사가 지도를 잘못 읽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매봉을 한참이나 지나왔으니
결과적으로 산행에 여유가 생겼다.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일부는 공 선배의
고집으로 이홍규 선배의 차로 매봉까지 되돌아가서 사진 촬영을 하여 방문 징표를
가지고 왔다. 3시 50분에 소황병산을 출발했다. 5시에 노인봉에 도착하여 30분가량
시간을 보냈다. 7시경 진고개산장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8시에 그
곳을 떠났다. 서울로 오는 길은 길다란 차의 행렬로 정체가 생겨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 2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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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 대간 조사 계획을 반성하며
  4월에 지리산에서 시작했던 산행은 원래 계획에는 백두 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달라지는 자연^5,23^인문 환경의 변화를 조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서울문리대 산악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백두 대간의 남한 부분을
40개 구간으로 나누고 그 각 구간에서 길에 의해 잘리는 동물 통로의 장애물 빈도,
산불이나 기타 인간 간섭에 의한 변화 정도, 쓰레기 양, 토양 채취 조사 등을
내용으로 했다. 그러나 이 환경 조사 기획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 일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나는 '생물 다양성 2000' 프로젝트에 묶여 있던 터라 여유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지친 심신으로 서둘러 영국으로 떠나 두 달 만에 돌아왔으니
일이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하다.
  그 동안 산행에 참여했던 회원들이 일부 구간의 토양을 채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 방면에는 문외한들인지라 토양을 자신의 연고지로 옮긴 다음 말려서
보관하라는 지시를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 대부분이 흙을 봉지에 그대로 넣어
두었던 것이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문외한들이 따라 할 수 있는 표준 조사
방법을 미리 마련해 두지 않는 데 있었다. 또한 조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더라도
산행이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어 구간마다 다른 시기에 자료를 모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비료를 할 수 없었다. 산악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전 구간을 운행해
내는 것이 일차 목적인 상황에서, 실토하건대 내가 건성으로 만든 환경 조사 계획은
너무 무모했다.
  나는 이 일이 언젠가 남북한 산악인들의 협조를 통해 재미있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구간을 나누어서 여러 사람이 일시에 산행하며
조사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여력이 있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살펴보면 도저히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 구간에 낙엽 주머니를 비치하고 분해 속도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이다.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의 분해 속도를 비교할 때 낙엽이 아닌
표준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이를테면 목질부가 많은 나무저나
순전히 셀룰로오스로 구성된 솜뭉치를 놓아 두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남은 양을
측정하여 분해 속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일은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이룰 수 있는 아름다운 행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행사를 하기 전에 먼저 표준
조사 방법의 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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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들의 우리 땅 보기
  기존의 산맥 개념과는 달리, 대간과 정맥이라는 개념은 물길을 바탕으로 우리
땅의 지리를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대간과 정맥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은 물을
건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대간과 정맥은 유역을 나누는 분수령을 잇는 축이기
때문이다. 대간은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리적인 축이며 동시에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식물의 이동 축이 된다. 이를테면 백두산 호랑이가 지리산 나들이를 갈 때는
백두 대간을 따라 평행하게 가는 것이 가장 수월한 이동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이동로 곳곳이 잘려서 야생 동물들은 분수령의 축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방해를 받게 되어 있다. 이제 지리산의 곰은 덕유산의 곰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
이러한 현상으로 좁은 구역으로 야생 동물은 근친 교배를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인간 사회에서 친족끼리 결혼할 수 없는 윤리는 근친 교배를 하면 필경
자연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서식지의 단편화로 동식물의 근친 상간을 유도하고
있다.
  얼마나 인간 본위적인 행위인가. 그러면서도 남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하는 도덕의
허구성을 나는 더 이상 찬성할 수 없다. 이타적인 행위는 자신이 포함된 체계가
선택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른 생물에
대해 윤리적인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도, 필경 우리가 선택되는 데 그 일이
필수적이라는 깨우침에 바탕한다. 우리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서 지켜야 할 윤리는
이제 당연히 자연으로 연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환경 윤리의 바탕이다.
  백두 대간은 이 땅의 골격이다. 그 골격을 메워서 하나의 모양새로 가꾸는 살이
유역이다. 유역이란 떨어지는 빗물이 강을 이루어 한 곳으로 모이는 지역이다.
유역은 분수령이라는 경계로 나누어진다. 산천이 분명한 이 나라에서 땅을 보는
골격이 분수령으로 인식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산을 나누고 물은
모은다고 했다. 백두 대간은 바로 커다란 분수령의 연결이다. 이 분수령의 의미는
무엇일까? '산경표(뫼 산, 지날 경, 겉 표)'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대간과 정맥은
이러한 분수령으로 연결된 경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분수령으로 이어지는
경계의 의미는 무엇일까?
  * 그림 4-13.
  그림설명: '산경도'에 나타난 백두 대간의 골격과 산맥 개념 비교. 산세를
바탕으로 작성된 전형적인 지형 분류 체계는 1903 년 발표된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산맥도와 다르다(주).
  * (주) 이우형이 제공한 그림과 '한겨레 신문' 1994 년 1월 7일자.
  * 그림 4-14.
  그림설명: 유역과 하천의 크기를 나타내는 그림. 하천 차수가 클수록 큰 강을
나타낸다. 다른 차수의 하천과 만나면 그 중 큰 차수가 유지되고, 같은 차수의
하천이 합류할 때만 그 다음 차수의 하천이 된다(주).
  * (주) Hewlett(1982).
  자고로 우리 행정 구역의 한 단위는 '동(골 동)'이라는 한자로 표현된다. 동은
사용하는 물(물 수)이 같은(같을 동) 곳을 의미하니 그 동리가 하나의 유역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뜻한다(주).
  * (주) 황기원(1995).
  사용하는 물이 같다는 것은 물을 매개로 만날 기회가 많다는 뜻이다. 만남이
많다는 것은 정보 교환이 원활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물을 쓰는 장정들은
논농사를 중심으로 한 만남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아낙네들은 빨래터와 우물가에
모여 이웃간의 정리를 나누었다. 그들은 같거나 비슷한 물건을 사용하고 같은
낱말과 억양을 가졌다. 그러기에 한 유역 안의 자연이나 문화도 비교적 동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역의 자연과 문화의 물리적인 표현은 토지 이용으로 나타난다. 토지 이용의
부산물이 빗물에 녹아 자연스럽게 강으로 흘러가기에 강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연속성을 지닌다. 동시에 강의 수량과 수질은 유역의 자연적인 요소와 물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생각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따로 보기 7) 시골과 더불어 사는 도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먹어야 한다. 먹어서 피와 살이 되고 난 나머지
부분은 몸 밖으로 보내야 한다.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배설하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우리들의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먹는 양이 내보내는 양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몸무게가 늘지 않는데 이는 매일매일 먹는
양만큼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먹는 양과 내보내는 양이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살이 찌거나 몸이 야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하루하루 무심코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과정에서, 배설하는 양이 먹는 양과
함께 나이에 걸맞는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병이 생긴다. 제대로 먹고 배설하기
위해서는 몸뿐만 아니라 식탁과 화장실을 잘 돌봐야 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도시인의 활동에 필요한 물질들을 도시 밖으로부터
들여와야 하고, 또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데 쓰고 남는 물질은
폐기물이란 이름으로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도시가 성장할 때는 들여오는 양이
내보내는 양보다 많아야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들어온 물질의 양만큼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는 물질들이 모여 쓰레기로 둘러싸이게 된다.
우리들이 무심코 도시로 물질을 들여오고 내보내는 양이 도시의 나이에 걸맞는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도시는 병을 앓게 된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물질을
공급하고 폐기물을 받아 가는 곳을 잘 관리해야 한다.
  우리들의 원만한 건강을 위해서는 식탁과 화장실의 기능이 원활해야 하듯이
도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골이라는 식탁과 폐기물 처리장이 있어야 한다. 시골
사람들로서는 듣기 거북할 수도 있지만 시골은 도시의 식탁과 폐기물 처리장 기능을
동시에 해 주어야 한다. 문제는 도시가 자기의 기능 수행에 필요한
음식물(에너지원)을 공급하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배설물을 처리해 주는 시골의
고마움을 모르는 데 있다. 우리가 식탁과 화장실을 돌보아야 생활이 영위되듯이
도시는 시골을 돌보지 않으면 스스로 병들 수밖에 없다. 도시가 시골을 돌볼 수
없다면 도시는 자기 안에 시골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마치 옛날 시골이
자급 자족했듯이 식량을 마련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로 보기 8) 경계의 특징

  투명한 고무 풍선에 잉크를 넣고 맑은 물이 담긴 큰 세숫대야에 담가 보자.
잉크는 풍선에 갇혀 대야로 흘러가지 못한다. 우리는 고무 풍선이 물과 잉크의
경계임을 알고 있다. 경계가 되는 풍선에 잉크를 담아 두어 맑은 물로 흘러들지
않도록 하듯이 외부인의 침입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려면 담이 필요하다. 국가는
국경을 정해 놓고 행정 업무의 편의를 도모하는 동시에 적군의 침입이나 귀중한
자원과 정보의 유실을 막고 있다. 잉크, 가족, 국가는 하나의 계이며, 이 계를 다른
계와 구분하는 필수 요건은 경계다.
  그러면 이 경계의 성격은 무엇인가? 물질과 에너지, 정보 교환이 낮은 곳이라고
정의해도 좋지 않을까? 풍선의 안팎에서 잉크는 잉크대로 물은 물대로 각각 서로
섞이고 교환되고 있지만 그 경계 부분을 가로지르는 교환은 거의 없다. 원만한
가정에서는 가족간에 활발하게 의사 소통을 하지만 담을 사이에 두고 그 바깥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은 상대적으로 적다. 한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
협조와 정보 교환은 상대적으로 외국과의 정보 교환에 비해 많은 것이 원칙이다.
만약 가족의 일원이 가족보다 외부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족과의
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기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다. 한국 사람이 내국인보다 외국인과 접촉이나 의사 소통을 많이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내면적으로 외국을 더 따르게 되며, 비록 국적이 한국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한국인이라 보기 어렵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고무 풍선은 내부와 외부의 물질 교환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경계지만 담과 국경에는 문, 전화선, 공항, 항구 등이 있어서 물질, 에너지, 정보가
그 곳을 통해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교환이 막무가내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모든 계는 경계 내부의 성격을 유지하는 선에서 개방을
허용하는 속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경계 안에서 정의되는 계의 본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생물 시간에 배우는 세포막도 선택적 투과성을
가진다. 세포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물질을 세포 외부와 교환하기
위해 선택적 투과성을 가지는 것이다. 간혹 잘못되어 독성이 있는 물질을
받아들이면 세포와 세포를 포함하는 생명체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유발된다.
우리가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것은 세포막이 선택적 투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경우이기도 하다.
  열린 사회는 풍선과 같이 모든 것을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 투과성을 가진
세포같이, 적당히 개방된 개인, 가족, 사회, 국가를 장려한다. 그러나 지나친 개방은
쇄국과는 다른 형태의 병폐이므로 자칫 줏대 없는 인물이나 문화적으로 지배당하는
상태로 전락되는 국가를 초래한다. 이쯤에서 세계화라는 부질없는 단어가 얼마만큼
열린 사회를 주장하고 있는지 한 번은 생각하고 넘어가기를 바란다.
  이제 풍선을 바늘로 가만히 터뜨려 보자. 잉크가 맑은 물로 조용히 퍼져 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잉크는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물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물의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와
같이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옮겨 가는 현상을 우리는 확산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힘이다. 따라서 물질의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정보의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 흐름을 막으려면 경계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담은 일종의 경계로서 집안의 재화가 흘러 나가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낮은 담은
터진 풍선처럼 제 구실을 못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
경비원이 필요하다. 그 경비원이 하는 일은 에너지의 다른 표현이다. 반면에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로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드는 것은 확산의 원칙을 거스르는
현상이다. 그것은 그만큼 에너지를 소비해야 가능하다. 비유컨대 지금 인구 밀도가
낮은 시골에서 높은 서울로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은 우리의 소중한 국보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거나, 우리의 본질을 저해할 마약 같은 물질이나 저급한 문화가
확산되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를 강구하고 있는바, 그것은 바로 에너지를
사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확산을 막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도시의 경계선 안으로 사람들과 물질을 끌어 오는 유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인가 아니면 정보인가? 또는 다른 요소가 있는가? 환경
악화가 대부분 물질, 에너지, 정보의 도시 편중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보면 이
유인물의 적절한 국가적 분배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이들의 분배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유인물의 실체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제5부 땅과 물을 함께 묶어

  교과서 냄새가 나서 싫긴 하지만, 지난 얘기들을 꿰고 있는 원리들을 중심으로
묶었다. 생명의 고리를 엮어 가는 사슬에도 밝고 어두운 선택의 여지가 놓여 있다.
고리로 이어지는 흐름은 하늘과 땅, 물 그리고 생명을 묶는 흐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투고 어우러지는 과정을 통해 작은 고리와 큰 고리는 나이를 먹는다.
생태계의 발달도 그렇게 이루어지니 바로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서로 다른
요소들을 아우르고 엮어 가는 것은 인간에게 맡겨진 도리다. 이름하여 경관
생태학이 가고자 하는 길이다. 
    먹이 사슬의 빛

  아테네 토양의 불모성은 그 곳에서 민주 정치를 이룩했고, 스파르타의 비옥성은
귀족 정치를 이루어 놓았다(주). 추측하건대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 안에서 정보의
흐름은 서로 크게 다를 것이다. 귀족 정치 사회의 경우 정보 흐름은 매개하는
사람들은 크게 귀족과 평민으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교환 체계 또는 고리를 이룰
것이다. 반면에 민주 정치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교환 고리가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각각의 작은 고리들에는 다른 고리들과의 연결 부위가 있으리라.
먹이 사슬이 모여 먹이 그물을 이루듯이.
  * (주) 몽테스키외의 말. 전경수(1994) 91쪽에서 재인용.
  재미있게도, 일반적으로 비옥한 토양보다는 어느 정도 척박한 토양에 다양한
생물이 깃들인다(주). 인간 사회와 생물 사회의 유사한 면모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비생물적 부분과 생물 사회를 아울러 생태계의 구조라 한다. 먹이 사슬을 표현하는
그림에 나타나는 식물과 동물은 바로 생태계의 구조이며, 이들 생물을 매개로
일어나는 에너지 흐름과 물질 순환, 정보 교환 양상이 생태계의 기능이다. 다양한
생물 사회에서는 물질, 에너지, 정보의 흐름이 다양한 생물적^5,23^비생물적
요소들에 의해서 매개된다. 따라서 생태계의 다양한 기능 수행은 다양한 구조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먹이 사슬을 특징으로 하는 생물 사회의
민주주의가 척박한 토양에서 더 자주 관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주) Huston(1979), Begon 등(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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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와 물질은 생물을 따라 흐른다.
  시골집 텃밭에는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봄이 오면 얼었던 땅이 풀리고
나뭇가지에 물이 오른다. 나무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새싹을 틔운다. 머지않아
푸른색으로 치장하고 꽃을 피우리라. 이 나무에서 어떤 벌레는 수액을 취하고 어떤
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을 정경이 떠오른다. 때로는 극성스러운 들쥐가 나무껍질을
갉아먹기도 하겠지. 그래도 살아 남은 감나무에는 꽃이 피고 벌과 나비는 꿀을 빨
것이다. 가을이면 새들이 잘 익은 홍시를 쪼아먹고, 수확 철까지 버틴 감은 부모님이
거두신다. 떨어지는 잎과 죽은 가지는 때로 아버님의 손에 희생되어 아궁이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일부는 나무 밑에 남아 세균과 곰팡이의 먹이가 되리라.
  텃밭의 콩은 뿌리혹박테리아에게 자신이 생산한 물질을 제공하고,
뿌리혹박테리아로부터 귀중한 질소를 얻어 쓴다. 뒷산의 소나무는 균근이라는
일종의 곰팡이와 더불어 살고 있으리라. 소나무는 곰팡이에게 뿌리로 수액을
제공하고, 균근은 가는 균사로 주변의 인을 흡수하여 소나무에게 제공한다. 식물과
미생물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관계가 정겹다. 때로 나무와 곰팡이의 어우러짐에
두더지가 끼여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불편하지 않다. 두더지는
곰팡이를 먹고, 포자가 포함된 배설물을 여기저기 쏟아 곰팡이를 퍼뜨린다.
  식물 잎의 주요 기능은 광합성이다. 광합성이란 식물이 토양에서 뿌리로 빨아들인
물과 영양소를 잎으로 흡수한 이산화탄소와 태양 에너지로 잘 섞어서 유기물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산된 유기물은 에너지가 담겨 있는 물질이라서 뭇
생물의 먹이 자원이 된다. 이 자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요리되어 벌, 나비, 벌레,
쥐, 미생물 등 초식 생물의 먹거리가 된다. 이렇게 자리는 벌, 나비, 벌레 등을 작은
새들이 먹고, 그 작은 새는 큰 새들이 먹는다. 들쥐는 뱀이 먹고, 뱀은 삵쾡이나
고양이가 먹는다. 이와 같이 자연의 먹이 사슬은 바로 다양한 식물 종과 그 종이
이루는 다양한 구조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행로로 구성된다. 그 과정을 대충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잎 ^25,135^ 벌레 ^25,135^ 작은 새 ^25,135^ 독수리, 사람
  꿀 ^25,135^ (벌, 나비) ^25,135^ 사람
  씨, 열매 ^25,135^ 새, 사람
  껍질 ^25,135^ 들쥐 ^25,135^ 뱀 ^25,135^ 삵쾡이, 고양이
  마른 잎과 가지 ^25,135^ 미생물 ^25,135^ 벌레
  수액 또는 뿌리 분비물 ^25,135^ 미생물 ^25,135^ 벌레

  이 고리들의 연결 하나하나를 일컬어 먹이 사슬이라 한다. 이를 풀이하면 먹이
관계로 이루어진 사슬이다. 사슬을 이루는 각각의 고리를 영양 단계라 한다. 사슬의
앞에는 식물이 흡수하는 영양소가 있지만 잎의 과정 표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먹이
사슬의 첫째 영양 단계는 바로 식물로서 유기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흔히 생산자라
한다. 식물을 먹는 동물은 초식 동물이다. 이들은 1차 소비자라고 불리며, 먹이
사슬의 두번째 영양 단계가 된다. 그리고 그 1차 소비자로부터 먹고 먹히는
순서대로 2차 소비자, 3차 소비자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육식 동물이다. 초지와
토양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먹이사슬을 그려 보면 그림 5-1과 같다.
  * 그림 5-1.
  그림설명: 초지와 토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먹이 사슬의 보기(주). #1 초지, #2
토양.
  * (주) Smith(1992).
  요컨대 먹이 사슬이란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먹고 먹히는 과정에 연결되는
에너지와 물질 이동 관계의 요약이다. 이러한 먹이 사슬은 녹색 식물에서 시작하여
초식 동물, 육식 동물로 연결되는 초식 먹이 사슬, 용존 유기물을 흡수하는 미생물을
출발점으로 하여 포식자로 이어지는 용존 유기물^5,23^미생물 먹이 사슬, 그리고
동식물의 사체나 낙엽과 같은 유기 쇄설물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생물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포식자 단계로 이어지는 쇄설물 먹이 사슬로 구분하기도 한다(주).
이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 먹이 사슬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도 있고, 앞의 보기처럼
더 많은 갈래로 나눌 수도 있으며, 더욱 크게 묶어서 식물 ^25,135^ 동물 ^25,135^
미생물로만 이루어지는 간단한 관계로 표현할 수도 있다.
  * (주) 이도원 등(1995), 127쪽.)
  그러나 자연 생태계에서는 먹이 사슬이 하나의 직선 관계로 끝나지 않는다. 먹이
사슬과 사슬의 중간 중간에 이웃 사슬들이 연결되어 복잡하게 얽혀서 먹이 그물을
형성하고 있다(주).
  * (주) 이도원 등(1995), Odum and Biever(1984).
  한편 미생물이 분해한 것을 식물이 다시 흡수하므로 먹이 사슬에 동반되는 물질
흐름은 더 연장되어 식물 ^25,135^ 동물 ^25,135^ 미생물 ^25,135^ 식물로 연결되는
순환 관계를 가진다. 이를테면 식물은 생산하고 동물은 식물을 먹으며 동물은 필경
죽을 것이므로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미생물이 남긴 분해 산물은 이산화탄소와
무기 영양소이어서 다시 식물이 흡수하여 광합성에 사용한다. 동물은 식물을
뜯어먹기 때문에 식물의 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연 생태계에서
미생물의 분해를 도와 재순환을 촉진한다. 결국 이 과정은 식물, 동물, 미생물에
의해서 매개되는 과정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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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기 사슬을 밝은 길로 선도하자.
  먹이 사슬과 관련된 문제를 어두운 쪽으로 끌고 가느냐 밝은 쪽으로 유도하느냐는
사람 하기에 달렸다. 먹이 사슬 원리를 잘 이해하면 이를 수질 개선에 활용할
방도도 보인다.
  물가에 자라는 식물은 물에 포함된 영양소를 흡수하여 수질 오염의 한 형태인
부영영화를 감소시킨다. 그러나 겨울이면 죽고 봄이 되면 썩어서 영양소를
방출한다. 이 영양소가 식물의 성장에 이용되기도 하지만 많은 양은 물로 들어가서
또다시 부영영화에 한몫을 맡게 된다. 수자원의 부영양화를 걱정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썩기 전에 식물을 제거하여 물로 되돌아가는 영양소 양을 감소시키려는
욕심을 가진다. 그 방법은 우선 식물을 베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수변에서 생산된 유기물을 땅으로 옮기는 방법은 용이하지 않다. 그 곳은
지반이 약해서 차를 들여놓을 수 없다. 언젠가 팔당호 안에서 자라는 수초를 베어
내고 옮기기 위해 제초선을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식물을 베어 내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큰 호수에서 수초
제거선을 운행하려면 화석 연료와 인력이 필요하다. 화석 연료를 태워야 하니
그만큼 에너지를 소비하고 또 공기를 더럽히게 된다. 또한 운반을 위해 사람을
동원하려면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먹기 사슬의 원리를 이용하면
자연의 힘으로 많은 영양소들을 땅으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귀중한
세금을 절약하는 방편이 될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연에서 식물이 생산한 유기물은 다양한 경로를 따라
사용된다. 그 다양한 경로는 다양한 생물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식물은 초식 동물이
뜯어먹기도 하고 미생물이 분해하기도 한다. 죽은 식물들은 지렁이를 포함한 무척추
동물이나 미꾸라지 같은 척추 동물들이 직접 먹기도 한다. 또한 식물은 꽃을 피우고
씨앗을 생산하여 벌과 나비에게는 꿀을, 그리고 새들에게는 먹이를 제공한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한다면 인력이나 동력이 아닌 자연의 힘으로 유기물을 우리들이 사는
땅으로 옮길 수 있다(주).
  * (주) 돌이켜 보면 이 생각은 1982 년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 사유가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는 동안에 많은 에너지와
물질이 바다로부터 섬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최근 논문에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논문도 다양한 먹이 사슬을 따라 흘러가는 측면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Polis and
Hurd(1996).

  * 표 5-1. 먹이 사슬의 다양한 출발점(주)
  식물부분: 채식유형  채식 생물의 예 순
  살아 있는 조직의 비생식 부분: 비생식 부분 초식에서 출발  염소, 초어
  살아 있는 조직의 씨나 열매: 씨나 열매를 먹는 경우  새
  죽은 조직의 고형 유기물: 유기 쇄설물을 먹는 경우  벌레, 미꾸라지
  용존 유기물의 분비물: 부니질 용존 유기물 섭취  세균, 곰팡이
  용존 유기물의 식물 조직: 식물액을 탈취 및 상부 근리공생^5,23^기생  세균,
곰팡이
  용존 유기물의 꿀: 꿀을 먹는 경우  벌, 나비.
  * (주) Lee(1997).
  식물의 광합성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염소와 같은 가축이 물가의 풀을 뜯게
하는 방안도 권장할 만하다. 최근에는 잡식 동물인 염소가 물가에서 자라는
고마리나 좋지 않은 환경에 많이 나타나는 환삼덩굴도 먹어 치우는 모습이 관찰되고
있다. 초어는 수중에서 수중 식물을 뜯어먹고, 지렁이나 미꾸라지로 하여금 죽은
식물을 먹게 하므로 그들을 식량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림 5-2.
  그림설명: #1 물가에서 자라는 풀을 뜯는 염소와 자운영. #2 겨울의 마른
풀밭에서 먹이를 찾는 염소가 있는 풍경(주).
  * (주) 경남 고성군 고성읍 덕선리에서 각각 1992 년 4월 26일과 1993 년 12월
19일 촬영.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많은 식물들은 초식 동물에 의해서 적당히
뜯어먹히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광합성을 더욱 열심히 한다. 그것은 물과
토양에 있던 더 많은 영양소들이 초식 과정을 통해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군집 수준에서 보면 적당히
뜯어먹히는 지역의 종 다양성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높다는 사실이다. 이는 식물과
동물 간의 보이지 않는 공존 전략 결과를 대변하고 있다(주).
  * (주) Paige and Thomas(1987).
  특히 물가에서 자란 식물의 경우 대부분 살아 생전에 먹히기보다 생장기를 끝내고
죽는다(주). 죽은 식물의 유기 쇄설물은 미생물이나 벌레들의 먹이가 되고, 그것들은
먹이 사슬을 따라 물고기나 다른 생물의 몸으로 전환된다.
  * (주) Newman(1991).
  이를테면 다슬기는 식물의 잔재를 먹어 하천을 청소하고, 그 다슬기를 반딧불의
애벌레가 먹는다. 다 자란 반딧불을 필경 육지로 날아오르니 이 때 물에서 생산된
유기물이 육지로 이동된다. 이처럼 수많은 곤충들이 물에서 애벌레 시기를 지낸
다음 탈바꿈하여 하늘로 날아오를 때는 몸에 담긴 많은 양의 영양소를 뭍으로 옮겨
놓는다. 이런 과정을 잘 활용하면 물의 생물학적 산소 요구량을 증가시키는
유기물을 감소시키고, 동시에 여름밤에 반딧불 놀이를 즐기는 꿈 같은 일도
가능하다.
  꿀과 씨앗은 농축된 에너지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 습지를 창포나 수련 등의
꽃밭으로 만들어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는 한편 양봉을 곁들이면 벌과 나비들이
자양분을 열심히 땅으로 옮기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또한 열매를 맺는 식물인
경우는 새들이 날아와 씨앗을 취할 것이다. 물가에서 갯버들의 꽃가루를 먹는
박새와 붉은머리오목눈이가 나중에 숲에서 잠자리를 잡고 배설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얕은 물에서 개구리를 먹은 중대백로도 소나무 숲에 가서 밤을 보낸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대책은 수원지인 호수에 영양소가 물려 들기 전에 땅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제안한 바와 같이 마을 주변에 소규모 습지를 만들고
축산 폐수나 인분으로 미나리와 미꾸라지를 키울 수도 있다. 미나리는 폐수에서
나오는 영양소들을 흡수하고 벌레를 키운다. 미나리와 벌레는 미꾸라지를 살찌게
한다. 벌과 나비는 꽃에서 꿀을 빨아 영양소를 제거한다. 이렇듯 폐수의 영양소는
먹이 사슬을 거쳐서 자원으로 변모하니 일거 양득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방안은 물질의 생성처와 소비처를 적절히 연결시키려는 시도다(주). 이와
관련된 자연의 원리들을 발굴하는 것은 생태학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한 원리들이
연출되도록 우리 경관을 꾸려 가는 설계 기법과 관리 방안을 도출하는 일은
조경학자를 포함한 응용 생태학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이는 다양한 행로를 겨냥하여,
생물 다양성이 창출되는 자연의 진화 과정에 역행하지 않고 동참하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길에 동참하기 위해서 자연의 방식을 더욱
더 열심히 살피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에게
마음을 열듯이 자연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 (주) Forman and Gordon(1986), Pulliam(1988).
  왜 메마른 우리 사회에는 메마른 땅 아테네에서 민주 정치가 발전했듯이 학문적
다양성이 피지 않는 것일까?(주1) 도리어 다양한 산천 경관에 대한 반대 급부일까?
온갖 분파로 나누어져 당쟁으로 이어졌던 지나친 다양성에 식상한 결과일까?
어쨌거나 이 땅의 메마른 생태학이 바로 우리의 먹이 사슬 위에 드리우고 있는 검은
그림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언젠가
밝은 날이 오겠지(주2).
  * (주1) 문화와 학문을 포함하는 무형 요소의 다양성은 이미 많은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 언급하고 다루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시간의 역사와 함께 다양한
요소들에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바살라의 책 '기술의 진화'는 지극히 많은 다양성 중 하나를 다룬 내용이며 전혀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좀더 틀을 갖추어 분석하고 해석한 점만이
존경스럽다(김동광 옮김, '기술의 진화', 서울: 까치, 1996).
  * (주2) 이상은 '성서와 함께' 1996 년 5월호에 게재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어두운 흐름

  부부든 친구든 아니면 사업상의 교류든 간에 인간 사회의 좋은 관계란 아마도
어떤 것을 한쪽이 주고 싶을 때 상대가 기꺼이 받아 주고 한쪽이 필요할 때 상대가
기꺼이 제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태계에서도 먹이를
수요하는 만큼 공급하는 곳이 있으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수요 공급의 균형이 잘 맞는 것은 음양의 조화와 같다.
  한편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데 그가 이미 많이 가졌고, 누군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데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불행한 상황이다. 들고 나감과
주고받는 관계가 서로 맞지 않으면 만물에 문제가 생기는바 이것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모습이다. 수요 공급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식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광합성에 필수적인 질소나 인과 같은 영양소의 공급이 수요에 따르지 못하여
재생산이 어렵고, 동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먹이가 부족하여 영속성이 없어진다.
따라서 긴 역사를 통해 자연은 공생과 경쟁으로 먹이 사슬을 이루는 수요 공급의
균형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자연의 먹이 사슬에 뛰어들어 또 다른 사슬 경로를 만든다. 때로 사람이
개입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지나친 간섭은 문제를 일으킨다.
영양단계를 이루는 일부 생물들은 무분별하게 잡아 버리거나 왈패 같은 외래종을
도입하는 것이 대표적인 간섭이다. 때로는 자연 생물들이 만들지 않는 물질을
생태계로 도입하여 생물 농축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
    생물 군집 구조의 불균형
  언젠가 미국 케이밥 공원에서는 야비한 코요테가 미워서 사냥꾼을 풀어 잡아 버린
적이 있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불행이 다가왔다. 코요테가 없어지자 초식 동물이
늘어나서 풀을 마구 뜯어 땅이 노출된 것이다. 비가 오니 침식이 생기고 산사태가
일어났다. 자연의 조화를 무너뜨린 무지의 대가 치고는 가혹하다.
  농업과 축산은 자연의 먹이 사슬에 끼여드는 또 다른 보기다. 축산에서 일어나는
순환 경로는 식물(사료) ^25,135^ 가축 ^25,135^ 미생물 ^25,135^ 식물로 그려 볼 수
있다. 조화로운 축산에는 동물이 유기물 분해를 촉진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구성 요소들의 불균형으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축산 폐수 문제는 먹이 사슬의 일부 구성 요소가 치우쳐
잘못된 현상이다.
  요사이 봄이면 산나물 뜯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 이왕 산을 갈 양이면 산나물
채취를 겸한 유흥도 흥겹다. 그러나 천연 보호림에까지 가서 산나물을 뜯는 사람이
늘어 가는 현실은 아무리 봐도 지나치다. 가을이면 많은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
가서 산의 에너지 흐름을 옆길로 돌린다. 당연히 산 안에서 흐르는 에너지 부분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산이 생산하는 산동물의 먹이 사슬에 사람들이 끼여들었기
때문이다.
  산나물과 도토리를 비축하여 겨울을 나야 하는 산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먹이 사슬에 끼여든 사람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그들의 미움을 받은 행위가
언젠가 업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을까? 더구나 산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 봐도 오락을 곁들인 도시인들의 산나물 뜯기는 점점 미워지고 있다.
  산 위에 오르내리는 뱀을 그물로 잡는 행위는 들쥐 떼가 극성을 부리게 하고,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겨울잠 자는 개구리를 끄집어 내는 행위는 벌레들을 불러온다.
과도한 농약 사용은 잘 어우러져 있는 토양의 먹이 사슬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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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입종
  생태계는 종조성으로 대표되는 구조를 바탕으로 기능을 유지하고, 또 기능의
유지는 구성종들을 선택하는 과정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종의 구성이 달라져도
생태계의 기능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 기능이 왕성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부레옥잠이나 블루길이 이 땅에 만연해도 본래의 에너지 흐름과 물질 순환
기능은 유지될 수도 있다. 때로는 절멸한 토착종의 기능을 외래종이 대하면서
생태계의 기능을 유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외래종을 도입하여 일부
기능을 보완하는 것은 친구에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장려해야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생태계의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일본이나 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경제적^5,23^행정적 기능을 관리해도 좋다는 발상과 같다. 우리가 왜 과거의
일제 치하 시절을 수치스러워하는가?
  때로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깡패에게 청탁하고 나서 발목 잡히는 내용의
드라마가 있듯이, 도입종의 도움은 정녕 값비싼 기능적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남아프리카에 도입된 관목과 교목은 유역의 물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초래하여 물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주). 물론 그 외래종 도입은 헐벗은 산을
녹화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노출된 토지를 감싸고 침식을
막는 데 적당하고 빨리 자라는 수종을 유럽과 호주로부터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빠르게 번져 가고 고유종을 몰아내고 토양 수분을 왕성하게 흡수하여 시내로
흘러가는 강물을 고갈시켜 수자원 공급 문제까지 유발했다.
  * (주)van Wilgen 등(1996)
  언제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미국의 개척 시기 때 철도를 건설하고 나서 땅이 노출되자 땅을 덮어 줄 지피
식물이 필요했다. 그들은 잘 자라는 칡을 일본에서 도입한 후 철도 주변에 심어서
땅을 보호하는 득을 보았다. 그러나 항시 그러하듯이 처음의 적당한 혜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도 가끔씩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제 미국 남동부
지대에서는 칡이 창궐하여 수목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 때 만났던 어떤
미국인이 어디선가 잘못 들었는지 그 칡을 한국에서 들여왔다며 조금은 비난투로
말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편, 경관의 구조와 기능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은 바로 문화를
그린다.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외국산 동식물이 이 땅의 경관을 꾸미고, 그 경관
속에서 어느덧 우리는 우리 문화를 잊어 간다. 서서히 데워지는 물 속에서
천연스럽게 익어 가는 개구리처럼 우리는 이 부분에 지나치게 한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 표 5-2. 우리 나라 수계의 도입 어종과 황소개구리 분포
  동물종: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순
  큰입배스: 9  1  0  1  2
  블루길: 15  3  6  2  7
  떡붕어: 16  3  6  6  9
  이스라엘잉어: 17  3  4  6  5
  초어: 9  3  1  1  2
  백련어: 9  1  0  0  1
  무지개송어: 4  0  0  0  0
  찬넬메기: 7  1  2  2  1
  황소개구리: 9  3  2  2  4
  총조사 수역: 한강 19, 금강 4, 영산강 7, 섬진강 6, 낙동강 10.
  * 자료: 공동수 개인 제공(1995 년 자료).

  표 5-2에 포함된 자료는 우리 나라 강산에서 외국산 물고기들이 고유의 먹이
사슬을 침범하고 있는 현실의 한 가지 보기일 뿐이다. 도입종의 극성은 우리 땅
고유의 먹이 사슬에서 억센 자의 갈취를 보여 준다. 이 땅에는 한국 사람에 의해서
유지되는 우리 문화가 필요하듯이 우리 생물에 의한 우리 생태계 기능 유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생물 다양성을 강조하는 실질적이며 동시에
정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도입종은 이 땅의 평화스러운 먹이 사슬을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흩뜨려 놓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부주의한 실소로 인해 외국 동식물이
이 땅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간간이 아까시 Robinia Pseudoacacia 나무나
돼지풀의 성가심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띄는 일들에 밀려 체계적인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 어두운 현실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힘이
빠진다. 되돌아갈 길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1996 년 봄에 서울 남산의 아까시나무를 베어 내고 고유 식물을 심으려는 작업을
목격하기는 했지만 이것 또한 인력과 에너지 그리고 돈이 들지 않고서 될 일인가?
하지만 비용이 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난 몇 년 동안 아까시나무가 산과 야생
동물을 보호해 준 대가라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주). 이제 도입종과 관련된
실수를 재연하지 말고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서는 신중한 방책을 찾는 일만 남았다.
  * (주) 지금의 아까시나무 처지를 보며 나는 한나라 장군 한신을 생각한다.
항우와 싸울 때 유방에게 쓰임을 받았지만, 승전이 된 다음에는 버림을 받아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겼다. 사방공사를 해야 했던 어려운 시기에 모진 성격을
지닌 아까시나무의 덕을 본 사람들은 이제 도리어 그 나무의 극성을 싫어한다.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라는 어린 날의
노래처럼 우리 경관에 긍정적인 요소로 자리잡은 나무를 지나치게 미워하는 것은
아닌지? 비록 말 없는 나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모진 나무의 덕을
보기 전에는 장래의 관계까지 배려할 여유가 없었던 데서 문제가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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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물 농축
  생태계에서 일정한 구성 요소의 생물량 축적은 생산량 또는 섭취량이 호흡, 배설,
피식으로 잃는 양보다 많을 때 생긴다. 어떤 원소나 물질의 총획득량이 총손실량을
초과하면 축적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우리가 성장하는 일정 기간 동안 섭취하는
음식물의 양에서 배설과 호흡, 증발로 사라지는 양을 빼면 그것이 몸무게의 증가
또는 감소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먹이 사슬을 통해서 에너지와 물질이 이동하는 것은 각 영양 단계에서 얻고 잃는
과정의 연결이다. 하나의 영양 단계의 경우 포식자로서 먹는 경우에는 얻고
피식자로서 먹히면 잃는다. 이 때 일정 시간 동안 얻는 양이 잃는 양보다 많으면
축적되고 적으면 감소된다.
  먹이 사슬을 따라 이동하는 물질 중 생물의 대사 작용에 이용되지 않는
디디티(DDT)나 피시비(PCB) 같은 난분해성 살충제와 방사능 물질 그리고 독성
수은이나 납 화합물은 호흡으로는 손실되지 않는다. 특히 합성 유기 화합물은 묵에
녹지 않으나 동물의 지방에는 녹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배설물로 손실되는 양이
상대적으로 적어 생물체에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물질의 농도는 먹이 사슬을
따라 높은 양양 단계로 갈수록 생물체의 지방 조직에 점점 높아지며, 이런 현상을
바로 생물 농축이라 한다.
  * 그림 5-3.
  그림설명: 먹이 사슬을 따라 일어난 생물 농축의 보기(주).
  * (주) Miler(1992).

  * 표 5-3. 먹이 사슬을 따라 일어난 생물 농축의 보기
    영양단계: 물
  DDT 농도(mg/kg 건량): 0.000003
  농축률: 1
    영양단계: 식물 플랑크톤
  DDT 농도(mg/kg 건량): 0.00003
  농축률: 160
    영양단계: 동물 플랑크톤
  DDT 농도(mg/kg 건량): 0.04
  농축률: 약 13,000
    영양단계: 작은 물고기
  DDT 농도(mg/kg 건량): 0.5
  농축률: 약 167,000
    영양단계: 큰 물고기
  DDT 농도(mg/kg 건량): 2
  농축률: 약 667,000
    영양 단계: 새
  DDT 농도(mg/kg 건량): 25
  농축률: 약 8,500,000
  * 자료: Woodwell 등(1967).

  카슨 Rachel Carson 여사의 유명한 저서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이런 생물
농축 과정으로 인해 디디티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북극의 고래나 곰에게도 그
성분이 검출된다는 사실을 인식시킴으로써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끌었다. 한편
방사능 물질과 독성 중금속은 천천히 분해되거나 전혀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생물
농축된다.
  생물 농축된 디디티나 다른 지용성 난분해 물질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물을
위협한다. 직접 치명상을 입히는 경우도 있고, 생식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몸을
약화시켜서 질병, 기생충, 포식자의 침해에 대해 저항력을 잃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길한 작용이 먹이 사슬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을 예외로 하지 않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물질 순환과 생명 부양계

  1991 년 9월 26일 미국 애리조나 주의 남부 지방에 있는 도시 오러클 Oracle
에서는 역사적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987년 초에 시공하여 무려 4 년 이상의
공사 기간을 소요하며 건립한 대규모 실험 장치를 가동하기 위한 행사였다. 이
장치는 건평 1 만 2700제곱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온실로서, 네 쌍의 과학자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밀봉함으로써 인류 최초로 지구라는 자연 생물권을 가장
완벽하게 축소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가장 완벽한 흉내라는
가정 아래 일을 진행했다. 우리의 생명 부양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생태적
고정을 비롯한 과학적 현상들을 관찰하고 증명할 것이라며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하여 그 장치는 '생물권 Biosphere 2'라고 명명되었다(주).
  * (주) 생물권 2 건립과 관련된 내용은 '과학동아' 1992 년 3월호에 소개한 바
있으며 이 글을 생물권 2 건립 후 발생한 문제를 중심으로 '과학동아' 1993 년
4월호에 발표한 내용을 약간 수정한 것임을 밝혀 둔다. 이도원(1992, 1993).
  * 그림 5-4.
  그림설명: 생물학적 재생 과정을 시험하기 위해 설치한 대형 장치와 부대 시설로
이루어진 '생물권 2'의 항공 사진. 밀폐된 1 만 2700제곱미터 면적의 온실로
우림지대, 사바나^5,23^해양, 습지, 사막, 집약적 농경지, 인간거주지 등의 생명부양
환경과 함께 허파 기능 지역, 에너지 센터, 냉각탑 등 부대 시설을 포함하고
있다(주).
  * (주) 이도원 등(1995).
  실험이 시작된 다음부터 생물권 2 주변으로부터 부정적인 소문이 심심찮게 흘러
나왔다. 사실 생물권 2의 건립은 시작부터 몇 가지 상충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과학적인 연구를 고려한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관광 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비난이 들리기도 했다. 실제로 1992 년에 무려 23 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으며, 기념품점에서는 400 만 달러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과학적인 측면에서 생물권 2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생물권 2에서는 공기, 물, 폐기물이 재순환되어 태양 에너지와 전기, 컴퓨터,
전화를 제외하고는 외부로부터 아무것도 공급받지 않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곧 물질 순환의 측면에서 닫힌 계였다. 이런 실험을 흔히 물질 순환과
에너지 흐름이라는 생태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생물권 1인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물권 2에서도 태양 에너지는 물을
순환시키는 원동력이며, 광합성에 필요한 에너지원이 된다. 증발된 물은 깨끗하게
되어 음료수로 이용할 수 있고, 광합성으로 생산된 음식물은 거주지(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기반이 된다.
  * 그림 5-5.
  그림설명: 에너지 흐름은 물질 순환을 추진한다. 그림 #1은 그림 #2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흐름과 물질 순환을 개념화한 것이다. #1은 물의 순환, #2 유기물 생산
지역(삼림, 농경지 등)과 소비 지역(도시) 사이에 일어나는 물질 순환(주).
  * (주) Odum and Odum(1981)을 참고로 다시 그렸다.
  사람들은 음식물을 먹고 소화^5,23^호흡하는 과정에서 그 속에 포함된 에너지를
사용하며 동시에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이렇게 발생된 이산화탄소는 삼림이나
습지, 농경지의 식물과 바다의 식물 플랑크톤이 행하는 광합성에 다시 이용된다.
따라서 외부와의 물질 교환을 차단하더라도 생물권 2에서는 이 과정을 통해서
이산화탄소가 충당되기 때문에 태양 에너지가 공급되는 이상 연속적인 광합성이
가능하게 된다. 동시에 생물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는 그 광합성 과정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적절한 순일차 생산성이 있는 이상 그것을 기반으로 동물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
      ------------
    걱정했던 문제가 생기다.
  그런데 1992 년에는 생물권 2 안에서는 증가하는 이산화탄소를 비밀리에
제거해야 했다. 다음해 2월에는 산소 농도가 21 퍼센트에서 15 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산소 15 퍼센트 농도는 고도 3800 미터에서 나타나는 값으로 그
수준에서는 산소 결핍증이 나타나기 때문에 생물권 2의 생물들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외부로부터 산소를 공급받아야 했다.
  생물권의 에너지 대사 또는 에너지 변환이나 흐름으로 불리는 과정은 물질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에너지 흐름의 대표적인 매체가 탄소라는 물질이다.
생물권에서 에너지 흐름이 탄소에 작용하는 일을 단순화하면 아래와 같은
화학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6^356,14,135,23^(이산화탄소) ^26^ 6^125,23,135^(물) ^26^ Energy ^246,25,135^
^14,235,125,2,23,135,235^(포도당) ^26^ 6^135,23^(산소) ^25,135^: 생산과정,
^246,25^ 소비과정)
  * 여기서 포도당은 대표적인 유기물이다.

  위 화학식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생산 과정은 유기물, 즉 에너지가 담긴 탄소
화합물의 합성 과정을 대표한다. 왼쪽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유기물을 소비하는
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생물권의 순생산이 양(^26^)의 값을 가지면 해당 기간에 생물권에서
이산화탄소가 소비되고 산소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반대로 그 값이
음수이면 이산화탄소가 증가되고 산소는 감소됨을 의미한다. 이 결과는 곧 생물권의
대기에 숨쉴 만한 공기의 질이 유지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요소다.
  생물권의 생산자들이 자기 호흡을 초과하여 만들어 놓은 순일차 생산량의 일부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물인 동시에, 다른 소비자와 분해자 그리고 인공 동력기들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원이다. 이 양이 충분하면 생물권 2는
지속적으로 운행될 것이며, 충분하지 못하면 사람을 비롯한 일부 생물들의 생존에
위협이 뒤따를 것이다.
  1993 년 2월에 생물권 2의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은 그
밀폐된 공간에서 위의 화학 반응이 왼편으로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생물권 2에서 생물들이 숨쉴 만한 산소 수준이 유지되지 못했으며 동시에
순생산성이 음의 값을 가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생물권 2 안에 사는 여덟 명의 거주자들은 식사량을 줄여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1992 년에 대부분 에너지 섭취량을 하루에 1750 킬로칼로리에
제한해야 했다. 보통 어른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2000--3000kk를 섭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이 굶주렸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굶주림은 생물권 2로부터 최초의 과학 논문 한 편을
발표하게 했다. 곧, 왈포드 박사가 저칼로리이며 저지방인 음식물이 콜레스테롤,
혈압, 혈당 그리고 몸무게를 감소시킨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실험실
동물에서도 나타났는데 스파르타식의 다이어트가 노화를 지연시키고 사람들의
건강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
    좋아라고 했던 유기농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그러면 생물권 2에서 산소 부족현상을 일으킨 원흉은 무엇이었을까? 역설적이게도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하기 위해 유기물을 풍부하게 공급한 것이 산소 소모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유기물을 기반으로 토양 미생물들의 활성이
강화되면서 더 많은 분해가 발생한 것이다.
  적절한 양의 유기물은 토양 미생물의 활동을 매개로 하여 식물 경작과 미세
동물들의 활동에 적합한 서식처를 제공하지만 지나치면 골칫거리가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땅에서 유기물이 분해되고 그로 인해 공기 중의 산소 소모를
일으키는 현상으로서, 수계가 부영양화되면 과도한 양으로 생산된 유기물이
분해되고 그로 인해 수중의 산소가 고갈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와 같이 지구에서의 유기물 분해 과정은 현재 조금씩 낮아지고 있는 대기의
산소 수준을 설명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브르 곤충기'에서도 벌레와
미생물을 시체(유기물 덩어리)를 청소하는 생물이라 했듯이 이들은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키는 화석 연료와 유기물 축적을 상쇄시키는 데 존재 의의가
있을는지 모른다.
      ------------
    지구에서도 산소 결핍 현상이 생길 수 있다.
  일정한 수준의 산소 유지는 지구라는 보다 큰 계 안에서는 대체로 가능하다.
이를테면 도시에서는 음식물의 소비로 표현되는 유기물의 산화가 광합성이 일어나는
양을 훨씬 초과하여 계속되고 있지만, 열대 우림을 비롯한 삼림과 농촌 지역에는
그것을 상쇄하는 양의 순생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구 전체 규모에서 볼 때 도시는 이산화탄소를 생산하고 삼림, 습지, 바다,
농경지는 그 이산화탄소를 자원으로 광합성을 하여 도시로 식량을 공급하는 순환
과정을 통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작은 규모인 생물권 2는 대기의
용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인간 거주지에서 소비 과정이 지나치면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려되는 것은 이제 지구에서조차 산소^5,23^이산화탄소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산업 혁명 이후 석탄과 석유를 포함한 화석 연료의 과도한 소비와
삼림의 파괴 때문이다. 지구의 이산화탄소 증가와 산소 감소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지구가 생물권 2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이기 때문일 뿐이다.
  생물권 2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산소 공급은 지구에서도 순생산성이 음의 값을
계속하는 이상 언젠가는 산소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더구나 생물권 2에서는 산소를 공급해 줄 바깥 세상이 있었지만 적어도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서는 생물권 1인 지구로 산소를 공급해 줄 바깥 세계를 찾을
수 없다. 
    생태계 발달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인류 역사를 볼 때 어떤 지역이든 그 곳을 차지한
국가들의 흥망 성쇠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든 저절로 생겼든 간에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새로운 생물종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또 사멸되는 과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자연 지역에서 서식하는 식물종들의 단기적인 흥망 성쇠 또는 생물
구성에 대한 역사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구의 장기 역사를 진화라는
이름으로 기술한다면 국지적인 지역의 단기 역사는 천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미국의 생태학자 오덤 박사는 생태계의 역사에서는 생물적 요소뿐만
아니라 무생물적 요소들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생태계 발달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했다. 일본의 번역에서 따온 천이라는 용어는 왕조가 계승되는
것처럼 어떤 지역을 차지하는 식생, 동물, 미생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뀐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사 변천에는 구조적인 측면과 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왕조와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 및 그 주변 민초들이 하나의 구조적인 면을 형성한다면, 거기에서 조성되는
구조 및 분위기의 생성 기작 또는 과정들은 기능적인 면이라 볼 수 있다.
생태학에서도 생태계의 역사적인 면, 곧 생태계 발달을 논의할 때는 종종 구조적,
기능적인 측면을 나누어 고려한다.
    ------------
      구조적인 측면
  온생대의 어떤 지역에서 화산이 폭발할 때 또는 지각의 융기에 의해서 바다의
바닥이 공기에 노출될 때는 아무런 육상 식물도 존재하지 않는 불모지가 생겨날
것이다. 이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곳의 식물 구성은 어떤 변천을 겪을 것인가?
  불모지에 처음으로 옮겨 와 살 수 있는 생물은 육안으로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불모지의 첫 입주자는 영양 물질과 토양 수분이 빈약하고 땅 표면이 태양열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미생물이다. 미생물이 일군 척박한
땅으로 처음 들어오는 식물은 지의류다. 지의류가 처음 그 곳을 우점할 때는 환경이
그들에 대해 유리한 편이다. 그러나 지의류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하등
동물과 미생물의 활동으로 인해 주변 환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 생물군들은
에너지와 영양 물질을 흡수하고 또 노폐물을 분비하는 과정에서 주변 환경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지의류도 밀려난다. 민들레, 사초, 벼과식물이 자리를 비집고 끊임없이
들어온다. 그 무렵에는 주변 여건이 이러한 초본류의 식물에게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한 시기를 풍미한 초본류의 운명도 영원하지는
못하다. 그들은 지의류를 밀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바꾼 환경 때문에
관목류들에게 밀려날 처지를 맞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관목 시대에 이러 소나무 숲이 그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도 결국은 그늘에서 잘 견디는 나무들에 밀려난다. 외부적인
교란이 없다면 우리 나라 산지 비탈은 신갈나무, 졸참나무 등의 참나무 종류와 여러
가지 관목들이 섞여 자라는 온대 낙엽 활엽수림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식물군들이 자리 이음을 하는 과정을 식물 천이라 한다. 그러나
식물상의 변화와 함께, 식물에서 먹이와 보금자리를 얻는 동물과 미생물도 변한다.
이를테면 수관(나무 수, 관 관)이 없는 숲의 가장자리에 사는 새들은 삼림이
성숙되어 감에 따라 주로 삼림 안에 서식하는 새들에 의해서 밀려난다(주).
  * (주) 이도원 등(1995).
  한 지역의 천이를 포괄적으로 생태계 발달이라 한다. 천이동안 일어나는 각각의
단계를 천이 단계라 한다. 시간이 충분히 흐른 다음 더 이상 생물상의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천이의 마지막 단계는 극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천이는 생태계 안에서 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종의 구성과 군집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거기에 존재하는 생물 종에 의한 물리적 환경 변화와, 동일 집단
수준에서 일어나는 생물 상호 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리적 환경이
변천의 양상과 속도를 결정하고 종종 발달 한계를 규정하기도 하지만 천이는
궁극적으로 생물 작용에 의해서 조절되는 과정이다.
    ------------
      기능적인 측면
  한 사람이 탄생한 후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변해 가는 몸무게를 그래프로 그려
보면 어떻게 될까? 일생은 아마도 서서히 자라는 유아기, 한창 자라는 시기,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몸무게가 크게 변하지 않는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기를 고려한다면 나이에 따라 나타나는 몸무게를 보여 주는 그래프는 대략 그림
5-6과 같이 나타날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 나이를 x 축으로 하고 매년 증가하는
몸무게의 증가량을 y 축으로 하여 그래프로 그려 보면 어떨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서서히 증가하는 시기, 한창 증가하는 시기, 나이가 들어 증가하지 않는 시기는
그림 #2와 같은 형태를 보여 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그림 #1의 그래프를
방정식으로 표현했을 때 그에 대한 미분 함수를 기술하는 그래프다.
  * 그림 5-6.
  그림설명: #1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한 개인의 몸무게, #2 매년 늘어나는
몸무게의 양.
  그러면 하나의 생태계가 발달하는 동안 축적되는 유기물의 총량을 시간에 따라서
그래프로 그려 보면 어떻게 될까? 그 유기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비율이
일정하다면, 생태계가 발달하는 동안에 축적되는 유기 탄소 또는 질소 등의 영양
원소 총량은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매년 달라지는 유기물 증가량을
그래프로 그려 보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 실내에서 실행한
작은 모의 실험 장치와 실제 생태계의 하나인 삼림에서 측정한 결과를 비교해 보자.
  모의 실험 장치에 나타나는 생태계 발달은 유리 플라스크 같은 실험실 배양기에
빛을 공급함으로써 관찰할 수 있다. 생명 활동에 필요한 무기 염류들을 적당히
함유한 배양액으로 플라스크를 반쯤 채우고 거기에다 연못에서 채취한 물과 침적물
시료를 접종한다. 다양한 작은 생물들과 식물의 번식 수단 또는 씨앗들이 그 용기에
포함되도록 시료는 두 군데 이상의 지역에서 채취하여 접종하는 것이 좋다.
  그림 5-7은 그러한 모의 실험 장치에서 관찰되는 생태계의 특징 중 광합성에
의한 생산(P), 호흡(R), 생물량(B)의 변화 양상을 나타낸 것이다. 연못으로부터
가져온 조류 algae 를 배양기에 넣어 놓으면 처음 2--3주 동안에는 풍부하게
공급되는 영양 물질을 이용하여 빠르게 성장한다. 세균, 원생 동물, 선충류, 갑각류
같은 작은 종속 영양 생물들도 조류 생산에 의해 공급되는 먹이량에 따라 비슷한
증가 추세를 보인다. 따라서 살아 있는 물질의 전체 무게인 생물량은 빠르게
증가된다. 이와 같이 배양의 초기 단계에는 총생산량이 총호흡량을 초과하기 때문에
순생산량은 생물량으로 축적된다.
  * 그림 5-7.
  그림설명: 천이와 생산성의 변화: #1 모의 실험 생태계, #2 삼림 생태계(Pg =
총일차 생산성, Pn = 순일차 생산성, R = 호흡, B = 생물량)(주).
  * (주) 이도원 등(1995).
  그러나 배양기와 같은 닫힌 계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간과 영양 물질 같은
자원이 한계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유기물 부패에 의한 영양 물질의 재활용률이
생산을 제한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생산량과 호흡량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순생산량이 없으므로 생물량 증가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외형적으로 배양기는 밝은 초록빛에서 연두색으로 변하는데 이는 성숙된
단계에서는 유기 쇄설물과 그것을 먹고 사는 작은 동물들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무한히 계속될 수 있으나, 최초의 접종에서 생물 다양성이 낮으면
생태적으로 주요한 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생물들이 없어지므로 죽은 생태계로 변할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이는 극단적인 독립 영양 상태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때로는 호흡이 생산을 능가하고 있는 종속 영양 상태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종속 영양 상태에서 천이가 시작되는 흥미 있는 보기로는 동물을 키울 때
사용하는 '배양'을 들 수 있다.
  일정량의 건초를 물에 넣고 끓인 후 그 용액을 어둠 속에서 2--3일 정도 내버려
두면 종속 영양 세균의 배양이 진행된다. 아주 작은 미소 동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연못물을 첨가하면 한 달가량 동물 천이를 관찰할 수 있다. 처음에는 보통 단세포
동물인 편모충류가 나타나고, 섬모가 있는 원생 동물들이 그 뒤를 잇는다. 그
다음으로 다소 특이한 기능을 가진 섬모충류, 아메바 그리고 윤충들이 천천히
자리를 이어 간다.
  만약 조류가 없거나 배양이 어둠에서 계속되고 새로운 건초액이 첨가되지
않는다면, 원래의 유기물이 모두 사용되고 없어지면서 작은 모의 실험 생태계는
쇠퇴될 것이다.
  그림 5-7의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공적인 작은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천이의
기능적인 추세는 훨씬 규모가 큰 자연 생태계인 삼림에서 긴 기간에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의 실험 장치는 너무 작고 닫힌 계이기 때문에
물리적^5,23^생물적 다양성이 크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 발달과 함께 일어나는
중요한 특성들을 모두 보기는 어렵다.
  요컨대 어린이는 어른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자란다. 마찬가지로 젊은 생태계는
성숙한 생태계보다 변화 속도가 빠르다. 천이의 중간 연령에 있는 생태계에서
유기물이 축적되는 속도는 초창기나 극상의 생태계보다 빠르다. 유기물 수소, 산소,
탄소, 질소, 황, 인 등의 영양소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외부에서 영양소를 공급할
경우 젊은 생태계가 훨씬 왕성하게 받아 먹는다.
  이러한 양상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정보를 넙죽넙죽 챙기는 반면에 나이 든 분들은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과 일맥 상통한다. 일반적으로 노인이 젊은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보를 더 왕성하게
흡수하는 연령층은 젊은이들이다. 마찬가지로 숲도 천이의 중간 단계에서 변화와
생산성이 높으며, 충분히 성숙하면 유기물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는 정상
상태가 된다.
      ------------
    생태계 발달 원리들의 의미
  영양소들은 육상의 삼림과 농경지에 있을 때는 말 그대로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영양물로서 삼림과 경작 식물의 증산에 공헌한다. 그러나 호소나 강으로 과도한
양이 들어가면 부영영화라는 수질 저하 문제를 초래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유기물과 영양소 함유량이 높은 폐기물을 육상 생태계에 뿌리는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
  생태계의 발달 시기에 따라 영양물을 수용하는 능력의 차이가 있다면 생태계의
영양소 흡수 능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유기 폐기물을 뿌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이 시기는 생태계의 순생산성이 가장 높을 때, 즉 생태계 발달의 중간
단계다. 우리 개인이 사춘기에 몸집이 커지고 많은 정신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처럼,
또한 발전 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이 시기는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용의 측면만 고려하면 숲의 목재 제공이라는 기능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미
성숙하여 성장 속도가 늦어지고 목재가 될 만한 나무들을 베어 낸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다음 세대에 일할 어린이와 노인의 지혜가 함께 필요하듯이, 성숙한 숲이
가진 기능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성숙한 숲은 토양 단면뿐만 아니라 수관의 수직적인 층화를 통해서 동물과
미생물들에게 다양한 서식처와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충분히 성숙과 자연 숲에서는
풍우에 시련을 받으며 부분부분이 교란되어 서로 다른 천이 단계의 조각들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생태적 특성이 다른 지역들과 안배를 이뤄 숲 전체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환경의 변화와 조화를 만드는 데 유리하다.
  * 그림 5-8.
  그림설명: 삼림의 수직층화의 다양성과 새의 종 다양성에 나타나는 비례 관계(주).
  * (주) Recher(1969).
  이러한 자연 숲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인간이 가꾸는 땅도 지역적 안배가
필요하다. 젊은 생태계는 생산 기능이 왕성한 반면 성숙한 생태계는 우리에게 보호
기능을 제공한다. 이것은 젊은이와 노인이 더불어 이끌어 가는 성숙한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인간의 삶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식량이 공급되어야 하며, 이는 생산성이 높은
천이의 초기 단계와 흡사하게 이루어진다. 동시에 인간의 삶은 성숙한 생태계가
제공하는 보호 울타리도 필요로 한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문화 생활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생물과 경관의 다양성이 없이는 정신적, 문화적인
다양성이 보장될 수 없다. 우리는 보고 듣는 만큼 생각하고, 생각한 만큼 문화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흔히 일컬어 환경의 질이 저하되었다 함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아서
그러하다는 것이지 모든 생물의 환경이 나빠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인간 활동은 인간 자신의 환경을 질적으로 저하시키는 동시에 어떤 다른 생물에게는
양호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 역사상 영원한 동물의 왕국은
없었으며 인류 역사상으로도 영원한 나라는 없었다. 궁극적으로 대물림은 주체가
스스로 여건을 그렇게 조성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런 기작으로 천이 과정 동안 식물,
동물, 미생물이 대물림을 하듯이 그리고 진화 과정 동안 그러했듯이, 인간은 이
지구라는 서식지를 물려 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비관적 결론에
다다른다.
  다행히 인간이 여타 생물과 다른 점을 가졌다면 그러한 운명을 좌우하는 기작과
변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과연 그 지식으로 자리 물림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 자리에 현존하는, 또 들어오고자 하는
자연의 부분들과 교감함으로써만 어느 정도 존립의 연장이 가능하지 않을까"이상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과 '생태학: 환경의 위기와 인류의 미래'(이도원 등, 1995)
제7장을 발췌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생태계를 넘어서 경관 생태학으로

  1994 년 12월에 열린 한국생태학회와 한국잔디학회의 공동심포지엄에서 두 번째
연사로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첫번째 인사는 발표를 마무리하여 일본에서 본 최근
동향을 간략히 덧붙였다. 유전 생태학과 함께 경관 생태학(경치 경, 볼 관, 날 생,
모양 태, 배울 학, landscape ecology)이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고 있으니 우리도
나무를 심고 경치를 꾸미는 데 필요한 응용적인 부분을 곁들여 생태학 분야의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다음 차례로 발표를 하면서 그 분의 의견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경관
생태학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6 년 미국 조지아 대학의 갈리
Frank A. Golley 박사와 경관 생태학자 터너 Monica Turner 박사를 중심으로
국제경관생태학 협의회를 창립할 때 귀동냥할 기회가 있었으며, 관련 논문들을 몇
편 읽은 수준이라서 할 얘기는 있었다.
  흔히 'landscape'를 '경관'이라 번역하는데, 경관 생태학이란 용어가 때때로 필요
이상 시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경관 생태학을 나무나 심고 경치를 꾸미는 데에 필요한 응용 생태학으로 보는
것은 협소한 생각이다. 경관 생태학은 하나의 경관 안에 있는 공간적, 시간적 구성
요소와 생물 및 생지화학적 과정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구조적인 측면과 기능적인 측면이 양 축을 이루고 있다. 때로 동의어로
'land ecology'(주1)도 사용하지만 이 또한 우리말로 토지 생태학이라 번역하면
수중 생태계 aquatic ecosystem 를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주2). 아무튼 아직 적절한 번역어가 제안되지 않아 앞의 경우와 같은 오해가
생기고 있다.
  * (주1) Recher(1969), Zonneveld(1995).
  * (주2) 구미에서도 독일어 Landschaft 를 landscape 로 옮겨서 경치 또는
풍경이라는 의미로 혼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Zonneveld, 1995). 따라서 토지
생태학 land ecology 과 함께 공간 생태학 spatial ecology, 지역 생태학 regional
ecology 이란 용어를 경관 생태학 landscape ecology 대신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한편 지역 생태학은 경관 생태학과 공유하는 내용이 많지만 경관보다 더 큰
단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구별하기도 한다(Forman, 1995).
  내 발표가 끝났을 때 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첫 발표자의 반발이 들어왔다. 나는
아연해졌지만 짧은 시간에 그 분과 청중을 함께 이해시킬 만큼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대답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가면 자연히 밝혀질 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여기서 마치겠습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
    경관 생태학이란?
  경관 생태학은 토지 자원 관리에 생태학적 원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태동했다. 신대륙에 비해서 좁은 면적과 오랫동안의 분절된 토지 이용으로 자연
자원의 집약적 관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요구되는 유럽에서 발달하여 1980 년대에
북미에 도입되었다(주).
  * (주) Malanson(1993).
  비행기나 인공위성으로 내려다 본 지역은 여러 가지 유형의 토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러한 조각들이 모여 이루는 모양이 주변 환경의 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은 경관 생태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환경
문제는 생태계와 생태계 사이에 평행을 이루고 있던 에너지와 물질의 분포가 인간의
토지 이용 변화와 함께 달라지면서 발생했다는 이해도 뒤따랐다. 이를테면 맑은
물의 오염은 육상 생태계에 있던 물질이 수중 생태계로 과도하게 이동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태계 연구는 하나의 생태계 안에 있는 내부 구성 요소들의 구조적인 측면 및
물질 순환과 에너지의 흐름뿐만 아니라 대사 회전과 과정을 포함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관여하고 있다. 반면에 경관 생태학은 동질적인 경관의 조각 patch 과
조각의 경계를 가로질러 일어나는 에너지, 물질, 생물, 정보의 이동에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이동과 지역을 이루는 각기 다른 특징의 토지 크기, 모양, 배열,
구성 요소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하여 경관 생태학은 경관 구획 안에서 생태계의 공간적 크기와 배열의
규칙성, 분포 등의 구조적인 내용과 그러한 공간적인 형상이 자아내는 유동, 상호
작용, 변화를 포함하는 기능적인 측면, 나아가 구조와 기능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주).
  * (주) Schreider(1990). 경관 생태학은 근래에 발달하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
원격 탐사, 지리 정보 체계, 모형, 프랙털, 침투 이론 percolation theory 등으로
무장하여 경관의 구조적, 기능적 관계 규명에 힘을 쓰고 있다.
  경관 생태학의 주요 단위인 경관은 토지, 토양, 동물, 식생들이 자아내는 지질
구조뿐만 아니라 들판, 삼림, 정착지, 공장 부지와 같은 인간 활동 유형을 포함한다.
공간적으로 경관은 수제곱킬로미터의 크기이며, 이질적인 지형, 식생 형태, 토지
이용의 모자이크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모자이크는 크게 (1) 긴 역사에 걸쳐
일어나는 지질적인 과정, (2) 자연 발생적인 불이나 태풍, (3) 벌채, 농경 활동, 도시
건설과 같은 인적 교란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최근의 경관 생태학은 경관 형성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간 활동뿐만 아니라 그것을 좌우하는
인문적인 부분까지 연결시켜 경관 구조와 기능의 변화를 기술하고 예측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주).
  * (주) Poore and Poore(1987). 보호경관국제심포지엄에서 Lucas(1992)
인용(Urban 등, 1987)    경관 생태학의 쓰임
  상품의 생산지와 소비지 간의 원활한 유통은 건전한 경제에 크게 공헌한다. 이와
비슷하게, 경관 생태학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에너지, 물질, 생물, 정보를
생성하고 공급하는 생태계와 그것을 소비하는 생태계의 연결을 도모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육상 생태계가 인위적인 토지 이용 변화로 인해 영양물을 과도하게
생산하는 경우에 그것을 다른 육상 생태계로 유통시킨다면 물로 들어가는 양이
적어질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하나의 보기일 뿐이다. 이미 물질뿐만 아니라 에너지,
생물, 정보의 자연적^5,23^인공적 공급처와 소비처를 밝히고 주고받는 관계를 원만히
이루기 위해 이를 토지 이용 계획과 조경 설계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주).
  * (주) Forman(1995), Dramstad 등(1996)
  * 그림 5-9.
  그림설명: 경관은 자연 과정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에 의해서 좌우된다(주). 환경의
질과 자원 공급은 다시 자연적, 인문적 요소에 되먹임 과정을 가지지만 그림에서는
생략했다.

  자연적 요소 ^25,135^ 생태적 요소 ^25,135^ 생물분포 ^25,135^ 경관의 구조와
기능 ^25,135^ 환경의 질과 자원 공급.
  인문적 요소 ^25,135^ 시장원리, 사회요인 ^25,135^ 토지 이용 정책^456,34^실행
^25,135^ 경관의 구조와 기능 ^25,135^ 환경의 질과 자원 공급.
  * (주) Lee 등(1992)의 그림을 참고로 다시 그렸다.
  주고받는 아름다운 관계가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공적인
힘으로 이들 대상의 분포를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공적인 조정은
대부분 더 많은 에너지와 돈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자연적인 과정을
소홀히 함으로써, 폐수를 처리하고 축산 농가나 가정으로부터 흘러나와 상수원에
축적된 영양소를 육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돈을 쏟아 넣고 있다.
  경관 단위 사이의 물과 영양소의 운반, 식물과 무척추 동물 및 척추 동물의
이동과 같은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경관 생태학자와 생태
공학자들은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원의 흐름 경로, 물질의 이동 형태, 이동을
매개하는 힘을 발굴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
    경관에서 요소들의 흐름은 다양한 과정과 매체로 이루어진다.
  자연에서 물질, 에너지, 생물, 정보가 흘러가는 경로는 다양하다. 흐름의 경로는
자원을 이용하는 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빠져나가는 현상의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이기도 하다. 대략 휘산되는 기체 형태, 물에 녹아 있는 상태(용존상), 흙
알갱이와 같은 입자상, 죽은 식물 조직(씨앗, 낙엽, 죽은 가지), 살아 있는 동물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질의 이동 형태는 확산과 집단류 mass flow, 생물의 적극적 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확산이란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현상을 말한다.
집단류는 물질이 바람이나 물의 흐름에 실려 이동하는 경우를 말하며, 적극적
이동은 동물이 자신의 이동 수단을 이용하여 옮겨 가는 현상을 일컫는다.
  모든 물질은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서는 인구 밀도가 낮은 시골에서 높은 도시로 사람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런 확산을 거스르는 현상이다. 이는 에너지의 작용으로
집단류와 적극적 이동을 통해서 확산을 역행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세상에서 에너지를 빼앗아 버린다면 도시에서 시골로 사람이 흩어져 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물질을 옮겨 놓는 힘은 태양 에너지, 중력, 원자력 등에서 비롯된다. 옮겨
놓는 매체는 물, 바람, 동물, 사람들이지만 물의 흐름도, 바람의 발생도, 동물의
에너지도, 사람이 가진 에너지도 대부분 태양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사람을 한
곳으로 모으는 힘도 따지고 보면 태양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도 어쩌면 태양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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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관 생태학에서 보는 녹색 다리와 띠
  인간 사회에서는 근친의 결혼을 금한다. 이는 근친을 부모로 하는 어린이는
도태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식물의 경우도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특성들이 만나 유전자와 학습을 통해서 새로운
기회를 끊임없이 창출해 내야 한다. 그러나 동물들은 서식처가 단편화되면서, 다른
환경 지역에 살며 다른 특성을 키워 온 짝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서식지의 단편화는 현존 생물이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그 곳에 내몰린 생물들의
근친 상간을 초래하여 필경에는 망하는 쪽으로 몰아간다.
  이제 환경 윤리를 생각해야 할 때다. 인간의 윤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좁은
의미의 윤리라면, 환경 윤리는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노^36^예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사람을 착취했지만
인류의 성숙은 그것을 예방하는 윤리를 발전시켰다. 마찬가지로 여태까지는 사람이
환경을 착취하는 문화적 미성숙이 이 땅에 머무르고 있지만, 화목한 길로 나아가는
것은 필경 인류 문화가 지향할 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단편화된 서식처를 인위적으로 이어 주려는 노력은 환경
윤리에서 제안하는 도리의 일부다. 그러나 돌보고자 하는 동물의 이동이 어느 정도
규모의 폭과 식생 및 지형 구조를 필요로 하는지를 그 동물의 입장에서 규명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녹색띠나 생태 다리를 설치하는 것은 재정과 인력 낭비이며 문제를
오히려 잘못 방향으로 이끌 소지가 있다. 우리가 보존 생태학에서 흔히 겨냥하는
대형 생물의 처지에서 볼 때 차 소리와 인적, 불빛, 오염으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폭이 좁은 생태 다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동물 행동에 대한 이해
없이 설치된 생태 다리는 쥐와 같이 약삭빠르고 해로운 동물들에게나 이동로를
제공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생태 다리라는 이름에 매료되어 환경부에서는 지리산과 설악산에 생태 다리를
놓겠다는 발표를 했다(주). 언젠가 분당에 있는 공원을 녹색 다리로 연결하겠다는
소식도 신문을 통해서 읽었다. 이처럼 환경부를 위시하여 지방 자치 단체들의
장까지 생태 다리 조성을 인기성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발상은
생태계와 생태계 사이의 동물 이동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관 생태학의 영역에
속한다.
  * (주) '조선일보' 또는 '중앙일보' 1995 년 8월 16일자.
  그러나 생태 다리가 그 이름에 걸맞는 기능을 하려면 그것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동물의 행동을 고려하는 사전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교원대학교에서 행동 생태학을 전공하는 박시룡 교수가 언젠가 '조선일보'의
독자란을 통해서 환경부의 어설픈 생태 통로 설치 계획에 대해 비판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보존 생물학자 해리스 Larry Harris 는 동물 이동을 위한 통로에 대해 세 가지
다른 목적에 따라 적당한 통로의 너비를 권장하고 있다(주). 첫째, 개별 동물의
이동을 고려하면 그 동물들의 행동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으며, 또 통로 기능이
몇 주 또는 몇 달 정도 발휘될 것을 기대한다면 너비는 수십 미터가 적당하다. 둘째,
하나의 생물종 전체 이동을 고려하며 그 종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 충분하고 수년
동안 통로 기능이 유지될 것을 바란다면 너비는 수백 미터가 적당하다. 셋째, 모든
동물군의 이동을 겨냥하며 그 생물들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의 동물 이동을 기대하는 통로라면, 너비가 수천 미터는
되어야 한다.
  * (주) Forman(1995), 155--156쪽 재인용.
  이러한 미국인의 주장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밀어 놓아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변 경관 바탕이 미국보다 열악한 경우에는 오히려 그들의 제안보다 통로
너비가 더 넓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굳이 개념만 전시 행정적으로 내세우는 처사는 또
다른 사대성일 뿐이다. 
    (따로 보기 9) 작아지는 지구

  중학교 시절 3 년 동안 많은 추억을 안겨 준 통학 길은 공동 묘지 사이를 지나야
했다. 어느 날인가. 무수히 솟아 있는 무덤을 보며 엉뚱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무덤이 늘어나면 지구가 무거워지고, 그에 따라 나타날 지구의 만유 인력 변화로
인해 우주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을까? 이 걱정은 되풀이될 겨를을 잃었다가 생태학
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연장된 사유로 이어졌다. 물질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무덤
속의 시신으로 변한 사람이 일생 동안 했던 일이란 지구 한 부분의 자리 옮김일
뿐이다. 그러니 무덤이 늘어난들 지구 생태계의 크기에는 변화가 없으리라.
  그러나 지구의 크기가 변하고 있다는 인식이 다시 찾아왔다. 지구 역사를 통해 볼
때 꾸준하게 증가하는 산소에 비례한 유기물 생산의 증가가 지구의 크기를 키워
왔지만, 이제는 화석 연료 사용 증가와 삼림 훼손으로 소비 과정이 우세해져 반대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일생 동안은 현저하게 변하지 않지만 지구의
크기는 6억 년 전부터 유기물이나 그 변형물(화석 연료)이 축적됨에 따라 아주
천천히 커지고 있었다.
  그림 5-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늘날 지구에서 유지되고 있는 산소 수준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대략 46억 년 전에 생성된
지구는 무려 25억 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환원성 대기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시 대기는 다량의 질소, 수소, 이산화탄소, 수증기를 포함하였고,
일산화탄소, 염소, 황화수소도 오늘날의 많은 생물들에게는 유독할 정도로 높은
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구 대기의 화학적 조성에 나타난 커다란 변화는 적어도
20억 년 전에 최초의 광합성 미생물인 시아노박테리아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
  * 그림 5-10.
  그림설명: 지질학적 역사에서 생물군의 진화와 대기의 산소 및 이산화탄소 수준
변화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주).
  * (주) 이도원(1995).
  광합성 미생물은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간단한 무기물질로부터 먹이를 만들 수
있었고, 그 부산물로 기체 상태의 산소를 방출했다. 그 과정은 앞에서 소개한 화학
평형식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반응이 우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로
지구의 순생산성이 양의 값을 가짐에 따라 대기의 산소는 증가하기 시작했고,
산소가 대기로 확산되어 감에 따라서 에너지 효율이 훨씬 더 높은 호기성 생물들이
진화했다. 그리고 오존 보호막이 발달되어 생명이 지구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점점 더 복잡한 다세포 생물들의 발달이 거의 폭발적으로 뒤따라
일어나면서 오랜 기간 생산이 호흡을 초과하게 되었다.
  그림 5-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생대에는 산소가 오늘날 수준으로 증가되고
이산화탄소는 감소되었다. 그 수준은 아주 적은 범위 안에서 변화를 보이며
오늘날까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지구에서 인류의 출현과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중학생 때의 걱정과는 반대로 지금은 오히려 화석 연료와 유기물의 분해 증가
때문에 지구가 그렇게 작아지고 있다. 탄소만을 고려하면 매년 지구로부터 탄소 3.2
^16^ 10^453456,,1,15^ 그램에 해당하는 지구 무게가 감소되고 있다(표 5-4). 물에
담가 둔 사탕으로부터 용해성 물질이 녹아 가듯이 대기에 담긴 지구로부터 탄소
물질이 녹아 확산되고 있는 듯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지만 지구에 물질이
보태지고 공기로 손실되는 과정에는 또 다른 과정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운석과 분진, 질소 고정 등을 통해서 지구에
보태지는 무게가, 날아가는 탄소의 양을 상쇄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 표 5-4. 지구의 연간 이산화탄소 생산과
소비량(10^45,3456,1,15,356,1245^C/yr)

  화석연료 연소와 시멘트 생산: 5.5 ^26,35^ 0.5
  열대 토지 이용 변화에 의한 방출: 1.6 ^26,35^ 1.0
  해양에 의한 흡수: ^35^2.0 ^26,35^ 0.8
  북반구 산림의 재생산: ^35^0.5 ^26,35^ 0.5
  기타 육상 생태계 흡수(이산화탄소와 질소 공급 증가, 기후 온난화에 의한 광합성
증가): ^35^1.4 ^26,35^ 1.5
  대기의 증가: 3.2 ^26,35^ 0.2
  * 자료: IPCC(1994).

  지금 지구가 작아지는 것은 과거의 광합성 산물이 과도하게 소비된 결과다.
따라서 지구가 작아지는 과정을 막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광합성을 통해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것이다. 광합성의 증가는 지구상의 일차 생산자를 이용하면
가능하다. 혹자는 나무를 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한다. 어느 해양
생태학자는 철분이 일차 생산성을 제한하고 있는 해양의 일정 지역에 철 함유
물질을 뿌려 주면 바다의 조류가 광합성을 증가하여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구가 작아지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서
문제가 될 만큼 빠른 만유 인력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을지라도 지금까지 논의한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자성이 촉구되고 있다.
  지구가 작아지는 만큼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증가한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소위 온실 효과는 많은 환경 관련 책자에 이미 소개되어 있으니 굳이
여기에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대신에, 증가된 대기의 이산화탄소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자. 여기에 대한 예상으로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첫째,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므로 그것을 감소하는 방향으로 반응이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화학에서 흔히 나오는 러샤트리에르 원리라는 것과
비슷하다. 이산화탄소 증가를 감쇄시키는 광합성은 자극되고, 생산하는 분해 과정은
위축될 것이다. 표 5-4에서 보듯이, 이산화탄소와 질소 공급, 기후 온난화에 의한
광합성 증가는 그런 과정을 포함한다.
  두 번째 입장은 탄소 이외의 식물 생리 활동에 필수적인 다른 영양소 공급이
뒤따르지 못하면 러샤트리에르의 원리로 예상되는 만큼 광합성이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별히 지금의 환경은 인위적인 과정과 화석 연료 연소에서
비롯되는 질소 화합물의 공급으로 인해 질소 과잉 공급이 일어나는 상황이므로
질소는 광합성의 제한 요소로 작용할 것 같지 않다. 반면 생물 활동에 필요한 양의
대부분이 토양으로부터 공급되는 인은 결핍될 가능성이 크다. 그 까닭은 인이
공기에서 공급되지 않는 동시에 침식과 용해로 인해 많은 양이 수계로 유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양에서 인의 결핍으로 인해 대기의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더라도
광합성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따로 보기 10) 젊은 생태계

  나이 40이 넘으면 왕성하던 체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30
대의 마지막 해에 다가왔던 힘든 상환은 십진법에 길들여진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 힘든 상황을 벗어나는 데는 늦은 나이에 검도를 시작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40 대 초반은 검도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지금도
신체라는 계의 젊음을 유지하는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검도를 계속하고 있다.
  젊음이란 무엇일까? 육체적, 정신적으로 신진 대사가 원활한 것이 젊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신진 대사가 원활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잘 먹고 잘 배설한다는
뜻이다. 정신적으로는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필요한 것은 취하고
쓰레기 정보는 버리는 소화 과정이 젊은이의 특징이다.
  내가 아침마다 운동을 하는 것은 내 육신에 자극을 주는 행위다. 그렇게 유지되는
육신의 젊음은 정신적 젊음과 병행될 것이라는 무언의 기대가 있다. 생태계의
젊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자연 체계에도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이 있는
것일까? 생태계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극을 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치 적절한 운동으로 신체의 젊음을 유지하듯이, 생태계에서도 젊음의 유지는
적절한 자극으로 이루어진다. 적절한 풍상, 홍수, 불이 바로 그런 자극의 매체다.
그런 자극이 없으면 조로한다. 이를테면 인위적인 댐 건립으로 홍수를 조절할 경우,
하류에 대한 자극이 줄어들어 하천 생태계가 조로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아스완
Aswan 댐 건립에서 찾을 수 있다. 댐의 건립으로 나일강 하류의 범람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삼각주의 조로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왔다.
  우리 나라 하천도 댐의 난립으로 범람이 줄어들었지만 하류의 회춘 기회는
줄어들고 있음에 틀림없다(부산대 생물학과 주기재 교수의 개인 의견이다). 근래에
알게 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교수인 콘돌프 G. Mathias Kondolf
박사에 의하면 구미에서는 댐의 건설로 부족해진 자갈과 침전물을 인위적으로
공급하여 하천의 회춘을 도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
나라에서는 골재 채취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더욱 늙게 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하류 하천이 받아들이고 뱉어야 할 자갈을 걷어 내는 것은 인위적인 조로를
조장하는 일이다. 어차피 늙어 갈 것이니 그것이 좀 빠르면 어떨까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이여, 너 자신도 좀더 빨리 늙어 볼 일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태계도 나이를 먹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어린
생태계에는 생물들이 어중이떠중이 찾아온다. 서로 다투는 중에 일부는 도태되고
일부 선택된 생물은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풀밭을
거치고 관목 숲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자리바꿈을 하면서 천이가 진행된다.
소나무는 늘 푸른 나무라서 고고해 보이지만, 그 뒤에는 타감 작용으로 다른 나무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도도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그 소나무는 필경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가진 나무들에게 자리를 물려 준다. 세월이 더욱 흐르면
참나무류가 천이의 다음 시기를 승계한다. 소나무의 고고함을 밑거름으로 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성숙한 숲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인간 사회의 발전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천이는 어느 수준에 있을까?
  어쨌거나 소나무가 참나무 숲으로 변해 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것을
막으려면 돈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미국 조지아 주에서는 펄프용 소나무 숲이
참나무 숲으로 바뀌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관리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가 결국 참나무에 밀려 사라져 가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정서적으로 굳이 소나무를 남아 있게 하려면 인공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인공적인 관리는 남산이 노쇠하지 않도록 자극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일은 반대 급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젊음을 좀더 연장시키려고
하는 운동도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는 점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하기 전에 먼저 남산의 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소나무가 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천이가 그냥
진행되도록 두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심각한 오염으로 병들어 있으니 치유를
해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돌고 도는 세상이라 참나무 숲을 거쳐서 더욱 노쇠하면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가기 위해 천이의 초기 단계가 따라올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운동을 하는 것만큼 남산도 어느 정도의 자극은 수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자극이 적절한 것일까? 
    (따로 보기 11) 보존과 보전이라는 용어

  많은 분들이 영어의 'conservation'을 '보전(보전할 보, 완전 전)'으로,
'preservation'을 '보존(보전할 보, 살필 존)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용어는 서로 바뀌어야 한다. 첫째, conservation 의 본래 뜻은 사람이
손을 대어서 관리를 하는 경우고, preservation 은 손을 대지 않고 완전하게 있는
그대로 두는 경우를 의미한다. 따라서 preservation 을 '보전'이라 하고
conservation 을 '보존'으로 하는 것이 한문의 뜻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에너지는,
형태는 변화하지만 양이 변하지 않아 에너지 자체가 원래대로 존치(있을 존, 장치
치)되어 있다는 의미로 물리학에서도 energy conservation 을 에너지 보존이라
옮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무엇보다 물리학에서 오래 전부터 'energy
conservation'을 '에너지 보존'으로 옮겨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삼척 동자도
알고 있다. 또한 화학 등의 분야에서도 쉽게 변질되지 않는 물질의 특성을 '보존성
conservative property'이라 옮기고 있다. 흔히 사용하고 있는 영한 사전에도
conserve 를 '보존하다'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일부 힘을 가진 사람들이 'conservation'을 '보전'이라고 고집하는
까닭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하나의 용어를 분야마다 다르게 옮겨서
혼란을 야기시키는 짓은 후학들에 대한 일종의 횡포다. 1976 년에
한국기술단체총연합회가 발행한 '증보판 과학기술용어집'에서는 conserve 에서
파생된 단어 거의 모두를 '보존'으로 옮겨 놓은 반면에 preserve는 '보전하다'라고
옮기고 preservation 은 보존으로 옮겨 놓아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1995 년 4월
대만에서 만난 일본인 생태학자에게 물었더니 conservation 을 보전이라 했다.
1996 년 동경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히구치의 '보전 생물학'도 영문 제목을
'Conservation Biology'라 옮겨 놓고 있다. 아직 충분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나라 누군가가 일본의 번역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5,5,5^. 일본을 따라
하느라고 혼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 
    제6부 아쉬운 대로 맺는다.

  길게 끌어 온 얘기를 이렇게 맺으려 한다. 쓰임새와 관념적인 부분을 나누어
모았다. 아내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고 꼬집었지만 시작부터 그러했으니
이제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굵은 틀 속에 녹여 있지 못해 아쉽지만 다음 꿈을
꾸며, 찔러오는 날카로움을 받아들일 준비나 해야겠다.
    환경 관리를 위한 묶음

  여기서는 실용성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요약하고, 떨어져 있는
내용을 엮어 보았다. 글쓴이의 성향 때문에 모든 환경 문제를 포괄하지 못하고
수자원 관리를 중심으로 얘기를 풀 수밖에 없었다. 물 자체보다 땅의 생태에
기울어진 것도 아쉽지만 더욱 굵은 틀을 잡는 일은 숙제로 남겨 놓았다.
  수자원 관리는 내용물 관리 content management 와 용기 관리 container
management 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내용물 관리한 수량과 수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 자체를 조절하는 방법이며, 용기 관리란 물이 담기는 수로 주변과 유역의
토지 이용 조절로 수자원 관리를 도모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오수의 공학적
처리는 명백히 내용물 관리이며, 수변과 유역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하는 비점
오염원의 제어는 용기 관리의 대표적인 보기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용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용물 관리는
헛수고가 된다. 따라서 하천 관리는 물길이 닿는 수변과 유역의 토지 이용 관리로
접근하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이러한 용기 관리에서는 수변
유역의 수문학적^5,23^생지화학적 과정을 십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용기
관리는 물이 흐르는 맥락을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맥락 관리 context management
라고 할 수 있으며, 물 자체보다 땅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땅의
관리이기도 하다. 반면에 내용물 관리는 물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다스린다는
측면에서 물의 관리라고 부를 수 있다.
    ------------
      땅의 관리
  지금까지 소개된 내용을 고려하건대 하천 수질 관리에서 하천변의 위치는 아주
독특하다. 이제 흐르는 물이 하천변에서 적당히 머물도록 유도하여, 물질을 받고
변환하는 역동적인 기능을 활용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생겼다. 어디서든 젊은 힘을
억누르면 결국 갈등이 생긴다. 남아도는 젊은이의 힘을 건전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선도의 원칙이듯이, 역동적인 지역의 힘을 유역의 다른 성숙한 계와
물리적, 생물적 과정으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람직한 환경 설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1 유역 맥락에서 하천과 식생 지대를 바라보자.
  육상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반드시 수변 지역을 거쳐서 하천으로
향한다. 더구나 유역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 또는 토지 이용에 따를 영향이
물길을 따라 하천으로 집약된다는 사실은 하천 관리의 기본적인 제약 조건이다.
따라서 하천은 통로를 따라 흐르고 있는 물 자체가 아니라 이웃한 수변 습지와 함께
그것이 속한 전 유역을 통해 조망해야 한다.
  유역에서 토지 이용의 배치는 유역 전체의 영양소 보유력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림 6-1의 #1은 하천 주변에 농경지를 두는 경우고, #2는 하천 주변에 숲을
형성하고 유역의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다. 특히 우리 나라는 산의 경사가
급하고 낮은 곳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1과 같은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오염원과 수자원 사이에 식생 완충대 기능을
하는 숲을 둔 토지 이용이 훨씬 양호한 수질 유지를 약속할 것임은 틀림없다.
  * 그림 6-1.
  그림설명: 유역의 하천 주변에 가상 배치해 본 대조적인 토지 이용(주)
  * (주) Omernik 등 (1981).
  만약 어떤 유역 하나가 온통 도시로 가득 찬다면 그 곳의 수질은 당연히
고약해진다. 그런 중에도 그 곳을 살 만한 환경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인력과 재력,
에너지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 유역의 도시화는 환경 친화적 발상의
결과물일 수 없다. 이제 유역 단위로 토지 이용 유형들을 적절히 안배하는 계획과
설계가 필요하다. 나아가 어느 정도 규모의 유역 단위로 토지 이용 계획을 하는
것이 환경질 유지에 효과적인지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하는 유역 단위의
지역 지구제 도입이 필요하다. 올바른 하천 관리는 하천을 이웃하는 유역의 자연적,
문화적 과정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특히 하천의 물과 직접 반응하는 수변 지역의
생태적 특징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주).
  * (주) 이도원(1982).

  #2 강변에 나무를 심고 풀을 가꾸자.
  힘이 넘치는 대상을 어떻게 누그러뜨릴 것인가? 힘을 흡수해 줄 이웃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역 안에서 역동적인 젊은 속성을 가진 하천 주변의 자투리땅을
관리하는 데는 그 속성을 억누르는 인공적인 이용과 토목적인 행위보다는 생물학적
원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권유한다. 나긋나긋한 식물이 바로 역동적인 힘을
흡수하고 달래 줄 희망이다.
  따라서 식목일에는 우리 나라 하천 제방을 따라 식수를 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하천변은 거의 모두 숲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하천변의 나무들은 강으로 몰려드는 오염 물질들을 걸러주는
역할과 함께 매우 중요한 하천 정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내 어린 시절 여름날의
그늘과 가을날의 팽나무 열매로 하교 길을 더디게 하던 것도 작은 도랑가의
숲이었음을 기억한다. 이제 산림을 깎아 건설을 하는 면적에 비례하여 일정 길이의
하천변을 숲으로 가꾸는 의무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 그림 6-2.
  그림설명: 우리 나라 농경지와 강변에 남아 있는 숲띠는 자연적인 식생 완충대
역할을 하고 있다(주).
  * (주)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방태천에서 1997 년 6월 28일 촬영.
  더구나 더 이상 산에 나무 심을 곳이 없는데도 식목일 행사를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심지 말아야 할 곳에 나무를 심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참나무 아래에서는 잣나무가 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숲에는 식목일에
심은 잣나무가 참나무 아래에 버젓이 존재한다. 이제 식목일 행사를 하천 제방으로
이끌자.

  #3 작은 물길이 흐르는 곳만이라도 녹화하자.
  작은 물길이 흐르는 곳만이라도 식생 지대를 남기고 또 이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면, 지표 유출수를 따라 흘러드는 영양소들을 걸러 주며 생물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이 곳의 녹화는 실개천의 수질뿐만 아니라 수량 유지에도 공헌한다.
더구나 실재천의 빠른 흐름을 저지하고 침투수를 증가시켜 큰 강의 홍수를
예방한다.
  * 그림 6-3.
  그림설명: 지형과 물길을 고려한 식생 지대의 배치(주).
  * (주) Burel and Baudry(1990).
  하지만 지금의 유역 토지 이용은 실개천의 물 흐름을 빠르게 하여 큰 강의 홍수를
도모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다 큰 것에 대한 강박 관념이 합세하여 대규모
공사와 댐 건설로 악순환을 조장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강을 위시한 모든 큰
강변을 식물 대신 시멘트로 덮어 물길을 더욱 빠르게만 만들고 오염 물질의 자정
작용을 빼앗아 이제는 서해가 파산을 선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우리 수자원 체계는 파산 직전의 회사 꼴이다. 말단 직원이 시원찮으면
담당 과장이라도 제대로 보강해 주면 좋으련만 그러하지도 못하니 이사와 부장이
허둥대는 상황이다. 사실은 그것보다 더 불행한 처지다. 회사는 사장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오염 물질을 서해가 너른 아량으로 받아
준다고 해도 치유 효과가 큰 강이나 샛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도시의 작은 물길을 옆에 있는 풀밭이나 숲은 도로에 깔려 있는 오염 물질들이
물에 씻겨 갈 때 정화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하수가
고갈되는 상황에서도 도시 유출수가 숲과 풀밭을 지나게 되면 지하수 충원에 공헌할
수 있다. 제3부의 '식생 완충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토양 유기물이 풍부한 풀밭과
숲에는 침투수의 양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투수를 증가시키는
데에 도시의 녹지를 활용하는 사례는 드물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길가의 지대를
높여 물길이 녹지를 스쳐 가는 기회를 막고 있다.
  이제 도시에 잔재하는 녹지를 도로나 생활 공간보다 낮추는 방안을 도시 계획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하자. 그리하여 더욱 많은 도로의 지표 유출수가 식생 지대를
통과하게 되면 이는 미생물과 동물, 식물에 의해서 정화될 뿐만 아니라 또 지하로
침투되는 수량(물 수, 헤아릴 량)도 증가할 것이다.
  * 그림 6-4.
  그림설명: 남아 있는 숲 조각으로 물길을 둘릴 수 있는 곳(주). 그림에서는 보도가
차도보다 높기 때문에 차도의 빗물이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하수구로 간다.
  * (주) 서울시 관악구 봉천7 동 서울대학교 총장 공관 앞에서 1996 년 10월 29일
촬영.
  그렇다고 모든 지역에서 이런 제안이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유의하자. 이를테면
영양소와 다른 오염 물질 함량이 지나치게 많은 지표 유출수를 작은 숲 조각으로
이끄는 것은 위험하다. 먹고 남는 양을 숲 조각이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남는 양은 오히려 지하수를 위험에 빠뜨릴 염려도 있다. 따라서
유입수를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식생 완충대 면적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4 강터의 습지와 식생 완충대의 효과적인 이용을 도모하자.
  인가(사람 인, 집 가)에서 시작되는 지극히 작은 하수구는 필경 개울로 이어진다.
개울은 좀더 큰 도랑으로 모이고, 도랑은 다시 큰 강을 이룬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수로 주변에 앞서 말한 식생 완충대를 비치하여 물의 자정 작용을 최대한
도움으로써 수질 개선을 도모하자. 그림 6-5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식생
완충대의 효과적인 이용을 위해 나름대로 수평적인 설계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주).
  * (주) Lowrance 등(1995 a), (1995 b), Schultz 등(1995).
  * 그림 6-5.
  그림설명: 식생 완충대의 제안된 유형(주).
  * (주) Lowrance 등(1995).
  그림 6-5의 구역 1은 오염원과 인접한 지대다. 여기서는 육상으로부터 지표
유출수에 실려 떠내려 가는 부유 물질을 포착하고, 한곳에 몰려 힘이 생기는 물의
흐름을 흩뜨린다. 또한 잔디와 같은 초본류들로 표면의 거칠기를 한껏 북돋우어
지표 유출수의 흐름을 최대한 저지함으로써 부유 물질의 침을 도모하는 한편, 표면
가까이의 지하를 따라 흐르는 물에 포함된 영양소와 물질을 깊고 무성한 수염
뿌리로 흡수, 분해하도록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식물로는 키가 작더라도
흐르는 물의 높이보다는 크고 동시에 그 흐름의 세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촘촘한
종류가 적당하며 가축의 먹이가 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하다. 이 지역의 폭은
최소한 6 미터 이상이 효과적이라 한다.
  구역 2는 구역 1에 이웃하여 5--15m 폭으로 마련한 큰 나무 지대다. 여기서는
식물의 긴 뿌리가 지하수로부터 영양소를 흡수하며, 구역 1을 통과한 부유물질과
침수될 때 강의 상류로부터 떠내려오는 부유 물질을 잡는다. 또한 식물과 미생물의
흡수, 탈질 작용으로 영양소의 제거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이 지역의 토양
수분은 거의 포화 상태이며 우기에는 침수되기도 하기 때문에, 생리적으로 수분을
좋아하고 뿌리 체계가 크고 길게 뻗으며 빨리 자라는 식물이 적당하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버들, 포플러,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적절한 수종으로 추측된다.
  구역 3은 제방을 보호하고 영양소를 포착^5,23^제거하며, 하천을 이루는 수계의
물리화학적^5,23^생물학적 환경을 조절한다. 침수에 잘 견디고 나긋나긋하여 홍수의
흐름을 크게 저지하지 않는 달뿌리풀이나 갈대 등의 초본류 그리고 갯버들과 같은
관목류가 자라도록 한다. 이들 군락은 가을에 구역 2로부터 떨어지는 낙엽을
포착하여 물벌레들과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변 환경 조건에 따라 구역 2와 3은 위치가 서로 바뀌거나 복합되는 것이
바람직할 경우도 있다. 낙엽은 물이 맑은 상류에서는 물벌레와 물고기의 먹이
자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하류 하천에서는 산소를 소모하는 오염 물질이 될 수
있다. 하천폭이 좁고 물살이 빠르며 햇빛이 무성한 수관부에 차단되어 물가에
이르기 어려운 상류 지역에서는 교목과 관목의 혼재가 불가피할 경우도 있다.
반면에 하천이 넓은 하류에서는 물가에 관목대를 형성하여, 수변 식생대에서
생산되는 낙엽이 강물로 유입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설계가 더 유용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수변 습지에서 탈질 작용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고려할 때
경작지와 수변 습지 사이의 완충대 폭이 50 미터 가량이 적당하며 20 미터 정도면
질산염 제거에 충분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반면에 땅이 좁은 우리 나라에서는
식생 완충대가 그다지 매력적인 발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천변의 식생대가
수질을 개선하고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는 이상, 우리 나라 실정에 맞는 이용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아울러 수변이나 습지가 아닌 삼림대를 이용하면 경관 내에서 이동하는 영양
물질의 농도를 감소시킬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오리나무,
사시나무, 물푸레나무, 가문비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40--90m 폭의 삼림대가
경작지와 호수 사이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통과하는 물의 질산성 질소 농도를
감소시키며, 경우에 따라 암모니아성 질소와 인의 농도를 크게 감소시킨다고 한다.
몇몇 연구 결과, 경작지를 떠나 폭 60 미터 가량의 삼림대를 과하는 지하수에서는
질산성 질소의 감소가 두드러졌고 인의 감소 또한 거의 모든 경우에 나타났다.
심지어 오리나무와 갯버들류로 이루어진 10 미터 폭의 식생대는 지하를 통해
하천으로 흘러드는 물에 포함된 대부분의 인을 흡수하며 질소, 납, 카드뮴 같은
물질을 반이상 줄이기도 했다는 보고도 있다(주).
  * (주) Malanson(1993), 147쪽.
  생물 다양성 보호 지역이 아니라면, 강변의 식생 완충대는 천이의 극상 상태에
이르기 전에 주기적으로 간벌하여 목재 생산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관리는 지대의 젊음을 유지하여 나무의 왕성한 성장과 영양소 흡수를 촉진함으로써
수질 보호에도 공헌한다.
  이웃 지역으로부터 많은 양의 영양소가 물가의 숲으로 유입되면 상대적으로 유기
탄소가 부족해지며 그 결과 미생물에 의한 영양소 흡수와 탈질 작용에 의한 질소
제거가 느려진다(주). 이 경우에는 식생 완충대에 톱밥이나 죽은 나뭇가지 같은 유기
탄소원을 첨가하여 미생물 활동을 도울 필요가 있다. 앞서 제2부의 '미물인들
가만히 있을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기 탄소가 풍부하면 미생물들은 영양소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외부 환경으로부터 질소나 인 등의 필수 영양소들을 왕성하게
흡수한다.
  * (주) Schnabel 등(1996).

  #5 동물을 생각하고 이용하자.
  식생 지대는 영양소가 포화되면 보유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제3부의 '식생
완충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유 물질을 잡아 두는 반면 물에 쉽게 녹는 형태의
영양소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영양소가 수계로 유입되면 일차 생산자인
조류가 그것을 쉽게 흡수하여 물꽃 현상이 유발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하면 식생
지대 아래에 작은 습지를 만들어 물이 머무는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습지에서는 영양소들이 조류, 수초류, 미생물에 흡수되므로 보다 정화된 물들이
큰 호수나 강으로 합류될 수 있다(주).
  * (주) Lee 등(1986), Schultz 등(1996). 이런 작은 습지는 특히 골프장 하류에
설치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생산성이 높은 강터의 습지와 식생 완충대라고 해서 들어오는 물질을
무한정 잡아 줄 수는 없다. 잔칫날 잔뜩 먹어 배부른 아이가 맛있는 음식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 한계에 다다르면 강터 또한 어쩔 수 없다.
수변으로 들어오는 양만큼 나가게 되는데, 이것을 정상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쌓인 영양소를 다른 곳으로 퍼내면 다시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퍼내는 것은 일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어간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하려면 화석
연료나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태양 에너지의 도움을
받아 볼 궁리를 할 수 있다. 동물이 먹고 퍼내면 자연적인 힘에 의해 하천변은
영양소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지속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습지와 식생
완충대는 영양소를 소비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생물을 생산하는 장소로 간주될 수
있다. 자연에서 식생 지대는 공급받은 영양소를 기반으로 식물, 동물, 미생물을
양육하는 생물의 생성원이다.
  한편 강터와 습지에서 생산된 생물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생활사를
물에서 완성하는 것보다 육상으로 이동하여 마감하는 것이 유리하다. 물고기가
배설한 고농도 질소 배설물은 봄에 플라크톤의 생산을 촉진시킨다(주).
  * (주) Allen and Hoekstra(1992), 111쪽.
  물이나 물가에서 먹이를 취하고 뭍으로 올라와 밤을 보내는 생물들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휴식하는 동안 땅에다 배설물을 뿌림으로써 물에 있는 영양소를 퍼
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어떤 환경이 야생 동물에게 안식처가 되는 것일까?
아마도 물리적^5,23^화학적^5,23^생물학적으로 변화가 적고 시끄럽지 않으며 안정된
곳이 적당할 것이다. 그런 요건을 갖춘 곳은 어디일까? 바로 성숙한 숲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농경지나 목장에서 흘러나온 영양소들을 강터 습지의 식물들에
의해서 흡수되고, 그 식물들은 강터를 기웃거리는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먹이를
취한 동물들은 이웃의 조용한 숲을 찾아들어 잠자리를 마련하고 그 곳에다
배설한다. 성숙한 숲 또한 몸무게가 늘지 않는 어른의 경우처럼 들여온 만큼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배설물이 씻겨 내려 주변 농경지로 간다. 이
과정에서 영양소는 수자원을 부영양화시키는 대신 긴 순환 과정을 거쳐서
재활용된다.
  * 그림 6-6.
  그림설명: 오염원 발생 지역, 강터의 습지, 성숙한 숲으로 연결되는 상상적인
재순환 과정(주).
  * (주) Lee(1997).
  * 그림 6-7.
  그림설명: 유역에서 숲으로 이루어진 하천변 지대의 연결과 제안된 식생 완충대의
단면(주).
  * (주) Lowrance 등(1984)의 그림을 수정했다.
  물가에 오리나 염소를 키우며 주기적으로 방목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때로는 식물을 성장기 내내 그냥 내버려 두는 것보다, 심하지 않게
방목을 하면 식물의 성장을 촉진함으로써 더 많은 영양소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주).
  * (주) McNaughton(1986), Allen and Hoekstra(1992).
  요컨대 육상 생태계의 영양 물질 보유를 최대화하여 수자원의 부영양화를
감소시키려면, 유역에서의 습지와 식생대의 공간적인 분포 그리고 수문, 수질,
동식물의 분포와 이동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천변의 습지와 식생
지대는 점이지대로서, 천연적으로 물가를 따라 연결되어 물과 야생 동물들의 통로가
되는 곳이다. 따라서 토지 이용 계획 단계에서 이 지역이 끊기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
      물의 관리
  땅의 영양소 보유 능력이 감소되면 자연히 물질은 물과 공기로 옮겨 간다. 우리가
걱정 없이 누리던 물과 공기의 혜택이 질의 저하와 함께 감쇠된 것은 기실 더 많은
물질이 육상으로부터 물과 공기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자원에
영양소가 부쩍 많아지면 부영양화가 일어난다.
  수자원이 부영양화되면 조류가 무서운 속도로 번성하게 된다. 부영양화 상태에서
제일 골칫거리는 영양소 그 자체보다 그것이 일으키는 조류의 번성이다. 수계의
조류 번성을 방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얘기해 온 바와 같이 영양소가 땅으로부터 물로 유입되는 길을 막는 것이다.
효율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이 방법이 최선이다. 일단 영양소가 물에 들어가서
섞이면 분리해 내기가 어려울 뿐더러 땅으로 다시 되돌려 놓으려면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수중으로 유입된 영양소를
제거해야 하는 상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수중의 영양소를 제거하는 방법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조류가 흡수하기 전에 물에 있는 영양소를 제거하는 방안이다. 이
경우 물이나 물가에 사는 고등 식물도 영양소를 흡수해야 하는 처지이므로 이들이
먼저 영양소를 흡수한 후 식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둘째는
생산된 조류를 먹이 사슬의 상부에 있는 물고기가 많이 뜯어 먹게 하는 것이다.
전자가 상향식 제어라면 후자는 하향식 제어가 된다. 상향식 제어 원리는 영양소가
많아지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니 너무도 당연하다. 반면에 하향식 제어는
먹이 사슬의 뒷부분을 제어함으로써 조류의 현존량을 감축시키려는 노력이다.
  상향식 조류 제거 방식으로서 호수나 저수지에 뗏목을 띄우고 거기에 미나리를
재배해 보자는 개인적인 생각이 떠오른 것은 1990 년 팔당호 주변에서 골재 채취가
한창 논의될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 착상은 가슴에 묻어 둔 채 실천할 길을 찾지
못했다. 1995 년 8월에 일본 건설성 하천 환경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이삼희
씨에게 일본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특허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이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왕시 하천 관리일을 맡게 될 무렵에 저수지에
인공 부도(사람 인, 만들 공, 뜰 부, 섬 도)를 띄워 꽃밭으로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전경수 교수의 '똥이 자원이다'라는 책을 보면 남미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는
티티카카 호 위의 떠도는 섬(주)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원주민들이 있다고 하니
식물을 키우는 정도의 뗏목 제조는 큰 일이 아닐 듯싶다.
  * (주) 전경수(1992). 이것은 '도또라'라는 갈대풀이 엉켜 긴 시간 동안 수면으로
떠도는 과정에 운반된 검은색의 찰흙이 얹혀서 이루어진다. 떼 위에 사는 기분이
드는 작은 섬으로 원주민은 이를 우로스 Uros 라 부른다. 큰 부도인 경우에는
초등학교와 경작지도 있다고 한다. 1996 년 7월 5일자 '조선일보'는 티티카카 호
갈대 섬의 지리적인 위치와 구조를 그림으로 소개했다. 이렇게 연상된 착상은
캄보디아에서 이미 인공적으로 만든 수상 마을로 실현되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조성철, '캄보디아의 수상마을', '새농민' 1996년 2월호). 1997 년 1월
21일에 일본 건설성 하천환경 연구소의 나카무라 씨 안내로 가스미우라 호를
방문하여 부도의 실용성을 시험하고 있는 쓰쿠바 시 인근의 현장을 견학했다.
그들은 공극률 96 퍼센트의 합성 재료를 활용하여 부도를 만들고 그 위에 갈대를
키우며 수질 정화와 함께 물벌레 및 고기, 새가 찾아오는 효과를 조사하고 있었다.
  떼(뜰 부, 떼 벌) 아래의 물에 잠기는 부분에는 그물 주머니를 붙여서 물고기를
키우며, 위에서는 식물을 키우는 것이다. 미나리를 키우면 반찬으로 이용할 수 있다.
꽃을 가꾸면 보기에 아름답고, 잘라서 시장에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 벌과
나비를 곁들이면 꿀도 취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떼는 물가의 습지를 물 위로
연장한 모습이다. 잘 설계된 떼는 사람들이 낚시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장소나
새들의 서식처 기능도 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경관이 지금까지 이 땅에 가능하지 못했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뗏목이 목재를 옮기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듯이 경사가 급한 우리 땅에서 물은 한곳에
머물기보다는 이동하는 경관 요소였다. 그러기에 부도는 이동 수단이지 정착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싫든 좋든 상황이 많이 바뀐 셈이다. 고인 물이 썩는다는
옛말이 있지만 이미 곳곳을 저수지로 만들어 물이 머무르는 경관 요소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부도가 생길 만도 하다.
  이 착상을 자그마한 저수지에 적용해 보면 제법 쓸모가 있을 듯도 하다. 떼를
줄로 매어 저수지 가에서 밀고 잡아당기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수면 위 식물의
배치와 수거를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용도에 알맞은 떼의 재료와 구조는
생물학자의 몫이 아니니 손재주를 가진 분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나 이 방안도 다각적인 측면에서 비용 편익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대
준비의 성가심과 함께 다른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물 사용의 효율 측면에서도
검토가 요구된다. 호수 표면을 떼와 식물로 덮기 때문에 물이 증발되는 양은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식물을 통한 증산 작용으로 인해 대기로 손실되는
물의 양이 증대될 수도 있다. 물과 식물, 대기로 이동하는 물질의 생지화학적 과정도
검토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 식물 생산이 가능하고 또 물고기 수확이 가능할지?
어느 정도의 유기물이 메탄으로 전환될 것인지? 어느 정도의 질산염이 탈질 작용에
의해 질소 기체나 아산화질소로 제거될 수 있을지? 어느 정도의 인이 식물에 의해서
흡수될 수 있을지?
  하향식 조류 제거 방식은 먹이 사슬의 원리를 고려하고 있다. 조류를 먹고사는
물벼룩과 같은 동물 플랑크톤이 우세하면 조류는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동물 플랑크톤을 먹는 작은 물고기들이 많으면 동물 플랑크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오히려 조류의 현존량이 증가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물고기를 먹는 큰 물고기
개체군을 인공적으로 높여 주면 조류의 번성을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선다.
이렇게 먹이 사슬을 따라 전달되는 영향을 계단 효과 cascade effect 라 한다.
  * 그림 6-8.
  그림설명: 먹이 사슬을 따라 나타나는 계단 효과의 원리, 짝수 영양 단계가 강할
때는 조류의 현존량이 줄어드는 반면에 홀수 양양 단계가 강할 때는 조류 현존량이
증가한다.

  영양단계  1차  2차  3차  4차
  먹이사슬(보기)  생산자(식물 플랑크톤) ^25,135^ 1차 소비자(식물 플랑크톤)
^25,135^ 2차 소비자(작은 물고기) ^25,135^ 3차 소비자(큰 물고기).
  하향식 영양단계  약 ^246,25^ 강 ^246,25^ 약 ^246,25^ 강.
  하향식 영양단계  강 ^246,25^ 약 ^246,25^ 강 ^246,25^ 약.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까닭은 큰
물고기의 효과가 먹이 사슬을 따라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서 각 영양 단계에서 그
효과를 상쇄하는 보상 효과가 일어나기 때문으로 이해되는데. 이를 보상 반응(더할
보, 갚을 상, 돌아올 반, 응할 응, compensatory response)이라 한다. 이는 하향식
조류 제거 방식이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용화되는 데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지나침이 문제로구나!

  "제가 보니까요, 세상에는 무엇이든 넉넉한 것 같데요. 그게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한 군데 몰려 있기 때문에 없는 사람은 꼭 필요한 것도 모자라고, 있는
사람은 혼전만전 쓰고도 남아도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나누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모아야 한다. 어떤 부자도 그건
안 돼."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어요. 우선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시작하면 누군가
따라오겠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결국 세상 전부가 공평해질 것
아니에요?"(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143쪽).
  물산을 잘못 유통시키면 부작용이 생기듯 인물이 너무 한쪽에 몰리거나 너무
적으면 반드시 일이 생기네(이재운, '소설 토정비결' 62쪽).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
  질병이 건강한 동물에 나타나는 특정한 과정들의 과도함이나 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이정우 옮김, '생명의 논리, 유전의 논리', 201쪽)?
  그리움이 너무 많으면 마음이 범람한다. 간신히 막아 두었던 그리움의 뚝이
무너져 내리면 해야 할 말들은 길을 잃고 떠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홍수 난
마음으로 무엇을 적으랴(양귀자, '천년의 사랑', 18쪽).
  (어린이의 교육에서) 통제와 사랑의 지나침은 피해야 한다. 안전은 항시 중용에
있다. 그러나 중용의 위치를 아는 것이 어렵다(Dobson, 1970, 32--33쬭).
  마음에 있어 걸림은 마음의 동맥 경화를 초래한다. 흐르지 않고 괸 물이 썩어
버리듯 마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머무름과 걸림은 마음을 썩게 하는 방일(놓을 방,
놓을 일)과 게으름 그리고 집착을 초래한다. 마음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될 것이다(최인호, '길없는 길' 4권,
172쪽).

  이 글들이 전편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질, 에너지, 정보의 정체 또는 잘못된 흐름이 곧 문제의 발원이라는 해석이다. 이
원활하지 않은 소통은 과도 또는 과소의 원인이 된다. 여기서 잘못되었거나
과하다(지나치다)는 평가는 순전히 사람의 잣대로 내려진다. 요컨대 사람의 잣대로
자연과학적인 시각에서 가늠하는 환경 문제는 에너지와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이나
생물의 편중에서 비롯된다.
  이제 흐름을 기능이라 본다면 흐름을 매개하는 구성원들의 존재 양태는 구조라
부를 수 있다. 비유컨대 인간 사회에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조직은 구조적인
면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정보의 흐름은 기능적인 측면이다.
  이 글들의 전편에 자라잡고 있는 또 하나의 바탕은 물질, 에너지, 정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체계는 선택받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가정이다. 결국
사람의 잣대는 효율적인 것이 장기적으로 선택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심증적인
가정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때로는 '효율'이라는 단어에 최면이 걸려 있는 내
바쁜 삶을 보면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이미 내 일생은 서양 교육과의 인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니 돌아설 수도 없다.
  어쨌거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물질, 에너지, 정보가 때로는 주체가 속한 체계에
잘 보유되어 쓰임새가 있어야 하고 때로는 원활하게 유통되어 지나치게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이제 환경 문제와 관련된 생태적 중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생태적 중용'이 옳다 하더라도, 그 실천 과정에 나타나는
적당한 정도는 보편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얄궂은 면을 지니기 때문에 곱씹어야 할
영원한 화두다.
  책에 나타난 표현은 저마다 다투고 있는 생각들 중에서 선택된 요소라 했다(주1).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의사 결정과 행동은 여러 가지 대안 중에서 선택된 것이며,
그 선택은 또한 주체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선택받기 위한 노력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존재하는 것은 긴 역사를 통해 스스로 선택하기
위한 노력에서 기안한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노력 없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현상을 환경이 선택한 결과인가? 생명체들의 변이가 필연적으로 유용성, 필요,
진보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주2) 다윈의 자연 선택설은 아마도
후자의 입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선택될 수 있는 적자(쫓을 적, 놈
자)는 어떤 체계를 말하는가? 어떤 체계의 대물림을 보장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 (주1) 황기원(1995).
  * (주2) 이정우(1994), 244쪽.
  하나의 체계는 저마다 다투는 요소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는 데에 발전이나 진화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생물 진화와 인간 발전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런 발전과 진화를
향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란 발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선택받기 위해서 쏟아 내는
지나친 노력에서 연유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길들여져 온
발전과 진화 개념이라는 세계를 버린다면 우리의 행동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참으로 허황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물질, 에너지,
정보라는 개념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상황의 도래를 꿈꾸고 있다. 그 때가 되면 이
글 전체가 기반한 가정이 허구일 것이므로 내 모든 미망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한때 생물학과 최재천 교수는 '아즈텍 공화국의 왕권 다툼'이라는 개미 공동체
사회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공동체를 위한 활동에서 자기 힘을 아끼는 여왕개미가
살아 남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가 행동 생물학을 소개하는 어떤 글에서 "개체가
집단(주)의 존속을 위해 자발적으로 산아 제한을 하는 체계는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주장은 나와 다른 시각을 보인다. 과연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이 자연
세계에서 장기적으로 선택받을 수 있는 것일까?
  * (주) 여기서 집단은 개체군을 의미한다. 사람에 따라 population 을 집단이나
개체군으로 번역한다.
  이 내용은 사실 나 자신의 비인간적이고 조금은 가증스럽기도 한 농담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지만 발상은 이러했다.
"지금으로서는 미국 땅을 물리적인 힘으로 빼앗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 곳으로 이민 가서 한 가족이 자녀를 열명씩 낳아 생식
능력이 생길 때까지 키워 낸다면 아마도 100 년 후에는 미국을 우리 땅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발상은 결코 장려할 수 없다. 하물며 환경을 염려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이러한 발상 자체가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발상은
실현되어서도 안 되고, 실현되도록 방치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정확하게 최재천 교수의 표현과 일치한다.
  이 점이 바로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경계일까? 인간 사회에서마저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선택된다면 이 땅에서 도덕을 추구할 분위기는 더 이상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우리가 도덕을 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약아
빠진 여왕개미가 도태될 확률이 높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도덕은 긴 역사를 통해서 선택된 실체이자 우리의 정보 보유 장치 안에 깊숙이
내장되어 있기에 여전히 거론되는 것인 동시에, 또 쉽사리 물러가지 않을 하나의
체계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깡패의 길을 굳이 따르지 않는 것은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그 화려해 보이는 삶이 긴 역사 속에서는 선택될 수 없다는 정보가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너무 쌓이면 넘친다. 지나침은 결코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바로 지나침에서 비롯된다. 지금 귀여움을 받는 사람이나 생물, 사물도
그것이 지나치면 필경 홀대의 대상으로 전략한다. 생태계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변화는 지나침 쌓임이나 지나친 부족에서 시발한다.
  인간 활동은 지구의 지화학적 순환 과정은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화석
연료의 연소와 삼림 훼손의 대기와 생물에 대해 인간 활동이 미치는 주요한
영향이다. 이를테면 에너지를 얻으려 화석 연료를 태우고 농경지와 도시 지역을
확보하려 숲을 베어내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올라가게
된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온실 효과로 인해 지구 기온이 점점 더
상승하고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주장은 이제 너무도
일반적이다.
  * 그림 6-9.
  그림설명: 1855 년 이래 지구 전체의 화석 연료 소비량 증가 경향(주).
  * (주) Houghton(1991).
  화석 연료에는 탄소뿐만 아니라 질소와 황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화석 연료를
연소시키면 하늘에 질소와 황 산화물을 올려 놓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원소들의
질산과 황산의 형태로 빗물과 함께 내리는 현상을 산성비라 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질소와 황은 단백질의 구성 원소로서 그것이 없으면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산성비는 대기에 필수 원소가 지나치게 넘쳐서 지탄을 받는 현상이다.
  최근까지는 화석 연료에 포함되어 있는 황이 산성비의 주원인이라고 인식되었다.
이러한 문제 인식에 힘입어 탈황 기술의 개발이 자극되었다. 그에 따라 산성비에서
황산의 양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질산은 비교적 방치되어 이제는 산성비에서 질산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화석 연료 연소뿐만 아니라 인공적인 질소 고정과
관련이 있다.
  * 그림 6-10.
  그림설명: 인공적으로 고정하는 질소량이 증대하는 경향(주).
  * (주) Vitousek(1994).
  대기의 구성 요소를 보면 질소가 79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이것은 질소
기체로서 존재하는데 이것을 대부분의 식물이나 미생물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암모늄이나 질산염의 화학 물질로 바꾸려면 질소 고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자연에서 질소 고정균의 활동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질소가
경작물의 생산성을 제한하는 원소염을 인식한 사람들은 인공적인 질소 고정법을
애써 개발했다. 대기의 질소 기체를 고정하여 폭약이나 화학 비료로 사용되는 양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화석 연료와 대기에 포함되어 있던 질소는 자연적, 인위적 과정을 거쳐서
토양으로 투입되는 양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투입량의 증가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대로 어느 정도 땅의 생산력을 높여서 이익을 안겨 준다. 그러나 해가 거듭하면
지나치게 많은 양의 질소가 땅에 쌓여 넘치는 것은 당연하다. 땅에서 넘쳐 흐르는
질소는 다시 물이나 하늘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 때 재빨리 질소 기체로 바뀌면
좋으련만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친구들을 동반하기에 또 다른 문제를 유발시킨다.
  땅에 쌓인 질소는 물에 씻겨 가거나 하늘로 날아간다. 이 때는 땅에서 보유하기
어려운 화학 물질 형태부터 우선적으로 유실된다. 질산염은 물에 녹기 쉬운
물질이라 지표나 지하 유출수에 쉽게 씻겨 간다. 질산염은 음이온이라서 양이온인
알루미늄이나 수소 이온을 동반한다. 결과적으로 주변의 물은 질산염으로
부영양화되고 과잉의 알루미늄과 산성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질산염은 또한 칼슘,
마그네슘과 같은 필수 영양소들을 동반하므로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고
산성화시킨다. 하늘로 날아갈 때는 질소 기체로 변하기도 하지만 온실 효과 기체인
아산화질소로 날아가기도 하므로 대기 환경을 괴롭힌다(주).
  * (주) Aber 등(1989).
  결국 화석 연료의 연소는 땅에 수소 이온과 황산염, 질산염이 쌓이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지금까지 산성비라 하여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지나치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산성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산성의
직접적인 원인인 수소 이온만 걱정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산성화된 토양에
석회를 뿌려서 수소 이온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도리어 다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산성일 때는 그나마 낙엽이나 유기물에 보유되어 있던 황과
질소가 석회를 뿌리면 중성으로 되면서 분해가 빨라져 빗물에 씻겨 갈 수 있는
황산염과 질산염 형태로 변할 수 있다. 이렇게 변한 영양소는 지표 유출수에 쉽게
씻겨 가서 주변의 수자원을 부영양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러기에 땅의 산성화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단순하게 석회를 첨가하는 것은 수자원의 부영양화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 흘러가는 영양소를 다시 땅에 잡아 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땅의 생물 창고들에 쌓고 또 쌓아도 자꾸 넘쳐서 빗물에 씻겨 가는데, 그
질소와 황을 잡아 둘 창고를 마련하는 방도는 없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미생물과 토양의 창고를 넓히는 일이다. 미생물은
자신이 에너지를 고정하지 못하므로 일반적으로 고정된 에너지의 공급에 따라 어느
정도 활동의 제한을 받는다. 그렇다면 남아도는 에너지원을 공급하면 미생물의
활동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톱밥이나 나뭇가지다. 이것들은 사실 미생물들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골고루 가지고 있지 않기에 쉽게 썩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조잡한
음식물로 인해 영양소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비타민을 먹는다는 사실을! 미생물에게
조잡한 톱밥과 나뭇가지들을 안겨 주면 그들은 에너지 부족을 보충할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 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유기 탄소를 공급하면 식물이나 동물에
비해서 재빨리 영양소를 흡수할 것이다. 미생물은 고등 생물에 비해서 몸집이 작고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체계이며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몸이 작으므로 부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표면적이 넓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양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토양에 넘치는 영양소들을 흡수할 것이다.
사실 질소와 황이 집적된 토양에는 에너지 자원인 유기 탄소가 모자라고, 톱밥과
나뭇가지는 유기 탄소가 남아돌지만 질소와 황을 포함하는 미생물의 필수 영양소가
부족하다. 미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질소와 황이 쌓여 있는 토양과 톱밥은 궁합이 잘
맞는 자원이다. 참고로 미생물, 토양, 톱밥에 함유되어 있는 탄소와 질소 함유량을
분석해 보면 현저한 차이가 있다. 미생물, 토양, 톱밥은 각각 질소 1그램당 탄소를
4--9, 8--15, 400그램씩 함유하고 있다. 산술적으로 미생물이 톱밥을 먹이로 하여
400그램의 탄소를 취한다면 영양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주변에서 43--99그램
가량의 질소를 섭취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실 톱밥에서 섭취한 탄소 중
상당한 부분이 이산화탄소로 날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양은
아니지만 몸 밖으로부터 많은 양의 질소를 섭취해야만 영양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산성화된 비원과 남산의 숲에 그저 석회만 뿌릴 것이 아니라 톱밥도
곁들여서, 생태계 전체가 질소를 포함하는 영양소를 아울러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북돋워 주면 어떨까? 미생물은 톱밥에 재빨리 반응하여 질소를 흡수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토양으로부터 용탈되는 양을 감소시킬 것이다. 그리고 톱밥 양이
서서히 줄어들면 미생물은 조금씩 죽어 가고, 주검이 분해되면 영양소가 방출될
것이다. 때를 맞추어, 미생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천히 반응하는 식물은 미생물의
주검에서 비롯되는 영양소를 흡수하며 성장해 갈 것이다. 산성비와 함께 떨어져
내린 과잉의 질소는 식물의 성장을 거쳐 먹이 사슬을 따라 동물의 몸까지 옮겨 갈
것이다. 그러나 항시 너무 많은 것은 좋지 않으니 지나친 양의 석회나 톱밥은
곤란하다. 석회와 톱밥의 알맞은 양을 결정하기 위해 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생각들과 관련하여 제주도 '^46,5,3456,26^항'에 대한 전경수 교수의
의견에도 이런 의미가 숨어 있다.

  후원에 심은 나무를 이용하여 물을 보관하는 장치가 있었다. 마치 여자들이
머리를 땋듯이 띠(새)를 땋아 나무에 매달아 둔다. 이를 '^46,5,3456,26^'이라 한다.
바로 그 밑에 물을 받아두는 항아리가 있다. 이를 '^46,5,3456,26^항'이라 한다.
빗물은 나뭇잎 사이로 흘러 내린다. 빗물은 나무 줄기를 타고 흐르다가
'^46,5,3456,26^항'으로 모아지며 '^46,5,3456,26^항'에 차곡차곡 고여 나간다.
'^46,5,3456,26^항'에 개구리 서너 마리를 잡아다 가둔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하여 서성인다. 뱀 같은 생물이 살아 숨쉬는 물은 오랫동안 살아 있는 물일
수밖에 없다.

  나무 기둥에 건조한 띠를 다발로 꼬아서 잎사귀에 떨어진 빗물이 고이도록 하는
^46,5,3456,26^은 단순히 빗물을 한 곳으로 모으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빗물이 짚으로 만들어진 걸름 장치를 통과하도록, 즉 빗물이 ^46,5,3456,26^이라는
걸름 장치에 침윤되게 함으로써 빗물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겸하도록 고안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주).
  * (주) 김영돈^5,23^문무병^5,23^고광민(1993), 147쪽, 전경수(1995)에서 재인용.
  여기서 침윤은 물리화학적 흡착과 생물적인 흡수를 포함하고 있다. 산불 난
지역에 짚을 뿌려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함으로써 미생물에 의한 영양소
흡수를 도모하듯이, ^46,5,3456,26^의 재료인 띠를 통해 빗물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들의 미생물적 흡수와 분해를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제주도 사람들이
^46,5,3456,26^을 만드는 데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해 보고 그 결과 띠로 만들었을
때 가장 깨끗한 물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과학적인 사실로 유추해 보건대 전경수 교수의 비유대로 ^46,5,3456,26^은
빗물을 정화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46,5,3456,26^에 영양소와 오염 물질이 누적되고 미생물의 활동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흡작, 흡수 또는 분해로 비롯되는 정화 능력은 당연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제주도 사람들이 낡은 ^46,5,3456,26^을 새로운
^46,5,3456,26^으로 교환하는 시기를 어떻게 알아내고 실행했는지 궁금하다. 
    글을 마치며 큰 세상을 그린다.

  수학적인 확실성과 엄밀성을 가지고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고전 과학의
신념이 사라지면서 과학은 비로소 문학과의 근본적인 유대를 발견하기 시작한 듯이
보인다. 열역학 제3법칙의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문학이란 과학의 변방이 아니라
바로 그 중심에 불가사의하게 위치한 일종의 엔트로피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김종갑, 1995).
  생태학은 생명 현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다양함과 풍성함에 매료되어,
비생명적인 요소가 가지는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생태학은 생명과 비생명을
구분한다. 그러나 생태학에서는 그것의 대비보다 상호 보완성을 강조한다. 이
때문인지 근래 생물학에서 발원된 생태학은 생물의 물질성에 눈을 두고 있는 분자
생물학의 득세로 인해 자기 고향에 발붙이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타향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는 학문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에 독점되지 않고 심지어 문학에까지 포함되는 대중성은 생태학의
다양성을 키울 수도 있겠지만 자칫 힘의 분산으로 인해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잃을
수도 있다. 마치 자연 선택이 생물 다양성을 가꾸어 가듯이 이제 생태학에서도
옆에서 부추기는 변이에 걸맞는 학문 선택이 필요하다(주). 이러한 다짐으로 나는
결국 생태학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와 나 자신의 공부가 가지는 한계를 동시에
들추고 만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시공간으로 떠돌아야 하되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애매한 주장만 뱉은 꼴이 되었다.
  * (주) 이도원^5,23^유신재(1993).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품고 있던 모든 생각을 쏟아 버리고 싶었다. 고백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쏟아 버리면 담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리라는 희망이 이 작업의
원동력이었다. 여전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는 하드웨어의 빈약함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연
과학에서 출발한 내 공부가 하드웨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반면에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결국 양쪽을 모두 허약하게 만든 꼴이라고 반성한다. 아마도 내가 과학적인
사실을 아무 데나 비유하고 과학과 문학을 혼돈하는 위험한 수준에 와 있다는
유신재 박사의 충고는 그런 부분을 우려하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 글에서 그런 허약한 부분을 나타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본능적으로 묻어두려고 했겠지만 예리한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리라.
  1995 년 여름에 3 년 전 번역했던 생태학 관계 저서의 개정판(주)을 만들면서
내용이 지나치게 미국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번역을 할 때는 그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례들이 미국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환경 경제학을 연구하는 이정전 교수가 왜 남의 책에 그렇게
시간을 보냈느냐고 지나가듯이 하신 말씀이 더 이상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 (주) 이도원 등(1995).
  미국인이 쓴 미국 책이니 미국적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책을 꾸릴 수 있는
정보가 미국에 많이 축적되어 있는 상황이라서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960 년대 초에 보만 F. Herbert Bormann 과 라이컨스 Gene E. Likens
박사가 뉴햄프셔 주 하버드브룩 실험 삼림지에서 유역 생태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미국 장기 생태 연구에 큰 힘이 되었다. 미국과학재단은 1977 년부터
3 년간 연속 3 회의 워크숍 과정을 거쳐 장기 생태 연구 지원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미국 본토에 특징적인 17개 지역을 선정하고 나중에 남극까지 포함시켜 생태 자료를
계속 수집하고 있다(주).
  * (주) Franklin(1988), Nottrott 등(1994).
  * 그림 6-11.
  그림설명: 미국 장기 생태 연구의 산파 역할을 했던 보만 박사(오른쪽)와 라이컨스
박사가 자신들의 연구지인 하버드브룩에서 설명하는 모습(주). 그들의 연구 계획을
미국의 국립보건연구원에 처음 제안했을 때는 재정 지원이 거절되었으나 다음해에
과학재단이 지원했다고 한다.
  * (주) 미국 뉴햄프셔 주 하버드브룩 실험 삼림에서 1996 년 8월 10일 촬영.
  우리 나라보다 면적이 조금 큰 영국은 전국 일곱 지역에서 육상 생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주변 대학과 환경 연구 기관들을 연계시켜 국가적 차원에서 장기
생태 연구와 정보 수집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 나라보다 훨씬 작고 인구가 2000
만에 지나지 않는 대만도 이미 다섯 곳의 장기 생태 연구지를 지정하고 70 명
이상의 박사급 생태학자들이 자료를 모으고 있다.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밑도는 중국도 과학원 산하에 생태 연구망을 구축하여 29개 지역의 생태 현상을
21개 연구소의 1400 명 전문 인력이 조사하여 매년 보고서를 내고 있다(주).
  * (주) 'Chinese Academy of Science', 1993.
  * 그림 6-12.
  그림설명: #1 영국의 육상 생태 연구소 위치, #2 대만의 장기 생태 연구지 위치,
#3 미국의 장기 생태 연구지 위치.
  일본은 그 명칭에서도 장기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자료를 이미
하나하나 확보하고 있다. 1965 년 부터 쿄토 대학 생태 연구 센터를 중심으로 일본
최대 호수인 비와 호를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50여 개의 장기 생태
연구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동남아 열대림인 사라와크의 생태적 자원
탐사에까지 손을 뻗어 현지인을 값싼 인건비로 동원하며 장기 생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는 과거의 수문 역사, 식물과 새에 대한 기록과
자료까지도 모두 일본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일본은 왜 사라와크에 엄청난 연구비를 투자하는 것일까? 인류 생태학자 전경수
교수의 말씀을 빌리면 우리 나라 목재상들이 동남아에서 벌이고 있는 열대림 벌채는
위험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 일본이 자행한 잘못을 흉내내고 있는
반면에 일본은 시대에 뒤진 자원 갈취 방법을 버리고 유화책을 사용하고 있다.
근래에 월남전을 기회로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는데도 우리가
더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동남아 열대림의 갈취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두렵다. 나중에 우리는 일본으로 돌아갈 동남아의 원망을 모두
덤터기 써야 할지도 모른다.
  장기 생태 연구에 관한 한 아무것도 보여 줄 수 없었던 1994 년 4월, 대만에서
열린 국제 장기 생태 연구망을 위한 학술 대회에서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앞으로 다가올 기회를 생각한다.
  낙후된 이 땅의 생태학을 눈앞에 두고 우선은 남의 것을 보면서 우리 것을 만들
궁리를 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이 이 땅에서 우리 생태학을
만들기 위해 더불어 의견을 나누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하나의
촉진제가 될 수 있기를 빈다.
  긴 역사에서 살아 남으려면 긴 안목을 가져야 하며, 긴 안목을 갖는 것은 보다
장기적인 추세를 보여 주는 자료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장기 생태학적
연구 성과물을 바탕으로 자연 환경을 해석하고 가꾸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생태학적 자료가 없다. 생태학자로서 부끄러운 노릇이기는
하지만, 이제 법학자에 의해 자연 생태계의 중요성이 인식될 정도로 우리 사회
인식이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희망을 주고 있을 뿐이다.

  대기, 수질, 폐기물 등 인간의 활동에 의해 오염되는 영역은 기술의 발전과 관리
개선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그러나 자연 보존, 야생 동식물 보호, 생물 자원
보존 등의 자연 생태계는 사전 예방적 차원에서 관리해 주지 않으면 그 피해는
우리의 예상을 불허한다(주).
  * (주) 이상돈(1995).

  중앙대학교 법대 이상돈 교수의 주장은 대기, 수질, 폐기물 문제와 생물 다양성
문제를 별개의 사항으로 본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일단 사라진 생물과 자연 생태계는 영원히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없다는, 생명의 비가역적 속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내가 먼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고구려 지도를 펼치면 수도가 국내성에서 시작하여 세월과 함께 남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기개가 줄어든 결과이기도 하다. 한번 가진
좁은 마음으로 좁은 땅에 가두어지면서 우리의 사고가 점점 위축되지는 않았는지?
지도 위로 큰 땅을 잃고 작은 땅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가련한 형상들이 겹쳐
보인다. 천수만을 메워서 얻는 땅은 잃어버린 고구려 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땅의 위인들은 아직도 귀중한 습지를 메워 사유화하고는 지도를
바꾸었다고 큰소리친다. 참으로 가소로운 모습이다.
  * 그림 6-13.
  그림설명: 고구려의 영토와 우리 수도의 이전사(주).
  * (주) 한국정신문화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이 땅에 가두어 두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국경선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은 우리와 같이 작은 나라 사람들이다.
그러나 경계를 허물면서 밀려들어 올 온갖 잡동사니들을 여과할 수 있는
정신적^5,23^문화적인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필경 가야 할 길은 커다란 인문(사람 인, 글월 문)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문은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이 위대한 음악자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스마르크 이래 가꾸어 온 훌륭한 숲 때문이라는 주장을 예사로
들어서는 안 된다. 역으로, 망가진 자연을 보고 자란 인물이 큰 인문을 세우는
일이란 참으로 어렵다. 그런 점에서 속박과 전쟁, 가난의 고리로 피폐해진 자연과
인성을 동시에 되찾아야 하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너무도 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차근차근 쌓아 나가면 필경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앞날은 오로지 지금 마음을 어떻게 다잡는가에 달려 있다. 
    (따로 보기 12) 계단 효과에 나타나는 보상 작용

  보상 작용은 자연의 복잡성과 탄력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생물들간에 먹고 먹히는 혹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다. 따라서
자연을 1차 생산자와 1차 소비자, 2차 소비자 등등으로 연결된 먹이 사슬 구조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 하겠다. 이러한 생물들간의 복잡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생태학자들은 먹이 사슬이라는 말 대신 먹이 그물이란 용어를 사용해 왔다.
  예를 들어 보자. 흔히 호수에 사는 작은 물고기는 동물 플랑크톤도 먹고 식물
플랑크톤도 먹는다. 동물 플랑크톤은 주로 식물 플랑크톤과 원생 동물을 먹고산다.
이제 작은 물고기를 몇 차 소비자라고 불러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모든
생물들이 인간들 마냥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먹잇감(육식이냐 포식이냐, 물렁한
놈이냐 혹은 딱딱한 놈이냐 등의)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각 생물들에게
"너는 몇 차고 너는 몇 차야"라는 식의 꼬리표를 붙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작은
물고기가 식물 플랑크톤과 동물 플랑크톤을 모두 먹더라도 동물 플랑크톤을 더
선호한다면 작은 물고기는 근사적으로 2차 소비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화는 오히려 생물들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보상 효과다. 요즈음 간혹 '왜 보상 효과를 가지고
운운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기에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먹이 단계를
통해 정보가 이동된다고 주장하는 '먹이 사슬 가설'이라는 생각이 내재해 있는
듯하다. 즉, 주객이 전도된 느낌과 같은 것이다. 보상 효과는 흔한 경우이고 먹이
연쇄 효과가 특별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먹이 사슬 개념은 오히려 이를 거꾸로
만들어 버린 격이다. 하지만 여전히, '왜 보상 효과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문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근본적인 물음이기에, 결국 생물들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답은
없고, 다만 많은 그럴싸한 가설들만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 생물이건 포식자에게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우선은 발각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발각된 후에는 열심히 줄행랑을 치거나 혹은 기만적인 술수를 써서
포식자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만약 근처에 피식자가 숨기 좋은 장소가 있다면
포식자는 번번이 먹이를 얻는 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먹이 연쇄 가설은 우선 호수
중앙과 같이 동일한 서식처가 비교적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경우에 적용되어 왔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는 포식자가 한번 먹잇감을 발견하면 어지간해서는 놓치는 법이
없다. 다만 먹잇감이 많지 않아 발견하기 힘들 뿐이다.
  호수 가운데에 살면서도 간혹 큰 물고기에게 잘 잡히지 않는 놈들이 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큰 놈들을 물리칠 수 있는
혹은 적어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 온 결과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남조류라
불리는 일종의 식물 조류 집단은 군체를 형성하는데 간혹 종에 따라 유독한 물질을
분비하여 동물 플랑크톤은 여간해서는 이 놈들을 먹기가 힘들다. 이것들은 한번
번식하면 대량 증식하여 수질에 큰 문제를 야기시키곤 한다.
  어떤 물고기들은 자신의 입 크기에 따라서 먹을 수 있는 먹잇감이 한정되기도
한다. 자신보다 작은 놈이라고 해서 무조건 더 막을 수는 없다. 때로는 충분히
작아야, 때로는 충분히 커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농어와 같은 물고기는 새끼들이
자기가 먹기에 적당한 크기이면 그것마저 그냥 먹어치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다른 새끼를 다 먹어치운다면 농어는 결국 다음 세대들에 가서 멸종하고 말
것이다. 이 예로부터, 먹는다는 것은 늘 포식자 개체군을 증가시키는 쪽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피신처와 함께, 포식에 대한 반항과 재치를 이용한 피식자의 전략을
알아보고 먹이에 대한 선택, 자신의 종족마저 먹어 버리는 포식자의 행동 습성이
어떻게 보상 효과를 유발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주로 포식자^5,23^피식자간의
먹고 먹히는 관계, 그래서 얼마나 잘 도망치고 숨느냐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의외로 많은 생물들이 서로를 도와 가며 혹은 적어도 서로
피해를 주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먹이 사슬 효과나
보상 효과에 대한 논란이 단지 먹고 먹히는 생물들간의 관계에만 집중될 때는
자연에서 나타나는 약육강식의 측면에 크게 치우치게 된다.
  반면에 산불 혹은 태풍과 같은 큰 교란에 대해 생태계가 가지는 자기 유지 능력과
회복 능력 등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면, 보상 효과에 대한 논의는 조화와 균형이라는
사뭇 다른 방향에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보상 효과에 대한 이해를 계속
증진시킨다면 이는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고 다시 회복시키며 혹은 인간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연을 잘 이용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관점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이상은 보상 반응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강신규 군이 스웨덴에 머무는
당시 보내온 글이다). 
    (따로 보기 13) 환경 문제와 땅의 외부 순환 증대

  개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먼저 스스로 해결하고자 한다. 혼자서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친구와 의논하면 좋은 해결책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의존하면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작은 가정이 가진 문제를
공동체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것은 그런대로 봐 줄 만하지만 모든 문제를 외부의
탓으로 전가하거나 외부의 도움만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비난받게 된다.
국가간에서도 무역과 같은 부문의 수수 관계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면 서로
도움이 되지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거나 돕는 상황이 되면 그 관계가 오래
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외부의 물질과 정보를 거부하지 않는 적당히 열린 계는
환영받지만, 주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많이 열리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된다.
  예전에는 하나의 가정 안에서 물질의 내부 순환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사실
전근대적인 사회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자급 자족이라는 단어는 물질 내부 순환의
다른 표현이다. 먹을 음식, 땔감 그리고 직물을 모두 논밭이나 삼림에서 얻었다. 곧,
의식주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와 물질을 모두 가까운 생활 공간에서 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들, 이를테면 재, 인분, 퇴비를 논밭에
공급하면서 재생산을 도모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사회 발전과 분업이
일어나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가정의 외부 순환이 상대적으로 증대하게 되었다.
내가 먹고 입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물질은 먼 곳에서 공급되고 또 폐기물도 먼
곳까지 이동하게 된다. 이것은 가정이라는 계를 기준으로 보면 물질의 외부 순환
증가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가정이 물질 획득과 폐기 과정을 외부에 의존하는 정도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숙한 생태계는 물질과 정보의 내부 순환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유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인위적인 간섭을 받게 된 대부분의 육상
생태계에서는 외부 순환이 상대적으로 커짐으로써 그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 인간
활동이 수행되는 가정과 땅에서는 더 많은 물질이 폐기화되고 내부 순환의 길을
벗어나, 수권(물 수, 둥글 권)과 기권(공기 기, 둥글 권)으로 이송되어 거기서
처리되도록 방임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나치게 친구에게 의존하면 그가 싫어하듯이
이제는 물과 공기가 땅의 의존을 꺼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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