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이순신
차례
이 책을 읽는 분에게
1. 임진년(1592) 일기
2. 계사년(1593) 일기
3. 갑오년(1594) 일기
4. 을미년(1595) 일기
5. 병신년(1596) 일기
6. 정유년(1597) 일기
7. 무술년(1598) 일기
충무공 연보
이 책을 읽는 분에게
1. "난중일기"의 가치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전라 좌수사가 된 임진년(1592년),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1월
1일부터 공이 마지막 적탄에 맞아 전사하던 전날인 무술년(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일기이다. 이 글은 또한 충무공이 몸소 진중에서 기록한 수기이기 때문에 이 충무공의 사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어느 글보다도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기에 이 글은 이미 국보67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원본, 즉 충무공이 손수 쓴
초고 7권은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원본은 중간에 빠진 곳이 많은데, 이것은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뒤에 없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글에는 임진왜란 7년간의 이 충무공의 진중 생애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 장엄한 7년
해전의 세세한 전과, 원 균에게서 받은 갈등과 모함, 그 많은 고난상들이 그대로 이 속에 실려
있어, 누구나 성웅 이 충무공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2. 충무공의 생애와 업적
충무공은 인종 원년, 서기 1545년 3월 8일 새벽 서울 건천동에서 이 정의 3남으로 탄생했다.
탄생할 때 그 어머니 변씨의 꿈에 시아버지가 와서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아이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 하였다. 이에 남편에게 이 말을 고하고 이름을 그대로 지었다 한다.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이다.
공은 어려서 이웃 어린이들과 노는데도 언제나 전쟁놀이를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반드시
대장이 되어 딴 아이들을 지휘했다. 항상 활을 가지고 다녔고 옳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른이라도 활을 당겼다고 한다.
장성하면서 무예에 뜻을 두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하여 부지런히 재예를 연마했다. 공이
28세 때 훈련원 별과 시험에 응시했다가 말이 거꾸러져 공의 왼쪽다리가 부러졌으나, 곧
버드나무 껍질로 상처를 싸매고 태연했다 한다. 3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었다. 이것이 공의 벼슬길의 출발이었다.
1579년에 봉사로 영전, 그 해에 군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발포 만호가 되었다. 1583년에는
함경도 건원보 권관이 되어 호족 울지내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고, 1586년에는 조산보 만호가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북방의 국경 지대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병력
증강을 요구했으나 이 일에 의해서 거절당했다. 그 해 가을에 호족이 대거 남침하여 60여 명을
빼앗아 왔다. 이 호족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이 일은 공에게로 전가시켜, 마침내 공은
직위에서 해임되어 백의로 종군하게 되었다.
1589년에 다시 정읍 현감이 되고, 1591년에는 마침내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어 좌수영으로
부임했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의 일이요, 일개 미관으로서 일약 수군
절도사라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은 공의 실력이 인정을 받은 까닭도 있겠지만 당시 중신이던 서애
유 성룡의 천거가 많이 작용을 한 것이었다. 이 중임을 맡은 공은 미구에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도 보강했거니와, 저 유명한 '거북선'의 창조가 바로
이때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드디어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 20여만은 일로 북상하여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자 의주로 파천하고, 6월 13일에 평양도 함락되는 등, 왜적은 삼천리 강산을
맘대로 유린하고 있었다.
드디어 공은 5월 4일에 출동을 개시하여 옥포, 적진포 해전을 비롯하여,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 한산도,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을 모두 대승리로 이끌어 미증유의 전과를
올렸다. 그 중에서도 한산도와 부산포의 해전은 유명한 싸움으로서, 이로 인해 왜적은 결정적
타격을 받았고, 공은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은 개전 초기에 적을 섬멸하여 완전히 제해권을 쥐고 있으면서, 좌수영인 여수가 지리상의
조건이 좋지 못하다 하여 거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니, 이것이 1593년 7월의 일이었다. 이 해
9월에 조정에서는 삼도 수군 통제사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공을 이 자리에 임명하여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게 하는 한편 전라 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했다. 이 자리에서 공은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든 전비를 갖추면서 한 시간의 한가한 틈도 없는 진중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1596년에 왜와의 화의가 깨어지자 왜적은 다시금 침략을 감행해 왔다. 그러나 이때 우리
조정에서는 충무공을 무고사는 간신배의 농간에 속아 공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며칠 후에 하옥된 공은 사형을 받게 되었던 것을 다행히 판중추부사 정 탁의 간곡한
반대로 사형을 면하고 출옥하여 백의로 종군하게 되었다.
한편 통제사가 되어 한산도 본영에 부임한 원균은 충무공이 애써 닦아 놓은 모든 기초를 엎어
버리고 충무공에게 신임받던 모든 사람들을 갈아 놓은 후 주야로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해 7월에 원 균이 거느린 해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 당하고,
원 균 자신도 전사함과 동시에 한산도마저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해군을 소생시키는 길은 충무공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8월 3일에 통제사 복직의 교서를
내렸다.
충무공이 다시 부임했을 때 남아 있던 배는 겨우 12척 뿐이었다. 그러나 이 소수의 배를
가지고 막강한 부대를 편성하여 비장한 결의와 필승의 기개로써 같은 해 9월 15일에 마침내
명량 앞바다의 전투에서 적의 대함대를 무찌름으로써 우리의 제해권을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공은 고금도에 진을 치고 일면 전투, 일면 건설의 장기 작전의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공이 마지막 결전을 하게 된 것은 저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것은 순천의
소서행장의 군대를 그 퇴로에서 공격한 싸움인데 이 싸움은 공의 진두 지휘하에 승리로
끝났지만, 공이 친히 북채를 쥐고 선발대가 되어 적진 중으로 돌입하다가 원수의 적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니, 그때 공의 나이 겨우 54세였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공은 부하
장수에게 명하여 자기의 죽음을 숨기고 끝까지 잘 싸우라고 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완전한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3. 성웅 이 순신
공은 숭고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그 지극한 충성과 막강한 통솔력으로 볼 때 우리 나라
역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성웅이며, 임진왜란 중에 국가의 운명을 홀로 붙들었던 민족적
은인이다. "하늘로 날을 삼고 땅으로 씨를 삼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로를 가졌다."고 칭찬한 명나라 제독 진 린의 말은 실로 공을 아는 평이라
하겠다.
또 적국인 왜의 학자 덕부저일랑도 공의 전사를 평하여.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
조선 전재의 전후 7년 사이에 조선에 책사, 변사, 문사의 유는 많지만, 전쟁에 있어서는 오직 한
사람 이 순신만을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 전쟁에 있어서 비단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3국을 통하여 실로 제 1의 영웅이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충무공을 우리가 조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 다시없는 자랑이다. 또
충무공을 조금이라도 안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기쁨이자 힘이 되는 것이다.
끝으로 이번 역본에는 이전의 책들에 빠져 있던 부분을 보강해 넣었음을 밝혀둔다.
옮긴이
@ff
1. 임진년 일기
1592년 1월 1일 __ 8월 27일
진중에서 읊음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쪽에서 위태로운 몸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른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다 사양하리오
1월
1일(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수가 없다. 병사의 군관 이 경신이
와서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편전과 여러 가지 물건을 바쳤다.
3일(갑자) 맑음. 동헌에 나가 별방군을 점검하고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발송했다.
7일(무진) 아침에는 갰다가 늦게부터 하루 종일 눈비가 내림.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
전문을 받들고 갈 남원 유생이 들어 왔다.
9일(경오) 맑음. 아침 식사를 일찍 끝낸 다음 객사 동헌으로 나가 전문을 봉해 올려 보냈다.
10일(신미) 종일 비. 방답의 새로 부임한 첨사 이 순신이 들어왔다.
11일(임신)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늦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이 봉수가 선생원에서
돌 뜨는 것을 가보고 와서 보고하기를, "이미 큰 돌 17덩어리에 구멍을 뚫었습니다."한다. 서문
밖 해자가 네 발이나 무너졌다. 십 사립과 담화했다.
12일(계유) 궂은비가 개지 않음. 식후에 객사 동헌에 나갔다. 본영 및 각 포구의 진무들 둥
월등한 자들이 모여 활쏘기 시합을 했다.
15일(병자)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16일(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각 고을 관리들과 색리들이 와서 만났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와 가수들도 역시
이렇도록 심하게 보살피지 않았으니 몹시 해괴한 일이다. 한갓 제 몸 살찌울 것만 일삼고 딴
일은 이렇게 돌보지 않았으니 다음날일 일을 또한 짐작할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 몽세가
자칭 석수래서 선생원 돌 뜨는 데로 가서 근처의 개들에게까지 해가 미쳤기에 곤장 80대를
때렸다.
17일(무인) 맑았으나 춥기가 겨울과 같다. 아침에 순사와 남원 반자에게 편지를 썼다. 저녁에
쇠사슬을 박을 구멍 뚫은 돌을 실어 오기 위해서 배 4척을 선생원으로 보냈다. 이 배는 김
효성이 거느리고 갔다.
18일(기묘)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여도의 천자 배가 돌아갔다. 우등계문과
대가단자를 순사영으로 보냈다.
21일(임오)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감목관이 와서 잤다.
23일(갑신) 맑음. 둘째 형 요신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사복시에서 받아다가
기르던 말을 올려 보냈다.
24일(을유) 맑음. 맏형 희신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의 답장을 보니, 고부
군수 이 숭고를 유임하게 해달라고 장계를 올린 일로 폄론을 입어 사임장을 냈단다.
30일(신묘)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따뜻하기 초여름 같았다. 동헌에서 공무를 마친 뒤에
활을 쏘았다.
2월
1일(임진)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 끼고 비가 잠시 내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에 나가서
쓸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마침 피라미 떼가 웅덩이 안에 몰려 들었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았으니 가위 장한 일이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와 술을 마시면서 함께 새 봄
경치를 구경했다.
2일(계사) 맑음. 동헌에서 공무를 보았다. 쇠사슬을 건너 매는 데 필요한 크고 작은 돌
80여개를 실어 왔다. 활 10순을 쏘았다.
3일(갑오) 맑음. 새벽에 우후가 각 포구의 부정한 일을 적발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나갔다.
공무를 끝낸 뒤에 활을 쏘았다. 탐라 사람이 아들딸 도합 여섯 식구를 데리고 도망해 나와서
금오도에 배를 대었다가 방답의 순환선에 잡혔다고 사환을 보내왔다. 이에 문초해서 승평으로
보내어 가두어 두라고 공문을 띄웠다. 이날 저녁에 화대석 네 개를 실어 올렸다.
4일(을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에 북쪽 봉우리 연대 쌓는 곳에 올라가 보니 축대
쌓는 곳이 매우 좋아서 절대로 무너질 까닭이 없다. 이 봉수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종일토록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어 내려와서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8일(기해) 맑았으나 큰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칠 범포
29필을 받았다. 낮이 되어 활을 쏘았다. 조 이립과 변 존서가 자웅을 겨루었는데 조가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서, 방답에서 마음껏 방비하더라고 몹시 칭찬한다. 동헌 마당에
돌기둥으로 된 화대를 세웠다.
9일(경자) 맑음. 새벽에 쇠사슬을 꿸 긴 나무를 베는 일로 이 원룡에게 군사를 인솔케 하여
두산도로 보냈다.
10일(신축) 안개 끼고 비가 오다가 혹 개기도 하고 흐리기도 했다.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김 인문이 순찰사의 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거짓 고해서 군사의 동원을 청하는 일이 생기게까지 했다. 비단 이런 일뿐이 나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 나라가 일본과 무슨 딴 생각이 있는가 의심하게까지 만들었으니, 그
흉악스럽기가 이를 데 없다. 통사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해괴스럽고 통분하기를 이길 수가
없다.
12일(계묘) 맑고 또 바람도 잤다. 아침 식사 후에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해운대로
옮겨가서 활을 쏘았다. 침렵치 놀이를 구경했는데 매우 조용했다. 군관들도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었으며, 조 이립은 절구를 읊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13일(갑진) 맑음. 전라 우수사 이 억기의 군관이 왔기로 살대 큰 것과 중간 것 백 개와 쇠
50근을 보냈다.
15일(병오) 큰바람이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석수들이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너무 많이 무너졌기로, 이들을 매우 벌하고 다시 쌓게 했다.
16일(정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여섯 순을 쏘고 신구번 군사를 점검했다.
17일(무신) 맑음.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19일(경술) 맑음. 순시 길을 떠나서 백야곶의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 기생 또한 와 있다. 비가 온 뒤라 산에 꽃이 만발하여 좋은
경치를 이루 형용해 말할 수가 없다. 저물게 이목 구미로 와서 배를 타고 여도에 이르니 영주의
원과 여도 권관이 마중 나왔다. 방비한 것을 일일이 검열했다. 흥양 원은 그 이튿날 제사가
있다고 먼저 갔다.
20일(신해) 맑음. 아침에 모든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든 것이요, 무기도
상당히 완비되었다. 늦게 떠나서 영주에 이르니 좌우 산의 꽃과 들가의 봄풀들이 그림 같다.
옛날에 영주가 있었다더니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21일(임자) 맑음. 공무를 끝낸 뒤에 주인이 자리를 베풀어 주어 활을 쏘았다. 정 조방장도
또한 와서 보았다. 배 수립도 나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매우 즐기다가 밤이 깊은 뒤에 파했다.
신 홍헌을 시켜서 술을 가져다가 전일 사환 노릇하던 삼반하인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했다.
22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마친 뒤에 녹도로 갔다. 황 숙도도 역시 동행했다. 먼저 흥양
전선소에 가서 배와 기구들을 친히 점검하고, 계속하여 녹도로 가서 새로 쌓은 봉우리 위의
문루위로 올라가서 보니, 아름다운 것이 이 고을 안에서는 가장 좋았다. 만호의 마음 쓴 것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양 원과 황 능성 및 만호와 함께 취토록 마시고 겸하여 대포 쏘는
것을 보았다. 촛불을 밝히고 얼마 있다가 파했다.
24일(을묘) 가랑비가 온 산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별하기 어렵다. 비를 무릅쓰고 떠나서
마북산 밑 사량에 이르러서,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하여 사도에 도착하니 흥양 원도 역시 이미
와 있다. 전선을 점고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 거기서 잤다.
25일(병진) 흐림. 여러 가지 전비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군관과 색리들에게 죄를 주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이곳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제일 잘못되었는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도 하지 못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를 탈 수 없으므로 그대로 잤다.
26일(정사) 아침 일찌기 배로 떠나서 개이도에 이르니 여도 배와 방답의 마중 나온 배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저녁때 방답에 이르러 공사례를 마친 다음에 무기를 점검했는데, 장편전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전선은 다소 완전하니 반갑다.
27일(무오) 흐림. 아침에 점검을 끝낸 뒤에 북쪽 봉우리에 올라 땅 형세를 바라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떨어져 있는 섬이라 사면에서 적이 쳐들어오게 되어 있고, 성과 해자도 역시 엉성하니
몹시 근심스럽다. 첨사가 애를 썼지만 미처 시설을 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새벽에 배를 타고
경도에 이르니, 아우 여필과 조 이립이 군관, 우후와 함께 술을 싣고 마중 나왔다. 이에 함께
즐기다가 해가 진 뒤에야 본청으로 돌아왔다.
28일(기미)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마친 뒤에 활을 쏘았다.
29일(경신)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중위장을 순천 원으로 갈았다 하니 한심한 일이다.
3월
1일(신유) 망궐례를 행했다. 식후에 별방군과 정규군을 점고하고, 하번군을 점고하여 놓아
보냈다. 공무를 마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2일(임술)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승군 100명이 돌을
주웠다.
3일(계해) 비. 오늘은 삼짇날 명절이건만 비가 이렇게 내리니 답청도 못하겠다.
조 이립, 이후, 군관들과 동헌에서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셨다.
4일(갑자) 맑음. 아침에 조 이립을 전송하고 객사 대청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서문 밖의
해자와 성을 증축한 곳을 순시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성실하지 못하므로 책임자를 매로
다스렸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듣건대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니 다행이다.
5일(을축)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녘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이 보내는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란 책을 가지고 왔다. 책을 보니
해전, 육전, 화공선 등 여러 가지에 대한 것을 일일이 설명했는데 실로 만고의 기서다.
6일(병인)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근해서 군기를 검열했다. 활, 갑옷, 투구, 전통, 환도 등에
파손된 물건이 많아 제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것이 몹시 많다. 이에 색리, 궁장, 감고 등의
조를 의논했다.
12일(임신) 맑음. 식후에 배 있는 곳으로 나가 경강의 배를 점검하고, 다시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는데 때마침 동풍이 세게 불고 격군도 없어서 도로 돌아왔다. 곧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다음에 활 10순을 쏘았다.
13일(계유) 흐림. 순찰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14일(갑술) 종일 큰비가 내림. 이른 아침에 순찰사를 만나려고 순천으로 가는데, 비가 몹시
퍼부어 가는 길을 분별치 못하겠다. 억지로 선생원에 이르러 말에 꼴을 먹여 가지고 다시 해농
창평에 이르니 길 위에 물이 괴어 깊이가 석자나 된다. 간신히 순천부에 닿아, 저녁에 순찰사와
적조한 이야기를 했다.
20일(경진) 큰비가 내림. 늦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각 방의 회계를 검열했다. 순천
관내를 수색하고 겸초하는 일을 기한 안에 끝내지 못했기로 대장 및 색리, 도훈도 등을 문책했다.
사도 원에게도 또한 만날 일로 해서 공문을 띄웠었는데, 혼자 수사해버리고 한나절 동안에 내외
이로도와 대소 평두를 모두 조사하고 그날로 돌아갔다니 몹시 거짓된 일이다.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흥양과 사도에 공문을 띄웠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퇴근했다.
23(계미)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맑음. 식사 후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보성에서 올
판자가 아직도 안 왔기에 색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서 독촉하게 하고, 순천에서 온 상사 소
국진에게 매 80대를 때렸다. 순찰사가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발포 권관은 군대를 통솔할
재목이 되지 못하니 갈아야 하겠다고 했다. 이에 아직 갈지는 말고 그대로 유임시켜 방비에
힘쓰도록 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24(갑신)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우후가 수색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순찰사와
도사의 답장을 송 희립이 모두 가져왔다. 순찰사의 편지에 말하기를, "영남 관찰사의 편지에,
대마도주가 공문을 보냈는데, 일찌기 배 한 척을 내보낸 일이 있는데 만일 귀국에 닿지 않았다면
필시 풍랑에 깨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몹시 음훙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인지라 그럴 이치가 절대로 없는데 말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였다.
25일(을유) 맑았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나서 활쏘기를 10순
했다. 경상병사가 평산포에 도착하지 않고 바로 남해로 간다고 한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새로 쌓은 성을 순찰해 보니 남쪽 끝이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27일(정해) 맑고 바람도 없음.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면서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28일(무자) 맑음. 출근하여 공무를 보고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다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29일(기축) 맑음.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니 다행한 일이다.
4월
1일(경인) 흐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공무를 본 뒤에 활쏘기 5순을 했다. 별조방을
점검했다.
6일(을미) 맑음. 진해루에 나가서 공무를 보고 나서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을 전별했다.
7일(병신)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사시에 비변사에서 비밀 공문이 왔는데, 이것은
영남 관찰사와 우병사의 장계에 의해서 온 공문이다.
9일(무술)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갬.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방 응원이 도방에 관한
공문을 만들어 보았다. 군관들이 활을 쏘았다. 광양 현감이 수색 검토에 대한 일로 배를 타고
왔다가 어두워서 돌아갔다.
11일(경자)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갬. 공무가 끝난 뒤에 활을 쏘았다. 순찰사의 편지와
별록을 군관 남 한이 가지고 왔다. 처음 베로 돛을 만들었다.
12일(신축) 맑음. 식사 후 거북선의 지자, 현자 포를 쏘아 보았다. 순찰사 군관 남 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에 나가 활 10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가면서 노대석을
살펴보았다.
15일(갑진) 맑음. 국기일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낼 답장과 별록을 써서 곧
역졸을 시켜 딸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 우수사의 통첩에, "왜선 90여척이 나타나 부산앞
절영도에 정박했다." 하였고, 그와 동시에 또 수사에게서 공문이 왔는데, "왜선 3백 50여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한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순찰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띄웠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16일(을사) 밤 10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띄우고 또 삼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17일(병오) 흐리고 비오다가 갬. 영남 우병사가 머물러 있고 물러가지 않는다 한다. 늦게
활쏘기 5순을 했다. 번을 그대로 보는 수군과 번을 새로 드는 수군이 속속 방비처로 모였다.
18일(정미) 아침에 흐림.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 권관은 이미 면직되었으니 대리를 정해 보내라." 했기로, 나 대용을 즉일로 정해
보냈다. 오후 2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역시 함락되었고, 양산, 울산 두
군수도 역시 조방장으로 성에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또 "병사, 수사들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 후면에까지 도착했다가 즉시 회군했다." 하니 더욱
통분한 일이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에 머무르면서 군사들을 인솔하고 오지
않으므로 잡아 가두었다.
19일(무신) 맑음. 아침에 품방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냈다. 아침 식사 후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친히 독려했다. 오후에 상격대를 순찰했다. 입대하러 온 군사
7백여 명이 역사에 동원되었다.
20일(기유)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많은 적병이
몰려와 막아낼 길이 없고 승승장구하여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는 것 같으니, 전함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후원해 주도록 조정에 장계해 달라."는 것이었다.
21일(경술) 맑음. 성 위에 군대를 벌여 세우는 일을 사장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 부사가 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22일(신해) 새벽에 잘못된 일을 적발하는 일로 해서 군관을 보내는데, 배 응록은 절갑도로
가로, 송 일성은 금오도로 갔다. 또 이경복, 송한련, 김인문으로 하여금 두 산도의 적대목 실어
내리는 일에 각각 군인 50명씩을 데리고 가게 하고, 남은 군인들은 품방에서 일하게 했다.
5월
1일. 해군들이 일제히 앞바다에 모였다. 이날은 흐렸지만 비가 오지 않고 남풍만 세게 분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 첨사와 흥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모두 분격하여 자기
몸조차 잊어버리니 가위 의사라 하겠다.
2일. 맑음. 삼도 순병사와 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송 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왔는데,
말하기를,"남해 원, 미조항 첨사와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한 번 왜적의 소식을 듣더니
갑자기 도망쳐 버리고, 군기 등 물건도 모두 흩어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가위 놀라운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즐거이
나가 싸울 뜻을 가했다. 그러나 낙안 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이 있는 듯하니 탄식스럽다. 그러나
엄연히 군법이 있으니, 비록 피하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는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3척이
앞바다로 들어와 정박했다. 비변사의 명령이 내려왔다. 창평 현령이 부임했다는 공문서가 왔다.
이날 저녁에 군호는 용호라 하고, 복병은 산수라 했다.
3일.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새벽에 경상 우수사의 답장이 왔다. 오후에 광양 군수와 흥양
군수를 불러다가 함께 이야기하는데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본도 우수사가 수군을 이끌고
함께 와서 약속했다. 방답의 판옥선이 침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 배였다. 실망을 금치 못했다. 조금 있자니 녹도
만호가 만나자고 하기에 불러들였다. 그에게 물어보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들어가니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고, 만일 기회를 잃었다가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다. 이에 중위장을 불러 내일 새벽에 출동할 것을 약속하고, 곧 장계를 써서 올렸다. 이날
여도 수군 황 옥천이 적의 소식을 듣고 자기 집으로 도망한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매달았다.
4일. 맑음. 어둔 새벽에 출발하여 바로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 우부장, 중부장, 후부장 등은 우편으로부터 개이도로 들어가 수토하기로 하고 그 나머지
대장선들은 모두 평산포, 곡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나기로 했다.
29일.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바로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가 와 있다. 함께 의논하다가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적들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한다. 곧 그곳으로 쫓아가 보니 왜놈들은 벌써 상륙하여 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밑에 매어 놓아, 항전하는 태세가 매우 견고하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고 명령하여 일시에 달려들어 화살을 비 오듯이 쏘고, 여러 가지 총을 바람과
천둥같이 쏘아 보내니 적들은 두려워하여 물러가고, 화살에 맞은 자의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왜적의 머리를 벤 것도 많았다. 군관 나 대용이 이 싸움에서 탄환을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했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사람 중에 역시 탄환에
맞은 자가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살라 태우고 돌아왔다.
6월
1일. 맑음. 사량 뒷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2일. 맑음. 아침에 떠나서 바로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척이 벌여 서서 정박하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하다. 배 위에
누각이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버티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에 편전과 대소 승자총을 비 오듯이 어지러이 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모든
왜군들은 일시에 놀라 흩어지는데, 우리 여러 장졸들이 일시에 활을 쏘니,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자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모조리 섬멸시키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이윽고 왜적의
큰 배 20여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 도망하여 개도로
들어갔다.
3일. 맑음. 아침에 다시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개도를 협공하니, 적은 이미 도망하고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다. 고성 등지에 가고자 했으나 병세가 외롭고 약해서 울분을 참은 채
그대고 잤다.
4일. 맑음. 우수사가 오기를 고대하여 이리저리 머뭇거리고 바라보는데 정오쯤 되자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온다. 온 진중이 장병들이 모두 기뻐 날뛴다. 군사를 합치고
약속을 거듭한 뒤에 착포량에서 묵었다.
5일. 아침에 떠나서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왜선 한 척이 크기가 판옥선만하고, 배 위에는
누각이 높다란데, 소위 장수라는 자가 그 위에 앉아 있다. 그 밖에 중선이 12척이요, 소선이
20척이나 된다. 일시에 쳐서 깨뜨리니 화살이 비 오듯 하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자 그 수를 알
수 없고, 왜장의 목도 일곱이나 벴다.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에 올라 달아났지만 그 수는 몹시
적었다. 이로부터 군대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7일. 맑음. 아침에 떠나서 영등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한다. 복병선을 시켜
가서 탐지케 했더니, 적선이 먼저 우리 군사가 온다는 것을 알고 남쪽 큰바다로 달아났다고
한다. 우리 여러 배가 일시에 쫓아가서, 사도 첨사 김 완이 한 척을 온전히 사로잡고, 우후가 한
척을 완전히 사로잡고, 녹도 만호 정 운이 한 척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왜적의 머리는 도합
36개였다.
9일. 맑음. 바로 천성. 가덕에 이르니 적선이 한 척도 없었다. 재삼 수색하다가 군사를 돌려
당포에 돌아와 밤을 지냈다. 날이 새기 전에 출발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와 잠시
이야기했다.
8월
24일. 맑음. 객사 동헌에서 정 영공과 아침을 함께 먹고, 즉시 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와
점심을 먹는데, 정 조방장도 역시 자리를 함께 했다. 오후 4시경에 떠나서 노를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밤 3경에 다시 달빛을 이용하여 배를 띄워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니, 동녘이 이미 밝았건만 새벽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25일. 맑음. 아침 8시경에 안개가 걷혔다.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니 평산포 만호가 편지를
바쳤다. 거의 당포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와 함께 배를 매고 서로 이야기했다. 오후 4시경에
당포에 이르러 그곳에서 잤다. 밤 3경쯤 되어 잠깐 비가 내렸다.
26일. 맑음. 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세우고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순천 부사 권 준도
왔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 앞바다에 이르러 잤다.
27일. 맑음. 영남 우수사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에 이르니 웅천 현감 이
종인이 와서 이야기했다. 그는 왜적의 머리 서른 다섯을 베었다 한다. 저물게 제포, 서원포를
건너니 밤이 이미 2경인데, 서풍이 차게 불어 나그네 마음이 편안치 않고, 꿈도 또한 몹시
어지럽다.
@ff
2. 계사년 일기
1593년 2월 1일__9월 14일
무제
비비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을 에이는 양 쓰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노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제갈 양 중원 회복 어찌 했던고
재우치던 곽 자의 그리웁구나
몇 해를 원수막이 해놓은 일들
이제 와 돌아보매 임만 속였네
2월
1일(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발포 만호 황 정록, 여도 권관 김 인영, 순천 부사 권준이 와서
모였다. 발포 진무 최 이가 두번이나 군법을 어겼기 때문에 처형했다.
2일(정해) 늦게야 갬. 녹도 가장, 사도 첨사 김완, 흥양 현감 배 흥립 등의 배가 들어오고 낙안
군수 신 호도 왔다.
3일(무자) 맑음.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 군수만이 미처 못 왔다. 동쪽 상방에
나가 앉아서 순천 군수, 낙안 군수, 광양 군수와 한참 동안 의논했다. 이날 경상도에서 온 공문에
보면,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김 호을과 나장 김수남 등, 명부에 적혀 있는 해군 80여 명이
도망갔다고 한다. 그런데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군관 이 봉수. 정사립 등을
비밀히 보내서 70여명을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고 김 호을과 김 수남 등은 그날로 처형했다.
오후 8시경부터 비바람이 크게 불어, 여러 배들을 구호하기 어려웠다.
5일(경인) 경칩이어서 둑제를 지냈다. 비가 퍼붓듯이 내리다가 늦게야 비로소 갰다. 아침
식사 후에 가운데 대청에 나가니, 보성 군수가 밤새워 육로로 달려왔다. 뜰에 잡아다 놓고
기일을 어긴 죄를 문초하니 순찰사, 도사 등이 명나라 군사를 접대할 사무를 맡아 가지고
강진, 해남 등지로 온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도 공무인지라, 다만 대장과 도훈도, 아전들에게만
죄를 물었다. 이날 밤에 서울서 온 벗 이 언형을 전별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6일(신묘)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맑음. 날이 밝자 배를 풀고 닻을 달았으나 오정 때는 역풍이
불어, 저물어서야 사량에 이르러 잤다.
7일(임진) 맑음. 새벽에 떠나 바로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 원 균이 먼저 와 있기에
함께 이야기했다.
8일(계사) 맑음.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의 기약 어긴 과실을 몹시
탓하여 지금 먼저 떠나겠다고 한다. 나는 애써 이를 말리고 오늘 중으로는 도착할 것이라고
했더니, 오정 때 과연 돛을 달고 온다. 바라다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기뻐 날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보니 거느린 배가 40척에 지나지 않는다. 당일 오후 4시쯤 출발하여
초경 무렵에 온천도에 도착하여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10일(을미)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갬. 오전 6시경에 배로 떠나 바로 웅천 웅포에 이르니,
왜선들이 여전히 줄지어 정박하고 있다. 두 번이나 유인해 보았으나, 그들은 우리를 겁내는 터라
잠깐 나왔다가는 금시에 돌아가서 종시 잡아 섬멸할 수가 없으니 통분한 일이다. 밤 2경에 영등
뒤 소진포로 돌아와 배를 대고 밤을 지냈다.
12일(정유)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삼도군사가 새벽에 일제히 떠나 바로 웅천 웅포에
다다라서 어제처럼 적의 무리들을 드나들면서 유인했으나 적은 끝내 바다에 나오지 않는다. 두
번이나 뒤를 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통분한 일이다. 이날 저녁에 도사가
우후에게 글을 보냈다.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품을 배정한 것이라 한다. 초저녁에 다시 칠천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 그치지 않는다.
14일(기해) 맑음. 증조부의 제삿날이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왔다. 아침 식사 후에
삼도의 군사가 약속하고 있는데, 영남 수사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전라 좌, 우도 여러 장수들과만
약속했다. 이때 우후가 술에 취해서 망령된 말을 했다. 그 못난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 만호
정 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 응표도 역시 마찬가지 였다. 이같이 큰 적을 치려고 약속하는 때에
술을 몹시 마셔 이 꼴이 되니 그 사람됨을 더욱 말할 수 없다.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가덕
첨사 전 응린이 와서 만났다.
15일(경자)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과녁을 만들고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와 광양 현감이 사량 만호 이 여념, 소비포 권관
이 영남, 영등호 만호 우 치적 등과 함께 왔다. 이날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해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또 순찰사영 영리의 고목에는, "2월 초하루에
서울에 들어갔는데 왜적은 모두 섬멸되었다."고 했다. 저물녘에 원평증이 와서 만났다.
16일(신축) 맑음. 늦은 아침에 큰바람이 불었다. 들으니 영의정 정 철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한다. 노비 단자를 정 원명에게 보내면서 가져다가 사신 일행에게 전하라고 일러
보냈다. 오후에 우수사가 보러 와서 함께 밥을 먹고 갔다. 순천, 방답도 역시 보러 왔었다. 밤
1경쯤 신 환과 김 대복이 와서, 임금이 내린 글통과 부체찰사의 공문을 전한다. 그 편에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개성을 치고, 이달 초 6일에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적을 함락시킬 것이다."는
소식을 들었다.
17일(임인)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고 종일 동풍이 불었다. 이영남, 허정은, 정담수, 강응표
등이 보러 왔었다. 오후에 우수사를 가서 보고 또 새로온 진도 군수 성 언길도 보았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 수사의 배에 가서,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저물어
돌아왔다. 도중에서 신전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재촉하여 진으로 돌아오다가 선전관의
표신을 만나, 배로 맞아들여 상의 분부를 받았다. 그 글은, "급히 적이 돌아가는 길로 가서
도망가는 적들을 섬멸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즉시 받았다는 글을 써 주고 나니, 밤은 이미
4경이나 되어 있었다.
18일(계묘) 맑음.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행세는 전과 같다. 사도 첨사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 만호, 녹도 가장, 좌우 별도장, 좌우 돌격장, 광양 2호선,
흥양 대장, 방답 2호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적을 유인하게
하니 적선 10여척이 뒤를 따라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날쌔게 나와서 적을 쫓는데, 딴
복병선이 뚫고 들어가 포위하고 쏘니, 왜적은 죽은 자의 그 수를 알 수 없고, 목을 벤 것이
1급이다. 여기에서 적의 행세가 크게 꺾이어 끝내 쫓아오지 못한다. 날이 저물기 전에 여러
배들을 거느리고 원포로 가서 물을 길어 가지고 어둠을 타서 영등 뒷바다로 돌아왔다. 사화랑
진에서 밤을 지냈다.
19일(갑진) 맑음. 서풍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사화랑에 진을 쳤다.
남해 현령에게 붓과 먹을 보냈더니 와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 여우와 이 효가도 와서
인사했다.
20일(을사) 맑음. 새벽에 배가 떠날 때는 동풍이 잠시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갑자기
큰바람이 불어 배가 서로 부딪쳐 깨져, 거의 배를 제지할 수가 없다. 즉시 명령하여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싸움을 중지시켰기 때문에 다행히 배들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양
1척, 방답 1척, 순천 1척, 본영의 1척이 충돌되어 깨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에 이르러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이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려갔는데, 순천 부사가 한 마리를 잡아보내 왔다.
22일(정미)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동풍이 크게 불었다. 그러나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곧 떠나서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좀 자는 것 같으므로 배를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 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상륙하는 체
했다. 또 우도 여러 장수의 배들 중에서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 동쪽 가로 보내어 역시 장차
상륙할 것처럼 속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한다. 이에 전선을 합쳐서 일시에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게 되었다. 그런데 발포의 2호선과
가리포의 2호선이 명령 없이 제 맘대로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 당했으니, 그
통분함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조금 있자니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제할 수
없이 되었더니,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냈다. 이 때 경상 좌위장와 우부장은 보고서도 못
본체하고 끝내 구사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에게 책망도 했지만,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돛을 달고 소진포로 돌아와 잤다. 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중으로
왔고 어머님의 편지도 역시 왔다.
23일(무신)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만났고, 아침 식사 후에는
원수사가 왔다. 순천, 광양, 가덕, 방답도 역시 왔고, 이른 아침에 소비포, 영등, 와량등도 와서
만났다. 원 수사는 그 음험함을 이를 길이 없다. 최 천보가 양화진으로부터 와서 명나라 군사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와 공문을 전하고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24일(기유) 맑음. 새벽에 아산과 온양에 보낼 편지와 집에 보낼 편지를 써 보냈다. 아침에
떠나서 영등 앞바다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퍼부어 바로 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갔다. 비가 멎자 우수사 이 영공, 순천, 가리포, 성진도와 함께 꽃놀이를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배 만드는 기구를 들여 보내는 일로 패자와 흥양에 가는 공문을 써
보냈다. 양곡 90되로 자염을 바꾸어 보냈다.
28일(계축) 맑고 바람도 없음. 새벽에 떠나서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왜적이 움츠리고 있어
나와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우리 배는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리목으로 향했다. 우부장이
변고가 있다고 알리므로 모든 배들이 돛을 펴고 바로 나가서 조그만 섬을 포위하고 보니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닥 첨사의 사후선 등 모두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여 그 모양이 몹시
수상하다. 이에 그들을 결박하여 원 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는 크게 노여워했다. 그의 본의는
군관을 보내서 고기잡이들의 머리를 베어오려 했기 때문이다. 초저녁에 아들 염이 왔다. 이날
사화랑에서 잤다.
29일(갑인) 흐림. 바람이 몹시 불자 염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전라 우수사 원 균도
만나러 왔다.
30일(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봉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3월
2일(정사) 종일 비가 내렸다. 창 밑에 쭈그리고 앉았노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회포가 어지럽다. 이 응화를 불러서 한참 이야기하고, 이내 순천의 배로 보내서 원의 병세를
살피도록 했다. 이 영남과 이 여념이 왔다. 그들에게서 원 영공의 옳지 못한 행동을 들으니 깊이
탄식스러울 뿐이다. 이 영남이 왜놈들이 쓰는 작은 칼을 놓고 갔다. 이 영남에게 들으니, 강진
사람 둘이 살아 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 가서 문초를 받고 갔다고 한다.
3일(무오) 아침에 비가 내렸다. 오늘은 삼짇날, 답청하는 날인데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있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입성했는지의 여부조차
모르고 있으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4일(기미) 처음 맑음. 우수사 이 영공이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원 영공도 왔다. 순천 원은
병이 중하다고 한다. 들으니 명나라 장수 이 여송이, 함경도로 들어간 왜적이 설한령을
넘어섰다는 말을 듣고 개성까지 왔다가 도로 평안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민망함을 이길 수 없다.
6일(신유) 맑음. 새벽에 떠나서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들은 육지로 달아나서 산허리에
진을 치고 있다. 우리 관군들이 철환과 편전을 비 퍼붓듯이 어지러이 쏘자 죽은 자가 몹시
많았다. 사천의 여인 한 명이 포로로 잡힌 것을 빼앗아 왔다. 이날 칠천량에서 잤다.
8일(계해) 맑음.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을 먹은 후에 광양, 낙안, 방답이 왔다. 방답과 광양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가지고 왔다. 우수사도 역시 왔다. 어란 만호도 또한 쇠고기 음식 몇
가지를 보냈다. 저녁에 비가 많이 내렸다.
10일(을축) 맑음. 식사 후에 배를 띄워 사량으로 갔다. 낙안 사람이 행재소로부터 와서
전하는 말이, 명나라 군사들이 일찌기 송도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기 때문에
행군하기가 어려워 날이 개기를 기다려 서울로 입성하기로 약속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그
기쁨을 이길 길 없다. 첨사 이홍명이 와서 인사했다.
12일(정묘) 맑음. 아침에 각 고을 문서를 처결해 보냈다. 본영 병방 이 응춘도 문서를 정리해
가지고 갔다. 염과 나 대용, 덕민, 김인문도 모두 영으로 돌아갔다. 식사 후에 우수사의 사처에서
바둑을 두었다. 광양 현감이 술을 차려 가지고 왔다. 밤늦게 비가 내렸다.
13일(무진) 비가 세차게 오다가 늦은 아침에야 갰다. 우수사 이 억기와 첨사 이 홍명이 바둑을
두었다.
14일(기사) 맑음. 여러 배들을 출동시켜서 배 만들 재목을 실어 왔다.
15일(경오) 맑음. 우수사가 왔다. 우수사 편의 장수들과 우리 편 장수들이 관덕정에서 활을
쏘는데, 우리 편 장수들이 많이 이겼다. 그래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해 왔다.
17일(임신) 맑음.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신 경황이 와서 전하기를, 안 세걸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그들은 곧 돌아갔다.
18일(계유) 큰바람이 종일토록 불어서 사람들이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소비포 이 영남과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우수사와 장기를 두어 이겼다. 남해 현령 기 효근도 왔다. 저녁때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다. 밤중에 비가 내렸다.
19일(갑술) 종일 비가 내렸다.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20일(을해) 맑음. 우수사와 이야기했다. 오후에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온다는
소식이 왔다.
5월
1일(갑인)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2일(을묘) 맑음. 선전관 이 춘영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라는 것이다. 이날 보성 군수 김 득광, 발포 만호 황 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그 밖의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미뤘기 때문에 모이지 않았다.
3일(병진) 맑음. 전라 우수사 이 억기가 해군을 인솔하고 왔는데 해군들이 많이 뒤떨어져서
유감이다. 선전관 이 춘영이 돌아가고 이 순일이 왔다.
4일(정사) 맑음.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 유감이다. 우수사,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도 모여서
약속했다.
5일(무오) 맑음. 선전관 이 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왔기에 아침밥을 대접했다. 명나라에서 내게
은청 금자 광록 대부의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데 필시 잘못 전해진 말일 것이다. 저물게 우수사.
순천, 광양, 낙안 도 영공과 같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했다. 또 군관들을 시켜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했다.
7일(경신)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우수사 이 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에
올라앉아서 공무를 처리한 후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도망갔던 발포의 수군을 잡아 내어
처형하고, 순천의 이방도 입대에 관한 사무를 태만히 한 죄로 처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미조항에 이르자 동풍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 간신히 도착하여 정박했다.
8일(신유)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사량 바다에 이르니 만호 이 여념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에 있다고 말하고,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 영남이 보러 와서 수사의 잘못이 많다고
자세히 말했다.
9일(임술) 흐림. 아침에 떠나 걸망포에 이르니 풍세가 불순하다. 우수사 이 억기, 가리포 첨사
구 사직과 같이 앉아 작전 계획을 짰다. 저녁에 수사 원 균이 배 2척을 거느리고 왔다.
10일(계해)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떠나서 견내량에 이르자 흥양 군사를
점검하고 약속을 어긴 여러 장수들을 처벌했다. 우수사와 가리포가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윽고 선전관 고 세충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와서 전하는데, 보니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을 치라는 내용이었다. 부체찰사의 군관 민 종의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저녁에 영남 우후 이
의득과 이염남이 보러 와서 앉아 이야기하다가 밤이 늦어서 돌아갔다. 윤봉사 제현이 본영에
왔다고 편지를 보내 왔기에 답장을 보내어 아직 본영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11일(갑자) 맑음. 선전관이 돌아갔다. 늦게 우수사가 진을 친 데로 갔더니, 이 홍명과 가리포
첨사도 와 있다. 바둑을 두는데 순천이 또 오고, 계속해 광양도 왔다. 가리포가 술과 고기를
낸다. 조금 있으니 영등으로 적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가덕 밖 바다에
적선이 무려 2백여 척이 머물러 정박하고 출몰하며, 웅천에도 전일과 같다고 한다. 선전관이
돌아가는데, 임금의 분부를 행하는 일에 대해서 도 원수와 제찰사에게 보내는 공문 3건을 한
서류로 만들어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났다. 이날 남해로 왔다.
12일(을축) 맑음.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송 시랑 응창의 통첩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의 말 5필을 중국에 보내기 위해서 올려 보내라는 지시도 왔으므로 병방
진무를 띄워 보냈다. 늦게 수사 원 균이 왔다. 선전관 성 문개가 보러와서 피난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통곡할 일이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 검은
각궁, 후시를 성 문개에게 주어 보내니, 그는 순변사 이 일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저녁때 이
영남, 윤 동구가 보러 왔다. 고성 현령 조 응도도 보러 왔다. 새벽에 좌우도 체탐인을 영등
등지로 보냈다.
13일(병인) 맑음. 조그만 산등성이에 과녁을 치고 여러 장수들이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다투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혼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닭이 울 때에야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14일(정묘) 맑음. 선전관 박 진종과 영산령 복 윤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함께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한다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내가 우수사 이 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면서 술을 두어 순배 돌리자 수사 원 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하므로 모든 배 안의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 망측한 꼴은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저녁에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16일(기사) 맑음. 아침에 적량 만호 고 여우, 감목관 이 효가, 이 응화, 강 응표 등이 보러
왔었다. 각 고을 공문과 소장에 대한 결재를 해 주었다. 해와 회가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해서 베개에 누어 신음했다. 들으니 명나라 장수가 중로에 체류한다고 하니 간사한 계고가
없지 않은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걱정이 많은 터에 일이 이와 같으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흐른다. 점심때 윤봉사가, 관동 아주머니가 양주천천으로 피란갔다가 거기서 별세했다고
하니 통곡함을 참을 수 없다. 어찌 세상일이 이다지도 가혹한가? 장사는 누가 주장하여
치르는가?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17일(경오) 맑음. 새벽 바람이 몹시 사납다. 아침에 순천, 광양, 보성, 발포 및 이 응화가 와서
보았다. 변 존서는 병이 있어 돌아갔다. 영남 우수사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급한 보고서를
보냈는데, 이 제독은 지금 충주에 있고, 적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고 있다
하니 통분한 일이다.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심사도 역시 어수선하다. 고성 군수가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와 쇠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을 보냈는데 복중이어서 받기가 미안하다.
그러나 간곡한 정리로 보낸 것이니 의리상 도로 보낼 수고 없기로 군관들에게 내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18일(신미) 맑음. 이른 아침에 몸이 매우 불편하여 온백원 4알을 먹었더니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고 조금 몸이 편안해진다. 종 목년이 해포로부터 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 한다. 곧 답장을 써서 돌려보내면서 미역 5동을 함께 보냈다. 전주 부윤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순찰사 권 율이 절제사를 겸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을 찍지 않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대금산과 영등 등지의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나 그다지
큰 흉모는 없다고 한다. 새로 협선 2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19일(임신) 맑음. 순찰사의 공문에 의하면 명나라 장수 유 원외의 통첩에 의하여 명나라 군사가
부산 바다 어귀를 벌써 끊어 막았다 한다. 공문은 확인서를 쓰고, 또 공무에 관한 보고도 써서
보성 사람을 시켜 보냈다. 영등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보고한다.
21일(갑술) 새벽에 배를 띄워 거제 유자도 앞바다에 이르니 대금산의 정찰대가 보고하기를,
적들의 출입하는 것이 전과 같다고 한다. 우수사와 오래도록 이야기하는데 이 홍명이 왔다. 오후
2시부터 비가 내려 농작물이 조금 소생되는 듯하다. 이 영남이 보러 왔었다. 원 수사가 거짓말로
공문을 만들어 돌려서 대군이 동요했다. 군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어지러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밤새도록 거센 바람이 불고 또 비가 내렸다. 새벽녘에 거제 선창으로 갔으니 곧
22일이었다.
22일(을해) 비. 기다리던 비가 흡족히 내렸다. 늦은 아침에 나 대용이 본영에서 돌아왔는데,
송 시랑의 통첩과 그의 파견원, 본도 도사, 상호군을 지낸 선전관 한 사람 등이 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송 시랑의 파견원이 전선에 대한 것을 알아보러 오는 것이라고 하므로 곧 우후를
정하여 영접하도록 내보냈다.
23일(병자) 새벽에는 흐리기만 하고 비가 오지 않더니, 늦게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고, 또 본도 병마사의 편지와 서류가 왔다. 그 내용은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워낙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진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녁때
아들 회가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이리로 들어온다고 했다.
어두워진 뒤에 경상도 수사가 와서 명나라 관원 접대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했다.
24일(정축) 잠깐 비가 내리다가 잠깐 개곤 했다.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나 대용이 명나라 관리를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보고하기를, 명나라
관리를 통역 표 헌과 선전관목 광흠이 함께 온다고 한다. 오후 2시경 명나라 관리 양 보가
진문에 당도하였기에 우별도위 이설을 시켜 나가 맞아 배로 안내하게 했더니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많다. 내 배에 오르도록 청하여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고 맞아서 마주 앉자고 하니 굳이 사양하고 앉지 않는다. 서서 한참
이야기하는데 우리 배의 위엄이 장하다고 많이 칭찬한다. 예물 단자를 바치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받고서 재삼 감사를 표한다.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25일(무인) 맑음. 명나라 관리와 선전관은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은 모양이다. 아침에
통역 표 헌을 다시 청해다가 명나라 장수가 무엇이라 하던가 물었더니, 명나라 장수의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다만 왜적을 쫓아보내라고만 한다는 것이다. 역관의 말에는 송 시랑이
해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야불수 양 보를 보냈던 것인데, 해군의 위엄이
이렇게 장하니 기쁘기 비길 데 없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는 늦게 본영으로 돌아갔는데, 첩자를
준 것도 있다. 낮에 거제 앞 유자도 바다 어귀로 진을 옮기고 우수사와 한참 동안 군사 일을
상의했다. 광양이 오고, 최 천보, 이 홍명이 와서 바둑을 두다가 돌아갔다. 저녁에 조 붕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갔다. 초경이 지난 뒤에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감사 영리 한
명과, 접반사 군관 한 명이 진문에 왔으나 밤이 깊어서 들르지 않았다.
26일(기묘) 비.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니 곧 절강의 포수 왕 경득인데, 글자는 조금
알지만 한참이나 서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순천이 노루고기를
냈는데 광양도 오고 우수사 영공도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청했어도 오지 않았다. 비가
저녁내 그치지 않고 밤새 퍼부었다. 2경 때부터 사나운 바람이 크게 불어 배들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부딪치는 것을 간신히 구했더니, 또 발포가 탄 배와 마주쳐서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했다. 군관 송 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 배와 부딪쳐 많이 상했다
한다. 늦은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과격한
언사가 많이 있으니 가소롭다.
27일(경진) 풍우에 부딪치기 때문에 진을 유자도로 옮겼다. 협선 3척이 간 곳이 없더니 늦게야
돌아왔다. 영남 병사 최 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그로 보아 원 수사는 송 경략 응창이 보낸 화전을
혼자 쓰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꼴이 참으로 우습다. 전라도 병사의 편지도 왔는데, 창원의
적들을 오늘 토벌하러 갔다가 비가 아직 개지 않아서 나가 치지 못했다고 한다.
28일(신사) 비가 종일 내렸다. 순천과 이 홍명이 와서 이야기했다. 광양 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독운 임 발영은 위에서도 몹시 옳지 않게 여겨서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분부가 있고, 해군 일족에 다한 일도 그전과 같이 하라는 명령이 있다고 한다. 비변사의 공문이
왔는데, 광양 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킨다고 했다. 관보를 가지고 왔기에 보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용호장성 응지에게 배를 바꾸어 탈 수 있게 하기 위한 명령서를 써 주어 본영으로
보냈다.
29일(임오) 비. 방답 첨사와 영등 만호 우 치적이 보러 왔다. 접반사, 도원수, 순변사, 순찰사,
병사, 방어사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오후 8시쯤 변 유현과 이 수가 보러 왔다.
30일(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 4시경에 잠시 개더니 다시 내렸다. 아침에 윤 봉사,
변 유헌에게 적에 대한 일을 물었다. 이 홍명이 와서 만났다.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자기 혼자서만 쓰려고 계획했다는데,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자, 공문도 보내려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하더라고 하니 가소롭다. 명나라 배신이 보낸 화공하는 기구인 화전 1천
5백 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혼자 쓰려고 한 것은 그 계획이 몹시 우스운 것이다. 저녁에 조
봉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 기 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아가씨를
싣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이같이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 심지어 예쁜
여자를 싣고 놀다니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장이라는 원 수사조차 역시 이러하니
어찌하랴? 윤 봉사는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 군량미 14석을 실어 왔다.
6월
1일(갑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님 편지를 보니 편안하시다니 몹시 다행스럽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도 한꺼번에 왔는데 명나라 관리 양 보가 왜물을 보고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더라고 한다. 순천과 광양이 보러 왔었다. 탐후선이 왜물을 가져왔다. 충청 수사 정
영공이 오고, 나 대용, 김 인문, 방 응원 및 조카 봉도 왔다. 그 편에 어머님의 편안하심을 알게
되어 매우 다행이다. 충청 수사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저녁밥을 대접했다. 황 정욱과 이 영이
강변에 나가서 이야기하더라니 한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날은 맑았다.
2일(을유) 맑음.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처결해서 보냈다. 온양의 강 용수가 진중에 이르러
명함을 들여 보내고 먼저 경상도 본영으로 갔다. 군관 송 두남, 이 경조, 정 사립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아침 식사 후에 순찰사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와서 적의 정세를 물어보고 가려
하므로, 우수사와 상의해서 대답해 보냈다. 강 용수가 또 왔기에 양식 5말을 주어 보냈다. 정
영공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하는데, 가리포의 구 우경도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3일(병술) 새벽에 맑더니 늦게 큰비가 내렸다. 지휘선을 연기로 그슬리기 위해서 좌편 딴
배로 옮겨 탔다. 바야흐로 활을 쏘려는데 비가 몹시 내려, 배 위가 새지 않는 곳이 없고 앉을
자리가 없으나 탄식스러운 일이다. 평산포 만호, 소비포 권관, 방답 첨사가 모두 와서 만났다.
저녁에 순찰사, 순변사, 병사, 방어사들의 답장 공문이 왔는데 어려운 일이 많았다. 각 도의
군마가 많아야 5천을 넘지 못하고 또 양식도 거의 떨어져 간다고 한다. 적의 무리들의 방자함은
날로 더해가고,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잔 말인가? 초저녁에 지휘선으로 돌아가 침실로
들어갔다. 비는 밤새 내린다.
4일(정해) 비. 하루 종일,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식전에 순천 부사 권 준이 왔다. 식후에는
충청 수사 정 영공과 이 홍명, 광양 현감이 와서 종일토록 군사일을 의논했다.
5일(무자) 비. 종일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배 밖으로 머리도 내밀기 어려웠다. 오후에
우수사가 와서 해진 뒤에 돌아갔다. 저물게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풍세가 몹시 사나와서
배들을 간신히 구해냈다. 경상도 수사가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냈다 한다. 그 흉계가 실로 우습다.
6일(기축) 갰다 비가 오다 했다. 보성 군수가 갈려가고 김 의검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저녁에
본영의 척후병이 왔는데 어머님께서 안녕하시다고 한다.
7일(경인) 흐리기만 하고 비는 오지 않았다. 순천과 광양이 오고, 우수사와 충청 수사도
오고, 이 홍명도 와서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본도 우후가 저녁에 보러 와서 서울 안 소식을
전했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8일(신묘) 잠깐 맑더니 바람이 또 고르지 못하다. 아침에 영남 수사의 우후가 군관을 시켜
전복을 보냈기에 구슬 30개를 대신 보냈다. 나 대용이 병으로 본영에 돌아갔다. 병선 진무 유
충서도 병으로 사임하고 육지로 돌아갔다. 광양이 오고, 소비포도 왔다. 광양이 쇠고기를 내와서
함께 먹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각 고을 아전 11명을 처벌했다. 옥과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보내는 것이 성실치 못해서 도망하는 자의 수가 거의 백여명이나 되건만, 번번이
거짓말로 대답하기 때문에 이날 목을 베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아
마음도 어지럽다.
9일(임진) 오랜 비가 처음 개니 온 군중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심기가 불편하여
온종일 배 속에 누워 있었다. 서류를 접수했다는 접반관의 확인서가 왔다. 그 편에 이 제독이
충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본군 의병 성 응지가 돌아올 때 본영의 군량미 50석을 가지고 왔다.
10일(계사) 맑음. 우수사 이 억기와 가리포 첨사가 와서 군사에 대한 계획을 자세히
의논했다. 순천 부사도 왔다. 삿자리 20닢을 짰다. 저녁에 영등포 정찰부대가 와서 보고하기를,
웅천의 적선 4척이 저희의 본토로 돌아갔고, 또 김해 바다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척이 나와서,
19척은 저희 나라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부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새벽 2시쯤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서 적을 치자는 것이다. 그의 시기와 흉모는 형언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회답하지 않았다. 네 고을의 군량에 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11일(갑오) 비가 오락가락함. 아침에 왜적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해서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회답하지 않는다. 낮 12시쯤 충청수사의 배로 갔으나 수사는
내 배로 와 앉아 있으므로 잠깐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 길로 우수사의 배로 갔더니,
가리포, 진도, 해남들이 우수사와 함께 술자리를 차려 놓고 있었다. 나도 두어 잔 마시고 곧
돌아왔다. 탐후인이 와서 고목을 바치고 돌아갔다.
12일(을미) 잠깐 비 오다가 잠깐 맑음. 아침에 흰 머리털을 10여개 뽑았다. 흰 머리털이
있으면 어떠리오마는 다만 위에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종일 혼자 앉았는데, 사량이
와서 보고 갔다. 밤 10시경에 변 존서와 김 양간이 들어왔다. 행궁의 기별을 들으니, 동궁께서
편치 않으시다고 하니 걱정스럽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유상의 편지와 윤 지사의 편지가
왔다.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 하니 불쌍하다. 중 해당도 왔다. 밤에 명나라 군사 5명이
들어 왔다고, 원 수사의 군관이 와서 전하고 갔다.
13일(병신) 맑음. 늦게 잠시 비가 내렸다. 명나라 사람 왕 경과 이 요가 와서 우리 수군의
형세가 어떠한가를 보고 갔다. 그들에게서, 이 제독이 진격 토벌하지 않아서 자기 조정에서
문책을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감격하는 점이 많았다. 저녁에 진을 거제
세포로 옮기고 거기 머물렀다.
14일(정유)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오전에 낙안이 보러 왔다. 가리포를 청해다가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순천, 광양도 왔었다. 전운사 박 충간의 공문과 편지가 왔다. 경상 좌수사의 공문도
왔다. 늦게 비바람이 몹시 치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16일(기해) 잠깐 비가 내렸다. 느지막하게 낙안 원편에 진해 고목을 얻어 보니, 함안에 있는
각 도 대장들은 왜적들이 황산동에 나가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물러가서 진양과 의령을
지킨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순천, 광양, 낙안 들이 왔다. 초저녁에 영등 정찰군 광양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김해, 부산에 있던 적선이 무려 5백여 척인데, 안골포, 웅포, 제포 등지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적도들이 합세해서 다른 지방을 침범할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우수사와 정 수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밤 10시경에 대금산에 있던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는 내용도 역시 이와 같다. 12시쯤 송 희립을 경상 우수사에게로 보내서
의논했더니, 내일 새벽에 수군을 거느리고 오겠다고 한다. 왜적의 꾀는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17일(경자)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이른 아침에 원 수사와 우수사와 정 수사들이 와서
이야기했다. 함안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진주로 물러가 지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조 붕이
창원에서 와서 적의 형세가 대단하더라고 전해주었다.
18일(신축) 비다 오다 말다 했다. 바람까지 몹시 불므로 진을 오양역 앞으로 옮겼다. 그러나
바람에 배가 안정되지 않아서 다시 고성 역포로 옮겼다. 봉과 변 유헌 두 조카를 본집으로
보내서 어머님의 안부를 알아오게 했다. 명나라 장수가 선사한 왜물과 기름 등속을 본영으로
실어 보냈다.
21일(갑진) 맑음. 새벽에 진을 한산도의 망하응포로 옮겼다. 점심때 원 연이 왔다. 아침에
아들 회가 와서,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22일(을사) 맑음. 전선을 만들기 위해서 자귀질을 시작했다. 목수가 2백 14명이요, 본영에서
온 사람 72명, 방답에서 온 사람 35명, 사도에서 온 사람 25명, 녹도에서 온 사람 15명,
발포에서 온 사람 15명, 여도에서 온 사람 15명, 순천에서 온 사람 10명, 낙안에서 온 사람 5명,
흥양, 보성에서 온 사람 각각 10명이었다. 방답은 처음에 15명만 보냈기에 군관과 아전을
처벌했는데, 그 정상이 몹시 간사하다. 들으니 지휘선의 1호선 손 걸을 본영으로
돌려보냈었는데, 못된 짓을 많아 하다가 잡혀 갇혔다고 한다. 이 자를 잡아오라고 했더니 이미
와서 인사를 표하기에, 제 맘대로 출입한 죄를 다스리고 겸해서 우후의 군관 유 경남도
처벌했다. 오후에 가리포가 오고, 적량의 고 여우와 이 효가도 왔다. 저녁 무렵 소비포의 이
영남이 보러 왔었다. 초저녁에 영등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딴 일은 없고, 다만 적선 2척이
온천으로 들어가기에 탐지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24일(정미) 식후부터 큰바람이 불더니 늦게까지 그치지 않았다. 저녁에 영등이 정찰부대가
와서 아뢰기를, 적선 5백여 척이 23이 밤중에 소진포로 들어갔고, 가리포사와 오고 경상
우수사도 와서 함께 의논했다. 듣자니 진주가 포위 당했는데 아무도 감히 진격하지 못한다고
한다. 날마다 비가 내려 적들이 물에 막혀서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을 돕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낙안의 군량 1백 30석 9두를 나누어 주었다. 순천의 군량 9백
석은 받아서 찧는 중이라 한다.
26일(기유) 큰비가 몹시 내리고 남풍이 몹시 불었다. 아침에 복병선이 와서 변고를
보고하는데, "적의 중선과 소선 각 1척이 오양역 앞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닻을 들게 하고 모두 적도로 나가서 진을 치게 했다. 순천의 군량 1백 50석을 받아서 의능의
배에 싣게 했다. 저녁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무수히 진주 동문 밖에 합쳐서 진을
치고 있는데 매일 큰비가 와서 물에 막혔는데도 악착같이 싸우고 있다. 지금 큰물이 적진을
휩쓸려고 하고, 또 적들은 밖으로 양식과 구원병이 올 길이 없으니, 이런 기회에 만일 대군이
힘을 합해서 한번 싸우면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마침 양식이 끊어졌으니, 우리
군사는 평안히 앉아서 피로한 적을 막는 것이 되니, 그 형세가 백번 싸우면 백번 다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또 이렇게 순조롭게 도와주시니 해군의 적이 비록 5, 6백 척을 합쳐서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27일(경술)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오정에 적선 2척이 견내량에 나타났다고 하므로 전군을
거느리고 나가 보니,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에 불을도 앞바다에 진을 쳤다. 아침에
순천, 광양을 불러다가 군사 문제에 대해서 토의했다. 충청 수사가 자기 군관을 보내서, 흥양의
군량이 떨어졌으니 3석만 꾸어 달라고 하므로 주어 보냈다.
28일(신해) 잠깐 비가 오고 잠깐 맑았다. 어제 저녁에 강진의 정찰선이 적과 싸운다는 말을
듣고 온 군대를 출발시켜 견내량에 이르니, 적도들은 우리 군사를 보고 두려워하여 달아난다.
물결과 바람이 모두 거슬려서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 머물러 밤을 지냈다. 새벽 2시경에 불을도에
돌아왔으니 오늘은 곧 명종의 제삿날이다. 종 봉손과 애수 등이 들어와, 고향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다행스럽다. 원 수사와 우수사가 함께 와서 군사일을 의논했다.
29일(임자) 맑음. 서풍이 잠깐 불더니 개고 빛이 맑다. 순천과 광양이 보러 오고 어란 만호와
소비포 등이 또한 왔다. 종 봉손 등이 아산으로 가는데, 홍, 이 두 선비에게와 윤 선각 명문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진주가 함락되어 황 명보, 최 경희, 서 예원, 김 천일, 이 종인, 김 준민이
전사했다고 한다.
7월
1일(계축) 맑음.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 기운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선전관이
와서 임금의 유서를 전했다.
2일(갑인) 맑음. 날이 저물어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함께 선전관을 대접하고 돌아갔다.
저물게 김 득룡이 와서 진주가 위태하다고 전한다. 놀랍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이는 필시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전한 것이리라. 초저녁에 원 연이 와서
여러 가지로 군중의 일들을 이야기했는데 우스운 말이 많다.
3일(을묘) 맑음. 적선 두어 척이 견내량을 넘어오고, 한편으로는 육지로도 나오고 있으니
통분한 일이다. 우리 배가 바다로 나가서 그 뒤를 쫓자 그만 도망해 버렸다. 그대로 돌아와서
잤다.
4일(병진) 맑음. 흉악한 적 수만여 명이 죽 벌여서서 기세를 올리니 통분하다. 저녁때
걸망포로 진을 옮기고 잤다.
5일(정사) 맑음. 새벽에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견내랑으로 적선 10여 척이 넘어온다."고
한다. 모든 배가 일시에 떠나서 견내량에 이르니, 적선은 어쩔 줄 모르고 달아나다. 거제 땅
적도에는 말만 있고 사람은 없기로 싣고 왔다. 늦게 변 존서가 본영으로 떠났다. 또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긴급 보고가 광양에서 왔다. 저녁에 걸망포로 돌아와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6일(무오) 맑음. 아침에 방답이 보러 왔고 소비포도 왔고, 한산도에서 새로 만든 배를 끌어올
셈으로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끌어왔다. 공방과 곽 언수가 행조로부터
왔는데, 도승지 심 희수 및 윤 자신과 좌상 윤 두수의 답장이 왔다. 윤 기헌도 안부를 보냈고, 또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기록한 문서도 왔다. 이것을 보니 탄식할 일이 많다. 흥양이 군량을
실어 왔다.
7일(기미) 맑음. 아침에 순천, 가리포, 광양이 보러 와서 군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가볍고
날랜 배 15척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가서 탐색하기로 하여 위장이 거느리고 갔다. 그러나 적의
종적이 없다고 한다. 거제에 사로잡혀 갔던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적들의 하는 일을
물었더니, "흉악한 적들이 우리 수군의 위엄을 보고 달아나려 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진주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필경 전라도까지 넘어갈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말이다. 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8일(경신) 맑음. 남해로 왕래하는 조 붕에게서, 적이 광양을 친다는 바람에 광양 사람들이 이
미 관청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는 말을 들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순천과 광양을 곧
보내려다가 적확치 못한 소문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를 중지하고, 사도 군관 김 붕만을 보내서
알아 오도록 했다.
9일(신유) 맑음. 남해에서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전멸했다." 하므로, 광양과
순천과 송 희립, 김 득룡, 정 사립 등을 떠나 보냈고, 이 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이 소식이야말로
뼈속까지 아픔이 스며들어 말을 못하겠다. 우수사, 경상 수사와 함께 일을 의논했다.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잠깐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새로 한 시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동정을 전하는데, 사실은 왜적이 아니고 영남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거짓 왜적의 모양을 하고
광양으로 들어가서 민가를 쳐부셨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니 오히려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진주 일도 헛소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주 일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닭이 이미 울었다.
10일(임술) 맑음. 김 붕만이 두치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광양의 일은 사실이나 다만 왜적
백여명이 도탄으로부터 건너와서 광양을 치고 들어갔으나 그들은 총 한 방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왜적이라면 어찌 총 한 방도 쏘지 않았을 리가 있으랴. 저녁에 오 수가 거제
가참도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적선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자들의 말이, 무수한 적들이 창원으로 가더라 한다. 그러나 이 말도 믿을 수가
없다. 저녁에 진을 한산도 끝 세포로 옮겼다.
11일(계해) 맑음. 아침에 이 상록이 명령을 어긴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할 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선 10여척이 견내량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이에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5, 6척이 벌써 진 앞으로 다가온다. 그대로 진격했더니 적들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오후
4시쯤 걸망포로 돌아와 식수를 길어오도록 했다. 사도 첨사가 와서 말하기를, 두치에 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병의 복장을 가장하고 저희끼리 장난한 것이라
한다. 순천과 낙안은 이미 결딴이 났다고 한다. 통분함을 금할 길이 없다. 어두운 뒤에 오
수성이 광양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광양의 반란은 모두 진주에서 피란 온 사람들과 그 고을
사람들이 꾸민 흉계라고 한다. 고을 창고는 쓸쓸하고 마을은 텅 비어 종일 다녀도 사람 하나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은 그 다음은 간다고 했다. 달빛
아래 우수사의 배를 찾아갔더니 원 수사와 직장 원 연이 먼저 와 있다. 군사 일에 대해서
의논하다가 헤어졌다.
12일(갑자) 맑음. 가리포의 군량 진무가 와서 전하기를, 사량 앞바다에서 자는데 왜적이 우리
옷을 입고 우리 배를 타고 돌입해서 총을 놓으면서 노략질해 가려고 한다고 한다. 이에 곧
경쾌하고 날랜 배 3척씩을 뽑아서 모두 9척을 보내 잡아 오도록 명령했다. 한편 또 배를 각각
3척씩을 뽑아 착량으로 보내서 요새를 방어하고 오도록 했다. 고목이 왔다. 또다시 광양의 일은
헛소문이라고 전해 왔다.
13일(을축) 맑음. 늦게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광양, 두치 등지에는 적의 행적이 없다고
한다. 흥양 현감이 들어오고 우수사도 또 왔다. 순천의 거북선 수군인 경상도 사람의 종 태수가
도망가다가 잡혀왔기로 형을 집행했다. 늦게 가리포가 보러 오고, 흥양원도 또 와서 두치의
잘못된 소문과 장흥 부사 유 희선의 공연히 겁내던 일들을 전했다. 또 말하기를, "그 고을 산성
창고에 있는 양곡을 빠짐없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 행주성의 승전도 전해 주었다.
초저녁에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의 배로 갔더니 가리포가 몇 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았다.
4경이나 되어 자리가 파했다.
14일(병인) 맑았다가 늦게 이슬비 내림.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김. 비는 먼지를 적실
뿐이다. 몸이 몹시 괴로와 종일 신음했다.
15일(정묘) 맑음. 늦게 사량의 수색선과 여도 만호 김 인영과 순천의 김 대복이 들어왔다.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어지럽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이 뱃전에 비치니 정신이 맑아져서 잠 못 이루는 사이에 닭이
벌써 우는구나!
16일(무진) 맑음.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흡족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17일(기사) 비. 몸이 몹시 불편하다. 광양 현감 어 영담이 와서 보았다.
18일(경오)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정 사립이 돌아왔다. 우수사 이 억기가
와서 보았다. 신 경황이 두치로부터 와서 적의 헛소문을 전했다.
19일(신미) 맑음. 이 영남이 와서 진주, 하동, 사천, 고성 등지의 왜적이 이미 도망갔다고
전한다. 저녁에 광양 현감 어 영담이 진주에서 피살된 장수들의 명부를 보내 왔는데 보니,
참으로 비창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20일(임신) 맑음. 탐후선이 본영에서 돌아왔다. 병사의 편지와 공문, 그리고 명나라 장수의
통지가 왔는데, 그 내용이 몹시 괴상스럽다. 두치에 있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쫓게 도망해
숨었다는 것이다. 그 거짓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상국이 이러하니 딴 것을 말해 무엇하랴.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다. 충청 수사와 순천, 방답, 광양, 발포와 남해가 와서 보았다. 이 해와
윤 소인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21일(계유) 맑음. 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가 와서 적을 칠 일을 의논했다. 원 수사의 하는
말은 몹시 흉칙하고 거짓스럽다. 사람됨이 이 같은데도 일을 같이 하니 어찌 뒷근심이 없겠는가?
그 아우 연도 뒤따라 와서 군량을 빌어 가지고 갔다. 저녁때 흥양도 왔다가 어두울 무렵에
돌아갔다. 초저녁에 오 수 등이 거제로부터 돌아와, "영등의 적선이 아직도 머물러 있어 제
맘대로 방자하다." 고 한다.
22일(갑술) 맑음. 오 수가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실어 오려고 나갔다. 울이
와서, 어머님께서 안녕하시고 막내 아들 염의 병도 차도가 있다고 자세히 말해주었다.
24일(병자) 맑음. 초저녁에 오 수가 돌아와서는 하는 말이, 적이 물러가기는 했으나 장문포의
적들은 여전하다고 했다.
27일(기묘) 맑음. 우수사 우후가 본영으로부터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 만한 일이
많다. 체찰사에게 가는 공문을 썼다. 경상도 우수영의 영리가 체찰사에게 갈 서류 초안을 가지고
와서 보고했다.
28일(경진) 맑음. 아침에 체찰사에게 편지를 썼다. 경상 우수사와 충청 수사, 본도 우수사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그러나 원 수사의 흉칙함은 볼 수가 없다. 정 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에게로 갔다. 순천, 광양이 와서 보고 즉시 돌아갔다. 사도 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포작
10명이 왜적을 옷을 바꿔 입고 하는 일이 몹시 조밀하다기에 추궁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족장 10여대를 때려서 석방했다.
29일(신사) 맑음. 새벽 꿈에 아들을 얻었다. 포로 되었던 군사들을 찾을 징조이다. 본영
탐후인이 왔는데, 염의 병이 낮지 않는다 하니 몹시 걱정이다. 저녁에 보성 김 득광, 소비포 이
영남, 낙안 신 호가 들어와 보았다.
8월
1일(임오) 맑음. 새벽 꿈에 커다란 대궐에 들어갔는데, 마치 서울인 것 같고, 거기에서
기이한 일이 많았다.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했다. 임금이 피란 가신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려가면서 탄식하는데, 적의 형세는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서로
나라 일을 의논할 즈음, 좌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놀라 깨었다.
2일(계미)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심사가 답답하여 닻을 들고 포구로 나가니 정 수사도
따라온다. 순천, 광양이 와서 보고, 소비포도 또 왔다. 저녁에 진 친 곳으로 돌아왔다. 이 홍명이
와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어둘 무렵에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말하기를, "방답이 근친하러
가겠다고 간절히 청하는 것을 나는 여러 장수들을 하나도 내보낼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또 말하기를,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여 나에게도 무도한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망령된 일이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염의 병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또 적을 치는 일도 쉽게
끝나지 않고, 내 몸도 무거워서 아침부터 밖에 나가 마음을 달랬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염의
상처는 종기가 되어 침으로 헤치면 고름이 흐르는 형편이니, 며칠만 더 늦췄다면 구할 길이 없을
뻔했다 한다. 놀라고 탄식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은 조금 살아날 길이 있다 하니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하랴. 의사 정 종지의 은혜가 더없이 크다.
4일(을유) 맑음. 순천과 광양이 다녀갔다. 저녁때 도원수의 군관 이 완이 삼도의 왜적의
형세를 보고하는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 해서 담당 군관과 아전을 잡으러 우리 진으로 왔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6일(정해) 맑음. 아침에 이 완이 송 한련, 여 여충과 함께 도원수에게로 돌아갔다. 저녁에 원
수사가 오고, 이 억기, 정 수사가 와서 일을 의논하는 동안, 원 수사의 말은 걸핏하면 모순이
생겼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저녁때 비가 오기 시작했으나 이내 그쳤다.
7일(무자) 아침엔 맑더니 저물게는 비가 내렸다. 농사에 흡족하겠다. 가리포 첨사가 오고,
소비포와 이 효가도 보러 왔다. 당포 만호가 작은 배를 찾아 갈 일로 왔기에, 주어 보내라고
사량에게 지시했다.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 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래 헛소리를 잘하는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8일(기축)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순천, 광양, 방답, 흥양 등을 불러서 복병을 보낼 일에 대해서
함께 의논했다. 충청 수사의 전선 2척이 들어왔으나 1척은 쓰지 못한다고 한다. 김 덕인은 그
도의 군관으로서 왔다. 본도 순찰사의 진중에 있는 군인 2명이 공문을 가지고 적의 형세를
탐비하러 왔다. 우수사가 유포로 가서 원 수사와 만난다니 우스운 일이다.
9일(경인) 맑음. 아침에 아들 회가 와서 어머님께서 안녕하시다 하고, 또 염의 병도 차츰
나아간다고 한다.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오후에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 영공도 와 있다.
경상 수사는 군사를 일제히 내어 복병시키기로 해놓고 슬며시 혼자서만 먼저 보냈다고 하니
해괴한 일이다.
10일(신묘) 맑음. 아침에 방답 탐후선이 들어왔다. 임금의 분부를 전하는 편지와 비변사의
공문과 감사의 공문이 한꺼번에 왔다.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 배로 갔더니 해남이 술상을 차렸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여 간신히 앉아서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13일(갑오) 본영에서 온 공문을 결재해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배 위에 앉았노라니
회포가 천 갈래 만 갈래다. 이 경복을 시켜 장계를 가지고 가라고 보냈다. 송 두남이 군량미
3백석과 콩 3백석을 실어 왔다.
15일(병신) 맑음. 오늘은 추석이다. 우수사, 순천, 광양, 낙안, 방답, 사도, 흥양, 녹도, 이 응화,
이 홍명, 좌우 도영공들이 모두 모여 이야기했다. 저녁에 회가 본영으로 갔다.
17일(무술) 맑음. 지휘선을 연기로 그슬리기 위해서 좌별도선으로 옮겨 탔다. 늦게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 수사도 왔다. 제 만춘을 불러다가 문초했더니 분한 일이 많이 있었다. 종일
이야기하고 의논하다가 헤어져서 초경도 되기 전에 지휘선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달빛은 낮과
같고 물결빛은 비단 같아 회포를 스스로 이길 수 없다. 새로 만든 배를 바다에 띄웠다.
18일(기해) 맑음. 우수가, 정 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조 붕이 와서, 원 균의 군관 박 치공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19일(경자) 맑음. 아침 후에 원 수사에게 가서 내 배로 옮겨 타자고 청했다. 우수사와 정
수사도 왔다. 원 연도 같이 있었다. 말 가운데 원 수사의 음흉하고 고약한 것이 많으니, 그
허무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씨 형제가 옮아 간 후에 천천히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와, 우수사, 정 수사와 함께 자세히 이야기했다.
20일(신축) 아침 식사 후에 순천, 광양, 흥양이 왔다. 이 응화도 또한 왔다. 송 희립이
순찰사에게 문안할 겸 제 만춘을 문초한 공문을 가지고 왔다. 돌산도 근처에 옮겨와서 살면서
무리를 지어 제물을 약탈하는 자들을 좌우 양편으로 군사를 갈라서 잡아오도록 방답과 사도를
보냈다. 저녁에 적량 만호 고 여우가 왔다가 밤이 깊은 뒤에 갔다.
23일(갑진) 맑음. 윤 간과 조카 뇌와 해가 와서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울이 학질을 앓는다는 소식도 들었다.
25일(병오) 맑음. 꿈에 적의 형적을 보았으므로 새벽에 각 도 대장들에게 알려서 바깥 바다에
나가 진을 치게 했다가 날이 저문 뒤에 한산도 안 바다를 돌아 들어왔다.
26일(정미) 혹 맑기도 하고 혹 비도 내렸다. 원 수사가 왔다. 조금 있자니 우수사와 정
수사가 같이 모였다. 순천, 광양, 가리포는 곧 돌아갔다. 흥양이 와서 제사 음식을 대접했다. 원
수사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기에 조금 주었더니, 몹시 취해서 흉악하고 고약한 말을 함부로
하니 해괴한 일이다. 낙안에게서 일본의 수길이 명나라에 보낸 글의 초고와 명나라 사람이 그
지방에 와서 기록한 것을 보내 왔는데, 보니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다.
28일(기유) 맑음. 원 수사가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30일(신해) 맑음.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보내고 다만 7, 8척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씨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런 따위다.
9월
2일(계축) 맑음. 장계의 초안을 써서 내렸다. 경상 우후 이 의득과 이 여념 등이 와서
보았다. 어둘녘에 이 영남이 와서 보았다. 또 선병사가 곤양에 와서 공로를 세웠다는 일과
남해가 도체찰사에게 불공하다는 책망을 들었다고 전한다. 가소로운 일이다. 효근이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 알 것이다.
3일(갑인) 아침에 조카 봉이 와서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본영의 사정도
들었다. 장계를 올릴려고 초안을 만들었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군사 일족들에 대하여 일체
징발하지 말라고 했다. 새로 도임 해서 사정을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4일(을묘) 맑음. 폐단을 보고하는 장계와 총통을 올려 보내는 일과 제 만춘을 문초한 내용을
올려 보내는 것 등 세 가지를 봉해서 올리는데, 이 경복이 가지고 갔다. 유 정승과 윤 참판
자신, 윤 지사 우신, 심 도승지 희수, 이 지사 일, 안 습지, 윤 기헌에게 편지를 썼다. 정표로
전복을 보냈다. 조카 봉과 윤 간이 돌아갔다.
6일(정사) 맑음. 새벽에 배 만들 재목을 운반해 올 일로 여러 배를 내보냈다. 식후에 우수사
배로 가서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원 수사의 음흉한 말을 듣고, 또 정 담수가 근거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는 말을 들으니 우스웠다. 파선된 배의 재목을 여러 배가 끌어왔다.
7일(무오) 맑음. 아침에 재목을 받아들였다. 순찰사에게 폐단을 진술하는 공문과 또 군대
편성을 개정하는 일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종일 혼자 앉았으니 마음이 편안치 않다.
저녁때 탐후선을 기다렸건만 들어오지 않는다.
9일(경신) 맑음. 식후에 산마루에 올라가 여럿이서 활 3순을 쏘았다. 정 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모였는데, 광양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10일(신유) 맑음. 공문을 탐후선 편에 보냈다. 날이 늦게 우수사의 배에 가서 방답과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체찰사의 비밀 공문이 왔다.
14일(을축) 종일 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었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다.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 가장 필요한 것이건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 만드는 법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더니 이제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왜총보다 더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해 보더니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제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좋겠다. 이에 순찰사, 병사에게
그 견본을 보내고, 또 공문도 돌리도록 했다.
-9월 15일부터 12월 말까지 빠졌음-
@ff
3. 갑오년 일기
1594년 1월 1일__11월 27일
한산도의 노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1월
1일(경진) 비가 몹시 내린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 훈련차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는 그치지 않는다.
4일(계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문을 적어 보냈다. 저녁에 신 사과, 배 첨지와 함께 이야기
했다. 남 홍점이 영에 왔다. 그의 가족이 어찌 분산되어 있는가 물었다.
6일(을유) 비. 동헌에 나가 남평 도병방을 처형했다. 저녁 늦도록 서류를 처결했다.
8일(정해) 맑음. 늦도록 공무를 보았다. 남원 도병방을 처형했다.
11일(경인)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근친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내로 갔다. 남 의길, 윤 사행과 조카 봉도 함께 갔다. 어머님께 뵈오니 어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시어 일어나지 않으셨다. 소리가 시끄러우므로 놀라 깨어 일어나셨으나 기운이
어렴풋하시어 앞이 멀지 않으신 것 같다. 오직 눈물이 흐를 뿐이다. 말씀은 착오가 없으시다.
적을 치는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이날 밤 손 수약의 아내의 부음을 들었다.
14일(계사)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보니, 설날 아산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무려 2백여 명이나 산을 둘러싸고서 음식을 달라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늦게 동헌에 나가 장계 올릴 글을 봉함하고 또 중 의능을
면천시켜 준다는 공문을 봉해 올렸다.
15일(갑오) 맑음. 이른 아침에 남 의길 및 여러 조카들과 함께 있다가 동헌으로 나갔다.
동궁의 분부를 전달하는 글이 왔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치라는 것이었다.
16일(을미) 맑음. 황 득중이 들어왔다. 들으니 문학 유 몽인이 암행어사로 흥양에
들어왔으며, 잡문서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
17일(병신) 새벽엔 눈이 내리고 늦게는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배에 올라 아우 여필 및 여러
조카들과 아들을 작별해 보냈다. 다만 조카 분과 둘째 아들 울만을 데리고 배를 띄웠다. 이날
장계를 올렸다. 오후 4시경에 와두에 이르니 거슬리는 바람에, 더구나 썰물 때여서 배를 움직일
수 없다. 닻을 내리고 조금 쉬다가 6시경에 다시 닻을 들고 노량에 이르렀다. 여도 만호, 순천,
이 함 및 우후가 와서 잤다.
18일(정유) 맑음. 새벽에 떠날 때는 역풍이 몹시 불더니, 창신도에 이르자 바람이 순해졌다.
돛을 달고 사량에 이르니 다시 역풍이 불면서 비까지 쏟아진다. 만호와 수사의 군관 전 윤이
보러 왔다. 전 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으로 붙들어 왔다고 하여 도원수가 방해하려 한다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 같은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랴?
19일(무술)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큰바람이 불다가 해가 저무니 더욱 드세다. 아침에 떠나서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쫓아 돛을 반만 올렸더니 여러 장수들과 이야기했다. 저녁에 원
수사도 왔다. 소비포가 영남 여러 배에서 활꾼과 노 젓는 군사들이 거의 다 주려 죽게 되었다고
전하니, 참혹해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원 수사가 공 연수와 이 극성이 좋아하는 계집들을
모두 관계했다고 한다.
20일(기해) 맑기는 하나 큰 바람이 불었다. 살을 에는 듯 추워서, 여러 배에 있는 옷 없는
사람들이 목을 움추리고 떠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낙안과 우수사 우후가 보러 왔다.
늦게 소비포, 웅천, 진해원들도 왔다. 진해는 명령을 어기고 진작 오지 않아서 죄 주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만나 보지 않았다. 바람은 조금 멎은 듯하지만 순천이 오는 것이 걱정된다.
군량도 도착되지 않아 이 역시 답답하다.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 장사 지낼 차사원으로
녹도 만호를 정해 보냈다.
21일(경자) 맑음. 아침에 본영 격군 7백 42명에게 술을 주었다. 광양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가 와서 보고하기를, 병으로 죽은 시체 2백 14명을 거두어 묻었다고 한다.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해 돌아온 2명이 원 수사에게서 와서 적의 실정을 자세히 말했지만 믿을 수가 없다.
22일(신축) 맑음.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사정에 올라 앉아 진해 현감 정 항으로
하여금 교서에 대하여 숙배례를 행하게 하고, 종일 활을 쏘았다.
23일(임인) 맑음. 낙안이 하직을 고하고 갔다. 흥양의 전선 2척이 들어왔다. 최 천보, 유
황, 유 충신, 정 양 등이 들어왔다.
24일(계묘)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산역 일로 목수 41명을 송 득일이 데리고 갔다. 영남 원
수사가 군관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경상 좌도에 있는 적 3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고 하니 기쁜
일이다. 평 의지는 지금 웅천에 있다고 하지만 자세치 않다. 유 황을 불러서 암행어사가 붙잡아
갔다는 일에 대해서 물었더니 문서를 몹시 함부로 꾸민 때문이라고 한다. 놀랍고 놀라운 일이다.
또 격군에 대한 일을 물어 보았더니, 아전들의 간악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전령을 내려
소모군 1백 44명을 잡아 오라고 하고, 또 흥양 현감을 재촉하여 전령을 보내도록 했다.
25일(갑진) 흐리다가 갬. 송 두남, 이 상록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끌어오고자 사수와 격군 1백
32명을 거느리고 갔다. 아침에 우수사, 우후, 이 정충이 와서 늦게까지 활을 쏘았다.
26일(을사) 맑음. 아침에 사정에 올라 활 10순씩을 쏘았다. 순천 부사가 기일을 어겼기로
벌을 주고 그대로 눌러앉아 공무를 보았다. 오후에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온 진주 여자 1명,
고성 여자1명, 서울 사람 2명을 데려왔는데, 서울 사람은 정 창연과 김 명원의 종이라고 했다.
또 왜놈 하나가 스스로 와서 우리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했다.
27일(병오) 맑음. 새벽에 배 만들 목재를 끌어오는 일로 우후를 내보냈다. 새벽에 변 유현과
이 경복이 들어왔다고 보고한다. 아침에 충청 수사의 회답이 오고 어머님의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님께서는 편안하시다니 다행한 일이다. 다만 동문 밖 해운대 옆에 횃불을 든
강도가 나왔고 미평에도 또한 횃불을 든 강도들이 들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늦게 미조항
첨사와 순천이 같이 왔다. 아침에 소지와 그 밖의 공무를 처리하고, 스스로 항복해 온 왜적을
심문했다. 원 수사의 군관 양 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말 안장, 해산물, 귤, 유자 등을 보냈기에
곧 어머님께 보냈다. 저녁에 녹도 복병한 곳에 왜적 5명이 횡행하여 총을 쏘므로 활을 쏘아 한
명을 죽이니 그 나머지는 화살을 맞고 도망했다. 저물게 소비포가 왔다.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28일(정미) 맑음. 아침에 우후가 와서 인사했다. 경상 우후 이 의득이 보고하기를, 명나라
제독 유 정이 이달 25__26일 사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회군한다 하며, 또 위무사 홍문관 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후에 해군영으로 온다고 한다. 또 화적 이 겸 등을 잡아 가두고 아산, 온양
등지에서 횡행하는 도적 90여명을 잡아 죽였다고 하고, 또 익호장 김 덕형이 근일간에 들어올
것이라 한다. 전선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30일(기유) 흐리고 큰바람이 불다가 늦게는 좀 순해졌다. 순천 부사와 우수사 우후와 강진
현감 유 해가 와서 보고하고 돌아갔다. 미조항 첨사가 돌아간다고 인사하러 왔기에 평산포에서
도망갔다가 잡혀온 군인 3명을 그 편에 딸려 보냈다. 나는 몸이 편치 않아 종일 땀이 흘렀다.
군관과 여러 장수들을 활을 쏘았다.
2월
1일(경술) 맑음. 늦게 사정에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청주에 사는 겸사복 이 상이 임금의
분부를 받고 왔는데 거기에는, "경상 감사 한효순이 장계하기를 경상 좌도에 있는 왜적들이 모두
거제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이는 장차 전라도를 침범할 계획이다. 경은 삼도 수군을 합하여 이를
섬멸시키라." 했다. 오후에 우수사의 우후를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도 첨사가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진으로 왔다. 이 경복, 노 윤발, 윤 백년 등이 도망가는 군인을 싣고 육지로 가는 배
8척을 잡아 왔다. 저녁에는 가는 비가 내리다가 한참만에 그쳤다.
2일(신해) 맑음. 아침에 도망가는 군인들을 실어내던 사람들의 죄를 다스렸다. 사도 첨사가
서 전하기를, 낙안이 파면되었다고 한다. 늦게 사정에 올라갔다. 동궁에게 올린 글의 회답이
내려왔다. 각 관포의 서류들을 처결해 보냈다. 활 10순을 쏘았다. 사도 첨사를 기한에 대지 못한
죄로 벌 주었다.
3일(임자) 맑음.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식후에 사정에 올라가 활을 쏘았다. 광풍이 크게 일었다. 우조방장 어 영담이 왔는데,
그 편에 적들의 소식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우우후가 여러 장수에게 부물을 보내왔다.
원 식과 원 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한다.
4일(계축) 맑으나 바람이 셌다. 늦게 본영의 전선과 거북선이 들어왔다. 동궁의 명령이
내려왔고, 정 찬성의 편지도 가져 왔다. 각 관포의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조카 봉이 오는 편에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5일(갑인) 맑음.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있는 큰 고개로
내려가니 봉우리들은 수려하여 동서로 구부러졌으며, 또 봉우리 위에 평탄한 곳이 있는데 거기에
좋은 자리를 잡으려다가 꿈을 깨었으니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봉우리 위에 한 미인이 혼자
앉아서 손짓하는 것을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운 일이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1백장을 일일이 세어서 수결 했고, 화피 89장도 또한 세어서 수결 했다. 발포
만호와 우수사 우후가 와서 만나고 함께 밥을 먹었다. 늦게 사정에 올라가서 순창, 광주 아전들의
죄를 다스렸다. 우조방장과 우수사 우후, 여도 등이 활을 쏘았다. 원수의 회답이 왔는데, 심
유격이 이미 화친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의 간사한 꾀는 헤아릴 수가 없는 터로
먼젓번에도 저들의 꾀에 빠지고서 이번에도 또 이렇게 빠지니 탄식스러운 일이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듯하여 마치 초여름과 같더니 2경쯤 되어 비가 오기 시작했다.
7일(병진) 맑음. 서풍이 크게 분다. 아침에 우조방장이 와서 만나고, 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한다. 어머님께와 홍 군우, 이 숙도, 강 인중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서 조카 분이 가는 편에
보냈다. 봉과 분이 나갔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은 온양으로 갔다. 심사가 불편하다. 각 배의
소지 2백여 장을 결제하여 주었다. 고성 현령이 보고했는데, 적선 50여척이 춘원포에 왔다고
한다. 삼천포 권관과 가배량 권관 제 만춘이 와서 서울 소식을 전한다. 도망하는 격군을 붙잡기
위해서 이 경복을 보냈다. 이날 군대를 나누어 편성하고 격군들을 각 배에 나누어 실었다. 방답
첨사에게 도피자를 붙잡아 오라고 전령 했다. 낙안 군수의 편지가 왔는데 새 군수 김 준계가
내려왔다고 하므로 그에게 도피하는 군인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보성 전선 2척이 들어왔다.
소비포가 와서 보았다.
8일(정사) 맑으나 동풍이 크게 불고 날씨가 차다. 아침에 순천이 와서 말하기를, 고성
소소포에 적선 50여 척이 드나든다고 하므로 즉시 제 만춘을 불러 지형이 평탄한지의 여부를
물었다. 진주에 피란해 있는 전좌랑인 이 유함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9일(무오) 맑음. 새벽에 우후가 배 2, 3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편으로 가서 띠풀을 베었다.
아침에 고성이 왔는데, 돼지를 가지고 왔다. 그에게 당항포에 적선 왕래하는 것을 묻고 또
백성들이 주려서 서로 잡아먹는다니 장차 어찌 살 것인가를 물었다. 늦게 사정에 올라가서 활
10여순을 쏘았다. 이 유함이 와서 작별을 고하므로 그 자를 물으니 여실이라고 했다. 순천과
우조방장, 우수사 우후, 사도, 여도, 녹도, 강진, 사천, 하동, 보성, 소비포 등도 왔다. 늦게 보성이
들어왔다. 무군사의 공문을 가져 왔는데, 시위할 군인들이 쓸 긴 창 수십 자루를 만들어
보내라는 것이다. 이날 동궁이 문책한 데 대한 답을 보냈다.
12일(신유) 맑음.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의 편지가 왔다. 여기에
보면, 선전관 송경령이 수군을 살펴보기 위해서 들어온다고 했다. 오전 10시경에 적도로 진을
옮겼고 오후 2시경에 선전관이 도착했다. 유지 2통과 밀지 1통 모두 합하여 3통인데, 그 중
1통에는 명나라 군사 10만 명과 은3백만 냥이 나온다는 것이요, 1통은 흉적들의 계획이 호남으로
가려고 하니 힘을 다해서 지키고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는 것이다. 그 중 밀지에는, "바다 위에서
해가 지나도록 나라를 위해서 애쓰는 것을 내 항상 잊지 않는다. 그러니 공이 있는 장사들로서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을 적어 올리라."는 것이다. 또 서울의 여러 가지 소식도 묻고, 적들의
소문도 들었다. 영상의 편지도 가져 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시는 것을 들으니 강개하고
그리움이 한이 없다.
13일(임술) 맑고 따뜻함.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의 편지를 쓰고, 식후에는 선전관 송 경령과
이야기한 뒤에 종일 배에 있었다. 오후 6시경에 배가 떠나서 한산도로 돌아오는데, 경상 수사 원
균의 군관 제 홍록 이 삼봉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적선 8척이 춘원포에 들어와 정박했으므로
가서 공격할 만한다고 한다. 곧 나 대용을 원 수사에게 보내어, 조그만 이익을 보고 공격하다가
큰 이익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니 아직 그대로 두고 기회를 보아 적선이 더 많이 나올 때를
타서 공격하도록 말하라고 했다.
14일(계해) 맑고 따뜻하고 바람도 온화하다. 경상도의 남해, 하동, 사천, 고성 등지에는 송
희립, 변 존서, 유 황, 노 윤발 등을, 우도에는 변 유헌, 나 대용 등을 시켜 점검하러 보냈다. 본영
군량미 20석을 실어왔다. 방답 첨사와 첨지 배 경남이 왔다.
15일(갑자) 맑음. 새벽에 거북선 2척과 보성 배 1척을 가목 다듬는 곳으로 가서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식후에 사정에 올라가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심문했다. 순천
부사, 우조방장, 우수사의 우후, 발포 만호, 여도 만호, 강진 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어 순찰사 이 정암이 공문을 보냈는데, 내용을 보니 조도어사 박 홍로가 순천, 광양, 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하여 달라고 장계를 올렸던 바, 해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회답이 왔다는 것이다.
16일(을축) 맑음. 아침에 흥양과 순천이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의 비밀 장계 초안을
가져왔는데,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은 파면해 내보내고, 순천은 탐관오리로 의논이 되고, 그 밖의
담양, 진원, 나주목, 창평 수령들은 잘못을 덮어주고 칭찬하여 장계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국가일이 이렇고서야 절대로 평정할 이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해군 일족에 대한 일과 장정 네 명중에 두 명은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몹시 그르다고 했다.
그러니 암행어사 유 몽인은 국가의 급하고 어지러운 것은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에 당장 당한
일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이 거짓스런 말만 믿었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마치
악 목에 대한 진회의 일과 다를 것이 없다. 국가를 위하는 아픔이 더 심하다. 늦게 사정에 올라,
순천, 흥양, 우조방장, 우수사 우후, 사도, 발포, 여도, 녹도, 강진, 광양 등과 함께 활 12순을
쏘았다.
순천 갑목관이 진중에 왔다가 돌아갔다. 우수사가 당포에 왔다고 한다.
17일(병인) 맑음. 따뜻하기가 초여름과 같다. 아침에 지휘선을 연기로 그슬리기 위해서
사정에 올라가서 각처의 서류룰 결재해 보냈다. 오전 10시쯤 우수사가 들어왔다. 행수군관 정
홍수와 도훈도를 군령으로 곤장 90대를 때렸다. 이 흥명과 임 희진의 손자가 왔다. 대나무로
만든 총통을 가져다가 처음 시험해 보니, 소리는 나는 것 같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우수사가 거느린 전선은 겨우 20척이라고 하니 더욱 한심스러운 일이다.
순천, 우조방장이 와서 활 5순을 쏘았다.
19일(무진)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사정에 올라가 앉았노라니 얼마 안 되어 우조방장과 순천
부사가 오고 이 홍명도 왔다. 조금 있다가 손 충갑도 왔다. 그를 불러들여 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어 보니 감개무량한 바가 있다. 종일 이야기하다가 늦게 숙소를 내려갔다.
21일(경오) 맑고 따뜻함. 몸이 몹시 불편해서 종일 신음했다. 순천과 우조방장 어 영담이
와서 견내량 복병한 곳을 살펴보고 있다고 한다. 청주 의병장 이 봉이 순변사에게서 와서 육지의
일을 자세히 말한다. 우영공은 청주 영공의 ?부인데 해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오후 6시경에
벽방의 척후하는 장수 제 한국이 와서 고하기를, 구화역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와서 정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배를 풀어 삼도에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제 홍록이 와서 보고하기만
기다렸다.
22일(신미) 날이 거의 샐 무렵 제 홍록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선 10척은 구화역에 도착하고
6척은 춘원포에 도착했다고 한다. 또 날이 이미 새어서 미처 추격하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정찰이나 하라고 일러 보냈다.
29일(무인) 맑음. 벽방 척후장 제 한구의 보고에 의하면, 왜선 16척이 소소포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에 각도에 전령을 내려 이를 알리도록 했다.
3월
1일(기묘) 맑음. 망궐례를 행했다. 사정에 앉아서 금모포 만호를 매 때리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종사관이 돌아갔다. 어둘 무렵에 배가 떠나려고 하는데 제 한국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왜선이 이미 모두 도망했다고 하므로 가는 것을 중지했다. 초저녁에 장흥 2호선에서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3일(신사) 맑음. 아침에 전문을 보내고 사정에 앉았는데, 경상 우후 이 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수군을 많이 잡아 오지 못했다고 수사에게 곤장을 맞고 또 족장까지 치려고 하더라 하니 놀라운
일이다. 늦게 순천, 우조방장, 좌조방장, 방답, 가리포, 좌우수사, 우후들과 활을 쏘았다. 오후
6시경에 벽방 망장이 보고하기를, 왜선 6척이 오리량과 당항포 등지에 들어와서 나누어
정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즉시 전령을 내려 배들을 집합시켜 대군은 흉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정예선 30척은 우조방장 어 영담이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초저녁에 배를 띄워 지도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새벽 2시경에 떠났다.
4일(임오) 맑음. 새벽 2시경에 배가 떠나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6척을 뒤쫓아 잡아서
불태워 없애버리고, 저도에서 2척을 불태워 없앴다. 소소강에 왜선 14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과 원 수사가 함께 진격하여 토벌하도록 전령을 보내고, 고성 경계 아자음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5일(계미) 맑음. 새벽에 겸사복을 당항포로 보내서 적선을 깨뜨리고 불태웠는지 탐지하게
했더니 우조방장 어 영담이 보고하기를, 적들이 우리 군사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밤으로
도망했기로 빈 배 17척을 빠짐없이 불태워 없앴다고 한다. 경상 수사의 보고 내용도 이와
같았다. 우수사가 와서 만나고 있는데 비가 몹시 내리고 바람도 또한 미친 듯이 불어서 바로 그
배로 돌아갔다. 이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또한 적의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우조방장과
순천, 방답, 배 첨사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가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이날 저녁에 광양에서 새 배가 왔다.
6일(갑신) 맑음. 새벽에 탐망군이 보니, 적선 40여 척이 청슬로 건너 오더라는 것이다.
또 당항포의 왜선 21척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는 긴급 보고가 왔다. 늦게 거제로 향하는데
역풍으로 간신히 흉도에 이르렀다. 남해 현감이 보낸 급보에, 명나라 군사 두 사람과 왜적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들어왔으므로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를 올려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패문을
펴보니, 명나라 도사부 담종인의 적을 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저녁에 우수사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불러 보았다.
7일(을유)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이리저리 뒤치기도 편안치가 않다. 패문을 아랫 사람을 시켜서
쓰도록 시켰더니 글이 말이 아니다. 원 수사가 손 의갑을 시켜 만들어 보내게 했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병을 억제하고 일어나 앉아서 글을 만들어 정사립을 시켜 써서
보냈다. 오후 2시경에 배가 떠나서 밤 10시쯤 한산도 진중에 닿았다.
13일(신묘) 맑음.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오후에 원 수사가 와서 자기의 잘못된 일을
고백하므로 장계를 도로 가져다가, 원 사진과 이 응원 등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인처럼 차린
소위 가왜를 목잘라 바친 일은 고쳐 보냈다.
17일(을미) 맑음.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변 유헌이 본영으로 돌아가고, 순천 역시 돌아가고,
해남이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갔다. 황 득중 등은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들어갔다.
18일(병신)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다. 남해 기 효근, 소비포 이 영남, 적량 고 여우, 보성 김
득광이 보러 왔다. 보성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22일(경자) 맑음.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담 지휘 종인의 자문과
왜장의 서계를 조 파총이 가지고 갔다고 했다.
24일(임인) 맑음. 몸은 조금 나은 듯했다. 미역 60동을 따왔다. 군관 정 사립이 왜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
25일(계묘) 맑음. 사로잡혀 갔던 아이로서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 담종인이 패문을
가지고 왔던 자를 흥양으로 보냈다. 저녁에 여필과 회가 변 존서, 신 경황과 함께 왔다. 그 편에
어머님의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선산이 모두 와서 모두 산화에 연소되었는데도 아무도 이를
끄지 못했다 하니 지극히 애통한 일이다.
26일(갑진) 맑고 따뜻함. 조 방장과 방답이 보러 왔다. 발포는 휴가를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늦게 사량 만호, 사도 첨사, 소비포가 함께 보러 왔다.
29일(정미) 맑음.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웅천, 하동, 소비포
등이 와서 만났고, 장흥, 방답도 또한 와서 보았다. 저녁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이 함께 왔는데,
봉은 몹시 아파서 돌아갔다. 밤새 걱정되었다. 어둘 무렵 방 충서와 조서방의 사위 김 함이
왔다.
4월
4일(임자) 흐리다가 늦게 비가 내렸다. 아침에 원 수사의 군관 송 홍득과 변 홍달이 새로
급제하여 받은 홍패를 가지고 왔다. 경상 우병사 박 진의 군관이며 공주 박 창령의 아들인
의영이 와서 두 장수의 안부를 전했다.
12일(경신) 맑음. 순무 어사 서 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충청
수사도 함께 와서 술 세 순배를 마셨다. 원 수사는 짐짓 취한 채 광증을 부리며 무리한 말을
함부로 뇌까리니 순무 어사도 괴이함을 금치 못한다. 하는 짓이 이렇게 몹시 흉악하다.
13일(신유) 맑음. 순무 어사가 전쟁 연습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이에 죽도 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연습해 보였다. 선전관 원 사표와 금오랑 김 제남이 충청 수사를 잡아갈 일로 왔다.
14일(임술) 맑음. 아침에 김 제남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늦게 순무 어사의 배로 가서
군사의 기밀에 관해서 자세히 의논했다. 저녁에는 충청 수사의 배로 가서 작별의 술을 마셨다.
16일(갑자)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사정에 올라가 밀린 공무를 결재해 보냈다. 경상 수사의
군관 고 경운과 도훈도 및 변고에 책임을 지는 아전을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의
변고를 보고하는 일을 급히 하니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렸다. 저녁에 송 두남이 서울서
내려왔는데, 장계에 응하여 일일이 하교한 대로 시행했다.
17일(을축) 맑음. 늦게 사정에 올라 공무를 결재했다. 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거제 현령이
보고하기를, 왜선 백여 척이 본토로부터 처음 나와서 절영도로 향해 온다고 한다. 저물 무렵,
거제로 잡혀 갔던 사람 16명이 도망해서 돌아 왔다.
18일(병인) 맑음. 새벽에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적의 정세를 자세히 물으니, 평 의지는 웅천
땅 입암에 있고, 평 행장은 옹포에 있다고 한다. 충청도의 새 수사와 순천 및 우수사 우후가
오고 늦게 거제 현령도 왔다. 저녁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부슬부슬 내렸다.
22일(경오) 맑음. 바람이 시원하게 가을 날씨 같다. 장계와 조총을 올려 보내고 또 동궁에게
긴 창을 봉해 올렸다.
24일(임신) 맑음. 아침에 서울로 편지를 썼다. 늦게 영암 군수와 마량 첨사가 보러 왔다.
여러 가지 장계를 올려 보냈다.
25일(계유) 맑음.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고통스럽게 지냈다. 아침에 보성이 보러
왔다. 밤새도록 앓았다.
26일(갑술) 맑음. 병세가 몹시 중해져서 사람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곤양이 돌아갔다.
28일(병자) 맑음. 병세가 아주 좋아졌다. 경상 수사 원 균과 좌랑 이 유함이 보러 왔다.
5월
1일(무인)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사정에 올라가니 날씨가 아주 맑고 시원하다. 아침에 아들
면과 계집종 4명, 관비 4명을 내 병시중을 하게 하려고 보내 왔다. 그러나 덕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내일 돌려보내라고 일렀다.
3일(경진) 맑음. 아침에 흥양이 휴가를 고하고 돌아갔다. 군량미를 계비했다. 이름을 쓰지
않은 직첩, 즉 공명 고신 3백여 장과 유서 2장이 내려왔다.
4일(신사) 흐림. 바람이 사납게 불고 큰비가 내려 종일 그치지 않더니 밤이 되자 더욱
심해졌다. 경상 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적 3명이 중선을 타고 추도에 왔기로 잡아
놓았다고 한다. 이들을 신문해서 잡아오라고 했다. 저녁에 공 대원에게 물었더니, 왜적들은
바람을 좇아 배를 띄워서 저희들의 본토를 향해 가다가 중간에서 거센 바람을 만나서 배를
맘대로 조종할 수가 없어 표류하다가 이 섬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간사한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 설과 이 상록이 돌아왔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6일(계미) 흐리다가 늦게 갰다. 사도, 보성, 낙안, 소근들이 보러 왔다. 오후에 원 수사가
사로잡은 왜인 3명을 데리고 왔기에 문초해 보니, 이랬다 저랬다 거짓말만 한다. 할 수 없어 원
수사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하도록 했다.
8일(을유) 맑음. 원수의 군관 변 응각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의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서 적으로 하여금 무서워서 도망가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경상 우수사, 전라 우수사를 불러 의논하고 방략을 정했다.
9일(병술)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회포가 산란하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이가 된 것만 같다.
10일(정해) 비가 내림.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허다한 배들이 바다 위에
가득 차 있다. 비록 적이 침범해 온다고 해도 넉넉히 섬멸할 수 있겠다. 늦게 우수사 우후와
충청 수사가 와서 장기를 두었다. 원수 군관 변 응각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저물게 보성 군수가
왔다. 비는 종일 그치지 않는다. 아들 회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소비포가 약을 보내
왔다.
13일(경인) 맑음. 이날 금모포 만호가 보고하기를, 경상 우수사에게 소속된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잡혔었는데, 그 보자기들은 원 수사 있는 곳에 숨어 있다 하므로
사복들을 보내서 잡아오려 했더니 원 수사가 크게 노해서 사복들을 결박했다고 한다. 이에 군관
노 윤발을 보내서 풀어 주게 했다. 밤 10시경에 비가 다시 내렸다.
16일(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오더니 저녁에는 큰 비로 변하여 밤새도록 내린다. 집들이 새어
마른 데가 없으니, 여러 배에 있는 사람들의 거처가 괴로울 것이 몹시 염려된다. 곤양이 편지를
보내고, 유정이 적진 중으로 왕래하면서 수작한 초기를 보내 왔기로 내용을 보니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
20일(정유) 비는 내렸으나 큰 바람은 조금 그쳤다.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갖가지 생각이
가슴에 치민다. 호남 방백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유감스럽다.
24일(신축) 잠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오후에 우수사와 충청 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구 사직에 대한 장계를 가지고 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29일(병오) 아침에는 비가 오다가 저녁에 갰다. 웅천 및 거제, 적량들이 보러 왔다. 저물녘에
군관 정 사립이 고하기를, 남해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순천 격군을 싣고 나간다 하므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30일(정미) 흐리기만 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적들과, 도망가자고 꾄 광양 1호선
군사와, 경상 보자기 3명을 처벌했다.
6월
4일(신해) 맑음. 충청 수사, 미조항 첨사 및 웅천이 와서 보기에 종정도 놀이를 하게 했다.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 말하기를, "수군 여러 장수들과 경주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 하니 금후로는 전의 습관을 모두 고치도록 하라." 했다.
통탄함을 금할 수가 없다. 이것은 곧 원 균이 술취해서 망녕된 짓을 한 때문이다.
5일(임자) 맑음. 충청 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사도, 여도, 녹도가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밤
10시쯤 급창, 금산과 그 처자 3명이 모두 유행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이나 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자라, 하루아침에 죽어간 것이 참혹하다. 송 희립이 낙안, 흥양, 보성에 군량 독촉할 일로
나갔다.
8일(을묘) 맑기는 하난 찌는 듯 날이 더웠다. 충청 수사와 함께 활 20순을 쏘았다. 저녁에 종
한경이 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니 다행이다. 군사에 대한 공로에 따라 벼슬을 내려주는
교지가 왔다.
14일(신유) 더위와 가뭄이 심해서 섬 속이 몹시 덥다. 충청 영공, 사도, 여도, 녹도와 함께
활 20순을 쏘았는데 충청이 제일 잘 맞혔다. 이날 경상 수사 원 균이 활 잘 쏘는 부하를
거느리고 우수사의 거처에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
15일(임술) 맑음. 오후에 비가 내렸다. 신 경황이 들어오는 편에 영의정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나라 근심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윤 우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슬픈 회포를
금할 수가 없다. 순천, 보성이 보고하기를, 명나라 총병관 장 흥유가 백여 명을 거느리고 호선을
타고 바닷길로 해서 이미 진도 벽파정에 도착했다고 한다. 날짜로 계산해 볼 때 금명간 도착할
것이나 바람이 거칠어 배를 맘대로 부리지 못한 것이 닷새째다.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히 내렸다.
이것은 하늘이 백성을 돌보심이 아니랴?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한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아들 면이 더위를 먹어 몹시 앓는다고 했다. 걱정스럽다.
18일(을축) 맑음. 아침에 군관 조 추년이 전령을 가지고 왔는데, 원수가 두치에 이르러, 광양
원이 수군을 옮겨다가 복병을 정할 때에 사사로운 인정을 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군관을
보내서 그 까닭을 묻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원수는 그 서처남 조 대항의 말만
듣고 이렇게 사정을 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이 없다. 이날 경상 수사가 청했으나
가지 않았다.
20일(정묘) 맑음. 충청 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박 치공이 와서 서울 간다고 한다. 저녁에
본포에 물러가 있었던 영등 만호의 죄를 다스렸다. 탐선 이인원이 들어왔다.
21일(무진) 맑음. 충청 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마량 첨사가 보러 왔다. 명나라 장수가
물길을 거쳐 벌써 벽파정에 이르렀다는 것은 잘못 전한 말이라 한다.
22일(기사) 맑음. 조모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날 복더위가 전날보다 한결
더해서 섬 안이 찌는 것 같아, 사람들이 그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저녁부터 몸이 불편해서 두
끼니나 먹지 못했다. 오후 8시경에 소나기가 내렸다.
23일(경오) 맑음. 늦게 소나기가 왔다. 순천, 충청 수사, 우수사 우후, 가리포 첨사가 와서
만났다. 우후는 군량을 독촉할 일로 해서 나갔다. 견내량에서 산 채로 잡은 왜적에게 그들이
현상을 신문하고 또 무엇을 잘하느냐고 물었더니, 염초 굽는 일과 총 쏘는 일을 모두 잘한다고
했다.
25일(임신) 맑음. 충청 수사와 활 20순을 쏘았다. 종사관의 배행 아전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도 어사의 말이 지극히 놀라웠다.
28일(을해) 맑으나 더위가 심하다. 명종대왕의 제삿날이어서 종일 홀로 앉아 있었다. 진
무성이 벽방 망보는 것의 부정 사실을 조사하고 와서 적선이 없더라고 보고했다.
7월
2일(무인) 맑음.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이날 순천 도청과 색리, 광양 색리 등의 죄를
다스렸다. 좌도 사부들의 활 쏘는 것을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주었다. 늦게 순천
부사, 충청 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노 윤발에게 흥양 군관 이 심 및 병선색, 괄군색들을
붙잡아
오도록 군령을 주어 보냈다.
4일(경진) 맑음. 아침에 충청 수사가 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뒤에 마량 첨사, 소비포
권관이 또 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왜적 5명과 도망한 군사 1명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했다.
충청 수사와 활 10순을 쏘았다. 옥과에서 원조 사업을 한 조 응복에게 참봉 직첩을 주어 보냈다.
6일(임오)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못했다. 최 귀석이 도둑 3명을 잡아
왔다. 나는 다시 박 춘양 등을 보내서 왼쪽 귀가 떨어져 나간 그들의 괴수마저 붙잡아 왔다.
아침에 정 원명 등을 격군 정비하지 못한 죄로 가두었다.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7일(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충청 수사가 그 어머니 병이 중해서 오지 못했다. 우수사와
순천, 사도, 가리포, 발포, 녹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영남이 배를 거느리고 오려고 곤양으로
갔다. 포로로 잡혀 갔던 고성 보증인을 신문했다. 보성이 왔다.
8일(갑신)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몸이 편치 않아 여러 장수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각 관포의 공문을 처결해 보냈다. 저녁에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온 고성
사람을 직접 신문했다. 광양 송 전이 병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낙안과 충청 우후가 온다고
했다.
9일(을유) 바람. 아침에 충청 우후 원 유남이 교서에 숙배했다. 늦게 순천, 낙안, 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의, 격군에 대해서 등한히 하고 기일을 어긴 죄를 다스렸다. 가리포 이 응표와
임치의 홍 견, 소근포 박 윤, 마량 첨사 강 응호 및 고성 조 응도가 왔다.
11일(정해) 궂은비가 내리고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장계를 친히 기초했다. 경상 순무의
공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오후에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봉학도도 함께 쏘았다. 윤 언침이 점고를 받기 위해 왔기에 점심을 먹여 보냈다. 저물게
비바람이 사나와지더니 밤새 그치지 않았다.
13일(기축) 비.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떤지 생각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보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몹시 길한 괘다. 다시 짚었더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 같다.'는 괘가 나온다. 두 괘가 모두 길하다. 조금 마음이 풀린다. 또 유정승에 대해서
점쳤더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온다. 다시 점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온다. 몹시 길한 괘다. 비가 저녁에 내렸다. 홀로 앉아 있는 심사를 이길
수가 없다. 늦게 송 전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섬을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 첨사와 순천이
와서 만나고 어둘 무렵에 돌아갔다. 비가 내릴지 갤지를 점쳐 보았더니, '뱀이 독기를 내뿜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온다. 장차 큰비가 내릴 모양이니 농사일을 위해서 근심스럽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린다.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왔다.
15일(신묘) 비가 내리다가 늦게 맑음. 아침에 조카 해와 종 경이 왔다. 면이 차도가 있다는
말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 없다. 조카 분의 편지를 보니 아산 산소들과 가묘가 모두 별일
없고, 어머님도 편안하시다니 다행한 일이다. 그 삼촌이 처음 듣고 마음 아파했고, 또 들으니 그
어머니의 병세도 위중하다고 한다. 활 10순을 쏘았다. 수루에 올라 거닐 때 박 주사리가 급히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장수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렀는데, 곧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이에 즉시
삼도에 전령을 내려 죽도로 진을 옮기게 하고 거기서 방을 보냈다.
17일(계사) 맑음. 새벽에 포구로 나가서 진을 쳤다. 오전 10시경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
홍유가 병호선 5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바로 영문에 이르더니 육지로 내려서 함께
이야기 하자고 한다.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먼저 사정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은 배에서 내려 곧 올라와서 함께 앉았다. 먼저 바닷길 만리에 여기까지 온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고 말하니, 대답하기를 지난해 7월에 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왔더니 요동 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길로 오는 도중에 돌섬과 암초들이 많고, 또 장차 강화를 한다고 하니 갈 것이
없다고 간절히 말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동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시랑 손 광과 총병
양 문들에게 보고했다고 하고, "금년 3월 초순에 배로 떠나 왔으니 무슨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한다. 나는 차를 들라고 청하고, 다시 술을 권하면서 심정이 몹시 강개했다. 또 밤이 깊은 것은
모르고 적의 형세에 대한 것을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20일(병신) 맑음. 아침에 통역이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장수가 남원에 있는 유 총병에게로
가지 않고 바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처음에 파총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유 총병에게 전해졌는데 지금 여기에서 중지하고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반드시 사람들의 말이 있을 것이니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파총은 이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 필마로 혼자 갔다가 만나보고 즉시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 고 한다. 아침 식사 후에 파총은 내 배로 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다가 이별하는 술
7잔을 마신 뒤에 닻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서 거듭 서운한 뜻으로 작별했다. 이내 경수와
충청, 순천, 발포, 사도와 함께 사인암에 올라가 종일 술마시고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21일(정유) 맑음. 아침에 명장과 문답한 것을 서류로 꾸며서 원수에게 보고했다. 저녁에
수루에 올랐더니 순천이 와서 이야기했다. 오후에 흥양 군량선이 들어왔는데, 색리와 선주에게
족장을 호되게 때렸다. 늦게 소비포가 와서 말하기를, 기한에 대지 못했다고 해서 원 수사에게
곤장 30대를 맞았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26일(임인) 맑음 아침에 각 관포의 공문을 결재해 보냈다. 식사 후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았는데, 순천과 충청 수사가 와서 보았다. 늦게 녹도 만호가 도망간 군사 8명을 잡아 가지고
왔기에, 그 중에서 괴수 3명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때렸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께서는 편안하시고 면의 병도 소복된다고 하다. 허실의 병세는 점점
중하다고 하니 걱정이다. 유 홍과 윤 근수가 작고했다고 하고, 윤 돈이 종사관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신 천기도 들어오고, 어둘 무렵에 신 제운이 와서 보았다. 노 윤발이 홍양의 아전과
감관을 붙잡아 가지고 들어왔다.
28일(갑진) 맑음. 흥양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신 제운이 주부의 직첩을 받아 가지고 갔다.
늦게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것을 감독했다. 의능이 그 일을 맡아서 했다.
8월
1일(병오) 비. 몸이 편치 않아 수루에 앉아 있다가 곧 마루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낙안 김
준계가 강집을 데리고 군량 독촉하는 일로 군율을 받들어 공초하고 내어 보냈다. 비가 밤까지
계속되었다.
2일(정미) 비.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니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낳을
달이 아니었기로 비록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늦게 수루 위에 옮겨 앉아, 충청 수사, 순천 권
준 및 마량 강 응호와 함께 내렸다. 송 희립이 와서 고하기를, 흥양 훈도도 작은 배를 타고
도망했다고 한다.
6일(신해) 맑다가 비가 내렸다. 충청 수사와 활 10순을 쏘았다. 저녁에 장흥 황 세득이
들어오고 보성이 나갔다.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고 면도 차츰 차도가 있다고
한다.
12일(정사) 흐림. 늦게 충청 수사 및 순천과 함께 할을 쏘았다. 소비포, 웅천도 왔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이 전령을 가지고 왔는데, 직접 만나서 군사일을 의논하자고 한다. 그래서 오는
17일에 사천으로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13일(무오) 맑음. 오전 10시쯤 배로 내려가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갔다. 따로
날랜 장수를 뽑아서 춘원 등지로 보내서 적을 기다려 무찌르게 했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도
없이 잔잔한데 해를 시켜 저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두었다.
17일(임술) 흐리고 늦게 비가 내림. 원수가 낮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하므로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사천 원의 사처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간의 예의를 마치고 나서 함께 이야기했다. 그는 오해했던 것이 많이 풀리는 빛이요,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다. 술을 내놓고 마시기를 청하여
8순을 돌렸다. 원수는 몹시 취해서 자리를 파하고, 나도 숙소로 돌아오니 박 종남, 윤담이 와서
만났다.
19일(갑자) 맑음. 저물게 잠깐 비가 내렸다. 새벽에 사량 뒤쪽에 이르렀는데 원 수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칡 60동을 거두고 나니 그제야 원 수사가 왔다. 늦게 출발하여 당포에 이르러
잤다.
25일(경오) 맑음. 사도가 휴가를 얻어 집에 가기고 9월 초에 돌아오라고 일렀다. 사정으로
내려가 활 6순을 쏘았다.
26일(신미) 맑음. 아침에 각 관포의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흥양 보자기 막동이란 자가 장흥
군사 30명을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사형에 처하여 효시 했다. 늦게 사정에 가서 활을
쏘았다. 충청 우후 원 유남도 와서 함께 쏘았다.
28일(계우) 밤 2시경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는데, 비는 아침 6시경에 갰으나
바람은 크게 불어 밤새 그치지 않았다. 회가 잘 갔는지 어쩐지 몰라 몹시 염려스럽다. 진도 원
김만수가 보러 왔다. 원수의 장계로 해서 문책하는 글이 내려 왔는데 이것은 장계의 오해에서 온
것이다.
29일(갑술) 맑고 북풍이 크게 불었다. 늦게 사정에 올라가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해남 현감
현 집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 응지가 세상을 떠났다니 슬픈 일이다.
30일(을해) 맑고 바람도 없음. 아침에 해남 원인 현집이 와서 보았다. 늦게 충청
우후, 웅천, 거제, 소비포가 모두 와서 만났다. 허 정은도 왔다.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중하다고 하니, 이미 생사가 판단 났는지 모르겠다. 나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딴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랴? 마음 아픈 일이다. 김 양간이 서울에서
왔는데, 영의정의 편지와 심 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다. 원 수사의 일은
몹시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고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니, 이것은 천고에 두고 두고
탄식할 일이다. 곤양이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도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한스러운 일이다. 밤
2시경이 지나도 심사가 산란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9월
3일(무인) 가랑비가 내림.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에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도 계획을 세워 적을 토벌하려고 하지 않는다."했다. 그러나 3년 동안
바다 위에 있었지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기를 결단하고 원하여 소굴
속에 있는 적이어서 경솔히 앞으로 나가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서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밤 10시경에 흥양이 내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이 될 때까지 이야기 하다가
돌아 갔다.
7일(임오) 맑음. 아침에 순천 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가 초 10일쯤 본부에 도착되고
좌의정도 돈다고 했다. 몹시 불행한 일이다. 순천이 진중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었는데,
그들이 모두 사로잡혔다 한다. 친히 보지는 않은 일이지만 해괴하기 짝이 없다.
9일(갑신) 맑았다가 비. 여러 장수가 활을 쏘았다. 삼도가 모였는데 원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김 천지도 함께 활을 쏘다가, 돌아가 경상도 부대에서 잤다.
10일(을유) 맑음. 바람도 조용했다. 사도가 사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김 경숙이
창신으로 돌아갔다.
11일(병술) 맑음. 일찍 수루에 나가, 남평 색리와 순천 격군으로서 세 번이나 군량을 훔쳐 낸
자를 처형했다. 각 관포의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늦게 충청 수사가 보러 왔다. 소비포는 원
수사가 모함하려고 하는 까닭에 달밤을 타 본포로 돌아갔다.
12일(정해) 맑음. 일찌기 김 암이 방에 왔다. 늦게 우수사, 충청 수사가 오고, 장흥이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크게 취해서 헤어졌다.
13일(무자) 맑고 따뜻함. 아침에 충청 우후가 와서 만났다. 또 조도 어사 윤 경립의 장계
초안 2통을 보니, 하나는 진도 군수의 파면을 청한 것이요, 하나는 수군과 육군을 서로 바꾸어
뽑지 말 것과 수령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뜻이 자못
고식적이었다. 저녁에 하 천수가 자계의 회답과 홍패 97장을 가지고 왔다. 영상의 편지도 역시
가지고 왔다.
20일(을미) 바람은 계속되나 비는 멎었다. 홀로 앉아서 간밤 꿈을 생각한다. 꿈에 바닷 속에
있는 외로운 섬이 달려가다가 내 눈앞에 와서 주춤 섰다.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아서 모두 놀라
달아나고 나만이 혼자 서서 끝까지 그것을 구경했다. 그 광경이 매우 장쾌했다. 이것은 왜적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갈 징조다. 체찰사의 공문이 왔다.
22일(정유) 아침에 사정에 앉았노라니 우수사 및 장흥이 왔다. 경상 우후도 와서 명령을 듣고
물러갔다. 원수의 밀서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출동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23일(무술) 맑고 바람이 드셈. 일찌기 사정에 나가서 공문을 결재했다. 원 수사가 와서
군사의 기밀을 의논하고 갔다. 낙안 군사와 본영 군사 51명, 방답 수군 45 명을 점고했다. 고성
인민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는 글을 올렸다. 진주 강 운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온 소관 황
천석을 몹시 신문했다. 광주에 가두어 둔 창평현 아전 김 의동은 사형에 처하라는 전령을
내려보냈다. 저녁에 충청 수사와 마량 첨사가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27일(임인) 아침에 맑다가 저물게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 늦게 배를 타고 포구로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떠나서 적도 앞바다에 대었다. 곽 첨지, 김 충남, 한 별장, 주 몽룡 등이 모두
와서 약속한 뒤에 각각 원하는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저녁에 선 병사가 배에 왔으므로 본영
배에 타게 했다. 저물녘에 체찰사의 군관 이 천문, 임 득의, 이 홍사, 이 충길, 강 중룡, 최 여해,
한 덕비, 이 안겸, 박 진남 등이 왔다. 밤에 잠시 비가 내렸다.
29일(갑진) 맑음. 배를 띄워 장문포 앞바다로 돌입하니 적의 무리들은 험한데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높이 누각을 짓고 양쪽 봉우리에서 보루를 쌓고서 조금도 나와서 대항할 빗이
없다. 선봉 적선 2 척을 무찔렀더니 즉시 육지로 올라가서 도망가 버린다. 빈배를 불태워
없애고, 칠천량에서 밤을 보냈다.
10월
1일(을사) 새벽에 떠나서 장문포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와 전라 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무르고 있다. 내가 충청 수사 및 선봉 여러 장수들과 바로 영등으로 들어가니, 흉적들은
물가에 배를 걸쳐 놓고 아무도 나와 대항하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오니,
사도 2호선이 육지에 배를 대려고 할 무렵 적의 작은 배가 바로 들어와서 불을 던졌다. 비록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분한 일이다. 우수사의 군관과 경상 수사의 군관은 그 죄를 중하게
다스렸다. 밤 10시나 되어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4일(무신) 맑음. 곽 재우, 김 덕령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백 명을 뽑아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선봉은 먼저 장문포로 보내서 드나들면서 싸움을 돋우라고 했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쳐들어가서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은 어찌할 줄을 몰라 동서로 달아난다.
육지의 군사는 왜적 하나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도로 배로 내려온다. 해가 저문 뒤에
칠천량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선전관 이 계명이 표신과 선유의 교서와 임금이 주는 초피를
가지고 왔다.
6일(경술) 맑음. 일찍 헌봉을 시켜 장문포 적의 소굴에 보냈더니 왜적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거기에 쓰기를, "일본은 명나라와 지금 화친을 맺는 중이니 서로 싸울 것이 아니다"
했다. 왜놈 1명이 칠천량 산기슭에 와서 항복하려 하므로 곤양이 불러서 배에 태우고 물어보니,
이는 곧 영등에 있는 왜군이었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9일(계축) 맑음. 아침에 정자에 이르니 첨지 김 경로, 첨지 박 종남, 조방장 김 응함, 조방장
한 명련, 진주 목사 배 설, 김해 부사 백 사림 등이 모두 돌아간다고 한다. 김과 박은 종일 활을
쏘았다.
12일(병진) 맑음. 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 늦게 우수사 및 충청 수사가 왔다. 경상 원
수사가 적 토벌한 일을 자기가 직접 장계를 올리고자 하므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비변사의
공문에 의하여,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를 좌도에 15벌, 우도에 10벌, 경상도에
10벌, 충청도에 5벌을 보내 왔다.
15일(기미) 맑음. 박 춘양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7일(신유) 맑음. 아침에 어사에게 사람을 보냈더니 어사는 식사 후에 오겠다고 한다. 늦게
우수사가 왔고 어사도 역시 왔다.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거짓말한 것을 많이
말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원 수사도 또 왔는데, 그 흉악하고 거짓스런 꼴이란 말할 수가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왔다.
21일(을축) 맑고 조금 흐림. 종사관도 나가고 우후도 나갔으며 발포도 또 나갔다. 늦게
항복한 왜적 3명이 원 수사에게서 왔기에 문초를 했다. 영등 만호가 왔다가 밤이 늦어서
돌아갔다. 그에게 작은 아이가 있다기에 데려오라고 말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25일(기사) 맑고 서풍이 크게 불다가 밤에야 그쳤다. 몸이 불편하여 방에 있었다.
남도, 거제가 오고 영등이 와서 한동안 이야기했다. 전 낙안 군수인 첨지 신 호가 왔는데,
체찰사의 공문과 목화, 벙거지, 정목 1동 등을 가져 왔다. 함께 의논하다가 밤 되어 물러갔다.
26일(경오) 맑음. 빙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신 첨지에게서 들으니 김 상용이
이랑이 되어 상경할 때, 남원 부내에 들어가 자면서 체찰사를 보지 않고 갔다고 한다. 세상일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30일(갑술) 맑음. 적을 수색하고 토벌하러 배를 들여보내고 싶으나 경상도 전선이 없어
오기를 기다렸다.
11월
3일(정축) 맑음. 아침에 김 천석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 3명을
데리고 왔다. 수색 토벌을 나갔다 돌아온 것은 밤 10시쯤이었다.
4일(무인) 맑음. 항복한 왜인들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전문 가져갈 유생이 왔다.
5일(기묘) 흐리고 이슬비가 내렸다. 송 한련이 큰 생선 10마리를 잡아 왔다. 순변사가 그
군관을 시켜서 항복한 왜병 1명을 보내 왔다. 밤새 큰비가 내렸다.
7일(신사) 늦게 맑음. 항복한 왜병 17명을 남해로 보냈다. 늦게 금갑도 망호, 사도 첨사, 여도
만호, 영등 만호가 모두 왔다. 이날 낮에 신 첨지가 원수에게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원수는
수군에서 머무른다고 한다.
13일(정해) 맑음. 바람이 자니 날씨가 따뜻하다. 신 첨지와 아들 회가 이 희남, 김 숙현과
함께 본영으로 갔다. 종 한경도 또한 은지 김 정휘의 집에 가라고 명했다. 장계도 올려 보냈다.
원수는 방어사 군관을 시켜서 항복한 왜병 14명을 데리고 왔다. 저녁에 윤 련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망발된 말이 많으니 우습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있으니 세 자식이 의지할 곳이 없는 때문이다. 15일이 아버님 제사여서 나가지 않았다. 밤에
달빛이 낮과 같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뒹굴었다.
15일(기축) 맑음. 봄날처럼 따뜻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참으로 재변이다.
아버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고 홀로 방 안에 앉았으니 슬픈 회포를 말할 수 없다. 날이
저문 뒤에 탐선이 돌아왔는데, 순천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져 왔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21일(을미) 맑고 아침엔 바람도 잤다. 조카 뇌가 나갔고, 이 설은 포폄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종금선, 우년, 이향, 수석, 행보들도 역시 나갔다. 김 교성, 신 경황이 나갔고, 남도포,
녹도도 나갔다.
23일(정유) 맑고 따뜻하다. 흥양 군량과 순천 군량을 받아 들였다. 저녁 때 이 경복이 소실을
데리고 들어왔다. 들으니 순변사들이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27일(신축) 맑음. 식후에 대청에 나가 앉아서 좌우 도로 갈라 보내둔 항복한 왜인들을 모조리
데려오게 하여 총 쏘는 연습을 시켰다.
-11월 28일부터 12월 말까지 빠졌음.-
@ff
4. 을미년 일기
1595년 1월 1일__12월 18일
한산도의 밤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못 드는 밤
새벽 달 창 너머로 칼과 활을 비추네
1월
1일(갑술)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새벽엔
여러 장수들과 색군들이 와서 해가 바뀐 인사를 한다. 원 전, 윤 언심, 고 경운 등이 와서 보았다.
색군들에게 술을 먹였다.
7일(경진) 맑음. 흥양과 방 언순과 함께 이야기했다. 남해에서 항복한 왜인 야여문이 와서
인사를 드렸다.
21일(갑오)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장흥이 왔는데, 그에게서 순병사 이 일의 처사가 극히
형언할 수 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를 쓴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우습다.
26일(기해)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탐선이 들어와서 흥양을 잡아갈 나장이 온다고 한다.
2월
1일(갑진)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대청에 나가 보성의 기한 늦은 죄를 다스리고, 도망가던
왜인 2명을 처형했다. 금부 나장이 와서 흥양을 잡아갈 일을 전했다.
4일(정미) 맑음. 몸이 불편하다. 장흥과 우후가 왔다. 원수부의 회답 공문과 종사관의 답장도
왔다.
11일(갑인) 비가 내리다가 늦게 잠깐 갰다. 황 숙도와 허 주와 변 존서가 왔다. 종일 공무를
보았다. 저물게 임금의 분부가 왔는데, 둔전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17일(경신) 맑음. 군사들의 아침밥을 재촉해 먹여 가지고 바로 우수영 앞바다에 이르니, 성
안에 있던 왜놈 7명이 우리 배를 보고 도망가므로 그대로 배를 돌려 나왔다. 장흥과 신 조방장을
불러 종일 계책을 의논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20일(계해) 맑음. 우수사, 장흥, 신 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 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29일(임신) 맑음. 고 여우가 창신도로 나갔다. 배수사가 와서 둔전 만들 일을 의논했다.
3월
1일(갑술) 맑음. 삼도의 과동한 군사들을 모아 놓고 위에서 하사하시는 무명베를 나누어
주었다.
9일(임오) 맑음. 늦게 대청으로 나갔다. 방답의 새 첨사 장 린, 온 포의 새 만호 이 담이
공적에 대한 인사를 행했다. 진주 이 곤변이 보러 왔다.
11일(갑신) 흐리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사도시의 주부 조 형도가 와서, 좌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항복한 왜병들의 일을 말하기를, "수길이 출병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종시 아무런
보람도 없기 때문에 군사를 더 내어 부산에 진영을 만들려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7일(경인) 비가 멎을 것 같다. 아들 면과 허 주와 박 인영 등이 돌아갔다. 이날 군량을
계산하여 표를 붙였다. 충청 우후가 보고하기를, "수사 이 계훈이 불을 내고 물에 빠져 죽었으며
군관과 격군 도합 1백 40여 명이 불타 죽었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늦게 우수사가
보고하기를,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온 항복한 왜병 심안은기를 문초했더니, 그는 영등에
주둔했던 왜병인에 그 장수 심 안돈이 그 아들을 자기 대신 구고 쉬 돌아갈 것이라." 한다.
20일(계사) 비가 세차게 내린다. 식후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배 수사를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밀포의 둔전 만든 곳을 살펴보려고 간다고 했다.
23일(병신)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세 조방장과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리에 올라 보니
3면으로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쪽으로 뚫려 있다. 소포 세울 자리를 닦고 거기
앉아서 돌아갈 것을 잊고 있었다.
27일(경자)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우수사가 와서 종일 활을 쏘았다. 어둘 무렵에 박
조방장에게로 가서 발포, 사도, 녹도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표마와 종 금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29일(임인) 맑음. 식사 후에 두 조방장과 이 운룡, 조 계종과 함께 활 23순을 쏘았다. 배
수사가 순찰사에게서 왔고, 미조항 첨사도 진에 왔다.
4월
1일(계묘) 맑고 큰 바람이 불었다. 들으니 남원 유생 김 굉이 해군에 관한 일로 진중에
왔다고 하므로 불러서 함께 이야기했다.
10일(임자) 맑음. 구화역 역졸이 와서 아뢰기를, 적선 3척이 또 역 앞에 왔다고 한다. 이에
삼도 중위장들에게 각각 배 5척씩을 주어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가서 무찌르게 했다.
13일(을묘) 흐리고 비. 세 조방장이 같이 왔다. 장계와 편지 4통을 봉해서 거제 군관 편에
올려 보냈다. 저녁에 고성 현령 조 응도가 와서 적들의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거제에 있는
적이 웅청에 군사를 청하여 밤에 기습하려고 한다."고 한다. 비록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런
염려가 없지 않다.
17일(기미) 맑음. 동북풍이 세차게 불었다. 식후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세
조방장과 활 15순을 쏘았다. 배 수사가 왔다가 곧 해평장 논치는 곳으로 갔다. 미조항 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20일(임술) 맑음. 늦게 우수사에게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 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왔는데 남해를 효시 하라고 했다.
24일(병인) 맑음. 이른 아침에 울과 조카 뇌, 완을 어머님 생신에 음식 마련할 일로 보냈다.
오정 때 강 천석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인 망기시로는 무성한 풀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을 잡았고, 한 놈은 물 속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그 왜인을 곧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나누어 맡긴 항복한 왜인을 모두 불러 모아서 머리를 베라고 했다. 그러나 망기시로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베임을 당했으니 가위 독한 놈이다.
25일(정묘) 맑고 바람도 없음. 구화역의 역졸 득복이 경상 우후의 보고를 가지고
왔는데, "왜병의 배 대, 중, 소 모두 50여 척이 웅천에서 나와서 진해로 향한다."한다. 이에 오 수
등을 정찰하러 내보냈다. 흥양이 와서 보았다. 사량 만호 이 여념이 돌아갔다. 아들 회와 조카
해가 돌아와서 어머님이 편안하시단 말을 들으니 다행이다.
27일(기사) 맑고 바람도 없음. 몸이 불편하다. 권 동지, 미조항 첨사, 영등 만호가 와서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밤 3경에 우수사가 적을 탐색하고 돌아왔는데 아무런 적의 종적이 없다고
한다.
5월
2일(갑술) 맑음. 밤 10시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고, 종사관이 본영에
도착했다고 한다.
11일(계미) 늦게 비가 내렸다. 두치 군량과 남원, 순창, 옥과 등 합쳐서 68석을 실어 왔다.
14일(병술) 궂은비가 그치지 않는다. 종일, 밤새도록 내렸다. 아침 식사 후에 대청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사도가 와서 고하기를, 흥양이 받아간 전선이 돌에 걸려서 엎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장 최 벽과 십선장 도훈도를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다.
17일(기축) 맑음. 아침에 나가서 본영 각 배의 사부와 격군으로서 급료 받은 사람들을
점고했다. 소금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21일(계사) 흐림.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려는데, 항복한 왜인들이 고하기를, 저희들 동료 중에
산소라는 자가 흉칙한 일이 많으니 죽여야겠다고 한다. 이에 그 왜인을 시켜 목을 베게 했다. 활
20순을 쏘았다.
29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사직의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금만 공을 세웠는데,
임금이 총애가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서 티끌만으로 보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6월
3일(갑진) 흐림. 아침에 남해가 보고하기를, 해평군 윤 두수가 남해에서 본영으로 건너온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곧 배를 정비하고 현 덕린을 영으로 보냈다. 사량 만호가 양식이
떨어졌다고 보고하고 곧 돌아갔다.
13일(갑인) 흐림. 새벽에 경상 수사 배 설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그 대신 권 준이
임명되었으며, 남해 기 효근은 유임되었다 하니 놀랄 일이다. 어둘 무렵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금오랑이 벌써 영내에 도착했다.
16일(정사) 맑음.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순천 칠선장 장 일이 군량을 도둑질하다가 잡혔기
때문에 처벌했다. 오후에 두 조방장과 미조항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24일(을축) 맑음. 우도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에 부정을 조사했다. 여기에서 12명을 잡아내고
그 대장까지 처벌했다.
27일(무진) 맑음. 허 주와 조카 해와 기 운로들이 돌아갔다. 신 조방장과 거제와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30일(신미) 맑음. 문 어공이 삼을 사들일 일로 나갔다. 방답, 녹도, 신 조방장과 활 15순을
쏘았다.
7월
1일(임신)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지 마음이 산란하다. 종일토록 누웠다 앉았다 했다.
3일(갑술) 맑음. 아침에 충청 수사에게 가서 문병하니 많이 덜해졌다고 한다. 늦게 경상 수사
권 준이 와서 이야기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밤 10시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 하나 입맛이 달지 않으시다고 한다. 민망스러운 일이다.
4일(을해) 나주 판관 원 종의가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 전들이 산 일터에서 노
만들 나무를 가져와 바쳤다. 식후에 대청으로 나갔다. 미조항과 웅천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도 향각궁으로 내기 활을 쏘아서 내 군관 노 윤발이 1등을 했다. 저녁에 임 영과 조
응복이 왔다.
5일(병자) 맑음. 대청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늦게 박 조방장 종남과 신 조방장 호가 왔다.
방답이 활을 쏘았다. 임 영이 돌아갔다.
7일(무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음. 경상 수사, 두조방장, 충청 수사가 왔다. 방답, 사도 등을
시켜서 편을 짜서 활을 쏘게 했다. 경상 우병사에게 온 유지에, "국가의 화가 참혹하고 종묘
사직의 원수가 남아 있어, 신의 부끄러움과 사람들의 원통함이 하늘과 땅에 사무쳤는데도 이것을
아직도 깨끗이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이 하늘을 이고 있으니, 대체로 혈기 있는
자로서야 그 누가 팔뚝을 걷고 마음을 썩이면서 그놈들과 살을 저미고자 하지 않으랴.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 보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이 없는데도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무도한
말을 지껄이고 자주 사사로이 편지를 통하여 현저히 저들을 높이고 아첨하는 태도가 있어,
수호하고 화친한다는 말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해서 부끄러움을 끼치고 혼란을 열어
놓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이 죄는 군율을 적용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고 돈독하게 타이르고 경고함이 정녕했다. 그런데도 고집을 더 세우고 스스로 죄의
구렁으로 빠지고 있으니, 나는 보기에 몹시 해괴하고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에 비변사 낭청
김 용을 보내서 구두로 내 뜻을 전하는 것이니 경은 마음을 고치고 힘써서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말라."하였다. 이것을 보니 황송함을 이길 수 없다. 김 응서란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허물을
늬우치고 힘쓴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만을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10일(신사)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다. 늦게 우수사와 이야기했다. 군량이 떨어졌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참으로 민망스러운 일이다. 술 몇 잔을 먹고 밤이 깊어 수루 위에
누웠으니 초생달 빛은 다락에 가득하고 만 갈래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15일(병술) 맑음. 늦게 대청으로 나갔다. 두 조방장과 여러 사람이 보러 왔다. 경상 수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18일(기축) 맑음.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서 박, 신 두 조방장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오후에
떠나서 저녁에 지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3경쯤 되어 거제 현령이 와서
말하기를, "장문에 있던 적의 소굴이 이미 모두 비어 있고, 다만 30여 명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사냥하는 왜인들을 만나 하나는 활로 쏘아 죽이고, 하나는 산 채로 잡아 왔다고 한다.
4시경에 떠나서 견내량으로 돌아왔다.
21일(임진)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들으니 우후가 들어온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에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 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누어 보냈다. 어둘 무렵에
회와 울과 우후가 같은 배로 섬 밖에 도착했다. 아들들이 돌아왔다.
28일(기해)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배로 내려가 삼도가 합하여 포구 안에 진을 쳤다. 오후
2시에 어사 신 식이 진에 왔다. 곧 대청으로 내려가 한참동안 이야기하다가, 각 수사와 세
조방장을 청해서 함께 이야기했다.
8월
1일(신축) 비바람이 거세다. 어사 신 식과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곧 배로 내려가 순천 등
다섯 고을 배들을 점고했다. 저문 뒤에 어사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같이 이야기했다.
3일(계묘) 맑음. 어사는 늦게 경상도 진으로 가서 점고했다. 저녁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7일(정미) 비. 아침에 아들 울과 허 주와 현 덕린과 우후가 같은 배로 왔다. 늦게 두 조방장
및 충청 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표신을 쥔 선전관이 광후가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원수가 3도의 해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밤을
세웠다.
12일(임자) 흐림. 일찍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늦게는 두 조방장과 활을 쏘았다. 김 응경이
경상 수사 원 균에게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수사에게 가서 활쏘기 내기를 해서 배 영수가 또
졌다고 한다.
16일(병진) 비가 개지 않고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심회가 어지럽다. 두 조방장을 불러서
같이 이야기했다.
20일(경신) 맑음.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는다. 권 수사, 우수사, 발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10시에 전령이 왔다. 자정이나 되어 배를 타고 곤이도에 이르렀다.
21일(신유) 흐림. 늦게 소비포 앞바다에 닿으니 전라 순찰사, 군관 이 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강 응호, 오 계성이 함께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물녘에 사천 땅 침도 앞에 배를 대고
잤다.
23일(계해) 맑음. 체찰사에게로 갔더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어야겠다는 말이 많았다. 호남 순찰사는 헐뜯어 말하는 것이 많으니 탄식스러운
일이다. 늦게 나는 김 응서와 함께 촉석루에 가서 장수들이 패전해 죽은 곳을 보고 참혹하고
가슴 아픔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다가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25일(을축) 맑음.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체찰사, 부사, 종사관과 함께 모두 내 배에 타고
오전 8시경에 떠나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진을 합칠 여러 곳과 또 적과 접전하던 곳들을 가리켜
점검하면서 종일토록 의논했다. 그 결과 곡포는 평산포와 합하고, 상주포는 미조항과
합하고, 적량은 삼천포와 합하고, 소피포는 사량과 합하고, 가배량은 당포와 합하고, 지세포는
조라포와 합하고, 제포는 웅천과 합하고, 율포는 옥포와 합하고, 안골은 가덕과 합하도록
결정지었다. 저녁에 진에 도착하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사례를 모두 마친 뒤에
헤어졌다.
28일(무진) 맑음. 이른 아침에 체찰사, 부사, 종사관과 함께 수루 위에 앉아서 여러 가지
폐단되는 일들을 의논했다. 식전에 배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나갔다.
29일(기사) 맑음. 일찍 나가 공무를 보았다. 경상 수사 권 준이 체찰사에게서 왔다.
9월
3일(임신) 맑고 동풍이 크게 불었다. 아우 여필과 아들 울과 유헌이 돌아갔다. 강 응호가
도양장의 추수할 일로 함께 돌아갔다. 정 항, 우 수, 이 섬이 적을 탐지하고 돌아왔는데, 영등의
적진은 2일부터 비었고, 누각과 모든 굴들을 다 태워 없앴다고 한다. 웅천 사람으로서 적에게
투항했던 공 수복 등 17명을 달래서 데리고 왔다.
7일(병자) 맑음. 식후에 경상 우수사가 왔다. 충청도 병영의 배와 서산, 보령의 배들을 내어
보냈다.
10일(기묘) 맑음. 오후에 충청 수사 선 거이와 두 조방장과 함께 우수사 이 억기에게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14일(계미) 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았다.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와서 함께 작별하는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면서 준시에 말하기를, "북쪽으로 갔을
때도 함께 고생했고, 남쪽으로 와서도 사생을 같이했네. 한 잔 술 오늘 밤 달이 내일은 서로
떠나는 정이 되네."라고 했다.
16일(을유) 맑음. 나가서 공무를 보고 장계를 봉해 올렸다. 이날 저녁 월식하고 밤들어
밝아졌다.
17일(병술) 맑음. 식후에 서울로 편지를 써 보냈다. 김 희번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유자
30개를 영의정 유 성룡에게 보냈다.
21일(경인) 맑음. 박 조방장을 작별하려 했으나 경상 수사와 작별하기에 해가 저물어서 가지
못했다.
23일(임진) 맑음. 태조대왕의 황후 한씨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웅천
사람으로서 사로잡혀 갔던 박 녹수, 김 회수가 와서 보고, 겸하여 적의 정상을 말해 주었다. 이에
각각 무명 1필씩을 주어 보냈다.
28일(정유) 식후에 집 짓는 데로 올라갔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가 와서 보았다. 회와 울도
기별을 듣고 왔다.
10월
3일(임인) 맑음. 해평군 윤 근수의 공문을 구례 선비가 가져 왔는데, 김 덕령이 김윤선들과
함께 죄 없는 사람을 대려 죽이고 바다 진영으로 도망해 들어갔다고 한다. 이에 이들을 찾았더니
9월 10일경에 보리씨를 바꾸려고 진에 왔다가 이내 돌아갔다고 한다.
5일(갑진) 이른 아침에 수루에 올라가서 역사하는 것을 감독했다. 수루 위 바깥 서까래에
흙을 발랐다. 항복한 왜인들을 시켜 흙을 운반하게 했다.
13일(임자) 맑음. 일찍 새로 세운 수루에 올라가서, 항복한 왜인들을 시켜 대청에 흙 올려
이는 일을 필역하게 했다. 송 홍득이 군관을 따라서 갔다.
17일(병진) 맑음. 아침에 가리포와 금갑도가 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진주 한 응귀, 유
기룡들이 계원미 20석을 가져와 바쳤다. 부안 김 성업과 미조항 첨사 성 윤문이 와서 만났다. 정
항은 돌아갔다.
21일(경신) 맑음. 이 설이 말미를 청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늦게 우후, 이 정충, 금갑 만호 가
안책, 이진 총관들이 보러왔다. 바람이 몹시 싸늘하다.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으므로 공
대원을 불러서 왜적의 정형을 물었다.
26일(을축) 맑음. 들으니 임 달영이 왔다고 한다. 불러서 제주 가는 일을 물었다. 송 홍득, 송
희립 등은 사냥을 갔다.
11월
3일(신미) 맑음. 황 득중이 들어와서 말하기를, 왜선 2척이 청등을 거쳐 흉도에 이르러
해북도에 가까이 와서 불을 지르고, 춘원포 등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11일(기묘) 맑음. 새벽에 임금의 탄신 축하례를 행했다. 본영의 탐선이 들어왔다. 변 주부, 이
수원, 이 원룡 등이 왔다. 그 편에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갑다. 저녁에 이
의득이 왔다.
13일(신사) 맑음. 도양장에서 추수한 벼와 콩이 8백 20석이었다.
15일(계미) 맑음. 아버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앉아 아버님을 그려
보노라니 그 정회를 이길 수가 없다.
16일(갑신) 항복한 왜병 여문연기와 야시로 등이 와서 고하기를, "지금 왜병들이 도망하려
한다."고 한다. 이에 우후를 시켜 잡아다가 그 주모자 준시 등 두 명의 왜인을 목베었다. 경상
수사와 우후, 웅천, 방답, 남도, 어란, 녹도는 내어 보냈다.
18일(병술) 맑음. 어 응린이 와서 전하기를, "행장이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이에 경상 수사에게 명령하여 수륙으로 정탐하게 했다. 늦게 한 응문이 화서
군량을 계속해 준비할 일에 대하여 아뢰었다. 얼마 후에 경상 수사와 웅천 등이 와서 의논하고
갔다.
24일(임진) 맑음. 순라선이 나갔다가 밤 10시에 진으로 돌아왔다. 변 이성이 곡포 권관이
되어 왔다.
26일(갑오) 흐리다가 갰다. 식후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관양군 훈도가 복병하고 있다가
도망간 자들을 잡아다가 처벌했다. 항복한 왜인 8명과 그들을 인솔해 오는 김 탁 등 2명이 같이
왔기에 술을 주었다. 또 김 탁 등에게는 각각 무명 1필씩을 주어 보냈다.
28일(병신) 맑음. 예종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유 척, 임 영 등이 돌아왔다.
조카들과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 잤다.
30일(무술) 맑음. 남해에서 항복한 왜인 야여문, 신지로 등이 왔다. 경상 수사가 보러 왔다.
12월
4일(임인) 맑음. 순천 2선과 낙안의 1선 군사를 점검하고 내보냈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서
떠나지 못했다. 조카 분과 해가 본영으로 갔다. 황 득중, 오 수 등이 청어 7천여 두름을 싣고
왔으므로 계산하여 김 희방의 곡식 사러 다니는 배로 넘겼다.
8일(병오) 맑음. 우우후 이 정충과 남도포 만호 강 응표가 와서 인사했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근일 소비포에서 만나자고 한다.
13일(신해) 맑음. 왜옷 50벌과 연폭... 초저녁에 종 석세가 와서 말하기를, 왜선 3척과
소선 1척이 등산 바깥 바다로부터 합포에 이르러 정박해 있다고 한다. 아마 사냥하는 왜선일
것이다. 곧 경상 수사, 방답 첨사, 우우후 등에게 기별하여 정탐하게 했다.
17일(을묘) 비. 삼천포 앞에 이르니 체찰사 이 원익은 사천에 갔다고 한다.
18일(병진) 맑음. 아침에 삼천포로 나갔다. 정오에 체찰사가 보에 들어와 조용히 의논했다.
초저녁에 체찰사가 또 의논하자고 청하므로 같이 이야기하다가 새벽에야 헤어졌다.
@ff
5. 병신년 일기
1596년 1월 1일__10월 11일
무제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론 신하 때 못탄 것 한이로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건질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북건 쓴 처사 되어 살아가리라
1월
1일(무진) 맑음. 새벽 2시경에 어머님께 들어가 ㅂ다. 늦게 남양 아저씨와 신 사과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에 어머님께 하직하고 영으로 돌아왔다. 심회가 몹시 산란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3일(경오) 맑음. 새벽에 바다로 내려갔다. 정오에 곡포 바다에 이르니 바람이 조금 불었다.
4일(신미) 맑음. 새벽 2시쯤 발선하는데 이여념이 와서 인사하므로, 진중 소식을 물으니 모두
여전하다고 한다. 걸망포에 이르니 경상 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린다. 우후는
먼저 배에 왔으나 몹시 취해서 인사불성이라 곧 그의 배로 먼저 갔다고 한다.
7일(갑술) 맑음. 이른 아침에 이 영남과 좋게 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 숙이
덤벼들기 때문에 피해 왔는데, 이제 딴 곳으로 가야겠다고 한다. 늦게 권 수사와
우후, 사도, 방답이 오고 권 숙도 왔다. 오후 2시에 견내량의 복병장인 삼천포 권관이 급히
보고하기를, 항복한 왜놈 5명이 애산에서 왔다고 한다. 이에 안골포 만호 우수와 공 태원을
뽑아 보냈다.
8일(을해) 맑음. 입춘인데도 날씨가 몹시 차서 엄동처럼 매섭다. 아침에 우우후와 방답을
불러서 함께 약식을 먹었다. 일찍 항복했던 왜인 5명이 들어왔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저희
장수의 성질이 악하고 일도 고되기 때문에 와서 투항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가졌던 크고 작은
칼을 거두어 누각 위에 간직했다. 그러나 실상 부산에 있던 왜인은 아니요, 가덕 심 안둔의
부하라는 것이다.
12일(기묘) 맑으나 바람이 불어 추위가 지독하다. 웅천 현감이 보고하기를, 왜선 14척이 거제
금이포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경상 수사에게 알려서 삼도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보라고 했다.
15일(임오) 맑고 따뜻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대청에 나가서 공문을 작성하여
발송했다. 투항한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주었다. 낙안과 흥양의 전선, 병기, 부속물 및
사수, 격군 등을 점검해 보니 낙안이 더 엉성하다. 이날 밤 달빛이 매우 맑으니 가히 풍년을
점치겠다.
17일 (갑신) 맑음. 아침에 방답 첨사 장 린이 말미를 받아 조카 분과 김 숙 등이 같은 배로
떠났다. 우후를 불러다가 활을 쏘는데 미조항 첨사 성 윤문과 곡포 권관 변 익성이 같이 와서
인사하므로 인사하므로 함께 활을 쏘았다.
18일(을유) 맑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복을 마랐다. 늦게 곤양, 사천이 와서 취해 가지고
갔다. 동래 현령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놈들이 반역할 눈치가 많이 보이고 심 유격이
소서행장과 함께 1월 10일에 먼저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19일(병술) 맑고 따뜻함. 늦게 나가 공무를 보았다. 사도와 여도가 함께 왔고 우후와 곤양도
왔다. 경상 수사도 와서 우우후를 불러 왔는데, 곤양이 술을 마련해다가 바치므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부산에 항복해 들어 갔던 왜인 4명이 와서 전하기를, "심 유경이
소서행장, 현소, 사택정성, 소서비와 함께 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간 뒤로 소식이 없다."하므로
양식 3두를 주어 보냈다. 이날 저녁에 박 자방이, 서 순찰사가 진중으로 온다고 해서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이날 메주를 쑤었다.
24일(심묘) 맑음. 북풍이 세게 불어 눈보라를 치며 모래까지 휘날리니 사람들이 감히 걸을 수
없고 배도 운항할 수가 없다. 새벽에 견내량 복병이 보고하기를, 어제 왜놈 1명이 복병한 곳에
와서 투항했다 하므로 이곳으로 보내라고 했다.
28일(을미) 맑음. 오정에 순찰사가 와서 활쏘기 내기를 하자고 하므로 내기하여 순찰사가
7푼을 졌다. 미안하다.
2월
3일(경자) 맑음. 아침에 장계를 수정했다. 경상 수사가 와서 말하기를, 적량 만호 고 여우가
장 담년에게 피소되었다는데, 순찰사가 장계를 올려 파면시키려 한다고 한다. 어둘 무렵 어란
만호가 견내량 복병한 곳에서 보고하기를, 부산 왜놈 3명이 성주에서 투항해 온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병한 곳에 와서 장사하겠다 하므로 곧 장흥 부사 배 흥립에게 전령하여 내일 새벽에
가서 타이르라고 했다. 왜적들이 어찌 감히 장사를 한다고 한단 말이냐. 그것은 우리의 허실을
염탐하려는 것일 게다.
6일(계묘) 흐림. 새벽에 목수 10명을 거느리고 거제로 배를 만들러 보냈다. 사도 첨사 김
완이 조도 어사의 장계로 파면 되었으므로 본래의 포구로 내보냈다.
9일(병오) 맑음. 서풍이 크게 불어서 배가 다니지 못했다. 늦게 권 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활 10순을 쏘았다. 저녁에 바람이 잤다. 들으니 견내량과 부산에 왜선 2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웅천 우후를 보내서 탐지하게 했다.
13일(경술) 맑음. 식후에 나가 앉아서 공무를 보았다. 강진 현감 이 극신을 기일 늦은 죄로
처벌했다. 영암 군수 박 홍장을 파면시킬 장계를 기초했다. 제주 목사에게 화살대 등을 보냈다.
18일(을묘) 맑음. 식후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체찰사의 비밀 공문 3통이 왔는데, 하나는
제주 목사에게 계속하여 후원하라는 내용이요, 하나는 영등 만호 조계종을 심문하는 일에 관한
내용이요, 또 하나는 진도의 전선을 아직 독촉하여 모으지 말라는 내용이다. 저녁에 김 국이
서울서 내려왔는데, 비밀 공문 2통과 책력 1권을 가져 왔다.
20일(정사) 맑음. 입대에 관한 공문을 사사로이 작성한 죄로 손 만세를 처벌했다.
26일(계해)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내림. 늦게 대청에 나갔다. 여도와 흥양이 와서
영리들의 백성 해치는 폐단을 말한다. 몹시 놀라운 일이다. 양 정언과 영리 강 기경, 이
득종, 박취 등을 중죄로 다스림과 동시에 전령을 내려 경상도와 전라 우도의 수사에게 있는
영리들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경상 수사가 와서 만났다. 조금 있더니 견내량에 있던 복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선 1척이 견내량으로부터 들어와 장차 해평장에까지 가려는 것을 막고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둔전의 벼 2백30석을 1백 98석으로 만들었더니 준 수가
32석이라고 한다. 낙안에서 작별의 술을 나누고 보냈다.
30일(정묘) 맑음. 아침에 정 사립으로 하여금 보고문을 작성하여 체찰사에게 가게 했다. 날이
늦게 우수사가 보고하기를, 벌써 바람이 온화한 봄철을 당하여 대응책이 시급하므로 소속된
부하들을 거느리고 본도로 가고 싶다고 한다. 그 마음 쓰는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70대 씩을 때렸다.
3월
1일(무진)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경상 수사가 와서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늦게 해남 현감 유 형과 임치 첨사 홍 견, 목포 만호 방 수경을 기일 어긴 죄로 처벌했다. 해남
현감은 새로 도임해 왔기로 매를 때리지 않았다.
5일(임신) 갰다가 흐림. 새벽 4시경에 배를 띄워 날이 밝을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하고 있는 곳에 도착하니 마침 아침 때이다. 아침을 먹고 서로 만나 보고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는 모든 것을 사과한다. 이에 술을 시작하여 몹시 취해 가지고 돌아왔다. 도중에 이
정충의 장막 아래로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취해 쓰러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몹시 내리므로 내가 먼저 배에 오르는데 우수사는 취해서 인사도 차리지 못하므로 작별을 할
수가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과 수원이 모두 와 있다. 비를 맞으며
진으로 돌아오니, 김 혼이 또 와 있다. 함께 이야기하다가 자정이나 되어서 잤다. 계집종
덕금, 한대, 효대와 은진도 왔다.
11일(무인) 흐림. 해, 회, 완, 수원 등이 떠나갔다. 저녁에 방답 첨사 장 린이 성낼 일도 아닌데
공연히 성을 내어 상선 급수군에게 곤장을 때렸다니 놀라운 일이다. 곧 군관과 이방을 잡아다가
군관에게는 태형 20대를, 이방에게는 50대를 때렸다.
14일(신사) 궂은비가 개지 않는다. 새벽에 삼도의 보고가 왔는데, 견내량 근처 거제 땅
세포에 왜선 5척과 고성 땅에 5척이 와 있다가 상륙했다 한다. 이에 3도의 여러 장수들에게 배
5척을 더 추려 보내도록 전령했다. 늦게 나가서 각처의 서류를 결재해 보냈다. 아침에 군량에
관한 회계를 맞추었다. 방답, 녹도가 와서 보았다. 체찰사에게 보낼 공문을 만들었다. 춘곤이
심해서 밤새도록 땀을 흘렸다.
23일(경인) 새벽에 정 사립이 와서, 물고기로 기름을 많이 짜서 가져왔다고 했다. 늦게
나가서 각처 서류를 처리하고 활 10순을 쏘았다. 충청도 수군의 배 8척이 들어왔다. 종 금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어머님께서 안녕하시다고 했다.
26일(계사) 맑고 바람이 불었다. 체찰사의 명령이 왔는데, 전일 우도의 수군을 돌려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를 잘못 본 까닭이라는 것이었다.
4월
3일(기해) 맑고 동풍이 불었다. 어제 저녁에 견내량에 있는 긴급보고에 의하면, 왜놈 4명이
부산으로부터 장사하러 나왔다가 바람에 불려 표류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새벽에 녹도 만호 송
여종을 보내서 그 까닭을 물어 보게 했더니 그들은 우리를 정탐하러 왔던 것이 분명하므로 목을
베어 죽였다.
7일(계묘) 맑음. 부찰사가 나가 앉아서 상을 나누어 주었다. 새벽에 부산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명나라 수석 사신 이 종성이 달아났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 부찰사가
입봉에 올라갔다. 점심 후에 두 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10일(병오) 맑음. 아침에 어사가 온다는 기별을 듣고, 수사 이하의 사람들이 포구에 나가서
기다렸다. 조 붕이 왔는데 오래 학질을 앓아서 몹시 수척해졌다. 늦게 어사가 들어와 같이
이야기하고 불이 켜진 뒤에 헤어졌다.
14일(경술) 비. 아침 식사 후 나갔다. 홍주 판관 박 윤과 당진 만호 조 효열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충청 우후 원 유남에게 곤장 40대를 때렸다.
19(을묘) 맑음. 습열 때문에 침을 20대나 맞았다. 몸에 번열이 있는 것 같아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둘 무렵에 영등이 와 보고 돌아갔다. 종 목년 및 금화, 풍진 등이 왔다. 이날
아침에 남 여문에게서 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기뻐 뛸 것 같으나 다만 믿을 수가 없다. 이
말은 전부터 펴졌었으나 아직 확실한 기별은 오지 않고 있다.
22일(무오)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나갔다. 부산에서 허 내은만이 편지를 보냈는데, "명나라
수석 사신 이 종성은 달아나고 부사 양 방형만 전과 같이 왜병의 진영에 있는데, 4월 8일에
달아난 사유를 위에 아뢰었다."고 했다. 김 조방장이 와서 노 천기가 술을 마시고 망녕된 말을
하다가 본영의 진무 황 인수, 성 복 등에게 욕을 보았다고 보고하므로 곤장 30대를 때렸다. 활
10순을 쏘았다.
30일(병인) 맑음. 저녁에 목욕을 했다. 우수사가 와서 보았다. 충청 우후도 와서 보고
돌아갔다. 늦게 부산 허 내은만의 편지가 왔는데,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갈 의사인 것 같다고
했다. 김 경록이 돌아갔다. 어머님 편지가 왔다.
5월
2일(무진) 맑음. 일찌기 목욕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총통 2자루를 만들었다. 김 조방장 완과
조 계종이 보러 왔다. 우수사가 김 인복의 목을 베어 효시 했다.
4일(경오) 맑음. 조 종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 정이 4월 1일에 죽었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다.
6일(임신)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큰비가 내려 농민들의 소망을 채워 주니, 기쁘고 다행하기
이를 데 없다. 비 내리기 전에 활 5, 6순을 쏘았다.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 어둘 무렵에
총통과 목탄을 넣어 두는 창고에서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 이것은 감관들이 조심하지 않아서
새 숯을 쌓는데 묵은 불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니 탄식스러운 일이다. 울과
김 대복이 같은 배로 나갔다. 비가 몹시 오니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 앉아서 걱정이다.
9일(을해) 맑음. 이 영남과 평안도 일을 의논했다. 부안 전선에서 불이 났으나 많이 타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11일(정축) 맑음. 새벽에 앉아서 이 정과 이야기했다. 식후에 나가 비인 현감 신 경징이 제
기한에 오지 못한 죄로 곤장 20대를 때리고, 또 순천 격군 감관 조 명의 죄도 다스렸다.
13일(기묘) 맑음. 부산 허 내은만의 편지가 왔는데, "청정이란 놈이 이미 10일 내에 그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의 왜적들도 역시 장차 철거해 갈 것이며 부산에 있는 왜병들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건너가려고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한다. 이날 활 9순을 쏘았다.
15일(신사)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는데, 우수사는 오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나갔다.
들으니 한산도 뒷산 높은 봉우리에서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인다고 하기에 혼자 말을 달려
올라가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인다. 느지막에 조그만 냇가로 돌아와서 조방장과
거제와 함께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진으로 돌아왔다. 어두워진 후에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잤다. 바다 위에 달은 뚜렷하고 바람 한 점 없다.
18일(갑신) 비는 갰으나 바다에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체찰사에게서 서류가 왔다. 늦게 경상
수사가 보러 왔다. 나가서 공무를 보고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돌아왔는데, 어머님께서
안녕하시기는 하나 식사가 주셨다니 답답하다.
22일(무자) 맑음. 충청 우후, 좌우후, 홍주 박 윤 등과 활을 쏘았다. 홍 우가 장계를 가지고
감사에게로 갔다.
24일(경인) 아침에 날이 흐려 비 올 기운이 많다. 문종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나가서 활 10순을 쏘았다. 부산 허 내은만의 편지가 왔는데, 다만 부산에만 남아 있다고
했다. 명나라 수석 사신이 걸려서 새로 딴 사람이 온다는 기별이 22일에 부사에게서 왔다 한다.
허 내은만에게 쌀 열말과 소금 한 섬을 보내면서 마음껏 정보를 탐지해 보내라고 했다. 어둘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 퍼부었다. 박 옥, 옥지, 무재 등이 살대 1백 50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28일(갑오) 비. 들으니 전라 감사 홍 세공이 파면되었다고 한다. 청정이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모두 못 믿을 말이다.
30일(병신) 흐림. 아침에 곽 언수가 들어왔다. 영의정 유 성룡과 도원수 김 명원, 정
판부사, 윤 지사 자신, 조 사척, 신 식, 남 이공의 편지가 왔다.
6월
2일(무술) 비. 아침에 우후가 방답으로 가고 비인 원 신 경징도 나갔다. 가죽으로 앞치마를
만들었다.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활 10순을 쏘았다. 편지를 써서 본영에 보냈다.
6일(임인) 맑음. 사도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활을 쏘았다. 술과 음식을 먹이고 다시 또
쏘아 승부를 겨루게 하고 헤어졌다.
10일(병오) 비. 낮에 부산에서 고목이 왔는데, 평의지가 9일 이른 아침에 대마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15일(신해) 맑음. 늦게 나가서 공무를 보고 충청 우후와 조방장 김 완 등 여러 장수를 불러서
활 15순을 쏘았다. 일찍 부산 허 내은만이 와서 왜적의 정세를 전하기에 양곡을 주어
돌려보냈다.
20일(병진) 맑음. 어제 아침에 곡포 권관 장 후완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포 만호에게
일찍 진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책망하니, 기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여일을 물리게 된
것이라고 대답한다. 해괴스럽기 한이 없어서 곤장 30대를 때렸다. 오늘 낮에 남해원 박 대남이
들어와 교서에 숙배한 뒤에 함께 이야기하다가 활을 쏘았다. 충청 우후도 와서 함께 활 15순을
쏘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박 남해와 함께 자세한 이야기를 하다 밤이 되어 헤어졌다. 임
달영이 또 왔는데, 소를 무역한 기록과 제주 목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24일(경신) 초복. 맑음. 일찍 나가서 충청 우후와 활 15순을 쏘았다. 경상 수사도 와서 함께
쏘았다. 남해는 자기 고을로 돌아갔다.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저희 동료인 신시로를 죽이자고
청하기에 명령하여 죽이게 했다. 남원 김 굉이 군량을 축낸 데 대해 증거를 얻으려고 여기에
왔다.
28일(갑자) 맑음. 명종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침에 고성 현령이 보낸 긴급
보고에 의하면, 수찰사의 일행이 어제 벌써 사천에 도착하였고, 오늘은 소비포로 오리라고 한다.
29일(을축) 갬. 늦게 나가서 공무를 보고, 조방장 등 여러 사람과 철전, 펀전, 보통 활 도합
18순을 쏘았다. 남해 원의 편지가 오고, 야여문이 돌아갔다.
7월
7일(임신) 맑음. 경상 수사와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와서 세 가지 화살로 활쏘기
연습을 했다. 저녁 때 활 만드는 직공 지이와 춘복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8일(계유) 맑음. 충청 우후와 활 10순을 쏘았다. 체찰사의 비밀 표험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9일(갑술) 맑음.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각항 공문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이 전이 받아
가지고 갔다. 늦게 경상 수사가 와서, 통신사가 탈 배가 설비가 와전치 못하다고 여러 말을
했다. 그의 말 속에는 우리 배를 빌려 주었으면 하는 뜻이 있었다. 물을 끌어들일 대나무와 중국
사신에게 줄 부채를 만들 대나무를 구하기 위해서 박 자방을 남해로 보냈다. 오후에 활 10순을
쏘았다.
10일(을해) 맑음. 새벽에 꿈을 꾸니, 한사람은 화살을 멀리 쏘고, 한사람은 갓을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내 스스로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의 무리가 멀리 도망간다는 것이요,
갓을 차서 부수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발로 찼으니, 이는 적의 괴수가
왜병들에게 모두 섬멸 당할 조짐이다. 늦게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황 첨지가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가 되고, 권 황이 부사가 되어 근일 중으로 바다를 건너게 될 터이니,
그들이 탈 배 3척을 정비해서 부산으로 보내라."했다. 경상 우후가 와서 백문석 1백 50장을
빌려갔다. 충청 우후, 사량 만호, 지세포 만호, 옥포 만호, 홍주 판관, 전 적도 만호 고 여우 등이
와서 만났다. 경상 수사가 보고하기를, "춘원도에 왜선 한 척이 와서 대었다."한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수색하고 탐지하도록 하라고 전령 했다.
17일(임오) 새벽에 비가 뿌리다가 그쳤다.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일어나 홍산 원 윤
영현이 붙잡히고, 선천 군수 박 진국도 끌려갔다고 한다. 밖의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때에
안 도둑이 이러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20일(을유) 맑음. 탐후선 편에 들으니 충청도 도둑이 몽학이 포수 이 시발의 총에 맞아서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22일(정해) 맑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종일 나가지 않고 홀로 누각 위에 앉았다. 종
효대, 팽수가 흥양의 군량선을 타고 나갔다. 저녁에 수천에서 보내온 공문을 보니, "충청도
도둑이 홍산에서 일어난 것을 곧 죽였다고 하는데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 당했다가 간신히
면했다."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자정쯤 크게 비가 내렸다. 낙안의 교대할 배가 돌아왔다.
26일(신묘) 맑음. 이 전이 체찰사에게서 표험 3벌을 받아 가지고 왔는데, 하나는 경상
수사에게 보내고 하나는 전라 우수사에게 보냈다. 금부의 나장이 윤승남을 잡아 가려고
내려왔다.
30일(을미) 맑음. 늦게 조방장이 와서 활 3가지를 쏘았다. 위에서 유서 2통이 내려왔다.
전쟁에 쓸 말과 지이와 무재도 함께 왔다.
8월
3일(무술) 맑았다가 이따금 비를 뿌렸다. 지이를 시켜서 새로 만든 활을 써보게 했다.
조방장과 충청 우후가 와서 함께 활을 쏘았다. 아들들은 유량중의 활을 쏘았다. 이날 늦게 송
희립과 아들들을 시켜서 이들이 기록되어 있는 황 득중, 김 응겸의 허통하는 서류를 만들어 주게
했다. 오후 8시경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새벽 2시경에야 그쳤다.
9일(갑진) 흐림. 아침에 수인에게서 삼 2백 30근을 받아들였다. 하동에 종이를 가공해 달라고
도련지 20권, 주지 32권, 장지 31권을 보냈다. 늦게 나가서 서류를 처결하여 나누어 주었다.
11일(병오) 맑고 동풍이 세게 불었다. 체찰사에게 가는 여러 가지 공문을 서류로 만들어
발송했다. 배 조방장과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늦게 활터로 같이 가서 말 달리는 것을 보고
저물게 영으로 돌아왔다. 초저녁에 거제가 급히 보고하기를, 왜선 1척이 등산으로부터 송미포로
들어갔다고 하더니, 밤 10시에는 다시 보고하기를, 아자포로 옮겨 대었다고 한다. 배를 정해서
내보내려 하는데 또다시 보고가 오기를, 견내량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에 복병장에게 명하여
잡으라고 했다.
16일(신해) 갰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저녁 무렵 체찰사가 진주에 왔다는 기별을 받았다.
새로 갠 하늘의 달빛이 하도 밝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20일(을묘) 바람. 새벽에 전선 만들 재목을 끌어 내리기 위해서 우도 군사 3백 명, 경상도 1백
명, 충청도 3백명, 좌도 3백 90명을 송 희립이 거느리고 갔다.
27일(임술) 맑음. 일찍 떠나서 사천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그 길로 진주로 향하여 체찰사께
뵙고 종일 의논했다. 날이 저물 때 목사의 처소로 돌아와 잤다. 김 응서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날 어둘 무렵 이 용제가 역적의 도당에 관한 편지를 가지고 왔다.
윤 8월
6일(경오) 맑음. 아침 식사 후 경상 수사, 우수사와 함께 사정에 가서 말 달리며 활 쏘는 것을
보고 저물어 돌아왔다. 방답 첨사가 진중에 도착했다.
11일(을해) 맑음. 체찰사를 모시는 일로 진중을 출발하여 당포에 도착했다. 저녁 8시에
체찰사에게 갔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14일에 떠난다고 한다.
14일(무인) 맑음. 새벽에 두치에 도착하니 체찰사와 부사 한 효순이 어제 벌써 와서 잤다고
한다. 곧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 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에 도착했다. 지나는 온통 쑥밭이
되어 참혹한 꼴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우선 전선 정비하는 일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24일(무자) 부사와 함께 가리포로 갔더니 우우후이 정충이 먼저 와 있다. 함께 남쪽 망대에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알 수가 있다. 참으로 한 도의 요충지다.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 공의 흉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27일(신묘) 맑음. 체찰사가 진도로부터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9월
6일(기해) 맑음. 먼저 무안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고하고 길을 떠났다. 나주 감목관 나
덕준이 뒤쫓아와서 함께 이야기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17일(경술) 맑음. 체찰사와 부사는 입암 산성으로 가고 나 혼자 진원현에 이르러 원 심 윤과
이야기했다.
20일(계축) 비. 아침에 모든 사무를 담당한 아전들의 죄를 의논했다. 늦게 광주 목사를
만나고 길을 떠나려는데, 명나라 사람 2명이 이야기하자고 청하므로 술을 먹였다.
24일(정사) 맑음. 일찌기 떠나서 선 병사의 집에 이르니 그의 병이 몹시 위중하다.
염려스럽다. 저물어서 낙안으로 갔다.
10월
4일(정묘) 맑음. 식후에 객사 동헌에 나가서 종일토록 공무를 보았다. 저녁때 남해가
도착했다.
9일(임신) 맑음.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종일 어머님을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시고 어머님은 매우 서운해 하시는 기색이다.
10일(계유) 맑음. 자정에 뒷방으로 갔다가 새벽 2시경에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정오에
어머님과 작별하고 오후 2시에 배에 올랐다. 바람 따라 돛을 올리고 밤새도록 노를 재촉해
돌아왔다.
11일(갑술) 맑음.
-10월 12일부터 이듬해 3월 말일까지 빠졌음.
@ff
6. 정유년 일기
1597년 4월 1일__12월 30일
죽은 군졸들을 제사하는 글
웃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내게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그대들 혼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인 제물 받으오시라
4월
1일(신유) 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의 윤 간의 종의 집에 가서
봉, 분, 울, 사행, 원경들과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 자신이 와서 위로해 준다. 비변랑 이
순지도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 더 한층 이길 수 없다. 기헌도 왔다. 모두 정으로 위로하면서
술을 권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억지로 마셔 취했다. 영의정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 탁, 판서 심
희수, 찬성 김 명원, 참판 이 정형, 대사헌 노 직 동지 최 원, 동지 곽 영들이 사람을 보내서
문안했다.
3일(계해) 맑음.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부도사 이 사윤, 서리 이 수영, 나장 한 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도착했다.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서 수원으로
들어가 경기 관찰사 홍 이상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
복룡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했다. 부사 유 영건이 나와
보았다.
10일(경오) 맑음. 식후에 흥백의 집에 가서 금부도사와 이야기했다. 늦게 홍 찰방, 이 별좌
형제, 윤 효원 형제가 보러 왔다. 이 언길, 허 제가 술병을 차고 왔다.
13일(계유) 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의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하고 있는데, 울이 종 애수를 들여보내어, 아직 배가 온다는 소식이 없다고
한다. 또 들으니 황 천상이 술병을 들고 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 찰방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으로 왔더니 조금 있다가 종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음을 전한다. 뛰어나가 가슴을
치면서 뛰고 뒹구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다. 즉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다. 길에서
바라보는 애통함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다음날 대략 적었다.)
19일(기묘) 맑음. 일찍 길에 오르면서 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으나 무엇하랴?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이 있으랴. 일찍 죽는 이만 같지 못하다. 뇌의 집에 이르러 사당에
뵙고 하직을 고하고서 금곡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러, 강 정, 강 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하고, 그 길로 보산원에 도착하니 천안 원이 먼저 와서 말에서 내려 냇가에서 쉬고 있다.
임천원 한 술이 중시를 보러 서울에 가는 길에 앞을 지나다가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서
조상하고 갔다. 회, 면, 봉, 해, 분, 와곤 변 주부가 모두 따라서 천안까지 왔다. 원 인만도 와서
보기에 작별한 뒤에 말에 올라 일신역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28일(무자) 맑음. 아침에 원수가 군관 승경을 보내서 문안하고 또 전하기를,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 한다. 또 이제 들으니 친절한 군관이 토제영에 있다고
하므로 편지와 공문을 보내서 나오게 하는 바이니, 데리고 가서 간호하라고 하면서 편지와
공문을 가져 왔다. 순천 부사의 소실이 죽었다고 한다.
5월
2일(임진) 늦게 비. 원수는 보성으로 가고, 병사는 본영으로 가고, 순찰사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보러 왔다가 돌아갔다. 부사도 와서 보았다. 진 흥국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흘리면
서 원 균의 일을 이야기한다. 이 형복과 신 홍수도 왔다. 남원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님 영연이 편안하시다고 한다. 또 유헌이 식구들을 데리고 무사히 금곡에 도착했다고 한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았으니 슬픔을 어이 참으랴?
5일(을미) 맑음. 새벽 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보았다. 늦게 충청 우후원
유남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 공의 잘못된 일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배반하므로 장차
형세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이 날은 단오절인데, 멀리 천리 밖에 종군하여 어머님에 대한
예절을 폐할 뿐만 아니라, 곡하고 우는 것조차도 역시 맘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보응을 당하는가? 나 같은 일은 고금을 통하여 둘도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이다.
7일(정유) 맑음. 선산 군수 안 괄이 한산에서 와서 음흉한 자의 일을 많이 말했다. 안 괄이
구례에 갔을 때 조 사겸의 수절녀를 사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11일(신축) 맑음. 김 효성이 낙안에서 왔다가 곧 돌아갔다. 광양의 전 현감 심 성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어서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에 왔다가 나를 보러 와서 근래의 소식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식이란 모두 흉인에 대한 일이었다. 부찰사가 온다는 기별이 왔다.
16일(벼옹) 맑음. 저녁에 남원 탐후인이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들러
세우겠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은진현에 이르니 그 고을 원이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유는 또 말하기를, "중한 죄수 이 덕룡을 고소했던 사람이 잡혀서 세차례의
형을 받고 장차 죽을 것이다."라 한다. 놀라운 일이다. 또 과천 좌수 안 홍제 등이 이상궁에게
말과 20세 되는 계집종을 바치고서 석방되어 갔다고 한다. 안은 본래 죽을죄도 아닌데 여러
차례 형벌을 받고서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된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28일(무오) 흐림. 늦게 떠나 하동현에 이르니 그 고을 원 신 진이 서로 만나 보기를
반가와하고 성안 별사로 맞아 들여 간곡한 정을 베푼다. 그도 원 균의 미친 일을 많이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 했다.
29일(기미) 흐림. 몸이 몹시 불편했다.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면서 조리했다. 현감이 정다운
말을 많이 해주었다.
6월
5일(갑자) 맑음. 서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초계원이 달려왔기에 함께 이야기했다. 식후에
중군 이 덕필도 달려와서 함께 지난 이야기를 했다. 거처할 방을 도배했다. 저녁에 이 승서가
보러 와서 수직하던 병졸과 복병들이 도망한 일을 말했다.
8일(정묘) 맑음. 아침에 정 상명을 보내서 황 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늦게 이 덕필과 심
준이 와서 만났고, 원과 그 아무도 와서 만났다. 원수를 마중 가는 사람들도 10여명이 와서
보았다. 점심 후에 원수가 진에 왔으므로 나도 가서 보았다. 종사관은 원수의 집 앞에서 원수와
한참 이야기했다. 얼마 후에 원수가 박 성의 사직하겠다는 글의 초본을 보이는데, 박 성은
원수의 하는 일이 소탈한 점을 많이 말했다. 원수는 이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체찰사에게
글을 올렸다고 한다. 또 복병에 대한 사항 등의 서류를 보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몸이 몹시
불편해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12일(신미) 맑음. 늦게 승장 처영이 보러 와서 부채와 짚신을 바치므로 다른 물건을 답례로
주었다. 그는 적의 정세도 이야기하고, 원 공의 일도 이야기했다. 오후에 들으니 중군당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갔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원수에게 가보니, 우병사의
긴급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초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하므로
복병군을 보내서 그들의 길을 막고 군대의 위세를 올리려는 것이라고 한다.
15일(갑술) 맑다가 비. 어두워서 청주 이 희남의 종이 들어와서, 주인이 우병사의 부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묵고 있다고 말했다.
18일(정축) 흐리나 비는 내리지 않음. 아침에 황 종사관이 자기 종을 보내서 문안했다. 늦게
윤 감이 떡을 해 가지고 왔다. 명나라 사람 섭 위가 초계에서 와서 이야기하는데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 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혀 갔다가 지금 처음으로 나와 보니,
적병 10만명이 이미 사자마나 대마도에 왔을 것이요, 행장은 의령을 거쳐 바로 전라도로
쳐들어올 것이며, 청정은 경주, 대구 등지로 진을 옮기고 바로 안동으로 가려 한다."고 했다.
저물게 원수가 사천 갈 일을 알려왔기로 곧 정사복을 보내서 물었더니, 원수는 수군의 일로 해서
사천에 갔다고 한다.
19일(무인) 새벽에 닭이 세 번 울자 문을 나서니 장차 원수의 진에 도착하려는데 날이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는 황 종사관과 나와 있다. 내가 들어가 뵈니, 원수는 원 균의 일로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조정에 말해서 안골, 가덕을 모두 섬멸시킨 뒤에
수군이 나가서 토벌한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심사인가. 이것은 핑계하고 나가지 않으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까닭에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를 독촉하여 나가게 할 것이니, 통제사는
내가 지휘할 것도 없다."고 한다. 내가 또 임금의 분부를 보니, 안골에 있는 적은 경솔히 들어가
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수가 나간 뒤에 황 종사관과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데 초계 원이 왔다.
작별할 무렵에 초계 원에게 말하기를, 진 찬순을 심부름시키지 말하고 하니, 원수부의 병방
군관과 원이 모두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돌아올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온 사람이 나를
따라왔다. 이날 땅이 마치 찌는 듯했다. 저녁에 작은 워라말이 풀을 조금 먹었다. 낮에 군사 변
덕기, 변 덕장, 변 경완, 변 경남이 와서 만났다. 진사 이 일장도 와서 만났다. 밤에 소나기가
크게
내려 처마에 떨어지는 비가 마치 물을 퍼붓는 것 같았다.
25일(갑신) 맑음. 다시 명령해서 무우씨를 뿌리게 했다. 식전에 황 종사관이 와서 만났다.
해전에 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금명간 진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야 돌아갔다. 저녁에 서울 종이 한산에서 돌아왔다. 들으니 보성 군수 안
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놀람과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한 놈의 적도 사로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분함을 어찌 말하랴. 거제가 또 사람을 시켜서 미역을 실어
보냈다.
29일(무자) 맑음. 변 주부가 마흘방으로 갔다. 종 경이 돌아오고, 이 희남, 이 방도 돌아왔다.
이 중군과 심준이 와서 전하기를, 심유격이 체포되어 갔는데, 양 총병이 삼가에 가서 결박해
보냈다고 한다. 문 임수가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초계역에 당도했다고 한다.
7월
*이 달의 간지가 잘못되었으나 원문에 따르고 수정하지 않는다.
3일(임오) 맑음. 합천 오 운이 와서 산성에 관한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 좌병사가 그 군관을
시켜서 항복한 왜인 2명을 압송해 보냈는데, 청정의 부하라고 한다.
13일(임진) 맑음. 아침에 남해가 편지를 보내고 음식을 많이 보내서 말하기를, 싸움에 쓸
말을 끌어 가겠다고 했으므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늦게 이 태수, 조 신독, 홍 대방이 보러 아서
적토벌 할 일을 이야기했다. 송 대립, 장 득홍도 왔다. 장 득홍은 자비로 복무한다고 한다. 양식
2말을 주었다. 이날 칡을 캐어 왔다.
14일(계사) 맑음. 이른 아침에 정 상명에게 종 평세, 귀인과 짐 실은 말 두 필을 주어 남해로
보냈다. 정 상명은 전마를 끌어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 꿈에 내가 체찰사와 함께 한 곳에
가보니 시체들이 즐비한데 혹은 발로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기도 했다. 아침 식사 때
문 인수가 와가채와 동과전을 가져다 준다. 방 응원, 윤선각, 현 응진, 홍 우공 등과 이야기했다.
홍은 그 아버지의 병으로 해서 종군하고 싶지 않아, 나에게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놀라운
일이다. 오전 10시쯤 황 종사관이 정 인서를 보내서 문안하고, 또 김해 사람으로서 왜적에게
붙었던 사람 김 억의 편지를 보여 준다. 거기에 보니, 7일에 왜선 5백여 척이 부산으로 나왔고
9일에는 왜선 1척이 합세해서 우리 수군과 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배 5척이 두모포에
표류해 갔으며, 7척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들으니 분하고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다. 즉시 황 종사관과 일을 의논하고 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얼마 있다가 내가
탔던 말을 홍 대방을 시켜 달려 보라고 했더니 잘 달린다. 날씨가 비올 기미가 많기에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에 닿자마자 비가 몹시 내리다가 밤 8시경에야 갰다. 달빛이 하도 밝아 낮보다
더하니 회포를 어이 다 말하랴.
16일(음미) 혹 비도 내리고 혹 개기도 했으나 종일 흐리고 맑지는 못했다. 아침 식사 후에
손 응남을 중군에게 보내서 수군에 대한 소식을 알아 오도록 했다. 그가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경상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우리에게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더라고 한다. 탄식스러운 일이다. 늦게 변 의정이라고 하는 자가 수박 두개를 가지고
왔는데, 그 생김새가 몹시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궁촌에 처박혀 사는 사람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니 자연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소박한 태도다. 이날 낮에 이 희남을 시켜
칼을 갈게 했더니 아주 잘 들어서 적장의 머리를 벨 만하다.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행로에 고생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된다.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4일에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5일에 칠천량에 이르러 자고, 일에 옥포로 들어갔다가 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서
다대포에 이르러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배들이 함께 돌격했더니,
왜병은 모두 육지로 도망하고 빈 배만 남아 있어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다가 불지르고
그 길로 부산 영도 밖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천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오기에 서로
싸우려
했으나 왜선들이 피하여 흩어지므로 종시 이들을 섬멸시킬 수 없었고, 세남이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초 앞바다까지 표류하다가 육지로 오르려고 했으나, 거이 다
적에게 죽고 세남만은 혼자 숲 속으로 기어서 목숨을 보전하여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해군뿐인데, 해군이 이와 같으니
다시 더 희망이 없다. 거듭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또 선장 이 엽은 적에게
잡혔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다. 손 웅남이 집에 돌아갔다.
18일(정유) 맑음. 새벽에 이 덕필이 변 흥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습을 받아 통제사 원 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로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어 수군이 크게 깨졌다는 것이다. 듣자니 통곡이 터져 견딜 수가 없다. 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전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밤 10시까지
이야기했으나 별 방법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했더니, 원수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이에 송 대립, 유 황, 윤 선각, 방 응원,
현 응진, 임 영립, 이 원룡, 이 희남, 홍 우공 등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삼가현에 이르니 새로
부임한 원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21일(경자)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 천추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로 많이 제
고장에 있어 혹은 올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밀보리밭을 갈기도 한다. 점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원 안 위와 영등 조 계종 등 10여인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는데, 경상 수사 배 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는다. 우후 이 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 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육지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고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한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원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이 생겼다.
25일(갑진) 갬. 황 종사관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 언공이 보러 왔다가
원수부로 갔다. 저녁때 배 백기의 병 문안을 가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하다.
8월
3일(신유)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 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와 유서를 전하는데
내용을 보니, 삼도 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다. 숙배한 뒤에 받은 서장을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서 바로 두치로 가는 길을 거쳐 오후 8시경에 행보역에서 말을 쉬었다. 자정이 넘어서 다시
길을 떠나서 두치에 도착하니 날이 새려고 한다. 박 남해가 길을 잃고 잘못 강정으로
들어갔으므로 말에서 내려 불러왔다. 쌍계동에 도착하니 뾰족한 돌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
금방 온 비에 물이 넘쳐 흘러서 간신히 건넜다. 석주에 이르자 이 원춘과 유 해가 복병하고
지키다가 나와서 보고,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다. 저물 무렵 구례현에 이르러
보니 온 고을이 쓸쓸하다. 성 북문 밖 전날에 주인했던 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짜기로
피난했다고 한다. 손 인필이 곧 와서 보고, 겸해서 곡식까지 지고 왔다. 손 응남은 일찍 익은
감을 가져왔다.
6일(갑자) 맑음. 아침 식사 후 길을 떠나 옥과 지경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이 피란민들로 길이
가득 찼으며, 남자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것이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들은
울면서,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인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했다. 길 옆에 큰 홰나무가 있기에
내려앉아서 말을 쉬게 했다. 순천 이 기남이 와서 어디서 죽을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옥과현에
이르니 원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정 사준, 사립이 먼저 와서 관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조응복, 양 동립도 나를 따라 이리로 왔다. 나는 병을 청탁하고 나오지 않는 원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려 했더니, 홍 요좌가 내 뜻을 미리 알고 급히 나왔다.
7일(을축) 맑음. 일찍 떠나 바로 순천으로 향하는 도중, 고을을 10리쯤 못 가서 선전관 원
집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오는 것을 만났다. 길 옆에 앉아서 펴보니, 병사가 거느렸던 군사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닭 울 무렵에 송 대립이 순천 등지로 다서 적의 정세를
정찰해 가지고 왔다. 석곡 강정에서 잤다.
9일(정묘) 맑음. 일찍 떠나서 낙안에 이르니 5리밖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와 본다.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나 까닭을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병사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퍼뜨리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기 때문에 인민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했다는 것이다. 관청에 들어가니
조용하여 사람 소리가 없다. 순천 부사 우 치적, 김제 군수 고 봉상 등이 와서 절한다. 늦게 보성
조양에 이르러 김 안도의 집에서 잤다.
12일(경오) 맑음. 아침에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늦게 거제, 발포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배 설이 황겁해 하더라는 것을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하여 제가 감당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국가 대사를 크게
그르치는데도 조정에서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13일(신미) 맑음. 거제 현령 안 위, 발포 만호 소 계남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우후 이 몽귀가
전령을 받고 들어왔기에, 본영의 군기와 군량을 하나도 옮겨 싣지 않은 일로 해서 곤장80대를
때려 보냈다. 하동 현감이 와서 전하기를, "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 산성과 벽견 산성도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제 손으로 불질러 버렸다."고 한다. 통탄할 일이다.
16일(갑술) 맑음. 아침에 보성 원과 군관들을 굴암으로 보내러 피해 달아난 관리들을
찾아내게 했다. 선전관 박 천봉이 돌아가는 편에 나주 목사와 어사 임 몽정에게 답장을 보냈다.
사령들을 박 사명에게 보냈더니 사명의 집은 벌써 비어 있더라고 했다. 오후에 활 장인 지이 및
태 귀생, 선의, 대남 등이 들어왔다.
25일(계미) 맑음. 그대로 머물어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당포의 어부가 피란민의 소
2마리를 훔쳐다가 잡아 먹기 위하여 적이 왔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나는 이미 이것이 거짓임을
알았기 때문에 배를 굳게 매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자들을 잡아 오게 했더니 과연
예상대로였다. 이렇게 해서 군대는 안정시켰으나 배설은 벌써 도망가 버렸다. 거짓말을 한 두
사람은 목을 베어 효시 했다.
28일(병술) 맑음. 적선 9척이 갑자기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겁이 나서 달아나려 한다. 경상
수사 배 설도 달아나려 한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각지기를
흔들면서 급히 뒤를 쫓으니 적선들은 물러가고 말았다. 갈구까지 쫓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장도로 진을 옮겼다.
30일(무자) 맑음. 벽파진에 머물러서 정찰병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늦게 배 설은
적이 많이 몰려 올 것을 염려해서 도망하려 했으나, 관하의 여러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또
그 실정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미리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일이
아니므로 그대로 참고 있었다. 이때 배 설이 제종을 시켜서 소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조리를 하겠다고 했다. 이에 나는 육지로 올라가서 조리하라고 허락해 주었더니, 배 설은
우수영으로 올라갔다.
9월
7일(을미) 맑음. 탐망 군관 임 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중에서 13척이 이미
어란포 앞바다에 왔는데, 그 뜻은 필시 우리 수군에 있는 것이다."한다.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을 내려 재삼 신칙 했다. 과연 오후 4시경에 적선 12척이 나타난다. 우리 배들이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서 적을 추격하니,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한다. 먼 바다까지 쫓아가다가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리고 또 복병이 있을까 걱정도 되어 끝까지 쫓지는 않았다. 벽파정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약속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습격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다."하고 재삼 타일러 경계하고 헤어졌다. 밤 8시경에 과연 적들이 습격해 왔다.
그들은 탄환을 많이 쏘아 댄다. 내가 탄 배가 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과 산이 모두
흔들린다. 적의 무리들도 대항하지 못할 것을 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 하면서 그저
포만 쏠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정이 넘자 아주 도망해 버렸다.
9일(정유) 맑음. 구일 명절이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차려 먹이려는데 마침 부찰사 군량 중
제주 소 5마리가 왔다. 녹도 송 여종과 안골포 우 수를 시켜 그것을 잡아다가 군인들에게 먹이고
있는데, 적선 2척이 감보도로 해서 곧장 들어와 우리 배의 형편을 살피는 것이다. 이에 영등포
만호 조 계종이 바짝 추격하자 적들은 당황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달아났다.
14일(임인) 맑음.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정 건너편에서 봉화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서
실어 왔더니 곧 임 준영이었다. 정찰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2백여 척 중에서 55척이 먼저
어란으로 돌아갔다."한다. 또 말하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 중걸이 전하는
말에, 중걸이 이달 초 6일에 밤새도록 산에 의지해 있다가 왜적에게 붙잡혀서 결박되어 왜선에
실렸는데,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을 만나서 왜장에게 사정하여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왜병이 깊이 잠들었을 때를 타서 귀에 입을 대고 남몰래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말을 들으니 조선 수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쫓아와서 혹
쏘아 죽이기도 하도, 혹 배를 불태우기도 했으니 몹시 통분한 일이다. 이제 각 처의 배들을 불러
모아서 합세해서 모두 섬멸시킨 뒤에 바로 서울로 가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이런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므로 즉시 전령을 보내서 피란민들에게 타일러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했다.
15일(계묘)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서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꼭 죽으려고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고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서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하고 재삼 엄격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했다.
16일(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부대가 나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이 명량으로 해서 똑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것으로 온다."고 한다. 즉시 여러 배들에게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 배들을 포위한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항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생각하고 문득 회피할 꾀를 내는데, 이때
우수사 김 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 현자 등 여러 가지 총을 어지러이 쏘니 탄환은 바람과 천둥치듯 쏟아진다. 한편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들이 대항하지 못하고 가까이 왔다
물러갔다 한다. 하지만 여러 겹으로 포위 당해서 형세가 장차 어찌될지 알 수가 없어, 온 배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낯빛이 질린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다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이 틈을 타서 더 대어 들것이어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를 세우라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 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 위를 불러, "안 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 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한다. 나는 또 김 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했다. 이 두 배가 적진을 향해서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게 지휘하여
안 위의 배에 마치 개미 떼처럼 붙어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한다. 이에 안 위와 그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럽게 치다가 배 위에 사람이 거의 힘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적에게 들어가서 비가 퍼붓듯이 마구 총을 쏘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모두 쓰러진다. 이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 응두의 배가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서 쏘아 죽이니 적이 한
놈도 움직이지 못한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적의 배를 굽어 보더니, "저기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의
적장 마다시다." 한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 돌손을 시켜서 갈구리로 낚아서 배에 올리니,
준사는 기뻐서 날뛰면서, "이게 마다시다." 한다. 나는 즉시 명령하여 그놈을 토막 지어 베어
죽이게 하니 적들의 의기가 크게 꺾였다. 우리 모든 배들은 적들이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올리고 소리치면서 쫓아 들어가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움직이고
또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서 적선 31척을 깨뜨리니, 적선은 모두 물러가고 다시 접근해 오지
못한다. 우리 수군은 이 바다에서 정박하려 했으나 수세가 몹시 험하고 바람도 또 거슬러 불 뿐
아니라,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당사도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17일(을사) 맑음. 어외도에 이르니 피란선이 무려 3백여 척이나 먼저 와 있었다. 나주
진사, 임 선, 임 환, 임 업 등이 와서 보았다. 우리 수군이 크게 이긴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또 양식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주었다.
18일(병오) 맑음. 그대로 어외도에 머물렀다. 내 배에 탔던 순천 감목관 김 탁과 영노 계생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박 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 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19일(정미) 맑음. 일찌기 떠나 행선 했다. 바람이 부드럽고 물결도 순하여 무사히 칠산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인가 곳곳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대고 잤다.
20일(무신) 맑음. 새벽에 떠나 바로 위도에 이르니 피란선이 많이 닿아 있다. 이 광축, 광보가
보러 왔다.
23일(신해) 맑음. 승첩에 관한 장계 초본을 마련했다. 정 희열이 와서 보았다.
10월
1일(무오) 맑음. 아들 회를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 오라고
했다.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와서 아산 소식을 전하는데, 집이 적에게 습격 받아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9일(병인) 맑음. 일찍 떠나 우수영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다. 또 인적도
보이지 않으니 참담하기 한이 없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김 종려, 정 조, 백 진남 등이 보러 와서 만났다.
11일(무진) 맑음. 새벽 2시경에 바람이 자는 것 같으므로 비로소 닻을 들고 바다 가운데
이르러 정탐인 이순, 박 담동, 박 수환, 태 귀생 등을 해남으로 보냈더니,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하니 이는 필시 적의 무리가 달아나다가 불을 지른 것일 게다. 낮에 안편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적이 배를
감추어 둘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동쪽은 앞에 섬이 있어서 멀리 바라볼 수가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까지 통해 있고 서쪽으로는 비금도에 통해서 눈이 훤했다. 조금
있다가 중군당과 우치적이 올라왔다. 조 효남, 안 위, 우 수가 뒤따라 올라왔다. 날이 저물 무렵
산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노라니 조 계종이 왔는데 그는 왜적의 정세를 말하고 나서 또
말하기를 왜적들은 우리 수군을 몹시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 희급의 부친이 와서 뵙고, 자기가
포로 되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마음 아픔을 이길 수 없다. 저녁엔 날씨가 따뜻해 봄과 같고
아지랭이가 하늘에 날아 비 올 기미가 많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창가에
앉았노라니 회포가 어지럽다. 밤 10시경 허한이 몸을 적신다. 자정엔 비가 내렸다. 이날 우수사가
군량선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무릎을 때렸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13일(경오) 맑음. 정찰선이 임 준영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정세를 들으니, 해남으로
들어와 웅거했던 적들이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모두 도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남 송 언봉과 신 용 등이 적진 속으로 들어가 왜놈들을 데리고 나와 지방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하니 통분함을 참을 수가 없다. 우수사의 군관 배 영수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사의 부친이 바깥 바다로부터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낮에 들으니 선전관 네 사람이 법성포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저녁때 중군 김 응함에게 들으니, 섬안에서 누군가가 산 속에 숨어서 소와
말을 잡아 죽인다고 한다. 즉시 황 득중, 오 수를 보내서 수색하게 했다.
14일(신미) 맑음. 새벽 2시쯤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실족해서 내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내 아들 면이 나를 붙들어 안는 것 같은
형용을 하는 것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알 수가 없다. 늦게 배 조방장과 우후 이 의득이
오고 배의 종이 경상도로부터 와서 적의 상황을 전한다. 황 득중 등이 와서
보고하기를, "내수사의 종 강 막지라는 자가 소를 많이 치기 때문에 12마리를 끌어갔다."고 한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 편지를 전하는데, 떼어 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황난하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이라는 두 자가 써
있다. 면이 전사한 것을 마음 속으로 알고 간담이 떨려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나?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무엇을 의지한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너를 따라가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리라. 네 형과 네 누이와 너의 어머니도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 목숨은
남아 있어도 이는 마음은 죽고 형용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 이날 밤 9시경에 비가 내렸다.
16일(계유) 맑음. 우수사와 미조항 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 원 유형도 보냈다. 밤
10시에 순천 부사 우 치적, 우후 이 정충, 금갑 이정표, 제표 주 의수 등이 해남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왜적 13명과 적진에 투항해 들어갔던 송 언달 등의 머리를 베어 왔다.
21일(무인) 비가 오다가 눈으로 변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와 뱃사람들이 얼고 떨 것을
염려하여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 정 상명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안 현감 남 언상이
들어왔다고 한다. 언상은 본래 수군에 소속된 관원인데, 제 몸만 보전하려는 계책으로 수군에는
오지 않고 몸을 산골에 숨긴 지 달포가 넘었다가 이제 적이 물러간 뒤에야 무거운 벌을 받을까
겁내어 비로소 나타났으나 그 하는 짓이 몹시 해괴하다. 늦게 가리포 및 배 조방장 우후가 왔다.
25일(임오) 맑음. 종 순화가 배를 타고 아산으로부터 온 편에 집안 편지를 받았다. 초저녁에
선전관 박 희무가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명나라 수군의 배가 정박하기 적당한 곳을 생각해서 곧
장계하라는 것이었다.
28일(을유) 맑음.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해서 피 은세에게 주어 보냈다. 늦게 강 막지의
집으로부터 지휘선으로 옮겨 탔다. 저녁에 염장의 도서원 걸산이 큰 사슴을 잡아 바쳤으므로
군관들에게 내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30일(정해) 맑으나 동풍이 불고 비 올 기미가 많다. 아침에 집 지을 곳에 내려가 앉았노라니
여러 장수들이 보러 왔다. 해남 원 유 형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자들의 짓을 전해 준다. 일찌기
황 득중을 시켜 목수를 데리고 섬 북쪽 산 밑에 가서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늦게 적에게로
갔던 정 은부와 김 신웅의 계집 등과 또 왜놈을 지시하여 나쁜 짓을 하게 한 김 애남 등을 모두
목베어 죽였다.
11월
1일(무자) 비. 아침에 사슴 가죽 2장이 물에 떠내려왔기에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다. 저녁에 북풍이 크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려서 사람이 안정할 수가 없었다.
7일(갑오) 맑음. 아침에 해남 의병이 왜적의 머리 하나와 환도 1자루를 갖다 바쳤다. 이
종호와 당 언국을 잡아 왔기로 거제 배에 가두어 두었다. 늦게 전 홍산 윤 영현과 생원 최 집이
보러 와서 군량 벼 40석과 쌀 8석을 바쳤다. 며칠 동안의 양식에 도움이 되겠다. 본영 박 주생이
왜인이 머리 2개를 베어 왔다.
11일(무술) 맑음. 식사 후에 새 집에 올라가니 새로 부임한 평산 만호가 도임장을 바친다.
그는 하동 현감 신 진의 형 신 휜이다. 전하는 말이 그는 이미 숭정으로 승진되었다고 한다.
12일(기해) 맑음. 늦게 영암, 나주 사람들을, 타작을 못하게 했다고 해서 결박지어 왔다. 그
중에서 주모자를 가려내어 처형하고 나머지 4명은 각 배에 가두었다.
14일(신축) 맑음. 해남 원 유 형이 와서 윤 단중의 무리한 일을 많이 전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해남 아전이 법성포로 피란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는데, 이를
구조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배 안에 있는 물건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를
중군 배에 가두었다. 김 인수는 경상도 수영 배에 가두었다.
16일(계묘) 맑음. 아침에 조방장과 장흥 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군공을 조사한 기록을 보니, 거제 현령 안 위가 통정이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로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내게는 상으로 은자 20냥을 보내왔다. 명나라 장수 양 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배에 괘홍의 예식을 행하고 싶으나 멀어서 가지 못한다."했다.
영의정의 답장도 왔다.
18일(을사) 맑고 따뜻하여 봄날과 같다. 윤 영현이 보리 왔고 정 한기도 왔다.
20일(정미) 맑음. 송 응기 등이 산역군을 데리고 해남 소나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날 밤
순생이 와서 잤다.
22일(기유) 흐리다 맑다 함. 저녁에 김 애가 아산에서 돌아왔다. 그는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온 사람으로서, 이달 10일에 아산 집에 들렀다가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이다. 밤에 비와 눈이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다. 장흥에 있던 적은 20일에 도망갔다는 보고가 왔다.
23일(경술) 바람이 크게 불고 눈이 많이 내렸다. 이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아산 집에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눈물을 거둘 수가 없다.
28일(을묘) 장계를 봉했다. 무안에 사는 진사 김 덕수가 군량 벼 15석을 가져다가 바쳤다.
29일(병진) 맑음. 마 유격의 차관 왕 재가 명나라 군사가 수로로 내려온다고 말한다. 전
희광과 정 황수가 오고 무안 현감도 왔다.
12월
1일(정사)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경상 수사 이 순신이 진에 왔으나 나는 배가 아파서 늦게야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종일 대책을 의논했다.
2일(무오) 맑음. 날씨가 매우 따뜻하다. 영암 향병장 유 장춘이 적을 토벌한 사연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50대를 때렸다. 윤 홍산, 김 종려, 백 진남, 정 수 등이 보러 왔다.
4일(경신) 맑고 몹시 추웠다. 늦게 김 윤명에게 곤장 40대를 쳤다. 장흥 교생 기업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을 쳤다. 거제 미치 금갑도, 천성이 타작을 끝내고 돌아왔다. 무안 및 전
희광도 돌아왔다.
5일(신유) 맑음. 아침에 군공을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김 돌손이 봉학을 데리고 함평 땅으로 갔다. 보자기 수색의 책임을 맡은 정 응남이 점세를
데리고 새로 만드는 배를 검사하기 위해서 진도로 가려고 함께 떠났다. 해남의 독동을 처형했다.
전 익산 군수 고 종후가 왔고, 김 억창이 오고, 광주 박 자가 오고, 무안 나 덕명도 왔다.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어제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서 이 순신이 아직도
전도로 방편을 좇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 하니,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국가의
일이 바야흐로 바쁘고, 또 옛 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자가 아니라고 했고,
또 전쟁에 나가서 용맹스럽다는 것은 소찬을 먹어 기력을 피곤해 가지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예기에도 경과 권이 있다고 해서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니, 경은 내 뜻을 깊이
생각하여 소찬 먹는 일을 그치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하였다. 또 임금의 분부로 고기 음식을
가지고 왔으니 더욱 비통한 일이다. 해남의 죄인들을 함평이 자세히 심문했다.
10일(병인) 맑음. 해, 열과 진원이 윤간, 이 언량과 함께 들어왔다. 배 만드는 곳에 나가
앉았었다.
11일(정묘) 맑음. 경상 수사 이 순신 및 조방장 배 흥립이 보러왔고, 우수사 이 시언도 왔다.
18일(갑술) 눈.새벽에 해는 어제 마신 술이 채 깨기도 전에 배를 타고 떠났다. 심회가 편치
못하다.
21일(정축) 눈. 아침에 홍산 윤 영현이 목포에서 보러 왔고, 늦게 배 조방장 및 경상 수사가
보러 왔다가 술이 취해서 돌아갔다.
22일(무인) 비와 눈이 섞여 내렸다. 함평 현감 손 경지가 들어왔다.
23일(기묘) 눈이 세 치나 쌓였다. 순찰사 황 신이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24일(경진) 눈이 오다 혹 개기도 했다. 아침에 이 종호를 순찰사에게 보내서 문안했다. 이날
밤에 나 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머무르고 있는 것을 싫어하는 줄을 모르니
한심스럽다. 밤 10시경에 집에 편지를 썼다.
25일(신사) 눈. 아침에 열이 돌아갔는데 이는 그 어머니 병 때문이다. 늦게 경상 수사와 배
조방장이 와서 보았다. 오후 6시경에 순찰사가 진중에 와서 함께 군사에 관한 것을 상의했다.
연해 19고을은 수군에 소속시키기로 했다. 저녁에 방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26일(임오) 눈. 방백과 방에 앉아 군사에 대한 방책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늦게 경상 수사와
배 조방장이 보러 왔다.
28일(갑신) 맑음. 경상 수사와 배 조방장이 보러 왔다. 비로소 들으니 경상 수사가 가지고 온
물건이...(이 아래는 원문을 알 수 없음.)
29일(을유) 맑음. 영암 좌수는 문초해서 놓아주었다. 오후 8시쯤 다섯 사람이 선두에 왔다고
하기에 시골종을 보냈는데...(이 아래는 원문을 알 수 없음.)
30일(병술) 입춘. 눈보라가 어지럽고 몹시 추웠다. 배 조방장이 와서 보았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와 보았는데, 평산 만호와 영등만이 오지 않았다. 부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밤은 1년이 끝나는 밤이라, 비통한 마음 더욱 심했다.
@ff
7. 무술년 일기
1598년 1월 1일__11월 17일
진중에서 읊음
한바다에 가을 바람 서느러운 밤
하염없이 홀로 앉아 생각하노니
어느께나 이 나라 편안하리오
지금은 큰 난리를 겪고 있다네
공적은 사람마다 낮춰 보련만
이름은 부질없이 세상이 아네
변방의 근심을 평정한 뒤엔
도연명 귀거래사 나도 읊으리
1월
1일(정해) 맑음. 늦게 눈이 내렸다. 경상 수사와 조방장 및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2일(무자) 맑음. 나라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날 새 배에 낙괴했다. 해남 현감
유 형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 대립, 송 득운, 김 봉만이 각 고을로 나갔다. 진도 군수 선
의문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일(기축) 맑음. 이 언량, 송 웅기 등이...(이하는 글자가 없어졌음.)
4일(경인) 맑음. 무안 현감 남 언조를 곤장을 때렸다. (이하는 글자가 없어졌음.)
-1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 빠졌음.
9월
15일(정유) 맑음. 진 도독이 인과 함께 일제히 행군하여 나로도에 이르러 잤다.
19일(신축) 맑음.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참담하다. 자정에
달을 타고 하개도로 배를 옮겨 대었다가 날이 새기 전에 행군했다.
20일(임인) 맑음. 오전 8시에 유도에 도착하니 명나라 장수 유 제독이 이미 진군했다. 바다와
육지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많기고, 수군이 드나들면서 대포를
쏘았다.
21일(계묘) 맑음. 아침에 진군해서 혹 활도 쏘고 혹 대포도 쏘면서 종일 서로 싸웠으나
조수가 매우 얕아 진격할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적이 경쾌선을 타고 돌아와서 정탐하려 하는데,
허 사인 등이 쫓아갔더니 적은 육지에 올라 산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탔던 배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빼앗아다가 즉시 도독에게 바쳤다.
22일(갑진) 맑음. 아침에 진군해서 나갔다 들어갔다 하다가 유격이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사람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자세포 만호와 옥포 만호도
탄환에 맞았다.
23일(을사) 맑음. 도독이 화를 내어, 서천 만호 및 홍주 대장과 한산 대장 등을 각각 곤장
7대를 때리고, 금갑도, 제포, 회령포에게도 각각 15대의 곤장을 때렸다.
25일(정미) 맑음. 진 대강이 돌아와서 유제독이 보내는 편지를 전했다. 이날은 육지를 떠나서
공격을 하려고 해도 모든 기구가 완전치 못했다. 김 정현이 와서 만났다.
27일(기유) 아침에 비가 잠시 뿌리더니 서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형 국문이 글을 보내서
해군이 속히 진군한 것을 칭찬했다. 식사 후에 진 도독을 보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저녁에 신 호의가 와서 보고 잤다.
30일(임자) 맑음. 이날 저녁에 왕 유격, 복 유격, 이 파총이 백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왔다. 이날 밤 등불이 휘황하여 적의 무리들의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10월
2일(갑인) 맑음. 오전 6시에 진군해서 우리 해군이 먼저 나갔는데, 오정까지 싸워서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 첨사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고 이 청일도 역시 전사하고, 제포 만호 주 의수와
사량 만호 김 성옥, 해남 유 형, 진도 군수 선 의문, 강진 현감 송 상보가 탄환에 맞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3일(을묘) 맑음. 도독이 유제독의 비밀 서류에 의하여 초저녁에 나가 싸워서 자정에 이르도록
격전해서, 명나라 배 사선 19척과 호선 20여척이 불타서 도독이 뛰고 자빠지고 하는 것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다. 안골 만호 우 수가 탄환에 맞았다.
4일(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배를 띄워 적을 공격하여 종일 서로 싸우니, 적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달아났다.
6일(무오) 맑고도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서 말하기를, "유 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했다. 통분한 일이다. 나라 일이 장차 어이 되려는가?
9일(신유) 육군이 이미 철수했기 때문에 도독은 배를 거느리고 바닷가 정자에 이르렀다.
11월
8일. 도독부에 나가서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다가 어둘 무렵에 돌아왔다. 이윽고
도독이 보자고 청하기에 즉시 나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의 적들이 10일경에 도망해
철수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통지되어 왔으니 급히 진군해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는
것이었다.
9일. 도독과 함께 일제히 행군해서 백서량에 이르러 진을 쳤다.
10일. 좌수영 앞바다로 가서 진을 쳤다.
11일. 유도로 가서 진을 쳤다.
13일. 왜선 10여척이 장도에 나타났으므로 곧 도독과 약속하고 해군을 거느리고 추격하니
왜선은 물러가 움츠리고 종일토록 나오지 않는다. 도독과 함께 장도로 돌아와 진을 쳤다.
14일. 왜선 2척이 강화할 목적으로 바다 가운데까지 나오자, 도독은 왜말 통역관을 시켜서
왜선을 맞아 조용히 붉은 기와 환도 등의 물건을 받았다. 오후 8시경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2마리와 술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15일. 이른 아침에 도독에게 가보고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왜선 2척이 강화할 셈으로
두세번 드나들었다.
16일. 도독이 진 문동을 왜영으로 들여 보내더니, 이윽고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을
도독에게 갖다 바쳤다.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 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 효열 등이, 왜적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갔더니 왜적은 언덕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사로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겼다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ff
충무공 연보
1545년 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새벽,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남.
1566년 무예를 닦기 시작함.
1567년 2월, 맏아들 회 출생.
1571년 2월, 둘째 아들 울 출생.
1572년 8월, 훈련원 별과 시험에 응시 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뼈가 부러짐.
1576년
2월, 식년 무과의 병과에 합격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됨.
1577년 2월, 세째 아들 면 출생.
1579년
2월, 훈련원 봉사가 됨.
10월, 충청 병사의 군관이 됨.
1580년 7월, 전라도 발포의 수군 만호가 됨.
1582년
1월, 군기 정차관(조사관)의 사원에 의한 보고로 파직되었다가 5월에 다시 복직되어
훈련원 봉사가 됨
1583년
7월, 함남 병사의 군관이 됨.
10월, 건원보의 권관이 되어 오랑캐 두목 울지내를 사로잡음.
11월,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함. 이달에 부친이 별세함.
1584년 고향 아산에서 분산, 벼슬을 쉼.
1586년
1월, 사복시의 주부가 됨.
16일 후 곧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옮김.
1587년
8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함.
여진족의 기습을 격파했으나 병사 이 일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함.
1588년 윤 6월 집으로 돌아와 한거함.
1589년
2월, 전라 순찰사 이 광의 군관이 됨.
11월, 선전관을 겸함.
12월, 정읍 현감이 됨.
1590년
7월,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발령됨.
8월, 만포진 첨사로 승진되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정읍 현감에 유임됨.
1591년
2월, 진도 군수로 전임 발령되었으나 부임 천에 가리포 수군 첨사로 전임 발령됨.
13일에 전라 좌수사가 됨.
1592년
거북선이 완성됨.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남.
5월, 옥포, 함포,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여 가선대부에 승진됨.
6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승첩하여 자헌대부로 승진함.
7월, 한산도, 안골포 해전에서 승첩하여 정헌대부가 됨.
9월, 부산 해전에서 승리함.
1593년
웅포 해전에서 승첩함.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8월, 삼도 수군 통제사 됨.
1594년 10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함.
1597년
2월, 원 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파직, 서울로 끌려감.
3월 4일, 감옥에 갇힘.
4월 1일, 28일 만에 특사되어 권 율 도원수의 막하로 백의종군함. 이달에 모친
별세 함.
7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원 균이 대패하자 8월 3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됨.
9월, 명량 해전에서 승첩. 막내 아들 면이 아산에서 전사함.
10월, 고하도에서 수군 진영을 설치하여 전비 강화함.
1598년
2월, 수군 진영을 고금도로 옮김.
7월, 명나라 수군(도독은 진 린)과 연합 함대 결성함.
11월 19일 새벽, 노량 해전에서 유탄을 맞아 54세의 나이로 순국함.
-전사 후 45년 만인 인조 21년(1643), '충무'란 시호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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