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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탄드라비젼

by Casey,Riley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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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머리에)

이 책의 텍스트는 THE  BOOK OF THE SECRETS(I-IV)로서
1972년부터 1973년 11월까지  인도 봄베이에서
라즈니쉬에 의해 강의된 것인데 경전 부분의 강의는 전역(全譯)되고
질문 부문은 발췌해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전인 Vigyana Bhairava Tantra는
미국인 폴 랩스(Paul Reps)에 의해 영역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는 인도 북부의 캐쉬미르 지방 스리나가르를 여행하다가
은자 락쉬만쥬(Lakshmanajoo)에게서 산스크리트어필사본을 입수했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가지 질문들에 부딪친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해답을 찾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배운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마칠 때까지
풀지 못하는 특수한 유형의
질문들이 있다.
그 해답은 박사 과정에서도 배울 수가 없다.
이를테면 '나는 왜 태어나고 죽는 것인가?',
'지금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살고 싶어하는가?' 그리고 ' 이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등의 질문들은 쉽사리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만들었다. 철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만들면 만들수록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져서 그만 최초의 질문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그 질문을, 그 근원적인 의심을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곧바로 해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사고 활동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더 나아갈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서  은산철벽에
부딪칠 때,어쩔 수 없이 생각이 멈추어진다. 머리 굴림이 멈추어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그때 그 질문은 저절로 풀린다.
삶 자체가 완전한 우연성에서 완전한 당위성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더 이상 질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의심할래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개인의 실존적인 체험이어야만 한다.
그 체험을 추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사람들은 수행자, 혹은 구도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그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전세계 모든 종교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을
한권의 책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들을 그 책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엄청난 행운을 만난 것이 된다. 그 책이 바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즉, 우리말로  풀이하면
'의식 초월 탄트라'라는 책이다.
이것은 탄트리즘이 티벳으로 건너가 불교 탄트리즘으로 재구성되기 전,
 힌두 탄트리즘의 근본 경전이  되는 책으로서,
그 연원은 BC 30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여러 탄트라 경전 중에 가장 고대의 탄트라 경전인 것이다.
그 책은 매우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들의 112가지 소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112가지 소절은 앞에서 말한 궁극적인 질문들을푸는 방법을 적어 놓았다.
인생에서 가장 궁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가  이 112가지  방법 중에  한가지만이라도  통달한다면
그는 종교를  만들 수  있는 교조(Founder)의 역량을 갖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책의 이런 특수성과 여러가지 역사성  때문에
그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종교들의 수행 방법이 이 112가지  중의 한두가지를 채택하고 있어
지구상의 어떤 명상 방편도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고 이 경전을 강의한 오쇼 라즈니쉬는 말하고 있다.
한편, 아직 한국에서는 일부  예술과 문학에만 도입되고
 정신운동으로까지 파급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방향을 불러일으키는 사조가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것이 단순한 사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뉴에이지 무브먼트(New Age Movement)'라 불리는 정신운동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운동은 60년대와 70년대에 세상을 풍미했던 히피 운동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히피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 병리 현상의
한 반응이지만, 이 뉴에이지 무브먼트는 사회 각 방면의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벌이는 일종의 문화 운동이며 제2의 르네상스라고까지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에는 거대한  사상적 기둥이 둘 있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두  사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u  krishnamurti)와
 오쇼  라즈니쉬  (OshoRaneesh)라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 의식의 개혁이다.
이들은 사회 제도나 종교의 개혁을 부르짖는 것이다.
신인류(New Man)의 탄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후세에이 두 사람은  21세기 우주 문명을 예언한 20세기
지구 문명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기억될 것이다.
흔히들 바둑 애호가들은 바둑을 인생에 비유해서 말하곤 한다.
그래서 인생 애호가라고 할 수  있는 역자는
(딱히 무엇이라고 부를 만한 주의를 갖고 있지 않기에)
인생의 일면을 바둑에 비유해서 말하고 싶다.
한 판의 바둑은 유희를 벌이는 두 사람의 실력에 따라서 그 질이 달라진다.
똑같은 흑돌과 백돌을 쥐고서 똑같은  바둑판에 돌을 놓아 가지만
그 차원은 모두 다른 것이다. 그처럼
인생 역시 똑같은 구조를 가진 육체와 똑같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삶의 유희를 벌이고 있지만 그 차원은 제각기 다르다.
인생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질이 제각기 다른 것이다. 그리고 바둑의 급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정석과 방편들을 적어놓은 기서를 읽어야 하듯이
인생의 급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여기에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라고 하는
최고(最古)의 인생 기서가 있다.
그리고 이 기서를 명쾌하게 현대어로 강의하는 인생의 명인'오쇼 라즈니쉬'가 있다.
그리하여 이 책 '탄트라 비전'은 그것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인생 급수가
18급에서 9단으로 도약하리라고 역자 본인은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은 미약한  역자보다 더 재능있고 훌륭한 사람의 손에  의해
앞으로도 계속 재번역의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책이라는 점도 확신한다.
부족한 번역에 독자 제위의 애정 어린 질책과 지도를 기다리는 바이다.


         (목차)
제1권
1. 탄트라의 세계
2. 호흡(呼吸),우주에 이르는 다리
3. 다섯개의 신비
4. 그대의마음을 쉬게 하는 방편들
5.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
6.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I
7.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II
8.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V
9. 정지 명상법
10.지성파와 감성파를 위한 각각의 방편

제2권
1. 시각(視覺) 명상법 I
2. 시각(視覺) 명상법 II
3.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
4.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I
5.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II
6.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V
7. 탄트라적 성행위의 영적 의미
8. 환상에서 실재로
9. 삶을 흐르는 물결처럼
10.파도에서 바다까지

제3권
1. 자각과 판단 정지를 위한 탄트라 방편
2. 변화를 통해 변함없음을 발견한다.
3. 욕망으로부터 자유에 이르는 길
4. 빛과 함께하는 탄트라 명상
5. 현존에 관한 방편들
6. 존재계로 되돌아오라
7. 에고를 조복받는 방편들
8. 허공의 발견
9. 자유를 찾아서
10.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4권
1. 그대의 집은 불타고 있다.
2. 약도없는 길
3. 삶은 하나의 신비다
4. 마음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다
5. 그대 자신은 그대에게 낯설다
6. 위험 속에서 살아라
7. 변형의 공포
8. 붓다의 오르가즘
9. 존재가 되라
10.텅 빔의 철학

탄트라의 세계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탄트라의 세계

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살펴볼  것이 몇가지 있다.
먼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세계는 지성적이거나 철학적인 세계가 아니다.
여기에 이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길과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도덕이나 원칙 같은 것도 없다.
'탄트라'라는 말 자체가 방법이나 길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이  점을 주시하라.
탄트라는 지적인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사물을 '왜'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문제로 대한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에 이를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또한 '탄트라'라는 말은 테크닉을  의미하며 이런 접근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다.
과학은 '왜'라는 의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의문에 더 관심을 쏟는다.
바로 이 점이 과학과 철학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철학자는 '이것은 왜 존재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러나 과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대가 '어떻게'라고 묻는 순간, 그때는 방법 즉 테크닉이 중요해진다.
그때 탁상공론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심이 되는 것은 경험이다.
탄트라는 과학이다. 탄트라는 철학이  아니다.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거기에는 오직  지능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대는 변화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그대의 변형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차원에서 그대로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탄트라는 다르다.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변화를, 그대의 차원적 승화를 요구한다.
그대가 달라지지 않는 한 탄트라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생각만으로, 그대의 두뇌만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그대의 전체성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전부를 요구한다.  그것은 훨씬 깊은 도전이다.
그대는 그 속에서 전체가 되어야 한다.
탄트라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전 존재를 바치는 길이다.
물론 여기서 데비의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며 추상적이다.
하지만 탄트라는 데비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철학적인 질문 자체가 이미 추상적이며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질문은 두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아니면 본질적이냐' 혹은 '지적이냐 아니면
전체적이냐' 하는것으로 말이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대는 그것을
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거기에 이론을 덧붙이고 가설을 세울 수 있으며
결론을 이끌어낼 만큼 체계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론을 세우는 데는 경험이 필요치 않다.
차라리 적게 알면 더 과감하게 체계와 이론을 세울 수 있다.
오직 장님만이 빛이 무엇인지를 손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할 때 무식할 때 대담해지는 법이다.
앎은 사람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대가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
많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크게 느낀다.
그래서 진짜로 현명한 사람들은 무지로 돌아간다.
그들은 어린아이나 바보처럼 순수해지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되려 한다면, 이론으로 하나의 체계를 세우려면
그대는 적게 알수록 좋다. 그래야 일이 쉽게 된다.
지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킨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적인것은 결코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사색이나 추론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야 되는 법이다.
사랑에 대한 이론과 철학을 안다고 해서 그대가 몸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체험만이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올 때는 이미 그대의 옛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옛날의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틈이 생겼다.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사람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의 의미이다.
탄트라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데비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데비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시바는 데비의 질문에 어떤 해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데비가 묻는 질문에 시바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질문은 데비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질문은 끊임없이 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질문의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데비의 질문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오직 시바만이 대답할 수 있다.
시바의 차원에 이르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진정한 해답을 보여줄 수 없다.
데비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한가지 테크닉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대비가 그 테크닉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해답은 언제나 질문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바는 '내가 누구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한가지 방편,하나의 테크닉을 가르쳐 줄 뿐이다.
그리고 그 테크닉을 쓸 수 있다면 그대 역시 해답을 알게 될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행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것은 없다.
그대가 뭔가를 행하지 않으면,  그대가 변화되지 않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으면,
지적인 차원 이상의 차원으로  옮겨가지 못하면,
거기에는 해답이 없다.
물론 여러가지 그럴싸한 대답들은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말들이다. 모든 철학적 해답들이 그러하다.
그대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철학은  거기에 맞추어 대답한다.
 그러면 그대는 만족스럽기도 하고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만약 그것이 그대를 만족시키면 그대는 그 철학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 속에서 아무런 변화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  그것이 그대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만족할 만한 철학을 만날  때까지 찾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대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감동받지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상태로 말이다.
그대가 힌두교도이건,  불교도이건, 아니면 기독교도이건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단지  그대를 가리고 있는 가면이며 옷일 뿐이다.
교회나 사원, 혹은 모스크에 가더라도 똑같은 사람이 간다.
단지 가면만 다를 뿐이다. 복장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가면과 복장은 모두 가식이며 거짓이다.
그것을 들추어버리면 똑같은 사람이 나온다.
똑같은 공격성, 똑같은 분노, 폭력,탐욕, 질투 등등,
모든 것이 똑같다. 기독교도의 성(性)이  불교도의 성과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도의 폭력이 이슬람교도의 폭력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모두 마찬가지다.
사람은 같은데 입고있는 옷이 다를 뿐이다.
탄트라는 그대의 옷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탄트라는 옷속에 감추어진 그대 자신을 바라본다.
만약 그대가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빛에 대해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빛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탄트라의 영역이다.
'빛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즉시, 탄트라는
묻는 자에게 그가 지금 눈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 다음 그를 변형시켜 그로 하여금 빛이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탄트라는 결코  빛이 무엇이라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빛으로 인도하고 빛을 보게끔 눈을 띄워 준다.
그래서 탄트라의 해답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눈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이것은 지적인 것이다.
하지만 눈먼사람 자신이 직접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탄트라를 지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시바는 데비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한편 탄트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는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탄트라의 언어는 시바와 그의 연인 데비  사이의 대화이다. 데비는 묻고
시바는 대답한다.
모든 탄트라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왜? 왜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연인끼리의 달콤한 속삭임이다.
둘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깊은 가르침은 전달되어지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연인만큼 깊은 관계여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이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사랑의 언어이다. 제자는 사랑의 자세속에 머물러야 한다.
탄트라는 제자가 수용성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자는 여성의 수용성으로 표현된다. 오직 그때만이 뭔가가 가능하다.
그대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적인 수용성의 기질을 갖추어야 한다.
데비는 묻는다. 그것은 여성적인 질문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면 왜 여성적인 태도를 이렇게 강조하는가?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다르다.
여성적인 마음은 수용성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받아들임, 완전한 신뢰와  헌신, 그리고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자는 이 여성의 심리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배울 수 없다.
그대가 닫혀 있는 한  그대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
질문만 던지고서 닫힌 채로  남아 있다. 그때 해답은
그대를 통과할 수 없다.
그대의 문은 닫혀 있다. 그대는 죽어 있다.
여성의 수용성은 자궁의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단순한 수용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여성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성의 정액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자기 몸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결코 외부의 이물질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의 몸은 창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태아는 그 속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제자에게는 자궁과 같은 수용성이 필요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죽은 지식을 긁어 모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것은 피와 살이 될 것이다.
그것의 성장은 그대에게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의 방식이다.
모든 탄트라 경전의 형식이 데비의 질문에 시바가 대답하는 것으로  일관되는데
데비는 시바의 여성 파트너이다.
한편 현대 심리학에서는, 특히  심층 심리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남자거나 여자이기만 한 인간은 없다. 모든 사람이 양성을 갖고 있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을 갖고  있으며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매우 최근에 발견된 사실이지만
탄트라에서는 수천년 동안 가장 기본적인 개념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그대는 시바가 아르다나리쉬바르(ardhanarishwar)의 모습,
즉 반남반녀 (半男半女)의 모습을 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시바는 반은 남자, 반은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데비는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다. 그녀는 시바의 다른 반쪽이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의 다른  반쪽이 되지 않는 한
스승으로부터 비법을, 심오한 가르침을 전수받기란 불가능하다.
그대가 스승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의심이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논쟁이 사라지고 논리와 이유가 사라진다.
완전히 하나로 흡수되어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그대속에서 그 가르침은 자라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그대를 변형시킨다.
논리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논리적인 언어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다.
내가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확증을 주고 개종시켜서 나의 제자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때 나의 주장은 옳고 그대의 주장은 틀리게 된다. 논리적인 언어는 자아
중심적이다. 그것은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에고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에고에만 관심이 있다. 자신의 에고는 항상 옳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나의  에고에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그대에게만 관심이 있다.
나는 내  말을 증명하거나 나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데 무관심하다.
나는 오직 그대를 돕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대가 성숙하고 변형되고 다시 태어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두번째로 논리는 항상  지적이다. 그때 개념과 원리는  매우 중요한것이 된다.
그리고 논쟁이  중요해진다.
그때 무슨 말을 하든 사랑의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그렇지 않다.
그때 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은 단지 가슴을 담는 그릇이다.
가슴과 가슴의 전달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것이다.
파르바티(데비의 다른 이름)는 시바의 무릎 위에 앉아서 묻고 있고 시바는 대답한다.
이것은 사랑의 대화이다. 거기에는 어떤 갈등도 없다.
시바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왜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 이토록 강조하는가?
그대가 스승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때 모든 행동 양식이 변화된다.
그때 이미 그대는 귀를 통해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마셔버리는 것이다.
그때 그의 말은 상관이 없다. 말 중간에 흐르는 침묵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그의 몸놀림, 그의 자비와 사랑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가 고집하는  구조이다.
모든 구절들이 데비가 묻고 시바가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대의 닫힘은 부서져 나가야 한다. 그때 스승은 약간 공격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편견과 선입관은 부서져야  한다.
그대가 과거를 완전하게 씻어내 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바의 동반자인 데비의 자세가 아니다.
데비에게는 어떤 과거도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억하라.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질 때 그대의 마음은 정지한다.
거기에는 과거가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남는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현재이며 유일한 시간이다.
지금이 전부이다. 거기에 과거나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데비는 그저 열려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방어막도 없다.
이제 청소되거나 파괴되어야 할 그루터기가 남지 않았다.
밭은 준비가 끝났다. 씨만 떨어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씨앗을 받아들여 품고 싹이 트게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모든 말들은
수천년 전부터  전해져왔던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들은 시바에 의해
주어진 메시지로서 베다와  바이블과 코란의 가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탄트라 각각의  문장들은 위대한 경전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보통 경전들은 교리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토론하고
보호하거나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사랑의 문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라는 말은 직역하면
'의식을 초월하는 방편'이다.
'비그야나(viguana)는 의식을 의미하며
'바이라바(Bhairava)'는 의식을 넘어선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탄트라'라는 말은 방편, 테크닉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식을 초월하는 방편'은 가르침 중에서도 최상의 가르침이다.
이것보다 더 고차원적 가르침은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무의식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의식적으로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의, 선사(禪師)들의 방편,
그것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좀더 인간이 의식적으로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더 깨어있을 수 있는가?',
'좀더 의식 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것을 하나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옮겨간다면 그것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둘 다를 모두 넘어가라. 그대가 양극을 모두 초월하지 않는 한 결코 궁극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도 되지 말고 의식으로도 만족하지 말라.
초월하라. 존재하라. 의식적으로도 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도 되지 말라.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선(禪)과 요가마저도 뛰어넘는다.
'비그야나'는 의식을 의미하는 보통 말이지만 '바이라바'는 특별한 용어이다.
그것은 탄트라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초월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시바는 '바이라바'로 데비는 '바이라비'로 알려져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중성을 뛰어넘은 자들이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오직 사랑만이 초월에 대한 일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때문에 탄트라 지혜의 기본 방편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만이 모든 이중성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이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가 된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둘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이중성이 초월된 것이다.
오직 이런 뜻에서 예수가 '신은 사랑이다'라고 한 말이 의미가 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상 사랑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이 사랑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베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신은 사랑이다' 란 말은 탄트라의 문구이다.
그것은 신 혹은 신성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사랑임을 의미한다. 왜인가?
사랑속에서는 하나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두가지로 나뉘어지지만 육체를 초월한 어떤 것이 하나를 이루게 된다.
사람들이 그토록 섹스를 갈망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갈망은 섹스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됨에 있다.
섹스를 통해서 두개의 육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일 뿐이다.
단 한순간 동안만 그들은 두개의 육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신체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갈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거기에서 멈추어 버린다면 위험한 것이다.
이 갈망은 하나됨을 원하는 더 깊은 목마름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속에서는 서로가 내면으로 녹아 들어간다.
거기에 하나됨의 느낌이 존재한다.
그때 이중성은 용해되고 만다.
이중성을 뛰어넘은 사랑속에서만이 우리는 바이라바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얼핏 볼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바이라바의 경지는  되돌아옴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사랑의 정점에서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 정점에 계속 머무름만이 있다.
우리는 시바가 카일라쉬(Kailash)산에서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카일라쉬 산은 가장 높은 정점, 가장
거룩한 정점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시바의 거처로 만들었다.
우리는 거기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거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순례 여행을 할 수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티르트라(Teerthyatra),순례라는 말이다.
사랑속에서 이 성스러운 순례 여행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성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골짜기,
어두운 골짜기에 살고 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사랑의 정점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곧 떨어지고 만다. 그곳은 너무 현란하고 휘황찬란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너무 높고 그대는 너무 낮다. 거기에서 계속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사랑속에서 계속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됨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시바의 거처이며 집이다.
바이라바는 사랑속에 산다. 그것은 그의 거처이다.
내가 그의 거처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카일라쉬 산꼭대기에서 산다면
그대는 거기가 카일라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카일라쉬의 꼭대기에서는 카일라쉬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정점에서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바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을 인식한다. 우리는 사랑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바는 사랑 자체이다.
바이라바의 경지는 그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정점에서 살고 있다. 이제 봉우리는 그의 거처가 되었다.
그러면 이 정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중성을 넘어서,
무의식을 넘어서, 의식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을 넘어서,
이 세상과 모크샤(Moksha;대자유)를 넘어서, 여기와 저기를
넘어선 곳에 이를 수 있을까? 그 방편이 바로 탄트라이다.
탄트라는 순수한 방편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데비가 가진 의문부터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그대 역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데비가
그렇게 묻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라.
'당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데비는 사랑 속에 깊이 빠져 있다.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
처음으로 그대는 내면의 실체와 대면한다. 그때 시바는 형상이 아니다.
그때 시바는 육체도 아니다.
그대가 사랑속에 있을 때 사랑하는 이의 육체는 사라진다.
형상은 사라지고 형상없는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심연을 대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육체를 대면할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할 때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심연을 대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진정이라면
그대의 육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절정의 순간 형상은 용해되고 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형상없음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데비는 처음에 형상과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시작된다.
그녀는 시바를 한 남자로 사랑했다.
이제 그 사랑이 성숙되었을 때 그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형상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어디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가장 강렬한 사랑의 순간에 터져나오는 것이다.
대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물응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에 한가지 물음을 창조하라.
대비는 시바가 사라졌을 때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형상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육체로써 움직이고 육체로써 살아간다.
하지만 육체가 그대는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는 하나의 육체로 보인다.
그의 내면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내면을 관통한다.
그때 더 이상 우리는 외부적인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
내면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때 형상은 사라진다.
임제 선사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의 첫번째 행동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내 몸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그는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가서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 좀 찾아오너라. 나는 내 몸을 잃어버렸다."
그는 형상없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대 역시 또 하나의 형상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을 직접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그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라. 거울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알겠는가? 만약 거울이 없다면 얼굴도 없다.
거울이 그대에게 얼굴을 주었다. 거울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홀로 남게 된다. 전혀 거울이 없고 거울처럼 작동하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다.
그대가 무인도에 홀로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거울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얼굴이나 육체가 있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우리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외형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또 다른 선(禪)의 스승인 회해선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명상속에서 너의 머리를 잃어버릴 때 그 즉시 나에게 오라.
그때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그때가 너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때가 되어야 드디어 너는 진정으로 배울 수 있게 된다."
머리를 갖고서는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사랑속에서만이 그대는 다른 사람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자신이 되어서 말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와 하나가 된다.
처음으로 그대는 존재의 심연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상없는 현존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수세기 동안에는 시바에 대한 어떤 초상화나 조각상도 조성하지 않았다. 단지
'시바링가(Shivalinga)'라는 상징물만 만들었을 뿐이다.
시바링가란 단지 빛나는 현존, 빛의 오라(aura)일 뿐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대가 어떤 사람속으로 들어갈 때
그는 육체가 아니다.
빛나는 현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데비는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우주는 어린아이들만이 안다. 연인도 안다. 때때로
시인과 미친 사람도 안다. 그러나 그대는 모른다. 이 세계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그대는 알지 못한다. 그대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다. 그대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부르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의 내면에는 어떤 시도 솟아나지 않는다. 우주 전체가 완전히 기계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우주가 경이롭게 보인다.
그대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다시 한번 어린아이로 되돌아 간다.
예수는 '오직 어린아이같은 자만이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왜인가? 우주가 경이롭지 않다면 그대는 종교적으로 될 수가 없다.
우주가 그대에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기질은 과학적이다.
우주가 어떠하든간에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경이나
신비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눈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찰 때 이 우주는 하나의
신비와 미지 (未知) 의 것으로 나타난다.
데비는 물었다.
'이토록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질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갑자기 비개인적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갑자기 질문의 차원이 바뀐 것이다.
형상이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우주, 형상없음, 무한이
될 때, 갑자기 데비는 자신이 시바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우주 전체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바는 우주 전체가 되었다. 모든 별들이
그 속에서 돌고 있다. 모든 공간이 그에 의해 둘러쳐져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대한 울타리가 되었다. 칼 야스퍼스가 '신은 거대한
울타리'라고 정의했듯이 말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들어갈 때 육체는 사라지고 따라서 개체 역시
사라진다. 사랑은 우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그대의 호기심은
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논리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형상없음에 대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오직 형상에 매달리고 거기에만 집착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항상 형상에만 관심을 갖는다. 결국 과학은 최초의 형상 이상의 것은
정의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랑에서는 형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끝이 아니다.
형상을 용해시켜 버려라. 형상이 사라질 때, 어떤 경계도 없을 때
모든 것은 서로 다른 것 속으로 녹아든다. 그리하여 거대한 하나를 이룬다.
우주 전체가 커다란 하나이다. 그때 비로소 우주는 경이로 가득 차게 된다.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데비는 계속 묻는다.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바퀴 중심축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이 바퀴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바퀴의
중심에 앉겠는가? 그 축이 어디에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 중심축 말이다.
데비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자신에게 묻듯이 계속 중얼거린다.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마지막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만약 그대가 지적인 질문을
한다면 그 문제를 풀어주는 모범답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비는 단지 자신의 의심을 모두 없애달라고 말하고 있다.
지적인 물음은 하나의 의문을 풀 때 하나 이상의 또 다른 의문들이 생겨난다.
어떤 답안을 주더라도 의심은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점을 명심하라. 의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의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무슨 대답이 떨어지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
그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러면 내가 '갑이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는 '갑은
누가 창조했는가?'라고 또 물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해결책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의심의 근원을
뿌리뽑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데비는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질문을 던질 때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해답도 갖고 있다. 단지 그대는 확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해답이 옳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 질문은 거짓된 것이다. 질문도 아니다. 그대는 자신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단지 호기심에서
질문을 던질 뿐이다.
마음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 낸다. 마치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듯
마음에서 질문들이 솟아난다. 그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대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조건
질문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것이 철학의 모든 역사이다.
버틀란드 럿셀은 노년에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렸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모든 철학을 이해할수
있을 만큼 자라면 이 모든 의문들이 다 풀릴 것이다.' 하지만
내 나이 80세가 된 지금 그 의문들은 하나도 풀리지 않고 그대로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철학이란 모든 궁극적인 해답들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철학은 끝없는 질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말한다. "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해답과 수많은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마음이 문제이다. 파르바티는 말한다.
"나의 질문에 개의치 마세요. 나는 많은 것들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 달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질문은 그 마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의심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해야 그 문제를 풀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곧 의심이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바는 대답했다. 물론 시바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의 방법은 마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그 테크닉은 가장 오래된 테크닉이다.
또한 112가지 방편의 완벽한 세트를갖추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다.
마음을 없애고, 마음을 초월하는 그 방편에는 어느 한 가지도 덧붙이거나
뺄것이 없다. 그리고 이 책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5000년의 나이를갖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오래되고 완벽한 책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가장 오래된 동시에 언제나 가장 새로운 것이다.
그 방편들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이 112가지의 명상법은 마음을 초월하는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먼저 우리는 그것에 대해 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지성은 단지 하나의 도구로만 사용하라. 그리고 이들 테크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의 과거 지식은 한쪽으로 제쳐 두어라.
그대가 지금까지 모아왔던 모든 알음알이들은 무엇이든지 제쳐두어라.
그것은 거을 위에 앉은 먼지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방편들을 신선한 마음으로 만나라. 논쟁하려 들지 말라.
그러나 깨어 있어라. 논쟁하는 마음이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그대가 논쟁에 들어가는 순간
그대는 깨어 있음을 놓치고 만다. 그대는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방편들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은
힌두교의 산물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상대성 원리가 유태교의 것인가? 전기가
기독교의 것인가? 그 누구도 그대에게 '왜 우리의 전기를 사용하는가?'
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과학은 그 어떤 민족이나 종교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탄트라는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힌두교의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힌두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방편에는 어떤 종교의식도 담겨 있지 않다.
어떤 사원도 필요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사원이 된다. 그대가
실험실이 된다. 모든 실험이 그대 속에서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신앙심도 필요 없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여기에 신앙은 필요치 않다.
코란이나 베다를 믿을 필요도 없고, 마하비라나 붓다에게 귀의할
필요도 없다. 교회에 다닐 필요도 없고 세례를 받을 필요는 더군다나 없다.
또한 불교도는 불교도로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이 방편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굳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새로이 믿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어떤 이념, 어떤 종교에
몸담고 ,있더라도 탄트라는 그대에게 개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탄트라는 종교란 단지 사회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대 내면의 문제는 탄트라가 관여할 것이다.
그대 존재를 변형시키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탄트라이다. 그대가 믿는 종교의 궁극적인 상태는
오직 탄트라의 방편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 신앙심이나 교리를 통해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테크닉들을 수련하더라도 그대에게 어떤 사회적 변화도 필요치 않다.
탄트라는 항상 그대를 도울 것이다. 그대가 어떤 옷을 입고 있던지 말이다.
탄트라는 순수과학이다. 그대가 아플 때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기전에 몇 가지 마이신 반응검사를 한다. 그때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반응검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불교들에게만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는 일도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대의 신념 체계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사회주의자이건, 자본주의자이건, 마이신 반응검사의 유형은 항상 똑같다.
그대는 무지하다. 아직도 그대는 갈등 속에 있다. 그대는 잠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병이다. 영혼의 병인 것이다. 이 병은 오직탄트라에 의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대는 오직 탄트라를 통해서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거듭나는 것은 마음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제적 현상이다.
그래서 그것은 과학이다. 그래서 그대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변화되고 싶다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라.
탄트라의 방편을 이용하라. 탄트라는 그대에게 헌금이나 신앙심, 혹은 순교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긍까지 탄트라는 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져도 그것은 완전히 왜곡되어 알려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탄트라는 매우 순수하고 고차원적인 과학이다.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란 극히 힘들다. 우리는 상대성 이론의
이름만 들었을 뿐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 살아있을 때 전세계에서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12명뿐이었다.
아인슈타인조차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단지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그러한데 탄트라는 더 힘든 것이다. 그것은 변형이
뒤따라야만이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 논리만 갖고서는 부족하다.
따라서 탄트라를 통해서 변형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전달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탄트라는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없었다.
그대가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적어도 그것을 오해하게 된다.
그냥 진공인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그것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니?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분명히 자체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비난하기 시작한다.
'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그래서 탄트라는 그처럼 긴긴 세월 동안에도 대중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다.
탄트라는 세상에 나오는 즉시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모두 현자로 변할 것을 두려워한
성직자, 종교 지도자들이 탄트라를 왜곡시키는 데 가장 앞장섰다.
사실 탄트라는 모든 이중성을 뛰어넘고 있다. 그것의 관점은 완전히
무도덕 (無道德) 적이다.
무도덕이란 말은 도덕적인 것도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서 도덕적이거나 아니면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뛰어넘어 무도덕적인 것은 판단하기에 매우 어렵다.
탄트라는 무도덕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한번 바라보라.
의학은 무도덕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도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가 도둑에게 약을 주어도 그 약은 들을 것이며 성자에게 주어도
마찬가지다. 약은 '나는 그가 도둑이므로 그를 죽게
할 것이고, 성자이므로 그를 살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학은 과학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존재  역시 도둑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 탄트라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탄트라를 수행하기 위해서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탄트라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탄트라는 그런 사람을 보면 웃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이 나서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안된다. 먼저 열을 내리고 오라. 먼저
건강해진 다음에 오라. 그러면 약을 주겠다."
이것은 다음의 이야기와 같다. 어떤 도둑이 성자에게 가서 말했다.
"저는 도둑입니다. 나에게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먼저 너의 직업을 바꾸어라. 그리고 난 뒤에 명상법을 일러주겠다."
또한 알콜 중독증 환자가 와서 말했다.
"나는 알콜 중독증 환자입니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성자는 또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술을 끊어라. 그리고 나서 명상을 배워라."
그러나 이런 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을 말하는 것과 같다.
알콜 중독증 환자나 도둑이나 부도덕한 사람들은 병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들은 병든 마음에서 생긴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한 치료약이 바로 명상이다.
그런데도 먼저 병든 마음을 고친 후에야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명상인가?
탄트라는 무도덕이다. 탄트라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다.
한사람으로서 그대의 존재면 충분하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탄트라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맞는 테크닉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대의 전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어라. 진정하고 참된 방편은
그대에게 어떤 선결 조건도 내세우지 않는다.
만약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생각해도 된다.
도둑에게  도둑질을 고쳐야 명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에게는 명상이  불가능할 것이다.
욕심있는 사람이 욕심의 대상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욕심을 버릴 수는 없다. 그대가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대체 효과를 내는 다른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천국이라든지 모크샤(解脫)라든지 사치타난다(至福)라든지 하는  것을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욕심의 대상일 뿐이다.
탄트라는 그에게 진정한 방편을 주지 않는 한 결코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설교를 통해서는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이 세상을 둘러보면
탄트라가 말하는 것들이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많은 군더더기들이 붙어 있다.
수많은 설교가들이, 종교 지도자, 도덕군자들이  거기에
쓸데없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였다.
그리하여 모든것을 오염시켜 놓았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더러운 것, 불결한 것 투성이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그들을 정신병원에 데려다 놓아도 그들은 설교를 계속한다.
"당신은 틀렸다.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마음에 많은 병을 갗고 있다.
그 병을 고쳐라."
그들은 이 세상을 정신병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설교를 멈추지 않는다.
"화내지 마라."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방편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말을 듣는 그대는 이렇게 반문한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이다.
그런데 단지 '화내지 마라'라고 말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화를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화는 더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죄의식까지 수반된다.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려고 시도하지만 반듯이 실패한다.
결국 그대는 열등감과  죄의식을 갖게 된다. 사실 분노와 대항해서
싸운다면 절대로 분노를 이길 수 없다.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자신과 싸워서 이겨본 적이 있는가?
결국에는 지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특별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
특별한 방편을 말이다. 그 방편은
그대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분노란 그대의  혼란된 마음에서 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면을 바꿔라. 그러면 외부도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소위 그대의 도덕성이라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분노도 버리고 성욕도 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하지말라'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는 인간이 아니다.
결국 그런 말을 계속 듣게  되면 사람은 열등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고
결국 자신이 죄인이라는 확신만 더욱 커진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온 세상에다 증명시킨다.
그래야만이 그들은 그 직업을 계속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죄인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교회나 사원이나  모스크가 계속 번창할 것이다.
그대의 죄는 그들의 밥줄이며
그대의 죄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교회는 높이 올라간다.
그들의 번영은 그대의 죄 위에, 그대의
열등감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지위를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탄트라가 비도덕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탄트라는 그대의 마음 자체를 변형시키는 과학적 방편이다.
그리고 마음이 변형되면 그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뿌리가 바뀌면 가지도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직자와 종교지도자들은 탄트라의 가르침이 전파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종교와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탄트라를 외곡시켰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계속 반대해 왔다.
한번 그대가 자연의 비밀을 알고나면
더 이상 종교적인 설명으로는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을 변화시키는 비밀을 알고나면
조만간에 마음에 대한 변화의 비밀도 알아내고 만다.
마음 역시 미묘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탄트라의 기본 전제이다. 마음은 미묘한 물질이다.
그래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대는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그대의 특수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라. 그러면 세상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마음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탄트라의 궁극적 경지이다.
탄트라가 궁극적으로 꾀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드디어 중재자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중재자가 사라질 때 비로소 그대는 실체와 직접 접할 수 있다.
이제 그대와 실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바이라바의 경지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무심(無心)의 상태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서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바꾸어라. 그대의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이 112가지  방편들이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물론 그  방편 모두가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112가지로써 충분하다. 이 안에 다 들어 있다.
그러니 그대에게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각각의 방편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맞는 방편을  고르라.
 우선 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보라.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적합한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조립품처럼 즉시 그대에게 잘 맞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모호함도 없다.
그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 방편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라.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대에게 맞는 한가지 방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대가 너무 심각하게 그것을 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단지 놀이하라.
그러면 어떤 것이 그대에게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때 심각해져라.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강렬하게, 진지하게, 그대의 전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그러기 전에는 단지 놀이처럼 가볍게 다루라.
한가지 방편에 대해서 적어도  사흘씩은 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부적합하다는 확신이 들면 다른  것으로 옮겨가라.
그리하여 그대의 방편을 찾게 될 때 다른 방편들은 모두 잊어버려라.
그리고 한가지 방편에만 매달려서 3개월은 꾸준히 해야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는 방편은
아무리 해봐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맞는 방편은 단 삼분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112가지 방편은 그대에게 기적적인 체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니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보라.
체험을 얻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는 가능한 여러 각도에서 그것들을 설명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사흘 정도 그것을 실험해 보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그대에게 맞는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삼개월 동안은 계속하라. 그대의 삶은 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아직 그대가 그 신비를 알지 못했다면 오직 이 탄트라의 방편만이
그대에게 그 신비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시바는 112가지 방편을 제시했다. 이것은 모든 가능한 방법들이다.
만약 여기에서도 그대가 맞는 것을 찾지 못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른 방법은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수행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기쁘게 살아라.
그대는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112가지 방편들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어떤 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 세대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다.
'이 112가지 방편 모두가 나에게 맞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는 인간 마음의 모든 형태들이 다 고려되어 있다.
아직 한번도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방편도 있다.
그것은 미래 어느때쯤 나타날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많은 방편들이 이미 쓸모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과거의 인류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대에게 맞는 방편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대가 찾기만 한다면 반드시 찾을 것이다.

(질문 )

"탄트라와 요가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있다.
탄트라와 요가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론 목표는 같다.
그러나 목표에 이르는 길은 다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분명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요가의 과정 역시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것은 똑같이 테크닉인 것이다.
탄트라처럼 요가도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실행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 요가는 투쟁의 길이다.
그것은 전사만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탄트라의 길은 전혀 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랑하고 녹아드는 길이다. 물론 깨어 있음 속에서 말이다.
요가는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길임에 반해 탄트라는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마음껏 풀어주는 길이다.
탄트라는 '그대가 누구이든지 궁극은 그대에게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성장이다. 그대는 궁극에까지 성장할 수 있다.
그대와 실체 사이에는 어떤 반대점도 없다. 그대는 실체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갈등도, 싸움도 없다. 본성을 거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대는  본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대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누구이든지 그대의 본성을 사용해야 한다.
요가에서는 초월로 가기 위해서 그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요가에서는 세상과 모크샤, 사바 세계와  열반,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대와 미래에 변화되어야 할 그대가 대립되게 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자신을 억압하게 된다.
요가에서의 초월은 죽음이다.
그대의 진짜 존재가 태어나기 위해서 그대의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탄트라의 눈으로 보면 요가는 고차원적  자살이다.
그대는 본능적인 자아를 죽여야 한다. 그대의 육체, 욕망,
인간의 모든 바람들을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전체적인 수용이다. 그대와 실체 사이에  어떤 간격도 만들지 않는다.
세속과 니르바나를 결코 나누지 않느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죽음이 필요 없다.
단지 필요한 것은 그대 자신을 이용한 초월만이 있다.
예를 들어 섹스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기본 에너지이다.
그 기본 에너지를 통해서 그대는 태어났다.
그대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세포 역시 그것에서 나왔다. 이제
인류는 섹스에 대해서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요가에서는 그대가 이 섹스 에너지와 싸우라고 한다.
싸움을 통해서 그대는 자신안에 새로운 다른 중심을 만든다.
그대가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 할수록 새로운 중심에 집중된다.
그때 섹스는 더 이상 그대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섹스와 싸우는 것은 그대의 새로운 중심을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때 더 이상 섹스는 그대의 에너지 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에너지가 존재속으로 흘러 들어올 것이다. 존재의 다른 중심으로 말이다.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섹스  에너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그것과 결코  싸워서는 안된다.
그것을 받아들여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이다.  그것은 악이 아니다.
모든  에너지는 그저 자연이며 중립적인 것이다.
그대가 사용하기에 따라 그대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대를 해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장벽으로 만들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을 하나의 징검다리나 받침돌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사용하라.
그것과 친구가 되라. 보통 사람이 섹스를 사용하면 그것은 적이 된다.
그것은 그를 파괴시키고 구덩이 속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요가는 그런 일상적인 마음에 반대한다.
일상적인 마음은 자신의 욕망때문에 자신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요가는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욕망과 싸워서 그대를 욕망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욕망을 지켜보라고 말한다. 그것에 대항하지 말라고 한다.
 단지 깨어 있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깨어 있으면서 욕망속에 움직일 때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다.
그대는 그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있지 않다.
그대는 그것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동시에 그대는 방관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요가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일상적인 마음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열등감과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마음을 비판하고 나서면 그럴싸하게 보인다.
그래서 요가의 언어를 통해 일상적인 마음을 판단해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는 섹스가 어떤  식으로 그대를 노예로 삼고 파괴하는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가에서 성욕과 싸우라고 말할 때 그대는 즉시 그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곧 요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쉽게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욕망에 쉽쓸리지 않고 욕망속을 돌아다니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오르가즘속에서 말짱한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을까?
일상적인 마음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위험해 보인다.
사실 그대는 자신이 욕망속에서, 섹스속에서, 모든 것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속이는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이 교활한지 알고 있다.
또한 그대는 자기가 정신이 말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감추고 있다. 그대가
위험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위험은 탄트라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속에 있다.
요가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그대 때문이다.
그대의 일상적인 마음, 성을 억압하고 성에 굶주리고 성에 몰두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기적인 마음은 성에 대해서 건강하지 않다.
그래서 성과 싸우게되는 요가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은 그 경우가 다르다. 사실 우리는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우리는 확실히
재정신이 아니며 불건강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논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잘못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미친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되어서
오히려 미치지 않은 것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붓다가 비정상이고 예수가 비정상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상이 우리에게는 비정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비정상적인 마음이 정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요가는 우리의 비정상적인 마음에 설득력이  있다.
만약 우리가 섹스를 자연스럽게 대한다면,
거기에 어떤 철학을 내세워  반대하거나 찬성할 필요가 없다면, 그저 자연스런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수용된다면 그때는 탄트라가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때라야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이용될 것이다.
이제 탄트라의 시대가 몰려오고 있다.
조만간  탄트라는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탄트라가
수천년 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은
탄트라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의식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탄트라가 공개될수 있는 것은
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사람들의 의식이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폭발의 시기는  서양에서 먼저 시작될 것이다.
프로이드, 응, 라이히 이후로 서양은 그 토양을 준비해 왔다.
서양의 심리학은 이제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병이 모두 섹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결론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섹스에 얽힌 무의식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인간은 성에 대한 잘못된태도 때문에 결국 정신적 불건강 상태를 얻게 되었다.
다른 태도는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만이 필요하다.
그대의 눈에는 섹스가 어떻게 보이는가?
신성하게 보이는가? 아니면 사악하게 보이는가?
반대하는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눈은 정상이다.
만약 어떤 태도라도 취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라.
탄트라는 그대가 어떤 사람이건 모두 받아들인다.
그리고 오직 전체적인 수용을 통해서만이  그대는 성장할 수 있다.
그때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이용하라.
먼저 그것들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에너지가 무엇인지, 섹스가 도대체 무슨 현상인지 이해하라.
우리는 그것을 피하기만 해왔다. 섹스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많이 들어 왔다.
그러나 그대는 모두 죄의식 속에서  그것들을 대해 왔다.
억압적이고 급하고 주저하는  마음속에서 말이다. 이제
그 모든 짐을 벗어버릴 때가 왔다. 성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그대는 그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떠날 수는 없다.
그대가 떠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그것에  묶이게 된다. 부정하면 할수록
그대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태도는 결국  그대의 마음을, 그대의 각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섹스는 아무런 감수성도 없이 계속된다. 그러면
결코 그대는 섹스를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들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 때처럼  깨어 있어야만이
그대는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때만이 말이다.
만일 그대가 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대는 정원을 지나갈 때 눈을  감고 급히 지나갈 것이다.
그대는 미친듯이 서두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그 정원을 빠져나왔는지 그대는 알 수 있는가?
꽃들이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그 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탄트라는 그대가 어떤  상태이든지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수많은 차원의  복합 에너지를 갖고 있는 거대한 신비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깊은 감수성과 통찰력과 애정을 갖고 그대
자신을 대하라. 그때 모든 욕망은 그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하나의 수레가 된다.
그때 모든 에너지가 도움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이 세상은 니르바나이며 이 육체는 하나의 사원이 된다.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이다.
요가는 부정의 길이다. 반면에 탄트라는  긍정의 길이다.
요가는 이중성을 통해서 생각한다. 요가란 말 자체가
두 개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두 개가 거기에 있다. 이중성이 거기에  존재한다.
탄트라는 '이중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만약 이중성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하든지 그대는 분열된 채로 남아있다.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이중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과 신성이 둘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질수 없다.
만약 그것들이 둘이 아니라면,
단지 두 개로 보여지는 것일 뿐이라면 그것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대의 영혼과 육체가 둘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대와 신이 두 개의 존재라면 거기에는 합일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둘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탄트라는 말한다.
이중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그대 눈의 착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중성으로 나타난 형상들은
그대의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그 이중성을 없애버려라. 하나가 되라.
싸움이 아니라 수용을 통해서 그대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육체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대 속에 어떤 다른 중심도 만들지 마라.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다른 중심을 에고라고 부른다. 에고를 만들어내지 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각하라. 만약 그대가 싸우려 든다면 거기에 에고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에고이스트가 아닌 요기를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요기들은 끊임없이 에고 없음, 즉 무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아가 될 수 없다. 그들의 길 자체가 에고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와의 갈등이 곧 그들의  수행 과정이다. 그대가 싸움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에고를 만들어내고 만다. 그리고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에고는  더 강화된다.
만일 그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때는 지고한 에고가 형성될 것이다.
탄트라는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때 에고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대가 탄트라를 이해한다면 거기에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싸움이 없다는 것이 곧 심취한다는 뜻이 된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흐르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반대로 너무 좋아한다.
그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우리는  생에 집착할 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심취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심취하되 깨어있으라고 말한다.
그대는 화가 나 있다. 탄트라는 절대로 화를 내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 가슴으로 화를 내라고 말한다.
단지 깨어있으면서 말이다.
 탄트라는  영적인 잠, 그대의 무의식적 상태에 대해서만 반대할 뿐이다.
깨어 있으면서 화를 내어라.  이것이 바로 키포인트이다.
그때 그대가 분노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변형될 것이다.
분노는 자비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분노는 그대의 적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은 자비와 똑같은 씨앗이라고 말이다. 분노와 자비는 같은 에너지이다.
만약 그대가 분노와 싸우려 든다면 그때는 자비로  변형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그대가 싸움을,
억압을 계속한다면 그대는 식물인간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는  어떤 분노도 일어날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자비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자비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억압을 계속한다면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거기에는 섹스도 없고 따라서 사랑도 없다.
섹스 에너지가 말라버리고 나면
사랑의 꽃을 피울 힘이 없다. 그리고 인생은 모든 의미를 다 잃고 말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신성도 없고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생물적인 대사작용만 있다.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것은 식물인간과
다름없다.
탄트라는 말한다. 이 모든 동일한 에너지들이  변형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그대가 세상에 반대한다면
그때에는 니르바나도 없다. 이 세상 그 자체가  니르바나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니르바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그대가 근원에 대해 반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탄트라의 연금술은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와 친구가 되라고 말한다.
그것들을 환영하고 고마워하라고 말한다.
화를 내고 섹스를 갈망하고 삶에 대해 집착하는 이 모든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때 그것들은 변형될  수 있다.
그것들은 무한을 향해 열려질 수 있다.  그때
섹스는 사랑으로 변형될 것이다. 독이 변하여 약이 되듯이 말이다.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구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될 때 거기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따라서 씨앗을 내던져 버리지 마라.
그리하면 꽃도 함께 내던지는 것이 된다.
 아직 그대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씨앗속에는
꽃의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그대가 꽃을 원한다면 씨앗을 소중히 여겨라.
 따라서 먼저 받아들임이 중요하다.
이해와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 그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몰두와 심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상한 것이 또 한가지 있다.
그것은 탄트라의 가장 깊은 비밀중의 한가지이다. 그대가
적으로 삼는 것은 무엇이든지 - 분노, 탐욕, 증오, 성욕따위  -
 그대보다 더 강한 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대의 적으로 여겼던 것을 신이  준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라.
 예를 들어 탄트라는 섹스 에너지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많은 테크닉을  개발시켰다.
성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마치 신성한 사원에 다가가는  것처럼 행동하라.
마치 기도처럼, 명상처럼  하라.
그것의 거룩함을 느껴라. 카쥬라호 사원에 있는  마이투나(性交)
조각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사원의 벽면에 섹스 행위를  묘사해 놓은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나 회교도,
자이나교도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어떻게 거룩한 사원이 돌로 조각된 섹스 행위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가?
성당이나 교회, 혹은 절에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그대는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현대의 힌두교도들 역시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인도가 백년 이상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상 힌두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의 지도자중의 하나인 푸르쇼타마다스  탕돈은
카쥬라호 사원을 파괴해야 한다고 떠들어 댔다.
그것은  인도인의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 탄트라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가슴속에 숨어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주류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요가는 인도인의 정신적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요가는 카쥬라호를 용납할 수 없다.
탄트라는 마치 그대가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는 것처럼
섹스 행위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전에
섹스 행위들을 묘사해놓은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러했다.
그대가 성전에 들어갈 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섹스 역시 거기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 어떤 것도 제외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온전한 하나를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신성이 서로 싸우는 두 가지 반대 극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마치 반대 극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반대 극처럼 보일 때만이 그것들은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양극성이 사라진다면 온 세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마라. 깊은 곳에서 흐르는 하나됨의 흐름을 보라.
탄트라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 점을 명심하라.
탄트라에서는 신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탄트라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러나 비종교적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다. 한 기독교
선교사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말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죄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악마가."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그러면 악마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러자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한참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악마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
악마는 죄를 만들었고 하나님은 악마를 만들었다. 그러면 누가 진짜 죄인인가?
악마인가? 하나님인가?
그러나 이런 이원론자들은 언제나 말도 안되는 개념을 고집한다.
탄트라에서는 신과 악마가 둘이 아니다.
탄트라에서는 '악마'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것이 올바른 관점이며 건강한 시각이다.
만약 이 세상에 어떤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양자 택일의 길밖에 없다.
첫번째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무신론자가 있다. 이 태도
역시 좋다. 적어도 그는 이원론자는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떤 거룩함도 보지 못한다. 또 한가지는
탄트라의 태도이다.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이 두가지 외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종교적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세포나 원자라도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때 이 세상은 완전히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세포 하나, 원자 하나라도 이 세상과 동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본래 하나이다. 단지 여러개라고 보는 것은 우리 시각의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온전히 거룩한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보든지
두가지 관점밖에 없다.
어떤 것은 부정하고 어떤 것은  거룩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에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탄트라이고 다른 하나는  요가이다. 탄트라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식 때문에 별로  호소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이 정말로 건강하고 혼돈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탄트라가 너무나 아름답게 비칠 것이다. 오직 그 사람만이 탄트라가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혼란스런 마음에는 차라리 요가가 더 설득력이 있다.
어떤 것에 매력이  있고 없고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결정권을 갖고 있는  자는 바로 그대이다.
내가 지금 요가를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궁극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유행하는 요가는  '아니올시다' 이다. 그 요가는 진정한  요가가
아니다.
그대의 병든 마음이 내린  해석에 의해 지금의 요가는 왜곡되어 있다.
올바른 요가라면 그대는  자동적으로
궁극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대의 마음이 건강할 때만이 가능하다.
단지 탄트라와 가는 길이 틀릴 뿐이다.
예를들면 마하비라는 요가의 길 위에 있다.  그러나 그는 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것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섹스가 떨어져나가 버렸다.
붓다 역시 요가의 길 위에 있다. 그는 이세상 속에서 살았고 그것을 깊이 이해했다.
그는 결코  그것과 싸우지 않았다.
그대가 한번 알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그것은
그대에게서 떨어져나가 버린다.
다시는 그것으로 인해서 신경쓰일 일도, 싸울 일도 없다.
붓다의 얼굴을 보라. 그것은 싸우는 사람의 얼굴과  다르다.
그 얼굴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는 얼굴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대 주위에 있는 요기들을, 수행자들을 한번 보라.
 그들의 얼굴에는 싸움과 갈등의 표정들이
영력하다. 그들은 마치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그대는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깊숙이 억누르고 있다.
그들은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세계는 남을 흉내내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들은  삶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들을 변형시킬 수  있는 깊은 감수성을 배울 수 있다.
 모든 욕망의 껍질들이  떨어져나가고
본질의 에너지가 변형되어  초월하는 경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탄트라가 이끌어  줄 수 있는 세계를
요가도 충분히 이끌어 줄 수 있다. 이 점을 기억하라. 우리는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자연인( 自然人)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인이 사는 세계에는 탄트라와 요가가 욕망을 초월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처럼 병든 사회에서는
요가도 탄트라도 어떤 것도 제구실을 할 수가 없다. 단지 그때그때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처방전 역할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요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억압하는 기술로 사용하기 위해  채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탄트라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마음껏  정욕을
발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병든 마음에는 요가도 탄트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속이는  데 쓰이는 하나의 사기행각일 뿐이다.
그래서  건강한 마음, 특히 성적으로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요가와 탄트라중 그대의 기호에 따라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유형이 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이다.
물론  나는 지금 생물학적 구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구분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기본적으로 남성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요가가 적합하다.
그와 반대로  여성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
즉 수용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탄트라가
맞는 길이다. 그래서 탄트라에는 여신들이 많이 나온다.
어머니 칼리 여신, 타라 보살, 그리고 수많은 데비들과 바이라비들이 나온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여신의  이름은 취급도 하지 않는다.
요가에서는 남신들이 많이 나오고 탄트라에서는 여신들이 많이 나온다.
요가는  밖으로 분출하는 에너지이고 탄트라는  내면으로
흐르는 에너지이다. 그래서 심리학적 용어를 붙이자면
요가는 외향성이고 탄트라는 내향성이다.
그래서 각자의 성향에 맞게 길을  선택하면 된다.
그대의 성격이 내향성이라면 싸움은  그대에게 맞는 길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외향성이라면 그때 싸움이 그대에게 적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마구 섞여 있다.
우리는 군중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전부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요가가
그대를 들쑤셔 놓고 탄트라가  그대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았다.
모든 약들이 그대의 병을  고친답시고는
새로운 부작용만 만들어 놓았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요가를 통해서 그대가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탄트라를 강조하는 이유는
탄트라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호흡(呼吸),우주에 이르는 다리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호흡(呼吸),우주에 이르는 다리

시바가 대답한다.

1.
빛의 샘 (光源)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 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 이 깃들어 있도다.

2.
숨은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百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 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 지어다.

3.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도다.

4.
숨을 완전히 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는 창조되거나 발명되는 것도 아니며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라. 그때 이 명상법들은 쉽게 이해될 수있다.
마음은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은 언제나 뭔가를
찾고 구한다. 항상 마음은 미래의 어떤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바로 이 순간속에서는
마음이 움직일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밖에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진리는 결코
만날 수 없다.
마음이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할 때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리를 찾고자 할 때는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
오히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빛나가게 된다.
진리는 지금 여기인데 마음은 늘 저기-미래나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대가 발견할 수는 있어도 진리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찾는 노력이 바로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을 때 그대는 현재로부터, 그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간다.
 그것은 그대가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찾는 자'는 현재에 있고 '찾는 행위'는 미래에 있다.
그대는 찾는 것을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고 있다.
"찾지 마라. 찾으면 잃을 것이다. 찾지 않으면 얻을 것이다."
시바가 말하는 명상의 모든  방편은 과거나 미래에서 떠도는 마음을 현재로 이끌어오는 방법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이미 여기에 있다.
마음은 찾는  행위에서 찾지 않는 상태, 즉 무위의상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을 지적으로 해석하려면 더욱 어려워진다.
도대체 무슨 수로 마음을 그렇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마음은 다시금 '찾지 않는 상태',
즉 무위의 경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금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마음은  말한다. '찾지 마라' 그리고 나면 마음은  또 말한다.
'나는 찾지 않아야 한다.'
그때 '찾지 않는 상태'가 새로운 목표가 된다. 이리하여 찾는 행위는  또 시작된다.
욕망은 뒷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비세속적인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찾는 행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똑같은 마음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목표는 세속적인 것이다.
찾는 행위 그 자체가 세속적인 것이기에.
그러므로 세속적이지 않은 것은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찾는 순간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 된다.
그대가 신을 찾는다면 신은 세속적인 것의  한 부분이다.
모크샤(解脫)를, 니르바나(信經)를 찾는다면 그것
역시 세속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대의 바람이 곧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르바나를 갈구해서는 안된다.
갈구가 끝난 상태가 니르바나이기 때문이다.
갈구가 끝난 상태를 갈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이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의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시바는 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명상의 방편만을 제시했다. 이 방편들은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바는 데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여기에 있다. 찾지 마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은 완전히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말 대신 그는 명상의 방편들을 주었다.
이 방편들을 실행하라. 그러면 마음의 방향이 전환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환은 결과이지 절대로 목적은 아니다.
이런 전환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이다.
그대가 한 가지 방편을 수행하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 떠도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는 현재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붓다가 방편을 이야기했고 노자와 크리슈나  역시
한결같이 방편을 이야기한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방편을 말하면서 지적인 개념을 동반시켰다.
그래서 불교 철학, 힌두 철학, 그리고  노장 철학이 생겨났다.
오직  시바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바는 오직 명상의 테크닉만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어떤 지적 개념도 섞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가장 교활한 것이 마음임을 속임수를 쓸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일단 마음과 연관되면 그것은 문제거리로 변한다.
'찾지 않는 상태'마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없앨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욕망이 없는 상태를 욕망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선가 영적인  격언, 즉 '욕망이 없으면 축복의 경지에 이르리라. 욕망이  없으면 그대의 영
혼이 자유롭게 되리라.
욕망이  없으면 고통마저 끝나리라.'라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들은 고통이 없는 경지를 얻으려고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바람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지금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갈망하는 상태에 있다.
단지 목표와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전에 돈과 명성, 부와 권력을  갈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갈망  없는 경지'를 갈망하고 있다.
갈망하는 행위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교활하게 위장하고 있다.
따라서 시바는 어떠한 소개도, 서문도 붙이지 않고  바로 방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명상의 방편들을
수행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현재로  돌아을 것이다.
마음이 현재로 돌아을 때  마음의 작용은 멈춘다. 그때
더 이상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떠다닐 수 없기 때문에 사념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현재속에는 사념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만약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어떻게 마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멈추어 버린다. 그때 그대는 마음 없음, 즉 무심(無心)을 얻는다.
그래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노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노력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역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현재라고 하는 지점을 정해 놓는 순간
그 지점은 미래  속으로 이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현재에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 그대는 또다시 미래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이 순간은 곧바로 물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대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꾸게 된다.
그대는 ' 언젠가 갈망도 없고 고통도 없는 경지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라고
 꿈꿀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또다시 '어떻게 하면 현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시바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방편만 주었을 뿐이다.
이 방편을 수행하게 되면 어느날
불현듯 그대 자신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의 존재가 바로 진리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며 니르바나이다.
시바가 제일 먼저 꺼낸 방편들은 호흡에 관한 것들이다.
우선 호흡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자. 그 다음에 방편으로 들어가도 늦지않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계속 숨을 쉰다.
그래서 죽음을 '숨을 거두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삶과 호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호흡이다. 호흡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어린아이는 청년이 되고, 청년은 늙어서 노인이  된다.
그는 병에 걸리고 추해진다.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나 호흡만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관계가 없다.
오직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대가 그 언제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호흡이 멈춰진다면 그대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호흡을 하는 데 그대가 계속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애를 써야 호흡이 가능하다면 그때는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호흡하려고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호흡할 수 있다.
그대의 영혼이 잠들어 있어도 호흡은 계속된다.
무의식  상태 속에서도, 깊은 혼수상태속에서도 호흡은 계속된다. 호흡은
그대 자신도 모르게 계속되는 어떤 것이다.
첫째로 호흡은 그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의 본질을 구성하는 인자이다.
둘째로 호흡은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것이다.
호흡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호흡과 삶은 동의어이다. 호흡은 삶의 메커니즘이다.
이때문에 인도에서는 호흡을 프라나(prana)라고 부른다.
프라나에는 생명력과 활동력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대의 삶은 그대의 호흡이다.
셋째로 호흡은 그대와 그대 육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호흡은 그대를 그대의 육체에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호흡은 또한 그대 자신과 우주 사이에서도 다리  역할을 한다.
육체는 그대에게 다가온 우주다. 육체는 그대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우주다.
그대의 육체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육체 속에 있는 모든 것, 낱낱의 세포들이 곧 우주의  부분이다.
그리고 호흡은 그것들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다리가 부서지면 그대는 더 이상 육체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때는 더 이상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
더 이상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그대에게 연결해주는 다리는 바로 호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호흡을 잘 다루면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윌할  수 있다.
그대는 미지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호흡은 두 개의 극점을 갖고 있다. 한 극은 그대의 육체와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 극은 그대의 존재와 초우주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호흡의 한쪽 극만을 알고 있다.
호흡이 우주 속으로, 육체속으로 이동하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호흡은 육체로부터 비육체로도, 우주에서 초우주로도  이동한다.
우리는 호흡의 다른 이 극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이 극점을 알게 되면 그대의 차원은 변형된다.
한편 시바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요가의 호흡이 아니라
탄트라의 호흡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가의 호흡법과 탄트라의 호흡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가에서는 체계적인 호흡을 한다. 호흡을 체계화시키면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그때 호흡의  비밀을 알게될 것이며 그러면 그대의 수명은  더욱더 연장될 것이다.
더욱 그대는 강해질 것이며,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더욱 젊어지고 싱싱해질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탄트라는 호흡을 제어하고 체계화시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는 방편으로써  호흡을 잠시 이용할 뿐이다.
따라서 탄트라에서는 호흡의 특별한 체계나 조절 따위를 수련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의 호흡 속에서 호흡의 또 다른 어떤 극점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호흡에는 확실히 두 개의 극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극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호흡을 해왔고 앞으로도 호흡을 계속하며 살아갈 것이다.
호흡과 함께 태어나서 호흡과  함께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호흡의 이 두 극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우주를 탐험했다. 인간은 달에도  갔다 왔다.
지금은 더 먼 별을 향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 삶의 가장 가까운 부분인  호흡에 대한 탐험은 전혀 하지 않는다.
호흡 속에는 두 극점이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문이다.
다른 세계 속으로, 다른 존재 속으로, 다른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육체 속으로 들어온 문이다.
그리고  육체를 빠져나갈 때도 그 문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 문은 너무나 미묘하다.
달을 관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달에 착륙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비행의 길이가 더 연장된 여행일 뿐이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정보만 있다면  더 먼 별까지도 갈수있다. 그러나 호흡은 가장
그대 가까이에 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일수록 관찰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
분명할수록 더 어렵다.  그대와 너무나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와  호흡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기 때문에 그대는 호흡을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보기가 힘들다. 오직 깊은 통찰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때만이 호흡의 두 극점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각성이 이들 방편의 기본이 된다.
자,그럼 각각의 방편으로 들어가자.

1.
빛의 샘(光源),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 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 이 깃들어 있도다.

호흡이 들어온뒤, (이것을 호흡의  하강점이라 한다.)
그리고 돌아나간 직후, (이것을  상승점이라 한다.)
거기에 지복이 깃들어 있다.
호흡이 들어올 때 주시하라. 그리고 호흡이 나갈 때 주시하라. 찰나와 같은
순간에 호흡의 정지 상태가 있다.
그 점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대가 그 점을 잡아내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오기 직전, 그리고 나가기  직전, 거기에 정지되는 순간이 있다.
그대가 그 순간을 잡을 때  깨달음이 가능하다.
그때 그대는 육체와 호흡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순간적으로 그 연결고리가 끊기는 것이다.
그때는 그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다. 이 점을 이해하라.
숨이 멈추는 상태는 그대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상태다.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흡의 정지 순간을
한번도 인식해 본  적이 없다.
그 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내쉬는 숨은 죽음이요, 들이쉬는 숨은 탄생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그대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다.  그 간격은 너무나 짧다.
하지만 그  간격은 반드시 존재한다. 오직 성실하게  주시하는
자만이 그 간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바가 말하는 '지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호흡법을 수련하지는 말라.
호흡을 조절해서는  결코 그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라. 완전한  주시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이 가능하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의도적인 면이 있다면
거기에 왜곡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는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호흡의 방편이 왜 이렇게 간단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간단한 방편을 통해서 무슨  대단한 명상을 하며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불생과 불멸을  아는 것이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아는 것과 정지의 순간을 잡아내는  것과는
질적으로 틀리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아는 것은 결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진리를 체험한다는  말이다.
말을 통해서, 사념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확신도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 정지 간격을 잡아내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노력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어떤 행위도 개입시키지는 말라.
의식의 분명한 각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이미 기기에 갖추어져 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숨이 들어오고 나오는 것만 살펴라.
그 들락날락하는 통행만을 주시하라.
공기가 그대의 콧구멍에 닿는 감촉을 느껴보라. 그 숨과 함께 단전으로 내려가라.
완전히 깨어 있는 중에 호흡과 함께 다녀야할 것이다. 결코 호흡을 놓쳐서는 안된다.
앞서가지도 말고 뒤따라가지도 말라.
오직 호흡 그 자체가 되어 호흡과 동시에 존재하라.
호흡과 의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올  때 그대도 들어오라. 그렇게 할 때만이 그대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정지 간격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숨과 함께 들어가고 숨과 함께 나와라.
들어가고 나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속에서,
 붓다는 특히 이 방편을 사용했다.
그것은 대표적인 불교 명상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바로  아나빠나사티
(Anapanasati)라는 것이다. 불교에는 대표되는 몇 가지 명상법이  있다.
그중에서도 남방불교, 혹은 소승불교라고 불리는
국가들, 즉 스리랑카, 태국,  버어마 등지의 불교 수행승들은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이 방편을 포함한 자신들의 수행법을 비파사나(Vipasana)명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붓다의 마지막 깨달음에 대한 체험은 바로 이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구도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런 저런 명상의 방편을 통해
그 목표에 이른다.
그리고 그 모든 방편들은 시바가 말하는 112가지 방편 속에 다 들어 있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 속에 말이다.
한편 비그야나의 방편 가운데 첫번째가 불교의 명상 방편이다.
그것은 붓다가 이 방편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호흡을 집중하라. 들어오고 나가는 그 호흡을  지켜보라."
 그러나 붓다는 한번도 두 호흡 사이의 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또한 정지  간격에만 집중하다보면 의식의 각성 상태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만 말했다.
"호흡을 알라. 호흡이 들어올 때 그대 자신도 함께 들어오라.
 호흡이 나갈 때 그대 자신도 호흡과 함께 나가라."
붓다는 결코 이 방편의 뒷부분, 즉 정지 간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붓다는 보통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이 정지 간격을 말하면 그들의 마음에는
그 정지 간격을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욕망이 생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의식의 각성에 장애물이 된다.
정지 간격에 이르려는 욕망의 바람이 불 때 그대는 앞으로 전진한다.
호흡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대는 호흡을 앞질러  간다.
호흡보다는 정지 간격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아예 그런 정지 간격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대가 관념적으로만 붓다의 호흡법을 알고 있으면
그것은 절반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실제로 실행을 해보면 그 절반은 자동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붓다가 말한 대로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날 그대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정지 간격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대의 각성이 예리하고 깊게 되면
그 각성은 하나로 묶여질 것이다.
그때 불현듯 호흡이 정지된 그 사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호흡과 함께 움직일  때 거기에 호흡이 없다면
어떻게 무자각의 상태로  처져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 그대는 알 것이다.
호흡이 텅 빈 상태를  깨닫게 될 것이다.
호흡의 핵심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때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이제 호흡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을 지복이라 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방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아시아의 전 지역이 수천 년 동안 이 방편과 더불어 살아왔다.
티벳, 중국, 일본, 버마, 태국, 스리랑카 등등...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전 지역이
이 방편을 수련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첫번째  방편이
붓다의 이름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고의적으로 이 방편을 회피해 왔다.
이 방편이 점점 불교의 방편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는 이 방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힌두교도들이 이 방편을 회피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시바에 의해서 서술된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가 불교도들에 의해서
 불교의 명상비전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편들은 불교의 것도 힌두교의 것도 아니다.
방편은 단순한 하나의 과학이며 원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속한 것이 아니다. 붓다는 이 방편을 사용했고, 붓다 이전부터 이 방편은 사용되었다.
단지 붓다는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은  자, 즉 붓다(Buddha)가 되었다.
이 방편은 다른 방편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고 쉽다.

2.
숨을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白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 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지어다.

이 방편은 앞의 방법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
강조하는 부분이 정지 간격이 아니라 두 호흡 사이의 회전점이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은  하나의 원을 만든다. 기억하라.
호흡은 절대 평행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호흡을  평행선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원을 그린다.
들어오면서 반을 그리고 나가면서 나머지 반을 그린다.
첫째, 호흡은 원형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두 개의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의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완전한 원을 그리는 것이다.
들어오는 숨은 내부의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반원으로 돌아서 나가는 숨이 된다.
또 나간 숨이 밖의 어느 지점에서 반원으로 회전하여 들어오는 숨이 된다.
그러면 왜 호흡은 회전하는가? 그것은 자동차 기어의 원리와 같다.
그대가 기어를 바꿀 때마다 중립기어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호흡 역시 중립기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호흡의 회전점이다.
이 회전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호흡이 바로 들어가고 나가고 할 수 없다.
이 중립지대에서는 그대가 육체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물질적인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물질적인 것은 그대 존재의 기어이며  정신적인 것 역시 또 하나의 기어이다.
 하지만 그대가 중립기어일  때
그대는 육체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단지 존재 그 자체라는 말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의 중립기어를 말이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말이다.
이때문에 호흡의 회전점이 강조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다.
그것은 거의 완벽한 기계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수많은 기어 장치들이 있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알고 나면 미칠 것이다.
인간의 이 기계  장치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의 이 기계 장치를 가지고 공장을 세운다면
10평방 킬로미터가 넘는 땅이 필요하며  256평방 킬로미터의
땅이 이 기계의 소음으로 진동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대의 몸은 7천만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뇌세포의 수만 해도 200만 개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세포들이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순간 순간마다 또한 이 기계  장치들은 가동되고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완전무결하다.
여기의 이 방편은 그대 마음의  기계 장치와 몸의 기계 장치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대의 본질은 기계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점을 명심하라. 그대의 존재는 메커니즘의 일부가 아니다.
그리고 기어를 바꾸는 순간마다 깨달음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잠잘 때 그대는 기어를 바꾼다. 낮에는 일하기 위해 다른 기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잠자는 것 역시 또 다른 마음의 기능이다.
일할 때와 잠잘 때 그 사이가 중요하다.
거기에 간격이, 회전점이, 중립기어가 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대는 또 기어를 바꾸게 된다.
하루 중에도 이 기어는 여러 번 바뀐다. 예를 들어 그대가
조용히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그대를 화나게 한다.
그와 동시에 그대는 또 다른 기어로 바꾼다.
화를 내게 되면 호흡의 리듬이 빨라진다.
호흡은 자극을 받아 떨리고 숨이 막히게 된다. 그대의 몸은 뭔가를
때려부수고 싶어진다. 뭔가가  박살이 나야 비로소 그 답답함이 풀리고
호흡은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호흡이 바뀌고 그대의 몸은 전혀 다른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결국에는 그대 자신이 다른 인간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차가  있다.
차에 엔진을 걸어놓고 기어를 중립  상태에 두면서 계속 가속 페달을 밟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차는 떨리면서 과열될 것이다.
그대가 화가 나는 것을 참으려 할 때  과열되는 것도 이런 원리이다.
그대의 기계  장치는 분노로 과열되었는데 그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때문에 열이나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몸은  기계다. 물론 그대 자신은 '그 이상'이다. 그리고 '그 이상'을 그대는
반드시 발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기어가 바뀔 때 회전점에서 '그 이상'을 발견하라.
이 회전점은 극히 짧은 순간이기 때문에 매우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관찰력이 없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어떤 것도 관찰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이 꽃을 관찰하라. 그대에게 주는 이 꽃을 관찰하라.'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 꽃을 도저히 관찰할 수 없다.
잠시 동안 그 꽃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아름다움과 연결된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다닐 것이다. 이제 꽃은 더 이상 그대의 관찰 대상이 아니다.
그대의 시각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붉다. 이것은 푸르다. 이것은 희다."
그런 다음 그 색깔에  연결된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것은  관찰이 아니다. 관찰 속에는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을 유발한다. 하지만 진정한  관찰은
언어적인 개념도 없고 감정의 어떤  움직임도 없는 상태 속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꽃은 그대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꽃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그대와 하나가 되어 있기에 거기에 홀로 남아 있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3분 동안만 마음의 어떤 움직임도 없이
완전하게 꽃과  함께 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여기 차원의 변형이 온다.
지복의 순간이 온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각성되지 못했기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로 원숭이처럼 건너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다. 원숭이로부터 말이다.  우리의 마음은 원숭이처럼 작용한다.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여기저기로 뛰어다니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고 그저 앉아만 있으라'라고 말했다.
그때 원숭이 같은 마음은 더 이상 날뛸 수가 없다.
선가(禪家) 에서는 좌선(坐禪)  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좌선은 '어떤  행위도 하지 말고 그저 앉아만  있으라'라는 뜻이다.
전혀 움직이지 말고 돌부처처럼 죽은 듯이  앉아 있으라는 뜻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두 호흡 사이의 회전점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대는 궁극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서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왜 그토록 이 회전점이  중요한 것인가?
이 회전점은 육체와 마음으로부터  그대를 분리시켜
다른 차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호흡은 그대와 함께 육체 차원으로 들어왔다가 그대와 함께
마음의 차원으로 나간다. 하지만 호흡의 두 회전점에서는 호흡이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다. 회전점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에는 호흡이 삶이라면 그대는 죽음이고, 호흡이
육체라면 그대는 비육체이며, 호흡이 마음이라면 그대는 무심이다.
호흡이 멈춰지면 마음의 작용도 따라서 멈춰진다. 왜 그런가?
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마음은 호흡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호흡은 육체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호흡의 정지는 그대
자신으로부터 몸과 마음의 분리를 뜻한다. 기어가 중립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차가 서 있다. 그러나 차의 엔진은 달리고 있다. 그 엔진은
매우 요란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기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차체와
엔진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차는 두 개로 분리된다.
움직이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만 엔진과 차체가 분리된 것이다.
호흡이 회전점을 지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 그대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깨닫기 쉽다.
이 존재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육체 속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단지 기계 장치일 뿐인가?
아니면 이 기계 장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인가? 호흡 사이에 있는
회전점에 지복이 깃들어 있다고 시바는 말한다. '이 회전점을
깨달아라. 그리하면 그대의 영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리라.'
라고 시바는 외치고 있다.

오늘은 이만!


다섯 개의 신비

도약하라! 비상하라!
그대 자신을 변형시켜라
그대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초월시켜라.

5.
미간(眉間)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 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6.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 사이에 항상 유념하라
이 수련을 계속하면 머지 않아 그대는 다시 태어나리라.

7.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는 미간에 있다가
그대가 잠드는 순간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8.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호흡의?두 교차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아는 자'를 알아라.

9.
죽은 듯이 누워 있으라.
화가 날때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속눈섭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폴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동양의 신비를 공부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는 한 신비주의 명상학교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입학원서를 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디를 가나 가장
훌륭한で?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입학원서를 냈다. 그러자
학교측에서는 단식과 호흡의 특별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타고라스는 학교측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식을 배우려고 여기에 왔지 수련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
그러자 학교측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의 존재가 다른 차원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지식을 전해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우리는 구체적인 경험에만 흥미가 있다. 삶을
통해서 경험되어지지 않는 지식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여 ! 당신은 40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호흡법을 수련하라.
의식이 각성된 상태에서 호흡의 어떤 지점을 계속 집중하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피타고라스는 이 수련을
거치기로 했다. 40일 동안의 단식과 호흡 수련을 거친 뒤에 그는
드디어 입학을 허락받았다. 그때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피타고라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피타고라스가 아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때 당신들이 옳았다.
그때 나는 잘못되어 있었다. 오직 지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40일의 이 정화(淨化)를 통해서 내 존재의 차원은
완전히 변형되었다. 나의 관점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제 나는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수련을 거치기 전에는
오직 지적인 것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다. 이제 진리는 개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진리는 결코 철학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존재의 경험이다."
피타고라스는 과연 어떤 수련을 거친 것일까? 피타고라스가
거친 수련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다섯번째 방편이다. 이집트의
이 수련법은 인도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5.
미간(眉間)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테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 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이것이 피타고라스에게 주어진 방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이 방편을 가지고 그리스로 갔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의 모든 신비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방편은 가장 심오한 명상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이를 이해하라.
'미간에 집중하라......'생리학자들은 미간에는 인간의
몸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인
' `샘(galand)'이 있다고 말한다.
송과선(pineal galand)이라고 불리는 이 샘은 티벳에서
'쉬바네트라(shivanetra)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시바의 눈,
제3의 눈, 탄트라의 눈을 뜻한다. 이 눈은 미간에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외냐하면 아직 그 기능을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작동될 수는 있지만 저절로는 절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
이 제3의 눈은 눈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을 뿐이다.
여기 이 방편이 바로 제3의 눈을 여는 테크닉이다.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을 미간에 집중하라.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그러나 눈을 떠서는 안된다.
반드시 눈을 감은 채로여야 한다.
이 방편은 가장 간단한 집중법이다. 그대는 사실 몸의 어떤 부분에도
쉽사리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미간에,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는 대번에 최면 상태로 들어간다. 두 눈은 제3의
눈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몸의
다른 부분으로 주의를 옮기기가 힘들어진다. 이 제3의 눈은 자석과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의 수많은 방법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
방편과 연결되어 있다. 이 방편은 집중하기 가장 간단할 뿐만 아니라
송과선 그 자체가 집중을 돕고 있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자석과 같은 작용으로 그대의 집중력을 끌어당기고 있다.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옛 탄트라 문헌에 따르면 집중은 제3의 눈에게 있어서 음식이라고 한다.
제3의 눈은 배가 고프다. 몇 생 동안을 굶주려 왔다.
그대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굶주렸던 것이다. 그대의
집중력을 제3의 눈에 기울이게 되면 그곳은 되살아나게 된다.
그곳에 음식이 주어진다. 집중력이 제3의 눈에 있어서 음식인 것이다.
한번 그대가 거기에 집중하고 나면 그때부터 집중은 어렵지 않다.
제3의 눈 그 자체에 의해서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정확한 지점을 아는 것이다. 먼저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의 시선을 모아 두 눈썹 한가운데로 옮겨 가라.
그리고 바로 그 중앙점을 느껴라. 그대의 시선이 중앙점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될 것이다. 두 눈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정확한 지점에 꽂혔을 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앞에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들을 주시하는 주시자이다. 한번만 이렇게 제3의 눈에 고정되

그대는 더 이상 사념에 휩쓸려 다니는 노예가 아니다.
그대는 사념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보통 그대는 주시자가 아니라 사념과 하나가 된다. 화가 날 때
그대는 화가 된다. 성(性)속에 있을 때 그대는 성이 된다.
욕망속에 있을 때 그대는 욕망이 된다. 어떤 사념이 그대를 찾아와도
그대는 그 사념이 된다. 그대와 사념 사이에 어떤 간격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제3의 눈에 한번 집중하게 되면 그때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제 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할 수 있다.
오가는 군중들을 구경하듯이 그대는 사념의 이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서 길거리의 사람을 볼 때 그대는 자신을 그 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멀리 떨어져 하나의 방관자로 남는다.
여기 분노가 있다. 이제 그대는 분노를 볼 수 있다.
분노를 하나의 사물처럼 볼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나는 지금
화가 났다'라고 느끼지 않는다. 대신 '지금 분노의 구름이 나를
휩싸고 있다'라고 느낀다. 그대는 '화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더 이상 화내는 자가 아닐 때 분노는 그 힘을 잃는다. 분노는
그대를 침범하거나 정복하지 못한다. 분노의 바람이 제 스스로
불어왔다가 불어갈 뿐,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고요히 남아 있다.
이 방편은 '주시자' 를 발견하는 테크닉이다. 이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하라.
그 사념들과 만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고정될 때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대는 주시자가 된다. 그대의 몸에 통증이 일어날 때 이를 주시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그대 자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동일시하지 말고 방관자,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주시하게 되면
그대의 의식은 제3의 눈에 고정될 것이다.
둘째, 그 역 또한 성립된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
그대는 주시할 수 있다. 그대는 사념들을 지켜볼 수 있다.
그 기로 호흡의 미묘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 호흡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먼저 호흡의 정수(The essence of breathing)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 공기로써만 호흡하지 않는다.
의학은 말한다.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호흡을 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공기는 단지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를 통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매개체에 실려오는 프라나(prana)에 희해서 호흡한다.'
도대체 프라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과학은 아직까지
그것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연구가들은
공기 이상의 신비스러운 어떤 것을 느꼈다. 호흡은 공기를 통해서만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기 시작했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오르곤(orgone) 에너지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프라나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기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라는 매개체 속에는
오르곤(orgone), 혹은 프라나, 혹은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
부르는 것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매우 미묘해서 느끼기 힘들다. 이것들은 비물질적 존재다.
공기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묘한 어떤 것이,
비물질적 어떤 것이 공기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
잘 집중하게 되면 그것의 느낌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활기에 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 속에서도 생명력이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대 속에서 뭔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력이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공기는 프라나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병원에 가게 되면 그대의 프라나는 그들에게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리고 많은 인파속에 있을 때 왜 그렇게 숨이 막히는가?
역시 그대의 프라나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숲속에
가보라. 그대 속에서 생명력이, 프라나가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프라나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 필요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프라나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여러 번 이 프라나를 경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 취급했다. 과학은 그 자신의 미신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공기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땅속에 묻힌 채 며칠이고 삼마디(三
味)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일은 실지로 이집트에서 있었다.
1880년부터 40년 동안 공기 하나 통하지 않는 땅속에 묻혀
삼마디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 사람이 있다. 당시에 그를 땅 속에
묻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는 묻힌 후 40년 뒤인 1920년에
땅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사람이
살아 나왔다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는 땅속에서 나온 뒤에도 10년은 더 살았던 것이다.
땅속에서 나올 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공기가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무슨 비법이 있는가?"
그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프라나가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프라나는
스며들어 온다는 것이다."
공기는 땅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프라나는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이를 안다면 매개체
(공기)가 필요없이 그대는 프라나와 직접 연결될 수 있다.
그러면 4O년이 아니라 수백 년이라도 땅속에서 삼마디에 들어 있을 수 있다.
제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수,
즉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 이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삼사라(윤회 )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라.'
호흡의 정수를, 프라나를 느낄 때 정수리까지 가득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모여들 때 이는 가능하다.
그대 머리 전체가 이 호흡의 정수로 가득 채워진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수는 실제로 사하스라라 차크라에까지 넝치게 된다.
그 다음 호흡의 정이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호흡의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빛의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내적인 재탄생의 의미이다.
여기 두가지 현상이 있다.
첫째,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의 상상력은 하나의 파워를 갖게 된다.
이 테크닉을 수련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순수는 일반적 순수의 개념과는 다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기 전에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을 때 그대의 상상력은 위험하다.
그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모두 위험하다. 누구를 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다.
이때문에 우선 먼저 순수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대는
여러번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대의
상상력은 행동화되지 못했다. 만일 상상력이 즉시 행동화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할 것이다. 그대 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대는 살인하고 싶다는 상상을 수없이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3의 눈에 집중력이 고정된다면
살인하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살인을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최면에 걸린 사람을 보라. 그는 무엇이든지 명령만 들으면
즉시 행동에 옮긴다. 명령이 좋든, 나쁘든, 불합리하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는 명령을 따를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제3의 눈 명상법은 모든 최면술의 기본이다. 최면을 걸 때
최면술사는 환자의 시선을 어느 한 지점에 고정시키도록 한다.
이렇게 그대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될 때 3분 이내에
그대의 내적 집중력은 제3의 눈 쪽으로 모이게 된다. 그대의
내적 집중력이 제3의 눈 쪽으로 굽이쳐갈 때 그대 얼굴은 변한다.
최면술사는 그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 얼굴에는 모든 생기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하여 그대의 얼굴은
깊이 잠든 것처럼, 죽은 자처럼 창백해진다. 최면술사는 그대의
얼굴에서 핏기와 생기가 사라지는 때를 알고 있다. 이는 지금부터
그대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흡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대 얼굴은 죽은 자의 그것처럼 창백하다. 그대의 전 에너지는
제3의 눈을 향하여 흐르고 있다.
이제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부터 당신은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라는
최면술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는 깊은 잠을 자게 된다.
"이제부터 당신의 의식은 무의식 상태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는 깊은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최면술사는 길바닥의 돌멩이를 그대 손바닥에 얹어 놓으며
"그대 손에 불을 얹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그대는
손바닥이 몹시 뜨겁다고 느긴다. 뿐만 아니라 실지로 손바닥이
타게 된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대의 모든
집중력은 제3의 눈에 모여 있다. 그리고 그대의 상상력은 최면술사의 말에
의해서 암시를 받고 있다. 이 암시를 받은 그대의 상상력은 즉시 행동화한다.
'지금 당신은 죽는다'라고 최면술사가 말한다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그대는 죽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제3의 눈 때문이다. 제3의 눈에 있어서는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둘이 아니다. 상상은 현실이다.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꿈과 현실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꿈은 현실이 된다. 이 때문에 상카라(Shankara)는 말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신성은 언제나 영원히 이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신성이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되는 것이다. 그대 역시
이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가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될
것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되듯이
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세상은 환영이다. 꿈이다."라고 상카라가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나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을 때 프라나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 상상만으로 프라나의 이 충만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6.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 사이에 항상 유념하라.
이 수련을 계속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다시 태어나리라.

호흡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대신에 호흡과 호흡 사이의 간격에 집중하라.
들숨이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리고 날숨이 다시 들어오기 직전,
 거기에 틈이 있다. 호흡의 정지 상태가 있다. 이 방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틈에 대하여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라고 한 것이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지 두 호흡 사이의 틈에 집중하라.
그러나 이 수련은 반드시 일상의 활동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어라. 그러면서 두 호흡 사이의 이 틈을
지켜보라. 걸을 때는 힘차게 걸어가라. 그러면서 그 틈을 주시하라.
잠이 오거든 잠을 자라. 잠들면서도 그 틈을 지켜보라.
그럼 왜 이 수련은 일상 활동 속에서 수련해야 하는가?
행동은 그대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행동은
그대의 집중력을 자꾸 불러온다. 하지만 그대의 집중력을 행동에
분산시키지 말고 호흡의 틈 사이에 고정시켜 놓아라. 결코 행동을
멈춰서는 안된다. 계속적으로 무슨 일인가를 하라. 우리는 두개의
차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행동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주변과 중심이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활동하라.
멈추지 말라. 그러나 중심에 대해서는 또한 집중을 게을리하지
말라.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대의 활동은 연극배우의
연기와 같은 것이다. 물론 그대의 배역은 붓다의 역할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도둑의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붓다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대는 붓다처럼 행동하게 된다. 도둑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대는 역시 도둑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할을 하는
도중에도 그대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대 자신으로 남는다. 중심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서는 붓다처럼, 아니면 도둑처럼 행동하고 있다. 알아야 한다.
그대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는 마치 붓다나 도둑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이지 그대 자신이 결코 붓다나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행동하되 그대의
의식은 언제나 그대의 중심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이 방편을 잘 수련하면 그대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가 될 것이다.
삶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그대는 연기를 하는 배우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만은 끊임없이 호흡과 호흡 사이의 간격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이 간격을 잊어버린다면 그대는 더 이상 배우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다. 연기가
아니다. 그대는 드라마를 삶 자체로 잘못 알아 버렸다. 여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편의 드라마를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그 삶은 삶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하나의 배역이다. 이 사회가 그대에게 맡겨준 배역인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 그 배역은 또 바뀐다. 그런데 그대는
하나의 배역을 그대 자신과 동일시해 버렸다. 그래서 이 방편을 통해
바로 그 동일시를 부숴버려야 한다.
크리슈나는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배우였다.
그는 그 자신의 중심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연극과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진지함이란 전혀 없다.
진지함은 자기자신과 드라마에 있어서의 배역의 역할을 동일시하는 데서 온다.
드라마 가운데 그대 자신이 진짜 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점은 왜 야기되는가. 그대
자신의 진지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람의 아내 시타를 빼앗겼을
때 만약 그대가 람이라면 아마 심장마비라도 걸렸을 것이다.
그러면 드라마는 그 순간 그쳐 버린다.
그러나 그대는 람의 배역을 맡은 배우일 뿐이다.
시타를 빼앗기는 대목에 가서는 시타를 빼앗긴다.
하지만 그대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시타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서 편히 잘 것이다.
진짜 시타를 빼앗겼을 때 람그 자신은 울면서 나무들에게 물었다.
"시타는 어디로 갔는가? 도대체 누가 데리고 갔는가?
그러나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람이 진짜로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삶이라는 이 드라마에 있어서 배우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람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신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이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삶 역시 드라마의 한 연출이었다.
(라마야나)라는 연극을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람의 배역을 연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같이 람, 그 자신도 지금
'라마야나'라는 드라마 가운데 람의 배역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위대한 배우로서 말이다.
인도는 라마야나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렇게
멋진 드라마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라마야나를
지은 발미키(Valmikl )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 드라마를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람은 라마야나가 다 씌어진 뒤에
태어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스토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마야나의 진짜 주인공 람 역시 드라마에 지나지 않는다.
람이 태어나기 전에 라마야나의 스토리가 씌어졌다면 람은
무엇을 했는가. 발미키가 라마야나를 쓴 뒤 람은 뒤에 태어나서
발미키의 라마야나를 그대로 연출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람의 일생은 라마야나의 스토리 그대로였다. 그의 아내 시타를
빼앗긴 것부터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까지 모든 것이
라마야나의 스토리와 동일했던 것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운명의 법칙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운명 !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대의 삶에서 야기되는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하여 예정되어 있다면 그대의 삶은 드라마가 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람의 배역을 한다면 그대는 드라마의 단
한 장면도 그대 마음대로 뜯어고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말 한마디조차 말이다.
만약 그대가 언제 어디에서 죽는다고 하자. 그 날짜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예정되었다. 죽음이 다가올 때 그대는
울고불고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모든 것은 이미 각본에
짜여진 대로 진행되고 있는데......그리고 그대는 이러저러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이 모두가 이미 짜여져 있기에
피할 수가 없다. 결국 그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연출해야 할 것이냐를 물어야 한다.
이 방편은 그대 자신을 노련한 연극배우로 만든다. 그대가
호흡의 틈에 집중할 때 일상적인 삶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흐른다.
그대의 의식이 중심에 있다면 그대의 집중력은 주변으로
쏠리지 않는다. 주변에는 다만 의식의 일부만이 머물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대 의식의 부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불과하다. 주변의 일을 알고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대 주변에서는 항상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대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것 같다.
이 방편을 수련하게 되면 그대의 삶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대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7.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는 미간에 있다가 그대가 잠드는 순간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제3의 눈을 알게 되면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 프라나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프라나가
가슴의 한가운데에 닿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꿈의 세계,
그리고 죽음까지도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 방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수련하라. 첫째, 호흡 속에서
프라나를 느껴라.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느껴라. 미간을
집중하면 이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숨결 사이의 틈을 집중해도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미간보다는 좀 어렵다. 단전에 집중하게 되면
역시 가능하지만 좀더 어렵다. 그러므로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제3의 눈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대가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이 죽을 때를 미리
알 수 있다. 죽기 6개월 전부터 이미 죽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성자들이 왜 자신의 죽는 날짜를 예언하는가? 그것은 쉬운 일이다.
호흡 속에 담겨진 것을 느낄 수 있다면, 프라나가 그대 속에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면, 프라나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대는 즉시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호흡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호흡은 더 이상
프라나를 운반해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 안에 있는 프라나를
밖으로 운반해 나간다.
하지만 지금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호흡의 가시적인
부분, 즉 공기의 흐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공기속에 프라나가 담겨 있다. 그렇게 해서 그대가 숨을 들이쉴
때 프라나는 공기속에 담겨 몸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숨을 내쉴 때에는 그냥 공기만 빠져 나간다.
프라나는 그대의 몸 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임종이 가까울 때는 이와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들어오는
공기는 더 이상 프라나를 운반해 오지 않는다. 프라나의 양이 조금씩
줄다가 마침내는 텅 비게 된다. 이는 그대 몸이 우주의 에너지,
이 프라나를 더 이상 흡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프라나가 필요없다.
그리고 숨이 나갈 때는 빈 숨만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이미 있던 프라나를 싣고 가 버린다. 이 때문에 그대가 일단 호흡의
만져지지 않는 부분을 알게 되면 그대는 죽는 날을 알 수 있다.
프라나의 이동이 바뀌는 6개월 뒤에 그대는 죽을 것이다.
잠들려 할때 이 방편을 수련해야한다. 이 방편을 수련하기
가장 적합한 시간이 바로 이때다. 잠들려 하는 그 순간에 그대의
의식은 잠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이제 그대는 아무것도 자각할 수 없다.
이 순간이 오기 직전에,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호흡을 깨달아야 한다. 프라나를 느껴야 한다. 이 프라나가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껴야 한다.
느껴라. 프라나가 심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껴라. 프라나는
그대 심장으로부터 몸 속으로 들어온다. 이 프라나가 심장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을 느껴라. 프라나를 느끼면서 잠들도록 하라.
잠의 안개가 그대를 덮도록 하라.
이를 체험하게 되면 꿈속에서도 의식은 각성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꿈꾸면서 동시에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꿈을 꾸면서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꿈꾸는 동안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제3의 눈 때문이다. 꿈꾸고 있는
사람의 두 눈을 본 일이 있는가? 꿈꾸는 사람의 눈동자는 위로,
제3의 눈 쪽으로 향하고 있다.
잠자는 어린아이의 눈을 보라. 그 눈동자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보라.
어린아이의 두 눈동자는 제3의 눈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어린아이의 눈을 보라. 어른들의 눈은 보지 말라.
그들의 잠은 깊지 못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들의 눈은 제3의 눈 쪽으로 향하고 있다. 제3의 눈쪽으로
향한 이 집중이 꿈을 현실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꾸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결코 느낄 수 없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이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꿈을 꾸었다'라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 거듭 말하지만 꿈꾸고 있는 동안은 결코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꿈꾸고 있으면서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이다. 첫째 잠에서 깨어났을 때, 둘째
그대 의식이 초롱하게 각성되어 있을 때. 꿈을 꾸면서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 '이것이 꿈' 임을 깨달을 수 있을 때 그대는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첫째, 꿈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꿈을 조작할 수 없다. 꿈조차 그대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특별한 어떤 꿈을 구려해도 그대는 결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꿈은 그대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그대는 꿈의 창조자가 아니라 꿈의 희생자이다. 꿈은 그대
뜻과 관계없이 꾸어진다. 그대는 꿈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대는
꿈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잠드는 그 순간에 프라나가 심장에 충만함을 기억한다면,
그리하여 그대의 호흡 하나하나가 프라나에 의해서 터치된다면
그대는 꿈의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대가 좋아하는 꿈은 무슨
꿈이든지 꾸게 될 것이다. 잠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 순간
이렇게 말하라. '나는 이러이러한 꿈을 꾸고자 한다.' 그러며
틀림없이 그대가 원하는 그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잠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그대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이러이러한
꿈을 꾸고 싶지 않다.'
그러면 그러한 꿈은 결코 그대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꿈의 마스터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지만
전혀 쓸모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대가 자신의 꿈에 있어서
마스터가 된다면 그대는 결코 꿈꾸지 않게 될 것이다. 꿈은 정지될 것이다.
더 이상 꿈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꿈이 정지될 때 그대
잠의 차원은 변형된다. 여기 잠은 죽음과 같다. 죽음은 깊은 잠이다.
잠이 죽음만큼 깊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꿈은 잠의 수면에서 만들어진다. 꿈꾸고 있는 동안
그대는 잠의 표면에서 흐를 뿐이다. 그것은 꿈에 매달리기 때문에
잠의 수면에서 떠도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 꿈이 없을 때 그대는
바다 깊숙히 떨어진다. 바다의 밑바닥까지 침몰하게 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잠은 죽음의 짧은 기간이요, 죽음은 긴 잠이다."
잠과 죽음은 동질이다, 잠은 하루하루의 죽음이요, 죽음은
삶에서 삶의 긴 현상이다. 삶에서 삶의 긴 잠이다. 그대는 피곤하다.
그대는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다시 생명력에 넘치게 된다.
그러다가 70, 80이 되면 완전히 피곤해진다. 이제 죽음의
짧은 기간 대신 긴 죽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긴 죽음 후에, 긴 잠
후에 그대는 완전히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몸을 받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꿈이 없는 이 잠을 안다면, 꿈속에서 '나는 지금 꿈꾸고 있다.'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이제 죽음의 공포는 없을 것이다.
완전히 죽은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완전히
죽을 수는 없다. 죽음이란, 완전한 죽음이란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그대는 자꾸자꾸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잠이 너무
깊기에 그대는 잠들기 전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전 세상의 기억들이 잠의 이 안개에 덮여 버린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 오늘 밤도 그대는 역시 잠들 것이다.
이는 마치 녹음된 테이프를 다시 지우는 장치와 같다. 기억도 이와 같다.
기억도 일종의 녹음 현상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뇌세포에 녹음된 그 수많은 기억들을 다 지워 버릴 수
있는 그런 기계 장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 마음에 묻은 기억의 티끌을 완전히 씻어 낼 수 있는 그런 기계 장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어제의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어젯밤 잠들던 그대를 전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의 잠은 죽음과 같게 될 것이다.
여기 어젯밤 잠들기 직전의 그대와,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대와는
전혀 연결성이 없다. 그것은 기억의 제거 장치에 의해서 어제의
그대 기억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죽음과 삶에서도 일어난다. 그대가 죽을 때,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
그대는 기억하지 못한다. 누가 죽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는 또다시 시작한다. 이 삼사라 속에서 자꾸자꾸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방편을 수련하면 꿈의 마스터가 된다. 그대는 꿈을 멈추게
할 수도, 다시 꾸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꿈꾸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 결코 꿈의 희생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그대의 잠은 죽음과 동질이다. 여기서 그대는 알 것이다. 죽음은
일종의 수면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꿈이 끝날 때 동시에
죽음도 끝나야 한다. 죽음이 한낱 잠과 같은 것을 느긴다면 그데는
죽음 그 자체와 연결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선택할 수 있다.
그대가 태어날 곳과 태어날 몸을 선택할 수 있다. 꿈의 마스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탄생의 마스터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탄생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꿈의 통제자가 아니라,
탄생의 선택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희생물에 불과하다.
모른다.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이 탄생과 죽음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발적이며 카오스 현상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꿈의 마스터가, 죽음의 마스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과 마스타가 된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8.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호흡의 두 교차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아는 자'를 알아라.

이것은 약간 다른 테크닉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이 차이점이
어마어마한 변형을 가져온다. 들어오는 호흡에는 나가는 호흡 쪽으로
회전하는 하나의 교차점이 있다. 앞의 2번 방편과 이 방편은
수련상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약간의 차이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이 방편은 앞의 2번 방편에
`지극한 헌신으로......'가 더 첨가되었을 뿐이다. 이 말이
첨가되면서 방편 전체가 아주 달라져 버린 것이다. 방편 2는
헌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과학적인 테크닉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오직 과학적인 방법만을 수련하기에는 우리의 가슴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 우리는 느낌이 있고 감정이 있다. 그러므로
머리보다 가슴 쪽에 서 있는 사람은 이 테크닉을 수련해야 한다.
과학적인 태도에만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과학 일변도의 마음이 아니라면
이 방편을 수련하라.
그러면 어떻게 이 방편을 수련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이 아닌
남을 경배할 수 있다. 크리슈나를, 붓다를, 예수를, 그리고
알라신을 경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대 자신을, 그대의
호흡 사이의 틈을 경배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불가능 속에 오히려 경배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에 탄트라는 말한다.
"몸은 사원이다. 몸은 신이 거주하는곳이다."
몸을 하나의 사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몸은 성스러움, 그 자체이며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이다.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 그대
자신이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대 자신 속에서
신이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먹을 때나 몸을 움직일 때도 마찬가지다.
그대 자신이 먹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대를 통해서
먹고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모든 것에 대하여
경배의 감정이 솟는다.
많은 성자들이 그들의 몸을 사랑했다. 그들은 그들의 몸이 마치
연인에게 속해 있는 것처럼 소중히 다루었다. 그대도 그대
자신의 몸을 그들처럼 소중하게 취급할 수 있다. 아니면 단지 하나의
기계로서, 물건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선택은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몸을 신성한 사원으로 취급할 수 있다면
이 테크닉은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먹을 때 그대 자신이 먹는다고 생각지 말라. 신이 그대 몸을
빌어서 먹는다고 생각하라. 먹는 행위는 마찬가지겠지만 태도의 이
변화를 계기로 모든 것이 변형된다. 음식을 먹는 그대의 행위는
신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행위로 바뀐다. 목욕을 할 때, 역시 신이
그대 몸을 빌어서 목욕을 한다고 느껴라. 그러면 이 테크닉을
수련하기가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9.
죽은 듯이 누워있으라.
화가 날 때 그 분노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눈썹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죽은 듯이 누워 있으라,' 이렇게 하게 되면 그대는 죽어 버릴 것이다.
몸을 거기 그대로 버려 둬라. 꼼짝도 하지 말라. 그대는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완전히 죽어 버렸다고 상상하라.
몸도 움직일 수 없고 눈도 움직일 수 없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대는 죽었다. 이때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 느껴 보라.
그러나 자신을 속이지는 말라.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약간씩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조금도 움직이지 말라.
모기가 물더라도 말이다. 죽음처럼 그대로 있어라. 이 방편은 가장
유용한 방편중의 하나이다.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는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는 방편이 아니었다.
그에 있어서 어느날 갑자기 저절로 일어난 변화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전생에 나는 이 방편을 수련한 결과 이생에 와서 저절로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인과 관계가 있다. 15세 되던 어느 날 그는 그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 전체가
빳빳하게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는 질식 상태를 느꼈다.
심장이 멎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악몽을 꿀 때 자주 일어난다.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리고 혀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렇게 심한 가위에 눌릴 때는
깨어나도 한동안 꼼짝할 수가 없다. 이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정신은 말짱하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의 정신은, 의식을
말짱했다. 그러나 그는 느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할래야 해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살려는 모든 노력을 단념해 버렸다. 두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죽음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점점 굳어지다가 마침내 죽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몸은 죽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지만 몸이 죽었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몸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렇 가뿐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죽어 버렸다. 죽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의식의 다른 차원을 안 것이다. 그는 집을 나와 버렸다.
그날 밤 그 죽음의 경험이 그를 변형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시대에 있어서 깨달음을 얻은 몇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방편이다. 라마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현상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결코 그렇게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쉬지 말고 수련을 계속하라. 그러면 어느
땐가는, 다음 세상의 어느 땐가는 그대에게도 자발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설령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그 노력은 헛되지 않는다. 그 노력은 그대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의 씨로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어느날 시절이 무르익고
비가 오게 되면 그 씨는 마침내 싹이 트고야 말 것이다.
모든 자발적인 현상이 이와 같다. 씨는 뿌려졌다. 그러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성숙해지고 더 많이 경험할 때, 그리고 더
많이 좌절할 때,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어떤 극적인 상황을 만나서
씨는 싹이 튼다.
"죽은 듯이 누워있으라. 화가 날 때는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슬픔을 느낄 때면, 두려움을 느낄 때면, 그 슬픔과 두려움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그대는 죽었다. 그러므로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몸은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죽는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두려움이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변형될 것이다. 그대의 차원이 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한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음에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몸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감정
(emotion)은 동작(motion)을 만들어낸다. 화가 나게 되면
몸은 즉각 이 슬픔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이것을 감정이라고 부른다.
감정은 몸에 동작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죽음을 느껴라.
그리고 그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어떠한 감정도 따르지 말라.
그 감정들을 그대로 거기 방치해 둬라. 그리고 그대는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움직이지 말라.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말라. 결코 움직여서는
안된다.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
이것은 메허 바바(Meher Baba)의 방편이었다. 몇 해 동안
그는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송장처럼 몇 시간이고 누워 있곤 했다. 이것은 정말 좋은 방편이다.
그대는 다시 제3의 눈에 고정된다. 이렇게 하여 일단 제3의
눈에 고정되게 되면 두 눈섭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다.
메허 바바는 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대는 의아해할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하찮은 방법으로 어떻게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그러나 3년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만 응시했다.
3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3분만 응시해 보라. 3분이
그대에게는 3년보다 더 길게 느껴질 것이다. 응시하는 동안의 3분이란
그렇게 길 수가 없다. 시간은 여기에서 영원히 정지해 버린
것 같다.
메허 바바는 계속 천장만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사고와 동작은
점점 정지되고 의식만 뚜렷해졌다. 아니 그는 응시, 그 자체가 되었다.
그의 삶은 깊은 침묵이 되었다. 이 응시로 하여 그의
내면은 침묵의 한가운데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 형식적인 말을
시키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
메허 바바가 미국에 갔을 때였다. 당시 미국에는 독심술에
정통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대방 앞에 앉아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상대의 생각을 정확하게 꼬집어내었다. 그의 적중률은
100퍼센트였다. 어떤 사람이 그를 메허 바바에게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는 메허 바바에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일생에서 단
한 번의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는 메허 바바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독심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단 한 가닥의
생각도 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종이 위에 이렇게 썼다.
"도대체 무슨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이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감은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직도 내
앞에 앉아 있는지 아니면 다른 데로 가버렸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눈을 뜰 때마다 그는 내 앞에 있었다. 하지만
눈만 감으면 나는 속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 달아나 버리고 내
앞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어떤 사실을 발견했따. 이 사람에게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계속적인 응시로 인해서 모든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것 같았다."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이것은 약간 변형된 방편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는 죽었다.
이것으로써 충분하다.
"화가 날 때는 그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이 한 구절만으로도 독립된 방편으로서 훌륭하다.
화가 뭉게구름처럼 일어난다. 그러나 그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서
어떤 행위도 하지 말라. 분노 그대로, 그냥 분노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법이 바로 이 방편이다.
"화가 날 때 그 분노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화가 나면 화를 내라. 그 분노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어라.
절대로 피하지 말라. 분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다면 이제 머지않아
그 분노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완전히 새사람이
될 것이다. 불안하거든 그 불안한 상태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불안을 없애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말라. 그러면 불안은 사라질 것이다.
불안의 먹구름이 지나가 버린 다음 그대는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형될 것이다. 결코 불안에 동요되지 말라. 불안, 그
자체를 똑바로 직시하라. 그러면 그대는 불안의 마스터가 된다.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말고 응시하라.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이 방편은 신체적이며 수련하기가 쉽다. 그러면 '빠는 행위'가
무엇인가? 갓 태어난 아기의 첫 행위가 바로 빠는 행위이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울기 시작한다. 아기가 왜 그렇게 우는지
그대는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사실 아기는 정말로 우는 게 아니다.
그저 우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는 것처럼 보이는 아기의
그 행위는 공기를 빠는 행위이다. 그가 울 수 없게 되면 몇 분후에
그는 죽을 것이다. 우는 것은 공기를 빨아 마시는 첫번째의 노력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그는 호흡을 하지 않았다.
호흡하지 않아도 그는 살 수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순수한 프라나를
섭취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유이다. 어머니와 아기의 사랑이
여타의 다른 사랑과 현저히 다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순수한
프라나, 에너지로 어머니와 아기는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아기는
전혀 호흡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날 때 아기는 미지의
이 세상으로 내던져진다. 그는 이제 프라나를,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힘으로 프라나를 섭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첫번째 울음은 빨려는 노력이다. 그 다음 그는
어머니의 젖을 빤다. 빠는 이 행위는 인간의 기본적인 첫번째 행위이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모두 두번째 문제다.
 첫번째 문제는 삶의 이 행위, 빠는 행위이다.

빨고 싶으면 빨아라, 그러나 '빠는 자'로 남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무엇이든지 빨아라. 공기를 빨아라. 그러나 빠는 그 행위자는
잊어버리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어떤 것을 빨 때 그대는 '빠는 자'이지 '빠는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제 행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라.
뛰어들어서 '빠는 그 자체'가 되라.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수련하라.
달릴 때는 '달리는 자'가 되지 말고 '달리는 그 자체'가 되라.
'달리는 자'를 느끼지 말고 '달리는 순간'을 느껴라.
그대는 진행 과정이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진행 과정이다. 그대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그 격정 속에 오직 달리는 그 진행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대신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젖꼭지를 빠는 행위이다. 담배 연기가 입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어머니의 젖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빨지 못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용이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동안 담배는 충분히 빨지 못한 어머니의 젖이다.
그러므로 담배를 잊어버려라. 담배 피우는 자마저 잊어버려라.
오직 담배 피우는 그 자체가 되라. 빨아야 할 대상과 빠는 자
사이에 빠는 행위가 있다. 이 빠는 행위가 바로 진행 과정이다.
이를 수련하라. 매사에 이를 수련하라. 그러면 그대에게 무엇이
옳은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찬물을 마신다. 찬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때 마시는 행위, 그 자체가 되라.
물에 대해서 잊어버려라. 물을 생각하지 말라. 목마름이나 그대
자신마저 잊어버려라. 오직 물을 마시는 행위 그 자체가 되라.
차가움과 물의 감촉, 그리고 마시는 그 진행 과정이 되라.
그대가 빠는 행위 그 자체가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빠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면 그대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그대의 행위는
이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그 첫번째 진행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빠는 행위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초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빠는 행위
그 자체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 방편을 어떤 젊은이에게 일러주었다. 그는 열심히
수련을 거듭하고 난 뒤 나에게 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딱 한 가지만 가지라고 한다면
그대는 무엇을 택하겠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말해 보라."
그러자 그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만, 제 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직
유방입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죄의식을 갖지 말라. 유방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외 죄의식을 느끼는가?"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유방에 대한 생각이 밤낮으로 나를 누르고 있습니다.
왜 여자만 보면 유방에 눈이 갈까요. 여자를 볼 때마다 맨 먼저
유방을 보게 됩니다. 여자의 몸은 보이지 않고 오직 유방만 크게
확대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경우 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점이다.
젖을 통해서, 어머니의 유방을 통해서 우리는 우주와
처음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땅은 그토록
터 온다. 어머니의 유방은 그대의 생명력과 사랑을, 그리고 삶에
필요한 영양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방은 그대의 기억속에
그렇게 부드럽고 포근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모든 남자들의 마음에는 유방에 대한 환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무엇이든지 빨아라. 빨되
빠는 자로 남아 있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어라.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어머니의 유방을 생각하라. 아니면 그대가 좋아하는 여자의
유방을 생각하라. 그런 다음 실지로 젖을 빨듯이 그대 상상 속에서
그 유방을 빨아라. 빨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빨아라."
그는 유방을 빨기 시작했다. 3일 밤낮을 정신없이 유방만 빨았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루 종일 유방만 빨고 싶습니다. 유방을
빨고 있으면 내 마음은 그렇게 편안하고 고요할 수가 없습니다."
3개월이 지나자 미친 듯 유방을 빨던 그의 행위는 하나의
만트라(mantra: 呪文) 가 되었다.
그는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달콤한 액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이 액을 마시게 되면 온몸은 에너지로 가득차게 됩니다.
저는 이제 음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음식을 먹는
일 뿐입니다."
나는 그에게 석 달을 더 계속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어느날 그는 춤을 추듯이 나에게 왔다.
"이제 빠는 그 행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석 달 전의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문이 열렸습니다. 내 안에서 뭔가 단단하고 고질적인 그 무엇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젠 나에게 아무런 욕망도 없습니다. 해탈도
니르바나도 필요없습니다. 신도 부처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다 좋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방편을 수련하라. 빠는 자가 되지 말고 빠는 그 자체가 되라.
그것은 모든 명상 테크닉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질문 )
"만약 우리가 이미 스여진 각본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라면
우리가 변형된다는 특별한 각본 없이 단지 명상을
통해서 어떻게 변형될 수 있습니까? 만약 변형된다는
특별한 각본이 이미 짜여져 있다면 뭣하러 힘들게 명상 수행을
합니까?
이 질문은 처음 질문과 똑같은 것이다. 똑같은 어리석음이 담겨 있다.
나는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이것이 우주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삶이
하나의 각본으로 이미 짜여져 있다는 것은 오직 그대의 생각을
바꾸어주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다.
인도에서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데 있어서 항상 이 운명에
관련된 방편을 이용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 그 의도는 그대가 모든 것을 꿈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번 그대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석한다.
예를 들면 그대는 어느 특정한 날 죽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은 꿈이 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정된 불변의 사실이 아니다. 아무도 그대에대해서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주는 조금도 그대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죽을 때 우주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우주는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 무심하다.
전 우주가 그대가 죽는 날짜를 미리 정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만큼
그대가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런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다.
그대가 우주의 유일한 주인공은 아니다. 그대가
존재하든 말든 우주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그토록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계속
남아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무의식인 것이다.
어린아이가 하나 태어난다. 그때 그는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공급받아야 한다.
반면에 그는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그는 어떤 것도
이 세상에 되돌려 줄 수 없다. 그는 너무나 무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음식과 사랑과
보호막이 필요하다. 그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어져야만이 그는 겨우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의 아기는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
동물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동물은 가족제도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너무나 무능하기 때문에 갓 태어나서
생존하는 데는 가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모가 필요하다.
아니면 부모 역할을 대신해 줄 사회가 필요하다. 아기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되는 순간 곧 그는 죽을 것이다.
아기는 매우 의존적이다. 그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음식을 필요로 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것들을 제공해 준다. 온 가족이 그에게 신경을 쓰고 그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요구대로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단지 요구만 할 뿐이다.
그래서 마치 전 우주가 자기를 위해서 창조된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전 존재계가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요구는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그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죽게 될 것이다. 그의 요구는 그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의 요구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라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에는 요구 사항이 매우 간단하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의 요구는 점점 커지고 복잡해진다. 어떤 때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 그러면 거기에 좌절이 싹튼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 거기에 깊은 좌절감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머리에서는 왕관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는 점점 중심에서 밀려난다. 그리도 어른이 되면
결국에는 완전히 체념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에는
여전히 자신이 중심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종종 사람들은 내게 와서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우주에서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를
묻고 있다. 그토록 귀중한 자신이기에 자신의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내가 창조되었습니까?"
이런 유치한 질문들은 모두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착각 속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하지만 그데는 어떤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
아무 목적도 없이 생겨난 것이 그대에게는 훨씬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존재에 무슨 목적이 있다면 그대는 그저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기계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인간의 발명품은 모두 나름대로의 존재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단지 존재계의 덤으로 생겨난 것이다. 모든 것은 간단하고 자명하다.
꽃이 거기에 있고, 별이 거기에 있으며, 그대가 거기에 있다.
모든 것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존재계는 어떤 목적도, 어떤 이유도
갖지 않는다. 오직 존재의 축제를 즐길 뿐이다.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생각은 문제가 많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어서 운명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이 이론은 단지
가설이며 또한 수단이다. 어떤 수단인가하면, 그대가 삶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대는 그 삶을 한편의 드라마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약 오늘 저녁에 내가 할말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나는 그 정해진 말에서 한마디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내가 한마디라도 바꾼다면 그때는 전과정에 혼란이
생길 것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모든 말이 우주나 신성- 혹은
그대가 좋아하는 무슨 이름이라도 좋다 - 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면
그때 나는 더 이상 내 말과 행동의 근원이 아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참관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대가 삶이 정해진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때 그대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간섭할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일생의 실패자라면 그것은 미리 정해진 것이다. 혹은 그대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 또한 이미 정해진 길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예정된 각본이며 그 가치 또한
그같은 것이다. -라마야나(Ramayana)'라는 신화에서 하나가
악역을 맡은 라반(Ravan)이 되면 다른 하나는 람(RAM)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라반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람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고
그대는 단지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저 무대 위에서 각본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그대가 배우라는 느낌, 그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는
그대의 삶은 미리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그런 방편이 운명론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그대와 너무나 친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그 방편이 별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항상 삶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운명론은
너무나 익숙하다. 누가 그대에게 삶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말하면 그대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누가 그런 것을 모르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운명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만 아니라
거의 법칙이나 진리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삶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그대에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을
주지 못한다. 그 방편이 지니고 있는 효력을 충분히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여러 번 자주 사용해서 이제 약효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방편이 도움이 된 한 가지 사례가 있었다. 내가 어떤
도시에 있을 때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는데
말이나 행동이 힌두교도와 같았다. 나는 처음에 그가 이슬람
교도인 줄 알지 못했다. 옷도 힌두교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교도나 기독교도들은 인생이 단 한 번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도나 불교도, 그리고 자이나교도들은 수많은
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해탈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만약 예수도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알았을 것입니다.
모세도 그렇고 모하메트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다면
인생이 여러개 있는지 단 하나밖에 없는지 분명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옳았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때는 크리슈나나
마하비라, 혹은 붓다나 상카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예수나 모세, 모하메트와는 다르게 말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기독교가 옳다면 그때는 붓다가 틀렸습니다. 크리슈나도 틀렸고
마하비라도 틀렸습니다. 반대로 붓다가 맞다면 예수와 모세
그리고 모하메트가 틀렸습니다. 그러니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 매우 헷갈립니다. 어떤 쪽이 옳습니까? 단 한 번의
인생입니까? 아니면 수많은 생입니까?"
그는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둘 다 옳다고 말한다 해서 이 질문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옳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틀렸습니다. 자, 뭐라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럴 필요가 없다. 당신의 접근 방법이 틀렸다. 그것은 둘 다
하나의 방편이다. 어떤 것도 옳거나 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방편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했다.
예수와 모하메트 그리고 모세는 마음의 한 가지 형태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붓다와 마하비라 등은 또 다른 마음의 형태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결국 그것들은 종교의 두 가지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힌두이즘과 유태이즘이다. 윤회를
믿는 불교는 힌두이즘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회적인 인생을
믿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은 종교는 유태이즘에서 나왔다. 그것들은
모두 이 두 가지 방편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라. 우리의 마음은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방편이 아니라 이론으로 인해하려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옳고 그름의 명제로 따지려 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어제 이것이 옳다고 말했는데 오늘은 저것이 옳다고
말하고 또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물론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아무도 둘 다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에 관심이 없다. 나는 오직
어떤 방편이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생이 수없이 많다는 방편을 사용한다. 서구에서 나온
모든 종교는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교리는 종교적으로 매우 빈약한 사상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왔다.
그들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도 그랬고 모하메트도 그랬다. 모세 역시 종교적인 것보다는
정치와 전쟁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 역시 사상적으로 풍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단 한 번의 생이면 충분하다. 그들은
굶주려 있고 죽어가고 있다. 만약 그대가 그들에게 생이 여러개 있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계속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완전히 낙심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수천 번의 생이라니?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니?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라. 한 번이면 족하다. 이 한 번의 생만 마치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 두 번 다시 살고 싶지 않다."
이 한 번의 생으로 모든 끝장을 다 보기 위해서는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직 전능한 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한편 붓다나 마하비라나 크리슈나는 매우 부유한 사회에 그들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은 서양이 잘살고 동양은 가난하다.
특히 인도는 정말 가난하다. 그래서 가르침을 위한 그들의 방편은
완전히 틀린 것이 되어 버렸다. 모든 힌두교의 아바타르
(化身)들, 모든 자이나 교의 티르탕카(賢者)들, 모든 붓다(覺
者)들은 그들의 출신이 왕자이거나 귀족의 자제였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철학적이며 모든 방면에서 세련되어 있었다.
그대는 고타마 붓다보다 더 세련된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절대적일 만큼 세련된 사람이다. 더 이상 어떤 것도 그에게
덧붙일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만약 붓다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고 해도 그는 더 갖추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부유한 사회를 향해 말했다. 기억하라. 부유한
사회는 문제가 매우 많다. 부유한 사회에서는 쾌락이 의미가 없다.
천국이 의미가 없다. 가난한 사회에서만이 천국이 호소력을
갖는다. 천국과 같은 사회 속에서 천국을 떠드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을 지겨워하고 있다.
그래서 붓다나 마하비라나 크리슈나는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은 고통도 초월하고
즐거움도 초월한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는 낙원은 이미 그들이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진짜 문제는 지루함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미래에라도 쾌락을 약속해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고통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진짜 문제는 지루함이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쾌락으로 지쳐 있다.
마하비라와 붓다와 크리슈나는 모두 이 지루함을 이용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 태어날 것이다. 그것은
끝이 없다. 윤회의 바퀴는 결코 그냥 멈추지 않는다. 잊지 말라.
지츰과 똑같은 살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영원히 말이다."
모든 쾌락을 알고 있는 부자들에게는 삶이 계속된다는 말이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반복이 문제다, 그들에게 지루
함은 고통보다 더 나쁜 것이다. 그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한다.
이 세상은 낡았고 오래됐다. 모든 것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
그래서 그들의 성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초월하라. 윤회의 바퀴를 벗어나라."
뚜자들에게는 지겨움에 대한 느낌이 강해지는 방편을 사용할
때만이 명상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지겨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결코 지겹지 않다. 그들은
항상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필요하다. 하지만
약속이 너무 멀다면 그것 역시 의미가 없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너희의 세대가 다 지나가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은 20세기가 된 오늘날까지 수도 없이 많이 인용되었다.
그것은 '너희의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의하면 곧 그대는 신의 나라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말은 무슨 뜻인가?
그 뜻은 '이 세상은 곧 끝날 것이니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이다. 예수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세월은 매우 빠르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다.세
곧 이 세상은 끝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내 말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
예수는 한번의 생을 강조하므로써 긴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붓다와 마하비라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사용한 방편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대로 하여금
바로 행동에 옮기도록 긴박감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인도는 오래된 나라이며 옛날에는 매우 부자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별로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간절함과
긴박감을 만들어 내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편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더 많은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한도 없이 계속 태어나고 또 태어나서 똑같은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는 아마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즉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나에게 새로운 것은 없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것은 완전히 악몽이다. 나는 그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새로운 것을 원한다. "
그래서 붓다와 마하비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진부한 것이며 반복일 뿐이다.
그대는 수많은 생을 계속 되풀이해서 태어나고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굴레를 자각하라. 이 지겨움을 절실하게 절감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라."
방편은 다르다. 그러나 목적은 동일하다. 도약하라. 비상하라.
그대 자신을 변형시켜라. 그대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초월시켜라.
우리가 그 종교적 교리들을 하나의 방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거기엔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때 예수와 크리슈나, 모하메트와
마하비라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방편을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그 원리는 그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그대의 마음을 쉬게 하는 방편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중심을 찾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을 쉬게 하는 방편들
10.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11.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라.
그때 그것이 일어나리라.

12.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 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인간은 중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 벗어나서 살아간다.
그 때문에 내면에서 긴장이 싹튼다. 그리고 끊임없이 갈등과
고뇌를 느긴다. 그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는 있지 않다.
그대는 올바른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균형을 잃었다.
그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모든
정신적 긴장을 초래한다. 그것이 심해지면 그대는 결국 미치게 된다.
'미친 사람(madman)'은 자신 밖으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Enlightened man)'은 미친
사람의 역 (逆) 이다. 그는 자신의 중심에 이른 사람이다.
그대는 그 중간에 있다. 그대는 자신 밖으로도 완전히 나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중심에 이른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머물러 있다. 어떤 때에는 중심에서 갑자기 멀어진다.
섹스속에서, 분노 속에서, 그대가 빠져드는 그 어떤 것 속에서 그대는
일순간 미치게 된다. 그때는 미친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이 영구적이라면, 한쪽은 일시적이란 것뿐이다.
그대는 다시 되돌아온다.
그대가 분노 속에 있을 때 그것은 미친 것이다. 그러나 영구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단지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대가 중심에서 멀어질 때 그대는 미친다. 그러다가도
중심에 가까워지면 일순간 그대는 지복을 경험한다. 그때
그대는 잠깐 동안 붓다나 크리슈나처럼 된다. 그러나 그 순간은 매우 짧다.
그대는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 그대가 그 자리에 왔음을
인식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벗어나 있다.
우리는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이미지, 확립된 자아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대가 계속 주기적으로
자기의 중심과 미친 상태 사이를 왔다갔다하면 그대는 어떤
확고한 자기 영상을 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일은 매우 어려워진다.
그대가 지복의 순간을 기대하기라도 한다면 그때 그대는
두려워하게 된다. 자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원치 않는 상태가 불쑥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인간이란 이 두 극단을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는 완전히 미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중심에 이르지도 못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바로 보통의 인간이다. 그는 분노 속에서도 광적인
상태를 확실하게 느낄 수 없고, 또한 엑스터시 속에서도 전적인
자유를 맛볼 수 없다. 그는 이도저도 아니다. 두 극점에서 본다면
그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은 죽은 인간이다.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나
시인, 화가들은 모두 정상이 아니다. 그들은 매우 유동적이다.
어떤 때에는 중심에 이르렀다가도 급격하게 미치기도 한다. 그들은
이 양 극 사이를 매우 빠르게 오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일시를
갖지 못한다. 콜린 윌슨의 말대로 그들은 자신들을 ' 아웃사이더'
라고 부른다. 정상적인 세계에서 보면 그들은 분명 아웃사이더들이다.
그래서 인간을 네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정상적인
인간형이다. 그들은 고정된 동일시를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나 교수 기술자나
심지어는 성자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에 집착한다.
두번째 타입은 매우 유동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업가가 아닌 시인, 화가, 혹은
예술가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딱히 지정할 수 없다.
어떤 때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떤 때는
미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붓다같은 환희를 맛보기도 한다.
세번째는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자신을
떠나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네번째 유형이 바로 그들의 집에 도착한 사람들,
중심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붓다나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이다.
이 네번째 유형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완전히
그 마음이 푹 쉬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 긴장이란것은
찾아볼 수 없다. 노력이나 욕망도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뭔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상태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만족한다.
어떤 것도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곳으로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바로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영원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지 않는다. 내일을 꿈꾸지 않는다.
이점을 명심하라. 그대는 계속 내일을 향해 살고 있다. 미래를
꿈꾸고 과거의 추억에 집착한다. 그대의 몸은 현재에 있지만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쉴 새 없이 오간다. 그대가 잠이 들었을 때라도
그대의 마음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붓다는 오늘을 산다. 그는 바로 이 순간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의 로든 것에 적용된다. 태양이 내리쬐면 더운 대로, 찬바람이 불면
추운 대로 느낀다. 더 나은 환경을 꿈꾸지 않는다.
더 나은 상태를 상정해 놓지 않는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 다가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 뭔가 되려고 하지 않으면 거기에는
긴장이 없다. 이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라. 만약 뭔가가 되고싶지 않다면
긴장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긴장은 지금 그대의
상태가 아닌 어떤 것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대는 갑인데
을을 원한다. 그대는 가난한데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대는 못생겼는데
미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대는 우둔한데 지혜로운 자가
되려 한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일단 그대가 뭔가를
원한다면 거기에는 항상 불만족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빈 자리를
메꿀 뭔가가 또 필요하다. 모양만 바뀔 뿐 욕구불만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이 상태를 트리쉬나(渴臺)라고 불렀다.
그대는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간다. 그것은 끝없이 계속되고 무한하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뭔가가 되려는 것을 포기할 때 그대는
지금 있는 그대로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대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말이다.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우둔하거나 지혜롭거나,
부자거나 가난뱅이거나 그대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때 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가 없다.
번뇌도 있을 수가 없다. 그대는 푹 쉬게 된다. 그대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무위(無爲)의 마음이다. 자신의 중심에 이른 마음이다.
이것은 미친 사람의 마음과 완전히 반대이다. 미친 사람은
어떤 존재(Being)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뭔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becoming)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을이 되려고
발버둥친다. 오직 앞만 바라보고 뭔가가 되고자 애를 쓴다.
따라서 그는 극도로 긴장되어 있다. 긴장하지 않고서는 미칠 수 없다.
미치는 사람은 극도의 긴장을 소화할 수 없게 될 때 미치게 된다.
그는 지금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고 하고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그가
미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있어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의 마음은 끝없이
찾아 헤맨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비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고 그것은 그에게 유일한
현실이다.
붓다는 바로 이 순간의 존재 속에 산다. 미친 사람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존재 속에서 결코 살지 못한다.
그는 항상 뭔가가 되려 한다. 이 둘은 양극이다.
그리고 잊지 말라. 미친 사람은 그대의 반대편이 아니다. 그는
붓다의 반대편에 있다. 붓다 역시 그대의 반대편이 아니다. 그는
미친 사람의 반대 극부이다. 그대는 단지 그 사이에 있다. 그대는
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그대는 미친 증세도 갖고 있고. 깨달음의
요소도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대가 갖고 있는 깨달음의
요소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려고 한다.
때때로 중심에서 갑자기 섬광 같은 일별이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이완되어 있다면 그때 그 순간들이 그대에게 감지될 수 있다.
그때 짧은 순간이지만 그대는 사랑 속에 있다. 그리고 드디어
그대의 연인과 하나가 된다. 그것은 오랜 바람이었고 오랜 노력이었다.
드디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
그대의 마음은 떨어져 나간다. 그대는 그대의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때까지 마음은 끊임없는
방황을 했다. 그대의 연인에 대해서 마음은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제 사랑하는 사람은 거기에 있고 갑자기 마음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해오던 사고의 과정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마음은 그냥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순간, 거기에는 어떤 욕망도 없다.
그대는 완전히 이완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전전긍긍하면서
굽어져 왔던 그대 자신을 가볍게 던져 버린다. 그대가 자신을 쉽게
던져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그대에게 중요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현존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작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때때로 갑자기 마음이 멈춰버리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 순간에는
욕망이 없다. 사랑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욕망 없음'이다.
이 말을 이해하라. 그대는 사랑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욕망 없음이다. 사랑이 일어날 때 욕망은 사라진다. 마음은 조용해지고
이완되면서 녹아버린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일생에 있어서 단지 몇 순간뿐이다.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대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짧은 순간이지만 그대는 몇 번 경험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다. 그 충격 앞에서 마음은 멈출 수밖에 없다. 그
앞에서 마음의 기능이란 정말로 쓸모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랫동안 갈망하던 사람이 그대 앞에 나타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짧은 순간 동안에 마음의 모든 기능이 작동을 멈추어 버린다.
그대는 중심에서 푹 쉬게 된다. 그대는 존재를 맛볼 수 있다.
그대의 중심을, 행복의 근원을 만지고 느낄 수 있다. 그대는 지복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그 향기가 그대를 감싼다. 갑자기 그대는
이전의 그대가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이 그토록 많이 변화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을 숨길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만약 사랑 속에 있다면 그대의
눈동자에서, 얼굴에서, 걸음걸이에서, 앉는 모습에서, 그대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그대는 사랑하기 이전의
그대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바라는 마음이 없어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한 명의 붓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충격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시 마음은 새로운 살기를 찾는다. 생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면 드디어 그대가 목표를
달성했다고 마음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되묻는다.
'오늘 드디어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수 있을까?
마음은 이제 제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음이 그 기능을
작동시키는 순간부터 그대는 다시 뭔가가 되려는 병이 도지게
된다.
때때로 사랑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도 단지 지겨움 때문에 마음이
그 욕망을 멈출 수 있다. 그때도 역시 그대는 중심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지겨워질 때 그는 생각하거나
욕망하는 행위를 멈출 수 있다.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철저하게
좌절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의
마음은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집에 이르게 된다.
더 이상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 모든 문들은 닫혀지게 되고
희망은 사라졌다. 더 이상 어떻게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기본적인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짧은 순간은 그것이 지속되겠지만 갑자기 그대의
마음은 살아난다. 그대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외냐하면 그렇게 해서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죽는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떤 욕망을 만들어 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마음이 그 기능을 멈출 때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된다. 그대는 휴일을 맞은 것과 같다. 교외로 나가
숲속에서 쉬고 있거나 바캉스를 떠나 바닷가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때 갑자기 그대의 일상적인 마음이 작동을 멈춘다.
거기에는 사무실도 없고 일도 없다. 더군다나 남편이나
마누라도 없다. 갑자기 매우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마음은 그것에
맞추어 기능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신선함이
가셔지지 않는 동안 그대는 잠시 이완할 수 있다. 그대의 중심에
잠시 머물 수 있다.
이 잠시의 순간 동안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뿐이다. 그때 맛본 경험을 그대는 잊을 수가 없어서 계속 그 경험을
맛보기 위해 어떤 것에 몰두한다. 그것은 섹스가 될 수도 있고,
마약이 될 수도 있으며, 도박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잠시
마음을 멈추게 할 만큼 신선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대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경험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지 그대가 의도해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대가 의도하는 것은
이미 마음의 작용이 거기까지 손을 뻗쳤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마음을 멈추게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그를 처음 본 순간 그대의 마음이 멈춘다. 황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와 결혼을 한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그 경험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대가 결혼하지
않았을 때 일어난 것이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에는 뭔가 신선한 것이 있었다. 그때 마음은
잠시 기능을 멈춘다. 그들은 완전히 그 신선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굉장한 순간이다. 나는 매일 이 순간을 경험하면서 살고싶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놓치면 안된다. 결혼해야지.'
마음은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결혼은 마음이 작용한 산물이다.
그러나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다. 결혼은 계산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결혼을 해놓고 그
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결혼한 모든 남녀가 좌절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그들은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순간을 기다리지만 그것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하나도 새롭지 않다. 사랑은 진부해졌고 모든 것이
기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제 사랑은 하나의 의무가 되었고
조금도 재미있지 않다. 처음에는 무척 재미가 있어서 깨가 쏟아졌겠지만
이제는 지겹기까지 하다. 그대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이제 그대는 더 큰 것을 기대하지만 그대의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경험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점점 작아진다.
이런 식의 일들은 비단 결혼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대는 새로운 스승을 찾아가고 만남의 첫 순간은 새롭다.
그의 말, 그의 동작, 그의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때 갑자기
그대의 마음은 기능을 멈춘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진짜 스승이다.나는 이제 매일 여기에
와야지.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대가 그 스승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좌절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대는 애써 그것을 부인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실망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결국 그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스승은 좀 엉터리인 것 같다. 처음에 가졌던 경험은 환상일 것이다.
아마 그 엉터리 스승이 나에게 최면을 걸었나 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
그것은 진짜다. 그대의 진부한 마음이 그것을 가짜로 만들어 버렸다.
그대가 경험한 것은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 경험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을 예상하고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결코 마음은 멈추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대의 마음은 그것을 소화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제 그대는 매일을 기대감으로 산다. 그것은 닫혀진 마음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새로운 상황에서만 일어난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만이 그대의 마음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말이 매일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라는 뜻은 아니다.
그대의 마음이 어떤 틀을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대의 마음이 미래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때 그대의
스승은 매일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도반(道半)
역시 새롭다. 사실 마음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새롭고 신선하다.
늙고 진부한 것은 오직 마음뿐이다. 그것은 항상 오래된
것으로 남아 있다.
태양은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른다. 오래된 태양, 낡은 태양은 없다.
달도 새롭다. 꽃도 새롭고 나무도 새롭다. 모든 것이 새롭다.
그대의 마음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대의 마음은 항상 낡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과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경험을 축적하고
경험을 투사하기까지 한다. 마음은 과거를 필요로 하고
생명은 현재를 필요로 한다. 생명은 항상 존재의 축복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대가 마음의 작용을 허용하는
거기엔 항상 불행이 뒤따른다.

그리고 다시는 자발적인 순간들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존재의 중심에서 편히 쉬는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을 위해 여기에 세 가지 방편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그대의 마음을 푹 쉬게 한다. 그대의 신경을
완전히 이완시켜 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존재의 중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다시는 더 이상 무엇이 되려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되는 이 방편들이 도와줄 수 있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중심을 찾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10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시바는 사랑으로 시작한다. 첫번째 방편은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은 그대가 말  있는 이완의 겅멈 숭에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이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대가 이완할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사랑의
삶이 될 것이다.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긴장한 사람은
항상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벌어야지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목적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상품이
아니다. 그대는 사랑을 사 모을 수도 은행에 저축할 수도 없다.
사랑을 통해서 그대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실제로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어떤 이유나
목적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것을 위해서 돈을 번다. 돈은 하나의 수단이다.
그대는 집을 짓는다. 그것 역시 어떤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하지만 사랑은 수단이 아니다. 왜 사랑을 하는가? 대관절 사랑을 통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사랑은 그것 자체로 궁극이며 끝이다.
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계산적이다. 그것은 항상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목적은 반드시 미래에 성취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지금 여기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집을 짓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집에서 살 수는 없다.
그대는 먼저 집을 완홍해야 한다. 그 다음에, 미래에 그 집에서
살수 있다. 그대는 돈을 벌 수 있다. 은행 잔고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불어날 수 있다. 지금 당장 불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수단은 항상 미래에 끝난다.
그러나 사랑은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사랑이 명상과 가까운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리고 죽음 역시 명상과 가깝다. 죽음은 항상 지금 여기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미래에 일어날 수 없다. 그대는 미래에
죽을 수 있는가? 그대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죽을 수 있다.
아무도 미래에 죽을 수 없다. 어떻게 그대가 미래에 죽을 수 있겠는가?
지금 당장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지 않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죽을 수도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대가 어떻게 과거나 미래에 죽을 수 있겠는가?
죽음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만 일어날 수 있다. 죽음, 사랑, 명상
이런 것들은 모두 그렇다. 그래서 그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대는 사랑도 할 수 없다. 그대가 사랑을 두려워한다면 명상도
할 수 없다. 그대가 명상을 두려워하는 한 그대의 삶은 쓸모없는 인생이다.
물론 어떤 목적상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대는 삶을 통해서 어떤 지복의 순간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삶은 거칠고 황폐하기 짝이 없다.
이 세 가지 문제, 즉 사랑, 명상, 죽음 같은 것과 그대의 삶이
밀접하게 결부되는 것이 이상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그것들은
서로 유사한 경험들이다. 만약 그대가 한 가지만 확실히 경험해
볼수 있다면 다른 두가지는 안해 봐도 잘 알수 있다.
시바는 사랑과 함께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인가?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그대가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과거가 멈춘다. 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대는 현재의 차원 속에 있다. 그대는 지금이라는
순간 속에 있다. 그대는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그대는 거기에 마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위 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랑이
눈먼 짓이며 미친 행동이라고 일찍이 말했다. 그들은 핵심을
찔러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장님들이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계산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를 볼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모하리만큼
불행한 사랑의 사건들을 동서고금을 통해 많이 볼 수 있다.
사랑 속에서는 내일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면
지금 실재하는 것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진실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이해하기 매우 미묘한 것이 있다. 과거나 미래가 없으면
우리는 이 순간을 현재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현재란 반드시
과거와 미래의 두 기둥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현재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시바는
'현재'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 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시간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말이다.
사실 그런 구분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시간은 오직 과거와 미래뿐이다.
현재는 시간에 속한 부분이 아니다. 현재는 영원의 부분이다.
흘러간 것이 시간이다. 그리고 다가올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상태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이다.
만약 그대가 과거에서 논다면 그대는 결코 현재로 들어올 수 없다.
과거는 항상 미래로만 통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들어오는 문이 없다. 그리고 그대가 현재 속에 있다면 절대로
미래에 들어갈 수 없다. 과거와 미래는 서로 통하지만 현재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깊어질 따름이다. 그대는 더더욱 현재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과거에서 미래까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은 일차원적이다.
그것은 과거 아니면 미래의 수평선 상을 달린다. 하지만 그대가
현재로 들어오는 순간 차원이 바뀐다. 그대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수직이동이 가능해진다. 차원적 비약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수평선 위를 달릴 수 없다. 붓다나 시바는 바로
이 점에서 살았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살고 있다.
누가 예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시간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자극시킬 만한 어떤 것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지, 죽음은 없는 것인지, 또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는지, 어떤 불행이 있는지 등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때 예수는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선승(禪僧)의
대답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대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가 알아듣도록 보충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시간은 수평선 위를 흐르고 신의 나라는
수직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이다 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다. 그대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첫째 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서 그대는 시간의 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자신들 속에
사랑을 향한 그토록 깊은 갈망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대가 그것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한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사랑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심오한 현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사랑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대가 사랑을 한 뒤에 그토록
좌절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시간 속에서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시간 속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미이라(Meera)는 크리슈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유부녀였다. 뿐만 아니라 왕자의 아내였다.
왕자는 크리슈나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육체가 아니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미이라와 크리슈나 사이에는 천년이라는
세월의 틈바구니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미이라는 크리슈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 천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루는 왕자가 미이라에게 말했다. 남편으로서 말한 것이다.
"당신은 계속 당신이 사랑하는 크리슈나와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춤을 추며 그를 연모하는 노래까지 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누구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에 빠져 있는가?
아닌게아니라 미이라는 크리슈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토닥거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마치 미친 것같이 보였다. 참다 못한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정말 미쳤군. 당신의 크리슈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신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가? 나는 여기에 있다. 나와
사랑을 나누자. 나는 완전히 잊어버렸는가?
미이라가 말했다.
"크리슈나는 여기에 있지만 당신은 여기에 없어요. 크리슈나는
영원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그는 항상 여기에
있어 왔고, 지금 있으며, 또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과거에도
여기에 있지 않았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여기에 있지 않을 거예요.
단 하루도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요?"
왕자는 시간 속에 있었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영원 속에 있다.
그래서 그대는 왕자 곁으로 가까이 갈 수 있지만 그 간격은 좁혀질 수 없다.
반대로 크리슈나는 시간 속에서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원 속에서는 바로 곁에 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눈앞을 바라보면 거기에 벽이 서 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면
거기에는 하늘이 있다. 그대가 시간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벽이 있다. 그대가 시간을 초월해서 보면 언제나 열린 하늘이 있다.
무한한 하늘이 있다. 그리고 사랑은 무한을 여는 문이다.
그대는 사랑을 통해서 존재계의 영원함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그대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은 명상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방편이다.
"달콤한 애무를 받는 동안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이 되어
애무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 속에서 방관자처럼 서 있지 마라. 사랑 자체가 되라. 영원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의 연인을 애무하는 동안, 혹은 애무를 받는 동안
행위자로 남지 말고 애무 그 자체가 되라. 키스를 할 때
키스를 하거나 받는 행위자가 아니라 키스 자체가 되라. 만약
그대가 행위자로 거기에 남아 있다면 그대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되고
그대의 사랑은 빛이 될 것이다. 그대가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극에 서 있는 것이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대는 따로 존재해 있어서는 안된다.
거기에 오직 사랑만 남아야 한다. 그대는 사랑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에고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행위 속으로 녹아 들어라.
행위에 깊이 빠져들 때 더 이상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못하면 어떤 행위 속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사랑이 에고를
해체하는 데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이스트들은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설명할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에고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에고의 죽음인 것이다.
시바는 사랑 자체가 되라고 말한다. 그대가 포옹할 때 포옹
자체가 되라. 키스를 하면 키스 자체가 되라.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고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그때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뛴다.
피가 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돈다. 그때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보며 손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움직인다.
사랑이 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가라. 사랑은
그대의 차원을 급격하게 변화시켜 준다. 그대는 시간을 벗어나서
영원을 대면한다. 사랑은 깊은 명상이다. 종종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성자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안다. 그들은 요가 수행자들이
놓치는 것들을 맛본다. 하지만 그대의 사랑이 본격적인 명상을
통해 변형되지 않는 한 그것은 일시적인 경험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탄트라가 필요하다. 탄트라는 사랑을 명상으로
바꾸어 준다. 탄트라가 왜 그토록 사랑과 성 (性)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지 이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대가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자연스런 문이 되기 때문이다.
데비를 안고 있는 시바를 보라. 그들을 보라.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둘이 아니다. 그들의 결합은 너무도 심오한 것이어서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시바링가(Shivaling)를 본다.
그것은 시바의 성기(性器)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것은
홀로 있지 않다. 그것은 데비의 성기 위에 세워져 있다.
옛날 인도인들은 매우 대담했다. 이제 우리는 시바링가를 볼 때
그것이 성기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아니 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응은 그의 자서전에 매우 아름답고도 재미있었던 일화를 기록했다.
그것은 그가 인도에 왔을 때 코낙(Konark)사원에 갔다.
거기에는 시바링가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 그를 안내하던 한
판디트(힌두교 신학자) 는 그를 안내하면서 모든 것을 다 설명했지만
유독 그 흔한 시바링가만은 빼 놓았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응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판디트에게 물었다.
그러자 판디트는 얼른 응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그것에 대해 묻지 마시오. 나중에 이야기해 드리겠소.
이것은 매우 은밀한 것이오."
융은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힌두교다.
나중에 사원을 나왔을 때 판디트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에 대해 큰소리로 질문하는 것은
좋지 않소. 그것은 비밀인데 지금 내가 말해 주겠고."
그리고는 다시 융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그것은 우리의 은밀한 부분이오."
융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한 위대한 학자를 만났을 때 그는 이
일화를 그 학자에게 말했다. 그 학자는 다름아닌 하인리히 짐머였다.
짐머는 인도의 사상을 서양의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를 깊이 사랑했고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삶에 대해서 논리적이지 않고 신비적인 접근
방식을 말한다. 그가 융의 말을 듣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네.
사실 나는 항상 위대한 인도인들에 대해서만 들어 왔네.
붓다나 크리슈나, 마하비라 같은 인물 말이네. 하지만 보통의 인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이네."
시바에게는 사랑이 위대한 문이다. 그에게는 섹스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섹스는 하나의 씨앗이며 사랑은 그 꽃이다.
섹스는 사랑이 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왜곡된다. 섹스의 외곡을 비난하라. 하지만 섹스 자체는
비난하지 말라. 섹스는 사랑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섹스의 잘못이 아니라 그대의 잘못이다.
섹스는 섹스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탄트라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사랑 또한 사랑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빛으로, 명상적 체험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그것은 궁극으로, 신비의 절정이 되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사랑이 변형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행위하는 자를
잊어버리고 행위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사랑 속에 있는 동안에는
사랑 자체가 되라. 그때 그것은 그대의 사랑도 아니며 나의
사랑도 아니다. 그 누구의 사랑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그대가 거기에서 사라질 때 그대는 궁극 속으로 녹아
들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꽃을 피우는 에너지가 된다.
D.H.로렌스는 이 시대에 가장 창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알든 모르든 그는 탄트라의 명인이다. 그는 서양
사회에서 철저하게 비난 받았다. 그의 책들은 출판 금지를 당하고
여러 번 법정에 서야 했다. 그것은 단지 그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썼기 때문이다.
"섹스 에너지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당신이 그것을 비난하고
억압하면 당신은 우주에 대항하는 꼴이다. 그때 당신은 이 에너지의
고귀한 꽃핌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억압할 때
그것은 추해진다. 그리고 악순환을 되풀이할 것이다."
섹스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당신이 그것을 비난하고
성직자들, 도덕군자들, 소위 말하는 종교적인 인간들, 교황,
대주교, 상카라차리아( 힌두교 종정 ) 등등의 사람들은 언제나 섹스를
비난하고 죄악시한다. 그것은 매우 추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대가 그것을 억압하면 그것은 추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우리가 말한 대로 그것은 사실이다. 그대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더럽고 추한 것이다."
그러나 진짜로 추한 것은 섹스가 아니다. 성직자들이 그것을
추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번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증명되면
그대는 그것을 더욱 추한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섹스는 순수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꽃피는 생명력이다.
존재계는 그것을 통해 그대 속에서 살아 있다. 그것을 왜곡하지
말라. 그것이 마음껏 꽃필 수 있도록 허용하라. 섹스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대의 마음이
억압 때문에 성욕으로 가득 찰 때 그대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시작한다.
그때 상대방은 그대의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섹스가 사랑으로 변형될 때 상대방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노리개가 아니다. 그대는 더 이상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때는 상대방이 목적이되고 그대는 사라진다.
그때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서로를
성적 노리개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다리가 된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 돕게 된다. 그리하여 궁극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그때 그것은 하나의 명상이 된다. 그 속에서 그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면 사랑하는 자는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게 된다. 그때 시바는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그대의 것이다."

11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라.
그때 그것이 일어나리라.

말은 쉬워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를 든 것이다. 도대체 시바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그대의 발에 가시가 박히면 매우 고통스럽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다리 위로 개미가 기어 올라가고 있다. 그대가 그것을 느끼면
그대는 즉시 개미를 털어내 버린다. 그대가 부상을 당했다든지
두통이 있다든지 몸에 어떤 종류의 고통이 있을 때 이 방편이
적용될 수 있다.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은 그중의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어쨌든 시바는 그대가 어떤 감각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감각의 문을 닫을 수 있는가? 먼저 그대의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그대가 맹인이며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라.
귀를 막고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라.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해서
모두 그렇게 해보라. 그때 호흡을 멈추어야 한다. 호흡이 멈추어지면
모든 감각은 호흡이 멎어 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멈춘다.
개미가 어디에 있느냐? 갑자기 그대는 저멀리 나가 떨어진다.
내 어릴적 친구 중의 하나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의사들은 모두
3개월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3개월 동안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했다. 내가 병문안을 갔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내가 당장 죽을 수 있도록 말이야.
3개월 동안 누워 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내겐 훨씬 쉽네. 돌처럼
누워 있는 것은 견딜 수가 없어."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번이 아주 좋은 기회일세. 눈을 감고 돌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해 보게. 자네는 움직일 수 없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자네는 돌이기 때문이야. 눈을 감고 석상이 된 자신을 느껴 보게."
그러자 그는 내 말대로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그냥 해보게. 자네는 여기에 앉아 있고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네. 아무것도 말일세. 자네는 여기서 어쨌든 3개월을 지내야
하니 그냥 한번 해보게."
평소 같았으면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도 않거니와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말했다.
"좋아 ! 한번 해보기는 하겠네. 하지만 믿지는 않겠네. 내가
석상이라 생각한다고 해서 뭔가가 일어날 리는 없지. 하지만 자네의
성의를 봐서 한번 해보지. "
그는 내 말대로 했다.
나역시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도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황속에 있게 되면, 절대적인 절망 속에 있게 되면 뭔가가
일어난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2,3분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군' 하고 눈을 뜰 줄 알았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정말
석상(石像)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이마에 서려 있던
모든 긴장이 다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두고 나와야 했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그의 호흡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잠이 들었는지 확인도 해볼 겸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해 보았다.
"나는 이제 가야하네. 그러니 눈을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났거든
말해 주게."
그러자 그는 눈을 떴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이것은 기적이다. 혹시 자네가 나를 어떻게 한 것이 아닌가?"
내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그는 내 말을 듣는 즉시 반박했다.
"분명히 자네는 뭔가를 했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눈을 감고 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어떤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왔네. 나는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뜨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했어, 정말 석상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단 말일세.
그리고는 시간도 멈춰 버린 것 같았어. 값자기 이 세상이 사라져
버리고 나는 홀로 내 속으로 깊이 들어갔어. 그때는 고통도 사라져
버리더구만. "
사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다. 수면제를 맞지 않으면 잠을
이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정확히 언제쯤 고통이 사라졌는지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처음에 나는 어디론가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고통이 거기에 있었고 나와 고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지. 그리고는 고통이 점점 멀어져 가더니만 마침내 사라졌어.
그때까지 적어도 10분은 걸렸을 거야. 고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
석상이 어떻게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각의 문을 닫아라. "
돌처럼 되라. 이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 버려라. 그대의 육체에
대해서도 문을 닫아라. 그대의 육체는 그대에게 속한 부분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부분이다. 그대가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닫혀질 때
그대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닫혀진다. 시바는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그 육체를 갖고 해보라.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다.
굳이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대가
'개미가 기어갈 때 나는 이 명상을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개미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어떤 느낌이라도 좋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차가운 침대에 누워서
할 수도 있다. 갑자기 차가운 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침대도 사라지고 침실도 사라진다.
전세계가 사라진다. 그대는 돌처럼, 죽음처럼 변한다. 그리고
외부로 향해 뚫려 있는 어떤 창문도 없다. 그대는 움직일 수도
없다.
그때 그대는 중심으로 내던져진다. 주변을 맴돌던 원심력을 잃고
갑자기 중심으로 당겨오게 된다. 처음으로 그대는 중심에 서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대는 이전의 그대가 아니다.

12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 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그대는 여기에 앉아 있다. 그대의 몸무게가 사라졌다고 느껴보라.
무게란 것은 없다, 그대는 지금까지 항상 무게를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부터 무게가 사라졌다고 느껴보라. 그러면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무중력 상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 그대의 몸은 사라지고 없다. 사실 무게를 가진 몸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본래 무게가 없다.
세계 여러 곳의 과학자들이 죽음에 대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죽기 직전의 사람의 몸무게를 잰다. 그리고 죽은 직후의 몸무게를 잰다.
그러면 죽은 직후의 몸무게가 조금 더 가벼워져 있다.
그것으로 봐서 분명히 죽은 뒤에 몸에서부터 뭔가가 빠져나갔다는 뜻이다.
그것을 영혼이나 자아, 혹은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어쨌든 과학자들은 아주 가벼운 그 무엇이 죽은 직후에 몸에서
빠져나갔다는 결론을 내렸다.
과학은 무게가 없는 물질은 인정하지 않는다. 태양 광선조차
무게가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가벼워서 무게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5백 마일에 방사되는 태양빛을 모아야만 제대로 그 무게가 나온다.
그 무게는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무게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빛의 무게까지 잰 것이다. 과학에서는
무게가 없는 물질은 인정되지 않는다. 무게가 없다면 그것은
비물질이다. 그리고 비물질은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몸무게가 차이가 나면 이것은 충분히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된다. 어떤 때는 죽기 직전보다 죽고 난
뒤에 무게가 더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반대일 경우에는 영혼이나
에텔체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이 죽은 사람의 몸 밖으로 빠져 나간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지만 죽은 뒤에 몸이 더 무거워진다면
그런 가설도 맞지 않게 된다. 그러면 어떤 가설이 성립되는가?
죽은 뒤에 몸 밖에 있던 것들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리고 그대는 무게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질은 무게를 갖고 있고 그대는 물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는 비물질적 존재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방편을 수련한다면 그대는 자신이 본래 무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상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본래 그대는
무게가 없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들어 내면
항상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그대는 자신에게 걸어 놓은 뿌리깊은 최면을 풀어야 한다.
그대는 스스로에게 '나는 육체다. 따라서 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라고 최면을 걸어 놓았다. 그대가 건 최면을 스스로 풀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며 무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무게를 느끼지 않을 때 그대는 마음마저 초월한다.
그때 시바는 말한다.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 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사실 마음도 무게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무게는
모두 다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 그것은 무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지성적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대체로 맞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종종 매우 가벼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말로 위대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을 가진 바보들도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마음이 무거우면 지성적이다.
그만큼 그 메커니즘이 복잡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무게를 갖지만 의식은 무게가 없다. 이 의식을 느끼려면
그대는 무게 없는 상태를 느껴야 한다. 걷든지 앉든지 잠을
자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이 방편을 한번 시도해 보라.
사람이 죽으면 종종 시체가 왜 더 무거워지는지 아는가? 그것은
의식이 몸을 떠날 때 육체는 방어막이 사라져 외부의 것들이
침입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대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그대가 나가는 순간 그대의 육체 속으로 들어온다. 많은 파장들이
죽은 육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대가 거기에 있을 때에는
그대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가 있어도 그대가
약해지거나 아플 때에는 그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
두번째는 그대가 행복하고 즐거을 때에는 몸이 매우 가볍다.
그대가 슬플 때에는 몸이 더 무거워진다. 마치 어떤 것이 그대를
누르고 있는 것 같다. 중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왜 그런가? 그대가
행복할 때 그대는 육체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리고 슬프고
고통스러을 때에는 그대가 육체를 잊을 수 없다. 지구의 중심을
향해 그대를 더욱 세게 끌어당기는 것 같다.
깊은 명상 속에서 그대가 자신의 육체를 잃어버릴 때 그대는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된다. 그때 종종 육체도 함께 떠오르는 수가 있다.
과학자들은 볼리비아에서 한 여인이 공중 비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명상 중에 있었는데 4年트 정도 떠오른
것이었다. 그 장면은 사진으로 남겨졌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장면을 TV를 통해 구경했다. 하지만 과학으로는 어떤 설명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명상을 하지 않을 때는 1피트도
떠오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명상이 방해를 받으면 갑자기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명상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대의 육체를
완전히 잊어버려라. 그러면 그대와 육체 사이에 동일시가 끊어진다.
그때 육체는 매우 작은 것이 되고 그대는 매우 큰 것이 된다.
그때 그대가 얻는 무한한 힘에 비하면 그대의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육체를 보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황제가
노예를 보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차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노예가 울면 황제도 운다. 노예가 구걸하면 황제도
구걸한다. 노예가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면 황제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한번 황제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나면 다시는
노예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한다.
그대는 무한한 힘을 유한한 육체와 동일시한다. 한번 그대가
진짜 자신을 깨닫고 나면 그때는 더 이상 몸무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비상할 수 있다. 육체도 함께 말이다.
세상에는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일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차차 모두 밝혀질 것이다. 한 여인이
4피트 높이로 떠오를 수 있다면 그때는 천피트 만피트 뿐만 아니라
저 우주 속으로도 도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한계도
없기 때문이다. 4피트나 4백피트, 4천피트가 무엇이 다른가?
이 세상에는 육체를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람(Ram)도 그랬고 모하메트도 그랬다. 기독교에 나오는
엘리야나 모세, 불교의 보리달마 등이 그랬다. 그들의
시체는 지구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모하메트는 육체 뿐만 아니라
그가 타고 가던 말까지 사라졌다. 이 이야기들은 황당무게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리고 신비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자신의 무게가 없음을 깨닫고 나면 그대 역시 중력의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대는 중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대는 중력의 노예가 아니다.
그대는 완전히 육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중력의 영향을 가장 적게 느끼도록 하는 자세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결가부좌라는 것으로서 붓다가 앉았던 방법이다.
그것은 바닥에 그냥 앉는 것인데
벌거벗은 채로 땅바닥에 앉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대가 결가부좌로 앉은 다음 허리를 펴고 몸을 상하좌우로
천천히 흔들어 보라. 그러면 중력의 방향과 수직이 되는 점이 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의자는 중력을 느끼는 부분이 매우 넓게 퍼져 있다.
그래서 내 몸은 중력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는다.
그대가 서 있다면 중력의 영향은 더 적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다. 마하비라는 명상을 항상 서서 했다.
그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 면적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단지 발바닥만 땅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자세로 앉는 것은 그대의 내부에 흐르는 전기가 잘 순환하게 된다.
그래서 그대의 척추를 꼿꼿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이제 그대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척추를 바로 세우는 것을 강조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척추를 바로 세울수록 중력이 미치는 면적이 줄어든다.
대지에 수직으로 세울수록 힘이 덜 든다.
그런 자세로 명상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무게를 완전히 느끼지 못하는 때가 온다.
갑자기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물질이 없는 세계속에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무게가 없는 것은 육체가 없다는 뜻이다. 그때 그대는 마음도
초월할 수 있다. 마음은 육체의 부분이다. 마음은 물질이다.
물질은 무게를 갖는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어떤 무게도 갖지 않는다.
이 세 가지 방편들을 몇일 동안만 집중적으로 해보라. 그러면 내가
한 말이 실제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질문 )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사색, 집중, 명상 이 세 가지는 어떻게 다릅니까?"

사색은 일관성 있는 생각을 뜻한다. 그것은 방향이 설정된 사념 활동이다.
우리 모두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은 다른 한 가지 생각을 또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어떤 정해진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이드 학파는
그것을 보고 ' 연상작용' 이라고 부른다.
그대는 길가에 있는 개 한 마리를 본다. 그 순간 그대의 마음은
개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개는 그대를 이끌어간다. 그때
마음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대는 문득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어린 시절 그대는 어떤 개 한 마리를 특별히
무서워했다. 그 개가 갑자기 그대의 마음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의 다른 추억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개는 즉시 사라진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한 백일몽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또 다른 것에 연결된다. 그대는 계속 사념의 방향 없는
회로를 따라 돌아간다.
그대가 편안함을 느낄 때마다 그대의 생각이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가 보라.
생각의 순서를 거꾸로 밟아 올라가 보라. 그러면
거기에 또 다른 생각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저것이 이것을 그대에게
데리고 왔다. 그것들은 아무런 논리적인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길에 지나가는 개 한 마리가 그대의 어린 시절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결도 없다. 오직 그대 마음의 장난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본 개를 내가 보았다고 해서 나 역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법은 없다. 세번째 사람이 그 개를 보았다고 해도
그 역시 자기 나름대로의 또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연상의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한 가지 사건만 일어나도 마음은 그 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컴퓨터와 같다. 한 가지 정보는 다른
정보로 이어지고 그런 작용은 계속된다. 그리하여 그대는 하루종일
그 짓을 하고 있다.
그대의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솔직하게 종이에 적어 보라.
그러면 아마 그대 자신도 놀랄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니 말이다. 그리고 두 생각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발견할 수 없다. 여하튼 그대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대의 이런 생각들을 사념의 구름,
혹은 사념의 물결이라고 부른다. 바람부는 대로 그대는 사념이
되어 흘러다닌다.
사념이 사색이 되려면 연상작용에 의해 떠다니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대는 특정한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그때 그대의 모든 연상작용들을 잘라 버린다. 그리고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 어떤 결론에 이른다. 그대의 마음은 어떤
곁길로도 빠져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직 정해진 길 위로만 가야 한다.
과학자들은 사색을 통해 어떤 문제에 접근한다. 논리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조차 한 송이의 꽃에 대해 사색한다. 그때 온 세상은
마음에서 사라져 버린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송이의
꽃만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 많은 생각들이 곁길에 나타나서
그를 유혹하지만 그는 그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매야 한다.
그때 마음은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사색이다.
과학은 사색이 그 기반이 되어 있다. 모든 논리적인 생각들이
바로 사색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념의 구름은 사색이 아니다.
사색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거기에 집중이 있다. 집중은 한 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점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날뛴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미친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한 길로만 가는 것이다.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집중속에서는
마음이 아예 움직이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마음이 일정한 곳만
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집중 속에서는 아예' 마음이
움직일 수 없다. 오직 한 점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모든 에너지가
그 한 점에 모인다.'
요가는 집중과 연관되어 있다. 사념이나 사색의 마음은 요가를 통해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다. 그때 명상이 일어난다. 명상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무심 (無心)의 상태이다.
그래서 여기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사념, 사색, 집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상이다.
명상은 무심을 뜻한다. 명상은 집중의 상태로 만족하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명상은 마음에 의해서
이해되어질 수 없다.
집중까지는 마음이 도달할 수 있다. 마음은 집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이해할 수는 없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명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중 속에서는
한 점에서라도 마음이 머물 수 있지만 명상에서는 그 한 점마저
사라져야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에게 모든 방향이 열려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한쪽 방향으로만 열려 있다. 집중 속에서는
방향이 없다. 오직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상 속에서는
그 한 점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
사념은 마음의 일상적인 상태이다. 그리고 명상은 가장 고차원적인 상태이다.
가장 낮은 상태의 마음이 바로 연상작용을 계속하는 사념이다.
그리고 명상은 마음의 절정, 마음의 죽음이다.
그대는 두번째 질문을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사색과 집중은 명상에까지
이르는 정신적 흐름의 과정입니다. 그러면 이 정신적 흐름의
과정이 무심의 상태를 성취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이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어떻게 마음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
그대의 마음이 묻고 있다. 어떻게 정신적 흐름의 과정이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모순처럼 보인다. 어떻게 마음이 마음의
사라지는 상태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지 말이다.
자, 이해해 보라. 마음이 있을 때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생각의 과정이 있다. 그러면 무심은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생각의
흐름이 없다. 만약 그대가 계속 생각의 흐름을 줄여 나간다면,
그대의 사념을 해체시켜 나간다면 그대는 점점 무심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생각이다. 무심은 '생각 없음' 이다. 그리고
마음은 자신의 자살을 도을 수 있다. 마음은 자살할 수 있다.
그대는 자살할 수 있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자살을 부탁할 수 없다.
자살을 하려면 그대만이 도을 수 있다. 마음 역시 무심의
상태가 되도록 도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마음이 도움이 되는가?
만약 생각의 과정이 점점 치밀해진다면 그때 그대는 하나의 마음에서
더 복잡한 마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반대로 생각의 과정이
점점 엷어진다면 마음 역시 줄어들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무심의 상태가 될 수 있도록 도을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마음은 그대가 지금 이 순간 그대의 의식과 함께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의식과 뭔가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그래서 거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점차로 그대의 마음을
줄여갈 수 있다. 1퍼센트씩 줄여 나간다면 그대는 99퍼센트의
무심을 갗게 될 것이다. 그리고 1퍼센트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의 방 안에 가구들을 하나씩 없애는 것과 같다.
가구를 하나도 남김없이 치우고 나면 그 방 안은 하나의 공간이 된다.
사실 공간이라는 것이 가구를 치움으로 해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공간은 본래 거기에 있었다. 단지 잠시 동안 가구에 의해서
점유된 것뿐이다. 그대가 가구를 치울 때 공간이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그저 공간이 복구된 것일 뿐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깊이 들어가 보라. 무심의 공간이 마음의 조각들에 의해서
점유되어 있다.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씩 치우면 그대는
무심의 공간을 다시 복구할 수 있다. 마음의 조각이란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바로 명상이다.
마음의 조각들을 점차로 치울 수도 있고 갑자기 없애 버릴 수도 있다.
가구를 옮기는 데 몇 생 동안을 계속할필요는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대는 텅 빈 공간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구를 조금 치워 버리면 그 자리에 다른 새 가구들을 들여놓는다.
옛 생각들을 조금씩 치워 버리면서 새로운 생각들을 그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 바로 문제다. 그래서 그대는 영원토록 완전히
텅 빈 공간을 접할 수가 없다.
아침마다 그대는 명상을 한답시고 눈을 감고 앉아 있다.
그대는 사념의 조각들을 하나씩 치워 나간다. 그리고 나면 빈자리가 생겨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시장에 나간다. 그러면 그 빈자리에
다시 생각들이 가득 차게 된다. 공간은 다시 메워졌다. 다음날
아침 그대는 다시 생각을 치운다. 하지만 직장에 나가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또 생각들을 갖다 놓는다. 그런 일이 언제나 반복된다.
그대는 항상 그렇게 해왔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대는 모든 가구들을 치워 버릴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결심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대는 가구가 있는 방안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대는 가구 없는 방은 상상도 못해 보았다. 그래서 텅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마저 갖고 있다. 그런 자유를 한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한한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다.
마음은 하나의 조건이다. 그대는 스스로 그 조건들을 만들어 놓고
게임을 즐긴다. 그대는 날마다 그 게임들을 반복한다.
그대의 마음은 마치 전축에다 레코드 판을 올려놓고 똑같은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은 익숙한 곡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신선한
곡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하는가?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이 그대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안심한다.
그대는 침대에 누워서 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는 왜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가? 낡은 습관은 하나의 조건이다.
그대는 그 조건을 쉽게 만들어 놓았다. 어린아이들을 잠재우려면
손에다 장난감을 쥐어 주면 된다. 그러면 아이들은 곧 잠이 든다.
그러나 장난감은 잠 속으로 함께 들어갈 수 없다. 잠이 들면 아이의 손에서
장난감이 떨어진다. 그 장난감이 바로 조건에 해당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그대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장난감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을 만드는 것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만약 그대가 어떤 새로운 방에서 잠을 자려 하면 잠을 자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생긴다. 그대가 잠옷을 입고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면
그대는 매일 잠자기 전에 그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만약
잠옷이 없으면 그대는 잠이 드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왜인가?
벌거벗고는 잠을 자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자는 것과 벌거벗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대는 잠옷을 입는 오랜
습관이 있다. 잠옷을 입어야 안심하고 잠을 이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벌거벗고 자는 버릇이 있다면 그대는 아무데나 가서
잠을 잘 수 없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합숙해야 할 경우에는
그런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의 침실에서 벌거벗어야만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고방식 역시
하나의 습관이다. 그대는 늘 하던 대로 생각해야 편안함을 느낀다.
매일 되풀이되는 생각 속에 있어야만 안전한 것이다.
그대는 생각 속에다 여러 가지 것들을 담아 둔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대의 가구들은 낡은 쓰레기가 아니라서 버리기가 아깝다.
그대는 밭은 것들을 그 속에 넣어 둔다. 모든 가구들을 한꺼번에
내다 버릴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이다. 그것은 즉각적인 깨달음이다. 지금 이 순간
그대는 그대의 모든 정신적 가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같자기 비워져 버릴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전의 동일시가 모두 끊어진다. 그때 그대는
처음으로 낡은 생각의 조각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 충격은 매우 클 수도 있다. 그대는
죽거나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방법이 사용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대가 준비되지 않는 한 그 방법은 사용될 수 없다.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그대가 닻을 내리고 있던 정박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그대는 미쳐 버릴 수 있다. 과거는 이슬처럼 말라 버렸다.
미래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래는 항상 과거를 기반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대는 현재 속에 존재해 본 적이 없다.
항상 과거 아니면 미래에 머물러 있었다. 그대가 처음으로
현재 속으로 들어오면 그대는 자신이 미쳐 버렸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런 방법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그대가 어떤
단체 속에서 스승의 지도 하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명상을 위해
그대의 전생애를 바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점차적인 방법이 좋다. 사실 대부분의 모든 종교가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대는
점점 텅 빈 공간에 익숙해져 간다. 그대는 허공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그것이 주는 지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의 가구는
하나씩 옮겨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념은 사색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색은 점진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집중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집중 역시 점진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명상의 단계로 뛰어들기에 좋은 준비가 된다.
그때 그대는 한 단계씩 음미하면서 걸어갈 수 있다. 그대가 각 단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지나가면 마지막 점에 이르게 된다.
그런 길은 비상이 아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다. 그래서 여기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사념, 사색, 집중 그리고 명상이다.

오늘은 이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

이 방편들은 단전에 뿌리를 박기 위한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이 방편들을 통해서 그대는 단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

13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 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14
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인간은 중심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면서
그 중심을 한번도 느끼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수가 허다하다.
인간은 자신의 중심을 몰라도 살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중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중심은 인간과 존재계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그것은 뿌리이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지식은 중심을 아는 데는 본질이 못된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모른다면
뿌리없이 떠도는 삶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존재를 받치고 있는
어떤 토대도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기초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 우주에서 한번도 진정한 느긋함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집없는 떠돌이이다.
물론 중심은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의 삶은 그저 의미없고, 공허하며, 이르러야 할 곳이 아무데도 없는
부평초의 삶이 되고 만다. 그대의 삶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그대는 계속 미를 수 있다.
  하지만 미루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깊은 좌절감은 그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인간은 중심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대는 중심을 갖고 있다. 중심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중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대와 존재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없이 어떻게 그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신성에, 혹은 불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매순간
그 뿌리를 통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뿌리는 깊이 묻혀 있다.
어떤 나무든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 역시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뿌리가
그대의 중심이지만 그대는 그것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의 중심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 그대의 삶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삶은 깊은 잠 속에 있는 한편의 꿈이 될 것이다.
에이브라함 마슬로우(A.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고
그 마지막 단계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말했다.
그것은 전 우주와 연결된, 그대의 뿌리, 그대의 중심을 알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그대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
우주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외계(外界)가 아니다.
그대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 우주는 그대의 집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뿌리를 찾지 못하는 한, 이 우주는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외계로 존재할 것이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이 세계에 내버려졌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대가 자신의 중심을 모른다면 그대는 내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아웃사이더이며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때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세상 역시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때 공포가, 고뇌가 그것의 당연한 결과로 생겨난다.
이 우주에서 버림받은 자는 당연히 공포와 고뇌를 갖게 될 것이다.
삶 전체가 투쟁과 갈등의 연속이다. 반드시 실패하게끔
운명지어진 투쟁 말이다. 인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전체를 대항해서 싸우는 부분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대항해서 이길 수 없다. 존재계에 따를 수는
있지만 대항할 수는 없다. 대항하는 순간 패배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이건 비종교적인 사람이건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단 존재계에 대항하는 사람은 비종교적인 사람이고, 반대로
종교적인 사람은 존재계에 순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종교적인
사람은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내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본래부터 이 세계에서 자라났다고 느낄 것이다.
내버려진 것과 자라났다는 말의 차이점을 인식하라.
샤르트르의 '내버려졌다'라는 말은 결국 그대가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대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대는 스스로의 뜻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왜 이 삶을 계속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 결과 그대는 풀 수 없는 고뇌를 짊어지게 되었다.
만약 그대가 이 세상의 한 부분이며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라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차원으로 우주에 의해 그대가 양육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우주는 다중 차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나무의 차원에서, 산의 차원에서, 별들의 차원에서, 은하계의 차원에서 말이다.
인간 역시 성장하는 하나의 차원이다. 우주는 수많은
차원들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고 있다. 인간 역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며
성장하고 있는 차원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다.
동물 역시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고뇌가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그대가 자신의 뿌리를, 자신의 중심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자신의 죽음도 알 수 없다. 죽음이란
오직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뿌리를, 자신의 전체성을,
이 우주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중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하나의 아웃사이더로서 산다면
거기에 고뇌가 싹트기 시작한다. 반면에 그대가
주인공이며 우주의 일부이며 존재계 자체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면,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긴다면, 그대는 지복감을 느낄 것이다.
지복감은 우주와 그대가 유기적인 합일체라는 사실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대가 중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샤르트르처럼 '내버려졌다'는 감정을 팎게 될 것이다.
생명이 억지로 그대를 살게 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러나 이 중심이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를 통해 이 중심에 이르는 방편들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이 태어날 때 그는 특정한 한 점에 뿌리를 박는다.
그 특정한 점을 '차크라(중심 )'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전(丹田 )에 있다.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자살을 할 때 이 단전에 비수를 박았다.
그들은 중심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중심을 잃고 헤매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단전을 통해서 산다. 아이들이 숨을 쉴 때
아랫배를 자세히 보라. 그는 아랫배로 숨을 쉬고 있다.
가슴도 아니고 머리도 아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그곳에서
멀어진다.
아이는 이제 자라서 또 다른 중심을 개발한다. 그것은 바로 가슴ㅇ디ㅏ.
감정의 차크라(중추) 이다. 그는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가슴의 차크라가 개발될 것이다. 하지만 이 차크라는
진짜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라서도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사랑이나 따뜻한 온정 속에서 자라지 못하면 그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 차크라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가족, 사회, 이 모두는
아이의 가슴 차크라를 개발시키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그
아이에게는 드디어 가슴 차크라가 개발된다. 하지만 이것은
제 2차 산물이다. 그대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개발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의 차크라가 개발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 차크라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란 쉽지 않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 역시 매우 드물다.
모든 아버지, 모든 어머니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어렵게 얻어지는 성숙이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
인간 사회에 그토록 사랑이 메말라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대는 계속 어린아이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의
차크라를 열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사회가 더 문명화될수록
사랑의 차크라보다는 머리의 차크라, 지적인 중심을 더 강조한다.
단전은 근본 차크라이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부차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없이는
생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 차크라가 생긴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사랑을 통해 개발된다. 사랑을 받고 그것에 대응할 때
그 차크라는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차크라는
지적인 차크라로서 그것은 머리에 생겨난다. 모든 논리와
모든 교육이 그 차크라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부차적인 차크라이다.
한데 우리는 이 세번째 차크라에서 살고 있다. 두번째는 거의 사라졌다.
있다고 해도 기능이 멈춰 있다. 가끔씩 기능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매우 불규칙하다. 그러나 세번째 차크라인 머리는
이제 삶의 기본적인 힘이 되어 버렸다. 이 사회가 그만큼 지적으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계산하고 사고하고 판단해야만이 살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에 머리로 그 중심이
옮겨질 것이다. 그대는 머리 속에서 삶을 시작할 것이다.
머리, 가슴, 단전 이 세 가지는 그대가 갖고 있는 세 개의 중심이다.
단전은 원초적인 중심이며 근본이다. 가슴은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개발되어야 하는 바람직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지성의 차크라도 역시 개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슴, 즉 감성의 차크라의 대가로 개발되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감성의 차크라는 그대의 지성과 단전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지성의 차크라만 개발된다면 다시는 단전의 차크라,
본래의 중심으로 되돌아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존재의 차크라까지 가는 방편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지성을 통해서, 이해를 통해서 존재까지 나아가야 한다.
단전의 중심은 존재 속에 있다. 가슴의 중심은 느낌 속에 있다.
그리고 머리의 중심은 앎 속에 있다. 앓은 존재와 가장 멀리 있는 것이고
느낌은 존재와 가까이 있다. 만약 그대가 느낌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면 지성과 존재의 다리를 연결하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힘들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지적인
사람보다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서양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지성의 차크라를 강조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인간의 뿌리에 대해서 깊은 향수를 갖고 있다.
시몬느 드 베이유 같은 사람들은 '근원을 향한 열망'이라는 책을 썼다.
서양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문화가 발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슴보다 머리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가슴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의 고동소리가 그 기능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아주 일부분이다. 가슴은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머리가
알수 있는 능력을 말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존재는 하나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종교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시는 가슴에 관한 것이고 철학은
머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가슴과 머리는 본래의 중심은 아니다.
진짜 중심은 아랫배에 있는 단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이 본래의 중심을 자각할 수 있을까?
아주 드물지만 가끔씩 그대는 단전에 다가가게 된다. 그때 깊은
지복감을 맛보는 순간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그대가 섹스 행위
속에서 단전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왜냐하면 섹스 속에서는
그대의 의식이 다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머리를 떠나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깊은 오르가즘 속에서 때때로 그대는 단전
가까이 다가간다. 섹스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환상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지복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은 섹스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전이다. 섹스 행위를 통해서
짧게나마 그 단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 속으로 깊이 떨어질 때 그대는 단전을 거쳐간다. 그대는
그것을 만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것마저 불가능하다.
현대인들은 섹스조차 머리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섹스 행위는
두뇌를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섹스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으로 처리한다. 그래서 섹스에 대한 영화와 소설과 사진들이
그토록 많이 난무하는 것이다. 특히 남자들은 섹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섹스란 하나의 경험이다. 그대는 그것을 생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점점 그것을
경험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섹스란 전혀 머리에
해당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섹스에는 지성이 필요없다.
현대인들은 섹스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대가 섹스를 생각으로 처리하면 할수록 그것은 악순환이
될 것이다. 섹스조차도 생명력 없이 메마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이미 서양에서 그렇게 되고 있다. 그저 반복적인 지겨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낡은 습관을 되풀이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좌절감을 느낀다. 마치
믿었던 것에 속은 것처럼 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의식이 중심을 향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머리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단전을 통해 갈 때만이 그대는 지복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경우야 어떻든 그대가 단전을 통과할 때 단전은 그대에게
축복을 줄 것이다. 싸움터에서 한창 전투에 몰두해 있는 전사들
역시 단전을 통과한다. 그러나 현대의 전쟁에서 군인은 더 이상
전사가 아니다. 잠든 도시 위로 폭탄을 쏟고, 화면에 나타난 적의
탱크나 비행기를 향해 단추를 누르는 그들은 단순한 기술자일 뿐
전사가 아니다. 그들은 싸움꾼들이 아닌 것이다.
때때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사람이 갑자기 자신의 단전에 던져지는 수가 있다.
칼을 들고 백병전에 뛰어든 사람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한 순간에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칼로 싸움을 하는 동안에는 그대의 사념도 멈추게 될 것이다.
만약 생각을 시작한다면 그 순간 그대는 죽을 것이다.
그대는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백병전 속에서 피를 튀기는데
그대가 생각을 하기 위해 머뭇거린다면 그대의 머리는 그 순간
잘려나갈 것이다. 거기에서는 생각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식은 머리로부터 내려와서 단전으로 간다. 그때 전사는
지복을 경험한다. 전투에 대한 환상이 그렇게도 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섹스와 전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그대는 단전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것을 한번만 맛본다면 어떤 위험이 있어도 그대는
그 기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니이체는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말했다. 왜인가? 위험 속에서
그대의 의식은 단전으로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념을 비우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마음을 작동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는 즉각 행동해야 한다.
뱀이 지나간다. 갑자기 그대는 뱀을 보고 펄쩍 뛴다. '이것은
뱀이다'라고 생각할 순간적인 여유조차 없다. 그대는 마음과
의논할 수 없다. 옷에 불이 붙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어떤
논리적인 사고도 전개시킬 수 없다. 그대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먼저 행동하고 나서 그 다음에 생각한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위험이 없다. 그대는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행등한다. 위험 속에서는 모든 과정이 역순으로 바뀐다.
그대는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 생각 없이 행동만 할 때
그대는 본래의 중심, 단전으로 내던져진다. 위험 속에서 스릴을 맛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대가 차를 몰 때 악셀을 계속 밟는다. 그러면 갑자기 어떤
순간이 오는데 그때는 모든 순간이 위험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한순간
그대는 이 세상 사람이 안되는 수가 있다. 서스펜스의 순간 속에서
죽음과 삶은 매우 가까이 만난다. 두 점이 만나려 할 때 마음은 정지한다.
그대는 단전으로 내던져진다. 젊은이들이
카 드라이빙에 열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광란의 질주 말이다.
혹은 그대가 도박을 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건다. 거기에 위험이 있다.
그때 마음은 멈춘다. 자칫하면 그대는 알거지가 될 수 있다.
마음은 작동을 멈추고 의식은 단전으로 내던져진다.
위험이 그만큼 매력 있게 보이는 것도 위험 속에서는 일상적인
마음이 그 기능을 멈추기 때문이다. 위험은 깊어진다. 그대의 마음은
필요없게 된다. 그대는 무심 (無心)이 된다. 드디어 그대는
존재하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마음의 활동인 사념은 사라진다.
그것은 명상의 순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위험을 찾아 다닌다.
그것은 명상의 상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복의 순간은 갑작스럽게 그대 속에서 폭발한다. 그것은 소나기처럼
내면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터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대가 지복을 느낄 때마다
그대는 단전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이번에 나온 방편들은 단전에 뿌리를 박기 위한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그냥 주먹구구식이 아니고
요행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 방편들을 통해서 그대는
단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자, 이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열세번째 방편에
들어가자.

13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 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이 방편의 의도는 그대로 하여금 내면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그대가 외부에다 하나의 중심을 정해 놓고 그것에
온 의식을 집중해서 바라본다면 그때 그대는 이 세상을벗어나게 된다.
이 세상 전체를 그대는 잊어버리게 된다. 갑자기 그대는
그대 내면의 중심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먼저 이것을 미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의 방랑자이다. 그것은 절대 한 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항상 쉴 새 없이 떠다니고 있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 다니면서 언제나 한 곳에 정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저절로 정착하지는 못한다. 마음의 구조 자체가 움직임이다. 그것은
오직 움직이기만 할 뿐이다.
만약 그대가 어느 한 점에 머무른다면 마음은 그대와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마음은 움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대가 멈추면
마음은 곧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움직임 속에서만
살 수 있다. 마음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다. 그대가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은 갑자기 죽어 버린다. 그것은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의식만이 남게 된다.
의식이라는 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마음은 그대의 활동이다.
걷는 것과 같은 하나의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어떤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은 하나의 활동이며
차라리 사념의 흐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대가 걷다가 멈추면 거기에는 더 이상 걷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걷는 행위는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집중할 때 의식은 그대로 있지만 마음이 사라진다.
의식은 다리와 같은 것이다. 의식은 그대의 본성이다. 마음은
걷는 행위로써 하나의 활동이다. 의식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그 진행 과정이 마음이다. 그래서 의식이 계속 움직이면
그때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만약 그대가 멈추면 거기에
마음은 더 이상 없다. 그대는 의식이다. 그러나 마음은 없다.
그대는 다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걷는 행위가 없다. 걷는 것은
다리의 한 기능이고 활동이다. 마음 역시 의식의 한 기능이며 활동이다.
그대가 한 점에서 멈춘다면 마음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마음은
'계속 움직여라'라고 말할 것이다. 마음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대를 움직이기 위해서 밀어젖힐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듣지 말고 그대로 머물러 있어 보라.
만약 그대가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항상 마음의 명령에
순종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는 주인이 되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대는 마음이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마음을 자신으로부터 가려내지 않는 한
그대는 항상 마음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마음의 속임수를 알고 그 굴레를 벗어나라.
마음은 사실 노예이면서 주인인 척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수많은 생을 거쳐오면서 주인은 노예가 되고 대신 노예가 주인 행세를 해 왔다.
그것은 하나의 믿음이었다. 자, 이제
그 반대로 해보라. 지금까지와는 거꾸로 믿어 보라.
탄트라는 경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五感) 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먼저 그대의 다섯 가지 감각이 다섯 가지 색채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색채들이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색채들이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라. 그대 역시
그 색채들과 함께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리하여 모든 색채가
하나의 중심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라.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다.
그러나 도움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색채들이 그대를 관통해 들어
가서 한 점에서 만난다고 상상해 보라.
이들 다섯 가지 색채가 한 점에서 만나게 될 때 전 우주가 해체될 것이다.
그대의 상상 속에는 오직 색채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작의 꼬리 깃털처럼 허공에 펼쳐져 있는데,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한 점에서 만나고 있다. 그 한 점은 어디에 잡아도 좋다.
하지만 단전이 가장 좋다. 그대의 단전에서 다섯 가지 색채들이
모인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전 우주가 그 색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 점을 보라. 그 점에 집중하라. 그 점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집중하라. 그 점은 해체될 것이다.
그대가 그 한 점을 집중한다면 그 점은 해체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그대가 한 모든 것이 상상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해체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사라질 때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내던져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사라졌다. 이제 그대에게는 세상이 없다. 이
명상 속에서는 오직 색채만이 있다. 그대는 세상 전체를 잊어버렸다.
그대는 모든 대상물들을 잊어버렸다. 그대는 오직 다섯 가지
색채만을 선택했다. 어떤 색이건 그대가 원하는 색을 선택하라.
이 명상 방편은 색채 감각이 뛰어난 사람에게 맞는 것이다.
화가의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색채를 상상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꿈을 컬러로 꿔 본 적이 있는가? 백명 중에 한 사람꼴
정도로 꿈을 컬러로 꿀 수 있다. 그대는 기껏해야 흑백의 꿈밖에는
꿀 수 없다. 그러므로 컬러의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이 명상이
좋다.
만약 그대가 색채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면 이 방편을 한번
시도해 보라. 다섯 가지 색깔이 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이 색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색채들이 그대 속에 들어와서 만나고 있다.
그 한 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하라.
움직이지 말고 그것과 함께 남아 있으라. 마음을 허용하지 말라.
그것이 무슨 색인지 알려고 하지 말라.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움직인다. 그대 속에 있는 색채로 취하라.
절대 사념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집중은 생각이 아니다.
정말로 그대가 색채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무지개가 된 것이다.
 공작의 꼬리 깃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전 우주 총간이 그
색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는 말라.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말라. 사념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말라. 모든 색채들이
만나는 그 점을 집중하라. 계속 집중하면 그 점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집중력을 강화하면 상상은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해체되어 버린다.
세상은 이미 해체되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거기에는 오직
색채만이 남아 있다. 그 색채들은 그대의 상상이다. 그 상상적인
색채는 한 점에서 만난다. 그 점 역시 상상이다. 이제 색은 집중과
함께 그 점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던져져 있다.
사물은 상상을 통해 사라지고 이제 상상도 집중을 통해 사라졌다.
그대는 오직 주체로서 남아 있다. 물질적 세계도 사라지고
정신적 세계도 사라졌다. 그대는 로직 순순한 의식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경전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
만약 그대가 색채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때는 벽 위에 한 점을
찍어라. 집중할 만한 대상이면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것이 내면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외향성과 내향성의
두 가지 성격이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내면에서 빛깔들이
한 점에 모이는 것을 상상하기가 훨씬 쉽다. 하지만 내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직 외부적인 것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외부를 향해 움직인다. 그들은 내면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들에게는
내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면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어떤 자아(Self)도 만날
순 없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외부 세계의 영상뿐이다.
생각, 감정, 느낌, 그 어떤 것도 도무지 내면적인 인상을 풍기는 것이 없고
항상 외부적인 것만 비친다."
이것이 극단적인 외향성의 마음이다. 데이비드 흄은 가장 외향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내면의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면,
도대체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조차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벽에다 한 점을 찍어라. 사람들은 내게 와서 종종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 그들은 항상 외부로만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어도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무척 어렵게 들린다.
만약 그대가 외향적이라면 그때는 외부에다 한 점을 찍어라.
그 결과는 똑같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집중하라. 그때 그대는
눈을 뜨고 집중해야 할 것이다. 만약 내면에다 한 점을 찍을 경우에는
눈을 감고 해야 할 것이다.
내면에 점을 찍든 외부의 어떤 벽에다 점을 찍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집중력이다. 눈을 뜨고 한
점을 바라보는 경우가 훨씬 사념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그대가 집중하고 있는 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까지 집중해야 한다. 눈을 깜박이지 말라.
깜박이는 그 움직임에 마음이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깜박이는 순간
그대의 집중은 잃어버린다.
그대는 달마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명상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에 하나이다. 그가 어떻게 집중을
했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가 여기에 있다. 그는 눈을 깜빡
거릴 때마다 집중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베어내었다. 그리고는 그 눈꺼풀을 마당에 던져 버렸는데
거기에서 한 식물이 자라나게 되었다. 그 식물의 이름은
중국식 발음으로 '타(Tah )'였는데 그것은 당시 달마가
머물렀던 산 이름이었다. 이 식물이 바로 오늘날의 차(tea: 茶)가
된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시면 그대의 신경이 각성되는 것이다.
그대의 눈이 깜빡거리면 곧 잠이 들게 된다. 그러면 차 한잔을
마셔라. 그것은 달마의 눈꺼풀을 달인 물이다. 선승(禪僧)들이
차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차는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달마대사의 눈꺼풀이다. 일본에서는 차의
축제를 연다. 그리고 모든 가정마다 집 안에 다실(茶室)이 있다.
그리고 제사나 종교 행사를 할 때에도 차는 빠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차 마시는 일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일본은 차를 마시는 예법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도(茶道)'라고까지 부른다.
그들은 마치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다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차가 준비되는 동안 고요히 앉아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차의 향기와 빛깔, 다기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감촉까지 놓치지 않고 느낀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달마의 눈꺼풀을 달여 마시는 것이다. 물론
그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대가 외부에 있는 한 점을 집중할 때, 그때 깜빡이지 않는 눈이 필요하다.
만약 내면의 한 점을 집중한다면 더 이상 눈은 상관이 없어진다.
그리고 외부의 점이든 내면의 점이든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집중하라.
그것은 풀어 없어질 것이다. 그대가 마음의
움직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그 점은 그대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점이었다. 그 점
마저 없어진다면 그때 의식은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움직일 대상이 없는 것이다.
모든 차원이 닫혀져 버렸고 마음은 이미 그
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의식은 그 자체에게로 돌아간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르게 되었다.
안이든 밖이든 한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 점에 집중하라.
그 점이 사라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만약 그것이 내면의 점이라면
그것은 상상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사라질 것이다.
그리호 그것이 외부의 한 점이라면 그것은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이다. 그대는 벽 위에 한 점을 찍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점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사실 그대가 한 점에 집중할 때 그 점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대의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외부의 점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음은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음은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은 죽는다. 마음이 죽으면 그때 그대는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갑자기 모든 연결 다리가 근ㅎ어진다.
마음이 곧 다리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대가 벽 위의 한 점에 집중할 때 마음은 그대에게서
벽으로, 벽에서 그대에게로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마음은 그렇게 해서라도 존재하게 된다. 그때는 아직 그 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집중을 계속하게 되면 마음은 왔다갔다하는
힘이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그 움직임을 멈춘다. 멈추는 순간 마음은 죽는다.
그때 그대는 그 점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대는 그 점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단지 빛이
들어오는 하나의 창문일 뿐이다. 마음이 사라진 이상 눈은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뜨고 있어도 말이다.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면 그때 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가 그 점을 볼 수 없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있다.
중심에 이르게 될 때 그대는 그대 존재의 뿌리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연결되어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속에 존재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한 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심이다. 그대가 한번만 이 중심을 알게 되면 그대는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계는 더 이상 그대와 상관없는
외계가 아니다. 그대는 이방인이 아니다.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 있고
이 우주가 그대의 집이다. 거기에 더 이상 갈등과 불안이 있을 수 없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 어떤 불화도 없다. 존재계는
그대의 어머니가 된다.
그대 속으로 들어와서 그대 속에서 꽃피운 것이 바로 존재계이다.
이 느낌, 이 감동, 이 환희, 더 이상 거기에 고뇌와 번민이 있을 수 없다.
그때의 지복은 어떤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왔다가 사라지는
어떤 바람이 아니다. 그때의 지복이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중심에 뿌리내릴 때 그 지복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지복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반대의 상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행복할 때
그대는 불행을 느낄 수 있다. 항상 불행하다면 그대는 그것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한번이라도 행복을 맛봐야 그대는 불행을 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중심에 이르면 지복의 순간이 닥쳐온다. 하지만
그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황홀한 느낌이 약해져 간다.
그저 고요한 평화만이 흐를 뿐이다. 하지만 그대는 진짜로 행복하다.
그것은 별이 빛나고 강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축복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일어난
어떤 것이 아니다. 이제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두번째 방편도 같은 윈리이다. 그 과학적 접근 방식 또한 같다.
그리고 작용 구조 역시 같다.

14
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이 명상 역시 눈을 감고 수련해야 한다. 탄트라 행자(行者)는
눈을 감고 자신의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야 한다. 해부학 서적이나
모형을 통해 척추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알아 두는 것도 좋다.
그리고나서 눈을 감고 그대의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 보라.
등뼈는 곧게 펴고 앉아야 한다. 그리고 척추 속에 연꽃 뿌리의
실처럼 섬세한 신경을 보라. 그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곧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왜인가?
척추뼈는 그대의 몸 전체 구조의 기초이다. 모든 것이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척추(spine)라고 부른다. 그 척추
곡에는 연근 속의 실 같은 것이 들어 있다. 해부학에서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척추 속에 있는 실 같은 것을 은줄(silver cord)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대가 아무리 세밀하게 해부를 해봐도 눈으로는
그 은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명상 속에서는 그것이 보인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이다. 그대의 척추 신경 속에 에너지의 코드가 들어 있다.
그것을 통해서 그대는 보이지 않는 존재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 즉 물질 세계와
그대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연결 다리와 같은 것이다. 그 실을 통해서 그대는 그대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고, 또한 그대의 영혼과도 연결되어 있다.
먼저는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야 한다. 거기에 매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대가 척추를 연상하려고 하면 그대는 상상으로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상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대는 실제로 그대의 척추를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한 구도자와 함께 이 방편을 직접 수련해 보았다. 먼저
나는 그에게 인체 해부도 중에서 척추가 나온 사진을 한 장 주었다.
그가 눈을 감고 내면에서 척추에 대한 영상을 떠올려 보는 데
도움이 되라고 말이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당신이 준 사진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그것은 사라지고 다른 척추의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당신이 준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 드디어 그대는 제대로 하고 있다. 내가 준 사진은 완전히
잊어버려라. 그리고 그대 앞에 떠오르는 척추에만 집중하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꺼린다. 그것은 정말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뼈와 내장과 피를 보면 그대는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우리의 몸 속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담을 쌓아 놓았다. 오직 몸 밖으로만
시선이 향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대는 몸 안을 볼 수 있다.
마치 이 방안에 들어와서 방안의 천장이나 벽을 볼 수 있듯이
그대는 몸 안으로 들어와서 몸 안의 구조들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 공포 때문에 할 수 없다.
인도의 요가에서는 인체의 내부에 대해 현대 과학에 의해서만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인간의 육체에 대한 외과적 지식은 최근에
개발된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요가에서 어떻게 신경계 전체를
알수 있었을까? 그들은 최근에 과학이 발견해 낸 사실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몸에 대해서 연구해 낸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몸을 대상으로 한 어떤 것보다도 정확하다.
요가는 육체에 관한 한 어떤 과학적인 연구보다도 정확하다. 그들은
육체의 기본적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대가 자신의 몸을 내면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만약
그대가 내면에 대해 집중할 수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그대의 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대는 또 다른 차원의 유물론자가 될 것이다.
요가는 차원이 다른 유물론이다. 그대는 육체에 관한 한
일가견을 갖게 될 것이다.
고대 탄트라와 요가 학파에서는 많은 뼈들을 그들의 연구 재료로 사용했다.
인간의 두개골에 대해서 탄트라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면에 대한 집중에 많은 도움을 준다. 먼저 눈을 감고
자신의 두개골을 영상으로 떠올린다. 그리하여 두개골의
외부부터 차근차근 살펴 들어간다. 그리고는 두개골 안으로 들어 간다.
그러면 점점 자신의 두개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대의 의식은 조명되기 시작한다. 한번 그대가 내면에 초점을 맞추면
그대는 발가락 끝에서 머리 끝까지 어디로든 탐구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것은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이다. 그대의 작은
육체는 거대한 우주인 것이다.
여기 탄트라에서는 특별히 척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척추
신경 내부에 생명의 실마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등뼈를 곧게
세우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척추가 굽어져 있으면
내면의 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섬세한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그래서 척추가 곧게 펴질 때만이 그
은줄을 얼핏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척추는 곧게 펴져 있지 않다. 힌두교도들은
어릴 때부터 척추를 곧게 펴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앉고 서고
걷고 잠잘 때의 기본 자세가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척추를 곧게 세우기 위한 것이다. 척추가 곧게 세워지지 않으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에너지 코드인 은줄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곧게 펴질 때 그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은줄을 보게 되면 그대는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빛은 그대의 척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것은 그대의 몸을 벗어나 있기도 하다. 그때 보이는 것이 바로
'오오라(後光)'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오오라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보통 그대의 오오라는
빛이 없는 그림자뿐이다. 그리고 그 오오라의 색깔은 그대의
모든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대가 분노할 때 그 오오라는 피빛으로
채색될 것이다. 그대가 슬프거나 침울할 때 오오라는 어두운
회색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이 척추 속에 있는 은줄을 깨달을 때 그대의 오오라는 깨달은
사람의 그것과 같아진다. 붓다, 마하비라, 크리슈나, 그리스도 등과 같은
사람들의 초상화는 항상 후광이 그려져 있다. 그들의
척추에서부터 빛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내면의 중심을 깨달을 때
그대의 몸 전체는 빛으로 가득 차고 넘친다. 그것은 몸
밖으로까지 뿜어 나온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 즉 붓다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 그의 오오라가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자 중 누군가가 깨달았을 때 스승은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오오라가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중국에 혜능(慧能) 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그는 흥인(弘忍)이라는
스승이 깨달았다는 소문을 듣고 오랜 여행 끝에 스승은 찾아갔다.
스승은 그를 보자 곧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여기에 뭣하러 왔는가? 그대는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혜능은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혜능은 자신이 아직
스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스승은 다른 것을 보고 말한 것이다. 스승은 커지고 있는 혜능의
오오라를 보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그대는 나에게 와서 배울 것이 없다. 조만간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와서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
그래서 그의 스승은 그를 받아들였고 그에게 절의 후원(後園)에서
방아를 찧게 했다. 그 절은 대중이 5백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
스승은 혜능에게 말했다.
"후원에서 일하고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 필요하면 내가 부르겠다."
혜능에게는 어떤 명상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경전도
읽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홍인은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학자와 명상 수행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제각기 연구나 명상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능은 쌀 씻고 방아 찧는 일에만 몰두했다.
어느덧 8개월이 흘러갔다. 그 동안 혜능은 한번도 스승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후원에서 스승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그 절에는 수많은 학자와 선승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혜능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혜능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일꾼이었다.
스승이 곧 입적 (入寂)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누군가가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네 줄의 시로 적어서 내라고 했다. 그 시를 보고서 깨달은 제자를
골라내고 그에게 법맥을 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절에는 위대한 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신수였다.
모두들 그가 홍인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스승에게 시를 바치지 않았다. 결국 신수
혼자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몸은 보리수 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매일 열심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러나 사실 신수조차도 스승에게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시는
매우 훌륭한 시였다. 모든 경전의 결론을 담고 있는 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수는 깨달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경전이었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깜깜했던 것이다.
그는 스승을 대면하고 자신이 지은 시를 내보일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몰래 스승의 방문 앞에다 시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이름을 써놓지 않았다. 스승이 옳다고 말하면 그때 자기가
썼다고 말할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스승은 그 시를 보고는
대중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시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깨달았다."
그 말이 떨어지자 절은 온통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모두들 그 시를 외어서 그 뜻을 음미했고 부엌에서 일하는
승려들조차 그 시를 외우고 다녔다. 그래서 혜능은 그 시가 무슨
시인지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혜능은 그만 웃고 말았다.
깨달았다는 자의 시가 깨달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혜능이 웃자 그 옆에 있던 한 승려가 물었다.
"자네는 왜 웃는가? 혹시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닌가? 자네가 뭐
아는 것이 있는가? 방아나 찧는 주제에."
사실 그때까지 혜능이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벙어리처럼 말도 하지 않고 언제나 일만 했던 것이다. 그때
혜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글을 쓸 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는 틀렸다. 내가 시구를 불러볼 테니 한번 적어보라."
그러자 승려들은 호기심에서 혜능의 말을 받아 적었다. 혜능의
시는 이런 내용이었다.
"보리수란 본래 없는 것이며 마음 역시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 때가 묻을 것이며 무엇을 닦을 것인가?
승려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 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곧바로 스승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스승은 그 시를 보자마자
누가 지은 시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혜능이 지었다는 말을 듣자
곧 그 시는 틀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승려들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라고 안심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스승은 모두들 잠든 틈을 타서 후원으로 혜능을 찾아갔다.
혜능이 스승을 맞이하자 스승은 곧 입을 열었다.
"너의 시는 깨달은 자의 그것이다. 나는 이 바보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쓸데없는 지식만 잔뜩 쌓은 바보들이다.
만약 그대가 나의 후계자라고 한다면 아마 그들은 자네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달아나라. 그대는 나의 후계자이며 깨달은 자다.
그 증거로 내가 스승께 물려받은 의발을 전해주겠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대의 후광을 보고 그대가 곧 깨달을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서 여기를 떠나라."
그대가 척추 속에 감추어진 은줄을 보는 순간부터 그 오오라는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대의 몸 주위를 둘러싸게 된다.
그때 변형이 일어난다. 그때 초월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그대의 중심에 이르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척추 속에 의식을
집중시켜 은줄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대가 몸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지 않는 한 내면에서
몸을 관찰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방편은 어쩌면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몸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몸에 대해
의식이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남자들은 항상 이념이나 관념에 사로잡혀 산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여자들은 자신의
몸속에 산다.
그대의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 보라. 처음에는 그것이 마치
상상 속의 한 장면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그대는 점점 상상력은
사라지고 그대의 마음은 그 척추 속에 집중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척추를 보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의 핵을 보는 순간
갑자기 거기에서 빛이 폭발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때때로 이런 일은 아무런 노력 없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섹스
행위 속에 깊이 몰두할 때 그것은 일어난다. 탄트라는 알고 있다.
깊은 섹스 행위 속에 몰입할 때 그대의 전 에너지가 척추신경으로
집중된다는 겄을 말이다. 그때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갑자기 전기가
통하게 된다. 그대는 척추를 건드린 것이다. 그대는 쇼크를 받을 것이다.
두 명의 연인이 깊은 사랑 속에서 서로에게 몰두할 때
깊고 고요한 포옹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일어난다. 그때 어두운
방 안은 밝은 빛으로 가득 찬다. 푸른빛의 오오라가 두 개의
육체를 감싸 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도 한두번 그것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대는 어두운 방에서 사랑에 깊이 빠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대의 몸에서 빛이 나와 방 안을 밝히는 것을 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심리학자들은 섹스 행위 속에 깊이 몰입하면
양전기와 음전기가 만나 스파크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기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척추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섹스 행위에 깊이 몰두할 때 그대에게 각성이 일어난다.
탄트라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다. 만약 그대가 척추 속에 흐르는 섬세한 은줄을
바라볼 수 있다면 탄트라는 이 깨달음을 위해서 섹스 행위를 이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하고 있는 섹스와는 완전히 질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스트레스 해소나 에너지 방출이 아니다.
급하게 치뤄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영적 결합이다. 두 개의 육체는 또한 두 개체의
만남이며 서로를 관통하는 두 주체성의 만남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이 방편을 제안한다. 깊은 섹스핸위 속에서
그것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섹스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려라.
그저 깊은 포옹만 하라. 그리고 내면으로 들어가 거기에 머물러라.
그리고 그대의 척추를 떠올려 보라. 그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 훨씬 많은 에너지가 척추의 중심 가까이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육체가 충분히 이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은줄은 더 잘 보일 수 있다. 사랑은 가장 깊은 이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커다란 긴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고민 덩어리로,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랑의 따스함 속에서 충분히 이완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그러나 남자들은 대개 눈을 감지 않는다. 섹스 행위 중에는 여자만이
눈을 감는다. 앞에서 내가 남자보다도 여자가 자신의 몸 속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자들은 눈을 뜨고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눈을 감아야 내면으로부터 육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눈을 감아라. 몸을 느껴라. 이완하라.
척추의 중심에 집중하라. 그때 탄트라는 말한다. '거기에
변형이 일어난다'고 말이다.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

(질문 )

"단전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것은 가슴과 머리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것과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까? 아니면 단전의
차크라를 개발하면 동시에 머리와 가슴의 차크라도 열립니까?
그리고 어떤 것이 단전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방법이며
머리와 가슴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방법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한 가지 기본적인 것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가슴과 머리의
차크라는 개발되는 것이지만 단전의 차크라는 그렇지 않다. 단전의
차크라는 발견되는 것이지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단전에는
중심이 있었다. 그대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일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개발할 수 없다. 가슴과 머리의 차크라는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것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문화, 교육을 통해 그것들을 개발시킬 수 있다.
그대는 단전의 중심과 함께 태어난다. 단전의 중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대는 가슴이나 머리의 차크라 없이도 살 수 있다.
그것들을 개발하면 더 좋다. 하지만 그대가 단전의 중심 없이는
살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이다.
가슴의 차크라를 개발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사랑과 감수성을 키우는 방법들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 그리고
머리의 차크라도 마찬가지다. 더욱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정서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존재는 개발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채로 거기에 있다.
단지 재발견할 뿐이다.
많은 의미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첫째, 그대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머리를 갖기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붓다가
될 수는 있다. 그대가 마쟈누(Majanu)가 되기는 불가능할 수 있다.
그는 가슴의 차크라가 궁극적으로 발달된 사람이다.
그는 어떤 사람보다 연애 방면에 뛰어나다. 하지만 그대는 붓다가
될 수는 있다. 붓다의 불성(佛性)은 개발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의 소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불성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이미 붓다이다. 단지 모를 뿐이다.
그대는 이미 아인슈타인이 아니다. 그대가 아인슈타인처럼 되려면
무진장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아인슈타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인슈타인처럼 되려면 그와 똑같은 부모에,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삶을 똑같이 재생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라도 빠지면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번 태어난다.
똑같은 상황은 두번 다시 재현될 수 없다. 같은 세상,
같은 시간대가 올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이미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과거는 그 속에 있다.
그대는 아인슈타인이 절대로 될 수 없다. 개인은 재현되지 않는다.
붓다는 개인이 아니다. 붓다는 하나의 현상이다. 어떤 개인적
요소도 붓다가 되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대의 존재는 충분히
붓다가 될 수 있다. 중심은 이미 거기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가슴을 열리게 하는 것은
개발이라고 부르지만 단전의 중심을 아는 것은 회복이라고 부른다.
그대는 회복해야 한다. 그대는 본래 붓다였다. 그대는 그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자신이 붓다라는 것을
아는 붓다와 자신이 붓다라는 것을 모르는 붓다들이다. 하지만
모두가 붓다이다. 존재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다. 오직 존재계만이
진짜 공산주의이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공산주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불평등이 기본이다. 하지만 존재계에서 보면 모든 것은 평등하다.
내면에서 본다면 그대는 붓다나 그리스도나 크리슈나와 동등하다.
하지만 외부적 삶으로 본다면 쌍둥이라도 평등하지 않다.
평등은 오직 내면의 차원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112가지의 방편들은 단전의 중심을 개발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 즉시 붓다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자신을 한번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있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어떻게 그대가 이미 붓다라는
파실을 확인할 수 있는 관점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대가 붓다가 되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대의
불성을 인식하도록 도울 뿐이다.

오늘은 이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I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I

15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두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16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17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인간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삶을 살아왔다. 인간은 중
심에 이르지 못하고 항상 주변만을 맴돌다가 생을 마친다. 그대는
언제나 외부로만 빙빙 돌면서 살아왔다. 한번도 내면으로
들어가 내면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대가 중심을 모르는 한
결코 내면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사실 그대는 내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중심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알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 내면으로 들어가라' 라고 말하면 그대는 그 글자만 알아들을 뿐
그 뜻이 무엇인지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대는 내면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대가 홀로 있을 때조차도 그대의 마음속에는 군중들이 가득 차 있다.
외부에 아무도 없을 때에도 그대는 여전히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대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계속 외부를 향한다. 그대는 잠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꿈꾼다.
꿈속에서도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길은 잠 속에서,
꿈 없는 잠 속에서만이 그대는 내면 속에 있다. 하지만 그때 그대는
무의식적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가 의식적일 때 그대는
결코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대가 깊은 잠 속에 있을 때
그대는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그대의 의식은 전부 외부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대는 글자만 이해할 뿐이다. 그것의 깊은 의미는 그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 의미는 경험을 통해서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글자에는 의미가 없다. 내가 '내면'이라고 말할 때 그대는
글자만 이해한다. 그대는 '내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단지
글자만 알아들을 뿐이다. 의식을 갖고 그대는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끊임없이 외부로만 돌아간다.
'내면' 이라는 말에 대한 느낌조차 막연하다.
내가 그대를 보고 피상적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심이
거기에 있지만 그대는 항상 주변만을 맴돈다. 의식이 없을 때만
그 속으로 깊이 떨어진다. 의식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외부로만
도는데 그것은 그대의 삶이 그만큼 강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미적지근하다. 그대는 죽은 자처럼 산다. 아니 둘 다이다.
죽은 자처럼 살든지 살아 있는 자처럼 죽든지 둘 다이다.
그러나 삶이란 주변에 있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중심에
설 때만이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변에서는 미적지근한
삶만이 가능하다. 그대는 힘없는 삶을 산다. 누구한테도 떳떳하고
확신 있게 '삶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진짜로 살지 못한 사람은
진짜로 죽을 수도 없다. 진짜로 살아진 삶만펯이
진짜로 죽을 수 있다. 그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언제든지 진짜는
아름답다. 하지만 거짓된 것, 흉내만 내는 것은 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대의 삶은 추하다. 그것은 진부하고 썩은 것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언제 어디선가
무언가 일어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은 그저 텅 비어 있다. 과거의 모든 순간이 그러했다.
단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며 미래에 뭔가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대뿐이다.
미래에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럴려면그대에게 강렬함이
필요하다.
삶을 꿰뚫어 버리는 강렬함 말이다.
그때 그대는 중심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더 이상 주변을 맴돌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삶의 동기를 찾게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저 허깨비일 뿐이다.
한때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한 교수와 같이 살았다. 어느날
그가 매우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가 말했다.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난다."
나는 그때 뭔가 읽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자라. 담요를 잘 덮고 푹 쉬어라."
그는 침대에 누웠는데 몇 분이 지나자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나는 지금 열이 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화가 나 있다.
어떤 녀석이 나를 욕했는데 갑자기 내 속에서 그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런데 왜 조금 전에는 열이 난다고 말했는가?"
그가 말했다.
"사실 열이 난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이지만 나는 내가 화를
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담요를 걷어차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자, 이 베개를 줄 테니 실컷 두들겨 패주어라.
거기에 화를 풀어라. 베개로 충분하지 않으면 내가 있다. 나를 실컷
때려도 좋다. 어쨌든 분노를 몰아내라. "
그는 내 말을 듣자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가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내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그의 웃음은 그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웃음조차 거짓인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은 진실과 멀어지는
거리를 만들었다. 그가 말했다.
"사실은 내가 진짜로 화가 난 것은 아니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순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네.
그것이 사실이네."
그래서 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자네의 감정에 대한 표현을 30분 동안에 세 번이나
바꾸었다. 처음에는 열이 난다고 했고, 두번째는 화가 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당황스럽다고 했다. 어떤 것이 진짜인가?"
그가 말했다.
"당황스러운 것이 진짜라네. "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좀 전에 열이 난다고 말했을 때 자네는 확신있게 말했다.
화가 난다고 말할 때도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황스럽다고
말할 때도 확신이 있다. 자네는 도대체 혼자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그리고 그 확신이 지속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그러자 그는 난처한 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네. 도대체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어. 그저 헷갈릴 뿐이네. 그것을 화라고 불러야 될지
당황이라고 불러야 될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자네와 따질 시간이 없네.
그러니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두게. 내 상황을
철학적으로 좀 정리를 해야겠네. 자네는 지금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인지를 따지려 하지만 나는 그럴 정신이 없단 말일세."
이것은 그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확신이란
중심에 설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에게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저 공허한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고 뜬구름처럼 보인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저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나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말 없이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십니까? 갑자기 부끄러워집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당신은 내 사랑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절주절 늘어 놓았다.
"왜 이 결혼이 좋지 않게 될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께 물어보러 온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빠졌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의 내면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던 것이다.
그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이 없다. 그대는
사랑에도 미움에도 우정에 대해서조차도 확신이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중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이 없이는 어떤 확신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평소에 느끼는 확신이란 전부 순간적이며
거짓된 것이다. 한순간 그대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음 순간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것은 그대가 삼고 있는 중심이 계속
바뀌는 순간적인 중심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중심, 결정화된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구제프는 '인간은 개성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개성이란
말 자체가 허구성이 깃든 말이다. 그대는 하나의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다수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대 속에서 말하면 그것은
순간적인 중심이 된다. 다음 순간 또 다른 중심이 거기에 있다.
매순간마다 그 중심은 바뀐다. 그대가 확신감을 느낀다면
그대는 자신이 단지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중심이 없는 수많은 파장들이 모여서 흘러가는 것이 그대이다.
그래서 그대가 죽을 때 그대의 삶은 하나의 낭비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떠도는 것이 바로 그대의 삶이다.
탄트라, 요가, 그리고 다른 종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그 중심을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매순간 통할 수 있는 중심을
찾고 있다. 그때 삶이 강처럼 계속 흘러가더라도, 파도처럼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하더라도 중심은 언제나 영원히 남아 있다.
그때 그대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이 경전에 나오는 112가지 방편들은 모두 중심을 찾기 위한 것이다.
중심은 항상 거기에 있어 왔다. 왜냐하면 중심 없는 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은 항상 중심을 갖고 존재한다.
중심이 없이는 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중심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우리는
중심을 바라보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자, 이제 궁심에 서기 위한 세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15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두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방편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아주 많이 사용된 방법이며
가장 간단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두 눈과 귀, 입과
코를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지금까지 계속 밖으로 흘러가던
그대의 의식이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춘다.
그대가 관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호흡을 멈추면 갑자기
그대의 마음이 멈출 것이다. 호흡은 마음의 조건이다. 그대는
그 말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방편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러시아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파플로브(Ivan Paplov)는
'조건반사'라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어
오늘날 전세계에 퍼져 있다. 그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항상 종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나중엔 종소리만 들어도
개는 침을 흘리는 것이었다. 파플로브는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조건반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마음은 하나의 조건이다. 그대가 하나의 조건을 없애면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멈춘다.
예를 들어 호흡을 하지 않고서는 그대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념은 항상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대는 호흡을 의식하지 않는다.
호흡은 항상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 모든 사념의 과정이
호흡과 함께 수반된다. 따라서 그대가 호흡을
갑자기 멈추면 아무런 생각도 진행되지 않는다. 당장 실험해 보라.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구멍을 모두 막으면 그대의 지식은 더 이상
외뚜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때 그대의 두 눈 사이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공간이
바로 제 3의 눈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전
존재계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 공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한번 그대가 두 눈 사이에 있는
이 내면의 공간을 느끼게 되면 그대는 존재계를 알 수 있다.
이 공간 속에 존재계 전체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알게 되면 전체를 알게 되리라."
일상적인 눈은 유한한 것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눈은
무한을 본다. 일상적인 눈은 물질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눈은
비물질적인 것, 영적인 것을 본다. 일상적인 눈으로는 결코
에너지를 똘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쿨질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눈이 열리게 되면 에너지가 보인다.
일곱 개의 구멍이 모두 닫혀지는 것은 중심에 서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왜냐하면 한번 의식의 흐름이 밖으로 흘러나갈 수
없게 되면 의식은 그것의 근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의식의
근원이 곧 제3의 눈이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집중된다면 많은 것이 일어난다.
첫째는 온 세상이 그대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스와미 람(Swarm Ram)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태양이 내 안에서 돌고, 별들이 내 안에서 운행한다.
달이 내 안에서 뜨고 전 우주가 내 안에 있다."
그가 처음 이 말을 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별이 람 속에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제3의 눈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면의 공간이다.
처음으로 내면의 공간 속에 빛이 비춰졌을 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 안에 모든 것이 다들어 있음을 볼 때 그대는 우주가 된다.
제3의 눈은 그대의 육체에 속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
신체가 아니다. 우리의 두 눈 사이에 있는 공간은 육체 속에 자리잡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을 관통하는 무한한 공간이다.
한번 그 공간이 그대 앞에 펼쳐지면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죽음도 있을 수 없다.
처음으로 그대가 이 공간을 알 때 그대의 삶은 진짜 삶이 된다.
강렬해지고 활기에 넘친다. 이제 어떤 안전장치도 필요없다.
어떤 공포도 그대를 위협할 수 없다. 그대는 죽임을 당할 수가 없다.
어떤 것도 그대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전 우주가 그대에게
속한 것이다. 그대가 우주이다. 내면의 공간을 안 사람에게는
엑스터시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아함 브라흐마스미 ! 나는 우주다. 나는 존재계다. "
특히 신비주의자 만수르(Mansoor)는 단지 이 제3의 눈에 대한
경험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가 처음 이 내면의 공간을 깨달았을 때
그는 '나는 신이다'라고 외쳤다. 만약 그가 인도에서 살았더라면
그는 신으로서 숭배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도에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호메트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어렵다. 만수르의 선언은 반종교적인 것이며
반이슬람적인 것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사람은
사람이고 신은 신이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신은 조물주인 것이다.
어떻게 피조물이 조물주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살해당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왜 웃는가? 만수르여!"
만수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그대들은 나를 죽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그대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대들은 이 만수르의 육체에 속고 있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이 우주를 만든 창조주이다. 태초부터 이 우주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바로 나다."
인도에서라면 그의 말이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그런 말은 수십세기 동안에 걸쳐 내려왔던 말들이다. 사람이 내면의
공간을 알게 될 때 한순간에 그것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때 그는 미치게 된다. 이 깨달음은 너무나 확실해서
그대가 만수르를 죽인다 해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만수르만큼은 죽일 수가 없다. 그는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전체이다. 그에게는 삶과 죽음이 없다. 그를 파괴시킬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다.
만수르가 죽은 뒤 이슬람교 신비주의자들인 수피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신상에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수르 사건 이후
수피 전통에서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제3의 눈을 깨닫게 될 때 침묵하라. 그때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 가족들을 만나더라도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들만 말하라."
그래서 이슬람교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슬람교이고, 나머지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전의 이슬람교, 진정한 이슬람교이다. 그것이 바로 수피즘
(Sufism)이다. 수피들은 만수르가 제3의 눈을 깨닫고 그 경험을
말한 것 때문에 죽음을 당한 뒤부터 아예 입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이 경전은 말한다.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라. 그러면 그대의
푸 눈 사이의 공간에 모든 것이 담겨지리라."
그 공간은 우주 전체의 공간이다.

16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모든 방편들은 마음의 특정한 유형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세번째 방편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방법이며 또한 위험하지도 않다.
그대 역시 그것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손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귀마개와 눈가리개만 있으면 손을 쓰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구멍들을 완전히 막는 것이다.
단 몇 초 동안이라도 좋다. 해보라. 그러나 연습은 하지 말라.
갑작스럽 게 하는 것만이 도움이 된다. 그대가 잠자리에 드는 순간
갑자기 그대의 얼굴에 난 구멍들을 막고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라.
고통을 느낀다면 계속하라. 절대적으로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말이다.
물론 호흡을 참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절대적으로
참을 수 없게 되면 그대도 모르게 얼굴에서 손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의지가 남아 있는 한
힘껏 참아보라. 때가 되면 내면 속에서 힘이 올라와 그대의 손이
떨어지게 할 것이다. 고통이 오더라도 그것은 한순간이다.
고통은 오래된 사고 습관을 깨뜨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몇 분만이라도 계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대는 아마 죽을 것처럼 느낄 것이다.
하지만 겁내지 말라.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대의
의지로 숨을 쉬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 그대가 곧 죽을 것처럼
느끼는 것도 그 순간뿐이다.
잠시 동안 그대가 그 상태를 참아낼 수 있다면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밝아진다. 그대는 내면의 공간이 확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속에 포함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때 손을 떼고 닫혀진 구멍을 모두 열어도 좋다. 하지만
그 느낌은 계속될 것이다. 시간날 때마다 이 방편을 시도해 보라.
하지만 연습 삼아서 그렇게 하지는 말라. 계속 훈련하면 몇 분간은
쉽 게 호흡을 멈출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훈련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갑작스런 충격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충격 속에서 그대의 오래된
사고 습관은 멈춰지고 새로운 것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훈련을 쌓고 있다. 인도에만 해도
그 숫자가 무척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갑작스럽게 하는 것이다.
연습을 통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말이다.
내가 지금 그대를 갑자기 밖으로 밀어 내쳐 버리면
그 순판 그대의 생각은 딱 멈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매일 연습한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기계적인 습관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연습하지 말라.
그대가 할 수 있을 때 곧바로 해 버려라. 그러면 어느날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공간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내면의 공간은
그대가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될 때만이 그대의 의식으로 들어온다.
그대가 '이제 나는 한순간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라고 느낄때,
' 이제 죽음의 순간이 왔다'라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중요한 순간이다.
그때 견디어 보라. 겁먹지 말라. 죽음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 방편을 수련하다가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이것이 안전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대가 이 방편을 수행하는 도중에
죽을 수가 없는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 직전에 사람은
무의식이 된다. 만약 그대가 의식적이라면 그래서 그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긴다면 그때는 걱정하지 말라. 그대는 아직도
의식적이다. 그래서 그대는 죽을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죽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되면 그때 호흡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대는
저절로 손의 힘이 빠질 것이고 더 이상코와 입을 막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방법은 안전한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네번째 방편은 세번째와는 달리 가슴이 발달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랑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바로 이 네번째 방편이다.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이 방편은 가슴 중심인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럼 먼저
가슴 중심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면 이 방편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가슴이 중심인 사람은 모든 것이 가슴으로 연결된다.
만약 그대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대의 사랑을 그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느낄 것이다.
하지만 머리가 중심인 사람은 그대의 사랑을 머리로 눈치챈다.
그는 그대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을 평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 그대를 사랑할 것인지 계획할 것이다.
그는 사랑조차 머리로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논리 없이 무조건 느낌만 강한 유형이 있다. 물론 가슴
역시 자신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 없이도 살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에게 '왜 당신은 사랑을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대가 머리 중심인 사람이라면 그대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가슴 중심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그저 사랑할 뿐이다."
그때 그대는 가슴 중심인 사람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유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때 그대는 머리 중심인 사람이다. 가슴 중심인 사람은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만약 아름답다는 것이 먼저라면, 사랑보다 이유가 앞선다면 그는 머리
중심인 사람이다. 가슴 중심인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이 먼저이다.
그 다음에 다른 모든 것이 따른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의 가슴에 느낌으로 와 닿는다.
그대는 자신을 관찰해 보라. 그대의 삶 속에는 매순간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들이 그대의 어느 부분에 와 닿는가?
길을 걷다가 거지를 만났을 때 그대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먼저 그 거지의 경제 사정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법으로 구걸행위를 금지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복지정책을 어떻게 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머리 중심인 사람이다. 그 거지는 단지 그에게
하나의 생각의 재료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 가슴은 전혀 자극을
받지 않는다. 오직 그의 머리만 자극을 받는다. 그는 그 거지를 위해서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그는 완벽한 사회주의
복지국가를 꿈꿀 뿐이다. 미래를 위해서, 유토피아를 위해서는
힘쓸 수 있다. 하지만 당장 그 거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미래를 위해 일하고 있다. 가슴은 항상 지금 여기에 고동치고 있다.
가슴이 중심인 사람은 지금 당장 그 거지를 위해 뭔가를 할 것이다.
이 거지는 하나의 존재이지 재료가 아니다.
그러나 머리 중심인 사람은 거지가 수학적인 기호로 보인다.
그에게는 거지가 도웅을 받아야 하는 사실보다는 구걸 행위를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대 자신을 잘 살펴보라.
그대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머리 중심인지 아니면 가슴 중심인지 말이다.
만약 그대가 가슴 중심인 사람이라면 이 방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속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가슴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기본적인 욕구이며, 아무도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모두 사랑이 넘치는 가슴 중심의 사람이라고 믿지만
그 믿음은 헛된 꿈일 뿐이다. 자신을 살펴보라.
마치 타인을 살펴보듯이 요모조모를 따져보면
자신이 어떤 유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방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속일 수 있어도
이 방편을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이 방편에 매달려 봐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그대는 곧 느낄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오면 나는 그들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런 것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엉터리 관념만 잔뜩 갖고 있다.
그런 관념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아상(我尙)만 갖고 있다.
그리고 종종 생활 속에서 그 아상과는 정반대로만 나타난다.
자신이 가슴 중심의 사람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가슴이 텅 빈 상태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두렵다. 자신에게
가슴이 없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
세상을 보라.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이 믿는 것처럼 가슴이
따뜻하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삭막하지 않다. 이 세상은 우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여서 세상을 이룬다. 그런데 이 세상에
뭔가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가슴은 거기에 있도록 훈련되지 않았다. 마음은 훌련될 수 있다.
마음은 거기에 있을 수 있다. 가슴은 아니다. 이 세상에
많은 학교가 있지만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마음을 훌련시키는 곳이다.
가슴을 훈련시키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훈련을 통해 그대가 한번 가슴을 열게 되면
이 세상은 그대에게 맞지 않다. 이 세상은 가슴이 통하는 곳이 아니라
논리와 힘이 통하는 곳이다.
만약 그대의 가슴이 열려 있다면 그대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이 세상은 오른쪽으로 돌고 있는데
그대는 왼쪽으로 도는 것과 같다. 모든 것에서 그대는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가슴은
더욱 퇴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거의 가슴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 때문에 정말로 쉽게 할 수 있는 방편들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가슴 중심의 방편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등이 말이다. 그 종교의 추종자들 역시
가슴 중심의 사람들이다. 모든 고대의 종교들이 이와 같은 상황이다.
베다가 편찬되고 힌두교가 생길 무렵 거기에는
가슴 중심의 사람들이 대부둔이었다. 머리 중심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과 정반대 상황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기도할 수가 없다. 기도는 가슴 중심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제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카톨릭 기독교인들은 기도가 주요한 방편이지만 그들은 완전히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기독교에는 명상과 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명상에 대해
광적인 바람이 일고 있다. 이제 서양에서는 아무도 교회에
가지 않는다. 만약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공식적인 행사 때문이다.
그것은 일요일 종교이다. 기독교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은
가슴 중심의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잊어버렸다.
명상은 기도보다 훨씬 머리 중심적이다. 그리고 기도는 명상보다 가슴 중심적이다.
기도는 가슴 중심의 사람들을 위한 명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네번째 방편을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
"모든 감각이 가슴속에 녹아들 때......"
이 말대로 한번 해보라. 많은 방법이 가능하다. 그대는 누군가를 마진다.
만약 그대가 가슴 중심의 사람이라면 그 감촉은 즉시
그대의 가슴에 전달될 것이다. 그대는 그 감촉의 질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머리 중심인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대는 약간 차가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체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일종의 차가움이 서려 있다. 만약 그가 가슴 중심인 사람이라면
약간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때 그의 손은
그대와 함께 녹을 것이다. 그대는 뭔가가 그의 손으로부터 그대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하나의 만남이 있다.
따스한 온기의 만남 말이다.
이 따스함은 가슴에서 나온다. 그것은 절대로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머리에서는 언제나 시원하고 차갑고 계산적인 것만 나온다.
그러나 가슴은 따뜻하다. 그것은 비계산적이다.
머리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를 따진다.
반대로 가슴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줄수 있는가를 따진다.
반대로 가슴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를 항상 생각한다.
 이 따스함은 뭔가를 계속 주고 있다는 뜻이다.
생명을 주고, 에너지를 주고, 내면의 진동을 준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그대를 껴안으면 그대는
그와 함께 깊이 녹아들 것이다.
손으로 만져 보라. 눈을 감고서 무엇이든지 만져 보라. 그대의
연인을 만져 보라. 그대의 자녀나 어머니를 만져 보라. 그대의
친구를 만져 보라. 나무와 꽃을 만져 보라. 대지를 만져 보라.
눈을 감고 대지와 가슴으로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대의 손은 대지의
감촉을 느끼기 위해 펼친 그대의 심장임을 느껴라. 모든 감촉이
그대의 가슴에까지 와 닿게 하라.
그대는 음악을 듣고 있다. 그것을 머리로 듣지 말라. 머리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려라. 아예 머리가 없다고 느껴라. 머리가 없는
자화상을 그대의 침실에 걸어두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것을 집중하라. 그대는 머리가 없다. 머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음악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껴보라. 그대의 가슴이 음악과 함께
진동하게 하라. 그대의 감각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결합하도록 하라.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용해되도록 하라.
"축복받은 자여, 모든 감각이 가슴속으로 녹아들 때 연꽃의
중심에 이르게 되리라."
가슴은 연꽃이다. 모든 감각은 연꽃의 개화(開花) 인 것이다.
그래서 먼저 그대의 감각을 가슴에 연결시켜라. 그 다음에는 모든 감각이
그대의 가슴속으로 들어와서 흡수된다고 생각하라.
이 두가지 생각이 확고해지면 그때 감각은 그대를 돕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가슴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와
가슴은 연꽃이 될 것이다.
이 가슴의 연꽃은 그대로 하여금 존재의 중심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한번 그대가 가슴의 중심을 알고 나면 그때는 단전의 중심으로
내려가는 것이 매우 쉽다. 사실 경전에서는 여기까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전체적으로 가슴에 흡수되면 그때 사념의 활동은 완전히 멈춘다.
그리고 단전으로 향하는 문이 저절로 열린다. 머리에서 바로
단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혹은 그대가 가슴과 머리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다 해도 그것 역시 어렵다. 한번 그대가 단전에
빠져들면 그대는 갑자기 가슴을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본래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신은 사랑이다' 란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확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문이 된다.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져들 때, 그때 사랑의 대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와 사랑에 깊이 빠질 때, 그때 머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때 가슴은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때 사랑은 기도가 되고
그대의 연인은 신이 된다.
실제로 가슴의 눈은 사랑 외에 다른 면을 볼 수 없다. 평범한
사랑 속에서도 이 일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은 신이 될 것이다. 그것이 영원하거나
심오한 것은 아니겠지만 단지 한 순간이라도 그대의 연인은 신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오래가지 않아서 머리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것이지만 말이다. 머리는 사랑조차도 무차별하게 처리해 버린다.
한번 머리가 지나가면 가슴이 이루어 놓은 모든 아름다움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그대가 머리의 방해 없이 사랑 속에 빠져 있을 수 있다면 그대의
사랑은 기도가 되며 그대의 연인은 신성에 이르는 문이 될 것이다.
그대의 사랑은 그대로 하여금 가슴의 중심에 이르게 할 것이며
가슴의 중심에 서게 될 때 자동적으로 단전의 중심으로
떨어지게 되리라.

17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이 방편에 대한 말은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과학의 공리처럼 짧다.
하지만 이 몇 마디의 말이 그대의 삶 전체를 변형시킬 수 있다.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
붓다는 이 방편을 사용해서 그의 명상법 전체를 집대성했다.
그의 가르침이 '중도( 中道)의 길' 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중도에 머물러라. 범사에 말이다."
붓다가 어느 도시에 갔을 때 슈로운이라는 왕자가 붓다를 찾아와서
입문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왕자는 매우 열광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출가하여 사문이 되자 온 나라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슈로운이 산야신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술과 여자와 모든 쾌락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붓다가 그 도시에 들어왔을 때 슈로운은 그를
만나기 위해 다르샨(영적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는 바로 그의
발을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저를 입문시켜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을 버리겠습니다."
슈로운과 함께 온 사람들도 그가 그렇게 갑작스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붓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은 기적입니다. 슈로운은
이렇게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매우 향락적으로 살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마 당신은 분명히 뭔가를 했습니다."
붓다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작동 방식이다.
그래서 왕자는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단지 그대들은 마음의 법칙을 몰랐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돌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마음은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이동한다. 그것이 마음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난다. 부에 취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한다. 완전히 빈털터리가되어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일반적인 법칙일 뿐이다. 부에
완전히 취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왜냐하면 한 극단에 완전히 이르러서야 다른 극단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시계추와 같이 말이다.
그래서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에 미쳐라. 그리고 그 부에 완전히 취하라.
그것이 지겨워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면 그것에 반대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광적인 요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섹스에 완전히 파묻혀 산 사람은 독신
수행을 할 수도 있다. 그는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광적인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이전에 오직 섹스만을
추구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섹스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극단으로 흐르는 태도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브하흐마차리아(독신 수행자)는 사실 섹스를 초월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온 마음은 섹스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섹스를
반대하지만 초월한 것은 아니다. 초월의 길은 항상 중도에 있다.
그것은 절대로 극단 속에 있지 않다. 그래서 붓다는 슈로운의
출가를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상된 것이다. 전혀 기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방식이다."
슈로운은 거지가 되었다. 그는 비구가 된 것이다. 붓다의 다른
제자들은 슈로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다른 극단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붓다는 그의 제자들에게 벌거벗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에 출가 사문들은 완전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벌거벗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붓다는 그것을 금지시켰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극단인 것이다. 그런데 슈로운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옷을 모두 내버렸다.
그는 붓다의 제자중에서 벌거벗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한 고행을 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한 끼씩은 꼭 식사를 하도록 했다. 그런데 슈로운은
이틀에 한끼를 먹었다. 그는 점점 야위어져 갔다. 다른 제자들이
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을 하는 동안 그는 뙤약볕에서 명상을 했다.
그는 본래 매우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6개월이
지나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수척해지고 검게 그을린
보잘것없는 육체로 변했다.
붓다는 어느날 밤 슈로운을 찾아가서 말했다.
"슈로운이여, 나는 그대가 입문하기 전에 왕자라고 들었다.
그리고 시타를 아주 잘 연주하는 훌륭한 음악가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면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다. 그대가 시타를 연주할 때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자 슈로운이 말했다.
"그러면 소리가 나지 않아서 연주를 할 수 없습니다."
붓다가 또 물었다.
"만약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게 되는가?"
슈로운이 말했다.
"그래도 안됩니다. 너무 팽팽하면 줄이 끊어집니다. 줄은 항상
적당하게 조여져야 합니다. 너무 느슨해도 안되고 너무 팽팽해져서도 안됩니다.
오직 시타의 명인만이 줄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만이 훌륭한 음악이 나올 수 있습리다. "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삶도 그와 똑같다.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해서도 안되고 오직
적당해야 한다. 나는 그대를 6개월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삶을 적당하게 유지하는 것은
오직 삶의 명인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슈로운 그대가 삶의 명인이
되고자 한다면 적당하게 중도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무심이 되어야 한다. 마음이 그 기능을 멈추지
않는 한 항상 극단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극단은 마음이 볼 때
환상적으로 보인다. 중도에서는 마음이 죽는다. 시계추를 보라.
시계추는 항상 양극단으로 움직1기 때문에 계속 움직일 수 있다.
만약 시계추가 중간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오른쪽으로 가려면 일단 왼쪽으로 가서 추진력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역시 이와 같다. 그대는 한가지 일을 하려고 결심한다.
하지만 일이 잘 안되면 어느 순간 그대는 화를 낸다.
그리고는 화를 낸 사실을 후회한다. 그대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이것은 충분하다.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 결단코 말이다."
그러나 이 '결단코'가 바로 극단인 것이다. 그대는 결단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한번만 더
생각태 보라. 그대는 그와 똑같은 결심을 몇번이나 했는가?
그대가 '결단코 화를 내지 않겠다' 라고 결심하는 것은 다시금 화를
내기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후회를 한다.
자신의 이미지가 손상되었다. 이제 그대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인 사람도 물론 아니다. 이제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적어도 그대의 눈에는 결코 화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단코 화를 내지 않겠다' 고 맹세한 그 마음이 다시금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이전에 그대가 후회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대가 결심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후회하고 다시 결심한다.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분노에서 후회로, 후회에서 분노로 움직인다.
중도에 머물러 있으라. 화를 내지도, 후회하지도 말라. 그대가 화를 낸다면
그때는 적어도 후회는 하지 말라. 다른 극단으로 가지 말라는 말이다.
그때는 이렇게 말하라.
"나는 화를 내었고 본래 그런 난폭한 놈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절대로 후회하지는 말라. 다른 극단으로 가지 말라. 중도에 머물러라.
그대가 거기에 머무를 수 있다면 더 이상 추진력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말한다.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그러면 여기서 ' 언제까지나'란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대가
도달할 때까지이다. 마음이 죽어서 궁극에 이를 때까지이다.
마음은 극단에 이를 때 생기를 느낀다. 마음이 중도에 머무르면
그때는 생기를 잃는다. 결국 그것은 죽어 사라지고 무심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쉬워 보이고 간단해 보인다. 아마 그대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만 되면 어떤 후회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니 해보라. 그대는 마음이 화를 낸 뒤에 계속
우회를 고집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이드는 남편과 아내는 계속 싸운다고 말했다. 수십 세기 동안
수많은 상담자들과 현자들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왔건만 부부는 계속 싸운다. 처음으로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대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동시에 증오에도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침에는 사랑을 하지만
저녁에는 증오하게 된다. 계속 움직이는 시계추처럼 말이다.
모든 남편, 모든 아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매우 독특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만약 부부가
싸움을 멈춘다면 사랑이 식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만약 그대가 싸우지 않는 부부를 보고 이상적인 부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 부부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그들은
이름이 부부일 뿐 서로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평행선을 달리며 마음속으로는 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항상 반대극으로 움직인다. 그대가 사랑을 원한다면
싸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대가 진정으로 싸움에 몰두하면
그것은 또 한바탕 사랑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대의 아내와
싸움을 피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피하게 될 것이다.
싸움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끝까지 싸워라. 그러면 저녁에는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추진력을 필요로 한다. 일상적인
사랑은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의 움직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 없는 사랑만이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붓다는 사랑을 갖고 있다. 그의 사랑은 싸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붓다가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별로 짜릿한 기분을 맛보지 못한다.
붓다의 사랑 속에는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싸움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저 무조건 부드럽기만 하기 때문에 그대는
곧 싫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대의 마음은 뭔가 싸울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붓다는 화를 내지 못한다. 그는 오직 사랑만
할 수 있다. 그대에게 그의 사랑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그대는
반드시 양 극단을 함께 느껴야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붓다가 12년만에 처음 고향에 들렀을 때 그의 부인은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을 전체가 그를 맞이했지만 그의 부인
야소다라(Yashodhara)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붓다는 웃으면서
그의 제자 아난다(Ananda)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소다라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잘 안다. 아마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12년은 긴 세월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를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집에 가서 그녀를 만나봐야겠다."
그래서 붓다는 집으로 갔다. 아난다도 함께 갔다. 아난다는
붓다가 어디를 가건 함께 간다는 것이 입문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붓다 역시 언제나 아난다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에 동의했다.
아난다는 붓다를 따라 왕궁으로 들어갔다. 야소다라의 방 앞에
이르자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겠다. 그녀는 무척 할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나와 함께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
붓다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야소다라는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폭발했다.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다.
붓다는 거기에 그냥 앉아 있었다. 한참을 운 뒤에
그녀는 진정하고 붓다를 쳐다보았다. 붓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때 붓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뭔가를 얻었소. 뭔가를 깨달았소. 그대가 진정하게 되면
나는 그대에게 내가 깨달은 진리를 주려고 하오. 나는 그대가
실컷 울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소. 12년의 세월은 긴 시간이오.
그대는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오. 그대가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이것은 아직도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오.
그러나 이 사랑을 초월한 사랑이 또 있소. 그 사랑 때문에
나는 당신을 다시 찾아온 것이오. 뭔가를 말해 주려고 말이오. "
그러나 야소다라는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에 느끼기가 쉽지 않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 사랑은 반대 극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랑과 짝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반대 극부는 저절로 사라진다.
그래서 이 방편은 놀라운 것이다.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무심한 마음으로 중도에 머물러라. 언제까지나."
한번 해보라. 이것은 그대의 전생애에 해당되는 경구이다.
그대는 그것을 가끔씩 연습할 수 없다. 그대는 계속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걷든지 머물든지 앉든지 눕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중도에 머물러라. 그러면 그대의 내부에서 고요함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고요함이 그대를 가득 채울 때
그대는 자신이 중심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한번 그것을 알게 되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중심점은 마음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점은 그대가
지금까지 찾아온 모든 것이다.

(질문 )

"붓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산야신(출가 수행자)이 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산야신은 먹을 것을 구걸하고
사회로부터 벗어나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붓다 자신도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수도원적 삶은 세속적
삶의 반대극부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중도의 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의 길을 중도의 길이라
부릅니까?"

그대는 세속적인 삶의 반대 극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삶의 반대극은 죽음이다.
그리고 역사상 자살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반대극부이다.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삶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만약 그들의 말처럼 삶의 의미 없는 것이라면
죽음 역시 의미가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 반대극부이다.
이것을 이해하라. 그대가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죽음이 삶의 반대극부라면 그때 마음은 쉽게 죽음으로 향해
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할때  그늘 삶에 그만큼 집착한
사람이다. 삶에 애착이 많은 사람만이 자살을 한다.
예를 들면 그대는 그대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너무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대는 자살을 한다. 마음에 삶에 너무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반대 극부로 가버린 것이다. 삶이 좌절될 때
마음은 죽음으로 쉽게 갈 수 있다.
자살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갑작스런 자살과 점진적인 자살이 그것이다.
그대는 점진적인 자살을 하고 있다. 그대 자신을
삶으로부터 조금씩 분리시킨다. 그대 자신을 조금씩 죽여 가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살았을 당시에는 자살을 강조하는 학파가 많이 있었다.
그드리이야말로 삶에 대해, 일상적인 삶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넌센스로부터 진짜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자살하는 길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그대가 살아 있다면 그대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살아 있는 동안 불행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자살을 하라고, 그대 자신을 파괴하라고 말한다. 그대가 이 말을
들을 때 그것은 너무 극단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 보라.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40년 동안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계속 작업을 해 왔다.
그것은 한 개인이 연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랜 기간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불행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마음의 기능인 한 불행은 멈추지 않는다.
단지 불행의 정도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이다. 불행이 없는 상태는
선택 사항에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마음을
조절한다면 불행이 작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적으로 보인다.
실존주의자들, 샤르트르와 까뮈 등등의 사람들은 삶이란 결코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삶의 본성은 공포와 번민과 고통이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은 삶에 대해
용감하게 부딪치는 길뿐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말이다. 그런
상황은 절망적인 것이다. 까뮈는 묻는다.
"삶이 이런 상황이라면 왜 자살하지 않는가? 이 삶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면 왜 삶을 떠나지 않는가?"
붓다가 살았을 때에 수많은 학파들이 있었다. 그 시기는 인간의
역사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역동적인 시대였다. 예를 들면
아짓트 케쉬 캄발(Ajit Kesh Kambal)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도 자살을 주장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종파도
형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50년 동안 혼자 살아 남아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자살을 권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짓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왜 당신은 지금까지 자살하지 않고 살아 남았는가?"
그러자 아짓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나도
엄청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이 가르침을
누가 전달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살 가치가 없다."
이것이 삶의 반대편극단이다.
붓다의 길은 중도이다. 붓다는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산야스(구도행)라고 했다. 삶에 집착하지도
않고 삶에 반대하지도 않는 것, 그저 중도에 머무는 것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하는 진정한 산야신(구도자)의 삶이다. 그래서 그대가
삶과 죽음에 관계하지 않을 때, 그때 그대는 한 사람의 산야신이 된다.
그대가 삶과 죽음이 양 극단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때
붓다의 길은 중도의 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산야신은
삶에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삶에 반대한다면 그는 산야신이 아니다.
그는 정신병 환자일 뿐이다. 그는 이미 다른 극단으로 가고 있다.
산야신은 균형 잡힌 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중도에 서 있다.
한편 만일 삶이 불행이라면 그때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극단으로 가라."
그리고 불교도에게도 삶은 불행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극단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도의 생각이다. 삶은 극단에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죽음 역시 극단에 서 있기 때문에 불행이다.
극단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이 모두 불행이다.
삶이 축복일 때는 오직 중도에 있을 때이다. 축복은 균형이다.
한 사람의 산야신은 균형 잡힌 존재이다. 그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좌경도 아니고 우경도 아니다. 그는 중도에 머물러 있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어떤 것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오직 중심에 머물러 있다.
죽음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은 불행의 씨앗이다. 만약 그대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불행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삶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불행을 선택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두 가지
극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두 개가 아니다. 하나의 흐름에
양 극일 뿐이다.
그래서 그대가 한쪽 극단만을 선택하면 다른 극단에 대해서는
반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행을 만들어 낸다. 죽음은 삶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음을 가려내고 삶만 얻을 수 없다.
삶을 택하는 순간 죽음도 택한 것이 된다. 그래서 거기에
불행이 생겨난다. 그대가 행복을 선택하면 저절로 불행이 거기에
들어 있다. 불행은 행복의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을 선택하면 그때 미움도 선택한 것이 된다.
미움이 사랑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대가 선택한 사람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하지 말라. 중도에 머물러라. 중도가 곧 진리이다.
다른 극단은 죽음이며 또한 삶이다. 그리고 중도에 서서 이
양 극단 사이를 흐르는 에너지야말로 진리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선택하지 말라. 선택은 하나를 원하고 다른 것은 반대한다는 뜻이다.
중도에 머무르는 것은 선택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때
그대는 이 전체를 초월할 수 있다.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선택 때문에 불행해진다. 선택하지 말고 그저 가만히
있어 보라.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해
보라. 그대가 양 극단으로 흐르려고 할 때마다 중간에 멈추어 보라.
그대는 점점 중도라는 것에 대한 육감이 느껴질 것이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섬세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것이 바로 그 느낌이다. 그러나 한번만 그대가 확실히 그 느낌을
잡게 되면 그때는 아무것도 그대를 방해할 수 없다. 아무것도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그때 그대는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산야스가 의미하는 것이다. 고통 없이 존재하는
것! 이것은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붓다는 처음으로
계속해서 중도에 머물 수 있는 방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은 이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II

그대의 전 관심을 방편에다 쏟아라.
결과는 잊어버려라.
결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방해가 된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II

18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여기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19
손이나 발로 지탱하지 않고 엉덩이로만 앉아 있어 보라.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20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21
감로수로 가득 찬 그대 육체의 한 부분을 침으로 천천히 찔러 보라.
그리고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신비스러운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두가지 차원으로 기능한다.
하나는 외부로 나가는 것인데 그때 그대의 의식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물질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이다. 만약 의식이
외부로 나가면 그때 그대가 아는 것은 물질이다. 그러나 의식이
내면으로 들어오면 그때 그대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물질이다.
실제로 거기에 어떤 구분도 없다. 물질과 비물질은 하나다.
그러나 이 실체라는 X가 눈이나 감각을 통해 볼 때에는 물질로 보인다.
그리고 똑같은 이 X가 감각이 아닌 중심을 통해서 보면 비물질로 보인다.
실체는 하나인데 그것을 보는 방식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감각을 통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각을 통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감각이 작
동하지 않는 점, 감각을 초월한 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방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대가 이해해야 할
세가지 것이 있다. 첫째로 그대가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볼 때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은 단지 창문과 같은 것이다.
보는 주체는 눈 뒤에 있다. 꿈을 꿀 때 그대는 눈을 감고 있어도
영상이 보인다. 보는 자는 감각 뒤에 있다. 그 주체는 감각을 통해서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감각을 닫아 버리면
그때 보는 자는 내면에 남게 된다.
만약 보는 자, 보는 의식이 중심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그 주체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깨달을 때, 다시 말해서
존재계 전체를 깨달을 때 그대는 존재계와 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중심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대의 의식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떤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체 속에 머무르는 것 말이다.
교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내면에 머무를까?'
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결국 바깥으로 나가려는 하나의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생각이 된다. 그리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외부적인 것이다. 그것은 내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내면에는 오직 의식만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구름과 같다. 그것들은 그대에게 다가오지만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은 외부로부터 나온다. 한가지 생각도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대가 언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에 대해서
생각하더라도, 그대의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것이라도 그것은
그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에게 속한 것은, 다시 말해 그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뿐이다. 그것은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단순한 의식을 내면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직접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몇가지 방편들이 필요하다.
그 방편들은 그대를 그대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직접적으로 그 중심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그대는 외부로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이기 때문에 그대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그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연주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 기분을 직접 느끼려 한다면 그대는
음악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 된다. 황홀한 기분을 느끼려는 욕심이
하나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행복감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대는 그것을 직접 움켜잡을 수 없다. 너무나 미묘한 현상이기 때문에
그대는 간접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뭔가를 할 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영원한 것이라도 그대가 직접 움켜쥐려고 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만다. 방편을 이야기하고 수단을
제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방편들은 그대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반드시 나타난다. 그러므로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방편에 주의하라. 그대의 전 관심을 방편에다 쏟아라. 결과는
잊어버려라. 결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방해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시킨 대로 우리는 명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명상하면 그것이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과에 너무 집착했다. 결과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오직 그때에만 그것은 일어날 것이다.
행위 속에 그대 전부를 몰입하라. 그럴수록 결과는 더욱 빨리 나타난다.
물론 그 결과는 언제나 간접적이다. 그대는 그것을
강압적으로 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하고 섬세하다. 그것은
공격받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방편들은 간접적인 수단일 뿐이다.
영적인 것에 직접적인 수단은 있을 수 없다. 자, 이제 중심에
이르게 하는 여섯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18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여기 대상의 가운데 축복이 있다.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 게 바라보라......."
여기에서 '사랑스럽게'가 열쇠이다. 그대는 사물을 사랑스럽게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렇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마 대상을 탐욕적으로 바라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것에서 뭔가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탐욕이다.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아름다운 육체가 있다. 그대는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랑스럽다고 느긴다. 하지만 왜 그것을 바라 보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갖고 싶은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탐욕이다. 그대는 그 몸과 얼굴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대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말이다.
탐욕은 그대의 행복을 위해 어떤 것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대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탐욕은 뭔가를 얻는 데 있고 사랑은 뭔가를 주늘 데 있다.
만약 그대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서 사랑을 느긴다면 그때는
즉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얼굴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남자를 혹은
이 여자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그때 그것은 그대의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랑은 그대 자신이 목적이 아니다. 사랑에서는 타인이 중요하다.
그러나 탐욕에서는 그대가 중요하다. 탐욕에서는 그대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방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그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어떤 수단이 되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랑에서는 그대 자신을 희생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탐욕은 빼앗는 것이다. 탐욕은 공격적이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의미가 없다. 탐욕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대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대의 말은 무의미한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라. 내면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대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두번째로 그대가 어떤 사물을 사랑스럽 게 바라본다면 그 대상은
하나의 인격을 띄게 된다. 그대의 사랑이 그것을 사람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대가 나무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면 그 나무는
사람이 된다.
어느날 나는 비베크(라즈니쉬의 제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새 아쉬람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모든 나무에
이름을 붙여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무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무에 사람처럼 이름을 붙여준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무도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에 대해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나무는 군중이 아니라 독특한 하나의
개인이 될 것이다.
그대는 개나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 그 개는 하나의 사람이 된다.
그때 그것은 다른 개들과는 달라진다. 그것은
인격을 갖게 된다. 그대가 개를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대가 어떤것을
사랑스럽 게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그대가 한 인간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사물이 된다. 탐욕의 눈이 그토록
공격적으로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무도 물건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대가 아내를, 혹은 다른 여자를, 혹은 어떤 남자를
탐욕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은 상처를 받는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물건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순간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은 대체될 수 없다. 물건은 대체될 수 있다. 한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 고유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물건은 그렇지 않다. 물건은 독특하지 않다. 얼마든지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랑은 어떤 것을 독특하게 만든다. 사랑이 없으면 그대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깊이 사랑하지 않는 한 그대는 자신의 독특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단지 군중 속의 한 부분일 뿐이다.
예를 들면 그대가 대학 교수라면 그때 그대의 직위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 다른 교수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다.
그대가 직장을 그만두면 누구라도 그대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곧 잊혀질 것이다. 사랑 없이 본다면 그대는
기능적인 중요성과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그대가 만약 상점의 점원이라면 문제는 더 간단하다. 그대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 만약 지금 당장 그대가
죽더라도 다음 순간 다른 사람이 그대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얼마나 효율이 좋은지를 따지는기계인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교수나 점원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때 갑자기
점원은 더 이상 점원이 아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
만약 그가 죽으면 다른 사람으로 그를 대신할 수 없다. 그는 대체될 수 없다.
그때 온 세상은 똑같지만 그 자리만은 절대로 같은 사람이
둘 있을 수가 없다. 이 독특함은 사랑을 통해 일어난다.
경전은 말하고 있다. 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고 말이다.
사랑은 사물과 사람의 구분을 없앤다. 그대가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그것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모양까지 다르게 보인다.
그대가 어떤 특정한 차, 예를 들어 벤츠를 운전한다고 하자.
그대가 운전하는 차와 똑같은 차는 수만 대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 차에 반해 버리면 그 차는 특별해진다. 그러면 다른 차로
대체될 수 없다. 하나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대는 이제
그 차를 사람처럼 대하게 되었다. 만약 어떤 곳이 잘못된다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타는 냄새가 난다거나 하면 그대는 그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자동차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한 기계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 복잡한 기계의 성질을 잘 알게 된다. 어떤 때는
상태가 좋고 어떤 때는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대에게
그 차는 점점 사람으로 변해간다.
왜인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어떤 사물도 하나의 인간으로 변한다.
그러나 탐욕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의 사물로 변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중의 하나이다.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것 말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가 어떤 사물을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 다음으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려라. 한 송이의 꽃을 보라.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려라. 꽃만 존재하게 하고
그대 자신은 사라져 버려라. 꽃을 느껴라. 깊은 사랑이 그대의 의식에서부터
꽃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오직 한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게 하라.
어떻게 하면 그 꽃이 더욱 아름답게 활짝 피도록 도을 수 있을까를 말이다.
온몸과 마음으로 그 꽃잎 한장 한장을 느껴보라.
그대가 어떤 일을 해내고 못해내고는 별로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을 아름답게 피우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그대의 간절함,
그대의 아픔인 것이다. 이 생각이 그대의 존재 전체 속으로 퍼지게 하라.
 그때 그대는 엑스터시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하나의 인간으로 변할 것이다.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
그대는 갈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사랑의 관계 속에 빠져든다면,
어떤 그룹에서 누군가와 사랑이 시작된다면 그때 그대는 군중에 대해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얼굴만 남게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대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 한 사람의 얼굴만 그대 앞에 떠오른다.
그때 그대는 대상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다.
그대의 사랑과 함께 머물러라. 하나의 심장을 느껴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만 생각하라.
"여기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그대가 사라지고 없을 때,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렸을 때,
그대의 즐거움은 관심 밖일 때. 그리고 오직 상대방만을 생각할 때
상대방은 그대 사랑의 중심이 된다. 그대의 의식은 오직
그에게로만 흘러간다. 깊은 자비심과 깊은 사랑의 감정으로 그대는
상대방의 행복만을 생각한다. 그 상태에서 갑자기 그대는 축복을 느낀다.
하나의 결과로서 축복은 그대에게 쏟아져 내린다.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서게 된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인다. 경전은 여기에서 그대 자신이
중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대는 자신을 아예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들어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기도할 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그러면 그 기도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리고 기도의 결과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득이 되도록 기도하고
축복이 내릴 때는 모두에게 골고루 내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한가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항상 다른
사람만을 위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만 하나의 예외를
만들 수 없습니까? 저에게는 이웃집에 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는 나의 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기도를 통해 축복을 받을 때
그만은 제외시킬 수 없습니까?
마음은 이토록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기도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대가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나누어 줄 수 있을 때까지 되지 않는 한 기도를 통해서
어떤 결과도 바라지 말라. 그러니 모든 것을 나누어 줘라. 그때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 되리라."
사랑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잊을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역경과
어려움도 사랑속에 있을 때는 쉽게 견딜 수 있다. 관심의 초점이
그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중심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된다. 지복감으로 말이다.
왜인가? 그대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텅 비워진다. 내면에 공간이 마련된다. 그대의 마음이 전적으로
타인의 행복에만 쏠려 있을 때 그대는 무심의 상태가 된다. 그때는
모든 생각이 멈춘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그대가 여전히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직도 에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에 빠질 때 그대는 완전히 무력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고뇌란 것이다. 그때 그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대는 모든 것을 하기 원하지만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 우주를 다 주고 싶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때 만약 그대가 이것저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완전히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사랑은 무력감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아름답다.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진정한 헌신과 자기 체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대가 누군가를 증오할 때 그대는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절대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의미하고 우스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대 마음은 그 기능을 멈추고 만다.
그 무력감 속에서 체념이 일어난다. 그때 그대의 마음은
텅 비게 되고 진정한 귀의와 헌신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랑을
심오한 명상이라고 부른다.
진정으로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다른 명상이 필요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112가지 명상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며칠 전에 어떤 구도자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들은 나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나는 처음으로 당신에게서
112가지의 방편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의구심이 일어납니다. '만약 이 112가지
명상 방편이 나에게 모두 맞지 않는다면 그때는 113번째 방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그것은 무리한 억측이 아니다.
만약 이 112가지 방편이 그대에게 모두 맞지 않는다면 그때
그대는 더 나아갈 길이 없다. 그러나 그대가 놓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대가 사랑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방편도 필요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한 방편이다. 그러나 사랑은 일반적인
방편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그대 자신을 그대의 의식 밖으로 내던지는 것을 말한다.
그대의 에고가 자리잡고 있던 곳에 다른 어떤 것이 들어온다. 그 자리가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마치 이제 그대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쟝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타인은 그대에게 지옥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틀렸다. 왜냐하면 타인은 지옥을 만들 수도 있고,
천국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탐욕을 통해 산다면
타인은 지옥으로 그대에게 다가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타인을 하나의 물건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람을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 그 사람 또한 그대에게 반항할 것이고
그대를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 상황은
지옥이 되고 만다.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서로에게 지옥을 만들어 준다. 그들은
상대방을 서로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물건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결코 그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가 어떤 사람에게
소유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소유하려고 든다.
결국 그런 행위를 통해 사람은 물건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물건으로 만든다면 그대는 반항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대의 적이 된다. 그때 그대 또한 나를
물건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대는 방안에 홀로 앉아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열쇠구멍으로 그대를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
그대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대는 화가 난다. 왜 훔쳐보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가? 그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화가 난다.
그것은 그가 그대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만약 입장이 바뀌어 그대가 그를 훔쳐보았다고 해도 그는 화를
낼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가 주체였다. 그는 지켜보는 자고,
그대는 관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관찰 대상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의 사물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관찰하면 갑자기 그대는 그대의 자유가 방해받고
파괴된다고 느낀다.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그를 주시할 수 없다. 주시하는 것은 폭력이다. 거기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는 한 그렇다. 만약 그대가 사랑 속에 있다면 그때의
주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주시는 상대방을 물건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상대방의 눈 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눈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대는 그를 물건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사랑을 통해
그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응시만이 아름답다. 나머지는 모두 폭력적이고 추하다.
심리학자들은 거기에 시간 제한이 있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낯선 사람일 때 그대가 얼마동안 그의 눈을 응시해도 괜찮다는 시간 제한이 있다.
만약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기면 그는 화를 낸다.
본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본다면 거기에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눈길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우두커니 서서 그대를 주시하면 그때는 내가
그대를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그대는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 단지 쳐다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이 물건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옷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쉽게 벌거벗을 수 있다.
외냐하면 그대가 옷을 벗는 순간 그대는 하나의 물건이 되기 때문이다.
몸 전체가 하나의 물건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의 온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만약 그대와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그대의 온몸을 유심히 쳐다본다면 그대의 육체는 완전히 물건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 앞에서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느낌 없이 옷을 벗을 수 있다. 혹은 옷을 벗기를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대의 온몸을 사람으로,
신으로 변형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 때에 그 행위는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순간은 축복이다.
지복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대상의 중심 속에 축복이 있다. "
갑자기 그대는 자신을 잊어버린다. 상대방이 거기에 있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완전히 부재 상태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대방도 역시 부재 상태로 변한다. 그대와
상대방 사이에 축복이 내린다. 연인들이 느끼는 황홀함이 바로 이것이다.
그 축복은 그대가 명상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점점 그들 모두가 사라져 간다.
어떤 에고도 없이 오직 순수한 존재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완전한 합일이다. 그 합일 속에서 축복을 느낀다. 그대가
만약 축복을 상대방이 그대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축복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대가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대는 명상 상태에 의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때는
그 정도가 더욱 깊어진다. 그대가 대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리를 알지 못한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축복이 일어나게 되면 그대는 오해하기 시작한다. 그 축복이 그
사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를
노치려 하지 않는다. 그를 꼭 붙들어 두고 싶어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통해 축복을 느끼면 그대는 불행을 느낀다.
그대는 이제 축복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 그대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그대는 질투하게 된다. 결국 그대는 그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조치를 단단히 취한다. 완전히 그를 소유하려 한다.
그대는 오직 그를 통해서만 축복의 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소유되는 순간 사랑은 사라져 버린다. 그때
사람은 하나의 물건이 된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축복은 이제 다시 그대를 찾아오지 않는다.
축복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대접받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대 역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를 물건으로 만들면 그 역시 그대를 물건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끼리 만났을 때에만 거기에
신성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소유 관계 속에서는 축복이 불가능하다. 마음은 사랑보다는
탐욕적으로 기능한다. 마음은 이렇게 생각한다.
'언젠가 축복이 일어났었다. 그러니 이제 그 축복은 매일 내게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그를 소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축복의 순간을 다시 맛볼 수 없다.
축복은 그대가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그대가 녹아들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상이 꼭 사람이 아니라도 가능하다. 한송이 장미꽃이나
하나의 바위와도 그대가 사랑에 빠진다면 축복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그 원리를 알게 되면 그대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지복의 순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의 의식이
깊은 사랑 속에서 사람이나 나무, 하늘, 별, 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벗어난다. 그때 그대의 의식에는
에고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에고가 사라지는 순간 거기에
축복이 일어난다.

19
손이나 발로 지탱하지 않고 엉덩이로만 앉아 있어 보라.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방편은 중국의 도교 수행자들에게 널리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방편이다. 조건만 맞으면 가장 쉬운 방편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대도 한번 해보라.
먼저 그대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번째, 그대는 매우
예민한 몸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그대는 거의 감각이 죽어버린
몸을 갖고 살아왔다. 그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대의 몸을 섬세하고 예민한 몸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방편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그래서 과대는 먼저 몸의 감각부터 민감하게 발달시켜야 한다.
특히 엉덩이를 말이다. 그대의 엉덩이는 몸에서 가장 감각이 무딘 부분이다.
하루종일 엉덩이로 앉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엉덩이가
손가락처럼 민감하다면 그때는 하루종일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엉덩이는 매우 무뎌졌다. 발바닥처럼 말이다.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엉덩이로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못 느낄 만큼 말이다.
그대는 이전에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아마
살아오면서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대의 엉덩이는 하나의 쿠션일 뿐이다.
그래서 먼저 그대는 엉덩이를 예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긴장을 풀고 의자에 앉아라. 팔걸이가 있는
의자면 더욱 좋다. 그리고 눈을 감아라. 그리고는 왼손이나 오른손중에
하나를 느껴보라. 오른손잡이는 왼손이 좋다. 왼손을 느끼는 동안에는
왼손 외에는 몸 전체를 잊어버려라. 오직 왼손에만
감각을 집중시켜라. 그러면 왼손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계속 무거워진다고 생각하라. 생각할수록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마치 왼손이 그대 자신인 것처럼 오직 왼손만 느껴라. 그러면
왼손은 갈수록 무거워진다. 그리고 나서 왼손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지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고 주목하라.
이런 식으로 적어도 3주 정도를 매일 계속하라.
하루중 어느 때라도 좋다. 매일 10분이나 15분 정도만 해보라.
3주가 지나기 전에 그대는 왼손이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왼손의 촉각은 굉장히 예민해졌다. 그래서
왼손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마저도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대가 왼손에 대해서 성공을 거두면 그때부터 엉덩이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해보라. 먼저 눈을 감고 바닥에 앉는다. 그리고
엉덩이 두 짝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라. 그대는 엉덩이이다.
그대의 모든 의식이 엉덩이에 집중되도록 하라. 그것은 어렵지 않다.
그대가 시도한다면 놀라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몸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다.
그대가 엉덩이만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대는 매우
예민해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일어나는 감각들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촉감이나 미세한 고통마저도 말이다.
그때 그대의 의식은 엉덩이와 하나가 된다.
처음에는 손으로 해보라. 본래부터 손은 예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에 대해서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번 그대가
어떻게 하면 된다는 요령을 터득하면 그 다음에는 엉덩이에 대해서도 해보라.
3주정도 말이다. 그래서 이 방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6주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몸 전체를 잊어버려라. 그리고 오직 엉덩이에만
감각을 집중하라. 침대 시트의 차가운 감촉을 느껴라. 혹은 욕조속에
누워서 온몸을 잊어라. 오직 엉덩이만을 느껴보라.
혹은 벽에 기대어 서서 엉덩이 부분만 벽에 대고 벽의 차가움을 느껴보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엉덩이를 서로 대고 있어 보라. 엉덩이를 통해서
무엇이 전달되는지 느껴보라. 이것은 그저 그대 엉덩이의
감각을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이 방편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라.
"손이나 발에 의지하지 않고......"
맨 땅 위에 앉아라. 손이나 발로 땅을 짚지 말고 붓다의 자세인
연화좌(결가부좌) 의 자세로 앉아보라. 혹은 달인좌(반가부좌)의
자세로 앉아도 좋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라. 엉덩이가 대지에
맞닿는 촉감을 느껴보라. 그대는 엉덩이의 감각이 매우 예민해져서
엉덩이 두 쪽 중에서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무게 중심을 한쪽 엉덩이에만
쏠리게 하고 다른쪽 엉덩이는 땅에 닿지 않게 해보라. 그리고는
상체를 옆으로 흔들면서 양쪽을 번갈아 땅에 닿게 해보라.
어느 순간 그대는 완전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균형이 잡혔다는 것은 그대의 엉덩이가 양쪽 모두 같은 양의
느낌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대의 몸무게가 양쪽 엉덩이에
정확하게 배분되었다는 뜻이다. 엉덩이의 감각이 예민해지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엉덩이의 균형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 순간 그대는 갑자기 중심에 이르게 된다. 그 균형때문에
갑자기 그대는 단전의 중심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엉덩이에 대해서 잊어버릴 것이다. 그대 몸 전체를
잊어버릴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중심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중심(center)과 '중심에 이르는 것(Centering)'과는 다르다.
중심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머리의 중심, 가슴의 중심,
엉덩이의 중심, 그 어떤 부분이라도 중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심에 이르는 것은 오직 한가지, 단전의 중심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 붓다의 앉은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이 양쪽 엉덩이가
균형을 잡은 것이라고는 아마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는 사원이나 절에 가서 마하비라나 붓다가 앉아 있는 조각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엉덩이의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인 줄은 모른다. 그대 역시 그렇게 앉을 수 있는 순간 그대는
단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20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이것 역시 방식만 다를 뿐 같은 이치이다. 그대가 기차를 타고
가거나 혹은 우마차를 타고 갈때 이 방편을 실행해 볼 수 있다.
이 방편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던 그 옛날에 발견된 것이지만
아직도 인도의 시골에서는 여전히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수레가 흔들릴 때 그대의 의식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깨어 있지 않으면 이 방편을 이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보통 수레를 타고 다닐 때 무의식적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움직여지는
힘에 대해서 저항한다는 말이다. 만약 수레가 왼쪽으로
기울면 그대는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수레가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몸이 한쪽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수레를 타고 가면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면 그대는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대가 기차를 타고 갈 때 피로를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왜 그대는 그토록 피곤해 하는가? 그대는 자신도 모르게
많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대는 기차가 흔들리는 방향과 계속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계속 싸우고 있다. 거기에 저항이 있다.
그러므로 저항하지 말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것이 첫번째 요점이다.
그대가 이 방편을 실행하려 한다면 저항하지 말라. 흔들리는 대로
몸이 쏠리는 대로 그저 쏠리고 흔들려라. 수레와 하나가 되라.
어떤 저항도 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이 여행을 해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술취한 사람은 밤새도록 흔들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어도
전혀 피곤함을 못 느낀다. 오히려 아침이 되면 상쾌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밤새도록 버스를 타고 가면 아침에
매우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버스의 움직임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취한 사람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버스의 흔들림과 하나가 되어 있다. 거기엔 싸움이 없다. 저항이 없다.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움직일 때,,, ,,, "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떤 저항도 하지 마라.
그리고 나서 두번째로는 한가지만 하라. 그것은 하나의 율동을 만드는 것이다.
그대의 움직임에서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조화가 되게 하라. 길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길을 탓하지 말고
길을 닦지 않은 정부도 비난하지 말라. 그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려라. 그리고 나서 눈을 감고 그대의 움직임에 박자를
붙여라.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라.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전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 회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그대를 방치하라. 회전을 만들어라.
원을 그려라. 처음에는 그 원을 크게 만들어라. 그리고 나서 그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라. 그 다음에는 그 원을 점점 작게 만들어라.
그대 몸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대 내부에서는 계속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커다란 원에서 시작하라. 눈을 감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그대도 멈추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큰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면 그대가 주저앉을 때에도 계속 머리 속은
돌아가고 있다. 앉아서도 그냥 있지 말고 계속 그 회전을 돌려라.
그 회전의 반경이 작아질수록 그대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무도 그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내부에서는 계속 미세한 회전, 진동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여라.
그리고 그 움직임의 속도를 점점 늦춰라. 그러면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근거로 많은 춤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의 춤은 전부 회전무용들이다. 그들은 회전을
계속하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나중에는 회전이 오직 인식으로만
계속된다. 점점 그 회전의 폭을 적게 만들어서 몸이 동작을 멈춘
뒤에도 마음은 회전을 계속한다.
그대가 20시간 정도 기차를 계속 타면 집에 와서 누워 있어도
기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처럼 회전을 계속하면
몸이 회전을 멈추었을 때에도 마음속에서는 회전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대가 몸을 땅에 던져서 완전히 쓰러지더라도 내부에서는
회전이 계속된다. 그것을 느껴라. 회전은 계속된다.
구제프는 이 회전무용을 개발했다. 그는 금세기에 이르러서
많은 기적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사티야 사이 바바와 같은 기적이 아니다.
사티야 사이 바바의 기적은 거리의 마술사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구제프는 진짜 기적들을 만들어 내었다.
어떤 마술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는 명상 무용을 위해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는 그 춤을 뉴욕 시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무대
위에서 회전무용을 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관중들 역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제프가 갑자기 '스톱!'하고 외치자 일제히 그들은
회전을 멈추었다. 그 스톱은 무용수에게 뿐만 아니라 청중들에게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청중들도 동작을 놘전히 멈추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회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백 명의 무용수들이 한꺼번에 계속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대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춤이 멈추는 순간
그대의 생각도 멈춰 버릴 것이다.
이 일은 뉴욕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공연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생각이 멈추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어느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백 명이나 되는 무용수들이 모두
무대의 맨 앞쪽 끝에 가서 회전을 해 나오고 있었다.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모두 떨어질 판이었다. 모든 청중들은 구제프가 스톱을
외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서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다시 무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용수들은 구제프의 명령이 없자
그대로 춤을 멈추지 않고 일제히 무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높이는 키보다 훨씬 높았고 바닥은 단단한 돌이었기 때문에
관중들은 너무나 놀랐다.
관중들은 너무나 놀라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무용수들이 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무용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구제프에게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높은 데서 돌바닥으로 떨어졌는데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제프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은 떨어지는 순간에 육체 속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내면의 회전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구제프는 그때 떨어져도 그들이 자신들의 육체를 관찰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육체를 관찰할 수 있게 되면, 그래서 거기에
어떤 저항도 없다면 어느 정도의 높이로는 잘 다치지 않는다.
높은데서 떨어져 뼈가 부러지는 것은 저항하기 때문이다. 떨어질 때
그대가 중력에 저항하면 그때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대가
중력과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룬다면 다치지 않는다. 경전은
말하고 있다.
"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그대도 할 수 있다. 수레가 필요없다. 그저 어린아이들처럼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회전해 보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돌아라.
만약 그대가 쓰러진다 해도 걱정할 일은 없다.
쓰러지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다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쓰러져서라도 눈을 감고 있어라. 그대는 계속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심으로 점점 다가가다가 어느 순간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이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한다. 그들은 계속 빙글빙글 돌다가 땅바닥에 쓰러져서
회전의 관성이 주는 느낌을 즐긴다. 그것은 육체는 그대로 있는데
의식은 계속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사리 느낄 수 없는
중심에 이르는 느낌을 어린아이들은 회전을 통해 느낀다.
그들의 육체와 의식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그대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갔을 때 즉시 태어나지 못한다.
거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아기로 태어났을 때에도
의식은 그 육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많은 간격이 있다.
그는 여러가지 것들을 하고 싶어하지만 아직 그의 육체가
준비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신생아들을 관찰해 보면 그들은 두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한쪽 눈으로만 본다. 그들은
항상 한쪽 눈으로만 본다. 그래서 한쪽 눈이 더 크다. 새로 탄생한
의식은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느슨한 상태이다. 그것이
완전히 고정되면 비로소 그들은 두 눈으로 사물을 본다.
명상은 이미 붙어버린 육체와 의식 사이에 하나의 간격을 만드는 것이다.
그대는 너무나 단단하게 그대의 육체에 고정되어 있다.
그때문에 '나는 육체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간격이 생긴다면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며
육체를 초월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몸을 흔드는 것이나
회전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것들은 그대와 의식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 낼 것이다.
다음은 중심에 이르게 하는 아홉번째 방편이다.

21
감로수로 가득 찬 그대 육체의 한 부분을 침으로 천천히
찔러 보라. 그리고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대의 육체는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그대-야말로 감로수인 것이다. 그대의
육체를 관통하라. 그대가 육체를 찔러도 그대는 찔리지 않는다.
오직 육체만이 찔릴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마치 그대 자신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육체만이 찔릴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대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통 대신에 축복을 느낄 것이다.
굳이 바늘로 찔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명상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고통이 그대의 몸 속에서 일어난다. 그때 그대가 할일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육체 전체를 잊어버리고 고통을 느끼는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다리가 아프다고 느끼면 다리에 집중하라. 그러면
다리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무릎이 아픈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또 그 무릎에 집중하라. 그러면 무릎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점이 아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점점 범위를 좁혀 들어가라.
갑자기 그 한 점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것이 그대가 아니라 집중하는 것이 그대이다.
앞은 것은 육체라고 하는 하나의 사물이다.
그대가 고통에 집중할 때 그대와 육체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진다.
그대와 육체 사이에 이어졌던 동일시의 끈이 끊어졌다.
그대가 내면으로 집중해 들어가는 동안 그대의 육체와는 점점 멀어진다.
그 움직임이 하나의 간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고통에 집중할 때 그대는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이제 그대는 관찰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통은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그대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고통스러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간격을 만들어 낸다.
그 간격이 커질 때 그대는 갑자기 육체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대는 오직 의식만을 인식하고 있다.
"육체의 어떤 부분을 침으로 찔러 보라. 그리고 그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만약 거기에 고통이 있다면 그때는 먼저 고통스런 부분에 집중하라.
그러면 그 부분은 침이 들어가는 한 점으로 축소될 것이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대는 침으로 감각이 예민한 육체의 어떤 부분을 찔러라.
몸에는 감각이 예민한 곳도 있고 무딘 곳도 있다. 그리고 아예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 그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침을 주어 그대의 등을 찔러 보게 하라.
그러면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이 바로 감각의 맹점이다. 그대의
뺨에도 그런 곳이 두 군데나 있다.
만약 그대가 인도의 마을들을 여행해 보면
여러번 종교적 축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화살로 뺨을 찔러 관통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뺨을 찔렸는데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그것을 보면서 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뺨에는 두 군데의 감각의 맹점이 있다. 이 맹점은
바늘로 찔러 보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고통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대의 육체에는 감각이 살아 있는 곳도 있고 죽어 있는 곳도 있다.
그래서 먼저는 감각이 예민한 곳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는
그곳을 침으로 찔러 보라. 동시에 찌르는 행위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 되는 부분이다. 침이
그대의 피부 속으로 들어갈 때 주의력을 집중하라.
고통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고통을 느껴라.
그리고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 보라.
고통이 그대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라.
고통과 그대를 퐁일시하지 말라. 침과 함께 몸 속으로 들어가라.
눈을 감아라. 고통을 관찰하라. 고통이 그대 속에 들어올 때
그대 역시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 침 끝이 그대를 찌를 때 그대의
마음은 쉽 게 집중된다. 예리한 침을 사용하라. 강렬한 고통을 이용하라.
그것을 지켜보라. 그것이 바로 '찌르는 행위 속으로 들어
가라'는 말의 뜻이다.
"그러면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되리라."
만약 그대가 관찰할 수 있게 되어 고통이 그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 끝이 그대를 찌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곧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내면의 순수는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와 육체는 별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런 경험을 하면 그대의 삶은 완전히 변한다.
지금까지 그대 삶의 초점은 그대의 육체에 매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가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상 똑같은 삶을 계속
할 수는 없다. 그런 삶은 중심이 없는 삶이었다.
그대가 육체가 아닐 때 그대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낸다. 그런
삶이 바로 산야신, 구도자의 삶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삶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제 그대는 하나의 영혼으로서, '아트만'으로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육체로 존재한다면 그때 그대는 물질과
탐욕, 성적 욕망에 매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육체에
집중된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대가 비밀을 안 이상 그런 삶을 계속 꾸려갈 수는 없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의식에 집중된 삶이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자비가 넘치는 삶이 될 것이다. 그 중심은
육체가 아니라 의식인 것이다.

(질문 )

"만약 깨달음과 삼마디(三味)가 전체 의식, 혹은
우주의식이라면 그때 그것은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주의식이라면 그것은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중심에 이른다'는 것은 한 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왜 중심에 서 있는 상태를 우주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중심에 이르는 것은 하나의 길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이지 결과가 아니다. 삼마디는 중심에 이르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중심에 이르는 것은 삼마디를 얻는 과정이다.
물론 깨달은 사람에게는 중심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모순처럼 보인다.
야콥 뵈메(Jacob Boehme)는 사람이 신성에 이를 때 그 상태가
두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모든 곳이 중심이며
다른 한가지는 아무데도 중심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둘 다 같은 뜻이다. 단지 '중심에 이른다'는 말이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길은 목적이 아니며 수단은 결과가 아니다. 수단은 얼마든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112가지 방편이
중심에 이르는 여러가지 수단이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한번 그대가 중심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폭발할 것이다.
중심에 이르는 것은 그대의 존재 전체를 한 점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한 점에 모아지면 그 점은 결정체로 변한다. 그 결정체는
자동적으로 폭발할 것이다. 그래서 중심에 이른다는 것은
폭발한다는 의미이다.
왜 중심에 이르는 것은 폭발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대가
중심에 이르지 않으면 그대의 에너지는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폭발할 수 없다. 그냥 흩어져서 퍼질 수는 있다.
하지만 폭발할 수는 없다. 폭발은 거대한 에너지의 응집이 필요하다.
폭발은 이제 그대가 더 이상 다른 데로 새어나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대는 한 점에 응축되어 있다. 그대는 영적 핵폭탄이다.
그대가 중심에 이르게 될 때만이 그대는 폭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히 핵폭발인 것이다.
그 폭발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그것에 이르는 방편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결과는 이야기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제대로
방편을 따르면 결과는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폭발 자체를 말로 표현할 길은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기본적으로 종교는 그것의 궁극적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종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방편뿐이다.
그것은 '어떻게-는 표현할 수 있지만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다-는 오직 그대에게만 남아 있다. 만약 그
대가 '어떻게'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이다-는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대만이
알 수 있을 뿐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아무 소용없는 무한(無限)의 경험이다. 그것을 나타낼 만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가 깨달은 후 40년 동안 계속 이렇게 말해 왔다.
"진리에 관해서 나에게 묻지 말라. 열반에 대해서 묻지 말라.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떤 것도 묻지 말라. 내가 말해 줄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길을
보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경험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더구나 언어를 통해서는 더욱 불가능하다. "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그렇지 않다. 방법은
과학적인 것이며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경험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방편을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그 결과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중심에 이르는 것이 되지 않을 때에는
뭔가가 잘못되었다. 어디에선가 그대는 중요한 과정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과정은 과학적이다.
그리고 폭발이 그대에게 일어날 때 그것은 언제나 개인적이며 시적인 것이다.
시적인 표현을 통해 그대가 경험한 것을 그대 나름대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표현이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말은 천차만별이다. 붓다가 어떤 것을 말했고,
마하비라가 그러했으며, 예수나 노자, 마호메트까지
자신의 경험을 나름대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표현에는 어떠한
공통적인 요소도 없다. 오직 한가지 그들이 동의한 것이 있다면
말을 통해서는 전체적인 표현과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력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무한히 애를 썼다. 만약 그대가 깊은 공감대를 갗고 있다면
원가를 전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깊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것이 전달될 때마다
그것은 전달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만약 그대가 깊은 사랑과 존경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것이 그대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다. 첫째로 그것은 표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표현되더라도 그대가 비판적이라면
그때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어떤 교류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 교류는 너무나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112가지 방편 전부가
암시로 일관되어 있는 젓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시바(Shiva)는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것을 하라. 그러면 축복이 일어나리라."
그 다음에는 침묵했다. 축복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축복, 체험, 폭발, 이런 것들은 모두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외냐하면 거의 99퍼센트는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바는 침묵했다.
그는 방법론만 말했다.
그러나 중심에 이르는 것은 끝이 아니다. 그저 길일 뿐이다.
외 중심에 이르게 되면 결국 폭발로 이어지는가?
그것은 거대한 에너지가 한 점에 모아지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몰리는 순간
그 한 점은 에너지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폭발하는 데까지는 과학적이다. 그것은 단순한 과학 법칙이다.
만약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도 중심에
관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외가 없다. 그대가
한 번 중심에 이르면 즉시 폭발이 일어난다. 거기에는 어떤 시간의
간격도 없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폭발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그대는 아직 중심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직도 그대는 여러개의 중심들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그대는
나누어져 있으며, 그대의 에너지는 흩어져 있어 여러 방향으로
새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에너지가 흘러 나가고 나면 그대는 에너지가 텅 빈 상태가 된다.
그것은 그대가 불능상태에 빠진 것이다. 죽음이 그대에게 오기 전에
이미 죽은 상태이다. 죽은 세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외부로 흘려 보내고 있다. 에너지의 양이
얼마나 되든지 그대는 잠시 후에 텅 빈 상태가 될 것이다.
에너지가 흘러 나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대는 매순간 죽어 가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에너지를 외부로 내던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태양도 시간이 지나면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다고 말한다.
4천년 안에 태양은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태양은
자신이 내뿜을 에너지가 더 없게 되면 간단하게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우주를 향해 내뿜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고 변형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모든 것이 죽는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은 불멸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대는 이 모든 것을 한가지 법칙으로 집약시킬 수 있다.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 나간다면 죽음은 그것의 자연스런 결과이며
그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모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오직 천천히 죽어가는 것만을 알 수 있다. 살아 있음의
강렬함을 결코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대는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흘러 들어와
응집되고 폭발하여 변형이 일어나야 한다.
에너지는 그대가 중심에 서 있을 때 흘러 들어을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그대의 중심을 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단전에 있다.
단전은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폭발이 일어난다.
폭발이 일어나면 그대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그대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니다.
다시 전체 속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탄생이 일어났다. 그대는
코스모스와 하나가 된 것이다. 이제 그대는 어떤 중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대는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어떤 에고도 없다.
붓다나 그리스도가 '나' 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그것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다.
그들은 어떤 에고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전체이다.
붓다가 임종을 맞이하는 날, 그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산야신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그래서 붓다가 물었다.
"그대들은 왜 우는가?"
누군가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붓다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40년 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깨달음을
얻는 날 죽었다. 40년 동안 '나'라고 하는 중심이 없었다. 그러니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지금 누가 죽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나'라는 말을 쓰는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들에게 말해 주기 위해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내부로 흐르게 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존재 목적이다. 어떻게 에너지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이 방편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중심에 이르는 것은 삼마디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경험이 아니다.
단지 궁극적인 경험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문이다.
중심이 사라지는 그 순간 삼마디의 체험이 일어난다. 그래서
중심에 이르는 것은 단지 통로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유일한 문이며
유일한 통로이다.
그대는 지금 중심에 이르지 못했다. 그대는 지금 여러개의
중심을 갖고 있다. 진짜로 그대가 중심에 이를 때 그대는 오직 하나의
중심만 갖게 된다. 그때 에너지는 방향을 바꿀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의 귀향(Homecoming)이다. 그때 그대는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면 다시 중심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전처럼 여러개의 중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이제
중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코스모스,
전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이제 그대는 곧 존재계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빙산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 빙산은 자신의 중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다와 분리되어 하나의 개체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바닷물과 빙산이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뉘어진 것이다.
만약 온도만 같다면 빙산은 자동적으로 녹아서
바닷물이 된다. 그러면 더 이상 빙산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그대와 붓다 사이에, 예수와 예수를 죽인 자들 사이에,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 아르쥬나는 빙산이고
크리슈나는 바다이다. 그 본성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르쥬나는 스스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며 고립된 개체라고 생각한다.
이 중심에 이르는 방편들을 통해서 온도가 변하면 빙산은 녹을 것이다.
그때는 오직 바다만이 존재한다. 바다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삼마디이다. 그것은 전체와 하나됨의 느낌이다. 그것은 사념과 다르다.
그대가 중심에 이르기 전에도 얼마든지 삼마디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그대는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 단지 그것에 대해 얻어 들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직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문제는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나야 한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바다만이 있다. 존재는
하나의 방편이며 삼마디는 그 끝이다.
삼마디중에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바는 매우 꽈학적이다.
그는 이야기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는 마치 전보 내용처럼
꼭 필요한 말만 한다. 한 마디도 필요없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삼마디를 표현하는 말은 그저 '경험, 축복, 그것'등이다.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것'은 설명될 수 없다. 그대가
어떤 일상적인 경험도 다른 사람의 설명을 통해서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대가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과일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그 과일에 대한 맛을 설명하면
어떤 맛이라는 기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물론 그대는 이해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대가
직접 그 과일을 맛보면 이전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모든 경험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로 전달될 수 없다. 굳이 말로 표현하게 되면 더욱 혼란스럽게 될 뿐이다.
그런데 현대의 언어분석학자들은 종교란 모두 넌센스라고 한다.
'왜 뭔가를 경험했다면 그 경험을 표현할 수 없는가?라고 묻는다.
그들의 관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종교적 경험은 제쳐두고라도 일상적인
경험마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단지 뜻 없는 수식어만 나열하는
것 뿐이다. 그대는 사과의 맛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사과를 먹어본 사람끼리는 사과의 맛에 대해 서로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둘 중에 한 사람이 먹어 보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떤 설명도 불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어려움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어떤 붓다와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는 오직
불교도와만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불교도와 붓다는 다르다.
예수는 불교도가 아니다. 그는 붓다이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과는 깨달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는 방편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었다.
그대는 장님과 빛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전달해 줄 수 없다. 그는 날 때부터 장님이었기 때문에
빛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한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다.그대는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겠지만 장님은 푸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장님이 아니라도 그렇다. 그대가 푸르다고 하는 경험과
그가 푸르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경험이 어떻게 같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푸른 것에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다. 외부적인 일도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그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경험했다.
하지만 자기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울기도 하고 노래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것이 그에게
뭔가가 일어났다고 하는 표시이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처럼 밖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마치 무슨 열병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 루소는 젊음이
인간의 삶에서 절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젊음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병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은 사랑이 모든
의미를 잃어버릴만큼 충분히 늙은 뒤에라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그대가 지혜롭게 되도록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느낌이다.
사랑을 또 다르게 느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진짜로 현명한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체험의 깊이가 깊을수록 강렬할수록 그는
언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붓다에게 신에 대해서 묻자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신에 대해서 말이 많은 사람은
신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저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말라. 그대들은 다른 모든 것을
물어도 된다. 하지만 신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학자들, 판디트( 힌두교 신학자)들은 신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들은 오직 지식만을 갖고 있다. 그런 그들이 붓다에 대해서
소문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붓다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가 신에 대해 정말로 안다면 왜 아무 말도 안하겠는가?
그러나 붓다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랑에 대해서도 표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신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때 어떤 표현을 해도 그것은 해가 된다. 시바가 경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두번째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된다 해도
그것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탐욕적이어서 어떤 것이
부분적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 부분에 집착해 버린다. 그리고는
마음은 방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그 결과에만
매달린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힘들고 지루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노력이 말이다.
그런데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 그런 결과가 생기기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방편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우리는 결과만 기억하고
그것을 바라고 계속 꿈꾼다. 그리고는 그 결과가 성취되었다고
믿기 시작한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며칠 전에 이곳에 있었다. 그는 아주 나이가 많은
산야신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구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 그는
거의 70살이 되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나는 정말로 알고 싶은 몇가지 물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갑자기 그는 말을 바꾸어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내가
알만한 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그는 계속 상상을 해 왔다. 축복, 신성에 대한 경험,
깨달음 같은 것을 말이다. 이제 그는 노년이 되어 죽음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모든 상상력과 지식을 동원해서 자신의 견해를
정립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경험했다면 그때는 침묵을 지키시오. 나와 잠시 동안만
함께 있어 보시오. 거기에 어떤 말이 필요없기 때문이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안절부절 했다.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고 칩시다. 그러니 나에게
그것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모른다고 치는 것은 있을 수 없소. 당신이 알든지 아니면 모르든지
할 뿐이오. 그 부분에서 분명하시오. 만약 당신이 안다면
그때는 침묵을 지키시오. 그리고 여기에서 잠시만 지내시오.
그런 뒤에 돌아가도 좋소. 그러나 당신이 모른다면 그때는 분명히
모른다고 말하시오. 그것이 그대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오."
그때 그는 당황했다. 사실 그는 나에게 몇가지 방법이나 물어
보러 온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함 브라흐마스미 (나는 브라흐만이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사실 나는 30년 동안
밤낮으로 그것을 생각해왔는데 말입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경험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혼동한다 그대의 지식이 경험이라고
느끼기가 쉽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간교하고 속이기를 잘한다.
그래서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바가 경험에 대해서
말을 해 놓았다면 그때는 모두들 그 설명을 흉내낼 것이다. 하지만
시바가 아무 말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속일 수 없다.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들중의 하나인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바이블도, 베다도, 기타도 이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책이 오직 방편들만을 말하고 있을 뿐, 결과에 집착하는
그대의 탐욕에 어떤 가능성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결과에 집착하기를 원한다. 마음은 방편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마지막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방편을 건너 뛰어 결과에
바로 이를 수 있다면 마음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웬 방편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성자 까비르(Kabi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하지 삼마디 브하리 ? 이것은 저절로 엑스터시가
일어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자연스런 엑스터시가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사하지 삼마디 (자연스런 삼마디)'를 성취했다면
그것은 좋다. 그때는 어떤 방편도 필요없다.
 그런데 왜 그대는 여기에 왔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아직 그 삼마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하지 삼마디'가 좋다고 느낌니다."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왜 그것이 더 좋다고 느끼는가? 혹시 아무런 방편도 필요없이
그저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아닌가?"
선(禪)의 가르침이 서양에서 황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선의 스승들은 아무 노력 없이 성취하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대는 이 점을 놓지지 말라.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경지,
즉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대가 더 이상 어떤 노력도 기울일 수 없을 만큼
많은 노력이 있은 뒤에야 그대는 무위의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했다. 그들은
논리에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깨달을 수 있다는 말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선을 서양에 알린 스즈키는 처음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보냈다. 이 기간이 앞의 기간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그는 매우 진실한 사람이다. 그는 금세기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모든 생애는 오직 선을 서양에
알리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의 노력 덕분에 선은 전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사람들은 선을 통하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것'은 자연스럽 게 꽃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옳다. 하지만 그대가 문제이다. 그대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대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 그대의 마음은
항상 천방지축으로 뛰논다. 그러면서 어떻게 자연스런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는가? 먼저 그대가 자연스럽게 되라. 그대 자신이
먼저 무위의 상태가 되라. 그러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폴 렙스(Paul Reps)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은
'선육선골(Zen Flesh, Zen Bones)'이라는 책이다. 그리고 그
책의 뚜록 편에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112가지 방편들은 '선보다 앞선 것'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자 많은 선의 추종자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은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어 왔고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오직 노력이 필요한 방편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은 노력도 방편도 필요없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선보다 앞선 것' 이 아니라 '선에 반대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 보면 그들이 옳다. 하지만 깊게 들어가면 그들은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다. 자발적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나긴
수행의 여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제프의 수제자인 오스펜스
키(P.D. Ouspensky)는 그 길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 길(道)을 알지 못한다. 단지 그 길에 이르는
몇 발자국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길(道)은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벌써 그대가 그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길조차 그대에게는
아주 멀리 있다. 그대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자면 말이다.
그래서 그대는 먼저 그 길에 당도해야 한다.
오스펜스키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길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스럽게
무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발성, 즉 사하지 요가(sahal Yoga)는 그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대가 아무리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자발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대에게서 어떤 자발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대에게는 사랑조차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 역시 하나의 거래이다. 사랑조차 하나의 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자발적인 폭발을 통해 우주와
하나가 된단 말인가?
먼저 그대는 인위적인 행동, 모든 거짓된 태도, 모든 선입관과
알음알이들을 던져 버려라. 오직 그때만이 자발적인 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무위(無爲)의
상태로 이르게 해 줄 것이다. 단지 그대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상태 말이다. 그런데 마음은 또 속임수를 쓸 수 있다. 마음은 항상
그대를 속일 것이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바는 결과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방편에 대해서만
계속 강조했다. 이점을 이해하라. 그대가 어떤 노력도
필요없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고 선을 좋아한다.
그들은 잘못된 이유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역시 어떤 노력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을 하는 데
어떤 방법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의 말도 옳다. 그러나 시바는 여기에서 112가지의 명상 방편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바 역시 옳다. 만약 그대가 시바와
크리슈나무르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면 그때는 시바를 선택하라.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대에게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다. 그대를 돕는 데 있어서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는 해롭다. 아무리 그와 함께 토론을 많이 해도 그대는 삼마디에
들지 못한다. 그대는 맞지도 않는 결론, 즉 '어떤 방편도 필요 없다.'라는
생각만 더욱 강하게 고집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방편이 필요하다.
방편이 필요없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아직 그 순간은 그대에게
오지 않았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뭔가를 안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시바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그 순간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루티는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쓸데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정확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방편도 필요없다는 것을
사랑에 비유해서 말한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미리 연습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거짓이 된다. 사랑은 미리 연습할 수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명상을 하는 것은 마음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편을 행할 때는 마음이 그것을 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을 이용한단 말인가?
그의 논리는 이처럼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논리를 듣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는 저절로
깨달음의 경험이 찾아오지 않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50년 동안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아직 한 사람도 그가 말하는
조건에 이른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섹스에 대해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계속 뭔가를 말하지만 어린아이는 아무런 의미도 모른다.
그대의 가르침은 오히려 위험스러울 뿐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필요하지도 않는 아이에게 미리 선입관만 심어주기 때문이다.
아이의 육체는 아직 성이 제대로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생물학적으로
성의 중추에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대가 계속
이야기한다면 귀를 갖고 있는 그로서는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가르침은 위험하고 해롭기만 할 뿐이다. 섹스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가 질문을 던져올 때 대답해도 늦지 않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해 주지 말라.
오히려 그의 머리에 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명상의 결과가 아니라 방편에 대해서만 배울 수 있다.
결과에 대해서만 안다는 것은 두 발이 허공 중에 떠있는 것과 같다.
그대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산수를 가르칠 때 그대는 먼저 문제를 푸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 다음에 답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에게
뒷페이지에 답이 있는 것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그러면 아이는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고 답부터 보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미리
답을 아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거기에 있고 그것을 푸는 방편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방편을 통해 답을 알아내어야 한다. 방편도 거치기 전에 미리
답을 아는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만을 갖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단지 관념적으로 이해한 것일 뿐
어떤 축복이나 엑스터시도 없다. 하지만 그대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무지 방편을 통과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그대는 그 축복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시바의 연인인 데비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시바는
오직 방편만을 가르쳐 주었다. 질문이 거기에 있다. 방편도 거기에 있다.
그대는 방편을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중심에 이르는 것은 방편이다. 답이 아니다.
답은 우주의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면 더 이상
어디에도 중심은 없다.

오늘은 이만!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V

금세기 가장 위대한 탄트라 행자인
게오르그 구제프는 '인간의 유일한 죄는 동일시(同一視)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의 방편은 이 동일시에 대한 것이다.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IV

22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 그때 그 상황과 그대의 모습에 집중하고 현재의
모습은 잊어버리면 거기에 초월이 일어나리라.

23
그대 앞에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의 충만한 실재를 느껴라.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오직 그것만이 실재한다고 느껴라. 그리고 나서 그
두가지 느낌,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 그리고 실현시켜라.

24
어떤 사람을 반대하거나 찬성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기분을
그에게 투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중심에 머물게 하라.

금세기 가장 위대한 탄트라 행자인 게오르그 구제프(George Gurdjieff)는
 '인간의 유일한 죄는 동일시 (同一視)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오늘 저녁 답파하게 될 열번째 방편은 이 동일시에 대한 것이다.
동일시란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동일시를 하고 있다. 오직 깨달음에 이른 자만이,
붓다만이 동일시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제프는
인간의 유일한 죄는 동일시라고 힘주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일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대는 한때
어린아이였다. 여기, 어떤 이는 젊고 어떤 이는 늙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모두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의
어린 시절을 이제 볼 수 없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고 자신만이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하나의 꿈이다. 그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꿈으로써 볼 수 있다면, 마치 그대 앞에서 어린 시절의 장면을
담은 영화를 보듯이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과 동일시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는 그대와 보여지는 그대가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그대는 그 속에 들어 있지 않다.
그대는 단지 한사람의 구경꾼이 될 뿐이다.
그대가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내용을 바꿀 수 있는가? 마찬가지다.
그대는 어린 시절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그대와 아무 상관없이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자기
어린 시절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여러가지 일들이 발생한다.
첫째로, 그대가 어린 시절을 하나의 꿈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현재의 상황도 다음날에는 꿈으로 바라볼 것이다.
지금 그대가 젊다면 그대의 젊은 시절은 곧 꿈이 될 것이다.
지금 그대가 늙었다 해도 임종시에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꿈이다. 어린 시절
한때가 그대에게 꿈으로 다가오듯이 말이다.
그래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과거와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면 말이다. 그 속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하나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미래 역시 구경꾼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대가 미래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든지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현재 일어나는
상황 역시 하나의 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 틈바구니가 생겨난다.
그대의 의식이 현재를 구경할 때 분명 의식은 시간의 일부가 아니다.
그대의 의식은 영원이다. 어떤 공간이 거기에 있고
그대는 그것을 마치 꿈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대의 모든 과거는 무엇인가? 거기에 틈이 있다. 공간이 거기에 있다.
과거를 하나의 꿈으로 보라. 이제 그것은 꿈이다.
그대의 과거는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실재인지 꿈인지는
증명하기 어렵다. 증명할 방법이 없다. 기억은 그것이
실재인지 꿈인지 말해줄 수 없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나이가 들면
종종 꿈과 현실을 착각하는 증세가 있다고 말한다.
어린아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항상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모른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꿈속에서 갖고 놀았던 장난감이
제 손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그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잠시 시간이 지나면 그대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안다. 만약 꿈속에서 누군가가 그대를 죽이려 한다면
꿈을 깨어나서도 여전히 가슴이 떨린다. 심장이 마구 뛰고
얼굴이 붉어진다. 아직도 공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어떤
꿈은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다. 그럴 때는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워서야
별일 없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
그대가 과거를 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카라(힌두교 철학자)와 나가르쥬나(불교 철학자)가
이 세상을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현실을 지켜볼 수 있는 그대의 의식을 인식하라는 뜻이다.
분명 그대의 의식은 하나의 방관자로서, 관찰자로서
따로 존재해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해 버린다.
며칠 전에 나는 쟝 쟈크 루소의 '고백록'을 읽었다. 그 책은 매우
보기 드문 책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전부 다 벌거벗긴
최초의 책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는 무엇이든지 완전히 밝혀 놓았다.
그러나 그대가 그의 책을 읽는다면 그는 분명히 그런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열어젖히고 있다. 그는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책의 맨 앞장에 그는 이렇게 써 놓았다.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나는 전능하신 신 앞에 말할 것이다.
당신은 나를 심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루소 이전에는 그 누구도 책에다 자신을 그처럼 진실하게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전능하고 영원하신 신이시여 ! 나의 유일한 소망을 들어주소서.
나는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수많은 대중을 모아 나의
고백을 듣게 하소서."
로크는 아마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상황 전체를 즐기며 의기양양해 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하지 않은 죄가
딱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동일시이다. 그는
죄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가 지은 죄가 무엇이든지 그는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세밀하게 아는 사람에게는 동일시야말로 유일한 죄가 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지성적인 사람들의 모임에 가서 낭독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무척 당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토록 적나라하게 자신의 죄를 책으로 밝힌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식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지겨워했다.
당황한 것은 루소 자신이었다. 그는 뭔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가 낭독을 끝내면
누군가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낭독이 끝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자리를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 자신 말고는 그대의 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그대의 선행에 관심이 없듯이 그대의 죄에도 관심이 없다.
인간은 그의 선행뿐만 아니라 죄악을 통해서도 에고를 강화시킨다.
죄를 지어 놓고 스스로 대견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자신을 성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이 할 수 없는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죄는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행위이다.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지 꿈과 같다. 그대가 그것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그것과 동일시를 끊어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축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동일시는 불행이다.
비동일시는 축복이다. 이 열번째 방편은 동일시에 관한 것이다.

22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 그때 그 상황과 그대의 모습에 집중하고
현재의 모습은 잊어버리면 거기에 초월이 일어나리라.

그대는 그대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사랑의 추억,
부모의 죽음, 그대의 기억이 뚜렷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좋다.
그것을 바라보라. 그러나 그 속에 개입하지는 말라.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회상하듯이 회상하라. 그대의 과거를 영화 보듯이 보라.
만약 그대가 첫사랑의 추억을 회상한다면 그때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그대 모습으로 말이다. 그대는
다른 식으로 기억할 수 없다. 그대의 과거 모습을 거기에서
분리할 수 없다. 마치 다른 한 쌍의 연인이 사랑을 하는 것처렁 바라보라.
그저 구경꾼처럼 말이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방편이다. 특히 붓다가 많이 사용한 방편이다.
이 방편에는 많은 유형들이 있다. 그대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 방편에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대가 잠에 떨어지기 전
그날의 기억을 역순으로 더듬어 나간다. 그러면 하루의 일과를
모두 기억하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 있었던 일까지 더듬어 간다.
그때 그대는 거기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들어 오후에 누군가가 그대에게 욕을 했다. 그대 자신을 보라.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그대는 어디까지나 구경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화를 내면 그때 그대는 동일시한 것이 된다. 그대는 명상의 요점을
놓쳐 버렸다. 화를 내지 말라. 그는 그대를 보고 욕을 한 것이 아니다.
오후의 그대 모습에 대해서 욕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그대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대라고 하는 고정된 틀이
없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대는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낮에 있었던 일을
밤에 회상할 때 이미 그대는 하나의 방관자로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화내지 말라. 누가 그대를 칭찬해도 즐거워하지 말라.
마치 영화를 보듯이 그냥 보라. 매일 밤 이렇게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불면증이나 악몽을 꾸는 사람에게는
더욱 좋다.
불면증, 몽유병, 그리고 악몽에 시달리는 이유는 그대의 마음이
늘어질 대로 늘어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대는 탄력성 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탄력성을 잃어버렸다. 잠자리에 들어서
잠을 자기 전에 하루의 일을 되새겨 보라. 그러면 다시금 그대의 마음은
탄력성을 되찾을 것이고, 그대는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처럼 깊이 잠들 수 있게 된다.
그대는 이 회상법으로 생애 전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마하비라는 이 회상법을 사용해서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미국에서는 이 회상법을 '심리요법 (Dianetics)'이라고 부르는데
하나의 정신 운동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그들은 그대가 만일 병이 나면
그 병은 그대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들의 말은 옳다.
그대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 나가다 보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들이 숨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풀어주면 그대의 병은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많은 성공적인 사례로 증명된 바가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특수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어떤
의약적 요법도 도움이 되지 않고 병은 계속 진행된다.
 병은 심리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는가?
심리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환자는 절망감을 느낄 뿐이다.
이런 병에는 위와 같은 회상법이 기적적인 효과를 갖고 있다.
만약 그대가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마음은
이 병이 일어난 처음 순간에 이르게 된다. 거기에는 분명히 심리적인 충격이나
상처가 관계되어 있다.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거품처럼 피어오른다.
그때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것을 인식하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많은 질병들이 단지 열등감이 해소되는 것만으로 말끔히  사라진다.
그대가 열등감의 본질을 한 번만 인식해도
그것은 깨끗해진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을
깨끗이 한 것이다.
이것은 깊은 카타르시스이다. 매일 그대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대는 새로운 건강을 느낄 것이다. 그대가 이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면
그들은 과거 때문에 짐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굳이 과거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들은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그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매일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 지나간 하루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해줄 것이다. 마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의 차례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때는 아무것도 풀어야 할 문제거리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은 더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시간 순서대로 나아가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인도에는 스승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아침부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신을 성찰하라고 한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상당한 해가 된다. 그때는 모든 상황이
덫으로, 함정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라. 저녁부터
아침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라.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모든 것을
깨끗이 해결할 수 있다. 그대는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녁의 일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아침으로 건너뛰지 말라.
그냥 하나의 흐름처럼 천천히 거슬러 가라.
그대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훈련시킬 수 있다. 100부터 1까지
역순으로 세어 보라. 99, 98, 97,,,,... 계속해 보라. 처음에는 약간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마음은 항상 1부터 100까지 세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대는 이 방편을 실행해 보라.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가보라. 그때는 마음의 문제들이
그대 앞에서 자취를 드러낼 것이며 그대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일 반복되어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지켜볼 수 있게 되면 굳이 저녁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지켜보라.
어떤 사람이 그대를 욕하고 있다. 그런데 뭐가 어려운 점인가?
그대는 자신을 이 상황에서 잠깐 분리시켜 보라. 그리고 옆으로
비켜서서 그가 그대를 욕하고 있는 장면을 구경해 보라. 그대는
그에게 모욕을 당하는 그대의 마음이나 몸과는 별개로 존재한다.
그대는 그 상황을 구경할 수 있다. 지켜볼 수 있다. 지켜봄이 없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분노는 그대가 동일시하고 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동일시하지 않으면
화가 날 수 없다. 분노는 바로 동일시를 의미한다.
이 방편은 과거의 어떤 일을 지켜보라고 말한다. 그대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경전에서는 '그대'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결코 거기에 없다. 항상 개입되는 것은 그대의 모습이다.
그대는 결코 개입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라.
그대가 나를 욕할 때 그대는 나의 존재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모습, 나의 껌질을 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껍질에서 나를 분리시킬 수 있다.
그대의 이름도 그대가 아니고, 그대의 모습도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이름과 모습을 인식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은 다르다.
그것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그토록 극명한 인식에 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먼저 과거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라. 그때는 어렵지 않다.
과거의 일은 급박함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20년 전에 그대를 욕했다.
그래서 거기엔 아무런 급박함이 없다. 그는 죽었을지도 모르고
모든 것이 끝났다. 그것은 이제 소설 같은 일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를 지켜보는 일이 쉬운 것이다. 그대가 한번만 그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현재 벌어지는 상황도 지켜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현재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는 급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유 공간이 너무 없다.
그대는 즉시 모든 사건에 대처해야 한다. 동시에 그와 멀리
떨어져 지켜봐야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고 말한다.
우선 과거를 회상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대의 모습을 구경하라.
지켜보라. 그 속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이 홀로 존재하는
의식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 초월이 일어나리라.
그대는 이것을 통해 변형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육체, 마음, 시간
속에서의 그대 존재, 이 모두가 그대의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대의 본질적인 실체는 다르다. 모든 일이 벌어지지만 그대의
실체는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한 의식으로 남아 있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질병과 노화, 탄생과 죽음,
그 모든 일들이 왔다가 지나가지만 그대는 결코 변치 않는 순수한 의식이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영향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 속에 있다는 이 실체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 방편의 목적이다. 과거에 대해서 시작하라.
그대가 과거를 볼 수 있을 때 거기에 간격이 생겨난다. 과거의 그대 모습과
그것을 지켜보는 그대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리고 미래를 보라.
미래는 조금 어렵다. 오직 몇몇 사람에게만 미래를 지켜보는 일이 쉽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과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미래를 지켜보는 것이 좋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에게는 죽음 외에 미래가 없다. 그들은 미래를 들여다볼 수 없다.
그들은 미래가 두렵다. 그래서 노인들은 항상 과거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들은 항상 추억만을 더듬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정해서 그때부터 시간을 따라 현재로 향해 온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슬픔과 분노와 한을 되씬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매일 앉아서 과거를 거슬러 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씻겨져 나간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죽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그대가 의식적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때 죽음은
더 이상 그대에게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없음, 불멸과 만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과거의 깊은 잔재들을 깨끗이 없애 버려라. 그대의 존재는 변형될 것이다.
이 방편은 어렵지 않다. 오직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고질적인 난관 같은 것이 이 방편에는 없다.
당장 오늘 저녁 잠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시간을 거슬러 아침까지 가보라.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더듬어 가라. 그대가
무의식적으로 보고 들은 일도 마음은 모두 기록해 놓았다.
낮에 그대가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노래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대는 무슨 노래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마음은
그 가사를 듣고 기록해 두었다.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불필요한 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저녁에 누워 하루를 회상해 가다가 그 시점에 이르면
그 노랫말이 들려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 기억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가사가 공허한 사념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아주 천천히
더듬어 가라. 세밀한 것들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더듬어 보라.
그대의 하루가 얼마나 길었던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모든 정보를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방편을 수행해 나가면 그대는 점차로 기록된 것은 모두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대가 한번 회상을 시작하면
그것은 녹음기를 돌리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깨끗하게 지워져 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대는 잠이 들게 될 것이다. 그 잠의 질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그때 잠은 명상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대가 잠을 깨면 곧바로 눈을 뜨지 말라. 다시 그 순간부터
어젯밤으로 거슬러 가보라.
처음에는 좀 어려울 것이다. 그대는 조금밖에 올라가지 못한다.
잠이 깨기 전 꿈의 몇 장면들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그대는 완전히 꿈마저 꿰뚫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3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3개월이면
그대는 잠을 완전히 관통해 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잠의 성질이
완전히 바뀐다. 그때 그대는 꿈이 필요 없다. 낮과 밤을 모두
더듬어서 되새길 수 있게 되면 더 이상꿈이 필요 없다. 꿈이란
낮에 그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마음이 밤에 해결하는 것이다.
사실 심리학자들은 이제 꿈은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그대가
잠이 들기 전에 미리 카타르시스를 하고 나면 꿈을 꿀 이유가 없다.
마음에 접수된 것은 한번쯤 충족이 되어야 한다. 꿈속에서라도 말이다.
그대는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 그 집에서 살고싶은
미묘한 욕망이 그 순간 그대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대는
바쁜 업무 때문에 곧 잊어버린다. 백일몽을 꿀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시
연기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대는 그 집에 살게 되는 꿈을 꾼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충족된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꿈이 수면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다. 꿈은 그대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은 그대의 수면을 돕는다. 꿈 없이 그대는 전혀
잠을 잘 수 없다. 꿈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대의 능력으로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욕망들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어리석은 욕망을 계속 갖고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그것은 생각 속에 남아 있다가 꿈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대는 굉장한 미녀를 보았다. 그대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미녀는 그대 같은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 그대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결국 꿈으로
해결해야 한다.
꿈속에선 그대도 그런 미녀를 소유할 수 있다. 그때 마음은 충족되었다.
마음은 꿈과 현실을 따지지 않는다. 마음에 관한 한
거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미녀를 현실에서 사랑하는 것과 꿈속에서
사랑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 꿈은 더 좋다. 미녀가 순순히
그대의 말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꿈이다. 그대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대밖에 없다.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이다.
마음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이라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어떤 장소에서 일년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면
그대는 일년 동안 계속 꿈을 꿀 것이다. 그때는 꿈이 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마음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백년 동안만 혼수상태에 둘 수 있다면
그는 백년 동안 꿈을 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면 그는 자신의 삶이 단지 꿈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의 삶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마음에게는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이다.
그대가 이 방편을 수행한다면 그때는 꿈이 필요 없게 된다.
그리고 순면의 질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꿈이 없으면 그대는
바로 존재의 심연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꿈이 없으면
그대는 수면 속에서도 깨어 있을 수 있다.
크리슈나가 바가바드 기타에서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요가 수행자는 깨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요가 수행자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도 역시 잠을 잔다. 그러나 그의 잠은 성질이 다르다.
그대의 잠은 무의식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잠이다.
그러나 요가 수행자의 잠은 무의식이 없는 필은 이완일 뿐이다. 그의 몸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전체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다.
이 방편을 오늘 밤부터 실행하라. 그리고 아침에도 해보라.
그대가 어느정도 이 방편에 숙달되면 일주일 치의 과거를 주말에
회상할 수 있다. 그때는 한적한 장소가 좋다. 하루 휴가를 내어
한적한 교외로 나가라. 나무 아래나 해변에 누워 태양과 모래를 느끼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라. 그리고 일주일 치에서 멈추지 말고
계속 그대의 과거 전부를 회상해 보라. 그대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마지막 것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말라.
그대는 놀랄 것이다. 평소에 그대는 4,5세 때까지의 기억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그대는 망각의 장벽을 뚫고 들어간다. 그대는 이 방편을 통해 점점
장벽을 뚫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태어나는 날까지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모래와 태양의 현실 속으로 돌아오라.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좀더 노력한다면 자궁의
장벽까지 뛰어넘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보낸 9개월 간의 기억도 회상할 수 있다. 그것 역시 마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대의 어머니가 침울할 때 그대 역시 침울함을 느꼈다.
그대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모두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화가 나면 그대 역시 화가 났다.
그녀가 행복할 때 그대 역시 행복했다. 그녀가 칭찬을 받으면
그대 역시 우쭐해졌다. 그녀가 아프면 그대는 고통을 느꼈다.
그대 역시 우쭐해졌다. 그녀가 아프면 그대는 고통을 느꼈다.
그대의 기억이 자궁 속에 있었을 때까지 꿰뚫을 수 있다면
이제 그대는 제대로 들어섰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자궁에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도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오직 이 기억 때문에 마하비라와 붓다는 전생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환생이란 하나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심리적 체험이다.
만약 그대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오기 전의 순간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더 많은
과거의 전생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그 방법에 익숙해지면
그대는 쉽게 다른 전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경험이다. 나는 지금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방편을 충실히 수행하면 점차 그대는 수많은
전생을 알게 될 것이고, 지금도 과거와 똑같이 넌센스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양식을 반복하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인가? 그대는 이제
자각해야 한다. 모든 것이 꿈이란 것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똑같은
전철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욕망이란 과거가 미래로 투사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에
욕망은 멈추게 된다. 욕망이란 그대의 과거 경험을 또 다시
반복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상황 전체를 알지 못하는 한
그대는 욕망을 떠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과거는 거대한 장벽, 바위 장벽으로 거기에 있다. 그대의 머리 위에 있다.
오직 그대를 미래로만 향하게 밀고 있다. 욕망은 과거에 의해
만들어지고 미래 속으로 투사된다. 만약 그대가 과거를
꿈으로 알 수 있다면 모든 욕망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낙엽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미래도 사라져 버린다.
그때 그대는 초월하게 된다.

23
그대 앞에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의 충만한 실재를 느껴라.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오직 그것만이 실재한다고 느껴라.
그리고 나서 그 두 가지 느낌,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 그리고 실현시켜라.

그대 앞에 하나의 대상이 있다. 예를 들면 장미꽃 한 송이가 있다.
무엇이든지 좋다. 우선 그것을 느껴라. 그대는 한 송이의
장미꽃을 본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흐느끼거나 울부짖을 것이다.
 혹은 웃거나 춤출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단지 보고만 있을 뿐이다.
보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대는 결코 완전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은 말한다. 이것은 장미다. 그대는
그냥 지나친다. 그대는 그것을 진정하게 본 적이 없다. 마음은
그것이 장미라고 말해준다. 그대는 장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
그래서 그대는 장미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 장미에 대해 과거의
기억만 떠올리면 굳이 현재 존재해 있는 장미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보는 것조차 완전하지 않다.
장미와 함께 남아 있으라.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껴라.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 보라.
그리고 만져 보고, 뺨에 대어 보라. 가슴에 대어 보라. 장미를
느껴 보라.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온 세상을 잊어버려라.
그대 앞에 있는 장미만이 존재한다고 느껴라. 아직도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다면 장미를 철저하게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오직 장미, 장미, 장미밖에 없다.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오직
장미꽃 한 송이만 남겨 두라. 장미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라.
이것은 우리가 예민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들은 쉽게 그것을 느낄 것이다.
남자들은 시인이나 예술가처럼 심미적인 감각이 없다면 좀 어렵다.
그러나 해보라. 아이들 또한 매우 쉽게 할 수 있다.
나는 이 방편을 내 친구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매우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그에게 장미 한 송이를 주면서 지금 한 말을
그대로 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내 말대로 했고 깊이 들어가서 즐겼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느끼고 있니?"
그가 말했다.
"나는 이제 장미꽃이 되었어요."
바로 그 느낌이다. 아이들은 매우 쉽게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절대로 훈련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가장 뛰어난 명상가들이 될 수 있었다.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오직 그것만을 느껴라.
이것이 사랑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대는 온 세상을 잊어버린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거기에 있다.
내가 사랑이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대는 이 방편을 사랑의 기술로 사용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며칠 전에 한 친구가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그의 아내는 어떤 것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온 것이다. 그 친구가
말했다.
"저는 일년 간 명상을 해왔는데 이제는 제법 깊이 들어감니다.
그런데 저는 명상의 절정에 이르면 갑자기 '라즈니쉬, 라즈니쉬,
라즈니쉬' 하고 외치는 것이 제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아내와 사랑을
한창 나누다가 절정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라즈니쉬, 라즈니쉬,
라즈니쉬' 하고 외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제 마누라는 산통이
다 깨진다고 불평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나와 사랑을 하는 거예요? 아니면 명상을 하는 거예효?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왜 라즈니쉬른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상당히 어렵게 됐습니다. 그렇게 외치지 않으면
절정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누라는 그 말만 들으면
김이 샌다며 마구 바가지를 긁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그의 아내가 불평하는 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이 프라이버시를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은 절대적인 프라이버시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그룹 섹스가 성행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많은 커플들이 한 방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넌센스이다. 그때는 사랑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섹스의 향연일 뿐이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장벽이 된다. 그것은 결코 명상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어떤 대상과도, 장미꽃이나 바위와도 그대가 깊은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을 잊어버린다. 그때 조건은 그 대상만이 현존하고
다른 대상들은 모두 사라지도록 느끼는 것이다. 그대가 자연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그것은 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대가 돌이나 바위를 두고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선사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명상을 위해 정원에 바위를 갔다 놓았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돌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그들은 돌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돌과 사랑에 빠지면 그때는 사람이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사랑에 빠진 그 대상마저도 떠나야 한다. 경전에서는
부재감과 실재감 둘 다 떠나라고 말한다. 오직 이 바위,
이 장미꽃, 이 여자, 이 남자만이 존재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이것마저 떠나게 되면 갑자기 그대는 텅 빈 허공 속에 떨어진다.
 그리고 시바가 말한 '실현하라'는 말은
이 허공(虛空)을 실현하라는 뜻이다. 이 무(無)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본질이며 순수한 존재이다.
무(無) 나 공(空)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그대는 하나의 대상을 통해서 접근하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속에
하나의 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에만 몰입하라.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그대의 의식이 오직 하나의 대상으로만 가득 차게 될 때
그것마저 떠나라. 그것마저 잊어버려라.
그대는 심연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어떤 대상도 말이다. 오직 그대라는 주체만이 있다.
깨끗하고 물들지 않은 순수한 존재만이 있다. 그것은 순수 의식이며
그대의 본질, 그대의 실체이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몇가지 단계를 퍼쳐야 한다. 그것은 실재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첫째 실재감을 완전히 느끼는 데는 며칠 아니면 몇주가 걸릴 것이다.
그때 한가지 대상을 정해놓고 그것에 대해 계속 집중하라.
대상을 바꾸지 말라. 처음 정한 대상을 끝까지 집중하라.
만약 그대가 장미꽃을 정했다면 끝까지 장미꽃만을 집중의 대상으로 삼아라.
그리고 매일 아침 '나는 이제 장미꽃이다'라고 말하라.
이렇게 해서 며칠이 지나면 그대는 점점 장미꽃에 밀착된다.
그러면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장미꽃만 생각해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때 갑자기 오직 장미꽃만 남고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온 세상이 사라진다. 이것이 첫 단계이다.
아마 그대도 우연히 이 단계를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대가 좋아하는
물건이나 애완동물, 아니면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 둘째 단계로 넘어가라. 눈을 감고 장미꽃에 대해서 잊어버려라.
만약 그대가 첫 단계를 확실히 거쳤다면 둘째 단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장미꽃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무(無)를 위해서 장미꽃을 잊을 수 있다.
첫째 단계는 그대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음은 항상
조급하기 마련이다. 그대가 첫째 단계를 연습할 때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 이것은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이것은 준비에 불과하다.
빨리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라.' 하지만 첫째 단계를 확실하게
거치지 않으면 둘째 단계는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첫단계를 완성하라. 그리고 나서 둘째 단계로 넘어가라. 그러면
대상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로직 그대의 의식만이 빛처럼, 순수한
불꽃처럼 남아 있다.
그대는 등잔을 갖고 있다. 그 등잔의 불빛이
여러가지 사물에 비추어져서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대의 방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많지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대의 등잔이 빛을 발하면 모든 것이 보인다. 이제 그 사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나면 오직 빛만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방편을 통해서 마지막에 남게 되는 그대의 의식이다.
그대의 의식은 빛이며 불꽃이다. 이 세상은 방안의 사물이다.
그대는 먼저 하나의 대상을 골라 집중하라.
그러면 다른 물건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남은 대상마저 버려라.
 그러면 갑자기 의식만이 남게 될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니르바나' 라고 불렀고, 마하비라는 '카이발리아' 라고 불렀다.
우파니샤드는 그것을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시바는 이 한가지 방편만을 수행할 수 있어도
지고의 존재를 실현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24
어떤 사람을 반대하거나 찬성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기분을 그에게 투사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중심에 머물러 있게 하라.

만약 누군가에 대해 증오나 반대 감정이 일어나면,
혹은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면 그때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그 감정을
그 사람에게 투사한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증오를 느낀다면
그대는 증오의 감정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나는 그대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 그대는 사랑이든 미움이든 무슨 감정이든지
나에게 투사한다. 하지만 경전에서는 말한다. 그대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말라고 말이다.
기억하라. 그대는 그런 감정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 내가 그대를 사랑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그대가
내 사랑의 원천이라고 느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혀 반대이다.
내 감정의 뭔천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대는 그저 영사막에 불과할 뿐이다.
내 감정을 투사하는 스크린인 것이다. 그대는 사랑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면서
'당신이야말로 내 사랑의 원천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허구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사랑 에너지를 끌어올려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때 상대방은 그대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만약 그대 사랑의 근원이
그대의 연인에게 있다면 그때는 그대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대의 연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대의 연인을 쳐다보고 반하는 사람은
그대 외에 아무도 없다. 이게 무슨 일인가? 결국 그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그대의 감정을 투사하고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밀월'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 달은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 그 달빛을 받은 온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놀라운 밤이다.
기적적인 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에게만 그러하다.
이웃집 사람에게 물어보라. 달이 그토록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말이다.
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대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달은 그저 그대의 감정이 투사되는 영사막일 뿐이다.
경전에서는 말한다. 그대가 어떤 기분을 느낄 때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말라고, 오직 그대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거기에
머무르라고 말이다. 기억하라. 그대 자신이 그 감정의 원천이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근원으로 가라. 그대가 증오를 느낄 때
대상으로 눈길을 던지지 말라. 증오가 생겨나는 그 점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그대속에 있다. 그대의 증오나 사랑, 분노 등의 감정을
근원에 이르는 내면의 여행으로 삼아라.
이것은 매우 과학적인 심리요법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욕한다.
분노가 갑자기 폭발한다. 그대는 흥분해 있다. 분노는 그대를
욕한 사람에게 흘러간다. 이제 그대는 그에게 분노를 투사한 것이다.
물론 그가 먼저 자신의 감정을 그대에게 투사한 것이다.
그래서 그대속에 있는 분노의 감정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분노는 그대의 것이다.
만약 그가 붓다에게 가서 욕을 한다면
그는 붓다에게서 아무런 분노도 촉발시키지 못한다. 만약 예수에게 간다면
예수는 그에게 다른 뺨을 내어 줄 것이다. 만약 달마대사에게 간다면
큰소리로 웃어젖힐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근원이 아니다. 근원은 언제나 그대속에 있다.
타인은 그 근원에 자극을 줄 뿐이다. 그대가 화내지 않으면 화가날 수 없다.
붓다를 때려보라. 붓다에게서는 오직 자비심만이 나올 것이다.
분노가 나올 수 없다. 분노는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물이 가득 찬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퍼 올리면 물이 담겨 나온다.
두레박은 단지 물을 퍼 올리는 역할만 할 뿐이다. 두레박이 물의 근원은 아니다.
타인의 욕이 분노의 근원이 아니다.
그대속에 가득 찬 것이 그의 욕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일 뿐이다.
이 방편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모든 감정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반대나 증오의 감정이 생길 때 즉시 그대의
중심으로 향하라. 상대방은 그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때 그대는 외부로 향할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감정의 근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감정이 그 근원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대가 화를 내려는 순간
그것이 기회이다. 그때 그 근원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외냐하면 그대가 화를 내는 순간 그대는 뜨겁다. 열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뜨거운 통로를 따라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시원한 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갑자기 전혀 다른 차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 앞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분노를 사용하라.
증오를 사용하라. 그리하여 내면으로 들어가라.
우리는 항상 타인을 탓하며 감정을 외부로만 투사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근원도 없다. 결국 공허함을 느끼고 좌절한다.
우리는 분노했을 때 사물을 인격체처럼 대한다. 미운 사람의
모두를 집어 던진다.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문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을 보았다. 문을 세게 밀치고 닫으며 문을 꾸짖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장자(莊子)에 나오는 아름다운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장가는 강에서 홀로 나룻배를 타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어느날 그는 여느 때처럼 눈을 감고 배 위에 앉아서 한참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배가 그의 배를 부딪쳐 왔다. 장자는 화가 불쑥 치밀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다. 내가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배에 일부러 충돌한단 말인가?"
그는 화를 내면서 눈을 떴다. 그리고 배를 보면서 막 소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배는 비어 있었다. 아무도 타지 않은 빈 배였다.
그저 강물을 타고 그냥 떠내려 온 것이다.
순간 장자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대가 빈 배를 향해 화를 낸다면 그대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다.
후에 장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을 감았다. 분노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분노와 함께
그냥 떠내려갔다. 그리하여 빈 배 때문에 나는 근원에 이를 수가 있었다.
캄캄한 밤중을 헤매던 나는 내면의 빛에 도달하게 되었다.
빈 배는 나의 깨달음이 되었다. 나의 스승이 되었다.
이제 어떤 사람이 나를 욕한다면 나는 웃을 것이다. 나는 그 배는
빈 배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방편을 이용하라. 그대에게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질문 )

"당신께서 강의하신 마지막 방편에서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신의 분노나 증오감을
억누른다고 느껴집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방출과 억압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들은 서로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감정을 방출하는 것이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둘 다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어 있다.
그대는 화가 난다. 그대는 화를 억누른다. 혹은 그대는 화를 방출한다.
다시 그대는 화를 억누른다. 그러나 화는 그것을 방출하거나
억누르는 것에 관계없이 이미 상대방에게 투사한 것이다.
이 방편은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방편은 방출이나
억압의 본질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이 방편은 타인에게 감정을
투사하지 말라고 말한다. 방출을 하거나 억압을 하거나 감정의
원천은 그대에게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감정이 발생하는 곳이
어딘지를 아는 것이다. 그대는 감정이 일어나는 원천을 찾아서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대가 감정을 억누를 때 그것은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방출하려는 마음과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는 이미 머리 끝까지 올라가 있다. 보통 여기서
두가지를 할 수 있다. 이것을 억누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퍼붓든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두 방식 모두가 원천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표면으로 향해 있다.
이 방편은 타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대의
분노 에너지가 일어나고, 원천을 찾아 다시 그대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분노에 대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
기억하라.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그대가 분노에 대해서
뭔가를 한 것이다. 억압 역시 분노에 대해서 뭔가를 했다.
분노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것을 붙잡지 말라. 단지 하나의
길로 사용하라. 분노를 따라 들어가면 분노가 나온 원천에 이를 것이다.
그대가 그 원천을 발견하는 순간 중심에 이르는 것은 매우 쉽다.
따라서 분노는 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천을 찾는 길이 되는 것이다.
다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억압하면 그때는 원천을 찾을 수가 없다. 잠시 동안은 억압이
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그것은 폭발할 것이다. 터져 나오는
에너지와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대는 'A'라고 방출하지 않고
'B'나 'C'로 방출할 수도 있다. 그대보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그대는 힘으로 방출할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방출하지 않는 한
그대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계속 중압감을 느낀다.
언제까지나 억압할 수는 없다. 결국 그대는 그것을 어디에선가
방출시켜 버린다. 억압은 방출을 연기한 것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상사에게 화가 난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경제적이지 못하다. 그대는 참아야 한다.
그대의 아내나 아이들에게 풀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그대는 트집을 잡아야 한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를 낼 이유를 잡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이제 그대는 화를 방출시킬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화를 낸다.
억압은 미루는 것일 뿐이다. 그대는 몇달 혹은 몇년을 연기시킬 수 있다.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몇 생애를 연기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방편은 억압이나 방출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방편은 그대의 기분, 그대의 에너지, 그대의 감정을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잡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잘 사용했다. 그는 먼저 그대가 화를 내도록
상황을 만든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앉아 있다. 그러면 그대가
들어간다. 그대는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를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대가
하는 말에 조소를 보내고 그대에게 모욕감을 준다. 그러면 그대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구제프는 그대의 상왐을 면밀하게 주시하다가
화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을 감아라. 그대의 분노를 인식하라. 내면으로 들어가라."
바로 그때 그대는 이 모든 상황이 미리 계획된 것임을 깨닫는다.
아무도 그대를 모욕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한 편의
연극일 뿐이다. 싸이코 드라마인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일어난다.
그대는 전모를 알았지만 에너지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원천으로 떨어지는 에너지와 함께 내려갈 수 있다.
이 에너지는 그대로 하여금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명상의 가장 성공적인 방법 중의 하나다.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라. 어떤 감정이라도 좋다. 그때 그대는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리고 어떤 것도 억압하지 않는다.
그대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에너지를 타고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모든 에너지는 원천에서 올라온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을 길잡이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원천에 이르게 될 때 에너지는
원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억압이 아니다. 에너지는
본래의 원천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에너지의 마스터가 되었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을 것이다.
한번 그 원리를 알게 되면 어떤 억압이나 방출도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에 그대는 화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대는 화를 낸다. 그때 이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조금 전에는 그대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에너지는 그대 안에 있다.
이 에너지가 다시 원천으로 내려갈 수 있다면 그대 역시
조금 전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에너지는 중립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도
미움도 분노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에너지일 뿐이다.
같은 에너지가 분노도 되고 섹스도 되며 사랑도 된다. 같은 에너지에 다른
모양을 준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가 깊은 사랑에 빠지면 분노로 방출될
에너지가 없다. 그대가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분노로
방출될 에너지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그대는 화를 낼 상황을
찾아 혜매게 된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섹스를 통해서 방출된다면
그대는 덜 폭력적으로 변한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섹스를 통해
방출되지 않으면 그때는 그대가 폭력적으로 변할 것이다.
섹스로 흘러갈 에너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병사들에게 섹스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은 매우 폭력적이다.
만약 병사들에게 섹스를 허용한다면 그 군대는 싸울 힘이 없어지고 만다.
정신 문명이 발달한 나라는 야만적인 나라와의 전쟁에서 반듯이
질 수밖에 없다. 야만적인 나라에서는 에너지를 전쟁 말고는
발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모든 사람의 성적 욕구가 충족되어 있다. 그들은 싸움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그때는 섹스의
자유를 부르짖어라. 만약 전쟁을 원한다면 섹스를 엄격하게 금지하라.
성을 억압하라.
그래서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소위 성자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계속 세계 평화를 부르짖고 있다. 동시에 섹스를
반대하는 이야기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금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계 평화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넌센스이다. 차라리 히피들의 말이 훨씬 옳다.
그들의 표어는 '사랑은 자유롭게, 전쟁은 원치 않는다'이다.
그대가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전쟁을 할 수가 없다.
성을 억압하는 수행자들이 그토록 폭력적이고 과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 화를 잘 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에너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원천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브라흐마차리아는 없다. 진정한 독신 수행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대는 섹스를 억누를 수는 있다.
그때 에너지는 폭력적으로 변할 것이다. 만약 섹스 에너지가
원천으로 돌아가면 그대는 어린아이같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도 섹스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대보다 더 풍부하다.
그러나 그것은 원천 속에 있다. 그것은 아직 육체로 이동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모든 호르몬 샘이 성숙되어지면
그때 섹스 에너지가 이동할 것이다. 왜 어린아이들이 순수하게 보이는가?
에너지가 아직 원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에너지가 근원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다.
신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면
그대의 에너지가 원천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그대가 에너지를
방출하면 그것은 외부로 떠다닌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통로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통로로 계속 에너지를 방출한다. 만약 억압하면
그때에도 에너지는 원천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어중간한 상태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하고 있는 에너지는 하나의 짐이 된다.
그래서 그대가 에너지를 방출하고 나면 개운함을 느낀다.
그대가 섹스를 통해 에너지를 방출하면 쾌감을 느긴다. 그대가 뭔가를
부수면 증오의 감정이 사라진다. 왜인가? 대기하고 있는 에너지는
짐스럽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뭔가에 짓눌린 듯하다.
그것을 원천으로 돌리든지 외부로 방출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
이 두가지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만약 그것이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그것은 녹아 사라진다.
에너지가 원천에 있을 때에는 형태가 없다. 예를 들어 전기 자체는
형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하나의 메커니즘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수천 가지 형태를
띠게 된다.
분노도 하나의 메커니즘이고 섹스도 그러하다.
 사랑도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증오도 물론 그렇다.
에너지가 증오의 통로로 들어오면 그것은 증오가 된다.
같은 에너지가 사랑의 통로로 들어오면 그것은 사랑이 된다.
그것이 원천으로 돌아가면 그저 아무 형태도 띠지 않게 된다.
그것은 사랑도 분노도 섹스도 아닌 순수 에너지 그 자체이다.
그래서 붓다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다.
방출하지 말라. 그대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까지도
낭비하게 만든다. 억압하지도 말라. 결국 한꺼번에 방출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는 이 방편을 통해서
에너지를 원천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그대는 쓸데없이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붓다는 그대가 화를 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자신을
벌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했다. 타인이 그대를 욕했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대는 화를 냄으로써 자신을 벌한다.
그대는 자신을 변형시키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다
방출해 버린 셈이다.
이제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알았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화를 참으려고 한다. 그대는 분노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것은 조만간 폭발할 것이다. 그대는 하루종일 분노를 모으고 있다.
한달 간의 분노를 모으고 있다. 이제 일년 동안의 분노를 모았다.
그리고 일생 동안의 분노를 모은 것이다. 그대는 여러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대는 억눌린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이제 그것이 한꺼번에 폭발할까봐 매우 두려워한다. 매순간이
내적 갈등과 긴장 속에 있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억압하는 것보다는 방출하는 것이 훨씬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억압과 방출 둘 다 어리석은
행위이다. 방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고 억압하는 것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차라리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화를 낼 때보다 더욱 생기가 넘치게 된다.
아무런 형태도 띠지 않은 채 그대는 강렬한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대의 현존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라.
그들은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가면 그는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 때문에
갑자기 그의 에너지 상태가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가 붓다에게 가까이 가는 순간 그대는 강력한 자력에 이끌리게 된다.
붓다의 현존은 형태를 띠지 않은 원초적인 에너지 때문에
그 곁에 있는 사람의 에너지 중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카리스마인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그에게는
다섯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독한 고행주의자들이었다.
붓다 자신도 매우 위대한 고행주의자였다. 그는 수많은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고통을 주었다. 그의 그런 지독한
고행에 감명을 받아 다섯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하지만 어느날 붓다는 그것이 정말로 어리석고 아무 의미 없는 짓임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몸을 학대해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닫자 고행의 길을 버렸다. 그리고
다섯 명의 제자들은 즉시 그를 떠났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타락했다. 당신은 더 이상 수행자가 아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가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다섯 명의 제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을 찾았다. 그는 비하르에서 부다가야로 베나레스를 거쳐
사르나쓰로 갔다. 그들은 사르나쓰에 있었다.
때는 저녁이었다. 태양은 지고 다섯 수행자는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붓다가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타락한 고오타마가 온다. 우리는 그를 존경할 필요도 쳐다볼 필요도 없다."
그들은 붓다가 오는 것을 보고도 못본 척하기 위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붓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섯 수행자들은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붓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모두 갑자기 눈을 뜨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붓다가 말했다.
"왜 이렇게 하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우리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절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신은 뭔가를 성취하셨습니까?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당신에게서 나옵니다. 혹시 우리에게 최면을 걸었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나의 모든 에너지가 원천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갑자기 자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정지(靜止) 명상법

"스톱!" 그 상태에서는 숨조차 쉬지 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정지(靜止) 명상법

25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26
어떤 욕망이 다가올 때, 그 욕망을 주시하라.
그리고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추어라.

27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한없이 걸어라.
그러면 결국 쓰러질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전체가 되리라.

 삶에는 두가지 균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being)와
행위 (doing)이다. 존재는 그대의 본질이다. 존재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다.
그대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대에 의해서 소유될 수 없다.
그대와 존재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없다.
그대는 바로 존재다.
그러나 행위는 그대가 성취하는 것이다.
행위는 그대가 저지르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저지르고 나서야
그것은 일어난다. 그래서 행위와 존재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대의 육체를 살아 있게 하려면 그대는 많은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 행위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아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행위는 그대의 존재를 둘러싼 주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주변을 통해서 살게 된다. 이러한 주변이 없다면
그대는 생을 꾸려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주변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가진 소유(having)는
무엇이든지 그대의 행위(doing)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중심은 행위와 소유라는 주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방편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대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그 행위는 그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그대의 존재(being)는
모든 행위 (doing)에 우선한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소유(having)에 우선한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항상 이 행위와 소유에만 휘말려 들고 있다.
마음을 넘어선 곳과 마음의 뿌리 아래에는 그대의 존재가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그대 자신의 중심,
그대의 존재에까지 이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궁극을 찾는 구도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결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이 '정지'에 관한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돈, 지식, 명예, 권력 등등
그대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그대 자신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가 가진 소유물이며 그대는 그것들과 다르다.
 두번째로 그대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행위는 그대의 존재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그대는 달릴 수도 있고 천천히 걸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선택할 수 없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행위는 하나의 선택이다. 그대는 선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성자가 도둑이 될 수 있고 도둑 역시 성자가 될 수 있다.
성자의 기질과 도둑의 기질은 두 가지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그대의 기호나 기질은 변화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의 존재는 변화할 수가 없다. 그대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대는 항상 그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이미 그대 자신은 거기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하겠는가?
누가 달리고 누가 웃으며 누가 도둑질을 하는가?
누가 성자가 되는가? 존재는 항상 모든 행위에 앞서 있다.
 그리고 행위는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존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대는 선택하는 자신을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은 이미 저기에 있다.
그대는 자신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이 점을 명심하라.
소유와 행위는 항상 그대의 중심을 둘러싼 주변일 뿐임을.
그리고 그대가 바로 중심임을 말이다.
 이 중심이 바로 진아(眞我)이다.
그대는 그것을 아트만(Atman), 혹은 그대가 좋아하는 무슨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
이 중심이 그대의 가장 깊은 본질이다. 어떻게 이곳에까지 도달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거기에까지 도달하지 않는 한,
그래서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한 결코 영원한 축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
죽음이 없는 열반의 세계를 결코 알 수 없다. 신성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 중심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언제까지나
불행과 고통과 분노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의 주변은
지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중심으로 들어가려면 그대는 다음의
방편을 수련해야 한다.

25
 그대가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이 방편의 요점은 행위하는 중간에 정지하는 것이다.
구제프는 이 정지 명상법을 서양에 널리 알렸다. 물론 그는 이 명상법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 방편들을 티벳의 라마승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많은 서양인들이
구제프가 소개한 이 정지 명상법을 통해서 자신의 중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정지 운동(stop exercise)'이라고 불렀다.
 티벳의 불교도들도 이 방편을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로부터 배웠다.
수피(Sufi)들도 역시 이런 종류의 명상 운동을 갖고 있는데
그들 역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로부터 배운 것이다.
기본적으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명상법들이 바로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 나온 것이다.
 구제프는 이것을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춤을 추도록 한다. 20명 남짓한 그의 제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추는데 춤이 무르익어 가는 순간
그는 갑자기 '스톱!'하고 외친다. 그가 스톱이라고 외치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모든 동작을 완전히 멈추고 있어야 한다. '스톱' 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는 자세를 어떻게 변형해도 안된다.
한 발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는 계속 들고 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명령이 떨어지면 계속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만일 눈이
저절로 감긴다면 그때는 별 문제다. 그러나 일부러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되도록 각성된 상태에서 눈 뜬 상태를 지속시키도록 해야 한다.
마치 조각상처럼 말이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난다. 행위 도중에, 춤 도중에 갑자기 그 동작을
정지시키면 틈이 생겨난다. 그때 그대는 두 개로 분리된다.
그대의 몸과 그대 자신으로 분리된다. 그대의 몸과 그대 자신은
동작 속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지가 일어나고 몸은 동작 쪽으로 가려한다.
지금까지 동작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속도가 작용하는 것이다.
몸은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대는 갑자기 멈추었다.
몸은 이 갑작스런 정지에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지하는 순간 몸은 움직이려는 강한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지 상태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이때 하나의 틈이 생겨난다.
그대는 그대의 몸이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움직이려는 충동을 가지고 그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몸의 충동에 협조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그것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조금이라도 몸의 충동에 협조한다면
그때 틈은 생겨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불편함을 느끼는 동작 중에
스승의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 명령을 들었지만
그대는 자신에게 편한 자세로 고친 후에 정지한다. 이런 식일 때는
결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이것은 스승의 잘못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잘못이다.
이 방편의 요점, 정지의 순간을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정지 명령을 듣자마자
즉시 정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 뒤로는 어떤 움직임도
있어서는 안된다.
 자세가 불편하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로 두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라.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식한다면 그때는 또 다시
자신을 속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더라도
그대는 움직이지 말라. 그리하면 거기에 틈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서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육체와 행위의 영역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게 된다.
정지하고 있는 것은 그대의 몸이고 정지시키는 자는 그대 자신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하나의 행위에서 다른 행위로,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대는 계속 옮겨 다닌다.
아침에 그대가 눈을 뜨자마자 행위는 시작된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대는 행위의 물결 속에서 떠다닐 것이다, 그대는 수없이 행위를 바꾼다.
그러나 단 한순간이라도 비행위 (非行爲),
즉 무위(無爲)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어렵다.
어떻게 그대가 비행위의 상태가 될 수 있겠는가? 비행위 속에 있고자
하는 그 노력 역시 또 하나의 행위가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위의 상태에 머물고자 애쓰고 있다.
그들은 부처의 자세로 앉아서 비행위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을 통해서 비행위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노력은 또다시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비행위를
하나의 행위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조용한
상태 속으로 억지로 밀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억지로 밀어넣는 행위는
결코 비행위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지만 결코 무위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위적인 명상은 또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유행가 대신에 성가를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노래부르는 것임에는 마찬가지다.
그대는 달리거나 혹은 걷는다.
혹은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긴다. 이 모두가 행위인 것이다. 한 행위에서
또 다른 행위로 끝없이 옮겨 다닌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곯아떨어진다.
물론 잠 속에서도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이다.
그대는 잠을 자고 있다. 그러면서도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잠재의식 속에서 아직도 그 행위는 계속되는 것이다. 소유와 잃어버림,
그리고 이동과 머무름의 행위가 꿈속에서 계속된다.
 오직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만 꿈꾸는 행위가 정지된다.
물론 이런 일은 갈수록 현대인들에게서 드문 현상이지만 말이다.
이 비행위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아직 각성되지 않았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행위는 정지되었다. 거기에
주변은 없다. 이제 그대는 중심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죽음의 상태, 무의식적인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힌두교에서는 수슈프티(sushpti)와
 삼마디(samadhi)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둘은 매우 비슷하다. 아니
똑같다고 말해도 좋다. 단 한 가지 차이점만 빼놓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차이점이란 엄청나게 큰 것이다. 그것은 각성의 차이이다.
수슈프티는 꿈이 없는 잠의 상태를 말한다. 그때에도 그대는
그대 존재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그대가
중심에 있다 해도 그것이 무의식적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그대의 에너지를 재충전시켜줄 뿐이다.
 그리고 삼마디의 상태에서도 역시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수슈프티와는 달리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이다.
한번 깨어 있는 상태로 중심에 이르면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이제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소유물과 자신의 행위가 단지 주변임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그대의 본성이 아니라 단지 표면에 이는 잔물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정지 테크닉을 통해서 그대 자신을 갑작스럽게 비행위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이 비행위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한다면 그 노력 자체가 또 하나의 행위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므로 억지로 비행위의 상태에 이르려고 하지 말라. 느닷없이
그 상태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 이것이 바로 정지 테크닉의 의미이다.
그대는 지금 달리기를 하고 있다. 그때 나는 말한다.
'스톱!' 내 말을 듣는 순간 정지하라. 정지하려고 들지 말고 그냥 정지하라.
일부러 정지하려 든다면 그대는 그 순간을 놓치고 만다.
예를 들면 그대가 여기 앉아 있다. 내가 '스톱'이라고 말하는 즉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멈춰라. 단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말라.
그러면 그대 속에 다른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 자리를 편하게 한 뒤 '당신의 스톱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대는 요점을 놓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정지하려는 어떤 노력도 해서는 안된다. 스톱 명령이
떨어지는 그 즉시 정지하라. 그것으로써 충분하다. 이 테크닉은
어디에서라도 수련할 수 있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다. 그때
별안간 그대 자신에게 명령한다.
 "스톱!"
 그 상태에서는 숨조차 쉬지 말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정지된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 역시 정지된다.
 모든 것이 정지되도록 하라. 숨도 쉬지 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라.
그 찰나에 그대는 느낄 것이다. 로켓의 속도로 그대
자신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단 한번 번쩍하는 섬광으로 기적이 일어난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진다. 그 순간에 그대는 변형된다.
이것이야말로 비행위의 상태이다. 이것은 수련을 쌓아서
얻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연히 그대는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방편을 자주 사용하라. 그대의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지금
이 명상법을 사용하라.
 이 방편에서는 스승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그룹을 만들어 수련할 수 있다.
구제프 역시 자신의 제자들을 그룹으로 만들어 이 정지 명상법을 시켰다.
 만약 그대가 자신에게 '스톱'을 명령한다면
그대는 십중팔구 스스로에게 속기 쉽다. 먼저 그대는
자신을 편하게 한 뒤에 '스톱' 이라고 말한다. 의식적으로는 어떤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이미 준비 태세에 있다.
그런 다음에 말한다. '자 이제는 정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수련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그룹을 통해서 수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스승과 함께 있을 때
스승이 갑자기 '스톱'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대는 아주
불편한 자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즉시 모든 것을 멈춘다면
바로 그 순간 스파크가 일어난다. 그 순간 중심에서 번개가 치는 것이다.
 행위는 수련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비행위는 수련되어질 수 없다.
수련이란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비행위는 항상 갑작스런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대가 차를
운전하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반대편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달려와
그대가 탄 차를 받아 버린다. 그 순간 그대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한다. 이와 동시에 그대의 마음은 정지된다.
호흡이 정지되고, 모든 것이 정지된다. 이런 종류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번 우리 자신의 중심으로 내던져졌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우리는 무의식으로 그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쳐 버린다.
 한때 나는 차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 사고가 났을 때 차 안에는
나를 포함해서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 사고를 통해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차는 마른 강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는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나와 함께 차에 탔던 두 사람은 울기 시작했다.
마침 내 옆에는 중년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붙들고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어!' 라고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인, 당신이 정말 죽었다면 어떻게 '나는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소?
당신은 죽지 않았으니 안심하시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로 울었다.
 "나는 죽었다.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그녀를 차에서 끌어냈을 때까지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죽었어."
 그렇게 해서는 미묘한 순간을 다 놓쳐 버리고 만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정지한다. 왜인가?
마음은 하나의 메커니즘이며 그것은 일상적인 틀 속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것이 바로 숙달의 의미이다.
 그대는 사고를 미리 대비해서 마음을 훈련시킬 수 없다.
그런식으로 마음을 훈련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고라고 부를 수 없다.
일어날 사고에 대해서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일상사이지 사고가 아니다. 사고란 순간적으로 일어나며
뜻하지 않게 터지는 것이다. 그대는 그 속에서 순식간에
미지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마음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사고에 대한 어떤 사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울던 그 여자는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의 의식은 현재 그 순간에 꽃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로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주의력은 자신의 현 상황에서 완전히
도피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설령 벌어지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일은 일대로 일어날 뿐,
그대는 단지 깨어 있기만 하면 된다. 각성된 의식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일은 이미 그대의 능력 범위를 넘어섰다.
마음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이다. 사고작용은
전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은 완전히 정지된다.
 위험을 느끼는 일들이 왜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사고가 일어나는 그 순간이 바로
명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옆차와 달리기 경쟁이 붙었을 경우
100킬로에서 120, 150, 180킬로로 늘어나고 속도는 인간의 통제 한계를 넘어 버린다.
이제 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차는 이미 그대의 조종 한계를 넘어 버렸다. 이때 그대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정지된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드 광들이 느끼는 스릴이다.
이 침묵의 전율 속에서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내던져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편은 그대에게 어떤 사고나 위험 없이 그대를
중심으로 데려다 준다. 하지만 명심하라. 그대는 그것을 반복
훈련할 수 없다. 어떤 사전 준비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만약 '12시 정각이 되면 나는 정지할 것이다'라고 계획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지의 상태에서 갑자기 정지 상태가
일어나도록 하라. 어떤 선입관도 갖지 말고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라.
 예를 들어 그대가 재채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그대는
그 낌새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막 재채기가 일어나려고 한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때 재채기는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충동이 시작되는 시초에 그대가 그 낌새를 알아차린다면,
그래서 '스톱' 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대는 재채기를 멈출 수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재채기를 멈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 빨리 찾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멈추려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더욱 의식적이게 만들고 결국
감각을 더 민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의 감각이 좀더 민감해질 때
그대의 전체적인 주의력은 거기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의력 때문에 재채기는 더 빨리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대는 직접적으로 재채기를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멈추게 할 수는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대는 재채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감각을 느낀다.
그때 단지 멈춰라. 재채기를 막으려고 하지 말라.
단지 자신을 멈춰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완전한 부동(不動)
속에 남아 있으라. 숨도 쉬지 말라. 그 순간 재채기의 충동이
되돌아가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충동이 떨어져 나간 상태 속에서
중심에서 나오던 미묘한 에너지는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 버린다.
재채기 속에서 풀어 버려야 했던 에너지가 말이다.
 충동이란 그대가 사용할 수도 없고 흡수할 수도 없는 어떤
에너지에 의해서 괴로워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이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나가려고 한다. 재채기를 하고 난 뒤에 시원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여분의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갔을 뿐이다. 이제 남는
에너지는 없어졌다. 그리고 에너지의 유출이 그대에게 미묘한
휴식감을 준다.
 이런 이유로 해서 파블로프(Ivan Pavlov)나 스키너(B.F.
Skiner)같은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섹스는 재채기와 같다. "
 섹스와 재채기가 심리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대에게는 에너지가 과잉되어 있다. 그래서 그대는
이 과잉된 에너지를 방출하려고 한다. 에너지가 방출되는 순간 그대의
신경 조직은 휴식을 느낄 것이다. 충동을 느낄 때, 에너지의 과잉을 느낄 때,
그리하여 그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 나가려고 할 때,
바로 그 순간 정지하라.
 예를 들면 지금 물을 마시고 있다. 물이 입술에 닿는다. 그 순간 정지하라.
입술이 물에 닿은 채로, 물 마시고 싶은 욕망이
거기 있는 그대로, 목마름이 있는 그대로 두라. 그리고 행위를 시작하려는
자신만을 완전히 정지시켜라. 숨도 쉬지 말고 손짓 하나
까딱하지 말고 마치 죽음처럼 굳어져라. 목마름은, 그 충동은,
그 방출하려는 에너지는 그대를 중심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로켓의
연료가 된다. 그 순간 그대는 중심으로 내던져진다. 왜인가?
충동은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충동은 에너지의
방출이기 때문에 그 흐름이 멈추어지는 순간 중심으로 되돌아 간다.
 또한 에너지는 부단한 흐름이다.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 나가든지
아니면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결코 에너지는 정체되지 않는다.
이것은 에너지의 법칙이다. 에너지의 이 법칙을 기억한다면
정지의 명상법을 수행하기는 보다 쉬워질 것이다. 에너지가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이미 에너지가 아니다. 따라서
에너지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이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충동이 일어날 때 그것은 에너지의 방출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 때문에 손은 물컵을 집으려 한다. 욕망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모든 행위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흘러가는 에너지의 이동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에너지의 흐름이 정지되면 그 에너지는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부단하게 흘러가는 것이 에너지의 특성이기에 그것은 다시
중심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존재 내부로 다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얼마든지 다른 차원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지금 화가 난다. 누구든 두들겨 패주고 싶다. 무슨 물건이든지
닥치는 대로 부수고 싶다. 그렇다면 그때 친구나 아내, 아니면
자녀든 누구라도 껴안고 입맞추고 열렬히 사랑하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대는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분노로 폭발하려던 에너지가
갑자기 사랑으로 변형된다. 그러면 처음에는 놀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사랑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화가 불꽃처럼 치미는
이 순간에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가?'
 하지만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에너지가 막 솟아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에너지는 행동으로
폭발하려는 바로 그 지점까지 왔다. 에너지는 그것을 폭발시켜 줄
동작을 원한다. 이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분노의 에너지는 즉시
사랑의 에너지로 바뀔 것이다. 사실 사랑이나 분노는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구실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에는 결코 느껴 보지 못했던
에너지의 격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싸움을 하지 않고는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에너지가 거칠게 이동할 때만이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한바탕 싸움을 하는 부부들이 있다.
그들은 온갖 욕설을 퍼붓다가 급기야는 서로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싸운다. 그 다음에 그들은 격렬한 사랑의 행위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
싸울 때는 언제나 사랑이 가능하다. 그리고 싸우지 않을 때는 사랑도 불가능하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있다. 그래서 남편이
어느날 때리는 행위를 그만두게 되면 아내는 안다. 더 이상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끝났다는 의미이다.
 왜인가? 왜 그토록 사랑과 싸움은 밀접한 관계인가?
그것은 같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동하는 방향이 틀릴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과 싸움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사랑할 줄도 모른다. 그에게는 아마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미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부처에게도 사랑이 있다. 그러나 부처의 사랑은
그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
그것을 절대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미움, 분노, 폭력 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언제, 어디서든지 순식간에 변형될 수 있다.
같은 에너지가 분노가 될 수 있고 사랑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번에는 그 에너지가 그대의 내부로 이동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려는 충동이 일어날 때 정지하라.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억제가 아니다. 그대는 어떤 것도 억제하지 않았다.
단지 에너지와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 각도에서
에너지의 변화를 간파했을 뿐이다. 그리고 에너지가 어떻게
내면으로 돌아가는지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충동은
진정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목마르지도 않으면서 물을 마시려다가 갑자기 정지한다.
그러면 거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에너지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때 그대는 아내나 남편에게 갑자기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포옹하고 싶고 키스하고 싶다. 그때 정지하라.
그 충동은 진짜라야 한다. 진짜로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거기에 없다면, 단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려는 키스였다면 그때
정지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중심으로 되돌아가야 할
에너지가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동은 반드시 진짜라야 한다. 진정한 충동을 통해서만이
에너지는 이동한다. 그리고 그 충동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킬 때
에너지 역시 멈춘다. 그때 에너지는 밖으로 나갈 길이 없어지다.
다시 중심으로 흐른다. 사실 에너지는 잠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진정한 충동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점점 잃어 가고 있다. 그대는 밥을 먹는다. 그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시계가 식사 시간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때 정지의 명상법은
아무런 변형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진정한 배고픔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면 느끼는 시장기는 습관성이며 자기 최면이다.
진짜 살아 있는 배고픔이 아니다. 그때 몸은 실지로 배고프지 않다.
단지 끼니를 거르면 뭔가 놓쳤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그리고 한시간만 더 지나면 배고픔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진짜 배고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진다. 만약 그대의
배고픔이 진짜라면 두시가 되면 더 배가 고파진다.
 그대가 졸음이 밀려을 때 정지하라. 그런데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이다.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를
말한 시바가 살 당시에는 여기에 아무 문제점이 없었다.
인간은 모두 진지했으며 순수하고 진실했다. 그들에게 거짓이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모든 것이 거짓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하는 척하고 분노하는 척할 뿐이다. 모든 것이 일회용
블라스틱과 같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기 때문에 지금 그대 자신이 진정인지
아니면 가장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대의 내면이 무엇인지,
본심이 무엇인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에 없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을 주시하라. 그래서 무엇이
진정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대는 지금 '갑'을 말한다. 그런데 느낌은 '을'에 있다. 사실은
'을'을 말하고자 하면서도 '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을'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회 전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사회 속에 살아남으려면 그대 자신마저도
잘못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보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진실해진다면,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에 귀기울인다면
그대는 갈수록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출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구도자들이 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 인간 사회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였다. 거짓된 사회 속에서 혼자 진실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으로 변해가는 사회를 떠나지 않으면
불필요한 싸움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으로부터 과감하게 떠나라.
잘못된 이 사회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라. 그러면 그대는 진실해질 것이다.
이것이 구도자들이 이 세상을 등지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보라. 그대가 얼마나 진실하지 않은지를
찬찬히 살펴보라. 자신의 이중 성격을 지켜보라. 그대는 '갑'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느낌은 '을'쪽에 있다. 따라서 진짜가 아닌 것을
정지시켜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정지 테크닉은 그런 식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무엇이 자신의 진정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 방편을 사용해보라. 모든 것이
거짓으로 변해가지만 아직도 많은 진실이 남아 있다. 다행히도
어떤 순간에 사람들은 진실해진다. 진실해지는 바로 이 순간에
정지 테크닉을 사용하라.
 지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것은 진짜다. 무엇이든지 때려
부수고 싶다. 어린 녀석을 후려치고 싶다. 이 순간 정지하라.
심사숙고한 뒤에 정지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화내는 것은 좋지 않다. 화를 멈춰야겠다. 어린 것을 때리는 것은
그를 돕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만둬야겠다."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식의
심사숙고는 전혀 필요치 않다. 그대는 지금 '사고하는 자' 이다.
심사숙고하게 될 때 에너지는 그 심사숙고로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정지해 봐야 내면으로 들어가야 할 에너지는
이미 없다. 화가 날 때 분노에 대해서 숙고하지 말라. 좋다,
나쁘다고 하는 생각까지 하지 말라. 대신 이 정지의 테크닉을 순간적으로
기억하라.
 분노는 순수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혹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것은 결과에 의존해 있다.
만약 어떤 것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으로 판명날 것이다.
혹은 그것이 그대를 내면의 중심으로 내던진다면 아름다운
엑스터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한 송이의 꽃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에너지는 그저 에너지일 뿐이다. 그것은 맑고 순수하며
어떤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그것에 대해서 머리를 굴리지 말라. 그대는 항상 어떤 행위를 해왔다.
단지 멈춰라. 그리고 멈춘 채로 머물러 있으라. 그 속에서
그대는 얼핏 내면의 중심에 대한 일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주변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중심이 그대의 비전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단지 그대가 뭔가를 해야한다는 충동을 느낄 때, 그때 바로 정지하라.
잘 안된다면 다음 세가지를 명심하고 시도해 보라.
첫째, 진짜 충동이 일어날 때만 그것을 시도해야 한다.
둘째, 정지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단지 정지하기만 하라. 세째,
기다려라. 그대가 정지했을 때, 숨도 쉬지 않고 손가락도 꼼짝하지
않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기다려 보라. 뭔가를 일부러 꾸며
내려고 하지 말라. 내가 기다리라고 말할 때는 내면의 중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진아에 대해서도 생각지 말고
아트만 따위는 잊어버려라. 깨달음의 일별이 거기에 있다는 것도
기대하지 마라. 그저 기다리기만 하라. 충동이, 에너지가, 움직임
그 자체가 스스로 변형되도록 하라. 만약 그대가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이나 중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에너지는
사고작용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이 내면적인 에너지를
매우 간단하게 소비해 버릴 수 있다. 단 한 조각의 사념도 에너지에게
충분히 방향을 잡아줄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그때부터
계속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스톱'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전체적인 스톱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시간 전체의 흐름이 멈추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떤 꾸밈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그대는 있으라.
바로 이 단순한 있음 속에서 갑작스럽게 중심이 폭발한다.
자, 이제 두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26
어떤 욕망이 다가올 때, 그 욕망을 주시하라.
그리고 갑자기 그 흐름을 멈추어라.

 이것은 동일한 방편의 다른 차원이다. 그대는 하나의 욕망을 느낀다.
섹스에 대한 욕망, 사랑에 대한 욕망, 음식에 대한 욕망,
어떤 것에 대한 욕망, 그대는 욕망을 느낀다. 그것을 주시하라.
경전에서 '그것을 주시하라'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에 대해 찬성하든지
반대하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 욕망을 주시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성적인 욕망이 마음속에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말한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주시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나쁘다고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욕망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경전을 참고로 하고 과거에 자문을 구하고 있다.
과거의 선생, 과거의 성자들에게 말이다. 그것은 욕망 자체를 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떤 다른 것을 주시하고 있다. 그대의 성장 배경,
그대의 교육, 그대의 문화 전통, 그대의 종교를 말이다.
그대는 많은 것을 주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대의 욕망은 주시하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마음속으로 가져오지 말라.
과거 속에다, 교육속에다, 조건 속에다 받아들이지 말라.
단지 그 욕망을 주시하기만 하라. 만약 그대의 마음이 사회에서
얻은 것들로부터 깨끗이 씻김을 받는다 해도, 그대의 부모가 심어준 것들이
빠져 나간다해도, 그대의 교육이, 전통이, 그대의 전체적인 마음이
깨끗이 씻겨져 나간다 해도 섹스에 대한 욕망은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욕망은 사회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생물학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그대 속에 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는 어떤 언어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았다. 그에게는 언어가 없다. 언어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반드시 배워야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언젠가
성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배움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회적인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세포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대가 섹스를 통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대 육체의 모든 세포들은
성세포이다. 그대는 성세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대의
생물학적 본성이 완전히 씻겨 나가지 않는 한 그대의 성적 욕망은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그 욕망은
이미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아이는 성적 만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섹스를 통해서 나왔다. 그의 전육체는 성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욕망이 있다. 그의 육체가 성숙해져서
욕망을 느끼는 데는 오직 시간만이 필요하다. 욕망은 그대가 섹스가
좋다 나쁘다 배우기 이전에 이미 거기에 있다. 섹스가 지옥이건
천국이건 그 어떠하다고 배우건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배우는 것은 결국 배우는 것이고 본래 있는 것은 이미 본래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내려온 전통, 기성 종교, 특히 기독교 같은 종교들이 섹스에 반대해 왔다.
히피나 여피(yippie)같은 새로운 문화 운동들은
전통과 반대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섹스는 좋은 것이며
황홀하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하나의 단편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대의 욕망을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추어 생각하지 말라. 단지
욕망 그 자체를 주시하라, 있는 그대로 말이다. 그것을 해석하려
들지 말라.
 여기서 주시란 해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지 있는 그대로
쳐다본다는 말이다. 욕망이 거기에 있다. 그것을 직접 그리고 즉시 바라보라.
그대의 생각 속으로 끌어들이지 말라. 생각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들은 외부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어떤 생각도 원본은 없다. 그래서 생각 속으로 끌어들이지 말라. 단지
욕망을 바라보라. 그것이 무엇인지, 이전에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직면하라. 그것과 조화하라.
이것이 곧 내가 말하는 '주시하라' 이다.
 어떤 욕망이 다가올 때 그것을 주시하라. 단지 사실을 보라.
그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다.
차라리 달에 가는 것이 더 쉽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이
그것보다는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사실 달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복잡한 일이다. 거기에 비하면
내면을 직시하면서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은 그대가
하는 모든 것에 미묘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다. 지금 내 말을 듣고 한번 살펴보라. 내가 '섹스'하고
말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그것에 반대할 것인지 찬성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니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혹은 '이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대는 단어 하나조차에도 해석을 내리고 있다.
 '섹스에서 초월의식까지(From Sex to Superconsciousness)'라는
책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왔다. 그들은 내게 와서
제목을 바꾸어 달라고 말했다. 섹스라는 단어가 매우 거슬린다고 했다.
그들은 그런 책을 읽지 않았으며 이미 그 책을 읽은 사람들도
역시 제목을 바꾸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인가? 그것은 그 말이 그대에게 어떤 해석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너무나 해석적이기 때문에 내가 '레몬 주스'라고 말하면
그대는 벌써 침을 흘린다. 그대는 그 말을 해석한 것이다.
레몬 주스라는 말은 진짜 레몬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대는 침을 흘린다.
그대는 해석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단지 고요히, 어떤 해석도 내리지 않고
방관자처럼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슬람교도이다'라고 내가 말하면 그 순간 힌두교도들은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유태인이다'라고 말하면 그 순간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이
좋지 않다고 결정을 내린다. '유태인'이라는 말이 기독교인의 마음에는
이미 어떤 해석이 되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이란
소리만 들어도 기독교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마음은 불끈 달아 오른다.
하지만 그 해석은 옛날의 것이다.
 모든 유태인은 서로 다른 유태인이다. 모든 이슬람교도 역시
개인적으로 모두 독특하다. 그대는 단지 '유태인을 안다'라는 것으로만
그를 해석할 수 없다. 그대가 아는 것처럼 모든 유태인이
다 나쁘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이 유태인은 아직
그대가 경험해 보지 않은 유태인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과거의
경험에 따라서 그를 판단한다. 해석하지 말라. 해석은 주시가 아니다.
주시는 사실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사실을 말이다.
사실과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힌두교 성자라고 하는 리쉬들은 섹스가 나쁘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나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에게 나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대는 하나의 순수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주시하라.
그것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라. 깨어 있으라.
그리고 갑자기 그것을 멈추어라.
 이 테크닉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첫째는 사실에 대해 깨어 있는 것,
일어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대가
성적인 욕망을 느낄 때 그대 속에 무엇이 일어나던가? 그대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대의 육체가 어떻게 떨기 시작하는지, 갑작스런
울음이 어떻게 터져 나오는 것인지, 마치 그대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끼게 되는지를 지켜보라. 그것을 느끼고 주시하라.
어떤 판단도 미리 내리지 말라. 그저 사실 속으로 들어가라.
성욕의 사실 속으로 말이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판단을 한다면 그때 주시는 멈추고 만다. 그대는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이제 그대는 욕망을 향해 얼굴 대신에
등을 돌린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그대는 존재의
생물학적인 심층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귀한 순간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대는 사회라고 하는 표층에 집착하고 있다. 사회는 가장
표면적인 층이다.
 섹스는 그대의 샤스트라(경전)보다 더 깊은 차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학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샤스트라가 파괴될 수 있다면
(사실 그것들은 파괴되어질 수 있다. 여러 번 그래왔다)
 그대는 해석의 기준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섹스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샤스트라보다 더 깊은 것이다.
그것을 표면적인 것과 함께 취급하지 말라. 사실을 주시하고
단지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대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느껴 보라.
특정한 리쉬에게. 예수와 부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이 살아 있는 순간이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을 주시하라. 지켜보라. 그리고 두번째 부분으로 넘어가라.
이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다. 시바는 말한다.
 "그때 갑자기 차단하라. "
 '갑자기'란 말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말라.
 "이것은 나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떠나겠다, 나는 이 생각과 함께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 욕망은 죄악이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그만두겠다. 그리고 그것을 억압할 것이다. "
 그때 하나의 억압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명상 상태가 아니다.
억압은 자신의 손으로 존재를 속이는 것이다.
억압은 심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대는 전체의 메커니즘을 흐트려 놓고 있다.
그리고 매일 폭발시켜 버려야 할 에너지들을 억압하고 있다.
에너지는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억누른다.
그것은 밖으로 흘러나올 수 없다.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그대는 계속 그것을 억누른다. 그러면 그것은 옆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왜곡된다. 이 왜곡된
에너지가 인간에게 기본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심리적인 병은 왜곡된 에너지의 부산물이다. 그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형태로 변해 나타난다. 그때 그대는 매우 힘든
고뇌 속에 빠진다. 왜곡된 모습 속에서는 어떤 만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왜곡된 내면을 감추고 살 수 없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라도 표출시켜야 한다. 억압은 왜곡의 창조물이다.
이 경전 즉 탄트라는 억압과는 거리가 멀다. 억제라는 말과도 상관이 없다.
이 경전은 단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멈춰라."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욕망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주시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주시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부분은 쉽게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주시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을 바라본다면 그때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우리가 성적인 욕망을
갑자기 멈출 수 있으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대는 그것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하고 싶은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 자신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서,
전통에서 빌려온 것이다. 처음에 주시하라. 그러나 그 다음에
좋다거나 나쁘다고 규정짓지 말라. 그러면 후반부는 쉬워질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흐름을 멈출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멈출 수 있겠는가? 그대가 어떤 것을 전체적으로
주시할 때 그것은 매우 쉬워진다. 마치 휴지를 던져 버리듯이 쉽다.
'그것을 멈춰라.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나의 욕망이
거기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빠져 나가고 있다. 그것은 솟아오르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전체를
흔들고 있다. 실제로 그대가 아무런 해석 없이 욕망을 주시할 때
그대는 존재 전체가 하나의 욕망이 될 것이다.
 성욕이 거기에 있을 때, 그리고 그대가 그것에 반대하거나
찬성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그것에 대해 무심하다면 그때 그대의
존재 전체는 그 속에 녹아들 것이다. 단 하나의 성욕은 불꽃이 된다.
그대 존재 전체는 그 불꽃 속으로 집중될 것이다. 마치 그대가
전체적으로 성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단지 성기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대의 육체는 진동하게 될 것이다.
열정은 하나의 불꽃으로 화한다. 바로 그때 멈추어라. 그것과 싸우지 말라.
단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을 멈춘다. "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대가 '나는 멈춘다'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의 분리가 일어난다. 그대의 육체는 성욕으로 가득 찬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그대와 성욕은 양극으로 나뉘어진다.
그대의 육체는 열정과 성욕으로 마구 뒹군다. 그리고 동시에
그대의 중심은 고요하다. 거기에는 싸움이 없다. 단지 분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그대는 마치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을 기억하라. 싸움 속에서는 결단코
그대에게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수년 동안 나와 함께 살았다. 그는 완전히
줄담배를 피워대는 골초였다. 그가 잠을 자는 순간을 빼 놓고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지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그러나 저녁에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담배를 끊겠다는
용기 같은 것을 다시는 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또 불쑥 말했다.
 "오늘부터 담배를 끊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어 버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자신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담배를
피우느냐, 끊느냐 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악순환이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물어 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담배에 대해서 반대하지 말라. 이것이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이다.
담배, 그것과 함께하라. 일주일 동안만 그것에 반대하지 말아
보라."
 그러자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담배를 무척 싫어하네. 그것에
반대하지 말라니?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끊지 못해서 할 수 없이
피우는 것일세."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자네는 너무 담배에 대해 적의를 갗고 있네. 그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란 말일세.
그것을 끊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게. 사람이
친구를 떠나서 어떻게 혼자 살 수 있겠나. 그러니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잊어버리게나. 담배와 같이 살면서 깊이 그것을 사랑하게나.
그리고 자네가 담배 자체가 되게나. 그것과 하나가 되면 모든 것이
쉬워질 것이네. 단 일주일 간만 마음껏 담배를 피우고 그것을
끊겠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게. "
 이 일주일 동안이 바로 하나의 주시이다. 그는 담배 피우는 사실을
쳐다볼 수 있다. 그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그는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것에 반대할 때 그대는
그것을 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반대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벽이 된다. 그때 그대는 주시할 수 없다. 어떻게 그대는 적을
주시하겠는가? 그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 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눈만을 깊이 바라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깊이 꿰뚫고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결코 서로의 눈길은 만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상황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7일 동안
그는 그것을 주시했다. 그는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기에 에너지는
거기에 있었고 마응 역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명상이 되었다. 그는 그것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애연가가 되었다.
7일이 지났지만 그는 완전히 날짜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7일이 끝났다. 어떻게 담배를 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3주가 지나서야 나는 그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자네는 완전히 잊어버렸는가?"
 그가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펼쳐진 현재 상황과 처음으로 다투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담배를 피우고자 할 때에는 단지 멈춰라."
 그는 나에게 어떻게 멈출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전체적인 상황을
주시했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자네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이 일 때 그것을 주시하라.
담배를 손에 들고 잠시 동안 멈추어 보라. 그리고 담배를 놓아 보라.
그것을 떨어뜨려 보라. 그러면 내면에서도 담배에 대한 욕구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그것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주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할 수 없다면 기억하라. 그대는 아직 사실을 준시하지 않았다.
그때 그대는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종일토록 생각한다. 그때 그대는
멈출 수가 없다. 갑자기 욕구가 거기에 있을 때 그대는 그것을
멈춘다. 전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한다. 테크닉은 동일하다. 단지
차원만 다를 뿐이다. 다음 방편으로 넘어가자.

27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한없이 걸어라.
그러면 결국 쓰러질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전체가 되리라.

 똑같다. 테크닉은 똑같다.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걸어라.
쳇바퀴 속에서 달리고 뛰고 춤춘다.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말이다.
한 발자국을 더 이상 못 옮기겠다고 느낄 때까지 해보라. 그러나
이제 완전히 지쳤다고 말하는 그대의 마응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의 소리에는 어떤 주의도 기울이지 말라. 그저 계속 달려가라.
춤추라. 날뛰어라. 어떤 생각도 만들어 내지 말라. 마음은 이제
그대가 지쳤다고 말해 줄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 강행하라. 사실 그대가 지쳤다고 하는 것은
그대가 지친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가장 외부의 표층이
지쳤을 뿐이다. 보통 저녁이 되면 몸은 지치게 마련이다.
하루 종일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재충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대는 깊이 잠이 든다. 우주적 충전기가 그대에게
에너지를 충전시켜 줄 것이다. 내일 또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첫번째 층이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지금 당장 달리기를 하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아마 '나는 매우 피곤하고 졸리우니 지금은 달릴 수가 없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 집에 불이 났소'
라고 말하면 그대는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는 피곤도 없다.
그대는 달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
그대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런데 비상사태가 일어나서 그대는
두번째 층의 에너지에 연결되었다. 그대는 다시 생기가 넘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테크닉에서는 두번째 층의 에너지마저도 고갈되어야 한다.
첫번째 층의 에너지는 쉽게 고갈될 수 있다. 그래도
계속하라. 그러면 새로운 에너지의 샘에 연결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다시 생기가 넘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명상 캠프에 있을 때 우리가 했던 일들은 마치 기적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 번, 아침과 저녁 그리고 밤에 한 시간씩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명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강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보기도 전에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가는 과로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격심하게 움직이고 나면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피로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세 번씩 격렬한
명상을 통해 모든 정력을 다 쏟아부었지만 아무도 피로해서
쓰러지지 않았다. 왜인가? 그것은 그들이 두번째 층의 에너지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 혼자서 그렇게 했다면 아마 지쳐 나자빠졌을 것이다.
에너지의 첫번째 층이 끝나면 그대는 '나는 몹시 피곤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5백 명 정도의 큰 그룹이 한데 뭉치면
아무도 자기가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조금만
더 계속하자'라고 자기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품는 똑같은 생각이다.
 '아무도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조금만 더 하자.
다른 사람이 아직 생생한데 왜 내가 먼저 지쳐 나자빠져야 하는가?'
 단체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자극과 힘을 준다. 그리고 두번째 층의 에너지는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비상사태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비상사태의 에너지가 다 고갈되면 그때 그대는
우주 에너지, 무한한 에너지의 근원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력과 분발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이제 이것은
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라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그대를
넘어간다. 물론 그것은 그대 자신이 아니라 그대의 첫번째 층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층마저 끝나게 되면 그대는
진짜 피곤하게 느낄 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들이 명상 속에 깊이 들어갈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이제 겁이 납니다. 나는 곧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진짜 중요한 순간이다. 그대에게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조그마한 용기만 있어도 그대는 세번째 층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장 깊을 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역으로 말이다.
 이 방편들은 그대로 하여금 에너지의 우주적 바다에까지 이르게 할 것이다.
그대가 대지 위에 전체적으로 무너져 내릴 때 그대는
처음으로 합일을 이를 것이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별로 생겨난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나누어지지 않은
존재 덩어리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질문 )

앞에서 이야기된 방편들에 따르면 분노, 성욕, 폭력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멈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편을 수행할 때 종종 뭔가 부자유스럽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왜 사람은 분노나 성욕 등등의 것을
멈추는 데 어려움을 느낌니까?

그것은 단지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대의 집중이 전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분노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멈추려고만 한다. 그러나 이해 없이는 어떤 혁명도 없다.
그대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낼 것이고 자신에게 더욱 큰
불행을 불러올 것이다. 어떤 것을 포기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을 이해하라. 뭔가를 멈춘다고도 생각하지 말라. 단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라.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만약 그대가 전체성 속에서 이해하게 될 때 거기에는
변형이 따라온다. 만약 그것이 그대에게 좋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나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왜 그대는 분노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왜인가?
그대는 분노가 나쁘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했는가? 그대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면 억지로 멈추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때 이미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는 무작정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만 한다. 왜인가?
사람들이 분노란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무비판적으로
그 생각을 따른다. 그래서 어떤 순간이 오면 그대는 일단
화를 내고 본다.
 이것이 이중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방식이다. 그대는 화를'내고
있으면서 동시에 화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만약 화를 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계속 화를 내어라.
그리고 화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혹은 그대가 화가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이것이 그대의 이해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인지 분명히
스스로에게 밝혀라.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영향으로 자신의 주변에다 불행을
만들어 놓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나쁘다고 말한다. 그들은 계속 그대의 마음속에 판단을 강요한다.
부모들이 그렇게 하고 사회가 그렇게 한다. 결국 그대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르고 만다. 그대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라 형성되고 만다. 그래서 그대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다.
그대는 어떤 일을 하면서도 생각은 반대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죄의식이 탄생된다.
 모든 사람이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화를 내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대에게
화가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섹스가 나쁘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 하지만 섹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대의 부모들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당장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쌍스러운 것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 "
 그러나 그토록 나쁜 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대의 부모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바로 그것의 적나라한 실현이다.
그대의 부모가 섹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섹스가 왜 나쁜 것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인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가?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딱지만 잔뜩 붙이고 있다.
그리고 그 딱지들이 불행을 낳고 지옥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 한 가지는 기억하라. 구도자에게는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현실을 이해하는 것,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 사회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는 것 말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그대 자신을 보지 말라. 그대는 눈을 갖고 있다. 그대는
장님이 아니다. 그대의 눈을 사용하라. 이것이 바로 주시의 의미이다.
그대가 주시한다면 그때 이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욕망을 멈추려 할 때 사람은 부자유스럽거나 불편을 느낀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60살쯤 된 노인이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왔고 또 많은 책을 저술했다. 그는 도덕가였다. 그런
그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진짜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야 나는 성욕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섹스가 빚은 불행에 대해서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많은 책을 썼지만 자식들을 괴롭혔다. 사실 도덕은 가장
훌륭한 속임수이다. 도덕을 통해서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즉시
죄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미묘한 고문이다.
 브라흐마차리아(독신수행)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라.
즉시 그대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브라흐마차리아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수한 동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에 대해서
떠들어 댈 때 다른 사람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대는 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그대는 사람들을 고문할 수 있다.
그들에게 열등감을 심어 줄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섹스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죄책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항상 브라흐마차리아에 대해서 꿈꿀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들의 마음은 브라흐마차리아를 생각하지만 그들의 육체는
섹스 속에서 살 것이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반대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이 육체는 사악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어떤 사람 속에 죄의식을 심어 놓으면 그대는
그 마음을 파괴한 것이다.
그 노인은 내게 와서 어떻게 하면 성욕을 몰아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은 처음으로 그가 사실을 인식하게 된 기회였다. 사실
그는 많은 기회를 놓쳐 왔다. 이제 섹스 에너지는 약해졌고 그것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섹스 행위가
폭력적이고 그 에너지가 강할 때, 성욕은 매우 젊은 것이다.
그때 그대는 매우 쉽게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매우 약해져 있었고 병들어 있어서 섹스 에너지를 자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도 젊었을 때에는 브라흐마차리아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는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브라흐마차리아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섹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진실을 자각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브라흐마차리아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을
자각하라고 재차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만약 내가 그것을 자각하려고 든다면 며칠만에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미 자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성욕을 떨쳐 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자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을 떨쳐
버리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가? 과연 당신
자신 안에서 그것을 발견할 필요가 없는가?"
 그러므로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포기란 말에는 그대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강요당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대는 그대 삶의 주체가 되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는 노예가 되지 말라. 그대는 눈을 가지고 있고,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섹스 에너지와 분노 등등의 것을 가지고 있다.
그대의 의식을 사용하라. 그대의 눈을 사용하라. 그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갖고서 깨어 있어라.
마치 그대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 그대를
가르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전체적으로 깨어 있으라.
아무것도 미리 결정을 내리지 말라. 서두르지 말고 결론 짓지 말라.
그대 자신의 자각을 통해 결론이 내려질 때 그것은 곧
그대의 변형으로 이어진다.그때 그대는 어떤 부자유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억압이나 아쉬움도 없다. 그리고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어떤 것을 멈출 수 있다. 나는 멈추는 것을
인식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명심하라.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자각할 때 그대는 어떤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멈추기 위한 기술 따위는 찾지 말라. 멈추는 것은 깨어 있음의
결과일 뿐이다. 그대가 깨어 있다면 그대는 욕망의 흐름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굳이 멈출 필요가 없다.
그대는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다.섹스가 거기에 있다.
만약 그대가 충분히 깨어 있다면 그대는 굳이 그것을 멈출 필요가 없다.
그때 섹스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만약 그대가 깨어 있으면서 그것을 멈추고자 결심한다면 그대의 체념
또한 아름답다.
 그러므로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한다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자각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브라흐마차리아, 즉 그대의 독신수행 역시
기볼적으로 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신수행 역시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느냐, 아니면 무의식적이냐 하는 것이다.
로렌스(D.H. Lawrence)같은 사람을 보라. 그가 말하는
섹스는 아름답다. 오히려 독신수행자보다 그가 말하는 섹스가
훨씬 아름답다. 그가 말하는 섹스는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탐구를 통해서 그는 섹스와 함께
살기를 결심했다. 그는 진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거기에는
어떤 죄의식도 어떤 머뭇거림도 없다. 그는 자연스럽다.
그의 섹스는 찬란하다.
마하비라 역시 진실을 충분히 자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섹스가 필요없다고 느꼈다. 그에게 독신 수행이란 로렌스의
섹스와 똑같이 아름답다. 그의 독신수행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 어떤 누구로부터도 영향을 받거나 강요당한 것이 아니다.
깨어 있음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무엇이든지 아름답다. 그것이
바로 신성이다.
고대의 성자들을 보라. 시바는 파르바티를 안고 있다. 파르바티는
시바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그대는 마하비라가 그런 자세로 있다고
상상도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대는 붓다가 그런
자세로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람(Ram)이 시타(sita)와 함께
앉아 있는 것 때문에 자이나교도들은 람을 신의 화신,
아바타르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여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마하마나바(mahamanava),즉
위대한 성자라고는 말한다. 하지만 신의 화신은 아니다.
여자와 항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거기에 있을 때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아나교도들의 생각이다.
만약 힌두교도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마하비라에 대해서
별로 달갑지 않게 말할 것이다. 힌두교도의 생각으로는 남자가
여자 없이는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도들은 여자가 없는 남자는
반쪽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대개 람은 시타와 함께 있다.
그리고 ' 람시타' 라고 부르지 않고 '시타람' 이라고 부른다.
여자를 먼저 앞세우는 것이다. 또한 '크리슈나라다' 라고 부르지 않고
'라다크리슈나(Radhakrishna)'라고 부른다. 여자와 함께
있는 신이야말로 완전한 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의 신은 홀로 있지 않다. 항상 파트너가 있다.
시트람이 진정한 완성이며 라다크리슈나가 되어야만이 완전하다.
크리슈나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그러니 크리슈나에게는
라다를 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인가? 그들은 이미 완전한
각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시바보다도 더 깨어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무릎 위에 파르바티를 앉혀 놓고 있다. 그것이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누가 과연 옳은가? 붓다가 옳은가? 아니면 시바가 옳은가?
문제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붓다와 시바는 로두 깨어 있는 사람이다.
그들의 선택은 모두 옳다. 단지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 틀릴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틀 속에 빠지지 말라. 그대의 의식이 각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각성하기 전에
이것을 그만두고 저것을 멈추는 따위의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라.
결론짓지 말라. 아무도 모른다. 깨어 기다려라. 그대의 존재가
꽃필 때까지 말이다. 누가 존재의 꽃을 피우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사람을
따를 필요가 없다. 따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모든 모방 행위는 자살 행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기다려라.
이 방편들은 그대를 깨어 있게만 할 뿐이다. 그대가 깨어 있으면
그대는 어떤 것을 멈출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대가
깨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떨쳐 버릴 수도 없다, 그대는 섹스에너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아니면 완전히 잊을 수도 없다.
내 말은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완전히 잊든지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어느 것이고 확실히 할 수 없다. 그대는 항상
어중간하게 둘 다를 모두 하고 있다. 받아들이다가도 떨쳐 버리고
떨쳐 버리다가도 다시 받아들인다. 그 악순환은 계속된다.
그대가 섹스에너지를 갖고 있을 때 그대는 한두시간, 아니면 며칠 뒤에는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를 새롭게 충전시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섹스를
잠시 잊었다가 새롭게 충전시켜 결국 그것에 휩싸이고 만다.
그러다가도 금방 다시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대가 각성 속에 있을 때는
그대가 확실히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떨쳐 버리든지 말이다. 그 어떤 행위도 아름다운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릴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안된다. 그대의 결심은
전체적이며 문제는 곧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부자유함을
느긴다면 그것은 그대가 아직 충분히 깨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좀더 깨어 있으라. 좀더 진실을 주시하라. 좀더 깊게,
좀더 주체적으로 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결론 따위는
염두에 두지 말라.

오늘은 이만!



지성파와 감성파를 위한 각각의 방편

그대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그때 그대는 건강하고 존제적인 존재의 관점을 갖게 된다.

지성파와 감성파를 위한 각각의 방편

28
힘과 지식이 점점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고 상상하라. 완전히 빠져
나가는 순간 거기에 초월이 일어난다.

29
헌신은 자유를 준다.


 탄트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병적 현상이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혼란에 빠졌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마음 자체가 하나의 혼란이다.
그대의 마음이 긴장된 것이 아니다. 그대가 바로 긴장이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라. 만약 마음에 병이 들었다면 그 병은 고쳐질 수 있다.
하지만 마음 자체가 하나의 병이라면 마음은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마음을 초월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서양의 심리학과 동양의 탄트라나 요가의 심리학이
다른 점이다.
 서양의 심리학은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마음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서양의 사고방식에는 마음을 초월한다는 개념이 없다. 초월은
그것 자체를 넘어서서 뭔가가 있을 때만이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때는 그대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개념처럼 현재 상태 이상의 그 무엇이 없다면
그때 마음은 종착역이 된다. 마음을 초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대가 자신이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육체를
초월할 수 없다. 누가 초월하며 어디로 초월하겠는가?
육체뿐일 때는 육체를 넘어서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따라서 그대가
육체를 초월한다는 것은 이미 그대가 육체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뜻이다.
그 무엇이라고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차원이다.
 마음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이다. 그대가 마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때는 마음을 초월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때 우리는
그저 마음의 병이나 고치려고 애쓸 뿐이다. 그것은 마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병을 다루는 차원이다. 병적인 상태를 고쳐서
정상적인 상태의 마음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정상적인 마음 자체가 바로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마음은 그저 하나의 냉소적인 마음이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단지 병든 마음을 정상으로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의 정상적인 마음이 건강한 것인지
아닌지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평균적인 마음,
보통 사람의 마음이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평균의 마음, 보통의 마음을 넘어서게 되면 그는 조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양의 심리학은 항상 평균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이런 경우에 특별히 지적인 탐구를 한 사색가가 있다.
제프리(Geoffrey)가 바로 그다.
그는 천재를 병이라고 말했다.
천재는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상적인 것이 건강하다면 그때
천재는 병적인 상태이다. 천재는 아마도 일종의 미친 상태에 해당된다.
그의 미친 상태를 이 사회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반 고호, 에즈라 파운드, 그 모든 시인, 화가, 과학자,
신비가들이 모두 미쳤다. 그러나 그들의 광증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허용된다.
그들의 미친 증세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것들은 써먹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적인 마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은 극단으로 흐르기 때문에 정상적인
마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미친 사람들을 봐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노벨상까지 준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아픈 상태에 있다.
 만약 정상적인 것이 건강의 표준이라면 그때는 정상적이지 않은
모든 사람이 아픈 것이다. 제프리는 우리가 과학자와 시인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날이 올 것이며 그들을 평균 상태로
재조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마음이 전부이며 그것 이상 없다는
가정 속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런 태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가 있다.
동양에서는 마음 자체를 하나의 병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는 엄밀히 말하면 정상적으로 병들었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으로 병들었는가를 따진다. 정상인은 정상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그대가 감지할 만큼 이상스럽지는 않다. 그는 그저 표준치인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는 병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는 그를 '정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음은 그 자체가 병이다.
 왜인가? 왜 마음이 병인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 보면 이해하기가
좀더 쉽다. 우리에게 육체란 죽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동양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완벽하게 건강한 육체는
가질 수 없다. 만약 그런 육체가 있다면 죽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균형을 유지해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육체는 없다. 늙지 않고 병들어 죽지 않는 육체는 없다.
그래서 완벽하게 건강한 육체란 없다.
 그러나 의학은 건강을 정의할 수도, 그 기준을 정할 수도 없다.
병은 정의할 수 있다. 특별한 질병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못한다.
그저 부정적인 방식으로, 병들지 않은 상태를 건강이라고 말할 뿐이다.
 죽음과 삶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두 다리처럼 동시에 걸어가고 있다. 그대가 살아 있는 순간이 곧
죽어 가는 순간이다. 그대 속에서 어떤 것이 매순간 죽어 가고 있다.
7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죽음의 경주는 그 마지막 목표에
골인할 것이다.
 그대가 태어나는 날이 죽기 시작하는 날이다. 생일날이 곧 사망일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성숙과 더불어 죽음도 성숙한다.
그러니 육체란 결코 진짜로 건강해질 수 없다. 건강이란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대가 평균적으로 건강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음도 같은 이치이다. 마음 역시 진짜로 건강해질 수 없다.
마음이란 항상 긴장과 고뇌와 번민 속에 있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잠깐 동안의 이완 상태를 경험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의 본성이란
긴장과 번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마음은 육체와 그대 내면에 있는 '비육체'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가장 신비한 다리인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서로 대조적인 것을 연결해 준다.
물질과 영혼을 말이다.
 만약 그대가 이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한쪽 둑은 물질이고
다른 쪽 둑은 비물질인 것을 잇는 다리라는 것을, 한쪽 둑은 보이는 것이고
다른 쪽 둑은 보이지 않는 것임을, 한쪽 둑은 죽음이 있고
다른 쪽 둑은 죽음이 없는 것임을, 그대가 무슨 이름을
붙이든 이 두 개의 모순은 그대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긴장이 가실 수가 없다.
 마음은 항상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또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 매순간 마음은 깊은
긴장 속에 빠져 있다.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긴장이 있다. 그것은 또한 고뇌를 만든다.
 나는 지금 그대의 은행 잔고에 대한 고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좀더 근원적인 고뇌, 붓다의 고뇌를 말하는 것이다.
그 고뇌는 생활고로 그대의 마음이 눌려 있을 때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고뇌이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그 고뇌를 인식한다면 그대는
종교적으로 될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이 근원적인 고뇌에 대한 것이다. 붓다도 고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재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의 미모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는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일반적인 걱정거리란 없었다.
그는 왕자였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남편이었다.
그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체를 메고 가는 광경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고뇌를 발견했다. 그 고뇌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마부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마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붓다는 태어나서 그때 처음으로 죽음과 대면한 것이다.
그는 당장 이렇게 물었다.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도 죽을 것인가?"
 이 질문을 보라. 그대는 이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 그대는 아마
누가 죽었으며, 죽을 나이가 되지 않았는데 왜 죽었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근원적인 고뇌와는 상관이 없다.
그대는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붓다는 모든 질문을 자신에게 돌렸다.
 "나도 죽을 것인가?"
 마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따라서
왕자님도 죽을 것입니다."
 붓다는 말했다.
 "마차를 돌려라.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이 삶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 마음은 고뇌로 가득 찼다. 이 고뇌가 풀리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인 고뇌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삶의 실정을 알게 된다면,
마음과 육체의 현재 상태를 깊이 인식하게 된다면
거기에 미묘한 고뇌가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그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점점 강하게 울려나올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 고뇌는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마음은 이제 끝이 없는
심연을 느끼게 되었다. 육체는 죽게 되지만 그대는 죽지 않는 것임을,
그대에게 죽음을 모르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연하게 깨달을 때까지 그 고뇌는 그칠 줄 모른다.
 이것은 거대한 모순이다. 그대는 두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개의
배 위에 타고 있다. 그대는 깊은 갈등에 빠지게 된다. 그 갈등은
마음의 갈등이다. 그 마음은 두 개의 양쪽 극단, 즉 죽음과 불멸,
물질과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다리인 것이다.
 둘째로, 마음은 하나의 과정이며 흐름이지 물체가 아니다.
마음은 형태를 갖고 있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마음(mind)'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마치 그대 속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그것은 텅 빈 허공일 뿐이다. 마음은 과정이며 흐름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작용(minding)'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산스크리트어에는 그것의
정확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타(citta)'이다.
 흐름은 결코 멈출 수가 없다. 흐름이 멈추는 순간 흐름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흐름이 존재하는 한 거기에 긴장이 있다.
흐름이 곧 긴장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그 움직임은 마음이 존재하는 한 멈출 수 없다. 이 지속적인
움직임이 그대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낸다. 만약 그대가 일일이
그 긴장을 해결하려 든다면 미쳐 버릴 것이다.
 우리가 항상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것에도 우리가 빠져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이 내면의
끊임없는 흐름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낯설고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꾸만 뭔가에 몰두하려 한다.
심심한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아무런 할일이 없으면 지나간 신문이라도 읽고 라디오라도
들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는 그 깊은
심연과 애써 마주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만약 그
심연과 마주치게 되는 순간에는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고뇌를 갖게
되리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심연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때 술은 아주 좋은 약이 된다. 그대는 무의식이 되기 때문이다.
섹스 역시 좋은 마약이다. 그 순간에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을 수 있다.
텔레비전도 좋고 음악도 좋다. 자신의 상황을 잊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바로 마음이다.
아니 마음작용(minding)인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작용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명상이며 무심 (無心) 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명상에 대해 묻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명상을 하려고 하면 갑자기 긴장이 됩니다. 그전에는
긴장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잘 지냈었는데 명상을 하려고
조용히 앉으면 갑자기 긴장됩니다. 그리고 잡념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안하던 온갖 생각들이 마구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상이 잡념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오해이다. 잡념은 명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항상 복잡하게 돌아가는 잡념 속에서 살아왔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의 의식이
내면을 살피지 않고 항상 외부로만 향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홀로 고요하게 앉아 있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끊임없이 자신의 본모습, 즉 존재의 심연을 애써 외면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 즉 마음작용은 바로
그런 노력의 과정이다. 그리고 거기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 생존하기 위한 갈등이며 에고의
투쟁이다. 에고란 바로 마음작용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무기이다.
가장 폭력적인 무기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생존 수단이 된다. 그것은 필요하다. 물론 폭력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마음이 바로 폭력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가 고요히 앉아 있을 때마다
그대는 내면의 폭력을 느낄 것이다. 사념들이, 폭력적인 생각들이
마구 달려와 그대에게 부딪칠 것이다. 마치 곧 폭발해 버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고요히 앉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만큼 무서운 고문과 형벌은 없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말한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발 고요하게 앉아 있을 수만 있어도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요히 앉아서 외우듯이 나에게도 어떤
주문(呪文)을 주십시오. 아니면 특별한 호흡법이라도 일러주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빠져서 고요히 앉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마음작용이다. 좀더
세련된 것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겉으로는 조용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명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명상은 무심한 상태가 되는 것이며 끝없는 자신의 심연을
대면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 생각도 일어날 수 없다. 그 놀라운
상황 속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명상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경악스런 사태 속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음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셋째로, 그대는 태어날 때 마음 없이 태어난다. 사람은 단지
마음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만 갖고서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사회 속에서 자라지 않으면 그는 단지 육체만 갖게 된다.
마음 없이 말이다. 그는 어떤 언어도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을 갖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는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다.
오직 느낌만 있을 뿐이며 그 느낌마저 인식하지 못한다.
 사회는 그대 마음작용의 능력을 훈련시킨다. 사회는 그대에게
마음을 준다. 힌두교도와 회교도가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똑같은 인간이지만 마음의 작용 방식이 다르다
태어난 뒤부터 그렇게 훈련받은 것이다. 사회가 다르면
그 사회 구성원의 마음도 달라진다. 그들은 다른 목표를 갖도록 훈련된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거나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갖도록 훈련된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가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훈련된 마음이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응과 자신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보수적이고 진부할 수밖에 없다.
진보된 마음이란 사실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그대에게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대는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이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K.MarX)의 '자본론(Das Capital)'을 읽어 보라. 그것은
바이블이나 기타(Gita),혹은 코란(Koran)에 비해 진부하고
보수적인 면에 있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고전(古典)'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학작품들을 보라. 거기에 어디 진보적인 것이 있는가?
'자본론' 역시 이 사회에서 닳고 닳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서 중심을 이루는 사상이란 바이블에서 인간의
소유욕을 중요시하는 것만큼이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는가? 삶은 매순간 변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항상 과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이며 삶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거기에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대는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대는 기독교인이고 그 여자는 불교도이다.
거기에 갈등이 생겨난다. 그녀는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사랑에 빠졌다. 삶은 이제 그대에게 새로운 상황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은 이 순간 고요해진다. 하지만 그런 고요는 미칠
가능성이 있는 정적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상황은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데
그대의 마음은 그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그 작용을 멈출 수밖에 없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
기반을 두고 과거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빠르게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매순간 변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마음은
긴장하게 되고 폭풍 전야의 정적처럼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결국 미쳐 버리는 것이다.
 동양보다 서양에 정신병자가 많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서양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변화되고 생활
여건도 빨리 변한다. 마음은 미처 그 변화에 부응할 수 없다.
하지만 인도를 보라. 인도는 서양만큼 빨리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도인들의 마음은 느긋하다. 하지만 그 느긋함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제 동양인의 마음도 긴장하고 있다. 서양의 변화가 동양에도
불어 닥치고 있다.
 이제 삶은 그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이해할 수 있을 때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해 못하는 상황이 계속 일어나면 그대는 미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자폐증 환자처럼 스스로의 이해 능력을 포기해 버릴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마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질병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거기에는
쉬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 심리학에서 하고 있는
정신분석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프로이드 이후 심리학자들은
이 마음의 질병 상태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초월이 쉽게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말라.
그것은 그대가 마음을 완전히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날개를 갗고 마음을 넘어가야 한다. 마음의 질병을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병든 채로 그냥 두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런데 이 방 안은
무척 덥다. 나는 두 가지 행위를 할 수 있다. 하나는 냉방장치를
설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방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다.
냉방장치를 설치하면 방 안은 시원해진다. 하지만 설치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서양의 방식은 그 마음의 방에서 나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면서 방 안을 시원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 머무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복을 경험할 수 없다.
행복의 궁극적인 정점에 결코 이를 수 없다. 단지 고통에서
잠시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정상
상태에서 남보다 덜 고통스러울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서양의 정신분석이며 심리요법이다. 이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프로이드는 가히 혁명적이다.
그는 인간에게 무시되어져 왔던 무의식의 영역을 인식의 장으로 끌어내어
펼치게 했다. 하지만 마음을 초월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프로이드나 응, 혹은 아들러가 개발한 심리학을 동양이 개발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동양은 적어도 5천 년 이상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다. 그리고 마음의 깊숙한 영역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게 파헤친 붓다와 같은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의 심리학 같은 것은 동양에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러하다. 동양은 마음이라는 방 내부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방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아 왔다. 유일한 관심은 그 방을 나가는 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양은 그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빠져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방 내부에 대한
설계도를 만들고 싶지 않다. 방 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것이 없다. 나는 오직 마음이라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방 밖을 빠져 나가서 무한한
하늘 밑에 서게 될 때 방안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대는 마음의 변화를 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대는 마음을
초월해 버렸다. 그때 모든 것이 변한다.
 만약 필요하면 그대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나가기 전과 나간 뒤에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방 안에서만 산다면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벌레나 마찬가지다. 그는 방 밖에 밝은 태양이
비치고 무한한 하늘이 펼쳐져 있음에 대해서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는 방 밖으로 나오는 순간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 때문에 처음으로 그는 벌레에서 사람으로, 무의식적 삶에서
의식적 삶으로, 잠든 삶에서 깨어 있는 삶으로 변형될 것이다.
 동양은 마음을 초월할 줄도 알고 마음을 이용할 줄도 안다.
따라서 마음과 그대를 동일시하지 말라. 이것이 동양의 결론이다.
그리고 명상의 모든 방편이 문을 찾아서 마음의 방을 나가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방편들 중에 두 가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첫번째 방편은 행위 중에 정지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정지에 관한 세 가지 방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것은 네번째 방편이 될 것이다.

28
힘과 지식이 점점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고 상상하라.
완전히 빠져 나가는 순간 거기에 초월이 일어난다.

 이 방편은 실제 행동 속에서 할 수도 있고 상상으로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우선 침대에 누워서 완전히 이완하라. 그리고 마치
그대의 육체가 죽어 가고 있다고 느껴라. 눈을 감아라. 곧 그대는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상상하라. 나는 죽어
가고 있다. 점점 죽어 가고 있다. 그 느낌이 생생하다면 그대의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납덩어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몸이 점점 죽어 가고 있다는 상상을 계속하라. 그러면 그대는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그때 갑자기 육체를 잊어버리게 되고
초월이 일어난다.
 육체가 죽어 가는 것을 느낄 때, 그때 초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대의 육체를 보라. 지금 막 그대는 죽어 가고 있다.
그대의 몸은 시체가 되었다. 육체를 보라. 그대는 자신의 죽음을 지켜 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초월이 있다. 그대는 마음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죽은 시체는 마음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시체는 완전히 이완된다.
마음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기 때문이다. 그대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육체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마음은 사라지고 없다.
기억하라. 마음은 삶을 위한 것이지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한 시간 뒤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에게는 오직 한 시간만이 남아 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멈출 것이다. 생각이란 항상 과거나 미래로 움직여 갈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집을 사고 자동차를 구입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혼을 하고
또 다른 사람과 결혼할 계획을 세운다. 그대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고 또 그 생각들은 항상 그대의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생명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결혼이니 이혼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그대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죽음과 함께 그것들은
사라진다. 죽음과 함께 걱정도 멈춘다, 모든 걱정은 살아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대에게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내일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명상을 가르친 모든 선각자들이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대가 내일을 생각한다면 명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 그대는 걱정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내일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걱정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승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저승에서의 삶까지도 계획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하루는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광고 쪽지 한 장을
나눠 주었다. 거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집과 정원이 그려져 있었고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당신은 이처럼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갖고 싶지 않습니까?
그것도 완전히 무료로 말입니다. "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집을 원하신다면 그때는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죽은 뒤 천국에 갔을 때 무료로 이런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팸플릿이었고 그 집은 지상의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내일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죽음 저편의 것
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은 결코 명상적으로 될 수 없다.
명상 속에서는 내일을 생각할 수 없다.
 처칠이 임종을 맞이했다. 그 곁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천국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와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처칠이 말했다.
 "그것은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나는 위대한 신께서 나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항상 걱정해 왔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으며 영혼도 없다. 그대의 죽음은
전체적이며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되살아나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붓다가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대로 하여금 내일을 염려하는 병을
고치려고 한 것이다. 그대를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그때 명상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래서 그대가 죽음을 느끼고 있다면 땅바닥에 쓰러져 죽은 자처럼 누워 있으라.
완전히 이완한 채로 '나는 죽어 가고 있다'고
계속 염송하라. 생각 뿐만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가 죽어 가고 있음을 느껴라.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상 중의 하나이다.
그대의 육체가 시체가 되었다고 느낄 때 그대는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고개도 돌릴 수 없다. 모든 것이 죽어 있다.
그때 갑자기 그대의 육체를 보라.
 마음은 거기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볼 수 있다.
그대는 거기에 있다. 그때 그대가 육체를 보면 그대라고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몸뚱아리일 뿐이다. 그대와 육체 사이에
간격이 뚜렷해졌다. 거기에는 어떤 연결 다리도 없다.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대의 육체는 죽은 듯이 누워 있고 그대는
한 사람의 구경꾼처럼 쳐다보고 있다. 그때 그대는 육체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다. 결코 육체 속에서가 아니다.
 기억하라. 그대가 육체 속에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 사라지고 없다면 그대는 자신이 육체 속에 있다거나
육체 밖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안과 밖은 마음과
연관된 상대적인 용어일 뿐이다. 단지 그대는 하나의 지켜봄이 되라.
이것이 초월이다. 그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
 때때로 실재 상황에서도 그것은 가능하다. 그대는 병이 들었고
나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은 그대의 의식이 깨어날 수 있는 매우 귀하고 유용한 기회다.
이것을 명상의 기회로 이용하라. 그대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그대에게 남아 있던 모든 힘이 빠져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라.
마치 존재계가 그대의 힘을 완전히 빨아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라.
곧 그대는 완전히 빈 껍데기가 된다. 그대의 에너지는
모두 빠져 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시체뿐이다.
 바로 이 순간 그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대가 상상하기 시작한지
며칠 만에 그대는 완전히 빈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모든 것이
빠져 나가고 그대 속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로 그 순간
초월이 일어난다.
 에너지의 마지막 입자가 그대에게서 빠져 나갈 때 초월이 일어난다.
그러나 동요하지 말라. 그저 한 사람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으라.
그때 이 우주와 이 육체는 둘 다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우주와
육체라는 현상을 보고 있는 주체인 것이다.
 이때 마음은 그대에게 더 이상 붙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열쇠다. 그대의 기호와 취미가 어떤 것이든지 그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대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달려라. 끝까지 달려라. 지쳐서 저절로 쓰러질 때까지
의지가 남아 있는 한 달려라. 그러면 어느 순간 그대의
에너지가 다했을 때 몸은 저절로 쓰러질 것이다. 그때 깨어 있으면서
그대의 몸이 거꾸러지는 것을 지켜보라. 종종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는 서 있는데 육체는 쓰러진다. 그대는 쓰러지는
육체를 볼 수 있다. 쓰러진 것은 육체일 뿐 그대는 여전히
서 있다. 그때 육체와 하나가 되어 쓰러지지 말라.
 춤을 추고 소리를 질러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하라. 그러나
절대로 쓰러지지는 말라. 그대는 어느 틈엔가 육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여전히 서 있다. 육체는 거꾸러졌지만 말이다. 그때
육체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어라. 요점을 놓치지 말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라. 한번 그대가 이 경험을 하고 나면 그대는 육체와
다른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밖에 서 있는 것(standing out)'은 영어에서 절정(ectasy)의
본래 뜻이다. 엑스터시 (ectasy)는 바로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그대는 무심의 상태 속에서 자신의 몸 밖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를 몸 안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무심이 되는 순간
그대는 몸 안에 있다는 느낌 역시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초월이다.
그때 몸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마음 안으로도 들어가라.
한번 이것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자신이 몸이나 마음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항상 마음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심해 왔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왔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한때의 유행처럼 흘러갔다. 이제
정신분석도 이미 한물 지나간 것이 되었다. 그리고 요즘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집단 심리요법으로써
일정 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방식이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유행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인가? 마음속에 있을 때는
기껏해야 마음을 정리하는 차원일 뿐 궁극적인 해결 방법이
안되기 때문이다. 정리해 놓은 마음은 얼마 안 가서
또 흐트러진다. 마음을 정리한다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언제 그 평안의 상태가 무너질지 모른다.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해질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이 전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마음은 그대의 목적에 이용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대는 마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그대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것은 탄트라에서 '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대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마음을 하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건강하고 전체적인
존재의 관점을 갖게 된다. 자, 이제 다섯번째 방편으로 넘어가자.

29
헌신은 자유를 준다.

 이 방편은 단 두 마디 말로 끝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간단하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어렵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헌신하라'는 한 마디 말로 끝내려 한다. 자유는 헌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는 두 가지 유형의 방편이 있다.
첫째는 지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그것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둘째는 감정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으로서
시적이며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마음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과학적인 마음과 시적인 마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서로 분리된 양극이다. 그것들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다.
마치 철도의 평행선처럼 언제나 떨어져 있다.
 때때로 한 사람이 시인이자 과학자인 경우가 있다. 매우 드물지만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분열이다. 그는 두 개의 인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시인일 때는 과학자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가 과학자일 때는 시인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린다.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개념과 논리가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의 세계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더 이상 논리나
개념 따위가 없다. 오직 거기에는 감정과 리듬과 감동만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이것은 마음의 두 가지 기본 유형이다.
그리고 이 장에서 말한 첫번째 방편은 지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두번째 방편인 '헌신하라, 자유롭다'는 감정적인 사람을
위한 방편이다.
 한편 그대는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어떤 것이
더 높고 낮은 것은 없다. 지적인 유형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이다. 그대가 무슨 유형에
속하는지 그것만 알면 된다.
 이 두번째 방편은 감정적인 유형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외인가? 헌신이란 무조건적이며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헌신
속에서는 헌신의 대상이 그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신뢰인 것이다. 그러나 지적인 사람은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
그는 오직 비판만 할 줄 안다. 믿지 못하고 의심만 할 줄 안다.
때때로 지적인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될 때가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실한 믿음이 아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절대로 진정한 신뢰가 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논리적 기반이라도 마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요점을 놓치고 있다.
믿음이란 결코 어떤 논리적 근거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논리적 근거나 증거가 있다면 그때는 믿음이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대는 태양을 믿지 않는다. 그대는 하늘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알기 때문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태양이 떠오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믿거나
혹은 불신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용기 있게
뛰어드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어떤 증거도 없다.
 지적인 사람에게는 그런 행동이 매우 무모하게 보일 것이다.
만약 그대가 신에게 헌신한다고 말한다면 그에게는 먼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
신은 기하학이 되어 버린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처럼 말이다.
아무도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수학적 진리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미 증명된 것은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자이며 성자로 알려진
사람 중에 하나인 테르툴리안(Tertullia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신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옳다. 이것이 바로 감정적인 사람의 자세이다.
그는 말한다.
 "신은 증명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다."
 그의 말은 역설적이다. 비논리적이다. 만약 그가 논리적으로
말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지적인 사람들은 매우 좋아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 이미 증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아무런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헌신에 대해서 잊어버려라. 먼저 사랑을 이해하라. 그러면
헌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사랑에 빠진다.
그 말을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사랑에 떨어진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그대의 무엇이 떨어진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대의 머리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분명 지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적 능력을 잃는다는 뜻이다.
그대는 미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한번 물어보라. 왜 사랑에 빠지는지 말이다. 그들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논리적 이유도 타당하지 않다.
 여기에 서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의 행동을 보라.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라. 그것은 완전히 비논리적인 것이며 얼토당토
아니한 것들이다. 그들은 마치 젖먹이들처럼 이야기한다.
외인가?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사랑에 빠지면
젖먹이처럼 이야기한다. 왜 고급 기술과학 용어를 쓰지 않는가?
왜 어린아이들처럼 이야기하는가? 과학 용어는 사랑에 아무런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 하나가 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었다.
그녀는 거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이 친구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했다.
그들은 둘 다 대학 교수들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과학 용어에 대해서는 서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쓰는 말에 대해서는 전혀 상대편 모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진장 애를 먹고 있다. 항상 사랑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것밖에 말할 수 없다. 과학 용어로는 도대체 사랑의
표현을 쓸 수가 없다. 나는 교수로서 내 전공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잘할 수 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매우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젖먹이 말이 통용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랑을 처음 경험한 것이 그대가 젖먹이였을 때
어머니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젖먹이로서 옹아리를 할 때
사랑의 말들을 처음 사용한 것이다. 그것들은 지성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대가 성장해서
누구를 사랑할 때도 그때의 감정으로 되돌아간다.
 한편 사랑의 감정이 깊어지면 질수록 침묵에 빠진다. 그때는
말이 필요 없게 된다. 만약 그대의 연인과 말없이 오랜 시간을 함께
있을 수 없다면 거기에는 이미 사랑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낯선 사람일수록 그대는 즉시 대화를 시작한다.
낯선 사람과 단 둘이 있을 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서로 많은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가교를 건설하지 않으면
어떤 공감대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문을 굳게 닫고 있고, 그는 그 나름으로 문을 닫고 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문을 조금씩 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조금 긴장이 풀어지면 정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연인들끼리도 계속 말을 해야 한다면 거기에는
이미 사랑이 식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된 것이다.
 누구도 사랑에 빠졌을 때 왜 행복한지 증명할 수 없다. 사실
사랑은 하나의 깊숙한 고통이다.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몸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란 정말 어렵다. 이것이 바로 섹스와 사랑의 차이점이다.
두 개의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다.
어떤 동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두 개의 마음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기란 무척 어렵지만 사랑
속에서는 가능하다. 그때 두 개의 마음은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에
빈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에서 사랑이 꽃핀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하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증명하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행태 심리학자인 왓슨(Watson)과 스키너 (Skinner)는
 사랑이란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백일몽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대가
만약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사랑은 일종의 이상심리라고 말이다. 그대의 육체가 호르몬의 분비로
인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그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왓슨조차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이 단지 화학적 변화로 인한 이상심리 작용이라고 말한 그가
자신도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왓슨 역시 행복을 느꼈다.
사랑은 증명될 수 없다. 그것은 내면의 문제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사랑 속에서는 그대보다 상대방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가 중심이 되고
그대는 주변이 된다.
 논리는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작용한다. 마음 역시 언제나
자기중심적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다. 그대가 너무 논리적으로만 행동한다면
그대는 곧 버클리(Berkeley)가 내린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며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일 뿐이다.
따라서 내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이 정말 거기에 존재하는 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어쩌면 나의 꿈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꿈이 아니라 정말로 존재한다고 나에게 증명할 길이 없다.
물론 나는 당신을 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꿈에서도
촉감은 있다. 꿈에서도 내가 누군가를 때리면 그는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이 상황이 꿈이 아니고 실제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정신병원에 가보라. 거기에는 혼자 앉아서 열심히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나 역시 혼자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대가 여기에
실재한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따라서 논리나 이성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결국 나만이 존재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꿈이 된다.
이것이 이성과 논리가 작용하는 방식이다.
 이와 정반대의 길이 있다. 그것은 가슴의 길이다. 가슴의 길에서는
나는 꿈이 되고 상대방이 실재가 된다. 그대가 이쪽 극단으로 흐르면
그것이 곧 헌신이다. 만약 그대의 사랑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직 상대방만이 남아 있다. 이것이 곧 헌신이다.
 사랑은 헌신이 될 수 있다. 사랑은 헌신의 첫걸음이다.
오직 그때만이 헌신은 꽃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조차 너무 멀다.
오직 섹스만이 현실이다. 사랑은 두 개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섹스로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헌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 가운데 있다. 그 밑에는 섹스의 심연이 있고 그 위에는
열린 하늘이 있다. 헌신의 무한한 하늘이 있다.
 만약 그대의 사랑이 깊어진다면 상대방은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리하여 그는 그대의 신이 된다. 그래서 미라(Meera)는
크리슈나를 신이라고 불렀다. 아무도 크리슈나를 볼 수 없다. 그리고
미라 역시 크리슈나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증명하는 데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오직
크리슈나를 사랑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기억하라. 그대가 현실의 인물이든
상상의 인물이든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변형은 헌신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가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라다(Radha)에게는 크리슈나가 현실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미라에게는 그가 상상의 인물이다. 미라가 라다보다 더 위대한
헌신을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라다조차 미라를 질투할 정도였던 것이다.
크리슈나가 실제로 옆에 있을 때에는 그의 현존을
느끼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크리슈나가 거기에 없을 때도
미라는 홀로 있으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그녀에게
크리슈나는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크리슈나의 실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헌신을 통해서 이미 변형된 것이다. 헌신이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크리슈나가 거기에 실재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가 있든 없든 전적인 헌신이, 전적인 사랑의
감정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초월이며 변형이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정화되어진다. 그것 역시 전체적인 순결이다.
 에고의 느낌은 모든 미침의 뿌리가 된다. 헌신의 눈에 비친
에고는 하나의 질병으로 보인다. 에고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 길이
에고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그때 상대방은 더욱 중요해지고
나 자신은 점점 바래지고 사라져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남지 않게 된다. 오직 상대방 존재만이 남게 된다.
 그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면 상대방은 타인이 아니다.
그는 그대가 존재할 때에만 타인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사라지고 나면 '당신' 역시 사라진다. 사랑을 통해서 그대는
헌신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그대는 아직 남아 있다. 그대가 사라지게 되는 정점이 어느 순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보통의 사랑 속에서는
자신이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방이 그대보다 중요해질 때만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상대방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거기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비로소 그때만이
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그를 위해 죽을 수 없다면
그를 위해 살 수도 없다. 삶은 죽음을 통과한 이후에만 그 진정한
의미를 간직하게 된다. 사랑 속에서는 그대보다 상대방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드문 일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사라지고 만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대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대가 그 경험을 통해서 헌신의 일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연인 사이에서 상대방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 사랑의
정점에서 그대는 사라지고 상대방은 신성이 된다. 그대가 이것을
사드하나(영적 수행 )로 삼는다면, 내면의 탐구로 삼는다면, 사랑을
즐거움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변형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때 사랑은 헌신이 된다.
 헌신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조복시킨다. 이 조복의
상대가 굳이 하늘에 있는 신이 아닐 수도 있다. 깨달은 스승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대가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다면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헌신은 자유를 준다. "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 속에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오직 사랑 속에 있을 때만이 그대는 섬세한
자유를 갖게 된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외부적인 모습으로 보자면 마치 사랑에 빠진 그대는 노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둘 다 서로의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속에서 자유의 일별을
보게 된다. 사랑은 자유인 것이다.
 왜인가? 에고가 속박이기 때문이다. 다른 속박은 없다. 그대가
감옥에 수감되어 탈옥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연인이
감옥 속에 들어오면 그 순간 감옥은 사라지고 만다. 여전히
벽이 거기에 있지만 그것은 그대를 가둘 수 없다. 그대는 완전히
그 벽들을 잊어버린다. 그대는 상대방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하늘이 된다.
감옥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다.
 물론 그대가 자유를 느끼는 것은 새가 날아다니는 공간적 하늘이 아니라
의식의 하늘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이
그대는 그 하늘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완전히 조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감정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이 방편이 유효하다.
 라마크리슈나를 보라. 그를 바라보면 마치 칼리 여신의 노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어머니라고 부르는 칼리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마치 노예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만큼 자유로운 사람도 없다. 그가 다크시네스바르에서 사제로서
처음 입문식을 했을 때 그는 사원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장로들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는 이상한 녀석이다. 그를 쫓아내 버려라. 그는 헌신하지 않았다."
그는 여신의 발에 바쳐질 꽃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먼저 맡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동이다.
이미 한 번 냄새가 맡아진 꽃은 신에게 바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공양물로 바쳐진 음식 역시 그가 먼저 맛을 보았다. 사제의
그런 행동을 본 신도들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법을 어긴 것이며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사원을 쫓겨나는 일이 있어도 미리 음식을 맛보지 않고는
내 어머니에게 그 음식을 바칠 수 없다. 어머니는 언제나
음식을 미리 맛보고 내게 음식을 주셨다. 그래서 이제 내가 먼저
음식을 맛보고 그녀에게 바칠 것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들이
나를 비난하고 내쫓으려면 마음대로 하라.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 어머니는 모든 곳에 계신다. 그녀는 당신들의 사원에만
매여 있지 않다. 내가 어디에 가든지 나는 지금처럼
할 것이다."
 한번은 한 이슬람교도 친구가 라마크리슈나에게 가서 물었다.
 "만약 당신의 어머니가 모든 곳에 있다면 모스크(회교 사원)에는
왜 가지 않는가?"
 그러자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좋다. 거기에 가겠다."
 그는 회교 사원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다크시네바르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한 모스크에서 머물렀다. 그때 그
친구가 와서 말했다.
 "이제 가도 좋다. "
 라마크리슈나는 한번 더 말했다.
 "나의 어머니는 도처에 계신다."
 사람들은 그를 칼리 여신의 노예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헌신은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그가 사랑하는 여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대가 사라지고 나면 그대의 연인은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어딘가에 존재하면 그때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할
땅이 없다.

(질문 )

 "당신께서는 사랑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사랑이
집착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속시킵니다. 집착과 자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것은 거기에 더 이상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집착이 실체이고
사랑은 미명일 뿐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질 때마다 얼마 안 가서
그대는 자신이 불행에 떨어졌다고 느긴다. 도대체 그것은
무슨 원리 때문인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며칠 전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그는 매우 심한
죄의식에 싸여 있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깊이 사랑했기에 그녀가 죽는 날
나는 마구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는 매우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숨을 깊이 내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울부짖는 것은 마음의 첫번째 층이다. 그는 슬픔과
괴로움을 느긴다. 하지만 두번째 층에서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며
시원해 한다. 그리고 세번째 층에서 그는 죄의식을 느낀다.
마음의 세번째 층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 앞에서
자유로워 하다니?
 그래서 그는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 마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빨리 그녀를 배신할 수 있습니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배반하지 않았다.
사랑이 집착일 때는 그것은 짐이 된다. 속박이 된다. 그러나 왜
사랑이 집착이 되는가?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그대가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집착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교묘하게 진행되어 간 것이다. 결국 그대는 자신이 집착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유에 대해서는 미묘한 공포를 느긴다.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되고 싶어한다. 왜 그대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가?
그대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서 지겨워하고 있다.
 그대가 고독할 때에는 아무것도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누군가에게 빠지고 일부러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대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살려고 한다. 그것은 그대 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홀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랑의 놀이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집착을, 속박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조만간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지
그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 말이다. 그대는 곧 집착이 표면에
들어날 것이고 사랑의 연기는 막을 내린다. 사랑의 연기는 그 기능을
다했기 때문에, 그대는 소유하고 싶은 사람을 드디어 손에 넣었기 때문에
이제 계속 집착할 일만 생겼다. 더 이상 사랑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 그때 그대는 속박을 느낀다. 노예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자유를 위해 갈등한다.
사랑은 결코 집착이 될 수 없다. 사실은 집착이 필요한 것이고
사랑은 포장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랑은 미끼였을 뿐이다.
고기가 걸려들면 사랑은 역할을 다했다.
만약 진정한 사랑이 고기에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집착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직 나만을 사랑해 달라'라고
말하는 순간 그대는 소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소유하는 순간 그대는 그를 은밀하게 모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를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갈등이 싹튼다. 자신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서
상대방을 소유하려 한다.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유롭고 독립된 의식으로서 움직여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함께 뭉칠 수 있고 서로에게 녹아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소유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것이다. 결코
인간이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만큼
그대는 인생에서 많은 불행을 피해갈 수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말은 소유당하지 않으려거든 소유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다.
그대가 노예가 되지 않으려거든 그 누구도 그대의 노예로 삼지
말라.
스승들, 소위 마스터들은 항상 제자들의 노예가 되어 왔다.
그대가 노예가 되지 않고서는 마스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소유할 때 그대 역시 그에게
지배당하고 소유당한다. 그래서 그대의 마스터는 그대의 노예인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마스터입니까? 아무도 내 제자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스승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오직 그때만이 그대가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무도 그대에게 노예가 되지 않을 때, 아무도 그대를 노예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의 노예도 아닌 자만이 진정한 마스터이다.
자유를 사랑한다는 것, 자유롭고 싶은 것은 자신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났을 때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침묵을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대가 내면의 의식을, 그대의 중심을 깨달을 때만이 사랑은
집착이 되지 않는다. 그대가 내면의 중심을 모른다면 사랑은
집착이 될 것이다. 아니 아예 사랑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내면의 중심을 알게 될 때 사랑은 헌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먼저 그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금 그대는 존재가 아니다.
어느 날 붓다가 마을을 지나가는데 한 젊은이가 와서 말했다.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까?
붓다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그대는 존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잊어버려라. 그대
자신이 있고 난 후에야 모든 것이 따라온다."
지금 당장에는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은 집착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행위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
먼저 존재하라. 그 다음에야 그대의 존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그 전에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집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이르노니 만약 그대가 집착에 대항해서
싸운다면 그대는 완전히 한 바퀴를 잘못 도는 것이다.
그대는 투쟁할 수 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승려들, 수행자들,
산야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집착을 느낄 때마다 그것에 반항한다.
그들은 도망간다. 집을 떠나고 아내를 떠나며 자식들을 버린다.
그들은 모든 소유를 버린다. 그들은 거지가 되어 산으로 달아난다.
그러나 그들을 쫓아가서 살펴보라.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
집착해 있다.
깊은 숲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한 친구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다른 고행자들도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나무 밑의 움막에서
지내고 있는데 새로운 구도자가 왔다. 마침 그때 내 친구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는 강가로 목욕을 하러 간 것이다. 그래서
그 나무 밑에서 새로 온 구도자가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강에서 돌아와 그 광경을 보더니 그 새로 온 구도자를
밀쳐 내 버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나의 나무 밑이다. 다른 곳을 찾아보라. 아무도
내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친구는 자신의 집과 가정을 떠났지만 이제 그 나무가 새로운
소유물이 된 것이다. 그대는 그의 나무 밑에서 명상할 수 없다.
그대는 어떠한 욕망을 쉽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의 집착은 쉽게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생각에게 속고 있다. 그러므로 집착과 싸우지 말라. 왜 집착이 거기에
있는지 이해하라. 그러면 그 깊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없기 때문에,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그 자리에 집착이 들어선 것이다.
그대 내면에는 진짜 그대가 자리잡고 있지 않다. 그대 내면에는
순전히 가짜 그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가짜 그대는
끊임없이 집착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가짜 그대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짓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기 위해
그대의 시선을 다른 데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
진짜 그대가 들어설 때, 모든 것은 달라진다. 그대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거지에서 황제로 변하는 것이다. 이제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진실로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대는
사랑으로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지복의 황홀감이 그대에게
차고 넘쳐서 그대의 사랑은 대지를 적시고 허공을 메우며 별들을
어루만질 것이다. 전우주가 그대의 사랑으로 목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II

탄트라는 이 세상을 그대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운명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대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방편들은 그대가 이러한 자세를 취할 때만 도움이 된다.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II
42.
하나의 소리를 영창하고 그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점점 작아져 가는 소리를 따라 그대의 느낌 역시
침묵의 조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43.
입을 가볍게 열고 혀의 중심에 마음을 집중하라.
그리고 호흡이 들어올 때 침묵 속에서 '흐(HH)'소리를 느껴라.

44.
어떤 'A'나 ,M'없이 그저 '옴(AuM)'소리 위에 중심을 잡아라.

탄트라는 세상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눈다. 하나는 삼사라
(SamSara)이고 다른 하나는 모크샤(Moksha)이다. 그대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삼사라이고 그 속에 감춰진 궁극의 세상이 모크샤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감추어진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대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거기에 있다.
삼사라와 모크샤는 별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두
가지 차원이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거기에 어떤 모순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이중성도 없다. 단지 우리의 한계 때문에 그것이
두 가지로 나타나 보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체를 보는 순간 그것은 하나로 나타난다.
우리가 삼사라, 즉 사바세계로 알고 있는 이 세상이 모크샤, 즉
열반의 세계, 궁극의 세계, 절대의 세계로 나타난다.
다른 전통에서는 이 두 가지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고 거기엔
갈등이 있다. 그러나 탄트라에서만큼은 그런 갈등이 없다. 이것은
 가슴에서부터 깊이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는 한
그대는 탄트라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가 기독교인이거나
이슬람교도 혹은 힌두교도나 자이나교도라고 할지라도
그대의 믿음은 이중적이다. 거기에 갈등이 있다. 세상은 속된 것이고
신성에 반대한다. 그대는 신성에 이르기 위해서 세상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모든 단체와 조직의 일반적인   신념이다.
마음은 이 이중성을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마음의
기능이란 것이 나누는 것뿐이라서 오직 이중성만을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은 하나의 프리즘처럼 작용한다. 빛이 프리즘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일곱 가지 색깔로 분리된다. 마찬가지로 마음 역시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가만 두지 않는다.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데까지 분해시켜 버리고 만다. 거기에는 오직 분별만이 남아 있다.
마음은 가장 작은 알갱이에 이를 때까지 분별을 쉬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가 진실을 알려면, 실체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마음 작용과는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합일의 길이다. 거기에는 마음이 아니라 무심이 필요하다.
탄트라는 분별하는 것을 부정한다. 전체는 전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삼사라이고 우리에게 감추어진 부분은
모크샤나 열반의 세계이다. 혹은 그대가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그러나 그 부분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그것이 미래의 언젠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계 속에는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는 그 속에 서 있다. 그대가
무심의 상태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자태를 드러
낼 것이다. 그대는 지금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데 두 눈을 꼭 감고서
태양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이미 있다.
그대가 눈을 뜨기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사실로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존재계에서는 태양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태양이?
감추어져 있다. 그대에게는 오직 어둠이 있을 뿐이고, 빛은 그대에게서
숨어 있다. 그러나 눈을 떠보라. 그 순간 빛은, 태양은 그대에게
사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이미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탄트라는 말한다. 이 세상은 이미 신성하다고. 그러나 그대는
눈이 멀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속된
것뿐이다. 그러나 탄트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 중의 하나는
바로 삼사라가 곧 모크샤라는 것이다. 이 사바세계가 곧 열반의
세계이며 궁극이라는 것이다. 현세와 내세가 둘이 아니며 차안과
피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탄트라에서는 많은
것이 가능하다. 첫째 탄트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깊은 수용이 그대를 완전히 이완시켜 준다. 그것 외엔 다른 그
어떤 것도 그대를 이완시켜 주지 못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구분이 없다면, 초월의 세계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면, 이 물질이 바로 신성의 몸이라면 그땐 아무것도
부정할 것이 없다. 아무것도 비난받을 것이 없으며 그대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신성을 깨닫는 데 수년이 걸릴지 몰라도
탄트라에서는 어떤 것도 조급하지 않다.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있고 시간 역시 부족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바로 지금이다.
그대가 눈을 뜨기만 향다면 그것은 그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거기에 신성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원죄를 부르짖는 기독교나 여타 다른 종교들의 자세는
탄트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화려한 거짓말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것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내면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그대는 사물의 대상만을 분별할 수 없다. 그대가
사물에 대해 분열을 일으키는 순간 그대 자신 역시 분열된다.
그대가 만약 이 세상은 잘못된 것이며 신성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면 그때 그대의 삶 전체는 저주 속에 빠질 것이다.
그대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웃을 수 없다. 심각함이 그대의 얼굴을 가리고 만다.
그때부터 그대는 오로지 심각하다. 그대는 게임을 벌일 여유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마음속에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은 삶을 부정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피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고 느긴다.
그래서 항상 피안의 세계, 초월의 세계는 이상적인 것이며
미래에나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언제나 죄악으로
가득 찬 곳이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그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대를 신경증에 걸리게 하고 미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탄트라는 유일하게 건강한 종교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종교가 건강하게 되면 그것은 탄트라가 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성전, 조직, 의식,
교리 등등의 외부적인 면이고 이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면으로서 신비주의나 밀교에 해당되는
부분인데 탄트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대가 이 세상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대의 내면은
평안해질 수 없다. 배타적인 태도는 긴장을 만들어 낸다. 한번만
그대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 이
세상은 매우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기본이라고 탄트라는 말한다.
우선 그대는 먼저 편안해야 한다. 그때만이 뭔가가 가능하다.
만약 그대가 긴장되어 있고 분열되어 있다면 어떻게 초월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미 안으로 미쳐 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이 상황에 완전히 묶여 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인다. 이 세상에 대해 많이 반대하는
사람일수록 이 세상에 매여 있다. 이 세상은 그대의 적이다.
그대는 이 세상의 포로가 되었다. 그때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세속적인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세상에 대해 싸울 수도 있고
세상을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는 여전히 세속적이다.
나는 세상을 포기한 한 성자를 보았다. 그는 돈을 만지지 않았다.
그에게 동전을 던져 주면 그는 눈을 감아 버릴 것이다. 그는
돈에 대해서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사실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를 받들어 모셨다. 그들은
그가 해탈한 성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해 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돈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지만 그것은 돈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다. 단지 돈을 만지지 않을 뿐이다.
왜 돈을 두려워하는가? 왜 싫어하는가? 기억하라. 증오는 애착의
역류일 뿐이다. 그대가 어떤 것에 깊이 애착하지 않는 한 그것을
증오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 돈에 깊은 애착을 갖지 않으면
그토록 돈을 미워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왜 그토록 돈을 두려워하는가?"
그가 말했다.
"돈은 방해가 된다. 돈을 향한 나의 욕심을 반대하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신성에 이를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또 하나의 욕심일 뿐이다. 그는 지금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돈을 만지면 신성을 잃고 돈을 만지지 않으면
신성을 얻는 것이다. 그는 돈보다도 신성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돈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탄트라는 이 세상에 집착하지도 반대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단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벗어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마라. 그러면 결국 부작용과 반발력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대는 자연스럽게
감추어진 영역이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길이 된다. 전체적인
수용은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다른 차원으로 그대의 에너지를
흐르게 할 것이다. 탄트라는 '니야티 (niyati)'의 개념을 믿는다.
그것은 운명 이라는 것이다. 탄트라는 이 세상을 그대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운명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대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때 그대의 에너지는 흩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방향을 바꾸어 내면을 관통한다.
이 방편들은 그대가 이런 자세를 취할 때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대가 기본 골격만 갖춘다면
이 방편들은 매우 간단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골격이 바로
'수용'이다. 한 번 거기에 수용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쉽게
굴러갈 것이다.
자, 이제 여섯번째 土리에 관한 방편으로 들어가자.

42.
하나의 소리를 영창하고 그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점점 작아져 가는 소리를 따라 그대의 느낌 역시
침묵의 조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대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도 좋다.
그때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대는 그 소리를 영창하는 동안에
단지 소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느낌까지도
영창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는 사라지고
느낌만이 남게 된다.
소리는 느낌에 이르는 통로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소리는 마음이고
느낌은 가슴이다. 마음은 가슴에 이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가슴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그 기회를 놓쳤다. 우리는 어디가 가슴으로 들어가는
지점인지 알지 못한다. 문은 닫힌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들어
가겠는가?
우리는 가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은 가슴을
통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관념적인
말이다. 가슴이라는 말마저 우리의 머리 속에 있다. 우리는 가슴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 신체의 가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의학은 우리의 가슴속에는 피를 돌리고 있는
심장밖에 없다고 말한다. 거기에 시나 음악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가슴 뒤에 숨겨진 더 깊은 중심을
알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머리로 산다.
어떠한 내면의 여행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소리다. 모든 소리가 멈추면 그대의 마음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는 마음이 없다. 침묵은 무심이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고요하다'라는 말을 자주한다. 하지만 그
말은 틀린 말이다. 마음은 침묵이 사라진 상태다. 마음과 칭묵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이 있을 때는 침묵이 없고 침묵이 있을 때는
마음이 없다. '고요한 마음'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
마치 '살아 있는 시체'라는 말과 같은 식이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반대로 그가 살아 있다면
그는 죽은 시체가 아니다.
그래서 '고요한 마음'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널리 퍼져 있고,사람들을 혼동시킨다. 명상을 모르는사람들이
함부로 이런 엉터리 말들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침묵이 들어오면
마음이 나가고 마음이 들어오면 침묵이 나간다. 그 둘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마음은 소리다. 그 소리가 체계적이라면 그대는 제정신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혼란스러우면 그대는 미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소리는 있다. 거기에는 아직 마음이 있다.
그래서 그대가 내면의 중심에 이르는 지점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때는 소리를 이용하라. 어떤 한 가지 소리를 정해서
그것을 영창하라. 마음속에 여러 가지 소리가 잡다하게 있다면
그때는 중심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소리만 있다면
그때는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소리들이
한 가지 소리에 의해 점령되어야 한다. 그래서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한 가지 소리를 영창하라. 마음속에 오직 그 소리만 남도록
계속하라. 처음에는 그대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하지만 점점 듣기
어렵도록 천천히 그리고 약하게 하라. 그러다가 갑자기 그 소리는
떨어져나가 버린다. 그때 침묵이 찾아들 것이다. 침묵이 폭발을
이를 것이다. 소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침묵이 있을 때 거기에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사념이 아니다. 그저 순수한 느낌
자체일 뿐이다.
그래서 이 방편은 만트라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 만트라는
자신의 종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대가 만약 힌두교도라면
그때는 '람(Ram)'을 사용하라. 그 소리는 그대의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소리이다. 그대는 오랜 전통이다. 그대는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과거 여러 전생에서부터 그것은 그대의 만트라였다.
그 소리를 이용하라.
만약 기독교인이 '람'을 사용한다면 그는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에게는 '람'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주예수'마
'마리아'가 훨씬 낫다. 그대에게 익숙한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새로운 소리에는 그대의 느낌이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내 친구 중의 하나가 독일로 이민을 갔는데 그는 거기에서
30년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모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의 모국어는 '마라티(Marathi )어'였는데 그가 30년 동안
독일어만 사용하다 보니 나중에는 그만 독일어자 자기의 모국어처럼
되어 버렸다. 물론 내가'모국어처럼'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것에
주의하라. 어떤 사람도 모국어를 바꿀 수는 없다. 다른 언어를
자주 사용해서 모국어처럼 될 수는 있지만 모국어는 될 수 없다.
그것을 표면적으로는 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속 깊이 들어
가면 거기에는 본래의 모국어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30년이 지났을 때 병을 얻었다. 그래서 인도의 가족들이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의식이 왔다갔다했는데 무의식으로 떨어졌을 때에는
마라티 어를 사용했고, 의식이 돌아오면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의 의식은 마라티어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무의식은
독일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의식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라티어가 거기에 남아 있다.
그것은 그의 모국어였다. 그 모국어는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그대가 어떤 소리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갗게 된다면
이 방편을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부러 만들어 낸 소리를
사용하지 마라.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소리를 사용하라.
만약 이슬람교도가 '람'을 사용한다면 그때는 매우 어려워진다.
그에게는 이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가장 오래된 종교 두 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힌두교와 유대교이다.
다른 종교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종교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며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시크교가 바로 힌두교의 소산이다. 이 거대한 두 흐름은
개종을 믿지 않는다. 물론 지적으로는 개종할 수 있다. 하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개종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반대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힌두교도는 힌두교도로
남아 있다. 그대는 교회에 가서 예수나 마리아에게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 속에서만 그렇다. 그대의 무의식은 바뀌지 않는다.
그대는 결국 힌두교도다.
힌두교와 유대교는 개종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무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그의 종교는 바꿀 수 없다.
옆에서 그를 혼란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혼란 역시 표면적인
것일 뿐 얼마 가지 않아서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대가
힌두교도로 태어났다면,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기독교의 만트라를
외운다고 해도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깊은 곳에서는 힌두교의
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깊은 느낌이 남아 있는 소리를 찾아라. 
어쩌면 그대의 이름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는 차라리 자기의 이름이 훨씬 낫다. 부크
(sukkh)라는 이름의 유명한 신비주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만트라로 사용했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다.
나는 신들의 이름을 많이 들어 보았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찾고 있다. 그런데 왜 내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이름을 이용했다.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에도 관심이 없다면 그때는 그대의 이름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렵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어떤 존경심도 품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존경할지 몰라도 그대 자신은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번째로 할일은 도움이 될 만한 소리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혹은 그대가 좋아하는
꽃 이름도 좋다. 그대가 깊은 애정이나 느낌을 갖고 있는
소리라면 무엇이든 좋다. 그것을 사용하라. 그대가 특별한 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때는 '옴'을 사용하라. 아니면 '아멘'도
좋고 '람'도 좋으며 '마리아'도 좋다. 혹은 붓다의 이름도 좋고
마하비라의 이름도 좋다. 하지만 거기에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대 스승의 이름도 좋다. 거기에 느낌이 있다면 말이다. 느낌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나서 그 소리를 영창하라. 그러면서 소리를 점점 줄여
가라. 그 소리가 그대 내부에서만 들려올 때까지 줄여 가라. 조금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리가 사라져 가는 대신
소리에 대한 느낌만 남게 될 것이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면
거기엔 오직 느낌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름붙일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이다. 깊은 사랑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 일반적인 사랑과의 차이가 있다.
그대가 하나의 소리나 이름을 사용할 때 거기에 사랑이 깃든다.
하지만 그 사랑은 국한된 사랑이며 이미 방향이 잡혀져 있다.
그대가 '람'을 계속 반복할 때 거기에 애착이 있다. 그러나 '람'
에 대해서만 그렇다. 람이 사라지면 이제 거기엔 느낌만 남는다.
그 느낌은 그저 순수한 사랑의 느낌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의 바닷속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사랑에 대상이 없을 때 그것은 가슴의 것이 된다. 그러나 대상이 있다면
머리에서 작용한다. 어떤 대상을 향한 사랑은 머리를
통해 나온다. 그러나 순수한 사랑의 느낌은 본래 가슴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종교와 상관이 없다. 가슴으로 깊이 들어가면
본래의 그대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힌두교도도 아니고 회교도도 아니다.
그대는 불교도거나 기독교인이 아니다. 가슴은 순수하다.
그대의 존재는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로도 규정 지을 수 없다.
이 방편의 핵심은 바로 이 근원, 이 가슴의 중심에 이르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근원과 연결죈 소리를 찾아야 한다. 가슴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느낌을 가진 소리를 찾아야 한다. 그 소리를
발견하면 그대의 가슴은 진동하기 시작한다. 적어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대의 온몸은 극도로 섬세해지고 예민해질 것이다.
그때 그대를 포근하게 감싸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느끼는 안정감이다. 그때 세상은 더 이상
생존경쟁의 냉정한 세상이 아니라 따뜻하고 포근한 세상이 된다.
그것은 그대의 느낌이 가슴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힌두 사원에 가면 '가르바그리하(garbhagriha)'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 말은 '자궁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르바(garbha)'란
자궁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사원에서 울리는 만트라를 함께 영창해 보라.
모든 사원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만트라를 갖고 있다. 그
만트라는 그 사원이 숭배하는 신과 연결된 것이다. 그대가 사원
안에서 그 만트라를 영창하면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처럼
아늑함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그곳은 닫혀진 공간이었고
오직 하나의 출구만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처음 인도에 왔을 때 그들은 힌두교 사원을 찾아갔다.
그들이 처음 받은 인상은 그 사원이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창문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직 작은 출입구
하나만 있어서 환기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궁 역시 오직 하나의 문만 갖고 있으며 환기 또한 전혀 · 되지 않는다.
힌두교 사원은 바로 이 자궁을 흉내내어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그대가 만트라를 영창하면 마치 자궁속에
들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사원을 '가르바그리하'
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사원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새로은
탄생을 연상하게 된다. 그대는 새사람이 될 수 있다. 그대가
애정을 갖고 있는 소리를 그 속에서 영창하면 그대는 자궁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 방편을 실외에서 수련하는 것은 어렵다. 그 이유는 그대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는 순간그것은 밖으로 흩어져 버리고
다시 그대에게 반향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은 골방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그대의 기력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 
그 골방 속에서는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그대는 소리의
반향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매일 같은 장소에서 이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사원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메카에 있는 모스크에는 이슬람 교도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들어가면
다른 소리를 내게 되고 그것은 결국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가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하면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원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회 개혁론자들은
 사원을 개방하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부르짖지만 그것은 넌센스일 뿐이다.
그들 말대로 한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될 것이다.
힌두 사원은 오직 힌두교도에게만 열려져야 한다. 힌두 사원은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천 년 동안 그들은 어떤 조화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혼란시켜서는 안된다. 그 혼란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사원은 공적인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장소이다. 그것은 관광객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지금 인도는 인도인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관광객의 무조건적인 출입이 허용되고 있다. 사원은
절대로 관광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바이브레이션으로
가득 채워진 장소다. 
만약그대가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나 머렸을 때 람사원에 다녔다면
그대가 성장한 뒤에도 그 사원에 들어가면 람의 만트라가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의식적으로 람 만트라를
영창하지 않아도 그대 속에서 람 만트라가 울려 올 것이다.
그것은 그 공간에 퍼져 있는 진동이 그대에게 울려 오기 때문이다.
그 진동이 그대의 가슴을 칠 것이다. 그래서 이 방편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런 장소가 좋다는 것이다.
이 방편은 사원에서 사용하는 방편이다. 사원이나 교회나 모스크가
모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대의 집은 별로 좋지 않다. 다른 진동들이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가지 소리로 그
공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대는 그렇게 강인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소리를 갖고 있는 장소로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매일 똑같은 장소에 가서 이 방편을 수련하는 것이 좋다.
그대는 점점 강력해질 것이다. 그대는 점점 마음에서 가슴으로,
표면에서 심층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이 방편을 어디에서든지 수련할 수 있다. 그때는 전 우주 공간이
그대의 사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이 좋다. 매일 정확하게 그 시간을 지켜라. 그러면
사원은 그대를 기다리게 된다. 그대가 올 때 사원의 공간 전체는
그대를 환영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상징적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의 문제다.
처음에 이 방편을 수련하는 것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그 시간이 되면 그대의 몸은 배고픔을 느낀다.
몸은 자신의 시계를 갖고 있다. 그대는 매일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그래서 그 시간이 다가오면 벌써 몸은 잠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매일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을 바꾼다면
그대의 몸은 상당한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불규칙한 생활습관이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80세를 살 수 있는데도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산다면 70세밖에 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육체의 시계를 정확하게
따라주면 90세까지도 살 수 있다. 10년이 연장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그대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신의 시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주의 시계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그대가
매일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사원으로 들어가면 사원은 그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될 것이고, 그대 역시 사원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는것이다. 이 두가지 준비가 만날때 결과는 천배 이상 확장된다.
사원에 갈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그대의 집에 조그마한 공간을
하나 만들어도 좋다. 그 공간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명상을 하는 데에만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목적은 제나름대로의
진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돈벌이나
카드놀이를 위한 장소로 그 공간을 사용한다면 그 공간은 이미
잡다한 진동으로 오염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진동을 예민하게
이용하는 이 방편에는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대가 집 안에 있는 하나의 작은 공간을 사원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마라.
오직 명상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라. 그대는 곧 그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소리의 일곱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43.
입을 가볍게 열고 혀의 중심에 마음을 집중하라. 그리고
호흡이 들어올 때 침묵 속에서 '흐(HH)'소리를 느껴라.

먼저 입을 가볍게 열어라. 그리고 혀 중간에 마음을 두어라. 그
다음에 호흡을 하라. 그때 '흐(HH)'소리가 나는 것을 느껴보라.
마음은 몸의 어떤 부분에도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조금만 훈련하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마음을 항상 머리에다
집중시키고 있다. 그 집중은 너무나 자연스런 것이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마음이 머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위치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한편 동양, 특히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마음이 단전에 머물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그들은 土위
단전호흡이라는 것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그때 마음은 다른 성질을
갖게 된다. 그러나 머리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때는 그런
특수한 마음의 성질을 느낄 수가 없다.
사실 마음은 육체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에는
두뇌가 있을 뿐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가슴에
손을 대고는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대는
마음을 몸의 어떤 부분에라도 집중시킬 수가 있지만 이미
집중되어 버린 부분을 쉽게 옮길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대부분
마음을 머리에다 집중시킨 채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심층심리를 연구하는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그대가 섹스 행위를 할 때 그대의 마음은 머리에서 성기관으로
옮겨 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만하게 섹스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이 머리에 있을 때 그대는 섹스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결코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대는 절정에, 봉우리에 올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아이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랑의 정점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살게 될 것이다.
그대는 탄트라 이야기나 카쥬라호 사원의 조각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카쥬라호 사원에 가본 적이 있는가? 아마 사진은 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있는 조각상들의 얼굴을 보라. 사랑의 행위에
열중해 있는 남녀의 얼굴들을 보라. 그 얼굴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섹스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붓다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환희가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머리를 통해서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섹스에 관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머리를 내던져 버렸다.
그들의 초점은 두뇌에 있지 않다.
그들의 의식은 성기관으로 내려갔다. 이제 마음은 무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붓다가 지닌 엑스터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섹스는 바로 명상이다.
왜냐하면 초점이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한 번만이라도 마음의 초점을 바꿀 수 있다면
그대의 머리에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다면, 그대는 이완될 것이다.
그대의 얼굴에 주름 잡힌 긴장은 모두 풀어질 것이다.
그대의 에고는 거기에 없다. 그대의 에고는 죽어 버렸다. 
그래서 사념이 복잡할수록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적어진다. 사랑은 다른 각도의
초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속에서는 가슴이 필요하다. 
사랑을 하려면 그대는 가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섹스 속에서는 성기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대가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면 그때는 머리가 필요하다. 그때는 두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랑은 수학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섹스는 절대로 수학이 아니다. 만약 머리 속에서는 계속 수학
문제가 돌아가고 있는데 그대가 섹스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저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변화될 수 있다. 탄트라는 인간의 몸 안에 일곱
개의 에너지 중심 (center )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 중심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만약 그대가 어느 하나의 중심에 집중한다면
그대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일본에는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무사 집단이 있다. 그들은
항상 무술에 대한 훈련을 쌓는데, 그들이 제일 처음 하는 훈련은
마음을 단전에다 내려보내는 일이다. 무사는 단전에 그들의 마음이
집중되지 않으면 싸움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잘하는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만큼 철저하게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뭔가가 다른 사람들이다. 
싸움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마음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계산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대가 갑작스런 공격을 당했을 때 어떻게 막아야 할지 생각·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린다. 공격을받으면 즉시 대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단전은 언제나 즉각적으로 기능한다. 단전에 집중되어 있는?사람은
언제나 싸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단전에는 머리와는
다른 미묘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텔레파시나 직관력과 같은 것이다. 상대방이 그대를 공격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살기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행동하는 즉시
그대는 방비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 아니다.
단전의 작용인 것이다. 
때때로 사무라이들끼리 만나서 싸움을 하게 된다. 그렇게 」 되면
양쪽 다 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다. 둘 중에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로 공격하기 전에 먼저
알아 버리기 때문이다. 
인도에 위대한 암산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마누쟘
(Ramanujam)인데 그는 문제가 주어지는 즉시 답을 말할 수 있었다.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인 하아디 (Hardy)마저도 그에게 완전히
빠질 정도였다. 하아디는 세상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하나였다. 그런 그가 여섯 시간에 걸쳐 풀은 문제를
라마누쟘에게 보여주었더니 라마누쟘은 즉시 답을 말했다. 그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었다. 마음을 통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라마누쟘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매번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다. 문제가 주어지면 그 즉시로 답이 떠오른다. 그것은
머리에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온다. "
그것은 바로 단전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그는 미리 어떤 훈련도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전생에 일본의 사무라이
였던 것 같다. 인도에서는 단전을 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그대의 마음을 어떤 특별한 중심에 집중시키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결과 역시 특별해진다. 이 방편은 혀의 중간부분에
그대의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혀인가?
그대가 뭔가를 막 말하려 할 때는 자연히 입이 조금 벌어진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혀의 중간에 마음을 집중하라.그대는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혀는 그대의 생각을 
제어하는 중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혀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모든 사념은 일시에 멈출 것이다. 그때 그대의
온 마음이 바로 혀의 중간 부분에 와 있음을 느껴라. 그때 마음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입이 약간
벌어지는 그 상태로 머물러라. 생각이 바로 말이다.
혀는 언어의 중심이며 언어는 곧 생각이다. 그대는 생각할 때
어떻게 하는가? 퍼기에 말이 있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도 없다.
생각이란 그대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의 혀가 거기에
관계된다. 그대가 생각을 하는 동안 그대의 혀는 진동한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혀를
느껴보라. 그러면 혀의 중간에서 진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진동은 혀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래서 생각이란 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대가 의식을
혀에 전부 집중시킬 수 있다면 그때 모든 생각이 멈출 것이다. 
묵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단지 외부적으로 말을 안할 뿐이다.
만약 그대가 외부적으로 말을 멈춘다면 그때부터는 속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한 달이나두 달,
아니면 일년 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대의 혈가 매우
심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가 언제나 재잘거리며
말을 할 때는 혀에 에너지가 축적될 시간이 없다. 그대가 생각을 하는 동안
혀에 의식을 집중하면 처음 약간은 미약한 진동이 있지만
곧바로 그대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고 
따라서 혀는 진동을 완전히 멈추게 된다. 혀의 진동과 사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혀를 얼어붙은 것처럼
완전히 멈추게 한다면 그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나서 '흐'소리를 느껴라.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트'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껴라. 이것은 두번째 단계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그대의 생각이 멈출 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신이 완전히 굳어져 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사념은 흐르지 않고
그대의 내면은 얼어붙었다.
생각 없음 속에서 그대는 영원의 부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과 함께 그대는 움직임의 부분이 된다. 자연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움직임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삼사라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삼사라' 란 바퀴를 의미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돌고 돈다.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절대뿐이다. 궁극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바퀴의 축과 같다. 바퀴는 돌지만 축의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세상은 계속 돌고 있지만 초월의 세계는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다.
그래서 그대의 생각이 멈춘다면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갑자기 그대는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옮겨 갈 것이다. 그대는 영원의 부분이 된다. 그것은 결코 변치
않는 여여 (如如)의 세계다.
그대는 들이쉬고 내쉴 때 '흐' 소리를 억지로 만들지 마라.
그저 공기가 그대의 혀 위로 흐르는 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때 그것은 바로 침묵의 소리다. 그대는 '흐(HH)'소리를 저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한소리이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 그대의 의식이 집중되고 사념이 멈출 때만이 겨우
들리는 소리다. 주의할 점은 그대가 의식적으로 그 소리를 만들어
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간다.
이 방편을 통해 그대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 소리는
호흡을 할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발견해야 하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방편에서는
숨이 들어올 때 '흐'소리를 느끼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숨을 내쉴 때는 소리를 만드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숨
 속에서 '흐' 소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깊이 깨어
있지 않고서는 그 소리를 발견할 수 없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묘한 소리이다.
그 소리는 일종의 침묵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먼저 혀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때 점점 의식이 집중된다. 그리고
집중과 함께 각성이 일어난다. 각성 속에서 그대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처음에 목구멍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계속하게 되면 가슴에서 일어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대는 가슴에 도달한 것이다. 그대는 드디어 마음을
초월한 것이다. 이 모든 방편들이 그대로 하여금 생각에서 무념으로,
마음에서 무심으로, 표면에서 중심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다리인 것이다.

44.
어떤 'A'나 'M'없이 그저 '옴(AuM)'소리 위에 중심을 잡아라.

이것은 조금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 방편이
잘 맞을 수도 있다. 특히 시인이나 음악가 혹은 매우 예민한
청각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 방편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청각이 무딘 사람에게는 너무 섬세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방편이 될 것이다.
우선 그대는 옴(AuM )을 영창해야 한다. 그리고 옴 소리 속에는
세 가지 소리, 즉 A-U-M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느껴야 한다.
A-U-M,그것들은 거기에 서로 섞여 있다. 성세한
청각을 가진 귀만이 그것들을 가려내어 들을 수 있다. 보통 사람의 귀로는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가려낼 수 없다면
그때는 이 방편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귀는 먼저 예민한 청각을 갖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일본의 선가에서는 먼저 귀를 훈련한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훈련 방법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 때 소리가 난다면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저 소리에 집중하라. 저 소리의 모든 감정을 느껴라. 소리가
화를 낼 때, 격노할 때, 소리가 자비로울 때, 소리가 사랑을 갖고 있을 때,
소리가 강인해질 때, 소리가 섬세해질 때, ---소리의 모든 감정을
놓치지 말고 느껴라. 바람이 나무에 불어닥칠 때 소리가 난다.
그것을 느껴라. 강물이 흘러간다. 그 소리의 감정을 느껴라.
 입문자들은 수개월 동안 함께 머물면서 낮에는 강둑으로 간다.
거기에 앉아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강물 소리는
언제나 다르게 들려온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물의 양과
흐르는 속도도 수시로 변한다. 그러니 그 소리 역시 변하기 마련이다.
한편 비가 많이 오면 수량이 갑자기 불어나서 홍수가 난다.
그때 강은 생명력으로 흘러 넘친다. 물론 강물 소리도 달라진다.
겨울에는 물 흐르는 소리도 멈출 것이다. 하지만 소리가 멈춘 것은 아니다.
단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해진 것이다.
그대가 의식을 집중한다면 들을 수 있다.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라는 책에서는 나중에 싯다르타가
뱃사공과 함께 사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는 싯다르타와 뱃사공
그리고 강밖에는 다른 누구도 없다. 그리고 뱃사공은 매우 고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을 강과 함께 살아왔고, 그래서 말이 없었다.
싯다르타가 고독을 느낄 때마다 뱃사공은 강둑으로 가서
강물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것이 인간의 말소리를 듣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점점 강물 소리에 대해서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의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강물은 그 분위기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어떤 때는 친근한 분위기였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강물이 노래했고, 어떤 때는 슬피 울었다.
또 어떤 때는 웃고 있었고, 어떤 때는 슬픔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때마다 미묘한 분위기의 차이를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의 귀는 이제 완전히 열렸다.
이 방편을 처음 시작할 때 그대는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옴 소리를
영창해 보라. 처음에는 'A-U-M'의 세 가지 소리가 합쳐져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소리는 각각의 발음으로
분리되어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A와 M은 떨어져 나가고 오직
U만 남게 될 것이다. 왜인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사실
실체는 만트라가 아니다. 실체는 A-U-M도 아니고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니다. 실체는 그대의 감수성이다.
먼저 그대는 세 가지 소리에 대해서 감각이 열린다. 물론 그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대의 감각이 예민해지면 A와 M은?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오직 가운데 소리만 남게 된다.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그대의 마음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대가 소리에
깊이 빠져들수록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생각을 하게 되는 한
그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머리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간접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는 동안 그것들은 매우 간단해 보인다. 그대는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난다. 그것들은 단지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매우 미묘한 어떤 것에 초점이 잡힐 수 있다.
일단 그대의 초점이 머리에서 옮겨지면 그대에게는 갑자기
각성이 일어난다.
선(禪) 에서는 공안(公案)을 사용한다. 유명한 화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서 한 손바닥에서 나오는 박수 소리를 들어보라. "
이것은 어떤 선사가 한 동자승에게 던진 화두이다. 그 동자승은
스승의 말을 듣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무엇인지?알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다. 아침에 바람이 불어 나무를 흔드는 소리가 나자
그는 그 소리가 바로 스승이 말한 소리라고 생각하고 스승에게
달려 갔지만 스승은 아니라고 했다. 이렇듯 그 동자승은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 소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스승으로부터
틀렸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동자승이 스승을 찾아오지 않았다. 스승을
찾아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들을 보내어
동자승을 보고 오도록 했다. 동자승은 나무 밑에 앉아서 뭔가에
깊이 빠져 있었다. 동자승은 드디어 마음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붓다가 되어 있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는 그를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붓다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뭔가에 깊이 빠져서 마치 삼매 속에 들어 있는 듯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
그래서 스승은 직접 동자승을 찾아갔다. 그리고 동자승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들었는가? 들은 것처럼 보인다."
동자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 없음의 소리 였습니다."
어떻게 이 동자승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가? 그의 감각이
개발된 것이다. 그는 모든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매일
귀에 들려 오는 소리에 모든 주의를 다 기울였다. 혹시 한 손바닥으로
나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나 해서 말이다. 밤에도 그는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식은 언제나 깨어 있었다. 그는 그대처럼
복잡한 사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스승이 자기를
놀렸다거나 말이 안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화두를 잡고 그것이 풀릴 때까지 씨름했다.
만약 그대가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그대는 당장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란 말인가? 어떻게 한 손바닥에서
박수 소리가 날 수 있는가?"
그러나 그 동자승은 달랐다. 그는 스승을 믿었고 분명히 그런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스승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그러나 번번이 빗나갔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감각은 예민해졌다. 그는 어떤
소리에도 공명할 수 있는 섬세한 현악기가 된 것이다. 그는 깨어
있게 되었고 각성의 싹이 텄다. 그가 스승을 찾아갔을 때마다 
스승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생각을 계속하면 그 소리를 놓칠 것이다. 때때로 그대가
그 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대가 깨어 있지 못해서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는 계속 찾고 또 찾았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가 한 점에
집중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그가
한 손바닥에서 나는 박수 소리를 찾는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감각을 개발한 까닭이었다. 동시에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그는 깨어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에게는 인식 자체만 남게 되었다.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순수한 의식 그 자체로만
남게 된 것이다.
'옴(AUM'소리에서 어떤 A나 M에다 그 소리에 중심을 잡아라.
이것은 매우 섬세한 감각을 필요로?한다. 이 방편이 원하는 대로
그대가 할 수 있게 되면 그대는 옴(AuM)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모든 발음들이 그냥 떨어져 나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대 자신도 떨어져 나간다. 거기에는 오직 소리 없음만이
남아 있게 된다. 그때 그대는 새로 태어난 붓다로서 나무 아래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질문)
"지금까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 나오는 여러 가지 명상 방편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저는 방편을 통해서는 내면의 문이 열릴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의 문이 열리는 것은 실제로 스승의 은총과 입문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스승께 입문하는 것은 언제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실제로 스승의 은총은 또 다른 한 가지 방편이다. 말만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것 역시 조복을 뜻한다. 그대는 에고를 조복받을 때만이 스승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조복도 하나의 중요한 방편이다. 만약 그대가
어떻게 조복하는지 모른다면 어떤 은총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은총을 주
수는 없다. 오직 받아들일 수만 있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은총이 항상 흐르고
있다. 그것은 거기에서 넘치고 있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다.
  등불이 탈 때 빛이 나오는 것처럼 깨달은 사람은 항상 은총을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만이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다.
은총은 스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테크닉이다. 어떻게
조복하는가? 어떻게 수용적으로 될 수 있는가? 조복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그대는 자신의 분노 앞에서도 조복할 수 있는가? 그대는 자신의 슬픔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 앞에서 조복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그대는 무의미한 것
앞에서 조복할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병 앞에서, 그대 자신 앞에서마저도 조복할
수 없다. 조복이란 전적인 복종을 말한다. 그대는 전적인 것을 그대의 스승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십니다.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
  그대가 기다리기만 할 때, 그리고 스승에게 가서 스승이 언제 무엇을 할지
이것저것을 물어보지 않을 때, 그대는 제대로 조복한 것이다. 이제 그대라는 존재는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상태까지 이를 수
있는가?
  이것은 또한 엄청난 자각을 필요로 한다. 보통 우둔한 사람들은 조복이 매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둔함이다. 그들은 그대가
스승에게 가서 스승의 발을 만지고 고개 숙여 절하면 그것이 곧 조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조복이 아니다. 그것은 조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조복은
내면의 태도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스승만
남아 있다.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직 깊은 자각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자각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대가
이 방편들을 계속 수행한다면 그대에게 자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각을
통해서 그대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미리 속단하지는 마라.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속는 것이다.
일단 방편을 수행하라. 그러면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 방편이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때는 조복을 통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곧 변형될 것이다.
그대가 진정을 다해 그것을 수행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이 절망감은 오히려
조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대는 절망감을 느끼는가? 아니다. 사실은 아무도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지금 안되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직 절망적이지 않다. 그대는 단지 게으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게으름 속에서는 어떤 은총도 받을 수 없다. 오직 비장한
절망 속에서만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절망은 게으름의 일부가 아니다. 절망은
모든 노력이 극에 다다랐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조복할 수 있다. 그때 그대의 조복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방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처음부터 하려고 한다. 그것은
마지막이며 궁극이다. 노력을 통해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거기에는 오직
절망, 절망, 절망만이 남게 된다. 만약 그대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그대의
에고는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대의 고개는 저절로 스승 앞에 숙여지고 손은 스승의 발을 만지게
된다. 그것은 다른 방식에서의 성취다. 그대는 절망 속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대의
전 존재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우주의 자궁이 되었다.
  그때 은총은 유용한 것이다. 그것은 항상 유용한 것이지만 그대는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대가 깨달은 사람 옆이나 뒤에서
무수한 시간 동안 앉아 있어도 거기엔 어떤 영적 교류도 일어날 수 없다.
  한편 거리(距離)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번째 거리는 공간의 거리이다.
그대는 거기 앉아 있고 나는 여기 앉아 있다. 두 지점 사이에는 공간적인 차이가
있다. 그대는 가까이 올 수 있다. 그러면 거리는 좀더 좁혀질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바싹 붙어 앉게  되면 공간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의 차원 속에서
그렇다.
  두번째 거리가 있다. 그것은 시간의 거리이다. 그대의 친구가 죽었다.
공간상에서는 두 점 중에서 한 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제 공간상에서는
거리가 사라졌다 그대가 눈을 감으면 그대 곁에, 아니 그대 속에 친구가 있다.
하지만 시간상에서는 그때부터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가지만 친구는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대 속에 있다. 이것이 시간상의
거리이다.
  세번째 거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거리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종종 세월이 약이 된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는 그대와 가장 가까이 있다. 그가 만일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대의 사랑이 있는 한 거기에는 거리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붓다와 사랑에 빠진다면 시간과 공간의 거리는 사라져 버린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대는 그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대는 지금 한 사람의 붓다 곁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전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거기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붓다와 만나지 않고도 그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붓다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은총은 사랑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사랑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영원한
현재형이다. 그래서 그대가 사랑 속에 있다면 은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의 조복이다. 사랑은 그대보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고 그대는 주변이 된다. 점점 그대는 사라져 가다가 어느 순간엔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만 남는다. 바로 그때가 그대에게는 은총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스승이 그대에게 은총을 베풀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먼저
절망의 상태에 이르러라. 그리고 사랑속에서 전적으로 조복하라.
  그때 스승은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스승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접촉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가 준비되었을 때 사랑의 알 수
없는 차원에서부터 은총이 쏟아진다. 그러나 은총을 하나의 도피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앞에서 여러 가지 방편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확실히 안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것을 실행해 볼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대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 후자가 더 가능성이 클 것이다.
112가지 방편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모두 듣고 나면 그대는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대는 그것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방편들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한 것인가?
  그래서 어쩌면 그대의 마음은 방편이 꽉 들어찬 명상의 정글 같은 세계로
들어가기보다는 '은총을 받는 것-구루크리파(Gurukripa)- 이 더 좋다는 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 방편을 따르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따라서 은총을 받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사고방식이 이런 식이라면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대가 절실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방편들을
절실하고 성실하게 수행해 보라. 이것은 마음의 일이다. 그렇게 해서 손해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그대는 지적인 거인이 될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대의
정신적 자유 분방함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편이 성공한다면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 해도 실패로 인해서 그대는 조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복은 또한 궁극적인 방편이 될 것이다.

이제 됐는가?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V

그대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 소리를 통해서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

소리를 통해 가는 길 IV?

45.
호흡이 끝날 때 '아흐(AH)'로 끝나는 것을 고요히 영창하라.
그러면 저절로 '흐(HH)'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발성이다.

46.
두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항문을 수축시킴으로써 듣는 것을 멈춰라.
그러면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47.
그대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 소리를 통해서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탄트라는 철학이 아니다. 탄트라는 오히려 과학에 가깝다.
과학이 객관적이라면 탄트라는 주관적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 접근 방식이
다분히 과학적이다. 탄트라는 경험을 중요시한다.
무엇이 진리이고 진리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철학이다. 하지만
탄트라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 것은 그저 공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여긴다. 탄트라는 그 대상이 과학의 대상과
다를 뿐 그 방식은 완전히 과학적이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물라 나스루딘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곳은 교회당 앞이었다. 그런데 그만 자동차가 달려와 그를
치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는 노인이었다. 그 주위로 구경꾼들이
금방 몰려 들었다. 어떤 사람이 그는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교회에서 사제가 뛰어나왔다. 그 사제는 한 노인이
숨이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종부성사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뜸 물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 아들 하느님을 믿습니까?
거룩한 성령을 믿습니까?"
물라가 눈을 뜨고는 그 사제에게 말했다. 
"맙소사! 나는 지금 죽어 가는데 당신은 내게 수수께끼 놀이를
하고 있군. "
모든 철학이 이와 같다. 그대는 죽어 가면서도 계속 수수께끼를 풀고 있다.
매순간 그대는 죽어 가고 있다. 사실 매순간 모든 사람은
임종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떤 순간에라도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수수께끼를 묻고 대답한다.
탄트라는 '철학이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명한 사람은 철학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대는 효묘한 말을 생각해 내지만 그것은 어떤 실질적인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어떤 새로운 시각도, 어떤 변형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대는 철학을 공부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다. 
그러나 앎이란 이와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무엇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앎은 알기 위해서 존재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기억하라. 탄트라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다. 주관적인 과학이다. 그 접근 방식이 철학적이지 않다.
그것은 현상계에 관한 것이지 이상 세계나 관념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궁극으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현상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오직 땅에 발을붙였을 때만이 궁극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그러나 철학은 그렇지 않다. 철학은 벽에다 페인트로 문을 그린다.
그리고 거기로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벽일 뿐이다. 
문은 그곳에 없다. 그대는 거기에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문을 찾을 생각은 안하고 가짜 문을 통과할 생각만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영읜히 벽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이 철학하는 데는 좋다. 그러나 경험하는 데는
무능하다. 탄트라가 방편을 그토록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학이 기술을 주장하듯이 탄트라 역시 방편을 주장한다.
'탄트라'라는 그 말까지도 방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112
가지 방편을 통해 현상계에서 궁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자, 이제 소리에 관한 아홉번째 방편이다. 

45.
호흡이 끝날 때 '아흐(ah)'로 끝나는 것을 고요히 영창하라.
그러면 저절로 '흐(HH)'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발성이다.

고요하게 '아흐'소리를 영창하라. 왜 경전은 하필이면 '아흐'
라는 소리를 들먹이는가? 그것은 그대의 숨이 나갈 때 나는 소리이다.
그대는 그것을 지켜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대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호흡이 나갈 때마다 그대는 더욱 고요해진다.
그리고 호흡이 들어올 때마다 더욱 긴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날숨은 죽음이고 들숨은 삶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전체적인
이완을 의미한다. 완전히 이완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삶은 
전적으로 이완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삶은 긴장과 노력을 의미한다. 오직 죽음만이 이완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절대적으로 이완될 때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내면에는
죽음이 일어난다. 붓다의 얼굴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그토록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다. 이완만 해서는
삶을 계속할 수 없다. 그대는 잠을 잘 때만 이완된다. 그래서
옛날부터 잠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잠은 일시적인 죽음이며 죽음은 영원한 잠이다. 밤이 그대를
이완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그것은 날숨이기 때문이다. 아침은
들이쉬는 숨이다. 밤과 낮은 대지의 날숨과 들숨이다. 
낮은 그대를 긴장시키고 
밤은 그대를 이완시킨다. 
빛은 그대를 긴장시키고  
어둠은 그대를 이완시킨다. 
밝은 곳에서는 잠들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빛은 삶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빛은 죽음에 반대한다. 그러나 어둠은 죽음과 유사하다. 그것은
죽음의 서막이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는 쉽게 이완할 수 있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완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이완은
어둠이며 어둠이 그대의 삶을 앞뒤로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태어나기 전에 어둠 속에 있었다. 그리고 삶이 끝나면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어둠은 무한하다. 이 빛과 이 삶은
단지 한순간일 뿐이다. 다음 순간 어둠이 찾아온다. 그대가 이 어둠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대는 지금 여기에서 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내쉬는 숨은 죽음이다. 그대는 어느 날 죽는 것이 아니라 매 호흡마다
죽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호흡 속에서 삶을 헤아린다.
그들은 삶을 연수로 따지지 않는다. 탄트라, 요가, 고대
인도의 모든 전통적 신념 체계들은 호흡의 개수로 삶을 헤아린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호흡의 개수를 갖고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호흡을 빠르게 한다면 그대는
결국 일찍 죽게 될 것이다. 그 대신 호흡의 간격을 늘여서 천천히
호흡한다면 그만큼 더 오래 살 것이다. 
동물들을 관찰해 보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래 사는
동물, 예를 들어 코끼리는 아주 느리게 숨을 쉰다. 반면에 개는
수명이 짧다. 호흡이 빠르기 때문이다. 개는 사람보다도 훨씬
빨리 호흡한다. 
탄트라나 요가 그리고 다른 인도 전통들도 그들의 수명에서
호흡을 헤아린다. 그대에게 주어진 호흡의 개수를 모두 채우고 나면
그대는 죽는다. 그래서 이 방편은 내쉬는 숨을 통해서 침묵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한다. 그대가 '아흐'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대가 텅 비게 된다는 뜻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삶은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 그대는 죽은 것이다. 극히 짧은 순간 동안 말이다.
그대가 그 순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그대를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 삶이 그대의 삶이 아니며 이 죽음이 그대의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들숨과 날숨을
넘어선 어떤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모두를 초월해서 지켜보는
영혼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지켜봄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호흡 사이에 텅 빈 공간을 인식하는 한 말이다. 삶은
모든 긴장과 함께 저절로 소멸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도해 보라.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방법이다. 일반적인 방법은 언제나
들이쉬는 숨을 강조한다. 내쉬는 숨에 대해서는 이 방편에서만 강조된다.
우리는 항상 숨을 들이쉬는 것에만 정신을 쏟는다. 결코 그것을
밖으로 내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들이쉬고, 우리의 육체는 그것을
밖으로 내던진다. 그대의 호흡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숨을 내쉬지 않는다.
내쉬는 것은 몸이 알아서 한다. 우리는 언제나 들이쉴 줄만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럴 힘만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내쉬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내쉬는 숨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이쉰 다음에는 언제나
저절로 내쉬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쉬지 않고서는 다시
들이쉴 수가 없다.
그래서 내쉬는 숨은 필요악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내쉬는 숨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호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나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불행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대가 변비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삶을 대하는 그대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들이마시기만 할 뿐 결코 내놓을 줄을 모른다.
마음은 내놓을 줄을 모른다. 그래서 변비로 고생하기
마련인 것이다. 변비 역시 밖으로 내보내는 문제이다.
하지만 공포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축적하기만 할 뿐, 내보내는 데서 생기는
허탈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축적한 것이 독이 되더라도 그냥
버틴다.
만약 그대가 오직 들이쉬기만 하고 내쉴 줄을 모르면 그대의
모든 호흡은 그대에게 독이 된다. 그대는 그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대는 생명 력을 독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다.
내쉬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쉬는 것은
그대에게 쌓인 독을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정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삶은 중독의 과정이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일 것이다. 삶은 그대에게 독을 쌓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서 그대는 많은 것들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용 과정에서 그것들은 독으로 변한다. 그대는
들이쉴 때 산소를 이용한다. 그 산소는 체내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독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산소 때문에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모든 것을 독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서양에서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생태학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이용하고 그것을 독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지구 역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었다. 지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유사 이래로 이처럼 많은 인구가 이
지구에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야말로 정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대의 몸이 독으로 가득 찼을 때 그대는
죽는다. 그 죽음을 통해 그대는 새로운 몸을 받는 것이다. 그대는
새롭고 신선한 기계를 갖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 호흡마다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날숨은
죽음과 유사하다 그것은 독을 배출시킨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숨을 완전히 뱉어낸 상태로 멈출 수 있다면 그대는 숨이 들어오는 동안에는
결코 만질 수 없는 침묵의 정점을 만질 수 있다.
그리고 호흡은 바다의 조수와 같다. 그대가 숨을 내쉴 때 바닷물은
빠져 나가고 물에 잠겨 있던 해안선이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이 방편의 요점이다. 이 방편에서는 내쉬는 숨에 역점을 둔다.
그대가 이 방편을 어느 정도 사용한다면 그대의 마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변비로 고생을 하고 있다면
들이쉬는 숨에 대해 잊어버려라. 오직 내쉬기만 하고, 들이쉬지 마라.
물론 그대가 숨을 내쉬고 나면 자연히 공기는 다시 들어온다.
내 말은 그대의 집착을 들이쉬는 데 두지 말고 내쉬는 데 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해도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몸은
언제나 그대가 의식하지 않는 것도 알아서 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그대의 변비는 곧 낫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그때도 내쉬는 데 역점을 두라.
들이쉬지 마라. 그러면 그대는 심장병의 고통을 덜 수 있다.
그대가 계단을 올라갈 때 그대는 피곤함을 느긴다. 숨이 찬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들이쉬지 말고 내쉬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러면 그대는 지치지 않고 높은 산도 오를 수 있다. 
이것은 무슨 원리인가?
그대가 내쉬는 것에 역점을 둘 때 그대는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자신을
열어젖히는 행위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을 닫아 버린다.
공포 때문에 말이다. 
그대가 내쉬는 숨에 역점을 둘 때 그대 삶의 모든 시스템은
정화하게 퇴고 죽음도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공포가 없다. 그대는
기꺼이 그럴 수 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사람만이 진정으로
살 수 있다. 오직 그만이 삶의 심층부까지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내쉬어라. 들이마시지 마라. 그대의 마음은 변화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탄트라의 간단한 방편들에 신빙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간단한 방편으로
이 복잡한 마음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복잡하지 않다. 단지 어리석을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독잡하다. 현명한 사람만이 단순하다. 그대의 마음은
매우 간단한 현상이다. 그대가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 마음을
쉽 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대가 사람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면 그대는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붓다가 출가하기 전 그의 뚜왕은 사람들에게
붓다로 하여금 죽음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점성술사가 와서 어린 붓다를 보고 그가 위대한 구도자가 될
것비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왕은 점성술사에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미리 막을 수 있는지 물었다. 점성술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죽음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그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결코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죽음은 모든 철학,
모든 종교, 모든 요가와 탄트라의 총 결론이다. 만약그대가
죽음을 인식 한다면 그대는 종교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만
종교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동물들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도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죽음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개 한 마리가 죽어 가고 있지만, 다른 개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자기 역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만약 그대가 다른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개와 다를 바 없다.
어떤 개도 구도자가 될 수는 없다. 오직 높은 의식을 가진 자만이
구도자가 될 수 있으메 세속적 삶에 데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오직 그만이 죽음과 만날 수 있으며,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동물과 구도자의 중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직 죽음만이 독특한 것일 뿐 나머지는 모두 유사하다.
그대가 죽음과 만날 수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동물에게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대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제 그대는 다른 차원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붓다의 아버지는 붓다로 하여금 어떠한 형태의 죽음도
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꽃의 죽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원사는 꽃이 시들기 전에
다른 꽃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에게는 어떤 생물이라도 죽는다는
사실이 보여져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오면서
많은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대의 부모는 물론이고
아내나 자녀가 죽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는
단지 그들을 위해 울 뿐 자신이 곧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붓다의 장래를 점친 점성술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무나 예민해서 그에게 어떤 형태의 죽음도 보여서는 안됩니다."
결국 붓다의 부친은 동물이나 꽃 뿐만 아니라 사람조차도 늙은이는
붓다곁에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늙은이가 호흡을 멈추고
죽는 것을 본다면 그때는 붓다에게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쉴 수 없는 것만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거시
 그의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의 임종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숨을 들이쉴 수 없는 것만으로 간단히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것이다. 단지 숨을 들이쉴 수 없는 것만으로 죽다니! 삶은
어지러을 정도로 복잡한데 죽음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대가 숨을
모두 내쉬고 들이마시기 전 가까운 곳에 죽음이 있다. 그대는
그때 죽음을 만질 수 있다. 그 순간엔 그대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이것을 하나의 만트라로 사용하라. 그대가 피곤함을 느낄 때마다.
그대가 긴장을 느낄 때마다 숨을 내쉬면서 마지막에 '아흐'
소리가 나도록 영창하라. '알라(Allah)' 역시 '아흐'처럼 그대가
숨을 모두 내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이다. 그대에게
숨이 모두 빠져 나갔다는 것은 삶이 모두 빠져 나갔다는 뜻이다. 
그대의 모든 문제는 바로 그 삶에 속한 것이다. 죽음에 속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대의 고뇌, 번민, 분노, 슬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삶에 속한 것들이다. 
죽음에는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다. 죽음은 끝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죽으면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대가 삶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래서 숨이 그대 속에서
모두 빠져 나가고 '아흐' 소리가 저절로 날 때 퍼기에는 삶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 순간 내면을 들여다보라.
새로운 숨을 들이쉬기 전에 말이다. 그 틈새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퍼기에 평화가 있다. 거기에 침묵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그대 역시
하나의 붓다다. 
그대가 그 순간을 잡을 수 있다면 붓다가 느낀 맛을 그대도
맛볼 것이다. 한 번 그것을 맛본 이상 그대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그 맛을 가려낼 수 있다. 그때 호흡은 들어오고 나갈 수 있지만
그대의 의식은 그 틈새로 깊이 들어갈수 있다. 이것은 발견하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숨이 모두 빠져 나갔을 때
그것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 
그리고 그 다음 들숨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어떤 노력도 없이
저절로, 자발적으로 '흐흐(HH)'속에 있게 된다.
그대가 문 옆에 있는 순간 그대는 궁극을 엿볼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대에게 파도가 치지 않는 순간 그대는 곧바로
붓다가 된다. 그 순간 그대는 자신이 파도라고 믿어 온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파도가 밀려 와도 더 이상 그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이미 바다라는 사실을 알고
 만 것이다. 
삶은 곧 파도와 같다. 죽음은 바다다. 붓다가 니르바나는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그토록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결코 그대가 불멸의 생명을 얻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완전히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오라. 나는 그대에게 생명을 주겠다. 넘치는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
그리고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오면 그대로 하여금 죽음을 깨닫게 해주겠다. 나는 그대에게
전체적인 죽음을 줄 것이다."
이 두 가지 말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은 말이다.
단지 붓다의 말이 좀더 근원적이다. 그러나 붓다의 말을 들으면
그대는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떼문이다. 인도인들은 인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라고 말하지만 가장 종교적인 사람은
오히려 이 나라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종교적이란 말인가?인도인들은 또 다른 붓다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은 그 이후로 없었다. 
세상은 붓다 때문에 인도를 가장 종교적인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붓다는 여기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는 죽음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의
지도계층인 브라만들은 삶의 언어를 사용한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죽음의 의미로 썼지만 브라만들은 무한한 생명이란 말로
'브라흐만'이란 말을 사용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 보통 사람들의 죽음은 전체적이지 못하다. 그대들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것은 전체가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전체적인 죽음,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죽음으로 인도하고자 한다."
전체적인 죽음이란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붓다는 죽음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대는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다. 그래서 그는 니르바나라고 불렀다.
그것은 완전한 소멸, 완전한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이것은 역설이다. 
그대가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 많이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기꺼이 죽고자 한다면 더 이상 죽음은 없다.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에게 죽음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수용을 통해서 그대는 죽음이 없는 내면의 어떤 것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은 육체의 삶과 죽음이다. 그리고 자신과
육체의 동일시를 깨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들이쉴 때는 의식이
깨어나기 힘들지만 몸 밖으로 숨을 모두 몰아내었을 때는
자신의 본모습을 의식하기가 쉽다. 그 순간만큼은 죽음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긴장할 때마다 '아흐'하고 한숨 쉬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쉬고 나면 긴장이 조금 풀어진다. 또한
그대가 기쁠 때도 똑같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 '아흐'라는 탄성은
숨이 모두 몸 밖으로 빠져 나갈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음성이다.
그대의 숨이 전부 빠져 나가면 그때 그대는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내면의 고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 다시 숨을 들이쉬어 보라.
그러면 결코 그 좋은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숨을 들이마신 까닭이다.
그래서 언어는 다르지만 '아흐'와 '흐흐'의 이 두 가지 탄성은
이 세상 어디에 가도 다르지 않다. 어떤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도
지칠 때는 저절로 '아흐'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실제로 자신의
죽음을 부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이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에 넘칠 때도 '아흐'를
연발한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지금 죽어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자신을 구원한 것이다. 완전히 자신을 이완
시키는 것이다.
그때 그대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대는 뭔가 자발적인
어떤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존재의 자발성이다.
'사하지 (sahaj)'가 바로 이것이다. 그대는 본래부터 존재해 있었지만
삶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삶 뒤에 가려져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었다.
삶에 집착하지 않을 때, 들어오는 숨에 애착을 느끼지 않을 때
가려져 있던 존재는 그 모습을 슬쩍 드러낸다. 거기에 일별이 있다.
그 일별은 점점 확실한 깨달음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한 번
그대가 그것을 알아차리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다. 그것은
그대가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다.
스스로 있는 것이다. 단지 그대가 잊고 있었을 뿐이다.
기억을 회복하라.
어린아이들의 숨결을 지켜보라. 그들은 완전히 다른 식으로 호흡한다.
아이들이 잠들었을 때 그들은 가슴이 아니라 복부로 호흡한다.
그러나 그대가 호흡할 때는 가슴이 움직인다. 그대의 호흡은
절대로 복부로 내려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들이쉬는 데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깊이 숨을 쉴 수 없다.
그대는 내쉬는 데 보다 주력해야 할 것이다. 그때 그대의 몸은
알아서 공기를 빨아들일 것이다. 복부의 힘으로 말이다.
몸은 스스로의 지혜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대보다 더 현명하다.
그것을 방해하지 마라. 그대가 숨을 들이쉬려고 의식할 싸는
그것은 방해받을 것이다.
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도록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라.
그대가 워낙 들이쉬는 데 집착해 있기 때문에
나는 내쉬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래 호흡은 그대보다 육체가 더
잘 알아서 할 것이다.
몸은 절대로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대가 들이쉬는 데 집착한다면
그때는 균형이 깨진다. 그대는 육체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다.
무엇이 육체에게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필요는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이다.
따라서 육체를 허용하라. 그대가 할일은 그저 묵은 숨을 내뿜는 일이다.
그대 속에 들어간 공기를 내버리는 일이다.
그러면 자연히 호흡은 복부로 내려갈 것이다. 단전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단전호흡이다. 그대의 의지로 하는 것은 단전호흡이 아니다.
그대가 하는 일은 그저 복부의 힘에 호흡을 맡기는 것 뿐이다.
그 방편이 바로 그대의 묵은 숨을 모두 내쉬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집착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대의
호흡은 완전히 밑바닥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그대의 폐에 6천 개의 구멍이 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 단 2천 개만이 호흡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나머지 3분의 2는
 독가스로 차 있다. 그래서 그것이 마음에 그토록 많은 번민과
고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호흡하는 것을
눈여겨보면 그들은 결코 들이쉬지 않는다. 오직 내뱉기만 한다.
들이쉬는 것은 몸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그가 첫번째 하는 일은 우는 것이다. 우는 것
덕분에 목이 열린다. 그리고 호흡이 시작된다. 그 울음은 첫번째
'아흐'인 것이다. 그리고 모체로부터 받았던 산소와 공기를 토해낸다.
이것이 그의 호흡에 있어서 첫번째 노력이다. 만약 아이가
울지 않으면 의사는 당황한다. 우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자궁 속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안된다.
그는 울어야 한다. 울음이야말로 자신이 드디어 개체가
되었다는 표현인 것이다. 이제 모체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숨뒬 수 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나자마자 첫번 째로
하는 행위가 바로 모체로부터 받은 것을 내쉬는 것이다. 그래서야
아기의 몸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능을 시작할 것이다.
아이들은 항상 숨을 내쉰다. 만약 그가 들이쉬기 시작하면
그는 이미 늙어 버린 것이다. 그는 그대에게 뭔가를 배웠다.
그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긴장되어 있을 때는 깊은 호흡을
할 수 없다. 왜인가? 그대의 복부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긴장은 복부의 경직을 가져와서 호흡이 얕아지게 만든다.
그때 그대는 얕은 호흡을 해야 한다.
'아흐'와 함께 숨을 깊이 내쉬어 보라. 거기에는 편안한 느낌이 흐른다.
이 방편을 계속하면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그대가 들이쉬는 부뚠에
역점을 둘수록 불행한 마음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하지만 내쉬는 것에 역점을 두면 불행을 느끼는 마음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강한 소유욕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소유욕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말이다. 탄트라는 단지 그대의 호흡 방식을 바꾸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각성이 싹트기 시작한다. 모든 잘못된 것은 
들이쉬는 데 있고 모든 좋은 것, 아름답고 진실된 것은
내쉬는 데 있다. 그대가 거짓말을 할 때는 숨을 들이쉰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을 말할 때는 결코 숨을 들이쉰 상태에
있을 필요가 없다. 거짓말을 한다는 공포 때문에 숨을 들이쉬는 것이다.
내쉬는 숨과 함께 그대의 진실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 '아흐'를 계속하라. 그러면 그대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건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차원이 다른 평온과 고요가
자라날 것이다.
그럼 열번째 소리의 방편으로 들어가자.

46.
두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항문을 수축시킴으로써 듣는 것을 멈춰라.
그러면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기능과
그것의 도(道)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지켜본다면 우리는 쉽게 육체를 알 수 있다. 그대는 귀를 막고
항문을 수축시킨 다음 지켜보라.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그대에게는
세상 전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시간마저 그 흐름을 멈춰 버린 것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대가 항문을 수축시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의 귀를 막고
동시에 눈을 감으면 내면에서 한 가지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러나 항문이 수축되지 않았다면 소리는 항문을 통해 새어
나갈 것이다. 소리는 매우 미묘한 것이다. 만약 그때 항문까지
수축된다면 그대는 그대의 내부에서 소리의 기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소리다. 그것은 소리의 음영이다. 모든 소리들이 멈출 때
그대는 침묵의 소리, 土리 없음의 소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항문이 이완되어 있다면 그것은 거기로 새어나갈 것이다.
귀를 막고 항문을 수축시켜라. 그때 그대는 몸을 잠그게 되는 것이다.
그때 침묵의 소리에서 나오는 존재의 느낌은 깊은 충족감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 주변의 것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그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육체를 모른다. 그것이 구도자들에게 기본적인 문제점이다.
이 사회는 육체에 대해 아는 것에 반대한다. 사회는 육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아이들에게 육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훈련시킨다.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과
육체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자신의 육체를 알지 못하게 한다.
육체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 이 사회에서 문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거기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만약 아이들이 육체를 알게 되면
그는 곧 섹스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그는 점점 성적으로
감각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예 그 뿌리부터
잘라 버리려고 한다. 불감증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육체를 느끼지 못한다. 뭔가 잘못된 것이 일어날 때에만
겨우 알아챌 정도다.
그대는 두통을 느껴야만이 그제서야 머리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티눈이라도 생겨야 자신의 발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고통이
있어야 그대는 몸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대는 즉시 자신의 질병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상당한 기간이 지나고 병이 깊어져서 고통이 심해질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아는 것이다.
그때 그대의 몸은 '나는 여기 있다'라고 그대의 의식에 노크를 해온다.
그래서 아무도 적절한 시기에 의사에게 가지 않는다.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이미 병은 깊어져 상당한 고생을 감수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아이들 때부터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자라난다면 그는 병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알게 될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병이 발병하기
6개월 전에 알 수 있는 이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병은 발병하기
6개월 전에 미리 몸에 통고를 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병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병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혀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그대에게 내일 죽을 일이
 생기더라도 그대는 오늘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다음 순간에
죽음이 일어나도 이 순간에는 그것을 모른다. 그대의 육체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모든 사회가,
모든 문화가 이런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육체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오직 우연한 기회로 그대가 섹스에 대해 아는 것만은 용서
받을 수 있다. 그 외에는 육체를 알아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문제점들을 만들어 낸다. 특히 탄트라에
있어서는 말이다. 탄트라는 육체를 알고, 그것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많은 일을 하지만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육체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많은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육체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심리요법가와 정신분석가들은
육체의 언어를 이해하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육체가 하는 말을 이하함으로써 더 진실한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거기에는 낡은 심리학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하도록 강요받는다. 자신의 마음에 감추어진 것이
다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정신의학은 그의 육체를 관찰한다.
거기에서 더 확실한 징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환자가 지독한 에고이스트라면, 그래서 그 에고가 룬제라면
그의 목은 겸손한 사람과는 다른 각도로 굽어져 있다. 그의 척추는 탄력성이 없다.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 인형처럼 보인다. 만약 그대가 그의 몸을 만진다면
목재를 만지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거기에는 살아 있는 육체의
따스함이 없다. 그는 군인들처럼 각도 있게 움직인다.
군인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라. 그들은 마치 목상처럼 보인다.
표정이 없다. 그들에겐 죽느냐 죽이느나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군기가 빠져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훈련을 잘 받은 군인일수록
장난감 병정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그와 다른 육체를 갖는다.
그대는 다른 방식으로 서거나 앉아 있다. 만약 그대가 강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고 산다면 행동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만약 그대가 항상 공포를 느낀다면 알지 못하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자세로 서 있게 될 것이다. 반대로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대는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다. 그대가 어디를 가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대를
둘러싼 우주를 마치 안방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무장하고 있다. 이 말은 단지 상징적인 말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그는 무장하고 있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육체의 구조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한 결과
마음과 육체는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의 배가 경직된다는 것이다.
그대가 그의 배를 만져 보면 마치 돌덩이를
만지는 것 같을 것이다. 만약 그가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그의 복부는 즉시 이완된다.
 같은 이치로 그가 자신의 배를 이완시키면
저절로 공포가 사라진다. 배를 부드럽게 주물러 보라.
그러면 공포심이 사라질 것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육체의 성질이
변하게 된다. 그의 몸에서는 훈기가 나온다. 그러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냉정한 사람은 그 몸에서도 냉기가 나온다.
그 냉기나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하나의 장애물이 되어 ?
그 자신의 육체를 아는 데 방해를 한다. 하지만 몸은 어쨌든 제 나름대로의
길을 갖고 있고, 그대 역시 자신의 길을 갖고 있다. 거기에
하나의 장벽이 탄생한다. 그 장벽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금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보면
금방 드러난다. 만약 그대가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면 그때는 그대의
손가락이나 손이 억압된 분노의 감각을 지니게 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대의 손을 만져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손인가? 분노는 손을 통해서 배출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빨로도 배출된다. 아주 격한 상황엔서 그대가 화를 억누르면
그때는 이빨이 덜덜 떨린다.
만약 그대가 성욕을 억누르면 그때는 성감대 부분에 그 억압된
성욕이 쌓인다.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성감대의 어떤 부위를
건드려도 섹스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억압되어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두려워하게 되고 그대의 터치를 피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개방되지 않을 것이다.
전체 여성들 중 절반 이상이 경직되어 있다고들 말한다.
소년들보다 소녀들에게 더 많이 섹스를 억압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20세가 될 때까지 섹스를 억압하면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 된다.
그때는 사랑을 하게 되어도 그녀의 육체는 열리지 않는다.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와 마음 사이에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녀의 윽체는 닫혀 있다. 아직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한 남자와 함께 앉아 있는 여자를 본다면, 만약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그녀는 그에게 끌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몸이 끌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한 소파속에 앉아 있다면 그 둘의 육체는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여자가 남자를 두려워한다면 그녀의 육체는 반대 방향으로 끌리게 된다.
만약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그녀는 결코 그 남자
앞에서 다리를 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 남자를 두려워한다면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방어행위다. 육체는 자신들
제 나름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탄트라는 이 현상을 인식하라고 말한다. 육체의 필은 감수성과
느낌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탄트라의 출발이다. 만약 그대가 이
육체를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육체는 영혼으로 나아가는 데
하나의 수레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육체에 반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사용하라.
그것은 하나의 수레다. 그 에너지를 사용하면 그대는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이제 탄트라는 그대의 귀를 막고 항문을 수축시키라고 말한다.
때때로 항문은 그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완된다. 만약
그대가 갑자기 공포를 느낄 때 그것은 이완된다. 극심한 공포를
느끼면 오줌마저 흘러 나온다. 그것은 그대의 방광이 이완되기 때문이다.
공포는 심리적인 것인데 어떻게 육체에 변화가 일어나는가?
육체와 마음은 깊은 뿌리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가 두려워하지 않는 한
오줌이 저절로 흘러 나오게 되는 일은 없다. 아기들은 실제로
자기의 육체에 대해서 정신적인 제어장치가 없다. 어떠한 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물들의 방광은 소변이 가득 차면 자동적으로 배출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통제한다. 그것은 마음이
육체의 기능을 억압하고 지배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배변 습관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만약 아이들에게 배변 습관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면
인간성은 많은 개선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배변 습관은 어린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첫번째 억압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말만 들을 수도 없다. 배변 습관을 가르치지 않으면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다. 아주 부유한 사회가 되면 그 문제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힘들다.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소변을 본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이다. 육체는 그런 훈련에 미리 대비한
어떤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도 육체에 대해서만큼은 동물과 마찬가지다. 육체는 문화를
알지 못한다. 그대가 마음속 깊이 공포를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육체를 통제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나서야 비로소
육체를 이완시킬 수 있다. 그대는 정상 상태에서만 육체를
통제할 수 있다. 비상시에는 통제할 수가 없다. 비상시를 대비한 훈련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진부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생활 속에서만 통제가 가능하다. 일단 비상시에는 통제력이 상실된다.
그대의 육체는 자신의 동물적인 방식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의 관계성이 이해되어지면 그때는 공포가 사라지게 되고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상시라고
하는 것은 공포 때문에 온다. 그래서 소변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겁쟁이의 표시로 통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소변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대를 겁쟁이로
생각할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깊은 호흡을 하고 있다. 그의 육체와
호흡 체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기에는 어떤 간격도 없다. 
겁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거기에 간격이 있다. 그 간격 때문에
그는 항상 많은 부담을 느끼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스트레스 때문에
 소변이 잘 통제되지 않는다. 비상시가 될 때마다 그 부담은
그를 짓누르게 되고 그는 중압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자연스런 이치이다. 중압감에서 해방된 겁쟁이는 쉽게 달아날 수 있다.
그때 그는 복부 근육이 이완된다. 긴장된 복부는 유아기적
상태로 도망가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왜 내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가?나는 그대의 사고의
과정과 소화작용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심리학자들은 그대의 꿈 중 50에서 90
퍼선트까지가 그대의 소화기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대가 과식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대는 악몽을 꾼다. 그것은 낮에 받았던
스트레스와 무관하다. 악몽은 과식 때문에 일어난다. 
많은 꿈들이 외부적인 속임수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손을 가슴 위에서 교차시키고 잠이 든다면 그대는
즉시 악몽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베개가 그대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으면
악마가 그대의 가슴 위에 올라가서 그대를 죽이려는 꿈을 꾼다.
이것 역시 문제다. 베개처럼 가벼운 것도 그런 무게를 느끼는가?
만약 그대가 깨어 있다면 그것은 무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는 마치 큰 바위가 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런 무게를 느끼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러하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가 의식을 갖고
있을 때 그대의 마음과 몸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거기엔
약간의 간격이 벌어져 있다. 그래서 몸의 감각을 정밀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에는 그대의 모든 통제 장치가 풀린다.
그대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그대의 몸은
감각을 되찾는다. 그 예민한 감각 때문에 베개도 바위로 느껴지는 것이다.
감각이 그 무게를 확대시킨 것이다. 그래서 육체와
마음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원리를 알게 되면 그대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항문을 수축시켜라. 육체 속에 소리의 근원이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을 만들어라. 그대는 닫혀진 육체의 공간속에서 침묵의 소리의
기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귀를 막아라. 그대 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집중하라. 내면으로 들어온 생명 에너지는 빠져 나갈 길이 없다.
소리는 그대의 귀나 항문을 통해 나간다. 그것은 소리가 출입하는
두 개의 문이다. 만약 그 문이 닫힌다면 그대는 쉽게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내면의 소리를 느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내면의 소리를
듣는 현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대의 사념은 해체될 것이다.
낮이라도 좋다. 이 방편은 언제든지 해보라.그대의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항문을 수축시켜라.그대의 마음이 멈춰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음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사념은 그것들을 멈춘다.
지속적인 사념의 흐름은 이제 거기에 없다.
그대가 하루에 여섯 번씩 이것을 계속할 수 있다면 3,4개월
안에 그대는 전문가가 될 것이다. 그때는 여기에서 지복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한 번만 듣게 되면 그때부터 그대는 언제든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끄러운 시장 안이나 교통이 복잡한
도로변이라도 상관없다. 외부의 소음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 외부가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그대는 내면에서 계속되는 세세한 음성을 계속 듣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대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대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때는 환경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대는 침묵 속에 잠길 수 있다. 그대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대는 변화가 없다. 
자, 이제 소리의 마지막 방편이다. 

47.
그대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 소리를 통해서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그대의 이름이 만트라로 쉽게 사용될 수 있다. 그대의 이름은
무의식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만큼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소리도 찾기 힘들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모두
잠을 자는데 누군가가 와서 '람! '하고 부른다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깨지 않을 것이다. 오직 자기의 이름이 '람'인 사람만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잠이 들었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표면의식에 기억된 것이 아니라,
바로 무의식에까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에디슨에 관한 일화를 틀은 적이 있다. 그때는 1차대전 중이었는데
토마스 에디슨은 이미 미국의 위대한 과학자로 존경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가난해서 드디어는 구호품 배급소에 가서
줄을 서야 했다. 당시, 그는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교수님'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이름이 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가 '토마스 알바 에디슨'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들은 이웃 사람은
 에디슨에게 말했다.
"왜 가만히 서 계십니까? 교수님의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1
이름은 교수님 당신의 이름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이 생각난 에디슨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나를
'에디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모두들 나를 ' 교수님' 이라고 부르니 말이다."
그대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불러보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다른 사람들만이 그것을 사용한다. 그대는 그 이름을 오직 듣기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깊이깊이 박혀 있다. 그대의 무의식을
관통하는 화살이 되어 말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훌릉한 만트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그대의 이름이 '람'이라면 그대는
'람-람-람'을 외우면서 마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그대 자신의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대 속에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다른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에 속했거나 마음에 속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람-람'을 계속 부르게 되면 그
자신은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된다. 
그대는 항상 다른 사람의 이름만을 불러왔다. 그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먼 그것은 마치 그대가 아닌 어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매우 뚜렷한 현상이다. 그대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지켜보는 자로 남을 수 있다. 이름과 분리된,
그대의 삶 전체와 분리된 자로 말이다. 그대의 이름은 그대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이름에서 분리되면 그대의 삶 전체에서
분리된다. 그만큼 이 이름이란 것이 그대 내면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대가 태어나고 얼마 뒤로뚜터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데는 항상 그 이름을 들어왔다.
그래서 그 소리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만큼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고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신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어떤 사람은
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나라얀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크리슈나였다.
모하메트란 이름 역시 신의 이름이다. 본래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그렇게 해왔던 것이다. 
이 방편을 사용하는 데는 이것은 좋은 이유가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인 '람'을 계속 외운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외우는 동시에 신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신을 부르는 것이 된다.
신의 이름을 계속 내면으로 외우다 보면 그대는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이름은 나와 다른 그 무엇이다.'
그때 점점 그 이름은 자체적으로 신성을 띠게 될 것이다.
그대는 어느 날엔가 이것이 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문득 느낄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정말 만트라로 변한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암쏭하라! 이것은 매우 좋은 방법이다. 그대는
그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려고 한다면 알람시계가 따로 필요 없다. 단지 세 번만
이렇게 되풀이하라.
"람! 그대는 아침 다섯 시에 정확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잠을 자라.그러면 그대의 이름 '람' 때문에 정확히
잠을 깰 것이다. 이것을 계속 수련하면 어느 날 그대는 갑자기 깨달을 것이다.
아침 다섯 시에 누군가가 와서 그대에게 '람! 일어나게'
라고 말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무의식이 그대를 깨우는
소리다. 
이 방편은 말한다. 
"그대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이 소리를 통해서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그대의 이름은 모든 이름들을 위한 문이 된다. 그러나 소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먼저 그데가 '람-람-람'이라고 발성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이다. 하지만그것을 계속할 때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대는 먼저 발미키(Valmiki)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발미키에게 '람'이라는 만트라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교육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조건 '람-람-람'을 계속 반복했다. 그러나
반복하는 데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 발음이 도치되어 자기가
'마라-마라-마라'라고 외우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는 '람-
람-람'을 외웠는데 결국 '마라-마라-마라'가 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이름을 빠르게 외우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의미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때는 '람(신)'이나 '마라(악마)'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것들은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
에너지의 진동인 것이다. 그대 이름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그 의미를 잊어버려라. 그저 단순한 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의미는
머리 속에 있는 것이고 소리는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니
의미를 잊어버려라. 무의미한 소리를 계속 반복하라. 그 소리를 통해서
그대는 모든 소리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소리는
존재하는 모든 소리의 문이 될 것이다.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인간의 의식을 탐구해 온 사람들의 말에 따라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단위는 소리라고 생각해 왔다. 
현대 과학은 그것이 소리가 아니라 전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과학 역시
소리 또한 전기의 한가지 형태라고 말한다. 반면에 인도인들은
전기 역시 소리의 한가지 형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특별한 라가(raga), 즉 특별한 소리를 통해서 불을 이르킬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는지 모른다. 이것은 인도인들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소리가 모든 전기의 기초라고 인도인들은 말하고 있다.
소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매우 자주 울려 주면 거기에서
전기가 달생할 것이다. 
아주 긴 다리를 군대가 지나간다고 할 때 그들은 절대로 행진곡을
연주하거나 군가를 ◎르지 않고 조용히 지나간다. 왜냐하면
군인들의 군가나 행진곡 때문에 다리가 무너지는 일들이 아주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군인들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군가나 행진곡에 발걸음을 맞출 때 생기는 규칙적인 소리가
특수한 진동을 일으켜서 교각에 균열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옅사에 보면 여리고(Jericho)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성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저히
점령할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특별한 소리를 이용해서 그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소리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알리바바의 이야기를 잘 알 것이다. 어떤 특수한 주문을 외우면
바위가 움직이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만약 그대가 특별한 소리를 만들 수 있다면, 계속 그 소리를
외움으로써 의미도 사라지고 마음조차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 그대의 가슴을 막고 있던 바위는 뽑혀 나갈 것이다.

(질문)

"당신은 우리에게 명상의 여러 가지 방편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쨌든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으면 그
방편들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까?"
 
그대가 입문할 수 있을 때 그 방편은 질적으로 달라진다.
나는 지금 방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대는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입문은 그것을 질적으로 달라지게 한다.
만약 내가 그대를 어떤 특정한 방편 속으로 입문시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게 될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 입문
속에서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 가지 방편들을 차례대로 한 가지씩 흐대에게 설명해 주면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 방편들이
그대에게 맞든지 안 맞든지 나는 설명만 할뿐이다. 그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이 자리에서 논의될 수 없다. 
하지만 그대가 입문하게 되면 방편보다 그대 자신이 더욱 중요해진다.
스승은 그대를 입문시킬 때 그대를 관찰한다. 그는 그대가
어떤 유형인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그대가 과거 전생부터 해
왔던 수행의 깊이와 지금 당장 작동하고 있는 그대 중심의 기능이
무엇인지도 파악한다. 그때 스승은 그대에게 맞는 방편을 결정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접근이다. 방편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연구되고 관찰되고 분석된다.
그대의 과거 전생이,그대의 의식이, 그대의 마음과 몸이 철저히 해부된다.
그대가 지금 처해 있는 그 시점에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스승은 그대에게 맞는 특별한 방편을 선택한다.
그는 그대에게 잘 맞도록 방편에 대해서 섬세한 수정 작업을 한다. 이제
그 방편은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것이 되었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밀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해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112가지 방편들은 모두 일반적인 방법들이다.
나의 설명을 주의깊게 듣고 힌트를 얻어 그대가 직접 자신에게
맞는 방편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방편이
그데에게 맞으면 그대는 그것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입문한 것이 아니다. 입문은 개인적인 것이다. 입문은 스승과 제자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다. 그대가 스승에게 입문하면 방편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대가 아니라 스승이 된다. 그대는 스승이 골라주는 방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스승은 그대보다 훨씬 예민한
통찰력을 갖고 있어서 그대 자신보다 더욱 정확한 선택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방편을 주는 시기 역시 스승이 결정한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에는 그대의 의식적인 마음이 듣고 있다.
그대는 잊어버릴 것이다. 싸그리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겨우 몇 가지만 기억할 것이다. 그것도 온통 뒤죽박죽된 상태로 말이다.
스승은 그대의 무의식이 열리는 정확한 순간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대에게 확실한 방편을 하나 준다. 그것은 곧 무의식  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그래서 입문식은 그대가 반수면 상태에서,
무의식적 상태에서 치러질수록 효과적이다. 그대의 표면의식이 잠들 때
그대의 무의식은 문이 완전히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문에는 헌신이 필요하다. 그대가 헌신하지 않는 한
입문은 주어질 수 없다. 그대가 헌신할 때 그대의 표면의식은 그
의무를 벗고 쉬게 되며 스승과 그대의 무의식이 직접 관계를 맺게 된다.
입문식이 거행될 걱절한 시기가 선택되어져야 하고 그대는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하는 기간이 몇 개월씩 걸릴 수도 있다.
그때는 먹는 것과 자는 것까지 주의 깊게 통제되고 완전히 고요한
정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제대로
입문할 수 있다. 그래서 입문식은 긴 과정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과정이다.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는 한 입문식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대를 이 방편으로 입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 방편들을 그대에게 소개할 뿐이다. 이 방편들
중에서 그대에게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은 그대가 할 일이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입문하려 한다면 그때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대를 입문시키기 전에 나는 먼저 그대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것도 감춘 것 없이 완전히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문제는 매우 쉬워진다. 올바른 사람이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방편을 통하면
결과는 즉시 나타난다.
입문식을 거치는 동안에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
행자에게는 입문이 곧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그때의 방편은
살아 있는 방편이다. 그것은 스승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대에게 주어진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입문이 아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112가지 방편들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흥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입문할 수 있다.
그대가 진실로 관심을 갖게 되면 그대는 입문을 청할 것이다. 스승
없이 혼자서 방편에만 의지한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몇 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문을 통한다면 그것은 매우 쉬워진다. 
그때는 그대 혼자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문제를 놓고 스스과 함께 탐구한다.
기억하라. 스승은 그대보다 훨씬 지혜롭고 그대보다
훨씬 경험이 많다. 스승은 그대가 겪어야 할 시행착오를
미리 다 겪었다.
스승은 그대가 고민해 온 문제들에 대해 이미
해결을 다 보았다.
그래서 그는 스승인 것이다. 입문이란 스승이
그대 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그대를 여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관계다.
그 관계를 통해서 그대는 쉽게 변형될 것이다.

이제 됐는가?

탄트라적 성행위의 영적 의미

들어가라. 느낌의 중심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라.
자 그러면 어떻게 이 느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자 여기 그 방법이 있다.

48.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처음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이 불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하고 마지막의 '타다가 꺼진 불'이 되는 것을 피하라.

49.
그토록 깊은 이 포옹 속에서 그대의 감각은 나뭇잎처럼 떨린다.
이 떨림 속으로 들어가라.

50.
실제적인 포옹 없이 단지 그 결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변형이 일어난다.

51.
오랫동안 해어져 있던 친구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다.
이 기쁨 속으로 깊이 스며 들어라.

52.
먹거나 마실 때 음식이나 그 자체가 되라.
그리하여 그 맛으로 그대 자신을 가득 채워라.

탄트라적 성행위의 영적 의미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경쇠약
증세를 갖고 태어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사실 인간은 태어날 때 신경쇠약을 갖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이미 지독한 신경쇠약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채 신경쇠약이 걸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바로 그
사회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가장 진실한 상태로 태어난다. 자연적인 상태로
가장 정상적이고 건전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신경쇠약 증세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경쇠약에 걸려 있다. 이제 그대는 하나가 아니라,
그대는 수많은 조각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것을 이해하라.
오직 그때만이 탄트라의 시작이 가능하다. 그대의 '느낌'과 '생각'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경쇠약의 근본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대가 믿고 있는 부분은 느끼는 부분이 아니라 생각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느낌'이 훨씬 본질에 가깝다.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대는 느낌으로 태어났다.
가슴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
'생각' 의 부분이 개발되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사회가 그대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대에게 '생각'이 중요시
되면서부터 '느낌'은 제한되기 시작한다. '나는 느긴다'라고
말할 때조차 그것은 정말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느낀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느낌은 완전히 죽어 버렸다. 이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그는 느끼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느끼는 존재다. 그는 생각의 차원을 모르고 있다.
그는 하나의 동물이며 자연이다.
하지만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꾸중을 듣고 비난을 받는다. 어떤 규범과
가치관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래서 그는 느낌을
억눌러야 한다. 그 억누름이 없다면 그는 언제나 그 느낌이
말성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울고 싶을 때 마음대로 울지 돗한다.
그의 부모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울게 되면
그는 혼이 난다. 매를 맞게 된다.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가족들이 원하는 어떤
특정한 관념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그는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순수한 그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바라는
어떤 규칙을 따라야 그는 비로소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후천적으로 부과되는 규칙이다.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본질, 즉 느낌은 억압당하고 대신에
부자연스럽고 비실제적인 것이 부과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분열이 일어나고 그 분열이 극심해지면
그는 더 이상 진정한 그의 본질과 연결될 수 없게 된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본질을 망각해 버린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는 진정한 그대의 본질이 아니다. 지금 그대의 얼굴은
하나의 가면일 뿐이다. 그대의 본래 모습은 그 가면 뒤에 깊숙히
가려져 있다. 그리고 그대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갖게 된다. 진실을 느끼는 순간,
진실 쪽으로 되돌아자는 순간, 이 사회는 그대에게 반대할 것이다.
그대를 외면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외면한다.
이런 분열 상태가 일종의 신경쇠약 증세를 유발시킨다. 그대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대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결국 이 진정한 욕구가 억눌렸을 때
그대는 상징적인 욕구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그대는
음식을 계속 먹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만족할 수 없다.
먹는 것에 대한 욕구는 사랑에 대한 욕구다. 음식과 사랑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래서 사랑이 결핍되었거나 억눌리게 되면
먹을 것을 밝히게 된다. 이 욕구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 왜곡된 욕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이것은 원초적인 욕구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대는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욕구로
변모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대는 정치가가 되려고도 하며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스타가 되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윽구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비상한 관심을 쏟는다 해도 그대의 근본적인
욕구는 채워질 수 없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이 그대를 사랑해 주는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우선 그대는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
관심과 사랑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억눌리게 되면
그것은 상징적인 욕구로 변질된다. 그때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그대가
바라는 것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충족되지는 못한다. 
그 욕구는 변질된 욕구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욕구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욕구와의 이 차이가 개인에게는 
신경쇠약의 원인이 된다. 
한편 탄트라는 가장 오래된 개념이며 동시에 가장 새로운 개념이다.
탄트라는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또한 가장
비전통적이기도 하다. 아니 전통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뚜엇인가? 탄트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가 전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 생을 모두 허비한 것이 된다. 헛탕인 삶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뚠열의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전체적인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가 되려고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생각은 오히려 분열에서 분열만을 조장하게 된다. 생각은 분열적이다.
그러나 느낌은 종합이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다.
따라서 하나가 되기 위한 생각이나 연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느낌의 한가운데로 푹 빠져 들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느낌의 중심(the feeling center)'에 접근할 때조차
우리는 행동이 아니라 생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때 주의하라.이 말이
그저 단순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지 아니면 느낌인지를 잘 살펴보라.
이것이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느낌은 전체다. 그대의 몸, 마음, 그리고
그대에게 소속된 모든 것이 이 느낌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의 경우엔 거기 오직 그대의 머리만이 포함된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많이 포함되는 것이다. 거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을 뿐,
마음 순간에는 흔적도 없을 그런 것만 있다. 그렇다. 여기에는
오직 부뚠만이 포함된다. 불행을 야기시키는 요소만이 포함된다.
부분으로서의 이 생각은 단 한 가지만을 약속할 수 있다.
그대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읖 말이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뒷부분의 말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대 존재 전체는 결코 생각속에
포함될 수 없다. 내일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생각이 지나가 버리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는 그 약속을 어떻게
행하겠는가? 이제 약속은 하나의 속박이 된다. 견딜 수 없는
속박이 된다.
샤르트르는 어딘가에서 '모든 약속은 거짓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대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다. 
약속한 것은 그저 전체 중의 한 부분일 뿐이다. 부분이 약속을 한다.
그리고 그 부분이 더 이상 영향력이 없게 될 때,또 다른 부분이
그대를 지배할 때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도대체 누가 약속을
지킨단 말인가? 그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억지로 그 약속을
지키려는 데서 위선이 시작된다. 그대는 아주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척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탄트라는 말한다. 
"들어가라. 느낌의 중심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라."
자, 그러면 어떻게 이 느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여기 그 방법이 있다. 

48.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처음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이  불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하고 마지막의 '타다가 꺼진
불'이 되는 것을 피하라.

섹스는 깊은 충족감을 줄 수 있다. 섹스는 부분으로 남아 있는
그대를 전체 속으로, 본질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라. 우선 첫째로, 섹스는 전체적인 행위이다. 
그대 내면의 균형은 이미 깨진진 오래다. 그대가 섹스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생각)을 인정했다. 그러나 섹스는 마음의
차원을 넘어선 행동이다. 섹스 속에서 그대의 두뇌는 사라져 버린다.
행동 속에서 그대의 두뇌는 사라져 버린다. 거기 어떠한 이유도 없다.
어떠한 사념도 없다. 만일 사념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섹스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다.
거기에 더 이상충족감은 없다. 오르가즘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이때 섹스는, 섹스와 행위는 그 자체가 이미 두뇌적인 것이 되고 만다.
논리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세상 전체가 갈수록 흥청거리고 섹스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은
사람들의 성욕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섹스를 전체적인 행동으로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섹스 에너지가 강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에 대해서 지금의 우리처럼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성에 대한 이 갈망은 진실을 잃어버리고
거짓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는 절점
더 성을 갈망하고 있다. 이것은 전체로서의 성행위 그 자체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섹스조차 사념의 차인으로 변식되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섹스의 타락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섹스를 즐길 수 있다. 섹스에 대한
책과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사랑들은 이런 식으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성행위를 해야 할 때면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거기에서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섹스에 대해 무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섹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강한 에너지 파장을 느긴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위에 임하게 되면
그들은 거기에 강한 에너지 파장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제 성행위조차 그들에게는
생각의 차원으로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섹스에 대해서
그저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코 완전한 성행위를 할 수 없다.
완전한 성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 전체가
거기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 전체가 참가할 경우
머리는 몹시 불안해진다. 머리는 더 이상 거기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제 맘대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그대를 전체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 섹스를 사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행위 자체가 하나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섹스에 대해서 지금까지 듣고 배워 온 모든 것을, 섹스에 대해
사회가 그대에게 가르쳐 준 모든 지식을 그대는 잊어버려야 한다.
그대의 지위를, 종교를, 그리고 그대의 스승들을 모둔 깨끗이 잊어야 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전적으로 그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자신을 통제하지 마라. 그것은 장애물이다. 섹스 속으로 뛰어들라.
미친듯이 성의 에너지로 들어가라. 무심(no - mind)의
경지는 마치 미친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몸이 되어야 한다. 짐승이 되어야 한다.
울부짖는 짐승이 되어라.
짐승이야말로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대인들에게는 오직 섹스만이 전체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섹스는 그대 속에 있는 가장 깊은 생물학적
중심이다. 그대는 섹스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대의 세포
하나하나는 모두 성 세포이다. 그대의 전신은 섹스 에너지의
파장이다. 
이 방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섹스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행위가 일종의 배설이다. 그러므로 성행위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급히 서두르게 된다. 그대는 단지 배설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넘치던 에너지는 배설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다음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배설 뒤의 편안함은 일종의
탈진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이 탈진을 그대는 휴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거기에 흥분은, 넘치는 에너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휴식은 부정적인 휴식이다.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만
휴식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인가?
이 휴식은 오직 신체적인 휴식일 뿐이다. 이 휴식은 결코 깊은 휴식이
될 수 없다. 영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서두르지 마라.
끝을 보려고 하지 마라. 처음 상태 그대로 남아 있어라. 섹스의 행위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처음 상태, 즉 애무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의 상태,
즉 사정이 그것이다. 처음 상태에 머물러 있어라. 그때가
보다 따뜻하고 휴식적이다. 서둘러서는 안된다. 끝을 보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리 끝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성적인 결합이 시작될 때에 최초의 단계인 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
에너지가 넘칠 때 그 에너지를 방출하려 하지 마라. 넘치는 상태
그대로 남아 있어라. 사정을 하려 하지 마라. 사정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처음의 상태에서, 그 뜨거운 불의 상태에서 전체와
하나가 되라. 뜨거움 그 자체가 되라. 그 남자와 또는 그 여자와
하나가 되라. 하나의 원을 만들어라.
여기 세 개의 가능성이 있다. 두 남녀가 만났을 때 세 개의
기하학적인 도형이 만들어진다. 첫째 사각형, 둘째 삼각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형이 그것이다.
이 도형들은 가장 오래된 탄트라의 도형이다. 탄트라 성행위의
도형들이다. 두 사람이 성행위를 할 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두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사각형의 만남이다.
이 사각형의 만남에서 그대는 생각하는 부분과 느끼는
부분의 둘로 나뉘어진다. 그대의 연인 역시 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래서 네 개의 만남이 되는 것이다. 이 만남은 너무나 복잡하다.
결코 깊은 만남이 될 수 없다. 본질적인 만남이 될 수 없다.
여기 네 개의 구석이 있다. 이 만남은 진실한 만남이 아니다.
만남인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만남이 아니다. 여기엔 영적인 교제가 없다.
그대의 깊은 부분은 닫혀져 있다. 상대방의 깊은 부분
역시 은폐되어 있다. 오직 두뇌끼리만 만난다. 두 개의 생각하는
부분만 만나고 있고,
느낌의 만남은 아직 은폐되어 있다.
만남의 두번째 유형은 삼각형의 만남이다.
 그대와 그대의 연인은 둘이다.
그러다가 이 밑변의 두 각이 어느 순간에 하나가  된다.
어느 순간에 그대 둘은 사라진다. 거기 하나만이 남게 된다.
이 삼각형의 만남은 사각형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 둘은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느낌이 그대에게
생명 력을 준다. 에너지를 준다. 이 만남을 통해서 그대는
다시 쇼생하고 젊어진다.
그러나 원형의 만남이 가장 차원 높은 만남이다. 이 만남이야말로
탄트라의 만남이다. 이 만남 속에서 그대는 하나의 원을 이룬다.
여기에는 각이 없다. 그러므로 만남은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차원이 아니며 일상적인 만남이 아니다. 사정을 하지
않을 때만이 이 만남은 가능하다. 사정을 한다면 이는 삼각형의
만남이 될 것이다. 사정하는 그 순간에 하나됨의 차원이 무너지며
다시 분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처음의 상태로 남아 있어라. 파국으로 이동해 가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처음의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우선
섹스를 생각하는 그대의 개념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성행위를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둘째,
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다음 순간을 생각하지 마라. 언제나 ' 지금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성행위의 처음 단계에서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없다면 그대는 걸코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오직 본질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지금 여기, 즉 현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남아 있어라. 두 몸의 만남을 즐겨라. 두 영혼이
용해되어 하나가 된다. 서로가 서로 속에 녹아드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다'고 하는 목적 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려라.
그 어디로도 나아갈 곳이 없는 이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지금 여기에
용해되어라. 이 뜨거움 속에서, 이 사랑 속에서 그대는 서로에게
용해되어 들어간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노리개로, 물건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그저 쓰고 버리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상대방 역시 그대를 하나의 물건으로 이용한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가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 사랑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대방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갈 수 있다. 처음 단계에서 서로 용해되는 것은
많은 통찰력을 그대에게 줄 것이다.
성행위를 끝내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점점 덜 성욕적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영적 차원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마음 뿐만 아니라 성기 역시 상대방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 버린다.
깊고 조용한 에너지의 순환이 두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몇 시간이고 이 상태로 머물 수 있다.
이 상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진다. 그러나
생각은 하지 마라. 상대방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그 순간을 붙잡아라.
거기에 머물러라. 이것이 바로 엑스터시가 될 것이다. 삼마디가
될 것이다. 사정이 엑스터시가 아니다. 이 경지를 맛본 이상
그대의 성욕적인 마음은 비성욕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진정한 브라흐마차리아(완전한 독신)의 경지가 숨어 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보통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흐마차리아가 되려면 이성 (異
性)과의 접촉을 가져서는 안된다'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는 이성을
피해야 한다. 이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아주 위선적인 독신주의가 태어난다. 이성을 멀리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이성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 도망가지 마라. 회피하지 마라. 있는 그대로를, 자연 그대로를
사용하라."
차원의 변형을 위해서 그대 전체를 사용하라. 싸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변형을 위해서는 완전한 수용이 필요하다.
목적 없이, 순수한 유희로서 만난다면
그대와 그대 연인과의 성행위는 언제까지나 처음의 상태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흥분은 에너지다. 그대는 이 에너지를 잃을 수도 있다. 또 이
에너지의 절정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에너지의 상실이 있다.
동시에 좌절감과 허탈감이 뒤따를 것이다. 그대는 이 허탈감을
휴식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휴식이다. 
탄트라는 긍정적이며 차원 높은 휴식을 준다. 두 연인은 서로에게
용해됨과 동시에 거기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솟아난다.
그들은 하나의 원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에너지의 순환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준다. 싱싱한 생명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 에너지의 고갈은 조금도 없다. 아니 더욱더 강한 에너지로
충만해질 것이다. 이성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대 몸의 세포들이
한올한을 되살아 나기 때문이다. 흥분의 상태가 사정의
절정으로 치닫는 일이 없이 서로 속에 용해될 수 있다면, 뜨거움의
처음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 뜨거움은 식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성의 유희를 연출하게 될 것이다. 에너지의 방출이 없다면,
욕망의 배설이 없다면 그것은 명상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대는 전체가 된다. 분열된 그대의 인격은 이를 통해서 더 이상
분열되지 않는다. 이 성행위는 분열된 인격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신경쇠약증 환자들은 그들의 인격이 분열된 사람들이다. 
그대의 인격이 다시 연결된다면 그대는또다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이 순수를 알게 되고 나서도
그대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어디까지나 연극이다. 그대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이 하는 연기 속에 말려들지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임을 그대는 철저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대는 가면을 써야 한다. 그것은 그대가 지금 거짓투성이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이 사회는 그대를 죽여 버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것은 그가 이 가면을 여지없이 벗어 던졌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해주라. 그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불필요한 싸움을 만들지 마라. 하지만 한 번 그대가
자신의 본래 얼굴을 알고 나면, 그대 존재의 전체성을 깨닫고 나면
이 거짓된 사회는 더 이상 그대를 신경쇠약, 정신분열의 차원으로
끌어당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코 그대를 미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사정을 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순환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끊어지고
밖으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러면 거기에 불(火)은 더 이상 없다.
아무런 성취도 없이 그대는 그저 에너지만을 낭비한 것이다.
그럼, 다음 방편으로 넘어가자.

49.
그토록 깊은 이 포옹 속에서 그대의 감각은 나뭇잎처럼 떨린다.
이 떨림 속으로 들어가라.

이 포옹 속에서, 이 깊은 교류 속에서 그대의 감각은 나뭇잎처럼
떨릴 것이다. 그 감각의 전율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한다. 섹스 속으로 들어갈 때 그대 몸이 멋대로 움직이도록
허락하지 마라. 그대 몸이 마음껏 움직이도록 허락하게 되면
섹스의 동작이 그대 전신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섹스 에너지가
성기에 국한되어 있을 때는 통제가 가능하다. 그러나 섹스
에너지가 그대 전신에 퍼질 때 그대는 더 이상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대는 나뭇잎처럼 떨릴 것이다. 그대는 울부짖기 시작할 것이다.
몸이 성 에너지에 불붙게 되면 이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짓을 억제한다. 이 사회 전체는 특히 여성의
모든 몸짓을 통제하고 있다. 여성 에너지의 확산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은, 여성의 윽체는 굳어져 가고 있다.
남자는 여자들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행사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수동적일 뿐이다. 왜 그런가? 왜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 그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이 깨어나게 되면,
여성의 몸에 있는 섹스 에너지가 불붙게 되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그녀를 만족시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은 고리형의 오르가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성은
그런 오르가즘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남성은 단 한 번의 오르가즘
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의 오르가즘은 수많은 오르가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남성의 오르가즘이 단수로 되어 있다면 여성의 그것은 복수이다.
어떤 여성이라도 최소한 세 개의 오르가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성은 단 하나의 오르가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남성의
오르가즘이 끝나게 될 때 여성의 오르가즘은 그제서야 잠이 깬다.
여성의 오르가즘은 그때부터 보다 높은 단계의 오르가즘으로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남성은 오르가즘을 경험한 후 깊은 수면
상태로 떨어져 버린다. 이와 반비례해서 여성의 감각은 점점 더
불붙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여성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남성은
결코 여성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 순간,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싶은 그녀의 오르가즘이 억눌려질 때 그녀는 즉시 또 다른
남자를 원하게 된다. 여기 일부일처제의 모순이 있다. 그라나 인단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성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억눌러 버리는 것이 훨씬 쉽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0%이상의 여성들이 오르가즘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은 단지 아기를 낳아 주고, 남자들의 배설 행위를
돕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은 남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흡족해 한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보라. 여성들의 이 슬픔을 보라. 여성들의 이 고통을 보라. 이 때문에
여성들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는다.
떨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섹스의 매동작 속에서 떨리기
시작할 때 에너지는 온몸으로 골고루 퍼져 나간다.
그때 세포 하나하나마다 에너지는 진동하기 시작한다. 하나하나의 세포는
모두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모든 세포는 성세포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성세포가 만나서 그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그대의
몸이 형성되었다. 그대의 모든 세포가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그대 몸
속에서 그대 자신의 반대 극성과의 만남 때문이다. 그대의 세포
속에는 개발되지 않은 이성 (異性)의 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떨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치 동물과도 같아진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가 동물이었다. 인간이 동물이라고 해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거대한 바람1 불어온다. 나무가 떨고 있다. 뿌리까지 떨리고 있다.
잎사귀 하나하나마다 모두 신들린 듯이 떨고 있다. 섹스는
거대한 바람이다. 그대 속에서 거대한 에너지와 바람이 불고 있다.
그대여, 전율하라. 그 전율 속으로 들어가 전율 자체가 되라.
그대 전신의 세포가 일어나 춤추게 하라. 그대 연인의 세포 역시
춤추기 시작할 것이다. 그럴 때만 두 사람의 만남이 가능하다.
여기 이 만남은 결코 육체만의 만남이 아니다. 이 만남은 바로
그대 자신의 생명 에너지와의 만남이다.
들어가라. 이 떨림 속으로 들어가라. 방관자로 남아 있지 마라.
관객이 되지 마라. 마음은 관객이다. 방관자로 서 있지 말고 떨어라.
이 떨림 속으로 뛰어들어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떨림 그
자체가 되어라. 떨림은 그대 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존재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대는 이제 떨리는 나뭇잎이다.
여기 두 개의 마음이 있다. 두 개의 육체가 있다. 이 두 개의 육체는
떨리는 두 개의 에너지로 변했다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룬다.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이 순환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그대는 우주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그대는 우주와 둘이 아니다. 이 떨림을 통해서
그대는 우주가 된다. 이 순간이야말로 위대한 창조의 순간이다.
그대의 육체는 유동적으로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액체가 될 것이다.
하나의 흐름이 되어 서로가 서로 속으로 스며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마음은 사라진다. 분별이 사라진다. 그대는 전체가 된다.
하나가 된다. 이것을 '아드바이타(advita)· 즉 불이뭔(不
元)이라고 부른다. 이 불이원을 느낄 수 없다면 불이원에 관한
모든 철학은쓸모없게 된다.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이원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되면 그대는 비로소 우파니샤드
(Upanishads )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전체가 무엇이라는 것을,
신비주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이 세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존재의 본질이 그대의 집이다. '나는 마침내
존재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걱정은 사라져
버린다. 여기에 싸움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을 노자는 '도(道)라고
불렀다. 샹카라(Shankara)는 아드바이타라고 훌렀다.
그리고 그대 역시 자신의 언어로 그것을 이름붙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깊은 사랑의 포옹 속에서 느끼는 것이
보다 쉬운 일이다. 살아 있어라. 그리고 진동하라. 떨림 자체가 되라.

50.
실제적인 포옹 없이 단지 그 결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변형이 일어난다.

이 방편에 익숙해지면 그때는 상대마저도 필요치 않게 된다.
섹스의 여러 가지 동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떨림의 그 느낌을 알아야 한다.
그 느낌을 알게 되면 상대와의 실제적인 행위가 없이도
그대 혼자서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좀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아니다. 거기 오직 에너지의 떨림만이 있다면, 하나의 순환만이
남는다면 그 순간 상대마저도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것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쉽다. 여성은 섹스의 동작 속으로 들어갈 때
눈을 감기 때문이다. 이 방편을 수련하는 동안은 두 눈을 감는 것이 좋다.
그럼으로써 순환의 느낌이, 하나로서의 그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우선 두 눈을 감아라. 연인과 함께 하듯이 누워라.
그리고 연인과의 애무를 기억하라. 느끼기 시작하라.
머지않아 그대 몸은, 몸의 세포들은 떨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 떨림을 따라라.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연인과 함께 하듯이 그렇게
움직여라. 오직 초기에서만 '함께 하듯이'라는 말이 적용된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말은 말이 아니라 사실로 나타난다.
사랑의 동작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렇게 움직여라. 아니 실제로
사랑의 동작을 시작하라. 소리를 질러라. 움직여라. 그리고 떨어라.
머지않아 순환의 느낌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 순환은 상대가
없이 만들어진 느낌이다. 그대가 남자라면 이 우주 전체가 여자가 된다.
또한 그대가 여자라면 이 우주 전체는 남자가 된다.
그대는 이제 존재 그 자체와 깊은 교류 속에 있다. 상대방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상대방은 문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로 들어가는 문 말이다.
이성과 사랑의 동작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그대는 존재 그 자체와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문에 불과하다. 여자 역시
문에 불과하다. 상대방은 우주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나 급히 서두른다면 결코 이것을 느낄 수 없다. 이 영적 교류 속에서
이 깊은 포옹 속에서 둘이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다면 그대는
상대방을 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은 전체의 확장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을 알게 되면 그대 혼자서도 얼마든지 수련이 가능하다.
이는 그대에게 전혀 색다른 자유를 줄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여기서 상대는 우주가 된다. 그때 이 방편은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존재계와 계속 연결 상태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다른 차원에서도 이것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침 산책을 하면서도 이는 가능하다. 아침 공기와, 떠오르는 태양과의
교류 또한 가능하다.
밤하늘의 별을 보라. 이 영적 교류는 별과도 가능하다. 달을 보라.
달과의 영적 교류가 가능하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우주 전체와
섹스 행위 속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성과 시작해야 한다. 그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그대와 가장 가까운 우주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성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은 단지 문이기 때문이다.
문을 넘어서면 더 이상 문은 필요가 없다.
탄트라는 섹스를 하나의 수레로 사용한다. 섹스란 무엇인가?
섹스는 에너지다. 그것은 훌륭한 방편이다. 섹스는 그대를 변형시킬 수 있다.
그대의 차원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식의 섹스에 대해서 감감 무소식이다. 우리는 섹스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부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동물을 보라.
그들은 우리 인간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 게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은 섹스를 하나의 죄악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섹스와 그대 사이에 깊은 갈등이 시작된다. 그대는 섹스
속에서 그대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것을
비난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세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섹스를 억눌러서는 안된다. 섹스는 결코 타부(Taboo)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에는 계속 섹스를 비난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그대는 단 한 번도 섹스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본 적이 없다.
그뿐이겠는가? 때로는 섹스에 대하여 거부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거부감이 그대 속에서 분열을 야기시킨다.
갈등을 야기시킨다.
탄트라는 말한다. 전체 속에서 움직여라. 또한 전체적으로 움직여라.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문화, 교양, 종교,
이데올로기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려라. 그저 섹스의 동작 속으로
녹아들어가라.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거부하지 마라.
완전히 무념(non-thinking)이 되라. 그때 비로소 상대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됨'의 느낌이
상대방에 대한 집착을 지워 버린다. 상대방은 사라지고, 그 집착마저
사라지고 거기 오직 우주만이 남는다. 우주 전체가 있다.
그대는 나무와도 그 행위가 가능하다. 달과도 가능하다.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섹스의 행위가 가능하다. 이 방법만 알게 되면,
순환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이 방편만 터득하게 되면 그 어떤
것과도 교류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아무런 상대가 없이도 이것이
가능하다. 단지 에너지와 말이다. 
그대 자신 속에서 이 순환의 느낌은 가능하다. 인간은 양성(兩
性)적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남성이며 동시에 여성이다. 여자 역시
여성이며 동시에 남성이다. 그 순환의 느낌은 처음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가능했다. 지금 그대 속에는 그대의 반쪽인 자신의
이성(異性)이 있다. 그 이성을 깨움으로써 이 행위가 가능해진다.
이 순환의 느낌이 그대 속에서 만들어진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과
더불어 깊은 포옹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순환의 느낌이 올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브라흐마차리아의 성취가
가능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 세상의 모든 독신주의는 잘못된
길이다. 그들은 지금 그들 자신의 문제접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이 순환이 그대 자신 속에서 만들어질 때 그대는 해방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때문에 탄트라는 말하고 있다.
"섹스는 가장 깊은 속박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를 성취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독을 약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의 기본 입장이다. 독을 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비난하지 마라.
비난하는 대신 그것을 사용하라. 그리고 어느 것에도 반대하지 마라.
그것을 이용하고 변형시키는 법을 찾아라. 탄트라는 삶의 수용이다.
그것은 가장 깊고 전체적인 수용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투쟁을
만들어 내지 마라. 어떠한 투쟁이라도 그것이 이미
투쟁인 이상 그대 자신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섹스를 반대하고 있다. 섹스를 두려워하고 있다.
섹스는 거대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 섹스 에너지 속에 들어
가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에너지의 물결이
그대를 어느 곳으로든 데리고 갈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섹스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과 섹스의 물결 사이에
둑을 쌓는다. 그런 다음 이 섹스 에너지, 이 생명 에너지가
자신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을 다스리고 통제하려고 든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섹스 에너지의 통제자가 되려는 것은 위선이다. 그것은 하나의 병이다."
그대는 이 섹스 에너지와 분리될래야 될 수가 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따라서
모든 분리는 위선일 수밖에 없다. 그대는 그 에너지의 한 부분이다.
그 바다에 이는 한 번의 파도에 불과하다. 그대는 얼어 버릴 수도 있으며
그 바다로부터 분리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얼음의
상태는 바로 죽음의 상태인 것이다. 인간은 죽어 있는 상태 속에서
살고 있다. 펄펄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는 이 강물 위에 부유하는 죽은 물질일 뿐이다. 녹아라. 녹아서 이 흐름과
하나가 되라.
강물과 하나가 되라. 강물 속에 녹아 들어라. 여기 차원의 변형이 온다.
투쟁을 통해서는 결코 변형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변형은
자각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방편은 참으로 중요한
방편이다. 그리고 섹스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차원보다 훨씬
심오한 차원을 갖고 있다. 섹스는 결코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다.
우리는 이 탄트라적인 섹스를 통해서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 끝은 없다. 섹스는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가장 심오한 명상이 된다. 

51.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친구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다.
이 기쁨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라.

만약 그대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는다.
그러나 그대의 관심은 그 기쁨이 아니라
친구에게 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어떤 것을 놓치게 된다.
그 기쁨은 순간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다. 그대의 관심은 오직
친구에게만 가 있다. 그대는 친구와 더불어 이야기할 것이다. 
지난날의 기억들을 더듬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곧 가실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그대 가슴에서 기쁨이 솟을 때 바로 이
기쁨에 집중하라. 이 기쁨을 느껴라. 이 기쁨과 하나가 되라.
친구로 하여금 이 기쁨의 외곽에 있도록 하고 그대 자신이 이 기쁨의
한가운데에 머물도록 하라.
이 방법은 다른 상황 속에서도 똑같은 수련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태양이 떠오를 때 그대는 그대 속에서도 무엇이 떠오르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태양을 잊어버려라. 태양으로 하여금
외곽에 있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 속에서 떠오르는 느낌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 느낌을 바라보는 자가 되지 마라. 그것 속으로
녹아 들어가라. 그러면 그것은, 그 느낌은 그대 전신에 퍼지게 된다.
그대 존재 전체가 그것으로 충만하게 된다. 일상 생활 속에서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드물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그냥 놓쳐 버리고 있다. 그대의 모든 관심이 외부의 대상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있을 때마다 '이 기쁨은 밖에서부터 왔다'라고 느낀다. 
친구를 만난다. 물론 이 기쁨은 친구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친구를 만났기에 이 기쁨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기쁨은 그대 속에 있다.
친구는 이 기쁨이 그대 속에서 나올 수 있도록 만든 상황에 불과하다.
기쁨이 그대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은 기쁨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분노를 느낄 때, 슬픔을 느낄 때, 그리고 불행을 느낄 때도
이것은 가능하다. 이처럼 상대방은 단지 그대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표출되도록 하는 하나의 자극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그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 느낌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라.
그러면 그대의 태도에 변화가 올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지니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서조차 이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화가 날 때 화를 내게 한그 사람에게 관심을 쏟지 마라.
그 사람은 분노의 외곽에 남겨 두라. 그리고 그대 자신은 분노 속으로 들어가라.
전체로서 분노를 느껴라. 그대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대로
그 분노의 불길을 내버려 두라.
"이 녀석이 나를 화나게 했다."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를 욕하지 마라. 그는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에게 고마워해야할 일이다. 그는 그대의
어느 부분에 충격을 가했다. 거기 상처가 있었다. 이제 그대는
그 상처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대는 상처 그 자체가 된다. 
부정적인 감정이건 긍정적인 감정이건 가리지 말고 이 방편을 적용하라.
거기에서 많은 변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감정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그 부정적인 것들이 여전히 그대 속에 남아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그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또
◎ 감정이 긍정적이라면 그대는 감정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기쁨이라면 그대는 기쁨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분노라면 그 분노는 사라져 버린다.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은 이 점에서 다르다. 어떤 감정이
그대 속에서 솟아오를 때,그 감정을 자각함으로써 감정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감정을
자각함으로써 그 감정과 하나가 된다면 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이다.
자각은 이같이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이 나쁜
감정이라면 이 자각을 통해서 그대는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축복이라면 그대는 그것과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자각을 통해서
그 감정이 더욱더 진해진다면 그것은 좋은 감정이다.
그러나 자각을 통해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나쁜 감정이다.
자각 속에서 죄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덕은 자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무성해진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덕과 죄는
사회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적 체험이며 느낌이다.
그대의 자각을 사용하라. 자각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다.
불이 켜지는 순간 거기 어둠은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어둠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둠은 빛의 부재 상태이다. 이 책상, 이
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불을 켜게 되면 어둠은 사라져 버린다. 어둠이 사라져 버리자
실재가 드러나게 된다. 이 방에 있던 실재의 물건들이 보이게 된다.
자각을 통해서 부정적인 모든 감정은 어둠처럼 사라져 버린다.
미움, 분노, 질투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대신 그대 속에 묻혀 있던 사랑, 기쁨, 평화 등이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
기쁨이 솟아오르면 그때 그대는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가라.

52.
먹거나 마실 때 그 음식의 맛 그 자체가 되라.
그리하여 그 맛으로 그대 자신을 가득 채워라.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다. 음식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먹고 있다. 
기계처럼 습관적이다. 
식사라는 것을 제대로 음미하지 않는다면 위장 속에 음식물을 채워 넣는
 행위에 불과하다. 우선 천천히 먹어라. 그리고 그 맛을
음미하라. 천천히 먹음으로써만 맛의 음미가 가능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마라. 맛을 음미하면서 그 속에 빠져 들어라.
단맛을 느끼면 단맛 그 자체가 되라. 입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그 맛을 느끼도록 하라. 무엇을 먹든지 그대 자신이 그 맛 자체가 되라.
탄트라의 가르침이 여타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아쉬람(수련원)에서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규칙이 있다. 
"맛보지 마라. 무슨 음식을 먹든지 맛으로 먹지 마라.
그저 육체를 찌탱하는 약으로 먹어야 한다. 맛은 일종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맛을 봐서는 안된다."
그러나 탄트라의 입장은 이와 정반대다. 
"맛보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데까지 음미하라. 가장 민감하게
느껴라.· 감각적이 되어라. 아니 감각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맛
그 자체가 되라."
맛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대의 감각은 경직될 것이다. 더욱더
무감각해질 것이다. 이 무감각 속에서는 몸을 느낄 수 없다.
그대의 느낌조차 느낄 수 없다. 그대는 다만 그대 자신의 머리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머리 속에 고정되어 있는 이것이 바로 분열이요,
갈등이다. 탄트라는 그대 자신 속에 어떠한 분별도 만들어
내지 말라고 말한다.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감각적이면 감각적일수록 삶은 더욱더 활기 차게 될 것이다.
활기 차면 활기 찰수록 에너지는 더욱 넘치게 되고 그대 존재의 문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지지 않으려 한다. 만진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다. 만진다는 것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모두 섹스의 동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만원
버스 속에 서 있다. 옆 사람도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 역시
옆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오직 옆 사람과 그대의 육체가 다을 뿐이다.
그대의 감정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일부러 그대의 몸을 만질 경우 그대는 일종의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가 그대의 몸을 만질 때 그대 자신은 그대의 몸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 마치 몸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죽은 송장을 만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무감각은 좋지 않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그대가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이 지금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삶을 놓쳐 버렸다.
거기에 죽음이 밀려오고 있다.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가
진정 살아 있다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아니 죽음 속에서조차
열렬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죽음이 올 때 그대의 감각은
모두 깨어난다. 그와 동시에 그대는 이 죽음까지 음미하게 될 것이다.
죽음! 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인가? 그대가 진정
살아 있다면 죽음 속에서조차 살아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죽음 속에서조차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죽어 가는
그대 몸의 감각조차 느낄 수 있다면, 몸의 그 감각들이 그대의 중심으로
수축되어 사라짐을 느낄 수 있다면, 그때 그대에게는 죽음이 없다.
탄트라는 말한다.
"먹거나 마실 때 음식의 맛 그 자체가 되라. 그리하여 그 맛으로
그대 자신을 가득 채워라."
물을 마셔 보라. 물을 마실 때 물의 맛을 느껴라. 자,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물을 마셔라. 물 맛을 느껴 보라. 물이 입에 닿는 순간
그 맛과 함께 차가움이 전신에 퍼지도록 하라. 온몸으로 그 차가움을 느껴라.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대의 감각은 점점 예민해질 것이다.
그와 함께 그대는 더욱 활기 차고 충만해질 것이다.
느낌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실패자이다. 삶은 덧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삶이 이토록 덧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결코 이
느낌이란 것으로 충만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 느낌으로
충만해지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
우리는 느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하나의 무덤이 되었다. 우리의 차원은 죽음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언제나 살아 있으라고 말한다. 더욱 펄펄 살아 있으라고 말한다.
삶이야 말로 신이기 때문이다. 삶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을수록 그대는 신성에 가까워진다.
전체적으로 살아 있으라. 거기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질문)

"당신께서 강의하신 대부분의 방편들은 육체를 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탄트라에서 육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기본적 요점들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첫째, 그대는 그대의 육체다.
지금 당장에 그대는 육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는 영혼이나 아트만 등등의 것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생각이나 개념에 불과한 것이지 그대의 체험은 아니다.
그대가 단지 하나의 육체뿐이라는 것이 지금은 옳다. 그대가
죽음을 모르는 영혼이라든지 불멸의 아트만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그것은 한낱 주워들은 생각일 뿐이다.
그대는 영혼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그 핵심을 꿰뚫은 적도 없고 불멸을 깨달은 적도 없다.
그대는 죽음이 두려워 죽음이 없다는 생각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실재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대는
죽음 없는 상태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운좋게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영혼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죽음 없는
상태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결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에 관한 한 그렇다는 뜻이다. 그대는
단지 육체일 뿐 불멸의 영혼에 대해서는 생각만 갖고 있다.
그대는 공포 때문에 불멸의 영혼이나 신에 대해 믿게 되었다. 그런 것들은
교회나 사원 혹은 모스크에 가서, 혹은 죽음의 문턱에 선
노인을 찾아가서 들은 것들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신론자들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이나 내세를 믿게 된다. 젊었을 때는 죽음에
대해서 별로 염려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남에게나 일어나는 일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늙어갈수록 점점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가까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을 갖기 시작한다.
모든 신앙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자신을 속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에
그대는 육체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대는 불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오직 죽음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그러나
'죽음 없음'이 거기에 있다. 그대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믿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아는 것이야말로 도움이 된다.
그대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들을 경험하지 않는 한 한낱 생각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생각이나 믿음으로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탄트라 수행이
그대의 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처음에는
육체만이 확실한 사실이다. 그대는 육체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그대가 육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고차원적인 것은 좋지 않다.
잘못하면 관념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육체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대는 그저 육체만 알 뿐이다.
육체를 넘어선 어떤 경험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대가 형이상학자나 신학자에게 간다면 그들은 분명히 영혼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절대적으로 과학적이다.
그것은 그대가 처한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대가 나중에
이를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허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탄트라는 육체에 대해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다. 탄트라는 있는 그대로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존교 지도자들도 육체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원론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두 개의 존재이다. 하나는
육체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이다. 그들에 따르면 육체는 영혼의 것이다.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 이원론이 그대의 마음을 쪼개고 인격을
분열시킨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게 만든다.
모든 분별이 그대를 쪼갠다. 그리고 그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다. 모든 사람이 여러 가지 분별심으로 분열되어 있다.
거기에는 어떤 유기체적 결합토 없고 중심도 없다. 그저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로 군중을 이루고 있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를 나눌 뿐만 아니라 그대의 영혼과 육체까지도 나눈다.
육체는 상체와 하체로 나누어 상체는 좋은 것이고
하체는 우둔한 것,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탄트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탄트라는 섹스조차 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5천 년 동안 탄트라는 섹스를 전적으로 받아들인 유일한
전통이 되어 왔다. 그것은 이 세상을 통틀어 존재하는 유일한
전통이다. 왜인가? 섹스는 바로 그대가 처한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성의 중추에 있다. 그대의 에너지는 섹스 센터에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성장이 시작되어 초월이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그 중심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때 그대는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대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다. 오직
그대가 거부한 그 지점에서만 움직임이 가능한 것이다. 탄트라는
육체를 받아들인다. 섹스를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탄트라의 지혜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변형시킨다고 말한다.
오직 무지만이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독도 약이
될 수 있다. 지혜를 통하면 말이다.
육체는 육체를 초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섹스 에너지는 영적인 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육체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대가 섹스 에너지를 부정한다면 영적인
힘 역시 얻을 수가 없다.
그대는 하나의 육체로 태어났다. 그리고 육체로서 살아왔다.
그대는 육체로서 병들고 육체로서 건강하다. 또한 육체로서 젊고
육체로서 늙는다. 그대의 전생애가 이 육체에 집중되어 있다.
그대는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마저도 육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낸다.
그대가 생애를 통틀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음식과 물과 은신처로서 무엇을 보존하는가?
육체를 보존한다. 그대는 아이를 무엇으로 생산하는가?
육체를 통해서 생산한다. 생애의 99.9%가 이 육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대는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육체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육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대는 육체에 대해서
물은 것이 아니다. 육체는 외형이고 그 내용은 바로 섹스다.
깊이 들어가 보면 육체는 섹스의 상징일 뿐이다.
그래서 섹스에 반대하는 전통들은 육체에 반대한다. 섹스에 반대하지 않는
전통만이 육체를 친근하게 대할 수 있다. 탄트라는
육체에 대해 절대적으로 친근하다. 육체가 성스럽다고 말할 정도이다.
탄트라에서 육체를 비난하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 육체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탄트라에서는 육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육체야말로
신성하고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대는 육체를 초월의 수단으로,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육체와 싸움을 벌인다면 반드시 지고 만다.
그대가 육체와 싸울수록 그대는 점점 병들어 갈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기회를 잃는 것이다. 싸움은 부정적인 츳이나,
탄트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변형을 원한다. 육체와 싸우지 마라.
그럴 필요가 없다. 그대가 수레와 싸워 수레를 파괴하면 할수록
그것은 움직이기가 어려워진다.
육체는 아름다운 수레이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롭고 너무나
복잡미묘하다. 그것을 사용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그것을 도와주라.
그대가 그것에 대항하는 순간 그대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디를 가려고 하면서 자신의 두 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다. 탄트라는 육체와 그것의 비밀을
알라고 말한다. 그것의 에너지를 알아라. 그 에너지가 어떻게 변형
되는지를 알아라.
예를 들면 육체 속의 기본 에너지인 섹스를 주시하라. 일반적으로
섹스 에너지는 생식에 사용된다. 하나의 육체는 다른 육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 명맥을 이어 간다. 섹스 에너지의 생물학적
효용은 오직 생식일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효용이 있다.
또 다른 창조적 행위가 거기에서 나올 수 있다. 생식은 기본적인
창조 행위이다. 그대는 뭔가를 만들어 낸다. 여자들이
어머니가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훨씬 미묘한 행복이다. 그녀는 뭔가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남자는 결코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여자의 섬세한 속성에서 나오는 창조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성에서 마음의 안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기질이 부족하다. 남자도 창조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이나 발명으로 변형될 뿐 심리적
안정감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이제 심리학자들은 섹스 에너지야말로
모든 창작의 원천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탄트라는
항상 그렇게 말해 왔다. 예를 들어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시인이
시를 지을 때는 섹스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에게는 일부러
브라흐마차리아(독신 수행 )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 그의 섹스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창조적 활동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브라흐마차리아를 강요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오직 수도원에
사는 승려들뿐이다. 그대가 창조적일 때 섹스 에너지가 창조적
행위로 흘러가기 때문에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브라흐마차리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성에 대해서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면,다시 말해서 일부러
브라흐마차리아가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노력이 그대로 하여금
성에 대해 더욱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브라흐마차리아는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억압되고 변태적인 것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그때 섹스는 더 이상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된다.
그것은 매우 좋지 못하다. 마음은 진적으로 미칠고 있다.
그때는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그것을 고칠 수 있다. 
탄트라는 그대가 명상 속으로 들어가면 성욕은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모든 에너지가 더
높은 차원의 중심 속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육체는 많은
에너지 차크라(center)를 갖고 있다. 
섹스는 가장 낮은 차크라(중심 )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인간은
가장 낮은 중심에서 존재한다. 에너지가 상승될수록 더욱 높은
차크라가 열린다. 같은 에너지가 심장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사랑이 된다.
그것이 더 높이 올라가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펼쳐진다.
같은 에너지가 그대의 가장 높은 중심, 즉 '·사하스라르
(sahasrar)차크라'라고 불리는 정수리의 한 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대의 몸에서 섹스는 가장 낮고, 사하스라르는 가장 높다.
이 두 차크라 사이에서 에너지는 움직인다. 그것은 섹스 차크라에서
방출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하나의 육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약 사하스라르에서 방출되면 그대는 하나의
정신을 탄생시킨다.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재생산이 아니다. 영적인 재생산이며 그대는 거듭 태어난다.
그대는 '드위지(dwij)'가 되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거듭
태어난 사람을 '드위지' 라고 부른다.
탄트라는 어떤 비판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변형을 위한 비밀스런
방편들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탄트라가
그토록 육체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다. 육체는 그대의 출발점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됐는가?


환상에서 실재로

꿈을 꿈이라고 의식할 때 그대의 존재는
서서히 깨어나긴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환상에서 실재로

53.
오, 연꽃의 눈이여, 감촉의 달콤함이여,
노래하고 바라보며 맛볼 때마다 그데가 존재함을 자각하라.
그리고 언제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라.

54.
만족감이 발견되는 곳마다
어떤 행위 속에서든지 이것을 실현하라.

55.
잔이 들려는 순간, 아직 잠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외부를 향한 주의력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거기에서 존재가 드러난다.

56.
환영이 그대를 현혹시키고
찬란한 색채들이 그대를 둘러쌀 때,
분별되는 것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문명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거짓스러워지는 훈련이다. 그리고
탄트라는 그 반대 과정이다. 그대 자신을 거짓에 물들지 않게 한다.
만약 그대가 이미 거짓스러워졌다면 탄트라는 그대 속에 숨겨져 있는
실체를 만질 수 있도록, 그것과 재접촉할 수 있도록
다시 진실해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계속해서 거짓스러워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번 이 거짓스런 과정을 이해하고 나면 그 즉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돌연변이이다. 
인간은 분리되지 않은 채로 태어난다. 그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구분도 없다. 오직 하나의 인격체로서
통일되어 있다. 인간은 마음과 육체 두 가지 다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틀린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 육체, 혹은 육체적 정신이다.
마음과 육체는 인간존재의 양면이다. 이것은서로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도 양극성이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교양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분리가 일어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나가 아니라 마음과 육체 두 가지로 분리되어 있다고
교육받는다. 물론 그 중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자신을 선택해서 동일시한다. 그리고
사념의 흐름이, 즉 마음이 자신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사념의 흐름이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다. 사념 없이도 그대가 존재할 수
있깃 때문에 그것은 중심이 아니다. 한 번 그대가 사념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사념은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그대는 거기에서 아무런
사념 없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더라도
그대는 존재한다. 따라서 깊은 잠에 떨어지면 그대는 거기에
아무런 사념 없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념은 그저 하나의
주변일 뿐이다. 그대의 존재는 주변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곳에 있다. 사념이 흘러가는 곳보다더 깊은 곳에 말이다.
하지만 그대는 계속 마음과 육체 두 가지라고 세뇌당해 왔다.
그리고 육체를 소유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주인이 되며
육체는 그것의 노예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마음의 편에 서서
계속 육체와 투쟁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틈바구니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가 문제를 일으킨다. 모든 고뇌와
번민이 바로 그 틈바구니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대의 존재는 그대의 육체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대의 육체는 존재계와 분리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육체는 존재계의 일부이다. 그래서 그대의 육체 역시 완벽한 우주이다.
그것은 유한한 것이 아니며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하다. 하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지켜보지 않았고
그래서 모르고 있다. 단지 육체는 어디에선가 끝이 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대 육체의 끝은 어디인가? 한번 생각해 보라.
태양은 지구로부터 엄청난 거리에 있다. 하지만 그 태양이 빛을
잃는다면 그대는 그 즉시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태양 광선이
지구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육체도 살 수 없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이지만, 그대는 태양 없이는 존재할수 없다.
태양과 그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은 그대의 육체와 별개라고 볼 수 없다. 그대는 태양의 연장이며
그대의 연장이 곧 태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대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꽃봉오리가 서서히
개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꽃은
다시 잎을 닫는다. 그것은 일몰과 관계되어 있다. 그대의 육체는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섭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그대는 지금 호흡하고 있다.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그대는 그 공기를 들이쉬고 내쉰다.
만약 단 한순간이라도 공기가 없다면 그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대의 호흡은 곧 그대의 삶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끝나는 부분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은 어디인가?
거기에 한계가 있는가? 아니,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 우주가
한계가 없다면 그대 역시 한계가 없는 것이다. 전 우주가 그대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대의 육체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우주이며 그대는 그 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역시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대의 마음도 육체의 일부분이다. 육체의 한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는 행위는 파괴적이라 할 수 있다. 분별과 함께
그대는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한다. 그대는 분별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생각한다. 그대는 자신의 사념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생각 없이 생각한다. 그때 그대는 마치 자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은 진실의 엄청난 외곡이며
완전히 뒤바뀐 생각, 즉 전도몽상(顚倒夢想) 이다.
그대는 육체를 소유할 수 없다. 육체 역시 그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대와 육체는 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다. 그대의 존재는 하나다.
양극성이 깊은 조화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양극성은 서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하나를 이루고 있다. 또한 그때마다
양극성이 서로 대칭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활력을 준다. 그것은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만약 그대 속에 대칭되는 양극이 없다면, 그래서 오직 일방적이라면
그대는 둔감해질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 다름없다. 마음과
육체, 이 대칭적인 극성이 그대에게 삶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반대적이면서 동시에 보충적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다.
같은 에너지가 양쪽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사념의 흐름을 자신과 동일시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머리에 중심을
두기 시작한다. 만약 그대의 다리가 잘린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잘렸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내 다리가 잘렸다'
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머리가 잘리면 그대 자신이
잘린 것이다. 그대는 살해당한 것이 된다.
눈을 감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보면 그대는 즉시 자신이
머리 속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대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 생명으로 들어가는 순간,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순간 거기에는 머리가 없다.
사실 그대는 어디에도 없다. 그대가 있는 곳을 몸 속에서
집어낼 수 없다. 만약 집어낸다면 그 순간 그대는 전체를 놓칠 것이다.
그대는 모든 곳에 있다. 그대의 생명은 그대 육체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펼쳐져 있다. 그것을 따라가자면 우주 끝까지 가야 한다.
'나는 내 마음이다'라는 동일시와 함께 모든 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 자신도 거짓이 된다. 그대의 동일시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동일시는 깨져야 한다. 탄트라의 방편들은
이 동일시를 깨기 위한 것이다. 탄트라의 노력은 그대의 머리를
없애 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의 마음과
동일시하면서 거짓이 되는가? 그것은 마음이란 것이 부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말의 연속적 흐름으로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사랑은 아니다.
'신'이라고 하는 단어 역시 신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때 사랑 자체는 '사랑' 이라는 말보다 덜
중요해진다. 신은 '신' 이라는 말보다 덜 중요해진다. 적어도 마음에게는 그렇다.
그대가 그 말들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대는 더욱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대는 말 때문에 실체를
놓치게 될 것이다. 실체는 바로 존재계다.
마음 위에서 사는 것은 거을 위에서 사는 것과 같다. 바람이 없는 날
밤에 호수 가에 한번 가보라. 그때 호수는 마치 거대한 거울처럼 보인다.
그대는 호수 속에서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달은 거짓이다. 단지 빛의 반사물일 뿐이다. 물론 반사물도
실체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체는 아니다. 마음 역시 이와 같은
현상이다. 그것은 반사물일 뿐이다. 그대가 그 반사물에 빠진다면
실체는 완전히 놓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물결이 일어도
마음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실체는
혼란스러워질 수 없다. 우리가 마음 위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는
평안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탄트라는 내려오라고 말한다. 그대의 머리 위에서 내려오라고 말한다.
반사물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실체를 향해 가라.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든 방편들이 바로 이것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하면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실체로 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 이제 방편으로 들어가자.

53.
오, 연꽃의 눈을 가진 이여, 감촉의 달콤함이여,
노래하고 바라보며 맛볼 때마다 그대가 존재함을 자각하라.
그리고 언제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다. 자기 인식이 없다. 그대는 식사를 하고 있고,
목욕을 하고 있고, 산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 행위 속에서
자신이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면서 막상 그대 자신은 보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다. 나무, 자동차, 집 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대의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왜인가?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모든 것을 반사할 수 있지만
그대 자신은 반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자각한다면 그때는 이미 마음을 초월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는 그대의 마음에 반사되지 않는다. 그대는 마음이라는
거울 뒤에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있는 것은 뭐든지 거울에
반사되지만 거을 뒤에 있는 것은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대의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눈동자 자체는 볼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의 마음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마음 뒤에 가려진
그대 자신은 마음의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는
언제나 마음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방편은 노래하고 바라보고 맛보는 등의 어떤 행위를 하는 동안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지
않고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의 흐름, 에너지, 생명력이 있음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다.
구제프는 서양에서 '자기 인식 (self -remembering)'을 기본
방편으로 사용했다. 그 방편은 바로 이 탄트라 경구에서 나온 것이다.
구제프의 모든 시스템이 바로 이 방편에 기초하고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기억하는 것, 자기를 인식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어려운 방편이다.
그대는 계속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3,4초만 지나도 그대는 자신을
인식하는 걸 잊게 된다. 그대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옳지, 나는 지금 자신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그대는 잘못하고 있다. 이 생각은 '자기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 속에서는 어떤 생각도 있을 수 없다.
그대는 완전히 텅 빈 상태가 된다. 자기 인식은 사념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고 되뇌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대는 놓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뇌이는 것은 마음의 일이다.
'나는 존재한다' 는 것을 말로 하지 말고 느껴라. 그것을 마음속으로
졸이지 마라.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지 느끼기만 하라.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그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대가 계속
노력한다면 이루어질 것이다. 걸어가는 동안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껴라. 이것은 생각이 아니다. 내가 그대의 손이나 머리를
만질 때 그저 그 감촉을 느끼는 것처럼 그대의 의식은 두 개의
화살로 나뉘어질 것이다.
그대는 숲속을 거닐고 있다. 나무들이 거기에 있다. 미풍이 불어 오고
태양이 떠오른다. 이것은 그대를 둘러싼 세상이다.
그대는 그것을 인식한다. 잠시 동안만 기다려 보라. 갑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생각이 아니고 느낌으로 말이다. 그것을
그대에게 일별을 준다. 그 일별은 어떤 LSD도 그대에게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일별은 실체에서 얻는 일별이다. 단 한순간에
그대는 존재의 중심에 던져진다. 그대는 거울 뒤에 있다. 그대는 반
사의 세계를 초월했다. 그대는 실존이 되었다. 그리고 이 방편은
언제라도 수련할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시간대나 장소가 필요치 않다.
'나는 시간이 없다'라고 변명할 수 없다. 식사할 때에도,
목욕할 때에도, 걷거나 의자에 앉아 있을 때 그 언제라도 좋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는 갑작스레 자신의 존재를 상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 존재에 대한
일별이 계속 일어나도록 노력하라.
그것은 어려울 것이다. 한순간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다음 순간 그대는 멀어져 간다. 어떤 생각이, 어떤 반사물이
그대에게 들어올 것이다. 그대는 벌써 그 정보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해지지 마라.
그대는 반사물들과 함께 수많은 생을 살아왔다. 그것은 마치 로봇의 작동
원리처럼 미리 입력된 것이다.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우리는
반사물에 던져진다. 그러나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대가 일별을 갖는다면
처음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충분한가? 그대는 언제나
한순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속에서 일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오직 노력만이 필요하다.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대에게는 오직 한순간만이 주어진다. 그러니 다음 순간까지
걱정하지 마라. 그대가 이 순간에 자각할 수 있다면 그대는 삶
전체를 자각할 수 있다. 이제는 오직 노력만이 필요하다. 이것은
종일토록 행해질 수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존재를
상기하라.
경전에서는 그대가 존재함을 자각하라고 말한다. 그대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이름은 람이다. 혹은 예수다'라고 계속
외울 것인가? 아니면 그대가 속한 가족이나 족보, 혹은 나라
아니면 종교, 카스트 계급인가 신조 따위를 생각할 것인가? 그대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니면 기독교인인지를 상기할 것인가.
도대체 그대는 무엇을 상기하겠는가? 경전에서는 단지 '그대가
존재함을' 이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어떤 이름도, 어떤 나라도,
어떤 족보도 필요 없다. 오직 거기에 단순한 존재만이 있게 하라.
그대가 누구인지 자신에게 말하지 마라.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고 자신에게 대답하지 마라.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단순히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상기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항상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가진 어떤 것에 대해서 상기해 왔다. 그대는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그대의 이름,종교,국가 등등의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지만 그대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실존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이것을 연습할 수 있다. 편안한 의자나 나무 밑에
 앉아서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 뒤에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껴보라. 기독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영국인도 독일인도
아닌 그저 그대가 존재한다. 바로 그 느낌을 가져라. 그때
경전에서 말하는 것을 실천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그대는 생명의 흐름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모든 거짓은 죽을 것이다. 오직 실체만이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거짓만이 죽기 때문이다.
실체가 아닌 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비실체에 집착해 왔다. 환상과 동일시해 왔다. 힌두교도로서의
그대도 죽을 것이다. 람이나 크리슈나로서의 그대도 죽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나 무신론자나 혹은 유신론자로서의 그대 역시 죽을 것이다.
이름이나 모양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죽는다.
그대가 이름이나 모양에 집착하면 죽음은 확실히 그대에게 공포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실존적인 것, 즉 그대의 근본에게는
죽음이 없다. 한번 모양과 이름이 잊혀지면 그대는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을 내면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영원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대가 존재함을 자각하라. 그리고 언제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라."
이 방편은 가장 유력한 도움을 주는 방편 중의 하나로서 많은
스승과 마스터들이 사용해 왔다. 붓다 역시 그것을 사용했고,
마하비라나 예수도 그것을 사용했다. 현대에 와서는 구제프가 그것을
사용했다. 다른 모든 방편 중에서도 이 방편은 가장 잠재력이
강한 것 중의 하나다. 시도해 보라. 그러나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몇 달이 지나갈 것이다.
오스펜스키는 구제프와 함께 있으면서 3개월 동안 지독하게 노력했다.
그는 자기 인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별이라도 갖기를 원했다.
오스펜스키는 골방에 갖혀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 했는데
그것은 자기 존재를 인식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30명이
이 수련에 들어갔는데 처음 일주일이 지나자 27명이 도망을 갔다.
오직 세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만을 하려고 애썼다.
중도에 그만둔 27명은 자기가 미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달아났다. 그들은 다시는 구제프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왜인가? 사실 우리는 지금 미쳐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친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다 미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미친 것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대가 진짜 정상적인 상태를 만나게 되면 그때는 그것이
미친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세 사람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 세 명 중의 하나가
바로 P. D. 오스펜스키이다. 3개월 동안 그들은 골방 속에서 그
수련을 해냈다. 처음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들은 단순히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일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가자
거기에서 '나는'이 떨어져 나갔다. 그저 '존재한다'라는 일별을
갖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한다' 에서 그 '나는' 마저도
하나의 명목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존재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 세 달이 지났을 때 그들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것 역시 하나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진정으로 그대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
그대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 없다. 만약 그렇게
계속 묻는다면 그대의 마음은 수만 가지 답을 주워댈 것이다.
그대는 계속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반복해서 묻지만 그때 떠오르는 대답들은 모두 거짓일 뿐이다.
진정한 한 지점에 이르기 전에 그 물음은 대답되어질 수 없다.
모든 대답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질문 자체도 떨어져 나가서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구제프는 이 한 가지 구석을 들이 팠다. 그대가 존재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 말이다. 그리고 라마나 마하리쉬는 다른 구석을 팠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묻는 것으로 명상을 삼은 것이다.
그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대답도 믿어서는 안된다.
마음은 '도대체 무슨 넌센스를 묻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자네는 남자 혹은 여자다. 자네는 이러 저러하다. 자네는
교육을 받았든지 안받았든지 부자든지 가난뱅이다. 자네는 이런 사람이다."
마음은 많은 대답들을 주워댈 테지만 중간에서 물음을 그치지
말고 계속 물어가라. 그 대답들은 모두 그대의 비실재적인 부분이다.
그것들은 모두 말에서 나온 것들이며 이 사회의 조건에서
생긴 것이다. 계속 물어가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살은 점점
깊이 관통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어떤 답도 더 이상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때가 제대로 되는 순간이다. 이제 그대는 해답 가까이에 있다.
어떤 대답도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는 진짜로 해답 가까이 온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직 허공만이 남아서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대의 모든 질문은 공허하며
어리석게 보인다. 그대는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그대에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갑자기 그대의 질문조차
뚝 끊어진다. 질문은 마음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사라지면 질문 역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존재한다.
이 방편을 시도해 보라. 거기에 모든 가능성이 있다. 그대가
지속적으로 이 방편을 수련한다면 그대는 실체에 대한 일별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실체는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이다. 거기에 죽음은 없다.
자, 두번째 방편으로 넘어가자.

54.
만족감이 발견되는 곳마다 그 어떤 행위 속에서든지 이것을
실현하라.

그대가 목마를 때 그대는 물을 마신다. 거기에서 미묘한 만족감이
얻어진다. 물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목마름도 잊어버려라.
오직 미묘한 만족감만을 느끼며 그것에 머물러라. 그것으로
가득 차라.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항상 불만족한 상태이다. 마음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불만족스럽다면 그대는 그 불만족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대가 목마를 때 그대는 그것을 느긴다. 그대는 목마름으로
가득 차게 된다. 처음에는 목에서 갈증을 느끼지만 만약
그 목마름이 그대의 온몸을 가득 채운다면 어떤 순간에 그대는
목마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라.
그대는 목마르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만약 그대가 사막 한가운데 있다면
그리고 거기서 물을 얻을 희망이 전혀 없다면 그대가
목마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대의 몸이 목마르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불만족이 느껴진다. 불행이 느껴진다. 고통이 느껴진다.
그대가 고통을 받을 때마다 그대 존재 자체가 고통스러워진다.
이것이 바로 삶 전체가 지옥으로 바뀌는 이유다. 그대는 긍정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대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느긴다. 삶은 그렇게
불행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불행이란 우리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붓다는 지금 여기에서
즐거워한다. 바로 이 삶 속에서 말이다. 크리슈나는 춤을 추며 피리를 불었다.
바로 이 삶 속의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크리슈나는 춤을 추고 있다. 삶은 불행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행복과 불행은 전부 우리의 해석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며 접근 방식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마음 때문이다.
이 점을 기억하라.그대 자신의 삶을 세밀히 분석해 보라.
그대는 얼마나 많은 축복의 순간들을 경험했는가? 얼마나 많은 만족과
행복의 일별들을 대했는가? 물론 그대는 몇 번의 그런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고통이나 불행을 경험한 순간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대는 그 순간들을 차곡차곡 축적해 놓았다.
그리하여 이 삶을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다. 아무도 그대를 지옥으로 밀어넣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부정적인 태도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기본이 되어 버렸다.
그대가 마음속에 있을 때 그대는 더욱 부정적으로 된다.
그리고 부정적인 일들이 더욱 축적된다. 같은 종류들끼리 모이게 마련이다.
그대는 수많은 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그대의 부정적인 접근 방식 때문에 그대는 모든 것을 놓쳐 버렸다.
이 방편은 그대에게 긍정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일상적인 마음과
그 과정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것이다. 만족감이 발견될 때마다
그것을 실현시켜라. 그것을 느끼고 그것과 하나가 되라.
이 말을 그저 지나가는 명언의 한 구절 쯤으로 취급하지 마라.
만족감은 더 위대한 긍정적 실존의 일별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창문이다. 만약 그대가 고통을 그대의 삶이라고
동일시하게 될 때 그대는 고통의 창문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오직 지옥을 향해서만 창문을 열어 놓고 있다.
만약 그대가 만족의 순간, 행복의 순간, 환희의 순간과 하나가 된다면
그대는 다른 창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존재계는 동일하다.
단지 그대의 창문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만족강이 발견될 때마다 그것이 어떤 행위 속에서라도
그것을 실현하라. 어디에서든지  거기에 조건은 없다. 그대는
친구를 본다. 그대는 즐거움을 느긴다. 그대는 연인을 만난다.
그대는 행복을 느낀다. 이것을 실현하라. 실체화시켜라. 그 순간에
실제로 행복해 하라. 행복을 하나의 창문으로 만들어라. 그때 그대는
마음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축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긍정적인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같은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일 것이다.
선의 스승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똑같다. 그러나 마음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아무것도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여여 (如如)하지만 세상을 보는 내가
여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여여한 것이 없다."
그대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세상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큰 집, 더 비싼 자동차
더 아름다운 아내나 남편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불행한
삶은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집도 여전히 작다고 느낀다.
언제나 불만스러운 그대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 삶의 태도,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환경을 아무리
밖워봐야 헛일이다. 오두막에서 궁전으로 이사해도 여전히
그대는 불행하다. 오두막에서 불행했다면 말이다. 
그대는 언제나 불행을 달고 다닌다. 그대가 어디로 가든지
불행은 그대와 함께 있다. 그래서 환경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단지 겉모습이 바뀌었을 뿐이다. 오직 인간 의식의 개혁만이
진정한 변화다. 그대의 마음이 부정에서 긍절으로 바뀔 때만
이 모든 것이 바뀐다. 만약 그데의 초점이 불행에 맞춰진다면
그대는 지옥에서 살게된다. 그대가 행복에 초점을 맞춘다면 바로
그 지옥이 천국으로 변할 것이다. 이를 실현하라. 이것이야말로
그대 삶의 질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양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 얼마나 더 부자가
되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질이 아니라 양 말이다. 그대는 두 채의 집과
두 대의 자동차, 아니 그 이상을 소유할 수 있다. 은행 잔고를
더 많이 늘릴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질이 여전하다면 사물의
풍요로움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진정한 풍요로움은 그대 마음의
질에 있다. 가난한 사람조차 질에 있어서만큼은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부자라도 가난한 사람처럼 허덕일 수 있다.
이것은 언제나 그래왔다. 양에 집착하는 한 그는 자신의 내면에 다른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질의 차원을 말이다.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할 때에만 차원이 바뀔 것이다.
내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이것을 생각하라. 그대가 어떤 것이
아름답고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라.
하루 24시간 동안에는 그런 순간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것을
노치지 말고 인식하라. 천국이 그대 가까이 있는순간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지옥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 순간들을
놓치고 만다. 태양이 떠오르고 꽃잎이 열리며 새들이 노래하고
미풍이 나무 사이로 불어온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순박한 눈동자로 그대를 바라본다. 그때 그대 속에
섬세한 행복의 느낌이 들어온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미소를 지을 때
그대는 행복을 느긴다. 
이것은 축적된다. 그대가 아침부터 시작한다면 저녁 때에는
달을 향해, 별을 향해, 고요한 어둠을 향해 마음이 열린다. 24시간
동안만 실험적으로 해보라. 한번 그대가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그대를 다른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외냐하면 그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붓다에 관한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부루나가섭이라는 붓다의 제자가
여행을 떠나면서 붓다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디로 가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라."
그가 말했다.
"저는 멀리 수카 지방으로 가고 싶습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매우 잔인하고 탐욕적이며 폭력을 좋아한다.
아무도 그들에게 비폭력과 자비를 가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부디 그대의 결정을 바꾸기 원한다."
그러나 부루나가섭은 말했다.
"제가 그 곳에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무도 그 곳에 가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는 가야 합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러면 먼저 내가 그대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겠다. 만약 그
지방 사람들이 그대를 모욕하고 멸시하면 그대는 어떻게 느끼겠는가?"
부루나가섭은 말했다.
"나는 그들이 단지 욕만 한다면 매우 선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나를 때리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나를
때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을 하겠다. 만약 그들이 그대를 때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부루나가섭이 말했다.
"그들은 매우 선한 사람이라고 느끼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좋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다. 만약 그들이 그대를 죽인다면
죽어가는 순간에 그대는 어떻게 느끼겠는가?"
부루나가섭이 또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그들은 나를 많은 실수가 일어나는 삶 속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가 말했다.
"그대는 이제 어디로 가든지 좋다. 이 세상은 그 어느 곳에서나
그대에게 극락이 될 것이다. 이제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마음대로 가라."
이런 마음 자세라면 이 세상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
부정적인 마음은 모든 것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오직 잘못된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탄트라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만족감이 발견되는 곳마다 그 어떤 행위 속에서든지
실현하라."
이것은 매우 섬세한 과정이다. 그러나 매우 달콤하다.
이것은 그대가 그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달콤함은 더할 것이다.
그대는 새로운 향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오직 아름답게 바라보라.
추하다는 생각은 잊어버려라. 행복한 순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불행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그때는 불행의 순간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행복에 관해 초점을 맞추면 조만간 불행은
사라진다. 광정적인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한다.
자, 다음 방편이다.

55.
잠이 들려는 순간,
아직 잠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외부를 향한 주의력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거기에서 존재가 드러난다.

그대의 의식에는 몇 개의 전환점이 있다. 이 전환점에서 그대는
다른 때보다 그대의 중심에 더 가까워진다. 그대가 운전 중
기어를 바꿀 때 언제나 중립상태를 거치게 된다. 아침에 그대가
잠에서 깨어날 때 그대는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인 중립
상태를 거친다. 그때는 비몽사몽의 상태 속에서 그대의 의식은
메커너즘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메커니즘에서 다른 메커니즘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두 메커니즘 사이에는 메커니즘이 없는 상태이다.
거기에는 틈이 있다. 그 틈을 통해서 그대는 존재의
일별을 가질 수 있다.
똑같은 일이 밤에 잠들기 직전에 일어난다. 그대는 깨어 있을 때의
메커니즘에서 잠잘 때의 메커니즘으로 옮겨 가는 동안 또 한 번의
틈이 생겨난다. 그 틈을 통해서 그대가 자신을 인식한다면
그대는 존재의 일별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하는가? 먼저 그대는 잠을 자려고 누워라.
그리고 방 안을 어둡게 한 뒤에 눈을 감아라.그리고 기다려라. 잠이
오고 있다. 단지 기다려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대의 몸은 점점 이완된다.
점점 무거워진다. 그것을 느껴라. 수면은 그 자체의
메커니즘이 있다. 그것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대의 깨어 있는
의식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매우 미묘하다.
마치 원자처렁 미세하다. 만약 그대가 놓친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다. 그리고 매우
작은 틈이다. 그 틈을 기준으로 각성 상태에서 수면으로 바귄다.
그러므로 단지 기다려라. 민감하게 지켜보라. 한순간도 놓치지 마라.
이것은 적어도 3개월은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대는
어느 날엔가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일별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마라. 그대는 지금
당장에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대는 오늘 밤 그것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이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몇 달이 걸릴 것이다.
보통 매일 밤 훈련을 하면 3개월 정도 걸린다. 매일 밤 그대는
그런 틈을 지나가지만 그대가 그만큼 깨어 있지 못하기에 그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의식과 그 틈이 만나는 것도
계획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든 상태도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매우 기이한 현상이다. 그대는 그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아는 것은 깨어 있는 것 아니면 잠자는 것 두 가지 뿐이다.
그대는 제3의 지점이 그대의 존재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 처음의 충격 때문에 겁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새롭고 미지의 경험이 다가올 때는 항상
공포스럽기 마련이다. 사실 이 지점은 그대가 죽은 것도 아니며
산 것도 아닌 상태이다. 이것은 하나의 심연이다.
두 개의 메커니즘은 두 언덕과 같다. 잠이 들 때, 혹은 잠에서
깨어날 때 그대는 하나의 언덕에서 또 다른 언덕으로 건너뛴다.
그러나 중간에 머무른다면 그대는 언덕 사이에 있는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심연은 바닥이 없다. 한없이 깊어서 끝없이 떨어진다.
계속 떨어진다. 수피들은 이 방편을 사용해 왔다. 그들은 마지막에
이 방편을 가르쳐 주는데 그 전에 먼저 안전을 위해 다른
훈련들을 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눈을 감고 자신이 깊은
우물 속으로 한없이 떨어진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 우물은 어둡고
바닥이 없다. 깊은 우물 속으로 한없이 떨어진다고 상상해 보라.
떨어지고 떨어지고 영원히 떨어진다. 거기에 끝이 없다.
그야말로 무저갱 (無情坑) 이다. 그대는 바닥에 도달할 수 없다. 이제
그 떨어짐은 어디에서도 멈출 수 없다. 만약 멈추려면 눈을 뜨고
상상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수피들의 수행체계에서 이 우물 낙하는 위의 방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훈련되는 과정이다. 그것이 좋다. 그대가 먼저 그것을
훈련하면 그대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침묵이 있다. 그대가 우물 속으로 더 깊이 떨어질수록 더 고요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이 세상은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간다. 그대는 멀리 멀리 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침묵은 어둠과
함께 커진다. 그리고 바닥 없는 우물 속으로 계속 떨어져라.
공포가 그대를 엄습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이 상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훈련을 통해서 그대는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때 그대는 각성 상태와 수면 상태의 두 언덕 사이에 있는
틈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심연도 바닥이 없다. 
붓다는 이 심연을 '쑤냐(空)'라고 불렀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알고 나면 그대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 낮에
의식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별을 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틈을 만나려면 수면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이 방편을 하루에
두 번 수련할 기회가 있다. 아침에 깨어날 때와 저녁에 잠들 때 말이다.
"잠이 들려는 순간, 아직 잠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외부를 향한
주의력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거기에서 존재가 드러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대의 진짜 존재를 말이다.
우리가 낮에 정신이 멀정할 동안에도 사실 우리는 거짓이다.
그대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지을 때 차라리 더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그대의 눈물 역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것은
하나의 가장일 수도 있고 연극일 수도 있다. 그대의 미소 역시 거짓이다.
관상학을 연구한 사람이 그대를 보면 그대의 미소는 가식적인
미소라고 말할 것이다. 그 미소 속에는 뿌리가 없다. 단지
그대의 입가에서만 잠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 미소는
내면에서 외부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미소는 억지 미소이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모두가 거짓이다.
그대는 자신을 아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필요도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대는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 거짓된 넌센스들을 계속 달고 다니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거의 자동적이다. 이 거짓은 그대가 깨어
있는 낮에도 계속떤다. 그리고 잠든 시간에도 계속된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그대의 꿈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이다.
그대는 꿈속에서조차 놀란다. 그대는 꿈속에서 두려워하고
그래서 상징을 만든다.
이제 정신분석가들은 그대의 꿈을 분석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큰 사업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신의 꿈을
분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꿈들은 상징적이다. 그것들은 현실이 아니다.
언제나 비유로 뭔가를 말한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싶다 해도 꿈에서조차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그대는 어머니와 닮은 어떤 다른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그 꿈은 따로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꿈속에서 그대는 홀로 있고 여전히 세상과 사회를 두려워하고 있다.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대는 왜 어머니를 죽이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큰 죄악이라고
그냥 배웠을 따름이다. 어머니에게 해를 끼치는 것조차
죄악이라고 말이다. 어머니는 그대를 낳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다. 모든 세상 모든 사회에서 이 사실만은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그러나 왜 이런 가치관이 생겨났을까?깊이 들어가면 모두가
어머니의 필요성에 대해 반대하는 가능성만 거기에 있다. 어머니는
그대를 낳았을 뿐 아니라 그대를 거짓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대를 가식적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대가
어떠한 인간이든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만들었다.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면 말이다. 만약 그대가 지옥에 있다면 그녀 역시
그  속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불행하다면
그대의 어머니는 그 불행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낳았고 길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대를 실체로부터
끓어내려 퍼짓스럽게 만들었다. 첫번째 거짓이 그대왁 그대의
어머니 사이에 생겨났다. 첫번째 거짓말이 그대와 어머니 사이에
말해졌다. 첫번째 거짓말이 말이다. 
그대가 어릴 때는 어머니가 보여주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그대에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만약 어린아이가 웃는다면 어머니는
그에게 더 사랑을 해쭈고 안아주며 젖을 줄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정치이다. 그는 정치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가 울거나 웃지 않으면
어머니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웃음으로 그의 어머니를 설득시킬 수 있다. 그래서 거짓말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가 존재계 속으로 나온 것이다.
이제 그는 거짓말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그와 그의 어머니와의
환계 속에서 배운 것이며 그것이 이 세상과 맺은 첫번째 관계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불행을, 지옥을, 혼란을 알기 시작할 때
어머니의 존재가 그 어딘가에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에겐 어머니께 원망을 느낄 모든 가능성이 있다. 모든 문명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꿈조차,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지금 그대가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그대의 꿈 역시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적일 뿐 실체가 아니다. 그대는 너무나 거짓투성이인 까닭에
꿈조차 진실하게 꿀 수 없다. 
우리는 두 가지 가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대가 잠들었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거짓 얼굴 사이에 조그만 문이 있다. 간격이 있다. 이
간격 속에서 그대는 자신의 본래 얼굴에 대한 일별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사회를 통하거나 그대 어머니를 통한 것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통한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분별도 없다. 오직 진실만이 있다. 거짓은 거기에
있을 수 없다. 그대는 그 얼굴에 대한 일별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두 개의 거짓 메커니즘사이에 있는 순박한 얼굴이다. 
보통 우리는 꿈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성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깨어 있는 동안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나 정신분석자들은
그대의 꿈에 더 신경을 쓴다. 그대가 각성해 있는 상태에서 하는 말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다. 낮에는 그대가 엄청난 거짓말장이가
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만이 뭔가를 잡을수 있다. 잠들었을 때는
꾸며대는 정도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에
가까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신 승려가 꿈속에서만큼은
성적으로 변한다. 만약에 그대가 독신 수행자라고 하면
깨어 있는 시간대에는 자신의 성을 억압한다. 그때 억압된 성은
꿈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해서 그대의 꿈은 성적으로 변한다.
꿈이 성적이지 않은 독신 승려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적인 꿈을 꾸지 않는 범죄자들은 간혹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성적인 요소를 행동으로 분출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인치고 성적인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난봉꾼은 아마 성적인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성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치고 그런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억압한 것이
꿈으로 다시 소생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들은 그대의 낮 시간대 생활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 생활이 전적으로 거짓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실한 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오직 꿈속에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꿈 역시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깨어
있을 때보다 좀더 진실에 가까울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키려는
방비가 낮 시간대보다 허술해지기 때문이다. 판단이나 해석을
내리는 것이 잠들어 있다. 그래서 억압된 정보는 그 자신을
표현한다. 물론 상징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상징은 분석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그 상징이 동일하다. 그대가 낮에는 다른 언어를
말할지도 모르지만 꿈속에서 하는 말은 다른 사람과
똑같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꿈의 언어는 같은 것이다. 만약
섹스를 억압했다면 그때는 똑같은 상징이나 그와 유사한 것이 나타날 것이다.
꿈의 언어는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꿈에서는 그것들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했고
융 역시 다르게 해석했다. 아들러 역시 제나름대로의
해석 방식을 갗고 있다. 만약 그대가 백 명의 정신분석가에게
그대의 꿈을 의뢰한다면 백 가지 해석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그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백 가지 해석이 나오니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말한다. 깨어 있퍼나 잠을 자거나 그대의 진실은
가려져 있다고.오직 그 사이에만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깨어 있는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꿈을 꾸거나 잠든
상태에 대해서도 집중하지 마라.오직 그 사이에 있는틈에 대해서만 집중하라.
그 틈을 주시하라. 하나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사이에 일별이 일어난다. 한 번 그대가 그 틈을 잡아낼 수 있으면
그대는 그것을 통달할 수 있다. 그때 존재의 다른
차원이 열린다. 진짜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 이제 오늘의 마지막 방편으로 넘어가자.

56.
환영이 그대를 현혹시키고,
찬란한 색채들이 그대를 둘러쌀 때 분별되는 것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매우 희귀한 방편이다. 이 방편은 여러 스승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인도의 가장 위대한 교사 샹카라
(shankara)가 이것을 사용했다. 그의 모든 철학이 바로 이 방편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마야(Mava)'라는 한마디로
대표될 수 있다. 샹카라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말했다. 그대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환영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감각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내 말을 듣고 있고 나는
내 말을 듣는 그대를 보고 있다. 이것이 전부 환영이다. 꿈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길은 없다. 내가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장자가 하루는 자고 일어나서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제자들이
주위에 모여들어 그를 보고 있다가 결국 물었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꿈 때문이다."
제자들은 갑작스런 그의 대답을 듣고 그만 웃고 말았다.
그들은 재미있어 하며 말했다.
"꿍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당신은 항상 이 세상은 걱정
거리가 많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꿈 때문에 걱정하십니까?"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데 그 꿈 때문에 지금 매우 혼란스럽다.
내가 그 꾼에서 나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물었다.
"그게 뭐 그리 걱정스럽습니까? 별로 이상한 꿈도 아닌데 말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몰라서 그렇다.
나는 지금 혼란에 빠졌다.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렸는지 모르겠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다."
장자는 그후로도 그 물음에 대해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그후부터 평생 궁금해 하면서 살았다.
지금 내가 그대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꿈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감각으로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꿈은 실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꿈을 꿀 때
그것이 실재라고 항상 느끼지 않는가? 꿈이 실재처럼 느껴지는데
왜 실재라고 해서 꿈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샹카라는 말했다. 그대가 대면하고 있는 상황을 감각을 통해서는
그것이 실재인지 비실재인지 알 수 없다고 말이다. 샹카라는
그것을 '마야'라고 불렀다. 마야는 환영을 의미한다. 환영은 비실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환영은 그것이 실재인지 비실재인지
가려낼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 점을 기억하라.
서양의 언어로는 '마야' 란 말을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환영 (illusion)이라고만 번역했다. 그러나 그 말은
비실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점이 틀린 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환영'이란 그것이 실재인지 비실재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세상 전부가 환영이다. 혼란이다. 그대는 결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항상 그대를 혼란스럽게 한다. 마치 꿈과 같다. 그래서 이
방편은 샹카라의 철학을 만들어 내게 된다.
'환영은 그대를 속이고'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 '속이는 것은
환영이다.' 그리고 '찬란한 색채들이 그대를 둘러쌀 때 분별되는
것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된다'에서 환영의 세계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온 세상이 무지개와 같다. 그것은 나타나기는 하지만
즌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와 무지개의 거리가 멀다면
그것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곁에 가까이 가면 그것은
해체되어 버린다.
온 세상이 마치 무지개 색깔과 같다. 모든 것이 멀리 있을 때
그대는 희망에 가득 찬다. 그러나 그대가 가까이 다가갈 때 희망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목표 지점에 이를 때 거기에는
오직 재만 남는다. 그 찬란한 색깔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분별되는 것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된다'의 상태가 된다.
그대의 모든 수학, 그대의 모든 계산 체계, 개념, 철학들이 전부
무기력해진다. 그대가 이 환영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럽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만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나눌 수가 없다.
그대가 계속 분별하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대가 그 자세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단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환영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동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대 자신에게로
향할 것이다. 그때 그대 자신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 
오직 그것만이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라. 나는 밤에 잘 때 나비가 되는 꿈을꿀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진짜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아침에 나는
장자처럼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다 꿈이다. 거기에는
어떤 것이 실재이고 어떤 것이 비실재인지 비교할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장자는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다. 꿈꾸는 자를 말이다.
그는 오직 꿈만 생각했다. 꿈만 서로 비교하면서 꿈꾸는 주체를
놓치고 있다. 장자가 나비가 되었다고 꿈꾸는 자가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된다. 나비는 자신이 장자가 되었다고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관찰자는 누구인가? 누가 잠들어 있고 깨어 있지 않은가?
그대는 내게 비실재이고 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꿈을 꿀 때는 꿈꾸는
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짓스런 꿈이라도 그것을 꾸는
자는 실재로 존재해야 한다. 그 존재 없이 꿈 자체만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꿈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이 방편은꿈을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전부 환영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추구하지 마라.
거기에서 확신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 이제 그 사실은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지난 3세기 동안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이었다. 그리고
샹카라는 단지 철학적이고 시적인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 3세기 동안에 확실했던 과학이 지난20년 동안에는
불확실해져 버렸다. 이제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물질에 관한 한 우리는 불확실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이며 변화의 연속이다.
오직 물질의 겉모양만이 확실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어떤 부분이 물질이고 어떤 부분이 아니라고 정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샹카라도 말했고 탄트라도 항상 말해 왔다. 이 세상은 환영이라고 말이다.
샹카라가 태어나기 전에도 탄트라는 이 방편을 설파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한낱 환영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꿈처럼
생각하라고 말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데는 저절로 의식의 초점을 내면으로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진실을 찾고 싶은 깊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온 세상이 비실재라면 그때는 거기에 어떤 은신처도 없다.
그때 그대의 삶이란 그림자를 좇아 다니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면으로 들어가라.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것이 '나는 존재한다'인 것이다. 만약 세상 전체가 환영이라면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것이 환영이라고 아는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지식도 환영이고 그 지식의 대상도 환영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환영일 수가 없다. 이것만이 유일한 확실성이다.
이것만이 그대가 발디딜 수 있는 유일한 바위다. 
이 방편은 세상을 꿈으로,환상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무지개일 뿐이다. 
이 느낌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대는 자신에게 던져지게 될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확실한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이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과학은 절대적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오직 종교만이 절대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꿈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꿈꾸는 자를 찾는다.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를, 아는 주체를 말이다. 

(질문)

"꿈속에서도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꿈은 영화와 같다. 그리고 세상을 비추는 영사막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의 거울 속에는 세상 모든 것이 비쳐진다. 그리고 그
영상이 바로 꿈이다. 그대는 너무 깊이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과 너무 많은 동일시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잠들었다는 뜻이다. 꿈꾸는
자는 꿈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대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 자기에 대한 무지가 바로 잠이다. 꿈이
완전히 멈추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그대는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필름이 끊어져서 영화가 멈췄을 때
그대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때가 있다. 그때야 시계를 보고
몇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런데 그대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스토리였지 시간이 아니었다. 
그대는 몇 시간이 흐른 것을 느끼지 못하고 슬프거나 우스웠던
것만 느꼈다. 이 얼마나 넌센스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영화였을 뿐이다.
스크린 위에 일어난 빛의 장난일 뿐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야 그대는 자신으로 돌아와서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다면
몇 시간 동안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대는 완전히 주변으로만
움직였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대는 자신과 함께 있지 않았다.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영화는 몇 시간이면 끝나지만 꿈은 한없이 계속된다.
몇 생을 걸쳐서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꿈이 멈추면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가 없다. 그대는 두렵고 당황스럽다.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 꿈은 익숙한 것이며 그대는
그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가(禪家)에서는 특히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갑작스런
깨달음이란 뜻이다. 그리고 112가지 방편 속에는 갇작스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방편들이 몇 개 있다. 단지 그 충격이 너무
커서 그대가 감당해낼지 의문스럽다. 그대는 폭발할지 모른다. 
죽을 수도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꿈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꿈이 없으면 그대가 누구인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이 세상이 값자기 사라진다면 그래서 그대만 홀로 남게 된다면
그대는 너무 충격이 커서 죽을 수도 있다. 모든 꿈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그와 같은 충격이다. 그때 그대의 세계는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세계는 그대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외부적인 사물로 子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눔으로
子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꿈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명심하라. 우리는 어떤 것도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수많은 세계가 있다.
마음의 수만큼 세상의 수도 많다. 각각의 마음은 그 자신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대의??꿈이 사라진다면 그대의 세상도 사라진다. 그대가
꿈 없이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갑작스런 방편이 일반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점진적인
방편들이 주로 사용된다.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이 좋다. 점진적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대는 갑자기 지금
이 순간에 깨달음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 여기에 아무런 장벽도 없다.
사실 장벽이 있을 수가 없다. 그대는 이미 깨달은 상태를 갖고 있다.
이 순간 바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반드시 죽게 된다. 그 상태를 그대는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은 그대에게 너무 큰 것이다. 
그대는 거짓된 꿈에만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대는 실체와
대면할 수 없다. 그것과 만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꿈속에서만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대에게서 더 이상 꿈이 아니다.
현실처럼 존재해 왔다. 
깨달음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절진적인 방법들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절대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 없다. 깨달음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점진적인 방편을 사용하는가?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실체를 대면할 때 생기는 충격을 견디게끔 도와준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체를 현실화시키는 데 그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달지 충격을 견디게끔 그대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그대가 즉각적으로 깨달음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하는 데는
7가지 방편이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충격을 견딜 수 없다.
오랫동안 어두운 곳에 살다가 갑자기 햇빛을 보면 눈이 멀어버리듯이 말이다.
엄청난 축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대는 죽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깊은 잠속에 있다. 어떻게 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꿈속에서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잠에서 깨어나는 데 있어서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꿈속에서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가 단지 하나의 꿈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꿈이라고 생각하라.
밥을 먹을 때도 밥먹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라. 앉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그 무엇을 할 때나 그렇게 생각하라. 우리가 이 세상을
마야라고 부르는 것도 이 떼문이다. 그것은 꿈이며 환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단지 철학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샹카라(Shankara)의 사상이 외국에서는 단지
하나의 철학으로 소개된다. 그 때문에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수많은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다. 서양에서도 버클리 (Berkeiey)같은
철학자들은 이 세상이 하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적인 이론일 뿐이다. 버클리는 하나의 가설로서 그렇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샹카라가 이 세상은 하나의 꿈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는 특별한 명상을 통해 그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역시
하나의 명상이다. 만약 그대가 꿈속에서 ' 이것은 꿈이다'라고
의식할 수 있으려면 먼저 깨어 있을 때부터 그렇게 의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꿈꾸는 동안 그대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없다. 그대는 이것이 실체라고 생각한다.
왜 그대는 꿈속에서 그것이 실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가 의식을 갖고 있는
낮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경향이며 습관이다. 그대에게
깊이 뿌리박힌 관점이다. 깨어 있는 동안 그대가 목욕을 하면
그것은 진짜다. 깨어 있는 동안 그대가 밥을 먹으면 그것도 엮시 진짜다.
깨어 있는 동안 그대가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 그것도 진짜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대가 하는 것은 진짜이며 실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굳어진다. 그런 태도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마음속 깊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대가 밤에 꿈을 꾸는 동안에도 같은 태도가 반복된다.
' 이것은 진짜다' 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꿈속에서도 변함없다.
그래서 먼저 분석을 한 번 해보자. 꿈과 현실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태도는 어딘지 좀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대를 보고 있다.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나는 꿈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그대를 본다. 보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내가 실제로 그대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의 영상이 나의 눈에 비쳤다.
나는 그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의 망막에 맺힌 그대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 영상은 신비한 과정을 통해
변화된다. 과학은 아직 그 과정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영상은 화학적인 변화를 거쳐서 나의 두뇌에 전달된다. 과학은 그것이
머리의 어느 부분이라고 정확하게 집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보는 것은 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눈은 단지
하나의 창문이다. 보는 것은 머리 속에서 일어난다.
눈을 통해 그대의 모습이 비쳐진다. 그대는 하나의 사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체일 수도 있다. 혹은 꿈일 수도 있다. 기억하라.
꿈은 삼차원적 영상이다. 사진은 이차원적이기 때문에 금방
사진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꿈은 삼차원적 영상이다.
거기에 시간까지 관계되면 사차원적 영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마치 실재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그때는 눈이 판단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영상은 화학적인 파동으로 변형된다. 그리고 그 화학적인
파동은 다시 전기적인 파동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두뇌의 어떤
부분으로 간다. 하지만 그 정확한 지점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 속에 있다. 그리고 그대는 항상 나의 외부에 있다.
결코 거기에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그대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나의 꿈속에 나오는 인물인지는 항상
확실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그대가 진짜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또한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이 상황이 그대의
꿈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갖고 있는 사고방식은 잠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래서 밤에 그대가 꿈속에서도 모든 것을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후로는 반대로 생각하라. 이것이 샹카라가 의도했던 것이다.
그대가 지금 보는 모든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어리석으면서도 교활하다. 샹카라가 '이것은 하나의
꿈이다'라고 말하면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렇게 열심히 수행할 필요가 뭐 있는가?"
만약 꿈이라면 먹을 필요도 없다. 왜 계속 먹으면서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먹지 마라! 그러나 그때 기억하라. 그대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꿈이다. 그리고 먹어라. 그러면서 기억하라.
그대가 많이 먹었다고 느낄 때에도 그것은 꿈이다.
샹카라는 그대에게 꿈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꿈을 바꾸려는 노력은 또다시 그 이면에
모든 것이 실체라고 하는 믿뜸이 깔려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 샹카라가 하는 말은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그것은 전부 꿈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꿈이기 때문이다. 낡은
꿈을 바꾸어 새로운 꿈을 러봤자 꿈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라. 3주간 정도만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꿈이라고 되뇌인다면 그것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들 것이다. 이전의 구태의연한 마음의
습관으로 자꾸 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이것은 실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그대는 '이것은
꿈이다'라는 사실을 반복하라. 5,6주 정도 지나면 그대는 꿈속에서
갑자기 그 사실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뚬이다'
이것이 의식으로 꿈을 관통하는 한 가지 길이다. 만약 그대가
꿈속에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때
그대는 낮에도 그 생각을 유지하는 데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저절로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신념을 만드는 것처럼 시작해야 한다. 그대는
계속 '이것은 꿈이다' 라꼬 되뇌이다가 꿈속에서마저 그 사실을
상기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도 잠에서
깨어났다는 느낌이 안들 것이다. 그대는 단지 새로운 꿈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24시간 내내
꿈속에 산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제 내면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때 그대의 의식은 이중적으로 변할 것이다.
항상 실재라고만 생각한 의식이 이제 서서히 꿈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꿈을 느낄 때 꿈꾸는 자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대가 영화를 실재라고 생각할 때는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오면 다시 그대 자신을
인식한다. 그것처럼 그대가 꿈을 꿈이라고 의식할 때 그대의 존재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제 됐는가?

삶을 흐르는 물결처럼

오,사랑스런 그대여,
쾌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말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삶을 흐르는 물결처럼

57.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말라.

58.
이른바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요술경처럼 나타나며
갖가지 그림을 보여준다.
즐거워하라. 그것을 그렇게 보라.

59.
오, 사랑스런 그대여,
쾨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말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60.
욕망들과 그 대상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듯이
자신 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라.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켜라.

본래의 마음은 하나의 거울과 같다. 그것은 순수하다. 그리고
순수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먼지가 그 위에 앉을 수 있다. 그때
순수함은 사라진다. 그러나 먼지가 순수함을 파괴할 수는 없다.
단지 순수함이 가려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마음의
조건이다. 먼지로 뒤덮인 채로 있는 것 말이다.
그 먼지 뒤에 본래의 마음이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더럽혀질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더럽혀질
가능성이 있다면 그때는 그 순수함을 다시 회복할 길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언제나 순수하다. 단지 먼지로 뒤덮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마음에 먼지를 더한 것이다. 붓다의 마음도
먼지로 뒤덮혀 있었다. 신성의 마음도 먼지로 뒤덮혀 있었다.
그러나 한 번 그대가 그 먼지를 제거할 수 있는 법을 알게 되면
그대는 가치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을 모두 성취할 것이다.
이 모든 방편들이 어떻게 하면 매일 쌓이는 먼지로부터 그대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먼지는 자연스런
것이다. 그것은 나그네가 길을 걸어갈 때 자연스럽게 먼지가 묻는
것과 같다. 그대는 수많은 생을 지나온 한 사람의 나그네다.
그대는 멀고 먼 노정을 여행해 왔다. 그리고 많은 먼지들이 거기에
묻어 있다.
그대는 이 방편들에 들어가기 전에 많은 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양과 다르다. 특히 내면의 변형에
관한 태도에서 말이다. 기독교는 어떤 것이 인간의 존재 속에
저절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죄악 같은 것이 말이다. 그러나 동양은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존재는 절대적인
쑨수 속에 남아 있다. 거기에는 어떤 죄악도 없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간이 정죄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존엄성이 감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신성하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다.
단지 그대로 내버려두면 먼지가 묻을 것이라고, 그리고 먼지는 반드시
묻게 되어 있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거기에는 죄악이 없다. 단지
거짓된 동일시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해 왔다. 아니, 그 마음에 묻은 먼지와 말이다.
우리의 경험, 우리의 지식, 우리의 기억들이 모두
먼지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경험한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간에 그것은 모두
먼지들이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 순수함을 다시
회복한다는 말이다. 어떤 경험도 없는 상태, 지식도 기억도 과거도
없는 순수한 상태를 말이다.
과거는 전부 먼지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항상 현재하는 의식과는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나 과거다.
그리고 그대의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대의 모든 지식은
먼지일 뿐이다.
'앎(knowing)'은 그대의 순수성이지만 지식은 먼지다.
아는 능력, 아는 에너지, 앎, 이것은 순수한 본성이다.
그 본성을 통해 그대는 지식을 모았고 그 지식은 이제
먼지와 같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에 그대는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하지만 그대는 그 순수함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대는 과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축적된 과거와 말이다.
 그래서 모든 명상법들은 기본적으로 그대 자신을 과거와
뚠리시키는 방법들이다.
그리고 그대를 지금 여기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붓다는 수년 동안 의식의 순수성을 다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방법을 말이다. 그대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그대는 속박되어 있다. 그대는
노예가 되어 있다. 과거는 그대를 짓누른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알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매우 세밀한
원자와 같이 극미한 순간이다. 그대는 계속 그것을 놓치고 있다.
과거 때문에 말이다. 과거 때문에 그대는 계속 미래로만 튕겨져 들어간다.
과거는 언제나 미래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둘 다 거짓이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역시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현재다.
붓다는 찾고 있었다. 그는 한 스승에서 다른 스승에게로 옮겨다니며 찾았다.
그는 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서 물었다.
그는 그들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했지만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려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 스승들은 미래에 관심이 있었다. 죽음을 넘어선
어떤 해탈된 상태에, 삶이 끝난 어떤 지점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게, 니르바나에게, 어떤 모크샤에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붓다는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오직 지금 여기에만 집중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모든 스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전체적으로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완전하고 순수하게 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스승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방편을 써보라. 이것을 올바르게 수행하게 되면 어느 날엔가,
미래의 어느 상태에 가서는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모든 스승을 떠났다. 그리고 홀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엇을 했겠는가? 그는 매우 간단한 것을 했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알고 나면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명백하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모를 때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오직 이 한 가지만을 했다.
그것은 현재 이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단지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대의 순수한 의식의 맛을 한번 그 맛을 알게 되면
다시는 잊어버릴 수 없다. 그때 그 맛이, 그 향취가 그대와
함께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의 변형으로 이어진다.
그대 자신을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마음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 자기 마음의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이 모든 방편들이 모두 다른 방법들이다. 그러나 모든
방편은 한 가지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이 점을 기억하라.
이 방편들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의 의식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방편들을 기계적으로 사용한다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순수함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대는 어떤 침묵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침묵은 조작된 침묵이다. 그것은 마음의 먼지에 속한 부분이다.
그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다. 따라서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마라.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을 기억하라. 그 이해는 그대의
존재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 그럼 첫번째 방편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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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마라.

욕망이 그대를 휘감을 때 그대는 거기에 휩쓸린다. 물론 그것이
자연스럽다.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을 때 그대의 마음은 욕망의
물결에 따라 요동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그대를 미래의 어떤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그대는 동요하게 된다. 평안하게 있을 수가 없다.
욕망(desire)은 결국 병(desease)이 된다.
경전은 말한다.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욕망이란 이미
흔들림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욕망 속에서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그대는 어떤 실험을 해봐야 할 것이다. 오직
그때만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그대는 분노 속에 있다.
분노는 그대를 사로잡는다. 그때 그대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이다.
더 이상 그대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때 문득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기억하라.
마치 그대의 내면이 분노라는 옷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분노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그
분노와는 분리된 내면의 한 점 속에 있다.
그대는 분노가 주변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주변은
전율하고 있다. 주변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상황을
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그 상황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구경꾼이 되라.
그대는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 흔들리지 않는 점이 바로 그대 본래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한 번도 그 점을 본 적이 없다.
분노가 거기 있을 때 그대는 분노와 하나가 된다. 그대는 분노가
그대 자신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통해 뭔가를 한다.
두 가지 것이 행해질 수 있다. 분노 속에서 그대는 폭력적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타인에게로 옮겨 간다. 그대와 타인 사이에는
분노가 있을 뿐이다. 내가 여기에 있고 그 다음 분노가 있고
그 다음 그대가 있다. 그때 그대는 내 분노의 대상이다. 분노로부터
나는 두 가지 차원을 여행할 수 있다. 하나는 그대에게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내 의식의 중심이 된다. 내 분노의
대상이 된다. 그때 내 마음은 그대에게 집중된다. 나를 욕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것이 분노로부터 그대가 여행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대는 분노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느낀
타인에게로 향하지 않는다. 그대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를 향해 간다.
보통 우리는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 만약 그대가 대상을 향해 간다면
그대 마음의 먼지 부분은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내가 흔들리고 있다'라고 느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마음의 먼지가 흔들리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느낄 것이다.
그대는 어떤 욕망에도 이것을 실험할 수 있다.
성적인 욕망이 그대의 마음에 일어난다. 그대의 온몸이 그것에
쉽싸인다. 그대는 성적인 대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 대상은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대는 상상력을 그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대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중낌에서 멀어질수록 그대는 더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안정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중심에 바로 서게 된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혼란이 없다.
태풍이 불 때 그 한가운데는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그것이 태풍의 눈이다. 분노의 중심, 성욕의 중심, 어떤 욕망의 중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태풍의 눈' 이 없는 태풍은 없다.
분노 역시 그 분노를 초월한 그대 내면의 어떤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 어떤 것도 반대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극은 항상 필요하다. 그대 내면에 움직이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중심이 없다면
거기엔 어떤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 속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없다면 흔들림조차 가능하지 않다.
다. 이를 분석하라. 이를 관찰하라. 그대 속에 절대적인 평정의
중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비교가 필요하다. 비교할 수 있는 두 지점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건강한 중심이 있기에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어떻게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머리 속에 아프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뇌 수술을 할 때 환자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는 머리 부분 자체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처럼 머리가 아플 때에도 그 아픔을 느끼는
관찰자가 있다. 그때만이 그대는 '내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픔은 아프지 않은 부분에 의해서 감지된다. 만약 그대가
병들었다면 그대는 열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대는 열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열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열은 열 자신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을 초월해 있는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대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분노 속에 있을 때 분노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대 속에 분노로 동요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 속에 있는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순수한 채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이 경전은 말하고 있다.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마라."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억압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방편은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분노를 억누른다면 그대는 다른 부분에서 평정을 잃을 것이다.
그것은 두 배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분노가 생길 때 그대의
문을 닫아라.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 명상하라. 분노를 허락하라.
그대는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억누르지 마라.
억누르기도 쉽고 표출시키기도 쉽다. 우리는 둘 다 한다.
상황이 허락되면 그대는 분노를 표출시킨다. 만약 그대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면 분노를 억누른다. 그대의 직장 상사나 그대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분노를 억누른다.
표출이나 억압은 둘 다 쉽게 할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은 어렵다.
지켜보는 것은 억압하는 것도 아니며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화를 내보라. 그러면 동시에 그것을 지켜보게 된다.
그대는 홀로 있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에 대해 명상할 수 있다.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라. 그러나
허공 속에다 하라.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두들겨 패고 싶다면 허공을 쳐라.
만약 그대가 고함지르고 싶다면 마음껏 고함질러라.
그러나 홀로 있을 때 그렇게 하라. 이 모든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때 그것은 하나의 싸이코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깊은 카타르시스가 될 것이다. 나중에 그대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성숙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터는
분노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중심이 그대 속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중심을 더욱더 확실히 찾아가라.
욕망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
그래서 탄트라는 욕망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 속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탄트라는 섹스조차 이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섹스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구경꾼으로
남아 있어라. 세밀한 관찰자가 되라.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단지 한 사람의 구경꾼일 뿐이다.
이 방편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대는 많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가 욕망에 휩쓸려서
동요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렵다. 그 중심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욕망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는 것까지 잊어버린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해보라.
먼저 그대에게 분노가 일어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지 마라.
그때가 갑자기 당도하면 자신도 모르게 이전처럼 그 분노의 감정에
쉽게 쉽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그대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라. 그리고 기억을 이용하라. 이전에 그대가 분노했던
사실을 떠올려 보라.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그 기억을
이용하라. 그것에 반응하라. 누군가가 그대를 욕하고 비난하던
사실에 대해서 반응하라. 그것을 되풀이하라.
마음이란 단지 녹음기처럼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그대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과학자들은 그것을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대의 기억 중추가 자극을 받으면 그것은
똑같이 되풀이되어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그대가 분노한 사실이 있었다. 그 사건은 그대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자극이 주어지면 마치 녹음기처럼
그것은 두뇌 속에서 재생될 것이다. 그것은 전기적인 자극으로도 가능하다.
그때 그것은 이전과 똑같은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의 눈동자는 충혈되고, 몸은 떨리기 시작하며,
미열까지 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재현된다. 그러나
전기가 나가는 순간 그것은 멈춘다. 만약 그대가 거기에 에너지를
다시 공급하면 똑같이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마음이란 녹음기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대는 얼마든지 같은 자극만 있으면 그 기억을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그대는 기억하려고 하지 마라. 단지 그 경험이 다시
반복된다는 사실을 느끼기만 하라. 그것을 다시 경험할 때 그대는
동요하지 말고 남아 있어라.
그래서 과거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때는 그것이 하나의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이 더 쉬워진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다. 만약 기억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때는 실제로 분노가 일어나도 중심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욕망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이용하는 것은 그대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누구든지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대가 그 상처들에 대해서 이 방편을 시도한다면
그때 상처는 아물 수 있다. 그대는 과거의 짐을 벗을 수 있다.
그대의 마음은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고, 묵은 때는 벗겨질 수 있다.
그대에겐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리호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적도 있다. 이것저것을 원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름처럼 그대의 마음을 덮고 있다.
그 구름은, 그 먼지는 현재 그대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억들을 찾아내어라.
그리고 이 방편을 시도하라. 그대는 그 상처들을 고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대는 이제 흔들리는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에
머물 수 있다.
구제프 역시 이 방편을 매우 자주 이용했다. 그는 상황들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 상황들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필요하다.
그대 혼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구제프는 폰테인블루
(Fontainebleau)에다 조그마한 학교를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교사가 되었다. 그는 그러한 상황들을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예를 들어 그대가 방에 들어간다. 그때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떼를 지어 앉아 있다. 그리고 그대가 들어가는 순간
그대에게 화가 일어나도록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대는 그 상황이 일부러 조작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조작이다. 그들 중 누군가가
간접적으로 그대를 비난한다. 그대는 당황한다. 그때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조한다. 그대는 분노가 폭발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때 구제프는 돌연 이렇게 외친다.
"잊지 마라. 동요하지 말고 중심을 찾아라."
하나의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학교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상황이 무르익는 순간 구제프는
소리친다.
"잊지 마라. 동요하지 말고 중심을 찾아라."
그때 그대는 이것이 조작된 상황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분노는
갑자기 사라질 수 없다. 그 즉시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체적인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몸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분노는 즉시 사라질 수 없다. 그대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그대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분노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대의 마음은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갑자기 그대의 이성은 가라앉는다. 오직 육체만이, 주변만이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 중심은 갑자기 가라앉는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대는 자신의 내면에 당황하지 않는 중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대는 웃기 시작한다. 그대의 눈은 분노로
충혈되었고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야수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대는 웃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과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주변을 말이다.
그대는 가족들과 이런 학교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가족끼리
서로 도와줄 수 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온 가족이 서로
의논해서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다. 친구들이 그룹을 만들어서
이것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실험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번 그대가 자신의 고요한 중심을 알게 되면
그대는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리 속 터지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서양에서는 지금 한 가지 심리 치료법이 개발되었다. 그것은
'싸이코 드라마' 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질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바로 이 방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싸이코 드라마
속에서 그대는 단지 하나의 게임을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게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대는 곧 완전히 그 속에 빠져든다.
그렇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음과 육체는
자동적으로 서로 반응하도록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싸이코 드라마의 연기자를 보라. 화가 나는 상황에서 연기자는
진짜로 화를 낸다. 그대는 그가 단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진짜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의 감정이
고조되면, 분위기에 쉽싸이면 그는 진짜로 그 감정에
쉽쓸릴 것이다. 그때 그의 연기는 실제처럼 보인다.
그대의 육체는 그대가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을 지켜볼 수 있다. 단지 화가 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만약 그대가 연인이나 아내,
혹은 남편과 성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진짜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섹스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상상만 해도 그대의
육체는 벌써 거기에 빠져든다.
섹스는 육체 중에서도 가장 상상력에 영향을 많이 받는 부분이다.
그대는 상상만으로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 육체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 그대가 성관계를 갖게 되면 그때 육체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간다. 꿈속에서, 상상 속에서 그대가 성행위를
할 때 그대는 실제로 사정을 한다. 오르가즘마저 느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육체가 속아넘어갔는가?
육체는 무엇이 실제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어떤 것을 하기 시작하면 육체는 그것이 실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싸이코 드라마는 바로 그런 원리에 착안한 기법이다. 그대는
화가 나지 않았다. 단지 화가 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대는
거기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대의 주변에서는 화가 난
것이 실제가 된다. 그러나 그 뒤에서 그대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대는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흔들림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흔들림이 없다.
이 두 가지 힘이 함께 작동할 때 그대는 저절로 변형된다.
싸이코 드라마 속에서 그대는 진짜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일단 한 번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알고 나면 그대는 실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찾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말이다.
이 방편을 이용하라. 이것은 그대의 삶을 전체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한번 그대가 흔들리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면 그대에게만큼은
이 세상이 불행하지 않다. 그 어떤 것도 그대를 혼란에 빠뜨리지 못한다.
아무것도 그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이제 그대에게 고통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고 나면
그대는 또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구제프는 이 방편을 종종 사용했다. 그는 순간순간 자신의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는 미소짓고 있다. 그는
그대를 즐겁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일순간 그대에게 화를
낼 수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양 옆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웃는 것이었다. 그 각각의 사람들이 한 말을 들어보면 한 사람은
'그때 구제프는 너무나 평화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라고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때 구제프는 너무도 괴팍스런 성질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동시에 루 가지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대도 중심을 주변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면 구제프처럼
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어떤 욕망, 어떤 분노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게임을 벌일 수 있다.
이 방편은 그대 속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거기에 양극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한 번만 확실히 체험하고 나면
그대는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그대의
인생은 다른 사람이 주인 노룻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노예가 될 뿐이다. 그때는 그대의 아내가, 남편이, 친구가,
자녀들이 마음대로 그대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그대는 노예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있다. 단지 한 가지 동작만으로도 그대는 울고 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행동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단지 상황에 따라
자동적인 반응만 보이는 자가 된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욕한다면
그대는 화를 낼 것이다. 그때 그대의 분노는 행동이 아니다.
반응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이해해 주면 그대는 즐거워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그것 역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반응이다. 그대는 도무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붓다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를 반대하고 욕했다. 붓다는 그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다른 마을로 갈 것이다. 이제 나는 가도 좋은가?
당신들이 내게 할 말이 끝났다면 나는 이제 갈 수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 마을을 들를 것이다. 만약 내가 가고 난 뒤에 할
말이 더 있다면, 다시 들를 때 나에게 말하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창 욕설을 퍼부으며 비난하고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그들의 말을 당연한 것처럼 듣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당신에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당신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당신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나에게 어떤 반응을 원한다면
그것은 너무 늦었다. 십년 전만 해도 당신들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행동하는 법을 알았다.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다. 당신들은 나의
행동을 조종할 수 없다. 아무것도 나를 혼란스럽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중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중심에 대한 앎이 그대를 한 사람의 마스터로 만들어 준다.
그렇지 않는 한 그대는 노예일 뿐이다. 한 추인의 노예가 아니라
수많은 주인의 노예 말이다. 그때는 그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대는 전우주의 노예가 된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그대는 곤경에 빠질 것이다. 수많은 주인들이 제각기 그대를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여러 가지 차원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대는 도저히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대는 갈가리
분열되어 끌려 다닐 것이다. 오직 자신의 주인이 된 자만이
고뇌를 초월할 수 있다.
자, 두번째 방편으로 넘어가자.

58.
이른바 이 우주는 하나의 요술경처럼 나타나며
 그림을 보여준다.
즐거워하라. 그것을 그렇게 보라.

이 제상은 한 편의 드라마다. 따라서 심각해지지 마라. 심각은
그대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대는 그 속에서 힘들어 할 것이다.
그대는 이 세상을 심각하게 대하지 마라. 아무것도 심각할 것이 없다.
온 세상이 단지 한 편의 드라마이기 때문에
만약 그대가 드라마로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
자신의 본래 의식을 되찾게 될 것이다. 
먼지란 것은 그대가 심각하기 때문에 쌓이는 것이다.
그 심각함이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드라마를 볼 때조차 심각해짐으로써 먼지를
붙인다. 영화관으로 가라. 그리고 구경꾼들을 보라. 스크린을 보지 마라.
그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단지 극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라. 그들은 영화를 보면서 울고 웃는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성욕 때문에 몸을 비틀기도 한다. 그 사람들을 구경하라.
영화보다 재미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스크린은 아무것도 아니다. 흰 천에 영사되는 빛의 장난이다. 
곽 그림자가 어울려 있는 그림일 뿐이다. 그리고 영사막은 텅
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토록 열광하는가?그들은운◎
흐느낀다. 그리고 폭소를 터뜨린다. 그들에게 그림은 그림이 6
니고 영차도 그저 영화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연극6t
라는 것을 잇어버렸다. ◎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If-
와.T 살아 있다!'라든지 '진짜다!'라고 외친다. 이런 일은 영화n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대 주위에 일어나는
삶을 한번 보라. 그것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대가 앉은 자리에는
적어도 열 명 이나 되는 사람이 묻혀 있다. 그들 역시 그대처럼 심각하게 살았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들의 문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싸웠다. 한 치의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땅은 여기 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없다. 
나는 豕들의 문제가 전혀 문제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문제들은 그대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어디로 갔는가? 만약 전인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땅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무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강은 여전히
흐르고 태양은 여전히 솟아오른다. 대지는 그 부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류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뻗어 나가는 것을 보라. 뒤를 바라보고 앞을 바라보라. 그대가
있는 모든 차원을 확장해 보라. 그대의 삶이 무엇인가?그것은
기나긴 꿈처럼 보인다. 그대가 그토록 심각하게 여기는 이 순간은
다음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대는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대의 첫사랑을 기억해 보라. 그때는 얼마나 심각했는가?
그 당시 삶은 오직 그것에만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대는 전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련한 꿈처럼 잊혀져 버렸다.
그대의 삶이 오늘에 달려 있다고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잊혀질 것이다. 삶은 흐르는 강물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것은 돌아가는 필름이다. 모든 것이 또 다른 모든 것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그대가 당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너무나 심각하다.
그대는 당황하게 되고 동요한다. 그래서 이 방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요술경처럼 나타나며
갖가지 그림을 보여준다. 즐거워하라. 그것을 그렇게 보라."
인도에서는 이 세상을 신이 정성 들여 창조해 놓은 작품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 세상은 신이 장난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릴라(leela)라고 부른다. 게임이라는 말이다. 이 릴라의
개념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창조란 말은 심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유대교의 신은 매우 심각하다. 단 한 번의 불순종
때문에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아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버려졌다. 아담은 우리의 아버지다. 우리는 그
때문에 이토록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신은 너무나 심각해 보인다.
신은 아담의 불순종에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이 너무 길다.
그 죄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사실 아담은 신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했다.
"지식의 나무에게는 다가가지 마라. 그 열매를 따먹지 마라."
하지만 그런 금지는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유혹이나 마찬가지다.
그 커다란 정원 안에서 오직 한 가지 열매만을 따먹지 말라는 것은
너무나 유혹적인 말이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들은 신이
실수를 범했다고 말한다. 만약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그런 언급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아담이 그 나무에 다가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산은 전인류가 살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은
절대로 먹지 마라'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마라'라고 한 말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담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 형벌은
너무나 길어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도
단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담이 저지른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전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인 두 인물을 내세운다. 그들이 바로 아담과
예수다. 아담은 죄를 범했고 예수는 그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버렸다. 그는 고통을 받았다. 아담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신은 아직 그 죄를 용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모든 인류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신의 개념은 매우 추하다. 그리고 또하
심각하다. 인도에서는 신의 개념이 창조자가 아니라 단지 놀이를
하는 존재다. 신은 조금도 심각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게임이다.
거기에 법칙이 있다. 하지만 그
법칙 역시 게임의 규칙일 뿐이다.
따라서 그대는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단지 실수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실수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이 그대를 벌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규칙을 어긴 실수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대가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은 그대에게 관심이 없다.
' 릴라'라고 하는 개념은  삶 자체에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준다.
그것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리고 이 방편 역시 이런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른바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요술경처럼 나타나며
갖가지 그림을 보여준다.
즐거워하라. 그것을 그렇게 보라."
만약 
그대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그대가 이 세상을 심각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는 방법을 찾지 마라. 단지 그대의 태도만
바꾸면 된다. 심각한 마음을 갖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축제를 벌이는 마음으로써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신화로, 하나의 이야기로 여겨라. 그대가 한 번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그대는 불행해질래야 불행해질 수가 없다.
불행은 오직 과도한 심각성에서 나온다. 7일 동안만 그렇게 보라.
7일 동안에는 오직 이것만 생각하라. 이 세상은 단지 한편의
드라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그대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단 7일 만에 말이다. 그리고 그대는 별로 잃은 것이 없다.
잃어버릴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다. 7일 동안 모든 것을 드라마라고 생각하라.
'쇼' 라고 생각하라. 이 7일은 그대에게 많은 일별을 줄 것이다.
그 일별은 그대의 불성(佛性)그대 내면의 순수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일별을 대하면서 그대는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 그대는 괴로워
할 수 없다. 그대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행복인지 생각할 수 없다. 그대는 이전에 어떤 행복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불행의 정도만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대는 덜 불행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그대는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오직 이 세상이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만이 행복이
일어난다.
이를 시도해 보라. 축제를 벌이듯이 모든 것을 하라. 단지 연기를 하라.
그대가 남편이라면 남편의 역을 연기하고 아내라면 아내의 역을 연기하라.
게임이 되게 하라. 물론 거기엔 규칙이 있다.
어떤 게임에도 규칙은 필요하다. 결혼도 하나의 규칙이며
이혼도 하나의 규칙이다. 그러나 심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하나의
규칙은 또 다른 규칙을 낳는다. 이혼이 나쁜 것은 결혼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각하게 대하지 마라. 그때 그대 삶의 질이
즉시 어떻게 변하는지 보라.
오늘 밤 집으로 가서 그대의 아내나 남편, 혹은 아이들에게
드라마의 한 배역을 연기하듯이 행동해 보라. 그리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보라.
만약 그대가 하나의 배역을 연기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대는 자신의 배역을 연기한 뒤에
침대로 가서 잠을 자면 된다. 그러나 기억하라. 7일 동안은
오직 이 자세를 견지하라. 행복이 그대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행복이 무엇인지 한번 알고 나면 더 이상불행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불행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 '올바른 태도
(正員)를 강조했다.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태도의 기준이 되는가? 나에게는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태도가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내게 다른 기준은 없다. 그대를 불행하게 만드는 태도는 잘못된
태도이다. 그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대의 행복이 기준이다.
자, 다음은 세번째 방편이다.

59.
오, 사랑스런 그대여, 쾌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마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모든 것이 양극단적이다. 그리고 마음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인다. 결코 그 중간에 머물지 못한다. 그대는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은 어떤 순간을 아는가? 병들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은
순간을 아는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도에
머무른 적이 있는가? 마음은 언제나 극단적으로 움직인다. 만약
그대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대는 곧 불행을 느낄 것이다. 행복은 사라지고
불행이 찾아온다.
그대는 좋다고 느꼈다가도 곧 나쁘다고 느낀다. 그 중간에
머무는 지점이 없다. 그대는 즉각적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 다닌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왔다갔다 계속 움직인다. 거기에
비밀스런 법칙이 있다. 한쪽으로 다달았을 때 거기에는 반대쪽으로
움직일 만한 힘이 모인다. 그래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대는 불행한 쪽으로 나가려는 힘을
모은다. 그래서 나는 웃고 있는 그대를 볼 때마다 그대가 울고 있을 순간이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도의 시골에서는 어머니들이 이것을 안다. 아이들이 너무 심하게 웃을
때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만 멈춰라. 그대로 나가면 울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행복해 하면 잠시 후에 그는 불행을 더 크게 느낀다.
만약 아이들이 울고 있을 때 그대가 그것을 멈추려고 하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울게 내버려두면 우는 에너지가 그치고
그는 저절로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 심리학자들은 어린아이가 룰고 소리를 지를 때 그를 억지로
멈추려 들지 말라고 말한다. 그를 설득시키려고 하지 마라.
그냥 내버려 두라.
마음껏 소리를 지르면서 울고 나면 그는 다시 즐거워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웃음도 절반만 진실이고
울음도 절반만 진실이다. 모든 것이 혼란 속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자연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이 방편은 그 자연적인 법칙을
바쭈기 위한 것이다.
"오, 사랑스런 그대여 쾌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마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그 가운데 머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거기에
머물 수가 있는가? 고통이 거기에 있을 때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것이 저절로 물러갈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그대의 노력은 반대 방향으로 향해 간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에 행복이 있을 때 그대는 어떻게 하는가? 그대는 다른 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노력한다. 행복이 거기에 있을 때 그대는
행복에 집착한다. 고통이 거기에 있을 때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난다. 이것이 자연스런 태도이다. 만약 그대가 이 자연적인
법칙을 초월하고 싶다면 그때는 고통이 거기에 있더라도 피하려
하지 마라. 그것과 함께 남아 있어라. 그러면 그대의 전체적인
메커니즘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어라.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하지 마라. 예를 들어 두통이 일면 그것과 함께 있어라.
그저 그것을 구경하라. 두통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어떤 순간에 행복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그냥 눈을 감고 구경꾼으로서 그 상태를 지켜보라.
집착하거나 달아나려는 것은 마음을 덮고 있는 먼지 때문이다.
그 먼지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약 그대가 한 사람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다면 양극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자연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그대는 곧 그 중간에 머물게 될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철학을 '중도의 길'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바로
이 방편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중도에 머무르라고 말한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간에 극단으로 흐르지 말고 중도에 머물러라.
그리고 지켜보는 것을 통해 중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대가 지켜봄을
놓치는 순간 그대는 이미 극단으로 가 있다. 그것은 집착하거나
탈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수용성이 필요하다.
수용성의 극치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지켜
볼 수 있다.
그대는 지금 행복하다. 단지 그 사실을 받아들여라.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마라. 어떤 노력도 하지 마라.
만약 불행이 오면 그때도 그것을 받아들여라. 행복이 가는 것을
내버려두라. 단지 언덕 위에 서서 내려다보라. 아침이 오면
저녁도 온다. 태양이 떠오르면 또 지기도 한다. 별들이 거기에 있고
어둠이 있다.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그대는 언제나 구경꾼이 되라.
단지 지켜보기만 하라. 저녁이 오면 다음에 아침이 오는 것을
알게 된다. 저녁이 오면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그저 인식하라.
고통이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구경꾼이다. 그대는 고통이
조만간 물러가리라는 것도 안다. 행복이 온다. 그것 역시 조만간
물러갈 것을 안다. 그대는 그저 하나의 구경꾼이다. 어떤 집착이나
도피 없이 그대가 지켜볼 수 있다면,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중도에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계추가 가운데 머물면 그것은
더 이상 양극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처음으로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대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혼란스럽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움직이지 않을 땐 폭음으로 그 실체를 알게 된다. 그대의 마음은
카메라와 같다. 그대가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가 흔들린다면
사진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이 움직일 때 그대가 아는 실체란 그저 혼란뿐이다.
그것은 악몽이다.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대가
중도에 머물 때만이 실체는 그 진상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 진리가
무엇인지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자, 네번째 방편으로 넘어가자.

60.
욕망들과 그 대상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듯이 자신
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켜라.

이 방편 역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그대는 항상
그 분노를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화를 내면 그대는
즉시 그것을 비판한다. 그대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
만약 그것이 명백하게 나쁜 짓이라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그것을 합리화한다.
똑같은 일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면 그때는 그 합리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대가 화를 내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크게 잘못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의 매를
들었다고 말한다. 그의 이익을 위해서 그대가 성을 내는 것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화를
내면 그대는 그가 미치거나 아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중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기준과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두 가지가 그것이다. 이 이중적인 기준 때문에
마음은 언제나 깊은 불행 속에 있다. 이런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그대가 단순한 마음을 가질 때만이 거기에 대한 일별을
가질 수 있다. 오직 단순한 마음만이 이중적인 기준을 떨쳐 버릴
수 있다.
예수는 '그대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한 가지 기준을 적용하라는 말이다. 이 방편은 오직 한 가지
기준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욕망들과 그 대상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듯이 그대 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켜라."
그대는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예외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평범한 마음의 생각임을 알아라.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범한 것이다. 모든 평범한 마음이
자신만큼은 비범하며 예외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비범하지 않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비범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면 된다.
그대 역시 모든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대 주위에는
똑같은 욕망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섹스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의 사랑은
섹스라고 부른다.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고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나 민족에게도 일어난다. 이 세상이 하나의 집단으로, 군중으로
뭉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인도가 자국의 군대에 '방어를 위하여'라는 표어를 내건다면
그때는 중국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군대가 방어를
위한 것이라면 그때는 누가 침략자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대가
역사를 살펴본다면 그 누구도 스스로를 침략자라고 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패배자가 침략자가 되는 것이다. 패배자는
역사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승리자만이 역사를 기술할
수 있다.
만약 히틀러가 이겼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는 히틀러야말로
침략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구세주가 될 것이다.
그때는 처어칠이나 루즈벨트가 침략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전쟁에 졌기 때문에 그는 결국 침략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이 인류를 구원한 것이 되었다. 이런 논리는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두루 통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남들과는
뭔가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다르지 않다. 종교적인 마음은 모든 사람이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대가 자신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적인 마음이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그 기준으로 똑같이
자신도 비판해야 한다. 두 가지 척도를 만들지 마라. 한 가지 척도만을
가질 때 그대는 변형된다. 그때만이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지성이 싹트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뭐든지 잘못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그리고 옳고 정당한 것은 그대 속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대가 변형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미 변형되어 있다.
그대는 지금 상태가 훌륭하다. 변형시킬 필요가 없다 세상이
변형되는 것이 필요할 뿐 그대가 아니다. 이 사회에 언제나 지도자,
정신 운동, 예언가들이 있어 왔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회를 뿌리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계속 떠들어댄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혁명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다.
인간은 이전과 그대로고 세상도 그대로 불행 속에 남아 있다.
그저 포장만 살짝 바뀌었을 뿐, 불행은 여전히 계속된다. 세상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잘못되었다. 그대 자신을 바꾸는 것이 문제다.
' 어떻게 내 자신을 바꾸느냐' 하는 것은 종교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바꾸느냐'하는 것은 정치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정치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온 세상이 자신과
같은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 모델이다.
이상형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다.
만약 거기에 폭력이 있다면 그는 즉시 그 폭력이 자신에게도
있을까봐 염려한다. 다른 사람 속에 탐욕이 있음을 볼 때
그가 첫번째 하는 일은 같은 탐욕이 자신 속에도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내부를 살펴서 그 속에 탐욕이 더 많이 들어
있음을 보고 자신이 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다. 그대가 한 가지 기준만을 적용
시키는 순간 그때 그대는 이미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마라. 나는 그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안는다면 그대는 그들에게
깊은 자비심을 갖게 될 것이다.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죄를 저지를 때 사회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죄다.
그대는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 속에 그런 씨앗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대는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대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한 적이 없는가?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그 전에는 살인자가 아니다.
단지 씨앗이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그대에게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어떤 순간이 지나면 그대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를 비난하지 마라. 차라리 그를 받아들여라.
그때 그대는 그를 향해 깊은 자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흐대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비난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자비심이다. 그것은 또한 깊은 수용성이다.
그때 그대는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때 온 세상은
그대 자신의 투사체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이다. 그때
모든 얼굴이 그대 앞의 거울이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모든
얼굴 속에서 볼 수 있다.
"욕망들과 그 대상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듯이 자신 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켜라."
수용성은 변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항상 거부만 해왔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아무것도 변형시키지 못했다.
그대는 언제나 탐욕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거부한다.
아무도 자신이 탐욕적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무도 자신이 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대는 화가
나 있다. 그대는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사실을 거부한다.
그대는 가면을 쓰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자신이 분노 자체라고나
분노의 씨앗을 갖고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부는 결코 그 어떤 것도 변형시킬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억압할 뿐이다. 억압된 것은 더 강해진다. 그것은 그대의 뿌리까지
내려간다. 그대의 깊은 무의식 속으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작용하기 시작한다. 무의식의 써둠 속에서 그것은 점점
강력해진다.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제는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용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한다.
거기에는 더 이상 억압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자신이 탐욕적이라는 것을 안다. 분노를 갖고 있고
욕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안다. 그대는 그것들을 자연스런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떤 비난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것들을 억압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마음의 수면 위로 나온다. 그때는 쉽게 제거될 수 있다.
깊은 중심에 숨어 있을 때, 그것들온 처리하기가 어렵다.
그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무의식 속에 있을 때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대가 아는 병은
치료될 수 있지만 모르는 병은 치료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라. 그대의 인간성을 받아들여라.
동시에 그대의 야수성, 동물성도 받아들여라. 거기에 무엇이 있든
비난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탐욕이 거기에 있다. 욕심을
비우려고 하지 마라. 그대는 할 수 없다. 욕심을 비우려 한다면
단지 그것을 억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 역시 또 다른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탐욕을 바꾸려고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탐욕적인 마음은 이상적이고 고상한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겉모습만을
바꿀 것이다. 그대는 점점 더 교활해진 탐욕을 갖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의 모든 재산을 다 버리면 그대는 신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면 그때 그대는 재산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거래일 뿐이다. 탐욕은 탐욕 없음으로
변화될 수 없다. 탐욕은 오직 변형되어야 한다. 초월되어야 한다.
폭력적인 마음이 어떻게 비폭력적으로 될 수 있는가?그대는
강제로 자신을 비폭력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그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그대는 오직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탐욕 그 자체를 받아들여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변형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변형은 그대가
자연스런 사실을 단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그대는 이해하게 된다. 탐욕은 항상 그대 속에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때 그대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하라.
단지 거기에 탐욕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이 인식이,
이 자각이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탐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노, 탐욕, 폭력 이 모든 것은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대가 그
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의 손을 불 속에 넣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단지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손을 넣는다.
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대는
그곳에 손을 넣을 수 없다. 
그대의 앎이, 이해가 깊어질수록 분노나 탐욕은 독이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거기에 어떤 억압도 없다면 그것들은 사라진다.
비폭력이나 탐욕 없음의 이상형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비폭력적으로 되려는 노력 없이
폭력이 사라질 때 그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또한 비폭력적인 사람도 깊이 들어가 보면 폭력적이다. 그의
폭력은 거기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세련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는 자신의 비폭력을 매우 폭력적인 발법으로 자신과 남에게
강요할 것이다. 그 폭력은 매우 미묘한 것이다.
이 방편은 수용하는 것이 곧 변형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수용을 통해서만 자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은 수용이 변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내 감각의
욕망을 받아들일 때 변형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으로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그대의 변형이다. 이것이 그대의 실체다. 동물과 같아지는 것이
뭐 잘못되었는가? 나는 아직 자신을 동물과 비교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스즈키 선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개구리를 사랑한다. 인간보다도 개구리를 더 사랑한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보라. 얼마나 명상적인가?
이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그에게는 고요함이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존재계와 하나가 되어 언제까지나 앉아 있다."
스즈키는 다른 데서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일 때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될 때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
고양이를 보라. 그는 이완하는 비밀을 알고 있다. 그는 이완에 관한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어떻게 이완하는가? 그것을 알고
싶다면 고양이를 보라. 고양이보다 더 훌륭한 선생은 없다. 고양이는
완전히 긴장을 푼 상태에서도 깨어 있다. 만약 그대가 긴장을 푼다면
곧 잠에 떨어진다. 하지만 고양이는 잠속에서도 깨어 있다.
그의 육체는 매순간 충분히 이완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탄력성이 있다.
동물처럼 되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되었는가? 인간은 에고 때문에
우월감을 갖고 있다. 에고는 말한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떤 동물도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존재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긴다.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긴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어떤 종교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정신분석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이 개발되지 않아서, 진화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건강하기
때문이다.
동물이 뭐 잘못되었는가? 왜 그런 비난을 하는가? 이 비난은
인간의 에고에 속한 부분이다. 인간은 성직자 계급을 갖고 있다.
인간은 같은 인간끼리도 우월하고 열등한 것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어떤 동물도 이런 특권층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아윈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원숭이에게 묻기가 겁난다. 그들은 인간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퇴보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넌센스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동물같아진다고 느껴지더라도 거기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나가 되라. 전체적으로 되라. 깨어 있음 그 자체가 되라.
그 자각 상태는 먼저 그대의 동물성을 회복시킬 것이다.
외냐하면 그것이 그대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인간성은 단지
거짓이며 표면적인 부분이다. 누군가가 그대를 욕할 때 그때
그대에게서 튀어나오는 것은 그대의 동물성이다. 그대의 인간성이 아니다.
그대의 인간성은 표면에 드러나 있을 뿐 그 속에는 동물성이 있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표면적인 인
간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거짓된 것이고, 동물성이 진짜 그대이다.
그리고 실체를 아는 것이 좋다. 만약 그대가 계속 깨어 있는다면
이 등물성 속에서 그대는 신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짜 동물이 되는 것이 거짓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동물성을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거짓에 반대한다. 거짓투성이인 인간이 되지 마라. 한 마리의
진짜 동물이 되라. 그 진실성과 함께 그대는 본질적으로 된다.
그때서야 그대는 계속 깨어 있을 수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진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짓에 물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대는 점점 존재의 깊은 층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동물보다도
실체에 더 가깝다. 그것은 바로 신성이다.
신성은 그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라. 모든 동물 속에도
신성이 있다. 또한 동물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 속에도 있고
바위 속에도 있다. 신성은 모든 것의 기본 중심이다.
그대가 거짓스런 인간이 될 때는 그 신성을 잃을 수 있다. 그리고
진실해질 때 다시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됐는가?


파도에서 바다까지

눈을 감아라.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보라.

파도에서 바다까지

61.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62.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63.
어떤 특별한 감각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 자각 속에 머물러라.


언젠가 스리 오르빈도(Sri Aurobindo)는 삶 전체가 요가라고
말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하나의 명상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명상이 되지 않는 한 명상은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명상은
부분이 될 수 없다. 그대 삶의 한조각이 될 수 없다. 명상이 일어나면
그대는 전적으로 그 속에 몰입된다. 그렇지 않으면 명상이 아니다.
그대는 삶의 한 부분만을 명상적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명상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명상은 그대 존재의 성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호흡과 같다.
그대는 무엇을 하든지 호흡을 한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어떤 상태에서도 호흡을 한다.
명상은 내면적인 호흡이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다.
그대가 공기를 호흡하는 것과 똑같이 그대는 의식을 호흡할 수 있다.
한 번 그대가 의식을 들이마쉬고 내쉴 수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물질의 육체가 아니다.
그때부터 고차원적 호흡의 삶이 시작된다.
그대의 삶은 다른 차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 파원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이다.
그대의 호흡은 신체적이고 명상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래서 그대는
삶의 일부분만을 명상적으로 만들 수 없다. 그대는 아침에
한 번 명상하고 잊어버릴 수가 없다. 사원이나 교회에 가서 명상을 하고,
거기에서 나오면 명상을 안하는 식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대는 명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겉으로 명상을 하는 흉내만
낸 것이다. 그대가 들어갈 때 진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명상은 그대 속에 언제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대의 기본을 이룬다. 
두번째로 그대는 어떤 장소에서도 명상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삶 전체가 하나의 깊은 명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산들이 명상하고
별들이 명상을 한다. 꽃들이 명상하고 나무들이 명상하며
모든 원자들도 명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땅이 명상하고 있다.
삶 전체가 명상하고 있다. 그대는 언제 어디에서나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명상의 입구가 될 수 있다. 그 방법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종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입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종교들이 있다. 그대는 그 입구들이 완전히 달라서 그런 사람들을
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시인이 한 명 있다. 그 시인은 어떤 스승을 찾아가지 않고서,
사원이나 소위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서
명상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의 시가, 그의 창조성이 그 입구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도자
기공 역시 작업을 통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궁수 역시 마찬가지다.
정원사도 그렇다. 그 누구라도 어디에서든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행동이든지 문이 된다. 그러므로 행위하라. 방편은, 길은,
방법은 기본이 아니다. 그대를 행동하게 하는 의식의 질이 기본이다.
인도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 까비르(Kabir)는 직공(織工) 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계속 베 짜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까비르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 베 짜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제공하겠습니다."
그때마다 까비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이 일은 단지 베만 짜는 것이 아니다. 베를 짜는 것은 외부적인
행동이다. 그대들은 이 일을 하는 동안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없다. 이 일은 나의 명상이다."
베 짜는 직공이 베를 짜는 일을 통해서 어떻게 명상가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음의 질이다. 그 질 때문에 베 짜는 일은 명상이
될 수 있다. 그때는 외부적인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신비주의자 중에 도공(陶工) 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고라(Gora)였다. 그는 동양인이었다. 그는 도자기를 만들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가 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를 빛는 동안에는
그 물레의 중심이 자신의 중심과 하나가 되었다. 그대는 물레가
돌아갈 때 거기에 하나의 중심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때 동시에 그대 속에 또 하나의 중심이 생긴다. 그 속에 빠져들 때
보이지 않는 의식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도
도자기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단지 도자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완성한 것이다.
어떤 행동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어떠한 행동이
명상이 되는지 알게 되면 그대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명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그때 삶 전체는 요가가 될 것이다. 탄트라가
될 것이다. 길을 가든지 사무실에서 일을하든지, 방 안에서
할일없이 누워 있든지 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명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명상은 행동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을 하게 되는 그대 마음의 질이다.
이제 우리는 방편으로 들어갈 것이다.

61.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먼저 파도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때 이 의식의 파도가
그대로 하여금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대는 바다 위로
출렁이는 파도를 본다. 그것들은 수면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파도는 없다. 이를 먼저 이해하라.
파도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단지 감각적이다. 더 깊은 감각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깊은 감각에서는 오직 바다만이 존재한다.
바다 없는 파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는 순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바다가 바로 본질이다.
언어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우리가 '파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파도(wave)' 보다는
'파도침 (waving)'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현상이고, 본질이 아니라 운동이며, 물질이 아니라
과정이다. 바다가 물질이며 파도는 그것의 한 모습이다.
바다는 침묵할 수 있다. 그때 파도는 사라진다. 그러나 바다는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바다는 침묵 속에서나 활동 속에서나 그 언제라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고요한 파도를 본 적이 있는가? 파도는 운동이며 활동이다.
그것은 고요해지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나 바다는 그대로 있다.
두 번째로, 파도는 하나의 개체로 나타난다. 파도는 그 자신의
개성을 갖고 있다. 독특하다. 서로 다르다. 똑같은 파도는 없다.
어떤 파도는 조금 크고 어떤 파도는 조금 작다. 그것은 모두 제나름대로
개성을 갖고 있다. 하나의 파도가 일어나면 다른 파도는 죽는다.
붙어 있으면서 동시에 함께 떠오를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일어나는 파도와 스러지는
파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늙은이는 죽고 아기는 태어난다. 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서로 관계가 있다면 그들은 동시에 태어나고
동시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한 파도가 스러지면서 다른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죽은 파도로부터 에너지를 모으기 때문이다.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들은 모두 같은 바다다. 그것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의 개성은
거짓이며 환상이다. 그것들은 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바다와 이중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것의 진실은 불이원성이다. 이제 나는 이
방편을 다시 한번 낭독한다.
"파도는 바다와 함께 있고 불꽃은 불과 함께 있듯이 우리 역시
우주적 대양의 한 조각 파도다."
우리는 우주의 바다 위에 있는 단지 한 조각의 파도다. 이를 명상하라.
이 느낌이 그대 속에 깊이 들어가도록 하라. 그대의 호흡이
마치 파도가 일어났다 스러졌다 하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하라.
숨이 들어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숨이 나오기 때문이며, 그대가
숨을 내쉴 때 역시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다. 호흡은 생명의
바다 위에 일렁이는 파도다. 그대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다. 그대의 개성은 단지
거짓이며 환상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개성이 없다.
무아(無我) 다. 바다와 같다.
모든 종교가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반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까지도 비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종교적인 사람이다.
고타마 붓다는 무신론자다. 그는 어떤 신도 믿지 않았다.
마하비라 바르다만 역시 무신론자다. 그도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취했다. 도달했다. 전체성을 깨달았다. 만약 그대가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외냐하면 신은 종교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고 없음이 종교의 기본이다.
그대가 신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에고이스트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비종교적인 사람이다. 에고 없는 마음은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는 저절로 신성을 깨닫게 된다. 에고가
없을 때 그대는 파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대는 바다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나 에고를 갖고서는 파도에 집착한다. 삶을 바다처럼 바라보라.
그대 자신이 한 조각 파도임을 느껴라. 그 느낌에
사무쳐라.
그대는 이 방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숨을 쉬는 동안
바다가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고 느껴라. 바다가 그대 속에
들어왔다가 나가고 들어왔다가 나간다. 호흡의 매순간마다
파도가 일어나고 스러진다고 느껴라. 들숨은 일어나는 파도이고
날숨은 스러지는 파도로서 말이다. 그 둘 사이에 그대는 누구인가?
그저 무(無)일 뿐이다. 쑤냐(Shunya)다. 공이다. 이 공이라는
느낌은 그대를 변형시킨다. 무(無)라는 느낌이 들면 그대의
모든 불행은 사라진다. 그대는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하게 된다.
그대가 없는데 누가 긴장할 것인가?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찬다.
아니 그대가 축복으로 채워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대는 없고
오직 축복만이 거기에 있다. 그대가 없는데도 그대는 불행을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붓다가 궁극의 상태, 즉 아난다(ananda ;지福)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다. 붓다는 '단지 거기에
불행이 없다'라고만 말했다. 그것이 전부다. 만약 그가 지복에 관해서,
아난다에 관해서 말했다면 그대늘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래서 붓다는 지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대는 어떻게
불행이 없어지는지를 알려고 하라. 그것은 그대라는 에고 없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파도가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즉시
죽음의 공포가 닥쳐올 것이다. 파도는 죽어야 한다. 주위에 있는 모든 파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대는 자신을 계속해서
속일 수 없다. 누군가가 새로 태어나더라도 거기에는 죽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그대 역시 죽는다. 만약 파도가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는 반드시 닥쳐오고 만다.
그러나 파도가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바다일 뿐임을 안다면
거기에 죽음의 공포는 없다. 오직 파도만이 죽을 수 있다.
바다는 죽지 않는다. 나는 죽을 수 있지만 생명은 아니다. 그대는
죽을 수 있지만 존재계는 아니다. 코스포스는 죽을 수 없다.
존재계는 계속 파도를 일렁이게 한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일렁이며
다른 사람 속에서 일렁인다. 그대의 일렁임이 스러질 동안에도
다른 새로운 일렁임들이 계속 시작된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파도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바다와
하나가 됨을 깨닫게 된다. 형상이 없는 것은 죽음도 없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그대에게 많은 불행을 낳을 것이다.
모든 고통, 고뇌, 번민은 죽음의 공포가 그 기본으로 되어 있다.
그대는 두려워서 전율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서 매순간 죽을까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대는 많은 안전 장치들을 설치해 놓을 수도 있고, 요새를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대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 흙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대는 길을 가다가 구두에 묻은 흙먼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이
나폴레옹의 몸인지 알렉산더의 몸인지 모른다. 어디엔가 알렉산더는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대의 몸에 묻어 있는 먼지가 말이다.
똑같은 일이 그대에게도 일어난다. 이제 그대는 여기에 있다.
다음 순간 그대는 사라질 것이다. 조만간 먼지는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사람의 구두에 묻어 있든지 아니면
도공의 손에 의해서 도자기로 구워질지 모른다. 그대의 몸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 자신이
지렁이나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나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형상을 이루며,
현상은 반드시 죽는다. 오직 형상 없음만이 영원하다. 그대가 형상에
집착할 때, 자신을 형상과 동일시할 때, 자신이 하나의 파도라고
생각할 때 그대는 스스로 심각한 문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대양이다. 파도가 아니다.
이 명상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변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그대를 돌연변이로 만들 수 있다. 그대의
모든 삶에 이 명상이 퍼지게 하라. 호흡할 동안에도 생각하고,
밥먹을 동안에도 생각하라. 무엇을 하든지 이 사실을 생각하라.
언제나 형상은 파도이며 형상 없음은 바다라는 것을 형상 없음은
죽음 없음이다. 형상은 곧 필멸이다. 그대는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매일 죽어 가고 있다. 어린 시절도 죽고
젊은 시절도 죽는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 그때 노년이 죽는다.
그리고 형상은 사라진다.
매순간 그대는 어떤 것 속으로 죽어 들어간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이 새로 태어난다. 그대가 탄생한 날은 탄생한 첫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앞으로 다가올 더 많은 탄생의 한 부분이다.
그대가 이 삶을 마치는 날은 처음 죽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이번
생의 마지막 죽음일 뿐이다. 그대는 그 전에도 여러 번 죽었다.
매순간 어떤 것이 죽어 가고 있고,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나고 있다.
그대의 일부가 죽고 일부는 태어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대 몸 속에 7년 이상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모든 세포는 변한다. 만약 그대가 70년을 산다면
그대의 세포는 열 번이나 바귄다. 그때마다 그대는 새롭게 태어난다.
새 몸이 되는 것이다. 매순간 어떤 것이 바뀌고 있다.
그대는 하나의 파도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파도는 잠시도
멈출 수가 없다. 움직이지 않는 파도는 있을 수 없다. 그대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 중의 하나다. 만약 그대가 이 흐름과 동일시한다면
그대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만 있는 것으로 제한된다.
그때 그대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실체의 껍데기만
붙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샹카라가 말한 '마야'다. 그리고 바다는
브라흐만이다. 바다는 진리다.
따라서 그대 자신을 일어나고 스러지는 파도의 연속으로 생각해 보라.
하지만 그대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이 파도들은
잠시 후에 사라질 것이다. 나타나는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모든 노력이 절대적으로 쓸모 없다.
오직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은 그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이다.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한 번 그대가 구경꾼이 죈다면
갑자기 그대는 파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다다.
우주는 그대를 통해서 파도친다. 그것을 느껴라. 그것에 집중하라.
그것을 명상하라. 수많은 방법으로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나도록
자신을 허용하라. 수많은 길을 통해서 말이다.
앞에서 나는 호흡에 대해 말했다. 성욕도 마찬가지다. 성욕이
그대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느껴라. 그대 자신의 욕망으로서가 아니라
그대 속에 일어나는 대양의 한 조각 파도로서, 삶의 고통으로서,
그대 속에 일어나는 생명력의 물결로서 말이다.
그대는 사랑의 행위 속에서 타인과 만난다. 그것을 두 파도의 만남으로,
두 개체의 만남으로 생각하지 마라. 두 개의 개체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는 사라지고 오직 대양만이 남아 있다.
그때 섹스 행위는 하나의 명상이 된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행위가 아니라 명상으로 느껴라.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주에서 일어난다고 느껴라.
그대는 우주위 일부일 뿐이다. 수면 위의 한 파도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우주로 떠넘겨라.
일본의 위대한 선사(禪師) 도원(道元)은 배고픔을 느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우주가 나를 통해 배고픔을 느끼는 것 같다."
그는 목마를 때에도 이렇게 말했다.
"존재계가 내 속에서 목말라 한다."
명상이 그대를 인도해 갈 곳이 바로 이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그대의 에고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우주의 한 부분이 된다. 그때
일어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존재계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더 이상 죄도 없다. 책임도 없다.
나는 그대가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본래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죄는 그 성립이 불가능하다.
죄는 오직 에고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무책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대만이 존재하는데
누가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그대가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을 본다면 그대는 그와 함께 자신이 죽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주가 죽어 가고 있고, 그대는 그것의 한 부분이다.
만약 그대가 활짝 피고 있는 한 송이 꽃을 본다면 그대 역시
그 꽃과 함께 피어날 것이다. 이제 우주 전체가 그대가 된 것이다.
그런 깊은 충만과 조화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삼마디
(Samadh)속에 있는 것이다.
명상은 길이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조화, 전체와 하나됨의 이
느낌이 목적이자 궁극이다. 이것을 해보라. 바다만 생각하고
파도는 잊어버려라. 그대가 파도라고 생각할 때마다 그대는 파도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불행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대를 벌주는 신 같은 것은 없다.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서
기도를 올릴 때마다 그대는 자신을 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신 대신에 법(Dharma)이 있다. 도(Tao)가 있다. 만약 그대가
그것과 조화를 이룬다면 그대가 지복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하늘
위에 앉아서 그대를 벌주는 사람이 없음을 안다. 그대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해 놓는 책 같은 것도 없음을 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법이나 도라고 하는 것은 단지 중력과 같은 것이다.
만약 그대가 똑바로 걷고자 한다면 중력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잘못 걷는다면 넘어질 것이고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그대를 벌한 것이 아니다. 단지 중력의 법칙에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가 잘못 걸어서 넘어지면 뼈가 부러질 것이다. 따라서 잘
걷고자 한다면 중력을 이용하라. 에너지는 잘 이용할 수도 있고
잘못 이용할 수도 있다. 그대가 자신을 하나의 파도로서 느낄 때
그것은 우주의 법칙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실체에
저항하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업(karma)의 원리인 것이다. 그 법칙을 제정한 사람은 없다.
신도 심판관이 아니다. 심판이란 추한 것이다. 만약 신이 심판관이라면
그는 완전히 지쳐 버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미쳐 버릴 것이다. 그는 심판관이 아니다. 그는 통제자도 아니고
법을 제정한 사람도 아니다. 우주는 단지 그 자신의 법칙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법칙은 그대가 실재 속에
있을 때 지복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비실재 속에, 거짓
속에 있을 때는 불행 속에 있는 것이 된다.
이제 두번째 방편으로 넘어가자.

62.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마음이란 것은 하나의 문이다. 그것이 어디를 방황하더라도,
사색을 하거나 꿈을 꾸거나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바로 그 순간,
그 마음은 문이 된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방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범한 마음이 문이 된다고는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지고한 마음, 이를테면 붓다나 예수의 마음만이
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초인간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대가 갖고 있는 바로 그
마음이, 꿈을 꾸고 계속 쓸데없는 망상을 피우고 있는 그 마음이,
추한 욕망과 갈증과 분노와 탐욕과 모든 저주스런 것들로
가득 찬 바로 그 마음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이 계속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해서 마치 정신병원 같은 그 마음이 바로 문이 된다고
이 방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이 어디를
방황하든지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이 내면이건 외부이건 상관이 없다. 바로 그때의 그
마음이 열쇠가 된다.
많은 것들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첫째로 평범한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지 않다. 평범한 마음이라고 해서 우주적인 마음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평범한 마음은 우주적인 마음의 부분이다.
평범한 마음의 뿌리는 존재계의 바로 그 중심에 뿌리박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죄인이라도
이 신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존재할 수가 없다.
만약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 역시 신성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계의 모든 것은 현존이 가능하다. 그 자체로 오직 존재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꿈을 꾸고 있다.
상상을 하고 있고, 방황과 긴장을 하고 있으며, 고뇌와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건 그것은 전체성 속에 뿌리박은 채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존재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그대는 그 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만약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존재계 속에 뿌리박고 있다면 그때 존재계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에고이스트 마음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
속에 있다. 그런데 그대는 왜 몸이 달아 안절부절못하는가?
그대는 신성 속에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방황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음과 방황, 마음이
향하는 대상과 마음 자체, 하늘을 떠도는 구름과 하늘 자체가 있다.
여기에 분명히 구름과 하늘의 두 가지가 있다. 종종 구름이
너무 많아서 하늘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대는 하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늘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없어질 수 없다. 하늘이 없어지게 하는 방법은 없다.
하늘은 거기에 있다. 가려졌든 가려지지 않았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구름 또한 거기에 있다. 만약 그대가 구름에만 집착한다면
하늘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하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구름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대는 구름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한다. 아무리 많은 구름이라도 하늘을 파괴시킬 수는 없다.
1인치라도 말이다. 구름은 하늘을 더럽게 만들 수 없다.
구름은 하늘을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늘은 언제나 그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 거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름인 사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인 의식이다. 만약 그대가 대상인
사념에 집착한다면 그대는 하늘을 잊어버린다. 그대는 주인을
잊어버린다. 그대는 손님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생각들,
사념들은 지나가는 객이다. 그대가 그 객들에게 초점을 맞출 때
그대 자신의 존재는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객으로부터 주인을
향해 초점을 옮겨라. 구름으로부터 하늘로 시선을 옮겨라. 이것을
실제적으로 수련해 보라.
성욕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의 구름이다. 혹은 더 큰 집을 가지고 싶은
탐욕이 일어난다. 이것 역시 한 조각 구름이다. 그대가
그 구름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히면 그것이 누구에게 일어난 것인지를
완전히 망각한다. 도대체 그 구름 뒤에 누가 있는가?
구름이 어떤 하늘 속에서 이동하고 있는가? 하늘을 기억하라.
그러면 갑자기 구름이 사라진다. 그대에게는 대상에서 주체를 향한
초점의 방향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구름에서 하늘로, 객으로부터
주인으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초점의 자리 이동이다.
선의 스승인 임제선사가 설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중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제게 유독 한 질문이 떠나지 않는데 대답 좀 해주십시오.
나는 누구입니까?"
임제는 말을 끊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거기에 집중되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대답할까? 그러나 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질문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눈이 그 장면에 집중되어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그는 단지 제자리에 앉아서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법석을 내려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질문을 던진 사람은 임제가 가까이 오자 겁에 질렸다.
임제가 꿰뚫어 버릴 듯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임제는 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심하게 흔들어 충격을 주면서 외쳤다.
"눈을 감아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보라."
그 사람은 눈을 감았다. 물론 겁에 질린 채로였다. 그는 이
질문을 던진 자를 찾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되돌아
오지 않았다.
대중(大衆)들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한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때 임제는 그에게 다시 한번 충격을
가해야 했다.
"이제 나와서 대중 앞에 고하라. 그대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얼마나 기적적인 방법인가?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이라도
나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나 역시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초점의 자리 바꿈일 뿐이다. 그대는 질문을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이다. 그대의 마음은 그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대답은 질문하는 자의 질문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초점의 방향을 바꾸라. 그대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이 경전은 말하고 있다.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대상에서 마음 자체로 옮겨 가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더 이상
평범한 마음이 아니다. 그대는 대상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평범해진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대는 스스로
한 명의 붓다가 된다. 그대는 이미 붓다다. 단지 두터운 구름에
억눌려 있다. 뿐만 아니라 그대 자신이 그 구름에 집착하고 있다.
그 구름들이 물러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대는 그 구름들을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부자가
될수록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그대의 하늘은,
내면의 공간은 가려져 있다. 따라서 그 하늘은 구름 뒤로 사라져 버리고
구름이 그대의 삶이 되어 버렸다. 구름의 삶이 바로 삼사라,
곧 이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초점이 바뀌어지면 단 한순간만이라도 하늘을 볼 수 있다.
그 일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이 갑작스럽 게
일어난다고 해서 그대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 일별은 결코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문득, 물이 수증기가 되는 온도에 이르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갑자기 거기에 있던 물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증발되어
버렸다.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대상 속에 있지 않게 된다. 구름을
향해 있던 그대의 초점은 내면의 공간 속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시선 중 일부는 내면을 향하고 일부는 외부의 구름을
향하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질 수 없다.
10%는 내면이고 90%는 외부라든지, 20%는 내면이고 80%는
외부라든지 하는 따위의 분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제나 100%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초점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대상을 바라보든지 아니면 자신을 바라보든지
둘 중의 하나만이 가능하다. 세상을 바라보든지 브라흐만
(Brahman)을 바라보든지 하나만 할 수 있다. 그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시 초점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만이 그대가 스승이 될 수 있다. 진정한 마스터인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초점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티벳의 신비주의자 중에 하나인 마르파(Marpa )가 기억난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가 되었을 때, 자기 내면의 공간과,
무한성과 조화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마르파여 ! 당신은 이제 어떻습니까? 불행과는 이별하게 되었지요?"
그때 마르파의 대답은 매우 엉뚱했다. 어떤 붓다도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마르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전처럼 불행할 수 있다."
질문한 사람은 그 대답을 듣고 당황했다. 그는 반문했다.
"이전처럼 불행할 수 있다고요?"
그러자 마르파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그 차이란 지금의 불행은 의도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때때로 세상을 맛보기 위해서 나는 외부를 향해
시선을 옮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스터가 되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양극으로 움직이는 것은 좋다. 한 극으로 이동해 갔을 때 나머지
한 극 역시 살아 남는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불행 속으로도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불행은 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불행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그것들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대가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초점을 내면으로
바꿀 줄 알게 되면 그대는 외부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
모든 붓다들이 이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을 향해
시선의 초점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내면은 더 이상
이 전과 같지 않다. 그들은 완전히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름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다.
때때로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혔을 때 그 광경은 아름답다.
구름의 움직임 역시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래도 하늘이 그대로 있다면
구름의 움직임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문제는 하늘이
자신을 잊어버리고 오직 구름에만 집착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추해진다.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방편은 아름답다.
"네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그대의 마음이 방환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 이것이다."
이 방편은 선(禪)의 전통에서 깊이 사용되어져 왔다. 선은
그대의 일상적인 마음, 즉 평상심 (平常心)이 곧 붓다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먹는 것을 통해 그대는 한 명의 붓다가 된다. 잠자는 것을 통해서도
그대가 붓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도
그대는 붓다이다. 그대는 이제 붓다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꿈처럼 황홀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만약 그대가 물을 길을 때 단순히 물을 긷기만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어떤 문제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그대의 마음이 구름에
집착하지 않고 의식의 하늘이 맑게 개어 있다면 그때 그대는
한 명의 붓다다. 식사를 할 때에도 어떤 사념에 끌려다니지 않고
단지 식사만 한다면 그대는 붓다다. 그러나 그대는 그냥 식사만
할 수는 없다. 그대는 수천 가지 생각들과 함께 먹는다. 마음은
지금 전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육체는 그저 로봇처럼
기계적오로 먹기만 할 뿐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며칠 전에 한 대학생이 이곳에 찾아왔다. 그는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어떤 소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녀와 함께 있을 동안 나는 시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 공부를 할 때에는 그녀 생각만 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를 할 때는 그녀 생각만 나고
막상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곧 닥쳐올 시험만 생각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 청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그 상황은 정말 말 그대로 뒤죽박죽이다. 그대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집을 생각한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사무실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대는 그런 마술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집에 있을 때는
집안일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무실에 있다면 사무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마술을 부려 집안일을 해치울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된다. 그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마음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는 물만 길어라. 만약 그대가 하나의 일에서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그대는 한 명의 붓다다. 그래서
그대가 선사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당신의 수행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수행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졸리면 잠을 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수행은 없다."
그러나 보기에는 간단하게 보이지만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대가 밥먹을 때 그저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앉아 있을 때
그냥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대가 그 순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면,
어떤 미래나 과거로도 빠져 나가지 않고 그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유일한 존재계다. 그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바로 이 마음이 붓다의 마음인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방황할 때 그것을 억지로 멈추려고 하지 마라.
그저 하늘을 자각하라. 그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붙들어매려고 하지 마라.
어떤 집중도 하려고 들지 마라. 그저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내버려두라. 그 떠도는 현상에 주의를 쏟지 마라. 찬성이나 반대
때문에 그대는 방황에만 집착한 채로 남아 있다.
하늘을 기억하라. 방황하는 것을 허용하라. 그리고 단지 이렇게 말하라.
"좋다. 그것은 그저 길 위를 지나가는 교통 수단이다."
사람들이 복잡하게 이길 저길을 옮겨 다닌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똑같이 붐비고 있다. '나는 오직 하늘이다. 구름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라. 그것을 느껴라. 기억하라. 그리고 그 속에 남아 있어라.
그대는 곧 구름이 개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대의 초점이 진실로
어떤 순간 내면으로 향한다면 구름은 물러가고 그대는 하늘이 된다.
더 없이 맑고 순수한 처녀성의 하늘 말이다.
한번 그대가 이 순수성을 알고 나면 그대는 다시 구름의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다. 그때 이 세상은 그것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대는 이제 마스터이기에 세상은 더 이상 나쁘지 않다.
그것은 사랑스럽다. 그대는 내면의 진실을 아는 마스터로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어여쁨을 알 필요가 있다.
자, 세번째 방편인다.

63.
어떤 특별한 감각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 자각 속에 머물러라.

그대는 눈을 통해서 바라본다. 기억하라.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그대가 바라보는 것임을 말이다. 눈은 볼 수 없다.
보는 자는 뒤에 가려져 있다. 눈은 단지 하나의 창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본다고 생각한다. 또한 귀가 듣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귀만으로 들을 수 없다. 단지 귀를 통해서
들을 뿐이다. 듣는 자는 뒤에 가려져 있다. 귀는 음파를 받아들이는
수용기관일 뿐이다.
내가 지금 그대를 만진다. 내가 손바닥으로 그대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고 해서 손이 그대를 만지는 것은 아니다. 손을 통해서
내가 만지는 것이다. 손은 하나의 기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두
가지 유형의 만짐이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진짜로 만질 때와
단지 형식적으릇 만지는 것이 그것이다. 사랑을 가지고 어루만지는 것과
상대방의 감촉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악수를 하는 것 말이다. 처음의 만짐은 나의 가슴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후자의 만짐은 거기에 내가 없다. 단지 죽은
손만 거기 있을 뿐이다. 만약 상대방이 민감하다면 그는 죽은 손을
느끼게 될 것이고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만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만지지 않는다.
여성들은 그 점에 있어서 매우 예민하다. 그대는 촉감으로
여자들을 속일 수 없다. 그들은 감촉에 있어서 대단히 민감하다.
그래서 그들은 안다. 남편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고 꽃을 사주며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그의 손길은 그가 거기에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때 여자들은 곧 알아차린다. 여성들은 민감한
촉감을 본능적으로 타고난다. 그대가 마스터가 되지 않고는 그들을
속이기가 어렵다.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그대는 그들을
속일 수 없다. 그러나 마스터는 남편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될 것이다. 그대의 손길이
그것을 보여준다. 아이들도 매우 예민하다. 그대는 아이들을
속일 수 없다. 그대는 아이들을 애무하지만 그 애무는 죽은 것이며
형식적인 것임을 아이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그대의 손에 흐르는
에너지가, 사랑의 에너지가 없다면 그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오직 그대의 손길에 그대 전체가 담길 때, 거기에 그대가 현존할 때,
그대의 중심이 손으로 이동할 때, 거기에 그대의 영혼이 존재할 때
그때 손길은, 감촉은 달라진다.
이 경전은 말한다. 감각은 단지 문이고, 수용기관이며 하나의
통로라고 말이다. 그대는 그 뒤에 가려져 있다. 음악을 듣는 동안
귓속에서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지 마라. 그대 자신을 놓치지 마라.
귀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을 자각하라. 각성하라. 누군가를
바라보는 동안......  이것을 해보라. 지금 당장 나를 바라보면서 해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는 눈에 의해서 나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눈에 의해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대가 눈 뒤에
감추어진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대는 눈을 통해서
나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눈을 통해서'라고 말할 때는
그대와 나 사이에 눈이 있다는 말이다. 그대는 눈 뒤에 서 있고
단지 눈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창문이나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은행 직원이 안경테 너머로 그대를 지켜 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의 안경은 코에 걸려 있고 그는 안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방해가 되는 것처럼 직접 나를 바라본다.
그처럼 나를 바라보라. 마치 그대의 눈이 코 위로 흘러내린 듯이
눈 위로 나를 바라보라. 갑자기 그대는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초점이 변화했다. 눈은 단지 하나의 문이다.
이제 하나의 명상이 된 것이다.
소리를 들을 때도 귀를 통해서 들어라. 그리고 귀가 아니라
그대 내면에 듣는 중심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들어라. 촉감도 마찬가지다.
손은 그저 촉감을 전달하는 기구일 뿐 그 뒤에 감촉을 느끼는 자가 숨어 있다.
어떤 감각에서든지 그대는 내면에 감각의
중심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감각이 그 내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다 보고를 한다. 그대가 나를 바라보고 내 말을 들을 때
그대는 눈과 귀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그리고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보는 자와 듣는 자가 같은 자임을 그대는 알게 된다.
만약 내가 체취를 풍긴다면 그대의 코는 그것을 맡을 것이다.
그때 세 가지 다른 감각이 하나의 중심에 보고된다. 그래서 그대는
그 정보들을 정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워진다. 만약
보는 주체가 그대의 눈이고 듣는 주체가 그대의 귀라면 그때는
눈과 귀가 서로 다른 것이어서 그 정보를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눈을 통해서 보는 자가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기도 하기 때문에 정보의 통합에는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합하는 자는 그대의 감각기관들과는 다르다.
모든 감각들은 이 통합하는 자에게 보고된다.
이 자는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합하고 하나를 이룬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나는 하나다.
나의 육체와, 육체 속의 현존과, 육체의 냄새, 내가
말하는 행위 이 모든 것이 하나다. 그대의 감각은 나를 분리시킬 것이다.
그대의 귀는 내가 어떤 것을 말할 때 보고할 것이며,
그대의 코는 내 몸의 어떤 냄새를 보고할 것이고, 그대의 눈은 내
모습을 보고할 것이다. 나는 하나지만 그대의 감각기관은 모두
따로 행동하여 나를 분리시킨다. 그리고는 각자 분리되어 보고된
정보들이 다시 하나가 되는데 내가 그대 속에서 하나가 되는 곳이
바로 그대 존재의 중심이다. 그것이 그대의 의식이며 자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대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망각이 곧 무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각은 자신을 아는 지식의 문을 열어준다.
그대는 내면의 자각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을 알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그 자각속에 남아 있어라.
자각을 지키고 있어라. 처음에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계속 잠에 떨어질 것이다.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눈에 의해서 보는 것은 쉽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통해서 본다면 처음에는
일종의 긴장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 뿐만 아니라
그대가 바라보는 사람 역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만약 그대가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기분으로 누군가를 쳐다본다면
그는 자신이 관통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그대가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가 뭔가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문득 알게 된다.
외냐하면 그대의 눈길이 상대방을 꾀뚫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대의 시선은
깊어진다. 그것은 그대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상대방의 깊은 곳까지 관통한다. 그래서 비밀 위에 세워진 이 사회는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깊이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대의 깊은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을 수 있다.
완전히 열려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그런 시선이 허용되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을
루크차(luchcha)라고 부른다. 그것은 보는 자(seer)란 뜻이다.
그리고 루크차는 로찬(lochan)에게서 나왔다. 로찬은 눈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크차란 '그대를 향해 눈이 된 사람' 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모르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마라. 그는
그대가 한 명의 루크차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에는 사물을 놓고 해보라. 한 송이의 꽃, 나무, 밤하늘의
별을 향해 해보라. 그것들은 그대에게 어떤 저항감도 표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것들은 오히려 그대의 바라봄을 좋아하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해보라.
그대의 아내, 아이들에게 말이다. 때때로 그대의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눈을 통해사 그를 바라보라. 아이는 이해할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다. 아직 사회의 물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왜곡되지 않았으며 자연스럽다.
그대가 눈을 통해서 그를 바라본다면 그는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그대의 현존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연인을 바라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이 방편의
느낌을 서서히 받아가면서, 그것에 대해 더욱 능숙해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됨에 따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그때는 아무도 그대가 왜 그토록 깊이 바라보는지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 그대가 그대의 감각 뒤에서 언제나
자각한 상태로 서 있는 기법을 갖게 된다면 감각들은 더 이상 그대를
속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감각들은 그대를 속일 것이다.
하나의 겉모습으로 꾸며진 세상에서 감각들은 그대로 하여금
그것이 실체라고 느끼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감각을 통해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자각한 채로 남아 있다면 세상은 서서히 그대에게
하나의 환영처럼 나타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본질을 관통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본질 말이다. 그것은 브라흐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질문)

"당신은 사람들이 분노와 폭력, 섹스 등등을 표현할 때
진실되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대학이나
젊은 세대들이 서양의 젊은이들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소극적이며 덜 폭력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서양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데 더 진실한 것입니까?
섹스나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진실을 향한 성장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째로 진실해지는 것은
전체적으로 사실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들, 이론들,
무슨 무슨 주의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대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대에게 거짓된 인격을 형성시킨다. 그대는 교양이란 이름의
여러 얼굴들을 갖고 있다. 그대가 나타내는 겄은 무엇이든지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실체는 항상 빠져 있다. 그리고 그대는
갑자기 헝동하고 있다. 그대 자신의 삶은 더욱 적어지고 어떤 것을
흉내내는 게임은 더욱 늘어간다. 그것은 그대의 진짜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교양이고 교육이며 문명이고 사회다.
인간은 세련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대에게 세련되어지는 부분이 늘어날 수록
진짜 그대 자신은 줄어든다. 
실체는 교육받지 않은 그대의 내면이다. 그것은 사회에 의해서
물들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어린아이가
홀로 남겨진다면 아이는 동물과 같아질 것이다. 그는 순수하다.
그러나 동물과 같다. 그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엔
어떤 가능성도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홀로 내버려둘 수 없다.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아이의 진짜 자아를 혼란시킬 것이다. 그것은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가면을 주는 것과 같다. 그는 배우가 될 것이다. 그는 진실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아이를 홀로 내버려 둔다면
그는 동물처럼 될 것이다. 순수하고 진실해지겠지만 인간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가르치는 것은 필요악이다.
우리는 그를 교육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그는 인간이 될
것이다. 
제3의 가능성이 이들 명상테크닉들을통해 열려 있다. 명상의
모든 테크닉은 인간에게 부여된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가면과 옷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사회가 주는 것은 언제든지 다시 취할 수 있다.
그래서 그대가 명상을 총해서 그것들을 벗어 버린다고 해도
그대는 동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인간 그 이상의 뭔가가 될 것이다.
그대는 초인, 동물이 아니면서 순수함을 지닌
인간 이상이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이에게는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그를 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대로 두면 그 아이는 
동물이 될 것이다. 물론 그는 순수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을 잃는다. 인간에게 열려 있는 의식의 차원을 놓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진실하지 못한가? 그는 자신의 내면은 동물인 체로
남아 있으면서 겉으로 인간성이라는 교양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분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동물은
그의 내면에서 살아갈 것이고, 인간은 그의 외부에서 살아간다.
그대가 무슨 행동과 말을 하든지 그것은 이중 매듭이 된다. 한 가지는
인간으로서 그대의 체면을 유지해야 하고 또 한 가지는 그대
속에 들어 있는 동물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이 결국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부정직하다. 그대가 이상
주의자가 될수록 그대는 부정직해지는 것이다. 이상은 '이렇게 하라'
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내면 속에 있는 동물은 거기에 반대할 것이다.
그것은 이상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다.
그때 한 가지 얼굴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거짓 얼굴을 말이다.
그리고 동물의 삶은 계속 유지된다. 그대는 성적인 삶을 계속
살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브라흐마차리아(독신 수행)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그대의 성적인 삶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사회 뿐만 아니라
가정 속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대의 의식 속에서도
그러하다. 그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부분이 아닌 것처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대의 생물학적 본성은 교육에 의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결국 원치 않는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
그대의 유전자는, 그대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는 교육을 통해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어떤 학교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대의 내면에 있는 동물을 바꿀 수 없다. 오직 과학적인
테크닉을 통해서만이 내면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단지 도덕적인 가르침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변화된 후에라야
그대는 이중성을 벗어난다. 그대는 단순해지는 것이다.
동물은 단순하며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현자 역시 단순하고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동물과 현자
사이를 오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god)과 개(dog)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을 거꾸로 읽으면 개가 된다. 개를 거꾸로 읽으면
신이 된다. 사실 신과 개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이다. 그것들은
통일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내면 속에서
개로 있으면서 겉으로는 신처럼 행동한다. 바로 이 점이 긴장과
고통을 만들어 낸다. 모든 거짓된 것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추락해서
동물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인간보다 더욱 진실해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동물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 동물은 초월의 문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동물은 변형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에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라. 동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갈등도, 투쟁도,
욕구불만도 없다. 그래서 변형이나 초월의 문제도 없다. 동물은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동물에게 있어서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거짓이란 개념조차 없다.
그들은 진실할 수밖에 없다. 진실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그들은 진실의 노예일 뿐이다. 동물은 진실할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권이 없다.
동물은 오직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어떤 자유도 없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성취이다.
그대는 언제라도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대는 다른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물론 그러한 때에 사람들은 항상 어려움 속에 있다. 선택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그리고 마음은 이루기 쉬운 것을 선택하고 싶어한다.
최소한의 저항만으로 어떤 것을 성취하고 싶어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다. 남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진짜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꾸미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간단하고 쉬운 것을 택한다. 희생 없이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동물은 단지 노예 상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택의 의지가 있는 만큼 어려움과 고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거짓이 있다. 그대는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필요악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동물보다
더 단순하고 순수해질 수 있다. 인간이 더욱복잡하기 때문에 더욱
단순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더 순수해지고 더 단순해질 수는 있지만
동물과 같아질 수는 없다. 동물의 순수는 무의식적인 순수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있다. 이제 그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계속해서 거짓과 함께 살아갈수 있다. 갈등
속에서 자신과 분리된 채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그는 의식할 수 있다. 그리고 거짓스런 행위를
그만둘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진실은 동물의 진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동물은
무의식적이다.  그는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할 수 없다. 그는 자연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실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진실을 강요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은 그에게 진실해지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사회가, 문명이,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해지기를 결심한다. 이 결심은 그대를 하나의 자아로 만들어 준다.
동물은, 거짓 속에만 사는 인간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준다.
사실 그대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부정직해질 때마다 그것은
강요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 아니다. 왜 거짓말을 하는가?
그것은 사회 때문이다. 그대가 진실을 말하면 그대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대는 저짓말을 하고 고통을 피해 간다. 
그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대의 선택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대에게 거짓을
말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그대가 한 번 진실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처음으로 자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진실과 동물의 진실은 다른 것이다. 인간의 진실은
의식적인 진실이다. 인간이 진실해질 때 그는 붓다가 된다. 
물론 붓다도 동물만큼 순수하고 단순하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을
빼고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의식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젊은이들이 더 진실하다는 뽄입니까?'라는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파고 대답할 수 있다. 점점 진실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욱 동물처럼 변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에서 나온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쉬운 길이다.
그냥 추락하는 것이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동양의 젊은이들보다 더욱
동물적으로 깊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동양도 서양을 맹렬하게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 동양의 젊은이들은
아직 거짓 속에 있다. 그들은 아직 염치를 차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선택의 차원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흐름이다.
동양의 젊은이들에겐 아직도 진실해져선 안되는 사회적 관습과
제도가 많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그런 제도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그 혁명의 방향은 동물적 순수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섹스와 폭력이 그토록 난무한 것이다.
이미 한 번 방향이 잡히면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붓다도 헉명 속에 있고
히피도 혁명 속에 있다. 그러나 그 혁명들은 서로 다르다.
질이 다르다. 붓다 역시 모든 제약 조건에 대해서 반대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초월해 간다. 그의 길은 인간이나 어떤 동물보다도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혁명은 동물을 향해 내려가는 혁명이다.
그대 역시 하나의 통일체를 향해 움직여 가지만
그것은 인간 이하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어쨌든 혁명은 좋은 것이다. 한번 마음에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대는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퇴보 뿐만 아니라
진보도 가능하다. 그래서 서양의 젊은이는 조만간에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혁명은 변화라는 점에서 좋지만 그 방향은 잘못되었음을 말이다.
그래서 서양에서 새로운 인간상(人間想)이 탄생할 가능성이 생겼다.
인간은 삶의 제약들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혁명의 재미만 만끽하고 추락해 버린다면
그때 혁명은 파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창조성도
갖고 있지 않다. 사실 종교는 가장 깊은 혁명이다. 하지만
한 번도 그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우리는 종교를 가장
정통적인 것, 올바르고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동물이나 인간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테크닉들은 그런 혁명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바가 진실하라고 말하는 것은 당나귀처럼 되라는 뜻이 아니다.
당나귀로 계속 남아 있으라는 뜻도 아니다. 그대의 거짓된 인격을
자각하라는 뜻이다. 그대를 감추고 있는 옷, 가면,
그리고 이전에 그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대가 아닌 그 모든 것들을
인식하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자비나 비폭력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인도인은 비폭력적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면 그들은 매우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비폭력적으로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폭력이다. 진실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마음
상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도 아니고,
원리도 아니다. 바로 마음의 상태이다. 그대의 마음 상태는 무엇인가?
그대는 폭력적인가? 그대는 화가 나 있는가?
시바가 '진실하라' 라고 한 말은 그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오직 사실만이 변화될 수 있다. 허구는, 소설은
변화될 수 없다. 만약 그대 자신을 변형시키고자 한다면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대는 폭력적이지만
자신은 비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변형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없다. 그런 비폭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대는 변화할 수 없다. 그 대신 폭력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어떻게 그대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우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그대의 해석 없이 그것들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앞에서
'바라보라' 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의 부하가 오고 있다. 그대 자신이
그를 어떤 눈길로 보고 있는지 바라보라. 그대의 상사가 오고 있다.
자신이 상사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를 바라보라. 그대의
눈길은 부하나 상사를 대하는 데 차이점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만약 차이점이 있다면 그대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그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언제나 편견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쓰고 사람을 본다. 거기에는 항상 그대의
해석이 따른다. 그가 부자라면 그대는 다르게 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가난하면 또 다른 방식으로 본다. 거기에서는 나름대로의
균형을 갖추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 그대는 그를
쉽게 대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부자를 대할 때 그는 약간 어렵게 대한다. 이미 거기에는 미묘한 계산이 깔려 있다.
그대의 계산을 살펴보라. 그대가 자녀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
그대는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화를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라. 그 말이 진실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
그대의 아들이 지금 그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면 그대는 화가 난다.
하지만 아들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서 모욕감을 느긴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사실은 그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의 에고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만약 그대의 에고가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장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화가 난 이유는 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이다. 
진실로 사랑 때문이라면 그대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랑 속에서는 에고가 사라진다. 거기에 상처받을 에고는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대가 단지 가장을 하는 것인가?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느끼는 것인데도 말이다. 아니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 그에게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 그리고 무엇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아내어야 한다.
그대가 변형하는 데는 사실의 부분만을 변형시킬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변형할 수도 없다. 허구는 변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생각과 그대가 하고 있는 모든 것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 그리고 사실을 파 내어라. 그대의 해석과 변명을
갖다 붙이지 마라. 그럴싸한 말들로 색칠하지 마라.
그대가 깨어서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면 그대는 점점
진실해질 것이다. 그 진실은 동물의 진실과 다르다. 그 진실은 깨달은
사람의 진실이다. 그대 자신이 얼마나 추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얼마나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 알수록 그대는 자신의
내면을 관통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넌센스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더욱 깨어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대의 추함은 점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추함은 그대의 무의식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추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계속되어질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대의 추함은 번지르한 것으로
겉을 가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추함이 숨겨져 있지만 절대로 그 속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아들은 에고가 상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숨기려 한다. 그대는
자신의 추함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숨길 뿐이다. 마치 닭이 숨을 때 자신의 머리만 땅속엔 박고
자신이 안전하게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형편이다. 그대는
자신에게 폭력이 숨어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고 있다.
그대는 오직 자신만을 속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은 정말로
지고한 존재라고 믿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착각에서
생긴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가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
그대를 아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대가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하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을
통틀어서 네 명의 친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대의 친구는 그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결코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친구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친구는 항상 그대의 등뒤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인가?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만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타인을 속일 수 없다. 오직 자기 토취만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대는 어떤 누구도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해석을 던져 버리고 아무런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라. 그리고 두려워 마라. 추한 것들이
거기에 수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 장면을 두려워한다면
그대는 결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지켜보라.
이것이 바로 지켜본다는 것의 의미다. 그것의 적나라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뿌리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낱낱이 분석하라.
왜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 그대가 어떤 식으로 그것을 돕고
유지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대는 추한 것들을 키워 왔다. 이제 그
모든 실체를 들여다보라.
시바는 말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즉시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바로 이
순간 그대는 모든 추함을 없애 버릴 수 있다. 그것을 보호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그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뿌리를 캐낼 수 있는 사람도
바로 그대다. 그것은 그대의 창조물이다. 지금 당장 그대는
그것을 던져 버려라. 그리고 다시 쳐다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대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대는 그것이 어떤 현상인찌,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매순간 그것을 키켜왔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욕을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만약 그의 말이 옳다면? 그때는 그저 보아라. 그가 옳을
지도 모른다. 그대 자신보다 그가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는 외부의
방관자로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응하지 마라. 기다려라.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주시할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욕을 했다.
그리고 나는 사실을 주시할 것이다.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옳다면 나는 당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우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틀렸다면
나는 당신의 실수를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주시하도록 시간을 달라."
결코 반사적인 행동을 하지 마라. 만약 그대가 나를 욕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다려라. 7일 동안만 살펴보자,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을 주시해서 살필 것이다. 그대가 옳을 수도 있다. 그대의
입장이 되어 나를 살펴볼 작정이다. 그리고 그대가 옳았을 때
나는 그대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그대가 틀렸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니 반사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그대는 나를 욕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나 역시
그대를 욕하란 말인가? 그러면 나는 주시 속에서 빠져 나온다.
나는 반사적인 행동을 한다. 그대가 나를 욕하면 나 또한 그대를
욕한다.
기억하라. 반사적인 행동은 결단코 옳지 않다. 그것은 옳을 수가 없다.
그대가 나를 욕한다면 그대는 나를 화나게 하는 가능성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화를 낸다면 나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나는 그대에 관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대의 욕설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후회할 것이다.
반응하지 마라. 실제 상황을 지켜보라. 그대의 관찰이 전체적이라면
그대는 어떤 것도 쉽게 버릴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손안에 있다.
그대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억압도 없다.
그대가 사실을 지켜볼 때 거기에는 어떤 억압도 있을 수 없다.
그대가 좋아해서 그것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싫어서
떨쳐 버리든지 둘 중 하나다.

이제 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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