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설의 판과 틀
조남현
= 차례 =
비평시리즈를 발간하면서 1
머리말 3
1. 고급의 소설과 작가를 위하여 5
1. 고급소설의 시련 5
2. 작가들을 위한 고언 19
2. 어둠의 시대와 삶의 빛 69
1. 최명익의 경우 36
2. 정인택의 경우 50
3. 소재와 작가적 '힘'(안회남 론) 64
4. "두만강"론 84
1. 도 입 84
2. '고향'과 "두만강"의 대비 87
3. "두만강"의 씨줄과 날줄 97
4. "두만강"의 그늘 109
5. 625에 대한 시각과 소설화 방법 114
6. 1970년대 소설의 실상과 의미 135
1. 배경요인 135
2. 1970년대 작가의 뉘앙스 139
3. 사회학적 상상력의 명암 145
4. 분단문학의 줄기 161
-- 여기서는 625의 표현이 6.25로 되어 있음을 사과드립니다. 31^절, 81,15^등
도 6.25와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사오니 읽으시는 데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그러나 2,3권은 재대로 되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1. 고급의 소설과 작가를 위하여
1. 고급소설의 시련
하나의 문학적 현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작가라는 존재 이외에도 많은 존재와 그 힘이 필요
하다 정책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후원해 주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며, 원고더미를 책의 형태로
변형시켜 구매충동을 느끼게 하는 출판사도 있어야 하며,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좋은 작품을 가
려내어 알림으로써 독자들이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는 일이 없게끔 유도하는 비평가들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학적 현상에 관한 한, 작가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는 바로 독서대중 또는 문학소
비자다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려운 마음을 갖고 쓰는 일기조차도 사실은 읽는 사람을 의식하고 쓰
는 것처럼 글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읽힐 것을 전제로 하고 또 기대하는 법이다
사르트르가 '제 2 의 작가'라고 격상시켰고 앨빈 토플러가 '문학소비자'(culture consumer)라
고 불렀던 독자의 존재와 그 독서행위에 대한 관심은 최근 1, 20년 사이에 부쩍 고조된 느낌이다
상당수의 문학이론가들이 지금까지 나온 각종 문학사나 문학이론을 독자라는 요인을 배제한 반쪽
짜리 문학사나 문학이론이라는 데 입을 모으고 있는 문학사회학이니, 기호학이니, 수용미학이니
화행이론이니 하는 방법론들은 한마디로 독자와 독서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통전제로 삼
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본질을 규명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세운 바 있는 로만 인가르덴은 "문학작품"이란
책에서, 문학작품은 작가에 의해 제작된 텍스트라는 예술적인 일면과 독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텍
스트의 구체화라는 심미적인 일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로만 인가르덴은 작품의 형
성과정에 있어 작가 못지 않게 독자도 큰 힘을 발휘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독서이론
하면 얼른 독일 문예학자 볼프강 이저(Wolfang Iser)를 연상케 된다 이저는 "독서과정"(1976),
"텍스트의 호소구조"와 같은 논문들을 모아 "독서행위(Der Akt des Lesns)"(1976)라는 아직 우리
독자들에게는 낯선 느낌이 있는 책을 펴낸 바 잇다
이저는 이 책에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텍스트와 '작품'을 구별하면서 텍스트는 독서행위를
통해서 재구성되어 작품으로 태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을 조금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독
서행위는 창작행위와 동위적 수준에서 어울린 끝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또 이저
는 소설텍스트는 언어구조와 효과구조로 짜여져 있으며 텍스트가 효과구조를 갖는 것에 반해 독
자들은 반응구조를 갖는다고 설명하였다
이저의 이와 같은 논리는 독자 혹은 독서행위를 작가나 창작행위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하
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시대의 추상적 인간에 관해 쓰지 말고 자기 시대의 인
간 전체에 관해서 또 동시대인을 위해서 쓰라고 열변을 토한 데서 짐작되는 것처럼 사르트르는
이저보다 훨씬 전에 최대한으로 '독자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창작행위의 당위성을 지적하였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장에서 작가는 어떤
세계관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독자를 결정하는 것이며 거꾸로 독자를 선택함으로써 그의 주제를
결정짓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보다 큰 양적 반응만을 염두에 두거나 기대하면서 소설을 쓰는 일
부 우리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사르트르가 암시했던 독자 제한론은 문학에 있어 독자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감도 없지는 않지만, 기존의 작가, 독자 관계가 더 이상 계속되기를 바라는
태도는 어리석다는 판단도 내포하고 있다
작가가 모든 독자들 위에 군림하여 진리와 교양의 유일한 공급원임을 자처하고 또 그런 관념이
통용되었던 시대는 이제 가버렸다는 뜻도 깃들어 있다 "백인의 독자들은 제아무리 선의를 가진
독자들이라 할지라도 흑인 작가에게는 여전히 타인"이라고 사르트르가 비유한 것은 한 작가가 제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모든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어려운 법이
라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베스트셀러가 된 저급의 소설들이 종국에 가서는 문학이론가들의 관심권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고급소설들은 교육수준이 아주 낮은 독자층 즉 일차원적인 인간들로부터는 처음부터 외
면당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우리 나라의 일급작가들 중 자신의 소설이 계층과 연령과 지식정도
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읽힐 것이라고 자신 있게 낙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르트르의 것이든 이저의 것이든 위와 같은 독자론은 예술소설이니 하는 것들이 그 글을 쓴
작가들이 만족할 만큼 많이 읽히고, 팔리고, 수용된다는 전제 아래 나왔을 것이다 고급소설, 예
술소설, 본격소설이 심각할 정도로 팔리지를 않아 이저가 말한 대로 소설이 단순한 텍스트로 굴
러다니는 마당에서야 어찌 수용미학이니 문학사회학이나 기호학이니 하는 것이 생색을 낼 수 있
겠는가 현상이 시원치 않게 돌아가는데 어찌 이론이 활기를 띨 수 있겠는가
필자의 어림짐작에 의하면, '좋은 소설은 안 팔리고 안 읽힌다'는 문학관계자들의 비감 어린
소리는 1970년대 후반기 몇 년 동안만 못 들어 본 듯하다 그때는 효용가치가 높은 책은 그에 비
례하여 교환가치도 높았었다 판매량이 많은 소설은 그 질적 높이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도식까지 나오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기에 다소 신명이 났던 우리 소설계는 1980년대에 들어오
자마자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 버리는 암울한 현상을 다시 목격해야 했고, 더 나아가서는 독서대
중 불신론에 휩싸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열이 매우 저조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전 어느 신문에 난
통계를 본즉 우리 나라 사람 1인당 독서량이 선진국의 10분의 일 수준에도 채 못 미친다는 것이
었다 팜플렛 지식과 시험공부를 통해 속성된 토막지식이 판을 치는 풍토에 대해선 많은 식자들이
우려하고 개탄하고 놀라곤 하였다 예로 부터 문을 숭상하고 서책 읽는 것을 최고의 가치 있는
행위로 삼았던 우리 민족의 기풍은 오늘날 어디로 갔는가고 울분을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풍토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요인이 지적될 수 있겠으나 책을
읽지 않고도 보람 있게 또 쾌적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풍조와 독서지도를 거의 할 수 없게
끔 만들어 버린 교육환경이 주인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소설이 안 읽히고 안 팔리는 크고 작은 요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각종 황색지와 악서가 독서계를 오염시키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대체로 이런 책이
나 간행물들은 과대광고와 허위선전의 부추김을 받아 무서운 세력으로 퍼지기 마련이다 지난
1970년대에 우리 문단과 독서계에서는 상업주의 시비를 몇 년간 두고두고 재여시킨 적이 있다 상
업주의 시비의 도화선이 되곤 했던 대중문학이나 행상소설의 작자들은 대체로 자기 방어나 자기
합리화의 반응을 보였는데 이러한 방어욕구나 합리화욕구의 밑바닥에는 결국 전통적 관념과 엄청
난 반응이 가져다 준 작가들 특유의 선민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류작가이든 삼류작가이든 교양과 진리의 유일한 공급원임을 자
부하던 때와 또 그것이 통용될 수 있었던 때는 가버렸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작가들은 자기
소설을 과대광고해서 판매부수를 올리려는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는 책임감도 없고, 작가를
이용하려는 의도로 가득 차 있음도 알아야 한다
고급소설이 잘 안 읽히고 잘 안 팔리는 두번째 요인으로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법이 쾌락지향적
이며 즉각적인 효과주의에 터를 잡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골치 아프게 살지 말자, 문화니
예술이니 혼이니 하는 따위의 개념들과 만나 속썩이며 살지 말자는 식의 풍조가 만연하다 보니
어느 덧 고급소설, 정통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며 유용치 않다는 극단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마르쿠제가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명명했고 골드만이 '무식한 전문가'(the illiterate
specialist)라고 경멸조로 불렀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또 이런 사람들이 별 불편 없이 사회
생활을 하게 되다 보니 문학은 어느덧 교양필수과목에서 빠져 버리고 말게 된 것이다 토플러가 '
문화적 소비자'라는 글에서 몇 사람이 만들어 놓은 통계자료를 인용, 제시한 것을 보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소설독자가 줄어드는 것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세계적인 추세임을 짐작케 된다
어떤 통계자료에 의하면 미국내의 고급예술 감상자들 중 교육자가 13퍼센트를, 과학자가 10퍼
센트를, 의사가 7퍼센트를, 회사원들이 2퍼센트를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1950년
대의 미국 남자가 미술책 구독자 중 40퍼센트를, 브로드웨이쇼는 63퍼센트를 차지하였다는 재미
있는 통계도 제시하였다 토플러는 미국의 문화소비자들, 즉 고급문학의 독자들은 교육수준과 소
득정도가 높을수록 많다고 하면서 교육수준의 높낮이를 하나의 기준으로 잡고 있다 그리하여 예
상대로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고급문화 소비자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사정을 우리의 경우에다 그대로 대입시킬 수는 없겠지만 고급문학은 교육수준이 높은
독자를 가장 뜨겁게 의식한 가운데 씌어지고 또 씌어져야 할 것이라는 명제는 흔들릴 수 없을 것
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고급소설이 당혹감을 안겨 줄 만큼 안 읽히는 또 하나의 배경론으로는 사
회과학서적에의 경도현상을 들 수 있다 그나마 책 좀 읽는다는 대학생들도 현실적인 요구와 시대
적 요청에 부응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거의 문학서는 도외시해 버린 채 사회과학서적들에 탐닉하
고 있는 실정이다 서양에서도 1980년대는 이데올로기가 중심개념이 되었던 시기라는 견해가 긍
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만큼 이러한 독서경향은 자연스러운 면도 있기는하다 또 어떤 학자
가 20세기는 '사실의 시대'(the age of fact)라고 규정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는 사실을 알려 주
고 진상을 토해내는 책들이 더 긴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구의 성격이 강한 소설양식에
서 과거의 사실이든 현재의 사건이든 그것에 관한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끄집어낼 수 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사회과학서적을 비롯한 다른 책들이 한 개인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관념을 주는 것이라면 소설
은 이러한 지식과 관념을 잘 뒷받침해 주고 통어해 주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뼈'를 심어 주는 책만 찾지 말고 '피'와 '살'을 만들어 주는 소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명
체가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뼈, 피, 살이 모두 필요한 것이라는 상식을 머리에 떠올리면 소설
독서무용론 자체가 '무용한 것'임을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이제 고급소설, 예술소설, 본격소설의 독저들을 확대시켜 나가는 방안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
다 차후, 보다 훌륭한 소설이 나올 터전을 닦고 지키려면 독서대중의 양적확대는 물론 질적 상
승을 유도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첫째로, 고리타분한 주장이긴 하지만 전반적인 의미에서의 독서교육이 좀더 강화되어야 할 것
이다 한창 독서를 많이 해야 할 대학생들을 보면, 나태하고 무성의해서 책을 안 읽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책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다 엄청나
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아무런 조언이나 안내도 없이 책을 열심히 읽으라고 외쳐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런데 독서교육은 교실에서 또 선생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성세대 전부가
독서지도교사임을 자임하면서 양서야말로 가장 좋은 보약임을 실천으로써 가르쳐야 한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소설독자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각종 국가고시, 취직시험 등 웬만한 시
험에 문학과목을 집어넣는 게 어떠냐고 한다 이 제안은 한번 웃고 넘길 것만은 아니다 또 소설
이나 시를 읽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이런 책들은 일찍이 조선조의 선비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주로 여자들이나 읽는 것이라는 따위의 고약한 통념도 빨리 깨져야 한다
둘째로, 고급소설의 독자들을 늘리기 위해서는 저급의 소설들에 대한 과대광고 행위가 자제되
어야 할 것이라는 제언을 해 두고 싶다
셋째로, 작가들은 무지한 대중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옛날의 영화에 연연하기보다는 '제한된'
독자들에게만이라도 강렬하게 호소할 수 있고, 충격을 줄 수 있는 지속적인 작품제작에 힘써야
할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여러 방면의 사고방식이 바뀌어 가는 마당에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
가 옜날과 같아야 한다고 고집할 수는 없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 작가들은 새로운 작가, 독자 관
계를 정립해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작가들을 위한 고언
'한국문학 왜 감동을 못 주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을 수 있다 요
즘처럼 문학지도 많이 나오고 게다가 문인들에 대한 가시적, 불가시적 제약도 많이 터져 나간 마
당에 이런 질문은 시의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고 마땅치 않은 눈길을 보낼 사람들도 있을 것이
다 이와 반대로 양적 팽창, 생산조건의 성숙이 반드시 질적 상승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
리에서 출발하여 이 질문을 깊게 파헤쳐 보는 계기로 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양적 팽창, 외
적 조건의 확충이 가져오기 쉬운 병리현상을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 이 질문의 가치를 가늠할 수
도 있다 실제로, 그달그달 쏟아져 나오는 소설들을 접해 보면 '한국소설은 어째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핵심에서 빗나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과거보다는 분명 더 많
은 양의 소설들이 나오고 있는데 '감동적인' 작품의 숫자는 결코 그에 비례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다 피상적으로만 관찰한다면, 수준 이상의 소설들을 읽는 독자들의 숫자가 증가할 기미를 보
이고 있지 않는 현상도 위와 같은 질문이 단순히 의례적인 것이 아님을 잘 뒷받침해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설 독자의 증감은 시대의 소설과 작가의 성패를 따지는 데 있어 신뢰할 만한 기
준이 될 수는 없다 특정 작가와 작품을 유행성 충동에 사로잡혀 또는 요란한 광고의 포로가 되
어 사 보는 독자들이 일시적으로 급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대의 소설문학의 성공이라고 재단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설독자들의 숫자는 늘어날수록
좋은 것이겠지만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문인들이 용인하거나 체념하고 있는 것처럼 문학독
자들이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현상은 결코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것으로 돌려야
한다 오히려 작가들은 거의 숫자가 고정되어 있다시피 한 소설독자들이 그나마 소설양식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나 불신감을 지닌 나머지 하나 둘 떠나가는 일이 없게끔 하는, 앞날에 대한 대비책
을 생각해야 한다 좋은 작품을 써서 한 명이라도 문학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사람을 늘려야겠다
는 발상도 좋긴 하지만, 내가 쓴 작품으로 말미암아 소설무용론을 내걸면서 문학 밖으로 이탈하
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생겨난 것은 아닌지 하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특히 이런 생
각은 값싼 소설로 유별난 물질적 보상을 받은 그런 류의 대중작가들이 더욱 자주 가져야 할 필요
가 있다 삼류작가가 많은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리는 그 사이에 다수의 독자들은 소설양식과 작가
라는 존재에 대해 뒤틀려진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며 또 오해된 역할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뒤틀린 관념과 오해된 역할기대가 극을 달리다 보면 소설양식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되며 정통작가들은 대중으로부터의 소외를 더욱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날, 소설양식에 대한 기본인식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리잡혀 있음을 특히 작가들은
깨달아야 한다 한마디로, 문학은 지적 사회의 제왕이라는 영광을 더 이상 누릴 수가 없게 되었
다 인간과 삶, 시대와 사회를 알기 위해 과거의 사람들은 곧잘 시를 외우고 소설을 탐독하였지
만, 현대인들은 문학을 어디까지나 인간학과 그리고 정신사의 '한 분야'로 고착시키고 있다 소
설을 쓰는 작가들 자신마저도 문학작품을 읽어야 교양이이요, 지식인이지라는 말을 자신 있게 내
뱉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이제 우리 작가들은 소설 쓰는 일을
문자 그대로 직업으로 생각해야지만 쓸데없는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게 된다
앞서, 암시한 바 있거니와, 한국소설 왜 감동을 못 주나 라는 글제를 필자는 오늘날 한국소설
과 작가들이 처해 있는 불리한 환경과 그에 따른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고쳐 보고 싶다 오늘날
우리 소설과 작가들이 어떤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기에 또 우리 작가들 자체가 어떤 문제점을 안
고 있기에 기대한 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하는가 그 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의 작가들과 작품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여러 각도에서 추출해 볼 수 있거니와, 여기서는 주제
의식의 생성과 표출이라는 측면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자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를 대전제로 놓고 출발한 작가들은 누구나 다 자기 작품이 한
시대나 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했거나 더 나아가서는 한 이념이나 사상을 생산하는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예컨대 로버트 니스베트(Robert Nisbet)가 "예술형식으로서의 사회학"이란 책에서 주장한 것처
럼 사회적 풍경화나 사회적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자기 작품이 평가되기를 바랄 것이고 혹은 테
리 이글톤(Terry Eagleton)의 말처럼 "문학적 텍스트는 이데올로기의 생산"이란 가설을 충족시키
는 것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할 수도 있다 아니면 최소한도 골드만류의 '집단의식'이나 '세계관'
을 일푼의 거짓 없이 반영한 결과로 평가되었으면 할 것이다
한 개인을 사회적, 역사적 산물로 보거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의 분비물로 이해하는 작가
들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배경이나 인물이 한 시대와 그 속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그려 낸 풍경
화나 초상화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날 우리 작가들은 이처럼 사회적 풍경화나 초상화를 그려 내는 것을 작가의 일차적 임무로
파악하는 데 별 이의를 달지 않고 있거니와,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작품이 역사학자, 사회학
자, 정치학자 등에 의해 해당 학문의 참고 자료로 활용되는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알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작가들의 소망은 오늘에 와서 더욱더 커진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소망은 단순히
소망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런 소망을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작가들의 노력도 더욱 치열해질
것이 분명하다 최근 많은 작가들이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사실복원작업'과 발을 맞추어 과
거의 역사적 사건과 그에 관련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그려 내기에 부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러한 노력의 산 표본이다
그러나 소설은 역사학이나 사회학과는 달라, 사실 기록에다 최종의 목표를 두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이나 시회학이 뼈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소설은 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
늘날 일반독자들은 어떤 것을 요구하는 수준과 입장에 서 있는가 이를 알아야지만 오늘날 우리
작가들이 처해 있는 불리한 여건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해방 이후 40년 이상 우리의 정
치문화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사실과 진상에 눈을 크게 뜨지 못하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사실과 진상에 기갈이 들린 독자들은 환상적, 예언적 요소 등 포스터(E.M.Forster)의 말처럼 '가
외의 적응'(additional adjustment)을 요구하는 소설양식에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의 무수한 충격적인 사건들에 얽힌 비사가 바야흐로 홍수처럼 터져 나오고 있
는 마당에, 속된 말로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비사와 실화가 범람하고 있는 마당에 소설을 읽고
앉았을 여유가 어디 있냐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정도다
오늘날 우리 작가들과 소설이 처해 있고, 이내심을 갖고 해소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다시 말해
문학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는 사회과학서적에의 경사 현상, 폭로물
의 범람 현상, 왜곡된 문학관의 심화 현상 등을 특기할 수 있다
첫째, 옛날 같으면 문학지나 창작집에 눈을 돌릴 법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발길을 돌려 사회과
학서적 쪽으로 가버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과학 쪽으로 발길을 돌린 독자들은 오늘의 우
리 사회처럼 인식론과 가치관의 변화가 큰 폭으로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에서는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요 힘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극단론자들까지 안고 있다 현실적인 이슈의 제
기와 해결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소설양식은 직접적이지도 못하며 효과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 이
들 소설양식 기피론자들의 변명의 골자다 개인의 문제나 사회적 이슈의 해결책을 찾는 데 있어
소설이 사회과학서적보다 '비효과적'이며 '비능률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
으리라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나 소설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학적 상상력과 시각은 오늘날 절
대적인 위세를 떨치고 있거니와, 사회적인 문제의 제기와 해결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과학서적에 거는 기대는 나날이 높아만 갈 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소설 들 중에서도 이른
바 진보적인 사회과학서적과 논의의 궤와 수준을 같이한 소설들이 우선적으로 눈길을 끌 수 있게
된다 인간을 어디까지나 개별자로 고집하면서 그 내면의 떨림을 집요하게 추적한 따위의 소설들
은 아주 제한된 독자들 사이에서나 읽히고 이야기될 뿐이다 몇몇 이론가와 독자들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내걸면서 최소한 작가들의 인간관이 보다 넓은 범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했
으나 잠재적인 문학독자들이 사회과학서적으로 발길을 돌리는 현상, 대다수 작가들이 인간은 사
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만을 절대 신봉하는 현상은 좀처럼 약해질 줄 모르고 있다
둘째, 우리 소설과 작가들을 괴롭히고 있고 한편으로는 싱거운 표현양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존
재로 각종 폭로물을 들 수 있다 요즈음 신문들과 잡지들은 다투어 가며 ㅂ;화, 야사, 고백 등 '
흥미진진하고, 충격적인' 폭로물을 내놓고 있다 이런 폭로물들은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
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부정과 비리, 탐욕과 횡포에 대한 뜨거운 분노와 냉정한 비판
의식을 일깨워 준다는 순기능을 갖고 있긴 하다
다투어 가며 폭로물을 터뜨리는 현상이 언제까지 갈지 알길은 없지만, 일반독자들에게 충격을
얼마만큼 주느냐 하는 면에선 기본적으로 허구의 양식인 소설이 실존인물과 실제사건을 대상으로
한 이들 폭로물과는 처음부터 경쟁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호소요, 도발'이라고 한 아
놀드 하우저(Arnold Hausr)나 '문학은 폭로'라고 한 사르트르가 소설보다 훨씬 극적인 비화, 야
사 등이 범람하는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았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그래도 예술과 문학의 호소나
폭로로서의 효능을 여전히 역설했을 것인가
물론 이 두 사람이 말한 호소나 폭로가 갖는 의미라든가 지향하는 세계가 작금의 우리 사회에
서 일종의 유행이 되고 있는 폭로물이 가져다 주는 충격의 내용과 동질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문학이 주는 충격은 기사나 르포가 주는 충격보다는 외형상으로는 약할지는 모르나 우리의 인식
세계의 고양의 가능성은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소설을 앍어 내고 소설가에게 결과적으로 힘이 되어 줄 법한 독자들 중 적지 않은 사
람들이 폭로물 쪽으로 시선을 돌려 일시적으로나마 소설이 읽히지 않는 우울한 현실이 뚜렷하게
솟아오르게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셋째, 소설다운 소설이 더 나아가서는 수준 높은 소설을 판별해 내는 시각과 기준이 혼란에 빠
진 점도 작가들로 보아서는 결코 이롭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 한때 여러 소설이론가들과 전문적
인 독자들은 특정 소재나 문제를 다룬 것으로써 일단 한몫을 보는 소설들에게 이의를 표시한 적
이 있거니와, 작품을 어느 한 시각이나 실리적 관념으로만 재어 그 높낮이를 판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말하자면 객관적이고 건실한 비평정신을 가로막는 소재주의라든가 자기류
의 단순논리로 작품을 변별하는 태도가 성행할 때, 참다운 작가와 소설이 오히려 소외되는 결과
가 빚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러이러한 인물을 다루었으니까 훌륭하고 또 이 소설은
이러이러한 주의, 주장을 내세웠으니까 주목할 만하고 하는 식으로 '총체적 시각'을 배제한 채
마구 추어 올리거나, 내버리다 보면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는 현상도 나타나게 될 것이고 소설을
외면하는 독자들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는 흔히 생각하듯 비평가에게만 떠맡길 일은
아니다 '총체적 시각'은 소설을 만들고, 보급하고, 광고하고, 소개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의식
해야 할 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본의도나 효능의 면에서 소설의 인접양식, 대체양식이라고 할 만한 것
들에 많은 독자들이 기울어지고 있는만큼, 독자적 존재로서의 소설의 위치를 분명히 알리고 또
지키려는 노력을 배가시킬 수밖에 없다 독자적 양식으로서의 소설의 가치를 지키고 키워 가려
하는 작가들에게 소설은 특정한 제재를 다루어야 하고, 특정한 관념을 견지해야 하고, 특정한 인
물을 내세워야 하는 따위의 주문은 오히려 창조적인 주제의식을 가로막는 것일 수가 있다 소설이
야말로 개인의 삶과 사회를 억압하는 도식적 사고, 획일주의의 발상을 파괴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또 '큰' 긍정을 낳기 위해 '작은' 부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지적 노력이 아닌가
잠재적인 문학 독자들이 혹은 사회과학서적 쪽으로 혹은 충격적인 폭로물 쪽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소설양식이 보여줄 수 있는 효능의 양극에서 사쇠과학서
적과 폭로물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양식에서 '피'와 '살'을 빼 버리고 '뼈'만 남겨 놓
을 경우 그때 우리는 사회학개론이나 역사기록의 형태만을 확인하게 되며 반대로 소설에서 작가
의 정신이나 사상을 계속해서 빼놓고 생각할 경우 그때 남는 것은 독자들의 가벼운 호기심만을
자극하는 기록물일 것이다 소설은 분명 동시대의 사회를 잘 헤아릴 줄 알고 삶의 본질을 잘 판
독할 줄 아는 사상가로서의 측면을 지닌 작가가 쓴 것이기에 사회과학서적을 한 지향점으로 놓을
수 있는 것이며, 또 소설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로 짜여져 있는 것이기에 '흥미'와 '호기심'을 불
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소설가는 유능한 사회과학자처럼 개인과 사회와 시대를 잘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능란하고 용의주도한 르포라이터처럼 독자들의 흥미를
한껏 자극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 중의 어느 한 가지 길만을 골라서 갔다가는 그때 소설가의 얼굴은 없어지고 대
신 아류의 초라한 모습만 보이게 될 것이다 사회과학자가 짤막하게 제시한 명제나 가설을 입증하
느라고 수백, 수천 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진땀을 흘리는 이류소설가가 되든지 아니면 무
가치한 사람들의 무가치한 이야기나 만들어 내는 통속소설가가 되기 쉽다
이처럼 사회과학서적과 폭로물은 오늘의 한국 작가들에게 분명 하나의 자극이요 암시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작가의식을 잡아매 놓는 덫이 될 수도 있다 덫에 채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부하고 연구하는 작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직접체험
의 내용이야 서로 비슷해져 가고 있는만큼, 간접체험의 양과 질에 의해 작품의 성패가 대략 결정
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학사상", 1986 5. "동서문학", 1988 9)25
2. 어둠의 시대와 삶의 빛
1. 최명익의 경우
최명익은 해방 이전에 10편도 채 안되는 중, 단편을 남겼음에도 일찍이 소설사가와 논자들로부
터 1930년대 지식인소설의 대표적인 작가, 이상과 견주어도 손색 없을 만큼 심리소설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열어 놓은 작가 등의 긍정적 평가를 받아 왂다
가령, 조연현은 최명익의 창작집 "장삼이사"(1947)를 대상으로 서평의 형식을 취한 '자의식의
비극'("백민", 1949 1)이란 글에서 문일, 정일, 병일, 명일 등 최명익 소설의 주인공들이 한결같
이 경멸과 자위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원인으로 "그들 인물들이 자신의 생활을 갖지 못한"점
을 지적했다 그리고 최명익 소설의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기가 누리고 싶은 생활을
갖지 못한 이들 인물들 옆에다가 나름대로 자기 생활을 가진 인물들, 예컨대 '심문'의 여옥, '비
오는 길'의 사진사 이칠성 등을 병치시켜 넣은 점을 꼽았다
이어 조연현은 이들 주인공들의 공통된 정신적 바탕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문일, 정일, 병
일, 명일, 현일 등의 명명법을 볼 때 형제간이라는 착각마저 안겨 주는 이들 주인공들은 "어떻게
살아야 인간은 후회 없는 일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과 "산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죽을 때까지는 살 수 있다"라는 운명론적인 체념이 공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조연
현의 이러한 파악은 단편 '비 오는 길'에서의 병일의 경우에 특별히 집착한 데서 빚어진 결과다
최명익이 만들어 낸 인물들은 무역증이라든가 과다한 자의식 또는 이재선이 "한국현대소설사"
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자포자기적이고 정신적인 결벽성"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
주인공들을 정신적 바탕과 기질의 면에서 완전히 쌍생아의 관계로 고착시키는 것은 무리라 아니
할 수 없다
최명익의 소설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공장에서 소사, 급사, 서사의 일을 한 몸으로 다 해내고 있는 병일을 내세운 '비 오는 길'("조
광", 1936. 5__6), 아버지로부터 파문당하다시피한 채 폐병을 앓는 한 여인과의 사련을 이끌고
나가는 교사 정일의 입장과 자의식을 깊게 파헤친 '무성격자'("조광", 1937 9), 교장 후보에까
지 오른 영어 교사로 세사를 자꾸 피해 가려고만 하는 문일을 주인공으로 한 '역설'("여성",
1938. 2__3), 일제가 강요하는 의미의 '시대인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쫓겨나 폐병과
절망감, 그리고 방황심리의 포로가 되어 버린 현일의 경우를 다룬 '폐어인'("조선일보", 1939.
2. 5.__2. 25), 상처한 화가로 옛 애인을 찾아 하얼빈에 갔다가 그 여인의 비극적인 삶의 행로와
종말을 지켜 보게 된 문일을 내세운 '심문'("문장", 1939 6)은 무리 없이 한 갈래로 묶어 볼 수
있다
이들 다섯 작품의 주인공들이 우선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외적 조건을 지니고 있는 이상, 최명
익의 소설들 중에서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갈래는 '지식인 소설'이라는 이름으
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또 이들 다섯 작품들은 최명익이 특히 작중인물의 내면파악과 심리묘
사에 있어서 동시대의 여타 작가들 사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만큼 큰 의욕과 능력을 보이고 점
에서 심리소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다
'역설'과 '폐어인'의 사이에 발표된 '봄과 신작로'("조광", 1939 1)는 일제가 자기 야욕을 채
우기 위해 강요한 '억지 근대화'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남긴 피해상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들려
주었다는 점에서 논자들의 주목을 받아 오기는 했다 그러나 최명익이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
은 지식인이었고 또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싶어했던 것은 1930년대 지식인들의 자포자기 심정, 무
기력 증세, 소외감, 절망감 등이었고 보면 '봄과 신작로'는 오히려 예외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밖
에 없다
멀리 달아났다가 붙잡힌 색시와 그를 붙잡아 데리고 가는 색시 장사꾼, 그리고 그들 옆자리에
서 속사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마디씩 참견했다 어울렸다 하고는 하나 둘씩 제 갈 길로 가버
린 동승객들을 대상으로 해서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스냅 사진을 찍은 '장삼이사'("문장", 1941
4), 이 소설도 최명익의 주제의식과 서술능력을 유감없이 잘 대변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봄과
신작로'와 마찬가지로 예외적인 경우로 밀려나기 쉽다 하층민의 뿌리 뽑힌 삶을 대상으로 하여
리얼리즘의 시각과 방법을 살린 소설들을 우선적으로 꼽아 놓고 보는 논객들이라면 최명익의 소
설들 중에서 '장삼이사'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최명익은 예의 뛰어
난 심리분석능력을 잘 발휘하고는 있다 작가는 피사체로서의 '장삼이사'에게 충실하기보다는 그
들 '장삼이사'의 살믜 모습을 살피고 헤아리는 사진사(작중의 '나')에게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았
다 이런 점에서 그는 리얼리스트라 해도 주관적인 리얼리스트라 해도 주관적인 리얼리스트에 가
깝다
만일 '장삼이사'에서 관찰자인 '내'가 처음부터 아예 설정되지 않았더라면 최명익은 제목에 더
잘 부합되는 방향으로 구체성과 전형성을 갖춘 리얼리즘소설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
에서 '신사', '당꼬 바지', '가죽 재킷', '곰방대 노인', '여인', '촌 마누라', '젊은이' 등으로
불릴 뿐 구체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는 작중인물들은 '나'로부터 동정심보다는 반감을, 일체감
보다는 거리감을 사고 있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 운연중에 내비친 관찰자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감
즉 지식인과 대중적 삶 사이의 거리감은 이미 '비 오는 길', '무성격자', '폐어인'에서 분명하게
실연된 바 있다
'비 오는 길'에서 병일은 애를 잘 키우고 돈 모으고 하는 범사에서 행복감을 만끽하는 사진관
주인 이칠성을 "청개구리 뱃가죽 같은 놈"이라고 경멸했고, '무성격자'에서 정일은 평생을 돈 모
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던 아버지를 끝까지 긍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폐어인'에서 현일
은 옛 동료 교사였던 도영이 "덫 속에 갇힌 쥐가 오직 할 일은 덫 속에 있는 미끼를 먹고 사는
것밖에 없다"고 자기 합리화하면서 무조건적인 현실적응태도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해 속으로는
경멸하게 된다 현일은 "김 선생과 나는 비위가 좋아야 산다 죽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도
영의 말에 긍정하는 빛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지식인과 세속적 인간들(das man)을 대비시키거나 아니면 양자 사이의 뚜렷한 거리를 확인시키
거나 한 최명익의 근본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최명익은 대중적이거나 세속적인 삶을 아래로
내려다보려는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초속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기 위한 것도 아
니었다 그는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1930년대의 우리 지식인들이 만날 수밖에 없었고
겪을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과 절망감, 자조적 감정과 소외의식을 보다 인상 깊게 음각하려 한 것
으로 파악된다 최명익은, 동시대의 현실과 역사에 대해 도저히 외면할 수도 눈감을 수도 없으나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 지식인들이 무기력과 절망감의 수렁에 참으로 깊게 빠져
들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위와 같은 대조법을 선택하였다
최명익은 대조법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그는 무력감, 절망감, 소외감에 휩싸인 채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또 충격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물현상에의
탁의'라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이것은 최명익 특유의 내면회귀성향과 심리주의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일이는 옴두꺼비의 안내로 의외에 발견한 무덤가에서 생명체이던 형해조차 이미 없어진 지
오랜 빈 무덤 속에 드러누웠거나 앉아 있을 옴두꺼비를 생각하며 자기 방에 누워 있는 자기를 눈
앞에 그려 보았다('역설')
내게는 청개구리의 뱃가죽만한 탄력도 없고, 의액이 풀잎같은 청기도 날카로움도 없지 않은
가?('비 오는 길')
그래서 나두 이 쥐를 배워서 이전 아무런 것이라도 먹구 살려우, 별수 있소? 아무런 처지서라
도 살아야지, 그래 나는 이 며칠째 쥐똥 밥이건 팥밥이건 막 먹지요, 김 선생두 이 쥐의 철학을
배우시우('폐어인')
새는 다시 날려고 애써 몸을 솟구다가는 또 떨어지고 그때마다 긴발톱과 모지라진 날개로 해적
이면서 쥐 소리 같은 암담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새는 몇 번인가 조롱이 흔들리도록 몸을 솟
구다 못하여 그만 제 똥 위에 다리를 뻗고 눈을 감아 버린다('심문')
'역설'에서 옴두꺼비는 기본적으로 세상 일에 나서기를 싫어하면서 겉으로 보아서는 안분자족
하는 듯한 문일의 삶을 훨씬 더 분명하게 윤색해 주고 있으며, '비 오는 길'에서 체념론과 독서
에의 의욕이 겹쳐 있는 병일의 삶의 방식은 청개구리의 뱃가죽을 매체로 해서 탄력성이나 윤기가
결핍된 것으로 새겨지게 된다
'폐어인'에서 선생 자리에서 쫓겨난 후 극도로 심신이 쇠약해진 도영은 스스로를 아무것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먹어 삼키려 하는 '쥐'로 비하시키기를 서슴치 않는다 자신을 '쥐'에다 비유
함으로써 도영은 극한상황에 몰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맹목적인 적응주의뿐이라고 암시
할 수 있게 된다
'심문'에서 과거에 이름난 사회주의 운동가였다가 현재는 여자를 등치면서 살아가는 아편쟁이
로 전락한 현철은 조롱에 든 '새'를 끝에 가서는 죽이고 마는 '쥐'로 비유되고 있다
이처럼 최명익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신이나 타인을 특정 동물로 비유하는 것은 작중의 이야
기를 다시 한번 의미있는 발롸체로 요약해 주는 힘을 지닌 것이라 하겠다 최명익의 각각의 소설
에 나타나는 동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을 밝히는 작업은 최명익의 그때그때의 창작의도를 파
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최명익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이든 단역이든 또는 지식인이든 속악한 가치관에
매달린 세인이든 결국에 가서는 거의 모두 '패배'쪽으로 기울고 만다 '무성격자'에서 머슴살이
로 출발하여 "오직 돈을 위하여 분망한 일생을 살아온" 끝에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만수 노인은
삶과 아들로부터 소외당한 채 결국 암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며, '비 오는 길'에서 소시민적 행
복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았던 이칠성도 사진관 확장이라는 나륾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갑자기 장질부사로 죽고 만다
'비 오는 길'의 병일, '무성격자'의 정일, '심문'의 명일은 사랑하는 여인이 비참하게 죽어 가
는 것을 겪었거나 가까운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인물들은 소설
의 끝에 가서도 삶의 자세나 인생관에 있어 크게 달라질 기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병일은 그렇다
치고, 정일과 명일마저도 가까운 이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을 특유의 무기력증과 체관된 성향
을 더욱 심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최명익의 작가의식의 실체에 좀더 바싹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들 주인공들이 작품의 중
간에서 노골적인 형태로든 은밀한 방법으로든 보여주었던 현실대으의 내용을 짚어 볼 필요가 있
다 가령 '비 오는 길'에서 병일은 "모두가 자기네 일에 분망한 세상에서 나도 내 생활을 위하여
몰두하는 시간을 가져 보겠다"는 취지에서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무성격자'에서 정일은 "
차차 서재에서 매력을 잃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 들렀으며 나중에는 다방
아리사의 마담인 문주와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똑같이 허무주의자이기는 하면서도 병일이 일종
의 엄숙주의를 지향한 반면, 정일은 의도적으로 방종과 타락의 길로 걷는다 비록 사련이라 할지
라도 한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자기 구제를 모색한 점에서 '무성격자'의 정일과 '심문'의 명일은
동일한 경우가 된다
돈이라든가 자리라든가 하는 세속적 가치가 손만 뻗치면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이를
온통 외면해 버린 점에서 '무성격자'의 정일과 '역설'의 문일은 결벽증이라는 범주에 똑같이 들
게 된다 이들이 보인 결벽증은 무욕의 태도라는 말로 대치가 가능한데 결국 지나친 결벽증이나
무욕은 일종의 도피주의라고 풀어볼 수 있다 주어진 현실에 대한 응전의 방법들 중, 도피주의가
가장 소극적인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랑에 빠져 버리는 것도 도피
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명익은 이들 지식인들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영영 내팽개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정
일로 하여금 부자간의 인륜이라는 것에 눈뜨게 하였고, 명일로 하여금 휴머니즘이 사랑 못지않게
큰 힘을 지닌 것임을 꺠닫게 하였고, 현일에게는 새 세대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도록 하였다
2. 정인택의 경우
1930년도에 "매일신보"에 '불효자식', '눈보라' 등의 습작을 발표했던 정인택은 해방 이전에
줄잡아 30편 가까운 중, 단편을 써냈다 작품 발표량에 비해서는 기왕의 논자들에 의한 소설사적
자리 매김이 미미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거니와, 실제로 정인택이 양이 질을 훨씬 앞질러
가는 작가의 한 실례였음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그의 작가로서의 본격적 활동은 '촉루'("중앙", 1935. 6)에서 시작되었다 이 단편은 동경에서
한 조선 청념이 끊임없이 룸펜을 자처하며 거지나 다름없는 비참하고 자기적인 생활을 꾸려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는 문자 그대로 동가식서가숙하는 비참한 몰골로 그
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또 "니힐을 쓰디쓰게 씹어 삼킨다"는 식의 의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있을 법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다 결국 '촉루'는 당시 독자들의 자연스러운 실감을 사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정인택은 동경을 배경으로 한 한 조선 룸펜 인텔리의 삶의 모습과 암울한 의식세계를 집
요하게 추적할 것을 '촉루'에서 굳게 다짐한 셈은 되었다
'촉루'에서 물질과 정신의 양면에서 실뿌리조차 내리지 못하였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소외당했
던 '나'는 '준동'("문장", 1939. 4), '미로'("문장", 1939. 7), '여수'("문장", 1941. 1)에 오면
일본 여자 유미에와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촉루'이후에 나온 '조락', '준동', '미로', '여수' 등의 소설은 룸펜 인텔리인 '나'를 중심구
조로 삼은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준동', '미로', '여수'의 세 단편은 일종의 연작소설을 이루
고 있다고 할 만하다
일본에서 한 조선 청년이 하숙집에서 일하는 일본 여자와 사랑을 맺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준동'에서 '나'와 유미에와의 관계양상보다는 우선 '나'의 기본적인 생활방식과 의식세계 그 자
체를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절대로 나와 사귀지 않는달제... 그때부터 내 주위에서 허무를 찾으려
애썼고 끝까지 혼자서 게을러 보리라
어째서 '나'는 소외감에는 이제 괴로워하지도 않으면서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지경으로 나아
가게 되었는가 '나'는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나마 '
준동'이외의 소설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한 설명은 커녕 암시조차 얻어 보기가 힘들다
굶주리기만 하고 있고, 굶주리기만 해야 할 고향에 있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공부를 핑계삼아
막연히 동경에 건너온 나였으나(중략) 동경까지가 나에게 동물이 되라고 요구할 때에(중략) 허약
한 몸이 기진맥진하야 오직 주위에서 '니힐'만이 발견될 때 그때는 벌써 나의 심신이 극도로 위
축되고 말았을 때이다
정인택은 '나'의 "심신이 극도로 위축되었음"을 여러 군데서 털어놓음으로써 '내'가 일본 여자
이면서 무식하고 나이 어린 유미에에게 의지하고 마침내 사랑을 느낀 것은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고 변명한 것이 된다 자살할 마음은조금도 없으면서 "죽지 못해 살지"를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
나'의 태도에서 나를 살려만 준다면 일본 여자면 어떻고 무식하면 어떠냐 하는 자포자기적 발상
이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꿈은 나를 체포하려 한다 현실은 나를 추방하려 한다"라는 이상의 글 한 구절을 작품 서두에
다 배치하여 창작 방향을 보다 적극적으로 내보이려 한 '미로'는 '나'와 유미에가 이미 예상했던
바와 같은 주위로부터의 손가락질과 따돌림을 뜨겁게 의식하고 행동하는 그 모습을 세밀하게 그
려 놓고 있다 '미로'를 '준동'의 연장선에다 올려놓고 보면,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와
폐병이 깊어져 시뻘건 핏덩이를 토하는 '나'는 눈에 띄게 적극적인 인물과 극적인 삶으로 변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정인택은 '나'의 결심과 선택을 합리화하려는 속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출옥한 다음, 옛 동지들의 무관심과 냉대로 인한 반사심리로 유미에에게 바짝 기울게 된
것이다 유미에는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술집에 나가면서도 '내'가 변심을 하고 조선으로 돌
아갈까봐 늘 마음을 못 놓는다 이에 반해 '나'는 유미에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없으면서
도 고국에 있는 아버지로부터의 인륜의 인력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은 '내'가 '나'를 위
해 보다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한 데다 임신까지 한 유미에를 보며, 생활태도를 완전히 바꿀
것을 결심하는 데서 끝난다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이고 간에 자기를 죽이지 않고도 살아나갈 길이 전연 없을 리는 만무
이니, 나는 좀더 적극적인 의욕을 가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자신 일부터 사회
와 인간과 절연하고 위축된 사고만 만지작거리며, 위축된 생활을 계속한 것이 모두 그 부끄러움
속에서 나온 것 같다
'미로'의 결말은 이상의 '날개'에 비해 위에 보이는 것과 같이 보다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각
성' 혹은 '개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몸과 마음이 병든 남편을 아내가 뭇 남자에게 웃음을
팔아 벌어 먹인다는 구성을 취한 점에서 '미로'는 '동요'("문장", 1939. 7)와 '연연기'("동아일
보", 1940. 3. 7__4. 3)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연연기'는 동경유학까지 다녀온 한 남자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가 폐병에
시달리는 폐인이 되었고 그 아내는 기생질을 마다 않고 돈을 벌어 남편 뒷바라지 해 준다는 이야
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기생인 김춘홍은 자신의 신세에 대해 별로 슬퍼하는 기
색이 없다 이 작품은 기생 김춘홍이 반평생을 폐병쟁이로 지내면서 결국 자기를 망쳐 버린 남편
윤군이 죽자 그를 따라 죽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는 결말을 주고 있다 이처럼 '연연기'
는 '미로', '동요' 등과 마찬가지로 남녀간의 사랑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뛰어
넘을 수도 있는 것임을 웅변하고 있다
이 세 소설에 나오는 여인들은 최명익의 '심문'에서의 여옥과 마찬가지로 순애보를 꾸미는 인
물이라 하겠다
조선 청년 '나'와 유미에는 단편 '여수'에서는 그 이전에 발표된 '준동', '미로'에서와는 달리
큰 비극을 빚어내고 있다 '여수'는 김군의 친구가 김군의 유고 즉, 김군과 유미에가 동경과 경
성 서소문에서 빚어 낸 일의 내용을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나'는 김가임이 저절로 밝혀
지게 된다 그러나 '나'의 성은 밝혀졌지만 이름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여수'는 기본적으로 액자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 일기체가 겹쳐진 것으로 보인다 여
기에다 중간에 서간문도 포함시키고 있다 동경 시대의 일기는 폐병을 앓고 있는 '내'(김군)가 유
미에와 가까워자게 된 배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소문정 시대는 유미에가 급격히 몰락해 버린 집
안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두 남녀의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이 소
설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한번 가버린 유미에는 소식 한자도 없고 돌아올
줄도 모른다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나'는 유미에가 자기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든 채 전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을 짐작만 한 채 폐병이 악화되어 숨지고 만다
'여수'에서 '내'가 유미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 그 배경에 주목하면, '여수'를 앞서
논한 '미로'의 속편으로 놓고 보는 것은 무리라 아니할 수 없다 '준동', '미로', '여수'는 외형
상으로는 이름이 같은 '나'와 유미에를 똑같이 설정하고는 있지만 특히 유미에의 경우 성격, 가
족 관계의 면에서 꼭 동일한 인물을 그려 냈다고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1940년 11월호 "조광"에 실린 특집 '작중인물지'를 참고하면 정인택은 그의 몇 편의 작품에 반
복해서 나타나는 '나'와 유미에를 겉이나 속이나 동일한 인물로 계획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조락', '촉루', '미로', '준동'등의 소설의 주인공 '나'는 이런 특징을 갖는다 하였다
이십 팔 세 모 전문 중도 퇴학, 무직, 약간의 이상주의자이나 약간의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
이기도 하다 (중략) 요새는 폐환으로 누워 있는데 아내 '유미에'가 벌어다 주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 먹고만 있다 (중략) 걸핏하면 혼자서 우울해진다 나쁜 의미에서의 전형적 근대지식 청년
머지 않아 작자는 이 주인공을 죽여 없앨 작정이다 ("조광", 1940. 11, p205)
정인택은 과연 그의 계획대로 위의 글을 쓴 지 2개월쯤 있다가 발표된 '여수'에서 회의주의자
이며 허무주의자, 그리고 폐병환자인 김가를 죽이고 만다 '나'는 몇 작품에서 거듭 나타나는 만
큼 정인택이 만들어 냈다기보다는 1930년대의 식민지 상황이 자연스럽게 분만해 낸 것으로 파악
해야 한다
그러나 '촉루', '준동', '미로', '연연기', '여수' 등의 단편을 보면, 1930년대의 조선의 현실
속에서의 문제적 인물을 의미깊게 형상화하고자 한 정인택의 야심이 제대로 꽃을 피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긍정하기가 어렵다 앞서 암시한 것처럼, '나'와 유미에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들
이나 '연연기', '동요'처럼 술집에 나가는 아내와 무위, 무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 사이의
관계를 그린 소설들은 순애형의 여인을 내세우는 데 가장 큰 목적을 두어 버린 듯한 애정소설 쪽
으로 기운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술집에 나가는 아내, 폐병이 들었거나 룸펜으로 떠도는 남편 등을 한 작품내에서 공존하
는 모티프로 삼은것만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남편의 역할과 아내
의 역할을 바꿔치기 한 정인택의 숨은 의도를 외면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또 룸펜이면서 허무
주의자를 자처하는 폐병쟁이 조선 남자를 일본 여자가 사랑하는 나머지 술집에 나가 돈버는 것도
마다 않는 그런 플롯을 설정한 정인택의 저의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처럼 병들고, 무능하고 그리고 좌우와 전후를 전혀 재려 하지 않는 듯한 조선 청년의
입장을 거듭거듭 제시함으로써 이런 인간형과 삶의 태도를 낳은 시대와 역사에 큰 의문부호를 던
지고자 한 것이다 죽지 못해 산다 하고, 끊임없이 니힐을 뇌까리고,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마
저 내팽개쳐 버린 채 일본 여자와의 사랑에 웃고 우는 존재가 어쨰서 생겨났는지를 정인택은 묻
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정인택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과 탐구정신을 작품 속에서 구체화하고 이식하는 과정에
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질문은 우렁차고 굵은 목소리의 형식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작중인물 '나'의 의식의 심저부가 이상의 경우처럼 보다 분명하고도 넓게 파헤쳤더라면,
또 최명익의 경우와 같이 지식인소설의 골격을 좀더 확실하게 갖추어 갔더라면 정인택의 소설은
문학사가의 눈길을 한 반이라도 더 끌어 모으는 결과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25
3. 소재와 작가적 '힘'(안회남 론)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아들이며, 김유정과 유달리 친교가 두터웠고, 규슈탄광으로 징
용갔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해서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소설부위원장을 지낸 적이 있고, 그 후 문
건파 속에 섞여 월북해 버린 안회남 그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48년
봄 이전에 월북할 떄까지 70편에 가까운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만한 작품 숫자라
면 그는 충분히 다작의 작가에 속한다
그러나 안회남은 질이 양을 따라가지 못한 작가의 경우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들을 총람해 보면, 그의 작품들의 재료들이 분명하게 의미의 자양을 확보하고 있는 것
인지 또 그의 소설들 속의 리얼리티가 총체성이나 전형성을 살려 낸 단면에 과연 가까이 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질문들을 안회남은 대체로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문제적' 인물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으
로 구체화시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물음들은 안회남과 같은 시기에 작품활동을 했으면서 이미
일급의 작가로 판정난 사람들을 기준치로 삼을 때라야 보다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다양성보다는 반복성에 가까운 작가라는 점이다 사건의
면에서든 인물의 면에서든 도저히 두 세 가지 유형으로 묶을 수 없는 작가를 다양성의 작가라 이
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복성이란 특정 사건이나 인물 또는 소정의 관념에 표가 나게 집착하는
것을 뜻한다 안회남의 소설을 읽다 보면, "또 그 얘기로군" "또 그 인물이로군" 하는 말을 몇
차례고 무심코 뱉게 된다 특정 사건이나 인물 또는 작가 나름대로의 고정관념을 몇 차례고 거듭
해서 제시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때의 반복성이 '깊이 있는'
서술이나 해석을 겨냥한 것인지 또는 작가적 성장과 직결되어 있는 것인지의 여부에 있다 일단
반복성의 효능을 살리는 가운데 대상으로서의 사건이나 인물을 꾸준하게 다각도로 파헤쳐 나간
것이 곧 연작소설이라 할 수 있다 안회남이 여급이나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 그리고 해방
직후에 조선 농민들의 징용과 귀국, 그 실상을 그린 '쌀', '소', '말', '섬', '별', '불' 등의
일련의 소설들을 연작소설의 형태로 처리할 수 있었더라면 반복성과 다양성의 효능을 한꺼번에
다 살려 내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편 소설가로서의 총체적인 시각과 단편작가로서
의 솜씨 있는 형상화 방법을 아울러 과시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소
설을 썼던 그 무렵에는 연작소설이란 형태가 그 어떤 작가에 의해서도 개발되지 못했었다
그의 소설들은 남자 주인공으로는 노동자, 룸펜, 작가, 회사원, 농민, 건달, 소사, 광부, 소년
등 비교적 다양한 계층과 입장의 인물들을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들 대부분은 여급
혹은 기생과 같이 불우한 존재들로 설정되어 있다 안회남은 남자 주인공과 여급 또는 기생 사이
에서 벌어지는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193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써내고 있다
문필에 종사하는 '나'의 동경유학시절 동창생인 이군이 동경에서 10년 동안 같이 살았던 기생
오와 본처 사이에서 고심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 '장미'("조광", 1936. 8)는 193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지식인늬 타락상을 비난하려는 의도도 지닌 것이라 하겠다 본처의 완강한 거부로
이군이 이혼에 실패하자 기생 오는 꺠끗이 단념하고 고향인 평양으로 가버리는데, 바로 이 대목
에서 작중의 '나'는 동경 시절 병든 룸펜 이군을 위해 온몸을 던져 희생하고 국내에 와서는 이군
의 가정을 위해 발길을 돌리고 마는 기갱 오를 '한 떨기 장미'로 미화하게 된다 나는 이군은 분
명하게 부정하였지만 기생 오에 대해서는 그 희생적인 태도와 선이 뚜렷한 행동을 높이 사 찬미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것이다
'소년과 기생'("조선문학", 1937. 1)은 집안이 아주 가난한 한 문학소년과 회사 취체역 영감의
애첩이 되고 만 동기 사이의 플라토닉 러브를 들려준 것으로, 이 소설은 결말에 가서, 그 후 안
회남의 한 기본관념으로 굳어지고 마는 '사랑은 곧 온실'이라는 사랑철학을 두 남녀가 확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온실이 될 떄라야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라는 따위의 사랑철학은 물론 새
로울 것도 없고 심각미도 없기는 하지만, 이 사랑철학은 궁핍을 현실로 안고 있는 소년과 가난
때문에 웃음을 팔면서 살 수밖에 없는 어린 기생사이의 영적 만남에서 나온 것인만큼 주의를 기
울여 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랑철학은 가난과 더럽혀진 몸이라는 절박한 현실에서 최소한 한걸음
이라도 뛰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곧 온실이라는 깨달음은 어둡고
배고픈 시대에 직면하여 '따뜻함'이나 '위안'을 갈구하는 1930년대 조선인들의 한 신앙형태로 확
대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소년과 기생은 1930년대의 우리 민족의 보편적 초상을
그려 낸 그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소년과 기생은 1930년대의 우리 작품에서
소년과 기생이 한편의 동화처럼 보여준 가난 속의 사랑, 더럽혀진 육체 속에서의 꺠끗한 영혼은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어지게 된다 '소년과 기생'이후
안회남은 아예 '온실'("여성", 1936 5)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쓴 적이 있다 폐결핵에 걸린 아내
를 극진히 간병하는 남편의 모습과 속마음을 그리고 있는 '온실'에서도 죽을 병에 걸린 아내라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그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는 한 인간의 극복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소
설에서 남편은 병든 아내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방에다 온갖 화초를 사다 놓는 가운데 아내
는 화초, 남편은 온실이라는 이치를 재확인하게 된다 '소년과 기생'에서 소년과 어린 기생이 서
로 온실이 되자고 다짐했던 것이 '온실'에 와서는 병든 아내와 간병에 여념이 없는 남편 사이에
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온실'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랑철학은 결국 안회남을 그 흔해 빠진
애정소설의 더미로부터 구출해 내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등잔'("사해공론", 1938. 10)은 철도공사장의 한 인부가 처로 하여금 공사장 근처에 술집을
내게끔 하고 나서 하루하루 별 불만없이 살아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으로, 이 소설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 김유정의 소설들을 떠올
리게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 달순은 자신의 기구한 팔자에 대해 조금도 괴로워하
는 기색이 없다 안회남은 이 소설에서 '가난 때문에'라는 원인을 잊지 않고 제시했지만 이야기
의 값을 자기도 모르게 반감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에레나 나상'("청색지", 1938. 6)에서
의 화가 '나'와 술집의 여급이면서 육체미로써 뭇 남성들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에레나 사이의
관계도 육욕에 끌려가는 남녀 사이의 사랑이야기로 귀착되고 있을 뿐이다 화가인 나는 에레나에
대한 추문이 퍼지자 그녀의 나체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릴 계획을 갖게 되는데,나의 진짜 속
생각은 그녀를 발가벗겨 놓고 그녀 몰래 처녀성 여부를 판별해 보자는 데 있었다 화가인 남자
주인공에겐 좋은 그림에 대한 예술가적 충동보다는 애인의 순결성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더 큰
과제였던 것이다
'투계'("문장", 1939. 7)와 '어둠 속에서'("문장", 1940. 7)는 술집여자의 사랑의 문제를 다루
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우리 사회의 하층민들의 삶의 모습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파
헤친 점에서 일치되고 있다 '투계'는 술집 갈보들의 행태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해서 알코올
중독자, 제면공장 직공으로 있다 물건 훔친 것이 발각나 쫓겨난 청년, 그 청년을 뜨겁게 사랑하
는 한 술집 갈보 등에 관한 에피소드를 주변에다 늘어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둠 속에서'를
통해서는 종로를 무대로 한 건달패들의 거칠기 짝이 없는 행태, 깡패를 기둥서방으로 삼고 있으
면서 하루하루 비참한 운명을 이끌고 가는 한 카페걸의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두 작품에 나
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알코올리즘, 절도, 폭행, 사련 등과 같은 광태와 비윤리성을 드러내 보이
고 있다 그러나 안회남은 이들 인물들이 어째서 이렇듯 비윤리적인 행동을 보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파헤치거나 의문을 표시한 흔적을 보여주지 않았다
바의 여급을 거쳤으며 지금은 다방의 여주인 노릇을 하는 아내와 룸펜인 남편 사이의 관계를
추적한 '번민하는 쟌룩씨'("인문평론", 1939. 10)는 이제껏 논한 작품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구성방법을 취한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작중의 '나'는 다방 손님으로서 아내 임순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김영식으로부터 정신적인 면에서 큰 피해를 받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이 소
설은 결말부분에 가서 임순과 영식이 옛날 한때 부부지간이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영식은 가해
자, 나는 피해자라는 나의 편견을 뒤집어 버리게 된다 '나'는 영식에게 크게 분노를 느꼈던 나
머지 '내'가 어렸을 때 간부와 놀아난 어머니에 대핹 증오심을 더욱 짙게 되새기게 되었으며, 마
침내는 내가 진짜 우리 아버지의 아들인가 하는 의심에 사로잡히면서 집안의 족보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번민하는 쟌룩씨'는 극심한 의처증은 자기 집안의
뿌리마저 의심하는 병적 심리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임을 잘 실증해 주었다 그러나 안회남은
작중 인물이 일종의 편집광적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작
중의 '나'는 진짜 도둑놈은 전남편 영식이 아닌 바로 '나'임을 깨닫는 상태로 돌아서고 만 것이
다 이 소설의 서술방법과 서술의도를 보면 쟌룩 씨가 번민한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이 갈팡질팡하
고 번민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번민하는 쟌룩 씨'도 사랑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의 내면
의 굽이를 그런대로 잘 따라가 본 한 실례라고 볼 수 있거니와, 중편 '탁류를 헤치고' ("인물평
론", 1940. 4__5)는 비록 사연의 관계이긴 하지만 아무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
에 빠진 한 여인의 내면세계를 차분한 어조로 파헤쳐 놓은 경우에 속한다 이 작품에서 엄연히
처자도 있는 소설가 광이는 첫남편과 헤어지고 딸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 밤이면 술집에 나가는
여급 순이로부터 진심과 희생정신이 어린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되나, 끝내는 한 가장으로서 가질
법한 죄책감에 짓눌려 처자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그런데 '탁류를 헤치고'는 그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특히 '에레나 나상', '온실', '번민하는 쟌룩 씨'와는 대조적으로 여자 주인공
의 입장에 서거나 그를 옹호하는 쪽에 서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 작가 자신이 윤리라는
개념을 이전보다는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여급인 순이가 주위사람들의 손가락
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설가 광이를 사랑했다가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담담한 마음으로
자기 주변을 정리하고는 만주국 목단강 쪽으로 이주해 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안회남은 이
혼녀이며 여급이라는 껍질이 두껍게 씌워져 있는 순이의 속으로 파고들어가 진심과 분별력, '뜨
거운' 사랑에의 충동과 '차가운' 결단력 등을 끄집어내어 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순이를 미화시
킬 수 있었다 이러한 미화는 센티멘털리즘의 발로라기보다는 휴머니즘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
다 이미 그의 여러 작품들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안회남은 비록 가슴이 끓어오르는 애정의
형식은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급, 기생, 노동자, 룸펜, 농민, 가난한 소년 등과 같은 낙오자
들의 등을 어루만져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급 혹은 기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들을 중심으로 하여 남녀 사이의 애정관계를 다룬
안회남의 소설들은 그 애정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거나 큰 시련을 겪는 것으로 끝이 나는 공통점을
보인다 또한 그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남자를 벌어 먹이기 위해 몸을 파는 신세
가 되거나 아니면 남자의 요구로 인해 사랑이 깨어져도 결코 남자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는 특징을 똑같이 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회남은 신분이나 입장의 면에서 자기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타인들을 '바라보고, 걱정해 주는' 작가로만 자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여느 작가들처럼 그도 한 지식인과 작가로서의
자의식의 세계를 투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편 '향기'("조선문학", 1936. 6)에서 실생
활과 문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문학 쪽으로 길을 잡아들어간 '그'는 바로 안회남 자신이
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까 안해에게 그가 취직하여 있는 상사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구루마꾼이 된다는 거나 지게
꾼이 된다는 것이 조금도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요, 정말 그러한 실생활을 몸으로 파고들어가서
그는 풍부한 문학의 소재를 얻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작가로서 오늘날까지 오
로지 자기 자신만을 바라다보며 생각하고, 이른바 신변소설을 써 왔는데 이제부터는 고개를 돌려
여러 가지 모양의 사회를 들여다볼까 하였던 것입니다
신변소설의 수준을 넘어 동시대의 사회와 삶을 보다 총체적으로 그려 보겠다는 안회남의 작가
로서의 소명의식은 비록 단편적인 형태로 남은 것이긴 하지만 소설로 쓴 김유정론이라 할 수 있
는 '겸허'("문장", 1939. 10, 아버지 안국선 일대기에 값하는 '명상'("조광", 1937. 1), 본처와
기생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소설가의 모습을 그린 '탁류를 헤치고' 등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소설들도 다른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별 다름없이 문제나 대상의 저변을 끈질
지게 파헤쳐 내려가는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안회남은 자신이 처해 있던 현실과 세계를 결
코 낙관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소재를 비극적으로 착색해 가는 솜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근본적으로 그는 소재와 문제 앞에서 힘이 달리는 작가였다 그의 작품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몇몇 명작들을 얼핏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긴 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효과 있게 꾸며내는 면에서 뒤처지고 만 나머지 모작 혹은 아류의 대접밖에 받지 못한
다 가령, 머슴이 주인댁 따님과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안회남의 '남풍'("여성", 1937. 5)
은 분명 김유정의 '봄 봄'("조광", 1935. 12)과 닮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남풍'은 군데군데
에서 개연성을 놓친 것 떄문에 '봄 봄'에 비해 공감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빚고 만다 술꾼이 되
어 버린 남편에 대해 아내가 원망, 분노, 연민 등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ㄹ표시한다는 이야기
를 들려준 점에서 또 남편을 룸펜 인텔리로 설정한 점에서 안회남의 '안해의 탄식'("신가정",
1933. 11)은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일종의 전형으로 삼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안해의 탄
식'에서의 남편은 '술 권하는 사회'의 남자 주인공에 비해 사회성도 약할 뿐만 아니라, 심적 갈
등의 면에 있어서도 심각미가 덜한 편이다 안회남의 '장미'는 이상의 '날개'("조광", 1936. 9)
보다 오히려 앞서 발표된 것이다 최고학부까지 나온 남자가 뭇 남성에게 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
의 등에 얹혀산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똑같이 들려준 것이면서도 어째서 안회남의 '장미'는 성공
작으로 평가되지 못하였는가의 이유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서술의도가 흐릿한
점, 대상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힘이 약한 점 등이 '장미'를 위로 끌어올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
다
이렇게 보면 안회남은 여러 소재들을 한편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에서 한계
를 드러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치하의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 사람의 삶 그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데 꼭 필요한 재료들을 골라 내고 모으는 능력은 충분히 긍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이렇듯 적합한 재료들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야기라는 집을 솜씨좋게 지어내는 단계에선 번번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과는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안회남은 가치 있는 이야기, 의미 있는 사건, 문제성이
큰 인물을 만들어 내는 '솜씨'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크게 의식한 편이었다 민요의 한 토막을 소
설의 서두와 끝에다가 배치해 놓은 '등잔', 여자 주인공이 받은 편지내용을 작품의 서두에다, 보
낸 편지의 내용을 끝에다 의도적으로 갖다 놓은 '탁류를 헤치고', 주인공이 돈을 쓴 명세서를
작품 중간에다 삽입시킨 '상자'와 '우울', 일부러 한 음절 제목을 씀으로써 여러 소설들을 하나
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내보인 '쌀', '소', '말', '섬', '별', '불' 등을 특히 염두
에 두면 안회남의 소설양식을 탄력성 있게 생각했던 것임을, 또 서술기교가 가져다 주는 효과를
의식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소설이 다루고 있는 사건과 인물을 보면 안회남은 분명 리얼리스트를 지향했던 것으로 드
러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 그 자체를 총체적 시각에서 볼 경우, 안회남은 불행하게도 작가로서는
힘이 달렸던 쇄말주의자로 떨어지고 만다25
4. "두만강"론
1. 도입
민촌 이기영의 대하소설 "두만강"은 모두 3부로 짜여진 것이다 1부는 29장으로, 2부는 37장으
로, 그리고 3부는 3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대하소설이란 말을 쓰는 대신 북한에서는 대
장편(에뽀뻬야)이란 용어를 내세운다 "두만강"은 한꺼번에 3부가 다 출간된 것은 아니었다 제1
부가 1954년에, 제2부가 3년 후인 1957년에 발표되고 나서 제3부는 이기영이 이 작품으로 '인민
상'을 받은 바로 그 이듬해인 1961년에 탈고를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3부를 발표하기 전에
"두만강"속의 한 주요 공간인 만주일대를 답사했고, 이미 발표된 2부를 부분적으로 손질했던 것
으로 전해진다 1부와 2부의 내용으로써 '인민상'을 수상한 것은 추측컨대 이기영에게는 소위 당
성, 인민성, 이념성 등의 요건을 더욱 크게 의식해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이 내린 창작원리를 잘 수행했다는 이유 아래 상을 받은 것인만큼 민촌으로서는 노동계급성,
인민성, 사상성 등의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또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각오는 제3부의 방향과 내용을 근본적으로 조종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 초기작이 아닌 바에는 모든 작품들은 대체로 원형이나 전형을 지니기 마련
이다 "두만강"의 가장 분명한 원형으로는 흔히 장편 "봄"이 지적되고 있다 1940년 6월에서 8월
10일까지 59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가 중단되었고 다시 "인문평론" (1940. 10__1941.
2)에 계속 연재되었던 장편 "봄"은 "두만강" 제1부는 19세기말부터 1910년 합방까지를 시간적 배
경으로 삼았고, 충청도의 한 민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내세웠고 또 봉건지주와 양반의 몰락, 신흥
지식인의 애국계몽활동, 농민들의 궁핍화 현상 등을 중심사건으로 설정한 데서 일치된다
그러나 이기영의 작품들 중 시, 공간적 배경 혹은 주요 인물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 또는 작중
의 주요 상황이나 사건의 측면에서 "봄"처럼 "두만강"의 일부분과 유사성을 지니는 것들은 적지
않다 "두만강"은 우선 양적인 면에서 방대하고 수많은 인물들이 문자 그대로 난마처럼 얽힌 관계
를 이루어 내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인만큼, 이기영이 특히 일제치하에서 써낸 작품들 중에서 오히
려 원형이나 전형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찾아내는 것이 더 손쉬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기
영의 해방 이전의 발표작들을 섭렵하고 정독했을 때라야 좀더 세련되고 정확한 판단이 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의 해방 이전 발표작들 대부분은 "두만강"을 예고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
은 아닐 것이다
2. '고향'과 '두만강'의 대비
"두만강", 그 중에서도 특히 제1부와 제2부에서 다룬 인물과 사건, 의식과 상황 등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기영의 다음과 같은 해방 이전 발표작들을 읽고
풀이하는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개벽", 1925. 5), '쥐니약'("문예운동", 1926. 1), '농부정도룡'("개벽",
1926. 1__2), '박선생'("개벽", 1926. 4), '아사'("조선지광", 1927. 2), '채색 무지개'("조건지
광", 1928 1), '원포'("조선지광", 1928. 5), '홍수'("조선일보", 1930. 8. 21.__9. 3), '서화
'("조선일보", 1933. 5. 30__7. 1), '고향'("조선일보", 1933. 11. 15__1934. 9. 21), '흙과 인
생'("예술", 1936. 1), '맥추'("조광" 1937. 1), '신개지'("동아일보", 1938. 1. 19.__9. 8), '
대지의 아들'("동아일보", 1939. 10. 1__1940. 6. 1), '광산촌'("매일신보", 1943. 9. 23__11.
2) 등등
"두만강"에 대해 이렇듯 예고지표에 해당되는 작품들 중에서도 '고향'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향'은 일제치하의 우리 농민들의 궁핍상과 핍박상을 강조한 점에서 또 주요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적과 동지로 양분하려는 의도를 뚜렷하게 내보인 점에서 현실에 '적극적'인 대응
방법을 보이는 인물을 양각한 점에서 "두만강"과 동질성을 견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
다 가령, '고향'에서의 안타고니스트 안승학은 "두만강"에 가서 탐욕스러우면서 무자비한 지주
한길주나 김진해로 대치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고향'에서 선비 농사를 지으면서 두레, 야학,
취직알선 등의 일을 주도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농민에게 동화되려는 김희준은 "두만강"에서 송월
동 농민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나중에 가서는 의병간련의 혐의로 사형당하는 이진경과 동일한 유
형의 인물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고향'에서 김희준과 안승학이 암투를 벌이고, 제사공장의 여
공들이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고, 마름 안승학이 타락과 사기를 일삼고, 마을 농민들이 제방공사,
철도부설, 제사공장건축으로 큰 피해를 보는 등등의 에피소드는 "두만강"에 가서 그대로 재현되
고 있다 '고향'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들은 "두만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성격과 행태 그
리고 나뭇가지처럼 펼쳐진 자잘한 사건들과 상황들에 대해 기본적으로 낯선 느낌은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향'과 "두만강"은 동질감을 안겨 주는 데서만 끝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속의
인물들과 사건들 그리고 현실인식이나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정신적 인자들이 "두만강"으
로 옮겨지는 그 과정에서 변형, 확대, 강화 등의 형태로 단련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고
향'에선 일본의 경제적 침탈과 지주의 수탈행위가 기껏 암시되는 수준에서 끝난 데 반해 "두만강
"에서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탈과 지주들의 수탈이 가장 큰 '원인적 사건'으로 명시되고 있
다 '고향'에서 이기영 자신이 프로타고니스트로 생각한 인물들, 가령 희준과 마을 농민들의 가
난에 찌들고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음각시키려는 뜻에서 잘사는 집, 흥하는 집의 사람들
의 행복해 하고, 여유 있어 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묘사하였는데 "두만강"에 가면 이
러한 대조의 수법은 한층 강화되는 결과를 보인다 강화의 결과를 맞는 것은 이런 것뿐만 아니다
프로타고니스트의 존재방식, 좀더 좁혀 말해 현실대응방식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아예 "두만강"의
총체적 구조가 '고향'의 그것을 강화시킨 경우가 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고향'은 원터골을 무대로 하여 일제치하에서의 우리 농민들의 비팜한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그려 내는 데서 시작하여, 동경유학출신으로 선비 농사 짓는 가운데 마을 농민들을 계몸하는 역
할을 감당하고 있는 김희준이 마름 안승학의 딸로 결국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투쟁하는 쪽으로
돌아선 갑숙과 함께 "현재 우리들이 거처하고 있는 사회를 따나서는, 그 처지를 떠나서는 문제가
서지 않는 사랑" 즉 '동지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 소설이다
이러한 동지적인 사랑 혹은 동지의식은 '고향'에서는 도달점이 되고 있지만 "두만강"에 가면
이러한 동지의식 또는 연대감은 분명 출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고향'이 인텔리 출신의
두 남녀가 적극적인 현실대응의 대열에서 동지가 될 것을 다짐하는 데다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두만강"은 주로 농민들 사이의 동지의식을 강조하는 가운데 농민을 투쟁의 주역으로 내세우고
있다 '고향'에서 김희준이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다면 "두만강"에서 김희준과 비슷한 성향을 보
인 이진경, 안무 등은 주변부에 서 있는 것이라 하겠다 또, 일제에 대항하고 가진 자들과 투쟁하
는 방법의 면에 있어서도 "두만강"은 '고향'과는 완전히 마주보는 자리에 선 것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이 두레라는 형태로써 농민들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고 또 주로 야학과 같은 방법에 의존함
으로써 정확한 현실통찰과 대응의지를 유도한 반면 "두만강"은 살인, 방화, 파괴 등과 같은 무력
투쟁의 방법을 필연적인 귀결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만강"이 우선 양적인 면에서 '고향'을 압도한다 치더라도 "두만강"이 모든 면에서
강화나 확대의 결과를 드러낸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약화 혹은 퇴화의 결과를 드러낸 것도 적
지 않다 퇴화의 두드러진 예로 남녀의 사랑이나 성의 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고향'에서는 타락의 형태든 순수성 표출의 형태든 갑숙과 희준, 희준과 처, 안동과 방개, 갑숙
과 경호, 안승학과 첩, 박수월과 경호 모친 등 여러 남녀관계가 인간은 살과 피, 본능과 갈등심
리를 지닌 존재라는 기본인식의 바탕 위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작품 전체에서 큰 비중
을 차지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 반해 "두만강"에서의 남녀 사이의 성 혹은 사랑의 관계
는 수많은 남녀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중도 아주 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
뼈' 즉 특정이념이나 경결한 의지를 지닌 존재로만 파악하는 인간관에 의해 기계적으로 처리되거
나 아예 뒤틀려 버리고 마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남녀의 사랑과 성을 비중있게 다룬다는 것
이 성공적인 소설의 절대적인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만강"이 거의 그러한 기조에
빠져 있는 것처럼, 사랑의 복잡한 감정이나 성충동이 있어야 할 곳에마저 딱딱한 동지의식만이
자리를 차지하다 보면 설득력을 주기가 어렵게 되고 만다 "두만강"에 나오는 남녀관계는 가진
자들의 타락을 고발하기 위한 장치가 되거나 아니면 동지애를 열어 주는 모멘트로 활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만강"에서의 남녀간의 사랑은 한경식의 경우처럼 에피투미아의 형
태로 빠지거나 박씨동과 옥이와의 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는 것처럼 아가페의 형식을
지향하거나 하는 식으로 양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향'을 통해 실제로 이기영 자신이 애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에로스로서의 남녀관계는 "두만강"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남녀 사이
의 사랑이나 성을 에로스의 수준에서 파악하고 묘사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은 결국 "두만강"의
인간관이 한 개인에게 있어 '가슴'은 빼 버린 채 '머리'와 '손'만 중시한 쪽으로 치달았음을 잘
입증해 주는 자료가 된다
'고향'과 "두만강"은 흔히 말하는 창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씌어진 것이라는 공통
점을 갖는다 '고향'이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나머지 이기영의 사상의 경향과 수준에 걸맞는 적
극성과 총체성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면, "두만강"은 당성, 인민성, 사상성 등 사
회주의 체제하의 창작원리의 한 모델을 자처했음인지 이번에는 적극성과 총체성을 지나쳐 곳곳에
서 도식적이고 작위적인 인상을 안겨 주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만강"의 경우
특히 제3부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한 목표이기도 한 적극적 인물의 제시와 총체적 현실의 형
상화를 잘 이행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아지로프의 한 구체적 방안인 이러한 목적의식이 자유
로운 창작정신과 사실제일주의(factualism)에 토대를 둔 객관적 역사서술의 태도를 곧잘 배반하
는 것임을 잘 반증해 주기도 한다
여러 측면에서 '고향'과 "두만강"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차이점과 함께 유사점을 분명
하게 내보이고 있거니와 이기영의 해방 이전의 작품들 중 '고향'처럼 "두만강"의 전형에 해당되
는 작품들이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기영은 대체로 일정한 소재를 두고 맴을 도는 가운데
그를 반복해서 다루면서 떄로는 확대의 형식을 때로는 심화의 형식를 드러낸 작가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우선, "두만강"은 이기영이 그 이전의 장 단편들을 통해 제시했던 인물과 사건, 상황과
사상들을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녹이려 한 '용광로'로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양의 방대함
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두만강"은 이기영 문학의 집성이며 결산보고서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의 해방 이전의 작품들이 일제의 검열제 아래서 태어난 것처럼 "두만강"이 북한에서
당의 냉엄한 통제와 요구 아래 씌어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작품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을 낳거나 굳히는 것이기보다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의 노력을 자극하는 것이 된다
3. "두만강"의 씨줄과 날줄
"두만강"은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 가운데 다양한 사건들을 설정하였고, 또 해방 이전에 이기
영이 자주 제시했던 각종 모티프들을 모아 놓고 있는 대하소설인만큼, 작품경개를 면밀하게 정리
하는 작업이 앞서지 않을 경우, 작품의 해석과 평가를 꾀하는 과정에서 부분과 지엽에 매달리거
나 자극적인 것과 신기한 것에 이끌리기 쉽다
"두만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제1부: 1890년대 충청도에 있는 송월동이란 곳에서 박곰손이 혼자 힘으로 자갈밭을 논으로 만
들어 놓았다(1. 빈농의 집), 지주 한길주가 낙향하고 동리 사람들이 길을 닦는다(2. 송월동), 의
병과의 내통혐의로 일인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 칠앗 이진사의 아들 이진경은 복수심을 새기
며 산다(3. 이진사 아들), 이진경의 매부이기도 한 한길주는 소작인들에겐 가혹한 존재다(4. 낙
향), 한길주는 자기 땅을 넓히기 위해 개간사업을 펼쳐 소작인들을 모두 무보수로 동원하나 곰손
만은 응하지 않는다(6. 마을의 틈입자),대흉년이 들어 마을 농민들은 기근에 허덕이나(7. 봄),
한길주는 큰 잔치를 벌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한다(8. 천렵), 왜놈들이 철도공사를 벌여 놓고 마
을 농민들 모두에게 부역을 나오라 강요하였다 곰손이가 중심이 되어 몇몇 사람들이 품삯투쟁을
하다 수비대로 잡혀 갔다가 3일 후 풀려 나온다(9. 경부선 철도공사), 한길주는 한길주대로 개간
공사에 부역나오라 하면서 말 안듣는 곰손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버린다(10. 토지분쟁사건), 이진
경은 마을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사립개명학교를 세운다(11. 신교육운동), 동헌습격의 혐의로 옥
살이하던 곰손이 석방되어 나왔다(12. 고난과 싸우는 사람들), 러일전쟁이 터진 가운데 한길주의
아들 경식의 타락은 날로 심해지고 왜놈들 행패도 더욱 심해진다(14. 전변하는 세상),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자원하는 농민들의 숫자가 급증했고, 마침내 한길주는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재물을 빼앗기고 만다(17. 의병의 활동), 한길주와 첩 성천마마 사이의 소생인 창복은
서울로 유학가 버린다(18. 첩의 아들), 합방이 되면서 송월동에도 새 바람이 불어닥치는 가운데
왜놈들 세상이 되어 버렸고, 제사공장이 서면서 많은 처녀들이 여공으로 흡수된다(20. 제사공
장), 박곰손은 이미 의병의 길로 나선 덕만의 부탁을 받고 제사공장에 수류탄을 던졌다(21. 삼형
제 폭포), 송월동에 사금광이 터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업자, 관리, 왜놈들이 송월동으로 몰려든
다(23. 신혈금광), 경식이 술과 노름에 미쳐 집안재산을 크게 축내자 한길주는 화병으로 누워 앓
다 마침내 죽고 만다(25. 한길주의 일가), 창복과 곰손의 아들 씨동이 농민야학을 개설하였다
(26. 새것과 낡은 것), 이춘실의 쌍동이 아들, 성천마마와 창복 등 여러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고
박곰손도 의병장 최동욱, 이진경과 부단히 접촉하는 가운데 북간도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27. 생
활난, 28.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곰손 일가는 두 달 만에 무산에 도착하였으나 곰손은 의병관
련혐의로 헌병분건소에 잡혀 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씨동이만 간도로 들어간다(29. 두만강)
제2부: 골병이 들어 나온 곰손은 이웃사람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소생하게 된다(2. 무산지대),
의병운동에 있어 한 주요 인물인 안무의 활약상(4. 안무), 곰손은 버려진 땅을 개간하였고 물레
방아도 설치해 주었다(5. 내기__7. 물레방아), 쌍둥이형제를 만난다(8. 쌍둥이 형제), 씨동은 간
도의병운동에 가담, 크게 활약한다(10. 진실일로), 갑룡, 최동욱, 씨동, 안무, 홍범도 부대의 활
동상(11. 화전민__15. 4월4일), 곰손과 씨동이 몇 년 만에 재회하였다(17. 아버지와 아들), 씨동
은 진경과 만나 시국담을 나누며 투쟁의지를 더욱 다지게 된다(20. 그들의 상봉), 씨동은 송월동
에 잡입하여 춘실, 최동욱, 강덕만 등과 함께 김진해 집에 방화하고 군청을 습격할 것을 모의한
다(21. 비밀공작), 씨동은 임무를 수행한 후 서울로 도망, 최동욱은 강원도로 숨어 들었다(22.
고향의 모습 26. 그 뒤의 박씨동), 곰손은 서울에서 열리는 공진회를 구경하러 갔다가 최동욱의
지시를 받아 백의동포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삐라를 살포하였다(28. 공진회 29. 암흑시대), 오
빠의 뒤를 따라 투쟁대열에 나선 분이는 간도 영동촌에 들어갔고, 무산으로 돌아온 곰손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징역 2년을 살게 된다(33. 위조한 투서), 31^만세사건이 터지면서 송월동
의 농민들은 이진경과 최동욱을 중심으로 하여 왜놈들과 무력충돌을 일으킨다 (35. 31^독
립운동), 강덕만은 죽고 이진경 외 여러 사람들이 붙잡히고 만다(36. 헌병대 유치장),씨동은 러
시아를 노동천국이며 이상국가로 생각하게 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곰손은 죽고 만다 씨
동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들어간다(37. 여명)
제3부: 씨동은 여기저기 독립단을 찾아다녔으나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한다 씨동은 옥이와
결혼한다(1. 역사적 전환기), 씨동의 눈에 독립군 단체들 사이의 알력과 대립이 포착된다, 안무
는 죽고, 옥이는 창일을 낳고, 씨동은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3. 갈림길), 31^운동 직후의
사회주의 운동 확산, 이진경의 사형집행(4. 그들의 운명), 송월동 사람들이 일본의 노동시장에
나갔다 되돌아온다(6. 노동시장), 씨동은 옥중에서 최혁으로부터 계급투쟁론을 중심으로 한 사회
주의 사상을 배운다(8. 옥내투쟁), 박분이는 여자 고학생들의 모임인 소녀회를 주도하고, 메이데
이가 임박하자 삐라를 뿌린다(10. 여자 고학생__11. 오누이), 창복은 사이비 사회주의자가 되고
만다(12. 역경과 순경), 노동연맹회 상무로 일하는 갑룡이 분이에게 사상교육을 시키고, 다시 분
이는 덕성을 의식분자로 만든다(13. 투쟁의 한길에서__18. 군중속으로), 씨동탈옥(18 탈옥), 씨
동은 탄광에 일자리를 얻어 그 곳에서 이철수와 동지관계를 이루면서 농민조합, 청념동맹, 야학
회 등에 적극 가담한다(22 신흥탄광), 김진해는 용소 복구사업과 개간사업을 벌이고 송월동 사람
들과 품삯을 갖고 계속 씨름한다(17, 19, 21, 23장), 송월동 사람들은 농민조합을 만들었고, 철
도종업원들은 동매파업을 일으킨다(25. 단결은 힘이다), 경남 철도종업원 총파업단행, 김갑룡이
배후조종(26. 계급의식의 각성), 신흥 탄광노동자들은 박씨동을 총책으로 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고무되어 평양 고무노동자들도 파업을 일으키는 등 전국 각지에서 지지의 표시가 있게 되었
다(29. 폭동), 간도의 아동골에서도 5.30폭동이 일어난다(30. 평강판), 간도로 돌아온 씨동은 여
러 곳을 다니며 삐라살포, 사상교육, 폭동조종 등의 항일, 반지주 활동을 전개한다(30. 평강판
__34. 추수폭동),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씨동은 장포수와 함께 대대적인 무기탈취공작을 꾀한
다 그리고 청년 혁명가 김동지의 영도 아래 창건된 항일유격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35. 항일
유격대), 씨동의 일당은 유격근거지로 최적인 어랑촌을 향해 희망찬 발걸음을 옮긴다(36. 투쟁의
불길 속에서)
1890년대 중바에서부터 한일합방 직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놓고 있으면서 충청도에 있는 송
월동이란 한 마을을 주무대로 내세운 제1부에서는 지주에게 끊임없이 반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의
병운동에도 관여하는 박곰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일면으로는 농민계몽운동을 펼치고 일면으
로는 의병들을 돕고 있는 지식인 이진경, 타락과 탐욕 그리고 농민수탈의 극을 달리고 있는 지주
한길주, 경부선철도공사를 벌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는 일인들, 일인들의 세력
에 붙어 타락한 행태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른바 '시대의 총아들', 순박하긴 하지만 힘이 없는
나머지 이곳에 붙었다 저곳에 붙었다 하는 농민들 등등을 만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제2부는 한
일합방 직후에서 31^운동 직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 가운데 무산, 송월동, 서울,
간도 등지를 주무대로 하여 박곰손, 박씨동, 이진경, 안무, 최동욱, 강덕만 등의 인물들이 삐라
살포, 관청 습격, 방화 등의 방법으로 반제, 반봉건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1^운동 직후에서 1930년대초까지의 독립운동사 혹은 사회주의 전개과정이 '병풍'노릇을
하고 있는 제3부는 제1장의 제목 '역사적 전환기'가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크게 전위 또는 주
의자로 묶을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의 투쟁방법, 투쟁이념 등이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지는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이미 2부의 끝부분에서 주인공 박씨동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예찬하는 식의 의식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뚜렷한 지식이나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채로 러시아
를 이상국가요 모델로 상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제3부에 오면 1부와 2부에서 작중 주요
인물들이 몸담아 왔던 의병이나 독립단, 또 이런 조직에서 주로 취했던 삐라 살포, 관청 습격 등
의 투쟁방법이 회의와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독립단은 결국에 가서는 항일유격대로,
소극적 투쟁은 적극적 투쟁으로, 노동쟁의나 파업은 아예 폭동으로, 또 민족주의 병용방안은 사
회주의 절대론으로 완전히 대치되거나 강화된 과정, "두만강"의 제3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담
고 있다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두만강" 그 중에서도 제1부와 2부는 작가 이기영의 자전적 요소를 여
러 곳에서 잘 살려낸 흔적을 드러낸다 가령, 개화사상가로서 천안에 사립 개명학교를 설립했던
민촌의 아버지의 모습은 사립 개명학교를 세운 작중인물 이진경에게서 잘 찾아볼 수 있으며, 민
촌이 10대에 농촌, 광산, 수리조합, 제방공사장 등지를 전전하며 날품을 팔았다는 사실은 지주
한길주와 김진해가 벌인 개간사업에 부역 나와 온갖 고생을 한 송월동 농민들의 삶의 모습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민촌이 동경에 유학가서 정칙 영어학교를 다니며 친구에게서 사회주의 계
통의 서적을 빌려 읽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력은 한길주의 서자인 창복에
게서 잘 살아나고 있으며, 어려서 민촌이 고대소설을 탐독했다는 사실은 "두만강"의 주인공 박씨
동의 어린 시절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렇듯 1, 2부와 3부는 작가의 전기적 내용을 직접 반영
했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4. "두만강"의 그늘
"두만강"의 1부, 2부, 3부가 3, 4년간의 간격을 두고 계속 발표되었던 1950년대 후반기에 이기
영을 포함한 북한작가들을 향해 당은 어떠한 주문을 하였을까 "조선문학통사"(과학원 문학연구
소, 1950)를 보면,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부르주아 반동작가로 몰아 숙청해 버린 당은 당시
전후문학자들에게 허무주의 풍조의 청산, 도식주의와 무갈등성의 극복, 사회주위적 사실주의 창
작방법에 위반되는 비속사회학적 방법에의 편햐음지, 생활의 피상적 기록에 편향 되는 것 금지
등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두만강"에서 에로스로서의 남녀관계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바로 허무주의 풍조를 청산해 버리려 한 민촌의 노력을 잘 입증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특히 제3부에 가서 반제, 반봉건의 투쟁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는 인물들을 영웅적
인 존재로 양각시키려 한 것은 '무갈등성의 청산' 바로 그 본보기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기영
이 "두만강"에서 작중 주요 인물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을 장황하게 또 반복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피상성'과 '도식주의'의 인상을 크게 염려한 데서 온 억지 서
술 방법으로 보인다
우리는 북한이 자랑하고 있는 이기영의 "두만강"을 통해서 북한문학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음
은 물론, 북한문학이 당성, 인민성, 사상성 등의 창작지침 아래서 씌어지고, 발표되고 있음을 ㄹ
또 북한문학의 한 이념적 정초의 하나가 유물사관과 계급투쟁사관임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
두만강"중에서도 특히 "청년 혁명가 김동지의 영도 밑에 창건된 항일유격대"에게 절대적 신앙을
보내면서 주인공 박씨동과 그 일파가 그 유격대를 향해 달려가게끔 하는 식으로 결말을 처리한
제3부는 북한문학의 근본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두만강"은
계급투쟁사관을 역설하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일제치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들려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1, 2부가 제3부에 필연성과 자연스러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채 억지로 걸려 있는 결과를 빚어내고 만다 뿐만 아니라 "두만강"은 사회주의 사상에
다가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 목적의식에 지나치게 고착되어 버린 나머지 실제로 작중인물
을 민족의식에서 계급의식으로 전환시켜 놓는 과정에서 필연성과 구체성을 거의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렇다 할 계기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씨동, 장포수, 분이,
갑룡 등이 계급투쟁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나 "청년 혁명가 김동지의 영도 아래 있는"항일유격대
를 향해 씨동, 장포수 등이 달려가는 것이나 모두 이기영과 "두만강"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들이 "두만강"의 설득력을 계속 약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에 대
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두만강"이 드러낸 한계는 곧 북한문학 전체의 한계다 ("문학사상",
1989. 6)25
5. 625에 대한 시각과 소설화 방법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의 한국소설의 역사와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625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른바
625소설을 외면하고서는 또 한국전쟁의 의미에 눈을 똑바로 뜨지 않고서는 해방 이후
한국소설을 대상으로 한 역사적 기술과 객관적 해석의 작업은 헛일로 떨어지기 쉽다
625는 분명 한국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흉터이며 또 우리의 오늘날의 삶과 상황이
625가 빚어 낸 의미의 자양에서 발을 뺴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만큼, 그 동안 한국작
가들은 이 소재를 한번쯤은 꼭 다루고 넘어가야 할 숙제로 인식하게끔 된 것이다 해방 이후 오
늘날까지 소설이론가들과 독자들 사이에서 명작의 반열에 들 만하다고 꼽히고 있는 작품들 그 중
심부에 다수의 625소설이 들어앉아 있는 사실에서 우리 작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
소재에 크게 부심해 온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625만큼 우리 작가들이 대를 물려 가
며 다루고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재도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 작가들은 625라는 소재를 한 편의 소설로 양식화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비극상을 드러내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인, 역사, 삶, 이념 등등의 추상명사
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으며 분단상황의 오늘과 내일을 면밀하게 헤아려 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작가들은 분단극복에 필요한 논리를 다지고 의지를 가
다듬는 모멘트로 이 소재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과 접근법의 다양함이 실제 작품들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만큼, 오늘날 우
리 작가들은 625는 희생, 한, 이데올로기, 민족, 폭력, 역사 등에 대한 주제의식을 가
장 잘 매개하고 있는 소재라는 점에 이의를 달고 있지 않다 직접체험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압박
감과 자신감, 그것에서 온통 벗어나 있는 미체험세대의 작가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소재를 우리 현대사의 어제와 오늘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직접체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접과 문학적 형상화의 성패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치더라도,
직접체험의 유무는 같은소재를 놓고도 상이한 접근방법을 낳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소
년기에 그것도 후방에서 겪었다 하더라도 전쟁을 '직접'겪은 작가들과 625에 얽힌 이
야기를 부모세대로부터 '들어서 안' 작가들 사이에는 분명 시각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625는 엄연한 삶의 일부요 현재의 한 형
성요인이 되는 것이지만 미체험세대의 작가들에게 625는 역사적 사실로 다가서는 것이
되기 쉽다 전자의 자기들은 아직은 '피해자'의 입장을 지키는 가운데 이념과 '피'사이를 또 한
과 화해의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는 반면, 후자의 작가들은 역사해석의 초기단계에서 흔히
보이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 시각 쪽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짙다 그ㄹ러나 나이로 보아 전자의
경우에 드는 작가들이 625의 소설 과정에 있어서 후자의 작가들을 오히려 선도할 만큼
의 새로운 시각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625라는 소재에 관한 한, 미체험세대가 체험세대보다 늘 신선하고 진취적인
시각과 창작방법을 가질 것이라는 예단은 늘 옳다고 만은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전자에 속하는
작가들은 미체험세대의 작가들에게 625를 전면적인 소재로 취하고 동시에
625가 안고 있는 의미의 핵심을 찌른 대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견해 쪽
으로 기울고 있다 전쟁을 '직접'겪은 세대로서의 오기랄까 책임감이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소재를 앞에 놓고 체험세대, 그 주에서도 참전세대와 그 이상의 연배에 있는 작가들
은 분노와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진 자전적 소설로 끌려들어가는 인력을 짙게 느낄 것이다 그리
고 같은 체험세대라 할지라도 지난 1970년대와 최근 1980년대의 여러 625소설들이 잘
보여주었던 것처럼, 소년기에 전쟁을 만났던 작가들은 체험이 빚어 낸 '뜨거운' 심정과 목격자,
주변인으로서의 체험이라는 성격이 빚어 낸 '차가운' 탐구욕이 잘 뒤섞인 소설양식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교과서나 부모세대의 이야기 그리고 풍문을 통로로 해서 625의 실체를 더듬
을 수밖에 없는 미체험세대의 작가들에게 전쟁은 기본적으로 역사소설가로서의 눈과 손을 더욱
분명하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미체험세대의 작가들에게서 주목할 만한 본격적인 전쟁소설
을 읽을 수 없는 형편에서 다음과 같은 인식은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즉 625를 소재로
한 소설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조건을 지닌 작가들은 바로 소년기 체험의 작가들이라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들 작가들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소설을 쓰는 데 있어 안성맞춤의 자산인 최소한의
직접체험과 그 체험에 함몰되지 않는 얼마간의 정신적 거리를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
년기의 전쟁체험은 뜨거움과 차가움, 상처와 냉철한 분석력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터로 아주 적
합하다는 논리다 소년을 목격자로 내세우면서 충격의 감정과 곧잘 자기 통찰로 이어지곤 하는
회상의 시점을 잘 교직한 소설들, 예컨대 윤흥길의 '장마', 김원일의 '노을', 이청준의 '소문의
벽', 유재용의 '누님의 초상', 이동하의 '굶주린 혼', 전상국의 '길' 등은 위의 판단을 잘 뒷받
침해 준다
소년을 목격자나 내레이터로 설정한 방법은 1970년대 한때 크게 유행되기도 했거니와, 지금도
효과가 큰 소설적 수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소년의 시점'은 천진한 세계와 더러운 세계를 극명
하게 대비하고 더 나아가서는 더러운 세계가 가져다주는 충격과 상처를 일깨워 주는 데 더할 나
위없이 의미를 건져 올리는 데는 분명 한계를 드러내는 일면도 있다 위의 소설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625를 소설화한 작가들은 바로 이 소년의 시점을 설정함으로써 그
들 나름의 숙제였던 '바로 보여주기'를 별반의 어색함이나 무리 없이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작
가들은 소년의 시점을 통과하면서 625에 관련된 인물들, 그들의 복잡다기한 관계가 빚
어 낸 상황들을 되도록 편견 없이 볼 수 있었고 그려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충격, 상처, 한
의 인자들을 더욱 선명하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유재용의 '누님의 초상'에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소련군 고급장교의 애인이 된 누님의 경우나 전상국의 '길'에서 피난 도중 외국군들에게 강
간당하고 마침내 동상에 걸려 두 다리가 절단되고 마는 누님의 비극은 남동생의 '나'의 망막에
비침으로써 더욱 충격적인 내용으로 살아나게 된다 작가들은 남동생인 '내'가 받은 만큼의 충격
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안겨 주기 위해 바로 이 소년의 시점을 설정했던 것이다 위에서 '장마'
를 쓴 윤흥길이나 '노을'을 쓴 김원일은 소년의 눈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깨끗한
창이라는 이치를 효과적으로 응용한 것으로, 이 두 작품은 좌익 쪽의 인물을 무조건 괄호를 치고
보려 한 종래의 일부 작가들의 태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공통점을 보면, 이 두 작가는 소년을 나
레이터로 설정한 작가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소년의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 소년의 입을 통
해 인물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작가적 관여나 전지자적 간섭을 최대한 유보해 두거
나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편견과 사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동시에
625의 한 단면을 거짓 없이 떠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년기에 전쟁을 직접 보고 겪고 했던 작가들이 소년을 목격자 겸 나레이터로 내세운 것은 자
연스러운 일이다 소년의 시점이 널리 공감을 산 나머지 일종의 유행현상으로까지 번져 갔다는
점은 625소설의 양식화 방법이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년기 체험의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한 결과이든 아니면 '바로 보여주기'라는 작
가적 소임을 잘 해내기 위한 묘책을 강구한 그 결과이든 '소년의 시점'은 625라는 소
재에 대한 새롭고도 공감도가 큰 접근법을 한껏 타개하는 신호가 될 수 있었다
625가 터진 뒤 40년이 가까워 온다 미체험세대가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해낼 30대에
들어선 지도 몇 년이 지난만큼 앞서 지적한 것처럼 625 그 자체는 자칫 역사소설로 양
식화될 운명과 시점에 놓이게 되었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의 작가들이 세대를 초월해서 또 작
품경향을 뛰어넘어 이 소재에 한 번 이상 매달렸던 경험을 갖고 있는 이상 625의 소설
화 방법과 또 그 결과인 소설유형은 실로 다기하다 아니할 수 없다 가령, 빨치산토벌대원을 똑
같이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그 인물에 대해 뚜렷하게 대조가 되는 시각을 지니고 있는
선우휘와 현길언 사이의 시차와 인식차이를 생각한다면, 또 부자 2대가 계속 수난을 당한다는 점
에 똑같이 착안하면서도 수난의 원인과 내용의 면에 있어서는 거리가 분명한 하근찬의 '수난2대'
와 이창동의 '소지'를 비교해 보면 625를 보는 시각과 접근방법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얼마나 다양하게 표출되어 왔는지에 대해 쉽게 짐작케 된다
그 동안에 발표된 소설들을 보면, 625를 소재로 한 소설들은 시각에 따라 전장소설
과 후방소설, 전시소설과 전후소설, 행동소설과 이념소설, 행동소설(목적문학)과 리얼리즘 등으
로 이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인물을 그리는데다 초점을 맞추었느냐에 따라 625소
설을 나누어 볼 경우,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이문열의 '영웅시대',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
원일의 '겨울 골짜기' 등과 같이 사회주의자 혹은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하나의 분명한
갈래로 남게 된다
그런가 하면 625를 소재로 한 소설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입장에서 서서 한의 생성과
정을 그리는 데다 역점을 둔 것과 한 가족이나 마을의 민족의 차원에서 '피'의 개념을 강조하는
가운데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으로 대별해 볼 수도 있다 사회경제사나 계급사회의 시각을
견지하며 빨치산을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작가들은 625를 대대로 짓밟히고 천대받아
오던 계급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시에 복수하거나 해한하는 현장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원일의 '노을', 조정래의 '불놀이', '태백산맥', 문순태의 '철쭉제' 등은 전쟁이 터지면서 그
전까지의 피해자가 일시에 복수심과 광기에 찬 가해자로 표변하고 다시 이들의 폭력에 의해 이전
까지의 가해자는 졸지에 결한의 포로가 되버리고 마는 과정을 메인 플롯으로 처리한 수작들이라
할 수 있다 한의 생성과 표출이라는 시각으로 전쟁을 해석하는 작가들은 한쪽의 해한은 곧 다른
쪽의 결한을 유도하는 것이라는 악순환에다 큰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전쟁은 최대의 악'이라는
주장을 눈이 번쩍 떠지게끔 환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한의 개념을 부각시키는 데 힘쓰고 있는 작가들은 대체로 한의 현상을 그리는 데서 머
물려고 하지 않는다 문순태의 '철쭉제'가 그 두드러진 예가 되고 있는 것처럼 한을 강조하고 있
는 작가들조차도 해한 ^25,25,135^ 결한 ^25,25,135^ 해한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
게 끊어 버릴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곤 한다 일찍이 황순원은 단편 '학'에서 좌와 우사이의 또
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가능성을 '학사냥'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제시하면서 조심스럽게
일구어 보았거니와, 윤흥길은 '장마',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에서 이창동은 '친기'를 통해서 이
은식은 '땅거미'를 통해서 능히 복수극으로 번져 나갈 수 있는 대립관계가 소멸되는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좌와 우, 가해자와 피해자,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 등 대립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 사
이의 화해가능성을 모색한 소설들은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보다는 '정'이나 '피'가
훨씬 더 인간적이며 값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
긴 하면서도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자주 배반당하곤 했던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625문
학 혹은 분단문학은 통일지향의식의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객들에게 좋은
자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는 이러한 인식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고 확대해석
이 될 법하다 625나 그 전사의 한 장면인 4.3사태를 소재로 취하면서 그에 관계되는
인물들의 존재방식을 좌우 이데올로기보다는 진실과 허위라는 스펙트럼에다 통과시켜 보는 방법
을 쓰고 있는 현길언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부정한 대표적인 최근 작가라 할 수 있다 '바람과
불길', '닳아지는 세월', '미명' 등의 작품에서 현길언은 한 개인의 삶은 진실과 허위라는 이항
대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다 그는 한 개인의 삶을 뒤틀리게 만들
고, 미망 속에 빠뜨리는 요인들 중 이데올로기와 군중심리 그리고 집단적 광기 등을 제일차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이문열의 '영웅시대' 등이 이데올
로기 비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주인공의 몰락을 예시하였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데올로기 그
자체와 광기와 맹목성으로 뭉쳐진 집합의지를 부정하고 있는 듯한 현길언의 작가적 기본자세는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에 예를 든 몇몇 작품처럼 이념보다 피를 앞세웠다고 해서, 또 이데올로기 초월의
경지로 접어들고 있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새로운 시각, 분단극복의 적극적 시도 운운하며 평가
하는 것은 냉철한 판단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혈육간의 사랑 앞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용지물이며 방해물일 뿐이라는 따위의 발상법은 이미
625 전후를 통해 여러 작품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표출되었던 것인만큼, 화해의 논리로
곧잘 연결되는 '피' 우선론, '정' 만능론은 꼭 새로운 시각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어느 경우
에 있어서는 오히려 고전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여순반란사건이 있은직후에 김동리는 이 사건을
소재로 취해 쓴 소설 '형제'에서 우익 쪽인 형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많은 동네 사람을 죽인 동
생을 살려 내기 위해 자기편 사람들을 배반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김
송은 단편 '폭풍'("전시한국문학선", 1954)에서 국군에 입대한 큰아들과 공산당 지역 책임자인
작은아들을 '똑같이' 사랑하면서 그 뜻의 표시로 집안의 감나무를 목숨 걸고 지키는 한 어머니의
경우를 제시한 바 있다 김동리는 625가 일어나기 한해 전에,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좌우 이념대립 속에서도 결코 뒤틀어지는 않는 형제애를 감명 깊게 그려 내었으며 김송은 모성애
는 이념을 초극하는 힘을 지닌 것임을 암시하였다 모성애는 이데올로기 따위는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이념에게 길을 내주려고도 하지 않는 숭고하면서도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내용의 인식
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작가들 사이에서 반복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폭풍'과
같은 해에 발표된 박영준의 '용초도병해'는 한국군포로가 판문점을 거쳐 용초도로 수송되는 도
중, 과거 포로수용소에서 전울르 무고했던 것으로 인한 괴로움과 북에 두고 온 사랑하는 여인으
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바다에 뛰어들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으로, 여기서도 한 개인
을 움직인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양심의 가책과 사랑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상가 같이 김동
리,김송,박영준 등이 전형으로서의 자리를 지켜 가며 제시한 '피' 우선론, 이데올로기 뛰어넘기
등은 겉으로만 볼 적에는 최근에 와서 큰 공감을 끌어 모으며 재현되고 있기는 하나, 이들 1940
년대와 1950년대의 작품들과 1980년대의 해당 작품들 사이에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해 전문학자들
빰치게 연구한 끝에 나온 노작들, 예컨대 '광장', '시장과 전장', '영웅시대' 등이 엄존하고 있
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내용을 알고 그 초월론을 시도한 것과 잘 몰라서 처
음부터 기피하는 태도로 빠진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625소설은 자기 주변에 '분단문학', '이산문학' 등과 같은 개념을 두고 있다
'625'소설은 1950년 6월에서 그 후 3년 동안의 기간만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이어
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주기 쉬운 것으로, 사실상 요즈음에는 좀더 포괄적인 용어인 분단문학이나
통일지향문학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분단문학이라는 용어는 625를 3년간의 전쟁기
로 굳혀 보는대신 625를 원인과 배경의 골이 깊고 그 휴유증이 장기간 그것도 심화된
형태로 지속되어 온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625소설이 한국전쟁을 '과거'로 보고
자 한 것이라면 분단문학은 '현재'의 한 원인으로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런가 하면 통일지향문학은 한국전쟁의 문제를 통일의 성취로써 해결해 보겠다는, 다시 말해 '미
래'에의 적극적인 인식과 희망에 서 있는 것이라 하겠다
지난 1970년대까지는 우리 작가들 사이에서 625를 엄청난 피해와 한, 혼란과 모순으
로 점철된 한국현대사, 바로 그 원인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해방 직후의 한국사회에 대한 지적인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625를 하나
의 결과로 놓고 생각하는 논의방법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김원일의 '불의 제전', 현기영
의 '순이 삼촌', 현길언의 '신열', '미명' 그리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과 같이 4.3사태나 여
순반란사건을 다룬 소설들은 625는 결코 지평돌출의 사건이 아니렀다는 점을 확실하게
일깨워 준다 625를 출발점으로 놓고 보려 한 사람들과 도달점으로 놓고 그 전사를 탐
색하는 데 힘쓴 사람들은 625의 원인과 경과의 해명에 있어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
다 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625를 이데올로기 대립의 현장으로 보는 경향이 짙으
며, 후자의 입장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계급갈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625를 소설화하는 방법에 있어서 각 작가들이 처해 있는 기본입장이 저마다
틀린만큼, 어떤 시각과 접근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식의 단정은 내리기 어렵다
여수반란사건, 제주사태, 대구폭동 등과 같은 625의 전사쪽으로 관심을 옮기든 아니
면 625가 그 절대적 원인이 된 이산의 아픔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든 그것은 온
전히 작가의 선택에 맡길 문제다 또 한의 골을 파헤쳐 들어가는 식의 방법을 취하든 화해의 가
능성을 모색하는 쪽으로 나아가든 그것도 작가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소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들에게도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울림'이 크고 '환기력'이 강한 작품을 써내야
한다는 점이다("동서문학", 1988.
6. 1970년대 소설의 실상과 의미
1. 배경요인
1950년대 소설 앞에 625가, 1960년대 소설 앞에는 41,24^와 51,124^이
있었다 1950년대 소설은 625로부터 상처받고 뿌리 뽑히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 한
한국인들의 실상과 정신적 기제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고 1960년대 소설은 41,24^와
51,124^이 영향원이 된 한국인의 삶의 모습과 의식의 저층을 파헤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70년대를 살았던 이들, 그 중에서도 의식이 깨어 있는 자들을 더욱 고통과 긴장 속
으로 몰아갔던 배경요인들 중 특히 어떤 것을 주목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어
렵지 않다 1972년 10월에 있었던 유신선포가 상징적으로 일러주는 암흑과 공포의 정치, 바로 이
것이 1970년대 한국인의 삶의 기조, 의식의 방향, 정신사적 추이 등을 근본적으로 조절한 것임은
두말할 것 없다 어둠과 얼음의 이미지로 착색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가장 근본적인 판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1970년대의 한국인들 대부분은 갈등과 절망감, 패배의식과 소외감 등으로 얼
룩져 버린 정치적 무의식을 곱씹는 수준에서 머문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어둠의 정
치 이외에 또 하나의 거대하고도 분명한 현실을 만나고 있었다 흔히들 사회과학자들이 닫힌 정치
의 부산물 또는 안전판이라고 지적하곤 하는 고속 경제성장, 근대화와 산업화의 열기, 대중문화
의 급팽창 등의 발전논리가 예상보다 훨씬 급격하게 열려 오게 된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정치와
앞으로 뛰어가고 있는 경제, 이는 1970년대 우리 사회가 만나야 했고 감당해야 했고 또 극복의지
를 가져야 했던 엄연한 '두 겹'의 현실이었다
정신사는 흔히 문학사의 상위개념으로 아니면 그림자로 설명되는 것으로, 1970년대의 정신사는
바로 이렇듯 어둠의 인식과 밝음의 감정이 분명히 갈라지면서 또 기묘하게도 잘 병존하고 있는
모순구조 위에 서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1970년대의 우리 소설사가 기본적으로 '혼
돈의 패턴'을 내부구조로 삼으면서 '계선적 패턴' (linear pattern)을 바깥틀로 잡고 있다는 논
리와 흡사하다 또 중간소설이 문자 그대로 어중간한 현실인식을 달리는 것이라면 1970년대에 들
어서서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났던 중간소설의 작가들과 작품들은 바로 1970년대의 정신사와 소설
사가 어둡기 짝이 없는 내면과 밝음을 과장한 외면이라는 양극을 동시에 그것도 위태롭게 디디고
서 있음을 잘 반증해 주는 것이 된다
이미 일제식민통치하에서의 작가들과 작품들이 잘 드러내었던 것처럼 닫혀 있는 정치문화나 경
제적 상황 앞에선 사실주의자들이 가장 괴로워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비록 1970년대는 걸맞게
시리 세태소설, 역사소설, 이념소설, 전쟁소설, 종교소설, 중간소설 등등의 다양한 소설유형을
선굵게 내놓았는지는 모르나 본격적인 수준의 사실주의 소설이 뒤로 물러나 앉은 시기였음도 부
정할 수 없다 가히 1970년대는 외압에 의해 비판적 사실주의가 질식상태에 빠졌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경제입국론, 산업화, 근대화의 논리, 대중문화론 등 과속과 비약과 급팽창의 현상을 오히려 예
찬한 넓은 의미의 사회발전론도 당시의 작가들에게는 시련이요 짐이 된 측면이 강했다 풍요, 능
률, 합리성, 세계주의 등의 이름 아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사고방법, 민족고유의 습속과 세계
관이 거침없이 또 급격하게 깨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우리 작가들은 이러한 누벨 바그 앞에
서 나름대로의 고민 어린 선택을 해야만 했다 수동적으로 변화의 물결을 타고 나간 작가가 있는
가 하면 변화가 접어들어야 할 길과 도달점을 일러주는 데 힘쓴 작가도 있다 그리고 변화가 남
기고 간 모순, 갈등, 병리현상 등에 시선을 모은 작가도 있다 첫번째 경우에서는 흥미제공을 장
기로 삼으면서 대중성에다가 제일 큰 비중을 두는 작가들의 얼굴을, 두번째 경우에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가득 찬 문학기능확대론자의 얼굴을 곧잘 만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세번째 경우에서는
어떤 결과를 남겼든 리얼리즘의 정신과 방법을 표방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2. '1970년대 작가'의 뉘앙스
1970년대 소설의 실체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록 저널리즘의 용어이긴 하지만 '1970년
대 작가'라는 말에 엉겨 붙어 있는 독특한 뉘앙스의 속을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대체
로 1970년대에 데뷔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인 작가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 것으로 이해되었고
사용되었다 긍정적 반응보다는 부전적 반응을 더 많이 머금고 있는 듯한 이 말은 '신기록을 낳
은 작가들'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면에서의 신기록이며 새로움인가 전
례 없이 높은 판매량을 보인 것, 그 당시로서는 충분히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세계관이나 감수성
을 터뜨린 것, 작가의 기본입상을 사상가보다는 장인 쪽으로 밀어붙인 것 등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두번째와 세번째 유형의 새로움은 직접적으로, 첫번째 것은 간접적으로 전통적
인 소설관과 작가역능론에 도전하고 충격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새로움의 내용들 중에서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부정적 측면
보다는 중립적인 현상쯤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문제는 첫번째와 두번째 형태의 새로움을 획득하
기 위해서 세번째 유형의 새로움을 거침없이 꾀하는 데 있다 '별들의 고향'(1973), '바보들의
행진'(1974)의 최인호, '영자의 전성시대'(1974), '미스 양의 모험'(1975)의 조선작, '아메리카
'(1974), '겨울여자'(1976)의 조해일, '죽음보다 깊은 잠'(1979)의 박범신, '땅콩껍질 속의 연가
'(1977의 송영, '부초'(1977)의 한수산 등은 전례가 드문 판매량의 성취를 세번째 형태의 새로움
에다 근거를 두고 보인 나머지 결국 '중간소설'의 범주로 떨어지고 만 경우가 되었다 소설을 본
격과 통속으로 대범하게 나누어 왔던 전통적인 이분법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제3의 갈래인 중간
소설들은 수준이 그리 낮다고만 볼 수는 없는 독자들을 소설 쪽으로 끌여들었다는 긍정적인 의미
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들 중간소설의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두터운 독자층은 나중에 가서
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함께 높은 소설들, 상품성과 예술성이 동시에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한국소설사에서는 전례가 별로 없는 바람직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 한국현대소설사에
있어서 1970년대 소설이 보여준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은 이처럼 고도의 예술적 가치로써 흥행에
도 성공할 수 있었던 작품들과 뛰어난 효용가치를 통해 크나큰 교환가치를 이끌어 낸 작가들에게
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1972), '당신들의 천국'(1976), '자서전을 씁
시다'(1977) 등 몇 소설집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 '장마'(1980),
황석영의 '객지'(1974), '삼포가는 길'(1975), '장길산'(1976), 김원일의 '어둠의 혼'(1973), 전
상국의 '하늘 아래 그자리'(1979), 박경리의 '토지'(1973__1976), 이병주의 '지리산'(1978), 박
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1978),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 김성동의 '만
다라'(1979),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1980) 등등이
바로 그 좋은 예다 이러한 소설집들은 작품만 좋으면 잘 팔린다는, 전대에는 없었던 공식을 세
워 놓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지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것임을 또 소설은 도덕적 상상력만이 능사가 아님을 잘 실증해 주었다 그리고 소설은 예술품이
면서 동시에 하나의 상품임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였고 창작물에 대한 당대의 평가의 신속성과 정
확성을 잘 반증해 주기도 하였다
효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동시에 높은 소설들이 본격과 통속의 전통적인 이분법을 오히려 강화시
켜 준 데 반해 앞서 말한 중잔소설들은 고급소설과 승화된 오락소설 그리고 통속소설로 삼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입장을 굳히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중간소설의 존재들은 1970년대의 가
장 시끄러웠던 논쟁거리, 즉 상업주의 문학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전문적인 문학독자들에게는 대
중소설과 오락소설 그리고 시민소설, 통속소설, 음담소설 사이의 미세한 차이점을 밝혀 보고자
하는 탐구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서로 미세하긴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이러한 소설유형들
은 골치 아픈 현실과 문제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하는 독자들의 도피충동
(Fluchtmotiv)을 충족시키는 데서 출발하고자 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소설유형에 드는 실
제 작품들의 양적 팽창은 표현의 자유를 가혹하게 제한한 정치적 상황의 뒤를 이어 사실주의 정
신과 방법에 타격을 가했다
3. 사회학적 상상력의 명암
일차적으로는 '닫혀진' 정치문화로 인해, 이차적으로는 중간소설류의 이상비대로 말미암아
1970년대 소설은 당대의 사회와 동시대인의 삶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또 본질을 추려 내어 그리고
자 하는 사실주의 정신과 방법이 뒤틀려 버리거나 움츠리고 만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
렇기는 하나, 1970년대를 사회학적 상상력이 만개한 시대로 파악하는 데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1970년대의 우리 소설은 1970년대의 우리 사회를 갈등이론, 소외이론, 계층론
등 사회과학의 주요 개념을 통로로 하여 접근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직 충분치 않다
고 하더라도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 셈이 되었다 비록 당시의 작가들 중 대부분이 현실묘사에
있어 피상성과 지엽성을 면치 못했다고 자책하는 형편에 빠져 있기는 하였지만, 최일남, 박태순,
이문구, 이청준, 윤흥길, 이동하, 박완서, 조세희, 전상국, 조정래, 김국태, 유재용, 문순태 등
등과 같은 작가들을 비롯한 1970년대 작가들이 당시의 우리 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풍경화나 초상
화를 성실하게 그려 내 보이려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표현자유의 억압으로
인해 입체적이며 총체적인 사회적 풍경화는 그려 내기 어려웠다 치더라도 최소한 사회적 초상화
를 성공적으로 그려 낸 작품들은 다수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한 개인을 타인과의 관계논리라는 시각에서 보고자 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시대
와 사회를 폭넓게 조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 주고 또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위상과
가치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게끔 해준다 그러나 작가들 모두의 과제인 인간탐구라는 문제에 있어
사회학적 상상력이 혹 주도적인 역할은 할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혼자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의 기본시각인 관계논리의 맞은 편엔 개별자론 혹은 단독자론이 서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개별자론 혹은 단독자론은 주로 심리학적 상상력이나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적
극 활용했던 작가들을 일종의 교범으로 알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상에는 1970년대 작가들
이 단독자적 존재론, 개별자적 인간론에는 무지했거나 무관심했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
로 1970년대의 일련의 상황은 당시 작가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사회학적 상상력을 더 많이 지
니고 활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 사회학적 상상력은 당시 작가들 사
이에서 특히 외적 요인 떄문에 총체적이며 예리한 리얼리즘정신과 방법이 계속 살아나지 못함에
따라 마침내 애초의 환기력과 충격을 유지하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비속화 경향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 종교, 존재론 등의 문
제를 들고 나온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김성동의 '만다라'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만연과 타락
에 많은 독자들이 식상해 버린 바로 그 시점을 탄 것이기에 예상외의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사회학적 상상력은 치열한 리얼리즘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본격적인 수준의 사회적 풍경
화는 별로 많이 그려 내지 못하였지만 또 소설양식의 단순화와 비속화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
만, 우리 소설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사회적 초상화응 실제로 적지 않게 남겼다고 할 수 있
다
1970년대가 남겨 놓은 사회적 초상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뿌리뽑힌 자들'(the
uprooted)이다 '뿌리뽑힌 자'는 하나의 집합명사로 100퍼센트로 확실하게 떨어지는 용어라고 하
기는 어렵다 이 말은 '없는 자'라는 말보다는 분명 지시영역이 좁은 것이기는 하지만, 반면에
더욱 동태적인 느낌을 안겨 주는 것도 사실이다 '뿌리뽑힌 자'라는 말은 피해, 박탈, 소외 등의
뉘앙스를 더욱 짙게 안겨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 두루 다 걸
치는 것이긴 하지만, 1970년대 소설의 경우 물질적인 면에서 뿌리가 드러나 버린 사람들 혹은 뿌
리가 드러나는 과정을 그리는 쪽으로 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소설들이 보여준 뿌리
뽑힌 자는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을 빼앗기고 만 자뿐만 아니라 가져도 좋을 법한 것을 이른바 '가
진 자'의 탐욕과 횡포 때문에 갖게 되지 못한 자까지 의미하였다
1970년대 소설에 나타난 뿌리뽑힌 자 속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존재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생존에 필요한 요건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노동
자들 둘째,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격랑에 휩쓸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 혹은 정신적 뿌리를
상실당하고 만 사람들 셋째, 적응력을 갖추지 못한 나머지 몰락의 길을 걷고 만 정직하며 소박
한 소시민들 넷째, 기존의 법, 제도, 관념과 극심한 마찰을 일으킨 끝에 정신적 항상성을 놓치
고 만, '의식 있는'자들 다섯째, 특히 625와 같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받은
외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머지 정신적 실조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들
대략 이와 같이 뿌리뽑힌 자를 나누어 놓고 보면, 뿌리뽑혀 있음의 상태가 물질적 측면의 상실
을 지나 정신적 소외감과 박탈감에까지 걸려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1970년대 소설을 '소외의
미학'이라고 설명하려 한 사람들의 논거는 바로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위의 하
위개념들은 완전히 독립된 상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대체로 겹쳐진 상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당시 소설 속에 등장한 한 개인은 첫번째 유형에 포함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번째나 네번
째 항목의 적절한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첫번째 유형의 인물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형상화한 것으로는 황석영의 '객지',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과 같은 작품들,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이
있다 그리고 두번째 유형의 인물과 그들의 삶의 정황을 밀도 있게 그려 낸 뛰어난 작품으로는 이
문구의 '관촌수필'(1977), '으악새 우는 사연'(1978), '우리 동네 X씨'계 연작소설이 있다 이문
구는 근대화나 산업화의 음지를 농촌에서 찾은 대표적인 경우가 되었거니와 '왕십리'("문학사상
", 1974. 5__10)를 쓴 조해일, '정든 땅 언덕 위'(1973)를 쓴 박태순, '서울 사람들'(1975)의 최
일남,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6), '도시의 흉년'(1977)의 박완서 등은 이른바 '도시소설'의
양식으로 나아간 경우라 할 수 있다 세번째 유형의 인물과 그의 삶의 경우를 정직하게 들려준
소설의 적절한 실례로는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이동하의 '모래'(1978), '바
람의 집'(1979),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1978), '살아 있는 늪'(1980),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1980) 등등을 들 수 있다 네번째 유형의 인물과 그의 행태는 사실상 1970년대 소설에서는 뚜
렷하게 독립된 형태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한때나마 적극적이면서 능동적인 행태를 보여줄 법한
이런 인물들은 첫번째에서 세번째까지의 인물유형에서 '겹쳐진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다섯번째 인물유형은 뒤에 가서 논할 625소설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존재로, 첫번째
에서 네번째까지의 인물유형이 1970년대 한국사회의 횡단면을 구성한 존재들이라면 이 유형은 종
단면을 투명하게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육체노동자의 삶의 모습을 거짓 없이 떠올리면서 당시로서는 모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
자들의 파업이란 모티프까지 살려 내 보인 황석영의 '객지', 고도의 전문지식과 의도적인 건조체
문체를 토대로 삼으면서 동시대의 공장노동자들의 척박한 근로조건과 비참한 삶의 모습 그리고
마침내는 노사분규의 현장까지를 치밀하게 형상화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기본적으로는 제대로 자리잡기 어려웠던 1970년대의 노동문학을 가장 잘 대변해 준 것들이다
1970년대의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똑같이 '노동자소설'(Arbeiterroman)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
는 황석영과 조세희는 양식화 방법의 면에서는 작든 크든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동자들
의 삶의 모습을 그리는 데 있어 황석영은 부정적인 양태마저 가림 없이 있는 그대로 내보이려 한
솔직성의 태도를 취했는가 하면, 조세희는 엄숙한 표정으로 일관한 가운데 노동자들의 실태에 관
한 보고서를 작성해 보였다 황석영이 노동자들과 같이 웃고, 떠들고, 슬퍼하고, 아파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조세희는 곤장 노동자들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면서도 완벽한 백서를 작성하고
자 한 학자나 기자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란 표제에서 잘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혹 눈물겨운 몸부림으로 끝날지언정 보다 나은 삶을 향한
꿈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충언을 분명하게 들려주고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특정인물의 이름이라는 수준을 넘어서서 1970년대에
급격하게 자리잡은 산업사회, '힘'과 요령이 판을 치는 세태의 그늘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
해 몸부림치고 있는 바로 그런 왜소하고 초라한 존재들을 상징적으로 일러준다 1970년대 소설의
주인공들 가운데서 아마도 '난장이'만큼 뿌리뽑힌 자의 인물유형을 적실하게 상징해 주는 것은
없으리라 단적으로, 난장이는 뿌리뽑힌 자의 대명사가 된다 조세희는 난장이 일가의 참담한 비
극상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가장이며 엄연히 어른인 난장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에 갔다 오는
환상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되도록 거짓 없이 적시하려 한 주제의식이 우선 시선을 끌고 있거니와, 이러
한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방법이 특수한 점에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다 조세희는 전통적인
소설미학 혹은 종래의 소설양식화 방법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해부의 방법을 여러 곳에
서 적극 활용했고 또 공문서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든가 하드보일드 문체를 의도적으로 많이 갖
다 쓴다든가 또는 관점의 이동을 빈번하게 꾀함으로써 소설양식의 가능성을 한껏 높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렇듯 엄숙하고 비장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현실인식과 신선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서술방법이 교묘하게 잘 반죽된 것 때문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더욱더 큰 긍정평가
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계열소설의 하나인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와 같은 단편을 보면, 작
가의 해설의욕이 과잉으로 흐른 나머지 소설이 마치 사회학개론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
도 받게 된다
만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1970년대에 발표되지 못하고 소재상의 금기가 다 깨어져
나간 오늘날에 발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소재가 주었던 충격과 서술방법에서 풍겨
져 나왔던 신선감은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조세희의 일련의 노동자소설은 총체적이며 치열한
리얼리즘정신이 시들어 있었던 바로 그 1970년대에 발표되었던 것이기에 예상 외의 큰 반응을 얻
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선 황석영도 예외라고 할 수는 없다 소재문학이라는 말이 비아냥거림 속
에서도 많이 떠돌아다녔을 정도로 197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삶의 세계를 다룬다는 그 자체만으로
도 미리 얼마간의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호스테스와 같은 타락
한 여인, 불행한 여자를 다룬 소설들이 알레르기반응을 받으면서 우선 한 점 깎인 채 읽힌 것과
는 좋은 대조가 된다 소재 그것이 곧바로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1970년대는
소재 그 자체가 곧 작품인 것 같은 착각을 안겨 주었었다
어떤 소요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는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 그것 하나
에만 매달린 채 '무능력자', '못 가진 자'의 길을 걷는 어느 중년사내의 경우를 그린 윤흥길의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1980년대에 와서 작가들로부터 온통 긍정적 시선을 받고 있는
'운동권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한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는 1970년대 작가
들이 공통적으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문제삼았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골 깊
은 갈등에 대한 근본적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윤흥길은 급격한 산업
화 정책, 물질주의와 권위주의의 팽배로 말미암아 당시의 한국사회가 모순과 갈등의 악순환상태
로 접어들고 있음을 날카롭게 꼬집어 내기도 하였다 한 개인 또는 한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욕에만 충실한 나머지 타인이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정황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현상까지 일게 되었다는 것이다 윤흥길은 이 작품을 통해 타락한 세계에 적응
할 힘과 의지를 지니지 못한 채 극도의 소외감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한마디로 정신적
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진 한 사내의 경우를 들려주고 있거니와 여기서 '아홉 켤레의 구두'란
아무 실속은 없는 그러나 선은 분명한 자존심을 비유하는 것으로 새길 수 있다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을 표방한 대다수 1970년대 작가들은 도시영세민, 농민, 노동자 그 누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든간에 또 도시, 농촌, 공장, 회사 그 어디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든 간에 한
결같이 '못 가진 자', '빼앗긴 자', '소외된 자', '짓밟힌 자'를 연민이나 흥분에 찬 눈으로 문
제삼고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궁기를 면하지 못한 농민, 척박한 근로조건에 허덕거
리는 노동자 이외에 창녀, 술집여자, 혼혈아, 도시빈민 등과 같은 밑바닥 군상을 주인공으로 설
정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는 아류작가들에 의해 일종의 유행현상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문제
의식과 창조적 정신으로 가득 찬 작가들이 내세웠던 '동정의 관점'도 나중에 가서는 에피고넨들
의 손때가 묻으면서 휴머니즘을 가장한 값싼 연민의 감정, 알량한 동지의식로 변질되고 말았다
4. 분단문학의 줄기
1950년대 이래 계속해서 한국작가들에게 작가적 소명의식을 일깨워주는 과제가 되어 온
625라는 소재는 1970년대에 들어와 주로 소년시절에 전쟁을 전쟁을 체험한 작가들의
가슴과 손을 만나면서 여러 편의 명작으로 태어나게 된다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황토
'(1974), '이십년을 비가 내리는 땅'(1977), 윤흥길의 '장마', '황혼의 집'(1970), 김원일의 '노
을'(1977__1978), '어둠의 혼'(1973), 현기영의 '순이삼촌'(1979), 박완서의 '배반의 여름
'(1976), 오정희의 '중국인거리'(1978), 이동하의 '장난감도시'(1979), '굶주린 혼'(1980), 전상
국의 '아베의 가족'(1979), '맥'(1977), 선우휘의 '쓸쓸한 사람'(1977), 오탁번의 '새와 십자가
'(1978), 홍성원의 '남과 북'(1977) 등등
작품의 양과 질을 다 함께 살펴볼 때 1970년대의 625소설은 전상국, 윤흥길, 김원
일, 이동하, 조정래, 김용성, 김문수, 현기영, 오탁번 등과 같이 전쟁을 소년기에 겪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소년기체험에서 출발한만큼 이들 작가들은 주로 회상의 시
점과 포즈를 통해 전쟁의 의미보다는 실상을 건져 내려 한 데다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있
는 그대로를 성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저절로 말하는 것이 되는 그런 방법을 취했다고나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상국은 '아베의 가족'에서 전쟁이 한국인에게 안겨 준 외상의 크기와
깊이를 더듬어 보았고, 윤흥길은 '장마'에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보다 힘이 더 센 것
은 바로 샤머니즘이요 '피'임을 일깨워 주었고, 김원일은 '어둠의 혼', '노을'등에서 이데올로기
가 한과 만나면서 광폭한 행동주의로 표출되는 과정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조정래의 '황토',
이동하의 '장난감도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전쟁 직후의 한국인의 삶의 양태를 '굶주림',
'박탈감', '공포심' 등의 이미지로 칠해 버린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625를 소재로 한 1970년대의 소설들에 대해선 대략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
다
첫째, 비록 부분적이고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직접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625의 참
모습을 그려 내고 알리려 했던 움직임을 지적할 수 있다 사실은 어떠하며 진상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ㄹ강하게 던지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은 넓은 의미의 또 새로운 뜻의 '보고문학'에다 귀속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1960년의 최인훈이 '광장'에서 또 박경리가 '시장과 전장'에서 체험내용
의 재현의지보다는 객관적 탐구욕에 더 크게 기대어 이데올로기, 사회주의자, 전쟁, 민족, 역사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색한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물론 이병주의 '지리산'과 홍성원의 '
남과 북'을 크게 의식하면 1960년대의 625소재문학과 1970년대의 그것 사이의 차이점
은 상당히 흐릿해지고 말 것이다
둘째, 625를 소재로 하여 소설을 쓴 작가들은 개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
지만 625의 의미를 단순한 과거사로 고착시키는 대신 '오늘'과 '여기'에 아직도 분명
하게 직접, 간접으로 걸려 있는 것으로 파악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 작가들의 잠재심리에 의하
면 625는 분명 1950년도에 빚어진 '역사'이며 동시에 1970년대 동시대인들이 직면해야
할 '현실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625라는 소재는 역사소설로 태어
나기보다는 아직은 민족문학이나 분단문학 또는 통일지향문학의 양식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더 많
이 안게 된다
셋째, 특히 '남과 북', '지리산', '노을', '장마'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1970
년대 작가들은 625라는 소재는 전쟁소설, 이념소설 등 여러 가지 소설유형을 매개하는
것임을 실천적으로 입증해 보였다 1980년대에 오면 여기에 제주 4.3사태, 여순반란사건 등을 집
중적으로 재조명한 사건소설이자 그리고 그 사건의 주역들을 안타고니스트로 몰아간 시각에서 벗
어나고 있는 '빨치산소설'과 같은 유형이 추가된다("현대문학", 1983. 3)25
7. 문제소설들을 따라서
1. 전체적인 인상
전쟁, 분단상황, 혁명, 정변, 경제발전 등으로 짜여진 해방 45년의 역사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설은 역사의 흐름에 직접 뛰어들고, 역사적 상황에 즉각적으로 응전하는 것인
만큼 해방 45년의 한국소설의 자취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지난 45년간의 우리 작가들과 소설들은 역사가 혼란과 급변의 패턴에 놓여 있는 가운
데 그때그때 모순과 갈등을 빚게 되면 그에 따라 소설양식은 리얼리즘으로 응수하게 되는 것임을
잘 실증해 주었다 작가라고 하면 마땅히 역사, 사회, 상황, 이데올로기 같은 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접근해야 한다는 관념이 이제는 편견의 형태를 벗어나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잡게 되었
다
반영론의 관점에서 서서 소박하게 생각하자면, 해방 이후의 한국소설은 그때그때의 위기사
(Katastrophengeschichte)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모방해 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사실에 감추어진 진실을 캐내려 하거나 그를 재평가
하고자 하는 준역사소설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을 보면, 또 특히 소재의 면에서 금기라는 것이
깨진 것을 보면 그 동안의 우리 소설은 작가를 에워싼 외부적 요인들과 또 자가 자신들의 문제가
겹쳐짐으로써 독자들의 기대지평과 시대의 요청에 제대로 부응하지는 못했던 것임을 알게 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소설의 흐름은 리얼리즘소설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이
념소설의 가능성이 부단히 모색되어 온 과정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정치문화의 거듭되는 혼란과
불안정으로 인해 리얼리즘정신이 시련을 겪어 온 바로 그 과정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논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의 우리 소설을 '아버지'의 부재 혹은 수난을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아
버지'를 찾고자 하는 과정으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는 한 시대나 사회를 이끌고 가는
근본적인 힘이나 가치 또는 이념이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설명된다 625나 이데올로
기의 문제를 다룬 소설들과 오늘날 우리들 삶의 풍속도를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그리고 있는 소
설들은 바로 아버지의 부재 또는 수난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해방 45년의 한국소설의 도정에 대
해선 '상처'의 묘사와 해부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한
국작가들은 개인적인 경우의 것이든 집단적 차원의 것이든 이 '상처'라는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대다수 한국인들은 역사나 상황은 한 개인에게 억압이나 피해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는 경험법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른바 625소설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 중 다
수는 '한'이라는 형식으로서의 상처의 실체를 파악하고 또 그 원인과 근인을 파헤치고자 한 노력
을 보여주었다 한은 해방 이후의 우리 소설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생성된 전통적 요인에 해당된
다 한의 씨앗이 뿌려지고, 한의 나무가 자라나는 토양으로는 전쟁 이외에도 무력한 피해자들을
많이 남기고 가는 역사적 사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980년대 소설은 최근 수십년 사이에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거나 짓밟히거나 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
었다 1980년대 소설도 전후소설 혹은 625소설이 한바탕 펼쳐 놓은 '상처' 그 연장선에
서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1950년대 소설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물질상의 궁핍이나 상실감에 빠져
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그려 내는 식으로 상처의 문학을 전개한 것이라면, 1970년대 소설은 급
속한 산업사회의 도래와 그에 따른 물질만능, 힘제일주의 등의 풍조의 확산으로 인해 이른바 못
가진 자의 소외감과 박탈감이 심화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오늘에 이르
기까지의 우리 소설은 이렇듯 시대에 따라 다른 원인과 양상을 제시하면서 상처의 문학을 만들어
오고, 가꾸어 왔다 해방 45년의 문학을 '상처'의 문학으로요약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동안
이 땅의 개개인들 대부분이 전쟁이나 빈곤이나 억압구조 등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 인간다운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피상적이며 소박한 리얼리즘에 자족하는 작가들이 눈에 보이는 상처에다 관심을 모아 왔던 데
반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심리주의를 표방했던 작가들은 상처를 양파의 모양으로 생각하면서
껍질 하나하나를 베껴 가는 보람을 맛보았다 비록 더러 현실성이나 객관성이 부족한 작품들을
남겼다 하더라도 바로 이들 심리주의 작가들에 의해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려지는 상처의 심부가
밝혀질 수 있었다 한이나 증오심 이외에도 공포심, 불안감, 죄의식, 패배의식 등이 한국인들의
외상을 구성하는 주요 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원초적 감정이나 잠재의식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런 말들은 추상어나 보통명사의 형식으로 나오기보다는 구체어나 고유명사로 존재해 왔다 그러
나 지난 40여 년간의 한국소설을 '상처의 원인과 양상의 기록' 정도로 주저앉혀서는 안된다 그
동안 한국작가들은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 차원의 것이든 상처가 왜 생겨났고 또 어떻게 나타나
고 있는가를 그려 내는 데서 머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전쟁이 가져온 것이든 극도의 빈궁이
빚어 낸 것이든 그 상처를 재빨리 잊어버릴 수 있거나,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음도 부
정할 수 없다
1950년대 작가들이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어설프고 미숙한 대로 근본적으
로물은 것이라면, 1960년대 소설은 개인다운 개인, 삶다운 삶을 찾으려 한 것이라 볼수 있다 그
런가 하면 1970년대 작가들은 도시화, 산업화의 격랑에 휩쓸려 뿌리가 드러나 버리거나 낙오되어
버린 자들을 향해 연민 어린 관심을 보내었으며 1980년대 소설들은 '힘'은 없지만 온몸으로 상황
에 뛰어들고 상황을 바꾸어 놓은 사람들에게 동지의식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은폐되
었거나 왜곡되어 왔던 해방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2. 개별적인 만남
이제, 해방 이후의 한국소설사에서 문제소설의 반열에 드는 몇 작품들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황순원의 '학'(1953), 이범선의 '오발탄'(1959), 김승옥의 '서울 1964년 서울'(1964), 이제하의
'초식'(1972), 서정인의 '뒷개'(1977), 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1978), 오정희의 '
유년의 뜰'(1980) 등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황순원은 1915년에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처음엔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집 "방가
"(1934)와 "골동품"(1936)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1940년도에 단편집 "늪"을 낸 이후 완전히 소설
가로 전신하였다 해방 직후 그는 남달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1948)
를 묶어 낸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창작집을 펴낸 바 있다 단편집으로는 "곡예사"(1952),
"학"(1956), "탈"(1976) 등이 있고 장편소설집으로는 "카인의 후예"(1954), "인간접목"(1957), "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5), "움직이는 성"(1973) 등이 있으며 1985년에는 12권으
로 된"황순원전집"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소나기', '학', '너와 나만의 시
간', '원색 오뚜기', '왕모래', '도토리', '별', '황노인' 등 그의 많은 단편들이 1950년대말부
터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한국단편소설의 간판작품들로 해외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다
황순원은 휴전조인이 있었던 1953년에 그의 문명을 한껏 떨치게 한 단편소설 '학'과 '소나기'
그리고 '카인의 후예'를 발표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학'("신천지", 1953. 5)은 이데올로기와 우정의 갈등을 기본구조로 삼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어렸을 때 단짝으로 지냈던 성삼과 덕재가 이데올로기와 전쟁으로 인해 적대관계에 놓
이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강요에 못 이겨 농민동맹 부위원장 노릇을 했던 덕재는 붙들려 끌려가
는 신세가 되고 이에 반해 성삼은 그를 호송해 가는 입장에 서게 된다 호송하는 도중에서 성삼
이 바른 대로 말하라고 다그치자 덕재는 농민동맹 부위원장은 자기 의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해명한다 덕재는 자기가 제일 빈농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부위원장 자리를 준 것 같다
고 하면서 '나는 예나 이제나 땅 파먹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결국 이념분자도 아
니었고, 빨치산이 된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지하면서도 소박한 농민에 불과했던 것이
다
'학'에서 황순원이 정작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분열과 대립으로서의 현재가 아닌, 화해와 동심
으로서의 과거였다 황순원은 이념과 증오, 대립과 분열이 지배하는 현재는 어디까지나 '거짓'이
며, 우정과 사랑, 화해와 일체감에 의해 이끌리는 과거가 '참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
서 그는 작품의 중간 중간에 학사냥놀이가 중심이 되고 있는 과거사를 끼워 넣고 있다 이 소설
의 끝부분에서 성삼은 덕재를 묶은 포승을 풀어 주고 나서 학사냥놀이를 시작함으로써 학사냥놀
이가 상징하는 과거 즉 평화와 순박함과 화해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과거로 복귀할 뜻을 분명하
게 내보인 것이 된다 학의 상징적 의미를 깨닫는 것은 단편 '학'의 주제의식을 파악하는 데 결
정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된다 학은 영원성과 무구, 그리고 초월성을 상징하며 학사냥은 영
원하고 떄묻지 않는 존재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데올로기는 다 부질없는 장난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쟁이나 이데올로기가 빚어 낸 증오감, 적개심, 광기 등도 무색해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학"은 매우 심각하면서도 복잡한 내용을 안고 있는 전쟁과 이념의 문제를 '손쉽게' 처
리해 버린 대담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 소설에서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 두 인물이 펼
쳐 보이는 '학사냥놀이'와 같은 행위가 당시의 상황에 대한 현실성이 있는 해결방안의 하나라고
는 보기 어렵다 또, 두 작중인물의 행위는 특히 리얼리즘을 신봉하는 독자들의 눈에는 '안이하
고, 엉뚱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적개심, 증오감, 상실감이 짙게 깔려 있었던 1953
년에 나온 것임을 염두에 둘 경우, 황순원은 동시대인들을 훨씬 앞질러 나간 비전을 제시한 것이
라 할 수 있다 황순원은 전쟁이 빚어 낸 인간파괴의 현실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것보
다는 이념대립과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 상황을 어루만져 주고, 극복하는 길 바로 그것을 선택했
던 것이다
"학"은 우익을 택한 성삼과 좌익에 설 것을 강요받은 덕재가 학사냥이 상징하고 있는 평화롭
고, 순박하고, 몰이해적인 과거를 공유하고 있음을 들려준 것이다 이러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
는 것은 오늘날 분단상황에 처해 있는 남과 북 사이에 민족적 동질성이 엄존해 있다는 의미로 확
대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학"에서의 두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실은 이념대립의
극복과 해소를 모색하는 전향적인 행태로 풀이되기도 한다 작중의 두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려
하면서 작가 황순원은 '미래'로 나가게 된다 "학"은 민족사의 전개란 문제에 대해 비록 암시적
이고 상징적인 서술방법에 머물렀다고 해도 당시로 보아서는 시대를 앞서 나간 전망을 보인 것이
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학"은 이데올로기와 전쟁 그 자체를 거부하는 몸짓마저 보여주고 있다
"학"의 또 한 가지 큰 특징으로는 전쟁이나 이념과 같은 서사문학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를 '서
정적 양식'을 연상케 하는 고도로 압축된 문장들과 응축미를 한껏 살려내고 있는 구성방벙에 의
거하여 처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현대소설사에서 무거운 소재와 경쾌한 표현방법이 이처럼 잘 합성된 소설의 유례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범선은 1020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평안
북도 풍천탄광에 징용된 적도 있으며 해방직후에 월남하였다
이범선은 "현대문학" 1955년 4월호와 12월호에 단편 "암표"와 "일요일"이 각각 추천되면서 등
단하였다 그 후 그는 1980년까지 단편 "학마을 사람들"(1957), "오발탄"(1959), "피해자
"(1960), "가물"(1964) 등과 장편 "동트는 하늘 밑에서"(1960), "춤추는 선인장"(1966), "당원의
미소"(1970) 등 총 7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가 남긴 창작집으로는 "학마을 사람들
"(1958), "오발탄"(1959), "피해자"(1963), "동트는 하늘 밑에서"(1969), "전쟁과 배나무
"(1957), "검은 해협"(1978), "당원의 미소"(1980) 등이 있다
"오발탄"("현대문학", 1959. 10)은 그 당시 아직 신인급에 속해 있었던 작가 이범선의 위치를
하루아침에 문제작가로 끌어올린 명작이다 발표시기를 볼때나 내용이 지닌 무게를 볼 때나 이
작품은 가히 1950년대 전후소설을 일단락 지은 것에 해당된다 "오발탄"은 전후 한국사회의 도처
에서 만날 수 있었던 가난하고, 희망 없고, 뿌리뽑힌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초상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나 도처에 극한상황을 펼쳐 놓았던 전후 우리
사회의 단면을 주로 어두운 색조를 써서 그려 낸 풍경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가자! 가자!'하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내뱉는 식물인간인 어머니의 존
재가 잘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산다기보다는 그냥 생존해 있는 것에 가깝다 계리사 사무실 서기
로 일하면서 극빈과 절망감 그리고 중압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송철호, 이북에 있느 고
향에서는 지주집안의 마나님으로 행세하며 살았으나 월남한 후 625를 만나면서 심한
충격을 받은 끝에 정신이상자요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어머니, 군에서 나온 지 2년이 지나도록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한 채 술과 비분강개와 자포자기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는 동생 송영호, 양
공주 노릇을 하는 동생 명숙, 음악도로서의 여대생 시절이 무색하리만큼 궁기와 피로가 몸에
배어 버린 아내 이 인물들 모두는 희망과 위안의 빛 한줄기 새어들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겨우겨우 숨만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송철호는 기본적인 삶의 방법이란 면에서 구 동생과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내게 된다
여동생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선 여자의 정조 따윈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투였고, 남동생은 굶어 죽어 가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양심이니 윤리니 법률이니 하고 따지는 형
에게 노골적으로 반발한다 여동생과 남동생을 현실주의자로 볼 수 있다면, 형 송철호는 일면 도
피주의자 일면 이상주의자의 기운을 지닌 것이된다 또 두 동생이 실질론자의 유형에 든다고 한
다면, 형은 명분론자에 해당된다
이 소설에서 형과 동생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같은 것은 어려운 시대, 배고픈 시대를 사는 사
람들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동생은 형을 향해 용기는 약하고 양심은 강한 사람이라고 꼬집
으면서, '양심은 손끝의 가시와 같고 윤리는 몸이 다 보이는 나이롱 빤쯔와 같고 법률은 허수아
비나 다름없는 것'이라는 흥미 있는 비유적 설명을 해보인다
마침내 영호는 권총강도로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아내는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만다 이범선은 이 소설의 끝부분에서 이렇듯 충격적인 사건들을 한꺼번에 만난 철호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극도로 방황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그려 놓고 있다 택시 속에서 계속 행선지를 바
꾸는 철호를 보고 운전수는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다고 투덜거린다
결국 철호는 일련의 극한상황에 계속 짓밟혀 버린 나머지 오발탄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만 것
이다 이범선은 철호를 오발탄과 같은 존재로 몰아버리고 만 존재나 힘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부추긴 것이 된다 이 물음은 1950년대의 우리 사회를 향하게 될 것이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이라는 위기사를 겨냥한 것이 된다
김승옥은 1941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였고 해방 이후엔 전라남도 순천지방에서 성장하였
다 그는 1962년에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와 그 후 "건
"(1962), "역사"(1964),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5), "내가 훔친 여름"(1967)
등의 문제작을 계속 써냄으로써 한국소설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김승옥은 "서울 1964년 겨울"(1966), "육십년대식"(1976), "무진기행"(1977), "염소는 힘이 세
다"(1980) 등 많은 창작집을 펴내기는 하였으나, 그는 실제로는 과작의 작가 혹은 일찌감치 절필
을 버린 작가의 경우에 속한다 그의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사실상 1960년대를 넘기지 못
한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소설을 창작하는 대신 다른 작가의 이름난 소설들을 시나
리오로 각색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의미에서 김승옥은 1960년대 한때 한국의 작단과 독서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섬인과 같은 작가라 할 수 있다
비록 몇 편에 지나지 않지만, 김승옥이 20대에 쓴 일련의 작품들은 '혁명'과 '반란'의 소설들
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삶과 세계를 보는 시각과 그에 다가가는 방법에 있
어 일대 혁명을 꾀하였다 동시에 그는 전통적인 소설형상화 방법과 기존의 표현방식을 뒤엎으려
는 시도도 보였다 그의 소설은 거의 공식처럼 '감수성의 혁명', '반질서주의', '감각적 문제',
'분위기의 문학' 등의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어차피 섬인과 같은 작가였던 이상, 당시
그에게 향해진 호평과 찬사 일색의 분위기를 그대로 엄정한 문학사적 평가로까지는 직결시킬 수
는 없다
물론, 그가 한국소설에 있어 전통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도덕적 상상력의 방법에 치명적인 일
격을 가했다는 평가를 뒤집어 놓을 수는 없다 그의 소설들에서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작가 자신의 것이든 작중인물의 것이든 윤리적 판단과 시비가 유보되어 있거나 거부당하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주요 인물들을 윤리의식의 진공상태나 선악관념의 대기권 밖에다 위치시켜 놓고
그 가운데서 인물들에게 '살'과 '피'를 부여하려는 공통점을 내보였다 김승옥이 뿌려 놓은 반도
덕적 상상력의 씨앗은 그 후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심층심리에다 관심을 집주이킨 작가들이나
이 세계와 삶을 섬세한 감각의 촉수로 두드려 보는 작가들 또는 현실적 코드의 저쪽 너머에 있는
심리나 물상을 응시하는 작가들 사이에서 활짝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데뷔작 "생명연습"에서 이미 그 원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반윤리
적 상상력 혹은 미학적 세계관이 보다 구체적으로 성취된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력
이나 세계관은 실제 현실 속에서 윤리적 가치관이나 질서의식의 조종을 받아 단단하게 구축되어
버린 고정관념과 기대지평을 해체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나'와 대
학원생 '안'이 이러한 해체작업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면,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고 나서는 자
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해 극도로 방황하다가 자살해 버리고 마는 중년 사내는 해체의 대상이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김승옥이 '나'와 '안'이란 인물의 '기이한' 사고방식과 '별난' 행동양식을
그리는 데다 초점을 맞추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와 '안'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일면
무의미하고 헛된 말장난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예민한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낯설게 하기'의 효
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 된다 '나'와 '안'은 간밤 내내 같이 술 마시고 함께 여관에 들었던 중년
사내가 자살한 것에 대해서도 충격도 받지 않고 당황해 하지도 않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바로
김승옥은 '나'와 '안'이 놀라거나 당황하리라고 예상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독
자들의 고정관념을 뒤엎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와 '안'이라는 대학원생에게서 찾아야
할 것은 비정함이 아니라 새로움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이른바 윤리의식이 가장 거대한 지배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존질서를 해체시켜 보려는 의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작중인물의 행동공간이 아
주 제한된 것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작가 자신이 새로운 방법의 삶 혹은 신선한 세계관을 희구하
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서울 1964년 겨울"은 개인과 그의 삶을 1950년대 소설이 내
내 강조하였던 상황, 집단의식, 상처의 논리 그리고 리얼리즘 등의 늪에서부터 구출해내려 한 노
력의 값진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하는 1938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1957년
에는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한 적이 있긴 하나 이듬해인 1958년에 "신태양" 현상
문예에 단편 "황색 강아지"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초식"(1973), "기차, 기선, 바다, 하늘"(1978), "유자약전"(1981), "사자의 눈물
"(1983), "방의 수첩"(1984),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5) 등 여러 창작집을 내놓았
다 그는 결코 다작의 작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작인 편도 아니다 그는 조용한 가운데서도 꾸
준하게 소설을 써낸 경우에 속한다 그만큼 이제하는 제한된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 것에 자족하면
서 고집스럽게 자기 스타일을 가꾸고 지켜 온 것이다 그가 한때나마 시 쓰는 일에 열중했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작가적 입상을
일찌감치 예견하는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이제하는 한 편의 소설을 써내는 과정에 있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든
가 서술의도를 명료하게 드러낸다든가 현실과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 낸다든가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들은 이제하 스스로가 규정한 바와 같은 '환상적 리얼리
즘'으로 비치기도 하였고 아예 앙띠로망이나 메타픽션의 한국적 본보기로 설명되가도 하였다 비
록 이제하는 탈전통적이며 반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의 한 모델로 평가된 나머지 소수파로서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맛보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의 소설들은 초이해와 불감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하류의 소설들이 대다수 독자들에게 안겨다 줄법한 낯선 느낌과 당혹감은
그 동안 우리 소설의 판이 너무 작지 않았느냐는 물음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된다
"초식"("지성", 1972. 2)은 자유당치하, 4.19와 5.16과 같은 격변과 혼란의 시기 속에서 남들
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살아온 한 기인의 행적을 따라간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얼음도매
업자에 불과한 62세의 서광삼은 아무 가진 것도 없고, 별 민는 데도 없이 세 번씩이나 국회의원
에 출마하였고 또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면 으레 채식을 하기 시작하였다 얼음 실어 나를 때 쓰
는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선거구역을 헤집고 다니며 한 표를 부탁하는 것이 선거운동의 전부였
다 이 소설의 나레이터인 '나'의 눈에 아버지 서광삼은 동키호테로 비치기도 하고 시대를 잘못
만난 신선이나 말도 안되는 광인으로 투영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선 아버지와 아버지 못지않게 개성이 강한 도수장 주인 사이의 긴장관계를 특별히 주
목할 필요가 있다 4.19가 일어난 지 며칠 뒤에 아버지는 도수장 주인에게 가서 손가락 하나를
끊어 가지고 길다란 광목에다 크게 풀초자를 써 보였다 그런데 도수장 주인은 5.16이 있은 지
며칠 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끌고 와서 '나'의 집의 문을 두드린다 이어 도수장 주인은 동네
학교운동장에다 혁명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어 놓고 나서는 황소를 도살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
인다
이러한 아버지와 도수장 주인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으로만 볼 수 없는, 보다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아버지는 4.19정신에다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반면에 도수장 주인은 5.16을
지지하고 그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 자체는 동키호테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식세계는 다분히 지사적인 색채를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초식"에서의 아버지는 기인은 기인이되 오히려 건강성을 지향했던 기인이다
서정인은 1936년에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 1962년에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후송"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귀에서 소리가 나는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한 장교가 타인에게 이해되지
못한 채 후송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 본 단편 "후송"을 낸 이래 그는 "강"(1976), "가위
"(1977), "토요일과 금요일 사이"(1980), "벌판"(1984), "달궁"(1987) 등의 창작집을 펴내었다
그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 문체 그리고 소설양식 그 자체에 대한 재래의 통념에 큰 충격을 안
겨 준 "달궁"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많이 써냈음에도 독자들로부터 집중적인 조명을
한 번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만큼 그는 일반독자들로서는 범접하기 힘든 소설을
써 온 것이다
한마디로, 서정인의 작품들은 작중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치밀하게 그려 내려는
작가의 노력과 작중인물들의 의식세계를 좀더 깊게 파내려가는 작가의 의욕이 대등한 힘으로 때
로는 맞서 있고 때로는 잘 어울리거나 한 바로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서정인은 외면묘사와 내면
회귀 그 어느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지는 법도 없고 또 어느 한가지를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대타적 관심과 즉자적 관심을 고루 살리려 한 만큼 서정인은 '욕심이 많은'작가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러한 욕심과 고집은 대중적 관심으로부터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한 요인
이 되기도 한다
서정인은 그의 작중인물을 곧잘 회한이나 자기 성찰로 내몰곤 한다 "강", "나주댁", "원무"
그리고 "뒷개" 등의 여러 작중인물들을 통해 이 점을 잘 확인해 볼 수 있다
"뒷개"("세계의 문학", 1977 겨울호)에서의 사내는 고향에 내려왔을 때보다는 사람이 어느 정
도 달라져 가지고 다시 고향을 떠나가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사내는 고향 뒷개에
있을 때는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서울에 가서 건축공사장 인부로 일하던 중 감독과 육박전을
벌이고 난 후 폭행죄로 고소당하게 된다 그리고는 합의 보는 데 필요한 돈을 구하러 뒷개로 내려
오게 된다 그러나 사내는 고향에 와서는 아들이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교 다니는 것을 또 누이동
생이 포구에서 갯지렁이 줍는 일에 뛰어 들어 개미처럼 한푼 두푼 돈을 모아 가는 것을 알게 되
었다 마침내 사내는, 작은 누이동생을 짝사랑한 나머지 못살게 구는 옛 노름친구의 마음을 강제
로 돌려놓는 일에서 새삼 자신의 역할을 찾게 된다 그는 여동생이 적금 들어 타 놓은 돈을 훔쳐
가지고 서울로 달아나려다가 몽땅 되돌려 준다
"뒷개"에서 사내는 이제껏 아들노릇, 오빠노릇 그리고 아비노릇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한 자신을 회한의 감정 속에서 되돌아보며 고향을 떠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내가 노
골적으로 또 뚜렷하게 자기 반성의 기색을 내보인다는 식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서정인은 자기
작품 "뒷개"가 그 흔해 빠진 교훈담으로 낙착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성이나 후회 쪽
을 향해 잔잔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 사내를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서정
인이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날카롭게 읽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5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되어 작가로서 인정을 받긴 했으나 그 후 10년 동안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10년의 기간은 단순한 동면기가 아니었다 그는 이 10년간의 침묵을 일시에 만회할 만
한 대작을 꿈꾸어 오고 내밀하게 준비해 왔던 것이다
1975년도 저물어 갈 무렵 조세희는 단편 "칼날"을 "문학사상" 12월호에 발표하면서 명실상부한
작가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우주여행"("뿌리 깊은 나무", 1976. 9),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문학과 지성", 1976 겨울호), "육교 위에서"("세대", 1977. 2), "궤도회전"("한
국문학", 1977. 6), "기계도시"("대학신문", 1977 6. 20), "은강 노동가족의 생계비"("문학사상
", 1977. 10)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문예중앙", 1977 겨울호),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창작과 비평", 1978 여름호) 등 주제와 소재, 서술기교와 문체의 면에서 기존문단과 독서계에
가히 뇌성이 될 수 있었던 문제작들을 계속 터뜨렸다
이상의 단편소설들을 포함시켜 12편의 작품들을 한 권의 창작집으로 묶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1978년에 내놓으면서 조세희는 본격작가로서의 성취감과 상업적 성공을 한꺼번에 맛
보게 되었다 그는 단 한 권의 창작집으로 또 3년 동안의 집중적인 창작활동으로 1970년대말에 일
약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의 반열에 뛰어오르게 되었다
창작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기본체재 한 가지만 보아도 예사 소설집들과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다 이 곳에 실려 있는 단편들은 각기 독립성과 자족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연작소설로 묶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세희에게는 '난장이계 연작소설'의 작가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난장이계 연작소설의 문학사적 가치를 정확하게 헤아리기 위해서는 우선 이 연작소설이 1979년
직전의 몇 해 동안에 만들어진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넓게는 못 가진 자들,
좁게는 공장노동자들의 억ㅇ울 한 사연과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면서 그들의
명시적, 묵시적 요구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현실적으로 정
치가 부재했고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고, 노동쟁의가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지 않았
던 바로 1970년대의 후반기에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변이나 배경이 어두웠기에 상대
적으로 조세희의 작품들은 더욱 선명한 빛을 뿜어 낸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조세희
는 어둡고 추운 시절에 노동문학의 한 모델을 제시하였고, 못 가진 자의 사연과 입장을 핵심을
추려 대변했고 또 참된 리얼리즘에 도달함으로써 1970년대 우리 문학과 작가들의 최소한의 양심
과 자존심을 사수한 셈이 되었다 그는 앞서 암시한 것처럼 여러 가지 기상과 새로운 소설수법으
로써 혹 표현자유제약이 강요할 수도 있는 리얼리티의 구멍들ㅇ르 채워 놓을 수 맀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는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가 은강그룹 회장의 동생을 살해한 사건을
두고 회장의 막내아들과 그 사촌형이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다 서술의 중심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세희는 이른바 가진 자 또는 사용자의 보편적 관념의 핵심을 파악하고자 함에서인
지 회장의 막내아들 경훈을 작중의 1인칭화자로 설정해 놓았다 경훈은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
는 기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먹을 것을 줌으로써 이 사회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훈은 노동자들의 여러 가지 요구와 그 밑바닥에 깔린 증오심과 불만
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억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판정에서 영수의 변호사가
은강공단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비인간적 대우의 구체적 사례들을 열거하는 것을 들으면
서 눈을 감고는 유럽여행, 요트놀이, 금발미녀와의 정사들을 공상하였다
마침내 경훈은 낮잠을 자던중 가시고기들이 자신에게 몰려오는 꿈을 꾸게 된다
한 떼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p322)
조세희는 1070년대에 한 재벌 아들이 꿈속에서 느꼈던 불안감과 공포심이 1980년대에는 실제
현실 속에서 증폭되고 확대되리라고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세희는 "내 그물로 오는 가
시고기"에서 은강그룹 회장 집안을 검은 색 한 가지로만 칠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난장이계 연
작소설 자체가 이미 여러 갈래의 인간형과 다양한 계층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
처럼, 조세희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심구조임을
인정은 하면서도양자 사이에서 절충과 조정의 역할을 맡고 있는 존재들의 가치마저 외면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한 편만 떼어놓고 보면, 그것은 산업사회를 배경으로 한 '악한소설'
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오정희는 1946영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첫 창잡집 "불의 강"을 등단한 지 근 10년이 되는 해인 1977년에 냈다 그 후 오정희는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625 직후의 한 피난민 가족의 암울한 사연을 들려준 "유년의 뜰"과 "
중국인 거리", 성년 여자로 화자를 옮기면서 자전적색채가 짙은 이야기들을 들려준 "겨울 뜸부기
", "저녁의 게임", "별사" 등 총 8편의 중,단편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창작집 "유년의 뜰"을
1981년도에, 그리고 세번째 창작집 "동경"을 1983년에 펴냈다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온통 회색빛으로 착색된 원체험을 자주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담담한 어조와 객관지향적 시선을 유지할 줄 알았으며, 여류작가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피상성'
과 '감상성'에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오정희는 소설은 어디까지나 인
간과 삶에 대한 하나의 '탐구'의 양식임을 깨닫는 가운데 이러한 명제를 곧이곧대로 실천에 옮기
기라도 하듯 빈틈 없고 전혀 배어 있지 않은 문장 하나하나를 만들어 가는 데 유별난 정성을 기
울여 왔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내연하는 탐구정신과 장인으로서의 성력이 잘
어우러진 끝에 나온 값진 산물임에 틀림없다
"유년의 뜰"("문학사상", 1980. 8)은 지난 1970년대에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어린이화자의
625소설이란 범주에 넣을 만하다 이 소설의 화자는 노랑눈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면
서 늘상 허기를 느끼고 차츰 도벽에 빠져 드는 7, 8세난 여자아이다 말하자면 "유년의 뜰"은 이
여자아이가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이 여자아이의 시선에 잡혀 들어온 한 피난민 가족의
'일탈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데다 초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쿵쿵하고 먼데서부터 울려오는 대포소리와 틀틀틀틀하면서 솜사탕을 피워 내는 기계소리
가 교차하는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그만큼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전쟁과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각자의 삶을 빚어 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들 작중인물이 비록 전쟁을 '먼 곳에서 들려오는 대포소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
더라도 여전히 전쟁으로부터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행방불명된 아버지, 애들을 먹여 살리기 위
해 밥집에 나갔다가 급기야는 '늙은 갈보'의 행태를 보이는 엄마,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누이동생들을 엄하게 다스리면서 대리가장으로서의 쾌감을 만끽하
는 큰오빠, 틈만 나면 외출하려다 오빠한테 매맞기 쉬운 일쑤인 언니, 음식이라곤 통 입에 대지
않고 나날이 말라 가는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남동생, 왕년의 화려한 시절을 곱씹으면서 계속 엄
마의 눈치를 보며 집안살림을 이끌어 가는 할머니, 바람났다가 목수인 아버지에게 끌려 들어와
골방에 갇혀 있던중 자살해 버린 분네, 슬픔에 넋이 다 나간 버린 분네엄마... 이들 모두는 직접
접이든 간접적이든 전쟁으로부터 상처받은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바로 오정희는 이렇듯 여러
일탈된 삶의 모습들을 실감나게 그려 가는 그 과정에서 냉정하고 태연하다고 할 만큼 슬퍼하거나
흥분하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고, 놀라거나 허풍을 떨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끝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들은 작중인물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비극적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마치 이 소설의 끝부분에서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중의 '내'가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고'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눈물이 자꾸자꾸 흘러내렸던' 것처럼
"유년의 뜰"의 끝부분에서 7, 8세 정도의 소녀인 '내'가 느꼈던 욕지기와 서러움은 바로 오정
희의 것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오정희와 비슷한 세대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원체험
(Unerlebnis)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지기와 서러움은 여러 차례 위기
사를 겪어 온 한국인들의 인생관과 역사의식의 밑바닥에 일종의 회의처럼 자리잡고 있는 기본감
정이라 할 수 있다
오정희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의 촉수와 잔잔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써 여류문학의 존재
가치를 한껏 과시한 결과를 남겼다25
8. 자아완성과 구원에의 몸짓(최인훈 론)
최인훈은 작가들이 그려 내야 할 현실은 일부 단순 소박한 리얼리스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리 얕지도 또 손쉽지도 않음을 특히 "광장" 이후 줄을 이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실증해 보인 작
가다 "GREY구락부 진말기"에서 1960년대 발표작까지를 통해 걸러진 그의 현실인식을 보면, 작가
에게 있어 현실은 탐구욕과 현실에 따라서 얼마든지 골이 깊어질 수도 있고 또 넓은 외연을 지니
는 것임을 쉽게 깨닫게 된다 최인훈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바로 또 깊이있게 헤아리는 뜻
에서 떄로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초현실 세계의 설정ㅇ르 통해 현실음각의 효과를 사기도 했고,
때로는 세계사적 정황이나 서양정신 쪽으로 의도적으로 순례해 보기도 했고 우리의 비참하고 못
난 과거사를 되짚어 보기도 했다 작가를 재미있는 이야기꾼이나 상실에 충실한 도덕꾼쯤으로 알
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면고", "총독의 소리"와 같은 소설을 쓴 최인훈은 나해한 작가로 비
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적어도 1950년대와 1960년대 학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이라는 한 점을 읽기
위해 때로는 때로는 종축으로 때로는 횡축으로 끝없이 달려나간 그의 창작방법은 가시적 현상과
일상성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자족했던 당대의 일부 작가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놓았다 최인훈
이 "광장"을 통해서 1960년대 작가들에게 한 수 일깨워 준 것이 있다면 국가, 민족, 사회, 개인
그 어떤 차원의 문제든간에 '자아동질성'을 찾는 데 힘쓰라고 한 점일 것이다 범상한 작가의식
과 문학적 상상력의 틀을 깨고 그토록 그가 끈질기게 또 노골적으로 정치, 역사, 사상, 예술 등
의 문제를 천착한 것은 바로 이 자아동질성의 발견과 회복이라는 과제가 요구한 것이라 하겠다
한 작가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이 다 그렇듯이 "광장"도 결코 평지돌출은 아니었다 학자형
작가로서의 최인훈이 처절하기까지한 모색과 고민, 그에게 빚어진 주인공 이명준의 충격적인 이
념세계와 행동양식으로써 분단현실에 얽힌 여러 고정관념들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던 "광장"은
"GREY구락부 진말기"와 "가면고"에서 이미 그 출현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좌절과 순사
의 형태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명준이 역사의 광장으로 뛰어나오기 위해서는, "GREY구락부 진말
기"에서의 현은 "순수의 나라에 산다는 느낌을 이어 간다"고 선언한 비밀결사에서 자기 구원에의
몸짓과 모색을 펼쳤던 것이며, "가면고"의 민은 예술창작, 최면상태, 현실적인 사랑 등의 기제를
통해 자아완성을 향한 몸부림과 방황을 보였던 것이다 현이 몸담고 있으면서 한때나마 자기 몰입
을 통해 위안과 평화를 느낄 수 있었던 그레이구락부나 민이 자기 완성과 참된 얼굴의 발견을 위
해 온몸으로 가대었던 무용극과 최면술과 사랑 등의 기제는 결국 '밀실'의 형식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밀실'에서의 현이나 민은 이제 막 '광장'으로 뛰어나갈 이명준을 잉태하
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최인훈이 조건반사적인 행동과 감정으로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을 접어
두고 대신 고도의 관념과 지성으로써 현실이해와 극복을 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GREY구락부
진말기"의현과 "가면고"의 민 그리고 "광장"의 이명준은 철저한 내수로써 저절로 외치의 힘을 갖
춘다는 다분히 동양적이며 고전적인 논리 위에한 줄로 서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
서 얼핏 현실도피적이고감상적이며 게다가 '치기 어린' 것으로 보이는 현의 행태나 초현실적이며
몽상적인 것으로 비치는 민의 행동양식이 다 반영론의 중심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그 의미가 축소
될 수는 없다
"GREY구락부 진말기"에서 그레이구락부가 결국 내부적 갈등과 외부적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해
체되기까지의 과정은 특히 젊은 지식인들을 에워싼 1950년대 우리 사회의 혼란과 파탄을 상징하
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레이구락부는 어떤 목적 아래에서 만들어진 모임인가
움직임의 길이 막혔을 때, 움직이지 않음이 나옵니다 예스라고 하기 싫을 때 노라고 하지 않
고 그저 입을 다무는 것도 또한 훌륭한 움직임입니다
... 우리는 역사의 알몸을 보았습니다 역사란 시간의 아지랑이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믿지 않
습니다 우리는 말짱한 빈손, 이것을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움직임을 저주합니다
이는 그레이구락부의 한 창립회원이 M이 읽은 창립선언서의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그레이구
락부의 정신적 기저가 맹목적 행동주의의 배격, 역사불신론, 방법적 관망주의 등에 놓여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 구락부에서 늘상 M은 레코드판만 뒤적거리고 있고, K는 밤낮 그림만
그리고 있고, 현은 난로 소제와 난로불 쬐기로 소일하고 있고, C는 낮잠자는 것이 취미요, 키티
(여대생 미스 한)는 호콩 미치광이의 모습을 보였다 이미 창립선언문에 잘 드러나 있듯이 이들
구락부원들은 '순수의 나라'에 가장 빠르고도 확실하게 도달하는 길로 '무위사상'을 채택하고 있
다
이들 구락부원들은 자기네들이 '창타입의 인간'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
는다
창은두가지 몫이 엇갈린 물건이다 창은 먼저 밖으로부터 들어앉은 방을 막아 준다 거치른 행
동과, 운동의 번잡에 대한 보호를 뜻하는 '건물'의 한 군데인 것이다(중략) 그러나 한편, 창은
이같이 닫힌 집이 바깥과 오가기 위한 자리다 창에서 이루어지는 바깥하고의 오가기는 오직 눈
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중략) 그들은 투정보다도 노래하여야 할 것이 많은 누리를 받아들였다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거의 아름다웠다(중략) 창은 슬기 있는 사람의 망원경이며 어리석은 자
의 즐거움이 아닐까? 이것이 그레이구락부의 믿음이다
슬기 있는 사람에겐 망원경 노릇을 해주며 어리석은 사람에겐 즐거움을 안겨다 준다는 '창'의
논리는 기존의 무형, 유형의 가치가 모두 깨져 나가고, 역사와 인간에 대한 불신감으로 뒤덮이고
허무감과 도피충동이 수시로 솟아나오는 전후 우리 사회에 대한 소극적인 그러나 하나의 적절한
접근법인지도 모른다 창의 이중적 기능에다 나름대로의 행동양식의 근거를 두고 있는 그레이구
락부 회원들은 당시의 현실과 사회를 결코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염세, 허무, 퇴폐에다 몸을 던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 세상을
"투정보다도 노래하여야 할 것이 많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낙관 쪽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염세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도 없는 한마디로 안개 속 같은, 그러나 가능성은 남아 있는 정신적
입지, 이는 바로 작가 최인훈 자신의 몫이기도 하다 작가 최인훈이든 작중의 구락부원들이든 현
실과 사회에 대해 우선은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행동양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도 탐구
욕이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탐구욕은 지성을 통로로 하여 이해라는 목적지에 닿고자 하
는 것과 신앙이나 자기 몰입을 통로로 하여 구원이나 자아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대별된다 작가 최인훈이나 현, 민, 이명준 등과 같은 그 주인공들은 두 가지 측면의 탐구욕이
함께 어우러진 경우라 할 만하다 "광장" 직전에 발표된 "GREY구락부 진말기"("자유문학", 1959.
10), "가면고"("자유문학", 1960. 7)는 바로 이렇듯 고도의 지성, 순수한 신앙, 자기 몰입 등을
통로로 삼으면서 이해, 구원, 자아완성등에 닿고자 한 탐구욕이 전후 1950년대 우리 젊은이들에
사이에서 행사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작의도를 가다듬고 구체적
으로 작품을 서술해 가는 과정에서 탐구욕이 지나치게 증가한 나머지 최인훈은 동시대의 리얼리
스트들 사이에서 예외적 존재 또는 이채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탐구욕의성취여부에 있어 "GREY구락부 진말기"와 "가면고"는 대조적인 결과를 드러내고
만다 전자의작품에서 그레이구락부는 현과 키티가 사랑을 나누어 남녀간의 개인적 사랑은 허용
치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뜨림으로써 또 불온단체혐의로 형사들에게 붙들려 가 조사받고 경고를
받음으로써 해체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회원들이 마지막 자구책으로 키티를 제명시키려 하자 키
티는 노골적으로 구락부와 그 회원들을 공격한다
그레이구락부가 무에 말라빠진 것이지요? 무능한 소인들의 만화, 호언장담하는 과대망상증 환
자의 소굴, 순수의 나라! 웃기지 말아요 그 남자답지 못한 잔신경, 여자 하나를 편안히 숨쉬게
못하는 봉건성 (중략) 그레이구락부의 강령이란 게 정신의 소아마비지, 풀포기 하나 현실을 움직
일 힘이 없으면서 웬 도도한 정신주의는? 현실에 눈을 가린다고 현실이 현실이 도망합디까?
그레이구락부 회원들은 자기네 모임이 '도피적'이라는 이름 아래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
으리라고 의식 못했던 것은 아니다 키티는 바로 이 콤플렉스의 핵심을 찔러 버린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키티가 공격한 내용은 그레이구락부에게 독자들이 품고 있을 법한
부정적 느낌과 평가를 온통 그대로 대변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현은 '불온서적을 읽고
', '국가를 전복할 의논을 한' 혐의로 취조받는 과정에서 그레이구락부란 결국 '잡담과 소일!'밖
에 한 것이 없는 모임임을 굴욕감을 느끼는 가운데서 자인하고 만다
현이 자신의 일상성을 온통 그레이구락부 속에 쑤셔 넣는 가운데 방법적 무위론을 통해 기대하
고 갈망했던 '순수의 나라'나 구원의 경지는 결국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비록 크고,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것은 사라져 버렸지만 바로 그 자리에 평범하면서 구체적인 깨달음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현은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구원'이나 '자기 완성'은 관념의
유희로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GREY구락부 진말기"는 현이 미스 한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었음을 확인시키는 단계에서
끝을 냄으로써 사랑의 효능과 의미를 아직은 시원스럽게 노정시키지는 않았지만, 최인훈의 그 후
소설에서 실제로 남녀간의 사랑이란 소재가 갖는 의미와 비중이 점점 커져 감을 보게된다 최인
훈은 "웃음소리"("신동아", 1966. 1), "크리스마스 캐럴4"("현대문학", 1966. 3), "만가"("현대
문학", 1967. 12) 등이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는 것처럼 남녀간의 사랑의 문제를 메인 플롯으로
처리한 소설들도 여러 번 써낸 바 있다 사랑이 밥, 일, 죽음 등과 함께 소설의 중심소재를 이루
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인훈은 이처럼 흔해빠진 소재인 사랑의 문제를 자주 다룬 편에
속하면서도 아예 처음부터 '사랑의 형이상학'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또 그에 눈을 뜸으로써 시시
한 애정소설이나 멜로드라마의 작가로 떨어질 소지를 말끔히 없애 버릴 수가 있었다
"GREY구락부 진말기"의 현에 비한다면 "가면고"에서의 민은 '참다운 얼굴'과 '구원'을 향한 몸
부림을 더운 처절하게 내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이 심리학적 촉수에 걸맞는 인물이라면 민은
정신분석학적 연구대상으로 적합한 인물이다 현이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떴을 떄 이미 민은 사랑
이 빚어 낸 어둠과 밝음을 고루 체험하였였고, 현이 구락부에 빠져 일종의 무중력상태에서 자족
하고 있을 때 민은 무용극 각본을 쓴다든가 심령학회에 들락거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자기 정립과
자아완성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보였다 작품의 끝에 가서 현에게 돌아온 것은 환멸과 입맛 쓴
각성이었지만, 민에게는 비록 최면상태의 것이기는 하나 '참다운 얼굴'의 획득이라는 결과가 나
타날 수 있었다 "가면고"에서 작가가 "애쓰지 않은 완성은 값이 없다"고 강조한 것처럼 민은 현
에 비해 훨씬 더 지적이며 종교적인 차원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끈질지게 자기
소외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하기야, "GREY구락부 진말기"의 주인공 현과 "가면고"의 주인공 민을 대비시키는 작업 자체가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의 전후를 가지고 보면, 민이란 인물은 현이 좀더
복잡해지고 적극적인 양태를 보이고 또 보다 지적인 면모를 지니고 난 그 결과에 해당되는 것이
기 때문이다
민이 최면에 걸려 가바나국의 왕자 다문고가 되어 종교, 학문, 여색 그 어느 것이 나의 업의
탈을 벗겨 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심각하게 자문했던 데서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작품 "가면고"
는 주인공 민의 고뇌와 모색의 과정을 일단 세 갈래로 나누어서 보여주고 있다 여류화가 미라와
의 불안한 관계, 최면에 의해 다문고 왕자가 되어 업의 탈을 벗기 위해 온갖 고뇌와 노력을 아끼
지 않는다는 이야기, 무용극 신데렐라 공주의 각본을 완성시키는 과정 등으로 나누어지는 스토리
라인은 실제 작품 속에서는 각각 음의 크기는 틀린 대로 교묘하게 삼중주를 이루어 내고 있다 이
렇게 보면 "가면고"는 삼중구성법을 취한 소설에 해당된다 첫번째 갈래의 이야기는 에로스적인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따져 본 것으로, 두번째 이야기는 자아완성을 목표로 삼은 한 개인
의 종교의 위력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세번째 이야기는 예술에의 몰입과 구원과의
관계논리를 모색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가면고"에서는 민이 다문고 왕자로 돌아가 "
자신의 업의 탈"을 벗겨 내는 데 성공하기까지 번민하고 모색한 내용의 이야기가 가장 큰소리를
내고 있다 "흉하게 이그러지고, 주름으로 얽힌" 자신의 업의 탈을 벗는다는 것은 곧 자기 완성
이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문고 왕자의 지난한 정신적 편력을 따라가 본 이 두번째
갈래의 이야기는 분명 환상의 공간이요 몽상의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625에 참전했다
돌아온 1950년대의 젊은 세대의 갈기갈기 찢어진 내면세계의 실상을 인상 깊게 전해 주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쟁에서 살아온 한 젊은 작가지망생이 여러 방법으로 자아완성을 꾀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
가면고"의 요지가 정리될 수 있는만큼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자아완성을 꾀하게 된 심리적 배경,
자아완성의 구체적인 의미를 추려 내는 작업은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ㄱ. 민에게 있어서 자기의 완성이란 몸과 다 같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원이었다
ㄴ.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당신께 아쉬운 무엇이 이 세상에 있단 말입니까 당신으 모든 배움
을 구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기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여인을 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기
쁘지 못하였습니다 깊이 얼굴에서 새겨진 업의 탈을 벗고 이 맑은 얼굴 속에 마음을 파묻으십시
오 이 얼굴의 임자는 생각을 모르고 살아온 히말라야의 나무꾼입니다(중략) 이가장 낮은 것과
순순히 결혼하십시오 당신의 몸을돌려 등 뒤에 기다리는 당신의 한쪽을 맞이하십시오
ㄷ. 저런 얼굴, 브라마의 이법에 아랑곳없이 살아온 이 여인이 눈앞에서 보여주는 얼굴은, 나
에게 치욕을 느끼게 했다 나는 발버둥쳤다 이 빛나는 얼굴은 그녀의 공이 아니다 애쓰지 않은
완성은 그것 스스로는 값없는 것이다
"가면고"에서 주인공 민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사고와 행동은 근본적으로 통어했던 '자아완성
'이란 결국 구원의 한 양식이 되는 것이며 애쓰는 과정을 통해 전취되는 성격의 것이라 할 수 있
다 그런가 하면 많은 지식이나 여인과의 사랑은 자아완성을 가져다 주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요컨대 최인훈은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의 융합, 높은 것과 낮은 것의 혼례, 복잡한 것과 단순소
박한 것의 어울림에서 자아완성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귀한 것이 비
천한 것을 받아들일 때, 복잡한 것이 단순소박한 것을 흔적 없이 수용할 때 자아완성의 기틀이
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민은 구원에 목말라 하고 자아의 완성이란 과제에다 온 몸을 내던지게 된 것
일까 민이 모든 사람의 정신적 활동을 환경과 대응 두 가지 개념에만 두드려 맟추는 것에 이의
를 달긴 하였지만 민에게 최면을 걸고 임상실험을 한 심령학자는 민의 경우를 이렇게 풀었다
본케이스는 청년기의 보상의식의 나타남으로써 싸움에 다녀온 젊은이들의 그 동안의 공백기간
을 무엇인가 값있는 어떤 것을 빨리 얻음으로써 메워 보려는 정신현상의 하나임
최인훈은 "가면고"가 평범한 전후소설로 평가되는 것을 우려한 듯,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전쟁
을 직접, 간접으로 겪은 모든 사람들을 피해자로 놓고 보는 고정관념에 대해 서슴없이 공격했다
사회학자나 심리학자가 전쟁에 나갔다 온 한 젊은이의 자아완성 혹은 자기 구원에의 몸부림을 전
후의 재빠른 보상심리의 산물쯤으로 해석할 법한 것에 대해 분명 최인훈은 문학적 상상력의 권능
을 단단히 신뢰하는 작가답게 꿈이라는 제3의 요소를 내세워 맞서고 있는 것이다 보상심리설이
과거지향적인 것이라면 '꿈'의 논리는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지닌다 물론 최인훈의 경우
에도 자아완성이나 자기 구원에의 몸부림이 1950년대 전후 한국사회에 대한 응전논리의 산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몸부림은 어떤 가치에도 당장 쉽게 매달리기 어려운 데다 앞날도
잘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한번 본격적으로 꿈이나 꾸어 보자고 한 데서 빚어진 것으로 이해해
야 한다
'꿈'과 '환상'에 대한 최인훈의 애착은 유별난 데가 있다 "GREY구락부 진말기", "가면고" 이후
에 가서도 꿈이나 환상의 장면을 설정해 놓은 작품들은 적지 않게 나타난다
거기서 꿈이 꺴다 요가, 흠씬하도록 땀에 젖어 있다(중략) 그런 다음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또 꿈을 꾸었다 그는 운하에 가 앉아 있었다("남들의 지붕 밑에서: 크리스마스 캐럴4")
새봄 새벽잠에 구보 씨는 어수선한 이런 꿈을 꾸었다(가족: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4)
온밤 그녀는 뒤숭숭한 꿈속을 헤맨다 푸른 잔디 위에 두 남녀는 행복스럽게 웃으면서 누워 있
다("웃음소리")
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초여름의 일요일 한낮이다 나는 내 방에서 풋잠이 든 사이에 늘 마
음에 있던 그 절터로 꿈길을 더듬어 가 보았던 모양이다(중략) 좋은 꿈에서 깨는 것처럼 세상에
못할 노릇이 없다("난세를 사는 마음 석가씨를 꿈에 보네")
최인훈의 소설들에서 심심치 않게 비치는 꿈은 고대소설과 신소설이 곧잘 취했던 예시의 기능
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위의 예문들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최인훈의 소설에 있어 꿈은
현실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게끔 하는 장치가 되고 있으며 현실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
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소설공간 속에서 꿈만큼 자주 나타나고 있는 공상이나 환상도 비슷한
기능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노래하는 사사송", "가족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4)", "웃음소리" 등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GREY구락부 진말기", "가면고", "웃음소리", "크리스마스 캐럴"등의 소설을 중심으로 하
여 최인훈의 작품세계를 개관해 보면 소설의 공간을 한껏 타개한 작가, 성장소설과 관념소설의
장인, 주지적인 소설가등의 별칭을 그에게 붙여도 좋을 것이다25
9. 소설공간의 확대와 사상의 실험(이문열 론)
1. 소설공간의 확대
이문열은 1977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단편소설부문에 "나자렛을 아십니까"로
당선되기 하였으나, 정작 작가로서의 참된 출발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부문에 "
새하곡"이 당선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작가로서는 늦깎이였다는 점을 크게 의식했고 또
그만큼 많은 습작물을 비축해 둘 수 있었던 덕분으로 그는 1979년 이래 특히 장편 "영웅시대"의
연재("세계의 문학", 1982 가을호__1984 여름호)를 마치고 향후 3년간의 절필을 선언했다 그 무
렵까지 비평가들과 일반독자들의 시선을 온통 제 한몸에 끌어 모을 수 있을 정도로 걸출한 창작
활동을 펼쳐 보였다 1980년대의 한국소설계에서 기억해 두어야 할 만한 창작집들의 대열에 이문
열의 여러 소설집 가령,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1980), "젊은 날의 초상"(1981), "
황제를 위하여"(1982), "금시조"(1983), "영웅시대"(1984), "익명의 섬"(1988), "구로아리랑
"(1987), "변경"(1989)등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
을 듯하다 특히 위에서 창작집의 제목이 된 중, 단편 "그 해 겨울", "금시조", "익명의 섬", "
구로아리랑" 등은 비평가들로부터는 이구동성에 가까운 찬사를, 독자들로부터는 열기로 가득 찬
호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수한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꼽히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문열은 웬만한 작가들이 대략 20년 이상이 걸려야 이루어 낼 법한 문학적 성과를 데뷔한 지 10
년도 채 안되는 그 사이에 다 해내고 말았다
이렇듯 요란한 밧수갈채와 뜨거운 감응력을 낳게 된 비범한 문학적 성과가 근본적으로 어떤 힘
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이문열 혹은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해 준 일군의 작품들
속에 괴력에 가까운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는 오늘의 우리 작가들 중에서는 유례가 드
물게 양과 질을 겸비한 작가, 효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작가가 될 수 있
었다
이문열의 경우, 이러한 힘의 실체는 여러 각도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여러 각도의 작업들
중에서도 이문열의 성가를 굳히는 데 한몫 당당히 한 작품들 사이의 외형상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손쉬우면서도 효과가 큰 방법이 될 수 있다 가령 "새하곡", "사람의 아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문예중앙", 1980 봄호), "우리 기쁜 젊은날"("세계의 문학" 1981 여름
호) "금시조"("현대문학", 1981. 12), "영웅시대",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문예중앙",
1984 봄 호), "구로아리랑" 등의 소설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를 '독특한' 방법으로 전달하
고 있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독특한'이라는 말속에는 '개성적'이라는 뜻은 물론 '적극
성', '과감성'의 의미까지 담겨 있다 독특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공통점은 이문열이
창작의도에 있어서 자기지향성을 강하게 내보이고 있다는 또 하나의 공통점과 연결지을 만하다
창작동기 또는 의도에 있어서 자기지향성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바로 이문열은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수준에서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억제
키 어려운 탐구심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하나의 이
야기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겨냥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의 형이상학적 탐구욕을 자극하고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독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있는 반면, 이
문열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창작의도도 만만치 않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는 인물, 사건,
상황 등에 대한 인식의 면에 있어서 미정형과 불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소설이 끝날 때쯤 정형과
확실성에 도달하는 그런 방법을 즐겨 구사하였다 이문열의 소설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되
는 동안 독자들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까지도 호기심과 경이갑, 낯설다는 느낌과 발견의 기쁨에
빠져 들고 있다
그의 대표작들이 우선 이런 두 가지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가 소설양식에 대한
기본통념을 고의든 아니든 간에 크게 파괴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걸작이든 범작이든 가리지
않고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이문열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소설양식의 확장공사를 꾀하고 있는 장인
임을 잘 입증해 준다 또한 대체로 그의 소설들은 기존의 소설유형들을 끊임없이 시험관 속에 넣
고 그 결과를 지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의 아들"은 단순한 선전문학의 차원에서
벗어난 참된 종교소설로서의 가능성을 일궁 것으로 "금시조"는 까다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하며
우리 소설사에서는 진정한 모델을 찾기 힘든 '예술가소설'의 한 경지를 잘 개척한 것으로, "우리
기쁜 젊은 날"은 교양소설의 한 적절한 실례를 제공한 것으로 "영웅시대"는 한 전형적인 마르크
시스트의 개인사와 내면을 천착하는 가운데 이데올로기소설의 한 패턴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
로 해석된다
특정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고도의 지적 소양의 직접노출을 배제해 왔거나 억눌려 온 기존
소설양식관은 이문열에 의해 의해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문열은 특정대상에 관한 박식을 때
로는 고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소설양식을 제한된 공간으로 파악하고 고집해 온 기본통념을 파괴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군대와 통신에 대한 전문지식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았다면 "새
하곡"의 밀도는 훨씬 약해졌을 것이며, 갓에 대한 교과서 이상의 지식과 이해가 깔리지 않았더라
면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의 주인공 도평노인이 갖는 비극적 색채는 금방 바래지고 말았을 것이
며 마르크시즘이니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에 대한 각별한 공부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영
웅시대"는 전쟁소설이나 행동소설의 수준에서 멀리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31^운동에 대한 전공학자 이상의 끈질긴 탐구욕과 식견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제1차 광복
전쟁사"와 같이 가히 아나토미의 모델이 될 만한 작품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특정분야의 전문지식의 축적은 오랜 시간에 걸친 왕성한 독서열이 낳은 산물임
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문열은 소설집 "그 해 겨울"의 후기 가운데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65년인가 66년은 장정본만 5백여 권 읽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때의 독서에 힘입은 바 많다
쓰는 것보다는 읽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는 원칙은 그때의 습관이 남은 탓일 게다 앞으로도 그
원칙은 고수해 갈 것이지만, 요즈음은 조금씩 깨어져 가고 있어 우울하다(P269)
나는 아직 서적과 관념에 의존하고 있다 좀더 공격적인 표현으로 고치면 현학적이란 뜻이 되
겠는데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이대로 버티겠다(중략) 작가로서 나는 천재
이기보다는 성실하고 싶다 기발하기보다는 진지하고 싶다 언제나 깨어 있어 끊임없이 추구하고
피 흘리고 싶다(p281__282)
이문열은 넓은 범위에 걸친 엄청난 독서량과 끈질긴 학자적 탐구정신이 좋은 소설이 자라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임을 실증해 준 작가다 이 점에선 이문열 바로 앞에 장용학, 최인훈, 이청준
등의 작가가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소설이라고 일컫는 그릇 속에다가 때로는 에세이
의 양식을 때로는 논문의 형식을 거리낌없이 집어넣곤 했던 장용학, 최인훈, 이청준, 장르파괴와
장르확대를 동시에 꾀했던 이들 작가들에 의해 소설은 가장 자유로운 서술양식으로 비치기도 하
였고 또 소설은 아예 그릇이 아니라는 점이 암시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세 작가들은
장르파괴 혹은 장르확대를 인생관과 세계관에서의 새로움의 모색, 가치관과 현실인식의 측면에서
의 실험정신 등으로 잇고자 한 공통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특정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의 축적과 탐구욕의 행사 그리고 작품내에서의 이의 적극적
활용이란 면에서 이문열이 이들 선배작가들보는 앞선 편이라 할 수 있다 이문열은 최인훈과 이
청준보다는 탐구의 범위가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일단 넓은 것으로 보이며, 장용학보다
는 훨씬 더 크게 독자들의 반응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문열이 이들 세 선배들과 마찬가
지로 장르확대를 통해서 시대정신을 색인해 가는 세계관과 현실인식, 가치관과 시각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냐 하는 점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있다 복고적인 낭만주의자, 보수적인 귀족주의자
등의 세평을 뜨겁게 의식하면 할수록 이러한 의문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오늘 여기'가 해체와 급변의 시대에 또 광기와 소아주의의 시대에 놓여 있는 만큼 사실상 역
사의 대세니 정신사의 주조니 하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이문열이 시대의
대세나 주조에 편승하려 했거나 동참하려 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대세나 주
조를 만들려고 하는 힘이나 존재들을 향해 단편적이긴 하지만 아주 냉소하고 야유를 보내지 않았
던가 "필론의 돼지",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에서 엿보이는 것과 같은 소영웅
주의에 대한 경멸,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 "제1차 광복전쟁사" 등에 잘 나타나고 있는 소
집단주의적 사고와 행동방식에 대한 냉소, "알 수 없는 일들", "충적세 그 후", "귀두산에는 낙
타가 산다" 등이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는 쾌락주의 풍조에 대한 고발 등은 대세와 주조에서 비껴
나려 하거나 정면에서 맞서려고 하는 이문열의 정신적 향배를 잘 입증해 준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또는 단순한 폐풍이든 문자 그대로 시대적 소명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든 이른
바 풍조니 집합의지니 하는 것으로 나타난 힘에 대해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인 점에서 그는 생
래적인 반골로 불릴 만하다
소설의 공간을 대학강의실이나 세미나실 혹은 아나토미의 현장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문열 특유
의 고집은 그의 인간적 기질의 산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언제나 깨어 있어 끊임없이 추
구하고 피 흘리고 싶다"는 위의 인용문의 한 구절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그는 상식을 근거
로 해서 곧장 주장하기보다는 우선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일정한
도그마에 안주하기보다는 회의하고, 분석하고, 따지려 들기 좋아하는 기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주 독자들의 존재와 기대감을 저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의 '해부'의 정신은
특히 1970년대 작가들의 창작경향에 대한 반발심리가 그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이문열이 의욕과 야심을 갖고 등단했던 1970년대말엔, 괜찮다고 하는 작가들마저도 값싼
모더니즘 아니면 도식적 리얼리즘에 강한 유혹을 느낀 채 '주변성'을 맴도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
이다 바로 이런 때에 이문열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신의 얘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는 명분
아래 "사람의 아들"을 터뜨리게 된 것이며, 결국 "사람의 아들"은 비평가들과 많은 독자들이 사
회학적 상상력과 대중화 논리에 식상이 돼 있었던 그 시기와 분위기를 잘 탄 측면도 있다 작품
으로서의 성패는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로써 흔히 상업주의 문학으로 일
컬어지는 천박한 모더니즘과 민중문학의 한 지류인 리얼리즘능사론 그 두 가지를 다 간접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거부한 셈이 된다 1970년대말의 시점에서 볼 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김성동의 "만다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함께 '제3의 소여'(teritumdatus)
를 이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제3의 소여'라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아들"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만큼 대안의 역능을 내보일 수 있었던 것이냐 하는 점에
대해선 선뜻 긍정하기가 어렵다 원척적으로 제3의 선택이 기존의 존재나 현상과 너무 큰 낙차를
보이면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합이나 극복의 형식 대신 초월 혹은 유리
의 형식으로 나아간 것이기에 결국 일시적 충격 쪽으로 굳혀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 땅, 육신, 현실에 보다 직접적으로 맥이 잘 닿는 것으로서의 종교정신
을 ㄹ고창하려 한 서술의도에서보다는 그 서술의도를 구현해 낸 방법면에서 더욱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찬반시비를 낳기도 했다 "사람의 아들"의 서술방법에 대해선 시선하면서
도 충격적인 표현방법이라는 평가와 논문이나 에세이의 대체양식이라는 요지의 마땅치 않다는 투
의 반응이 교차하였다 여러 민족들의 고대신들에 대한 해박함을 과시하고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
사이의 교리논쟁을 장황하게 해설하는 등의 방법을 써서 이문열은 존재의 근원과 초월의 문제에
울림을 주는 신, 종교의 문제에 착실하게 접근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설양식에 대한 재래의 통념
은 근본적으로 해체되는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술의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진지
한 태도와 천착에의 의지에만 지나치게 마음을 둔 나머지, 작가들이라면 싫든 좋든 고려해야 할
독자들과의 교감 혹은 소통의 가능성을 살리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가 소설의 공간을 한마디로 아나토미의 현장으로 자신있게 내다보았다는 증거는 "영웅시대",
"장려했느니,우리 그 낙일", "제1차 광복전쟁사" 등의 작품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로당계열의 공산주의자 이동영이 전쟁에 뛰어들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이네올로기에
회의를 갖게 되고, 마침내 이북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까지의 과정을 메인 플롯으로 처리하고
있는 "영웅시대"는 배경면에선 전장과 후방이 잘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서술방법의 면에선 관
념소설적 표현방법과 객관적 묘사의 태도가 대등한 비율로 잘 뒤섞인 경우가 된다 이 소설은 처
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이동영의 현재와 과거를 팽팽하게 병치시키고 있고, 이동영에게 일어난 일
과 그 처 조정인과 나머지 가족들이 겪는 사건도 나란히 늘어놓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현재를
먼저 드러내 놓는 가운데 그 원인과 배경을 소급해 가는 그런 방법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한마디
로 교대식 구성방법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썼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웅시대"가 "사람의 아들"
을 발표했을 때 이문열이 간혹 들었을 법한, 예컨대 소통가능성의 저하와 같은 문제점을 잘 보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웅시대"에선 동영과 그때그때 여러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상토론, 부록의 형식으로 달라붙어 있는 '동영의 노트', 회의와 번민의
과정 속에서 간단없이 노출되고 잇는 이동영의 사상체계 등에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동영이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그 후 어떻게 활동하였는가 또 무엇 때문에 회의하고
심적 갈등을 겪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결국 넓게는 근대의 사상운동
사, 좁게는 사회주의 사상운동사의 한 가닥을 잡게 하는 쪽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종 임금은 이 나라를 일본에게 맥없이 내준 무능력자요 비운의 인물이라는 교과서식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엎으려 한 점에서, 또 그 대안으로 고종 임금을 우국지사의 표본이요 살신성인의
지도자로 그려 내고 있는 점에서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은 아나토미의 효과를 한껏 활용한,
일종의 지적 모험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대하면서 그간 실증주의를 기본태도로 삼는 가
운데 후향사관과 같은 것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던 국사학도들은 당혹해 하거나 황당해 할 것
이 분명하다 근자에 들어와 우리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은 대체사를 만들어 내는 성까지 나아
가고 있긴 햇지만, 기왕에 굳혀진 역사적 사실을 정면에서 뒤엎어 버리려면 제아무리 문학적 상
상력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인 자료나 부동의 논거에 토대를 두어야 함은 물론이다 기본적으로 평
소부터 지적탐구, 해부의 정신, 관념적 접근과 개진에 능했던 이문열이니만큼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과 "제1차 광복전쟁사"에서 기도했던 역사 재해석은 귀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이라 하겠다 최소한, 지적유희의 기회는 열어 주는 것이라 하겠다 31^운동을 아예 기
미평화전쟁 또는 제1차 광복전쟁으로 확대해석 할 것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제
1 차 광복전쟁은 우리 모두가 누구의 부추김이나 앞장섬에 끌려감 없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수
행한 민족의 성전"이라는 주장에 대해 다각도로 논거를 마련해 보이고 있는 "제 1 차 광복전쟁사
"는 오히려 문학적 상상력의 신선미와 환기작용을 과시한 것이라 할 만하다
이외에도 "그 고향을 위한 영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장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
리", 중 단편 "어둠의 그늘", "금시조", "충적세 그 후", "두 겹의 노래", "구로아리랑" 등을 보
면 이문열이 깊은 인상과 낯설음의 효과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서술방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부
심했는가를, 또 이런 면에서 실제로 얼마나 탄력성이 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롤랑
의 노래", "정산선생", "종손", "장자의 꿈" 등 따로따로 자족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귀향'과 '
실향'이라는 구심점을 분명하게 지향하고 있는 단편들로 짜여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
하리", 서예 혹은 서예가의 정신의 저층을 파내려가는 가운데 '혼'과 '삶'과의 관계의 규명에까
지 나아가고자 한 "금시조", 공룡, 나방, 원숭이떼 등에 대한 고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인간의
식욕, 성욕, 독점욕의 더러움과 허망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 "충적세, 그 후", 그로테스크한 우화
의 틀과 반전의 결말처리법을 잘 활용한 가운데 성, 자유, 윤리, 사회 등의 개념을 점검하고 있
는 "두 겹의 노래", 형사로부터 취조받는 자리에서 어느 여공이 때로는 강변하고 때로는 완강히
부인하면서 현식이란 남자 직공의 실체를 자연스럽게 그려 내게 한 고백체의 형태를 밟은 "구로
아리랑" 바로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이나 인식은 새로운 형식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논리, 또는 이와 반대로 서술형식과 방법의 측면에서의 실험은 곧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에의 실
험정신으로 이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논리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옛 것의 권화, 그 속 뜻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이문열의 소설은 뚜렷한 결론은 얻어내지 못하였으나 문제점은 고루 파
헤쳐 낸 실험실을 연상케 한다는 점, 따라서 그의 소설들에서는 정형 또는 고체성의 비전과 퍼스
펙티브를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그의 소설은 이 세계와 현상과 존재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매너리즘이나 도그마에 빠져 드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려한 것이라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
었다 서술방법의 측면에서의 실험정신은 새로운 시각이나 인식의 모색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이
고 보면 이문열의 경우 서술방법의 실험정신이 이미 두드러지게 다양성과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만큼, 그의 소설들 속에는 단원적인 주제의식을 추출한다는 것은 도로가
되기 쉽다
대신, 그의 작품들은 여러 갈래의 상호 텍스트성을 지니는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맹춘중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등을 하나로 묶
을 수 있는가 하면 "그 해 겨울", "우리 기쁜 젊은 날", "하구" 등을 하나로 일괄하는 것도 가능
하다 그리고 "영웅시대"의 주변에는 "그 세월은 가도", "타오르는 추억" 등의 단편이 자리할 법
하고 "새하곡"과 "필론의 돼지"가 하나로 묶일 수 있을 것이며,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과 "
제1차 광복전쟁사"가 전후편의 관계로 묶여도 무방하다 소영웅주의를 비웃었고, 진정한 영웅이
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역설한 점에서는 "영웅시대"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
고 "필론의 돼지"마저도 상호 텍스트성의 관계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문열의 작품들 중에서는 타락한 남녀관계를 그리거나 도덕적 상상력으로써는 헤아리
기 어려운 의미를 지닌 남녀관계를 제시하는 식으로 성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두 겹의 노래",
"알 수 없는 일들", "익명의 섬", "타오르는 추억", "귀두산에는 낙타가 산다" 등의 작품들이 가
장 선이 굵은 유형을 마련하고 있다 이 유형에는 "심근 그리하여 막히다", "나자렛을 아십니까"
등의 초기작들과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 속에 단편의 형식으로 들어 있는 "방황하
는 넋", "폐원" 등이 추가될 수 있다
"맹춘중하"의 주인공인 백보 선생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비록 도시에서 사립전문학교
한문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시골에 가 처사로서 안빈낙도하며 살고 싶은 게 꿈이다 "사라진 것들
의 꿈을 위하여 "의 주인공 도평노인은 훌륭한 갓을만들어 내는 명장이 되겠다는 꿈을 고집처럼
안고 평생을 산 인물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위의 '옛 어른들'도 하나 둘씩 변해 감에도 도
평노인은 끝까지 갓방을 지킨 나머지 '끊임없는 붕괴와 소멸의 음향 속에 끝 모를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고향이긴 하지만 그 고향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정신의 권화로 떠
오르게 된다 그러나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이문열의 진짜 속셈은 갓으로 상징되는 옛 것의
정신을 사수한 한 명장을 찬미하기보다는 '장려한 낙일도 없이 무너져 버린', '해마다 황폐해지
고 퇴락해 간' 문중과 고향을 우울해 하고 비통해 하는 심정을 강조하고자 한 데 있었다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를 과거찬미나 복고주의의 몸짓 혹은 낭만주의로 풀이하는 것은 피상적 통찰의 결
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이문열은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단절을 안따까워하고 있는 것
이며 과거가 현재와 미래 속에서 하나의 에네르기나 의미로 살아남지 못하고 있음을 ㅇ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문열은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에서 소리와
기생에 미쳐 평생을 결국 낙오자로 산 인물의 경우, 생활과 긍지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다가 더
러운 현실과 타협해 버리고 마는 어느 종손의 경우, 양반정신의 계승과 가문의 명예회복을 필생
의 업으로 삼았으나 농촌에 대한 이해력의 부족으로 결국 재산도 꿈도 다 날려 버리고 만 인물의
경우 등을 제시하는 한편, 목숨을 걸고 왜놈들로부터 마을과 문중을 지킨 교리어른, 철저한 근왕
주의자이면서 군자의 길을 걸어간 정산선생의 정신과 풍모를 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에서는 문중이나 마을전체와 관련된 모둠, 화전, 채미 등의 민속과 벽계학
교라는 이름하는 누각에 대한 세밀한 기록을 보여주었으며 "지서: 세 개의 에피소드"에서는 피는
이데올로기보다도 진하다는 이치를 역설하였다 이러한 이치는 이념과 체제는 형제자매를 끝내는
갈라놓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는 못하리"속에 들어 있는 일련의 에피소드는 변화의 바람과 근대화
의 물결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가는 고향과 문중을 향한 안따까움과 그리움의 감정은 "우리들이
야말로 진정한 고향을 가졌던 마지막 세대"라는 이문열 나름의 자부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더
욱 큰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문열은 향수와 허망감에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영광과 전설의 공간인 문중에 대한 향수를 옛 것, 우리 것에의 절대적인 믿음으
로 확대시키려 하였다 "장자의 꿈"에서 도회지에서 많은 돈을 모은 일가 형님이 고향 탈환과 옛
영광 회복의 꿈을 펼치는 가운데서 양반정신 예찬론을 들먹거린 것은 옛 것에 대한 작가 자신의
긍정적 인식과 믿음을 잘 일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상 한 집단, 또는 한 민족의 문화는 대중 일반의 공통된 수준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의 정
신적 성취로 대표되어 왔다 양반은 그런 우리 민족의 엘리트였으며 그 정신은 바로 우리 문화의
정화였다 (중략) 양반정신은 그것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발전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것보다도 훌륭한 민족성이 될 수 있음을 학문에 대한 존중, 예술에 대한 사랑과 이해, 엄격한 도
덕률, 청빈과 지조, 매운 얼, 그리고 자존심과 긍지 (그런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어)
이러한 양반정신 계승론과 발전론은 이문열을 보수주의자, 귀족주의자, 반민중주의적 사고의
소유자 등으로 몰아친 민중문학론자들게 좋은 자료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다
양반정신 계승론의 연장선을 따라가 보면 존왕사상과 만날 수도 있다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과 "제1차 광복전쟁사"의 정신적 기저에 존왕사상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제1차 광복전쟁사"에서 이문열은 자신에게 향한 보수주의, 반민중사관 등의 비판을 크게
의식했음인지 아예 민중주의자들에게 때로는 거친 표현으로 야유를 해대고 때로는 냉정한 반론을
펼치는 식으로 나서고 있다 민중문학론자 또는 민중사관 신봉자의 공격내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다음의 대목은 이문열의 작가의식(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보는 눈의 정채
를 잘 보여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민들의 존숭과 애도 속에 비장하게 침몰한 왕조의 기억이 반드시 민중의식의 발아에
해로운 시대환경이란 결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중략) 피투성이 싸움만이 가장 좋은 시대환경이
며, 스스로의 고통을 지불하고 산 것만이 진정한 의식이란 것은 눈알 파란 인종들의 역사책에서
뽑아 낸 공식일 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의 원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마지막
임금님의 바랍도 의식의 자극 또는 계기의 마련이었지 임무의 부여나 독단의 주입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강요하고, 제대로 가르치기도 전에 부리거나 써 먹을 생각부터 먼저 하는 바
다 건너 못된 인종의 사이비 민중론자야 어째 그윽하고 환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랴
처음부터 "제1차 광복전쟁사"의 창작의도가 31^운동은 인왕산에서의 고종 임금의 마지막
가르침과 깨우침이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온 민족이 "누구의 부추김이나 앞장섬에 끌려감 없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난" 성전이요 광복전쟁임을 강조하고자 한 데 있었던만큼, 이문열의 정신세계
의 입지를 귀족주의니 근왕론이니 엘리트주의니 하는 것에서만 찾는 것은 단편적 사실에만 매달
린 단견이라는 비판을 받기가 쉽다
그러나 만일 인왕산에서 고종 임금이 지역별, 직능별 민족대표 이천 명을 모아 놓고 마지막 가
르침을 주었다는 대목이 순전히 대체사의 형식을 지니는 것이라면, 또 단순한 설화적 발상에 머
무는 것이라면 이문열을 존왕사상이니 보수회귀론이니 하는 말로 묶어 두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
다
이런 생각들을 표방했을 때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이나 역반응의 내용을 결코 모를 리 없음에
도 어째서 이문열은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 이렇듯 표가 나게 복고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
까 이문열의 저의를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알 수 없는 일들", "운수 좋은 날", "충적세, 그
후", "구로아리랑" 등과 같이 오늘의 세태나 풍조를 우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본 작품들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들은 복고조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부정적인 삶
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타락과 혼란, 반문화적이며 반지성적인 풍조로
뒤덮여 있는 오늘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만약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자신을 베어 가며 새로운 충성의 구심점을 마련해 주시지 않았더
라면 우리는 갑작스런 권위의 부재로 큰 혼란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흐지부지 사라져 버린 옛
권위에 대한 실망은 전통 속에서 어떤 원칙과 방향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았을 것이고
맹목적일 만큼 어떤 새로운 것에서 그것들을 찾게 만들었을 것이다 백 사람이 백 가지 주장을
내세우고 천 사람이 천 가지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의 구심점이 없고 확립된 권
위가 없으니 시비는 커지고 다툼은 격화될 것이며, 분열과 반목은 이 겨레의 보편적인 고질이 되
고 말았을 것이다
고종 임금이 민족대표 이천 명을 모아 놓고 왕조의 최후를 고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 결코 사실이 아님을 이문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을 사실인 것처
럼 우겨댄 이문열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이문열은 고종이라는 한 특정인을 떠받들
고 미화시키고자 하는 데다 근본적인 의도를 둔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이왕가가 망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역사 속에서 권위와 대경대법의 화신인 '님'이 부재해 온 것임
을 잘 알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님'의 부재라는 엄연한 현실로부터 오는 허망감과 방황심리
를 보상받으려는 뜻에서 '옛 것'에의 향수 혹은 찬미라는 한 방안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문열을 보수주의니 귀족주의니 존왕사상이니 하는 말로 규정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님'과 '뼈', '아버지'와 '권위'를 남달리 갈망해 오고 모
색해 온 이문열의 노력을 잘 실증해 주고 있는만큼, 우리는 이문열을 향해 갸륵하고 미덥다는 느
낌을 떨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소설들을 대하는 자리에선 미시적인 해석으로 빠지기에
앞서 이런 느낌들이 우선적으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작가세계" 1989 여름호)25
10. 고아의식과 사랑의 정신(윤흥길 론)
윤흥길은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빙청과 심홍" 그리고 1973
년도에 오늘의 윤흥길을 점지해 준 "장마" 등등을 통해 가시적 세계의 뒤와 속을 날카롭게 쏘아
볼 줄 아는 능력을 과시한 바 있다 앞의 두 소설을 읽노라면 1970년대 한국인의 삶의 한 종단면
을 포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종단면 속에서 계속 살아 숨쉬는 원천적 정서를 캐낼 수 있게
도 된다 "장마"를 통해서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625의 의미뿐만 아니라 이데올로
기의 대립이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방법과 습속에 가져다 준 암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윤흥길은 작중인물의 심리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함으로써 외적인 사건의 의미를 잘 설명하는 방법
에 능한 작가다 그는 외적인 사건이 개개인의 내면세계의 행동양식에 가져다 주는 변화의 양상
을 추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사건의 의미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령, 이 작
품의 끝에 가서 할머니는
"할머니의 긴 일생 가운데서, 어떻게 생각하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그러고도 놀라운 기
력으로 며칠 동안이나 식구들을 들볶아대면서 삼촌을 기다리던 그 짤막한 기간이 사실은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 한 순간을 확 타오르는 촛불의 찬란함과 맞먹는 할머니에겐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
에 넘치던 시간이었나 보다"
와 같이 풀이 되고 있어 할머니의 삶에 있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신앙임이 호소력 있
게 전달된다 또한 자식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극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이 사랑의 관계를 파괴
한 전쟁의 범죄가 강한 어조로 고발되고 있는 것이다 외관을 더듬는 데서 그치지 않f고 일정한
현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을 찾아내어 형상화하려는 것은 작가라면 누구나 갖는 욕심이겠지만
이런 면에서 1970년대의 윤흥길이 거둔 만큼의 성과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빙청과 심홍", "묵시의 바다" 등과 같은 표제에서 잘 나타난 것처럼 윤흥길
은 소재 선택의 과정에서나 주제표출의 도정에서 이색성, 개성, 비범성 등의 특징을 뜨겁게 의식
하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 대다수는 '별난' 소재를 제시함으로써 한 수 잡고 들어가는 식의 요
령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작가로서의 이색성이랄까 개성과 같은 것을 소재의 차원보다
는 주제의식의 차원에서 더 크게, 또 더 자주 건져 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윤흥길이 작
가로서 '새로운' 인식세계나 서술방법을 적극 지향했다는 의미가 된다
1980년도에 "문예중앙"에 연재된 바 있던 장편 "순은의 넋"은 작가가 그 이전까지 주제의식과
소재의 색깔 면에서 고루 그리고 뚜렷하게 보여 왔던 이채로움을 다시 한 번 잘 입증해 준 것이
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이채로움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수반한, 상식적이고 평범한 재료와 시각을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 고아출신이 입양알선기관을 운영하면서 겪는 심적
갈등의 터널을 차분하게 따라가고 있는 "순은의 넋"을 보면서 혹자는 '외진' 소재가 아니냐는 반
문을 할지도 모른다 윤흥길은 바로 이러한 있을 수 있는 반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고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 대한 독자 알반의 예비관념이나 통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식으로 현실감 넘치
는 인물과 갈등관계를 설정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625의 엄첨난 인간파괴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전쟁고아를 내세우는 가운데 독자들의 연민의 정을 겨냥하였던 종래의 소설
들로부터 근본적으로 등을 돌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은의 넋"은 흔히 말하는 상록수
형 인간상을 제시하는 데 궁극의 목표를 둔 것도 아니다 고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독자들
은 초속적이거나 금욕적인 인간형을, 또는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 마련이다
"순은의 넋"을 통해서 윤흥길이 이러한 독자들의 습관적 기대를 산산조각냈다고는 보기 어렵지
만 최소한 이작품은 고아를 다루거나 고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흔히 환기시켜 왔던 연민, 경
건함, 죄의식, 이타심 등의 감정의 테두리를 뛰어넘으려는 한 흔적은 역력하다 "순은의 넋"은
이러한 감정들 대신, 이러한 감정들에 도달하기 바로 전 단계의 감정 혹은 아예 그와 맞서는 자
리에 있는 감정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킨 것으로 드러난다 고아출신으로 입양알선기관인 은광원의
부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30대인 유준상이 때와 곳과 상대를 가리지 않고 뿜어 댔던 가학취미, 공
격욕, 시니시즘 등은 바로 윤흥길이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소설의 끝부분
까지 위의 공격욕구와 시니시즘이 무릎을 꿇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유준상의 예측과는 달
리 그의 위악적인 일련의 태도는 작중에서 은광원 원장과 김 보모가 나타내는 종교적인 희생정
신, 정죄의식, 성선설 등을 오히려 부각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원장과 김 보모보다는 유준상이 훨씬 더 이른바 '문제적 인물'에 가깝다
이 작품이 유준상의 형태와 사고를 그리는 데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 때문에 위의 판
단을 내린 것은 아니다 625라는 과거와 분단국가라는 현재 한 가지만을 떠올려도 유
준상이라는 작중인물에게 큰 비중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윤흥길이 "순은의 넋"에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뜯어 보고, 파헤치고, 풀이한 주인공 유준상
은 1950년대의 전후소설과 1960년대의 전쟁소설에서 전쟁고아로 등장했던 전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준상과 같은 전쟁고아들은 1970년대 작가들 대부분이 목전의 현실과 급변하는 삶을 추적하는
데 급급했던 그 사이 이렇다 할 명작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도 못할 만큼 '별 탈없이'어른이 되어
버린 듯했다 1970년대 이후로 대부분의 작가들이 관심권 밖으로 알게 모르게 밀어내 버린 '전쟁
고아'의 그 이후를 윤흥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준
상은 '전쟁고아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잘 떠올려지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한 답변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다소
는 오불관의 어투를 섞어 적당히 낙관적인 대답을 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윤흥길은 평생을 두
고도 끈질기게 엉켜 좀체 풀어질 줄 모르는 고아의식 혹은 결핍체험을 강조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한 대답을 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 된다
"순은의 넋"은 고아출신이면서 입양알선기관으로 변해버린 은광유 의 부원장직을 맡아 상담,
소개 등의 일을 하고 있는 유준상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매개로 하여 사랑, 대잇기, 죄의식, 봉사
정신, 양심, 타락 등등의 추상명사를 점검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준상이 그의 양모이자 은광
원 원장과 마찬가지로 고아출신이 아니면서 거기다가 입양사업을 성스러운 사회사업으로만 인식
할 수 있었다면 이 소설은 심리소설보다는 종교소설이나 상록수형 소설로 골격을 갖춘다고 해서
언짢아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인간을 살과 피가 있는 존재로 파악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명제
앞에서는 종교소설 같은 형태는 아무래도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생기기 쉽다
윤흥길이 이 소설을 종교적인 희생정신과 봉사정신 그리고 상록수형 인간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밀고 가려 한 것이 아닌 이상에는 유준상의 내밀한 억압관념과 유준상이 원장, 김보모에게 짙게
느끼는 갈등심리가 이 소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된다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공격욕으로 터져 나오는 그의 억압관념은 그의 양모를 향한 반발심리와
끊임없이 어우러지고 포개지는 형상을 보인다
한마디로, 유준상의 심층심리를 파헤치는 작업은 "순은의 넋"의 요체를 건져내는 작업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작품에서 유준상은 철들면서부터 지금까지 "왜들 낳는가, 그리고 왜들 낳아서 버리는가"와
같은 질문을 거듭거듭 떠올림으로써 인간, 입양사업, 미혼모 등등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잘 암
시하게 된다 작가에 의해서 "이십년을 그의 내부에서 기생해 온 괴물"(p28)로 풀이되고 있는 이
런 질문은 사실상 유준상이 입양업무 책임자로선 부적격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들 낳는가 그리고 왜들 낳아서 버리는가 그와 같은 의문을 자꾸만 키워 나가다 보면 결국
낳는 행위와 버리는 행위 모두 다 배설 위주의 생리현상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게 되고 따라서 그
런 이유 때문에 남이 버린 씨앗을 줍는 행위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양아들을 자기 사업의 후계자로 지목하여 거의 우격다짐하다시피 전문적인 공부를 시킨
어머니는 처음부터 실패의 잔을 들도록 정해져 있었던 센이었다 이른 나이부터 교묘한 면종복배
의 습성을 몸에 익힌 양아들한테 어머니가 속아 넘어간 결과였다(p53__54)
이 대목은 이 소설의 중심구조를 파악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유준상이 양모가 일생을 걸고 벌
여 온 고아사업과 입양사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어째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
는가 하는 점은 이 소설의 갖가지 갈등관계를 빚어 낸 근본동인을 풀어 주는 열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광원 원장으로, 유준상을 후계자로 꼽고 있는 양모는 입양사업을 금욕, 희생, 사랑, 봉사 등
의 덕목을 골자로 하는 일종의 종교정신의 발현으로 파악한 반면, 유준상은 고아출신에게 불행한
어른과 아이를 매일같이 대해야 하는 입양사업을 맡긴 것은 '잔인한 짓', '가혹한 짓'이고 판단
했다 원장은 고생한 며느리는 인자한 시어머니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관념에
서 있는 것이며, 유준상은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베풀 줄 안다'는 이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
던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회에 나가 고아로서의 벽을 절감하고 돌아온 유준상에게 나
이를 먹을수록 어느 면에서는 고아의식과 결핍체험으로 인한 외사심리의 압박을 더욱더 심하게
느끼는 유준상에게 평생을 처녀로 늙으면서 종교정신으로써 입양사업을 해 온 어머니가 긍정적으
로만 투영될 리는 만무였다 입양사업은 원장에겐 열패감과 한계의식을 확인시켜 주게 된 것이다
유준상과 그 양모사이에서 좀처럼 타협점이 구해지지 않은 채 지속되어 가는 갈등관계는 단순
한 감정대립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만하다 이 두 인물 사이의 관계는 무한한 사랑과
희생정신을 고창하는 종교적인 삶의 자세와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고아의식에서 출발하
여 인간과 세계에 대해 온통 뒤틀린 심성으로 대하려는 자기적인 삶의 태도가 맞부딪치면서 시작
된 것으로, 신성사와 세속사 간의 충돌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어머니는 인간세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과 어둠을 '사랑'으로써 양지 쪽으로 끄집어내려
한 반면, 유준상은 태어날 때부터 내팽개쳤다는 감정을 키워 때로는 무분별하기까지 한 공격욕으
로 이 감정을 해소시켜 가면서 인간과 세계를 절망과 조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머
니는 자기 희생으로써 사랑을 주려 애쓰는 반면 유준상은 상실감과 소외감에 휩싸여 참된 사랑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랑의 무한한 힘과 가능성을 믿고 있었던 그 시감에 유준상은
사랑의 결핍이 가져다 준 무서운 결과를 되씹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준상은 <고아출신은
절름발이 인생을 살아가도록 시초부터 정해져 있었다>(p112)는 자기 합리화의 의도가 다분한 강
변을 남기게 되었고 <요즘 세상은 돌고 도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진 일정한 자리에 끝까지
구어박히기 십상>(p127)이라는 절망어린 눈길로 버려진 영아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순은 의 넋>을 통해서는 인간을 밝고도 깨끗하게 보아주려는 시선과 극복이나 개선의
가능성을 인정치 않으면서 어둡고도 절망적인 존재로 보려는 눈길이 교차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윤흥길이 일종의 결정론자이면서 자학의 축4과 공격욕의 축을 끊임없이 오가는 유준상에게 서
술의도의 초점을 맟춘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김 보모란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일면 무력해
빠진 이상주의자, 관념론자로 보일 법한 원장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은광원 원장은 김 보모가 속죄의식에 바탕을 두고 내밀히 다져 가고 있는 정신적 지향점
그 극지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갈래 인간적인 욕망을 한 가닥 인생관으로 묶기가 그리 쉬운 노릇은 아니지 그러나 자기
인생에서 무엇으로 최고의 가치를 삼아야 할지 그것만 결정할 수 있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겠지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먹고 자고 숨쉬는 육신활동 전부가 최고위 영혼을 위해서 제
각각 봉사하는 은혜로운 삶도 가능해지겠지 자기 자신하고 피나는 투쟁없이 얻어지는 천직의식
은 있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설사 있어 받자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걸 난 지금도 믿
고 있어(p193)
사생아를 은광원에 맡긴 후 두번째 남자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그로 인한 절망감과 죄의식을 봉
사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보모로 들어온 김연숙은 바로 윗부분에서 보이는 것
과 같은 '최고의 영혼'을 위해 '자기 자신과의 피나는 투쟁'을 꾀하고 있다
비록 입양사업에 뛰어들게 된 동기는 다르나 할지라도 이 사업에서 '최고의 영혼을 감지하려
하고 확인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김연숙은 유준상의 인간불신론, 퇴행성, 공격욕구를 확인시켜 주
고 동시에 자극한다는 점에서도 원장과 같은자리에 서게 된다 유준상은 김연숙에게서 원장에 대
해 그동안 억누르고 참아 왔던 거부감이나 복수심리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내게 된다 유
준상은 자기 친모처럼 애를 낳아 버리고 이제는 양모처럼 완벽에 가까운 봉사정신으로 입양알선
사업의 대열에 뛰어든 김연숙을 보면서 배신감과 불신감이 포개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뿐만 아
니라 직접적인 공격에의 충동을 억제치 못한다 유준상은 김연숙의 삶의 경우에 대한 부정을 인
간의 위선됨과 정신주의적 미장술을 향한 근본적인 불신감으로 발전시킨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지나치게 폼을 잡는 상대를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신의 섭
리, 생명의 존엄성, 숭고한 인간애, 분골쇄신, 멸사봉공, 살신성인, 어린이헌장, 인류의 희망,
나라의 기둥, 만민평등 따위 거창한 구호는 그에겐 분명히 타기할 만한 허위요, 속이 빤히 들여
다 보이는 책략에 불과한 것이었다(중략) 우선 눈에 보이는 가치가 가장 확실하고 값지다 보이
지 않는 건 먼저 믿기부터 해야만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가외로 필요하기 떄문에 복잡한 세상에
번거롭기 짝이 없다 정신과 돈, 사랑과 빵, 또는 도덕과 유방 따위를 한번 나란히 놓고 보아라
어느 게 먼저 눈에 뜨일지는 보나마나 뻔하다(p165)
입양알선사업은 은광원 원장에겐 종교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며 김 보모에겐 한
때의 미혼모로서의 죄의식을 정화할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입양알선사업은 유준상에게는 고아의식, 소외감, 공격욕구 따위에 불이 붙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러나 유준상은 이에서 머물지를 않았다 그는 입양알선사업을 펼쳐 나가는 동안 인간이 본능과
유혹과 재래의 가치관 그리고 이기적 충동 앞에 얼마나 쉽게 무릎을 꿇는가를 볼 수
있었다
윤흥길은 은광원 원장과 김 보모를 등장시켜 인간의 삶 속에 무한한 사랑과 봉사를 향한 숭고
하면서도 아름다운 노력이 있음을 환기시켜 줄 수 있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아의식과 이로 인
한 뒤틀린 심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유준상의 경우를 통해서 어둡고,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의
속성을 잘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처럼 <순은의 넋>은 원장, 김 보모, 유준상 등 세 인물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관계가 화해
가능성을 중심구조로 삼은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윤흥길의 작가의식,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인간관과 사회의식이 어느 인물에게 제일 크게 기울어져 있느냐 하는 질
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그의 인간관의 중심부에는 유준상이 앉아 있는 것으로
또 그 중심부를 바짝 조이고 있는 주변부에는 원장과 김 보모가 자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외에도 유준상과 삐트리 아저씨는 '불구자'라는 범주로 묶일 수 있고, 김 보모와 최용선은
미혼모 즉 '타락자'로 묶는 것이 가능하다
이 소설은 개인의 삶 속에 깊이 묻혀 있는, 그러면서도 강한 에너지를 뿜어 낼 수 있는 여러
욕구 즉 자기애, 승화, 치환, 공격, 타자애 등등에 살을 잘 입힌 결과를 빚고는 있다 그러나 바
로 이 과정에서 한 개인을 일정한 억압관념이나 의지의 용기로 지나치다고 할 만큼 고착시켜 버
리려 한 점, 또한 인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개성보다는 보편성을 더 많이 염두에 둔 점 등이
한계로 남는다
그리고 유준상이 어머니나 김 보모에게서 느끼는 갈등 그 동기가 좀더 개연성의 뒷받침을 받았
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25
11. 양심과 진실에의 개안(정종명 론)
정종명은 1978년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치면 34세에 단편 <사자의 춤>으로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우리 소설계의 통례에 비추어 보면 늦은 나이에 작가로서 출발한 셈이다 한국
작가와 시인의 주요 산실의 하나였던 서라벌 예대 문창과를 나오기는 했으나 결국 지각데뷔를 하
고 말았다 그런데 조숙조로한 작가들의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떠올린다면 또 이변주, 박완서,
이문열 등과 같이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으면서도 남들보다 갑절 이상의 템포를 내어 작가로
서의 성가를 굳힌 경우들을 염두에 둔다면 지각데뷔는 사실 아무 문제도 될 수 없는 듯하다 위
에 예를 든 세 작가는 만학이면서 우등생이 된 경우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선
정종명이 이런 범주에서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건강한 윤리적 상상력과 매서운 고발정신을
견지하면서 계속 정진한다면 언젠가 주목의 대상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되리라
그의 단편들을 연대순으로 늘어놓고 보면 매우 흥미있는 결과가 드러난다 1980년에 발표되었
던 단편 <건널목 뛰어넘기>를 고비로 해서 그는 소재, 인식 그리고 서술방법 등의 측면에서 분명
히 변하고 있다 이런 추측이 과히 빗나간 것이 아니라면 데뷔 이후 오늘날까지의 정종명의 작품
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초기소설 <사자의 춤>(1978), <겨울우
화>(1980), <건널목 뛰어넘기>(1980)가 한 그룹으로 묶여질 수 있으며, <우울한 희극>(1980)에서
<장외전쟁>(1985)에 이르기까지의 소설들이 또 다른 그룹으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작품들은 부부관계, 친구관계, 부모자식 사이와 같은 개인간의 갈등세계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주인공도 한결같이 '나'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우울한 희극>
이후로 접어들어 정종명은 개인간의 갈등관계보다는 개인과 초개인적 힘이나 집단간의 인간관계
를 그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초개인적인 힘 혹은 집단은 흔히 '세계'라는 다소 모호한 인상
을 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하거니와 정종명의 이러한 변화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 들어야 할 것
이다 어쩌면 그는 개인의 삶에 좀더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 혹은 세계에는 눈을 뜬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은 영웅적 존재가 아닌 바에는 무력하고 유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대
다수 소설들은 개인의 좌절, 전락, 방황 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주의적 시각과 인식을 증명해
보이려 하였다 오늘날 진지한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 세상을 피상적으로 보거나 경박하리만큼 낙
천적으로 보는 작가들만이 한 개인의 능력을 필요 이상 확대해서 그린다는 인상이 깔려 있다
서사시와 로망스에 이어 오늘날 말하는 소설이 득세하게 된 것은 개인의 힘과 운명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각을 톡톡히 확인한 것을 의미한다
1980년도 이후의 정종명의 소설들은 이처럼 개인의 힘과 운명은 보잘것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의 삶은 짓눌리기 쉽고 깨어지기 쉽고 동시에 뿌리가 드
러나기 십상이라는 인식을 구체화하는 데 힘쓰게 된 것이다 예컨대 정종명은 주인공이 어떤 집
단이나 조직으로부터 쫓겨난다든가 소외당한다는 모티브를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요 인물들은 거의가 제외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제외를 두려워하는 증세를 내보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주인공들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흔히 조직, 사회적 분위기, 통념 등으로 일
컬어지는, 거대한 힘을 고발해 보고자 한 것이다 가령, <우울한 희극>의 양하일과 노향순, <추
방>의 세환, <탈>의 성지영, <이명>의 하기석, <사설문답>의 홍씨 등은 무조건적인 순응주의자로
서의 테를 벗고 '지금 여기'의 모순점들을 감지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개신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개신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이들 인물들은 종국에 가서는 소외되
거나 좌절되고 만다
<추방>에서 주인공 세환은 시진시인으로 '신문사 자매지인 종합잡지 기자로 특채되는 행운'을
맛보았고 이어 유수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서명사건'에
휘말려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작품도 게재되지 않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이러한 세환에 대해 주위사
람들은 면전에서는 위로를 해주었지만 뒷전에서는 기피인물로 낙인 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봐, 가능한 한 저치하고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아 자네 알지? 잘난 체하고 꺼떡거
리며 나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가짜야 지가 무슨 신념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고 어정쩡
하게 말려든 것뿐인데, 막상 일을 당하고 나서는 자기야말로 시대상황에 양심을 지킨 교두보인양
까불거리거든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수군거렸다 누군 뭐 저만큼의 양심이나 지조가 없어서 구구로 지내는
줄 아나? 천만에, 가장된 정의감과 도덕심이지, 나는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저보다 열 배 스무
배는 삐딱한 반골이라고 저런 치들은 하늘과 땅이 뒤집혀도 또 그런 불평 불만을 털어 놓게 마
련이라니까 아예 적당히 어르고 따돌리는 게 묘수야
그것은 실로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p158)
정종명은 세환이 표면상 정의감과 도덕심을 적극 행사하였음에도 주위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빈
축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만을 보고 정종며명의 작가적 성향을 규정했
다가는 속단이 되기 쉽다 그는 이 다음 대목에서 세환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꼭 틀린
것이 아님을 입증이라도 허려는 듯 서명사건에 세환이 말려든 것은 우연이었음을 밝혀 놓고 있다
세환은 '우연하게' 그 서명사건에 휘말렸을 뿐만 아니라 사겅이 터지고 나서도 <최소한 변절자라
는 낙인만은 자청해서 찍힐 수는 없지 않느냐는 허황한 공명심>을 갖게 된다 마침내 세환은 친
구의 세든 골방에 처박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망가져 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낙향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세환이 온몸으로 드러내 보인 우발적 가담과 '변절 콤
플렉스'는 개신자로서의 면모가 있든 없든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된 비합리적 성향일 수
있다 정종명의 이러한 인식과 발견은 우선 꾸밈이 없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환은 낙
향하는 도중에서 다방에 있는 아가씨와 알게 되어 잠시 그녀와의 정사에 빠지게 된다 읍내에서
영어선생을 하고 있는 친구 등과 어울려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셔 보았으나 세환의 갈증과 답답
한 심정은 좀처럼 풀릴 줄을 모른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서울에서 신문기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세환은 끝까지 그의 실상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세환이 미스 윤을
향해 잠시나마 쏟아 놓았던 도피충동과 감상을 거둔 끝에 망신당하고 마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결국 세환은 서울에서의 시인으로서의 삶에도, 또 고향에서의 삶에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
는 그 어느 쪽에도 적응하지 못한 채 실조상태를 내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추방>을 통해서 정
종명은 기성사회로부터 제외된 한 개인을 해부함에 있어 일방성을 잘 벗어난 느낌을 준다 즉,
한 개인을 에워싼 주위사람들의 몰이해도 문제이긴 하지만 그 개인의 내면 속에 있을지고 모를
과대망상과 영웅심리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인식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양비론에 서 있다 쌍방이 다 문제가 있다고 보는 가운데 주인공에 대한 연민의 정을 제어하고
있는 정종명의 태도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명>의 주인공 하기석도 <추방>의 세환과 비슷한 이유로 말미암아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된다
하기석은 전 직장에서의 노동쟁의에 앞장섰다가 파면당하고 나서는 그 후 이력서를 써 들고 여기
저기 직장을구하려 다녔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하기석은 학생 때부터 데모꾼으로 이력이 붙은 사
내였다 그는 마침내 주위사람들로부터 기피인물이 되고 말았다
사회에 나와서도 제 잘난 척하다가 스스로 모가지를 날린 놈이라구 저 자식은 꽃밭 속에서 살
게 해도 꼬투리를 잡아내려고 두 눈을 까뒤집을 놈이라구 그러한 착란과 오해 속에서 무려 이
년이나 빈둥거렸다(p60)
이 소설은 결국 하기석이 친구인 사장의 고도의 술수에 말려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어, 작가 정종명이 하기석 쪽으로 심정적인 차원에서나마 기울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러나 <추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사회 쪽으로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
니다 한 개인의 불행의 책임을 사회 혹은 타인들에게만 전가시키려 한 작품들이 많은 실정이고
보면 비록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는 있어도 정종명의 인식은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취직자리를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 하기석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며 유림산업 사장인 친구를 만
나 그 회사의 평사원으로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회사 나름의 인사원칙을 깨뜨리면서까지 사장
은 하기석을 부장으로 승진시킨다 이 인사이동의 후유증은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부장으로
승진되어야 마땅한 고참과장 서운배를 비롯해 대부분 사원들이 하기석의 벼락승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다 서운배는 서운배 대로 그 외의 사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불만을 터뜨린다 하기석은 벼
락승진을 앞장서서 야유하는 이석진과 한바탕 육박전을 벌였는데 이를 표면상의 이유로 내걸면서
하부장 부서의 사원들은 집단결근을 한다 하기석의 이런 사태에 대해 책임지겠노라고 하곤 집에
와서 내심 연락이 오길 기다렸으나 회사에서는 끝내 아무런 소식을 주지 않는다 하기석은 나중
에 가서야 이 모든 사태를 사자이 뒤에서 연출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는 전 직장에서 파면당했
던 바로 그 이유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밀려나고 만 것이다 평소에 사장은 하기석을 신임하는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긴 하였으나 하기석이 안양 근로자들과 자주 어울린다는 점을 포착하고는
그를 제거해야겠다는 속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석의 라이벌인 서운배도 하 부장의 직
속상관인 유종민 실장도 하기석의 전력과 함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던 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서운배나 이석진은 꼭 부정적인 인물로만 그려져 있진 않다 그들이 음모를 꾸며 하기석을 몰아
내는 장면은 설정되고 있진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정종명이 주인공 하기석의 행
동방식을 전적으로 긍정한 것만은 아님을 짐작케 된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는 그 어떤 인물 쪽으
로도 쏠리지 않으면서 중립성이나 균형감각을 취한 것이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인 <이명>은 하기
석의 감박관념이나 피해심리를 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편에 해당되는 <우울한 희극>에서의 양하일과 강인성은 월급인상 투쟁과정에서 이견을 드러
내다가 급기야는 다 함께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월간 '섬유, 방직'의 판
매실적이 부진한데다 복자공장 여공들의 실태를 보고한 기사가 말썽이 났기 때문이다 평소에 회
사측에 불만이 많았던 강인성은 복지공장 여공들의 시위를 보고 나서는 시위주동자 노향순에 공
감을 표시하는 기사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노향순의 노동운동권과 지금까지의 투쟁경위가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는 반면에,
그녀의 퇴직을 강요하는 회사측의 감언이설과 협박담 등이 비교적 악의적인 문장으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p306)
이 기사에 대해 새로 편집부장이 된 양하일은 우려를 표시했다 강인성의 마음 한 구석에는 편
집부장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하일은 강인성
과 그를 지지하는 편집사원들의 고집에 굴복하고 만다
책이 나오자 복지공장 쪽의 몇몇 남자들이 몰려와 그 기사가 <근로자들을 선동하는 계기가 되
었다>(p313)는 내용의 항의를 하면서 이영만 주간의 뺨을 몇 차례 후려갈긴다
말썽이 난 기사는 마침내 월간 '섬유, 방직'의 전사원들로 하여금 사직서를 쓰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양하일과 강인성이 중심이 된 편집사원들은 평소부터 월급이 적다는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해고의 공포를 약하게나마 느껴 오던 터였다
월급인상을 사주에게 강력히 건의하자는 점에서는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였으나 건의방법의 면
에서 강인성은 강경책을, 양하일은 온건책을 쓰자고 의견을 달리한다 편집부장 최남호는 표면으
로는 나서지 않으면서 은근히 강인성의 방법을 부추기고 그 쪽에 기대를 건다 그러자 총무부장
김기영은 젊은 사원들이 흥분과 기대에 차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보고는 슬며시 폐간설과 감원설
을 귀띰해 준다 그는 월급은 안 올려 주어도 좋으니 모가지만 붙어 있게 해 달라는 입장이었다
본사에 갔다 나온 이영만 주간의 입을 통해 휴간론이 보류된 대신 월급이 종전과 동일하게 되
고 말았다는 결론이 전달되자 강경론을 일삼던 강인성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양하일이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러자 강인성은 양하일에게 <다짜고짜 사직서부터 내미는 거냐>고 못마땅해
하면서 자신은 결정적인 기회를 위해서 꾹 참는 중이라고 변명한다 나중에 가서 양하일의 사표
는 반려되고 오히려 편집부장으로 승진하게 되지만, 이 대목에서 정종명은 양하일과 강인성을 대
비시켜 말만 앞세우는 사람, 허세를 떠는 인간을 부정적 존재로 환기시키고 있다
양하일이 편집부장이 되자 강인성은 계속 이죽거리던 끝에 파업결의문 작성에 동참하자는 압력
을 가해 온다 양하일은 결의문을 작성하는 현장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다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그 자리를 모면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이었
다 어찌 보면 우유부단하고 어찌 보면 기회주의자같이만 여겨져 뺨이라도 올려 붙이고 싶으리만
큼 얄밉기 짝이 없던 최남호__이쪽도 저쪽도 편들기가 곤란하여 끝까지 자기 혼자 속을 끓일 수
밖에 없었을 그의 괴로운 심정이 지금에 와서야 양하일은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도 결
국은 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p310)
이 소설에서는 작가가 이런 인물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강한 어조로 간섭을 꾀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런 점에 비추어 양하일이 취한 위와 같은 태도에 대해 긍정판단이나 부정판단을 분명
하게 드러내는 것은 속단이 되기 쉽다
양하일과 강인성의 행동방식, 가치관, 현실인식방법 등은 노향순이 주동이 된 여공시위로 말미
암아 부분적으로나마 굴절을 겪게 된다 <우울한 희극>은 월간 '섬유, 방직'사의 불안하면서 들떠
있는 분위기와 최저생계비를 확보하기 위한 여공들의 데모장면을 병치시킴으로써 밥의 문제의 심
각성을 한껏 잘 환기시켜 주게 된다 이 작품은 양하일이 이종사촌 누이인 노향순이 자신들의 처
절한 형편을 들려주는 것에 대해 긍정적 반응과 함께 일정한 거리를 내보이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어 정직한 시각과 인식을 힉득할 수 있게 된다 노향순에 대해 양하일은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잘못된 부분은 타이르기도 한 반면, 강인성은 노향순의 편에 서서만 이론을 펼치고 격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강인성은 월간 '섬유, 방직'사내에서 누적된 자신의 불만을 노향순을 통
해서 발산하려 한 면이 있다 어찌 보면 강인성은 노향순을 비롯한 여공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공장장을 구타하고 동조기사를 쓴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종명은 <우울한 희극>에서 제목이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빈발하고 있
는 문제적인 현장들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정직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밥의 문제를 에워싸고 개
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이 서로 갈등의 늪에 빠지는 것은 한바탕의 눈물겨운 그러나 희극이 아니
냐는 것이다 이미 그의 여러편의 소설들을 통해서 제시된 바 있거니와 정종명의 밥에 대한 관심
은 각별한 데가 있다 밥의 문제에서 적응과 부적응, 소외 등의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빵을 획득하기 위한 사람들의 행동과 선택들은 그것이 타인
을 큰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이상 정당성이 있다고 암시하였다
그는 문제적인 현장을 제시하면서도 누가 옳다 그르다 식의 작가적 개입을 꾀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판단중지랄 수도 있는 그의 태도에 대해 혹자는 아직 그의 인식세계가 미정형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현상의 배후를 깊게 파헤쳐 들어가지 못한 데
서 나온 우유부단의 소산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에 분석한 몇몇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그의 서술방법은 물론 최적의 것은 아니다 이미 앞
에서 암시한 것처럼 표면상 판단중지로 보이는 그의 현실관이나 인간관은 종합적이며 건강한 인
식세계를 향한 과정이라고 볼 만하다 자신의 것과는 다른 가치관이나 현실인식을 수용하려는 자
세가 작가들 사이에서 약하게 드러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정종명의 현실인식은 어느 한쪽
에 고집스럽게 매달리지 않는 점에서 오히려 많은 공감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그의 소설은 몬제적 공간이나 문제적 인물은 만들어 가는 데 흡족치
못한 결과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독자의 눈에 작고 보잘것없는 공간적 배경과 인물로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평소 '정직함'과 '소박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 작가이기에 정종명에게
는 처음부터 크고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유일한 우화소설인 <심판>은 적응과 소외의 문제에 대한 상징적 발언을 들
려주고 있다 원래 새매족에 속한 난추리는 치독사에게 물려 죽을 뻔했을 때 소년이 구제해 준
것을 계기로 소년에 의해 길들여지는 삶을 누리게 된다 난추리는 소년이 잡아다 주는 개구리를
먹고 컸는데 어느 날 난추리 형제들이 병아리를 먹이로 삼으려 하다가 소년의 어머니와 아저씨로
부터 쫓아내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이에 소년은 난추리형제를 산에다 내버리는 대신 발목에다 가
는 끈을 묶어 완전한 용서도 완전한 추방도 아닌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난추리형제는 추
위를 견디다 못해 숨을 거두고 만다 혼자 남은 난추리는 '비명에 간 두 형제의 목숨'과 해방의
기쁨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난추리는 고독감과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해방감을
더 이상 즐길 형편이 못 되었다 난추리가 자유의 몸이 된 직후의 공포와 고통을 이기고 스스로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찾아다니는 의지를 키워 가던 그때에 동족의 리더인 이더귀를 만나게 된
다 이더귀는 난추리에게 너는 인간들에게 보호받은 것이 아니라 이용당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난추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더귀는
하지만 너도 멀지 않아 그들을 원망하고 비난할 수 밖에 없게 될 게다 너는 이미 너 자신의
본성이 무디어져 하다 못 해 메뚜기 한 마리 스스로 잡아먹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까
사람들이 결국 너를 더할 수 없이 무기력한 새매로 만들어 버렸어(p174)
라고 일꺠워 주면서 우리 동족들은 인간에도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너(난추리)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다고 겁을 준 다음 동족과 인간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몰아세우기에 이른다 마침내
난추리는 공개재판에 회부되어 잣나무숲을 영원히 떠나거나 아니면 마을로 내려가 병아리를 채어
오라는 무거운 판결을 받게 되었다 난추리는 소년의 집에 있는 중닭을 향해 공격을 하였고, 처
음에 반가워서 뛰어나왔던 소년은 마침내 분노의 눈길로 돌을 집어 던지게 된다
순식간에 잣나무숲과 마을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눈부신 비상이었다
난추리는 자꾸만 위로위로 솟아올랐다 마을도 아니고 잣나무숲도 아닌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그
러나 그것이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한 떠돌이의 울분과 절망감에서 비롯한 무모한 비상임을 깨
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p178)
<심판>의 마지막 장면인 이 부분, 인간의 욕심과 동족(새매)의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소외의 아
픔을 맛보고 있는 난추리의 실상을 시적으로 감명 깊게 드러내고 있는 이부분은 정종명의 주제의
식을 읽어 내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윗부분이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정종명은 삶은 꿈
도 명분도 아닌 현실임을, 소속감은 삶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
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삶의 방법에 대해 이더귀와 난추리가 나누는 이
야기는 매우 크 의미를 담고 있을 뿐더러 앞서 분석한 몇몇 작품들에게도 손색없는 조명장치가
될 수 있다 난추리는 인간들로부터 보호받으며 살아왔다고 보고 있는 데 반해 이더귀는 이용당했
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난추리가 자립할 때까지 소년(인간)의 도움을 받겠다고 한 것에 대
해 이더귀는 동족의 명예를 더럽힌 이중인격자라고 매도하였다 난추리가 현실주의적인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면 이더귀는 명분론자 혹은 이상주의자의 탁의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속의 비의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는 한, 단편 <심판>은 정종명의 자랑거리가 아니할 수
없다
양심이니 진실이니 하는 개념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은 앞서 논한 작품 외에 <오월에서 사월까
지>, <사설문담>, <탈>을 통해서도 드로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사설문담>은 내레이터의 설정방
법이 독특하다는 느낌을 안겨 주며 <탈>의 경우는 소재가 이채롭다
<오월에서 사월까지>는 41,24^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우정문 교수가 심한 피해심리와 암
울감에 휩싸인 나머지 정신이상을 일으킨다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 교수는 자기 집을 무단
으로 침입란 두 사내로부터 아내가 능욕당하는 것을 보고 반항하다가 매를 맞는다 이 소설의 처
음과 중간부분만 보면 이 충격적인 장면은 작중의 실제사건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끝
부분에 가면 이 충격적인 사건은 우 교수의 정신병 증세가 낳은 환상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반전의 묘미를 맛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중간중간 우 교수의 발병원인을 암시한
대목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우 교수는 자신이 41,24^세대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지나칠
정도로 뜨겁게 의식한 나머지 '아무 소신도 없이 사는 자신'을 늘 부끄럽게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 교수는 그의 아내가,
떳떳하게 소신껏 산다는 건 물론 어려운 일일거예요 하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예요
자기 양심에 따라 자신한테 정직하게 사는 것이 곧 남한테도 떳떳하고 소신껏 사는 길이 아닐까
요(p139)
라고 하면서 소승적 양심도 양심임을 역설한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양심과 역
할을 대승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태도를 떨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 나머지 우 교수는 정
신병원의 신세를 지게 된다 <오월에서 사월까지>는 양심과 삶,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다 마침내 파국에 이른 한 지식인의 경우를 극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5
12. 역사적 사실과 진실의 틈(이균영 론)
중편의 골격으로 짜여진 이균영의 <그떄 그자리 사람들>은 회양군의 향토지를 편찬하는 과정에
서 역사의 분야를 담당한 한 전직교사가 1907년에 그 곳 동주리산을 무대로 펼쳐졌던 의병운동과
그 주동자들에 대한 진상을 알아내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는 데 초점을 맟춘 것이다
회양군 이웃의 시군에서 오랫동안 사회과 교사로 재직한 바 있고 관선 교육위원을 지내기도 했
던 박종진은 회양지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으면서, 우영문이 대장으로 있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그렇게 세전되어 온 1907년 의병사건의 '진실'에 대해 우연한 기회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박종진은 여러 사람들이 가슴속에 저마다 묻혀 있었던 비화를 수집한
끝에 우영문과 그의 후손들이 수십 년 동안 써 왔던 가면을 벗길 채비를 갖추게 된다 이 작품은
박종진이 우영문과 그 손자 우동선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가면을 벗겨 내는 작업을 결행하는 단계
까지는 제시하지 않은 채 결말을 맺고 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누군가의, 어느 것인가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거센
파도와 같은 제국주의에 거칠게 몸 부딪치고 피 흘리며 나서야 했던 그때가 아닌가! 무수한 일들
속에서 나는 결국 무엇인가를 취하고 무엇인가를 버려야 하며 그 가치의 높낮이를 정해야만 한
다> 갠 하늘에 별이 보였다
정직하고도 객관적인 역사서술에의 각오를 다지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는 <그때 그자리 사람
들>을 덮으면서 혹자는 시쳇말로 '화끈한' 맛이 없다고 아쉬워할 수도 있고 혹자는 이와는 대조
적으로 감상에의 유혹을 잘 뿌리치고 개연성을 높인 구성방법이라고 긍정적 반응을 보일 수도 있
다 그러나 이균영이 현재 작가로서의 입상 못지않게 국사학자로서의 참된 자세의 정립에도 부심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이고 보면, 작가 혹은 이 작품에서 소설양식의 통상적 효능을 기
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때 그자리 사람들>의 끝부분인 위의 인용문은 작중인물 박종진의 양심선언이기를 넘어서서
작가와 국사학자 즉, 과거의 진상을 파헤쳐 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명감을 공통점으로 갖는 작
가와 국사학자의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균영 자신의 새로운 각오를 표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선적으로 하나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때 그자리 사람들>이 이균영 자
신이 <불붙는 난간>과 같은 이전의 소설에서 드러내기도 했던 구성방법상의 허점을 말끔히 해소
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균영의 과거 작품들 중 일부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독자들이 '큰 흐름'이라고 생각할 법한 것에서 옆으로 빠져 버린 흔적을 분명하게 남겼다 <그때
그자리 사람들>은 박종진을 등장시키기 전까지의 부분을 회양지의 편찬계획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채워 놓았는데, 바로 이 부분은 이 작품의 서술의도의 방향에 비추어 볼 때 '불
필요하다'는 느낌을 살 만큼 너무 길게 또 자세하게 처리되었다 물론, 회양면에 엄청난 규모의
임해공업단지조성공사가 시작됨으로써 여러 차원에서 재래의 삶의 분위기가 파괴되어 간다는 내
용을 골자로 한 이 작품의 앞부분은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촉발시킨 1907년경의 사건과 그 진상
을 다룬 뒷부분과 '변화'라는 이름으로 한 묶음될 수 있기는 하다 임해공업단지조성설로 근자의
회양만에 배금주의가 판치고 세속적인 욕망의 광란이 빚어진 '변화'가 있었다면, 1907년경에는
일제의 침탈로 말미암아 당시 조선인들의 평화로운 삶의 분위기가 근본적인 동요를 보인 '변화'
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유추가 결코 억지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때 그자리 사람들>에서 이균
영이 좀더 효과가 살아날 수 있는 구성방법을 끝까지 치밀하게 구사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가
시지 않는다
이 작품은 1907년 회양지방의 의병봉기사건 주동자들의 후손들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저마다 자기네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해석하고 합리화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참된 의미의
역사해석과 기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웅변한 결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심과 욕망
사이의 팽팽한 맞섬의 관계, 명분과 실리의 야합가능성, 세속적인 힘에 의한 진실의 굴절 내지
조작의 현실 등에 대한 일깨움의 기능도 행사할 수 있었다
이균영은 외양으로 볼 때 규모도 작고 의미도 별반 크지 않은 듯한 한 마을의 에피소드를 매개
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환기를 꾀할 수 있었고 대답이 금방 나올 듯싶
지 않은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끔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회양군에 관한 역사서술을
책임 맡은 박종진이란 인물이 올바르고 정확한 역사기록을 위해 고심하고 애쓰는 것은 정직하게
살려는 몸짓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박종진은 세 가지 경우의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끝에 가서 정직한 삶의 자
세로 이어지는 올바른 역사서술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취하고 무엇인가를 버려야 하고 가치의
높낮이를 정해야 한다>는 다짐에 다다르고 있을 뿐, 어느 특정인물에게로 마음을 온통 다 주어
버리는 식의 행위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우 씨 집안에서 만든 문집 '운강집초'와 일인이 저술한 '조선폭도토벌사' 등에 의해 의병
대장으로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것으로 새겨져 있고 신화적 존재로 칭송되어 왔으며 그
에 따라 정부로부터 독립투사로 추서된 우영문 그 허상을 목격하게 된다 우영문은 어머니의 목숨
때문에 투항했던 것이며 그 후 일본으로부터 오히려 작위를 받는 변절의 길을 걷던 옛 부하들로
부터 피살당하고 만 것이다 박종진이 더욱 개탄했던 것은 우영문의 손자 우동선이 그의 조부에
대한 왜곡된 우상화의 저변에 깔린 진실을 은폐시키려 한 채 회양역사 편찬이나 회양인물지 제작
에 관계하는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한 사실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우동선에게서 돈을 긁어 내려면
우영문에 관한 일을 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만 하면 된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우동선은
많은 재산과 자기 집안의 큰 권세를 유지하고 늘리려는 의도에서 의병대장이었던 조부 우영문에
얽힌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노출되는 것을 적극 막아 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바로, 박종진은 오늘의 권세나 금력으로써 과거 사실을 왜곡시켜 왔던 우동선과 같은 위선적이
며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삶의 태도가 우리 사회에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또 있을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박종진은 우영문의 집안에서 3대째 종노릇을 해 왔으며 우영문과는 달리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면서 의병들을 지휘하다가 국외로 탈출하여 정확한 진상을 알 길 없는 행동을 벌렸던 김적
산의 경우와 또 그의 행적을 최대로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증손자 김진구의 경우만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진구는 박종진에게 우영문이 투항과 변절과 배신 등으로 일관했음을 처음으로 알려 준 인물
이다 김진구는 증조부인 김적산이 1907년 회양군 의병봉기의 참된 지도자임을 강변하는 가운데
증조부가 상놈출신으로 선비출신보다는 '사사로운 일'을 더 잘 뛰어넘었음을, 또 더욱 적극적으
로 일제에 맞서 싸웠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을 내세우는 김진구에게 박종진 자신
이 안따까워하고 있는 것처럼 가시적이며 결정적인 자료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김진구는 어려
서부터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회양봉기사건의 스토리를 자신의 증조부를 중심으로 해
서 엮고 있었던 것이다 김진구는 박종진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우리가 지나간 일을 얼마만큼 사실대로 알 수 있을까 책에 나오는 큰일의 뒤에는 얼마나 많은
작은 일들이 숨겨져 있을까 큰 이름뒤에는 얼마나 작은 일들이 숨겨져 있을까 큰 이름뒤에는 얼
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름없이 죽어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우리가 책에서 읽는 역사가 도시 허
망하게조차 느껴집니다(중략) 나라와 겨레를 판 자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민족해방투쟁으로 투사
들을 타도하는 선봉에 섰던 자들이 오히려 감투를 쓰거나 버젓이 상을 받고 역사책에 실리고 있
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합니다
무명의 투사, 참된 지사 등의 존재에게 사가의 눈길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담겨 있는
이 부분은 역사적 판단이나 역사서술을 행사하는 데 있어 흔히 가장 기본적인 태도로 꼽혀지곤
하는 문서숭배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효과를 갖기도 한다 옛 역사를 보면 문서나 기록을 작성
하고 남길 수 있는 권한은 아무한테나 주어졌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김진구는 <그러나 꼭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면 역사에 기록된 일보다 기록되지 않은 일
이 수천 수만 배 더 많다는 사실을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라고 증조부가 격하되고 왜곡된 점
에 대한 억울함을 강하게 토로하고 있으면서도 증조부의 부하가 김각수의 조부 김도식의 재산을
뺴앗고 그 집안의 여자를 음행한 사실에 대해서는 '큰 일 속의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변
명하기에 급급해 한다 김각수의 아버지는 국외에 나가 있는 김적산을 찾기 위해서 15년 동안이
나 여기저기를 방황하다가 종적이 묘연해졌으며 집안의 재산도 거의 탕진되고 만 상태에 이르렀
던 것이다
우영문, 김적산, 김도식 등 세 사람의 관계는 공격, 복수심, 한 등의 개념으로 한자리에 묶어
볼 만하다
우영문은 자신의 재산과 지위의 유지를 위해 김적산을 사경으로 몰아넣었으며 다시 김적산은
옛날에 빼앗긴 재산 때문에 김도식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었다 김도식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김적산을 찾아 오랜 세월을 헤매었으나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 작품에서 이들 세 인물 사이의 공방 관계, 이들 후손들 사이의 알력과 긴장감은 박종진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형이상적 차원의 대립상에 비해서는 의미가 약한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
리 작가들이 '있는 자'와 '없는 자'사이의 역학관계에 큰 관심을 갖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고
보면 결코 눈길을 떼어서는 안될 대목이다(<문학과 비평> 1987 여름호)25
13. 민중 민족 이념 그리고 소설(조정래 론)
1. <태백산맥>의 화두
1983년 9월부터 1989년 9월까지 만 6년간에 걸쳐 장장 만육천이백 매의 길이로 씌어져 10권으
로 간행된 <태백산맥> 1986년에서 1989년까지 매년 2권 내지 3권이 묶어져 나올 때 마다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평자들의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끌어 모은 대하소설 <태백산맥> 그리하여
625 전후의 현대사에 대한 총체적 파악과 진상의 복원에 성공한 작품으로, 분단극복과
민족문학의 한 값진 본보기로, 해방 이후 40여 년 동안의 이념상의 금압과 사안을 민족통일 지향
이라는 이름아래 일거에 깨 버린 소설로 어느 정도 평가가 굳어버리게 된 <태백산맥>
이 중 마지막 세번째 설명항은 실제로는 <태백산맥>이 채 완결도 되기전에 일종의 중계방송이
나 예단의 형태로 나온 것을 추상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하소설인만큼 창작기간과 간행
기간이 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태백산맥>은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한껏 기대감
이 어린 평가가 쏟아져 나온 점에서도 특이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공개적으로 받는 평가는 그것이 제아무리 호평이고 찬사라 할지라도 작가에게는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득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독자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나 비상한 관심
을 '지나치게'의식하다 보면 오히려 경직되기도 쉬우며 당초의 일관성 있는 계획에 금이 가기도
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일반론리긴 하지만 <태백산맥>이 이러한 일반론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
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사건에서 1953년 7월 서남지구 빨치산 토벌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31장으로 짜여진 제1부 '한의 모닥불'
(창작집 1__3권)은 여순반란사건 전후의 시기를, 24장으로 짜여진 제2부 '민중의 불꽃'(4__5권)
은 여순반란사건의 이후의 10개월 동안을, 27장으로 구성된 제3부 '분단과 전쟁'(6__7권)은 1949
년 10월부터 1950년 12월까지의 시기를, 38장으로 구성된 제4부는 '전쟁과 분단'(8__10권)은
1950년 12월부터 1953년 7월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취하였다 이때의 시간적 배경은 단순히 병
풍처럼 펼쳐져 있는 '물리적'시간이 아닌, 개인과 집단의 삶에 본질적으로 관여하는 '역사적'시
간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각 부의 앞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참고하면 조정래는 각각 조금씩은 편차가 있는 중심개
념을 염두에 두고 1부에서 4부까지를 엮어 낸 것으로 짐작된다 가령, <민족분단의 삶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민중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고자 하는 베짜기 작업>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1부는 '민중'이란 존재와 그 내면을 부각시키는 데다 작가정신의 초점을 맟추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제2부에 가서는 민중사관에의 신념으로 발전되고 있다 제3부 '분단과 전쟁'은 민족주의
를 부정하거나 비웃는 지식인들을 비판한 '작가의 말'의 한 대목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민
족주의로서의 재무장'을 고취시켜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정래에게 있어서 이렇듯 민중사관
과 민족주의적 각성을 흔히 '현대사의 실종기'라 일컬어지는 1948년에서 1953년까지의
625 전후사를 올바로 또 진실되게 보고 해석하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분단상황의 극
복과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동력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1, 2부가 '민중'을 중심개념으
로 삼았다면, 제3부는 '민족' 또는 '민족주의'를 또 제4부는 '분단극복'과 '통일'을 화두로 삼은
것이라 하겠다 대하소설은 온갖 물건이 그것도 제멋대로 놓일 수 있는 창고와 같은 것이라는 상
식적인 비유 앞에 서면, 작품이 진행되면서 중심개념이 조금씩 편차를 보이게 되는 현상은 '뒤엉
킴'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나감'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민중 민족 분단
극복 통일 등의 개념이 논리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보편성의 획득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
니지만 기본적으로 연결성도 강하고 상관력도 높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조정래 자신이 '민족의
허리 잇기', '통일민족사의 작은 디딤돌'을 소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은연중에 자임하고 있는 것
처럼, <태백산맥>은 과거를 바르고 진실되게 보려는 바탕 위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통일에의
뜨거운 신망으로써 명찰하고자 한 의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 반항적 소설과 이념소설의 골격
<태백산맥>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선대가 물려준 유산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
에선 또 분단고착의 논리를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용인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선 아직은
'반항적 소설'(resisting novel)일 수 밖에 없다 감정적 차원에서든 논리적 차원에서든 레드 콤
플렉스에서 실제로 헤어나지 못한 한국인들이 아직도 다수가 엄존하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빨
치산문학'이란 용어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거나 거부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은 형편이
고 보면, <태백산맥>은 레너드 데이비스(Lennard Davis)가 <이데올로기와 소설>이란 부제가 붙은
저서 <반항적 소설들>에서 상징한 '반항적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본적
으로 <태백산맥>은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사건에서 막을 올려 1953년 7월 휴전조인에서 막을내
리는 가운데 지리산 중심의 빨치산의 시각이나 입장을 최대한 살리려 하면서 이들 존재들에 대한
왜곡과 편견을 말끔하게 벗겨 버리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좌우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 동안
'적'의 이름으로만 불려졌던 빨치산의 존재에게 민족주의나 민중주의의 시각을 들이대어 합당한
값이나 정당한 자리를 찾아 주자는 창작의도가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이끌어 갔다는 것이다 그
리하여 이 작품은 625전후의 빨치산을 향해 단순히 또 습관적으로 '적'이라고 부르는
대신 '한 많은 농민', '자각하고 행동하는 민중'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 듯 당시의 빨치산의 존
재에게 그에 어울리는 값이나 자리를 찾아 주려는 작업은 감상에 호소하거나 공식문서에 의한 논
리의 틀에 의거해서 이루어질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로 조정래는 그 동안 덕지덕지 달라
붙은 편견과 도식성의 때를 벗겨 내고 근거도 확실하고 진취성도 분명한 재해석 작업에 닿기 위
해 수많은 기록의 검토, 증언채취, 여러 차례의 현지답사 등의 번거롭고 고달프기 짝이 없는 일
을 해낸 것이다
<태백산맥>을 써 내려가면서 주로 이론가형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 명시하고자 했으면서 또 작
가 자신이 더욱더 굳은 신념으로 다질 수 있었던 생각, 예컨대 해방 직후의 역사와 그 속의 개인
적, 집단적 삶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시각으로만 재단할 경우 실체와 진실을 놓치기 쉽다든가 이
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가 하는 주장은 조정래에게는 그것 자체가 이데올로기
일 수 있다 한마디로,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통해서 좌우이념에 대한 객관적 시각, 민족을 이
데올로기 위에, 또 민중을 '힘 있는 자'나 '가진 자'위에 두어야 한다는 당위론 등을 시험해 보
았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본의미를 레이먼드 월리암스(Raymond Williams)가 <마르크스시즘
과 문학>에서 설명한 것처럼 '특정집단이나 계급의 십앙체계', '과학적 지식에 대비되는 비현실
적인 미신의 체계'쯤으로 이해할 경우, <태백산맥>을 온통 떠받치고 있는 조정래의 몇 가지 새롭
거나 진취적인 관념과 신념은 이데올로기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태백산맥>
은 <소설은 그냥 삶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구성된 것으로서의 삶
을 그리는 것>이라는 류의 새로운 소설관의 한 실례가 되엄ㅆ다고 볼 수 있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든, 분단현실
의 빠른 극복을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모색과 제시에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이든 <태백산맥>을
우리 소설사에서 그 진정한 모범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이데올로기 소설의 반열에 포함시키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태백산맥>에선 좌익사상과 이에다 이념적 거점을 둔 여순반란사건과 같은 일이 빚어지게 된
배경의 한가닥을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으며 좌익이념분자들이나 행동대원들의 저마다 다 틀리는
이유와 사정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이 기득권 유지를 위한 '가진 자'나
'힘센 자'의 폭력행사를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뒤바뀌거나 무조건적인 증오감이나 적대감으로 쉽
게 변질되어 버리곤 하는 과정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가령, 벌교 지방의 정신적 지주로 '재림 예수'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서민영은 벌교 보성지
구 계엄사령관인 심재모 중위에게 여순반란사건은 단순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만은 아닌 일종의
'소작쟁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임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닫게 만든다
내가 크게 우려하는 바는 지주계급들로 이루어진 현정권이 농민이나 반대세력권을 일본놈들 식
으로 무작정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것이야 그 방법은 모든 계층, 모든 분야의 친일파나 민족 반역
자들한테까지 퍼져 나가 공산주의를 자기네들의 방어를 위한 적극적인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중략) 당장 농지개혁을 단행해 논밭을 무상으로 분배해 봐 벌교지역을 예로 들더
라도 이번에 입산한 논민들의 구십 퍼센트는 아마 하산하게 될 거야 자기네들의 절대목적이 성
취됐는데 공산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야 현정부는 그 간단명료한 원인해결은 하려
들지 않고 공산주의만 척결하려고 하고 있어(제3권, P161)
일제 때에 동경제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41년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징역을 살았던 적이 있
고, 해방이 되자 자기 소유의 농토를 공동농장화하면서 논촌계몽과 야학운동에 주력하였고, 순천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김범우, 염상진, 손승호, 안창민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바 있
는 기독교 사회주의자 서민영 그는 좌우대립의 단초를 농민들의 토지개혁요구가 전비를 뉘우칠
줄 모른 채 자기 방어에 혈안이 된 지주세력의 매카시즘적 행태에 의해 꺾여 버리고 만 데서 잡
고 있다 그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서의 토지개혁이 당장이라도 이루어지기만 하면 공
산주의의 문제는 웬만큼 다 해결된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서의
토지분배론은 서민영에게 있어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의 거의 유일한 해소방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론의 대전제가 되는 일이었다 서민영은 여순반란사건 직후 계엄사령관 심재모와
남로당 보성군책 염상진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하고 난 후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가겠다고 인사차
온 김범우에게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추상화되는 토지개혁 효과론을 강의하게 된다
사상대립 완화 농지개혁 ^25,25,135^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법 채택 ^25,25,135^ 지주계층 와
해 ^25,25,135^ 사회경제의 새 구조 ^25,25,135^ 민권회복, 인권회복 ^25,25,135^ 민주주의 탄생
^25,25,135^ 민족통일(제5권, p18)
결국 서민영은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을 외래사조 유입의 결과로만 해석하거나 소수 사회주의자
들의 선전, 선동의 소산으로만 풀이하는 태도를 다 물리쳐 버린 셈이 된다 일찍이 제1부에서 조
정래는 사회주의 이론가이면서 조종자인 염상진과 무지한 행동대원인 하대치와의 관계를 '화공과
화선지'로 비유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서민영은 사회주의 이념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데
있어 '화선지'에게 훨씬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농지개혁 요구의 좌절에서 여순반란사건의 제일차적 동인을 잡고 있는 서민영의 새 각은 '인
간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좌익에서 전향했을 때의 손승호가 이데올로기나 사상은 유식한 자들의
전유물일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데올로기는 <고통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
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배우지는 못했을망정 기본생활조건의 모순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
이 자신들이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고, 그 잘못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슨 방법으로든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마음 먹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사상입니다(제5권, p82)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고통스럽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한걸음 더 나
아가 그 잘못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고쳐야 한다고 마음 먹은 것은 '자기의 처지에 대한 각성
과 혁명의식에의 개안'이라고 고쳐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손승호는 민중의 자각이야말로 이데올
로기가 피어날 수 있는 최상의 밭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어느덧 그는 이데올로기는 소수 이념분
자나 사상가에 의해 민중의 삶으로 내려와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는 통념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대신 그는 이데올로기는 억압, 고통, 가난, 한 등으로 얼룩진 민중의 삶에서 자생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태백산맥>은 이렇듯 한국사회사상사와 동시대이념대립상에 대해 종합적인 지식과 인식
을 갖고 있는 서민영, 손승호 그리고 김범우 등의 머리와 입을 통해 이데올로기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펼쳐 놓고 있긴 하면서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명, 무명의 많은 빨치산들의 '성
분'은 결코 단색으로 칠하고 있지 않는다 하대치처럼 종의 자식, 소작인의 아들로서의 피맺힌
한이 입산의 직접동기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하섭처럼 파렴치한 부잣집 자식으로서의 죄의
식이 기폭제가 되어 사회주의 이론에 눈을 돌리게 된 경우도 있고, 이지숙이나 강동식의 처 외서
댁처럼 오빠나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투쟁욕으로 발전되어 간 사례도 있다 또 무당의 딸
소화처럼 남자에 대한 사랑과 이데올로기 선택을 동일시한 경우도 있다
하대치, 강동식, 김동기, 오판돌, 천점바구, 솥뚜껑 등이 한 또는 복수심을감정의 상태로 이끌
고 간 것이라면 이에 반해 염상진, 안창민 등은 한이나 지주들에 대한 증오심을 혁명론의 골자로
한 사회주의 이론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태백산맥>이 빨치산이 된 인물을 그리고 그 입산동
기를 밝히는 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새로운 동기를 분명하게 추가시키고 있는 점이다 앞서
말한 강동식의 처 외서댁은 근원을 따지자면 염상구가 산으로 올려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염상진
의 아우로 형에 대한 열등감이 원한으로 발전하였고, 칼 쓰는 데 능해 벌교 깡패들을 장악하여
청년단 단장으로 행세하고 있으면서 특히 빨치산의 가족들을 '좌익 척결'이라는 이름아래 온갖
방법으로 괴롭혀 온 염상구 그는 외서댁을 능욕해 임신시켰고 그 소식을 듣고 복수하러 산에서
내려온 강동식을 쏘아 죽였다 지주세력과 '힘있는 자'를 무조건 감싸고 도는 것과 나라에 충성
하는 것을 혼동한 점에서 또 자기의 입장이나 주장이 틀린 사람들을 가혹하게 몰아치는 점에서
염상구는 남인태 서장, 임만수 토벌대장, 백남식 중위 등과 한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인물들의 고뇌가 뒤따르지 않는 행동주의적 경향, 이 세상 사람들을 우리 편 아니면 적으로만 파
악하는 단순시각은 힘없고 겁많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산으로 올려 보내는 결과를 빚기도 했던
것이다 염상구와 유사한 행태와 사고를 보이는 작중인물들은 역설적이게도 무고한 양민을 빨치
산으로 만들어 버린 매개적 존재가 되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손승호가 다시 좌익으로 돌아가 신빨치가 된 것이나 김범우가 결국 인민군이
되어 포로수용소에 들어간 것은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인물은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스승 서민영과 함께 여순반란사건, 토벌대로부터의 압력과
가해 등의 시련 속에서도 튼튼하게 중도파를 지켰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손승호는 좌익에서 전
향하여 교직에 전념하고 독서와 창작으로 소일함으로써 반관자의 길을 걸었지만 김범우는 민족주
의를 내세우는 가운데 때로는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사이에서 갈등 조정자(conflict regulator)의
역할까지도 스스로 떠맡았던 존재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서민영과 마찬가지로 좌익측의 극단적
사고와 폭력성향을 거부했으며 동시에 사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된 지주계층과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친일분자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겉으로는 중도주의자라는 동
질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나지만 속으로는 김범우가 '민족'을 내세우면서 좌우세력의 화해까지 도
모하는 현실참여론의 면모를 보이는 데 비해 손승호는 '인간'을 내세우면서 좌든 우든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도피주의자로서의 방식을 내보이는 이질성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손승호를
다시 좌익으로 돌아가게 한 힘은 무엇이며 김범우는 과연 어떤 계기로 인민군의 대열에 뛰어들게
된 것인가 손승호는 국민보도연맹 벌교지부 결성 때 서울로 도망쳐 와서 이학송 기자의 알선으
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던중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고 만다 625가 터지자 감
옥에서 나온 그는 이제껏 견지해 왔던 '탈사상, 순수인간주의'의 태도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마
침내 공산당에 몸을 던졌으나 인민군이 패퇴함에 따라 그 길로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 것
이다 그리고 그는 빨치산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가서 앞날을 길게 내다보는 투쟁을 결심을 하
고 산에서 내려오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만다 결국 손승호는 전향자의 몸으로 '남로당
프락치혐의'로 체포되어 옥에 갇힌 것이 좌익 재가담과 입산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승호에 비한다면 김범우는 곡절과 반전이 심한 편이다 김범우는 인민군에게 잡혀 도당
문화선전부에서 일하던중 미군의 행패를 목격하고 그를 말리다가 미군부대를 탈출하여 인민군부
대로 가게 된다 결국 김범우가 인민군이 된 동기는 미군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이에서 빚어진
탈출행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1부와 2부 그리고 3부 중간까지에서도 볼 수 있었던 김범우의 진중하고 사려 깊은 탣ㅗ
와 처신, 포용성과 예리함을 함께 갖춘 사회사상가로서의 면모 등을 기억에서 떨쳐 버릴 수 없는
한, 3부 후반과 4부에서의 김범우의 사고와 행동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가볍게 또 작위적으로 처
리되었다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게 된다 <태백산맥>의 주요 인물로 기대받고 있는 존재답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3부 후반과 4부에서의 김범우는 정신적 무게가 급작스럽게 가벼워진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조정래가 전쟁의 인간파괴의 성격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
해서 김범우를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과 사고를 하는 것으로 그려 낸 것일 수도 있다 김범
우 같은 인물은 좌우이념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을 떠나 자칫 독자들로부터 기본적인 신뢰를 받
지 못할 수도 있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는 조정래의 관점을 제공하는 인물(a viewpoint
character)이 되고 있는 만큼 이 문제는 그리 작은 것이 아니다
본격적인 이데올로기 소설로서의 골격을 지닌 <태백산맥>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을 어떻게 짚어
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홍성원의 <남과
북>, 이병주의 <지리산>, 이문열의 <영웅시대> 등이 좋은 예가 되고 있는 것처럼 한국전쟁의 원
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또 한국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데서 작가로서의 승부를 걸
어 왔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고 난 직후, 김범우와 손승호 그리고 신문기자 이학송은 625의 성격에
대해 장황하게 의견을나누게 된다 이 자리에서 김범우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이번 전쟁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민족통일을 달성하려는 세력과 친일 민족반역으로도 부족해
서 다시 나라를 팔아 먹고 있는 신식민주의들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네(제6권 p285)
이에 대해 손승호는 <너무 민족 내부문제로 국한시켜 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한국전
쟁의 원인과 성격을 밝히는 문제에 있어서는 <미소의 책임과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중에 김범우는 포로수용소에서 당 정치위원회로부터 부하된 임무를 가지고 온 정하
섭을 접선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김범우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설명
하고 있다
이 전쟁이 말이야,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민족세력과 외세에 얽힌 반민족 세력과의
싸움인데 말이지,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기네 자유민주주의와 세계공산주의와의 싸움이 아닌가(중
략) 그들이 이 전쟁에서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겠나? 그건, 처음부터 작정된 것으로 자기네 자
유민주주의 체제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네(제10권
p165__166)
한국전쟁의 성격을 개전 직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민족통일달성 시도세력과 친일, 친미
의 신식민주의자들 사이에 일반화된 방약무인의 태도와 그에 따른 반감을 체험하고 나서는 한국
전쟁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미국의 입장을 추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625 직전까지는 '민족'을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의 우위에 두면서 친일
분자와 지주세력 정도를 부정적인 눈길로 보았던 중도파 김범우는 전쟁을 치르면서 좌익으로 돌
아서게 되었으며 미국에 대한 혐오감을 심화시키게 된 것이다 김범우가 품고 있는 혐오감의 밑
바닥에는 미국은 정말로 힘이 센 나라라는 체험적 인식이 깔려 있다
기본적으로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 되도록 '다각도에서' 접
근한 끝에 문자 그대로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려 한 것인만큼, 김범우의 주장만을 따오는 것
으로는 이렇듯 중요한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큼의 답을 들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김범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또 작품 끝부분에서 김범우가 다리에 나 탄흔과 팔뚝
에 새겨진 문신으로써 한국전쟁의 성격을 상징하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을 볼 때, 김범우의 주장
이 <태 ㄱ산맥>에서 가장 큰 울림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전쟁이 터진
직후에 이학송 기자가 특히 손승호를 향해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대립전쟁의 성격으로 보기 어
렵다>는 요지로 한국전쟁의 원인을 설명한 것은 앞서 본 김범우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혁명이나 사회개혁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었소 그것은 계급적으로 지주제도를 척결
하는 것이었고 민족적으로 친일 반민족 세력들을 처단하는 것 아니었겠소 그런 역사적 욕구 앞
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건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이 없소(중략) 그런데 그 욕구가 강대국 점령하에
서 중단되고 좌절된 것이 바로 남쪽 땅이오 그 욕구는 어쩔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숨을 죽인 것이
지 소멸되거나 해소된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설득력을 잃고 불신의 대상이 된 것에 반해
사회주의는 상대적으로빛을 발하게 되었소(중략) 한쪽은 무조건 공산주의를 없애자는 통일이고
다른 쪽은 사회혁명을 이루자는 통일인데, 어느 쪽이나 그 방법으로는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었소(제6권 p287__288)
이학송 기자는 전쟁이 일어날 만한 분위기가 미리부터 형성이 돼 있었음을 강조하는 데로 기울
고 있다 말하자면 이학송은 전쟁의 근인보다는 원인 쪽에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창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서민영은 전명환 원장을 만나 전쟁의 성격과 양상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여기서 서민영은 한국전의 양상을 이념이 작용한 민족전쟁이면서 외
국군대가 개입한 국제전으로, 또 그런 가운데서도 편갈이가 심했던 전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전 원장님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 그게 이념
적 민족전쟁이기 때문입니다(중략) 그런데 이번 전쟁을 계기로 해서 그런 사람들도 많이 양쪽으
로 갈라지게 되고, 전쟁 전에 있었던 중도파란 이제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어느 편도 안 들었다고 해서 죄가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얼마나 바른 생각을 가지
고 사느냐가 문제지요(제9권 p160__161)
손승호가 김범우가 전쟁을 겪으면서 좌익 쪽으로 가게 된 사실은 전쟁으로 인해 표면상 중도파
가 소멸했다는 서민영의 통찰을 잘 뒷받침해 주는 것이 된다
이상에서 지적한 김범우, 이학송, 서민영 등의 전쟁원인과 전쟁양상에 대한 견해를 다 합쳐 놓
은 곳, 바로 그 곳에서 <태백산맥>은 분단현실과 분단극복의지에 가장 무겁게 걸려 있는 문제,
즉 '625의 원인과 성격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운 답'을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작가 조정래는 김범우, 이학송, 서민영 등의 입과 머리를 통해 한국전쟁의 원인을 직강
하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그들 인물들의 '몸'에 대해서는 잠시 소홀한 듯한 느낌이다 이들 인물
들을 당시의 상황이나 사실에서 한걸음 떨어지게 해 놓은 채 혜안을 지닌 '사태분석가'나 '현대
사가'로 부각시킨 점은 아무리 보아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들의 '몸'은 1950년대에 있되 '머리
'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수준에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이런 의문은 때로
지루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것처럼 전쟁도 거의 모든 사람들을 오직 살아
야겠다는 본능으로 내몰면서 타인을 적 아니면 동지로 보게끔 만드는 것이 아닌가
결국 <태백산맥>은 정치소설, 역사소설, 전쟁소설, 영웅소설, 빨치산소설 등으로 불리는 온갖
산들이 모여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소설이란 이름의 산맥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문학과 사
회> 1990 봄호)
14. 상대주의에서 포용성으로(현길언 론)
작품의 질, 양면을 볼 때, 현길언을 1980년대의 문제작가 또는 1990년대를 주도할 작가의 반열
에 포함시키는 데 망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는 1980년대에 등단하여 이미 <용마의
꿈>(1984), <우리들의 스승님>(1985), <불임시대>(1987), <닳아지는 세월>(1987), <우리 시대의
열전>(1988) 등의 창작집을 속속 내놓은 바 있고 1980년대의 마지막 겨울인 지난해 세모에 소설
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를 묶어 내놓았다
1980년대는 현길언의 나이 40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1980년대를 '1980년대 작가'와 '40대
의 작가'의 두 가지 얼굴로 살아온 셈이다 1980년대의 유망한 신진작가들 대다수가 작중인물, 사
건, 주제의식, 톤 등의 면에서 편향성이나 큰 집중도를 드러내었던 점을 염두에 두면, 현길언에
게 있어 '1980년대의 작가'로서의 보편적 입상과 '40대'의 일반적 속성은 화음보다는 마찰음을
더 자주 빚어 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광주문제, 민주화, 통일운동, 노사대립, 이데올로기 개방
등으로 엮어진 격변의 시대에 마주 서서 1980년대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떠맡았던 문제의식의 내
용과 방향은 40대의 나이가 일반적으러 갖기 마련인 균형, 안정에의 지향성, 점진주의적 성향 등
과 어울리기 어려웠거나 상충되기 쉬웠다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소설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까지 그의 일련의 창작집들은 1980년대 신진작가들이 가졌고 또 가졌어야 했을 시대적
소명감과 40대로서의 평형적 시각과 객관적 인식의 성향을 고루 다 살려내려 한 고민과 노력을
거짓 없이 입증해 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울리기 힘든 요인들을 화음의 상태로 이끌려는 값진
노력이 없었다면 독자적인 시각과 어조가 분명한 현길언의 오늘의 작가적 위치는 확보되기 어려
웠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고민과 노력을 기꺼이 해낸 듯 싶다 현길언은 문자 그대로 끊
임없이 '소설쓰기'를 꾀함으로써 웬만한 작가들보다 두세 배 빠른 속도로 문학적 성과를 쌓아 올
린 바꾸어 말하면 축지법을 쓴 작가가 될 수 있었다
1980년대는 작가들이 현실 속에서 소재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소재가 작가를 끌어당기고 선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한 작가로서는 현실로부터 중압감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고 또
시라든가 폭로물과 같은 여타의 표현양식들보다 '힘'이 있는 소설을 쓰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
다 현길언은 이렇듯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작가다운 작가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같은 시대의 젊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진실을 밝혀 내고 캐내는 데다 온통 작가정신을
불태우긴 했지만, 자기 나이와 기질에 걸맞는 독자적인 시각과 소설화 방법을 굳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작가는 '자기의 결대로 보고, 느끼고, 말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교훈을 몸
으로 들려준 셈이 된다
현길언은 결코 흥분파는 아니면서도 추악한 삶이나 교활한 존재의 실체를 드러내어 고발할 줄
알았다 또 그는 이데올로기의 집합의지니 하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개념이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폭력'의 형태로 순진한 한 개인을 파괴시키려 하는 것에 대해 눈을
부릅뜰 줄도 알았다 그렇긴 하나, 그는 한 개인이든 시대전체든 또 과거의 사실이든 눈앞의 현
상이든 그것을 작중의 현실로 만들어 가는 첫 단계에서는 '일단 한걸음 물러서서' 보는 방법을
취했다 말하자면, 대상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소재나 대상과 의도적으로 거리
를 둘 경우, 작가는 소외감을 느끼기 쉬우나 반면에 소재나 대상을 실체에 가깝게 볼 수도 있게
된다 현길언 자신은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의 '작가 후기'에서 소외감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의 부단한 '소설쓰기'의 참된 의도가 대상으로부터 진실이나 실체를 건져 올리려는 데
있는 것임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다
진정한 사제가 없는 우리 시대에, 마법사들만이 사제인 양 굿판을 빌려 우리들을 유혹한다 모
두들 그판에 몰려가서 그들의 주술과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취하고 흥청거리려 한다 그 판에 끼
지 않는 고집을 유지하는 외로움을 감당하기에 힘이 든다 그래도 소설쓰기를 통하여 그것을 이
겨 보려고 버둥거려 본다
이 대목을 보면 현길언은 자신이 살아온 1980년대의 한국사회를 갈등과 광기가 얼룩진 판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기를 보다 긍정적이고 큰 사회에 도달하기 위한 전환기나 변혁기로
인식하고 있는 작가들에 비한다면 그는 '바라보기'를 고집하는 작가, '냉정한' 작가로 비치기 쉽
다 앞서 말한 '한걸음 물러서서 보기'와 얼핏 종립주의자의 인상을 안겨 주는 '바라보기' 그리
고 '냉정성'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 이전까지
그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자주 내보였고 견지했던 서술방법의 한 단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밝은 것에서 어두운 것을, 풍요한 것에서 빈곤한 것을 찾아내어 보여줄 줄 알았고 성공적인
삶과 인물에게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추악함과 허위성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 힘을 쏟아 왔다
그런가 하면 대승정신을 표방하는 각종 이데올로기가 폭력으로 변질되어 한 개인을 파괴시키거나
훼손시키려 하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이처럼 현길언의 소설은 겉으로 보아 긍정적인 것, 큰
것, 고상한 것, 밝은 것 등 속에 비밀이나 음모처럼 감추어진 부정적인 것, 작은 것, 추악한 것,
어두운 것 등을 파헤쳐 내는 데 궁극의 의도를 두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존재나 현상, 입장이나 사실을 한번쯤 뒤집어 보는 습성과 그 양면을 뚫어 볼 줄 아는 능력을 행
사해 왔던 것이다 사실상 그에게는 진보냐 보수냐 못 가진 자의 편이냐 아니냐 등의 편가르기
논리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여러 사건들을 그려 나가는 과정
에서 진실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어떤 것이 진실한 것인가 하는 보다 포괄적인 질문을 독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던져 왔다 이러한 질문은 현길언으로 하여금 휴머니즘을 목적지로
삼는 가운데 그 곳을 향해 리얼리스트로서의 길을 걸어가게끔 만들었다 물론 도대체 진실한 삶
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기왕의 몇몇 소설들과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
름답다>에서의 <신용비어천가>, <미로여행>,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 <혼이 머물다
간 낡은 >,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 등의 소설들을 통해 잘 실감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떄로는
현길언을 나약한 상대주의자로 내몰기도 한다 또 이런 질문은 어차피 모든 작가들이 표방할 가능
성이 높은 것인 이상 다른 작가들과 현길언을 변별해 주는 절대적 기준이 되기에는 곤란하다
이런 점을 마치 의식이라도 한 듯 현길언은 이번에 나온 소설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
답다>에서는 진실한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이 진실한 삶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상당히 구체
적인 답안을 작성하려는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 <신용비어천가>, <내가 만든 예수>,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 <혼이 머물다 간 낡은 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 등 최근작 10편
을 담고 있는 이 소설집은 이전의 소설집들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다른 점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
대 이전의 소설집에서는 비록 작가 자신의 육성은 감추어 버린 채 우회적으로나마 부정적 현상과
존재에 대해 고발의지나 비판의 톤을 낯추려 하는 가운데 '감싸 안으려는' 몸짓을 표나게 취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상이 삶이든 사태이든 또는 이념이든 간에 총명한 눈빛으로 시시비비를 가리
고자 한 자세가 소설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에 와서는 눈에 뜨일 만큼 풀어져 버리
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설집 제목 자체가 이러한 변화를 잘 시사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변화를 단순한 화해의 관점으로 줄달음치려 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작가로서의 예기가 꺾인
것으로 보아 버리는 하는 것은 성급한 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작가 자신이 작중인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암암리에 선악을 가리든 작중인물들 상호간에 시비를
가리는 식이 되었든, 이런 소설들은 주로 '머리'에 의해 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선악
이나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는 일방적인 포용의 형식으로 나타났든, 상호 이해의 모양으로 나타났
든, 작중인물들이 감싸 안는 결말로 나아간 것은 '가슴'으로 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식화
해서 말한다면 현길언은 '머리'에 의존해서 소설을 쓰던 것을 서서히 '가슴'으로 쓰기 시작하는
변화를 겪고 있는 셈이 된다 현길언으로서는 크다고 할 수도 있는 이런 변화는 특히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 <혼이 머물다 간 낡은 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 등 세 소설에서
잘 감지된다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에서는 제나름의 방법대로 사는 아들과 딸에게 일체의 간섭 없이 길
을 터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포로수용소에서 좌익포로들에게 린치를 당해 이빨이
몽땅 나간 것을 '경험상징'으로 삼고 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아버지 도기왕은 운동권에 적극
가담하여 큰 사건을 저지른 아들 정민에게 <아비를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느냐>는 말을 했고 미군 전용클럽에 근무하다 알게 된 미국인과 결혼하여 도미하겠다
는 딸을 보고는 <네 선택에 후회를 말아라>는 의미 깊은 한마디를 뱉으면서 결혼허락을 하였다
<앞으로 남북이 어떻게 통일이 된다 해도 난 반공포로였고, 지금도 반공주의자입니다>와 같은 자
기강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로수용소 시절에 맞은 것이 재발되어 폐인이 되었음에도 또 열렬
한 반공주의자가 받을 법한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했음에도 도기왕은 자기 선택을 후회해 본 적
이 없다
그러나 도기왕은 자기 아들이나 딸에게까지도 자기 선택을 강요하기는커녕 최소한의 합리화조
차 꾀하지 않았다 도기왕은 이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가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
럼 이제는 더 이상 자기의 시대가 아니고 자식들의 시대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반공포로로
서의 상처와 자칭 반공주의자로서의 외고집으로 일관해 온 도기왕의 눈에 급진적, 감상적 통일론
을 내세우며 운동권에서 큰 활약을 하는 아들이나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겠다는 딸이 곱
게 비칠리 만무다 이 작품에서 이러한 자식들의 삶의 방법에 대해 아버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
동을 취한 것이며 또 그 반응적 행태가 갖는 의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당신들의 시간
을 위하여>에서 아버지 도기왕은 평소 아들을사랑하긴 하였지만 '민족통일연구회' 사건에 연루된
것까지 긍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을 원망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부친
은 아들면회를 한 번도 간 일이 없었다 실제로 아들 정민은 <제일 두려운 것은, 누님이 우는 얼
굴로 나타나거나 혹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님이 저를 설득하시러 오시는 일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들 정민은 과거에 아버지가 목숨마저 돌보지 않는 열렬한 반공투사였음을 긍정하는 기색
을 보이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문제와 아들의 문제는 별개라고 인식하고 있고,
한핏줄이라는 점이 신구세대간의 있을 수 있는 갈등을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닿아 있다 아버지에게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분명하게 나누어 보고 있는 점에서 아들
도정민도 아버지 도기왕과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가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포용하였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버지가 아들
을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식으로 끝이 났다고 본다면 <혼이 머물다 간 낡은 집>은 작품 중간에서
의 상호 양해의 형태가 아들이 아버지를 온통 받아들이는 쪽으로 변해 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에 비한다면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는 처음부터 할머니와 아버지가 자기 방법대로 살
고자 하는 자손들을 '물줄기 따라 길 터주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드러난다
<혼이 머물다 간 낡은 집>에서 '나'의 아버지는 신학대학 교수이며 목사로, 할아버지로부터 '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배우긴 했으나 살아 생전 아무 종교도 갖지 않았
던 할아버지와 거리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전공을 사회학에서 신학으
로 바꾸었을 때 <제 인생 제가 사는 것이다 후회 없도록 해라>고 말했다 이미 할아버지는 아버
지가 어려서부터 예수 믿는 일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달가워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제사 때 아버지에게 배례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사에
참례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한적도 없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학문과 신앙을 되도록 이해하려
했으면서도 곧잘 '제 방식대로'란 말을 내세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아들로부터 방어하려 했던 것
이다
그런데 정작 무너진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지낼 때
성경을 할아버지 관 속에 넣어 주고, 스님이 독경하는 것을 허용하고 49재를 지냈고, 상식하는
것에 찬의를 표시하였다 아버지의 이러한 태도가 학교에서 문제가 되자 아버지는 오히려 당당하
게 자신의 동기와 입장을 표명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또한 관습이나 주변사람들의 압력에 의해서도 아니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관념이나 이데
올로기보다는 실체가 더욱 나를 강하게 옭아 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까 나는 부친의 죽음에 직
면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한 내 처신은 나의 진실임에 틀림이 없고, 또
한 인간의 진실에 더욱 가까운 일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는 이
념적 사고로서는 채울 수 없는 또 다른 진실이 있다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p179)
작가 현길언의 육성이라고 해도 좋을 작중 아버지의 웅변을 통해서 인간의 진실은 관념, 이데
올로기, 종교적 계율, 관습 등만 가지고는 다 설명될 수도 지켜질 수도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진실은 때로는 이념적 사고나 율법 또는 풍습에 의해 오히려 뒤틀
리고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죽음이란 현실
에 직면해서 마지막으로나마 '진실된' 자세를 보이려는 뜻에서 자신의 신앙과 학문이 가져다 준
관념, 율법, 체계를 잠시 덮어둔 채 이미 고인이 된 할아버지가 원하고 있을 법한 절차와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온통 껴안은 것은 할아버지가 아닌 '진실' 바로 그것이었다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에서는 아버지 백 실장과 ㅁ당사점거사건에 주동이 되었다가
옥살이를 하고 나온 큰아들과의 관계가 가장 시선을 끈다 이 소설은 석방된 후 큰아들이 출판사
를 합네 야학을 합네 하는 것을 그 아버지가 아무 조건 없이 순전히 부모의 정으로 아낌없이 지
원해 준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말하자면 현길언은 작중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단
순한 '협조자'의 이미지로만 몰아가 버린 듯하다 이미 이들 부모의 존재로부터 '교사'의 역할은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또 둘째 아들이나 외딸은 그들대로 '음악공부'에 바쁜 나머지
큰아들의 안부문제는 강 건너 불 바라보듯 하는 이기적이고 냉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어느
덧 백 실장의 집안은 한사람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삶의 길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껍질
뿐인 공동체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수현이는 감옥에 있고, 수진이는 무대 위에 있고, 수희는 피아노 건반 앞에 있지 않아요 오빠
도 내일이면 만사 제쳐놓고 회사 기획조정실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집 식구들은 일곱 가지
색 무지개처럼 제각각 제 빛을 뽐내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겁니다(p225)
현길언의 근본적인 의도는 제각기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꾸려 가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을
병치시키는 데 있기보다는 무지개의 일곱 빛깔과 같은 집안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낸 할머
니와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포용력을 암시하는 데 있다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 <혼이 머물다 간 낡은 집>,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 등
의 세 작품은 조선조 선조 때 제주도에서 있었던 반왕정쿠데타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
는 토론현장을 착실하게 중계한 <미로여행>, 미국에 거주하는 한 한인목사의 이념적 방황을 그려
내고 있는 <겨울여행>, 혁명정부가 들어서는 때의 한 신문기자의 순응주의적 행태와 이에 따른
지식인으로서의 고민하는 모습을 동시에 따라가 보고 있는 <신용비어천가> 등에 비하면 현길언으
로는 더욱 적극적인 작가적 자세를 드러낸 것에 해당된다 최소한 현길언은 이 세 편의 소설을
통해서 갈등의 심화와 다양화로 표현되는 '오늘 이곳'을 향해 한줄기 갈등해소방안을 들려 주었
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인물관계로 설정한 데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는 이들 세
작품들은 한결같이 화해의 분위기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화해의 분위기는 충분한
대화나 토론을 거친 끝에 상호 이해의 바탕을 탄탄하게 다진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신들의 시간을 위하여>와 같이 아버지와 아무리 부자간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삶의 방식과
아들의 삶의 길은 별개의 것이라고 처음부터 체념 섞인 인정을 하는 경우도 있고, <혼이 머물다
간 낡은 집>과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처럼 아버지든 아들이든 아예 어느 한쪽이 일방
적으로 상대방을 감싸 안아 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실상 현길언은 아버지의 존재나 구세대를 향
해 자식이나 신세대에게 간섭하지 말고 턱없이 설득시키려 하지 말 것을 권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지의 부재를 슬퍼하고 아버지의 시련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소설들은 특히 정신사적인
면에서 우리 소설내의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소설들에 비해 현길언의 위의
소설들은 밝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이 타인의 운명이나 삶의 방법에는 오불관하는 서양식 개인주의 혹은 최소
한의 갈등이나 가르침마저 포기해 버린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작가도 생각해
볼 일이다(<문학과 비평>, 1990 봄호)25
15. 역사의 진실, 그 현장검증(현길언 론)
1940년에 제주에서 출생, 그 곳에서 실히 중년기까지를 보낸 현길언은 1980년에 등단했고 그
후 꼭 10년 새에 <용마의 꿈>, <우리들의 스승님>, <닳아지는 세월>, <불임시대>, <우리시대의
열전>, <무지개는 일곱색이어서 아름답다> 등의 많은 소설집을 펴냈다 한마디로 그는 1980년대
내내 '늙은' 신인으로 자리해 온 셈이다 40대의 나이와 신인이란 위치는 얼핏 모순관계로 비치기
쉽다 그럼에도 그는 기본적으로 공존하기 힘든 두 개념을 상보관계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이
런 점에서 그는 우리 소설계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작가이면서 동시에 이채에 가깝다 이렇듯 현
길언은 40대의 나이와 신진으로서의 자리를 잘 반죽해 냄으로써 또 일정기간에 폭발적으로 많은
작품을 써냄으로써 이제는 중견작가로서도 손색없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1980년대를 축지법을 써서 지낸 작가라 할 수 있다
지난 1980년대에 발표된 현길언의 일련의 소설들에서는 그가 패기와 신선미로 가득 찬 신인으
로서의 얼굴과 균형지향적인 시각과 인식을 진지하게 더듬고 있는 4대의 표정을 야누스처럼 지니
고 잇음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나 오늘의 상황에 대한 전사를 문자 그대로 '본질
적으로' 또 편견 없이' 접근해 들어간 데서 1980년대 신진작가들의 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면 현
길언은 신인임에 틀림없다 또 대체로 40대 이후의 나이가 양시론을 취하든 양비론을 발휘하든
안정, 균형, 화해 등의 개념에 더 크게 집착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는 자각적 관심사와 소재의
면에서는 신인의 얼굴을 드러낸 것으로, 세계관과 시각의 면에서는 40대의 표정을 보여준 것으로
정리된다
현길언에게 있어 이 두 개의 얼굴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제각기 다른 곳을 지향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이 두 개의 얼굴은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서로 조절해 주고 때로
는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가령 신인적인 요소는 40대로서의 관성이 사실이나 진실은 덮어 버린
채 안가한 화해론이나 적당주의 또는 가치중립적인 태도로 빠져 드는 것을 억제하는 힘을 발휘하
고 있다 그런가 하면 40대로서의 균형지향적인 성격은 신인적인 속성이 사실이나 진실을 외면하
든가 왜곡해 버린 채 전향성 또는 편향성으로만 치달리고 하는 것을 잘 제어해 주는 결과를 낳기
도 한다 물론, 현길언에게 있어 이러한 두 가지 얼굴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이는 사
실, 진실, 인간주의 등에 빨리 또 확실하게 닿기 위한 통로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작게는 한
개인 크게는 역사적 사건을 대상으로 하여 현길언이 사실 또는 진실을 파헤쳐 내는 작업은 비판
적 리얼리즘을 요란하게 표방하는 작가들보다도 어느 면에서는 적극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필자는 1987년에 나온 현길언의 창작집 <닳아지는 세월>에 대한 서평을 쓰는 자리에서 그가 사실
주의(factualism)에다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역사적 대소사건을 진실 쪽으로 개방시키는 가운데 그에 얽힌 개인들이 부당하게 파괴
되고 왜곡되고 은폐되어 버린 것에 비상한 관심을 표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휴머니즘을 잘 구현
하고 있는 현길언의 태도와 방법은 어느 면에서는 사회비판을 표방한 작가들보다 더욱 적극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징실과 허위를 가려내고 한과 절망의 그늘 속에 묻혀 버린 삶을 양지 쪽으로
구출해 낸다는 것은 부정적인 힘과 존재를 향한 비판력 행사를 경과한 것으로 보아도 되기 때문
이다(출저, <삶과 문학적인 인식>, p210)
역사적 사건을 끊임없이 진실 쪽으로 개방시키려고 하고 오해와 한 속에 파묻혀 버린 개인의
삶을 양지 쪽으로 건져 내려 하는 것은 바로 사실주의의 요체다 이러한 사실주의는 모든 개인은
저마다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든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집단의지는 개인의지에 늘 우선할 수만
은 없다든가 하는 웅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휴머니즘을 구현하기 위한 몇 가지 절차들을 하나로
해 놓은 듯한 현길언 특유의 사실주의는 이기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개인주의를 하나의 도달점으
로 제시한 점에서 당파성에 등을 돌린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그런가 하면 개개인의 삶 그 자체에
다가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한 점에서 이념성을 외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그는 제주
414^사태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반복해서 배경으로 깔고 있는 가운데서도 작품에 따라 문
제적 인물과 문제적 행위는 달리 제시하는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들의 신부님>, <깊은 적
막의 끝>이 토벌대의 단순주의적 태도나 허위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귀향>,
<꿩 울음소리>, <불과 재>등은 414^사태 당시의 좌익 영웅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을 분명하
게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다 또 현길언의 작품들 가운데는 <꿩 울음소리>, <불과 재>등처럼 용
서의 감정이나 화해의 관점으로 기운 것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의 조부님>, <집 없는 혼>, <무혼
굿> 등과 같이 한이나 증오심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데 힘쓴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작품에 따른
시각상의 변주는 중립주의적 태도로 이해하기보다는 사실이나 진실에 적극적으로 또 바짝 다가가
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찾을 수 있고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길이라면 그는 어
떤 시각이나 입장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있었고 동시에 어떤 것도 긍정
할 줄 알았다 그는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였다
현길언은 한 역사나 개인의 진실은 그 역사나 개인이 위기에 처할 때 또는 시련에 빠질 때 은
폐되고 왜곡되기 쉽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런가 하면 거꾸로 그는 역사의 진실은 위기사
의 형태 속에서 또 한 개인의 참모습은 시련이나 모험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나
는 것이라는 이치도 용인하고 있다 이러한 이치는 캄캄한 밤일수록 별빛은 더욱 선명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현길언은 자신의 체험의 손길이 닿는 범위 안에서
위와 같은 인식을 뒷받침해 줄만한 구체적인 소재나 개념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찾아
낸 것이 바로 제주 414^사태요 좌우 이데오롤기 문제였다 분단현실을 그려 내거나 분단극
복의 문제를 다루는 데 치중하는 작가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현길언도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사
와 개개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기와 시련을 안겨 준 것은 바로 좌우 이데올로기와 그
에 대한 맹종의 태도였다고 파악하고 있다
현길언은 집단성보다는 개인에게, 이념보다는 삶 그 자체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라고
앞서 풀이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개괄적인 풀이만으로는 현길언의 작가적 특질의 그
핵심을 건져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에서 좀더 나아가 과연 현길언은 각 개인 앞에서 이데올
로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는가, 현길언은 이데올로기의 여러 속성들 중에서도 특히
어떤 것에 주목하였는가 등과 같은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에 대한 답변을 필자의 글에
서 구해 보기로 한다
현길언의 궁극적인 관심은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밝혀 내는 데 있지 않다 그는 특정 이데올로
기가 그에 직접 간접으로 얽혀 있는 개인들의 삶을 부당하게 또 뿌리채 뒤흔들어 버리고 마는 식
으로 행사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해 더욱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상이 특수한 관점으로
한정될 때 이데올로기가 되며, 이데올로기는 처음부터 한 개인의 사고, 의지, 정서 따위는 아랑
곳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이데올로기는 추종자의 소유욕, 명예욕, 권위욕 등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거나 악용될 수 있는 것임을 현길언은 이제껏 그의 많은 작품들을 통해 잘 실증
해 왔던 것이다(앞의 책 p221)
그의 작품들 가운데는 한 인물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뛰어드는 과정을 적극적 의지의 결여, 우
발적 동기의 작용, 회의적 태도의 노출 등으로 풀어 본 <미명>, <바람과 불길> 등과 같은 것이
있다 이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규정한 것이 된다 혹은 이데올로
기의 악용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특정 집단이나 계급의
신념체계로 규정할 경우, 현길언은 이데올로기 자체를 부정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
난다 그는 <그믐밤의 제의>, <작은 악마>, <밤나무 꽃>, <무혼굿> 등과 같이 현실의 모순과 허위
에 맞서 싸우는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품고 있는 신념체계에 분명하게 긍정적 의미를 안겨 준 작
품들도 써낸 바 있다 물론 그의 작품들 중에는 <껍질과 속살>, <닳아지는 세월>, <바람과 불길>,
<귀향>, <불과 재> 등처럼 이데올로기가 광기나 맹목적인 폭력성향으로 빠져 버리는 과정을 착찹
한 심정에서 그려 낸 것이 훨씬 더 많기는 하다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이나 계급의 관념체계 또는 신념체계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허위의식쯤
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를 환원주의적 태도에서 밀고 가는 사람들이 빚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환원주의(reductionsm)란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세속적인 재미를 본 사
람들이 자파 이데올로기나 다른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말한다 환원주의적 태도는 맹목적 증오심이나 광기 또는 폭력주의로 현실화되는 경향을 지닌다
제주 414^사태를 배경으로 깔면서 적극가담자를 주요 인물로 내세운 데서 공통점을 갖는
<귀향>, <우리들의 신부님>, <불과 재>, <꿩 울음 소>, <미명>, <무혼굿>, <집 없는 혼>, <깊은
적막의 끝> 등의 중 단편들은 바로 환원주의적 태도로 특정 이데올로기를 현실 속에 옮겨 놓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가족을 위시한 주위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거나 한의 포로가 된 채 살
아가고 있거나 한 경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현길언은 이들 작품들을 통해 이데올로기 대립
의 현장 속에서 또 환원주의자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희생자요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음을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었다
이들 8편 가운데서 가장 앞서 발표된 것은 <귀향>(1982)이다 이 소설은 414^사태 때 입
산자로 활동하다가 토벌대에게 쫓겨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가 34년 만에 귀국한다는 내용의 전
보문을 소개하는 데서 시작된다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학병에 출정했다가 해방을 맞았고 경설
제대를 졸업한 후 고향 근처의 학교에서 영어교사 노릇을 했다 영어선생을 하면서 아버지는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사회주의를 심어 주었으며 414^사태가 벌어지자 입산하고 만다 당시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는 가문중흥에의 기대를, 동네사람들로부터는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희
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터였다 현길언은 이 소설에서 남은 가족들을 모두 직접적인 피해자로
처리하고 있다 할머니는 공비들의 죽창에 찔려 죽은 것으로, 할아버지는 414^사태 직후
통비 분자의 혐의를 받고 계속 군경에 불려 다니는 것으로, 삼촌은 '폭도 새끼'라는 놀림에 짓눌
린 나머지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또 '나'는 신원조회에 걸려 외국유학을 포기하
고 나서 아예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 버린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아버지가 30여 년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가족들의 반응이 제각기 다른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사망자로 처리하는 식으로 호적정리를 한 다음 식음을 전폐
한 끝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에 반해 당숙은 과거사는 다 덮어두고 이해하자는 쪽이었고 어머
니는 잠시 배신감과 한도 잊어버린 채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담
담하게 현실을 맞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도 이국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숨져 간 다
음 유골이 되어서나 귀향할 수 있는 말하자면 역사의 피해자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귀향>에서의 아버지는 후에 발표된 소설 <꿩 울음소리>에서는 강경민으로 <미명>에서는 송광
철로 <불과 재>에서는 고진국으로 <깊은 적막의 끝>에서는 오규민으로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꿩 울음소리>에서의 강경민은 종가집 둘째 아들로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학병으로 출정한 적이
있고, 해방 직후에는 읍내 중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하며 많은 학생들에게 좌파 이념을 주입시킨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414^ 사태가 터지면서 많은 학생들은 강경민의 뒤를 따라 입산하여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강경민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강경민은 일본
으로 밀항해서 조총련의 중심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현길언은 이 소설에서 30여 년만에 고향을
찾아온 강경민이 자신의 과거 행적이라든가 현재 위치에 대해 회의나 사과를 끝까지 표시하지 않
는 것으로 처리해 놓았다 <귀향>에서 아들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심을 끝까지 풀지 않은 채 세상
을 떠난 '나'의 할아버지는 <꿩 울음소리>에서는 강경민의 조카 덕재로 되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인물이 품고 있는 증오심은 <불과 재>에서 시인 김학철이 빠져 들고 만 용서와 증오
의 양가적 감정과 함께 좌익이념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한국인들이 일각에서 반추하고 있는 적
대감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현길언은 이러한 인물들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원한, 냉소,
증오감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가족사적인 차원이나 개인사적인 차원에서 아직도 짙게 남아
있는 현실을 잘 일깨워 줄 수 있었다
<귀향>의 아버지와 <꿩 울음소리>의 강경민이 대체로 시류에 따라 사회주의자가 된 것으로 그
려진 반면, <불과 재>에서의 고진국은 일제 때 일본유학을 가 있던 중에도 계속 사상운동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학병으로 나갔다 돌아왔고, 학교와 마을에서 존경과 기대를 받는 교사였
고, 학생들에게 좌익이념을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고진국은 <귀향>의 아버지, <꿩 울음소리>의
강경민, <깊은 적막의 끝>의 오규민 등과 함께 동일범주에 드는 인물이라 하겠다 고진국이 '폭
도들'의 지도적 인물로 표현화되면서 '나'의 조부모는 폭도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고진국의 부모
는 폭도들로부터 피해받은 동네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등 많은 주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간
참극이 빚어지게 된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던 고진국 선생을 향한 '나'의 외경심은
414^사태, 그 중에서도 조부모가 비명에 간 것을 계기로 해서 증오심으로 뒤바뀌게 된다
작중의 나는 어른이 되어서는 세칭 민중시인으로 활약하게 되었으나 이미 어린 시절부터 반감을
키워 왔던 것이다 고진국의 딸로, 아버지의 죄업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남도시의 실력자요 유지
가 된 고영애에게 작중의 '나'는 자신의 심중을 솔직하게 털어 내보인다
나를 어릴 때 휘어 감았듯이 고 선생은 이 마을 철부지 젊은이들의 혼을 휘어 잡는 데 성공하
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았어요 정말 앳된 공산주의자들을 만드는 데 성공
했었지요 전 고 선생이 그 잘난 체 하는 것, 선구자연했던 그 점이 미워요 남들의 진실과 삶을
자신의 의도 속에 구속시켜 버렸어요 횡포요, 정신적인 독재자였으니까요, 한 시대의 시류를 물
꼬를 제 혼자 먼저 뚫어 놓겠다는 그 오만이 미운 겁니다
이러한 영웅주의적 태도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은 작중 시인의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현길언
자신의 것이기 쉽다 평범하지만 선량한 많은 민초들을 억울한 죽음과 어처구니 없는 몰락으로
몰아간 장본인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소영웅주의자들이라고 현길언은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
은 삶들이 결국 개죽음을 당하고 또 많은 집안들이 풍비박산이 되어 버린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을
현길언은 좌파 이데올로기나 이데올로그보다는 소영웅주의자들에게 물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고
진국의 체질적인 영웅심리와엘리트 의식은 사회주의 이념을 적극 수용하면서 더욱 크게 치솟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귀향>에서의 아버지, <꿩 울음소리>에서의 강경민, <깊은 적막의 끝>의 오
규민과는 달리 고진국은 토벌대에 붙들려와 마을사람들부터 단죄 당한 후 돌과 몽둥이 세례를 받
고 죽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불과 재>에서 414^사태와 자기 아버지의 행적을 <역사적
격랑>으로 돌리면서 아픈 과거는 잊자고 한 고영애는 용서의 감정과 화해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려 한 경우가 된다 이러한 고영애의 발상과 자세가 41,24^ 직후 제주사태 연
구모임을 만들어 역사의 진실을 찾아내고자 했던 작중 '나'의 태도와 대립이 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불과 재>에서의 화자, 즉 시인 김학철은 제주사태 연구모임을 주도하여 과거의 사실
과 역사의 진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던 점에서 또 많은 양민들을 어처구니 없는 죽음으로 몰
아간 이념과 이념분자들을 향해 무조건적인 용서도 맹목적인 증오감도 다 취하지 않은 채 이성적
이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견지하려 한 점에서 현길언의 소설 쓰는 정신을 잘 대변해 주는 존재가
된다 <불과 재>에서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부분은 현길언이 어째서 줄기차게 414^사태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그에 이리저리 얽힌 인물들과 사건들을 다양한 관점을 동원해가며 다루고 있
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다
당시 어쩌다 좌쪽에 가담해야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아프고 부끄러운 일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였고, 우쪽의 입장에서는 그 사태의 진압과정에서 빚어졌던 많은 부작용
이 오늘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냥 덮어두자는 것이다 (중략) 이대
로 가다가는 어느 먼 시절에 가서는 그 사태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 과실로만 처리될 가능성도 없
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실상은 영원히 가려지고 말게 되며 어느 쪽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래도 모두들 덮어두자는 것이다
현길언의 소설은 과거의 사실이 왜곡되어 전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역사의 실상은 영원히
덮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사실과 진실에 올바르게 또 바짝 다가가려는
뜻에서 위의 인용문에서 잘 암시되고 있듯이 특정 이념이나 관점에 고착되지 않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유형에 속한 인물과 사건을 형상화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작품에 따라 관점제시의
인물(a viewpoint character)을 바꾼다든가 사건의 원인과 경과를 상반된 각도에서 파헤쳐 본다
든가 진상을 드러내는 방법을 다양하게 구사한다든가 하는 식의 변화와 탄력성을 내보이고 있다
현길언은 기본적으로 <시국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나 <좌나 우라는 이
데올로기가 살아가는 일과 관계가 깊이 맺어져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못했던 사람들>(<미명>)
에게서 관점제시의 인물을 찾아내곤 했다 그리고 <귀향>, <불과 재>, <꿩 울음소리>에서처럼 좌
파 이데올로기와 '폭도들'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기도 하였고, <우리들의 신부
님>, <미명>, <집 없는 혼> 그리고 <깊은 적막의 끝>에서와 같이 414^사태 당시 토벌대의
환원주의적 행태로 인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관점제시의 인물로 놓고 보기도 하였다
특히, 가장 최근에 씌어진 <깊은 적막의 끝>은 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다가 자
의로 입산, 인민유격대 남동부지대 부대장이 된 오규민이 자수하면 살려 준다는 처음의 약속을
깨뜨리고 토벌대가 자수한 하산자들을 즉결처분하는 광경을 숨죽인 가운데 목격하는 것으로 끝을
낸 작품이다 아직 반공주의적 착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1982년도 작 <귀향>과 한 유격대 부대장
을 목격자로 설정해 놓고 토벌대의 약속위반을 문제 삼고 있는 1989년도 작 <깊은 적막의 끝>은
상당한 거리를 둔 것으로 드러난다 이 거리를 차분하게 헤아리면 현길언이 역사의 진실 또는 인
간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충분히 실감하게 된다 특히 <미명>의 주인공 백
지현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은 방황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쉽다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경구를 들을 수 있다시피 현길언은 역사의 진
실을 밝혀 내고 개개인과 그들의 삶을 껴안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방황'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이때의 방황을 단순히 중간주의라든가 이념의 진공상태라든가 하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속단이요 만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창작집 <우리들의 조부님>, 1990)25
16. 냉정한 눈, 뜨거운 가슴(이창동 론)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이창동은 서두름이
없이 그러나 꾸준히 작품활동을 펼쳐 작년에 첫 창작집 <소지>를 묶어 낸 바 있다 이 작품집에
는 1983년도 발표작이 3편, 1985, 1987년도 발표작이 각각 4편씩 수록되어 있는바, 이창동이 그
간 써낸 소설들이 거의 빠짐없이 창작집으로 묶여 들어간 것이라면 그는 결코 다작의 작가라고
할 수는 없다 만일 이런 결과가 바로 그 자신이 원한 데서 빚어진 것이라면 이창동은 '소모'라
든가 '고갈'과 같은 말하자면 일부 재기 넘치는 신인작가들의 항복을 알리는 불쾌한 언사를 의식
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이창동의 소설을 될 수 있는 한 오차를 줄여 가며 저울질 하기 위해서는 1983년도에서 1987년
까지의 우리 소설의 풍향을 어설픈 대로 측정해 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이 시기의 한국소설은
'오늘 이곳'의 삶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표현을 목표로 설정해 놓고 새롭고도 적극적인 방법을
찾고, 굳힌 것이라 하겠다 이런 여러 방법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혁명, 전쟁, 폭동, 사태 등
등과 같은 '대중적 이슈'(public issues)의 현장에 대해 새롭고도 정확한 시각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또 소재와 표현양식의 면에서 조금씩 조금씩 금기를 깨 버리는 작업을 펼친 것이었
다 전자의 모색은 한국현대사의 종단면을 깊게 파헤쳐 들어가는 작업으로 이어져 특히
625 전후사에 대한 값진 문학적 성과를 보여주게 되었으며 후자의 모색은 우리네 삶과
시대의 핵심을 감명 깊게 건져 올린 몇몇 '상징소설'을 낳는 보람을 갖게 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
에 있어서 신인자가들이 기성작가들을 앞질러 더욱 분명한 물증을 내놓았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니다
이창동이 한창 소설을 써내기 시작한 그 무렵, 한국의 작가들은 기성이고 신인이고 가릴 것 없
이 문자 그대로 우리 현실 속에서 '문제적인 인물'의 범주에 드는 개개인들을 향해 될 수 있는
데까지 오해와 왜곡의 껍질을 벗겨 낸 시각을 갖추는 데 전례없는 노력을 쏟았다 이런 방면의
노력은 과거의 큰 사건에 대한 올바른 재해석의 작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재해석 작업을 선도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과거의 사건들, 과거와 오늘의 인
물, 또 그들의 삶의 방법에 두텁게 내려앉은 오해, 비하적인 시선, 도식주의, 단순논리 등의 켜
를 벗겨 내려 한 데서 1980년대 중반의 상당수의 작가들이 부끄럽지 않은 작가의식을 자임한 점
은 우리 소설사의 또 하나의 개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창동의 데뷔작 <전리>가 나왔을 그때만 해도 운동권 인물과 그 행적은 한 작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또 작가의식을 시련에 빠뜨리는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전리>를 정확하게 의미매김하기
위해서는 위에 지적한 몇 가지 당대의 변화상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지만, 운동권 인물이란 모
티브가 아직은 금기사항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 못했던 바로 당시의 사정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리>에 등장하는 김장수란 운동권 인물에 대한 작가 이창동의 심정적 거리는 최근 들어
앞을 다투어 나오는 운동권 인물 주인공의 소설들에 비해 분명히 '원거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창동이 순전히 창작 여건만을 의식해서 자기 자신과 작중인물 사이의 거
리를 필요 이상으로 더 벌려 놓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운동권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
고 있는 이창동의 다른 소설들 즉 <소지>, <눈 오는 날>을 보면 위의 단정은 그냥 속단일 뿐이라
는 생각이 굳어지게 된다 똑같이 투쟁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있으면서도 <전리>, <소지>, <눈 오
는 날> 등 세 작품들은 이 인물에 대해 각기 다른 접근방법을 드러내고 있다 <전리>가 1983년
에, <소지>가 1985년에 그리고 <눈 오는 날>이 최근 1987년에 발표된 것인만큼 세 작품이 취한
인물창조방법 그 동질성과 차이점을 밝히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뿐인가 이창
동의 주제의식의 비의를 캐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전리>는 한 운동권 인물의 영웅적인 풍모를 부각시키고자 한 것으로 이창동은 그 인물에 대한
비극적 착색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영웅적 이미지가 더 잘 드러나게 되는 수법을 취하였다 <전
리>에서 주인공 김장수는 언제나 시위와 술자리를 주도하고 학교 안 어디서나 흰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며 그의 곁에는 항상 오미자가 붙어 다녔다 김장수의 후배인 '나'와 가까운 친구들은 <그
의 술솜씨와 민족이니 민중이니 분단현실이니 하는 등등을 외치는 높은 목소리 앞에서 늘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p254) 결국 김장수는 시위 도중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있던중 간경변증으로 죽고
만다 김장수는 감옥에 들어간 후 그 전까지는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던 오미자로부터 철저히 외
면당하고 말았으며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이 몇몇 후배들만이 지켜 보는 가운데 눈을 감게 된 것
이다 학교 앞 대포집의 딸이었던 오미자는 전라도 어느 깊은 산골출신이며 빨갱이의 유복자이며
그나마 언마 전엔 한 분 노모마저 세상을 떠난 김장수에게서 '영웅적 존재'를 예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장수는 오직 '힘이 없다'는 이유로 오미자를 돈많은 미국 남자에게 빼앗기고 말게 된다
버린게 아니예요 난 그때 내가 꿈꾸었던 욕심의 실체를 봤을 뿐이었어요 김장수 씨는 욕심은
있었지만 힘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미국인은 욕심은 없었지만 힘은 있었거든요 그러나 그걸
로 족했어요 욕심은 내게 있었으니까요(p261)
오미자의 배신과 철저한 외면은 김장수를 비극적 삶의 경우로 가장 깊숙하게 밀어 처넣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오미자는 김장수를 비극적인 인간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결코 작은 사람, 초
라한 삶으로는 끌어내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미자가 더욱 풍요롭고도 화려하게 살수록, 어려
서부터 가난과 소외와 외로움에 찌들려 왔고 커서는 부자유와 배신 그리고 중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에 질질 끌려간, 그리하여 온통 '비극적 삶'의 화신이 되고 만 김장수는 기묘하게도 더욱더
커지게 된다 김장수에게 직접 간접으로 달라붙은 비극적 조건들은 김장수를 패배시키는커녕 오
히려 영웅적 이미지에 더욱 단단하게 비끄러매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미자와 '나'는 김장수가 죽
고 난 후 둘이 만난 자리에서 <산 것은 김장수고 죽은 것은 우리들>이라는 인식에 뜻을 같이한다
오미자에게 느닷없이 김장수의 뼈를 내밀어 놀라게 한 후 '나'는 통쾌감과 슬픔이 뒤범벅된 울음
을 삼키면서 호텔 창 밖으로 뼈를 날려 보내고 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무서운 잠을 단숨
에 날려 보낼 어마어마한 폭음이었다(p286)
이 부분은 <전리>의 끝대목으로 이창동은 투쟁적인 인물의 뼛조각으로터 <어마어마한 폭음>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 만큼 운동권 인물에 대해 농도짙은 동반자 의식을 지닌 것이라 할 만하다
이창동은 프로타고니스트 김장수의 실체를 좀더 분명하게 만들어 내고 동시에 실감 있게 전달하
고자 하는 뜻에서 동지에 가까운 인물이나 대조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을 지닌 인물을 보다 더 곡
진하게 그려 내고 있다
결국, 이창동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인간형이며 문제적인 인간형의 한 실례인 운동
권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육신은 죽이고 대신 뼛조각 즉, 정신은 남겨 놓는 방법
을 택하게 된 것이다 육신은 죽었다는 모티프는 비참한 생장환경, 애인의 배신, 대다수 주의사
람들의 망각과 외면 등의 사실과 어우러지면서 패배의 결강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
품의 충격적인 결말부분에서 잘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뼛조각을 뜻을 같이하는 후배들이 나누
어 가졌다는 대목은 성취와 성장 그리고 밝은 전망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들 하
는 식으로 결말부분에 큰 비중을 두고 소설 전체를 의미매김하게 되면 이창동은 일종의 영웅소설
을 가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인공이 중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다가
서서히 죽음의 늪으로 비참하게 빨려 들어가는 중간부분을 조금도 줄이지 않고 받아들일 경우
<전리>에서 이창동은 어느 한 비극적인 부적응주의자를 낳은 시대적 정황을 고발한 것이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창동은 이렇듯 몇 갈래의 해석이 가능한 플롯을 설정함으로써 속은 뜨
겁지만 겉은 차가운 작가적 입상을 잘 갖춘 것이 된다
일단 <전리>와 연결시키는 가운데 운동권 인물을 어떻게 다루었느냐 하는 시각에서 <소지>를
볼 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형 성국과 동생 성호의 가치관의 차이가 노출되는 장면이다 형 성
국은 625 당시 보도연맹에 있다가 남한쪽의 경관들에게 끌려가서 행불이 되어 버린 아
버지의 이력 때문에 살얼음을 밟듯이 조그만 자리에 안분자족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에 있다
성국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말단 공무원의 길로 빠져 문자 그대로 착실한 소시민의 행로를 걸
어온 사내다 이에 반해 동생 성호는 형이 그야말로 어렵게 번 돈으로 공부를 해 가면서도 이념
서적 탐독과 전단 제작의 고삐를 좀처럼 늦출 줄 모르는 운동권 학생으로 그려져 있다 동생을
뒤쫓아 다니는 형사를 잘 구슬려 보낸 형은 눈치도 없이 집으로 유인물 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동
생을 본 순간, 흥분을 가누지 못한다
<그러니까 넌 이 종이에 담긴 생각을 위해서 경우에 따라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로구나>
<죽을 수 밖에 없다면 또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수도 있겠죠>(중략)
<똑똑히 알아 둬 난 너 같은 놈을 제일 미워해, 알았냐? 너같이 말 잘하는 놈, 말로는 뭣이든
다 하겠다는 놈들, 제 부모형제에게 제 새끼에게 피해를 주고 못살게 하면서 입으로는 온갖 고상
한 소리를 다하는 놈들, 무엇을 위해 죽겠다는 놈들, 그런 놈들은 무엇을 위해서 남을 죽일 수
있는 놈이야, 니들은 한마디로 빨갱이야>
<말씀 함부로 하십니다 형님!>(p100)
양극의 길을 치닫고 있는, 그리하여 좀처럼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러한 논쟁은 1980년
대 우리 사회가 참으로 힘겹게 안고 있었던 보수, 개혁 논리간의 갈등을 뒤틀림없이 반영하고 있
는 거울이라 하겠다 그런데 <소지>에 오면 <전리>에서 볼 수 있었던 삶, 죽음, 욕심, 힘, 패배,
재생 등과 같은 이항대립의 설정을 통한 해결방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동생 성호의 입장에서 보
면 이 소설 속에서 형이나 어머니나 모두 훼방꾼으로 비치기가 쉽다 그러나 이 두 아들의 어머
니인 '그녀'는 아파트 뒤 공터에서 성호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유인물 상자를 풀어 헤치고
성냔불을 그어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나름대로 두 아들의 갈등, 아버지에 대한
큰아들의 뿌리 깊은 원망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 등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소해 보겠다는
몸짓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소지>에서 정작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오늘의 적극적이며 투쟁적인 삶의 평지돌출의
현상으로 파악하거나 설명하려는 대신 억지든 아니든 간에 현재적 삶을 과거와 연결짓고자 한 점
이다 이창동은 '현재는 과거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이치를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봉하고 있다 가령, 그는 <전리>에서 반체제 운동가인 김장수를 '빨갱이의 유복자'로
묶어 두고 있고 <소지>에서는 성국의 원한으로 가득 찬 단순논리의 힘을 빌려 운동권 학생인 성
호와 보도연맹에 있다 우익 쪽에게 변을 당한 아버지를 '빨갱이집안', '대물림'과 같은 말로 묶
으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창동은 단면 <끈>을 통해서는 빨갱이 때문에 남편을 잃고 소년과부
가 되어 그 후 반평생을 처절하게 고생해 온 '나'의 어머니가 '나'의 아내를 두고 가출해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끈>은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줄기로 삼고 있으면서 '나'의 아
내가 일본에서 사는 그로나 한 번도 없는 외삼촌의 붉은 사상에 연루가 되어 조사를 받고 나온다
는 내용의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다 여기서 이창동은 작중 '나'의 생각을 빌려 한국인 각자의 오
늘의 삶을 옥죄고 있는 '끈'들 중 가장 잘 끊어지지 않은 것은 정신적인 탯줄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리고 조상의 사상적 성향은 후손에게 꽤나 질긴 '끈'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끈>에 오게 되면, 과거와 현재, 구세대와 신세대를 이어 주는 '끈'에 대한 이창동의 기본인식
이 좀더 분명한 인식을 갖추게 된다 최소한 이창동은 <소지>에서의 형이나 <끈>에서의 어머니가
드러내는 것과 같은 형태 즉 맹목적인 혈연의식이나 연좌제와 같은 '끈'의 형태에 대해서는 분명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이창동 나름의 믿
음은 좀처럼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인의 삶을 단자론의 시각으로 근접하는 대신, '영향', '운명'등의 개념을 매개로 해서 파
악하고 설명하려 하는 이창동 특유의 창잡방법은 <친기>에서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발휘된 듯하다
그가 한 개인의 현재적 삶을 대번에 파고들어 가지 않고 때로는 과거와 연결짓기도 하고 때로는
그 개인과 직접 관계가 없는 제3자의 영향력도 상정하는 가운데 서서히 그러나 핵심을 놓치는 일
없이 접근한다는 데 대한 논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전리>에서 잘 나타나 있고 <꿈꾸는
짐승>, <소지>, <슈퍼스타를 위하여>, <불과 먼지> 등이 그 좋은 실례가 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작중의 사건과 상황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뒤바꾸고 때로 오버랩시키는
것은 모든 개인의 삶은 저마다 주름도 깊고 부피도 두터운 것임을 긍정하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
을 입증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창동의 창작태도는 속도와 능률과 박력을 능사로
아는 일부 기성작가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일 수가 있다
오늘의 이창동을 주목하게 되고 내일의 이창동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된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
하자면, 객관지향적 시각과 뛰어난 자기 제어력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표현은 앞부분에서 제시
한 바 있는 '속은 뜨겁고 겉은 차가운 작가'라는 단정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창동 특유의 이러한 저력과 매력은 <눈 오는 날>, <빈집> 등의 소설에서 잘 확인된
다 <전리>, <소지>의 연장선에 놓고 보아야 할 <눈 오는 날>에선 '철들지 않은' 운동권 학생과
목욕탕 때밀이 청년이 각각 군인이 되어 인연을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김
일병은 강제징집된 경우로서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가 홧술을 마시다 고혈압으로 졸지에 세상을
떠난 아픈 사연을 갖고 있으며 전우들과 학교 후배들로부터는 '물에 기름 도는 감정을'느끼며 지
내야만 했다 <눈 오는 날>에선 운동권출신인 일병과 가난하고 못 배운 설움을 톡톡히 겪고 군에
들어온 상병과의 관계의 추이에 주목해야 한다 상병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부모, 가진 자 그리
고 이 사회 전체에 대한 증오심을 잘 가누지를 못했다 그런 나머지 상병은 그 누구를 향해서든
지 또 직접적이고 뚜렷한 이류가 없는데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을 자주 느끼게 된
다 김 일병은 이런 상병의 생각과 태도가 어떤 배경을 거쳐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는 하였지만
결코 공감하진 않았다 이 작품의 끝은 김 일병이 평소 자기에게 모욕을 가하기를 좋아하고 파괴
적인 충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상병을 위해 오히려 희생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눈 오는 날>에
서의 김 일병이 끼어 있는 인간관계는 개인과 개인 사이 또 계층과 계층 사이에는 연민이나 화해
는 흐를지언정 일부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내거는 따위의 동질성이나 일체감은 배양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암시해 준다 <빈집>에서 주인공 상수가 사리를 억눌려 가며 사용자와 근로자들에게 성
심껏 대하였음에도 결국 어느쪽으로도 악수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눈 오는 날>에서 최후의
'희생자'로 남는 김 일병의 경우와 같은 의미로 풀어야 할 것이다 <불과 먼지>에서 이창동은 '
나'라는 작가지망생의 두뇌와 심장을 빌려 '신나를 끼얹고 무언가를 외치며 삼층건물에서 뛰어내
리는 대학생들'의 삶의 경우를 곰곰이 음미해 보고 있는데 결국 이창동은 허망감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창동의 작중인물들은 모두가 '중간자'일 수밖에 없으며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이창
동이 만들어 낸 인물들은 몹시도 외로움을 타고 있다
이런 경향의 인물들을 만들어 낸 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개인을 개인이 원
하는 그대로 있게 내버려 두는 인간관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본 것인지도 모른다
이창동은 화합, 봉사를 쉽게도 들먹거리는 정치가류의 발상법을 뛰어넘어 개인의 보다 큰 자유
를 갈망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문학사상>
1988. 5)25
17. 어느 사상사적 풍경화(한승원 론)
고상한 사상보다는 샤머니즘에 잘나고 힘있는 사람들보다는 못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정사로
서의 역사에 참여할 법한 사건들보다는 범속하고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야사에 도시 속의 삶
보다는 농, 어촌의 삶에 훨씬 더 큰 관심과 애정과 탐구정신을 기울여 왔던 한승원 역사나 사회
학보다는 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보조자료로서의 성격이 짙었던 그의 소설 사실이나 현실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도려내기보다는 겉으로 보아 무가치의 더미 속에 묻힌 '삶'의 경우를 끄집어내
어서 의미 있는 이야기로 회생시킨 그의 소설
최근 출간된 연작 장편 <아버지와 아들>은 위와 같은 이제까지의 한승원 소설의 경향과 방법론
을 뒤집어 버리려는 듯한 움직임을 분명하게 내보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샤머니즘, 힘없
는 사람들, 야사, 농 어촌의 삶 쪽으로 쏠려 있었던 관심과 탐구욕의 바늘을 고상한 사상, 힘있
는 사람들, 정사 수준의 사건들, 도시 속의 삶 쪽으로 확실하게 옮겨 놓으려 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편 <아버지와 아들>, <밤기차>, <구멍>, <산 자들의 축제>, 중편 <겨울폐사>, <불꺼
진 창> 등 총 6편으로 짜여져 있는 <아버지와 아들>은 한승원이 자기 나름의 소재의 취향과 현실
인식의 취향에서 벗어나고자 한 몸부림 바로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 소설로써 '한'의
작가나 토속적인 삶과 이미지에 더 이상 안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 있어서 현실모사의 정신이나 반영론의 태도만이 능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승원이 '오
늘 이곳'을 정면에서 날카롭게 쏘아 보는 식의 변화를 보인 것은 그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감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변화는 적극성의 회복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그러나 한승원의 적극성의 회복은 창작방법의 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작품
을 온통 독자들의 눈과 손에만 내맡기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려 한 일면마저 내보이고 있
다 이제껏 무대 뒤에서 숨죽인 채 초조하게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던 한승원은 <아버지
와 아들>에 와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독자들을 향해 자기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방향을 손수 잡아 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이렇
게 해서 나온 것이 '아버지찾기와 아버지극복하기'라는 제목의 '작가의 말'이다 머리말이나 다
름없는 이 부분에 매달릴 경우, 능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해석을 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여유가
소멸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 작가 한승원이 득의에 차서 쓴 머리말부분은 조선 후기의 한문
단편들이 맨 뒷부분에다가 '사시왈', '사신왈', '외사시왈' 하는 식의 총평을 달아 놓아 작품 전
체의 의미를 '일시에'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과 흡사한 효과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
들>에서 '작가의 말'이란 부분은 작가의 서술의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요인물이 품고 있는 실
천적 이념의 정수까지 명시하고 있는 것인만큼, 작품 본분에 단순한 '보족적'기능을 넘어 적극
관여할 수 있는 힘과 무게를 지닌 것이라 할 만하다
한승원은 <아버지와 아들>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어 모으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유인력을 보일
법한 '살부계', 그 내력을 간단히 들려준 다음, 살부계는 <사람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행위>라고
규정하여 그 역기능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찾으려고 하고 또한 아버지를 극복하려고 한다 역사는 아들의 아버지
찾기와 아버지 극복하기, 이 두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의 경우 아들은 혁신적이기 마련
이고 아버지는 보수적이기 십상이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아버지 찾기와 아버지 극복하기(살부
계)가 어떤 형태로 나타났을까 바야흐로 어려운 시기이다(중략) 아버지 노릇하기와 아들 노릇하
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그 아버지 노릇하기와 아들 노릇하기에 고달파 있는 두
남자와 그 주변사람들의 아픔을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p6__7)
위에서 <역사는 아들의 아버지찾기와 아버지극복하기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명
제는 충분히 아포리즘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신선한 느낌을 갖게 하면서 그 내용
을 조심스럽게 되씹어 보게끔 한다 한승원은 바로 이러한 역사관을 힘주어 환기시키려는 뜻에서
연작 장편 <아버지와 아들>을 써 온 것이며 또 앞으로도 계속 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승원이 <친부살해>(patricide)라는 심층심리의 한 현실태인 살부계를 <사람이기를 스
스로 포기한 행위>로 판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러한 역사관에 대해 작가 자신이 오히려 거
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작품 가운데서 이러한 역사관은 운동권에 뛰어들어
끝까지 조금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박윤길이 <해방과 육이오를 전후해서 내덕도지방의 살부계 사
건이 이름났던 것>(p 160)에 눈을 뜬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박윤길이 자기에게 운
동권에서 발을 빼라고 집요하게 설득해 오는 아버지 박주철을 향해 살부계의 존재, 아버지 극복
의 논리, 혁명의 정신 등을 역설하는 대목은 작품 <아버지와 아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다
<아버지한테는 죄송스럽지만 저한테는 쌍도 쌍균 당숙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는 살부계라는
것이 퍽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아주 매력이 있는 말입니다 이 시대의 살부계는 과연 어떤 것이
어야 할까를 곰곰 생각해 봤어요 물론 피를 흘리고 죽도록 하는 살부여서는 안됩니다 정신적으
로 이념적으로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아버지를 극복하고 살부해야 하는 것입니
다>(p164)
<(생략)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를 보다 올바른 방법
으로 빠른 속도로 밀고 나갑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혁면이고, 죽이지 않고 타협하는 것은 답
습이고 정체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아들의 아버지죽이기에서 비롯됩니다 유물변증법도 그와 다름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그 회해 없는 영원한 투쟁... 오늘의 우리 세대들이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것이 그것 때문입니다>(p217)
이처럼 작중인물 박윤길은 인간의 심층심리의 한 형태인 친부살해와 한 조그만 역사적 사건으
로서의 살부계를 앞만 보고 달리면서 타협이나 절충의 태도는 허용하지 않는 투쟁사관, 징보사관
그리고 혁명의 논리를 더욱더 굳게 다지는 단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과 논리에 바탕
을 둔 아들로부터 정신적 측면에서든 사회적 측면에서든 살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버지 박주철
은 결국에 가서는 마음속으로나마 아들을 버리게 된다 박주철은 아들로부터 '살부의 대상', '적
', '창녀만도 못한 인간' 등등의 비난과 악의에 찬 욕설을 들으면서도 집요하게 또 여러 가지 방
법을 동원해서 아들을 운동권에서 빼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마침내 박주철은 <살부계를
들먹거리는 그 자식을 내가 내 새끼라고 안고 보살필 것이 무엇인가>(p301)하고 마으속으로나마
자식 포기선언을 하게 되며 아들의 법정에서의 최후진술을 방청석에서 다 듣고 난 다음에는 잠시
살부계를 머리에 떠올리며, <제깐놈들이 제 아비들을 어떻게 극복한단 말인가 어디 해볼 대로
해봐라 나는 아직 늙어 빠지지 않았다>(p306)고 하면서 냉소와 오기에 찬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이 소설의 처음에서부터 중간부분을 지나기까지 마냥 평행선을 달리ㄹ기만 했던 아버지 박주철과
아들 박윤길은 결말부분에 와서는 부자의 인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채 완전히 등을 돌려 버
리고 만다 한승원이 약속한 대로 <아버지와 아들6. 불 꺼진 창>에 이어 <아버지와 아들7>이 나
왔을 때 이 부자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보일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두 주요 인물 주철과 윤길은 살부계의 논리에 대한 주장과 반주장으로 말미
암아 완전히 적대관계로 빠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 한승원은 작중의 아버지나 아들에
게 각각 어떤 기본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며 어떤 식으로 거리조절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보
다 쉽게 표현할 경우 작가 한승원은 실제로 아버 편인가 아니면 아들편인가 하는, 어찌 보면 유
치한 질문으로 바뀌어질 수도 있다 작가가 누구를 프로타고니스트로 삼았고 또 어떤 인물을 안
타고니스트로 삼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크게 말해서는 해당 작가의 모든 작
품들을 하나의 괄호 속에 묶는 세계관을, 또 작게 말해서는 한 작품의 주제의식을 해명하는 데
하나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 박주철과 아들 박윤길을 표면상으로는 공평하게 대하려고 애쓴 것으
로 나타난다 한승원은 아들이 운동권에 몸담게 된 동기, 아들이 품고 있는 이념의 내용과 그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 및 과정 그리고 아들의 참담한 시련 등을 편견 없이,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
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모습과 생각을 그려내는 데 할애된 지면이 훨씬 많다는
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세계가 훨씬 더 복잡하게 또 넓고도 깊게 파헤쳐 진 점, 아버지의
행동과 사고를 묘사할 때 훨씬 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터치를 구사하는 결과를 내보이고 있다는
점 등을 떠올리면 작가 한승원은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입장과 논리에 기울어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에 있어서 아들보다는 아버지가 프로타고니스트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
난다 한승원은 이 작품의 결말을 아버지와 아들이 적대관계로까지 빠져 드는 것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박주철에게는 무조건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아들 박
윤길은 부정적인 눈으로만 보려 하는 그런 식의 거리조절방법을 취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승원이
아버지 박주철을 양심 있는 시민으로, 의식있는 시인으로 또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
력하는 아버지로 그려 내고자 했던 점은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조절방법이 최소한 양단론법은
무난히 뛰어넘은 것임을 잘 일러준다
비록 한승원은 아버지 박주철을 프로타고니스트로 미는 그 길을 택하긴 하였지만 박주철을 때
로는 앞뒤가 안 맞는 존재, '선이 분명한' 관념이나 사람을 만나면 주변성과 벙황성이 졸지에 더
욱 뚜렷하게 드러나 버리는 존재로 그리고 만 결과를 보였다
그가 내뱉어 놓은 시어들이 그를 날마다 밤마다 배반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시어들을 그 자신
이 은밀하게 배신하곤 했다 시어들은 깨끗한 삶,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도 괴로움과 부끄러
움을 타는 마음가짐, 민중들과의 공생, 보살행, 가난한 마음, 해탈과 밤샘을 부르짖는 데도, 그
는 더럽고 조잡한 파리떼들의 삶을 살고,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이기적으로 혼자서만 살아가
려 하고, 그리하여 항상 무거운 짐진 자가 되어 허우적거리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에서인지 그는
시인으로서의 박주철과 한 출판사의 편집책임자로서의 박주철과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박주철
로 분열된 채 살아오고 있었다 아름답고 깨끗하고 강한 힘을 가진 시를 써낸다는 말을 들으면서
도 그는 늘 출판사 사장의 장사를 위해서 책을 만들어 내고(중략) 불공정한 방법과 비산한 수단
을 써서 잘 팔리는 책이 되도록 공작해 왔다(p59)
이처럼 박주철은 자기 자신의 삶의 방법이 부분적으로 허위와 모순, 적당주의와 기회주의적 속
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잘 깨닫고 있다 박주철의 존재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을 자처하
고 역사의 흐름이니 시대적 정황이니 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지식인
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위상을 거짓 없이 비춰 주는 거울의 기능을 보이게 된다
그는 기회만 닿으면 아들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애를 썼고 막판에는 감옥에 갇힌 아들
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편지를 제대로 쓸 작정으로 우선 많은 이념서적들을 정독하는 성실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주철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아들 박윤길이 살부계의 존재와 개념을
들먹거리면서 제일 먼저 부정해 버린 '한국적 아버지의 권위'에 박주철은 끝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진보, 혁명의 논리를 위해서는 '정신적인'살부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는
윤길의 눈에 아버지의 말이니까 따르라는 식의 발상에 젖어 있는 주철이 순순하게 비칠 리가 없
다 이 소설 속에서 아들 윤길이 <나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민중의 소유물>(p20)임을 여러
차례 역설하면서 자기 주변의 크고 작은 문제를 모두 모두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는 것은
아버지 주철이 어리석게도 문자 그대로 '비합리적인 권위' 혹은 '껍질 뿐인 권위'에 매달리며 살
아온 것임을 반대부조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소설에는 '아버지의 부재', '
아버지찾기', '아버지의 시련' 등을 다룬 작품들이 하나의 독립된 갈래로 뚜렷하게 자리하고 있
음이 몇몇 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오늘의 작가들은 비평계로부터 '아버지
의 부재와 회복'이라는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듯도 하다 이때의 아버지
는 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의미를 지나, 한 시대나 사회를 소망스러운 모습으로 이끌어 가는 절대
적 가치관이나 근본이념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되는 게 보통이다
이렇듯 '아버지'에게 역사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아버지 계열의 소설'이란 유형을 상
징할 수 있다면 한승원의 <아버지와 아들>은 능히 이 계열의 중심부에 드는 것이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정신적인 차원에서든 철학적인 차원에서든 살부의 논리를 앞세워 세차게 도전하고 공격
해 오는 아들로 인해 엄청난 시련을 겪고 마침내는 절망과 환멸의 늪으로 빠져 버린 아버지를 어
디까지나 프로타고니스트로 설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버지 계열의 소설은 아버지
의 부재나 몰락을 일깨워 주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버지 찾기나 아버지 회복의 당위성을
목청높여 외치는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작가 자신이 주제명시적인 태
도를 취하는 가운데 강조했던 것처럼 후자 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비합리적인 권위'나 '껍데기 권위'로 부정적 판명을 받고 있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아버
지는 곧 권위라는 공식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계속 권능을 보여 왔던만큼, 구체적으로 어떤 결말
로 나아가든 이런 계열의 소설들이 우리 문학의 정신사적 지평을 활짝 열어 놓는 데 한몫 단단히
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승원의 <아버지와 아들>은 작품을 이루고 있는 여
러 가지 디테일이 세밀하게 분석되고 평가되기에 앞서 우리의 문학사상의 심화와 확대에 생색나
게 일조가 되었다는 개평을 우선적으로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승원답게 '한'을 지닌 인물들을 여러 명 포진해 놓은 가운데 사상소설 또
는 이념소설의 골격을 지향한 것이라 하겠다 이 소설은 전대의 한 사람의 한이 후대의 다른 사
람의 사상으로 연결되는 그런 기본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때의 한은 복수심이나 죄의식으
로 발전되면서 특정한 신념이나 세계관을 촉발하게 된다 가령, 윤길이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가 지주의 신분으로 살부계에 희생된 것에 오히려 죄의식을 갖게 된 것이라면, 수사관이 된 주언
이는 문자 그대로 천민으로 살다 간 아버지의 한을 복수심으로 키워 간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상소설 혹은 이념소설의 골격을 지향했다는 점은 이념적 측면에서의 여러
인물들간의 갈등이 빈번하게 노정된 사실에서 잘 증명된다 이러한 갈등은 이 소설에서는 주로
논쟁 혹은 가벼운 말씨름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자주 나타나고 또 비중이 제일 큰 논쟁이야말
로 두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 박주철과 아들 박윤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상토론인 것이다
윤길은 한마디로 운동권의 현실관과 역사관을 똑 떨어지게 대변하고 있으며, 주철은 현실참여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시각, 베스트 셀러를 만들어 내는 데 급급한 출판사의 사장 다음가는 책
임자로서의 현실감각, 중산층을 자임하는 한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꿈 등을 고루 배합시킬 줄 안
다 폭력배격론, 공산주의 불용론, 자본주의 체제 고수의지, 점진적 진보에의 믿음, 공정한 분배
정책 지지, 민주화 최우선론 등등을 똑같이 역설하면서도 윤길과 주철은 우리 역사의 오늘과 내
일을 보는 관점에서도 큰 차이을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조상이나 가족에 대한 기본 인식의 문
제에 있어서도 서로 어울리기 힘든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가령, 주철은 그 부친 박달호를 '무고
한 희생자'로 보는 반면, 윤길은 조부 박달호에게 몰락과 죽음을 안긴 부계에 오히려 긍정적
시선을 주고 있다
한승원은 <아버지와 아들>에서 주철을 프로타고니스트로 확정지으려 한만큼, 또 그연장선 위에
서 주철에 대한 연민의 정을 유도하려 했음인지 그가 여러 곳으로부터 그 어느 인물들보다도 공
격이나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 아버지는 그만큼 보수적이고, 우파적이고, 허무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데
가 있는 위인이라고 윤길은 생각하고 있었다 순수를 가장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의 소유자가 아
버지 주철이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과 순수는 파시스트적인 극우를 방관하고 도와주는 것이라
고 그는 생각했다 좌와 우의 중간쯤에서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박쥐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이런
부분은 좌가 나쁘고 저런 부분은 우가 나쁘다고 양쪽을 다 꾸짖으면서 절충주의 노선을 가는 것
이 아버지였다(p202)
(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로는 너는 개량주의자고 기회주의자고 절충주의
자야 미안하지만 너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중략) 너나 나는 기본계급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백날 해보아야 그 쪽에서는 안된다(p242)
(다) 큰형님은 나빠요 이기주의자고, 자신의 명예나 문학만을 생각하고, 참다운 삶을 생각하
지를 않아요 자신의 문학을 위해서는 피나게 가난한 형제들을 제물로 쓰고 소재로 삼고 잔인하
게 그들을 관찰하고 이용했어요(p117)
(가)는 아버지 박주철에 대한 아들 박윤길의 비판적 인식을, (나)는 박주철의 행동양식에 대해
동창생이면서 사상검사로 활약하고 있는 장기호가 내뱉은 경고와 비판의 내용을, (다)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된 동생 주평이 큰형 주철을 향해 던진 가시 돋친 말을 잘 보여준 부분들이다 박
주철은 운동권에서 활약하는 아들로부터, 공안검사인 친구로부터, 기독교 정신에 충실하다고 자
처하는 동생으로부터도 비판되고 있다 박주철이 '선이 분명한' 주위사람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여러 측면에서 첨예한 이념대립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마냥 평행선을 달리는 부자간의 논쟁을 중심부
에 놓으면서 윤길과 주언의 설전, 주철과 장기호와의 대화를 바로 그 옆에다 배치시킴으로써 압
축되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 그 풍경화를 잘 그려 놓은 셈이 된다
이 소설은 이렇듯 몇 가지 논쟁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핫 이슈인 이른바 좌우문제, 보
수 혁신의 문제, 세대간 장벽의 문제 등을 점검해 보고 있다 한승원의 <아버지와 아들>을 정독
하면 '오늘 이곳'의 사상적 풍경화를 대략 스케치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결코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이 소설은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가도 다른 문
제를 만나면 완전히 생각이 벌어지는 그런 인물들을 여러 명 설정해 놓음으로써 '오늘 이곳'의
사상적 풍경화는 단 두 가지 색깔만으로써는 다 칠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에 나타난 주철, 윤길, 주언, 장기호 등 여러 인물들 사이의 난마처럼 얽힌 갈등
관계를 정리해 보는 것은 우리의 사회사상사 그 외연과 내포를 가늠해 보는 예비작업일 수도 있
다
가령, 주철은 사고방식의 면에서나 제도의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
에선 아들 윤길과 일치하고 있으나, 그 변화의 논리를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선 아들과 상반된 견
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주철은 윤길과 주언이 같은 핏줄이라는 점과 한쪽은 쫓고 다른
한쪽은 쫓기는 자라는 점을 두루 염두에 두는 가운데 벌이는 설전을 보면서 자신이 나약하기 짝
이 중간적 존재임을 절감하게 된다 주철은 장기호를 만나 그로부터 민중론자, 반체제 인사, 극
좌 모험주의자 등에 대한 비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력하고', '어정쩡한' 중간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주철은 윤길, 주언, 자익호 등 색깔도 뚜렷하고 선도 분명한
인물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또 힘없이 '기회주의자', '절충론자',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자'로
주저앉아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사상사적 풍경화를 본격적으로 그려 내겠다고 한 의도에서
지나치게 집착했음인지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특정사상이나 신념의 담지자와 '한의 얼굴들'로 이분해 볼
수 있는데 이 두 인물군 사이의 접맥과정이 다소의 억지를 보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한'
의 문제를 오랫동안 보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한'의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 온 작가답게
한승원은 한이 특정사상이나 신념의 자궁 또는 촉진제가 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보이려
했으나 한과 사상의 접맥과정에서 관념성 혹은 도식성을 털어 내지 못한 나머지 현실감이 넘치는
이야기로 끌고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사회에 대해 품고 있는 사상은 책을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님을 실증해 보인 것만으로도 <아버지와 아들>은 '살아 있는' 인물을 그렸다는 평가를 들
을 수 있다 그러나 한승원은 크든 작든 집합의지와 개인의지 사이에는 늘상 편차가 있는 것임을,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개성과 은밀한 사연이 있는 것임을 보다 뜨겁게 의식했어야 했다
그리고 사람은 아무리 의식분자라 하더라도 공적 문제들에 대한 반응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임
을 좀더 크게 염두에 두었어야만 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아버지와 아들>은 박진감과 낯선 느낌을 더욱 높이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역사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살려 내는 것이라는 명분에도 훨씬
더 잘 맞아떨어지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문예중앙> 1989 가을호)25
18. 메타픽션의 외로움과 보람(이인성 론)
이인성의 소설을 특별히 주목해서 평설을 쓴다는 것은 모험에 속하는 일이다 지금 이 시간에
도 작가와 독자들은 리얼리즘이나 반영론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게다가 대다수 작가
들은 우리 소설이 동시대와 사회 속에서 외부적 압력이 커서 그리 되었든 작가들 자신의 능력 부
족이 큰 이유가 되었든 '할 일'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있는 형편
이다 이때의 '할 일'이란 바로 리얼리스트로서의 문제의식과 사명감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이론
의 추세에 맞추어 창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리얼리즘 등의
전향적 개념이 끓어오르고 있음에도 우리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에서는 '소설은 사회적 풍경화나
사회적 초상화를 그려야 할 것'과 같은 낡아 빠진 명제에 대한 근본적 회의나 반발은 별로 보이
지 않고 있다 우리 작가들 대부분은 리얼리즘에 식상되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면과제
로 리얼리즘의 진정한 성취를 제기하고 있을 정도다 후련하게 사실을 그려 낼 수 있었고 양심껏
진실을 들추어 낼 수 있얶던 시대가 근대문학이 열린 이래 단 한 차례도 없었지 않았느냐는 비판
과 회한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비판과 회한은 이제까지의 리얼리즘을 부분적인 것 관
급용의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면서 과거사를 대상으로 하든 목전의 현실을 소재로 하든 작가들에
게 총체적 시각과 적극적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총체적 시각과 적극적 인식을 갖춘 리얼리즘에의 열망이라는 우리 문단의 현실은 더욱 이인성
을 괴롭힐 것임에 틀림없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인성의 '독자적' 소설방법론을 선명하게 음각시
켜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소설양식에 얽힌 통념과 리얼리즘의 열기 고조라는 현실에 서서 볼 경
우, 이인성의 소설은 이채이면서 동시에 이단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예외적인 존재를 소설사
적 맥락까지 염두에 두면서 풀이하고 의미 매김한다는 것은 역시 모험에 가까운 노릇이다 이인성
의 소설이 전문적 문학독자를 자칭하는 이들에게마저 난해시를 대할 때와 같은 당혹감과 무력감
을 안겨 주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모험이라는 판단이 오류로 빠질 가능성은 훨씬 줄
어들게 된다 실제로 이인성의 소설은 지난 1970년대에 찬반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비대상의 시',
'무의미의 시' 바로 옆에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짝의 자리를 뒤늦게 채워 준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비대상의 소설이니 무의미의 소설이니 하고 불러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이인성의 소설이 이채요 이단일 수 있음은 뒤집어 말하면 한국소설에서 리얼리
즘이나 사회학적 상상력이 영원한 도달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일깨워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ㄸ라서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이인성의 소설을 정독하고, 해석하고, 의미 부여하는 일
련의 작업은 우리 소설의 높이와 넓이를 바르게 헤아리는 데 필요한 시금석을 마련하는 것일 수
있다 그의 소설이 아직은 '완성된' 극단과 '안정된' 예외성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
라 하더라도 그의 소설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특히나 새로운 소설이론에 관심이 큰 평자와 논자
들에게는 하나의 숙제로 비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인성의 소설은 온통 그 자체가 소설에 얽
힌 기본통념을 뒤흔들어 놓고 있을 뿐 아니라 소설양식에 대한 온갖 실험을 꾀하는 바로 그 공간
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테스트, 독자 등에 대한 기왕의 고정관념을 고집하는 사람일수록
이인성의 소설을 마주하면서 더욱 당황하고 속상해 하고 끝판에 가서는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
할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방향이라 하더라도 '격한'반응이 크면 클수록 그의 소설의 충격효과는
더욱더 컸던 것으로 새겨지게 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러한 논리는 가능성의 차원에 묻어 둘
수밖에 없다
이인성의 첫 창작집 <낯선 시간 속으로>(1983)를 내놓은 지 6년 만에 두번째 소설집 <한없이
낮은 숨결>을 펴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11편의 작품들은 시각에 따라 두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세 갈래로 분류되기도 한다 가령, 어떤 소재나 내용을 다루고 있는가 하는 기준에서 보면
이 11편의 소설들은 연작소설로 묶일 수 있는 것들과 독자적이면서 자족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것들로 이분된다 <그때 그를 당신도 보았다면>,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미 그를 찾
아간 우리의 소설기행> 등 6편이 연작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괄호 속으로 묶여지게 되며,
<당신에 대해서>, <한없이 낮은 숨결> 등 나머지 5편이 이렇다 할 공분모 없이 일군을 이루게 된
다 그런가 하면 이 11편의 작품들은 길이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기준에 따라 3분될 수도 있다
<글주정>, <그때 그를 당신도 보았다면>, <어느 허구에 관한 사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 쓰지 못하다> 등 4편의 작품은 분량면에서 보자면 콩트의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그를 찾아가
는 우리의 소설기행>, <이미 그를 찾아간 우리의 소설기행>,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등
3편은 능히 중편의 골격에 든다 혹자는 길이에 따라 작품들을 세 갈래로 나누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나무랄지 모른다 그러나 이인성의 경우, 이러한 분류방법은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이러한 분류결과를 통해서 그의 연작소설들이 실은 콩트 정도의 길이로 된 작품들과 중편의 골격
을 유지한 작품들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태로 꾸며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에서 이인
성 나름의 창작방법의 한 비결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한 편의 소설을 쓰되 결코 완성된 형태나
자족의 형식을 지향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특정소재를 어디서 끌고 왔는지를 또 이 소재를 어떤
과정을 밟아 한 편의 허구로 유도할 수 있었는지를 완전히 발가벗겨 내보였다 말하자면 대부분
의 작가들 사이에서는 드러내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혹은 드러낼 필요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
로 여겨질 법한 그런 내용들을 이인성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불필요한 일까지 해내려 한 이인성의 저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은 뒤에 가서 모색될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우선 소설가로서의 이인성의 '존재론적
탐구'에의 욕구가 유별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그는 존재와 삶 그리고
사회에 대해 '몰라서' 소설을 썼고, '알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소설을 썼다 전지자적
시점을 습관처럼 취하는 작가들, 독자를 계몽하려는 의도를 곧잘 드러내는 작가들이 보면 이인성
은 요령부득의 작가로 또 공연한 작업에 매달리는 작가로 보이기 쉽다
1 즉 소설쓰기와 소설읽기란 상황으로 우리__우리? 오, 우리!__를 수렴시켜, 모든 당신을 '당
신'에게, 모든 나를 '나'에게 끊임없이 되돌리며 되씹게 하는 일이다(<당신에 대해서> p21)
2 <그럼, 당신들의 용어를 빌어 대꾸해 볼까요? 이런 소설을 쓰는 건 바로 이 소설을 읽는 독
자로서의 당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섭니다>라고, 그:<해방? 이게 어떤 식으로 인간해방과 관련을
맺는지 말해 보겠소?> 나:<대개가 다 그렇지만, 이 소설도 삶의 여러 양상 중 어떤 하나에 초점
을 맞추고 있다는 걸 미리 염두에 두어 줬으면 좋겠군요 여기선, 내 소설을 읽는 독자 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꿈꾸고 스스로 반성, 비판하는 정신적 실천의 영역에서지요>(<당신에 대해
서> p23)
3 독자여, 먼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겠다 작가로의 내가 무엇보다도 지워 버리고자 했던 것은
작가가 아닌 나의 모습이었다(중략) 나는 내가 작가여야 한다는 당위론적 의지에만 너무 매달렸
고 시달렸다 나는 내가 원고지 앞에만 앉아 있기를 바랐으며, 또 다른 내가 되기를 게을리했다
더 많은 내가 됨으로써 오히려 내가 성숙해지고 그것을 통해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바뀔 수 있다
는 가능성을 도외시했다 (중략)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작가로서의 나를 부각시키려 전념한 것
은 어쩌면 작가가 아닌 내가 위기 없는 삶을 사는 데 너무 능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어진 생활에 너무 익숙하다 (<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에 의한> p47)
4 나는,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모른다는 사실만은 확
실히 알고 있다 나는 또 무엇인지는 모르나 무엇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떻게인지는 모르나, 그 어떻게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을 쓴
다? 의식과 감각과 상상의 더듬이로 암중모색하듯, 다른 체계로 공부하듯, 더듬어 앎으로 가며
삶을 바꾸어 보려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부른다?(<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에 의한>
p56)
5 그러면서 왜 자꾸 그 따위 소설을 쓰냐구?(중략) 소설이 이미 죄악인데 뭘, 티, 모르면 가만
있으셔, 취했으면 말도 삐뚜루하라구. 소설은 그늘만 찾는 독버섯이나 절망의 암세포쯤 될거야
(중략) 소설은 그늘만 찾는 독버섯이나 절망의 암세포쯤 될거야(중략) 소설이라는 게 죄짓기, 불
륜관계 멪기라는 게 내 궤변이니까 <글주정> p92)
1의 내용은 소설쓰기와 읽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요약된다 2에서 이인성
은 '해방'을 정신적,개인적 차원의 개념으로 고집하고 있으면서도, '해방'과 '현실'을 집단적 차
원의 해방과 사회적 현실로 해석하려는 오늘날의 전반적 시각을 소개하고 병치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인성은 개인을 '개성'과 '단독자'로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가 이른바 사회학적 상상력
에 짓눌려 버린 현실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도 절
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는 뒤엉켜 있는 것임을, 또 개인과 사회는
상호 토대요 상호 근거가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3을 보면, 최소한 이인성이 작
가로서의 '나'와 생활인으로서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인성은,작가로서의
'나'에게 충실하기만 하면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동안의 예측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있다 '위기 없는 삶을 사는 데 너무 능란하기 때문에' 또 '주어진 생활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나'에게 의도적으로 몰두했다는 것은 굴곡이 없는, 안정된
생활은 작가로서의 파탄과 좌절로 이어지기 쉽다는 우려를 표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러
한 류의 고민과 우려는 이인성의 것만은 아니다 삶의 질과 내용에 있어 개인간 편차가 점점 줄어
드는 세상이고 보면 '낯설음'과 '꺠어 있음'의 효과를 대번에 살 수 있는 소설의 창작이 결코 쉬
운 일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이는 오늘날 거의 모든 작가들의 남 모르는 고민을 속시원하게 털어
버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4에서는 '바뀜'과 '앎'이라는 두 낱말이 키워드로 떠오르게 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인성은 '앎'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며 또 '바뀌어질
것'을 기대하며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인성은 자신의 소설들이 독자들
에게보다는 바로 자기에게 더 큰 효과와 자극과 충격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된다
그 어떤 것을 소재나 대상으로 잡았든지간에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소설을 썼다는
논리는 독자를 계몽시키거나 또는 독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다수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당돌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스스로 바뀌어지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주
장은 문학의 대타적 효과를 근본적으로 외면해 버린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은 이인성
의 작가로서의 겸손한 태도를 반증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인성이 작가로서
너무 소심한 것이 아니냐 혹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 등과 같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독자와의 최소한의 소통가능성도 무시해 버린 채 또 전달을 대전제로 하는 텍스트의 최소한의 존
재이유마저 외면해 버린 채 자기 몰입의 상태로 빚어 내고 있는 부분들과 대목들을 그의 소설 속
에서 만날 때(물론 자주 만나게 된다!) 소심성 혹은 이기성 운운의 시미가 부질없는 짓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렇듯 독자와의 교통가능성보다는 자기 내부의 상상력의 천착에 더욱 힘쓰긴 하였지만, 또 대
타적 효과보다는 즉자적 효능에 더 크게 집착하긴 하였지만 이인성은 자신의 방법론이 최적의 것
이라고 고집한 흔적은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는 <그때 그를 당신도 보았다면>이란 소설 속에서
자기 자신이 이제 막 작가로서의 촉수를 들이대고자 하는 기구한 운명의 마라토너 한구복 선수의
경우를 소설화하는 방법과 시각이 실로 여러 가지가 있음을 자세하게 설명해 보이고 있다 그는
어떤 이야기방법이 독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것인가 하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반응을 대번에 불러일으키기 쉬운 서술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대상으
로서의 존재나 현상 또는 사건에 대한 '앎'과'깨달음'을 한치라도 넓히려는 뜻에서 재미와 공감
을 과감하게 희생시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존재론이랄까 세계관의 측면에서 우선 자기 자
신이 바뀌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컸던 나머지 독자들의 앞장에 서거나 위에 올라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소설가가 술 취한 상태에서 특히 자조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혼자 지껄인 형태로
되어 있는 위의 5의 부분에서는 비록 논리적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소설양식의 한계에 대
한 날카로운 자각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소설은 죄악이며, 배신이며, 기회주의며 독버섯이라는
판단은 소설가의 사회적 역할을 크게 부풀려 생각하는 작가들, 소설양식의 존립가치를 거의 절대
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작가들에게 하나의 야유요 독설로 들릴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이인성은 소설의 제일차적 요건은 재미다, 소설의 제일차적 임무는 독자를 깨달음의
경지로 이끄는 데 있다, 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전인적 소통을 위한 방법과 시각은 사회학적 상상
력에서 찾을 수가 있다 등과 같은 일련의 고정관념들을 향해 간접으로나마 거부와 냉소를 표시해
온 것이다
소설양식에 다각도로 얽힌 통념들을 향한 거부의 손짓과 냉소의 표정은 이인성이 끈질기면서도
기발하게 실험정신을 구현해 가는 그 과정에서 참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아예, 이인성의 소설들은 '실험소설', '메타픽션', '초소설'(surfiction), '반소설' 등의 이름
으로 총괄될 수 있는 만큼, 그의 소설들 속에서 실험적 요소를 찾아낸다고 법석을 떠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일런지 모른다 그렇기는 하나, <한없이 낮은 숨결>에서의 더듬거림의 방법,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에서의 언어촬영의 수법, <어느 허구에 관한 사실>에서 '신기록 위한 희새
의 주자 이홍식'이란 제목의 기사(<동아일보>1983년 3월 21일자 체육면)를 복사해서 제시해 놓은
것, <그를 찾아가는 우리의 소설기행>, <이미 그를 찾아간 우리의 소설기행> 등의 제목이 이미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소설기행'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것 등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집 <한없이 낮은 숨결>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연작소의 의미를 정확하게 헤아
리기 위해서는 우선 '소설기행'의 뜻부터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이인성의 창의적 고안이랄 수
있는 '소설기행'은 작가가 <책강 앞에서 미리 허구로 만들어 놓은 것을 실제 현실 속에서 다시
추적하는 것>(p204)을 뜻하며 <허구 자체를 현실적 사실로 현실 속에 끼워 넣고자 했던
것>(p205)을 가리키기도 한다 허구와 현실이 끊임없이 서로 유입되고 포개어지는 '소설기행'은
이인성에게 있어서는 진실을 찾아내려는 작가로서의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방황과 모색 바로 그
것이다 이인성의 소설에 꿰 비친 작가정신을 '소설기행'이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
이라면 이인성은 자기 자신을 불확실성과 불가지론의 미로 속에 내팽개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
라는 역설도 나올 수 있게 된다
결론 삼아 포괄적인 규정을 내리자면 이인성의 소설은 메타픽션의 기본논리를 다시 한 번 떠올
리게끔 하는 힘과 소질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메타픽션은 '창조'와 '서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
메타픽션은 사회의식과 자의식이 동시에 증대된 끝에 하나로 결합되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 메타
픽션은 작가는 더 이상 신적인 존재도 아니며, 사회적 책임감도 지닐 필요가 없으며 게다가 특권
을 누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고 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구체적 형태라는 것, 메타픽션은 독
립된 문학양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모든 소설의 경향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 등을 상기하게끔 만
든다는 것이다 이인성의 소설이 이처럼 메타픽션의 기본특징을 잘 떠올리게끔 해준다는 것은 결
국 그의 소설들의 성격과 의미는 메타픽션에 관한 논의로써 어지간히 해명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이인성의 소설에서 현재태든 가능태든 높이 사야 할 것은 소설양식의 가능성을 크게 일구어 내
었다는 점, 소설언어의 신국면을 실천적으로 열어 보였다는 점, 소설양식, 작가의 입장,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 창작방법 등에 대한 기존통념에서 자기 반성의 근본적 계기를 안겨 주었다는 점
등등이다
그러나 이인성은 자신의 소설에 가해진 난해성, 지루함, 자기 도취 등의 비판을 한번쯤 긍정적
시각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뛰어난 언어감각, 신선하게 증폭되어가는 상상
력, 집중도와 천착의 힘이 두드러진 표현 능력 등이 지엽적인 문제나 사소한 대상을 다루는 쪽으
로 '소모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냉정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의 근본적 성취를 아직도 큰 과제로 여기고 있는 우리 소설계의 실정이기에 이인성의
소설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장벽은 실험정신으로 충일한 이인성에게는 오히
려 도전의 보람을 안겨 주는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문예중앙> 1989 여름호)25
19. 환상의 수법과 '아버지'의 발견(최성각 론)
최성각은 십여 년 전인 1976년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부문에 당선된 적이 있고 지
난 198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부문에 <잠자는 불>로 당선되어 중앙문단에 얼굴을 내
민 셈이 되었으나, 아직은 생소한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작년 연말에 9편의 중, 단편으로 짜여진 창작집 <잠자는 불>을 세상에 내놓음으로
써 이제 더 이상 '낯선'작가로 남아 있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한마디로 <잠자는 불>은 최성각이
능히 주목할 만한 신인임을 잘 입증해 주었고 최소한 현재의 작품수준을 계속 유지시키는 한, '
큰'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음을 내다보게 만들었다
창작집 맨 끝에 있는 '작가의 말'중 다음의 대목을 보면 최성각은 문학하는 것, 소설 쓰는 것
을 이념이니 의식이니 하는 것에다 탯줄을 둔 굉장한 일로 생각한 것 같지는 않은 눈치다
몇 해 전의 경험, 말하자면 1980년의 그 일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행
복해지기는 도저히 글렀다는 절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절망이나 살아 숨쉰다는 죄의식
때문에, 혹은 분단된 땅덩어리에서 왠지 부패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듯한 물질 추구의 일상으로
슬그머니 편입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젊은이들이 죽어 가기도 할 때, 나는 지리멸렬한 소설이나
가끔 쓰며 신음했던 게다(p307)
물론 최성각은 소설 쓰는 일이 이 시대와 사회를 고민할 줄 알고 양심 어린 눈으로 지켜 보며
사는 사람들의 한 표증이며 보상행위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특히 <잠자는 불>, <뿌리박기>,
<모르는 사람들>, <돌의 의지> 등의 소설에서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1970년대와 1980년
대의 정치적 상황, 분단현실, 물신론의 풍조 등 우리 사회와 삶의 중심부를 꿰뚫어 보려 했던 것
이다 또한, 이들 작품들은 대승적인 정신과 양심을 지키려 한 가운데 어둡고 더러운 이 세계와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고자 한 인물들을 비극적이며 긍정적인 인간형으로 분명하게 새겨 낸 최성
각의 노력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삶의 중심구조를 쏘아 보려 했다는 점, 양심과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한
인물에게 큰 점수를 주려 했다는 점만 가지고는 최성각의 작가로서의 개성을 마련할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계관과 기본시각 그리고 인물형상화 방법은 기성이고 신인이고 가
릴 것 없이 1980년대의 작가들 사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간취되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동시대의 작가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최성각 나름의 독특한 시각과 방법은 어디
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것을 찾지 못하는 한, 이 글이 씌어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선, 최성각의 소설에서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작가가 '의식'이나 '말'
을 상당히 조심하고 아껴서 쓰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쉽게 찾게 된다 그는 의식과 말을 펼
쳐 내고 쌓아 올리는 데 있어서 깔끔하다고 할 만큼 또 때로는 소심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명하게 갈라 내고 있다 여기서 내 것이란 작가 자신의 고민과 체험을 통해서
자생한 것을 말함이며, 남의 것이란 자기의 정신과의 어울림 그 가능성에 관계없이 일시적으로
또 자기 편의상 빌려 온 것임을 가리킨다 속된 표현을 빌리면, 최성각은 잘난 척 할 줄도 모르
고 화장할 줄도 모르는 작가다 그리하여 최성각은 작가로서의 자기 분수를 지나치게 작게 잡은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자주 던져 주곤 한다 독자들을 향한 강한 인상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또 이념담지자로서의 자기 현시욕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머지 턱없이 허우대만 큰 말들을 남용하
고 뒤틀린 반영론마저 꺼려 하지 않는 일부 젊은 소설가들의 존재에 비한다면 그는 어정쩡하고
시원찮은 작가로 비치기 십상이다
진정으로 '나'의 의식과 말로써만 현실을 파악하고 삶을 해명하고자 하는 그의 기본태도는 담
담하고 간명한 문체의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기본적으로 깔끔하고, 담담하고, 간명한 그의 문
제는 일정한 인물과 사건에 얽혀 빚어지기 쉬운 흥분과 과장심리, 그라고 편견을 거부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자기 절제의 미학에다 바탕을 두면서 허세를 떨지 않으려 하고, 되도록
차분하고 냉정해지려는 서술방법은 대화부분이나 지문, 객관적 장면묘사나 논리적 해설 그 어느
곳에서든지 잘 유도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최성각이 작중의 인물과 사태에 대한 파악에 있
어서 가벼운 터치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는 이 세상
과 삶에 대해서 치밀한 분석이라는 미명 아래 속단을 일삼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중편
<잠자는 불>의 한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따뜻한 이해의 눈길을 내팽개친 도식화나 체
계화와 같은 주지적 작업이 과연 작가들에게 얼마나 큰 소용이 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선 회의적
인 편이다
이 세계는 과연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인가, 설명과 이름붙이기는 그러므로 하나의
폭력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붙이므로 해결될 뿐만 아니라 미결정의 순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 명명하고 나면 '그 밖'에서 있을 수 있으므로, 밖에 서 있다
는 것은 적어도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므로, 아아 그러한 욕구들은 얼마나 이기적인가(p81)
오늘의 현실을 재빠르게 규정하고, 온갖 상황에서 자신있게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은 최성각에
게는 사실상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서술방법을 결코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꾸로 전지자적 시점에 도달하였거나 지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현실 앞에서 눈에 띄게 긴장하고 조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대상으로서의 현실에 조심스럽게 다가감으로써 최성각은 근자의 작
가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소설미학을 순조롭게 굳혀 갈 수 있게 된다
그의 독특한 소설미학의 일단은 환산의 수법에 대한 유별난 애착과 활용에서 찾을 수 있다 부
끄러움의 감정, 분노, 고발정신 등을 감싸안고 있는 리얼리즘으로 직핍하는 것을 일종의 시대적
요청으로 알고 있는 작가들과 또 그들을 고운 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환상의 수법
은 놀이충동의 산물로 비치기 쉽다 사실상, 소설 속에서의 환상적 요소는 이따금 독자의 수준을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로서의 역할을 보이는 것이거니와, 전문적인 소설이론가들 사이에서마저도
환상적 요소에 대한 찬반시비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포스트
(E.M.Forster)는 <소설의 양상>에서 소설에서의 환상적 요소는 독자들에게 '가외의 적응'을 요구
한다고 하여 소설에 있어 환상은 어디까지나 덤이라고 암시한 데 반해,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
문학론>에서 환상과 현실(또는 현재계)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데 힘썼다 최성각의 작
품들 중에서 최소한 <밤의 소리>, <돌의 의미>, <잠자는 불>, <우리 모두 달밤에 춤을> 등은 환
상은 리얼리티로부터의 비상이나 도피라기보다는 리얼리티의 개입에 가까운 것이라는 논리에 서
서 볼 필요가 있다
깊은 밤이면 한 명씩 한 명씩 지하도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깊은 밤, 혼자서 커엉커
엉 소리 죽여 울며 지하도의 계단을 (올라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차디찬 달빛이 내리퍼붓는
지하도 위의 광장에서 비틀비틀 춤을 추며 미쳐 가고 있는 사람들을 (도대체 본 적이 있는가)
(중략) 그의 허리께에서부터 생선 비늘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은 ^636^이
상한 일이다(<우리 모두 달밤에 춤을>)
그러나 참으로 (기겁할 노릇이었다) 바로 그 풀밭에 갔을 때, 바로 그 지점에 갔을 때 우리
가족은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아빠나 엄마는 나보다 더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수련이랑 전번에
그런 해괴한 일을 이미 목격했지만 아빠나 엄마는 처음이었기 때문이가 참으로 망설여지지만,
(그리고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않겠지만 우리가 다시 갖고 온 것과 똑같은,) 그 못 생긴 얼굴의
돌멩이가 수십 개 여기저기에 흩어져 우리 가족을 향해 빙긋이 웃고 있었던 것이다(<돌의 의지>)
저벅저벅... 얼마만한 무리일까, 저들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그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기는 주택가가 아닌가? 말하자면 아파트 단지가 아
닌가? 이 아파트 단지에 심야의 이 시간에 누가 저렇게 무리를 이루어 무거운 신발을 신고 뛴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밤의 소리>)
3교시 수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책상 위에 조요히 엎드려 있던 혜옥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
키자 경자는 놀라서 양호실로 달려가고, 급히 교실에 달려가서 혜옥이를 보살필 때, 마침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우르르 교실에 몰려왔었다 그 순간 경자가 쓰러졌고, 혜옥이와 경자가 헛소리를
헤대며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본 다른 학생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자는 불>"
(밑줄은 원문에는 없는 것임)
위의 예문들 가운데서 밑줄 친 부분에 특별히 주문하면, 작가 자신이 현실적으로 좀처럼 일어
나기 어려운 사건을 의식하면서 설정한 것임이 확실해진다 밑줄 친 부분들은 표현방법이 서로
조금씩 틀리긴 하지만 작중의 주인공이나 내레이터가 한결같이 경악과 의심의 상태에 빠져 있음
을 공통적으로 일러주고 있다 놀라고 당황해 하는 것은 작중인물뿐만이 아니다 독자들도 당혹
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이렇듯 개연성이 희박한 사건들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머뭇거릴 것
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최성각은 독자들이 당혹감을 느껴야지만 (the reader's
hesitation) 소설 속에서의 환산적인 것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 토도로프류의 견해에
적절한 실례를 안겨 준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러나 최성각은 <진또배기 그늘>, <앞으로 가는 고기 뒤로 가는 고기>와 같은 예외적인 작품
이 있기는 하지만 독자들에게 불가사의한 느낌과 불가지론을 안겨 주는 수준에서 머물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의 시대와 상황을 날카롭게 쏘아 보고 있는 그의 의식이 머
뭇거림과 알 수 없음으로 이름지어진 안개 속에서 편안히 잠만 자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
기 때문이다 최성각은 작중의 환상적 요소를 대면하면서 독자들이 가지게 될 법한 당혹감과 해
체의식이 현실과 이 세계를 향해 새롭게 눈을 뜨는 힘과 계기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가 <잠자는 불>, <밤의 소리>, <돌의 의지>, <우리 모두 달밤에 춤을>
등의 작품 속에다 설정해 놓은 환상적인 사건과 존재들은 참된 리얼리티의 획득을 위해 의도적으
로 가시적인 현상을 파괴해 보고 피상적인 현실의 맥을 끊어 버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할머니들의 현신과 현실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고 또 아무도 없는 해변가
에서 그 할머니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고 하는 한 사진작가의 섬뜩면서도 기이한
체험담을 담은 <진또배기 그늘>은 아무래도 단순한 미스터리 드라마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
리고 한 40대 독신남이 대학생 때 동해안 어느 어촌에서 정월 대보름 날 밤 숫성황당에서 풍어제
의 한 절차로 제물로 바쳐진 여인과 합궁하고 난 후 그 충격에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준 <앞으로 가는 고기 뒤로 가는 고기>는 흥미 위주의 에피소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말하자면, 이 두 편의 소설은 환상적인 것을 현실이나 실재계의 문맥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나머지 환상의 가능성을 살려 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두 편의 소설에 반해 <잠자는 불>, <밤의 소리>, <돌의 의지>, <우리 모두 달밤에 춤을> 등
의 작품들은 우화나 일종의 상징소설로 읽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지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
다 가령, <잠자는 불>에서 광산촌의 국민학생들이 외견상 뚜렷한 이유도 없이 집단적으로 발작
을 일으켜 쓰러진 사건은 결국 <적절하게 배출되지 못한 억압된 감정적 욕구가 한 허약한 학생의
발작을 기화로 다른 학생들의 무의식을 자극해서 집단적으로 이환된>(p 76) 집단적 히스테리로
규명되고 있는데, 이때의 '집단적 히스테리'는 최소한 1970년대와 1980년대 역사의 격변과 사회
적 혼란에 극심한 멀미를 느낀 우리 동시대인들의 한 반응상태를 상징ㅈㄱ으로 짚어 낸 것이라
할 만하다 물론, 이 소설은 광산촌 사람들의 가난과 소외의식, 정서적 기아와 절망감을 충격요법
으로써 들려주려 한 데다 일차적인 창작의도를 둔 것이긴 하지만 '집단젇 히스테리'는 근자의 한
국인들 모두에게 한번쯤 걸릴 수 있는 문제로 확대해석해 볼 수 있다 광산촌 아이들을 우리 동
시대인들로,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광산촌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로 확대하는 것이 억지만은 아니
다 또 <밤의 소리>는 한밤중 아파트 단지에서 낮게 뜬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두껍
고 단단한 얼음이 천천히 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구보하는 소리 같기
도 한, 한마디로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주민들이 공포에 질린다는 이야
기를 들려주고 있다 여기서 이 '소리'의 속뜻을 정확하게 헤아리기 위해서는 정체모를 소리의 힘
에 끌려 나와 많은 주민들이 새벽에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서 구보를 하게 되는 장면을 응시할 필
요가 있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 소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또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한
가운데 처음에는 잔뜩 겁만 먹었다가 나중에는 그 소리에 호응하는 것을 의무로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밤의 소리>에서의 소리는 그것이 한 개인의 밖에서 온 것이든 아니면 안에서 저절로 생겨
난 것이든 개개인에게 공포심, 강박감, 적응본능을 불러일으킨 힘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그
런데 <돌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반전의 묘를 아주 잘 살린 이 소설의 끝대목을 보면,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반응을 강요한 이 소리가 과연 외부에서 온 것인지 각자의 내면에서 솟아오른 것인지
또는 환청이었는지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튿날부터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상한 구보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p306)
독자들을 또다시 당혹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두려움과 압박감은 분명하게 환기시키고 있는
이 소설의 결말이 비범한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씌어지고 있는, 운동권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계열에 드는 <돌의
의지>는 미륵불이 새겨진 돌멩이에 얽힌 환상적 구조를 끼워 넣음으로써 개성적인 시각과 독자적
인 형상화 방법을 살려 내는 결과를 맞을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머리 속의 생각 때문에 집에
있을 수 없다>, <광복절 특사로 집에 돌아온> 아빠는 강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인물로 그려지는
대신, 산에서 <돌멩이 한 개> 주워 온 것에 영 찜찜해 하는 소심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에선 미륵불이 새겨진 돌멩이 한 개를 가지고 왔다는 행위는 소시민적이며 이기적인 행복만
을 갈구하는 행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야지만 미륵불과 같이 보다 좋은 세상을 기다리며
신념을 다지는 아빠가 더욱 비범한 인물로 새겨질 수 있는 것이다
최성각은 <돌의 의지> 끝부분에 가서 아빠가 돌멩이를 다시 산에다 갖다 놓게 함으로써 9살 난
딸의 눈에 아빠가 더욱 긍정적이며 큰 존재로 비치게끔 만들었다 <돌의 의지>는 아빠의 시련과
번민이 완전히 끝나 버린 것으로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아빠가 언제인가는 승리할 것이라
는 믿음은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란 존재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 소설로는 <돌의 의지>
이외에도 <뿌리박기>,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낮에는 광부로 일하고 밤에는 광부그림만 그리는 한 중년사내가 탄광에서 작업도중 부상당했다
가 나중에는 자살해 버리고 만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뿌리박기>, 젊어서부터 닥치
는 대로 일을 했고 온갖 고생을 했음에도 자식 대학 보내는 걸 최고의 보람으로 아는 아버지가
아들이 불온혐의로 기관원들에게 잡혀 가는 것을 보고 화병을 얻어 마침내 죽고 만다는 스토리를
들려 주고 있는 <모르는 사람들>은 <돌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뿌리박기>,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아버지가 죽는 것으로 처리한 점에서 <돌의 의지>와는 좋은 대조가 된다 또 <모르는 사람들>에
서의 아버지가 보편성에 가까운 인물이라면 <뿌리박기>의 아버지는 일회성 혹은 특수성에 근접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돌의 의지>에서의 아버지는 특수성과 보편성의 중간을 달리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리고 <뿌리박기>와 <돌의 의지>는 아버지를 다분히 이념과 신념을 지닌 존재로 부각시
키고 있어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와는 좋은 대비가 된다
이처럼, 최성각이 아버지란 존재에 각별히 주목하게 된 것은 우연의 소치로도 볼 수 있고, 아
니면 어머니란 존재에게 바짝 기울어져 있는 대다수 작가들에 대한 은근한 반발심리가 낳은 결과
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해석보다는 아버지란 존재를 한 집단을 지키는 이념 혹은 정
신과 연결짓는 가운데서 출발하는 논리가 더욱 타당할 듯하다 <돌의 의지>에서 내밀하게 아픔을
되새기면서 투쟁의지의 불씨를 계속 보존하려는 것이나, <모르는 사람들>에서 아버지가 끝내는
선량하고, 소박한 삶과 꿈을 박탈당하고 마는 것은 단순한 한 개인의 시련과 좌절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우리 정신사의 균열이나 파국을 암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문예중앙> 1989 여름호)
25
20. 현실생산의 야심(강병석 론)
대체로, 강병석의 소설들은 시인으로서의 손길과 기자로서의 눈길이 교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가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에 여러 해 동안 시인으로 활동했었던 이력과 현재는 모 신문사 교열
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강병석의 작품세계의 특징을 밝히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된다
시인이 이미지를 통해서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라면, 기자는 일단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사
실과 현상을 확정 짓는 일을 꾀한다 또 시인이 가시적 현상의 밑바닥이나 저쪽 너머에 있는 본질
적 의미를 건져내고 찾아내는 데 힘쓰는 존재라면, 기자는 우선적으로 무엇이 있고 어떤 일이 일
어났는가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강병석의 소설들은 시인적 기질과 기자로서의 향성 그 어느 한 가지도 놓치기 않는
다는 작가 자신의 욕심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소설은 리얼리즘에 의한 서사적 기록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들이 기자로서의 시각이나 방법 등을 택일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에 비한다면 분
명 강병석은 욕심이 많은 소설가일 수밖에 없다 또 반전통, 반리얼리즘, 해체 등과 같은 소로를
외롭게 걸어가고 있는 윤후명, 이인성, 최수철 등에 견주어 보면 그는 리얼리즘이나 전통적인 창
작방법에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작가로 비치기 쉽다
물론, 오늘의 우리 소설계가 이렇듯 리얼리스트와 메타픽션파로 간단히 이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강병석을 두고 위상이 불안하다든가 색깔이 분명치 않다든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손길 쪽으로 쏠릴 것인가 하는 것이 강병석 앞에 분명히 과제로 놓여
있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을 제시하면서 본질까지 알려 주려고 하는 서술방법은 그 나름의 독특
한 창작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창작방법은 본질적인 사실제시의 방법이라 고쳐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실제 창작과정에서 작가 강병석 자신이 걱정하고 조심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본질
이 내포된 사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왕성한 탐구정신과 예리한 관찰
력에 의해 찾아지고, 만들어지고,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
하고 듣는 '값이 높은 이야기', '의미 있는 사건', '문제적인 인물' 등은 본질이 내포된 사실을
찾기 위한 지난한 탐구정신과 관찰력의 알찬 결실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강병석의 일련의 소설들
은 작가 자신의 이러한 탐구정신과 관찰력을 넉넉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위에서 말한 값이 높은 것, 의미 있는 것, 문제적인 것을 반영하거나 생산하는 데 이른바 시적
상상력이 한몫 단단히 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강병석은 한 편 한 편의 소설을 쓰
는 과정에서 시적 상상력 또는 시적 요소에 표가 날 만큼 크게 집착하고 있다
가령, 그의 소설이 제목만 보더라도 강병석이 시적 상상력에 얼마나 매달리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소설의 제목이라 해서 소재명시성으로 나아가란 법은 없긴 하지만 예컨대 <낱
말찾기>, <길바꾸기>, <날개꺾기>, <계단헤아리기>, <서울엔 신호등이 많다>, <먹은 물들지 않는
다> 등의 제목들은 기본적으로는 주제 암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긴 하면서도 시적 상징성을 지
향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병석 자신이 의식하고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낱말찾기>,
<길바꾸기>, <계단헤아리기>, 등과 같이 ^246,25,25^하기>형의 제목을 자주 써 보이는 것도 그
나름의 한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소설 제목들 중 <입술과 쥐>,<분홍 손가
락>, <차돌전>, <참나무산누에나방>과 같은 것들은 작중의 인물이나 사건에 작가가 단일한 이미
지의 색깔을 입히려 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런 제목이 붙은 소설의 내용을
보면 작가는 인물이나 사건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보다는 그를 대상으로 단일한 이미지의
착색에 더욱 힘쓴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때로 강병석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한 인상마저 던져 주고 있다 특히 <입술과 쥐>와 <분홍 손가락>의 경우, 입술이나 쥐 또는 분
홍 손가락이 작가의 진정한 서술의도에 본질적인 관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
다 물론 빨간 입술이나 분홍 손가락이 작품의 전체공간에다 다소는 섬뜩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
기를 피워 내고 있음은 외면할 수 없다
제목에 나타난 존재나 현상이 작품의 메인 플롯에 본질적인 관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제시한 중심 이미지와 작품의 리얼리티가 괴리되어 버린 것을 뜻
한다 시적 이미지와 산문적 사실이 잘 어울린 끝에 나오는 '사실적 상징'의 성취에 실패한 것으
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강병석의 소설들 중에는 <박중사의 호루라기>, <서울엔 신호등이 많
다>, <참나무산누에나방> 등과 같이 상징적 즉물과 작주의 리얼리티가 아주 잘 반죽된, 시적 이
미지에의 집착과 인물이나 사건의 구체적 형상화의 노력이 매끄럽게 화음을 이룬 작품들도 분명
히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입술과 쥐>, <분홍 손가락> 등의 단편들은 작가가 시적 상상력이나 시적 요소에 지
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균형감각을 놓쳐 버린 경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
처럼 쥐 잡아먹으 것 같은 한 여인의 빨간 입술이나 젊은 사장의 분홍 손가락이 갖는 분위기 환
기의 기능을 좀더 유기적인 것으로 내다볼 경우, 이 두 소설은 한번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희
생할 수 있게 된다 또 소설에서 일정한 이야기 대신 특정한 분위기를 구하고자 하는 독자들 앞에
서 이 두 작품은 불현듯 의미 있는 것으로 떠오르게 된다 단편 <입술과 쥐>는 비록 표제와 내용
이 불협화음을 빚어 내고 있기는 하면서도 자기 아이의 억울한 죽음을 여러 곳에 하소연하는 여
인,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기자직에 환멸을 느껴 사직하고자 하는 젊은 기자, 유일한 목격자임에
도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할머니,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않는 순경 등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가운데 결국 <입>을 매개체로 하여 윤리, 양심, 진실 등과 같은 큰 문제를 이끌어 내고 있다
또, 작가는 <분홍 손가락>에선 환상적 이라 할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외양과 추악하기 짝없는
내면이 포개진 인간세계의 한 단면을 제시하려 한 흔적을 분명하게 내보이고 있다 비록 결과적
으로 현실성도 약했고 공감도도 낮긴 했지만 작가는 <분홍 손가락>에서 더러운 것은 깨끗한 것
옆에 있으면 더욱 더럽게 보이는 법이라는 이치를 잘 활용하려고는 했다
소설가 강병석의 시적 상상력에의 의존이나 시적 양식에 대한 애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낱말찾기>, <계단헤아리기>, <여시님 여시님> 등의 작품들에서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소설 본문 속에다가 자주 시를 끼워 넣고 있다 소설 속에다가 시를 삽입시키는 방법은 그리 흔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낱말찾기>에선 대학 때 근, 현대사를 연구하는 서
클을 주도했던 남자 주인공이 학교신문에 발표한 문제시 <검정 고무신>의 전문을 만나게 되며,
<계단헤아리기>에서는 가짜 이순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어느 무명시인에 의해 씌어진 시 세 편
을 읽게 된다 <계단헤아리기>는 농촌 출신으로 국립 사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취업 대기중인
진짜 이순아가 무명시인이 가짜 이순아와 만나기로 약속한 강화도 보문사에 가는 과정을 따라가
본 것으로, 작가는 가짜 이순아의 허위성과 타락은 강조하려는 뜻에서 무명시인의 순수하면서도
치열한 내면세계를 활짝 내보이려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하여 강병석은 무명시인의 시세계
를 과도하다고 할 만큼 큰 비중을 두어 펼쳐 보이게 된 것이다 소설 속에 이렇듯 시가 많이 또
길게 인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은 쉽게 가셔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이
렇듯 시의 과다한 인용을 통해서 작중인물 무명시인뿐만 아니라 진짜 이순아의 내면의 움직임이
투명하게 비쳐지게 된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의 끝에 가서 무명시인이 위선과
고상함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속악하기 짝없는 실체를 드러내게 되면서 앞의 인용된 시에는 돌연
검은 구름이 뒤덮이게 된다 그 동안 인고와 억제 속에서 인간본능을 경멸하여 살아왔던 진짜 이
순아는 마침내 삶과 인간이 또 다른 한 면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았던 대역 이순아야말로 자신이 억제하며 살아왔던, 경멸하고 배격하면
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해 마지않았던, 다른 한쪽의 삶을 대신하여 살아 준 또 하나의 이순아였을
뿐이라고, 그녀는 이제 사내의 중얼거림을 소리내어 받아넘기고 있었다(p158)
강병석은 막판 뒤집어 엎기에 성공하였다 일면 추리소설 같은 긴장감을 계속 안겨 주면서 도
덕적 교훈담으로 귀결된 것처럼 보였음에도 이 소설은 허위와 타락의 행동으로부터 계속 피해를
본 주인공을 비윤리성에 대한 증오감 쪽으로 몰아가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와 긍정 쪽으로
방향을 틀어잡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 남의 이름을 훔쳐 가지고 미모와 잘빠진 몸매를 최대한으
로 악용하여 사기와 쾌락을 일삼았던 가짜 이순아는 진짜 이순아에게 도덕적 인생관과 그에서 빚
어진 증오심을 강화시켜 주는 대신 그 동안 가려지고 덮여졌던 삶과 인간의 또 다른 부면을 열어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끝부분에서의 주인공의 심리적 반전은 1960년대에 도덕적 상상력
절대론의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서서 '새로운 감수성'을 고창했던 김승옥 류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인 면에서는 서간체 소설로서의 틀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고백체 소설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가운데 부분적으로는 법정소설의 형태마저 담고 있는 야심작 <여시님, 여시님>은 작품 중간
중간에 '노동조합가', '노동해방가', '오월가', '자! 우리 손을 잡자', 개사곡 '철없는 아이', '
최진사댁 셋째딸', 박노해의 시 '장벽' 등을 인용해 놓았다 이 소설은 투쟁심을 고취하는 가사
들을 중간중간에 배치해 놓음으로써 이 작품의 발신자이자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한 병원장부인의 불안감과 공포심을 더욱 짙게 색칠해 놓는 효과를 올리게 된다 또한 이러한 노
래들은 이 작품에서 여시님, 불여시, 백여시, 붉은 여시 등으로 불리는 가진 자들이나 악덕 사용
자들을 향한 작가의 고발정신 또는 비판의식을 크게 살려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파헤치면서 현실개선을 위한 투쟁욕을 북돋우고 있는 시나 노래를 역시 과다
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배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단 강병석은 못 가진자, 노동자의 편에
서 있으려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롷기는 하나 작가는 소설 속에서의 시와 노래의 과다한 인용 및 제시가 작품 전체의 균형과
긴장감을 깨뜨려 버릴 수도 있는 것임을 예상했어야만 했다 <여시님, 여시님>에서 작가 강병석
이 궁극적으로 겨냥한 것이 가진 자에 대한 풍자나 비판인지, 못 가진 자에 대한 연민이나 일체
감인지 자칫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시님, 여시님>은 서간체와 고백체의 골격을
취하고 있으면서 해학성과 비판의식이 잘 어우러진 풍자성으로 길을 잡은 이상에는 가진 자, 다
스리는 자에 대한 부정의식을 심화시키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었어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여시
님, 여시님>에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와 노래가 삽입되어 관심을 끌어 들임으로써 작가가 말하
고자 하는 바가 다소 불분명해지고 만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이러한
시와 노래들은 <여시님, 여시님>을 최소한 이중주의 소설로 파악하게끔 하는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강병석은 이 작품에서 '노동조합가', '노동해방가', '오월가' 등의 노래
가사를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작중 노동자들의 더욱 격앙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일러주었는가 하
면,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인 병원장부인의 탐욕스럽고도 뻔뻔한 성격과 태도를 효과적으로 잘 형
상화해 내는 판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노동해방가'가 울려 퍼질수록 이여사는 주눅이 들기는커
녕 오히려 더욱더 간악해지고 교활해질 뿐이다 마침내 병원장부인은 '여시들이여 뭉치자'하고
외치게 된다
일방적으로 당하지 말고 당하는 여시끼리 똘똘 뭉치자, 오늘날의 사태에 공동대처함으로써 자
칫 들여시처럼 정처없는 유랑길로 밀려 가지 말고 영화롭던 지난 세월 권토중래하자 언젠가는
해 넘어가고 어둔 밤 다시 온다 여시들아, 끝까지 버티자(p340)
이 작품에선 가진 자, 다스리는 자, 사용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작술을 일삼
고 교활함과 냉혹감을 불사하는 구체적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강병석은 못 가진 자나 짓눌린 자
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 온통 들고 일어나고 또 한편에서는 가진 자들이 하나라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후안무치한 짓을 서슴지 않는 현상이 오늘의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현실임을 역설하려
는 의도에서인지 이 작품의 어느 인물에게도 고유명사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
시대인들은 어느 누구라도 '여시'도 될 수 있고 작중의 관리계장과 같이 될 수도 있고 조합장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어느 한쪽
에 서서 갈등심리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강병석은 오늘의 우리의 현실 그 심저부를 날카롭게 쏘아 볼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의 하나로 시적 상상력에 의도적으로 기댄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현실반영에 만족치
않고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적 상상력을 적극 활용하여 자기 나름대로 현실을 생산하려고
한 것인지 모른다 앞서 살펴본 <입술과 쥐>, <분홍 손가락>, <계단헤아리기>, <여시님, 여시님>
등의 소설들만 갖고도 강병석이 동시대인들의 삶과 사회를 결코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묘사하는
데 만족하는 작가가 아님을 충분히 잘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소극적으로 현실을 반
영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소설가가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혹은 길게 시를 삽입한 단편 <계단헤아리기>, <여시님, 여시님>에서 이미 그 징
후가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강병석은 소설공간에 대한 재래의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편
이다 그에게 있어 소설공간은 어떠한 서술방법이나 내용도 다 허용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령,
<입술과 쥐>에서는 추상적 논설의 형태를 취한, 주인공 유기자의 기자수첩의 한 페이지를 볼 수
있으며 또 한 젊은 과부가 유기자 앞으로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하며 보낸 편지의 전문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런가 하면 <분홍 손가락>에선 근로계약서의 한 양식을, <날개꺾기>에선 편
지와 진술서의 내용을 <서울엔 신호등이 많다>에선 같은 날짜와 각종 신문들의 주요 기사의 제목
들을, <먹은 물들지 않는다>에선 인쇄술에 대한 작가 자신의 전문지식을, 또 일본 통속소설의 여
러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중편 <참나무산 누에나방>에서는 누에나방의 생리와 누에나방
치는 법에 대한 작가의 가히 놀랄 만한 전문지식을 대하게 된다 크게 보면 '해부'에 해당되는 이
런 서술방법들은 어떤 소설들의 경우 불필요한 가지뻗기라는 느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
에도 기본적으로 이런 서술방법은 작가 강병석이 본질을 껴안고 있는 사실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내는 데에 얼마나 부심하였는가를 잘 일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소설의 공간을 넓게 보면서 '현실생산'에 필요한 것이면 어떤 서술방법도 시도해 보겠다
는 자세는 분명 강병석의 작가로서의 개성을 더욱 튼튼히 해주는 것이거니와 크게는 인물창조의
방법, 좁게는 문제적 인물의 형상화 방법의 면에서도 그는 가능성이 넘치는 작가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내보이고 있는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 주면에 널려 있는 그
런 성격과 자질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강병석의 시선과 솜씨를 거치고 나면 '독특하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존재로 바뀌어 버리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가령, <낱말찾기>에서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전류를 만드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출판사에
취직하여 낱말카드를 작성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꼈다가 결국 '말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는'식의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말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살아
있는 말을 찾아내고 또 말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행동하는 삶'이 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말이 무서워졌어 말의 기본적인 참뜻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린 거야 낱말카드 속에
갇혀 있는 말들은 모두가 죽어 버린 말들의 시체에 불과해 (중략) 내가 '자유'하고 발음한다 해
도,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뜻으로 풀이하는 거야 말로써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게 무서웠어(p19__20)
이 작품에서 남편은 <아끼던 후배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말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결국 진리를 위해 투쟁하다가 감옥으로 가고 만다 남편의 행태와 내면에 대해 소략한
서술로 끝난 것이 이 작품의 흠의 하나이긴 하지만, 말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는 데서 의식의 변
화, 더 나아가서는 삶의 방법의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를 찾고자 한 착상은 가히 이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박중사의 호루라기>에서 결국 비참한 몰락과 죽음으로 끝나 버리기는 했지만 박 중사가 자기
의 추악한 과거를 덮어 버리면서 오히려 근면하고, 성실하고, 희생적인 인물로 부각된다는 이야
기도 작가가 이 세상과 사람들을 그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고, 그려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차돌전>에서 명성과 부를 한 몸에 지니고 탄탄대로를 걸어오긴 했으나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
나 대승적 신념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천영만 교수를 회원증 수집에 몰두하고 갑작스레 이혼하
고 마침내 이 지상으로부터 증발해 버린 한마디로 기인 또는 광인으로 처리해 버린 것, 또 <날개
꺾기>에서 노조운동에 앞장 선 남자 주인공을 노조운동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는 속악한 인물로 몰아가 버린 것, 그리고 <먹은 물들지 않는다>에서 어느 인쇄소의 노사분규를
기본상황으로 깔아 놓으면서 사용자인 박정식 사장이 인쇄공에서 출발하여 어렵게 어렵게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털어놓는 데다 역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는 것등은 작가 강병석이 어느 쪽의
것이든 공식화된 현실인식의 방법이나 판에 박힌 구성방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잘 증명해 주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는 인물, 사건, 현상 등을 보되 되도록 상식이나 유행적 사
고나 적당주의적 발상이 던지는 그물에 잡히지 않으려 하면서, 일단 그 자체로 돌아가 보려는 의
욕을 크게 지니고 있다
<박중사의 호루라기>, <입술과 쥐>, <분홍 손가락>, <차돌전>, <날개꺾기>, <여시님, 여시님>
등에서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강병석은 허위의 인간 또는 이중성을 가장 크게 문제시한 데서
공통점을 갖는 이들 작품들은 작중 주요 인물의 허위적 성격이나 태도를 드러내는 방법, 또 결말
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제각기 상이한 내용으로 나아가고 있다 <박중사의 호루라기>, <차
돌전>에서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삶의 태도가 '각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여시님, 여시
님>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꺾이기는 커녕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분홍 손가
락>이나 <날개꺾기>는 못 가진 자와 힘없는 자를 속이고 악용하는 존재에 대해 응징하는 것으로
끝이 나 있다
'현실감이 약하다', '초점이 흐릿해졌다'는 말로 때때로 들어 가면서까지 이렇듯 다양하면서도
이색적인 창작방법을 구사해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그는 단순한 현실반영보다는 현
실생산을 작가의 목표로 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25
21. '병자'의 사회학(박양호 론)
박양호 하면 7편으로 된 연작소설 <지방대학교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1974년 <현대문학> 추
천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한편으로는 대학에서 소설론을 강의하면서 이렇다할 요란한 조명받
음없이 그러나 꾸준하게 작품을 써 온 편이다 이번에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여진 21편의 단편들
은 1974년에서 1984년 사이에 씌어진 것들로, 연작소설 <지방대학교수> 이전의 박양호의 작가적
관심사와 의식세계 그 전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박양호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창작활동을 꾸
준하게 펼칠 것이라는 전제를 세워 놓고 본ㄱ다면, 이 21편의 단편들은 분명 초기작에 해당될 것
이다
박양호의 초기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미친 새>(1978), <조그만 적>(1982), <삼촌 이야
기>(1984) 등이 그 좋은 실례가 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상징적' 수법 혹은 장치를 통해서 삶의
속성이라든가 동시대 사회의 흐름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 핵심을 건져 올리는 서술을 꾀하였다
는 점이다 대체로 상징적 수법은 특히 소설의 경우 '빠져 나가기'나 '굳히기'와 같은 동기를 갖
는 것으로 설명된다 참된 리얼리즘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정치적 분위기나
사회적 정황에 놓여 있는 작가들이라면 최소한의 리얼리즘이라도 붙들어 두려는 뜻에서 '빠져 나
가기'로서의 상징적 장치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리얼리즘의 정신을 보다 효과가 높
고 인상이 깊은 어조로 들려주려는 뜻에서 한 작가가 취하는 산징적 수법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박양호는 어떤 경우에 속하는가, '빠져 나가기'에 기운 것인가 '굳히기'로 쏠려 버린 것
인가 위에 예거한 4편 중에서 최소한 <미친 새>가 '빠져 나가기'에 드는 것임은 단언할 수 있으
리라 <미친 새>는 작가들의 소재선택과 표현면에서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당해 있었던 1970년대
후반에 유례가 드물게 나타난 '우화'이기 때문이다 <미친 새>는 <천충>, <조그만 적>, <삼촌 이
야기> 등이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표면상으로는 '닭들'에 관한 이
야기로 되어 있다
<미친 새>에서 닭들, 우리도 어디까지나 '새'임을 주위닭들에게 일깨워 주는 '미친' 닭, 왕초
닭, 사육사, 사육사가 데리고 다니는 개들 그리고 살쾡이가 등장한다 <말 잘 듣고 평화를 사랑
하고, 복종과 충성심이 강하고, 맹목적으로 속기 잘한 개떡 같은 닭새끼의 무리>를 향해 사육사
는 <일정한 키로 자라 줄 것을 바랐고> 또 <닭들의 발톱을 시시때때로 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육사는 개들을 풀어 놓아 24시간 닭들을 감시한다 <부리는 끝이 뭉툭하게 잘려 들어온> 문제
의 그 미친 닭은 옆에 있는 닭들에게 <우리도 분명히 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동시에 '날아
야 한다'는 신념을 주입시키던 중 개한테 물려 죽고 만다
아니, 무어라고 항변의 소리 한마디 지르는 놈도 없었다 그것이 우리 조상에게 대대로 물려받
은 비굴한 전통이었다 우리에게 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가르쳐 준 미친 닭이 우리의 눈 앞에서 참
혹하게 죽어 가고 우리의 왕초가 패대기쳐졌을 때에도 우리는 무서움 때문에 서로의 몸을 감싸며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을 뿐이었다
<미친 새>에선 이처럼 미친 닭, 왕초닭, 사육사, 개들 그리고 공포심에 휩싸인 채 일찌감치 자
포자기의 습성에 젖어 버리고 만 닭들은 온통 상징성의 의미를 뿜어 내고 있다 이들 여러 존재
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명령, 지배, 굴종, 반항, 의식화 등의 관계논리를 통해서 1970년대 후반의
공포정치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박양호는 <미친 새>라는 답답하고 춥기만 했던 1970년대
정치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떠오른 것인만큼, 작품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기에 앞서 우선
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작품은 1978년에 바로 동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비
록 우회적인 수법에 의거하긴 했지만 총체적으로 터치했다는 사실확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1970년대 문제작의 반열에 들 만하다고 하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천충>(1979)에서 전쟁에 나갔다가 불구자의 몸으로 돌아왔고
또 몇 년 동안 정성을 다해 가꾼 삼포를 일시에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천충떼에 대해 불안과 공포
를 떨구지 못하는 공통점을 지닌 한 부자를 만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천충은 충청도 태안반도
일대에만 그것도 아주 수년 만에 한번 나타나는 것으로 설면되고 있으며 천재지변처럼 가공할 만
한 힘과 기습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625때 참전했다가 팔 하나가 없어
진 철규는 어린 시절에 천충을 만난 적이 있고 그 후 전쟁이 끝난 지 20년쯤 되는 해에 다시 한
번 천충의 습격을 받게 된다
마침내 그들이 떠나갔을 때, 거기 남은 것은 참담한 폐허뿐이었다 햇빛과 빗줄기를 섞어서 자
양분을 만들어 뿌리에 공급하던 잎을 잃어버린 식물들은 이제 서서히 말라 죽으리라 도둑맞은
삼뿌리는 말라붙은 무꽁댕이처럼 시들어 버리리라 천충의 대군이 폐허에 망연히 서 있는 철규
씨의 귀에는 따르르, 따르르 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전쟁, 총소리, 파괴, 폐허
이처럼 아버지 철규는 천충으로부터 전쟁을, 전쟁으로부터 천충을 연상해 내고 있다 그는 천
충이 삼포를 폐허로 만들고 간 자리를 보았을 때의 절망감을 전투중의 쓰라린 기억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에다가, 월남전에 참전하여 다리 하나를 잃고 돌아온 아들 창
묵이 마침내 천충이 몰려오는 환상에 젖어 몸부림친다는 이 소설의 결말부분을 합쳐보면 박양호
가 천충을 매개로 하여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분명해지게 된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다음과 같은 대화부분을 주목해 볼 경우, 천충은 한 개인에게 일생을 통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역사적 환난' 그 즉물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약을 뿌리면 도망가요?>
<그렇다고는 하더구나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잊어 먹거든 십년 후일지, 이십년 후에 나타날
지 모르는 그 천충떼들을 쫓기 위해서 약을 준비해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거든...>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은 미구에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천충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방법에서 상반된 자세를 보이게 된다 아버지가 천충의 습격을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삼포재
배를 게을리하지 않는 반면 아들은 가업계승을 거부한 채 다른 일에 몰두하면서 아버지에게 삼포
가꾸는 일을 그만두라는 부탁까지 한다 이 소설에서 '삼포재배'의 모티프도 '사실적 상징'의 기
능을 보인다 천충이 식민통치, 전쟁, 이념대립 등과 같은 역사적 환난을 암시하는 것이듯이 삼포
재배에의 집념은 하나하나의 역사를 이룩해 가고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욕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파트에 사는 한 교사가 방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쥐를 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조그만 적>(1982)은 소설 맨 끝부분에 가서 급작스럽게 '쥐새끼'의 의미확대의 가
능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세상에는 아직 많은 쥐떼들이 살몃살몃 어둠의 공간 속으로 돌아다니면서 보통 사람들을 괴
롭히고 있다니까 말이다
이곳에서의 쥐는 더 이상 단순한 쥐로 보아서는 곤란한 만큼 작품 <조그만 적>도 쥐잡기에 관
한 에피소드 정도로 굳혀질 수만은 없다 이미 이 소설의 제목부터가 이 점을 잘 일러주고 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그 순간 '쥐'는 이 세상의 폄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때로는 짜증나게 만
들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존재들이나 관념들로 그 의미가 팽창하게 된다
<삼촌 이야기>(1984)는 주로 가물치와 갯버들붕어의 생태에 대한 흥미있는 관찰을 통해서 '본
능'과 '환경'의 본질에까지 접근해 보고자 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할아버지는 큰놈이나 강자
가 작은놈이나 약자를 잡아먹고 사는 먹이사슬을 하나님의 섭리로까지 믿고 있는 가운데 의지박
약하고 무기력한 아들을 가르치려는 뜻에서 가물치를 사 가지고 와서 어항 속에 넣고는 아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도록 한다 그러나 아들은 환경에 따라 물고기의 본성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임을 입증하는 실험을 해보인다 아들은 가물치도 '아주 배가 고프면' 실지렁이니 떡밥이니 가
리지 않고 먹게 되고 갯버들붕어도 '아주 배가 고프면' 실지렁이나 떡밥 대신 다른것도 닥치는
대로 주워먹게 된다는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할아버지는 자기보다 큰 물고기도 마구 뜯어먹고
사는 공격적 본능의 가물치를 보여줌으로써 아들에게 이 세상의 지배원리로 '약육강식', '적자생
존'이 엄존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려 했던 것이며 삼촌은 본능보다는 환경의 힘이 훨씬 더 큰 것
임을 실증해 보임으로써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도중에 돌아와 버린 자기 자신을 합리
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물치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제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본능우위론'
에 삼촌의 '환경절대론'이 밀려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소설에서 할아버지와 삼촌이 각각 'ㅁ눌고
기'를 매개로 해서 자기 입장을 강변한다는 설정도 이색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경쟁사회
로서의 인간세계의 축도를 어항 속에서 찾고자 한 작가의 발상도 비범하다
이처럼 아예 우화의 형식으로 나아갔든 아니면 작품의 한 존재에 내포되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살려 내는 방법에 머물렀든 간에 박양호가 존재와 사상의 이면을 천착해 들어 갔다는 것은 그가
묘사주의나 세태소설의 방법 ㄸ위에 결코 자족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의 소설에 합당
한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고의든 아니든 그가 작품 속에다 감추어 둔 '적극적 현실인식'의 알맹
이를 찾아내고 밖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은 비록 모호한 구석이 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인간다운 것' 또는 '정상적인 것'의
동요를 안따까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축일의
끝>, <가마미의 여름>, <천충>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구자나 폐인에게 연민 어
린 관심을 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방법론>, <빈 수레>, <풍촌>, <음력 크리스마스>, <떠나지
않는 배>, <오후 다섯시의 환상>, <연극연습>, <삼촌 이야기> 등이 좋은 예가 되고 있는 것처럼
박양호는 '정신이 병들어 버린' 인물의 경우를 다양하게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 중
에서도 특히 <음력 크리스마스>는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골출신 남녀들의 찰나주의적 행태
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떠나지 않는 배>는 물신론자들과 광신론자들의 모습을 그려 냄으로써
병든 세태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 것이 된다
박양호의 초기소설의 또 한 가지 큰 특징으로는 이미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그가 육신이 병든
자보다는 정신이 병든 자에게 훨씬 더 큰 관심과 탐구욕을 보인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드러내고 있는 정신상의 병적 징후는 기본적으로 작가들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포
착되기 마련이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병적 징후를 찾아낸 작가가 있는가 하면 '폭력'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내세운 작가도 있었다 또 돈이라든가 섹스라든가 권세에 대한 욕망으로 앞뒤 가
림 없이 무한정 줄달음질 치는 인물들을 아예 정신이상자로 진단해 버린 작가도 있었다
이렇듯 여러 가지 가능한 정신상의 병적 징후들 중에서 박양호는 과연 어떤 것을 가장 문제적
인 것으로 포착하였는가 한마디로 답하자면 그는 '사기한' 또는 '사기행위'에 가장 크게 주목하
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소방관>에서 승진을 위해 일부러 방화하고는 진화의 건수를 올리는 김 순경, <방법론>
에서 고시생임을 자처하는 남자와 여대생이라고 신분을 속이는 한 술집여자, <떠나지 않는 배>에
서 사교단체를 만들어 놓고는 천국티켓을 만들어 팔아 먹으면서 부동산 투기를 하는 용꼽추 일
당, <종이끈>에서 죄상이 분명함에도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고집하는 죄수들, <연극연습>에
서 한 고아를 앞장 세워 한 부잣집에게 교묘하게 사기 치려다 법망에 걸린 어떤 연극연출자, <빈
수레>에서 전직고관이었던 아버지의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첩의 자식 등은 바로 박양호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리구조를 뒤져 내어 찾아내고, 형상화해 낸 인물들이다 박양호는 <연극연습> 등
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기한(alazons)이 법의 응징을 받게 된다는 식의 결말처리를 꾀하였
다 그러나 권선징악담이나 공안류소설을 얼핏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식의 결말처리방법이 자주 사
용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기한이나 사기행위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표시한 작품들을 계속 써낸만큼, 박양호의 소설은
고유영역과 독자적 위치를 분명하게 확보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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