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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차범근] 슈팅메세지

by Casey,Riley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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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팅 메시지 제 1권
차범근


   제 1장 분데스리가의 차붐
   이 친구야, 나는 처음이 아니야
    처음 뵙겠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열기를 뿜는 토론이  벌어졌다. 보통 때 같으면 내
가 KO승을 거둘 참인데 구경꾼인 친구하고 후배녀석이 하나 엄마 편을 드는 바
람에 오늘 아침은  여의치 않았다. 얘기의 발단은 아침 일찍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는뎨 그 분 얘기가  나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설
명을 하기는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글쎄요
” “뵈면 알겠지요” “성함만 들어서는 모르겠는데요”만늘 연발했다.
  나는 정말이지 가장 솔직한 대답만을 하고 있었다.  내 가슴에 손을 얹어 부끄
럽지 않은.... 그런데 하나  엄마가 옆에서 성화다.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라고 하라는 것이다. 양심도  없지 원,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천연스럽게 인사
를 한단 말인가?
  전화를 끊고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 마누라,  친구, 후배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을 쳐다보는  눈초리로 나를 마라보고 있었다.  “너도 참!” “형도 
참!” “당신도  참!” 뒷 얘기는 들으나마나다.  “얘! 생각을 해봐라, 성경에도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고 가르치셨어, 그렇지  암ㅎ으면 죄야, 임마!” 
그러나 나의 이런 얘기는  이미 설득럭을 잃고 있었다. “형! 형이 한마디  ‘아! 
반갑습니다’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썩 좋을텐데 굳이  모른다고 캐물을 필요는 
없잖아요?” “야! 범근아,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X코치가 독일에서  너를 만났
느데 네가 잘  생각니지 않는다고 했다면서 네욕을 되게 하더라.  내가 생각해도 
너는 그 사람 잘 모르긴 할거야. 우리 학교 나온 것도, 대표선수를 지낸 것도 아
니야.” “그렇구나, 내가 몰라도, 혹응 한 번  스친 것을 통해서도 나를 나주 가
까운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친구와 후배는 너그러웠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스러워 했다. “너처럼 세상물
정 모르고 사는 사람 처음 봤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
회생활을 하냐, 너는 너무 세상  경험이 없어서 내가 다 걱정이 된다 야!” 팬들
의 사랑, 정말이지 나민큼 피부로 가까이 느끼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이제 나도 명색이  학부형인데 언제까지 응석이나 부릴 것인가? 이제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지....
  이런 류의 사건이 생기면 빠지지 않고 나를  구박하는 묵은 얘기가 있다. 하나 
엄아가 대학 1학년, 내가  2학년인데, 우리는 명동에 있는 순두부집을 자주 가는 
편이었다. 어느날 저녁 우리 맞은편 식탁에는  양복차림으로 보아 회사원인 듯한 
분들 대여섯 명이 기분좋게 한잔  곁들이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이 “어이! 차 선
수!”하고 반갑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냥 팬이려고 하고 넘겨야 되는
데 답답하기로  소문난 나답게 ‘어디서 봤더라“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그분은 
머쓱해지신 것이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지금 같으면 인사르 대
신 받아넘기겠지만 그때만  해도 사정이 달라 묵묵히  보고만 있던 하나 엄마의 
공격이었다. “글쎄 저분이 나를 어떻게 알지?”
  당시 나는  이 말 한마디로 하나  엄마한테 상당한 점수를 딴  것도 사실이다. 
스타면서도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순수한(?)으로 나를 후히 봐 준 것이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주변머리를  고치지 못하자 이제는 “저 
녀석 바보 아냐?”하는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는 악랄한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그 말은 S신문사에 계시다가 문화체육부  차관보를 거쳐 월드컵 유치 위원회 사
무총장을 맡고 있는  최상신 선배의 명언이었다. 그 분은 축구를  오래 담다하신 
데다가 나의  학교 선배라는 걱 때문에  특별히 내게 다정하셨던 것  같다. 물론 
나와 인터뷰도 몇 번 했을  것이고 내가 경기를 잘 했을 땐 등도 두들겨 주셨을 
게 분명하다. 그런대도  빈번히 모르는 사람 대하듯 지나치는 나를  보고는 기가 
막혀서 동료 기자들한테 “쟤 바보 아냐?”하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본인을 직접 만나보았데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이후 선배님은 나를 가장 잘 아는 한 분이 되셔서 바보아니냐고 했던 후배를 
한결같이 돌봐주신다. 내가  운동장에서 까이고 차이면 그 선배는 열이  받쳐 하
는 말이 “임마, 같이 차! 아니면 태권도를  배워서 급소를 찔러주든지! 에-그!” 
프랑크푸르트에 사시는 어느 대학 선배  한분은 몇 번이고 본인이 나의 대학 선
배임을 밝혀 주셨음에도 빈번히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자 “이 친
구야 나는 처음이  아니야! 벌써 몇 번일세!”히시면서  씁쓸한 뒷맛을 기분좋게 
웃어넘기셨다. 내가  식당에만 나타나면 꼭  이런 사건이 생기는  것을 보다못한 
식당 주인 이무성씨는  밤잠 안 자고 여구했다면서, 앞으로 누구를  만나도 “처
음 뵙겠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안녕하세요!”라고만 인사하라고 일러주
시시까지 했다.
    우리집 ‘경제권’
  날씨가 따뜻해지기 사작하는 계절이 되면 생기는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겨우
내 문을 닫았던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여는 것과 때를 같이해 매월 아내
로부터 받는 내 용돈이 아이스크림 값으로 만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잘 버는 
프로 축구 선수가 그까짓 아이스크림 값 때문에 엄살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막
내아들 세찌까지 아이스크림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덤벼드는 실정이니 하나, 두
리, 세찌, 그리고  내가 먹어치ㄴ우는 아리스크림 값은  하루에도 상당하다. 과자
공장 딸 출신인 하나 엄마는 어려서부터 단 것에 질렸다는 이유로 아이스크림을 
입에도 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내 용돈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경재권이 없는 나로서는 날이 따뜻해지면 용돈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내가 하나 엄마로부터  경제권을 몰수당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13년 전이다.  장가든지 얼마 안되어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를  치르고 있을 
때였으니까 5월 아니면  6월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우리는 동대문운동장
(옛 서울운동장) 앞에  서울장이라는 여관에서 합숙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시
당에서 해군 장교 세 분과 자리를 함께하게 됐다.  세 분 가운데 한 장교는 얼굴
이 약간 곰보였는데 말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배를 타면서 일어나는 일이며 귀신
애기를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늘어놓는 것이다. 잠수함,  최신식 무기, 거기에다 
진짜 바다에서 나타난다는 긔신얘기까지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나는 홀딱 
빠졌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이 24세, 더욱이 결혼까지 했으니 어리
다고만 할 수도 없는데도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던지 내게는 그 장교가 위대
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 장교는 한참  구수하게 얘기를 늘어놓더니 배가  조금 전 인천항에 도착해 
잠시 외출을 나왔는데 아직 짐을  안 풀어 빈몸으로 나왔으니 돈을 좀 빌려달라
고 내게 부탁했다. 때마침 내게는 돈이  없어 서울장 주인 아주머니한테서 5만원
인가 얼마인가를 빌려 내게 있던 비닐가방  한나와 건네주었다. 그러자 해군장교
는 가방은 그만두고 그 장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속았다기보다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후  여고나 주인인 아주머니에게서  꾼 돈을 
갚아야 할 처지여서 할  수 없이 하나 엄마한테 애기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지
금까지 ‘어리숙한 사람’이란 딱지와  함께 경제권을 박탈당한 체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돈이  궁할 때면 그 곰보 해군아저씨가 생각난다. 13년 
전 얘기니 그  아저씨도 많이 변했을 텐데 내글을  접할 때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할 지 자못 궁금하다.
    나의 지랑스러운 둘째 형님
  처제들은 시골에 계시는 둘째 형님을 ‘일용씨’라고  부른다. 그 연속극을 나
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처제들의 얘기인즉 전윈일기에 나오는 ‘일용씨’의 
모습이 둘째  형님의 모습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형님은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서 버섯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고향집에 전화를 하면 밤  열한시가 넘었
는데도 어머님과 함께 버섯을 다듬고 있다고 할  만큼 일이 많은 작업이다. 그러
나 어머님, 형수님, 그리고 형님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하는 엄청난 일의 양에 비
해 일년에 떨어지는 돈이 칠백만원  정도라고 해서 나는 참 심란한 기분이 들었
는데 정작 형님은 그만한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보통 자부심을 갖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천성 때문인지 형님은 한번도  도시생활을 꿈꾸거나 계획한 적이 
없는 분이다.  작은 운동구점 하나라도 동생  이름 걸고 할 법한데  여지껏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차도 갖고 계시지 않는 것이다. 농사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형님이 지난 번 만났을 때 “나
는 말이여, 버섯을 하면서도 뭣을 조금씩 치면  일이 훨씬 수월한데 유명한 아우 
생각을 하면 절대로 그렇게 못하겠어. 내 버섯은  정말로 아우 덕에 아무것도 치
지 않고 키우는거여”하며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말할 수 없는 고마움
과 형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 얼만 자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형님은 자신의 인감도장조차도  마을일을 돌봐주는 ‘이장’에게 맡겨놓고 그 
이장이 형님 몰래  오백만 원 을 대출받아 썼는데도  몇 년씩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만큼 순진하신 분이다.  그런 형님이 얼마 전 축구교실을 할  만한 아주 좋
은 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머뭇거리는 나를 보자 내가 돈이 모자라서 그러
는 줄 알고  몹시 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범근아! 
하교 뒷산에 있는 우리 밭을 팔면 한 사천만 원 된다는 데 내가 그걸 팔아서 보
태주면 그 땅을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우리 둘째 형님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고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신 형님.  하루종일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느 
초라한 모습의 농군 형님.  그러나 형님은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
다는 것이 기쁠 뿐이고 나는 그런 형님이 박사보다도 장간보다도 더 자랑스러울 
뿐이다.
    사기꾼이여 지구를 떠나라
  내가 독일에  가기 전 한국에 있을  때 일이니까 꽤 오래된  얘기다. 여의도에 
산다는 어느 아주머니가  전화로 “동생 있느냐”라고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막내이기 때문에 친동생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척중에도 그 당시 대학에 다
니는 동생은 없었다. 그 때 매우 걱정스럽게  전화를 끊은 아주머니가 심상치 않
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상사 직원 부인이  결혼하기 전 내 
동생임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간 적이 있었음을 뒤늦게야  알앗다. S대학
을 다녔다는 그 여자는 아직도  그 사기꾼을 내 동생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
었다. 다행히  나는 동생이 없어 변명하기가  쉬웠고 그 여자도 속은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 해 6월에는  사기꾼이 처가에 사기를 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떤 남자가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축구 감독 김호인데  이번에 독일에 갔다 오면서 
차범근이 장모님 갖다  드리라고 주는 선물을 잦고 왔다. 그런데  세관에서 통관
세 21만원을 물으라고 하니까 내 온라인 구좌로 돈을 좀 보내달라”면서 구좌번
호까지불러주더란 것이다. 평소  나나 아내는 “괜히 세관  검사대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어 귀국할 때 변변한 
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양주 한 병도 안 가지고 간다.  그래서 손 아래 
동서는 “형님! 비행기  안에서 파는 양주 한 병은 예의예요”하고  항상 불평을 
하는 판이다.
  그런데 10년 동안 선물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장모님 생각에 “
천지개벽이 아니고선 세금까지 물어야  할 별난 것을 사서 보내겠느냐”고 생각
햇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셨는지 전화 한  통화 안한 걸 보면 평
소 교육(?)의  효과가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사기꾼들이 의외로  많다. 가끔씩 
한국에 가 있을 때면 백년 묵은 산삼이 있다느니 기가 막힌 뱀탕이 있다느니 하
면서 멀쩡하게 밥 잘 먹고  튼튼한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전화를 해서는 몇백만원
씩을 겁없이 불러대곤  했다. 또 그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신문사나 
잡지사 이름을 대고 시간 좀 내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하나보다 하고 만나면 처
음보는 사란이 책이나 레코드  같은 것을 사라고 할 때, 또  이런 것들이 중고등
학교 코치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압력으로 느껴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 대
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내 눈에는 사기꾼으로 느껴질 뿐이다.
      좋습니다. 한번만 더요
    모델 연기는 어려워
  CF 녹음을 하러  갔더니 촬영을 마친 감독께서 “필름이 모통의  경우보다 배
가 소모되었다”고 혀를  내두른다. 필름 값도 필름 값이겠지만 온  가족을 찍어
야 하니 아침 아홉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날 새벽 세시까지 계속된 촬영이 순
조롭게 마무리될 리가  없다. 더구나 우리집 네로황제인 막내 세찌는  밤 열한시
가 되니까 필름이 돌아가는데도 연기(?)를 하다  말고 “나는 잘거야”하고 소파
에 누워서 안  일어난다. 거기다 형하고 놀다가 넘어지는 장면을  찍는데 두리가 
잘못해서 세찌를 조금 다치게 했더니 이때부터는 형이 옆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는 “나는 두리 때문에 삐졌어(화났어)!”하면서 심술을 부려대니 수십명의 스태
프들은 세찌 때문에 손놓고 심기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다른 도리
가 없었다.
  아이들을 모시고(?) 촬영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모래주머니를  매고 등산을 
가는거나 다를 바 없다. 그래도 노는 것은 카메라  의식 않고 신나게 잘 노는 터
라 추은 눈밭에서도 잘 찍었는데 요구르트를  먹는 신에서가 문제였다. 심사규정
에 13세 이하는 제픔선전을 못하게 되어 있어서 하나만 요구르트를 먹게하고 두
리와 세찌는 못 먹게 하니까 “두리야! 좀 웃어!”하고 감독이 아무리 외쳐도 기
분이 안나는데 웃을 수 없는 법! 보통 때  요구르트라면 앉은 자리에서 서너개씩 
먹어치우는 실력의 소유자인 두리에게 겨우  한나만 먹게 하고 못 먹게 해 놨으
니 심토이 날 수 밖에....
  그래도 나는 수차례 광고 촬영을 한 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족과 함
께 찍는 광고가 제일 편한 것 같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애들만 보면 저절로 웃
음이 나오고, 연기를 하지 않아도 공을 가지고  애들과 노는 것이야 내 일상적인 
일(?)이니까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일이다. 마누라 보고 웃는  것도, 애들을 쓰
다듬는 것도, 축구를 하는  것도 다른 모델과 하던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
도로 수월했다. 그래도  새벽 세시까지 지지 않고  곁에서 같이 찍어준 하나, 두
리, 세찌, 누군가 애들에게 무슨 고생을 그리 시키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
이들이 아주 좋은 경험을 했으리라고 스스로 믿는다. 남을 위해서 참는 것, 일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 그것은 일의 종류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귀중한 것만은 틀
림이 없으리라.
    자랑스러은 광고 모델
  독일에 아서 처음으로 메이드 인 코리아를 내세우며 수출하는 한국 회사와 광
고 계악을 맺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광고에 출연했었지만 스스로 영광스럽다
는 생각이 들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고계에서는 악명  높은 하
나 엄마까지도 “그렇게 해서  물건만 잘 팔린다면야”하면서 인심이 한껏 후해
졌는데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수출, 수출’하고 떠들긴 하면서도  사람들 눈
에 잘 띄이지  않는 곳을 골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깨알같은 글씨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새겨 놓거나 아예 국적 불명의 상품으로 해외사장에 나오는 상품
이 적잖았다. 그런데 나를 광고  모델로 택한 SKC(선경화학)에서는 한국에서 만
들었다는 것을 당당히 외치고 나오겠다고 하니 반가울 뿐 아니라 외히려 고마운 
생각까지 들었다. 시장에 나가면 딸기,  포도, 심지어는 감자까지 ‘독일산’아라
는 푯말을 꽂아 놓는 것으로 최고의  신용도를 대신 말하고 있는데 SKC는 차범
근을 내세움으로써 성실한, 그리고 프로다운 수준을 대변하고 싶다는 것이다. 독
일인인 광고매니저와 나의  생각은 현실적이었다. 무조건 최고의  품질을 주장하
는 것은 현실적으로  구매자들이 믿지도 않을뿐더러 꼭  촤고 품질의 가장 비싼 
물건만 팔리는 것른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답게 성실하고 부
지런한, 그리고 품질  면에서도 차범근처럼 프로급이란 점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마라도나가 아니길 참 잘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효과적인 광고를 위해서는, 8년 동안  설명한 끝에 겨우 사람들이 ‘붐
근차’로 부르게  된 나의 이름을  다시 원점인 ‘차붐’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유는 축구에 전려 관심이 없는 층의  사람들까지도 ‘차붐’이라고 하면 “아, 
그 축구 선수”하는데 ‘붐근차’는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조사 결과가 나
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듣기에  싫지 않은 얘기는, 조사중에 나에 대한 부정
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만났다는 것이다. 큰 돈 버는 것도 
아니고 큰소리 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떨리고 흥분되는 나를 보면서 아직까지 
그래도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구심점을 향해 똘똘 뭉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3개월이나 공짜 차를 타고서도 도요다의 광고세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그
렇지만 테니스 스타 보리스 베커가 독일의 간판 회사인 아디다스가 아닌 경쟁회
사 푸마의 상표를 선전하는 것을 보면 우리 한국 사람괴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
느 것 같다. 조금은 촌스럽기도 하고 지구촌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 혹은 고루한 
사고방식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을 줄 수 있는 것이 바
로 이것 아닌가  싶다. 이제는 나 차범근이도 광고 회사가  치켜주는 ‘비행기’
에 힘입어  누그처럼 뭔가를 보여줘야 될  모양이다. ‘성실하고 진실한, 그리고 
차범근처럼 좋은 한국 상품’이란 광고회사의 선전문구가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
다.
    CF 촬여의 고충
  생각보다 돈도 많이 벌지만 그만큼 어려운 게  굉고 촬영이다. 우리가 보통 아
침저녁으로 TV 앞에서 10초 20초 길어야 30초씩 보는광고가 1주일에 걸쳐 찍힌 
것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는 녹음까지 
끝내려면 꼬박 1주일이 걸린다. CF 그 자체는 짧지만 매일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모습은 용납이 안된다. 그래서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찍게 마련인데  음료수 마시는 장면을 찍는 일은 곤욕중의  곤욕이다. 아무
리 나처럼 잘 마시는 사람이라도  한두 번 마시면 배에서 물이 출렁거리게 마련
인데 그것도 ‘한번만 더’‘한번만  더’하면서 열 번 이상씩 되풀이하다 보면 
식도가 차고 넘친다.  그것도 목젖이 움직일 정도로 꿀꺽꿀꺽 마셔야  된다고 감
독이 곁에서 성화니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괴롭기는 감독도 마찬가지라고들 한다. 그들은  주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평소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고 한다. 그런데 나같은 경우는  감독이 모델
을 모시고(?) 다니며  일을 해야 하니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라고  해서 촬영도
중 한바탕  웃기도 했다. 불평은 감독에게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조연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주연이 “밥 좀 먹고 합시다”해야 밥도  먹고 쉬기도 할텐데 내 경
우는 그저 “빨리  합시다. 나 시간 없어요”소리만 하니 자기들이  굶기밖에 더 
하냐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번 한국에서 촬영할 때는 나도 스테프들도  모두 점
심을 굶어 다은 직전까지 갔었다.
  내가 광고를 처음 찍은 것은  1979년인데 그때 찍은 그 광고가 한국 광고대상
을 받았었다. 새벽에 해가 뜨는 것을 배경으로  해변가에서 맨발로 볼을 차고 가
는 모습이었는데 해가 뜨는 순간을 놓치면 안된다고 캄캄한 새벽부터 해운대 모
래밭에 준비 완료 해놓고 해뜨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5월이어서 아직 맨발을 물
에 담그기는 이른 때였는데 ‘한번만  더’가 열 번이 되고 가끔씩 감독이 섞어
서 외치는 “좋습니다.  한번만 더요”하느 속임수에 ‘행여나’하면서  하다 보
니 나중에느 발이 부르터 내발인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뛰는 사람이돼서 뛰는 일만큼은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이런 때는 또 도와주시는 
분들이 혼이 난다.
  한번은 남이섬에서 가로수 사이로 새벽 안개를 뚫고 뛰는 모습이 있었는데 안
개가 허구헌 날 끼어주느 것도 아니고 실제 안개가 낀 날은 햇빛이 부족해서 카
메라에 담을 수도 없기  때문에 고충이 여간 크지 않다. 그래서  맑은 날 아침에 
안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깡통에 구멍을 내고 줄울 단 다음 그 안에 불을 피우고 
연기를 내면서 나보다 2-3m앞에서 깡통을 아래로 흔들고 지나가면 연기가  올라
올 때 뛰는 것처럼 보인다. 헌데 앞에서 뛰어가는  역할을 맡은 분이 서너 번 하
더니 숨이 차다고  난리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돌아가면서 이 일을  도와줄 수밖
에 없었느데 이제는 어느새 굉고 찍는 일도 나의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거의 매번  한국을 방문할 때면 빠지지 않고 치르느  연례 행사가 돼버
렸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 가끔씩 처제들이 나에게  못생겼다고 할 때 나는 웃
으면서 대꾸한다. “이래봬도 내 얼굴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얼굴이라구”
    광고의 위력
  “Mexico mi amor"  우리 두리 녀석이 레코드판 한 장 사달라고 조르던 노래
다. “미 아모!  미 아모! 미 아모!”라는 메로디가  부드러워서 남미의 낙천적인 
분위기가 잘 나타나는 노래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클래식 가수인 페터 알렉산더
가 국가대표팀과 함께 취입한  노래인데 월드컵 때마다 레코드판 제작은 축구협
회의 주머니를 상당히 두둑하게 해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한 
비행기, 숙박비  등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가  서독의 경우 20억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식으로 경비를  충당하지 모르지만 이곳은 거의 전액을 광고로 
벌어들이기 때문에  월드컵이 가까워지면  광고전이 더욱 치열해진다.  이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나 초코릿은 이 무렵이면 틀림없이  축구협회 마크를 달고 나온다. 
축구협회의 고객이다. 그 외에도 콜라, 알콜 없는 맥주 등 수도 없이 많다.
  축구를 통한 선전 효과가  없지는 않으니까 몇십억원씩 광고로 돈을 벌어들이
겠지만, 이탈리아나 미국에 비하면 아직도 그 요란한 정도가 덜하다는 자평이다. 
분데스리가에서도 광고는 중요한  수입원이다. 선수들의 유니폼 앞에  붙이는 광
고는 대개 1년 혹으 2년  단위로 계약하게 되는데 가장 많은 돈을 받는 팀은 말
할 것도 없이 바이에른 뮌헨이다. 매녀 6억원  가까은 돈을 받을 뿐 아니라 선수
단에 필요한 비품을 지급하는데 각 물건에는 빠짐없이 광고주의 상표가 박혀 있
다. 함부르크나 쾰른도 4어원  이상은 벌어들이는 구단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돈을 쓴 만큼 효과가 있을까?
  나는 거꾸로 생각해 보고 싶다. 매년 새  시즌이면 가장 치열한 흥정이 벌어지
는데 그것은 다름아니  축구협회와 방송국간의 1년 사용료 협상이다.  스포츠 쇼
에 사용하는 게임  장면을 돈주고 산다는 것이다. 분데스리가 직접  중계는 금지
되어 있다. 구단의 입장  수입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취한 조치다. 지난해의 경우 
게임 장면 사용료로 방송국에서  협회에 30억원이상을 지불했는데 그 얘기는 그
만큼 시청률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
램에 자연스럽게 자기네 옷을  입혀 TV에 내보내는데 효과가 없을 리  없다. 우
리 두리 녀석이 어렸을 때  비록 글은 못 읽지만 유니폼 앞에 붙은 상표만 보면 
어느 팀인지 금방 알아맞히곤  했다. 놀라운 세뇌교육이다. 잘하는 팀 상표는 꼬
마들에게 대단한 것처럼  느껴질게 뻔하니까. 유럽팀과 같은  공식 유럽축구연맹 
주최 경기에는 팀에서 입는 일반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같은 모양에 
광고를 없앤 유니폼을 사용해야  하는데 유럽에서 열리는 3대 유럽 결승전은 전 
유럽에 중계에 된다.
  10년 전 내가 속해  있던 프랑크푸르트 틴은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전에 
올랐었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흰색 상의에 까만 팬티를  입었는데 프랑크푸르트
의 마크가 왼쪽  가슴에 조그맣게 달린, 규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복장이었
다. 6만이  꽉찬 운동장에서 결승전을 벌인  끝에 ‘샤웁’이란 선수가  한 골울 
넣어 1대 10으로 승리,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상 준비를 하는 짧은 시간
에 우리는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옷이 젖어  감기에 걸릴까봐서”라
며 우리가 평소에 입던 미놀타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
는데 젖은 옷과  갈아 입으라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의  환호소리에 끌
려 다시 나왔을 때 수백명의  카메라 맨들이 우승팀을 찍으려고 우리를 향해 몰
려 들었다. 중계되는 가운데  시상식도 근사하게 끝마쳤다. 컵을 앞에 놓고 찍은 
‘우승 팀’사진은 각국으로  보내져 스포츠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유럽축구
협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광고주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느긋하게 유럽축구협회에서 프
랑크푸릍로 요청한 벌금만 대납해주면  되는 것이다. 200만원. 생각보다 적은 액
수다.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가 이 일을 해주고 얼
마나 받았을까? 나는  모른다. 신문에도 없다. 다만  효과가 있기에 그런 법석을 
떨었을 것이란 점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범근 차두리, 우리는 차 씨다
    애들 맛에 산다.
  오늘 우리 하나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가방에서 신문지 한 조각을 꺼내놓는
다. 선생님이 가위로  오려주었다는 신문에는 내 사진이 들어 있고  장황하게 칭
찬을 늘어놓은 스포츠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하나는 가끔씩 친구나  선생님이 주
었다면서 신문을 들고 집에 온다.  하나의 아빠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래
서 나는 딸의 자부심을 채워주느라 오전 연습을 마치면 부랴부랴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리고 하나네  학교 앞으로 달려간다. 뻔뻔스럽고 변죽이 좋은  아들 두리하
고는 달리 하나는 성격이 차갑고  소심해서 저희 엄마가 신경은 많이 쓰는데 수
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걸어나오다가  나는 발견하고서는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다.
  "재미있었어?" "응."  "쉬는 시간엔  누구와 놀았어?"  "바네사." "공부는  잘했
고?" "응. 오늘 시험봤는데 하나 틀렸어." "왜?" "아빠도 학교 다닌 때 틀렸잖아? 
할 말이 없다.
  100점을 맞지 못했을 때  내가 한마디라도 하면 하나가 각본대로 나오는 저희 
엄마의 대답을 벌써  외어버린 것이다. 보기와는 달리 하나 엄마는  애들에게 태
평이다. "더하고 뺄 줄 알고, 곱하고 나눌 줄 알고, 쓰고 읽을 줄 알면 그 다음엔 
정신만 바로 박히면 돼. 100점 안 맞으면 어때?" 대충 이런 주의다. 매학기를 마
칠 때마다 이곳에서는 성적표를 부모들이 가서 15분씩 선생님과 면담한 후 받게 
되는데 우리의 경우 부부가  꼭 같이 간다. 지난 학기 때는  교실에 들어서서 악
수를 나누자마자 선생님이 "토요일에 TV를  봤느냐"고 물었다. 평소에 TV를 잘 
안 보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고 하자 유럽  텔레비젼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그밖의 인접국가에서 공동방영됨)에서 하는 '달리 달리'라는 프로그램에 "레버쿠
젠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퀴즈가 나왔는데  출연자가 
즉각적으로 "차붐"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TV를 보다 말고 "내가 바로 
그의 딸을 가르치는 선생이요"해서 자기 남편하고 한바탕 웃었다면서 즐겁게  얘
기했다.
  피를 나눈 자식이란  게 그런 모양이다. 평소에는 나의 직업과  관련된 얘기를 
하는 사람을 참 싫어하는데 우리 애들이 이런 일로 자부심을 가질 때는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하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얘기한다. "아빠, 교장선생님이 사인 다
섯 장만 달래." 얼른 책가방에  넣어준다. "아빠, 유치원에서 축구공에 선수단 사
인을 해서 기증해 달래. 가을 바자에 판다고." 여부가 없다. 한 선수 것도 빠뜨리
지 않고 받아서  보낸다. 하나가 좋아하니까 크리스마스 학예회 때는  두 시간을 
어린이 의자에  앉아서 재미없는 (?) 발표회를  구경한다. 사람 모이는 데라고는 
질색인 내가 두리의 유치원 축제에서는 주심을 봤다.
  나는 아직도 나의 일로 파티나 모임에 가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선수들이 모여서 식사하고는  춤을 추러가곤 하는데 나는 빠지기 일쑤이
다. 그러나 웬일인지 아이들  일에는 빠져지지가 않는다. 어쩌면 그게 이곳 독일
의 분위기인지도  모른다. 한국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애들 학예회에 아빠가 
넥타이 매고 참석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쉽게 '
등신'같다고 얘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우리 가족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표시라고 믿기  때문에 집안 행사에 빠져본  적이 없다. 
(하나 엄마는 분명히 아니라고 얘기하겠지만.) 결혼  기념일도, 하나 엄마 생일도 
늘 잊어버리고 지나가서 이제는 바가지조차 안 긁게 되었지만 토요일에 골을 넣
고 집에 돌아올 때는 애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엑셀레이터에 힘을 준다. "아
빠 골 두개 넣었지?" "그럼." 나도 잰다.  애들이 알아주는 맛에...
    개구쟁이 두리야!
  두 번째  태어난 녀석이 두리다. 처음에  딸을 낳고 둘째를 기다릴  때 솔직한 
심정으로 아들일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  하나 엄마가 딸이 넷이나  되는 집의 
큰딸인데다 첫딸을 낳을 때 나는 재팬컵에 출전 중이었는데 첫애를 얻고 좋아하
는 나에게 "딸도 괜찮아!"하는 재한이 형 (전 주택은행 김재한 감독)의 한마디에 
김 팍 세고 나니 무슨 선택받은 사람만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러나 한여름, 그것도 오스트리아로 합숙훈련을 떠나기  바로 하루 전날 프랑크푸
르트 마리안 종합병원에서 태어난 녀석이 고추를  달고 있었다. 그애는 그날부터 
축구 선수였다. 아니 저희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배부른 사진을 신문에 싣고
서는 번번이 "제2의 차범근이 들었다"고 떠들었으니 그때부터  이미 축구를 느꼈
을 것이다.
  나는 나와 아주 다른 아들 녀석을 보면서 그래도 피를 속일 수가 없다는 하느
님의 섭리에 놀란다. 슈팅을  때리는 작은 다리에 힘이 들어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슬며시 그 녀석의 단단한 허벅지를 만지고  만다. 내 허벅지는 굵기로 소문
이 나 있다.  크라마 감독은 나의 허벅지가 자기 허리만하다고  감탄했는데 두리 
녀석의 허벅지도 아이들의 허벅지라고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단단하다. 
그리고 빠르다. 나는 두리가 꼭 축구 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그렇다고 축구 
선수가 되는 게  싫은 것도 아니다. 다만  녀석이 공을 갖고 노는 모습을  볼 때 
점점이 박힌 그 둥그런 것이 그 녀석과 나를 묶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숨길 수
가 없다. 매주 화요일은 두리의 훈련이 있는 날이다. 훈련 시간이 똑같아서 날씨
가 좋으면 우리 구단 바로 옆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는데 연습 도중 곁눈질로 훔
쳐본 그 녀석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콧노래를 부르게 할 줄을 미처 몰랐다.
  녀석은 나이가 너무 어려  (그 당시 6세) 무리 가운데서 공을  가장 못 찼지만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공을 다루려고 애쓰는 모습이 어쩐지  나를 닮
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나는 녀석의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말을 '나는  아빠를 
좋아해요'라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의 가장 진실되고 열렬한 팬 두리! 녀석
은 아빠 팀이  곧 TV에 나올거라고 저희 엄마가  일러주면 아픈 아이처럼 꼼짝 
않고 무릎에 앉아 기다린다. 또 TV 인터뷰 때면  녀석은 대단히 충실한 조연 배
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면  녀석은 뒷자리 중간에 앉아 같이
하기도 한다. "끼! 부르릉!"하면서 핸들을 꺾고  브레이크를 밟는 시늉을 하며 커
브길에서는 나와 똑같은 각도로 몸을 튼다.
  나와 두리는 자동차 팬이다. 그래서 둘이서만  벤츠 공장으로 정비하러 들어갈 
때는 가장 신나는 날이다.  일단 차를 맡기면 끝날 때까지 한나절  동안 다른 차
를 사용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만끽하기 위해 차를 고르
는데 정신을 판다. "아빠! 저거 콤비!" "아냐, 이거  새로 나온 차인데 260km까지 
나간단다." 두리는 아직 속도에 대한 쾌감보다는 놀 수 있는 자리가 많은 왜건에 
관심이 더 많다. 그래서 의견일치를 보고 차를  골라 타고 나오는 순간부터 아버
지와 아들은 해피!  해피다. 차범근, 차두리. 우리는  차 씨다. 그러나 그  녀석은 
나하고는 전혀 다른 배짱이 어느 구석엔가 두둑하게  들어 있다. 또 호랑이 같은 
제 엄마를 구슬리는  재주도 내가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거기다 엉뚱하기까지 
하다. 날씨가 추워져 제 엄마의 감기 잔소리가  좀 심했던지 하루는 감기가 걸리
나 안  걸리나 본다면서 팬티까지  홀랑 벗고 잠자리에 들더니  그 다음날 아침 
"Kein Problem (No Problem)!"이라는 것이다.
  독일 유치원에는 자기 간식을 꼭 가지고 가서 아침 열 시에 함께 모여 먹는데 
녀석이 안 가지고 오면 다른 아이들이 서로 자기 것을 나눠 먹자고 하는 모양이
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 골라먹는 재미에 보름  이상이나 간식을 
안 가지고 유치원을 오간  뻔뻔스런 녀석이다. 두리 녀석은 BMX (ET에 나오는 
자전거)도 무척 잘  탄다.  언덕길도 자갈길도 내가  천천히 뛰는 속도보다 훨씬 
앞질러서 달려간다. 며칠전 조깅훈련에 녀석은 자전거를  타고 나의 뒤를 따라나
섰다. 그날도  녀석은 휙하고 앞질러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소리쳤다. "아빠! 
빨리 가자!"
  "야. 임마! 아빠  힘들다. 천천히 달려!" "빨리  와!" 한마디 남기도 휙  달린다. 
그러다 마지막 가장  힘든 과수원 언덕길이 나오자  엉덩이는 이미 안장에서 뗀 
채 무슨 사이클 선수마냥 자전거를  왼쪽 오른쪽 흔들면서 거의 선 자세로 힘들
여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웃었다. 번쩍 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두리야!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단다. 그래도 나는 네가  있어 든든한데 나도 너에게 든든한 
아빠였으면 좋겠구나. 나의  넋두리를 삼켜버리는 두리의 급브레이크  소리에 나
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가자! 엄마가 맛있는 거 해놨을 거야! 가자!"
    별난 아들 이름 '세찌'
  "야! 차붐! 넌 드디어  진짜 축구 선수가 된거야! 위대한 축구 선수는 다  애들
이 셋이거든.  펠레가 그렇고 베켄바워,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슈스터, 그리고 나 
니켈..." 셋째를 낳았다는 신문보도가 나자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 니켈이 부리
타케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세찌. 이곳 독일 친구들은 저마다 들어보지
도 못한 이름을 지어 이제 겨우 두리란 이름이 익숙해질 만하니까 또 세찌를 외
워야 하게 됐다고 투덜거리는데 이름 가지고  말이 많기는 서울서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통해 "축하합니다"하고  점잖게 운을 떼고 난 『스포츠 서울』의  방석순 
기자는 두리 다음에  난 아기의 이름이 세찌라고 하자  "세상에 '찌'자 들어가는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 이름  호적에 올릴 참이요?"라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이미 지어 놓은  이름, 게다가 신문에 나고 이곳 TV  해설자까지 축구
해설 도중 자세히  소개해 놓은 우리집 아니의 이름을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우리 세찌 녀석은 이름만 요란한 게 아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1986년  10월쯤 세찌가 태어날 것이라는 밝혔더니 어
느 팬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차 선수와 통화할 기회가 있거든 요즈음은  하나
만 낳기 운동이 한창임을 꼭 일러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도 아니고 '한집 걸러 하나'의 추세라고 하니 우리 같은 경우는 아
파트 한층의  애들을 몽땅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한국 축구  선수들도 나이가 
젊을 수록 '하나만 낳고 끝'이라고 하는데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수년을 산 
가장 모범적이어야 할 영증 (조영증)과 나만 애가 셋이니 사실 할 말이 없다. 거
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 『익스프레스』지는 내가 한국 가족계획협회의  '둘
만 낳기 운동'에 모델로 앞장섰다는 사실까지 알아내서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
를 유감없이 폭로하기까지 했다.
  세찌, 그러나 나는 우리 애들 셋 가운데 이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첫 번째 
난 아이를 '하나', 두 번째 아이를 '두리'라 지었던  나는 이번 아기가 세 번째기 
때문에 '세찌'라 했다.  모나지 않으면서도 처지지 않는 게 셋째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셋째 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
다. 수재, 천재, 일등,  또는 아슬아슬한 이등은 많으니까 우리 세찌는 그저 평범
하면서도 너그러운 남아로 건강히 커주기나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 얼굴 덕 보는 아내
  겨울에 먹는  감, 특히 말랑말랑하게 적당히  건조된 연시는 별미중에 별미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연시를 보기가 힘들더니 몇 년 전부터는 가끔 연시 파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지에서  들여오는 것들로 한 개에 500
원 정도하니 가격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직은 독일사람들이 감을 잘 모르는 터
라 과일가게에서도 모양으로 몇 개 갖다 놓는 식이지만 나야 한 번 먹었다 하면 
뿌리를 뽑는 실력이기 때문에 늘 한 상자씩 특별 주문을 해다가 먹곤 했다.
  이런 적도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가게의 문을  닫을 시간이 넘어 감을 주
문하겠다고 과일가게 안으로 들어간 하나 엄마가 붉으락푸르락해서 나오는 것이
었다. 심상치 않다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하나 엄마  왈 가게를 치우고 있던 이탈
리아 출신의  청소부 부부가 있길래  주인을 찾았더니 "왜 그러냐"면서  "여기서 
일하려고 그러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곁에서 이 말을 듣던 청소부 남편이 기
겁을 해 아내의 입을 틀어 막으려 했지만 청소부 아줌마야 이제 겨우 일터를 구
해 일을  시작한 처지니 밍크코트고 뭐고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저 어느 
동양 여자한테 자기  일자리 뺏길까봐 겁만 났던 게다. 나로서는  조금은 고소하
고 재미가 있어 하나 엄마가  어떻게 하는가를 가만히 눈여겨 봤더니 한달 가량
을 그 가게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어느날 하나 엄마가 근처 제과점에서 빵을 사가지고 
나오자 과일가게 주인이 뛰쳐나오더니  "미세스 차! 정말 미안해요. 일하는 아줌
마가 온 지 얼마 안돼 프라우차 (차 선수  부인)인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그
만... 나는 그 소릴 듣고  아주 기절할 뻔했다우.  우리 남편이 몇 번이나 전화를 
해서 사과를 하라고 그러는데 아무리 전화번호부를  찾아봐도 없더군요.  레버쿠
젠 팀으로 전화를 했더니 안  가르쳐 주고요..." 젠장!  미안하긴 뭐가 그리 미안
한지 원!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하나 엄마가 은근히 약올라 하는  걸 보는 
것도 보통 재미가 아니던데....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사를 한 뒤 처음으로 미장원에 가는 날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데리러 가기로 하고  차에서 내려줬는데 이 미장원 역시 하나 엄
마를 처음 보는지라  대접이 영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훈련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 내가 미장원에 들러 "여보! 차에서 기다릴께"하고 나오자 주인 남
자가 인터폰으로 자기  부인 (아마도 미용기술이 가장 뛰어났던  모양이다)을 불
러내고 없다던 스포츠 신문을 일하는애  시켜 사오게 하고 커피를 끓여 주고 갑
자기 부산을 떨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 엄마가 얼굴을 익힌  가게만 찾아다
니려 했던 속셈을 알 만하다.
  어디 그뿐인가! 시청에  전입신고 하러 혼자 갔다 오더니 일하는  여자애가 남
편도 같이 와야 한다고 부득부득 우기길래, 애들  학교 보낼 때 가까워서 부리나
케 그날 하오 시청에 갔었다. 책임자인 듯싶은  분이 나오더니 나를 대뜸 알아보
고는 "바쁠텐데 이렇게 직접  오지 않아도 되는데. 앞으로는 전화만 하세요"하면
서 문 앞까지 따라나왔다.  이쯤 되고 보면 하나 엄마가 어디  간다고 할 때마다 
귀빈용 벤츠차를 회사에서 보내주고  레버쿠젠팀 회장 비서실에서 미리 알아 이
것저것 해주지만 어디 그게  하나 엄마 예뻐서인가.  다 나  같은 사람 남편으로 
둔 덕이지....
      차! 골 언제 넣을 거야
    지도자 수업 걱정된다.
  세상일에 나는 항상 역부족을 느낀다. 나는  세상일에 노력이나 관심을 기울이
지 않는 편이고 '얼마나  많이 아는가'라는 잣대를 갖다 댄다면 유식과  무식 중
에 나는 분명히 무식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탤런트, 가수의 이름은 물
론이고 내가 쓰는 축구 용품의 상표도 나는  전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음식점
의 식사 메뉴만 해도 그렇다. 다음에  다시 먹고 싶으면 '맛이 이러하고 생긴 것
은 이런 음식'하는 식이다. 외기조차 힘든 음식 이름을 머리에 담는다는 것이 나
에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애들의 생일, 결혼기념일 같은 것을 기억하고 
챙긴다는 것은 당연한  무리다. 그래서 내가 매일 아침 읽는  성경책의 앞페이지
에 마누라 생일만큼은 적어 놓고 잊이 않으려고 애쓰는 사실은 지나가고 나서야 
"미안해, 내가 이렇게 적어  놓기까지 했는데"하면서 보여주는 효과를 다분히 노
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독일에 살면서 사무실 직원들의 이름을 내 식으로 개명해서 부르는 것은 다반
사고 꼭 필요할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정확한 발음으로 알려주어야만 했다. 레
버쿠젠 클럽의 비서인  미세스 엔스트를 입으로 나오는 대로  '에른'이라 부르기 
때문에 분명한 이름을 대야 할 때는  모르는거나 마찬가지다. 아마추어 매니저는 
그냥 뚱보라는 별명으로 적당히 부르고 옛날 회장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할아버
지, 그 부인은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 동안에 이런 것들이 모두 애교로 
통해서 남들을 웃기기도 하고 즐겁게 해주기도  했는데 정작 문제는 이제부터다. 
1989년 3월 6일이면 쾰른  체육대학에서 개강하게 되는 지도자 교육과정의 교과
서를 배부 받고 단어를 찾아야 한다. 아무리  줄잡아도 단어장 서너 권은 외워야 
할 판이다. 그러니  잠이 오게 생겼는가? 찾아서 정리해주는  것이야 비서 (마누
라)가 한다고 하더라도 머리 속에 집어넣는 일은 아무도 대신  해줄 수가 없으니 
그 동안 편안하게 모셔둔 머리를 한꺼번에 쓰느라고 고장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다.
  우리나라 말에 '몰랐으니 했지'라는 말처럼 모르고 겁  없이 덤비는 것이 상책
일지도 모른다. 정 하다가 안되면 할 수 없다.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서울에 가봐
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수 정예  스파르타식 교육' '책임지고 합격' '명문
학원' 듣기만 해도 으스스한  재수학원 광고들을 보니까 거기에는 잘 외우고  배
울 수 있는 신통법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거라도 급하면 배워야지. 그후의 6개
월은 그래도 나에게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기대감에 설렘이 없지도 않았다.
    고된 지도자 수업도 즐겁다
  "자-! 차붐이 이제 통역이 없이 왔습니다요." 쾰른 체육대학 입학 첫날 서글서
글한 대학 사무실 비서 아주머니의 놈담에 모두들 한바탕 웃었는데 사실 처음부
터 나는 모자라는 독일어 실력으로 교수들의 얘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종일 신
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저녁에는 머리가 띵하고 아팠다. 책가방도 새로  사고 머
리도 깎고 신입생답게 긴장하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정작 그곳에
서 만난 얼굴들을  새로운 교우가 아닌 수년  간 분데스리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호흡하고 생활하던 옛 돌료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내 또래들이지만 그때까
지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나는 빼고는 모두들 보기 좋을 만큼 살이 오르고 배가 
통통해진 것이 감독직함에 어울리게 제법 중년티가 나 보였다.
  나의 분데스리가 데뷔전 (다름슈타트) 상대였던 캔하겐, 국가대표 스타 플레이
어였던 마가트, 함부르크의 묄만, 뒤셀도르프의  제베, 브레멘의 라인더스.... 유래
없이 많으 왕녕의 스타들이  모인 학기라서 그런지 첫날 신문사 기자,  TV 카메
라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볼 때 새롭게 기대했던 대학의 모습이 아니고 우리들이 
늘 하던대로의 모습이었다. 수위 아저씨에게 팀사인이  든 페넌트를 갖다 주겟다
고 약속을 하고는 강의실 가까운 곳의 교수 전용 주차장에 파킹 장소를 일단 확
보해 두었다.  그래서 내가 가면 바리케이트를  치우면서 "헤이 차!"하고  반가워 
하는데 모르기는 해도 수위 아저씨는 학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늙은 우리들의 특
이함 때문에 선서히 허락해주었을  것이다. 새로 산 까만 책가방에다 교과서, 노
트, 사전, 연필 등을  챙기고 어김없이 아침 여덟시나 아홉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일곱시 반이 되어야  끝이 나는 딱딱한 강의  시간표를 들여다볼 때 점심시간이 
없다는 것은 나를 무척이나 걱정스럽게 했다.
  다른 동료들에게야 살도 뺄 겸해서 점심을 빵조각으로 때우거나 굶는 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토요일이면 운동장에 나가 뛰어야 하는 나에게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보온병에 따뜻한 국이나  스프를 담아가지
고 가서 도시락을  함께 차안에서 먹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래도 도시락을 먹고 
나서 사과를 한입 깨물을 때면  차안에 쭈그리고 앉아서 점심을 먹는 내 꼬락서
니에 어울리지 않게  새롭게 펼쳐질 나의 지도자  생활에 대한 설계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강의  중에서 내가 특별히 재미를 느꼈던 것은  심리학 시간처럼 
테마를 정해 놓고 토론할 때였다. 감독과 트레이너, 감독과 회장단, 감독과 선수, 
감독과 기자....
  이런 테마들을 놓고 감독이 이들과 어떤 형태의 관계를 가져야 되는가가 토론
의 대상이되는데 모두들 충분한 경험을 가진 선수들이고 또 토론에 익숙한 사람
들이기 때문에 상당히  진지하면서도 모두에게 유익한 얘기들이  오간다. 그러다
가 다시 화요일과 수요일 오후에  팀훈련에 참가할 때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무거운 책임을 만나게 된다. 샤워하는 나를 툭툭 치고는 "차! 골 언제 넣을 
거야?"라고 씩 웃으면서 묻는 감독의  말처럼 바로 이 숙제 또한 1989년 6월 시
즌이 끝날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도자의 참된 권위
  독일의 쾰른 체육대회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을 때의 일이다. '지도자가 된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한 반에서  3개월 가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개개인
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 있는 것은 선
수생활 중에 감독에게 골치를  썩이던 선수일수록 스스로가 감독으로서  선수를 
처방하는데  완고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장래가 유망한 18세의 
선수가 있는데 요즘에 와서 두 번씩이나 훈련에 늦고 연습태도도 어딘지 의욕이 
없어 보인다.  이때 감독은 이 선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테마를 놓고 
각각 처방을 내리게 된다. 이때 가지각색의 얘기가 다 나오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톤으로 "프로에서 두 번씩이나 늦는 게 어디에 있느냐, 그런 녀석이라
면 훈련도 못하게 돌려보내든지 자기가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감독이 뭣 때
문에 그런 선수를 붙잡고  얘기를 하느냐"면서 침을 튀기는 사람이 브레멘  팀의 
유명한 골게터였던 라인더스다. 그는  자신이 선수였을 때 '빠찡코'에 미쳐서 돈
을 다 날리고 보르도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도시)의 와인이 다  떨어지면 돌
아오겠다고 하고는 보르도에 가서 선수생활을 마친 위인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비단 라인더스뿐만  아니다. 반면에 나나  마가트처럼 별 
소리 없이 생활했던 선수들은 너무 이해일변도의 처방을 내려서 강경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권위를  갖되 그 권위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가르
친다. 다른말로 한다면 감독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은 안되고 스스로
가 존경을 받을  만한 행동과 생활로 권위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 집에  자주 들르던 몇몇 어린선수들의 애인들
은 밤 열한시에도 전화를  해서 이 녀석들을 찾곤 했다. 집에도  안 가고 어디를 
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르는 체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들은 
자기들을 벤치에 앉힌다고  감독을 욕한다. 바로 이럴 때 인간의  이기심은 정말 
무섭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끔이기는 하겠지만 밤늦도록 오락실이며 디스코테크며 돌아다니다가 감자튀
김이나 주워먹고 잠도 덜 깬  상태로 훈련장에 나타나는 녀석들이 자신이 꼭 주
전으로 뛰어야 된다고 믿고 있을 때 이 엄청난 차이를 무엇으로 매울 수 있겠는
가. 그래서  자신이 옛날에 그렇게 했던  선수들은 그런 심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강경한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소문나게 바람
을 피우던 사람이 감독이 되니까 우리들에게 집에  갈 기회를 주지 않았었고, 놀
러다니며 공이라고는 연습할 때나 겨우 만지던 만년 후보가 코치가 되니까 선수
들한테는 교과서대로 하라고  닥달하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장시간  통화를 한 
옛 레버쿠젠 팀의 감독  리누스 미셸은 내게 "부지런히 어학 공부하면서  훌륭한 
감독 밑에서 잘 배우도록 하라"고  일러줬다. 이것 역시도 모든 사람을 자기처럼 
성실하고 고상하게 보기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마음 나도 몰라
  분데스리가 1989년 6월  시즌이 시작된 지난해까지 몸담았던 레버쿠젠 클럽에
서 보내준 VIP카드의  승차 입장권에 나와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자 
축구화를 벗었다는 사실이  성큼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1989년 9월말까지
는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안돼! 안돼!"하면서도 당시 나는 스카우트를 요
청해오는 전화를 반기고 있었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 즈음해선 나는 최근 1
주일 동안 네덜란드 아약스 암스테르담 팀의 스웨덴 원정 훈련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연습기간 도중 실수가 잦아  구멍이 나자 암스테르담 베나카 감독은 "이
번 시즌에 우리 팀을  위해 같이 뛰어줄 수 없겠느냐"며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
다.
  다시 유니폼을 입고  뛴다는 생각에 나는 그만 가슴이 설레어서  "그러지요"라
고 대답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었다. 베나카  씨는 지난 1989년 시즌까지 스페인
의 명문 레알 마드리드에서 감독을 지냈고 또 지난 시즌 팀에 우승을 안긴 세계
적인 지도자인데 나의  옛 스승인 미셸씨와의 남다른  우정 때문에 나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베나카 감독이 전력이 약한  아약스 팀
을 맡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는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들이  당시 합숙 동
안 가진 연습 경기의 전적은 1승 2패였다.  하프타임 같은 때 감독이 선수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며 팀이  1년 동안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지켜보고 공부하
는 것은 몹시 흥미있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공부만 하기로 앞길을 정했
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클럽회장이  스웨던 호텔까지 전화를 해서 나는 굴복시킬 
히든카드가 있다는 듯이 우리집을  방문하겠다고 우길 때는 나 자신도 그런  '사
건'을 단순히 즐기는 것인지 아닌면 진짜 마음이 있는 것인지 조차도 확실히  모
르겠던 적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살케04, 함부르크, 오펜바흐 같은 팀에서 보챌(?)때는 입이 찢어
지면서 "좀더 두고  봅시다"라고 얼버무렸으나 나 스스로 생각해도 음흉하기  짝
이 없다. 그러나  정작 나로 하여금 선수로든 지도자로든 팀을  택하겠다는 엄두
를 못 내게 만드는 것은 "외국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코치는 무슨 코치예요. 한
국말로만 할 거예요?  지도자 생활은 공부나 미친  뒤 시작해요"하면서 잘날 체 
떠들어대는 마누라의 잔소리다. 그러면서도  내가 "스카우트 요청이 자꾸 들어온
다"고 들려줄 때마다 마누라는  흥이 나서 "그래서요, 이번에는 어느 팀인데요?"
라면 반색을 하며 물으니 엉큼하기는....
    지도자 데뷔 두려움 앞선다
  프랑크푸르트팀에 관한 기사가 실리는 날이면  학교의 동료들은 '너의 팀'얘기
라면서 신문을 건네주곤 했다.
  쾰른 체육대학 축구 지도자 과정의 책임자였던 디산스 교수도 내가 몇 차례나 
사실무근이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되묻는 것을 볼 때 선수 때와는 
또다른 행동의 조심성을  느끼게 됐다. 나에게는 한동안 같이 뛰었던  팀 동료이
면서 가족들끼리도  가깝게 지내던 휠 첸바인이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냥 두고 보자'고만 했었는데  가고 싶은 의사도  없으면서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은  적어도 지도자의 입장에서만큼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
을 그때 나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앞지르기를  좋아하는 신문
들이 "차붐이 코치로  프랑크푸르트에 와서는 곧 감독직을 맡게 될  것이다"라고 
요란을 떨 때 나는 나의 지도자로서의 동료일 수도 있는 프랑크푸프트팀의 감독 
베르거 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수로서 자리를 옮기는 것과는 달리 지도자의 경우는 항상 선임자가 있게 마
련이므로 나를 지도하던 감독들이 떠날 때마다 그들과 함께 마음 아파하던 나로
서는 도저히 베르거 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일수록 일단  시작되었다 하면 고삐풀린 말처럼 
잡을 방법이 없으니  불쾌해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나는 딱하기만  했다. 친구
인 부회장과 주장  쾨르벨은 "차붐보다는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기정사실로 
기자들에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이에 맞서 감독은 나에게는 코치가  필요 없다
면서 "프랑크푸르트 팀은 누가  와도 마음 놓고 일할 곳이 못  된다"고 의도적으
로 불평을 했다.
  그렇다. 동독에서 온 그에게 나의 존재는  어쩌면 프랑크푸르트의 텃세라고 느
껴질지도 모른다. 내가 그곳을 고향이라고 느낄  만큼 프랑크푸르트 팀 구석구석
에 앉아 있는 친구들, 그들이 내가 가장 적합한  존재라고 우길 때 설사 빠른 시
일 내에 내가 감독직을 안계  받으려고 하는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에
게도 부담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사는 것은 다 그런 것이야"라면서 당연한 생존
경쟁의 논리를 훈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
무 벅찼던 만큼 난 아직 초년생인 것 같다.  내가 몇 번씩 경험했던 나가는 감독
과 새로 오는 감독의  어색한 만남, 바로 이것이 나의 새로운  인생의 한 부분으
로 추가된다고 생각하니  그 시작을 미뤄보고 싶은  두려움이 나를 붙잡기도 했
다.
    지도자 생활 겁난다
  1989년 11월 10일.  10년의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그리던  고국으로 돌
아왔다. 하나의 끝남은 또 다른 일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은 누
구에게나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긴장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
든다. 결혼이나 입사, 입학의 경우처럼 새 출발의 의미가 크면 클수록 긴장과 설
렘의 정도도 크게  마련이다. 10년 전 분데스리가에 뛰어들기 위해  가방 하나만
을 둘러메고 독일행 비행기에 오를 때의 나의 심정이 그랬다.
  날고 긴다는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 틈에서 내가 제대로 배겨날  수 있을지, 
한 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쫓겨오지나 않을지. 가슴 부푼  희망보다는 솔
직히 두려움이 앞섰다. 똥개도 제집에서는 큰소리 친다는데, 태극 유니폼에 만족
하며 국내에 머무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까지 했다. 분데스리가  10년을 마
감하고 서울에서의 새  출발을 시작하면서 나는 10년  전 독일행 비행기에 오를 
때와 똑같은  초조와 불안감에 떨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의 
공백을 쉽게  메울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두렵다. 더욱이 이제부터  걸어야 할 
길은 전과 같지  않다. 지금까지는 선수로서 나 하나만 잘하면  됐지만 이제부터
는 나뿐만 아니라  내게 딸리 무리들까지도 잘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로서의 새 
출발을 해야 한다. 독일행  비행기에 처음 오를 때는 괜히 모험을  하나 보다 하
는 후회가 없지 않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나의 분데스리가 10년은 자랑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나의 나머지 인생도 후회하거나 퇴색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1989
년 11월 10일.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땅을 밟자마자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서울에서의 새 출발은  어떻게 시작할 것이며 지도자로서도 자신이  있느냐?"는 
등....
  이방인의 핸디캡을 안고서도 분데스리가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노력뿐이
었다. 분데스리가 진출 초기  많은 교민들로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건방진 놈'이
란 오해를 산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밥 먹고  잠자고 남은 나머지 시간은 공만 
차는 것으로 수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해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훈련에 훈련
의 연속으로 분데스리가의 스타플레이어들과 어깨를 겨룬 것처럼 서울에서의 새 
출발도 땀으로 시작, 땀으로 끝낼 것이다.
  참된 감독을 나는 봤다
  "다움(쾰른 팀 감독)이 미셸(레버쿠젠 팀)을  넘어뜨리면?" "레버쿠젠은 베티를 
데려오는 거야." 1989년  4월 15일의 쾰른전을 며칠 앞두고부터  이 같은 기사가 
신문에 오르내리더니 끝내  레버쿠젠 팀의 미셸 감독이 옷을 벗었다.  새로 오게 
되는 베티라는 감독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당시 독일 청소년국가대표 팀의 감
독으로 1974년 월드컵 스타플레이어였던 베티 포크츠를  말한다. 벌써 수년 전부
터 레버쿠젠 아마추어 팀의  매니저이자 레버쿠젠의 터줏대감 격인 모사꾼 뚱보 
카를 문트가 베티와 함께 레버쿠젠에서 같이 일을 하기로 약속한 모양인데 지난 
시즌 느닷없이 프로 팀  매니저인 마이어가 리누스 미셸을 네덜란드로부터 모셔
옴으로써 두 매니저들의 싸움에 팀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책상서랍 깊숙히 넣어 두어야 할 특급 비밀문서 격인 감독의 계약서를 까발리
고 그의 봉급을 공개함으로써 팬들에게 독일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빈곤감을 동시
에 자극하면서 감독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내가  쾰른 체육대학에 입학해서 지도
자 수업을 받을 때  배운것인데, 감독이 되어서 팀을 선택할 때는  그 팀 고유의 
분위기를 잘 파악한 다음 팀  전체가 감독을 뒷받침하고 감독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무엇보다도 먼저 약속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미셸 감독과 둘
이서 자주 대화하는 편이었다. 세계적인 감독이  들려주는 한마디 한마디의 경험
담은 나에겐  그대로 훌륭한 교과서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을 
받았던 것은 치졸한 북새통에서도  큰 감독으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다. 여러 감독들을  봐왔는데 크라마의 경우는 위기가 닥쳐오자 금방  약해져 버
리면서 타협의 방법을 찾았으나 외면 당했고,  리벡은 처음에는 상당히 신경질적
으로 대하더니 '시즌  후의 결별'로 분위기를 바꾸면서 그때까지  잘해보자는 방
법을 택했다.
  그런데 미셸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그야말로 미동도 없이 운동장에 
항상 같은 얼굴로 나타나서  훈련을 시키곤 했다. 그는 정말 프로였다. 치사하게 
남을 탓하지도 않았다.  "내가 한가지 실수했지. 나는 카를문트가 아마추어  매니
저라고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그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내가 모른거야." 이
런 의미있는 한마디와 함께 나도 감독도 공허한 웃음을 한바탕 터뜨렸었지만 감
독으로서 최고의 업적을 가진 그의 지나간 생애에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그때마
다 선명하게 채색되었다가  서서히 바랜 자국들로 얼룩져  있는지를 알 것 같았
다. 썰물처럼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에  혼자 서 있곤 하던 바위처럼 큰 감독. 굴
러다니는 돌도, 떠밀리는  모래도 아닌 바위니까 물이 또다시 밀려올  때도 여전
히 그는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을 것이다. 웃지도 않은 채.
      너그럽지 못한 자화상
    너그럽지 못한 나(1)
  1985년 11월 9일은  분데스리가에 진출해서 200번째 운동장에  서는 날이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시계가 여섯시가 지나면  일곱시가 되는 것처럼 7년 가까운 
시간을 독일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숫자가 된  것이었다. 지난 
일들을 되돌아 생각해본다. 참 부끄러운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의 '너그럽지 못함'
이다.
  나는 오늘 이 너그럽지 못함을 깊이  반성한다. 분데스리가에서 생활하며 만난 
여러 명의 감독들은 한결같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선수'로 아껴주었었다. 나를 
잘  아는  어떤 선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는  바뀌는  감독에게  마다 
LIEBLING(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전혀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독
일에 가기 전에도 그랬었다. 대표 팀의 감독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나는 그때마
다 각별히 보살핌을 받는  선수로 생활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 H감독님이 
신문을 통해 나를 나쁘게 얘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
다. 내게는  대표선수 시절 "봉근아,  봉근아"(H선생님은 나를 그렇게  부르신다) 
하시면서 귀여워해 주신 기억밖에 없으니까....
  내 자랑이 아니라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내가 모시는 모든 감
독들에게 한  번도 반항하거나 괴롭혀  드린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어리기도 
해 거의 맹목적인 순종이었다면  독일에 와서는 각기 다른 형의 지도자들로부터 
특징들을 배워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는  순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 명의 감독들을 만나면서 즐거운 기억밖에 남는 게 없지만 딱 세 번 
나의 '못 너그러움'이 그분들의 너그러움으로 무리 없이 지나간 적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팀에 있던 1981년,  부흐만 감독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부
상 이외의 이유로  한번도 주전에서 빠지거나 교체되어 본적이 없었다.  물론 허
리부상 직후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팀에 나 외에 뚜렷한 
공격수가 달리 없었기  때문에 나의 기용은 팀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다. 쾰른
과의 경기였는데 프레스틴이란 선수가 나를 맡았다.  어찌나 끈질긴지 90분 내내 
자존심도 없는  선수마냥 쫓아다니면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선수는 덕분에 
그날 저녁 TV 스포츠쇼에도 나갔지만  경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주공격수인 내
가 그렇게  묶여 있으니 득점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종료  10분을 남기고 
감독에게서 선수교체  신호가 왔는데 11번인  내가 나와야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 지금도 나는 기억이 전혀 없다. 공교롭게도 내 대신 들
어간 안데스 선수가 골을  넣어 우리 팀은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축제
였다. 경기를 마치고 VIP룸에서  스포츠 쇼를 보는데 우리 팀의 골이 터지는 장
면이 나오자 다시 한  번 박수를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이런  분위기가 신이 났
는지 우리 딸 하나는 페차이 선수 딸하고 테이블 위로 밑으로 온통 헤집고 다니
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차, 하나 좀 봐, 신이 났어"하면서  부흐만 감독이 말을 붙여오는
데 다른 때 같으면 이런  상황에 처해도 하나 엄마가 표 안 내고 잘 받아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워낙 쇼크가 컸었던지 둘  다 말을 잃고 말았다.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어땠을까.  좀처럼 안
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경기를 치르는 동안 나는 완전히  페이스를 잃고 부
진을 면치 못했다.  그래도 감독은 계속해서 나를 기용하고 끝까지  뛰도록 놔두
었다. 그래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감독은 조용히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는 쉽고도 간단하게 얘기
했다. "차, 나는 네가  필요하다. 그리고 너는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
는 너를 절대로 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는 한 너는 항상  주전이다. 차, 너는 
훌륭한 선수야. 내게는 네가 루메니게보다 더  소중해. 자신을 가져. 너는 분데스
리가의 1급 공격수야." 절대로  빼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감독이 나를  그렇게 
훌륭한 선수로 평가한다는 것, 이것들은 나를  다시 회복시키는 절대적인 계기가 
됐다. 이틀 뒤 카이저슬라우테른 팀의 골문은 내가  쏜 장거리 슛을 오른쪽 귀퉁
이로 빨아들였다. 골인. 그날 저녁 나는 모처럼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서 500그램
짜리 스테이크 하나를 기분좋게 먹어치웠다.
    너그럽지 못한 나(2)
  너그럽지  못해 부끄러운  얘기 두  번째다. 내가  레버쿠젠으로 오던  첫해인 
1984년에 레버쿠젠  팀은 창단 80년만에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7위에 올랐었다. 
아깝게 UEFA컵 출전권은 놓쳤지만 감독 크라미는 충분히 큰소리칠 수  있는 입
장이었다. 레버쿠젠 팀은 돈이  많았다. 관중 수입에 의존하는 살림이 아니라 세
계적인 회사인  바이에르에서 쓰는 엄청난 광고비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세보다 
값을 더  쳐주고 선수들을 사들일 때가  많았다. 감독이 한번 눈독  들인 선수는 
꼭 사들이기  때문에 선수를 뺏긴 팀들은  '바이에르 회사는 대기를  오염시키고 
바이에르 축구팀은 분데스리가를 오염시킨다'고 불평하면서 레버쿠젠 팀을  미워
했다.
  나도 한국에서 휴가를 마치고 첫 훈련에 나가 보니 자그마치 선수가 24명이나 
되었다. 한국의 나를  비롯해서 폴란드, 노르웨이, 독일....  국가대표급만 해도 열 
명에 세계청소년대회 우승 당시의 주전 선수가 네  명, 청소년 대표 등 그야말로 
호화군단이었다. 그러나 운동장에서 뛸 수 있는  선수는 열한 명뿐이니 감독으로
서는 스타팅 멤버를  고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선수, 모두가 
감독이 직접 스카우트해 온  선수,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이 어디 있
겠는가? 공격만 해도  웬만한 선수는 접어두고서라도 국가대표급만 셋인데 전형
적인 4-4-2 시스템을  쓰는 탓에 한 명은  꼭 빼야만 했다. 그러나 전기  리그가 
끝날 때까지  그게 나에게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부분 슈라이어가 
빠졌고 가끔 바스도 빠지면서 전반기를 보냈었기 때문이다.
  팀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전기 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나는 장딴지 근육
에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는데 그때까지  그 정도 부상으로 나를 쉬게 한 감독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경기가 더 중요하니 쉬라는 것이었다. 
기쁘지 않았지만 쉴 수밖에 없었다. '감독을 돕는 길은 아프는 것'이라는 후보선
수들의 빈정거림이 듣기 싫었다.
  그 뒤 중요하다는 선수권 대회 2회전이  베를린에서 있던 날이다. 감독이 아침 
일찍 내방으로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나쁘고 빙판이니 어린 선수들을 내보내자
고 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독일 생활에서의 처음 
맞는 주전탈락,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분데스리가 경기는 아니지만 선수권 대회 
역시 공식경기니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경기가 있었는데 나
는 종일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았다. 입이 마치 붙은 사람처럼  도무지 떼어지
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우리는 쉽게 이길 수 있었다. 전반전이 끝나자 감독
은 나에게 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없이 어린 선수
가 나를 위해서 교체되는 것도  싫었지만 후반전에 나가는 내 모습은 더더욱 생
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를 챈 감독은 "후반전에 나가는 게 처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날 저녁,  그분은 굉장히 많은 술을  마셨다. 그분 마음도 나  못지 않게 
괴로웠던 것이다. 이기고서도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픈 크리마 감독의 정, 버스안
에서 본 그의  뒷모습은 분명 쓸쓸한 것이었다. 1주일 후  함부르크 팀과의 경기
가 있었다.
  공격수 세 명을 따로 불러 감독은 조용히 얘기했다. "차는 지난번 보니까 전반
전부터 뛰지 않으면  얼음같이 차가워져서 게임이 안 풀리는 것  같더라. 그러니 
전반전은 차가 나가고  후반전은 너희들이 반반 나눠 뛰도록 해!  슈라이어 너는 
후반전에 나가서도 곧잘 뛰잖아?"
  감독이 사람 좋은  크라마였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2대 0으로  이겼다. 내가 
혼자 두  골을 다 넣었다. 그러나  나의 너그럽지 못함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했는지.... 그래도 나는 후배 선수들을 벤치에 앉혀 놓은 채 뻔뻔스럽게도 계속해
서 뛰었다. 골이 터지면  사양하지 않고 맘껏 기뻐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다음 
시즌부터 감독이 바뀐다는 소문이 나돌아 감독이  불안해했다. 놀라운 것은 나같
이 나이 든  선수까지 벤치 신세를 져본 판인데도  한 번도 기용되지 않은 적이 
없던 주장이 그 일을 추진했다는 것이었다.  관중들이 그렇게 교체하라고 아우성
을 쳐도 자기는 계속해서 뛰었으면서....
  내 일처럼 분했다. 하지만  나는 주장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나 엄마도 
"지금 감독을  돕는 길은 당신이 운동장에서  갑절로 뛰는 것밖에 없다"고  경기 
때마다 강조했다. 그후 얼마 안  돼 감독은 갔다. 그리고 새 감독이 들어왔고 감
독 교체를 추진했던  주장도 벤치로 밀려나 방출선수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나
는 그후에도 뻔뻔스럽게 뛰었다. 크라마를 향한 작은  정도 항상 내 심장 속에서 
같이 뛰었다.
    너그럽지 못한 나(3)
  부끄러운 얘기 세 번째를 쓴다. 마지막이 되길 바라면서. 얼마 전 레버쿠젠 팀
은 크라마 후임의 새 감독을 맞아들였다.  에릭 리벡이란 사람인데 프랑크푸르트
에서도 감독을 했었기 때문에 레버쿠젠의 새 감독으로 계약을 했다는 보도가 나
오자 즉각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성격이 급한 사람
이라는 공통된  귀띔이었다. 리벡은 축구협회  감독으로도 오래 일한  적이 있어 
레버쿠젠팀의 거의 모든 선수들도 청소년 대표, 올림픽 대표, 국가 대표 등을 통
해서 감독과는  구면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의례적으로 나누는  악수 외에는 
그와 특별히 접촉한 적도,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었다.
  첫인상은 좋았다. 그리고 무척  친절했다. 월드컵 예선 때 말레이지아 전과 일
본 전에 가서 뛰어야겠다고 했을 때 "자네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선수니  훈련기
간 동안 난 자네  없이는 안 되네"하는 감독의 얘기가 우선은 나를 안심시켜  주
었다. 그후 말레이지아의  예선전에 협회의 요청이 없어 참가하지 못했을  때 그
는 크게  흥분했다. 일본에 가서 한국이  2대 1로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리벡 감독은 "젠장, 졌어야 자넬 부를텐데...."라면서 아쉬워했다.
  이런 감독의 호의는  내게 상당한 위로가 되었었다. 제스처가 없는  감독의 성
격은 자못 흥미롭다. 이런 것들을 파악하기 전 첫 경기 때의 일이다. 하노버에서 
경기를 하는데 후반  15분을 남겨놓고 리벡 감독이 나를 빼는  것이었다. 그야말
로 5년 만에 다시 당하는 일이어서 몹시  불쾌했다. 어웨이 경기에서 1대 1로 비
겼으니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고 교체되기 전까지  나도 그런대로 할 만큼은 
했다. 그런데도 리벡 감독은 나를 뺀 것이다. 가뜩이나 서른이 넘은 선수들이 그 
즈음해서 벤치에 나앉게 되어 나 혼자 뛰는 처지였는데 교체되니 일발의 불안까
지 느껴졌다.
  우울했다. 32세란  나이가 갑자기 확대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다섯 게임을 
치르는 동안 나는 한 골도 얻지를 못했다. 신문들이 조용할 리 만무했다. 노장들
을 다  빼면서도 나를 계속해서 뛰게  하는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감독은 앞으로도 계속 뀌게 할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편안하게 
해주었다. 일반적으로 자극이 선수들에게 약 구실을  하지만 나의 경우는 반대라
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감독이 그날 나를  뺀 이유는 상대 
선수가 붙잡고 늘어져도 뿌리치지 못하고 순하게(?)  구는 게 열통이 터져서였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그 방면에 있어서는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리벡 감독은 나를 포기한 것 같다.
  "축구의 생명은 골인입니다."  몇해 전 내가 한  모 음료 회사의 선전  문구다. 
맞다. 85-86시즌 들어 여섯 경기 만에 처음으로 두 골을  터뜨리던 날 나는 진심
으로 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웃는 모습이 상쾌한 감독, 웨르딩겐과의 경
기에서 나는 그 감독으로부터 된통 욕을 먹은  적이 있었다. 전반전을 2대 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걷어차인  종아리 근육이 땡기고 아파 한 번만 더 
힘주고 뛰었다가는 찢어질 것만 같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감독에게 바꾸어 달라
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감독은 눈조차도 마주치지 않고 딴전을  피우는 것이
었다. 다시 마사지사에게 큰소리로 얘기했다. 그제야 감독은 다섯손가락을 펴 보
였다. 5분만 더 버티라는 뜻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근육이 찢어지면 몇 주 걸린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바꿔주었다. 내가 빠지자 전세가 기울어져 2대 2
가 되고 말았다.  그 다음날 감독이 선수들을 모아놓고 야단을  치는데 예상했던 
대로 화가 나에게로 향했다. "차! 너는 나이도 가장 많고 우리 팀에서 제일 중요
한 선수인데 좀 아파도 참고 뛰어야 어린  선수들이 보고 배울 것 아니야!" 그것
으로도 화가  안 풀렸던지 리벡 감독은  자기 앞의 책상을 꽝꽝  치기까지 했다. 
왁왁거리기 좋아하는 리벡  감독, 그래서 우리끼리 연습 경기할 때도  서로 자기
편에 안 끼우려고 해서 마지막까지 팀이 정해지지  않는 감독. 그러나 나는 그와 
일하면서 7년만에 처음으로  전반 리그에 열한 골이나 뽑아낼 수  있었다. 내 축
구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준  리벡 감독. 그를 만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월급쟁이 회장님
    어느 재벌 총수님의 귀엣말
  지난 1987년 5월 독일의  마인트에 사는 한국인 친구 부부로부터 들은 푸념이
다. "아 글쎄,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레코드판을 몇 개 살까 해서 가게에  들렀
지요. 뭘 달라 해야 되나  해서 머뭇거리다가 예스터데이, 러브 미 텐더 같은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  그거요 하면서 '회상의 명곡'이란 타이틀이  붙은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나오잖아요. 그래서 다시 학교 다닐  때 즐겨 부르던 노래를 찾았
더니 이번에는 중년층을 위한 앨범  1,2,3을 보여주는 거예요. 한마디로 쇼크였습
니다." 나에게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얘기였다.
  요즘 젊은 선수들이 워크맨인지 뭔지를 귀에 꽂고 요란한 음악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무지 그것이 좋은 음악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
면 우리 시절의 청춘 문화는 이미 옛날 것이  돼 버린 모양이다. 사실 친구 부부
를 만났던 날은 나의 서른다섯 번째 맞는 생일이어서 더욱 많은 일을 생각케 했
다. 레버쿠젠 팀에서는 내가 최고 고참이다. 젊은 선수들이 내 소지품을 보고 어
디서 샀느냐, 얼마 주고  샀느냐고 물을 때마다 '아차 조심해야겠구나'하는 생각
이 들었다. 옛날에도 하나  엄마와 똑같이 산 시계가 보기와는 달리  아주 싼 것
이었는데도 내 말을 믿지 않고 뒤셀도르프 가게까지 가서 확인해보고 오는 어린 
선수들이 있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개성이 강하다는 유럽인들도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남
을 흉내내며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많이 가
진 사람들은 항상  남들이 흉내내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
에 있을 때, 많은 어른들을 뵙고 가까이에서  그분들의 생활을 보면서 배우지 말
아야 할 것도 흉내낸  적이 있고, 또 옳지 않은 것도 높은 분이  하는 것은 근사
해보였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열심히 땅장사하시던  어느 사
모님, 바로  그분이 내가 독일로 온  뒤 장관 사모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요즘 신문을 읽고 난 뒤의 씁쓰레한 뒷맛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한번은 우연히 만난 어느 재벌 총수님께 좋은 말씀 있으시면 한마디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대재벌 총수님은 
거짓말 같게도 갑자기 내 귀에 입을  슬며시 대시더니 "돈 있으면 금 사!"하시는 
것이었다. 하기야 내가  낮에 묻었던 축구화 바닥의 흙이 생각나서  자다가도 뛰
쳐나와 손질을 해놔야 속이  시원한 것만큼이나 그분도 자나깨나 돈버는 궁리를 
해서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나이 어린 나에게 하는 충고
치고는 분명히 야(?)했었다. 그러나 나도 이젠 중년,  만의 하나라도 나를 흉내내
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내 생활은 더욱  건실하고 모범적이어야 할 것같
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한 살 더 먹는 게 어쩐지 부담스럽기만 하다.
    방탄차 타는 '머슴 회장님'
  "아빠, 저번 시합 때 말야 사마란치 씨가 나 있는 데로 오길래 나는 또 올림픽 
개최국 아줌마라고 나한테 인사오는 줄  알았지. 히히! 그런데 내 뒤에 스트렝어 
씨가 앉아 있잖아." 말하기 좋아하는 마누라의 수다가 아니더라도 세계적인 기업
체인 바이에르  회사의 제일인자인 스트렝어 씨가  얼마나 조용히 움직이는지는 
나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다.
  "차! 빨리 배우고 잘 찬다고 소문났던데."
  골프장에서 만나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 모습이나  UEFA컵에서 우승
했을 때 들떠 있는 내 등을 두드리면서 "와이프에게도  축하한다고 전해 줘"하는 
식의 말투는 나로 하여금 10만 명 이상의 대가족을 이끌고 1년에 16조원씩의 거
래량을 기록한 세계적인 회사의  제일인자 스트렝어 회장님이라는 것을 전혀 느
낄 수 없게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 나는 "아하! 월급쟁이 회장이라서 한
국의 회장님들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의 회장님들이야 
직원들의 농담처럼  '어버이 회장님'이신데 스트렝어씨는  전혀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회장님은 구두 뒤축을 구겨 신고  입을 벌린 채 이를 쑤시는 
소탈(?)하기 그지없는 성품이시지만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가히 엄청
나다는 표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언젠가 벤츠 공장엘 갔더니  내가 차를 좋아하는 것을 아는 공장 직원
이 나에게 차  한 대를 보여줬다. 외형은  내 차와 크게 다른 게  없어 보이는데 
문을 열자 유리의 두께가 눈짐작으로  5cm는 돼 보였다. 웬만한 총알은 뚫고 나
가기에도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나 같은  문외한이 봐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내 차 같은  보통 벤츠만 해도 철판이  두꺼워서 웬만한 사고에는 안전하다고들 
하는데 그 차는 통쇠로 만들어 완전히 내  차의 두배 가까운 2.6톤의 무게라면서 
신이 나게  설명을 해줬다. 나는 이  차가 바로 바이에르 스트렝어  회장을 테러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차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그분의 지
위를 알 수가 있었다.
  정계나 재계를 통틀어 테러분자들이  표적으로 삼는 최고 인물 10인중의 하나
라는 것이다.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서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분이  세계적인 프
로 경영인으로 출세한  것은 젊고 유능한 수많은  인재들에게 분명히 살아 있는 
교육지표가 된다. 그런  엄청난 지위를 가지고서도 나 같은 사람에게  가까운 곳
에 있는 걸로 느끼게 하는  그분의 성품은 직원들에게 그들의 희망도 그만큼 가
까이 있는 걸로 느끼게 할 것이 틀림없다.
    회장님과 나
  지난번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마치고 서울에 들렀을 때 나는 포항제철의 박
태준 회장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매번 휴가때마다 뵙고 싶었지만  워낙 바쁘신 
분이라 국내에 잘 계시지 않아서 몇 년 만에  뵙는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국
내에서 그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 내가  포철엘 가려
고 그러는 게 아니냐고....
  나는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박 회장님의 보이지 않는 축구에 대
한 사랑에 감사드리고 있다. 포철 축구부가 창단된  지도 어언 20년 세월이 되었
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팀이다. 그 동안 김정남 감독을 비롯해 당대의 슈
퍼스타 이회택, 김호, 박수일,  이차만, 그리고 최순호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로
든 포철과 관계를 맺어보지 않은 스타는 거의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박 회장님은 대한민국 스타들의 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들만 모아서 
팀 하나 만들었다가  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없애버리는  것하고는 대조적이다. 
그저 항상 조용히 힘이 되어 주시는 데서  박 회장님의 참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했다는  말도, 이만큼 했으니 축구협회 회장을 맡겠다는  말도 전혀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누구보다 한국 축구가 잘되어  주기를 바라
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가끔씩  독일에 들를 때면 사람을 시켜서라도 
꼭 안부를 전해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보여주는  관심이 곧 
그분의 축구열을 대변한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내가 또 다른 면에서 박 회장님을  존경하는 것은 바로 '포항종합제철' 
그 자체 때문이다. 독일은 철강과 석탄으로 유명하다. 특히 내가 살고 있던 지역
은 한국에서 흔히 부르는 '루르지방'과 근접해 있어  광산과 제철 공장에서 일하
시는 한국 분들이 많다. 그런데 1986년 8월  경에는 지난 1985년 겨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만네스만'이라는 엄청나게 큰 철강공장이 잠정 휴업에 들어갔어다. 많은 
한국 분들이  놀게 되었던 것도 물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독일  굴지의 큰 
회사가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데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게 바로 한국의 포
항제철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가슴이 뿌듯하지 않을 한국인은  없을 것
이다.
  독일에 나와 있던  종합 상사의 주재원들도 얘기했다. 한국에서 나오는  것 중 
굽실거리지 않고  큰소리 치면서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포항제철의 쇠뿐이라
고....
  박 회장님을 뵈었을 때 그분도 나도 축구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분이 통쾌하
게 들려주는 독일 사람과 일본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 얘기를 나는 내가 독
일 골문에 골 집어넣는  기분으로 들었다. 그러니 한 시간도 짧을  수밖에 더 있
었겠는가! 박 회장님은  그날 오후에 새로 설립한 광양 제철소에  간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걸 보아야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다고 하시면서....
  헬리콥터를 보낼 테니  아내와 함께 내려갔다가 다시  오라고 하는 자신에 찬 
모습을 보고 나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 지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박 회장
님께 바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지금까지 조용하게 그리고  묵묵히 밀어주시던 
우리 축구를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십사 하는 얘기다.  지금은 축구를 
사랑하고 이해할 줄 아는 분들의 도움과 협조가 절대 필요한 때니까....
    레버쿠젠시가 온통 차붐 축제
  8년만에 UEFA컵이 서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내 품으로.
  뜨거워서 터질 것 같은  팬들의 열과오가 환호는 8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하늘에서는  [원더풀,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는 왈츠가 
높은 테너 가수의 음성으로  쏟아지고 관중들은 함성과 흥분으로 운동장을 덮고 
있었는데 간간이 보이는 노란 바탕에 까만 붓글씨의 응원 플래카드는 나에게 또 
다른 흥분을 더해 주었었다.
  '범근아, 너 알지. 끝내줘라'.
  나의 세 번째 골이 터졌을 때부터  UEFA컵은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나이  34세, 바로 그 감격스러웠던  순간에 나의 축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충동은 너무 감상적인 것이기만 했을까.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없었다.
  왁자지껄 집으로  몰려들었던 한국 손님들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는  흥분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파타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레버쿠젠 시도,  파티장도 온통 취해 있었다. 깊은 밤에 빵빵거리
면서 돌아 다니는 자동차, 어깨에 어깨를 걸고  훈훈한 초여름 밤을 맥주로 식히
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리들이 레버쿠젠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취한 경찰이 
팬들과 어울려 [오! 미스터 나이스]를 신나게 부를 때 푸른 제복이 어떤 일을 하
기 위해 입는 것인지를 그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된 듯해 보였다.
  "부미!"(감독이 부르는 나의 애칭)하고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파티장에 들어
선 나를 끌어안은 감독과 부인의 벌겋게 젖은 눈은 지난 세월 동안 그와 우리가 
나눈 고통의 밀담을  소리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었다. 눈물과 웃음이  결국은 같
듯이 고통과 영광은  같은 무게로 우리의 인생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손수건
을 링 위로  던졌다는 신문들의 빈정거림 속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감독이 떠나기  1주일 전에는 레버쿠젠의 영웅이었다. "이  컵은 나의 이별의 
왕관이다"라고 반쯤  취해서, 아니 하나도 안  취해 있던 감독은 소리쳤다.  나는 
그때 뭐라고 소리쳤을까. 그 밤의 모든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8년만에 안아본  UEFA컵은 어느
새 살찐 아들 녀석처럼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아빠! 나 일등했어
    벌써 딸에 신경 쓰이네요
  언젠가 차고에 차를 넣고  앞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딸 하나가 “아빠”하고 나
를 불렀다. “아빠, 저기  보이는 별이 내 별이예요. 예쁘지요.” 끈으로 만든 알
록달록한 것들을 팔찌랍시고 주렁주렁  낀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밤하늘에 그만
그만한 작은 별 세개가 나란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 침대에 누우면 창문 너머로 저쪽 하늘이 보이는데 그 중에 저 별이 제일 
예뻐서 내 별로 정했어요.” 하-. 딸아이의 속삭임이 너무 황홀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며칠 전에도  마당 뒤꼍에 있는 개울가에서 친
구들과 함께 집짓는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으로  뒤집어쓰고 놀던 딸에게, 선
생님이 시험지를 깜빡 집에 놓고 와서 돌려주지 못하기라도 하면 100점 맞은 것
보다 더 좋아서  날뛰는 딸에게, 1주일 내내 깡그리 놀고서는  월요일만 되면 피
아노 선생님이 오는 것 때문에 오만가지 죽상을 하면서 심통을 부리는 철딱서니 
없고 선머슴 같은 딸에게 별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니....
  내가 너무 채신머리없이  호들갑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너무  한가하기 때문인
지는 모르지만 딸애 하나를 보니  딱딱한 씨앗을 뚫고 나오는 작고 보드라운 새
싹을 보는 것  같아서 신기롭기만 하다.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였던  니켈은 함
께 겨울휴가를 가면 모두가 저녁을 먹고 따끈한 찻잔을 기울이는 시간에도 큰딸
을 간수하느라고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서 이리저리 놀리곤 했는데 
이제는 내 차례가 된  것 같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  집 앞에서 자전거
를 타고 빙빙 도는 낯모르는 꼬마 사내 녀석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옛날 같으면 
“저놈들이 차붐네 집이라고  구경온 모양이구나”하고는 지나쳤을 텐데 요즘은 
‘혹시....?’하는 생각에 얼굴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된다.
  그러는 나를  보고 아내는 주책이라고  눈을 흘긴다. 그러나  누나도 여동생도 
없고 바로 위의 형하고 함께 자라면서 허구헛날 밀치고 박치다가 엄마한테 구들
장 꺼진다고  꼬집히고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또 엄마 말고는  여자가 없었으니 
식사때가 되면 내가  뛰어다니며 걸레로 마루를 훔치고  상 놓고 하던 어린시절 
때문인지 나는 딸 하나가 유난히도 대견해 보인다.  두리 녀석이 나에게 골을 못
넣는다고 투덜거릴 때면  “너는 얼마나 잘하니? 아빠는 지금 서른다섯  살이야! 
옛날에는 아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알기나 해?”하며  무조건 그리
고 확실하게 아빠 편을 들어주는 딸이다.
  아빠가 학교에 바래다주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하나는 아침이면 엄마 몰래 내 
방에 들어와서는 귀에다  속삭인다. “아빠 오늘도 학교에 데려다줄  수 있어?” 
더 자고 싶은  것도 참고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학교까지 데려다줄 
때면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딸아이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남은 잠을 깨우는 싱
그러운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곤 했다.
    운동 소질은 유전인가
  예쁜 발레복을 입고  우아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하나. 건강하고  생동감이 넘
치는 몸매로  혼신의 힘을 다해 비오듯  땀을 흘리며 뛰는 운동선수  하나. 나는 
큰딸 하나의 모습을 놓고  ‘아빠의 욕심’과 ‘본인의 본능적인 취향’ 때문에 
은근히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 중이다. 나를 닮아서  팔다리가 길고 무척 빠른 하
나가 지난 주에는 몇 개 학교가 합쳐서 벌인(대회이름도 나는 모른다.) 육상대회
에서 릴레이 선두주자로 나서 1등을 하고는 또 100m를 13초에  뛰어서 1등을 했
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트로피를 받을 것이라고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래서  하나는 시간만 나면 “토요일에는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걱정을 하더니 드디어 해가 쨍하고 뜨니까 그만 기분도 쨍하고 좋
아져 학교엘 갔다.
  육상부도 아니고 연습을 한것도 아닌 애가 육상부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
고 자기도 하고  싶어서 “선생님, 저는 하면 안되나요?”하고  자진해서 물었다
고 하니 그 아빠에 그  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밥상에 앉을 때면 아빠의 속
도 모르고 자랑을 늘어놓는 딸에게 대놓고 “운동은 안돼”라고 차마 얘기할 수
는 없어서  “수영이나 육상같은 기록경기는 힘들고  고달픈 것이야”하면서 몇 
차례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도는 해봤지만 “아니야 아빠!  나는 굉장히 재미있던
데”하고는 들을  생각도 안하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는 오랜  시간을 독일에서 
자라면서 ‘무엇이든 잘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무엇은  좋고 무엇은 그만 못한다고 얘기할 수가 없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버지로서  딸 하나에게 그릇된 가치관의 혼동을 주고  싶지 않
은 욕심도 없지 않다는 말이다.
  “아빠! 선생님께서  내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아빠보다 더 유명해질  거라고 
날더러 꼭 달리기를 하라고  하셨어.” 아빠보다 더 유명해질 수 있다는 유혹(?)
이 우리딸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뛰지 않으면 않으면 못 
배기게끔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일까? 아, 그래도 나는 발레를  하는 예쁘고 
멋있는 딸이 훨씬  좋은데. 나와 아내가 늘 주장하듯이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
해주고 부모들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실제로 당해보니 이
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버지를 잘못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참으로 원 없이 마음껏 뛰어 놀았었다.  숙제도 없었던지 
학교가 끝나면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온 동네 애들과 몰려다니면서 놀았었
다. 위로 형들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상당히  압력이 되어서 왕초 되기가 쉬운데 
형이 둘씩이나 되면서도 나는 한번도 남을 번듯하게  거느려본 적이 없다. 그 대
신 비록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고 하는 축구이긴 했지만 꽤 잘했던지 몇 살씩 차
이가 나는 형들이면 대항 축구 시합을 할 때도 나만큼은 필요에 의해서 꼭 끼워
주곤 했었다. 동네에  자전거라는 것이 처음 나왔을 때도 모두들  쿵쾅 넘어지고 
난리인데 나만 한번에 유유히 타고 운동장을  돌았다는 얘기나, 스케이트를 신자
마자 타더라는 얘기는 아버지로부터 하도 들어서 별 신기한 느낌도 없었는데 지
금 우리 애들을 키우다 보니 그 정도라면 운동에 소질이 있던 모양이다.
  몇 년  전 한국에 프로씨름이 막  시작되었을 때다. 시골집 마루에  앉아 형과 
얘기하던 중 형이 웃으면서  “야 범근아. 너 씨름 한 번  해봐라” 하길래 “에
이, 형도. 내가  무슨 씨름을....”하고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형은 아니라고 정색
을 했었다. 나는  요즘 우리 애들을 자세히  본다. 확실히 엄마보다는 아빠 피를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굳이  외모를 꼽지 않더라도 무척  빠르다는 것이나 
나서지 않는 성격 같은 것이 그런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딸 하나가  모든 친구들이 학교에서 상영하는 「모모」라는 영화
를 보는데 볼 사람만 보라는  얘기를 뒤로 하고 159개 학교가 참가한 달리기 대
회에 자진해 나가서  2등을 했다. 저희 엄마는 보라는 영화는  보지 않고 달리기
가 더  좋아서 참석하였으니 “소질이 있으니까  좋아한다”라고 평가하는 반면 
나는 “그 또래 애들이라면  나가서 당연히 1등을 해야지 무슨 소리야”하도 신
통치 않아 했었다.  이때 하나 엄마 왈 “하나야, 두리야,  너희는 큰아버지나 할
아버지처럼 내 아들 내 내동생이  천하의 최고인 둘 아는 형이나 아버지가 없어
서 큰 인물이 되기는 글렀다”면서 빈정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원래 아버지 만한 아들이 없다잖아. 두리와 하나가 아버지를 
잘못 만났나?
    우리집 안방 마님은 천방지축
  언젠가 신문을 펼쳐들 때마다 “감독을 괴롭혀도 치사하게 괴롭힌다”고 슬슬 
열을 올리기  시작하던 마누라가 드디어  신문기자와 한바탕 한  모양이다. 평소 
아주 친하게 지내는 독일의 축구 전문지 「키커」지의 우도 보네코 기자는 훈련
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가는 나를 붙잡더니 “차붐! 그래도  내가 은미 씨에게 지
금까지 얼마나 잘했니? 그런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대충 감이 오는 것 같아서 “야! 너희들이 너
무했지 뭘 그래?”라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전후 사정을 듣고 보니 너무한 사
람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친하고 또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라고 해고(사실은 자기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야! 레버쿠젠 기자들 말야! 당신들하고는 시시해서 말하고 싶
지도 않다.  그래도 프랑크 푸르트의 기자들은  적어도 뭐가 옳고 그른지 정도는 
알았었다”고 퍼질러 놨으니 레버쿠젠 기자들의 직업 의식을 근본부터 깍아버린 
셈이다. 지랄(?)  같은 성질에 천방지축이란 말이  우리 마누라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  새삼 감출 필요도 
없는 마누라 흉이지만 당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는 실력이다. 그래
도 기분이 내킬 때면 정은  있어서 어려운 사람들한테는 꽤 잘한다고 하는데 그 
지랄맞은 성질머리가 한번 발동을 하면 견뎌내는 사람이 드물다.
  언젠가는 이역만리에서 온  손님을 “물어보지도 않고 국제전화를  척척 쓰고, 
내 전화번호부  노트에 아무렇게나 끄적거려  놓고, 현관에 놔둔  숙녀용 향수를 
뭔지도 모르면서 척척  뿌리고, 세탁장이고 냉장고고 말도 없이 막  뒤지는 꼴이 
지난번 독일에 왔을 때 선물  산다며 꿔간 돈도 갚지 않는 것 등을 미루어 보아 
분명히 자기 모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득이 있어서인 줄 아는 모양이다”라면
서 쫓아내다시피 한 적이 있다.
  어디 그 뿐이랴.
  “한 줄 써주겠다”는 한국 기자의 호의를 “써준다고 생각하면 쓰지마라”고 
사양(?)하지 않나, 남들은 전경환  씨가 식사를 하자고 하면 비행기 표를 물리면
서까지 기다린다는데(새마을  본부 비서가 나에게 한말)이놈의  마누라는 시간이 
없어서 안 된다고 버티니 남들은  속고 모르고 마누라가 내조 잘해서 내가 이만
큼 됐다고 한다.
정말이지 완전히  그 반대다. 좀  나긋나긋하게 웃고 부드럽게  굴면 좀 좋은가. 
1989년 설날 아침의  일이다. 생일이 12월이어서 한국 나이와 만으로  세는 나이
가 꼭 두 살씩  차이가 나는 마누라는 늘 만으로 자기  나이를 생각했었다. 그러
다가 모처럼 맞은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서 애들 나이를 우리 식으로 계산해주다 
자기 나이도 계산해보니 서른하고도 다섯살인 모양이다. 화! 하면서 몹시 놀라는 
마누라를 곁눈질하면서 나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이때다 싶어서 잽싸
게 한마디 했다.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그 성질 좀 새해에는 누그러뜨리라구.  젊은 여자가 
성질부리는 거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서른  하고도 다섯이나 먹은 아줌마가 
그러는 건 징그러운 거야.” 이것은 확실히 모처럼  찾은 설날 아침에 얻은 의외
의 수확이었다.
    아버지의 인터뷰
  “저 사람이 누구의 아버지다! 그러면 나는 얼마나 좋은지!” 언젠가 중정모에 
한복을 입고 귀에는 보청기를 꽂으신 우리 아버지가 TV 카메라 앞에서 신이 나
서 하신  한마디다. 동네 어르신들이  뒤에 주책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는 가장 근사하고  솔직한 표현이었다고 믿어진다.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 
사람들은 우리 마을을  까치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이야  공장이 들어서고 
큰길도 뚫렸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홍씨와 차씨가  모여 사는 촌락에 불과했
다. 이 촌부락에서 일생을 농사일로 보내신 아버지가  아들이 TV에 나오고 신문
에 사진이 실리고, 거기에다 운동장에 가면  가끔씩 ‘차범근 아버지’라고 알아
보는 데다 전국 시청자들에게 비쳐진다고 생각하셨을 때 어찌 신이 나지 않으셨
겠는가?
  이럴 때 ‘누구의 덕’을  찾고 ‘누구에게 감사하고’하는 식의 표현은 솔찍
히 말해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한 천박한 여자를 보는 것 같은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아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팬들에게 감사드린다”는 표현은 “나
는 좋아서 춤만 나와요!”하는 표현에  비하면 훨씬 더 구시대적이다. 내 아들이 
금메달을 땄으니 하루 종일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어무이요! 인자 고생 안해도  되겠심더!” 가난에 한이 맺힌 아들
이 금메달을 따자 부자가 된 느낌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의 고생이 본인
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한 수고보다 더  마음에 걸리고 가슴아팠는지도 모른
다.
  1986년 당시 나는  멀리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TV로 보면서 가끔씩 
나오는 조직위원회 임원들의 인터뷰가 너무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
다. 그래서인지 거창하고  어려운 말만 골라서 쓰는 인터뷰 내용을  아주 짤막한 
독일말로 나레이터하고 말 때 좀더  쉽고 살이 붙지 않은 표현이 오히려 효과적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은 남자건 여자건  기쁜일이 있을 때는 곧잘 운
다. 중국을 꺾은  우리 탁구 선수들이 그랬고 민속 씨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천하장사 이만기는  누군가의 무동에 올라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우리의 감정은 솔직하다. 그러나 언어 표현은 너무 어렵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얼마나 근사한 표현인가? 아이들도 어른들도 무
식한 이도 유식한 이도 모두  공감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답변하기에 가장 곤
란한 질문이 있다면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께  한디...."다. 말하기에 너무 
막연하다. 차라리 “차 선수 당신 한국 떠난  지 벌써 8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많
은 팬들이 당신을 기억하고 성원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게 대답하기 훨씬 
수월할 것 같다. 묻는 사람도  솔직하게, 듣는 사람도 솔직하게 말할 때 듣는 이
들이 재미있다. 독일에  있을 때 매주 토요일 분데스리가가 끝나면  스포츠 쇼나 
운동장 카메라 앞에 끌려나오는  스타들의한마디는 궤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솔직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토요일 브레멘의 괴짜 감독 레하겔은 아나운서가 “당신 선수 시절에 경
기를 무척 거칠게 했다고 들었는데....”라면서 살살 약을  올리자 “천만에! 기자
들이 뭘 몰라서 그렇지 그때도 내가 파울을 하면 돌았다고 하고 폭츠(당시  국가
대표 팀의 수비수)가 거칠게 하면 국제적인 선수라고 하더라”면서  자시의 감정
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또 어떤 감독은 “내가  이기면 운이 좋았고 다른 감독이 
이기면 전술이 좋았다고 하는데 나는 뭐 항상 운이 좋은 줄 알아요?”하면서 불
만을 꾸밈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다시 얘기를  처음으로 돌리자. 아버지에 이어 
카메라 앞에 선  우리 어머니는 “글쎄 남들은  우리 아들이 잘한다고 그라는데 
나는 통  모르겠네유”라고 하셔 동네 어른들로부터는  “그래도 아주머니는 말 
잘했다”는 후한  평(?)을 들었지만 내  생각에는 역시 우리 아버지의  인터뷰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 같다.
      못 말리는 축구 지망생
    두리야 제발 축구 선수만은
  어제는 갑자기 두리가  테니스를 배우겠단다. 의식적으로 축구로부터  멀게 하
려는 나의 의도가 어느  정도 적중한 것 같다. 죽어도 축구만  하겠다던 첫째 녀
석이 이 핑게 저 핑게로  연습 때마다 제대로 데려다주기 않기를 한 1년 했더니 
제풀에 방향전환(?)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두리가 축구 하는 것을 너무 좋
아한다. 쬐그만 녀석이  넘어지고 폼잡는 것도 보기에 좋을뿐더러 가끔  내가 다
쳐서 제대로 연습을 못할 때는 마당에서 제법  내 파트너 구실을 해주는, 아들하
고 축구 하는 재미란  또 다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리가  그 정도에서 그쳐주
었으면 한다.
  축구를 업으로 삼는 일은 안 해줬으면 한다는  애기다. 오래 전에 어느 회사의 
간부라는 사람이 나를  옆에 두고 이런 얘기를 했다. “1년에  5억원씩만 번다면 
나도 축구를 하겠다.”  이런 투의 얘기를 하는 소위 엘리트라고  자처하는 사람
들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예의(?)조차도 갖추지  못한 사
람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내가 학교 다
닐 때 공부를 잘 했으니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 더 잘할 수 있는데 다만  안 할뿐’이라는 식이다. 400m도 제대로 뛰어 낼지 
모르는 자신의 능력은 모르고 모리가 일을 다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축구는 그렇게  아무나 할수 있는 그리 
쉽고 단순한 육체 운동이 아니다. 적어도 국가  대표선수 정도라면 사회 어느 분
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축구 선수
인 나의 눈으로  보면 축구란 미련한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는 없는 분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이나 선배님들을 보면  건방지게도 늘 긍지를 가지라고 
부탁드리곤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두리의 축구를 말리는 것은 다만  이런 이유
때문이아니다. 너무 어려서다.  권모술수가 경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지름길이
란 것이 없으며, 재벌  회사의 회장 아들이 회장은 될 수  있지만 슈퍼스타의 아
들이 슈퍼스타가 될 수 없는 지극히 순수한 이 길이 편안하고 안일하게 크는 요
즘 애들의 하나인 우리 두리에게는 너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두리는 분명히 
자기가 하는 축구를 아빠가 도와줄 수 있다고 믿을 게 뻔하니까.
    축구 지망생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던 베켄바워가 자기 아들이  패스미스를 하자 “저 자식, 
한번만 더 그 따위 실수를 하면 쫓아가 따귀를 때려줄거야”하더라면서 딸 하나
뿐인 게르트 뭘러가 “나는 아들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한 얘기를 들
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이기를 “만약에 아들이 나만큼  못하다면 나
는 운동장에조차 가지 않을  테니 얼마나 한심한 아버지가 되겠느냐”면서 그래
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은 몰염치한 감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히 지내는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다. 맞는 얘기다.
  나 역시 우리 집안에서는 엉터리 코치, 자격  없는 코치로 신임을 잃은 처지니 
뭘러의 말에 이해가 간다. 두리가 축구를 한답시고  야단을 떤 지 벌써 1년이 지
났는데도 누굴 망신시키려는지 실력이 말이 아니다.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데려
올 때마다 야단을 쳐놓았더니 운종장에 내놓으면 영  맥을 못 추는 것이다. 부딪
히고 싸우기는커녕 경기 도중 남의 집 물 구경하듯 쳐다만 보고 있는 녀석을 보
노라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하루는 부자끼리 싸우는 것을  보다못한 아내가 “다음부터 당신은 집에 계세
요. 내가 따라갈 테니까”하고 끼여들었다. 그런데 내가 데리고 갈 때에는 볼 한 
번 제대로 차 보지 못하던 녀석이 저희 엄마와 다니기 시작한 첫날부터 골을 넣
었다고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연속해
서다. 이렇게 되자  두리 녀석은 으레 저희  엄마와 연습장에 가려고 떼를 썼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바가 바로 게르트 뭘러하고  같은 것이다. 그저 무조건 두리 
잘한다고 응원을 하는  엄마가 따라나서야 겁도 덜 나고  마음 푹 놓고 볼을 찰 
수가 있는데 꼬치꼬치 따지고 이유를  대는 스타 아빠 앞에서는 기가 죽어 안되
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두리의 개인 트레이너에서 밀려나고 말았는데 몇 주 사이 
벌써 큰 변화를 엿볼 수가 있었다. 사실  두리뿐 아니라 감독의 칭찬에 기분ㅇ이 
좋아지고 사기가 오르기는 나처럼 나이 든  프로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 한국인들은 앞에 선  사람을 칭찬하거나 솔직하게 찬사를 보내는데 인색한 
편이다. 나  역시 감독이 되었다 해서  금방 달라질 것 같지가  않은데 감독론을 
보면 감독은 칭찬과 꾸중을 적절히  할 줄 알아야 하며 칭찬은 선수에게 자신감
을 주는 효과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이론을 나는 두리
에게조차 적용할 줄  모르니 지도자로 나선 후  나의 앞길이 은근히 걱정되기도 
한다.
    나의 겨울 휴가
  1985년의 겨울 휴가는  나의 외국 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휴가였다. 오스트리
아의 브람베르그. 인스부루크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아주 작
은 마을인데  빌드 쾨글이라는 해발 2천  300m의 스키장이 있어 알프스를  찾는 
스키꾼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도착하던 날, 때마침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알프
스 산간 지대의 통나무집에서  해질녁이면 뿜어내는 굴뚝의 연기를 더욱 훈훈하
게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하고  작은 시골, 어렸을 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곳이었
다. 검불 지피는  냄새가 작은 마을을 온통 뒤덮을 저녁나절이면  딱지며 구슬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고(수지 계산을 맞추면서)  집으로 달려가 우거지뿐인  밥상 
앞에서도 군침을 삼키던 기억이 새롭게 나를 침묵으로 끌고 갔다.
  떠나기 전날 축구협회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나는 모든것을 훌훌 털고 
출발할 수가 있었다. 길고 길었던 멕시코 월드컵 출전 문제. 드디어 일단락이 나
자 나는 짐을  챙겨서 떠난 것이었다. 설사 반대되는 결과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나는 ‘끝났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홀가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브
람베르그에서 독일 국경으로 50Km 가량 산길을 따라가면 레버쿠젠 팀의 감독이
었던 크라마가 살고 있는 동네가 나온다. 지난여름  휴가 때부터 한 번 가겠노라
고 한  약속을 그제야 겨우 지킬  수 있었는데 레버쿠젠 소식이며  친구들 안부, 
월드컵 얘기를 나누느라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냈다.
  크라마 감독은 나의 아픈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아시아 지역에서의 
오랜 생활로 유럽인들과  아주 다른 우리들의 일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1985년 봄 바이어 레버쿠젠 팀에서  그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을 때 마침 한국에
서 외국인 코치를 초빙하려 한다는  애기를 우연히 듣고 나는 그에게 한국에 갈 
것을 권했다. 일선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그가 아는  모든 축구 지식이나 외교 능
력을 86ㅇ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위해  써달라는 것이었다. 크라마에게 있
어서 돈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감독
과 쾌히 승낙을 했다.
  나는 여러 차례 축구협회  회장님과 부회장님께서 사실을 말씀드리고 이런 좋
은 기회에 우리가  필요한 점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감독의 현재 입장과 
함께 전했다. 생각해  보겠다는 것 이상의 통보를  나는 받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 후 감독은  발끈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네가 없이는 한
국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솔직히 무능력을 얘기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서 크라마 감독과 접촉을, 그것도 크라마  감독이 탐탁하
지 않게 여기자 협회에 모든 권한을 준 사람이라는 증빙서류까지 첨가해서 보낸 
그들에게 있어서의 무능을 사실대로 애기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묻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에 감독은 축구협회가  제시한 만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연봉을 자신이 너무 
많다며 깍으라고 자청했다는 것과 그 이후 이곳 일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다는 
서신을 보냈는데 답장이 여지껏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우리 둘만이 아는 쓸쓸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우리가 떠나올 때  크라마 감독은 하나와  두리에게 선물을 
주면서 국경까지 바래다주었다.  크라마 감독의 배웅을 뒤로  하고 브람베르그에 
도착하자 이미 1진은 당도해 있었다. 항상 휴가  때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났던 
나로서는 30명이라는  대식구가 왁자지껄하게 휴가를 같이  보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호텔 한  층을 점령한 우리는  어른은 어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가관이었다. 
촌동네라서인지 아니면 독일이 가까워서인지 면장이라는 어른이 선물을 들고 찾
아오고 동네 신문사에서  사진을 찍어가는 등 아무튼  유명세 덕에 조금은 바쁠 
수가 있었다. 아침 열시부터 저녁 네시까지 계속되는 스키 강습. 이틀째 되는 날
부터 하나와 두리는 쌩쌩거리며 잘  달리기 시작했는데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강습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애들 전체가 시합을 벌였는데 새까만 머리
의 두 녁석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걸고 신나할 때 나도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서 
싱글벙글거리다가 하나 엄마한테 구박만 받았다.
  건강한 분위기,  가족적인 화제, 무엇보다도 나에게  좋았던 것은 일찍 스키를 
타기 위해서 오늘  꼭 일찍 자지 않아도 된다는 아마추어다운  여유엿다. 긴장이 
풀리고, 경기를 잊고, 가족과  함께 웃고 즐긴다는 것은 정신 건강상으로도 틀림
없이 커다란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 직업은 현역 선수다. 다
른 친구들은 은퇴도 했고 아이들 방학도 남아 있기 때문에 더 머무를 수가 있었
지만 나는 곧 시작되는 훈련  때문에 하루만 더 있다 가라는 억지꾼들을 떼어놓
고 올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 집 책상 위에는 수북히  쌓인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
부분이 한국에서 온  카드였다. 가족들과 하나 둘 펼쳐보며 즐거웠던  휴가 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앞으로 숨막히게 돌아갈 바쁜 시간 동안  최선을 다
해 경기에 임할 것을 새삼 다짐해봤다.
      작은거인 마라도나
    마라도나는 진짜 작은거인
  1987년 크리스마스 전에 서독 축구  국가대표 팀이 남미원정 중 브라질 및 아
르헨티나 국가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었다. 독일에서는 한밤중에  중계가 되
었는데 경기 내용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  경기의 해설자는 연방 디에고 마
라도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지 않고 TV를 시청한 대가는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날 저녁 마라도나가  보여준 플레이는 기술이나 묘기라
기보다 차라리 천진한  어린아이의 재롱 같아 보였다. 수만 관중이  디에고를 외
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작은 키의 마라도나는 마치 
우리 집 세찌가 도리도리 짝짜꿍을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긴장이 무엇인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 같
았다.
  그런데 1988년 초에 마라도나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팀과 언젠가 내
가 가려고 했던 AC밀란과의  경기에서 나는 또한 나의 작고 귀여운 ‘마스코트
’를 보고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87년도 유럽의 최우수 
선수였던 네델란드 출신의 머리를 갈래갈래 땋은 그 흑인 소년은 돌아가는 템포
가 질러가는 상대  선수보다 빠를 만큼 스피드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보다 개구
쟁이 흑인 꼬마를  뻥튀기 기계에 올려놓고 튀겨놓은  것 같은 어른 개구쟁이의 
천성이 내 눈엔 더욱 돋보이는 무기로 보였다.
  더욱이 요즘은 10년, 20년 전처럼 펠레는 영원히 브라질에, 베켄바워는 언제까
지나 독일에 머무를 수 없는  세계 축구의 현실로 볼 때 이들의 낙천성이야말로 
어느 곳에서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인  듯했다. 레베쿠젠클럽에
서 발간에 책에  실린 나에 관한 소개란 에서  리벡 감독은 “그는 뛰어난 운동
(육상)선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선수”라고 얘기했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나를 가르쳤던 감독  중 특히 
부흐만과 크라마가 자주  했던 것 같다. 기초가 가장 완벽하다느니  가장 뛰어난 
기술을 습득한 선수라느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나는 나의  분데스리가 10년 넘은 경험을 통해볼  때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마지막 단계에 올라서기엔 성격적으로 담대하지 못하다는 크나큰 약점
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나는 내가 하는 경기에 대단한 손님이  오게 되면 마
라도나 처럼  즐겁고 신나는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응원  많이 할 테니 잘하라”라든지  “한 골 넣어라”는 얘기는 
일부러 안  들은 걸로 한다. 솔직히  말해 전혀 고맙거나 도움이  않되는 심리적 
부담만 쌓이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깰 수 없는  담, 늘 경기에 신중하게 임하는 
나의 성격은 감독들 눈엔 만점일지  모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펠레나 마
라도나처럼 한 단계 높은 더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걸림돌이기도 하
다.
    마라도나에 두 손 들었다.
  서독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꺽고 결승에 올랐다. ‘맥
주가 샴페인을 꺽다.' 생맥주 조끼와 샴페인 잔을 양쪽에 그려 넣은 주먹만한 제
목 못지 않게  독일의 월드컵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은행에  다녀오는 나를 
한 경관이 경찰서 창문 너머로 묻는다.
  “차붐, 누가 나을 것 같아. 마트이스? 롤프?”
  다름 아닌 마라도나를 잡는데 마트이스와 롤프 중 누가 더 나을 것 같냐는 질
문이다. "마라도나,  마라도나, 그를 붙잡아야 된다“고  독일은 결승전을 앞두고 
연일 떠들었다. 드디어   마라도나를 맡기로 했다. 그는 바이에른 뮌헨팀의 게임 
메이커다. 많이 뛰고  악착같은 선수다. 기술과 슈팅이 뛰어난  선수이기도 하다. 
경기가 시작되자 마자 평소의 마티이스답지 않게 그는 자기 경기를 포기하고 마
라도나에 붙어  다녔다. ‘위대한 예술가.’ TV  수상기에서 독일인 아나운서가 
수없이 쏟아내는 이 말 한마디. 조금도 더하지 않은 얘기다. 언젠가도 얘기 했지
만 나 역시 아름다운 마라도나의  슈팅 모습을 보고 그게 바로 예술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마트이스를 잘  안다. 그는 90분을 한 선수만 쫓아다니기엔  너무 아까운 
선수다. 그는 화려하게 돌파도 하고  골도 넣을 수 있는 선수다. 그리고 서독 대
표팀에서 코너킥과 프리킥도  평소 그가 찼다. 그러나 결승이 있던  날 마트이스
는 마라도나의  그림자 였지 선수가  아니었다. 프리킥도 코너킥도  그에게는 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마라도나 옆에만 붙어 다녔다. 그렇게 하는데도 
간간이 마라도나가 왼발로 볼을 받아 돌면서 오른발로 한 패스가 오른쪽으로 뛰
어들어가는 선수의 발 앞에 정확히 떨어질 때 나는 같은 축구 선수로서 입을 다
물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감각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만 준 특별한 선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운동장에 들어설  때마다 또 경기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그
리고 그가 가슴에  그리는 성호를 생각해봤다. 과연 마라도나 자신은  자기의 묘
기가 스스로 습득해서 얻은 것이라고 믿고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다. 나는 가끔 정신없이  뛰고 난 후에 내가 한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적
이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  정말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가 하는 모습은  플롯에 바람 
타는 멜로디 같기도 하고 가끔은  교회에서 떠 다니는 웅장한 오르간 소리 같기
도 했다.
  독일에서는 지금까지 베켄바워를 ‘축구의  황제’라고 부른다. 누구에게도 그 
이상의 칭호를 붙여주지  않았다. 물론 펠레에게 까지도 약간은 비껴  선 칭호를 
붙인다. ‘세계의 축구 스타’  혹은 ‘축구 영웅’ 같은 식으로. 어쩌면 마라도
나에게 ‘위대한 예술가’  칭호를 단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그들이 마라도나 앞에서 완전히  두 손을 다 든 모습을. 물론 독일 역시
도 어느 상황에건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저력이 있다. 설사 골을  한 두개 먹
고있는 상황이라도 그들에게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뚝심이 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전에서도 우리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봤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승리는 경기 전부터 이미 내 마음 가운데 뚜렷이 믿어졌
다. 시대는 영웅을 만들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화려한 별들
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칭송한다. 펠레, 베켄바워, 켐페스, 로시.... 그러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이미 시작 전부터  철저히 마라도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이겼다.
    마라도나와 이탈리아 
  오른쪽 코너에서 빠르게 날아오는 볼을 골문을 등지고 가슴으로 받아 바로 몸
을 틀면서 왼발로 때렸다.
  골인! 주먹을 불끈 하늘로 치켜드는  곱슬머리의 작은 선수, 이럴 때 예술이라
는 경지로 까지  축구를 끌어올려 주는 것이다.  1985년 가을, 이골이 터지기 전 
유럽이 이 모습을 TV로 보여 주었다. 아름다웠다. 나폴리,  세계 3대 미항 중 하
나라고 하지만 지금은 가난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노동자들의 도시를 그는 
완전히 포로로 쥐고 있다. 그는  왕이다. 실제로 왕이 쓰던 별장에 세 들어 살고 
있는데 방이 30개에, 여섯개의 홀, 여덟개의 목욕탕, 여섯개의 발코니, 수영장, 테
니스장, 그리고 경호원을  두고 있다. 한달 집세가 600만원,  그래도 그의 대가족
과 친구들이 지내기에는 “too small", 너무 작다고 얘기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90억원에 팔려 나폴리에 갔는
데 그의 4년 봉급의 합계는 60억원에  달한다. 나에게 나폴리에서 제시했던 연봉
이 세금을 제하고 1억5천만원이었던것을  보면 그는 나의 10배에 가까운 연봉을 
받고 있는 셈이다. 쓰레기 치울돈이 없어  하루의 4천톤의 쓰레기가 길가에 내팽
겨처진 채 방치되고  있는 나폴리 시의 실정과  사진을 함께 보여주며 신랄하게 
비판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또 빈민가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아 TV
에 보여주면서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도 남부의 사는 그
들은 즐겁다. 피자, 스파게티, 그리고 축구가 있으니 즐겁다.
  나폴리운동장은 6만 가량이 들어간다. 7년전 나도  그 곳에 갔었지만 깨끗하거
나 아름다운 운동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열광하는  팬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어느 현대식 운동장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폴리의 팬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
다. ‘1년  정기 관람권’이 매년 평균  5만장이 팔리는 곳이다.  엄청난 숫자다. 
마라도나가 처음으로 나폴리에 갔을 때는 여름 휴가 철 이었는데 구단에서 ‘마
라도나 소개식’ 이라는 전무후무한 아이디어를 짜서 팬들을 불러 모았을 때 무
려 6만의 유료 입장객이 운동장에 모여 유럽을 어리둥절케 했었다. 이탈리아, 그 
곳은 확실히 색다른 면이 있는 곳이다.
  한 예로,  카톨릭에서 교황은 거의  신격화되어 모셔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언젠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의  사장이 대표로 있는 유벤투스 팀
에서 폴란드의 국가 대표인 보니에크  선수가 탐이 나서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
다. 몰론 유벤투스  팀은 매주 일요일 경기가 벌어지는 이탈리아에서  일요일 오
전이면 모든 선수가 오전 미사에 참여 하는 것으로 보아 그 피아트 대표가 독실
한 카톨릭  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교황께서  직접 조국의 
선수를 이탈리아로 끌어 내 주셨다.
  폴란드는 30세 이전에는 외국에 나갈 수 없다는 규정이 공산권이니 만큼 철통
처럼 지켜지고 있었는데  이탈리아인들의 열병에 ‘예외’로 보니에크가 유벤투
스의 선수가 된  것이었다. 물론 피아트에서 폴란드에 상당한 지원을  했을 것이
라는 후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탈리아인들을  ‘남쪽사람’이라 부른다. 물론 
지리적으로 남쪽에 위치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 말 속에는 가벼운 멸시가 들어
있다. 철저한 독일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 그 곳에서는 곧잘 벌어진다.
  “평일 오후에 경기를 하면 모두 일하는 시간인데 누가 오겠느냐”는 독일 사
람들의 사고방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요일 오후에  중계되는 로마 운동장의 
관중석에는 한 치의  여유도 없다. 독일인들이 아무리 그들을 비웃어도  20대 후
반의 젊은 선수들의  ‘희망 근무지’는 이탈리아다. 일확천금의  가능성이 존재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 선수들을, 그것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들었
다 놓았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클럽 회장단 회의에서  외국인 선수 
허용을 두명에서 세  명으로 늘리자는 열변을 토할  때 독일 구단주들의 화색이 
좋아지는 것은 그들이 아주 좋은 바이어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마라도나.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그가 나폴리로 간 이후에는 
장티푸스를 앓는다는 얘기도, 애인이 가버렸다는 얘기도  없는 걸 보니 스페인에
서처럼 불편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을 황홀경으로 몰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펠레를 보고 “야!”하
고 감탄했던  것처럼 우리 두리가  마라도나를 보고 “와!”한다면 세계  축구의 
앞날은 분명 밝을 것이다.
    마라도나와 스테파니 공주
  1986년 뮌헨에서  열린 스포츠 박람회  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독일 기자들의 
“당신의 희망이 무었이냐”는  질문에 대한 마라도나의 답변이  걸작이다. 첫째
는 자기  아버지처럼 36세가 되어서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모나코의 
말괄량이 공주 스테파니를  사귀어 보는 것이며, 마지막은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것이라고 했다. 네델란드의  왕자도 그의 생일 기념 인터뷰에서 어떤  여자를 좋
아하느냐고 묻자 “아주 예쁜 멋쟁이, 예를  들면 모나코의 스테파니”라고 솔직
히 대답을 해서 유럽의 신문 잡지들을 즐겁게  했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
서 스테파니가 TV에 나올라치면 갑자기 분주해 진다.
  “엄마, 스테파니!”
  “자기야, 스테파니 나왔다.”
  때르릉!
  “하나 엄마! 지금 제1방송에 스테파니 나왔어.“
  파출부 아줌마의 긴급 보고다. 처음엔 하나  엄마를 주책이라고 나무랐는데 언
젠가 선수들하고 얘기를 하다보니 집집마다 마나님들이  같은 꼴인 모양이다. 슈
라이더 선수의 부인은 비디오로 녹화를  해놓고 그 다음날 아침에 한번 더 본다
고 하니 참!
  1985년 여름,  보리스 베커가 윔불던  테니스 대회에서 17세  소년으로 우승을 
하고 막대한 상금을 한 손에 쥐자 그는  곧바로 영국에서 모나코로 떠났다. 신문
들은 아름다운 야자수와 매력적인  공주가 있는 모나코로 갔다고 적었지만 실제 
그의 관심은  공주도 야자수도 아닌  세금이었다. 물론 신문들도  이를 모를리가 
없었지만 보리스 베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언고 싶지 않았던지 아무도 그의 합법
적인 탈세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었다. 독일은 세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 중 하
나다. 물론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덴마크, 노르웨이 등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그
래도 그의 경우라면 미혼인데다 상금이 워낙 많은 액수이기 때문에 70% 정도의 
세율이 매겨진다고 한다. 그는 거주지를 곧바로  그의 부모가 살고있는 하이델베
르크 근처 작은 마을에서  모나코로 옮겼다. 모나코의 주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나코의 주민들은 액수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15%의 세금만 내면 된다.
  그래서 테니스 선수였던 비외른 보리가 선수 생활을 마칠 때 까지 모나코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디 운동  선수 뿐인가. 세계적인 쇼맨, 영화배우, 가수 등 막대
한 수입을 올리는 소위 자유직업의  인기인 들은 작은 아파트 한채는 그곳에 마
련해 두고 주민 행세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그곳의 아파트 한 채 값
은 독일의 웬만한 저택과 맞먹는  액수라고 하니 모나코라고 하는 그 작은 도시 
국가가 세계적인 부자들로 포화상태인 모양이다.
  비외른 보리가 선수생활을 마친  뒤 그의 루마니아 부인과 이혼하고 스톡홀름
의 젊은 애인에게로  돌아갈 때 국회에서는 그의  지나간 수입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비외른 보리는  스톡홀름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을 받으며 다시 영예로운 스톡홀름의 시민이 된 것이다.
  펠레, 베켄바워, 마라도나  등 세계적인 선수치고 세금문제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축구 선수는 거의 없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세금도 상당 하다. 나의 경우도 
한국에서 광고 한 건 하는데  천만원이란 세금 고지서를 받고 납부를 했으니 독
일서 반씩 뚝 잘려 나가는  세금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입을 다물지 못했
을 것이다. 한국의 웬만한 기업주들도 7,80%씩 세금을 낸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
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비외른 보리나 마라도나 혹은 소피아  로렌 처럼 1년
에 몇십억을 순전히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스타가 있다면 그까짓 세금이 문제냐 
싶다. 모나코, 세금, 스테파니.... 이런 말들이 우리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만한 진짜로 굵직한 대스타 하나라도  나왔으면 한다. 바로 우리 대한민
국에서.
        제 2장 86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비가 내렸다
      한국도 축구 수출 하세요
    자신있는 스포츠맨
  지금은 조용히 야인으로 지내지만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서독의 수상직을 맡
았던 슈미트씨가 수상 시절  TV 좌담프로에 나온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나
야 원래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지라 다른 프로를 보려고 하는데 슈미트씨의 팬
인 하나 엄마가 그냥 놔두라고 명령을 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로를 건성으로 
보고 있었다.
  항상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회전의자를 좌우로 움직여 가면서 온화한 모습
으로 여유있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조금 있으니까 내가 알
아들을 만한  얘기가 나왔다. “얼마전  내가 지방엘 갔었는데  꼬마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에 서서 사인을 해주다가 무심결에 얼굴을 쳐다본 녀석이 바로 전
에 받아간 녀석이잖아요. 그래서 손목을 붙잡고 물었지요.”
  “야! 너 조금 전에 받아가지 않았어?”
  “그래요, 그렇지만 당신 사인 다섯 개와 베켄바워  사인 한 개를 바꾸기로 내 
친구랑 약속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두개가 더 필요해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두 개를 더 해줘야지!”
  스튜디오에서는 폭소가  터지고 나도 하나  엄마도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그분의 팬이 돼버리고 말았다.
  어느 해 가을, 보리스 베커가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하자 전 서
독은 17세 소년에게 미치다시피 했었다. 가끔씩 비치는  그의 모습을 TV로 보면 
까만 잠자리 안경에다 워크맨을  귀에다 꽂고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우스꽝
스럽기조차 한 ‘요즘 아이들  모습’ 그대로 였다. TV 스포츠 쇼에  베커가 나
오던 날 그의 게스트로 1986년 당시의 서독  대통령 바이츠 체커 씨가 출현했다. 
대통령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게스트로서의 임무에 충실했고 꼬마 주인공은 “
우리 둘은 이상적인 더블 파트너(복식조)”라면서 의젓하게 시청자들을 웃겼다.
  나이로 봐서는 할아버지와 손자뻘이고  직위로는 현직 대통령과 운동선수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모든  독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주인공과 게스트라는 입장
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운동선수에게는 ‘승리’이외에 따로 출세라는  게 없다. ‘진급’이라는 절차
도 물론 없다. 오직 본인  땀을 흘려가며 애써 쌓은 실력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면 이 이상  정직한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까만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없고, 
위대한 정치가가 아직은  될 수 없어도 알리나 펠레는 세계를  지배했었다. 알리
가 한국에 오던날, 웬  사람이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왔던지. 어느나라 국가원수
의 방문보다 더 뜨겁고 열렬한 환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이보다도 더 
희망적인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콤플렉스가 있
었다.
  “공부도 못하는 녀석들.”
  “가난한 집 애들.”
  “운동은 해서 뭐에다 써! 무식한 운동선수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그곳의 분위기  때문에 점차 잊혀져 가고 있을 때쯤에 만
난 어떤 감독님이 “한국은  여기와 다르다”라는 말로 약하기만한 우리 스포츠
맨들의 입장을  설명할 때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었다.  독일의 스포츠맨들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신있
는 모습으로 그들의  분야를 이끌고 간다. 자기 직업에 있어서  열심히 훈련하고 
경기하는 것 어느것도  중요치 않게 여기는 그들의  단순함이 곧 발전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그것은 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혀로 입술 위아래를 훑어가면서 아이처럼 베커는 말한다. “맞아요, 굉장히 많
은 충고가 들어오지요. 교수,  변호사, 정치가, 사업가.... 하지만 듣기만 할 뿐 어
떤 것도 나를 결정하게는  할 수 없어요.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나 이기 
때문이죠. 세계적인 수준의 테니스를  해보지 않고서는 나를 알 수 없지요. 렌들
(이반렌들)은 나보다 훌륭해요.” 이제는 프로의 출범으로 돈벼락이 쏟아진 한국
의 스포츠계도 서서히 땅이 굳어질 때가 된 것 같다. 우리의 스포츠 동료들이여! 
실력을 키웁시다. 적어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고, 발전시키며 책임질 수 있는 
실력을 키워봅시다. 자신있는 스포츠맨! 우리의 미래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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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TV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어느 식당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피자 
기술자가 점령(?)하고 있는  화덕이 위치한 구석은 온통 머리를 갈래갈래  딴 축
구 스타 루드굴리트의 포스터와 기념품들로 빈틈이 없었고 식당의 다른 한쪽 구
석에 위치한  바에는 바텐더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반바스텐 사진과 기념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탈리아는 확실히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유럽에서 열
리는 챔피언스 컵, 위너스 컵, UEFA컵에서 이탈리아는  1989년 AC밀란, 제노바, 
나폴리가 각각 결승에 올라  사상 두 번째로 한 나라가 두  개의 컵을 차지했다. 
마라도나의 나폴리  팀이 UEFA컵을 차지한  데 이어 루드굴리트와  반바스텐이 
몸담고 있는 AC밀란이 챔피언스 컵을 차지한 것이다.
  루드굴리트! 반바스텐! 바로 챔피언  결승전이 열렸던 바르셀로나 구장 전광판
에는 4대  0으로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팀을  꺾은 AC밀란의 득점선수 이름이 
마치 네덜란드의 경기이기라도 한 듯 큰 글자로 번쩍이고 있었다.
  한때 이탈리라 축구  하면 유벤투스, 인터밀란으로 대신하던  세계적인 명문인 
인터밀란이 바로 AC밀란과  한 도시에 있다. 네덜란드의 콤비  루드굴리트와 반
바스텐이 AC밀란에서 팬들을  사로잡자 1988년 여름 인터밀란은 바이에른 뮌헨
으로부터 브르메와  마태우스로 이루어진  독일제 콤비를 사들였다.  네덜란드제 
콤비가 공격적이면서 뛰어난 득점력을 갖고 있는데 비해 독일제 콤비는 많이 뛰
고 씩씩한 병정들인데 팬들의 입맛에는 당연히 네덜란드제가 좋은가 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라도 국토 자체가 지면이 수면보다 낮고 바
람이 많으며 토질이 나쁜  악조건 속에서 사는 네덜란드인들의 국제적인 적응력
은 가히  알아줄 만하다. AC밀란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명문 중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모두 네덜란드인이다. 
분데스리가의 슈트트가르드 팀  감독인 아리한도 역시 네덜란드  사람이다. “우
리 나라에는 암스테르담과 아인트호벤 외에는 이렇다 할 프로 팀이 없는 실정에
서 축구인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라고 얘기하는 
그들에게 외국의 프로 팀들은 한마디로 네덜란드의 축구인들을 소화해내는 시장
인 것이다. 
  그래서 네덜란드인들은 한결같이 외국어를  잘한다. 한때 레버쿠젠팀의 감독이
었던 네덜란드인 미셀도 그 바쁜  시간중에 언제 배웠는지 일곱 개 국어를 거침
없이 해냈다. 이처럼  유럽 축구의 노른자위들을 상당수  찾는 그들에게는‘명분
과 권위보다는 실리를 찾는  뛰어난 장사꾼으로서의 국민적인 기질’이 크게 작
용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도 프로  축구팀이 정해진 몇 자리를  놓고 넘쳐나는 
축구인들이 불안해하면서 서로  경계하기보다는 선수든 감독이든 세계를 시장으
로 삼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이  너무 멀면 우
선 아시아의 시장부터라도….
    주제넘는 책임감
  내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팀  합류가 결정되기 전의 일이다. 모 신문사의 U
기자가 우리집을  방문하던 날 서독 「키커」지(축구전문  주간지)의 편집국장인 
토비엔이 마침 월드컵  문제로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토비엔은  우람한 몸
집에 해박한 축구  지식과 더불어 넘치는 인간미로  나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였
다. 그는 프랑크프르트, 카이저스라우테른 쪽 지역 담당 부장이었기 때문에 1986
년쯤에는 나하고 거의  관계가 없는 상태여서 이런  면에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나에게 부담없이 사귈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담당 기자와 선수 사이라는 관계가 나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서먹하기만 한 것
이다. 서울의 H신문사에 가면 아편쟁이(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처럼 생긴 지자가 
한 사람 있는데 본래는 체육 담당이었다가 외신부와 정치부를 거쳐 다시 체육부
로 복귀했다. 그와는  체육부에서 축구를 담당하고 있을 당시 알게  되었는데 외
신부, 정치부를 거치는 동안에  우리는 더없이 친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우선은 
대학 선배인데다가 그 선배는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나보다 못생긴 사람 가
운데 하나여서 같이 다니는  나를 흐믓(?)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선배가 
체육부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줄었구나 하는 생
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전화 한  통 안 했더니 월드컵 문제  때문에 전화를 걸어온 그 선배는 
서두부터 “야! 임마!”였다.  그러나 이런 못난 내 성격에도 불구하고  토비엔은 
아주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였다. 부인과 애들도 우리집  식구만큼이나 요
란해서 같이 모여 바베큐라도 하는  날에는 웬만한 집 대여섯 가족 모인 것만큼
이나 시끄럽다.
  아버지가 중공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폐렴으로 병사했는데 동양사 교수였기 때
문에 동양에 관한 지식도 꽤  있는 편이었다. 아무튼 그날 U기자는 우연히 토비
엔과 합석한 자리에서 나의 월드컵 팁 합류에 관한 독일 축구계의 반응 같은 것
을 물었는데 토비엔은 여러 가지 설명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현재 분데스리가의 공격수  중에 차범근처럼 7년간을 꾸준하게 잘하고 있는 
선수는 없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수비하고  달라서 공격수들은 경기의 기
복이 무척 심하다.  루멘지게 같은 경우가 꾸준히 잘하는 예인데  지금은 독일에 
없고, 리틀박스키가 잘하고 있다고  하나 그들 역시도 3, 4년의 분데스리가 경력
이 있을 뿐이다.
  수없이 많은 공격수들이 나타나지만  오래 버텨내지 못한다는 얘기인데 그 이
유는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팬이나 본인이 원하는  것은 많지만 하루 이틀이 아
닌 장기간을 계속해서 자기를 컨트롤 하려면 이런 일반적인 제1동기가 아닌 제2
의 강렬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대표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든지 할  때는 이곳 독일 선수들의 
경기가 다시 활발해질  수 있는데 국가대표래야 공격수의 경우 고작  4, 5명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가능성이  희박한 다른 공격수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
다. 그래서 감독들의 가장  큰 고충도 바로 이런 일반 선수들에게  뭔가 강한 자
극을 주어 동기의식을 유발하는 것이다. 주전에서  갑자기 빼버린다든지 화를 낸
다든지 하는 것들이 모두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차 선
수에게는 강력한 제2의 동기의식이 끊임없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스
로가 ‘나는 대한민국  제1의 스타’라는 자부심이다. 그래서 차  선수는 스스로
에게 무척 까다롭게  군다. 마치 ‘나는 한국 제1의 스타이므로  설사 이곳이 분
데스리가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태도다. 자신의  활약상을 한국의 
축구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한국의 스타가 이렇게 
한다는 것, 이것이 한국 축구라는 것을 이곳  유럽에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 선수의 그런 면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점이 스스로를 7년씩이나 이곳에 묶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놀랐다. 심리학적인 측면의 설명도 훌륭했지만  내 스스로도 발견치 못한 
나의 일면을 기자적인 촉각으로 끄집어낼  때 거울을 보고서야 내 눈이 작은 것
을 알아차린 느낌이었다.  내가 스스로 한국 제1의 스타라고까지  비약해서 구체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끊임없이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
은 내가 경기를 잘해야 한국의 팬들이  기뻐한다는 주제넘은 책임감이었다. 한때
는 독일에 있는 이유로 내가  잊혀져 간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깝기는 했지만 월
드컵 때문에  신문보도가 나가자 팬들의  전호가 빗발친다는 K기자의  귀띔이나 
팬들의 여론에 민감한 TV방송에서 나의 새벽잠을 깨울 때 나는 아직은 이런 주
제넘은 책임감이 어울리지않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보냈다.
  나의 이 주제넘은 책임감을  정말 주제넘게도 영원히 나를 지키는 불침번으로 
내 옆에 두고 싶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팬들의 사랑과 묶어서…….
      내가 너무 못생겼다구요
    내 척추 속엔 금침, 콩팥도 ‘쌍둥이’
  고등학교 시절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을 때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계신 
장운수 선생님은 거액의  자비를 들여 나로 하여금  한의원에서 금침을 맞게 했
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금침을 척추  부위에 집어넣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이후 통증없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담당 한의사의  말에 따르면 75
년이 지나면 침  자체가 없어지고 효과도 사라진다는데  요즈음 이 금침이 돌아 
당시를 회상하게 만든다.  금침은 종아리, 허벅지, 무릎,  어깨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는데 처음에는 무릎이나 종아리  같은 데서 전기가 오는 것처럼 당기고 
아팠다. 그러나 이제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아! 지금은 이 녀석이 이리로 왔
구나!’하고 침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돼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의사인 룬추하
이머가 하루는 기겁을 하고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달려왔다. 척추 속에 쇠가 들
어 있고 신장도 ‘쌍둥이 신장’인 때문이었다. 도양  침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
하는 그로서는 척추에  왜 쇠가 들어가 있으며  또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네 방식으로는  등을 째고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 등에는 수술한 흔적도 없으니 금침의 효과는 접어두고서라도 
침을 어떻게 넣었을까 하는 점부터 궁금했던 서이다.
  나는 신장이 양쪽에 두개가 있다. 고무풍선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으면 얇아지
듯이 두 개인 경우는 그  벽이 무척 얇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쉬 상하게 된다
고 한다. 당시 나의 부상은  상당히 심해서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정
상적인 신장을 가진 사람도 그  위험도가 상당히 높은데 나처럼 유난히 얇고 큰 
신장을 가진 경우는 한층 더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가 있었다. 이제는 다 지
나간 얘기들로 나는 이처럼 건강하게 뛰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침술에 대해 박
사 학위를 가진 서양의사들조차 도무지 이해를 못할 만큼 서양과 동양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독일 수상인 콜을 주인공으로  해서 지어낸 
콩트를 모아 번역해서  만든 책을 그 예로 들어보자. ‘콜’이라는  이름 자체가 
재미있어 호사가들의 흥미를 돋우는  모양인데 우리 나라 말로 치면 ‘배추’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우리 나라의  배추는 이곳 이름으로 ‘중국배추’고  우리가 말하는 양배추는 
‘하얀 배추’, 빨간빛을 한  배추는 그냥 ‘빨간 배추’라고 부른다. 헬무트 콜 
수상의 둥글둥글한 모습은  ‘헬무트 배추’로서 꼭 어울리는  인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이 책을 선전하는 잡지광고를 보면 엉뚱하게도 콜 수상
이 아닌 바이에른의  스트라우스 주지사의 사진을 싣고 있는 것이다.  또 비만증 
치료라는 제목의 광고란을 보면  독일에서 수입한 기계로 금방이라도 살을 쑥쑥 
뺄 수 있는 것 같은데  모순적이게도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 탓인지 이곳 성인들
의 비만증은 그 심각 정도가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높다.
  책마다 동양의 신비한  다이어트 법을 선전, 소개하고 남산만한 배를  가진 사
람들이 작고 호리호리한 동양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는 이곳 현실과는 너무
나 큰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이제는 대한항공이 매주 세 번씩  서울과 독일을 왕
래한다. 루프트한자와 에어프랑스로도 서울과  유럽을 연결하면서 분주하게 문화
를 섞고 있다. 그러나 동양을 바라보는 눈은 신비하기만 하다. 그리고 멀다.
    ‘안 미남’내 얼굴
  1986년 6월로 기억된다. 월드컵 팀이 멕시코에서  귀국할 때 나는 먼저 귀국해 
있었는데 공항에서의 환영식에 나오라는 명령에 따라  다시 공항에 나갔다. 축구 
선배님들이며 선수 가족들로  꽉 찬 공항은 마치 잔칫날 같은  분위기였다. 앞으
로 봐도 반가운  사람, 뒤로 봐도 보고 싶던 사람들이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데 
멋을 잔뜩 부인여자 분들이 5,  6명 서 있더니 나를 보고 아는 체하면서 웃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병주 부인이에요." “아 예, 하하하.” 왜  웃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병주 부인을 시작으로 인사가 계속됐다.
  “저는 정종수예요.” “정용환이에요.” “저는 조민국…….”
  자신의 이름 대신 소속(?)만  밝힌 셈이다. 그러고는 문을 나서서 공항 광장으
로 나서는데 웬  아가씨들이 요란스럽기에 큰 키로 쓱  넘겨봤더니 주성(김주성)
이 녀석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주성이 오빠, 사인해 주
세요.” “주성이 오빠,  사진 좀 찍어요.” 내가 옆으로  지나가는데도 “범근이 
오빠”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정신없이 “주성이 오빠”만 찾아 헤맨다. 
주성이 녀석 날보고 보란 듯이  여유 있게 아가씨 팬들을 대하고 있는데 도대체 
나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던 것 같다.
  하나 엄마의 핀잔대로 “당신은  못생겨서”가 그 이유였던 듯 싶은데 주성이 
녀석이 귀엽게 생긴 것만큼은 틀림없다. 성격도  붙임성도 좋고 싹싹해서 나같이 
생겼다는 종부(김종부)보다는  선배들로부터도 귀여움을 더 받는  것 같다. 우리 
축구계에는 이세연 선배가  붙여 놓은 “3대 추남”이 있다.  누구인지는 당사자
의 사생활을 침해할 것 같아 감히 밝힐 용기가 없으나 결단코 내가 거기에 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얘기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나도 대학 시절에는 그 못생겼다는 얘기가 듣기 싫어서 정정을 요구하는 의견
을 많이 냈지만 그때마다 아무에게도 동의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 하나 엄마 역
시 나를 못생긴 남자로 보기는 마찬가지여서 결혼전 친구들로부터 “제 눈에 안
경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무심결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야, 내가 그렇게 못생겼냐? 
나보다 더 못생긴 사람도 있잖아.”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음, 성화도 
그렇고....” 쌀장수 박성화 얘기다. 배꼽을 쥐고 웃던  하나 엄마가 그 얘기를 성
화한테 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들려온 얘기에 의하면 성화 녀석 
밤새 잠을 난 자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야! 내가 범근이 
형보다 못생겼냐”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엉뚱한 사람까지 고민하게  한 내 
얼굴을 우리 하나와 두리 녀석이 너무나도 꼭 닮아 또 골치를 썩인다.
  처제 친구들의 표현을 빌면 “하나는 잘못 닮고 두리는 잘 닮았다”는데 아무
튼 우리 집 차  씨는 한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1986년  10월에 태어날 ‘세찌’
에게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혹시  이번에는 엄마 닮은 딸이  나올까 해서.... 
하나, 두리, 세찌가  다 나를 닮아도 물론  상관이야 없지만 이왕이면 엄마 닮은 
딸이 하나쯤 있어서  내가 조금은 덜 구박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제는 나보고 잘생겼니 못생겼니  하는 사람도 없는 걸 보면 하나  아빠, 두리 아
빠, 세찌 아빠의 얼굴로 내  모습이 굳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아빠의 얼굴이야 다 
똑같은 거니까.
    근차붐이 누구야
  1985년 여름 스포츠  인들의 파티가 있어 우리  부부가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문 앞에서 안내를 맡고 있던 젊은 남자 두 분이 명단을 뒤적이면서 쩔쩔매는 것
이었다. 앞으로 뒤로  훑어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미안한지 연신‘죄송
합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벌써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아  그 사람들 옆
으로 다가갔다. “B에서 찾아보시지요”  “없는데요” “그럼 C(Cha)에서 찾아
보시죠” “벌써 봤지요.”  “그렇다면 T(Tscha)는 어때요.” “거기도  없던걸
요.” “그럼 마지막으로 K를 봐주세요.” “왜요?” “글쎄 한 번 보세요.” 그
곳에 내 이름이 있었다. Kun Cha  Bum. '근차붐‘이라는 이름을 명단에 써놓은 
사람의 무례(?)도 보통이 넘지만 사실 내 이름의  표기법 때문에 항상 많은 질문
을 받았었다.
  레버쿠젠 구단의 구장 내 기자실에는 아래와 같은 친절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
다. “친애하는 기자 여러분! 차범근  선수의 이름에 대해서 착오 없으시길 바라
는 뜻에서 아래와 같이 알려드립니다. ‘범근’은  그의 이름이고 ‘차’는 그의 
성입니다. 바이에르 홍보실.”  오죽했으면 기자실 안에 이런 안내문이 나붙었을
까마는 어쨌든 내 이름은 참으로  많다. 가장 표준이 “차!”하고 부르는 것이고 
우리 클럽의 친구들은 어렵지만 “붐쿤!”하고 부른다. 그러나 독일 대부분의 스
포츠 신문들은 ‘차붐’이라고 고집스레 쓰고 있으며 그것도 Cha가 아닌 Tscha
로 쓴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도 괴롭고 민망한 이름은 “쿤!”하고  부르는 것인데 성에 
해당하는 줄 알고 그런 것이다. 하기야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통하기
만 하면 되겠지만  ‘차붐!’은 나의 애칭이자 알아듣기 쉽고 부르기  쉬운 이름
이 됐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서울시  전화번호부 책을 들춰보면 대부분의 이름
들은 두 개  이상 나열해 있는데 ‘차범근’은 유일하게 혼자밖에  없었다. 아직
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범근’이란 이름은  부르기도 듣기에도 그렇게 
좋은 이름은 아니다. 그런데도  얼마 전 한국의 팬인 기사 아저씨  한 분이 아들 
이름을 ‘범근’으로 지으셨다니 그분의  바람 못지 않게 나도 그 ‘정범근’이
가 씩씩하고 착실한 청년으로 자라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막 대표선수가 되어 우리 작은 동네를  들뜨게 했던 무렵, 동네의 어른들
이 대견스러워 부르시는 ‘범금이’‘범근이’소리가 여섯 살짜리 동네 꼬마 귀
에는 저희  친구 정도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하루는 어머님이  앞마당에 고추를 
널고 게시는데 쪼그만  녀석 하나가 대문 안으로  쑥 들어서더니 “범근이 있어
요?”하고 묻기에 어머님이 하도  기가 막혀 “왜 그러냐?”고 되물었더니 “그
냥 놀려고요”하더라는 것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은 나를 ‘차범
근이’로 부른다. 나를  직접 보면 ‘차범근 아저씨’라고  하겠지만 ‘차범근이
’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게 아마 저희들에게도 편하려니 하는 생각이다.
  요즈음 ‘하나 아빠’라는 말도 ‘차 선수’못지 않게 친근한 내 이름이 되었
지만 사실  ‘차 선수’라고 불러 주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내가 생각하기에
는 가장 무난하고 듣기에도 거북하지 않을 듯한데 이상하게 나에게 있어서는 ‘
차 선수’는  존칭이 아닌 존칭의 의미로  씌여질 때가 많다. 내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 그곳 광산에 노무자로  왔다가 머물러 살고 있는 소위 ‘가다 그룹’의 
교민들이 초면인 나에게 “범근아”“범근아”하고  불렀었다. 이곳에 왔던 다른 
선수들한테는 자기들에게 ‘선생님’이란  칭호를 쓰라고까지 하면서 소위 국가
대표까지 지낸 노장스타 선수들의 이름을 불어댔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분들은 아직도 버릇이 돼서 내가  없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 엄마한테 
‘범근이가’로 시작하다 찬바람이 씽 도는 얼굴을 보고 놀라서 격을 높여 주는 
게 ‘차 선수’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학부형인 본인과 부인을 옆에 
두고 이름을 불러대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
게 ‘범근아’가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바로 가끔씩 은사님이 불
러주실 때다. 나를 키워주신 장운수 선생님, 이제는 “하나 아범아”하시지만 나
는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범근아”가  훨씬 좋다. 그리고 정겨운 똥차 형, 호곤
이 형, 재만이 형,  짤막이 형, 꺽다리 형……. 이 형들이  “범근아!”할 때 나는 
고향을 느낀다.
    교포가 건네준 ‘해묵은 사진첩’
  1989년 새해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풍성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한국에서  부쳐져 오는 신문 꾸러미에 휘갈기듯 쓴  프랑크푸르트 공항
우체국 어느 우체부의 꼽사리 연하장이 며칠간 계속 나를 친근하게 하더니 어느 
날 멀리 미국에서  앨범 두 권을 들고 나를  찾아온 이민 교포 대학생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클럽 사무실에까지 자기 덩치만큼이나  풍성한 화제를 가져다주었
다.  10년 전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따라 텍사스로 이민  갔다는 그는 10
년 전 한국에 있을 때 보았던 나에 관한 신문과 잡지의 스크랩들을 간직하고 있
다가 나도, 자기 자신도 불쑥 어른이 돼버린  후에 ‘범근이 형’을 찾아온 것이
다.
  새롭게 보는 10년 전의 한국  신문과 잡지는 여러 면에서 나에게 무척 새로웠
다. 호흡을 가다듬고 두 눈에 힘을 모은  다음에 읽어나가야 할만큼 활자는 무척 
작았고 나의 기사 맨  끝에 쓰여 있는 기자들의 이름 석자도  이제는 차장, 부장
님들이 돼버려서 더 이상 차범근의  얘기 뒤끝에 쓰여질 것 같지 않은 이름이었
다.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의  프로다운 매력을 와이셔츠 단추를  배꼽까지 풀어헤
친 모습에서 찾고 있는 기사를 보자 10년 전 우리가 생각했던 프로의 허상을 한 
눈에 읽을 수 있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대의 얼룩 유니폼, 또 공군의 
푸른색 유니폼, 그리고 내 심장이 뛰는 곳에  태극기를 단 대표선수 유니폼을 입
은 나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는 너무도 다른, 그래서 내가 상당히  긴 시간을 무
거운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이었다.
  양 볼에 아직 통통히 살이 쪘던 당시의 나는 비록 타협할 줄 모르고 고집스러
웠지만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순수하고 깨끗했으며  열심이었다. 특히 ‘온 국민
의 성원과 희망을 양다리에 싣고’라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을 만큼 대단히 무거
운 국민적 기대를 안고 독일땅에서 뛰었지만 그때 나는 부담스럽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넘치는 의욕이 그런 국민적 큰  기대를 내가 충족시켜 주고 있다
는 희열과 기쁨으로 축구이외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았던 신기할 만큼 가난하고 
초라하면서도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되돌아보는 10년. 많은 분들이 당시 외곬인 
나를 꾸짖고 욕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분들도 나도 그때가 내 인생에 가장 진
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고, 그래서 더욱 가치를 둘  수 있는 시간들이
었다고 서로 확인하곤 한다. 나는 그 날  갑자기 편안하고 안락하기만 했던 부끄
러운 30대를 되돌아보고 무거운 마음이 되었다.  사진만 보아도 뜨거움이 느껴지
는 20대가 엄한 얼굴로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

      길고 질긴 30대를 위해
    나의 30대
  우리집 사모님(‘차범근의 마누라’란 소리가 진저리나게 듣기 싫다니  나라도 
이렇게 불러줘야지)이 20대를 마감하고 30대로 접어들던 때 꽤나 심각해했다. 30
세가 되는 것이 싫어서다.  내가 여자가 아니니 깊은 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나 
역시도 축구 선수로서 30줄에 들어설 때 무척  두려웠던 것 같다.플레이가 몇 경
기 째 풀리지 않으면 성급하게 은퇴를 생각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이것으로 한계
가 아님가 하는  의문으로 항상 살얼음판에 선 기분이었다. 남자들의  체력은 일
반적으로 16세부터 시작해서 20세까지 증강했다가 다시 하강하게 되는데 분데스
리가 선수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나이는 25세에서 30세까지로 꼽는다.
  20대 초반의 선수,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투지, 그에 뒤따
르는 체력이 화려한 경기를 펼칠수 있는 요소가  된다. 나의 경우를 봐도 그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말 뛰듯 달리고 5분 동안에  세 골을 넣는 광기(?)까지 부렸던 
때였다. 내가 분데스리가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이름
조차 생소한 10대 스타들이  태어나는데 나는 항상 “어린아이들이 한번 자신이 
붙으면 그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고 얘기했다. 그런  아이들이 한참 뛸 때 그
런 팀하고  경기를 하면 무척이나 골치가  아프다. 우선 그런 선수들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젊은이 특유의 기질에 질려 버리게 된다.
  내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에도 물론 나이는 26세였지만 분데스리가에 열렸던 
나의열기에 상대 선수들이 압도당했던것 같다. 그러나  이 젊은이의 열기가 사라
지고 제정신을 차리게 되면 대개  1년에서 3년 정도의 슬럼프를 맞게 되는데 바
로 이 시기에 어리고 경험없는 선수들의 상당수가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포기하
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이 시기가  지나면 직업선수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보이
게 된다. 그러나 비오고 해나고 바람불고 눈오고  하다 보면 어느듯 은퇴할 때가 
온다. 그때가 30세에서 32세.
  이때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기장을 떠난다. 1984년까지 레버쿠젠에는  30세 이
상의 선수 4명이  주전으로 뛰었었다. 그러나 1986년부터는 주저  ㄴ11명 가운데 
나 혼자만 남았었고  그나마 26세의 회르스터를 뺀  나머지 선수는 평균 연령이 
22세였다. 18, 19세의  선수들 한테 나는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1984년
까지만해도 나는 은퇴를 해야 할 적당한 시기를  찾는데 조급해 했다. 그러나 언
제부터인가 ‘위신’이니 ‘체면’, 이런 것 때문에 다시  할 수 없는 좋은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있는데도 그만 둔다는게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됐다.
  ‘내가 그만 두고 싶지 않아도  필요 없을 만큼 낡으면 구단에서 어련히 알아
서 내쫓으려고’하는 마음이었다.
  체력이 가능 할 때만 할 수  있는 축구, 나는 오래 하고 싶었다. 굳이 젖산 검
사에서 19세 먹은 아이들보다 체력이 좋다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
는 축구가 너무 좋다. 십여 년 동안 잘  뛰기 위해서 술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잘 자고 잘  먹고 그랬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조각  남은 초콜릿을 오래오
래 아껴먹기 위해서  기꺼이 이런 ‘절제’를 하리라. 길고 끈질긴  나의 30대를 
위하여.
    프로의식
  독일에 있을때 일이다.  한국에서 장모님이 보낸 소포가 왔다.  표고버섯, 김튀
각, 고춧가루  등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풀면서 포장한 신문지를 뜯다  보니 내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내용으로 봐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합류가  결정된 직후
의 기사인  것 같은데 나의 프로  의식을 매우 염려하는 투의  얘기였다. 고국의 
버섯향기가 잔뜩 배어 있는 신문을  읽다 말고 문득 나 스스로에게 의문스런 점
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과연 무엇이 프로의식인?’하는 것이었다.
  축구와 같은 경우 단체경기를  하는 직업선수들은 개인 운동을 하는 선수들과 
다른 특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 역시  독일에 가서 맨 처음 배운것은 한
국에 알려진 것처럼 화려한  일들이 아니라 나를 둥굴둥굴하게 만드는 작업이었
다. 우물 안 개구리  처럼 한국에 있을 때는 내가 최고인  것처럼 알고 지내다가 
맨 처음 부닥치는 현실이 펠레가  아닌 이상 나보다 잘하는 선수는 항상 존재한
다는 것이었다. 특히  세걔적인 선수가 되고 싶어서 눈을 세걔로  돌린다면 더욱
더 작아  보이는 내 모습은 어쩔  수 없었다. 프로 축구선수는  능력별로 대접을 
받는 직업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잘하는 선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모른다면 
그냥 한국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남아  있는 게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을것
이다.
  고집이나 오기를 표면에 나타내서는 절대 안  된다. 스타의식은 자기의 실력을 
키우는 거름이 되어야지  그게 곧바로 꽃이 핀다면 그 생명은  짧아진다. 어설픈 
오기 보다는 충실한  생활이 그의 생명이나 인기에  확실한 보템이 된다고 나는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격도 두부모판에 드어가면  두부가 되어야 
하듯이 어느 일을 막론하고 조화를 이룰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 말에 “장사
꾼 속(내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
음에 들지 않는 동료나 감독이 있다손 치더라도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철저
히 인내하고 동화되어야만  한다. 세계 축구 선진국의 국가 대표단만  봐도 그렇
다. 어느 선수 하나 자기  팀에서 스타 아닌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일단 대표단
이 구성되고  나면 그 중에 또  스타가 있게 마련이다. 그곳에서도  적잖이 젊은 
선수들이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들 때문에 팀 생활에 적응을 못해 
경우가 많다.
  내가 레버쿠젠으로  옮겨올즈음 함부르크에서 얘기가 한창  무르익은 적이 있
다. 명문 팀이기에  나도 무척 가고 싶었고  그들(특히 선수들)도 나를 원했지만 
매니저가 같은 값이면  다시 팔 수 있는 젊은  선수를 사는게 이롭다고 해서 나 
대신 뷔트게를 사고 말았다. 나에게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지금 그 젊
은 선수는 다시  카이제르슬라우테른으로 팔려가고 말았는데 함부르크에서 거의 
2년 동안 벤치에만 앉아 있었다.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팀동료들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또 한 예로 흑인 혼혈인  하트빅이란 선수도 2
년만에 함부르크에서 쾰론으로, 다시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로 옮겨갔는데 독일 
올림픽 국가대표까지 지낸 뛰어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에 비해 뒤지는 적
응력이 결국 분데스리가에서 그를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분데스리가에서 줄곳 나를 남에게 맞추는  것을 배우면서 살아왔다. 그게 
곧 나의 직업이기에 아직도 완전하다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많은 감독들이 나를 
뛰어난 프로라고  할만큼은 배웠다. 10년  전 프랑크푸르트 팀에  처음 입단했을 
때 주장이자 인기 선수인 그라보브스키가 있었다. 당시 감독은 그보다 2, 3세 정
도 위인데다가 인기  선수 출신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불화를 본적이  없었다. 그
들은 철저히 자기 일에 충실함으로써  팀 창단 80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 연맹전
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프로다.
  심한 경우는 감독의 나이가 선수 보다 적은  경우도 있다. 실제로 리벡이 프랑
크푸르트 팀 감독으로 있을때 린드너(1986년  당시 프랑크푸르트 부회장)같은 선
수는 나이가 훨씬 많았었다.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곳, 바로 그런 상황에서 
문제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선수가 진짜 프로가 아닌가 싶다.
    배고픔
  1985년 독일에 들른 고등학교 코치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모처럼 뵙는 
한국 분들이라 반갑기도  했고 청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시골 아저씨 이름
이 생각나는 것 처럼 나를 깨우는 얘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에게 일
기를 쓰게 해서 거두어 읽어봤더니 실컷 한 번 먹어봤으면 하는 얘기가 가장 많
더라는 것이다. ‘배고픔’ 지금은  나 역시도 잊고 산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
절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언젠가 라도 한번 실컷 먹고 싶었던 라면.  운동을 마친 뒤 혜화동에서 목욕하
고 학교까지 올라가려면 골목골목에서  나는 찐빵, 만두 찌는 냄새, 단순한 군것
질의 욕구가 아니라 성장기 청소년의 육체 바닥에서부터 나는 허기가 그것을 찾
는 것이었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반찬에 밥, 그것도 상급생이 아닌 다음
에는 먹고 싶어도 숟가락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 나에게도 그 당시 머리에 
꽉차 있는 욕구는 “먹고  싶다. 실컷 한번 먹어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신체는 고등학교 과정을 지나는 동안 완성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성장기의  자녀들에게 옷 사대기 신발 사대기가 힘
들다고 투정하시겠지만 우리의 신체가  그만한 발달을 하려면 물만 먹고는 어림
도 없는  일이다. 특별히 단백질이 가장  많이 요구 되는 시기는  나는 이때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지고 성장해 가는  신체의 세포들, 이 세포들의 
양적 팽창과 지적 향상을 도우려면 단백질, 쉽게 말해서 고기가 꼭 필요하다. 작
은 동양 사람과  큰 서양 사람, 작은  옛날 사람들과 큰 요즘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나처럼 영양실조다 뭐다  하면서도 179센치까지 자란 사람도 있지
만 어쩌면 나도 그 당시 잘 만 먹었으면 김재한 형만큼이나 컸을지도 모른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내가 26세에 독일에 왔는데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
의 2센치가 자랐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이다. 나는 180센치에 
가깝다. 독일에 와서  처음에는 하루 저녁에 1킬로그램의 쇠고기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남들은 놀랐지만  나는 먹을 수가 있었다.  내 몸의 세포들은 피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던지 청소년기에 다  피지 못한 것들이 늦게라도 화분에 물준 것
마냥 핀 모양이다.  2센치. 키의 2센치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후배
들 고등학교 선수들은  잘 먹고 잘 크고 그리고  축구에 기술 향상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두뇌 발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의 나무를 잘 기르는것과 같은 식이다. 낙엽을  긁지 않고 놔둬서 거름이 되
게 하고  적당한 비가 수분이 되었으면  한다. 대전상고 선수들은 그  학교 출신 
선배들이 한 명씩 선수를 맡아서 먹이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배불리 먹
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
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지면을  통해서도 그 도와주는 분들께 감
사드린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학교에서도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도시락을  두 개씩 싸와서 맛있는 반찬을 먹게  해줬던 고등
학교 때의 내 짝 경일이 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놈의 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독일에  있을 때 1년에 얼마나 버느냐고 묻는 사람
들에게 나는 곧잘 조목조목 설명해주곤 했다. 호기심으로 듣는 표정이 재미있다. 
그 다음 “그것 밖에?”하는 놀라움이  신나고, 나중에 “별거아니구나”하고 손 
탁 털고 일어서는 모습이 진짜로 재미있다. 풍선에  바람이 픽하고 빠지는 것 같
은 사람, 입을 헤 벌리고 “그것밖에 못 벌어? 나만도 못하잖아?”하는 사람, “
차범근이 너 소문만 쩡하지  별거 아니구나” 하는 사람, 내가 읽을  수 있는 표
정은 그야말로  여러 가지다. 또 나이  들고 여우가 있는 분들은  “그래 가지고 
나중에 생활이 안 될텐데”하기도 한다.
  여담 한마디하자면 몇 년 전 어느 여기자 한분이 독일의 우리 집을 방문한 적
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열이면 어홉은  묻고 넘어가는 
봉급 얘기가 또  시작되었다. “예? 봉급이요? 1년에 1억 2천쯤  받아요”  그러
고는 막 “근데 세금으로  반이 나가지요”라고 덧붙이려는 순간 “그것밖에 못 
받아요? 12억이  아니고요?”하는 것이다. 성질 급한  우리집 마나님 0.5초도 안 
걸려 하는 말이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영자 여인 사건 이후 숫자 개념이 
없어졌나봐요?”
  꽥! 12억이고 1억이고 나에게는 다 굉장한  돈이다. 1년에 1억 2천만원을 번다
면서 그게 무슨 굉장한 돈이냐고  하시겠지만 내 손에 그만한 돈이 모이려면 꼬
박 3, 4년이 걸린다.  정확하게 떼고 나오는 50%의 세금, 네 식구가 잘  입고(의) 
잘 먹고(식) 잘 사는(주)데  드는 돈이 보험료, 자동차 굴리는 돈까지  합쳐서 월 
150에서 200만원 정도. ‘잘’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수평 저울처럼 생활비와 저
축이 서로 올라가는데 가계부 붙잡고 사는 하나 엄마의 ‘잘’은 다분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의 봉급은 이곳 수상 봉급보다 많다. 전 서독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4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아름답고 젊은 부인과 살고  있다. 그러
나 이 정도 봉급이면 나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 수 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이제 막 학위를 받은  우리또래의 박사가 연구소에서 받는 봉급이 90에서 120
만원 정도고 모든 과정을 마친 의사가 종합병원에서 받는 봉급이 4천~5천마르크
(120에서 150만원)인데 비하면 얼마나 많은 돈인가? 나는  분명히 돈 잘 버는 축
구 선수다. 그런데  한국만 가면 기가 팍  죽는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상상컨데 
꼭 촌놈 쌀 팔아서 서울 쌀롱에 가서  쓰는 격이다. 후딱하면 튀어나오는 몇십만
원, 몇백만원 하는 숫자가 나를 섬뜩섬뜩 놀라게한다. 몇십만원 짜리 봉급쟁이들
이 자기 봉급 반을  밥 먹고 나서 척 낼 때 나는 벌써  이상해진다. 즐비하게 서 
있는 억대의 아파트들, 그  속에 사는 몇십만원 짜리 봉급 생활자들을  볼 때 나
는 진짜로 수상해진다. 상관없다.
  수상하고 이상하고 요상해도  문제는 내게 있으니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나는 하나 엄마를 꽤나 믿었었다. 지난번  계약 때도 보니까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10% 정도 연봉을  깍자는 클럽의 제의를 “성적이 모든 걸 말해 주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하기에 굶어죽진 않겠구나 했
었는데 확실히 함께 살면 닮는 모양이다.
  레버쿠젠의 경우 연봉의 반이  한꺼번에 나오는데 도대체 챙기는 기색이 없었
다. 때가 됐는데  싶어서 물었더니 벌써 한달 반이 지났다면서  그때서야 은행에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하도 한심해서 “그렇게 챙기지도 않을 돈, 뭐하러 더 받
겠다고 애를 써!” 했더니  “돈 더 받으려고 그랬나 뭐? 당신이  그만한 선수인
가 확인해보려고 그랬지!”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 엄마까지 이 지경에 이르렀으
니 어떨 땐 슬슬 걱정이 된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생활이 안 될텐데” 하시던  어떤 분의 말씀이 지극히 
지당한 것 같은  생각에서다. 기껏 생각해서 보낸 모교의 기금이  “야구 선수도 
몇백만원씩 하는데 돈 잘 번다고 소문난 차범근이 몇십만원 내면 도리어 욕먹는
다”는 이유로  중간에서 되돌아와 버렸을  때 다시 한번  “아차”한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있다. 차범근이 돈 잘  버는게 몹시도 못마땅하셔서 인간성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던 분들!  지금쯤 손 탁 털고 일어나시면서 아주  걱정스럽고 근
엄한 얼굴로 “자-식, 별거  아니었었구나. 그 녀석 나중에 어떻게 생활을하지”
하고 염려하실 겁니다. 그러니 미워하지 마십시오, 제발.
      축구는 두뇌로 하라
    선수 이적 막지 마세요
  아주 오래 전 프로 팀을 맡고 있던 단장 한 사람이 “요즈음 선수들은 부지런
히 해서 다음 계약때 더 잘 받을 생각은 않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해서 한밑천 잡
을 궁리만 한다”고  불평을 했다. 나는 축구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는 항상 
필요 이상의 감정을  보이는 병(?)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  분위기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선수들이 돈벼락과 함께  들이닥치는 프로팀의 창단을 영
구적인 사업으로 믿지 못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좋아 한다고 서둘러서 축구팀을 
만드는 구단을 선수들이  어떻게 평생직장으로 믿겠어요?”라고 했는데 사실 그 
동안 우리 국내 프로리그는 “없애버리겠다‘는 위협을 수없이 받으면서 성장할
때를 놓친  채 절뚝거리면서 오늘까지  왔다. 요즈음도 구단  관계자들은 툭하면 
”일년에 수억씩 손해를  보면서 무엇 때문에 프로구단을 맡겠느냐?“고 그럴듯
한 이유를 앞세워 주위의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술집에 가서 술을 먹고는 옆에 앉은  호스티스에게 “야! 
네가 옆에 있다고 소주가 양주되냐?  이 돈은 순전히 내가 너에게 그냥 주는 것
이야. 잘 알아둬”하고 팁을 준다면 그는 이만  저만 몰염치한 인간이 아닐 것이
다. 수십 명의  선수들이 자기 회사의 유니품을 입고 땀흘리고  외로움을 참으면
서 가정을 떠나 허구한 날  합숙하고 경기하는데 정작 그들이 속해 있는 구단의 
태도가 그렇게 도도하다면 서글픈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6년이 지난 선수가 
자유계약 허용’조항이 백지화되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6년이 지난  선수가 완전히 자유화 되는 조항 자체에는 문제
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조항을 선수들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문제
가 있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조차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선수들이 팀을 옮
겨가고 또  사가는 팀이 생겨나자 “우리  이것 귀찮으니까 없애버리자”하고는 
구단주들의 의기가 투합된  것이다. 보완과정도 절충단계도 전혀  거치지 않고서 
말이다. 이제는 과열  스카우트의 방지를 위한 것이라고 해서 팀을  선택하는 것
도 드레프트제가 되어서 팀으로부터  뽑힘을 당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팀에서 
알아주는 것 이상은 사실상 받지도 못하게 하고,
  한번 계약에 묶이면  불필요한 인물이 되기 전에는  영원히 그 팀의 소유물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어떤 신문은 현대판 ‘노비 문서’라고 했다. 
어떤 이는 “1년에 억이 넘는 돈을 접대비로 쓴다고 자랑하는 이런 식으로 경비
를 절감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결정을 내릴수 있는 배경이  “소주가 양즈 되냐?”는 식의 몰염치와 억지를 깔
고 있는 듯해서 더욱더 쓸쓸하다.
    ‘결과 보장된 도전’은 없다
  무엇이던지 발전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항상  도전해야 한다. 그러나 ‘도
전’이라는 자체가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장된 도전’이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며 결과가 보장된 것이라면 ‘도전’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
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즈음 “야구는 잘 되어가는  것 같아 보이는데 왜 축구
는 관중도 없고 팬들의 관심도  끌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
발전을 위한 과감한 도전’보다는  ‘잡음 없는 현상유지’에 훨씬 더 만족하고 
안주하려는 구단주나 축구인들의 자세가  그 상당부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
어진다. 물론 그 외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그 원인으로  꼽힐 수 있지만 
바로 이 ‘물이 고여 있는 상태’는 정말로  국내 팬들을 지루하게 만든다. 물론 
스포츠의 특성도 야구와  축구는 다르다. 야구는 큰것을 한번 치면  몇점씩 나는
데 반해 맞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두가 죽는, 어쩌면 우리 축구  보다는 훨씬 더 
많은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와 가장 다른  부분이 될 수도 있는데 야구는 
선수를 사고 팔고 혹은 바꾸는데 있어서도 이제는 당사자나 팀이 그 ‘위험부담
’에 크게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감독들도 팀을 옮기고 또 그러다 보니 능력과 특징도 자연스럽게 드러
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한다면 축구는 어떤가?  필요치 않은 선수는 과감히 
팔고 필요한 선수로 내체를 해야  하는데 ‘다른 팀에 가서 잘하면 골치 아프니
까’그냥 붙잡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또 선수 역시 ‘좋다! 내
가 많이 받고 팀을 옮기는  대신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다’는 의지보
다는 ‘괜히 옮겨서 더 못하게 되면 나중에 욕먹지 않겠는가’하는 책임회피 식
의 결단이 리그  자체를 침체하게 만들고 팬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부담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
이 어쩔 수 없이  닥치면 인간은 변화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 
관리’를 우리는 긍정적이면서도 이상적으로 해나가면서 자기 발전을 꾀해야 하
는 것 같다.  지금처럼 6년 계약 선수들이 무더기로 풀려나는데  각 팀은 선수들
을 사고 팔지 않으면 서로 바꾸어서라도 선수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고 그로 
인한 효과를 얻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지금 이대로가 상책이다’라는 듯이 변
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바로 이런  관계자들일수록 입에 침을 튀기면서 프로 축구의 
발전책을 제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팀을 없앨 수도 있다고 우리 모두를 위협하면
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토요리그’어떨까
  지나간 80년대는 우리  축구사에 있어서 가장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한 시기였
다. 국내 프로  리그가 ‘슈프 리그’라는 이름으로 화려한 출범을  했었고 우리 
선수들에게는 생활인으로서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을 닦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도 했다. 매주 치르게 되는 경기는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말할 수 없는 큰 도움
을 주었으며 80년대에 두 번씩 월드컵 예선을 통과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이런 
경기들을 통해서 닦여진 것이다. 물론 불미스러운  일도 부끄러운 일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설공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하는데는 누구도 반대의 의견을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80년대가 집을 짓는 시기였다면 이제 90년대는 집을 집답게 꾸미는 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채워야 할 부분들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어쩌면 집을 짓는  것보다 더 더디고 표시 나지않는 지루한(?) 작업이 
남아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90년대를  맞으면서 우리 선수들의 기량 향상
을 위해서는 대학 리그를, 그리고 축구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관중을 동
원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이 많은  경기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슈프 
리그’를 통해서 이미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대학선수들에게도  매주 경
기 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렇게 된다면 축구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선수들의 발전 속도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
게 될것이다. 운동장  사정, 대회 경비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우선 
쉽고 간단한 방법부터 사작해 볼 만하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매주 토요일. 전국을 몇개로 쪼개서 각  대학 운동장에서 홈엔드어웨이 식으로 
간단하게 경기를 한다면 텅  빈 효창구장보다는 오히려 공짜 학생 구경꾼이라도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꼭  거창해야 할 필요도 없고 요란스러
울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해서 각 지역의 상위  몇 개 팀들이 모여 일년에 한번씩 
결승 리그를 치르는 식으로 한다면 우승팀에게  프로 구단들이 1,2천만원씩 모아 
상금을 지급하리라는 기대는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제 국내 팬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한다. 특히 
포철 구장을 선두로 울산으로 연고지를  옮긴 현대 같은 각 구단들이 자기 운동
장 갖기와 자기  고정팬 확보에 열의를 쏟는다면  90년대가 저물어 갈 때쯤에는 
각 팀의 색깔이  분명해질 것이다. “아무리 해도 팬들이 오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만큼 팬들을 운동장에 불러모으려고 애쓴 구단이 있을까? 연고지의 
팬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2천년대의 한
국은 분명히 ‘세계 톱클래스’를 향한 야심을키울 수 있을 것이다.
    축구는 두뇌로 하자
  “그의 이름과  그의 한마디는 여전히 분데스리가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있
다. 그에게 독일  축구의 문제점과 우리 감독들이 얼마나 부당한  책임과 역할을 
떠맡고 있는지를 들어본다”는 ‘스포트  빌트’지 편집자의 설명 아래 실린 분
데스리가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감독  하펠의 인터뷰는 역시 고민이많은 한국 축
구를 위해서 같이 들어볼 가치가있다고 생각한다.
  “독일 축구가 시들한 이유를  단적으로 꼽기는 복잡한 모자이크와 같은 것이
라서... 우선 첫째 조각은, 요즘 축구선수들은 몸과  힘으로만 경기를 해. 사실 축
구는 80%는 머리로,  20%는 발끝으로 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요즘  많은 선수들
이 바로 이  머리가 떨어진단 말야. 그러니까  경기의 묘미가 없는 거야. 거기다 
옛날 같지 않아서 기본기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채 분데스리가로 오는 선수들
이 많아. 그래서 이젠 훌륭한  선수 찾기도 힘들어. 감독이 쓸만한 재목 하나 찾
게되면 그건 정말  행운이지. 그리고 감독들도 특징이 없어서 자기의  축구를 선
수들에게 전수시킬 수가  없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 오베라트나 네처  같은 선
수들은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이라서 지도자로 나서면  분명히 독일 축구계에 
큰 보탬이 될텐데  자신들이 안하려 한단 말야. 매스컴이나 팀으로부터  보통 시
달림을 받는 자리가 아니거든.
  또 축구는 돈이 많이 드는  거라서 스폰스가 있어야만 하는데 바로 이 사람들
이 축구장에서까지 아는 척하려 들어 야단이야.  대부분의 클럽들이 스폰스는 스
폰스대로, 클럽  임원들은 임원대로 간섭한단 말야.  사실 클럽 회장이나 단장이 
감독에게 출전 선수 문제를 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되거든. 이런 팀에서는 
감독을 하루 빨리 그만둬야해. 내가 네들란드에 있을 때(하펠은 오스트리아 인으
로서 네들란드 대표팀을  맡아 아르헨티나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함)  오프사이드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그물 치듯, 고기가 걸리라고 치자는게  아니고 경기
장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얻어서 경기의 템포를 좀더  빨리 하려고 생각해낸 거
야.
  그런데 이 장님 같은 감독들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뒤따라 하거든. 1958년 제
6회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4-2-4시스템으로 우승하니까 10이면  9명의 감독들이 
모두 4-2-4로, 1966년 제8회  대회에서 영국이 4-3-3으로 우승하니까 또 하나같
이 4-3-3.... 바로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자신이 뚜렷한 안목과 축구의  틀이 없이
는 축구 발전에 도움을 줄 수가 없지.“ 긴  인트뷰의 끝을 맺는 62세의 지칠 줄 
모르는 명 축구감독. 내가 다시 그를 찾을 때까지 건강하기를 빌어본다.
    훈련량과 위장병
  한국의 9월은 더위가 한  풀 꺽이기 시작하는 때다. 7,8월의 뒤통수가 띵할 정
도로 더운 날  하루 세 번 훈련을 하고 나면  밥 먹기가 귀찮아 물에 말아 훌훌 
마시는 것으로 한끼를  때우곧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 축구선
수 중에는 위장병 환자가 유난히 많다.
  한때 독일에서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이희완 씨는 독일로 건너온 뒤 위장병이 
없어지고 밥맛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그 원인이 독일에서는  훈련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믿는다. 사실 나는 한국의  선배들을 뵐 때마다 
우리나라 축구는 훈련량이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리어 “한국의 
사정을 너무 모르는 이론상”이라는 면박과 함께 다른데 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
도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적재적량이 있어 너무 많이 실으면 
고장이 나고 수명도 단축된다. 나는 인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단순노동도 적정 노동시간을 초과하면 능률이 줄고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하물며 고도의 기술과 정신집중을 요하는 운동에서 이미 지쳐 있는 몸과 마음으
로 훈련을 계속할 때 부상이 속출 하리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웬만한 운동 선수치고 해마다 몇백만원씩 들여  보약을 복
용하지 않는 선수가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보약 값을  들이고 또 많
은 양의 훈련을 하면서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대회만 나가면 왜 뒤떨어지는
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곧잘 “선천적으로  타고난”이라고 한다. 그러나 체력이야  말로 적당
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좋은 식사로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이제는 옛날같
지 않아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들이 우리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체력
을 보강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되
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할 지금 적당한 훈련량, 효과적인  훈련방법에 대
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병난  위장에 몇백만원
어치 보약을 쏟아넣는 것보다 건강한 위장에 사과 한 알이 우리 몸에는 더 유익
하지 않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공차기 보다 힘든 독일 말
  귀국하기 1년 전 독일에서 나는 매일이다시피 “10년을 이곳에서 살았으니 모
국에 돌아가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독일 
생활동안 10년이 하루같이 도무지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독일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남들은 1년만 살아도 잘도 하는데  나는 말을 하려
면 머리하고 꼬리는 다  도망가고 가운데 토막만 간단명료하게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공부를  하는 나에게 “아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하는 
딸 하나가 얄밉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와 두리는 선생 삼아 꽤 열심히 하기도 했
다. 독일말에 나오는 Z를 그냥 가벼운 ‘ㅈ’으로 읽는다고  해서 동료 선수들이 
매일같이  내   생일을  물어  쯔바이   운트  쯔반지히스테(22일,   Zwei  Und 
Zwanzigste)에 거푸 나오는 Z를 짜장면 하면 'ㅉ'으로 읽는 연습도 꽤 하고 R발
음을 할 때는 목에 생선가시  걸린 사람처럼 캑캑거리는 연습도 하긴 했는데 입
만 열려면 연습했던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인 친구들은 도리어  자기들이 머리와 꼬리를 뗀  엉터리 독일 말을 나한테 
해서 웃기기도 했다.
  이렇게 형편 닿는  대로 살다가도 가끔 우리  두리가 눈치도 없이 "아빠가 공 
제일 잘 차는데 왜  주장을 안해“하고 물을때는 할 말이 딱  막히고 만다. 독일
에 있을 때 중국 부인이  미국에 가서 가정부로 시작해 억척스럽게 성공하는 내
용의 TV를 본 적이 있다. 갑자기 하나가  "두리야, 저 사람 꼭 아빠처럼 말한다. 
그지?"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것을  듣고 "야, 내가 저렇게 엉터리로 하
냐?"하며 한방 먹이려다가  얘기하는 폼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어서  그
만 기가 죽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답
답한 노릇인지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너무 말을  많이 한다고 잔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 말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조금
은 풀린다. 독일 말. 10년이 지나도 이  모양이니 언제나 잘하게 되려나. 머리 꼬
리 제대로 달고 화장까지 한 멋진 말을 할 날이....
    뻔뻔스런 아내 덕
  이거 정말 큰일났다.  내일은 마누라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 되는데  여간 불편
하고 찜찜한 게 아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평소 과장된 얘기를  하려도 해도 왠
지 뒷맛이 개운치 않아서 그만두곤  하는데 눈도 깜짝 안 하는 마누라의 뻔뻔스
러움 때문에 선량한 남편(?)이  이렇게 끙끙 앓게 된 것이다. 1988년 여름휴가를 
마치고 첫 훈련에 들어가던 어느 날, 반가운  동료들과 안부도 묻고 휴가 동안의 
얘기도 하면서 한창 흥이나 떠드는데 레버쿠젠 팀 공격수인 슈라이어 녀석이 폴
라로이드카메라를불쑥 내밀더니  "차! 은미(아내의 이름) 목걸이  있지? 왜 작년 
크리스마스 때 산 것 말이야. 그걸 찍어다 줄 수 있겠어? 안젤라(슈라이어 부인)
가 똑같은 것을 하나 맞추고 싶어해서"라는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덜컹 하고 멎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하나 엄마의 가짜 목걸이
를 보고는 정신을 못  차리고 묻고 또 묻고 안젤라에게 "가짜라는 말을 안  해줬
다"는 하나엄마의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킥킥거리고 웃을 여유가  있었는데 
오늘은 웃을 기분이 싹 가시고 말았다. 사진  찍어다 주면 분명히 목걸이도 빌려
다라고 하텐데 그때는오도가도  못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전부터  하나 엄
마가 서울 이태원에서 사온 가짜  액세서리들을 들고 다니는 게 못마땅했다. '루
비똥' 핸드백이니 뭐니  잔뜩 챙겨 올 때면 "가짜를 뭐하려  들고 다녀?"라고 한
마디하게 마련인데 뻔뻔스런 마누라는 "내가  들고 다니면 다 진짜인 줄 알아요, 
걱정 마세요"한다.
  하긴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야, 은미! 정말 좋은 것 샀구나. 어디서 샀
어?"하면서 열어보고 뒤집어보며 부러워하고 감탄하는 동료 부인을 곁눈으로  볼 
때면 "이런 한심한 여편네들!"하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가짜가 탄로 날까 봐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태원 가짜는  진짜보다 더 잘 만들어서 되집기 아니라 
뜯어봐도 모른다“는  뻔뻔스런 마누라 말이  더 걸작이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큰일이지 않은가. 보석상에 갖다 보이면 금방 탄로가 날텐데....
  "하나 아빠! 슈라이어한테 가서 은미가 목걸이를  한국에 두고 왔다고 하면 되
잖아요. 귀국할 때 보속이 너무 많으면 곤한하니까 일부 떼어 놓고 왔다고. 안젤
라는 정신도 없나.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모르게.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목걸이
에 다이아를 몇개씩  달고 다니겠어? 또 그 금은?" 라고  하며 도리어 큰소리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거짓말을 해야 된다.  아이쿠  주여! 내가 앞으로 이 같은 
곤욕을 치르지 않으려면 주머니를 털어 진짜를 사줘야 할까 봅니다.
    그때와 지금
  1973년 3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입학실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나는 
방콩에서 빡빡 머리의 촌놈  대표선수가 되는고달픔(?)을 맞이했다. 내가 영관스
런 대표 선수의 첫걸음을 고달픔이라는 표현으로시작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다. 그 당시(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지만) 나는 진자  촌뜨기였다. 외모뿐
만 아니라 공 차는 것도 하는 짓도 그랬다.  그런 나를 당시 축구협회 장덕진 회
장님꼐서는 무엇을 보고 그러셨는지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표 선수로 뽑으셨
다. 그 당시의 태표 팀은 역대 대표 팀 중  최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선
배님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세연, 이회택,  박이천, 정강지, 김호,  김정남, 정병탁.... 나로서는 TV에서나 
뵐 수 있는 분들이었다. 나이로도 10세 가량  차이가 나는 분들이니 나는 그분보
다 한 세대 뒤에나  오는 선수기도 했다. 또 당시 선배님들은  성격도 요즘 사람
들처럼 약고 매끄럽다기  보다는 무뚝뚝하고 우락부락했던 것 같다. 그런  대 선
배님들과의 합숙이 시작됐는데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라 운동이 끝나고 모두 쉬
는 시간이면 나는  선배님들의 빨래를 하느라 손바닥이 빨갛게 까지곤  했다. 또 
20개가 넘는 볼에 바람 낳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튜브의 튀어
나온 바람구멍처럼 생긴 볼의  바람구멍에 펌프로 바람을 넣자면 펌프질에서 나
는 열기로 손갉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낮잠도 못하고 애써서 볼에 바람을 낳어 메고 나가면 예외 없이 '볼에  바람도 
제대로 못 넣는  놈!'이라고 기합이 떨어진다. 공포와 같은  일이었다. 지금도 잊
혀지지 않는 일은, 현재는 아주대 팀을 맡아  유능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 김
희태가 처음으로 후배 선수로  들어옴으로써 나의 말단 생활이 끝났는데 태릉선
수촌에서의 어느 여름이었다. 낮잠을 자는데 희태 녀석이  잠이 덜 깬 사람 마냥 
내 방으로 와서 침대에 걸터앉더니 "형! 볼에 바람을 넣어야 돼!" 하면서 한숨을 
쉬고 도로 나가는 것이었다. 노이로제, 녀석에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고림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고달픔은  그 당시의 
후배 선수라면 마땅히 치러야 할 그런 일이 아니고 모자라는 내 실력이었다.
  나는 중학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축구 경력이래야 겨우 4년 
남짓한 때였는데 십여 년을 인기 선수로 이름을 날린 형들의 공 차는 모습을 보
니 도저히 창피해서 같이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형들이 슈팅이 훈련
을 하면 골문 뒤에서  볼이나 줍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래서  가끔씩 감독 선생
님이 불러야만 나가 몇번 슈팅하고는 또 계속  뒤에만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
독 선생님들은 내가 너무 어려서인지 귀여워해 주셨다.
  18세, 한창 뛸  나이였으니까 언덕을 뛰는 훈련을 하면 올라갈  수록 힘들어야 
하는데 저 녀석은 탄력이 붙어  잘 뛴다면서 손명섭 선생님은 노루새끼 뛰는 것 
같다고 칭찬해 주시기도  했었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민병대  선생님이 감
독으로 계실 때 나는 식사 때나 버스에서 서열대로 앉는 것을 모르고 아무 데나 
앉았다가 선생님이 특유의  이북 사투리로 "어? 이 친구 보게나!  여기가 어디라
고 앉아 있어? 저기 저 뒤로 가게, 자넨 저쪽 끝이야!"하시는 바람에 놀라 맨 끝
자리로 도망친 적도  있다. 그러나 그후로 선생님은 항상 버스에서도  나를 옆자
리에 앉히시고는 "남자는  큰 길로 다녀야 해! 골목길은 남자가  다니는 길이 아
니야!"하고 일러주시곤  하셨는데 급기야는 투견장까지  끌고 가서  맨 앞자리에 
앉히시는 것이었다.
  참 즐거운 추억들이다.  양복을 제대로 못 입어서 넥타이를 선배들이  매준 것
은 물론이고 한  번은 양복저거리 단추를 다 채우고 입었더니  "에이! 어그 촌놈
아(세연이 형 특유의  어휘) 양복저고리는 다 잠그는  게 아냐! 하나만 잠그든지 
아니면 잠그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촌놈!"하신다. 또  회택이 형(현 포항제철에 
이회택 감독)은 내가 기죽어있는  것이 실력이 없어 그런 줄은 모르고  선배들한
테 주눅이 들어 그런 줄  알았던지 하루는 "야 임마! 신경 쓸 것 없어. 밸꼴리는 
대로 한번 해봐!"하시면서 실컷 해보라고 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버릇처럼 지나간 일들 생각하기를  즐긴다. 그때마다 '내가 어떻게 해 나
갔다'는 것보다는 그때 '누군가가 어떻게 도와줬다' 혹은 '나를 아껴주었었다'하
는 부분이 훨씬 많은 것을 볼 때 혼자 사는 세상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86년  4월 말, 참으로 오랜만에 대표단  합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무척 많은 생각을 했다.  광래, 창선이, 영증이 같은 또래는 동료라
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 밑의 후배들.... 글세 내가 그 친구들한테 어떻게 해
야 할까? 나의 말없는  행동 때문에 부담스러워하지나 않을까? 내가 대표선수로 
활약할 때 그 친구들은 중학생이었을 테니까 우리가 서로 느끼는 거리감은 불가
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소속되어  있던 레버쿠젠 팀의 경우를 보면 
18,19세의 선수들이  몇 됐는데-더러 지나치게  건방진 선수들은  제외지만-많은 
어린 선수들에게 꼭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내 마음이 그들과 잘 통해서 즐거웠던 
것을 보면 서로가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쁘면 어떤 축구화를 신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오는 어
린 선수들, 같은 방을 쓰면 약속이 있으니 몇  시쯤 깨워 달라는 부탁을 하는 녀
석, 나에게는 모두가 다 즐겁기만 한 기억이다. 그해  어느 날 "키커"지와의 인터
뷰에서 '드렙스'란 어린 녀석이 "차는 운동이나 인격 면에서 표본이다"라고 과잉 
칭찬을 해서 나한테 꿀밤을 맞은 적이 있긴 하지만.... 당시의 한홍기 부회장님께
서 대표선수로 확정된 사실을 알려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차 선수, 솔직히 말해야  되겠네! 그 동안 결정이 늦어진 이유는 자네가 오게 
되면 모든 매스컴이 자네에게만 관심을 보일텐데 그렇게 되면 다른 선수들의 사
기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겠나? 잘  생각해서 행동해주게!" 서로 헐뜯고  싸우는 
것, 서로 잘났다고 요란 떠는 것, 팬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선배가 후배
를, 후배가 선배를  오순도순 감싸고 돌보는 것을  보고싶은 것이다. 싸우는 것? 
그것은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자!  우리 한번 보여주자. 싸우고 다투지 않는 우
리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기억을 잘해야 출세도 하지
  1987년 여름  휴가 때 모리셔스라는  아프리카의 작은 섬으로  여행을 갔었다. 
수상스키, 윈드서핑, 요트  등 온갖 스포츠 시설을 다 갖춘  '스포츠 섬'이었는데 
그곳에서는 한국사람을 만나게 될 아무런 연고가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며칠만에 우연히 해변가에서  만나본 한국사람은 이상하게도 나를  몰라봤다. 내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그가 첫눈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이야할 수 있겠
지만 잠깐의 대화 중에  내가 "독일에 있는 축구 선수인데 팀과  함께 왔노라"고
까지 얘기를 해도 날더러  "가수냐"하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이 친구 간첩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엔 너무 멀쩡하게 생겼고 그렇다고 아무
리 축구에 관심이 없기로서니 한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 직장 생활끼지 
했다는 사람이, 나를  모른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얼토당토않
은 억지가 생겼다.  그래서 그 다음날 신이  나서 쫓아온 다른 동료가 차라도 한
잔하자는 것을  빈둥빈둥 놀면서 시간이  없다고 삐딱하게 퇴짜를  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 방면엔 나 역시도 나을 것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몇 년 전 일인데 내가  잠시 귀국했을 때 내가 묵고 있던 호텔 커피숍에서 수
행원을 거느린 어느  멋쟁이 노신사를 만났다. 그분도 그렇고 비서도  내가 당연
히 자기네의 신분을 알 것으로 믿고 안부만  묻느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나
에게는 '정말 깔끔하고 멋있는 분이다'라는 생각만 들었지  내가 아는 분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  선수! 앉아서 차나 한잔 같이하지!"하는 것을  시간이 더 지
나면 내가 모르는 것이 들통날 것 같아서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약속이 있
어서요"하고는 선 채로 헤어지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커피숍에서 일하는 분이 아주  자상하게
도 알려줬을  때 나는 나의 그  기막힌 망각증에 스스로 감탄을  할 지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국무총리를 오래동안 하셔서 TV를 통해 탤런트 못지않
게 자주 뵙던 분인데....  그러니 "형부!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잘못하
다 간첩인 줄 알겠어요"하는 처제의  핀잔에도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이 출세하려
면 상대방의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해야 한다는데 반쯤 포기하고 사는 나도 걱
정이지만 아프리카의 그 친구도  나처럼 출세하고는 미리 담을 쌓았는지 걱정이
다.
    꼬마 추구대장 할래요
  "야! 너는 도무지 시원치가 않아서 내가 불안하다.  너 말야, 앞으로 누가 물어
보면 무조건 돈 없다고 그래. 독일서 몇 년  전 부동산 사기 걸려 다 날려버렸다
고 하란 말야. 그리고 뭘 하려거든 나한테 꼭 물어봐. 알았지? 어휴 시원치가 않
아서....“ 한번 해기했으면 됐지 두  번 세 번 다짐을 받아 뭐하나. 젠장. 나야말
로 어쩌다 이꼴이 됐지. 우리  딸 하나가 이제는 14세의 어엿한 '숙녀'인데 도무
지 사람들은 나를 믿기를 유치원  애한테 돈주어 보내는 것처럼 불안해 하니 보
통 문제가 아니다.
  그것도 '떡대' 좋은  체육부의 최장신 선배 한 분만  그러면 "정직하다고 나를 
우습게 보기는"하며 할 말이  있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하고 말을 놓을  만
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 열이면 열 모두가  다 그런 식이니 심각하다. 한편으
로는 벌어 놓은 돈도 별로 없는 나를 놓고 저렇게 걱정하는 분들에게 은근히 미
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시원찮아할까. 우리 집에서야  언젠가 얘기한 
대로 생전 처음  보는 곰보 해군 장교의 항공모함  얘기에 홀딱 빠져 돈을 잘못 
빌려준 뒤로 큰일날 사람으로 낙인찍혔지만 밖에서까지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
은데 온통 야단들이다.
  수박 한 덩어리  만 원 주고 살라치면 20명한테는  물어야 할 것 같고 아파트 
다섯 평 늘리려 해도  50명은 허락을 해줘야 할 모양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 속 
안 썩이려면 아무래도 꼼짝달싹 않고 꼬마들이나 모아놓고 대장노릇 하는 게 상
책일 것 같다.  고수부지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애들이나 조기축구회를  보니 재
벌도 부럽지가 않았다. 마치 그  운동장이 다 내 것 같았다. 그저 축구를 좋아하
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볼 하나에 운동화만 있으면  된다. 주위의 
선배들은 나를 염려하지만 강변의  잘 다듬어진 운동장들은 벌써부터 나를 흥분
시킨다. "선배님들 너무 염려 마십시요. 나는 애들하고 놀게요. 운동장이 있고 축
구공이 있는데요 뭘."
      우리도 갈비 좀 뜯어야겠수다
    만우절 해프닝
  1987년 4월 2일자 독일  신문에 의하면 200명 가량의 팬들이 마라도나를 보기 
위해 레버쿠젠 연습 구장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뒤편 연습장에 가보라"고 말
하는 운동장지기도  모처럼 있는 신나는  일인지 연신 싱글벙글  이다. 슈퍼마켓 
여 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오늘 운동장에 사람들 많이  왔었지요?"하면서 "생각
만 해도 재미있다"고 웃어댄다. 지나가던  어떤 시민도 "나는 어제 TV에서 토니 
슈마허가 빅토리아 퀼른으로 간다고 해서 깜박 속았다"고 거든다.
  4월 1일, 그러니까 만우절인 이날 그곳의 각  지방 신문들은 저마다 희한한 아
이디어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데 '레버쿠젠 저녁뉴스'란 신문은  1면 전체를 
할애, '1989년부터 마라도나가 레버쿠젠에서 뛰게된다'는 제목을 붙인 다음 마라
도나의 연습 사진과 또 우리 구단의 회장과 감독이 마라도나의 계약성에 사인하
는 사진을 실었다. 물론 이 사진은 모자이크 기법을 응용, 조작한 것으로 어딘지 
어색하면서도 그럴싸해 보였다. 이 신문은 또  마라도나가 지금 레버쿠젠의 라마
다 호텔 14층에 묵고 있는데 14층 전체를 경찰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접
근할 수 없으며 4월 2일 아침 레버쿠젠 구장서 시법 연습을 갖게 된다고 덧붙였
다.
  라마다 호텔에는 14층이  없다. 슈퍼마켓의 여 종업원은 바로 이  대목에서 눈
치를 챘다지만 많은 레버쿠젠  팬들이 곧이곧대로 믿고 마라도나를 보러 운동장
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4월 1일 저녁 TV 뉴스에  국가 대표기도 한 퀼른팀의 골
키퍼 토니 슈마허가 아마추어  구단인 빅토리아 퀼른으로 가기로 했다면서 큼지
막하게 보도를 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에 깜박  속았지만 이쯤 되면 당연히 나
타나야 할 토니 슈마허의 흥분된 인터뷰가 빠지고 없어 겨우 눈치를 챌 수 있었
다.
  그날 살케04팀이 있는 겔싱키르센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만우절 장난 기사
가 나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아랍의 어느 부호가 빚이 많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살케04클럽을 사버렸으니 선수들  처리 문제는 차차 해결하기로 했다는 내
용의 기사가 나 난리가 난 모양이다. 그날 오후  훈련 때 리벡 감독은 니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면서  "아마 내일쯤은 흥분한 열성  팬들이 떼지어 구단  사무실로 
쫓아가 시위꽤나 할 걸"이라면서 은근히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속여서 재
미있고 속아도 크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만우절. 오랫동안 길에서  만나는 팬들
마다 마라도나 얘기를 즐거운 화제로 삼는 것을 보면 만우절 하루만큼은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만우절 헤프닝
  "히히 내가  큼직하게 써버렸지.  그랬더니 다른  신문사에서 지금  야단이야!" 
1986년 6월 미국 입국비자 없이 멕시코 월드컵을 취재하러 갈때 큰 덩치의 미국 
경찰도 기가 질려 도망치면 못  잡을 성싶었던지 수삽을 채우고 가자더라는 S기
자의 웃음 섞인 얘기다.  S기자의 말대로 그가 쓴 기사가 나간 뒤 며칠  동안 신
문사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던 기억이 떠올라 범인(S기자)과 함께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한국과 독일은 여덟시간의 시차가 벌어진다. 내가 막 깊은 잠에 
빠지기 시작하는 밤 열두시쯤 한국의  석간 신문 기자들은 출근과 함께 한창 원
고를 쓰게 된다.
  반면 조간신문은 석간보다 출근이 늦어 내가 깊은 잠에 빠져 드는 새벽 두 세
시경에야 얘깃거리를 찾아 나선다. 대개의 경우  기자들은 우리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는 시간을 피하여 전화를 걸지만 어느 한 신문사에서 나와 관
련된 이상한 기사라도  실리는 날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새벽 두시건  세시건 관
계없이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다. 내게 물어봐야 "그런  게 신문에 났어요?"하는 
뻔한 대답이지만 신문사 테스크의 말초신경이란 워낙 예민해서 소위  '별것도 아
닌 것'을 가지고 요란하다.
  더욱이 요사이는 국제전화가  쉬워져서 1주일에 서너 번씩은 한국의 신문사들
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데 내가 쓰는  글에 우리 식구 다음으로 가장 자주 등장
하는 인물이 기자들인 것을 보면 신문 그 자체가 내 생활에 그만큼 깊숙이 자리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본의 아니게 '뻥튀기'하는 데 
공범이 되는 수가 있다. 그해 여름 한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모 신문사에서 "도
대체 차범근이 지금까지  얼마나 벌었는지를 써야겠다"면서 인터뷰를 요청해  왔
다.
  이미 쓰고 없는  돈까지 다 들춰서 계산을  맞추는데 기자 왈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쓰는 것이니까  액수가 커야 재미있다"면서 독일 돈 1마르크를  400대 
1로 환산하는 것이었다. 사실 독일에 처음왔을  때만해도 독일돈은 200대 1 정도
였고 최근 몇 개월  사이 400대 1로 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엉터리지만  "재미
로...."라는 말에 "그렇게 하라"고 하고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침신문에 
'차범근이 14억 벌었다'라고  주먹만하게 기사에 실린  날  월드컵 대표선수들과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더니 "현! 그렇게 돈을  만ㄶ이 벌었는데 우리도  갈비 좀 
뜯어야 겠수다"라면서 '갈비'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원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면 그렇게 되는 법이다. 그래도 1986년  서울 아시
안게임 때는 금메달이 쏟아지는  덕분에 3주간 조용히 아침식사를 할 수가 있었
는데 정확히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4일째 되던 날 '따르릉!'하고 아침식사에 끼
여드는 L기자. "'금비 때문에 지면이  없을 것 같아...." 하면서 원고를 부치지 못
한 이유를  둘러대자 "누구 맘대로!"하면서 호통을  친다. 부랴부랴 원고를  불러 
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자 때르릉! 이제는 "한국입니다"라는 교환 아가씨의 목소리
만 들어도 어느 신문사인지 알 것 같다. "금비가 금방 바닥났수?" 잇따라 울리는 
벨소리에 반갑다는 인사를  또 잊어버리고 불쑥 나온 나의 첫마디다.  신문사 때
르릉! 반송국 때르릉! 아침 좀 먹읍시다.
    별난 팬레터들
  1986년 연말엔 외국에서  보내온 팬레터에 사인지 한 장씩을 넣어  답하고, 한
국에 연하장 몇 장 띄우느라 우표값이  자그마치 15만원이나 들었다. 우체국으로 
들고 간 우편물은  비닐 백으로 두 뭉치나 됐을  만큼 양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보내는 곳도 각각이었다. 1985년도엔 체코와 스웨덴에서  경기를 했던 탓인지 그
쪽에서 온 편지가 대부분이었고 일본, 케냐 이니도와  같은 곳에서 온 것도 간혹 
눈에 띄었다.
  유럽의 인접 국가에서 오는 편지들은 사인 용지만 넣으면 되도록 봉투에 자기 
주소와 함께 우표까지  붙여서 같이 보내오지만 체코, 동독 같은  곳에서는 으레 
그냥 보내온다. 이런 팬레터들은 편지 바구니에  넣어뒀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처
리하게 되는데 게으른 탓에  아주 오래 걸러 한 번씩 해치우게  된다. 독일에 처
음 왔을 때 나는 필기체로  휘갈겨  쓴 이들의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어 발신인
으로 적혀 있던  주소를 수신인 주소란에 그대로 오려붙여 보내기도  했었다. 그
러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한국에서 보내온 편지들로,  한학급의 어린이들이 
단체로 위문편지 형식의 글을 보내온 것과 당시만 해도 프로선수가 떼돈을 버는 
것처럼 알려졌기 때문인지 도와달라는 내요의 편지가 많았던 것을 특히 잊을 수
가 없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온  편지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뜯어 봤더
니 "세상에 인간들이란...."으로  시작해서 밑도 끝도 없이 잔뜩  욕설을 늘어놓은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저  보내온 편지가 구단 사무실에  보관된 채 
미처 내게 전달이 안 됐는데  내용인즉 몇 월 며칠까지 얼마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편지 중 특별한 것은 나중에 다시  볼 요량으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지만  이제는 니런 내요의 편지는 거의오지 않는다.  대신 88
서울 올림픽이 가까워  오면서 신종(?) 편지가 생겨났었는데 그것은 장사  차 한
국에 다니는 독일인들이 보내오는 편지였다.
  대부분이 자기가 언제 한국에 다시 가는데 부탁한 친구들이 많아서 그러니 사
인지 좀 보내달라는 것이고 어떤 이들은 친구들 이름까지 Kim Lee Park.... 이렇
게 적어서  날더러 누구누구에게라고 써달라는  사람도 꽤 있었다.  솔직히 말해 
어떤 때는 귀찮다. 그러나 나 역시도 편지를  받는다는 것이 즐거운 일임에 비춰 
소홀히 취급할 수가  없게 된다. 특히 봉투 가장자리가 알록달록한  항공 우편물
을 받으면 반가워서 얼른 발신인 이름을 보게된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인 경
우 반가움은 덜하게 된다.
    알프스 체어마트의 '자연의 숨결'
  1987년 말에서 1988년  초에는 눈다운 눈이 쏟아져  본적도 없고 춥다고 느껴 
본 적조차도 없었던  참으로 이상한 겨울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자동차 지붕에 
스키를 매달고 알프스를 향아는  휴가객들의 자동차 행렬이 수 시간을 고속도로
에 선 채 기다려야  할 만큼 붐비겠지만 해발 2천m 아래로는 푸르기만 한  알프
스가 스키장 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그 겨울 고속도로는 한산하기만 했다.
  겨울 휴가를 맞은 나는 1년 중 유일하게 애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수소문 끝에 스위스의 체어마트로 떠나기로  했다. 해발 
3천m라서 여름에도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인데 계약상 스키를 탈 수 없도록  되
어 있는 축구  선수인지라 호텔에서 TV나 보고 있던  나는 새삼 엄청나게 비싼 
그곳의 물가와 기발한 개발  정책을 보고 연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나라 
식으로 얘기하면 무궁화 네다섯 개짜리  호텔만 꽉 들어찬 그 마을은 하루 리프
트 사용료가 성인의 경우 5만  원이 넘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싼 무공해 도시였
다. 유럽에서도 고급 휴양지 중 하나인 그곳은 자동차가 없다. 전기로 다니는 약
간 길쭉한 호텔 전용 택시 몇 대와 말이 끄는 마차가 그 마을 교통 수단의 전부
인 것이다. 그래서 체어마트의 바로 아래 동네는  운동장 만한 주차장을 몇 군데 
지어 놓고 그 수입으로 먹고 사는 듯 해 보였다.
  주인을 태우고 온 차들이 체어마트까지 들어갈 길도 없을 뿐만 아니라 통행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들을 전용차에  태워주고는 한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숭고한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그들의 정신을  돈버는 재주 
정도로밖에 치지 못하는 내가 속물 같기도 하지만 엄청난 물가는 아름답고 작은 
최고급 가게들과 함께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더욱 짙게했다.  영화에서나 봄
직한 귀부인들이 털 코트에 모자를  쓰고 강아지를 안은 채 마차에 오르는 모습
이나 엔화의 위력으로  몰려든 일본인들이 더욱 초라해 보이는 모습,  거기에 체
어마트를 침범하지 못하고 무작정   서 있는 유럽 각국의 고급 승용차들 사이에 
미국 사람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들....
  체어마트는 한참 개발에 열을 올리는 우리에게 뚫고 부수고 세우는 것 말고도 
있는 것을 그대로 꼭 가두어 두는 것도 개발인 것을 알게 해주는 도시였다.
      대세가 내게 기울어졌다
    1987년 여름 고국소식
  독일에 있을 때 10시쯤이면  항상 TV 종합 뉴스를 보았다. 시사에  특별히 관
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늘 우중충한 날씨에 젖어 지내다 보니 뉴스 맨 마지막에 
보내주는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
가 나도 모르게 뉴스가 진해되는 동안, 더  정확히 말하면 일기예보 시간대가 가
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시합 전과 같은 묘한 긴장감이 내장을 뒤틀면서 나를 불
안하게 했다.
  처음엔 이유를 몰라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되돌아보기도 하면서 심중에
서 일어나는 반란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애썼다. 어이가 없었다. 이유라는 게 바
로 뉴스가 끝날 무렵 해외 소식을 전해주는 그 시간이 두려웠던 것이다. 데모대, 
최루탄, 전경, 거기에  내가 듣기엔 분명 과장된 듯한 뉴스  코멘트, 이런게 없이 
지나가는 날은 아픈  배가 사르르 가시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
다. 언젠가부터 동료 선수들도  더 이상 전날 저녁의 TV 뉴스를  나에게 전하지 
않았다. 새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화면과  겹쳐 나오는 '불안한 한국'이란  제목 
때문인지 감독은 "차붐! 여기서 있지 그래"히고 자주 나에게 권했다.
  저렇게 어수선한 데  가서 축구라는 한가한 것을  위해 일한다는 게 돈키호테 
아니냐는 식이다. 슬프고  쓸쓸했다.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한국  신문 경제면
에 등장하는 남아도는 달러 얘기도   대꾸하는 나를 우습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86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이 비처럼 쏟아졌다는 '금비'얘기는 더더욱 대
꾸할 거리가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나는 스포츠가 
어느 한 나라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대단한 역할을 한다고 스스로 믿었고 또 
그와 같은 자부심을 갖고 일해 왔다.
  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 분들도  내 마음과 별로 다를 게 없기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유럽인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일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당
시 내가 느낀 바는 누가  뭐래도 그 나라의 얼굴은 정치요 정치하는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학생, 그 더운 날 솜옷에 불이 붙
어 이리저리 나뒹구는 전경,  팡팡하며 자욱한 연기와 함께 쏘아대는 최루탄, 획
하고 던진  화염병이 시뻘건 불길을 내뿜는  모습, 이런 모습을 매일  저녁 보는 
독일의 친구들에게 "나는 앞으로 내 나라로 돌아가 한국  축구를 위해 일하겠소"
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나를 돈키호테로 볼 것이다.
  차범근이가 골을 100개나 넣어도 뉴스의 마지막  부분, 해외 뉴스에 나오는 한
국의 그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포니가,  르망이 전세계를 휩쓸어도  그 모습과는  바꿔지지 않았다. 
정치야말로 우리들의  얼굴이라는 것을 나는  정말 절실히 느끼게  됐다. 고국의 
밝은 소식을 들으면서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난 매일 기
도 드렸다.
    잔치 벌여놓고 주인이 싸울 수 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결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집안에의해 좌지우지될 
수 없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오랫동
안 정권을 쥐고 있는 몇몇 삶들에 의해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자주 제한 받아야 
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서서 그들에게 저항했고  더러는 희생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게  있다. 학생들, 운
동권 학생들만이 집권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크고 
무서웠던 힘은 마치 양동이의 물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주둥이 양끝의 
상위 위치가 바뀌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대다수 소리 없는 국민
의 의사였다.
  우리 축구 선수들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축구장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처
럼 학생들도 당연히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남북 회담을 추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 역시 사회에 속해  있는 수많은 집단 중의 하나라는 기본 이념부
터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다. 88서울 올림픽이 개박되기 얼마 동안  우리 나라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한라산, 백두산을 찾는 학생들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조용
하고 평화로운 올림픽을 원한다는 것도 생각했어야  했다. 부부 싸움을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반갑게 웃으며 반기는  게 예의인데 꼭 지금 싸우자고 자꾸 덤비기
만 하니 잔칫집 주인으로써 한판 싸워서 손님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보이스카우트 비슷한 옷차림에 머리는 60년대 식 꽃으로 장식하고 꽃 몇 송이
를 가슴에 안은 채 판문점에 나타난 이북 학생들의 모습과 전경들에게 얻어맞으
면서 닭장차에 실려 가는 우리  학생들의 모습이 당시 심심찮게 독일은 물론 각
국 TV에  등장, '불안한 서울 올림픽'을  떠올리게 했다. 시위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반 시민들의 분노를 간과했더라면 지금쯤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축구 선수라서 올림픽의 우상화를 노려  이런 얘기를 했던 것은 아
니다. 오히려 그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오랫동안 남들이 말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양동이의 물이 기울고 있지  않은가? 통일은 학생들만의 문데도 아니고 또 당
장 이뤄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순수한 충정을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보기 전에 한번쯤 '평화로운  올림픽'을 생각했지 때문에 
우리는 주인으로서 무사히 훌륭한 올림픽을 치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한 친구는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포르노 배우를  국
회의원으로 뽑는 너희도 참 한심한 나라다"라는 나의 공박에 천만의  말씀이라며 
펄쩍 뛴다. 이유는 '마피아가 판을 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은 전체 정치인에 대
한 일종의 침묵 시위라는  것이다. 마피아와 손잡는 정치인, 부정하고 부패한 정
치인들에게 "우리는 도둑이나 강도보다는 차라리 미친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뜻
을 전하려는 의도라는 얘기다. 듣기에 따라 그럴 듯하다.
  1987년 10월 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서독 정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출세 가
도를 달려왔던 40대의 젊은 주지사 우베 바셀이 네 자녀를 남겨둔 채 스위스 겜
프의 한 호텔 욕실에서 시체로 발견된 후  자살이다, 타살이다를 놓고 단정을 짓
지 못하자 그  사건은 전체 국민들에게 정치의 도덕성을 의심케  했다. 일반적으
로 우리는 서독을 생각할 때 교과서 같다는느낌을  받곤 했었다. 내가 친분을 갖
고 있는 몇몇 정치인들을 보더라도 그들의  익숙하고 가난한(?) 생활이 나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지곤  했었다. 명예와 부와 권력을 동일시하는 잘못된  나으 생
각으로는 주지사와 국회의원이  곧 팔자를 고치는 일이  아닌 서독에서 뭐 그리 
권력에 대한 암투가 대단하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주지사의 죽음은 나에게 주는 단순한 실망뿐만 아니라 많은 서독 사람
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그들을 분노케  하고 말았다. 선거 중 상대 
후보의 탈세 문제를 파내 협박할 뿐만 아니라 타이퍼라는 기자는 주지사의 사주
를 받고 상대 후보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바그너 박사인데 나의 호나자 중  한 
명이 당신과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에이즈로 
나에게 치료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고백은 조사위원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
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결국 1987년 초부터 변심한 그 타이퍼 기자가 지금까지 측근으로서 온갖 추잡
스런 수작을 같이하는 주지사의  비리를 공개하면서 시작된 싸움이 결국은 죽음
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문득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그는 과연 무
엇을 위해 그렇게  했을까 하는 바보스런 의문이 생겼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완전히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생각지는 않는
다. 직업 정치인이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 정치인들은 서독의 정치인에  비해 비
교적 잘 살기 때문이다.  또 몇 달 동안 모든 일 제처둔 채  목숨 걸고 쫓아다닐 
당원들도 수없이 많다.
  이 사람들이 나중에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다
니는 걸까.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서,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내 한 몸 아끼지 않
겠다는 갸륵한 생각임을 굳이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저렇게 다니면 
가족은? 그들의 생활은....? 나야말로  걱정이 팔자다. 공이나 차자. 그래야 한 골
이라고 더 넣지.
    독일에서 지켜본 대통령 선거
  1987년 독일에서  고국의 대통령 선거를  TV로 지켜보았다. 과정이나  결과에 
무심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선
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최루탄이 터지는  등의 광경을 TV로 보고 더욱 착잡해지
는 심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치에 무식하고 무관한 나 같은 사람도, 아니 
어쩌면 초등학생 정도의  사고력만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 사람에 한 사람 
꼴로만 나가 싸웠으면 멋진 승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세가 나에게로  기울어졌다"며 저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얘기를  들
은 뒤 이들이 한결같이 참패를 당하고 난 후 생각해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뿐이
다. 선거를 한다는  그 자체가 자못 신기하면서도 기특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거
가 있기까지 최루탄 속에서 잘 참아준 시민들이나 일부 열성 학생들을 위해서라
도 멋진 플레이를 발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축구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줄 알지만. 그래야  독일에서 1주일에 두 번씩 몰아
서 오는 신문을  보기 위해서 10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독을 했던 
것이다.
  이제는 다 지나간 얘기다 '부정선거다' '관권 개입이다'하는 소리도 이제는 듣
기 싫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라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두 분이 
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잘못되었던 당시의  판단을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당시의 상황르  생각하며 귀신이 씌었나 보다고 한탄을 한다.  누가 돈을 
먹었다는 식의 얘기보다느 훨씬 마음이 가기는  한마디다. 많은 사람들이 말뜻조
차도 애매하게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후보의 득표는  큰 것이었
다.
  '집안싸움'에 진력이 나서  떨어져 나간 숫자까지 합친다면 더  많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국민들을 외면한 것은 그분들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된 지금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순수하고 젊은 우리  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로 희생
되도록 부추기거나 방치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부정선거를 따지기 전에 자신
들의 판단 착오였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치가답게 새로운 정부에 
강력히 반영시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와 두리도 TV를 볼  때마다 
자꾸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냐"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대답이  자꾸 
궁해지는 아빠의 체면도 좀 생각해줬으면 한다.
      아빠! 우리 독일서 쫓겨나는 거야?
    참을성 심어주는 부모의 용기
  해발 3천 400m에  있는 스키장까지 스위스의 전동식 톱니 기차로  올라가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플랫폼에 꽉 찬 스키꾼들 사이에서  애들이 자리라
도 잡고 앉아서 가려면 여간 동작이 빨라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하나야 두리야, 아빠가  너희들 스키 들고 갈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서 앉아
라”하고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우리나라  말로 무진장 열심히  교육을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기차가 도착하자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또 한 번 “하나야 두
리번거리지 말고 앞으로 가”하고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소리지만 그래도 느낄
까 봐 되도록 부드러운 멜로디로  다그쳤는데 내 뒤에 있던 꼬마 녀석도 마음이 
급했던지 나를 헤집고 앞으로 갔다.
  그때 그 애의 아버지가 남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독일 말로 “천천히 타도되
는데 뭘 그래”하면서 애를  끄집어 도로 내 뒤에 세우고는 “미안해요”하면서 
자기 아들의 한쪽 팔을 꽉 붙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살다가 그때만
큼 스스로 무안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내  나름대로는 애들 교육을 
제법 진지하게 시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지내던 
많은 한국분들도 애들 교육이 잘돼  있다고 칭찬을 해왔던 터라 그 충격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하는 조급함과 이
기심을 나  자신은 얼마만큼 고쳤다고 믿어왔는데  자식에게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두리가 학교 학예회에서  시 낭송을 하게 돼 있었는데 그만 며칠 
전에 감기를 앓는 바람에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대신 시키기로 한 적이 있었다. 
며칠만에 학교에 간 아들 녀석이  너무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 엄마가 선생님께 
반반 나눠서 시키자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 애기를  들은 친한 이웃집 아줌마가 
하나 엄마의 생각에  자기는 반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두리가 예기치  않은 사
건에 부딪쳐서 참을 수 있고  받아들일수 있는 것을 배우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애가  그랬다면 가만있겠어?”하고는 꿍얼꿍얼거
리던 하나 엄마가 두 손을 들고 만 일이 나중에 또 있었다.
  그 집 애하고  두리가 같이 축구를 하러 다니는데  시합이 있다고 해서 그 집 
식구가 온통 몰려갔던 모양이다. 갔다 와서는  코치가 토마스를 경기장에 내보내
지 않아서 줄곧 벤치에서 울고 있었다는 엄마의 애기를 듣고 왜 애들 축군데 좀 
얘기해서 잠깐이라도 뛰도록 해주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물론 뛰는 것도 즐겁겠
지만 참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경험이니까 배우도록 가만 놔뒀다는 것이
다. 정말 부모로서  대단하다고 할 만한 용기다. 예기치 않은  불이익, 손해를 비
켜나가도록 도와주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란 게 부모가 돼 보니 
참 쉽지가 않았다. 정작 교욱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 것 같다.
    인기 선수의 아이들
  어린이날이 되니까 몇 년  전 이맘때 일이 생각간다. 서독 올림픽  대표 팀 감
독으로 있던 뢰어가 쾰른 팀을  맡고 있을 때 성적이 부진해서 매스컴에서 연일 
물러나야 한다고  떠들어대자 유치원 다니는  그의 딸이 “아빠! 우리는  독일서 
쫓겨나는 거야?”하며 불안해한다는 기사가 실려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1987년엔 「안피크」라는  자서전으로 완전 궁지에 몰려  있던 세계적인 골키퍼 
토니 슈마허의 자녀들이 그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었다. 아버지 토니를 비난하는 
쾰른 지역 내의  차가운 분위기가 느낌으로 와  닿았는지 아니면 어느 지각없는 
사람이 애들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한 때문인지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온 아이들
이 “왜  사람들이 아빠를 욕해?”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토니 슈마허 
부인의 고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했다.
  유명한 아빠를 둔 아이들. 어쩌면 타고난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때 어느 부모라도 
본인이 받는 고통  이상으로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따금 
아이들까지 슈퍼스타의  일부분으로 여기고는 “너희 아빠가...”하면서  전혀 거
리낌없이 말을 내뱉는  어른들을 볼 때 나는 “우리 애들에게  저렇게만 해봐라. 
내가 가만두나”하고 벼르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팀에 있을 때 팀  동료 니켈은 
배짱이 두둑해서 운동장에서도 뛰기 싫으면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구경만 해 
늘 팬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한번은 후반전에 나란히  경기장으로 들어가다가 “차붐! 저것들이  지금 뭐라
고 떠드는지 아나? 날더러  나가라는 거야! 선수들이 잘못 뛸 때도  있다는 것을 
저 녀석들도 배워야 돼”하면서 꿈쩍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우
리가 좀더 친해졌을 때 그는 내게 이런  고백을 해왔다. “나는 우리 애들만큼은 
운동장에 오지 못하도록 하지. 자네도 알잖아. 팬들이 유난히 나한테는 왁왁거리
는 것을. 우리  애들에게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최고인데 저치들이  떠드는 소리
를 들어 봐! 애들 심정이 어떻겠어.” 아버지가 직장 상사에게 욕먹고 있는 모습
을 지켜볼 때의  아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장소만 다를 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일반인이나 운동선수나 다를 게 없다.
  이젠 우리 두리  녀석도 제법 컸다. 분데스리가 선수들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전형적인  꼬마 팬이다. 아빠인 내가 얻어다 주지  않으니까 레버쿠
젠 팀의 리벡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서는 “내가 두리인데 우리 아빠가 자
꾸 까먹어서 그러니까  사인 두 장만 보내달라”고  해서 기어이 사인지를 손에 
넣을 만큼 열성이다. 한번은 장차 독일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 대표
선수가 될  것인가 하는 주제넘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또 1986년  겨울엔 내가 
깁스를 해서 한쪽밖에  양말을 신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아빠가 하는 것이라 
좋아 보였는지 녀석도 겨우내 한쪽 양말만 신고 다녔다.
  어느 날 다리가 아프다고 울어서 봤더니만 내 흉내를 낸답시고 붕대를 종아리
에 칭칭 감고서는  피가 통하지 않아 고생이지 않은가. 어느  꼬마에게도 아빠는 
다 훌륭하게만 보인다.  이 당연한 권리를 신문이, TV가, 못난  어른들이 아빠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애들로부터 아빠를  빼앗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비애를 
느낀다.
    꿈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
  순간적으로 굉장히 아프면  신경질이 팍 솟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때의  신경질은 너무나 감정적이고 자연발생적이라  상황을 구분할 
만한 여유를 잃게  마련이다. 그래서 종종 운동장에서 주먹질을 하곤  하는 모양
인데 나는 아직까지 ‘굉장히 아픈’ 것의 반작용으로 누구를 때려본 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1986년 9월의 일이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두리 녀석
과 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이날도 두리  녀석은 11번이 새겨진 유니폼에 팬
츠,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기다란 스타킹에 뽕이 제법  뾰족뾰족한 축구화
를 신고 있었다.
  내가 볼을 갖고는  뺏으라고 했더니 갑자기 내  정강이를 향해 두발로 덮치는 
것이었다. 어찌나 아픈지 “악!” 소리만  하고 두 손으로 정강이뼈를 붙들고 주
저않고 말았는데 두리 녀석은 옆으로 쓱 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냉큼 돌아서는 것이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
야! 볼을 보고 태클을 해야지 다리를 차는 게 어딨어?  그리고 아빡가 아파 죽겠
다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하고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런데  녀석의 하
는 말이 더 걸작이었다.
  “월드컵 선수들은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어쩐지 그렇지 않아도 건방진  폼이 멕시코를 다녀오면서 더 건방져졌다고 생
각했더니만 역시나다. 거기다 한 수 더 떠서  독일 애들하고 마당에서 축구를 하
면서도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볼을  발 앞에 놓고 양발을 적당한 간격으로 벌
린 채 두 손을 뒤로 한 다음 애국가를  아는 부분까지 생 음악으로 불러댄다. 그
리고는 끝  부분에서 “와!”하는 관중의  함성도 자기가 지르고는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몸푸는  시늉도 한다. 게다가 가끔은  오른손을 들어 흔들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가관이다.
  그러는 녀석을 보고 두리 엄마는  “스타는 무슨 폼만 잡는 것인 줄 아느냐”
하면서 축구  선수가 되긴 이미 글렀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훌륭한 
선수 중에는 그런 것들이 근사해 보여서 축구를  시작한 사람도 많을 테니까. “
어느 한 나라의 축구가 흥하고  안하고는 골목 축구에 달려 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베켄바워가 그랬었고 마라도나, 펠레가 모두 골목 축구로 시
작했다. 가난한 집에서 변변한  장난감도 없이, 또 자기가 몸담고 꿈을 키울만한 
방 하나도 없이 살다보니 길거리가 곧 자기 방이 되었고 아무 것도 필요없이 맨
발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보니 닥치는 대로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 동네  마당에서 친구들하고 볼을 차면 자꾸 벗겨지는 고
무신을 짚으로 꽁꽁 묶고  차야 했었다. TV가 없었으니 국가 대표  선수들의 얼
굴을 알 리가 만무하고 이름조차도  잘 모르는데 하루는 유니폼을 입은 어떤 청
년이 동네에 온걸 보고  온종일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기억도  난다. 축구 선
수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막연한 기대와 동경, 이런 것들이 스타가  되는 시발점
이다. 베켄바워에 이어 두 번째 황제가 독일에서 태어났다.
  작년에 이어 윔블던 테니스  우승컵을 안은 보리스 베커에게 기자단에서 붙여 
주었다. 본인은 그냥 베커라고 부르라고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그도 우리도 ‘
카이저(황제)’란 말에  익숙해질 것이다. 베커의 출연  이후 독일의 테니스장은 
빈 코트가 없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코치들도 예년에  비해 말할 수 없이 바쁘
다고 했다. 아이들은 본 대로 느낀 대로한다. 위대하고 굉장해지고 싶은 것은 그
들만의 본능이고 특권이며  꿈이다. “축구 선수 별 볼일 없어”라는  말이 아이
들 입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보따리를 싸야되지 않을까?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
은 없을 테니까.
      입으로 하는 축구 당할 자 누구요
    ‘축구장 마련 작전’ 물거품
  한국에 있을 때부터  나는 많은 축구화를 갖고 있었다. 발바닥의  감각이 까다
로워 5개월에 걸쳐  구입 해야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쯤 고를 수 있었던 것도 
축구화가 많은 이유 중에 하나다. 신발장에 죽  널려 있는 축구화를 보노라면 마
음이 무척 뿌듯하고 흡족하다. 당시만 해도  아디다스 축구화는 싱가포르나 홍콩
에 가야 구할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옛날 얘기 같지만 한국  돈의 가치가 형편 
없던 시절이라 마음먹고 환전해 간  100달러에다 큰 경기 때면 받는 일당 몇 달
러를 합하고, 가끔 단장이  주는 용돈을 털어야 축구화 한두 켤레를  살 수 있었
다. 이처럼  어렵게 산 축구화가  신발장에 가득했으니 내가  얼마만큼 축구화를 
좋아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한때 나는  축구화가 아니라 축구장을 갖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
다. 반듯하게 다듬은 축구장 양 쪽 끝에  그물을 드리운 골대를 상상하면 종일이
라도 운동장의 잡초를 뽑고 물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1988년 어느 날 
100만 마르크(약3억6천만원)의 거금을  마련, 고향 근처의 땅 사기에  나섰다. 내 
축구장을 갖는다는  생각에 너무 들떠  며칠이나 잠을 설쳤다.  그러나 결과부터 
말하자면 땅 사기에 실패하고 아내에게 그 돈을 돌려주고 말았다.
  충청도 출신인 어머니를 많이 닮아서 오리지널 충청도 사람보다 말이 더 느린 
둘째 형님이 버섯 키우고  농사 짓느라고 세상 물정에는 까막눈이면서 경운기를 
끌고 동생의 축구장을 만들 땅을 찾아다닌지 한  달 만에 “범근아, 군청에 알아
봤더니 그 땅은  또 그린벨트라는 구나, 휴”라며 지칠대로 지쳤는지  한숨을 길
게 내쉬었다. 처음엔 “야! 동생이 축구장 만든다니 신난다”며 열심히 다니시더
니 한번은 “좋은  땅이 있다”면서 값을 조금  깎아보겠다고 하는 사이 거꾸로 
땅 값은 하늘 높이 치솟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고 어떤 땅
은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것  같은데 한번 더 가봐야겠다며 경운기를 몰고 가보
니 팔려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는 한 달 사이에 형도 조금 약아졌는지 “형!  그 땅은 너무 비싸요”하면 
“범근아 땅 값은 받을 만큼만 부르는 거라더라”면서 귀동냥 한 얘기를 들려주
더니 모처럼 고른 땅이 그린벨트에 묶여 맥이  풀리는 모양이다. 흙으로 된 축구
장2, 3개를 나란히 만들고 그 옆에는 1, 2천명 정도 구경할 수 있는 엉성한 잔디
구장을 추가해 실내축구를 할 수  있는 체육관을 돈을 벌어서 만들게 자리를 남
겨두고.... 이런 신나는  계획을 세웠건만 물거품이 된 것이다.  막상 돈을 돌려주
자 아내는 미안했던지 “아니 논밭은 농사라도 지어서 그런다 하지만 누워 잠만 
자는 땅은 왜 그리 비싸지?”하며 나를 위로했다.
    지구를 떠나거라
  언젠가 어떤 코미디언이 ‘지구를  떠나거라’고 해 한 동안 유행어가 됐다는
데 조금만 더  있다가는 축구 담당 기자들의 “차범근! 이제  한국을 떠나거라”
는 소리가 나를  지구 밖으로 몰아낼 기세다. 1989년 12월  오밤중에 “차범근이 
삼성팀 창단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TV뉴스가 나가자 어떤 기자들은 물 먹었
다고 생각했는지 잔뜩 열이 나서 씩씩거리며  전화를 걸어오는가 하면, “분명히 
그런 일은 없을 거야”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 본 사람까지 한바탕 소
란스러웠다.
  “6개월에서 1년은 한국 축구에  관한 공부를 한 다음에 거취를 결정하겠습니
다”고 분명히 밝혀뒀는데도 기자들 말처럼 뚜껑이 벗겨지는 그날까지는 ‘비상
등’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죄’를 짓고 있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주제  넘게 한국 축구를 본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럼 지가  한국 사람 아니었단 말이야? 그거 올데갈데 없
으니까 괜히 헛소리 하는 거 아니야?” 화딱지가 나서 죽겠는데 무슨 소리는 못
하랴. 그건 내가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러나 그런 북새통이 나에게는 특별히 새
로울 것도 없고 그래서 결정을 앞 당길 이유는 더더욱 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볼 것도  보고 들을 것도 듣고 알 것도 안 다음에 결정을 
하기로 작정을 했으니 ‘그때까지만 나 좀 봐달라’고 사정을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프로 팀은 물론이고  대표 선수들의 특징조차 잘 모르는 
판이니 고등하교, 대학교 선수는  전혀 모른다고 해도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그
런데 내가 성급하게 팀부터 맡아  놓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잘난 척해
서도 아니고 겸손해서도 아니다. 한국 축구를 파악  하지 못한 사실이 나를 그렇
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코치를 초빙 한다는  말에도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유는 감독이라는 
직업이 아주 예민해서 손끝 감각이 없이는 팀을 통솔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과 장관들을 몽땅  데려다 놓으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
라는 발상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20대를 
대할 때마다 느끼고 사고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는 양심상 
팀을 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언어가 다르고 세상을 보고 느끼는 
방법이 다른 외국 사람이 어떻게 단시간에 선수들의 상태를 파악해서 대처할 수 
있겠는가? 얘기가 다른데로 흘렀는데 이 마당에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기자들이여! 차범근이가 지구에 붙어  살 수 있도록 제발 다른 기
자 물 먹이는 일일랑 말아 주십시오.”
    전철 너무 좋더라
  ‘백수’인 주제에  자주 바쁘다를 연발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정말로 시간이 
너무 없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꼭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길거리에 버리고 다
니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회사나 신문사, 관공서가 시청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위치하고 있
었기 때문에 한번 시내에  들어가면 몇 군데 일을 한꺼번에 볼  수가 있었다. 그
러나 지금은  꿈 같은 얘기다. 밀리고  밀리는 차들 틈에 끼어서  겨우 영동이나 
시청 앞에 도착하면 반나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  다음에 다시 다리를 건너서 반
대편 방향의 약속 장소에 도착해  한두 군데 일을 보고나면 하루가 땡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요즈음은 사무실이 영동에 꽤 많이 위치하고 있어서 강북과 강남을 오
르내려야 하는 일은 불가피한  현실이 됐다. 그런데 지난번, 이미 서울에서는 교
통지옥으로 소문이 나  있는 상계동엘 갈 일이 생겼다. 서독에서  사용하던 면허
증을 국내용으로 바꾸는 일 때문에 그곳에 있는 운전면허 사무소엘 가야만 했는
데 가기 전부터 주위에서 어찌나 겁을 주는지  상당히 긴장을 하고 떠났었다. 아
니나 다를까 상계동을 출발해서 용산에 있는 집에까지 도착하는데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거짓말 같은  ‘사실’을 누구
도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며가며 아까운 하루를  다 보내고 그래도 서류가  빠져서 다음날 또 그곳을 
가야 했는데  은근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며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때 
누가 “출퇴근 시간이 아니니까 전철을 이용하면 더 빠를 것이다”고 얘기를 해
서 그  다음날 오후에는 그 사람  말대로 전철을 타보았다.  오후 2시경이었는데 
전철은 꽤 조용하고 아늑했다.   우선 눈 앞에 벌떼처럼 밀려  있는 자동차 행렬
과 빨간신호등을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좋았다.  같이 전철을 
탄 아저씨들은 “차범근 선수  아니세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전철을 탔어요?”
하고 묻기도 하셨는데 이렇게 알지  못하는 이웃들과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서
울에 온 지 한달 만에 처음인 듯했다.
  씽씽달리는 전철을 타고  상계동까지 꼭 45분 만에  도착했는데 마치 거저 온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사람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을 이용하지 
않는 나 같은 ‘백수’는 전철이 제격이다. 빨라서 좋고, 이웃을 만날 수 있어서 
좋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까 더욱 좋고. 그래서 요즈음 나는 약속 장소에 나
가려면 “전철이 다녀요?”하고  먼저 묻는다. 요즈음 같은 때에  시간을 번다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인기인, 무엇이 대단하길래
  1990년 3월에 나는 때 아니게 병원을  열심히 들락거렸다. 귓바퀴가 아주 깊숙
히 찢어져서 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조심하지 않으면 염증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했다. 머리도  제대로 감을 수가  없는데다 쿡쿡 쑤셔서  아파죽겠는데 부아까지 
치밀어올라서 더욱 신경질이 났다. 별 다른 일을  하다가 귀를 다친 것도 아니고 
새벽마다 하는  조기축구회에서 볼을 차다가 해딩하는  머리에다 대고 상대방이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찢어진 것이다.
  마누라가 ‘병’이라고 얘기할 만큼  몸무게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 한국에 돌
아오고 나서도 계속해서 새벽과  오후에 운동을 했는데 동네의 조기축구회는 내
가 늘 즐겁게 볼을 찰 수 있는 것이  되어주었다. 주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 가게
나 수리센터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볼을 차는데 아파트 단지 자체가 워낙 오
래된 탓인지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깍듯이 대하는 모습이나 어른들이 ‘깡
’으로 공을 차는 모습이 마치 한식구 같은 분위기다.
  특히 보통사람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소박한 사람들이 모여서 볼을 차는 분위
기가 너무 좋아서 부담 없이 함께 어울려 땀을  흘리곤 했다. 그때 쯤 해서 우리 
집이 수리를 마친 탓에 처음 훈련에 나갔을 때에는 “내가 차 선수댁 계단을 했
지요”“나는 부엌이요”하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훈련을 마치고  차 한 잔씩 하
면서 나누는 얘기들도 세상 모습 그대로라서  듣기에 좋았다. 그런데 연예인들이 
모여서 하는 축구 팀이 우리동네  조기회팀과 경기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보면 일
방적이라고 얘기할 만큼 상대 팀이 거칠게 경기를 한다.
  우리끼리 할 때에는 그렇게 기세 좋게 날뛰던 아저씨들도 연예인 팀한테는 그
렇지가 못했다. 나는  괜히 마음이 상하는 것  같았다. 특히 “우리 팀은 거칠게 
경기를 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조기회 팀에게  당연한 듯 얘기할 때에는 
참지 못할 정도로 뒤틀렸다. 나나 그들이나 인기인이고 유명인이다. 우리들이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
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누리는 계급과 함께 배설물을 밑으로  쏟아내는 사람들
이다. 있는자가  조금 편리하게 살기는  하지만 그들이 착각하는  만큼의 지위는 
우리 모두 중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다. 인기인, 연예인, 그게  뭐 대단한가? 더
구나 우리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말이다.
    한국 상사원들
  우리나라가 의류를 한창 수출하던 때 가장  인기있었던 제품이 군용 파카였다. 
국방색 두툼한 파카가 요즈음은 방수 처리된 패션 파카에 밀려났지만 내가 독일
에 갔을 때만 해도 운동장에 오는 관중  60% 이상이 그 파카를 입고 있었다. 내
가 프랑크푸르트로  가게되자 운동장을 찾기 시작하던  한국인 상사 주재원들도 
이 파카가 필수품인지라 회사에 샘플로 놓아둔 파카를 죄다 입고 나섰었다.
  급기야 어느 회사 파카  판매 담당자는 등판에다 큼직하게 매직으로 ‘샘플’
이라고 써놓기에 이르렀는데 다음 일요일에 보니 샘플이란  글씨 위에 X를 긋고
는 입고 나섰더라는 것이다. 그때는 지사 직원들이 꽤 바빴다. 수출이 상당히 호
조를 보이던 때라 회사 일도 바빴지만 우선  신문 봐야지, 토요일 감상평 늘어놓
아야지, 구단마다 새로  등장하는 인기 선수 이름 외워야지....  그중에 가장 우수
한 분으로 주응증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2년 남짓 공부에 전 분데스리가를 통달
할 정도였다. 어찌나  잘 아는지 인기 선수의 약력은 물론이고  시시한 감독들의 
이력까지 줄줄 외웠다.   월요일 점심식사 때 분데스리가 얘기라도  나오면 으레 
주응증씨의 현황 보고가 있었다.
  “이번 시즌으로 분데스리가에 계약이 만료되는 선수는  모모다. 몸 값은 모모
마르크다” 기타 등등. 이들은 대개 운동장을  함께 찾는데 구경꾼들의 응원방법
도 무척이나 기발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모두가 조용할 때  끝내주는 한국 말
로!’가 그들의 응원  모토였다. 그래서 가끔씩 “범근아! 죽여놔”하는 귀에  익
은 음성을 경기장에서  듣게 된다. 입으로 하는 축구!  어찌 입으로 하는 축구를 
발로 하는 내가 당할 수  있겠는가? 어쩌다 시간이 나서 놀러라도 가는 날 신나
서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펠레’도 거기서는 배워야지 별 도리가 없
다.
  “아! 거! 그때는 발꿈치로  살짝 밀었으면 들어가지 않았겠소!” 자기는 아이
스하키 선수였다면서 얼굴도 안 변하고 열변을 토해놓던  홍 차장. “걔는 왜 공
만 잡으면 똥볼을 질러? 통 내 맘에 안 들어!” (자기가 감독인가 뭐, 마음에 들
고 안 들고 하게...) 그래도 김세경 씨는 여전히 심각하게  계속한다. “그래 그거 
차 선수한테 줬으면  단독이잖아!” 그것도 그럴듯한 얘기다. 어디  그뿐이랴. 프
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반경  200km내에는 꼭 구경을 가야 토요일이 무사히  넘
어가는 박 이사,  또 지금은 마산에다 못공장을 차려놓고 달러  벌어들이기에 열
심이시라는 김상무. 이분은 레버쿠젠 출석부에 결석이 없던 분이다. 그것도 아들 
현준이와 함께.
  그런데 나는 가끔씩 교회나 회사 축구대회에서 이 ‘말로 하는 축구’ 전문가
의 실전 실격을 보게 된다. 절묘한 패스, 통쾌한 슈팅, 박진감 넘치는 경기, 이것
들은 다 필요없는 사항에 불과하다. 오직 억지 잘 쓰는 편이 이기는 것이다. 5분 
뛰고는 가슴이 결린다고 벌렁 드러눕는다. “동네  축구에 페널티킥이 어디 있느
냐”고 목에 핏줄을  세우며 그들의 우기는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쌍룡식품을 경영하셨던 아저씨는 가끔씩 1회용 주심으로 불려
다닌 적이 있는데  억지꾼들의 성화를 도저히 견디다못해  “한국 인 회사 축구 
경기에는 절대 주심을 안 본다”고 공포를 한 적이 있다.
  한국 인 회사들이 독일  회사와 경기를 하면 최소한 5대 0이다.  가장 큰 원인
은 두말할 것도 없이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D산업의 독일 지사의 
경우는 대개 골키퍼는 말 못하는 현지 독일 사람에게 맡기고 공격은 이론가들이 
직접 맡게되는데 그나마 페널티킥은 박 이사가  독점하게 된다. 한번은 체이스맨
해턴 은행과의 경기가  있어서 구경 삼아 갔었는데  어찌나 못하는지 상대 팀이 
일곱 골인가 아홉  골인가를 넣었던 것 같다. 그래도 1988년에는  12대 8로 졌었
다니 대단한 성장을 한 셈이다. 그들의 입과  이상을 충족 시켜주기 위해서 우리
는 노력하고 뛰어야 되나보다.
        제 3 장 어린이와 ‘축구 교실’의 꿈
      쌍둥이 형제, 영광과 고통
    “뛸 때까지 뛰는거지 뭐”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1986년 7월 2일부터는 다음 시즌을 위한 훈련이 다시 
시작됐다. 나로서는 분데스리가 여덟 번째 시즌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1985년도
의 시즌은  크고 작은 부상 가운데서도  서른네 경기를 모두 출전할  수 있었다. 
기쁘기만 했다. 독일에서의 처음 4년은 거의  매년 시즌이 끝날 무렵이면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어  서너 경기를 쉬곤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적응도 되었고,  몸에 대해 상당히  예민해져서 웬만한 근육부상은  연습 조절로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생활처럼 미련하게 연습을  많이 해서 근육에 무리가 가해져 근육부상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근육질의  딱딱함은 잘못된 음식물 조절이나 수면 부족
을 그대로 대변해  주기 때문에 불성실한 생활과  연관해서 선수 자신에게 나쁜 
이미지를 준다. 레버쿠젠  팀의 부흐만 감독은 나의 보충 훈련이  본인의 설득으
로 도저히 그쳐지지 않자 훈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억지로 나를 끌고 라커룸으로 
들어가곤 했다.
  한국에서 3, 4시간씩 하던  훈련 방식이 몸에 배어 독일 진출  초기엔 팀 훈련
만으로는 도무지 적성이 풀리지가 않았다. 기분이 좋을  때까지 하는 게 그 곳의 
훈련 스타일이라면 늘어질  때까지 해야 속이 후련한 게 우리  스타일이었다. 한
국에서야 경기가 늘 있는 게 아니어서 상관이 없지만 독일에서는 월요일부터 금
요일까지 속된 말로  뼈가 빠지게 했다가는 정작  토요일 경기장에서는 뛸 힘이 
없는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경기장에서 뛰는데 나는 그렇
게 되지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후배가 독일에 오게되면  나는 이런 기간부터 단축시켜서 나보다는 훨씬 
빨리 적응하게끔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지난  시즌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나도 오래 뛸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 가운데  하나라는 확신이다. 30세가 넘으면서 불안해지
던 심리상태가 이제는  “할 때까지 하는 거지  뭐!”하는 식으로 자유로워졌다. 
우리 나라 축구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피셔가  은퇴했을 때의 나이가 36세. 원
껏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의 동갑인  루베시도 옷을 벗었다. 레버쿠젠 팀의 
내 또래 세 명도 모두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전에 느끼던 불안 같은 것은 없었다.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나에게 동료  선수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
차! 한번만 더 늙었다고 얘기하면 가만 안 둘거야!” 장모님이 정육점을 하는 슈
라이어는 “불고기가 제일 맛있다”는 결론으로 우리집  불고기, 불갈비가 더 먹
고 싶어서도 보낼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같은 클럽의  나이 어린 선수
들은 원장 선생님이  갈까봐 심각하게 얘기했다. “차!  당신은 베스트 플레이어
야!” 그들은 날더러 유치원 원장이라고 했다. 스물이 채 안 되는 어린 선수들을 
윽박지르지 않는 선수가 드문 모양이었다.
  그 선수들은 그 무렵의 나에 비해 참  잘했다. 그래서 잘한다고 칭찬해줄 수밖
에 없는데 그들은 그  소리에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연습  때도 어린 선수들이 
실수를 하면 괜히 화를 내고 요란을 떠는 몇 선수가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자
기 주전 자리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17, 18, 19세의  아이들이다 보니 엉
뚱한 일도 많았다. 저희끼리 차를 바꿔 타고  다니다가 사고를 내는가 하면 학생
인데도 불구하고 무단결석을 하고 전자오락실로 몰려가 동네가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또 체셀같은 녀석은 합숙소에서 감독이 “오늘  저녁엔 TV에 나오는 서부 
영화를 보지 말고 일찍들 자라”고 지시하면 귀가 번쩍 띄어서 “어느 방송에서 
하느냐”고 되물어 감독을 웃지도 화내지도 못하게 만들곤 했다.
  이렇게 하는 짓으로 봐선 우리나라  중학생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운동장에 세
워 놓으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기는지 신통할 정도로 소신껏  경기를 했다. 
이런 어린 선수들을 모아놓고 나의  옛날 얘기를 들려줄 때면 우리 후배도 하나
쯤 데려다가 섞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여튼 어린  후배들, 동료들, 감
독 덕에 85-86 시즌엔  ‘올해의 스타’로 뽑히는 영광까지 가질 수  있었다. 지
나간 수상자들의 명단을 훑어보면 기가 죽어 도리어 내가 뽑힌 게 누가 되지 않
았나 하는 걱정을 금할 수 없었다.
  1979년엔 케빈  키간이 뽑혔었고  루메니게가 두  번, 브라이트너,  루디 펠러
(1984년 당시 득점왕), 루베시(1983년  당시 득점왕)…. 그리고 나 차범근이 1986
년에 뽑혔다. 「키커」나  「빌트」「자이퉁」지 등 거의 모든  신문사에서 뽑아
준 ‘올해의 베스트 11’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며칠 후 프랑
크푸르트의 최고급 호텔 ‘켐핀스커’에서 축하 리셉션과 함께 시상식을 한다는 
통보가 왔다. 운동장에서 주심이  사용하는 빨강, 노랑 딱지와 똑같은 크기의 순
금패에 부상이 있었다. 그날 만큼은 넥타이 매고  구두도 좀 닦고.... 팬들에 감사 
드리며 항상 좋은 플레이를 보여드릴 것을 새삼스럽게 다짐해 보았다.
    난생 처음 짚어본 목발
  1986년에 나는 발목  수술을 했다. 오른발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려
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아프다는 핑계로  이것 저것 시키
는 게 재미있더니 역시 남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내가 남을 위해 하는 게 속편
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사흘이나 지나서였다. 전에도 부상으로 인해  몇 차
례 드러누운 적이  있기는 하지만 목발을 짚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맹장수술
을 빼고는 수술을  한 것도 처음인데 미련하게도  힘줄이 닳아 납작해질 때까지 
뛴 탓에 그냥 꿰매지 못하고 복숭아 뼈에 골을 내서 꿰매야 했다.
  마취에서 깨자 얼마나 아프던지 48시간을 계속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이
렇게 아플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축구를 포기하고 수술도 하지  말았을 걸!’하
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때 허리뼈에  금이 가고 발바닥이  꽈배기처럼 돌아가는 
등 남들이 보기에 심각한 위기를 맞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1986년 겨울만 해도 나는 양 쪽  엄지 발톱이 곪아
서 모두 빠져버렸었다. 추운 날씨에 경기를 하는  동안 밟히고 얼고 미끌리는 수
난을 당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시커멓게 죽은 양쪽  엄지 발톱에 뜨
거운 바늘로 구멍을 뚫은 다음 고름과 피를 짜내고 가라앉혀야 했는데 그렇다고 
훈련과 경기를 거를 수 없었던 탓에 일주일이면 나을 부상이 한 달이나 걸렸다.
  한번은 유행성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음날  경기가 예정되어 있어 어떻게
든 설사를  멎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의사는 손톱만한  정제로 된 
숯을 시간당  세 알씩 먹을 것을  내게 지시했다. 숯의 뛰어난  수분 흡수력으로 
장내의 수분을 제거하자는 의도였는데 숯을 먹으면서까지 경기장에 나가려는 선
수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감독은 한 경기 한 경기 치를  때마다 마치 카운
트다운하는 것처럼 “차붐!  이제 네 경기만 뛰면  돼! 힘 내라구!”하면서 나를 
운동장으로 내몰곤 했었다.
  86-87 시즌 전반기 17게임 가운데  부상의 악화로 마지막 한 경기에는 결장하
고 말았지만 나는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차붐이 50%만 해내도 나는 
다른 어떤 선수보다 먼저 차붐을  기용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감독 방침과 “
내가 아파 도저히  뛸 수가 없어도 감독이  원한다면 운동장에 서겠다”는 나의 
각오가 나로 하여금 16경기에  출장할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여
덟 시간 동안 뛸 때도 딱 한 차례 허벅지의 근육 파열로 대통령 배 국제 대회의 
크고 작은 경기를 한 경기도 빠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가벼운 부상으로도  쉬고 싶어하는 요즘 후배들을 보노라면 ‘
참 약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1987년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남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인 왕새우를 버터, 마늘과 함께 볶은 것인데 도
무지 먹히지가 않았다. “여보! 왜 다 안 드세요?”  “글쎄 당기지가 않네.” “
아마 너무 좋아서  그러나 봐.” 두 달여 만의 팀  훈련 합류, 모처럼 무리 없이 
시도할 수 있었던 발리  슛이 나를 흥분 시켰던 것이다.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수술이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발목에 메스를 가하긴  했지만 깁스를 한 채 
보낸 지난 겨울은 생각처럼 가볍지 만은 않았다.
  게다가 1986년 크리스마스 무렵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발이 깁스에 묶
여 있을 때는 마음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또 깁스
를 풀고 한  달 가량을 프랑크푸르트로 가 힘든  훈련을 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들려오는 후배들의 잇단 은퇴 소식은  수술 후 컨디션을 되찾기 위해 애쓰던 나
를 괜히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분을 묘하게 했던 것은 오
른쪽 허벅지가 눈에 뛰게 가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구분을 못 하겠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수술한 다리의 종아리가 무척 가
늘게 보이는 것이었다. 수술을 할 때 받은 충격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성급한 독일 기자들은 훈련 첫날부터  “2주 후에 있을 첫 경기에 뛸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데 사실 첫 훈련에  임하는 나의 기분은 착잡했었다.  몸을 푼 
뒤 동료끼리 모여 가볍게 볼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마음만 약간 거북할 뿐 전
혀 통증이  없자 혹이 갑자기  떨어져나간 것처럼 시원섭섭했다.  훈련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마지막 10분 동안 슈팅을 하는데 겁에 질려 주춤거리기만 할 뿐 잘 
뻗어지지 않던 전과 달리 오른발이 거침없이  뻗어지는 것이었다. 오른발로 골을 
성공시키고 발리 슛을 때리고, 수비를 따돌리고 하는  것은 반년 만에 처음 해보
는 동작들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난 후 감독이 무척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
차붐! 좋았어! 1주일 후부터는 게임도 뛸 수 있겠는데….” “저 역시 정말  예상 
밖인데요.”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안도의 숨이 나오는 날이었다. 사실 프랑크푸
르트에서의 훈련은 무척  힘들었다. 더욱이 팀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혼자 프랑
크푸르트에 있는 동안은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특수  훈련이 부상
에서 재기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감독에게 프랑크푸르트에 있겠
다고 한 것이었다.
  친구들이 많이 있어 뮌헨으로  가지 않고 프랑크푸르트를 택했지만 정작 프랑
크푸르트에서 한 달 머무는 동안 첫 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힘들고 고단해서 하루 두 차례의  훈련과 병원에서 받는 마사지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내 소식이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나면  친구들은 “차! 너 애인
이라도 생겼니? 식사하고 가라는데  왜 한 번도 오지 않느냐”는 전화를 걸어오
곤 했었다. 첫  번째 홈경기인 도르트문트와의 경기부터는 게임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회복 후 처음엔 발등과 발가락에  모든 체중을 싣기에는 불안한 느낌
이었지만 그 기분도 차츰 없어졌다. 앞으로 몇 년을  더 뛰게 될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으나 그때의 나를 주저앉게 하지 못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300게임 영예’뒤엔 고통 있었네
  1989년 4월 15일의  쾰른 전은 내게 퍽 의미있는 경기였다.  1978년 12월 30일 
다름슈타트98 소속으로 보쿰 전을  통해 분데스리가에 처음 뛰어든 이래 10시즌
째인 그날 외국 선수로는 최초로 분데스리가  통산 300게임 출장을 돌파했다. 내
가 생각해도 대견하기만 한 이 기록을 세우자  이곳 저곳에서 축하를 해왔다. 구
단에서는 기념 트로피를 만든다고 야단이었고 팀 동료선수들은 샴페인을 가져오
지 않았다고  성화였다. 10년에 300회를  뛰었으니까 나머지  경기까지 감안하면 
매 시즌 34게임 중 평균 30게임 이상 출장한  셈이다. 더러는 34게임 모두 뛴 시
즌도 있었는데 종아리에 난 얼룩진 상처들을 보며 생각하면 미련스럽게 뛴 적도 
참 많았던 것 같다. 갈라진 근육을 붕대로  단단히 동여맨 채 그라운드에 나섰던 
것은 다반사였고, 진통제를 맞고 멍멍한 다리로  90분을 정신없이 뛰고는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경우도 적잖았다.
  또 그 300개의 숫자  중에는 존경하는 감독의 마지막 경기라서 무거운 마음으
로 뛰었던 적도 있었고,  병신이 되지 않나 싶을 만큼 심하게  다쳐 국내 팬들을 
놀라게 했던 경기도  있었다. 오랫동안 골이 터지지 않아 천근같이  무거운 다리
로 운동장을 밟던 때도, 그라운드에 서기만 하면 골이  터질 것 같은 날 듯한 기
분으로 경기를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야간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가 여덟시
에 시작되는데도 네시쯤 커피와 케이크 한 개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도무지 
양이 차지 않아 늘  허기가 지곤 했던 것도, 지는 경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로
서는 경기에 질 때마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같이 눈앞이 캄캄했던 것도 생각해보
면 향수가 느껴지는 부분들이다.
300게임을 치르는 동안 겨우 아장아장 걷던 딸 하나는 이제 어였한 10대 소녀가 
되었고 아내는 어느새 중년의 아줌마로 변했다.
  ‘범근이 형’이라고 나를  부르는 팬들도 이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차범
근 아저씨’라고 나를 불러야 할 어린이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아니 나를 거의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우리들의 기름진 모습
이다. 그때만 해도 각 신문사들은 부장님이라야  겨우 국제 전화가 허용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아무나 무시로 새벽이면 나를  깨워댔다. 또 외국은 온통 파라다
이스고 달러가  쏟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던  외국행을(이곳은 포기하고 갈  만큼) 
망설이는 젊은 선수들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부잣집 아이들을 보는 것같아 기
분이 좋다.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통이 크고 인심이 후한 삼성을 스폰서로 가진 쾰른 팀의 
늘어지는 자랑 때문인지 가끔씩  한국 스폰서를 갖고 싶다고 조르는 분데스리가 
매니저들의 전화를 받을 때면 내가 100회씩 다섯  차례쯤은 변한 것 같다. 300게
임 출장 기록을 세울 수  있도록 성원해주신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뿐
이다.
    “더 뛰라”는 말 짜증나요
  나는 오래 전부터 운동장을 떠나는  나의 심정을 그로 쓰고 싶었지만 왠지 잘 
써지지가 않았다.  막상 축구화를 벗게  되는 심정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레버쿠젠의 팀  관계자들, 기자들, 함부르
크의 매니저로 있는 옛 감독 리벡, 프랑크푸르트의  부회장인 나의 옛 동료 휠첸
바인 같은 축구 관계자들이  2, 3년만 자기들 팀에서 더 뛰라고  할 때는 당연히 
고맙고 자랑스러워야 할 일이 이상하리만큼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혹시 나 자신
의 심리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읽은 어느 음악 잡지에 실린 정경화씨의 인터뷰는 바로 
나의 마음을 대신  보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세계 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인 그
분은 남들로부터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 때면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재능이 없이 세계적인 연주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모든  재능있는 사람이 다 세계적인 연두가가 되는  것은 아니
다. 그분은 이 재능이란 말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선물’의 의미를 부정해
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젊었을 때 오로지 연주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과 바이올
린 그리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뉴욕아파트에서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해준‘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하던 시간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
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숭고한 오만인가?  정열적인 여성답게 세계 정상을 달리는 연주가답게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라고  자신을 표현했지만 나의 심정도 남들이 “아직
도 잘 뛰는데 …”라며 아까운 것을 버린다는  듯이 얘기할 때는 정말 섭섭했다. 
“축구 선수에게 미터기를  달아서 뛰는 만큼 돈을  받는다면 차붐이 제일 많이 
받을 것”이라는 독일의 어느 기자의 말마따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제
일 많이 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들이  쉽게 얘기해 버리는 ‘좋은 체력’
이 숨막히는 생활에서 얻어진 것이어서인지 89-90 시즌 들어서면서 “내가 어떻
게 이런 생활을  10년씩이나 했을까”할 정도로 힘들게  느껴지고 한 번쯤 쉬어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바로 이럴 때 “더 뛰고  쉬라”고 하는 얘기가 아마도 나에게는 너무나 잔인
하게 느껴져서 섭섭했던 모양이다. 내가 분데스리가에서  마지막 경기를 하던 날 
그렇게 고대하던 아내의 1년 만의 호사는 밤 늦도록 거리를 산보하고 내일을 걱
정하지 않으며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즐겁
게 잊고 있다가도 가끔씩 덜컹덜컹  내 심장을 붙들고 냉기를 쏟아 내놓는 착각
의 주인공이 그동안  나를 붙잡았던 내일의 훈련, 바로 그것이었음을  새삼 깨달
았던 순간이었다.
      나의 소망 나의 꿈
    ‘끼’있는 아이로 키우자
  옛날에 우리 어른들은 유별나고 일을  잘 벌이는 아이들을 볼 때면 ‘크게 될 
놈’이라고 칭찬을 하곤 했었다. 그것은 옛  어른들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재능’아니 ‘끼’를 십분  인정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었기 때
문이다. 나는 요즈음 아이들을 키우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살면서 어느 한 방면
에 무한한 재능을 가지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객기’를 부리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볼 때면 왠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고 콘크리트 벽에서 자연으로 시야
가 옮겨지는 듯이 신선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남편을 만나러 독일로 간 아내의 친구는 자기의 남편인 소설가 황석영
씨를 ‘양아치’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미안하고 대단히 위험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그가 이북을 방문하고  그곳을 둘러보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쉽게 보자면 주어진 현실에 그의 ‘끼’가 만족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요즈음  같으면 전 과목 만점을 받아야 대학에  갈 수 있
기 때문에 밤 새워 문제집과 싸움을 해야만 하는 청소년기에 지금 기성세대에서 
자기의 영역을 갖고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습작에 미쳤
었다’ ‘노래에 미쳤었다’ 혹은 ‘인생을 고민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등 자신의 ‘끼’에 깊이 빠져본 경험을 갖고 있다.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엔 새벽 일찍, 그리고  밤 늦게 혼자서 축구공과 씨름을 
하면서도 고달프다거나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그 어마어마
한 ‘국가 대표선수 차범근’이 된다는 꿈에  오히려 소년의 행복을 만끽했었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우리 
어른이 이런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어떠하겠는가? 나는 요즈음 아이들을 키우면
서 또 축구 교실에 오는 꼬마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축
구 놀이’에 정신을 파는 모습을  볼 때 ‘저런 아이들을 가두어 두고 머리에다 
억지로 무엇을 집어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른들의 교육 자세’가 안타깝기만 
하다.
  매년 5월이면 어린이 달이라고 해서 신문사나 방송국 같은 곳에서 ‘어린이들
에게 한마디’를 부탁해올  때가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정작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지 부탁하거나 해줄 말이 없다.
콩나물같이 연하디 연한 우리 아이들에게 ‘판에 박은 모범생’이 되라고 늘 강
요만 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부탁을 할 염치가 어디 남아 있어야지.
    인기 선수 활용하자
  ‘축구계’라고 하면 초등학교부터 원로 축구인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과 폭이 
엄청나게 넓다.  그러나 축구계의 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대표선수, 그중에서도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몇몇 인기 선수들이다. 꽃을 따면  열매가 맺지 않
는다. 또 사람들은 꽃의  모습과 향기를 보고 좋아한다. 우리가 팬들을 모으려면 
이 꽃들을 잘 가꾸어야만 한다.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순호(최순호)가 아들 녀
석 두리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얘기도 들려주고  사인도 해주기로 한 모양이었
다.
  며칠 전부터 기다리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스타플레이어들의 위력을 새삼 실감
할 수 있었다. “아빠! 순호 아저씨 전화야!  따봉이야!” “와! 변병주 아저씨래, 
빨리빨리.” 두리 녀석은 이름을 알 만한 선수들이  집에 전화라도 하면 두 손을 
치켜들고 신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 아들만 그러는 게 
아닌 모양이다. 영증이네(전  현대자동차 코치 조영증) 큰  딸도 순호 아저씨 빽
(?)에 큰 소리깨나 친다고 한다.  아마도 말 안 듣는 녀석들에게 순호 아저씨 사
인을 나눠주지 않는 모양이다. “아빠!  주성이 아저씨 언제 우리 집에 와?” “
저 아저씨가 대표 팀 코치야?”
  집에 온 희태(김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타들
을 우리는  팬을 모으는 데 적극  활용(?)해야 한다. “요즈음 선수들은…”하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기회와 여건만 만들어 준다면 얼마든
지 봉사하고 일하려는  선수들을 무척 많이 만났었다. 실제로 많은  인기 선수들
이 한국 축구를 위해서 봉사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제는 마음을 열고 
한 가지  문제로 함께 걱정해야 한다.  축구가 패들로부터 사랑 받지  못 한다면 
한 자리 차지했다고 만족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린이 축구 교실
  오래 전부터 한강 고수부지의  잔디 구장을 어린이 축구교실 주말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그곳을 관리하는 한강공원 관리사업소  직원과 함께 현장에도 
나가보고 아이디어도 내고 해서 몇  개월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될 즈음이
었다. 느닷 없이  김우중 회장과 박종환 감독이 대통령을 만나는가  싶더니 급기
야는 전용 구장 건설 자리에 얘기가 미치자 한강 고수부지 사용 계획을 전면 중
지하라는 지시가 위로부터 떨어졌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그날 아침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난감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이 사용하게  될 잔디 구
장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첫 번째 경기가 열릴 1990년  9월 1일에는 애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김흥국
씨도 오게되어 있었고(저학년 주심을 맡기로 했음)  최순호, 변병주, 정용환 같은 
슈퍼스타(?)들이 꼬마 스타들의  경기를 관전하고 함께 얘기도  하도록 준비되어 
있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홀딩’이 된 것이었다. 특히 내가  어떻게 해보겠
다는 기대조차 갖지 않게 된  이유는 그동안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위로부
터의 지시’에는 우리  공무원들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외도 없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와 함께 그 일을 준비
하던 공원  관리사업소 직원은 우리들이 계획한  프로그램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인가를 나보다 저 절실히 느꼈던 것 같다.
  이미 나보다 먼저 축구 협회에 전화를 해서 협회가 사용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곳에 이촌 지구(내가  사용하려는 곳)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묻고  그렇지 않다고 
하자 나에게 전화를  해서 ‘가능성’이 있음을 전해주었다. 그 때서야  나는 협
회에 전화를 했고 대한 축구협회는 기꺼이 “이촌 지구가 사용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공문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고맙고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이  축구교실을 하면서 구로구청과 은평구청  생활체육과 직원
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항상 그분들을 ‘예외 인물’로 여긴다. 왜냐
하면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보는 공무원은 수동적
이고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상뿐이었는데 그분들은 그렇지 않기 때
문이다.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편견인가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에게 
직접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어린이 축구 캠프를 열자
  나는 어린이 축구교실을 하면서 우리 축구가 많은 어린이들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린이들을 모집하는데 100대  1이 훨씬 넘는  경쟁률을 보인 
것도 그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친구들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여름캠프에 좀 끼워달라고 빽(?)을 쓰고 덤볐다. 이것은 최순호가 하거나 김주성
이나 변병주가 해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또 함께  힘을 합해도 마찬가
지다. 1990년 여름방학 때는 월드컵을 치른  뒤라 어린이나 부모님들에게 축구를 
홍보하기는 아주 적당한 시기라고 나는 믿었다.
  그 것을 두고 일종의 ‘데먼스트레이션’이라고 해도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선수들이  점점 더 인기가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우리는 삐딱
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유명세를 우리 축구가 나누어 가지는 
것이니까. 유명한 선수를 바라보는 어린이들의 눈길이  곧 축구를 바라보는 것이
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축구 스타 키우기’와  ‘팬들에게 사랑을 받도록 도
와주는 일’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1990년  4월에는 축구 협회에서 ‘축구 발전 
위원회’의 모임이 있었다.
  이제 막 개설한 ‘어린이  추구교실’ 때문에 시작부터 어린이들의 지도에 빠
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이 회의에 참석하질 못했는데 사실 축구 발전에 대
해 말로만 떠드는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지난 토요일 럭키
금성과 대우의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다가 우연히 천안 진입로에서 
『스포츠 서울』이 1990년 3월 최우수 선수로 뽑은 축구 스타 최순호를 만나 점
심을 같이 하고  함께 운동장으로 떠났다. 예전부터 늘 생각하던  부분이기는 했
지만 순호의  주변에 몰려드는 애들이나,  힐끗힐끗 눈길을 보내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이들을 이용해서 더 많은 꼬마 팬들을 모으고 팬들에게 축구를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무척 컸다.
  최순호나 김주성, 변병주  같은 스타들을 선전하고, 그들을  더 유명하게 하고, 
팬들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해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어린이 캠프를 열 수 
있도록, 축구 협회가  각 구단에 권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그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팬들이 운동장을 떠난  것이 하루 이틀만에 일어난 눈
에 보이는 변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서서히 팬들이  줄었기 때
문에 우리들이 더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팬이  느는 것 역시 아무리 우리
가 뛰어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리 금방  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피
부로 느낄 만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오래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아직도 있는가
    골프 대중화에 입맛 씁쓸
  ‘대중화’라는 말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았더니 ‘수가 많은 여러  사람, 민중, 많은 사람들’ 그리고는 부연해서 ‘특
히 노동자, 농민들의 일반  근로 계급’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물론 꼭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대중이라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별 무리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비슷한 삶의 수준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
고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통해 ‘골프의 대중화를  저해하는…’이라는 기사를 대할 
때면 솔직히 말해서 입 맛이 쓰다.
  엄청나게 비싼 장비에 물리는 세금과 골프장 입장료, 회원권, 캐디 팁 같은 것
이 대중화를 저해 한다고 목청을  높이니까 대중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더라도 한번 필드에  나가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18홀을 도는데 필요
한 네 시간에다 왔다갔다  하면서 소요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일반 대중에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어느 날을 잡아도 쉽게 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거기
다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골프장까지 한 짐이나 되는 골프체를 챙겨서 가려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그들이  얘기하는 대중의 수준에 낄 수가 없게 된
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나라처럼 좁은 땅에 시립 공원 하나도 제대로 없는 판에 아
무리 작은 골프장이라도 십만 평은  넘어야 하는 그 면적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넓은 그림  같은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나  동시에 즐길 수 있겠는가.  염치 없는 
비교가 되겠지만 가장  작은 십만 평짜리 골프장도  국제 규격의 축구장 33개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33개의 잔디 축구장에서 700여  명이 동시에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뛰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땅의 효용성에서도  골프는 대중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골프를  치는 나의 입장에서 얘기해 본다면, 들이는 시간과 
돈과 그 밖의 것들을 비교해  볼 때 실제적인 운동량에 있어서는 테니스나 탁구 
또는 축구 같은 것들에 비해 형편 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는 분명히 재미있는 운동이다. 넓은  필드를 가로지르는 장타가 제
대로 맞았을 때에  ‘딱’하는 소리는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도 가끔씩 
필드에 나가곤 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 자체가 특권이며 
고마워해야 할 일인 줄을 모르고  더 많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 대중화를 앞세우
는 몰염치는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골프장의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부르면 오늘도 점심시간에 한강 다리 밑 고수 부지에서 하루종일 구부렸던 다리
를 모처럼 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즐겁게 볼을 차는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들에
게는 붙여 줄 이름이 없지 않겠는가.
    유학생 다시 서독 온 이유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내가  다니던 독일의 교회에서는 유학을 마친 학생들의 
송별식이 벌어진다. 그때면  독일에 남아 공부를 더 해야 할  학생들은 자신들의 
앞 날을 보는 것 같아  큰 박수로 축복을 해주고 나처럼 독일에 오래 눌러 살던 
사람들은 그들이 한  고생이 기특해서 잔잔한 박수를 진심으로 보낸다.  특히 독
일은 대학 등록금이 없기 때문에  여유가 없는 학생들도 많이 건너와 있는데 자
신들이 직접 생활비를 벌어 쓰며 공부를 마친 학생들의 수고는 참으로 대단하다
고 할 만하다. 그런데  애써서 공부한 학생 중에 푸른 꿈과  희망을 안고 귀국해 
놓고서는 되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의 일이라서 “공부를 좀 더 하려고 다시 왔어요”하는 말에 “좋으신 생각
입니다”라고만 응수를 했었는데 우연히  듣게 된 독일로 돌아온 사연은 어처구
니 없다는 느낌이었다.  “제가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의 강사  자리를 알아봤는데 
그렇게 후진 학교에서도 천오백만원과 스텔라 한 대를 달라고 하더군요.”
  “예? 그런  소리를 누가 하는  것입니까?” “학장이지요.” “그럼 그  돈은 
누가 갖는 것입니까? 모두  재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잘은 모르지만 반
반 아니겠어요?” “그래서요?” “그럴 돈이 저한테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돈
이 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요?”  “그 다음 말은 옮기기도 창피합니다. 내
가 결국은 학교로  다시 가야 하니까 집안 얘기하는 꼴이  되는데요, 날더러 1년
만 있으면  그 돈이 다 빠진다는  겁니다.” “맙소사! 어떻게요?” “...”  얘기 
하고 싶지 않은게 당연할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분데스리가에 
뛰어들기 위해 독일로 건너가 십여 년을 생활했다.  곧 설레는 가슴을 안고 한국
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돌아가  선수로서가 아닌 사회인으로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솔직히 나는 두려웠었다.‘타국 생활 10년’의 공백
을 전혀 느끼지 않을 만큼 적응력이 강하지도 세상 일에 밝지도 못한 나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 차는 일밖에 한  일이 없는 데다 바깥 일에 관심이 
없어 나는 누구보다 세상 물정에 어둡다. 학장의  천오백만 원 요구에 기겁을 하
고 되돌아온 유학생처럼 세태에 적응 못하고 다시 보따리 싸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을 했었다. 아, 암담한 현실이여!
    요즘 마음이 무거워요
  1989년 5월경 독일에서 신문이나 TV를  통해 본 한국의 노사 문제나 학원 문
제는 나같은 보통 사람들을 답답하고 우울하게  했다. 노동자도 학생도 그렇다고 
재벌도 정치가도 아닌 우리들은 발이나 동동 구를 수밖에 없겠지만 하루는 유난
히 마음이 무거웠다. 노사 분규라는  것이 처음 막 시작되었을 때 “맞아, 잘 산
다는게 뭐야! 번지르르한  건물 높게 짓고 백화점에 번쩍번쩍한 물건  잔뜩 쌓아 
놓는 게 아니지. 진짜로 잘 살려면 가장 못  사는 사람들도 마음놓고 살 집이 있
고 굶지 않으며 아플 때  병원에 못가는 사람은 없어야지”라고 나는 생각 했었
다.
  그리고는 그 얼마 후 난리를 바울케 하는  소요가 있자 “이상하다. 정말로 잘 
살고 싶서 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융통성과 한계가 있을 텐데 그 정도가 저토
록 심한 걸  보니 혹시 대한민국을 말아  먹자는 사람들의 소행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갔다.
  그런데 길고도 끝이 없는 듯한  노사 분규를 “돈을 더 받자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화풀이를 하거나 분노를 표시하는 것으로 치닫
는다”고 진단한 어느 글을 읽고 상당한 이유가  된다고 느꼈다. “십만원 더 받
는다고 집이 생기냐?” 1년 모아 백만원, 10년  꼬박 모아 천만원인데 우리의 현
실은 10년 후의 천만원에 아무런 의미를 둘 수가  없다. 사실 집 값이 10년을 기
다려 천만원이 오른다고 해도 제로 게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집 값은 10년이 
아닌 1년에 천만원씩  오른단다. 그러니 자기 집을 갖기 위한  꿈의 실현에 전혀 
도움이 못  되는 그 돈을 써  버리기 위한, 그래서 순간이나마  즐거워지기 위한 
술집들이 공단 주변엔 불야성을  이룬다고 하니 학생이고 부녀자고 대낮에 끌고 
달아나는 놈들이 생겨날 수 밖에....
  언젠인가 13년만에 처음 한국을 다녀온  정희 아빠는 아주 풀이 죽은 채 전화
를 해 왔다. “나는 여기서  살다 이곳에서 죽어야 할 모양이오. 한국은 이제 우
리 같은 사람들이 일할 곳이 못 되더구만요.  그래도 여기서는 내가 노동하고 마
누라가 구멍 가게를 그럭저럭 꾸리면  좀 고달파서 그렇지 다음 해엔 모아 놓은 
돈에 은행 돈 좀 얹어 집도 한 칸 사고 애들 대학까지 보내는 데는 걱정이 없는
데 한국 가면 대학은 고사하고 당장 입에 풀칠할 일도 걱정이더라구요.”
  정희 아빠의 입에서는 욕이  나왔다. “빌어먹을, 그래도 잘 사는 놈들은 손발 
꼼짝 안하고 뒈지게 잘사나봐요.” 풀 죽은 목소리  뒤로 고생할 만큼 했으니 고
향에 돌아가겠다고  들떠 있던 한 달  전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뒈지게 잘 사는 놈’  한마디에 왠지 자꾸 얼굴이 뜨거워졌다. 광부로, 노동자
로, 이른 새벽부터  구멍가게로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람이 없어서  정희 아빠는 
그래도 이제 독일을 고향으로 삼을 모양인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신문을 뒤적
이면서 왠지 마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의 나라’의 인정을 아시나요
  1988년 어느 날 독일 여성지에 실린 슈미트 전 서독 수상 부부의 사진은 무척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 색도 좋아진 것 같고  표정도 밝고 아
름다웠다. 슈미트 씨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전  처음 몇 백만 마르크를 모았
노라는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관직에만 있던 그러서는 돈을 벌  기회도 없었는
데 이제는 책도 쓰고 강연회도 참석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세와 사례비를 받는다
고 했다. 1회 강연  사례비가 2만 마르크. 한국 돈으로 8백만원이라고 하니 월급
쟁이 생활에 길들여진  그분으로서는 엄청난 돈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수상직을 
그만두고 첫 해외 여행할 때의 신문 기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공식 여행이 아닌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이 부부는 비행기의 서로 다
른 칸에 떨어져  앉게 됐다. 전직 수상에  대한 예우로 비행기의 1등석을  탈 수 
있는 특전이 부인에게까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등석은 엄청나게 비싸
다. 나도 가끔 공짜로 태워 줘서 타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슈미트 씨의  부인도 수상 시절에는 1등석이나 전용
기를 탔을 것이다. 또 그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월급쟁이 관료 노릇만 
했다고 해도 설마 남편과 나란히 1등석에  앉을 만한 방법쯤이야 없었겠는가. 나
는 참 용기 있는 분이라고 느꼈다. 가식이나  허영보다는 정직과 진실을 더욱 자
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용감한 여성이었다. 
  싹둑 잘랐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헤어스타일은 용기나 정직과 상당
히 어울려 보였다.  결코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다듬지도 않은 그분의  모습이 어
느 날  유난히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그 전날 뉴스에서  백담사에서 은둔 
중인 전두환 전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눈가에 뜨
뜻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5공화국이라면 눈을 길게 뜨고  째려보던 나였
지만 그날 만큼은  그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산사 같은 데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많
은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이 우유부단하기만  한 바보 같은 정 때문에 역사가 걸
러지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은 정을 담
은 그 우유부단한  피가 바로 내 속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
다.
    아무리 억울해도 폭력만은
  1983년 우리  청소년 축구 팀이 멕시코에서  4강이란 신화를 창조했지만 원래 
한국은 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이 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없었던 것
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북한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려 국제 축구 연맹으로부터 국제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당
하는 바람에 한국이  대신 출전하는 행운을 안았었다. 당시의 신문에  난 사진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독일의 동료들이 그 사건을 너무 놀랍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도리어 신기하게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페널티킥을 잘못  줬다 해서 “야! 전부  나와” 
하고는 경기를 하지도 않고 짐을 챙겨 나가 버리는가 하면 대표 팀 감독까지 했
던 분이 팬들 앞에서 축구 협회 임원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았고 그 
후에도 여전히 대표 팀 감독을  하는 것을 보았던 터라 경기장에서의 폭력은 흔
히 있을 수 있는  일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보낸  약 10년 동안을 
뒤돌아봐도 선수는 물론이고 감독이나  코치가 주심을 폭행하거나 경기 도중 퇴
장해 버리는 모습을 분데스리가에서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곳의 주심이라고 해서 100%  정확하게 판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
렇지만 억지 항의는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해가 된다는 기
본 생각이 배어 그런지 언젠가 스페인팀이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왔을 때 세 명이 
빨간 딱지를 받고도  결국 끝까지 경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하면 상대 선수들은  몰려들게 마련이다. 이때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주심은 
거칠게 항의하는 선수  하나를 택해 노란 딱지를 보이고 등을  돌려버린다. 어떤 
선수들은 주심에게 욕지거리를 계속 퍼부어 빨간 딱지를 받기도 하지만 대충 이 
정도면 기가 꺾이고 만다.
  서울 올림픽 복싱장 사건의 경우 우리가 그것을 보도하는 외국 언론들을 섭섭
하게 생각은 했었지만  그들에게는 생전에 쉽게 볼 수 없는  건수(?)였을 것이라
고 생각하면 이해가 갈 만도 한 것이다.  그 동안에도 어지간히 신문이나 팬들로
부터 말을 많이 들었을텐데 나까지 끼어서 괴롭혀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들의 생각이 어떤 원칙도 무력에 의해 바꾸어질 수 있다고 막연하게나마 믿
는게 두려울 뿐이다.  독일의 방송 리포터는 계속 수줍고 평화로운  우리들의 모
습과 복싱장을 비교해 보이면서  “이처럼 수줍은 민족에게 어떻게 저런 폭력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하기야 86아시안게임 때만 해도 모 여대 앞에서 실크 원피스에 나이키 운동화
를 신은 여학생들을 보고 그렇게  신기해 했으니 이번 같은 경우는 이해가 더더
욱 어렵겠지.
      코미디언을 웃기는 슈퍼 스타들
    10억원 마다한 ‘기술 고문’ 라텍
  1987년 여름, 독일 프로 축구 바이에른 뮌헨  팀 감독을 지냈던 우도라택은 세
계적인 명 클럽이자 그가 화려한  성적을 낸 적이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팀으
로부터 연봉 10억원에 다시  와 줄 것을 제의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호
히 거절하고 쾰른  팀의 기술 고문으로 취임했다. 지금까지 독일  축구계에 기술 
고문이란 직책이 없었던 터라 “도대체 그게 뭐 하는 자리냐”고 지자들이 물었
을 때 우도 라텍은 “쾰른  팀의 구단주도 다른 구단주들 만큼은 축구를 이해하
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기 때
문에 행정과 실기를 총괄해서 지도해  줘야 한다”고 그다운 얘기를 수백만 TV 
시청자 앞에서 했다.
  그는 지금 고인이 된 바이스바일러와 함께 독일 축구계의 가장 뛰어나고 화려
한 경력과 실력을 갖춘 명장으로 꼽힌다. 그러기  때문에 돋보기를 코에 걸친 바
이스바일러나 머리가  반들반들한 매서운 눈매의 라텍  앞에서는 누구도 축구에 
대해 아는 척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베켄바워  역시 지도자로
서는 아직 한참 더 배워야  한다고 분명히 얘기하는 그에게서 자칫 독선적인 느
낌을 받게 될지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후배들을  스스로 키워 내고 지금도 
여전히 돌보는 그의 모습을 보면 감히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내가 속해 있던 레버쿠젠 팀의  감독도 그 밑에서 트레이너 생활을 했기 때문
에 제자인 셈인데 경기장에서 흥분을 해 그라운드를 뛰어 나가려는 감독의 등을 
두들기며 달래는 그의  뒷모습이 TV에 비칠 때면 보스  같은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웃을 때 피가 터지는 듯 얼굴이 빨개지는  그는 자기 선수가 멋진 골을 넣
기라도 하면 벤치에서 같이 흉내를  내며 즐거워하고 또 골문 앞에서 턱도 없이 
공을 하늘로 쏘아 대는 자기 팀 공격수를 보고는 남의 일처럼 배꼽을 쥐고 웃는
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선수들에게는 묘한 믿음이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경기도 이기고 돈도 벌 것이라는.... 아무튼 자기 말
마따나 기술 고문이 총괄해서 지도를 잘 했기  때문일까. 조용한 날 없이 떠들썩
하던 쾰른  팀 선수들이 라텍을 영입한  뒤 모두 착한 학생(?)으로  변하고 십여 
년만에 처음으로 선두 그룹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가 운동장에서 입고 관전하
던 스웨터가 어느 경매장에서 600만원에 팔리는 것도 흥미로울 뿐이지 놀랍지는 
않다. 경기가 끝난 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차를 타고 스페인의 별장으로 가
기 위해 비행장을 향하는 그의 모습은 내가 축구인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바켄바워의 콧대도 꺾은 ‘장이 근성’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전을  하루 앞둔 지난 1988년 6월 22일 서독 대
표 팀은 전력  노출을 꺼려 연습장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었다.  감독으로서 베켄
바워는 스스로 성적을 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믿어지는 일이라면 어떤 조치도 취
할 권한이 있었고 또 전혀  주저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의 내, 외신 기자들은 운
동장 밖에서 서로의 얼굴이나 보며 잡담을 하는 등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모양
이다. 그런데도  물 샐틈 없는 경비망을  뚫고 들어가 사진을 찍고  예상 멤버를 
확인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헬멧을 쓰고 오렌지  색 작업복 차림의 커다란 연장  그릇을 든 그가 별 의미 
없이 운동장 경비원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그 연장 그릇 안에 카메라
가 들어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극성스런 기자
라면 그 전과가 이미 축구계에  알려져 있을 테니까 까만 용접용 안경으로 적당
히 얼굴을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대작전(?)을 완수하고 어이 엇어하는 
동료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연장 가방 안에 든  필름을 자랑스레 설명하는 그르 
볼 때 살맛을 느꼈다.
  저런 지독한 장이정신(?)이야말로  일의 종류를 제쳐 두고  대단히 훌륭하다는 
생각에.... 그런 일이 있은  뒤 서독 팀은 네덜란드에 2대 1로  패하고 말았다. 실
력이 뒤지는 경기였다.  경기 후 그 카메라맨의 카메라를 뺏어  내동댕이쳐 버렸
다는 베켄바워. 서독 팀이 경기에 패한 뒤 라커룸의  문을 걸어 잠근 채 15분 이
상 바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그 안의 분위기가 어떠 했을 것이란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카메라 기자 못지  않은 어느 방송 기자가 있었으니 
그는 생방송 상태에서 기어이 베켄바워를 마이크  앞에 끌어내고 기뻐했다. 그때 
TV를 보며 어쩌면 볼썽 사나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불안했
다.
  한참 후 라커룸을 나오는 베켄바워의 모습이 비치자 “베켄바워, 베켄바워! 한
마디만....” 보기  좋게 실패였다. 순간  기자는 “마이크 케이블이  얼마나 긴지 
모르지만 쫓아가 보겠다”하더니  “베켄바워, 베켄바워! 생방송 중이예요.  지금 
중계되고 있는데 한마디만....”  기발한 아이디어다. ‘생방송’ 바로  이 한마디
가 외교적이고 항상 팬을 의식하는  베켄바워로 하여금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없
게 하리라는 것을  베켄바워를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방송 기자의 의도는 적중했다.
  ‘생방송’이란 한마디에  얼굴을 바꾸고 예의 말끔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 베켄바워나 뛰어난 직업의식으로  패장의 얼굴을 속 시원히 팬들에게 보여준 
기자나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니 훌륭한 ‘꾼’이고 ‘장이’들이다.
    슈퍼스타가 싫어하는 사람들
  독일이 테니스 강국인 스웨덴을  누르고 데이비스컵을 차지하던 날 라커 룸에
서 동료들과 함께 미친듯이 좋아하던 보리스 베커는 TV카메라가 다가오자 뒤에 
놓인 책상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감독과  동료들이 눈짓과 손짓으로 그를 일으
켜 세우기는 했으나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정말로  귀찮고 싫다는 듯이 몇 마디 
내뱉고는 인터뷰를 끝냈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때에 윔블던  대회를 제패한 
10대 소년이 하늘 위의 태양처럼  떠 받들림을 받다가 뜨거운 감자처럼 내 팽개
쳐지거나 밟아대는 신문,  방송에 환멸과 함께 무척 큰 상처를  받았으리라는 것
은 쉽게 짐작이 간다.
  1988년 여름 서울에 도착한 벤 존슨은 기자 회견에서 ‘칼 루이스를 좋아하느
냐?’는 질문에 “나는 기자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좋아한다”고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황제보다 더 
멋있는 칭호가 없나 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던 기자들이 약물 중독으로 캐나다로 
돌아간 그를 놓고 “은행돈으로 산  저택에 집 값을 매달 지불하려면 배운 것이
라고는 없는 검둥이니 세차장일밖에 더 하겠냐”고 떠들 수 있는 기자들의 직업 
생리를 이미 너무도 잘  알았던 모양이다. 베커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절하
려고 노력하고 좋은 인상을 남에게 심어주고자 애쓰던 매우 긍정적인 사고의 소
유자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지미 코너스와 비외른 보그가  세계 테니스계를 주름잡을 때 “라커룸에서 만
나면 서로 무슨 얘기를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섹스”라고 지미 코너스
는 대답을 했다. 물론 “그건 알아서 뭐해?”하는 식의 비웃음을 섞어서. 그러나 
독일의 지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이런  스타들의 못 돼 먹은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쩌면 좋은 얘기와 나쁜 얘기를 모두  써야 하는 것도 독자들에게 읽을 
거리가 충분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보다도 더 불리고 깔아뭉개야 하는 직업
적인 사고방식이 항상  좋은 얘기만 써 주기를  바라는 스타들과 맞아떨어질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건 너희들 일이고 이건 우리들 일이다라는 경계가 뚜렷한 것이 프
로들인 것이다. 본인이 읽어서 화가 날 정도가  돼야 제목만 보고 독자들이 신문
을 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일 보는  스타들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화나게 
하고 쥐어박고 때리고 밟을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을 가진 기자,  바로 이런 사람
들이 베커나  벤 존슨 못지 않은  프로들이다. 이들의 칭찬은 꾸짖음  못지 않게 
또 화려하기만 하니까.
    분데스리가의 괴짜들
  독일 축구계에서는 감독, 골키퍼, 레프트 윙을 광기라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
다. 과거 감독,  골키퍼, 래프트 윙 중에 괴짜가 많았기  때문인데 내가 보기에도 
특히 분데스리가 골키퍼들은 한결같이 개성이 강한  특별 선수들이다. 언젠가 자
서전으로 독일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국가 대표 골키퍼 토니 슈마허가 자기만 
아는 독불장군형으라면,  멕시코 월드컵에  후보 골키퍼로 따라갔다가  베켄바워 
감독의 눈에 벗어나  대회 도중 쫓게 돌아온  함부르크의 슈타인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괴짜다.
  멕시코 월드컵 때 후보 골키퍼로  머무르는 데 분통이 터져 술을 잔뜩 퍼마시
고는 기자들한테 “매가리 없는 새끼들”이라느니 “장마철의 오이 같은 녀석들
”이라고 대표 팀을 싸잡아 욕했다가 다음날  집으로 돌려보내졌을 정도다. 그러
나 같은 괴짜라도 1947년 뮌헨  월드컵 당시 국가 대표 골키퍼였던 제프 마이어
나 벨기에 국가 대표 출신이면서  뮌헨 팀서 수문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마리 파
프는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코미디언 스타일로  인기가 높다. 두 선수  모두 늘 
무릎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바지에다 조금은 못 생긴 얼굴이 보기만 해도 저절
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데 마리 파프의 경우 이따금 익살스런 몸짓으로 팬들을 
웃긴다.
  뮌헨 팀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치는 오후 경기 때면 새들이 공원 잔
디밭인 줄로 잘못 알고 뮌헨  팀 골문 근처에 내려앉곤 하는데 그 때마다 볼 대
신 새를 붙잡겠다고 다이빙을 하는 것이다. 또  볼이 상대 문전에서만 오갈 때면 
심심해 못 견디겠다는 듯 골문  뒤의 사진 기자 옆에 턱을 괸 채 하픔하는 시늉
을 해서 진짜 코미디언보다 더 시청자들을 웃겨  주기도 한다. 제프 마이어는 지
금도 스포츠 코미디언 페스티벌에 단골로 출연, 돈도  꽤 잘 버는데 세계적인 테
니스 스타들의 서비스폼과  제스처를 흉내내는 것이 그의  주무기다. 우리나라에
서는 포항제철의 조병득처럼 점잖고  신사적인 골키퍼도 있지만 이곳은 물이 좋
지 않아서인지 대충 다 그렇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유난히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욕을 퍼부어대는 감독이 있
는가 하면 경기 도중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벤치에서 뛰쳐나가 하프
라인에 꽂혀 있는  깃대를 뽑아 미친 듯 휘두른  뒤 슬며시 다시 꽂아 관중들의 
웃음을 사는 감독도  있다. 이 때문에 감독 벤치에서 관중석으로  쫓겨나는 감독
도 있는데 내가 분데스리가에서 겪은  여섯명의 감독 중 가장 조용했던 분은 유
고 출신의 브랑코 제벡이었다. 그는 베켄바워, 브라이트너 등 수많은 축구인들로
부터 가장 훌륭한 감독으로 꼽히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분 밑에서 훈련
을 시작했을 때는 그가 얻은 수많은 우승의 영광이 이미 그를 알콜 중독자로 만
들어 놓은 뒤였다.  게임에서 지거나 이겨도 늘  말이 없는 제벡 감독, 날카로운 
눈초리 외에는 어떤 설명도 절제하던 이성을 가진 그분도 알콜없이는 호각을 불 
수 없었으니 예외 없는 광기였던 것 같다.
      이 친구 너무 심하잖아
    레버쿠젠 팀에 ‘감사 감사’
  탈세를 하건 안하건 간에 세무서 반갑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
처럼 월급에서 꼬박꼬박  떼어서 자진납부(?)하는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사업하
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독일의 세무서는 제 아무리 수상이
라도 꼼짝할 수 없는 엄격한 곳이어서 법을 최대한 이용한 ‘절세’이외에도 탈
세나 세무  공무원을 뇌물로 매수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 바로 이런  곳에서 1989년 봄 반갑지  않은 편지가 날아왔는데 
1983년부터 계산해서 밀린  세금 2천5백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세금 내역이라
는 것이 예를 들자면내가 멕시코에서  월드컵 경기를 할 때 우리 가족이 멕시코
를 방문할 수 있도록 모든 경비를 클럽에서 내주었는데 이곳 역시도 ‘불로소득
’이라는 것을 위시해서 그 동안  나에게 모든 편리를 봐 주었던 시시콜콜한 것
까지 다 들어 있었다. 얼마나 세밀하고 정확한지  손에 발까지 모두 들고 입까지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화가 나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독일의 사화 분위기 
자체가 가진 자들이  낸 세금이 그렇지 못한  계층까지를 위해 얼마나 공평하고 
고르게 쓰여지고 있는가를  실제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어린 아
이들에게 주어지는 교육의 기회는 한마디로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피아노,  미술, 노래, 바이올린, 수영,  스포츠.... 
어떤 것이라도 신청만 하면 거의 무료로 배울 수가 있고 학교에서 하는 활동 중
에 돈을 네거나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는사회가 용납을 안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의 책임을 가진 자의 세금이 주는 셈이다. 그레서 몇만원, 몇
십만원씩하는 특별 회비 기부금 같은 것은 든든한 국가 재정 앞에 맥을 못 추기
때문에 가진 자들의 횡포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귀국해 살면서 특히 아이
들을 둘씩이나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이기 때문인지 이것 저것 특별 활동을 하는 
우리 아이들의 친구들을  다만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 조금도 신이  나거나좋아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세
금이 이렇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해도 2천5백만원을 낸다는 것은 크게 부담스러
웠다.
  그런데 레떠쿠젠 팀의  회장이 "6년 동안 '차'가 우리 팀을  위해 정말 열심히 
뛰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세금을 책임지겠다"고 집으로 전화를 했었다고  한
다. 당연한 직업 상의  할 일을 한 것뿐인 나를 여지껏  고맙게 생각하는 레버쿠
젠 팀. 아마 앞으로 평생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법'이 존경 받는 사회 
  재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찮고 성가신 일 같다. 더욱이  나처럼 언어까지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이  머나먼 타국에서 그 성가신  재판을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법이 나를 억울하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변호사를 내세우고 서슴 없이 싸울 준비를 갖
추게 되었다. 독일에 있을 때  나를 속이려 하다. 법 앞으로 가자고 하면 슬금슬
금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어느 겨울, 횡단  보도 앞에 잘 서  있는 내 차를 들이받은 뒤의  차 주인이든 
보험 회사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보험  회사 역시 여
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쌍방의  잘못이니 자기 차는 자기가 수리를 해야 한다면
서 수차례 편지를  주거니받거니 했었다. 울화통이 터졌다. 변호사에게 자초지종
을 애기하고  편지를 띄운 바로 3일  후 ‘모든 금액을 소금  시키겠습니다'라는 
짧은 편지를 보험 회사로부터 받았을 때 어이가  없기도 했다. 또 언젠가 독일에
서 가사를 하게 되었었다.
  옛날 집을 도배하고 칠해서 세를  줘야 하는데 우리 클럽서 이런 잡일을 하고 
있는 이가 이를 원해서 맡겼다.
견적이라면서 8천 마르크(약 4백만원)를 애기하길레 "기껏 도배하고 4백만원! 이 
친구 너무 심하구나"하면서도 늘  덜컹거리는 고물 차를 타고 다니는 처지가  안
쓰러워 한마디도 않고  그자리에서 완불해 줬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얼마나 궁했
던지 아니면 나를  우습게 본 것인지 6개월이 지난  후 또 5천 마르크를 달라고 
온 것이다. 변호사가 경찰에  의뢰해 보니 영수증은 자기가 만든 것이었다. 나에
게는 통해도 변호사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감독대로 선수를  돕지는 못할망정 그 따위  짓을 한다고 야단을 치자 
그는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식이 아닌 재판정에서  옳고 그름
을 가린다는 것은 '법 보호  아래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7년 전 나와 같
이 일을 했던 선수 중개업자인  클레머와 그의 변호사 클룸페가 나를 상대로 소
송을 재기했었다. 클레머는 중개업자답게  허풍도 좋고 공갈도 잘 친다. 또 클룸
페는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사자라는 별명이 붙여진 쾰른
의 변호사였다.
  7년 전 이틸리아로 이적하려고  할 때쯤 부동산 문제가 터지자 중개업자인 클
레머는 부동산 사건의 주인공이자 프랑크푸르트의 부회장이며 그의 중개업 경쟁
자인 생커를 시켜서 이 기회에 매장시키기 위해 클룸페 변호사 사무실을 문턱이 
닳도록 다닌 모양이다.  일이 성사되었을 때만 커미션을 먹게 되어  있는지라 내
가 레버쿠젠으로 온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2만5천마르크(4백만원) 상당
의 수고비를  청구했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에 공개하겠다는  공갈도 심심찮게 
해댔다.
  물론 내가 법정에  나가야 하는 그런 재판이  아니니까 부담이 없기도 했지만 
재판을 통해 짐으로 우송된  판결문은 '클레머가 변호사를 둔 것은 차를  위해서
가 아니라 사업  경쟁자를 망가뜨리기 위함이며, 아울러 쾰른 지역  변호사가 프
랑크푸르트 법정에 설 수 없다는 것도 상식'이라고 해서 상고 기간이 지난  후에 
법정에조차 나가  보지 않은 나는 모든  비용, 즉 변호사비와 법원에  내는 비용 
등을 서면으로  돌려 받은 적이 있었다.  법은 억울한 사람을 위해  있는 참으로 
좋은 것이다. 말 잘못하는 외국인, 거짓말 못하는 순진한 사람들. 이런 사람 
들에게 법은 정말 "법, 사랑하는 법이여" 소리를 들을 만하다.
  행복은 작은 것에 있다 남들과 비교하면 우습고 시시한 것들이 자신에게는 행
복감 그 자체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이쩌다 15년을 뛴 어린 후보
선수의 뿌듯해 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가뭄에  콩나듯 백점을 맞고는 종
일 시험지를 들고
다니는 우리 진 두리, "남학생들한테  네가 가장 인기가 좋다"고 귀틈해 준 친구
의 말에 눈치도 없이  황홀해서 종일 콧노레를 부르는 우리 딸  하나. 모두가 행
복한 사람들이다. 마라도나가 있다고 해서 또는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행복감이 줄어들 필요가 없고, 늘  백점 맞는 아이들이 많다고 해서 
두리의 모처럼 맞은 백 점이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빛을 잃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실은 "야! 나는 네가 맨날 백  점 맞지 못하는 게 기분 나쁘다"고 한
마디하고 싶지만 녀석의 행복감을 잡치게 할 수가  없어서 꾹 참는다. 하기야 맨
날 백점 맞는  아이가 백점 맞고 우는 것보다는  80점만 맞던 녀석이 백점 맞고 
희희낙락 기분이 째지는 것이 행복감 자체만  갖고 비교한다면 훨씬 경제적(?)인 
셈이다 사람에게 행복감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을  것이다. 과테말라
로 원정갔을 때였다. 한  구두닦이 소년이 우리 팀 감독이 돈을  많이 줄 사람으
로 보였던지 높은 의자에 앉혀  놓고는 침을 탁탁 뱉어 가면서 열심히 문지르고 
광을 내더니 감독이 5달러를 건내 주자 그 자리서 한바퀴 돌며 마냥 좋아했다.
  어려운 나라라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동생을 등에 
업은 우리 딸 하나 또래의 어린 여자아이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
고 꽃을 팔다가 잔뜩 사주는 손님을 만나자 놀란 듯이 활짝 웃는 모습은 천국이 
따로 없어보였다. 정말로 아름다웠다.
  1989넌 2월 수백억원의 재산과 세계적인 명성,  그리고 줄을 있는 미녀들을 거
느렷던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비외른 보리가 자살 소동을 벌인 것을 보면서  '행
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하고 새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두딱
이 소년, 꽃 파는 소녀,우리집의 하나와  두리, 그리고 옛날 레버쿠젠팀의 어리지
만 행복한 후보들.... 나는 그들의 행복을 아끼고 싶다. 


      나는 눈 뜬 장님인가?
    서양 사람들의 '버르장머리'
  나는 이혼하는 부부들이 성격 차이 때문에 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사람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꿴히 할 말이 없으니까 별소리를 다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즘 나는 그 성격 차이, 사고 방식의 차이가 그렇게 가벼운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
각이 든다. 서울 올림픽 때의 일이다. 엷은 하늘 색 차림의 미국 선수들이 입장한 때 나는 단복도 
그렇고 그들의 자유스러운 모습도 홍분된  잔칫집의 분위기와 그리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특히 몇몇 선수들이 '나 여기  있어요'라고 쓴 제법 큰 플래카드 같은 것을 TV나 카메라를  향
해 흔들 때는 나도 같이 한바탕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독일의 TV도 그 모습이  무척 재미
난 듯 오랫동안 비춰 주기도 했는데 그들의 행동을 달리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뒤 한국 신문을 바아보고 "고얀 놈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하며 불쾌해 하는 기사를 접했
을 때 상당히 당혹스러웠던 느낌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정말로 그렇게 화를 낼 
일이라면 '재네 좀 보라'하고 킥킥 웃었던 나는 "도대채 어디서 왔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커다란 벽을 느꼈던 사건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즐길 줄 모르고 웃지 않으며 멋대가리 없다는 독일 사람들도 우리와 비교한다면 
차이가 나는 것 같다. 1988년 어느 날 서독의 정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슈트라우스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 묘는 지금도 관광 참배객이  버스로 줄을 잇는다고 하는데 생존시  그는 
뚱뚱하고 땀을 많이 흘리는 외모와 큰 목소리, 강한 성격  때문에 만화가들이 그를 곧잘 고객으로  
삼곤 했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뜨고 그를 애도하는  한 캐리커처는, 세계적인 정치가들의 이름
(레이건, 고르바초프)이 적힌 수없이 많은 커다란 화환들 맨 끝에 만화가 자신이 조그마한 화환을 
들고 낭패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그래도 '바이에른 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좀 너무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
었었다. 그리나, 다음날 레버쿠젠팀 단장의 생일 파티에 모인  그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슈퍼'라면
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또  다른 벽을 느꼈다.  이런 양 쪽 벽이야말로 생선도 고
기도 아닌 내가 평생 느끼게 될 사고방식의 차이인 것같다.
    나눠진 땅 갈라진 이념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이북 방문을 허용하는 대통령의 발표가 있었을 때 그 발표를 듣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호기심이  발동했었다. 이북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법으로 이
북 방문을 허용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은근히  이북 사람들 축구한는 것도 한번 보고 싶고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금강산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사관, 한국 관광 공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기대  에 부풀기도 했었는데 불과 몇달이 
지난 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두려울 만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동과 서로 갈린 나라의 서쪽 한편에서 한 10년 살아본 나는 "이 사람들은 남의 탓에 갈라져 살
뿐이지 자기들끼지는 통일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나름대로 믿어왔었다. 우선  자유롭게 서로 왕
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나   유럽의 각종 대회 때면 동독 메달도 마치 통일된 독일의 
것 마냥 좋아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랬다. 얼음판의 여왕인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가  두번째 동
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제패했을때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표현으로 신문 1면 전체를  장식 
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독  매스컴의 비중으로 친다면, 테니스의 보리스베커나 슈테피 그라프에 
못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988년 겨울 뮌헨에서 시상하는  밤비상의 스포츠부분 시상자로 결정되
어 뮌헨에 도착했을때 어떤 호텔에 묵으며  무엇을 하고 시상식에서는 이떤 옷을 입을 것이가 하
는 것까지 온통 사랑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TV  앞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사랑이 듬뿍 담긴  얘
기가 무색하도록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
고 곧 "내가 이쪽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었지 동독은 아직도 냉랭한 모양이구나" 라고 짐작했다. 그
러나 계속되는 나의 질문을 받은 꽤 많은 "서독의 친구들은 지신들의 동독을 이웃나라 중의 하나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처럼 카타리나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당신네 사람'이라는 말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한 부분만 보고서는 네가  산 10년이란 숫자로 독일을 다 아는 것처럼 지레 
믿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한번 가보고 싶은  이웃 나라였을까? 아니면 누구처럼 내가 가서 통일의 
물꼬를 터야만 한다는 어마  어마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까지 
뭐가 뭔지 모르고 구경하겠다고 날뛰니....
    독일이 잘 사는 이유 아시나요 
  독일에서 나의 고문 변호사 사무실은   법원으로 부터 몇 분 안걸리는 도보 거리에  있었다. 각 
분야의 전문 변호사들로 그룹을 이루고있는 이런 류의 사무실이 시내 중심가인 그 곳에는 즐비하
다. 한번은 나 때문에  일을 늦게 마찬 변호사를 집으로 바래다주는데 그는  "이곳 변호사들은 법
원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근무증에 차가  피요치 않아서 대부분 전철이나 기차로 출퇴근을 할 수 
있어 매우 좋다"고  말했다. 나는 변호사의 하루 대부분의 일과가  사무실과 법원에 국한돼있다는
데 상당히 놀랐다.
  그는 명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상당히 알려진 변호사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두리와  아주 친
한 친구인 거프리드의 아버지인 미스터 차비는 내 또내의 박사로 바이에르 회사 내에서도 유능한 
인재로 꼽히는 모양 이었다. 이  아빠는 비가 오거나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10Km정
도 되는 바이에르 회사까지 자전거로 출퇴근
했다. 건강에도 좋고 대기오염을 방지하는데 일조를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일을 사무실에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처럼 교재술을 마셔야 하고 점심  저녁은 물론 심지어 아침 식사까지도 함께 하는 등 
분주히 뛰어야만 출세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전거나 기차 전차를 타고 출퇴근한다는 것은 상상
조자 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곳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처
럼 교육열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밤낮 없이 콩 튀듯 바쁘게 뛰는 것도 아니다.  재치가 뛰어나야 
하고 센스가 탁월해서 상황에 따라 순발력있게 대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대도 세계에서 가장 안정 되게 잘사는  것을 보면 시간과 에너지를 갖자 자신이 맡은 일에
만 모두 쏟을 수 있도록 불필요한  것들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 사회의 분위기와 독일이라는 나라
를 더욱더 능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같다. 해야 할 일은 좀 소흘히  하더라도 교제만 잘 하면 성
공할 수 있는  사회라면 개인의 출세야 별개의 문제지만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국가적인 역랑을 
키우는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복잡한 서을 시네에 차랑이 한없이 늘어나는  상황을 독
일과 비교해 곰곰 생가해 본다. 
    빛비랜 축구 명문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뒤셀도르프의 전력이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약화 되띤서 괸중이 줄어 팀 운영
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프로 축구는 단순한 괸람객이 아닌 고정 팬을  많이 확보해
야 원만한 팀 운영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시는 수년 전부터 국제 도시로 탈바꿈, 
깔끔하고 단정한 국제 기업인들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서 축구 팬을 잃게 됐다.  외국인들이 자
꾸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특유의 옷 색깔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향토 팬은 줄어들고 대신 뜨내기 
구경꾼들이 운동장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도시는 돈이 많아지면서 엄청난 돈을 들여  유치하는 이반 랜들이나 보리스 
베커의 프로 테니스 시범 경기가 벌어질 때면 그 비싼 입장권이 몇  달 전부터 매진되곤 한다. 축
구는 서민 운동이다. 테니스와 달리 단순히  보는 것으로 즐기기 보다는 '네편 내편'이 훨씬 중요
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 편가름이 프로 축구의 마탕니지도 모른다.
  향토색이 짙은 지역일수록 좋은 팬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데 바이에른 뮌헨 같은 깅우가 좋은 
예다. 독일의 가장 남부에 있는 이 바이에른은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알프스 지역이다. 날
씨가 좋고 지역이 방대한 데 비해 뮌헨 팀만이 이 지역을 독점하고 있어 늘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그들의 커다란 생맥주 조끼가  말해 주듯 그곳 사람들의 
낙천적인 농심(農心)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
  이와 달리 중부의 루르  지방에는 반경 150Km가 채 안되는 좁은  지억 안에 분데스리가 팀(18
개)이 반 수 이상 속해 있다. 물론 뮌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작지만 이런 지역은 또 나
름대로 팬을 모을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 광산, 철광산업 등 늘 어두운 데서 노동하는 이 곳
주민들에게 토요일 늦게 벌어지는 축구 경기는 모처럼 소리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
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노무자들이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대로 옆동네를, 혹은 이웃 광산을 이기
고 싶은 심리가 발동, 거의 군 단위마다 팀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며이 된다.
  도르트문트, 살케, 보쿰.... 이런 팀들이  바로 이곳에 속해 있다. 아무튼 스포츠, 특히 축구는 양
쪽 골대 뒤에서 편 갈라  싸우는 팬들이 있어야 신이 나고 구단으로서도 존재 가치가  있다. 동독
에 갇혀 있는 서베를린이 수많은 세제 혜택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인들이 그 곳에 살기
를 피하자 이제는 외국인들의 도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자연적 현상은 그 막
강하던 베를린의 팀들이 모두 2부 리그, 혹은 아마츄어로의 전략이었다. 
 이런 것과 비교하여 우리 나라를 보면 서울은 프로 축구가 뿌리를 내리기에 부적합한 곳이며 영
-호남 지역이야말로 팬들과 호흡하는 축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가장  이
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없어 다른 지역의 다섯개 팀만으로 올  시즌 프
로 축구 대회를 치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보다 근본적인 지역 연고제의 정착, 나아가 진정
한 팬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남 지역의 프로 팀 창단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포가 세다.
    약물 복용 검사
  내가 독일에 있었을 때 TV의 스포츠  쇼에 세계 스키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가 소변 
검사 결과 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 메달을 박탈당한 독일 선수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의사의 지시에 따라 복용했을 뿐인데 나중에 알고보니  의사 자신이 도핑테스트(약물검사)
에 걸리는 약이 줄 모르고 준 것이라는 거다. 금메달을 날려 버린  그 기분이 얼마나 씁쓸하고 어
이 없을 것인가는 같은 운동 선수로서 백 번 이해 할 만 했다.
  약물 투입. 한국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말로 들린지 모르지만 그 문제를 둘러싸고  상당한 시비
가 오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월드컵이나 올림픽, 그 밖의  공식 대회에서 꼭 소변검사를 통해 
약물 복용 여부를 검사하게 되는데 이제는  스포츠 의사들도 어떤 약이 검사에 걸리고 안 걸리는
지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1986년에 있었던 멕시코 월드컵의  경우 선
수 전체가 검사에 응하는 게  아니고 팀 별로 한두 명씩을 제비뽑기로 선정, 도핑  테스트를 실시
했다.
  불가리아와 경기를 마친 뒤의 일이었다. 선수단이 버스 안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변병주 선수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소변 검사를 받으러 간 녀석이 감감  무소식이어서 팀 전체가 한참을 기다렸
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버스에  오르는 녀석을 향해 "야' 너는 애기냐? 오줌도 못  싸게"하고 네가 
핀잔을 주었다. 말은  조심해야 한다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탈리아와 경기를 마치고 내가  걸려든 
것이다. 물을 큰 병으로 둘씩이나 마시고 아랫배를 있는 힘을 다해 눌러도 소식이 없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가볍게 끝네 주고  돌아가는대 나만 쩔쩔매고 있있으니 병주한테 소리친 대
가를 톡톡히 받은  셈이다. 흥분제 등 복용을 금자하고  있는 약을 복용하면 경우에 따라  상당한 
효과가 있기는 하는  것 같다. 약간의 환각 작용을  하는 약물을 투입할 경우 일체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어지기 때문에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경기를 하게  된다는 얘기다. 1985년 겨을 유
럽 축구 선수귄  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독일의 보루시아  MG는 홈 구장에서 떨어진 스페인의 
아들란티코 마드리드 팀과의 준준결승 첫  번째 대결에서 5대 O이라는 점수로 대승을 거뒀다. 워
낙 큰 점수 차로 이겨  어웨이 경기에서도 보루시아 MG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의견이 지
배적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경기가 시작 되자마자 맥 없는 경기를  펼쳤던 1차전 때와 달리 말 그대로 미친 듯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오직 골키피 한 명만을 수비에 남겨  둔채 전 선수들이 공격을 퍼붓는데 
독일 선수는 얼마나 기가 죽어 있었는지 모처럼 넘러오는 단독 볼도 제대로 처리를 못 할 정도였
다. 순식간에 여섯 골을 뽑아 넨 마드리드는 후반 몇 분을 남겨 놓고 한 선수를 교체했다. 그런데 
교체되어 나오는 선수의 표정이나 몸짓이 바로 몽롱하게 기분 좋은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
다.
  아직 경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운동장을 뛰어나오면서 환호하고 또 두손을 허공에 대고 주
먹질하는 그의 모습은 나중에 독일 기자들로부터 약물을 복용한 것 같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
다. 분데스리가도 그렇고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도 아직은 도핑테스트를  하지 않고 있다. 가끔씩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이런 문제로 시끄럽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분데스리가  감독 가운데 상당수가  알콜중독에 걸려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 승폐가 주는 
긴장이나 스트레스를 인간 의지로도 어쩔 수 없나보다.
    '뻥'이 유별나게 센 사람들
  세상을 살다 보면 유난히  '포'나 '뻥'이 센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악취미라  할지 모르지
만 나는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게 여간 즐겁지가 않다. 솔직히 이린 사람이 부럽기조차 하다. 이들
이 한 말을 내가 믿고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욕하기보다 그 '뻥'을 믿은  나의 미련스
러움에 웃어 버리고 만다. 우리 축구계에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포'
가 있다. S성을 가진  모 신문사의 기자로 덩치가 나에 비해  배나 되고 몸무게도 kg아닌 톤으로 
계산해야 함직한 거구인데 '우렁차게 고는  콧소리'가 그의 상표다. 코를 얼마나 요란하게 고는지 
새마을호 열차의 여객 전부가  경고(?)를 줄 수밖에 없었을 정도다. 표현력이  뛰어난 P기자의 동
행담을 듣자면 코고는 소리 자체가  요란스러움이나 시끄러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의 간장
을 녹인다는 것이다.
  한번 숨을 들이쉴쉬어 내뿜을 때까지의 긴박감이란  매번 숨이 꼭 넘어가 버릴 것 같다는 얘기
다. 어느 해인가 가을 이 S기자가 독일에  왔을 때, 내 차의 운전석 옆자리에 앉히고는 50km정도 
간 적이 있다. 20분 정도 달렸던
것 같은데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이르는 시간이 너무 짧아  절정에 이르
기 전에 깨우고 말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 하여금 부러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태평하게 자
고 있었다. 그후 우연이  독일을 방문한 'S포' 기자의 신문사 동료는 그에게서  들은 무용담을 전
해 주는데 본인이 내 차(벤츠)를 몰고가면서 시속  200km로 달리다가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니 신
나게 코를 골던 그도 기가 막히게 스무스하게 멈추더라는 것이었다.
  꿈에서 나하고 같이  운전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S포'기자는 얘기  도증에도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나는 포가 세다"는 참고의 말을 적절히 섞어 주는데 가끔 넋을 잃고  듣던 나에
게는 상당히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뻥'을 미
워하지 않는다. 모두들 나처럼  악취미여서인지 아니면 '뻥' 그 자체가 남에게해를 주지  않는, 자
기 중심에서 그치는 애교(?) 때문인지 모르겠다.
    '스포츠 스타'와 '생활인' 사이
  우리 나라에 직업 선수 제도가  생긴 이래 많은 은퇴 선수들이 있었다. 아직 시작  단계이기 때
문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현역 선수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는 부분일 것이다.  더구나 햇수를 거듭할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은퇴  선수들을 지도
자로서 자체 소화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독일의 경우도 크게 
좋은 편은 아니다. 다만 선수들 스스로가 오랜 경험을 통해 '현실화된 생활인'이라는 것이 조금은 
다른 부분일 따름이다.
  우리 나라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의 인기 선수들은 물론 걱정할 게 없다. 그  정도의 선
수라면 10년 이상의 선수 생활을  통해 적어도 생활의 기반은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
전히 축구로만 재산을  모을 수 있는 분데스리가의 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선수들이 은퇴 
후의 생활 기반을 닦기 위해 현역  시절 스포츠 용구점을 경영한다든지 다른 이름으로 조금 덕을 
볼 수 있는 사업에 손을  대기도 한다. 파울 브라이트너처럼 벌어 놓은 돈으로 느긋하게  치과 의
사 공부를 시작해 벌써 이빨이 형편 없는 우리 두리 녀석을 설레게 하기도 하고 또 가끔 축구 담
당 기자로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머리를 쓰기 싫어하는 선수들은 평범한 생활
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직장이라면 아디다스 같은 회사의  영업사원인데 내가 보기에는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 같다.  물론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없지만 유명한 각 종목의 스포츠인들에게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나눠주고 취급 품목도 지정해 준다. 그러면 왕년의  스타들은 가게
를 도우면서 주인들과 식사도  하고 주문도 받고 또 가게 선전도 해준다.  아디다스에서는 이들에
게 판매되는 해당 품목의 일정한 부분을 급료로 지불하는 것이다. 많이 팔면 많이 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팀의 간판 스타였던 그라보브스키는 남을 찾아다니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그 좋은 직장을  하루 다니고는 집어치워 버렸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많은 현역 스타들이 평범한 생활인이 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쟁이와 찢어진 눈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경기 때,  후반 31분에 소위 바나나  킥이라고 하는 슈팅으로 골을  넣자 
TV에서 이를 보여주면서 나와 감독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오곤 했다. 사실 바나나  킥뿐만아
니라 대부분의 골이 운을 따라  주지 않고는 성공될 수가 없다. 이날 TV에서는 오른쪽  사이드를 
돌파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찢어진 눈의 한국인 차붐'이라고 아나운서가 나를 소개했다.
  '찢어진 눈.' 우리가 서양 사람들을 가리켜 '코쟁이' 혹은 '파란 눈'이라고 하는 것처럼 서양 사
람들은 우리를 부를 때 특히  한국, 일본, 중국의 작은 눈을 가진 사람들을 '찢어진  눈'이라고 표
현한다. 신문에서야 가끔씩 그런 표현을 쓰지만 TV를 통해서 듣기는 그때가 처음으로  우리 식구
들은 TV를 보다 말고 그  표현이 재미없어 한참이나 웃었다. 외모나 다르고 생활 방식이  판이한 
독일에서 살다 보면 웬만한 자부심이나  사회적인 위치에 있지 않고는 늘 그 다른 점을 우리의 '
약점' 으로 치부하고 넘겨 버리기 쉽다.
  내가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독일에 살고 있던 노무자들의 충고는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김치
를 먹지 말아라" "마늘도 먹지 말아라"  "일요일에는 빨래를 하지 말아라" "일요일엔 청소도 하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 나는 김치도 먹고 마늘도 먹으며  토요일 경기를 잘 치를 때면 기분이 좋아 
다음날 마루도 훔치고 마당의 잔디를 깎기도 한다. 그러나 내 주위에 마늘과 김치, 불고기를 좋아
하는 독일 친구들이 늘어나는 것과는 달리  나는 점점 마늘이 싫어지기 시작하는데 거의 10년 동
안의 독일 생활이 나를 그렇게 만든것 같다. 독일식 식사를  계속하다가 모처럼 한식을 하고 나면 
며칠씩 내 입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나 자신이 불편을 느낄 때가 많은데 휴가 때 한국에 가면 하
루 세 끼를 모두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먹는 일에 적응하기도 일주일이 걸렸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체질이 변한 것이지 동양 인이라는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은 절대 아니
다. 나는 오히려 지독한 냄새가 나는 치즈를  먹는 독일 친구들에게 "발가락 냄새가 난다"고 저만
큼 가라고 하곤 했다.  얼굴의 생김새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이들에게 특히  이상스업게 느껴지
나 보다.
  하루는 하나가 학교를 다녀오자마자 "엄마! 내 친구가 날더러 왜  그렇게 코가 납작하냐고 물어
"하면서 아내의 입을 쳐다본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하는 아내 왈 "하나야!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몰라. 네 친구한테 물어 봐라. 걔는  왜 
코가 큰지."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하나가  "엄마! 걔도 모른 대, 지 코가 왜 큰지"하면서 즐거
워하는 것을 볼 때 '차이점'을  '약점'으로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본인의 마음가짐에 달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독일을 다녀간 선수들이나 축구 인들이 "외국인이라고  해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몹시 못 마땅해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바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외
국인이어서 팬들은 오히려 나를 잘  알아본다. 이것은 장점이다. 또 잘못할 경우는 사고방식이 다
르다는 이유로 감독이나 동료들의 보호를  받게 되기도 한다. 물론 국가 대표가 될 수  없기 때문
에 대표 선수들이 받는 관심이나 사랑을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들을 키우면서 동서의 차이점을 '약점'으로 받아들이지 않게하려고 애쓰는데  두리야 워낙 제 
잘난 멋에 사는 녀석이니까 걱정이  없고, 하나 역시 아직은 큰 문제가 없어 내가  외국에서 사는 
빚을 아이들에게 덜 진 느낌이다.'찢어진 눈'의  얘기를 듣고 재미있어 하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랑
하는 우리  가족! 독일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두리 녀석처럼 제잘난 멋에  살아보련다. 기죽지 않
고....
    전도 사업
  분데스리가 진출 초기 프랑크푸르트 팀에서 합숙할 때 동료 선수들이 신기한 눈으로 나를 보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책을 낸 나의 아주 절친한  친구이자 현재 프랑크푸르트팀의 주장이기도 한 
살리 쾨르벨이 그의 책에 내가 그의 집을 처음 방문해서 한쪽 소파에 앉아 기도하던 모습을 적고 
있는 걸로 봐서 합숙기간 중 식사 때마다 머리를 숙이고 한참씩 기도하는 나를 보고 그가 신기하
게 여겼을 것으로 쉽게 짐작된다.  그래도 당시 팀 동료들은 먼 나라에서 온 나를  무안하게 하지 
않게 하려고 자기들이 눈치껏 기다렸다 식사를 시작하든지 아니면 아주 조용하게 식사를 했다.
  그런데 팀에서 의사 소통이 전혀  불가능했던 나는 벙어리 노릇하기가 답답해서 그랬는지 한국 
교민만 만나면 꽤나  끈질기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곤  했다. 그 중에 내가 전도를  하리라고 
마음 먹고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하던  세 분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모험이거나 판단미스
라고 해야 할 만한 인물들을 감히 정해 놓은 것이다.
  당시 서독 대우 지사에 계시던 주응증  선배는 앞에서 잠깐 얘기한 적이 있지만 스포츠라면 국
내외를 막론하고 또  어느 종목이라도 막힘 없이  꿰는 인재인데 술자리, 고스톱,  체육회, 차범근 
응원가는 데, 놀러 가는 데 등 모두 다 고문으로 되어 있어서 도무지 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서 이따금 여럿이 모인데서 "형 교회 갑시다. 내가 형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기도한다우"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만 나를 얼빠진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찌어찌 하다 보니 주 선배가 나와 같이 교회 같은 데를 가게 되었는데 본인의 뜻
에 따라 과거가  화려하고 앞으로도 지을 죄가 너무도 많은지라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일단은 
우리 두 가족만의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몇 살지도  않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비밀이 있을 수가 있는가.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외환  은행의 임형이 "주응증이가 예수 믿는 걸 보
니 차범근의 기도는 하느님과 통하는  모양인데 이거 정말 큰일났다"면서 나를 만나자 매우 심각
한 얼굴로 "차 형! 앞으로 기도할 때  제발 내 이름만은 빼줘, 나도 주응증이처럼 예수 믿게 되는 
날엔.... 어이쿠! 큰일나!"하고 울상을 짓는 것이었다.
  고려대 시절 막걸리 먹고 무교동에서  하던 실력을 서독에 와서 풀어먹다가 프랑크푸르트 파출
소내 사람 가두는 곳까지 직접 답사해 보신  분이 겁이 많기는....  아무튼 이런 일 때문인지 내가 
사람을 꽤나 귀찮게  한다는 얘기가 교민들 사이에  나돌았던 모양이다. 지금의 레버쿠젠으로  온 
뒤에도 밖에서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형준이 아빠를 초대했더니 이분 첫마디가 가관이다. "야! 
날더러 예수 믿으라고 만나자면 나 안 갈란다. 차 선수 소문 났더라고...."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겁내는 사람들이 몇 년 전만 해도 꽤 있었는데 이제는 너무 오래 있다보
니 귀국하고 나만 남았다. 귀찮게 해줄 사람도 별로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날 더욱 귀찮게 해
야 할 것 같다. 그나마 남 생각할 줄 알고 또 고마워할 줄 아는 것도 다 하느님 덕이니까.
      감독님 모시기 어렵네요
    누가 돌대가리냐
  신문을 뒤적이다보니 나처럼 긴  얼굴에 말대가리 상을 한 사람에 대한 관상풀이가  있었다. 얘
기인즉 쉽게 화 내지는 않으나 한번  틀어지면 일확천금이 놓여 있어도 꿈적도 안하며 높은 사람 
앞에서도 자기가 할 말을  서슴없이 하는 상이라는 것이다. 샐러리맨들은 술김에 하고  싶은 말들
을 한다지만 나는 오늘 관상을 본 김에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요즘 한창 걱정거리로  대두되고 있는 '한국 축구의 불분명한 미래.'  나는 이 부정적인 결과의 
책임이 우리 축구인에게는 거의 없다고 얘기하고 싶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 동안 협회나 각 구
단의 실질적인 결정권과  파워가 소위 비축구인들에게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축구인으
로서 축구계에서 설치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마치 우리 축구인들은  돌대가리의 집합소
요 바보들만 모여 아귀다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인데 축구인들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는 그
분들이 지금까지 직접 해 온 일은 어떤 것인지 묻고 싶다.
  몇 십년 만의 추위라하여 온 독일이 움츠러들고 예정된 경기마저 취소되는 소란을 벌이던 1985
년 겨울, 월드컵 팀과 함께 온 축구 협회의 모 부회장은 훈련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훈련 장소
는 팀을 지휘하는 감독이 선택하는 게 독일의 상식이고 또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이같은 상식
에 따라 레버쿠젠 클럽의 회장과 감독은 "김정나 감독이 직접 보고 장소를 결정하시죠"라고 하는
데 이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내가 보면 된다"면서 문제의 부회장이 말을 가로막고 나서  모두를 
어리둥절하게만들었다.
  상무의 한마디에 자기의 의견조차 변변히 얘기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달려왔던 그 부회장님. 조
기 축구회에서조차 볼 한 번 차 본  적이 없으신 분이 어떻게 무슨 상식으로 감독을 제쳐놓고 훈
련 장소를 정하겠다는 것인가. 그저 우리 축구인은 "잠자코 있어!" 하면 잠자코 있다가 일이 잘못
되면 "돌대가리 같은 축구인들!"로 취급당하면서 쥐어 박히기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축구 협회를 
대표해서 온 부회장이란 분들이 자기 말도  책임지지 않고 야밤 도주해 버리는 일을 나만해도 벌
써 두번이나 당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김호, 김정남, 이회택, 김호곤, 이차만, 고재욱 등 한국  축구 황금기의 스타였던 많은 선배와 선
수 출신의 젊은 지도자들이 이제는 축구계에 두껍게 깔려 있다. 나는 이분들이 일류 학교, 훌륭한 
가문의 이력서는 없어도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일들을 더 잘할 수 있을 
줄로 믿는다. 감독을  뒷전에 둔 채 작전을  지시하고 스타팅멤버까지 간섭하는 구단장이  아직도 
슈퍼 리그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심한 분노와 비애를 느낀다.
    눈치 보기 이제 그만 
  '왕중의 왕'이라고 하니  황제쯤 되는 모양인데 황제를  뽑는 제44회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의 
운동장 분위기가 어찌나 스산한지  10년 만에 고국의 그라운드를 찾은 나의 마음이  무거웠다. 효
창 구장에서 실업과 대학이 경기를 할  때도 그랬지만 동대문 구장에서는 명색이 국가 대표가 중
심이 된 프로 팀들의 결전인데도 스텐드  한 가운데 옹기종기 둘러앉은 몇 사람 외에는 열기라고
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냉기로 가득했다.  나는 누가 뭐래도 한국에에서는 다른  종목보다 
축구  팬이 가장 많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들의 기질에 가장 잘 맞는 스포츠,  가장 하기 쉽고 보기 쉬운 스포츠가 바로 축구다. 그래
서 잠재해 있는 팬들을 운동장으로 끌어들이는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꽉꽉 들어찬 운동장
에서 선홍아! 주성아!를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프로 팀들의 경기를 관전한 
후, 우리 프로 팀들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관중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고 또 흥미있는  경기를 펼 
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에 있었던 현대 일화  팀의 경기는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이
었다. 프로 리그 꼴찌의 부진을 그 기회에 씻어보자고 하는  으욕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팀
과 비교할 때 훨씬 활기차고 많이 뛰는  부지런한 축구를 해 보였고 또 공격적인 색체를 짙게 띤 
팀 킬러는 축구로서의  '상품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물론 어떤 팀들은  너무 움츠린 경기를 하기 
때문에 소위 유럽에서  말하는 '콘테축구', 즉 승부만을 염두에 둔  게임 운영으로 지루한 경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관중들도  돈을 주고 입장하기 때문에 스텐드에서 고함으로 야유
를 보내 좀더 볼 만한 축구를 하도록 요구해아 했다.
  감독들은 구단측 눈치를 보느라 승폐를  떠나 팬들을 위한 과감한 경기를 선사하기에는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기기만을  종아하는 임원들, 아무리 내용이 좋은 경기를 해도 지면 
소용이 없다는 식의 축구를 이해하는 수준은 우리 축구, 특히  감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텅  빈 운동장에서 우리끼리 싸우고  우리끼리 우승컵 나누어 가지고  우승한다고 
좋아하는 것보다 비록 꼴찌를 하더라도 경기때마다 관중이 몰려오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서 
축구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바로 그런 팀의 운영이 이상적이지 않겠는가? 보여줄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 "한번 오십시오"라고 팬들에게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축구 활로 새 모델 창안뿐 
  1990년 로마 칠드컵이 끝난 후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거기에 참가했던 상당히 많은 나라의 사
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카메룬'이라는 검은 대륙의 가난
한 나라를 상당히 부러워l하고 있다. 나 역시도 카메룬의 검은 돌풍이 지나간 후 나름대로 호기심
을 가지고 이책 저책 혹은 보도 자료를 뒤적이면서 그 이유나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을 가져
ㅅ었는데 솔직히 말해  카메룬을 흉내낸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오늘이 엄청난  투자, 과학적인 훈련, 정부 지원, 해외 연수 같은  데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파악한 카메룬 혹은 아프리카 축구의 비결은  그들이 못살고 
덜 깬 덕분에 그 곳 아이들이 널려 있는 빈터에서 짚이나 잔디를 묶어서 맨발로 공을 찰 수 있는 
여유(?)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월드컵
의 스타 한지 뮐러는  "우리는 브라질보다 훨씬 더 많은 인재를 갖고 있다.  그 아이들은 공도 유
니폼도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공터에서  짚더미를 차고 있지만 조금만 도와준다면 우리는 세계적
인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애기했다. 이렇게 해서 키워진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더욱 다듬어지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나 역시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사직했으니까 굉장히 늦게서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셈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동네 앞마당에서 애들과 어울려 고무신 신고  짚이나 돼지오줌통
으로 만든 공을 공부 걱정 한하고 맘컷 차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같은 시기에 엄
격한 훈련을 받은 다른 동료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
나 요드음 아이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하더라도 뛰어 놀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그 시절에 키울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렷과 응용력을 키워 낼 수가 없고 그저 정해 주는 생각과 방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우리 축구가 답답하다고 한다. 또  지도자들은 "독일 선수들은 위치 선정이 뛰어
나다"며서 훈련 방법이나 지도 비결이 있는가를 묻기도 한다. 'ㅋ'으로 시작하는 카메룬과 콜롬비
아가 1990년 월드컵 대회 첫 경기에 성공했다고 '코리아'도 벨기에를  이길 것이라는 엉뚱한 발상
이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천편일률적인 '감'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맞는  이상적인 제도와 훈련 방법을 연구해야 할것이다. 카메룬의 방
법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외국 '유명 감독' 모시기 어렵다 
  축구 협회가 올림픽  대표 팀을 맡길 외국인 감독을  찾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격는  모양이다. 
이제는 웬만한 수준의  감독은 축구 선진국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권위와 실력을 인정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더욱더 큰 것이다. 내가 오랜 독일 생활을 통해 볼  때 축구 
협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물론 그곳애도 분대스리가 1,2부 감독을 거
친 실업자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아무나 데려다 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세계 축구계가 인정하는 감독을 모셔 온다는 것은 보통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적인 감독들이 자신의 무대를 버리고 '한국'이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을  원할 리가 없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 오려고 애쓰는 감독은 데려다 놔 봐야 큰 도움이 안되고 우리가 정작 모셔 오
고 싶은 감독들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함께 일을  한 경험이 있는 감독 중 
부호만이나 리백은 한국 팀 감독 자리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었다. 실제로 나에게 부탁(?)을 하기
도 했었다. 분데스리가의  명문 클럽이 프랑크푸르트 팀을  맡았었고 그때 독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던 경력을 가진 부흐만이나 독일 올림픽  대표 팀 감독도 역임했고 레버쿠젠 팀과 함께 유
럽 선수권을 차지한 리벡이 분데스리가의  수준급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에는 성이 차지가 
않았다.
  그러나 튤립 왕국 네덜란드의 영웅적인 리누스 미셀은 내가 만난 여덟명의 감독 중 "이분 정도
라면 한국 축구에 큰 보탬이 될 수 있겠다"고  느낀 유일한 분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을 내
려놓고 한 수 배우겠다고 모셔 오는 것이라면 적어도 세계 축구계가 다섯 손가락을 펴고 꼽을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욕심이기도 했다. 물론 그분의 실력이나 축구에  쏟는 애정 
역시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한국 대표팀'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기도 햇었지만  그분은 '네가 대표 팀을 맡고 있으면 내가 가끔씩가서 
봐주지"하는 정도 이외에는 우리 팀을 맡는다는 것을 꿈에서 조차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얼마 전,  62세의 나이로 나이로 월드컵에서  참패하시피한 네델란드 대표 팀을  다시 
맡으셧다고 한다. 바로  이런 어려움을 지금 축구 협회는 안고  있을 것이다. 나는 협회의 수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가  외국으로부터 세계적인 지도자를 모셔 오
는 데 성공한다면 그 수고 역시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귀여운 호돌이 지구촌 새 친구로 
  "아빠, 올림픽 이제 그만 하는 거야. 에이, 왜 벌써 끝나지, 조금 더 하지 않고." 서울 올림픽 폐
막식 행사를 보면서 뭐가  그리 아쉬운지 두리가 연방 묻는다. 16일간이면 그  또래의 꼬마들에겐 
결코 짧게만 느껴질 수  없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을텐데도 말이다. 하기야  한국이 메달을 따면 '
우리 한국' 독일이 메달을  따면 '우리 독일'하면서 왔다갔다 응원을 하는  얌체였으니까 두 나라
를 응원하면서 누구보다도 올림픽을 즐겼으리라 짐작이 간다.
  시계를 새벽 세 시에 맞춰 놓고 개막식이 시작되자 이불을 질질 끌고 내려와 벽난로 옆에 자리
를 잡고 반즘 감긴 눈으로 TV를 지켜보는 열성을 보였다. 반 달 내내 제일 먼저 일어나 TV중계
를 본 다음 늦게 일어나는  나에게 브리핑을 하는 역할을 성실하게 해냈다. 칼 루이스와  벤 존슨
이 붙던 날은  내가 일어 날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던지 자고 있는 나를  치고는 "아빠, 
존슨이 이겼어. 안됐다 그지" 하면서 루이스 팬인 나와 엄마를 은근히 위로했다. 
  4년 전 LA 올핌픽 때는 자기가 미하엘  그로스(LA올림픽 수영 4관 왕)라면서 소파에서 수없이 
뛰어내렸었다. 이번에는 자기 동생한테 "세찌, 너는  칼 루이스야. 나는 벤 존슨 이고"라면 멋대로 
배역을 바꿔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두리로선 '약물 파동'이 쉽게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아빠, 
그람 다른 선수들도 다  먹으라고 하면 되잖아." "그 약은 몸에 해로운 것이야."  "그럼 아픈 사람
이 어떻게 세계 기록을 세워."  갈수록 태산이다. 그렇게 귀찮게 묻던 녀석도 정작 심각한 상황에
선 입을 다물었다. 뉴스 시간마다 보여주던 복싱장의 한 '싸움판'을보고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얌체  같은 녀석이라도 그 순간만은 '우리 
코리아'이기
에 말없이 보고 있었겠지. 우리가 아쉬워하건 말건 올림릭 성화는 꺼졌다.  그러나 우리는 잊혀질 
수 없는 귀여운 호돌이를 온 세계에 선물했다. 얼마나 장한 일인가.
    강 팀에도 허점 한두 골은 자신 
  1986년 5월 4일. 멕시코 월드컵 축구의 막이 올렸다. 32년 동안 온갖 역경을 뚫고 온 국민의 염
원이던 '꿈의 구장에 오른 믿음직한  후배 선수들 덕에 나는 그들과 경기가 있기 전날 새벽 멕시
코 고원에서 세계 축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남미 강호 아르헨티나와 첫 기량을 겨뤄불 수 있
는 행운을 얻었다. 5월 초  미국에서 대표 팀과 합류해 고지 적응 훈련을 쌓은 후 5월  19일 멕시
코에 입성, 한 달 가량  팀과 생활을 같이 했다. 1972년부터 고국에서 대표 선수  생활을 했고, 독
일로 옮겨 7년 동안  프로 선수로 뛰고 있었지만 김정남 감독, 김호근 코치는  어느때보다도 현대 
감각에 맞는 축구를 하고 있었고 나와 짝을 이루는 최순호 등 젊은 선수들의 기량도 상당한 수준
임을 느꼈다.
 선수로서 마지막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조국과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가슴  뿌듯한 감동
과 흥분이 방망이질 쳤지만  그러나 차분한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독일 생활 
중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득점 찬스가 났을 때 놓치지 않을 자신감이다. 고원에서는  체력이 문
제다. 체력에 관한 한 나는 자신이 있다. 멕시코에 가서 2, 30m를 전력 질주하고 난 뒤 피로 회복 
시간을 체크해 보니 다른 선수들은 40초 가량 걸렸지만 나는  20초밖에 되지 않았다. 젊은 선수들 
못지 않게 90분을 풀 가동할 수 있다.
  후배들이 열심히 뛰면 마무리는  순호와 네가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강호들과  싸우더라도 몇 
번의 기회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경기마다 한두 골은 얻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적
지 않은 평가로는 강호  중의 강호들이 포진한 A조에서 우리가 16강에 오를 수  있는 확률은 '낙
타 바늘구멍 찾기'에  비유되지만 그리나 멕시코에 직접  가서 우리 선수들의 훈련과 연습경기를 
지켜본 축구 전문가들이 새로운 눔으로 볼 만큼 수준급임을  인정했다. 비록 8강에 오르지는 못했
었지만 우리 축구 선수들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혼신의  힘으로 경기를 치렀었다. 나는 믿는다. 
틀림없이 우리 한국 축구가 크게 성장해 윌드컵 대회 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애들 뛰어 놀 곳 없나요
    아이들의 희망 
  귀국한 지 한 달째였다. 여전히 쿵쾅거리고 아직까지도 집수리가  끝나지 않은 것도 짜증스럽지
만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두리 녀석이 마음놓고 놀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가끔씩 나를 
따라 이른 새벽에 고수 부지에 내려가곤  하지만 혼자 내려보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
라고 모두들 펄펄 뛰니 종일  뛰어놀던 두리에게는 갑자기 날개가 잘리고 만 셈이 된  것이다. 아
파트 앞에 주차장이 있는데 모두들 출근하고 나면 제법 그
럴듯한 공터가 되지만 한두 대 서  있는 자동차를 망가뜨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난리가 나기 때문
에 수위 아저씨들이 자꾸 집으로 올려 보내곤 한다.
  유괴범이 무서워서 고수부지에도  못 나가고, 자동차를 망가뜨릴까 봐 주차장에서도  놀지 못하
는 아이들이 우리 두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서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환경에 익숙하
고 또 노는 방법도 우리 애들하고는  달라서 만화를 본다든지 컴퓨터를 가지고 논다든지 하는 식
으로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뛰어놀지 않는 아이들이 과
연 아이들인지 나는 몹시 불안하다. 특히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두리 같은 아이들 처음 봤다"면
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 애들에게 혀를 내두를 때는 은근히 부아가 나가도 했다.
  며칠 전 어린이  송년 특집 공개 방송 녹화가 있어서  방송국엘 갔더니 방송국에서는 아이들을 
상대로 희망 사항을 설문 조사해 놨었다. 아이들의 희망 혹은 요구 사항이 '용돈을 더 달라''부모
님들이 우리하고 더 많이 놀아 달라'는 것 같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놀랍게도 세 번째
는 '학교 수업 시간에 체육  시간을 더 많이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뛰어 놀고  싶어하는 어린이, 
힘이 넘쳐나는 어린이, 이런 애들이 결코 우리 두리뿐만이 아니라는 말도 될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샤워장도 제대로 없는 맨땅 운동장에서 공도 제대로 없이 마른 얼굴로 축구를 하
고 있는 우리 청소년 선수들, 애들이 놀 만한 동네 한가운데 땅은 디스코 클럽, 술집에 다 뺏기고 
그나마 고수부지는 부모님들의 노파심에, 아파트의 넓은 땅은 자동차에  뺏긴 우리 아이들이 궁여
지책으로 방에 들어앉아 장난감이나  만지작거릴 때, 나는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청소년 
범죄가 바로 이런 데서부터 싹터 오르기 시작하는 게 아
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난다.
    대중을 위한 체육 진흥 사업
  최근 체육부는 일반인들과 어린이들에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더 많이 제공하
기 위해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운동장, 체육관, 수영장 등을 더  많이 만들
어서 일반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스포츠를  통한 체력 단련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해주겠다는 얘기
다. 정말이지 요즈음 서울 같은 도시의 형편에서는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지간한 거리는 걷기보다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게 되는 일반인들이 시설 좋은 사우나 헬스클
럽에서 체력을 단련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보통 테니스장이나 수영장의 사용료 역시 무척 비
싼 편이어서 일반인들이나  온 가족이 이용하기에는 가계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거기다  아파트 
단지나 시내 곳곳에 그물을 쳐 놓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골프 연습장은 오히려 일반 서민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외감을  느끼게 해서 도리어 심기가  불편해지는 병(?)을 주는 스포츠가  되어 
있으니 여유가 없는 계층은 그나마 스포츠로 몸을 단련할 기회를 거의 잃고 있다.
  이럴 때 국민 건강의 차원에서 국가 예산으로,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체육관, 수영
장, 테니스장, 운동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누구나 다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또 세금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쓰여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또하나의 현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즈음 고수부지에서 축구를 하는 조기회나 개인  택시 운전사 또는 여러 이
름의 축구 팀들은 그곳에 있는 축구장 두 개 중 한 개를 없애고 그 자리에 수영장을 만든다는 소
식에 풀이 죽어 있다.
  다른 곳도 같은 형편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인 이촌지구 고수부지도 밤낮을 가릴 것 없이 
공차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니 운동장이  하나로 줄게 되면 가게 아저씨들, 개인택시 운전사 아
저씨들, 동네 아이들이 당장 운동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물론 어린이들이 물장난할 수 있
는 수영장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새삼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해할수 없는  것은 파
헤쳐질 운동장 바로 곁에는 지난해  골프연습장을 만들려다 시민들의 눈이 무서워서 그만둔 아주 
넓은 땅이 아직도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 땅의 이용방법이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빈 땅을 놔두고 굳이 있는 
운동장을 파헤쳐서 수영장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런  경우가 이촌 지구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모처럼 일반인을 위해 벌이는 사업이라면 좀더 철저히 일반인을 위하는 계획이었으면 하
는 것이 나의 바람일 뿐이다.
    한국 체면 깍는 입양 고아
  얼마 전 비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돈을 받고 밀거래한데서 비롯된  미국에서의 '입양 고아 파문'
이 국내에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이제 막 국제 무대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
한 우리들의 체통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창피하다기에 앞서 가
슴이 두근두근하는 게 솥뚜껑만  봐도 자꾸 놀랄 것같은 심정이다. 내가 꽤  알려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한국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많은 독일 부모들로부터 자주 연락을 받게 된다.
  덜렁덜렁하고 선머슴 같은  킴, 야무지고 영리해서 공부를 잘하는  이본느, 여자 애들만 데려와 
친자매처럼 자란 여  치과 의사.... 이런 아이들의 부모들은  한결같이 아직도 한국은 입양을 할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이런 부모들을 만날 때면  나의 어
떤 감정을 앞세워야 할지 무척 망설여진다.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가  굉장히 잘 산다고 믿고 있는
데 형편이 어려워서  입양을 시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말도 안되는  얘기일 테고 그들에게 행복한 
선물로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인간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장을 정돈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양부모라고 해서 매달 50마
르크(약 2만 원)씩을 한국 어린이 앞으로 보내는 이도 꽤 많다. 푸줏간 할아버지가 들고와서 읽어 
달라던 편지는 나를 더욱
당혹하게 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내용도 청승맞지만 양지바른 담벼락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찍은 증명사진의 초라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 언젠가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가끔 고아원을 찾으면 애들과 찍게  되는 기념사
진을 이곳 사회단체로 보내서 그 사진이 구
걸용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고고 기절할 뻔한 적도 있다.
   이곳 교회의 여전도회 부인들은 자신들의 돈을 모아 한국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 사람들
이 대부분 가난한 과부나 서민들인  것을 직접 만나봐서 나는 잘 안다. 도대체 우리의  현실은 어
떤 것일까? 너무 과하게 떠들어도 안되겠지만 있으면서 남에게 신세지는  것도 좀 뭐하다. 그렇다
면 이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할  단계가 아닌가 싶다. 나의 곤란했던 입장이 곧 한국인  모두의 입
장일 테니까.
    나는 안 필요하니?
  1990년 4월 17일과  18일은 내가 13년 전부터  꿈꾸고 약속해왔던 '차범근 어린이  축구교실'을 
은평구와 구로구 어린이 220명과 함께 시작하는 날이다. 1978년 5월  22일 큰딸 하나가 아빠 생일
에 맞춰 태어나던 날 나는 일본에서 열리는 재팬컵 축구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우리가 경기를 
마치자 일본의 초등 학교 어린이들이 공 하나씩을 들고 축구를 배우기 위해서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장차 내가 해야  할 일
은 '어린이 축구 교실'로 정해져 있었고, 하나 두리 세찌를 키우면서 더욱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아주 오래 묵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물론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그 
약속을 지킬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독일로 떠나면서  "차범근 아저씨가 돌아오면 
너희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줄 거야"라고  했던 약속을 믿으면서 기다리던 어린이들이 이제는 신사 
숙녀들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그들의 아이들에게라도  이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기쁠 뿐이
다. "19일은 내가 약속이 있어. 하지만  17, 18일은 내가 오후 4시까지 거기에 갈 수 있지. 공짜로 
이틀을 수고해 달라는 나의 염치없는 부탁에도 두말없이 승낙을 하는 뽀빠이 이상룡씨. "형! 앞장 
만 서세요?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닿는 데까지 해야지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후배들의 격려, 나이가  많은 것이 마안하다는 듯이 "나는 안 필
요하니?" 하고 묻는 선배님. "제가 처음 시작하는 것이니 애들에게 기념으로 유니폼 한 벌씩만 해
주시죠"라고 부탁을 했더니  "약속한 것이니까 물론 해줘야지"하면서 나는 약속한  기억조차 희미
한데 선뜻 승낙해 주시는  어느 대 선배님.... 나는 이번 일을  준비하면서 많은 분들의 조건 없는 
사랑에 세상이 그렇게 삭막하지는 안다는 것을 새삼배웠다.
  하루는 여러 가지 준비차 구청에 들렀더니 "차범근 축구 교실 문의 전화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
"는 즐거운 비명(순전히  내 입장에서 볼 때)이 터진다.  어떤 부모들은 "축구 교실에서 받아주는 
것만 확실하다면 이사를  오겠다"고 조르기도 한단다. 또 올해는 곤란하다고  했더니 일찌감치 내
년도를 위해서 신청을 해 온  구청이 벌써 두 군데다. 제일 먼저 운동장을 내주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던 용산 구청에는 미안할 뿐이다.  돈 한푼 안 벌어다 줘도 하루 세끼 밥  꼬박꼬박 먹여주는 
마누라에게도 고맙고.......
        제 4 장 한국인의 축구 사랑
      스타들의 러브 슬럼프
    수영은 내 인생의 전부(?)
  인기 선수 가운데 바보스러우리만큼 운동에만 전념하다 한 번 사랑에 빠지면 감독이나 부모 등 
주위 사람들과 불화를  낳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제패, 이탈리아 기자단으로부터  금세기 가장 훌륭한 스포츠맨이란 격찬을 들었던  보리스 베커가 
그 예에 속한다.  모나코 왕국의 외국인 체류 심사권을  쥐고 있는 현직 고관의 딸인 3세  연상의 
여대생 베메디크를 베커가 알게 되면서 '그의 사단'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베커가 13세 되던  해부터 그를 맡아 세계  챔피언으로 키운,베커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감독 
귄터 보쉬가 그를 떠나게 됐고 그 뒤 그의 성적은 테니스 팬들의  기대에 못 미쳤다. 또한 로스엔
젤레스 올림픽 수영 3관 왕인 미하엘 그로스가 2세 연상의 금발 미인인 일로나 코샬트를 알게 되
면서 그의 어머니와 대표 팀 감독을 몹시 화나게 했었다.  88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면 훈
련을 더욱 열심히 해야한다는 주위의  성화를 들을 때마다 그는 "수영은 나에게 중요하긴 하지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사랑에 취한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10종 경기  은메달리스트인 현대판 장사 힘센이 방송리포터로 맹활약하고 
있던 그의 부인 제니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20세 안팎의 젊은 선수들에게 
사랑은 보통 심각한 문제
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이 한 몸에 집중된 선수
라 해서 철판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감정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도 그
런 때가 있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메달권에서 탈락했을  때 경기를 위해 생각하고 연구
하는 시간보다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편지 쓰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내  모습이 사랑에 빠진 21세 짜리의 자연스런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러나 지금은 가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어린 선수들을 볼 때 염려가 앞서기도 한다.  무작정 자연
스런 현상이라고 관심을 떨쳐버리기엔 그 시기가 너무 중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 뜰 무
렵은 완성된 체력 외에 기술과 경험이 쌓이면
서 선수로서의 기틀이 잡히기 사작하는 시기며 또 일생을 통해 가장 훌륭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아주 짧은 몇 년인 것이다.
  수영 왕 미하엘 그로스의 애인은  자기를 위해 미하엘이 88서울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했는데 그것은 사랑의  에너지를 기록에 보태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도 바로 그
것일 것이다. 어차피 훌륭한 선수가 인간이 아니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즐거운 생활이 좋은 기록 만든다
  프로테스 선수들의 생활은  매우 불규칙하다.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상금이 걸린  대회를 찾아다
니는 그들은 장거리 여행에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 게다가 상위 랭커들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
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 가운데서 모든 관리를 스스로 해야  하는 프로 중위 프로인 테니스 선수들은 그들의 원정 경
기에 부인이나 애인을 동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흔히 그리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돈 많은 
프로 선수들의 화려함 때문에 매력적인 부인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늘 호텔과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만  하는 그들에게 미리미리 아침 식사를 주문해주고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며 매니저가 할 수 없는 모든 뒤치다꺼리로 그들을 호텔 생활로부터 편안케 해줘야 
하는 한 여자로서의 역할은 운동을 하는 몸인 내가 보기엔 상당히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1
년 내내 계속되는 그들의 경기  스케줄은 이미 정신력만으로 버티기엔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한때 서독의 올림픽 국가 대표 수영 선수단은  전지훈련이나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애인(수영 선수들은 어려서 거의가 미혼임)과 한 방을 쓰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감독의  생각은 "즐거운 생활이 곧 좋은 성적을 내는 활력소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자꾸  변한다. 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나, 어렴풋이나마  폐허 속에서 풍
요를 모르고 식민지 시대의 악몽을 세뇌 받으며 자랐던 우리들의 세대가 조금이나마 갖고 있는 '
정신력으로 이기는 생활'은 이미  지금 세대에 강요할 수가 없게 됐다.  굶주려 보지 않았고 참아
보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에게 참고인내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임을 강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진 것을 마음껏 보일 수 있는  안락한 분위기와 기분 좋게 훈련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원한다.
  내가 환경을 이기기보다는 환경이  나를 돕기를 바란다. 나는 미국의 세계적인 여자  육상 선수
인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가 화려한  화장을 하고 긴 손톱에 고급 손목 시계 '칼체를 찬 아름
다운 자태로 기록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거울 속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비춰보는 것으로 
정신적인 안정을 찾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  누가 맞춰야 하는지는 이미 끝
난 싸움이다. 좀더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과학적인 훈련  방법과 심리학, 그리고 젊은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마라도나의 '섹스 스캔들'
  '마라도나 택시에서 사랑을' '심지어는 구름 위의 창공에서도'. 한 때 독일의 스포츠  신문을 요
란하게 장식하던 소제목이었다. 독일에서 그 정도일 때 요란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신문들의 호
들갑은 어느 정도였을까.  생각만 해도 같은 축구 선수로서  또 마라도나의 기술에 반한 팬의  한 
사람으로서 끔찍하기까지  하다. 마라도나는 한때 하오  3시에 시작되는 훈련장에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는데 그에게 실망한 팬들의 폭동에 가까운 항
의 때문이라고 한다.
  "디에고, 너는 축구만 생각해야지 여자를  밝히면 안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생명은 더 이상 연
장될 수가  없어." "디에고는 축구나 해야지  우리 이탈리아 처녀들에게 아기나  만들어줘서는 안
돼!" 나폴리 구단 사무실로  걸려오는 팬들의 항의 내용이 바로 위와 같은 것이라고  신문들은 전
했다. 이와 관련된  얘기가 시작된 것은, 22세의 시나그라라는  멋쟁이 아가씨가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책방 여  점원인 이 아가씨가 토요일 TV프로에  나타나 아기를 보여주면서 마라도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것도 시청률이 가장  높은 토요일 저녁 7시 15분의 RAI라는 프로
에서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프로그램이 나간 뒤 이번에는 마라도나가 "내 아기는 내년 3월에 다른 애
인 클라우디아가 낳을 것이다"라고 말해 신문들이 더욱  그의 여성편력을 들추게 됐다. 더욱이 그
의 친구 겸 보디가드이기도한 아르헨티나 태생의 카를로까지 나서서 "디에고는 매일 여자를 상대
하지 않으면 머리가 아파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해놓았으니 신문과 방송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퍼스트  클래스의 커튼 밑에서 헬가라는 스튜어디스와의  사랑 놀음, 심지어는 경기 
시작 30분 전에도 여자를 찾는다는 얘기, 택시를 집어타고서는  운전사에게 뒤돌아보지 말라고 해
놓고서는 그 안에서 15분에  걸쳐 요란한 사랑을 했다는 얘기 등 참으로읽기도,  말로 옮기기에도 
낮이 뜨거워지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들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마라도나. 그가 아
무리 타고난 축구 선수라고 할지라도 같은 선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도깨비 같은 생활을 하고
서는 그와 같은 위대한 경기를  보여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술 그 자체는  타고났다손 치
더라도 90분을 누빌 수 있는  체력은 계속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TV를 통해 본  마라도나
의 경기가 어슬렁어슬렁한다든지 대충 뛰지 않고 기회만 포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는 90분 동안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수비를 달고 경기를 하
기 때문에 많이 뛰지  않으면 수비에게 먹히게 된다는 것 쯤은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러 유명한 선수들이 이혼을 하기는  한다. 펠레, 베켄바워,비외은 보리. 그러나 이들의 경우는 
마라도나와는 그 동기가 다르다.  루마니아 태생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인 비외른 보리의  전 부인
의 경우 "훈련만 너무 많이  하고 부부 생활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막대한 위자료를  받
아냈었다. 펠레의 전 부인도 이혼  사유가 너무 잦은 원정과 시합 때문이리고 한 얘기를  미뤄 볼 
때 세계적인 톱스타가 되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거만하면서도 무한한  폭발력이 잠재해 있는 듯한  마라도나,욕을 하면서도 빠뜨리지 않고  쓰는 
그에 대한 수식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 마라도나.' 나는 그가 오래오래 멋진 경기로 우리
를 즐겁게 해주고 '축구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축구 팬들에게 보여주기
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합니다
    떳떳한 부자가 되고 싶다
  뒤셀도르프에 들어서면 고속도로 왼편에 '헨켈(HENKEL)'이라고 쓰인 높다란 굴뚝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공장을  보게 된다. 창업주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이 회사는 본드나  세탁비누 
같은 소비재 화학제품을 주로 생산하는데  그 창업주는, 뒤셀도르트에서 '헨켈'이란 성을 가진 사
람은 모두 부자라고 할 만큼  자손 대대로 부를 누리는 대단한 재력가였다. 고인이 된  그분은 유
언을 통해 다시 전후의 암담한 시기에 가장 절실했던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헨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루에 한  끼는 꼭 따뜻한 식사를 하게 하라"면
서 떼어놓은 막대한 유산을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된 지금까지도  점심시간이라면 '헨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고 있다. 현재 할렐루야  팀에 소속돼 있는 후배 김
강남은 언젠가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동료 선생님들의 생활을 들려 주었다.
  서울 시내는 엄두조차  못 내고 멀리멀리 변두리로 이사를 가야  하는 젊은 선생님들이 종로에 
있는 학교까지 출근을  하려면 좌석일반 버스, 전철을 골라  타기 위해서도 주머니 돈을 세고  또 
세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일어나기 싫은 새벽에  몇백원을 아끼기 위해서 몇십분을  서둘러 
출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웬지 그들의 소리 없는 분노가 내게 와 닿는 것 같은 섬
뜩함을 느꼈다. 나는 독일에 사는 동안 '있는 자가 누리는 안락'에 대해서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
껴보지 못했다. 벤츠500을 타고 남의 손을 빌려 마당에 잔디도 깎고 청소도
하고 했지만 내가 내는 엄청나게 많은  세금이 그들에게 고루 혜택을 주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
이었다.
  1년이면 수억원씩 손해를 보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콜라한 잔 값에 운영되고 있는 동네마
다 세워진 수영장, 직장이 없어  노는 사람에게 지급되는 생활보조비, 수입이 많다고 해서 웬만한 
아이들의 3배 이상씩 내는  유치원 공납금, 차등제로 없는 사람이 많이 받게되는 어린이  양육 보
조비, 우리에겐 한 푼도 안 주면서 가난한 부모가 애를 낳으면 지급되는 몇백만원의 보조비, 이런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의 변호사는 자주 투덜거린다. "저 놈팽이 스물을 먹여 살리려고 
내가 여지껏 공부하고 지금도  이렇게 밤중까지 자네 집에 와서 일한다"고. 그러나  지금 우리 나
라에서는 "당신 몇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 당하고 있다"고 부르짖는 소리를 노사분규 현장에
서 자주 듣게 된다.
  남들이 듣고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부자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는  부분을 다 그들을 위해 내놓
을 만한 용
기가 없다. 다만 스스로에게 없는 자들을 마음 아프게 하지 않는 부자(?)이기를 다짐할 뿐이다.
    뭘 알아야 선수 소개도 하지
  매년 가을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각 대학의 선수 스카우트는 보통 팬들의 상상을 훨씬 뛰
어넘는 대단한 것이다.  더욱이 매년 정기 전을 여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데 이 덕분에 두 학교의 5개부(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 선수라면 모두 기본 실력 
이상의 스카우트 솜씨를 갖고 있다.
  이렇게 치열한 싸움 속에서 적어도 나 정도라면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에게는 상당한 효과를 얻
을 수 있는 특A급 얼굴마담은  될 텐데도 나는 여지껏 한번도 스카우트에 동원 되어 본 적이  없
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으로 찍힌 모양이다. 내가 대학 2년  때의 일이다. 바로 나의 고등학
교 2년 후배인 선수를 놓고 양교가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이 붙였는데 그것은 작전상 내가 당연
히 도와야 할 선배인 나의 몫이었다. 보통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하루 24시간을 그림자처럼 화
장실까지 붙어다녀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급할 때는 선수의 부모들을 붙잡고  "아버님! 
어머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제가 아주 훌륭한 선수로 키우겠습니다" 하는 식의  즉석 연기도 해야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나
는 "형! 고려대로 갈 테니 안심하세요"하는 마음에서 빵 몇개를 쥐어주고 풀어줘 버렸다. 다음 날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스카우트의 산표본인 차만이형이 종원이를 싣고 가는 차 앞에 드러눕고 난
리를 쳤지만 결국 연세대에 빼앗기고 말았다. 웬만하면 나를  야단도 치고 혼도 낼 텐데 "살다 살
다 별놈 다봤다"는 식으로 아예 아무 소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후배들에게 가장  ‘한심한 스카우트 사건‘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사
람이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나만 해도 이쯤 됐으면 남의 말을 믿는  일에 조
금은 생각을 해야 되는데 정신이 아직 덜 든 걱 같다. 언젠가  아글이 둘인 폴란드 국가 대표선수 
보이토비치의 딱한 처지를 돕고 싶어하던차에  마침 포항제철에서 그에게 딱 어룰리는 자리으 선
수를 찾길래 소개를 해줬다.
  레버쿠젠 팀의 마사지사나  기자들은 심심치 않게 나에게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동정심이 생겼다.  그래서 더 성심성의껏 돌봐주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독일  친구들이 나에
게 해준 충고는 틀리지  않았다. 포철 입단을 결심하고 한국에 건너갔던 보이토비치는  뒤늦게 자
녀교육 문제로 되돌아 왔다. 이쯤 되고 나니 왜 선배들이  “큰일은 나한테 꼿 물어봐”하고는 다
짐에 다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나도 이제 주제를 알아야지.
    통산 90골 문턱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쵸프 내외가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방문하던 날 불과 몇 개월 전 경
기차 그곳을 방문하면서 보았던  내가 봤던, 비가 후줄근하게 내리는 프라하하고는 전혀  다른 도
시의 모습이 TV화면을 통해  비춰졌다. 한산하다 못해 을싸년스럽던 그때와는 달리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꽉  찬 인파가 정성들여 키웠음직한 빨간 튤립  더미와 어울려 무슨 자유의 봄이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울렁이고  있었다. 동유럽과 가장 근접해 있는 서독의 입장에서  선거 ㄸㅒ
마다 혹은 데모 때마다  거의 공식작으로 등장하는 이슈가 핵무기에 대한 공포증이다,  최근 소련
이 민간 기업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기업간  국제 역이 가능하게 된 데 군침이 당긴 바이에르 회
사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미.소간의 화해 무드에 따른 핵무기로부터의 얼마간의  해방감은 갑자기 
고르바쵸프 부부의 인기를 올려놓은 느낌이다.
  물론 고르바쵸프 부인은  패션 감각이 뛰어난데다 미인이다.  그리고 그들 부부가 주는  온화한 
분위기는 뒤에 걸린  붉은 색의 소련 국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솔직히  나 
역시 싸우는 것보다 화해하려고 애쓰는 편이  더 보기 좋은지라 알게 모르게 부드러운 인상인 그
들 부부에대해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친구가 들고 온  신문을 뒤적이다 
이상한 장면응 발견할 수 있었다.  고르바쵸프 부부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찍은 똑 같은  사진 두
장이 나란히 실렸는데 원래의 것과  소련 신문에 보도된 사진이 딱 한 군데 차이가  났다. 고르바
쵸프 부인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툭 튀어나온 손톱 크기만한 다이아 반지를 소련 신문은 매직
으로 말끔히 지워서 보도한 것이다.
  서독 신문은 이 사진과 함꼐  ‘소련 국민들에게는 모르는게 약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달았
는데 나의 일, 우리나라의 일이 아닌데도 씁쓰레한 뒷맛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기는 국네 신문에서도  마찬가지다. 1985년부터인가 나로서는 7년만에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발행되는 종합일간지를 받아보기 시작했는데 그 때 주류다 비주류다 혹은 상도동계니 동교동계니 
하는 야당에 관한 기사를 읽노라면 몇  주째 분데스리가 통산 90번째 골을 터뜨리지 못해 애태우
는 나의 처지만큼이나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소련 신문에 관심을 갖고 우리 나라 야당의 움직임에 귀 기울여 봤자 나의 90번째 
골은 저절로 나와주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직접 넣어야 나의 90번째 골이 
되는 것이다. 정치와 스포츠는 그래서 조금 다르다.
    7년만의 합숙
  점심먹은 뒤 찾아온 친구와 애기를 나누나  돌아와 보니 변병주가 전화기를 내려 놓은 채 자고 
있었다. 처음 콜로러도에서는 김종부하고 같은 방을 쓰다가  로스엔젤레스로 옮겨오면서부터 변사
또(변병주의 별명)가 내 방으로  오게 됐는데 오자마자 첫날부터 머리를 쓴 것이다. “혈!아마  20
분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요. 방송국이래요.끈질기대요.앞으로 전화 오는 거  전부 커트할까요? 
두시에 형수한테서 오는 것만 빼고.” 이해가 간다. 나야  새벽부터 10분,20분씩 울리는 전화벨 소
리에 면역이 되어 아무리 시끄러워도  잘 자지만 보통사람들이야 전화가 10분 이상 요란스럽ㅂㅂ
게 울리는 것을 들어본 경험이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특히 새벽인 줄  알면서 꼭 새벽 3,4시에 전화를  걸어 깰 때까지 울리게 하다 수화기를  들면 
“전화 하기 힘드네요”로 시작하는 J기자.  다음에 한국 가면 병주하고 애기를 좀 시켜줘야겠다. 
사실 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팀의  일원으로 합숙 올 때 대표 선수들의 위험순위를 상중하로 
나눴었다. 그 중 제일 위험함으로 피해야  할 선수로 꼽았던 게 변병주와 이태호다. 이들 둘은 우
선 밥 먹을  때 절대로 옆에 앉히면 안되는데  앉다보면 열에 아홉은 옆자리다. 자기네  애기로는 
한번 밥 먹는데 웃기는 것으로 세 번은  소화시켜 준다는데 내 생각엔 먹는 대로 소화가 돼서 도
무지 배가 차지 않고 한참 웃다보면 도리어 배가 고프다.
  그래서 멕시코로 향하기 전 밥 먹는 시간에는 따로 멀리 앉아서 든든히 먹으리라고마음을 먹었
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방까지 같이  쓰면서 전화조차 못 받게 하니 제대로 걸린 셈이다.  그 다음
으로 주의해야 할 인물들이 광래와 창선이, 영증이라고 점찍어  뒀는데 애네들은 잔소리가 심하고 
합숙하다가 마누라가 보고 싶으면  괜히 나한테 심술이다. 창선이가 묵고 있는 방을  가보면 벽에
다 아들 사진과,  마누라 사진을 총 천연색으로 벽에 붙여  놓고 하루 빨리 돌아가 볼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1985년 겨울 독일에서  훈련할 때도 나는 저녁이면 밥을 많이  먹어야 되는데 창선이가 있으면 
야단을 쳐서 쉽지가 않다. “아따!형수는 밥도 안하요?” 마누라 보고 싶으면 괜히 형수라면서 우
리 마누라를 끄집어들이는 게  창선이다. 그 ㄸㅒ도 후배 녀석들이 하도  못 살게 굴어 위에서 경
련이 나고 말았는데 녀석들 한다는 소리가 “하루 합숙하고 그래요? 우리는 한달을 해도 마 꺼떡
없심더!”하면서 미안해 하는 기색도  없는 것이었다. 그 때는 또 광래하고  병주가 한 방을 쓰고 
있었는데 손님 왔다고  배도 깎아주고 대접을 제법 융슝히 하길래  앉아 있었더니 전화벨이 울렸
다. 한국의 부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애들도 여럿이 있고 해서 안 듣는  체하고 애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광래로부터 날벼
락이 떨어졌다. “핸님요! 와  이라요. 갑시더. 핸님이 있으믄 변사또가 사랑한단 말 몬  하쟎아요.
” 이런 젠장.  할 수 없이 대여섯 명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나오자 병주 녀석  입이 해벌어져 
가지고는 책상 위로 다리를  척 올리고 느긋하게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핸님’
이 있다고 해서 사랑한단 말을 못할 병주가 아닌데 광래가 잘못 본 건지 괜히 나를 야단 치고 싶
어서 그런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대표 팀에는 양호한 그룹이  없쟎아 있다. 그날도 경기를 마친 뒤 배가 아파  땀을 흘리
는데 아침 식탁에  나오는 빵 발라 먹는 꿀을 언제  꼬불쳐 뒀는지 순호가 들고 와서  “형, 꿀차 
타 먹어요”하고 내놓는다.  또 순문장 병득이는 심각하게  한참 쳐다보더니 자기가 지압을  하면 
낫는다고 날더러 누우라는데 어디 믿을 수 있어야 눕지. 한참  밑의 후배들은 귀엽다는 말이 자존
심 상한다고 하지 말라지만  나는 그들이 귀엽다. 종부가 빨래 해주고, 병주가 전화  받아주고, 창
선이가 주장이랍시고 축구 협회 돈  많이 드니 밥 많이 먹지 말라고 야단치고, 광래가  교양 교육
을 해 주고, 든든한 의사 병득이가 있는데다 통역 영증이까지 있으니 걱정거리가 없다.
  사실 영증이가 한때 미국에 있었다고 꼬부랑 말을 제법 하는데 한번은 병주하고 둘이서 영증이 
없이 이발하러 갔다가  완전히 우습게 되어 돌아 오고 만  적이 있었디. 그러잖아도 잘생긴(?) 두 
사람이 미남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오! 신나는 ‘합숙데이‘여!
      이제는 정말 돌아갑니다.
    진로결정은 올 여름에나
  1986년 4월 26일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날이다. 김종부는 현대와  대우 싸움에 모처럼 축
구협회가 기동력을 발휘, 월드컵 대표  제명 처분을 단행했다는 소식이다. 1985년 겨울 나의 대표
단 선발 문제가 수 개월에 걸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데 비하여 종부의 제명 문제는 24시간이 
채 안걸렸으니 축구협회의 행정력도 상당히 신속화된 것 같다.  차범근이는 양쪽의 스포츠 싸움에 
가만히 앉아서 런던과 레버쿠젠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한 날이었다. 나는 두 신문에게 감사드린다. 
신문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인기 스포츠의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
에 그 날처럼 양 스포츠지에  1면 톱기사로 실린 것을 놓고 불평할 생각은 없다. 더구나  얼굴 두
꺼운 서독 스포츠지에 익숙한 나에게 고국의 신문들은 비교적 사실에 근거한 기사를 쓰고있는 편
이어서 약간의 덜하고 더함은 오히려 애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두 스포츠 신문에 나에 관한 기사가  상반된 내용으로 보도된 뒤 어떤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이 
계속되었다. 참 어려운 얘기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우리들이 내일을 설계하고 계획하는 것은 단순
히 설계로 끝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고 알려진 것 외에는 거짓말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대우와 차범근, 그리고  도대체 차범근은 언제나 귀국할 것인가.” “선수로  뛰지는 않
으려나.” “왜 안 오는가. 돈이 적어서?” 신문사에서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얘기는 끝이 없
는 것 같다. 나의 독일  생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돼 왔다. 부상, 부동산 문제  등이 있기는 했
지만 나는 이런 일들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독일 생활 중 내가 가장 만족해 하는 것은 많은  분데스리가 축구 인들이 내 이름 
석자를 대면 ‘성실한 선수’,  ‘훌륭한 선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게끔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우연이나 행운을 노리던 철  없는 사고
에서 노력하면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결과가 있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 쉽게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괜히 ‘잘 쌓아온 이름에 먹칠할까 두려워서’라고 하
는 얘기를 들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평범한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 처음 서독에 왔을 때처럼 열심히  한다면 왜 좋은 결과가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돈을 적게 주니까’하는 얘기를 듣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받을 수 있는 
액수는 내게 있어서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부자가 아니다. 가난하게 살아온 나와 
허영을 모르는 하나 엄마는 어차피 호화롭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돈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
은 게 지금 우리 입장이다. 모르겠다.  하나 엄마가 다이아 반지나 찾고 진주 목걸이를 원하면 몰
라도 바짝 깍은 손톱에 반지, 시계없이도 행복해 하니 나에게는 몇억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럼 독일에서 영영  살 것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가끔  독일에서 코치 생활을 하는 나를 
상상해 보왔지만 한국축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보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컸다. 어느날  우리 두리
가 속해 있는 어린이 축구  팀의 7세짜리 꼬마 하나가 기가 막히게 공을 차는 것을  보았다. 배워
서 하는게 아니라 타고난 재질이었다. 그 아이를 보자 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 나
라를 샅샅이 뒤져서  저런 녀석 200명만 골라 키우면 20년  후에는 우리도 세계 무대에서 큰소리 
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축구가 한 없이 야구에 당하고만  있는 현실도 울
화통이 터진다.
  구단은 1987년 7월 말로  끝나는 계약을 연장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때 “우리  팀의 어린 
선수 들을 위해서라도 남아 줘야 겠다.”는  감독의 말은 나를 찡하게 했다. 그러나 그 요구에 쉽
게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국내에 돌아올 결심이 서 있던 것은 아니였다. 대우로 간
다는 합의가 이뤄진 것은 더더욱 아니였다. 나는 휴가차 한국에 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였
다. 그리고 나서 독일에 더 머무를 것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는 데 어떤 까다로운  조건이나 희망사항이 있어서 많은 의문을 뒤로 한 채 
귀국을 꺼려했던 것도 아니다.  어쩐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한 시즌 한  시즌 나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귀국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귀국에 대해
서는 나 역시도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것 만큼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이번 시
즌에 내가 최다 득점자가 됐더라면 지금쯤 훌훌 떨치고 보따리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을 매 시즌 해왔다. 그러나 매 번 놓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더  잘해야 한다는 욕구,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독일에 붙잡아 둔 것 같다.
    차붐 가족 ‘행복한 고민’
  하나가 어렸을 때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웃에  오래 살던 교포 아이(당시 코트라 관장으로 
일하시던 분의 초등학생 아들)가 한국에  돌아가 공부를 하게 됐는데 모처럼 알아들을 만한 단어 
‘신라’가 나오자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손을 번쩍 들고는 “프랑크푸르트에 레스토랑 ‘신라’가 
있어요”했다는 그 아이 엄마의 얘기를 듣고 크게 웃은 적이  있다. 그러나 1989년이면 우리 하나
와 두리도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보통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두리는 
“걸어 가자”는 말이 얼른 안 떠오르면  “발로 가자”는 식으로 둘러 붙이기라도 할 줄 알지만 
하나는 한없이 “음.음”거리면서 생각만 한다.
  게다가 생각하는 것  역시도 한 없이 편안해서 어렸을 적엔  꿈이 서커스에서 춤추는 것이라고 
해 나를 적잖게 실망시키더니  요즘은 좀 더 발전해서 옷 파는  가게의 예쁜 여 점원이 되는것이
다. 그러니 한국에 있는  분 말마따나 “옛날 흙집 같으면 반나절에 허물겠다”는  솜씨로 아파트
를 휘어잡을 애들과 그저 무신경하게  빽빽거리는 저희들 엄마의 우렁찬 목소리까지 합치면 앞으
로 이웃과의 생활도 보통 큰 문제가 아닌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오래 산다지만 나는 웃는 소
리만 요란한 데 비해 하나 엄마는  보통 말소리도 싸움하는 소리만큼 큰데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
은 두리, 세찌까지  합친다면 가장으로서 나는 당연히 이웃을  위해 분명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다.
  게다가 10년 독일 셍활에 길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무심결에 “안녕하세요”하고 인사
를 할 것이고 사람이 많은 다방이나  사무실에 들어갈 때면 으레 고개를 까딱하고는 똑같은 인사
를 할테니 이것도 또 고치려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에  마주치는 낯선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
하면 분명히 이상한 눈으로 볼  텐데 상대가 여자라면 더욱 곤란해 할 것 같다.  걱정이 팔자라지
만 벌써부터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집에 가는 게 좋아서일 것이다. 10년  전 독일에 올 때 그때도 
나는 똑 같은 걱정을 했다. 너무 놓아서.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거나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살맛 나는 일
이다. 이는 비단 나의 경우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더 필요한 존재,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
람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애써 일하고 공부하는지 모른다. 5년 전  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너의 장애를 내가 책임지겠다.”면서  나를 꼭 갖고 싶어했을 때 나는 주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오게 되면 무조건 ‘대우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초소한의 도래요 마음으로 하는  보답이라고 믿고는 신문이나 방송, 기타  여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귀국하면 대우”라고 못 박듯이 말했었다.
  그런데 4년 전 대우행은 우습게  깨지고 말았다. 물론 양쪽이 모두 다 할 말이 있을  것이고 그 
자체를 나만이 옳다고  우길 만큼 나 역시 미련하고  답답하고 미련한 사함은 아니다. 그러나  그 
때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섭섭했던 것은  “차범근이 포철, 현대, 다 알아보고 오라는 데가 없으니
까 대우에 오려고 한다”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이었다. 더구나 이것만은 내 자존심을  걸고 꼭 
지키고 싶다고 애썼던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섭섭했는지도 모른다.
  대우행 결렬이 신문에 나자 바로  그 다음날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은 “내가 해주겠다”면서 
뒤셀도르프에 있는 포항제철 소장을 급히 집으로 보내셨다. 현대에서는  “그것 때문에 협상이 깨
졌냐”고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결코 황당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바로 대우의 
고위 간부 자신이 표현한  대로 ‘리즌어블’한 얘기를 했을 뿐이다. 지금도 나  자신이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게 행동했던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문득문득 독일에 있어서의 마지막 시즌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냉기가 쏴 하고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약 2년 전에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레버쿠젠 팀에서 나를  코치로 쓰
겠다고 했을 때  한마디로 흥미없다고 했다. 아직도  여러분들이 보여주시는 관심이 이제는  한국 
축구에 발을 담글 때라고  스스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용기를 갖게  해주신 여러분들
께 감사드린다.
    차붐, 정말 돌아가는 거야
  1988년 12월이었다. “걔네는 와야  오나보다 하는거지 뭐.” “형님네 귀국한다는게 벌써 언제
부터야.” “차범근! 어제 우리 집사람이  네가 내년에는 한국에 가느냐고 묻길래 100% 아니하고 
그랬어.” “야! 너 호주머니 꽉  채워주면 돼잖아.” 사람이 신용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는  없
는 법이다. 나를 두고 정말  이번에는 가느거야 하는 정도는 가장 양호한 편이고 내가  간다고 해
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측이  훨씬 더 많은 사항이니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은 생
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깨달은 게 사람은 한치 앞을  모르니 섣불리 얘기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것인데 신용이 없어질 대로  없어진 다음에 깨달은 게 돼나서 써먹을  때도 이제는 별로 없을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귀국하겠다고 하면  집에서나 처가에서 꽤 반가운 눈치더니  이제는 
비행기 타고 올 때 반가워해도 별로 늦지 않을 것이라는 눈치다.
  레버쿠젠에서도 매니저만 빼놓고 선수들이나  마사지사나 운동화 당기는 친구나 한결같이 한참 
더 있을 사람 취급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했던 말이 다 거짓말이 된 옛날을 생가해서 큰소리를 
못치니 은근히 답답해진다. 사실  레버쿠젠에 올 때만 해도 내가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리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작은  집에서 잠깐 살다가 홀가분하게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동안 매년 돌아가겠다고 했으니  이제 가겠다는 소리나 있겠다는 소리나 듣는 사람입장에서
는 그게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매번 마음이야 단단히  먹었지만 이번이야말로 정말로 가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있다. 사  둔 
아파트도 4월이면 비게 되어잇고 분데스리가에서도 10년 뛰었으면 원 없이 뛰었다는 생각에 나는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매니저가 나에게 더 있으라고 했을  때도 용감한 무사처럼 나는 가
겠노라고 딱 잘라 말했었다. 어떤 연예인 말마따나 멀쩡히 잘  사는 사람을 이혼한다 이혼한다 하
니까 소문대로 헤어지게 되더라고 하더니 옆에서 믿지를 않으니까 아예 굳은 각오도 괜히 흐트러
지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매니저가 “오스트리아에서 너를 사겠다는 데가 있는데 분데스리가가 피곤해서 싫
으면 거기는 좀 괜찮잖아?”하고 묻는데도 나는 “가야돼요”하고 말했다가 “그래도 한 번 들어
나 봐”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알았으니 물어봐요. 심심한데 들어나 붑시다.”하고 싱겁게 떠들
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자기를 잘만 관리하면 오래 뛸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도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라.” 어느날 독일에 온 현대 축구단 코치 김인권 형이 저
녁을 같이하면서 무심결에 한 말이 나에게는 상당히 곱씹을 만한  얘기였다. 래서 나는 신용이 없
고 아무도 내말을 안 믿는 모양이다. 정말로 집에 가고 싶은데!
    나는 행복합니다.
  “차붐! 당신은 한국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됐고  그 동안 줄곧 독일에서만 축구를  해왔는데 
한국인들은 여전히 당신을 잊지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까?” 1989년  봄, 우연히 두 사람으로부
터 똑 같은 질문을 받고도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던 터라  해줄 수가 없었다. 88서울 올림
픽을 다텨온 기자는 “한국 선수로서 외국에 나가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고 나름대로 한국에서 듣고 본 것을  정리하게도 했고 최근에 서울을 다녀왔다는 어느 독일 목사
님은 “한국 사람이 외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고 돈도 번다는 사실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
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바이에르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김포 공항에 도착하면  가끔 우연찮게 알게되는 차범근과 
같은 회사직원(?)이라는 것  때문에 세관원들이나 공항 직원들로부터 친근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는 얘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고맙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외국에 떨어져 있다기보다
는 한국에 있는 분데스리가 선수라는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같는 것 같은 의아심을 가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듣고 굳이 생각을 해 본다면 1979년 내가 독일로  올 당
시 우리 나라는 참으로  어두운 시기였다. 1980년 여름 처음 귀국한 때에도  프랑크푸르트 회장단
의 임원 중 누구도 선뜻 서울에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끼리(선수)만 갔던 여행이었
다.
  그 여름에 지금  적십자 총재로 계시는 전 고려대학교 김상협  총장님 댁에서 자리를 함께했던 
어떤 분이 “이   사람아! 요즘 한국에서 살 맛 나는 사람은  차범근하고 이주일뿐이네!”라고 농
담을 했을때 모두들 한바탕  웃기는 했지만 유쾌한 웃음은 분명 아니었다. 이처럼  모두가 우울하
고 어둡던 때에 그래도 세계가 인정하는  무대라고 할 수있는 분데스리가에 가서 우리 선수가 골
을 넣고 독일 신문들이 콜아를 환호하는 것을  울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최초의 일이라는 것
이 지금처럼 국제화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실제  이상의 상당히 큰 의미와 가치를 주었던 것 같
다. 만약 지금과 같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쏟아지고 대한민국의 상표를 세계 어느  곳에서난 만
나게 되는 때라면 그 강도는 분명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게 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일에서 왔다고 하면 먼저 차범근 안부부터 묻는 택
시 운전사, 공항직원,  식당 종업원 그리고 이상한 직업의  아가씨들까지 나로서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한국에 갔더니 자네는 바켄바워보다  더하더구만!”하는 말을 전해들을 때의 
행복감이란 마당에 내리쬐던 봄볕보다 훨씬더 따뜻했다.
    프랑크푸르트 코치 자리 사양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이 축구 열기는 말할 수 없이 뜨겁다.  지난 시즌 겨우겨우 턱걸이를 
해서 분데스리가에 살아남았던  프랑크푸르트 팀이 새 시즌에  들어와서는 일곱 경기째 계속해서 
선두를 달리면서 그 곳  팬들을 열광시키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엔 프랑크푸르트 팀과  함께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모처럼 가서 본 프랑크푸르트의 발트 스
타디움은 나의 마음을 잠시라도 흔들기에 충분했다. 6만의  관중이 몰고온 승용차들의끝없는 주차 
대열, 꾸역꾸역 구름 다리를 타곤  운동장 안으로 몰려들어가는 요란스러운 깃발의 행진, 가스 나
팔을 불어대면서 오늘의  한 판 경기에 생사가  달리기라도 한 듯 ‘하인트라흐트!’를  외쳐대는 
극성 팬들의 무리. 이런 것들이 10년 전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감격과 감동을 되살려
주고 있었다.
  아내는 그 때의 흥분이 되살아난 듯  “역시 프랑크푸르트는 사람 사는 데 같아” 하면서 이미 
운동장 입구에서부터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은 그 날이  나로서는 프랑크푸르트 팀 회장단
에게 코치 스카우트에 대한 수락 여부를 통보해 주기로 약속한 마지막날이어서 막상 운동장에 들
어갔을 때에는 나 자신도  오늘 내가 매우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큰 경기가 있는 날이라고 고향집 찾아들 듯이 모여든 은퇴한 옛 동료들, 1년 중 기껏해야 
18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VIP  클럽 1년 회원권이 100만원을 넘는데도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들
어찬 VIP룸은 내가 그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역사가 있는 명문  클럽의 또 다른 모습이었
다. 그날 아내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큰 글씨로  ‘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씌어  있었다. 스스로를 프랑크푸르트 체질이라고 믿고 있으니  모처럼의 프랑
크푸르트 나들이는 신나는 옛날과 조금도 다를 리 없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 빠진 경기가 있는 날 오는 건데 내가 날을 잘못 잡았지 하고 은근히 후회
스러웠었다. 그리고 그날  경기후 감독과 회장단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마지막으로 내린 나의 결심을  통보할 때는 너무나 아쉬웠던지 아내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친
구들은 나의 결심이 믿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하기야 너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줄곧 돌
아간다고 하기는 했었지.”라고 기억을 해내기도 했다. “아쉬울 때 가는 게 좋은거야!  짧은 인생
을 너무 자주 쉬어가면서 살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계속 아내를 위
로했다. 그래도 아내는 여전히 섭섭한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양이 맛살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서울에 갔다온 하나와 두리가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아빠, 이상해요. 서
울에는 교통법규가 없나봐요. 차들이 빵빵 해놓고는 그냥 획획  지나가요”라고 고국 방문 소감을 
말했다. 클랙슨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독일에서 살다가 급할 때마다 울려대는 빵빵  소리가 마치 
축구장의 주저뱅이 팬이  불어대는 나팔소리처럼 들려 처음에는  무척 불안하고 깜짝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공범자였기 때문에 괜히 마른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희들은 어디어디 갔었니?”하고 물었다. “서울랜드, 드림랜드, 패밀리랜드, 롯데월드, 
수원...” 하면서 제법 혀 꼬부라진 영어식  R자 발음까지 해대는 통에 수원 할머니 집이 거기 끼
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우리 애들을 미국이나 영국쯤에서 보냈던 걸로  착각했을 것이다. 
“놀이터의 이름이 무슨 랜드니 월드가 곡 들어가야 하나”하고는  못 마땅해서 투덜거렸다. 실망
을 안고도 여름이니까 그래도 상추쌈이나 오이 소박이 같은 것을 먹어봤을 것이라는 기대에 “뭐
가 제일 맛있었니?”하고 물었더니 수없이 많은 아이스크림, 얼음과자 이름들을 들이댔다. 아이차
나 쭈쭈바를 먹었던 10년전의 나에 비해 선택의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어른
들이 먹고 남긴 냉커피까지 마셨다니 내가 기대했던 모범답안과는 거리가 먼 것들 뿐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를 실망시킨 것은  두리 녀석이 “외할아버지가 해태 팀을 좋아하니까 나
도 나중에 해태  야구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변심(?)을  해버린 것이다. 꼭 축구 선수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빈말이라도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대놓고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 은근히 입맛만 썼다. 이래저래 마땅찮아 “배우라는 것은 안 배우고...”라고 언짢게 대
꾸했다. 녀석들이 한국에서 배운  노래라며 온종일 부르고 다니는 CM송도 듣기 역겨운 ‘고양이 
맛살’. 하도 듣기 싫어서 “도대체  과자 이름이 뭐 저래? 지을 게 없으니 별걸 다  붙이는 모야
이지?”하고는 짜증을 냈더니 한바탕 크게 웃고난 아내가 “오양 게맛살이란 것을 재들이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모르고 아는 척하는 게  더 무섭
다니까. 기껏 한달 갔다오고.
      뭘 알아야 해먹지
    황재만 선수를 아시나요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어떤 분이 차범근 어린이 축구교실에 약간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은데 구
좌번호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전화를 해왔다. 사실 우리 축구교실은 구청의 도움과  많은 자원 
봉사자 선생님들의 협조로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돈이 별로 필요하지가  않다. 물론 얼마 전 장
학사께서 놓고 가신 10만원과 유공  어린이 축구교실에서 받은 강사료 40만원을 처리할수 없어서 
넣어 놓은 차범근 어린이 축구교실  통장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후원’을 자청하는 사람들
이 많은데도 변변히 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하지 않는 것은 나 자신 아니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이 
그걸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아주 넉넉한 형편이 아닌  선생님들인데도 교통비와 수고는 자신들이 
스스로 담당하겠다고 하는  것은 후원회나 스폰서로부터 돈을  모아서 근사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님들께 더 큰 감사를 느끼게 할 수 있어서 ‘보람이 있기’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에게  손 내밀기를 정말 싫어하는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오늘은 너무 가슴이 답답해서 오랫동안  망설이던 끝에 본인에게는 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
면서도 이 얘기를 꺼낸다. 1970년대 롱스로인을 간판으로 미드필드를  누비던 국가대표 황재만 선
수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이 많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척추  아래부분에 힘이 없어지면서 쇠약해
지는 증세를 보이더니 벌써 수년 째 하반신 불구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치료 차 일본으로 
떠났다. 나는 옛날에 보아왔던 형의 건강한 모습,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 웃는 얼굴을 기억하고는 
아프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지난 겨울  귀국해서 만난 형의 모습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더구나 선수 생활을 통해 나름대로  모아두었던 것들도 수년간의 병치레로 모두 없애고 이제는 
임대 아파트에서 애들과 함께 여름 더위보다 몇십 배나 더  지긋지긋한 병, 그것도 이름도 흔적도 
없는 병과 싸우는  형의 모습은 .... 나는 팬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 대표선수의  일생을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 몰염치하고  분수를 못가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형을 기억하는  분들 중
에는 그의 아픔을  알고 싶어하고 느끼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물론 답답하기도 하고.
    주성아! 정말 야생마처럼 뛰어라
  남들에게 알려지고 또  유명해지는 소위 ‘스타’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인 것 같다.   가끔은 
터무니없는 말썽으로 유명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의 인간적인 매력이 팬들을 자기 
옆에 꽁꽁 묶어두기도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인내(?)를 가지고 우리 축구계의 스타인 
김주성 선수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나는 귀국한 후 약 6개월 동안 여려 차례의 국내 경기, 대표팀 
경기를 통해 그의 모습을 보았지만 내가  기대하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남들
처럼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기르고, 비싼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고 물을 들이는 등, 또 액세서리에 비싼 옷을 걸치는 
것은 이미 주성이의  등록상표가 되었었다. 또 외국 잡지나 외신을  타고 흘러오는‘김주성’이름 
석자는 그의 경기를 훨씬 더 많이 보아온 국내 언론이 이름만 듣고 혹은 잘해야 한 경기 정도 보
고 의무적으로 내보내는 외신보도를 스스로 판단해 볼 필요성이나 자존심조차도 팽개친채 무조건 
커다란 상자에 집어넣어서 포장을 하는 사대주의 덕분에 점점 더 상승되는 면도 없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야생마’라는 그의 이름에 어울리는 경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친 듯이  파고들고 상대를 괴롭히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야생마같은 기질이  90분 동
안 폭발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단정지어 얘기할 수는 없다.  지난 6개월간 
보여준 주성이의 경기 모습이 그의  한계인지 아니면 슬럼프인지를.... 그러나 나는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능력을 주성이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꼭 부탁하고 싶다. 
  어떤 형태로 스타가 되려는지 그것은 자유지만 정말로 사랑받고 영원히 팬들을 나의 것으로 만
드는 ‘대스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실력’이 최우선이다. 긴머리에  금팔찌를 보고 주성이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무섭게 달리고 번개같이  가슴이 서늘한 슈팅을 갈겨댄다면 그들은 영영 주성
이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는  1990년 로마 월드컵, 주성이는 아주 중요하고 또 몹시 부
담스러운 시합들이 될  것이다. 이미 유명해져버린 주성이를  상대가 놓아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
에....
  바로 이때 초라하게 주저앉아버리지 않고 정말 야생마처럼 무섭게 달릴 수 있도록 정신 바짝차
리고 칼을 갈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성아! 인생에 있어서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야. 로
마에서 실제로 너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세계 축구인들에게 “그 녀석 쓸만한데” “별 것 아니
군, 한국의 수준이 그렇겠지“하는 판단 중 어는 쪽으로 너를  심느냐는 것은 너 스스로에게 달렸
다.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이해해다오.
    명 지도자는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범근아! 제발 책임 회피하지  말고 한 놈 구해서 보내라.” 한국  시간으로 늦은 저녁 시간인 
것 같은데 이회택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대표 선수들을 올림픽에  다 내보내고 그나마 있는 선
수들까지 다쳐서 무척 힘들다면서 “독일에서   쓸만한 수비수를 구해 보내라 ” 고 했었는데 소
식이 없자 섭섭했던 것 같다. 통화를 하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찡하고  아픈 것이 뭔가 말로는 표
현하지 못할 어떤 것으로 가슴이 뭉클해 오는 것을 느꼈다. 감독은 정말로 힘든 직업이다. 이것은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두려우리만큼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의 옛 동료인 브라질의 인기 선수  티타가 “선수는 자신이 스스로 경기도 하고 책임도 지지
만 감독은 남을(선수)  통해 보이면서 모든 책임은  혼자 지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고  진지하게 
얘기하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꼭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회의
와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다. 그러기 때문에 피를 말리고 심장을 조이는  감독들을 볼 
때면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고 그때마다 가슴 아려
야만 하는 그 길을 스스로 택하고 맞아들이는 모습을 볼 때면 대단한 용기라고 나는 경탄하게 된
다.
  1987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포항제철 팀을 이끌고  프랑스로 전지훈련을 왔던 이회택  선배가 
자기가 데리고 있던 김순기 코치를 빼내  우리 집으로 보내놓고는 전화를 했다. “범근아! 김코치
에게 많은 것을 좀 가르쳐 보내라. 젠장!  내가 뭐 알아야 해먹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선배가 
뭘 모른다고 얘기한다면 남을 가르쳐본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나는 뭘 알겠는가.   이때 나는 
선배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나를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10년 전  아시아에서는 누
구도 나보다 나을 수 없다는 자신감에  넘쳤던 내가 축구를 배우기 위해서 독일에 왔다고 진심으
로 거리낌없이 얘기할 수 있었던 바로 그때가 떠올랐다. 
  여느 사람들처럼 자신의 출세를 보장받고 지속하기 위해서 “제가 뭘 압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시키는 대로 하지요“하는 식의 과장된 아첨이  아닌 정말로 너무 몰두하다가 보니 아무 것도 모
르는 것 같은 지경에까지  이른 선배가 내뱉은 “젠장! 뭘 알아야 해먹지!하는  말이 나에게는 무
한한 기대를 갖게 해준다. 어디 나 뿐이랴만은.
    ‘그라운드의 풍운아’
  얼마 전 국내 신문을  보니 젊은 축구 지도자들이 모여 농성하는  사진 맨 앞에 넥타이를 매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이회택 선배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회택이  형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묘한 
감회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철저히  대조적인 괴짜 형에 대한 겁많은 후배의 연민 같은  것일 것
이다. 나는 담배와 술이 몸에  해롭다는 이유로 이를 가까이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철저한 미
래대책형이라면 반대로 회택이 형은 당장 호주머니에  10원 한 장 없이도 기분에 맞고 해주고 싶
은 사람이 있으면 당장 끌고나가 외상으로  양복을 맞춰주는 도무지 대책을 안 세우고 사는 사람
이다. 
  별안간 삭발을 한 채 행방불명이 되고, 또 어느 때는  주유소 사장님이 되었다가 양복점 주인으
로 둔갑하기도 했던 형은 6, 70년대의 올드팬들에게는 아직도  선명한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는 불
세출의 스타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  형이 가까운 이들과 한 잔 걸치면서 축구에 대해  얘기할 때
면 ‘지은 죄가 많아서’라면서 불만을  삭이려고 애쓴다는데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회택이 형의 
변화설(?)은 형이 이젠 한국 축구를 위해 정말로 큰몫을 하겠구나 하는 큰  기대와 함께 한편으로
는 이제 형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하는 쓸쓸함을 느낀다. 늘 선이 굵어서 나의  햇병아리 대표선
수 시절에도 형의 절대아성에 도전하려는  키 큰 순둥이 차범근을 한번도 표면적으로 경계하거나 
방해한 적이 없었다.
  축구에 대한 눈이 트이기  전 나는 열 번 치고 가다 열 번  막히는 한이 있어도 오른쪽에 뚫린 
내 길밖엔 갈 줄을 몰랐다. 다행히 당시만 해도 아시아에서는  내 스피드가 먹힐 때라서 돌대가리
라는 별명 하나 얻는 정도로  끝났지만 요즘 같은 축구라면 말할 것도 없이 벤치감이다.  당시 센
터포워드였던 회택이 형은 나하고 발을 맞추느라 가장 답답했을 텐데도 다른 형들이 고함을 치고 
방방 뛸 때 “야! 너 밸꼴리는 대로 한번 해봐”하면서 오히려 지붕 구실을 해주곤 했었다.
  전형적인 60년대 스트라이커로서 작고 빨랐던 형은 당시 팬들의 취향이 쓸데 없는 슈팅을 많이 
때리면 욕심이 많다느니, 혼자서만 골을 넣으려고 한다느니 비난할 때인데도 “야! 그냥 때리는거
야. 40개 때리면 한 개 안 들어가겠느냐“며 ‘밸꼴리는 대로의  실천론’을 펴 겁많은 나를 놀라
게 하기도 했다. 왠지 나는 후배들에 대한 기억보다 선배들에 대한 기억이  더 뚜렷이 남는 것 같
다. 아직까지 회택이 형이  어떤 후배들보다도 뛰어난 선수였다는 기억이 늘 나에게  잠재해 있는 
것은 요란했던 회택이 형 팬들의 역할도 무시 못한다.
  가끔씩 느닷없이 없어졌다  나타나서 하는 재기전, 모처럼 마음  먹고 정성들인 대회의 결승전. 
이럴 때마다 스타킹을 발목까지  내리고 인상도 별로 좋지 않았던 형의 팬들은  열광하곤 했었다. 
가끔 뛰기가 싫어서인지, 형의 말처럼 밸이 꼴려서인지 운동장 가운데서  두 손을 허리에 마냥 얹
고 마냥서 있는 형을 향해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에누리 없는 욕지거리조차도 마치 연극무대에 배
우와 관객이 호흡을 맞추는 모습 같아 보였다. 이제 40대가 되어버린 회택이 형.‘지은 죄가 많은 
형’과 ‘받은 죄가 많은 나’는  분명 한국 축구에 가장 큰 빛을 진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열심
히 해서 갚아야겠다.
    아시아의 폭군
  약 20여년 쯤엔 아시아 축구무대에 폭군이 있었다. 요즘엔  아시아 국가들끼리의 경기가 전처럼 
활발치 못한데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는 웬만한 아시아 친선경기대회엔 단일 팀을 내보내도 우승
할 만큼 실력차가 벌어졌지만 그 당시엔 아시아 모든 나라의 선수들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처지
였다. 지금도 3,40대의 축구 팬이라면 일본의  가마모토나 모리는 말할 것도 없고 팔이 길다고 소
개되었던 말레이지아의 링삭이나  머리가 둥그렇고 큰 소진촌,  이름이 희한한 땀띠 같은  선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당시엔 한번 대표 선수가 되며  거의가 10년 이상 뛰던 터라 태국의 킹스컵이나 말레이지아
의 메르데카 컵, 한국의  박스컵에서는 이 모든 선수들이 꼭 1년에 서너번씩 만나곤  했으니 입장
식 같은 날 으레 서로 반가운 안부인사를 나누곤 했다. 바로 그  때 쯤 아시아의 모든 선수들에게 
누가 제일 무서우냐고  물엇다면 아마도 열 중 여섯 이상은  “코리아의 골키퍼”라고 했을 것이
다. 당시의 골키퍼 이세연 선배는 얼마나 무서운 얼굴이었던지  패널티에이러 안은 자기집 안방이
나 다름 없어서 감히 아무도 접근을 못했다. 이 선배  얘기인즉 까부는 놈들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서 불을 끄곤 원투스트레이터를 뽑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지는 않느다 하더
라도 아직까지 가장 거친 태국 선수들  까지도 볼을 치고 들어가다 세연이 형이 덮치려고 깡패같
은 폼을 잡고  뛰쳐나오면 볼은 놓고 도망갔다는 것을  전설로 믿고 있다. 배짱이 두둑하다  보니 
공격수인 나를 놓아두고  대신 승부킥을 성공시켜 신탁은행을 우승시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며 골키퍼로서의 자질이 천부적인 것 같다.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서독축구계의 우스갯소리중에 골키퍼, 감독,  레프트 윙은 광기라는 말이 
있다. 불과 4개월 만에 분데스리가 최정상급 골키퍼 네 명이 팀을 떠나게  된 이유가 성적 부진이 
아니고 하나같이 객기를 부린  때문이었다. 수십만 유권자를 앞에 놓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은 채 
자기의 의견을 소신껏 말할 수 있는  게 대통령 후보로서의 중요한 자질 이라면 ‘아시아의 폭군
’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배짱과 객기가 뛰어났던 세연이형이야말로 골키퍼로서 뛰어난 자
질을 타고 나지 않았나  싶다. “이 새끼! 공 줍는 것부터 다시 배워”하고  내게 소릴 치던 무시 
무시한 형에게 내가 뒤늦게 공개적으로 형의 과거사를 들출 수 있는 용기는 물론 살도 찌고 둥글
둥글해진 형이 아들 축구하는데 쫓아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을 텐데 나까지 챙겨서 받아 치지는 않
을 것이란 생각에서이다.
    88올림픽에 생각하는 박종규 회장님
  “역사적인, 사상 유례없는  최고의......”라는 식의 수식어를 무척 즐기는  우리들에게 올림픽만
큼 이 말이 딱 어울리는  일도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그러나 10년 전 분명히  나는 서울올림픽 
개최가 한낱 꿈에 불과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올림픽’하면 늘  떠오르는 분
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종규 전 IOC 위원이다. 나는 말레이지아에서 메르데카 컵 국제 축구 대
회를 제패한 어느 여름 날   그분을 처음 뵈었다. 한 줄로 서 있는 선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격
려하시더니 중간쯤에 서 있던 내 앞에 와서 갑자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주시는 것이었
다. 
  당시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코룸’이란 고급  시계였다. 그후 대한 체육 회장이  되실 
무렵 나는 독일로 떠나오게 되었다. 내가 있던 프랑크푸르트 바로  옆 도시인 비스바덴에 당시 그
분이 부회장으로 있는  세계 사격 연맹 본부가  있었다. 굽실대는 서양인들을 거느리고  저녁마다 
파티를 여시던 회장님은 독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던지 나도 수차례 참
석하게 하곤 했었다. 파티에는 사격 연맹의 특수성 때문인지  대부분 아프리카 장성들이나 경호실
장 같은 막강한 사람들이 참석하곤 했었다. 나는 그때 처음  서울 올림픽 유치를 구상하는 그분의 
개인적인 야망(?)을 듣고 “회장님도 참!  서울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로서
는 도와드릴 수도 말릴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어서 굿이나 보며 떡이나 먹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
각했다.
  회장님은 IOC위원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종신제인 IOC위원은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에  한해
서 한 자리 더 배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부마 사태가 발생하면서 서둘러  귀국한 후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렇게 원하던 IOC위원이 되셨다.  올림픽 성화는 서울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고인이 되신  그분은 사실상 이 대단한 잔치와  무관한 분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떠도는 
갖가지 얘기에도 불구하고  ‘서울 올림픽’하면 박종규 회장님이  떠오르는 것은 올림픽 유치의 
태동을 너무 가까이서 본 탓일까.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감독과 나
  1985년 후반리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를 마친 직후의 얘기다. 퉁퉁  부어서 험악하기 짝이 없
는 다리를 가지고 90분을 뛴 나에게 리벡 감독은 미안한 지 식사를 마치고 슬그머니 내 옆자리로 
왔다.“부미(Bum이라는 말: 감독은  늘 그렇게 부른다.)! 한국은 뭣하러  자꾸 가려고 그래? 여기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지도자  생활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데 뛸수 있는  데까지 뛰는거야! 코치
나 감독이 얼마나 골치  아픈 직업이지나 알아?”“어유-. 나는 감독들 왁왁 거리는 게  지겨워서
라도 빨리 그만둘래요!”일시에 VIP룸에서는 폭소가  터졌는데 그중에서도 리벡 감독부인이 제일 
크게 웃었다.
  나는 지금까지 진담이건 농담이건 어떤 감독에게도 그런 식의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레버쿠젠 팀의 리벡 감독에게는 자주 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선수들은 투정으로 
그러는데 이유는 평소  어찌나 왁왁 대는지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당하는  것에 대한 보복일 것이
다. 그렇다고 레버쿠젠 팀에서 그런  일로 인한 잡음은 없다. 경기에서 진다거나 플레이가 부진하
기라도 하면 하프타임 때 우리는 여지 없이 당해야 한다. "뭣하러 왔어  지금! 다 집으로 돌아가!" 
어찌나 소리가 큰지 다음날 신문을 보니 운동장 경비원들이 솜으로 귀를 막고 다녔다고 한다.
  감독의 이같은 고성으로 인해 0대2로 지고  있다고 불호령이 떨어진 뒤 3대 2로 역전승한 예가 
여러 번 있었다는 데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떨어지는 불호령은  항상 같은 
말이다. “부미, 느네  나라는 쿵후도 없냐?”당하면 되돌려 줘야 속이  시원한 감독 성격에 상대 
수비에게 한없이 당하기만 하는 게 열통 터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가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하나 
엄마는 감독 부부에게  “30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고치느냐! 괜히 정신만  분산돼서 
경기에 지장이 있다.”고 역설을 해도 마찬가지다. 쉽게 얘기해서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써먹고 싶은거다. 실제로 전반 리그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경기 같은  경우 결승골도 종료 1분 전
에 넣었지만 감독에 대한 분풀이를 수비한테 좀 했었다.
  코너킥이 나면 나를 붙잡는 상대 수비를 주심이 보도록 요란하게 뿌리치기도 하곤 했었는데 그 
날 감독은 기분이  좋아서 주심한테 “우리 부미는 절대로  반칙을 안한다.”고 했다나. 그랬더니 
주심이 “오늘은 옛날의 차붐이 아니었다.”고 응수를 해서 더더욱 감독의 입이 찢어졌었다. “상
대방이 붙잡으면 요란하게 뿌리쳐라!  수비가 걸면 넘어져야 주심이 볼거 아냐!”  하도 1년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같은 소릴  들으니까 나도 조금은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감독은 나
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에게 써먹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내서 써먹으려고 무진 애를 썼
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나의 8년간의 한국 대표선수 생활은 나에게도, 팀에게도 아쉬웠다고 생각
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대표선수 시절 나는 헤딩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청소년대표 
시절에는 많은 헤딩 공을 넣었었는데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코뼈가 부러진 이후로 안하게 
된것이다. 물론 이 점은 감독들께서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감독도 나의 이런 불안을 해
소시켜 주면서 헤딩을 하도록 유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코뼈 다친 뒤로 헤딩을 무서워한다
”로만 끝났다. 태릉선수촌에서  실시한 서전트 점프(선태로 하는  점프) 테스트에서도 모든 선수 
가운데 내 기록이 가장 좋아서 얼마나  헤딩을 잘 할 수 있는지가 증명됐었는데도 불구하고.... 아
쉽다.
  물론 나의 헤딩력이 되살아난 것은 어떤 감독의 힘이 아니라 분데스리가가 주는 절박함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을 무릅쓰고  펄쩍펄쩍 볼을 향해 뛰게  했기 때문이다.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나는 나의 후배들을 보았다. 나처럼 아주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월드
컵에서의 승패는 국가의 명예와  직결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크게 성장할 수 잇는  최강의 기회
기도 하다. 감독의 호령소리가  없더라도 우리 후배 선수들은 멕시코 월드컵을 계기로  자신의 취
약점을 최대한으로 보완하는 기회를 만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베켄바워’ 선생
  쾰른 팀의 주장이면서 독일 대표  팀 주장이고도 한 공격수 클라우스알롭스가 프랑스 1부 리그
의 마르셀리로 이적하는 것이 확실해지자 과격한 편인 독일 축구협회 노이어 베르거 회장이 그를 
더 이상 대표 팀 주장 자리에 앉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인지  진담인지 하여튼 한마디를 했었다. 그
러나 대표 팀 감독인 베켄바워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 곧 반격을 하고 나섰는데 항상 외교
적이고 편안한 얼굴을 가진 그에게 가끔씩  이런 모습을 발견할 떼면 나는 다시 지도자로서의 그
를 좋아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존경을 받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특별히 대표 팀은 온 국민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는 만큼 감독이 받게 되는 외부로부터의 간
섭이나 모략은 대단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만 해도 그렇다. 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킨 빌라프
도 감독이 대표  팀을 대폭 개편하자 밀려난 선수들이나 1978년  월드컵 우승 당시의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던 메노티는 예선통과도  못할 거이며 빌라르도를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고집과 불치병인 암을 치료하는 의사출신답게  끈질긴 인내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드디어 우승을 
이끌어냈다.
  이런 경우 베겐바워는 그의 선천적인 외교술이나 인내로 잘 극복해 나가지만 가끔 정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의 냉정하면서도 철저한  승부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하는데 
심심치 않게 터지는 이런 일들은 번번이 그의 승리로 돌아갔다. 7년 전  그가 대표팀 감독직을 처
음 맡았을 때 데어발 전임  감독의 임기가 남아 있었지만 성적 부진을 이유로 그가  맡게 됐었다. 
지도자로서의 자격증도 없이 팀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대표 팀의 책임자 가 되었는데 몇
번의 국가대항전을 치르고 난 후 베켄바워는 모든 대표 선수들에게 TV 스포츠 쇼에 출연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그 동안 늘 버릇처럼 부정적인 꼬리를 달고 해설하는 방송국 측을 공격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줄 수 밖에 없었다. 방송국 측에서 가장  언변이 좋다는 아나운서를 내세워 베켄바
워와 논쟁을 벌이게 했으나 오히려 베켄바워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이다.
  베켄바워는 “내가 이끄는  대표 팀을 비난하는 것가지는  좋다. 그러나 당신들이 뭘  안답시고 
독일 축구가 슬럼프다 슬럼프다  하니까 팬들에게도 그렇게 인식되는 게 아니냐. 얼마  전 기자회
견하는데 어느 이탈리아 기자가 나더러 서독  축구가 왜 스럼프냐고 묻는데 돌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그 기자가 뭘 알겠나. 당신들이 떠드는 바로 그  소릴 흉내내는 것”이라고 아나운서를 공박
한 뒤 때마침 분데스리가 경기를 해설하기 위해 옆에 앉아 있던 리포터를 향해서는 “분데스리가
를 끌고 들어가는  물귀신”이라고 서슴없이 쏘아댔다. 베켄바워였기 때문에 그런  과격한 공격이 
용납되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지도자 같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가면서 부닥치
는 어려움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베켄바워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독일이 낳
은 축구스타 루메니게가 부상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베켄바워는 지도자로서의 연륜이 극히 짧으면서도 이미 한 세상을 살아본 사람인 것 같은 느낌
을 준다. 인내하고 항상 남을 칭찬하며 겸손하면서도 때로는 고집도 부릴 줄 아는 베켄바워. 시즌
이 끝나면 그를 만나 더  많은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우리가  잊고 사는 
평화로운 삶의 방법에 대해서.
    잊을수 없는 부흐만
  프랑크푸르트 팀과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서독축구협회 컵 결승전이 슈트트라르트 시의 네커스타
디움에서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경기 전부터 팬들의 관심은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한  10종 경기
의 서독 육상 대표 선수  출신이기도 한 수비수 브리겔과 나의 격돌에 크게 집중돼  있었다. 올림
픽 육상 선수답게 장거리와 단거리에 능하고 높이 뛰기와 멀리뛰기도 잘하고 힘이 장사인 브리겔
은 내가 맞붙어본 선수  중 가장 재미난 상대였다. ‘옥니에 장사’인 브리겔과  ‘촌스럽고 고양
이처럼 날쌘’나는 경기 스타일이 정반대면서 서로 막상막하여서 전부터도 풍자만화에 자주 등장
했던 터였다. 아무튼 결승전을 앞두고 나는 가벼운 부상으로 컨디션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경기가 있던 날 아치 미팅에서 감독은  평소와 달리 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여러 지시를 
지시했다. "차붐! 오늘 자넨 수비에  가담하면 안돼. 공격만 하고 우리 팀이 공격을 당할  때는 하
프라인까지만 후퇴하도록 해. 그대신  한곳에만 가만히 있지 말고 볼이 가까이 없을  때에도 좌우
로 계속 움직여 브리겔이 90분  내내 자네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 되네. 만약  자네가 수비를 
한다고 브리겔을 끌고 들어오거나 가만히  서 있어서 브리겔에게 공격할 기회를 주거나 브리겔에
게 쉴 틈을 주면 절대 안돼."  90분 내내 뛰었다. 브리겔 역시 나를 놓고 공격에 적극 가담하기엔 
불안하고 반대편으로 가버린 나를 다시 쫓아오기도 힘든 일인지라 계속 내 뒤를 붙어다녔다.
  자기 마음대로 뛰는 사람보다  쫓아 다니는 사람이 더 피곤하게 마련이다. 제풀에  지친 브리겔
은 너무 약이 오르고  화가 났던지 주먹으로 나를 한 방  먹이는 바람에 신문들은 “차붐이 오늘 
우승 파티에서 수프만 홀짝거렸다.”고  떠들었다. 브리겔은 나를 쫓아다니느라 녹초가 됐고 끝내
는 내게 헤딩골까지 허용했었으니 국가  대표까지 지낸 그로서는 주먹을 휘두르고도 시원치가 않
았으리라. 나는 당시 브리겔을 끌고다니면서 지치게 만들라고 지시했던  부흐만 감독을 지금도 우
수한 지도자로 꼽는다. 어쩌다 부상이  너무 심해 못 뛰겠다고 할 경우 리벡 감독은  그의 성격대
로 “어금니를 꽉 깨물어”라고 한마디 하면 끝났다. 그때  부흐만 감독은 “분데스리가 공격수가 
온 몸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운동장에 나갈 수 있는 경우는 휴가  때 뿐”이라고 더 지독한 말을 
설명에 곁들여 하곤 했었다. 훌륭한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타 선수들을 다
루지 못하는건지 아니면 안하는 건지  아무튼 그런 문제로 1부 리그에서 실패를 거듭하다 지금은 
2부 리그에서 감독을 맡고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벼랑에 선 유럽 축구의 영웅
  머리가 하얗게 센 미셜  감독의 주름진 손등과 떡 벌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처져 있는 어깨를 
볼때면 내가 언제  이렇게 정이 들었나 하고 놀랄  정도로 마음이 아파왔었다. 1988년 여름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네덜란 드 팀을 이끌고 결승전에서 소련을 꺾던 날, 세계의 톱스타들인 크만, 반
바스텐, 굴리트의 등에 업혀  환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온 독일을 네덜란드제  물감, 오
렌지빛으로 물들인 가운데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장군 칭호를 받으며 선수들은 감독에게 1천만
원이 넘는 최고급 금시계를 선물했다는 기사를  읽은 나는 아주 감동적인 영화 한편을 보는 것만
큼이나 기분이 좋았었다.
  그러나 1988년 UEFA컵과 유럽 선수권 대회를 제패한 감독은 새 시즌을 앞두고 기자들과 팬들
을 향해, “오늘은  오늘일 뿐이지 어제가 오늘을 돕지 못한다.  밤새 내린 눈들은 녹으면 그만이
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눈이 녹으면 질퍽거려서  오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것인지, 영국의 
기자단이 레버쿠젠의 미셜  감독을 1988년의 최고 지도자로  뽑았던 날 독일 팬들은 “미셜(감독 
이름) 집으로”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또 나의 일곱번째 감독이 벼랑에 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 다른 때보다 더 마음이 아픈것은 미셜 감독이 분데스리가 수준을 엄청나게 뛰어넘은 
고액 봉급을 받은 네덜란드 사람(2차 대전  이후 서독과 네덜란드 사람들은 사이가 무척 나쁘다.)
이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팀내의 파워게임 때문에 성적이 나쁘다는  것 이상으로 감독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치사한 세력 싸움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다 있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황을 모르는 철부지처럼 감독을 조를 수 밖에 없었다.
  1989년 3월 6일부터  시작되는 분데스리가 감독 자격을 얻는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몹시  미안한 부탁이고 감독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
을 잘 알았지만 3개월의 긴 절충 과정을 거쳐 감독은 겨우 “이제부터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는데
”하면서 내 손을 잡아줬다. 마치  꾸어준 돈을 받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 남편을 찾아와요. 이이가 사교적이 아니어서  그렇지 당신에겐 분명히 도움
이 될 거예요.”하면서 감독 부인까지도 같이 격려해 주었다. 아약스 암스테르담을 이끌고 유럽의 
모든 대회를 휩쓸었던 감독,1974년 뮌휀 월드컵에서 준우승하곤 세계  축구계의 귀족들이 모인 바
르셀로나에서 6년간이나 감독 생활을 한 세계적인 지도자 미쉘. 어제 내리 눈이 다 녹았다. 두 가
지 일을 해야 되는 나의  마지막 반 시즌, 감독에게 행운의 흰눈이 계속해서 펑펑  쏟아지게 하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시간과 몸을 쪼개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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