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후광==최수철
내가 나의 시각에서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전쯤의 일이었다. 어떤 심상치 않은 예감이나 전조가 가끔 그러하
듯이, 그 일은 어느 날 새벽녘의 몽환을 통해 처음 내게로 찾아들
었다.
음력 보름쯤으로 기억되는 그날,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
에 이끌려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드는 실내로 걸어들어갔다. 처음
에 나는 그곳에 나 혼자만이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곧 나는
누군가가 구석진 곳에 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
견했다. 주위가 어두웠던 탓에 그의 몸은 지워져 있었고 얼굴만이
오롯이 떠올라 있는 듯이 보였는데, 이목구비의 어렴풋한 윤곽만
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주 바라보는 상태에서 조금씩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얼굴과 그 주변에서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검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받아 가볍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점점 더
심하게 흩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 따라 머리카락은 일렁거
리는 검은 빛의 햇살처럼 그의 얼굴을 감쌌으며, 이윽고 실제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변색되기 시작했다. 잠깐 사
이에 이미 흰색으로 바래어진 그의 머리카락은 그 자리에 백발로
덮인 야누스의 잘려진 머리를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변화는 거기
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일어났다. 그 흰빛이 푸른색으로 변하
고, 그 푸른색이 다시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강력한 흡판을 가진
핏빛의 불가사리가 되어 얼굴에 들러붙은 것이다. 섣불리 떼려들
었다가는 살갗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한 그 꿈틀거리
는 빛에 의해 얼굴은 차츰 뭉개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 주위의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
다. 그때 나는 줄곧 꽃향기 같기도 하고 향불을 피을 때 나는 것
같기도 한 냄새를 코로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 눈과 코의 얼얼한 마비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그 얼굴 위로 내 주변 인물들의 얼굴이 하
나씩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끝으로 나 자신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고, 그 순간 영사막이 걷히듯 나의 시야는 닫
혀버리고 말았다.
그 섬뜩한 경험을 했던 날, 나는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 한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문득 그것이 이를테면 인체의 후광 같은 것, 일종의
아우라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든 인간
과 사물에게는 독특한 분위기 내지는 기운이 어려 있는데 그것을
아우라라고 부르며, 특수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특히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나는 신비론자도 아
니고 최면술사나 초능력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
은 아마도 그것인 듯했다. 나는 그 누군가의 얼굴 둘레를 감싸고
있던 후광을 보고서 그 놀랍고도 기이한 광경에 머리카락이 빛을
내며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갑자기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
을 느꼈다, 그러나 나로서는 비록 생시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여
하튼 갑자기 존재의 후광이, 그러니까 아우라가 나의 눈에 보인
까닭이 무엇인지 아무래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앞으
로 내게 어떤 특별한 사건들이 닥쳐올 징조인지, 혹은 이미 지나
간 과거의 인상적인 사건들이 남긴 여운인지 생각해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날 몇번에
걸쳐서 그 후광을 실제로 목도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이상
한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나는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계속하여 눈앞에서 어른거리
던 그 빛을 아침 출근길에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만남과도 같은 것이었
다. 그러나 그날 하루의 일정은 평소와 별로 다른 점이 없이 진행
되었다. 일찌감치 회사에 도착한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에
큰길로 다시 나와서 근처의 해물식당으로 갔다. 몇달 전부터 나는
일 주일에 서너 번 가량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해오고 있었는데,
이번 주에는 주말이 벌써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아직 한 번도 들
르지 못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오른쪽으로 바짝 붙어서 길을 따라 걸었다.
특히 걷고 있을 때면, 내게는 항상 왼쪽에 있는 것들이 오른쪽에
있는 것들보다 더 신경이 쓰이곤 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단순히
내가 오른손잡이인 탓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것은 충
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왼쪽 눈보다 오른
쪽 눈의 시력이 더 좋다거나, 왼쪽보다 오른쪽 어깨의 결림이 덜
하다거나 하는 것들도 제각기 이유가 되겠다고 나설 것이기 때
문이었다.
그러니 나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항상 오른쪽에 붙어서 길을 걸었다. 그러다보면 의외로 오른쪽에
있던 예기치 못한 장애물에 부딪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눈의 초점이 너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잊지 말아야 했는데,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퉁이를 돌아서 저만치 앞쪽에 식당의 간판이 보였을 때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침 여덟시가 넘은 시간에 길 위에서 하품을 하는 사람
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왼쪽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
은 대부분 잠이 모자란 데다가 갑자기 아침의 서늘한 공기를 쐬
어서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퀭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둘러
걷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그들이 하품을 하지 않는 이유가 아
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길 위에서 그들
은 여전히 잠이 든 채 몸을 웅크리고서 앞뒤로 굴러다니고 있었
다. 그런 탓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 누구에게서도 후광이
비치는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의 얼굴은 몸만큼이
나 잔뜩 오그라들어 있어서, 흡사 물이 끓어서 바닥까지 바짝 졸
아붙고 있는 주전자를 연상시컸다 내게는 그들의 머리 위로 허연
수증기가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식당 주인은 길에 나와 서서 집게로 수족관 속을 헤집고 있었
다. 출입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수족관 안에는 새우와 게 등속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아침마다 잘려진 새우와 게의 다리나 수염을
집게로 건져내곤 했다. 게들과 새우들은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서
로 싸우거나 질식해 죽어가면서 끊임없이 몸의 말단부분들을 잃
어가고 있었고, 주인은 물이 쉽게 썩는 것을 막기 위해 그것들을
수시로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번 나는 주인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어지럽게 버려진
그 갑각류의 다리들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렸을 적에 곤충들의 다리가 너무도 쉽게 잘려지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불쌍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신기해했던 것
을 기억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몸에서 간단히 떨어져 나온 갑각
류의 다리들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무의미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갑각류들 자신들에게는 그 중에 어느 하나라도 잃는 것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들이 잘려나가는
순간 그들에게는 생명을 담아두는 육체라는 그릇에 구멍이 뚫리
는 셈이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무의미함이라고 부를 만
했다.
전날 내가 몸을 굽혀서 그것들을 살피고 있는 동안에, 영문을
알지 못했던 주인은 죄라도 지은 듯한 표정을 짓고서 내 곁에 엉
거주춤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는 내가 보고 있을 때에는
결코 수족관 속에 짐게를 집어넣지 않았다. 그날도 그는 내가 다
가오는 것을 발견하자 얼른 집게를 든 손을 등뒤로 돌리고서 다
른 쪽 손을 들어올려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수족관이 내다보이는 자
리에 앉았다. 해물을 다루는 허름한 식당 특유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침에는 산 것이든 익힌 것이
든 생선의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식당을 출입하면서부
터 나는 아침 식전이라고 하더라도 심한 비린내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는데, 텅 빈 속을 뒤집어놓을
듯한 그 냄새는 강한 휘발성 액체처럼 나의 뇌를 깨어나게 했고,
그때마다 나는 다분히 비장한 심정이 되어 그 냄새를 콧속으로
깊이 들이마시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주인은 내게 그동안 적조했다느니 얼굴을 잊을까봐 애가 다 탔
다느니 하는 말을 주워섬기며 상을 훔치고 물잔을 가져오고 하느
라고 부산히 움직였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이 장삿속에서 나오는
의례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에 굻주려 있
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입 안에 들어 있는 그 많은 말들을 특히
내게만 털어놓으려 했다, 그는 내가 아침에 식사를 하러 오건 저
녁에 술을 마시러 오건 가리지 않고 유독 나를 붙들고서 자기 나
름의 장광설을 펼쳐서 그를 아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어리둥절
하게 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내가 그의 연인이라고까지 농담삼아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나의 환자였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에게 내가 치료해줄 수 있는 질환이 따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나의 환자라는 말로밖에는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환자가 의
사를 대하듯 자신의 신상에 관계된 모든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
놓으면서 때때로 내게 매달리고 의지를 하려들기도 했던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런 그가 부담스러웠다.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
는 것이라곤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
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나를
만날 때마다 그런 태도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로서는
여하튼 그가 나의 환자였기 때문에 그냥 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그가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서 주방을 드나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너무 둔하고 굼뜨다
고 자주 놀려댔다. 그의 나이가 아직 비교적 젊은 편인데도, 벌써
부터 노인네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가 몸을 굽혀서 물건을 집어들 때 허리를 뻣뻣하게 세운 채 엉덩
이를 약간 뒤로 빼고서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곤 하는 것은 영
락없이 뼈가 굳은 늙은이의 행동거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오히려 자기 쪽에서
사람들의 그런 말에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가 그렇게 자세를 취하는 까닭은 그 편이 물건을 가장 확실히, 실
수없이 움켜쥐고서 들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었다. 더욱이 그는 나름대로는 자신이 제법 효율적이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사람이 느릿느릿 걷
는다고 해서 공연히 쭈뼛거리는 것으로 볼 수는 없듯이, 자기도
그와 같은 경우라고 했다. 그러니 그로서는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을 때마다 자주 혼란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면
다시금 사람들은 그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조로증의 한 증상으
로 판단하여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그는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다, 그 밑
도 끝도 없는 많은 불만은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말이 되어 내 위
로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그의 말에 귀를 열어놓고 앉아 있을 때
면, 나는 어김없이 그에게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고 무엇인가
에 굶주려 있는 기색을 발견하곤 했다. 나는 그가 여러 직업을 전
전하던 끝에 얼마 전까지도 개인택시를 운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증상이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는 심한 수전증으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말하는 방식에서 택시 운
전사들의 말버릇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날도 주인은 상 위에 음식이 다 차려진 뒤에 인삼주가 담긴
소주잔을 들고 와서 내 앞으로 슬쩍 밀어놓았다. 그러고는 내 앞
자리에 걸터앉아서 말문을 열었다.
이 세상이 과연 맹숭맹숭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라고 보시나요? 맨입으로는 마실 물도 없지요, 공기도 맨입으로
삼키기가 께름칙하지요? 텔레비전에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도무지 맨정신으로는 균형을 잡을 수가 없지요, 맨날 애써 세워놓
은 것들이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만 봐야 하는 데다가,
정치가라는 위인들도 서민들처럼 돈을 찾아 맨몸뚱어리를 굴려대
기는 매일반이고, 길거리나 학교나 맨손으로는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문화니 뭐니 하는 것도 뿌리가 뽑혀서 맨바닥에 나뒹굴고
있으니.....이러다가 세상이 대체 어디까지 갈까요? 대체 이런
세상에서 어찌 한순간인들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요?
그의 느닷없는 맨정신 타령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베어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내 머릿속에는
맨정신, 맨입, 맨손, 맨몸뚱이, 맨바닥, 맨날 따위의 (맨)이라는 접
두사가 붙어 있는 단어들만이 남겨져서 빙글빙글 맴을 돌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곧 나는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만약 방금 전과
같은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면, 당연히 나는 그가 제법
쓸 만한 유머를 구사한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결코 말장난을 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세상에 대해 자기 나름의 비분강
개를 터뜨리고 그 절절함을 강조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
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진지함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맨)으로 시작되는 말들이 남긴 그야말로 맹숭맹숭한
여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말들은 이를테면 계속 새로
이 맨몸으로 다가와서 나의 맨살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
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 느낌은 그리 거북하거나 불쾌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어딘지 속을 메슥메슥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내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 대신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서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건너다보니, 그도 또한 평소처럼
정색을 한 얼굴로 나를 빤히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치뜨여
진 그의 눈은 내게 자 그러니 자기 말에 어떻게든 대답을 해보라
는, 아니 그보다는 나보고 이런 세상에 대해 어떻게든 해보라는
뜻의 말을 담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는 나 자신의 이런 미지근하
고 모호한 태도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 곁에 붙어앉아서 말
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날더러 어떻게든 해보라고 촉구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눈
빛이야말로 그가 나의 환자라는 사실의 엄연한 증거였다.
그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내느라고 나는 밥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기계적으로 수저를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여
러 가지 반찬을 앞에 두고 공연히 맨밥을 먹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때 차라리 다행스럽게도 그가 갑자기 어조를 좀더 높여서 말
을 이었다.
아니지, 이런 세상에서 어찌 한순간인들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냐고 물을 게 아니지요 맨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버터낼 수
가 있겠냐고 물어야지요. 그렇지요, 세상이 그러니 더더욱 맨정신
으로 버터내고 견뎌내야지요. 그저 그러는 수밖에 없지요. 언젠가
도 얘기했지만, 지금이야말로 나를 지키고 그래서 살아남아야지
요. 하지만 당장 내 앞에는 커다란 구멍이 패여 있어요. 내가 현
실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몸뚱어리가 그 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몸을 부딪쳐보아도 그 구멍을 빠
져나갈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어쩌지요? 내가 내 몸뚱어리를 포기
하지 않는 한 그 구멍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어
찌해야 할까요? 내가 내 몸을 포기해야만 그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이 지독하게도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나요? 그런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혀요. 숨조차 내 목구멍
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지요. 그러니 이러지도 저
러지도 못하고 내 맨발바닥에는 오물들만 밟히고 있으니 어쩌지
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서 좌우로 설레설레 저
어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무래도 오늘은 처음 시작부터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이 평소처럼 신변잡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대신, 그날따라 유난히 힘겹게 자기를 뒤
집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때 나의 눈길은 머리카락이 반쯤 벗겨진 그의 머리에 자연스
럽게 머물렀다. 나는 머리카락을 번뇌초 혹은 무명초
라고 부른다는 것을 기억했다. 무명이란 번뇌의 근원에 해당
되는 상태이므로 두 말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승려들이
삭발을 하는 것도 그 번뇌를 제거한다는 의미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속세에서는 번뇌가 무성하면 머리가 빠진다고 하
니 이 또한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다시 수저를 들려 할 때, 뜬금없는 생각 하나가 내 머리를 스
쳐 지나갔다. 기왕에 맨발바닥이라는 말까지 나왔다면 맨대가리
라는 말은 왜 안 나오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나는 그에게 (정 힘들면 맨대가리를 땅에 콱 처박
아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나는 기발
하기는 했어도 엉뚱하기도 한 그 발상을 애써 내리누르고서 자
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계산을 치르기 위해 돈을 내밀자, 그는 거스름돈을 건네주
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나 이전의 누군가도 그러
했듯이 마침내 더이상 자기의 수다를 참아내지 못하고서 서둘러
떠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내려 하는 듯했다. 내가 아무런 반
응도 보이지 않자, 그는 볼멘 목소리로 불쑥 이렇게 말했다.
아마 모르실 겁니다. 모르실 거예요. 항상 내게 이렇게 잘해주
시면, 나는 화가 납니다. 이건 오만이 아닙니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자꾸 이러시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화
가 납니다.
그는 정말 화가 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고, 나는 어이가 없어
서 입이 벌어졌다. 실로 그는 심각한 환자였다. 그런데도 그의 의
사인 나는 그가 앓고 있는 병의 정확한 원인을, 그의 비밀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
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을 못 하
는 것이 특히 큰 미덕일 수 있었다. 그들은 유사시에 타조처럼 땅
속에 머리를 박고서 다른 소리로부터 귀를 막아버릴 수 있었다.
그 편이 차라리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
는 가장 좋은 방법일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방금 전에 그
에게 맨대가리를 땅에 콱 처박으라고 말해버리고 싶었던 것도 그
런 까닭에서였다.
나는 난감함에서 비롯되는 마음속의 동요를 감추고서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유지하며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내 뒤를 바싹 따라오더니 갑자기 몸을 약간 굽혀서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앞이 막혀버린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평소
에도 그는 헤어짐이 임박하면 항상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이렇듯 돌발적이면서 다분히 공격적인
행동을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몸을 비키는 대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약간 숙인 채로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우리는 각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동
안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낯선 기운에
의해 나의 시야가 갑작스럽게 선연히 씻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의 머리 주위에서 새벽에 보았던 푸
르스름한 후광이, 아우라가 피어올라 주위로 번져나오는 것을 보
았다. 그 모습에 나의 눈까풀은 푸르르 떨렸고, 나의 온몸은 전율
감에 쉽싸였다. 나로서는 왜 이런 광경이 돌연히 눈에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의 머리로부터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 빛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만약
내가 거기에 손을 댄다면, 당장 찌릿찌릿 전기가 통할 것 같았다.
그만큼 그 빛은 내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곧 나는 그 상태를 더는 견뎌낼 수가 없게 되었다, 나를 바라보
는 그의 눈동자도 제풀에 놀란 듯 더욱 크게 팽창되어 있었다. 그
눈도 견디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그의 몸을 옆으로
젖히고서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내게는 달리 행동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 하여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머릿속의 혼란은 여간하여 가라앉지 않았다. 나
는 아우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렇
다고 일부러 나서서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존재하
든 존재하지 않든간에,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갑자기 눈에 보인
다는 것은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자꾸 왼쪽으로 쏠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으며 오른쪽으
로 붙어서 걸음을 옳겼다. 여전히 눈에 방금 전에 보았던 빛의 여
운이 남아 있었던 탓에 앞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이 모
든 것이 일상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우연하고도 착란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제는
더이상 그 누구에게서도 후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볼 수도 없었고 보지도 말았어야 했을 것을 보고야 말았다. 나는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었으며, 무엇인가에 쫓기듯 더욱 빨라지는
발걸음을 늦출 수도 없었다.
그날, 사무실에 돌아와서도 나는 내가 본, 아니 내 눈에 보인
그 빛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시각이 왜 그
런 이상 증상을 겪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아무래도 하
루가 내내 이상한 일들로 점철되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을 뿐이
었다. 그러나 내가 미리 감지한 그 이상함 속에는 호기심이나 흥
미로움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고, 오직 혼란스러움과 어리둥절함
만이 가득했다.
식당 주인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세심하게 돌아보자니, 한 가
지 분명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그토록 맨정신이니 맨
발바닥이니 하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나는 맨귀를
열어서 그의 맨혀가 발음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맨몸으로 다가가지도 않았고, 맨마음을 드러내지도 않았
던 것이며, 아마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었
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어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오후가 되면서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잠시 자리를 비
웠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복도에서 나를 찾아온 방문객을 만났
다 그는 내 앞에서 사무실 쪽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부르는 대신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
리고 있는지 그의 머리카락과 상의 어깨부분이 젖어 있었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쉴새없이 좌우로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흔들고 다리를 건들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연극을 하면서 비록
엑스트라로나마 간간이 영화에도 출연하곤 하는 나의 친구였다.
먼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창문 옆의 내 자리가 비어 있
는 것을 보고는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나는 그의 등을 한번 툭
치고서 창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그는 멋쩍은 듯이 다시금 과장
되이 몸을 흔들며 내 뒤를 따라왔다. 이윽고 그는 내가 권한 옆자
리의 의자에 걸터앉아서 상채를 뒤로 젖히고는 발을 쭉 뻗었다.
나는 그의 심기가 그리 편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하면서 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 기미
가 보이지 앉자 심드렁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전 내내 전화통만 붙들고 있었어. 적잖은 전화를 받
았고, 내 쪽에서도 그만큼은 걸었어.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느끼
곤 해. 전화벨 소리는 정말 도발적이라고. 하기야 우리가 전화로
나누는 말도 거기 못지않게 도발적이긴 하지. 대화라는 게 대부분
우리 의지나 본심과는 상관없이 꼬이고 얽히고 하면서 오해를 낳
는 쪽으로 치닫다가 문득 서둘러 끊어지곤 하는 법이니까. 오늘
통화한 내용이 거의 그랬어. 연극 홍보관계 일이라는 게 원래 그
렇잖아. 전화가 불쾌한 여운을 남기면서 끊길 때마다 나는 뚜뚜
소리를 내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한동안 멍청히 눈을 껌벅거
리고 있어야 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상대방이 이
미 전화를 끊은 게 분명한데도, 저쪽에서 하는 말이 들려오기 시
작한 거야. 이미 차단된 전화선 너머에서 상대방이 수화기를 내려
놓은 뒤에 뇌까리는 마지막 몇마디 말들이 내 귀에 들려왔던 거
야. 나는 너무 놀랐고 당연히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
게다가 그 말들이 하나같이 욕설이나 빈정거림뿐이어서 더 황당
했고 참담했지. 그 말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어. 빌어먹을. 한심
한 녀석. 이자식이 언제부터 이렇게 엉망이 됐지. 정신차려, 임마.
이미 너무 늦었어.
그런 일이 매번 어김없이 반복되었는데, 방금 전에 서로 아무리
화기애애하고 우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뒤라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어. 내가 듣지 못하리라 믿고서 상대방이 혼자말로 하
는 말들은 예외없이 나를 조롱하고 야유하는 소리들이었지. 마치
전화기에 입이 달려서 제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 같았어, 나는 내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지. 처음에 나
는 그것들을 환청이라고 생각하려 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환청이
라기보다 나 스스로 내 속에서 만들어낸 말에 가까운 거겠지만
말이야. 어처구니없게도 내 속에서 들려온 말에 내가 오히려 놀라
고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돌아보는 꼴인 셈이었지. 누
구 들은 사람은 없나 하면서. 하지만 어쨌든 전화가 끊길 때 내
귓전에 남아 있던 어떤 여운이 그런 말로 바뀐 건 사실이었어. 나
는 대화가 어이없이 끝날 때마다 나 혼자 마치 끝말 이어가기를
하듯이 내 식으로 상대방의 마지막 말을 붙들고 늘어지곤 했던
거야. 그렇게 해서 그 말들을 찾아낸 거지. 결국 그래서 나는 차
라리 그렇게 믿기로 했어. 내가 들은 말들은 모두 사실이라고 말
이 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전화를 받으니 마음이 훨씬 편해지더군. 그
리고 세상살이라는 것도 좀더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어.
따지고 보면 끊겨진 전화선 저편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초능력에 해당되는 거지. 초능력이라는 게 뭐 별거겠어. 자기
를 넘어서면 그게 초능력이지. 물론 나도 알고 있어. 이건 모두
나의 피해의식의 소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세
상사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상은 우리가 다가가면 다시 그
만큼 멀어지는 법이지. 어쨌든 오늘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이런
장면을 그리고 있었어, 누군가가 정확히 내 정수리를 겨냥하여 커
다란 칼을 내리치는 거야. 그때 내 손에도 칼이 하나 들려 있어
서, 나는 반사적으로 그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상대방의 칼을
막아내지. 그러자 칼날이 부딪치는 깡 하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만큼 크게 일어나고 커다란 불똥이 튀어서 시야를 덮어버리는 거
야. 오늘 하루는 그렇게 지나왔어.」
그는 말을 하는 동안 불면증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몸을 뒤챘다. 나는 손으로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를 뒤적이고 있었지만, 옆눈으로 계속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는 예전부터 그가 의심이 특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먼저 그 자신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때로 공격적인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위인이었다.
나는 그가 전화를 끊는 척하면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는 풀섶
에 매복한 병사처럼 숨을 죽이고서 적의 동정을 살핌으로써 상대
방이 무심히 내뱉는 말을 잡아내려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끊겨진 전화선을 이어가면서까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
의 분노감에 다름아니었다.
며칠 전에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전화기의 자동응
답장치에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몹시 격양된 어조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니 아무
도 자기에게 전화를 걸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말이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중간에 전화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때
이미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내게 욕설이나 다름없이 들렸으며,
이제 상황이 반전되어, 아니 악화되어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
터 욕설과 다름없는 야유와 조롱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서 다짜고짜 답답해서 미칠 지
경이라며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동응답장치에 들어 있던 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타인들을 앞에 놓고 직접 입에 담을 자신이 없었던 말을 그 장
치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니, 비록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다 해도 듣지 않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여
하튼 그는 전화에 대고 엉뚱하게도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 집
에 돌멩이라도 던질 것이고, 거리에 나가 강도짓이라도 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때 나는 얼마 전에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보았던 몇개의 장
면을 기억했다. 출연이라기보다 잠간 얼굴을 비친 것이었는데, 그
가 맡은 역은 점잖게 차려입은 회사 간부로서 곤경에 처한 여주
인공을 힐난하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한순간 화면 가득 클로우즈업되었다가 사라진 거만하다
못해 능청스럽기까지 한 그의 얼굴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느끼고 있는 크나큰 피폐함과 외로움을 감지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그가
내게 도와달라고 협박까지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주어진 일을
하고 나면 나중에 도리어 내게 화를 낼 것임이 분명했다. 그동안
그가 보여준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어떤 종류의 일을 주선해주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이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그에게 의류업계의 광고 제작용 사진을 찍도
록 권했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 옷을 벗기도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그는 거의 즉각적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서 그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멀지 않아 나를 힐
난하는 말로 바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었
다. 기왕에 그의 외로움이 경제적인 궁핍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고
그로 인해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 일이 저질러진
후에 우리가 함께 겪게 될 굴욕감은 그런대로 견뎌낼 수 있는 성
질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진을 찍었고, 다음날 이렇게 나
를 찾아온 것이었다.
전후 사정이 그렇긴 했어도 나는 그가 사진 제작작업을 어떻게
마쳤으며, 지금 어떤 심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 어제 오후에 사진을 찍었어. 한마디로 고역이었지. 무엇
보다도 셔터가 눌려질 때마다 울리는 찰칵찰칵 소리가 견디기 힘
들었어. 그건 마치 가위질소리와 흡사했어. 여러 개의 가위가 내
주위를 떠돌면서 속옷을 베어내고 살점을 썩썩 잘라내고, 얼굴에
억지로 띠고 있던 미소까지도 도려냈지, 나는 선 채로 도륙을 당
하는 한 마리 소 같은 신세였어. 하지만 너한테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니, 이미 불평을 한 셈이지. 도살당하는 소 꼴이었
다느니 뭐니 말한 게 이미 불평을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불평을 해야겠어. 이런 식으로 불평을 하면 너도 참아줄 수 있을
테지. 하기야 사진을 찍는 일이라는 게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거
와 크게 다를 바가 없지 특히 자기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대가로
비로소 간신히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게 그래.
젊은 여자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동안에 나는 오래 전부터 상
상해왔던 장면 하나를 줄곧 눈앞에 떠올리고 있었어. 어느 희극배
우가 연극이 끝난 후에 관객들 앞에 나가서 허리를 굽혀 박수와
환호에 답하고 있어, 배우가 상체를 들려 하면 관객들은 다시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박수를 쳐. 배우는 어쩔 수 없이 더 몸을
숙여야 하고, 그러면 관객들은 더 요란하게 반응을 하고, 그러다
가 결국 배우는 바닥에 엎어져버리는 거야. 내가 바로 그 배우였
어. 아니, 살아 있는 한 누구든 세상 앞에서 그 배우의 처지에 있
는 셈이겠지. 여하튼 사진을 다 찍고 났을 때, 나는 완전히 해체
되어버린 심정이었지. 내가 몸에 걸치고 있었던 한 뼘짜리 천과
살덩어리가 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남아 있는 것은
그 소리, 웃기는 얘기지만 어렸을 적에 자주 들었던 엿장수 가위
질소리와 너무도 똑같은 그 소리뿐이었어. 굴욕감이니 수치심이
니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고, 단지 그 소리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내 귀를 후벼대고 있었지.
그가 말을 마쳤을 때, 나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그의 머리 주위에는 불그스름
한 빛의 기운, 후광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 투명한 형체에서 눈
을 뗄 수가 없었다. 위험에 대비하여 주위를 살피는 새처럼 머리
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던 그는 잠시 후에 나의 시선을 의식하
고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계속 그를 보았고,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내 눈길을 받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후광을 보고 있었던 것이며,
잠시 후에 그도 내 눈의 초점이 자기의 얼굴이 아니라 그 주위에
맞춰져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힐끔 뒤를
돌아보고 나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바라는 걸 보니 꼭 관음증이 있는
사람같이 생각되는군. 남의 정사 장면을 엿보려고 노리는 변태성
욕자 말이야. 물론 그런 자들치고 너처럼 썰렁한 눈빛을 가진 사
람은 아무도 없겠지.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딜 가나 그런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게 사실일 거야. 그런데 내가 왜 하필 너한테서까
지 그런 눈길을 감수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가 갑자기 당황하여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음을 감지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도 없었고, 그렇
다고 내가 왜 그를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지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후광 운운하는 말을 하면, 그는 더욱 당혹스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는 눈길을 돌려서 나를 외면하는 쪽을 택
했지만, 내가 계속하여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어이가 없고 기
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러기를 몇번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후광은 색조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자기의 모든 것을
간파하려고, 아니 이미 간파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그는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흥분된 목
소리로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복화술사처럼 말
한다고 생각해왔지.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뱃속의 울림으로 소
리를 낼 뿐이면서, 실제로 말을 하고 있는 듯이 위장을 하고 있다
고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었어. 나는 또다른 많은 사람들이 립싱
크를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지. 미리 녹음된 말이나 노래에 맞
추어 입을 뻥긋거리기만 하는 걸 립싱크라고 부른다는 걸 자네도
알 테지만,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실상은 립싱크에 불과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거야.
자주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던 탓에 나는 남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
어.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우리가 복화술사든 립싱크를 하는 가
수든간에, 어쩌면 그런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우리 각자의 진심이라는 건 여하튼 엄연히 존
재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보자면 말이 어떻게 나오느냐를 가지고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하찮은 일일 수 있는 거지.
게다가 하찮은 일로 쉽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막상 하찮지 않은,
더 중요한 일로는 상처를 입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겠어?
나는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어,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사정이 달
라지는 건 아니었어. 그 결과로 나는 오히려 매사에 과격해지고
말았어. 아슬아슬하게 함정을 비켜나간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잖
아. 무엇보다도 나는 자기가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인
간들을 혐오하게 됐어. 그 자들이 스스로 그럴 듯하게 갖춰놓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모두 남들뿐만 아니라 자기자신까지 기만하
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는 거지. 그
래서 나는 점점 더 과격해져서, 되지도 않는 말을 떠벌리고 무모
하게 세상을 떠돌며 시간을 낭비했지. 한마디로 나는 떠돌이였고
떠벌이였어.
전부터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문제아라고 말했지. 하지만 내
가 문제아라고? 아니야, 나는 그저 애벌레 같은 존재였을 뿐이야.
나는 애벌레처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이리저리 기어다녔지. 그러니 자연히 세상은 내게 너무
도 넓고 복잡한 미로였어 세상이 미로라니! 세상은 당연히 미로
지. 나는 수시로 이 말을 반복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두 가지 느
낌을 동시에 받았어. 세상이 미로여서 정말 고통스럽구나 하는 것
과 세상이 미로여서 정말 다행이구나 하는 게 그거였어. 나는 미
로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실제로 호흡이 편안해져서 날아오
를 것 같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숨이 막혀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기도 했어. 그동안 나는 그 두 느낌 사이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셈이야.
내 심정이 그렇게 모순되어 있다보니, 나로서는 매사에 갈팡질
팡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서
도 그대로 드러났지, 너만 해도, 내게는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었
던가 하면 경계와 의심의 목표물이기도 했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한테만은 처음부터 특별한 감정을 느껴왔어. 결국 네가 내게 이
런 말까지 하게 만드는군. 그래, 기왕 말이 나왔으니 끝까지 하도
록 하지. 나는 내가 너한테 때로 구차하게까지 의존하는 것이야말
로, 내가 네 앞에서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왔어, 그 편이 우리의 관계를 유지시켜줄 테고, 내가 너를
멀리해서 우리 사이가 벌어져버리고 말면 그때는 정말 비참해져
버릴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거야.
나는 그런 나를 혐오했고, 그런 너를 사랑했어. 너를 사랑함으
로써 나는 나 자신도 조금은 사랑할 수 있었던 셈이지. 부끄러움
과 미안함을 넘어서서 너는 나였어. 앞으로도 나는 내내 이럴 수
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 매순간이 너무도 힘이 들고 고통스러워.
인간의 심장이 뼈로 이루어졌거나 그곳에 단지 몇개라도 뼛조각
이 들어 있었다면, 아마도 내 심장은 으스러지거나 쪼개지고 말았
을 거야. 심장이 단백질덩어리로 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
운지 모르겠어, 하지만 달리 어쩔 수도 없으니, 나는 내친김에 더
멀리 나갈 생각이야. 그러면서 내 눈물로 부족하면 눈을 뽑을 것
이고, 내 말로 부족하면 혀를 뽑을 것이야, 나는 널 사랑해.
그가 말을 마치고서 가쁘게 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말대로 그가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 과격해지고 있음을 느
꼈다. 내게는 그 격한 말을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후광이, 그의
아우라가 그를 대신하여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자기
도 모르게 너무 많은 말을 쏟아놓고 나서 그가 스스로 황망해하
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광은 더욱
선연히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머리에 불이 붙은
듯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눈알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때 그가 자리를 박차듯 벌떡 일어나서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자리에 앉은 채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뒤따랐다. 그는 올 때처럼 부산한 몸짓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그런 행동에 눈알을 하나 박아넣고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하든 반쯤은 자기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서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
곤 했다. 그것이 그의 주된 특징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는 남들뿐
만 아니라 자기자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 누구
도 자신의 아우라로부터 자유로을 수 없듯이. 아마도 방금 전에
그는 더이상 나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
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머리로 뻗치는 기운을 더이상 감
당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친구가 다녀간 후에, 나는 남들의 아우라가 눈에 보이는 일이
계속하여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더욱 절실히 예감했다. 연쇄
적인 모든 것은, 심지어 연쇄살인까지도 그다지 논리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떤 논리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
건 자체의 진행을 돕는 형식적인 혹은 비어 있는 논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내 삶의 모델들을 생각했고, 나의 관음증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의 허기진 관음증은 이 정도로 만족되지 않
을 것이고, 내가 겪고 있는 이상 증세도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나는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다양한 의식을 가
진 인간이었다.
비는 그쳤다. 그러나 점점 더 어두워져가는 실내의 공기는 그
눅눅함 또한 더해가고 있었다. 아까 창 밖을 지나는 전화선에 수
없이 많은 투명한 물방울들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잠시
후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의 다 떨어지고 불과 몇개만이 남아 있
었다. 가로수의 이파리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제
법 불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일찍 사무실을 나와서 도시 외곽에 있는 한 대학으로 갔
다. 나는 정문 근처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어둡고 텅 빈
복도를 따라 걸었다. 비가 온 뒤라 텁텁하면서도 습기찬 먼지의
냄새를 풍기는 복도는 영혼이 빠져나간 뒤에 육체 속에 생겨난
음산하고 허전한 동공과 흡사했다. 연구실들이 있는 사층까지 걸
어서 올라갔을 때, 내 몸보다도 나의 시선이 먼저 지쳐서 바닥에
낮게 깔린 채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교수는 방에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
었다. 나는 그가 불과 얼마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사실에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탁상용
전등을 켜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반투명의 전등갓을 투과
한 빛이 그의 상체를 감싸서 그 자체로 은은한 빛의 원륜을 이루
어놓고 있었다. 그는 내게 문 옆의 스위치를 올려서 형광등을 켜
달라고 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켜진 후에 그는 탁상용 전
등을 껐다. 그때 나는 방금 전에 보았던 빛의 원륜이 거의 사라질
듯하다가 그의 머리 둘레로 모여들어 어렴풋이 살아남는 것을 보
았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미처 마음의 준비
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일찍 그의 후광에 접한 탓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더욱이 그에게서 풍기
는 분위기에서도 전과는 사뭇 다른 데가 있었다. 구석진 곳에 몸
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상처를 입고서 눈에
불을 켜고 굴 밖을 내다보는 짐승과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인상
때문인지 그의 아우라도 또한 음산한 기운을 내비치고 있는 듯
이 보였다.
내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책과 종이뭉치 따위를 뒤적이고 있던 그는 손길을 멈추고서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그가 내게서 이상한 기미를 발견했음
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나의 태도에서 의아함을 느끼
고 있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좀더 본질적인 모종의 변
화를 내게서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
며 안경 너머로 나를 찬찬히 살폈다, 잠시 나는 혹시 이제 나의
아우라도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가 그것을 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부터 나는 까닭 모르게
머리 쪽에서 일종의 더운 기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줄곧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니, 이윽고 고개
를 저으며 정색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에 마주앉았을 때, 그가 내게 원고가 든 봉투를 내밀며 말
했다.
영상매체가 기승을 부려서 새로운 문맹의 시대가 도래한 마당
에 이런 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군, 이제 문자는 점점 더 점
성을 잃어버려서 단순하고 간단한 기호로 전락해버리고 말
거야. 글이라는 게 말라버린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아무도 그것으로 뭔가 복잡하고 정교한 것을 빚으려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될 테고, 그저 그때그메 조각으로 떼어내서 필요한
곳에 소모해버리면 그뿐이겠지. 복제 가능시대에는 복제 가능한
것만 선호되어 살아남는 법이고,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서 결국에는 도태되어버리게 마련이야.
나는 그가 요즘에 여러 가지로 궁지에 몰리고 있음을 알고 있
었다. 그는 소송에 걸려 있었다. 얼마 전에 그가 일간지에 게재한
칼럼이 문제가 되어 모 사회단체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당
한 것이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번 소송은 그에게 유리하지
만은 않다고 했다. 게다가 그가 동료 교수들과의 사이에서 겪고
있는 심각한 불화는 이미 공공연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부터 독단적인 수업방식으로 인해 학생들과의 사이에 갈등을
빚곤 했는데, 이번에 특히 심하게 충돌을 일으켰고, 그것이 학교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적만큼이나 그의 지지
자 또한 많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벌어진 안팎
의 싸움은 간단히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몹시 지쳐 보였는데, 그 모습은 내게 의외였다. 내
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도 그는 항상 주위에 분란을 일으키며
다니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이처럼 지친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보기 싫은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듯이 내게 손짓으
로 어서 봉투를 가방 속에 집어넣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서, 대신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원고에 덧붙일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가 사진기
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대에 위협을 받는 게 비단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 우리에
게는 근본적으로 남들을 밀어내려는 힘이 있어. 그런데 그게 힘일
까. 그건 마치 지렛목도 없이 지렛대를 쓰려고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각기 중심을 잃어버리고 있어. 그런데도 주변의 모든 게
너무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이야. 그래서 요즘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 나이에 며칠씩이나 외부와의 관
계를 끊고서 죽은 듯이 잠을 자고 꿈을 꾸곤 한다네. 그러면서 무
수히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영상들, 상념들에 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곤 하지. 말하자면 내 머릿속의 바둑판 위에 하얗고 까만 바
둑알들을 가득히 늘어놓았다가 한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고서,
다시 놓기 시작하는 것이네. 기왕에 채워졌던 바둑판이 일거에 쓸
려나갈 때면, 고통스럽다 못해 공포감이 느껴지지, 하지만 나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계속하여 판을 짜
고 쓸어버리고, 다시 짜고 또 쓸어버리는 과정, 그렇듯 짓고 부수
고 다시 짓는 과정이 내게 삶의 교훈성을 부여할 테니까. 그런 과
정이 나를 교화할 테니까 말일세.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을 때, 나는 사진기를 집어들었다. 혹시
나의 그런 행동이 그의 말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
지 않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로 하여금 일부러 자세를 취하게
하기보다는 지금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두는 편이 그에게도 편
할 듯했다, 게다가 바깥은 벌써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
다. 내가 사진기를 눈에 가져다대자, 그는 순간 노려보듯 경직된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했다. 그는 자기가 나름대로 진정어린 말을
어렵게 꺼내놓고 있는 중에, 내 쪽에서 볼일을 챙기려 하는 데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행동을 돌이킬 수 없었던 나는 파인더 안
에 그의 모습을 정확히 가두었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 더 정확
히 말하자면 그의 아우라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 방에 들어설
때 첫눈에 이미 내게 보이고 있었던 그 아우라가 이제 바람에 가
물거리는 작은 불씨처럼 깜박깜박 점멸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꺼져가는 생명의 빛처럼 가물거리고 있는 그 아우라에서 그가 애
써 가리고 있던 표정, 절망적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다, 그리
고 그제서야 나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좌절감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진기를 든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 상
태에서 플래시를 터뜨렸다가는 그의 아우라뿐만 아니라 그의 존
재 자체가 강한 빛 속으로 빨려들어 일순간에 사라져버릴 것 같
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태로라면 나중에 현상을 한다고
해도, 아우라는 사라지고 그의 절망적인 표정만이 남게 될 터이
니, 그 사진은 현실적으로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었다.
그는 다시금 자기로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표정에
접하여,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혹은 공연히 감정을 드러냈다고 자
책하는 사람처럼, 머쓱해하는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
는 내가 사진기를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고 난 후에도 한동안 사
이를 두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나는 은퇴를 고려하고 있네. 그러기에
는 아직 이른 나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당분간 쉬면서 주변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 너무 늦기 전에 말이야. 지난번에
동유럽에 갔다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몬테네그로 공화국에 들렀
던 적이 있었지. (검은 산맥의 주민)이라고 부르는 그곳 사람들은
당시에 특히 강력했던 투르크와 베네치아의 침략을 막아낼 정도
로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싸움에 임하여 공포의
감정을 보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여장을 시켜서 산 밑으로
내쫓았다고 하더구만. 은퇴를 결심하려고 하니, 웬지 그 이야기가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세상에 대해
터무니없는 적개심이 들끓게 되고 말일세. 물론 그 적개심이 과연
용기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나의 죄의식이 변형된 것에 불과한
건지 나도 잘 모르지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게는 오래 전부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한 친구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내 적개심은 유독 그 자에게로
향해 있어. 나도 잘 이해할 수 없기는 해도 여하튼 그동안 그 자
의 존재는 나의 뇌리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네. 물론 그 자
가 내게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끼친 건 아니야. 그 자를 볼 때면
매번 나는 뜬금없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연상하곤 하네. 도스토예
프스키의 소설은 가장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고 있는 문학의 전범
과 같은 것이지. 하지만 엄청난 상상력을 가지고 인간의 극단적인
모든 점을 다를 줄 알았던 그 소설가가 만약 지금 나와 식탁에
같이 앉아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가 쓴 한 소설에서 주인공이
어느 귀족의 코를 잡아 비틀었듯이, 나도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코를 비틀었을 것이네. 어쩌면 뺨까지 때렸을지도 모르지.
그와 비슷한 심정을 나는 그 친구에게 느껴왔네. 그 자는 항상
유령처럼 내 곁을 떠돌면서 내게 영향을 미쳐왔지. 그 자는 나의
전폭적이고 항구여일한 동조자인 동시에 가장 힘겨운 경쟁상대이
기도 했어. 나는 내가 그를 능가할 때 행복했고, 그의 기대에 미
치지 못할 때 불행했네. 내가 지금까지 얻은 대부분의 것들은 그
자로 인해 가능했던 셈인데, 하지만 그 자 때문에 나는 결코 멈출
수도 없었지.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도, 현재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유발한 것도 바로 그 자였네. 그래서 이제 나는 누군
가에게 하나쯤 있게 마련인 그 존재를, 나의 분신이자 동반자이기
도 했던 그놈을 죽여버리고 싶네. 그래서 뭘 어쩌려느냐고 묻고
싶겠지? 물론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지, 하지만 오랫
동안 공들여 짜온 판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이상, 나로서는
그 자를 없애버려야만 뭔가 새로운 판을 짜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내게는 무엇보다도 용기가 필요하다네. 큰
일을 앞두고도 자기도 모르게 위법행위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
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 소시민들의 일상이니까. 혹시 자네가 과대망상과 편집증을
가지고 있다면 내게 그걸 좀 빌려주게. 아니야, 나는 이미 너무
늙었어. 내 힘으로 나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어. 그러니 그 일을
자네가 해줄 수 없겠나? 자네가 나를 위해 그 자를 죽여줄 수 없
겠어? 그 대신 나는 내 영혼을 팔아넘길 준비가 되어 있네. 그렇
게 해서라도 나는 그 자가 죽는 걸 보고 싶네, 아마도 그 자가 숨
이 끊어질 때 자네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걸세. 못된 생명은 죽을
때도 유난히 버둥거리는 법이니까.
그의 말은 당장이라도 끊어져서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 듯
하면서도 포복을 하듯 조금씩 끈질기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말을 하는 동안에 그의 아우라가 점점 더 흐릿해져가
고 점점 더 자주 깜박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삶의 기력이 천천히 소진되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기분이 상하여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말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 따라 나도 팽
팽한 긴장감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자네는 지금 지옥의 사자와 같은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있군.
마치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듯이 말일세. 하지만 내 말을 소홀히
듣지는 말게.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는 온갖 악덕을 저
지른 애비를 둔 아들과 같은 존재야. 그러면서도 막상 그 애비는
부재하고, 단지 막중한 죄과와 존재의 하중만이 남아 있지. 그렇
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누구든 자기를 내던져
서 응징할 것은 응징하고 제물을 삼을 것은 제물로 삼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나는 자네를 설득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아니야, 모두 부질없는 소리
일 뿐이야.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
거기까지 말하고서 그는 갑자기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는 듯 내
쪽을 향해 팔을 내저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말을 대신해버린
그 순간, 나는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후광이
마침내 꺼져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게는 그의 아우라가 죽어
가면서 내는 그르릉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섬뜩함에 흠칫
몸을 떨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서 창백하게 질렸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은 바로 자기자신이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또다른 자아를 죽이려들다가, 결과적으로 방금 자
신의 아우라를 죽이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에 그가 한
말들은 그의 아우라가 숨이 끊어지면서 계속하여 내지른 비명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보다 더 크게 놀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아우라
가 사라진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듯 눈을 커다랗게
치켜뜬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는 현기증이 느껴지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의
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탐색하는 눈길로 나를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그가 마지막 남은 힘을 그러모아 힘겹게 말을 이
어나갔다.
아니야, 가지 말고 잠시만 더 머물러주게. 솔직히 고백하지. 방
금 전까지 나는 관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을 죽이는 것도 불사하려 했지,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고 있었네. 하지만
이제는 잠시나마 내가 악몽과 같은 광기에 사로잡혔었다는 사실
을 깨달았네. 마치 먼길을 떠났다가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야.
그러니 내 걱정은 너무 하지 말게.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네. 그런데 오늘따라 자네는 어딘가 무척 이상하게 보이는군,
마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그건 자네 대학 시절에도
못 본 모습이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자네에게서는
뭔가 서늘한 기운이 눈에 잡힐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네. 그게
내게 힘을 준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방금 내 꼴을 보았
으니, 자네도 조심하도록 하게 큰 비밀을 가지려면 특히 행동에
유념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을 마치고서 그는 약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의 얼굴에 차츰 온화한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등을 벽에 붙이고 서서 나를 위해 문
을 열어주었다, 그와 악수를 하고서 헤어진 후에, 나는 발을 끌며
어둠침침한 복도를 걸었다.
건물을 나서니 바깥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계단 앞에 이르렀
을 때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나는 방금 전에 그가 본
것이 틀림없이 나의 아우라였을 것이라는, 그가 내게서 아우라를
본 것이 분명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적
으로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가 그에게서 아우라를
보았듯이, 나의 아우라도 또한 그의 눈에 보이기에 이르렀다는 사
실은 내 몸을 떨리게 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서 희뿌염한 빛을 감싸안고 있는 가로등
밑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나는 그곳에 서서 헝클어진 머릿속을 가
다듬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자신의 존재가 위협을 당한 까닭이
아우라가 쇠해졌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까 단말마에 처한 그의
아우라가 그를 대신하여 파괴적인 힘에 저항했으며, 결국 그가 아
우라의 경고를 받아들인 것임을 그는 알고 있을까. 그리고 간신히
정신의 균형을 되찾은 지금 그는 버려진 봉분에 풀이 돋듯 멀지
않아 자신의 아우라가 되살아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인가.
나는 아파트 문의 손잡이에 열쇠를 꽂았다. 시계바늘이 돌아가
듯 열쇠가 천천히 반바퀴를 돌았다. 나는 드디어 유난히 힘든 하
루가 끝났으며, 이제부터 시간은 죽은 뱀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 곁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지면
되었다.
실내에 들어섰을 때, 나는 불을 켜기 위해 습관적으로 벽에 붙
은 손잡이를 더듬었다. 그때 나는 이미 거실에 불이 들어와 있음
을 알았다. 나는 신발을 벗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에 나갈
때 불을 끈 것은 분명하므로, 내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가 방문한
것으로 생각해야 옳았다. 과연 소파 옆의 기둥형 옷걸이에는 연둣
빛의 여자 상의가 걸려 있었다. 그 옷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욕실의 창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안에
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을 들었다. 나는 욕실 쪽으
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그녀가 돌아와 있었다. 열홀 전쯤에 내
곁에서 사라져버렸던 그녀가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녀
는 더운 물을 이마로부터 온몸에 받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샤워중에 문이 열렸
을 때 태연히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증기와 계속하여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가
려진 그녀의 몸은 전등 불빛을 받아 반투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거실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교하
게 얽혀 있는 것 같아도, 사실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사라짐은 완
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이 세상의 특징이기도 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관문의
자물쇠를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떠날 때마다 이번만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면서도,결코 열쇠를 두고
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와서 그 열쇠가 아직 유효
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감격하곤 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어
느 정도 흘러서 그녀가 나를 떠났었다는 사실마저 내가 잊을 때
쯤 되면, 다시금 그녀는 열쇠를 바꾸지 않은 나를 저주하며 짐을
꾸리곤 했다, 우리의 이렇듯 다분히 파행적인 관계는 제삼자의 시
각에서 볼 때는 소모적이다 못해 희극적이기까지 할 것이었다. 그
러나 모든 희극적인 일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절대절명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듯이, 우리도 매순간 거기에 모든 것을 다 걸고서 한
발도 물러설 수 없었다.
집 안의 곳곳에서는 아직도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남겨놓은 자취
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내버려두고서 사라졌다가 그것
들이 채 치워지기도 전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얼마 후에 그녀가 가운을 걸치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빈 집에서 혼자 샤워부터 할 수 있
는 사람도 그녀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들어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횐색 가운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거실
과 주방 사이의 다소 어두운 공간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나를
정면으로 향하는 대신 왼쪽 어깨를 내 쪽으로 보이며 비스듬히
선 채로 말했다.
이 세상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흔적은 남고,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흔적을 따라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에요. 내게는 그 흔적이 적어도 추억이니
미련이니 하는 것들은 아니었어요. 그 대신 악몽이고 끔찍한 환
상이었지요. 추억과 달라서 악몽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당신 앞에 다시 서게 된 것도, 그리고 당
신에게 이렇듯 담담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것도, 그동안 수없이
우리 두 사람에 대한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에요. 악몽이 없었
다면 내게는 당신에게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돌아올 용기도 없
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는 달라요. 당신의 감정은 남들과 어울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간신히 뼈대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에요.
당신은 그 점을 가지고 스스로 신중하고 냉정한 편이라고 말하지
만, 애초에 당신 안에는 떨림판 같은 게 들어 있지 않아요. 있다
해도 성능이 영 부실한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바닷물
같은 존재예요. 아무리 당신을 껴안고 당신을 마셔도 당신에 대한
갈증이 가셔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갈급증만이 생겨날 뿐이지
요.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또 악몽에 쫓겨 당신 곁으로 왔어요.
당신이 내게 주술처럼 걸어놓은 갈급증 때문이지요. 그 갈급증의
끝에는 허상밖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나는 목이 메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나는 그녀가 전과는 태도를 달리하기로 작정했음을 알았다. 지
난번까지만 해도 그녀는 나를 뿌리치고 떠났다가 돌아올 때면 조
금은 내 심기를 헤아려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이 변했음을 밝
히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마치 자신이 항상 그 자리에 있
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내게 공세를 펴서 우리 사이의 어색한 분
위기를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녀가 하는 말
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말은 맞지도 틀리
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 또한 그동안 그녀를 붙잡은
것도 붙잡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며, 내 쪽에서 그녀를 내쫓은 것
도 내쫓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의 관계가 감정적인 우
여곡절 속에서 수시로 부침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내 앞으로 걸음을 옳겨서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나는 내심으로 조금 긴장했다. 머리가 뜨겁게
들쑤셔지는 듯한 감각이 여전하여, 혹시 그녀의 눈에도 나의 아우
라가 보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의 성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녀는 내게서 보이지 않던 것을
갑자기 보게 된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들 것이었다. 그
러나 그녀는 팔짱을 긴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때 아우라를 본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
락과 물기를 머금은 살갗이 맑고 투명한 인광을 발하는 것을 보
았다. 나는 그 빛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
다. 햇살과도 같은 엷고 얇은 후광에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은 물
속에 들어앉은 듯 아스라이 멀어져 보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
녀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울림으로 온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
을 느꼈다. 내가 그녀에게서 어떤 변화를 분명히 감지한 것도 그
때였다. 그녀는 이제 나를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계
자체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우리 사이
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만남과 헤어짐의 상황에 어떻게
든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당신은 내 감정체계가 물 먹은 스펀지 같다고 말한 적
이 있어요. 스스로 기꺼울 때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물을 흠뻑
빨아들여서 출렁거리다가, 약간이라도 의심이나 회의가 찾아들면
단번에 물을 꾹 짜내버리고서 가볍게 튀어오른다고요. 한마디로
내 감정이 두께가 너무 얇다고 탓한 거예요. 하지만 내가 스펀지
라면 당신은 기억상실증 환자예요. 내가 변덕스럽다면, 당신은 변
덕을 일으킬 힘도 여유도 없어요. 모든 게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갈
뿐이지요. 그건 단지 나한테만이 아니에요 작년에 내 친한 친구
가 죽어서 당신과 함께 문상을 다녀왔는데도, 당신은 며칠 후에
문득 그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요즘 잘 있냐고 물었던 사람이
에요. 그 일만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져요. 물론
당신 나름대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조금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결코
그럴 수는 없었을 거예요.
당신과 헤어질 때마다 나는 매번 이런 생각에 잠겼었어요. 이번
에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진 이 침묵은 영원한 것일까, 순간적인
것일까. 당신의 부재는 항상 그런 질문으로 내게 다가왔어요. 그
러다가 다시 만나면, 우리가 그동안 멀쩡히 살아 있었다는 게 기
가 막히곤 했지요. 나는 그렇게 고통받았어요. 당신에 관한 한 나
는 영원의 문제와 싸웠어요. 하지만 영원 운운하면서도 우리 각자
는 어차피 혼자여서, 이렇게 서로에게서 붙들 것이 아무것도 없다
는 게 너무도 끔찍해요. 우리는 모두 산 채로 이미 저승의 불에
살이 지글지글 타들어가고 있는 형국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쉬지 않고 바스락거리고 있는
거지요. 내게는 육체와 정신의 모든 움직임이 그저 바스락거림으
로만 여겨져요. 광기니 냉정함이니 전쟁이니 협상이니 하는 모든
것도 바스락거림의 일종으로 보이긴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나한
테 감정으로든 행동으로든 지속적인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주 말
했지요. 끝없이 뒤집히기만 한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온통 바스락
거림뿐인 세상에서 지속적인 것을 어디에서 찾나요? 그래도 물론
그런 게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나도 그 점을 인정해요. 하지만
당신은 내게 지속적일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지 못했어요. 물론
여건이 허락될 때 생기는 지속은 저급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렇게 묻겠어요. 당신 자신은 완전한 지속으로 내게 다가와본 적이
있나요?
그녀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하면서 완만
한 기복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럼에 따라 그녀에게서 아우라의 모
양이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우라는 때로 연한 색조를
띠며 더욱 농밀하고 선명해지는가 하면, 문득 수증기처럼 뿌옇게
흐려지면서 거의 사라져버릴 듯하다가 신기루처럼 되살아나고 있
었다.
나는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섬세한 심리적 갈등이 그때그
때 아우라의 상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손도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서 세찬 물살에 휩쓸린 물고기처럼 파들
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전부터 나는 성격상으로 모나
고 예민한 사람들과의 삶과 적당히 둔하고 무감각한 사람들과의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하는 문제를 놓고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나의 경우에는 당연히 후자 쪽이 더 견
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우리의 예
민함은 자주 상대방에게 대책없이 공격적으로 작용하게 마련이었
고, 그때 피차 겪게 될 고통의 양도 또한 적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가 예민하고 민감하다면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서도 예민하
고 민감해져서 피차 불행을 겪지 않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며, 그 사실
이 내게는 놀랍고도 기이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민함이라
는 것은 외부와 만나는 통로를 세밀하게 짜나아가는 것이라기보
다, 오히려 더 깊숙이 자기 내면의 벽에 갇혀버리는 것인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마치 자기 안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를 듣는 데에
귀를 바치고 있어서 바깥의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되듯이.
그녀와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남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가
까워졌다. 우리는 점심시간 전에 남해안의 한 도시에서 배를 타기
위해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서울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일행이 모두 일곱 명이었던 우리는 미리 준비된 소형 버
스를 탔는데, 그 여행을 주선한 친구가 당시에 아직 미혼이었던
우리를 일부러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혔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
리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혼곤히 잠속으로 떨어졌다. 그녀도 내
옆자리에서 잠이 들어 내 쪽으로 조금씩 몸을 기울이더니 곧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가만히 앉아 있
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그녀의 머리에 내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
했다.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그것도 잠이 든 사이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
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마음이 그지없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
던 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
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
고 있었고, 그녀가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얼굴
을 붉히며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말했다. 점잖은 야만인 같으신
분이군요.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말을 받았다. 웬걸
요, 얌전한 원숭이 같은데.
그때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지금까지도
예기치 못한 빛을 발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억상실증 환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그 기억에 집착하여 무의식적으로 다
른 기억들을 접어두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분명 나는 그
녀의 말대로 기억상실증 환자였다. 그러나 나 역시 그녀만큼이나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상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잊
어버려야 하거나 잊어버려도 좋을 것들은 과감히 잊어버리려 했
다. 변덕을 버리고 일관된 지속으로 나아가려면 포기할 것들이 너
무도 많은 탓이었다.
이제 그녀는 안정을 거의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많이 침착해진
표정으로 손가락을 모아서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풀어지게 마련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선도, 크게 굽이진 머리카락의 컬도, 이렇듯 지루할 정도로
뻑뻑한 이야기도. 풀어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를 맥빠지
게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구원이 가능하다면 그 풀어짐
의 순간에 찾아올 것이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
겼다. 뭔가 마음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그녀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나는 매번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쓸려 넘어갈 때마다 언뜻언뜻 그녀의 모습이 다르게 드러
나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 따라 내게는 그녀의 생각도 순간순간
달라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윽고 그녀는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
고는 눈을 깜박이며 애소하는 듯, 취한 듯 몽롱함에 잠긴 눈길로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방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
니까..... 서로 끝까지 단 한 가지 사실도 숨기지 않고서 마음속
에 들어 있는 모든 걸 털어놓아보자고 약속한 남녀가 있다고 생
각해봐요. 두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서로를 죽이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어쩌면
상대방을 삼켜버리지 않는 한 결코 끝나지 않겠지요 그건 사실이
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붙들고 쉬지 않고
말을 붙이는 걸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뭔가
를 얻어내야 했으니까요.
내가 떠난 건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전부터 당신을
대하고 있으면 나는 마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신이 모셔진 신전
안으로 들어서는 기분을 느끼곤 했어요. 게다가 그 신전은 자주
터만 남은 유적으로 내 앞에 서 있곤 해서, 나는 말없이 그 안을
배회하다가 그냥 돌아나와야 했지요. 내가 당신을 떠날 결심을 하
게 되는 건 바로 그 신전의 문 앞에서였어요. 내게는 삶이라는 이
미스터리 속에서 계속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게 하는 단서랄까,
어떤 끈 같은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어요. 나를 지탱시켜줄 유일하
고도 치명적인 끈 말이에요. 당신은 그걸 내게 주려 하지도 않았
고, 내가 찾는 걸 도와주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길을 나섰지요. 하지만 길 위에 서면 막막하기만
했고, 내 안의 그 막막한 뭔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히는 것 같았어
요.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힘을 소진시키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
는 것들에 매달리게 되었어요. 당신은 어떤 하잘것없는 일에 한없
이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나요? 내가 그랬어요. 매번 그랬는데 이
번은 더욱 더 그랬어요.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모든 것
이 텅 비어 있었어요. 육체와 정신의 곳간도, 심지어 예금통장까
지도.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이 불모지처럼 황량하게 버려진 내 무
의식의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갔지요. 마치 캄캄한 방 안에 갇힌
느낌이었어요. 며칠이고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나는 그때 처음으
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마음의 눈
으로 뭔가를 본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만
그 치명적인 끈도 보이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당
신을 본다면 무엇이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구요.
그때 나는 그녀의 아우라가 계속 변화를 거듭하더니 이윽고 서
서히 빛의 액체와도 같은 유동체가 되어 그녀의 얼굴과 어깨 주
위를 감싸고 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로 인해 그녀의 상반
신에서는 은근한 휘황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
가 그러고 있듯이 그녀도 놀라고 흥분된 빛을 눈에 가득 담고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침내 그녀가 내게서 아우라
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가슴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는 것
을 느끼며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쏘아보듯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녀는 내 얼굴에 초
점을 맞춘 채 천천히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너머로 내 얼굴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내가 보고 있는 이게 뭔가요? 아까부터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으려 했는데,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는
데, 점점 더 분명해지는 이건 대체 뭘까요? 마치 푸른빛의 실로
짠 시트가 당신 얼굴을 감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보고자 했던
게 바로 이걸까요? 우리에게 이렇게 감춰지고 가려져 있었던 게
있었다니오? 왜 갑자기 눈에 보이게 된 걸까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말해주려 하는 걸까요? 짐승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면, 본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내지르는 그 비명 같은 울림
에서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는데, 지금 이 빛은 내 영혼을 울
리고 있어요. 그래, 바로 이거였어요. 내게도 이런 게 있나요? 있
겠지요? 내게서도 보이나요? 손에 닿을 것 같아요. 이것 봐요, 느
껴져요. 내 손이 말하네요. 들어보실래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탁자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무릎
을 꿇듯이 하고 앉아서 빛을 건져내려는 듯 두 손으로 내 얼굴
주위를 더듬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나로부터 빛을 전해받아서 푸
르스름한 인광을 발하며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이르기 위함이었을까. 내가 하루 동안 이미 네 번에 걸
쳐 아우라를 보았던 것이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던가. 그러
나 타인들의 아우라로부터 섬뜩한 두려움만을 느꼈던 나는 이렇듯
갑작스런 반전이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
는 대상과 내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 그 모든 것들은 분명히 실체
였다. 그렇다면 나로 하여금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그 아
우라들이야말로 허상이었다. 나는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 자신이 머릿속이 증발되어버릴 것처럼 얼얼하였던 탓에, 나
로서는 그녀가 던졌던 그 많은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 그녀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그녀는 나의 표정과 내 손의 감촉을 통해 자신의 아우라를 확인
했다. 마주잡은 우리의 손을 통해 한데 만난 그녀와 나의 아우라
는 우리의 살갗을 타고서, 그녀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나의 소매
속으로 따뜻한 물처럼 흘러들어갔다.
그녀는 이마를 숙여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나의 아우라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나의 아우라
를 보는 사람인 동시에 나로 하여금 그 아우라를 볼 수 있게 하
는 사람이었다. 나의 아우라를 담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때로는
푸른빛으로 때로는 황금빛으로 충혈된 듯이 보였으며, 그녀의 얼
굴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그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과도 같았
다. 우리는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연인이 되어 오랫동안 빛과 열
기, 시선과 표정으로 한데 어우러진 채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있
었다. 우리 주위에는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비누냄새와도 같은
향기가 아우라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새벽녘에 혼자 거실로 나왔다. 바깥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전날 보았던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창가
로 걸어갔다. 바닥에는 그녀의 몸에서 벗겨진 가운이 허물처럼 떨
어져 있었다. 나는 유리창 앞에 서서 거기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
라보았다. 유리창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둠은 내게 거울과 같은
것이었다. 밝음 속에 서 있을 때면, 나는 나 자신을 놓쳤다. 그러
나 어둠속에서는 나를 응시할 수 있었다. 어둠은 항상 나의 내면
을 비추어주었다. 빛은 끊임없이 달리지만 어둠은 머무른다고 나
는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를 들여다볼 때 빛은 언제나 나의 뒤에
있었다. 그 빛에 의해 어둠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빛이
내 몸을 뒤에서 떠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내
가 어느 날 갑자기 남들에게서 후광을 보았고, 나 자신도 후광을
띠게 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록 불과 하루 동안에 나와 타인들의 아우라가 불러일
으킨 한 바탕의 놀라운 드라마를 몸으로 겪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아우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나는
내가 그들과 가까이 접할 때 우리 사이에 영혼으로든 육체로든
전기 방전이 일어나서 아우라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
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우라가 모습을 드러낸 것
은 우리의 의식이 죽음의 위기에 노출되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으
며, 그 점에서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내게는 적어도 한 가지 분명히 예감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앞으로 한동안 사람들에게서 아우라
의 모습을 먼저 보게 될 것이고, 그들을 아우라의 모습으로 기억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게 아우라의 드라마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동안에 세상이 밝아오기 시
작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밀려오는 빛은 내게 잠시 어두운 세상
의 후광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 아침 햇살은 내 눈에 보이는 만물의 후광이 되어 있었다. 그리
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내 존재
의 후광을 이루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태양이 마침내 둥
근 윤곽을 드러내기에 이르러, 지상의 모든 그림자는 벌써부터 빛
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우리들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 내면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우리들 영혼이 스스로 드리우는 빛나는 그림자, 금박이 입혀진 그
림자, 어둠으로부터 비롯되는 후광, 아우라를 식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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