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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봉우일기

by Casey,Riley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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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명: 봉우일기, 1
  (봉우 권태훈 유교전집)




  지은이 봉우 권태훈 선생(1900--1994)은 서울 재동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에 낙양의 지가를 올린 소설 '단'의 실존 주인공으로 6세 때부터 정신수련을 시작했으며 19세 되던 해에 당대 도계의 거인인 일송 선생으로부터 민족 전래의 정신수련법을 전수받았다. '단', '백두산족에게 고함',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등 일련의 책을 통해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과 정신수련법의 부흥을 주창했으며, 평생을 민족의 뿌리 찾기와 한민족 고대 문화 및 역사의 회복에 헌신하였으며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역은이 정재승은 단기 4291년(1958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봉우 권태훈 선생문화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철학 및 심신수련법을 수학했다. '백두산족에게 고함',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취음선생시선'을 엮어 펴냈다.

      차례
    제1권

      서문
    1951년
  1. 한글기념일을 맞이하여
  2. '내 이념' 이라는 책자 중에 '우리의 직업은 무엇으로 할까' 라는 것을 갱초해 보자
  3. '내 이면' 이라는 책자에 '우리가 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다시 기록해 보자
  4. 지를 입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5. 우리가 걷고자 하는 길은 어떠한 길인가
  6. 우릴 부족을 보충하자면 무엇이 급선무인가
  7. 지나간 인생의 잘못을 회상함
  8. 우리가 우선적으로 구하여 우리 동지 규합에 수범이 될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9. 동지도 가지가지
  10. 우리의 발족은 하시가 적당한가
  11. 국제연합의 한국에 대한 사명
  12. 재
  13. 한의학과 약학계에 우리가 바라는 바
  14. 연정원을 갱생하자면
  15. 단기 4285년 원단을 맞이하여

    1952년
  16. 임진년 상원일 내 소감
  17. 지방선거를 앞두고
  18. 연정원이 되기 전에 숙으로 설립하자면
  19. 임사소홀이 후회의 원인이 된다
  20. 진퇴유곡인 나의 처지
  21. 무제
  22. 친산 성추 후 내 소감
  23. 연방사를 재추진해 보자
  24. 정양론
  25. 공로를 자경함
  26. 소불인이면 난대모라
  27. 차기 주권자 될 인망이 있다는 세평을 받는 인물들을 내 의견대로 평해 보자
  28. 6. 25 기념일을 당하여
  29. 반구저기
  30. 정, 부통령 직선운동이 전개됨을 보고
  31. 우연히 백무무를 초대면하고
  32. 먼저 최저생활을 확보하고 정신수양에 착수하라
  33. 묘연한 내 생애
  34. 병중에 중추월을 맞이하며
  35. 가을밤 홀로 앉아
  36. 인지위덕
  37. 심서고
  38. 궁달유시
  39. 연정원 동지들 중에 장래를 촉망하는 기위 동지를 재고사해 보자
  40. 선덕
  41. 소인은 식어력하고 군자는 식어도라
  42. '신자'를 보다가 '군인' 장을 재삼 반복하고
  43. 시는 왕지야오 서는 왕고야오 춘추는 왕사야라
  44. '신자' '덕립' 장을 보고
  45. 조구석사우찰지부능식야 현어권형측리발식의
  46. 랑묘지재비일목지지며 호자지구비일호지액이라
  47. 소유권과 점령권의 공권과 사권을 논하여 보자
  48. 궁시기소불위
  49. 아원수의 등장을 보고 한국전선이 동요될까 하는 염려가 우리 인사들에게 많음을 보고
  50. 사불가실기 모불가소홀
  51. 앞으로 다가올 민족적 변동에 대비하자
  52. 때를 아는 사람
  53. 달마조사
  54. 정중재 대면인상기
  55. 나의 과거
  56. 연정원의 연혁
  57. '천부경' 현토
  58. 낙수

    1953년
  59.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60. 서고청 선생의 친산을 경안하고
  61. 위창 오세창 옹을 조함
  62. 부재기위하얀 불모기정이라
  63. 모덕사 제향에 참석하고
  64. 연정원을 발족하기 전에 수련도장으로 선발족해 볼까 하는 내 소감
  65. 민족의 수난기를 당하여
  66. 안빈낙도
  67. 정전 조인의 보를 듣고
  68. 체육론
  69. 나의 참회--계색하는 본의
  70. 박산주장을 추억하며
  71. 조산주장
  72. 작보를 듣고
  73. 고우 문수암을 추억하며
  74. '심인경' 사의
  75. 연정원의 추억
  76. 협의소설을 보다가
  77. 연정에 대한 설명을 쓰고자 하는 내 마음
  78. 우주 대자연을 그대로 본받아서
  79. 김덕규 군의 서신을 받고
  80. 정명분
  81. 차종환 동지를 조함
  82. 낙수

    1954년
  83. 냉정히 생각하라
  84. 여해 본의--청수록 머리글
  85. 애향
  86. 중추 타령
  87. 가족들 각자의 불평을 추상해 보자
  88. 박산주장을 추억하며
  89. 무제
  90. 을축년 정신수련중 투시한 우리나라의 운로
  91. 인궁하는 요즘 내 모습
  92. 설초를 환송하고
  93. 봉우 내력
  94. 면우 선생님과의 만남
  95. 낙수

    1955년
  96. 을미 원조에 내 사적으로 바라는 바
  97. 일운을 조함
  98. 인촌 옹을 조함
  99. 신야일몽
  100.  조로와 양신양정
  101. 근일 촌간에서 한학을 교수하시는 것을 보고
  102. 낙수

    강연록(1)
  103. 단학공부의 민족사적 당위성

    제2권

    1959--1962년
  104. 용산 연정원 신축기--단기 4292년 개천절 시공

    1963년
  105. 소박 옹을 회상하며
  106. 미군 일부 철수한다는 말을 듣고
  107. 인생무상
  108. 물심합일과 대동정치
  109. 김병로 옹이 서거하다--가인 옹 사회장
  110. 도심과 인심
  111. 기몽
  112. 연국을 난초하며
  113. 계묘년 제석을 당하여 회고함
  114. 낙수

    1964년
  115. 정신과학과 정신수련의 목표
  116. '서유기'를 보며
  117. 민족자결
  118. 이상과 실현
  119. 불이 북한을 승인하려는 태세를 보인다
  120. 상원월
  121. 몽중에 상봉한 남모를 추억해 본다
  122. 인생의 성공과 실패
  123. 명과 실
  124. 삼일절 특집방송을 듣고
  125. 삼일정신과 민족정기
  126. 물질과 도덕의 합치점
  127. 65세 생조의 소감
  128. 고인을 추억하며
  129. 몰자경
  130. 남도 나와 같이 사랑하자
  131. 유생론적 생사관과 자살행위
  132. 이 책을 마감하며 내 소감
  133. 낙수

    1965년
  134. 한중일 협의소설의 무예표현 수준
  135. 패사소설의 가치
  136. 사리설

    1966년
  137. 정신수양법에 대한 사견 추기
  138. 수양법 본론 들어가는 글
  139. '용호결' 말미에 쓰고자 하는 말
  140. 정신수양법 서론
  141. 우리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142. 박옹의 고력수행

    1969년
  143. 장개석이 대총통으로 4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78년
  144. 박하성 옹이 가다
  145. 무오제석

    1979년
  146. 박대통령의 피격 흉보를 듣고

    1980년
  147. 노졸의 자평
  148. 나의 최대 단점
  149. 낙수

    1982년
  150. 대종교 총전교로 선출된 소감
  151. 자기의 자격을 정평해 보자
  152. 무사무려한 몸
  153.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성패를 주저 말고 곧 행동에 옮기라--내 일생 불변의 신조

    1983년
  154. 진퇴유곡의 내 심사
  155. 환원하신 친우들을 추억한다
  156. 계해년 제2차 대종교 경배에 참하고
  157. 광복절을 당해서
  158. 청수록
  159. 무제
  160. 절처봉생

    1984년
  161. 하원갑 갑자년을 맞으며
  162. 개천절 선의식을 거행하고
  163. 하원갑 갑자년을 보내며
  164. 호흡법 정요

    1985년
  165. 을축년 원단을 맞이하며
  166. 백산운화의 씨앗을 뿌리며
  167. 86세 생조를 맞으며
  168. 축수록
  169. 여운삼 옹의 내방을 받고
  170. '단' 후속편과 단학회 출범
  171. 아세아올림픽 개최와 세계평화운의 신아

    1986년
  172. 여해의 구호
  173. 이헌규 동지의 환원을 조한다

    1987년
  174. 정묘년 원단사
  175. 치란의 철칙과 인생살이
  176. 대종교 정묘년 제1회 경배일에 불참하고 내 죄송한 심정을 기록함
  177. 유도회 이사회에 참하여
  178. 조물주님께 특청을 심고합니다.
  179. 무제
  180. 노태우 씨 발언을 듣고
  181. 일부 난동하는 모교도들의 악행을 보고
  182. 이백하 옹의 환원의 보를 방송에서 보고
  183. 만사분이정 부생공자망
  184. '천부경' 해설

    1989년
  185. 의학적 몽상
  186. 한배검을 모신 지 80주년 기념으로
  187. 우리 고대사와 조상의 근본을 찾는 일
  188. 낙수

    1991년
  189. 계룡산 수련학인 제위

    강연록(2)
  190. 연정16법과 육통해
  191. 원상법요
  192. 지감, 조식, 금촉
  193. 신, 경, 성
  194. 정일집중
  195.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196. 조식법의 유래
  197. 조식의 목적 및 공효
  198. 조식의 실제
  199. '용호결', 법분16
  200. 말씀(1)
  201. 말씀(2)
  202. 말씀(3)

    대담
  203. 정신수련 혹문장
  204. 남북통일, 과연 1999년 이전에 이루어질 것인가

    어록
    연보

    서문
  1994년 5월, 우리는 소중한 국로 한 분을 잃었다. 생전에 그는 세인들로부터 진정한 이해를 받지 못했다. 그가 평생 갈파했던 이념, 사상들이 이 시대 방황하는 우리 겨레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며 이정표인 줄 우리는 너무나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밝은 영혼의 소유자, 귀중한 전통가치의 계승자들에 대해 야박하고 인색한 것인가. 역사를 돌아보아도 정신과 영혼의 위대함을 역설한 선각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핍박과 냉소뿐, 민족 고유의 정신을 계승한 선지자들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혹독한 고난을 겪어야 했으며, 심하면 역사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그 결과 나라는 망해 남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서로 죽이고 국토마저 둘로 갈라 원수 마냥 살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우리가 내쳐버린 우리 정신의 선각자 봉우 권태훈(1900--1994) 선생의 유고집이다. 선생은 격동과 파란의 20세기를 거의 전 기간 살아오며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혼란, 그 와중에서 야기되는 온갖 세파를 겪으면서도 틈틈이 글을 남겼다. 형식은 일기이나 그 속에는 자신의 내면적 고백, 이념과 사상적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와 그 자산에 대한 설파, 현실정치, 사회문화에 대한 비평 등이 담겨 있다.
  1988년에 발간된 '백두산족에게 고함'과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에서 봉우 선생의 수필들을 극히 일부 다루었으나 당시의 '단 열풍'에 부응하느라 정신수양 관계의 글들만 뽑아 실은 관계로 전모를 살필 수 없어 아쉬웠던 차에, 이제 환원하신 지 4년 만에 비로소 유고의 거의 전부를 엮어 펴내게 되니, 엮은이로서 실로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글을 1951년부터 1991년까지의 일기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의 글들은 분실되어 살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먼저 밝힐 것은, 12년 전 선생께서 이 일기책들을 주시며 당부하신 뜻에 따라 개인의 사생활적 신변잡기만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글이 이번 유고집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유고집의 체제는 편년체로서, 연도에 따라 씌어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내용을 보면, 국조 한배검 이래 면면히 이어 내려온 우리 겨레의 정신사적 특성인 포함삼교로서의 현묘지도를 몸소 체현했던 금세기 마지막 국선의 풍모를 살필 수 있는 각종 정신수양론, 앞서간 정신계의 선각자들에 대한 회상과 증언, 우리 도맥의 원류에 대한 고찰, 또한 전통 천문학, 지리학, 의학, 역학, 수학 및 각종 술법과 제자백가적 사상들에 대한 섭렵과 철학적 사색의 편린들, 그리고 선생이 몸담고 있던 정치, 경제, 역사, 문화적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비판, 남북통일 문제를 비롯한 민족적 진로에 대한 모색과 대안의 제시, 나아가 열렬한 민족애에 바탕을 둔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 내지 세계사적 예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자신의 일생에 대한 잔잔하면서도 솔직담백한 회고와 다양한 교우관계, 스쳐간 벗들과 정치인을 포함한 당대 인물들에 대한 논평과 함께, 마지막으로 80년대 후반의 열정적인 대중강연 육성 녹음을 CD에 담아 실었다.
  또한 책을 정리하면서 처음으로 선생의 일대기를 살필 수 있는 연보를 작성했는데, 이는 후일 '봉우사상' 연구에 필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얼마 전 동국대 사학과 윤명철 교수로부터 정신문화연구원 편찬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유편에 봉우 선생을 민족문화사의 인물로 수록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교수 말이, 사전에 기록할 때 봉우 선생을 한마디로 무엇이라 정의했으면 좋겠으냐고 한다. 나는 잠시 머뭇거린 뒤 '선인' 이라고 답하였다. 윤교수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그리 생각하나 문제는 현대인물의 직업에 선인이라는 항목은 없으므로 실제 쓸 수는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선인이란 말이 적어도 공식적 쓰임새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선인은 실재한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실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실재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못 알아보고 지나쳤을 뿐이다.
  사실상 '선' 이란 말처럼 우리 겨레얼의 본질과 그 뿌리에 잇닿아 있는 말도 없다.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시대까지도 우리 민족주체성의 상징적 언어가 바로 선, 신선, 국선, 화랑도, 풍류 등으로, 다 같은 궤적의 색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국조단군도 선인 이셨다고 '삼국유사'에 전하지 않는가. 단군선인의 후손인 우리가 이제 20세기 말에 와 국가에서 편찬하는 대백과사전에 한 인물을 선인이라고 표기할 수 없다면, 이야말로 제 근본을 망각하고 넋을 잃어버린 경우가 아닐 수 없다.
  봉우 선생의 행적을 살펴보건대, 그 정신의 중심은 대황조 한배검의 홍익인간 이념에 있었다. 이 이념은 시간적으로 1만년 이상 유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고, 공간적으로도 전 인류의 정신적 전범이 될 세계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선생은 당대의 민족적 현실과 사상의 조류가 어디로 흘러가든 이 정신의 주축은 그대로 지닌 채 근현대를 살아왔다. 겉으로는 유가의 전형적 선비로서 13경을 통달하였고, 불교와 도교의 모든 경전을 섭렵하였으며, 실제로도 유불도 3교의 전통 수련방식대로 오랜 기간 수행하여 그 진면목을 통견하였다. 후학들에게도 유불선 3교가 그 근원은 하나이고 귀착점도 하나라고 늘 강조하며 3교의 평등성을 말하였으며, 깨달으면 다 똑같으니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사상의 시비를 제일 금기로 삼고 경계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포함삼교야말로 우리 선인들의 정신적 유산이자 사상적 특징인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민족정신의 계승과 정신수련을 통한 우주와 자아의 진정한 발견과 더불어, 당대 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로써 평생을 견지해 왔다. 청년기에는 만주 무장독립투쟁과 국내에서의 애국동지 규합 활동으로 일제 치하를 보냈고, 해방정국에서는 김구 선생을 위시한 임정파 정치인들과 고유하며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정치 일선에 몸담기도 하였다. 선생은 평생 비좌비우의 민족노선을 관철하였다. 이승만 정권 이후 십수년 간 계룡산 산촌에 칩거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놓지 않았고, 글로써나마 국가와 민족의 현실과 장래에 대한 울분과 비판, 애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선생은 평소 '나라 없는 도인 없고 나라 없는 학인 없다.'는 말로 흔히 정신수련인사들이 국가와 민족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소아적 성취에 집착하는 경향을 극력 배제하고, 항상 민족이 있고 나서야 진정한 자아회복도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이 또한 현묘지도의 접화군생하는 선인의 풍모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마땅히 봉우 선생을 우리 민족의 개국 이래 길이 전해 내려온 겨레얼의 담지자, 선지자로서의 선인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선인의 또 다른 면모 하나는, 세계와 인류, 우주에 대한 거시적 예언을 수행하는 선지자의 모습이다. 봉우 선생 또한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선생은 일제시대부터 민족과 세계의 장래에 대한 끊임없는 예언을 통해 좌절과 혼돈으로 분열, 침체되어 있던 민족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희망과 비전을 제공하였다.(참고로, 민족의 흥성과 소련의 분열상 등 세계정세에 대하여 예언한 글이 이미 1951년도 수필에 적시되어 있으며, 1999년까지의 남북통일 완수라는 확신에 찬 예언은 아직 그 시효를 남긴 채 많은 이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선생의 예언자적 면모는 일정 부분 사회역기능적 요소를 배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이 점이 일부 학인들이 선인으로서 선생의 진면목을 잘못 이해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무관하게 민족과 국가에 대한 순수한 진언이라는 성격이 강한만큼, 민족 구성원들에게 국가적 진로에 대한 희망과 세계정세에 대한 낙관적 시야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옳으리라.
  봉우 선생은 오랜 세월 정신수련에 정진했던바, 우주와 존재의 심연을 그야말로 명징하게 꿰뚫어보는 심안과 혜안의 소유자였다. 또한 엮은이의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정신수련의 근본 대요를 이처럼 친절하고도 상세히, 그리하여 확연히 깨우칠 수 있도록 가르쳐준 이는 근래에는 없을 듯하다.
  선생은 정신수련을 통하여 인간과 자아, 민족과 인류, 나아가 이 우주의 비밀을, 그 본질을 깨달았다. 그가 평생 주장했던 사상들의 개관만 하여도 소소한 연각이 아닌 대각의 경지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봉우사상의 핵심은 '진정한 자아의 발견--깨달음--을 통한 세계 및 우주와의 합일'이며, 이의 통로는 지구가 개벽한 이래 면면히 이어내려온 인류의 고성 대황조 한배검의 현묘지도, 선도이며, 구체적으로는 '천부경', 홍익인간 사상 및 '조식호흡론을 통한 명명(선천의 밝았던 것을 후천에 다시 밝힘)'의 개념으로 제시된다.
  1984년 소설 '단'을 통해 선생이 갈파했던 가장 중요한 논제는 다름아닌 우리 민족사상의 복권이었다. 우리와 혈연적 근원이 같은 상 나라의 멸망 이후 3천년 간 민족의 쇠퇴와 함께 민족사상 역시 서서히 쇠퇴하여 대한제국 말엽에 와서는 속 알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겨레얼의 주체이자 내재인 심종은 사라지고 그 외현인 교종만이 남게 되었으니, 현재의 한국사상은 혼백은 없고 형해만 존재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생은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기고 온전한 민족혼의 복원 방법으로서 민족 고유 정신수련법의 부흥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선생 자신 또한 정신수련을 통하여 심교 양면의 조화를 꾀하였고, 현재와 같은 사상적 불균형을 해소해야만 자아와 세계의 우주적 정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봉우 선생의 민족주의는 결코 편협한 이기주의나 국수주의의 소산도 아니며, 정치경제적 동기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발생에는 한층 깊고 내밀한 연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신수련을 통해 얻어진 깨달음과 무한한 정신의 힘으로 투사된 우주사와 개아의 비밀, 그 실체의 확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정신의 빛을 돌이켜 자아 및 인간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맨 첫 자리(시간적으로는 약 1만년 전)에 인류의 첫 밝은이 한배검이 계신다는 것이다. 한배검은 당시 전지구적 대홍수로 인한 개벽 이후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세계의 중심이 된 우리나라에서 탄생, 온 겨레의 정신적 교사이자 조상이 되었으며, 현 인류의 뿌리인 5족(황, 백, 흑, 갈, 홍의 다섯 족속)을 교화, 치화, 이화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부터 세계 최고 문명의 건설자이자 전파자가 되었으며, 한배검의 가르침을 받은 각 종족들이 중국대륙, 인도, 중동지역 등으로 퍼져 세계에 여러 문명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 민족주의는 그 배태부터 홍익인간, 이화세계요 본질적으로 세계일가의 평화사상에 기반하고 있으며, 편협하고 배타적인 제국주의적, 국수적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선생은 평소 신화 같은 이야기를 "나는 이와 같이 보았다." 하는 확신에 찬 어조로 후학들에게 강조하곤 하였던 바, 그 확신의 근원은 다름 아닌 정신적 수련의 높은 경지에서 얻어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투철한 시력에 있었다.
  어쨌든 엮은이는 '단'에서 선생이 언급한 민족사상의 복권문제와 그 전제로서의 TAL종의 복원 등이 한낱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이념의 유희가 아닌, 절대공의 세계에 도달한 한 도인의 진묘유의 반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정신병자가 아닌 정신수련의 궁극적 경지를 체현한 사람의 민족의 삼생(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담론들을 어찌 간과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 선생의 업적은, 민족사상의 원류인 선도사상의 시원을 대황조 이래의 현묘지도로 규정하여, 중국 선도를 제 할애비 마냥 추종하던 사대주의적 사상 풍토를 일신케 하는 시발점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단' 이후로 우리나라의 선도계는 그간의 중국적, 왜색적 영향에서 벗어나 다시금 한배검의 정신적 가르침 아래로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온전히 봉우 선생이 우리 고유 선도의 실존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보여주신 데에 기인한 것이다.
  '단' 이후 두드러진 사회적, 사상적 현상 하나를 덧붙이자면, 대황조 가르침의 총화인 '천부경'과 홍익인간 사상의 구체적 공론화를 들 수 있다. 천지인으로 표상되는 우주와 개아 간의 생성, 발전, 소멸 관계를 순환논리적으로 다룬 '천부경'을 톡특한 '^5,3456,2^'의 이치로 풀어나가는 선생의 해법은 많은 학인들의 눈을 틔어주었고, 특히 '천부경'이 역의 조종이라는 시사는 이 경전을 구한말의 위서라 여기는 기성학계의 냉소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열정을 지닌 많은 재야 학인들로 하여금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선생은 그간 막연하고 아리송하기만 하던 '홍익인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공자의 '대학' '혈구' 장을 인용하여 아주 상세히 설명을 가하였다. 즉 홍익인간이란 사람이 자신에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도로서, 그 헤아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려의 방향을 상하, 전후, 좌우의 전 방위적 관계에 놓고 실행하는 것이라 설파하였다. 결국 '천부경'은 우주실존의 만고불역의 진리를 설파함이요, 홍익인간 사상은 그 진리의 실천강령으로서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지름길이라 할 수 있겠다. 엮은이도 홍익인간 사상의 본뜻을 이해해 보려고 무수한 책들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선생처럼 간명하게 대의를 드러내준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 해답은 정작 가까운 데 있었으나 그 누구도 직지해 준 사람은 없었는데 이는 바로 교종만 무성하고 심종은 고사 직전인 우리 사상계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경우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봉우사상의 특징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조종인 대황조 한배검의 가르침인 '천부경'과 홍익인간 이념을 온전히 계승하여 민족사상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는 고유 현묘지도의 정신수련법인 조식호흡론과 정일집중론이 있는데, 정일집중론이란 심종 비전의 요지로서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간단히 말하자면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되 중도를 취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조식호흡론과 정일집중론의 구체적 실천을 통한 '천부경'과 홍익인간 이념의 현대적 복원은 민족사상의 원형 정립과 나아가서는 세계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대승적 목표로까지 그 외연을 설정해 두고 있다. 선생은 이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야말로 진정 이 나라, 이 겨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미래역사의 흥망도 이에 달렸다는 판단 아래 평생을 이의 현실적 구현, 그 실체적 전파에 진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되어야 할 점은, 1만년 이상 전해 내려온 국유현묘지도, 풍류도, 선도의 정맥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대적 외세의존사상의 주류에 휩쓸려 단절될 위기에 처했을 때, 유일하게 민중 속에 전해져 그 맥을 이어주었던 북창 정렴(1506--1549) 선생의 선도수련서 '횽호비결'을 근대에 이르러 재발굴하고 현대에까지 그 민족사상사적 중요성을 강조한 이가 바로 봉우 선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근대인으로서 '용호비결'에 주목한 유일한 인물로서, 우릴 고유 선도의 정맥을 잇고 현대에 다시금 그 발흥을 위해 진력한 점은 민족선도사에 확실무의한 공헌으로 기록되어 마땅하다. 
  선생의 정신수련에 관한 가르침 대부분이 이전의, 아니 당대에도 여전히 대다수 도인들이 비밀로 했던, 그야말로 하늘의 비밀이자 비인물전의 내용들이었다. 고인들이 무가지보로 삼았던 내용들을 이렇듯 황연히 다 주고 가신 뜻이야 후학들로서는 분명히 알기 어려우나, 선생의 평소 언행으로 미루어 문명사적 전환기에 처한 민족과 인류의 장래를 위해 이러한 정신수련법들이 지대한 공헌을 하리라 믿고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분야에 진정 눈을 뜨도록 하려는 간절한 염원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한편 봉우 선생과 북창 선생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바, 선도수련법의 핵심을 조식법, 즉 호흡법으로 보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봉우 선생은 늘 호흡법이야말로 대황조 한배검 이래 내려온 정신수련법의 정종이라며 각종 수련방법 가운데 가장 우위에 놓았고, 북창 선생 역시 '용호비결'에서 호흡수련을 통한 정신일치와 집중력으로 우주의 근본자리로 환원함이 진경계요 진도로라며 호흡법의 중요성을 갈파하였으며, 나아가 달마선사의 구년면벽관심도 이 호흡수련법을 체득했기에 가능했었다고 까지 강조했던 사실에서, 유구한 민족의 도맥이 시공을 초월해 두 선생을 관류하고 있음을 본다. 이렇듯 호흡법을 최우선시하는 관점이야말로 중국의 선도사상과 구별되는 우리 선도의 고유한 특성이기도 하다.
  이 글을 정리하며 새삼 선생의 시대를 앞선 통찰력과 예지력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 글들 속에서 엮은이는 새로운 시대의 열림을 온몸으로 예감, 확신하고 그에 대비하고자 노심초사하던 한 선각자의 모습을 보았으며, 겨레의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 앞길을 밝히고자 고군분투하는 강개한 우국지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구절구절마다 배어 있는 대아적 사상에서 구극의 진리를 향해 가는 구도자의 풍모를 느끼며, 새삼 간절한 사모의 염이 솟아남을 자감하였다.
  생각해 보면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망국과 통한, 분단과 혼란, 부패와 오욕으로 점철된 세월뿐이었다. 말년의 10년 세월만이 숨통을 잠시 튀워주었을 뿐, 전광석화와도 같은 시간만이 그의 씨뿌림 작업을 위해 주어졌다. 그 ^5,3456,2^의 파종을 위해 80년 이상을 인고하다가, 짧은 파종이 끝나자 총총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선생의 모습에선 한 성실한 지식인의 초상을 읽을 수 있다. 세월이, 세상이 그를 저버리고, 운명의 가혹함이 그를 짓밟고 절망과 실패의 나락으로 밀어붙였어도, 그는 곧 평정을 회복하고 얼의 주체를 잃지 않는 꿋꿋한 면모를 견지하였다. 선생의 메시지는 놀라우리만치 일관성이 있었으며, 그는 진부할 정도로 부동의 철학을 지닌 채 맨몸으로 풍풍우우 속을 걸었다. 50년대 이후부터 90년대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간단없이 씌어진 일기와 수필들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한 선비의 고결한 영혼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유학자로서 선생의 면모를 보면, 구한말의 민족적 대 수난기에 세상의 권력을 좇아 곡학아세하는 부유들은 물론 겨레의 암담한 현실을 외면하고 독야청청하는 반민족적 유학자들을 통박하고, 자신의 학문을 민중의 삶에 구현하여 경세치용, 실사구시를 추구한 진정한 실학자였으며, 학문을 위한 학문, 탁상공론하는 '죽은 학문'을 거부하는 태도를 평생 일관함으로써,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학문하는 이들에게 학인의 본령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선생의 글들이 담고 있는 개성 뚜렷한 내용들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근현대사회의 또 하나 중요한 정신사적 증언으로 남을 것이라 믿어진다. 특히 해방 이후의 정치사회비평적 수필들은 국가적 위기국면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부패하고 어지러운 사회현실에 대한 근원적 정신혁명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문집이기는 하나 어떤 주제를 다루든지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글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 편하게 어디서부터 읽어나가도 무관하다. 이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 배에 탄 겨레 모두에게 선생의 글들이 몸과 마음의 수양서로서, 새로운 발견의 길잡이로서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유고집을 엮으며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으나,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특히 연보는 엮은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자료와 역량, 주위 여러분의 증언에 힘입어 작성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연대기록이 빠진 것이 많다. 이의 보완은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엮은이로서는 최선을 다한 기록이라는 점만을 덧붙이며, 제현의 질정과 새로운 사실의 제공을 고대한다.
  봉우 선생의 저술과 구술을 토대로 책을 엮어내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네 번째 결실인 이 책으로써, 선생의 전기적, 사상적 궤적을 추찰할 수 있는 기본자료들은 집성된 셈이다. 11세 때인 1968년 봄 어머니를 따라가서 처음 봉우 선생을 뵙고 17세 때에 첫 가르침을 받은 이래, 본성이 아둔하고 게으른 엮은이로서 평소 스승님께 과분한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한 까닭으로 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지내왔다. 스승님의 마지막 유고집을 정리하고 나니, 새삼 그분에 대한 그리움, 회한, 자책감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스승님 앞에서 그 얼마나 공부의 성공을 다짐하곤 했던가, 후학들에게 늘 겸손하시고 다 같은 학인을 자처하시던 그 너그러운 미소와 푸근했던 말씀들이 절절히 그립다. 이제 어디서 다시 그 벽력 같은 깨달음의 말씀, 그 생동하는 기운을 접할 수 있을 것인가.
  눈물로 스승님을 추모하며, 다시금 뜻을 추스려 그분께서 평생 걸으셨던 홍익인간, 세계일가의 큰 길로 전심전력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하리라.
  늘 그렇듯이, 지난 2년 간의 출간 과정 동안 수많은 이들의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우선 난해한 한문 번역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엮은이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한학자 최종은 선생님, 김영복 인형, 부친의 유고집 간행을 쾌히 승낙해 주신 한국단학회 권영조 회장님, 연보를 교정해 주신 연정원 성주흥 원장님, 스승님의 사진자료를 제공해 주신 전 한국단학회 권영국 국장님, 늘 후학들을 격려해 주시는 김학수, 이석민, 지정현, 정찬두 선생님, 선사의 육성 테이프로 글로 정리해 주신 박병운 박사 내외, 육성녹음의 마스터테이프를 만들어 주신 이용우, 이상식 선생, 특히 '용산 연정원 신축기'와 60년대 일기 대부분을 상신리 고택에서 발견, 전해준 김광묵, 조성택 동지와, 음으로 양으로 엮은이를 도와주신 안기석, 문장록, 유하영, 문재윤, 강성재, 강진원 등 수많은 연정원 동지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출간에 힘써 주신 정신세계사 정주득 사장님과 전직원 여러분, 서울에 머무는 동안 물심으로 후원해 주신 후배 이동원의 부모님, 이상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렇듯 많은 분들의 조언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온전히 봉우 선생님과 대황조 한배검님께 바칩니다.
  천장기원 4635년(1998) 10월 3일 개천철
  문하생 온양후인 정재승 지죄근저
  천장기원이란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대황조 이래 역대 단군(밝은 임금)중 한 분으로 문자를 만들어 역사시대를 연 고성 복희씨의 단군 등극시를 말한다. 즉 역사시대 이전인 상고, 중고시대를 제외하고 근고시대의 단군개주로서, 현행 단군기원에 304년을 더해야 한다. 봉우 선생은 평소 현행 단군기원은 근거가 없으며, 중국 사가들의 조작으로 요임금 등극 이후로 설정해 놓았다고 비판하였다.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p 133 '건기수' 참조

    일러두기
  1. 이 전집은 기간된 '백두산족에게 고함'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민족비전 정신수련법'에 수록된 내용과 지극히 사적인 내용 및 기타 수록에 적합치 않은 sodyddf 제외하고 저자가 남긴 모든 글을 수록하였으며, 제외된 글 중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대목들은 연도별로 '낙수'에 모아 실었다.
  2. 원문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원래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부 낱말과 연결 및 종결 어미, 띄어쓰기, 따옴표, 구두점 등 일부 표기법을 현대의 맞춤법 규정에 맞게 손질하였다.
  3.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는 원문은 국문체로 변환하고 일부 한자를 괄호 안에 넣었으며,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뜻풀이를 병기하였다.
  4. 한시 등 원문이 한문체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한자를 노출하여 표기하고 바로 아래에 엮은이의 '풀이'를 넣었다.
  5. 원문에 제목이 없는 경우에는 엮은이가 본문의 내용을 참고하여 제목을 달았다.
  6. 각권의 말미에 실린 '내용별 찾아보기'의 활용을 돕기 위해, 모든 글과 강연록, 대담 등의 제목 머리에 일련번호를 부기하였다.
  7. 글은 연대순으로 싣되, 한 주제에 대한 여러 글이 비교적 길지 않은 기간 사이에 기록된 경우에는 일자에 상관없이 연속하여 배열하였다.
  8. 특별히 양력임을 표기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자가 표기한 모든 일자는 음력에 따른 것이다.
  9. 모든 각주는 엮은이의 것이다.
  10. '강연록'의 경우 CD 제작과 포장의 편의상 연대에 상관없이 각권에 나누어 실었다.

      1951년
    1. 한글 기념일을 맞이하여
  음력 9월 9일 금일은 중양날이요. 겸하여 우리가 잊지 못할 한글기념일이다. 한글은 훈민정음의 변칭이니, 훈민정음은 조선 제4대 왕위이신 세종대왕께서 재위 28년 병인(1446년) 9월 9일에 이 훈민정음을 친히 창작하시어 백성에게 반포하신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상술한 바와 같이 한자도 우리 성조 단군의 창작이시었으나 불행히 중국으로 가 아주 중국화하고 우리 민족으로는 한자가 우리글인 줄도 아지 못하게 되었고, 중국화한 한자는 호번(넓고 복잡함)하여 보통 백성의 통속문화가 못 될 정도다. 상형, 회의 등 6종으로 분한 것이요, 훈민정음은 초중종, 청탁이 있을 뿐 순전한 음으로 28자가 자모합자가 되어 세상만물, 세상만사를 형용 못할 것이 없을 만치 만능한 문자였다. 그러나 이 글을 창작하신 성주 세종대왕의 본의와 같이 아국에서 보급하지를 못하고 한갓 한자의 부용 대우를 받고 지낸 것은 우리의 조선이 사대사상에 물젖은 연고였다.
  이 한글의 문화가치로는 세계 각국을 통하여 기우(그 오른쪽)가 없을 것이다. 평이간단하고도 못할 말 없이 기록할 수 있으며 비록 단시일이라도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습득할 수 있을 정도의 국민교육상 중대영향이 있는 문자였다. '훈민정음 서문'과 같이
  유천지자연지성 즉필유천지자연지문 소이고인인성제자 이통만물지정 이재삼재지도 이후세불능역야라.
  풀이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는 법이니. 그러므로 옛사람이 소리를 따라 글자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만물의 뜻을 통하며 그것으로 삼재(하늘, 땅, 사람)의 도리를 실었으니. 후세에 능히 바꿀 수 없음이라.
  (주석 1)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의 첫글
  이처럼 세계문화사상 제일 우수한 국문을 가진 나라는 없다. 비록 민족은 쇠퇴하여 금일과 같으나 자타가 공인하는 완전 무결한 세계문화사의 웅관(으뜸)이 될 문자였다. 오백년간을 그다지 대우를 못 받은 것은 오로지 선유들의 사대성에서 생긴 일이요. 나라에서도 국문을 국문으로 대우 않고 언문이라고 하시하여 부녀자의 부득이 습득할 정도로 교습한 것이 정책상 실책이었다. 그리다가 경술 후에 일본압박하에서는 아주 이 한글을 폐지할 정책이 수립되어 우리말도 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었다. 을유 8.15 후에 다시 갱신하여 금일을 아주 한글날로 정하고 국민이 기념하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 우리 민족문화가 수준을 향상하여 세계적으로 돌진하면 이 한글이 금일 영문과 같이 세계화할 날도 머지 않다고 본다. 세계의 자랑할 이 문자를 가지고도 우리가 약화된 관계로 세계진출은 그만두고 국내에서도 그리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일부 인사에 지나진 못하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로다. 한글기념일을 당하여 다시금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향상시켜서 세계적으로 제압하여 이 한글이 현 영문 이상의 보급이 되게 할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제2세 국민이나 잘 교육하며 자진할 것이다. 우리의 수준이 세계를 돌파함으로 우리의 한글도 세계보급이 될 것이다. 이 우수문자를 가지고도 현하의 대우를 받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부족한 연고다. 세종대왕의 본의대로 사대성, 의존성을 버리고 나라의 민족으로, 내 나랏말로, 내 나라 글로 독립하자는, 당시 명나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은연히 표현하신 성의를 본받아 우리도 일보전진하여 세계적으로 나갈 결심을 굳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우리의 의무다.
  일로 오늘을 기념하노라.
  한글 창작 516년 되는 신묘년(1951) 9월 9일
  후생된 권태훈은 이 붓을 그치노라

    2. '내 이념' 이라는 책자 중에 '우리의 직업은 무엇으로 할까' 라는 것을 갱초해 보자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순농업국이 아니었고 공업이 상당히 발전되었던 나라다. 상고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도 주종술, 석기, 자기, 이금술 등이 현금의 과학문명을 운위하는 시대로도 추상도 못하는 것을 보아 고대 우리의 공업이 얼마나 진보되었다는 것을 알 일이요, 그 후 점점 유권자들의 압박으로 공업은 아주 패퇴하고 말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장래의 직업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 것인가를 연구해 보자. 현 농업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부득불 현 농촌에서 전업적으로 생산할 사람만 농업에 종사키로 하고 반부 내지 6할의 전업을 공업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공업화하기에 천혜가 있다. 10대강 유역과 강화도, 진도, 명량 등의 천연의 수력전기발전 지대가 있고 북한의 풍부한 광물로 일정시대에도 함경도는 유수한 공업지대가 되었었다. 수력전기로 적극적 공업을 추진하고 이 공업화한 물품으로 세계를 상대로 진출하면 국부민강도 자연 있을 것이요, 비록 농촌이라도 이 전력을 이용, 가가 부업이 있게 하고 이것으로 우리 한국은 산국이니 조림을 잘 하고 천혜의 반도국이라 삼면이 해면이니 해산물도 타국에 비하여 불소한 나라라 해산업도 역시 국가화하였으면 농업으로는 자국식량문제를 해결하고 공업으로는 물론 자작자급하며 8--9할의 세계진출을 하고 해산물도 세계시장으로 나가면 우리의 국내산업은 족족할 것이요. 여분으로 얼마든지 타국에 진출할 수 있고 목축도 우리나라의 적업이다. 이 여러 가지로 공업과 농업과 해산업으로 분류하여 나가면 국가경제는 별 문제 없이 해결될 것이다.
  이것은 단시일에는 안 되는 것이니 물론 국책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민치 공농이 병행하면 자연 세계로 진출하는 상업도 반수(동반하여 따라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천혜인 수력전기발전 지역이 많다는 것이 우리나라를 공업화하여 장래 세계진출의 필연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수력발전 지역에서 전부 발전이 된다면 무려 오천만 키로 이상이 될 것이요, 우리의 소요가 이 전력을 다 필요할 때는 세계의 비가 없는 공업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을유 8.15 후에 소위 일류 산업가들도 목전의 이익만 다투지, 환언하면 외국무역으로 국내 생산물이나 소모할 정도다. 한 사람도 단 10년이나 20년을 계속하여 장구적으로 나갈 기업에 착수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한심한 일이요, 국가에서도 역시 상공 요인들이 현재 있는 공업이나마 휴장 못하게 하지를 못하니 하가(어느 여가)에 신규로 백년대계나 기백년 장구책을 생각할 여지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원수부터 이런 원대한 생각을 할 정도가 못 되고 우리나라에 적합한 공업을 시설하느니보다 기성품이나 타국에서 갖다 쓰는 것이 속하게 생각한 것 같다. 흥국흥가의 거물은 절대 못 되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자기 목전의 영화나 생각하는 도배들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천혜가 있는 이상 하시든지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하자면 제일 공업교육과 발명기금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다 국가민족의 사업이요, 어떤 개인을 위하는 사업이 아니다. 일국이 단결하여 이 사업을 기공하면 불구한 장래에 성공이 완전히 올 것이다. 이러한 공업으로 자가의 건설도 하려니와 타국에 진출하면 자연 국위가 선양되는 것이요, 과학문명의 수준도 돌파가 그리 난사가 아닐 것이다.
  현 정책으로 보아서는 이 불안한 농업이나마 착취의 착취로 진보성이 없고 점점 퇴화하는 것을 일반 인사들이 다 아는 바이다. 이 현상으로는 건설할 시일이 없고 외양으로만 장래부흥을 말하나 소위 요인급들의 사복이나 채우고자 하는 비행이 층생첩출(겹겹이 생겨남)하는 현상이니 한심한 일이다.
  현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정세로는 금보를 업혀 두고 숙수불각(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함)하는 양이라. 이 잠이 깨기 전에 타인의 손에 이 금보가 안 가기를 빌 뿐이요., 이런 생각이나 정책을 가행할 인물이 아직 나오지 않으니 이것이 미신적으로 운이라는 것인가 보다.
  (주석 2) 이렇게 고대하던 그 인물은 10년 후 1961년 5. 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였다.
  금번 전쟁이 종식하고 통일 성업으로 들어가서 거물급들이 많이 나와서 국책이 착착 진행되었으면 우리 한국이 아세아주에서 절대로 타국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만만하고 일보전진하여 세계진출도 그리 난관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내가 몽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우리나라 장래에 중흥의 일책으로 아는 바이다. 각종 직업이 다 병진하여 나가면 가유인족(집안과 사람이 풍족해짐)할 것이요 가유인족하고 보면 국가부강 자연 있다. 충분한 준비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하면 우리의 수준이 세계수준을 별 문제 없이 단시일에 돌파할 수 있을 것이 확연한 사실이다. 여기서 과학문명의 진보성이 정신문명과 합치되면 그 진보가 속도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언해 둔다. 우릴 민족이 앞으로 대운이 있는 이상 불구에 이런 국책이 누구 두뇌에서든지 나올 것이요 또 나오기만 하면 절대로 성공할 것이다. 비록 기다한 지장이 있을지라도 백절불굴하고 나가서 국가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우리 백산민족의 만년대계일 것이다. 여기서 시간이 있는 대로 구체적 설명을 할까 한다.
  이 붓을 든 것은 을유해방 후에 모 청년에게 '내 이념' 이라는 것을 기록해 준 것인데 대동소이할 것이다. 이후에 구체적 설명을 해서 내가 가졌던 포부를 말하고자 하노라. 이 붓을 그치노라.
  신묘(1951) 9월 초십일 상신정사 봉우 병석에서 갱초


    3. '내 이념' 이라는 책자에 '우리가 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다시 기록해 보자
  우리가 구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제일 궁금하다. 일부 '정감록' 숭배자들이 말하는 해인을 가지고 조화가 무궁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항우같이 용맹한 사람인가. 강태공이나 문태사 같은 천상천하를 마음대로 출입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석가여래 같은 불존인가. 야소(예수)나 소크라테스 같은 성자인가. 대상인물이 누구인가 제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묘연하게 이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고 구하면, 있으면 좋으나 만약 없는 사람을 구하다가는 부지하세월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구하는 대상인물이 어떠하면 우리의 희망을 달성하기에 족한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각자의 의견이 다를 것이다.
  (주석 3) 문중. 동이족이 세운 은상나라 말엽의 태사로, 강태공을 군사로 등용한 주나라와 맞서 싸움. 정신계의 고단자이며 선인으로서 도서 '옥추경'에 '구천응원외성보화천존'으로 숭앙받고 있다.
  그러나 내 이념에는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누구든지 수양과 경험이 있고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작지불이(꾸준히 노력함)하는 추진력과 백절불굴하는 의지와 추현양능(현인을 추대하고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함)하는 아량과 여중공락(여럿이 더불어 즐김)하는 대금도를 가지고 그 금도로 택인하며 그 흉해(넓은 아량)로 접하고 나가면 사상임하(위를 섬기고 아래에 임함)에 근신하며 박채중모(널리 여러 사람이 지혜를 모음)를 여기소출(내 몸에서 나온 것처럼 생각함)하면 그의 행사가 우리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라고 본다.
  이 정도도 물론 그리 용이하게 구하지는 못할 줄로 아는 바이나 우리는 현실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니 대요(요임금)는 유가에서 제일로 치는 성인이시다. 그 행정을 보면 별 신기함이 없이 그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기의 후임을 구할 때 대순(순임금)을 경가도어(농사짓고 물고기 잡음)로부터 기용하여 자기가 수십년을 각계에 사용해 보고 여러 사람 중에 제일 적임자로 택한 것이요, 일조일석에 대순을 구하여 적임자라고 준 것은 아니다.
  순은 호문(묻기를 좋아함)하시며 호찰이언(남의 말을 잘 살핌)하사대 은악이양선(남의 나쁜 점을 가려 주고 좋은 점을 드러냄)하시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자기는 불이과불천노(두 번 잘못을 하지 않고, 성냄을 옮기지 않음)하며 또 따인에게 문하기를 늘 좋아하나 그 상대방을 잘 살피고 그의 잘한 것은 칭찬하고 본받으며 그의 단점은 말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역행자였다.
  (주석 4) 불천로: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처럼 자신의 성냄을 남에게 옮기지 않음.
  여기서 대요씨가 대순에게 전위할 때에 전수심법이라고 '유정유일이오사 윤집궐중이라'. 하시니 오직 대중을 상대하는 데에는 과불급한 행동이 없이 다만 중도만 하면 무사하다는 말씀이요, 대순의 행사도 오직 그 '유정유일 윤집궐중' 이라는 것 외에는 타도가 없었다. 백관도 다 각안기무(각기 그 임무에 안정됨)할 정도로 별 신출귀몰한 사람만 구하지 않았고 다 평상하며 보국안민하는 공정한 이념뿐이었다. 백관들도 각기 추현양능하며 공정한 심리로 백성을 대하니 백성인들 강구연월(태평성대)에 격양가가 없을 리가 없다. 이것이 태평성대였다. 우리 나라도 단군성조께서 치국하실 때는 물론 이와 같은 행정으로 백성이 무위이치(하는 바 없는 것처럼 정치를 함)하였을 것이다.
  (주석 5) 유정유릴 윤집궐중: 오로지 하나에 정통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붙잡는다.
  현금도 물론 전쟁시대요 약육강식하는 시대이니 영웅의 경천동지하는 신기묘산을 구할지 모르나, 내 생각에는 우주구란(우주에 혼란이 오램)이라 개사태평(모두 태평성대를 생각함) 고로 불구하여 이 전쟁이 종식되고 다시 치세(평화세상. 난세의 상대개념)가 세계적으로 있을 조짐이 이곳저곳에 선견되는 것으로 보아서 불구한 장래에 세계일가인 대동평화 정책에 순응하는 인물이 은연중 양성되어 있을 것이요, 이런 인물이라야 백성에게 호감을 얻어서 장구한 성공을 할 것이다. 생이지지(나면서 모두 앎)한 성자가 아니라도 학이지지(배워서 앎)하면서 근수덕업(근면하게 덕업을 닦음)하는 인물이면 우리의 대상인물일 것이요, 백집사(모든 일의 집행)는 지도자의 나침반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니 자연적으로 그 정책에 순응 못하는 자는 퇴장할 것이요, 순응하는 자는 지구할 것이니 이것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다 같은 것이다.
  적재적소로 인재를 사용하면 인재야 하대무지(어느 시대에나 없으리)리요, 국책으로 양성하면 얼마든지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은 지금 사람이요 일은 고대의 성대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 하필 고대와 동격인 성인이 와야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법으로 그 사람을 양성하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사람을 양성하라는 것이 모순이 있나 할지 알 수 없으나 법을 우리 백성의 최안최적한 것으로 제정하고 그 법대로 행정하면 법으로 그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하는 대상인물은 성자도 아니요, 불존도 아니요, 강태공, 문태사나 초백왕(항우)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제정할 헌법을 그대롤 잘 준수할 인물을 구하면 되는 것이요, 그래도 지도자라 거기에 합당할 만한 인물이면 족족한 것이다. 여기서 그 택인 방법이 좀 곤란할 것이나, 구하는 방식도 대중이 합일한 법리화한 방식으로 구하는 것이 제일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일도 요하고 인물의 출세도 요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늘이 시련하시는 대로 시련을 받고 전쟁으로도 그 백성들의 인내성이며 대항성이며 국가가 무엇인지를 교화하시는 대로 민족이 무엇이라는 것도 이 전쟁중에서 알 수 있는 것이요. 또는 흉년이난 병이나 천재시변으로 1차, 2차, 3차로 순서대로 시험해 보시고 그만하면 너희도 독립할 만하다고 인정하시면 우리가 구하는 인물도 그 시련속에서 백련금이 된 인물이 나올 것이요. 민족들도 선거할 것이다. 여기서 간단하게 이 정도로 장래 대상인물의 구하는 정도를 기록해 보고 이 붓을 그치노라.
  신묘(1951) 9월 초십일 봉우서우유신정사 하노라
  (주석 6) 봉우는 유신정사에서 쓰다


    4. 지를 입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입지라는 것은 현대 신조어가 아니요 기천년 전부터 전래하는 술어다. 고성의 말씀에 '입지불고즉기학개상인지사(뜻을 세움이 높지 않으면 그 배움이 모두 보잘것없음. 즉 보통사람의 일이 됨)'라 하신 말씀도 있다. 말하자면 목적이다. 내가 목적지를 천리외에 두었으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각종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목적지를 천리나 만리나 자기 의사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내 자신이 그 목적지에 도달하자는 것이니 누가 타인의 목적하는 바가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이 개입 못할 이 중대한 사건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이 지를 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이것이 제일 선결문제다. 이 세상 사람에서 뜻을 세우지 않고도 잘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다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서 보더라도 입지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이 사람 중에서도 잘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왜 고인 말씀이 입지가 높지 않은 즉 그 배움이 모두 별 볼 일 없다고 규정하시었는가가 의심된다. 그리고 자고로 입지한대로 성공하는 사람이 최소수가 되니 이 입지하는 방식이 어찌해서 그러한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성 말씀에 안분지족(분수를 알고 만족함)하라는 훈계가 얼마든지 있고 또 입지불고즉기학개상인지사라고 말씀하시었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결이 안 된다.
  내가 한번 소선을 타고 대해에서 표풍(풍랑에 표류함)한 일이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표풍된 신세랄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따라간 것이 4--5일. 이 욕을 보다가 우연히 육지를 만났고 더구나 내가 제일 연이 깊은 곳이었다. 이것은 우연한 기적이었다. 여기서 내가 '오!' 하고 자각한 바가 있었다. 세상에서 입지가 없이도 잘 지내는 사람은 내가 표풍하여 인연 있는 땅으로 우연히 닿은 것과 소호(아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 배 있었다.
  그 다음 어느 사정(활터)에 가본 일이 있었는데, 수백인의 사수가 모여서 한 관혁에 경사를 한다. 종일 보니 오시오중에 적중하는 자는 1--2인이요, 그 다음은 사시 삼시의 차례로 오시불중자도 많았다. 그 수백인 중에서 오시단심을 관한 자는 1인밖에 없었다. 다 과불급(지나침과 못 미침)이 개부중(모두 맞지 않음)이었다. 그러나 사수 자신이 자기의 역부족한 것만 탄식하지 1인도 누구를 원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여기서 내가 각한 바 있었다. 이 궁도가 우리의 입지와 같다. 지를 입한 사람은 사정에 나올 사수요, 관혁은 지요, 입이란 관혁의 거리다. 이 사정에 보통 120보에 입관(과녁을 세움)하는 것이나, 후예나 유기나 비위 같은 사수들이야 관을 천보외에 입할 것이요, 비록 같은 궁도라도 소년이나 여자들은 관을 120보 안에 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입지라는 것도 이와 같다고 본다. 각자가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각자의 최안최적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를 택하여 불휴(쉼 없음)의 노력으로 정진하면 각자의 성공은 필연적일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심호사사난성(마음이 넓어서 일마다 이루기 어렵네)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것이 입지에 가장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입지불고즉기학개상인지사라는 것도 그 '고'자가 한계가 있다. 사자(선비)는 지를 군자에 두고, 군자는 지를 현에 두고, 현은 지를 성에 두어서 불휴의 노력정신으로 추급할 만한 '고'를 말씀하신 것이다. 사자가 곧 성에다 입지하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이 심호사사난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각자의 역량에 최고노력으로 추급할 곳에 지를 입하고 성공되거든 다시 그 이상으로 옮기는 서차적으로 승진하라는 것이요, 입지불고즉기학개상인지사라고 각자의 역량도 검토 않고 희성희현(성현을 바람)이나 영웅호걸이나 문장명필이나를 입지하라는 '고'자가 아니다. 자기의 소질이 있고 노력하면 나갈 수 있는 것을 택하여 물론 자기의 양력(역량을 헤아림), 탁덕(덕을 헤아림)도 필요하나 시대의 순응되는 지를 입하고 비상력을 내어서 작지불이의 꾸준한 인내력으로 추진하면 성공 한 될 리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자기가 역량이 이석궁이나 삼석궁을 인할 만하면 적(과녁)을 천보외에 입하여도 무방하고 자기 역량이 보통에 지나지 못하거든 120보 관혁에다 연습하여 적중하는 것이 자기의 성공할 도리라 여겨서 지를 입한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라고 내 자각한 바 있었다.
  세상에서 입지 없이 지내는 사람이 많으나 이것은 보통인의 상사라 말할 필요 없고, 지를 입코자 하는 사람에게 내 의사를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입지는 각자가 택할 것이요, 각자의 역량에 넘치는 입지는 패하는 본이라. 성할 만한 지를 택하여 작지불이로 나가면 자기대로의 성공이 있을 것이다. 타인의 거대한 사업이나 성예를 부러워하여 부족한 역량을 생각지 않고 너무 고원한 입지를 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그렇다고 평이한 일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선택을 백사 천사해서 제일 성공성이 농후한 것을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택하는 방식은 자고로 입지전 중에서 다각적으로 심사를 해서 내가 입지하는 것이 고대인의 하모(어느 누구)에 해당하고 하모가 노력으로 성공한 데 비하여 내가 그만한 노력쯤이야 별 문제가 없다고 자신만만한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입지에 대소귀천은 없고 성공만 하면 이것으로 족한 것이요, 실패하면 화호불성일 것이다. 그러니 화호불성될 입지보다는 계급적으로 9층을 가다가 못 가여도 8층이나 7층은 확실한 입지로 나가는 것이 제일 입지의 요소일 것이며 입지가 있으면 반드시 추진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 입지가 암만 좋을지라도 나가지 않는 입지는 공공한 입지니, 실천력이 있어서 성공 가능성을 가진 입지를 하라는 것이다.
  일로 이 붓을 그치노라.
  신묘(1951년) 9월 11일 봉우서우유신정사
  (주석 8) 화호불성이면 반위구자라: 호랑이를 그리려다 강아지를 그린다는 고사


    5. 우리가 걷고자 하는 길은 어떠한 길인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죽기까지 하는 일이 천층만층 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나누어 보면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최상은 이 세상에 나서 우주인의 할 일을 하고 가는 사람이요. 그 다음은 성현군자와 영웅호걸들의 명전천추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일국의 인물, 일대의 인물로 역사를 좌우하는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일도, 일군, 일향의 선사나 명사가 많은 것이다. 인물이야 위인이건 거물이건 물론하고 선과 악의 구분이 있고 일이야 성공했건 못했건 공과 사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성공여부로만 가지고 그 사람을 평하여서는 안 될 일이다.
  고인들이 말하기를 일시 영화를 바라서 천추에 처량하지 말라고 한 말이 있었다. 이것은 비록 업적은 있으나 공적이 아니요 사적이며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걷고자 하는 일이 어느 부문에 속하는가 하는 말이다. 공정한 입장에서 심사해 보자. 우리가 비록 거보로 가지 못하였으나 우리가 걷는 길은 공을 위한 길이요, 사에는 속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선악을 구분해 보자. 물론 악은 아니다. 선에 근한 일이다. 그러면 이 일이 성공하면 공적이요 선적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할 일이다.
  그러면 이만한 노정기를 가지고 왜 속보로 가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는가 하면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열성이 부족한 것이요 또는 주위환경이 허락치 못하는 것이 주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고대문화의 정신문화를 주로, 물질문화를 종으로 갱생하여 우리 민족을 다시 우주사상에 빛내 보자는 것이니, 무엇이 남에게 부끄러울 것이 있으리요.
  그러나 이 이념을 가지고 한 사람이 나가서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연정원을 시작하였던 것이요. 연방사도 조직해 보고 동지회도 해보고 각양각색으로 해보며 일정시대는 그자들에게 색안경으롤 보게 되고 현정치인에게도 여전히 색안경으로 첨시(눈을 휘둘러 봄)를 하니 이것이 무서워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내 열성 부족이나 동지 단결이 참으로 극난하다. 6, 25 사변에 수십인의 동지를 잃고 다시 나가고자 하니 신동지 규합이 제일 큰 문제다. 이런 일을 하는데도 경제력이 시일을 좌우하니 대체로 자격이 부족한 연고다.
  (주석 9) 연정원. 연방사. 동지회는 모두 일제치하에서 봉우 선생이 조직했던 민족운동 결사의 다른 이름들이다.
  내 선친께서 심호사사난성(마음이 넓어 일마다 이루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 자신으로는 비록 심호병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일을 버리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아주 내게 최적한 목적을 택한 것이다. 세인이야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관계할 것 없다. 잘하든지 못하든지 나가는 대로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비록 고대의 있는 일을 내가 갱신하려고 하나 세인이 보기에는 새로 내가 창작이나 하나 하여 불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십년 적공만 하면 우리 규합된 동지가 다 사상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니 그리 적은 일은 아니다. 전심전력을 다하여 일로 매진하기를 심서할 뿐이다. 고대의 방식대로 우리 동지들을 양성하여 정신적으로 지위를 확보하고 다시 나가서, 물질문명으로 나가서 화학이공을 세계수준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하고 동지들과 같이 나가서 우리 민족사를 빛내고 나가서 세계사를 우리의 업적으로 빛내자는 것이다. 걷고자 하는 길은 대도요.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부언하노라
  야심후라 안력이 부족하여 자행을 불변(구별 못함)할 정도니 가소로다.
  신묘(1951년) 9월 11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라노


    6. 우리 부족을 보충하자면 무엇이 급선무인가
  우리가 전문으로 이 사업에 종사 못하는 이유는 내가 제일 정신이 정일치 못하고 열이 부족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데 너무 주의하는 것이 지지부진하는 연고가 되고 그 외에도 주요원인은 내 가정생활이 단순하지 못하여 내가 가사를 보아서 별 수입은 없으나 내가 아주 탈수(손놓음)할 용기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이 원인을 해소하자면 즉시로 생활의 최저확보를 하고 아주 탈수하였으면 좀 일이 속진될 것 같다.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혜택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선결문제로 내 경제가 가족생활하고 여유가 좀 있어서 우리 사업하는 데 보충이 되었으면 동지 규합에도 유리하고 사업진행도 순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이 경제에게 붙잡히면 도리어 큰 방해가 될지 알 수 없다.
  작년에 반년이라는 시일이 경제확보코자 하는 의도에서 소진하고 6, 25사변으로 귀어허진(헛된 일이 됨)하니 또 이런 일을 착수할 용기가 안 나온다. 이 경제가 너무 풍윤하면 이 경제가 동지 규합의 장해가 되고 너무 부족하면 식생활 해결에 안비막개(눈코 뜰 새 없음)니, 우리가 할 일에 추신(바쁜 중에 몸을 뺌)이 못 되니 과불급(지나침과 못 미침)이 개불중(모두 맞지 않음)이라. 경제 도 좀 허락될 정도는 있어야 하겠는데 명예에 불관하고 아무 일 없고 후일에도 무관한 사업에서는 도저히 여의한 경제력이 나오지 못하고 혹 경제문제가 해결될 듯한데는 후일 명예에 말이 있을 듯 한데서 연락이 되니, 가위 진퇴유곡이로다.
  그리고 이런 경제문제가 재재하니 정신이 정일해지지 않는다. 정일한 정신이 못 되니 사업에 열이 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공사가 혼잡되어 싸우는 것 같다. 그리고 생활도 아주 사적이라고는 못 하는 것이다. 금명 양년중에 이 생활문제 해결하고 그 후에 전문적으로 사업에 나가 보겠다. 그리고 보니 우리의 부족 보충에 급선무가 경제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신묘(1951년) 9월 11일 야심후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7. 지나간 인생의 잘못을 회상함
  과거를 잠심묵상하여 보면 순조로만 나간다면 성공의 길을 걸을 뻔한 일이 한 번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중도에서 노정을 고치기도 하였었고 실패하여 다시 다른 큰 일로 착수한 일도 있었다. 50여년을 풍풍우우(거친 세상살이)로 지내는 중에 금석이 아닌 내 몸은 쇠할 대로 쇠하고 약할 대로 약하여진 것이 이 풍풍우우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기서 백옥은 49년을 경과하고 50이 되어 49년의 잘못을 안다라고 번연개오(번뜩 다시 깨우침) 하였으나 나는 50이 넘은 지 벌써 2년이나 되었으나 물론 비니 시니를 떠나서 과거에 추억도 많으나, 작비(어제의 잘못)를 각하고 내두(장래)와 희망을 가지고 결연 진출할 용기가 나오지 않는다. 과거라고 다 비한 것도 아니요, 내두라고 다 시하라는 원리가 어데 있으랴. 고인의 작비를 각하였다는 것도 과거사 중에서 비한 부분을 각하였다는 것이요. 그 비하였던 것을 거울 삼아 앞일을 잘 하자는 것이다. 백옥이도 49년의 과거를 추억하며 이것이 비하였고 저것이 비라고 생각하던 끝에 오십이각사십구년지비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주석 10) 거백옥. 중국춘추시대 위나라의 대부. 정치가. 공자가 군자답다고 칭찬하였음.
  나도 백옥이와 같이 52년 전 사를 추억해 보자. 내 가정이 비록 한말이었으나 중대부가(고려때 종3품 문관벼슬 집안)에 혁혁한 문벌을 가지고 나온 몸이었다. 내 선친이 45세에 만득귀자(늦게 본 귀한 자식)로 금이야 옥이야 하고 기르던 것이다.
  내 선친은 경학가는 아니었으나 문학가요, 관계에 나왔으나 명로(벼슬길)에 열중하신 이가 아니요, 충의를 좋아하시는 이였다. 말하자면 명리로상의 이해득실에 좀 부족하고 대의명분에는 남에게 지지 않는 분이었다. 그리고 임정(정사에 임함)하여 억강부약(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부추김)하시는 특점을 가지고 내 책임감을 잊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청백하시고 검소하시나 궁교빈족(빈궁한 친구나 친족)에게는 후하시었다. 고성의 성리학에는 좀 부족하시었으나, 복선화음(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오고 음란하면 화가 미침) 이라고 선행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박학다문이시었으나 문장가도 아니었다. 음덕(보이지 않는 선행)을 좋아하고 행선을 좋아하시어서 본성은 열화와 같으시나 양성하시어 대인접물(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춘풍화기로 지내신다.
  내 선친이 소년시대에는 풍상을 많이 지내시고 40에 비로소 관계에 나오셨으나 법부, 내부의 국장, 과장, 대신, 관방비서, 고등재판소 판검사 등을 역임하시고 외임으로 평산, 진도, 능주의 3군을 지내시고 광무황제(대한제국 고종황제) 선위 하시자 능주서 기관(관직을 버림) 하시고 귀가 하시었다. 그러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낙향하시어 강개흥이비 하신 것이 시부적성권(시와 부가 쌓여 책이 됨)이 되어 영동, 공주로 오시어서 집회하신 것이 50여 권이시었다.
  (주석 11) 강개한 마음으로 시를 지음. '시경'에 보임.
  내 선친께서 내가 학자노라 자처하신 일도 없고 내가 문장이라고 자처하신 일도 없으셨다. 그러나 문학가들이 많이 왕래하고 늘 자비하시기를 도연명의 타사야 내 만일이 못 되나 도의 팽택을 버린 것 이나 내가 능주를 버린 것은 동일하다고 말씀하시었다. 친족간에도 애정이 많으셨으나 오직 중부주와 대의명분 관계로 정면충돌이 되어 늘 불화하시었다. 81세에 하세(세상을 하직함)하셨으나 강령하시고 정력이 조금도 쇠하지 않으셨다. 그러시던 중말년 수십년 간을 안빈낙도하신 것은 자타공인하는 일이다.
  (주석 12) 중국 진나라의 시인 도연명(365--427)이 405년에 팽택의 현령이 되었을 때, 군의 장관이 "속대하고 배알하라."고 함에 분개하여 "내 오두미의 봉급 대문에 허리를 굽히고 향리의 소인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고 그날로 사직하고 귀향한 고사. 이 일을 적은 글이 중국 6조 제일의 명문 '귀거래사' 이다.
  그리고 내 자친께서는 고결하신 성격에 나에게는 아주 성모시었다. 나의 장래에 소호라도 흑점이 될 일이라면 음적, 양적으로 교도하시고 장래에 위인이 되라는 암시를 많이 주시었다. 불행히도 내 자친께서 내 18세 윤2월 초사일 하세하시어 다시 나의 대소사를 교도하시는 가정훈화를 을을 곳이 없었다. 물론 선친도 계시나 전적으로 나를 교도하시기는 내 자친이시었다. 내 초중년 불행은 다 내 자친이 안 계신 연고로 해석할 외에 타도가 무하다. 자친이 생존하시었다면 내가 감히 재산을 손대어 볼 생각도 못할 것이요, 또 내가 자친의 교도로 무슨 방면으로든지 성공의 길을 걸을 것을 자친이 돌아가시고 내 마음대로 자행자지해서 중간에 물적으로 일시적 성공도 해보았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자친 돌아가신 지 만 4년 만에 패가하고 그 후 30년 동안을 일한(대단히 빈한함)이 여차(이와 같음) 했었다.
  그러나 내 선친의 호선하시는 실적과 내 자친의 고결명철하시는 수범이 내 흉중에 항상 떠나지 않는다. 내 선친께서는 선사부모(부모를 잘 섬김)하는 것이 효라고 하시며 양지(마음을 편히 해드리는 봉양)가 양구체(입과 몸을 위하는 봉양)보다 나으니라 하시는 말씀이 내가 실패한 후에 몇 번 주의하시는 것을 복문하였고 내 자친께서는 일시의 애정으로 장래에 큰 성공을 목표로 출가하는 것을 불금한다 하시고 효도 소인의 효와 대인의 효가 있으니 내가 살아서 그 소인의 효를 받고자 않는다, 영은 만고라도 불멸하는 것이다, 네야 무슨 짓을 하든지 앙불괴천(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음) 부불작인(내려보아 사람에 부끄럽지 않음)하게 큰 일에 양심적으로 나아가서 부모된 영이 반가움을 갖게 하는 r서이 진실한 효라고 비록 일시적 과오가 있더라도 개과하고 목표하고 나가는 대로 불휴불식하고 나가서 성공으로 부모의 영에 고하라, 네 역량이 부족하거든 네가 뒤에 서고 잘할 사람을 앞에 세우고라도 큰 일이 성공하면 다 성공되는 것이니 생사를 너무 관심 말고 할 일만 힘쓰라고 하시던 말씀이 항상 마음에 소멸되지 않는다. 여기서 52년뿐만 아니라 내가 사후라도 내가 실력이 부족하였지 내 부모는 현부모라는 것을 잘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사조나 우조는 어떠하였던가 하면 문학의 선생님은 초입학이 정무정(정만조) 선생이시니 전국적으로 웅문이시오, 경학으로는 곽면우(곽종석) 선생이시니 비록 수차에 지나지 못하나 내 마음이 부족함이 없을 만치 족족하였었다. 사조는 이만하면 족족하였으나 내가 부족한 고로 아직 성공의 길을 못 밟은 것이요, 우조에 있어서는 내 소장(잘하는 바) 이 수리학이었었는데 전국적인 거물급인 우조가 부족하다고도 못한다. 여기서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자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남유강회에 전달흉해라고 하였는데 나도 보통은 지난다. 구미는 못 가보았으나 일중 각지나 우리 산천 고적은 볼 만치 보았다. 그러나 흉해가 본디 좁아서 별 소득이 없다. 절차탁마도 각계각층 인물들과 접촉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내가 본디 험석이랄 마광이 나지 못한다.
  (주석 13) 남으로 양자강과 회수지방(지금의 강소성 이남)을 두루 다니며 가슴의 바다 같은 포부를 펼침. '사기' '태사공자서'에 보임
  (주석 14) 옥, 돌, 뼈, 뿔 등을 갈고 닦아 빛을 냄. 즉 학문,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닦음. '시경' '위풍 기오편'. '논어' '학이편' 에 나옴.
  그리고 30여년 빈곤생활에 간고의 맛을 많이 보았으나 아직 인고력이 부족하다. 이 일 저 일 해서 일도 많이 해보았으나 모사가 아직 주밀하지 못하다. 실패도 많이 해보았으니 경험도 있을 것인데 아직 과감성이 부족하다. 이것이 다 나의 단점이다.
  가는 대로 가서 천리를 가든지 만리를 가든지 가는 대로 가볼 것이요. 이만하면 하고 중간에다 중지는 말 것이다. 말하자면 백옥은 사십구년지비를 각하였다 하나 나는 내 경과사를 추억해 보고 비건 시건 각한 바도 없고 또는 부지한 바도 없다. 다만 이렇거니 하고 앞으로 나갈 용기가 부족하니 작비를 각했나니 못했나니 말할 필요 없이 그렇거니 해둘 뿐이다.
  신묘(1951년) 9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


    추기
  내 일생을 통하여 과거를 추억하는 중에 시와 비의 양조를 분하여 대강 기록해 보자.
  능주서 상경한 후에 당연히 정규학교로 가서 수학하는 것이어늘 불연하고 사숙에서 무규칙한 수학을 한 것이 제1차 비였었고, 10세시에 비록 대동지환이라 하나 조혼한 것이 제2차 비요, 13세시 상처한 것이 제3차 비요, 이왕 상처하였으면 완전한 성년에 재취할 것을 곧 혼인한 것이 제4차 비요, 재혼 후 심리가 불합하여 외색을 시작한 것이 제5차 비요, 소학을 졸업한 후 비록 소졸로는 우수하였으나 일고(제일고보) 추천생을 거절한 것이 제6차 비요, 비록 소졸이었으나 당시 내가 수학의 천재라는 말을 들을 만치 고등수학까지 별로 내가 해결 못한 것이 없었으니 그대로 수리학 전문이라도 할 일인데 아주 중단하였으니 제7차 비요, 이왕 가정에서 한문이라도 학습하였으면 전문적으로 할 일인데 오일경조로 말만 배우네 하고 전심전력을 하지 않은 것이 제8차 비요, 그 후 심리학이니 정신학 방면을 습득했으나 알아둘 정도요 역시 전력이 없었으니 제9차 비요, 그 동안 신경쇠약으로 신체가 아주 불건하였으니 이것은 부주의한 연고라 제10차 비요, 그후 공주로 반이(이사) 후에 자친상을 당하였으니 집상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일인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으니 제11차 비요, 복약으로 건강이 복구되고 방랑중에서 다소 경제적 여유도 있었으니 아주 지족을 하고 다시 향학이라도 할 일인데 아주 낭인생활을 하다가 경신년(1920)에 아주 경제적 패배가 되어 일패도지하였으니 제12차 비요, 그간에 내가 한시에 취미를 가지고 아무 좌석에를 가든지 보통은 되었는데 좀 전문적으로 연구했으면 중류 이상의 시가라도 될 것을 패가 후에는 다시는 시라고 말도 안 하였으니 역시 제13차 비요, 기익년(그 다음해)인 신유년(1921)에 투기에서 패가한 이상의 경제적 소득이 있었는데 아주 복구하고 여유가 족족한 것을 욕심으로 또 실패하였으니 제14차 비요, 그 다음 또 투기에서 상당 거액이 입수된 것을 여전 실패하니 제15차 비요, 동년에 우조인 산주와 수리를 연구하고 정신법도 연구하여 준학자가 되었으니 불고하고 완성할 것인데 경제적 실패하고 제주로 가서 연구를 중지하고 다시 착수도 안 했으니 이것이 제16차 비요, 그 익년인 임술년(1922)에 재가하여 근력하고 업농이나 하면서 수리나 시학의 연구에 전공하였으면 불과 기년(몇 년)에 가족안정은 될 것인데 신문 지국이니 또 투기나 하다가 아주 입추지지(입추의 여지)가 없이 되어 토혈증으로 고생하였으니 이것이 제17차 비요, 그 후 갑자년(1924)에 전라도를 가서 무슨 실업이라도 종사할 일인데 청년시대에 선친이 용서하신 채권을 받으려고 귀중한 시일을 보내고 있었으니 제18차 비요, 그 익년인 을축년(1925)에 우연히 광주로 가서 약업을 종사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약업이라 실업인데 중간에서 또 투기로 변했으니 제19차 비요, 또 인천서 정신연구에 성적이 좋았는데 불구하고 중지하고 또 지방순회행각으로 나갔으니 물론 경제가 정신 연구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나, 아무렇든지 제20차 비요, 그 익년에 광주에 한약상 허가를 얻어서 개업을 주선할 일인데 또 기술방면으로 낭인생활을 하고 개업을 안 한 것이 역시 원인이야 있으나 제21차 비요, 정묘년(1927년)에 약종상 자금을 얻어서 서울 가서 소비하고 허가까지 취소하니 제22차 비요, 무진년(1928)에는 서울서 약업으로 상당히 입수되었으니 다시 허가를 갱신할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소위 고등계 행세라고 낭인생활로 목포까지 가서 1년이란 시일을 작객하고 마니 무정견한 낭인생활이라 제23차 비요, 기사년(1929)에는 벽태(윤덕영)와 연락하고 위인모충(남을 위하여 정성껏 꾀함)을 덜 하였으니 제24차 비요, 그 후 갑술년(1934)에 중부상을 당하고 낭인생활로 극빈 중에 벌채사업 예비가 아주 불충분한 것과 또는 수판이 맞지 않는 벌채를 감정문제로 시작하여 친지간에 신용문제가 더 생하게 되니 역시 제25차 비요, 병자년(1936)에 부채여산한 중에 소성을 두니 제26차 비요, 그 해 선친상을 당하여 집상 못하고 우왕마왕 하였으니 제27차 비요, 무인년(1937)에 산직전을 매하여 선산 수호를 소홀히 하였으니 제28차 비요, 기묘년(1938)에 도일하여 수입이 상당하였으나 낭비로 생활상 문제는 해결 못했으니 제29차 비요, 임오년(1941)에 근신을 못하다가 7개월이라는 영어 생활을 한 것이 제30차 비요, 그 익년에 가정생활이나 치중하고 음적으로 각종 연구나 할 일인데 역시 낭인생활로 분주하며 또는 간산을 연구적으로 한 것을 행술(술법을 행함)한 것이 제31치 비요, 갑신년(1943)에 가아(아들)가 소학교 졸업이니 당연히 중학 준비를 못한 것이 제32차 비요, 을유 8, 15를 맞이하여 무자년(1948)까지 미온적으로 열이 없이 운동한 것이 제33차 비요, 양력(힘을 헤아림)을 못하고 귀의(국회의원) 입후보한 것이 제34차 비요, 연정원에서 내가 불근신한 것이 환언하면 택인을 못하여 여러 청년의 귀중한 시일을 허송케 한 것이 제35차 비요, 6, 25 사변에 물론 경제가 용서 안 하나 내가 남하하였으면 같이 몇 사람은 갔을 것인데 내가 안 가서 피살당한 사람이 다수이니 이것이 비록 다 자기의 운명이나 나의 과실이라 제36차 비요, 9, 28 후퇴 후에 제반 일을 청년에게 맡기고 나는 서울이나 가서 잔무 정리나 할 것을 연차불위(이를 안함)하고 시일을 보내서 공사 공히 불리하니 제37차 비요, 그 후 선후책(좋은 대책)이 얼마든지 있는데 불계하고 교주가 되어서 진퇴유곡이 되었으니 제38차 비이다.
  (주석 15) 중국 한나라 장창이 경조윤(서울시장)이 되었다가 며칠 후에 면직되었던 일에서 비롯한 말. 오래 계속되지 못하는 일을 비유함.
  (주석 16) 교주고슬의 준말. 고지식하며 변통성 없이 굳어진 소견
  대강 기록해 본 것이요, 비가 어찌 38차만 되리요. 3백, 3천도 더 될 것이나 이 38차로 거수한 것이다. 이 밖에도 얼마든지 비가 있는 줄도 잘 아는 바이다. 내가 용진력과 인내력과 주선력과 계획력이 아주 부족하여 이 방면에 영점이요 기타에도 계왕개래에 자임이 부족하다. 이런 병점과 비점이야 얼마든지 있다.
  (주석 17) 계왕성개래학의 줄임말. 즉 지난 성인을 잇고 앞으로 오는 후학을 열어주라는 뜻. 유교의 대표적 표어
  그러고 보면 백옥이 사십구년지비를 각하였다 하더니 나는 과거 52년간 산적한 비 중에서 대표비만 38을 기록해 본 것이다. 비를 각한 것도 아니요, 지한 것도 아니요, 과거를 추억하며 기록해 본 것이다. 기록하자니 이 비 저 비가 서로 선출권을 다투는 것을 다 정지시키고 대표로만 기록해 보았고 이상보다 훨씬 큰 비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지기지비(자신의 잘못을 앎)라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부언해 둔다. 나는 이것이 대표비거니 하나 타인은 내 단처가 이 이상 더 큰 비점이 있을 것도 잘 아는 바다.
  그러고 보니 지인난(남을 알기 어려움)이라고 말하나 지인 보다도 지기난(자신을 알기 어려움)도 그리 보통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 이라는 비결이 있는 것이다. 아직 극노쇠가 아니라 나의 도기가 아주 근절되지 못하고 단독 생활이 아니라 무슨 일이라도 해볼까 하는 욕구가 있는 관계로 경제가 부수되는데 타인들은 나의 내용을 아지 못하면 경제관이 좀 청백치 않다 할지 알 수 없고 사적으로만 나가면 가족적으로 단합되어 생활하면 안전한 것을 연차불구하고 항상 광폭적으로 나가서 타인들은 나를 호사자라고 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고 내가 도시로 나가는 것이 내 일신에는 유리한 줄 아나 욕구성에는 농산어촌을 중심하고 나가야 할 것인 관계로 산촌을 못 떠나는데 타인들은 용단성이 없다고 말하며 주변없다고 말하는 줄도 잘 안다. 이런 정도는 다 감수하겠다. 여기서 먼저 내 비라는 기록을 써서 보는 것이요, 시라는 기록은 좀 시일을 경과해서 써여도 좋을 것이요, 안 써여도 좋을 것이다. 이 붓을 그치노라.
  신묘(1951년) 9월 20일 야심무매(밤은 깊고 잠은 없음)하여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추기
  비행 중에 오륜삼강에 관한 비행이 얼마든지 많으나 이 비행은 도덕적이요 사업적에서 나타나는 내 비행만 대강 기록한 것이니, 후일 보시는 분이 내가 이 비라는 것을 주로 사업진행에서 말한 것이요, 도덕적에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 주시오.


    8. 우리가 우선적으로 구하여 우리 동지 규합에 수범이 될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국가나 단체나 사람을 구하는 방식은 다 같다. 너무 거물급도 대중에서 극소수인 관계로 대상하고 구할 수는 없고 너무 저열하면 사무집행에 지장이 생기는 관계로 대중을 상대로 통속적이요 사무적 능간(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 사업에 기초가 될 사람이다. 우리의 이념에 동호를 가지고 사업적이면서도 장래의 거물이 아니면 우리 동지 규합에 완전한 성공을 볼 수 없다. 그러니 기성 인물에서는 도저히 구해 볼 가능성이 박약하다. 그러니 장래에 거물급이 될 잠재성을 가진 동지를 구하여 일방 동지로 협력하며 일방 그의 부족을 보충하여 내두(장차) 거물급이 되기까지 우릴 동지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박에서 옥이 나오고 석에서 금이 나온다. 그러니 내 말하는 것은 옥이나 금을 완성품을 구하자면 다 임자가 있어서 우리 손에 올 리가 없으니 우리는 우수광석을 구하여 그 중에서 정금미옥을 내자는 본의다. 그러니 이 정금미옥이 든 광석을 알아보는 책임이 중하다. 말하자면 초백왕(항우)은 기성된 금이요 한패공(유방)은 광석에든 금이었으나, 백왕은 그 금이 정금이 아니었고 패공은 광석에서 채출하여 백련하니 정금이 되었다. 이와 같이 공장이 손에서 탁마를 받은 옥을 구하지 말고 옥이 든 석을 구하여 우리가 마음껏 탁마하여 광채를 날 수 있는 한 내보는 것이 우리의 이념이다.
  금석이나 옥석이 다른 돌이 아닌 줄 알기는 용이하나, 그 속에 든 금이나 옥이 우수한지 저열한지가 보통 안목으로 분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광석이라고 보통 돌이 아니라고 구해 두었다가 급기(때에 이름)하여 선광, 채광, 제련을 다하여 보아도 별 성적이 없으면 이는 소기에 어그러지는 일이다. 여기서 금석이나 옥석도 보통 안목으로는 절대 불가별(분별하기 불가능)할 것이요, 좀 안목이 있어서 이 금석, 옥석을 안대도 그 품질이 현수(현격하게 다름)할 것이다.
  그러니 금은 양이 많은 것을 구하여 백련하면 정금이 되나. 옥은 아주 질이 다르다. 미옥이 아니면 다른 옥을 탁마한대야 미옥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정금 될 자격을 가진 인물은 구할 수 있으나 미옥 될 질을 가진 인물은 구하기가 절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금석 옥석인가 알아보기도 보통은 못할 일이요, 더구나 정금미옥이 든 것을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돌 속에서 현덕을 안 사람은 공명이 있을 뿐이요, 또 조조가 있을 뿐이었다.
  천하에서 1인이나 2인의 지기가 귀한 것이니, 돌 속의 금을 알기는 돌 속의 옥 알기보다 나을 것이요, 또 같은 돌 속이라도 미옥인지 아닌지 알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미옥이 든 돌을 안다고 곧 내 물건이 되는 것도 아니요, 내 물건이 된다 하더라도 탁마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해 보지도 않을 수가 없다. 정금이 든 돌도 구해 보고, 미옥이 든 돌도 구해 보자. 우리는 정금미옥이 다 되어 있는 대로 가여도 좋으나 우리의 이념과 동일한 곳이 별로 없다. 이러하니 할 수 없이 정금미옥이 든 돌이라도 구해 보자는 것이다. 가다가 점금미옥이 우리와 이념이 같다면 우리가 합치하여도 손될 것 없다. 그러니 정금미옥이 든 돌을 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념이 같은 정금미옥을 구하든지 두 가지 중이다. 현상으로 보아서 출세한 정금미옥도 보이지 않고 우리의 이념의 동보조로 나가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금 사람들이 말하자면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것이나, 백산운화가 세계일가의 동화정책에 합치될 날이 머지 않다. 대동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동책이 현세계를 지배할 것이요, 우리 백산족이 이 대동책을 세계에 선포할 것이다. 그러면 한중인(한국, 중국, 인도) 추축이 되어 동방의 제약소국가도 다 안형태평하게 지내게 하며 황백 대세가 환국이 되어 미주는 여전히 자유세계에 동서대립할 것이요, 영불 등은 이등, 삼등국으로 자보에 여력이 없을 것이요, 소련은 해체되어 중소(여러 작은) 국가로 변해질 것이다. 이것이 장래의 우리 이념하고 있는 백산운화라는 것이다.  삼육성중(36명의 성스러운 무리)이 범태(평범한 사람)로 나온 것은 가리지 못할 사실인데, 어디서 정금미옥을 구할 것인가. 연정원에서도 내가 영전에 심축한 것이 백산운화를 응할 인물들이 속히 출현하기를 구한 것이다. 다 광석은 광석이었으나 정금미옥이 든 돌이 아니었었다. 그러니 아무 광석이건 모아 보아야 그 중에서 정금이나 미옥이 든 광석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은 이 광석을 구할 사람이다. 그러니 외면으로 매광소(광석 사는 곳)라는 간판이라도 있어야 할 일이다. 매광도 할 것이요, 탐광도 할 것이요, 기성품도 구해 볼 일이다.
  이 정금미옥이 아니고는 우리가 이념하고 있는 일을 성공하기에 너무나 노력이 드는 것이다. 기초 상량될 인물들이 다 아직 미지수에 있는 것이나, 백산운화로 보아서 범태로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노소를 물론하고 남북동서도 무관이다. 오직 우리의 대상인물이면 우리가 구할 책임이 있다.
  삼국시대(중국)에 18로 제후가 회합하였을 시에 현덕은 말좌에 공손찬의 부하였었다. 그러나 18로 제후는 당 정금은 못 되었던 인물이다. 수로도 치지 않던 현덕이 미옥인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리요. 오직 조조가 천하 영웅을 평하다가 유사군여조(오직 그대와 조조)라고 지인지감(사람을 알아보는 감식력)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현세에도 정금미옥이 재야한가, 그렇지 않으면 맛갛지 않은 직장을 가지고 은명하는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주석 18) 맛갛지 않은: 알맞지 않은, '맛갛다': 알맞다
  그러하니 광폭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미옥을 싸고 있는 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삼육성중이 일시에 취합하기는 어려운 일이요, 1인, 2인씩 규합되어 과반수라도 규합된 후라야 마음 놓고 발족할 것이다.
  근세사로 보아도 독일 희도라(히틀러)도 최초에는 수삼인의 동지와 결합하여 거사 준비를 하였고, 이태리 무소린(무솔리니)이도 역시 흑의단의 기명(몇 명)의 거두들과 거사하였고, 손문이나 장개석도 동지가 그리 많아서 시작한 것이 없다. 장개석도 손문의 유지로 손문의 동지를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황포군관학교에서 자기 손으로 양성한 종지들이 친병으로 제일 강했던 것이다. 이것은 개석이가 금석에서 채금해서 백련을 하여 정금으로 만든 것이요, 그의 동지들은 그리 장개석의 우에 출할 자가 없었다. 이것이 당 규합동지의 역이요, 개석의 현상은 비록 대만일우(대만 한구석)에 칩복하였으나, 아무리 무정한 사가라도 개석을 세기의 영웅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다. 고영웅(고대의 영웅)에 비하여 소호도 손색이 없는 영웅이다. 그러나 자기사업을 비록 중산(손문의 호)의 유지로 하였으나, 자기가 규합한 동지가 중심체가 되어서 그 성공을 완전히 하였을 것이다. 그의 일시적 실패로 그의 영웅적이면서도 위인이라는 것을 못내 애석해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손으로 거사해 보았으면 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내 구해 볼 수 있는 대로구해 볼 것이요, 정금이옥주의는 버리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정금이나 미옥이 든 돌을 구해서 절차탁마하여 백련을 해서 우리의 소구에 맛갛게 해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초입지를 변하지 않을 것이요, 1인 2인의 동지라도 속히 규합해서 우리의 입지대로 나가 보자는 것이 본의다. 우리가 구할 사람은 물론 정금미옥이 아주 된 사람도 좋고, 정금미옥이 든 돌도 좋다는 것이다.
  신묘(1951년) 9월 21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9. 동지도 가지가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동지, 동지 하나 그 동지 중에 진정한 동지가 얼마나 되며 또는 동지라 하더라도 그 가지가 얼마나 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동지는 동지다.
  우리가 여기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동지라는 것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백산운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같은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 의사를 찬성하든지, 또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라도 무조건하고 동행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확정 않은 사람으로 무엇인가고 와서 맛볼 겸 동행하는 사람이 다 동지의 하나이다. 이 중에서도 우리를 지휘하고 선두에 나설 사람도 있고 그저 동일방향으로 나갈 사람도 있다. 십리 동행도 동행이요, 만리동행도 동행이요, 또 하루길 동행도 동행이요, 한나절 동행도 동행이다. 말하자면 방향이 같다는 말이다. 기로에 오기 전까지는 같이 가는 것이 다 동행이다. 그러니 목표가 동일하고 출발이 똑같은 동행은 좀 귀할 것이요, 가는 중에 상봉하였든지 다른 길에서 이 길로 와서 만났든지 동행은 틀림없다. 여기서 그 동행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동행하는 동지들을 취급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각인각심이라 십리를 갈지 만리를 갈지 알 수 없고 다 같이 가더라도 목적지가 같을지 다를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고로 이 동행하는 사람 구하기가 얼마나 극난한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사가 소연(분명함)히 증명하고, 근세라도 각국 실정을 보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많다.
  여기서 고인들이 말하기를 지인지면부지심(남을 알고 얼굴을 알아도 마음은 모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부지심하니 다 동지가 아닌가 하면 그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단거리 동행도 동행이요, 장거리 동행도 동행이요, 사생을 같이 하는 동행도 동행이다. 그러니 지심부지심을 문제할 것 없이 동행하거든 동행이거니 하고 내 행동이나 소홀함이 없이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언충신행독경(말에 믿음이 있고 행동은 진지함)하면 수만맥지방(비록 남북의 오랑캐나라)이라도 가행(갈 수 있음)이라 하였으니, 취할 방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동지들을 만났더라도 내가 취할 태도는 여전히 언충신하고 행독경하면 동행인의 심리여하를 불구하고 내가 갈 길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주석 19) 공자님 말씀. '논어' '위령공' 장에 보임
  동지들과 일을 같이 하는 것도 소호도 이 동행인과 상대하는 태도가 변하여서는 안 된다. 상대하는 동지야 어떠하든지 여전히 내 목적하는 방향으로 근신하고 진출하면 중간에 지장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행이 십리를 동행하건 만리를 동행하건 내 보조나 내 태도는 내 목적을 지향하고 꾸준히 언충신하고 행독경하며 나가면 비록 동행 중에서 아무 고장이 생하더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까지 가기에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동지애, 동행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애는 동지건 아니건 있어야 하고, 동행이건 아니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인은 박애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벙애중(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함)하되 이친인(어진 이를 가까이 함)이라고 말하신 이도 있다. 
  (주석 20) 공자님 말씀. '논어' '학이' 장에 보임
  애는 누구든지 다할 것이나, 친하고 인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사해지내개형제(온 세상 모든 이가 모두 형제임)라고도 말하나, 동가홍상이라고 동지나 동행에게 우선적인 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지애라는 것을 이해를 잘 하면 추인, 추애(사랑의 실천)가 되어 대인접물(남을 접하여 사귐)에 막힌 데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동지든 동행이나 다른 사람보다 우선적으로 내가 솔선하여 애정을 베풀라는 것이다. 그래 동지나 동행 중에 내 입장을 밝게 하라는 것이다. 자아를 인식한 연후에 동지를 대하라는 것이다.
  동지간에는 겸공(겸손과 공경함)과 자애가 겸행해야 된다. 물론 이상 이하가 있을 것이니 사상육하(위를 받들고 아래를 길러줌) 하면서 동지로 동행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아를 인식하야 한다는 것은 동지가 내 이상인지 내 이하인지를 구별해서 차별대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사상할 인물인지 육하할 인물인지 겸공과 자애에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부적(맞지 않음)하면 동지로서 이탈하기 용이한 것이다. 고인이

  대인막설부여오하라
  오자오시피역오니라
  이물간오하면 오역물이로다
  추오급물하면 물역오라

  풀이
  남을 대하여 나와 같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나 스스로 나라 할 때 그(남) 역시 나인 것을
  사물의 입장에서 나를 보면 나 또한 사물이니
  나를 미루어 생각함이 사물에게 미치면 사물 또한 나이다.

  라고 평등론을 말한 이가 있었다. 나는 이 글을 동지에게 잊지말고 적용하면 별로 실패 없을 것이라고 본다. 동지도 가지가지나 나로서는 동일한 동지 대우를 하되 사상육하를 잊지 말고 자아성을 가지지 말고, 평심서기(평온한 마음으로 기운을 폄)하고 대인접물하면 가지가지 동지라 구분이 잇을 것이나 나는 일심으로 대하면 족한 것이다.
  신묘(1951년) 9월 21일 심야 봉우서우유신정사


    10. 우리의 발족은 하시가 적당한가
  우리가 욕구하는 일은 어떤 개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어떠한 단체를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한 나라, 한 민족을 위하고자 하는 것이요, 미루어서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종자를 심은 지 벌써 오래다. 그러면 이 종자가 심어진 때부터 벌써 발족이 된 것이다. 다시 새삼스럽게 우리의 발족을 운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자가 심어진 것은 우리들이 알 뿐이료, 세인의 이목에는 아직 미현된 것이다. 그러니 이 신아(새싹)가 발생되고 지엽이 점무(점차 무성)하여 화개결실하는 계단을 보고 세인은 비로소 무엇인가 하고 호기심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종자는 심었느나, 아직 신아가 나지 않았다. 신아가 나자면 춘화일난(봄처럼 화창하고 따뜻함)한 시절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그 춘화일난한 시기가 하시쯤 되겠느냐 하는 말이다. 신아가 나온 후에도 완전한 화개결실이 되자면 상당한 시일과 백반(여러 가지)의 노고를 다 겪어야 비로소 그 화도 개하고 실도 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아가 아직 나지 못한 것은 이 춘화일난한 시기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이다.
  고인의 말에 대기는 만성이라고 한다. 우리도 욕구하는 일이 그리 적은 일이 아니요, 우리의 힘이 그 일에 넉넉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니 넉넉지 못한 힘을 합하고 또 합하여 이 합한 힘이 열이 생하여 춘화일난한 시기를 만들 것이다. 그러하자니 상당한 시일을 요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고인의 시구에

  기경납설고고목
  일착동풍개개화

  풀이
  몇 번 납설 지낸 마르디 마른 나무
  봄바람 한 번 닿으니 가지가지 꽃이네
  (주석 21) 납일, 즉 동지 뒤의 셋째 미일에 내리는 눈

  라고 하였다. 우리의 과거경과는 말할 것도 없이 상설중에서 있었다. 그러나 장래에 잔설은 사라지고 춘풍이 불날이 그리 머지 않다. 적설은 이미 사라지고 심곡에 잔설이 아직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춘한이 상초(아직 엄함)하다는 말이다. 이 춘한을 견디기가 동지섣달 설한풍보다 더 자미(재미)가 없다.
  그러나 설마 춘한에야 냉기가 있다 해도 동사할 리는 없다. 아무리 준비를 못했더라도 얼른 우수, 경칩이 지내고 청명절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의 발족이 우수, 경칩절 지내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입춘은 지냈으니 안심들 하고 청명 맞이 준비나 할 일이요, 신아가 발생되거든 전심전력으로 배양하여 백절불굴의 의지로 이 신아가 장래 충천지교목(하늘 높이 자라는 나무)이 되기까지 우리들이 보호하여 화개결실의 영을 보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시일이 많아야 두 절기만 지내면 청명절이 올 것이니 상설몽 꾸지 말고 봄바람엥 잠을 깨소. 동지들이여 봄소식 전하노라. 우리의 목적에도 이 봄이 왔도다. 춘화일난 좋은 시절 순식간에 맞이하리
  신묘(1951) 9월 22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11. 국제연합의 한국에 대한 사명
  국제연합의 한국에 대한 사명이 무엇인가. 정치적으로 평화를 목적으로 교섭하며 군사적으로는 분열된 국토를 통일을 목적으로 나가며 경제적으로는 파괴된 것을 재건을 목적으로 나간다. 거룩한 말이다. 사명만은 성스럽다.
  그러나 여기서 회상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회상하느냐. 8, 15 직우에 미소 양군이 군사적으로 한국을, 남북을 각기 점령 하였으니 이것은 군사적이요 정치적이 아닌 이상 당연히 양군이 정치적으로는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근본정책인데, 불연하고 남북 양군이 각기 주장을 달리 하여 소위 미소공동회담이라는 것이 남북의 주요인물은 참석을 불허하고 양군 대표만 회담하고 각기 주장을 고집하여 필경은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정부를 수립하게 되도록 제일차 한위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한다고 선언한 것이 6, 25사변을 배태시킨 것이다.
  미소 양군이 고집을 않고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었으면 비록 대내적으로는 분쟁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대외적으로는 큰 문제가 생할 리가 없고 또는 군사적으로는 통일을 목표로 진행한다 하나 국련(UN)에서 좀더 한국을 6, 25사변 전에 원조하여 무비가 충실하였으면 6, 25사변이 국지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될 리가 만무하다. 국련에서 6, 25사변 전에 남북의 무비현상을 아주 알지 못하였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알면서 내버려둔 것은 6, 25사변 발발을 예기한데 지나지 못한다. 북방에서는 완전 무비를 하고 있는데 남방에서는 극히 약한 무비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 물론 우리 한국이 부족한 관계나, 일동일정을 감시하며 일촉즉발의 위기가 있음을 좌시하고 있던 미국이나 한위들의 심사를 알 수 없다.
  여기서 국군이 전패된 후에 전한국이 물적, 인적으로 파괴될 대로 파괴되어 다시 재건하기 어려운 정도에 와서 국련의 경제적 목적은 재건에 있다 하니, 감사는 하나 이 재건보다 십분지 내지 백분지 일만 가지고 한국을 6, 25사변 전에 완전무지를 하였던들 이런 파괴가 올 리가 만무하여 국련에게 경제적 재건을 요구할 리가 없을 것이다. 선자엥 잘못이 있으나, 후자라도 배신함이 없이 평화통일 재건을 실행하영 주면 감사의 의는 표하겠고 우리 민족 자체도 의존성을 버리고 자립의 길을 하루라도 속히 걸어야 국련 신세을지지 않을 것이다.
  이 붓을 들자 여러 가지로 감루(눈물이 돎)를 금치 못하노라
  신묘(1951) 10월 개천절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12. 재
  재라는 것은 인류가 사는 데 근원이 되는 것이다. 하늘이 이 인류를 내심에 반드시 인류를 생존하게 하심이라. 우리 인류가 세상에 나서 하늘이 내신 그 거룩한 덕을 갚고자 할진대, 다 각각 자기대로 그 생명을 보전해서 하늘의 인류를 내신 본의를 그대로 보답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요. 책임이다. 우리가 이 책임을 완수하고자 하면 먼저 우리의 생명을 보전해야 하는 것이요, 이 생명을 보전하자면 먼저 그 보전하는 도리를 우리가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생명을 보전하자면 무엇으로 가한가 하면 의식주가 아니면 우리 인류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의식주 삼건사가 한 가지라도 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환언하면 우리 인류의 생명은 이 재가 아니면 보전할 수 없는 것이요, 우리 인류가 이 생명을 보전하고야 하늘이 이 세상에 내신 그 거룩한 덕을 갚을 수도 있고 자기 책임 완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생명을 보전하는데 잠시도 불가결할 이 재를 선결문제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세상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기 자기 소장(잘 하는 바)대로 직업에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재를 생하고자 하는 대요가 두 가지 있고 또 이 재를 생하는 법도 두 가지 있다. 재를 생하고자 하는 대요가 한 가지는 나의 의식주를 위하여 전문적으로 나가는 것이니, 풍의식화거주(먹고 입는 것을 풍요하게 하고 사는 곳을 화려하게 함)하고 개인적 부호를 목적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광범위하게 말하면 천하요, 축소하면 일국, 일족이나 일도 일군이라도 동일한 궤도다. 환언하면 대중을 상대로 내 전심전력을 다하여 대중의 의식주를 풍유하게 하고자 함에 따라 자기 의식주도 해결하고 자기나 대중이나의 후박 분별이 없이 나가는 것이 대중을 위하며 따라서 자기도 위하는 대요다. 이것이 재를 생각하고자 하는 두 가지 대요요, 그 다음 재를 생하는 법의 한 가지는 재를 생하는 사람이 많고 재를 소비하는 사람이 소하면 항상 그 재가 여유가 있고, 그 반대로 재를 생하는 사람이 소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재가 항상 부족할 것이다. 환언하면 한 방면은 적극이요, 한 방면은 소극이다. 이것이 재를 생하는 만년불변하는 공식이다.
  그러하니 우리도 이 세상에 인류로 나온 이상 잉 재가 없이는 이 생을 보전할 수 없는 것이요, 또 이 재를 생하지 않아서는 이 의식주를 계속할 수 없는 것이 불변하는 철칙인즉, 우리도 여기서 재라는 것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하여 두며 그 다음 생재하고자 하는 대요나 생재하는 법칙을 신중히 검토하여 일거일동을 주의할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재상분명이 시군자'라고 말씀하시어 혹은 대인들도 재상의 이해 관계로 상대방과 분명치 못할까 주의한 것인가 하였더니, 이 재의 원론을 쓰며 생각하니 그 분명하라는 것은 생재의 대도, 소도에 분명하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석 22) 재산상 분명함이 군자이다
  고인도 이 재라는 글자로 말이 많다. '재취어상이 민산어하'라고도 하고 '재산어상 이민취어하'라고도 하였다. '민지취즉오지취니, 민기족하면 오수여부족고' 한 말씀이 있다. 재에 대한 대관절인 것 같다. 또 '유토면 차유재요, 유재면 차유용이라' 하시며, '소인은 낙기락이리기리' 라고 하시고 맹자는 '여중악락과 독악락이 숙락이냐'고 반문하신 일도 있다. 대인의 어세장민(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기름)하며 이용후생하는 대도에 이 재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이 재라는 것을 범연시(데면데면)하지 말자는 결론이다.
  (주석 23) 재물이 위로 모이면 백성은 아래로 흩어진다.
  (주석 24) 재물을 위에서 흩으면 백성은 아래에 모인다.
  (주석 25) 백성의 잘삶은 나의 잘삶이니, 백성이 이미 풍족하면 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할꼬
  (주석 26) 땅이 있으면 이는 재물이 있음이요. 재물이 있으면 쓸모가 있다.
  (주석 27) 소인은 그 즐거움만 즐겨 하고 그 이로움만 이롭게 생각한다
  (주석 28) 무리와 더불어 음악을 즐김과 홀로 음악을 즐김이 어느 것이 좋으냐. '맹자' '양헤왕' 하편에 보임
  신묘(1951) 10월 개천절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추기
  재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고로 이 재로 말미암아 실패한 인사가 얼마나 되는가. 이차관지(이로서 봄)컨대, 이 재라는 것을 정당한 해석 하에 이신발재(몸으로 재물을 많이 벎. 부자가 됨)나 이재발신(재물로 출세함)의 구분을 가지고 나는 어느 부문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발족하는 사람이 극소하고, 해가는 대로 하다가 지족을 못하고 탐재라는 말을 들은 인사가 자고로 많다. 그리고 구재(돈을 벎)하는 방식은 같으나 용도가 공이나 사로 분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별을 자타가 공인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자기 양심이 알 것이다. 자타가 공인되기까지는 이 재를 사용한 후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여기서 안빈낙도하고 이 재라는 문제를 될 수 있는대로 초월하라는 것이다. 하필 군자라야 안빈낙도하는 것이 아니다. 사자(선비)로 누구나 당연히 할 일이다. 이 재라는 것은 우리와 불가분의 입장에 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너무 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득책이라 하겠고, 또 목적이 있어 나가는 사람들은 부득불 이 재가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니, 확실한 책을 세우고 구재하여 사업목표를 도달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동지들 중에도 비록 목표는 좋으나 이 재라는 원천이 없어서 실패한 인사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하니 이 재가 우리의 목표를 도달하는 데도 유일한 부수조건이 되는 것이니, 이 재의 생하고 않는 데서 우리의 노정에 지속(늦음과 빠름)이 있다. 안빈낙도로 일생을 보내시는 인사야 무슨 그리 재와 관련성이 많지 않으나, 사업을 목표로 나가는 인사들이야 직접 관련성 있는 것이니 신중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묘(1951) 개천절, 봉우 추기


    13. 한의학과 약학계에 우리가 바라는 바
  한방의나 한약종상에 대하여 우리가 바라는 바가 있다.
  한방의로도 물론 풍부한 학식과 노련한 수단을 가지고 임상진단에 병인이나 가족을 경탄케 하는 분도 많고, 양방 일류병원에서 불치로 퇴원한 병자가 한의의 손에 완치된 실적도 많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서 한의학을 교수하거나 연구하는 기관이 아주 미미하고 현상으로 보면 38년 전 갑인년(1914)엥 비로소 왜정하에 의생 시험이 있었고 그 후 연년이 도 위생계에서 약간의 강습이 있었으나, 한의학을 치중하여 강습한 것이 아니라 양의에 대한 상식을 강습하고 한의학은 약간의 강론이 있을 뿐이었고, 한약종상도 연년 허가를 내주고 약간의 강습이 있어서 이 강습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경험이 좀 있는 사람은 의생으로 허가해 준 것이 보통이었다.
  이 의생이나 약종상에 의약의 학식이 얼마만한가 하면 보통은 어느 약국 종업원으로 기년간 종사하고 시험에 통과하여 의생이나 약종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문견과 경험이 있을 뿐이요, 체계가 있는 전문적 학식은 보통 다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한방의약계에서 과거가 미약하였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한방의생으로 임상진단에서 신출귀몰한 진단을 자신있게 하는 분을 여러 분 보았다. 그리고 나도 이 의약학을 좀 연구해 보았는데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연구할 자료가 얼마든지 있고, 병리학이나 임상진단학도 무던히 상세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방의학계가 통일이 못 되어 잘하는 사람은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아중 영점이다.
  한약도 병자에게 사용해 보면 어떤 약은 신기한 약이 많다. 그러나 한약도 역시 통일이 못 되어 약종상이라고 약성이나 약학에 대한 상식이 아주 없는 이가 걱셩드뭇하다(자못 많다). 이것이 우리 한방의약이 대우를 못 받는 연고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사계(이 방면)의 최고권위자들이 합하여 한의학이나 약학에 전문이나 대학을 기성(꼭 기약하여 이룸)하고 약도 정제를 해서 연구와 경험이 학리적으로 나와서 신구 의약이 동일한 대우를 받게 하라는 것이다. 전문이나 대학을 졸업하고라도 연구소를 특설해서 우리 의학이나 약학이 세계진출을 목표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상에는 한방의약의 대우나 실질이 다 통합적으로 보아서 50프로도 못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신의약이 다 우수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왕왕 고명한 의사나 유명 처방약은 신방(양방) 의약으로 도저히 치료 못할 중환자도 경경하게 치료하는 예가 있다. 여기서 우리 의약계가 통일이 못 되고 기초지식이 보급되지 못한 관계로 통계해 보면 신구 의약의 비율이 50프로라는 것도 대접한 말이다. 우리들 중에서도 중진만 회합해서 신구를 비율해 본다면 반비례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중진들이 비밀을 지키지 말고 사계를 갱생시켜서 후진하는 사계 동지들을 양성해 보라는 것이다.
  내 이 좌상에서 소위 우리나라 최고급이요 신의약계 권위자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말이 한방도 경험적으로 혹간 효력이 있는 것이나 좀 정제나 했으면 좋을 것이요, 의서도 이론적이지 실지적이 아니라고 무슨 학교나 연구소를 낼 정도는 못 된다고 가치 없는 것으로들 말하고 좌상의 신과학자들이 다 동감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들이 구의약에 상식이 없어서 하는 말이요, 자기들이 아직 사계 중진을 만나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보편적이 못 되고, 소위 현 의생들이나 약종상들 중 그 사람들이 말하는 대상인물의 90프로는 무려(가격이 없음)하다. 이것이 사계가 발전 못하는 원인이다.
  신묘(1951녀) 10월 개천절날


    14. 연정원을 갱생하자면
  연정원을 갱생하자면 먼저 연정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연정원을 갱생해서 유리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연정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비록 전문적으로는 종사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수십년 전부터 정신연구를 목표로 혹은 사문에서 참선도 해보고 산상에서 석굴이나 토굴을 수축하고 단신이나 혹은 3--4인, 혹 10여인이 정식으로 정신을 수련해 본 일도 있고 또는 해변이나 교목상에서 고력수행도 해보고 설상에서 내한수행도 해보고 하간에 수중에서 수수행도 해보았다. 그러던 중 우리 동지들이 무자년(1948)에 계룡산상 삼불봉하에서 10여인이 집단해서 내한수행으로부터 고력수행을 계속할 때, 우리가 거주하는 석굴을 제인의 의사로 명명할새, 각인각양의 별 명명이 다 있었으나 연정원이 제일 합격되어서 아주 연정원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 연정원 이라는 명명 아래에 우리들의 정신연구를 목표로 동지들이 집합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 연정원이 장시일을 요치는 못하였으나, 원우들 중에서는 상당한 단계까지 갔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 연정원이 되기 전에도 역시 정신수양을 같이 한 동지가 얼마든지 있다. 무자년(1948) 전에 규합된 동지나 무자년 후에 규합된 동지나 다 연정원우로 가입한 것이다. 원우의 자격은 우구나 우리들이 목표하고 나가는데 동호자로서 정신수양에 참가한 자가 원우의 자격이 있고, 비록 정신수양만 같이 하였더라도 목표가 다르면 원우동지로 취급 안 하였다. 
  우리의 연정원 목표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항상 말하는 우리의 대황조(한배검)가 동양문화의 원시가 되고, 대황조의 교화가 유불선의 분파가 된 것이라는 우리 고대문화와 역사를 다시금 회생시켜 보자는 목표다. 이것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고대 역사와 문화를 우리의 손으로 다시 갱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몽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주 소년시대부터 이런 암시를 받은 일이 있었고, 그 후 정신연구로 중국 일본 각지와 우리나라 명산대천 고적이 있을 만한 데에서는 다 고적을 수집해 보고, 문헌은 문헌대로 고적은 고적대로 또는 내가 연구하는 수리학에서도 이적 증거를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 보았으나 다 확실 무의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이 역사가 소멸된 천삼백년 이상이나 되는 것을 다시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민족혼을 살리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 민족 중에서 이 말을 창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근년에 신단재가 중국에서 문헌으로 보고 이 말을 좀 비친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본 우리 대황조와 신단재가 본 대황조가 다 같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일생릉 이 주장에 헌신하자는 것이다.
  연정원에서 수향하는 방식은 무슨 방식인가 하면 대황조가 가르치신 방식대로 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유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선교에서나 다 같은 방식이요, 또 금일 서양에서 정신학을 연구하는 것이나 동양에서 연구하는 것이나 방식이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민족의 습관이나 풍속이 다른 관계로 소호의 차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과학으로는 아직 설명 못할 일이 많이 있다. 물론 구미에서도 정신학자만은 이 과학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많을 것이다. 과학으로 본 이 세계는 인류의 체육이나 지육의 차가 현 문명족으로는 통계학상으로 보아서 얼마 되지 않는다. 혹 체육에도 괴력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이것은 과학상으로는 증명키 난한 예외요, 지육 방면에도 물론 천재가 있으나, 소학, 중학, 전문, 대학, 대학원이라는 계단이 아니고는 최고수준에 갈 수 없는 거시 과학적 증거다. 이것이 현세계를 통해서 거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이 연정이라는 것은 천재가 아닌 아무 사람이라도 우리가 말하는 수양방식을 취하면 잉 장기 수학을 안 하고라도 충분히 차에 필적할 만하게 지육이 발전할 수 있고, 체육에 있어서 천생의 대력자가 아니라도 아무리 체육이 불발달된 사람이라도 내가 지도하는 대로 일정 기간만 경과하면 완전한 체육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환언하면 정신수련을 하면 학자는 자기 학과에 따라서 박사학위에 갈 만한 학력을 얻을 것이요, 운동가는 세계 현기록쯤은 무난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연정원을 갱생하자면 제일 먼저는 급비로 원우를 양성해서 어떤 기간까지는 선전하도록 수양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은 내가 말라고 하더라도 확충될 것이라고 추측된다. 물론 여기서 원우 될 만한 심사도 있어야 하는 것이나, 이런 것은 예외로 하고 이 연정원을 갱생하자면 제1요건이 경제문제로 주력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연정원 수련기간을 만 2년 이상 5년으로 정하고 이상은 자유로 연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현세계 과학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고 이상 수준을 돌파하자면 2기까지면 문제없다고 확언해 둔다. 현 과학에서도 이화학이나 공학이나 농학이나 의약학은 2기면 세계 수준돌파가 문제없고 문학이나 법률, 경제학이나 철학이라면 세계 수준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정신연구 방식을 근대 일본서 유행되는 방식과도 비교해 보고, 중국 방식이나 인도 방식과도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 고대부터 전래하는 방식으로 지극히 간단하고 실행에 옮기기가 가장 용이한 것이다. 그러나 고인들의 비불발설(비밀로서 발설하지 않음)하고 개인적으로만 전해 오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것을 공개해서 우리 고대 수양방식을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불선 3가나 현재의 각 종교에서 수양하는 방식이 소호의 차는 있으나 대동소이하고 그 중 완전무결한 것이 우리가 하는 방식인 것 같다. 이 방식을 상세히 기록해서 원우나 세인에게 공개코자 하나 이보다 효력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동지 중에서 1기 내지 2기를 완전수련시켜서 인적으로 증거를 보이는 것이 제1요건일 것 같다.
  고인들은 자기 일신만 독선기신(홀로 자기만 온전하게 함)이라고 겸선천하(아울러 천하를 온전하게 함)의 의사를 갖지 않은 인사가 많다. 그 이유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마음대로 안 되니 내 일신이나 수양하면 그만이요, 또 보편적으로 하자면 세인과 시비곡직을 가리느니보다 내 일신이나 수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유일 것이다. 나도 동감은 하나, 동가홍상이라고 이 좋은 방식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 대황조의 가르치심으로 우리 민족이 수천년을 해오던 것이 중간 침체되었던 것을 우리의 손으로 다시 우리 민족, 우리 국토에서 부흥하고자 함이 당연한 일이니, 비록 마음대로 일이 진전이 안 된다 하더라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효과를 거두어 볼 것이요, 추진하는 데 노력이 든다고 독선기신할 의사는 없다. 이것이 내 일신을 이 민족에 바치고 내 일신도 이 민족과 영고를 같이 하고자 한다는 것이 내 상각에는 당연하다고 자신을 가지고 내 최소년시부터 미미하나마 이방면으로 헌신해 오던 것이다.
  내가 이 연정원을 갱생하는데 내 일신이 희생이 되든지, 내 일신의 별 성공이 없든지는 별문제로 하고, 이 연정원이 갱생되어 원우에서 성공자만 나온다면 나는 이것으로 성공이며 내 마음은 이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는 세상 부귀영화를 원하는 것보다 이 연정원이 갱생하여 후진 원우들만은 성공이 있기를 제일 축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타국의 수준을 못 가는 것은 물질문명이 부족한 원인인데, 현상으로 이 물질문명의 수준을 추급하자면 적어도 1세기 이내에는 절대부족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신문명으로 전력하여 물질문명을 추급하자면 비록 장기간이라 하더라도 20년 이상 30-40년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거국적으로 이 정신문명에 나가면 30-40년 이내에 세계 권위있는 과학자는 다 우리 민족에게서 나올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렇다고 나는 유심론자가 아니다. 심물합치론을 주장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물심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하며 따라서 정신연구는 유심론에 그치는 정신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심유물 양론의 비를 타파하고 이원합치론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내가 시간만 있으면 이 정신연구 방식을 우리가 한 방식과 딴 나라에서 하는 방식과 비교도 해보고 우리가 하는 방식도 합리화하여 문헌으로 저술해 보아야 수련재료가 될 것이다. 내가 아니라도 이 책임을 완수할 인사가 많을 줄로 아나, 공자님의 말씀에 '당인하얀 불양어사'라는 말씀도 있으니 선배가 있는데 양보말라는 것이 아니다. 제 책임은 제가 완수하지 다른 사람에게 의존 말라는 것이니 나도 내 책임완수를 목표로 나가는 것이요, 타인은 타인대로 자기 책임을 완수할 것이다. 각자의 책임을 완수하다 보면 자연이 우리나라의 정신계가 발전될 것이라는 것을 내가 부언해 두고 우리가 이 연정원을 갱생하자면 불가분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될 것이라고 결론을 해둔다.
  (주석29) 어진 일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제문제 해결방식 같은 것은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좋은가, 혹은 동호자 간에 발론해서 하는 것이 좋은가, 혹은 무슨 방식이라도 경제만 해결되면 이 연정원을 갱생할 것인가 하는 제문제에 있어서는 될 수 있으면 자기 일신이 공정한 입장에서 정당한 일로 경제를 해결할 일이지, 일이 급하다고 소호라도 정치 못한 일로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일은 일대로 안 되고 사람의 위신은 위신대로 실추한다는 것을 부언해 두노라.
  우연히 이 붓을 든 것이 자연언지장야(자연 말이 길어짐)로다. 이만 그치노라.
  신묘(1951) 10월 12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추기
  이 방식에 있어서는 후일에 상세한 기록이 있을 것이나, 고인들이 말하기를 '현현현중현이요 묘묘묘갱묘'라고 해서 세인이 이 법은 고원난행지사(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일)로 알고 이 정신수련이라면 겁을 내고 시작도 못하는 것이 보통이요, 혹 우인(친구)들도 이 방면에 성공한 사람은 이인 같이 아는 것이 보통이나, 이 방식은 절대로 지간지이(지극히 간단하고 쉬움)하고 수우부우부(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문즉이회(들은 즉시 이해함)할지요, 행즉지미(행한 즉 곧 깨달음)할 것이다. 고인의 말이 '행행행리각이요 거거거중지'라고 이 방식은 수행해 가며 자신이 이렇다고 깨달음이 있고 날이 갈수록 지낸 일이 그렇구나 하고 알아짐이 있는 것이다. 비일단일석에 활연관통하는 것이니, 이 방식대로 하면 연구력이나 기억력이 보통사람으로 생각 못할 한치 자기 성력 여하로 백배 천배의 증진이 있어 내가 말하는 물질과학을 연구하는 데도 이 비율이 되는 관계로 시간관계가 보통이면 10년에 될 일이 정신수련의 득력자면 1년이나 1월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석 30) 현묘함을 강조한 말.
  (주석 31) 가고 가고 가는 속에 깨닫고, 가고가고가는 중에 앎.
  (주석 32) 비일단일석 활연관통: 하루 아침저녁에 환하게 도를 통해 버림이 아님.
  이 방식에도 각기 재질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정신집중의 일법인 것이요 타법은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는데 유정유일(오직 정하고 오직 하나로)하면 용사만배(그 쓰임이 평소의 만배)가 될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는 방식이 여럴 방식이 있으나 제1로 호흡일법이 동서양 고금을 통해서 공통된 법이요 그 다음은 정관이니, 그 외에도 피동적(외부의 힘을 빌림)인 정신집중법이 상당히 많으나 당 호흡법의 다음 가는 법이다. 유가 솔성(천성을 좇음)이나 선가 명성이나 불가 견성이 다 호흡법에서 되는 것이다. 상세는 뒤로 미루고 이 붓을 그치노라.
  신묘(1951) 10월 13일 야심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15. 단기 4285년 양력 원단을 맞이하며
  원단, 원단 하면 과거 기천 기만년도 이 원조가 있었고 미래 기천 기만년도 또 이 원조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단기 4285년 임진 원조라고 별다른 날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에는 조선조 오백년에 비록 문약하였으나 왕가에서나 민간에서나 현철도 많으시고 위인도 그리 적지 않아서 우리 역사를 장식하기에 그다지 안색이 없을 지경은 아니었다. 유학계로도 정퇴율우를 비롯한 현군자가 배출하여 동방유교사를 자랑하게 되고, 군왕으로서는 세종대왕 같으신 성주가 나시어 세계문화사에 이채를 보게 되고 이학계(성리학)로는 화담(서경덕), 북창(정렴), 구봉(송익필), 남명(조식), 고청(서기) 등 제 선생이 배출하시어 이학계의 역사적 중진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불교계에도 무학, 서산, 사명, 진묵 등 무수한 거석이 불교사를 자랑하고, 충의에는 생사육신이니 삼학사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충의지사가 조선사를 자랑하고, 무장으로는 해군 충무공 이순신 성생이나 육군의 충장공 권율 선생과 김덕령, 임경업, 박엽 장군 등 무수한 명장이 배출하여 항상 국난을 구하였다. 박엽 같은 장군은 비록 미지수라고 하나 그의 실력은 명장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주석 33) 설날. '원조' 라고도 읽음
  (주석 34)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그리하여 오백년간에 선조대왕 시대 임진란이 비록 8년이라 하니, 양차에 걸린 것이랄 중흥 후 복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역시 그 피해가 특심하였으나 국지에 한한 것이요, 인조대왕 시대 병자, 정묘 양차 청란은 비록 굴욕적이나 인민의 피해는 극소하였고, 이괄란은 국지적이라 단시일인 만큼 별 피해는 불감하였고, 홍경래란도 국지적이랄 역시 미미한 파문이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조선 오백년은 임진란을 제하고는 이렇다는 인민적 대파문이 없이 지내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경술년 국치를 당하여 40년간 망국 민족의 비애야 무어라 말할 수 없었으나, 점축적으로 식민지 생활이라 목전의 급을 구할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다가 8, 15해방으로 다시 민족은 독립의 기분에서 날뛰었으나 군정 3년에 정치적으로 너무나 미온적이라 수십 년간을 애국애족에 헌신하던 인사들은 염증이 나서 전업자가 속출하고, 극렬한 애국투사들은 중상모략으로 불우의 탄을 가지고 혹사혹병하며 비록 생명을 보존한 인사라도 중상모략을 염려하여 각각 은명(이름을 숨김)에 급급하였다. 세상에는 특제, 속제한 애국자들이 활보로 득의하고 있었다. 그리다가 남북대립의 남한에서는 북한을 대비할 만한 준비가 없었다. 자상달하(위에서 아래까지)로 의존성에 타고(남을 돌아봄)할 여가가 없었으며, 사리사욕에 국가니 민족이니를 생각한 인사가 기인(몇 사람)이나 되는가, 양심이 있거든 솔직한 고백을 해보라.
  이러한 환경으로 8, 15 이후 8년을 경과한 것이 6, 25사변을 초래한 것이다. 참으로 우주사가 있은 이후로 처음되는 괴변이다. 양백(미국과 소련)의 피동이 되어 동족상잔에 우리 동방 초유한 참화를 당하고, 남은 국련군(유엔군), 북은 중공군이 다 각기 외래세력으로 피해자는 우리 배달민족이 있을 뿐이다. 북이나 남이나 승한대야 같은 민족은 기할(몇 할)이나 사상하였는지 알 수 없고, 산업은 전부 정지상태가 되었다. 집정자들이여, 무엇이 쾌어심(마음에 통쾌함)한가?
  맹자는 불기살인자(살인을 즐겨 하지 않는 자)가 능왕(유능한 왕)이라 하였는데, 북이나 남이나 불기살인 이라고는 못할 것이다. 남은 비록 정당방위라고 할 것이나 이 정당방위가 나오기 전에 국방이나 정치 외교를 다 잘하였으면 이 6, 25사변이 감히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책임은 동일하다고 본다 북이 병적으로는 강하다 하나 지피지기를 못한 것이 실책이요, 또는 단지기일(그 하나만 앎)하고 미지기이(그 둘을 모름)가 실책이다.
  단지기일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북에서 생각하기는 남에서 배후에 미국이라는 국련군이 있으나, 인도네시아에서 유엔의 무능한 처단을 보고 생각하기를 전격전으로 남한을 석(석권)하면 유엔에서 역시 인도네시아와 같은 처단이 있을까 하는 단지기일이라는 것이요, 북한이나 배후 소련에서 남한이 미소 양대 세력에 대립되는 장래전쟁에 불가궐(빼놓을 수 없는)할 병참기지라 인도네시아와 같은 무능한 처단을 하지 않을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이지기이라는 말이다.
  이왕 발단되고 제1책은 실패하였으나 소련이나 중공이나 다 대륙성을 가진 거물들이다. 패한대야 전패할리도 없고 약간 사상자가 있대야 인구정리책에 일조가 되는 것으로 아는 대륙성들이라 지구전으로 소모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도 역시 물자소모전으로 대립하고 보니 남이나 북이나 다 이발지시(시위를 떠난 화살)라 할 수 없이 알며 못 고치는 냉기침이 되어 양 거물 상쟁에 폐허와되는 것은 남북을 통하여 우리 강산 우리 민족뿐이다. 회지막급(후회막급)일 것이다.
  그러니 금추간(올 가을중)부터 소위 정전 문제가 생하였으나, 주권이 남북에 있지 않고 여전히 미소에 있으니 이것이 움려 계자 마시기다. 그러나 우리 집정자들은 정전이니 무엇이니에 정신이 없고 이 난국중에도 여전히 상하교정리(아랫사람 윗사람이 서로 이익만 취함)할 뿐이다. 정전을 절대 반대라고 민족은 궐기대회를 도처에 발기한다. 그러나 우리 자의로 전쟁도 할 수 없고, 우리 자의로 정전도 할 수 없다. 그저 미군의 여율령사바하라야 아직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다. 민족적으로 기막힐 일이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동지이몽(같은 가지에 다른 꿈)일 것이다. 북은 중공이나 소련이나 이해가 같으나, 남은 국련군과 이해가 같다고는 못 본다. 정전 문제가 크리스마스 전에 해결하리라던 것이 또 연기가 된다. 이리저리 기로를 두고 양력으로 4285년 원조를 맞이하게 되니 이조 오백년 전 일은 중단하고 오백년간에는 처음 난관을 두고 이 원조를 맞이하는 것이다. 금년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주석 35) 주문 뒤에 붙는 후렴구절. 주문의 내용이 법대로 시행되기를 비는 뜻.
  여기서 천견을 기록해 보겠다. 제일로 문제가 순조로 호상 양보되어 정정이 된다면 그 다음에 면치 못할 다건이 있다. 제1. 포로교환에 있어 남은 물론 선대 하였으나 북이 과연 어떠하였을 것인가. 여기서 피해자 가족과 민족여론이 비등할 것이요, 제2로 남북경계가 여전히 철의 장벽이 되고 북은 북대로 군사설치가 극도로 될 것이요, 남도 북에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여론은 유엔군이 비록 군사적으로 중공과 인민군을 승리한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조건이 나올 것이다. 말하자면 정전 후 군사나 외교나 행정 부문에 있어서 위임이나 통치 유사한 언론이 있어서 제2차 6, 25를 방지한다는 미명 하에 우리 민족은 이름 좋은 외면만 기년 독립을 계속할지 알 수 없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나와서 완전한 주권자가 나오기 전에는 이 굴레를 못 벗을 것 같다. 이렇다고 위정자들이 정신을 차릴 것인가 하면 우선 친미나 해서 사생활이나 안정할 정도요, 민족의 사활을 양심상으로 구하고자 하는 자가 기인이 못 될 것 같다.
  이것이 정전의 부당선이요, 만약 중공이나 인민군이 이 정전을 이용해서 완전한 전비를 가지고 정전협정을 무시하고 또 불법침입한다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행복일 것이다. 무슨 조건인가 하면 미군도 이 이상 더 인내 못할 것이요, 국군도 여기서 패하면 갈 데가 없는 고로 최후적 결전에 들어가서 양강선(압록강, 두만강 경계)까지 진출할 호조건이 된다. 이 조건도 아니요 저 조건도 아니면 문서상 정전만 되고 외교로 차일피일 연장만 하면 민족은 자연 불안 속에서 금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것도 정전의 부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정전 3조건이 될 것이요, 만약 북군이 하책으로 정전을 차탈피탈하고 연기하다가 전격전을 시하여 수천대의 공군이 일시적으로 남한 각지를 공습하고 정신전으로 인해전을 써서 한강선을 돌파하고 남하한다면 이것이 북군의 제일 하책이요, 남군의 제일 유리책일 것이다. 이런 배신행위를 하면 이때는 물론 맥아더 원수안이 그대로 시행되어 단시일 결정적 치명상을 줄 것이다. 이것은 북군의 하책이며 남군의 행일 것이다. 그 다음 장기전으로 차전차화(한편 전쟁, 한편 평화)로 일방 전하며 일방 정전론이나 가지고 외교적으로 나서면 부지중 남북한은 미소 수중에서 고사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양방 공히 하지하책이다.
  (주석 36) 뜻밖에 생긴 사고나 병. '차일피일' 의 뜻. 탈: 탈날 탈.
  그러나 이런 수난기가 어디 또 있을 리가 없다. 하늘이 진류사민(이 백성을 싹 죽임)하실 리가 없는 한 내 천견으로는 함지사지(죽을 곳에 빠짐) 이후에 생이라고 각종 시련을 다 해보시고 제일 인내할 줄 잘 아는 민족이라고 장래에 대복으로 오만년 무극대도의 극락세계가 우리 민족의 손에서 될 것 아니가 생각된다.
  금년이 우리 민족 생사기로에 방황하는 해다. 운이 좋으면 갱기할 여우가 있을 것이요, 운이 부족하면 불변하는 집정자들이 이 민족을 사지로 인도할 것이다. 생이냐 사냐 두 기로에서 이 붓을 들고 내 천견이나마 기록해 보는 것이다. 정치가의 주견은 물론 우리 같은 천견이 알 수 없는 일이나, 나는 내대로 내 소견을 기록하는 것이다.
  신묘(1951년) 12월 13일에 봉우서우상신정사하노라


      1952년
    16. 임진년 상원일 내 소감
  음력 원조는 조조에 부산 출발을 하느라고 10여 일간을 분주불가하여 비록 내 소감은 있었으나 기록할 여가가 없었고, 상원일인 금일에야 비로소 상신 본가에서 일숙을 하게 되어 총말중(매우 바쁜 가운데) 내 소감을 기록해 보는 것이다.
  (주석 1) 음력 정월 보름날. 명절의 하나.
  임진년은 과거 이조 오백년간에 최대 상흔이 남은 361년 전 임진년이 기억된다. 손조대왕 임진년에 왜적 침공을 받앙 조야가 방어할 대책이 없이 당시 8도는 적의 마제(말발굽) 하에 유린되고, 정부는 의주 일우(한구석)에서 근근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다가 육군의 이치대첩이 시작되어 금산의 조중봉, 광주의 김덕령, 현풍 곽재우 등 기다한 의병과 관군이 합작하여 착착 방어전에서 격퇴전으로 전환하고 해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광전절후(앞은 비워두고 뒤를 끊음)의 위훈을 수립하여 적으로 재기를 불허하였다. 육군으로는 당시 행주대첩이 적이 서울을 버리고 갈 원인을 작한 것이요, 해군으로는 명량대해전과 노량대전이 적으로 감히 수백년간을 서고(서쪽을 돌아봄)할 정신이 없게 한 것이다.
  이런 의미심장한 임진년을 당하여 또 6, 25의 북적의 남침으로 정부가 부산 일우에서 근근 유지하고 소위 삼팔선의 경계도 황해도와 경기도 일부를 상실하고 있고중부에서는 잔비가 준동하여 영일(편한 날)이 없는 현상이다. 정부는 여전히 대아를 망각하고 목전의 적이 있음을 생각지 못하고 파당적으로 아전인수를 일삼고, 정사는 자상달하(위에서 아래까지)로 일비(날마다 그르침)하여지는 현상에 더구나 유엔군이나 유엔총회에서는 적극책이 나오지 앟고 현상유지로 정전설로 반년을 연장하고 있다. 전쟁은 우리 국내서 하고 실권은 유엔의 수중에 있엉 비록 불평사가 있다 하더라도 불감언(감히 말 못함)할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다.
  소위 현 정계요인이라는 인물들을 대하여 보았으나 일언반사도 이 난국해결책을 말 못하고 해결은 오로지 유엔에서 해줄 것이라고 유엔을 조상 믿듯 하고 있고 자기 자신들은 정계를 이용해서 모리나 하고 자기 파당의 세력이나 획득하자는 야심이 소위 최고인물층으로부터 말초에 이르기까지 충만하여 우리가 보기에는 이 난국이 어찌 해결될까 의심시된다. 비록 유엔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 재건을 목표로 나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주력이 부족하다면 100 프로를 다 유엔에다 신뢰하기는 무리한 일이다. 이 난국에 있어서도 계몽을 못하고 상하가 교정리하니, 연이불위(그런데도 위태롭지 않음)하기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이 대난국을 목전에 두고 소위 국의보선을 출마한 자들을 보건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들은 기억원이라는 거액을 용지(다 씀)하며 출마하는 의도가 어디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이 자들이 다 정상모리배라고밖에 못 보겠다. 소위 거물급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거물인데 그 거자(크다는 것)가 정치적 역량이 거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리수완이 타인보다 거하다는 물건들이다. 양심적이면 출마비 기억원씩을 소비 말고 이 경제적으로 난국에 대처하여 후방사업이라도 전력을 다하면 도리어 애국애족적일 것이다. 금전은 금전대로 소비하고 취소(비웃음을 삼) 는 취소대로 하니 가련한 인생들이라고 나는 이 거물들을 평한다.
  이런 일이 얼마든지 목전에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임진년도 이 현상으로는 별쾌한 소식이 올 것 같지 않다. 다만 바라는 바는 소위 지방자치법 실시가 4월 25일에 있고 이어서 대통령선거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물고사를 잘 해서 임진년 1년을 운위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기초가 될 시정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유엔은 유엔대로 노력할 것이요. 우리 국민은 국민대로 노력해서 나가야 평화도 있고 통일도 있고 재건도 있을 것이다. 현상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관은 않는다. 우리들끼리라도 계몽도, 자성도 해가며 민족정신이나 국가정신을 고취하면 비록 혼몽중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여러 번 소리가 나면 잠을 각성할 것이다.
  계명성이 비친 지는 벌써 오래니, 조욱(아침해)이 상승할 시기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속히 각성해서 통일평화 재건에 그치지 말고 우리의 장래 백산대운 성업의 배태가 임진년에서 나왔으면 하늠 미미한 희망을 가지며 의미심장한 기로에 선 임진년을 맞이하며 360년 전 임진년의 대난국을 해결하던 선배들의 고심열성을 다시금 추모하는 것이다. 현하도 인물이 그때보다 못하다고는 않는다. 양심적으로 나가면 정치, 외교, 군사가 불구하여 쇄신될 것이다. 인민은 초상지풍(풀 위에 부는 바람)이라고 지도자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금년은 인물은 비록 구인물이라 새 정신으로 나오는 인물을 맞이하기를 빌 뿐이다. 금년의 바라는 바는 이것이 제일 중요점이다. 백사만사는 다 망각해야 된다.
  이 붓을 그치며 감개무량하다.
  임진(1952) 상원일, 봉우서우상신정사하노라


    17.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제가 국회에서 통과한 지는 벌써 시일을 경과하였으나 중간에 6, 25사변이 있어 중단되었다가 금춘에 갱신하여 초대의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치안이 아직 확보도 되지 못한 차시에 시행하는 것은 좀 시기상조의 감이 있으나, 지방자치로 보아서는 1일이라도 속히 실시되어 우리가 우리 지방을 자치하여 보았으면 하는 감도 불무(없지 않음)하다.
  비록 지방자치라 하더라도 정부시정방책을 좌우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도는 도, 시는시, 읍면은 읍면대로 왜곡은 시정해 가며 상부의 시행하는 정책을 운행할 수 있는 것이며 더욱이 시읍면에 인선 문제를 지방선출의원들이 인격자를 선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민간사정이나 행정부문의 사정에 비추어 사무능률이 우수한 인물을 상급관청에서 임명된다면 말할 것도 없으나, 비적격자의 왜곡임명이 불소(적지 않음)한 관계로 이 지방자치법을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말단의 원 1인 선출의 공명정대성을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그 선출된 의원이 어떠한 행동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읍면의 의원들이 아주 선량이라면 비록 정부에서 소호의 부족이 있더라도 사사히 시정해서 직접 민생문제는 해결될 것이요, 이로써 일보를 진하여 국의 선출에동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지방자치법이 시행되어 언실 공히 자치가 됨으로 국가의 기반이 확고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최말단인 면의원 선출에 있어서도 선거인이나 피선거인이나 공히 사적을 버리고 국가적 견지로 공공연하게 인격자를 선출하는 것이 당연하고 소호라도 그 책임을 완수 못하면 이는 국가 민족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잘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거도 신사도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격이 부족한 자가명예욕으로 입후보하는 것은 비양심적이요, 또 무자격자를 투표하는 것도 신성한 투표권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을 보건대 선출의원 정원잉 30인 정도에 입후보자 예정이 500--600인이라는 부산시를 위시해서 입후보 난립상이 되는 것 같으로 이것은 아직 지방자치의 부족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30인 선출에 입후보가 서로 양보해서 나는 자격이 부족하니 우수한 인재가 나오라고 양능(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함)하는 것이 당연하다. 30인의 반수나 20인 정도나 입후보되고 그 여수는 추천인들이 선택해서 충수할 정도로 수준이 된다면 국가민족이 공영될 것이요, 세계 하국(어떤 나라)을 막론하고 모범 선출이 될 것이다. 그런데 현 우리 지방선출상은 1대 10은 보통이니 인물이 많은 관계인가 수준이 저열해서 그런 것인가 탄신할 바이다. 자력을 부지하고 나오는 자가 부지기수니 이런 인물들은 다 민족의 조인들이다. 우리 나라가 하시쯤이나 이 선거가 국ㅈ0적 모범으로 될 것인가 한심한 일이다. 최고 지도 인물들도 환실(떨어짐을 두려워 함)하는 몰염치한 행동이 현연히 보이니, 자비를 부지하고 환실기위(그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함)만 하면 어찌하자는 말인가.
  지방선출이 4월 25일과 5월 10일의 2종이 있어서 맹렬한 선거전이 예상되는데 나는 이 전쟁을 벽상에 관하고 제일 위기인 실전이 1일이라도 속히 평화로 돌아와서 국토가 통일되고 이번 선출의원들이 재건으로 부흥의 기초를 박아주기를 빌며 이 붓을 그치노라
  단기 4285년(1952) 3월 9일 봉우제우유신정사

    추기
  이번 지방자치법을 이용해서 기괴망측상이 다 보이는데, 이런 인물들이나 정치부랑배들은 목전의 국가안위도 도외시하고 일개인 사리사욕만 좇는 공비 이상의 악질들이다. 하루라도 속한 장래에 이런 부문의 인물들의 개과를 바라고 국가민족의 수준이 속히 향상되기를 비노라.

    당일 당시 추기
  이 다음 선거도 신성하게 해주소서. 이 민족을 위하고 이 나라를 위하여 공정한 마음으로 추현양능하소서!


    18. 연정원이 되기 전에 숙으로 설립하자면
  연정원을 새로 발족하자면 기다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역시 시일을 요하지 않으면 신발족을 하기 어려우니 먼저 숙으로 발족해 보자는 의사도 일부에서 있다.
  이 숙에서 무엇을 주로 연구할 것인가 하면 주요과목은 문학, 사학, 정치, 경제학, 병학, 수학 등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기초상식인 문학이 없이는 과거, 미래, 현재를 추관할 수 없고 정치, 경제학이 없이는 이념을 표현시킬 수 없고 병학이 없이는 처세에 곤란할 것이요, 수학이 없이는 추산이나 설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인재를 양성하는데 중요한 절목이다. 그 외에도 물론 알아야 할 일이 많으나, 이상 수종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과목이다.
  문학이라 해도 기초상식 정도로 알 필요가 있으나, 한문 이라고 순문학적으로 학습하라는 것이 아니요 원리만 충분히 해득하면 좋을 정도로 하고 음풍영월이나 기술 같은 것은 예외로 하고, 정치경제학도 통론대요 정도로 신구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지 세목에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너무 상세해서는 못쓴다는 것은 아니나 그럴 필요가 없고, 병학만은 상식 이상으로 좀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사적 득실을 틀림없이 평할 수 있을 만하고 또는 현세계에서 전쟁이 있을 때에 내가 갑국의 참모총장도 돼보고 을국의 참모총장도 되어서 작전을 해보고 또는 상대방의 전략이 무슨 방식으로 나오니 차방에서는 이런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단정해서 귀추를 예언할 만하면 하필 병사 뿐만 아니라 섭세학으로 무슨 일이든지 확실한 설계가 선다. 실패가 적고 성공이 용이할 것이다. 물론 문학에서라도 섭세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병사학이 더욱 긴절하게 해놓았다는 것이다. 문학에도 한문으로 대학, 중요, 역학등은 섭세학으로 불가결할 문학이며 동양철학이다.
  그리고 수학은 될 수 있으면 정밀심오한 연구를 해야 실패가 없는 법이다. 호리유차(아주 조금만큼 차가 있음)에 천양이처(하늘과 땅이 바뀜)라고, 수학이란 호리 만치라도 오산이 있다면 전부가 허사가 되는 법이니 극히 정연해야 하는 것이다. 역을 연구하는 데도 이 수학적으로 하는 부문도 있는 것이요, 정신수양을 하는 데도 이 수학적 방밥을 이용하는 곳이 많은 것이니, 이 수학이라는 것은 만사에 불참하는 곳이 없어서 더욱 장래를 촉망하고 나가는 인사는 이 수학을 전적 학습해야 실패가 없는 것이다.
  (주석 2) 아주 짧은 거리나 극히 적은 분량. 1리는 1의 100분의 1이며, 1호는 1리의 10분의 1.
  병사학도 대체로 이 수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연고인가 하면 병학이라는 것은 가감으로 승패를 결하는 것이다. 오직 수학일 뿐이다. 소가 대를 당하지 못하고 약이 강을 당하지 못하고, 과가 중을 당하지 못한다는 철칙이 수학적인 것이요, 동양 병선이라는 태공이 무왕의 문을 답하되, '동력 커든 탁지코, 동지 커든 탁덕이라' 한 것이 만고불변의 병사 철칙이요, 이것은 수학적으로 가감이법으로 계산하는 뎅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원칙이 되나 수학의 종류가 많은 것과 같이 병사학도 유사하다. 병의 정병이니 붕정이니 하는 것도 강약을 말한데 불외하다. 강자는 가변이요 약자는 감변인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주석 3) 힘이 같거든 지혜를 혜아리고, 지혜가 같거든 덕을 혜아리라.
  내가 항상 병학이나 수학을 좋아한다. 그 연고로 수십여 년 간을 각국에서 전쟁이 날 때마다 내 추측대로 예언을 해보았으나 십중팔구는 적중된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설명식을 대서 보면 별 실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숙에서도 이 정도 학습을 해야 할 것인데, 숙생은 어느 정도 인물이면 되는가 하면 될 수 있으면 전문이나 대학생이 최적하고 그 이내라도 열성만 있는 인물이면 별 문제 없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기간은 최소한 2년이요 좀 전문적이라면 4--5년이 필요하다. 갑신년 활민숙이나 일본의 성하촌숙이나 다 이런 정도로 인물을 배양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지들과 구체적으로 타합하고 최단기일 안에 이 사업을 실현해 볼까 하는 예산을 가지고 있다. 기성인물 100명을 규합하느니보다 2배양한 인물 30--40인이 효과적으로 보아 100프로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에서 중국통일의 몽을 실현하였고 히틀러는 나찌스당으로 독일재패를 도하였고 뭇소린이는 흑샤쓰당으로 이태리를 재건하였고 스타린이도 공산당으로 소련에서 세계재패를 몽상하고 있다. 이것이 다 자가배양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가 숙을 설립하고자 하는 원인이 이와 같다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우리의 손으로 배양한 인물이라면 우리가 몽상하고 있는 대동책의 발족 당시에 발기인 격이 아니면 찬조 격이라도 될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몽상이 없다면 아주 농산어촌이나 건설하고 일생이나 편안히 경과하고 자손이나 가르치면 족족하나, 우리는 수십년을 하루같이 대동책 실현을 몽상하고 있는 바에야 어찌 일신안일만 생각하리요. 이것이 우리의 망상인지 알 수 없으나 나로서는 다시 목적을 개할 수 없는 입장이요, 동지간에도 미미히 바라는 바이다.
  이 숙을 설립하자면 선결문제가 경제이나, 금년중에 내 극력해서 이 실현을 최단기간 내에 해볼까 한다. 장소나 인물은 별 문제 없고 단지 경제만 허락되면 안심하고 발족할 예정이다. 숙은 용산의숙이라고 할까, 신야촌숙이라고 할까 아직 미정이나 이 비방에다가 둘 예정이다. 연정원은 연정원대로 추진하며 숙은 숙대로 추진시킬 예정이다. 일호라도 사욕으로 이런 생각한다면 동지들에게 죄과일 것이나, 내 자신이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동지들에게 맹서하는 바이다. 유종의 미가 되기를 비노라
  단기 4285(1952) 3월 18일 봉우서우유신정사


    19. 임사소홀이 후회의 원인이 된다.
  (주석 4) 일에 소홀히 임함.
  무릇 무슨 일이든지 착수하기 전에 준비공작에 충분히 용의하고 기초공사에 만전한 설계를 가지고 내 자신이 구비할 조건을 한 가지라도 불비함이 없이 완전무결한 후에 비로소 발족하면 비록 중간에 백난 구비하고라도 중간 풍파는 각오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내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검토도 안 해보고 덥석 착수하고 보면 곤란은 곤란대로 보고 일의 효과는 없는 것이 보통이다. 말하자면 실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임사해서 무슨 일이든지 그리 주밀한 조사를 하지 않고 덥석덥석 아무 일이나 착수하다가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임사소홀한 관계다. 이것이 후회되는 것이나 남아가 세상에 나서 어찌 꼭 될 일만 하리요. 대의소재(대의가 있는 곳)에는 그 의를 위하여 사의 성부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명분을 위할 뿐이다. 그리고 신체나 정신의 노력이 되고 혹 내 일신의 심물 양면이 다 손이 있더라도 큰 덩어리에 성공이 있다면 알고도 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영웅이나 의사나 협자류들이 흔히 하는 일이다. 대의명분의 소재라면 비록 일이 실패되어 수사(비록 죽어도)나 무회(회한이 없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타산이 아니고 꼭 되려니 하고 착수하였다가 실패하는 일은 대체로 모사불밀해서 불성공이 되고, 따라서 후회막급인 것이다. 내가 항상 아무 일이나 실패의 원인은 나라는 것을 도외시하고 그 일에 주요성만 보는 관계로 일은 성공되고 나는 실패하는 예가 많은 것이다. 내가 호사하는 관계다.
  금번에도 재향군인회 창립 발기인으로 중앙에서 일을 볼 때에 재향군인회의 성립성은 확실히 파악하고 내가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기년간을 허송하던 한국재향장교회를 위해서 우리들이 노력했던 것이다. 일의 귀결점은 물론 재향군인회야 성공될 것이요. 또는 구한국장교단동 가입되게 되었다. 내 본격적인 희망은 성공되었다. 이로 만족한 r서이다. 그러나 내 일신으로 말하면 비군인 동지들의 협조는 귀허되고 말았으니 실패는 나 1인이요, 신용도 나 1인이 없을 뿐이다. 내 1인이 실패함으로 나를 협조하던 동지들도 비군인 편은 다 실패다. 이것이 내 책임이다. 이것은 내가 고의로 한 일은 아니나 임사소홀해서 잉 점에까지 유의 못한 것이 과실이다. 후회한들 무엇 하리요. 그리고 선후책을 생각하는 외에 타도가 무하다. 이런 일에 선후책이 잘 나오면 선패자는 불망이라는 것이다. 아직껏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없을 리도 없다.
  (주석 5) 선패자 불망: 최선을 다해 싸워서 패한 자는 망하지 않음.
  이번에 공귀타인(공은 남에게 돌아감)이요, 죄귀자기(잘못은 나에게 돌아옴)다. 가소로운 일이나 내가 임사소홀이 후회의 원인이 된다는 제를 쓰며 비록 후회는 않으나 내가 소홀하였다는 것은 부정 못하겠다. 내 항상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또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는 단정 못하니 될 수 있으면 덜 하라고 경계하는 바이다.
  단기 4285년(1952) 3월 19일 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20. 진퇴유곡인 나의 처지
  내 현금 입장이 진부득퇴부득인 장면에 도달하였다. 진하자니 부수조건이 내 본의에 불리하고 퇴하자니 내 일신의 부채여산(빚이 산 같음)하고 가족들 처리 문제가 곤란하다. 말하자면 엉거주춤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도시로 나가서 거주해 볼까 하니 내 마음에 없는 낭인 생활을 안 하면 생활할 도리가 없으나 낭인생애는 내 소원이 아니요, 또 산촌으로 환원하자니 부채가 여산한데 무슨 도리로 청산할 수 없어서 이러도 못하구 저러도 못해서 부평초 같은 심정으로 마음에 없으나 부득이 도시로 나가 볼까, 아니다, 산촌으로 도로 가자 하고 상신을 와서 보면 아무리 하여도 부채청산 방침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도로 도시로 나가 본다. 여기서 공암차가(공암리의 빌린 집)로 아직 가지 못하는 주요원인이다. 무슨 확정 산책이 있은 후에야 이리로 가든지 저리로 가든지 할 예정인데 아직은 좀 더 진부득퇴부득할 것 같다. 이것이 미혼진에 내가 포위된 중이다. 나가서 완전해결책이 뵈지 않고 들어오아서 안정하고 있을 수가 다각적으로 없다. 이왕 범한 제문제나 다 해결해 놓기 전에는 결정적으로 진이냐 퇴이냐를 정하지 못하겠다.
  이 미혼진이 하월, 하일에나 벗어질는지 이 붓을 들며 자탄식을 하는 바이다.
  단기 4285년 3월 19일 봉우족미우유신정사
  (주석 6) 봉우는 유신정사에서 덧붙여 씀


  21. 무제
  이윤백이유하혜각구성인지일체하대 공자는 성지시자라 집대성이라 하였다. 그 시자가 의미심장하다. 가이행즉행하고 가이지즉지하며 가이원즉원하고 가이방즉방이라. 시고로 가이임하며 가이청하며 가이화라. 유어시니 차소이공부자지집대성이시니.
  여유독서맹자라가 지어차시자하야 고우선생활 공자지성은 비어일년지유춘하추동하야 온냉한서지부제나 세공이 성이만물이 화육하야 순환만세이불변하고 이윤백이유하혜지성은 비어일년지유사서하야 각유춘하추동지일기하대 후인이 막감평기장단은 공자지춘하추동이나 삼성지춘하추동지일서가 소무이하고 유불능순환무단이라. 연이나 세공지성는 일반이라 하였었다. 당시선사찬여지총명하시고 불복강석하시어 기후에 여자사활안자활순하인야며 여하인야요 유위자이고시라 한 문구를 보고 공자의 시성도 사자가 입지하고 작지불이하면 누구나 그 시자에 근할 것이라 자사하였었다.
  (풀이)
  이윤, 백이, 유하혜는 각기 성인의 한 부분을 지녔으나 공자는 성인으로서 때에 맞춰 집대성하셨다. 그 '때'의 의미가 자못 깊다. 가히 갈 만하면 가고, 가히 그칠 만하면 그치며, 가히 둥글 만하면 둥글고, 가히 모날 만하면 모남이라. 이런고로 가히 맡길 만하며, 가히 맑으며, 가히 화함이라. 오직 때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공부자의 집대성하신 바이시다.
  내 어려서 '맹자'를 읽다가 이 '시'자에 이르러 선생께 고해 가로되, "공자의 성인됨은 일년 충하추동이 있음에 비해서 온냉한서가 같지 않으나 일년의 공적이 이루어지고 만물이 화육해서 만세를 순환하여 변치 않고, 이윤, 백이, 유하혜의 성인됨은 일년 사계절이 있음에 비하여 각기 춘하추동의 한 기운만을 지니고 있으되 뒷사람이 감히 그 장단점을 평하지 못함은 공자의 춘하추동이나 세 성인의 춘하추동의 한 가지가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오직 순환무단함은 능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년 공적의 이룸은 똑같다." 하였었다. 당시 스승께서는 나의 총명함을 칭찬하시고 다시 그 뜻을 강의하시지 않으시어 그 후에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안자가 가로되 '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자는 또한 이와 같다.' 한 글을 보고 공자의 때에 맞는 성인도 선비가 뜻을 세우고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나 그 시자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였었다.
  그러던 것이 어언 53세라는 반생을 지내 보니 공자의 가이행가이지라는 일구도 마음대로 해본 기억이 나지 못한다. 내 반생을 통하여 행하고 싶으나 행하지 못한 일이 백사의 99는 될 것이요, 지하고 싶은 일을 지하지 못한 것도 역시 백사의 99나 될 것이다. 내 유시에는 자기(스스로 기약)하기를 나도 사람이니 고성이 하신 일을 나도 하면 하겠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왔으나, 지내고 보니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각오하였고, 안자의 순하인여하인이라는 말씀은 안자와 같이 거성불원(성인 되기가 멀지 않음)하신, 구체이미(성인이 다 되었으나 조금 모자람)하신 분의 말씀이지 후세 사자가 혹 양력탁덕(힘과 덕을 헤아림)을 못하고 나도 무던하거니 하다가는 중도, 속한(세상 사람)이도 못 되고 중도에서 방황할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자가 공연히 고성 말씀을 고해하고 성현군자를 경시 말고
  
부적규보면
  무이지천리요
  부적세류면
  무이성강해라
  (풀이)
  반걸음 한걸음이 쌓이지 않으면
  천리에 이르지 못하고
  작은 물줄기가 모이지 않으면
  강과 바다를 이루지 못한다.

  고, 실행면에 있어서 불휴의 노력으로 1분 2분이 합해서 한 시간 두 시간이 되고, 한 시간 두 시간이 합하여 하루 이틀이 되고, 하루 이틀이 합해서 춘하추동의 일서가 될 수 있다는 원리를 잊지 말고 나가면 부지불식중에 밤이 새벽으로 되고 새벽이 조일로 화하여 이날이 지내고 그 다음날이 오면 어제 오늘이 되고 부지중 명일이 또 와서 이러는 중에 춘하추동의 일서로 되고 또 나아가 일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는 중간은 행행행리각(행하고 행하고 행한 속에 깨달음)이요 거거거중지(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앎)가 될 것이요, 어디까지 가서 보면

  배회문전구
  주인심불견
  승당기입실
  주인비별인
  (풀이)
  문앞을 배회한 지 오래되어
  주인은 찾아도 뵈지 않네
  집에 올라 방에 들어가니
  주인은 다른 사람 아니었네

  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성가라는 것인데, 이 성가는 우주사를 장식하는 가옥들로 여기 한 채 저기 한채 이 집 저 집 합해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광실 몇 집인가. 우주가 무한하나 이 집은 많지 않다. 우주가를 찾고 보면 빈천이 하관(무슨 상관)이며 부귀가 무슨 것가.

  한진광지희미하나
  산전로지비원하고
  구인탑 바라보고
  일궤이궤운석한다
  안전옥백하수설인고
  로리금화기성련이라
  락도야 못할망정
  안빈이야 못할손가
  공곡유란이
  불이무인불향이니
  세여아이상위유하한재아
  자중자수유사자이도리라
  여수불민이나
  개척고인 황무도하야
  진사금인평이행하려니와
  세인막탄진도난하소
  일척허주범중류하네
  범중류혜인막도로다
  사립어옹근도두를
  근도두장등안하고
  일엽허주를 부세인하리
  기어세인아
  속등주도피안하소
  (풀이)
  새벽빛의 희미함을 한탄하나
  앞길의 멀기 않음을 생각하며
  구인탑 바라보고
  (주석 7) 아주 높은 탑. 1인은 8자. 약 2.4 m
  한 삼태기 두 삼태기 돌을 나른다
  눈앞의 옥과 비단 어찌 말할 것인가
  화로 속의 금과 불이 거의 단련이 되었네
  낙도야 못할망정 안빈이야 못할손가
  텅빈 골짜기의 그윽한 난초가
  사람이 없다 하여 향기가 안 나는 것은 아니니
  세상이 나와 더불어 서로 맞지 않아도 어찌 한함이 있으랴
  스스로 보중하고 스스로 닦음이 오직 선비의 도리니라
  내 비록 불민하나
  옛 사람의 황폐한 길을 개척하여
  오늘날 사람으로 하여금 평탄코 쉽게 다니도록 하려니와
  세상사람들은 나루 건너기 어렵다 탄식하지 마소
  한 척의 빈 배 물 가운데 떠 있네
  중류에 떠 있음이여, 사람들은 건너지 마소
  도롱이 삿갓 쓴 어옹은 나루목에 가까운 것을
  나루목 가까우니 장차 언덕에 오르고
  한 척 빈 배를 세인에 부치리
  세인에게 말을 부치니
  속히 배에 올라 저 언덕으로 건너가소
  
  단기4285년(1952) 3월 23일 여해옹 소기

    추기
  허주일법으로 계황성하고 개래학하니 여우입신야하나 동문에 제개학, 교하에 각진덕하며 동구에 유교도석이라. 교하반석우유이락하고 방계이상하니 우유백록담수영방사해하고 자양산월공휘만천이라 하고 우소상즉각명월류수보감개라 우각태극암이라 하고 기하에 우유탄금대삼자하니 하허고인이 은우신야하야 자비어이윤호아. 혹유지자예각차이대후인호아.
  여선고입차산이십일년이하세하시고 설구곡우차동천하시고 각동구왈 신야춘추요, 도원일월이라 하시어 말년운둔을 표하시고 구곡에 곡곡이 이요자로 명명하시어 구룡조천이라 하시니 도학의 성공을 일방으로 의미하시고 선고향수팔십일세시나 용은 양구요, 구룡이 조천하면 구구팔십일수에 조천하신다는 예기도 된다. 선고하세후에 아역이주차산하야 토목옥상가하고 금화실중력하며 안빈하며 지내는 중이다. 비록 고인의 만일이 못 되나 오직 의사만은 고인을 배우고자 하는 바이다.

  백산대운이 불구하고
  근역풍운이 장청하니
  서기동방붕래의리라
  세인아! 막한소두무족하고
  궁궁을을용이지니라
  막탐지상십승하고
  선수심두심승하라
  (풀이)
  허주일법으로 앞서가신 성인을 잇고 앞으로 배움을 여니, 내 우연히 신야에 들어왔으나 동네 입구에 세운 문에 '개학'이라 크게 써놓고, 다리밑에 '진덕(착한 일에 매진함)'이라 새겨 있으며, 동네 입구에 도를 가르치는 돌이 있더라. '이락'이라 새겨져 있고 옆 시내로 오르니 또한 '백록담물 가득 차 온 바다로 흘러간다'고 새겨져 있고 '자양산의 달은 함께 온 시내를 비춘다' 하고, 또 계곡을 좀 오르면 '밝은 달 흐르는 물 보재로운 거울이 열린다'고 새겨져 있고 또 '태극암'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또 '탄금대'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어떤 옛사람이 상신리에 숨어 스스로 성인 이윤에 빗대었을꼬. 혹시 미래를 알고 있는 도인이 있어 미리 이것들을 새겨놓고 뒷사람을 기다린 것인가.
  (주석 8) 여기서는 공주군 상신리
  (주석 9) 맹자 '진심장' 상편에 나오는 군자삼락 중 하나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 무고하면 첫째 즐거움이요. 위로 하늘에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울 일이 없으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들을 얻어 그들을 교육함이 셋째 즐거움이다.
  나의 부친께서 이 계룡산에 들어오신 지 21년 만에 돌아가셨으 니 계룡산 상신리 계곡에 아홉 구비를 만드시고 동네입구에 새기시길 '이윤이 숨어지내던 신야의 세월이요 무릉도원의 세월이라' 하시어 말년은둔을 나타내시고, 아홉 구비 계곡마다 '용'자로 이름을 지어 '아홉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 하시니 도학의 성공을 한편으로 뜻하시고, 부친께서 81 세의 수를 누리셨으나 용은 양9의 9룡이 하늘로 올라가면 9 x 9 = 81 세에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예언도 된다. 부친 하세하신 후에 나 또한 그대로 이 계룡산에 머물러 흙과 나무, 집 위에 올리고 쇠와 불, 방 안에서 단련하며 안빈하며 지내는 중이다. 비록 고인의 만분지 일이 못되나 오직 의사만은 고인을 배우고자 하는 바이다.

  백두산족의 큰 운이 멀지 않고
  이땅의 풍운이 장차 개이니
  거의 동방의 봉황이 와서 기다리리라
  세인들아, 작은 머리 다리 없음을 한탄 말라
  궁궁을을 쉽게 알리라
  땅위의 십승지 찾으려 말고
  먼저 마음의 십승지를 닦으라
  단기 5285년 3월 23일 봉우서우유신정사


    22. 친산 성추 후 내 소감
  (주석 10) 어버이 산소
  (주석 11) 성묘
  효도가 백행지원이 된다고 고성이 말씀 하시었는데, 나는 부모님께 효도를 못 해보았다. 정평하자면 불효막대하다
  내 자친께서 내 18세시에 하세하시고 내 선친께서 내 37세시에 하세하시었다. 그런데 내 선비상(모친상)을 당하여 부재모상(부친은 살아 계신 모친상)이라 1년간인 단기간이었으나 상중엥 집상을 못하고 상례도 소홀하였다. 내 연령도 소년기였으나 대체로 서모가 새로 들어와서 가정풍파가 하루도 없을 날이 없었다. 연고로 안심하고 집상하게 못 되어서 상중임을 불계하고 반은 노상에서 있었다. 그러자니 무슨 정성이 있어서 상례를 잘할 수 있겠는가. 불수년(불과 수년)에 내 실수로 패가하고 적수공권으로 생활고를 당하니 호구 관계로 동서분주하자니 무슨 사상지도(위를 섬기는 도)에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제례 역시 말 못할 지경이요, 양친(부모 섬김)도 역시 아주 말 아니었다. 가빈친로(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노쇠함)하고 내가 별수단 없고 그 경과야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상태였다. 더구나 내가 경신년(1920)에 신환으로 구사십생이 되고 뒤이어 임술년(1922)에 또 토혈병증으로 사선에서 방황하다가 우연히 신병은 차효를 보았으나 가정생활은 여전히 조석난계(아침저녁 잇기가 어려움)였다. 비록 가빈하다고 사친(부모 섬김)하는 데 불효하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내 소행을 양심적으로 말하라면 효도는 못하였고 또 고의로 불효한 것은 아니나 불효는 불효다. 혹 무슨 도리가 있을까 하고 장재도상(길 위에 오래 있음)하여 재가무일(집에 있는 날이 없음)하니 양친할 새가 없었다.
  경신년에 선비 산소를 공동묘지에서 갑동으로 면례하고 계해년(1923)에 영창이가 조요하였다. 갑자년(1924)부터 내가 전라도로 가서 호구지도를 구해 본 것이 술도 정치 못한 의업을 종사하였다. 그 익년(다음해)에 허가를 얻었으나 개업을 못한 그대로 수년을 전남에서 경과하다가 정묘년(1927)에 반재도 상반재가(반은 길 위에, 반은 집에 있음)로 양친도 하고 섭세(세상을 살아감)도 했다. 그리고 선비 산소를 아기봉 하 정봉에 면례하였다.
  기사년(1929)만은 생활이 좀 극도곤란은 안 받았다. 이어서 경오년(1930)에 영조가 생하고 신미년(1931)도 근 1년 재가하였으며, 임신년(1932)도 역시 재가일다 하였다. 임신년에 선비 산소를 계룡산 정봉에다 면례하였다. 계유년(1933)도 반재도상반재가였다. 갑술년(1935)에 재가하며 벌채사업을 했다. 생활은 소유(조금 여유있음)했다. 병자년(1936)에 소성(작은 집)을 얻어 반년간 대전서 생활하고 합산해서 지내다가 병자 12월 14일에 선친상을 당하여 동후(동네 뒤)에 장례를 모시고 10여 년 간을 경과하도록 내 일신상에는 별별 문제가 다 있었으나 생활상으로는 소유해져서 최하등세는 안 물었다.
  그리다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하기 전에 을유해방에 내 역시 청년이니 정당운동을 하느라고 가산은 도로 공수가 되었다. 무자년(1948)에 선친 산소를 아기봉 아래 장군배로 면례하고 당년에 묘변을 당하고 다시 봉축하고 기축년(1949)에 선비 산소를 또 공산당들에게 묘변을 당하고 부득이 선친 산소 후룡(뒷산)에 임시로 모시었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가서 있다가 6, 25사변에 귀가해서 피난차로 산상에 가서 성묘하고 9, 28수복 후에 시기는 기억이 안 되나 일차 성묘한 후로는 신묘년(1951) 만 1년을 성묘 못했다. 거리야 10리밖에 안 되었는데 왜 성묘를 못하였는가 하면 공비가 간간 산으로 출현한다고 토벌대가 무시하고 왕래해서 생명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성묘를 못한 것이요. 좀 안정한 후는 무심히 있다가 못한 것이다. 작년은 금초도 못했다. 사사여사생(죽은 사람 섬김은 산 사람 섬김과 같다)이라 하는 고어가 있는데 이때까지 성묘도 않고 금초도 안 한 것은 도시 불효인 까닭이다.
  임진(1952년) 2월 21일에 소성을 대동하고 성묘를 하고 낸 감상이 더욱 불효하였다는 것을 각오한다. 선비 산소는 그리 심하지 않으나 선친 산소는 사초(잔디풀)가 무성하였던 곳이라, 금초를 안 해서 사초가 반이나 상하고 잡초가 심하였다. 자식된 도리에 죄송이라기보다 불효막심하였다. 내가 못 갔으면 타인에게 부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내 생각에는 10리밖에 안 되는 산소에서 내가 안 가고 타인에게 부탁하기는 미안해서 고의로 안 한 것이었으나, 현장을 와서 보니 금초시에 아무에게라도 부탁하였더니만 못하게 되었다. 수원수우(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요)하리요. 일에서 백까지 내가 불효한 원인이다.
  내가 선친 산소나 선비 산소의 금일 현상을 뵈옵고 조부모 산소의 황원야초상을 연상하며 내가 불효하였다는 감상이 흉중에서 배회하고 후일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예정해둔 고령산지를 내가 노쇠하기 전에 구득해서 영구히 안장하였으면 내 일생의 불효한 것을 만일이라도 용서하실 것인가 하는 내 생각인데, 고령산지는 금전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곳이요, 금전이 있더라도 용이하게 입수할 수 없는 곳인 줄 잘 아는 바다. 그러나 타인은 백년을 가도 그 자리에 손을 댈 리가 없어서 내가 안심하고 금전만 입수하면 매산(산을 삼)할 준비를 해볼까 하는 결심이다. 조부모 산소는 현상으로는 아주 미궁에 들어 있는 중이다. 비상수단이 아니면 구일면모를 찾을 수 없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불효막대하다. 비록 사변(6, 25)이 이 현상을 만든 것이나, 미연에 방지 못한 것이 내가 불효인 연고다. 효는 백행지원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실행해야 할 일이다. 감개무량하다.
  단기 4285년(1952) 3월 29일 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23. 연방사를 재추진해 보자
  방가(나라와 가정) 공히 다사한 차시에 사자(선비)라고 어찌 자기 일신의 한적만 취하여 은퇴생활을 계속하리요. 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총역량을 발휘해서 방가에 일조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내가 수십년 전에 연방사를 창설하였던 것도 이 취미에 불외하다. 동지를 규합해서 농산어촌에 중견인물로 민족정신을 계발하며 앞으로 의리의 수준을 향상시켜서 세계만방에 오천년 역사를 가진 문명족속이라는 것을 자타가 공일할 만치 양성하자는 것이 제일 목표요, 그 다음은 이 정도에 그치어서는 별무신기니 일시적 소강책에 그치지 않고 만년대동책을 우리의 손으로 이 우주에서 발단해 보자는 것이 주목적이요 무슨 침략이니 전쟁을 목표로 영웅심리를 양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만국태평이요 만민공영을 목표로 나가자는 것이다. 현상으로 보아서는 자기 일신도 솔성을 못하는 형편이니,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어찌 될 것인가 할 것이나 인인이 개성이 된 연후에 반드시 성대가 되는 것이 아니요, 민이란 초상지풍(풀위의 바람)이라, 위대한 지도자만 있으면 가여위선(착해질 수도 있음)이며 가여위악(악해질 수도 있음)인 것이 우리 백성의 본연된 성정이다.
  그러니 우리의 이 연방사를 재추진하자는 것도 이 의미인 것이다. 농산어촌의 순박한 백성들을 하루라도 이 고해에서 속히 벗어나게 해볼 연구를 우리들이 해서 최안, 최적한 방식으로 우리가 선체득하고 이 체득한 경험으로 우리 백성을 지도하자는 것이다. 이 일터에 일꾼을 모집해 보겠다는 것이 연방사 발족일 것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는 어느 일개인을 위하는 것도 아니요, 또 일국가만 위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일인일인의 행복된 가정이 집합하여 일동일면이 행복되고 일동일면이 완전한 행복됨으로 일군일도가 완전해지고 일도일도가 완전무결함으로 일국이 강해지고 또는 태평해지는 것이요, 또 이를 추진함으로 천하태평이 되는 것이다. 이 태평성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실천궁행으로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위해서 일하자는 것이 연방사의 취지인 것이다. 우리는 범태탁골(평범한 출신)이라 성현군자가 아니나, 우리들이 욕구하는 바는 고인의 치평을 운위하는 것이니 소호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한다. 현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전되어서 우리는 100년, 200년을 가더라도 추급 못할 현상인데 어느 세월에 수준이 같기를 바라리요 하는 소극론자들이 있으나, 나는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유심유물이 합치됨으로 비로소 우리의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이다. 현 구미의 물질문명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낙후된 것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 물질적 낙후에 낙망 말고 물심합치로 나가면 불구한 장래에 과학계를 우리 민족이 제패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물심합치론으로 우리 중견인물들을 양성해서 물질문명 낙후에 낙망 말고 전문적으로 나가면 최단시일을 요하고 그 물질문명을 압도할 것이라는 것을 재삼 언명해 둔다.
  연방사로 동지를 규합해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잠재적 정신을 고취시키고 연정원으로 후진청년들을 양성시키며 물심양면의 합일론을 실현한다면 1기, 2기, 3기 간을 두고 우리 민족 목전에서 '우리의 오천년 역사에 전통성이 이런 것이 잠재하였으니 안심하시오' 하는 거종 소리가 자연히 삼천만 민중의 고막을 진동시킬 것이다. 이것을 나 1인만 주장한다면 혹 정신이상자로 취급을 당할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말하는 것은 식자 간에 동감을 가진 사람이 불소하다는 것을 확언해 둔다.
  현과학이 아직 극도에 가지 못했다는 것은 과학자 자신들이 증명할 것이다. 말하자면 발전도중에 있다고 본다. 기계학만은 장족 진보를 보고 있으나 이것은 각국에서 전쟁 관계로 잉 점에 치중하였다는 것이 주원인일 것이다. 다른 과학 방면에서는 아직도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 민족들도 물심 합치론을 실현화시키면 불구해서 장족진보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성조 단군임의 유전해 주신 그 무엇이 아닌가 한다.
  민족에게 누구나 있는 잠재성이 있으니 우리 민족은 양같이 순하나 용맹한 사자에게 아주 굴하지 않고 언제든지 중흥을 잘하고 구전십기하는 잠재성을 우리가 잘 발휘하도록 동지규합해서 지도해 보자는 것이다. 이 잠재성도 촉각이 둔해서 좀체 동하지 않는 것이 상성이라, 동지들이 거종으로 이 잠재성을 촉동시킬 책임을 가진 것이다. 이 책임 완수가 연방사의 성공일 것이요. 우리 민족의 행복의 종자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무슨 종교나 예언가들이 말하는 상례가 아니라 현실을 증거삼아서 말하는 것이다. 백 가지 이론보다 한가지 사실이 승리하는 것이니 과학만으로는 수준이 근사에서 영미법덕(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이 서로 양보 안 할 정도요, 일로(일본, 러시아)도 역시 그 등대(같은 상대)에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일탄이 세계를 좌우한 것은 그 나라 전체의 과학문명이 압도적 우세해서 그런 것이 아니요, 원자탄 발명인이 개인적으로 타인보다 나았었고 이 사람을 가진 민족이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타인의 불급하는 두뇌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 나라 전국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인식할지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도 개인적으로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 얼마든지 있으나 아직 민족적으로 추진을 못 시키고 연구실 하나도 준비 못 해준다는 데서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이요, 인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인식하라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신계의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과학계에 가서 연구실을 가지고 연구하면 현 원자탄쯤은 별 문제 없이 압도할 것이요, 다른 신발명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을 규합하자는 것이 연방사의 본의다.
  고대에 세탁업을 하는 가정에서 구수비방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국 유지자가 천금으로 그 비방을 구해서 그 나라가 동월에 거병 도강할 때에 사용해서 일국이 흥했다는 사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세탁업자의 구수약비방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잘 알아 달라는 말이다. 자진해서 헌책하는 인사도 없고 또는 나라에서 그런 인재를 구하는 일도 없으니 우리들이라동 자진해서 동지를 규합해서 세탁업자의 구수비방을 구해 보며 또 양성시켜 보는 것이 우리 연방사의 의무며 우리 민족된 책임이라는 것을 부언해 두고, 나도 별 기능은 없으나 물을 통하는 홈통의 자격은 있다는 것을 말해 두노라. 나를 위하는 것도 아니요, 남을 위하는 것도 아니요, 오로지 우리 민족의 책임이라고 자신하고 자진해서 이 연방사를 창설할 것이요, 재추진해 볼까 하는 것이다.
  임진(1952) 5월 18일 봉우 자경하노라


    24. 정양론
  명일이 내무진(와도 다함이 없다)이라고, 금일에 못하면 명일에 하지 하고 미루는 근성이 우리가 벌써 53세에 백발이 성성한 노약이 되었다. 조문도(아침에 도를 들음)면 석사(저녁에 죽음)라도 가하다고, 비록 53세의 노쇠를 인아(남과 나)가 공인하나 지금이라도 용단성을 가지고 백사를 다 버리고 정양을 시작하는 것이 내게는 최대한 사업이다.
  내가 정양을 못하면 언제나 현상일 것이다. 정양으로 열뇌를 식히며, 갱진일보해서 우리가 소망하는 바를 성공하면 우리는 이미 노쇠하였으니 별무용처라 후진들이라도 열어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요 책임일 것이다. 여기서 일신이나 일가의 생활문제는 해결 못한다 하더라도 장래의 영생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현상 이 몸을 가지고 임사하면 비유하여 말하자면 일행백리하는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1년을 간대야 3만6천리다. 10년을 역시 간대야 36만리가 되는 것인데 아무 고장 없이 10년을 계속해서 갈 수도 없고 간대야 진행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진도 되고 후퇴도 있고 와우횡행도 있고 중지도 있을 것이니, 10년 만에 총결산을 본대야 큰 이상 없으면 다행이요, 소호라도 전진하였으면 특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1년이고 2년의 정양기를 마치면 하루 백리 갈 사람이 하룰 천리나 만리를 갈 수 있을 것이니, 10년 갈 길을 1년만 가여도 무난통과하고 전진하는 것도 큰 문제 없이 성공될 것이라고 쾌언해 둔다.
  그러니 비록 몸은 노쇠하였으나 정양을 단행할 결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정양을 성공함으로 내 장래가 있고 불성공 함으로 장래가 실패라는 것을 부언해 둔다. 현상만으로는 전진 가능성이 아주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박약하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내 역량을 정평하면 잘 아는 것이다. 정양이 없이 나가서 일을 한다면 성패가 반분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패변이 더 많을 것인가의 정도요 성공된대야 보통 성공에 지나지 못할 것이 당연한 일이다. 확정적 사실이라 부정 못하겠다. 그러나 1--2개년의 정양기를 얻는다면 일시적으로 별 성공을 못 하더라도 장래 영생은 희망이 있는 것도 확정될 사실이다. 이 좌냐 우냐 하는 판단 아래에 내 몸의 장래가 아주 판단되는 것이나, 백발성성하다고 자포자기할 것은 아니다. 이 몸은 노쇠했으나 아직 마음만은 그다지 약해지지 않았다. 가옥처쇄(집안과 처를 감옥과 자물쇠에 비유)의 난관을 해탈하고 하루라도 속히 정양을 실현해 보자. 최단기간 내에 실현할 것을 맹세하고 이 붓을 그치노라.
  단기 4285년(1952) 5월 23일 봉우서우유신정사


    추기
  정양이라는 것은 별 방식을 구하거나 사조(스승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내 자신이 수십년 경험한 정양법대로 비록 도시에서라도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규칙적으로 1년, 2년을 수행하면 족한 것이요, 또 취직이 되어도 무관한 것이다. 다만 일정 시간만 있으면 될 수 있고 너무 가정생활에 곤란만 안 되면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현상은 백난이 구비해서 착수를 못하는 것이다. 이를 배제하고 나갈 용기가 부족해서 지금껏 있는 것이다. 별 준비는 필요 않으나, 가족생활이나 내 일신의 정양중 심신을 노비(힘들고 고달픔) 시키지 않을 정도가 못 되어서 착수 못하는 것이요, 할 만한 준비가 되는데 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호사만 않으면 전문적으로 정양에 용력하면 될 것인데 내가 호사하는 관계로 일잉 그칠 줄을 모르고 생겨서 정양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내 불찰이다. 속히 이 호사벽(일을 좋아하는 습벽)을 개하고 정양에 나가기를 결심하리라.


    25. 공로를 자경함
  (주석 13) 헛되이 늙음을 스스로 경계함.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누가 일을 다 하고 여감(남은 감회)이 없이 가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리요. 그러나 다 자기대로 할 일은 하고 자기 목적하던 일이 자기 역량에 지나쳐서 못 성공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다 못하고 가는 법은 없는 것인데, 나는 내가 목적한 바야 성공하든지 않든지 간에 내가 53년이나 되도록 풍풍우우로 아무 이렇다는 일을 해놓은 것이 없고 그러면 목적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도 별로 이렇다는 표현할 일이 없이 지나왔다. 이것이 공로(헛되이 늙음)라는 말이다. 53년이라는 백박이 성성한 무위무능한 노인으로 화하고 보니 한심한 일이다. 물론 잘했든지 못했든지 아무 것도 않고 지내 온 것은 아니나, 표현할 수 없고 실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 일신사로 말하더라도 효어친(부모에 효도)해야 하는 것인데 부모님 생전에 별로 효를 못하였고 불효된 일이 많았을 뿐이요, 사사여사생(돌아가신 분 모시기를 살아 계신 분같이 함)이라 하는데 내가 부모님 하세 후에도 여전히 효를 못하였고 불효한 행동이 있었을 뿐이요. 계술(조상의 뜻과 사업을 이음)을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아직껏 계술을 못하였고 위선사(선조 위하는 일)에도 정성이 부족하다고 확언해야 정평이요, 대외적으로는 충어군 해야 하는 것인데 아주 표현한 불충이라는 일은 없으나 군에게 충했소 하고 내놓을 것도 없다. 신어우도 역시 향당붕우(자기가 사는 지방의 친구)에게 확신될 만한 행위를 못하였고 혹은 신을 수한 때도 있고 혹은 신을 못 지킨 때도 있어서 우도에 신이 있는 정평을 듣기는 부족하다. 그리고 경어장(윗사람을 존경함)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특별히 불경장한 것 없으나 또 경장 했다고 표현될 만한 점이 없다. 우형제(형제간 우애)는 내 역량껏은 우애해 볼까 했으나 역시 타인이 너는 우애있는 사람이라고 확평할 것 같지 않다. 와부부(부부간 화목)는 별로 불화하지는 않으나 모범적 화는 못 된다. 그리고 보면 오륜에서 겨우 낙제 안 할 정도 인물이요, 성적이 우수한 점은 1건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53년이 되도록 1건도 이렇다는 실적이 없는 확증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유시무종하다고 평한다. 사실은 그러하였다. 그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니나 사실은 유시무종한 일이 많다. 오사 한다고 평하난 내가 호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불구심해(깊이 해석함이 없음)하고 될 듯한 일이면 착수하는 것이 내 병이다. 첨전고후(앞뒤를 잼)하고 좌계우량(좌우로 헤아림)하며 일을 착수하는 것이 상리인데 나는 이렇게 심각한 연구를 않고 착수해 놓고 진행해 가며 해결을 연구하는 병이 있다. 그러니 실패를 잘 한다. 그러나 내 심산은 일이 정당하고 행동이 불량성이 없다면 성공과 불성공을 심심 고려 않고 그저 해보는 것이다. 해 가면서 역량껏 연구도 해보고 진행법을 책모하는 것이 내 천성이요, 소호라도 양심에 부족한 주사(일을 만듦)라면 이해나 확실성이 있더라도 착수 않는 벽성이 있다.
  내가 일생을 통해서 범과가 되는 줄 알고 범한 것은 색계밖에 없다. 그 외에는 재상(재물 관계)이나 다른 일이나 양심이 허락 않는 일을 착수해 본 일이 없다. 재상 외에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실수한 일은 있으나 고의로는 1건도 양심에 허락 안되는 일을 한 일은 없다. 그러나 내 본성잉 소어계활(생활에 소홀함)해서 생활고를 받고 있는데 나 같은 무재무능한 사람으로 생활고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소호도 불만감은 없다. 그렇다고 안빈낙도하는 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원천우인(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함) 안 할 정도다. 말하자면 곤란이 내 대가려니 하지, 불평불만이나 인내 못할 지경은 아니다.
  왜 그러면 안빈낙도가 못 되는가 하면 나는 비록 성공은 못하나 이 빈을 면코자 차사피사(이 일 저 일)에 착수해 본 일이 1차, 2차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그 일에 불성공해서 할 수 없이 빈에 인내하는 것이지, 그 빈을 천직이거니 하고 안하는 것도 아니요 또 무슨 도를 낙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득이한 인내다.
  그래도 미미한 희망이 있고 목표가 있는 것이다. 이 목표까지는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없는 일이나, 그저 불식지고공으로 미력이나마 휴식 없는 전진중일 것이다. 내가 60을 살든지 70을 살든지 혹은 80, 90을 살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는 작지불이(끊임없이 힘을 다해 함)하고 내 목적 도달하기까지 가볼 확고불변한 입지는 있다. 이것이 나를
빈곤에서 인내하는 용기를 내주는 것이다. 비록 곤란할지라도 초지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 결심이다. 이 초지가 관철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다 부작용인 사업이라는 것을 확언해 둔다. 재상이나 색상이나 명예상이나 다 내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목표하고 있는 것은 성공하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일이요, 내가 입지하고 있는 일에 아무 것이나 다 희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정평하자면 내 일생을 지내고 확평하라는 것이다. 내가 은인자중하며 아무 욕이나 영을 다 불관하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재언해 두는 것이다. 내 목료를 달성하는 데는 재도 핑요하고 인도 필요하나, 그렇다고 아무 재나 아무 인이나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53세가 되도록 아무 일도 못했다고 그것도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일신으이 부족으로 이런 일이 있는 것이다. 타인이야 무어라 하든지 세상에서야 무어라 평하든지 내 마음에는 소호도 변함없는 내 입지다. 내 초지관철을 내가 내 일생에 못하면 내 승계자를 구할 뿐이다.
  여기서 내 미미한 욕심은 내 생전에 확실한 기초라도 보고 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되어가는 대로 둘 예정이다. 내가 일시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내 입지는 확고불변하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범위와 한계가 다 있는 것이요, 무조건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동지도 규합해 보고 인재도 양성해 보고 하는데 판국이 국한된 인물은 도리어 나를 의심하고 자기의 주밀을 자랑하는 인사들이 많다. 그럴듯한 일이다. 각자의 주장대로 할 일이다. 공문 10철이나 모니불 12제자나 야소의 10대 제자나 다 구체이미(형체는 갖추었으나 미미함)하였고, 그 외에 공문 3천 제자나 모니불 49년 설법에 제자가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성공자 기인이며 야소도 제자가 성공자는 10여인 외에는 별 다른 제자가 없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 생각에는 사도나 제자도가 다 완비하지 않은 관계가 아닌가 한다. 이런 말은 죄를 범하는 줄 알며 해보는 것이다.
  고성은 계왕성개래학(앞서간 성인을 잇고 미래의 배움을 엶)하시며 학불염교불권(배움에 싫어하지 않고 가르침에 권태를 느끼지 않음)하시었다. 이것이 사도 였는데, 그 사도를 그대로 행하는 후세인사가 얼마나 있는가 의심된다. 계세말속(말세의 풍속)이라 별일이 다 많으나 누가 궐중(그 가운데)을 집(잡음)하고 정일(정밀한 하나)을 전할까. 이무이치(이치는 둘이 됨이 없음)요, 도무이도(도는 두 가지가 없음)가 아닌가 한다.
  우연히 붓을 들다가 언지장(말이 길어짐) 하였도다. 내가 53세가 되도록 아무 성과가 없고 공로해서 혹 인내 못하고 변할까 염려하여 자경하는 것이 요령부득한 말을 많이 기록했도다. 후인은 과한 책을 말으소서
  어임진오월회일 봉우자경우신야정사
  (주석 14) 1952년 5월 그믐날에 봉우는 신야정사에서 스스로 경계함.


    26. 소불인이면 난대모라
  (주석 15)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꾀하지 못한다. '논어' '위령공' 편에 나옴
  장자방의 이교습리와 한신의 과하슬과(사타구니 아래를 무릎으로 기어감)가 모두 인내로 성공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소진의 기처불하기하고 강태공의 기처투분이도한 것이 다 일시적 인내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그러나 제현들이 유연히 인내하고 자중하여 조금도 이런 충동으로 초지를 변함없이 나갔다. 포옥도, 회서십상서도 다 불우(때를 못 만남)하였을 때에 얼마나 역경이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바이다. 백절불굴이라는 의지로 당하는 역경을 극복해가며 나가다가 운이 좋으면 순조로 성공할 것이요, 비록 불성한대도 수원수우(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함)할 바 아니다.
  (주석 16) 장량이 이교에서 황석공이 다리 밑에 떨어뜨린 신을 주워다가 그에게 신기고 병서를 받은 고사.
  (주석 17)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소진이 출세하지 못했을 때 고향집에 들렀더니 아내가 베틀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으며 냉대했다는 고사
  (주석 18) 강태공은 80세가 되도록 출세를 못하고 숱한 고생을 겪으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가 고생에 지쳐 그가 말려놓으라 했던 곡식을 땅바닥에 버리고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다.
  (주석 19) 초나라 변화씨의 박옥(돌 속에 든 옥)인데, 변화씨가 이 옥을 품고 초왕에게 바쳤다는 데서 나온 말, 후에 진나라의 옥새가 됨.
  (주석 20) 진 나라 소진이 왕에게 열 번 품은 글을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고사에서 나온 말.
  나도 53세가 되도록 순조로 되는 일이 없이 역경에서 역경으로 순환하는 중이나, 다행히 내가 변하지 않고 꾸준히 불휴불식의 태세를 취해온 것은 사실이다. 내가 하는 일이 성하건 불성하건 내 초지는 불변하고 53세가 되었다.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태공망이나 백리해에 비하여 아직도 수십여 년 후생이다. 내가 초지관철까지의 도정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 예정할 수 없으나, 그동안 아무 역경이 있더라도 인내 또 인내하며 내 실력양성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내 실력이 부족함을 한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과 경과의 역경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역경이 없이 성공하는 법이 없다. 인내하기 극난한 일이라도 은인자중하며 내 할 도리만 잘하면 부지불각중 내 덕량과 인심이 자연 합치 해지는 것이다.
  나는 항상 시시비비주의를 가지고 있는 관계로 섭세하는 상대방이 언제든지 생겨서 입장이 곤란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말하자면 남의 시시비비를 내가 불관하면 이런 상대방이 없을 줄도 잘 아나, 천성이 시시비비를 좋아하니 할 수 없이 상대방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는 중에 절차탁마로 내 행동이 고쳐져서 무단(끝이 없음)한 시시비비에는 불관해야 할 것이다.
  (주석 21) 백리계라고도 한다. 중국 춘추시대 우나라 대부였으나 천신만고를 겪은 후 70세 때에야 진나라 재상에 등용되었다. '사기' '진본기' 와 '맹자' '만장' 상편에 보인다.
  내가 이 시시비비가 병이요, 또 이 시시비비가 내 장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내성을 기르라는 자경일 뿐이다.
  임진(1952년) 5월 봉우 자경


    27. 차기 주권자 될 인망이 있다는 세평을 받는 인물들을 내 의견대로 평해 보자
  신문지상으로도 보도되고 잡지에도 발표한 바 있었다. 전인지술(앞사람의 서술)이 비의(갖추어짐)라고 각자의 의견을 발표 못할 것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외람한 줄 알면서도 이 붓을 든 것이다.
  평에 오른 인물은 신문지상대로 현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전임 부통령 이성재시영 선생과 현 부통령 인촌 김성수 씨와 현 국회의장 이철기범석 군과 역시 전임 국무총리인 장면 씨와 현 대통령 출마자인 신흥우 등을 조상(도마 위)에 놓고 내 의견대로 평을 해보자
  제일 먼저 붓을 현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에게로 옮기자. 그의 초년 생활이나 임정 당시 경력은 인소공지(남이 다 아는 바)니 그만두기로 하고, 8, 15 후 귀국하여 우리 안전에 표현된 일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4년 임기 안에 한 일을 사실대로 평해 보자.
  무엇보다도 이박사는 친소인원현인(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이를 멀리함)하는 근성이 있다. 이 근성은 무슨 연고인가 하면 박사는 박학하나 정하고 전문적이 아니다. 그저 여러 가지를 알 정도요, 한 가지라도 확신있게 아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와 접근되는 인물들이 자기의 의사를 승순(순순히 승복함)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데, 소위 거물급 들이야 누가 제 의사에 맞지 않는 이론이나 주장에 무조건하고 승순할 리가 없고 박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시정하려는 것이 보통일이다. 여기서 자기 주장대로 하자면 물론 순조로 안 되고 자기 위신 문제도 있다. 자기 생각에도 자기가 무던하거니 하는데 거물급과 상대하면 불편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물급을 경이원지(겉으로 존경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멀리함)하고 절대로 접근을 피하며 자기 의사에 승순하는 인물을 사용해서 자기 말이라면 유령시종(오직 명령만 옳다고 따름)하는 자들만 상대하는 아주 보통에 지나는 성벽이 있다. 문선홀략(남의 잘한 것은 금시 잊음)하고 기과불망(남의 과오는 잊지 않음)하며 청참이미(남의 잘못을 고함을 듣고 좋아함)하고 문간이구(자기의 잘못을 지적함을 듣고는 미워함)하는 성질의 소유자다. 그래도 자기의 박학으로 이명시하(아래에 현명하게 보임)하나 대통령 4년 간에 정적(정치업적)이 곡상무직하(위로는 굽었고 아래는 곧음이 없음)라는 평외에는 불평할 것이 없다. 승순하고 아부하는 인물들이 박사의 조정에는 가득하고, 정직하고 공정한 인물들은 화를 피하기에 여가가 없어서 각 방면으로 은신들을 한다. 말하자면 현자는 선피(먼저 피함)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6, 25사변도 있고 정계혼란도 있고 별별 수단을 다 사용하여 박사 재선운동에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거물급들이나 혹 대상인물들은 무슨 화나 있지 않을까 해서 슬슬 피하는 중이다.
  내가 무자년(1948)에 서울서 초대 대통령 선임 호외를 보고 내 소감을 기록한 바 있었다. 박사가 정치에서 백 가지에 한가지도 선정을 못할 것이니 우리 백성은 도탄에 들 것이라고 하였고, 또 우리 백성이 운이 좋아서 이런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무슨 연고인가 하면 미온적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나오면 현상유지나 혹은 완진적(완만하게 나아가는) 보조로 민족도 반세기 내지 일세기를 경과하지 않으면 완전한 활로를 찾기 어려운 일인데 의외로 박사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으니 민족은 급전직하로 도탄에 들어서 민족적으로 각성이 새로워서 불구하여 우리민족의 상처를 대 수술할 날이 있으리라고 평한 일이 있었다. 과연이다. 4년간 민생고야 다른 인물이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100년간 받을 고난을 단시일에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재 박사 정치는 대외, 대내 다 실패다. 차기에 또 당선된다면 불구하여 정변이 있으리라고 확언해 둔다. 성문과정(소리소문이 그 실정보다 과도함)한 인물이다. 

  팔심노옹하소구오
  기심불변기정산하니
  안명역경유수지오
  (풀이)
  팔십 늙은이 무엇을 구할꼬
  그 마음 변치 않는데 그 정력은 흩어지니
  눈앞에 역경을 누가 있어 알리요

  금번에 만기 퇴임하고 이종여년(여생을 마침)하면 박사에게는 행막행언(이 이상 행복할 수 없음)일 것이다. 만약 재임한다면 천추에 유취(나쁜 냄새를 남김)할 것이다. 현상으로도 시번화(시절의 번화함)는 있었으나 만세처량은 막연(면치 못함)할 것이다.
  (주석 23) 실제로 후일 이승만은 만리타향 하와이에서 처량한 말년을 보내다 외로이 죽었다.
  그 다음 성재 옹을 평해 보자. 옹은 부통령 사임 후 세평이 아주 청렴결백하다고 한다. 내가 옹이 부통령 당선시에 내 소감을 쓰기를 옹이 부통령을 당선된 것은 옹을 위하여 욕은 될지언정 영은 되지 못하리라고 평하였다. 부통령으로 박사를 보좌하여 선정을 못할 것이요, 기괴망측한 사건이 층생첩출하는데 시위소찬(직책은 다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여 목만 먹는 일)으로 부통령 자리에 앉았기도 미안하고 옹은 비록 관후장자(관대하고 후덕한 사람)의 풍은 있으나 확립한 정견 정략이 없고 또 박사와 항재하여 개과천선시킬 용감성이 부족하니, 감노이불감언(성내기는 해도 감히 말하지는 못함)하고 부통령 자리에 있다는 것이 옹을 위하여 무엇에 해당하다고 보는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격일 것이다. 고결한 옹의 성격에 한 걸음 나가서 은퇴생활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것이 옹의 명예도 아니요 실력발휘할 곳도 못 된다고 평하였던 것이다.
  과연 옹은 참다 못하여 부통령의 직을 사하고 은퇴하였었다. 부통령이 옹의 누덕(덕에 누가 됨)은 될지언정 청덕은 못 되었다. 금번에도 대통령설이 있으나, 나로서는 옹의 출마를 원치 않는다. 하고인가 하면 84세 노옹으로 아무리 정력이 좋다 하더라도 이 난국에 나와서 요리할 것 같지 않고 또는 옹은 청렴개결하고 관후장자의 덕은 있으나 진현퇴사(현인을 나오게 하고 사특함을 물리침)하며 수기응변(기회에 따라 변화에 응함)하여 대외 대내에 주권자 격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적격자가 못 된다. 득인어인(인재를 얻고 거느림)의 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옹은 90 노옹이니 누가 주권자로 되든 원로 격으로 국지대사나 상의하고 청한직인 상원의장이나 추대했으면 적당하다고 본다. 혹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임을 다하지 못하리라고 확언하노라.
  그 다음 현 부통령 김성수 씨를 평해 보자. 씨는 왜정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유공한 인물이다. 호남 거부로 김성수벌 이라면 조선 경제계를 좌우하던 인물로 교육사업이나 산업이나 될 수 있으면 일본인에게지지 않고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손으로 해보자고 언론기관까지 잡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든지 투쟁적인 사업가요, 고인들도 위부(돈을 벌음)면 불인(어질지 못함)이요 위인이면 불부라 하였는데 인촌은 부하면 능히 불인의 평을 면하였다. 일본에 삼릉, 삼정, 주우 재벌과 같이 우리 조선에서 박흥식 재벌과 비견하여 우리나라 경제계의 중진이다. 그러며 각계각층 인사들을 망라하여 민족운동을 하던 것이었다.
  8, 15 후에 송진우 군이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자 인촌을 당수로 추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기를 한민당은 일제 잔재들이라고 규정하고 민족 반역자 소굴이라고 칭호하였다. 과연이다. 일제 당시 지식계급으로 관변이나 경제계나 교육계에 투신하던 인물들은 다 그 산하로 모였으니 누가 그런 말을 안 하리요.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한민당에서도 인촌만은 민족을 구하려던 애국자라고 다른 동지들에 불호평을 들으면서도 인촌만은 악평을 하지 않았었다. 한민당의 제반 악덕이 인촌 1인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확언해 둔다.
  그러나 그 대표 인물이라 한민계통을 배제할 리는 없다고 본다. 현 부통령으로 선임해서 역시 무슨 정치상의 유리한 점이 있는가 하면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다 잘 아는 바다. 현 대통령 계통과 부통령 계통이 정계에서 대립되어 서로 선치를 한다면 알 수 없는데, 그 정반대로 나오며 권력의 쟁탈전에 있는 것 같다. 인촌이 차기 대통령으로 출마하느니보다 다음 거물 내각에 문교부 장관으로나 재무부 장관이라면 아무 나라에 가든지 별 손색이 없으나 그 이상의 직에 있는 것은 적격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니 물론 세력으로는 대통령 쟁탈 축록전에 1인이 될지 알 수 없으나, 자격으로는 백모로 보아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만약 당선된다면 한민계가 불구해서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촌을 위하여 안정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 다음 현 국회의장 해공 신익회 선생을 평해 보자. 옹은 임정요인의 1인으로 8, 15에 나와서 갈팡질팡하다가 한독당에서 나와 국민당을 조직해서 당수로 있으며 초대 국회의장으로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보좌하며 4년 간이라는 세월을 경과했는데 당을 한국민주당에 합당하여 민국당이라 개칭하고 최고위원으로 있는 중이다.
  옹은 내가 평하기를 음험간독, 근세영웅 이라고 하였다. 무엇이 그리 음한가 하면 자기 마음에 없으나 자기 목표를 살리기 위하여 공정하다고, 광명하다고 못할 일을 하는 것 누가 양이라고 하겠는가. 무엇이 험한가 하면 정의와 인도로만 일을 할 수 없으니 모략적으로 자기 지반을 긴축하자는 심산 이것을 누가 순하다 하리요. 무엇이 간한가 하면 현인군자는 명어성쇠지도(성쇠의 도에 밝음)하고 통호성패지수(성패의 수에 통함)하고 심호치란지세(치란의 세를 살핌)하고 달호거취지리(거취의 이치에 통달함)라 하였다. 물론 자기가 목표하는 일을 하는데 자기의 당인 국민당을 가지고는 아무 효과가 없으려니 하고 과부 재가가듯 신랑감을 감언이설로 설복하여 상대당의 인물이 안하에 있음을 기회로 고배를 마시며 안연히 합당하니 누가 이것을 광명정대하다 하리요. 그러고 이것이 장구적이 아닌 것도 알며 일시적으로 화류계 여자가 외입하듯 하니 누가 절개 있다 하리요. 그러니 자위신모(스스로 자신을 위한 모략)는 잘한 것이다. 무엇이 독한가 하면 옛말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임정요인들과 동고동사하던 사람이 자기목적 달성을 위하여 임정요인들을 폐리(헌 신)와 같이 버리고 더구나 임정인물들과 정반대인 한민당과 악수하고 일을 하니 누가 독하지 않다 하리요. 이것이 내 평하기를 음험간독이나, 근세영웅이라고 본 것이다.
  무엇이 영웅적인가 하면 해공은 그전에 무슨 일이든지 별로 주밀한 적이 없었고 덥석덥석 일을 잘 저지르는 성격이었는데 의장이 된 후로는 무슨 일이든지 신지재사(두 번, 네 번 신중함)하고, 그 본성이 그리 청렴 못하던 사람인데 아주 염결해지고, 덕이 부족하였는데 수덕을 하며 신을 지키며 의가 있는 것같이 하여 어중(대중 관리)하는데 바로 그럴듯하게 하여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영웅수단의 덕이요 신이요 의요, 평시 소양이 있는 덕신의가 아니다. 4년 간 국회에서 명의장으로 명망이 있는 것이 해공이 장래에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행사가 아니가 한다. 그리고 보니 음험간독하였으나 근세영웅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고인의 말에 작심삼일도 어렵다거든 4년을 1일같이 변함이 없다면 역시 제2의 천성이 되는 것이다. 옹은 두뇌가 명민하고 가이선(선할 수 있음), 가이불선(선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마음대로 할 인물이다. 4년 의장으로서 별 큰 결점이 뵈지 않으니, 장래에 1차쯤은 과히 자리를 욕되지 않게 할까 한다. 4년 전으로 보아서는 비오하아몽(오나라의 어린애가 아님. 어린애로 취급하나 좀 추켜주는 말)이다. 인물이 극귀한 현 우리 정계에 해공의 우에 출할 만한 인물도 역시 귀하다. 서축에 오호대장이 다 가니 요화가 대장이 된다고 해공도 인물 없는 우리 한국이라 하시든지 1차쯤은 희망이 있는 인물이라고 확언해 둔다.
  그 다음 철기 이범석 군을 평해 보자. 무자년(1948)엥 철기의 국무총리 인준을 듣고 내가 평하기를 치기복중(어린 준마가 무거운 짐을 걸머짐)이라 하였다. 철기는 천리마의 성격은 구비하나 아직 그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국무총리보다 족청운동이나 더 하며 인재양성에 노력하는 것이 철기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던 것인데, 과연 국무총리로 무성무취(아무 한 일이 없음)하게 경과하고 나왔다.
  철기는 항상 몽상하는 것이 독일 희도라(히틀러)나 불란서 나파륜(나폴레옹)을 현대에도 될 수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 병인 것 같다. 군은 좀 부족한 겸공대상(겸손과 공경으로 윗사람을 대함)하고 자애급하(자애가 아랫사람에게 미침)하는 것이다. 하사지풍(선비에게 내 몸을 낮추는 풍도, 아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혼막혼어자명(자기 잘난 체하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음)인데 철기는 이 자명이라는 성벽이 득중(대중을 얻음)하는 데 실패가 된다. 철기만 못한 인물은 물론 철기를 숭배하려니와 만약 대등성을 가진 인물이라면 절대로 그 수하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철기의 결점이다. 이 결점이 있는 한은 기차(몇 번)라도 실패할 것이요, 이 결점을 알고 고치면 불구한 장래에 자기 목표에 갈 것이다.
  절인력(절륜한 힘)이 쓸 데 없고 순민심(민심에 순응함)잉 제일이라는 것이다. 철기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순민심하는 덕량이 아주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현상으로 보아서 별 거물이 없으나, 철기의 안하무인하는 성질이 하류인사는 모르되 중류 이상 계급으로 자처하는 인사들은 마땅치않아하는 것이다. 비록 충천지세를 가지고도 겸공자애의 태도가 보이면 상대인물이 호의적으로 협동되는 것인데, 내 명령에 복종하라고 강압하면 할 수 없이 복종하는 사람은 복종하나 비위에 맞지 않는 인사는 반대할 것은 자연일이다. 
  철기여! 천리마는 그 힘을 찬하는 것보다 그 덕을 찬하는 것이다. 하루라도 속히 수덕하면 그 목표에 도달할 날이 가까울 것이다. 만약 덕이 없으면 일시 혁명장군은 될지언정 성공은 못하리라. 현하 원외 자유당의 처사도 말하자면 덕에는 어그러진 일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라. 고려 태조 왕건과 같이 실덕은 궁예에게 보내고 덕망은 자기에게 집합하고자 하는 행동이나 왕건은 거조(온 조정)가 다 궁예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현하 우리 정부는 아직 이 지경이 안 된 것을 인식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민간도 그리 우매하지 않다는 것을 속히 각오하라는 것이다. 현 자유당 원외세력이 차기 대통령 등락으로 좌우될 것이며, 아직 확고부동한 세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철기는 천리마는 천리마라도 아직 다 자랐다고는 못 하겠다. 덕력이 균일한 후라야 그 자리에 갈 것이다. 족청이나 자유당 원외파나 다 철기의 무기인 것은 틀림없으나 장약병중(장수가 약하고 병졸은 강함)하면 성공이 곤란한 것이다. 수습인심에 노력하고 무단정치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 법을 중히 안 여기면 난이 있을 뿐이니, 의법행사하며 수덕수신으로 대인 접물해 보라는 것이다. 내 철기의 장래를 촉망하는 관계로 그의 부족된 점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제인 출마평은 몇 차후면 혹 가능성이 있을까 한다.
  그 다음 장면 씨을 평해 보자. 씨는 천주교인으로 신망이 넓은 인물이요, 군정시대 입법원 의원으로도 있었고 전번에 국무총리로도 무예무취(명예도, 잘못도 없음)한 인물이요, 국련 특사로는 성과를 거두었고 그 위인이 현 혼란정국임에 불구하고 공정하였고 자기주의로는 큰 실패한 일이 없었으며 국련 계통에서는 호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정직한 외교가로는 신망이 있을 것 같고 정치가로는 너무 단순하여 서정(온갖 정사)에 다 잘할까가 의문시된다. 선한 평이요 악한 편은 아니나 역량이 좀 부족하고 정치수완이 아직 처녀라는 말이다. 구미계통에서는 아주 호평하나 우리는 만점이라고는 절대 못 보겠다. 유아한 재상으로는 족하나 일국을 대표할 대통령으로는 어느 모로 보든지 부족한 점이 보인다. 현하 국제관계가 미묘한 차시이니 외교관계로나 일시적 당선될 가능성이 있으나 실력만은 부족하다는 것을 확언해 두노라.
  그 다음 출마한 신흥우 군을 평해 보자. 군은 청년시대에는 미국서 이박사와 같이 애국운동을 해보았으나 귀국 후 기독교청년회에서 총무로 있었고 범태평양회의에 조선 대표로 김활란 여사와 자주 다닌 일이 있고 별 이렇다 할 정치운동을 한 적이 없다. 청년 시대에 청년회관에서 강연을 수차 들었으나 말하자면 요령부득할 횡설수설로 대중인기가 아주 없는 인물인데 8, 15 후 군정 하에 미군정과 결탁하여 모리행동으로 수십억대의 부호가 되고 그 다음 6, 25 후에도 모리로 백억대의 장자다. 물론 학식이야 있을 것이나, 정견이라는 것은 의문되는 인물이다. 미지수의 인물이다. 수십년 전의 그 행사나 근년의 그 행사는 정객 같지는 않으나 알 수 없는 것은 사별삼일(선비가 사흘을 이별)이면 괄목상대(눈 비비고 서로 대함)여든 하물며 수십년 간이나 상대하지 않은 이때리요.
  이 정도 붓을 그치기로 하고, 누가 되든지 벽상에 관기전(바둑시합을 관람)이나 할 r서이다. 그리고 현 총리인 장택상 군의 영단성 있는 정치가 유시유종하기를 바라며 국회부의장 조봉암 군의 조직적 인물의 포용량이 좀 크기를 바라고 또 산양와룡(산볕에 누운 용)도 봉시운화(때를 만나 운이 됨)하기를 빌고 이 붓을 그치노라.
  감히 포의한사(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국 거물들을 평하였으니 외람되기 짝이 없으나, 사자필단(선비 붓끝)에 무슨 소리는 못 쓰리요. 첨군자(여러분, 여러점잖은 분들)는 혹 괘안(눈에 걸림)하시더라도 노부의 축수소견법(잠을 쫓아보내는 방법)으로 용서하기를 바라노라
  단기 4285년(1952) 6월23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28. 6, 25 기념일을 당하여
  경인년 6월 25일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마침 1일간 휴식코자 청파동 송씨 댁에 가서 위기(바둑)대회에 참석하였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비상경계 명적(사이렌)이 일어나며 한청단원들이 비상소집령 전달차 분주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인민군이 동두천을 점력하고 물밀 듯 들어온다고 전하고 서울은 비상계엄령이 내리고 정신이 없다. 나도 곧 갈월동 숙사로 와서 보니 가아(아들)는 급히 부평 부대로 가고 가족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좌우간 안심이나 시키고 오후 소식을 탐지하니 의정부 북방에서 진퇴한다고 전하다.
  그 다음날인 26일은 의정부를 또 인민군이 점령하였다고, 국군이 탈환전쟁중이라고 벌써 피난민이 서울에 대만원이었다. 승차하는 사람은 승차하고 보행은 보행으로 용산 가도가 빈틈이 없었다. 오후 방송에 의정부는 인민군에 점령되고 미아리 북방에서 대항중이라고 한다. 포성은 충천한다. 정부나 국회에서 결사적으로 수도를 수비한다고 결의한 모양이다.
  그렇게 또 하루를 지내고 27일 오전에 모 국회의원 댁을 방문한즉 오전 한시에 비상소집해서 세시까지 전부 월강 피난하였다고 한다. 수도를 포기한 것이다. 오전부터 종일 피난민들이 남하한다. 우리 식구 중에도 2인은 선행했다. 오후 일몰시부터 군인이 많이 남하하는 것 같다. 마침 대우가 폭주하는 중이다. 가인(아내)이 피란하자고 권하나 수무분전(손에 푼돈조차 없음)하고 어찌할 수 없어서 묵묵부답하고 있었다. 정밤중에 창외를 보니 군대가 구보로 남하하는 것 같다. 결정적인 것 같다. 비록 공수라도 좌이대사((앉아서 죽음을 기다림)할 수 없어서 가인의 권고에 오후 12시경에 행리(행장)를 약간 가지고 폭우를 맞으며 가구 4인이 출행하였다.
  28일 오전 1시 반경이었다. 한강 인도교에 도달하자 대폭음이 나며 인도교는 양단되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서니 올수가 없었다. 날이 새며 정창모 군의 여사 효창공원 철도관사를 갔다. 거기서 조식하고 정군이 피난 준비금 3만원을 가지고 와서 1만원은 자기가 갖고 1만원은 자기 동생을 주고 1만은 내게 준다. 감사하였다. 갈월동 숙사를 정군과 같이 와서 보니 그때를 맞추어 인민군 전차 두 대가 선발대로 와서 난사하는 기관포 탄환이 작은아버지 댁 2층으로 관통해서 내 신변에 낙하하는데 정신없이 정군과 지하실로 피신하였다. 미기(얼마 안 됨)에 인민군 입성대가 시가행진을 한다. 가족들과 같이 이 경과를 당하고 있는 중에 정규명 동지가 와서 피난할 방책을 말한다. 그래서 내가 용산까지 왕래하는 순간에 별별 일이 다 있었다. 귀가해서 일행이 나, 소성, 종제와 같이 오산서 일박하고 있었다. 오산서 이명식이를 만났고 그 모친과 조모를 만났다. 홍성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다시 서울을 갈까 하고 영등포까지 갔었다. 이것은 오산서 보니 무수한 자동차가 수원으로 가며 곧 수도를 복구할 것이라는 관계였다. 가서 보니 소호도 변함없는 전황이다. 다시 승차하고 대전까지 직행해서 일박하고 공암까지 오니 그날이 마침 이장회라 석상에서 경과를 말하고 귀가하여 제3일에 가아가 패전 후 부대가 해산해서 왔다. 2일간 휴식하고 곧 대전으로 보냈더니 본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또 귀가하였다. 1인의 군인과 동행하였다. 할 수 없이 산사에 가서 피난 도중 신동운 군도 같이 와서 있었다. 10여일이다. 이 지방도 인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다시 피난 못 간 것은 대체가 공수인 까닭이다.
  할 수 없이 있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어 부자가 월여 만에 자식은 먼저 나오고 나는 다음 나와서 피신을 별별 수단을 다해 가며 하여 겨우 생명은 보존되고 옥중동고하던 동지들은 수백인에서 5--6인 외에는 다 총살당하였고 연정원 동지들도 수십인의 희생자가 났다.
  그 다음날 9, 28 수복 후는 중지하고 이 정도가 6, 25에 내 사적으로 머리에 지내는 기록이다. 군대의 행동이나 미군의 전투상 같은 것은 다음 시간 있으면 기록하기로 하고 이 정도로 그친다. 만 2년이 된 오늘 다시 추억되는 이날을 기념해서 두어 자 적어 본 것이다.
  단기 4285년(1952) 6월 25일 봉우서유신정사하노라


    추기
  이 사변으로 인하여 거족으로 파괴요 멸망이니 사적으로 운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도 당한 사실대로 기록해 보자.
  이 사변이 나기 전에 서울서 백방노력을 다해 가며 주선하던 일이 제1건은 외자처 관계인데 6월 말일 내로 완전해결을 보게 된 것이요, 제2건은 산림벌채 건인데 19만석 허가가 역시 6월말 이내로 다 되었던 것이요, 제3건 대지 건은 허가만 찾으면 다 된 것이다. 3건사가 다 6월 말일 내릉 기한부로 천신만고를 다 겪고 일이 거진 된 때에 6, 25사변이 발발하여 다 수포로 돌아가고 공수로 하며 8개월 동안에 개미금탕 모으듯한 가산도 돌아볼 여지가 없이 당재약(중국산 한약재)과 차력약재 준비품도 상당히 해놓고 시기를 기다리던 것인데 1건도 가지고 나올 정신이 없었다. 남은 것은 부채와 가권들의 적신(맨몸)이다. 공주로 귀가해서 수일이 못 되어 우리 부자가 다 적도배의 반동분자라고 교양생활을 하게 되니 향리 갓나은 역시 역산(반역자 재산) 취급으로 다 압수당하고 생명도 구제된 것이 연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변으로 우리 동지간에 극친밀한 중에서 적도에게 피살당한 인사가 수십인이다. 그리고 성기상통(서로 뜻을 같이 함)할 동지로는 수백인의 희생이 났다.
  이것이 내 6,25 기념이다. 내 일생을 통하여 잊지 못하겠다. 나는 아주 사적으로 치상명적 손실이다. 다시 복구할 정도가 아니다. 내가 일생을 통하여 6, 25 직전 같은 기회가 있을수 없었다. 말하자면 백사여의하였었다. 내가 장래 모종 희망이 이 준비로 완성되나 하였던 것이다. 내가 다시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생각도 않던 귀인이 이곳저곳서 돌보아 주었다. 3건 중에 서울시 모종 청부도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 허화(헛꽃)다. 이러는 중에 내 몸은 쇠약해지고 머리는 아주 백발이 되었다.
  내 일생을 통하여 각양각종으로 진심 노력해서 규합된 동지가 이 사변으로 반분 이상이 손실되고 다시 갱기할 희망성이 희박하게 되었다. 다시 규합하지도 못할 것인가 할 것인가 알 수 없으나 동지 1인을 얻기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적재적소가 있어서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일을 하기에 곤란한 것이다. 내가 이 6,25 사변 후에 충남 일대를 순회하여 보고 부산 지방을 6--7차나 왕래하며 혹 1인이라도 보충될 인물이 있나 하고 탐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 동지로 목표가 같은 인사가 귀하다는 말이다. 남의 집에 금송아지가 내 집의 병아리만 못한 것이다. 별별 인사를 다 접촉 했으나 이 사람이면 손실된 아무개 대신으로 보충되리라고 자신 가지는 데는 한 곳도 없고 준동지 격이나 혹은 장래 기회가 있으면 좀더 심사해 보아서 동지로 하든지 예외로 하든지 할 정도 인물도 기인(몇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동지규합에 전심전력을 다할 수 없는 관계로 계속적으로 종사를 못하였다.
  6, 25 기념사를 반포면에서 청하는데 이것저것 두통이 나서 출석하지 않았다. 내 심사를 누가 알리요. 9, 28수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6, 25 기념이라는 의미에서 내 소경력이나 그저 몇 자 적는 것이다.
  단기 4285년(1952) 6월 25일 봉우서우신야정사하노라


    29. 반구저기
  (주석 24) 반구: 어떤 일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 생각하는 링. 저기: 내몸에서 찾아보라. '맹자' 에 보임. 여기서 '제'의 발음은 '제'가 아니라 '저'
  자고로 세사가 여의한 일, 극히 귀한 것이다. 무슨 일을 경영하든지 여의하게 성공을 못하면 우수사려(걱정근심)를 않는 사람이 역시 극귀한 것이다. 여기서 그 인격이 표현되는 것이다. 학식이나 지식이나 상식이 있다고 반드시 일일이 다 여의하라는 것이 아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학식을 표준해서 일을 하는 것이요.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 지식에 될 듯한 것을 하는 것이요, 상식이 있는 사람도 자기 상식 범위에서 일을 경영하는 것이다. 유력자나 무력자도 역시 자기 역량대로는 다 추진해 보는 것이니, 박족시에야 누가 자기가 하는 일이 안 될 줄 알고 시작하리요. 그러나 종국에는 여의하게 성공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상례다. 목적을 정하고 나가는 사람들의 말이다.
  사농공상의 본업에서 사자(선비)가 학창에서 입학해서 졸업하는 것이나, 농업하는 사람이 일년 풍작물 수입하는 것이나, 공업하는 사람이 공장에서 물건을 조작하는 것이나, 상업하는 사람이 이 물건 저 물건을 교환무역으로 장사하는 것은 당연히 하는 것이라. 이것을 성공이니 무엇이니 운위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이 사농공상에서도 누구나 다 자기가 생각한 것과 같지는 못한 것이다. 사자가 학교입학이 다 여의히 되는 것이 아니요, 농업인이 양전옥토에 우순풍조해서 풍년이 꼭 들리는 것 아니요, 공업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제품에지지 않게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것도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요, 상업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지지 않을 이익을 볼수가 꼭 있으라는 법이 아니다. 그 외에도 각양각색의 입지가 다 여의성공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시 소양이 없는 사람으로는 일조에 자기가 마음먹고 일을 하다가 실패하면 원천우인(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함)하는 사람도 있고 우수사려로 성병(병이 남)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일패도지하고 다시 재기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혹 백절불굴하고 꿋꿋이 성공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사람은 천에 하나나 만에 하나도 귀하다.
  그러니 그 실패하는 사람들은 우수사려나 원천우인을 하지 말고 반구저기하라는 것이다. 계단적으로 순서를 밟아서 완전무결한 준비를 해놓고 다른 사람의 백 배, 천 배 성심성의껏 일을 추진하였는가, 내가 실패한 것은 내가 실패할 만한 원인이 있어서 실패한 것이니 그 실패가 당연하니 다시 실패가 없을 정도에 준비를 해가지고 착수하라는 것이다. 이런 준비가 없이 요행으로 성공을 할까 하고 갈팡질팡하고 아무 일이나 덥석덥석 하다가 요행으로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무슨 우수사려를 하며 원천우인을 하리요, 내가 반구저기할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말은 용이하나 반구저기하고 재기를 목표로 나가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사람은 볼 수가 없다. 이것이 소양이 부족한 관계다. 욕구가 많을수록 실패가 많은 것이요, 욕구가 적을수록 실패가 적은 것이다. 누가 욕구가 없으리요마는 오로지 자기 역량에 가장 적당한 범위 내에서 목적을 택하여 비상력을 내서 나가면 그 목적이 전일만 하다면 여의성공 안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혹 천재시변이나 불가피할 사정으로 못 되는 수도 있으나 수인사대천명할 뿐이지 원천우인할 필요가 없고 내가 할 도리를 다 하였는데도 실패하였으면 다시 배력, 삼배력을 내서 재기를 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가 53년까지 한 일도 성공 못했으나 도시 내가 준비나 열성이 부족한 관계요, 조금도 다른 연고가 없는 것은 소소(밝고 밝음)한 일이다. 누구를 원망할 바 있으리요. 그러니 불평사가 있거나 또는 실패하였을 때는 반드시 반구저기해 보라는 것이다. 고성 말씀에 사근어도(활쏘는 것이 도에 가까움)한다는 말씀이다. 나는 비록 이 일 저 일을 실패 하였으나 이 일이 다 내 목적을 해나가는 준비공작에 부업적인 일이었고 아직 본격적에서는 실패니 성공이니를 가는 도중이니 성여불성은 내 준비 여하가 확답하는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며 칭찬할 바 아니다. 성공할 만한 완전무결한 준비를 가지고 작지불이하며 비상력을 다 내서 나가고도 성공 못한다는 것은 비인력소치이니 할 수 없는 것이요, 수인사하고 대천명하면 자고로 여합부절(부절을 맞추듯 딱 들어맞음) 이라는 것이다. 종두득두(콩을 심으면 콩을 얻음)하는 원리는 절대 이탈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단기 4285년(1952) 7월 2일 봉우서우신야정사하로나


    30. 정, 부통령 직선운동이 전개됨을 보고
  오천년 역사에 처음 있는 우리의 주권자를 우리의 손으로 선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런데 이 직선에 있어서 우리가 보는 관점으로는 일득일실이 있지 않은가 한다. 물론 우리의 주권자를 우리의 손으로 직접 선거한다는 것은 세계 각국의 통례다. 그러나 우리나라 우리 민족은 아직 자의로 누가 주권자 될 자격을 가지고 있나 선택을 할 만한 사람이 전인구의 1할 이내가 아닌가 한다.
  투표 실정을 보라. 서명 하나도 하지 못하고 붓깍지로 찍어서 하는 투표도 그대로 잘 못하는 현상이 아닌가. 더구나 지방에서는 입후보자가 누구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다가 투표용지에서 초대면하는 정, 부통령 입후보자 씨명이니 그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시일이 촉박해서 선전도 못하게 되니 민간인으로 누가 누구인 줄 알고 선택할 것인가. 아직 민지가 선전 않고도 차기 영도 인물을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하지 못하다.
  대통령 입후자 4인에서 이승만 박사는 4년이라는 기간을 대통령으로 재직한 인물이니 민간에서 다 아는 바다. 그러나 그 외 3인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못 아는 사람은 누구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투표는 자유분위기라고 하나, 경찰에서는 이박사 선전이 이러하다. 6, 25 사변에 미군 사령관이 이박사더러 더 항전할 수 없으니 항복하라는 것을 애국자이신 대통령께서 우리 민족은 적수공권이라도 항전하여 최후의 1인이라도 항복은 안하겠다 하시어서 사령관이 증원군을 청구해서 이 나라가 다시 회복된 것이요, 국련에서 구호물자가 나오는 것도 이박사 한분을 보고 나오는 것이요, 현금도 비료, 광목, 식량을 미국에서 선척에 만재해 놓고도 이박사가 대통령으로 당선 안 되면 물론 중지될 것이요, 전쟁도 이박사가 아니면 계속 못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전한다. 촌민들이야 누가 이 선전이 좀 지나치다는 것을 시정할 사람이 있으며, 혹 있다 하더라도 함구할 외에는 타도가 무하다. 공관리들 말은 선전이 아니라 계몽이라 한다.
  그리고 조봉암 씨는 좌익을 대표한 출마자요, 이시영 씨는 한민당을 대표한 출마자라, 농민이나 노동자는 절대로 불리할 것이라고 하고 신흥우 씨는 민족반역자로 모리배라고 선전하는 반면에 이 3씨의 선전은 1인도 못 보았다. 그리고 '부통령에는 이박사님이 지명하신 분은 함태영 이라고 대통령이나 부통령이나 다 기호 2번을 꼭 찍으라'고 선전한다. 부통령 선전에는 혹 있었으나 철기와 함씨의 축록전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다 자유분위기라는 허명 뿐이다. 이래서 진정한 애국자와 진정한 영도자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출마자가 투표 전 30일 내지 60일 전에 출마하고 충분히 선전한 후에 공직자는 함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타국과 같이 관선 출마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거법은 엄중하기만 하지 권리있고 부자가 아니면 어떤 애국자, 어떤 영도자가 있더라도 민간에 진출할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인권이나 금권 있는 자를 위해서 된 선거법이라고 본다. 국민수준이 향상된 때 같으면 출마자 심사를 투표인들이 잘 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으로는 맹목적으로 피동적으로 하는 투표라 그리 반갑지 못하다고 본다.
그리고 금번에 대통령 출마가 4인이요 부통령 출마가 9인이라는 대혼전을 보게 되었는데 이박사야 재선할 욕심에 출마할 것이나 이시영 선생 같으신 이가 고결한 성격에 누가 될 뿐이지 비록 자진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80이 넘으신 노선생이 비록 애국적 견지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평하자면 실수라 아니할 수 없다. 부통령 당선 당일에도 내가 소감을 기록한 바는 성재 옹의 누덕은 될지언정 청덕은 못 된다고 평하였었다. 더구나 90 노옹이 강산에 은퇴해서 국가원로 격으로 계신 것이 당연하지, 정상배의 권고로 이박사와 위를 다툰다는 것은 불명예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식자층에서는 성재 옹을 아나 민간인 전체로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시영 선생의 당선보다 은퇴하시기를 축하는 사람의 1인디다.
  그리고 조봉암 씨 출마도 그리 찬성은 못한다. 조씨 자신도 금번에 입선되려니 하고 출마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차기를 꿈꾸고 예비공작인 것 같다. 그러나 민의원 부의장으로 충심껏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한다. 국회측에서 선배인 해공이 은인하고 있는 이때에 조씨가 나오는 것은 민간에 이 박사가 이렇소 하고 선전이나 해줄 심산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조씨는 폭이 좀 부족한 대신에 조직력이 있는 사람이요, 덕이 좀 부족하나 지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인으로 언제나 일차 등장할 것이다. 장래를 촉망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금번은 별로 소득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당선이 되어도 금번만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내 확언해 두노라.
  그리고 신흥우 씨는 정치적으로 출각한 분이 아닌 이상, 이번 출마는 아주 무의미하다고 본다. 인테리급인 이상 대통령 출마라도 해보아야겠다는 명예욕인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보기에는 참의원 출마도 적격자가 아닌 것 같다. 초년, 청년 시대에는 민족운동도 양념 삼아 좀 해본 분이다. 귀국 후에는 미국식 호화생활로 시종한 인물이다. 정치인으로 입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4씨가 다 적격자는 못 된다고 본다. 그러나 현상으로는 아무렇든지 후사야 어찌 되든지 일이야 잘하든 못하든 민족의 행이 되건 불행이 되건 이박사가 당선되더라도 보좌역이나 이전 4년 같지 않았으면 민족에 다행한 일이다. 만약 여전히 전철을 밟는다면 민생고를 어찌나 지낼까 걱정이다. 민족에 운이 있다면 물론 보좌역이 현명한 이가 나올 것이다. 대체로 보아서 입후보가 2인쯤 되어서 백열전(온갖 재주와 힘을 다해 맹렬히 싸움)을 하는 것이 선거전인데 네 명이나 난립되어서 대외적으로도 좀 창피한 일이다.
  그리고 부통령은 9인이 입후보가 있었으니 누가 누구 대통령의 부통령에 적격자인 것을 알 수 없다. 그래도 부통령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이니 나는 누가 대통령 당선되면 보좌역으로 나가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이야 누가 되든지 참의원장이나 되겠다는 의도인가 알 수 없으나 부통령이 9인이나 입후보한 것은 자기비판을 못하는 인물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 소견대로 평해 보자.
  기호순으로 1번 이윤영 씨는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로 이박사가 임명했으나 국회에서 인중이 안 되어서 낙선되자 수순을 계속적 국무총리설이 있었으나 번번 실패하였고, 사회상, 무임소상으로 소호도 공헌이 없고 여진여퇴하는 인물로 자당이권 도득(꾀하여 얻음)과 자기 개인복리에 영영구구(명리를 탐하며 바쁘게 보냄)하는 인물이요, 서북인들의 이권취득 대표로 나오는 인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인물이요, 이박사는 신임하는 인물인 것 같다.
  그 다음 2번 함태영 씨는 78세의 고령인 종교가이시다. 정치가로는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 하고 서북인의 신망은 이윤영 씨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러나 금번에 이박사가 지명하였다고 무전으로 각서에 통지하여 경찰 관력으로 득표하는 것은 함씨 자신이 하는 것은 아니나 불명예한 일이요, 당선된다 하더라도 관력인 것이다. 자유분위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정치적으로는 부족하나 종교가로 양심이 있을 것이니 일로 정평을 정적으로는 부족하나 양심적으로는 급제점이라고 해보자.
  그 다음 3호 이갑성 씨는 3, 1운동의 33인 잔존조의 1인으로서 수십년 간을 하루같이 애국자이다. 이시영 씨 부통령 사임 후에도 김인촌과 축록전에 근소한 차로 석패하였었다. 그러나 현상 민도가 관조나 당조나 금조가 아니면 자신이 없는 관계로 이갑성 씨도 3건이 다 불비한 것 같다. 수준이 좀 향상된 때라면 물론 당선권 내에 들 것이나 금번에는 자신없을 것 같다고 평해 둔다.
  4번 조병옥 씨는 정계의 혹성적 인물이다. 한민당만 아니라면 상당한 득표가 있을 것이나, 씨는 자격이 부족하다느니보다 한민당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투표하는 사람이 조박사를 부통령으로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제일 악조건이라는 것을 말해 둔다.
  5번 임영신 여사는 별별 소문이 다 있으나 소문은 소문대로 두고 여중호걸이며 여류 정치가다. 그 수완이나 웅변이나 정치적 상식이나 또는 당히기 어려운 복력(뱃심)이나 모두가 여중거물이다. 우리 남성들이 다 이만하면 무슨 일이든지 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여성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못해서 임영신 씨의 투표가 그리 많을 것 같지는 못하는 아무렇건 만록총중일점홍격(모두 푸른 가운데 한 점 붉은 격)이다. 장래에는 여성에서도 정치가로 많이 나오기를 바라노라.
  6번 백성욱 씨는 이박사 최고고문 격으로 있는 인물이다 내무장관으로 6, 25 사변시에 해임당하고 광진사장으로 상당한 적축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종교가며 또 정치음모가이다. 내무장관 당시에 정적(정치 업적)은 아무 것도 없었고 6, 25 사변으로 남하 당시에 내상으로 경찰 통솔을 못하고 자기 일신만 대전 와서 있던 것을 보면 별 자격은 없는 것 같은데 이박사님은 백성욱이라면 강태공, 제갈공명 이상으로 숭배하는 인물이라 알 수 없는 인물 중의 1인이다. 그러나 득표는 별 수 없으리라고 본다. 종교가로 이박사의 상담역은 될지언정 부통령으로는 시기상조라고 평해 둔다.
  7번 정기원 씨는 삼우장에서 추천하는 인물이라 하나 그 내력을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라 평을 중지하기로 하고, 8번 전진한 씨는 대한노총의 대표인물로만은 투쟁을 하는 인사요, 양심적이며 좀 부족하나마 정치수완도 있는 인사다. 그러나 현 대한노총 세력이 분산해서 득표가 당선권 내에는 어려울 것 같다. 다시 부흥 후 내두를 보기로 하는 것이 전씨에게 유리할 것이다. 장래에 다 유망한 인물들이다.
  9번 이범석 장군은 금번 개헌안 성공자요 금번 국회사변이 우리가 보기에는 자초지종이 다 이 철기의 총지휘라고 본다. 그렇다면 금번만은 자기는 퇴장하고 당이나 결속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자기가 말하자면 준법정신으로는 위반된 혁명적으로 거국을 동원하고 국회를 압도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또 그 선거에 자기가 부통령으로 입후보하는 것은 영웅적으로는 할 일이나 군자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철기는 대체로 먹(학문)이 좀 부족하다. 그래서 나옹(나폴레옹)이나 희도라나 무소린이나 장개석을 몽상하고 있다. 혁명적으로 하면 되지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보는 관점이 상이한 것이다. 말하자면 영웅적이요 군자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철기를 위해서 좀 수양을 더 하고 그 독재성에서 민주자유성을 양성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력을 잡자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시적 성공은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남는 불명예가 있다는 것을 각오하라는 말이다. 좌우간 이같이 노력하고 욕구하고 부하들이 추진하니 금번에 물론 당선권 내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비추어 어떠한가 하고 묻는 말이다.
  앞으로 4년간이 누가 당선되든지 국가다사지추(국가에 일이 많은 때)라 이 국가, 이 민족을 위해서 완전한 평화가 확립되게 노력하소서.
  단기 4285년(1952) 8월 5일 봉우 투표 후 소감서우유신정사하노라


    31. 우연히 백무무를 초대면하고
  호사하는 관계로 오시라는 사람이 영어중 있는 것을 구출해 볼까 하고 황한주 동지와 상의하였던 것이 의외로 호전이 못 되어 구설을 듣는 관계로 선후책을 강구하려고 황씨를 진잠면 대정리 3구 주로암동으로 방문하였다가 공행하고 인해서 신모를 방문한 것이다. 시간이 있는 관계로 신도내에 백씨가 있으니 일차 심방해 보자고 신이 발의한다.
  백씨는 서울 태평가 이용순씨 댁에서 자주 상봉하였으나 인사한 일이 없고 또 중앙천 계통이라 길이 달라서 상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중앙천 한태을이는 재작년 신도내에 와서 별별 공작을 다하다가 필경은 실패하고 현금 대전 가서 있고 백씨는 내 친지 김인배 군과 동거하며 정도교주 박시묵씨 영애 현 20세 된 여자를 작첩(첩을 만듦)해 가지고 신도내에 있는데 용전여수(돈 쓰기를 물같이 함) 한다고 전한다. 심심하니 일차 심방해 보자는 신씨의 발의에 나도 응한 것이다. 김인배 군은 자기 고향 선산에 유사하여 부재중에 그 부인과 모친의 환대를 받고 왔다.
  백씨를 대면하니 일면여구(한 번 대면이 마치 오래 본 것 같음)하게 접대하고 거두절미하고 직접 토론으로 들어갔다. 세인들이 말하기를 진사(임진, 계사년. 1952--53)에 성인출이라 하고 타국에서도 다음 운수 성인은 우리 나라에서 나온다 하니 그 성인은 어떠한 성인이 나오는가 각기 의견을 교환해 보자는 것이다. 
  먼저 내 의견은 수천년 전에 나오신 성인들은 각기 지역이 달라서 그 성의 발표가 그 지역에 맞게 하였으나, 금번에 나올 성인은 전세계를 일가로 볼 성인이 나올 것이라, 그리고 세인들이 말하는 세계를 극락세계 이상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발표한결과 백씨도 동감이라고 하고 공자의 말씀하신 백인(서슬 퍼런 칼날)은 가도(밟을 수 있음)언정 중용은 불가능이라고 하신  그 중이 자상달하(위에서 아래까지 도달함)의 일이관지(하나로 꿰뚫음)한 중이었는데 내가 말하는 것은 경위의 다 중심되는 중을 발표하며 실행하실 성인이 나오시어 우리 우주의 다시없는 대성인으로 내두 개벽운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백씨는 주장하기를 성인이 나시면 우리가 영생하고 우리뿐만 아니라 공충초목까지 영생해서 우리가 소호라도 불평이 없는 태평세계가 창설되리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불생불멸(나지도 죽지도 않음)한다고 주장하며 내두로는 문자가 38만 자가 나되 자자개이 글자마다 다 다름)하고 인인개해(사람마다 다 해석함)라고 말하며 마판설(마구간 바닥의 널빤지 같은 너절한 이야기)을 주장하고 강증산의 만고에 둘도 없는 위인임을 주장하고, 수운사도 역시 다 성자라고 말한다. 남학이나 동학의 삼교합일설을 그대로 주장하나 아주 남학이나 동학도 아니요, 자찬이 상당하다. 
  내가 시간관계로 후일을 기하고 토론을 중지하고자 할 때에 마침 이헌용 옹이 심방하시어 백씨와 대화하신다. 백씨가 이씨더러 아가 누구인가 하니 이옹이 말하기를(자기를 가리키며) 내가 아라고 하니 백씨 말이 그 신구가 없어질 때에는 누가 아인가 하니 정신이 아라고 이옹이 답하니 그러면 어느 것이 진정한 아인가 하고 문하는데 이옹의 답이 구구하다. 그리고 백씨가 이옹에게 묻기를 옥황상제라 하닌 있는가. 이옹이 답하기를 있다고 한다. 백씨가 말하기를 그러면 어느 곳에 있는가. 이옹이 답하기를 --청천을 가리키며--저기라고 말하니, 백씨 말이 우리가 다 같이 세계 하국, 하인을 물론하고 이의 못할 옥황상제의 계신 곳이 어느 곳인가, 무슨 증거가 있는가 하니 이옹이 역시 답이 구구하였다. 이옹이 말하기를 내가 학역(역을 배움) 60년에 통령 했으니 전하고 죽어야 하겠다고 말하니 백씨가 말하기를 역은 누가 창조한 것인가 하니 이옹이 복희씨가 시화팔괘(비로소 팔괘를 그림)하시고 문황이 문언화 하였다고 하니 백씨 말이 역의 진정한 작자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데 이옹은 이 이상 더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백씨 마이 우리나라에서 도사가 많이 있었는데 백두산의 우도방은 김선초 선생이 주장하고 지리산의 좌도방은 정도화가 주장하는데 정도화는 갑인년(1914)에 선화하였다고.
  그 외에도 이런 종류의 말이 많았다. 무자년(1948)에 천에서 이기를 거두어서 술객들이 용술을 못한다고 말한다. 또 인도의 대정사가 25국 인종을 집회해 놓고 법사가 강연을 하는 25개국 개개인물들을은 모두 각기 자기나라 말로 들었다고 한다. 거기서 우리나라 황씨가 참석하였는데 법사 말씀이 성인이 우리 조선에서 난다고 하였다 하며 무슨 증거로 성인이 꼭 우리나라에서 나는가 하고 이옹에게 물으니 이옹이 답하기를 간은 성시성종이라 우리나라에서 성인이 난다고 하니 중국인이 우리나라를 지적해서 간방이라 하였지 세계 각국에다 간방이라고는 안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확실한 증거는 못 된다고 백씨가 이옹의 답에 반항한다. 그리고 성인이라면 무슨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백씨가 또 말하였다. 이옹이 말하기를 무슨 표가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옹이 배상(등 위)에 72흑자(사마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아마 자기가 성인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 같다. 백씨 말이 표라는 것은 아무가 보든지 그 자리에 그 표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무슨 흑자나 있는 것이 표가 아니라고 한다. 이옹은 무연(크게 낙담하는 모양)하는 것 같다. 좀더 들었으면 소견법(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되겠는데 시간 관계로 작별하고 후일을 기하고 돌아왔다.
  백씨는 내가 보기에는 총혜(총명하고 지혜로움)한 인물인데 언과기실(말이 그 실제를 넘어섬)은 물론이어니와 아직 대수(적수)를 만나지 못해서 안하무인 격이다. 기중은 미필유야(반드시 있지는 않음)리라고 내가 평해 둔다. 그리고 한태을의 선전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말만은 그럴듯한 말을 가지고 세인의 이목을 현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총혜를 가지고 수심정기하고 위국위족하는 일을 하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를 단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거세개연(온 세상이 다 그러함)한데 탄식 안 할 수가 없다.
  임진(1952년) 양 8월 12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추기
  근일 종교가니 술객이니 하는 인물들이 실지에 술객이나 종교가로 권위있는 인물들을 상대 못한 인사들은 어목인지 진주인지를 분변을 잘 못하는 것이다. 한태을, 이선평, 백무무 등이 다 차에 근한 인물들이다. 자고로 성인은 말고 현군자라 하더라도 겸양지풍이 있는데 황호성인호(하물며 성인에게 있어서랴)아. 자직자(스스로 곧은 자)는 필곡(반드시 굽음)이요, 자시자(스스로 옳은 자)는 다비(많이 틀림)라. 고인의 겸공대상(겸손과 공경으로 윗사람을 대함)하고 자애급하(자애로써 아랫 사람에게 미침)하는 풍을 학하며 인이 백번 상접할수록 그 결점을 찾지 못할 만큼 수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무의 총혜와 변재는 가애(보기 좋음)나 방약무인하는 태도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노라.
  임진(1952년) 양 8월 12일 봉우 추기


    32. 먼저 최저생활을 확보하고 정신수양에 착수하라
  먼저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은 광음이다. 이 귀중한 광음을 허송하지 않으려면 조선의 여음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계활(계획적 생활)이 부족한 사람들은 최단시일 내에 최저생활을 확보하고 단연 결심하고 다시 오기 어려운 우주시간을 무의미하게 허송하지 않고 가장 유효하게 이용하는 것이 우리의 성공일 것이다.
  만약 이 식생활 문제로 말미암아 일생을 아무 것도 못하고 영영구구 하다가 소년은 이로(늙기 쉬움)하고 계전오엽(섬돌 앞 오동잎)이 신추를 보(알림)하면 만사가 다 허사라. 탄식한들 무엇 하리요. 비록 노쇠하였더라도 광음을 허송하라는 것은 아니나 기혈이 쇠하면 만사가 다 여의하게 되지 않는 것은 정리라. 될 수 있으면 청장년 시대에 수양이나 사업을 해놓고 노쇠시에는 은퇴하여 한양(한가로이 몸을 정양함)이나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이 붓을 든 것이다.
  (주석 26) 조선의 여음: 선조가 쌓은 공덕으로 자손이 받는 복.
  (주석 27) 명예, 세력, 이익을 얻기 위해 몹시 바쁘게 지내거나 아득바득함.
  완전한 준비가 없이 사업을 합네 하고 불사가인생산작업(생계문제를 돌보지 않음)하고 강호로 왕래하다가 일은 성공해 놓은 것 없고 백수(흰 머리)만 날리면 이것이 허로요, 이것이 실패라는 말이다. 아주 청장년 시대에 목적한 일을 성공할 만한 준비를 해놓는 것이 성공할 예고가 되는 것이다. 내가 실지 경험을 해본 연고로 청장년 시대에 노쇠시대를 생각 않고 목적달성에만 나가는 인사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일생을 통하여 식생활이나 호화롭게 하면 이는 금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소아를 위해서 생하고 사하는 이것이 금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더러 금수라 하면 물론 노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가 금수와 같으면 비록 면목은 인간일지라도 금수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식생활도 못하고 목적달성도 못하는 우리 같은 인물들은 금수만도 못하지 않은가. 만복웅심(뱃속 가득한 웅대한 마음)은 미소(없어지지 않음)하였으나, 삼천장발(3천 장 머리털)의 상설을 누가 막을 것인가.
  살아서 목적을 달성 못하면 고인의 말씀과 같이 도위금일용(도가 오늘날 사용함에 어긋남)이니 명허후인지(이름이나 뒷사람이 알게 함)나 할 것인가. 그도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을 남기신 구봉 송익필 선생 같으신 이는 도성덕립(도를 이루고 덕을 세움. 즉 성현을 이름)하신 분으로서 다만 도불행(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탄식하신 것이나, 우리 같은 범부야 무명야초나 다를 것이 없는 인물들이라 공회웅심(헛되이 웅심을 품음)이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공자 말씀에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라 하시니, 아직 지명지년(50대)이니 후회 말고 목적달성에 매진해볼 것이다.
  (주석 28) 조선 선조 때의 학자(1534--1599). 성리학에 통달하고 예학에 뛰어났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나 때를 못 만나 불행했다. 봉우 선생에 의하면 조선조 오백년래 최고의 도인으로서, 성인의 경지에 이른 분이라 한다. 국난(임진란)을 예견하고 이순신에게 거북선의 원리와 해전의 전략을 전수해 주었다 한다. 계룡산 수정봉에서 성도하였다. 문하에 의병장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 고청 서기, 사계 김장생 등 많은 우국지사와 학자를 배출하였다.)
  내가 이런 험적(경험의 자취)이 있는 관계로 청장년 시대에 가졌던 심회를 동일하게 가진 청장년들이 있다면 불계하고 선결문제가 인생의 불가결할 가인생산작업의 최저생활을 확보하고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유효하게 이용할 만한 사업이나 수양에 착수하라는 것이다. 준비 없이 나가는 사람은 기름 없는 기계요, 나침반 없는 선박이라 움직일 수도 없고 목적에 갈 수도 없다는 것을 재삼 고하는 바이다. 마음과 실지가 전연 다르다는 것을 명고(명확히 고함) 하노라.
  단기 4285년(1952) 8월 14일 봉우서우유신정사


    33. 묘연한 내 생애
  6, 25 사변에 적수공권으로 귀향하자 공산당에게 반동자로 입옥한 후 향가는 역산(반역자 재산) 취급으로 일몰도 공여(남음)한 것이 없이 압수당한 후 9, 28수복 후에도 아무 것도 없이 친구들의 구호로 생활을 존속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이 곤궁생활에 쪼달리어서 가족 개로(모두 일함)로 호구하고 지내던 것을 내가 작년 동지부터 군인회니 무엇이니 하며 좀 출입을 하다가 생각하지 않은 부채를 금하 선거까지 계속하여 천여만환을 졌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부채는 한푼도 보상 못하며 가족 개로 정신도 좀 부족해진 것 같다. 더구나 작년에 맥농(보리농사)을 준비 못한 것이 금년 맥작(보리 작황)이 아주 무수입이 되어 가족이라야 자식은 일선에 군인으로 가서 있고 서모는 자작자급하고 내 권구(식구) 4인뿐인데 이것도 현상의 식량이 맥미9보리, 쌀)가 앞으로 순여(10여 일)에 절량될 보고가 있고 소백분(밀가루) 기되(몇 되)가 있으나 역시 기일분 식량에 지나지 못한 것이니 이 다음은 무엇을 먹고 지내야 할 것인가 묘연하다. 배급은 중지되고 수입은 없고 생각해 보아야 별 수가 없다. 혹 여행이라도 해볼까 하니 여비가 한푼도 없으니 아주 무전여행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중이다. 천불생무록지인(하늘은 녹이 없는 사람은 내지 않음)이라고 설마 아사야 할까 하고 있으나 대체로 어찌할 수 없는 중이다.
  친지간에서는 내가 이 정도로 극도에 도달한지는 아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생활을 어지 하느지 알지 못하고 지낸 지가 벌써 수십여 년인데 졸지에 생활에 착심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별수가 없다. 있는 식량 다 되는 대로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다 먹고 되어가는 대로 지내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돛대 없는 배가 만경창파에 둥둥 뜬 것 같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언덕으로 오든지 저 언덕으로 가든지 해야 하겠는데 둥둥 뜨기만 하면 마음이 조리어서 견딜 수가 있는가. 더구나 부채는 여산하고 독촉은 견디기 어려울 만하고 아무 일도 희망은 아직 없으니 만사분이정(모든 일 나뉘어 이미 정해짐)인데 부생(떠 있는 삶)이 공자망(공연히 스스로 바쁨)이로다.
  어디 두고 보리라. 해결이 되는가 더욱 곤란을 받을 것인가. 양단간에성 대정되리라. 아무리 하여도 임진, 계사년(1952, 53년)은 이렇거니 하되 너무 예산이 없어서 갑오년(1954) 맞이를 할 용기가 나오지 않는다. 1년 반만 지내보자. 그리고 급한 20일 후 문제 즉 식량이 어찌 되나 보자.
  하도 묘연한 내 생애라 기록해 두노라.
  임진(1952년) 8월 15일 봉우소기우신야정사


    34. 병중에 중추월을 맞이하며
  암야의 월색은 상현이건 하현이건 만월이건을 물론하고 누가 반가워 안 할 사람이 있는가. 더구나 청량한 가을하늘의 중추월이야 더 말할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늘이 태양의 너무 수고함을 아끼사 이 명월로 이 암야에 주시는 것이다.
  이 월광도 가지가지가 있는 것인데, 춘하추동의 사시가 다르고 산림천택의 지역에 다르다. 그리고 음청(흐린 날과 갠 날)이 부동한 것이다. 월광 자체야 하시인들 소호나 변할 바 있으랴마는 우리가 보는데 가지가지로 이 월광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의 환경이 또한 월광의 색채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의 환경이 또한 월광의 색채를 좌우하는 것이다. 희로애락우경공의 칠정이 역시 이 암야의 고아명도 각인각양의 견해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자고로 이 각인각양을 공통해서 이 월광을 제일 우평(우수하게 평함)한 것이 중추월이다. 물론 춘월도, 화월도, 하월도, 동월도, 운월도, 설월도 없는 것은 아니나 금풍옥로의 청량한 하늘에 운기 희박하고 하계도 춘생하양(봄에 낳고 여름에 기름)하여 만물이 무성하던 것이 가을기운으로 더 자라지 못하고 차차 거두고자 하며 농가에서도 일년가색(일년 농사)이 재어추(가을에 있음)하여 그 노고를 휴식코자할 시절에 그 고요한 밤 충성(벌레소리)은 낭랑하고 월광은 여수할 때가 일년월광이 도재어중추(모두 중추에 있음)인 것이다. 누가 이 암야에 월광을 보기 싫어할 사람이 있으며 반가이 맞이하지 않으리요.
  금일이 임진(1952년) 중추요, 때는 야오경(새벽 3--5시)이다. 우연히 병상에 누워서 이 고요한 밤에 홀로 잠을 못 이루고 있으니, 중추월은 다정하게 내 창을 엿보는구나. 나도 창을 밀치고 중추월을 바라고 있자니 무념무상하던 이 몸이 또 대경기상(경계를 대하니 생각이 일어남)이 되는도다. 금년이 어느 핸가. 임진이로다. 아주 상고는 알 수 없으나 근고로 임진년의 우리나라 흥망을 조상(도마 위)에 놓고 8년 병화가 시작되던 361년 전을 회상해 본다.
  이조 오백년 중 명종, 선조 시대같이 인물이 배출된 시대가 귀하다. 그러나 이조 개국 이래 200년간 문치로 태평무사하다 일조 임진왜란을 당하여 군신상하가 다 수습책을 알지 못하고 선조대왕은 의주로 몽진하시고 8도는 물끓듯 했으니 그때에 무슨 중추월의 반가움과 대자연의 덕택을 알 수 있었을 것인가. 8년 동안 문신은 외교로, 무신은 방어로 차차 왜적을 물리치고 중흥을 하였다.
  이 중흥공신에서 수군의 충무공은 내 진외가 직계 조선이요, 육군의 충장공(권율)은 내 11대조가 되신다. 세인들도 이 임진이라면 누구나 용사역을 연상하고 임진란을 회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중흥공신에 충무공, 충장공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혈통도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던 위인들의 혈통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기록해 보는 것은 자기의 부족을 너무 자포자기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임진란 다음 광해반정이 있고 남서인의 대투쟁이 있었으며 인조대왕의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으로 국치를 당하고 이괄란으로 공주 몽진이 있었고 그 다음 소론 사대신, 노론 사대신 이며 또 예설 다툼으로 노소론, 남인의 대혼전이 있었고, 영조대왕의 말년, 장조대왕의 사사극이 있었다. 그리고 정조대왕 때부터 천주교의 입국으로 층절이 많았고 홍경래란이 서도를 요란하게 하였고, 고종황제 등극 초부터 대원군께서 양이론으로 대참살이 있었고 그 다음 임오군요, 갑신 시월지변, 갑오군란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였고 경술합병이 되어 망국하자 기미독립운동 이후로 을유 8, 15까지 망국민으로 얼마나 비참극을 당하였는가 가히 알 것이다. 그러니 아무릴 좋은 경치인들 백성들이 무슨 흥이 있게 볼 것인가. 조불모석(아침에 저녁을 생각 못함)하는 인간들이라 그저 여리박빙(얇은 얼음을 밟는 듯함)하고 조심조심하고 지냈고 그저 무슨 일이고 흥불흥이락불락(흥겨워도 흥겹지 않고 즐거워도 즐겁지 않음)으로 지내왔으니 이 중추월 같은 좋은 경치도 아무 가치를 평하게 못 되었었다.
  (주석 29)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주석 30) 조태구, 이광좌, 최석항, 유봉휘
  그러다가 을유 8, 15해방으로 우리는 이상을 아주 거대하게 가졌었다. 우리나라 독립은 물론이요 세계평화의 목적을 달성해 보자는 이념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이 현상을 부일할수 없는 것이다. 무자(1948년) 8, 15에 대한민국이 탄생한 후로 불과 수지년에 이 국가 이 민족에게는 백병이 구생(모두 남)해서 이 민족의 사활기로라고 하는 것보다 아주 정평해서 사선에서 방황하는 도중이다.
  경인년의 6, 25사변으로 우리 민족은 일대수난기였다. 남북을 통해서 수백만의 생령이 희생되고 일선에서는 얼마나 죽는지 알수 없는 이때요, 6, 25 당시를 회상하면 우리 민족 전부의 수난이었으니 재언할 필요가 없으나, 나 개인으로도 경인 중추 오경시에 만약 사선을 넘지 못하였으면 내 부자도 금일이 있었을는지가 의심되고 우리 동지들도 이 중추월을 이용하여 참살당한 동지가 얼마던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언 신묘(1951년) 중추월을 지내고 또 임지 중추월을 맞이하며 내가 병상에 누워 묵상 속에서 중추월을 바라보는 것은 중추월이야 변함이 없다마는 세사야 어찌 그러한가. 세사나 인사가 다 무상하도다. 현 우리 민족의 참상은 어떠한가. 이북은 알 수 없으나 이남만은 한수풍재로 신문이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식량에 6백만 석이 부족이라고 하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6백만 석인지 천만석인지 알 수 없고 민생고도 말할 수 없다. 중추라고 절사(명절제사)는 그만두고 조석난계(조석끼니 잇기 어려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무슨 중추월 경황이 있겠는가.
  묻노라. 창공에 걸려 있는 저 중추월이여. 다 알 수 있으리라. 만고를 회상하면 이렇고 그 다음은 어떻든가 속임없이 대답하라. 다정한 중추월은 내 묻는 대답을 하렴직하다마는 두전하횡(북두칠성은 구르고 은하수는 비껴 있음)에 오경은 어느덧 지나고 계명성이 뵈일라. 소언(조금 있다)에 일륜홍일(둥근 붉은 해)이 중추월을 대신하여 동산지상으로 올라온다. 아마도 천도나 인사나 다 순환무단(끝없이 순환함)하다고 치구필란(평화가 오래면 반드시 어지러움)이요, 난구필치(혼란이 오래면 반드시 평화로움)라고 중추월이 대답하는 듯하도다.
  임진(1952년) 중추 8월 기망신(음력 열엿샛날 새벽)봉우서우연연당하노라


    35. 가을밤 홀로 앉아
  요수진이한담청(장마무이 다하니 찬골물이 맑음)이라는 고문이 있다. 중추절을 지내고 환경을 도아보니 하필 한담만 청하리요.
  하천부운(여름하늘 뜬구름)이 다기봉(수많은 기이한 산봉우리 같음)하던 무상한 변태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고 천랑기청(하늘은 밝고 기운은 맑음)한 중추 기분이 완연하고 삼재가 다 범하여 먹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하여도 그래도 농가에서는 집집이 햅쌀밥 안 먹는 집이 없고 과물도 조율시리(대추, 밤, 감, 배)며 산과들을 안 먹는 집이 없는 것 같다. 그 여름 동안 번뇌에 쌓여서 지내던 몸도 비록 임시라 하더라도 기분(몇 푼)의 청쾌미가 있다.
  그리고 보니 정히 삼청이 아닌가 한다. 천도 청하고 지도 청한데 인간도 비록 일시라 하나 청하도다. 우리 같은 불농불상(농사도 장사도 안 함)하는 사람이야 추역춘(가을이나 봄이나 매한가지)이니 예외로 하고, 그 삼청 속에 같이 들면 역시 기분만이라도 청쾌미가 있다. 낮에는 대중들과 같이 엄벙덤벙하며 농촌 추흥을 맛보나, 밤이 되면 불면증으로 점점 길어가는 밤 맞이하기가 참으로 번뇌를 더하는 것 같도다.
  그러나 야심독좌추창견(깊은 밤 홀로 앉아 창문 밀고 보니)하니 명월은 만천하고 옥로는 만지한데, 충성(벌레소리)만 낭랑하고 사경이 적요하다. 만천성월(하늘 가득한 별과 달)은 서로 쟁광하며 밤 가는 줄 모르는 것 같도다. 나도 이 자연미를 맛보고자 정전에서 산보하다가 산보도 역시 피곤해서 타좌수정(앉아서 고요히 명상함)하여 보니

  망세속지갑자하고 
  취차리지건곤이라
  시즉무념무상이나
  종즉만상구현하야
  호지흡지가 면면불색이나
  미지차신지재어하처하고
  왕래응대를 무불여의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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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하추동이 한래왕하니
  미지동방서일휘우창전하고
  경경개안즉문외촌아지급천에
  청방지폐성입이하고
  지두지숙조초성에 보여속기고로
  인필이기하노라
  (풀이)
  세속의 시간을 잊고
  이 속의 세계에 취하노라
  처음엔 아무 생각도 없더니
  나중엔 만상이 모두 나타나
  숨을 들이쉬고 내쉼이 실타래 풀리듯 이어지나
  이 몸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고
  왈래와 응대가 뜻대로 안 됨이 없어
  충하추동이 한가히 오고가니
  동쪽의 밝아오는 해가 창문 앞에 비춤을 모르고
  가만히 눈을 뜨즉 문밖에 마을 아가씨 물 긷고
  푸른 삽사리 짖는 소리 들리며
  가지끝의 자던 새 처음 깨어 내게 빨리 일어나라 알리므로
  붓을 당겨 쓰노라
  임진 중추 기망 익일 봉우서우유심노옥
  (주석 31) 봉우는 신야의 띠풀집에서 씀


    추기
  불능시지정좌수양하고 매당망상이 번뇌심신시하여 야정인면지시에 욕수습산정하여 간혹타좌나 실일폭십한이라 유하득야아.
  연이나 번뇌시는 비차즉북가표라. 고로 왕왕갱보입황무고도하니 도난황무나 승어초행이라. 천험도중하고 도도진행하니 산천은 의구하고 보리는 간난이라. 진일보정일보하니 미지차행기시료요 행행수대도나 황무난개척이로다. 욕행고인도거든 수시조발정하소. 중도무여정하니 조발모도안하느니라. 발정귀조리를 어차사상미로다.
  (풀이)
  수시로 고요히 앉아 수양을 하지 못하고 매양 망상이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깊은 밤 다들 잘 때에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려 가끔 고요히 앉아 정신을 수양하나 실로 하루 햇볕에 열흘 추위와 같으니 무슨 소득이 있으랴. 그러나 번뇌가 일어날 때 이것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때때로 다시 거친 옛길로 걸어 들어가니 길은 비록 매우 거치나 처음 다니는 것보다 낫네. 산천이 험한 길 가운데 천천히 나아가니 산천은 의구하고 걷는 발길 몹시 곤란하이. 한 걸음 딛고 한 걸음 쉬니 이 여행이 어느 때 끝날까 아지 못하고, 가고 감 비록 큰길이나 거칠고 거친 번뇌는 환히 헤쳐지기 어려워라. 옛사람 길 가려거든 모름지기 일찍 길을 나서시오. 중도에는 쉴 곳 없으니 일찍 떠나야 저물어 저 언덕가 도달하리. 길떠남 이른 것을 귀히 여기는 이치를 이 보습에서 맛을 보노라.
  (주석 32) 쟁깃술 끝에 맞추는 날. 원래 나무로 했으나 후세에 철제로 함. 사: 보습 사
  여해 소기


    36. 인지위덕
  (주석 33) 참으면 덕이 됨.
  고대에 장공예가 구대동거하되 가정이 극히 평화하여 당시 국와이 그 집에 행차하여 그 치가하는 도를 문하되 장공예가 아무 말도 않고 '인'자를 100자를 서하니 '인지위덕' 이라는 말이다.
  (주석 34) 중국 당나라 산동 사람. 가족 9대가 같이 살며 효우로 유명했다.
  비록 장공예 가족이라도 누구나 다 평화를 좋아하였을 리가 없다. 그러니 주인공인 장공예가 백사를 당하는 대로 비록 불평한 일이 있더라도 일가의 평화를 위하여 인하는 것으로 백 가지 난관을 다 돌파하고 또 일단 가정평화를 위해서는 자기의 주견이라는 것을 모두 희생하고 그저 인지위덕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니 구세(아홉 세대)를 동거하는 동안에 아주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되어, 그리고 주인공 장공예에게 감화가 되어서 그 가족으로는 누구나 다 인내를 잘하게 되니 이것이 백인당중유태화(백 번 참는 집안에 큰 평화 있네)라는 것이다.
  그저 참으라니 옳은 일이나 그른 일이나 아무 일이고 모두 참으라는 것은 아니다. 대내적으로 평화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고 참으라는 말이다. 소불인이면 난대모라고 대의명분이나 또는 자기의 주목적하는 일에 참아서는 안 될 일이라면 당연히 발작(감정을 일으킴)해야 하는 것이다. 인하는 데에도 대소사를 구별하라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시적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참으면 성공의 도움이 되는 것이다. 장공예도 자기가 목적하는 가정평화를 위해서는 아무런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다 참은 것이었다. 만약 자기가 목적하는 가정평화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일이면 참았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 참는다는 조건이 얼마든지 있다. 사자가 공부하자면 한서의 고를 참지 않으면 안 되고, 수면의 고를 참지 않으면 안 되며 피로의 고를 참지 않으면 안된다. 본디 백 가지 부족한 곳에서 족을 구하고자 공부하는 것이라 이만하면 족하거니 하는 마음으로 참으라는 말이다. 이 마음을 안 참으면 누구나 목적지까지 못 가고 중도에서 중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족의 고통을 참고 족하도록 나가라는 말이다. 이 부족의 고를 참고 참아서 작지불이하면 그 참은 대가가 성공이라는 것으로 변하는 것이 원리라는 말이다. 하필 사자의 공부만이 궤도리요, 만사가 다 동일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 인지위덕이라는 것을 좀더 상세하게 기록하고자 하나, 사사건건 들어가며 말하기가 시간관계도 있고 또는 지면관계도 있어서 이 정도로 대강 말하는 것이다. 참는다는 것이 자기 목적하는 일의 방해가 되는 일이거든 무슨 일이든지 다 참고 자기 목적 달성에 일로매진하라는 것이다.
  고인이 참지 않은 예를 들면 주무왕이나 은탕왕이나 모두 일로이천하평(한 번 성냄으로 천하가 태평해짐)한 것을 보면 탕무(탕왕과 무왕)도 그 이상 더 참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는 말이다. 우리도 인지위덕 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서 목적지까지 가는데 별별 일이 다 있더라도 모두 참고, 가는 길만 가라는 최후의 부탁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이 붓을 든 것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나가 보니 중도에는 별별 마장이 많아서 참을 수가 없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참지 못하고 보면 한 번 못참는데 일은 백 보, 천 보 후퇴한다. 이것이 소불인이면 난대모요, 인지위덕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그런 줄을 알면서도 또 일을 당하면 육식칠정이 다 참지 못할 일만 연발해 당하니 과연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목적도 그리 용이하게 성공할 일이 아니나, 참으로 마장도 말할 수 없을 만치 많도다. 장공예는 집의 구대동거하는 데에도 백인을 서하여 보였는데, 우리의 목적이 성공되자면 천인 만인으로도 오히려 부족하다 할 것이다. 인이 많아서 해될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무슨 일이든지 못 참아서 병이 되는도다. 그러니 육식칠정에 관하여 피동적으로 생기는 일이어든 움직이되 육식칠정에 무관하였거니 하고 참으라는 말이다. 누가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으리요마는 주목적이 완성되지 않는 한은 이것이 모두 우리의 마장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면 우리의 나가는 길이 점점 대도요 평탄해질 것이라. 질주하여도 걸림새 없으리라는 말이다. 목적지에 가면 그곳이 어느 곳이건 우리는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 백난사가 다 있더라도 참으라는 말이요, 우리가 나가는 것을 참으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인위백성지본(참는 것이 백 가지 성공의 근본이 됨)이라고 부언하며, 인지위덕이란 고훈을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고자 하나 시간관계와 지면관계가 있어서 이만 그치노라
  임진(1952년) 8월 30일 야 여해소기하노라


    37. 심서고
  (주석 35) 제갈공명의 '심서' 가운데 '지인' '심인' '승패' '몰응' '격세' 장 등에 대하영 봉우 선생의 고찰하신 바를 기록한 수필이다. 1952년 소작. '심서'는 제갈공명이 지은 병법 전략서로, 전부 46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갈공명의 시호를 따서 '무후심서'라고도 불린다. 무후가 돌아가기 전 휘하 장수 강유에게 전해졌다.
  지인
  (주석 36) 사람의 본성을 앎.
  '무후심서'를 보다가 '지인' 이라는 장구를 보고 내가 감동한 바 있었다. 먼저 그 원문을 기록하고 다음 내 소감을 말해 보자.
  미지인지성이 모난찰언이니 선악이 기수하여 정모불일이라. 유온량이위사자하며 유외태이내기자하며 유외용이내겁자하며 유진력이불충자하나니. 연이나 지인지도가 유칠언하니 일왈문지이시비하야 이관기지하고 이왈궁지이사변하야 이관기변하고 삼왈자지이계모하야 이관기식하고 사왈고지이과난하야 이관기용하고 오왈취지이주하야 이관기성하고 육왈임지이리하야 이관기렴하고 칠왈기지이사하야 이관기신이니라
  (풀이)
  무릇 사람의 품성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과 악이 이미 갈리어져 겉으로 드러난 형태가 하나 같지 않다. 겉으로 온순하지만 속이려는 사람, 겉은 태연하지만 속으로는 당황하고 낭패하는 사람, 외모로는 용맹하나 마음은 비겁한 사람, 최선을 다하는 듯하지만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 들이 잇으나, 사람을 아는 길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 질문을 던져서 글 질문에 대한 옳고 그름을 물어 안에 지닌 뜻을 관찰한다.
  둘째, 말로써 궁하게 하여 변화를 관찰한다.
  셋째, 계략을 꾸미게 하여 그로써 그 사람의 지식을 관찰한다.
  넷째, 환난을 당했을 때 그 용기를 본다.
  다섯째, 술로써 취하게 하여 그 심성을 관찰한다.
  여섯째, 이익이 운앞에 있게 하여 그 청렴함을 본다.
  일곱째, 일을 기약한 시간 내에 하는가의 여부로 그 믿음(신용)을 관찰한다.
  
  무후 제갈량은 천고의 위인이니 어련히 알고 이 '심서'를 자신의 후계자인 강유에게 주었을까. 말하자면 무후의 심법을 전하는 기록인 셈이다. 강유에게는 이만하게 기록해 주면 틀림없으리라고 전해 준 것이요, 후세의 타인도 이 정도로 그 심법을 수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강유와 무후 사이는 강유는 혹 임사불급(일을 당하여 미치지 못함)한 때에 털끝만치의 조력만 있어도 우수한 효과를 얻을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후인으로서 이 '심서'를 금과옥조로 알아서는 실패할 때가 많다고 본다. 내가 53년 동안의 경력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이 '심서'를 무후가 후세인에게 무조건하고 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무후가 촉에서 선제--유비 현덕--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손권이나 조조를 상대로 자기 일생을 헌신하였으나, 임종 때에 아무리 생각하여도 적강아약(적은 강하고 아군은 약함)하여 유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오로지 충의일념으로 자기 후임자를 택해 보니 오직 강유가 군웅 가운데 조금 나은지라, 부득이 강을 내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책임완수를 할 것 같지 않아서 병중에 노심초사하다가 필경 이 '심서'를 작성하여 최후의 부탁을 한 것이다. 요가 순에게 전수심법은 오직 '유정유일이오사 윤집궐중 이라고 '정일' 두 자로 심법을 전하시었으니 요순의 대등성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유에게 전한 무후의 '심서'는 46조의 장문이었다. 무후의 진충보국하려는 성의는 말할 것도 없고 강이 얼마만큼 부족하였던가를 가히 살필 수 있다. 이 '심서'를 무시해서도 아니고, 강유를 무시함도 아니다. 무후의 생각에는 이만하면 강이 알고 행할 수 있거니 하고 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후세인이 오해하지 말고 이 '심서'를 참고로 볼 것이요, 보는 사람이 강유가 못 되었을 때에는 정답이 달리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석 37) 오로지 하나에 정통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붙잡는다.
  첫째, 옳고 그름을 물어서 그 사람의 뜻을 본다는 조문을 검토해 보자.
  세상에는 구시심비자(입은 옳으나 마음은 그른 사람)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시비관에 대의명분이 확실하나 자기의 처자를 생각해서 자기의 본심 아닌 말을 하는 일이 세상에는 없다고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심시구비에 속할 것이다. 또는 능력이 뛰어나 인물이 자기 위에 많지 않거나 또는 대우가 부족한 때에는 그 하는 말이 피상에서 나오는 수가 많고, 또한 기회를 엿보고 출세하고자 하는 인물들은 비록 자기가 행하지는 못할지언정 구두로는 시비분석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강유는 시인(사람을 시험함)에 무지이시비하여 능히 그 뜻을 볼 수 있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무후가 먼저 알고 있으므로 이 정도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림이 없는 내 사람을 고평하는 때에 한정된 문구라고 본다.
  둘째, 말로서 궁하게 하여 그 사람의 변화를 본다는 문구도 역시 동일하다고 본다. 시험하려는 인물이 아주 게세위인(세상을 뒤덮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라면 알 수 없으나, 시험 대상자가 도리어 시험을 하는 사람보다 우수한 인물이라면 시험하려는 사람이 궁지이사변코자 할 때에 고의로 얼마든지 묵과할 수 있는 것이요, 수졸(어리석게 보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위에는 시험을 당하는 사람의 격이 시험하는 사람을 안중에 두고 안 두느냐에 따라 얼마나 답변을 정직하게 하느냐가 문제이다. 또는 비록 인격은 부족하다 하더라도 변재가 응구접대를 잘하고 수기응변에 잘하는 인물로 자기의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은인자중하고 시험에 응하여 응변을 잘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그 사람을 알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우선 시험하는 사람의 자격 여하가 문제를 좌우한다. 그러니 무후가 강유에게 전한 것은 당시에 강유가 시험하는 사람으로 앉으면 상대가 그 이상은 별로 없으리라고 본 견해에서 이런 문구를 기록한 것 같다.
  그러므로 후세인물들이 자신의 인물됨을 생각하지 않고 궁지이사변하여 이관기변이라고 상대자가 고수인지 평등인지 하수인지를 모르고 시험을 한다면 상대자가 응할자도 있고 불응할 자도 있으니 어찌 그 변화를 볼 수 있으리요. 여기서 자기가 자기비판을 정직하게 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상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셋째, 계략을 꾸미게 하여 그 지식을 본다는 문구이다.
  계모를 부재기위하여서는 불모기정이라고 불문에 부치고 알더라도 대답을 안 하면 알 수 없고, 또한 대답한 계모가 제일 상책인지 제이, 제삼책인지 이것을 생각해서 평할 것인가, 직접 실행해 본 후 알 것인가, 그러니 이 계모라는 것은 말하기 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 답변으로 그의 지식은 발로할 것이나, 그 역시 시험하는 사람이 상대자보다 우월해야 될 것이라는 말이요, 또는 시험 대상자의 인격이 고의로 시험하는 사람을 농락하려 들면 제일책을 두고도 중책이나 하책을 말할지 알 수 없는 것이요, 시험하는 사람의 성의가 시험대상자로 하여금 성심성의껏 답안이 나오게 하는 것이 더욱 난문제라고 본다. 역시 인격 문제요, 후세인이 용이하게 알려고 하여서는 백 번이라도 실패할 것이다.
  넷째, 화난을 알려 그 용기를 본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사전에 은혜를 베푼 것이거나 또는 그 화난이 어느 부분의 입공할 조건이라면 알 수 없으나 무조건하고 화난을 알려 봐야 그 용기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후한 삼국시대에 18로 제후가 모였으니, 용장이 구름 같았으나 화웅에지지 않은 장수가 없었고 누가 감히 상대할 자가 없었다. 또는 18로 제후 자신들은 신중히 관망만 할 때였다. 관공(관우)이 자진하여 출전했으나 원소가 달가워하지 않았고 18로 제후에 사람이 없어서 이런 하수가 출전코자 하는가 하였으나, 조조가 그 대중 앞에서 따뜻한 술 한 잔을 권하고 먼저 마시고 출정하라 하였다. 관공이 장담하고 내 참장(장수의 목을 벰)하고 와서 술을 들겠다 하고는 출전하여 몇 합이 채 안 되어 화웅의 목을 베어 가지고 제후들 앞에 와서 공을 고하니 따라 놓았던 술이 채 식지 않았다. 이것은 관공이 자진하여 제후들을 압기하고자 하던 것이요, 결코 고지이화난하여 이관기용한 것이 아니요 스스로 그 용맹을 드러낸 것이다.
  그 다음은 백마의 둘레에 상장이 구름 같았으나 감히 상대할 사람이 없었는데 관공이 자진하여 안량, 문추를 참하였으니 이것은 관공이 조조의 은혜를 갚고 속히 황숙--유비현덕--에게 갈 조건으로 용력을 다함이요, 고지이화난하여 이관기용한 것이 아니다. 용이 있는 사람도 자기의 상대가 되는 곳에 화난이 있다면 기필코 승리할 생각으로 용진할 것이나, 자기 아니라도 얼마든지 싸울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면 묵묵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용을 먼저 헤아리고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만한 화난을 고하여 보는 그 용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그 환난을 고하기 전에 그 사람들로 하여금 화난에 몸을 아끼지 않고 용맹을 다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놓아야 하는 것이요, 무조건하고 화난만 알린다고 용맹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 구절도 역시 내가 할 도리는 다하고 이만하면 내가 화난을 고하여도 용을 다하여 주겠지 하고 해볼 것이지, 내 도리는 못하고 구원을 요청해 봐야 용이 나올 리가 없음은 당연하다. 즉 제갈무후가 강유보고 군이 앞으로 신인을 만나거든 이 정도로 하라는 말이요, 하장들에게 대우하는 것은 황숙이 하던 일이나 무후가 하던 일이나 강유가 다 잘 본 것이라 별 부탁 안 한 것이다. 나도 이 정도로 더 얘기를 않는다.
  다섯째, 술을 취하게 하여서 그 성품을 본다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상대편이 중니(공자) 같으신 유주무량(술을 마시되 그 양이 없음)하되 불급란(흐트러지지 않음)이라는 주량의 소유자라면 무슨 술을 취하게 하여 그 성품을 볼 수가 있겠는가. 술에 자기 본성이 나올 만큼 취하자면 대취한 뒤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대주하는 사람부터 술에 양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요, 또 단면 인물들이면 무의미하고 수이 취하도록 마신 후에 취중에 본성이 나온다고 은밀한 일을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삼국시대 오나라의 주유의 거짓 취함도 있고 주유 아니라도 얼마든지 주량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백면 인물들의 행동은 그리 용이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거물급들도 조직적 인물들은 이 술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농락하려는 일이 많으나 아주 단주인에게는 시험할 수 없는 일이요 또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술을 마시더라도 거량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인물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본 경험으로도, 구한말 어느 재상이 아주 술을 못 하는지라 당시 일본군 사령관 장곡천 대장이 술버릇으로 술 마시기 시합을 핑계 삼아서 별별 공작을 다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 재상들이 그 주량을 당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 사령관이 항상 그 술 안 마시는 재상을 보고 술 안 마심을 한하던 것이었는데, 어느 날 마침 그 사령관이 한적한 때에 그 재상이 방문하였다.
  사령관이 다시 술을 왜 안 마시는가 하며 말하자, 그 재상이 말하기를 나는 아직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먹어야 취할지 알 수 없는 고로 취하면 일을 못 보고 또 취한 상태에서 안 취한 사람에게 자기의 평소 있던 일을 모두 다 본정대로 발로하게 될 것이므로 후회가 있을까 하여 아예 술을 안 마시는 것이라 하였다. 사령관이 그 재상이 술을 못 먹는 것이 아니고 안 먹는다는 말에 그러면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시면 되지 않겠는가 하며 대주한 지 5일 만에 사령관은 아주 취할 데까지 취하여 정신이 없이 횡설수설하고 자기 본정을 많이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재상은 오히려 여전히 정신이 멀쩡해 가지고 귀가 하였다.
  그 다음 사령관이 주실이 있음을 알았고 일일이 주의했다. 그 재상은 그 후로도 여전히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 술을 취하게 하여 그 본성을 살펴보고자 했던 사령관이 이 음주회를 개최한 것인데 반대로 자기 본성을 다 말하게 되었으니, 이런 경우가 없으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보면 이 역시 무후가 강유의 음주량을 알고 이렇게 해보라고 말한 것 같다. 그러니 후세에서 마구 통용하지 말라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그럴듯한 방법처럼 보이나, 예외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여섯째, 이익을 눈앞에 보이게 하여 그 청렴함을 본다고 하였다. 이것도 보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평시에 없던 특별대우로 임지이리한다면 처세에 능한 인물은 비록 청렴치 못한 인물이라도 얼마든지 청렴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요, 또 이득을 취한 인물이라고 반드시 인격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관중이 포숙으로 인하여 이익을 많이 취했으나 여전히 관중은 관중이요, 포숙은 포숙이다. 그러니 이로써 임하게 하여 그 청렴함을 살핀다는 것이 그 인물이 백사를 구비하였으나 탐욕으로 인하여 패망이나 안 할까 해서 보는 것이지, 아무 자격 없이 단지 청렴함만 갖고는 성공을 하기가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물급들은 이 임지이리하는 이에는 비록 본성이 청렴하지 않아도 청렴하게 보일 수가 잇다. 이것도 대아와 소아의 염(청렴)이 있는 것이니, 대아를 위해서 청렴하다면 좋은 일이라고 하겠으나 소아를 위한 청렴이라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백 사람이 모든 이익을 취했으므로 나는 홀로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청렴이 아니라, 자기도 취할 수 있으며 취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취하지 않는 것이 청렴이라는 것이다. 이라는 것이 무슨 부수조건이 있는 것 같으면 누구나 그 조건의 관계로 이를 취할 리 없고 아무 부수조건이 없는 이라도 자기 전두에 걸림이 된다면 그 이를 취하지 않는 것이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일이다.
  세상에는 이것에서는 이를 취하고 저것에서는 취하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다. 고대에 여조가 선인이라 세상에 와서 어떤 사람이 자신을 늘 일심으로 숭배하는지라, 자기가 여조라고는 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가 선행을 많이하니 내가 그대에게 이것을 부마." 하고 손끝으로 하나의 돌덩어리를 가리키니 그 돌이 변하여 황금이 되었다. 그 사람이 무수히 절을 하고 받지 않는지라 여조 생각에 곤궁한 노인이 이다지 청렴함에 놀라며, 좀더 큰 돌을 손끝으로 가리켜서, 그대가 정성이 지극하니 이 큰 황금덩이를 가지라고 하나, 여전히 그 노인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하기를 3--4차 만에 여조의 노인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니, 노인이 답하기를 소인은 다른 것은 다 싫고 선생의 그 가리키는 손끝을 주시면 소원이 족하겠다 하는지라 여조가 그 우매함에 일소하고 떠나갔다는 얘기가 있다.
  (주석 39) 여동빈(755--805). 당대의 신선. 순양진인. 64세에 승천.
  청렴도 여조의 손가락 끝을 소원하는 청렴이라면 진정한 염이 아니라는 것이요, 임지이리라는 이가 여조가 제일 먼저 가리키던 조그만 돌덩어리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소리를 탐하지 않고 진정한 명리를 취하고자 한다면 탐도 아니요, 또는 청렴치 않다고도 못한다는 말이다.
  일곱째, 일을 기약하여 그 신의를 본다고 하였다. 이 역시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을 기약한다는 그 일이 그 사람 능력 범위 내에 충분한 일을 기약하고 그 신용이 있나 없나를 볼 것이지, 능력이 없는 일을 기약하고 그 신용을 책하면 그 신을 이행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 않을지언정, 하지 못할 일을 약속하고 그 신용이 있나 없나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관공이 군령을 다짐하고 화용도에 나가서 조조를 석방하였으니 자기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실신하였다. 그러나 누가 관공더러 신이 없다 하리요. 이것은 신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걸고 실신한 것이니, 이것이 대의명분이다. 그러나 후세에서는 이 구분을 못하고 그 신용을 저버린 것을 벌하지 않았다 하여 논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 일을 기약하여 그 신용을 본다는 것도 심사를 잘해 보고 그 신용을 이행하는 사람의 실정이 어떠해서 신을 지켰으며 또는 지키지 못했는가를 백방으로 연구하며 깊이 살펴보라는 말이다. 또한 고인의 말씀처럼 이란으로 기간성지장 이라는 실수가 없게 하였으니 그 지인(사람을 앎)이라는 점이 이상의 일곱 조목에 국한하지 말고 백 번 천 번 후회 없도록 심사하여야만 한다. 쟁반에 가득 찬 구슬이라도 실이 없으면 꿰지 못하는 것이니, 먼저 그 실을 준비하고 다음에 명주를 구하라는 부탁이다.
  (주석 40) 이란으로 기간성지장: 계란 두 개로 간성이 되는 장수를 버린다. 즉 사소한 허물을 들어 장군의 자질이 훌륭한 사람을 몰아냄
  (주석 41) 양공은 불기척촌지후: 훌륭한 목수는 재목이 조금 썩었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
  지인이 이만틈 어렵고 또 알았다. 하여 모두 내 사람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니, 욕유위자(하려고 하는 사람)는 선자수신(먼저 스스로 자기 몸을 닦음)하고 백무일실(백에 하나도 실수가 없음) 후에야 시가발족(비로소 발을 내딛음)하라는 것이다.
  감히 공명 선생의 '심서'를 평하니 후생의 외람된 죄를 자부하노라
  임진(1952년) 8월 28일 여해옹 지죄근서
  (주석 42) 죄인 줄 알며 삼가 쓰다.


    추기
  무슨 일을 하든지 규합동지해야 중력이 형성되는 것이요, 고장난명(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음)이라고 혼자서는 일을 할 수 없고 대중을 상대로 해서 동지를 규합하자면 제일 선결문제가 지인이다. 그래서 내가 '심서'를 보다가 이 '지인'이라는 글을 보고 50세를 지내오는 동안 경험한 그대로 사의를 첨부해 본 것이다. 이 대중을 상대로 해서 확실히 지인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 일은 발족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그 사람을 알았다해서 그 사람이 내게 응할 인물만 있으라는 것도 아니어서, 여기서 비로소 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가지고 같이 가자는 것이 동일권이요, 또 반드시 우리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동성상응(같은 목소리로 서로 상응함)이라는 것도 있고 동도상성(같은 지혜로 서로 꾀함)라고도 하였다. 동일한 방향에서 만약 동성상응이 안 되면 어느 때나 동지상모가 되기 용이한 것이요. 동지상모하면 일은 점점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지인도 어렵고 동성상응도 어려운 일이며 동도상성도 그리 쉽다고 누가 하리요.
  그러고 보면 순풍에 돛 달고 나아갈 사람이 누구인가. 역사적으로 여기서 부득이한 동지상모가 나온다. 그러니 우리가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대동홍익의 목표로 나아가는 바에야 동지상모의 폐해는 절대로 없으리라. 합력이 있을 뿐이다. 


    격세
  (주석 43) 공격의 형세
  고지선전자는 필선췌적정이후도지하나니 범사노량절하며 백성이 실원하며 군령이 불습하며 기기불수하며 설불선설하며 외구불지하며 장리각박하며 상벌경해하며 영진실차하며 전승이교면 가이공지요, 약용현수능하며 양식이 여하며 갑병이 견리하며 사린이 화목하며 대국이 응원이면 적유차자는 계이피지니라. 
  (풀이) 옛부터 잘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적의 정세를 헤아린 후에 일을 도모하나니, 무릇 장수는 늙고 식량은 바닥나며, 백성이 모두 원망을 하고, 군대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으며, 기계를 수리하지 않고 설치할 것을 미리 설치하지 않으며, 밖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으며, 장수와 관리들이 각박하며, 상벌이 가볍게 내려지고, 기강이 풀어져 부대들이 차서(질서)를 잃어버리며, 전쟁에 승리하였다 하여 교만하면 가히 공격할 만하다. 만약 상대에서 어질고 밝은 이를 기용하고, 전투에 능한 이들을 그 밑에 두며, 양식이 넉넉하고, 완전무장한 정예군대가 견고하고 날카로워서, 주위 사방과 화목하며 큰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이런 적을 만나면 계교를 써서 피해야 한다.
  내가 느낀 바로는 '무후심서'에서 '격세'에 대한 주해가 병가에서 지극히 중요하며 당연한 이론 이라고 본다. 그러나 태공이 무왕에게 대답한 '동력커든 탁지하고 동지커든 탁덕' 이라는 원리와 배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격세' 장 원문에 '고지선전자는  선취적정이후도지'라는 말에 태공이 역지덕(힘과 지혜와 덕)을 비교하라는 원리가 다 있는 것 같다.  그 이하 구절은 혹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로양절하며 백성이 실원하며 군령이 불습하며 기기불수 하며 설불선설하며 외구부지하며 장리각박하며 상벌경해하며 영진실차하며'라는 구절로만 본다면 타국의 공격을 받지 않고라도 충분히 자멸 자망의 처지에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정병을 거느리고 전격하면 무인지경에 들어감과 같은 것이니 무슨 격세가 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병가에서 적국을 취하고자 할 때에 어찌 반드시 이런 조건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리요. 다 같은 유리한 조건이 있더라도 각자의 자신을 가지고 전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후가 격세에 대한 설명을 이와 같이 한 것은 적국이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멸망할 처지가 아니거든 될 수 있는 대로 전쟁을 피하라는 경계요, 또는 강유가 상대방의 이런 악조건이 있기 전에는 먼저 공격할 만하다 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요사여신(일을 다루는 데 귀신 같음)의 제갈량이 미리 알고 상대방이 이 정도가 아니거든 병력을 동원 말라는 부탁 이라고 본다.
  그 다음 상대방이 승리한 후에 교만해지거든 공격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세력으로 참패한 후면 비록 적이 승리한 후에 교만해진다 하더라도 반격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구절로보면 적을 유인하여 거짓 참패를 하고 아군의 약점을 보인 후에 적이 승리하여 교만해져서 방비를 허술히 한 틈을 타서 치명상을 주라는 것 같다. 그 패배가 선패자는 불망이라는 정도의 패배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상대자가 비록 전쟁의 승리를 교만하더라도 내 실력이 반격할 수 없는 때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조건을 잘못 보고 지피지기를 못하고 병력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후가 강유에게 이런 '심서'를 전할 때에 군의 실력이 부족하니 상대방에게 이런 약점이 확실히 보이기 전에는 공격할 의사를 먹지 말라는 부탁으로밖에 생각 안 된다. 그저 촉이나 방수하고 있거라 하는 명령으로밖에 볼 수 없다.
  (주석 45) 최선을 다해 싸워서 패한 자는 망하지 않음.
  그 다음 적국이 약용현수능하며 양식이 여하며 갑병이 견리하며 사린이 화목하며 대국이 응원이면 적유차자는 계이피지라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을 역사상으로 보면 양국이 모두 현인을 기용하여 그에게 권능을 주고, 양식이 아주 풍족하고, 완전 무장한 정병들이 견고하고 날카로우며, 주위의 모든 나라들이 화목하게 지내고 큰 나라의 응원이 서로 있는 나라도 자기네의 주장이 같지 않을 때에는 전쟁이 일촉즉발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무후가 강유더러 조조, 조비가 여러 가지를 구비하고 손권이 역시 용이한 적국이 아니어서 격세가 군에게 불리하니 그저 방어나 하라고 재삼 명령한 것으로 본다.
  (주석 46)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186-226). 조조의 맏아들. 문제. 문학에도 뛰어나 '전론' 5권을 지었음.
  이 '격세' 장으로 보아서는 전쟁이 날 리가 없다. 주변국가에서 공격할 만하다 한 조건이 있다면 싸우지 않고 먼저 항복할 만한 것이니 전쟁이 날 리 없고, 또한 적국이 용현수능해서 양족병강하면 싸우지 않고 승리할 수 없고 싸워도 승패를 알 수 없으니 자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사는 이 원칙 하에 움직이지 않고 물론 약육강식하는 것이다. 강자들 사이에도 상쟁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본다. 현대에도 강자들의 쟁패전에 세계인류는 숫자를 증감하고 있다. 강자와 강자 사이에서 서로 균형을 취해서 세계평화를 주장하니, 이 균형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이면 용서 없이 범하는 것이 이 세계에 통하는 정상인 것이다. 이 '심서'에 기록한 '격세'를 본 후에 비로소 공격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요, 토벌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진정한 공격의 형세도 이사의 원리로 보아서 100프로의 격세를 보고 공격하면 절대로 실패는 없을 것이다. 이 용병은 3대의 용병으로서 탕무의 용병이다. 그러나 탕무도 이런 조건을 가지고 일조일석에 성공을 못한 것이니, 만약 각축장에서 쟁패전을 벌인다면 이것은 승패를 예측 못하는 일이어서 전국시대의 전쟁이 있을 뿐이다. 왕도가 없었던 시대의 일이므로 무후도 될 수 있으면 전쟁을 피하라고 이런 전법을 강유에게 전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이런 약점이 드러 나기만 기다릴 것 없이 자가의 자력강진에 노력을 다하라는 말이다.
  임진(1952년) 9월 12일 유신초당에서
  (주석 47) 은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 탕왕은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쳐서 추방하고 은나라를 세웠으며, 무왕은 은나라의 폭군인 주왕을 토벌하여 주나라를 세웠다.


    몰응
  (주석 48) 전쟁에 대응하는 단계
  약내도난어이하며 위대어세하며 선동후용하며 형어무형이면 차는 용병지지야요, 수도사열에 계마고치하며 강노재임에 단병우접하며 승위포신에 적인이 고급이면 차는 용병지능야요, 신충시석하여 쟁승일시하며 설패미분에 아상피사면 차내용병지하야이니라.
  (풀이)
  만약 난국을 헤쳐나감에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고 큰 일을 도모함에는 미세한 것부터 해나가며 일을 미리 움직이어 뒷날에 대처하여 쓰도록 하고 평소의 규율을 엄하게 하여 형벌이 없어도 형벌이 있을 때와 다름이 없으면 이것은 용병의 지혜요, 지휘관과 사병들이 부대별로 질서정연하게 나뉘어져 있고 군마들은 서로 내달리며 강한 쇠뇌가 조금밖에 없으면 적은 수의 병사들로는 접전하고 그 위세를 타서 자신감을 얻음에 적들이 위급함을 느끼게 되면 이는 용병의 능함이요, 몸은 화살과 돌이 난무하는 가운데 좌충우돌하여 승리는 잠시뿐, 완전히 승리를 모르는 상황에서 적은 죽고 나도 부상하면 이는 곧 용병의 맨 아래 단계이니라.
  (주석 49) 여러 개의 화살을 잇달아 쏘도록 만든 활. 노. 노포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용병지지와 용병지능이 아니라 그 용병지하라는 조건이다. '신충시석하여 쟁승일시하며 성패미분에 아상피사면 차내용병지하야'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가 많이 목격하는 전법이다. 소위 토벌작전이라고 지리산이나 그 이외의 작전지구에서 확실한 선견제승책이 없고 경찰토벌대들이야말로 몸은 활과 돌이 난무하는 가운데 좌충우돌하며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진정한 성패는 갈려지지 않고 나도 부상을 당하고 적은 죽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요 절대로 의외가 아니다. 우리측에 유리한 조건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적군이 산악을 점거하고 전쟁은 하나 역시 포위중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적군은 제반조건이 불리함에 비하여 아군은 다만 산악이라는 조건 외에는 모든 유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쾌히 토벌을 못하고 장구한 세월에 막대한 소비와 많은 희생을 내고도 완전한 항복을 못 받고 있는 것은 적이 강한 것이 아니요 아군이 약하기 때문이다. 물론 산악전이라 야전과는 판이한 줄도 잘 알고, 비록 적이 산악을 먼저 점령하였으나 지리적으로 소상히 알고 있는 곳이라 얼마든지 작전계획이 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병가의 가장 하책을 취하고 있는 경찰토벌대 여러분을 위하여 병학상 소양이 없음을 애석히 여기며 몇 자 적는다.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내며 적재적소를 택하지 않고 항상 동일한 태세로 산중 공비와 상대하는 것은 역시 위정자의 무능이요 또한 지휘자의 책임이라고 본다. 하필 병가의 하책을 택하는가 의심된다. 토벌대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려는 병사가 부족한 관계로 희생이 오히려 많이 나는 것이다. 물론 군대들의 공비토벌 때에는 성적이 양호하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토벌대라고 그렇게 하지하책만 취하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정부의 부주의요 지휘관들의 무자격함 때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미군들이 항상 쓰는 전법은 비록 물자는 소비할지언정 인명은 될 수 있는 대로 희생이 없도록 하는 것인데,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같이 빈약한 나라로는 이 전략을 사용하기는 곤란하다. 될 수 있으면 용병지지나 용병지능으로 기정(임시변통수단과 정통적 방법)을 겸용하며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는 방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용병지하라는 구절을 보다가 하필 우리 경찰토벌대들이 수년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이 하책을 사용하기에 문득 느낀바가 있어서 이 붓을 든 것이다. 군인으로서는 물론 병사학을 배울 것이나 군인이 아니라도 실제 전투에 참가하는 사람은 병사상식을 알게 하고 실전에 나가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병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경험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토벌대로 편입하여 전지로 보내는 것은 양떼를 몰아서 호랑이 앞에 보내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임진(1952년) 9월 12일


    심인
  (주석 50) 원인을 살핌)
  부인인지세하야 이벌악즉황제도 불능쟁위의오, 인인지력하야 이결승즉탕무도 불능여쟁공의라. 약능심인이가지위승즉만부인웅장이라도 가도며, 사해지영호라도 수제의리라.
  (풀이)
  무릇 남의 형세를 빌려서 악을 벌하면 황제도 능히 위력을 다투지 못하고, 남의 힘을 빌려 반드시 승리하면 탕무도 능히 같이 공적을 다투지 못한다. 만약 능히 인을 살펴서 그것을 더해 당당하게 승리한다면 곧 만 명을 거느리는 영웅 같은 장수라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세상의 영웅호걸이라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심인' 장을 살펴보건대, 촉이 조조와 상쟁하지 않을 수 없고 상쟁하자니 자력이 약해서 당할 수 없으니 동오의 세를 인하며 힘을 빌어서 조조와 상쟁하면 조조 비록 영웅이나 촉이나 오에게 제압되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진시황이나 원태조 같은 영웅들이 천하를 정복할 때에 비록 상대가 아무리 나의 세력을 동원하여 공격 하였어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형세에 불과하였다. 그 후에도 이런 실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먼저 인접국가의 정세를 살펴보라는 말이다. 인접국에서 아국보다 우수한 무기와 전비, 인종으로 장차 무엇을 의미하고 준비하고 있을 시기에는 아국도 전심전력을 경주해서 대내외에 최선을 다할 것이나, 나라의 크고 작음, 강하고 약함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때에는 어찌할 수 없이 외교정책으로 해결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요, 만약 침공을 당할 때에는 부득불 선패자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전술로 불망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의 독일이나 제2차세계대전의 일본이나 선패자는 불망이라는 원칙 아래 패한 것이다.
  (주석 51) 적의 세력이 너무 강대하여 맞붙어 싸우다가는 전멸을 당할 형세일 때. 뒷날의 재기를 기약하며 항복하는 것을 말함.
  이 '심인'의 주석을 보지 말고 먼저 심인 이라는 원리를 연구하여야 한다. 고서의 구절에 니착되지 말고 주견을 세우고 독서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승패
  현재거상하며 불초거하하며 삼군이 열락하며 사졸이 외구하며 상의이용투하며 상망이위무하며 상권이형상이면 차는 필승지징야오. 삼군이 수경하며 사졸이 타만하며 하무예신하며 인불외법하며 상공이적이며 상어이제하며 상촉이화복하며 상혹이요언이면 차는 필패지징야니라.
  (풀이)
  현명한 인재가 위에 거하며, 어리석은 자들이 아래에 거하며, 삼군이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병사들이 두려워하며, 서로 용감히 싸울 것을 의논하며, 서로 위무 당당하기를 바라고, 서롤 벌을 받지 않고 상을 받을 것을 권하면 이는 반드시 이길 징조요, 삼군이 여러 번 놀라며, 병사들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아래로는 예의와 신의가 없으며, 사람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서로 적과 같이 두려워하며, 서로 제압하려고 하며, 서로 화복을 부탁하고, 서로 요망한 말로써 현혹하면 이는 반드시 패할 징조이니라.

  이 '승패' 장도 상대자가 나와 대등한 것을 조건으로 하고 서술한 것이다. 예를 드어 두건덕이 이세민에 비하여 필승지징이 더 많았으나 승리는 이세민에게 가고 두건덕은 패하였다. 근세에 들어와 벨기에가 독일에게 패할 때에 --제1차세계대전 당시--벨기에에게 필승지징이 구비하였으나 독일에게도 역시 필승지징이 구비하였다. 그리고 보면 여기서는 대소강약이 승패를 결정한 것이다.
  (주석 52) 중국 수나라 말엽 농민반란의 영수. 농민 출신(573-621). 성품이 검소하고 관대하여 선비를 중용하였다. 나중에 이세민과 싸워 패한 후 피살됨.
  (주석 53) 당나라 2대 황제(598-649). 수나라 말기의 동란 때에 부친 이연(당고조)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여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움.
  그 다음 제2차세계대전에서도 독일은 필승지징이 있었고 일본도, 이태리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나 연합국의 양적 우세라는 중과부적으로 일패도지하였다. 일독이 세 나라가 모두 선전하였으나 필승지징이 분명히 있었다. 연합국 또한 필패지징은 없었고 비록 다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필승지징이 있었다. 그렇다면 선결문제는 질과 양의 차이가 없는 한, 서로 대등한 경위에 한하여 이 필패지징이나 필승지징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질과 양과 약과 강과 대와 소의 차이가 있는 한 일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적국이 필패지징이 있더라도 본래 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면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6, 25전쟁을 목격한 바, 미군의 제반 조건이 필패지징이 많았다. 그러나 질적으로 우수한 무기로 반격하니 북한군이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북한에서는 자기네에 필승지징이 있고 남한에는 필패지징이 있다고 병력을 움직인 것은 사실이나 병사라는 것은 먼저 잘 관찰하고 깊이 심사숙고한 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참모들이 자신의 일시적 편견으로 한 나라의 승패가 좌우되는 때가 없지 않다. 그래서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 이라고 하였지만, 반드시 백전백승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알고 자신을 안 후 남이 강하고 나도 강하면 승패를 나누기 어려우니 정치적으로 해결할 것이요, 내가 강하고 남이 약하면 싸워도 이길 것이요, 남도 약하고 나도 약하면 역시 승패를 가리기 어려우니 될 수 있는 대로 정치적 해결이 필요하다. 여기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것이요, 아약피강(내가 약하고 남이 강함)한 줄 알고도 백전백승한다는 말이 아니다.
  무후가 주로 강유에게 전하는 '심서'는 촉나라를 지키고 보전하고자 목적한 것이요 후세를 통해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불변한다 해도 수기응변(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함)해서 하라는 것이지 고정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혹 무후에게 질의하려는 후인들도 이런 뜻을 알면 별 이의는 없을 것이라 본다.
  임진(1952년) 11월 14일 유신정사에서


    38. 궁달유시
  (주석 54) 잘살고 못살음은 때가 있다.
  고지사자곤 잠거포도하고 이대시라가 약시지이동즉능성절대지공하고 약시불지즉몰신내이니 동서고금이 소무이취라. 연이공선자아백리해팔십칠십이상주상진하고 불지자아백이해팔십칠십이전지소학소수소행지하사하니 량가탄야로다.
  이윤부열백이숙제유하예지위성이역미지기소학지절차하니 후세사자곤 장하이능득기경호아. 소부허유도 요시지대은이미지요곤 견기하덕이욕양위호아. 사자필찰기유연후에 모이학지가야라.
  공문지심법이 수왈전지용학이대학즉거공부자일천팔백년후에 주부자곤 자례기중심장적구이중간근이천년즉미지무하니 여견론어맹자지서즉비공자맹자지도학절차라. 제자각습기편언척구지언행하니 기지양성지본의호아. 주부자곤 저술성이대전이비감망설이요지전순즉정이이자이이요, 순지전우즉지첨득도심유미하고 인심유위이구하니 심법지전이 필불재어오거서명의라. 수학지절목이 역불번도 명의어늘 세강속말하야 사자도습피상하고 전심어문자중하니 기소득자기하요, 사자지학이 다어문장이극소어도학하니 도학지연몰구의라.
  여소시상견노학구배의 소장이 불과음풍영월지소기이대담자기어자아팔십상주하고 백리해칠십상진하니 오배도 수오십육십이운도즉가기자아지팔십궁달운자곤 비일비재라 상관기소학소수큰대 불과어기구예설과 기권경서지피상과 음풍영월지소기와 기편작문지자부로 비어자아백리해하니 량가탄야로다.
  잠거포도자곤 하대무지이득시이동자즉우주기인이니, 기가왈궁달유시이부지어명운이 가호아. 고인지대인조명자곤 량유이야라.
  현세즉세계일까요, 인류지망태평이 여한천지망우즉불문동서남북하고 장이일단운예이강시우지책자곤 일출어세즉수비자가자족이라도 숙감불작약이영지호아. 세인지학수고대구의라.
  금즉비잠거포도지시이포도자가동지시며 가동지기라. 막언궁달유시하고 득차기이부동하며 우차시이잠거자는 비애구애족이며 역비자애자야라. 연이상무하사지풍하고 하무경상지심하야 상하교정리하니 난즉난의로다. 동서양기상박이 불구필현이차일현즉양기구식하고 중화지기발연이흥하리니, 양성차기이구의라. 시즉시의로다. 시호시호여. 불재래지시호로다. 양기상박이구식즉오만년무극대도지중화기흥하리니 가위오만년지시호로다.
  (풀이)
  옛부터 선비는 도를 지니고 묻혀 살며 때를 기다리다 때가 되어 움직이면 능해 절대(세상에 견줄 바 없음)의 공을 이루고 때가 이르지 않으면 몸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는 동서고금이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런데 공연히 자아(강태공)와 백리해의 80세, 70세에 각각 주나라 재상, 진나라 재상됨을 부러워하고 자아와 백리해가 80세, 70세 이전에 무엇을 배우고 닦고 행했던가는 모르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로다.
  이윤, 부열, 백이, 숙제, 유하혜의 성인됨 또한 그 배운 절차를 알지 못하니 후세의 선비들이 어떻게 그 경지를 얻을 수 있으랴. 소부와 허유도 요임금 시절의 대은(위대한 은자)이었지만 요임금이 그 무슨 덕성을 보고 임금의 자리를 그들에게 물려주려 했겠는가. 선비들은 마땅히 그 까닭을 살핀 연후에 경모하며 배우는 것이 옳으리라.
  공문(유교)의 심법이 비록 '대학' '중용' 두 책에 전해졌다 하나 '대학'은 공자님 가신 지 천팔백년 뒤에 주자가 '예기' 속에서 문장과 구절들을 찾아내어 펴냈으니, 그 사이 약 이천년 동안 대학의 심법은 잊혀졌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보기에 '논어' '맹자' 두 책은 공자, 맹자의 도학 절차를 다룬 책이 아니다. 제자들이 제각기 주워들은 단편적인 어구들을 모아놓은 언행록에 불과하니 어찌 두 성인들의 본뜻이 담겨 있다 하겠는가. 주자가 이미 '성리대전'을 저술하여 도학의 본체를 드러낸 마당에 내가 감히 망녕되이 말할 수 없으나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한 심법은 정일이 두 글자뿐이었고, 순임금이 우에게 전할 때는 여기에 도심유미(도의 마음 오직 미약함)하고 인심유의(사람 마음 오직 위태함)의 두 구절을 보탰을 뿐이었으니, 심법의 전함이 오거서(다섯 수레의 책)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도를 닦는 절차가 또한 번잡하지 않음도 분명하거늘 세상이 말세 되어 선비들은 한갓 겉모양만 익히고 문자(책)에만 열중하니 도를 얻은 자 그 몇이나 되리요. 선비의 배움의 문장에는 많으나, 도학 방면으로는 극히 적으니 도학의 사라짐이 이미 오래더라.
  내 어렸을 때, 늙은 학자들이 음풍영월이나 하는 작은 기예나 장점으로 알고 큰소리치며 스스로 자아나 백리해처럼 우리도 비록 50--60세의 나이지만 운만 도래하면 곧 크게 출세할 수 있다고들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배우고 닦은 것을 자세히 보건대, 몇 구절의 예설과 몇 권 경서의 피상적 이해, 약간의 풍월을 읊조리는 기술, 몇 편의 작문을 자부함으로 강태공과 백리해에 자신들을 비교하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잠거포도자(도를 품고 묻혀 사는 이)가 어느 시대인들 없으리요마는 시운을 얻어 움직인 사람은 이 우주 열린 이래 몇 명뿐이라. 모두들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여 세상에 나아갔을 뿐, 운명적으로 시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찌 잘살고 못살음이 시운에 달렸다고 명운에 맡겨버림이 옳은 자세라 하겠는가. 옛사람의 대인은 명운을 만든다 하는 말이 진실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세계일까요, 인류는 큰 평화를 바람이 마치 가문 하늘에 비를 바라듯 하고 있으니, 장차 일단의 구름과 무지개로 때맞춰 비를 내려줄 계책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비록 내 집안, 내 나라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가 감히 환호작약 안하며 환영하지 않겠는가. 세상사람들 학수고대한 지 이미 오래더라.
  오늘날은 도인이 묻혀 지낼 때가 아니니, 바로 세상에 나와 움직일 수 있는 시기이다. 잘되고 못됨은 시운에 달렸다 하지 말라. 이 기회를 얻어 움직이지 않고, 이때를 만나 숨어드는 사람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지 않음이며 또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음이라.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윗사람은 선비들을 대접하는 기풍이 없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어 위아래가 서로 이익만 다투고 있으니 참으로 어렵기는 어려운 처지로다. 동서의 두 기운이 서로 부딪침이 멀지 않아 나타나, 한 번 나타난즉 두 기운 모두 사라지고 중화의 기운이 벌컥 일어나리니, 이 두 기운 빚어진 지 이미 오래도다. 때는 때로다. 때로구나! 때로구나! 다시 안 올 때로구나. 두 기운 서로 부딪침 모두 그치면 오만년 무극대도(끝없는 큰길)의 중화기가 일어나리니, 가히 오만년의 때로구나.

  이 좋은 때를 무엇으로 맞이하나, 흉중에 가득 찬 대동책을 가지고서 동지들 연성하고 이때를 허송마세. 말령된 세인, 부유(썩은 선비)들 궁달유시 찾지 말고 이때를 맞이하려 빨리빨리 나가 보자.
  학우등사(배움이 넉넉하여 벼슬함)하는 것은 소아들도 아느니라. 소학미우(배움이 넉넉치 못함)하거들랑 망령된 마음 먹지 말고 호구지책 생각하소. 의식족이지예절(먹고 입음이 족해야 예절을 앎)이라. 시간 얻어 학습하면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하다고 공부자(공자)도 말삼하셨거든, 성인이 후세인을 기만하실 리 없느니라.
  나이 먹었다 자세하고 자포자기하지마라. 고선에 여동빈은 육십 이후 수련하여 백일승천(대낮에 하늘로 오름)하였었고, 당나라 고달부는 오십에 시학(학문을 시작)하여 문장이 되었나니 작지불이(계속하여 노력함) 고성훈을 잊지 말고 행해 보면 해로울 것 바이 없다. 다시 보기 어려우니 좋은 시절 허송 말자. 이런 권고 세상사람 도리어 조롱한다. 자위신모(스스로 자신을 도모함) 못하면서 대담세사가소(세상일에 대해 큰소리치니 우스움)라고 세인은 소아(나를 비웃음)하고 나도 또한 소세인(세상사람을 비웃음)을. 그리고 보니 소소가 이 아닌가. 소소가 다 허사로다. 잠심수도(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지킴) 제일이라.
  (주석 55) 고적 (약 700-765). 중국 당나라 발해조현(현재 하북성 경현)사람. 자가 달부. 어려서 매우 가난하였음. 나이들어 회남. 서천 절도사를 역임하고 발해현후에 봉해짐.
  세인의 총명사(총명한 선비)들 두어 마디 권하노니, 양기가 상박커든 피난은 생각 말고 구세구민 힘을 쓰소. 힘쓴 사람 피난하고 피난자는 당란한다.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여해노부 늙었다고 말이야 늙을 것가. 구민자는 생하고 자피자(스스로 피하는 자)는 난생(살기 어려움)이라. 대운을 맞이하면 받아서 쓸 것이요, 대운을 피해가면 양기에 휩쓸리리. 십년이 멀다 말고 신목이 여전(번개와 같음)하니 세인이 다 보리라. 궁달유시 이 넉자가 금일에 맞으리라.
  임진(1952년) 9월 12일 봉우소기우신야모옥


    39. 연전원 동지들 중에 장래를 촉망하는 기위 동지를 재고사해 보자
  (주석 56) 몇 분.
  원우로서는 다 같은 원우나 대외적으로와 대내적이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런 관계로 원우 중에서 몇 사람만 택해서 재고사를 하고자 한다. 금번에 고사하고자 하는 원우는 주로 대외적 인물을 택한 것이다. 내내적으로는 별로 재고할 필요를 감하지 않는다. 그런고로 고사를 중지한 것이다.
  제일 선두로 백강을 재고사해 보자. 백강은 원만후덕한 편은 아니나 명철한 인물로 주밀안상(빈틈없고 자세함)하고 족지다모(지혜롭고 꾀가 많음)하여 처세에 능이 있고 지심공정(마음을 공정히 갖음)한 인물이다. 장자풍(덕망이 있는 사람의 풍모)은 있으나 통솔력이 있는 압인지기(남을 압도하는 기운)가 있는 두령급으로는 좀 부족하고 두령급의 참모 격으로는 족족한 인물이다. 대인접물시에 백면(백가지 얼굴)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좀 양이 협하여 상대의 무례나 탈선을 보면 용서 없이 평론한다. 그리고 불순분자를 포용해서 사용하려 하지 않고 즉시 숙청하려는 것이 두령급으로는 좀 결점이요, 군사젹으로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외에 대인접물할 때는 겸양도 하고 자애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소의 모략도 있는 것 같다.
  백강을 중심으로 선발할 수 있는 인물이 적지 않은 것은 가리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백강을 원로 격으로 말하자면 최고고문격으로 우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인물고사 책임을 가지면 별 실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자파수당(자기 사람을 당에 심음)하려는 일도 있을 듯하나 이것은 우리가 주의하면 공정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백강을 내가 재고사한 결과 보고다.
  우리가 성의껏 월로 대우를 하면 별 반대 없이 나와주리라고 믿는다. 백강이 응락한다면 그 배후에 혹 산하에 동지가 상당히 있으리라고 예측된다. 백강도 백강대로 무엇을 몽상하고 있을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임정파 재규합이나 한독당계 재단합을 몽상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독당계에서는 삼분오열되어서 재단합이 곤란하리라고 확언해 두고, 임정파 역시 단합성을 볼 것 같지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말하는 연정원 단합이 용이하다고 qhse. 임정파나 한독당파에서 백강으 그리 추존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만약 생환한다면 소앙의 영도성이나 조완구 선생의 고절이나 일파의 열변을 도리어 임정파나 한독당계에서 추대하기 쉽다고 본다. 그러니 우리가 요망하는데는 최고고문 격으로는 백강이 적재하다고 본다. 다른 선배들은 우리를 이해 못한다는 관계다. 원로대우는 할지언정 사업부문에서는 백강만 못하다는 말이다.
  (주석 58) 조소앙(1887--?) 독립운동가. 정치가. 경기도 양주 출생. 3, 1운동후 상해 망명.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한국독립당 창당. 1948년 남북협상에 찬동. 김구. 김규식과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옴. 6, 25때 납북됨.
  (주석 59) 조완구: 독립운동가(1880--?). 서울 출신. 일찍이 대종교에 입교. 북간도 용정 일대에서 선교활동. 이후 상해 임정에서 27년간 독립운동. 6, 25 때 납북 됨
  (주석 60) 엄항섭(1989--?)의 호. 서울 출생. 3, 1운동 가담 후 1920년 중국 망명. 항주의 지강대학 졸업. 이후 김구 선생을 보좌하며 임시정부 선전부장.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지냄. 문장에 뛰어나 김구 명의로 발표되는 모든 성명이나 호소문 등을 거의 기초하였다. 6, 25 때 납북됨.
  그 다음 차종환 동지를 고사해 보자. 총명재예(총명하고 재능과 기예가 있음)한 인물로 반생이 지났으나 수불석권(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하는 성벽을 가지고 박학다문(멀리 배우고 많이 들음)한 동지다. 그리고 차종환 동지 독자의 포부가 있고 또는 자기대로 영웅심리를 가지고 있으며 불우시(때를 못 만남)를 탄하며 득기이동즉능성절대지공(기회를 얻어 움직이면 능히 절세의 공를 이룸)하리라고 자신만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사한 바로는 이러하다.
  본성이 총혜한데 다독다문해서 이론이나 주장이 세속평배(세상의 평이한 무리)들에게는 절대로 비교가 안 되는 관계로 아직 그 선입견을 충분히 파괴시킬 인물을 상대해 보지 못했으므로 세상에서는 나만한 인물이 또 어데 있나하고 비록 빈궁하나 기회 오기만 고대하며 대수(적수)를 못 만난 채 자기가 영도자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백련금이 못 된다. 그리고 이론과 실지면에 있어 차이점이 좀 있다는 것을 확언해 두며, 그 기국(재능과 도량)은 좋으나 정금미옥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직 실질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덜 받은 것이 탁마가 덜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렇든지 거재(큰 재목)임에 틀림없다. 일차 상대해서 자기 선입견을 파괴시켜 그 영도성(지도자가 되려는 독선적 성질)을 취소시키고 동지로서 단결되어 서로 기단취장(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함)해 가며 동심 협력한다면 사원이나 원직에 비견할 인물이다. 아직 대인접물에 겸양풍이 좀 부족한 것이 숙과수두(익은 열매 머리를 수그림)라는 것을 본받지 못하는 관계다.
  (주석 61) 방통의 자.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선비로. 당시 제갈공명과 쌍벽을 이루던 책사. 유비현덕의 부군사였다.
  동지는 하필 책사나 모사로 대우하느니보다 조직이 완성되면 선전부문의 최고책임을 갖더라도 결코 실수 없을 인물이다. 그러나 굴레를 씌우지 않으면 어자(부리는 이)의 말을 잘 안 들을 인물이라. 비록 동지로 동심 협력할지라도 굴레만은 단단히 씌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언해 두노라. 그리고 차동지도 배후나 산하에 약간의 인물들이 있다는 것도 증명하노라. 완성한 후에 타파와 비교하더라도 타파의 최고위원들에게 절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학은 학이나 동물원의 학이라고 평하였었다. 속히 청산으로 보내서 학의 본성을 발휘케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본다. 현상으로는 구체이미(몸통은 갖추었으나 미약함)라는 말이다. 차군을 위해서 그 선입견이 하루라도 빨리 파괴되기를 바라노라.
  그 다음 장이석 동지를 고사해 보자. 동지는 출림맹호로 자처하는 것 같다. 내가 고사한 결과는 맹호가 아니라 홍안(기러기. 큰 놈은 홍, 작은 놈은 안)이 아닌가 한다. 백년해내개형제(백년 바다 안은 모두 형제임), 만리운간일우모(만리 구름 사이 한 깃털임)라고 영영구구한 행동을 하지 않고 동지를 위하여 자기의 노력을 불석(아끼지 않음)하는 것이요, 동지를 위해서 동지의 영췌(잘되고 못됨)로 자기의 입장을 좌우하는 것 같지 않다. 입장불면하고 위인모충(남을 위해 꾀를 내어줌)하는 인물이다. 윤곽만은 분명히 혁명투사다.
  그런데 내가 고사한 결과는 동지의 식견이 투철해서 동지규합인 물고사에 만점이라고는 못하겠다. 하고(어떤 연고인가)오하면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가 먹불을 놓고 도끼로 벽연(대충 나무를 깎아 놓는 것)을 한 후에 다시 큰 자귀(나무를 깎아 다듬는 연장)로 깎는 것인데, 장동지는 재목이 곧은 것만 보면 다 재목이거니 하는 것 같다. 비록 곧지 않으나 도편수의 안목에는 줄만 맞으면 쓰는 것이다. 그런데 도편수로서는 일견 효연(환하고 똑똑함)한 적재적소라 비록 거목이 있더라도 그 공사에 불합하면 보지도 않는 것이다. 장동지는 그저 곧고 큰 재목이라면 먹줄도 안 맞혀 보고 일견 허심하려는 것이 애사지풍은 좋으나 구사(선비를 구함)하는 본의는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록 동지라도 출처(나온 곳)가 다르다는 것이다. 죽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것인데 사자출세(선비가 세상에 나옴)에 너무 구구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내가 재고사한 보고는 동지가 인물고사력이 부족하니, 동지는 동지대로 동일 노선에서 활약하며 다른 동지의 진로나 개척하며 동지와 동지 간의 중간입장에서 주선해서 사업추진에 노력하면 다각적으로 보아도 양심분자니, 일방지임을 맡는 것도 도리어 타당하다고 본다. 좀 조직이 덜 된 감이 있으나 거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말이며 대의만은 좋으나 세밀부문에는 아직 타인을 못 따른다는 말이다. 동지들이 협력해서 전두에 세우고 일 시키면 양심껏 일할 인물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기 1인이 독자적으로 일을 한다면 성공이 곤란하리라고 확언해 두노라
  (주석 62) 조봉암(1898-1959)의 호. 정치가. 경기도 강화 사람. 1919년 3, 1운동 참가. 1년간 복역 후 1925년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역임. 1930년 일제에 체포. 7년형 받음. 해방 후 조선공산당 탈당. 1948년 제헌국회의원 당선. 1956년 진보당 조직.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간첩행위를 했다 하여 이듬해 처형됨.
  그 다음 최승천군을 재고사해 보자. 물론 병도 있고 장점도 있는 인물이다. 무슨 단결이 되든지 충분히 군의 활동할 여유를 주고 배후에서 기정 선로를 신개척하거나 지장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교섭의 책임을 일시적으로 지게 하면 사명을 절대완수할 인물이요, 무슨 사업부문으로 장구한 시일을 계단적으로 추진하는 데는 자신이 젓은 인물이라는 말이다.
  내가 주고라고 평한 일이 있다. 역시 이 의미다. 우리 동지간에 대외적으로 후방에서 충분한 준비만 해준다면 일면의 방파제로는 틀림없는 거물이다. 만약 동지에게 만기만능을 다 맡긴다면 실수하기 십상팔구가 될 것이나, 오로지 최고위원 자격으로 유사시에만 잠시 대외적으로 난관을 돌파하는 데는 맹장이라고 안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동지로 우리들 중에 거물 대우를 안 할 수 없다. 속히 그 단점을 개과하기를 바라노라. 양공은 불기척촌지후라고 타인이야 무슨 소리를 하든지 나는 항상 최군을 거물로 취급하노라.
  (주석 63) 훌륭한 목수는 나무에 조그만 흠이 났어도 그 나무를 버리지 않고 잘 사용한다는 고사.
  그 다음 임지수 동지를 고사해 보자. 동지는 족지다모한 분이다. 그리고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선입견을 얼마든지 양보하는 아량이 잇다. 은퇴나 자수를 좋아하는 동지가 아니요, 진취와 투쟁을 사양 않는 성질이나 자기 타산이 맞는 때는 얼마든지 후퇴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은둔생활로 자족한 것이 아니라 하시든지 재기를 몽상하고 있으며 사면팔방에 자기 손 닿는 대로는 후일 출세에 유리한 조건이라면 수단을 불택하고 간섭해 두는 성벽이 있다. 그러니 타인은 그 행동을 예측하기 곤란할 것이다. 정하거니 하면 동으로 변하고, 동하거니 하면 정으로 변한다. 그러나 자기로는 정중유동(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음)이요, 동중유정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변화막측한 인물이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서는 점점 진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지의 장점이요, 타인은 동지더러 남관(남쪽 과녁)을 선사(잘 쏨)하는 인물이라고 평을 하나, 나는 임동지의 남관을 선사하는 것은 자기 진취를 목표로 나가는 중의 일로정일 것이요 자기의 주목표는 남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바다. 남관을 선사하는 선수면 방향만 고치어서 북관을 사하라면 여전히 북관도 선사하리라고 믿는다. 타인은 그 동지가 남관을 선사하던 전과자라고 북관에는 선수 자격을 불허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이동지가 타방면에서 북관을 사중(가운데 맞춤)하는 최고기록으로 우승한 후에는 경악할 뿐일 것이다.
  내가 동지를 평하기를 춘산미호(봄산의 아름다운 여우)라고 하였다. 그 변화막측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동지가 모사하여 착수하다가 실패하여도 큰 우려는 안 할 것이요, 또 소소한 성공을 한데도 역시 큰 환희는 안 할 인물이다. 그러나 작사(일을 만듬)를 자기의 부업으로 아는 관계로 이것을 본목적으로 알고 동사(같이 일함)하던 사람들은 실패하기 용이하다. 모사를 잘하는 관계로 이 일 하다가 실패하면 차기로 다시 하지 하는 근성이 있어서, 그 병동을 부지하고 동사하거니 하고 같이 있다가는 축계망리격(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지의 단점은 모사를 너무 용이하게 하지 말고 1건이라도 충분히 성공되면 자기 목표 달성에 지장이 없을 정도 큰 것을 백사천려로 절대 실패 없을 일을 하라는 것이다. 너무 이것저것 모사를 하니 안심이 덜 되고 확고한 모사를 않다가 실패되면 비록 정신상으로는 큰 손실이 없다. 하더라도 귀중한 시간이 소비되고 또 동사하던 인적 손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 동지의 다모보다 확실무의한 성공의 길을 밟으라는 부탁이다. 그리고 전도양양하니 확고한 향토의 지반을 가지고 또 동지규합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다. 동지가 나가서 성공한다면 타단체의 주참모 격보다 손색이 없다고 확언해 두노라.
  내가 고사한 결과는 우리 발족하기 전에 경제적 부문을 동지가 담당하였으면 하는 것이요, 발족한 후라도 단체경리를 맡으면 큰 실수 없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민의원이나 참의원 석상에 명석한 두뇌로 발언하면 민족에게 큰 죄과는 안 질 것이요, 아무데로 가든지 거물급의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내가 재고사한 보고다.
  그 다음 김일승 동지를 고사해 보자. 근일은 아주 소식을 불통하니 근작하상(요즘 무엇을 하는지)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7년 전에 본 그대로 다시 엄정한 비판을 해보자.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궁시기소불위(궁하면 그 하지 않을 바를 생각한다)라 하였다. 이 동지는 피난민으로 그 궁함이 비할 데 없었다. 그러나 의식주 3건으로 거진마적지간(수레먼지와 말발굽 사이)에서 방황하는 행사는 절대 없었다. 계룡산 서용추 상에 산전을 궁경(몸소 경작함)하며 단칸 토옥에 칩거하며 불관세사(세상일 관여 않음)하고 주경야독하는 것이 고인의 풍도가 있고 비록 청년이나 언행 어느모로 보든지 변증법리를 그대로 한다. 먼저 고성경훈을 들어서 인증을 하고 또 근세 동서양 정치를 들어서 비교를 하니 한 가지도 자기 개인의사로 하는 것이 없다. 아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다. 그리고 변재가 있다. 구여현하(말을 물을 거꾸로 쏟는 것같이 함)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지를 만나기 전에는 아주 함구하고 종일여우(늘 우둔한 것 같음)해서 누가 보든지 아주 농촌청년으로 밖에 안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성질이 강직하고 침착하나 활발하고 원만한 것 같지 않다. 여도할죽(칼로 대를 쪼갬)하는 사리분변과 충송녹죽 같은 지신고절(몸가짐과 굳은 절개)과 고목사회(마른나무, 죽은 재) 같은 처궁자안(궁해도 스스로 편안함)과 청산유수 같은 불휴근공(쉼 없이 노력하는 공부)과 근언독행(신중한 말과 독실한 행동)하는 평시 소행을 어느 모로 보든지 비록 청년이라도 사표의 자격이 있다. 누구보다도 나는 이 사람을 존경한다. 설만궁항(눈 가득한 가난한 마을)에 고송이 특립한데 단정백학이 유유자적하는 감이 잇다. 우리의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이 동지는 우리의 고문 격으로 추존하고 백사를 상의하면 성공의 길을 밟을 것 같다.
  이 동지는 사업인으로 나가느니보다 유악지중(대장이 작전계획을 세우는 곳)에서 책사로 있는 것이 도리어 성공일 것이다. 사업인으로 나가는 데는 세상일이라는 것은 아지 못하고 하는 중에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으며 실패하는 중에 지과도 있고 또 일거리가 생기는 것이요, 자기 역량에 과중한 것을 하는 데서 노력도 있고 응원도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아주 순풍쾌범(순풍에 돛 닮)으로 순조로만 되기를 바라리요. 백절불굴하고 나가는 중에 완전한 성공이 있는 것인데 김동지는 두뇌가 너무 명석해서 우답불파(소가 밟아도 안 깨짐. 몹시 견고함)할 일이라도 성공 후 제2, 제3, 제4의 역경을 생각하는 관계로 무슨 일이든 착수를 극히 주의하는 것 같다. 그러니 사업인으로는 질팡질팡하고 되는 일도 하고 안 되는 일도 하는데서 진정한 일이 생기는 것인데 너무 고목사회성을 가져서 고문 격으로는 최고대우자요, 사업부문에는 좀 성질을 개한 후라야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 중에 거물급이요, 거물급 중에서도 침착하기는 이 동지가 제1석에 사양 안 할 것이다. 6,25사변 후에 상월면에서 있었다는 전설만 듣고 그 후 부산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 소식이 전연 불통이라 속한 시일 안에 소식을 탐해 보기로 하자.
  후일의 인각 일석은 당연히 참할 인물이요, 그렇다고 그 성질이 무슨 모략이나 음모로 성공을 도모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언해 두며, 만약 자기가 보는 바에 정로라하면 불사소관(작은 관직도 사양하지 않음)할 심리다. 그 비위에 맞지 않으면 부귀가 비소원(원하는 바 아님)이라고 빈궁을 고수할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아서는 부귀번화상이 부족하고 청고한적한 은사풍이 많다. 이것이 내가 김일승 동지를 재고사한 보고다.
  (주석 64) 충훈부. 조선조 때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들이 있던 관부.
  그 다음 한의석 동지를 재고사해 보자. 동지는 유재유능한 사람이다. 침착성을 가지고 범사에 임하는 관계로 망위망행(망녕된 행위)은 안 하는 인물이다. 아주 기국이 인판(인쇄판)과 같다. 무슨 일이든지 한 번을 하든지 열 번을 하든지 소호도 차이가 없을 정도의 인물이다. 명찰하는 관계로 이 세상에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는데 불참하고 은명생활로 양정양신이니 하며 무문언하여도 불노하며 대지이촌민(촌사람으로 기다림)하여도 자열(스스로 기뻐함)하는 아주 선은(잘 숨어 지냄)하는 인물이 되었고 근년은 위병(병이 듦)을 칭탁하고 정신수양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 같다. 구일 보다는 미목이 아주 청수해졌다. 이 동지도 안빈낙도하며 득기이동(기회를 얻어 움직임)하려는 태세를 정비하고 있다. 
  (주석 65) 무문언 하여도 불노: 들음이 없어도 화내지 않음. 즉 명예에 무관함
  동지들 중에 가장 조직적이요 계획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간단 명료한 언사로 설명식이 변론을 잘하며 지신공정(몸가짐 공정함)하는 인물이다. 내가 고사한 결과가 거물급으로는 소호의 손색이 있으나 동지급으로 고참 격이라는 것과 업무상으로는 아무 업무를 책임지든지 실수 없을 인물이다. 그리고 타단체의 고급간부들에게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언해 두며, 그 결점은 폭이 아주 확정되었다는 것뿐이다. 이상으로 보고를 그친다.
  물론 대외적으로도 이상 기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로 이 기위의 재고사를 해본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세상의 인물들을 무조건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업추진에 협력할 동지들과 아직은 우리의 목적을 아주 알지도 못하나 알면 반대 안 할 동지를 선택해서 선차 심사하였고, 금번 재고사를 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고사가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바는 이러하다고 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김상조 동지나 신훈 동지나 윤창수 동지나 한상록 동지나 서기원 동지나 김도향 형제 동지나 민계호 동지 외 수십 동지가 있다. 그러나 별 이상 없다고 본 동지는 재고사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그 다음 신규합 동지가 얼마가 될지 알 수 없으며 신규합 동지에서 원로 격이나 거물급이나 고참 격이나 동지 격이 얼마나 되는지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다.
  금일은 이 정도로 고사를 그치노라
  임진(1952년 9월 13일 봉우서우유신정사


    40. 선덕
  (주석 66) 착하고 바른 덕행. 착한 행위
  고성유훈왈, 계명이기하야 자자위선자는 순지도야이오
  계명이기하야 자자위리자는 척지도야이니 욕지순여척지분인댄 무타이라 리여선지문야니라
  (풀이)
  예 성인 남기신 가르침에 가라사대, 닭이 울며 일어나 차근차근 착한 일만 하는 자는 순의 무리들이요, 닭 울며 일어나 차근차근 이끝만을 찾는 자는 도척의 무리들이다. 순과 도척이 나뉘어짐을 알고자 한다면 다른 데 있지 않으니, 이끝을 좇느냐 착한 일을 하느냐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주석 67) 여기서 옛 성인은 맹자이며, 이어지는 글은 '맹자' '진심장구' 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석 68) 중국 춘추시대의 몹시 악한 사람. 현인 유하혜의 아우로. 도당 9천명과 떼지어 전국을 휩쓸었다.

  내가 위의 말씀을 아주 청년시대에 한 번 의심한 적이 있다. '순은 기대지야(그 큰 지혜로다)이신저. 호문(듣기를 좋아함)하시며 호찰이언(남의 말을 잘 살핌)하사대 은악이양선(악을 숨기고 선을 부추김)이러시다'라는 구절을 본 일이 있었고 순이 평시 수양으로 습여성성(평소 습관으로 더불어 제2의 천선을 이룸)하여 무슨 일이든지 한 것이 자연적으로 악한 일을 안 한 것이요, 계명이기하여 자자위선한 형적이 보이지 않는 아주 선을 행하려니 하고 자자한 것은 자연이 아니요 강행이 아닌가 하였고, 도척도 역시 춘추시대의 유하혜 같은 성인과 형제간이나 그 소행은 아닌 게 아니라 악행이 많았었다. 그러니 역시 척도 그 평시 행동이 선한 일을 못하여 아주 습여성성이 되어서 아무 일을 하든지 선하게 못한 것이요, 계명이기하여 자자위악하였다고는 못 보겠다. 역시 척의 소행이 자연적으로 악하였지, 내가 무슨 일이든지 꼭 악사만 자자부지(꾸준히 멈추지 않음)하고 하겠다고 행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존의(의심함)한 일이 있었다.
  (주석 69)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신. 성은 전 이름은 획. 식읍이 유하에 있었고 시호가 혜였으므로 유하혜라 부름. '맹자'에 이윤, 백이와 함께 성인으로 평가받음.
  대순과 도척은 양극과 같다. 선의 대표인물이요, 악의 대표인물이다. 평시 소양이 제2의 천성이 되어서 무슨 일이든지 한 것이 자연적으로 선하였고 악하였던 것이라는 것을 재표명하는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도척이 산동에서 횡행하다가 오자서의 진국행을 중로에서 침범했다. 오자서가 상권하기를 "장군이 나 같은 소년 1인쯤 통과시켜도 무방하지 않은가." 하고 통과시켜 주기를 애원하였으나, 도척은 용서 없이 침범하는고로 오자서는 다시 권하였다. "장군의 명망이 산동 제국에서 감히 바라볼 사람이 없는데, 나 같은 소아와 시합을 하다가 실수하시면 도리어 불명예가 아닌가." 하고 좋은 말로 권하였으나 필경 두 사람의 시함으로 오자서의 쾌승이 되었다. 하지만 오자서가 역시 좋은 말로 위로하고 조금도 해를 가하지 않고, 또 쾌승한 장소도 아주 두 사람 외에는 남들은 모르는 장소에서 도척을 이겼으나 역시 온언순조(따뜻한 말로 순하게 다룸)로 "장군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한 일이니 승부가 난 표시를 말고 그저 통과시키는 것같이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도척도 감사하였다. 그래서 오자서의 진국왕반(진나라에 갔다 옴)에 적극 노력을 다해서 오자서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말하자면 수은보은(은혜을 입고 은혜를 갚음)하였다. 그리고 보면 자자위악(부지런히 악행을 함)코자 하는 인물이면 오자서의 은혜라고 반드시 갚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도척 같은 인물도 큰 충동을 받으면 가여위선(선행을 할 수도 있음)이며 가여위악(악행을 할 수도 있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고인의 말씀에 좀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 있다. 물론 본의가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악을 짓지 말라는 권고인 줄은 아나, 권선서에 선을 행하면 복이 되고 악을 행하면 화가 되는 것이니, 후일의 복을 받고자 할진대 중선봉행(모든 착한 일은 받들어 행함)하고 제악막작(모든 악한 일은 짓지 말 것) 하라는 말씀이 있다. 물론 복선화음(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줌)이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일의 복을 받기 위하여 교환조건으로 선을 행한대서야 그 행한 선이 물론 악보다는 나을 것이나 상인의 이손교계(이익손실을 비교 계산함)하는 산판적 선이 아닌가 한다. 고성 말씀은 교환조건이건 아니건 중선봉행하고 제악막작하면 자연적으로 습여성성해서 가제국치가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다. 그리고 선덕 이라는 것은 하필 물질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현인의 말씀인데,

  불출문구만명
  불비재행만공
  불가법도만인
  (풀이)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만인의 생명을 구하고
  재물을 쓰지 않고도 모든 공적을 행하며
  법을 빌리지 않고도 뭇 사람을 제도한다.

  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 주해를 보면.
  충의수재부지교훈자손생도성덕이제세시취불출문구만명이요, 효우방편입지가주인욕존심공덕무량시위불비재행만공이라. 아자시우시천인개극성극신환희선사각양선서찬미선인흥기선념시위불가법도만인 이라는 것이다.
  (주석 71) 부지: 부지. 도와주며 돌보아줌. 서로 도움 '맹자' '등문공' 편에 나옴.
  (풀이)
  개미가 서로 따라가면 도와주듯이 자손을 가르치고 제자들의 덕을 이루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면 이것이 밖을 나가지 않고도 무 생명을 구한다는 것이요, 효도하고 우애함을 잘 하면 내 설자리를 지을 수 있고, 욕됨을 참고 마음을 두면 공덕이 한이 없으리니, 이것이 재물을 쓰지 않고도 모든 공적을 행함이라. 나는 스스로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천한 것 같으되, 사람들은 모두 극히 성스럽고 신통하여 착한 일을 기뻐하고 좋은 글을 드날리며 착한 사람을 찬미하고 착한 생각을 일으키니, 이것이 법을 빌지 않고 만인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혹(누군가)이 갈번에게 무엇이 선사가 되는가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사람에게 이로운 일은 선사가 되는 것이니 사람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은 대소의 구별이 없으니 내 역량에 따라서 할 것이다. 말하자면 도로에서 장해물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의 통행에 지장이 있기 쉽거든 이것을 내가 먼저 보았으면 치워놓고 가는 것도 역시 사람에게 이로운 행위가 되는 것이니, 이를 미루어서 제급부위(위급한 지경을 도와 해결해 줌)도 하며 구기해갈방생(굶주리고 목마름을 구해 주며 생명을 놓아줌)도 하며 무릇 사람이나 사물에게 유리한 일이면 수시수기하여 내 역량대로 행하고 할만한 일을 그저 간과하지 않으면 자연 습여성성하여 무슨 일이든지 강위강행(억지로 하는 행위)을 안 하더라도 위인위물(사람과 사물을 위함)하는 행사가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답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심상으로 내가 이인이물의 일을 하면 타인도 역시 이인이물의 행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인이물의 행사가 역시 자기의 복리도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구호하는 것이 적선이 되기는 하나,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유재세자(재물과 세력이 있는 사람)는 적덕(선행을 쌓음)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그 용이한 것을 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가 되나니, 용이할수록 더욱이 많이 하면 이는 금상첨화가 되는 것이요, 빈천자(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는 적덕하기 극히 곤란하나. 곤란하다고 하지 않으면 이는 자기가 되나니, 곤란할수록 더욱이 잘하면 이는 한 번의 선행이 쉽게 선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백 번 선행에 해당될 것이다. 여유가 생기기를 기다려 착한 일을 행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심덕이 그리 크게 평가할 수 없다. 여유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많이 하라는 말이다.
  근일로 보라. 수십년을 각박성가(각박하게 집안을 이룸)해서 백석꾼이니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사람들이 이 재산을 모을 적에 얼마만큼 각박하였던가. 혹 후덕한 사람도 있으나 예외로 하고, 대체로 지주의 악덕이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던 것이 하루아침에 농지 분배가 되고 보니 자기네의 일장춤몽이 되고 말았으니, 그 사람들도 만석꾼이 나는 천석만 가져도 자기생활은 유족할 것이니 9천석을 가지고 공익사업을 했었으면 공익사업이라고 그 9천석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익은 익대로 되고 손은 손대로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로 민생복리될 일이 많았을 것인데 그저 소작인만 착취하고 아무 공익사업도 못하다가 일조에 토지개혁이 나니 한바탕 봄꿈으로 화하고 말았다. 이런 것이 다 자기 일도 되고 자기와 남을 같이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부선사업(선행을 지탱해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선도 좋으나 될 수 있으면 부선사업을 하라는 말이다.
  눈앞에 급한 때는 자선도 안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당연히 할 일이요. 무슨 음덕을 많이 하고 뒷날 복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위선불구인지(선행을 하되 남이 앎을 구하지 말라)라야 하는 것이다. 일선쯤 해놓고 자랑은 백선이나 천선한 것같이 하는 것은 명예상이 되는 것이요, 선이라고는 못 본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아를 위해서 일하라는 것이다. 소아를 위하다가 선하지 않은 일을 하기 용이하다는 것이다. 선악의 분기점이 대아 소아의 분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인의 복선화음이라는 것은 권선하는 말씀이요. 그렇다고 장래 복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우민들이 악행을 할까봐 선행을 권하는 것이요, 손인이기(남에게 손해 끼치고 자기는 이롭게 함)하면 역위자해(자신도 해치는 일이 됨)한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 한다. 중국 금화라는 땅에 장안인이라는 사람이 수천석의 적곡(쌓아놓은 곡식)이 있었는데 때마침 대흉년이었다. 사람들이 권하기를 이 곡물을 더방곡(곡식을 지킴)해 두면 고가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장이 답하기를 "내가 이익을 보기 위해서 적곡한 것이 아니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이 와서 기아에 있는 사람에게 구제를 하라 하나, 장은 "내가 명예를 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이 그 곡물을 내놓아 180리나 되는 도로를 수축하고 또 제방을 40리나 되는 것을 수축하였다. 그래서 그 고을 사람들이 큰 흉년에 고용되어 그 임금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흉년을 구해 주었고 또 도로도 험한 것을 평이하게 하고 수해를 제방으로 막아서 인민의 장구한 해를 없게 하였다. 이것이 온정히 대아에서 나온 부선사업이다. 물론 기민을 주었으면 180리 도로는 여전히 험했을 것이요, 40리 제방이 될 수 없으며 그 고을 사람들에게 수천석의 정신적 부채를 지웠을 것이다. 그러나 장이 그렇게 하지 않고 부선사업으로 그 지방 인민들의 흉년의 아사를 면케 하고, 읍인들도 당연한 고임을 받고 일하였으니 무슨 정신적으로 빚 될 것이 없다. 이런 것이 진정한 선행일 것이며 또는 물적으로의 행선일 것이다.
  물론 정신적 행선사(착한 일을 함)는 여기 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흔히 흉년에 식량과 돈이나 주면 선행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이 예를 말해 두는 것이요, 그렇다고 흉년에 구호해 줄 만한 사람보고 주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동가홍상이라고, 할 만한 자력이 있거든 부선사업으로 하라는 말이다. 악이라는 것은 자신도 해롭고 타인도 해롭다는 말이다.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선행을 하라고 이 붓을 든 것이다.
  임진(1952년) 9월 13일 봉우서우유신초당


    41. 소인은 식어력하고 군자는 식어도라
  (주석 72) 소인은 일하며 먹고 살고. 군자는 도로써 먹고 산다
  소인이니 군자니 하는 것은 도덕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요. 그 자리를 가지고 한 말이다. 환언하면 소인은 육체노동을 하라는 말이요, 군자는 정신노동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니 육체나 정신이나 무엇이고 노동을 않으면 그 대가를 받지 못하리라는 확언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불급어정신노동(위로 정신노동에 미치지 못함)하고 하불급역육체노동(아래로 역시 육체노동에 못 미침)하여 상하사불급(위아래 일이 미치지 못함)이 되고 유식지민(놀고 먹는 백성)으로 세간기물(세상에 버리 물건)이 되어 어언간 53년이라는 장시일을 기생충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의심될 것 없이 허송세월하고 도로무성(헛되이 늙어 이룬 것 없음)하였으니, 왕사(지난 일)는 불가수(쫓을 수 없음)나 내두(앞으로)나 개과하자.
  장년(30--40대)에 불각(깨닫지 못함)하고 도로공탄하소용(늙은이 되어 헛되이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고.
  가이상가이하(위도 아래도 될 수 있음)니 일심매진하여 보라. 성공하기 전에는 식어력도 관계없고 기력부족(그 힘이 부족함)하거들랑 고궁(궁핍을 견뎌냄)도 하여 보라.
  빈천이 하관(무슨 상관)이며 부귀가 하소원(무슨 소원)가.
  식어도 할량이면 명실상부해야 된다. 명불부실(이름이 실상에 맞지 않음)하고 보면 허화가 이 아닌가.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라고 공부자가 말씀하시니 내 나이 53세이나 얼마든지 나갈지라.
  쉬지 않고 나가 보면 진두(끝)가 있을 것을.
  지이불행(알며 행하지 않음)은 반불여부지(외려 모르느니만 못함)라 속히 행해 보면 육십이이순(60에 귀가 순해짐)하고 칠십이종심소욕(70에 하고 싶은 대로 마음을 따름)하더라도 불유구(법도에 거슬리지 않음)라 하셨으니, 7--8년 수련하면 이순지년(60세)될 것이라.
  앞으로 종심소욕불유구는 성인의 행적이나, 입지불고면 기학이 개상인지사(모두 별볼일 없음)라 하시어서 불량력불탁덕 하압고서 군자를 자기(스스로 기약함)하고 소인은 식어력이라고 불무소사(작은 일에 힘쓰지 않음)하압다가 이변백설(귀가의 하얀 눈. 흰머리) 53세 순식간에 돌아오고 정신도 혼모(흐리고 약함)하고 기력도 점점 쇠하여 소년 장지(장한 뜻)는 어데 가고 남은 것은 근신이라.
  명불승형(이름이 몸만 못함)할까 해서 연기성형불휴(기운을 연마하여 몸을 이룸을 쉬지 않음)로다.
  그 형이 완성은 못하였으나 부지중 칠층옥탑 다만 결정(맨꼬대기만 없음) 하였고나.
  구인산 쌓자 하고 일궤토(한 삼태기 흙)를 허비 말며 식어력도 하여 보고 식어도도 하여 보았다.
  세상사 이러하니 노년자세(늙은이 자세) 말고 하루 바삐 들어가자
  임진(1952년) 9월 17일 밤 봉우 소기


    42. '신자'를 보다가 '군인' 장을 재삼 반복하고
  (주석 74)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학자인 신도(BC 395--315)의 저서로 '위덕' '인순' '민잡' '지충' '덕립' '군인' '군신' 등 7편만 전한다. 신도는 전국시대 법가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이다. 처음 도가 사상을 배웠으나. 그 이론을 법가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객관적 존재로서의 규율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
  '산자'의 '군인' 장 원문은 이러하다.
  군인자곤 사법이이신치즉주상예탈이 종군심출하나니 연즉수상자수당이나 망다무궁하고 수벌자수당이나 망경무이하나니 군이 사법이이심으로 재경중즉동공수상하고 동죄수벌의리니 원지소유생야라. 시이로 분마자지용책과 분전자지용구가 비이구책위과어인지야라. 소이거사새원야라. 고로 왈대군이 임법이불궁즉사단어법의리니 법지소가에 각이기분몽기상벌이무망어군야라. 시이로 원불생이상화의리라.
  (풀이)
  군주된 사람이 법을 버리고 몸소 다스리면 벌 주고 상 주며 목숨을 주고 뺏는 것이 군주의 마음을 좇하나오니, 그런즉 상을 받는 사람은 비록 마땅하다 하나 더 많은 상을 받기 바라고, 벌을 받는 자는 비록 마땅하다 하나 끝없이 가벼운 벌을 바라나니, 군주가 법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그 사안의 경중을 재단하기에 공적은 같은데 사람따라 상이 다르고 죄과는 같은데 사람따라 벌리 다르니, 이것이 원망이 생기는 까닭이다. 이런고로 말을 나눌 때 쓰는 책과 땅을 나누는 데 쓰는 구(측량자의 일종인 듯)가 책과 구가 아니고 인지로 하면 지나치게 된다. 사사로움을 버려야 원망을 막는다. 고로 말하기를 군주가 법에 맡기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사안은 법에 의해 판단되리니, 법을 가했을 때에 각기 그 분수에 따라 그 상벌을 받으므로 군주에게 바랄 것이 없다. 이러므로 원망이 생기지 않고 임금과 백성이 화목하게 된다.

  이상이 원문이다. 약 2천년 전이나 현대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법치국가에는 오로지 준법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요, 이 정신이 없으면 무엇으로 국가나 사가나 다스릴 수 있으리요. 다스리지 못하면 혼란할 따름이다. 국가나 개인가정이 혼란하고서 망하지 않는 법이 없는지라, 비록 주재인물이 두뇌가 명석하다 할지라도 규구준승으로 의법행사하는 것과 같을 수 없는 것은 지자를 부대하고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법을 무시하고 주재자 일인의 권력이나 지력으로 임의행지하는 것은 고인도 원지소생(원망이 생기는 바)이라고 평이하게 말하였으나, 사실은 원생이생불측하고(원망이 생기며 예측 못함이 생기고) 불측즉가망이라(예측 못하면 곧 망한다) 아니할 수 없다. 주재자(군주)도 이 임의행지하는 악벽이 있으면 반드시 개과해야 할 일이요, 만약 개과하지 않고 작지불이즉대가이망국이요(계속 해나가면 크게는 나라를 망칠 수 있고) 소가이망신(작게는 몸을 망칠 수 있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명시하자(자신의 총명으로 아래에 보이는 것)는 혼(어두움)이라고 주재자의 일인의 명이 법으로 정한 법치국가의 법을 당하지 못할 것은 소연(명백)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은 이 위법정신이 가득찬 지휘 하에서 살고 있으니 대소간에 답안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원생이상하불지즉국불능치의리니, 국불치즉민기능안호아! 민불안즉혹경혹망을 미가지야라.
  여시이독시서라가 재삼반복자로라. 사민이 유하죄우하야 당차액난호아! 창천아, 민애사하야 속속사지환원하야 구학부미고지전이 여하오.
  여집차필하니 감개무량이로다.
  (주석 76) 학부: 학철부어의 준말. 즉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 라는 뜻으로. 사람의 아주 곤궁한 경우를 이름. 출전 '장자'
  (풀이)
  원한이 생기면 위아래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곧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리니,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찌 안정될 수 있으랴! 인민이 불안하면 나라가 기울거나 망함을 알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읽다가 두 번 세 번 다시 보았노라. 이 백성들이 무슨 죄, 무슨 잘못이 있길래 이런 재앙과 난리를 당하는 것인가! 푸른 하늘이여, 이를 애처러이 여기사 속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여 아주 곤궁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죽기 전에 구해주심이 어떠신지.
  내 이 붓을 들자니 감개무향하도다.
  임진(1952년) 9월 17일 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43. 시는 왕지야오 서는 왕고야오 춘추는 왕사야라
  (주석 77) '시경'은 과거 인민의 의지와 감정을 표현한 것이요. '서경'은 예전 나라의 말과 문서를 드러낸 것이요. '춘추'는 지나간 일들을 말한 것이라. '신자' '일문'에 나옴.
  고서에 명막명어체물(밝음은 사물과 접해 체득한 밝음이 제일이다)이라고 한 데가 있다. 그런데 '신자'에 '시는 좡지야'라 하였다. '시경'은 중국의 열국시대의 인심과 풍속, 당시 초목금수의 이름과 위로는 정치의 득실과 아래로 향토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으로 가림없이 지(뜻, 의향, 본심, 감정, 희망 등의 표시)를 발표한 것이다. 이러하자니 선한 것도 있고 불선한 것도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후인이 보고 거울 삼으라는 것이요, 정위풍 같은 짓을 본받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 이와의 지를 발표한 것을 보고 종선개악(선을 따르고 악을 고침)하라는 향토문학이다. 그러나 도리어 정위풍의 가장 음란한 곳을 본받는 근대의 악질 청소년들도 아주 없다고는 못한다. 그 거울은 아무 말 없이 비쳐줄 뿐이나 보는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뿐이다. 고인은 흥어시(시에서 일어남)라 하였으나, 근대인은 이 시를 어떻게 이용하며 해석 하는지가 큰 문제다.
  (주석 78) 중국 주대의 춘추시대의 12열국을 말한. 곧 노, 위, 진, 정, 조, 채, 연, 제, 진, 송, 초, 진.
  (주석 79) '시경'의 '정풍'. '위풍'을 말함. 시의 내용이 음란함.
  (주석 80) 공자님 말씀 '논어' '태백' 장에 보임. "자왈 흥어시. 입어에. 성어락."(공자 가라사대. 시로써 정서를 일깨우고. 예로써 행동을 바로잡고. 음악으로 인격을 완성하라.)
  그 다음 '서는 왕고야'라 하였는데, '서경'은 중국에서 요순 이후로 역대 제왕과 군신 간에 주로 문답한 국가 정치, 경제, 의식, 국방, 농상공형정(농업, 공업, 상업, 형법의 다스림)과 나라와 나라, 군주와 신하, 신하와 인민들과의 관계된 역대 중요 문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역대 제왕의 인물고와 행정고가 되고, 또 군신(여러 신하)의 인물고와 당시 백성의 수준을 말해 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시경'은 민정을 말한 것이요, '서경'은 국정을 말한 것이다. 역시 역사의 일종으로 가장 간이하게 당시의 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난신적자(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들과 부모에 거역하는 자식들)들은 여기서 가장 최악한 장면을 본받아서 행정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다.
  '서경'의 '요전'을 보면 한 제왕이 다음 제왕에게 전위하는 심법이 다만 '유정유일이오사 윤집궐중이라 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정일하라는 고다. 그 다음 '순전'에는 우에게 전하는 고가 역시 '도심은 유미(오직 미약함)하고 인심은 유위(오직 위태로움)하니, 유정유일이오사 윤궐집중'이라 하였고, 그 다음은 자손에게 전하는 것이라 그 심법은 좀 다르나 역시 간단하였다. 그리고 문무왕(문왕과 무왕)에 이르러서는 자연 경계하는 말도 많고 백성에게 경계하는 말도 길어지게 되었다. 민지가 발달하므로 단순하지 않아져서 그런 것 같다.
  (주석 81) '오직 정하고 일하여 모름지기 그 가운데를 붙잡으라'는 뜻으로, 요가 순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전한 심법이다.
  후세의 인주(역대 제왕)를 보면 '서경' 속에서 가장 악정하던 인군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택해서 감연히 시행하는 인주가 얼마든지 있다. 우주의 큰 거울인데 이를 악이용하는 사람이 아주 없다고는 못 한다. 고대 인주도 이런 인주가 있다고 인주로서의 실격자인가 합격자인가를 불계하고 이런 행동을 감행하는 인주들은 그 행동만을 거울삼는 폐해도 있다. 여기서 그 거울을 주의 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악이 개오사(모두 나의 스승)'라고 하였으나 그 악한 것을 고치기보다 악행을 본받는 인주와 신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주석 82) 공자님 말씀)
  그 다음 '춘추'는 왕사야 라 하였는데, 공자작춘추(공자가 춘추를 지음)하시고 지아자(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요, 죄아자(나를 벌주는 것)도 춘추라 하시었다.
  (주석 83)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공자가 엮었다고 전해지는 오경 중의 하나. 은공으로부터 애공에 이르기까지 242년간(BC 722-481)의 역사.
  '춘추'는 '서경' 다음에 춘추 십이열국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시되 존주대의(주나라를 받드는 큰 의리)로 평을 가한 역사의 시초이다. 의를 주로 한 대경대법을 그대로 기록하신 것인데, 역사를 쓰다 보니 성군현주도 있고 충군애국한 신자도 있었으나 혼군암주(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도 있고 난신적자(난신과 역적)도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난신적자를 필주(붓으로 죽임. 곧 글로써 죄를 벌함)를 하셨으나 난신적자로도 편안히 부귀를 누리는 자가 없지 않아서 이것이 후일 난신적자들이 본받는 거울이 되었다. 그래서 후세에 이 '춘추'를 본 받아서 혼군암주와 안신적자들을 필주할 천추정기를 가진 인물이 극귀하다. 맹자 말씀에
  상하교정리면 이국위의리이다. 만승지국에 시기군자는 필천승지가요, 천승지국에 시기군자는 필백승지가니 만취천언하며 천취백언이 불위불다의언마는 구위후의이선리면 불탈하야는 불염이니이다.
  (풀이)
  위라래가 서로 이 끝에 얽혀 싸우게 되면 나라는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만승(만 대의 병거)의 나라에서 그의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 집안 사람인 것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의 임금은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 집안 사람이니, 만분의 천을 가졌고 천분의 백을 가졌다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만일 의를 뒤로 미루고 이만을 앞세운다면 아주 빼았아 버리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석 82) '맹자' '양혜왕' 상편에 나온다

  하였다. 후세에도 '춘추'의 의가 없으면 난신적자가 어느시대라고 없으리요, 사필을 가지고 공공정정하게 왕사(과거의 사적)을 평해서 후세의 난신적자와 혼군암주가 그 필주를 겁내서 만분지 일이라도 개오할 도리가 있다면 이것은 '춘추'를 본받은 역사가들의 필주일 것이다.
  근세 역사가들은 그 기록이 왕사를 기행문 식으로 기록하고 아무런 정평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국가 일기의 대용문이 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는 '춘추'에 부끄러움이로다. 동국(우리나라) 역사도 아직 '춘추'에 비길 필주를 보지 못하였다. '신자'에도 너무 간단히 시는 왕지야요 서는 왕고야요 춘추는 왕사야라고 말하고 평을 가하지 않은 것이 후인이 보면 과연 이 삼종이 다만 과거를 위한 일종의 과거기록으로 알아서는 너무 평이 가볍다고 본다. 왕지, 왕고 왕사이나, 거울삼아서 선악을 택하라는 평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후세의 난신적자나 혼군암주들이 일견송연(한 번 보고 두려워 오싹 소름이 끼침)해서 감히 전철을 밟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역사가의 책임이라고 본다. 한갓 문인의 필단(붓끝)이 공정한 평어가 없이 그저 기행문과 같이 기술해 놓으면 도리어 후세 인물들이 본받아서 성군현주가 되기보다 용이한 혼군암주가 되기 쉬운 것이다. 집필자들이 필주를 해서 후에는 다시 그런 인물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붓을 든 사람의 중대한 책임이라 하노라. 그리고 '신자'에도 다른 조례는 명시되었으나 이런 12조가 상세한 설명이 없이 기재되어서 유감으로 생각하고 몇 자를 적어 보노라
  (주석 85) 원래 신도의 저서는 12론이 있었다고 '사기'에 씌어 있으나 이 글의 12조는 어떤 의미인지 명확치 않다.
  임진(1952년) 9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44. '신자' '덕립' 장을 보고
  입천자자 불사제후의언. 입제추자 불사대부의언. 입정처자 불사군처의언. 입적자자 불사서얼의언. 의즉동양동양즉쟁 잡즉상상해 재유여불재독야. 고신유양위자국필난 신양위 국불난자 군재야. 시군불난의. 신군즉필난 자유양위자 가필난 자양위이가불난자 부재야. 시부이불난의. 실부즉난 신의기군이무불위국 얼의기종이무불위가.
  사견
  (주석 86) 봉우 선생의 풀이
  전자를 세우되 제후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하며, 제후를 세우되 대부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하며, 정처를 세우되 군처(여러 처. 여기서는 첩실들)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하며, 적자를 세우되 서얼(서자와 그 자손들)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할지니, 의심한즉 움직여서 둘이 되나니 움직여서 둘이 된즉 서로 다투고 잡되어서 곧 서로 상처 주고 해치게 되리니 재함을 둠이 홀로에다 둠이 아닌 연고라. 그런고로 신이 두 자리가 있으면 나라가 반드시 혼란하되 신이 양위(두 자리)가 있어도 나라가 혼란하지 않은 것은 인군(임금)이 있음이라. 인군을 믿어서 혼란치 않음이니 인군이 없은즉 반드시 혼란할 것이요, 자식이 두 자리가 있으면 반드시 집안이 혼란할 것이요, 자식이 두 자리가 있고도 집안이 혼란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있음이라. 아버지를 믿어야 혼란하지 않음이니 아버지를 잃은즉 혼란할지니, 신하가 군주를 의심한즉 나라를 위태롭게 하지 않음이 없고, 서얼이 종손을 의미하고 종가가 위태롭지 않음이 없나니라.
  (주석 87) 벼슬의 품게에 붙여 부르는 명칭. 조선조 때는 정1품에서 종4품까지였음.
  사의
  (주석 88) 봉우 선생의 해설
  가여입갑이요 가여입을이입갑하면 중필유의어니와 갑이외가여입자이입갑이면 숙감의호아. 입천자입제후입정처입적자에 선택기불감여감을상항자즉수백입이불감의어니와 불택인이입즉수무상쟁지인이라도 인필모지하고 불관어차자도 감생의혹하나니, 역왈부차승치구지라 하니 차지위야라. 부는 소인지사야요, 승은 군자지기라. 소인이 승군자지기고로 도사탈지라 하니 언불칭기기야라. 고선택인하야 사적어기기즉수백입이나 인불능의하리니 덕입운자는 택유덕자하야 사군기위라는 말인 것 같다. 현세의 우리나라 실정으로 보아서는 명실상부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동양이 아니라 동천동만인 것 같다. 연이불위자는 (그러나 위태롭지 않은 자는) 미지유야로라(있는지 모르겠다).
  (풀이)
  갑을 세울 수도, 을을 내세울 수도 있는데 갑을 내세우면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어니와, 갑 이외의 가히 세울 수 있는 사람이 갑을 세운다면 누가 감히 의심하겠는가. 천자와 제추나 본부인이나 적자를 내세움에도 먼저 갑을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을 택한다면 비록 백 번을 세운다 해도 감히 의혹이 없을 것이니,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세우면 비록 서로 다투는 사람이 없다해도 남들이 반드시 우습게 보고 여기에 관계없는 자들도 감히 의혹을 가질 것이다. '주역' 계사전에 공자께서 말씀하신 '등에 지고 또 말을 타면 도적을 오게 한다'는 구절이 이것을 이른 말이다. 등에 진다는 것은 소인의 일이요, 말을 탄다는 것은 군자의 기구라. 소인이 군자의 기구를 타므로 도적이 이를 빼앗으려 하니 그 그릇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그 그릇에 맞는 사람을 가려서 비록 백 번을 세운다 해도 사람들이 의심할 수 없으리니, 덕을 세운다 함은 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제자리에 있게 한다는 말인 것 같다(이하 원문과 같음)
  (주석 89) '주역' 계사전 상편에 보인다. "역왈부차승치구지라 하니 부야자는 소인지사야요. 승야자는 군자지기야니 소인이승군자지기라. 도사벌지의며..."(역에 말하기를 '등에 지고 또 말을 타면 도적을 오게 한다' 하였다. 등에 진다는 것은 소인의 일이요, 말을 탄다는 것은 군자의 기구이다. 소인이 군자의 기구를 타면 도적은 이것을 빼앗으려 생각한다...)
  임진(1952년) 9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


    45. 조구석사우찰지불능식야 현어권형즉리발식의
  수천근 되는 돌을 대우씨더러 얼마나 되는가 하면 비록 대우씨라도 보기만 하고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되 이 돌을 비록 우린이라도 저울에 달아 보면 분리(터럭만한 무게)라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누구나 알 일이다.
  의심할 바 없으나 세상에서는 지능이 높다고 자처하는 선비도 권형(저울)을 버리고 물건의 중량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준법정신이 없이 고인의 만고불역하는 법을 무시하고 위법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는 자명자암(스스로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음)한 관계로 등하불명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은 누구나 잘 알되 준법정신이 부족한 것은 사람이 손톱 밑에 가시가 들면 곧 아나, 심장에 병이 든 것은 중대하여도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도다.
  어찌해서 사소한 일은 다 잘 살피고 일신상 혹은 자기 평생의 대관계 있는 일은 아주 살필 생각을 하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 줄은 소아들도 다 아는데 전국민의 먹을 양미가 아주 부족한 줄 알면서도 위정자가 아무 대책이 없으면 백성의 아사를 좌시할 것인가. 개인의 불식즉가(먹지 않으면 죽음)라는 것은 알기 용이하고 전국적으로 사활이 문제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가. 위정자의 답변을 구하는 바이다. 이것도 불변하는 법이 있을 것인데 준법정신이 없이 그저 위급문제로 대처할 것인가 의심시된다.
  정부로서 흉년에 대처하는 예가 다른 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선언이 아무 대책 없다고 쉬운 말로 선전하니 우리 한국의 내년도 식량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구석을 권형(저울)에다 달아 보라는 것이다. 달아 보지도 않고 어물어물하고 백성이야 죽든 살든 구렁이 담장 넘어가기로 시위소찬만 할 작정인가. 한국 전체에 6할이라는 피해액이라면 예년에 볼 수 없는 큰 재년(재앙의 해)이라. 아마 국제연합에서 구호가 나오려니 하고 아무 준비 없다가는 목전에 생각 이상의 큰 동요가 있다는 것을 위정자들도 각오하라는 것이다.
  (주석 90) 재덕이나 공로가 없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갖 자리만 차지하고 공으로 녹만 받아먹음을 비유한 말.
  준법해서 연기민산(해마다 굶주리면 백성은흩어짐)한데 어떻게 한다는 예가 확실히 있으리라고 믿는다. 정치학을 좀 연구하고 위정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규구준승권형이 없이 방원장단경중을 알고자 하는 우리 위정자들에게 하도 답답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법에다 비추어 보라는 것이다. 부재기위(그 자리에 있지 않음)하야는 불모기정(그 정사를 꾀하지 말라)이라 하는 것이나, 내가 모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피난민의 일분자로 목전이 암담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상사(위정자)들이여, 민원이 있다고 원망 말고 역지사지해 보라는 말이다.
  (주석 91) 규는 콤파스, 구는 자, 준은 수준기. 승은 먹줄. 권형은 저울. 즉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말함.
  우연히 집필한 것이 언지창(말이 길어짐)함을 불각(깨닫지 못함)하는도다.
  임진(1952년) 9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


    46. 낭묘지재비일목지기며 호백지구비일호지액이라
  (주석 92) 낭묘(궁전)의 재목은 한낱 나무의 가지가 아니며. 호백(여우 겨드랑이에 있는, 힌털이 붙은 가죽)의 갖옷은 일개 여우의 겨드랑이가죽이 아니다.
  낭묘지재가 어찌 일개 나무의 가지로 되며 호백지구가 어찌 일개 여우의 겨드랑이가죽으로 되리요. 그러니 낭묘는 진동서남북기재(동서남북의 목재를 다씀)라야 방가성(바야흐로 이루어짐)이요, 호백지구도 역시 동서남북 사방의 여우 겨드랑이 가죽을 모은 후에야 하나의 갖옷을 완성하나니, 한갓 나무의 가지로 낭묘를 이루려 하면 안될 것이며 한 여우의 겨드랑이가죽으로 갖옷을 만들려면 또한 이루지 못하리니, 어찌 물건만 그렇고 일은 그렇지 않다 하겠는가.
  (주석 93) 궁전의 목재. 낭묘는 나라의 정치를 하는 궁전. 정전. 묘당.
  한 나라의 정부가 되자면 사방의 인재들을 당 모은 후에야 비로소 정치가 이루어지거늘, 그 사람의 바르고 굽음이나 선하고 악함을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자기를 따르고 자기 명령에만 복종하는 자들만 취해 쓰니, 이는 한 나무의 가지로 궁전을 지으려 하고 한여우의 겨드랑이가죽으로 갖옷을 만들려 함이니 어찌 옳다 하리요. 정치요인들의 행사가 틀림없이 이와 같도다.

  민지소능자불동이잡처어하하나니 자상달하즉 민각진기능이역어상이어늘 불차지위하고 사지양분삼분하야 유여당자만 취지하니 이는 폐옥취석지행이라 불가찬야로다.
  욕언지장이나 장즉필궁어취모역자하리니 도해어구덕고로 이차지필하노라.
  (풀이)
  국민들 가운데 능력있는 사람들이 정부와 뜻을 같이하지 않고 밑에서 잡다히 거처하니, 나라의 위아래가 잘 소통되면 백성들이 각기 그 능력을 다해 위를 위해 일하거늘, 이렇게 하지 않고 둘, 셋으로 나누어 오직 여당만 취하니 이는 옥을 버리고 돌을 취하는 행위니 찬동할 수 없다. 말이 길어지려 하나, 길어지면 반드시 반역을 꾀하는 사람으로 취급당해 곤란해지리니 도이어 입으로 쌓는 덕행에 해가 되는고로 이로써 붓을 그치노라
  임진(1952년) 9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


    47. 소유권과 점령권의 공권과 사권을 논하여 보자
  산에 가서 사슴이나 누루가 출현되면 무기를 가진 사라이건 공수로 있는 사람이건 공수면 곤봉이라도 가지고 자기 힘 닿는대로 쫓아 보는 것이 상리다. 이것은 물의 소유권이 없는 관계로 누구나 질족자(빨리 뛰는 사람) 선득(먼저 얻음)으로 점령권이 있다. 그런 연고로 그 사슴이나 노루를 쫓는 사람을 누구나 무리하다고 않는 것이다. 운이 좋거나 용맹이 있으면 누구든지 그 물을 점령할 수 있는 것이요, 타인의 소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 관계다.
  그러나 일본 나라 공원 같은 곳에 수백 수의 사슴이 있으나 한 사람도 그 사슴을 무기나 곤봉을 가지고 쫓는 것을 못 보았다. 이것은 그 사슴의 소유자가 있어서 타인으로 점령할 수 없는 관계다. 이런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우부우부나 궁협촌맹(궁벽한 시골사람들)이라도 다 잘 아는 일이다. 비기소유(그 소유가 아님)면 수일호(비록 한 가닥 털)라도 불능취용(가져 쓰는 것은 불가능함)이라고 명시된 것이다.
  그러나 자처어명민(스스로 명민하다고 여김)하는 사람도 남의 소유권이 확정된 물건을 침을 흘리며 별별 수단을 다하여 점령코자 하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점령권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제2 점령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당부정할 줄 알면서 하며 혹은 야욕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런 점령욕은 누구나 이기적에서 나오는 것이요, 공익적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산양이 산에 청초를 먹는 것이 자기의 소유권이 없으나 양으로 풀을 먹는 공연한 점령권이 있는 것이다. 절대로 소유권 침해로 보지 않는다. 양이라도 남의 전원에 가서 먹었다면 별문제다.
  우리들도 우리의 제일 귀중한 1초라도 없으면 안 될 공기는 누구의 소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적 점령권이 있는 것이다. 일월성신의 광휘나 금목수화토의 자연이나 춘하추동의 세공이나 누가 내 소유요 하고 혜택을 독점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같이 점령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추호의 이해를 상쟁한다. 이것은 사권을 상쟁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신비를 누구나 다 자수함으로 점령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소유권 침해라고 말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하늘이 심심장지(깊이깊이 감춰둠)한 신비를 충분한 수련과 성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막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 신비를 얻으면 성현군자나 영웅호걸이나 자기 실력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소소한 이해에 생을 걸어놓고 남의 소유권 침해를 하나 이는 오로지 사권에 한한 것으로 평생을 보내면서도 하늘이 심심장지하고 성심성의를 다하여 수련하는 자에게 보상하려는 신비는 누구나 다 점령할 수 있는 공권인데 감히 취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국한된 사권의 남의 소유로 되어 있는 재물을 점령코자 말고, 취지무금(취해도 금함이 없음)이요 용지불갈(써도 마르지 않음)하는 공권을 자기의 성심성의로 비상력을 내어서 점령하면 산에서 출현한 사슴이나 노루를 쫓는 것과 비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자기것이 아니라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보고도 자기 금력 외에는 무관심하나 이물질욕을 조금 떠나서 정욕이나 정치욕이나 명예욕 같은데 가서는 망사생(죽음과 삶을 잊음)하고 남의 소유권을 알면서도 침해하는 자가 부지기수라. 어찌 이런 사권 점령욕에 열중하며 한이 없는 공권 점령욕이 없는가. 아무리 보아도 가석한 일이다.
  세상에 사적으로 하는 일도 평생을 다해야 소득이 얼마 되지 못하는 것인데 이 영영구구하는 사람들은 물심양면의 사소한 소유권을 가지고 천년만년을 자기 독자의 소유가 될까 하고 망상하는 것이 일방으로 가소하며 일방으로 가석한 일이다. 고인의 말씀에 어도 아소욕(내가 원하는 바)이요 웅장(곰 발바닥)도 아소욕이나 불가취겸(다 갖기는 불가함)인데 사어이취웅장호(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함)리라 하였으니, 인생 백년간에 공권이나 사권을 다 겸치 못할진대 그 사권을 버리고 그 공권을 취할 바라 하노라. 아무리 취하여도 소유권 침해가 안 되는 것이다.
  임진(1952년) 9월 17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48. 궁시기소불위
  고인이 말하기를 궁시기소불위(빈궁하면 그 하지 않을 바를 생가함)라 하였으니 고인도 아마 궁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생각해볼 여가가 없이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하고 덥석덥석하는 것이 상례인 것 같다. 그래서 궁한 사람이 극히 궁해서도 그 소위(행위)가 변함없이 양심적이요 허둥지둥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소양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고사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위라는 것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유심이위(의식적 행위)도 있고 무심이위(무의식적 행위)도 있고 진위(진짜 행위)도 있고 가위(가식적 행위)도 있고, 반진반가위도 있고 실위(실속있는 행위)도 있고 허위(헛된 행위)도 있다. 또 반실반허유도 있다. 이 위 저 위가 위는 다 위요, 이 불위 저 불위가 불위는 다 불위다. 이 불위도 욕위이불능위(하고자 하나 할 수 없는 행위)도 있고 불욕위이불위(내키지 않아 하지 않음)도 있고 지이불위(알면서 하지 않음)도 있고 가위이불위(할 수 있으매 하지 않음)도 있고, 역부족이불위(힘이 부쳐 하지 않음)도 있고 지부족이불위(지혜가 모자라 하지 않음)도 있고 불상봉이불위(서로 만나지 못하여 하지 않음)도 있고 상봉이불위(만났는데 하지 않음)도 있고 부득허이불위(허락을 얻지 못하여 하지 않음)도 있고 득허이불위(허락을 얻고도 하지 않음)도 있다. 이 종종 불위를 동일시하여 불위라 하면 고사방식이 어떻다 하겠는가.
  제일 먼저 위든 불위든 그 원인을 심구할 필요가 있다. 위불위지간(하고 안 하고의 차이)인데 무엇이 그리 심구할 것인가 하나, 고사가 허술하면 후세 구안자(안목을 갖춘 자)의 책을 면치 못할 지라. 그런고로 심사숙려 라라는 것이다.
  '맹자'에 불위자(하지 않는 것)와 불능자지별(할 수 없는 것의 구별)을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인증을 비거(비유를 들음)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협태산이초북해를 어인왈아불능이라 하면 시는 성불능이어니와, 위장자절지를 어인왕아불능이라 하면 시는 불위야언정 비불능야이니이다.
  (풀이)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일을 나는 못한다고 남더러 말하면 이것은 정말 못함이어니와, 어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일을 나는 못한다고 남더러 말하면 이는 하지 않는 것이언정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석 94) '맹자' 양혜왕 상편에 나옴.

  라고 인증비거(증거를 인용하여 비교함)를 하셨다. 이불위라는 것은 가위이불위(할 수 있지만 안 함)를 위(이름)함이요, 다른 불위를 말한 것이 아니다. 궁시기소불위라면 다른 궁자 같으면 가위(할 수 있음)할 일을 이 궁자는 안빈하고 불위하든지, 인궁(궁함을 참음)하고 불위하든지 했다는 궁시기소불위라는 것이다. 타궁자 같으면 무소불위(안 하는 것이 없음)인데 이 궁자는 어떤 일을 가위이불위(할 수 있어도 안 함)하니 타궁자의 비가 아니라고 하는 말이다. 빈천이라고 불이기본의(그 본뜻을 옮기지 않음)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빈천이라는 것이 침입하였으나 감히 본인의 굳은 의지를 좌우하지 못하고 여전히 가행지사(해도 좋을 일)를 가행하고 불가위지사(해서는 안 될 일)를 불위하여 조금도 궁하다고 의지가 동요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궁은 비록 경제적으로 궁하나 도의적으로는 풍부한 연고다. 우리도 궁한 자라 혹인이 무소불위라고 궁하니 평시에 안 할 짓을 아무가 그런 짓을 한다고 책을 안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임진(1952년) 9월 22일 봉우 자경하노라


    49. 아원수의 등장을 보고 한국전선이 동요될까 하는 염려가 우리 인사들에게 많음을 보고
  (주석 95) 아이젠하워 원수
  제2차대전이 승부가 거의 결정적으로 되었을 때에 승리를 자신하는 연합국 측에서 제1차 막부(모스크바)삼상회담이 있었다. 자기들 말로는 전쟁 종말 후에 각국의 평화를 위하고 동양 문제와 우리 한국독립 문제를 부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그 당시에도 기술이 있었으나 일경 고등계 압수품으로 없어졌고 그 후 '내 이념'이라는 책자에도 '우리 조선 문제'라고 하여 이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또 다시 재록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 이념' 이라는 책자 역시 고등계 요시찰 예비검속 때 압수당한 관계이다.
  (주석 96) 2943년 10월 30일 미, 영, 소의 3대국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회합하여 발표한 대국협력에 관한 선언.
  막부삼상회담에서 물론 다른 문제도 많을 것이나, 동양 문제가 등장하였다면 영미소 3상만 회담되고 중국에서 불참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내 사견으로는 백색인종들이 자기들의 유리한 조건을 비밀회합한 것이요, 무슨 동양평화니 한국독립이니를 운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언해 두노라. 이 증거는 소소(밝디 밝음)하다고 본다. 그 다음 카이로회담이나 얄타협정이나 다 동일한 의미라고 본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미국의 기정방침이 있는 것이요, 무슨 스씨가 대통령이 된다고 그 기정방침이 그리 용이하게 없어질 리가 없다고 본다. 스씨가 대통령이 되든지 아원수가 대통령이 되든지 미국의 전통적 정책은 절대 불변할 것이라는 말이다. 아원수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졸지에 불리한 조건이 나올 리도 없고 또한 유리한 조건이 나올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 나라 전통적 정치 그대로일 것이다.
  (주석 97)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스티븐슨.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에게 패배.
  하고인가 하면 미국이 장개석 정권을 후원하는 것을 보라. 모택동에 연전연패할 당시에 미국에서 국부군을 절대원조하였으면 금일 장개석이 대만 일우(한구석)에서 저지경을 당하고 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외양으로 후원합네하고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관계로 모택동은 소련의 적극원조를 얻어서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4억 인민에게는 적극적 원조를 않는 미국이 어찌 우리 삼천만인 한국족에게 한하여 적극적 원조를 할 것인가 생각할 여지가 있다. 삼상회담에 우리나라를 20년 이상 신탁하고 성적이 불량할 때는 또다시 신탁을 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미국이 하였고, 비록 군사적 해결방책이라고 하나 하필 세계대전의 평화해결책이 우리나라 38선에 미소 양군이 평분해야 군사적 해결이 나지 만약 우리나라 전체를 미국이나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점령하면 군사적 해결이 못 난다는 조건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백인종들이 우리 유색인종의 완전독립을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요, 무사하게 자주독립되는 것도 그리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우리나라나 독일이나를 반분씩 점령해서 미소 양세력 하에 존재하며, 분쟁이 나서 서로 상쟁하여 이 상쟁을 원조한다는 명목으로 장기적 미미부진하는 원조를 하면 남북이 서로 파괴멸망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고, 중국도 역시 이 전쟁에 참가해서 파괴되고 또 장개석과 중공도 상쟁해서 자멸을 초래하면 1세기나 2세기까지는 갱기(다시 일어남)할 여유가 없을 것이니, 이 지경이면 강국의 식민지나 시장화하는 외에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독일도 역시 이 참화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내 억측이 아니요, 필연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경과를 보라. 군정시대에 미소공동위원회라는 것도 너희끼리 해보라고 실컷 상쟁을 붙여놓고 종말에는 아무 소득이 없이 종결하였고, 6, 25사변 당시에도 이북의 준비하는 것을 미군은 탐지하고도 국군에게 준 무기는 절대로 실전에 사용할 무기가 못 되었다는 것은 국군으로서는 다 잘 알 것이다. 군대훈련용에 지나지 않는 것을 주고 국방을 하라고 하니 이것은 숙수대사(손을 묶고 죽음을 기다림)하라는 말과 다를 것 없다. 거기서 6, 25사변에 대구까지 미군도 이렇다는 대항도 못하고 후퇴하여 9, 28 수복시에 일기로 양서, 양북까지 진격하였다가 또 1, 4후퇴에 한강선을 넘어오니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전략적이 아니요, 우리 강산 우리 민족을 다시 갱기 못하게 파괴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 안 된다.
  또 한 가지는 물산 풍부한 미국으로 우리나라에 건설재건을 목적하는 공업시설이라고는 일호반점 유의 않는 것도 역시 시장화하자는 것 외에는 타조건이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기정방침이 아주 있는 이상 스씨가 나오건 아원수가 나오건 일반이요, 또는 우리나라와 같이 대통령 1인이 그 나라를, 정부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미리 이 정책을 완수해야겠다는 의사가 있으면 그 정책을 완수할 인물을 선거하는 것이라 아원수의 당선은 미국민의의 표현이요, 절대로 아원수가 당선되었다고 미국민의에 배치될 정책이 나오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휴전회담이 1년이라는 긴 세월을 연장하는 것도 외면으로는 이 전쟁을 평화로 휴전하자는 형식이나 실상은 남북한을 통하여 시일이 연장될수록 파괴와 희생은 점점 많아질 뿐이요, 하등의 호소식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실상은 유색인종의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나 소나 영이나 불이나는 다 우퇴조로 당당한 유권자들이요 그 다음 갱기코자 해서 차기라도 결승전에 참례할 우려가 있는 나라나, 장래라도 선수 될 가망성이 있는 민족이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침해될까 염려해서 아주 영양부족으로 연습을 못해서 예선 당시부터 퇴장하거나 입장코자 할 가능성부터 소말 시킨다는 것이다. 제일 장래성이 있는 중국을 내쟁으로 정신병을 만들어 놓아서 금치산 선고를 내리고 다음 우리나라도 장래에 선수 희망을 가진 소년이라고 아주 병신의 불구자를 만들어서 선수는 그만두고 운동 구경도 못 가게 만드는 격이다.
  이 다음은 일본이 있다고 본다. 일본을 미국이 그리 귀해서 장래 선수권 쟁탈전에 또 등장할 염려가 있는 민족을 그저 두지 않으리라고 본다. 내 본 바에는 아원수가 4년 재위기에 일본을 외양으로는 아주 해방하는 것같이 하고 아주 민족적 대치명상을 주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아원수가 등장해서 미국인으로 당연히 있을 일이요, 또 미국인 수판으로 보면 세계인구의 반부 이상을 황색인족이 차지하고 있으니 중국, 한국, 일본만 처리해 놓으면 그 다음 약소국 기개(몇 개)와 인도, 터키니 하는 나라는 아직 자립하기도 곤란하니 자기네의 우퇴권을 침해 못할 것이니 그 다음 흑인족도 별고 백인족과 상대할 곳이 없다. 그러면 세계는 4분해서 4분의 3은 무권자로 취급하고 4분의 1이 유권으로 자처한 중에서 또 우퇴 4조에서 자기편이 3조요 상대가 1조밖에 안 되면 또 1조가 부전퇴가 되리라고 수판을 놓을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전통적 정책일 것이다.
  그러나 세사는 여기서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다.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제4--5등국에서 일약 1등국으로 약진되었고 독일이 보불전쟁 이후로 가국이 되어 세계1차대전에 패하였다가 다시 재거두하여 구주를 석권하였었고 오지리(오스트리아)는 백년래로 노제국으로 제1차세계대전시까지도 강국이었는데 그 후로 등외로 취급되고 토이기(터어키)도 멸망에 가깝던 나라가 케말파샤가 난 후로 다시 2등국 지위를 보장받고 서방아(스페인)는 혁명으로 좌우가 상쟁하더니 프랑코 정권의 통이로 금차대전에 엄정중립하고 상당한 전리가 있어서 그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장래도 백인족의 수판대로 백인족의 만년왕운 하에 유색인족은 아주 노예생활을 면치 못할 줄로 미국에서 예산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이번 6, 25사변 계기로 한국에 조선족 간의 동족상잔이 되고 또 중공군이 북한에 가답해서 동일 황색인종 간에 상잔이 되고 잉 배후에서는 다 같은 백인종이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황색인종으로 자각하는 날에는 내가 항상 말하는 중인조(중국, 인도, 조선)동맹에 일본이나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가 다 가담해서 황인종 대연합으로 백인종을 대할 날이 그리 멀지 않으며, 막부(모스크바)에 중인조 국기가 연합해서 휘날릴 날이 역시 불구할 것이라는 것과, 황백환국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확언해 두는 것이다. 현상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기상천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될 확실성이 잠재한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원수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우리가 염려할 것도 없고 환영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비록 미소가 국책으로는 황색인종의 재기를 불허하나, 또 아전인수하고자 하는 양대음물(두가지 큰 음험한 물건. 여기서는 미국과 소련)들이 서로 장계, 취계해서 각기 제 나라에 유리하려는 근본방침이 있는 관계로 이 두 놈이 서로 신용을 지키면 우리는 백년재기 못할 굴욕이 있을 것이나, 이놈들이 욕심에 신용을 못 지키는 데서 우리의 갱기점이 나오는 것이요, 이놈들의 비밀이 아주 폭로됨으로 우리 약소국가들의 의존성이 없어지고 자립성이 나며, 한민족, 한나라의 자립으로는 부족해서 선치자(먼저 나서는 자)의 일언반사로 아세아 대연맹이 반드시 성립된다는 것은 내가 언제든지 말하는 것이다.
  장개석이 을유 8, 15에 각 장군들이 승전을 축하하니, 장개석이 말하기를 문전에 소적은 물리치었으나 장차 올 대적은 누구의 힘으로 막을까 하고 통곡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장개석의 영웅루를 항시 동정하는 바이다.
  이 붓을 든 것은 우리 인사들이 스씨가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 전쟁에 유리하니, 아원수가 되어서 불리하니, 하고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고 내 생각에는 아무가 미국대통령으로 되든지 미국 전통적 정책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아원수의 당선은 민간이나 미국 전체가 공화당 정책이 금번에는 사용될 시기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 인사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이 붓을 든 것이며, 우리들도 하루라도 빨리 의존병을 치료하고 정신만이라도 속히 자립하라는 경고로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원수를 초청하였으나 아원수가 한국을 와 보아서 한국전쟁 실정을 알고 안 와 보아서 실정을 모를 위인도 아니요, 이 대통령의 초청이 그리 유력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유식자가 아니라도 다 알 일이며, 설사 아원수가 내한한다 하여도 이는 수십만의 국련군 장병을 위함이요, 하등 우리 한국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주 확언해 두노라.
  임진(1952년) 9월 27일 여해기하노라


    추기
  아원수가 미국 대통령 입후보 당시에 비록 한국에서 전쟁은 승리를 못할지언정 이 이상 미국 청장년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군 대신 국부군(대만의 장개석 군대)으로 대체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전미국인에게 호인기를 얻은 요점이다. 그런데 스씨 편에서는 우리도 그 의사는 있다. 그러나 만약 미군이 철수하고 한국군이 방어한다면 공산군의 마제(말발굽)가 또 남한을 답파하리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책이 우리를 더 원조하는 것도 아니요, 공화당 정책이 우리를 더 고립시키는 것도 아니다. 우리 국군에게 완전한 무기를 대여하고 방어하며 진공하라고 한 일은 없다. 극약, 극소의 병기와 공급부족한 보급으로 현 국군이 그만치라도 용전하는 것이 그래도 우리의 전통적인 용감성이 아니면 일선 장병들의 비상간고(온갖 고생을 고루 겪음)임은 다 말할 것 없다.
  그러나 국군들도 후방부대들은 정신계몽이 덜 된 감이 없지 않다. 군인으로서 탈선행위가 있는 것 같다. 일선과 후방의 구별이 없이 건투정신으로 일치하여 정부야 무어라 하든지 군대나마 일치 되기를 바라노라. 미국이 아니면 자립을 못하려니 하고 있지 말고, 백방으로 주선을 다 해서라도 자립할 준비나 잘 해서 비록 미군이 철거하더라도 우리는 이렇다 하고 완전히 승리해서 비록 정치는 자립못하나 군대만은 특수하다는 세평이 나오기를 바라노라.
  여해기우유신정사하노라


    50. 사불가실기 모불가소홀
  (주석 99) 알운 기회를 놓칠 수 없고, 일을 꾀함은 소홀할 수 없다.
  하갈동구가 각유기시하야 수호백구지귀나 불귀어불한지지요, 수유경저나 무용어불열지시라. 고로 주사자필선심기회연후에 가이주사요 모계자는 당주밀연후에 가이성공이니, 약소홀즉목수선이나 혹유오월피구와 납천착갈하여 수백모이불성하리니, 언수이나 행실난이라.
  세인이 숙불모사리요마는 성공자는 백불일이즉 시는 사실기이모소홀이고야라. 실기이모사하면 수량평이 당로나 불족외요, 수모이소홀이면 이려지재도 불족칭이라. 수우부우부라도 불실기기하고 모이주밀즉백무일실하리니, 차즉법임사에 심사숙려하고 사선언후즉무실패지우하리니 기탄세사불여의자십상팔구운이리요. 불여의자지책임어아지불민하고 불재어세인지위아불충하니 선지기이후지피하고 량력도덕하여 상저칠분여유하고 협아삼준지량자를 상택이주사즉십주십성백시백종하리니 하탄지유리요.
  선수수양정신하여 련득정일지공하고 득기이동즉위극인신지제하고 대시이용즉능성절대지공하여 가이유방백세요 약불득시즉고궁이택천하영재이전수심법ㅎ여u 사불멸기공업이 가야요, 불가망동이취소어후세가야라. 사본무대소하고 족어기즉대요 부족어기즉소하니 유적어기여부이라. 불가망구니라. 연이나 득기이부동자는 재불족야요 비무운야라.
  고략서기정우상하고 상세지사는 갱대시간여유하여 상고차략초불비하노라.
  (풀이)
  여름엔 갈포 입고 겨울엔 갖옷 입음이 각기 그 때가 있어, 비록 여우갖옷이 귀하나 춥지 않은 곳에서는 귀하지 않고. 비록 가벼운 모시가 있어도 덥지 않을 때에는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일을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기회를 살핀 연후에 일을 함이 옳고, 계획을 도모하는 사람은 은당 주도면밀한 후에 성공할 수 있으니, 만약 소홀하면 꾀가 비록 좋아도 5월에 갖옷을 입고 섣달 겨울에 갈포를 입어 비록 백 가지 꾀를 내도 성공할 수 없으니, 말은 비록 쉬우나 행함은 실로 어렵다.
  세상사람이 누가 일을 꾀하지 않으랴만, 성공한 이는 백에 하나둘에 지나지 않은즉 이것은 일은 기회를 잃고 모의엔 소홀한 까닭이다. 기회를 잃고 일을 꾀하면 비록 장량과 진평이 벼슬을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일을 꾀하는 데 소홀하면 이윤과 여상의 재주도 일컬을 필요 없다. 비록 우둔한 남녀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꾀하되 주도면밀하면 백에 하나도 잃음이 없으리니, 이는 곧 무릇 일에 임함에 일을 먼저 하고 말은 뒤에 하면 실패의 걱정이 없을 것이니, 어찌 세상일이 뜻대로 안 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열에 여덟아홉이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의 책임은 자신의 불민함에 있고 세상사람의 나에게 잘못함에 있지 않으니, 먼저 자신을 알고 뒤에 남을 알며 힘을 헤아리고 덕을 재며 늘 7푼의 여유를 두고 3푼의 양을 나에게 맞출 것을 항상 가려서 일을 하면, 열 번하면 열 번 이루고 백 번 시작하면 백 번 마치리니 어찌 탄식함이 있으랴.
  먼저 모름지기 정신을 수양하여 수련으로 정일의 공을 얻고 기회를 얻어 움직이면 지위가 인신의 최고에 오르고 때를 기다려 쓰면 능히 절대의 공을 이룰 수 있어 길이 백세에 향내를 남길 수 있고, 만약 때를 얻지 못하면 빈궁을 고수하며 천하의 영재를 가려 심법을 전해주어 그 공업이 없어지지 않도록 함이 옳고, 망녕되이 행동하여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 옳다. 일에는 본시 크고 작음이 없고 자기에 만족하면 큰 일이요 자신에 불만하면 작은 일이니, 오직 자신에게 적당한지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망녕되이 구함은 옳지 않다. 그러나 기회를 얻고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재능이 부족함이요, 운이 없음이 아니다.
  고로 그 정황을 간략히 위에 서술하고 상세한 것은 다시 시간여유를 기다려, 간략히 서술하느라 갖추지 못한 것을 상세히 고하겠노라.
  임진(1952년) 9월 27일 밤 여해소기우유신정사


    추기
  욕상기즉가한우마고초초근기하고 갱대후일 하노라
  (풀이)
  상세히 쓰려 한즉 너무 많으므로 초초히 삼가 쓰고 뒷날을 다시 기다리노라.


    즉일 부기
  근일안혼태심소기임지두지왕래불능성작소조로이여회상선부형지칠팔십소령유간세서능사세자즉차무내소장지시불근자신이조로태심고야가괴가괴
  (풀이)
  요즘 눈이 어둔 것이 심해서 손가락 가는 대로 쓰는 바,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 일찍 늙음에 가소롭다. 내가 돌아가신 부친의 70--80 높은 연세를 생각건대 외려 능히 잔글씨를 보고 쓰셨는데, 이는 젊었을 때 자신을 삼가지 못해서 일찍 늙음이 이처럼 심한 까닭이라. 부끄럽고 부끄럽다.


    51. 앞으로 다가올 민족적 변동에 대비하자
  정국은 점점 미묘난측하게 변해지고 전국(전쟁국면)은 1년 간이나 교착상태에서 일진일퇴로 진전을 불허하고 있던 것이 의외로 금추에 중공군이 전선적 대공세에 아군도 약간의 피손(손실을 봄)이 있었고 수도사단은 대손실을 당하였으나, 적군도 우리의 10배에 가까운 손해을 보고 이북 70여 도시에 대폭격으로 북한은 아주 폐허가 되고 우리 남한은 수십년래의 초유한 풍한재에 수재를 겸하여 민생문제는 더 지장받을 수 없을 지경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위정당국자들은 소호의 반성이 없이 여전히 민생문제는 도외시하고 당파적 분쟁만 시사(일삼음)하니 민생이 하죄(무슨 죄)인가. 소위 모모 단체의 최고진영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자기네의 선거에 사용할 정도요, 그 이하 간부진영들은 각자 이권획득에 정신이 없어서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로는 별볼일 없다는 의미인지 각 단체가 말초기관은 전부 휴면상태다. 이것이 애국단체며 이것이 청년운동이냐. 도시 인민을 기만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다. 또 자기네에 유리한 사용조건이 있으면 중앙으로부터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하 애국단체들이며 청년운동일 것이다. 우리가 왜정시대에서 애국운동이니 청년운동이니 하던 시대와는 전연 의의가 상위하다. 우리들의 당시 운동은 우리들 자신부터 희생이 되며 헌신적으로 애국운동을 하였는데, 현하 각 단체 운동자들은 각자 이권을 도득(꾀하여 얻음)해 놓고 자기네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애국이니 청년이니를 표방하고 운동을 전개해서 이는 간부진영이 득하고 손은 뇌동부화한 인민이 보게 하는 것이 현하 정세다.
  자유당도 각도당수가 거의 각도지사로 임명되고 또 중앙간부들도 다 요직에 임명되었으니 하부층은 어떠한가 하면 도군당수에게까지 다 이권이 있고 그 이하는 아무 소득이 없다. 하필 자유당뿐이랴. 한청(한국청년단)도 그러하고 한부(한국부인회)도 그러하고 다른 단체가 안 그런 단체가 없다. 이 다음 선거가 있다면 물론 또 각 단체에서 운동이 전개되리라고 본다.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자기네의 선거 때만 이용할 공작물화하는 현상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요.
  또 정부 장관급도 장관을 도득하는데 자금을 필수조건으로 하고 장관으로 임명되면 이 장관이 행정부문의 소속사무를 총감독하여 책임완수를 한다느니보다 이 장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동안 기십억, 기백억의 모리 장소로 아는 것이 보통이니 이것이 위정자로 할 일인가. 그리고 국법에 중죄를 진 사람도 금전만 많으면 다 무사하게 되고 신성모 같은 장관은 방위군 사건이나 거창 사건에 책임자인데 일본으로 피신하였다가 시일이 경과한 후에 귀국해서 법적으로는 아무 말도 없고, 해양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등사가 얼마든지 있다. 백성이 나라를 믿고 살 수가 있는가. 자상달하(위에서 아래까지)로 안 그런 것이 없고, 안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러니 민간도 서로서로 기만을 못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 같다. 아마 이것이 극도에 달해가는 도중이라고밖에 안 보인다. 물구즉변(현상이 오래되면 변함)이라고 이 혼란이 극도에 도달하면 불구한 장래에 평화가 오리라는 것도 확정한 사실이요 또 이 편화가 오기 전에 반드시 무슨 충동이 생할 것도 자연의 일이다. 이 과도기에 있는 우리 인민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불쌍하다는 말이요. 이 내두에 올 변동이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멀어도 제1기는 명년 하간이 아닐까 한다. 이 변동이 나온 후라야 제2기 변동이 나고 이 제2기 변동이 태동함으로 비록 잠정적이나마 정국, 전국, 민생문제가 역시 변동할 것이다. 완전한 변화가 있기 전에는 완전한 안정이 없는 것도 자연한 일이라. 우선 잠정적 변화가 옴으로 역시 잠정적 안정이 오리라는 예언을 가림없이 해두는 것이다. 이 잠정적 안정이 옴으로 장래에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재건 부흥을 의미하는 시기가 온다는 것도 가림없이 예언하겠노라. 재건이나 부흥을 하자면 또 민생고도 있고 재건이나 부흥의 방해물도 제거해야 할 것이니, 순조로이 되면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혁명이라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문부문을 달리하고 설명을 요할 것이나, 이렇다는 예고로 그치고 이 제1기 변동이 옴을 맞이하기에 우리 민생문제의 기다(수많음)한 애로를 타개하지 않으면 일조일석에 곧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반드시 무슨 충동으로 화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있으나 충동이건 아니건 불계하고 우리는 생활을 극복해 가며 본심을 변함없이 지키고 제1기 변동에서 제2기 변동까지의 과도기를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주석 100) 1953년 여름. 즉 7월의 한국전쟁 휴전을 의미함.
  (주석 101) 제1기 변동 이후 5, 16혁명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5, 16군사혁명정권의 슬로건은 재건이었고. 박정희정권 하에서 어찌되었든 경제발전으로 민생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주석 102) 제1기 변동 (1953년)에서 제2기 변동(1984년)까지의 과도기는 약 30년으로 추측됨.
  그리고 우리는 이 시기를 민족에게 예고하고 또 차안피안(이 언덕 저 언덕)에서 민족의 도교(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야 우리의 임무를 하는 것이요, 또 제2기가 온 후에 그 다음이 더욱이 우리의 민족에게 보답할 날이라는 것을 하일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일생을 이 사업에 헌신하는 것이다. 먼저 나라는 선입간을 없애고 민족의 충복이 되면 이것으로 만족한 것이요, 제일 추현양능(어진 이를 추대하고 능력있는 이에게 양보함)하고 허심탄회하며 동지규합해서 이 과도기에 일꾼이되고 그 다음 대동책 실현에 일꾼이 됨으로 최고지상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일개인 사생활이야 삼순구식(한 달에 아홉 번 먹음)을 하기로 무슨 구애될 것이 있으리요. 유아동지(오직 우리 동지)들은 이 목적달성에 전심전력을 다할 뿐이요, 사생활 여하로 진로를 좌우해서는 남아가 아니라는 것을 쾌히 맹서하자.
  잊지 말라. 반드시 올 백산운화 대동정책이 우리의 손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동지들은 더욱 굳은 결심으로 대오를 정제하고 명령을 대기하라. 이 명령은 대황조의 명령이요, 다른 사람은 감히 부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각오하라.
  제1기 변화가 우리의 준비명령이요, 제2기 변화가 우리의 차려 명령이 되는 것이다. 동지들이여, 잊지 말고 시기를 고대하라. 농산어촌의 순량무결한 동지들이여! 우리의 통일완수도 여기 있고. 우리의 평화건설도 여기 있다.
  임진(1952) 10월 17일 봉우 지죄근기하노라


    52. 때를 아는 사람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다고 한다. 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때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가 문제다.
  때라니 부유(하루살이)는 조모(아침저녁)가 일생이요, 인생은 백년이 일생이요, 요지벽도(신선세계의 푸른 복숭아)는 삼천세일결자(3천년 만에 하나 열림)하고, 춘은 팔천세위춘(8천년을 봄으로 함)하고 팔천세위추(8천년을 가을로 함)하 하니 이것이 때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지 그 때가 이만치 많은 것이다. 때가 있으나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일국이 흥하였다가 쇠하자면 기백년이 되거나 최소한이라도 1세기는 되어야 흥망성쇠가 판이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 때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부터 우리나라의 장래에 난리가 나서 인민의 도탄이 된다고 예언하신 분, 고철(옛적의 밝으신 분)의 말씀을 믿고 피란 경영하시던 것이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백여 년 전부터다. 그때부터 이 때라는 것을 확실히 아지 못한 관계로 이런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피란이니 난리니 하도 들어서 청각이 아주 둔해진 것이다. 아무가 아무 소리를 하든지 별 관심을 하지 않았다.
  (주석 103) 참죽나무 춘, 상고에 대춘이란 사람이 만년 이상을 살았다는 장자의 우언에 의해 장수의 비유로 쓰임.
  그러다가 6, 25사변이라는 난리가 나자 다른 나라는 모르되 우리나라로는 우사 이래 초유한 난리다. 이 난리가 고철들이 예언해 놓으신 그 난리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지내고 보니 이 때가 그 때라는 말이다. 그러니 때, 때, 하여도 6월 25일까지 발발하기 전까지는 이 때를 안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6, 25사변을 당해서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다가 급한 지경을 다 지내고야 이번 난리가 고철의 예언대로였다고 지낸 후에는 다 그 때를 알았다.
  그러면 이 다음 때는 언제인가 하면 또 묘연하다. 안다는 사람들이 다 말하던 남생이가 되었다. 그리고 보면 때를 아는 사람이 극히 귀한 것이다. 고성의 말씀에 치구즉란(평화가 오래면 어지러워짐)이요 난구즉치(난리가 오래면 평화가 옴)라는 때는 누구나 알 것이나 이것도 또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성쇠존망이 혹장혹단(길거나 짧음)하고 혹유일패불기자(혹 한 번 패하면 일어 나지 못함)하고 혹유패이선홍자(혹 패해도 다시 일어나 흥함)하고 혹장성불쇠자(혹 오래 번성하고 쇠하지 않음)하고 혹잠성즉쇠자(혹은 번성하자 곧 쇠망함)하니 이 때라는 관절이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 알기 어려운 때를 찾지 말고 수인사하고 대천명 하라는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천불능궁력색가(하늘이 힘써 일하는 사람은 궁하게 하지 않는다)오 인수감모수신사(사람이 누가 감히 몸을 수양하는 선비를 업신여기랴)라는 말씀이 그때는 때대로 두고 내 할 일이나 잘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도 앞으로는 때는 때요, 우리가 빈천한 자리에 있으니 '소빈천하얀 행호빈천하라'는 말이다. 안분지족(분수를 알고 만족함)하면 그 때가 어디로 가지 않고 올 것이요, 수인사도 않고 무슨 천명만 기다리리요, 그러니 다른 말 말고 안빈낙도 하라는 말이다. 때는 때대로 오더라도 그 때를 받을 만큼 준비하고 고대하라는 부탁이다. 이것으로 이 붓을 그치노라.
  (주석 104) '빈천할 때에는 빈천한 대로 살라.' '중용' 제14장에 보임.
  임진(1952년) 11월 초일일 봉우서


    추기
  시호시호(때로다, 때로다) 이내 시호, 불재래지시호(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로다. 장부일지 시호로저. 오만년지시호로다. 늘부른 최수운은 장래의 시호시호를 안 사람이나 그시호를 알 사람이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53. 달마조사
  달마조사는 천오백여 년 전에 남부 인도에서 수련 득도하고 배로 바다를 건너 중국 남해 지방에 이르렀다. 당시 양나라 무제의 궁중에서 오랫동안 설법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아홉 해를 면벽한 뒤 더 수련하는 중에 제자 2조 혜가를 만나서 비로서 전법하였다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중국에 불법이 들어오기는 한나라 명제시대였으나, 조사는 중국 선종 6조의 창조로서 별별 기적도 많았고 불법의 전해진 경로로 보아도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가섭불의 의발을 받은 정통이다. 우리나라 불교 선종사에서도 이 조사가 초조가 되며, 우리의 목전에서 9년이라는 긴 세월을 면벽의 실지 수련방식을 전한 것도 또한 조사가 처음일 것이다. 이것이 석가모니불의 설산 6년이나 중니(공자)의 위편삼절과 같이 후일 학인을 가르친 수범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다른 학자들이 그만한 노심노력으로 장구한 시일을 전공한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물론 시간적으로야 혹 그런 장시간을 요한 분이 많을 것이나 정일한 전공을, 장구한 시일을 통해 수련한 분이 극히 귀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유가의 학인들은 비록 장구한 시일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주로 일용사물지학이란 백과사전식 학습이라 정일한 정공이라고는 못 본다. 박람 박식을 하자니 어찌 하나에만 전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이미 불법 전승의 정통을 의미하는 의발을 받은 터에 또다시 중국으로 와서 9년면벽을 하였다. 함은 뒤사람들에게 심법 수련의 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주석 105)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자꾸 숙독하였으므로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 
  유불선이 공부하는 방식은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물론 초입문에는 서로의 발단지가 다른 관계로, 또한 풍속과 인종의 자질의 청탁이 상이하므로 약간 방식도 다르나 전공하는 방식은 부지불각중 동일점을 보게 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게라는 것이 자가득도를 대표한다. 달마조사는 2조 혜가에게 의발을 전하고 아래와 같이 게송을 읊었다.
  
  오본래자토
  전법구미정
  일화개오엽
  결과자연성
  (풀이)
  내 본시 이 땅에 와
  불법(진리)을 전하여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하였네
  한 송이 꽃이 다섯 잎으로 피어나리니
  열매는 절로 맺어지리라.

  이것은 중국에성 자기 이후로 선종이 다섯 갈래로 분류될 것을 통각한 말이었다.
  2조 혜가는 득도 후 역시 자신의 제자 3조 승찬에게 의발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본래연유지
  인지종화생
  본래무유종
  화역불회생
  (풀이)
  본래 인연은 땅에 있어서
  땅으로 인해 씨앗은 꽃을 피우니
  본래 씨앗이 없으면
  꽃 또한 피어날 수 없도다

  3조 승찬은 4조 도신에게 의발을 전하니, 도신이 처음 나이 14세에 3조에게 와서 해탈법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3조가 그에게 "누가 너를 속박하느냐?" 물으니 그는 "아무도 속박하지 않나이다." 하였다. 3조는 "그런데 무얼 다시 해탈법을 구하는가?"라고 물으니 도신이 언하에 대오하고 이후 9년 동안 3조를 스승으로 모시다가 다음의 게를 받았다.

  화종수인지
  종지종화생
  약무인하종
  화지진무생
  (풀이)
  꽃과 씨앗은 땅에서 비롯하고
  땅으로부터 씨앗과 꽃은 나지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없으면
  꽃과 땅 모두 생겨남이 없으리

  여기서 3조 승찬은 2조의 연법론을 반복하고 또한 이조의 지원론에 대하여 자신의 인원론을 내세웠다. 
  4조는 5조 홍인에게 의발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화종유생성
  성인지생생
  대연여성합
  당생생불생
  (풀이)
  꽃과 씨앗은 나게 하는 성품이 있고
  성품은 땅으로 인하여 생을 일으키나니
  큰 인연과 성품이 합하여
  마땅히 생과 불생을 일으킬지니라

  이것은 천원론과 지원론, 인원론의 합치점을 말하고 있다.
  5조는 6조 혜능에게 의발을 전하였는데, 6조 이후로는 의발을 더 이상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5조 홍인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유정래하종
  인지과원생
  무정기무종
  무정역무생
  (풀이)
  뜻이 있으매 씨앗을 뿌리니
  땅에서 열매가 다시 생기네
  뜻이 없으니 씨앗도 없고
  성품이 없으니 생겨남도 없도다

  그는 여기에서 천지인 혼원론을 처음으로 주장하여 천원, 지원, 인원이나 삼원합치를 운위할 것 없잉 천지인 혼원론으로서 가늠지려 하였다.
  마지막으로 6조 혜능의 게는 아래와 같다.

  심지함제종
  보우실개맹
  돈오화정이
  보제과자성
  (풀이)
  마음의 땅은 여러 씨앗들을 머금나니
  고른 비에 모두가 싹이 뜨네
  활짝 깨우침의 꽃이 이미 피었다면
  보리의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리라

  즉, '연이니 법이니 무엇이니 무엇이니가 법인 줄 하는가, 이런 가운데에 언제든지 이러니라.'라고 말하면 의발을 다시는 전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초조 달마대사의 게 내용이 직설적으로 법을 표현한 것을 보며 그의 tlarud을 깊이 생각한 바 있었다.
  (주석 106) 다시 기록하면 이렇다: 오본래자토 전법구미정 일화개오엽 결과자연성.
  이것이 연이요 이것이 법이라고 표현하므로 연리 연인지 아닌지, 법이 법인지 아닌지 그 가운데에서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결정이 되지 않을까 하여 직접적으로 법을 설한 것이다. 또한 이법전법, 이심전심에 외형적인 의발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없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6조 후에는 형식이 없어지리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도 정일집중이라는 구어가 참으로 무엇이 정이며 무엇이 정 아닌가. 일이라니 그 일이 참인가 아닌가. 집이라니 어느 것을 집하여 놓치지 않겠는가. 중이라니 이것이 중인가 아닌가 의심해야 옳은가 않는 게 옳은가. 이를 믿는 무엇이며, 의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무슨 연고로 달마조사를 제목하였는가. 안 하면 어떠한가. 내가 이 붓을 드는 것이 옳은가, 안 드는 것이 옳은가, 옳고 그른 것이 없는가. 이래도 무방하고 저래도 무방한가, 잘했는가 못했는가, 대답이 있는가 없는가, 달마는 달마대로요, 봉우는 봉우대로 이렇다고 든 붓인가. 벽상종성(벽 위의 시계소리)은 오경인지 사경인지 그저 소리만 들릴 뿐
  임진(1952년)f 11월 초사일 야심, 계룡산 유신정사에서


    54. 정중재 대면인상기
  (주석 107) 정봉화 선생.
  중재를 상대하기는 벌써 6--7년 전이나 되었으며 그 후도 상봉은 여러 차례 되었으나 온토심곡(마음의 곡절을 조용히 토의함)한 적은 없었고, 서로 인사할 정도였다. 금번은 나도 가극(틈. 여가)이 있었고 중재도 동기휴학중이라 역시 시간적 혜택이 있는 때라 서로 심곡을 온토할까 하고 심방하였던 것이다. 제1회 심방에는 중재의 여행으로 이틀간이나 고대하다가 공행하고 제2차 심방으로 수일간을 대좌하여 별로 가림이 없는 토론을 하여 보았다.
  내 사견으로 보아서는 중재도 백산운화의 역군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그 성의와 자임이 누구에게지지 않을 만한데 여러 가지로 검토한 결과가 대황조(단군)에 대한 문헌만은 자기 역량껏 수집해 보았고, 또 자기 동지들과 해석해 보았고 그 집대성을 한 것 같으며, 양단전과 같이 구월산에 가서 대황조께 치제(제사드림)까지 한 일이 있었으며, 비록 변증법으로는 답변을 못하나 묘연한 신의 묵시가 있는 것 같은 자기의 영응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내가 본 바요, 중재가 자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자임은 자기가 아니고 누구 대황조의 성업을 다시 백두산족속에게 전할 사람이 있는가 하는 묘연한 포부가 보인다.
  여기서 내가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보았다. 문헌적으로는 자신이 있을 만치 연구하였으나, 영적으로는 미미한 영감적 해석이 있을 뿐이요 아직 구체적으로는 백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수십년 간을 호흡법을 계속하였으나 도시 문헌적이요 구전심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중재는 심법만 얻으면 최단시일 내에 확실히 전진되리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대황조 이념에 신성은 족하나 경이 어느 정도인가 문제다. 신이나 성이 족하면 경도 부족할 리가 없다고 보리라.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대황조 성덕을 확실무의하게 인식한 후라야 전심전력을 다하는 신앙이 생기고, 이 신앙에 도가 지날수록 진정으로 경이 생하고 이 경의 도가 극에 달한 것이 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재가 신이 생한 것은 우리민족으로 누구나 단군임을 신하는 데에서 시작하고 더구나 일정시대에 중재는 구한국 명문거족으로 자연 없지 못할 배일사상에서 우리 한족의 우월감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을 연구하는 중에 대황조 학설이 점점 수집되어 민족혼을 살리자는 데서 신이 생한 것이요, 이 신이 도를 지나서 또 성이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되어서 우리 백산족으로 왜놈에게 압박을 면하자면 대황조를 숭봉해서 민족혼을 고취하는 외에 타도가 없다는 데에서 동지도 규합되고 또 다른 대황조 학설을 운위하는 인사들과 상대하여 보니 순수한 학자가 없는 데서 성공을 목표로 성의가 생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성경신과는 노정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대황조의 성덕이 확실무의하게 이러하신 어른이시다라는 것을 안 연후에 다른 성인에 비하여 다시 비류가 없는 성신이신 줄 알면 누가 신하지 말라고 백 번 천 번 권한들 신앙 안 할 수 있느가. 더구나 이 대황조는 직접 우리의 조선(조상)이라는 점에서 자연적으로 신앙이 최고도에 갈 것이며 이 최고도에 간 것이 경이 되는 것이다. 이 경의 정도가 극치점에 간 것이 비로소 성이 되는 것이요, 이 성이 오래 지속된 것이 성공일 것이다. 그러니 중재의 신성이 노정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건 대황조에 대한 신이나 성은 족한 인사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검토하여도 정금미옥은 아니요, 또는 탁마 잘 된 무부(붉은 바탕에 흰무늬가 있는 옥 종료)도 아니요, 천진난만한 그대로의 박옥(쪼개거나 갈지 않은 옥)이라고 본다. 양공(우수한 기술자)을 만나서 절차탁마를 지내면 비로소 미옥이 될 것이다. 현상은 박옥이 무부의 성기 된 대우를 못 받는 것이 현세의 상리요, 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내가 보기에 한되는 바는 그 박옥이 광윤은 하나 거대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애석해하노라. 하루라도 속히 양공을 만나서 그 부윤방달(넉넉하고 윤택함)의 본성이 그대로 발휘해지기를 바라고 이 붓을 그치노라.
  임진(1952년) 12월 13일 봉우서우유신정사


    55. 나의 과거
  여말선초의 공훈으로 왕건이 삼태사를 봉하였으나, 삼위 태사가 다 차수왕랑(왕랑에게 손을 빌림)하여 나조(신라왕조)의 원을 보하였을 뿐, 출사(벼슬에 나감)하지 않고 자손이 고기(옛터)에 상전하니 이 삼태사는 안동 권씨의 시조와 안동 김씨의 시조와 인동 장씨의 시조였다. 그 후 그 자손과 안동 유림에서 삼태사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삼태사묘를 안동읍 중앙에다 거대하게 건축하고 천년이나 숭봉한다.
  이 권태사가 우리 시조요, 그 후 여조의 문청공이 내 21대조요, 문정공 국재 선생이 내 20대조요, 여말선초의 정강공이 내 18대조요, 문충공 양촌 선생이 내 17대조요, 문경고이 내 16대조요, 강정공이 내 12대조요, 임진란 선무원후이신 충장공이 내 11대조요, 병조호란에 강화도에서 순절하신 충의공이 내 10대조요, 판관공이 내 8대조요, 7대조, 6대조 양대는 문학을 닦으시어 출세 안 하시었고, 5대조는 문장과 명필로 저명하시었고, 고조 승지공은 당시 인물로 경상가에서 망이 높으시던 것이요 증조 참찬공은 수졸하시어 상사(생원 또는 진사)로 오래 강상팔대가라는 칭호를 들어시었고, 조부 찬정공은 순후하신 성품으로 음덕이 많으시었으나 청빈하시어 항상 안빈낙도하시었고, 백종조 상사공은 인망이 높으시나 일찍 은퇴하시어 출세 안 하시었고 양조부 규장각 제학공은 천재의 칭호를 받으시고 과장에서 하시든지 웅문으로 종횡하시던 어른으로 불행히 조서(일찍 돌아가심)하시었고, 선고(돌아 가신 아버지) 승지공은 5현제 분으로 백부주(큰아버지)는 백종조부(큰할아버지)께 출계(양자로 감) 하시고 선중부주(둘째아버지)는 생가봉사하시고 선고께서는 제학공께 출계하시었다.
  초년에 많은 풍상을 경과하시고 고종 을미년(1895)에 출사하시어 내외직을 많이 지내시고 정미년(1907)에 고종께서 선위하실 때에 능주군수로 계시었고, 임소에서 계실 때였다. 내가 8세시다. 아무 철도 없을 때였다. 어느날 야심해서 관아 서재에서 독서하고 와서 보니, 선친 내외분이 통곡하시어 아주 실음(목소리가 쉼)하시었다. 나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광무황제(고종)께서 일본놈들의 강압으로 제위를 내놓으시고 태상황이 되시었다. 이런 망극할 일이 또 있느냐, 조정에 가득 찬 역적놈들을 다 소탕치못하고 도리어 그 아래에서 있는 것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못할 일이다. 당연히 군욕신사(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하는 법인데 천리타향에 네 하나를 두고 차마 못하는 내 금일 심정을 네가 후일 장성하면 잘 알리라 하시고 또 내외분이 통곡하신다.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종야통곡(밤새워 욺)하였다.
  그 익일 군민을 크게 모이시고 그 사유를 말하시고 군수의 자리를 폐리(헌 신)와 같이 버리시고 서울 구저(옛집)로 오시었다. 그 후 서울에서 법부 협판이니 내부 협판(내무부의 둘째 벼슬)이니, 대구관찰사니, 평양관찰이니 여러 번 취임 권고가 왔으나 두문불출하시고 전부 거절하시었다. 그러다 경술년에 합병으로 망국되자 곧 낙향하신 것이었다.
  나도 소학교를 졸업하고 약간의 신구학을 수득하였으나, 왜정시대라 독립지하운동으로 혹은 일선에서 무장투쟁도 해보고 혹은 국내외로 선전활동도 해보고 혹은 청년운동도 하고 혹은 동지규합도 하며 외면으로는 아주 낭인 생활을 해오던 것이었다. 그러는 중에 왜경에게 체포되어 수십차 영어생활로 내 반생은 물이 들었었다.
  그러다 을유 8, 15해방을 당하고 보니 도리어 마음이 안정된다. 내 아니라도 구국열사들이 마음놓고 다 입국하시어 어련히 독립운동을 잘 하실까 하고 후퇴하여 보았으나 마음과 같지 않아서 또 임정파이던 한독당에 가입하여 미력이나마 일을 하다가 또 대한민국 경찰에게 몽상에도 없는 피의로 수차 입옥하여 아주 병신이 되었다. 그러다 6, 25사변에는 인민군에게 수개월 영어생활을 하다 기적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현상까지 나온 것이다.
  나야말로 풍풍우우가 하루도 청명할 날이 없는 신세다. 왜놈은 왜놈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인민군은 인민군대로 다 각각 영어생활을 시키니 내야말로 누구를 위하여 싸운 것인가. 내 스스로가 의심이 난다. 그러나 이 몸이 살아서는 이 싸움을 안 그치겠다.
  임진(1952년) 12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하노라


    56. 연정원의 연혁
  내가 아주 소년시대인 임자년(1912) 봄이다. 소학교(충북 영동보통학교) 동창이던 이홍구, 안명기와 그때 우리를 지도하던 소학교 선생님 박창화 씨와 같이 영동 천마산 중화사라는 데를 갔다가 삼봉이라는 고지를 간 일이 있었다. 
  그 고지는 그 산중에서 제2고지로 삼천척에 가까운 곳이라 봉정에서 내가 안계의 광활함과 산곡의 분파됨을 보고 감상담으로 우리가 일보일보의 전진으로 숨가쁨과 피로를 인내하고 이 정상에 오기까지는 아무 쾌활함이 없이 왔으나, 이 봉정에 와서 보니 동서남북의 수백리 산천이 안하에 있고 대등한 속리산이나 덕유산도 평등하게 보이니 우리가 일보전진해서 최고봉을 답파하고 상유천하유지(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음)라는 계한을 정해서 형이상은 형이상대로 형이하는 형이하대로 우리가 최고정을 점령해서 오늘 이 자리에 쾌활감을 잊지 않고 장래의 목표를 최고봉 답파에 두겠다고 말하였다.
  이홍구 군도 찬성하였고 안명기군은 하필 최고 정상이 맛인가 아무 데나 경치 좋고 수석이나 무던하면 세 칸 초당 지어놓고 왕래친지나 접대하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여 세 사람의 의견불일치를 보고 서로 자시(자신의 옳음)를 주장하는 중에 박창화 선생이 소문(웃으며 물음)하기를 최고정상을 가자면 노력이 얼마나 들며 난관이 얼마나 개재한지 알고 최고정상을 목표로 하는가, 의사만은 좋으나 백절불굴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발족을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으로는 더욱이 난관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적규보면 무이지천리요 부적세류면 무이지강하라 하였으니, 백절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내 동지를 규합해서 최고정상을 목표로 오늘부터 출발하리라, 우리의 오천년 역사를 다시 장식시킬 포부를 가지고 적국인 일본을 물리치고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헌신적 진출을 하리라, 생사를 초월하여 애국애족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최고정상 답파를 목표로 나가자, 동지는 모여라, 우리의 기하로 모여라. 제1로 독립전취요, 제2로 민족의 세계제패요, 제3으로 만년평화를 목표하고 나가자 하고 열광적으로 산정에서 대성고호하니, 이군이나 안군이나 박선생이나 다 부지중에 열루(뜨거운 눈물)를 흘리며 우리 민족 독립만세를 부르고 안군도 이 이념이라면 찬성하겠다고 동지규합을 결의하고 귀가하였던 것이다.
  (주석 108) 반걸음이라도 쌓지 않으면 천리에 이르지 못하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쌓이지 않으면 강에 이르지 못한다.
  구 후 박창화 선생이 음적, 양적으로 많은 지도가 있었고, 외양으로 단연계니 친목회니 금란계니 하며 동지규합을 시작하였고 주로 민족정신을 주입함을 목적하고 비록 소년들이나 정수 동지가 상당숫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내가 발기인이 되고 인물고사는 박선생이 해서 비밀을 통하는 동지는 이홍구, 송철헌, 이윤직, 김극수, 김두수, 송우헌, 안명기, 안상호, 김복진, 김기진 등으로 수시 모임을 갖다가 내가 5년 만에 공주로 이거한 후로 각인각산(각기 흩어짐)되어 왕래가 두절되었다. 그 후도 이윤직, 이홍구만은 간간 왕래 하였으나, 기미년(1919) 3월 1일 후로 사회주의가 우리 지역에 들어오자 이 동지들의 태반이 그 방면으로 전환되고 혹은 주위환경으로 아주 중지한 동지들도 많다.
  그 후 나는 만주로 가서 출입하며 독립군 생활을 하다가 만 4년 만에 아주 단념하고 귀국해서 미미한 지하운동으로 외면으로는 신문기자도 되어 보고, 생명보험 외교원도 되어 보고, 약품 채약상도 되고 행상도 되어 보고, 투기업자도 되어가며 백면백작으로 동지규합에 노력해 왔었다. 그러며 유사종교의 간부진들도 동원해 보고, 학교 교원진들도 움직여 보았다. 그러다 왜정시대에 수십차나 영어 신세를 지고 그 동안 공섭단이니 연방사니 계몽사업이니 동지계니 하며 각양각색의 집회를 하며 동지규합에 전력한 것이 동지층으로 수백명이나 되었다.
  8, 15해방이 되자 동지들은 당연히 일층 더 노력해서 독립완수로 매진할 것인데 의외로 동요되어 혹은 관계로 혹은 군인으로, 혹은 사상전황이 되어 현존불변하는 동지가 백여명에 불과해서, 이 동지를 가지고 연정원이라는 연구소를 시작하고 좀 자격이 부족한 동지는 양성해서 완전한 동지로 향상시킬 예산이었다. 그러던 중 6, 25사변으로 동지 중 50여인이 피해를 당하고 아직 수습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우리 연정원의 연혁이며 현상이다.
  연정의 주목표는 물론 정시을 연구하는 데 있으나 부수조건으로 화학, 공학도 있고 문학과 체육학도 있다. 그러나 주목표는 여전히 정신연구다. 이 정신연구가 동서양을 통하고 고금을 통한 동일한 방식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종교로는 유불선 3교가 다 연정 방식이 있으나 각자의 본 바가 달라서 좀 방식의 차이가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현 야소교나 회회교나 정신연구 방식은 대동소이하다.
  내가 말하는 연정원이라는 것은 종교적 숭배정신을 가지고 정신을 연구하라는 것이 아니요, 인신은 소천지니 천지인의 합리화한 원리를 정신연구로 각오(깨달음)해서 물욕의 장벽으로 양지양능(배우지 않고도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지능)이 발휘 못하는 것응 다 환원해서 천지의 원리대로 풍부한 인생이라 풍부한 그대로 발휘하면 성자도 될 수 있고 철인도 될 수 있다. 여기서 성공자는 최고봉을 답파한 자요, 비록 최고봉을 답파 못하더라도 어떤 고지쯤은 별 문제 없이 답파할 것이다.
  내가 정신을 연구하라 하니 유신론자로 알 것이나, 그것이 아니요 유물유신합치론을 주장한다. 이원합일론이다. 유물만으로 만사를 해결할 수 없고 유신만으로도 역시 만사를 해결하지 못한다. 유물유신이 합치됨으로 전지전능(온전한 지혜와 능력)이 되어 만사가 다 완전한 해결을 할 수 있고, 우리가 목표하고 나오는 연정원의 최고 정봉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심합일이 되면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이 만년평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유물론으로 과학문명이 서로서로 차이가 있어서 각자 위지대장(대장이 됨)이요 구왈여서(모두들 내가 성인이라 함)이라는 점에서 전쟁도 있고 승패도 있는 것이다. 만약 물심이 합치된 전지전능으로 우리 우주를...(이하 원고 유실)
  1952년


    57. '천부경' 현토
  일시무시일석삼극무
  진본천일일지일이인
  일삼일적십거무궤화
  삼천이삼지이삼인이
  삼대삼합육생칠팔구
  운삼사성환오칠일묘
  연만왕만래용변부동
  본본심본태양앙명인
  중천지일일종무종일

  이상 원문 81자
  김동운, 이상규, 이광규 3노인 합좌현토

  일은 시로되 무시일이니 석삼극하면 무진본이라. 천은 일의 일이요, 지는 일의 이요, 인은 일의 삼이니, 일적십거로대 무궤화삼하나니 천도 이에 삼이요, 지도 이에 삼이요, 인도 이에 삼이니 대삼이 합육하야 생칠팔구하고 운삼사성에 환오하면 칠이라. 일이 묘연하야 만왕만래에 용변이나 부동본이니 본은 심이라. 본태양하야 앙명하면 인중천지일이니 일은 종이로되 무종일이라.

  서현근과 대전 송씨 합현토
  일시무시일이라. 석삼극하면 무진본이라. 천의 일은 일이요, 지의 일은 이요, 인의 일은 삼이라. 일적십거하면 무궤화라. 삼천이오 삼지이오 삼인이니 삼대를 삼합하고 육생하야 칠팔구를 운삼하고 사성환오하고 칠일묘연하니, 만왕만래에 용변하고 부동본이라. 본심본태약앙명이라. 인중천지일하니 일종무종일이라.

  사의--비토(현토가 아님)라 즉해
  (주석 109) 봉우 선생의 풀이
  일이 시하기를 무에서 하고 시한 일에서 석하기를 삼하니 극은 무에 진하나니 본이 천에 일은 일이오, 지의 일은 이오, 인의 일은 삼이니 일잉 적하야 십이오 거무하야 궤화하니 삼이라. 천도 이에 삼이오, 지도 이에 삼이오, 인도 이에 삼이니 대삼이 합하야 육이라. 만왕만래하아도 용은 변하되 부동본하나니, 본이 심이라, 본이 태양의 앙명이니 인중천지가 일이라. 일이 종하고 무도 종하기를 일에서 하나니라.
  차현토이수십년고고존지--1952년 12월
  (주석 110) 이 현토는 이미 수십년이 되었으므로 아직 보존해 둠.

    58. 낙수
  (주석 111) 본문에 실리지 않은 글 중에서 엮은이가 가려뽑은 것들이다. 이하 매년 마찬가지
  1. 동지들도 가지가지라. 최후목표까지 동일한 노정을 가지고 갈 동지도 있고, 발정시(길을 떠날 때)에 전송(떠나는 이에게 잔치를 열어주거나 선물을 주고 송별함)이라도 하는 격으로 동지가 되는 인사도 있고, 어디를 방향하는지 알수 없으나 인간적으로 상교할 만하다고 동지, 동지 하고 교제하는 인사도 있고, 내 본목표를 가자면 중간까지에 기다한 관절이 있는데 그 관절까지 동일 목표로 가는 동지도 많다. 관절마다 기로가 생하는데 어느 관절에서 상분할지 알 수 없는 동지도 있다. 내가 그 동지를 보기나 그 동지가 나를 보기나 동일한 것이다. 그렇고 발족하는 정거장 광장에 같이라도 가는 동지도 얼마든지 있다. 세상에는 동지, 동지 하나 정상은 그 동지가 동일한 목적으로 최종선까지 가는 동지는 기인이 못 되는 것이다. 동지, 동지 해야 동지가 확실한 동지가 귀하나, 그저 동지라고 하고 이 동지애를 확대시켜서 동일 귀착점에 가기를 빌고 이 붓을 그치노라.
  1952년 3월 수필 중

  2. 내 선친께서 재세시에 간간 하교하시기를 심호사사난성(마음이 넓으면 일마다 이루기 어려움)이라고 하시어 양력(힘을 헤아림), 탁덕(덕을 헤아림)을 하지 않고 임사(일에 임함)하면 항상 곤란이 많다고 하시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입지불고즉기학개상인지사(입지가 높지 않은즉 그 배움이 모두 보통사람의 일이다)라고 하신 성훈이 기억되어서 될 수 있으면 자기 역량보다도 나은 것을 입지하고 진출하는 것이 물론 중간에 노력도 많을 것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을 가지고 50년이나 긴 세월을 불휴의 노력으로 일보일보 전진하는 도중이다.
  1952년 수필 중

  3. 백산운화를 가지고 나온 삼육성중의 범태가 그 누구누구인 줄 알고 1일이라도 속히 규합되어 이 대운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그 누구의 책임이라는 것을 망각 안 하면 당 현장의 81난을 경과하고라도 영음사를 왕복한 기록이 존재하니 비록 경제적 난관이 중첩할 지라도 낙망 말고 나갈 것이나, 일난경과면 일난복래는 상사로 알고 극복하며 이 책임완수까지는 자임자중할 것이다.
  1952년 '경제적으로 기생이 되는 내 소감' 수필 중

  4. 금차 대운은 광대한 천지에 광명한 일월이 항존할 것이요, 일시적 차운쯤으로는 그 광명은 좌우 못하는 것이다.
  1952 수필중

  5. (그림생략)

  6. 숫자대용 (그림생략)

  7. 인생이란 70, 80이 되더라도 동이라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50만 되면 아주 고정 인물로 자처하는 데 나는 불쾌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생이란 죽기 전까지 동해야 한다는 내 항시 소신이다.
  1952년 수필 중

  8. 자고로 책인즉명(남을 책하면 밝아짐)하고 서기즉혼(자신을 용서하면 어두워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타를 구별할 것 없이 누구가 하든지 정당하게만 하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사람이 권리에 야욕으로 자기의 위신을 상실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영화는 이런 사람들에게 잘 가는 것이 이 세상의 상리다. 그러니 누구나 영화를 싫다고 할 사람이 있는가. 만고에 처량을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1952년 수필 중

  9. 내가 9세시에 나철 선생이 서울 마동서 대종교를 창설할 때에 참가하여 11세까지 거경(서울에 거주)시에는 참배하였었다. 그 후는 다시 왕래가 없었으나, 나는 대황조를 우리의 글자 그대로 대황조로 숭봉하지 무슨 교조로는 숭봉코자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우리 백두산족의 오족이 통일하여 대황조 이념이 신 홍익인간을 실현시킬 책임이 우리의 손에 있다는 것을 감사히 생각할 뿐이다.
  1952년 9월 28일 '대황조 봉안에 대한 사견' 수필 중 추기

  10. 아무리 생각하여도 주권자의 노혼(늙어 어두움)이 이 나라 운명을 좌우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일인지해(한 사람의 해)가 급어일국(한 나라에 미침)하니 가불신호(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아. 우리 민족들이 자작자수(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음)하는 것이닌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칭찬하리요. 다만 우리 운명만 바랄 뿐이로다. 하늘이 한수풍 삼재로 농민뿐 아니라 국민의 양정을 말유(아주 엉망이 됨)하게 하고 또 목전에 병란이 위급존망지추요, 또 정쟁의 풍운이 장기(장차 일어남)하니 무슨 운명이 이같이 기구한가. 장차 무슨 대운이 우리 민족에게 올라고 먼저 시련을 이같이 하시는가. 민족은 민족대로 자숙하고 장래를 고대해 보자.
  1952년 9월 13일 수필 중

  11. 내가 내 화에 가족들에게 불편한 소리도 하나 가족이 하죄(무슨 죄)오. 우리 지내는 것을 극빈궁자에 비해보면 그래도 소소 차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비록 잡곡이라 해도 조반석죽(아침은 밥, 저녁은 죽0은 하는 셈이다. 물론 이것도 계속성은 없으나 현상까지는 이 정도였다. 금일은 백미(보리쌀) 두 되의 치량을 해왔다. 5--6일은 또 식생활은 해결하겠다. 가소로운 일이다. 이 세쇄(아주 자잘함)한 말을 붓을 안 들고자 했으나, 불면증이 있어서 청수제(잠을 청하는 약)로 이런 붓을 들고 잠을 청해 보는 것이다. 무슨 해결책을 구하고자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충성(벌레소리)은 낭랑하고 사경이 고요한데 홀로 이 붓을 들고 있는 내 심서동 가장 파동이 심하도다.
  1952년 9월 20일 수필 중

  12. 내가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별 필요 없는 존재다. 우리 가족들은 이 동네 특유의 시목(감나무)도 재양(심어 키움) 못하며 또는 광우리도 만들 줄 모르고 또 고사리도 꺾을 줄 모른다. 그 다음 나무장사도 못하고 또 구루마도 부릴 줄 모르며 농사도 모른다. 이것이 이 동네의 기물(버린 물건) 취급을 받는 원인이요, 나도 그 원인을 구태여 변경코자도 안 한다. 그저 나는 나대로 산중인답게 지낸다. 그러나 이 경치 좋은 계룡산 신소동천(신소계곡)을 대자연이 주신 대로 그대로 사랑하고 이 동네 천석(물과 돌)은 타동에 비가 아닌 만큼 신체야 불건강하건 건강하건 간서나 하고 피로하면 청천백석(맑은 물 흰 돌)에 청풍명월도 내 피로를 휴식시키며 청송녹죽이나 정란야국이 내 고적한 회포를 위로한다. 혹 등산하여 원조(멀리 바라봄)도 해보고 혹 임수하여 관란(물결을 바라봄)도 해본다. 남이야 무어라 하든지 나는 역시 이 동네 사람이요 나는 나대로 이 동네를 동경하는 사람이요. 내가 3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낸 기념이 이곳에 있고 또 내 선친, 선비 산소가 이곳에 계시다. 어느 모로 보든지 이 동네는 잊을 수 없는 데요, 더구나 내 신체가 불건강할 때에는 더욱이 한적한 산천이 아니면 한양(한가히 정양함)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정양 장소로 이곳을 택한 것이요, 절대로 경제적으로나 출세적으로 이곳을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근일도 몹시 쇠약해져서 이것을 회복코저 또 이 신소산천을 찾아온 것이다.
  임진(1952년) 중양(음력 9월 9일) 다음날 수필 중

  13. 양화분배태하여 황학성중발아되고 현무수중자장하여 창호일성에 백수가 진경커든. 금학일성에 단풍이 래의하야 하원적토운을 문하도이만발한다. 이것이 오만년무극대도삼육성중분명하다.
  북벽만리접빙해요 서활금인대곤륜은 한중인일가로써 호명천하환황백을 여차여차복여차하여 홍익인간이념을 펼침이 차시요화출세요 대순중화니라.
  (풀이) 
  양쪽 불이 싹을 움직여 황학소리 속 싹은 트고 현무는 물속에서 잘 자라니 푸른 호랑이 한 번 울부짖음에 뭇 짐승이 크게 놀라거든, 금닭 한 번 우는 소리에 붉은 바람이 불어와 지난 정묘년(1987) 문 아래 복사꽃과 오얏이 활짝 피었네. 이것이 오만년 무극대도의 성스러운 서른여섯 무리임이 분명하다.
  북쪽으로 만리을 열어 얼음바다에 접하고 서쪽으로 멀리 금사람이 곤륜산을 대함은 한국, 중국, 인도의 한 집안으로써 천하를 호령하고 황백을 바꿈을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다시 이와 같이 하여 홍익인간 이념을 펼침이 이것이 요임금이 세상에 나옴이요 대성인 순임금의 거듭 빛남이로다.
  1952년 9월 28일 수필 중

  14. 안재홍 씨가 백두산 탐사기 중에 산상에서 거궐(큰 집)이 있는데 적지무인(고요하니 사람이 없음)하였고 다만 1인이 있었으나 아무리 문답코자 하나 불응하더라고 기록해 두고 그 거궐의 현판은 호천금궐이라고 하였더라는 것을 출판서 중에 확실히 기입하였다. 내가 여기에 부기하는 것은 호천금궐의 호천상제는 복희씨임에 틀림없고 제1세 단군이 호천상제이신 복희씨라는 것을 확언해 둔다.
  1952년 수필 중

  15. 무슨 일이든지 일단 자기가 승낙하고 나온 이상에는 비록 자기 일에 좀 희생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책임완수는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마음에 없고 또 시원찮은 것을 맡으면 그까짓 것에 힘들일 것 있나 하고 너무 무관심한 것이 우리들의 통병이다. 이 병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격(그 사람의 자격)으로 적당한 자리에 못 가더라도 그 자리의 임무만은 근실히 복종하고 여력은 함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만약 인격자라고 자기의 맞지 않는 자리에 있어서 책임을 완수하지 않는다면 후일에 인격자로서 자기의 적재적소에 가 반드시 잘하라는 법이 어디 있으며 누가 신임할 것인가. 비록 자기역량에 부족한 일이라도 유족한 감을 가지고 선처하면 타인이 보기에 그 사람은 그 자리에는 지나는 사람이라고 공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점점 그 이상 자리로 갈 수 있고, 그 자리에 가서 능력이 발휘 못 됨으로 더 가지 못할 것이 상식적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흔히 자기 자격에 좀 부족한 자리에 가면 창피하고 마음이 시들해서 노력을 하지 않다가, 말하자면 주의를 않다가 실수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소홀이라는 것은 항상 경이(가볍고 쉽게)하게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요, 이 소홀이 있고 성공하는 법이 결코 없는 것이 만고불역지전이다. 임사무소홀(일을 맡아 소홀함이 없음)하라는 것이다. 고인들은 비록 성현군자라도 소소한 직책에서도 시들한 맛이 보이지 않고 유공불급(오로지 손길이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 함)해서 근실하게 책임완수를 하는 것이 상사다. 이것이 고성현군자들의 수범이라고 본다. 예는 들 필요가 없다. 동서현철이 모두 다 일궤도이다. 성기가 못 된 인격자임자들이 항상 자기 임무를 완수 못하고 실수하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소소사라도 근실히 진력하라는 부탁이다.
  1952년 12월 29일 수필 중

  16. 고지대장은 상관천문중찰인사하달지리하고 능겸지인용자가 가거기위하였는데 현금아국장성첨위중능겸득차자기인고. 위거상장자가 불지적지래부하고 불지적지강약하야 불능예비하고...
  (풀이)
  옛부터 대장은 위로 천문을 보고 가운데로 사람일을 살피며 밑으로는 지리를 통달하고 능히 지혜와 사랑과 용력을 갖춘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현재 우리나라 장성 여러분들 중 능히 이것들을 갖춘 사람이 몇 사람인가. 고위급 장군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적군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아지 못하고 적군의 강약을 몰라 미리 준비를 못하고...
  1952년 수필 중

  17. 영웅시
  (주석 112) 봉우 선생의 20대 초반 만주 독립군 시절 지은 시로, 만리정성 서쪽 끝 옥문관(옥새)에서 동쪽 끝인 요동땅 금인(소재가 확실치 않음)까지 삽시간에 질주하는 장부의 영웅적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옥새거금인이
  일만이천리라
  풍취사작운하야
  삽시도요하라
  (풀리)
  옥새에서 금인까지
  일만이천리
  바람 부니 모래, 구름 되어
  잠깐새 요하를 건너에

  18. 구흡강하용백로요
  수요산악호령분이라
  (풀이)
  입으로 강물을 들이마시니 용의 넋 드러나고
  손으로 멧뿌리 흔드니 호랑이 영혼 달아나네


      1953년

    59.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고인의 말씀에 안빈낙도하고 하나 글자 그대로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비록 동일한 빈궁이라도 주위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이 우리 인생으로 면치 못할 일이다.
  그런데 내 자신으로 경험해 보건대 내가 20세까지는 자타가 공인할 호화생활을 해왔던 것이요, 21세부터 급경사로 25세부터는 아주 최저생활에서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빈궁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내가 양심상 가책을 받을 일을 한 적은 없었고 또 가족도 극히 평화리에 지냈으나 이 빈고(가난한 고통)를 감수하였을 뿐이요, 이 빈고를 타개할 무슨 방책을 연구해 보지 않았고 또 누구에게 의존해서 이 빈고를 면코자도 안 하였으니 그렇다고 무슨 낙도라고 자부할 만한 행위가 없었다. 그저 내가 경제적으로 수단이 부족해서 패가한 것이니 수원숙우(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의 잘못이리요)하리요. 다만 하늘이 주시는데 받을 따름이라고 가족들이 합하여 평화스럽게 지내었을 뿐이요, 그저 의미없이 현금까지 지난 것이다.
  그 중간에는 물론 극도로 곤란할 때도 있었고 혹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을 때도 있었다. 이것이 30년 간이라는 장시일이요, 또 그간은 나는 가정생활고보다도 항상 염두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 민족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렇다는 체계를 세워서 운동을 한 것이 아니요, 무슨 명예를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음적, 양적으로 내 역량 있는 대로 불휴의 노력을 해온 것이다. 이 관계로 일경에게 수십차 영어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내가 계통적으로 체게가 있는 운동이 아니라 아주 증거불충 하다는 주장을 항상 하고 장기처형을 당한 일이 없었다. 최장기가 만 7개월이요, 다 그 이내였다.
  그러다가 을유년에 8, 15를 당하여 그 후에 당적을 한독당에 두고 민족운동을 하였으나 내 자신만은 비좌비우(좌익도 우익도 아님)인 중립정신을 항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또 외세의존세력에는 수하를 불구하고 반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결점이 되어 수차에 대한민국 경찰에게도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이것이 54세에 이르는 금일이었다. 안빈도 아니요, 더구나 낙도는 말할 필요가 없고 그저 당한 빈궁을 당하는 대로 하지 인내 못하게 고통을 받을 지경은 아니요, 비록 미미하나 민족운동자입네는 자임하는 것이다. 남이야 무어라 하든지 내 자신은 이 정신이 있을 뿐이요, 가족도 동일할 뿐이다. 그러나 너무 열이 부족하고 또 내 역량이 허락치 않아서 유의미취(뜻은 있으나 성취 못함)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내가 불변하는 마음으로 이 궤도에 나가나 다각도로 보아서 속력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방식을 고쳐서 속력이 좀더 나오도록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의, 주장을 실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속력을 내자면 무슨 방식인가 하는 데서 제론이 있으나, 동지규합으로 단결되어야 힘이 생기고 이 규합이니 단결에 시간을 소비하는 원인이 정신력으로만 단행하는 관계로 속진이 못 된다고 본다. 물질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병행해야 반드시 완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비록 54세에 무재무능하나, 총역량을 다 내서 나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고인들과 같이 무슨 안빈낙도를 주장하는 내가 아니요, 내 주의 주장을 위해서는 이 빈궁으로 성공이 곤란하다면 이 빈궁을 타개하고 경제적으로 먼저 지반을 갖게 되는 것도 무방하고 만약 그렇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럴 필요도 없다. 내 일거수일투족은 다 내가 주장하는 주의를 위해서 성불성을 예외로 내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혹 세인들은 나를 오해하는 일이 많다. 내가 정신수양을 할 때 본 인사들은 내가 무슨 고목사회가 다 된 성자처럼 아는 사람도 있고, 또는 내가 경제 방면에 유의하는 것을 본 인사는 내가 모리 방면에 매두몰신(머리를 처박고 몰입함)하는 사람으로 아는 인사들도 있고, 혹 음풍영월로 머리를 식힐 때 본 사람은 내가 시인이나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혹 체육 관계로 우리 고대 체육을 운위할 때는 나를 무슨 소설 중의 허구인물로 아는 사람도 있고, 내가 무슨 정당이니 단체에 투신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정권에 야욕이나 있는 사람으로 아는 사람도 있고, 내가 구고(옛것을 연구) 관계로 추수(고대 수리학)나 천문이나 지리를 취미적으로 보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술객으로 아는 사람도 있고, 내가 유불선이나 타종교들을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연구하는 관계로 종교설을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종교인인 줄 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민족 고래 의약의 장족적인 특점을 간혹 언급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의약술자로 대우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동지규합상 남녀를 구분 않고 접근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내가 호색지도라 평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궁불능자존(빈공하여 스스로 생존이 불가능 함)하는 것을 보는 인사는 나를 아주 파락호로 취급한다. 각양각색의 대우를 받는 나다.
  (주석 1) 행세하는 집 자손으로 난봉나서 결딴난 사람.
  남이야 무어라하든지 악평을 하든지 호평을 하든지 불관하고 나갈 자신을 가지고 있는 중이요, 내 이념이라는 것이 내 개인에게는 성불성이 다 별 관계 없는 일이요, 우리 민족을 위해서는 성공되기를 내 전심전력을 다하여 바라는 바라 변함없이 추진코자 이 붓을 든 것이다.
 계사(1953년) 2월 18일 야 봉우서


    60. 서고청 선생의 친산을 경안하고
  (주석 2) 고청 서기. 본관 이천. 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 자는 대가. 실용적 학문의 연구에 전심. 만년에 계룡산 고청봉 아래에서 많은 후진 양성에 힘씀
  (주석 3) 어버이 산소.
  (주석 4) 지나가며 봄.
  우연히 춘풍화기를 이용해서 수실 서해찬 동지와 등산소풍할 차로 행정을 정하였다. 이 산 저 산으로 왕래하다가 원당 후록(뒷산 기슭)에 이르러 석물한 거묘가 여러 곳이었다. 그러나 안목에 그럴듯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좀 높이 올라가서 후룡(뒷산세)의 기복을 보고 행룡(산세의 진행상태)된 대로 운보(걸어봄)해 보니, 취기(기운이 모임)가 된 곳에 암석이 있고 그 아래에 승금상수혈토인목이 분명한 곳에 긴밀한 작국(형국을 이룸)이 되었는데, 거묘가 토피를 반이나 벗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향토명산은 분명하다. 산법(풍수지리법)으로 본다면 유자손가용지지(자손이 있고 쓸만한 땅)요, 식록은 근계(근근이 이어감)요, 관록은 미미한 곳이다.
  (주석 6) 승금은 입수(땅의 기운이 뭉친 곳)를 말하며, 상수(물 나가는 자리). 혈토(혈에서 나오는 흙). 인목(혈자리의 기운을 앞에서 막아주는 것)의 네 요소를 뜻함.
  서동지에게 물어보니 서고청 친산이라고 하며, 고청 생존시에 작점(점 찍음)한 곳인데 토정 이지함 선생이 마침 오셨다가 이 산지를 보고 과하다고 평하셨다고 한다. 고청 선생이나 토정 선생이나 다 도덕군자요 더구나 성리학에는 우리나라의 태두인 중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하시고, 마음으로 대지명산을 구하시지 않고 근근이 향토명산인 제4, 제5에도 근참(간신히 참여함)할 곳을 점산하고도 토정 같으신 선생은 과하지 않은가 하고 질문한 것을 보면 고인들이 욕구 않는 것을 잘 추지 하겠다. 이것이 지족(족함을 앎)이요, 이것이 망구길지(망녕되이 길지를 구함)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고청 선생 친산을 보면 별 흠처는 없으나 또한 장처도 이렇다는 것이 없고 부국(부자 형국)이니 귀국이니에는 근사하지 않고 보자손가용지지(자손을 보존할 수 있을 정도의 땅)에 불과하고 소소한 식록이나 있을 정도인데 이 정도도 분수에 지나치지 않는가 하는 경계를 붕우간에 하였으니, 현세인물들은 왕후장상지지나 만대영화지지가 아니면 구산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것은 오로지 현세인물들의 지족을 못하는 연고다
  내가 이번에 고청 선생 친산을 경안하고 고인드릐 지족수분하는 정도를 잘 알았도다. 이것으로 내 일생의 경계를 하고자 이 붓을 든 것이다.
  계사(1953년) 음력 2월 20일 보우서


    61. 위창 오세창 옹을 조함
  (주석 7) 3, 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1864--1953). 갑술정변 이후 천도교에 진력하여 손병희와 더불어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함. 해방 후 민의원, 한국민주당 당수등을 역임.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1928년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모아 '근역서화징'을 간행
  기미 3월 1일 추상 같은 왜적 경계 하에서 손의암(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33인은 천추대의를 수립하기 위해서 생사를 홍모(기러기털)와 같이 여기고 대한독립선언을 세계에 선포하고 그 선언의 내용은 일언반사도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책함이 없이 가장 성스러운 정의, 인도의 자유평등을 부르짖었습니다. 그 후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 교훈이 되어 끊임없는 국내외의 무수한 혁명운동을 계속하여 필경은 선열들의 의지대로 을유 8, 15가 있고 그 다음 무자(1948년) 8, 15로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세계에 일독립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토의 뜻 아니한 양단으로 말미암아 완전통일을 못하고 또 경인(1950년) 6, 25에 남북의 동족상잔의 거가 있어 국토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게 여지없는 파괴가 되고 민족은 상잔해서 천만에 가까운 희생이 되고, 정치는 아주 요란상태에 함(빠짐)하여 하시에 평화가 될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혼란상을 본 채, 33인의 1인이신 90 고령의 오세창 옹이 지하로 가시게 됨에 임하여 무슨 말씀으로 지하에 계신 33인의 선열 영혼에 고하시겠습니까. 옹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시고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시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옹은 안심하시고 지하에 계신 33인의 선령과 그 외 무수한 선열들게 우리 한국은 장차 완전통일될 계단에 있고 나아가 세계민주우방의 일원으로 세계평화를 성립시키며 일보전진해서 세계장래의 대동책을 우리 민족이 제창하게 됨은 지하에 계신 선열들의 뿌리고 가신 열혈의 꽃이요 앞으로 열매가 될 것이라고 전해 주소서.
  옹도 세기에 빛이 날 혁명가시며, 3, 1운동의 잔존조 가운데 유일무이한 중보적 존재이시었던 것입니다. 천추 후 수범이 되실 순수혁명가로 복잡다단한 정계에 일체 투족을 안 하시고 수서운권적(물 흐르고 구름 걷히듯) 한성(한가한 품성)을 서화에 부치신 채 이 세상을 버리시니, 우리는 그 명복을 빌며 역사는 그 방명(향기로운 이름)을 유전할 것입니다.
  일로 조사를 대신하나이다.
  계사(1953년) 3월 초칠일 후학 권태훈 경조


    추기
  격일해서 국내의 이시영 선생이나 오세창 선생 같은 원로들이 저 세상으로 가시게 됨은 국가적으로 대손실이라고 본다. 비록 양선생이 직접 정치에는 간여치 않으시나 민족들의 믿음은 든든하였던 것이다. 이 두 선생이 가신 후에 민족들이 누구를 그 다음으로 원로 격으로 믿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았으나 다시는 두 선생에게 우리 민족들의 믿던 마음을 옮길 자리를 찾지 못하겠도다. 그러니 두 선생의 가심이 더욱 애통함을 금치 못하겠도다.


    62. 부재기위하얀 불모기정이라
  (주석 8) '그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꾀하지 말라.' 공자님 말씀. '논어' '태백' 편에 보임.
  고성 말씀에 부재기위하얀 불모기정이라고 하시었다. 후인이 여기서 오해하는 사람이 혹 있지 않은가 한다. 기위에 부재하는 사람이면 기정을 모하지는 않을지언정 어찌 내가 배운 바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 일은 이 정도로 해보겠다는 생각이야 못할 리가 있는가.
  고인이 말하기를 학우등사(배움이 넉넉해야 벼슬자리에 오름)라고 하였다.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으나 장래를 입지하고 정치나 군사나 법률이나 여러 가지 종목에 내가 입지한 과목이면 내가 배워서 다년간을 경험하여 비록 내가 그 자리에 아니라도 내가 하면 이렇게 방침을 정하겠다고 예정한 것이 실지면과 상위점이 없이 진행되면 또 일보를 전진해서 타인이 그 자리에서 행하는 정책보다 우수한 방책이 확립된 연후가 아니면 그 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독자적 입장으로 내가 목표하고 나가는 방면의 부문이라면 독자적으로 얼마든지 연구도 할 수 있고 모책도 세워볼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별 준비 상식도 없는 인물들이 대중석상에 그 자리가 없는 사람으로 시시비비를 과론하면 이는 실지면에 아무 파급되는 효력이 없이 다언다패로 자기 위신만 타락되는 것이니, 상재방이 있는 일이어든 될 수 있는 대로 대외적, 대중적으로 그 자리가 없는 사람으로는 선전 말라는 것이요, 독자적으로 연구 말라는 것이 아니다.
  (주석 9) '논어' '자장' 편에 보임. "자하왈. 임이우즉학, 학이우즉임."(자하가 말하기를, "벼슬살 때 틈이 나면 학문을 다꼬, 학문을 닦다 여유가 생기면 벼슬을 살시." 하였다.
  말하자면 근년 같은 전쟁시대에 군사학을 참고로 연구해 보더라도 독자적으로 적아간 군사 승패가 어찌될까, 내가 참모가 되었다면 어떤 전략으로 상대해 볼까, 또는 적이나 내가 군사적으로 가치가 어느 정도나 되는가, 그리고 만약 우리편의 부족점이 있다면 무슨 방략으로 이 난관을 타개할까, 또는 내가 적이라면 어떤 전략이 나오겠다는 것을 독자적으로 충분히 연구한들 누구 무어라 할 것 아니나, 내가 군사가도 아닌 이상 대중석상에서 군사득실이나 군의 비밀 같은 것을 생각 않고 말하다가 내가 말한 것이 아군의 전략상 불리한 선전이 되거나 혹 적의 제오열(스파이)에 탐문이 되면 나는 부재기위한 사람이 모기정하다 실패한 것이다. 정치, 군사가 모두 비밀이 있는 것이니, 나로서는 독자적으로 연구는 해 볼지언정 타인을 상대로 말을 신중히 고려해서 될 수 있으면 부재기위하얀 불모기정하라는 것이다. 근일 정계나 군문에 별별 일이 다 있으나, 직접 내게 대한 일이 아니어든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내 독자적으로 연구는 얼마든지 좋은 것이다. 그 자리가 오기 전에는, 그 자리가 오더라도 충분히 사무를 처리할 준비학식이나 상식을 양성하라는 말이다. 공연히 무익한 한담으로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인사가 정계 득실이나 군문의 승패를 논의 말고 수구여병(병마개처럼 입을 지킴)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문을 수득(닦아 얻음)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부재기위 불모기정 이라는 고훈을 오해할까 염려해서 이 붓을 든 것이다.
  단기 4285년(1953) 3월 25일 봉우서


    63. 모득사 제향에 참석하고
  (주석 10) 면암 최익현 선생 사당.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 있음.
  강연을 듣고 곧 모덕사를 가서 제향에 참석하였다. 현계세(현재의 말세)에 윤상을 고취하는 이런 거조는 만월공의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면암 선생의 역사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기록할 필요 없고, 당일 행사는 평시 숙습이 없는 의유행속(선비의 옷을 입고 속된 짓을 행함)에 별별 인물들이 다 있어서 나는 예에는 문외한이나 고성 말씀에 곡례삼천에 일언이폐지왈무불경이라고 하시었는데, 제례의 경의보다 평시 소양이 없는 실산이 자주 보인다. 비록 금일이라도 좀 습의라도 하고 행사하였으면 이런 실수는 없을 것 같고 대체로 보아서 구두로는 예설을 알지 모르나, 몸소 예절을 행한 인물이 귀하였다는 것이 참기한 우리의 공통된 관점일 것이다.
  (주석 11) '예기' '곡례' 편의 3천 가지 조목
  (주석 12) 한마디로 덮어놓고 말하면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즉 경 뿐이다.
  제례는 엄숙을 주로 하여 성경을 극해야 하는 관계로 양양호여재기상하며 여재기좌우라 하였는데 당일 제관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우리가 보기에 한 분도 그 성경을 다하신 이가 없는 것 같고 그저 형식이나 유건도포(유교 선비가 쓰는 두건과 옷)에 사자인 체하는 데 불과해서 그 인물들이 진정으로 모덕하는 것인가, 자기들 명예를 구하는 것인가 의심이 없지 않다. 내 행실이 어떻건 나도 사자다 하는 것 같다. 좀 질적 향상이 있기를 바라노라.
  계사(1953년) 양력 4월 26일 봉우서
  (주석 13)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 가득하기가 그 위에 있는 듯, 좌우에 있는 듯함. '중용' '귀신' 장에 나옴.


    64. 연정원을 발족하기 전에 수련도장으로 선발족해 볼까 하는 내 소감
  우리의 고대문화의 정화인 정신수양 연구를 다시 부흥해 보자는 것이 내가 말하는 연정원 발족이라는 것이다. 환언하면 정신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필 내가 아니면 이 고대문화의 최고정화인 정신수양법을 부흥 못할 것인가. 내가 아니라도 사계에 권위자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주제넘게 이 중대한 사명을 자임할 것이 있나 하고 수십차를 주저하던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도 고단자는 은둔하고 저단자는 불급해서 도리어 고대의 숭고한 정신문화를 자기네의 이용도구로 아는 인사들도 많다. 그래서 과불급(지나침과 못미침)이 개부중(모두 맞지 않음)이라고 우리의 정신문화 부흥에 길이 없다. 부득이 선배에게만 맡길 수 없고 또 부족한 인사들에게 기대할 수도 없다. 내 아는 대로, 내가 수련해본 경험으로 가림없이 정신문화를 연구해 보자는 것이 내가 연정원을 발족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 발족에도 층절이 많다.
  일왈 정신문화의 유래와 원리를 수득한 인물이 있어야 하겠고, 이왈 경제적 혜택이 잇어야 하겠고, 삼왈 위치도 적합해야 하겠고, 사왈 수득하고자 하는 인사의 주위사정이 그의 성공까지를 허락되어야 하겠고, 오왈 연정원의 유지를 확립할 방잭이 있어야 하겠고, 육왈 관에서 협조적이나 또는 주동적으로 나와야 하겠다. 이상의 조건에서 한 건이라도 부족하면 정신문화 부흥의 길이 묘연한 것이다. 비록 고인 말씀이 유지자사경성(뜻이 있으면 일은 마침내 이루어짐)이라고 하나, 백절불굴의 노력이 없이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연정원을 발족할 준비공작의 일부로 수양도장을 먼저 발족해 볼까 하는 내 심산이다.
  이 수양도장이라는 것은 대문이 걸려서 통행할 수 없을 때에는 협문(좁은 문)으로 선입해서 대문을 열어볼까 하는 방편법이다. 연정원이라면 세인들이 고원난행지사(높고 멀고 행하기 어려운 일)로 아는 관계로 세인이 잘 알고 취미를 가지고 있는 운동으로 각종의 경기에서 몇 종을 택해서 특별수양을 하게 하는 도장으로 발족해서 여기서 부지중 정신문화의 연결성을 수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연정원 발족 준비로 우선 수양도장을 발족하자는 취지다.
  올림픽대회에서 현행되는 신기록은 우리의 수양법으로 정신연구를 연결하면 2개년이라는 단시일이면 자신있게 신기록을 내겠다고 내가 주장하는 것이다. 각 종목을 통해서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반수 이상 자신만만한 것이다. 그래서 세인이 취미를 가지고 있는 체육으로부터 정신문화의 숭고성을 찾아보게 하자는 방편법이다. 이 수양도장에서 점진적으로 정신문화를 주입해 보자는 것이다. 수양도장으로 발족하면 세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청장년이 할 일을 노쇠층에서 그런 일을 착수하는 것은 망동이라고 할 것이나, 연정원 발족의 준비로 방편법을 쓰는 것이다. 세인은 양해하시기 바라노라.
  계사(1953년) 5월 27일 봉우서


    65. 민족의 수난기를 당하여
  금년 춘간에는 40여일 한소(가뭄 소동)로 삼논(언덕, 습지, 평야)이 다 동요되었고, 또 하간에는 30일 장림(긴 장마)에 맥작(보리농사)이 아주 귀어허지(빈 땅으로 돌아감)가 되었다. 이것이 천도가 부조하고 음양이 화협(모두 화합함)치 못한 것이다. 현인이 재위(마땅한 자리에 있음)하면 이음양순사시(음양을 절도에 맞게 하고 사계절을 순조롭게 함)한다는데, 아마 우리나라는 현인이 부재기위(그 자리에 있지 않음)한 것 같다.
  천재와 시변(계절의 변고)이 그칠 줄을 아지 못하니 민생고야 더 말할 수 없고 우순풍조(비바람이 순조로움)하더라도 목전에 국가의 위급존망을 걸고 전쟁에 정전이니, 휴전이니, 북진통일이니, 정전을 결사반대하니 하고 거국거족이 외치고 있는 이때에 더구나 한재, 수재가 연첩해서 또 식생활의 위기를 당하게 하니, 이것이 우리 삼천만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며 사지에 빠진 뒤에야 생이라고 우리 민족의 최대 수난기에 도달한 감이 무엇으로 보든지 확실하도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위기가 초동(초겨울)에 상설(서리눈)을 맞이하는 초목의 위가 아니요, 조춘에 잔설이 상초(여전히 준엄함)해서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그러나 춘한(봄추위)이라고 동사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병들이 말라는 법도 없다. 이와 기경납설고고목(몇번이고 겨울눈을 맞은 마른 나무)인 신세들이니 아무런 한위(추위의 위세)가 오더라도 꾸준히 인내하고 극복해 가면 일착동풍개개화(한 번 동풍이 불매 가지마다 꽃핌)의 소식이 오도록 기대해야 당연한 일이니, 천의 시련이거니 하고 무슨 곤란이 있더라도 모두 감수하며 국민된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고 평화로운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비록 조춘상설(이른봄 서리눈)일망정 너무 혹독해서 인내하기가 엄동상설 보다도 일층 심한 것 같다. 한서(추위와 더위)가 다 최절정에 가야 고개를 숙이는 것이 원리라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 민족이 최고수난을 당하는 것은 자연적이 아니요 인위적인 관계로 후일의 평화도 필경 자연적으로 될 것이 아니요 인위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최고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나는 자신만만하다. 유사 이래로 흥망성쇠가 다 인과가 있는 것이라. 우리 민족도 반드시 앞날의 흥하고 성할 월인(먼 원인)이 확유(확실히 있음)해서 그 결과가 머지 않아 있으리라는 것을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제반 역경을 다 감수하고 지내는 것이나 소위 자칭 위정자라는 지도인물들은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역경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의 일신 복리를 위해서 제반 최고발악을 다하니, 도리어 우수한 백산 민족의 유래근성으로 세계만방을 대하기가 남부끄럽다는 것이다. 어디서 3류, 4류도 못 되는 인물로 구성된 기관이 권리를 잡고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행사를 그대로 기록해 가지고 자기들이 다시 보더라도 한출첨배(땀이 나서 등을 적심)할 일이 맣을 것이다. 아무리 양심이 없다해도 그래도 일시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리라고 본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수난기이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장래 복이 올 조짐이라고 본며, 이것이 비록 인위적 수난이나 역시 대자연으로 막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민족은 민족대로 하루라도 속히 전비(과거의 잘못)를 세척하고 일로 건국정신으로 매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현상에 자상달하(위에서 아래까지)가 아직 몽중에 있는 것을 불구에 새벽종소리에 깊이 든 잠을 깨일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확언해 두노라.
  계사(1953년) 5월 27일 봉우서


    66. 안빈낙도
  연령에 비하여 내 건강상이 조로한 편이다. 금년이 54세인데, 내 신체는 아무리 호평해 보아도 60 이상 노인과 같다. 더욱이 신체가 건강상 부족이라느니보다 인내력이 쇠퇴한 것이다. 청장년 시대 같으면 매일 수백리씩 행보하고도 야심하도록 담화하여도 조금도 무리한 감이 없었다. 그런데 현상은 조금만 무리한 일을 하면 피곤을 인내할 도리가 없다. 여기서 내 신체쇠약상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몸이 항상 둔탁한 것 같다. 또한 기억력이 아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이 물론 신체도 쇠약한 원인이나 제일 관련성 있는 것은 정신상 고통이 심한 관계가 아닌가 한다. 무항산이면 무항심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같은 것이요, 무항산이유항심자(든든한 재산이 없으며 변치 않을 마음을 가진 사람)는 유사자능지(오직 선비만이 그럴 수 있음)라 하시었으나, 이 무항산이유항심도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고난에 봉착하면 항심이 있기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나도 이 무항산중에서 백전노졸이 다 된 인물이나, 그래도 예상 이외에 봉착한 곤란은 졸지에 해소하기가 극난한 것이다.
  이 극난한 처지를 잘 극복하고 나가는 것을 고인들이 말하기를 안빈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마음은 안할지언정 생리적으로 빈궁에 쪼달리는 신체라 어찌할 수 없이 쇠약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안자 같으신 성현도 일단사(도시락 한 개에 담은 밥) 일표음(표주박 하나에 담긴 물)으로 불개기락(그 줄거움을 고치지 않음) 하신다고 공자께서 칭찬 하시었으나, 안자께서 신체의 조로상을 막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주석 14) '맹자' '양혜왕' 상편에 나옴.
  (주석 15) '논어' '옹야' 편에 보임
  덕윤신(덕은 몸을 기름지게 함)이요 부윤옥(재물은 집을 기름지게 함)이라고 하였다. 덕윤신 이라는 것은 심광체반(마음은 넓어지고 몸은 살찜) 해진다는 것이나, 비록 단사표음 일망정 궐(거름)함이 없어야 그럴 것이다. 마음이 아무리 안하여도 생리적으로 보급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신체가 약해지는 것이 원리이다. 그래서 안빈만으로는 비록 마음은 변함이 없을지언정 신체의 변함을 면하지 못한다. 여기서 일층 안빈하는 마음을 굳게 하는 데는 마음을 도에 부치어 낙도를 해야 비로소 안빈낙도지사가 되는 것이다. 이 지경을 변함없이 꾸준하게 쉬지 않고 나가면 그 수양력의 표현이 마지막에는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되고 군자도 될 수 잇는 것이다. 그래서 고성 말씀에 작지불이(쉼없이 노력함)면 내성군자(곧 군자가 됨)라 하시었다. 이 말씀은 수양력의 계속적 노력으로 결정된 표현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내가 회고하건대 3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빈궁이라기보다도 극빈 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쪼달리고 쪼달린 몸이 54세라는 반백지년이 되었다. 내가 처음 빈궁하였을 때는 재기할까 하고 역전해 보았고, 그 다음부터는 할 수 없는 일이니 되어가는 대로 가라고 방임해 두었고, 그 다음은 동일 빈궁상에도 가지가지가 있는데 내 빈궁이 다른 빈궁상보다는 도리어 고급이라고 환언하면 자족인가 지족인가의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안빈이라고는 지경이 미달하였고 또 낙도라는 것은 나로서는 아주 문외한이다. 내가 우연히 빈궁해져서 이 빈궁이 오래감으로 관습이 되어 차차 계단적으로 빈궁을 원망하지 않을 정도의 고궁은 되었을망정 아직 안빈이라 자처는 못하겠고 더구나 낙도라는 것은 내가 성리에 소양이 없는 인물로 어찌 낙도를 바라리요. 아직 도가 무언가 하고 의심할 정도이언정 확실성을 가지고 도를 지하지도 못하는 인물이 어찌 낙할 바를 알리오. 내가 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심 없는 지도도 못하니 낙도야 아직 요원하다는 것이다.
  계사(1953년) 5월 봉우서


    67. 정전 조인의 보를 듣고
  천인이 공노할 경인(1950년) 6, 25에 김일성군의 남침으로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삼천리 금수강산 한 조각도 완부가 없이 폐허로 화하고 삼천사백만 대황조의 겨레는 남북전쟁의 덕으로 일천만에 가까운 인구가 상실되고 남이나 북이나 난민 아닌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주석 16) '찔리거나 찢기지 않은 완전한 살가죽'의 뜻으로. 흠이 없는 곳의 비유.
  이 동족살상을 꿈에도 생각 않고 여전히 발악하는 김일성 도당이나 또 민족의 사활을 불계하고 각자의 모리에 매두몰신하는 남한 정계요인들이나 다 대황조님의 죄인들이요, 우리 민족 전체의 죄인들이다. 이 죄는 반드시 자기 본인이 받을 것이요, 혹 용서된다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면함 없이 받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보는 원인이요. 이보다 이 전쟁의 총책임을 반드시 질 사람은 묻지 않아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소련 수상 스탈린과 영국 수상 처칠이요, 이들이 전세계 인류에게 진 좌과라고 본다. 소위 포츠담회담이니 얄타협정이니가 금일 한민족의 전멸을 초래한 것이요, 또 제3차세계대전의 배태를 시킨 것이다. 달하자면 유색인종의 장래 발전을 막지 위하여 38선에서 동양족의 자멸을 시킬 장벽을 만든 것이 3거두의 각자 안정책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라. 황인종이 아주 멸망하기 전에 처칠이가 생각하는 앵그로색슨족이 선멸(먼저 멸망함)할 것이며 소련이 그 다음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확언하고, 신은 이 불쌍한 민족을 반드시 머지 않은 장래에 구하리라는 것도 확언해 두노라.
  보라. 영국에서 한국에 출병하고도 중공에게 무기공급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국제신의인가. 보라. 역사는 불기(속이지 않음)한다. 신의 없는 나라는 하시든지 이 정반대로 배신자에게 망하는 법이다. 금번 전쟁에서 이익을 본 나라는 영국과 우리의 인국인 일본뿐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임시라도 정전되고 정치적으로 완전한 성과를 본다면 모르되, 아무 성과 없고 무의미한 정전으로 그친다면 이것은 국제연합의 체면도 없고 미소의 인종소비정책에 주구 노릇 한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내수외교(정치와 외교) 못한 것도 원인이나, 총책임은 미소양국이 수범인 것이다.
  정전 조인의 보가 있고, 부흥비 2억5천만불 계상의 보가 있으나 부흥실비에는 몇 분의 일이 될 것이요, 정부요인들이 모리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런 종류의 인물들은 당연히 숙청하고 민족정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남북의 통솔자들도 반성하지 않으면 천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 금수강산 삼천리를 우리 민족 일천만의 피로 물들여 놓고도 여전히 위정자들이 정치를 개혁해서 부흥시킬 방책이 나오지 않고 이 부흥비를 이용해서 자복이나 자당의 이익이나 꾀한다면 양같이 순한 우리 민족이라도 좌시할 수 없을 것이요, 그보다 일천만의 전화를 입은 영령들이 용서를 않을 것이다.
  이 다음 3개월 간에 정치회담에서 별 기대를 못 가지나, 그래도 혹이나 좋은 방책이 나올까 하고 약소민족의 비애을 느끼며 이 국치적인 정전 조인을 듣고 이 기록을 하는 것이다. 나도 무슨 인명이 상하는 전쟁을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소득없는 파멸만 된 이 전쟁이 이대로 정전 조인이 된다면 장래에 또 무슨 큰 화가 있을까 해서 이 국치적 정전을 반대하며 이 붓을 그치노라.
  계사(1953년) 6월 17일 봉우서하노라


    추기
  소위 현지선이라는 것은 중동부의 국군선과 동부의 국군선은 고성, 금성까지 진출하였으나, 영미군이 담당한 서부선은 임진강 북안에서 한강 구까지 강화 교동이 이 선에서 도리어 이북이 다 서울서 반일정이 못 되는 지역까지 적군이 와서 있고, 소위 정전이 되면 서울에서 안심하고 정치를 할 수가 있는가.
  국련군의 원조는 감사하였으나 진정한 원조가 아니요, 국군의 행동을 감시하는 정도의 원조라는 데서 불만감을 가지고 있다. 충실히 후방에서 원조나 하고 국군의 전진을 제지 말았으면 최악의 경위라도 39선은 확보하였을 것이다. 소위 군사고문인 미국인들이 국군이 전진하면 제지하고 후퇴하면 동정을 하니 어찌 전진할 수 있는가. 대체로 믿지 못할 국련군이다.
  그리고 정전 조인이라는 명목에도 동상이몽 격이다. 포로교환을 조인 후 2개월 이래로 하고 정치회담을 3개월 이래로 하자는 미국인의 주장은 자국군을 생환시키는 데 주점을 둔 것이요, 공산군의 주장은 교환을 최종까지 하자는 것은 정치회담을 자국에 유리하게 전개하자는 것이다. 이 주장이나 저 주장이나 우리 대한민국으로서는 아무 주장할 힘이 없다. 이 굴욕적 조인에 우리나라 정부는 맹종할 외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감개무향한 일이다. 이후 정치회담의 진전이 좌우하려니와, 아무렇든지 우리 민족의 총궐기로 전후 재건부흥에 진력하여 이 국치적 정전 조인을 자력갱생으로 세거(씻어버림)해야 당연하다고 본다.
  계사(1953년) 6월 17일 봉우추기하노라


    68. 체육론
  지육, 덕육과 체육을 아울러 삼육이라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육은 국민보건상 하시든지 불가결할 지육, 덕육과 병행하며 대등성을 가진 중차대한 부문이다.
  구시대에 사자의 육예에도 예악사어서수의 과목이 있는데, 예악은 덕육에 속하고 사어(활쏘기와 수레 부림)는 체육에 속하며 서수(글쓰는 것과 수리학)는 지육에 속한 것이나 예악에도 체육에 속한 부류가 많은 것을 볼 때에 상고에도 얼마나 국민교육에서 체육을 치중하였던가를 찰지(살펴 앎)할 수 있다. 근대에 건강한 몸에 완전한 지식이 있다는 것도 역시 체육을 치중해서 말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물론하고 그 나라 청년의 기백이 좋은 나라는 흥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하였다. 이것이 역시 삼육병행이라고 본다. 그보다 더 체육을 치중하는 나라가 흥한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 조선조 오백년에는 사자들이 아주 체육을 도외시하였던 것은 가리지 못할 사실이요, 체육에 속한 부류는 아주 하적들이나 숭상할 일이요 소위 선비로는 문학이나 전문하면 족하다는 성문육예(공자님 문하의 여섯 가르침)를 망각한 이상한 사자풍(선비의 풍속)이 유행되었다. 그래서 국가는 일쇠(날마다 쇠퇴함)하고 청년기백은 아주 점잔(점점 쇠잔함)을 주로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전래하는 풍속이 아니요, 조선조에서도 중엽 이후의 폐풍이라고 본다. 우리 민족이 고대에는 강하였던 것이 이 체육이 강했던 원인이요, 근대에 약해진 것은 오로지 체육이 약해서 체육의 정화인 무술이 부족해서 타민족에게 압박을 당하여도 감히 상대할 용기가 나지 못하는 연고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족성같이 생각하는 인사들도 있으나 그것은 인식부족이요,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부터 강했으나 평화를 좋아하고 투쟁을 일삼지 않는 종족이었다. 우리 역사가 증명한다. 1차도 외국을 선침(먼저 침략)한 일이 없고 또 적국이 있으면 반드시 반격태세를 취하여 성공하였다. 이것이 민족성으로 보아서 강하나 평화를 좋아하여 타국을 선침하지 않고 선침한 적국은 반드시 반격한 것이다. 비록 국정의 불치로 일시적 약화된 때는 있었으나, 이것은 예외로 본다. 위만의 침략은 내란적이었고 한무(한나라 무제)의 사군은 국가적으로 패망기였던 관계였으나, 우리가 회고해 보건대 중고시대에 중국에서 열국시대라 할 때에는 비록 중국 제국이 간과(방패와 창, 즉 전쟁)로 일삼았으나, 1차도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보더라도 민족적으로 강해서 불가침으로 안 관계요, 또 수당의 침략은 자국의 멸망을 초래할 정도의 패적(패전)을 보았고 거란족의 침략도 강문창(강감찬 장군)의 반격을 당하였던 것이요, 조선조에 와서도 중엽까지는 그래도 상무정신의 여풍이 상존해서 임진란을 반격해서 중흥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 우리나라가 체육을 아주 치중했던 관계인데, 임진란 이후로 아주 문약해서 인조대왕 반정 후 김류배(김류의 무리) 문신의 전횡으로 국민들이 체육이 무엇일까 의심할 정도로 망각했었다. 그래서 이괄란이나 정묘, 병자 양차 호란이니, 또 경술합병이나에 아주 신경이 마비되어 체육 관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근년에 다시 이 체육을 흥기코자 하나 미미부진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새로 재건되는 금일 무엇보다도 먼저 흥기시킬 것은 이 체육이라고 본다. 이 체육이 왕성함으로 국민중 청장년의 기백이 왕성해지고 이 청장년의 기백이 왕성해짐으로 일국의 운명이 왕성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창하는 바는 우리 민족의 재래체육법 그대로, 말 하자면 구 삼국시대에 국민 전체가 모두 시행하던 그 체육법으로 다시 갱생교육하라는 것이다. 현 세계 어느 나라에서 행하는 체육법보다도 훨씬 우수하고 체험해 보면 납득하기 용이한 법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체육 중 일종으로 운동법이나 무술 같은 것은 우리의 재래법이면 현 세계에서 비류를 못 볼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상세는 후일의 시간이 있을 때를 기다려서 기록하기로 하고, 현 세계에서 행하는 권투, 유도, 검도, 펜싱, 레스링, 용권, 각력(씨름) 등 제종이 다 각국의 정수체육이나, 우리의 재래식 체육법을 수득함으로 이러한 각종 체술은 압도하기 무난하다는 것을 확언해 두고 집정자나 지도자들의 각성을 기다리고 또는 지도인물이 없다면 이 체육법을 아는 인사가 비록 자진해서라도 고인의 비전하던 법을 공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관계로 내가 불초함을 무릅쓰고 이 붓을 드는 것이다.
  내가 고인의 체육법의 만분의 일이나마 수득해본 고로 외람함을 불구하고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선배들이 휘지비지하는 것은 독선기신하는 것이나, 내 본의는 공개해서 민족적 공헌이 되기를 바라는 관계로 중언부언하는 것이나 이 글을 쓰는 심정을 후인들은 오해 없이 살펴 주기 바라는 바요, 또 선배들이 자진해서 이 재래체육법의 전모를 보여주기를 바라노라.
  (주석 17) 우물쭈물 얼버무려 넘김
  (주석 18) (남이야 어떻든 간에)자기 한 몸의 처신만을 온전하게 함.
  계사(1953년) 6월 20일 봉우서우유신정사


    69. 나의 참회--계색하는 본의
  병자년(1936)선친이 하세하시기전에 그 봄이다. 내가 태전(대전)서 있다가 근친차(따로 나가 살다가 본집에 가서 어버이를 뵘)로 상신 본가로 왔었다. 선친께서 말씀 끝에 일편 소첩을 주시며 내 비록 실천 못한 일이나 그렇다고 말 안 할 수 없어서 몇 구절 적어주는 것이니 평생 잊지 말라고 하시며 주시었다. 내용은 간단한 색계(호색함에 대한 경계)에 대한 고금인들의 명구였다. 그리고 선친께서 직접 내게 관련된 조건도 수구를 첨가하신 것이다. 선친께서 내게 다른 일은 큰 걱정이 아니요, 다만 이 계색에만 명심하면 큰 실수 없으리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선친께서 경계하신 이 색이라는 것에 대하여 내가 실천한 일이 잇는가 하면 10차를 환경이 범할 듯한 때면 당연히 10차를 다 색계를 생각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내 실행력이 아주 부족해서 10차를 당하면 8--9차까지는 그래도 색계를 생각하여 범하지를 않으나, 10차에 1--2차는 불고체면하고 범행을 한다. 이것이 비행인 줄 알면서 고치지 못하는 내 약점이다. 친교(어버이의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불효다.
  그런데 내가 선친 하세 후에 상중에 심범인 2차요 의범이 2차요 색범은 없었고, 그 후 기묘년(1939)에 2차를 범하였고 경진년(1940)에 의범 1차가 있었고 신사년(1941)에 또 범행 1차가 있었고 임오년(1942)에 범행 2차가 있었고 의범이 2차가 있었다. 계미년91943)에 범행이 1차요 의범이 1차요, 갑신년(1944)에 또 범행 1차가 있었다. 을유년91945)에 의범이 2차요, 병술년91946)에 범행이 1차요 의범이 1차다. 정해년(1947)에 의범 1차가 있을 뿐이었고 무자년(1948)에 역시 의범이 1차 있을 뿐이었고 범행도 1차였다. 기축년(1949)에는 범행은 없었으나 무자년 건으로 불명예를 당했다. 그리고 기축년에도 의범은 1차가 있었다. 경인녀(1950)은 의범이 1차 있을 뿐이었다. 신묘년(1951)은 아무 범행이 없었다. 임진년91952)은 심범, 의범 각 1차가 있었고 계사년(1953)은 의범 1차로 좀 창피하였다.
  통계를 보면 금년까지 선친 하세 18년 간에 내가 범행한 것이 심범이 3차요, 의범이 15차요, 색범이 8차다. 이것이 내가 부주의하는 연고이다. 그리고 선친께서 경계하신 것을 실행 못한 나의 무성의며 불효한 일이 모두 이 색이라는 명목으로, 웅심(웅대한 마음)이 얼마나 좌절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데 내가 이 색계만 아니면 만사가 다 잘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왕사(지난 일)도 왕사려니와 내두(미래)를 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백행이 다 불비하지만 이 색계만 지키면 그래도 앞날이 있을 것이다.
  비록 18년 간의 범행은 과거 범행으로 하고 내 일생을 통해서 다시 이런 범행이 없기를 자경하며 심범은 심범이라하되, 의범은 주위환경이나 본인들의 허락만 있으면 범행되는 것이니 정범에 다음가는 범행이요, 이 의범이 실범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심범이라면 편방 의사에 지나지 않으나, 의범은 게단적으로 범행목적달성에 수행(따라 행함)을 보는 것이라 상대방의 의사 여하나 주위환경이 범행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대한 관절이다. 그러니 혹 망상으로 심범까지 왔더라도 이 심범 자리에서 의범까지 못 오게 하는 것이 게색(색욕을 삼감)하는 본의라고 본다.
  내가 본디 호색(여자를 좋아함)하는 사람이다. 그런 연고로 내 선친께서 그 천성을 아시는 관계로 내게 색계를 하신 것이다. 18년 간을 생행 못한 일을 참회하며 다시 이런 일이 없기를 맹서하고 이 붓을 그치노라
  계사(1953년) 6월 27일 봉우서우유신정사


    70. 박산주장을 추억하며(1)
  기미년(1919)에 처음 대면하고 을해년(1935)에 고인이 된 산주 박양래 선생을 추억한다.
  돌이켜보면 나와의 교도는 담담하였으나, 어느 모로 보나 내게는 사도에 있어야 할 인물이요. 우도에서 서로 사귈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사비우의 사이로 서로 공경하며 무슨 일이든 상의해서 했고 혹 과오가 있다면 거리낌없이 상대방을 책선하곤 하였다. 그러며 내가 의심이 나서 묻는 말이면 일문즉해(한번 들으면 즉시 이해함)하게 명확한 답변을 주었고, 무엇을 연구하든지 서로 도움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은 산주장에게 별별 소리를 다하지만, 이것은 전혀 산주장의 피상을 보고 하는 소리요 그의 본래 자격에는 일분(한 푼)동 당치 않는 말들이다.
  산주 박양래 선생은 소시에 계모 슬하에서 아주 역경으로 지내다가 동년에 우연한 기회로 어떤 술객을 따라 출가한 뒤에 별다른 소득이 없이 수년 간을 허송하고 드디어는 승도가 되었다. 그의 사승은 당시 선사로 유명한 수월, 만공 스님으로서 그 문하에서 다년간 종학하다가 공부에 조예가 있어서 양 선사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다 퇴속하영 산문으로 고명한 술사들을 역방하고 수행하며 삼교구류(세상의 온갖 학문)에 모르는 것이 없었을 정도였으며, 신술이나 수리의 정온을 체득하였다. 그가 유일의 중보로 아는 것이 이오산이었다. 기을임은 보통으로 여겼다.
  (주석 19) 사시산법을 말하며, 정신수련의 방책으로 중시되었음.
  (주석 20) 기문, 태을수. 육임수
  이렇게 공부를 닦은 후 표연히 하산하여 당시 술객들과 비교해 보느라 술객들의 전국적 집회소인 인천 미두장에 머문 것이었다. 소위 일류로 자처하는 술객들도 이곳에 한번 발을 내닫으면 그 말기(하찮은 재주)가 나오고 마는 곳이었으나, 산주는 수년간을 여러 술객들과 비교해 본 후에는 안공일세(적수가 없음)하였고, 실제로 은군자는 모르나 세상에 알려진 술객들로서 그와 비교가 되는 사람이 없었다. 즉 타가지장기(남의 큰 재주)는 차인지말기(이 사람에게는 하찮은 재주)였던 터였다.
  (주석 21) 일제시대 항구 인천에 형성되었던 곡물집하장으로, 곡물시세가 매일 형성되었고 지금의 증권시장처럼 쌀 100가마를 단위로 석 달짜리 증권을 통해 곡물을 거래하였다. 각종 투기가 횡행하였음,
  그리고 추수(닥쳐올 운수를 미리 아는 것)에 능해서 국가민족의 성쇠를 지장(손바닥)과 같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생전에 아무런 국면에도 참례 못하리란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여기서 낙망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내가 이것을 살펴 알고 수차례나 비록 국면에는 불참할지라도 후진이나 육성해서 은군자로서의 명망이나 전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고 권해 보았다. 그러나 산주는 자신이 생전에 근고를 다해서 소득한 바가 하루아침에 소용이 없게 되고 신후(죽은 뒤)에 의지할 바가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하며 늑 낙망하는 말을 하고 했다. 이후로 그는 자신의 고급 수리를 세인의 청구에 한 번도 시용한 일이 없었으며, 또 사생활을 위해 쓴 적도 없었다. 즉 자신이 얻었던 귀중한 공부는 고결하게 지니고 이 세상을 작별하자는 행동이었다.
  얼마 후 그는 생각지도 않은 병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중증의 병자가 되었다. 내가 궐할 역량이 부족했던 탓이요, 또한 그의 마음을 그치게 할 무슨 호조건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가정 생활도 비록 형제는 있었으나 자신의 만분지 일도 못 되었고 후손이 없었으며 내외간에도 그리 다정한 편이 못 되었다. 후진들 가운데 그를 숭배하여 수리와 역학, 신술 등을 배우고자 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인사들이 없었고, 그저 산주를 이용하려는 모리배들 뿐이었다. 진실로 그의 형편을 애석해하는 사람들은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인물들이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리 노쇠하기도 전인 48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버리고 저나라로 갔다. 산주는 이 세상에 계연(얽매여 연연함)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뒤에 남은 우리야 어찌 그의 감을 추억하지 않을 것인가.
  그를 정평해 보면 그는 양평한백의 자격이 충분한 인물로서, 때를 얻지 못하여 명주가 땅 속에 묻힌채 빛을 발하지 못함과 같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요. 그는 상관천문, 중찰인사, 하달지리의 3건에 모두 능하였고 절륜한 용력과 신통한 검술을 갖추었으며, 운주유악중(장막 안에서 궁리를 함)이어도 쾌승천리외(천리 밖의 사람을 능히 이김)하는 묘산을 구사하였다. 또한 지피지기하는 시해법과 고금진법에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는데, 다만 때를 못 만난 것, 이것이 그가 실시한 불운의 영재가 된 까닭이다.
  이 영재를 17년 동안이나 상종하면서도 상경은 하였으나 사사를 않고 여전히 우도만 고수한 내 자신이 무엇으로 보나 부족했던 관계요 역시 운이라고 본다. 나는 나대로 자신을 가지고 서로 만나며 그 부족함을 보충하면 되려니 했던 것이 그가 조요함으로써 다시는 상의할 곳이 없고, 또한 그런 영재를 만나지 못했으니 누가 그 할 일을 대신하리요. 그의 생전에는 그리 물을 일이 없었으나 그가 가고 난 지금은 물을 일이 얼마든지 있어도 물을 곳이 없으니, 내가 이 일을 추억 안 할 수 없고 또한 지금(1953년) 같은 국가존망지추가 되니 이런 때에 좌우에서 서로 상의한다면 제갈량이나 사마수경을 어찌 부러워하리요. 그러나 독지난명(혼자의 지혜는 명확하기 어렵다)이라 항상 일을 당할 때마다 이런 때 산주장이 생존하였다면 서로 운주도 해볼 것이요 서로 책모도 해볼 것이 아닌가. 여기서 더욱이 남은 내가 고적함을 느끼며, 내 좌우에 비록 산주장만 못하더라도 그 반만이라도 될 자격의 인물이 있다면 무엇이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리요. 만약 산주장이 생존하였다면 두 사람이 용산초당에서 백산운화의 성업을 배태시킬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 고장(외손바닥)이 난명(소리를 내기 어려움)이라고, 그 양평한백에 비견하는 영재를 이 비상시를 당해 못내 그리워하는 것이다.
  (주석 23) '삼국지'에 나오는 후한 말엽의 은사. 사마휘. 형주에 은거하며 방통, 제갈량등 많은 제자를 배출해다. 당시 정신계의 지도자였다. 도호가 수경이다.
  왜 산주를 양평한백에 비하는가 하면, 양평의 모지도 있으려니와 한백의 용지와 전술도 능한 점에서 양평에게만 비교하지 않고 한백에게도 비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술객들이 많으나 산주와 비견될 만한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비록 재질은 산주의 만일이 못 되나 아직 천년이 54세요, 또 백산운화를 주로 하며 황백환국이 목전에 있는 관계로 이 난국을 보고 요리할 인물이 아직 나오지 않으니 고인이나마 산주를 추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그와 대등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내가 산주를 알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를 알 사람은 나 하나뿐이요, 그를 진정으로 추억하며 그의 전모를 그려보는 사람도 나 하나뿐이기에 그렇다.
  산주는 운독이장(작은 궤 속에 넣어 감춤)하는 심리요, 나는 대기가이고(그 값을 기다려 팖)하고자 하는 심정이라 산주장은 시은(시정의 은자)이 되었고 나는 움직이고자 하는 관계로 풍풍우우가 많았다. 이것이 내가 산주를 추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계사(1953년) 6월 27일 봉우서우유신정사


    71. 조산주장
  (주석 24) 삼비의 한 사람인 산주 박양래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명호애재, 명호통재라. 일생일사는 이지상야니 일생즉일사곤 고소난명이무난자는 사어사야라.
  고사어사자는 수사나 불사영생야요, 사유영야라. 사자무여감하고 조자역무비상이라.
  범인지생사즉생여부유하고 사여초로자하야 생무가칭하고 사무가석이라.
  사자수유구구지애이조자역무가조지의하니 차시상정야로되, 연이지약산주지사야는 유심불연자존언하니, 생이유실소호하고 양어계모지수하야 한온감고가 불적어신이라.
  재도십세변출가하야 호구어촌여산림지간자곤 유년의러니 적인만공수월양선사지수양하야 탁적산문오육성상후에 인유감이배별은사하고 독처산문면벽9년에 일조황연유득하야 인이하산하니, 광익흉해삼교구류무소불통하고 상우고인에 안공일세러니, 내하시불지운불도하야 결연이탁적어시정지문하니 실고인은어시지의야라.
  거연십유칠재에 간경풍풍우우를 하족설재아.
  시정모리지방과 탐재오색지기는 자이위신사배구각이 왕왕여시인데 기외무지몰각자하족괴재아.
  계자지불하기와 마씨지노투분은 이소고연이니, 세인지불지장궤지옥도 역리지상야라.
  (주석 15) 계자지불하기: 중궁 춘추시대 책략가인 소진이 성공하지 못하고 곤궁한 처지로 집에 돌아왔을 때, 형제와 아내, 형수들이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그를 비웃었다는 고사. 계자는 막내아들. 즉 소진을 가리킨다.
  여년재약관시교사인에 일견허기러니 후어언이십유여년에 항여초견시하야 상경상공에 유공상실하고 봉장론신에 망침폐식하고 통론고금에 불지기휴하고 여자이위진세간소터모새지흉해하고 영서상휘의러니, 여근년이채신지우로 불출산문자구의라. 불득원원상종의러니 의외홀접란서하니 차하고야며 차하사야오.
  (주석 26) 영서: 영검이 있는 무소. 즉 마음
  (주석 27) 채신지우: 자신의 병에 대한 겸칭. '맹자'에 보임.
  오조지대망반귀허의라. 오조다건필천상사인야부인저. 사인지사하이어매옥분난재아. 천하박어사인호아. 
  사인즉달어생사지도자수무여감어기사야나, 여지애막과어차이라.
  겸이사인신대효복슬하공허하고 기사미면어시정도방이행려지사로 탁시어산사화장지장하니 가위생무가거지지요 사무장신지소하니 운하박야며 명하기호아.
  사인지사실인어오조지운건운기하여 천상사인야부인저. 천상사인야부인저.
  차인지사당이어부유지조모초로지존몰이환유시어포영지변환소조여시극참하니, 상필천사차인시련육신어차생하고 성과정신어래생야부인저. 차인지영문웅무불실삼대좌성지재이은어거진마적지문하니, 세인기지학서계시용음사택호아.
  명호애재라. 명호통재라. 선거자무감어영계이후유자독자상정당하여재아. 영응유지하리라. 상향.
  (주석 28) 상향: 조문이나 제문의 마지막 맺음말.
  (풀이)
  아, 슬프고 슬프도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음은 이치에 늘 있는 일이니 한 번 태어난즉 한 번 죽음은 진실로 면키 어려우나, 더욱 어려운 것은 죽을 곳에서 죽음이라.
  고로 죽을 곳에서 죽는 것은 비록 죽음이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삶이요, 죽어도 외려 영광이라 죽은 자는 남은 한이 없고 애도하는 사람 또한 슬프고 쓰라림 없어라.
  평범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란 살아서는 하루살이와 같고 죽어서는 풀잎의 이슬 같아 살아도 일컬을 것이 없고 죽어도 애석해할 것 없도다.
  죽은 자는 비록 구구한 슬픔이 있을지라도 애도하는 사람은 또한 애도할 뜻이 없으니 이는 보통 있는 인정이로되, 그러나 산주의 죽음에 이르러는 아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 태어나 어려서 의지할 바를 잃고 계모의 손에 길러져 춥고 따뜻함과 달고 씀이 몸에 맞지 않았더라.
  겨우 10세에 이르러 곧 집을 나와 마을과 산속 사이에서 먹고 삶이 몇 해가 되더니, 마침 만공, 수월 선사의 가르침을 만나게되어 산문(절집)에서 5--6년 자취를 남긴 뒤에 느낀 바 있어 은사께 절하고 물러나와 홀로 산중에 거처를 정하고 아홉 해를 정신수련하매 어느 아침 환하게 밝은 얻음이 있어 인하여 산을 내려오니, 마음속을 바다처럼 넓히고 더하여 유불선을 포함해 모든 학문 사상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독서를 통해 예사람의 벗으로 삼음에 눈에 참이 없더니, 실로 예사람이 저자에 숨은 뜻일러라.
  어느덧 17년에 그간의 곳애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시정 잇속꾼이라는 비방과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비난은 스스로 신사라 이르는 자들의 입아귀가 왕왕 이와 같은데 그외 무지하고 지각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산주장에 대해 괴이하게 말하겠는가.
  소진의 처와 형수가 베틀에서 안 내려옴과 강태공 부인 마씨가 화를 내며 삼태기를 던짐은 이치가 진실로 그러한 바이니, 세상사람들이 궤짝에 감춘 옥을 모르는 것도 또한 보통 있을 수 있는 이치라.
  내 나이 겨우 20세에 이 사람을 사귐에 한 번 보고 친구 되니 이후 어언 20여 년에 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 공경하매 오직 서로 실수할까 두려워하고, 한 번 만나 마음을 논함에 자는 것을 잊고 먹지 않으며, 옛과 지금을 통해 논함에 그 쉼을 모르고, 내 스스로 일러 이 티끌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가슴의 막힌 곳을 풀어 펴고 마음을 서로 비춰 본다 하였으니, 내가 근래에 신병으로 산 밖에 나간 지 오래라 부득이 자주자주 만나 보지 못하더니 뜻밖에 홀연히 그대 죽음의 소식을 접하니 이 무슨 까닭이며 이 무슨 일인가.
  우리의 기대하고 바람이 반은 허사로 돌아갔네. 우리들의 허물이 많아 마침내 하늘이 이 사람을 죽였음인가.
  이 사람의 죽음이 어찌 옥을 파묻고 난을 불살라버림과 다를 바 있으랴. 하늘은 어찌 그리 이 사람에게 야박하신가.
  이 사람은 삶과 죽음의 도에 통달하여 비록 그 죽음에 남은 한이 없으나, 나의 슬픔은 이보다 더 슬플 수가 없네.
  또한 이 사람의 부친 대상이 끝나지 않았고 슬하엔 아무도 없으며 그 죽음이 시내 길가의 행려자 죽음을 면치 못하여 산사의 화장장에 시신을 맡기니, 가히 살아서 거할 땅이 없고 죽어 묻힐 곳이 없으니 운이 어찌 그리 각박하며 명이 어찌 그리 기구한가.
  이 사람의 죽음은 실로 우리들의 운명이 절뚝발이처럼 기구함에서 비롯되었으니 하늘이 이 사람을 죽였네. 하늘이 이 사람을 죽였네.
  이 사람의 죽음은 응당 하루살이나 아침이슬의 있다 없어짐과는 다르나, 도리어 물거품과 그림자의 덧없이 변하는 환영보다 심한바가 있어서 이처럼 세상과의 인연이 극히 참혹하니, 생각건대 하늘이 반드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번 생에서 그 육신을 시련케하고 내생에서 정신의 성과를 얻게 함이네.
  이 사람의 영웅스런 문장과 무예가 고대 하은주 세 나라의 임금을 보좌하던 인재들에 조금도 떨어짐이 없으나, 세속에 숨어 있었으니 세상사람들이 어찌 학이 닭의 횃대에 앉아 있음과 용이 뱀의 못에서 울고 있음을 알 것인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먼저 간 사람은 영계에서 여한이 없으나 뒤에 남은 사람의 홀로 아픈 심정 그 무엇으로 표현할 길 있으랴. 형혼은 응당 앎이 있으리라. 상향
  세청저중경(을해(1935년) 중복) 유우봉우곡배
  계사(1953년) 7월 19일 봉우난초중습득고불기지의재초우유신정사
  (주석 29) 남은 벗 봉우는 통곡하며 절하다.
  (주석 30) 봉우가 어지러운 글 속에서 습득하므로 버리지 않을 뜻으로 유신정사에서 다시 기록함.


    72. 작보를 듣고
  속담에 까치가 울면 희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까치의 보희도 여러 가지이다. 대체로 보아서 까치가 세음으로 연첩해서 전전보희하는 때엔 십중팔구 원객이 찾아온다. 까치가 비록 미물이나 손님의 내불래쯤은 예지하는 것 같다. 아까처럼 가는 소리로 겹쳐서 연달아 우는 것은 손님의 내방을 뜻하고, 단음으로 삼절성(세 마디 소리)은 비록 연달아 울어도 별 신기한 것 같지 않다. 또한 오전이나 조반 들기 전에 울어야 적중되지, 정오 이후에는 맞지 않는다.
  오늘은 해뜨기 전부터 까치가 단음 삼절로 연달아 내보하니. 내객이 있다고는 하나 별로 친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고대에 조수의 소리를 관찰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이것을 경험해 보고 안 것이 아니라 자심이 영통해서 조수의 의사표시를 우리 인간의 대화같이 안 것이었다. 조수지음을 찰(살핌)할 정도면 그 소리를 듣지 않고도 그 의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님께서 말씀하신 '문기성하고 불인식기육 이라는 내용과는 다르다. 무기성은 그 애성을 말씀하신 것이요, 별다른 이유를 뜻한 것이 아니다. 성인은 평범한 것을 말씀하시었고 신기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누구나 동일하게 알 일을 말씀한 것이요 성인만 아는 일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뒷사람들은 하나라도 남보다 더 아는 일이면 이것을 표현해 보느라 애씀이 또한 상리요 상정인 듯 하다.
  (주석 32) '맹자' '양혜왕' 상편에 나옴. '군자란 금수들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한다.'는 맹자의 말이다.
  일찍 일어나 독서나 하자니 동네아이들이 방해하여 소견법(시간 보내는 법)으로 몇 자 적어 보는 것이다.
  (과연 오후에 한객이 다녀갔다.)
  계사(1953년) 7월 초사흘 유신초당에서


    73. 고우 문수암을 추억하며
  (주석 33) 본명은 문병옥이다.
  사람이란 본디 무상한 것이다. 내가 문수암을 처음 만난 것도 아무 생각 없이 여행하던 중에 전남 영암군 시종면에서 이원서라는 노인의 설왕설래 속에서였다. 즉 문씨라는 승도가 일차 상봉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나 역시 호기심으로 그 노인과 함께 영산강을 건너서 나주 어느 마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서 그 다음해 광주에서 내가 객지생활을 1년 동안이나 할 때에 비록 거처는 한 집에서 안 하였으나 조조모모에 상봉 안 한 날이 없이 이곳저곳을 동행하곤 하였다. 조계산에서 송광사, 선암사의 고적도 같이 찾아보고, 무등산에서 김덕령의 선산도 평해 보고 물염적벽에서 승지며 산세도 논해 보고, 곡성에서 과객 노릇도 해보고, 밤길 운월치에서 맹견을 타살해서 바랑에 넣고 광주 80리를 온 일도 있고, 무등산 폭포놀이를 중복날 광주읍 부잣집 자제들과 같이 가서 그들이 크게 차려 놓은 음식을 얻어먹고 석양천 더운 날에 취흥이 도도한 부잣집 청년들이 우리를 믿고 폭포놀이 온 부랑청년들과 큰 싸움을 해서 봉변을 당하려던 차에, 문과 또 이모라는 동지와 내가 이 싸움을 일언반사 허비 않고 그 부랑청년 중 제일 강호 한 명을 문이 고루 위에서 한 손으로 들어 절벽 아래로 던지려 하니 싸움이 자연 중지되었고 우리는 석양에 유유하게 증심사로 돌아왔다.
  또 광주신사에서 김면수 씨와 셋이 동행하였다가 부지불각중에 문이 신사에 있던 큰 수탉 두 마리를 감쪽같이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김씨는 도망한 일도 있고, 광주 누문성 주점에서 부랑청년 수백 명에게 포위되어 당장에 봉변할 지경에 문이 그 가운데 두목을 한 손으로 앞집 지붕 위로 던져 버리자 부랑배들이 일시에 도망간 일도 있었다.
  한번은 광주에서 일본군이 여단 대항 연습이 있었는데, 광주공원 위에서 사오백 칸의 거리가 있는 석유창고 앞을 일본군 장교가 탄 차가 일장기를 날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몰우전(팔매질)으로 연달아 자동차 네 대의 운전석 유리창을 깨뜨리는 광경을 본 적도 있었다. 또한 광주공원 위에서 사정에서 관혁을 향해 쏘는 화살을 뒤쪽에서 돌팔매로 맞혀 떨어 뜨리는 일도 보았다. 나는 정성면 집에서 연자매 알석을 수십 명이 들어서 문수암의 배 위에 놓고 그 위에 십여 명이 장고를 치는데, 문수암은 정종 두 되를 유유히 마시고 긴 시간을 노래부른 일도 있었다.
  또한 광주에서 일인이 중량 200근 되는 것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수암이 유유하게 편수(한 손)로 들어올려 세 칸 밖으로 던진 일도 있었고, 김심재의 요청으로 금산사에 가서 본산 거승 모씨를 압도할 생각으로 금산사 대웅전 계단 아래 약 7--8척 되는 곳에 수암이 누워 금산사 청년승려들 보고 자신의 배 위로 뛰어내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약 50여 명이 차례로 뛰어내렸으나 조금도 움찔하지 않았다. 그 거승이 뛰어내리는데 위로 먼저 6--7척 뛰어올라 힘을써서 수암의 배 위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이것을 수암이 복력을 팽창시키니 거승이 4--5칸 밖에 가서 엎어진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선실에서 세월을 보내더니, 대선법계를 얻어 선문의 중진으로 있으면서도 나와 왕래하며 별별 기이한 행적들이 많았었다. 항상 독립운동에 주력하며 배일사상으로 전심전력을 다하던 동지이다. 나의 선친께서 농담으로 "반대화상(살찐 화상)이 묻지 않아도 노지심임을 알겠다."고 하시면 문수암은 "소승의 살찜은 노지심이와 같사오나 소승의 문학이나 선교양종의 지위는 노지심이 디딜 다리가 없어서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고하곤 하였다.
  문수함은 구한말 지사 황매천의 고제(뛰어난 제자)였고 필지서지와 또한 승도로서 선교 양종에 선사와 강사의 지위를 얻고 있었으며, 당대 만공, 한암 대선사의 고족(뛰어난 제자)이었다.
  우엲 중국으로 들어간 이후로 간간이 소식이 있을 뿐이더니, 을유 8, 15해방 후에도 생사존물을 알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중에 믿을 만한 곳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수암이 을유년 이후로 부산에 내려와 승려로 있으며 속가 살림을 하다가 우연히 병을 얻어 서천극락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확실한 얘기를 듣지 못하였다. 이 사람이 후손이 없고 여식이 하나 있으나 내가 광주 있을 때 수암의 계씨(아우)가 그 질녀(조카딸) 혼사라고 부친인 수암을 청하니, 그의 말이 출가인이 무슨 딸 혼인에 상관이며 더구나 사위자식이 장인이 승려라고 불만일는지 알 수 없으니 안 간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을 뿐이다.
  그는 한학에도 보통 유자로는 당하지 못할 만큼 공부하였고 감여술(풍수지리)에는 석우 화상과 같이 불가 양명풍(양대 풍수사)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내가 이 사람과 친하기도 우연한 기회요, 이별하기도 부지중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의 친분은 누구보다도 가까웠고 사상은 민족독립노선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내가 기성 종교에 대해 별로 찬의가 없는 것을 잘 아는 관계로 서로 만나면 자신의 종교 선전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동일한 민족정신으로 배일 사상만 공명하던 동지이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별별 말 못할 비밀이 다 있었으나, 절대로 비밀을 엄수하고 발설하지 않던 사이였다. 그리고 장래에 민족의 공영이 되면 생사를 다 같이 바치자고 한 인물이었는데 허무하게 이 세상을 떠나며 한마디 말도 남김이 없었으니, 이것이 인생의 원리라 하나 그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다. 문수암도 늘 말하기를 불가나 속가나를 통해 친구라고는 봉우밖에 없다고 서로 믿고 지내 오던 중에 흔적 없이 가버리니 당시 누가 그 자취를 따를 것인가.
  와서도 모르고 가버려도 모르니 사람은 참으로 무상하도다. 누가 이렇지 않으리요마는 내 더욱 창연한 바는 이 사람의 감이로다. 그는 삶이나 죽음이나 염두에 두지 않는 인물이라 오로지 대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고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때가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때인지라 이 사람의 추억 더욱 심하도다.
  고이고이 서천에서 극락을 누리소서
  계사(1953년) 7월 20일 봉우 근기


    74. '심인경' 사의
  (주석 34) 고상옥황심인경'을 말함.
  이 '심인경'은 선친께서 거금(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인 무신년(1908)에 국사일비(나낫일이 날로 어그러짐)하고 가운이 건둔(운수가 침체함)한 때라 선서(좋은 책)를 많이 간행하시는 중에 '옥황심인경'도 100부를 간행하시어 유지 제위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선친께서는 유불선 제선서에서 가장 긴요하다는 경서를 종신송독(평생토록 소리내어 읽음)하시고, 선비께서도 정성이 배타(남보다 곱절)하시어 범인으로서 따르지 못할 정근을 많이 하신 것은 불초가 목도한 바요, 또 양위분(두 분)의 정성으로 불가사의한 기적이 이루 기록할 수 없었다. 선비께서는 일찍 하세하시고 선친께서는 81세에 환원하시었는데, 환원하시기 전 3일에 선친께서 불초(봉우 선생 자신)와 제자(동생) 제인(여럿)을 대하시어 천상에서 첩지(임명서)가 왔는데 너희들에게 뵈이려 하였더니 그 첩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찾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에 선친께서는 기력이나 정신이 조금도 쇠하심이 없었고 환원 당시에도 여상(평상과 같음)하시었다. 장례가 5일이었으나 여전히 수면하시는 것 같았다.
  내 선친께서 과화존신(죽음을 지나도 정신을 보존함)에 치중하시어 이 성서를 봉행 하시기를 50여년이시었으나 불초는 계승을 못하고 풍풍우우에 백수가 되었다. 그러나 불초는 청년시부터 '용호결'에 유의하고 호흡법을 연구해 보았다. 아주 소년시대부터 선비께서 지도하시던 것이었다. 후에 '심인경'을 봉독하여 보니 이 '심인경'은 단가의 종지요, 무엇보다도 최긴최요절목(가장 긴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내가 실행본 지 오래요, 또한 후인을 위해서 이 '심인경'을 시간만 있으면 간행하고 내가 통속적으로 주석해볼 예정으로 선차 이 원문을 쓰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천지만성의 종지가 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중언하노라.
  (주석 35) '삼성경훈'을 말함. 내용은 '태상감응편'. '부우제군음질문'. '관성제군명성경' 이다
  계사(1953년) 7월 21일 여해 봉서


    75. 연정원의 추억
  사람이 일생을 지내고 보면 지나온 일을 다 기억 목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일생에 맞는 인물이나 특별한 교분이 있던 사람이 아니면 거의 잊어버리는 것이요, 또 명산대천도 기억에는 존재할지나 오래되면 관람시 그대로 생각 안 되는 것이 보통 일이요, 소시에 배운 서책을 노안으로 보면 아주 초대면하는 것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 한 사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요, 세인이 거의 다 그러하다. 이것이 보통이요, 이것이 상정이다. 괴이할 것도 없고 또는 괴이하게도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몇 가지 아주 불변색으로 박힌 인판이 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잊고자 할 필요성도 없는 일이 평생을 통해서 수를 세일 만큼 있다. 그 중에 한 가지인 연정원이 내 두뇌에서 아무 수술을 해도 사라질 줄을 아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물을 필요 없고, 내가 상애단이니 의열단이니 공섭단이니 연방사니 동지회니 하며 각양각색의 동지를 규합해 보았다. 물론 소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정신연구를 목표로 동지를 규합해서 여러 차례 수련해 보았으나 번번이 개인자격 향상을 주로 한 것이요, 그 밖에 집력을 못하였던 것이다. 사실은 간성장에서 아주 전공하였으나 무조(조건 없음)하고 수양한 것이요, 이것을 완수함으로 우리들이 무슨 관계성이 있다는 것을 구설로는 한 일이 없다.
  (주석 36) 계룡산 갑사 계곡에 있는 한옥별장.
  연정원 발족시에는 아주 우리 주의나 주장을 서천맹심(하늘과 마음에 맹서함)하고 시작한 것이요, 또 이것이 우리의 결정체가 될 내두에 서광이 있을 예조가 많았다. 그 원우 중에서도 무엇이 무엇인지 부지하고 있는 원우도 있었으나 이것은 하우불이(어쩔수 없는 바보)라 할 수 없는 일이요, 그 다음은 다 동일목표라는 것을 알게 되고 삼동상설에 만수동빙(모든 나무 얼어 있음)이 춘화만개(봄꽃이 활짝 핀 것처럼 서리가 내림)한 시절과 같은 때도 주야불관하고 고력정근을 불휴하던 일인데, 의외에도 좌익계열의 모략으로 우리를 좌익단체라고 경찰이 구속하고 별별 엄형(엄한 형별)을 해서 나는 아주 병신이 되고 원우들은 해산이 되었다.
  그래도 또 재건을 꿈꾸고 있었으며 경제적, 물질적으로 준비를 불태(게으르지 않음)하고 있던 중에 6, 25사변으로 원우중에 제일 노력해 오던 사람들이 모두 희생을 당하고 나도 또 공산당에게 구속을 당해서 별별 고생을 다하고 생명만 보존했다. 우리를 모략하던 그자들은 6, 25사변에 사상적으로 모두 처분되고, 우리를 그자들과 연락해서 고문하던 형사는 여전히 지금토록 형사로 있는 중이요, 연정원우들로 남은 사람들은 각자 호구(입에 풀칠하기)에 분망하여 다시 단합될 날이 기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원우였던 사람만 고대할 수 없고 재출발할 용기를 내는 중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를 희생해서라도 이 연정원의 재생을 도모하는 것이다. 또 연정원 초발족시와 같이 전공을 했으면 1년만 계속한다면 우리 목적의 일부는 달성될 것 같다. 아무래도 내 머리에서 이 '연정원'이라는 3자가 죽기 전에는 사라지지않을 것이다. 금년, 명년을 기회로 적극 추진해서 재발족을 할 복안을 확립하고 있다. 연정원을 추억하며 이 붓을 그치노라
  계사(1953년) 7월 23일 봉우서우유신정사


    추고
  연정원에서 반년만 무사히 경과하였다면 5--6인의 승계자가 확실히 있었을 것인데, 이 마장이 영원히 있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역시 연정원을 재발족하고자 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구성이 문제가 될 것 같다. 혹 경제가 허락된다 하여도 이에 응할 인물이 누가 될지 알 수 없는 것이요, 제1회 원우만큼 열을 낼지가 의심이다. 일차만 극력을 다하여 완성시키면 그 후로 나가는 것은 별 문제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연정원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먼저 체육을 보급시키고 보급이 연을 작하여 연정원우의 자격 선발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속한 시일 내로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 동일한 취지라면 다른 동지가 하더라도 나로서는 찬성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백 가지 이상보다 한 가지 실현이 속히 되기를 바라고 이 붓을 그치노라.


    76. 협의소설을 보다가
  중국인 저술 협의소설은 역대적으로 수천년간을 계속한 민간패사다. 역사적으로 대요만 기록해서 민간인이 상세를 알지 못하겠는고로 이런 것을 소설화하여 통속적으로 역사의 상식을 보충할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좀 역사적으로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저술이 다각적으로 비록 소설이라도 보익이 많을 것인데, 고대 소설은 그래도 이 방면에 극히 유의한 것 같고, 근대 협의소설은 아무래도 그저 소설화한 감이 많다. 비록 미문가구(아름다운 문장)로 평가한다면 근대소설이 가치가 있을 것이나, 이 소설을 저술한 본인의 목적은 고대저술이 아마 우수한 것 같다.
  '열국지'로부터 이전에 '봉신연의' '개벽연의' 가 있고 이후인 '후열국지' 와 '동서한연의' '삼국지' '속삼국지', '진가팔왕기' '수당연의' '전당기' '설가장전' '오대잔당기' '진도남전기' '설악전' '칠협오의전' '수호지' '서유기' '안록산전기' '천보유사' '전송기' '전명기' '팽공안' '팔대의' '신주충복지' '명태조창업지' 운운의 반역사, 반협의 소설들이다. 저자에 따라서 내용이 다르다.
  물론 대의명분을 주로 한 것은 중국소설의 특장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협객의사의 무예나 투지를 목표로 한 데도 있고 혹은 정신적으로 신비를 주로 한 데도 있다. 또는 그저 기행전기로 주목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잇다. 말하자면 고대소설에는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 측면을 합치해서만이 저자의 주목적을 표현하였고, 중고에 와서도 부지중 정신, 물질의 혼동 가운데에서 물질 측면을 주로하며 그 정신방면은 어느 곳인지 비장해서 얼른 보이지 않게 하였고, 근대로 내려올수록 무예니 지혜니가 다 물질적으로 보통 습득하면 되는 정도에서 주로 사실을 자미있게 미누가구로 포장을 해서 문사들이 그 본의나 주목적보다도 그 문체에 취하게 한 감이 없지 않아, 보는 사람들도 그 소설의 주목적보다 거기서 나오는 서문이니 시문, 가사니 하는 것에 잘 형용한 것을 서로 칭찬한다. 그러니 주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소매(견문이 좁고 사리에 어두움)한 분이 아주 없다고 못 하겠다.
  그리고 저자부터 유물적으로 편경(한쪽으로 치우침)되어서 일부 패사를 보아도 정신수양자라고는 협의 운운하는 인물 중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 근대 협의소설의 통병이요, 민간의 요구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모모 문인들이 '홍루몽' 이나 '요화전' 이나 '형창초이' 나 '서상기'니 하는 비협의 소설 중에 어느 구석인지 정신수양 방면에 암장을 시킨 곳이 보인다. 그리고 권선징악을 주로한 소설도 협의를 떠난 '금병매' 같은 내용에서 정신수양 방면을 볼 수 있다.
  협의소설이라고 무예만 주로 하였을 리가 없다. 실질적인 무예를 연습하자면 많은 애로가 있을 것이요. '요지지이'와 같다는 것은 아니나 그런 불가사의한 일도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저술하는 문사들이 자기 자신이 정신수양에 별 근기가 적은 연고로 이것을 표현시키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고대라고 협의들이 정신수양을 많이 하고, 근대라고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협의가 다 대의명분을 주로 하나 억강부약(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부추김)이라는 것도 이 대의명분을 주로 하는 한계 내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비록 요사여신(일을 귀신같이 해냄)은 못할망정 지피지기(남을 알고 나를 앎)하면서, 목전의 길흉은 알지 못하여 맹목적으로 일생을 행동하다가 그야말로 운이 좋으면 출세하고 부족하면 강호협객으로 늙어 죽는 데 지나지 못하니 이는 저자들이 여러 조건들을 덜 생각한 것 같다. 후인들도 그 저술갈이 횡행천하하던 협객들이다. 이 무예만으로 한 줄 안다면 오해라고 본다. 
  (주석 37) 중국 청나라 포송령이 1679년에 지은 문어체 단편설화집. 신괴. 귀호를 취급한 괴기소설로. 묘사가 자세하고 착상이 교묘하며 문장이 현란함.
  여기서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협의가 되려거든 제일 먼저 조건이 정신수양을 해서 상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나가는 것이 무예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둔다. 만약 중국 근대의 협의들이 그 일을 기록한 문사들의 전기와 같다면 어찌 최후의 승리를 목표로 출세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시된다. 이래서 나는 유물유심의 편경을 주장 않고 이원합치론을 어느 말 끝에라도 주장하는 것이다.
  중고 시대에도 명장들이 용관지군(용력이 군대에서 으뜸)해도 실패하는 것은 반드시 이 지피지기하는 혜력이 보족한 연고요, 이 혜력이 부족한 것은 정신수양이 덜 된 연고라고 확정하는 외에 타도가 없다고 본다. 협의들로도 구비해야 할 조건은 장수나 일반으로 지인용이 평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지라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학습한 지식만 가지고는 인과 용에 평행이 되기 곤란한 관계로 정신수양을 별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붓을 그치노라
  계사(1953년) 7월 25일 봉우서우유신정사


    추기
  근일 탐전소설이 협의소설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사설탐정이 없고 무슨 일이든지 형사진에서 총책임짓는 고로 탐정술이 우리나라에서는 행세를 못하고 협의도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별 발족을 못 보았기에 내가 예를 들어본 것이 중국의 협의소설을 주로 말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국가기관이 아니고도 무예나 정신술이나 수련시키는 곳이 많고 혹 협의들이 사고를 내어도 예사로 아는 것이다. 대의명분상 그러해야 옳다고 인정되는 것이나, 우리나라 대대로 유전성이 천년 이래로 협의의 입각을 불허하였고 이 협의들의 행사가 있다면 국법이 묵과할 아량이 없었다.
  그런데 을유 8, 15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도 간간이 보이는 이 협의행사를 세인의 동정은 받으나 관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또 억강부약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민대민이 아니고 흔히 민대관이 되어서 협의로 해석하면 반정부행위가 되고 이 행위를 법에서는 극렬하게 처단하게 되니, 겨우 싹을 터보던 우리나라의 협의도 유월비상(여름에 날리는 서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건 저렇건 우리나라에서 여기저기서 무영회도 열고 정신수련원도 열고 해서 무술도 외국인에게지지 않을 만큼 하고 정신력도 세계수준을 돌파하였으면 우리 국법도 이 협의로 발생된 사건에는 좀 고려해줄 법안도 나올 것이다. 속한 장래에 여러 가지로 이 협의의 양성장인 무술도장이나 정신수련원이 발족하기를 바라노라.


    77. 연정에 대한 설명을 쓰고자 하는 내 마음
  내가 때마침 서력 1900년생이 되어 이 세계가 아주 전환기를 당한 차시오, 또 우리나라가 장차 망하려는 시절에 신구가 교체되는 한말정치에서 내 선친이 이 복잡다단한 관계에 투신하시어 당시 중대부인 칙임관급(황제의 명으로 임명된 고등관리)으로 고종황제께 은총을 받으셨다. 그러다 좌천하시어 능주군수로 지방관이 되신 때인데, 고종황제께서 선위하신 이 당시는 벌써 조정은 왜인의 수중에 실권을 다 바친 시절이다. 내 선친께서 단연 관계에서 용퇴하시고 국은을 보답 못하신 것을 항상 비가강개(슬픈 노래로 원통해함)로 세월을 보내시었다.
  (주석 38) 종3품 하의 문관벼슬. 요즘의 차관보급
  그래서 나도 가정문견(집에서 보고 들음)이 습이성성(익힌 것이 성격이 됨)해서 부지불각중 불평객의 1인이 되어 배일운동을 음적, 양적으로 하는 관계상 일정 당시에는 아주 기물(버린 물건)로 취급을 당하였고 또 내 자신도 그 당시 그 정도로 취급받는 것이 도리어 무방하였다. 그래서 내가 학령(배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규학교에서 일본인의 교육을 받고자 하지 않은 관계로 서울 일고(제일고보)에 추천생으로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내 자습으로 학력을 두슥하였었다. 그러니 물론 학교에서 습득한 것과는 판이해지는 것이다. 과학문명의 전문학식이 없어서 다른 출세는 못할 것을 잘 각오하고 이 과학전공을 중지하고 고래식 정신수련법을 독자적으로 연구도 해보고, 각계각층의 정신적 선배에게 지도도 받아 보았다.
  그래서 정신연구를 시작한 후에 우리 한국은 물론이요, 동호자라면 일본, 중국을 불원천리만리하고 역방하며 지도도 받고 자습도 하며 혹은 심법도 전수를 받은 일이 있고 또는 내가 자각한 점도 있어서 고인의 고력수행하던 방식이나 현세 선배들의 지도하는 방식이나 또는 신구식의 연구법이 비록 외관으로는 상이점이 있는 것 같으나 귀결점에 와서 보면 유불선이나 또는 야소교(예수교)나 회회교(이슬람교)나 인도교(힌두교)나 기타 유사한 철인들의 행사가 대동소이한 점을 발견하였고 또는 백가서에서 합치점을 확실히 파악한 것이다.
  구 후에 별별 철인자처하는 인물들을 모두 만나보았으나 한 사람도 이 원리를 추월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 원리에 배치되는 이론이나 실행은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것을 보면 이 원리가 가장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연정(정신연구)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을 감히 쓰고자 하는 바다.
  예사람의 진수가 있는데 화사첨족 격으로 네가 무엇을 기록해서 세인의 이목을 혼란케 할 것인가고 하겠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바는 예사람의 진수를 반대코자, 어목혼주(물고기눈을 진주와 혼동함)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들이 전해주신 진결(참비결)은 보고 듣는 사람이 혹 알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인증비거(증거를 끌어대 비교함)를 들고 광범한 논리로 후인이 보아서 그 진의가 어디 있는 줄 알 길이 없다. 숙독완미(완전히 읽고 그 뜻을 앎)하면 혹시 요해할 수 있으나, 초학자로는 백화점에 가서 어느 물건이 좋은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다 좋은 말씀이나 가장 긴요한 점을 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바에서 가장 긴요한 점만 택해서 곧바로 연구코자 하는 인사에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이 내가 설명하는 것을 보면 즉석에서 실행으로 옮길 수 있게 내가 수십년 고심하던 것에서 발췌해서 최안최적자(가장 안정되고 적당한 것)를 택해서 또 아주 간단명료하게 남녀노소와 유식무식의 구별이 없이 공통적으로 알기 용이한 구어체로 쓰고자 하는 심산에서 나온 바이니, 관서(관대한 용서)하심을 바라는 바다
  (주석 39) 광범. 광대함. 보편적임.
  그리고 이 설명을 보고 연정에 착수하려는 인사는 제일로 정신이 현대과학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는 물질문명인 현대과학으로만은 절대로 정신계를 엿볼 수 없다는 것도 확언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이 물질문명에 1세기 가까운 낙오를 하였으니 이 낙오를 물질문명으로 뒤따라가자면 앞으로 1세기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따라잡는대야 또 후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연구에서 얻음이 있다면 과학물질문명의 진보율이 보통 1세기에 될 것이면 20년이면 충분하게 따라가고도 여유가 족족해서 일보전진할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유물관으로 보면 우리가 1세기 이상의 낙오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나 유심관으로 보면 우리가 수세기를 앞선 것이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유심유물의 이원합일론을 그대로 실현한다면 앞으로 수십년 만이면 물질문명을 우리가 제패하고도 여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설명코자 하는 것이다. 세밀한 분해는 설명서에 쓰기로 하고 이 정도로 중지한다.
  계사(1953년) 9월 초육일 봉우 지죄근서


    78. 우주 대자연을 그대로 본받아서
  일월왈래에 주야가 분하고 월의 영허(참과 기움)로 1월이 성하고 춘하추동으로 1세가 성하고 주이복시(한 번 돌고 다시 시작함)하여 1녕이 2년 되고, 2년이 3년으로 천지개벽 후 변함없이 만믈이 다 춘생, 하장, 추수, 동장으로 생성수장을 하는 것이 이 우주의 대자연일 것이요, 이 대자연을 그대로 본받아서 인간은 인의예지로 교화하는 것이 대자연의 생장수장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인은 춘의 생함을 의미함이요, 예는 하의 장양함을 의미함이요, 의는 추의 수확함을 의미함이며, 지는 동의 심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사만물이 다 이 원리를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혹 이 원리를 벗어나서 되는 일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이는 원리에 배치된 것이라 장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역리도 있을 수 있으나, 절대적으로 이 대자연을 벗어나서는 성패존망의 도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내에 옛부터 지금까지 역대인물들이 모두 무위이치(가만히 있어도 다스려짐)할 것인데 왜 성쇠존망이 있으며 성현하우가 있는가 의심할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대자연이라는 말이다.
  춘생추살하는 것도 자연이며 성쇠존망하는 것도 자연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연의 도를 아는 관계로 자신이 성하는 대자연의 원리대로 하면 성할 것이요, 쇠하는 원리대로 하면 쇠하는 것이다. 존망도 역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춘이 생하는 원리를 가졌다면 천지간의 화평이 그 영생을 의미함이요, 추가 사하는 원리를 가졌다면 천지간의 숙살지기(쌀쌀한 가을의 기운)가 그 패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성이 말씀하기를 '불기살인자가 능일지'라고 하신 것도 이 춘의 생육하는 도를 가지면 능히 전하인심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이니, 역시 대자연을 본받으라는 말씀이다.
  (주석 40) '사람 죽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능히 통일할 수 있다.' '맹자' '양혜왕' 상편에 나옴.
  가을이 되어서 금풍이 일취(한 번 붊)하면 초목군생이 모두 기를 펴지 못하고 점점 축위하다가 엄상(된서리)이 일강(한 번 내림)에 초목이 개고(모두 말라버림)하는 것이다. 인간도 이 화풍이 없고 금풍이 불기 시작한다면 엄상이 올 조짐이요, 이 엄상이 온다면 패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지간 대자연은 순환무단(끝없이 돌고 돎)한 것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아서 천지대자연의 생장을 본받으면 언제든지 패망할 수 있는 것이 역시 인간의 대자연이다. 그러니 우리도 우주대자연을 본받아서 춘생추살의 도를 그대로 보아 인간의 장구화평을 하도록 자연을 본받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근세에는 전세계가 숙살지기 속에서 있으니 세계적 파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일점미미한 희망은 무엇인가 하면 이 숙살지기 속에서 국제연맹으로서 약육강식하며 숙살을 주장하는 것을 제지하며 세계영구평화를 목표로 하는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숙살지기를 온화지기로 변코자 하는 것이니, 이것이 춘생을 의미하고 영구평화를 의미하는 대자연의 원리대로 본받는 것 같다. 즉 우주의 장래가 영구태평코자 하는 춘화의 배태가 이 숙살지기 속에서 벌써 생긴 것이요, 이 춘화의 세력과 추살의 세력이 어느 편이 강한가가 문제이나 세계인류로는 누구나 이 숙살을 좋아할 리가 없고 이 춘화를 싫어할 사람이 없으니, 현상이 비록 5할, 5할의 세력을 가졌더라도 종래에는 춘화의 세력은 날로 증가하고 추살의 세력은 날로 감소하여 이 세계평화 실현이 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고해 두나, 이 숙살지기도 춘빙이 해하던 단시일에는 안 될 것이요, 적어도 양세력이 일차 부딪치기 전에는 그 숙살지기가 흩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아주 예고하노라. 그러자면 우리 인류는 양대 기류의 부딪치는 곳에 있는 부분만은 할 수 없이 장래 태평을 위해서 희생될 것을 각오하라는 것이다.
  금번에 풍재가 백년래에 초유하다고 전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양대 기류의 충돌이 이렇다는 신의 예고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이 아주 평온 무사하리라고는 볼 수 없으며, 우리에게는 온화한 남풍이 부딪쳐서 전국을 휩쓸었으니 양대 조류의 부딪칠 때도 우리에게는 남풍이 취래(불어옴)할 조짐이라는 것을 아주 명시하노라. 두고 보라. 노부가 허언을 하나, 불구해서 실현되리라. 그리고 이 양기상충에 숙살지기가 파괴된다는 것도 아주 예고하노라. 그 다음은 중화기가 부지중 초춘이 왔다 고하리니, 잔설이 있어도 춘광은 춘광이리라. 춘이라고 한기가 없어지고 일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주 각오하라.
  어언간 귀홍득의천공활이요 와류생심수동요하고 봄이 언제 온지 알지 못하고 봄은 봄대로 이 강산 이세계에 올 날이 그리 머지 않다는 것을 세인에게 고하며 이것이 대자연을 그대로 본받아서 인간적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고하노라
  (주석 41) 귀홍득의천공활 와류생심수동요: 돌아가는 기러기 뜻을 얻었으니 하늘이 넓고, 누운 버들 뿌리를 내리니 물이 흔들리네.
  임진(1952년) 9월27일 여해노부 소기우물물재 하노라
  (주석 42) 물물재에서 웃으며 쓰다


    79. 김덕규군의 서신을 받고
  금번 서울 갔던 길에 수차나 갈월동으로 배방하였던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시간관계로 찾지 못하고 귀가하였으나, 좀 창연(서운하고 섭섭함)하던 길에 귀가해 보니 김덕규 군의 만지장서(종이를 가득 채운 긴 서신)가 와서 묵고 있었다. 세서성문(잔글씨로 이루어진 글)인 다섯 장의 장서였고, 가득 찬 내용은 자기의 의사를 표시하느라고 노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군도 환경이 그리 좋다고는 못할 역경중에 있는 사람이다. 그 역경을 그대로 그려보는 것이라 만지장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김군의 성격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사람이라 논리적으로 또는 상상적으로 붓을 든 관계로 그 이론이 구상적이면서도 실질적 고배를 마신 관계로 애원적 기분이 충일한 점이 많다.
  김군은 6, 15사변에서 서울서 6월 28일 인민군의 입성식이 있자 그날 오후에 나를 심방하고 또 내가 피란하는 행리(행장)를 용산 도선장까지 갖다가 주고 갔었으며, 수복 후 그 다음해 이른봄에 상신리 본가까지 내방한 일이 있었으나 그 후에 소식이 없어서 항상 염려하던 중에 서울서 그 소식을 듣고 상신와서 또 그 서신을 보니 아무 모로 보든지 반가운 일이다. 서신의 내용은 서두에 그간 격조된 사유와 관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음으로 덕규는 붕정십만리(앞길이 매우 멂)의 요원한 청년이오니 방광파미혼(빛을 터뜨려 미혹한 영혼을 밝혀줌)의 대도로 인도하기를 원한다는 필두로 내가 지난번 교훈한 것을 아직껏 명심불방(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음)한다는 것으로 말을 시작해서 질문하기를 인생이 내하처귀하처(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인가 알고자 한다는 말을 중심 삼아 석존의 '인생은 행복스런 열만에 도달하기 위한 자아탈각이다'라는 경구절을 인증하고 인생은 유구한 억만년 동안 수련 또 수도하여 인간까지 와서 현재로 만족하고 타락한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며 자기 의사를 삽입하였다.
  그 다음 내가 김군에게 말했던 '현재 인간까지 왔으니 그 다음에는 수필료(좇아 반드시 완료함)하는 길', 즉 열반의 길로 정진, 정진하고 한결같이 정진하라던 말을 잊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다음으로 천오백년 전에 혜초는 천축국을 왕반(갔다 옴)하고 그가 지은 글 '숙지귀향로(고향가는 길 익히 아는데), 공견백운래(공연히 흰구름 오는 걸 보네)' 라는 구를 생각한다는 것과, 그 당시 교통 불편을 불구하고 혜초가 자유자재하게 천축을 왕복한 것을 부러워 한다는 이유는 불구자 아닌 불구자로 무항산(일정한 재산이 없음)한 부자유의 몸으로 허송세월하고 잇기 때문이라는 것과, 백사불여의(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됨)하니 오직 나갈 길은 수련뿐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는 것을 진술하였다.
  또한 재가자수(집에서 혼자 수련함)하자니 일폭십한으로 촌진척퇴(한 마디 나가며 한 자를 물러섬)로 그 공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요즘 시구에 산간벽지의 정처에서 안거수련을 불허하니 어려운 일이라는 말과, 을유년(1945년) 제1기 사관학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는데 부평초 같은 심서와 행적이 의외에 나를 만났다는 것과 그 후 삶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주석 43) 하루 볕에 열흘 추위. 일이 중간에 자주 끊김을 비유한 말. 십한일폭.
  또 그 아우가 일선에 가 있다는 것과 끝으로 김군의 장래에 갱생의 열쇠를 나더러 불어보는 것이요, 더하여 세계의 정세나 추수상으로 장래의 예측이 어떠한가를 물은 것이요, 자기가 또다시 군문에 투신해서 사관학교 입학을 해야 하느냐, 수도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의 기로를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 편지내용을 약기한 것이다. 내가 사실 책임감이 있다. 이 묻는 말에 내가 정확한 비판이 있어야 하겠다. 청년의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서신에 대한 내 판단은 답서로 하기로 하고 편지 내용만 기록해 본 것이다.
  계사(1953년) 10월 15일 봉우서


    추기
  이 의사, 이 역경에서 헤매는 사람이 김군 한 사람뿐만 아니라 자고급금(옛부터 지금까지)에 수많은 동고자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극락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범칭하기를 고해라고 한다. 사실이 고해다. 비록 자기의 어느 모로는 행복스러운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거우주(우주를 들어)의 대관으로 보아서 이 고해상을 벗어난 분이 몇 분이나 되는가 가장 귀한 수자를 차지하고 있는 분들을 목표로 나가는 사람은 성공하기 전에 가장 다른 사람보다 당하지 못한 역경을 백 배, 천 배 더 당하며 그 역경, 그 고해를 건너가서 그의 성공인 순경과 극락에 도달할 것이요, 비록 도달치 못하더라도 고해 가운데 평형을 벗어 나서 비록 이 육신은 그 역경에서 헤매나 영은 초월하여 고해가 아닌 청경에 출입한다면 영은 장래의 광명의 길을 보고 그 육신의 고를 고로 생각지 않을 것이며 또 육신의 고의 가치가 영의 환희에 비례가 안 될 것이다.
  이 육신과 영의 합치점까지 못 간 동지들은 흔히 육신의 고통으로 영의 고통인 줄 오인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아마 김군도 이 영과 육신의 경계를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좀 있다. 육신이 극히 고로하면 그 영도 안일하지는 못할지나 육신의 향락을 지극히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을 받는 것과는 같은 비례가 안 되는 것을 추상하면 알 일이다. 육신의 고통은 아무래도 해결하자면 단순하나, 영적 고통은 해소하기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요 육신의 고통을 해결하는 정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을 재인식하라는 말이다. 육신 외에 영혼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영과 육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육신의 고통이 사라질 날이 없고, 영과 육신이 불가분의 일체로 알면 영의 환희하는 점이 육체의 고통하는 점하고 비교해 보아서 어느 점이 우세인가 보라. 여기서 육신의 역경과 잘 싸우는 사람들을 세인이 평해서 무어라 하는 것인가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고락상을 말하는 것이다.
  고인들이 궁곤을 당해서 인빈(가난을 참음), 수졸, 지빈, 안비하며 낙도하는 것을 불개(고치지 않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 육신의 고로와 영의 향락을 수놓으며 점수를 자가판정하는 분들이다. 여기서 우주의 고금이나 동서를 논할 바 아니요, 아마 통론일 것이다. 영육 이원이 아니요, 일원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 나도 이 붓을 들어보는 것이다. 내가 이 일원론을 창시한 것이 아니요, 천지개벽한 후로 이 일원론이 있던 것이요, 현상의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니 하며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성의 정경을 밟지 않은 관계라고 본다.
  김군의 서신을 보고 내가 또 이 붓을 든 것은 이런 동고자들이 많은 관계로 부득이 내가 외람함을 무릅쓰고 고성이 하신 말씀대로 기록해 보는 것이며, 더구나 수련을 목표하는 동지로는 선결문제가 인고정진하라는 것이기에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80. 정명분
  (주석 44) 명분을 바르게 함
  부자왈필야정명호인저 하시니, 이 정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윤문자'는 말하기를.
  대도무형 칭기유명 명야자정형자야. 형정유명즉 명불가차 고중니운필야정명호. 명불정즉언불순야. 대도불칭중유필명생어불칭즉군형자득기방원 명생어방원즉중명득기소칭야. 대도치자즉명법유묵자폐이명법유묵치자즉불득이도
  (주석 45) 공자닌 가라사대.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함인저.' '논어' '자로' 편에 보임. 자로가 "위나라 주군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가?" 하고 질문한 데 대한 공자의 답변이다.
  (주석 46) '윤문자' '대도' 편에 나온다. '윤문자'는 중국 전국시대 사람인 윤문의 저서로. '한서' '예문지'에 수록되어 있음. 윤문은 명변에 능했으며 명가 사상가 중 하나이다.
  (풀이)
  큰 도는 형체가 없어 그릇에 맞게 이름이 있으니, 이름이란 형체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형체가 바르게 됨은 이름에서 연유하니, 곧 이름이란 조금도 오차가 있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중니(공자)께서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함인저'라 하셨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 또한 순리에 맞지 않게 된다. 대도는 일컬을 수 없으나, 만물은 반드시 이름이 있어 이름지을 수 없는 곳에서 생기니, 곧 모든 형체는 스스로 그 모나고 둥글음--모양새--을 얻는다. 이름이 그 모양새에서 생기는 곧 만물의 이름은 그 일컫는 바를 얻는 것이다. 대도를 다스림이란 곧 명가, 유가, 법가, 묵가의 이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명가, 법가, 유가, 묵가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것 또한 대도를 떠났다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내가 '윤문자'를 보다가 내 의견을 소회대로 기록하는 관계로 '윤문자' 원문을 인용한 것이요, 무슨 '윤문자' 학설이 가장 정확하다고 이 붓을 든 것이 아니다. '윤문자'는 '대도'라는 제목 하에 '정명호인저' 하신 부자(공자) 말씀을 인용하기를 이상의 원문대로 하였다. 나는 '정명분'이라는 제목 하에 '윤문자'의 원문을 인용해본 것이다.
  천지대자연에는 아마 형은 있으나 명이 있었을 리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무명이 천지의 시가 된 것 같은데, 혼돈이 초개(처음 열림)해서 상경하중(가벼운 것은 위로, 무거운 것은 아래로)하여, 청탁이 분하고 이 청탁이 나뉨으로 음양이 되고, 순음순양만으로 만형(모든 형상)이 다 될 수 없어서 반음반양이 중간에 있어서 사상으로 나뉘고, 이 사상만으로 형을 다 정할 수 없어서 오해이니 팔쾌니가 되어 착종변화한 것이 우주만유의 형을 조성한 것이요. 이 형을 구분하는 데 명이 없이는 무엇으로 가릴 수가 없어서 명이 시한 것이다.
  천지대자연의 형이 있다면 역시 천지대자연의 명이 있어야 그 형에 그 명이 자연적 부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기 용이한 상천하지의 만유형상을 종이입난(쉬운 것을 좇아 어려운 데 들어감)하여 그 명을 정하는데, 우리가 알기 용이한 것이야 누구나 다 동일한 명을 정할 것이나, 단식이 아니요 교중(서로 겹침)된 형에 대한 명을 우주 어느 곳에서라도 긍종하게 정하는 것이 그리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이 형에 정당한 명이 아니면 의심이 생하여 명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명을 믿지 않음으로 그 도가 행히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선정명(먼저 이름을 바로함)하라는 것은 만대후인이라도 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 형이면 그 명이 있게 되어 아무리 형에 대한 다른 명을 붙이고자 하되 할 수 없을 만큼 선정기명(먼저 그 이름을 바로 잡음)하면 누가 감히 그 명을 의심할 자가 있으리요. 그렇다면 신이 자연 생하고 신이 후하여져서 경이 생하고 이 경이 성으로 화하여 고인의 도를 본받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명에 형이 맞지 않으면 부지중 이 운행은 중지되고 마는 것이다. 이 명은 공식이 모두 이런 형에는 이런 명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선정명을 하는 것인데, 우리의 일용사물 중에서라도 국군 이라는 명은 어떠한 형을 구비한 자에게 해당된다는 것인데, 만약 공식을 벗어나서 그 형이 부족하다면 그 명이 그만큼 부당하다고 확정이 되고 아주 그 형이 명과상부하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그 명을 갖지 못할 것은 자연한 일이다. 물가의 방을 원이라 명했다고 멈출 리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명을 가진 형이 가장 많으나 간혹 명형이 상부치 않은 점도 발견되는데, 이 점이 발견된다면 이것은 위식(공식을 위반)이다. 정당한 답안이 나올 리가 만무한 일이다. 사람이라는 명이 있으면 형도 사람이 할 일을 해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것인데, 사람의 할 일을 못하면 비록 사람의 명은 있으나 실은 그 부족한 대로의 부명이 있을 것이다. 세인이 아무리 명철하지 못해도 명분을 정한 후에는 그 명분을 범하지 않는 것이 우주를 통해서 동일한 것이다. 만야의 추곡이 적하나 각자의 명분이 정해진 것이라 일립(한 개의 낱알)도 범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명분이 정해진 연고요, 또 어자조자(고기 잡고 낚시하는 사람)가 강해에서 무량대획을 하여도 누가 말 한마디 않는 것은 이 강해에 누구의 것이라고 명분이 없는 연고다. 그러나 현상으로는 이 무한한 강해도 국여국간(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경계를 상쟁한다. 이것은 구일에는 없던 일이다. 상에 있는 자는 그 명이 상부할 형을 해야 하고, 하에 있는 자도 역시 명실이 상부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은 확정된 것이어니와, 우리의 할 일은 이 명으로 있다가 충분히 형을 다하고 남음이 있다면 명을 다시 정할 수 있고 분도 따라서 변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체 만물은 고정된 명이 있고 분도 따라 나온다. 사람이란 자기의 노력과 개척으로 성현, 군자, 영웅, 호걸, 효제충신. 인의예지, 갖은 명자를 마음대로 취득할 수 있고, 그 반면에 반비례로 사람답지 못한 일을 하면 별별 기괴망측한 명자를 또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도 이와 동일하여, 재상자가 정명형(명과 형을 바로잡음)하면 그 나라가 태평할 것이요, 부정명형하면 그 나라가 패망할 것이라는 공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재상인물들의 명분이 상등한가 불상등 한가 한번 고찰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인의 공안에 미루고 묵언하는 바요, 자상달하로 선정명분(먼저 명분을 바로함)하라는 말이다. 재상자가 정명형이 못 되거든 추현양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줄은 누구나 다 알 일이라, 공심보다 사심이 앞서고, 사심보다 욕심이 앞서서 부지불각중에 행하는 일이 금수불약(금수보다 못한)한 행위를 하고도 거세개연(온 세상이 다 그렇다)하니, 태연자약하고 도리어 누가 정언이 있을까 하고 권력과 위력으로 억압하는 현상이니 더욱이 명분을 선정하지 않으면 이 도가 행하기보다 금수의 역으로 구사하기가 좀더 속할 것 같다. 이것이 말세요, 이것이 난세라는 것이다.
  그러니 극성즉쇠(창성함이 극에 이르면 쇠함)하고 극쇠즉성(쇠함이 극에 이르면 창성해짐)하는 원리로 보아 아마 머지 않아서 성세, 치세(태평성대)가 나올 조짐이 아닌가 하고 이 흑암중에서 미리 명분을 바로 하는 것이 성세와 치세를 맞이하는 일이 될까 하고 이붓을 드는 것이다.
  계사(1953년 10월 18일 봉우서우유신정사


    추기
  내가 연전에 명과 형이라고 제목하고 쓴 것이 있는 것 같다. 대동소이한 것이나 내용이 좀 다른 것 같아서 제목을 없애려 하다가 그대로 두는 것이다.


    재추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병(보통 걸리는 병)이라면 그 형이나 실보다 그 명을 존중히 하는 폐단이 있고, 존중이라면 그래도 의미가 좋으나 허무맹랑한 형과 실의 근처에도 가지 않은 명을 좋아하는 아주 실행성 부족한 행동을 현저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여관, 상점, 회사, 신문 등에서 종종 보는 것이다. 지방에 아주 잘 알지도 못하는 존재가 세일, 계일, 제일, 아일, 아세아, 동양 태평양, 한국, 조선 등과 유사한 명패를 가지고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혹 일류라면 용혹무괴(얼굴이라도 혹 부끄럼이 없음)라고 하겠으나, 말할 수 없이 부진한 곳도 명패만은 훌륭하다.
  이것뿐이랴. 관계나 공직이나 회사 중역진이나 각계각층을 통하여 보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다. 지방 말단의 평직원도 못 될 자격을 가지고 근일 유행하는 '빽'이라는 것으로 형보다 명이 백 배나 되는 인물이 90프로나 되는 현상이다. 명실이 상부한 자가 백무일인(백에 한명도 없음)인 현상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안 그런 사람은 아주 계군학(닭무리 속의 학)이나 석중옥(돌가운데 옥) 같다.
  명실상부라는 것은 책임완수라는 의미이다. 장관이면 장관의 책임을 완수함으로 그 명을 욕되지 않는 것이다. 하필 장관뿐이랴. 상은 상대로, 하는 하대로 말초기관인 면리까지라도 동일하다. 물론 각자더러 물으면 각자의 책임을 완수한 것 같이 말하리라. 그러나 실적을 조사해 보라, 어떤 사람이 자기 책임을 완수한 사람이 있나. 각자가 양심 호소를 해보라.
  여기서 거족적으로 파탄이 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이 정도의 책임을 불이행하고 국가나 민족이 무사한 예가 없다고 본다. 현상이 아중 극도에 달한 것 같다. 그러니 멀지 않아서 절정에 도달할 것 같다는 말이다. 조일(아침해)이 상승하기 직전까지 군마병치(마귀떼가 몰아침)한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속히 아침해가 떠오르기를 바라고, 다가올 대서광을 예기하는 민족으로 각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81. 차종환 동지를 조함.
  인생은 허무하다. 생로병사를 누가 면할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반생에 만복(배 가득)의 웅지를 가지고 풍풍우우 별 못 당할 일을 다 당해 가면서도 변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해 보려고 비상간고(온갖 고생을 고루 맛봄)를 다하던 동지 차종환은 거금(지금부터) 15년 전에 일차 상봉한 후로는 인편으로 몇 차례 소식을 알았을 뿐이요, 비록 상대는 못하였으나 성기상통(말과 마음이 서로 통함)하며 유사시에는 일견지역(한어깨 노릇)을 당할 사람으로 자인했던 관계로 연정원 동지평에서도 단연 거물급으로 추천했던 인물이요, 내가 그 인물평에 농중학(우리 안의 학)으로 너무 훈인(사람에 길들여짐)하여 청고성이 좀 부족하다는 점을 기록하고 이 사람의 개농방학(우리를 열고 학을 내보냄)하여 청산노송으로 보내서 다시 본성을 기르게 못하는 것을 항상 겸연(마음에 차지 않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간혹 인편에 들으면 대덕군 동면에서 아주 시정을 멀리하고 은군자가 되어 독서에 취미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아마 이 사람이 노송소학(노송에 깃들인 학)으로 환원했는가 하고 인물이 극귀한 금일이라 장래 기대를 누구보다도 더하고 있었는데, 어제 의외로 모씨에게서 차동지가 금년 봄여름 사이에 환원(죽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로 망연자실하였다.
  이 사람은 현성인물중에서는 그 비류가 없는 인물로, 부득기시(그때를 못 얻음)하여 기복염거하고 태행산을 넘는 중이었다. 누가 그의 감이 옥을 매(묻음)하며, 난을 분(태움)하는 것인 줄 알리요. 인물은 추풍낙엽같이 영락하고 신지은 보이지 않는 이때에 그대를 보내는 노부의 마음이 실로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입장이로다. 차군의 영이 있다면 내 금일 이 붓을 들고 얼마나 자탄하는 것을 잘 알리라.
  (주석 47) '천리마가 소금수레를 끈다' 유능한 현사가 천한 일에 종사함
  (주석 48) 중국 화북지방의 높은 산. 교통의 장해가 되어 예로부터 관문이 많았음.
  군이 고인의 풍도가 있고 영호의 양이 있어서 안빈낙도하며 이대기시(그 때를 기다림)하던 것 중에 연근면요(나이가 근근이 요절을 면함)요, 슬하무축(슬하에 자식이 없음)하고 의어매가(누이집에 의지함)라가 포옥이거(옥을 품고 감. 죽음)하니 수지계군학립(누가 닭무리 속에 학이 서 있음을 알랴)이리오.
  내가 군을 또 보내고 감탄(슬퍼 부르짖는 느낌)하는 바는, 유룡(제자 권오훈)이 서하고 준총은 조변(변고를 당함)하고 신응(주형식)은 화거하고 여증거물(남은 가운데 큰 인물)인 농학이 또 백운향(천상의 상제 계시는 곳)을 찾으니 노부 자연 심신이 상함을 금치 못하리로다.
  하군의 영이 있거든 내 금일 심정을 살필지어다.
  계사(1953년) 12월 21일 봉우조하노라


    추기
  차군은 헌헌장부의 기상이 있고 선위설사(대중 상대로 이야기를 잘함)를 하며 족지다모(지혜와 꾀가 많음)한 인물로, 거연장자풍(아주 큰 인물 같은 풍모)이 있어 현직 장관급보다 조금도 손색이라기보다 도리어 우수한 격이 있던 인물이다. 자기(스스로 기약함)하기를 역사의 일편(한 부분)에 충당하리라고 있던 인물이다. 내가 신미년(1931)에 초대면을 소성(인천)에서 하고 그 후 대전 와서 상봉을 자주 했던 것이나 그 후로는 아주 소식이 없었고, 신사(f1941년) 혈맹의열당 관계가 있은 후에는 아주 상봉도 못하였고 소식만 간간이 인편으로 들을 뿐이었다. 일차라도 심방할까 하다가 지연되어 못 가보았다. 사람이 가고 보니 내가 생전에 못 가서 본 것이 섭섭하다.


    82. 낙수
  1. 좀 실패를 거듭하니 정신이 명랑하지 못해서 일주(하나의 계책)를 막전(펴지 못함)이다. 일방으로는 이러하는 중에 동지규합이라는 업적을 부지중 호성적이요, 어느 정도로 동지규합 목표를 내걸고 나가느니보다 도리어 성공이다. 이것이 모두 연정원 취지를 완수시키는 동중이요, 내 일생을 통하여 걸어오는 길이 이러하다. 이 일 저 일 실패하는 동중에 접촉한 인물들이 내 동지가 되고 그 중에 동지가 아니라도 선악이 개오사(모두 나의 스승)라고 다 내 일하는데 경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고지 두 고지로 연차 점령하여 목표고지가 부지불각중에 점령되고 악전고투의 지난 기록이 성공의 호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하니 내가 53년 걸오온 과거가 실패의 실패를 거듭했으나, 그래도 기다한 고지를 정복한 내 기록도 적지 않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다.
  실패, 실패라 하나 후퇴해 가는 실패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전진하는데 순조로 나가지를 못해서 한 고지 두 고지 해가며악전고투가 실패의 적으로 화한 것이다. 내 전법이 점진적 완화 전법이지 전격전이 못 되는 관계로 동지들이 아주 신물을 내는 것이다. 중도에서 개로(길을 바꿈)하는 동지들은 유감이나 할 수 없는 일이요, 동고해 가며 목적달성까지 가는 동지가 진정한 동지일 것이다.
  걸어나온 것도 많으나 앞으로 역시 갈 길도 그리 근거리는 아니라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장래도 10년 내지 15년이면 우리의 목적지 도달은 못 될지라도 동지들이 출발점에서 시발해서 결승을 앞두고 용진하는 모습은 확실히 목견할 것이다. 여기서 내 생명이야 70이건 80이건 알 바 없고 우리 동지의 계속사업으로 누가 우승기를 갖든지 우리가 성공은 일반일 것이다. 일로 자경하노라.
  1953년 3월 17일 수필 중


  2. 이 이념을 실현하는 데는 우리 민족이 먼저 우리 대황조가 가르치신 삼육병진법을 체득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이 물질문명이 극도에 달한 구미제국을 설복할 것이며, 무엇으로 한중인(한국, 중국, 인도)의 통일을 볼 것이며, 무엇으로 현하 우리 민족의 만인만당주의를 타파하고 일심이 되어 애국애죽의 이념 외에 타념이 없게 지도할 것인가. 이것이 말하기 용이하나 실행하기 극난한 것이다. 언행이 일치하게 되자면 신선실천(몸이 먼저 실천)해서 수법을 해야 일인이 화십인(열 사람을 교화함)하고 십인이 화백인하면 점점 보급되어 화피초목(교화가 초목에까지 입음)에 뢰급만방(힘입음이 만방에 미침)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질적 향상이 선결문제인데, 이 구체적 문제는 별도로 하고 이 붓을 이 정도로 그치노라.
  1953년 3월 21일 수필 중


  3. 추기
  (주석 50) 2번 글에 대한 추기이다.
  대동정책과 소강정책을 공자께서 말씀하시었고 용화세존은 극락세계를 말씀하시고 야소는 부활을 말씀하시었다. 수운은 명년춘삼월호시절에 다시 온다고 장래의 춘화세계를 말씀하였다. 김일부는 주야장단이 없고 춘하추동이 없는 세계가 된다고 하였다. 이 여러 가지 말씀이 다 세계일가에 태평성대를 의미한 말씀들이니 내가 초창적으로 이런 말을 발단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확립하는 것이다. 성인들은 고금동서를 물론하고 다 같은 궤도에서 이 세계인류를 어떻게 하면 이 고해상에서 건져 볼까 하시는 것이다. 이 자비심이 하필 인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화피초목에 뇌급만방이라고 하시었다. 화(교화)가 초목에까지 피(입음)한다면 동물이나 인종에게는 말을 더할 것 없다. 동서 각 성현들이 다 각기 그 요지를 설명하시었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고, 그저 내 소회를 기록해볼 뿐이다.


  4. 연과 인과 과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아닌게 아니라 운명의 작희를 많이 원망해 보았다. 그런데 내가 당한 과가 무슨 인으로 연하여 이렇거니 하면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칭찬할까 알 리 없으나, 그래도 사람이란 신이 아니라 일일이 이 인과만 생각할 길이 없어서 대사생심(일이 생기면 여러 생각이 남)하니 가소로운 일이 다 많도다. 그렇다고 내가 이 인과를 다 알아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당한 일을 심구(깊이 연구)해 보면 이것은 이런 인이요. 저적은 저런 과라고 묵상으로 독자판정해본 것이다.
  이 인과설이 나오면 대인은 무명(운명이 없음)이니, 대인은 조시(시운을 만듦)니 하는 것도 또 이상하게 생각되는 때도 있다. 어찌해서 공자께서 위편(가죽끈)이 삼절(세 번 끊어짐)하되 오히려 기아수년지탄(내가 몇 년만 더 있었으면 하는 탄식)이 계시고, 모니불은 설산육년과 사십구년설법으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시고도 계세말법(말세 불법)이 부진할 것을 걱정했으니, 이것이 모두 연법에는 할 수 없다고 본다. 문태사의 각행이 강태공보다 우수하나 상운(상나라의 운)이 다된 때라 오뢰의 액을 면치 못하였으니, 범인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주석 51) '논어' '술이' 장에 보임. "자왈 가아수년. 오십이학역. 가이무대과의."(공자 가라사대, 몇 해를 더하여 쉰에라도 역을 공부하게 되면 큰 어물은 없게 되련만!) 
  1953년 7월 22일 수필 중


  5. 미국에서 참전한 것은 공산세력의 남침하는 것을 중지시키고자 함에 있고 우리 한국을 위해서 참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전쟁중에서도 북진해서 39선까지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것도 희생이 무서워서 현지선에서만 방어하고 1보도 전진 못한 것이요, 만약 전진해서 남북통일을 한다면 한국으로는 유리한 일이나 미국으로는 양강 삼천리에 막대한 전비를 판출하는 것이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을 통일시켜도 적국은 목전에 있고, 만주를 정복하여도 역시 적국이 안전에 있다. 일기로 막부(모스크바)를 완전점령하기 전에는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못 보는 관계로 한국의 현재 전선에서라도 조건이야 무어라 하든지 전쟁만 중지한다면 양보하고 조약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한국의 현 위정자들은 연작(제비와 참새)이 안지당하지화(어찌 집 아래의 재앙을 알랴)라고 무엇이 무엇인 줄 아지 못하고 미국이나 국제연합만 믿고 안심하고 있는 미련한 인물들, 가련도 하고 가증하도다. 아무렇든지 천우신조해서 이 원리를 벗어나서 속히 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정치회담이 완료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1953년 10월 18일 수필 중


  6. 우리는 본연적인 자연대로 지내기를 바라지 무슨 인위적인 동작에서 면치 못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일생을 구구영영(구구하게 아득바득 삶)하며 지낸 사람이나, 아무 영위가 없이 지내다 간 사람이나 간 뒤는 무엇이 그리 차가 많은가? 아주 초월했다면 이것도 별문제지만 그 지경과 같이 원만치 못하고 약간의 영광이 조건(앞을 비춤)할 정도라면 무엇이 평인과 다르다고 할 것인가. 그러니 원각이 되지 못한 초수자가 되려면 서민과 불변한다. 그러면 도리어 천연적인 자연 속에서 변함없이 지내라는 것이요, 자신이 있거든 백척간두갱진일보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일상관이다.
  고인 말에 문소문이래(소문을 듣고 왔다가)라가 견소견이거(나 본대로 보고 가노라)로라.
  1953년 수필 중


      1954년

    83. 냉정히 생각하라
  무슨 일을 당하든지 열중하면 실수하기가 용이하다. 내가 금번에 교육구 서무과장과 학무과장의 처사에 일시적으로는 분기를 인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곧 양씨를 만났으면 내 처사가 또 무슨 실수가 없었을까 한다. 자기들의 처사가 선의가 아닌 줄을 자각하였다면 그런 처사가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 선인지 악인지를 구별 못하는 단순한 학자들이 비밀히 하는 음모라 상대가 아지 못하려니 하고 일시적 감정을 이런 기회에 갚아 보겠다는 가련한 인생들이다. 내가 이 가련한 인생들을 상대로 분기를 참지 못하고 무슨 실수가 있었다면 나는 그 인물들보다도 더 못한 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임사해서 냉정히 생각하면 거기서 자기비판도 나오고 상대인물의 비판도 나오는 것이다. 회상해 보아서 내게 잘못함이 있다면 당연히 개과할 일이요, 또 상대방의 잘못이 있다면 공정한 제3자의 비판이 있을지니 내가 직접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금번 내가 당한 일은 내가 부채가 없었다면 그들에게 이런 일을 당할 리가 없는 것이니, 제1조건은 무슨 일이 있든지 빚을 속히 청산할 것이요, 둘째는 이 인물들을 아량으로 용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왈가왈부는 절대 금물이다. 그러나 어느 기회에 풍자는 해두는 것이 그들에게 개과의 길을 주는 것이라고 본다.
  어느 일이나 될 수 있으면 냉정히 생각하고, 선결 문제가 시와 비를 나누어 보고 다음 내가 어느 부문인가 보아 시이면 남의 비를 책할 것 없고 자중할 것이요, 내가 비이면 속히 잘못을 고쳐서 재범이 없게 하여 내 비를 상대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상대방이 선의 해석을 하도록 용서를 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무시무비(옳고 그름이 없음)한 일이라면 관계할 필요 없이 자기 목표하고 나가는 일이나 매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금번 일시적으로 좀 오해하였던 관계로 이 붓을 들어서 일후에 이런 경위에 열중하지 말고 냉정히 생각하라는 자경을 하는 것이다. 혹 일시적 시비판단으로 갑시을비(갑이 옳고 을은 그름)를 정해 보면 이것이 어느 날 어느 때에 또 을시갑비를 양성(빚어냄)할지 알 수 없으며 또는 상대방과 시비나 선악이나를 쟁론해서 내게 승리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심덕에는 어느 점인가 결점이 생기고 상대는 언제든지 적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알고도 포용하면 상대방도 하시든지 부지불식간에 잘못을 고칠 여유도 있고 천선(착하게 변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법적 이론이 아니요, 도덕적 견지에서 당연하다고 보는 논법이다. 이것도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냉정히 생각하라는 말이다.
  갑오(1952년) 2월 초구일 봉우서우유신정사


    84. 여해 본의--'청수록' 머리글
  원천이 미미하나 세류로 숨어들어 밤이나 낮이나 그칠 줄을 모르고 흐르고 흘러서 이 흐르는 물이 산골짜기 시냇물도 되고, 이 물 저 물 합해서 대하 장강도 되었다가 또 그칠 줄을 몰라 가고 간 것이 대해가 되었다.

  평평평막여해
  불평평역여해
  용물무량숙여해
  불택세류학여해
  (풀이)
  평평하기는 바다와 같음이 없고
  평평하지 않음도 바다와 같은 것이 없다.
  무한대로 사물을 받아들임이 누가 바다와 같으랴
  가는 물줄기 잡지 말고 바다와 같음 배우라

  위와 같이 나 자신의 학설을 지은 일이 있었다. 사실 원천의 한 방울 물을 보고 누가 큰 바다의 웅위가 거기 있는 줄 알 것인가. 청탁거세를 나누지 말고 쉬지 않고 나아가면 대천도 되고 장강도 되고 대해도 되는 것이니, 남이야 무어라 하든 쉬지 말고 나아가라는 뜻에서 여해라 한 것이다.
  이 기록에 담긴 내용이 청수록(잠을 청하기 위한 글) 이건 축수록(잠을 쫓기 위한 글)이건, 한담이건, 횡성이건 수설이건, 공적이건 사적이건, 성설이건 불성설이건을 막론하고 난초(어지러이 씀)를 시작한 것이 어느덧 한 권의 공책을 만년필로 정복해서 완전히 잉크칠이 되었다. 벌써 12권째이다. 전에 기록한 9권은 분실하였지만 내가 이 책자를 써서 꼭 누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분실 여부에 무관하게 다만 시간 나는 대로 붓을 잡은 것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잠을 청하기 위한 글들도 있고, 사회상에 반영되는 일을 보고 대체로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생각하라는 주장으로 권선징악에 목표를 둔 글들도 있다.
  비록 부귀한 사람이라도 소아에 기우는 인물은 여지없이 독평을 가하고, 아주 산야에 묻힌 촌부로 무명한 은자라도 대아로 생을 바치는 이에게는 극구찬양하였다. 나는 우리의 염원인 대동정책이나 장춘세계의 이상을 언제나 실현시켜 보자는 일념이 있을 뿐이요, 전세계에 고통과 전쟁이 없는 태평건곤을 우리민족이 선봉이 되어, 이 깃발을 들고 인류역사를 갱신시켜 보자는 세계일가주의의 주창자로서 그 배태를 이 책자에다 토해 본 것이다.
  우주평화를 요란시키는 인류의 공적들을 하루라도 빨리 해체시키고, 전 인류의 만년 공존공영을 책하며, 우승열패로 약육강식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던 인류사를 만년 평화사로 갱장(다시 장식함)함에 전우주인들은 다 같이 환영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자근지원(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여 멀리까지 도달함) 이라. 먼저 배달족, 백두산족이여, 황색, 백색, 흑색, 홍색, 갈색의 모든 사람들이여, 어서 바삐 깨달아 인류사 갱신의 역군으로 나오라. 나는 백발옹이나 죽기까지 변함없이 이 장춘세계에 영원한 평화를 이룩할 인물들의 양성에 헌신하리라. 내 한 몸의 영예나 고난에 상관없이 다만 나의 염원이 성공의 길로 나아감을 시작하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백산족들이여, 전세계 인류들이여.
  을미(1952) 신춘 여해 소기


    85. 애향
  누가 자기의 고향 즉 향토를 사랑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다 동일한 것 같다. 자기의 향토가 반드시 명산대천의 승지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비록 그 고향이 이렇다는 것이 없을지라도 자기 향토라면 자기의 조선이 살아오던 곳이요 자기가 자라난 곳이라, 비록 타향에 나가서 자기대로 성공하고라도 필경은 자기 고향에 돌아오고 혹 못 오게 된다면 그곳에다 자기 고향이라는 기념이라도 하는 것이 보통례가 되고, 고인들도 타향에서 성공하고라도 자기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금의환향이라고 다 부러워했다. 이것이 인지상정인 것 같다. 그래서 향토에 한 가지라도 자랑거리를 만들어 볼까 하는 것이 우리들로는 누구나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을 더 나가서 우리 향토를 우리의 손으로 다 실리지 못하게 되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다시 우리의 손에 돌아오게 할 운동을 하는 것도 제1은 내몸을 위함이요, 그 다음 조상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에게 효가 되고 나라에 충이 되는 것이요, 장자에게 경으로 추진하는 것이요, 이 마음이 한걸음 더 나가서 애족애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포애가 되고 이것이 숭조 이념이 되는 것이다.
  보라. 공산주의 국가들은 국경과 민족의 차별이 없고 세계일가 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인데 독일군이 대거 침범해서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에 육박하였을 때에 스탈린이 왜 세계 공산주의 진영은 단결해서 이 대난을 구하라 하지 않고 슬라브족은 궐기하여 이 위급을 구하라고 하였는가. 이것도 공산주의라는 간판으로 국경과 민족차별이 없다고 선전해서 각국의 방어선을 박약하게하고 세계 공산주의 국가를 슬라브족의 산하에 둘 야심임에 불과하다. 스탈린도 급하니 슬라브족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환기한 것이다. 이런 확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국 공산주의자들은 애국애족의 이념을 내버리고 슬라브족을 조선으로 아는 고치지 못할 중병이 들었도다. 하루라도 속히 이 병을 치료하라.
  이 병과 유사병자들이 또 있다고 본다. 무엇인가 하면 종교인들의 오신(잘못된 신앙)과 모대병(큰 것을 사모하는 병) 환자들의 본정신 없는 언행이라고 본다. 종교라면 무슨 종교인가. 천주교인들이 프랑스인 신부를 천주(하느님)와 근사히 생각하는 것과, 야소교인(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백인종에 한한 것이요, 하나님 아드님도 백인종이 아니고는 될 수 없이 생각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는 레닌이나 스탈린이 돼야 가장 신성한 줄 알고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양자나 가봉자(의붓아들) 정도로 자인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 모대병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대황조의 자손으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가장 역사가 깊고 위대한 조선을 모시고 있는 것은 가리지 못할 일이나, 신라 김춘추의 삼국통일이라는 나당 연합군의 정복이 있은 후로 우리 대황조님의 역사는 부지불식간에 소멸되고 통일되었다. 신라는 숭조 이념에서 모당병 환자로 수백년을 중통(몹시 앓음)하다가 아주 국가는 망하고 신흥국인 고려도 이 병이 전래해서 사대병 환자가 되었다가 그래도 고려는 그 병이 아주 중증은 아니었으나, 이조 초엽부터는 영영 고치지 못할 중태에 빠져서 우리나라가 세계문명 발상지요, 어느 나라 개조보다 가장 위대하시고 신성하신 대황조임을 모시고 세계인류사상으로 어느 나라에 비류가 없는 민족을 가지고, 또 전세계 지역적으로 우리나라에 비등할 나라가 한 곳도 없는 금수강산 삼천리를 가지고도 내 라라의 가장 우수함을 아지 못하고 사대병의 중태에 아주 빠져서 세종대왕 같으신 애국애족하신 성주가 가 사대모대 병을 고치시려 한글을 제정 하시고 또 자국의 문화가 타국에 비할바 아니라는 암시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조 시대부터 병증은 점점 위중해서 향토애라고는 남보다 못하다는 자처로 우리나라가 중국과 근사할 정도라고 중국을 중화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소중화라고 자감(스스로 감수)하는 문헌이 많았다. 그러니 숭조 이념이나 애족애향 이념이 있을 수 없다. 비록 위대하신 인물이 간간 나시어도 이 병자들 보기에는 도리어 건강자가 병자인 것 같아서 위대하신 이의 출세를 불허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최종막을 내리게 된 원인이라고 본다.
  교육부터도 구시대 한문이라는 것이 13경을 송독하며 과문육체에 능한 선배들도 역사를 물으면 중국사에 능하지 자국사에는 부지초면이라 아는 사람은 근세사인 고려사와 이조사 정도요, 삼국사나 상고사는 치지도외(내버려두고 도외시함)하고 지리를 물으면 조선 8도 360주에 피상만 말하지, 우리 조선이 발상하신 백두산을 중심으로 수천년을 두고 개척하시던 지역에는 일언반사를 말하는 유학(유교 선비)을 보지 못하였다. 혹 그런 데 유사한 소리를 하면 이단지설이니 사문난적이니 해서 아주 매장해 버리는 것이 상사였다. 이것이 망국의 중대한 원인이 된 것이다.
  (주석 1) 문과 과거에서 보던 여석 가지 문체. 시. 부. 표. 책. 의. 의.
  경술망국을 계기로 당시 청년층까지는 모르되 소년층부터 이후 출생한 사람들이야 물론 일본 식민지교육을 받고 또 이문목격(견문)이 다 홰정에 젖었으니 숭조 이념이니 애구애족애향을 모른다 해도 습여성성(습관이 더불어 성품을 이룸)해서 큰 죄과가 아니라고 볼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애향이라는 제목을 쓰고 주로 어느 지도인물의 모대병 중환에 걸린 것을 불쌍히 여겨서 이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금번 우리나라 현 대통령이신 이승만 박사님이 미국을 방문하신 것은 개인 이승만 박사가 아이젠하워 원수를 방문한 것이 아니요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미합중국 대통령 및 정부와 각 기관을 방문한 것이라 일언일동이 국여국간에 여러 가지 탈선점을 발견했으나 그만두고, 한 가지 들은 바를 말하고자 한다. 미국의 은혜는 죽기까지 갚아도 못 갚겠다라는 말과 미국에서 허락한다면 미국 와서 살다가 죽겠다라는 이구를 가지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제1, 미국의 은혜라는 것은 아마 6, 25사변의 구원을 의미한 것인가 한다. 미국서 구원한 것은 감사하기는 하나, 이 미국이 무조건하고 한국전쟁에 참가해서 구원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공산주의 진영에서 민주진영을 침공할 때는 유엔기구에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유엔 자체의 위신을 위해서 당연히 묵과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요, 또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세력이 아주 한국을 점령한다면 미국의 방어선이 태평양에서 가장 약화하는 것도 사실이라 미국으로서는 진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6, 25전쟁 발발 책임이 내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미군이 태평양 전초방위를 한국은 제외한다는 선언으로 김일성군을 남침하도록 유인한 것이라, 비록 6, 25사변이 김일성 군대의 남침으로 시작했으나 이 도화선은 확실히 미군 사령관과 미국 대통령 트루만에게 있다고 확언한다. 그보다도 전쟁 발발 직전에 미국 민간인으로 한국 내에 있던 사람들은 약 1개월 전에 거의 철수한 것을 보면 물론 전쟁이 날 것을 예측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미국 정부나 군부에서 한국군의 무비를 어느 정도 했는가 하면, 전쟁에 응할 무비가 아니라 평화시의 지방 경비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것이 만약 우리 한국의 실책이라면 유구무언이나, 기실은 미국인 군사고문의 일언일동이 한국군 양성에 직접 파문을 던지는 것이요, 미국 정보나 군부에서도 미국 고문과의 말이라야 신용하는 것도 사실이 신용이라기보다 미군 사령부 직속이 되어 있는 관계였다. 이러하니 그 당시 미국태도가 너무나 애매하였다.
  그리고 남북분열의 원인이 미국과 소련에 있다는 것은 내가 이미 전술한 바 있어서 더 말 않겠으나, 대체로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낸다던 유엔에는 진정으로 감사할지 모르나 미국만은 당연히 파병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우리 한국의 전화는 미소 양국이 분담할 것이요, 더 직접 책임자는 미국이라고 보니 전쟁 후에 보내는 구호물자도 이 의미로 보아서 이 전쟁이 안 났으면 이 구호를 받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우리 한국을 대표한 대통령으로 미국의 무슨 은혜가 죽어도 다 못 갚겠는지 의심시된다. 이승만 개인으로는 백 번 천 번 죽어도 미국의 은혜를 못 갚을지 알 수 없으나 한국을 대표한 이승만 대통령으로는 이것이 실언이라고 보며 국가적 존엄성을 잃은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이승만 박사님이 개인인지 대표인지, 또 금번 행각의 공사를 분변치 못하고 노망인 언동이라고 보고, 더구나 그 다음 미국서 허락한다면 여생을 미국 와서 보내고 죽기까지 미국서 하리라는 말은 대통령을 그만두고 일개인일지라도 민족 정기를 잃어버린 아주 도의에서 탈선한 언동이요, 대통령으로 일국을 대표해서 미국을 간 공행이라면 한국 국민에게 당연히 그 망언을 사과해야 옳다고 본다.
  정조를 파는 매춘부도 그래도 그 조상을 알고 그래도 자기의 향토는 사랑할 줄 아는데, 일국의 원수로 정조를 파는 매춘부만도 못한 언동을, 더구나 국민 대우를 받아서 간 이승만이 이런 본의가 있다면 이는 우리 한국사람이 아니요, 미국인이 된 지 오랜 사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국을 사랑할 것이요, 조선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화성돈(워싱턴)을 숭배할 것 아닌가. 우리 국민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사실 이승만의 이런 언동이 사실이 아니요 풍설이나 오전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혹 이 박사가 노망증이 생겨서 일시적 망발이요 본의는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이승만 박사도 대통령 자리에 있건 안 있건 숭조 이념과 애국 애족애향의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고 이 붓을 그치노라.
  갑오(1954년) 7월 그믐날 봉우서우유신정사


    86. 중추 타령
  천도의 순환이라 하나 그 무더웁던 장하천기(긴 여름 날씨)는 어느덧 형적을 감추고 초추칠월도 노염(늦더위)과 싸워가며 언제 가는 줄 아지 못하고, 신석(새벽과 저녁)의 옥로금풍(새벽이슬과 저녁 소슬한 바람)이야말로 가을맛을 알게 하는도다.
  하운(여름철 구름)은 다기보(기이하게 솟아오른 여러 산봉우리 같음)이라고, 올 여름같이 청천(개 하늘)을 보지 못하고 지낸 적도 별로 없었다. 지난 7월도 역시 그 여위(남은 위세)로 여전히 장림(오랜 장마) 속에서 흐리명덩한 기분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지냈었다. 중추(음력 8월)가 돌아오자 하늘은 점점 높고 기운도 맑아간다. 바람이 불면 청량한 맛이 오래 장마레 괴로워하던 더운 머리를 부지불식지중에 식혀주는 것 같다. 그야말로 누구에게 이 감사한 뜻을 표할 것인가. 조물주는 불언불소(말도 안 하고 웃지도 않음)하고 우주의 공전을 감독하시며 천리는 불편부당 하다는 원리를 보여주실 뿐이다.
  순환무단한 이 천리를 보고 우리도 감동한 바가 있었다. 조물의 춘생하야추수동장(봄에 나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거두며 겨울 저장함)하는 원리와 같이, 인사도 천진난만한 춘생인 어린 소년 시대야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화기만만하였다. 그러나 청장년 시대를 당하면 이것이 하양 시대인 것 같다. 무수한 고난을 다 맛보며 우수사려와 희노애락으로 섭세(세상을 살아나감)의 진미를 맛보고 이 하양 시대를 표준해서 인생은 고해에서 부침한다고 한다. 그러나 부지불식중에 이 시기를 경과하면 금풍옥로의 추수 시대가 되어 반생의 고생을 청산하고 향락기로 돌아와서 하양의 고를 결실한 추수의 낙으로 보답한다. 
  우리도 인사가 이 천리에서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도 국민을 하양 시대에는 들들 볶다가 이 볶은 결실이 추수 시대로 가면 얼마큼 안정과 평화로 변하는 것이다. 천리의 중추천기가 정신을 쇄락하게 함을 보고 우리의 장하양성고(긴 여름의 기르는 고통)를 같이 맛보던 인류로 우리에게도 천리와 같은 중추의 천기, 청풍명월이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붓을 드는 것이다.
  어찌 조물주가 거짓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갑오(1945년)의 중추. 비록 해마다 오는 음력 8월이나, 금년 갑오에 맞이하는 중추 천기는 전세계 인류를 말할 것 없이 가장 하양시대의 열독이 심한 우리 백산족에게부터 그 시원한 청풍, 명랑한 명월을 우선적으로 조물주는 무편무당하게 보내시라. 갑오 중추를 맞이하며 해마다 오는 그 중추와는 의미를 달리한, 어느 말 못할 비장을 가지고 이 갑오 중추야말로 요수진이한담청(장마물 그치니 찬 골 물 맑더라)이라고 그 장림고(오랜 장마의 고통)의 악몽을 아직 깨지 못한 우리 동포에서 속히 이 소식을 전해서 청풍명월 맞이할 준비를 하자.
  그리고 갑오 중추, 하필 갑오 중추랴마는 아마 청풍명월이 중추래야 제일 좋을 듯해서 중추 타령을 하는 것이다. 실상이야 중추도 좋고 구추(음력 9월)도 좋을씨고, 구추하일불중양(9월 어느 날이 중양절(9월 9일) 아니랴)이라고, 인류의 추수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갑오 추풍으로 열뇌(뜨거운 머리)를 식히며 이 붓을 드는 것이다.
  (주석 2)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도인인 고옥 정작의 시에 나옴. 정작은 의약에 조예가 깊어 1596년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친형인 북창 선생을 따라 정신수련의 학문을 터득한 뒤 36년간 혼자 살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청풍명월하시무리요마는
  청마지추호운개라
  조물소식유수지요
  활수명경자연휘니라
  수삼지이담소좌하야
  교수시망자미원하더라
  (풀이)
  청풍명월 어느 때라도 없으리요마는
  갑오년 가을 좋은 운 열리네
  조물주 소식 누가 있어 알랴
  생생한 물 밝은 거울에 자연 비치네
  몇몇 벗들과 웃으며 얘기하고 앉아서
  머리 들고 때로 자미원을 바라보더라
  (주석 3) 삼원의 하나인 성좌. 중천북극의 작은곰자리 부근에 있으며, 천제가 거처하는 곳으로 일러 내려옴. 자미궁
  갑오(1954년) 음력 8월 초삼일 여해 소기


    87. 가족들 각자의 불평을 추상해 보자
  고대 중국에서 장공예가 9대 동거하며 족인이 수백이로되 아주 화락하다고 칭송이 자자해서 당시 그 나라왕이 친림해서 장공예더러 그 치가하는 법을 질문하니, 장공예가 엎드려서 아무 말도 없이 다만 인자 100자를 서정(써서 올림)하였다. 그래서 그 후세에 가족이 많은 집에 백인당중유태화(백 번 참는 집안에는 큰 평화가 있다)라는 주련이 보인다.
  (주석 4) 당나라 운주 수장(산동지방)사람. 집안에 9대가 같이 살았으며 효성스럽고 우애 있기로 유명했다.
  사실 그런 것 같다. 어느 집이나 가족 전체가 다 화합하기는 극히 곤란한 것이다. 약간의 서로 불평점이 있는 것은 서로 참아가며 가족 전체의 향복(복을 누림)이 될 합치점을 구하는 것이 당여한 일이요, 혹 그렇지 않은 가족이 있더라도 이해하도록 훈도를 온언순사(따뜻하고 순한 언사)로 하는 것이 가족 각자의 책임이다. 그러나 어느 가족이고 다 그러하기에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다만 가장된 사람이 가족들의 불평불만점을 파악해서 탈선이 안 되도록 선도하는 것이 그 책임이라고 본다. 이 책임을 완수하는 가정은 신이 보답하기를 평화와 안락으로 하고, 이 책임을 완수치 못하는 가정은 신잉 불평과 곤란으로 보답해 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평화스러운 가정보다 불평을 말하는 가정이 더 많은 것은 가족들이 서로 참아야 하고 서로 단결해서 가족 전체의 향복이 될 합치점을 구하는 책임을 완수하는 가정이 그 책임을 완수 못하는 가정보다 소수인 것 같다. 고인의 말씀과 같이 지피지기하면 백전백승이라고, 가족간에서라도 서로 그 불평불만점을 안다면 서로 양보하고 서로 위로하며 우리의 평화와 향락이 있을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각자의 책임이 완수되는 것이다.
  현 사회를 모두 평화와 안락으로 변화하자면 각 가정의 가족들의 불평불만점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잘 파악하는 법을 서로 알도록 하는 것이 제일 양방(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타인이 보기에는 갑이라는 가정은 절대로 불평불만이 없고 평화안락한 가정이라고 할 모범가정의 가족들을 만나서 극히 친해진 후에 각자의 의견을 들으면 역시 가족들의 불평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대립하는 각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고 또 서로 양보성이 있어서 외현(밖으로 드러남)되기에 평화만점이 되는 것이었다. 각 개인으로는 역시 불평불만이 있고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정도란 말이다. 이것이 심판자의 채점하는 방식으로 당연히 만점은 못 주나 우등점이라는 말이다. 점점 이 정도만 되어도 불평불만의 기세가 감축해지고 평화안락의 무대가 되면 불평불만이 어느 곳으로 슬그머니 피난을 가고 그 가정은 아주 영구 평화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정반대의 가정에는 역시 그 보답도 정반대가 올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이래서 그 평화안락한 가정에서 장양(길러짐) 되어진 제2세들이 또 동일한 평화안락한 가정으로 남혼여가(남녀가 결혼함)한다면 남녀의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되어 이 가정이나 저 가정이나 같이 또 평화안락한 가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를 택하다가 그렇지 못한 곳에서 택해진다면 그 불평불만의 발로를 보게 되고, 이 발로가 다른 가족들의 숨겨져 있던 불평불만을 다시 끌고 나오게 된다. 가족 1인의 선택 부정(정밀치 못함)으로 전가족에게 파급되는 영향이 지대하다. 이것이 우리들이 흔히 보는 사실이다. 도시나 촌이나를 막론하고 아주 평화롭게 지내던 가정에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여전히 평화로운 가정도 있으나, 불과 수년 만에 중첩하는 풍파를 내는 실례가 많은 것이다. 이것이 그 신인의 가정적 교양이라는 것보다 그 가정이 평화롭지 않던 가정이라는 확증이 된다. 가정의 가족들은 신인을 선택하는 방법을 주의를 백 배 해야 할 일이요, 만약 주의가 다 못 되었다면 신인이 가정에 들어온 후로 절대로 그 탈선의 기회를 주지 말고 완전히 평화가정 수립의 교수를 시킨 후에 그 가르침을 수료했다고 간주가 된 후에 안심하라는 부탁이다. 혹 신인이 불평불만을 호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좋게 얘기해서 그것이 재연되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가족 전체가 책임을 지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가정에 그치지 않고 일동, 일면, 일군, 일도에 미칠 수 있으며 치국평천하가 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성도 말하시기를 '도는 조단호부부(부부에서 단서가 말들어진다)라고 하시었다. 가족의 다스림으로 천하가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신이 아니요, 또 사람마다 성현군자가 아님에야 어찌 이 세상에서 일생을 경과하는데 만사가 다 도덕이나 법률에 합하리요. 잘못되는 일은 잘 되게 고치고 다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음으로 개과천선이 될 것이다. 인수무과(사람이 누가 과오가 없으랴)리오, 개지위선(과오를 고쳐 착해짐)이라고 사람으로 하여금 개과천선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당연하고,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불평불만으로 나오는 허물이 있다면 가족 전체가 서로 온순사(따뜻하고 순순한 말)로 그가 개과천선하도록 교도하는 것이 각자의 책임이다.
  (주석 5) '중용'에 보임
  그 교도하는 방식은 따뜻한 말로 불평과 불만이 발로한 후에 하느니보다 사전에 그들의 불평과 불만이 무엇인가 서로 추상해서 그들에 대한 행동과 선도를 불평과 불만이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완전한 책임이행이 된다. 제일 가족들의 심리파악이 문제라는 말이다. 동일한 과오라도 원인을 알고 그 과오에 해당하게 책임을 물으면 과오를 법한 자도 감수하는 밖에 타도가 없다는 것이다. 아지 못하는 관계로 부당한 상벌이 있어서 불평불만이 생기는 것이요, 선천적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역시 선도하면 그 발로할 자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들의 내포하고 있는 불평불만이 어는 정도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도 선도를 못한다면 그 불평불만을 내포한 사람의 과오가 아니라 선도시키지 못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본다. 대체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속언에 문동답서가 되면 불평도 불만도 있을 것은 자연 일이다. 고성 공자께서 제자들이 동일한 일을 가지고 질문해도 가장 그 사람에게 적당한 점을 택하시어 답하시는 관계로 제자의 질문은 같으나 공부자의 답은 다르셨다. 이것이 공부자께서 그 제자들의 질문하는 이유를 아시는 관계이다. 후세 학자님들도 공부자같이 답하신 이가 몇 분이나 될지 의심시 된다.
  내가 소년 시대에 간재 선생께 수학한 일이 있어서 여러 사람이 동일한 말씀을 물었는데 대답이 조금도 다름없이 모두 동일하였다. 묻는 제자들의 의사가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간재 선생님의 답안이 부중(맞지 않음)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같은 사람들이 면우 선생님께 가서 한 사람씩 시기를 달리해서 물어보았다. 면우 선생님의 답안은 모두 그 사람을 중심하시고 대답하시었다. 여기서 간재 선생님은 정적이요, 면우 선생님은 동적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적 이라도 동을 내포해야 하는데 아주 정적, 아니 아주 사회적(죽은 재 같은)이었고, 면우 선생님은 각인각답으로 그 심리를 파악해서 재문을 불허하게 하였다.
  (주석 6) 1841--1922.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전우.
  (주석 7) 곽종석. 구한말 영남 유학의 거두. 애국지사.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가족들의 불평불만을 무슨 방식으로든지 정확하게 추상해서 그 불평불만이 발로되지 않게 사전에 잘 이끌어서 가족 전체의 향복이 되고 일가일문(한 집안)에 평화할 목적으로 단결하면 그들의 불평불만은 춘설 같이 사라지고 가정의 평화와 안락은 부지불식지간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요 가족들인 만큼 가장 접촉이 많은 사람이니 그들의 심리파악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추상하는 방식은 내가 그 사람으로 되어서 다른 가족들이 나에게 하는 것을 미루어보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 사람이 되어서 바꾸어 추상하라는 것이다. 내가 내대로 있고 다른 가족의 불평불만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내 논에 물 대기로 내 생각을 더 하기 쉬운 일이라 남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할 것이다. 이래서 내가 중언부언하는 것은 일가족의 평화 안락보자 거족적으로 평화안락을 얻자면 가장 가까운 내 가족부터 평화안락할 근본방침을 수립하라고, 가족의 불평을 추상하라고 제목을 쓴 것이다.
  갑오(1945년) 8월 8일 봉우서우유신초당


    추기
  가족의 불평과 불만을 추상하라는 말만 기록하고 해결방식을 말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노인이 자손이 없어서 불평을 가지고 있는 가족을 아무리 해결할래야 그 마음이 만족하게 자손이 두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왜 불평하느냐고 그 불평을 발로시키는 가족을 책망하지 말고, 그 가족이 없어서 항상 쓸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어느 일이나 그 쓸쓸한 감이 나기 쉬운 곳에는 될 수 있으면 위안을 주어서 그 쓸쓸한 감정이 적도록 하면 비록 자손이 없을지라도, 비록 자손이 없는 불평이 내표하였을지라도 이 쓸쓸한 불평을 발로할 만한 곳이 생기지 않아서 비록 유자생녀(자녀가 있음)하는 사람처럼 환락은 없을지라도 무자손의 비애는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족적으로 극히 주의하면 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가족 중에 독신생활을 하는 가족이 있어 고적을 느끼는 불평이 있다면 아주 사망해서 배우자가 없어서 독신생활로 고적하신 이를 아무렇게 하여도 내외가 있는 사람처럼 고적을 불감할 수는 없는 일이요, 요즘같이 객지에 나가 사는 독신생활도 부득이한 사정이다. 그러나 가족 중에서 내외를 가진 가족이 무슨 방식으로든지 그 적막감을 발로하지 않게 자신들이 주의하고 그 고적을 잊을 만한 취미를 가질 대상을 주도록 용의하라는 것이요, 또 지족을 하도록 그보다 좀 더한 고적감에 빠져 있는 실정을 간간이 소개해 주고 안심을 시키라는 것이요, 빈부의 차나 허영심으로 불평불만이 있는 것을 무슨 방식으로든지 교양을 시켜서 그런 공상을 버리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 밖에 각종의 불평불만을 아주 해소할 수 없으니 다른 위로 방식으로 그
+것들을 잊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일인데 가족적으로 편증편애성(사랑하고 미워함이 한쪽으로 치우친 성질)이 있어서는 안 되고 박애주의를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요, 잘못하는 가족일수록 접촉을 더 해서 개과천선하도록 하는 것이 가족 상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또 불평불만을 조건조건으로 열거할 필요가 없어서 이 정도로 그친다.


    88. 박산주장을 추억하며
  앞서 위의 제목으로 기록을 한 바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그 행록의 일부를 쓰고자 한다. 
  산주가 인천 미두장에서 옥관도인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터라 그를 평하고자 하는 사람은 선입감을 이해득실에 두고 자기와의 이불이로 그의 인격을 말하고, 그와 무관한 사람들 역시 남의 말 하기 쉬운 터라 그의 피상만 보고 옳다 그러다 한다. 어찌 그것이 그 사람의 정론이리요. 비록 세상에서 학식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산주에 대한 평을 할 때엔 어떻게든 자신의 존엄성을 살리고 타인에게 신용을 받을 만큼 하느라고 산주의 장점은 자기의 몇 분의 일에 해당하였고, 또 그의 단점은 무지몰각한 인사로도 안 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육안으로는 태산이 높고 안 높은 것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맹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제각기 제가 본 것이 코끼리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 일반적인 산주에 대한 평가들이다.
  나도 비록 인천에서 미두장꾼 노릇을 한때 해보았으나, 미두로 인한 이해득실은 각자의 자취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고맙다고 할 것이 없다고 보는 관계로, 이해득실로서 산주를 평하는 인사들의 선입감을 버리라는 말이다. 또한 산주가 근대의 외양으로 학행하는 인사들처럼 가식적인 사람이 아니요, 그저 인간적인 박양래이니 혹주혹색을 가지고 그의 전체을 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왜곡을 버리라는 것이다. 고인들도 불평한 일이 있으면 혹 방랑생활도 하고 혹 광인 행색도 하고 또는 그 명가를 아주 매방한 이도 있으니, 산주가 불평과 낙망으로 자포자기 생활을 시작한 후의 행동으로 산주의 전체을 평한다는 것도 부족한 짓이라고 본다. 공부자를 상가지구(초상집 개)와 같다고 평한 사람도 있으나, 누가 그 평가를 정당하다 하겠는가. 그와 같이 산주의 친우로 자처하는 도덕군자연하는 분들이나, 대술객연하는 인물들이 그가 환원(죽음)한 이후 산주의 인물됨에 대해 묻노라면, 내가 보기에 산주에 비해서 천양지판인 인물들이 그래도 호언장담하는 것이 가관이다.
  내가 본 산주 그의 친천 미두장은 그의 은명하는 곳이었고, 그의 지덕체 삼육으로 보나 내가 본 예로 보아서 상관천문하고 하찰지리하며 중찰인사하였으며, 변리음약(음양을 변화하고 다스림)에 무소부지(모르는 것이 없음)요, 삼교구류(유불선과 제반 학문)에 무일불비(하나도 갖추지 않음이 없음)며, 박학호문(널리 배우고 듣기를 즐겨 받아들임)하며 자예건공(천지를 노려봄)에 안공일세(적수가 없음)하였고 겸하여 만부부당지용(만 사람이라도 당해내지 못할 용력)을 지녔으며, 팔구원공(72가지 기문둔갑 공부법)에 조화무쌍하였다. 시운만 얻었다면 삼대좌성지재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리라고 말하고 싶다.
  (주석 8) 하은주 세 시대에 임금을 보좌하던 수뇌급 인재.
  그런데 그는 무엇 때문에 그리고 낙망하였을까? 선추대운하니 내두요원이고 차추신운하니 기수불장이라 여기서 만사무심하였다는 것이요. 내가 산주의 그런 이유로 방광(겉으로 미친 행색을 하고 다님)함을 알고 수차에 걸쳐 권고를 해보았으나, 그는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저 그렇게 있다 갈 뿐이라며 그 마음을 변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비록 때가 불리불통할지라도 천하의 영재에게 그의 지닌 보배를 모두 전하여서 후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 아니가 한 즉, 전하는 것 또한 무운이라며 조용히 세상을 하직함만 못하니 다시 내생을 기약함이 옳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방광하였으니 속안이 어찌 이 사실을 알리오.
  (주석 9) 선추대운하니 내두요원이고 차추신운하니 기수불장이라: 먼저 대운을 살피니 미래가 멀리 있고 다음으로 일신의 운을 살피니 그 수명이 짧을러라.
  을해년(1935) 이른 봄 내가 사는 계룡산 유신정사에 찾아온 것이 곧 그대로 영원한 작별이 되고 말았으니, 그는 그해 여름 인천 송림사에서 서거하였던 것이다. 시신은 화장하였으니, 살아서도 의지할 곳 없었고 죽어서도 돌아갈 곳 없었다 정령은 흩어지지 않으니, 새로이 삼신산 신선보에 오르려니와 영혼이 있다면 여해의 오늘의 심곡을 잘 살필 수 있으리라. 서불진언하니 봉장자지리라.
  (주석 10) 서불진언 하니 봉장자지리라: 글은 말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니 만나면 자연 알리라.
  옥량락월의희처에
  고인의범시시현이로다
  정상자광휘불편하여
  상궁벽락하황천이로다
  해악신첨련기선하니
  분명구일의중인이로다
  (풀이)
  꿈속에 고인의 모습 때때로 나타나네
  정산의 자공은 비추임이 편벽되지 않아
  위로는 하늘, 아래로 황천에 닿았네
  신선계에 새로이 기운을 연마한 선인이 들어오니
  분명 옛날의 뜻을 지닌 사람이로다
  갑오(1954년) 8월 초열흘 봉우 근기


    89. 무제
  진시황이 6국을 병탄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천하무우(천하에 걱정이 없음)라 하며 1세 2세로 만세에 이르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으니 황제란 덕은 삼황을 겸하고 공은 오제 한하다고 스스로 칭한 것이었다. 진시황은 시서를 불태우고 유생을 파묻어 만민을 어리석게 만들려 하였으나, 만민이 어리석어지기 전에 그 아들이 먼저 마록(말과 사슴)을 가리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2세도 못 가 나라가 망하였다.
  (주석 11) 중국 전국 시대(BC 403--221)의 강성했던 일곱 나라 중 진나라를 제외한 초, 연, 제, 조, 위, 한의 여섯 나라.
  (주석 12) 고대의 세 성군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 또는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 등 여러 설이 있음.
  (주석 13) 역시 고대의 다섯 성군으로 소호, 전욱, 제곡, 요, 순, '사기'에는 소호 대신 황제로 되어 있음.
  진승과 오광의 무리는 각축장이 개시됨에 지나지 않고, 정장과 백왕은 결승의 거두이나 초한의 승부는 이미 방량이 처음 운산(산대놀림)할 때 나 있었던 것이요, 해하의 싸움 때문이 아니다. 운주자(산대를 놀리는 이)가 주역이요 결승자는 그 다음인 것이다.
  (주석 14) 진나라 말의 농민반란 지도자
  (주석 15) 진나라 2세 황제 즉위년엥 진승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6개월 만에 패하여 죽음. 이것이 진나라 말기 동란의 원인이 되었음.
  (주석 16) 한고조 유방
  (주석 17) 초패왕 항우
  (주석 18) 중국 전한 창업공신. 자는 자방, 한신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3걸이다.
  후한 광무제가 나라를 중흥할 때에도 엄자를이 광무제의 중흥을 운주로써 진실로 알았고, 전장의 28장수는 그 조아(손톱과 어금니)에 지나지 않아다. 한말의 풍운 역시 그러하니 황숙 유비의 촉나라를 보존함과 손권이 오나라를 지킴과 조조의 호령천하가 비록 정립하였으나, 실제 삼국을 요리한 것은 바라 제갈공명의 운주에서 나왔으니. 무엇으로 그렇지 않음을 대신하리요.
  (주석 19) 후한 광무제의 친구로서 당시의 은일지사였으며, 광무제를 도와 후한 건국에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공성신퇴하였다.
  영웅호걸은 대를 이어 속출하나 오직 얻기 어려운 것은 옛부터 이윤, 여상, 양평, 자릉, 공명의 무리라. 역대의 창업주(제왕)들을 살펴보건대 이와 같은 인물들을 얻은 자는 창성하고 잃은 자는 패망하였다. 치란(난국을 다시림)의 환국(전환국면)이 되면 하늘은 반드시 영재를 택하여 생민을 구원하시나니, 동서고금의 역사가 동일한 궤도요 소호도 다름이 없도다. 무릇 현세를 관찰한즉 치란의 환국임을 알 수 있으니, 곧 하늘이 이미 영재를 낳아서 기르고 감추어, 그 때를 기다려 온 지 오래이다. 어찌 극도에 달한 난을 두려워할지며, 어찌 도탄에 빠진 인민을 걱정하리요. 다만 고대와 비할 수 없는 것은 천하가 모두 동요하여 능히 천하를 제도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뜻을 이룰 수 없으니 옛날에 한 나라, 한 경제를 다스려도 만족한 것에는 비할 수 없음이라.
  고로 인민의 학수고대함도 급하기는 하나, 하늘의 이러한 사람을 선택함 또한 어려운 것이다. 천하가 혼란하지 않으면 그 영재의 대소도 알 수 없는 것이니, 천하의 극란(지극히 어지러움)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천하를 능히 건질 사람을 내놓는 것이다. 중성(뭇 별)의 광망(빛살)이 모두 북극성을 에워싸고 신성(새벽별) 두엇이 하늘 끝에 남아 있다가 동천조일(동녘하늘 아침해)에 만광이 빛을 잃을 것이로다.

  일륜홍일하시승고
  벽상고괘양의도로다
  육주오양진일가어늘
  하수분별백여황고
  만년전쟁무승패하니
  중화일기천하평하리
  성시성종간명도하리
  수식배달출신성가
  수심정기련기진하면
  삼일일삼재기중이니라
  봉황래의풍뢰수하니
  장춘세계즉기시로다
  (풀이)
  둥글고 붉은 해 언제나 떠오를꼬
  벽 위에 높이 거니 음양도로다
  지구는 한 집안이어늘
  어찌타 백과 황을 나누는고
  오랜 싸움에 지고 이김 없으니
  중화의 한 기운으로 온 세셍 편케 하리
  처음과 끝을 맺는 간방의 도를 밝히니
  신성한 이 배달족에 남을 뉘라 알 것인가
  마음 지키고 기운 바로잡아 그 참됨 닦으면 
  셋하나 하나셋 그 가운데 있나니라
  풍뢰산 봉우리에 봉황새 짝지어 날아드니
  늘봄세상 바로 그때로다
  갑오(1954) 8월 초열흘 여해 소기


    90. 을축년 정신수련중 투시한 우리나라의 운로
  (주석 20) '백두산족에게 고함' 중 '연정원우 수련기'의 일부로서, 출간 당시 누락된 것을 이번에 모두 실었다.
  경으로 대황조 등극까지의 과거와 위로 동서위인들과 득도자들의 고행을 참관하게 되고, 또 대현게에서 연구발명하는 신기계와 세계지도의 신채색을 보게 되어 이것이 진인가 가인가 하는 것은 예외로 하고, 또 내가 본 것이 유루(빠짐)가 없이 본 것인가 어느 한 부분만 보았나 하는 것도 아주 예외로 하자.
  다만 과거는 말할 필요가 없고 미래의 일부라 하더라도 신미년(1931)에 만주의 신생을 예고하여,

  금양소춘천에
  부의삼등극하나
  만월십오수에
  환멸수포영이라
  지나운쌍십장은
  화덕성래하계라
  천손거무소식하니
  황용기양자강이라
  쌍오두쌍십미에
  사백주통일가라
  (풀이)
  신미년 10월에
  부의가 셋째로 등극하나
  15년 만에
  환영은 사라지고 물거품 그림자 되었네
  중국의 운 10월 10일 장수(장개석)는
  화덕성으로 아랫세상에 내려왔네
  천손은 가고 소식 없으니
  황룡(무진년)이 양자강에서 일어나네
  5월 5일 기병하여 10월 10일에
  400주를 통일했네

  무진년(1928년) 5월 5일에 장개석의 기병으로 10월 10일에 중국 통일을 예고하고,

  음험북해용은
  득죄강인간이라
  불개전생성하고
  임의해생영이라
  자자위악사하나
  장권칠십녕이라
  삼인금수운에
  봉황동래의하면
  고분삭북지하고
  세진이칠색하리라
  (풀이)
  음험한 북해의 용은
  죄를 얻어 세상에 내려왔네
  전생의 성격 고치지 않고
  임의로 생령을 해치네
  이렇게 꾸준히 나쁜 일을 해서
  70년 정권을 장악하네
  세 사람 금수운에
  봉황이 동방으로 오면
  북녘땅(만주)을 고분하고
  27색을 쓸어 없애네
  (주석 21) 고: 고와 같은 자로서 수초의 일종을 뜻하며, 외로울 고로 쓰이기도 함.

  이것은 아마 스탈린을 의미한 것 같은데, 70살에 사거(사망)한 것까지는 부합하였으나 삼인금수운이 무엇인가 암시오, 또한

  이화개락오백년에
  사구겁운역난면을
  시당청계하시절하야
  천상천병이 자연구리라
  간어제초운재하오
  평분강산한미세로다
  유군유국개허명이니라
  양적상투해생영을
  쌍괴상전백호야하니
  시산혈해인지췌로다
  금수강산삼천리에
  금전누대진병정을
  냉금부금궁을지니라
  소두무족개자취러라
  황천호생본시덕이라
  흑사육월우연휴를
  동방원후와 북방웅이
  살진예의군자국하고
  청양화풍취방초하면
  각귀각국각자안하리
  소소기복을 하수설고
  청용청사라 운시평을
  (풀이)
  오얏꽃 폈다 진 오백년에
  36년 나쁜 운을 또 면치 못함을
  을유년을 당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가 자연히 구하리라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낀 운명을 어찌하리오
  강산을 똑같이 나누니 한을 씻을 도리 없네
  임금과 나라 있어도 모두 헛된 이름일세
  두 적이 서로 싸우며 사람들을 해침을
  두 괴뢰가 서로 경인년(1950)에 싸우니
  시체는 산 같고 피는 바다 같아 사람들 모두 파리하도다
  금수강산 삼천리에
  금전누대(도시)모두 불타버림을
  냉금부금궁을(일정시대 비결 글귀)은 아느니라
  소두모족(비결에 나옴)을 다 알아서 하라
  하느님은 살리는 것을 좋아함이 본래의 덕이라
  계사년(1953) 음력 6월에 우연히 멈춤을
  동쪽 원숭이(일본)와 북쪽 곰(소련)이
  예의군자국을 죽여 없애고
  을미년(1955)에 평화스런 바람이 방초에 불면
  각자 각 나라로 돌아가 각자 편안하리
  자잘한 기복을 어찌 다 말할꼬
  갑진을사년(1964, 65)이라 운이 비로소 평탄해짐을

  이라고 우리나라 운로를 예고하였다. 내두는 알수 없으나, 경과는 부합된 것 같다. 그 외에도 각종 신무기의 출현을 예고해서 원자탄, 원자포, 전차대, B29 등을 말하였고, 그 밖에 7건 신무기는 아직 출현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을축(1925년) 4월 13일간 소견(본 바)의 일부다.
  갑오(1954년) 8월 회일(그믐날) 수필 중


    91. 인궁하는 요즘 내 모습
  (주석 22) 곤궁함을 견뎌냄)
  순은 궁에 처하였을 때에 여어하이우미록(물고기, 새우 고라니, 사슴과 짝이 되고 벗이 됨)하시었고 유유자적하여 안빈낙도 외에는 타념이 보이지 않았다. 하필 대순뿐이랴. 고현군자들이나 금현군자들이나 처궁(곤궁에 처함)의 도는 동일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가림없는 심판을 해보자. 내가 궁한 정도는 고인들 공하다는 이보다는 좀 나은 것 같고 처궁하는 것은 아주 고인들만 못하다. 그렇다고 내가 고인의 궁한 정도보다 아주 유족하다는 거은 아니라 다만 나는 천위염빈편여건(하늘이 어려운 사람을 위해 특별히 건강을 주었다)하시어 내 묨이 고인에 비해서 좀 건강하다는 것이요, 또 약간의 생재(돈을 벎)할 수 있는 경험이 있어서 비록 궁하나 고인들 보다는 속수무책할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요, 또 가족이 대가족이면 단결이 어려운 것인데 불과 4--5인이라 단결하기 용이한 점이요. 또는 현부형(어진 부모)이 계시어서 가정문견이 약간 있는 것이 역시 타인보다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주석 23) 육방옹의 시에 나옴. 방옹은 중국 남송의 시인인 육유(1125--1210)의 호. 절강성 소홍 사람. 남소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웅혼 호방하며 애국열정이 넘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러나 내 빈궁한 정도는 60평생에 가옥도 내 소유가 없고 부동산도 내 소유가 없고 또 농업도 못하고 상업도 못하고 공업도 못하는 백계무책인 사람이요, 백무일능(백에 한 가지 능력도 없음)한 인물이다. 다만 가족 전체가 안일한 생활을 하지 않고 근로하는 관계로 비록 여유는 없으나 호구함에 큰 염려 없이 지내는 것이 고인들처럼 안빈낙도(빈궁속에서도 편안히 도를 즐김)가 아니라 인빈욕도(빈궁을 참으며 도를 바람)를 하는 것이라 안빈낙도와는 차등이 운니(구름과 진흙)의 격이 있다. 다만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될 수 있으면 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요, 실제에 있어서는 간간 과오를 범하는 일이 많다. 과오인 줄 안 이상에는 지과필개(과오을 알면 반드시 고침)해야 옳은 일인데 개과천선을 번번이 못하는 것이 고인에게 부족한 점이다. 다만 지과하면 욕개(고치려 함)하는 마음만은 있고 실행력이 부족 하다는 말이다. 이 부족이라는 것이 내 마음의 역량이 고인보다 부족한 관계다. 그리고 학도(도를 배움)의 역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고인들의 안빈낙도하는 사람들은 불관한사(급하지 않은 일에 관여 안 함)하고 자력수양에 전력을 다하는데, 내가 지낸 경험으로 보면 나는 선관한사(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여를 잘함)하여 득실이 상반(서로 반)하나 공소세월(공연히 세월을 소모함)에 상침두변(흰머리가 머리 주변에 생김)한다는 것이다. 별무소성(별로 이룬 바 없음)하고 어언백발(어느덧 흰머리)이니,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장래가 비록 멀지 않으나 중도개로(도중에 길을 바꿈) 말고 전심전력으로 인궁이 고궁(곤궁함을 잘 지킴)이 되고 수궁이 안궁(곤궁함을 안락하게 여김)이 되도록 진력해서 욕지어도(도에 뜻을 둠)가 부지중 낙도경(도를 즐길 지경)까지 도달하게 되어야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한 성공이요, 그 다음에 각이니 견이니 명이니에 가는 것은 다만 계단적임을 말하는 것이요, 별다른 도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연히 붓을 들다가 인궁하는 내 현상과 전진력이 부족한 내 자신의 심판을 기록해 보는 것이다.
  갑오(1954년) 11월 초길일 봉우서우상신초당


    92. 설초를 환송하고
  (주석 24) 김용기 선생의 호로. 봉우 선생의 부친이신 취음공께서 지어 주셨다 함.
  설초가 연정원우 기록에서나 동지서전(동시 서열)에서나 고참에 다음가는 원우 수반이다. 내가 평하기를 수년 정연이 있은 후에야 시구(점칠 때에 쓰는 가새풀과 거북)로 묘당(조정)의 고문을 받을 수 있으나, 현상으로 중지하면 비승비속이 되어 충분한 효과를 발휘 못할 것이요, 위자손지계(자손을 위하는 계책)에는 족하나 자신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구를 기록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설초가 연정 준비로 수년을 불휴의 노력을 하며 경제적으로도 저축이 되어 가산을 그 부인에게 맡기고 입정의 길을 떠나고자 하던 것인데, 의외에 상배(부인이 죽음)를 하고 가족 맡길 곳이 적당치 못해서 정신이 산란하던 차에 대전으로 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슨 방식이든지 가족의 누만 없다면 초지를 완수하겠다고 확답하고 작별하였다.
  현상으로 설초는 한문이 기성명은 하고 삼십육산에 박람한 분이라 세상에서 보통 행세하는 술객들의 비류가 아니요, 산안(풍수지리를 보는 안목)이 고급이며 헌기지술(의학)도 파정(자못 정밀함)하고 선택에는 호중(충청도)에서 기우(그 오른쪽)가 없을 것이요, 화랑도의 체술을 체득해서 정오(정밀하고 심오함)에 달하였고 연정원 현 원두로 2계에서 왕래하는 분이다. 일슬지공(한 번 더 크게 노력함)만 있다면 3--4단계의 진취를 가망하겠는 관계로 내가 역권(힘써 권고함)하였다.
  설초도 자지하고 있는 분이라 어느 기회만 있으면 재수련발족을 하리라고 믿는다. 설초의 재발족으로 3--4계에 확달(확실히 도달) 된다면 연정원의 다행이 아니라 우리 배달족의 행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설초가 현상으로는 천문을 보나 극치에 못 가고, 추수를 하나 시일과 인물의 누구인 줄 부지하고, 투시에 장하나 직시에 결이 있고, 정산(정밀한 산법)을 통하나 법에 준하고 변통자재가 아직 못 된다. 대체로 구체이미(몸체는 갖췄으나 아직 미약함)라는 말이다. 소인(보통 사람)이 이 경지에 가자면 사수(스승의 가르침을 받음)가 있고 성의가 있더라도 10년 세월을 요하지 않고는 도달 못할 계단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내가 확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인물의 개평보다는 설초에게 치중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안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바라는 바는 설초의 전두에 애로가 없이 명년춘풍을 무사히 지내고 명년추동부터 다시 굳은 결심이 나도록 조물이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이 글을 그치노라
  갑오(1954년) 10월 28일 봉우서


    93. 봉우 내력
  경신년(1920)에 나는 중병을 앓아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약 넉달 간을 무려 열한 번을 혼절하며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하였었다. 그때 열한번째 혼절하였을 때에는 4일 동안 숨이 완전히 끊어진 죽음의 상태가 된지라 가족친지들은 나의 시신을 거두어 손발을 묶고 얼굴을 백지로 쌓은 후 백지를 덮어두고 칠성판에 누인 채 병풍을 쳐놓았다. 이 나흘간 나의 영혼은 이 세상 아닌 꿈속의 다른 세상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꿈 얘기는 다음과 같다.
  나는 광화문처럼 생긴 큰 문 앞에 서 있었다. 가운데 문은 잠겨 있었고 좌우 두 문은 열려 있었는데, 좌측 문으로는 머리 깎은 중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나는 일반인들이 다니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얼마를 들어가니 큰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한복판에 층계가 있고 그 계단 높이 세 노인이 앉아 있었다. 제일 눈에 띄는 이는 마치 관공(관우) 같은 형상으로 9척이나 됨직한 큰 키에 눈이 부리부리하니 아주 무섭게 생긴 사람으로 동쪽에 앉아 서쪽을 보고 않아 있었는데,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 불이 번쩍하며 '네 이놈, 여긴 무엇 하러 왔는고' 하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다른 노인 한 분은 대머리에 평복 차림었고 남쪽에 앉아 북쪽을 보며 앉아 있었는데 아주 인자한 관상에 말도 아주 친절히 해주었다. 이분과 마주앉은 노인은 나라의 재상복 차림이었고 아무 말이 없었다.
  대머리 노인은 "너희들 이왕 여기에 왔으니 구경이나 좀 하거라." 하며 권하는데, '너희들'이라고 하는 걸 보니 나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들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권유대로 세 노인이 앉아 있는 높은 누각 뒤로 돌아가 보니, 세상의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제일 큰 화분에 모란꽃이 여러 그루 심겨 있었는데, 꽃은 딱 세 송이가 있었다. 하나는 아주 활짝 피어서 이미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한창 피는 중이었고, 세 번째는 꽃봉오리가 막 벌어지려는 상태로 아주 탐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그 대머리 노인은 나더러 하나 골라잡으라고 권했다. 나는 세 번째 막 피기 전의 모란꽃을 집었는데, 대머리 노인이 주시려 하자 관공 같은 노인이 안 된다고 막는 것이었다. 대머리 노인은 "이게 비상화(특별한 꽃)인데 비상인이 아니면 갖고 갈 사람이 없다."고 하였고, 관공 노인은 "물론 당연한 일이나 귀한 것을 주는데 그리 쉽게 그냥 주면 안 된다. 내가 안 주려는 게 아니고, 쉽게 주면 소중한 줄 모르니 좀 주의를 단단히 시킨 후에 줌이 옳지 않은가."고 말하였다. 나머지 한 노인은 대머리 노인과 같은 의견이었고 한동안 설왕설래한 후, 대머리 노인은 나를 보며 "그래, 이 꽃 가지고 잘 내려가거라." 하고 다정히 작별을 하였다.
  나는 그 높은 계단 위의 누각을 다시 내려와 마등을 벗어나 걸어가는데 길 왼편에 큰 전각 한 채가 눈에 보였다. 전각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발이 쳐져 있었으며 안에서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들이 언젠가 많이 듣던 귀익은 소리들이었다. 그러자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봉우, 봉부!--그때까지 나의 호는 여해였고 '봉우'란 여기서 처음 들었는데, 마치 나를 두고 부르는 듯하였다.--아, 봉우 그깟 잔병 갖고 뭘 그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도 "요순우탕, 공자, 석가여래 같은 역대 제성들도 모두 생로병사를 겪었는데, 나라고 앓지 않을 수 있나. 그렇게들 얘기하는 걸 보니 자네들은 병 고칠 방법을 알고 있겠군 그래." 하고 대꾸 하였다. 그랬더니 전각 안에서 여럿이 웃는 소리들이 들리더니, 한 사람이 "아, 봉우형 입심이 여전하구먼. 서유기 봤어? 행자 있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손오공 말이야?" 하고 받았더니 "그래, 그래." 하고서는 다시 말이 없었다.
  이후 나는 꿈에서 깨어나 의식을 회복한 후, 몽중에 들은 대로 오공(지네)을 50마리씩 잡아 생즙을 내어 마신 지 5일 만에 육신의 병마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나는 꿈에서는 깨어났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이, 시신으로 처리되어 온몸이 묶여 병풍 뒤에 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을 회복한 날 오후에 영남에서 한 선비가 찾아와 나를 만나고자 하였다. 그의 이름은 장인근 이었은데, 곽종석 선생께서 보내셨다면서, 죽은 사람을 오늘 꼭 찾아가 만나 보라고 하셨을 리 없으니 자신이 시신을 한번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연유를 물으니, 작년 기미년(1919)에 곽면우(곽종석) 선생께서 작고하시기 전 학문상의 문제로 곽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선생님 말씀이 이 문제는 나보다도 공주 계룡산 밑에 사는 권태훈이가 더 잘 아니, 내년 모월 모일에 반드시 찾아가 물으라 하시며, 날짜를 꼭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셨다는 것이었다.
  그가 고집대로 시신을 안치한 방에 들어가 병풍을 제치고 나의 죽음을 확인하느라 얼굴의 한지를 벗겨내니 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지라, 밖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다 고함을 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기적적인 소생을 하게 된 것이다.
  면우 곽종석 선생님은 기미년 8월 24일 별세하셨는바, 다음해에 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것을 미리 아시고 장인근이란 학인을 통해 구해 주신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이상이 내가 봉우란 별호를 얻게 된 내력이다.
  봉우 선생의 구술을 중심으로 엮은이가 서술함


    94. 면우 선생님과의 만남

  면우 곽종석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3세 때 아버님의 편지 심부름을 하면서였다. 그때는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으나, 하룻밤을 같이 모시고 자던 중 밤중에 선생께서 일어나 앉으시길래 나도 따라 일어났다. 글쓰시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노라니, 선생님의 두 눈에서 안광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컴컴한 종이 위를 환하게 비추는 것을 목격하였다.
  뒷날 내가 우리 민족의 발상지 되는 만주와 몽고 지역을 답사한 후 경남 거창의 가복산 다전으로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이때에는 만주 지역을 편력하며 나름대로 파악한 사실들에 관하여 선생님께 여쭈어 확인을 하고 싶었던 차라 나에게 귀중한 발걸음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곁에 모시던 학인들을 다 물리친 뒤 선생님을 모시고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도 선생님은 한밤중에 일어나 앉으시더니, 낮에는 아무 말도 없으시던 어른께서 "천지! 천지는 성수지" 하시며 벅찬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같은 어조로 "백두산은 성산이지!" 하시면서 나를 돌아보며 "보았지?" 하신다.
  나는 백두산을 여러 차례 등정하였는데, 정상의 천지 가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많았다. 어느 땐가 휘황찬란한 달빛이 비치는 인적 없는 태고의 연못 가운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하늘로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올라 까마득하게 물기둥이 되더니, 비가 되고 구름이 되어 하늘을 덮고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광경이 연출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장엄하고도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면우 선생께서 "보았지?" 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뜻하신 것이다. 이런 광경이 한 해에 몇 번 없는 일이라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감이 있다면 이런 광경 같지 않을까 싶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백두산족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씀하신 뒤, 마치 당신이 내가 편력한 곳들을 같이 다녀오신 것처럼 내가 느꼈던, 의문을 가졌던 것들을 하나하나 묻기도 전에 확신에 찬 어조로 확인해 주셨다. 즉 안동 북쪽 요동반도를 이루는 산맥과 백두산에서 장장 이천여 리를 뻗어내려온 산맥으로 이루어지고 압록강을 남으로 둔 대분지, 즉 계관산과 오룡배에 둘러싸이고 자그마한 금석산을 중심으로한 넓은 땅이 바로 미래에 백두산족 중흥의 중심지가 될 북계룡이라는 것이며, 당신은 이미 늙어 볼 수 없으나 다음 세대들은 그때를 볼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때로부터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면우 선생님 같은 선각자를 만나 보지 못하였다.
  선생은 기미년 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유독 유학자가 없음을 통분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엥 보낼 유림의 진정한 독립의지를 표명한 2,674자의 장문을 지어, 137명의 서명을 받아 문인 김창숙을 시켜 상해로 보냈다. 이 일로 일본 헌병대에 연행, 대구 감옥에 수감되어 당년 5월 20일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나,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징역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나."며 재판장을 꾸짖었으며, 공소를 하지 않고 대구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셨다.
  7월 19일 병환으로 보석출감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8월 24일 낮 10시 본가 다전의 여재에서 별세하시었다.
  봉우 선생의 구술을 중심으로 엮은이가 서술함.


    95. 낙수
  1. 이 갑오년(1954)에서 오는 갑오년(2014)까지 또 60년 간을 1기로 하고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세계적 진출과 한중인 동맹과 아시아연맹으로 세계를 제패할 자신이 만만하고 미주는 그대로 자보(자력보존)할지나, 소련은 패망할지며, 구주는 중소(여러 작은)국가로 근근히 자보할 것이다. 인구잉여는 세계 공한지가 얼마든지 있는 것을 이용할 것이요, 황백환국이 틀림없이 이 갑오년으로부터 저 갑오년 60년 간에 되리라는 것을 제언해 두노라. 이것이 무슨 미신이나 '정감록'을 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치학이나 군사학에 근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1954년 원단 수필 중

  2. 남북통일의 방식론에 있어서는 내 생각대로 해보겠고 선결조건은 무엇인가 쓰기로 하자.
  제1. 미소야 무어라 하든지 남북 원수가 무엇보다도 먼저 오천년 역사를 추억해 볼 일.
  제2. 합하면 강하고 분하면 약해지는 원리에서 탈선하지 말고 용단력을 내어 통일문제에 호상 양보할 것.
  제3. 의좀심을 1일이라도 속히 버릴 것.
  제4. 남북 공히 대황조 정신을 선양할 것.
  제5. 통일되기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민족은 국방사상에 전력할 것.
  제6. 민족문화로 세계수준을 돌파할 것.
  제7. 통일이념으로 일치단결해서 세계평화와 국토재건과 민족부흥에 합력할 것. 
  이상의 선결문제를 민족 각자가 불망하면 통일은 다만 시간문제일 것이다. 현상은 자유주의라는 명목 하에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온전한 개인들의 이기심에서 동서분망 하느라고 통일이야 되든지 말든지 자기 1인만 호화생활만하면 충분하다는 도배가 상류층으로 자처하는 인물들이나, 최하급으로 자처하는 인물들 간에 공통된 점이라고 본다. 관료는 관료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농민이나 상인이나 공안이나 또 문인이나 모두 신성한 맛이 없고 상하고 교정리(서로 이익을 다툼)하는 것뿐이다. 북한도 동일한 것 같다. 이것이 통일의 암초라고 본다. 이 암초가 속히 없어져야 통일성업이 완전히 될 것이요, 통일에 그치지 않고 일보전진해서 섹p에 활보할 수 있다고 본다. 현상으로는 통일이 되어도 무슨 말 못한 조짐이 있지 않은가 해서 이 붓을 드는 것이다.

  3. 우주도 흐르고 우리 인류도 역시 변함없이 흐르도다. 오면 가고 가면 오고 천년 만년 가리로다. 우주와 같이 걷는 우리의 걸음자취 알아 무삼 몰라 무삼.
  1954년 7월 25일 수필 추기

  4. 순이 호문하시며 호찰이언(남의 말을 잘 살핌)하시되 은악이양선(악을 숨겨주고 선을 드러냄)하신 것은 섭세행정(세상을 헤쳐가는 방편)을 말씀하신 것이나, 유정유일이오사 윤집궐중이라 하신 심법이 박람광기(널리 읽고 지식이 많음)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작지불이(끊임없이 노력함)라고 역작(힘을 들임)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감히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일중이라는 글자는 두 자가 아니요 한 글자로서 (점역자 주: 밭 전 자 모양과 비슷한 모양)이란 글자라는 것을 부언해 두며, 고인은 중자로 일중이란 자를 나타낸 일이 있으나 본래 (점역자 주: 밭 전 자 모양과 비슷한 모양)자는 구사이사(눈이 넷, 귀가 넷)요 오행구족(오행이 다 갖춰짐)하며 상생상극에 변화무상 이라는 글자다. 일중 선생이 입지인지 자기(스스로 기약함)인지 또는 자신이 일중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표현인지 후생으로는 알 길이 없으나, 공자도 불거하신 일중이라 자기나 입지인 정도리라고 본다.
   1954년 8월 중추일 "최주남 일중 선생 인상기" 중


  5. 오성
  #1 금-서, 성, 황, 원, 한, 남, 장, 류, 신, 곽, 로, 배, 문, 왕, 반, 음
  #2 목-김, 조, 박, 최, 유, 공, 고, 차, 조, 강, 류, 염, 주, 육
  #3 수-오, 려, 우, 기, 허, 소, 마, 로, 여, 천
  #4 화-이, 윤, 정, 강, 채, 라, 신, 정, 변, 지, 석, 진, 길, 옥, 탁, 설, 함
  #5 토-송, 권, 민, 임, 림, 엄, 손, 피, 구, 도, 단


  6. 유유창천(끝없이 멀고 푸른 하늘)이여, 우리 배달족으로 이 악몽을 속히 깨도록 계명성을 울리시라. 그렇지 않으시려거든 이 망량(도깨비)들은 속히 거두시라. 황천(하느님)이 진류사민(이 백성을 모두 죽임)하실 것가. 사필귀정이라고 동천욱일(동녘에 또오르는 밝은 해)이 불구장승(오래지 않아 떠오름)할지나 하도 답답해서 이 붓을 드는 것이요, 누구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누구를 증오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요 다만 바라는 바는 큰 희생 없이 이 날이 속히 새기를 바랄 뿐이다.


  7. 호흡으로 수련하면 별 자미(재미)는 없으나 초계 이상에서 2계까지만 가면 원상으로 현상되는 것보다 우수하다는 것이다. 변화비승은 말할 필요 없고 연정의 방식이나 법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출입현로(정신계를 출입함)를 수련시만 할 것이 아니라 하시든지 임의로 할 만치 되자면 호흡이 1문 이상 조식이 되어야 충분한 것이다. 뇌부, 자부, 악동(산과 강)의 진령과 상천하지의 유임무임(맡은 임무가 있거나 없음)한 정선, 산선의 왕래출입 노정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심, 관물을 마음대로 해야 비로소 연정원 정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석 25) 하늘에서 벼락을 주관하는 부서. 혹은 뇌신을 가리킴
  (주석 26) 천상의 신선들이 거처하는 곳.
  금부비록(정신계의 도인 기록부)에서 명패를 보면 현 우리 민족에서는 현삼석, 조, 유, 성우, 김현국 등 5인의 명패가 광채가 날 뿐이요, 박의 패는 비록 금이나 마광(갈아서 낸 빛)이 안되고 이용련은 준패요 정패가 아니요, 현재 정패를 가진 사람이 10인 내외다. 이 비록으로 보아서는 삼육성중이 하시에 제회할 것인가 의심된다.
  현상으로 보면 좌도방이니 우도방이니 하며 수백 명의 대정법계가 있는 것같이 말들 하나,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사의 명찰은 기인이 못 된다. 나의 가까운 곳에서도 억천만년무일인터니 우주금시유차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고, 수만 가지 대도통을 자기가 가졌다는 사람도 있고, 인천개벽운에 자기가 그 성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도 있고, 태을선인이 육신하강했다는 물건도 있고, 장래에 올 용화교주가 자기라고 하는 인간도 있는데, 이 종류가 수십여 인이다. 그러나 금부명패에는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한 사람도 이름자가 보이지 않는다. 장래는 알지 못하겠으나 현상으로는 다 제외될 인간들이다.
  반드시 대법계를 간 사람이라야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삼육성중이 범태로 임세하였다니 혹 대법계를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말이요, 법계를 참례한 사람이 장래에는 역시 그 수가 될 것은 자연한 일이라고 본다. 현상도 하법계는 상당수가 되는 것은 사실이나 중단 이상이 몇 사람 못 된다는 말이요, 고단자가 타국에 비해서 아주 소수하는 말이다.
  1954년 9월 초하루 수필 추기 중


  8. 정의가 부족한 친족간에도 빈궁을 구호 못하는데 현 유엔기구에서는 세계의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이재국이 있으면 비록 충분치는 못하나 상호 원호하는 것이 미풍양속이라고 본다. 이런 것이 치(치세, 평화세계)의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비록 현재도 혼란이 여전하나 오전 0시는 지난 것 같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거의 닭이 처음 울 때의 징후가 아닌가 한다. 이 계단으로 나가면 금계삼창(금닭이 세 번 욺)하고 조금 있다 동천서색(동쪽하늘의 새벽 빛)이 천하에 치를 알릴 날이 올 것도 별 이상히 여길 것이 없다고 본다. 대체로 물극즉변(현상이 극에 달하면 곧 변화함)이라는 원리 그대로일 것이다. 난극(혼란의 극한)을 지낸 우리 인류도 다음 오는 것이 치가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세인은 금계삼창을 기다려서 동천욱일을 맞이하소. 치가 시한 줄 아니 못하고 난극시에 하던 행위를 변함없이 하다가는 습여성성(습성이 됨)하여 그 악행이 변해지지 않고 동녘의 아침해가 상승하면 누가 능히 그 형을 가릴 것인가. 이것이 소위 주출망량격(대낮에 나타난 도깨비 격)이 될 것이니 소행을 회고하고 개과천선하라. 인수무과(사람이 누가 잘못이 없으리)리요, 개지위선(잘못을 고쳐 착하게 됨)이니라.
  여기서 붓을 그치고 금닭이 세 번 울기를 기다릴 뿐.
  1954년 수필 중


      1955년

    96. 을미 원조에 내 사적으로 바라는 바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내가 염원하는 바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소소한 조건이야 상이점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내가 바라는 바 비록 사적이라 할망정 거의 동일한 것이다. 더구나 을유 광복절 이후로 10년이 경과되었으나 내가 염원하는 바는 1건도 성취함이 없었다. 해마다 성취하기 어려운 염원을 변하지 않고 하는 것은 이것이 공염불인 줄 모르고 하는 것은 아니나, 내가 염원하는 바가 백무일성이라고 성취하기 쉬운 것으 택하여 염원할 수 없는 것이다. 성불성으로 내 본심을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금년도 번연히 공염불인 줄 알면서도 또 예년과 같이 바라는 바를 내 마음대로 기록해 보자.
  해마다 내가 염원하는 바는 정신연구의 완성을 어찌하면 될 것인가 하는 염원이 내 염원 중의 80프로는 항사 점령하고 있고 다른 것은 소소부분일 것이다. 연정원을 새로 발족하자면 금년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기초공사를 해야겠다는 것이 금년중 최대목적이요, 그 다음에는 가아(아들) 성취(결혼)d 대하여 주의를 요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는 가정생활을 무슨 방식으로든지 좀더 안정시켜야 하겠다는 것과, 그 다음에는 내 신체의 쇠약을 방지하자면 복약과 수련(정신수양)으로 획득한 효과가 건강으로 복구될 것이다.
  그러나 복약을 하자면 경제문제가 있고 또 복약 기간에 근신도 해야 하는 것이요, 수련을 하자면 장소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힘쓰지 않고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상의 조건 외에동 사소한 여러 요구가 있으나 이것은 예외로 하고, 차례로 염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보자.
  제1조로 연정원을 새로 발족하자면 어찌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해마다 생각나는 대로 여러 번 기록한 바가 있으나, 을미년(1955)에도 다시 염원 중 최우선으로 이에 대한 방식을 성공 가능성이 있는 것을 택해 보자.
  연정원 신발족이라면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연정원 동호동지의 규합이 선결문제요, 그 다음은 장소와 경제가 수반되는 것이요, 또 세간 여론에 무관할 정도를 택해야 하겠고, 그 이상의 조건이 구비하고도 연정원우들의 인내력과 성신력이 문제요, 비록 원우 되는 인물의 인내력과 성신력이 충분하다 할지라도 지도자의 자격 여하가 이 조건의 성불성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가 저단자라면 중단 이상의 목표를 지향할 수 없는 것이라, 여러 조건이 구비하거든 발족해 보겠다는 것이 지금껏 발족 못한 대원인이 되어 왔다. 그런 연고로 금년에는 발족 방식을 좀 개정해 보는 것이다.
  제1조건으로 연정하는 장소가 문제인 관계로 장소를 불택하고 장소만은 각자의 편의를 도모하여 분산수련을 시키기로하고, 지도 방식도 전공을 피하고 보통수련식으로 초보까지 재가자습의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급시켜서 각계각층의 동지를 망라해서 연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상식을 알 정도로 하자는 것이 금년의 개정 방식이요, 그 중에서 수인의 재가전공을 선택해서 우선 초계(첫 깨달음) 정도까지라도 전속지도를 해서 그의 성공으로 모범을 시킬까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재가수련 방식을 가급적 평이하게 개편해 볼까 하고 여기서 약간의 수련이 된 후에 각자가 자진해서 택정(고요한 곳을 택함) 수련하도록 하는 것도 도리어 효과적이 아닌가 한다.
  이상의 제1조건을 기록해본 것이요, 그 다음은 가아 성취에 주의를 요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요 제1로 당자사에 치중할 것과 문벌씨족 관계를 초월하라는 것이요, 경제적으로 혜택이 있는 곳을 절대로 거절하라는 것이요, 학벌은 중고 졸업 정도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2조건이요, 제3조건인 가정경제 확립이라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요 가족이 수삼인밖에 안 되는 관계로 조금만 노력해서 계획을 수립하면 최저생활쯤은 가능할 것 같다. 이 계획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실현이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것이 제3조건이요, 제4조건인 건강회복도, 정신수련도 작지불이(계속 노력함)해서 마음에 놓지 않고 복약 건도 기회를 보아서 착수하면 아주 불가능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모두 여의하게 성공하고 않고는 역시 내 자신의 성의와 주위사정의 순역(순하고 거스름)으로 좌우하는 것이라. 사불사역도(일은 돌이켜서 볼 수 없음)니 이 정도로 붓을 그치노라
  (주석 1) 제갈량의 '출사표'에 보임
  을미(1955년) 원정(새해 첫날) 봉우서


    97. 일운을 조함
  일운(조종후)을 초대면한 것이 소성(인천) 산주장(박양래 선생) 석상에서요, 그 다음잉 박동암 석상에서다. 외양호풍신(겉으로 풍채가 좋음)이요. 선위설사(말을 아주 잘함)를 하는 엄연 장자풍이 있었다.
  당시 소성은 비록 모리장(이익을 꾀하는 곳)이었으나 자상달하(위에서 아래까지)의 역학자와 수리연구자와 정신수련자와 통령자들이 그 수를 부지할 만큼 많았었다. 그 다사(많은 선비)중에서 일운은 자타가 공인하는 거물급의 한 사람이었고 역학에는 누구보다도 자신만만하였었다. 당시에 나는 그 다사 중에서 왕래하며 기단취장(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함)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운이 비록 삼도구류에 박식은 아니나 역학만으로는 소성에서 그우에 나갈 인물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소성 염적(깨끗치 못한 흔적)이 역시 일시적 운둔생활임에 틀림없었고 그 교유가 모두 고금류(수준이 높은 사람들)였고 순모리배와는 왕래가 없었다. 이 점으로 보아서 나도 교유를 하던 것이요, 무슨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주석 2) 유도, 불도, 선도와 중국 한 대의 아홉 학문을 이름. 즉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그 후 그가 내게 약방문을 구하는고로 내가 솔직하게 다 전하고 제법까지 수고를 불석(아까워 않음)하고 전해 주었다. 그가 나더러 이전법을 배우라 하는 것을 내 의사에 불합해서 불응하였던 것이다. 그 후 한양에 와서 그 교유자가 순전한 학행자와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주석 3) 변치 않는 전거, 전칙, 민족 전래 정신수련법의 하나.
  그러던 중에 내가 벽수태(윤덕영)와 금릉위(박영호)와 교유할 당시에 두 분이 다 역학자를 구하는고로 일운을 추천한 일이 있었다. 양인이 다 역학에는 자신이 있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일운이 응대여류(대응함이 물 흐르는 것 같음)하여 양인에게 소호도 손색이 없었고 귀인(지체높은 이)들이라고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었다. 도리어 사자(선비)로 극히 거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내가 일운이 벽수를 대한 때와 금릉위를 대한 떼어서 비록 표나는 손색은 없었으나 어느 모인지 벽수의 박람이나 금릉위의 상세에는 일운의 좀 미급점이 간간 나올 때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인접물하는 것이 두 분은 아주 능해서 추궁을 하지 않는 데서 상대자의 단점을 가려주는데 반해서 일운은 자만심으로 용납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일운의 학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살필 수 있었고 그의 관심술의 부족점을 발견하였다. 그 두 분이 일운을 상봉하려는 본의를 알지 못하는 관계로 일운의 언사가 두 분에 만족을 주지 못한 것이다. 일운은 역을 다독하고 연구하는 학인이라는 정도였고 통의 대소는 물론하고 통한 분이 아니라고 내가 평을 가했었다. 그러나 일운만치도 벽수나 금릉위를 상대하는 분이 수인을 제하고는 없었었다. 그러니 당시에는 역학자라고 인정할 밖에 타도가 없다.
  일운의 은사는 전라남도 나주의 최도은 이었다. 최도은은 당시에 누구에게도 일두지를 양보 안할 만한 이전법에는 능자였으나 일운은 다음에 여러 모로 보아서 도은사의 조박(술재강, 찌끼)이었다. 그러나 일운이 저허(스스로 허락함)하기는 당세 일인(제1인자)이거니 하는 행동이 많았었고 또 도인의 행하지 않을 행도, 즉 세인으로 누구든지 행하는 일을 종종 하고 또 과대평가를 하는 것이 일운의 학력이 하련(단련)이 덜 된 연고였다. 세상의 역학을 연구하는 인사들은 다 일운만 못하다는 자만이 그 학력의 전진을 방해한 것이었고, 또 안빈을 못한 것이 그 노경의 결벙이었다. 말하자면 처궁불안(곤궁에 처해 불안함)해서 다발망언(망언을 많이 함)한 것이 일운의 고결을 해한 점이라는 말이다.
  을유 8, 15 후에 그가 신도(계룡산 신도안)로 이거하자 나도 왕래를 빈번히 하였으나 우연한 관계로 근년은 아주 상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연전에 참척(자식이 아버지보자 먼저 죽음)을 보고 망팔노인(80세가 다 된 노인)이 상부(청상과부)와 동거하고 있다가 백사(모든 일)가 다 맞지 않아서 아마 화병으로 세전(설을 맞기 전)에 환원(죽음)한 것 같다. 내가 풍문으로 들을 뿐이요, 상세는 아직 못 들었다. 그리고 아직 조상도 못 했다. 이것이 내가 고인에게 성의가 부족한 관계다. 빠른 시일 안에 조문코자 한다.
  그리고 이상의 일운이 신이나 성이 아닌고로 보통사람이 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고 했으나, 이것은 일운의 주위가 허락치 않은 연고요 일운의 본성은 아닐 것이다. 비록 순수한 도덕군자라고는 못하겠으나 일운은 일시적 혜성같이 났던 인물이요, 그 공부의 실력도 우리 조선에서 현재로는 그 비류가 극히 귀한 박학이었다는 것은 가리지 못할 일이요, 이런 사람이 주위의 환경이 그의 학력을 순수하도록 못하고 부득이 남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이 원망스러운 것은 이 사회상이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자리가 안정된 때라면 일운도 가인생산작업(집안식구 먹여살리기)을 일삼지 말고 그의 역학을 전공했다면 어찌 오늘의 실이 있을 것인가. 세인은 일운의 감을 무의미하게 슬퍼할지나 나는 이 세상이 이런 학자를 순수하게 전공 못하도록 탁랑으로 이끄는 것을 원망하며 일운의 주위환경이 이 불운에 있었다는 것을 동정의 누(눈물)을 불금(금치 못함)하며 일국지진보(한 나라의 진짜보배)가 진토에 매몰되어 무성무후(소리도 냄새도 없음)하게 사라짐을 못내 슬퍼하는 것이요, 나와 일운과의 일시적 감정으로 그 사후를 왜곡한 평을 가하고자 않는 것이다. 비록 탁마는 덜 되었을지언정 옥임에는 틀림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으며, 그 옥이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돌 속에 있다가 돌 대접도 못 받고 사라짐을 어찌 사람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이것은 세상의 동일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함이요. 내 1인이나 일운을 위하여 이 조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일운의 영이여! 내가 오늘 이 붓을 드는 것을 살필지어다.
  을미(1955년) 정월 초육일 봉우 근조


    98. 인촌 옹을 조함
  인촌 옹과는 겨우 안면을 알 정도요, 별다른 친분은 없었고 그의 선옹(부친)과는 노소불계(나이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음)하고 교제가 친밀했던 터이다. 그리고 내 선친과 인촌 옹의 성옹과도 관계에서 동관(같은 관직)으로도 지내시고 또 세의(대대로 사귀어온 정의)도 있는 처지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빈부관계가 현수(아주 층이 져서 다름)해서 서고 교제가 없었다. 그리고 나와는 정당관계가 아주 대립되었던 처지라 외론산으로도 자주 교제하는 것이 처세에 불리하였기 때문에 최근 을유해방 후로는 아주 조절(막혀 끊어짐) 상태였었다. 그런고로 근년 행사는 남의 전하는 말로 알 정도요, 목격한 사실은 거의 없다.
  (주석 4) 김성수(1891--1955). 정치가, 교육가, 교육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운동을 추진했음. 1920년 동아일보 창간. 1932년 보성전문학교 경영. 1951년 제2대 부통령 당선. 1952년 이승만 독재 반대. 사임.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 추서됨.
  중간에 우리 동지들이 아주 모당(한민당)과 결원(원한 맺음)되었을 때에 모모 계층에서 인촌에 대해서 최후 처분(암살) 문제까지 일부 청년급진파에서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내가 그 자리에 의외로 참석한 일이 있어서 그들에게 불가하다는 이유를 설명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내가 말한 바를 지금도 기억한다. "공과 죄라는 것이 그 정을 실하면 사람이 평하기를 부당하다 한다. 적국의 장점을 알고 친붕(가까운 친구)의 단점을 살피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금번에 비밀회담을 하는 중에 내가 아지 못하고 이 자리에 참례케 되었으니, 내가 불계하고 퇴장하는 것이 물론 당연한 일이나 청년동지들이 일의 정편(정당함과 편벽됨)을 아지 못하고 행사(일을 진행함)하면 우리 전체의 악영향이 미칠 것을 비록 측문(곁에서 들음)하고라도 중지 못 시키면 역시 내게 연대책임이 있는 것이라 내가 묵과할 수 없어서 여러 동지에게 그 불가성을 말한다. 그 이유로는 인촌은 비록 한민당 당수나 그 당적으로는 국가와 민족를 위해서 불평(불공평)한 일이 많으나, 이것은 당을 운영하는 몇몇 개인들의 두뇌가 왜곡한 관계요 인촌 개인의 과오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질적으로 부정한 단체에서 인촌 옹을 추대했을 뿐이지, 인촌 개인만은 과거 행사로 보아서 그 공을 받을지언정 죄를 받아서는 불평한 처사라고 누구든지 생각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당시 화살의 방향이 인촌에서 다른 곳으로 간 것은 가리지 못할 사실이었다. 금년 정월에 인촌 옹이 서거의 보를 접하고 내가 그를 조코자 하니 먼저 인촌 옹과 나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누구나 부귀가에서 출생하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 부귀가의 향락과 번화상으로 가장한 타락의 그물에서 일생을 보냄이다. 이 상례를 벗어나서 입지를 굳게 성공해서 소아를 버리고 애아로 나가는 사람이 천의 하나거나 만의 하나가 못 되는 것은 인간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촌 옹은 호남거부로 귀를 겸한 김만중 옹의 장자로 출생해서 만사가 안전에 구족(모두 갖춰짐)함을 폐리(헌 신)와 같이 생각하고 조년(이른 나이)에 학업을 닦고 일본에서 귀국 직후로 왜정하 압박이 심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육영으로 민족의 이목을 열어주고자 중앙학교와 보전(보성전문)을 사재로 경영하고 민족의 후설(목구멍과 혀)이 되고자 동아일보를 경영하고 산업발전에 의존성을 버리고자 경성방직을 역시 사재로 경영하였으며, 왜인들의 대자벌과 조선의 산업을 위해서 적자를 감수하고 계속 경영하고 또 농업도 10만 두락(마지기) 이상을 가지고 왜인들의 착취를 벗어나고 국토를 고수하며 왜정 당시에 극귀인 상원의원 추천을 사하고 오로지 민족정기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가 해방 이후에 송진우씨와 장덕수 군 등의 추대로 한국민주당의 당수로 있었으나, 내가 생각하는 바는 옹은 틀림없는 민족주의자이며 애국자라는 것을 가리지 못하겠다.
  옹이 성재(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뒤를 이어 부통령의 자리에 있었으나 이 자리는 우남(이승만) 옹이 있는 한은 시위(제사 때 신위에 시동을 앉히는 자리. 껍데기 자리)라고 안 할 수 없다. 인촌 옹이 이 자리를 기한 전에 사양하고, 불평이 많은 그의 말년을 기약치 않은 중풍으로 몇 년을 신음하다가 66년이라는 하수(오래 못 삶)를 겨우 하고 저세상으로 가게 됨은 우리 민족으로서 복이 부족한 연고라고 보며, 이왕 돌아오지 못할 인촌 옹의 명복을 빌고 이 붓을 그치노라.
  을미(1955년) 2월 초이일 봉우서


    99. 신야일몽
  몽중이다. 내가 어느 곳을 가서 보니 별유천지다. 그곳에 있는 분들은 거의 다 도복을 입고 있으며 또 그곳에는 신위가 많은 것 같다. 그 신위의 명칭은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그 신위들이 성장하고 있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다 평복으로 있지 않고 성장을 했으며, 무슨 주문을 송하고 또 무슨 부도 사른다. 서책도 상당히 많은데 내가 그 신위들과 상대해서 이론을 해가면 그 사람들과 문답을 했다. 그러나 나는 단신이요, 그곳은 대중이었다. 내 마음만은 그리 복종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해서 일변 조소하는 태세를 취해서 그 신위들과 그 도인들이 불만해하는 것을 내가 짐짓 이론을 해서 추궁을 했다. 그 신위들도 내가 묻는 말이 힐문(트집잡아 따져 물음)하는 것을 대답하기가 불편해하며 그 경계가 황기와 홍기가 가득한데, 신위들 중에서 나더러 본위에서 오래 공위로 있는데 왜 가서 보지 않는가 하고 반문을 한다. 내가 미소하며 신위들이나 자기자리나 잘 지키지 남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내가 어느 곳이 본위인지 아느냐고 하니, 신위는 본위가 상계 아닌가 하고 대답한다. 나는 '상계가 본위라고 하느냐, 내 현신이 본위니라.' 하며 또 조소했다. 다른 신위들이나 도인들이 내가 너무 이론하는 것을 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서책에서 천서가 있었다. 내가 '대학' 과 역학만 보아도 동일하니라고 하며 우주문자는 다 의사를 전하는 것이니 모두 동일하다고 말하였다. 내가 일성장호(한 소리 길게 냄)하고 천문을 열고 동북으로 향해서 무한히 보고 보니 계룡산정에 월색이 고요하다. 호을로 상봉에서 호흡하다가 개안하니, 신야정사의 남가일몽이었다. 하도 명백해서 기록해 보는 것이다.
  을미(1953년) 2월 11일 봉우서


    100. 조로와 양신양정
  근일 몽의 과로현상이 소화가 불량하고 지절(관절)이 불리하고 피로를 인내할 도리가 없고 정력이 아주 감축해지고 신체가 침중(병이 중함)해서 기동이 불편한 등의 조로상을 정(드러남)하게 되었다. 이 현상이 장기지속된다면 불과 몇 년에 종지부를 고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자신하고 있는 것은 어느 기회만 있으면 복약으로 완전히 나의 조로상을 방지하려니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바가 있어서 자신을 가지고 자위하는 것이나, 이것도 정도 문제다. 기회는 속히 오지 않고 쇠약은 날로 심한 데서 염려가 그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식보는 못하겠다. 약보만은 혹 가능성이 있는 것이나 이것도 시일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운영산 정도라면 하시든지 복용하겠는데, 마음만은 정지환이나 용호단이나 적어도 반룡단 정도요, 최악의 경우라도 구성단 3--4제쯤은 하는 관계로 보충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실현성이 박약한 것이다. 그렇다면 운영산이라도 불계하고 복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다. 운영산도 장기복용하면 조로상은 방지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리고 모정(정력소모)되는 행사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야 하겠는데, 근년 내 경험으로 보아서 도리어 이런 행동이 더 도수를 자주 하는 것 같다. 요즘은 내가 바둑 관계로 정신과 신체가 모두 피로를 느끼는 일이 간간 있다. 이것을 주의해야 하고 또 망상과 허구를 청신(깨끗이 새롭게 함)해야 하고 무리한 생리적 손실을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알고 범한다. 이것이 지과필개(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침)가 아니라 고범(고의적 범행)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주자계하라는 것이요, 이런 여러 가지 원인이 내 조로상을 초래하는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완보당거(느린 걸음이 수레보다 나음)요, 독침당약(홀로 잠이 약보다 낫다)이라고 하고 내가 수련중 현상(나타난 현상)에서 막탐녹용천량(녹용 천 냥을 먹을 생각 말고)하고 상석기정일점(늘 그 정 한 점을 아끼라--'명심보감')하라는 계어도 본 일이 있었다. 정이라는 것은 하필 색으로만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사려망상과 칠정이 모두 모정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양신양정을 해서 조로상을 방지하라는 말이다.
  을미(1955년) 2월 19일 봉우서


    101. 근일 촌간에서 한학을 교수 하시는 것을 보고
  동양 5천년사를 대강 보건대, 수천년 전부터 유교전성시대에 국가에서 상서학교를 시설해서 국민을 교육하되 예악사어서수의 육예를 분과, 인생 8세에 즉입 소학(곧 소학에 들어감)해서 15세에 비로소 태학에 들어가 경사자집을 박학(널리 배움)하고 오륜삼강을 수득하는 것이요, 여기서 전공하신 분이 석학이라는 것이다.
  (주석 5) 향리의 학교
  (주석 6) 유교의 전통 교육과목, 즉 예학과 음악. 활쏘기와 말타기, 수레몰기, 글쓰기와 수학을 필수교양으로 삼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근대사를 보면 나이 여덟 살에 소학에 들어가는데 그 소학이라는 것이 학교라는 의미의 소학이 아니요, 주부자(송나라 주희)께서 저술한 책자 '소학'을 시수(처음 배움)하고 그 다음에 용학논맹시서역(중요, 대학,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역경)과 만마사와 '고문진보'와 당송시를 겸수해서 10세 내외부터 저술을 주로 하고 10여세만 되면 과문육체(문과 과거시험의 여섯 문체)로 일생을 마치는 사자가 얼마든지 잇고 나라에서도 이것은 우리나라 독특한 한문 교수법이요, 더구나 지방에서는 10세 이내부터 '통감'을 시수해서 배우다가 허송세월을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이 유교에서 가르치는 법이 아니요, 우리 한국 근대의 잘못된 교수법이었다.
  (주석 7) 경서, 사서, 제자, 문집의 총칭
  (주석 8) 중국 전한의 역사가 반고와 사마천의 역사서인 '한서'와 '사기'
  (주석 9) '자치통감'. 중국 역대 군신의 사적을 편년체로 엮은 책. 정사 이외의 풍부한 자료와 고증을 첨가, 후세 편년사의 전형이 됨. 1084년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
  그런데 한국 말엽에 고종황제 갑오경장 후로는 과제(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정치를 갱신했었다. 그래서 신문명을 수입하고자 소학, 중학, 전문학교를 신설하고 인재를 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한학 교수방식이 조금도 불변하고 있었다. 갑오 이후로는 국가다사한 시대와 국가에서 별 교수방식을 가르친 일이 없었으나, 경술합방 후로도 왜정하에서 방치해서 한학을 배우는 학동들이 여전한 방식으로 해나왔다. 이것이 60여 년이 되도록 불변하는 일이다. 현재도 소년들을 소위 농촌학구(학자)들이 소학과 통감을 교수하느라고 귀중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문을 배우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소학이나 통감을 배우지 말라는 것도 아니나, 다만 이 소년들과 청년들의 귀중한 시일을 가치있게 활용하라는 것이다. 아주 유교적 교수를 하려거든 예악사어서수를 다 가르쳐 주든지, 그렇지 않거든 한문을 문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아주 전공해서 얻음이 있게 하라는 말이다. 학구(학자)라는 인물들부터 육예가 다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현시대에 가르치는 방식이 적합한가 부적합한가도 생각지 않고 다만 태고의 천황씨적 그대로 수업시키며 청소년들의 두뇌를 버려주는 것을 내가 목도하는 관계로 이 붓을 든 것이다.
  비록 촌학구들이라도 우리나라 민족혼이 무엇인가, 우리 민족사가 무엇인가를 선결문제로 교수하고 자원(한자의 근원)을 알기 용이하게 설명하고 육예를 교수 못할지언정 그 육예가 고대에서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라도 알게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지육, 덕육, 체육의 삼육병진 교수법이다.
  현재 시골학자들은 삼육에 있어서는 자신부터 배우지 못한 것이라 자국의 역사는 알지도 못하고 중국 약사인 '통감'을 교수하라면 신이 나서 하는 것을 보면 가소로운 일이로다. 만약 이 학구들에게 우리 대황조의 건국사를 물어보면 겨우 '동몽선습'에서 소득한 정도의 설명이 있을 뿐이요, 기자사나 삼국사 정도는 지금의 소학생보다도 부족한 분들이 대담호어(큰 소리로 호기있게 얘기함)로 당세에는 한학이 내게 비류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들이 촌로들에게는 그래도 신용을 받는 인물들이다.
  한문을 배우고자 하는 소년들이나 청년들도 그 원인을 물어보면 그 부모들이 경제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보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바로 귀농하기는 싫고 한 인간들이 원인 없이 한문수업합네하고 귀중한 시일을 소비시키는 것이다. 혹 백에 1인이나 천에 1인 정도가 이 한문을 습득함으로 동양문학과 철학 전공의 노선을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지몰각한 문교행정 책임자들은 한문폐지론을 주장하며 공문서도 한자 불용을 주장한다. 이것은 우민정책인 줄 알고 일부러 하는 악질 위정자들의 소위지만, 국책으로 한문교수법을 가장 명료하고 편리하게 발표할 필요가 있어서 현 촌학들의 부정한 교수로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나도 한문을 갱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의 1인이라 이 한문을 좀먹는 자들의 소행을 보고 이 붓을 든 것이다.
  을미(1955년) 2월 19일 봉우서


    추기
  그 학구진을 총망라해 놓고 한자가 어느 곳에서 시생(처음 생김)했는가 하고 질문하면 정곡을 맞추은 사람은 그들 중에서 별로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망평(망녕되이 평함)하고 싶다. 헌자체가 몇 번이나 변해서 현재 사용하는 형식이 되었는가 해도 역시 정해자가 몇 사람이나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사락도 '통감' 정도로 본 학구진들이라 구고학을 알 리가 없고 자원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누구나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 학구진에서 촌간에서 망자존대(함부로 잘난체함)하는 자들을 말한 것이다. 물론 한문학자들 가운데 석학자도 얼마든지 있으니 그런 분들이야 예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해서 촌간 학구님들에게는 실례될지 모르나 나는 현실 그대로 쓰자니 이렇게 안 할 수 없다고 본다.
  (주석 10) 현재의 고고학


    102. 낙수
  1. 다만 바라는 바는 인도와 중국이 손을 잡고 중국이 소련에서 이탈하여 민족공산인 삼민주의로 환원하여 대아세아연맹으로 발족했으면 미소가 공히 관망할 외에 타도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염원하는 중인조(중국, 인도, 조선)연맹일 것이나, 현 우리나라는 미혼진(혼란)에 빠져서 국가존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니 하시에 각성할 것인가, 국민으로는 걱정이다. 우리나라가 현재 아무 준비 없이 전쟁만 또 난다면 가치 없는 민족의 희생뿐일 것이라 전쟁 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건상(천문, 하늘)을 보아도 별 이상이 없고 다만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의 백기가 수차나 있었으나 이것은 남북한에서 불가피한 방어진지 강화의 현상 그대로인 것이다. 건상으로는 작년 춘간에 보인 그것이 금년에 실현될 것이 아닌가 한다. 단체에 약간의 변동이 있으나 민족에게는 절대적 호운이 있을 것 아닌가 하고 있으며, 또는 금년 말까지는 모종의 확실한 소식이 있을 것도 수학상으로는 기대되고 있다.
  이 다음 금년 72국이나 포국해서 득실을 다시 평해 보기로 하고, 또는 건상 변화가 있으면 잘 보나 못 보나 본 대로 평하기로 해두고, 금년 신춘에 바라는 바를 내객들에게 대답해 두고 산중한적한 정사에서 사위청산만 바라보고 간간이 할 일 없으면 이런 수필이나 기록하며 치회일민(현실사회의 밖에 있는 국외자)으로 자처하는 내 마음 가소롭도다.
  1955년 3월 10일 수필 중


  2. 백성들의 소행이 복받을 만 못하면 자연히 재상인물(높은 인물)이 용군암주(용력하고 어두운 군주)가 와서 난정으로 그 국가를 쇠하게 하고, 그 백성들의 소행이 복 받을 만하면 재상자가 성군현주가 와서 국리민복이 될 정치를 하는 법이다. 이것이 천운이라고 하나, 실지로는 인위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현상으로 받고 있는 것이 국가의 성운이냐 쇠운이냐를 알아야 하고 만약 쇠운이라면 이 쇠운을 물리치기 위하여 국민 전체가 전역량을 다해서 성운에 이바지하는 행위를 한다면 하늘이 그 대가를 멀지 않아 우리의 몸이나 우리 자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산 역사요, 산 교훈이다. 민족 전체에서 복받을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을 때에는 그 나라가 자연 성해지고, 그 반대로 민족전체에서 죄받을 일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나라가 자연 쇠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위요, 천심이다.
  현 우리나라의 행정이 복받을 만한 선정이 못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의 초중년대나 또 우리 선배들이 이 나라에서 복받을 만한 일을 못 했던 관계로 현 정치인의 머리에서 선정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들부터 경서해서 하늘의 대가로 주신 곤란을 감수하며 후진들의 장래를 위하여 우리들부터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간의 선행으로 인심, 천심을 합치시켜서 온 우주에 긴 춘화가 오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하여 묵은 우주사를 다시 개편해서 장춘세계 건설사로 바꾸자는 내 소회다.
  사불가역도(일은 돌이켜서 볼 수 없음)라 해서 현대인들은 목전의 일만 신중하고 후일에 올 대가는 생각 않는 관계로 득세만 하면 무소불위하다가 부지불각중에 역사의 죄인이 되고 유후만년(영원히 악취를 풍김)하게 되어도 자과(자신의 과오)는 알지 못하고 타인만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기만해서 장래를 자승자박하는 행위를 감행하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어찌 불쌍치 않으리요.
  1955년 수필 중


      강연록(1)

    103. 단학공부의 민족사적 당위성
  (주석 1) 1986년 6월에 한국단학회 연정원 회원들을 상대로 강연한 내용이다.
  단학을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는가가 제일 첫 번째로 공부할 문제다. 서울에서 지금 단학으로 도장을 낸 데가 현장으로 50--60개 가까이 될 것이에요. 여러 군데서 나왔는데 저희들 이렇게 와 주신 것 감사하구요. 또 단학이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느냐? 배우실 첫 번 생각이 무엇 때문에 배우실 생각이 있느냐 이것이 첫문제예요. 아무 까닭 없이 시간을 버려가면서 배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걸 뭐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배워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신 것이 이 원인이 무엇이 있을 거다 이걸 보면 된다.
  단학이라는 것이 첫 번에 단학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호흡법, 조식법이랐어요. 이걸 단학이라 하고 글자로 나온 것은 얼마 뒤에 나온 소리고, 처음에 호흡법이다, 호흡이라 하고 다음은 조식법이다. 숨을 고르게 하는 법이다, 숨을 고르게 쉬는 것이다 하는 것은 누가 숨을 안 쉬는 사람 있습니까? 생물치고 숨을 안 쉬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얼 이상할 게 있어서 그런 호흡을 법도를 이렇게 가르칠 까닭이 뭐냐 이렇게 알기 쉬워요. 우리가 사람이나 동물이나 호흡이 지속하면 살고, 호흡이 지속 못하면 갑니다. 그런데 단지 살기 위해서 호흡을 하고 있느냐, 살기 위해서 호흡을 하느냐. 호흡이 마련된 것은 조식을 해서 인체의 건강을 유지하며 정신을 복구시켜서 우리의 정신을 선천적으로 좋았던 정신을 후천적으로 자꾸 휘어지고 때가끼고 구름이 끼어서 휘어진 그것을 다시 밝히려고 밝혀야 한다. 뭘로 그 때를 벗기며 가운데 구름낀 것을 제치겠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때를 살아갈려면 우리가 보통 하는 호흡이 10초 안쪽인데 이걸로 쭉 호흡만 하고 나가면, 자기 먹는 대로 먹고 자면 자고 호흡해 나가는 것 조금도 변할 게 없어요. 그것 뭐 호흡조식을 않은다고 사람의 생명이나 뭣에 더 큰 야단나는 것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해야 하겠다는 것은 무엇 때문에 나왔는고 하니, 조식하는 법이 나온 것은 지금부터 햇수를 잘 따질 수가 없습니다. 역사에 글자를 표현해 놓은 것이 다 흐려져서 어디로 가버려서 따질 수가 없으니까, 약 만년 가까웁니다. 약 만년 그때 사람의 인류라는 것이 그전에도 얼마 전에도 났었지만, 중간에 개벽이 돼 가지고 다 인류가 참 없어지고 찌그러진 인류들이 여기저기들 남아 가지고 있을 적에 개벽이라고 그러지요. 그것을 그럴 적에 요번 개벽되는 것이 만년 조금 넘는데, 만년 될 적에 사람들이 전부가 여기저기 흩어져 가지고 무지몽매해 아무 것도 몰라 가지고 생명만 얻어 가지고 살려고 했으니까, 동물이나 우리나 비숫하게 같이 지낼 이때에 선지자, 동방에 백두산에서 선지자 단군이 나셔서 '너희들 그렇게 해서는 동물과 마찬가지가 되니까 안 되겠다. 그러니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려고 각 부족들을 산재한 부족들을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교화를 시킨 것이예요. 교화시키는 것이 사람되는 도리를 가르치고, 먹고사는 것을 가르치고 또 인제 그걸로 족한 게 아니니까 우리가 예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머리가 좋아져야 하니까 그러게 해야 한다. 지덕체 세 가지를 겸비해 가르친다. 그러실 적에 이 단학이라는 호흡법, 조식법의 하나입니다.
  백성들 가르치실 때 제일 첫 번째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 너희 맘대로 남용하지 말고... 제일 먼저 정신을 지가 할 수 있는 힘에 해나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아무 거나 욕심내고 마구 덤비면 그건 일을 하나도 성고하기에 어려우니까 지가 마음을 호탕한 마음을 하지 말고 좋은 맘으로 가져라. 맘을 제일 처음 목표 정하는 일에만 전력하도록 하지, 여러 가지 산새한 것에 욕심을 내지 마라.
  지감이 첫 조건이고 고 다음이 조식입니다. 조식을 해 숨을 고르게 쉬어 우리가 지금 아무래도 10초 안쪽 호흡이 보통인데 10초 안쪽 호흡 이것만 가지고 하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 머리라는 것이 한정이 있어서 많이 알아지지 못하고 연구 등 할 제에 잘 알아지지 못하고 기운이 얕아져서 공부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공부가 하기 좋고 연구해 나가는 거이 좋을려면 뒷골이 좋아야 하니까 그것을 좋게 할려면 호흡 조식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조식을 해서 얻음이 있다고 해도 얻은 뒤에 요새말로 초능력 이런 것은 아닙니다만 기운이 좀 많이 생기면 그 당므에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 남하고 남보다 내가 좀 나으면 남보다 내가 위에 서서 아랫사람을 힘들게 부려먹고 뜯어먹을려고 하는 것이 예정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이예요. 그러니까 금촉을 해라. 금촉을 하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는 행동을 나쁘게 하지 마라. 행동은 실지로 하는 행동이고 첫 번에 지감하는 것은 마음으로 자기 머리로 그야 adkan 것도 못 돼서 밑에서 보통사람도 못 될 사람이 대통령도 꿈꿀 수 있고 국회의장도 꿈꿀 수 있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 그 자리에 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지만, 못 갈 생각을 생각하는 것은 지감, 감정을 그쳐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금촉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지낼 만하는 것을 하면 괜찮은데 지내서 하지 못할 일 남한데 해로운 일을 금해라. 못된 짓 말라는 소리여. 대체로 그러니 그 전에 전설처럼 들리는 얘기죠. 그 전엔 사람이 나면 자연 영특해지고 여러 사람 사는 것도 수가 몇백년씩 살았대요. 건강하고 몇백년씩 살고 건강한 몸이 되고 이랬었는데,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그것 못허고 지켜나오지 못하니까 지켜나온 사람은 건강하고 잘살고, 머리고 좋고 못 지킨 사람은 보통사람이 돼서 상기하... 중간에 성인들이 그랬어요. 제일 머리가 좋은 사람하고 하우불이(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기질을 변하지 않음)할 수 없는 사람은 늘 따라 다니는 일이지. 그걸 따라당기는 것이 아니에요. 상기하고 하는 사람은 선지나나 성인이야. 현인이나 이렇게 된 사람은 미리 조식을 해서 공부를 해서 머리가 맑게 된 사람이고, 그 중간에는 좀 하다가 좀 그래도 중간씩이라도 한 사람이니까 좀 보통보다는 낫고, 하우라는 사람은 안 한 사람이야. 아무 것도 안 한 사람은 그로부터 하우가 되었다.
  그런데 그 뒤에 내려온 것이, 과학문명이라는 것이, 물질문명에 과학문명이라는 것이 차츰차츰 이제 길을 밟기 시작해서 우리가 몇만년부터 해서 한 4천년, 3천년 전까지는 이 정신문명이 앞섰는데, 그 뒤부터는 이 과학문명이 차츰차츰 앞을 서기 시작했죠. 과학문명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중기까지 놀면 안 되는 일이 전부 과학문명이여. 과학문명에 힘썼다 보니까 정신문명이라는 것은 생각을 않고 내버리니까 점점 머리는 나빠지고 머리가 좋아지지 않고 건강도 약해져서 그런 것이 부족한 나라일수록 평균연령이 낮고, 우리나라도 우리나라가 인제 경술년에 합병돼 가지고 일본에 침범을 당한 그 뒤 얼마 뒤까지 우리나라 국민 평균연령이 40 몇살이 됐어요. 40이 조금 넘었지 50 평균이 못 됐어요. 우리나라는 50 근처에나 갔으니까 무던한데 좀 우리나라 못하게 지내던 인도나 저런 데는 평균연렬이 28세쯤 됩니다. 그건 우리만도 못한 대체가 못 된 것이가 봐요. 거기에도 성자도 많고 잘난 사람도 한국 사람보다 10배보다 많지만 대체 국민들이 못 했으니까 평균연령이 30살이 못 됐어요.
  근데 지금 과학수준이 40--50년 전보다는 우리나라도 그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 예전보다는 거기 노인들이 안 계시니까 모르지만, 노인들이 젊어서 어려서 보던 현상하고 지금하고 현상하고 비교해 볼 것 같으면 천양지판이에요. 이것 지금 과학적으로는 천당에 간격이에요. 저 밑바닥에 있다 천당에 간 격이지. 서울에 집이라는 것, 다 서울의 4대문 안에 신집이라는 것이 청년회관 YMCA 있었고, 저 한국은행이 나중에 그 다음에 있었고, 저 꼭대기 동대문 곁에 가다 보면 안상호병원이라고 처음으로 양식집 하나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생긴 것이 뭐냐 저 명동성당, 그 다음에 불란서 공관, 이화학교 뒵니다. 그것이 신집에 좀 생겼지 그전에 없었습니다. 전부 1층짜리입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보면 뭐 한꺼번에 내다본 게 세 집도 못 내다봐요. 전부 높은 집들이 그득하지 그늘에 가려서 볼 수가 없어. 그렇게 되면 이게 우리가 천당에 와 있지 이게 예전 땅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물질문명의 극치라고 할까요.
  물질문명에 호강을 많이 하지만 극치가 돼 가지고 그 물질문명 때문에 물질병이 또 적지 않아요. 신문지상이나 정부에서나 얘기들 하는 게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나라 과학도 무던히 돼서 과학 수준이 선진국에 따라간다 자꾸 이런 소리가 납니다. 여러분들 잘 아실 겁니다. 그런 소리가 안 나나, 선진국 따라간다고, 이게 거 선진국 따라가느라고 복잡하게 과학문명이 돼 나가는데, 여러 가지 과학 중에 어떤 수준까지는 저 나라에서 말하고 사회에서 말하는 선진국에 따라가는 것이 있지. 아주 없진 않을 겁니다. 수백가지 중에 몇 가지는 자기들이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그 근처에 따라가기 쉬워. 그러나 대체로 봐서는 세계에서 1등국이라는 나라의 그 수준에 따라갈려면 항창 둥 주먹 쥐고 따라가서는 못 따라 갑니다. 비행기나 타고 따라가면 따라갈까. 아직 멀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걸 뭘로 극복해야 하나? 현대과학을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현대에서 사는 사람은 현대 것으로 살아야지 딴 것으로 살지 못할 텐데 무엇으로 극복해야 하나. 그것 별 게 아니다. 하늘에서 주신 사람의 머리나 육체에 준 것은 그 선진국이라고 하는 사람하고 우리하고 비교해서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 우리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이 연구하는 거 우리도 연구할 수가 있는데, 모자라서 설비라든지 가르치는 것이 모자라서 못 따라가고, 또 머리고 좀 모자라서 거기까지 가자면 지금 대전에서 못 따라가, 정부에서나 아무 데서나 사회에서나 과학을 만지는 분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해야 그걸 하루라도 속히 그 수준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넘어서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왜 안 하시겠어요. 도저히 불가능해요. 경제적으로도 부족하고 원료도 부족하고 설비해놓은 것도 부족해서 거기까지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예전 조상들이 하시던 수련법, 호흡법으로 단을 수련한다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무었이냐? 여기서 어디서 보면 이 단학을 한다면 초능력이 있느냐고 가끔 묻습니다. 단학이 초능력을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현대 우리나라가 해방됐다고나 할까, 해방이란 글자부터 참 창피하지만, 해방이 되어 가지고 40여년 동안 이만치 따라왔는데, 뒤떨어져서 허덕허덕해 경제적으로도 부족하고 머리도 부족하고 설비도 부족하고 그래서 뒤떨어져서 그러는데, 이것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앞서지 못하면 도저히 후진국 소리를 면하지 못한다.
  이것을 면할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 여러분이 오늘 앉아신 건 단학을 하자는 것, 그것이 그것 하자는 것들이, 단학의 지칭하는 데서 딴 데서 말하는 것 뭐라 했는고 하니, '음부경'에서 나옵니다. 고자선청하고, 장님이 귀가 빨라, 한눈이 없어지니까 그 대신 눈 대신 행동할 것이 눈허구 귀허구 한꺼번에 들어서 귀가 빨라서 부스락거리기만 해도 벌써 알아듣는다 말이에요. 장님이 귀가 빠릅니다. 귀먹은 사람 눈치가 빨라요. 귀먹은 사람 듣지를 못하니까 저 사람 입만 벌렁벌렁하면 무슨 소린지 알아봅니다. 고자선청하고 농자선시하나니 절리일원이면, 사람의 신체에 어떤 한 가지 기능을 자르면 한 가지 기능은 열 배나 는다. 전리일원이면 용사십배라. 그것은 보통인데 눈 밝으려고 귀를 임시로 먹을 수가 없는 거구. 귀 잘 들으려고 눈멀 수가 없는 것이요. 그러면 이걸 무얼 해야 하느냐. 삼반주야면 용사만배라 했어요. 이런 것 하나를 하면 열 배밖에 늘지 못하지만 삼반주야면, 세 번 주야를 노닐면 시간으로 72시간이에요. 그 효력이 만 배가 된다. 그것은 딴 게 아니에요. 정신수련을 해서 호흡을 해가지고 이 정신련이 72시간에 꼬불꼬불거리지 않고 심파가 꼬불거리고 않고 한 줄로 쭉욱 나가게 신출만 나갈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무얼 하든지 보통사람 진기의 능력의 만 배를 늘일 수 잇다. 그것은 잘한 사람이 만 배를 낸대니까 못했다 하더라도 저기 열배하고 천 배나 는다 말이에요.
  책을 보통 여기서 이런 책 학교에서 배운 것 이런 게 한번 쓰윽 보는 것 한 번 본... 보면 알지야 알지요. 그것 다 외지 못합니다. 기억력이 나빠서 배웠으니까 속을 알기는 아나 이게 잘은 나오지 않아요. 불변색으로 사진이 덜컥 찍혀지지 않아요. 어떤 것은 알고 어떤 건 모르고 이렇게 되는데 호흡수련이 돼가지고 공부가 웬만치 나간다면은 한번 눈에 보인 것은 붉은 색으로 돼요. 예를 들면 사진기를 가지고 와서 여러분한테 와서 첫 번 사진을 배우는 사람이 이렇게 들고서 거리도 맞히고 방향을 맞히고 몇번씩 이래 가면서 찍는데도 잘 백이지 못할 때가 많아요. 연습된 사람이야 잘 되지만.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백이는 데도 힘이 드는데 하나씩 백이는데도 가서 서다 맞췄다. 이리 서라 저리 서라 한참 후에 맞춰지는데 우리들 머리 공부하는 거나 똑같애. 그렇게 되는데 영화 찍는 것 보니 비행기 타고 밑에서 쭉 돌아가는 거 언제 맞출 수 없어서 한번 벌쭉벌쭉 지나가면서 찍히는 것이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나오거든.
  머리도 그러는 것이요. 머리도 그래서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서 단학이라는 것을 연구를 해서 호흡이 어느정도꺼정 호흡에 계제가 있어요. 많이 더 많이 하는 것은 호흡 긴 사람이 더 많이 하고 좀 고만 못한 사람은 고만만 좀 적고 그러는데, 공부를 해서 책을 보면 열 권 보나 스무 권을 보나 한번 지낸 것은 여기서... 두루루 다 외지 못합니다. 도루루 다 외진 못해도 속에 있어서 생각하면 몇째 장에 보던 그거로구만 이게 나와요. 그거 하던 사람 여러분들도 잘 아세요. 여러분이 목표를 눈으로 보진 못하셨어도 노인들은 보셨을 거예요. 이 근년에 최남선이 이광수 홍명희 한용운--중이요--임규, 세 분 이름은 잘 모릅니다. 여덟 분입니다. 이분이 한 선생한테 가서 공부를 했는데 이 공부를 했어요. 한 성생한테 그 선생은 누구냐, 지청천이라고 아시겠죠. 지청천이라고 하더니만 지청천의 형님에 지설봉, 이운영입니다. 그 어른한테 가 공부한 거예요. 공부한 것이 딴 게 아니고 호흡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 하니 문학계에서 그네들이 책을 이렇게 한번 보면 다 알아. 눈으로 본 걸 안다고 해서 그들은 입으로 읽은 것 아니고 목독이라고 합니다. 눈만 지나온다 이럽니다. 선천적으로 그네들이 그렇게 재주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이 공부를 해가지고 천재들이 됐지.
  여기서 여러분도 다 드러시면 좋고 다 그렇지 못하면 공부하신 이만이라도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과학자가 세계 과학자 어떤 과학자한테도 질 이치가 없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더 잘할 거구 연구도 남보다 많이 한 사람이 연구를 더 할 것은 사실이여. 그러면 10년 20년에 고생을 하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거 현대과학을 우리가 지금 따라갈려면 10년 20년 못 따라갑니다. 우리나라 경제형편이 그렇게 연구하라고 얼마든지 대학 나와 가지고 대학원 나온 뒤에 연구하라고 10년 20년 공부하라고 주지 않아요. 각자가 먹기가 급하니까 대학원이나 나오면 어려운 사람은 직장 구할려고 급하지 다시 연구할 새가 없습니다. 만약 이걸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해가지고 머리가 나온다면 20년 정도가 아니라 1세기를 따라가도 저 사람들한테 늘 뒤떨어져 갈 것이, 10년이면 1세기에 따라갈 거 넉넉히 따라갑니다. 10년이면 1세기 따라갈 거 100년에 못 따라갈 거 앞선다 말입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저 사람들보다 앞서지 요새 과학이지 물질과학 형이하학에 앞서 놓고 정신이 앞서 놔야 그때 가서 세계 우위권에 들지 맨날 뒤떨어지면 무엇에 앞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볼 적에 미국에서 해방이 된 뒤에 6, 25사변이 날 적에 유엔군이 여기에 와서 다 도와주고 그 전쟁에 우리들을 구해 줬으니까 우리한테 은인입니다. 이북한테 망할 것을 구해줬으니까 그런 은인이 없는데, 그러면 여기서 지금 그 나라 믿기를 내 조상보다 더 믿는 사람이 반도 넘을 거예요. 미국의 말이라면 뭐라 해도 무슨 소리든지 다 예예 하고 반도 넘을 텐데, 한번 뒤로 생각해 볼까요?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전해 가지고 일본이 이 나라를 내놓을 적에 한국에 사는 우리들이 남한하고 북한하고 나누자고 했습니까? 두 쪽으로 나누자고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국사람들 너희들이야 황인종들 잘되든지 못되든지 상관없는 거고, 큰 사람들이 OK이건 일본이 차지했던 거 우리가 내놓은 거니까 가운데 저 생선 갖다 놓고 너도나도 이렇게 좀 나누자고 해서 한쪽 딱 끊어가지고 38선을 그어 가지고 남쪽 북쪽 갈라놓은 것은 누가 갈라놓은고 하니, 미국하고 소련하고 갈라놓은 거지 누가 갈라놨어. 우리가 갈라놨습니까? 자기들이 자기 수판에 맞추기 위해서 갈라놓은 건데, 지금 남북통일하는 것을 당신네들이 좀 해주쇼 사정을 하면 사정 들어요? 자기 수판에 맞지 않는데. 미국을 믿어 가지고 미국이 잘해 주기를 믿어가지고 그냥 거기다 대고 머리 숙이는 사람도 실없는 사람이고, 북쪽 사람들 소련을 믿어 가지고 제 할애비처럼 믿는 사람들도 실없는 사람이에요. 우리나라는 우리의 손으로 살려야지, 남의 손 가지고는 못 살립니다.
  6, 25사변이 왜 난지를 아십니까? 6, 25사변이 여기서 왜 났느냐 말이여. 김일성이가 군대세력이 커가지고 남쪽 치면은 바로 이길 테니까 남쪽에는 세력이 없으니까 다 치면 다 통일해서 제나라 된다고 그렇게 나온 건가요? 기가 막히죠. 여러분들이 거기서 난원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가 얘기해도 전 그걸 본 거니까 얘기합니다. 6, 25사변 나기 한 달 전에 미군의 알맹이는 가족들이나 꼭대기 뭐 하는 것은 싹 빠져나갔습니다.
  내가 있던 집이 어디 뉘집인고 하니, 미군 민간정보 여덟 가지 총책임자의 집이었습니다. 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민간정보 총 책임자. 누구라고 이름 대래도 이름 댈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미군하고 그전부터 일정시대부텀, 요만해서부텀 그 사람들 심부름 잘 하던 사람인데, 그렇게 하던 사람이 해방이 되니까 그 사람 찾아가지고 정보책임자로 맡겼어요. 그 부하가 수백명이 있었어요. 민간정보는 그 사람이 총책임이었어요. 여덟 가지 정보를 그 사람이 총책임자였으니까. 내가 그 집에서 그 집주인이 나를 왕래하는 사람이 많고 하니까 손님들 오는데 접대도 가끔 해주고 잘해 줘요. 잘해 주니까 나는 고맙게만 여기고 저 사람이 나를 왜 이렇게 하나 하고 그냥 거기 있었는데, 거기 모이는 게 정치 뭐 관계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가만히 앉아서 수집하거든. 거기서 얘기하는 게 무슨 소리 하는지 다 수집할 수 있단 말이예요. 그리고 자기 부하가 100여 명이 있으니까. 그 집이 뭣을 했는고 하니 골동품상입니다. 골동품상인데, 미국 들어가는 짐을 싸는데 그 집이 맡아서 싸요. 그 집에 가져와서 하는 게 아니고 사람 얼마 보내서 싸러 보내는데, 한달새를 6, 25사변 나기 전에 싹 실어갔어. 그렇게 해놓고 뭐라 했는고 하니. 태평양방위선을 일본해에다 둔다 이래 버렸거든. 한국은 그러니까 이 38선은 방위선에 두는 게 아니고 거기다 둔다 하니까 아 미국이 인제 떠나는가 하고 이북사람들이 이거 공것이니까 떠나면 공거니까 밀어쳤다... 그래도 미군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유엔군이 와 가지고, 보십시오. 유엔군이 와 가지고 여기서 싸우는데 무기라든지 뭣이라든지 하는 것이 미군이나 영군이나 다 기계가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차지했던 때 이리 밀려나왔습니까, 미군이나 영군이 있던 때가 이리 밀려나왔습니까? 한쪽에서는 저리 쭉 올라가도록 그냥 쳐서 올라갔는데 이쪽 맡은 데 개성 이쪽은 뒤로 썩 물러나서 서울하고 가까워야 나중에 시비가 한국에서 꼼짝을 못하거든. 요기서 200리밖에 안 되는데 후퇴를 시켜 가지고 거기서 있는데, 군사적으로 어떻다고 뭐라 하지만 그건 고의적이야. 왜 기계가 많고 뭐든지 넉넉하고 비행기도 칠 수 있고 한데 왜 슬슬 꽁무니빼고서 여기까지 가깝게 내려왔느냐. 이건 전부 고의입니다. 나는 미국사람 만나도 자꾸 그런 소릴 합니다. 너희가 그건 고의여. 그런 고의하니까 너희 나라가 인심을 얻지 못하고 하는 법들이 그런 짓을 하니까 그런다고 하면 그건 정치지 우리가 모른다고 해요. 그 증거가 여기만 그런 것 아니여. 월남에 가보십시오. 월남도 400억 500억 달러 돈을 줘가면서 싸움하지 않고 뒤로 슬슬 밀어내니까 공산당한테 다 뺏겨버리지 않았어요. 여기서 제일 먼저 알아듣기 쉽게 1,4 후퇴하기 전에 저 맥아더 장군이 안동현까지 갔었을 때 안동현 위에 비행기 폭격해서 적군 못 들어오게 하자니까 그러면 그때 그냥 됐지 하자고 하니까 맥아더 목을 딱 쳤어요. 니가 뭘 아느냐, 넌 군대장군이지, 우리 국책은 그놈들 저희끼리 싸우당 죽든지 살든지 하라고 하는 거지, 그리 한쪽으로 청하는 것 우리 보기 싫으니까 그래 가지고 소련하고도 왜 싫어하구 할 게 뭐 있어. 너 그만. 또 뭐모르니까 그런다고 목 떼 버렸어. 그런 거 여러분이 잘 아실 거예요. 맥아더가 여기서 잘못해서 쫓겨나갔나 남북통일시켜 줄려고 하니까, 그 쓸데없는 거 갈라놨던 거 왜 그러냐고 훼방놓은 것입니다.
  이걸 누구한테서 믿어서 남북통일을 하겠는냐. 우리의 손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왜 그 사람들이 세계의 평화를 요란 시키느냐. 유엔기구라는 것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까. 유엔기구에서 보십시오. 공산진영에서 만약 수십 나라 몇 나라가 뭐라 해가지고 이 물질진영에 조금이라도 낮은 소리가 나와 뭣을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는 자기들은 그게 뭐 돈아니니까 냈을 테지. 내면 그게 옳으냐 그르냐를 말할 게 없이 그게 미국의 조금 머리에 건드리면 부결권 딱 내버려. 그러니 거 부결권이라는 게 세계가 다 평화롭게 해 나가자는 건데, 평화롭게 해 나가자고 뭐가 나오면 부결권시켜 버리고 여기 지금 자본주의 국가에서 100나라가 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또 무슨 일이 올라가면 소련이 이건 안 돼, 공산에 방해되니까 안 돼. 두 놈은 세계 두 대가리고, 그 대가리는 무슨 대가린고 하니, 우리 인간 평화를 요란시키는 대가리지 별 게 아니에요.
  이것을 누굴 믿어. 누굴 믿고 누굴 믿어가지고 우리들이 그냥 있는 거냐 말이여. 우리들이 일어나서 우리 머리가 좋아가지고 우리가 한 가지래도 왜 머리로 하나하나 머리가 그 사람들만 못해요? 저 사람들이 이걸 누르게 된 원인이 뭐냐. 핵무기나 많이 가지고 있는 그건데, 그 사람들이 다 맨듭니까? 몇억씩 되는 사람이 다 맨드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 머리 둘이나 셋 머리로 맨들어 가지고 하나 만들어 가지고 있어서 그게 우월한 무길 가지니까 이걸 가지고 세계에서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우리의 머리도 그보다 나은데 맨들지 말라는 법이 어딨어요. 얼마든지 맨들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을 믿다 소련을 믿다 하는소릴 말고 우리는 우리 몸을 사랑하고 우리 조상을 찾아서, 예전에는 이렇게 남한테 쩔쩔매던 나라가 아닙니다.
  3천년 전 동이족이라면 중국 전체가 쩔쩔매던 때예요. 3천년 전 문왕 강태공이라면 잘 아실 거요. 강태공이가 나와 가지고 은나라 쳐서 뿌신 것이, 은나라는 우리 백두산족 아닙니까? 백두산족이 중국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거 밀어내고 우리가 3천년 동안 우리가 후퇴를 했는데 후퇴를 한다고 해도 저 사람들잉 지금 중국땅 그 남쪽으로만 차지하고 있었지 북쪽은 어림도 없었어요.
  내가 대구 가서 대학생 중고등학생이 그득한데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한테 침범당한 게 얼마냐, 우리나라가 남의 나라를 정벌한 게 몇 번이나 있나 물어보니까 정벌은 한 번도 한 일이 없다네. 정벌은 한 벙도 한 일이 없구 우리나라는 몇십 차례 뭐 세기도 잘 세드만 얼마 남의 나라에게 침범당한 거밖에 없소. 그래 그럼 당신들이 역사를 누가 가르친 역사를 배웠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족속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천자를 가졌던 것이 몇이나 됐는지 아는가? 백두산족이 중국 들어가서 나라를 차지한게 몇이나 되는지 아는가 말이여.
  가깝게도 청나라라는 것이 요 만주족입니다. 주원장이라는 것이 이쪽의 함경도 쪽에서 나간 사람입니다. 송나라 조송이라는 게, 유송말고 조송이라는 것이 이쪽에서 나간 사람입니다. 그 전에도 그런 게 여럿이 있는데, 진시황이 여러분이 다 아실 거요. 전국 적에 전국의 여러 나라를 다 없애버리고 제일 강국이라는게 여섯 나란데, 여러 나라를 다 없애버리고 중국 그때 말로 천하지, 중국을 다 통일하면서 진시황처럼 그 무서운 호랑이, 싸우면 번번이 이기는 그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중에 뭐 하다 망했습니까? 만리장성을 쌓아 망했어요. 만리장성을 뭐 때문에 쌓습니까? 만리장성은 몽고사막에 있으니까 그 몽고사막에 바람이 불어서 먼지들이 올라올까봐 겁이 나서 쌓았나요? 북쪽에 있는 백두산족 동이족이 무서우니까 그리 들어올까봐 일만이천리를 쌓은거야. 그럼 그전에 그만치 무서워하던 족속들입니다. 싸우면 겁이나고 그런데 그런 뒤에 한나라가 들어왔어. 한패공(한고조 유방)이가 들어와서 한나라를 400여년 지내는데, 400여년 지내면서도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몽고족들이 '싸울 테냐, 내가 말하는 소릴 들을 테냐?' 보물이나 뭐 갖다 바치면 안 싸워요. 그 나라에서 딸이 왕족에서 딸이 있다면 공주, 임금의 딸이니까 공주나 옹주나 그럴 테지. 공주가 얼굴이 좀 이쁘다면 그 딸 나 줘, 안 주면 뒷소리가 싸우겠다는 소리니까 겁이 나니까, 딸을 직접은 못 주니까 왕소군이라는 게 임금딸로 이름해서 갖다 바치지 않습니까? 싸움해서 넉넉히 이길 것 같으면 왜 그렇게 해요. 못 싸워서 질 테니까 겁이 나니까 딸도 주고 뭣도 주고 다 주지. 그전에 그만치 강했어요.
  우리나라가 인제 아주 약해진 게 언제냐? 삼국통일된 뒤입니다. 신라 고구려 백제 헐 적에 백제허구 고구려를 망하게 한 뒤에 삼국이 통일이 됐다는 거, 요새 저 역사상으로 왜곡했다고 김씨가 이병도를 역사왜곡한 일본사람의 첩자 같다고 고소했다고 신문에 났더구만요. 그때는 신라시대 이야기 저 꼭대기꺼정 그건 거짓말이여. 신라가 삼국통일했다는 게, 백두산족으로 있는 고구려라는 것이 만주 한쪽 저 서백리아 한쪽까지 쭉 차지하고 있던 거 그거 다 뺏겼어. 다 뺏기게 한 것이요. 그럼 싸워서 뺏긴 거야. 가운데 내란을 만들어 가지고 개소문이 아들이 형젠데 두 놈끼리 서로 싸우니까 저희들이 싸워선 못 이기니까 두 놈끼리 서로 싸우게 해놓고 신라 합동하니까 신라도 여기 병법이여 가치가 있으니까 망해 버렸어. 망하고 차지한 게 뭐냐? 신라 강토라는 것을 여러분이 잘아실 거예요. 삼남,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삼남에다 강원도를 좀 차지하고, 경기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황해도부터 강원도 한쪽으로 전부 당 저쪽에 다 붙어버리고 만주 전체을 다 뺏겨버리고.
  우리나라 역사로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이 고구려적에 경관이라고 있었어요. 경관이 요동에 있었어요. 경관이라는 것이 글이 있을 때는 글로 쓰고 글이 없을 때에는 조각을 해놓습니다. 그래 가지고 큰 역사가 은대요. 삼국통일하다 보면 이세민이가 처음부터 경관부터 헐었어. 이놈의 나라 역사가 있으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부텀 헐어버렸어요.
  우리가 조상은 그렇게 강하시고 어디한테도지지 않던 조상입니다. 우리 조상을 찾으면 우리 조상들이 하시던 우리의 단학, 이걸 해가지고 머리가 좋아 가지고 내가 단이라고 쓴 데, 만주 고기 단군할아버지 생존해 계실 때 차지학고 계실 때 저쪽의 몽고니 서백리아니 그쪽 다 도루 우리가 차지한다고 이런 소릴 했습니다. 남북통일이라는 것은 앞으로 15년 안쪽에 된다고 하였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밥 먹고 내가 지내는 놈이 안 된 말 자신없는 말을 죽은 뒤라도 그놈 미친놈 소릴 들을려고 그런 소릴 해요? 여러분들 당해 보십시오. 당해 보시고 나중에 그러세요. 야 늙은이 정신병자처럼 떠들더니 사릴 이렇게 되는구만 소리가 나나 안 나나 보십시오. 앞으로 여러분에게 좋은 운이 온다. 3천년 후천운에, 앞으로 내가 책에는 3천년이라고 썼는데, 앞으로 오는 게 3천년이 아니라 이건 영세 아주 길쭉한 우리의 평화운이 오는 게야. 이 평화운이 백두산족 남쪽에 있는 백두산족이 주도권을 가져요. 땅을 많이 차지하고 뭣을 한다는 것보단, 그 발단을 우리의 머리로 발단을 시킨다는 것을 내 말해요. 여러분께 시간이 오래돼서 한 시간이나 되어서 그건 그 정도로 그쳐놓고, 그 다음에 의심나거든 나중에 질문시간에 물으세요. 무얼 가지고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응 의심이 조금 나실 테지 안 나지 않을 테니까. 요 다음에 며칠 뒤에 질문시간에 지가 나와서 답변해 드리죠.
  그리고 오늘의 본격 문제는 뭔고 하니. 호흡하는 법이 어떻게 하느냐, 인제 그걸 봐야 합니다. 단학책들 가지셨죠? 암만 거기 저 한문 국한문을 섞어서 했다고 해도 막 말로 헌 것만은 못해요. 요 다음에 그 책을 여러분이 알으시기 쉽게 붓 잡을 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쓰라고 하겠습니다. 마로 해놓고 말대로 고대로 해서 녹음기 놓고 여기다 틀어가지고 여러분들이 들으시게 얘기할 작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기 있는 게 지가 한 50년 전 첫 번에 수단을 시작하던, 수단 시작은 첫 번에 여섯 살 때부터 시작했습니다만 산에 댕기면서 어려서 공부하던 것이 한 50년이 넘었습니다. 쉰일곱해나 이렇게 되는데, 법이 어려우면 못 합니다. 가장 쉽고 가장 허기 편하고 그런 거예요. 그리고 애들이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상관없어요. 누가 호흡을 않겠습니까?
  다 여러분이 하는 호흡인데, 그 호흡을 마구 쉬질 말구 좀 길게 쉬고 곱게 쉬고 가늘게 쉬어라 단 3가지입니다. 이 공부 요령은 그것 떠나면 하나도 없습니다. 호흡을 지금 막 하는 호흡을 조금 가늘게 하면 조금 길어질 게 아닙니까? 조금 길게 쉬고,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똑같아야 골라지니까 고르게 하고 조금 길게 위어라. 호흡의 양이 호흡이라면 어디로 가든지 들어가는 게 여기 폐활량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호흡해 보면 알죠. 폐활량이 큰 사람은 오래 하고 짧은 사람은 적게 하는데, 우리 호흡은 이것이 폐활량이 아니라 아랫배에다 기운을 보내, 아랫배 쑥 내려가는 게 아니라 배꼽에서 조금 내려서 불두덩 위 배태가 있지 않습니까? 배태 있는 그 가운데입니다. 그 가운데 정도로 해가지고 숨을 들이마셔라 그겁니다. 지긋이 힘을 거기다 주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런데 억지는 하지 말고. 억지로 힘을 줘서는 병나요. 가만히 숨을 들여마시고 머무르지 말고 고대로 나가야 합니다. 들여마시고 나가고, 들여마시고 나가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하는 호흡이 10초가 못 돼요. 보통 우리 하는 호흡이 10초가 못 돼요. 억지로 참을라면야 뭐 1분도 참지만은 보통 하는 호흡이 10초를 못 하는데, 그 10초 못 허는 호흡을 5초 들여마시고 5초만 내쉬어라. 그런데 그 숨을 물론 폐로 들어가지만 기운은 모으는 것은 아랫배에다 지급이 힘을 써라. 버쩍 힘을 쓰면 안 돼요. 지긋이 약하게 그래 가지고 나가는 시간도 시계를 보고 5추를 가만히 들여마시고 5초를 내쉰다. 그게 수월하게 자꾸 그렇게 되면 고르게 되면 5초가 10초도 되고 15초도 되고 20초도 되고 조금씩 조금씩 늡니다. 조금씩 느는 게 단학 기본과정입니다.
  20초 들여마시고 20초 내쉴 만하면 벌써 인제 호흡은 됐다 이거예요. 그것으로 성공이 아니에요. 인제 단학하는 호흡의 과정으로 20초 들여마시고 20초 내쉴 만한 사람이라면 이건 아무 데 가해도 단학 호흡법 조식법하는 사람이 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입으로 절대로 숨을 쉬어선 안 됩니다.코로 만 들여마시고 코로만 내쉬어요.
  절에 가면은 참선하는 사람은 첫날 들어가면서 대번 타좌를 시킵니다. 발을 이렇게 가보좌를 시키는데, 여기선 앉는 것은 아무렇게나 앉아도 됩니다. 가부좌를 해서 발목이 아프게 되면 호흡하는 것보단 발목 아픈 것이 생각나 안 돼요. 편하게 앉아요.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앉아요. 편하게 앉으시고, 허리를 펴면 안돼요. 허리를 이렇게 쭉 펴고 앉으면 숨이 덜 들어가요. 숨이 덜 들어가니까 허리를 가냥 앉는 자세로 앉아요. 앉는 자세 허리 펴지 말고 그냥 앉으면 요렇게 앉은 것이 앞이 약간 낮춰집니다. 앉는 자세대로 앉아요. 허리 펴지 말고. 허리 펴면 숨이 덜 들어가요. 인제 그것이 단학하는 본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스님도 몇 분 오셨구만. 절에서 주처상 부처님상이 그 무슨 상인 줄 아십니까? 불가에서 으레껏 부처상이니까 석가여래나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누구 그런 양반이라고 허시기가 쉬워요. 예전에 조상들이 공부하실 적에 호흡하는 상을 불타처럼 앉아서 허라는 표본입니다. 그렇게 앉으면 돼요. 눈을 스르르 밑으로 감고, 몸 약간 이렇게 하고, 부처님 허리 쭉 펴고 앉은 것 있나 보십시오. 허리 쭉 펴지 않았습니다. 그건 공부하는 호흡하는 사람들이 너희들 이 상을 보고 체구를 이렇게 하고 앉아서 해라 하는 표본입니다. 절에서 얘기할려면 석가여래 삼천년 중세불이니까 석가여래가... 여러분들이 여기 인도사람들 보시면 알으시죠. 인도사람들 얼굴에 부처님 같이 생긴 사람들 있어요? 석가여래 가족상 따라 베껴나서 그림 그리는 것 보니까 얼굴 길다랗고 검은 얼굴이에요. 조금 덜 검지, 그 지금 부처상은 아닙니다. 절에 있는 부처상은 우리 호흡하는 자세를 그대로 그려놓고 너희 이대로 보고서 공부해라 그 상입니다. 절대로 틀리지 않아요. 단지 타좌만 했죠. 타좌 안 해도 괜찮아요. 앉기 좋게 편히 앉아라...
  첫 번에 호흡이 잘 안 되거든 기대도 좋아요. 의자 같은 데 기대 앉아도 좋고 의자에서 해도 좋고, 이게 앞으로, 졸려서 앞으로 수그러지는 사람은 의자에 조금 기대앉아서 해도 괜찮아요. 호흡 숨이 잘 들어갑니다. 고르게 하는 게 제일 첫 조건이고, 조식이니까 가늘게 하고 길게 하고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똑같이 하고 숨은 아랫배에다 지긋이 쥐가며 하고 입을 벌리지 마라.
  숨을 그쳐서는 안 되고, 여기 흔히들 호흡도장에 가보면 숨 그치는 호흡이 많아요. 그 책에 폐기라고 있습니다. 기운을 닫는다. 그러니까 폐기한다고 입을 꼭 다물고 숨을안 쉬고 아래에다 숨을 뭉치는데, 그건 글자를 잘못 봐서 그래. 그건 유기여 유기. 머무를 유자 기운 기자. 들여마시는 숨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20초가 넉넉한 사람은 호흡이 한 30초가 되거든 30초 호흡을 들여 마셔서 15초 들여마시고 15초 내쉬지 말고, 왜 말라고 하니 15초를 쑥 들여마시면 나가는 게 15가 쑥 얼른 나갑니다. 15초를 못 나가고 빠르게 나갑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말고 자기가 숨을 세서 30초가 넉넉히 되는 사람이거든 10초 조금 넘게 12초나 들여마시는 것 12초쯤 들여마시면 이것 3초가 남아요. 10초를 마시면 5초가 남아요. 밖에서 들어올 공기가 덜 들어오니까 여기 남어. 기운 남겨둔다는 것이요. 내보내는 것도 가만히 곱게 내보내서 30초하는 사람이 12초 12초하면 24초면 6초가 남아요. 금하게 나갈 까닭이 없어요. 내가 넉넉히 하는 호흡을 그놈을 가지고 그 안에서 줄여 가지고 짧게 하니까 말이요. 그래서 그 호흡이 순하게 조식되는 호흡으로 30초가 40초가 완전히 된다면 조식을 해 가면 기운을 남겨 가면서 하는 호흡이 30초가 된다면 이 사람은 40초나 45초 호흡이 넉넉한 사람이여. 만약 40초 호흡 조식이 되면서 그렇게 남겨 가면서 할 수 있다면 이건 1분 호흡이 넉넉한 사람이여. 그래야 이거 늡니다. 이걸 숨을 힘껏 들여마시고서 급하니까 싹 나가면 이건 조식이 안 돼. 고르지 않아. 숨이 골라야 혀. 물결과 마찬가지여. 바람이 불면 술렁술렁하고 앞이 뵈는 게 아무 것도 안 뵈는데 바람이 안 불 때 조용할 때 가보면 산도 물도 뵈고 다 뵈지 않습니까? 이 머리도 그래요. 이 심파가 고르면 여러 가지 영감이 뵈는 게 다 잘 뵙니다.
  오늘 좀더 얘기해도 좋겠습니다. 헌데 요 정도로만 해드리고 또 뒤에 허는 사람들이 얘기하게 허구요. 며칠 뒤에 지가 나오거든 그날은 제 시간이 아마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인가 그렇게 됐습니다만 그날 시간은 여러분들하고 얘기를 좀 해야겠어. 여러분들하고 나 얘기도 하지만 여러분들이 그동안 해오신 것 의심나는 일 물을 일이 있으면 술 먹는 사람이 술 먹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 것이여. 호흡하는 사람이 호흡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 것이니까 여러분이 물으시면 나 아는 대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은 시간을 내가 무제한으로 좀 길게 얘기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이걸로 마칩니다. (이상 CD 수록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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