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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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 `밤길의 사람들'
“시위대는 매일 밤마다 명동을 순회하고 있었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었다. 을지로
쪽에서와아와아 하다가 신세계쪽으로 돌고 퇴계로 쪽으로 술래잡기를 하다가 다시
충무로쪽으로 제일백화점 앞으로, 그리하여 명동성당 쪽으로 원무의 무대를 바싹
좁혀 놓곤 했다. 밤길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최루탄이 터
지면 마치 불꽃놀이에 놀란 강아지들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금세 다시 모여들었다.
결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태순(54)씨의 중편 <밤길의 사람들>은 1987년 6월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어떤 열기에
관한 이야기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에 요약된 그 열기는 많은 사람들을 밤길로
내몰았다. 4·19나 부마사태, 그 이전의 농민군 봉기에 필적할 함성과 흥분이 그 밤길을 채
웠다. <밤길의 사람들>은 비록 그 범위를 서울 영등포와 명동 일대로 국한시키고 있지만,
1987년 6월의 밤과 낮에 그 열기는 휴전선 남쪽의 거의 전부를 채우다시피 했다.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두번째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86년엔 서울 아시안게임을 성공리에 열었고, 88년엔 꿈과도 같은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다. 국민들은 수출고와 국민소득 향상으로 대별되는 경제성장에 현혹
돼 어느정도의 정치적 부자유쯤은 용납하려는 것 같았다. 재집권을 위한 권력쪽의 의욕은 5
·3 인천사태와 부천서 성고문 사건, 건국대 사건과 같은 무리수와 강압책도 마다하지 않았
다. 87년 초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숨진 사건은 “(책상을)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어거지로 흐지부지되는 듯했다. 그것은 5공화국의 저 숱한
의문사의 하나로 역사의 갈피에 접혀지려는가 보았다.
정권은 마침내 “(직선제로의)개헌은 없다”는 이른바 4·13 호헌 조처를 발표하고, 6월10
일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민정당 전당대회를 예고한다. 이에 맞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
동본부를 결성한 재야와 범민주 세력은 민정당 전당대회일에 맞추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
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를 벌이기로 한다.
박태순씨의 소설은 서춘환과 조애실이라는 남녀 노동자의 눈을 통해 그 해 6월을 증거한
다. 한때는 중동 건설현장에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지금은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뜨내기
신세인 `노가다' 서춘환과, 열여섯 나이부터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종사해온 노동의 삶을 마
감하고 이제는 가정을 이루어 안주하고 싶어하는 조애실. 그해 6월의 최루탄과 화염병, 눈물
과 재채기 속에서 이 둘은 어울리지 않게도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를 한다. 그러나 남자
의 경제적 무능과 여자의 정신적 피폐는 그 데이트에서 활기와 의욕을 앗아가 버린다.
소설 속에서는 첫번째 만남이자 그들의 인생에서는 두번째 만남이 있던 6월 초의 어느날
밤 바깥 사회를 들끓게 하던 열기와 함성은 다만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제시될 뿐이다. 서춘
환과 조애실이 데이트 삼아 걷는 영등포의 대로와 골목에서는 “노동삼권 보장하라!”는 구
호와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가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던 적령기 남녀 노동자에게 그것들은 당장의 관심사에서는 거리를 두
고 있는 것이었다.
두사람의 세번째이자 소설에서는 두번째가 되는 만남은 6월14일 아침에 이루어진다. 조애
실을 포함한 2백여 학생·시민이 농성 중인 명동성당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그 안에 서
춘환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실은 저 역사의 날 6월10일 오후에 서울역 휴게실에
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지만, 조애실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긴 바 있었다. 노동운동
경험이 있는 조애실이 명동성당 농성자들 속에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서춘환은 그날부터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맴을 도는 `밤길의 사람들'에 합류한다. 그의 눈이 사회와 역사를 향해
열린다.
“이 혼란, 무질서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시간은 고장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해방을
구가하고 있었다. 서춘환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가를 정말이지 완전히 잊
고 있었다.”
앞서 영등포 거리에서의 맥빠진 데이트가 역사의 변방에서의 만남이었다면, 명동성당에서
의 그들의 해후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새벽을 여는
밤길의 사람들로서 그들의 만남은 더이상 역사와 무관한 만남일 수는 없게 됐다. 소설 속에
서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결합은 비로소 역사적 필연성조차를 지니게 된다.
6월항쟁의 와중에 터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직격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은 밤길의 사람들
을 한층 분노케 했으며 권력의 저항의지를 한결 꺾어 버렸다. 민정당 대통령후보 노태우씨
는 6월29일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한다. 언론은 `중산층의 승리'
라며 이를 반겼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밤길의 사람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을 염두에 둔 명명이었다. 그것은 과연 승리였을까?
`항복선언'이라고도 불린 6·29선언이 있기 훨씬 전 조애실을 포함한 명동성당 농성자들
은 자체 투표를 통해 근소한 차로 해산을 결정한 다음 설움이 복받쳐서 통곡을 한다. 그들
은 왜 울었을까?
“그렇게 갈구했어도, 이 땅에 우리 모두가 원하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 그
러니 우리의 농성은 성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속상하고 분해서 울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사실입니다.”
<밤길의 사람들>에서 작가의 시각은 `중산층의 승리' 운운했던 언론의 시각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그가 넥타이 부대나 대학생을 제쳐두고 한 쌍의 노동자를 주인공으
로 내세운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난민과 부랑 노동자를 거쳐 조직 노동자로 문학적 시선
을 옮겨온 작가는 이 소설에서 `과연 노동자들에게 6월항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
고 있는 것이다.
“양김씨에게는 6월항쟁이 사면복권과 직선제를 가져다 주었겠고, 중산층과 학생운
동권은 그 나름으로 87년 6월을 평가하겠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그것의 성과보다는
이제부터 쟁취해야 할 게 무엇인가를 알게 했다는데 그해 6월의 의미가 있다고 봅
니다. 그해 가을 해방 뒤 최대 규모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진 데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는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전태일의 누이동생 순옥씨에게서 농성장의 분위기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전태일의 분신 때 그 르포를 썼고, 청계피복노조와 긴밀한 관계
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씨에 관한 소설을 쓰고자 가족과 자주 접
촉하던 중이었다.
서춘환이 밤길의 사람들에 섞여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며 오갔던 명동 거리에서
이제 그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입구에 세워진 `평화의 거리' 간판을 지나 명동 거리를
걷노라면 각종의 옷가게에서는 악다구니와도 같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화사한 차림의
사람들은 생각없이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간다. 그 거리에 여전히 사람들은 북적대지만, 그
들이 연출하는 것은 서춘환이 목격했던 생산적인 무질서는 더이상 아니다. 일상의 늪에 함
몰된 타자들의 섬. 광장이면서도 실은 수많은 밀실의 집합에 불과한 이 거리의 복판에 명동
성당이 있다. 한때는 `민주화의 성지'로 불렸던 이곳 역시 이제는 본디의 종교적 구실에 자
족헤 있는 모습이다. 오랜만에 찾은 성당 앞에서 작가가 말한다.
“4·19에서 87년까지가 한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90년대란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지난 연대의 거대담론이, 고스란히 부활하지는 않더라도,
그 기저의 정신만은 어떤 형태로든 되살아나리라고 믿습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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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의 `겨울 골짜기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은 높이 7백~9백m대의 산들로 옴팍하니 둘러싸인 분지형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남상면을 지나 거창읍으로 통하는 북쪽으로는 신원면의 상징과도 같은 감악산
(951m)이 버티고 있고, 산청군 오부면 및 차황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쪽에는 보록산
(800m)과 소룡산(779m)이, 그리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각기 월여산(863m)과 갈전산(764m)이
절집의 사천왕처럼 신원면을 지키고 있다. 분지 너머로 시야를 뻗으면 남서쪽의 지리산과
북동쪽의 가야산, 그리고 북서쪽의 덕유산에 이를 테지만, 신원의 사천왕들은 그같은 시야의
확장을 가로막고 나선다. 사천왕들이 가로막는 것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향하는 시야만은 아
니어서, 신원면 밖에서 보면 높직한 산과 깊숙한 골짜구니가 눈에 들어올 뿐 그 안에 아기
자기한 마을과 논밭들로 이루어진 분지가 자리잡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렵다. 예로부
터 천분과 소여에 만족하지 못하는 중생들은 감악산을 끼고 도는 숭더미재나 소룡산을 빗겨
나가는 밀치재를 통해 분지 너머로의 출타를 도모해왔다.
그러한 사왕의 위요와 영검으로써도 이념의 차이로 인한 인간의 광기와 맹목은 물리칠 수
없었음인가. 1951년 2월11일 신원면의 분지 안에서는 총성과 비명, 초연과 선혈이 뒤섞이고
교차하면서 아수라의 지옥을 연출한다.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들이 신원면 대현·
중유·와룡리 주민 6백여명을 집단학살한 것이다.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이 포함된
비무장 양민을 `청소'한 까닭은 그들이 빨치산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것이었다. 국군의 주
장은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950년 12월5일 4백∼5백명의 빨치산이 신원면 양지리의 분주소
를 습격, 점령한 이후 다음해 2월7일 국군이 신원면에 진주하기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
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군이 다시 들어올 무렵 빨치산에 적극 협력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군쪽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것이었
다.
전시의 혼란과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건은 당분간 물 밑에 잠겨 있다가 한 달 뒤부터
야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다. 국회의 진상조사반은 4월7일 현장을 확인하고자 숭더미재
를 넘던 길에 빨치산으로 위장한 국군의 공격을 받고 철수하기도 했다. 그해 말 군법회의에
서 연대장과 대대장 등 관련자들은 3년에서 무기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1년 뒤 모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극도로 숨 죽이며 살아온 희생자의 유족들과 신
원면 주민들은 4·19 이후 유족회를 구성하고 위령비를 세웠으나, 5·16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그 위령비를 무너뜨려 매장해 버렸다. 그 뒤로 30여년 이어져온 군인 대통령 시절에
희생자들의 명예는 위령비와 함께 땅 밑 어둠 속에 묻혀져왔다.
김원일(54)씨의 장편 <겨울 골짜기>는 빨치산의 신원면 점령 직전 시점에서부터 시작해
이후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알려지게 된 비극의 연원과 전개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유혈비
극의 와중에 세상 빛을 본 한 아기의 가족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모를 담고는 있지만, 사건
의 뼈대를 제외하고는 작가적 상상력에 의한 허구에 의존했다. 소설은 `산'과 `마을'의 시점
을 오가면서 서술되는데, 양쪽의 중심인물은 천우신조로 살아난 아기의 아버지 문한돌과 그
의 동생이자 빨치산인 한득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씨의 서슬이 시퍼렇던 85년부터 현지답사를 거쳐 87년 초까지 몇
몇 잡지에 나누어 발표한 뒤 단행본으로 펴낸 이 소설은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의 사슬에 단
단히 묶여 있던 빨치산들의 생활을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그려 관심을 모았다. 김원일
씨가 소설에서 그린 빨치산은 그 전까지 공비(共匪)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잔인하고 맹목적
인 이념의 노예와는 달리 나름의 역사·철학적 신념을 순수한 인간애와 결합시킨 더운 피의
소유자들이다. <겨울 골짜기>에서 또하나 인상적인 모습은 산과 마을에 관계 없이 당시 사
람들을 괴롭혔던 극도의 굶주림이다. `들피지다'라는 표현에 실려 전해지는 전쟁통 기아의
참상은 전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소설은 그러나 신원면을 점령하여 국군 토벌대의 보복적 학살에 빌미를 주었던 빨치산의
움직임에 대부분의 분량을 할애하고 정작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결말 부분에서 간략하게
처리하고 넘어감으로써 학살의 무분별과 잔혹성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준다.
거창에서 총을 난사한 부대가 그 사흘 전에는 이웃 산청군 금서면의 8개 마을에서 주민 5백
여명을 집단학살했으며, 경북 문경과 전북 순창·고창 등에서도 수백명에서 1천여명에 이르
는 양민들이 군경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게다가 거창사건의 충격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그해 3월에는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국민방위군들의 식량과 의약품, 부식비를 사령관 등 간
부들이 착복함으로써 1천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사건이 밝혀지는 등 전쟁기 군의 부패
와 행악은 극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거창읍을 거쳐 신원면에 이르는 길은 곳곳이 꽃사태였다. 이미 한철 지난 느낌의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는 물론 길 양옆에 펼쳐진 과수원의 복숭아·배·사과꽃, 마을의 살구꽃과 길
섶의 싸리꽃, 민들레, 할미꽃, 그리고 크기와 색깔과 모양은 달라도 제각기 아름다운 이름
모를 들꽃들, 거기다가 꽃보다 덜 예쁠 것도 없는 버드나무와 포플러, 미루나무, 히말라야시
다 따위의 연록색 새 잎들…. 첩첩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 그리고 옥계천의 맑은 물을 지나
는 길은 흡사 강원도의 어느 산악지대를 달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깨끗한 포장도
로를 타고 면소재지인 양지리와 학살 전날 주민들을 집결시켰던 신원초등학교가 있는 과정
리를 지나 이르른 오후의 대현리는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외롭게 논을 가는 두어명의 농
부와 그들이 부리는 소의 아령과 경운기의 엔진 소리가 새소리에 섞여 들릴 뿐 인적조차 뜸
하다.
대현리와 학살 장소인 탄량골 사이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다. 수백명의 주검이
겨우 두개의 커다란 무덤에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묻혀 있다. 학살 뒤 3년이 지나 주인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뼈를 수습하도록 허락되자 큰 뼈는 남자, 작은 뼈는 여자, 더 작은 뼈는
아이 식으로 분류를 해 3기의 묘를 꾸몄지만, 그나마 아이들 묘는 아예 군과 당국이 없애버
렸다는 것이다. 4·19의 자유 공간에 세웠던 위령비 역시 5·16과 함께 무너뜨려졌다. 그 뒤
로도 요원할 것만 같았던 신원의 신원(伸寃)은 사건 발생 45년 만인 지난해 말에야 특볍법
이 통과돼 비로소 법적인 근거가 마련됐다. 쓰러진 위령비와 스프레이 구호 따위로 어수선
한 묘지에서 만난 마을 주민 박종권(52)씨는 “위령탑을 세우고 묘지도 확장, 정비해 학생들
을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쓰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
박노해 `노동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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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13일 낮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절규는 노동자계급 최초의 자기선언이었
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수출 드라이브의 뒷전에서 나사못보다 못한 대
우에 시달리던 한 노동자의 분노는 스물셋 젊은 몸뚱어리를 장작 삼아 불타올랐다. 그것은
노동해방이라는 미륵세상을 갈구하는 지성의 소신공양이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84년 가을, 노동자계급은 또 한 사람 그들의 대변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 몸을 불사르는 방식은 아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
다간 오래 못가지/이러다간 끝내 못가지”(박노해 `노동의 새벽' 첫 연).
전태일의 분신과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의 출간은 그 형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용에서는 동일한 것이라 할 만하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고발, 계급해방에의 간절한
열망, 동료 노동자들을 향한 각성과 단결에의 외침이 그 두개의 형식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14년이라는 시간의 진행이 남한 노동자계급의 일과 삶에는 아무런 질
적인 차이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노해(본명 박기평·39)씨가 공식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83년 황지우·김정환씨 등의
시동인 `시와 경제' 제2집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에 `시다의 꿈' `하늘' `얼마짜리지' 등
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긴 공장의 밤/시린 어깨 위로/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드르륵 득득/미싱을 타
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
에 올린다/끝도 없이 올린다”(`시다의 꿈'1·2연).
노동해방을 가리키는 필명을 앞세운 박노해의 등장은 남한 노동자 계급의 자기표현이 문
학적 성숙을 이루었음을 뜻했다. 그의 시들은 송효순 유동우 석정남 등의 노동수기류를 계
승하면서 발전적으로 넘어섰다. 수기와 생활글이라는 직접적이고 무기교적인 형식이 좀더
세련된 장르인 시로 넘어갔다는 점에 박노해 등장의 의미가 있다.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노해의 노동시편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일제시대의 뜨내기 노동자 출신 작가 최
서해에 비견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슷한 무렵에 등단한 농촌 교사 시인 김용택과
함께 논의됐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
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
주하면서 노동자 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 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 박
노해의 등장이 촉발한 문학창작의 주체 논쟁은 87년 김명인씨의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민중
문학의 구상'이라는 논문을 거치면서 민족·민중문학의 급격한 이념 분화로 이어진다.
박노해의 시집을 지금 읽어보면 당시 던진 충격은 많이 완화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
은 박노해씨의 뒤를 잇는 여러 노동자 시인들의 시에 우리가 익숙해진 데다, 창작 주체에
관한 강박에서 벗어나 박노해 시의 성취와 한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의 새벽>의 시들은 예외없이 노동자의 일과 삶을 노래한다. 거기 그려진 노동자들
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힘겨운 작업에 시달리며, 그 과
정에서 프레스에 손목이 잘리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위험에까지 노출돼 있다. 신혼의
노동자 부부는 작업시간의 차이로 인해 얼굴을 마주보기조차 쉽지 않으며, 모처럼 “찾아먹
는” 휴일에도 별다른 오락과 취미생활을 즐길 경제적 여유가 없다.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
는 소일거리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에 막걸리 몇 잔 걸치며 냉정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분노를 영영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
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줏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
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 마지막 연).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박노해는 흔히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56년 전남 출생,
15살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는, 시집 갈피의 간략한 소개말고는 그에 관해 알려진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은 `박노해'라는 이름이 노동시를 쓰는 창작집단
이 편의상 내세운 공통의 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세상의 호기심과 상상에는 아
랑곳없이 박노해는 새로 창간된 격월간 <노동해방문학>에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 형태파
괴적인 `시사시(時事詩)'들을 선보이는가 하면, 남북노동자회담 제안, 현대자동차 파업 격려,
문익환 목사 방북 환영 등의 시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노동자 시인에서 노동운동
가이자 혁명가로 변신하는 듯했으며, 그의 행보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박노해 현상'이라는
조어를 낳는다.
무릇 모든 절정은 파국과 추락을 예비하고 있음인가. 그는 91년 봄 사노맹의 `수괴'로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해 <한겨레신문> 송년호에 실린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
그가 “그해 겨울,/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고 갈파하거나, 옥중시집 <참된 시작>에
덧붙인 산문에서“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소리
'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데에서 이 혁명가 시인의 강파른 세계관이
변모를 겪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구로공단과 가리봉 일대에는 구둣발에 밟히는 낙엽과도 같은
쓸쓸함이 흘러다닌다. 시속에의 적응이 잰 눈에는 10여년 전과의 차이가 분명히 보인다. 치
떨리는 분노와 강고한 희망이 공존했던 노동자들의 얼굴에서는 적당한 체념과 그만큼의 안
락이 잡히는 것 같다. 진한 살색의 외국인노동자들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 역시
두드러진 변화다. 가리봉역의 영어 안내방송은 그 한 부수효과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숫자가
줄어든 만큼 시장과 가리봉 오거리의 상점들 또한 흥청거리던 활기가 한결 덜해 보인다. 무
엇보다도 파업과 시위와 플래카드를 보기 어렵게 됐다. 박노해는 글렀던가? 적어도 그의 초
발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등단작 가운데 하나인 `시다의 꿈'을 읽어 보자.
“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
고 싶은/시다의 꿈으로/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허청이며 내달리는/왜소한 시다
의 몸짓/파리한 이마 위로/새벽별 빛나다”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재단사 보조)의 꿈, 그 꿈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
다. 전태일의 26주기를 맞아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들의 함성과 열기는 노동자 시
인의 초발심이 역사의 한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4
김용택의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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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가을 강이다.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 속에는 푸른 하늘과 알록달
록한 산그림자가 잠기어 있다. 그 하늘과 산 위로 고기들은 유유히 날아다니며, 물낯을 씻는
늦가을 햇볕이 그들을 포근히 덮어 준다. 강가에는 형제 같은 느티나무 두 그루, 마을 앞 텃
밭의 고춧대 위에는 황적색 딱새 한 마리, 잎 진 감나무 가지에는 까치밥 두엇이 꽂힌 듯
매달려 있다. 한살이를 마감한 논에는 효수당한 농민군 같은 볏단들이 서거나 누워 있고, 앞
뒷산에는 붉나무를 필두로 한 가을 나무들이 저마다 누렇고 붉은 잎사귀를 상처처럼 혹은
훈장처럼 거느리고 서 있다. 고적한듯 화려한 그 풍경은 아랑곳없다는 듯 공중에는 까치가,
땅 위로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이곳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 <섬진
강>의 시인 김용택(48)씨의 둥지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
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
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준다”(`섬진강 1' 앞부분).
전주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50㎞를 짚어 내려가면 갈담이라고도 부르는 임실군
강진면 소재지에 이르고, 거기서 같은 길을 10리 가량 더 가면 나오는 곳이 덕치면이다. 앞
산이 좌우로 길다랗다 해서 `긴뫼(長山)'라 이름붙여졌으나 우리네 이름이 항용 그러하듯
진메'로 통용되고 있는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이 시인의 고향이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서
발원해 경남 하동 포구로 몸을 푸는 섬진강 5백리 물길을 두고 보자면 진메는 강의 중상류
쯤에 해당한다. 그 조금 위쪽 강진면 옥정리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섬진댐이 물을 막고
있어 댐 아래로는 수량이 매우 적다.
“아가/새아가/강 건너 저 밭을 봐라/저게 저렇게 하찮게 생겼어도/저게 나다/저 밭
이 내 평생이니라/저 밭에/내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과/곡식 무성함의 기쁨과 설
레임과/내 손톱 발톱이 범벅되어 있느니라”(`밭')
.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던 김용택씨
가 시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82년이었다. 82년이라면 5월 광주의 충격과 아픔이 채 가시
지 않은 무렵이다. 미증유의 학살극은 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복 없는 백성들
은 애꿎은 소주병이나 작살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닷가 가파른 벼랑 위에도 원추리꽃 한
송이가 피어 있듯이 숨막히는 역사의 격랑 속에도 서정의 몫은 엄연히 있었음인가. 김용택
씨의 섬진강 시편들은 시대의 불인두에 데인 화인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며 삶이란, 그리고
역사란 한 판 승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낮은 목소리로.
“이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이 세상
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끝을/저무는 강물
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섬진강 5―삶')
김용택씨의 서정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방관적인 여느 `순수서정'과는 구분된다. 김용택씨는 그가 몸 담고 있는 농촌의 현실,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적 상황, 그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라는 큰 흐름에 두루 주목하면서
서정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감싸려 한다. 그의 시에서 서정과 역사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
다.
농촌의 현실에 발 붙이고 농민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농민시
의 계보에 속한다. 1985년에 초판이 나온 그의 첫 시집 <섬진강>은 그보다 10여년 전에 출
간된 선배 시인 신경림씨의 <농무>를 잇는 농민시의 80년대적 적자라 할 만하다. <섬진
강>에 실린 시 `눈길'은 신경림씨의 같은 제목의 시를 연상시키며 두 시인 사이의 영향관계
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전답들을/어떻게 갚아갈 것인가, 겁도 안 나는 이 많은 빚을
/걸을수록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들판 끝 자욱한 동네 감빛 같은/불빛을 따라
/팍팍한 눈길을 걷는다”
서정이라고는 하지만, 농촌과 농민 현실의 팍팍함을 고발하는 시인의 어조가 마냥 가라앉
아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80년대에 특히 승했던 현장시의 흔적을 보이는 `마당은 비뚤
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와 같은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올라간다.
“우리는 말여 옛적부텀/만백성 뱃속 채워주고/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
고/논두렁은 비뚤어졌어도/농사는 빤듯이 짓는/전라도 농군들이랑게/고부 들판에
농군들이여/(…)/다 우리들 덕에 이만큼이라도/모다덜 사는지 알아야 혀/아뭇소리
안허고 있응게 다 죽은 줄 알지만 말여/아직도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땅을 파는/농군이여/농군.”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의 수량이 갈수록 주는 것처럼 진메마을의 인구도 감소일로에 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린 마을엔 노인들만 남아 생의 저물녘을 지키고 있다. 20여 가호
가 사는 마을엔 서너채가 빈집으로 버려져 있고,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만도
여덟에 이른다. 시인의 기억에 따르면 70년대 중반부터 이농 물결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그가 처음 부임했던 70년대 초 덕치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7백명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은 불
과 53명의 학생이 교사 6명과 함께 생활하는 미니 학교로 바뀌었다. 2학년 8명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은 20년 저쪽의 일들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떠나고 물은 줄었어도 마을 앞 강에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름이면 별을 보며 잠을 청하곤 했던 벼락바위에는 말리려고 널어놓은 흰 호박 쪼가리들이
얹혀져 있고, 각각 쏘가리와 다슬기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이름붙은 쏘가리방죽과 다슬기방
죽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강물에는 돌고
기, 납자루, 쉬리, 꺽지, 피라미, 버들치, 모래무지, 자가사리 따위의 민물고기들이 추억처럼
오고 또 간다.
그러나 자연적 아름다움과 효용을 겸하고 있던 마을 앞 징검다리는 경운기 한 대가 다닐
만한 넓이의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징검돌이 치워지고 시멘트가 퍼부어지던 무렵 시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극도로 야위는 통에 두달 가량 고향 마을을 찾지 못하다가 상황
이 끝난 뒤에야 와서 보고는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고 보면 의사들이 진단과 치료를 제
대로 할 수 없었던 시인의 병은 어쩌면 섬진강의 병이 아니었을까.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
프다'는 저 유마거사의 경지에 시인이 이른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인은 섬진강과 진메마을을 믿고 사랑한다. 풀이 자
라고 꽃이 피었다 지고, 같은 자리에서도 해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고, 잎이 출무성했다가
는 어느 순간 속절없이 져버린 뒤 흰눈이 내려 덮이고…. 1년 사시사철 하루하루가 매번 다
르기 때문에 세월가는 줄 모른다. 신선놀음이 따로 있을 것인가. 예가 바로 천국인 것을.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
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
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
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1' 뒷부분)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5
김인숙의 `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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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은 살아 있는 투쟁의 불꽃이다. 어떠한 억압도 그들의 불꽃을 죽이지는 못
한다. 오히려 억압은 그들을 더욱 강고한 힘으로 폭발하게 만들 뿐이다. 그들은 짓
밟히면 짓밟힐수록 더더욱 강력한 힘으로 다시 튀어 오르는 용수철이다. 용수철이
라니! 다이너마이트이다. 수소폭탄이다. 핵폭탄이다!”
김인숙(33)씨의 소설 <79~80>은 1987년 말에 나왔다. 그러나 출간된 지만 10년도 되지 않
은 이 작품을 지금 읽어 보면 매우 오래된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전의 70년대나
60년대의 소설보다도 낯선 느낌. 우리말이라는 낯익은 그릇에 담긴 이물스러운 내용물이라
는 점에서는 흡사 북한 소설을 대하고 있는 듯한 거리감조차 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이 소설이 `80년대'의 소산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80년대'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이 서력기원 1980년 1월1일에서 1989년 12월31일까지의 특정한 시간대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한국적 맥락에서의 80년대란 무엇보다도 정치·사회
적 변혁을 향한 몸부림으로 특징되는 격동의 연대, 불의 연대였다. 물의 포용성보다는 불의
파괴력이 선호됐던 그 연대에는 문학에 대해서도 물이 아닌 불이 될 것이 요구됐다.
김인숙씨가 24살 때 발표한 <79~80>은 80년대의 태동에 관한 소설적 보고라 할 만하다.
이 소설의 시간대는 제목에서 보듯이 79년에서 80년―더 정확히는 박정희의 암살에서부터
광주항쟁 직후까지의 2백여일에 걸쳐 있다. 그럼에도 세권짜리 짧지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은
그 기간이 우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숨막히는 기간이었음을 웅변한다.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박정희 체제 18년의 붕괴를 알리는 어느 고교 교사의 말이다. 이 진술
의 형식적 간명성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착잡함이 연출하는 부조화와 불일치는 아연 긴장
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그 긴장은 전환기를 맞은 역사의 긴장이자 그 역사를 추적하고 채집
하려는 소설적 긴장이기도 하다.
이후로 소설은 그 두가지 긴장의 증폭과 해소가 교차하면서 직조하는 양탄자와도 같은 형
국을 보인다. 10·26 박정희 암살에 이어지는 12·12 쿠데타와 서울의 봄, 광주학살이 역사
적 긴장의 이름들이라면, 소설적 긴장은 그 사건들을 맡고 또 맞는 작중인물들의 의식과 행
동에서 비롯한다.
그 많은 인물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윤익을 비롯한 학생운동권이다. 지하서클에 속한 윤
익과 그의 동료들은 위기와 기회의 두가지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는 전환기를 맞아 위기는
돌파하고 기회를 포착하고자 동분서주한다. 윤익의 상대편에 놓인 인물이 공장지대에서 야
학을 하는 종훈이다. 종훈은 세상이 온통 불로 치달아가는 때에 스스로를 얼음이라 믿고 싶
어하는 인물이다. 윤익이 결단과 행동의 인간이라면 종훈은 회의와 관념의 인간이다. 윤익이
역사적 격변의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는 반면 종훈은 그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고자 한다.
종훈 못지 않게 가증스러운 것이 고시라는 통로를 거쳐 신분상승을 꾀하는 이기주의자 채
현, 그리고 타락한 재벌2세 희욱과 같은 대학생들이다.
윤익을 비롯한 학생운동권과 대결하는 것이 희욱의 아버지인 강흥국 사장과 그의 조카 강
승훈 대위로 대표되는 보수 기득권층이다. 이들에게 있어 윤익들의 기회는 위기이며 거꾸로
이들의 기회는 윤익들에게는 위기가 된다. 양쪽 세력은 역사라는 하나의 대상을 놓고 일종
의 제로섬 게임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과 구분되는 제삼의 세력이 민중이다. 한 마디로 민중이라고는 하지만 민중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우선은 종훈의 야학 학생들을 필두로 한 각성한 노동자들을 들 수 있다. 채현
의 동생인 영이가 그 대표자이거니와, 이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요구에서부터 시
작해 사회적 정의와 세계의 올바른 진행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
영이의 큰오빠인 채욱과 그의 동네 사람들이 또다른 유형이다. 이들은 일신과 일상의 소
소한 욕망과 희비에 휘둘릴 뿐 좀더 커다랗고 객관적인 세계를 생각할 여유를 찾지 못한다.
어려운 말로 즉자적 대중이라 일컫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윤익의 고향인 마산의 친구들과 함백 탄광의 광원들은 가장 문제적인 유형에 속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불의 폭발력, 그리고 일상적 무기력과 타락이라는 공통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적 소설'이라는 말을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 그것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
데 하나로 현실적 패배와 승리라는 당위의 위태로운 공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결
말은 작가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규정하는 `전망'의 요건을 의식했음을 보여준다. 광주
학살에서 보듯 민중과 변혁세력은 기득권 세력에게 철저히 짓밟혔다. 소설 속에서 그것은
탄광지대에 숨어 있던 윤익이 경찰에 붙들려가는 것으로 치환된다. 역사도 패했고 윤익도
패했다. 그럼에도 작가와 소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들의 5월의 패배! 나는 그것을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패배로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다. 패배라니! 민중들이 살아 있는데, 아니 그들은 살아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당연히 더더욱 찬란한 생명으로 살아오를 것인데 패배라니! 패
배는 없다! 민중들은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는다.”
<79~80>은 80년대 학생운동의 기념비적인 소설이라 할 만하다. 소설은 숱한 토론과 논쟁
에 종사하며 조국과 세계의 운명을 기꺼이 자신들의 두 어깨에 걸머지려는 운동권 학생들을
상세히 묘사한다.
이 작품은 또한 공동창작이라는 창작방법상의 실험으로써도 기념할 만하다. 북쪽의 3·15
창작단 등에 관한 소문이 그 논의를 부채질한 것이 사실이고, 그 무성했던 논의들에 비해
실제적인 성과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지금껏 살아남은 것은 극히 드문 실정이
다. <79~80>은 비록 대표집필자인 김인숙씨가 주도적인 구실을 했고, 그 결과 그의 이름을
달고 출판됐지만, 공동창작으로서 시도됐고 또 상당부분 진행됐다는 점에서 나름의 문학사
적 의미를 지닌다. 물론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쉬움도 없지 않은 작업이었다.
“공동창작의 특성상 전형별로 인물 유형을 미리 정해 놓고 출발했다. 당연히 도식
성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인물들이 저절로 살아 움직이거나 제 울타리를 벗어나는
식의 파격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역시 같은 소
설을 쓸 것 같다.”
윤익의 고향이자 박정희의 몰락을 가져온 하나의 요인이었던 부마사태의 무대인 마산을
찾는다. 소설 취재를 위해 온 때로부터 10년 만이라는 작가가 동행했다. 4·19 때와 `마부사
태'(이곳 사람들은 굳이 마부사태라 부른다) 때의 학생들의 진출로인 `혼도로' 양옆에는 작
은 규모의 가구상들이 밀집해 있고, 그 일방도로가 끝나는 서쪽에 3·15기념탑이 서 있다.
유서깊은 몽고정 옆이다.
윤익의 껄렁패 친구들이 출입하던 사창가인 오동동 나래비골목의 대낮은 한산하고 조용해
오히려 낯설다. 반대로 60년과 79년 시위 때 수백 수천의 학생·시민이 스크럼을 짜고 밀려
왔던 시내 중심가는 평일임에도 젊은이들의 물결로 출렁인다. 제각기 텔레비전에서 본 스타
들의 이미지를 모방해 모자를 쓰거나 머리를 눌러 붙인 아이들은 옷가게와 커피점과 술집이
늘어선 거리를 쌍쌍이, 또는 서너너댓씩 건들거리며 흘러다닌다. 물처럼. 여유롭게. 과연 시
대는 불에서 물로 바뀌고 있는 것인지.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6
김남주의 '전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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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
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아니 수백만 명이 다시 죽어갈
지도 모른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김남주, `전사 2'의 첫 두 연).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1945~94)의 시들은 선명한 메시지와 강렬한 어조로 하여 두드
러진다. 김남주가 외세에 대한 거부와 부자들을 향한 증오, 독재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을 노
래한 유일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 거부와 증오와 싸움을 노래 바깥의 현실로 옮기려 했다
는 점에서 그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분된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으며,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
가.”(`시인이여')라고 그가 부르짖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고은, `화살')는 선동과 같은 궤에 놓이면서도 훨씬 더 강한 울림을 울린다. 그것은 무기
(창:화살)와 대상(압제자:과녁)의 차이가 빚어내는 미학적 거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
다도 말 그대로의 전사와 시인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철의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쓰러지기 불과 보름여 전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
선'(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김남주는 중심인물인 이재문 등 20여명과 함께 그때 이미 체
포된 상태였다. 이후 모두 80여명이 검거돼 그 가운데 2명이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른 남민
전 사건이란 무엇이었던가.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남민전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과 보조를 맞추어 예속적 독재권력의 타도와 외세의 축출, 그리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목표
로 한 비밀결사였다. 남민전이 가장 직접적인 모델로 삼았던 것은 베트남 통일의 원동력이
었던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이었으며, 국내적으로 그것은 인혁당과 같은 자생적 사회주의
결사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검거 당시 아직 준비위 차원에 머물러 있던 남민전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민주투
쟁국민연맹 명의의 반독재 유인물 살포에 주력했으며, 김남주와 박석률 등 남민전 전위대의
전사들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담을 넘기도 했다. 남민전 동지이자 김남주의
부인인 박광숙씨에 따르면 남민전은 무엇보다도 반독재 민주화투쟁 단체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공포통치의 시대에 남민전은 교사와 노동자, 학생 등 각계
각층을 망라한 통일운동체였다. 강령에 있어서는 반제국주의와 노동해방을 표방했
지만, 실제로는 반독재·반유신투쟁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김남주의 대부분의 시는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방
에서 쓰여졌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이라고 규정한 그
에게서 선동의 효과가 미학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와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글에서 그는 그 둘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토를 달았지만, 그것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의 규정과도 같아서 그에게 있어 우선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혁
명이었다. 그러나 흥미있는 것은 시보다는 혁명에 기운 그의 선택이 오히려 미적 완성도가
높은 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
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노래' )
“미군이 있으면/ 삼팔선이 든든하지요/ 삼팔선이 든든하면/ 부자들 배가 든든하고요//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부자들 배도 터지고요.”
(`삼팔선' 전문)
김남주는 하이네,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등 외국 시인들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에서 보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김지하에 이르는 참여적
서정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제국주의/신식민주의, 독재/자유, 자본/민중의 명료한
이분법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절창을 낳았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쓰여졌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가 면회온 친지
들에게 불러주거나, 읽던 책의 여백이나 우유곽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간수의 눈을 피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시를 새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
해 보라!).
김남주는 먼저 석방돼 나와 그의 옥바라지를 계속한 박광숙씨와 출옥 한달여 만에 결혼해
서 아들 토일이를 두었다. 노동자들이 1주일에 사흘 금·토·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긴 토일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시인은 가고 뒤에 남은 처자와 함
께 그의 고향 해남을 찾는다. 희고 붉은 코스모스, 노랗고 예쁜 벼들, 그리운 이의 손짓처럼
하느작대는 억새로 해서 가을 들판은 따뜻하고 정겨웁다. 해남읍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삼산면 봉학리 그의 생가에서는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마당에 넌 고추와 호박을 돌
보고 있다가 어린 손주를 반긴다.
푸른 대숲으로 둘러싸인 집에는 군 청년회에서 만들었다는 시화 패널들이 처마에 걸려 있
을 뿐 시인의 생가임을 알리는 이렇다 할 기념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주로 썼다
는 사랑채에 그가 옥중에서 보았던 이런 저런 잡지와 단행본들이 먼지에 덮여 쌓여 있다. `
수번 2164, 교부일 81. 3. 23, 요납일 81. 4. 22'의 열독허가증이 붙은 책들은 80년대 초의 어
느 시점에 얼어붙은 채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시인은 죽어서 망월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가 쓴 시 `망월동에 와서'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5월 광주 희생자 묘역에서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찾았을 것인가. 그의 분신인 토
일이와 부인 박광숙씨를 일어나 반기지 못하는 무덤 속의 그를 안쓰러워하며 `전사 2'의 뒷
부분을 떠올린다.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투
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
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
은/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
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7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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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나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철거반―그들은
내가, 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그 집에서의 마지
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과 싸우고
돌아와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난장이 연작은 그 노트에 씌어지
기 시작했다.”
작가 조세희(56)씨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관한 어느 회고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1975년 겨울부터 발표되기 시작해 78년에 단행본으로 묶인 이 연작은 최인훈씨의 <광
장>과 함께 올 초 1백쇄를 넘어섰다. 이는 이 책이 20년 가까운 세월의 풍화작용을 이기고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는 뜻이 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쳐 12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연작의 어떤 점이
그토록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문장과 감수성으로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그늘
진 삶을 그렸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다.
전쟁의 상흔과 아픈 기억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60년대 후반부터 작가들의
시선은 진행중인 삶의 불구성을 향하기 시작했다. 황석영씨의 <객지>와 같은 예외를 빼고
는 아직 노동자의 삶이 작가적 관심의 중심으로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도시빈민들의 처지는
농민문제와 더불어 60, 70년대 작가들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였다.
난장이 연작의 의의는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억압과 착취의 실태를 정면으로
문제삼았다는 것과 함께, 도시빈민을 다루되 기존의 사실주의 내지는 자연주의적 기법 대신
모더니즘의 방법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의 모순을 천착하면
서도 사실주의의 획일성을 피하려는 실험과 갱신의 정신이 이 작품을 진정 새롭게 만든 것
이다.
연작의 중심인물들은 물론 난장이 일가다.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의 무허가 주택에 살
고 있던 40대 후반의 난장이와 그 부인, 영수 영호 영희 세 남매로 구성된 일가에게 철거라
는 위기가 닥친다. 경제적 근거가 전무한 그들이 시쳇말로 `딱지'라 불리는 아파트 입주권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거리에 나앉는 과정이 표제작의 대강을 이룬다. `뫼비우스의 띠'의 꼽추
와 앉은뱅이 역시 난장이 일가와 같은 처지를 당한다. 딱지장사로 돈을 챙기는 사내로부터
영희가 딱지를 되찾아온다든가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 사내를 살해한다는 등의 설정이 비현
실적이기는 하지만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효과는 부인할 수 없다.
도시빈민의 자식들은 노동자로 편입된다. 까만 쇠공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간―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은 난장이의 자식들은 각각 은강 자동차, 은강전기 제일 공장, 은강방
직 공장에 취직한다. 작가의 시선도 그 공장들이 있는 서해안 항구도시 은강으로 옮겨간다.
`기계 도시' `은 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클라인씨의 병' 같은 작
품들이 은강을 무대로 삼고 있다.
“우리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 공헌도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생계비는 팔만삼천사백
팔십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이백삼십일원이었다.”
죽어라 일을 해도 사정은 나아지질 않는다. 야근 시간에 졸다가는 반장이 들고 다니는 옷
핀에 팔을 찔린다.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움직이는 노동자들은 해고돼 블랙 리스트에 오
르고 어딘가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며 어두운 골목에서 뭇매를 맞는다.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그리자면 그들의 적대 계급인 자본가와 그 주변 세력을 등장시키
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은강 그룹의 소유주 일가와 그들의 수족으로 기능하는 율사가 그들
이다. 거기에다가 신애와 그 동생으로 대표되는 양심적인 중산층, 윤호의 가정교사였다가 노
동자로 `위장취업'하는 활동가 지섭과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더해져 소설은 한 사회의 전
체상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영수가 은강그룹 총수의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작가의 메시지가 그처럼 극단적인 마무리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었으리라. 작가의 진짜 대안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기 전 영수의
시점으로 이렇게 표현된다.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
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
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
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영수와“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
나도 없었다”는 은강그룹 총수의 아들 경훈 중에서 작가가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질문에 속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지배적인 특징의 하나
는 선과 악, 지배와 피지배, 강자와 약자 사이의 구분이 선명하다는 점이다.
동화적 구도라고도 할 수 있을 단순명료한 이분법이 군더더기 없이 짧고도 냉정한 번역투
문장에 얹혀 있는 데에서 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는 풍겨나온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
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
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
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연작이라는 <난장이…>의 장르상 특징 역시 주목을 요한다. 한국 소설사에서 1970년대를
기술하면서 연작이라는 양식을 언급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윤흥길씨의 <아홉 켤레의 구두
로 남은 사내>와 이문구씨의 <관촌수필> <우리 동네 0씨>와 함께 <난장이…>는 70년대
연작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단편의 기동성과 장편의 총체성을 결합한 연작으로서 <난장이
…>의 성격에 관해 조세희씨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난장이 연작'은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놓았을 때, 그것은 분열된 힘들에 지나지 않
았다. 나에게, 책은 분열된 힘들을 모아 통합하는 마당이었다. 나는 작은 노트 몇
권에 나뉘어 씌어져 그동안 작은 싸움에 참가한 적이 있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아
직 분명한 정체를 잡혀보지 않은 소부대들을 불러모았다.”
분열됐던 힘들이 모여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 됐다는 것은 이 연작이 `난쏘공'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80년대 내내 대학가의 필독서였다는 사실에서 얼른 확인된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8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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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모
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한 인간
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
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
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청준(57)씨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은 유토피아의 본질과 한계를 문제 삼는다. 아니,
이 소설에서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수반하는 얼치기 유토피아, 그러니까 디스토피
아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의 주체가 `우리들'이 아닌 `당신
들'이라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당신들의 천국'인
가? 이 물음에는 이 소설의 야심만만한 문제의식과 작가 이청준씨의 세계관의 무게가 함께
걸려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를 무대로 삼고 있다. 소설의 주인
공은 5·16 쿠데타가 있은 지 얼마 뒤 군복 차림으로 소록도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해온 조백
헌 대령. 그가 나름의 열의와 진정을 지니고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꾸미고자 노력
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우여와 곡절이 소설의 대략적인 얼개다.
앞머리에 인용한 글은 조 원장 아래서 보건과장으로 봉직했다가 섬을 떠난 이상욱이 조
원장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상욱은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조 원장의 포
부와 실천을 처음부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조 원장이 행동의 인간이라면
상욱은 관념의 인간이다. 조 원장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현실적 능력과 기반을 지니고 있
다면 상욱이 자신을 구현하는 방법은 부단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서다.
소록도에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조 원장의 포부는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된다. 원
생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듣는 건의함 설치, 섬 운영의 결정권을 행사할 환자들의 장로회
조직, 병에 감염되지 않은 환자의 자식들과 병원 직원 아이들의 공학 단행, 환자들만의 축구
팀 구성과 각종 대회 출전,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간척공사…. 하지만 처음 개봉한 건의함들
이 한결같이 텅 비어 있던 데에서도 보듯이 조 원장의 의욕은 일쑤 환자들의 무관심과 냉대
에 부닥친다.
조 원장의 선의가 환자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이상욱과, 환자들의 우두
머리 격인 황희백 장로에 의해 각각 자유와 사랑의 문제로 치환돼 제시된다. 상욱에 따르면
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조 원장의 계획이 치명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은 비판의 자유
다. 원장의 의도가 아무리 미쁘고 그 결과물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천국의 거주민인 환자
들이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짜 천국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황 장로는 상욱의 자유조차도 사랑이라는 좀더 근본적인 덕목이 없이는 불완전한
것임을 역설한다. 자유가 천국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면 사랑은 그 종교적 근거를 이룬
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두가지 요건, 그리고 실제로 천국 건설을 추진할 실천적 힘이 결합돼
야 한다는 것이 <당신들의 천국>에 나타난 유토피아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일차적으로는 물론 소록도라는 구체적 섬을 무대로 그 섬의 주민들인
나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인 조백헌 원장은 실제로 두차례에 걸쳐 8년 가
까이 소록도병원 원장을 지낸 조창원씨를 모델로 삼고 있다. 나환자 선수들과 일반 선수들
과의 축구 경기, 오마도 간척사업 등은 조창원 원장 시절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은 정치적 알레고리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소설 첫머리에 군복 차
림으로 부임하는 조 원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빗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
다. 조 원장과 박정희의 유비는 더 이어진다. 오마도 간척사업을 독려하기 위한 지시문에서
사업을 반대하거나 비방하는 일, 미신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의 일을 금지 사항으로 규
정하고 있는 대목은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의견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긴급조치의 `자기완
결성'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지배와 피지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와 같은 철학적·인류학적
질문에 관계된다. 김윤식 교수(서울대·국문학)가 이 소설의 작가를 두고 “도스토예프스키
의 주제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작가”라 이른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다.
소록도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으로부터 5백m 거리에 있는 1백50만평 넓이의 자그
마한 섬이다. 녹동항에서 소록도만을 오고 가는 페리형 도선은 오르는가 싶으면 어느새 건
너편 잔교에 가 닿는다. 작은 사슴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은 소록도를 처음 찾는 이
들을 맞는 것은 선착장에 세워진 시멘트 구조물이다. 흰 바탕에 검은색 세로 글씨로 쓰여
있으되, `한센병은 낫는다.' 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이 짧은 문장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
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갈구와 체념이 담겨 있을 것인가.
소록도는 크게 보아 관사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뉘지만 양쪽을 가르던 철조망과 감시소는
없어진 지 오래다. 많을 때는 5천~6천명에 이르렀다는 환자는 지금은 1천58명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69살로 최근엔 해마다 50명 가량이 세상을 뜨고 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섬 소록도는 순전히 환자들의 치료와 생활 공간으로만 쓰이고 있
어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다. 섬 한가운데의 중앙공원은 그 아름다운 자연에 적절한
인공미가 더해진 소록도 최고의 명물이다. 멋진 소나무와 향나무들이 잘 깎인 잔디와 조화
를 이룬 6천평 넓이의 공원에서 그러나 환자들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
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
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중앙공원이 조성되던 무렵을 회고하고 있는 부분은 환자들이 이 공원을 어떻
게 보고 있을지를 알려준다. 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 말기 10년 동안 재임했던 수호 원
장 시절이었다. 환자들을 강제동원해 등대와 종루, 납골탑, 선착장, 그리고 공원을 만든 수호
는 그 자신의 동상을 세워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케 하다가 끝내는 자신의 동상 앞에서 환자
의 칼에 맞아 살해되기에 이른다.
인근 장흥군 출신으로 초등학교 소풍 때 처음 소록도에 와 보았다는 작가는 “소설을 쓰
던 70년대에 비해서 소록도의 현실은 많이 개선된 것 같다”면서도 “소록도로 상징되는 바
깥의 현실이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9
김지하의 `197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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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
을 죽음이라 부르자/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김지하, `1974년 1월' 앞부분).
1974년 1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얘기는 72년 10월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선포된 유
신은 박정희 개인에게는 영구집권을 위한 법적 보장이 되었겠지만, 국민들에게 그것은 정치
적 질곡의 심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은 73년 가을부터 본격화했으며 그해 12월24일 발족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는 그 집약
적 표현이었다. 74년 1월8일 오후 5시를 기해 발효된 긴급조치 제1호는 이같은 유신반대 움
직임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그러니까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그 개정을 제안하는 행위, 나아가 그같
은 비판과 제안을 보도하는 등의 행위까지를 중범죄로 취급해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긴급조치는 공포통치 시대의 막을 열었
다.
김지하(55)씨의 시 `1974년 1월'은 긴급조치의 발동과 더불어 잠적한 시인이 강릉에 도망
가 있으면서 구상한 것이다.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낯
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
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설악산 백담사 근처 암자를 거쳐 강릉으로 내려온 시인은 옥천동 오거리의 `경북집'이라
는 옥호를 단 집에서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셨다. 방광이 부풀어 변소에 다녀오던 시인은 문
득 벽에 걸린 깨진 거울을 들여다본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마주 보았다. 섬뜩했다.
거울에 비친 시인의 모습은 양면적이다. 그는 시대와 대결하는 투사인 동시에 지치고 나
약한 여느 필부(匹夫)의 면모도 내비친다. `불퇴진의 민주투사 김지하'의 신화는 시인 자신
에 의해 벗겨진다. “겁이 없어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것은 아니었다. 겁내는 자신을 채찍질
하고 추스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싸움을 오히려 더욱
숭고하고 값진 것으로 만든다.
시대와 불화한 데 따른 시인의 수난과 그에 대한 문학적 대응은 대체로 박정희의 통치기
와 겹친다. 그는 64년 6월3일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해 처음으로 4개월간의 감옥 체
험을 한 이래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
다. 어떤 의미에서 70년대란 박정희와 김지하의 대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가
유독 문인들의 참여와 행동이 두드러진 시대이긴 했지만, 지하는 단연 그 뜨거운 상징이었
다.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두 손엔 철삿줄/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나는 간
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황톳길' 첫연).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
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첫연).
`황톳길' 등의 초기시에서 유혈과 죽음의 역사가 현재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전통 율격에
얹어 노래했던 시인은 싸움의 절정기에 쓴 `타는 목마름으로'와 같은 시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구를 각혈하듯 내뱉는다. 두 시 모두에서 핵심적인 어휘로 등장하는 동사 `타다'는
그의 시세계의 강렬함을 말해줌이다.
현실이 어둡고 싸움이 버겁기로서니 마냥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법. 역시 강릉에서 쓴
시 `바다에서'는 수난과 고통의 현장으로 회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한치뿐인 땅/한치도 못될 이 가난한 여미에 묶여/돌아가겠다 벗들/굵은 손목 저
아픈 노동으로 패인 주름살/사슬이 아닌 사슬이 아닌/너희들의 얼굴로 아픔 속으
로/돌아가겠다 벗들….”
그래서 돌아왔다. 장남의 출생도 지켜보지 못하고 도피행각을 벌이던 시인은 대흑산도에
서 체포되고, 민청학련사건 관련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현 정
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 재판정에서의 진술이었
다.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를 구출하기 위한 운동이 일본과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
까지 불거져나온 탓인지, 그는 구속된 지 10개월 만인 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종
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 뭔
가 이상하다”는 것이 그의 출옥 일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광고탄압이 한창이던 <동아일보>에 연재한 `
고행―1974'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밝힌 혐의로 3월13일 다시 체포되고 형집행정
지처분이 취소된다. 그 사이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이 있었다.
김지하씨는 여전히 옥 안에 있으면서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는다. 그날은 옥 안에서 시
작한 참선이 꼭 1백일째를 맞은 날이었다.
“참선 덕분에 퍽 가라앉은 상태에서 방송을 들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무상하다
는 것이었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 가리다.'”
`투사 김지하'가 `생명사상가'로 변신한 것이 박정희의 죽음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옥방
창틀에 싹을 틔운 민들레를 보고서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에 눈을 떴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시인 자신은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인 흐름이라고 설명하지만, 투사 김지하를 사랑하
고 존경했던 이들에게 그같은 변모는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저항에서 생명으로'라고 요약할 수 있을 그 변모가 표나게 드러난 계기는 지난 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이었다. 젊은이들의 잇따른 분신을 거칠게 질타한 시인의 글이 어떤 신문
에 실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하의 변절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생
명운동가 김지하와, 투사 김지하를 사랑했던 이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은 양쪽 모두를 상처
입혔다. 그 어느쪽이 의도한 바도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시인의 의도가 생때 같은 목숨들의 스러짐에 대한 안타까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시인이 발표한 시 `척분(滌焚)'을 다시 읽어보자.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가 뉘우쳤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
주리니/모란 위 사경(四更)/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0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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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다 돌아올 시간에 그녀는 떠난다. 밤에 더욱 빛나는 야광을 몸에 바르고
번쩍이면서 일몰의 저녁 순간에 불확실한 그림자를 길게 끌며, 지치고 더러운 거
리로 나가기 시작한다.” (최인호, <별들의 고향>)
1970년대 고도성장이 노동자·농민의 소외와 함께 드리운 또 하나의 그늘은 향락산업의
발흥이었다. 성장의 결실에서 소외된 계층의 몸부림이 있는 한편에서 소수의 수혜자들은 두
툼해진 지갑을 개인적 쾌락을 위해 선뜻선뜻 열고는 했다. 호스티스라는 직업이 일반화한
것이 70년대 들어와서의 일이다. 술집을 찾는 남자 손님들의 말상대 노릇을 하며 때로는 몸
을 팔기도 하는 이들은 봉건시대 기생의 후예라 할 만했다.
1972~3년 신문연재를 거쳐 출간된 <별들의 고향>은 이 새로운 직장여성을 본격적으로 등
장시킨 소설로서 이른바 `호스티스 문학'의 선도 구실을 했다. 착하고 예쁜 처녀 오경아를
나락으로 이끄는 것은 곤궁한 경제와 운명의 심술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난 때문에 대학
을 1학년에 그만둔 뒤 믿었던 남자에게 버림받고, 가까스로 결혼해 모처럼 안락한 가정을
꾸미는가 했으나 이전의 낙태수술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됨으로써 다시금 버림받
은 여자. 호스티스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들의 고향>이 호스티스라는 직업의 연원과 현상에 관한 사회경제적 성
찰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오히려 경아의 운명의 변전을 개인 차원의 `사나운 팔
자' 정도로 치부해버림으로써 동정적인 독자들의 눈물은 자아낼지언정, 전형성의 요건을 충
족시키지는 못한다.
어쨌든 경아는 몰락하고, 스물일곱의 이른 죽음을 맞는다. 첫 남자에게 몸을 허락할 때나,
짧은 평생 동안 단 한번이었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도 `버림받지 않기를' 바랐던 경
아는 그 바람도 헛되이 거듭 버림받고 혼자가 되고 만다.
소설의 화자인 화가 김문오가 어느 맥주홀의 호스티스로 있는 경아를 만났을 때 그 여자
는 지치고 망가져 `정상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꿈을 접은 상태였다.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
는 문오와의 관계도 불현듯 끝나고, 한참의 세월이 흘러 보기 흉할 정도로 살이 찌고 몸이
상한 경아는 말한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난 이제 지쳤어요.”
그러니, 누구 못지 않게 아름다운 꿈과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경아를 이토록 망가뜨
린 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래, 경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인지도 몰라. 밤이 되면 서울 거리에 밝
혀지는 형광등의 불빛과 네온의 번뜩임, 땅콩 장수의 가스등처럼 한때 피었다 스
러지는 서울의 밤, 조그만 요정인지도 모르지. 그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죽인 것이야. 무책임하게 골목골목마다에 방뇨를 하는 우리가 죽인 여자이
지.”
<별들의 고향>은 무엇보다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작가의 추산으로는 상·하권 합해서 1
백만권이 팔렸다. 이 소설은 또 작가 자신의 각색을 거쳐 영화로도 만들어져 역시 수많은
관객을 모았다. 그 이후 최인호씨는 최고 인기작가이자 청춘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80년대가
이문열의 시대인 것과 같은 의미로 70년대는 최인호의 시대였다. 마침 통기타·생맥주·청
바지, 그리고 장발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기세를 올리면서 최인호씨는 가수 송창식씨와 함
께 그 상징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그가 만끽한 대중의 사랑은 평론가를 비롯한 문학전문가들의 내침을 대가로 삼은
것이었다. 등단 이후 참신한 감수성으로 특히 산업사회 속 도시적 삶의 각박함과 소외, 소통
불능 등을 섬뜩하게 그려내서 기대를 모았던 그는 <별들의 고향> 이후 `본격문학'과는 거
리를 두게 된다. 작가 자신은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지만, 본격문학쪽에서 보자면 재능
있는 한 사람의 작가를 잃은 셈이 된다.
“당신은 참 좋은 작가였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작가가 되려 한다. 당신
은 우리가 옹호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우리의
입장이 점점 코너에 몰리게 됐다. 그러니 양자 중에 하나를 택일해 달라.”
지난 94년 샘터사에서 새로 나온 <별들의 고향> 앞머리에 쓴 장문의 `작가의 말'에서 최
인호씨가 소개하고 있는 작고 평론가 김현의 말이다. 여기서 `우리'란 창작과비평에 대한 문
학과지성을 가리키거니와, 인용된 김현의 말은 당시의 문단 분위기와 최인호 문학의 방향전
환과 관련해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별들의 고향>에 대해서는 또한 말초적 감각과 감상으로 독자의 비판정신을 마비시켰다
는 참여문학쪽의 비난도 가해졌다. 소설의 연재가 시작된 72년 9월은 저 악명높은 10월유신
이 선포되기 불과 한달여 전이었다.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바깥 사회를 꽁꽁 얼렸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철권통치와 질곡은 이 소설 속 어디에서도 끼어들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것은
가령, 마찬가지로 감각주의적 대중소설로 분류되며 역시 영화로 각색돼 크게 성공한 조해일
씨의 <겨울여자>가 미흡한 대로나마 당시 도시빈민의 실태와 그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
그에 대한 당국의 탄압 등을 그리고 있는 것과 비교될 법한 점이다.
“낮에는 커피를 팔고 밤에는 약간의 아가씨들을 모집해 맥주를 팔고 있는 좁은 홀
안은 침침할 정도로 조명이 어둡고 탁자와 탁자를 가리는 칸막이가 중국집처럼 놓
여져 있어서, 우리들 중 몇몇 짓궂은 축들은 술을 들 생각은 않고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들과 뽀뽀를 나누거나 음담이나를 지나칠 정도로 퍼부어대고 있었던 것이
다.”
경아가 주로 근무했던 맥주홀은 역시 70년대적 문물이다. 전문화·첨단화하는 90년대의
술집 풍경은 그와는 같지 않다. 문오의 단골 맥주홀이있던 서울 무교동은 상업지대로 탈바
꿈했다. 맥주홀의 90년대적 변종은 룸살롱과 카페 따위일 터이다. 이밖에도 스탠드바니 찻집
이니 방석집이니 요정이니 따위가 먹성 좋은 짐승처럼 서울 시 전역을, 아니 서울뿐이 아니
라 삼천리 팔도강산 구석구석을 삼켜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방배동과 신사동의 카페골목처럼 술과, 때로는, 몸을 함께 파는 호스티스들의 직
장이 밀집된 지역은 있다. 그 풍경이야 뻔하다. 낮에는 도시의 여느 골목과 달라 보이지 않
는 그곳은 밤이면 면모를 일신한다. 차라리 그곳은 낮에는 잠들어 있고 밤이 되면 인공조명
과 함께 피어난다. 술과 돈과 향수와 정액 냄새가 어지러운 군무를 추는 곳. 90년대의 경아
들은 더이상 어수룩하지 않다. 투철한 직업의식과 프로 근성, “즐기면서 번다”는 태도가
더이상 낯설지는 않게 된 것이 이즈음의 사정이다. 이것은 진보인가 퇴보인가.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1
조해일의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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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맨얼굴을 보기 위해 머나먼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곳에 가면 깨닫게 된
다. 서울에서 정북방으로 20여㎞ 거리, 휴전선 이북의 원산을 향해 벋어 있는 경원선 국도와
철로가 나란히 지나가는 곳,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주한미군들과 몸 부대끼
며 살아온 도시, 동두천이 그곳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함석헌은 우리 겨레를 `학대받은 계집종'에 빗댄 바
있다. 그의 비유가 여유와 관조의 결과이기는커녕 냉정한 관찰의 산물임을 지나간 역사는
보여준다. 고려 때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에서부터 조선의 그 많은 논개들, 식민지 강점기
의 일본군위안부들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여성들은 겨레의 굴종과 치욕을 온몸으로 감당해
왔다. 게다가 그것은 이민족의 지배에서 해방된 뒤에도 끝나지 않았으니, 오늘날 양공주 또
는 양색시로 불리는 이들이 그를 증거한다. 해방과 함께 이 땅에 들어왔으며, 한국전쟁을 거
치면서 진주를 확고히한 미군들은 이른바 기지촌을 형성시켰고 그것의 첫번째 필요조건은
몸 파는 여자들이었다.
팔려고 내놓은 한국 여자들의 몸뚱어리와 그것을 사고자 하는 미군 병사들의 욕정,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클럽으로 이루어지는 기지촌은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여러 시인
·작가들이 그 세계에 눈을 주었음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시인 장영수·김명인씨가 각기 시
집 <메이비>와 <동두천>에서 혼혈아와 기지촌 풍경을 다루었고, 소설가 천승세씨의 `황구
의 비명'과 윤정모씨의 <고삐> 연작은 양공주 문제를 프리즘 삼아 한미관계의 예속적 본질
을 까발렸다. 최근작으로는 복거일씨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과 윤이나씨의 <베이비>가
기지촌과 양공주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1972년에 발표된 조해일씨의 중편 `아메리카'는 기지촌인 ㄷ읍 ㅂ리의 클럽에 스며든 대
학 중퇴생의 눈에 비친 양공주들의 삶과 죽음을 소묘한다. 군을 제대한 뒤 학교에 복학하는
대신 당숙이 운영하는 클럽의 문지기로 취직한 `나'는 클럽을 드나드는 양공주들과의 성적
인 일락(逸樂)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차츰 ㄷ읍의 사정에 눈을 떠간다.
무책임한 구경꾼이거나 기껏해야 본능에 몸을 맡긴 한 마리의 숫컷으로서만 자신이 몸 담
고 있는 ㅂ리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 변화가 오는 것은 우연히 목격한 양공주의 죽음으로
해서이다. 동거하던 여자를 밤무대 쇼에 나간다는 이유로 목 졸라 죽인 흑인 병사의 범죄를
겪고 그렇게 죽은 양공주의 장례식을 지켜본 그는 양공주들의 자치 조직인 `씀바귀회'를 찾
아가 그들의 실상을 청취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비록 그가 “오늘 내게 그녀들의 춤은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격렬한 거역의 몸짓처럼 보였다”라며 시각의 변모를 토로하지만, 그것의 궁극은 “가
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갈등 내지는 소외관계라는 도식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일 따름이다.
그같은 무력감의 결과일까. 소설의 결말은 홍수의 몫으로 돌아간다. 홍수는 클럽과 골목을
채우고 넘치지만, 기지촌 자체나 그것의 정치경제적 근거를 함께 쓸어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명 구조용 고무보트를 타고 동네 골목에 나타난 미군들은 노약자들을 부대로 대피
시켜 보살피기조차 한다.
그렇다면 미군의 자비와 잔혹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단 말인가. 같은 양공주 문제를 다
룬 천승세씨의 `황구의 비명'이나 윤정모씨의 <고삐> 연작이 미군과 미국에 대한 고발과
거부라는 명쾌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끝을 내버린 `아메리카'
의 성취를 회의하는 시각도 있다. 그에 대해 작가는 “현실에서 명쾌한 매듭이 지어지지 않
는데 소설 속에서만 유독 매듭을 짓는 것도 작위적일 것”이라며 “나는 다만 기지촌과 양
공주들의 실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가 `아메리카'를 비롯한 일련의 기지촌 소설들을 쓰게 된 데에는 부친이 동두천에서
클럽을 경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소설에 나오는 ㄷ읍 ㅂ리는 바로 작가의 부친이 클럽을
경영했던 동두천시 보산동을 가리킨다. 하지만 소설이 쓰여진 뒤 사반세기, 소설 배경으로부
터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96년 여름의 보산동은 소설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사뭇 다르
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산동의 상징이었던 양공주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사정과 관
련이 있다. 한때 3천명 가까이에 이르렀다는 그 여자들은 지금은 겨우 30명 미만에 머물고
있다. 그 여자들이 출입하는 클럽 주인들의 모임인 한국특수관광업협회 동두천지부의 이명
석 지부장(46)은“현재 지부에는 33개 업소가 가입해 있지만, 실제로 영업을 하는 곳은 10여
군데밖에 안 된다”고 밝혔다. 달러의 위력이 현저하게 줄어든 데다 미군들에 대한 주민 감
정이 나빠져서 그들이 전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부대 밖으로 나오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흑인 병사에게 살해당한 동료를 단체로 장례지낸 `씀바귀회'의 모델인
민들레회 역시 회원 수의 격감으로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나마 주말 저녁에나 기지촌 분위기를 낸다는 보산동 골목의 평일 낮은 황구의 혓바닥만
큼이나 늘어져 기신거리고 있었다. 인디언헤드니 맨해튼, 와일드캣, 뉴하우스, 리버티 따위의
영문 이름을 쓴 클럽이나 테일러, 사진관들이 오래 된 영화 세트처럼 꾸며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활기와는 거리가 멀다. 땡볕이 내리쬐는 골목을 한동안 지키고
서 있어도 양공주로 짐작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두세명씩 짝을 지어 어슬렁
거리는 사복 차림의 미군 병사들, 열살 미만의 흑인 혼혈아와 또래의 한국 아이, 무료한 표
정으로 어서 밤과 주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동네 주민들이 골목을 오갈 뿐이다.
소설 속에서 흑인 병사에게 살해당한 양공주의 장례는 동료 양공주들의 집단적인 한풀이
의식과도 같이 치러진다. 소복한 여자들은 미군 부대 정문에서 노제를 지낸 뒤 부대 앞을
흐르는 신천의 다리를 건너 상패동 공동묘지까지 흙먼지 이는 길을 곡을 하며 나아간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졸(卒)한 양공주들은 동두천시 서쪽 상패동 공동묘지
의 한켠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홍주리의 무덤, 면사포 한번 못 써보고' `양춘실의 무
덤, 다음 세상엔 좋은 팔자 타고나기를' `박데비의 묘, 꺾인 꽃도 꽃이랍니다'…. 양공주들의
`경기'가 좋았던 시절만 해도 이런 묘비명이 적힌 나무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었다지만, 지
금은 그렇지가 않다. 돌보는 이 없는 그 여자들의 무덤은 세월과 인정의 풍화작용에 씻기고
무너져 다시금 없을 무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2
신경림의 `농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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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구경꾼이 돌아가
고 난 텅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
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
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
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나
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
를 흔들꺼나” (신경림, `농무' 전문).
신경림(61)씨의 시집 <농무>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 초였다. 월간문학사 간행의 3백부
자비출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집을 자비출판하는 것이야 관례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문제
는 `월간문학사'. 정식 등록조차 돼 있지 않은 이 무허가 유령 출판사의 정체인즉, 한국문인
협회의 기관지인 <월간 문학>과 관련돼 있다.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한 시인은 절친한
지기인 소설가 이문구씨가 편집을 맡고 있던 이 잡지의 명의를 잠시 빌리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농무>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시집은 다음해 시인에게 제1회 만해 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창작과비
평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창비시선'의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창비시선'의 무녀리로서 <농무>는 좁게는 이 기획의 성격을, 넓게는 민족문학 진영의 시
가 나아갈 방향을 어느정도 규정해 주었다. <농무>가 지니는 그같은 규정력은 평론가 유종
호씨에 의해 `선행 시편의 추문화'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바 있다. 이 시집의 어떤 점이 앞선
시들을 한갓 추문(醜聞)으로 만든 것일까?
김수영이나 신동엽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의 한국시를 지배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언어를 번롱(飜弄)하는 모더니즘의 그릇된 작풍이었다. 다수 대중이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떠난 시는 당연히 그 현실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
고, 시와 현실,시와 대중 사이의 괴리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시집 <농무>의 새로움은 내용에 있어서 60년대 농촌의 곤핍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어휘와 문장을 동원했다는 점
으로 크게 구별된다.
“어떡헐거나./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우
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하얗구나.” (`겨울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
나.” (`파장')
신경림씨는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돼 시단에 나왔다.“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로 끝나는 `갈대'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은 앞에서 든 시집 <농
무>의 전반적인 기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시인이 등단 이듬해 초까
지 시를 발표하다가는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65년 말까지 10년 가까이 침묵
을 지켰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때까지 내가 썼던 시들에 대해 회의도 생겼고, `불온한' 독서회에 가담해 있던
차에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이 미칠 파장이 두렵기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농
사도 지어 보고 광산이나 공사장 일도 하고 장사도 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
더라.”
<농무>에 그려진 농민적 삶의 세목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시인이 고향인 충
북 충주를 비롯해 문경·평창·영월·춘천 등지를 떠돌며 보고 겪은 일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농사는 안 되고 세상은 갈수록 힘겨운 씨름 상대로 변해가는데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
은 술에나 취하고 광태(狂態)를 연출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고자 한다. 울분과 절망에 휘둘리
던 농민들은 문득 짐을 꾸려 서울을 향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은 서울은 서울이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죽어 버리자고 복어알
을 구해 온/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산 일번지')
시집 <농무>의 또다른 축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격동이 민초들에게 가한
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모두/싫어졌다”는“대학을 나온 사촌형”, “울분 속에
서 짧은 젊음을 보낸” 죽은 당숙,“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주정을 하는 또다
른 당숙 등이 그 시련을 대변한다.
시집 <농무>의 무대는 시인의 고향인 충주시 노은면 연화리 장터와 보련골, 그리고 충주
시 일대다. 13대 선조 때부터 들어와 살았다는 보련골은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보련산
(764m) 아래의 아주 신씨 집성촌이다. 산과 계곡, 적당한 크기의 들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고장은 구한 말부터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촌이 됐다. 시인의 탄생지인 입장(立場)은 광산
개발에 따라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큰길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이 크지 않은 면소재지
에도 처음으로 4층짜리 연립주택이 세워져 `노은 빌라 분양 개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
에 나부낀다. 보련산의 그 많던 탄광은 오래 전에 폐광돼 보련골은 전형적인 농촌의 면모를
되찾았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그 정경의 어디에서도 30년 전의 울부짖음은 들을 수 없다.
보련산 너머 남한강변의 목계나루는 <농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시인의 또다른 대표시
인 `목계장터'의 무대가 된 곳이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
가분 파는” 방물장수가 앉아 쉬곤 했던 주막은 속절없는 세월에 쫓겨 간 곳이 없다. “민
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를 대신해서는 매점의 산뜻한 파라솔이 성하(盛夏)의 햇볕
을 피해 그늘을 찾아든 길손들을 맞이한다. 폐쇄된 나루 아래쪽에는 지난 73년에 세운 목계
교가 시의 이야기를 과거로, 과거로 밀어내고만 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3
이문열씨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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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열된 세계 제국의 변경인이다.(…)그런 변경에 제국이 가져올 것은 뻔하
다. 그것이 변경의 확대를 위한 것이건, 유지를 위한 것이건, 제국이 가장 힘주어
그 원주민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 적대의 논리다. 결국 당신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와 소비에트로 표상되는 두 제국의 적대 논리
내지 그 변형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당신들이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
체다.”
이문열(48)씨는 장편소설 <변경>으로써 `한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자 한다. 구체
적으로는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의 십수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풍경을 이 소설에 담겠다는 것이다. 전9권으로 완결 예정인 가운데 지금까지 나와 있는 6권
은 60년대 중반까지를 시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한 시대의 총체적 면모를 담기 위해 작가는 명훈, 영희, 인철 3남매를 번갈아가며 초점 화
자로 내세우는 방식을 택한다. 이들 남매는 작가의 앞선 장편 <영웅시대>의 비극적 주인공
이동영의 자녀들이다. 그러니까 <변경>은 <영웅시대>의 뒷얘기에 해당한다. 이문열씨에게
있어 `이걸 위해 나는 쓰기 시작했다'는 글감의 앞토막이 <영웅시대>였다면, <변경>은 그
뒷토막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또한 <영웅시대>가 작가의 아버지 얘기를 다룬 가족사 소설
인 데 비해 <변경>은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자전소설임을 뜻하기도 한다.
<변경>은 작가의 분신인 인철을 주인공 삼은 자전적 성장소설인 동시에, 그 인철이 미적
인 목적을 위해 글을 다루는 장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예술
가소설이기도 하고, 또한 `한 시대의 벽화'를 자임하는 사회소설 또는 세태소설이기도 하다.
전체의 3분의 2 가량만이 출간돼 있는 현재 인철의 성장사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형인 명훈과 누나인 영희의 편력이 더 다채롭고 극적이다. 인철의
성장은 그가 대학생이 되고 젊음의 몸살을 앓게 될 마지막 제3부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그려
질 터이다.
앞의 여섯권에서 보이는 그의 성장은 월북한 좌익을 아버지로 둔 탓에 불안정하고도 곤궁
한 삶을 견뎌야 했던 소년의 그것이다. 그 성장은 그러나 명혜라는 또래의 소녀와 나누는
푸릇한 첫사랑으로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이 채색되는 성장이며, 문학을 향한 치명적 매
혹에 점차로 함몰되는 성장이기도 하다.
작가의 성장사를 다루는 <변경>이 예술가소설적 특성을 내비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가로서 문학에 대한 애증어린 정의를 내리는 것은 그한 예이리라: “이 정체 모를, 허망
한, 그러면서도 언제나 현란한 가치의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고, 늘 패배하면서도 지칠 줄 모
르는 호전성으로 사회의 다른 가치들을 간섭하며, 그래서 항시 고단하고 가끔씩은 피해망상
에까지 시달려야 하는 고약한 일….”
사회소설로서의 <변경>은 명훈과 영희의 동선(動線)을 따라 두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영
희가 산업화의 진행과 더불어 성장한 호스티스 산업을 대변한다면, 명훈이 담당하는 것은 4
·19와 5·16과 같은 커다란 정치적 사건, 주먹세계의 내막, 그리고 농촌의 붕괴 따위다. 특
히 소설의 초반부에서 명훈의 주변에 배치된 두 대학생들을 매개로 다루어지는 4·19에 대
한 묘사는 작가 자신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관심을 끈다.
4·19가 일어나기 전이나 진행중인 한가운데, 그리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나중까지도
줄기차게 등장하는 그에 대한 정의는 `우연히 한 판 잘 맞아떨어진 역사의 복권'이라는 것
이다. 이 정의는 작가의 이념을 대변하는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이념적·계급
적으로 다종다양한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 되풀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자신의
이념을 무리하게 전파하려는 작가의 무의식적 욕망이 소설적 질서와 개연성을 훼손하는 경
우를 여기서 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여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
망을 걱정한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을 의심쩍어하지만 나는 또한 오히려 당신들의
이념 과잉이 못 미덥다.”
훗날 작가가 된 인철의 말에서 보듯 작가 이문열씨는 이념과 전망, 진보 따위에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변경>은 보수적 세계관의 한 전범이자 정점으로서도 의미를 지
닌다. “내 정신은 어렸을 적부터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와 부정 속에 자랐다
”는 구절은 그같은 보수적 세계관이 `아버지 콤플렉스'로 요약되는 가족사적 배경과 무관
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작가의 세계관에 대한 평가를 뒤로 돌린다면 <변경>에서 우선 잡히는 것은 서울에서 밀
양으로, 밀양에서 돌내골로, 돌내골에서 다시 어딘가로 정처없이 떠도는 일가의 슬픈 뒷모습
이다. 좀더 시야를 넓힌다면, 60년대 산업화가 거느린 두개의 그늘, 그러니까 호스티스 산업
으로 일컬어지는 향락업의 대두와 농촌의 피폐에 따른 이농의 문제가 이 소설에서 힘주어
그려지고 있는 것들이다.
“대지는 시들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은성한 제국의 도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뜨겁고 매서운 유혹이여, 채찍이여./사랑하는 이 하나둘 불려가고/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잘 있거라, 내 나고 자란 변경의 산과 들이여./캄캄한 원주민의
밤, 황무(荒無)한 대지를 떠돌던 꿈이여.”
고향 돌내골에서 개간에 매달렸던 명훈이 끝내 상록수의 꿈을 포기하고 돌내골을 떠나면
서 읊은 시의 한구절은 그가 맛본 좌절과 농촌의 아픔을 서투르지만 진솔하게 노래하고 있
다.
소설 속 돌내골은 작가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에서 청송군 진보쪽으로 1㎞ 정
도 나가 있는 선산 일대의 언덕받이다. 작가와 함께 찾은 개간지에는 장마 뒤의 한여름 땡
볕 아래 고추며 담배, 사과·대추나무 따위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푸른 잎사
귀들이 가려 덮고 있는 황토 비탈 어디쯤에선가는 척박한 운명을 갈아엎기라도 하겠다는 듯
하염없이 곡괭이를 내리치는 명훈의 앙다문 입술과 땀에 젖은 얼굴이 보이는 듯도 하다.
“나에게 고향이란 추상적이지 않고 생생한 개념과도 같다. 고향은 나를 앞서 살아
갔던 나의 핏줄들의 경험의 총체로서 때로는 나를 감시도 하고 때로는 격려도 하
는,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기쁨과 행복보다는 고통과 슬픔을 더 많이 가져다 주었을 고향 원리와 개간지를 둘러보며
작가는 사뭇 상기된 표정이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4
전혜린과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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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아니었다.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번역문학가'라고나 할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
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번역서 목록의 일부다. 번역이 아닌 그
자신의 글이라고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인 여자.
근엄한 문학사에서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의 글들
은 이른바 문학적 가치나 문학사적 의미와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사회사적·정신사적 범주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여자를 형성시킨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상처와 폐허였으며, 그 여자가 형성
에 기여한 것은 60년대 한국의 미숙한 실존주의적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50년대 후
반 4년간의 독일 체험이 놓인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 조건에 절망하고 삶의 구체적 세목이
보이는 평범과 비속을 혐오했던,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순간순간을 불꽃처
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여자. 한국이라는 박토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뮌헨의 자유를 호흡하
고자 했으며, 여자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적 성을 지향했던 여자. 인간이라는 육체
적 현존이 아닌 정신과 관념만의 그 어떤 추상적 존재를 열망했던,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마침내는, 좌초했던 여자. 그 여자의 이름 전혜린.
전혜린(1934~65)이 단신으로 독일의 뮌헨에 내린 것은 1955년 가을이었다. 그가 태어난 황
해도 해주와 그가 학교를 다닌 서울은 각각 북조선과 한국으로 갈라져 한바탕 피의 제의를
치른 뒤끝이었다. 분단 한국의 딸 혜린은 또다른 분단국 서독의 남부 도시 뮌헨을 찾았고
대학 근처의 동네 슈바빙에 짐을 풀었다.
“슈바빙은(…)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 그 속에 한번 들어가서 그것을 숨쉬고 그것에 익고
나면 다른 풍토는 권태롭고 위선적이고 딱딱하고 숨막혀서 도저히 못 참게 되는
곳인 것 같다.(…)슈바빙은 한마디로 청춘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
도 적지 않게 바쳐지는, 그러나 젊은 목숨이 황금빛 술처럼 잔에 넘쳐 흐르고 있
는 꿈의 마을, 이것이 슈바빙이 아닐까.”
전혜린에게 있어 4년간의 슈바빙 시절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본질적 삶의 세례를 받
은 시기였으며, 그는 귀국해서 죽기 전까지 `복음'의 전파에 주력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절감한 그가 언제나 그리워한 그의 도시는 뮌헨이요
슈바빙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한국에 대한 혐오와 뮌헨을 향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뿌리뽑힌 사대주의적 지식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
의 전도된 향수에는 그 나름의 내력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벗어나고자 했
던 조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전혜린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삶의 일회성이라는 치명적인 화두를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 “죽음을 씨로서 속에 지닌 과실로의 삶”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것은 전혀 새로
운 발견이나 독창적인 수사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도 소박하고 치기만만해 실없는
웃음마저 깨물게 만드는 성질의 발언이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60년대 한국 사회와, 그 뒤
90년대에 이르도록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절한 천재'의 신화가 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등생으로 성장해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독일 유학을 떠났으며, 오식된 활자, 즉자·대자, 불합리, 자살 따위
실존주의의 용어들을 상용했고,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다니던 사람. 도
저한 페시미스트이자 동시에 순간순간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생의 찬미자. 평
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의 패배자.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경험에서 행복을 느낀 모순의 존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광휘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서른둘 젊은 나이에 맞은 성급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전혜린에게 역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의 차원으로
떨어졌거나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그 가운데에 놓인 당대의 민족적 현실이라는
차원은 생략돼 있다.
전혜린이 이상의 연인처럼 찬미하고 동경해 마지 않았던 슈바빙은 뮌헨 중심가에서 북쪽
으로 벋어나간 레오폴트 거리와 유럽 최대의 도시 공원이라는 엥글리셔 가르텐(영국공원)을
끼고 있는 동네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청 광장 주변과 달리 대학촌인 이 동네의
주인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술집을 찾아드는 젊은 학생들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통해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기림을 받은 숄 남매의 이름을 딴 광
장이 있는 대학본부로부터 북쪽으로 1㎞ 남짓 올라오면 `뮌헨의 자유'라는 근사한 이름의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을 한동안 들어가다 보면 `제에로제'(연꽃)라는
이름의 카페가 나온다. 제에로제는 뮌헨에 상륙한 전혜린이 처음 음식을 사먹어본 뒤 값싸
면서도 양질의 음식, 주인의 친절에 반해 단골로 삼았던 집이다. 지금은 스페인 음식점 겸
술집으로 바뀌었지만 옥호와 외벽만은 전혜린 당시와 다르지 않다. 지난 90년에 이 집을 인
수했다는 주인 엘라디오 페르난데스(45)는 “전혜린의 자취를 좇는 한국 유학생과 관광객들
이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면서 “그뿐 아니라 독일과 세계 각국의 작가와 예술가들도 이
집을 추억하는 글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가게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에로제와 영국공원 사이에는 자그마한 냇물이 흐르고 그 연변에 아마도 전혜린이 세를
들어 살았을 집들이 서 있다. 전혜린이 `포의 어셔가를 연상시킨다'며 끔찍해했던 그 집들은
그러나 그 사이 새로 단장된 듯 안정된 주택가의 면모를 보인다.
주말의 영국공원 호수에는 뱃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백조니 오리니 하는 물짐승들과 함께
떠 있고, 숲 사이로 난 산책로에는 걷거나 자전거 또는 말을 탄 사람들이 오가며, 모처럼 얼
굴을 드러낸 여름 햇볕 아래 젊은 여자들이 벗은 몸을 태우는데, 가까운 교회에서는 정오의
종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이 평화와 축복의 풍경 속에 녹아들지 못한 채 공원 기슭의
벤치에 홀로 앉아서 유학생 전혜린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조국의 파란 하늘과 맑은 물
을 그리워했을까. 그 그리움 한 방울 눈물로 바뀌어 문득 굴러떨어졌을까.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5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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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
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광고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
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
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64년 겨울 서울의 한 포장마차에서 세 남자가 만난다. 김이라는 성을 가진 `나'는 사관
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고, 대학원생 `안'은 부잣집 장남으
로 두 사람은 모두 스물다섯살이다. 서른대여섯 돼 보이는 또 다른 사내는 서적 외판원. 처
음에 말문을 튼 안과 `나'는 학력과 처지의 천양지차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과는 겉돌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나중에 합류한 제3의 사나이는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숨지자 그
시신을 병원에 판 뒤 낙담과 죄책감으로 시체 판 돈을 다 써버리자고 스물다섯살짜리들을
유혹한다. 억지로 돈을 쓰러 돌아다니던 세사람은 불자동차 뒤를 쫓아가 불구경을 하는데,
상처한 사나이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남은 돈을 던져버린다. 세사람은 그날 밤 같은 여관
의 서로 다른 방에 투숙하며, 다음날 이른 아침 상처한 사나이가 밤사이 자살한 것을 알게
된 두 젊은이는 몰래 여관을 빠져나와 기약없이 헤어진다….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쓴 것일까. 젊어서 이미 늙은
것들의 말장난 같은 대화와 상처한 중년의 자살로 채워진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 그것도
한국 소설사에 우뚝한 작품이 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제목을 `서
울 1964년 겨울'이라 단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1964년 겨울로 돌아가 보자.
그해 겨울은 추웠다.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나선 군사정부에 의해 패퇴했다. 4
·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을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소장. 그를 상대로 한 싸움
을 별러왔던 학생들의 반격이 6·3사태로 불리는 64년 여름의 용틀임이었다. 그 용틀임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제 학생들에게 남은 것은 개인 차원의 사소한 실천뿐이었다. 그것은 또
한 재래적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단자(單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포장마차에서 만난 세 남자는 사회이면서도 사회가 아닌 독특한
동아리를 이룬다. 그들은 포장마차라는 동일한 공간에 각자 술을 마시러 왔다는 공통점으로
묶이지만, 그것이 어떤 유의미한 공동체의 형성에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세사람은 각자의 고
독과 상처로 자은 고치 속에 웅크리고 틀어앉아 있을 뿐 고치 밖의 세계로 나올 염을 내지
못한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는 지문은 그들이
함께 그러나 따로 든 여관방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모두가 몸 부리어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김승옥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개인의 발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
까지의 한국 소설은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개인의 존재에 눈뜨지 못했었다. 소설이 개인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 개인은 공동체의 역사와 현실에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사이비 개인이었
다.
김승옥 소설은 또한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감수성으로써 두드러진다. 혁명
으로까지 일컬어지는 그 감수성은 사물에 대한 상투적인 인식을 거부하고 익숙한 것들을 새
로운 눈으로 봄으로써 결국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게 된다. `무진기행' 중 안
개를 묘사한 저 유명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김승옥씨의 소설들이 발아하고 무르익은 곳은 작가가 다니던 서울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
일대였다. 작가에게 서울은 전쟁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폐허 같은 도시였다. 서울 토박이라
고는 구렁이 같은 복덕방 영감과 앙칼진 목소리의 셋방 주인 아주머니 정도일 뿐 나머지 서
울 주민은 월남 피난민들과 자식들 교육을 위해 상경한 이농민들이었다. 이들이 얽히고 설
켜 생존을 위한 악다구니를 펼치는 살풍경이 서울의 모습이었다.
“파괴의 폐허 위에서 새로 시작되는 한국, 특히 서울에 대한 관심은 내 소설의 테
마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처럼 작가로서 흥미로운 도시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에게 서울이란 평생 그물을 던져도 고갈되지 않는 황금어장과도 같다.”
60년대의 서울이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었고(`서울 1964년 겨울'), 70년대의 서울은
이상문학상을 주었다(`서울의 달빛 0장'). 그렇다면 96년 여름의 서울 하고도 동숭동 마로니
에 공원과 대학로는?
1996년 여름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늦은 오후의 그곳은
저마다 세상으로 열린 숨구멍이라도 된다는 듯 허리께에 호출기를 찬 젊은이들로 채워진다.
관악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서울대가 있던 마로니에 공원이 그들의 주요 집결지다. 이 거리
의 명물인 아마추어 화가들과 가수들, 엔비에이(NBA)의 환상을 사고 〔買〕 또 사는〔生〕
아이들, 새 상품 홍보를 위해 목걸이 볼펜을 나누어주는 언니들, 다른 대책이 서지 않아 하
릴없이 앉아 있는 연인들, 나름으로는 이곳의 터줏대감인 몇몇 알콜중독자들, 아이스크림 장
수, 외국에서 산 장신구와 기념품을 늘어놓고 여행경비를 마련하려는 외국인 배낭여행자….
이들은 무책임한 구경꾼이자 스스로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즐기며 96년 여름 서울의
대학로를 수놓고 있다.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가가 90년대 소설에 관해 말한다.
“언어에 관한 자의식이 강해졌다는 것은 장점이다. 반대로, 싸워야 할 적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는 것은 단점이다. 개조를 위한 욕구와 절규가 보이지 않는다.”
알다시피 그는 결코 민중문학론자도 실천으로서의 문학의 신봉자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는 4·19와 6·3을― 그 성취와 좌절, 영광과 수치까지를 포함해 ―청춘의 훈장으로 간직
한 전투의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6
김수영과 4.19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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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민주주의의 첫 기둥
을 세우고/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기념탑을 세우자/아아 어서어서 썩어빠
진 어제와 결별하자”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첫 연).
김수영(1921~68)의 이 시는 그의 가장 좋은 시도 아니며 4·19를 노래한 가장 빼어난 시
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1960년 4월26일 이른 아침에 쓴 이 시는 4·19의 순수 절정의
순간을 직접 호흡하고 있다는 미덕을 안고 있다. 이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사의 표명은 2
백명 가까운 젊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갈구하던 바의 최대치는 아니더라도
그 최소치에는 가까웠던 것이다.
1960년 3월15일의 제5대 정부통령선거는 `국부' 이승만의 본질과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
낼 기회와도 같았다. 노욕과 망상으로 똘똘 뭉친 우남이 입 안의 혀 같은 이기붕을 부통령
에 당선시키고자 저지른 미증유의 선거부정은 당장 그날로부터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다. 마산에서 터져 나온 항의시위는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그보다는 그날
실종된 한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그였
다.
김주열의 주검에 다시 십여명의 사상자로 대답한 마산의 2차 시위는 남한 전역으로 들불
처럼 번져나간다. 4월18일 고려대학생 3천여명이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에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건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19일 성난 학생과 시민들은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치달아 독재타도를
외쳤으며 경찰은 발포로써 응답했다.
비상계엄령이라는 채찍과 자유당 총재직 사임이라는 당근으로써도 우남은 돌아선 민심을
되잡을 수 없었다. 4월25일 대학교수단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
리로 나섰을 때 그의 운명의 나침반은 이미 하와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남에게는 정치적·인간적 실패, 나아가 역사적 죽음으로까지 다가왔을 4·19는 한국문
학으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것은 4·19가 열어놓은 해방의 공간이 자유로운
문학적 표현을 가능케 했다는 의미와, 4·19 자체가 두고두고 한국문학의 가물지 않는 수원
(水源)이 됐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시에 있어서 4·19의 적자는 김수영과 신동엽이었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에서 “껍
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
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며 4월혁명을 동학혁명에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면
서도 그 성과와 한계,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가리고자 했다.
김수영에게 있어 4월혁명은 시세계의 전면적인 변모를 가져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50년
대를 철저한 모더니스트로 통과한 김수영은 1960년 4월19일을 기점으로 해서 참여적인 사실
주의 시인으로 변모한다. 앞서 인용한 시를 비롯해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
`만시지탄은 있지만' `그 방을 생각하며' 등 4·19를 직접 다룬 일련의 시편들은 물론, `가
다오 나가다오' `거대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사랑의 변주곡' 등 현실의 치부를
구체적이면서도 신랄하게 까발린 시들이 직·간접적으로 4·19의 영향 아래 쓰여졌다.
그리고 그같은 변모의 궁극은 뜻밖의 교통사고로 숨지기 불과 보름 전에 토해놓은 절창 `
풀'이었다. 산문투의 장광설과 거칠것 없는 발성으로 특징지어지던 김수영 시세계의 또한번
의 변모를 예감케 하는 이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는 사실은 한국문학사의 안타까움
이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
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
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
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전문).
4·19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 들어선 것은 자유당과 별다를 것도
없는 민주당 정부였다. 그나마도 1년 뒤에는 박정희 소장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4·19
의 이념은 철저히 능욕당했다. 그런 점에서 4·19는 미완의 혁명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도 계속 진행중인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작가 김승옥씨가 70년대 초 월간 <샘터>에 발표한 짧은 이야기에 `정직한 이들의 달'이
있다. 바로 4월19일 경무대 앞에서 총상을 입고 그날 밤 수도육군병원에서 숨을 거둔 서울
문리대 수학과 학생 김치호의 마지막을 그린 것이다. 김치호가 말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어요. 부정한 짓을 하면 안 된다구. 그래서 선거를 부정으로 한
사람들에게 선거를 공정하게 다시 하라구 말했어요.(…)학교 교과서가 주동자예요. 부
정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부정이라고 가르치는 교과서가!”
그 김치호는 지금 서울 수유리 북한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4·19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다른 많은 교과서주의자들과 함께.
4·19 묘지는 혁명 이태 뒤인 1963년 현재의 위치에 조성됐으며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국
립묘지로 새단장했다. 평일 오후의 4·19 묘지는 참배객이 드문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온 젊은 엄마들, 근처 국립재활원의 환자들, 노인들, 연인들,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비둘기들로 채워져 여느 시민공원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을 보면서 생각한다. 4·19가 추구했던 정신과 이념은 이 묘역의 어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일까. 제가 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일까, 청장년의 나이로 4·19를
겪었을, 그러나 이제는 다만 무력한 삶의 구경꾼으로 가라앉아 있는 노인들일까. 아니면 유
영봉안소니 만장이니 수호자상이니 수호예찬의비니 하는 각종 시설물일까. 4·19는 성소에
서 기림을 받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 한정된 넓이의 묘역에 갇혀서 숨막혀 있는 것은 아
닐까.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7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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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5㎞ 남짓 떨어진 경남 산청군 삼장면 상내원리.
1963년 11월12일 새벽 어둠이 몇 발의 불길한 총성에 찢기며 진저리를 쳤다. 지리산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빨치산 2명 중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총상을 입고 생포된 것이었다. 신
문들은 `망실공비(亡失共匪)'를 잡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정작 빨치산이 우리 역사로부터 망실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아마도 1955
년 4월1일 지리산에 대한 입산통제가 해제된 때를 그 시점으로 잡을 수도 있으리라. 휴전협
정이 체결된 지 2년이 가깝도록 전투지역으로 취급받아온 지리산이 마침내 전란의 허울을
벗게 된 그 순간에도 남한 전역에는 59명의 빨치산이 남아 있는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
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남쪽 체제를 위협하지도 북의 혁명노선을 부추기지도 못하는 채
하루하루의 생존에 절대의 가치를 두고 있었다.
남쪽 체제에 대한 저항을 존재이유로 삼았으되 종내는 북의 권력자들로부터도 버림받은
빨치산은 한국 현대사가 낳은 가장 큰 모순과 비극의 담지자들이라 할 만하다. 당연히 그들
은 수다한 시인·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했음직 하다. 한국문학에서 빨치산의 형상
화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신동엽(1930~69)의 시 `진달래 산천'을 단순하게 빨치산 시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
를지도 모른다. 제목에서나 12연 49행의 이 시 전체를 통틀어서도 명백히 빨치산을 가리키
는 단어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암시적·간접적으로 심어 놓은 몇몇 시적
장치들을 뜯어 보면 이 시의 주인공을 빨치산으로 상정하는 데 그리 무리는 없어 보인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모서리엔/이름 모를 나비 하나/머물고 있었
어요.//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당신은/잠이 들었죠.”
시의 첫 두 연은 자못 평화로운 봄 풍경이다. 비록 장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버
려 던져져 있으므로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진달래꽃 피어 있고 나비 한 마리
앉아 있으며 사람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를 구가할 수만은 없는 엄연한 전시라
는 사실을 시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6, 7연이 알려준다.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발목을/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꽃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온종일/탄환을 퍼부었지요.”
이어지는 8, 9연은 잠의 평화와 그것을 깨뜨리는 전쟁의 심술 사이의 선연한 대비이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그늘 밑엔/얼굴 고운 사람 하나/서늘히 잠들
어 있었어요.//꽃다운 산골 비행기가/지나다/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리더군요.”
마지막 연에서 평화와 전쟁 사이의 싸움은 결국 전쟁쪽의 승리로 돌아간다.
“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당신은 피/흘리고 있었어요.”
이 시를 굳이 빨치산 시로 읽을 만한 근거란 무엇일까? 4연과 5연을 보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남햇가,/두고 온
마을에선/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당신은 쓸쓸히 웃었지
요.”
비록 명백한 진술은 아니지만, `기다림에 지쳐 산으로 간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야산
대'로 알려진 초기 빨치산을 연상시킨다. 미군정의 남로당 불법화 방침에 쫓겨 산악지대로
숨어든 이들은 소규모의 무장대를 형성했으며, 이들 야산대가 여순사건 이후 입산한 군인
및 민간인들과 합쳐져 이룬 것이 구빨치산이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산을 내려왔던 이들은
인민군의 퇴각 이후 다시금 산으로 쫓겨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만 몰락과 망각의 운명이었다.
`진달래 산천'은 한 꽃다운 젊은이의 죽음을 통해 몰락의 길에 들어선 빨치산들의 비극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 시는 경어체의 공손한 어투와 전쟁이라는 공손하지 못한 현실, `
잠들다'와 `피흘리다', 꽃·나비와 장총·탄환·기관포, “얼굴 고운 사람”과 빨치산을 보
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차가운 눈 등 여러 갈래의 대비를 시적 구성의 원리로 삼고 있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신동엽은 그
해 3월24일 같은 지면에 `진달래 산천'을 발표한다. 1959년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이념공세
속에 조봉암의 사형집행으로 마감된 진보당 사건이 정국에 냉기를 끼얹고 있던 연도였다.
비록 간접적이고 우회적일망정 우리 문학사에서 빨치산의 존재에 거의 최초로 눈을 돌린 신
동엽의 선구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 `망실공비'가 `회복'된 지 30여년, 지리산 입산통제가 해제된 뒤로부터는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는 전북 남원군
산내면,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지리산 지구 전적기념관'이 유일하다. 여
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된 반선시설지구를 마주 보는 위치에 지난 79년
세워진 이 기념관에는 `북괴'제인 와이셔츠 팬티 수건 고무신 배낭 방한복 따위의 생활용품
과 일제인 초단파송수신기 망원렌즈 카메라, 그리고 소련제인 권총 기관단총 소총 로케트탄
따위가 남쪽 군경의 전투 및 일상용품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또한 관련사진과 지리산 일
대 작전 모형도 준비돼 있다.
지리산의 상징이자 한라산을 제하고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은 사시사철
배낭을 맨 등반객들로 북적인다. 6월 하순의 천왕봉 가는 길엔 이미 늦은 철쭉마저 모조리
져버린 채 녹음만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장터목 산장에서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지나야 하
는 제석봉 일대는 오는 98년 말까지 자연휴식년에 들어가 있다. 제석봉의 명물 고사목들은
새로 심은 9천주의 구상나무 치수(稚樹)들과 출무성한 야생풀들 속에서 옛 모습을 잃지 않
고 있다.
제석봉의 완만한 구릉을 지나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한동안 타다 보면 어느덧 통천문
(通天門)에 이른다. 깎아지른 벼랑 속으로 난 자그마한 통로다. 철사다리를 타고 문을 지난
뒤 아찔한 바위 벼랑을 힘겹게 오르면 드디어 천왕봉! 사면이 탁 트여 있는 일망무제의 이
바위 봉우리에서는 지리산의 숱한 연봉들과 그 위를 감도는 구름조차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
다. 그 운봉의 어디메쯤 속절없이 스러져간 빨치산들의 염원과 절망이 안쓰러이 떠돌고 있
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도 하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8
고은의 만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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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부여땅 몇 천 리/마한 쉰
네 나라 마을마다/만남이여/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이 오랜 땅에서/서로 헤
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
이여//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고은, <만인보> 서시).
고은(63)씨는 연작시 <만인보(萬人譜)>를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
방에서 구상했다. 그해 5월17일 자정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처와 동시에 체포
된 시인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방에 갇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
국 소리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손바닥만한 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 무덤과 같은 방에서 그의 의식은 옛일의 회고와 추억을 탈출구로 삼았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
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 뒤에야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석방되며 결혼하고 자식을 본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 제1연)고 선동했던 그가 80년 5월
광주를 통과하면서 <만인보>의 세계로 나아간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는, <만인보>에 대한 설명
에서 그의 70년대를 특징짓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찾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보>를 권력에의 투항이나 현실 순응으로 보는 시각 역시 맹목과 단
견으로서 타기되어 마땅하다. 그보다는 싸움의 역사로부터 견딤의 역사로, 화살의 세계관에
서 장강(長江)의 세계관으로 변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가 될 터이다.
실제로 `서시'에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는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대하는 시
인의 관점에 조금치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취해서 소리 지르고 깨부수는 것
말고는 권세도 명예도 누리지 못한 할아버지 고한길을 기리는 노래의 끝 연은 이렇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실컷 배웠으므로/실컷 배웠으므로”.
그런가 하면 시인에게 가갸거겨를 배워준 친구네 집 머슴 대길이는 그가 속한 계급과 무
관하게―혹은 바로 그 계급으로 말미암아― 곧고 바른 인격의 담지자로 그려진다. 봄 산에
올라서도 마을 처녀에게 허튼 시선 한 번 주지 않으며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
단다/남하고 사는 세상인데”라고 말하는 그를 향해서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
지 않았”다. “대길이 아저씨/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
우는 불빛이었지요”라는 진술은 민중적 모범에 대한 시인의 귀의를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로부터 시작한 <만인보>의 여정은 시인의 가족과 친척, 고향 사
람들을 두루 훑은 다음 시인 자신의 편력을 따라서 이 땅 곳곳으로 벋어나가도록 돼 있다.
지난 86년과 88, 89년 세 차례에 걸쳐 한번에 3권씩 모두 9권이 나온 <만인보>의 초반부
는 시인의 유년시절 고향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이모저모를 소묘한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배고파서/하루이틀 꼬박 굶고/물배만 채워/다섯 식구/서로 얼굴 보고 앉았”(`굶는 집')는
궁상과 허기의 삶이지만,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굳은 믿음으로 밝은 빛깔로 채색된
다. 가령 대를 이은 소도둑으로 군산형무소 감방에서 마주치게 된 어느 부자간의 대화를 들
어 보라.
“선득아 너 들어왔냐/예 2년 먹고 나가려고 들어왔어라오/밥 먹을 때 오래오래 씹어먹
어라/예” (`소도둑').
그러나 이처럼 밝고 낙천적인 어조도 한국전쟁기의 끔찍한 나날을 서술할 때에는 별무소
용이 되고 만다.
“인민군 들어와/반강제로 여맹 간부 노릇 하며/찢어진 치마 입고 다니고/여맹 간부 노릇
한 죄목으로/이 사내/저 사내/치안대한테 욕보고 나서/혓바닥 깨물고 죽어버”린 `임영자'나
동네 이사장 구장 이장 다 거치며 존경받다가 이복형제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치안대에 잡
혀와서는 그 치욕을 못 견뎌 우물에 빠져 죽고 만 `김병천', 그리고 “싸락눈 쌀쌀맞은 초겨
울 아리따움”에 공부도 잘해서 “인공 때/여맹 간부였다가/수복 후/어찌어찌 몸 상해버리
고//그 아리따움 일거에 망해버리고/죽음보다도 못하게시리/죽음보다도 못하게시리”의 `조
부희'의 경우는 그 악몽과도 같은 기억의 몇몇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보도연맹 가입자의 학살과 우익 및 지주의 처형, 다시 인공시절 부역자의 처단으로 이어
지는 살육의 악순환은 십대 후반의 소년의 정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마을 주
변의 참호와 방공호 속에서 공산군들에게 학살당하거나 생매장당한 시체를 파내는 일에 동
원됐던 고은태(시인의 본명) 소년은 기어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산과 들을 정처없이 쏘
다니게 된다. “`아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
사로써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시인은 그의 산문집 <1950년대>에서 썼거니와, 자살 시
도와 출가, 환속, 투쟁으로 이어지는 파란과 갱신의 출발점이 바로 그의 50년대였다.
시인의 고향은 현재의 전북 군산시 미룡동. <만인보>에 미제방죽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파유원지와 할미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은태 소년이 학살당한 이들의 주검을
나흘 걸려 파내었던 할미산의 참호는 우거진 관목에 가리기는 했지만 예대로 남아 있다. 그
러나 문둥이만 혼자 살 뿐 인적 하나 없던 저수지 가에는 고층아파트군이 숲을 이루게끔 되
었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건너다 보인다.
시인이 다녔던 미룡초등학교 자리에는 군산대학교가 들어서 있고, 군산중학교를 오가는
길에 <한하운 시초>를 주움으로써 문둥이 시인이 될 꿈을 키웠던 한길은 지금은 왕복 4차
선 도로로 바뀌었다. 시인의 생가는 없어졌지만, 팔순의 어머니는 생가 근처에 홀로 살면서
노년을 즐기고 있다.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겨버린 큰아들을 위해 손수 담근 인삼주를 내오
신 어머니는 “치다 보기도 아깐 내 아들”이라며 황홀해하고, 시인 아들은 그 어머니를 보
며 “늙은 주제에도 싸가지가 있어” 한마디 한다. 이어서는 권커니 잣커니 오가는 술과 노
래…. 미성년의 나이로 출분을 행했던 시인은 한결 귀가 순해져서야 돌아와 어머니이신 고
향을 끌어안는가.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19
이문구의 `관촌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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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
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
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룩― 하는 기러기 울음 소리가 들릴 즈음
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
나고 있었다.”
이문구(55)씨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우리네 마음자리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한국적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것은 사실 유토피아니 무릉도원이니 하는 외국에서 들
어온 언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민족의 정서로써만 표현과 이해가 가능한 정복(淨福)의 두
레공동체일 터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어른의 코골음과 부엉이의 울음과 강아지의 꿈꾸기
가 서로 넘나들며 뒤섞인다.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고 어우러지는 원융과 합일
의 시공간이 그곳이다.
<관촌수필>이 추억하는 풍요와 화평의 세계는 작가의 토속적인 문체에 얹혀 광휘와 윤기
를 더한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보호하고 번식시키는 환경운동가처럼 작가는 겨레의 말글
살이에서 잊히고 묻히게 된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적극 살려내고 있다. 게다가 토종 된장국
과 같은 능청과 해학, 그리고 씀바귀나물처럼 싸름한 비애와 아픔은 한국적 감성의 현을 섬
세하게 건드린다.
<관촌수필>이 그리고 있는 한국적 유토피아의 원형은 그러나 6·25라는 미증유의 비극으
로 처참하게 찢긴다. 특히 작가의 분신인 민구 일가는 아마도 전쟁의 발톱에 가장 혹독하게
할퀴인 집안일 것이다. 남로당 충남 보령군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인근 청양과 서천의 지하
당을 조직, 관할하던 민구의 아버지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며, 겹의 참척을 본 조부
마저 자식들의 뒤를 따르자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작가는 그러나 사태난
죽음들의 구체적 사연을 시시콜콜 주워섬기지는 않는다. 소설의 초점은 그것들을 보듬고 흐
르는 일상에 맞추어져 있다.
“숭헌… 뉘라 양력슬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歷)을 아는 벱여….
” 혀를 끌끌 차는 마지막 이조인(李朝人) 할아버지에게서 아침마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고, 낮이면 펄밭을 뒤져 꽃게를 잡고 고둥을 주우며, 아이다운 장난기와 심술로 장에 온
촌사람들을 놀려 먹기도 하고, 밤이면 개펄 위를 몰려다니는 도깨비불에 마음 졸이다가도,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여우울음에 홀린 듯 어슴새벽 바닷가로 나가 보는 것이 그 일상이
었거니와, 전쟁은 그 가난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고 만다.
가령, 읍내 여관의 종업원으로 취직한 월남 피난민 솔이엄마는 장돌뱅이 서울 사내와 눈
이 맞아 핏덩이를 데리고 밤도망을 놓는다. 그 충격으로 솔이아버지가 목 매달아 자살하고,
두 노인네는 며느리보다는 집안의 대를 이을 손주를 찾을 겸하여 떠돌이 장수로 나선 것은
전쟁이 부린 도깨비 심술의 전형적인 사례로 된다.
전쟁이 바꾸어버린 팔자의 주인으로 민구네 집 부엌데기 옹점이를 빼놓을 수 없다. 덜렁
대기는 하지만 당차고 속이 깊은 데다 인정 많고 쾌활했던 옹점이는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나간 남편이 죽자 시집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장터의 약장수 패거리를 따라다
니며 노래를 부르는 신세로 영락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죽
마다 눈물 고였다….” 결혼하기 전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부지깽이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
부를 때 옹점이는 자신의 운명이 노랫말이 가리키는 길을 따르게 되리라 짐작이나 할 수 있
었을까.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1972년에서 77년까지 발표된 <관촌수필> 연작의 첫편인 `일락서산(日落西山)'의 한 대목
에서 작가는 이렇게 탄식한다. 소설의 배경인 작가의 유년기에서 20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거기서 다시 20여 성상이 흘러가버린 90년대 중반의 관촌마을은 앞서의 탄식조차도 사치가
아니면 엄살로 들릴 정도로 변화의 거센 바람에 하릴없이 노출된 모습이다.
95년부터 보령군과 합쳐져 보령시로 불리는 옛 대천시 중심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
는 관촌부락은 이름마저 대관동으로 바뀌어 있다. 작가의 생가 터에는 오래 전에 2층 양옥
이 올라갔고, 주변의 논과 밭 자리에도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서 있다. 돌과 흙을 이겨 쌓은
생가 터의 축담 일부, 그 너머의 낮게 휘어진 소나무와 문전옥답 옆의 은행나무가 유년기의
기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을 닮았다 해서 이름붙은 집 뒤의 칠성바위는 소설이 쓰여질 당시만 해도 “한결
같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들을 지키고 있었”지만, 근처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지어지던 어느
땐가 사라져 없어졌다. 작가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바위들은 고인돌이었던 듯하다”
며 “아마도 깨뜨려져 건축 자재로 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가 무엇보다 안타까워하는 것은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았던 수령 4백년 된 팽
나무가 베어진 것이다. 작가의 유년기에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매달아 구르곤 했던 팽나무
는 그 자리에 한창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에 밀려 쓰러졌다. 95년 가을 마을 입구에 세워진
<관촌수필> 안내비의“서쪽 언덕 위의 마을 처녀들이 그네를 뛰던 팽나무는 아직 남아 있
다”는 명문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마을 뒷편의 부엉재와 그 아래의 솔수펑은 여전하지만,
마을과 바다 사이에 자리잡은 드넓은 개펄은 바둑판 모양의 농토로 바뀌었고 그중 일부는
다시 운전연습장이니 식당이니로 야금야금 변신하는 중이다.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초·중반에 남로당 아버지의 얘기를 소설로 쓴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세월은 변함없이 흘러 지난 93년에는 <관촌수필>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있는 대천
·보령 지역에서 드라마가 일대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화제와 소란 속에서 작가 역
시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 하나를 품어보았다. 소설 속 민구의 첫사랑이었던 옹점이가 드라
마를 보고 혹 연락을 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
아 숱한 방랑과 고생 끝에 일찍 죽은거나 아닌지…”라며 말끝을 흐리는 작가의 눈에 얼핏
물기가 서렸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0
최인훈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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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폐허 위로 비가 내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쟁의 종결과 함께 용도폐기된, 그리
하여 이제는 다만 아픈 기억의 처소로서만 남아 있는 이 시멘트 구조물의 잔해들은 5월의
비에 속절없이 젖고 있다. 비는 내려서, 지붕 없는 경비대장 막사의 채색 벽화를 적시고, 무
도장의 시멘트 바닥을 흐르다가 틈새를 만나서는 슬쩍 스며들기도 하고, 채 스미지 못한 것
들은 경비중대본부의 바닥에 처연히 고여 있기도 하다. 비는 내린다. 40년 저쪽의 먹빛 구름
으로부터 막막한 세월의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시멘트로 굳어버린 기억의 땅을 두드린다.
비는 내린다. 땅은 젖는다. 풀은 자란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
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전쟁은 끝났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 의해 시작
된 한국전쟁은 북조선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1953년 7월27일을 기해
무기한 휴지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남북 양쪽은 전쟁기간 동안 잡아두고 있던 포로들을 교
환했다. 교환하되 포로들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남과 북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이 아니면 북, 북이 아니면 남이라는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나라를
택한 이들이 있었다. 최인훈(60)씨의 소설 <광장>에서 인용한 위의 대목은 판문점에서 있었
던 송환심사에 나간 주인공 이명준이 공산군 장교와 나눈, 그리고 국군 장교와 나누는 것으
로 상상하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명준은 왜 중립국을 택했나? 그에게 중립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꿔 말해서 그에게
남과 북은 무엇이었나를 묻는 일이며, 문제적 소설 <광장>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는 질문이
기도 하다.
해방된 조국의 남쪽에서 대학을 다니던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 방송 시간에 나온
일로 해서 경찰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한 뒤 떠밀리듯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인민의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 그곳에서 정작
인민들은 가슴 편 주인이기는커녕 주눅든 양떼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적 존
엄성을 짓밟는 남한과 인민대중에게서 역사의 주체 자리를 빼앗은 북조선. 20세기 중반 한
반도의 남과 북에 나타난 이 못난이 형제들에 관한 작가의 비판적 사유는 밀실과 광장이라
는 독특한 비유에 얹혀 전개된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
부터, 괴로움은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
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장을 찾아 월북했지만 그곳에서도 꿈꾸던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 명준은 대신 무용수 은
혜를 만나 그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으로 절망과 허무를 이기고자 한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
리라.”
은혜가 모스크바 공연을 떠난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명준은 전세가 기울어가는 낙동강 전
선에 투입된다. 스스로 명분을 찾지 못하는 전쟁에 회의하던 명준은 그곳에서 우연히 간호
병으로 나온 은혜와 재회하며 두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 절망적인 사랑을 불태운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라던 명준은, 그 은혜마저 뱃속에 새
생명을 품은 채 전사하고 말자 더이상 버틸 힘을 잃는다. 그가 인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남
지나해의 검은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은 그 때문이다. 명준이 탄 배를 좇아온 두 마리 갈매기
에 촉발된 그 투신은 그러나 죽음에의 투항이 아니라 사랑에의 귀의로 승화된다.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
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4·19가 일어난 지 6개월 뒤인 1960년 10월에 발표된 <광장>은 4월혁명의 문학적 적자라
이를 만했다. 동리 류의 무시간적 토속성이 아니면 장용학의 관념과잉, 또는 손창섭의 자연
주의적 현실비판의 지배 아래 있던 당시 소설 풍토에서 지적 깊이와 세련된 감각을 아울러
갖춘 <광장>의 출현은 문학에서의 4월혁명과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북진통일론만을 인정하
던 지배 이데올로기의 틀을 벗어나 남과 북의 체제를 비교적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은 `혁명'이 열어놓은 자유의 숨구멍으로 해서 가능했었다. 물론, 작가가 밀실과 광장이
라는 개념을 먼저 상정한 다음 남과 북의 현실을 그에 꿰어맞추었다는 식의 비판으로부터
무한정 자유롭지는 않지만, <광장>이 거둔 성과는 그같은 비판의 날을 한결 무디게 한다.
전쟁이 끝난 지 43년. 거제도에는 포로들의 경비를 맡았던 국군과 미군의 경비막사와 보
급창고, 탄약고 따위의 흔적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뿐 애초에 천막으로 지어졌던 수용소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주민들이 살던 집과 논밭을 징발해 수천개의 천막을 세웠던
자리에는 전보다 더 많은 주택과 건물이 논밭을 거느리고 들어서 있다. 거제시 신현읍 고현
리의 경비막사 등 유적 옆에 지난 93년 콘센트로 세워진 `거제포로수용소유적관'이 당시의
유물과 사진 등을 보여주지만, 하루 평균 8백여명에 이른다는 관람객의 숫자를 생각하면 초
라하기만 한 규모다.
자욱한 비안개에 감싸인 고현항을 부산행 쾌속선 엔젤호에 실려 떠나온다. 이명준의 천사
는 말할 것도 없이 은혜와 그의 딸이었다. 두 마리의 갈매기로 환생한 그 천사들이 인도행
타고르호의 선상에서 명준의 몸뚱이를, 그의 파산한 관념을, 역사와 민족에 대한 가없는 절
망을, 한반도적 실존의 버거움을 저 남지나해의 아득깜깜한 심연 속으로 끌어내렸으리라. 역
사의 미아 이명준. 그는 그 깊은 바닷속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발견했을까. 밀실을 허락하
는 광장, 그리고 광장을 향해 열려 있는 밀실을 찾았을까. 아니, 그는 그렇다 치고 정작 뒤
에 남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밀실인가 광장인가. 그것은 혹 성욕뿐의 밀실과
싸구려 쇼의 무대만도 못한 광장으로 양극화한 것은 아닐까.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1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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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아롱대는 봄 들이다. 황토색 논과 밭은 또 한 해의 농사를 위해 일제히 갈아엎
어져 있고, 곳곳의 틈바귀마다에는 스스로 아름다운 봄꽃들이 자랑처럼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 있다. 팔뚝을 걷어부치거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들판 이곳저곳에
서 허리를 굽힌 채 일에 열중이고, 널찍한 들길로는 트랙터며 트럭이 오고 간다. 이 분주하
고도 평화로운 풍경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으며 선회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북성리 758 OP(관측소)에 설치된 망원경에 잡힌 이 광경은 임
진강과 합수해 서해로 흘러드는 폭 2㎞의 한강 하구 너머로 보이는 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
면 일대의 것이다. 발돋움하고 손을 내밀면 그만 손끝에 잡힐 것처럼이나 가깝게 보이는 이
한 폭 풍경화는 그러나 인간의 수치로 계량할 수 없는 아득한 분단의 강물 너머에서 꺼질
듯 가물대고 있다. 첫눈에 평화와 풍요의 훈김을 내뿜던 그 풍경은 그곳이 북한 땅이라는
인식이 개입하자 기아와 폭동 따위 살벌한 단어들로 덧씌워지고 만다.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이 헐벗은 야산들과 `주체조선' `반미' 등의 구호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한반도적 초현
실성으로 무장한 이 모든 풍경에 눈을 주던 작가 박완서(65)씨는 “반세기 동안이나 가지
못한 고향땅이 이토록 지척에 보인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고 말했다.
박완서씨의 고향은 개풍군 청교면 박적골. 강 건너편 기슭에서 8㎞ 정도 들어간 마을이다.
관측소 관할 장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그래요. 예전에는 개풍에서 강화까지 친
척들을 찾거나 일을 보느라 걸어다니기도 했죠. 조오기 당두포리 나루에서 이쪽으로 배를
건너는 것말고는…”이라며 사뭇 상기된 표정을 짓는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
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
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
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박완서씨의 자전적 연작 `엄마의 말뚝·2'에서 어머니가 가루로 변한 오빠의 유체를 들고
와 강물에 뿌리던 곳이 이 어름이었을 것이다. 남달리 똑똑하고 심성 또한 무던하여 알토란
같았던 외아들이 전쟁의 와중에 개죽음을 당하고 난 뒤 그 혼백이나마 고향땅으로 흘러가도
록 물가에 나와 뼛가루를 날리는 어미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한 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 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엄마의 말뚝' 연작은 모두 세 편으로 되어 있다. 연작의 첫편은 향리인 박적골에서 하찮
은 복통으로 남편을 여읜 어머니가 어린 오누이와 함꼐 서울로 출분해서부터 억척과 의지로
마침내 집 한 채를 마련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애초에 고향을 떠날 때의 거창한
포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대문 밖 현저동(지금의 무악동) 산꼭대기에 여섯칸짜리 누옥을
장만한 어머니는 무량한 감개를 이렇게 토로한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작가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엄마의 말뚝·2'는 이 연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쟁
과 오빠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해방 뒤 한때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오빠는 삼팔선을
넘어 물밀듯이 남진해온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이웃의 고발로 끌려가서는 의
용군으로 입대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9·28 수복에 이어 다시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
한 1·4 후퇴가 시작될 즈음 육신과 정신이 다같이 망가진 오빠가 “흉몽처럼” 돌아온다.
시민증이 없는 오빠 때문에 남들의 피난대열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민군의 재입성
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도 없던 일가는 예전에 살던 현저동 산꼭대기의 한 집을 피난처로 정
해 틀어박혔으나, 오빠는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돼 죽임을 당한다. 소설은 40년 가까이 애써
덮어두고 있던 그 끔찍한 기억이 수술을 위한 마취의 부작용으로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곱다
시 되살아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연작의 마지막 편은 이 마취 사건 뒤로도 7년을 더 살
다 간 어머니가 아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돼 강물에 뿌려지길 바랐던 당신의 소망과는 달리
서울 근교의 공원 묘지에 묻히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명민하고 헌칠하여 어릴적 영웅이었던 오빠를 앗아간 전쟁의 악의(惡意)라는 모티브는 박
완서 소설의 가장 커다란 화두가 됐다. 이미 등단작인 장편 <나목>에서부터 변형된 형태로
오빠의 죽음을 다루었던 작가는 그 뒤 `부처님 근처'와 `카메라와 워커'를 비롯한 단편들,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장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 줄기차게 동일한 모티브
를 반복, 변주하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 생때 같은 청년의 죽음이 한 가족의 아
픔과 고난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 전체의 비극을 대표하게 되기 때문이다.
솔권하여 서울로 온 작가의 어머니가 마당이 세모꼴이라서 괴불마당집이라 불린 여섯칸짜
리 집을 마련한 현저동 산동네는 거센 재개발 바람에 휩쓸려 있다. 대부분의 집들은 이미
철거돼 벽돌과 베니어 합판, 녹슨 철제 캐비닛, 부러진 우산대, 스티로폼 조각 따위로 어지
럽다. 옛 집들이 뭉개진 자리에서는 포클레인이 새롭게 터를 닦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무악 제1구역 세입자대책위원회'가 쇠파이프와 폐타이어를 이용해 세운 감시용 망대가 을
씨년스럽다. `뭉치면 주거 해결 흩어지면 살 곳 없다' `무주택 서민 목 조이는 개발정책 개
혁하라'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는 개발과 정비에 가린 서민들의 아픔을 절규한다. 어
지러운 골목길을 한동안 기웃거린 끝에 마침내 옛 집터를 찾아낸 작가는 “우리 집 앞의 `
부장집'은 아직 남아 있는데 괴불마당집은 이렇게 무너졌네요”라며 무너진 대문 옆 주춧돌
자리쯤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울에서 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길은 곳곳의 도로확장공사 덕분에 평일임에도 극심
한 체증을 빚었다. 마침내 강화대교를 건너서는 강화 읍내를 지나 북쪽으로 채 10분을 못
가서 송해면 당산리 호박골 민통선 검문소를 만난다. 이곳은 철원과는 달리 민통선 안쪽에
도 자연부락들이 산재해 있으며 군내 버스도 수시로 검문소를 들락거린다. 그렇더라도 인마
와 탈것의 진행은 북쪽 해안의 철책선 너머로는 더 이어지지 못한다. 물 위를 건널 배가 없
어서가 아니다. 분단의 부자연을 깨칠 가슴이 없음이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2
조정래의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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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
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
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
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
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
이다.”
조정래(53)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남겨 놓은 흔적으로부터 시
작한다. 소설의 시점(始點)이 되는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제주 4·3항쟁 진
압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으며,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
·10총선거 저지를 목표로 내걸었었다. 이승만에 의한 단정수립 기도가 일본의 패망 이후
38선 이남과 이북에 각기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현상고착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 동족상잔과 분단 고착화로 이어지는 여순사건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2백자 원고지로 1만6천5백장에 이르는 장강과도 같은 길이의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은 제석산 아래 자락에 자리잡은 현 부자네 제각 부근이다. 당으로부터 지역의 거점 확
보를 명령받은 정하섭이 그 대상으로 새끼무당 소화를 설정하고 제각 옆에 있는 소화네 집
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일제 지배 당시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조선인 소작농들을 동원해
20리 벌교 포구를 따라 제방을 쌓아 조성한 중도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세워진
제각은 한옥을 기본틀로 삼되 구석구석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이다. 가령
마루는 조선식에 천장은 일본식이고 툇마루를 타고 돌아가면 본채와 붙어 있는 변소에 이를
수 있으며, 기와지붕 아래 처마에는 벚꽃 무늬를 단청으로 새겨 넣는 식이다. 이 집을 지은
지주는 또한 큰길에서 제각에 이르는 소로 양옆으로는 벚꽃나무를 심었으며 집 앞 마당에는
일본식 연못이 있는 정원을 꾸며놓았으니, 일제 식민당국에 대한 그의 감사의 염을 능히 짐
작할 수 있음이다.
비밀임무의 수행이 주는 긴박감과 청춘남녀의 만남에서 오는 풋풋함이 버무려져 피워내는
착잡한 분위기로부터 시작된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의 끝자락에서부터 전쟁 직후까지 한국
사의 가장 긴박한 한 시기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여기서 총체적이라는 것은 단행본
10권의 방대한 분량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사건 전개를 두루 담았다는 소재의 차
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침내 전쟁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족사의 모순을,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깝다.
<태백산맥>의 총체성을 우선적으로 담보해 주는 것은 이 소설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
는 민족적 비극의 연원을 민족 내부의 사정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분단내인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견해는 그간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민족 자존심의 훼손을 막고자 흔히
동원되었던 논리―한민족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외세의 대리전을 치렀을 뿐이라는―를 정
면에서 반박하고 민족 구성원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땅의 문제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지식인 출신 야산대장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농민 전사 하대치, 회의하는 지식인이지만
역사로부터 끊임없이 선택과 실천을 강요당하는 김범우, 양심적인 국군 장교 심재모, 부패한
우익의 대표자 최익승·최익달, 염상진의 동생인 우익 행동대장 염상구, 손승호, 서민영, 안
창민, 소화와 이지숙, 외서댁, 들몰댁…. 수백명의 등장인물이 엮는 크고 작은 사건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거대한 역사의 양탄자를 짠다. 그 양탄자 위에서 민중의 나날의 삶과 역사라는
이름의 추상은 완벽하게 호응하여 일치를 이룬다.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취를 보장한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라도 방언의 탁
월한 구사이다. 거기다가 걸쭉한 육담과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욕설 등은 민중적 삶의 활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소설의 사실성을 더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 양귀신덜이 들이닥침스로 시상 판세가 위찌 돌아가등가? 코가 석 자나 늘어졌든
지주덜이 새 기운 얻어 되살아나고, 순사질 해묵은 죄 지가 먼첨 알고 뽕빠지게 도망
질혔든 눔덜이 도로 그 자리 차고 앉고, 그 공평허게 일 잘허든 인민위원회럴 공산당
못자리판이라고 몰아때레 사람덜 잡아딜이고, 자네덜도 다 아는 이약 새 날아가는 소
리로 일일이 되짚을 것도 없이, 지대로 잘 돼가는 밥솥얼 엎어뿐 것이 누구냐 그것이
여. 보나마나 그 양코배기덜 아니었드라고?”
최인훈씨의 <광장>이 1960년 4·19의 자식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태백산맥>은 정녕
1980년대의 아들이다. 5·16 이후, 아니 4·19의 꿈같던 한 순간을 제하고는 해방 이후 줄곧
우리 사회를 옥죄어온 우익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80년대를 통틀어 격렬히
용솟음쳤고 그 결과 최소한의 이념적 자유와 균형의 틈이 마련되었거니와, <태백산맥>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한 떨기 민들레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념적 균형을 위한 작가
의 고민이 거꾸로 이념의 역편향이라는 비판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말이다.
<태백산맥>이 비록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긴 하지만 현실의 벌교에는 소설 속 사건이 펼
쳐졌던 이런저런 무대들이 소설과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다. 하대치의 아
버지가 한 뙈기 소작논을 바라 등뼈가 휘도록 돌덩이를 져날라 쌓은 중도방죽, 방죽에서 읍
내로 이어지는 소화다리, 염상구가 읍내 주먹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담력 싸움을 벌였던 철
교, 염상진이 하대치를 시켜 압류한 지주의 쌀을 쌓아 놓았던 횡갯다리, 김범우의 집, 그리
고 염상진의 야산대가 한동안 해방구로 삼았던 율어 등…. 특히 좌우로 첩첩 산줄기들이 벋
어내려오다가 문득 자진해버린 바탕에 적당한 크기의 분지성 들판이 조성된 율어의 지세는
독립성과 안전성이라는 해방구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소설과 현실의 이
런 일치는 작가 자신이 한국전쟁 이후 3년 동안 벌교읍에 살았던 경험의 소산이다.
“해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다루는 대하소설의 무대로 벌교를 삼은 것은 제
가 벌교읍의 골목골목까지도 훤히 안다는 이점말고도 벌교가 겪은 역사가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성을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 인근 벌교읍에서 조계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빨치산의 투쟁 루
트 등이 소설의 배경으로서 적당했기 때문이죠.”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3
현기영의 `순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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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제주는 화사하다. 그 화사함은 노골적인 아부의 말처럼 나그네의 온몸을 간지럽힌
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불과 한시간 미만을 공중에 떠 있으면 이를 수 있는 섬 제
주를 아득한 거리 너머의 땅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닥 자연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좁고도 너른 땅에서 오직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광과 물산은 자못 이국정취까지를 풍
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때문인지 제주공항에 내려서는 나그네들은 평강공주를 지어미로
맞아들이는 바보 온달처럼 벙글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다. 청춘남녀들이 4월을
즐겨 결혼의 철로 삼는 데에는 이 무렵의 제주가 뿜어내는 이런 화사함이 한몫 단단히 거들
고 있을 법하다.
하지만 제주의 4월을 꽃 피는 화사함만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함덕 해수욕장의 은빛
모래사장, 유채꽃 만발한 북촌 마을의 옴팡밭, 물소리도 시원한 서귀포 정방폭포, 성
산 일출봉의 깎아지른 절벽과 그림 같은 해안선, 아니 제주의 관문인 국제공항부터가
겉으로 보이는 화사함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피 흘리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고 있는 것
을.
제주의 4월은 화사함을 구가하는 관광객들의 환성과 상처를 다독이는 내지인들의 한
숨이 교차하며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한라산을 훑어내린 바람에 실린 그 기류는 제
주 해협을 건너 한반도의 심장부로, 다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불어 불어 간다. 가
며 외친다: 내 말 좀 들어줍서; 이 내 원통한 죽음을 제발이지 알아줍서.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에 신고접수된 피해자만도 1만명이 넘으며, 전체적으로 적어도
3만에서 많게는 6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은 제주 4·3사건. 해방의 환희가 분단의 질곡
으로 형질변경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이 사건은 해방공간의 모순과 지향을 축약해 보여줌으
로써 민족사적 전형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또한 사건 발생 후 반세기가 가까워지도록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미루어짐으로써 겨레의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48년 4월3일 새벽 1시 제주 전역에서 무장 게릴라들이 경찰 지서와 우익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4·3의 봉홧불을 지펴올린 주체세력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을 위한 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반대를 거사의 취지로 내세웠다.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
서 풀려난 겨레가 독립국가의 꼴을 갖추기 전에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외세와 그에 빌붙은
분열주의자들은 반분된 땅덩어리나마 제 몫으로 차지하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따라서 단독
선거 반대라는 4·3의 취지는 당시의 정세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족적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4·3은 또한 해방과 더불어 삼팔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에 대한 이 땅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의 표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운형 주도의 건국 준비위원회와 그 후신인 인민공화국
이 독립국가 수립의 채비를 착착 다져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싸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친일파와 민족분열주의자들을 두둔하고 나선 미군정의 처사는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으로서의 그들의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음이다. 게다가 대흉년과 콜레라의 창궐로 인해 민
심이 흉흉해진 제주에서는 그나마 미곡정책 실패와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민
중들의 불만이 포화지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3월1일 제주 읍내 관덕
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해 6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은 미군
정 및 경찰과 민중들 사이의 관계를 화해 불능의 차원으로 몰고 감으로써 사실상 4·3의 도
화선 노릇을 했다.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55)씨의 중편 `순이 삼촌'은 30년 동안 묻혀있던 4·3의 진실을
거의 최초로 공론화한 문제적 소설이다. 비록 이 소설로 인해 작가 자신은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책도 발매 금지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이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역
사적 의의는 그로 인해 더한층 막중해졌다.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맞추어 고향인 제주 서촌 마을에 내려간 `나'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은 30년 전 향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통해 4·3의 아픈 역사를 고발
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한 순이(順伊) 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부른다)은 30년 전의 학살 현장에 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인물이지만, 평생 그 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떨쳐버리
지 못하다가 그예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
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소설 `순이 삼촌'은 48년 음력 섣달 19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
사건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이날 아침 이 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자 군인 2개 소대 병력이 마을로 들이닥쳐 3백여동의 가옥을 불태우고 수백명
의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마을의 남정네들이 군·경에 학살당하거나 토벌대를 피해 입산함
으로써 여자만 남게 되어 한동안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한 북촌은 함덕 해수욕장
과 지척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제주 마을이다.
검은 돌담과 샛노란 유채꽃, 기와지붕 가녘의 흰색 테두리와 옥빛 바닷물이 현란한 색채
의 잔치를 연출하는 이 마을에서 반세기 전의 비명과 유혈을 떠올리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
나 일주도로변의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은 어김없이 그날 마을사람들을 소집한 군대가 학살
대상자를 정하기 위해 군·경 가족을 가려내던 그 장소요, 웃자란 마늘 줄기들로 시퍼런 학
교 뒤 옴팡밭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던 바로 그 학살터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내 상상 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년 전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북촌이 비록 현기영씨의 고향은 아니지만, 소설 속 `나'의 목소리를 작가 현씨 자신의 것
으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바람에 날려오는 유채꽃의 비릿한 향내에서 죽은 자
들의 시취(屍臭)를 맡고, 화산암의 거무튀튀한 색깔에서는 완벽하게 불타버린 반세기 전 제
주도를 연상하게 된다고 현씨는 말했다.
“작가로서 내가 4·3에만 매달리는 것은 편협한 지방주의 때문이 아니라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문학적 전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에 응축되어 있는 민
족적·민중적 모순을 통해 보편성에의 요구에 응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4
이태준의 `해방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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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
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 `그날이 오면' 첫연).
소설 <상록수>의 저자이기도 한 심훈(1901~36)의 시 `그날이 오면'은 일제 통치의 전기간
을 통틀어 조국 해방에의 의지를 가장 절절하게 노래한 시편에 속한다. 3·1운동에 참가했
다가 옥살이를 겪고 일시적일망정 상하이로 망명까지 했던 그의 이력은 이 시의 진정성과
절박함을 담보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주제의 선명함을 미학적 고려에 앞세우는 데서도 느낄
수 있는 그 절박함은 역으로 `그날'의 요원함에 대한 뼈저린 회한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마침내, 그날은, 왔다. 심훈이 보지 못한, 아니 윤동주와 이육사와 한용운이 끝끝
내 살아서 보지 못한 그날은 늙은 히로히토의 침통한 항복선언과 함께 문득 현실이 되었다.
심훈과 윤동주와 이육사와 한용운은 그날을 만난 기쁨에 죽지 못하고, 죽어서야 그날을 맞
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한으로 남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그날을 맞이한 이들에
게 1945년 8월15일은 새로운 가능성과 의욕의 이름이었다.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민
족의 지배 아래 신음해온 겨레붙이들로서는 이제야말로 누구의 간섭과 훼방도 받음이 없이
제출물로 근대화라는 역사의 신작로를 활보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상허 이태준(1904~?)의 중편 <해방 전후>는 반성과 희망이 교차하는 민족사의 갈림길을
배경으로 작가 자신의 행적과 사유를 기록한 자전소설이자 보고문학이다. 해방 전과 후에
정확히 절반씩의 분량을 할애한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현'은 일본 관헌의 압
력에 못이겨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의 번역에 손을 빌려준 일을 두고 괴로워하다가 강원도
어느 산읍에 처박혀 낚시질 따위로 세월을 기다린다.
이곳에서 그는 향교의 직원(直員)으로 있는 전통 선비 `김직원'을 만나 시국담을 주고받
으며 울분을 나누기도 한다. 일제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서는 의견이 일치했던 두 사람은 그
러나 막상 해방과 함께 그 적이 사라지자 현격한 견해의 차이를 내비친다. 철저한 근왕주의
자인 김직원과 반봉건 근대화론자인 현은 해방 조국의 미래 설계를 놓고 갈라서게 되는 것
이다. 새 나라의 국체에 관한 견해 차이는 해방정국 최대의 쟁점이었던 신탁통치에 대한 평
가로도 이어진다. 김직원의 완강한 반대 입장을 “비실제적인 환상이나 감상”으로 치부하
면서 신탁통치야말로 “가장 과학적이요 세계사적인 확실한 견해”라고 믿는 현의 생각이
그것을 보여준다.
소설 속의 현이 다름아닌 작가 이태준 자신의 가탁임을 상기할 때, 그가 당시 남로당을
필두로 한 좌파의 노선을 좇아 찬탁 쪽에 섰다는 사실은 마땅한 설명을 기다리는 수수께끼
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에 카프의 계급문학에 반발해 순수문학 그룹인 구인회를 결
성했던 현/이태준이 해방 직후 좌익 문인단체인 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고 이듬해에는
마침내 월북을 택하기에까지 이른 것은 또 어찌된 일일까. 그가 물론 궁극적으로 그를 기다
리고 있을 숙청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소설 속에서 그에 대한 충분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소설 마지막
문단에서 보이는 막연한 희망과 활기가 당시 그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 아직 차나 어딘지 부드러운 벌써 봄바람이다. 현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관
으로 내려왔다. 친구들은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끝나고 이번엔 `전국문학자대회' 준
비로 바쁘고들 있었다.”
이것을 비슷한 무렵에 발표되었고 해방공간이라는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채만
식의 단편 <역려>의 마지막 문장들과 비교해 보자.
“비는 오고. 다음 차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차를 우리는 음산한 정거장에서 민망히 기
다려야 하였다.”
해방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받아 놓고 이태준이 보이는 낙관과 채만식이 내비치는 주저와
회의 사이에는 얼마나 너른 간격이 가로놓여 있는가. 그 두 가지 태도의 차이가 결국 이태
준의 월북과 채만식의 낙향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으리라.
<해방 전후>의 전반부에서 현이 마음의 평화를 찾아 숨어든 곳은 경기도 이천군 안협면,
지금은 휴전선 북쪽이다. 이태준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군 산명리 역시 휴전선 너머에 있으
며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철원군 율이리는 남방한계선 남쪽의 민통선 안에 자리잡고 있다.
상허와 <고향 전후>의 자취를 좇는 여정은 따라서 분단현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
다. 해방기를 그린 소설의 무대가 바로 분단의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해방이 약속했던 기
회와 희망이 거꾸로 분단이라는 위기와 질곡으로 뒤바뀌어 버린 민족사의 역설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휴전선 이남에서 안협과 산명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구철원으로 알려진 민통선
안쪽이다. 옛 철원군 노동당사와 월정리역, 철의 삼각 전망대, 샘통 철새도래지 등이 있는
이 일대는 일반인들로서는 전적관에서 주관하는 안보관광을 신청해야만 둘러볼 수가 있다.
민통선 출입을 관할하는 제5검문소를 지나 불과 1백m 정도만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그 유명
한 노동당사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전쟁의 이빨에 모질게 할퀴여 뼈대만 남은 이 삼층 건물의 벽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다녀
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의 사이사이에 Cpt Stephens, 1SGReese 따위의 미군들 이름이 보이
는가 하면, `서태지 만세'와 `북조선사회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가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당사에서 철새도래지와 옛 철원역터를 지나 월정리역과 철의 삼각지 전망대에 이르는
길의 좌우로는 철원평야의 광활한 논과 밭이 펼쳐진다. 자세히 보면 무너져내린 가옥과 건
물의 흔적이 논과 밭 사이에 숨은 그림처럼 새겨져 있다. 수시로 나타나는 도로봉쇄용 낙석
과 지뢰 주의 표지판을 지나쳐 가던 길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가로막히는데, 그곳이 철의
삼각지 전망대와 월정리역이다.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에 눈을 대면 시야 왼편으로 나타나는 백마고지 너머로 <해방 전
후>의 무대인 안협이 아련히 보이는 듯도 하다. 군인들의 간헐적인 구호와 대남·대북방송
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오는 가운데 외출을 나온 일단의 병사들이 무리지어 기
념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전망대와 역 주변에서는 무력대치의 긴박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어김없는 분단의 현장. 민족의 완전한 해방은 여전히 유예되고 있으
며, 전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5
채만식의 `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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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 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
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 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
채만식(1902~50)의 장편 <탁류>의 뒷부분에서 주인공 초봉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가증스
러운 작태를 연출하는 두 사내를 향해 이렇게 울부짖는다. 허랑방탕한 첫 남편 고태수가 결
혼한 지 열흘 만에 비명에 가던 날 그의 친구인 꼽추 장형보에게 겁간을 당하고서 무작정
상경길에 오른 초봉이는 기찻간에서 만난 아버지의 친구 박제호에게 자신의 몸과 운명을 의
탁한다. 1년 가까운 동거 끝에 초봉이가 아비 모를 딸을 낳을 즈음 초봉이에 대한 정도 식
은 제호가 때마침 나타나 아이에 대한 친권을 주장하는 형보에게 자기들 모녀를 떼버리듯
넘겨주려 하자 순량하기만 한 초봉이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채만식이 1937~8넌 <조선일보>에 연재한 <탁류>는 이처럼 선의를 짓밟으며 비비 꼬여만
가는 한 여인의 운명을 통해 식민지시대 한국사회의 그늘을 조망하려 한 소설이다. 초봉이
의 기구한 삶의 역정과 초봉이 아버지 정주사의 몰락과정,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비참한 처
지는 그 구체적인 실상을 직·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음이다.
`인간기념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의 첫 장은 정주사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소개하는
데 할애된다. 선비의 집 자손으로 한일합방 직후부터 13년 동안 군청 서기로 일한 끝에 퇴
직한 정주사는 선산과 논 몇천평, 집 한 채를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 얼마를 가지고 고향
서천을 떠나 군산으로 솔권하여 온다. 하지만, 이곳이라고 뾰족수가 있을 리 없어 미두(米豆
) 중매점의 사무원을 거쳐 미두꾼으로 나선 그는 이태 만에 밑천을 날려버리고 거렁뱅이나
다름없는 하바꾼으로 전락한다. 채만식이 그 특유의 풍자적 어투로 일컬은 대로 “입만 가
졌지 수족은 없는 사람” 정주사는 미두로 대표되는 식민지 수탈사를 증거하는 `인간기념물
'이라 할 수 있다
.
정주사의 4남매 가운데 첫째인 초봉이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곤궁에서 해방시키는 데 자신
의 젊음과 미모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장사 밑천을 떼어준다는 거짓 약속을 믿고
고태수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초봉이의 모습은 심봉사의 눈을 뜨이겠다는 일념으로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의 효성을 연상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생 계봉이가
“아주 켸켸묵은 생각”으로 폄하하는 초봉이의 봉건적 자기희생의 이데올로기는 훗날 얼마
든지 피할 수도 있는 형보의 사슬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데서 또한번 위력을 발휘한다. 형보
의 등장으로 제호라는 끈이 떨어진데다 말을 듣지 않으면 딸 송희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협박에 닥뜨린 초봉이는 사태를 이렇게 정리한다.
“형보? 좋다, 형보는 말고서 형보보다 더한 놈도 좋다. 원수는 말고 원수보다 더한 것
도 상관없다. 송희만 탈없이 편안하게 기르면 고만이다.”
갖은 학대와 악행을 견디다 못한 그가 결국 형보를 타살하고 살인자의 처지로 영락하는
과정은 그의 시대착오적 봉건 이데올로기와 운명에 대한 소극적 순응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만, 그 한켠에서는 식민체제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읽히는 듯도 하다. 악의로 똘똘 뭉친 형
보를 독초(毒草)에 비유하고 “그것을 가꾸는 `육법전서'에의 울분”을 삼키는 등장인물 승
재의 모습이라든가 “천하에 몹쓸 악당. 그놈을 죽였다구 그게, 그게 죄란 말이냐?”라는 초
봉이의 절규에서 안중근과 이봉창 윤봉길 등의 거사를 연상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면 소박한 휴머니스트라 할 승재의 경우를 살펴 보자. 고아 출신 의사로 갑돌이 갑
순이식 연애의 상대였던 초봉이가 갑작스레 결혼한 뒤 그의 동생 계봉이에게로 마음을 돌린
승재는 가난하고 무지한 동포들을 위해 무료로 의술을 베풀고 야학에 참여하는 등 깜냥껏
애써 보지만, 체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는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계봉이와 나
눈 대화에서는 가난의 원인이 분배의 불평등에 있다는 말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더 깊이있는
인식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한다. 사태의 핵심에 가 닿기 직전에 멈칫거리는 태도에서 검열
의 그림자를 본 것 역시 지나친 것일까.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
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
린다.”
채만식의 당대에 식민 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상징했던 금강 하류는 여전히 흙빛을 머금은
채 서해로 흘러든다. 정주사 일가가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군산을 향해 똑딱선에 올
랐던 장항읍 용당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도선장에서는 지금도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당
두차례씩 군산행 도선이 강을 건넌다.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지금의 군산여고 앞 월
명동 일대에는 그때 지어진 일본식 가옥들이 잘 가꾼 정원수와 함께 남아있어 마치 일본의
한 마을을 재현한 영화 세트와도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가 하면,
“급하게 경사진 언덕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들이, 손바
닥만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듯 다닥다닥 주어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인 것이다.”
숫적으로 절대다수였던 조선인들이 조건도 열악하고 터도 좁은 곳에서 복닥대며 살아야
했던 개복동과 둔율동 일대의 산동네는 초가와 생철이 슬레이트와 기와로 바뀌긴 했지만,
게딱지와 콩나물이긴 매일반인 채로 90년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다. 그 동네 초입의 공중전
화 박스에서 90년대의 초봉이는 생활정보지의 안내를 받아 가며 거푸 전화번호를 눌러 본
다. 갈색으로 부분염색한 머리, 엉덩이를 겨우 가린 똥꼬치마,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부츠,
허리께에서 달랑거리는 앙증맞은 핸드백 차림인 그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곳은 아마도 초원
까페, 사계절단란주점, 귀빈룸싸롱 따위이리라.
군산시 북서쪽 해망동과 신흥동, 월명동을 끼고 있는 월명공원에는 1984년에 세운 `백릉
채만식 선생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탁류>의 머릿글을 앞면에, 채만식의 문학적 업적을
적은 행장기를 뒷면에 새겨넣은 문학비는 물 오른 철쭉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바람도
자고 유난히 햇볕도 따스운 날, 문학비 근처 매점 앞 탁자에는 동네 노인들 서넛이 나와 앉
아 물결처럼 흘러간 지난 생을 되씹고 있는데, 노옹들의 한담을 한 귀로 흘리며, 철쭉이며
벚나무의 새순이 움트는 기색에 귀를 쫑긋거리며 문학비는, 흘러흘러 서해로 잠겨드는 금강
줄기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6
박태원의 `천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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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쪽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중심부를 뚫고 동진
한 다음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틀어 내려가다가는 성동구 사근동과 송정동, 성
수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랑천과 합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성수대교와 동호대교의 어름
이다. 태백시 인근에서 샘솟아 강화 북쪽의 서해로 몸을 풀기까지 5백㎞ 가까운 한강의 흐
름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제2지류인 청계천의 물길은 본
류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본디 이름이 청풍계천(淸風溪川)인 청계천은 그러나 일제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교까지
가 1차로 복개된 데 이어 1958년부터 시작된 여러차례의 복개로 지금은 용두동과 마장동 어
름 이하를 제하고는 정작 물길을 볼 수는 없게 돼 있다. 폭 50m의 아스팔트가 덮이고 그것
도 모자라 삼일 고가도로가 공중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청계천에서 `맑은 개울'이라는 이름
의 유래를 짐작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
에는 제법 맑은 물이 흘렀고, 시골의 여느 개울가와 마찬가지로 아낙들은 빨래더미 속에 일
신의 번뇌와 세상 근심을 함께 넣어 두들기고 비벼 빨았다. 박태원(1909~86)의 장편 <천변
풍경>은 바로 이 청계천 빨래터의 광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1936~7년에 걸쳐 월간 <조광>에 두차례로 나뉘어 연재된 <천변풍경>은 일제 통치의 극
성기라 할 30년대 중반 서울 서민층의 삶을 꼼꼼히 재현하고 있다. 모두 50개의 짧은 장으
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장삼이사들의
삶의 이모저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수십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되는 사건도 주인공
이라 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이 소설에서 어찌 보면 청계천이야말로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계천 주변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과 사건
들을 하나의 소설 속에 모아 놓는다. 요컨대 청계천은 이 소설의 조직원리가 된다.
젊은 첩 안성댁이 학생놈과 보쟁이는 모양을 보고 속을 태우는 민주사, 바람둥이 남편에
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의 무관심과 시부모의 학대를 못 이겨 이혼하고 돌아오는 이쁜이, 처
녀과부 신세로 호색한인 시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금순이, 술집 여급에서 부
잣집 맏며느리로 신분이 격상됐으나 남편의 변심과 시댁 식구들의 냉대로 괴로워하는 하나
꼬, 금순이와 하나꼬를 친언니처럼 보살피는 또다른 여급 기미꼬, 시골 가평에서 상경해 어
리보기 취급을 당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서울 깍쟁이로 변모하는 소년 창수, 청계천 다리 밑
움막에 거주하는 거지들….
소설은 이들 천변 인물군상의 1년 남짓한 삶을 카메라의 눈처럼 충실히 좇을 뿐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일구어내거나 섣불리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소설
은 문득 시작하고 불쑥 끝난다. 기승전결이 따로 없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도 천변에서 사
람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소설이 끝난 다음에도 그들의 삶은 아랑곳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럴진대, 소설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 속에서 청계천은 근대와 전근대, 도시와 시골이 만나는 접경이다. 창수와 금순이, 만
돌 어멈 등은 각자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시골집을 떠나 서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해보
고자 할 때 청계천변을 그 첫 무대로 삼는다. 그곳에는 기생과 카페 여급이 나란히 활보하
며, 냉혹한 이익의 추구와 끈끈한 인간애가 공존한다. 시골에서와는 달리 청계천의 빨래터에
는 엄연히 주인이 있어 빨래꾼들에게서 돈을 받아서는 다시 나라에 세금을 낸다. 그러나 전
후사정을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시골뜨기 아낙이 다른 빨래꾼들의 역성 덕분에 첫번의 요금
지불을 면제받을 만큼은 인정이 살아 있다.
<천변풍경>은 이처럼 두개의 시대의 공존과 자리바꿈을 세필화의 필치로 그려내지만, 그
것은 그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임화가 그 자연주의적 편향을 지목해 `세태소설'
이라 이름붙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는 소박한 휴머니즘의 관점은 있을지언정 뚜
렷한 이념이나 사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 어느 인물에게서도 당시의 민
족적·계급적 모순에 대한 자각을 엿볼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비판도 부
재하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바람 없고 따뜻한 날, 남향한 대청에는 햇빛도 잘 들고, 그곳에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귀돌 어멈과 할멈이, 각기 자기들의 일거리를 가지고 앉아 육십팔원짜리 `콘서트'로 `쩨·오
·띠·케'의 주간방송, 고담이라든 그러한 것을 흥미 깊게 듣고 있는 풍경은, 말하자면, 평
화―그 물건이었다”는 대목은 그 직후에 나온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탁류>의 풍자적
어투나 비극적 분위기와 얼마나 다른가.
박태원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이효석 등 30년대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문학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해 활동한다. 그들이 내세운 바는 문학적 전문성과 프로의식이었거니
와, 그것은 실은 카프 계열의 계급문학에 대한 반발에 다름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1일'과 <천변풍경>은 당시로 보아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갖춘 작품으로
서 춘원 이광수와 월탄 박종화 등의 상찬이 잇따랐다. 그 박태원이 해방기에는 좌익계인 조
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고 한국전쟁중 월북해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는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한 사실은 지금도 숱한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 다 괜은 소리… 덮긴, 말이 그렇지, 이 넓은 개천을 그래 무슨 수루 덮는단 말
이유? 온, 참….”
소설 속 한 인물은 청계천 복개에 관한 소문을 듣고 턱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마
나 그 넓은 청계천은 어김없이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이제 그 위로는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빨래하는 아낙들이 깃들었던 천변의 가옥 자리에는 높직높직한 건물들이 솟아 있다. 한때
맑았던 물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소음과 진동에 짓눌리며 질식 상태로 흘러간다. 광교를 중
심으로 한 소설의 무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청계천 평화시장은 1970년 봉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 오늘도 청계천의 복개된 도로 아래로는 한때 맑았으나 더이상
은 맑지 않은 물이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7
강경애의 `인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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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 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
를 위하여 몇천만년을 두고 싸워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
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나갈 인간이 누굴까?”
강경애(1906~44)의 장편소설 <인간 문제>는 하나의 커다란 의문으로 끝을 맺는다: 근본적
이면서도 유구한 인간의 문제가 있으니, 그 문제를 과연 누가 풀 것인가? 그 `문제'가 무엇
인지에 대해 강경애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농부의 딸에서 노동자로 존재전이한
선비의 죽음, 그 싸늘한 주검을 대면하는 노동자 첫째의 절망과 분노로 마감하는 소설의 대
미는 문제의 정체와 해답의 소재를 스스로 밝히고 있음이다.
근대 한국문학사상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된 거의 최초의 여성 작가라고 말하는 것은 강
경애에게는 칭찬이라기보다는 욕에 더 가깝다. `여성'이라는 틀로는 가둘 수 없는 보편성과
문제성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식민지시대의 노동 현실을 가장 올바르고 가장 짜
임새 있게 그린 작가라는 평가가 그의 이름에 수반돼야 할 것이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인간 문제>는 일제 강점하 조선의 농촌과 도시, 농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려 한 문제작이다. 무지하지만 선량한 선비와 간난이, 첫째
등과 지주 정덕호 일가로 대표되는 착취 계급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그
려진다. 덕호의 머슴 노릇을 하다가 그가 던진 주판에 머리를 맞아 숨진 선비의 아버지, 덕
호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한 끝에 버림받는 간난이와 선비, 타작마당에서 소작농민들을 선동
해 지주에게 대드는가 하면 주림을 못 이겨 밤이슬을 맞다가는 도망을 놓는 첫째, 제가 사
랑하는 대학생 신철이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이유로 친구인 선비를 학대하고 모욕하는 덕호
의 딸 옥점이 등의 인물군상은 친일 지주와 농민들 사이의 계급모순을 생생한 실감과 함께
전해준다.
그러나 <인간 문제>의 진면목은 역시 주요 인물들이 활동 공간을 옮겨가는 인천을 무대
로 삼은 후반부에 있으며, 장연을 배경으로 한 전반부(=농촌과 농민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인천(=노동자계급 및 노동문제)의 전사(前史)로서 더 큰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상경한 간난이와 함께 인천에 새로 생긴 대동방적 공장의 노동자로 옮겨 오는 선비, 역시
인천에서 부두노동 일을 하는 첫째,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지원하는 신철이 등이
모두 인천으로 모이는 것이다.
특히 방적공장 노동자들과 부두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작업 모습, 방적공장의 기숙사 생활,
여공에 대한 공장 감독의 성적 착취, 공장 내의 조직화 과정, 지식인 출신 활동가와 노동자
들 사이의 연대 등에 대한 묘사는 <인간 문제>의 주제의식을 미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빼어
난 세목이라 할 수 있다.
양주동과 1년 가까이 동거하다가 헤어진 뒤 수원 농림학교 출신의 장연군청 서기 장하일
과 결혼해 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강경애는 대부분의 소설을 간도에 머물면서 발표했고 <인
간 문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국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주시하고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상세히 그렸다. 실제로 1929년의 원산 총파업을 전야제 삼은 30년
대 전반기의 조선은 일제 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발한 노동운동의 개화를 보였다. 특
히 1931년 초여름 평양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투쟁을 벌여 유명해진 강주룡과 그의 동료들에
게서 보듯 여성 노동자의 의식화와 조직화는 괄목상대할 정도였다.
국문학자 이상경(36)씨는 <인간 문제>의 장점으로 꼽히는 노동현장의 구체적인 묘사는
작가 자신의 체험에 힘입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강경애의 연보에는 20년대
후반의 몇년간이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는데, 그 기간 동안 그가 인천에서 노동현장에 있었
거나 적어도 외곽에서 지원하는 일을 했으리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쓸어나온다. 잠깐 동안에 수천 명이나 돼 보이는 노동자들이
축항을 둘러싸고 벌떼같이 와와 하며 떠들었다. 그들은 지게꾼이 절반이나 넘고 그
외에 손구루마를 끄는 사람, 창고로 쌀가마니를 메고 뛰어가는 사람, 몇 명씩 짝을 지
어 목도로 짐을 나르는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어린애 할 것 없이 한 뭉치가 돼 서로
비비며 돌아가고 있다.”
소설이 나온 뒤로 60여 년, 90년대 중반의 인천 부두에서 지게를 메거나 손수레를 끄는
수천 명의 노동자를 목격하기는 어렵게 됐다.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커진 부두에서
아직도 5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고 있지만, 그들은 기중
기와 트럭 따위 힘센 기계의 일을 관리하고 보조하는 일에 치중할 뿐이다. 요즘 부두에서
흔히 보이는 것은 중국산 참깨와 옥수수, 밀 따위를 실어 오거나 수출용 자동차를 실어 내
가는 대형 화물선, 그리고 중국과 인천을 오가는 페리 여객선 등이다.
소설 속 대동방적의 무대가 된 동일방직 역시 옛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지 않다. 한때
수천명에 이르렀던 노동자는 자동화 바람에 밀려 지금은 6백여명 수준으로 줄었고 갈수록
줄고 있는 추세다. 1934년 일본 동양방적의 인천공장으로 출발해 해방 이후 한국인에게 불
하된 동일방직은 70년대 민주노조 투쟁의 상징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구사대의 똥물 세례
를 받고 1백명이 넘는 노조원들이 해고를 당하면서도 민주노조를 지키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싸움은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된서리를 맞고 말았지만, 그들의 기개와 활약은 한국 노동
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한 장으로 남아 있다.
이상경씨는 “30년대의 <인간 문제>에서부터 70년대 동일방직 투쟁의 소산인 석정남의
르포 <공장의 불빛>, 그리고 80년대 노동소설의 대명사인 방현석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모
두 인천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만큼 한국의 노동문학과 인천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
다”고 말했다.
<인간 문제>에서 노동자 첫째를 의식화시키고 간난이들의 공장 내 투쟁을 지원하던 신철
이 고문과 회유에 넘어가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첫째의 깨달음은 `인간 문제'를 해결할
역사의 주체가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는 소설 전체의 주제를 평이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 신철이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그로 하여금 전향을 하게 한 게
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과거와 같이, 그리고 눈앞에 나타나는 현재와 같이 아무런
여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신철이는 길이 많다. 신철이와 나와 다른 것이란 여기 있
었구나!”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8
송기숙의 `암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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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재재발기며 팽팽하게 힘이 꼬이고 있었다. 하늘도 째지게
여물어 탕탕 마른 장구 소리가 날 듯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위로는 뭉게구름이 한 무더기 탐스럽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목포 서쪽 다도해상에 있는 암태도 앞바다는 송기숙(61)씨의 소설에서 묘사된 바와 여일
했다. 비록 소설이 쓰여진 때로부터 16년여, 소설 속 상황으로부터는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
러 지나갔고, 달력은 아직 한겨울이라 할 2월 초에 머물러 있었지만, 가을과 겨울의 차이도,
16년 또는 70년의 거리도 그곳의 햇살과 물살과 하늘과 구름을 크게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다만, 실장어잡이를 위해 바다 위에 띄워 놓은 여러십척의 무동력 바지선들만이 여일한 풍
경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을 뿐.
겨울의 오전 7시30분. 목포항의 희붐한 여명을 뚫고 길을 나선 고속 훼리호는 1시간 30분
의 항해 끝에 어김없이 암태도 남강 부두에 닻을 내린다. 부두에 대기하고 있던 암태운수
소속 지프형 택시에 타고 순식간에 집 대문 앞까지 당도한 동네 아주머니는 “아따, 빠르요,
잉. 폴쎄 와부렀소야”라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대여섯 시간씩 걸리
기 일쑤였던 것에 비하면 과연 빨라진 것이다. 그토록 길고도 험한 뱃길을 수백명의 섬사람
들이 목숨을 걸고 오고 갔던 70여년 전 그때, 이 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19년 3·1만세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조선민족에 대한 지배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었다. 헌병경찰제도를 없애고 보통경찰제도를 채택하며 교원과 문관들이 차고
다니던 칼을 풀도록 하는 등 문화정치의 표면적인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화국면이 뚫어놓은 공간이 억눌린 겨레에게는 최소한의 숨쉴 구
멍으로 기능한 것 또한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거치면서 성장한 민중들의
정치의식은 1920~1930년대 한반도를 각종 농민운동과 노동자투쟁의 마당으로 만들어 놓았
다. 암태도로 대표되는 20년대 소작쟁의 바람은 조선 민중과 일제 통치당국 사이의 그 같은
힘관계를 배경으로 하고서 일어난 것이다.
암태도의 소작 농민들이 지주 문재철을 상대로 쟁의에 나선 것은 1923년 8월 추수를 앞두
고서였다. 서태석 회장이 이끄는 소작회 회원들은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던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하며 쟁의에 돌입했다. 그로부터 장장 1년여에 걸치는 암태도 소작쟁의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20년대 중·후반에 가히 전성기를 구가한 소작쟁의의 물결 속에서도 암태도 소작쟁의가
유독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상 일본 관헌과 일제 당국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점과 함께 그 싸움의 양상이 전례없이 치열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한 배수진
을 친 것과도 같은 소작인들의 요구에 대해 문 지주쪽은 관과 경찰의 힘을 믿고 마냥 뻗세
게만 나왔다. 농민들과 그들의 진짜 적인 일제 당국 사이의 대결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문 지주 부친 송덕비의 파괴를 둘러싸고 문씨 일족 청년들과 농민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
어지고 이를 빌미 삼아 경찰이 소작회 간부들을 대거 구속하자 농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1924년 6월 1천여명의 암태도 농민들은 면민대회를 열어서 경찰서와 문재
철의 집이 있는 목포로 나가 싸움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암태도 소작쟁의를 전국
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원정투쟁이 시작된다. 두차례에 걸쳐 열흘 남짓, 남녀노소가 망라된 6
백여 농민들이 목포 경찰서와 법원 마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농성은 당시 신문에 이
렇게 그려졌다.
“대지를 요를 삼고 창공을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
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습기가 가득한 밤
이슬을 맞으면서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은 두 뺨을 인정없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이틀 되는 초 9일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보아도 기특할 정도로 분명히 소작인들의 편에 섰던 <동아일보>등 신문의 연속된
보도는 이 사건을 암태도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 차원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문 지주와 그를
비호하던 경찰 및 사법부의 입지를 크게 줄여 마침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는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성하고 혼연일체가 돼 싸움에 나섰던 암태도 농민들의 각
오가 무엇보다 커다란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송기숙씨가 1979~1980년 잡지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 <암태도>는 이상과 같
은 역사적 사실을 대체로 충실히 좇고 있다. 그는 “사건 자체가 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으
며, 반봉건적·반일적인 순수 민중운동이 암태도라는 작은 섬에서 불타올라 마침내 성과를
거둔 것이 무엇보다 통쾌했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 별다른 첨삭을 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
다”고 밝혔다.
그러나 작가란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존재이어서인지, <암태도>에는 서태석씨와 청년회
장 박복영씨, 부인회장 고백화씨, 문재철 지주 등 실존인물들 말고도 몇명의 허구적 인물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소작농들인 춘보와 만석이다. 동학에 가담했다가
관의 눈을 피해 암태섬으로 흘러든 춘보는 1920년대 소작쟁의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연
속선상에 있다는 작가의 역사인식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남사당패 소리꾼으로 따라다니다가 부자집 막내딸과 눈이 맞아 역시 암태섬으로 밤도망을
놓은 만석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일제 당국의 화해 제스처를 받아들이려는 박복영을
향해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려면 이제 당신도 더 나서지 마시오. 당신은 배가 안 고파본
사람이라 소작인들 속을 몰라요”라며 대드는 장면은 서태석과 박복영 등 근대교육의 혜택
을 받은 지식인의 손에 있었던 싸움의 지휘권이 민중 자신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암태섬에는 소작농들의 애환이 넘실거렸던 너른 들이 여전하고 문 지주 부친이 살았던 남
강 부두의 집, 그리고 당시 소작회 사무실이 있던 집도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1943년 이웃
압해섬에서 숨을 거두었다가 지난 79년 암태도로 옮겨온 서태석씨의 묘 옆에는 `의사 서태
석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소작농민들이 원정투쟁을 전개했던 목포 경찰서와 법원 자
리에는 각각 호텔과 교회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고, 문 지주가 일제 말
기인 1941년에 세운 문태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농구에
열중이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29
한용운의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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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공고
히하기 위한 각종 조처를 착착 밟아나갔다. 총독부에서 헌병 및 경찰로 이어지는 행정적·
무력적 기반 마련, 항일의병전쟁에 대한 강력한 토벌작전, 신문지법과 출판법, 조선교육령
등의 법제적 장치를 통한 언론 및 교육의 통제,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식민지적 농
업구조의 형성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안정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무단정치'(武斷政治)로 규정할 만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러나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일찍이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 등을 통해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검질긴
투쟁의 전통을 쌓아온 조선인들은 1919년 1월21일 급서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흥분하고, 그해 2월8일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고무받아 전국적인 규모
의 항일시위에 나선다. 3·1만세운동이다. 그 만세운동의 한가운데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
만해는 3·1운동의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거사 당일에는 태
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의 앞에 서서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
을 선도했다. 거사 직전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한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 대해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한 옥에
갇힌 민족대표들 사이에 자신들이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들 중 일부가 불
안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분뇨통을 그들에게 던지며 나약함에 대해 일갈했다는 일화
는 너무도 유명하다.
만해는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지닌 독립투사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불교사상가요 한국 현
대시의 한 흐름을 열어젖힌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다. 혁명가와 사상가와 문인이라는 세가지
성격을 한 몸 안에 아우른 그의 전인적인 풍모는 한국사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경우
를 찾기 힘들 정도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한 저술과 월간 불교잡지 <불교>의 운영,
청년불교단체의 설립과 지도 등을 통해서 그는 불교의 혁신과 대중에의 파급을 꾀했으며 그
궁극적 도달점은 그 자신 `불교사회주의'라 이름한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 사이에 한층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역시 <님의 침묵>이라는 걸출한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서의 만해 한용운이다. 3·1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인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 딸린 오세암에서 탈고해 다음해 책으로 묶어낸 <님의 침묵>은 3·
1운동의 정신과 힘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명시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표제시를 비
롯해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님'이라는 절대의 존재를 향한 구애와 귀의, 이별
의 슬픔과 기다림의 환희라는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묶여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상
태에서 떠나간 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애정을 토로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연애시
의 구도를 취한 이 시집은 만해의 님이 그가 귀의한 불교적 진리일 수도, 그의 조국인 독립
조선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넓고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
에 도리질을 한 지가, 칠석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라는 시 `칠석'의
한 구절은, 그가 <님의 침묵>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점을 감안한다면, 만해의 님의 자리
에 무엇보다도 먼저 조국을 놓아두어야 함을 알게 한다.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화자의 세계인식과 문학적 형상화를 가능케 하는 기본 전제로
기능한다. <님의 침묵>의 모든 시들은 이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해도 지나치
지 않다. 그 이별은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과의 합일의 가능성이 완전히 깨어지고 마는 부정
의 원천이 아니라 사랑의 강도를 확인하고 장래의 합일을 희구하게 만드는 긍정적·생산적
인 이별이다.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
다”(`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구절은 이별과 만남, 눈물과 웃음, 죽음과 생성의 변증법적 순
환을 요령있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
습니다.” (`님의 침묵')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한학을 수학한 만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존망을 염려
하며 일단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17살 때인 1896년이었다. 백담사와 오세암 등지에서 불목
하니 노릇을 하다가 시베리아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1904년 초 잠시 향리에 들렀다가 그해
말 완전히 출가하게 된다. 외아들 보국이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의 일이었다.
행동하는 학승으로 변모한 그는 경성에서 불교개혁과 조선독립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펼
치는 사이사이 그가 처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
론>과 <님의 침묵> 등을 저술했다. 그러나 지금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그의 자취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머물던 백담사의 요사채는 `만해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흔
한 편액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다만 그 곁에 세워진 시비 `나룻배와 행인'만이 한가닥 씁쓸
한 위안을 던져줄 뿐이다. 백담사를 찾는 관광객들 역시 만해의 자취보다는 지난 89년 표변
한 세상인심에 쫓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방의 위치에만 관심을 보인다. 만해와 전두
환씨는 60여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같은 건물 같은 방에 머물렀었다.
백담사에서 6㎞ 남짓 떨어져 있는 오세암 역시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해 시절의 건
물은 한국전쟁 당시 다 불타 없어져 버렸고, 원래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천진관
음보전'의 옆 벽에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만해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따름이
다. 오세암의 주승인 경원 스님은 “오세암 경내에 만해의 시비를 건립하고 그가 머물던 방
을 다시 꾸미는 한편, 백담사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산길에 그의 법명이나 싯구를 딴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관련 학자 및 문인들과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0
이인직의 `은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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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대관령은 바람도 유명하고 눈도 유명한 곳이라. 겨울 한철에 바람이 심
할 때는 기왓장이 훌훌 날린다는 바람이요, 눈이 많이 올 때는 지붕 처마가 파묻힌다
는 눈이라. 대체 바람도 굉장하고 눈도 굉장한 곳이나, 그것은 대관령 서편의 서강릉
이라는 곳을 이른 말이요, 대관령 동편의 동강릉은 잔풍향양(潺風向陽)하고 겨울에 눈
도 좀 덜 쌓이는 곳이라.”
이인직(1862-1916)의 소설 <은세계(銀世界)>에서 대관령은 바람과 눈의 세계이자 동강릉
과 서강릉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이 8백수십 미터 높이의 고개는 좁게는 서강릉과 동
강릉을, 넓게는 영서와 영동을 나누며 솟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양쪽을 이어 붙이
는 연결통로의 구실도 맡아 하고 있다. 경계와 통로―나누고 연결하는 대관령의 이 두가지
상반된 기능이 <은세계> 전반부의 구성원리로 기능한다.
신소설의 개척자로 국문학사에 자리매김되는 이인직이 1908년에 발표한 <은세계>는 두개
의 이질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릉 경금 동네에 사는 알부자 최병도가 그의 재산을
노린 강원감사에게 붙들려가 고초를 당한 끝에 죽음을 맞는 전반부, 그리고 그의 소생인 옥
순·옥남 남매가 미국에 유학 가서 선진문물을 배우고 돌아오는 후반부가 그것이다.
강렬한 반봉건과 근대화 지향의 메시지로 하여 문학사적 자리를 확고히 한 이 소설에서
최병도가 살던 동강릉은 백성들의 노동과 절약과 저축이 결실을 맺은 풍요와 자족의 땅으로
묘사된다. 거기에는 물론 대관령 서쪽으로 상징되는 봉건적 탐학의 부당성과 잔혹성을 극대
화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은세계> 전반부는 당시 구전되고 있던 민요를 적절히 삽입하여 봉건체제의 질곡과 서민
들의 해방 욕구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가운데 경금 동네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봉건적 탐학의 정도와 그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우리 동무 내 말 듣게, 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입고 남거든 돈 모을 생각 말고 술 먹
고 노름하고 놀 대로 놀아 보세, 마구 뺏는 이 세상에 부자 되면 경치느니.”
최병도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매타작을 당한 뒤에야 놓여나 대관령 위에서 끝내 눈을
감는 것으로 전반부는 끝나고, 후반부는 어린 남매의 미국 유학생활을 그리면서 근대화의
명제를 강조하는 데 치중하게 된다. 그런데 썩어빠진 봉건 지배세력과 농민층 사이의 집단
적 대결을 실감나게 그렸던 전반부에 비해 모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후반부의 묘사와 구
성은 지나칠 정도로 허술하고 억지스럽다.
최원식 교수(인하대)를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은세계> 전반부는 `최병두 타령'
이라는 구전 민요를 바탕 삼아 쓰여졌으며 후반부는 이인직의 순수한 창작적 덧붙임이라 한
다. 그러니까 실화에 기반한 `최병두 타령'과 구전 민요의 핍진성이 <은세계> 전반부의 사
실성을 뒷받침하는 반면, 후반부에서는 이인직 자신의 맹목적이고 뒤틀린 개화사상이 소설
의 통일성과 주제의식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를 붙들고 이 백성을 살리려 하면 정치를 개혁하는 데 있는 것이니, 우리는
아무쪼록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을 넓혀서 아무 때든지 개혁당이 되어서 나라의 사업
을 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성하는 것이요.”
옳지 않은 정신으로 고국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생각해서 이제 그만 돌아가자는 누이의
제안에 대한 옥남의 살찬 대답은 작가 이인직의 개화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소설
에서 보이는 작가 이인직의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뒤틀려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개화는―그것이 설령 미국과 일본의 영향과 지배 아래 이루어진 것일지
라도― 선이라는 맹목적 개화론이 이인직의 사상이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들여앉힌 뒤 대한제국 정부군을 강제로 해산시킨 1907년을 두고
“황제 폐하께서 정치를 개혁하신 해”라 반기는 데서도 그 왜곡의 정도를 알 수 있거니와,
의병의 무리와 맞닥뜨린 옥남이 그들을 훈계하는 대목은 전도된 상황인식의 극치를 보여준
다.
“여러분 동포가 의리를 잘못 잡고 생각이 그릇 들어서 요순 같은 황제 폐하 칙령을 거
스르고 흉기를 가지고 산야로 출몰하며 인민의 재산을 강탈하다가 수비대 일병 사오
십 명만 만나면 수십 명 의병이 더 당치 못하고 패하여 달아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망 무수하니, 동포의 하는 일은 국민의 생명만 없애고 국가 행정상에 해만 끼치는
일이라.”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로서 한일합방 과정에서 결정적인 막후교섭을 담당한 것은 이같은
맹목적 개화사상과 뒤틀린 근대화론의 결과라 할 것이다. 이인직이라는 근대 지식인과 그의
소설 <은세계>의 파탄은 봉건제의 질곡을 벗고 바야흐로 근대화의 첫발을 떼어 놓으려 했
던 민족이 외세의 영향과 지배 아래 놓임으로써 피할 수 없게 된 파행과 모순을 극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최병도가 원주감영으로 끌려갔던 길목이자 시체나 다름없는 몸으로 강릉 집으로 후송되어
오다가 숨을 멈춘 곳이기도 한 대관령은 오늘도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긴요
하게 쓰이고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아우성치며 옷깃을 파고드는 대관령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릉은 겨울 햇볕 속에 평화롭게 잠겨 있다. 태백산맥의 서쪽 등허리를 훑으
며 올라온 바람은 대관령 고개를 넘어 평화의 땅 강릉으로 쳐내려가지 못하고, 돌연 허방이
라도 만난 듯 어지럽게 헤매며 돌아치다가는 가뭇없이 스러지고는 한다.
최병도가 살았던 대관령 아래 경금 동네는 행정구역상으로 강릉시 성산면 금산1리에 해당
한다. 강릉 김씨가 세웠다 해서 `건금'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는데, `건금'은 이 지방 사람
들의 발음으로는 `경금'이 된다. 아주대 국문과의 김종철 교수는 강릉대에 재직하고 있던 지
난 87년 <은세계>의 흔적을 찾아 이 동네를 답사하고서는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
은 한 집을 최병도 집의 모델로 지목했다.
지금의 집주인인 최석규(68)씨는 장성한 세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부인과 함께 아흔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대관령 바람에 시달린 고택은 기와가 흔들리고 서까래가
내려앉는 바람에 지난 93년 거액을 들여 새 단장을 마쳤다. 사람이 살기에는 한결 편해졌지
만, 예스러운 멋은 더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용 때문에 미처 수리를
하지 못한 사랑은 북쪽 벽이 완전히 무너진 채 못 쓰는 가전제품과 재봉틀 따위를 넣어두는
창고로 구실하고 있어 세월의 덧없음을 말하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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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1
박경리의 `토지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선의 식민지화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을 타게 되었
다. 러시아와 일본은 각기 아관파천과 명성황후 살해를 통해 조선의 식민지배를 꾀했다. 일
본 낭인들의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맛본 유생들은 단발령을 계기로 수하들과 농
민군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뚫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농민군의 분발에 당황하고 일본의 이른바 내정개혁 강요에 몰린 정부
는 갑오개혁을 단행한다. 왕권 제한,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문벌 타파, 과거제 폐지,
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갑오개혁은 농민전쟁에서 집약적
으로 분출된 봉건체제의 내부모순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일
본의 조선 내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박경리(70)씨의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배와
민중의 검질긴 독립투쟁, 그리고 2차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
어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고개가 무거
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 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그렇기로서니 수상한 세월 힘없는 나라에서 맞이하는 박복한 백성들의 명절이 어찌 평화
와 풍요의 겉보기에만 그칠 것인가. 과연 작가는 곧 이어서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
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라며 시의 경지를 방불케 하는 문장을 내밀고 있다.
더구나 그 비애의 속내인즉, 산문적 사실성과 치열성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
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
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
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토지>는 만석꾼 대지주 최참판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를 주인공
으로 내세워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둘러싼 대하 드라마를 전개한다. 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
인이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낳은 자식 김환이 의붓형수인 별당아씨와 밤도망을 치
는 사건은 장강처럼 흘러갈 소설의 초입에 물살 급한 여울목을 마련해 놓는다. 상피붙은 남
녀를 쫓는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지는 한편에서는 치수의 고임을 받아 그의 만석지기 농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하녀 귀녀의 음모, 치수가 비명횡사한 뒤 최참판댁 재산과 토지를 노리는
그의 재종형 조준구의 행보, 마을 남정네 용이와 무당 딸 월선이의 비련 등 인간사의 오욕
칠정이 쉬임없이 피었다 진다. 거기에 동학군 출신인 대목수 윤보, 의병에 가담하는 김훈장,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길상과 그 아들, 조준구가 대표하는 상업영농과 서희의 곡물무역의 자
리바꿈에서 볼 수 있는 경제의 단계적 발전 등 사회·역사적 변모가 포개진다.
<토지>의 무대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3개
도 12개 군에 걸치는 남도 5백리를 내려와 하동포구에서 남해로 흘러들기 전에 강의 북동쪽
으로 빚어놓은 악양들을 내다 보며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폭이 넓지도 수심이 깊지도 않
으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으로 꼽히는 섬진강은 발원지에서부터 남해 바닷물에
몸을 풀기까지 지리산 자락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구비쳐 내려오는데,
강을 바투 쫓아오던 경상도쪽 산자락이 문득 멀찍이 물러나 앉으면서 조물주의 선물처럼 이
루어 놓은 너른 벌이 바로 악양들이다. 김제·만경의 광활함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그래
도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규모다. `외지 거지가 악양에 들어와도 1년은 놀고 먹을
수 있다'는 말은 그런 규모가 가능케 하는 풍요와 여유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하동에서 멀지 않은 통영에서 출생해 진주에서 학교를 나온 박경리씨는 1960년대의 어느
날 화개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악양들을 접하고는 이곳을 당시 구상하고 있던 <토지>
의 무대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소설을 집필하는 도중 평사리를 직접 답사하지는 않았다. 소
설 속 동네 구조와 실제의 평사리의 모습이 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겨울 한복판의 악양들에는 <토지> 서두와 같은 벼이삭의 물결 대신 날선 바람의 갈기만
이 휘날리고 있다. 어쩌다 한둘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는 이들이 눈에 뜨일 뿐 너른 들에 사
람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 소의 음메 소리가 서로 화답하
는 마을에서도 사람을 마주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담쟁이 덩굴이 벋어 올라간 오래 묵은
돌담들, 담 옆 헐벗은 나무에 달랑 두 개 달려 있는 까치감, 마루 밑에 넣어 둔 단호박 덩이
들과 처마 밑의 메주, 시레기 다발 따위가 대신 사람의 자취와 체온을 전해준다.
악양들의 옥답과는 달리 산쪽으로 다가 앉은 마을에는 유난히 돌이 흔하다. 거의 모든 집
의 담이 돌로 되어 있음은 물론 마을 뒤편의 다랑논의 논둑 역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았으
며, 돌을 고르다 못한 언덕빼기는 단감나무 밭으로 알뜰하게 활용하고 있어 땅밖에 모르는
농부들이 박토를 일구며 흘린 땀을 짐작케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소설 속 임이네와 강천
댁, 두만네, 막딸네 등 아낙들이 시름을 털어놓거나 신세를 한탄하는가 하면 작은 일로 아옹
대기도 했음직한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남아 있다.
박경리씨는 평사리를 답사하지 않았지만, 이곳 주민들은 <토지>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
고 있었다. “볼 기 뭐 있다꼬 사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와 쌓십니더”라는 가게 주인 아주
머니의 말에서 평사리가 이미 문학사적 지명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평사리에는 여
관이나 여인숙, 식당은 물론 민박집 하나도 변변한 것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것이 생
겨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달랑 지도 한 장 들고 물어 물어 찾아오는 수많은 독자들
을 위해 마을 입구에 이곳이 소설 <토지>의 무대라는 안내판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
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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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2
양귀자의 '숨은 꽃'
박경리(70)씨의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배와
민중의 검질긴 독립투쟁, 그리고 2차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
어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
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양귀자 `숨은 꽃')
소설가 양귀자(41)씨의 중단편 `숨은 꽃'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의 귀신사를 무대
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귀신사에 귀신사는 없다. 전주에서 모악산의 서북쪽 허리를 딛고 지
나는 712번 지방도로를 30분 가량 타고 달리면 이르게 되는 청도원 마을 앞에는 국신사(國
信寺) 입구임을 가리키는 팻말이 서 있다. 절 뒤편 팻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절의 이름은
국신사 구신(狗信)사 구순(狗脣)사 귀신(歸信)사 등으로 다양했지만, 귀신(歸神)사로 불린 적
은 없었다. 그러니까 작가는 `돌아가 믿는다'는 뜻의 귀신(歸信)을 `신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神)으로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1992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숨은 꽃'은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일종
의 소설가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뜻대로 글이 써지질 않자 머리를 식힐 겸 여행에
오른 길이었다. 작가가 여행길에 오른 것은 전교조 원년의 투쟁을 그린 단편 `슬픔도 힘이
된다' 이후 3년만에 쓰는 단편이 시작부터 미로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3년이라는 공백기
간이 작가의 손을 굳게 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슬픔도 힘이 된다'는 진술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세상의 변화에 있었
다. 세상이 갑자기 텅 비어 버린 듯했다. 써야 할 것이 우글대던 머릿속도 세상을 따
라 멍한 혼돈에 빠져 버렸다.(…)소련과 동구권의 대변혁이 몰고온 파장은 그나마 모
색되어 오던 이 사회의 새로운 물결, 상식적인 삶의 예감까지 붕괴시키는 데 단단한
몫을 하려는 듯이 보여졌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합(소련)이 사망신고를 낸 것은 91년 말이었다. 옛 소련의 붕괴
는 폴란드에서 시작해 루마니아에 와서 일단락된 동유럽 국가들의 탈사회주의 도미노(89년),
그리고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 통일(90년)이라는 국제정치적 변화의 완성과도 같았다. 이
로써 1917년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출범한 공산체제는 70여년간의 실험을 끝내고
일단 역사의 무대 뒤로 물러났다.
옛 소련과 동유럽의 정세가 한국의 소설가로 하여금 글쓰기의 미로에 빠지게 했다? 중국
베이징 하늘에서 펄럭이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뉴욕 증시를 들썩이게 한다는 식
인가? `숨은 꽃'에 작용하는 혼돈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 한국의 사회 및 문학
운동을 복류하던 마르크스주의적 함의 내지는 지향에 눈을 주어야 한다.
한국전쟁이 친미 반공 정권의 온존·강화로 귀결된 이후 휴전선 이남에서 마르크스와 공
산주의 이념은 제일의 금기사항이었다. 반공이라는 부정적·소극적인 가치가 국시(國是)로
떠받들리는 형편에서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이 설 자리는 없었다. 조봉암의 진보당과 정체도
불분명한 인혁당 사건 등이 관련자의 사형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은 이 땅의 이념적 경직성
을 말해 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같은 불구적 현실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8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학생운
동과 노동운동을 필두로 한 운동 진영은 자신들의 실천과 목표를 마르크스주의의 틀에 맞추
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 속출했고, 마르크스주의와 관
련 서적에 치중하는 출판사와 서점이 성업을 이루었다. 급기야는 문학에도 마르크스주의 바
람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직간접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이들이 옛 소련·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
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목표가 비록 현실 사회주의와 완전히 일
치하지는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그것의 존재가 중요한 참조사항
이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운동권이 급속히
쇠락한 데에는 이같은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미로는 너무 교활하다. 지식과 열정을 지탱해 주던 하나의 대안
이 무너지는 것을 신호로 나의 출구도 봉쇄되었다. 나는 길 찾기를 멈추었다. 길 찾기
를 멈추었으므로, 나는 내 소설의 새로운 주인공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세계사적 변화에서 촉발된 글쓰기의 미로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여행길에서 작가는 김종구
와 황녀라는 야성적인 인물들을 만난다. 세상의 어떤 제도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고 생명
의 본성에 충실한 김종구는 작가의 세계관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든다. “사는 일이 가장 먼
저란 말이오. 사는 일에 비하면 나머지는 다 하찮고 하찮은 것이라 이 말입니다”라거나 “
머릿속에 생각이 많으면 행동이 굼뜨고, 그러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라는 김종
구의 말에 작가는 크게 깨닫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와 연루된 모든 것들, 한마디로 뭉뚱그려 높은 도덕과 긴 역사의 문
화라고 하는 것들이 이들 앞에서 얼마나 하찮게 무너지는가를 절감했다. 내가 영향받
고 그에 의해 단련되던 것들이 사실은 아주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평생
이 작은 세계 밖으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은 절망이었다.”
문화니 이념이니에 앞서 구체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실이야말로 작가를 글쓰기의
미로에서 건져내고 숨어 버린 꽃들의 꽃말을 찾게 하는 열쇠가 된다. `숨은 꽃' 이후 작가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천년의 사랑>이라는 대중적 소설들로 방향을 튼 것
과는 별도로, 그의 이런 깨달음은 이념 부재의 90년대를 감당해 나가야 할 작가들에게 핵심
적인 준거가 되어 마땅하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귀신사는 대웅전 격인 대적광전과 명부전
두 채의 불당과 살림집뿐으로 단출했다. 이즈음 웬만한 절에는 구색 삼아 놓여 있는 커피
자판기와 공중전화기가 없는 데서 보듯, 찾는 이 드문 고적함이 절집다운 맛을 더해 주는
곳이다. 일주문에 해당할 절 입구의 첫번째 돌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양옆으로 두 기의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세월의 풍마우세에 기꺼이 몸을 맡긴 이 환경친화적 돌비석
들은 더이상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돼 천연의 돌덩이인 양 시치미를 떼고 있
다. 그나마 왼쪽 것은 계단에 바싹 붙여 지은 민가의 벽돌담에 파묻혀 그 일부로 귀속돼 버
렸다. 슬레이트 지붕의 그 집은 다시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로 변해 한쪽 벽은 무너지고, 굳
게 닫힌 대문 앞에는 마른 잡초가 우거졌다. 무릇 사람이 지은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자연으
로 돌아간다는 뜻일까.
작가와 함께 귀신사를 찾은 날은 마침 예순을 갓 넘기고 돌아간 어느 필부(匹婦)의 사십
구재가 올려지고 있었다. 대적광전에서는 요령을 흔들고 경을 읊으며 망자를 천도하는 스님
의 독송이 흘러 나오고, 그 자신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중늙은이는 빗살무늬
창호 사이로 그 소리를 가만히 엿듣고 섰다. 법당에서 재를 마친 일행은 절 마당으로 걸어
나와 망자를 향해 마지막 예를 갖춘 뒤 흰 종이와 천 등속을 태우며 그 재를 날린다. 망자
는 드디어 명부에 이르렀다.
망자의 가족들도 떠나간 뒤 절은 다시 적막으로 돌아간다. 마당의 연화 대석에서 떨어지
는 감로수, 이따금씩 들리는 까치 울음과 동네 개 짖는 소리, 멀고 가까운 길을 내닫는 차량
의 질주음이야 그 적막을 부추기는 추임새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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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3
도종환의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눈물이, 떠난다는 생각을 얼핏 떠올렸을 때/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애착이나 억울
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부정하고 부정해도 끝내 부정할 수 없는/우리의 마음 하나
아주 여리고/아주 작던 그래서 많이도 고통스러웠던/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그런 것
하나를/역시 버릴 수 없어서 아팠다.”
해직교사 시인 도종환(42)씨의 최근작 `겨울 금강'의 한 대목이다. 지난 89년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나 햇수로 9년째를 맞는 처연하면서도
굳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전교조 충북지부장인 그는 동료들과 함께 11일부터 다시한
번 단식에 들어간다. 최근 확정된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이 교직원노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항의의 표시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가/단식 농성장에서 병원으로 실려오는
차 안에서/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나이 사십에.//아름다운 세상 아, 형벌 같은 아름다
운 세상” (도종환, `단식' 전문).
지난 92년의 복직투쟁 당시 그는 단식 나흘째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지쳐 있는
내게 다가와/몰래 하나씩 먹으라고/김선생이 손에 쥐어 준/빠알간 대추 한 줌”(`대추')을
요령껏 먹었더라면 병원 신세를 지도록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으로서의 양
심과 자존심이 그런 요령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얼음 속에 갇힌 빈 배 같은 그대를 남겨 두고/
나는 아직 살아 있어서 굽이굽이 강길을 걷는다/그대와 함께 걷던 이 길이 언제 끝날
지/아직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어/새벽의 바다에 이르렀음을 끝까지
믿기로 한다/내가 이 길에서 끝내 쓰러진 뒤에라도/얼음이 풀리면 그대 빈 배만으로
도 내게 와 다오/햇살 같은 넋 하나 남겼다 그대 뱃전을 붙들고 가거나/언 눈물 몇
올 강가에 두었다 그대 물살과 함께 가리라” (`겨울강' 전문).
전교조가 무엇이관데 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비장한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시인이 배를
곯다가 쓰러지면서까지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과 “새벽의 바다”란 구체적으로 무
엇일까.
전교조는 멀리는 1960년 4·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에 나타났다가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4·19 교원노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좀더 가까이는 70, 80년대의 전사회적
민주화 투쟁과 그 일부로서의 교육 민주화 투쟁의 소산이다. 전교조의 전신은 6월항쟁 직후
인 87년 9월에 창립된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였다.
전교협이 전교조로 변신하게 된 것은 협의체 성격의 임의단체인 전교협 보다는 노조로서
강력한 조직력을 갖는 전교조가 교육민주화투쟁에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임의단체 전교협을 주시해오던 당국은 전교조의 결성과 동시에 강경 탄압에 나섰고,
전교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
다.
도종환씨의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은 전교조 사태로 인해 해직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던 시인의 심정이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소묘와 함께 담겨 있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강물이 가다가 만
나고 헤어지는 산처럼/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우리 꼭 다시 만나자/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
만/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하나 되어 꼭 다시 만나자”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전교조 결성 초기의 싸움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하는 선생님들을 빼앗기지 않
으려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머리가 굵은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교내 농성에서부터 항의 투신, 투석전 등의 방식으로 싸움에 나섰고, 광주와
부산, 인천 등지에서는 고교생대표자협의회라는 조직이 결성되기도 했다. 해마다 1백명 이상
의 학생들이 성적제일주의 교육에 절망해 죽음을 택하는 상황에서 전교조의 교육이념과 소
속 교사들의 실천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호소력을 지녔다는 반증일 터였다.
초기 전교조의 싸움이 벌어진 89년 여름은 잇따른 방북사건으로 조성된 공안정국의 한파
가 전체 사회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 무렵이었다. 야당은 물론 재야와 노동운동 진영조차도
숨을 죽이고 있던 공안한파 속에서 전교조는 반독재민주전선의 최전위에서 모범적으로 싸웠
다. 전교조의 헌신적인 싸움에 고무된 민주진영은 `전교조 탄압저지와 참교육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참교육실현을 위한 학부모회' 등의 단체를 결성해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
발적인 범국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청주 중앙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도종환씨는 전교조 결성 초기에 구속되었다. <지금 비
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에 실린 많은 시들은 유치장과 감방에서 지은 탓에 비장한 결의에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옳다고 믿어 이 길을 택했으므로/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도/죄악이라고 믿
었으므로/우리는 새벽이 오는 쪽을 향해/담담히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서슬 푸른 칼
날에 수천의 목이 잘리고/이 나라 땅이 곳곳이 새남터가 된다 하여도/우리는 이 감옥
에서 칼날에 꺾이지 않는/마지막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에 쓰러져 있어도/빛나고 높은 그곳을 향해/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정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
“어쩌다 늦은 오후 길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핑돕니다”라고, 시인
은 시집 후기에 쓰고 있다. 그것이 89년 9월이었고, 그로부터 어느새 7년 남짓의 세월이 흘
렀다. 그때 그가 담임을 맡았던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이제 대학 2학년의 청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남들 다 출근할 때 `나만 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착잡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에게도 출근할 곳이 생겼다.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의 `참교육 빌딩' 3층 전교조 충북지부 사
무실이 그곳이다. 사무실에서는 이 교사 시인이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중앙중학교가 지척에
바라다 보인다. 더이상 학생들의 모습에 눈물바람을 하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
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직될 당시에 그 기간이 이토록 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전교조를 탈퇴하고라도 현직에 남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해직의 아
픔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 발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걸려오는 전화로 석유난로가 안온하
게 덥혀 놓은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새삼 분주하고도 긴박하게 바뀐다. 또 한번의 단식농성
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 전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속에 중앙중학교를 찾는다. 학생들은
모두 교실에서 수업 중이라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당분간은 들어설 수 없는 그 운동장을
바라보며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어릴 적 꿈을 가만히 되새겨 본다. 무엇이 그 꿈을 이
처럼 유예시키고 있는가도 따져 보면서.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어릴 때 내 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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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4
요산 김정한 선생의 삶과 문학
10일로 요산 김정한 선생이 타계한 지 열흘째가 된다. 그런데도 요산이 떠났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이는 요산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모든 후학들의 한결같은 느낌이다.
아쉬움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하고 있다.
요산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건강 악화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문단의 거목으로
존칭되고 당대의 양심 혹은 스승으로 존경받는 것은 요산이 문학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행동
인으로서도 우리의 귀감이 됐기 때문이다.
요산은 백낙청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의 말대로 “조용히 살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문학
을 한층 문학답게 해 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산문학'이 민족문학의 이정표가 될
힘을 그만큼 크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산의 문학정신은 등단작인 <사하촌>과 26년 절
필 끝에 문단 복귀작으로 내놓은 <모래톱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통받는 민중을 대변
하는 것이었다.
사회 중심에서 소외되고 힘있는 자에게 착취 당하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
해 가는 사람들을 `순덕이'라 지칭하며 이 나라의 수많은 순덕이들의 참담한 생활을 적시함
으로써 동포애적인 연민을 이끌어 내는 한편, 순덕이들 자신들에게 인내만으로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으며 애오라지 사회의 부조리나 힘있는 자의 억압에 저항할 때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요산문학의 본질이었다.
요산의 단편 `산거족'에는 저항의 당위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삶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요산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천착의 강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요산
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도 인간 존엄을 위해서는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장
치가 필수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후학들에 대한 요산의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항상 열심히 정직하게 살기를 당부했
고 태작을 내는 문학인에게는 문단에 문학 공해 풍토를 조성한다며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이 무척이나 아끼는 문학인 한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호히 출입금
지를 명했다. “어려울 때 힘이 돼준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록 안락을 취할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면 그걸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되자 선생은 손수 내의를 구입하거
나 영치금을 마련해 부산 교도소를 찾아 그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후학들에게는 “너거
가 가서는 안된다. 심부름 하다가 중정에 찍히기라도 하면 우짤기고!”라는 말로 일을 맡기
지 않았다.
요산은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작품을 쓰고 싶어했다. “논개 얘기를 장편으로 쓸기다.”
자서전 집필에도 무척 마음을 썼다. “출판을 해 공해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이라 타자로 쳐
서 책 일곱권만 만들어 일곱 아이들한테 주어 가훈으로 삼게 할기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뒤 단정수립을 반대했던 요산이 후학들에게 항상 일깨우던 과제는 통일문제였다. 그
러나 결국 요산은 남북대화마저 막힌 냉랭한 현실을 개탄하며 세상을 떠났다. 편히 하길 바
랐지만 영영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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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5
문익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
이 아니라고/이건 진담이라고//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
치는 거야/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가기로
결심했다구”.
문익환(1918~94) 목사가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한 것은 1989년 초였
다. 그해가 저물기를 기다릴 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불과 두달여 뒤인 3월25일 그는 유원호
·정경모씨와 함께 평양 땅을 밟는다. 시에서 밝힌 대로였다.
문 목사 일행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닷새 앞선 3월20일엔 작가 황석영씨가 역시 일본과
중국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그해 6월27일엔 가톨릭 농민회 출신 서경원 의원이 이미 88
년에 2박3일간 북한을 다녀온 사실이 뒤늦게 발표됐고, 서 의원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6월30일엔 한국 외국어대생 임수경씨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
양을 방문했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가히 북한행 러시라 할 만
한 추세였다.
87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정권교체의 꿈은 후보단일화를 거부한 김대중·김영삼씨의 고집으
로 무위로 돌아갔다. 선거라는 민주적 방식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한 신군부는 88년 서울 올
림픽을 차질 없이 치르면서 한층 안정적인 통치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6월항쟁의 거대한 몸
부림으로도 아무런 현실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민주세력은 바야흐로 실의와 낙담의
늪으로 빠져들려는가 보았다.
87년 대선국면에서 김대중씨의 상대적 진보성을 근거로 이른바 비판적 지지(비지)의 입장
에 섰던 문 목사가 평양행을 감행한 것은 이같은 민주화 운동 진영의 침체된 분위기를 배경
으로 하고서였다. 물론 그것이 당장의 국면전환을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다. 그의 평양행이
조국의 분단현실에 대한 오랜 고뇌와 각고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그보다 10여년 전에
쓴 또다른 시 `꿈을 비는 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똥 같은 내일이야/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벗들이여!/이런 꿈은 어떻겠소?/155마일 휴전선을/해뜨는 동
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다라/국
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비록 휴전선상에 남북 병사의 넋이 깃든 무덤을 만들고자 하는 꿈이 평양으로 가겠다는
잠꼬대로 바뀌었을지언정, 휴전선과 평양 사이의 거리, 꿈과 잠꼬대 사이의 거리란 근본적으
로는 영에 가깝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쨌든, 문 목사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
담을 갖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연방제 통일 원칙 등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 목사의 방북 기간이 열흘 정도였던 데 반해 황석영씨는 한 달 이상을 북한에 머물면서
김 주석은 물론 홍명희·박태원 등 월북작가들의 가족과도 만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
다. 게다가 그는 93년 귀국하기 전까지 미국과 독일 등지에 머물면서 몇차례 더 북한을 방
문했으며 그 결과를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기행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서경원 의원의 입북이 비밀리에 수행됐고 일찌감치 간첩사건으로 규정된 경우인 데 반해,
임수경씨의 방북은 전대협에 의해 공식 발표됐고 여론의 지지도 등에 업은 경우였다. 그는
방북 목적대로 평양축전 개막식에 참가했고, 축전 기간 중인 7월7일에는 북한 청년학생 대
표와 함께 `남북청년학생공동선언문'을 채택, 발표했다. 그의 활동을 전하는 북한의 텔레비
전 방송은 부분적으로나마 남쪽에서도 방영됐고, 여론은 그에게 `통일의 꽃'이라는 영광스러
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특히 그의 구김살 없고 발랄하면서도 소신이 뚜렷한 언행은 북쪽
동포들에게 문화충격과도 같은 것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임씨는 그의 귀환길에 동행하고자
파견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15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옴으로써 자신의 방북 목적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
문 목사 일행과 황석영씨, 서경원 의원, 임수경씨 등의 잇따른 방북은 단기적으로는 공안
합동수사부로 상징되는 공안정국을 불러오기도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민간 통일운동의 물꼬
를 텄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문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말
하고 있는 바 역사를 산 사람들이라 할 만했다.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
바꾸는 일이라구/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이땅에서 오늘 역
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
는 일이라고/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주장하
는 일이라고”.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가 지난 93년 3월 출소한 문 목사는 그 뒤에도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을 만드는 등 민간통일운동을 위해 애쓰다가 94년 1월18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결혼 50주년을 불과 다섯 달 남겨놓고서였다.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부터 반백년
동안 그의 삶의 동반자 노릇을 해온 부인 박용길(77) 장로는 김일성 주석의 1주기를 앞둔
지난해 6월28일 남편의 뒤를 좇아 평양을 방문해 한 달 남짓을 북에 머무르다가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우리 목사님도 돌아가시고, 김일성 주석도 갑자기 세상을 떠 버려 남북 정상회담도
일단은 허사가 되고 말았죠. 게다가 남쪽의 `조문파동' 여파로 남북관계는 갈수록 꽁
꽁 어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라도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목사님의
11년 옥살이를 나도 겪어보고 싶었습니다.”
판문점에서 박 장로를 체포한 당국은 그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던 임진각을 피해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이리저리 달려서는 그를 경찰병원에 입원시켰다.
드문드문 눈발까지 날리는 평일 오후의 임진각은 비교적 한산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시골 아주머니들과 두어 쌍의 젊은 연인들, 이따금씩 보이는 군복 차림의 휴가병들을 제하
면 지긋한 연배의 노인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제각기 지니고 온 자동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붙박이 사진사 정성춘(50)씨가 무심히 바라보고 있
다. 25년째 임진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정씨의 고향은 20리 밖 장단. 걸어서 한 시간 남짓
이면 갈 거리를 반세기가 가깝도록 되짚지 못하고 있다. 남가좌동의 집에서 매일 출퇴근을
한다는 그는 “올해 미수인 모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 보시는 것이 소원”이
라면서 “남북관계가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봐서는 그 소원을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70년대만 해도 이곳을 찾는 실향민도 많고 사진기도 별로 보
급되지 않을 때여서 일할 만했죠. 세월이 갈수록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피부
로 느낍니다.”
목포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1번국도는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에서 문득 끊기고, 방향을
틀어 내려오는 길 양옆으로는 미군부대들이 호위하듯 늘어서 있다. 필경 서울 사람들의 분
위기 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한 것일 식당들은 임진각 턱밑까지 치받치고 있는데, 끊어진 철
길 위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장이 자물쇠처럼 걸리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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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6
[타계 김정한 선생 일대기]
뒹구는 민중 끌어안은 '모래톱'
28일 타계한 요산 김정한씨는 70년대 민족문학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 중심축 구실을 한
민족문학계의 원로 소설가다. 올해 미수이자 등단 60돌을 맞은 요산은 지난 15일 후배 문인
들이 마련한 `김정한 선생 문학 60주년' 기념식을 받고 그 대쪽 같은 인생을 마감했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생의 마지막을 자서전 쓰기에 바쳐 온 요산은 마치 죽음을 내다본 듯 “내
생전에 책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었다.
1908년 지금은 부산시로 편입된 경남 동래군 북면에서 태어난 요산은 <낙동강의 파수꾼>
이란 자신의 산문집 제목이 이르듯, 평생을 낙동강변을 떠나지 않았다. 1936년 일제와 토착
지주의 수탈로 핍박받는 민중들을 그린 소설 <사하촌>으로 등단한 요산은 식민시대 농민문
학의 전범으로 평가 받은 이 작품의 정신을 일생 견지했다. 영리사업체로 변한 나환자수용
소를 그린 <인간단지>, 홍수와 부재지주의 횡포에 저항하는 낙동강 사람들을 다룬 <모래톱
이야기> 등 요산의 문학세계는 사실주의에 철저한 `저항문학', 세상을 향해 외치는 `발성의
문학'이었다.
요산은 낙동강뿐 아니라 또한 `시대의 파수꾼'이었다. 일제시대와 군부 독재시대를 거치며
늘 진보적 문인이자 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지켜본 그는 일제 말기인 40년 절필, 61년 5.16쿠
데타 뒤 부산대 교수 해직 등 굴곡 많은 현대사를 비판의 정신으로 지켜본 뒤, 이제 눈을
감았다. “나 평생을 천대받고 고통받는 이들 편에 서 있다”고 말하던 한 시대의 양심이
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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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7
[80년대 지성]
김지하의 저서
박경리(70)씨의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배와
민중의 검질긴 독립투쟁, 그리고 2차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
어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김지하 시인의 주요 저작은 그의 `전속 출판사' 격인 솔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고 있다.
그때까지 시집으로 묶이거나 발표된 서정시들을 시인 자신의 고증을 거쳐 다시 정리해낸 결
정본 시전집 <밤나라>와 <모란 위사경>, 그리고 담시집 <오적>이 나온 것이 1993년이었
다. 신작시집 <중심의 괴로움>은 이듬해에 나왔다. <황토>와 <애린> 등 주요 단행본 시집
을 비롯해 그의 사상적 전환을 시사한 새로운 시도인 <대설 남> 전5권 역시 다시 출간되었
다.
그의 생명사상과 문학관·세계관을 대담 형식으로 담은 <생명과 자치>가 올해 나왔고,
지난해에는 신작 산문집 <님>과, 신작 중심 산문집 <틈>이 나왔다. 이전 산문집의 글들은
<생명>과 <옹치격>, <동학이야기> 등에 나뉘어 실렸지만, 장시 <이 가문 날의 비구름>과
몇몇 산문집은 이전의 전집 출판사인 동광출판사를 비롯해 몇 출판사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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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38
[80년대의 지성]
백낙청의 사상과 삶 그리고 저서
1) 사상과 삶
64년 26살의 나이로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전임강사가 된 이래 백낙청은 언제나 문학
비평, 혹은 변혁 운동 전선의 전위에 서 있었다. 그는 어떤 때는 평문을 통해, 어떤 때는 시
국 선언을 통해 한국 변혁 운동의 방향들을 제시하곤 했다.
그는 66년 자신이 만든 계간 <창작과비평>에 <시민문학론>(69년), <민족문학이념의 신
전개>(74년) 등을 발표해 그의 문학 비평의 근간이 되는 `민족문학론'의 터전을 마련했다.
80년대 들어서는 이른바 `과학성'으로 무장한 급진적인 비평가들로부터 `소시민적 민족문학
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민족문학론'의 중심을 잡아가며 일관되게 `
리얼리즘'에 관한 글들을 써냈다.
그는 반제반봉건 시민혁명론을 필두로 분단모순론 등 변혁 이론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진
보적인 문인들의 성채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건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실천의 핵심성이다. 그는 일찍부터 “시인이 시쓰기를
잠시 유보할 시기가 있을 수도 있다는 당연한 상식”을 말함으로써 책상머리를 넘어선 구체
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가 택한 개념인 `지혜'도 실천과의 연관 속
에서 이해해야 한다
.
둘째로 그는 민중을 세상을 바꾸는 일의 주체로 본다. 80년대에는 그의 민중 개념의 모호
함 탓에 `소시민성'이라며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이
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체적인 싸움을 진행시키는 것이지 개념의 절대적 정확성을 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셋째로 한국의 자본주의는 계급뿐 아니라 민족과 분단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전제다.
2) 저서
백낙청의 책들은 그의 명성에 비해 적다. 먼저 그가 주로 계간 <창작과 비평>에 쓴 글들
을 모은 평론집들이 있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Ⅰ·Ⅱ> <인간 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민족문학의 새 단계> 등 네 권인데 그는 이 논쟁적인 글들을 통해 진보 문학계를 이끌었
다. 두번째로 그가 염무웅과 함께 엮은이로서 낸 네 권의 합동평론집 <한국문학의 현단계Ⅰ
·Ⅱ·Ⅲ·Ⅳ>가 있다. 이는 계간 <창작과비평>이 폐간된 80년 이후 창비의 평론가들이 숨
통을 틔우던 차선의 형식이었다.
엮은이로 펴낸 책으로는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서구 리얼리즘 소설 연구> <리얼리즘
과 모더니즘> 등도 있다. <신경림 문학의 세계> <고은 문학의 세계>는 공저자로 참여했
고, 역서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목사의 딸들>이 있다. 그밖에 잡문집으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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