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아제 바라아제(3)
한 승원 저
----- 차 례 -----
작가 소개
제1장 두 마리의 외뿔짐승
제2장 약과 병
제3장 개 같은 사람 사람 같은 개
제4장 바다를 짊어지고 사는 여자
제5장 아수라
제6장 진흙으로 만든 소 물을 건너고
제7장 보석을 머금어주는 연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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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두 마리의 외뿔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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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팔팔한 남자 이순철은 검문을 피하느라고 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몸이
단단해 보였다. 장발이었고 눈이 매섭게 번뜩거렸다.
호리호리한 여자 강수남은 그를 따라 걸었다.
이순철은 강수남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떨쳐버리고 혼자만 갈 기세였다.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두껍게 덮여 있었다.
벚꽃잎만한 눈송이들이 흘러내렸다. 현기증 나게
쏟아지는 꽃잎 같은 눈보라 줄기들 사이로 검은
공간이 절망처럼 강수남의 의식을 아득하게 하곤
했다.
"산 넘고 들판 가로지르고 강을 건어야 하는데
따라올 수 있겠소?"
이순철이 강수남에게 물었다.
강수남은 얼굴이 기름했다. 눈썹이 여치의
더듬이같이 길었다. 목도 가늘고 길었다. 그 여자는
법명이 진성인 비구니였다. 환속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니는 가발을 쓰고 세속옷을 입고 마을로
나섰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일이었고 벌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간 그니는 속명을
쓰기로 했고, 어디엘 가든지 속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승복을 입은 승려의 신분으로서는
맛보고 느끼고 터득하고 깨달을 수 없는 부분을
맛보고 느끼고 터득하고 깨달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제가 보기로는 별로 강단지지도 않을 것
같은데...... 폭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어요. 이 나라
관상대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기는 하지만......"
강수남은 그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따라 걷기만
했다.
"감상이나 호기심으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는 좋아하지 않소. 잠행하는
저를 살피려고 하지 마시오."
이순철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강수남은 종종걸음을
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이순철 씨의 짐이 되게 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
상관 마시고 혼자 행동을 하둣이 거침없이 길을 잡아
가시기만 하십시오. 이순철 씨와 자는 그저 기찻길에
놓여 있는 두 개의 나란한 쇠줄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영원히 한데 합쳐지지 않고 섞이지 않는 지루하고
답답하고 차가운 두 개의 쇠줄 말이죠?"
강수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자하고 남자하고 단둘이 가는데 그렇게 그렇게
끝까지 합쳐지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고 그럴 것
같소? 남녀가 끝내 합쳐지지 않고 섞이지 않는
그것같이 재미없는 일이 세상에 어디 또 있는 줄
아시오?"
그들이 산허리를 넘었을 때 짙은 눈발이 그들의
눈앞을 가렸다.
"빌어먹을......"
그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더니
"내가 어째서 이렇게 엄동설한 속을 떠돌게 되었는
줄 아시오?"
하고 말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려 하지 않고
그는 말을 이었다.
"한 늙은이를 모시고 훈훈한 온실 같은 방 주변을
맴돌면서 배불리 밥 먹고 단잠 잘 자고 그 늙은이가
읽히는 대로 책을 읽고 외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참
묘한 일로 그 늙은이한테서 쫓겨났어요. 나는 아직도
그 늙은이한테서 쫓겨난 까닭을 모릅니다."
그가 늙은이라고 말을 한 것은 그의 은사
스님이었다. 그는 두 해 전에 환속을 했다. 그가
그러했다는 것을 그니는 우종남한테 들었다.
산기슭을 벗어났다. 밭이 시작되었다. 밭에는 눈이
허옇게 쌓여 있었다. 눈보라가 눈앞을 가렸다. 마을을
오른쪽에 끼고 걸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새로 사귄 이웃집 친구를 잠시
만나고 들어오니까 그 늙은이가 물었어요. '저녁은
먹었느냐?' 네가 '네.' 했지요. '어디서 오는
길이냐?' 다시 묻기에 '이웃집에서 오는 길입니다.'
했지요. '설거지는 다 했겠구나?' 하고 또 묻더군요.
'네.' 했지요. 그랬더니 '에끼 빌어먹을 자식. 너
이놈, 당장 봇짐 싸가지고 나가!' 이럽디다
허허허......"
큰절엘 갔다가 오자 그의 은사 스님이 상좌인
그에게 물었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저녁 공양은 했느냐?"
"그럼 바루도 씻었겠구나."
그는 사실대로 "녜,녜." 하고 대답을 했다.
그게 어떤 뜻으로 묻는 물음인지를 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일부로 그렇듯 미욱하게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 은사 스님도 그가 그렇듯 일부러 미욱한
대답을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터이었다. 미욱한
대답을 은사한테 황소뿔같이 들이민다는 것은 그
은사를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어르신께서 선문답을 하고 싶으셨던 거로군요."
강수남이 말했다.
"빌어먹을...... 세상은 그렇게 말장난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요. 쓰팔."
이순철은 투덜거렸다.
눈은 이미 발목이 차게 내려 쌓였다. 아직도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무릎까지 차오르고,
허리까지 차오르고, 끝내는 머리까지를 덮도록 내릴
모양이었다. 북극도 아닌데 웬 눈이 이렇게 내릴까.
눈이 허옇게 덮인 농로를 강수남과 이순철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끝이 없는 눈 덮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
그들에게는 시계가 없었다.
해는 저 검은 구름 속 어디쯤에 있을까. 얼마쯤 더
가면 인가를 만날 수 있을까. 강수남은 겨울 내의
위에 딱딱한 청버지를 입고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그 위에 등산복을 걸쳤다. 목과 머리에는 털목도리를
감았다. 등에는 베개만한 배낭을 짊어졌다.
먹물빛의 승복은 그니를 보이지 않게 가두곤 했다.
마을 사람들과 함부로 섞이지를 못하게 하였다.
그니는 그들과 두루두루 섞이고 싶었다. 이번 참삶의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 가발을 쓰고 여느 젊은
여자들같이 편한 옷을 입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은 이때껏
철석같이 지켜온 계율을 깨뜨리는 일인 것이었다.
눈은 녹아서 그니의 내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발은
오래 전에 감각이 없어졌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순철은 자기가 모시고 있던 늙은이한테서 쫓겨난
이야기를 한 뒤로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수남은 이순철이 이순녀의 오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순녀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순녀는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였다. 그러나 강수남 쪽에서 아직 그 말을
꺼내지를 않고 있었다. 이순철 쪽에서 다시 무슨
말인가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눈구덩이에 빠진 강수남이 비틀거렸다. 무릎을
꿇었다. 이순철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와서 부축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가
일으켜주기를 기다리느라고 굼뜨게 눈 덮인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러다가 일부러 다시 비틀했다.
이순철이 그녀의 장갑 낀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생각보다는 근기가 약하시군요."
이순철이 이렇게 말했다. 아하, 이순녀! 하고
강수남은 새삽스럽게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도 이순녀의 그것처럼 콧소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떨리는 결도 비슷했다. 그윽하게 울리는 데가
있었다.
강수남은 자기를 일으켜준 그의 손을 놓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속으로 적의를 느꼈다.
"어쩌자고 이 폭설 속을 이렇게 나섰습니까?"
이순철이 물었다.
"이순철 씨는 왜 이 길을 이렇게 나섰어요?"
그는 웃었다. 웃는 입모습이 이순녀를 빼다가
박아놓은 것 같았다. 그니가 잘 아는 이순녀가 남자로
변장을 하고 이렇게 그니와 나란히 가고 있는
듯싶었다. 그니는 이를 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니가 이순녀를 미워해야 할 이유기 없었다. 그것은
질투요 시기였다.
그니의 눈길과 그의 눈길이 눈발 소용돌이치는
허공에서 서로 마주쳤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이순철이 모시고 있던 그
늙은이가 이순철에게 물었다는 말들을 떠올렸다. 그
늙은이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물음을 던졌을 터인데,
이순철은 기껏 밥벌레로서의 대답만을 한 것이었다.
그 먼 격차와 깊은 골은 무엇으로 메꾸어야 하는가.
"우주라는 것이 뭐요? 진리라는 것은 또 뭐요? 가장
하잘것없는 벌레들의 삶 속에 그것들은 담기어
있어요. 나는 벌레같이 살기를 자청했소."
이순철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강수남은 이순철을 찾아 한 달 동안이나 헤매었다.
이순녀의 오빠 이순철은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공업도시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전국노동자협회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 남자를
반드시 만나보라고 소개를 해준 것은 우종남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그 친구하고 마주앉아
있으면 속이 훈훈해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터득할 수 있게 됩니다."
강수남이 세상을 가장 참답게 살아가는
사람(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참다운 길을
터득해야겠다고 말을 했을 때 우종남은 이순철을
소개해준 것이었다.
"이리로 가면 인가가 나오기는 나옵니까?"
강수남이 물었다. 몸을 녹이고 쉬고 싶었다. 지쳐
있었다. 이순철을 따라 나선 것을 후회했다. 이
남자한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가요? 그런 것은 영영 안 나올지도 모르지요.
저도 이 길 처음입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그니는 절망했다. 한 걸음도 더 내디딜 수가 없도록
무기력해졌다.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지도상으로 어디겠냐는 말씀인가요? 저도
모릅니다. 여기는 바람이나 구름만 다니는 길입니다."
바람이나 구름만 다니는 길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기는 바람이나 구름이란 말인가.
사람인 나는 바닥이나 구름만 다니는 이 길을 잘못
들어섰을까.
"강수남 씨는 남자를 깊이 사귀어봤소?"
이순철이 물었다. 강수남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체했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눈 밟는 소리만
났다. 강수남은 손이 시리고 아렸다. 털목도리 밖으로
내놓은 코와 눈과 볼도 아렸다. 눈보라는 그녀의 속살
속으로 파고들려고 기승을 부렸다.
그니는 학생시절에 자기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낸
이웃집 하숙생을 생각했다. 그 하숙생은 한 시골
면장의 아들이었다. 심장판막증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그를 남자라고 이름할 수도 없고, 깊이 사귀었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니는 우종남을 생각했다.
우종남은 그니로 하여금 세간 쪽에 눈이 뜨이도록
해주려고 애를 쓰곤 했다. 이번 여행을 주선한 것도
그였다. 그와도 깊이 사귀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사귀어야 깊이 사귀는 것일까.
맨살과 맨살을 마주대고 비비는 것일까. 영혼의
교감이나 교통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 그분과 깊이 사귀었고, 지금도
사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하고 한 번 깊이 사귀어보기로 합시다."
이 남자가 나를 희롱하려 하는구나, 하고 그니는
생각했다.
이순철이 말을 이었다.
"이 엄동설한 속에서는 서로 뜨거운 피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얼어죽지 않습니다."
강수남의 눈앞에서 눈보라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순철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강수남은 그의 손을
피했다.
그들은 하얀 눈벌판에 발자국 두 줄을 찍으면서
가고 있었다. 눈송이가 수국의 꽃덩이같이 굵어졌다.
이순철은 소매와 팔꿈치와 호주머니 주변이
헤어져서 너덜너덜한 돕바를 입고 있었다. 뚝뚝한
양복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미 눈
눅은 물에 젖어 있었다. 등에는 아이들이 운동
보조가방으로 쓰곤 하는 끈 긴 감색의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얼굴은 깡 말랐지만 눈은 형형했다.
몸은 꿋꿋했다. 걸음질이나 말씨에 지친 구석이
없었다. 우종남은 이 남자한테서 무엇을 배우라고
나를 보냈을까.
'뜨거운 피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강수남은 이순철이 하던 말을 생각했다. 어떻게
뜨거운 피를 주고받는다는 것일까. 그니는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니에게는 온기가 필요했다.
어디에서 모닥불이라도 좀 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됐다. 이 허허벌판 속 어디에 그럴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가 뻗어온 손을 피한 것을 후회했다.
눈은 한없이 내릴 모양이었다. 이 눈송이들은
무엇의 넋일까. 이 넋들에는 어떤 한이 스며 있을까.
이것들은 어디서 오고 있을까.
땅에 쌓인 눈은 이제 성문다리(정강이)께까지
차올라 있었다. 발이 푹푹 빠졌다. 미끄러지곤 했다.
몸은 빨리 나아가지를 않았다.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잠시 쉬면 어떨까. 푹신한 눈밭에 누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남자의 등에 업히어 가고 싶었다.
아아, 하고 그녀는 운명을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러한 눈보라 속에서 쓰러지게 되고,
이순철이라는 이 남자의 등에 업히어 가도록 마련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남자하고
일생을 함께 하도록 운명지워졌는지도 모른다. 밤이면
성행위를 하고, 아들을 낳고, 딸도 낳고, 시장에서
콩나물 백원어치를 가지고 실랑이질을 하고, 학교로
아들딸들을 쫓아다니고, 담임교사한테 봉투를
주고...... 그러한 아낙이 되도록 누군가가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강수남은 비웃었다.
참으로 잘 사는 길을 찾아 나선 사람은 무소뿔처럼
꿋꿋하게 혼자서 나아가는 것이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모든 욕심들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강수남은 이를 물고 맥이 풀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거야말로 용맹정진이다. 이 눈길을 헤쳐 나가지
못하고 어찌 참으로 잘 사는 길을 발견할 수 있으랴.
이순철이 다가와서 그녀의 팔 하나를 잡았다.
그에게 잡힌 팔끝의 장갑을 낀 손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저기 산이 보이네요."
이순철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거뭇거뭇하게
자란 수염과 눈썹에 눈이 묻어 있었다. 그의 형형한
눈길이 뻗어간 곳을 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산이
보이지를 않았다. 허연 눈보라가 회오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지러워 비치적거렸다.
내 눈에는 왜 산이 보이질 않을까. 그가 말하는
산은 정말 산일까. 사실은 그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데
그니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산이 보이네요.' 하고
말을 한 것일까.
어지럽게 춤추며 내리는 눈발 속에 아기를 가슴에
안고 달래는 한 아낙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니였다.
이순철이 눈보라 속을 뚫어보며 말을 이었다.
"산모퉁이 앞으로는 강둑이 있네요. 그 근처에
인가가 있을 겁니다. 헛간 하나를 빌려서 밤을
지냅시다. 동태가 되기 꼭 알맞는 폭설이오."
강수남은 빗겨 날리는 눈보라 저쪽의 산모퉁이
강둑을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눈알 속으로
눈송이들이 들어갔다. 찬바람도 들어갔다. 눈알이
시렸다. 눈물이 나왔다. 흰눈 덮인 벌판과 빗겨
날리는 눈송이들이 굴절되면서 어지럽게 휘돌았다.
발을 잘못 디디고 비틀했다. 이순철이 그니의 어깨를
부축했다.
이 남자는 환상을 보고 있구나,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사막에서는 신기루 현상이 있다고 했다.
눈이 허옇게 쌓인 산이나 들판도 사람의 눈을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하곤 한다고 했다.
아니, 이 남자는 '파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을
찾으려는 내 눈에는 '파도'가 보일 리 없다. 아득한
무기력이 그니의 온몸을 휩쓸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면서 그니는 절망했다. 다리에
더욱 힘이 풀렸다. 그니의 머리 속에 두 구의 시신이
보였다. 그니의 시신과 이순철의 동태처럼 얼어 죽은
시신이었다.
"몸이 얼어 죽게 된 처녀에게는 무엇이 약인 줄
아십니까?"
이순철이 물었다. 그가 붙들고 있는 팔뚝에 뜨뜻한
온기가 번지고 있는 듯싶었다. 그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총각의 맨살이 가장 좋은 약이래요. 원래 처녀
총각의 맨살은 서로 닿기만 하면 어떻게 무슨
의학적인 기기로 측정을 할 수 없는 고도의 열을
낸답니다. 붙은 두 몸 사이에 생고구마를 넣어도
익어버린답니다."
그는 다시 입을 다문 채 걷기만 했다. 그니의 머리
속에 문득 어려서 어머니가 뜨거운 욕조 속에 몸을
넣고 때를 문질러 주던 것을 생각했다. 어머니의
손길은 그니의 몸의 모든 살갗들을 속속들이 문지르고
씻었다. 뚫려 있는 모든 구멍들을 비비고 우벼
씻어주었다.
자라면서는 그녀가 혼자 목욕탕엘 가서 어머니가
우벼 씻어주던 곳들을 자기의 손으로 그렇게 씻곤
했다. 피부는 부드럽고 탄력이 있었다. 흰떡같이
희었다. 그 모든 것들을 그니는 한 위대한 어른한테
바치고 있었다. 그 어른의 뜻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
어른의 눈길에 아프게 뇌새를 당하면서 노예처럼
복종하는 행복을 맛보며 살아오고 있었다. 아,
시타르타 왕자님, 석가모니 부처님, 하고 그니는
중얼거렸다.
"저하고 함께 살아가요.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돈
벌어서 집도 사고, 이웃사람들하고 아웅다웅 싸우기도
하고......"
우종남이 문득 이렇게 말을 던지곤 했었다. 그니의
손목을 잡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그니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내 손목을 한 번
잡기만 하면 음험한 욕망들이 스러져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돌이나 나무같이 견고해지는 그니에게
우종남은 이렇게 말했었다.
"저하고 결혼합시다. 영혼만의 결혼도 좋고
몸뚱이만의 결혼도 좋고, 그 둘 모두의 혼례도
좋습니다."
우종남의 말에 강수남은 웃기만 했었다.
"벌레들이나 짐승들이나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집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강수남 씨는
어떤 모양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순철이 그니의 손을 아프게 죄며 물었다. 그
물음의 저의를 알 수 없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기의 의식이 얼어붙어가고 있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는 강수남의 손을 그니의
호주머니 속에서 빼냈다. 그것을 그의 호주머니
속에다 집어넣었다. 장갑 낀 그니의 손을 그의 손이
힘 주어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리고 아리는 손끝이
깨어지는 듯싶었다. 참았다. 잠시 후면 손이 녹을
것이다.
얼어붙어가는 그니의 의식을 그가 녹이려 들고
있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저기 저 어떤 암자에 노스님 한 분이 있는데 그
노스님을 흔히 성자 같다고들 한답니다. 삼라만상의
삶의 법칙을 꿰뚫어보는 해안을 가졌으면서도 그
노스님은 항상 어리아이처럼 웃고 경박하다 싶게
행동을 하곤 한대요. 상좌들이 죽을 끓여주거나
잠자리를 보아주려고 해도 마다고 하고. 속옷이나
양말을 빨아주겠다고 해도 마다고 하고, 밥상을
가져다가 드리려 해도 손을 젓곤 한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손수 한대요. 차도 끓이고, 샘으로 냉수를 떠
마시러 손수 가고...... 밖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아무 데에 있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노스님께
법문을 해달라고 합니다. 가서 좀 해주십시오.' 하고
말해도 그 노스님은 고개를 저어버린답니다. 자기는
아직 남의 절이나 마을에 가서까지 법문을 해주고
어쩌고 할 경지에 이르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이해
일흔 살인데 아직도 서책을 대하기만 하고 면벽참선을
하기만 한답니다. 놀라운 스님이지요."
강수남은 그분이 대관절 어느 암자에 있는 어떤
스님인가를 물어서 찾아가 참 삶의 길에 대하여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순철은 그니의 손을 계속
주무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니의 손이 녹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그 손을 타고 가슴으로 밀물지고
있었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한데 그 노스님도 딱하시기는 마찬가지여요. 그
노스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자기를 '성자
같은 사람'이라는 그릇으로 만들어놓고 그 그릇의
모양새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답답한
어른이란 말입니다.
그의 말에 그니는 승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참
삶의 길을 찾으려는 그 스님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그가 그니의 손을 더욱 힘주어 쥐었다.
"강수남 씨는 스스로를 어떤 모양새의 그릇으로
만들어가려 하고 있어요?"
그니는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렸다. 나는 어떤
모양새의 그릇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그가 갑자기
너털거렸다.
"강수남 씨 가슴에도 유방은 있으시죠?"
그 말이 그니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이순철은 구만리 장천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를 잡아 자기의 호주머니에 넣고 만지는
개구쟁이처럼 그니의 손을 주물럭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유방이라는 것은 한자로 된 말이고, 순 우리말로
하면 젖가슴이요. 아니오. 젖통이요. 유두라는 것도
젖꼭지요."
눈보라는 한결같이 줄기차게 그들의 눈앞을
어지럽게 가리면서 빗겨 내렸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끈적거리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을까.
그니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순철은 말했다.
"이상스럽게도 사람들은 유방이라든지 유두라든지
하고 말을 하면 점잖고 고결하지만, 젖통이라고 하고
젖꼭지라고 하면 저속하고 음탕한 사람으로
여겨버립니다. 어쨌든지 저는 유방이나 유두는 남의
말 같고, 젖통이나 젖꼭지는 우리말 같아요.
아니지요. 유방이나 유두는 꽃무늬 장식이 잘 된데다
간지러울 만큼 부드러운 서양식의 천으로 만든
젖통가리개. 말하자면 브래지어라는 것으로 싸덮은
귀족적인 여자들의 그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젖통이나 젖꼭지는 자락치마의 치맛말로 동여 주인
것이나 젖통가리개라는 것을 하지 않은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의 축 늘어진 그것들을 말하는 것 같단
말입니다."
내 젖가슴은 여느 여자들의 그것보다 빈약하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작은 정구공만 할까 말까.
브래지어로 젖가슴을 싸매지 않아도 철렁거리지 않고
불룩해 보이지 않으므로 그니는 그것을 차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이 드러날세라 꼭 째인 무명조끼로
싸맸다. 이 사람은 나의 그 빈약한 그것을 유방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젖통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한데 이 남자는 그 허무한 살덩이에 대하여 왜
그렇듯 집요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남자 저
남자를 바꾸어가며 살아가는 이순녀의 피가 이 남자의
피 속에도 흐르는 까닭이다. 그 뜨겁고 짐승스러운
음욕의 피 말이다.
강수남은 그 사이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하느라고
잊고 있었던 추위를 생각했다. 눈 녹은 물에 젖은
발끝과 눈보라에 노출된 볼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옷
속으로도 추운 바람은 파고들었다. 체온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를 악물고 배와 가슴에다 안간힘을
집어넣는데도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주물리고 있는 손 하나만 녹아 있었다. 그
손을 통해서 그의 따스한 체온이 그의 몸 속으로
아련하게 건너오고 있었다.
"유방이든지 젖통이든지, 좌우간 그것은 생명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있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생명을 키워내라고 점지된 그 젖통을 생명 키우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순리가 아니요."
이 말을 하면서 이순철은 그니의 손을 더 힘껏
쥐어주었다. 아야 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살아가기의 가장 참되고 올바른 길은 원래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억지로 되돌리지 말아야
하고, 자기의 책무를 외면하고 도망치지 말아야
하고......"
속에 억분이 가득 찬 사람처럼 그는 말했다.
"나는 혼자 행려병자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죽은 내
어머니를 가엾게 여기면서 동시에 증오합니다. 남편
없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면서 돈놀이를 했지요.
그것이 잘못되어 아들도 집을 나가고, 딸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러다가 한 남자한테 돈을 모두
떼이고는 결국 실성해가지고 실쭉실쭉 웃으면서
찻길인지 사람의 길인지 물인지 불인지 가리지를 못한
채 떠돌다가 죽었답니다."
이순철은 한동안 말을 끊고 걷기만 했다. 아하,
이순녀는 그 어머니 때문에 그렇듯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되었구나,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그 여자는 세상을 억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어요.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모되는
어머니의 낯선 모습에 몸서리를 치곤 했어요.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돈놀이하는 인색한 한 아주머니의
얼굴로 보일 때도 있고,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기회를
노리는 왕거미 같은 마귀로 보일 때도 있었어요. 어느
남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화장을 짙게 하고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다니는 화냥기가 철철 흐르는 창녀로
보이기도 하고, 해감내만 풍기는 자궁을 가진 추한
암컷으로 보이기도 하고, 속에서 부글거리는 성적인
불만족 때문에 아들딸을 달달 볶아대는 늙은 암탉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그 어머니 밑에서 아들딸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고, 질식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동생
순녀가 집을 뛰쳐나간 것도 그 까닭이고, 제가
대학시험에 세 번이나 실패를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원래 억척스럽고 사나운 어머니는 아들을
잡아먹는답니다. 한 어머니를 그렇듯 억척스럽고
사나워지도록 만드는 사회는 비극적인 사회입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남자지요. 부딪쳐오는 절박한 것들을 피해
도망을 친 남자입니다. 그래 가지고 머리를 깎았어요.
그 양반은 자기의 도닦기도 실패를 하고 한 가정을
이끌기도 실패를 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데도 실패를
한 사람입니다. 결국은 이 실패가 한 여자를 그렇듯
억척스럽고 사나워지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순철은 그의 호주머니에 든 그니의 손을
주물럭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와 그니의 눈앞에서
흰 눈송이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여자를 그렇게 억척스럽게 사나워지게 만든
것은 그 여자의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 젖통과
자궁입니다. 아기를 낳아 기르고, 먹여 키우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젖통과 자궁은 다른 어떤 일로 그것을
메꾸려고 합니다. 돈을 턱없이 많이 벌려고 하고,
아들딸들을 분수에 넘치게 큰인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억척스럽고 사나운 어머니의 등쌀에 순하고
부드러운 아들딸들은 시들고 말라지게 됩니다."
강수남은 용광로 같은 불지옥에서 몸부림치는 한
늙은 여자를 생각했다. 그 늙은 여자를 구하러 그
지옥에 뛰어든 젊은 남자와 여자를 떠올렸다. 자기
어머니의 지옥살이를 구제하고자 이들 남매는 이렇게
헤매는지도 모른다. 아니 자기 어머니의 업보 때문에
이런 황야를 헤매는 것이다.
그니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면서 이순철은 말을
이었다.
"강수남 씨는 분명 여자이기는 한데 여자 노릇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직무유기하고 같습니다.
말하자면 강수남 씨가 지니고 있는 젖통이나 자궁을
낳고 키우는 일에 사용하려 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오."
이순철은 추궁하듯이 말했다.
"세상은 어떤 일을 억지 써서 순리 아닌 쪽으로
돌리려 하고 책무를 외면한 채 도망치려 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지러워지고 어두워집니다. 나는 내 동생
순녀가 환속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 둘을
키우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편견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어떤 것이 또다른 어떤 것보다 크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큰 것보다 더욱더 큰 어떤
것(가장 참된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내가 주의 깊게 관찰을 하여온
바로는, 강수남 씨도 여느 여자나 마찬가지로
순간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모되곤 해요."
이순철의 그 말에 강수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 모습이 순간순간 달라지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보는 눈의 잘못이다. 이 남자의 눈에 보여지는 대상인
나의 잘못은 아니다. 절대로 나는 순간순간 한결같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 강수남
때는 자기가 성녀(聖女)라는 착각을 한 채 살아가는
여자인 듯싶었습니다. 또 얼마쯤 뒤에는 불감증이
있는 여자로 보였습니다. 영원히 석녀(石女)일 수밖에
없는 여자 말입니다. 얼마 전 눈보라 속에서는
결백증이 심한 암코양이 같은 여자로 보였고, 또 얼마
전에는 신들려 있는 무당딸같이 보였습니다."
이순철이 말을 끊었다.
강수남은 눈보라 수런거리는 허공을 향해 실소를
했다. 사람들은 물을 물이라고 하지 않고 파도라고
한다. 파도는 순간순간 변한다. 바람이나 물의 흐름에
따라 굵어지기도 하고 흰 거품을 내뿜으면서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갈매기의 날개폭같이 작아지기도
한다. 지금 이순철은 물을 보지 못하고 파도만 본다.
나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현상만 보는 것이다.
"달을 보고 환상에 잠겨 있는 집시 처녀 같기도
하고, 일찌기 어느 양반한테 계간(鷄姦)을 당한 어린
사당패 같기도 하고, 감상에 젖어 있는 문학소녀
같기도 하고, 여호와에게 넋을 빼앗긴 광신도 같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또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이 남자한테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남자한테 얻을
게 많다고 한 우종남 또한 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허량한 자가 아니겠는가.
얼마쯤 걷다가 이순철이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여자 노릇을 하십시오.
도망쳐다니거나 잠행을 하는 자는 어디서 어느 놈한테
붙잡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모릅니다. 그러한
잠행하는 자의 흔적을 당신의 자궁 속에 담으십시오.
역사 바깥에서 맴돌지 말고 그 한가운데로
뛰어드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젖통이나 자궁이 곧
역사를 올곧고 튼튼하게 낳아 키우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때껏 많이 먹어댄 밥값을 지불하는
길입니다."
'영혼의 유방과 영혼의 자궁으로 가장 참된 삶을
낳고 기른다고?' 하고 강수남은 반문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남자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이념의 질곡에 붙들려 있다. 독선에 빠져 있다.
독선이 세상을 얼마나 비극적이게 만드는가.
시야가 트였다. 눈이 그치고 있었다. 바야흐로 서쪽
하늘에서 불그죽죽한 빛살이 번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 땅거미가 내릴 것이다.
인가를 찾지도 못하고 날이 저물면 어떻게 할까.
눈밭에서 동태처럼 굳어져 죽어갈 것인가.
"저기, 저 산모퉁이에 인가가 보입니다."
이순철이 흰눈 벌판 끝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땅에는 눈이 정강이께가 묻힐 만큼 쌓여 있었다.
이순철의 턱이 가리키는 곳에 산 같은 것이 보얗게
나타났다. 산모퉁이에 커다란 조개 하나가 눈더미
속에 묻혀 있는 듯한 동그스름한 것이 보였다.
강수남은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몸에 힘을 주었다.
이순철은 자기의 호주머니 속에 든 그니의 손을
아프게 주물러댔다. 나는 무얼 얻자고 이 남자를 따라
나섰을까. 그니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턱이 달달
떨렸다. 이를 물고 안간힘을 썼다.
석유난로의 반사경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그
앞에서 뜨개질을 하는 어머니가 생강차를 끓여주던
일이 생각났다. '마셔라. 감기에 좋단다.' 천식을
앓던 은선 스님의 방에서 차를 끓여드리고 마시던
일도 떠올랐다. 혀끝과 코와 눈과 귀와 목구멍과
뱃속이 동시에 화끈 뜨거워지고 얼큰해지는
생강차였다.
뜨끈뜨끈한 방에 들어가 몸을 녹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산모퉁이의 인가에 가면 그렇게
뜨끈뜨끈한 방이 있을까. 있을 것이다.
"운명을 믿으십니까?"
이순철이 물었다. 강수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이 멎은 대신 바람이 세차졌다. 쌓여 있는 눈이
바람에 날려 그니의 얼굴을 할퀴었다. 숨이 막혔다.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눈 쌓인 들판이 굴절되고
있었다.
"성격입니다. 성격이 운명을 만듭니다. 성격은 버릇
들이기에 따라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운명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갑니다. 운명의 운(運) 자에는 수레
바퀴가 있습니다. 운명은 자기가 밀고 가는 쪽으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입니다. 누군가의 뜻에 따라 이렇게
되었다기보다는 우리들 둘이 공동으로 연출을 한
겁니다. 우리는 영혼과 영혼의 맨살을 섞고 있어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죠."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참삶의 길을
찾겠다고 나선 나의 길은 나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길일까. 강수남은 신음을 하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순철이 말을 이었다.
"내 동생 순녀라는 계집아이 말입니다. 그
아이한테는 천부적인 화냥기가 있어요. 혼자는 죽어도
못 사는 여자지요. 엉덩이가 실팍하고 젖통도 크고
얼굴에는 도화살이 끼어 있어요. 어머니의 못된
부분만 다 닮은 것이지요. 그 아이 몸속의 뜨거운
피가 그 아이의 운명을 그렇게 밀고 가고 있는
겁니다."
흰눈을 뒤집어쓴 산모퉁이 앞에는 강이 있었다.
강을 굽어보는 산모퉁이에 집이 한 채 있었다. 덮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내려앉을 것 같은
초가였다. 부엌을 중심으로 방이 양쪽에 있었다. 그
집의 북쪽 모퉁이에 원뿔 모양의 칙간이 있었다. 마당
가장자리로는 썩어 쓰러진 싸릿대 울타리의 잔해가
눈덩이에 눌려 있었다.
그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대오리문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부엌은 문이 없었다.
동굴같이 검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찌그러진 툇마루
위에는 마른 감나무 잎사귀들이 몇 장 뒹굴고 있었다.
그들이 그 집에 이르렀을 때는 밤이었다.
파르스름한 눈빛 때문에 집의 형체와 주변의 숲을
분별할 수가 있었다. 주인이 집을 비운 지는 반년쯤
된 듯했다. 그 뒤로는 아무도 거쳐가지를 않은
듯했다.
이순철은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부엌의 나무청부터
더듬어보았다. 땔나무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강 굽이 쪽에서 달려왔다. 지붕의 눈이
날렸다. 강수남은 댓돌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불을 지피고 방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그니는 슬펐다. 이 허무한 몸뚱이는 지금
한 오라기의 온기라도 얻고 싶어한다. 쿵쿵 지반이
울리도록 그니는 발을 굴렀다.
"혹시 성냥이나 라이터 가지고 있어요?"
이순철이 그니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그니는
절망했다. 이순철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없으면 땔나무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릴없이 동태처럼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는 등에 지고 있는 자루를 툇마루 위에 벗어
던지고 그 밑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칙간 쪽으로 갔다. 모퉁이를 한 바퀴
돌아나왔다. 그의 손에는 팔뚝만한 몽둥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우리 불을 만듭시다. 혹시 모르니까 방으로
들어가서 방바닥을 한번 더듬어봐요. 성냥 알갱이 한
개라도 떨어져 있는지...... 나는 부엌바닥을
더듬어볼 테니까. 발만 구르고 있지 말고 빨리
서둘러요. 우리 몸 식으면 얼어 죽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그니는 대오리문을 열었다. 차가운 빈 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의 땀내와 지린내와 곰팡내들마저도
삭아버리고 없는 공허의 냄새였다. 그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시꺼먼 괴물이 목을 조를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니는 까만 어둠 기어 나오는 방을 등지고
이순철이 들어간 부엌을 향해 선 채 발을 굴렀다.
이순철이 바삐 나와 방 안으로 들어가서 바닥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히들거렸다.
"태평양 한가운데다가 누군가가 빠뜨려놓은 금반지
한 개를 찾는 것이 낫겠구만......"
그는 밖으로 나오더니 서쪽의 흙담 위에 걸쳐진
처마의 썩은 이엉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순철은 뜯어낸 썩은 이엉 가운데서 눈에 젖지
않은 것을 추려 방바닥에 깔았다. 두 아름 뜯어다가
깔고 세 아름 뜯어다가 깔았다. 대오리문 쪽이 무릎
차게 쌓였다. 이제는 그의 손이 닿는 처마에 더
뜯어낼 이엉이 없었다.
"이리 들어오시오."
이순철은 아직도 댓돌 앞에서 발을 구르고만 있는
강수남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니는 썩은 이엉
깔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니의 등에서 배낭을
벗겨냈다. 그니를 썩은 이엉 푹신하게 깐
방바닥레 앉혔다. 마주 앉아 그니의 젖은 신을
벗겼다.
강수남은 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그 경황에서도 눈앞에 가벼운 현기증 같은
졸음이 오곤 했다. 그니는 하품을 했다. 졸음과 함께
무기력이 왔다. 누워 자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됐다.
"자면 죽어요. 이 악물고 이쪽 다리 주물러요."
이순철은 그니의 두 손을 끌어다가 그니의 왼쪽
다리 위에 놓아주었다. 그는 그니의 오른쪽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입김이 그니의 코끝을 스쳤다. 그니의
온몸에서 모공들이 곤두섰다. 그래 잠들면 죽는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자기의 왼쪽 다리를
주무르려고 했다. 두 팔 두 손도 굳어져 말을 듣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고 팔을 뻗고 두 손끝으로 발을
주물렀다.
"이런 콩나물같이 샛노란 강단 가지고 이 길을 왜
나섰어요? 정신 차려요. 두 눈 부릅뜨고...... 이쯤의
추위에 그렇게 무기력해져서야 어떻게......"
이순철은 그니의 언 발을 으깨어버릴 것같이
아기차게 주물러댔다. 그니는 아아 하고 신음을 했다.
얼얼 하고 감각이 없던 발에 감각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는 문득 히들히들 웃었다.
"기막힌 일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아까 강수남
씨하고 눈보라 속을 나란히 걸어오면서 말입니다.
옛날 혼자 이불 속에 누워서 용두질치던 일을
생각했어요. 용두질이 뭔 줄 알아요? 남자들의
자위행위를 용두질이라고 합니다. 허허허......
그런데, 이 추위, 이 눈보라 속에서 가난하디 가난한
젖통을 야무지게 싸맨 여자하고 나란히 걸어오다가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요."
강수남은 이를 문 채 자기의 왼발을 주물렀다.
그니의 왼쪽 발에도 감각이 살아나고 있었다.
이순철은 그니의 종아리를 주물러놓고 허벅다리를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 뭘 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니의 바짓가랑이는 눈 녹은 물에 젖어 척척했다.
바짓가랑이 끝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그의 손은
사타구니께를 주물러댔다.
"불을 피우고 있는 겁니다. 사랑의 불 말입니다."
이순철은 그니의 귀를 비비고 볼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이런 때는 가장 인간적인, 아니 사실은 가장
동물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나 이웃 사람을
위하여 좋습니다."
강수남은 아직도 자기의 한쪽 다리만을 주물르고
있었다. 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니의 몸
여기저기를 이순철의 손길이 불바람처럼 휩쓸었다.
허벅다리와 허리를 주무르고, 옆구리와 배를
주물렀다.
아직도 그니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까 이
빈집 안으로 들어설 때보다는 좀 덜 추운 것 같았다.
이순철도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결같이
여유를 보이면서 히들거렸다.
"당신, 그 다리만 그렇게 주무르지 말고, 이제는 내
다리를 주무르시오. 당신 몸만 얼어붙고 굳어져가는
것이 아니고, 내 몸 여기저기도 시리고 저리고 아리고
굳어져가고 있어요. 당신 손이 닿는 곳 아무데나
주물러요. 그래 내 왼다리부터 주무르시오. 힘껏
주물러요. 으깨어지도록 더 힘껏!"
이순철은 소리를 꽥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손
하나를 그니의 젖가슴 속으로 집어넣었다. 강수남은
몸을 움찔하면서
'이게 무슨 짓거리요?'
하고 꾸짖으려고 했다. 입술과 혀가 굳어져 있었다.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의 손은 품을 꼭 조인
무명베 조끼 위를 더듬었다. 그니의 젖 하나를
손아귀에 넣었다. 거칠게 주물렀다. 다른 손 하나를
또 넣었다. 다른 젖을 눌렀다. 그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니은 몸통을 모로 틀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지 말아요. 지금 그 젖가슴이 얼어붙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왜 이러십니까? 이 추위 속에서
얼어 죽어가는 한 여자를 이렇게 희롱을 해도 되는
겁니까?"
그녀는 추위로 말미암아 어눌해진 혀와 입술을
움직여 말을 했다. 이순철은 그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히들거리면서
"아이구, 웬 젖통이 이렇게 가난하요? 절벽이 따로
없구만!"
하고 말했다. 그의 손은 계속해서 그니의 젖을
주물러댔다. 그니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니는
추위와 배반감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는 미친듯이
그니의 가슴을 끌어안아 버렸다. 밀어내려는 한쪽의
힘과 끌어안으려는 다른 한쪽의 힘이 엇갈려 그들은
잠시 버둥대다가 모로 넘어졌다.
강수남은 밑으로 깔리고 이순철은 그니를
덮어눌렀다. 그는 그니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이런
짐승 같은 놈, 하고 그니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성에 호소를 할 양으로 그의
가슴을 걷어밀고 팔을 잡아 젖히면서
"이순철 씨, 이럴 수 있어요?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하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벌집같이 뚫린 창구멍을 통해 눈가루가 날아들었다.
휘잉 하고 귀기 어린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문짝이
흔들렸다. 눈 쌓인 산야를 질풍이 마녀같이 내닫고
있었다. 어딘선가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순철은 강수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짐승이 되어 있었다. 우종남은 바로 이러한
짐승스러움을 발견하라고 나를 이 남자한테 보냈을까.
강수남은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물었다.
그의 한 손은 그니의 한쪽 젖을 끊어낼 듯이 찍어
누르고 있었다. 다른 한 손은 그니의 바지 지퍼를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니는 그의 그러한 두
손의 손목을 잡았다. 그것들을 그니의 몸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니의 어떠한 기도도 그의 완강한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하는 대로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그니는 혼신의 힘을 모았다. 발악하듯 안간힘을
쓰면서 무릎을 그의 두 가랑이 사이로 밀어넣는 데
성공했다. 그때는 그니의 바지 지퍼가 열려진 뒤였다.
그는 바지의 허리춤을 잡아 허벅다리 쪽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니는 그의 허리춤 잡은 손목을
비틀었다. 허벅다리가 드러나고 무릎이 드러났다.
그는 이어 내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니는 악을
쓰듯이
"이 짐승보다 못한 놈!"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그의 몸을
물어뜯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니는 그의 입술을
피해 얼굴을 오른쪽으로 틀어젖히고 있었다. 얼굴을
그의 어깨 쪽으로 돌렸다.
상대편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몸을 보호해야
할까. 이 남자의 한 순간의 짐승스러운 욕심을
채워주면 어떠랴. 그런 다음 이 남자가 잘못된 음심을
깨닫도록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니는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반발을 하듯이 그의 어깨살을 힘껏
물었다.
"억!"
하고 이순철은 소리쳤다. 동시에 그니의 몸을
깔아뭉개려 하던 동작들을 멈추었다. 썩은 이엉들이
깔려 있는 방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사이에
강수남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벗기어진 내의와
바지를 올려 입었다.
지퍼를 채우면서 그를 피해 안쪽 구석으로 가서
섰다. 썩은 이엉자락 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이순철이
허허허 하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니는 그가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날아들어온 푸르스름한 눈빛에 비친 이순철한테서는
귀기가 서려 있는 듯싶었다.
"아이고, 이 땡초년! 몇 년 동안 색에 굶주린
이놈한테 육보시(肉菩施) 정도는 가벼이 여기고
해주리라고 생각을 했더니, 이제 보니 살생을
보통으로 아는구만...... 당신, 그래 가지고는 당신이
말하는 '참삶의 길' 찾기는 다 글렀어."
이순철은 상체를 일으키고 앉으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어댔다. 그의 웃음소리가 수묵처럼 퍼져 있는
어둠 속을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귀기 어린 바람이 산기슭과 강둑을 몰아치고
있었다. 눈을 무겁게 실은 소나무 가지들이 그 바람에
부대끼면서 꺾이고 있었다.
강수남은 안쪽 방구석에 붙어선 채 모멸감과
배신감과 억분을 가빠진 숨결로 내뿜고 있었다.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니는 이를 악물었다.
다가가서 이순철의 따귀를 치면서,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이순철이 웃음을 그치고 그니를 돌아보았다.
강수남은 그가 다시 자기에게 덤벼들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물고 독한 경계의 눈길을 그에게 쏘아
날렸다. 짐승스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먼저 눈길로써
제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니는 자기의
눈길에서 독기가 난 야행성 짐승들의 눈같이 푸른
형광을 뿜어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조금 덜 춥지요? 몸도 어느 정도
풀리셨지요?"
이순철은 아직 웃음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여기 내 어깨에는 아마 살점이 떨어졌는
모양인데요? 강수남 씨, 나한테 그렇게 잔인하게 할
수 있어요? 아이고, 어깨를 못 움직이겠는데!"
하고 엄살을 부리면서 그니에게 물어 뜯긴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직거려보았다. 아하,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연극이었더란 말인가. 나를 범하려고 한
것은 추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더란 말인가.
그니는 멍청해지면서 그니의 몸에서 없어진 추위를
생각했다. 마비되었던 것을 생각했다. 그니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니다.
저 사람은 내 몸을 범하는 데 실패를 하자, 저렇게
표변한 것이다. 앞으로도 그를 계속 경계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렇지만 강수남 씨, 이 밤이 다 밝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삶의 마지막 벼랑 끝에 앉아들
있습니다. 그 벼랑 끝에서 죽음 쪽으로 떨어지지 않게
우리를 끌어올려야 할 사람은 우리들 스스로
뿐입니다. 이리 오십시오.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죽습니다. 우리는 이 밤을 무사히 넘기 위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불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몸속에
불을 지펴야 하는 거예요."
그의 말을 합리화시켜주기라도 하듯 눈보라의 귀기
어린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눈 날리는 소리와
나뭇가지들이 떨고 있었다. 닫아놓은 대오리문 앞을
바람이 달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들어왔다.
강수남은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이순철의 말대로
어떤 형태의 불이든지 만들어 이 혹한 속에서 몸이
얼어붙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혼자는 안 돼요.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두 몸을
마주대야 합니다.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몸을 마주대고 맨살을 비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맨살 비비듯이 영혼의 교통을 해야 합니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몸이 풀릴 만큼
풀렸으니까 다시 그 방법을 쓸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어요?"
강수남은 그를 멀거니 보고 있기만 했다.
이순철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얼른 이리 오시오.
이런 방법으로 세상의 추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을
나는 내 동생 순녀한테서 배웠어요."
순녀라는 말에 강수남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철사심처럼 곤두섰다. 이순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우종남이도 이순녀에 대하여
말을 하곤 했었다.
"강수남 씨도 순녀를 한 번 만나보셔야 할 겁니다.
순녀에 대해서는 참 묘한 소문이 나 있어요."
그렇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곤
해도 그니는 자꾸 이순녀라는 여자한테 참패를 했다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곤 햇다. 너도 살아가고 나도
살아간다. 서로의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누구의 살아가는 방법이 어떤 사람의 살아가는
방법보다 위대하다든지, 누구는 살아가는 방법에서 그
어떤 이에게 이겼다든지 졌다든지 하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도 그니의 가슴 속에는
이순녀에 대한 적의가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것은
은사인 은선 스님이 그니의 가슴에 못을 박은
때문이었다. 은선 스님은 그니의 만행을 도금한 가짜
금반지처럼 우습게 알고, 이순녀의 이 남자 저 남자
바꿔치기하며 떠돈 일은 금강석같이 알았었다.
그 까닭을 말해주지 않은 채 은선 스님은 죽어
갔다. 은선 스님은 순녀를 편애했다. 강수남은 쓰라린
고독과 소외감을 맛보면서 이를 갈았다. 편애하는
은선 스님의 도력을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은선의 법통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경들을 읽고 또 읽었다. 조사들이 밟아온
길을 더듬어 살폈다. 무소의 뿔처럼 꿋꿋하게 나아갈
자신이 생겼다. 이제 선재동자같이 '참 삶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몇 십 명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을
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의 드높은 경지에 올라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종남의 말마따나 인생의 진흙탕
속에서 생수처럼 향 맑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
향맑은 삶의 뜻을 몸에 배게 하리라 하고 선방을 나온
것이었다.
"순녀 그 가시내는 지금 또 다른 남자하고 살고
있어요."
이순철은 히들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거침이 없어요. 두려워하지를 않아요.
더러워하지를 않아요. 지금 저쪽 항구 끝에서 밥집을
내고 삽니다. 이 세상에 풀 붙이고 살려면은 자기의
맨살 말고 더 좋은 풀 붙일 거리가 어디 있느냐고
그럽디다. 얼음같이 단단하게 굳어진 것 녹일려면
푸른 피 퍼덕거리는 여자의 속살 말고 더 좋은 뜨거운
것이 어디 있느냐고 그럽디다. 정말 그렇지요. 남남인
사람들이 서로 대붙여 살아가려면은 맨살부터 가까이
마주대야겠지요. 맨살 가운데서도 가장 부드럽고
뜨거운 부분을 들이밀어야겠지요."
강수남은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강 굽이를 돌아
달려온 바람이 구멍 숭숭 뚫린 대오리문을
흔들어댔다. 그니의 발과 손과 드러난 살들은 시리고
아리기 시작했다. 체온이 떨어지고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있어 불을 피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등과 가슴과 엉덩이와 다리통을
감싼 옷들은 눈 녹은 물에 젖어 있었다. 그 옷의
물기는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 서
있다가는 얼어 죽게 된다. 저 남자를 끌어안아야
한다. 서로 몸 여기저기를 주물러주어야 한다. 서로의
근육이나 세포 하나하나가 잠들지 않도록 들쑤시고
비벼대야 한다. 열리 나도록 해야 한다. 이 엄동설한
속에서 살아 배기려면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생명력이 타올라야 한다. 저 남자의 손에 젖가슴을
맡기고 저 남자의 입술이 내 얼굴이나 목덜미나
가슴팍을 지나다니도록 해야 한다. 핥고 빨도록 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순철이 그니에게로 다가왔다. 그니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강수남 씨는 여자가 무엇 하는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추위는 사실 내가 더 많이
타고 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추위를 느끼는 온도는
이도쯤의 차이가 있답니다. 여자가 더 강한
것이지요."
그들은 다시 먼저처럼 썩은 이엉 깔린 방바닥에
앉았다. 그가 그니를 끌어안았다. 그니도 그를
안았다. 서로의 언 살들을 비비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슴에 묻기도 하고 입술로 상대의 목 속에
입김을 주입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왔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 자궁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멍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이 있어요. 수컷들은 발정한 암컷의 자궁
속으로 함몰합니다. 암컷들은 자기들이 누군가의 자궁
속으로 함몰하지 못하는 대신 수컷들을 자기의 자궁
속에 함몰시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자궁들은
생명을 낳는 곳이자 생명을 함몰시키는 곳이요. 자궁
속의 난자에 씨가 하나 배태되려면 일억 오천만 개의
다른 정충들이 죽어가야 합니다. 그 정충 하나를 심기
위하여 수컷들은 자기의 전인생을 투척하는 겁니다.
성행위를 하면서 진땀을 흘리고 무수히 절망을 하는
겁니다. 절망을 하곤 하기는 암컷 쪽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들은 마주 앉은 채 한쪽 다리를 상대의 사타구니
속으로 넣었다. 이순철은 그니의 다시 시리고 아리기
시작하는 발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점차 그니의 허벅다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니도 그의 발과 다리통을 비비기도 하고 주무르기도
했다. 한쪽 귀가 상대의 목에 닿기도 하고 볼에
닿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닿는 볼과 귀와 목을
맞비볐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것은 사람의 살이오. 다른
사람의 살을 더러워하는 것은 병입니다. 결벽증은
사람을 인색하게 하고 독선적이게 하고 패쇄적이게
하고 계급적이게 하고 잔인하게 편을 가르게 합니다.
강수남 씨한테는 결벽증이 있어요."
이순철의 말이 옳다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그니는
그니의 코를 스치는 그의 얼굴에서 많은 냄새를 맡고
있었다. 쿠릿한 입내를 맡고, 감은 지 오래된
머리냄새를 맡았다. 겨드랑이 쪽에서 번져오는 시금한
땀내도 맡았다. 덜 구어진 오징어 냄새 같은 남자들
특유의 체취도 맡았다. 이 잠행을 하고 있는 남자는
목욕을 한지 오래이고, 내의들도 갈아입지를 않아
더러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자기의 한 몸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서
이 우주가 금방 깨끗하고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자기의 한 몸도 깨끗하고 아름답게 닦고 꾸며야
하겠지만 그 깨끗하고 아름다운 한 몸으로 우주의 한
부분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장식해야지요. 자기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주변의 더러움과 미운
것들을 빨아 없애야 자기의 깨끗함과 아름다움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결벽증은 주변의
더러움을 외면하고 피하게 만듭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하고
강수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못 살고 못 먹고 헐벗은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한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그들은 부지런히 상대의 다리와 어깨와 몸통
여기저기를 주물러댔지만 체온은 자꾸 떨어졌다. 강
굽이를 달려온 바람은 대오리문을 흔들어댔다. 그들은
후들후들 떨었다.
그니가 그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썩은 이엉
깔린 방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그는 그니의 젖가슴
속에 얼굴을 묻었다. 두 손으로 젖 두 봉을 끊어낼
듯이 찍어눌렀다. 강간을 하려는 사람처럼 그니의 두
다리를 꼬고 배를 마주댔다. 그니도 안간힘을 쓰면서
그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가 엿가락처럼 꼬아 감은
두 다리에 안간힘을 썼다. 그가 그니의 입속에 그의
입술을 넣었다. 그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옴!"
하고 신음을 했다. 속으로 옴마니반메훔, 하고
부르짖었다. 나의 만개한 연꽃 속에 위대한 그대를
품습니다. 그대를 품어 그대처럼 영원한 빛으로
피어나고 싶습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그니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안았다. 순간 뜨거움이 가슴
속에서 피어났다. 그 뜨거움이 머리 속과 등줄기와
아랫배 쪽으로 번져갔다. 눈앞이 환해지고 아찔한
쾌감이 전류처럼 전신에 퍼졌다. 가장 깊은 곳의
속옷이 젖고 있었다. 이순철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니를 끌어안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떨어졌던 그들의 체온은 회복이
되었다. 그의 품속에서 그니는 이 남자하고 결혼을
해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고향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할까. 아기도 낳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다니기도 하고......
"'옴'은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이 싹틀 때 터져
나오는 소리인데 간밤에 강수남 씨는 그 소리를
질렀어요."
이순철이 동녘을 보고 선 채 말했다. 그는 간밤
썩은 이엉을 뜯어낸 처마 밑에 서 있었다. 허허로운
눈벌판 저쪽에서 핏덩이 같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강수남은 그 해를 보고 있었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그 악몽은 보물섬엘 다녀온
듯싶은 것이었다. 품속에 번쩍거리고 울긋불긋한 곱고
단단한 보석들을 지니고 돌아왔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니에게는 그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악몽같은 밤을 그와 함께 한번쯤 더 지내고 싶어졌다.
아쉬웠다.
그들은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젖은 신을
다시 신었다. 그는 벗어 던졌던 자루를 짊어졌고,
그니는 배낭을 짊어졌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이순철이 물었다. 간밤의 일로 계획이 변하지
않았느냐는 뜻의 물음이었다.
"순녀 씨가 산다는 그 항구로 가겠어요."
강수남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했다. 또 다른
남자하고 살고 있다는 이순녀를 만나고 싶었다. 어떤
모양으로 그 인생이 망가져 있는지 보고 싶었다.
"아니요, 지금 그리로 가지 마시요. 순녀 만나기
전에 당신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소."
이순철은 등에 진 자루에서 볼펜을 꺼내
종이쪽지에다가 적으려 했다. 얼어붙어 써지지를
않았다. 그는 말로써 만날 사람에 대하여 일러주기
시작했다.
"잘 기억을 해두시오. 그 항구 미처 못 가서
동촌이라는 면소재지가 나오는 데 거기서 내려가지고
풍년농원을 물으시오. 가서 주인남자한테 내 이름을
대고 얼마 동안 머물러 살겠다고 하시오."
그들은 성문다리를 덮는 눈밭을 걸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강 하구 쪽으로 나란히 뻗어갔다. 그들은
눈의 구덩이를 잘못 디디고 주저앉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했다. 쓰러진 상대를 일으켜주기도 하고
비틀거리며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뱃속이 쓰라렸다. 배고픔과 함게 무기력증이 왔다.
"그 사람한테 가면 주의해야 합니다. 뭐든지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좀 무리한 짓을
하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법을 따르시오."
다릿목 앞에 이르렀다. 보기 드문 외나무다리였다.
외나무다리는 눈을 두텁게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그것은 흡사 거대한 용이었다. 눈부신 비늘들을
쇠창살 같은 햇살 속에서 번쩍번쩍 빛내고 있었다.
"나는 이 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강수남 씨는
이쪽으로 더 내려가다가 큰길이 오면 차를 타십시오."
"미끄러운데 어떻게 건너시렵니까?"
"건너는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그는 그니의 한쪽 젖을 덤썩
움켜쥐었다. 그니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움켜쥔 것을 서너 차례 주물럭거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너털거렸다.
"이 젖이 부디 생명을 키울 수 있게 당신의 자궁에
위대한 씨를 담으시오. 어허허허......
이순철은 강둑에 서 있는 소나무의 가지를 꺾었다.
잎사귀들 많이 달린 가지 두 개로 빗자루를 만들었다.
그것으로 다리 위의 눈을 쓸면서 한 걸음씩 나아갔다.
허름한 돕바를 입고 등에 자루를 지고 윗몸을 굽힌 채
눈을 쓸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순철의 모습은
흡사 짐승이었다.
강수남은 눈 속에 발을 묻은 채 서서 그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그는 강을 건너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별로 높지 않은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다가는 미끄러졌다. 기우뚱한 몸을 가누고 다시
나아가다가는 굴러떨어졌다. 저 산허리를 넘으면
어디일까. 그는 저 언덕으로 가고 나는 이 언덕에
남아 있다. 그를 뒤따라가고 싶었다.
강수남은 그의 모습이 산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발을 옮겼다. 간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옴!" 하고
부르짖었던 스스로의 소리가 그니의 귀청에 남아
있었다. 그니는 그와 몇 차례의 성행위를 치렀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순철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니는 생각했다.
'에끼 빌어먹을 자식, 당장 나가거라.'
늙은이의 이 말 한마디에 집을 뛰쳐 나올 수
있었을까.
들을 건너자 찻길이 나왔다. 제설차가 지나간
얼마쯤 뒤에 버스가 뒤따라왔다. 눈덮인 산야가 눈을
아프게 했다. 눈이 멀게 되고 머리 속이 눈같이 흰
백치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풍년농원을 묻자 운전사는 한 이십분쯤 달린 뒤에
그니를 내려주었다.
강수남이 풍년농원을 찾아갔을 때 농장 주인은
주먹만한 코를 실룩거리면서 그니를 속속들이 살폈다.
부수수한 머리칼들을 한동안 보았다.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음에는 그니의
민틋한 가슴을 살폈다. 훌쭉한 배와 가는 허리와
다리와 발을 뜯어보았다.
"어째서 좋은 머리를 길지 않고 가발을 썼을꼬?"
마흔 살은 조금 넘었을 듯한 농장 주인은 코를
찡긋하면서 물었다. 그니는 얼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젖가슴은 또 어째서 그렇게 가난하요? 여자는
젖가슴이 풍성해야 복이 있는 법인데? 우리 집에서는
젖통 작은 여자는 쓰지 않어요. 집안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농장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면 몰라도, 농장에 드나들면서 작물 손대고
그러겠다고 한다면은 안 돼요."
농장 주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의
눈길은 매섭게 그니의 얼굴과 몸매 여기저기를
훑었다. 말은 퉁명스럽게 차가웠다.
"얼굴이 곱고 예쁜 것하고 풍성한 복하고는 관계가
없는 법이오."
강수남은 이순철이 조심하라고 일러주던 말을
떠올렸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니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 두어주시겠다고만 하면 시키시는 대로 다
할께요."
"참말이오?"
그는 코를 찡긋하면서 불쑥 그니의 젖가슴께로 손을
뻗쳤다. 그니는 그의 검은 머리털 속에서 내다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털들을 바보스럽게 쳐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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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약과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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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덕도 없고, x복도 없는 년이 무슨 미련이 아직도
그렇게 남아 있어서 얼른 들어오지 않고 시장바닥을
쉬파리같이 잉잉거리면서 싸다니고 있냐?"
정선 스님의 그 말에 상좌 둘이 허리를 붙잡고
까르르 웃었다. 순녀가 빼어난 미모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의 덕을 보지를 못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
복을 누리고 살아가지도 못함을 그렇게 속인처럼
걸쩍지근하게 말을 한 것이었다.
순녀도 웃었다. 오랜만에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본
웃음이었다. 웃으니까 속이 편해졌다. 그렇다, 이렇게
웃음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자,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비행장 출구 앞이었다. 사람들이 출구로 빠져
나갔다. 정선 스님과 상좌 둘도 나갔다. 정선은
나가면서 순녀의 손을 말없이 꼭 쥐어주었다. 정선
스님과 상좌들의 모습이 소지품 검사대 저쪽으로
사라졌다. 순녀는 출구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정선과
그니의 상좌들은 순녀에게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정선은 오래 전부터 순녀에게 시장바닥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지 말고 다 털어버리고 산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틀 전에 그 항구 근처의 전등사의
법회 때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가게엘
들른 것이었다. 정선은 순녀가 차려준 백반 한 그릇을
맛있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며 먹었다.
순녀는 그녀가 지금 처해 있는 입장을 말해주지를
않았다. 정선 스님은 어떻게 내가 이 항구에 살고
있는 줄을 알았을까.
대합실 밖으로 나와서 순녀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비행기와 그녀 사이에는 기다란 끈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자기는 그 비행기
안에 실리어 가고 가짜만 땅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가신 은사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너의 등신은 산을 내려가서 떠돌고, 진짜 혼령은
여기 내 곁에 남아 있다. 아니, 네 등신이 여기 내
곁에 남아 있고 네 혼령이 산을 내려가 사두사방을
헤매고 다닐지 모른다.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이 진짜
너이겠느냐? 그것을 네가 분명하게 알았을 때 나하고
너하고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순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은사 스님의 말은
그녀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 어느 것도 나의
진짜는 아니다. 그것은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나한테는 지금의 골치 아픈 삶들이 널려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내 팔자다.
순녀의 식당은 바다를 바라보는 상가 끝머리에
있었다. 기사식당이었다.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시작한
식당이었지만 어느 사이엔지 일반 손님들이 더
많아졌다. 식당은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순녀가 식당으로 돌아왔을 때는 점심때가 훨씬
기울어 있었지만 손님들은 아직도 붐비고 있었다.
식당일을 도맡아 감잡는 조기님이 말했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전화가 세 군데서
걸려왔어요. 저기 풍년농원 박 사장한테서 오고,
모르는 어떤 남자한테서 오고, 애들 학교에서
오고...... 그 남자는 이따가 다시 걸겠다고 했어요.
애란이가 또 여길 온다고 오고 있는 모양이어요."
조기님이 재빨리 주어새겼다. 때마침 계산을 마치고
나서는 손님에게 껌 한 개를 주며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단골 손님이었다. 언젠가 한 번 순녀의 손목을 덥썩
잡으며 얼굴을 붉힌 적이 있는 운전기사였다. '당신
얼굴을 보고 가기만 하면 피곤이 싹 가신다고요,
흐흐흐......' 순녀도 그 손님에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에게 차인철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 남자는 순녀의 공손한 인사에 또 얼굴을 붉혔다.
그와 같이 그녀의 얼굴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순녀는 전화를 걸었다는 그 어떤 남자가 현종
선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친 생각이라고
자신을 꾸짖으며 돌아섰다. 서둘렀다. 주방 일을 하는
안동댁이 챙겨놓은 밑반찬과 개소주 냉동시켜놓은 것
세 봉지와 새로 사놓은 남편과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속옷들을 싸들었다. 병원으로 달려가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산재병원이었다.
그 병원에 남편과 시아버지가 입원해 있었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의 간호를 하느라 붙어 있었다.
시아버지인 한길언은 삼 년째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한정식은 척추를 다친데다 두
다리가 끊어졌다. 칠 년째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정선 스님이 순녀에게 x덕도 없고 x복도 없다고 한
것은 그녀의 그 형편되어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찌할 것인가. 모두 그녀가 사서 저지른
일들이었다. 그녀를 얽어매는 고통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순녀는 투후 하고 한숨을 쉬면서 출입구를 향해
두어 걸음 걷다가 말뚝처럼 멈추어서버렸다. 바야흐로
여자아이 하나가 출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딸 애란이었다. 애란이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곧 계산대 앞으로 갔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조기님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끝으로 눈과 코와
입과 목과 머리칼과 젖가슴을 더듬었다. 만지고
쓰다듬었다. 조기님은 애란이가 그렇게 만지고
쓰다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것을 보는 순녀의 가슴은 칼로 에이는 것처럼
아렸다. 가슴 한복판에 차돌같은 것 하나가 뭉쳐져
있었다.
식당 안의 손님들 몇이 잠시 먹는 행위를 멈추고
애란이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주방의 아주머니들
셋도 일손을 놓고 애란이 하는 짓을 보았다.
"이모로구나! 그런데 왜 저번보다 더 말라졌네?"
애란이가 조기님의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제서야 조기님은 애란의 두 손을 모아잡았다. 두
눈을 멀뚱하게 뜬 애란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오늘은 많이 헤매지 않고 빨리 잘 왔는가보구나?
선생님께서 전화하신 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
애란이는 조기님의 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고 순녀가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활짝 웃었다. 금방울을
굴리는 듯한 소리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 오셨지! 그렇지? 흐흐흐 우리 어머니
냄새 난다."
순녀는 말을 잃은 채 탁자들 사이의 통로에서
쪼그려앉았다.
애란이 순녀에게로 걸어갔다. 순녀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애란이는 쪼그려앉은 순녀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쌌다. 조기님에게 했듯이 얼굴 살갗들을
속속들이 더듬어 만졌다. 뚫려 있는 구멍들을 쓸었다.
돌출된 코와 귀바퀴와 입술을 만졌다. 머리카락과
턱과 목ㅈ기와 젖가슴을 만졌다. 두 팔을 벌려 순녀의
얼굴을 자기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에 코를
가져다 대고 짐승처럼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마
쪽으로 코와 입술을 끌고 내려갔다. 순녀의 이마와
콧날과 볼과 입술에다 무슨 자국을 내기라도 할 듯이
입술을 찍어댔다. 그러면서 냄새를 계속 맡았다. 목과
젖가슴에 코를 박았다.
순녀의 가슴에서 목구멍 쪽으로 치올라온 뜨거운
덩어리가 눈물로 변해서 흘러내렸다. 멈추고 있던
숨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내뿜었다.
"달디달다, 흐흐. 우리 어머니 냄새......"
대란은 순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들 모녀를 보던 사람들은 어느 사이엔지 모두
얼굴을 돌렸다. 손님들은 밥들을 먹었다. 주방의 보배
어머니가 눈물을 찍어냈다. 주방 여자들과 조기님은
그들 모녀가 하는 짓들을 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자기 할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애란이는 순녀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밀어내면서 건너다보았다. 애란이의 두 눈이
멀뚱거렸다. 순녀가 애란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순녀의 눈물 어린 눈에 애란이의 동글납작한 얼굴과
거기에 뚫린 구멍새들이 굴절되었다.
"난 다 알 수 있어. 어머니 얼굴이랑, 아버지
얼굴이랑, 이모 얼굴이랑...... 그리라고 하면 다
그릴 수도 있어."
언젠가 애란이는 순녀에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순녀는 애란이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 나올까
두려웠다. 애란이의 얼굴을 그녀의 가슴 속에 묻었다.
뒤통수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 가엾은 새끼를 어떻게
할까. 애란이는 눈을 멀겋게 뜨고도 빛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였다. 애란이뿐만이 아니었다. 두 해 터울인
아들 성근이도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빛을
식별하지 못하는 청맹과니였다. 순녀는 그들 남매를
모두 맹학교에 넣어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 걱정 마셔요. 저는 어디든지 한 번
걸어가보기만 하면 그 길을 다 알아버려요. 길이
얼마나 넓은가, 몇 걸음쯤 가면 전주가 있는가,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 데에 가게가 몇 있는가,
무슨무슨 가게인가, ......앞에서 자전거가 오는지,
리어커가 오는지도 알고, 달려오는 차가 짐차인지
택시인지 자가용차인지 버스인지도 다 알아요. 우리
학교 교문에서 몇 걸음 가면 버스 정류소가 있는지도
알고, 몇 정류장째에서 내리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나오는지도 다 알아요."
그녀의 딸 애란이는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순녀는 딸 애란을 끌어안은 채
그녀가 없을 때 전화를 걸었었다는 '어떤 남자'를
생각했다. 순녀는 그 어떤 남자가 현종 선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랬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었다. 함정에 빠져 있는
자기,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기를 구해줄 사람은
현종 선생 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현종
선생이 언젠가는 자기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예감이었다. 그런 예감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그녀는 늘 미워했다. 스스로를
함정에 빠져 있거나 동굴 속에 갇혀 있다고 규정짓는
자기가 미웠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자기에게 그녀는 데면데면했다.
선생과 제자로서 만나는데 뭐가 켕기고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럽단 말인가. 그렇게 대들면서도 그녀는
현종 선생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모든 것을 다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종 선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종
선생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혼자 사는 까닭이
그녀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 현종 선생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 아이들을 배반하는 것이고, 병원에 누워
있는 남편과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다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전화가
현종한테서 걸려온 것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니, 아까 그 남자......"
조기님이 순녀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수화기
속에서 흘러 나온 것은 예감대로 현종 선생의
목소리였다.
"어머, 선생님!"
하고 나서 순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울음이 목을
막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딸 애란의 손이 그녀의
눈시울을 더듬었다. 순녀는 떨었다. 울음을 참자니
말을 이어 할 수 없었다. 울음소리가 저쪽으로
건너간들 어떠랴.
"저, 드리고 싶은 말이 많은데요. 거기가
어디셔요?"
그녀는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터미널이다. 막 도착했는데, 일을 보고 나면 아마
저물 것 같다. 그때 다시 전화하마."
"안 돼요. 지금 약속을 하시지요. 제가 터미널
쪽으로 나갈께요. 이층에 있는 다방에서 느지막하게
만나요. 여덟시쯤...... 선생님께서 늦으시더라도
제가 내내 기다릴께요."
순녀는 허둥댔다. 저쪽에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잡음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어라고
하셨느냐고 젖혀 물었다.
"여덟시면 너무 늦다. 여섯 시 반에서 일곱시가
좋겠다."
저쪽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순녀는 그 시간에
맞추어 나가겠다고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돌아서면서
그와 약속한 것을 후회했다. 혀를 물었다. 그 사람을
만나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이제 와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조기님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화기 속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변하는 표정을 읽고 있었다. 저
언니는 그렇듯 많은 남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또
나타난 그 어떤 남자와 관계를 맺으려 한다, 하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애란이 뭐 먹고 싶으냐?"
조기님이 순녀의 딸 애란이에게 물었다. 애란이는
순녀의 젖가슴을 만지면서 "엄마 젖!" 하고
키득거렸다. 순녀의 가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빨아들였다.
"아이고 달다."
순녀는 애란이를 데리고 나갔다. 딸아이를 달래서
보내고 병원으로 달려가 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햇살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고양이털 같은
햇살이었다. 그것은 차가운 바람을 뚫고 애란이의
약간 갈색인 머리칼에서 반짝거렸다. 제과점으로
들어가려다가 순녀는 매듭가게를 생각했다. 남편
한정식이 매듭공예를 하겠단다고 재료들을 구해오라고
했다. 그것을 벌써 한 달 쯤이나 사다주지 않고
있었다.
매듭공예는 굵은 노끈으로 하는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원이 자살을 할 수 있는 물건들을 가까이 두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이후로 과일칼이나 허리띠 같은
것들을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곤 했다.
그녀가 매듭공예 재료를 사다가 주지 않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오늘 들어가면서는 소설책을 몇 권 사가지고
가야겠다고 순녀는 생각했다.
"나 닭튀김 먹고 싶다."
애란이가 말했다. 순녀는 딸의 후각에 놀라며
제과점 옆에 있는 닭꼬치집을 돌아보았다. 그리로
애란을 이끌었다. 닭꼬치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애란이
"나 아버지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보고 싶은데,
병원에 가면 안 되나?"
하고 물었다. 순녀는 '응 안 돼.' 하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병원에 오면 안 된다는 말을 어떻게
해줄까. 애란이가 오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마가 안 데리고 가도 나 혼자서 찾아갈 수
있어."
"아빠가 좀더 좋아지면 데리고 갈께. 지금은 아빠가
너무 많이 편찮으시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그렇고......"
순녀의 말은 궁색스러웠다.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함게 입원한 사람들이나 간호원이나 의사들에게
자기의 아들딸 모두가 청맹과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을 한다면, 남편
한정식부터가 그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한 번도 맹학교에
맡긴 딸과 아들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했을 때도 자기 아이들을 남 앞에 내보이기를
싫어했다.
"성근이가 따라오려 하는 것을 떼어놓고 왔어요.
앞으로는 성근이한테도 혼자서 길 찾아다니는 법을
가르쳐줘야겠어요."
애란이는 순녀의 손 하나를 자기의 두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마음의 눈을 뜨면 모든 것을 환히 알 수 있어요.
앞에 앉은 사람의 가슴 속까지도 뚫어볼 수 있어요.
저는 지금 어머니의 속을 뚫어보고 있어요."
애란은 눈이 성한 아이같이 허공을 쳐다보면서
깡총깡총 뛰었다.
"그저께 이슬방울 이야기를 읽었어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담고 있대요. 산,
강, 꽃, 사람, 다람쥐, 해, 구름, 나비, 벌, 잠자리,
별, 달...... 이슬방울은 우주를 가슴에 품고 있어요.
그것이 이슬방울의 마음이래요. 그것을 읽고 저는
사람들 마음을 뚫어보는 꾀를 알아냈어요."
애란이는 닭꼬치를 아귀아귀 잘 먹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순녀는 절대로 하지 말자고 스스로와 한
약속을 깨고 그 생각을 했다. 내가 왜 그 여자의
뒤치닥거리를 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애란은 순녀가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애란의 동생
성근이도 마찬자지였다. 이 아이들을 낳은 여자는
시아버지 한길언과 남편 한정식이 거듭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병원에 눕자 세 살짜리 애란이와
젖먹이인 성근이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버렸다. 그때
순녀는 그 산재병원의 간호사였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다 순녀에게 미쳤다고 했었다.
식물인간 되어 있는 예순살 노인에다가 허리와 다리
부러진 남편에다가, 빛을 가리지 못하는 두 청맹과니
새끼들에다가...... 대관절 어찌하려고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충고들을 하여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었다. 나는
그렇게 남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다 해내겠어요. 아버님께서는
언젠가는 의식이 살아날 거고, 당신도 곧 좋아져서
제가 하는 식당 계산대를 지켜줄 수 있게 될 거예요.
돈 많이 벌어가지고 아이들한테는 바이올린을
가르치겠어요. 맹인악단을 만들어주어야겠어요. 두
아이들이 다 감수성이 뛰어나요. 넉넉히 해낼 수
있어요. 저도 그렇게 끝까지 그 아이들을 밀어줄
자신이 있어요. 식당도 그럴 만하게 잘 될 테니까
두고 보셔요."
하얀 시트 속에 얼굴을 묻고 있기만 하는
한정식에게 순녀는 수십번 수백번 타이르고 달래곤
했다. 그러나 한정식은 순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화냥기를 냄새맡곤 했다. 순녀가 그에게
어떻게 해주든지 그는 자기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위선을 경멸하곤 했다.
"웃기지 말어라, 이년아. 니년이 무슨
관세음보살이나 성모마리아라고 이 아랫도리 없는 놈
각시 노릇을 하겄단다고 그래?"
한정식은 두 차례나 자살을 하려고 했다. 시트를
찢어서 목을 매달으려고 했고, 한 번은 과도로 동맥을
끊었다. 그것은 물론 그의 본처가 도망을 가버린
직후였다.
지금 한정식은 세상을 살고 싶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운신이 가능해지기만 하면
허리 반으로 갈라진 땅 안을 뒤져서 본처인 양숙자를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하여 살고 있었다. 한정식은 이를
뿌드득 갈곤 했다. 어떤 때는 눈에 야행성 동물의
그것 같은 푸른 인광이 어리어 있기도 했다.
"엄마, 나 커서 동화작가가 될 거예요. 동화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만이 쓸 수 있어요."
애란이 입안에 닭꼬치를 머금은 채 말했다.
다행히도 애란이와 성근이는 순녀가 그들의 계모인
줄을 몰랐다. 순녀는 애란의 적극적이고 발랄한
태도가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애란의 머리와 볼을
쓰다듬었다. 등을 토닥거렸다.
눈으로 상대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청각이나 촉각이나 후각을 동원해서 사랑 표시를
해주곤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들과 맛있는 것을
먹여주는 일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고독하고
답답한 그 아이들의 사랑결핍증을 해소시키는
길이었다.
"더 먹을래?"
순녀의 물음에 애란은 기름 묻은 손가락을 빨면서
"이제는 생크림빵 먹고 싶다."
하고 말했다. 순녀는 애란을 제과점으로 데리고
갔다. 애란이는 빛을 식별할 줄 아는 아이처럼 과자
진열대와 빵 진열대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빵들이 아주 예쁘게 만들어졌지, 그렇지 엄마?"
하고 말했다. 순녀는 응 정말 네 말이 맞다, 하고
맞장구를 쳐주면서 문득 윤보살이 키우다가 죽었다는
아이를 생각했다. 순녀가 낳은 아이였다. 박현우가
데리고 가버린 그 아이는 은사인 은선 스님을 거쳐
윤보살에게 양자로 넘겨졌다.
한데 그 아이한테는 심장판막증이 있었고, 그것을
수술하다가 잘못되어 죽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죽음은 어머니인 나의 죄와 아버지인 박현우의 죄로
말미암았으리라. 순녀는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애란이와 성근이한테 더 진한 사랑을 쏟으려
들곤 했다.
그것은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녀로 말미암아 죽어간
전남편에 대한 생각이 그녀를 늘 고문하곤 했다.
그녀는 적어도 그녀가 차려놓은 처용식당을 눈에
보이지 않는 도량이나 법당 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속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을 빛덩어리가 되도록
유도(제도)해야 했다. 그렇게 유도하느라고 그녀는
상대가 원할 경우 은밀하게 잠자리를 함께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녀 스스로가 못 견뎠다.
순녀는 애란이가 먹고 싶어하는 대로 먹이고, 동생
성근이와 친구들에게 가져다주라고 과자빵 한 봉지를
사서 들려주었다. 머리와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선생님한테 허락을 얻기 전에는 밖에 나오지
말아라. 선생님게서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어?"
애란은 고개를 저었다. 멀뚱한 눈으로 순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지혜롭게 잘 찾아다닌다고 얼마나 나를
대견해하는데?"
순녀는 애란의 멀뚱한 눈이 무서웠다. 그 눈이
그녀의 거짓스러움을 꿰뚫어보는 듯싶었다. 그녀는
눈이 성한 아이에게 하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길을 건넜다. 버스정류장 앞에 이르러서 애란은
발을 멈추었다.
"차 오면 타고 갈 테니까 엄마 먼저 가."
순녀는 애란의 하는 짓들이 신통스러웠다. 모든
것을 넉넉히 볼 수 있는 아이가 일부러 보지 못한
척하는 듯싶었다.
"여기서 차를 태워주면 혼나 학교 앞에서
내려가지고 기숙사까지 찾아갈 수 있겠어? 안
데려다주어도 되겠어?"
순녀는 애란 앞에 쪼그려앉으면서 말했다. 애란은
한쪽 손에 빵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순녀의
머리와 얼굴과 젖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순녀도
애란의 머리와 얼굴들을 쓰다듬었다. 그것이 그들의
작별인사였다. 버스가 왔다. 순녀는 애란이만
태우지를 않고 자기도 함께 탔다.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병원으로 갈 참이었다.
시청 앞 네거리에서 차가 막혔다. 버스 뒤쪽에서
누군가 옛처 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것을 시발로
여기저기에서 재채기들을 했다. 순녀도 눈시울이 맵고
콧속이 근질거리는 듯싶더니 재채기가 나왔다. 젊은
아낙의 등에 업혀 있는 아기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애란이도 재채기를 했다. 콧물이 줄줄
흘렀다. 순녀는 애란이의 콧물을 휴지로 훔쳐주었다.
애란이 멀뚱한 눈을 휘둥굴리면서 사방으로 얼굴을
내둘러댔다. 순녀는 애란의 얼굴을 재빨리 가슴 속에
품었다.
"코를 밖으로 내놓지 마라."
순녀는 애란의 귀에 속삭였다. 애란은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뭔 일이 벌어졌어?"
하고 물었다.
"글쎄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구나."
순녀가 이렇게 얼버무리려 하는데 애란이가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품 밖으로 빼냈다. 멀뚱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폈다. 눈에 무슨 빛살인가가
포착되었을까. 순녀는 애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애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눈을 끔벅거렸다.
"눈이 아프다. 빛이 너무 강한가봐. 어머니도 눈이
아프지?"
애란은 흥분해 있었다.
"아, 그렇다. 무지개다.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깔이
날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엄마?"
애란이 속삭이는 말에 순녀는 대꾸를 해줄 수가
없었다. 학교까지 데려다 주러나서기를 잘했다. 이
아이가 혼자서 가다가 이 일을 당했으면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타협하고 조정을 할 수 없을까.
"뭔 놈의 최류탄을 이렇게 쏘아대는고, 빌어먹을!"
"시위를 하려면 공장 안에서나 할 일이지 어째서
시내로 나와서 저 지랄들을 하는 거야?"
사람들이 투덜거렸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운전기사! 문 열어주시오. 차 안에 있다가는
숨막혀 죽겠소."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가면의 기사들 같은 전경들만 시청 쪽 길을 막고
있었다.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들은 가끔씩
재채기들을 하고 콧물을 훔치곤 했다.
순녀의 남편 한정식도 척추와 다리를 다치기 전에는
그 해안도시에 있는 재철소의 노동자였다. 그는
시위를 할 때마다 앞장을 서곤 했다고 했다. 그 해
봄, 임금 11% 인상의 타결을 보고 술을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이튿날 작업을 하다가 그는 쇳덩이 밑에
깔렸던 것이다.
한정식이 재해를 당하던 당시 그는 도망을 가버린
그의 아내와 살고 있었다. 순녀는 그 무렵의 상황을
속속들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정식은 무섭도록 힘이
세고 고집불통인 남자였다.
자의식이 강한 근육질의 남자인 한정식은 울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게 되면 그날 밤 여자를 못
살고 구는 습성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를 거칠게
다루었을 것이다. 못다 푼 억분을 여자의 깊은 안속에
쏟아넣곤 하였을 것이다. 11% 인상이 뭣이여, 쓰팔,
빌어먹을...... 그는 밤새도록 그의 아내를 안은 채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써댔을 것이다. 가뜩이나 그의
아내는 몸이 호리호리하고 마른 편이었지만
강골이었다. 입술이 두껍고 목과 허리가 길고
엉덩이가 실팍했었다. 볼에는 복사꽃빛이 어리어
있었다. 눈에는 핏기가 있었다. 그런 여자는 색을
밝힐 뿐만 아니라 남자를 치게 한다던 것이다. 이튿날
한정식은 술과 여자한테 너무 많은 정력을 허비한
까닭으로 눈앞이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그 재해는
그의 아내 탓이다. 다음날 일을 나갈 남편의 기(氣)를
그렇게 쏙 뽑아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
속속들이 태워버리고 재만 남게 해서 내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생각을 하다가 순녀는 혀를 물었다. 자기의
전남편 송동욱이 생각났다. 앰뷸런스 운전기사인
송동욱은 벌거벗은 채 그녀의 배 위에서 죽어간
것이었다. 복상사였다. 순녀는 소름을 쳤다. 아 그
사람은 어째서 그때 그렇게 스스로를 다 태우려고
몸부림을 쳐댔을까.
순녀는 전남편 송동욱에 대한 죄의식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죄의식이 아내가
도망쳐버린 한정식의 모든 것을 떠맡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순녀는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성기능이 마비된 남자를 남편으로 받들겠다고 나서게
했는지 모른다. 처음에 그녀는 비구니나 수녀처럼
세상을 살아갈 참이었다.
순녀는 혀를 깨물었다. 그녀가 한정식의 아내 노릇
하기를 자청한 것은 반드시 그 죄의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서울의 한 종합병원으로 가버린
의사 장영길 때문이었다.
마흔 세 살 난 장영길은 틈만 있으면 순녀를 자기의
차에 태우고 바닷가나 산골짜기로 달려가곤 했다.
고학과 독학으로 의사가 되었고, 이제 살 만큼 살게
된 그는 즐기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젊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안타까움을 순녀를 통해 해소시키려
했다. 순녀와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겨울바다와 여름
산야를 헤매었다.
버스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녀는 배반감으로
몸을 떨었다. 사람들이 유리창문을 열쳤다. 바람이
폭포수처럼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걸신 들린
사람이 허겁지겁 음식을 삼켜대듯이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참, 엄마, 성근이 축구를 잘 한대요.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성근이가 다른 애들보다 공을 잘
쫓아다닌대요. 성근이는 축구선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순녀는 애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맹학교의 교문 앞에서 그들 모녀는 헤어졌다.
애란은 성한 아이처럼 운동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순녀는 애란이 교사 모퉁이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찬바람이 등 뒤쪽에서
달려왔다.
돌아서면서 그녀는 병원의 입원실에 있는 썩은
나무등걸 같은 남편과 터미널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현종 선생을 동시에 생각했다.
순녀가 서점에서 산 소설책 세 권을 들고 병원
복도를 바삐 걸어가는데 담당 간호사가 눈을 치껴뜨고
말했다.
"어디 갔다가 인제 오우? 언니 없는 새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어요."
후배인 고을남 간호사는 순녀를 빤히 보면서 짜증
어린 소리로
"가서 보시오. 척추뼈가 허옇게 드러났어요. 그렇게
되도록 왜 그냥 놔두고 있었소? 썩은 살 제가 다
뜯어냈어요.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고, 환자는
몸부림을 쳐대고......"
하고 말했다. 순녀는 얼굴이 화끈 달았다.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겠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남편의 등허리에는 욕창이 생겨 있었다.
신경이 죽어있는 부위를 불결하게 관리했을 때 살이
썩어들어가는 병이었다.
입원실로 들어가자 남편 한정식은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침에 순녀가 사다가 준 것이었다.
순녀가 없는 사이에 활자 하나하나를 모두 뜯어읽었을
것이었다. 한데 한정식은 그것을 또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아무 신문이나 쳐들고 들여다보곤
했다.
"여보, 죄송해요. 빨리 올려고 했는데, 애란이가
와서...... 그 아이 달래 보내느라고......"
순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한정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한테 점심 대접하고, 물건 사오는 것
조금 신경 쓰고 어쩌고 하니까는 이렇게 시간이
가버리대요. 여보, 다음부터는 늦지 않을께요."
순녀는 한정식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는
신문을 놓으며
"그것 사왔어?"
하고 물었다. 그것이란 매듭공예 재료인 노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한테 그 말을 했더니 퇴원해서 하라고
합디다. 입원실에서 그것을 늘어놓고 그러면 안
된다고....... 책이나 사다 드리라고 해서 소설책
사가지고 왔어요. 요즘 인기 있고 잘 팔리는 것이라고
합디다. 굉장히 재미있대요."
그녀의 말에 한정식은 눈을 감았다. 후우 한숨을
쉬었다. 책을 그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또
시아버지인 한길언의 입원실엘 가야 했다. 기저귀를
가져다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대소변을 흘리곤 하는
시아버지 한길언에게는 기저귀가 많이 필요했다.
"저, 얼른 삼층 아버님한테 내의 좀 가져다가
드리고 올께요."
순녀는 한정식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옆침대
환자의 보호자인 젊은 여자가 기회를 보고 있었던 듯
순녀에게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지 아까부터 댁의
시어머니가 두 차례나 다녀가셨어요."
하고 말했다. 순녀는 그 젊은 여자에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눈을 감은 한정식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를 않았다.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한정식은 순녀의 위선을 비웃고 있었다. 여느 때
그는 양숙자가 내팽개쳐버린 병든 식구들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 그녀의 진실은 아니라고 단언하곤 했다.
웃기지 마라고 빈정거리곤 했다.
"제발 천사인 척하지 말어. 이 잡년아.
관세음보살인 척하지 말어. 좋은 젊은 시절
구차스럽게 남의 눈치 보아가면서 그 지랄하지 말고
얼른 멀리 도망가버려. 얼굴이 못났어, 어디가
병신이여? 뭣이 부족해서 사지 멀쩡한 좋은 남자
찾아가지 않고, 이리 보아도 병신이고 저리
보아도 병신인 구덕인 이 집구석의 송장이 되려고
그래?"
한정식은 문득 이렇게 소리쳐대곤 했다. 그 말을
순녀는 수십번 수백번 들어왔다. 그때마다 순녀는
우스갯소리를 하듯이 말을 하곤 했다.
"당신 따라 살으라고 부처님도 시키고 예수님도
시키고 그럽디다. 나 당신하고 살면서 장사해가지고
아이들 뒤대주고, 아버지, 어머니 돌보아드리고
그러는 것....... 저는 정말 즐거워요. 당신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아이들 명랑하게 잘 크고
똑똑하고 감수성 좋고...... 이제는 아버님 의식이나
돌아오고, 돈이 더 좀 잘 벌려서 장차 아이들한테
악단을 만들 수 있게나 되었으면 원이 없겠어요."
한정식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거짓말 마, 거짓말 마, 하고 속으로
소리치는지 알 수 없었다.
순녀는 시어머니한테 가져다가 줄 기저귀보따리를
꺼내들고, 한정식의 손 하나를 힘껏 쥐어주었다. 그는
아랫몸을 담요로 덮은 채 모로 누워 있었다. 욕창
때문에 바르게 눕지를 못했다. 담요 속에는 한쪽
다리만 있었다. 다른 한쪽은 잘라낸 것이었다. 남아
있는 것마저도 신경이 살아나지를 않고 있었다.
입원실을 나서면서 순녀는 정말 알 수 없는
집안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니는 신축중인 건물의
비계에서 떨어져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고, 남편은
저렇게 아랫도리를 못 쓰게 되어버렸다. 또 아이들
둘은 앞을 못 보는 청맹과니였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데 이런 끔찍스런 형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시아버지 한길언의 입원실로 들어섰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한길언의 팔다리를 주물러대고 있던
시어머니 제주댁이 화들짝 반가워하며
"나 저기 좀 갔다가 올 테인께 니가 느희 아부지 좀
지켜라."
하고 말했다. 순녀는 시어머니 제주댁이 어디엘
갔다 오려 하는가를 훤히 짐작하고 있었다. 제주댁은
무당을 믿었다.
"너도 갑갑할 것이다만은 돈 조끔 보태라. 이십만
원은 들 것이다."
제주댁은 외출 준비를 하면서 순녀에게 당부를
했다.
"기저귀는 내가 들어와서 갈아 입힐 테니께 그대로
두고, 이따가 때 되면 그것이나 좀 데워서
떠넣어드리고, 가래 끓으면 뽑아내고...... 혹시 자리
비우지 마라."
제주댁은 황망히 입원실을 나갔다.
오래 전부터 제주댁은 무당한테 다니면서 젊은
나이에 비명에 간 전남편의 원한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전남편은 원과 한이 너무나 깊고 단단하게
박혀 있어서 쉽사리 풀어버리려고 하지를 않았다.
저승으로 가지를 않고 계속 이승을 떠돌면서 제주댁과
그녀를 데리고 사는 한길언한테 저주를 퍼부어대곤
하는 것이었다.
제주댁은 이렇게 믿고 있었고, 그것을 며느리인
순녀에게 고백을 했었다.
시아버지 한길언은 깊은 잠이 든 사람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담당 의사들은 벌써 손을 들었다.
회사와 재해보상과 쪽에서도 넌덜머리를 냈다. 제발
퇴원을 좀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억지로 퇴원을
시키려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제주댁은 의사들의
연구실을 쫓아다니면서 악을 써댔다.
"어째서 성성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송장 취급해?
차라리 나를 죽여!"
회사 사람들이 설득을 하려 하면 그들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허리를 끌어안고 물어뜯으려 들었다.
아무도 어찌하지를 못했다. 한길언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퇴원 소리를 입에 담지 못할
것이었다.
한길언은 한동안 자주 열이 나고 숨이 가빠지곤
했다. 그때마다 산소통을 가져다 대어 소생을 시키곤
했다. 이제는 그러한 일도 일어나지를 않았다.
한길언은 혈색이 좋아지고 있었다. 숨결도 고와졌다.
가끔식 발가락끝이 미세하게 움직거리곤 했다.
제주댁은 그것을 들여다보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곤
했다. 의사한테 달려가서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저렇게 발가락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면은 금방 의식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더라."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구르면서 목울음 섞인 소리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날밤 단골 무당한테 쫓아갔다.
다녀와서는 들뜬 목소리로
"이제는 그 당신이 웬만큼 억분이 풀렸단다. 그래서
이때까지 두 발로 디디고 있던 느희 시아버지 목을 한
발로만 디디고 있단다."
하고 말했다.
제주댁의 믿음은 견고했다. 그것이 미신이라고 몇
차례 설명을 하여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순녀도
더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오히려
제주댁의 의식이나 정서에 혼란만 더해줄 것 같았다.
시어머니 제주댁은 제주댁대로의 믿음체계에 따라
믿고 살아가게 놔두는 것이 효도일 것 같았다.
순녀는 아까 시어머니 제주댁이 하던 것처럼
시아버지 한길언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의식 없는 사람의 모든
근육과 살갗은 하루에 수십 차례씩 마시지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제주댁은 집념이 무서운
여자였다. 하루 세 차례씩 따뜻한 물수건으로
한길언의 몸을 씻고 주물러주곤 했다. 한길언은 환자
같지가 않고 깨끗했다. 퀴퀴하고 구리칙칙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시어머니 제주댁의 그 무서운 집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제주댁은 순녀에게 무슨 이야기인가를 할듯
하다가 하지 않곤 했다. 시어머니 제주댁은 무슨
비밀인가를 감추고 있었다.
"나뿐 인사, 아직도 멀었소. 그 벌 다
받으려면은......"
하고 제주댁이 푸념하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아버지 한길언의 근육들을 하나하나 주물러가면서
순녀는 후회했다. 조급해졌다. 제주댁이 시아버지
한길언을 지켜 달라고 한 것을 거부했어야 하는데,
잘못했다. 저녁에 꼭 다녀와야 할 데가 있다고,
무당한테는 다음 날 가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다.
제주댁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올 것이다.
왼쪽 다리를 다 주무르고 오른쪽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현종 선생하고도 괜히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만나면 무얼 할 것인가. 그와의 약속을 어떻게
할까. 누구보고 시아버지의 머리맡을 지켜 달라고
하고 터미널다방으로 나갈까. 후배 간호사 하나를
불러다가 놓고 갈까. 그만둔 지가 오래인 내 말을
누가 들어줄 것인가. 그들도 바쁜 업무들이 있는데 내
청을 들어줄 것인가. 옆의 환자 보호자에게 부탁을 좀
할까.
순녀는 옆의 침상들을 둘러보았다. 시아버지 한길언
외에 환자들 셋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이십대의
젊은이였다. 옆구리에 오줌을 뽑아내는 비닐 주머니를
달고 있는 수술환자였다. 다른 한 사람은 사십대였다.
무슨 약물엔가 중독되어 전신이 마비된 환자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오십대였다. 숨을 가쁘게 쉬면서
가끔씩 기침을 하고 오한 때문에 담요를 두껍게 덮고
오들오들 떨곤 하는 환자였다.
이십대 환자의 보호자는 삼십대쯤의 여자였다.
누님이라도 된 듯했다. 보신탕을 사다가 먹이고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에 뭔 일 있으면은 간호원을 불러. 어려워 말고
불러. 그 사람들은 환자가 요청을 하면 언제든지
달려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인께."
누님이 말했고, 이십대의 환자는
"알았어, 걱정 말어."
하고 말했다.
사십대 환자의 보호자는 사십대 중반쯤의 여자였다.
검정 바지에 싸구려 팥죽색의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남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살결이 거무튀튀하고 볼과 목에 군살이
붙었다. 가난과 짜증과 원망과 넉두리들이
주저리주저리 열려 있는 얼굴이었다. 그 사십대의
환자는 한 삼사십분쯤의 간격으로 몸 어디인가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 보호자는 옆에 기대서 있다가 그
호소에 따라 다리를 들어 올려주기도 하고, 모로
눕혀주기도 하고, 다시 바르게 눕혀주기도 했다.
오십대 환자의 보호자는 그 환자의 며느리나 딸인
듯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떨어대는 환자의 침대
주변을 돌아보면서 부풀어 있는 담요자락을 꾹꾹
눌러주곤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팔뚝시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순녀는 절망했다. 저렇게 자기의 환자 돌보기나
바깥의 일에 바쁜 사람들한테 어떻게 시아버지
한길언을 맡기고 외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길언의
머리맡은 적어도 오분 이상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길언의 숨결에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순녀는 가래 뽑아내는 기기에 스위치를 넣고 호스를
한길언의 목에 뚫은 구멍 속으로 넣었다. 목 속으로
들어간 호스가 골골고르르륵 소리를 내면서 가래를
뽑아냈다. 의식이 깊이 잠들어 있는 한길언은 목에
차오른 가래를 '으흠' 하고 끊어 뱉거나 위 속으로
삼키지를 못했다.
순녀는 호스를 개어 얹고 스위치를 껐다. 한길언의
상체를 들어올리고 등뒤로 올라가 앉았다. 그녀는
등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등을 가슴에
기대놓고 그의 두 팔을 양손으로 하나씩 잡아 늘였다.
젖가슴으로 그의 등을 힘껏 밀어내면서 두 팔을
뒤쪽으로 젖혔다. 가슴운동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팍을 우그러뜨리면서 숨을 토해내게 하고, 그의
팔을 젖혀 가슴을 펴주면서 숨을 들이쉬게 해주었다.
그 짓을 스무 번 반복했다. 그 짓만은 제주댁이
하지를 못했다. 그녀가 하루 세 차례씩 그 운동을
시켜주곤 하였다. 힘이 들었다. 그녀의 등줄기에는
땀이 솟았다.
저녁 배식 리어커가 왔다. 여섯시가 가까워 있었다.
순녀는 또 조급해졌다. 어떻게 할까. 현종 선생이
나와 있을 시간에 그 다방으로 전화를 걸어 나가지
못한다고 말을 하자. 다른 환자의 보호자들이 식탁을
환자들의 앞에 놓았다. 배식꾼들이 밥쟁반들을
가져다가 놓아주었다. 순녀가 내다놓은 식탁에도
쟁반이 놓였다.
시아버지 한길언에게 음식물을 먹이는 일은
고역이었다. 먼저 침대를 L자가 되도록 만들어놓고,
보호자가 암죽을 그의 코구멍을 통해 위 속에 찔러
넣어놓은 호스에다 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를
일으켜 앉히고 등을 쿵쿵 두들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위 부분을 가볍게 쓸어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가지고 온 개소주를 마찬가지로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어머니 제주댁이 하곤 하듯이 순녀는 그대로
했다. 시아버지 한길언은 언제인가 의식이 깨어나기는
깨어날까. 이러다가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정말 이
사람은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는데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일까. 이 아픔이 죄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이
사람의 그 죄업은 전생에 지은 것일까, 이승에서 지은
것일까.
순녀는 식탁을 치우며 남편을 걱정했다. 지금 남편
한정식은 저녁을 먹고 있을까. 배식꾼이 식탁을 침대
옆에 가져다놓고 밥쟁반을 가져다주었겠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은 나를 얼마나 못마땅해할까.
약속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순녀는 계단 옆에 있는
공중전화통으로 갔다. 오십대 환자의 보호자에게
시아버지 한길언을 잠시만 보아달라고 하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여자의 은색칠을 한 긴 손톱이
눈에 거슬렸다. 진하게 칠한 입술연지도 그렇고, 눈
가장자리를 검고 푸르스름하게 칠한 것도 그랬다.
머리칼을 노랗게 물들이고 금방 타질 정도로 엉성하게
부풀려 곱슬기를 낸 것도 그랬다.
"네, 오래 있지 마세요."
남자의 목소리처럼 걸걸한 그 ㅈ은 여자의 차가운
말시도 귀에 걸렸다.
터미널다방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괜히 약속을
했다고 후회를 하며 여남은 차례 돌렸을 때에야
신호가 갔다.
"현종 씨라는 손님이 거기 와 계실 거예요."
그녀의 말에, 사무적으로 냉랭하게 전화를 받고
나온 여자의 목소리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여섯 시 반이 지나 있었다. 다음 사람이 전화를
걸도록 물러서 주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병원의
마당에는 차들 여남은 대가 엎드려 있었다. 블럭담
밖은 찻길이었다. 버스와 승용차들이 줄지어 달렸다.
화물차들도 섞여 있었다. 찻길 양옆에는 수양버들이
실 같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문득 '천안
삼거리'라는 노래를 생각했다.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 멋에 겨워서 축 늘어졌구나 흥
에루와 좋다 흥으으으응 성화가 났구나 흥.'
간호원 시절에 한 달에 두 차례식 교양강좌를
받았었다. 그때 강사로 온 소설가 한 사람이
"천안삼거리는 무얼 상징하는 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사람들의 두 다리와 몸통이 만나는 삼각지
한복판을 상징합니다."
"능수버들은 또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 가지들이 제
멋에 겨워서 축 늘어졌는데 왜 누가 성화를 냅니까?"
이렇게 물어놓고 그 강사는 물 한 잔을 마시고
한동안 뜸을 들였다가
"이 노래는 노동요입니다. 노동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지요. 사실은 이 노래가
아주 음험한 노래입니다. 늘어진 승수버들은 남근을
말하고, 성행위를 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잠들어 있는
남근 때문에 성화가 난 겁니다."
하고 말했다.
순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의식이 깊이 잠들어
있는 시아버지를 눕혀놓고 고등학교 시절에 좋아했던
선생한테 전화를 걸으려 하면서 왜 그 음험한 노래의
생각이 났을까.
남자가 수화기를 놓고 돌아서자 순녀는 곧
터미널다방의 전화번호를 재빠르게 눌러댔다. 아까
사무적으로 냉랭하던 그 목소리가 또 나왔다.
실내방송 소리가 드넓은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현종 씨, 현종 씨 전화 받으세요."
그 말이 다시 한번 들렸다. 잠시 후에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 말이 흘러 나오고 전화가 끊겼다. '......잠들어
있는 남근 때문에 성화가 난 겁니다.' 우습게도 머리
속에 이 말이 스치고 있었다.
순녀는 시아버지 한길언이 못 미더워 입원실로 가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한길언은 고르게 숨을
쉬며 자고 있었다. 그녀는 오십대 환자의 보호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오십대의 환자는 아직도
담요를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볼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아니 아주 택시를 타고 획
날아갔다가 올 것을 그랬다. 시어머니가 다니곤 하는
무당집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를 빨리
오라고 해놓고 가보자. 시어머니에게 둘러댈 핑계를
장만했다. 오십대 환자의 보호자에게 전화 한 통화
하고 올 동안만 더 신경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머님, 가게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어요. 급해요.
얼른 오셔요."
순녀는 무당집에서 전화를 받고 나온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남편 한정식의 입원실로 갔다.
한정식은 또 누운 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진지는 드셨어요? 아까 어머니 다녀가셨지요?
무당집엘 가실란다고 아버님을 지켜 달라고
해서......"
떳떳하지 못하게 어물거리고 잠시 한정식의 표정을
읽었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굳어져
있었다. 당장 그 얼굴을 펴지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친 걸음에 또 그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그는 순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고리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래 두고 기어이 현종
선생을 만나러 가야 하는가.
"잠깐 갔다가 올께요. 주정뱅이 하나가 난장판을
만들어놨다는구만요."
순녀는 도망치듯이 입원실을 빠져 나왔다. 내가 왜
이럴까. 한정식은 내가 어느 한 외간남자 때문에
허둥대고 있다는 것을 벌써 알아차리고 있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 택시가 달리고 있는 동안 순녀는 눈을
감았다. 밖에는 차들이 샛노란 눈을 뒤룩거리며
질주하고들 있었다. 식물인간 되어 있는 시아버지와
뿌리 없는 나무등걸 같은 남편에다 청맹과니인 딸과
아들을 둔 여편네가 지금 어디에 헛눈을 팔고 있는
것인가. 나도 한정식의 전처처럼 그들을 버리고
도망을 가려고 이러는 것인가. 아니다. 잠깐만 현종
선생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된다.
스치는 체취만으로도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만끽할
수가 있다. 만끽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는 내
아버지를 닮았다. 그에게서는 먹물 들인 옷 입고
구름처럼 떠돌다가 간 아버지의 냄새가 난다.
갈대숲에 가을바람 스적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도 나
때문에 새 여자를 구해 살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지 않던가.
그녀는 아버지인 운봉 스님이 갈대밭 머리에서
가리키던 하늘의 구름장들을 떠올렸다. 현종 선생의
시집을 생각했다. '낙화암 연가'라는 시집이었다. '이
시집을 머리 깎고 먹물 들인 옷 입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순에게 바친다.'는 글귀가 그 시집의 맨 앞
페이지 한가운데에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시집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 시들을
다 외웠다. 어느 글자가 어디에 박혀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낙화암을 혼자서 다시 오른다/백제 여자의
넋이 되어 백마강 물 굽이를 저승새처럼 헤맨다/머리
깎고 향불 피우며 산다는 너의 소식에/내 육신 삼천
육백 마디는 모래알들처럼 흩어진다/고란사의
목탁소리가 된다/끈 끊어진 염주알들이 되어 꽃 되어
떨어져간 그 여자들같이 곤두박질을 친다.
......걸리고 싶다. 네 목에 걸리고 싶다. 다
버리고 뛰어가 네 목에 한 알 염주로 걸리고 싶다.
바람이 되고 싶다. 봄 되면 산수유의 꽃가루에 머물고
여름 되면 향맑은 시냇물 줄기에 머물다 네 옷자락
속으로 기어들고 싶다. 겨울이면 한 마리 노루 되어
폭설 때문에 먹이 못 얻어 헤매다가 너 머문 산사의
뜰 앞에서 먹이를 구걸하고 싶다. 물방울이 되고
싶다.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비가 되고 눈이 되어 네
자는 뜨락에 떨어지고 싶다. 달이 되고 싶다. 너 자는
창가에서 새벽녘을 어정거리고 싶다. 밤 새워 말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아, 생각들의 부질없음이여,
잡초처럼 칙칙한 나의 어둠이여.
......곰나루 나룻배에 오른다/녹두장군이 결박된
채 서울 쪽으로 타고 건너갔었다는 그 뱃길을 혼자
건너본다/아내가 못 다 쓴 시 써주겠다고 나선
남자/죽은 아내를 물너울 속에 팽개치고 살아 있는 한
여자의 파랗게 깎은 머리를 취한다/그 여자의 넋과
함께 한 웅큼의 백마강물이 된다/나는 나의
인과(因果)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손 비비는
파리다/순아, 어떻게 하면 이 강물을 밟아 건너는
진흙소처럼 물에 젖지도 않고 물에 불어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냐.
현종 선생은 이같이 순녀에게 주는 사랑의 시만으로
시집 한 권을 낸 것이었다. 순녀는 그 시들을 속으로
외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 시 속에 묻혀 살고 있었다.
그런 현종 선생을 아직 여고 졸업을 한 이래로 십 몇
년 동안 만나지를 못한 채 살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몸이 자꾸 떨려왔다. 화끈화끈 열이 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운전사의 말에 순녀는 택시의 문을 열쳤다.
터미널의 대합실은 텅 비어 있었다. 형광등 불빛만
있었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없고, 돌아오는 사람들과
그들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터미널다방은 대합실 이층에 있었다. 순녀는 계단을
치올라갔다. 다방 출입구는 대중식당의 출입구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가 좀만 더 꾸물거리면 그가 그
사이에 바람이 되어 없어져버리기라도 할세라 그녀는
황급히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섰다. 다방 안은 휑 비어
있었다.
출입구 옆의 계산대 앞에서 순녀는 다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안쪽 구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가 현종 선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에게로 달려갔다. 현종 선생이 아니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 앞에 선 채
다시 다방 안을 둘러 살폈다. 창문 쪽 구석에 젊은
남녀가 마주앉아 있었다. 현종 선생은 아직 안
나왔을까. 기다리다가 돌아갔을까. 어쨌든지 잠간
앉아서 기다려보자. 순녀는 창문 쪽에 자리를 잡았다.
가슴 속에 암담한 응어리가 담기어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어둠이 진을 치고 있었다. 머리 위에
형광등이 강한 빛살을 퍼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아득하게 드넓은 광장
한복판으로 몰아내는 물결이었다. 그녀는 늘 스스로가
어둠 속에 갇히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 고개를 돌려도 어둠 뿐이고 저리 고개를
젖혀도 어둠 뿐이었다. 시아버지 한길언과 남편
한정식이 짓고 있는 어둠에다 아들딸들이 풀어내는
어둠이 그녀를 질식하게 했다. 그들에게 빛을
안겨주어야 한다고 그녀는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가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빛이 되기 위하여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촛불처럼
태워야 했다.
차라리 그때 그렇게 해버릴 것을...... 하고 순녀는
생각했다. 순녀는 칠 년 전에 한 호텔의 커피점에서
만났던 미국교포 남자를 떠올렸다. 거기에서 아파트
스무 채를 세놓고 있고, 스물 다섯 살의 딸과 함께
산다고 했었다. 딸이 결혼을 하여 나가기 때문에 그는
새 여자 하나를 얻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었다.
어떻게 줄이 닿았는지, 서울 고모가 순녀와 그 남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저 돈 아주 많습니다. 앞으로 많이 살면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을 살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때까지
둘이서 푸지게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 돈이
있습니다. 사실 말해서 이때까지 선을 많이 봤지요.
그런데 그때마다 맘에 들지를 않아 제쪽에서 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순녀 씨 경우는 다릅니다. 이때껏
제가 찾고 있었던 이상적인 여잡니다. 허락을
해주십시오. 살면 얼마나 삽니까? 허덕거리고 살 것
없습니다. 넉넉하게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잘 먹고, 또
그 광활한 나라에서 여기저기 관광이나 다니면서
유유자적하면서 나하고 삽시다. 나 이래봬도
겅강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자신있게 내뱉는 말들을 듣고만 있던
순녀는
"집에 가서 한번 생각을 해보겠어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남자가 따라
일어서면서 말했었다.
"반은 허락을 한 것으로 알고 예식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순녀는 벽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였다.
그 재미교포 남자와 선을 본 뒤로 큰고모는 순녀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었다.
"그런 자리가 어디 또 있을 줄 아냐? 눈 딱 감고
그리로 시집 가거라."
"그 사람을 며칠 보았다고 무조건 그리로 가요?
서로 몸 비비고 살려면 서로 정이 있어야지......
저는 그럴 수 없어요."
"나는 잘 모른다마는 함께 살다보면 정은 자연
생기게 마련이라더라."
"싫어요."
"왜 싫어? 몸도 강단져 보이고, 마음씨도 좋아
보이고, 성실해 보이고 그렇더라. 놓치지 말고 용단을
내려라. 내 조카사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보아서 그런지 나는 대번에 정이 들어버리더라."
"그렇게 좋으면 큰고모가 그리로 가시지 그래요?"
순녀가 볼멘소리를 하자 큰고모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글쎄 내가 네 나이라면 너 제치고 그렇게
하겄다마는 이 쭈글쭈글한 얼굴 해가지고 어떻게
엄두나 내겄냐?"
큰고모는 밤낮으로 순녀를 졸라댔다. 순녀도
슬그머니 권하는 대로 그렇게 해 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순녀는 큰고모의 보챔에
대꾸를 하지 않아버렸다. 큰고모는 순녀가 마음을
돌린 것으로 알았는지 예식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재미교포 쪽에서 날이면 날마다
찾아왔다. 자기는 이미 예식준비를 다 해두었노라고
했다. 목걸이와 보석반지를 큰고모와 순녀가 있는
자리에서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서울에 막
도착한 날 마련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큰고모에게 끌려가서 드레스와 한복과 투피스와
코트들을 맞췄다. 큰고모는 순녀의 내의들을 샀다.
잠옷도 샀다. 정말로 그 남자 따라서 건너가버릴까.
그렇게 하자. 거기 가서 그의 많다는 돈이나 쓰면서
넓은 나라 안 휘휘 돌아다니면서 살자. 여기 좁은 땅
안에 갇혀 외롭고 아프게 살아갈 것이 무엇인가.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큰고모가 예식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순녀는 방안에
늘 누워 있곤 했다. 뒷산에 올라가 숲속을
헤매다니기도 하고 시장바닥을 싸다니기도 했다. 몇
사람의 얼굴들이 걸리고 밟혔다. 현종 선생의 얼굴이
차돌같이 가슴 속에 박혀 있었다. 죽은 전남편의
얼굴과 그의 어린 아들의 얼굴도 밟혔다. 자기는
언제인가 현종 선생을 만나 살아야 할 것 같았다.
현종 선생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을 버리고 내가 어디로 누구를 따라간단 말인가.
큰절에서 한 큰스님의 주례로 예식을 치르기로 한
날 새벽녘에 순녀는 큰고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큰고모는 소스라쳐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큰고모는 순녀의 마음이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다고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큰고모는
순녀의 손부터 잡았다.
"너 또 엉뚱한 생각 했구나!"
"안 되겠어요. 저 그냥 나가버릴래요. 지금 이 길로
가서 그 사람 만나 사실 이야기 해야겠어요. 그리고
어디로 한 바퀴 돌아다니다가 들어올께요.
돌아다니다가 봐서 어디 붙어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살아버리고 그러겠어요. 죄송해요. 큰고모."
순녀는 차갑게 말했다.
"너 미쳤냐?"
"안 미쳤기 때문에 저는 그 사람이나 제가
불행해지는 것을 미리 막는 거예요."
교포 남자를 다방으로 불러낸 순녀는
"그 사이에 진행시켜왔던 일 없었던 것으로
해버리지요. 죄송해요. 생각을 해보고 또 해보아도 안
돼요.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했고, 그 남자는 멍청해져버렸다. 순녀가 그
남자를 앉혀놓은 채 몸을 일으키자 그 남자는
"당신 후회할 겁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순녀는 아직 스스로 그 교포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가지 않기로 해버린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 자기 시아버지 한길언과 남편
한정식이 입원해 있는 그 산재병원에 간호사로
들어갔다가 척추 다치고 다리 잘린 한정식을 남편으로
맞아버린 것도 후회하지를 않았다.
오래 전에 자기는 그렇게 강압적으로 덤벼드는 교포
남자를 떨쳐버리고, 다리 끊어지고 척추 못 쓰는
한정식을 남편으로 맞아 살아가도록 마련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x덕도 못 보고
x복도 없는 년이......' 하던 정선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빼어난 미모의 덕도 못 보고, 그로
말미암아 남자를 잘 얻어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지 못하도록 마련이 되어 있었을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중 아닌 중 노릇, 수녀 아닌 수녀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슨 소리냐. 서울로 떠버린
의사 장영길이도 만나고 의사 안영철도 만나고,
풍년농원 박달재도 만나고, 사공평도 만나고, 엉터리
환쟁이 지홍순도 만나지 않았느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미색에 침을 흘리며 손목을 잡아보려
하고, 끌어 안아보려 하는 것을 내심으로 즐기며
살아오지 않았느냐. 나는 창녀같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현종 선생을 만날 만큼 깨끗한가. 나는 현종
선생 만큼은 깨끗하고 성스러운 모습으로 간직해야
한다. 만나서는 안 된다. 그를 만나면 그를 죽이게
된다. 그가 내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내가 그를
잡아먹게 되는 것이다. 그를 장영길이나 안영철이나
박달재나 사공평이나 지홍순같이 대해서는 안
된다...... 그 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쑤셨다. 그녀는
스스로의 내부를 성난 눈알로 쏘아보았다.
아직도 혼자서 살고 있다는 그를 만나 위로해주고
싶다. 아니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다. 그는 빛니다.
그를 만나는 것은 환희다. 나는 빛과 환희에 허거져
있다. 빛과 환희를 내 속에 충전하고 싶다. 내 주변을
칭칭 감고 있는 어둠을 뚫고 나가려면 빛과 환희가
필요하다.
순녀는 얼핏 혼란이 느껴졌다. 지금 이렇게 다방
안에 앉아 있는 자기는 진짜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등신이다. 진짜 나는 입원실 안에서 식물인간 되어
있는 시아버지를 지키고 있다.
현종 선생은 기다리다가 가버린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어서 오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가자.
잠시만 더 기다려보자. 내가 입원실을 비운 사이에
시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지금쯤엔 시어머니가 오셨을 것이다.
물잔을 가져다 탁자 위에 놓고 차 주문을 받고 난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례지만, 혹시 그 남자를 기다리지 않는가
모르겠네요. 키가 훤칠하게 크고, 머리에는 흰
머리칼들이 한두 개씩 있는데, 얼굴은 미남이고, 한
마흔 몇 살쯤 되어 보이고......"
순녀는 종업원의 차분하고 이지적인 동글납작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현종 선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종업원이 얼핏 묘사한 대로 그는 그 사이에 그렇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순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남자 끌려갔어요. 끌고 간 사람은 둘인데 형사
같던데요."
순녀는 멍해졌다. 종업원은 순녀의 넋을 잃어버린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 남자 맞아요? 무슨 죄를 지을 것 같지는
않던데, 점잖게 생긴 것이...... 그 형사 같은
사람들이 가자고 하니까 천장을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두말 않고 따라갑디다."
하고 나서 주방을 향해 갔다. 순녀는 다방을
나왔다.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구름장들이
무겁게 덮히어 있었다. 어느 사이네 저렇게
구름장들이 몰려들었을까. 비가 한바탕 퍼부었으면
좋겠다. 현종 선생은 어디로 무슨 일 때문에
끌려갔을까. 순녀는 그의 시를 생각했다.
......순아, 눈이 내린다. 고부땅 배들평야에 눈이
내린다. 내 아내를 매혹시킨 것은 전봉준의
무엇이었을까. 전봉준의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망하여 개미떼같이 흩어질 때 내리던 그 눈이 지금
내 눈을 어지럽힌다. 나를 미망에 빠져들게 한다.
해마다 이맘 때 이 버스를 타고 배들평야 전녹두의
생가를 찾아가고, 만석보의 비석 갓머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늘 그 생각을 할 뿐이다. 내 아내의 가슴을
사로잡은 것은 전봉준의 x부리 같은 상투였을까,
형형한 눈빛이었을까. 눈이 내린다. 아내를 그에게
빼앗긴 자의 가슴에 칙칙한 미망이 내린다. 절망이
내린다. 아내를 위하여 시도 쓰지를 못하고, 그년을
사로잡은 그 남자의 가슴을 헤아리지도 못한 자의
가슴에 재로 내린다. 바로 그 재에서, 순아, 파랑새
한 마리가 눈보라 짙은 허공을 뚫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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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개 같은 사람 사람 같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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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안 돼요."
풍년농원의 주인 박달재는 큰 코를 실룩거리면서
강수남의 민틋한 젖가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어눌렀다. 강수남은 깜짝 소스라쳤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박달재의 얼굴에서는 처음 대하는 여자한테
무례를 저질렀다는 가책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수남의 가슴에서는 모멸감이 들끓었다. 얼굴이
빨개졌다. 당장 무례한 주인에게 면박을 주고
돌아가버리고 싶었다. 첫 대면을 하는 여자, 자기와
정을 주고 받은 바도 없는 여자, 어떤 신분인지도
모르는 여자의 유방을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무례하고 몰지각한 사람한테서 무엇을 배우라고
이순철은 나를 여기에 보냈을까.
"좌우간 따라와보시오."
풍년농원의 주인 박달재는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강수남은 저 남자를 따라갈까 그냥 돌아가버릴까
망설였다. '거기 가서는 그 주인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해야만 돼요.' 하고 이순철이 하던 말을 생각했다.
박달재가 강수남을 안내한 곳은 일꾼들의 방이었다.
눈이 녹고 있었다. 기와지붕의 처마 끝에서는
작달작달 눈 녹은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낮이었다.
해는 농장에 쌓인 눈 위에서 눈이 시리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방은 둘이었다. 하나는 자기 조카들 부부가 쓰고
다른 하나는 여자들이 쓰는 것이라고 했다. 방은 비어
있었다.
"불을 지피기만 하면은 따뜻하요. 여기서 자는
사람은 없어요. 여자 품꾼들이 옷을 갈아입고 그럴
뿐이지러. 이 겨울에는 뜻밖에 묘한 주인들이 생기곤
해서 불을 자주 지피게 되는구만요. 그런디, 이런
구질구질한 데서 귀한 아가씨가 어떻게 단
며칠간이라도 배겨낼 수 있겄소?"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혀놓고 박달재는 앞에 선
강수남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강수남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방바닥에는 비닐장판을 깔았다.
천장이나 바람벽은 신문지로 도배를 했다. 문은
나왕으로 만든 것이었다. 잠그는 고리가 빠져버리고
없었다. 북쪽 바람벽에 책보를 펼쳐놓은 것만한
창문이 있었다.
"있어보려면은 우선 이쪽 우리 조카네 방에 들어가
몸을 녹인 다음에 불부터 지펴야 될 것이오. 이
사람들은 눈 덕분에 영화구경 간다고 갔은께 밤
되어야 돌아올 것이오."
강수남은 심란했다. 여자들을 위하여 비워두고
있다는 그 방에는 낡은 담요 한 장과 땟국에 절은
강아지만한 베개 하나가 있었다. 방 안쪽 두 구석에는
사료부대가 천장 닿게 쌓여 있었다. 심란해 있는
그니의 속을 알아차린 듯 박달재가 말했다.
"담요 한 장하고 이불 한 채를 우리 임 여사가 더
가져다가 줄 것이오."
풍년농원 주인 박달재가 말했다. 강수남은 그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같은 냉기가 기어나오는 방으로 들어갔다.
박달재는 강수남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강수남은 방 한가운데 서서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아궁이 쪽 바람벽에 낙서가 있었다. 검정
사인펜으로 쓴 것이었다. 그것을 훑어 읽는데
박달재가 말했다.
"아, 그것은 여기 머물다가 이틀 전에 바람같이
떠나간 한 미친 놈이 남겨놓고 간 표적이오. 보니까
수클입디다. 나중에 강수남 씨가 떠나갈 때 거기다가
암클로 짝을 맞춰놓으시오."
배낭을 벗어놓고 나오자 박달재는 나무청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무청에는 목재소에서 실어온 피죽들이
쌓여 있었다. 신문지 한 뭉텅이가 있고, 그 옆에 녹슨
도끼 하나가 자루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춥게는 안 사요. 이런 나무
얼마든지 있은께."
강수남은 아궁이에 불부터 지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니의 속뜻을 알아차릴 듯 박달재가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주었다. 그니는 신문지로 밑불을 놓고
피죽을 올렸다. 박달재는 그니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고 우뚝 선 채 입으로만 지시를 했다.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신문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요. 도끼로 피죽을 잘게 패가지고 불을
사르시오."
강수남은 그가 시키는 대로 도끼를 집어들었다.
피죽을 버텅나무에 놓고 잘게 쪼갰다. 도끼는 피죽의
표면에서 튕겼다. 날이 너무 무뎠다. 그니가 도끼날을
들여다보고 있자, 박달재가
"날이 있고, 없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저쪽 방 사람들은 그 도끼 가지고 못하는 것이 없소.
문제는 정신통일이고 힘이오."
하고 말했다. 뭐 이런 남자가 있을까,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연약한 여자가 힘들게 하는 일을
보고만 있다니...... 더구나 자기의 집에 처음 온
사람인데 이렇게 대접을 할 수 있을까. 강수남은 이를
물고 도끼를 쳐들었다. 버텅나무에 기댄 피죽을
내리찍었다. 튕겨 나간 것을 주워다 놓고 다시
찍었다. 피죽이 벌어졌다. 그 틈을 다시 찍었다.
등줄기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잘게 쪼갠 피죽들을 신문지 불 위에 얹었다. 금방
붙었다. 그 위에 쪼개지 않은 피죽들을 얹었다.
사실은 행자시절에 많이 해본 불 지피기였다.
아궁이의 불이 맹렬하게 타기 시작하자 박달재는
"인제 됐소. 나 한 가지 부탁을 해야겄소. 이리
나와보시오."
하고 그니를 데리고 부엌 밖으로 나갔다. 그는
허옇게 눈 덮인 농원 일대를 가리켰다. 한쪽은
포도밭이었고, 다른 한쪽은 축사였다. 축사 어귀에는
우락부락한 도사견의 머리 그려진 입간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지금 강수남 씨와 같은 그러한 차림새 해가지고는
이쪽 포도밭하고 대추밭하고 저쪽 축사 쪽에 드나들지
마시오. 이것은 내가 만든 이 농원 안의 법이오.
당신의 차림새가 어떠하니까 내가 어째서 그러는지,
그것은 며칠만 여기 머물러 보면 곧 알게 될 것이오."
방바닥은 귀가 얇았다. 한 아궁이의 피죽불을
넣었을 뿐인데 방바닥이 두루 따뜻했다. 강수남은
따끈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박달재가
수클이라고 하던 바람벽의 낙서를 읽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구름에게는 구름의
길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길이 있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이 개의 길을 가기도
하고 개가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사람 같은
구름도 있고, 구름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이 구름의
길을 가기도 하고, 구름이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개인가 사람인가 구름인가. 나는 무엇으로서
무엇의 길을 가고 있는가."
배에서 쪼륵 소리가 났다. 시장기가 회오리바람처럼
속을 어수선하게 했다. 얼른 밥을 좀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공복감은 그니의 내부를
한겨울 밤의 역 광장처럼 텅비게 만들고 있었다.
강수남은 눈을 감았다. 나는 구름인가 사람인가
개인가. 이 같은 시장기쯤은 잊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사람이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꿈결 속에는 들려오는 듯싶었다. 구들장
밑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득하게 먼 어느
벌판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악귀들의
신음하는 소리일까. 이곳은 전에 공동묘지였을까.
그래서 한스러운 귀신들이 울고 있는 것일까.
강수남은 눈을 뜨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꾸짖었다.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무슨 짐승들인가가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축사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다. 도사견들의
소리다. 나는 여기엘 무엇하러 왔는가. 사람의 대접을
제대로 해줄 줄도 모르는 박달재라는 주인한테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기나 할까. 아, 순녀, 하고 그니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우종남이가 순녀를 살아 있는
관음보살이라고 했다. 흠,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 차림새 해가지고는 이쪽 포도밭, 대추밭이나
저쪽 축사엘 드나들지 마시오.'
박달재가 하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내 차림새가
어떻다는 것인가. 그니의 젖가슴을 찍어누르면서 안
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니는 무명 베조끼로 졸라맨 젖가슴을 손으로
만졌다. 민틋하게 보이도록 졸라맨 젖가슴하고
포도밭, 대추나무밭이나 축사하고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별 묘한 사람 다 보겠다, 하고 강수남은
실소를 했다.
발자국 소리가 강수남의 방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니는 기다렸다. 밥상을 들고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북쪽 창밖의 어둠에는
붉은 기운이 가셨다. 푸른 기운이 짙어졌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방에 있소? 불이나 조끔 켜고 있지."
문을 연 것은 중년 아낙이었다. 그 아낙은 담요와
이불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강수남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중년 아낙은 안고 온 것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슴푸레한 천장
한가운데를 더듬거렸다. 데룽거리는 소케트의
스위치를 젖혔다. 불그죽죽한 빛살이 방안에 가득
찼다. 그 아낙은 강수남을 내려다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티끌 하나도 안 묻고 젊고 참한 사람보고
어떻게 이 땟국 속에서 살으라고 시방 이러는지 알
수가 없네. 아가씨요. 아주머니요? 어디서 뭣 때문에
시방 이 고생을 하러 왔소? 여기는 막노동판이오.
상스럽기 이를 데 없고,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그러는
데요. 개들이나 사는 데요."
중년 아낙은 강수남을 데리고 자기네 살림집으로
갔다.
"나도 사실은 이 집 머슴이나 진배 없소. 앞으로는
나를 임 여사라고 부르시오. 다들 그렇게 부르니께."
대문 앞에 외등이 환히 켜져 있었다. 그것은 석등
속에 전구를 넣어 밝힌 불이었다. 대문은 나무로 만든
것인데 썩어 찌그러져 있었다. 그 대문 앞에서부터
덩굴천장이 시작되었다. 등나무덩굴일까,
포도나무덩굴일까, 장미덩굴일까. 동굴 같은
덩굴천장은 마당을 오른쪽에 끼고 나아갔다. 진돗개
두 마리가 달려왔다. 강수남은 자기를 물어뜯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망부석같이 우뚝 서버렸다. 한
마리는 임 여사에게 덤벼들고 다른 한 마리는
강수남에게 덤벼들었다. 무는 것이 아니고 윗몸을
세워 두 앞다리와 주둥이로 강수남의 가슴과 목을
더듬었다.
"저리 가!"
임 여사는 소리쳐 꾸짖고
"놀라지 말아요. 반갑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니까.
요것들은 사람들보다 더 영리해요."
하고 말했다.
강수남은 머리끝이 곤두서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유우, 저는 물어뜯으려고 덤벼드는 줄 알았어요.
아이구, 저는 개가 싫어요."
개들은 그렇게 말을 하며 임 여사를 뒤따르는
강수남의 허리와 다리와 허벅다리와 발에서 번갈아
냄새를 맡아댔다. 그니는 그게 무서웠다. 가슴이
저리고 깊은 속살과 항문의 신축근이 시리고 아렸다.
"싫다고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돼요. 저것들은 말을
알아듣소. 지금 그것들이 아가씨 냄새를 익혀두려고
그러요."
임 여사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다. 강수남은
뒤따라오는 개가 뒤꿈치를 물세라 재빨리 문을
닫았다. 부엌에서 한 여자가 저녁밥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 됐냐? 새로 일하러 오신 분이다. 인사해라."
임 여사는 주방의 여자에게 말했다. 강수남에게
주방의 여자를 소개했다.
"내 딸이오. 이름이 영이(英二)라요. 인제 스물 두
살인데 우리 집 전무요."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하기만 했다. 임 여사가 강수남을 식탁 앞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은 딸 부자요. 모두 다섯이오. 이름을
영일(英一), 영이(英二), 영삼(英三), 영사(英四),
영오(英五)라고 지었어요. 바깥양반이 첫딸 막 낳을
때부터 그렇게 지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글쎄 낳으면 딸이고, 또 낳으면 딸이고...... 그래도
그 양반은 딸 많은 것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딸 많은 것이 뭔 자랑이라고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소리요?"
영이가 시래기국 그릇들을 식탁으로 나르면서 웃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얼른 오십시오. 같이 들어버리시게."
네 사람이 식탁에 앉았다. 영이하고 강수남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박달재와 임 여사가 나란히
앉았다. 그 집 식구들은 다 식욕들이 좋았다.
강수남은 그들이 달게 밥 한 그릇씩을 비우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다.'는 박달재의 말을 떠올렸다. 박달재가
'수클'이라고 말하던 바람벽의 낙서를 떠올렸다.
이들은 사람 같은 개들인가, 개 같은 사람들인가.
박달재는 아귀아귀 밥을 입게 우겨 넣으면서 쩝쩝
입맛을 다셨다. 콧물을 자꾸 훌쭉거렸다. 손님인
강수남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심해주지를 않았다. 임
여사가 말없이 휴지통을 박달재 앞에 들이밀었다.
그는 휴지 한 장을 뜯어내더니 힝 코를 풀었다.
그 소리가 주방 안을 찌릉 울렸다. 다시 한 번 더
힘껏 코를 풀어버리고는 계속해서 먹어댔다. 그것에
길이 든 듯 임 여사와 영이는 아랑곳 않고 잘들
먹었다. 그가 교양이 없다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철저하게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인 모양이라고
그니는 생각했다.
강수남의 숟가락질이 어느 사이엔지 느려져 있었다.
그의 콧물 훌쭉거리는 소리, 힝 코를 풀어 던지는
행위들이 역겨웠다. 그것이 밥맛을 달아나게 했다.
그니의 그러한 속을 꿰뚫기라도 한 듯 박달재가 쩝쩝
입술 소리를 내면서 코를 찡긋하고 웃었다.
"상관하지 말고 먹어요. 생각하기에 따라 추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깨끗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아니요? 원효는 해골바가지 속에 담겨 있는 물을
마시고 도통을 했었다던데...... 히히.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소리내고 싶은 대로 내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아귀아귀 먹어대야만 식욕이 나요.
조심조심하면서 입 오므리고 소리나지 않게 씹고
그러면 소화가 되지를 않아요. 강수남 씨도 한 번
나같이 해보시오. 사람도 자연이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선한 일이지요."
강수남은 그의 말에 가슴이 찔끔했다. 나는 너무
조심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남의 눈치를
살피는지도 모른다. 그 눈치 살피기 때문에 나는
없어지고 남이 올곧다고 여기는 행위만 살아남아 나를
업고 다니는지 모른다.
젖가슴이 둥실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무명 조끼로
졸라매고 다니는 것도 남의 눈치를 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여자이기 때문에 있는 젖가슴이요, 있는
젖가슴이기 때문에 두둑하게 솟은 것을 어찌하자고
졸라맨단 말인가. '사람도 자연이지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선한 일이지요.' 그니는
박달재의 말을 되새겼다.
강수남은 부끄러웠다. 임 여사와 영이의 가슴은
풍만하게 강조되어 있었다. 강조시키기 위해서 허리를
잘록하게 하고, 가슴에 스펀지 제품의 젖통가리개를
찼는지 모른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났을
때 박달재는 이번에야말로 강수남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딸 영이가 차를 가져오려고 일어나자 영이의
엉덩이를 툭 치면서 말했다.
"강수남 씨, 우리 영이 젖가슴하고 엉덩이
실팍하지요? 잘 먹고 잘 자니까 이래요. 건강하고
일도 잘 하지요. 애도 잘 낳고, 우유 같은 것은 안
먹여도 될 만큼 젖도 많고 그럴 것이오."
박달재의 그러한 행동에 부인인 임 여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이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몸을 약간 모로 꼬았을 뿐이었다. 박달재는
너털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딸들 다 이렇소. 여자는 이렇게 풍성해야
돼요. 이래야 근기가 있어요. 사람이 근기가 없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오. 새끼들을 건강하게 못
낳아. 여자가 새기들을 약하게 낳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오? 나라가 쇠약해져요. 망해요. 오늘날 우리
민족이 어째서 요 모양 요 꼴인지 아시오? 호리호리한
여자들이 새끼들을 허약하게 낳았기 때문이오."
박달재는 손수 술병을 가져다가 따라 마셨다.
강수남과 임 여사와 영이에게도 따라주었다.
포도알들에 소주를 부어 우린 것이었다.
"오늘 밤에는 이 정도 해둡시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면 잊어버리니까."
강수남은 어지러웠다. 개 같은 사람, 사람 같은
개...... 그니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담겨 있는 물을 마시고 나서 중국행을
그만두었다. 만일 그가 중국엘 갔더라면 그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달라진 생각은 당시의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 나는 이 농원에 와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강수남이 그니의 방으로 오자 박달재의 조카 내외가
외출에서 돌아와 있었다. 강수남이 자기 방문을
열어도 그들은 방문을 열고 내다보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키득거리고 깔깔거렸다.
강수남은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박달재가 '수클'이라고 말하던 바람벽의 낙서를
읽었다. 거기에 '암클'로 짝을 채우라고 하던
박달재의 말을 떠올렸다. 옆방에서는 계속해서 그들
내외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간지럽고 껄끄러워. 그러지 말아. 그렇게
문질러버리면은 화끈거린단 말이야."
여자의 소리에는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남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는 듯했다. 계속해서 수염
부수수한 코밑의 인중과 턱으로 여자의 볼이나 목을
문지르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어리광을 부리면서
키득거리다가 깔깔거리다가 했다. 괘종시계가 아홉
점을 쳤다.
"인제 그만. 여보, 빨리 일어나. 늦으면 고모부한테
또 야단맞는단 말이여."
어리광을 부리던 여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들은 한동안 소란을 떨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차갑구만 왜 이래?"
여자가 짜증스럽게 말했고, 남자는 킥킥 웃었다.
남편이 차가운 손을 넣어 아내의 속살을 만지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농원 쪽으로
멀어져갔다.
이날 밤 박달재의 처조카 내외는 강수남의 잠을
내내 설치도록 만들었다.
남편이 아내의 어디를 어떻게 만지고 주무르고
문지르는지, 아내는 성난 암코양이같이 앙탈을
부리기도 하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 키득거리는 소리는 마치 젖이 떨어질락말락하는
아이가 재롱을 피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암캐가
암내를 피우며 앙알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아내가 간지럼을 타면서 남편을 또 어떻게 하는지
남편도 가끔씩 앓는 것 같은 소리로 웃었다.
강수남은 그들 부부가 하고 있는 짓들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그들은 서로의 몸 여기저기를
손끝으로 만지기도 하고 쓸기도 했다. 벌거벗은 채
개처럼 서로의 몸을 핥기도 하고 빨기도 했다.
박달재가 '수클'이라고 한 바람벽의 낙서를 읽었다.
이 방에 머무르면서 그 낙서를 한 사람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었다.
강수남은 그들의 그러한 소리에서 초연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의 소리에 이런저런 도색적인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곤 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저런 소리쯤은
괘념 않고 머리 속을 하얗게 비우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그것이 그니의
뜻같이 되지를 않았다.
마침내 옆방의 부부는 색정적인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합이 이루어졌을 때 내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무어라고
소리치면서 앓고 있었다. 남편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거친 숨결소리와 안간힘 쓰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마침내 서로 투덜거리며 싸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목 죄어 죽이고
죽어가는 듯한 단말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그니의 가꾸 개 같은 사람도 있고 사람 같은 개도
있다는 바람벽의 낙서를 떠올렸다. 그들 부부를
그니는 개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니도 그들 부부처럼 개 같은 사람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의 거칠어진 숨결과 함께 그니의
숨결도 거칠어지곤 했다.
강수남은 견딜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그니의 몸을 감쌌다. 덜 녹은 눈이 푸르스름하게
어둠을 녹이고 있었다. 그니의 몸은 달떠 있었다.
별들을 보았다. 붉은 별, 푸른 별, 노란 별, 먼지같이
뽀얀 성운들이 방울소리를 내고 있었다. 초롱 같았다.
이승에서 살다가 떠난 사람의 넋들이 저렇게 불을
밝히고 있을까. 그 별들을 가슴에 담았다. 그니는
거듭 심호흡을 했다.
그날 밤 강수남은 꿈속에서 시커멓게 덩치가 큰
남자하고 몸을 섞었다.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항을 하려고 해도 팔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르려 해도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를 않았다. 시커먼 그 남자는 그니의 깊은
내부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아픔이 아니고 진저리쳐지게 하는 환희였다.
그니는 그 시커먼 덩치 큰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 남자는 어느 사이엔지 우종남으로 바뀌어 있었다.
학생시절에 이웃집에서 하숙을 하던 면장 아들이었다.
심장판막증으로 죽은 그 하숙생의 넋이었다. 그니는
악 소리를 지르며 소스라쳐 잠을 깼다. 옆방은
고요했다. 농원 쪽에서 짐승들의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옆방의 문 열리는 소리에 강수남은 잠이 깼다.
방안에는 새까만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방안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불 속만 따스했다. 농원
쪽에서 양철통 들어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들의
웅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농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강수남은 찬 공기에 얼굴을 내놓을 채 새벽의 어둠
속을 걸어가는 옆방 남자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렸다.
꿈속에서 그 시커먼 남자에게 당했던 일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니는 몸을 모로 뒤채면서 움츠렸다.
자동차의 시동 거는 소리와 그 차가 부르릉거리며
어디론가 가는 소리를 들었다. 옆방 문이 여닫혔다.
부엌의 전등불 켜는 소리가 들렸다. 물 받는 소리, 솥
씻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쌀 일어 솥에 붓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렌지
켜는 소리도 들렸다.
강수남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가발을 벗어
던지고 점퍼와 양말만 벗고 스웨터와 청바지는 입은
채 잤었다. 가발을 썼다.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니는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 농원을 한 번
둘러보고 싶었다.
청색 기와를 얹은 주인집이 새벽의 푸른 어둠
속에서 아직 자고 있었다. 그니가 잠을 자고 나온
별채는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가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모퉁이를 지나서 농원 쪽으로 갔다. 포도밭과
축사 사이에 거대한 사람의 형채가 어슴푸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 발을 멈추었다. 자세히 보니
하얀 석고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동녘산 머리 위로 붉은 빛살이 퍼졌다. 구름장들이
금빛으로 빛났다. 푸른 어둠이 이내 같은 안개로
변했다. 그것은 여인상이었다. 석고로 조악하게 만든
것이었다. 밑에 '풍요의 여신'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니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그 석고상을
뜯어보았다.
농촌 아낙의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광주리를 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포도가 가득 들어 있었다. 등에는
아기 하나를 업었다. 그 아기는 포도송이를 입에
물었다. 아낙은 한 팔로 등에 업은 아기의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한 팔로는 아기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가슴에 안긴 아기는 그 여자의 저고리섶
밖으로 불거져 나온 제 머리통만한 젖통 하나를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우스운 것은
그만한 젖통이 세 개나 더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젖통이 네 개나 되다니....... 아낙의 몸은
뚱뚱했다. 엉덩이는 크고 다리통을 굵었다. 얼굴은
관세음보살의 그것처럼 복스럽고 후덕해 보였다.
입술은 두꺼웠고, 볼에는 보조개가 패 있었다.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강수남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젖통 네 짝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풍만한 그
젖통들을 보면서 강수남은 정조대 같은 무명 조끼로
싸맨 자기 젖가슴을 생각했다.
농원 축사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거구의 남자가 오고 있었다. 코가
통마늘같이 크고 뭉툭했다. 눈썹이 새까만 남자였다.
등허리를 약간 구부린 듯한 그 남자는 검정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강수남을 보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이상스러운 광채가 솟았다.
그것은 동쪽 하늘에서 날아온 노을빛 때문인지 그의
의식 속에서 용트림을 하는 어떤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광채가 그니를 섬뜩하게 했다. 그니는 간밤
꿈속에서 시커먼 남자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팔짱을 끼면서
움츠렸다.
그랬는데도 그 남자는 그니의 몸에서 시선을
거두어가지를 않았다. 그니가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의 눈에서 솟고
있는 광채는 발정한 암컷을 보는 수컷의 눈에서 솟는
그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강수남은 진저리를 쳤다. 그 진저리는 어쩌면
발정을 한 암컷이 수컷한테서 느끼는 전육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그런 현상이
자기의 몸속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자기 몸과 마음을 신뢰할 수 없었다.
강수남은 그를 피해 몸을 돌렸다. 그때 별채 쪽에서
그의 아내가 왔다.
아침을 먹고 나서 강수남은 박달재의 소개로 그의
처조카 내외와 인사를 나누었다. 남편은 김창수였다.
강수남이 이미 그날 새벽에 기이한 석고상 앞에서
상면을 한 거구의 남자였다. 그의 아내는
임승단이었다. 김창수는 새벽에 단둘이 아무도 없는
데서 대했던 것과는 달리 강수남을 향해 자꾸
히죽히죽 웃었다. 바보스러운 웃음이었다. 새벽에
보았을 때보다 그는 등허리를 더 많이 구부린
모습이었다.
혀가 짧은 듯 말이 약간 어눌했고, 강수남을 바로
보지 못하고 수줍어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내리깔곤
했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서 그니는 음험한 마성을
느꼈다. 야수성을 느꼈다. 김창수는 일부러 어눌하게
말을 하고 바보스럽게 행동을 하는지 모른다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그의 아내 임승단은 키가 작달막하고 젖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굵고 엉덩이가 드넓었다. 얼굴도
동글납작했다. 입술은 두껍고 볼은 불그스름했다.
강수남에게 고개를 까닥하면서 임승단은 김창수의
한족 팔을 끼었다. 내 남편이니까 넘보지 말라는 뜻인
듯했다.
그들은 조기 출하할 포도밭에서 비닐하우스를
덮으러 간다고 했다. 강수남은 박달재에게 작업을
구경하러 가겠다고 했다.
"좋아요. 얼마든지...... 그렇지만 뭐 특별히 볼
것은 없어요."
박달재는 선선하게 응낙을 했다. 그러자 그의
처조카 임승단이 그니의 팔을 끌었다. 그니를 방
안으로 들이밀었다. 임승단은 방문 밖에 선 채 그니의
민틋한 젖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래 가지고는 못 들어가요. 잠깐 기다리셔요."
하고 빙긋 웃었다. 자기의 방으로 달려갔다.
임승단은 자기의 젖통가리개 하나와 양말 네 짝을
가지고 왔다. 그것을 강수남 앞에 내밀며 말했다.
"내 헌 것인데 좀 클 것이오마는 차시오. 커서
헐렁헐렁하면 이 양말짝들을 쑤셔 넣어요. 우리
고모부는 여자 인부들이 가슴을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좋아해요, 히히...... 상당히 음험한 어른이셔요."
강수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양말짝들을
한쪽에다 쑤셔 넣어도 헐렁헐렁할 것임에 틀림없는 이
여자의 브래지어를 어떻게 찬단 말인가. 헐렁헐렁한
젖통가리개 속에 양말짝들을 채워서라도 젖가슴을
부풀려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짖인가. 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자기의 농원이라고 이 안에 들어오는
여자들한테 이렇게 폭군스럽게 군림을 하는
박달재라는 사람은 대관절 어떠한 위인인가.
변태성욕자다. 그니는 끓어오르는 모멸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 배낭을 둘러메고 떠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니의 눈앞에 눈 쌓인 나무다리를 건너가던
이순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농원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라고 주의를 주던 말들이 떠올랐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여기 일하러 오는 사람들은
으레 다 이렇게 해요. 입고 있는 속옷 위에다가 이것
두르고 양말짝들을 쑤셔 넣으면 돼요. 안 그러면은 못
들어가요. 아가씨같이 가슴 민틋한 사람은 고모부가
농원 안엘 못 들어가게 해요. 젖통 작은 여자가 농원
안에 들어오면 흉년 든다고......"
하고 나서 임승단은 발을 구르며 빨리 젖통가리개를
차라고 재촉했다. 강수남은 멍해지면서 젖통가리개를
받았다. '젖통 작은 여자가 농원 안에 들어오면 흉년
든다고' 한 임승단의 말이 뒤통수를 쳤다. 스웨터와
내의를 벗었다.
임승단의 말대로 자기의 정조대 같은 무명 조끼
위에다가 그 헐렁헐렁한 젖통가리개를 찼다. 임승단이
양말짝들을 쑤셔 넣어 젖통가리개의 쭈그러드는
부분을 불룩하게 일으켜주며
"아가씨는 참 묘한 브러지어를 차고 있소잉."
하고 말했다. 그니는 여자이면서도 여자 아닌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젖가슴 불룩한 것을 못마땅해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그것을 성가셔 하고 귀찮아하고
있었다. 그니는 그니가 항상 몸 속에 담기도 하고
우러러 받들기도 하는 빛덩어리들한테 그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것을 거두어가 달라고 빌곤 했다. 임승단이
킥킥 웃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여기가 참 묘한 데요. 살아보면 이상스러운 구석이
많아요. 우리 고모부는 살짝 돈 사람이라고 그래싸요
사람들이...... 히키키키... 그래도 나는 우리
고모부가 참 좋아요. 우리한테 무지하게 잘
해주거든요."
강수남은 젖통가리개를 찬 다음 내의와 스웨터를
입었다. 양쪽 젖가슴이 스웨터 자락을 들치고 튀어
나왔다. 임승단이 그니의 젖가슴을 보면서 말했다.
"훨씬 인물이 돋보이네요. 앞으로는 잘 맞는 것을
사다가 항상 차세요."
임승단이 앞장 서서 나갔다. 강수남은 뒤따라
나가면서 그날 새벽에 풍년 여신상 앞에서 마주 대한
김창수의 눈을 생각했다.
젖가슴을 불룩하게 하고 나서는 자기를 그 사람이
어떤 눈으로 볼까. 왜 하필 그 사람의 시선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가. 주변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보건
상관할 것이 부언가.
강수남이 밖으로 나오자 박달재는 코를 찡긋하고
웃었다. 김창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흘긋
곁눈질로 강수남을 보았다. 그들은 말없이 포도밭으로
갔다.
그들을 뒤따라 박달재의 아내 임 여사가 오고 딸
영이가 왔다.
얼마 있지 않아서 얼굴이 거무튀튀한 청년이 한
사람 왔다. 박달재가 그 청년에게 강수남을 소개했다.
그 청년은 문희수였다. 농고를 졸업한
영농후계자였다. 박달재의 풍년농원에 와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두고 봐서 쓸 만하다 싶으면 우리 사위를 삼을
생각이오."
박달재는 이렇게 말을 해놓고 껄껄 웃었다. 그 말에
영이가 발끈해서
"또 저 소리 하시네."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임 여사가 박달재를 돌아보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셨으면 속데다가 깊이 묻어놓고
계세요. 미리 발설부터 하지 마시고......"
문희수는 어색해하면서 뒤통수를 쓸었다. 박달재가
그 두 여자를 싸잡아보며
"왜 어째서? 속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고 다들
눈치채고 있는데 아주 우리 사위 삼을 것이라고 말을
해버리면 또 어때서? 다른 딸년들은 다 애비가 하는
이 농장 싫다고 빠져 나갔고 우리 영이 하나면 애비
밑에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일을 하니께 사실
말해서 나는 아주 희수 저놈하고 짝을 지어서 농원을
다 물려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어."
하고 말했다. 임 여사가 우뚝 발을 멈추고 어이없어
하면서
"그렇더라도 말부터 앞세우지 마시란 말이요. 또
희수가 조그만 맘에 안 들면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치고 그러면서...... 당신 정말 어째 그러시오?"
하고 말했다. 박달재가 허공을 향해 허허허 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을 이랬다저랬다가......
변덕 잘부리는 사람이라고 그러는 것이여. 그렇지만
희수를 사위 삼겠다는 것은 사실은 것을 어쩔 것이여.
야, 희수야 너도 우리 영이 싫지 않지야? 우리 영이란
년, 엉덩이도 실팍하고 젖가슴도 풍만하고 복있게
생기지 않았냐. 허허허......"
영이는 그 말을 못 들은 체하고 비닐자락을
풀어내기만 했다. 그 자락 끝을 문희수가 잡아당기고
있었다.
강수남은 무슨 일을 어떻게 거들어야 할지를 몰라
우두커니 선 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들만 보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의 지주를 옮기던 박달재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이제 보니, 다들 짝이 있는데 강수남 씨만
외짝이구만 그래."
건넛산 위로 구름장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장들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눈이 시리게 짙푸르렀다.
"짝이 없는 것은 좋지를 않는데 어쩌냐 이거."
박달재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조카사위 김창수에게
"창수야, 이따가 점심때 말이다. 하순이하고
갑돌이하고 흘레붙여라잉. 어저께부터 암내 냈는디 더
잘 익으라고 놔둔 것인께. 오늘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순이, 다순이, 마순이도 잘 살펴보고 제대로 익었다
싶은 놈부터 을돌이하고 붙여라. 병돌이는 오늘 좀
쉬라고 그러고......"
하고 말했다. 도사견들의 교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아야 쓴다. 암컷들도 잘 멕여야
하지만 갑돌이, 을돌이, 정돌이, 병돌이 그 네 놈들도
잘 멕여야 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여. 수컷
기가 쇠하면 새끼들이 많이 안 든단 말이다."
포도나무 줄기줄기 밑에 덜 녹은 눈들이 있었다.
하우스의 지주 위로 비닐 한 자락을 덮고, 그 속에
줄을 달고 또 한 자락을 덮었다. 이중으로 보온을
시키는 것이었다. 강수남은 속에서 두번째로 치는
비닐자락을 들어올려주었다. 박달재가 비닐자락을 펴
늘이면서 강수남에게 말했다.
"개들을 키워보면 참 재미있어요. 그놈들같이
정직한 사람을 아직 보질 못했어요.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성이 그리우면 서로 만나 몸을
비비고...... 그런데 그것들은 새끼를 낳기 위해서가
아닌 때에는 절대로 흘레를 붙지 않습니다. 나는
그놈들한테서 순리를 배웁니다. 나는 순리대로 농원을
운영하고 있고, 순리대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도리라는 겁니다. 포도 조기생간을 해보아도
마찬가지요. 이 비닐하우스로 자연의 질서를 약간
앞당겨주는 것인데 그게 아주 재미있어요. 이
포도라는 놈들한테는 반드시 눈을 한 번 맞게 해줘야
합니다."
이날 점심 무렵에 해괴한 일들이 농원 안에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난 김창수는 도사견의 축사로
갔다. 박달재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갑시다."
강수남은 김창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개들의 흘레붙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면구스럽고 망칙한 짓이었다. 그래도 그니는 그것을
보고 싶었다. 농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샅샅이 살펴두고 싶었다.
그니의 뒤를 따라 임승단이 나왔다. 문희수도
나왔다. 박달재가 어흠어흠 목을 가다듬으면서 자기의
아내 임 여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딸 영이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살짝 어디로 새지 말고 앞장 서라. 그것같이
성스러운 일이 또 있다냐? 설거지는 이따가 하고 얼른
가자. 그것은 큰 경사여."
"싫어요."
영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은 일에는 축하를 해주어야 하는 법이여."
박달재가 모녀를 재촉했다. 임 여사는 말없이 그의
등을 걷어밀었다.
영이는 설거지를 대충 해놓고 농원 밖으로 나갔다.
박달재가 영이의 뒷모습을 향해 코를 찡긋하면서
말했다.
"더 깨끗해지려면 더러운 것 속을 더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법인데......"
마당에 서 있는 임승단과 강수남과 문희수에게
"꼭지 덜 떨어진 것들은 놔두고 우리끼리나 가자."
하고 그들을 앞장 세웠다. 축사 쪽으로 가면서
강수남은 박달재가 하던 말을 생각했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순철은 이
사람한테서 무엇을 얻으라고 나를 이리로 보냈을까.
그들이 축사 앞에 이르자 김창수는 박달재에게
"보니까 오히려 하순이는 뜬뜬해 있어요. 오히려
나순이, 마순이가 더 잘 익었구만요."
하고 말했다. 박달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은
것들부터 성사를 시키라고 명령하고 축사 모퉁이로
돌아가면서 바지 앞단추를 풀었다.
축사는 남쪽을 향해 석 줄로 나란히 지어져 있었다.
옆면과 뒷면을 적별돌로 쌓고, 앞면은 철망으로
가렸다. 지붕은 낮았다. 윗몸을 약간 굽혀야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축사는 이백여 칸쯤 될 듯했다.
모두가 잡종 도사견들이었다. 강아지들 여남은
마리씩을 넣은 칸이 있고, 중쯤 되는 것들 서너
마리씩을 넣은 칸이 있었다. 배와 젖들이 밑으로 처진
암컷들이 한 마리씩 들어 있는 칸들이 있는가 하면
수컷만 한 마리씩 들어 있는 칸도 있었다.
개들은 낯선 강수남이 얼씬거리느데도 짖으려
하지를 않았다.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멀거니
그니를 보면서 낑낑거리거나 식식거리기만 했다.
개들은 모두 벙어리였다.
"어려서 고막들을 다 터버리기 때문에 이놈들은
듣지를 못합니다. 소리를 모르기 때문에 짖을 줄도
몰라요. 빛을 알 뿐이고 주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자고...... 암컷들은 교미를 해서 새끼를 낳고 수컷은
암컷한테 봉사를 할 줄밖에는 몰라요. 이놈들은
소리를 모르기 때문에 먹는 만큼 자라고 살이
찝니다."
박달재는 바지의 앞단추를 채우면서 돌아 나와서
강수남에게 말했다. 김창수는 익숙하게 나순이와
갑돌이를 합방시키고 다순이와 을돌이를 합방시켰다.
마순이와 정돌이를 합방시켰다. 박달재가 김창수에게
말했다.
"이 참수(기회) 넘기면 안 된다. 하순이하고
병돌이하고 합방시켜줘봐라."
"병돌이는 오늘 쉬게 하라고 했잖아요."
"괜찮아."
김창수는 그의 명령대로 하순이와 병돌이를
합방시켜주었다. '돌'자 돌림의 수캐들을 '순'자
돌림의 암캐들의 방으로 들여넣어주는 것인데,
수캐들은 김창수의 지시를 익숙하게 따랐다.
개들은 주인의 뜻대로 교미를 시작했다. '어려서
고막을 다 터버리기 때문에 이놈들은 듣지를
못합니다.' 박달재의 말이 강수남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잔인한 짓이다. 사람들의 귀를 듣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그니는 들었다. 빛을
식별하지 못하게 해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것은 출생지옥의 삶이다. 누가 그 지옥을
마련하는가. 누가 그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늘에는 검은 구름장들이 북에서 남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그 구름장들 사이로 해는 찬란한 빛살을 땅
위로 퍼부었다.
별로 차갑지 않은 바람이 축사를 가린 비닐자락들을
흔들고 있었다. 구름의 그늘이 축사 위를 지나가곤
했다. 교미를 하는 개들이 색정적인 신음소리를 냈다.
주변의 다른 개들이 코를 벌룸거리면서 철망 앞을
번잡스럽게 왔다갔다 했다. 그 개들은 안타까워하면서
식식거리고 낑낑거렸다.
그 소리가 강수남 가슴에 야릇하게 반향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등줄기와 아랫배와 두 다리와 팔
쪽으로 뻗어가는 전류 같은 것이 있었다.
박달재는 뒷짐을 진 채 교미중인 암캐의 우리들을
철망 너머로 들여다보고 다녔다. 이것이 이 개들의
삶이다. 강수남은 초연해지고 태연해지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에게는 구름의 삶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삶이 있다.
"흐흐흐, 시기가 쪼금 맞지 않기는 하다마는 그래도
경사는 경사다. 새끼들이 육십 마리는 나올 것이다.
야, 우리 잔치 한 번 벌이자. 깽매구 한 번 치자.
강수남 씨, 나는 흐흐흐 이런 재미로 사요."
박달재는 흐르는 침을 마셨다. 그는 흥분한 채
교미중인 암캐들의 우리 앞을 서성거렸다. 임승단은
축사 머리 쪽에서 박힌 듯 서 있었다. 맨 먼저 합방을
시킨 나순이와 갑돌이를 내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승단은 미세하게 떨었다. 눈은 흐려져 있고, 볼에는
열기가 번져 있었다.
"승단아."
박달재가 목이 깊이 잠긴 소리로 불렀다. 승단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간신히 돌렸다. 박달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서 느희 고모보고 안주 준비하라고 그래라.
돼지고기볶음에다가 두부 얹고...... 막걸리를
걸르라고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쌉쌀한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
그때 김창수가 배를 움켜쥐면서 몸을 모로 틀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김창수는 이때껏 자기가 합방을
시켜놓은 개들이 제대로 교미를 하고 있는지
어쩌는지를 확인하고 다니고 있었다.
"아이고 배가 갑자기 어째 이러는고? 뭔 약을
먹든지 좀 먹어야 쓰겄소."
김창수는 박달재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몸을
돌렸다. 임승단이 김창수를 돌아보았다. 박달재가
짜증 어린 소리로,
"뭔 배가 갑자기 아프다고 시방 그러냐?"
하고 말했다.
김창수는 그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임승단의 팔
하나를 훔치듯이 잡았다. 임승단이 걱정스레 김창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따. 그들은 축사를 빠져 나갔다.
그들의 방이 있는 별채로 갔다.
김창수와 임승단은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박달재가 허공을 향해 허허허허
하고 웃었다. 합방중인 개들을 보면서 웃음 섞인
소리로
"역시 개는 개다 히키키......"
하고 말했다. 바쁜 걸음으로 축사 앞 마당을 빠져
나갔다. 그는 본채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여태껏
개들의 합방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축사 마당을
어기적어기적 걸어다니고 있던 문희수가 박달재의
뒤를 따라 갔다. 그는 본채 쪽으로 가지 않았다. 아까
영이가 나가던 길을 밟아갔다. 영이를 쫓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강수남은 축사 앞에 혼자 남아 있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무엇인가. 임승단의 젖통가리개를
차고 그 속에 양말짝들을 쑤셔 넣어 부풀린 자기의
가슴도 내려다보았다.
개들의 수런거림만 남아 있는 축사를 뒤로 하고
걸었다. 풍년여신상 앞을 지났다. 여신은 아기 둘을
업고 안은 채 무거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흐뭇해하고 있었다. 등에 업힌 아기는 포도 한 송이를
빨면서 키득거리고, 앞에 안은 아기는 젖통 넷
가운데서 하나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젖통 넷은
아기의 머리통보다 더 컸다. 젖꼭지는 거봉이라는 큰
포도알만큼씩 했다.
강수남은 김창수가 아프다고 한 배가 왜 어떻게
아픈 배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 부부가
자기들의 방으로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본채로 간 박달재도 그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강수남은 훤히 짐작을 하면서도 직접 그니의 귀와
눈으로 그들이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니는 별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김창수 내외의 방과 그니의 방
사이에 부엌이 있었다. 그니는 자기의 방문 앞으로
갔다. 김창수 내외의 방에는 그니가 예상했던 일이
이미 벌어져 있었다.
여자가 신음하면서 무어라고 급히 쫑알거리고
있었고, 남자가 어눌한 소리로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조금 전에 그니가 축사에서
많이 들었던 그 원초적인 소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니는 눈앞이 아득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아, 나는 무엇인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지옥이다!' 하고 강수남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출생지옥이라는 곳이 바로 여기 이런
곳일 터이다.'
강수남은 아까 영이와 문희수가 걸어 나간 길을
밟아갔다. 그쪽에 호수가 있었다. 아니다, 하고
그니는 고개를 저었다. 결코 지옥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질척거리고
끈끈한 이런 것이 삶의 참모습인지도 모른다.
"저것들은 새끼를 두 달 만에 낳아요. 지난 가을에
접붙인 것들은 출산을 다 마쳤어요. 그 강아지들이
지금 잘 크고들 있어요. 그것들은 금년 여름 성수기에
출하를 할 것이오."
박달재는 술이 거나해서 이렇게 말했다. 밤이었다.
그는 도사견들의 흘레로 말미암아 기분이 좋아서
저녁밥을 겸하여 잔치를 벌였다. 조카들 내외와
문희수와 강수남을 불러들였다. 잔치라고 해보아야
특별하게 따로 장만한 음식은 없었다.
호수에 놓아 기르는 오리 한 마리를 잡고, 돼지고기
삶은 무침에다 생두부를 곁들여놓고 포도주 새
항아리를 튼 것이 고작이었다. 포도밭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 배추 겨우살이를 뜯어왔다. 그것이
달콤했다. 사람들은 모두 달게 먹었다.
박달재는 취하자 강수남의 옆으로 와서
횡성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개들을 그렇게 키워 파는지
아시오? 그것 때문에 나는 한때 많이 괴로워했지러.
내가 공들여 키우는 짐승들을 보신탕 집으로
팔아넘긴다는 것은 불지옥에 갈 일이고, 칼산지옥에
갈 일 아니오? 부처님은 기어다니는 벌레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불쌍하게 여기라고 가르치셨는디
말이지요. 적으면 한두 마리에서 여남은 마리씩,
많으면 한 트럭씩, 눈 시퍼렇게 뜨고 낑낑거리는
저것들을 출하할 때마다 나는 괴로워서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팔려가 죽을 그놈들한테 용서를 빌고는
했지러. 그렇지만 빌어도 안 돼요. 이놈의 짓을
걷어치우려고 작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용식당 주인인 이순녀라는 시람을 만난 뒤부터 모든
것이 싹 괜찮아졌어요. 이순녀 그 사람 식당에서
음식찌꺼기를 하루 한 차례씩 가져나르곤 하지요.
내가 하루는 개 열 마리를 출하하고 괴로워 술을
마시고 지옥 넋두리를 했더니 그 여자가 이렇게 말을
합디다. '아이고 박달재 아저씨 극락에
가시겄구만요.' 내가 노려보면서 '놀리고 있소.
사람을?' 하니까, 그 이순녀 씨가 항상 소만
때려잡으며 사는 백정들의 이야기를 합디다. 소의
속에 들어 있는 넋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의
넋이랍니다. 그 넋들은 이승의 축생지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백정들은 그 소 속에 들어
있는 넋들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축생지옥을 면하게
하고 사람의 길로 다시 태어나게 재촉해준다는 점에서
무지무지하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순녀 씨가 그럽디다. '어머, 박달재 아저씨.
아저씨가 키우는 그 개들의 넋들도 모두 축생지옥을
살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셔요. 아저씨는
지옥살이하는 그것들을 편히 잘 먹이고 병 안 나게
보살피고 찬바람 안 들게 우리 단속 잘 해서 재우고
그러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재촉을 해주는
좋은 일을 하고 계시지 않아요?' 그 여자한테서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이렇게 마음이 편해졌어요.
흐흐흐흐."
강수남은 박달재에게서 이순녀에 대한 말이 나오자
속이 뒤틀렸다. 속상해하고 있는 자신을 그니는
꾸짖었다. 박달재는 입이 마르게 이순녀를 칭찬하고
있었다.
"그 여자 혼자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러.
생과부라고요. 아주 백합같이 깨끗하지러. 중 노릇
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수녀같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여. 그 여자 얼굴만 한 번 보면은 음심이 싹
없어진단 말이오. 사실 말을 한다면 그 여자가 그렇게
혼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길래 내가 몇 번이든지
그 여자를 여자 노릇 하게 해주려고 생각을 해봤지러.
음식찌꺼기를 날마다 가져나르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까짓것 그냥 그 여자를 거리마다 쌔고쌨는
여관방으로 슬쩍 끌고 들어가서 날이면 날마다
과부같이 혼자 허덕거리는 그 여자의 가슴에 응어리진
고독 덩어리를 콱 깨물어서 터뜨려주고 싶어 미칠 것
같더란 말이여. 그래서 날마다 내일은 정말로 그
여자를 그렇게 해주어야지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지러. 그런디 그 여자를 마주 대하기만 하면 그
먹었던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여.
오히려 고개만 수그러져."
"아따, 저 흉악한 영감쟁이 내숭 떠는 것 좀 보소."
그의 아내 임 여사가 떠들어대는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저 주책바가지가 그 여자를 한 번
보듬어보려다가 되게 무참을 당한 모양이여."
박달재는 손으로 세차게 저었다. 합장을 하고
허공을 우러르며 진정으로 말했다.
"무참을 당했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여?
부처님한테 맹세를 하고 하느님한테 증인을 서 달라고
하고 말을 하지만 나는 그 여자한테 무참당한 적
없어. 진실이여. 당신도 가보고, 강수남 씨도
가보시오. 그 사람은 참말로 관세음보살님이거나
성모마리아이거나 할 것이오. 아닌게아니라 나 그
여자 손목도 잡아보고 보듬어보기도 했지러. 입도
맞추어보고 젖통도 만져보고 그랬지러. 그렇지만 그
여자는 나한테 쌀쌀맞게 군 적이 절대로 없어. 그
여자 손목을 잡아보거나 보듬어보거나 입을
맞추어보거나 하면 금방 극락세상에 가 있는 것 같어.
흉한 마음, 돈 욕심 다 쏵 없어져요. 나만 그러는 줄
알어? 그 식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저 봐라, 저 주책바가지, 인제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
임 여사의 말을 아랑곳 않고 그는 침을 튀기며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쏵 알려졌어요. 가보시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지러. 그 집에 가보면 꼭 한 삼 년
구황이 든 세상 같어요. 사람들이 밥 한 그릇을 사
먹으려고 줄을 지어 서 있다시피 해요. 다 같은
식당밥인데 어째서 하필 그 여자가 낸 그 식당만 그
지경인지 아시오? 다 그 여자한테서 풍기는 훈훈한
바람이 음식맛을 맛깔스럽게 해주기 때문이라고요.
누구든지 그 여자하고 마주 앉아 말을 하거나 한 번
웃음을 주고받아버리기만 하면은 그 집 단골손님이
되어버린단 말이여."
강수남은 속에서 불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이순녀가 대관절 어떻게 살아가기에 그렇게
관세음보살 같다고 할 정도로 소문이 났을까.
내일이라고 당장 가서 한번 만나볼까. 박달재의
풍년농원에서 더 건져낼 것이 없다 싶을 때 그 여자를
만나러 가자고 그니는 생각했다.
박달재는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속에 든 포도나무의 잎들이 가치의
발만큼 해졌다. 밭 가장자리의 버들개지는 살이
오르고 있었따. 비닐하우스를 씌우지 않은
포도나무들은 겨우 움이 나오기 시작했다.
봄이었다. 구름은 끼지 않았는데 대기는
우중충했다. 바야흐로 암캐들은 연일 발정을 했다.
얼마쯤 뒤에는 비닐하우스 속의 포도나무들에 꽃이
피기 시작할 것 같았다. 그 속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난로를 설치했다.
어느 꽃샘추위가 몰려든 날 풍년농원에 전보가
날아들었다. 박달재의 장모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그의 장모라면 김창수의 아내인 임승단한테는
할머니인 것이다. 박달재 내외와 김창수의 아내
임승단은 서둘러 길을 떴다.
"할머니, 할머니, 히잉......"
임승단은 눈물과 콧물을 훔치며 김창수를 몇 차례
뒤돌아보면서 박달재 내외의 뒤를 따라갔다.
"조카사위 너만 믿는다. 늦잠 자지 말고 제때에 밥
주고 혹시 무슨 병이 났는가도 살펴보고...... 암내
내는 놈 있으면은 실기(失機)하지 말고 접붙여주도록
해. 새벽에 짬빵통 퍼오는 것은 희수가 좀 해라. 운전
살살 해야 한다잉. 우리 없는 동안에는 희수가 집에
가지 말고 조카사위하고 같이 좀 자거라. 날
추워지면은 비닐하우스에 난로 잘 피우고...... 혹시
개 사러 오면은 저쪽 맨 끝에 있는 기돌이, 나돌이,
다돌이...... 그 또래 것들만 팔어. 계산은 영이보고
하라고 하고......"
박달재는 김창수와 문희수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고
강수남에게
"우리 없는 동안에는 안집에서 영이하고 함께
자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날 밤부터 농원 안에 남아 있는 네 사람 영이,
강수남, 김창수, 문희수 들은 주인 박달재가 시킨
대로 했다. 문희수는 김창수하고 함께 잤고 강수남은
영이 혼자 있는 안집에서 잤다.
강수남은 박달재 부부의 방에서 혼자 잤다. 영이가
그니와 함께 자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니는 영이가
박달재 부부 방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대로 거기서
누웠다. 잠자리를 옮겨서인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잠이 오지 않은 자의 밤은 유다르게 길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니는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서 찬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새 기분으로 잠을
청할 참이었다. 문을 밀고 나가려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문 잠그는 소리, 영이의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하 하고 강수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이의 방에 들어온 사람이 문희수일
것이라고 그니는 짐작했다.
영이가 자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렇게 문희수를 제 방으로 이 밤에
불러들이는 것일까. 영이의 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도란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영이가 어떤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말자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박달재도 문희수와 영이를 장차 짝
지어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던가. 강수남은 문을
밀고 나갔다. 응접실은 어두웠다. 무엇을 더 얻으려고
나는 여기 머무르고 있는가, 하고 그니는 생각했다.
그니는 자기의 삶이 박달재와 그 주변 사람들의
질척거리고 끈적거리고 뜨겁고 구질구질한 듯하면서도
달콤한 삶에 비하여 무척 값없어 보였다.
마당으로 나왔다. 개 두 마리가 와서 뛰어올라
그니의 얼굴을 핥으려고 했다. 그 진돗개 두 마리하고
그니는 친해졌다. 그니는 개들을 뿌리치고 농원
쪽으로 걸어갔다. 김창수가 혼자 자고 있을 별채와
비닐하우스와 포도나무들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것들의 머리 위로 별들이 수런거렸다. 그니는 잠든
것들이 숨쉬는 소리를 들었다. 별들이 수런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호수 쪽으로 갔다. 호수는 밤하늘을 향해 눈을
허옇게 뜨고 있었다. 그 호수 속에 별들이 떨어져
있었다. 미세한 바람이 불어왔다. 호수가 움직이고
있었다. 별들이 일그러지면서 춤을 추었다. 혼례를
생각했다. 별들과 호수와의 혼례였다. 강수남은
심호흡을 했다. 가슴 속에 별들을 품었다. 속에서
무엇인가 꿈틀 하고 움직거렸다. 무엇일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내 피도 붉고 진하다.
문득 며칠 전에 보았던 개들의 흘레가 생각났다.
벙어리 개들의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순간 그니는 몸을 돌렸다. 무슨 냄새인가를 맡았다.
호수 저쪽의 대문 주변에서 어른거리느너 것이 있는
듯싶었다. 머리끝이 곤두섰다. 진돗개들이
따라왔을까? 그니는 대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니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누군가가 대문 옆의 편백나무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니는 그 사람의 눈에서 날아오는 빛살을 보았다.
야행성 동물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인광 같은
것인 듯싶었다. 그니는 누구냐고 묻지를 않았따. 그가
누구일 것이라는 것을 그니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니는 도망을 치듯이 안채 쪽으로 걸었다.
박달재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잠을 자지
않고 저러고 있을까.
강수남은 그가 쫓아와서 팔을 낚아챌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푸거
주저앉게 될 것만 같았다. 등나무 밑에 이르러서 뒤로
돌아보았다. 그 사람은 아직도 대문간 옆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았을까. 다시
눈을 부릅뜨고 대문간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무슨 빛인가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갔다. 영이의 방에서 수상스러운
수런거림이 있었다. 마음이 어수선했다. 괘념하지
말자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다. 아니, 나뭇잎 자신 때문이다.
그것들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는 사람 마음의
흔들림 때문이다.
방으로 들어갔다. 한가운데 우뚝 선 채 방안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아랫목에 장롱이 있고, 윗목
구석에 텔레비젼과 영상재생기(VTR)가 있었다.
박달재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내부를 살펴보고
싶었다. 텔레비젼 수상기 밑에 '새농민' 잡지와
'농민신문'들이 쌓여 있었다.
누렇게 변색이 되고 표지가 너덜거리는 조그만한
옥편이 있었다. '포도재배법'과 '도사견 사육법'이
있었다. 소설책도 너댓 권 있었다. 소리나지 않게
장롱문을 열었다. 옷장 위쪽 선반에 비밀스럽게
책보로 덮어 놓은 것이 있었다. 들쳐보니 비디오
테이프였다.
두 개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열반경(1)'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하나에는 '열반경(2)'라고 쓰여
있었다. 어떤 스님이 염불하는 것을 녹화해 두었을까.
이런 영화가 언제 제작되었을까. 강수남은
'열반경(1)'을 꺼냈다. 영상재생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테이프를 넣었다. 브라운관에 소낙비 오는 듯한
빛살이 요동을 치다가 약간 녹화상태가 좋지 않은
천연색 화면이 나타났다. 그 화면이 강수남의
뒤통수를 쳤다. 금발의 벌거벗은 여자와 체구 건장한
벌거벗은 백인 남자가 격렬하게 성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처절하리만큼 구체적으로 여자의 모든
것과 남자의 모든 것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
영상재생기 속에서 테이프를 빼냈다. 테이프가 빠진
브라운관에서는 어지러운 빛발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스위치를 꺼버렸다. 그니는 멍한 잿빛으로
변한 브라운관을 보고 있었다.
축생지옥이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박달재의 말을 떠올렸다. 그니는
테이프를 장롱 속에 넣으려다가 돌아섰다. 다시
그것을 재생기 속에 넣고 재생을 시켰다.
축생지옥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고 싶었다. 그니는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그것들을 모두 보았다.
소리까지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은 이 농원에
들어와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그 경우에는 짐승의
소리나 사람의 소리나 별 차이가 없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열반경(2)'까지도 다 보고 자리에 들었다. 그니는
벌거벗은 채 축생지옥 속에서 뒹구는 꿈을 꾸고 또
꾸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속옷도 젖어
있었다. 갈아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속옷은
별채의 그니 방에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가져다가 갈아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접실의 괘종시계가 여섯 점을 쳤다.
영이의 방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바쁘게 서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잠시
뒤에 그니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언니, 저 개밥 가지로 가는 차 타고 가서 시장
봐가지고 올께요."
영이의 말은 강수남에게서 허락을 받으려는 말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일 뿐이었다. 그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영이는 밖으로 나갔다. 영이가 무어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출발했다.
자동차의 소리가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드는가
했는데 농원에서 도사견들의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창수가 도사견들에게 밥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농원 안에는 그와 내가 있을 뿐이다. 그가 축사에
있을 때 얼른 가서 속옷을 가져오자. 강수남은 간밤에
본 시꺼먼 남자의 눈에서 빛나던 푸른 빛살을
생각했다. 그에게 건너오는 듯싶던 냄새도 생각했다.
덜 구어진 오징어 냄새 같은 남자 냄새였다. 시큼한
땀내가 어리어 있는 냄새였다.
지옥이다. 축생지옥이다. 지옥을 건너는 법을
터득하라고 이순철은 나를 여기에 보냈을 터이다.
진흙으로 주물러 만든 소가 강을 건넌다. 물에 불어
허물어질 것 같은 그 진흙소가 어떻게 물 한 방울도
몸에 묻히지 않고 그 강물을 건널 수 있는가. 나는
그런 진흙소가 되어야 한다.
강수남은 밖으로 나왔다. 김창수가 마당에 서
있었다.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두 손을 마주
비볐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가
떠듬거리면서 말했다.
"저, 저기 타, 타순이가 아, 암내를 내가지고 바,
밤새 집을 다 물어뜯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 어느
놈하고 접을 붙여야 좋을지 모, 모르겠구만이라."
강수남은 얼굴이 화끈 달았다. 이 남자가 어째서
나한테 와서 그것을 물을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니는 볼멘소리를 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김창수 씨가 알아서
해야지......"
그 말에 김창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뒤통수를 쓸었다. 다시 고개를 들고
그니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니는
그에게 얽히어 있는 많은 것들을 읽었다. 그는 모든
일을 주인의 명령에 따라 하곤 했었다.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해서는 못 하는 위인이다. 그니는 입에
씹히는 대로 말했다.
"갑돌이하고 붙이시오."
그 말이 떨어지자 김창수는 윗몸을 한 번 굽신하고
굼뜨게 몸을 돌렸다. 축사 쪽으로 갔다. 그니는 저
순하기만 한 짐승 같은 사람을 너무 무서워하면서
경계를 하여왔다고 생각했다.
배낭에서 속옷을 꺼내가지고 안채로 갔다. 문을
걸어 잠갔다. 목용탕에 가스순간온수기가 있었다.
순간온수기와 이어진 쇠대롱에 종이판이 붙어 있었다.
거기의 주의말이 쓰여 있었다.
'당신은 그 가스온수기 쓰는 법을 제대로 알고 쓰려
합니까?'
따스한 물이 쏟아지게 해놓고, 그 물줄기 속으로
알몸을 들이밀었다.
'당신은 이 풍년농원에서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알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 합니까?'
이 말을 혀끝에 놓고 씹었다. 간밤에 자기의 몸이
더렵혀져 있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간밤 잠자리에서
구질구질하게 흘렸던 땀과 오물들을 비누칠해서
씻어냈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상쾌했다.
'당신은 음습한 풍년농원 건너가는 법을 제대로
알고 뛰어들었습니까?'
이 말을 입안에 뒹굴렸다. 창밖을 향해 심호흡을
했다. 축생지옥 안에 있으되 그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럴 수 있다.
강수남은 자만에 빠져들고 있었다. 박달재와 그의
아내 임 여사와 그의 딸 영이와 그들이 사위를 삼으려
하는 문희수와 그의 조카 내외들은 모두 축생지옥에
떨어져 버둥거리고들 있는 무리들이다. 축생지옥
바다를 나는 물 한 방울 몸에 묻히지 않고 건너는
진흙소가 되어야 한다. 그니는 단전(丹田)에 힘을
주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감좋게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박달재의 처조카 임승단이었다.
"영이냐? 아무 일 없지야?"
하고 임승단은 말했다.
"영이 아닌데요."
강수남의 말에 임승단은 미안하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우리 집 그 사람 조끔 바꿔주시오. 아주 급한
일이구만이라."
하고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면 말을 해
달라고, 틀림없이 금방 전해주겠다고 강수남이
말했다. 임승단은 직접 그 사람한테 물어보아야
한다고 기어이 바꾸어 달라고 했다. 그니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김창수는 축사에 있었다. 갑돌이와 타순이의 흘레를
보고 있었다. 그는 엉거주춤 허리를 굽힌 채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누르고 있었다.
"빨리 가서 전화 받으세요. 친정에 간 부인한테서
걸려왔어요."
동쪽 하늘에서 치자빛 햇살이 뻗어왔다. 그 햇살이
축사 앞에 서 있는 김창수의 얼굴을 비쳤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강수남을 보았다. 그니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한쪽 다리를 약간 절름거렸다.
울상을 지으면서 그는 애원을 하듯이 말을 했다.
"저, 저기 뭣이나. 저 조끔 살려주시오. 나
죽겄소."
강수남은 그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눈이
이상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코와 입으로는 단내를
뿜었다. 그는 짐승이 되어 있었다. 교미중인 갑돌이와
타순이가 앓고 있었다. 합환화의 향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소리와 냄새 때문에 다른 암수의 개들이
철망으로 주둥이들을 들이민 채 낑낑거리고들 있었다.
김창수도 그 개들같이 미쳐 있다고 그니는 직감했다.
도망치듯이 축사를 빠져 나갔다. 한데 김창수가
달려와서 그니의 팔 하나를 잡았다.
"저 조끔 사, 살려주시오. 고, 고모부가
가르쳐줬어요. 개를 저, 접붙이다가 배가 아프면은
얼른 오, 오줌을 싸, 싸버리라고."
강수남은 그가 그니에게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니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는 그니의 팔을 놓치지 않았다. 그니를
덥석 안아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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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바다를 짊어지고 사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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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녀의 남편 한정식은 아침밥을 먹고 나서 신문을
펼쳐들었다. 이순녀는 보조침대에 엉덩이를 붙인 채
그 신문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둠이 가득 들어찬 기나긴
동굴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없는 칠흙 같은 어둠의 길이었다. 그 길을 시아버지
한길언이 걸어가고 있었다. 시어머니 제주댁이 그를
부축했다.
그 뒤를 손자인 애란이와 성근이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한 젊은 여자가 휠체어를 밀고
갔다. 아랫도리 못 쓰는 남자가 그 휠체어에 타고
있었다. 휠체어를 미는 것은 순녀였고 타고 있는 것은
그녀의 남편 한정식이었다. 그 생각을 하던 그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긴 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말어. 후회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한정식이 냉엄하게 말했다. 이순녀는 아차 잘못했다
하고 생각했다. 한정식의 말을 듣지 못한 체하고
기사들을 훔쳐 읽었다. 순간 번갯불 같은 것이 눈앞을
스쳤다. 그니의 눈길을 얼어붙에 하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전국교직원노조 인산지부장 현종 씨가 일차 공판을
받았다는 기사였다. 이순녀는 멍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옆 침대의 오십대 환자가 잘 나오지 않는
트림을 뿌걱뿌걱 내뿜고 있었다. 그 환자의 딸이 그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이순녀는 자기가 기사를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좀전에 읽은
기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분명했다. 현종은
불법단체조직 혐의와 시위집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는데 이번에 그 일차공판이 열렸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 끝에는 그가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이 그를
교내 학생시위 사주 혐의로 고소를 제기하였는데
그것은 취하했다는 말이 덧붙여 있었다. 현종 교사를
고소한 교장은 그 동안 학생들의 강한 반발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기사는 말하고 있었다.
이순녀는 복도로 나왔다. 공중전화통 옆 유리창 턱
앞에 섰다. 철창에 갇힌 현종 선생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가보자. 오늘 가서 면회 신청을 해서
만나보자. 영치금도 넣어주자. 그녀는 조급해졌다.
......너는 항상 여기 있다. 내 속에 있다. 우리는
같은 바다 같은 섬 주위를 흐르는 해류다. 바위에는
바다풀들을 자라게 하고 갯벌밭에서는 게들과
낙지들과 짱뚱이들을 기어다니게 하고 우리들의
영혼의 심저에서 슬픔을 기어다니게 하고 우리들의
영혼의 심저에서 슬픔을 빛으로 건져올리는 어부들의
배를 띄우는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이순녀의 머리 속에 현종의 시 한 줄기가 맴을
돌았다. 그녀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혀를 깨물었다.
"가게에 좀 갔다가 와야겠어요. 애들 학교에도 좀
가봐야겠고. 늦을지 몰라요. 간호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시고 진지도 많이 드시고 그러셔요."
"아주 오지 말아버려. 나 내 명대로 못 살겠어, 너
보기 싫어서."
이순녀가 한정식의 침대를 등지고 출입문 쪽을
한걸음을 재디디려는데 한정식이 앓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니년은 위선자야. 너한테서는, 어떤
개새끼들인지는 모르지만 그 개새끼들의 냄새가 항상
난단 말이야. 우리 솔직해지자. 제발 오늘은 나갔다가
들어오지 말어라."
한정식의 오기스러운 그 말에는 가락이 붙어
있었다. 무당의 푸념 같은 가락이었다. 이순녀는 가슴
한복판에 송곳 하나가 들어와 박히는 듯싶었다.
얼굴에 불덩이를 끼얹는 것 같았다. 천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현종 선생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서 한
순간이나마 한정식한테 섣부르게 한 적이 있었는가.
누구한테 손목을 한두 번 잡히고, 끌어안기고, 입술을
내주고, 혀를 맞빨아보았다고 해서 당신을 소홀히
대접한 적이 있었는가. 내가 또 어디 아무나 끌어안고
돌았는가. 모두 그럴 만한 사람들만 선택해서 그렇게
해왔다. 나는 내가 알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부족됨
없이 고루 위해주려고 하고 있다.
남편에게는 남편만큼, 시아버지나 시어머니한테는
또 그만큼, 아들딸한테는 또, 그에 적당하게,
식당에서 일을 하는조기님이나 아주머니들한테는 또
그만큼, 현종 선생한테는 또 그에 알맞게 마음을 쓰곤
했다. 간호사 시절에는 환자들을 편애하지 않았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고루 위해주곤 했었다.
간호사로서의 생활을 버리고 한정식의 집안으로
뛰어든 것은 어둠의 동굴 속에 들어 있는 그 집안
사람들을 빛 쪽으로 끌어내보겠다는 소망에서였다.
이순녀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한정식을
남편으로 모시는 내가 현종 선생을 만나러 가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 현종 선생을 버리고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인가. 그 사람은 내 심중의 아버지다.
빛이다.
어둠의 동굴 속을 관통해가는 이들을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 힘의 원천이다. 그 사람이
없다면 이들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를 외면하고 어떻게 진흙탕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연꽃을 피워낼 수 있단 말인가.
'여보, 당신 어째 그러셔요?'
이순녀의 머리 속에 이 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말을 뱉어내지 않았다. 그것은 원망의 말이었다. 그
대신에 한정식을 달래놓을 말을 찾았다. 마땅한 말이
없었다. 울음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왔다. 그냥
나왔다.
택시를 탔다. 한정식이 그런다고 해서 현종 선생의
면회를 그만둘 수 없었다. 택시는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른 해를 오른쪽에 끼고 달렸다. 바다는
검푸르렀다.
먼 바다에서 달려온 물결이 검은 바위에서
부서졌다. 물결들이 하얀 거품을 튕기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무얼하고 있는가. 절간에 모인 수백 수천의
스님들이 입을 모아 사홍서원을 장엄하게 읊조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싶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목탁을 두드리고 싶었고 염불도 하고
싶었다. 빛덩어리 앞에 몸을 던져 절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마와 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자기의 머리칼 같지가 않았다. 나는 산속에 있어야
하는데...... 머리 깎고 수도를 하고 있으면서 잠깐
속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먹물 들인 옷을 입고 바랑을 지고 산모퉁이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리에 그렸다. 이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갈까. 정선 스님을 찾아갈까.
그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x덕도 못 보고
x복도 없는 년이......'
식당에 들어서자 조기님이 순녀를 맞았다.
아주머니들도 나와 있었다. 조기님은 청소를 하고,
아주머니들은 새 김치 담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 왜 머릿수건 안 썼냐?"
순녀는 자기의 목소리가 너무 퉁명스럽다고
후회했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의 구멍새들이 작은
조기님은 화난 표정을 한 순녀를 건너다보면서 빈
코를 마셨다.
"저는 항상 청소 다 해놓고 세수하고 나서 앞치마도
두르고 머릿수건도 쓰고 그래요."
순녀는 티없이 맑은 조기님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굳어진 얼굴을 풀고 웃었다. 얼른 귀엣말을 했다.
"니가 모범을 보여야 저 아주머니들이 잘 한단
말이다. 빨리 쓰고 해라."
마늘을 까던 안동댁이 순녀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배추를 썰던 보배 어머니는 손놀림을 더 빨리 하면서
수다스럽게 말했다.
"뭔 일인지 모르겠소? 날이면 날마다 손님이
늘어가는 모양이요. 하루 한 포기씩을 늘려 한다고
하느디도 날마다 김치가 저녁 손님을 다 못 받고
떨어지곤 하구만요."
"당연하지러. 아주머니들 솜씨가 워낙 좋을께."
순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마늘을 까는 안동댁의
엉덩이 옆에 있는 생새우를 보았다. 젓갈국과 마늘과
함께 갈아넣을 생새우들은 기다란 수염들을 휘젓고들
있었다. 꼬리와 다리들을 세차게 움직거리기도 했다.
"우리 집 김치맛을 보고는 환장들을 하요. 다른
반찬은 젓가락 한 번도 안 대고 계속 김치만 달라는
사람들도 있지러."
마늘을 까는 안동댁이 소매로 코를 문지르고
말했다. 순녀는 그 아주머니 앞에 앉아 마늘 한 통을
집어들면서 속삭이듯이
"아주머니, 앞치마랑 머릿수건이랑 안 가져왔어요?
아주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을 쓰면 훨씬
젊고 이뻐 보이시더구만......"
하고 말했다.
마늘을 까던 안동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조기님과 배추 써는 보배 어머니를 보았다. 조기님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을 쓴 채 쓰레기를 휴지통
속에 담고 있었다. 조기님이 사주를 했는지, 배추를
써는 보배 어머니는 바야흐로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을 쓰고 있었다. 하얀 수건들을 쓰자
조기님과 보배 어머니는 얼굴이 환히 밝아 보였다.
앞치마를 두르자 허리도 늘씬하고 잘록해 보였다.
그들만 깨끗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식당 안이 한층
깨끗하고 훤해 보였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소. 깜빡 잊어버렸네."
마늘 까던 안동댁은 허둥지둥 방으로 가서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내왔다.
청소를 하는 양산댁도 머릿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둘렀다.
사람들의 심리는 묘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머릿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르라고 순녀가 그렇게
당부를 하곤 해도 종업원들은 틈만 있으면 그것을
벗어버리곤 했다. 주인인 순녀가 없을 때에는 그것을
아예 쓰고 두르려고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을
단속해야 할 조기님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표박이인 그 머릿수건이나 앞치마가 싫은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천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주인에게 종처럼 부려지고 있다는 슬픈 생각이 그것을
벗어젖히게 하곤 하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잘 아는 사람이 와서 자기가 앞치마
두르고 머릿수건 쓰고 식당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마음 속에 깔려 있어
그러는 것일 터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순녀는
그들과 함께 일을 할 때면 자기도 머릿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르곤 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업원이라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가능하면 조기님과
아주머니들에게 식당의 수입과 지출을 공개했다.
수입이 많이 오른 날이면 많이 오른 만큼 얼마씩을 더
배당해주었다. 그리고 이익금을 무슨 명목으로
저축한다는 것을 말하고 이해를 구했다.
"아주머니들 들어보십시오. 기님이 너도 알아둬라.
나 이 돈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챙기지
않는다. 그것들한테 장차 뭣을 한 가지 차려주려고
그런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사든지, 가야금이나
거문고나 아쟁이나 대금 같은 것을 사든지......
그것들 악단을 만들어주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려고 그런다. 내 생각으로는 서양 관현악기들도
다룰 수 있게 하고 우리 관현악기들도 다룰 수 있게
해주고 싶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주머니들과 조기님은
숙연해졌다. 얼마 동안은 머릿수건도 잘 쓰고
앞치마도 잘 둘렀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것이
흐지부지해졌다. 순녀가 있을 때면 잘 쓰고 두르지만
없을 때면 그렇지를 않은 것이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식당에 다니면서
일하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시지 말아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지러. 다른 사람들 입에 맞게 음식
장만해주고, 그 사람들이 맛있게 잘 먹고 가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워요? 우리는 식당 보살님들이고 식당
천사들이라요. 자랑으로 알아야지러. 머리에 희고
깨긋한 수건을 쓰는 것, 앞치마를 두르는 것도 식당에
오는 사람들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지러.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빛으로 가득 채워놓은
이 세상 아니오? 다른 사람들 입에 맞는 음식
만들어주고, 그 사람들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그
빛세상에다 내 조그만한 빛 한 덩이를 더 보태주는
것이 아니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오. 나는 그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요. 그 재미에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끼어들지를 못해요."
순녀는 그 이야기를 하다가 마주앉은 안동댁의 두
손을 한데 모아 잡았다. 안동댁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길은 서로의 눈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것은 서로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뻗어갔다.
안동댁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해장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입맛이 떫었지만
억지로 삼켰다. 수백 수천의 비구들이 입을 모아
장엄하게 읊조리는 사홍서원의 소리가 또 아련히
들려오는 듯 싶었다. 구치소로 갔다. 아직 면회
신청접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댓 있었다. 작달막한 아주머니에게 면회 신청하는
요령을 물었다.
접수를 시켜놓고 순녀는 대기실 안을 서성거렸다.
조울증이 그녀를 가만 있지 못하게 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 방광이 거북스러웠다. 이십분쯤
전에 변소엘 다녀왔는데 다시 가고 싶어졌다. 변소로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혹시 현종 선생이 무슨 일로 어디로 불려가고
없으면 어떻게 할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자가
왔다고 면회를 시켜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숨이
가빠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줌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서 손을
씻었다. 거울 앞에 섰다. 화장을 화지 않은 얼굴이
까칠했다. 머리도 부수수했다. 입술도 말라 있있다.
블라우스도 꾀죄죄했다. 살림살이에 찌들리고 세파에
들볶인 아낙의 얼굴을 순녀는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그 사람을 몇 년 만에 만나는가. 이런 꾀죄죄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대해도 될까. 순녀는 부수수한
머리칼들을 두 손으로 누르기도 하고, 결을 보아서
빗겨 넘기기도 해보았다. 머리칼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디 그 사람이 겉얼굴을 보랴. 속얼굴을
보시겠지. 이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식당에서 잠시
얼굴을 다듬고 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를 했다.
대기실로 들어갔다. 아직 호명을 하지 않았다. 서
있을 수도 없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항문이나
여근이나 아랫배 속이나 가슴 속이 조이고 시고
아리는 듯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보았다. 구름은 없는데 하늘은 우중충했다. 그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무슨 관계요?"
접수부 속에 앉은 교도관이 순녀를 빤히 보며 묻던
말이 아직 귓결에 남아 있었다.
"제자요."
순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었다.
"그 사람 홀아비인 모양이던데 혹시 사실상의 부인
아녀요?"
교도관은 짖궂게 물었다. 순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일찍 와서 접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을 하며 그녀는
접수부 앞을 지나 긴 의자들 사이를 뚫고 걸었다.
화장실 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려 걸었다. 대기실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방광은 또 거북하게 부풀어
있었다.
순녀는 조급해졌다. 그 사이에 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순녀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호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접수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면회실 입구에 선 교도관이 이순녀를 불렀다.
그녀는 육번 면회실로 들어갔다.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밑부분에 말이 통할 수 있는 잔 구멍들을
뚫어놓았다. 유리벽 저쪽에 쇠창살들이 수직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유리벽 저쪽을 보고 선 채 현종 선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 이분쯤 기다렸을 때
미결수복을 입은 중년 남자의 얼굴이 유리벽 저쪽에
나타났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중년 남자의 얼굴에는 코밑수염과 구레나룻이
성성했다. 길게 자란데다 부수수한 머리칼들은
반백이었다. 낯빛은 창백했고 눈은 퀭하게 커져
있었다. 그 눈과 광대뼈 사이가 푸르스름하게 꺼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 운봉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 흘러가는 흰구름들을 보았고
쇳소리를 내며 출렁거리는 갈대숲을 보았다.
현종의 눈이 멀건 빛살을 유리벽 이쪽의 순녀에게로
쏘아댔다. 그 눈빛은 독기를 품고 있는 듯싶었다.
이상스러운 마력을 가진 전파 같았다. 그것 때문에
순녀는 맥을 잃었다. 눈앞이 아물아물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가슴 속에서 울음이 밀고
올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입술이 굳어 있었다.
유리벽 저쪽의 현종도 마찬가지였다. 멍히 순녀를
유리벽 너머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남자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입회 교도관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면회
상대자가 바뀌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 그가
순녀에게
"현종이라는 사람 면회 신청한 이순녀 씨 맞지요?"
하고 확인을 했다. 순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빨리빨리 이야기하시오. 그렇게 하고 있다가는 말
한 마디도 못 하고 면회시간 다 끝나겠소."
순녀는 현종에게 웃어 보이려고 해보았다. 무슨
말이든지 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얼굴은
굳어 있었다. 머리 숙은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백치가 되어 있었다. 말을 못 하기는 유리벽
저쪽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만 있었다.
그렇다. 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한테는 바깥 사람의
건강한 삶을 말해주어야 한다. 순녀는 기껏 이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저 잘 살아요. 건강하게 계시다가 나오세요. 제가
뒷바라지 해드릴께요."
하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말 대신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순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현종 선생과 헤어져 살아온 십 년의 세월이
울음과 눈물로 변해서 흐르고 또 흘렀다.
현종의 눈에도 물이 괴고 있었다. 현종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껌벅여가지고 눈물을 말렸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볼 근육을 움씰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시간이 다 되었다고 입회 교도관이 말했다. 그 말이
순녀의 울음을 더 격렬하게 했다. 현종도 끝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신 죄 많은 사람이구만!"
입회 교도관이 현종에게 말했다.
면회실 밖으로 나가는 현종의 뒷모습이 눈물 어린
순녀의 눈앞에서 굴절되었다. 면회실 밖에서 날아온
역광이 현종의 반백의 머리칼들을 은회색으로
물들였다. 아버지, 선생님...... 순녀는 속으로
소리쳤다.
대기실로 나와서 그녀는 한동안 넋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백치처럼 멀거니 바쁘게
움직거리는 사람들을 보다가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접수부로 가서 영치금을
넣어주고 빵과 우유와 요구르트를 넣어주었다. 내일을
책을 사다가 넣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의도
넣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가던 순녀는 구치소 정문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구치소의 하얀 담을 보았다.
그 하얀 벽이 살벌하게 느껴지면서도 정답고
예뻐보였다. 그 속에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몸의
일부가 들어있는 듯싶었다.
......사람들보다는 새를 만나고 푸나무들을
만납니다. 배반을 모르는 천녀(天女)들은 하늘에 살지
않고 숲속에 삽니다. 저는 당신을 향해 어우러지는
숲이 됩니다. 그 새들을 날마다 밤마다 당신의 몸
담긴 절간으로 날려보냅니다. 당신에게로 치솟는 탑이
됩니다. 구름으로 떠돌다가 그 절간을 두들기는
빗줄기가 되고 안개가 되고 진눈깨비가 됩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순녀의 머리 속에
현종의 시가 떠올랐다. 바보, 바보, 하고 그녀는
스스로를 욕했다. 왜 그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 한
마디도 하지를 못했더란 말인가.
식당으로 가서 순녀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흘긋거리면서 조기님이
"무슨 일 있었어요. 언니?"
하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순녀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체했다. 아주 오늘
책까지 사서 넣어주고 올 것을 잘못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나갔다.
문밖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서점들이 있는 번화가로
갔다.
소설책 두 권, '화엄경'과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해설서들, 기독교 '성경' 시집 세 권을 샀다.
'노자'와 '장자'도 샀다. 그것을 싸들고 구치소로
갔다. 책들을 접수시키고 나오는 그녀의 발은
가벼웠다.
몸을 가볍게 움직거려서인지 젖가슴이 털렁거렸다.
잔뜩 부풀어나 있던 젖가슴과 가슴 속이 쭈그러들어간
듯싶었다. 자기가 낳은 아기한테 젖을 먹이고 난
어머니의 마음이 이럴까. 그녀는 얼굴이 화끈
뜨거워졌다. 현종의 아내 노릇을 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또 그의 시를 외웠다.
......나는 달이다. 닻을 내리지 못하고 내부의
소용돌이를 감당 못하고 어지러이 헤매며 포구 밖을
떠도는 나는 고구려의 백수광부(白首狂夫)다. 안고
돌아야 할 큰별을 잃고 궤도를 이탈한 별이다. 언제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너를 돌고, 너는 나를 휘돌리는
우리들의 만다라는 어느 때 어디서 재조립될까.
이순녀는 현종이 풀려나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팽개쳐버리고 싶었다. 한정식의 식구들도 팽개치고
식당일도 팽개치고 싶었다. 아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버스정류소로 가면서
그니는 아버지 운봉 스님을 생각했다. 아무도 그
스님을 그녀의 아버지라고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과부 노릇을 하면서 고리대금업을 하던
어머니도 그랬고 순녀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그 운봉의 모습이 생각났다. 자기를
기어이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쓰는 순녀를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었다. 운봉은 그녀를 데리고
갈대숲 무성한 강둑을 헤매기도 하고 들판길을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가 그때 그녀에게
해준 말들은 언제든지 갓 잡아올린 생선들처럼 그녀의
의식 속에서 푸드득거렸다.
'느희 아버지는 실패했다. 산중에 들어박혀
부처님을 면대하고 자기 한 몸 잘 닦아 극락왕생하려
했던 그게 잘못이었단 말이다. 못 먹고 못 입고 박해
받는 중생들하고 아픔을 함께 하는 고행에서 얻어지는
그 어떤 것이 가장 값진 것이란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네 아버지의 육신에 이미 어떻게 치유할 수 없는 병이
들어박혀 있었단다.'
아버지의 실패를 딸이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
버스가 왔다. 빈 자리에 앉으면서 'x덕도 못 보고
x복도 없는 년이 무슨 미련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
잇어서 안들어고 있냐?' 정선 스님의 말을 생각했다.
다시 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으면 무얼 할 것인가.
선방에 앉아 벽을 바라보면서 백날 천날 참선을 하면
무얼 할 것인가. '절에 남아 있는 내 넋과 속세를
떠도는 내 등신 가운데서 내 진짜는 어떤 것일까.'
은선 스님이 던져준 그 화두를 백번 천번 들어올리고
되씹어보면 무얼 할 것인가.
나는 요부기(妖婦氣)가 있는 여자다. 중이 되든지
수녀가 되든지 끝까지 버티어내지를 못하고, 과부가
되어도 수절을 해내지 못할 여자다. 나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끌어들이곤
하던 어머니를 닮았다. 이 뜨거운 피를 가지고서는
시장바닥 근처에서 살아야 한다. 몸으로 태워야 한다.
이 육신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이 육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육신,
이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문제는 주인공이다.
그 썩은 육신 불태워 날린 그때 그 주인공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한겨울의 얼음 새벽달 기울어지고,
서산에 배고픈 노루 슬피 울고, 찬바람 으악새숲을
흔드는 그때 그 주인공은 어디로 가고 있을 것인가.
이 생각을 해서인지 순녀는 절을 하고 싶어졌다.
환장할 것 같았다. 가까운데 절이 없었다. 절들은 왜
시 외곽이나 산속에만 있을까. 교회들처럼 시중
어디에나 있다면 좋겠다. 빌어먹을, 절이면 어떻고
교회면 어떠랴. 교회로 들어가서 절을 하자. 절을
하는 상대가 부처님이면 어떻고 예수님이면 또
어떠랴. 순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십자가가 솟아 있었다. 절을 하여본 지가 얼마
만인가. 장엄하게 사홍서원 읊조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수런거렸다. 얼굴에 열꽃이
피어났다. 순녀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좀
지난 시각의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의자들
사이를 뚫고 중앙의 바람벽에 걸려 있는 예수상을
향해 나아갔다.
강단 앞까지 나아간 그녀는 한동안 예수상을 향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 그것이 부처님으로 보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예수상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박현우라는 남자 때문에
하루 삼천 배씩 벌을 받던 일이 생각났다.
절을 세번 네번 거듭할 때마다 가슴 속의 무거운
부담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절은
복종이다. 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잡으면서 눈을
감는 것도 복종의 표시이고, 두 손바닥을 마룻장에
붙이고 이마를 그 위에 얹듯이 숙여 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표시이다. 당신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따르겠다는 맹세이다.
'부처님, 예수님, 당신들 두 어른은
너그러우십니다. 당신들은 수절을 하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굴린 과부들과 몸을 파는 창녀들을 다
받아들여 구제를 했습니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그녀와 맨살이
되어 서로를 불태우다가 그녀의 가슴 위에서
죽어간(복상사한) 전남편(송동욱)을 생각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왜 그렇게 스스로를 다
불태우지 못해 그렇게도 안간힘을 쓰면서
안타까워했었을까.
'아아, 부처님, 예수님, 저는 살인자입니다. 저의
몸 어디에 살이 끼어 있었길래 그 사람은 그렇게 제
가슴 위에서 재가 되었습니까. 저는 지금 저를 벌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남자 노릇을 할 수 없는 남자를
위하여 이 육신을 바쳐야 한다고 저를 매질해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제가 이제 다시 육신이 오롯한 한
남자를 섬기려고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눈 번히 뜬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섬기곤 하는 저는
창녀입니다. 저는 창녀 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정식을 버릴 수도 없고 현종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 밖에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 특히 현종을 외면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가슴 위에서 스스로를 불태우고 재가 되어간 전남편을
극락으로 인도해주시고, 한정식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는 제가 현종이라는 또 한 남자를 제 속에 수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그 남자를 섬기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니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섬기어도
좋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멀리 떠나갔던 그이가 다시
제 곁으로 오게 해준 당신들의 은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현종이라는 남자를 섬기면서도 변함
없이 한정식과 그의 가족들에게 빛을 안겨주는 일을
게으름 없이 해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시오. 그
이중 삼중 사중의 생활이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 벌을 이승 끝내고 한 줌 뼛가루로
흩뿌려지고 제 주인공이 새벽 찬 달빛 속을 헤매일 때
받을 수 있도록 유예해주십시오.'
순녀는 백팔배를 했는지 그것의 몇 곱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에야 그 절하기를 멈추었다.
"자매님은 어디 사시는 누구십니까?"
정태진 목사는 순녀에게 물었다. 검은테 안경을 낀
정 목사는 그윽한 눈으로 순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턱 앞으로 명주올 같은 김이
피어올라갔다. 그는 퍼피잔을 들고 있었다. 정 목사의
약간 거무튀튀한 얼굴을 건너다보고 있던 순녀는
자기의 커피잔 속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정
목사가 끓여 내민 것이었다. 그들은 목회실의
안락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경배를 하지 않습니다. 아마
우상숭배를 하시던 분 같은데...... 잘
찾아오셨습니다."
정 목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렇게 말했다.
정 목사 쪽에서 무슨 냄새인가가 날아오고 있다고
순녀는 생각했다. 여느 때 그는 냄새가 아주 짙은
향수를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향수냄새 말고도
무슨 냄새인가가 날아오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 냄새다. 오징어 덜 구어진 듯한 냄새였다. 그
냄새가 그녀의 몸에 뚫려 있는 구멍들을 열어젖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냄새에 구멍들을 열어젖뜨리고
있는 스스로에게 반발을 하듯이
"경배야 어떻게 하건 그게 무슨 상관 있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당돌하다고
생각됐다.
"그렇지요. 물론 알맹이가 중요하지요. 그렇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형식에 따라서 내용이 바뀌기
일쑤이니까요, 어허허......"
정 목사는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쨍 울리는 가성이
섞이어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그는 턱을 목 속으로
끌어당기는 버릇이 있었다. 이 사람을 자기네 식당의
단골손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와 사귀다보면 그의 귀와 눈이 전혀 다른 쪽으로
터지고 뜨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방울이나
은방울을 흔들어대는 듯한 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저는 가끔씩 똥치는 막대기한테도 경배를 합니다.
경배하는 대상의 생김새나 모양새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어떤 대상에게 경배를 할 때, 그건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예수님이 되기도 합니다.
산신령님이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결국 저한테 경배를 하는 겁니다."
순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설 같은 논리를
폈다. 정 목사가 허공을 쳐다보면서 너털거렸다.
안경알 속의 눈이 일자로 감기고 있었다.
"그러한 오만이나 몽상은 인간된 자는 누구든지 다
한 번씩 가지곤 합니다. 그러나 높으신 곳에 계시는
그분 앞에서 그것은 먼지같이 부스러지고 만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서 알게 됩니다."
웃음 섞인 소리로 말을 하고 나서 정 목사는
그녀에게 물었다.
"자매님은 어디에 사시는 누구십니까?"
순녀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밀고
올라왔따. 빈정거리듯이 그녀는 말했다.
"저는 어디에 사는 줄도 모르고 제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알았으면 제가 뭣이 답답해서
여기엘 들어왔겠습니까?"
정 목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너털거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방황하는 자매님
같은 분을 위해 교회를 지으라 하시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의 훌륭하신 딸이 되실 기회를
아버지께서 마련하시기 위해 자매님을 이리로
인도하시었습니다. 이제 곧 자매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에서 방황을 끝내고 평화를 찾으시게 될
겁니다."
"저는 순결하지 못한 여잡니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들을 무수히 받들어왔어요. 이젠 또 한 남자를
섬기려고 하고 있어요. 그 일을 용서받고 싶습니다.
한데 우리에게는 웬 계율들이 그렇게 엄합니까? 여러
남자를 받들더라도 그 여러 남자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가슴에 섬기려고
하는 남자는 또 그 남자대로 사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예수님이 가엾은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고 병든 자들을 구하여 주었듯이 그 사람들을
모두 사랑할 수는 없을까요? 지금 제가 받들고 섬기려
하는 그들은 둘이 다 병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갇히어
있고, 마음이 병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몸과 마음이
다 병들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제가 그들의 빛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아니."
하고 말을 하면서 순녀는 몸을 일으켰다. 정 목사를
등지고 출입문을 향해 가면서 말을 이었다.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들 둘만이 아닙니다.
새끼들 둘이 그렇고, 그 남자의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저는 그 집 며느리입니다. 이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녀는 허공을 향해 물으면서 목회실을 나갔다. 정
목사가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자매님, 자매님."
하고 불렀다.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서 정 목사를
향해 합장을 하고 머리와 허리를 깊이 숙여주고 몸을
돌렸다. 나의 깊은 속뜻을 아는 사람이 누구이랴. 그
높은 곳에 있는 분들 말고 누가 알랴. 믿는 사람은
무소뿔처럼 혼자서 당당하게 나아간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나는 이제 한정식과 현종 그 두 남자를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 그들은 외로운 섬들이고 나는
바다이다. 그 섬들을 위하여 나는 출렁거려주어야
한다. 나의 이러한 생각들을 몽상이라고 해도 좋고
오만이라고 해도 좋다. 내 신념대로 사는 것이다. 내
식, 내 법대로 하는 것이다.
식당에 들르자 금방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전화를 건 모양이라고 순녀는
생각했다. 또 무당집엘 가려고 그려를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냉동실에서 개소주 팩을 꺼내들고 택시를
탔다.
병원 현관 앞으로 들어서다가 순녀는 눈앞에 섬광
같은 것이 번쩍 일어나는 듯싶었다. 말뚝같이 박히어
서버렸다. 바야흐로 애란이와 성근이가 현관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혼겁해 있었다.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댔다.
순녀는 달려가서 애란이와 성근이를 한데 싸잡아
안았다. 그들의 얼굴이 그녀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두 아이의 손 네 개가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들은 울면서 그들의 코를 그녀의 가슴팍과 목과
볼과 머리칼에 대고 냄새를 맡아댔다. 그녀가
어머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새삼스럽게 소리쳐
울어댔다.
순녀는 그 아이들의 등을 도닥거리기도 하고 머리와
얼굴 여기저기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볼과 입술로
그 아이들의 볼과 이마를 문질러주기도 했다.
누군가가 이 아이들한테 심한 박해를 가한
모양이었다. 수위가 들어가지를 못하게 했을까. 빛을
식별하지 못하느너 자기의 아이들한테 심하게 한 그
누구인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니까 여기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순녀는 애란이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수위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있었으면 그렇지 않았을텐데...... 그쳐라.
어서 그쳐. 남 부끄럽게 왜 울어?"
생각 같아서는 입원실로 데리고 가서 제 아버지
한정식과 대면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정식이
싫어할 것을 생각했다. 그냥 달래서 보낼 계략을
세웠다. 그녀는 두 아이의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씻어주면서
"애란이랑 성근이랑 뭐 먹고 싶으냐? 가자. 엄마가
맛있는 것 사줄께......"
하고 말했다.
그때 그녀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섰다. 이때껏 두어
걸음 떨어져서 세 사람이 하는 짓들을 지켜보고 있던
삼십대의 아낙이었다. 그 아낙은 한정식 옆 침대의
환자를 간호해주러 오곤 하는 여자였다.
"큰일날 뻔했어요."
그 아낙이 눈을 휘둥굴리며 순녀에게 말했다.
"글세, 수위들이 지키고 서서 아이들을 들여보내지
않던데, 이 아이들은 어떻게 우리 입원실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보니까는 이 아이들 둘이
다 눈까지 성찮은 모양인데......"
그 아낙은 이마와 볼에 깊은 주름이 잡히도록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애들 아빠는 뭔 성질이 그렇게 불
같답니까?"
그 아낙은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휘뒹굴렸다.
"처음에 나는 이 아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 아부님 다리 주물러드리고
있느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애들 아빠는 신문을
보고 있습디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들어왔어요. 나는 간호원들이 들어오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렸지요. 문 앞에 이 아이들 둘이가 서
있습디다. '누구 찾아왔냐?' 내가 이렇게 물었지요.
그러니까 큰 아이가 대꾸를 않고 두 팔을 십자로 벌린
채 내 쪽으로 옵디다."
애란이는 자기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해줄 셈이었다. 말없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그녀는 풍겨오는 냄새와 들려오는
숨결소리로 넉넉히 자기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 냄새와 숨결에는 독특한 무늬와 결이
있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가슴 깊이 파고들곤 하는
것이었다.
네 개의 침대 사이를 걸어가면서 애란이는 청각과
후각에 온 신경을 모았다. 분위기로 미루어 어머니는
없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됐다. 아버지만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눈 없이도 모든 대상들을 기막히게
식별해내는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때 입원실 안은 조용해졌다. 환자와 간호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문득 나타난 두 아이의
괴이한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분위기에 한정식은 깜짝 놀랐다. 들여다보던
신문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한정식은 순간적으로
마치 미친 사람같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베고
있던 베개를 애란에게 던졌다. 베개가 애란이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놀란 애란이가 악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악 소리를 들은
성근이가 으앙 하고 울기 시작했다. 한정식은
애란이와 성근에게 계속해서 집어던질 무언인가를
찾느라고 침대 위에서 헤매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의 눈길이 유리창틀과 맞닿아 있는 사물함
위로 날아갔다. 거기에는 쟁반이 있고, 주전자와
물잔이 있었다. 오렌지쥬스 캔이 몇 개 있었다. 손을
뻗쳐 그것을 집으려던 한정식이 침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애란이와 성근이가 혼겁을 하고 울어댔다. 옆의
침대에서 자기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던 아낙이
달려가서 한정식을 붙들었다. 한정식은 '죽어, 죽어,
이 새끼들아, 죽어, 죽어!' 하고 악을 쓰면서 그
아낙의 손을 뿌리쳤다. 기어가서 사물함의 시울을
잡았다. 그 위에 놓인 것들을 집어다가 애란이와
성근이에게 던져댔다. 다른 환자들이 한정식에게
덤벼들었다. 그 사이에 그 아낙은 애란이와 성근이를
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한정식이 악쓰는 소리를
듣고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지금 애들 아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그 양반 어쩌면 성질이 그렇게도 급하다요?
나 생전 처음 봤소."
순녀는 그 아낙의 말을 들으면서 눈앞이 아득해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빛을 식별하지 못하는 이
아이들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변했을까.
머지 않아 죽으려면 심성이 그렇게 변하곤 한다더니
그 사람도 그럴까.
그녀는 그 아낙에게 고맙다고,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고 하면서 몇 차례나 고개와
허리를 깊숙히 숙여주었다.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은 아이들의 손 하나씩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병원
정문 쪽에서 바람이 날아왔다.
그 바람이 아이들과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게
했다.
순녀는 애란과 성근에게 어떻게 병원까지 올 수
있었느냐는 말을 묻지 않았다. 그것은 또 하나의 아픈
상처가 될 것이다.
제과점으로 데리고 가서 크림빵을 사주었다. 애란과
성근은 크으흑 크흑 하고 재채기질을 하면서 크림빵을
달게 먹었다. 아버지한테 당한 박해를 잊은 듯
"엄마는 왜 안 먹어?"
하고 애란이가 물었고, 성근이는
"한 번 베어 먹어 봐."
하고 순녀의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들이 권하는
대로 먹으면서 순녀는 그들의 손등을 쓸어주고 머리를
다독거려주었다.
이것들 둘을 버리고 간 여자는 마음 편히 잘 사고
있을까. 아무런 죄도 받지 않고 싱싱하게 잘 살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새로 만난 어떤
남자하고 시시덕거리며 웃고 맨살 비비며 잘
살아갈까. 하마 아기를 낳았어도 두셋은 낳았을
것이다. 어쩌면 감쪽같이 속이고 숨기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저께 나 동화 한 편 썼어요. 엄마. 선생님께서
제일 잘 썼다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성근이는 동시를
썼대요. 뭐라고 썼는 줄 알아요?"
애란이가 이렇게 말을 하자 성근이가 떼를 쓰듯이
"씨이, 싫어, 말 안 한다고 해놓고, 씨이, 싫어!"
하면서 애란이에게 덤벼들었다.
앞을 분간 못하는 아이답지 않게 성근이는 정확하게
한 손으로 애란이의 한쪽 어깨를 잡고 다른 한 손을
들어올렸다. 주먹으로 애란의 가슴팍을 쿵쿵 찍었다.
"넘어져! 탁자 엎어진다! 남의 가게에서 이렇게
장난을 치면 어떻게 해?"
순녀가 꾸짖었다. 애란이는 순녀의 가슴 속으로
몸을 숨기면서 성근을 골리기라도 하듯이 말을 했다.
"어머니, 잘 들어봐요. '우리 어머니 얼굴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답니다. 극락에 계시는 부처님,
하늘에 계신 하느님, 제 소원을 꼭 들어주셔요. 우리
어머니 얼굴을 한 번만 보게 해주셔요. 꿈에라도 꼭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걸 읽고
선생님께서 우셨대요."
성근이는 화를 냈다. 애란이가 순녀의 품 속으로
숨어버렸다. 자기 마음대로 애란이를 때릴 수 없자
성근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헤엄치는 사람같이
발길질을 하면서 울었다. 순녀는 울컥 목이 메었다.
애란이를 버려두고 성근이를 얼싸안았다. 성근이는
순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었다.
"멍청한 것아, 우리는 죽어도 얼굴에 달린 두
눈으로는 세상을 볼 수가 없어. 우리는 마음의 눈
뜨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거시야. 내가 늘 말했지 않아?
머리 속으로 그려보라고 말이야. 내 얼굴도 만져보고,
네 얼굴도 만져보고...... 그리고 그 비슷한 얼굴을
네 머리 속에 그려보라고...... 우리 얼굴은 어머니
얼굴을 닮았으니까."
애란과 성근이는 단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사랑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순녀는 생각했다. 이것들을
버리고 달아난 여자는 아무 일 없이 잘 살까. 순녀는
달아난 그 여자를 저주하고 있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성근이는 한 손으로는 빵을 들고 먹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순녀의 젖통을 만졌다. 애란이는 손에 묻은
크림을 혀로 핥았다. 손가락을 입안에 통째로 넣고
빨았다. 순녀는 젖통을 만지는 성근이의 손은 그대로
두고 애란의 입에 넣고 빠는 손가락만 뽑아내주었다.
"시집 갈 처녀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면 어떻게
해?"
순녀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리 속에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란과 성근이가
나란히 죽어 누워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남편
한정식이 두 아이의 목을 조르는 모습과 무슨
약물인가를 두 아이에게 먹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성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혀끝을
아프게 깨물었다. 그런 생각을 한 데 대한 보상을
해주기라도 하듯이 성근이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볼을 댔다. 그런 그녀의 머리 속에 시아버지 한길언을
관 속에 담는 사람들의 형상이 그려졌다. 매듭 재료로
사다준 노끈을 꼬아서 목을 매단 남편 한정식의 혀
빼물고 눈 까뒤집은 모습이 그려졌다. 그를 무덤 속에
파묻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우는 시어머니 제주댁의 모습이 보이고, 그 여자가
눈을 감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도 보였다.
식구들의 시체들 속에 혼자 우뚝 서 있는 자기의
모습과, 바가지들을 수백 수천 개 엎어 놓은 듯한
공동묘지 입구에 현종이 서 있고, 그에게로 달려가서
가슴에 얼굴을 묻는 자기 모습도 떠올랐다. 아, 아,
순녀는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얼른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 혼자가 된
다음에 현종에게 가려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속의 어디에 그러한 악귀가 들어 있을까. 남편
한정식의 말마따나 나는 위선자다. 그녀는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면서 애란이까지를 끌어다가
품속에 안았다. 그들의 얼굴에다가 볼을 비볐다. '나
너희들 버리지 않을께. 진짜 어머니보다 더 너희들을
잘 돌보아줄게.' 하고 그녀는 속으로 소리쳤다.
스스로 한 그 약속은 수렁을 디디는 발이었다. 그러한
약속들을 하고 또 하여왔다. 은밀하게 다른 남자와
여관엘 들어갔다가 온 날에 그녀는 속으로 더 단단히
그런 약속을 하곤 했다. 앞으로도 늘 할 터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런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곤 할까.
자기가 지은 죄업에 대한 보상이었다. 눈에 뜨거운
물이 괴었다가 흘러내렸다.
아버지 운봉은 겨울산을 헤매다가 죽어갔다. 그
아버지를 닮은 남자 현종을 학교에서 쫓겨나게 했다.
그 뒤 현종으로 하여금 홀아비로 늙어가게 했다.
현종은 그녀가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간 것을 자기
탓으로 여기며 평생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돈놀이를 하다가 돈을 떼이고 미쳐 떠돌다가 죽었다.
그녀와 첫남편 박현우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윤
보살에게로 가서 심장수술을 받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녀의 맨살 맨몸 위에서 자기를 불태우던 둘째남편
송동욱이 숨을 거두었다.
그 악업을 풀어 녹이려면 이렇게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빛을 찾아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 두
아이를 위해 맹인 관현악단을 만들어주고, 남편
한정식이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식당업을 더욱
번창하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 한길언의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간호하는 시어머니를
도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내부에서 그녀의 생각을
비웃었다.
'빌어먹을, 그게 뭐 얼머나 대단한 일이야? 쓰레기
같은 인생들 한둘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서 죽어
묻힌들 대우주의 질서가 무너지는가. 다 쓸데없다. 내
한 몸 잘 먹고 잘 입고 잘 즐기다가 가야 한다.'
순녀는 자기 내부의 빈정거림에 쫓겨 몸을
일으켰다. 조개만큼식한 과자빵을 서 근이나 사서
애란의 손에 들려주었다.
"가지고 가서 친구들이랑 먹어라.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한테 얼른 가보아야 한다."
그녀의 말에 애란이가 순녀의 손 하나를 감싸
만지면서 말했다.
"우리는 학교 찾아갈 수 있어요. 오늘 성근이한테
길 찾아다니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성근이도
인제는 혼자서 우리 식당집엘 넉넉히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성근아?"
애란이는 상대를 볼 수 있는 아이같이 성근이를
돌아보았다. 멀뚱한 눈을 끔벅거렸다. 성근이도
마찬가지로 애란이를 향해 멀뚱한 눈을 깜박거렸다.
한길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하늘에서는 고양이 털 같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문 옆 정원의 산초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한길에 나와서 순녀는 갈등을 느꼈다. 이
아이들을 저희들끼리만 가라고 할까. 학교에까지
데려다주고 올까.
순녀는 건널목 앞에서 쪼그려앉았다. 두 아이로
하여금 작별인사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애란이랑 성근이랑 어디 얼마나 길 잘 건너고
버스 잘 타는지 한 번 봐 볼거나?"
애란이와 성근이가 순녀에게로 덤벼들었다. 순녀는
애란이가 두 손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아이의 손에서
과자빵 봉지를 받아 들어주었다.
애란이와 성근이는 두 손으로 순녀의 얼굴을 더듬어
만졌다. 목과 머리칼들과 젖가슴도 만졌다.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다. 순녀는 과자빵
봉지를 땅에 놓고 그러한 두 아이의 머리와 등과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만지기도 했다. 이 새끼들을
버리고 간 그 여자는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을까.
그 아이들의 입에서 비린 입내가 날아왔다.
애란이는 순녀의 볼과 이마에 입술을 대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자나가는 사람들이 세 사람이
한데 엉기어 하고 있는 쓸어만지기와 입맞춤을
구경했다. 순녀는 지나가는 눈길들을 피했다.
아이들의 등을 가만가만 두들겼다. 이제 그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아이들은 아쉬운 듯 바로 섰다.
애란이의 손에 과자빵 봉지를 들려주었다.
"저기 우리 식당집에는 와도 여기 병원에는 오지
마라잉."
순녀는 당부를 했다. 애란이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얼굴이 굳어졌다.
순녀는 서 있고 애란이와 성근이는 건널목을
건너갔다.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애란이는 건널목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선 채 청각과 후각으로
다가와서는 사람들을 살폈다. 신호가 바뀌고 맹인들을
위한 전자신호종이 울자 서둘러 길을 건넜다.
청바지에 흰 점퍼를 입은 한 남학생이 애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애란이 그 남학생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 남학생이 허리를 굽히며
무어라고 대꾸를 했다.
버스 두 대가 거듭 왔다. 앞의 것은 뒷개 쪽으로
가는 것이고 뒤의 것은 애들의 학교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 남학생이 애란이와 성근이를 이끌고
뒤에 온 버스문 앞으로 갔다. 두 아이가 사람들을
뒤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그 남학생만 남고 버스가
떠나갔다. 순녀는 달려가서 그 남학생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녀는 두 아이를 실은 버스가
투명한 대기 저쪽으로 아득하게 사라질 때까지 내내
서 있었다.
"언니는 어디를 그렇게 다니요? 또 난리 한 번
났어요."
복도에서 만난 후배 간호사 고을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녀는 고을남의 작고 뾰쪽한 입을 향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입원실로 들어가자 남편 한정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문을 펼쳐들고 있었다. 옆침대 환자의
보호자가 그녀에게 눈을 꿈적거렸다. 고개를 저였다.
얼른 어떻게 위안을 시켜보라고 귀엣말을 했다.
순녀는 입을 다문 채 남편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한정식이 잠긴 소리로
말했다.
"우리 편편갈림합시다.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나하고는 지옥으로 가고, 새끼들은 극락으로 보내고,
당신은 좋은 남자 따라가고...... 당신 괜히 생고생
사서 할 것 없소."
순녀는 남편 한정식의 침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었다. 애틋하고 간절하게 통사정을 하듯이 말했다.
"여보 당신, 이제 좀만 참으면 돼요. 머잖아
아버님도 깨어날 것이고, 당신도 휠체어 타고
다니면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게 된다고요.
그리고 우리 애들이 얼마나 영특한 줄 알아요? 누가
데려다주지도 않는데도 성한 아이들보다 더 잘
찾아오는 것 봐요. 그 아이들은 두 눈이 있는
어른들보다 더 잘 봐요. 마음의 눈들을 떴어요.
당신만 든든한 마음을 지니면 돼요.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절망을 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요."
한정식은 신문을 구겨쥐면서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는 몇 차례든지 그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영험하다는 안과의사들한테 가보라고 했었다.
"내 두 눈 뽑아서 그 아이들한테 하나씩 나누어줄
수는 없는지 물어봐. 허리, 다리 못 쓰는 병신한테
눈이 무슨 소용 있겠어?"
그녀는 두 아이를 앞세우고 부산,대구, 서울의
영험하다고 소문난 안과의사들한테 다 가보았다.
의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시신경들이 죽어
있으므로 시력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순녀가 안과의사를 만나고 와서 절망적인 말을
전해줄 때마다 한정식은 엎드려 얼굴을 침대시트에
묻은 채 이를 갈면서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쥐어지르곤
했었다.
"내가 그 애들을 그렇게 만들었어. 나는 그 짓을 그
여자가 사랑스러워서 한 것이 아니었어. 화풀이로
했어. 술 엉망으로 취해 들어와서 나한테 아니꼽고
더럽게 구는 놈들을 목졸라 죽이고 그 새끼들 배때기
속에 칼끝을 쑤셔 넣고 두들겨패듯이 그 짓을 했어.
그 애들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고 증오와 저주의
결과인 거란 말이여."
순녀가 서울의 한 안과의사를 만나고 온 날 밤에
한정식은 시트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안간힘을 쓰면서
말을 했었다.
"절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어둠 뿐이오. 이 세상에 어둠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어? 어둠은 죽음이야.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저주받은 혼령들만 득시글거리는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여."
한정식은 이렇게 말을 하다 말고 냉정을 되찾았다.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폈다. 숨을 고르게 쉬었다.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듯이 말했다.
"여보, 나 마음을 어디다가 의탁해야겠어요. 매듭
재료 좀 사다주시오. 내 맘 의심하지 말고......
마음이 안정되면 허리도 빨리 좋아질거요."
순녀는 그것이 위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살빛에서 내부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독기를 읽어내렸다. 그는 자기 식구들이 편편갈림하는
길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증오와 저주의 결과'라는 한정식의 말을 순녀는
혀밑에 뒹굴렸다. 누구의 저주와 증오의 결과란
말인가. 순녀는 시아버지의 입원실로 가고 있었다.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간호원들의 왕래도 없어졌다.
어느 입원실에서인가 환자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처럼 뚫린 복도였다. 순녀는 혼령처럼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 에끼 빌어먹을 년, 돈
억수로 많은 재미교포가 자기 따라가서 살자고 할 때
가지 않고 이 무슨 청승스러운 짓거리냐? 왜 자청하여
이런 지옥 속에 뛰어들어 이 고생을 하고 있느냐.
네가 지장보살이냐? 순녀는 이를 물었다. 한
간이역에서 마지막으로 본 운봉 스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늬희 아버지는 실패했다. 산중에 틀어박혀
부처님을 면대하고 자기 한 몸 잘 닦아 극락왕생을
하려 했던 그게 잘못이었단 말이다. 못 먹고 못 입고
박해 받는 중생들하고 아픔을 함께 하는 고행에서
얻어지는 그 어떤 것이 가장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네 아버지의 육신이 이미 어찌할 수 없는
병이 들어박혀 있었단다.'
아버지 운봉의 말을 생각하며 순녀는 속으로
소리쳤다. 그래 그 사람의 흉내라도 내다가 떠나갈
것이다.
지장은 끝내 극락행을 외면했다고 했다. 자기의
도닦음으로서는 넉넉히 부처가 될 수 있었지만
지옥살이에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이 존재하는 한
자기는 극락왕생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지장은
지금도 지옥과 그 주변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
지장의 후예들이 얼마나 많은가. 애란이와 성근이를
맡긴 처용맹학교에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아, 현종 선생님, 하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도 지장의 후예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기의 시어머니도 그런 사람일 듯싶었다.
......출근길에, 아침 이슬에 젖어 있는 들풀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부처님을 만난다/수업중 창밖에서
손짓하는 백양나무 잎사귀들에서 너를 만난다/해당화
가시와 꽃잎 사이를 스쳐온 바람에서 아내를
만난다/하느님과 부처님과 너와 아내와 함께 이불
속에 들고, 함께 식탁에 앉는다/버스를 타고 함께
떠나고 함게 돌아온다/함께 조개를 줍고 함께
헤맨다/나 이승을 떠나는 날 나를 위해 피같이
번져오르는 저녁노을을 함께 볼 것이다.
현종 선생의 시를 외면서 입원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시아버지 침대 머리맡에만 접시꽃 망울만한 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다른 침대들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환자들도 자가 보호자들도 모두 자고들
있었다. 그녀의 시어머니 제주댁만 시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시어머니느너 사람 같지 않았다.
순녀는 시어머니 제주댁 옆으로 다가갔다. 제주댁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제주댁한테선느 몸냄새가
날아오지 않고, 대신 찬바람만 날아오는 듯싶었다.
귀신인 듯싶었다. 그렇게 느껴지도록 제주댁은
깡말랐다. 눈에는 흰자위가 많았다. 한숨을 길게 쉬곤
했다. 그때 제주댁의 입술은 공기를 터뜨리듯이 푸후
소리를 냈다. 마치 신들린 무당이 '푸암'을 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리곤 했다.
누군가하고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제주댁은 순녀가 다가온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주무르던 다리를 놓고 다른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순녀는 제주댁의 맞은편으로 가서
시아버지 한길언의 팔을 주물렀다.
한길언은 조용히 자고 있었다. 이 깊은 잠을 언제나
깰까. 영원히 깨어나지 않고 죽어가게 되지 않을까.
그럴 바엔 제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 짐을 하나라도
덜어야 한다고 순녀는 생각했다. 이 무슨 죄 받을
생각인가.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머지 않아 소생할
것이라는 기대 하나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너 어째서 이 집구석을 뛰어들어 그 고생을 하냐?"
제주댁은 한숨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당해도 알고나 당해라. 이때까지 너한테 숨겨온
것이 있다."
한동안 고개를 덜어뜨린 채 한길언의 다리를
주무르기만 하던 제주댁이
"달아난 그년도 내가 그 이야기해준 뒤로 며칠 안
있다가 달아났다. 너도 그 이야기 한번 다 들어봐라.
선녀 같은 너한테 숨겨온 것이 끔찍스럽다."
하고 말했다.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거기에는
억분이 담기어 있었다. 말 마디마디가 오기스럽게
끊기고 있었다. 조금씩 떨고 있었다.
"모두가 이 원수 같은 사람이 지은 죄 때문이여. 그
죄업이 이대 삼대에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죄
지은 이 원수는 그냥 이렇게 아무런 고통도 모르고
잠만 자다가 죽어가서는 안 된다. 깨어나서 자기
후세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죽어가야 한다. 그 무당한테서 이렇게 된
깊은 내막을 다 들었다. 지금 그 사람의 넋이 이
원수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 있단다. 그 사람의 넋이
이 원수를 놓아주기만 하면 이 원수는 금방 깨어날
것이란다."
제주댁의 숨결은 가빠져 있었다. 혀를 내둘러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순녀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한길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묵 들어간 볼과
눈뚜껑과 콧구멍에 검은 어둠이 담겨 있었다. 죽음의
신이 한길언의 몸으로 기어들고 있는 듯싶었다.
순녀는 눈을 감았따. 제주댁이 한길언을 가리켜 '이
원수'라고 말을 하는 것을 그녀는 몇 백 번이든지
들었다.
"암, 그렇고 말고. 죄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너도 들었을지 모르겠다만은 참말로 무섭고 더러운
시국이었다."
제주댁은 자고 있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친정이 오룡돌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물질을 참 잘
하셨지야. 그런디 당신은 물질을 하고 살았어도
나까지 그 짓하고 사는 것 보기 싫다고 나를 산간
마을 말 키우는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그 사람은
나보다 한 살 위였는디 키도 훤칠하게 크고
구멍새들도 큼직큼직하고 순하고 나를 참말로
극진하게 위해주는 사람이었다."
순녀는 어려서 할머니에게 들이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해방 된 다음의 어지럽고 무서운 시절의
이야기들이었다. 순녀의 할머니는 그 섬에서 아들딸
하나도 잃지 않고 빼내가지고 나온 것을
'아슬아슬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아버지 운봉이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간 것, 큰고모 작은고모가 모두 절로
들어간 것, 그녀 자신이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
오빠 순철이 머리를 깎았다가 환속을 하여 헤매는 것,
어머니가 생과부 노릇을 하며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돈을 떼이고 미쳐 죽은 것들이 모두 그 어지럽고
무서운 때에 당한 상처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순녀는
생각했다.
"그런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허구헌 날 말 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자랐으니 무슨
세상 물정을 알았겄냐? 그러닌께 그 사람은 말하고
새로 얻은 각시하고 밖에는 모르는 위인이었단
말이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 해도
한사코 나를 떼놓으려고 하지를 않았으니께 말이여.
밭엘 가면서도 데리고 가고, 말을 몰아내리러
가면서도 데리고 가고, 땔감을 짊어지러 가면서도
데리고 갔어."
제주댁은 말을 끊고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다시
말을 잇지 않을 사람같이 한동안 다리만 주물렀다.
이윽고 말을 이었다.
"얼마나 어수룩한지....... 겨우 자기 이름
석자밖에는 그릴 줄을 모르고, 이 세상은 하늘이
있고, 섬을 빙 둘러싼 바다가 있는 줄밖에는 몰라.
섬이라는 것도 기껏 자기가 발을 디디고 있는 그
섬밖에는 없는 줄 안단 말이다. 사람들도 자기가 살고
있는 산간 마을의 여남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 섬
안의 시가지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작인 줄 안단
말이다. 말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사는 육지라는
데에도 기껏 그 섬의 시가지 안에 사는 사람들의
수만큼이 살고 있을 뿐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단
말이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사람으너
곧이들으려고 하지를 않어. 이 세상에는 이 섬보다
훨씬 드넓은 세상이 있다고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고개를 회회 저으면서 귀찮다고 생각하기 싫다고
퉁명스럽게 말을 해버리는 것이요. 미련하고
멍청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여. 생각도 깊고 머리
돌아가는 것도 빠른데, 산간 마을에서만
살아서......"
출입문 쪽의 젊은 환자가 보호자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환자의 시어머니인 듯한 보호자는 환자를
부축하고 화장실엘 갔다. 제주댁은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께 그것이 그해 늦은 봄이었을 것이다.
시할아버지 제사를 지낸 날 밤이었는디,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 제사르러 다 지내고
모두 둘러앉아 한창 음복을 하고 있을 때였지야.
그때만 해도 쌀이 참 귀했다. 쌀밥은 제사 때만
먹어보는 것이었다. 중간산 마을로 시집간 시고모하고
그 시고모의 아들하고만 남의 식구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 집 식구였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그 사람
손아래 시누이 하나...... 그때 나는 누군가가 제사
음식을 얻으러 오는가보다 하고 생각을 하면서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뭣을 좀 줘 보내라.'
시고모가 이렇게 말을 하더라. 얼마나 주어야 할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을 열고 내다보았지
그런데 이건 웬일이냐? 마당에 시커먼 사람들이 가득
서 있더란 말이다. 그들이 무어라고 두런거리는 소리
사이사이에 쇠붙이 소리가 얼핏 나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눈앞이 아득해졌어. 내 앞으로 시커먼 사람
하나가 다가왔어. '어르신을 좀 뵙게 해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어흠 헛기침을 하더니 '이리 들어오시오. 누구시오?'
하시더라. 그너니께 방문 앞으로 온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어르신께서 잠시 밖으로
나와주십시오. 우리 대장님께서 좀 뵙고 싶답니다.'
하더라. 시아버지는 '당신들이 누군 줄 알아서 밤에
당신들을 따라갈 것이오? 밝은 불 아래서 이야기를
하게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하고 버티었지. 시어바지
옆에 앉아 있던 그 사람(남편)이 일어나 나가려 하자
시아버지는 그 사람의 옷자락을 힘껏 당겨
주저앉혔지야. 그제서야 그 마을 이장이 얼굴을
들이밀면서 '만근이 삼촌, 사실은 이쪽으로 들어온
분들이 음식이 조끔 필요하다고 저보고 안내를
해달라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요.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이 있으면 좀 주셔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더라.
나는 등줄기에서 찬 물줄기가 흐르더라. 무슨
끔찍스러운 음모가 마당 밖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더라. 우리 집 식구들을 끌고 갈 귀신들 한
패거리가 몰려와 있는 것 같더란 말이다. '이 사람아.
그러면은 진즉 자네가 와서 그렇게 말을 할
일이지......' 시아버지가 섭섭해하자 이장은 '여기
온 사람들 수가 아주 많습니다. 음복하고 남은 것 다
쓸어서 싸주십시오.' 이러더라. 그러니께 옆에서
누군가가 '우리한테 이렇게 한 일들을 다 적어두면은
나중에 조선인민공화국 정부가 다 보상을 해줄
겁니다.' 이렇게 말을 하더라. 그런데 남은 음식이
얼마나 있어야 말이지. 그것으로는 그 스무남은 수의
장정들을 다 먹일 수가 없어서 새로 고구마 한
소쿠리를 삶았지야, 바로 그것이 엄청나게 큰 화를
불러왔구나."
제주댁은 한길언을 모로 눕혔다. 그의 옆구리와
등허리를 주물렀다. 화장실에 갔던 환자가 돌아와
눕고 있었다.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잠귀
얇은 환자들이 몸을 모로 뒤치었다. 어디선가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응급실에서
들려올 터이었다. 제주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께 우리 집에 들이닥친 사람들은 입산한
사람들이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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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아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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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경찰들과 청년단원들이 몰려왔다.
그것을 미리 알았다. 누구인가가 산 아래쪽을
지켜보고 있다가 소리를 질러 주었다. 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모두 산으로 피신을 했다. 한데 제주댁의
남편은 집에 있다가 그들에게 붙잡혔다.
뒤란 옆의 남새밭에 굴이 하나 있었다. 고구마도
묻어놓고 사람도 숨고 그러기 위해 파놓은 것이었다.
일제 때는 그녀의 남편과 그의 삼촌이 징용을
피하려고 거기에 숨곤 했었다. 다급한 김에 그녀의
남편은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일제 때의
순사들은 찾아내지 못한 굴을 청년단원들은 귀신같이
찾아냈다. 거기에 들어 있는 그녀의 남편을 개같이
두들겨팼다.
청년단원들은 다리를 절름거리는 그녀의 남편을
앞세우고 산을 내려갔다. 시어머니, 시어버지가
매달리고 제주댁이 두 손을 비비며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그들은 독살스러웠다. 매달리는 그들을 총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발로 걷어찼다.
그들이 산을 내려간 뒤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자리에 누웠다. 시어머니는 옆구리가 결려 숨을 쉬지
못했다. 시아버니는 허리를 삐었다.
그날 해질 무렵에 제주댁은 주먹밥 한 덩이와
고구마 삶은 것을 싸들고 시내로 들어갔다.
시어머니가 젊은 그녀한테 어떻게 해저물어가는 때에
바깥 나들이를 시킬 수 있느냐고 자기가 나서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마당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제주댁은 시어머니를 부축해다가
방안에 눕혀놓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러한 무서운 일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마을 아이들이 어디서 배워왔는지
'양담배도 안 피우고 양과자도 안 먹어......' 하고
노래를 하곤 했었다. 일본군대는 철수를 하게 되고
이제는 인민공화국이 들어설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돌았었다. 그동안 비행장을 닦는다, 반공호를 판다
하려 얼마나 강제 노역들을 했던가. 이제는 정말로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는 속에서 우리끼리 나라를
세워 잘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을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장이 위원장이 되고
반장들은 자동적으로 세포위원들이 되었다.
후쿠오카로 징용을 갔다가 돌아온 치국이가
면사무소엘 나다니면서 소식을 물어오곤 했다.
치국이는 면당에서 일을 하게 된다고 했다. 마을 안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것도 치국이었다.
"여기는 걱정 마라. 밥 들여주고 여기까지 올 수
없거든 친정으로 가서 자고 내일 오너라."
"죄 없으니께 그냥 풀어주기는 할 터이지만 그래도
혹시...... 하두 더럽고 무서운 세상이라 한없이
붙잡아놓을지도 모르겄다. 밥 들여주고 그냥 이리로
올 생각 말아라. 사돈네한테 미안하다마는 시내가
가깝기도 하고 그러니께 아주 느희 친정에서 머물면서
느희 서방 오바라지를 해라. 풀어주거든 함께 오도록
해라."
"그리고 너 얼굴이나 옷매무새가 너무 고와서
못쓰겄다. 얼굴에 숯검정 조끔 칠하고 머리칼들은
부수수하게 헝클어놓고 그래라. 옷은 그것 벗어놓고
내 헌옷 입고 가거라. 눈물이나 콧물도 씻지 말고
한사코 추하게 해라. 젊고 얼굴 희끗번듯한 것들은 다
결단 난다더라."
집을 나설 때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제주댁은 시어머니의 말대로 했다. 시어머니의
몇 십 차례 덫대어 기운 헌 치마와 걸레나 했으면
마땅한 저고리를 입었다. 머리칼들은 일부러
까치집같이 헝클어뜨렸다. 얼굴에는 흙먼지와
숯검정을 섞어 발랐다. 손등과 목줄기에도 발랐다.
그야말로 거지행색이었다.
경찰서로 갔다. 총 들고 문앞을 지키는 순경은
추하기 이를데없이 꾸민 그녀의 행색을 대하자 싱긋
웃기부터 했다. 그녀의 변장을 알아챈 것이었다.
그녀는 보초에게 다가가 남편의 이름을 댔다. 보초은
그녀의 얼굴과 차림새를 몇 차례 살피다가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했다. 경찰서 안에는 군복 입은
순경들이 우굴거렸다. 안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앞이 아득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푹 주저앉게 될 것 같았다.
안간힘을 쓰며 앳되고 순해보이는 군복 앞으로 갔다.
남편 이름을 댔다. 그 군복은 이름들이 까맣게 적혀
있는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언제
어떻게 생긴 사람들에게 잡혀갔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군복이
"청년단으로 가보시오."
하고 나서 성을 내어 소리쳐 말했다.
"머리도 좀 빗고, 옷도 좀 깨끗하게 입고, 세수도
말끔하게 하고 그래요. 이쁜 얼굴을 왜 그렇게 하고
다니요? 깨끗하고 하고 다니면 누가 잡아먹을까 싶어
그래요?"
그녀는 도망치듯이 경찰서를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청년단 사무실을 물어 찾아갔다. 청년단
사무실의 문앞도 경찰서의 문앞과 마찬가지로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보초
앞으로 다가가 면회를 왔다고 말했다. 그 보초도
경찰서 문앞의 보초가 하던 것처럼 그녀의 행색을
대하자 코를 찡긋하고 웃기부터 했다. 그녀의 위장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보초는 제주댁이 들고 있는 보퉁이를 받아들었다.
"남편 이름이 뭣이요?"
"문치호구만요."
"알았어요. 내가 전해줄 테니께니 가시요."
보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그에게 잘 좀 전해주라고 부탁을 하고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다가 그녀는 아주 그 보초에게, 남편이
쉽게 나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을 한 번 해볼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거무튀튀했지만
눈빛이나 입모습이 퍽 유순해보였다. 몸을 돌릴까
어쩔까 하고 망설이는데 보초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놀라 돌아섰다. 자기가 혹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싶었다.
"내일 밥 가지고 와서 내가 없으면 안독사를
찾으시오."
보초는 그녀의 얼굴을 뚫을 듯이 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독사라는 끔찍스런 이름을 입속에 뇌이며
머리와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몇 차례든지 했다.
오늘을 이대로 가고 내일 와서 저 안독사라는
사람한테 통사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가려는데 안독사가 다시 불렀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바야흐로 저녁
하늘에서 타오르던 노을이 꺼지고 땅거미가 기어들고
있었다. 혹시 저 안독사라는 사람이 자기 남편을
빼주겠다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다가가자 안독사는 서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저으면서
"시방 에미나이 집에까지 못 가요."
하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자 안독사는
"총 맞아 죽어요. 그리고 그쪽으로 가려면 양민증이
있어야 해요. 오늘부터 그것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다닙니다."
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는 양민증이
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이 있어요. 면사무소에 가면 해주는
것이요."
"아이고, 우리 면은 여기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도가도 못하게 발이
묶인 것이었다. 그보다 다급한 문제가 있었다. 당장
오늘 밤을 어디서 잘까. 시내에는 친척도 없고 친지도
없었다. 그녀는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어차피 양민증이 있더라도 밤길을 쳐서는 못 가는
것 아니오? 가다가는 산 사람들한테 잡혀 죽을
테니께니......"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안독사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잘 아는 여관에다가 재워줄 테니께니 거기서
자고 가라우요. 조금 있으면 교대를 할 테니께니 저쪽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기요."
제주댁은 안독사가 지정해준 건물의 모퉁이에서
기다렸다. 사람을 잘 만났는가보다. 하느님이 돕고
부처님이 도왔다. 아니, 엊그제 제사를 지낸
시할아버지의 혼령이 돌보았는 모양이다. 그녀는
어두워지는 길모퉁이에서 끈으로 묶인 짐승같이
서성거렸다. 청년단 사무실 주변 거리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득하게 먼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둘씩 보였다. 그것도
어두워지면서 끊어졌다.
청년단 사무실 입구에 선 안독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껌껌해져서야 보초 교대가 있었다. 안독사는
사무실엘 잠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녀를 데리고
여관 옆의 밥집으로 갔다.
"내 말 안 듣고 당신 집엘 간다고 갔으면 무슨 변을
당했을지 모르요. 오름(岳)이란 오름에는
빨갱이새끼들이 좍 깔렸소."
밥집 문앞에 들어서면서 안독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
주인 아주머니한테
"이 에미나이 세수 좀 하라고 물 한 양푼만 좀
떠다가 주기요."
하고 말했다. 제주댁은 주인 아주머니의 눈길을
피해 마당 쪽으로 돌아섰다. 주인 아주머니는 그녀의
얼굴을 흘긋 보고 물을 떠다가 마당 한가운데
놓아주었다. 그녀의 옆을 지나치면서 주인 아주머니는
속삭이듯이
"어쩌다가 저 사람들한테 걸려들었는가? 하라는
대로 하는 체하다가 틈 보아서 빠져 나가소."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한동안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씻어놓으니께 그렇게 이쁘구만 왜 그렇게 숯검정을
쳐발랐소?"
밥 한 숟가락 뜨면서 안독사는 마주 앉은
제주댁에게 말했다. 흰 쌀밥이었다. 감자를 넣은
갈치국도 나오고 가조기구이도 나왔다. 이 난리통에
웬 고기들이 이리 푸짐할까. 쓰라린 시장기가 뱃속을
뒤틀리게 했다. 입안에서는 군침이 돌았다. 목구멍
너머에서 당그레질을 했다. 남편 붙잡혀 들어가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몸져 누운 마당에 웬 시장기는
이렇게 드는 것일까. 남편은 그녀가 넣어준 고구마와
밥을 먹었을까. 먹새가 복스러운 남편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무엇을 넣어줄까.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서
친정으로 가야 한다. 친정은 무사할까. 어머니와
오빠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으로 들어가지나
않았을까.
"빨랑 먹으라우요. 이 밥 먹여가지구서리 오늘 밤에
에미나이 잡아먹지 않을터이니께니 염려 말고 맛나게
먹으라우요. 그 동안 시장했을 거로구만."
안독사는 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말했다.
제주댁은 숟가락을 들었다. 밥이 꿀맛이었다. 그래도
입질을 빨리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밥을 조심스럽게 두
숟가락째 씹어 삼켰을 때 안독사는 벌써 밥을 다 먹고
숭늉으로 입안을 헹구었다. 그의 눈길은 한시도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자기의 얼굴에 기어다니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안독사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주인아주머니한테
목청을 높여 말했다.
"아주머니, 오늘 밤에 아주머니 옆에다가 이
에미나이 좀 재워주시오. 이 에미나이 올데갈데 없는
사람이요."
제주댁은 갑자기 울음이 북받쳐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었다. 입안에 든 밥알들이
모래알같이 껄껄해졌다. 이 안독사라는 사람은 무슨
음험한 생각 때문에 그녀를 도우는 척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 에미나이가 울기는 왜 그렇게 설리 울어? 주인
아주마니 옆에 재워주겠다는데 그게 그리도 서러워
죽겠어? 나 참 기가 막혀 죽겠네."
안독사가 어이없다는 듯 담배연기와 함께 말을
허공에 내뿜고 나서 말했다.
"아주마니, 그리고 내일 아침에 밥 한 그릇만 좀
사주시오. 이 에미나이가 옥바라지하는 것까지 좀
도와주어야겠소. 밥값은 내가 계산할 테니께니......"
그 말을 듣자 제주댁은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흑어흑 하고 소리쳐 울었다.
다른 청년단원 둘이 들어오다가 그녀가 울어대는 것을
보고 빈정거렸다.
"아니, 이 집에 초상났는가?"
"안독사는 젊고 예쁜 미망인한테 조문을 왔구만
그래?"
"재미가 아주 좋겠시다."
그 청년단원들의 말에 안독사가 어색한 어투로
"아니, 이 에미나이가 오늘 밤에 주인 아주마니
옆에 재워준다니께니 이렇게 통곡을 하고 이
야단이구만."
하고 말했다. 한 청년단원이 걸걸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이 사람아, 이때까지 독수공방해온 여자보고 이 집
주인 아주마니 옆에 자라고 해놨으니 그렇지.
안독사가 실례를 해도 크게 했어."
다른 단원이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안독사, 그것 먹고 싶지 않으면 나한테나
넘겨주게나."
"이 사람, 말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말어! 이
에미나이 나하고 종씨란 말이여. 본관도 같고 파도
같구만 그래."
안독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호해주려고 하는 것은 진정인 듯싶었다. 안독사의
곤란한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얼른 울음을 그쳐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안독사가 물그릇을
집어드는 체하며 얼굴을 그녀 쪽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재빠르게 신경질적으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 빨리 그치고 밥
먹어요."
그날 밤 제주댁은 아무 일 없이 밥집의 주인
아주머니 방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에 그 주인
아주머니의 부엌일을 해주고 주먹밥 한 덩이를 청년단
사무실에 갇혀 잇는 남편한테 넣어주었다.
그날은 안독사가 보초를 서지 않고 보초를 서지
않고 작전을 나간다고 했다. 사무실엘 갔다가 온 그는
그녀에게
"내가 잘 부탁을 했으니께니 금방 풀어줄 기요.
집에 갔다가 오늘 오후에 나와 보시오. 남편하고 함께
돌아갈 수 있게 해줄 테니께니."
하고 말했다. 제주댁은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억누를 수가 없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기만 했다.
그날 그녀는 가까운 오룡동 친정으로 갔다. 거기서
남편의 점심밥과 저녁밥을 가지고 올 참이었다.
가면서 그녀는 출동하는 군인들의 차와 경찰들의
트럭들을 만났다. 청년단의 차들도 뒤를 따랐다. 그
차들을 비껴주기 위해 길 가장자리의 풀밭으로 들어선
채 그녀는 남편을 빼내온 뒤에는 친정으로 밀고
들어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외동딸 하나 있는
것이 난리를 피해온다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랴.
올케들도 용인을 할 것이다.
밭에서 일을 하는 부녀자들과 지나가는 여자들의
행색을 보고 제주댁은 속으로 아차 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에 구정구정한 땟국을 칠하고 있었다. 옷들도
거지 한 가지로 누더기 같은 것들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속에 이상스러운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자기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오만감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청년단의 안독사를 들먹이면 될
것이라고, 자기의 남편도 그 사람한테 보호를ㄹ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저런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저렇듯 추하게 위장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왜 하필
'독사'일까. 가명일까, 참말 이름일까.
오룡동에 들어섰다. 마을이 조용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들이나 아낙네들의 웃음 섞인 말소리들도
들려오지를 않았다. 골목길에서 그녀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한 차례 들려오다가
말았다. 긴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돌담들, 지붕들,
걸쳐놓은 장대들, 항아리들, 마당 모퉁이에 있는
돼지우리들, 귤나무들, 대나무들, 편백나무들- 어느
것 하나 눈에 익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들어서면
늙은 어머니가 맨발로 달려나와서 그녀를 맞을
것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몸은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벌써 친정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친정집에 들어서자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이미
벌어져 있었다. 오빠들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맞아준 것은 그녀의 늙은 어머니와 두 올케들
뿐이었다.
집안에서는 찬바람이 돌았다. 어머니는 몸져 누워
있었다. 큰올케는 금방 허물어질 듯했고, 작은올케는
배가 오름(岳)같이 둥둥했다. 큰올케는 바야흐로
입덧이 심하여 아무것도 먹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작은올케의 얼굴은 거뭇거뭇하게 기미가 끼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얼굴에는 땟국이 흘렀다.
찬바람이 감도는 것은 친정어머니의 몸져 누워
있음과 두 올케의 임신 때문이 아니었다. 두 오빠가
산으로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그 까닭으로 청년단과
경찰들이 번갈아 뒤지고 사람들을 족쳐댄다는
것이었다. 물질이 금해진 것도 오래이고, 곡식도 동이
나 있었다. 작은올케가 몸을 풀 때 쓰려고 아껴놓은
쌀 몇 줌과 보리 몇 됫박이 고작이었다. 산으로
들어간 오빠네들이 밤에 와서 얼마쯤 있는 곡식들을
죄 쓸어간 모양이었다.
"느희 서방은 어쩌냐. 무슨 변 안 당했냐? 거기는
산중이라 더할텐데 어쩌냐? 아이고 더 험한 꼴 안
보고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은 채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제주댁은 남편 이야기를
사실대로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해오는 듯
말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딸의 손을
쥐어주기만 했다.
"어쩔거나, 여기까지 와가지고...... 들어가 있는
그 사람한테 들여줄 밥이라도 좀 지어주어야 할
터인데......"
작은올케가 쑤어다가 주는 미역죽을 앞에 놓고 앉은
딸을 향해 어머니는 안타까워했다. 그것을 빈속에
마시고 나자 큰올케가 말했다.
"얼른 가시오. 먹을 것도 없으려니와 아기씨는 너무
젊고 이뻐서 안 돼요. 그리고 얼굴을 그렇게 하고
다니면 안 돼요."
제주댁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이를 물었다.
어머니를 내려다보면서 어떻게 기운을 차려
일어나라는 말을 하려는데 울음부터 터져 나오려고
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머니가 큰올케에게 말했다.
"암만 그래도 거기 묻어놓은 고구마 몇 뿌리
삶아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야 풀잎사귀라도
뜯어먹을 수가 있지만은 들어가 갇힌 사람은 맹물인들
누가 푸지게 들여준다냐?"
제주댁은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싸들고 친정집을
나섰다. 아득한 중산간 마을의 한 오름에서 총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마을 어귀를 빠져 나가는데 중산간
마을 쪽에서 군복들 여남은 명이 오룡동 쪽으로 왔다.
그녀는 도망치듯이 시내를 향해 걸었다. 한데 시내
쪽에서 군복 대여섯이 오룡동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올케가 시키는
대로 얼굴에다가 숯검정과 흙먼지를 섞어 바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마조마했다. 남자들의
눈을 금방 나의 위장을 알아챌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저 사람들이 붙잡아 끌고 가면 어떻게 할까.
예상한 대로 군복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주댁을
세웠다. 넷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데 맨 나중의 키
작달막한 남자가 발을 멈추고 돌아선 것이었다.
"어디 가?"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청년단의
안독사를 생각했다.
"청년단에 갑니다."
"거긴 뭐하러 가? 남편이 잡혀갔나?"
몇 걸음 지나쳐가던 군복들이 모두 발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막히다는듯이
말했다.
"이년 얼굴에다가 숯검정 칠했는 것 좀 보게?"
"니년 잡아다가 혹시 어쩔 줄 알고 그 따위 짓거리
했어?"
"빨랑 말해봐. 청년단에는 뭘 하러 가는 거야?"
키 작달막한 남자가 목청을 높여 물었다.
"안독사라고 그 양반......"
그녀는 모기소리만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안독사?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앞장 선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야, 안독사, 그 쪼매한 것이 어느 새 부뚜막에
올라갔어?"
"그냥 보내주고 가자."
몸집이 큰 남자가 동료들을 재촉했다. 그녀를
붙잡은 키 작달막한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얼굴이나 좀 말끔하게 씻고 다녀."
하고 동료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안독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갔다. 안독사 그 자식이 음흉하여
똥구멍으로 호박씨를 깐다는 둥, 대장 밑을 딱딱 긁어
쉬운 일만 골라서 맡는다는 둥......
그 말들을 들으면서 제주댁은 희망을 가졌다.
안독사라는 사람은 요령이 꾀 많은 위인인
모양이었다. 그 사람한테 잘 하기만 하면 자기의
남편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댁은 시내 입구의 검문소에서도 청년단의
'안독사'를 입에 담았다.
"그 사람하고 어떤 사이요? 그 사람 아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려버리려다가 양옆으로
저었다. 오빠라고 했다. 검문 경찰은 더 따지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양민증 가지고 다니시오."
하고 그녀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디서든지 청년단의
안독사만 입에 담으면 되다고 생각했다. 사람 하나는
잘 만났다. 무엇인가가 돌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삶은 고구마 둘을 청년단 사무실에 넣어주고
지난 밤에 묵었던 밥집으로 갔다. 안독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기만 하면 남편이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하여 시간은 이리 더디 가는 것일까. 그녀는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밥집 부엌에서 물을
길어주기도 하고 나물거리를 다듬어주기도 했다.
안독사는 밤이 늦어서 돌아왔다. 제주댁은 밥집
문앞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독사는
밥집의 모퉁이방 하나를 빌려 쓰고 있었다. 그녀는
주인 여자에게 안독사 그 사람 돌아오면 자기가 문을
걸어 잠그겠다고 했다.
안독사는 발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밥집
문 앞으로 스며들었다. 제주댁이 인기척을 하면서
그의 앞으로 나섰다. 그가 깜짝 놀라 발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아, 당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그녀의 팔 하나를
끌었다.
"그렇잖아도 당신 남편 때문에 싸우다가 왔어."
제주댁은 가슴이 펄럭거렸다. 남편의 신변에 무슨
위급한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팔을 끄는 안독사의 몸내와
술냄새가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안독사와 자기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독사에게 몸이라도 바쳐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이 사람은 지금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독사는 그녀를 자기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등진 채 옷을 벗어젖히는 그를 슬퍼하는
눈길로 건너다보았다. 그는 벗은 옷을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녀는 그 옷을 바람벽의 못에다가
걸었다.
"아주마니 지금 자지? 나가서 당신이 물 좀 떠주지.
이야기는 천천히 하지 뭐...... 아이고 오늘 먼지를
어떻게나 뒤집어썼는지, 눈이 잘 떠지지를 않아."
제주댁은 그의 아내가 되기라도 한 것같이
순종했다. 자기의 남편을 위해 싸우다가 들어왔다는데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아끼랴. 양푼에다가 물을
퍼다가 바쳤다. 비누를 가져다가 주고, 수건을 들고
옆에 서 있었다. 안독사는 양치질을 하고 푸푸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씻었다. 그녀가 내민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따라
들어갔다. 그는 보이지 않은 끈으로 그녀의 목을
걸어놓았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체하면서 그 끈을
끄집어당기고 있었다.
"저녁 진지는......"
그녀는 깊이 잠긴 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이 밥집에 들어오자마자 숯검정 바른 얼굴을 말끔히
씻고 머리를 곱게 빗어두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양치질도 했다.
"빨갱이새끼들한테 밥해 주고 양식 주고 한 것이
무시무시하게 큰 죄라, 어떻게 내보내자는 말이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요. 그래도 당신의 정상을
생각해서 대장한테 사정 이야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부대장이 나보고 누구한테서 무얼 얻어 먹었냐고 티를
뜯고 나선단 말이요."
안독사는 한동안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자식하고 이때까지 입씨름을 했어요.
하아, 그 자식이 권총을 빼들어! 이 안독사가 그 같은
권총알을 무서워할 줄 알아? 그게 무서웠으면 삼팔선
넘어오지도 못하고 거기서 빨갱이새끼들한테
버러지같이 밟히면서 살고 있을 거란 말이야."
안독사는 자기가 삼팔선을 뚫고 월남을 한 내력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하는 안독사의 눈은
충혈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침방울이 튀겼다. 그의
숨결은 가빠져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주댁은 그에게서 날아오는 체취를 맡고 있었다. 덜
구어진 북어 냄새 같기도 하고 시금한 식초냄새
같기도 했다.
"이래봬도 내래 평안남도 강서에서 천석꾼을 하는
아무개의 막내아들이요. 평안남도 안에서 강서
아무개라면 간밤에 태어난 강아지들까지도 다 알
정도였디요."
안독사는 울분을 토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형 둘과 누님 하나는 일찍부터 일본 사람들이
세운 학교엘 다녔지만 그는 늦게까지 서당공부를
하다가 조선인들만 다니는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그것을 이학년 때 그만두어 버렸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형들 둘이가 남보다 앞장 서서 군대엘 간 뒤부터
그는 요리집 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지 몇 달
뒤에 해방이 되었다.
면장 자리를 넘보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일본이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아버지는 뻔질나게 면사무소 출입을 했고, 군수와
친교를 텄고, 공출에 앞장을 섰다. 징병과 징용을
독려하기 위해 유지들과 함께 이 마을 저 마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는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해방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일본인들이 봇짐을 미처 챙기지도 못한
채 두들겨ㅂ고 쫓겨날 때 아버지는 골방에 들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군대 간 두 형들은 돌아오지를
않고 있었다. 평양으로 시집을 간 누님은 발을
끊어버렸다.
그런 와중에서 토지개혁령이 떨어졌다.
제1조 북조선 토지개혁은 역사적 또는 경제적
필요성으로 하게 된다. 토지 개혁의 과업은 일본인
토지 소유와 조선인 토지 소유 소작제를 철폐하고
토지 이용권은 경작하는 자에게 있다......
제2조 몰수하여 농민 소유지로 넘겨주는 토지는
다음과 같다.
(가) 일본국가, 일본인 또는 일본인 단체의 소유
토지
(나) 조선민중의 반역자...... 조선민중의 이익에
손해를 주며 일본제국주의자의 정권기관에 적극
협력을 한 자의 소유 토지와...... 또는 일본의 압박
밑에서 조선이 해방될 때에 자기 지방에서 도주한
자들의 소유 토지.....
이 토지개혁령으로 말미암아 안독사네 가신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
집 밖으로 내몰렸다. 그러기 하루 전날 밤에 이웃
마을의 청년들이 몰려들어서, 가뜩이나 심화로 가슴을
치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팼다. 그때 안독사는
뒤란의 늙은 감나무 위에 올라가 떨고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가자고 밤길을 나섰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슴과 옆구리를 붙안은 채 끙끙
앓으면서 걸었다. 남포에 이르러서 아버지는 피를
토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어머니마저도
두들겨맞아 열병이 들었던지, 삼팔선을 미처 넘지를
못하고 위아래로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안독사는
외돌톨이가 된 채 남한 땅으로 들어섰다. 함께
서북지방에서 내쫓기어 온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로
들어오자, 함께 내려온 젊은 사람들이 청년단을
조직했다. 안독사는 앞장서서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무는 버릇이 생겼다. 시꺼멓게
몰려들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몽둥이로 두들겨패던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보이곤 했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질러대던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피를 쏟으며
죽어가던 모습은 자다가도 벌떡 몸을 일으키게 하곤
했다. 몸서리를 치게 하곤 했다. 그들을 그렇게 한
것은 조선공산당 사람들이었다. 이제 안독사가
돌아가신 그 두 분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공산당의 뿌리를 이 땅 안에서 뽑고 쓸어내버리는
것이었다. 한데 울분으로 이성을 잃은 그들을
제주땅으로 투입한 것은 누구일까. 어쨌든지 제주땅에
들어선 그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빨갱이들로만
보였다. 그는 그 섬으로 건너온 이래로 신명을
다했다.
"공산당 놈들을 쳐부시기로 작정하고 눈에 불을 켠
것은 부대장인 자기나 그 밑에 있는 나나 매 한가지
아니겠어?"
안독사는 제주댁을 향해 충혈된 두 눈을 빛내면서
목청을 높였다.
"어디 쏠 테면 쏘아보라고 하면서 대들었어요.
그리고 그럴 까닭이 있다면서 당신 남편을
돌려보내자고 우겼어요. 대장이 말리면서 내일 다시
의논을 하자고 그럽디다."
제주댁은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안독사라는 사람은 어떻게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내
남편의 목숨을 살리려고 할 수 있었을까. 그 은혜를
어떻게 무엇으로 갚을까. 안독사가 그녀의 옆으로
쓰러지듯이 누우면서 말했다.
"아이고 피곤해. 나 저기 이불 좀 가져다가 펴줘."
그녀는 윗목 구석에서 이불을 끌어다가 그의 옆에
놓았다.
제주댁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안독사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일어서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는 체했을 뿐이었다. 그가 당기는
대로 그녀는 쓰러져 누웠다. 그가 그래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을 자리에 들어가 있는 남편을
살려주는 그에게 이 판국에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그 일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걱정 마. 내가 기어이 빼내줄 테니께이......응."
그녀를 소유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몸을 맡긴 그녀는 얼굴을 모로 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튿날 안독사가 빼내준 남편과 함께 중산간
마을로 돌아가는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며 눈을 감고
있었다. 남편에게는 이 사람한테 이렇게 몸을 주고
당신을 빼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친정 어머니는 그것을 백번 천번 당부를
했었다.
"사람은 길을 가다가 땅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미친
개한테 물리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다. 허공에 쳐놓은
거미줄을 얼굴에 뒤집어쓰기도 하고, 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다. 여자는 뜻하지 않은 데서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단다. 호젓한 데서 밭일을 하다가
이웃집 남자가 모르는 새에 다가와서 손목을 잡는
수도 있고, 혼자서 산길을 가다가 낯선 사람한테
당하는 수도 있어. 예로부터 여자는 익은 음식이라고
했어. 그러니께 시도 때도 없이 이 남자 저 넘자가
입질을 하려고 든단 말이다. 그러니께 여자는 미리
그런 호젓한 자리에는 가지를 않아야 하고, 남자가
음심을 품지 않도록 단둘이만 있지를 않아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참말로 어쩔 수가 없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을 때는 못이긴
체하고 당해주어야 한다. 정조 그것이 뭣이라냐? 그것
지키려다가 죽는다. 우선 살아놓고 봐야 해. 그리고는
그 말을 죽는 날까지 남편한테 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누구한테도 해서는 안 된다. 몸은 주지 않고
손목만 한 번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웃 집 총각 그 놈 버릇 좀 단단히
고쳐주시오. 그 놈이 길에서 단둘이 만나기만 하면
이러고저러고 한단 말이오.' 만일에 이렇게 고자질을
했다가는 끝장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은 물론
자기만을 위해 절개를 지키려 하는 아내를
고마워하겄지. 또 그 총각놈한테 쫓아가 혼장을
내주겄지. 그런데 남편은 평생토록 그 아내를
의심한다. '다른 남자들이 너한테 음심을 품는 것은
모두 네가 행실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여.' 이렇게
들볶는단 말이다. 하물며 누구에게 불가항력으로 당한
일에 대해서는 어쩌겄냐? 좌우간에 어디서 뭔 일을
당했든지 여자는 입을 바늘로 친친 호라매워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도 그렇게 남편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식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예로부터 여자 안
끼고는 살인이 나지 않는 법이다."
이튿날 아침에 제주댁은 사무실로 나가는
안독사에게 물었다.
"언제쯤이나 사무실로 나갈까요?"
풀려날 남편을 언제쯤 마중 나갔으면 좋겠느냐는
말이었다. 안독사는 정색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여기 가만히 있으라우. 오늘은 절대로
사무실에 찾아오지 말아. 다른 동지들이 눈치채면
곤란해. 당신 남편 살려주자고 내가 우길 수가 없게
된단 말이야. 풀어주게 되면 내가 당신 남편보고
이리로 찾아가라고 가르쳐줄 테니께니. 그리고 밖에
나다니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
그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어흠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밥집을 나갔다. 그녀가 그와 함게 잔
것을 주인 아주머니가 눈치를 챈 듯했다. 그 소문이
나가지고, 마을 사람들이나 남편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할가. 주인 아주머니한테는 기회 보아
울면서 통사정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주인
아주머니보다 안독사 그 사람이 입을 열까 더 겁났다.
그를 쫓아 나갔다.
"그 사람한테는 간밤의 그 일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해주시오. 그 사람이 알면 저도 죽고 그
사람도 죽고 다 죽소."
안독사는 코를 찡긋하면서 그녀의 등을 툭 치고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들어앉아서 당신 남편 기다리고 있기나 해."
제주댁은 밥집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을 대할 수가
없었다. 안독사의 방에 들어앉아 있기만 했다. 간밤
안독사와 맨살을 섞었던 일들이 악몽처럼 그녀의
의식을 아프게 들쑤시곤 했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남편과의 잠자리와는 또 다른 열기에 휩싸여
몸을 떨면서 앓곤 했었다. 남편을 죽을 자리에
보내놓고 그 무슨 벼락을 맞을 짓이었단 말인가.
이렇게 더럽혀진 몸으로 어떻게 남편을 맞을 것인가.
목욕을 좀 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녀의 몸속을
휘저어 놓은 안독사의 흔적을 속속들이 씻어내고
싶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방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 사람 살려내자고 한 일이지, 남편 없이
보낸 며칠 밤을 못 참아 화냥년질을 한 것인가.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귀에다가 신경을 모았다.
누군가가 그녀가 들어 있는 방 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 그 사람이 오고 있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댓돌 앞에서 그녀는 멍청해졌다. 남편은
오지를 않고 안독사만 걸어오고 있었다. 이 남자의
뒤에 오고 있을까.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을
밥집 문밖에 세워두었을까. 그녀는 다가온 안독사를
비껴섰다. 밥집 대문 밖으로 나가보려고 마당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안독사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해쓱해져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녀를 방바닥에
앉히고 그도 마주 앉았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담배 한 개비를 태워 물었다.
제주댁의 가슴은 다듬이질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얼굴을 깊이 숙였다. 얼굴이 타는 것같이 화끈거렸다.
간밤에 남편한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렇게 일이
되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그녀는 조급했다. 안독사는 담배연기를
빨아마셨다가 내뿜곤 할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안독사가 얼른 그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으나마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은
자기 남편의 흉사에 관한 것일 터였다.
이윽고 안독사가 제주댁의 손 하나를 끌어다가
쥐었다. 나머지 하나를 다시 끌어다가 모아 쥐었다.
그것들을 두 손으로 주무르면서 말했다.
"나 그 자식들을 깡그리 쏴 죽여버릴 테야."
그는 울분 어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하고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해놓고 간밤에 거기
가둬놓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다가 죽였어. 당신
남편도 죽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통곡을 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한데 그녀의 가슴 속에는 울음이 들어
있지를 않았다. 그녀를 그가 끌어안았다. 그의
몸냄새가 그녀의 가슴 속을 휘저었다. 이제는 이
남자하고 살아햐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꿈만
같았다. 남편이 죽었다는 것도 꿈같고, 남편이
죽었다는 마당에 딴 남자의 가슴 속에 안겨 있다는
사실도 꿈 같았다.
"내가 그 자리 알아놨으니까 일꾼 하나 데리고 가서
수습해다가 묻어줘. 내가 사람 하나 얻어줄
테니께니...... 그 사람하고 만나서 살아온 일, 그저
하룻밤 꿈이었다고 여겨버려. 그리고 이리로 와. 지금
그 산 속에 있는 집에 가봐야, 개죽음만 당할 게야."
교외의 나지막한 오름 밑에 남편은 누워 있었다. 그
자리에다가 묻어주고 산간마을로 갔다. 가면서 그녀는
몇 차례 검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청년단의
안독사를 들먹거렸다. 어떤 관계냐고 물으면, 그
사람의 아내라고 했다. 정말이냐고 파고 들면
정말이라고 당당하게 대들 듯이 말했다.
산간 마을 어귀에 이르러서 그녀는 넋을 잃었다.
잘못 찾아오지 않았는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밭
가장자리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키 작은 산죽들과,
거대한 뱀의 몸통처럼 어지럽게 휘어돈 돌담들이 눈에
익었다. 한라산 꼭대기 쪽으로 뻗은 능선도 틀림없는
자기 마을의 그것이었다. 한데 마을의 집들이
온데간데 없었다. 모두 불에 타버렸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던 흙담들과 바람벽들만 거멓게 그을린 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도 말들도 개들도
돼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길로 돌아왔더니라. 친정에도 안 갔어. 가면 뭘
하겄냐? 와서 그 안독사라는 사람하고 살았어. 그
안독사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 판국에 나를 받아줄
사람이 따로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살아오면서
보니께 내 남편을 죽인 것이 다른 사람 아닌 이
사람이었단 말이다. 이 사람이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다.
이 사람은 그때넉넉히 그 사람을 빼내줄 수
있었는데도 하잘것없는 내 몸뚱이 하나가 욕심나서
그러지를 않은 것이여. 어쩌면 이 사람이 앞장서서
죽이자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고...... 지금 이 사람이
이 벌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죄 때문이다."
제주댁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들을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그 머리칼들 속에는 흰 머리칼들이 섞이어
있었다. 옆의 오십대의 환자가 몸을 뒤치었다. 그
환자의 보호자가 쓴 입맛을 다셨다. 아랑곳하지 않고
제주댁은 말을 이었다.
"용산동 무당이 그러더라. 느희 서방 그러고 있는
것이나, 느희 새끼들 그러는 것이나가 다 이 사람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그러더라. 생각을 하면은
지긋지긋하다."
순녀는 시아버지 한길언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평온하게 잠이 들어 있는 듯한 한길언의 얼굴과
시어머니 제주댁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갑자기
제주댁이 전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기의
남편을 죽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지닌 채 어떻게 이 한길언이라는 사람과 살을
마주대고 살아왔을까. 이 남자는 어떻게 그런 악독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창밖에는 어둠이 꺼풀을 벗고 있었다. 시가지의
가등들이 희미해져갔다. 시가지 저쪽의 하늘이
불그죽죽해졌다. 거기에 떠 있던 별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한길언 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
아들과 손자들에게도 뻗친다는 게 사실일까.
"이 사람은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제주댁은 독기 어린 소리로 말했다.
"깨어나서 총총한 정신으로 자기가 지은 죄갚이를
더 끈질기게 하고 나서 죽어야만 쓴다. 죄갚이를 다
못하고 이대로 죽으면 지옥에 가서 너무 험한 벌을
받게 된다."
제주댁은 울고 있었다. 통치마 자락으로 콧물을
훔쳤다.
"천벌을 받고 있는 이 사람들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니가 끼어들어서 이 무슨 고생이냐? 나는 너한테
죄만스러워서 죽겄다."
순녀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새벽의 묽은 어둠이
수런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로든지 시어머니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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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진흙으로 만든 소 물을 건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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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남은 전등사 부처님을 향해 절을 했다. 금빛
부처님은 반쯤 감은 눈으로 그니를 보고 있었다.
등뒤에 걸린 만다라 속의 여러 부처님들도 그니를
보고 있었다. 그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들떠
있었다. 스스로의 가슴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니의
속에는 이상스러운 에네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개 같은 사람이거나 사람 같은 개인 그가
그니의 몸속에 쏟아넣은 것이었다. 아니, 그가 그것을
쏟아넣었다기보다는 전부터 있었던 그 에네르기를
그가 꿈틀거리도록 들쑤셔놓은 것이었다.
몇 번째 절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따. 그녀는
헤아리지를 않고 그냥 절만 했다. 오백 배를 했을까.
천 배를 했을까. 부처님 앞에는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니가 절을 함에 따라 그 촛불을 조금씩 움직거렸다.
오랜만에 절을 해서 그런지 그녀는 다리가 팍팍했다.
온몸에 땀이 솟고 있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절을
할 참이었다.
처음에 절을 하기 시작을 할 때 그니는 '천수경'을
외기도 하고, '금강경'을 외기도 하고, '반야심경'을
외기도 하고 '화엄경'을 외기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 경을 아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머리
속에 떠올리기조차 염증이 나는 그 화두를 다시
입속에 담고 뒹굴렸다.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입적한 은사 스님이 내려준 화두였다. 달마의
얼굴에 시꺼먼 수염들이 거의 빤한 틈 없이 붙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데 왜 그렇게
미련스러운 질문을 한단 말인가. 묻는 사람도 자기가
미련스러운 질문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질문을
던졌을 리 없다. 그 질문 속에서 나는 무엇을
찾아내야 할까.
'어째서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수염이 없느냐고
물었습니까?'
만일 그 은사 스님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항의하듯이 묻고 싶었다.
'왜,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그렇게 수염이 시꺼멓게
나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싶었다. 아니, '왜 하필 수염을 들고
나왔습니까? 왜 달마 스님의 남근에 대하여 묻지
않으셨습니까? 사령 왜 달마 스님에게는 남근이
있느냐? 이렇게 묻지를 않으셨습니까?' 하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 화두를 내려준 그 은사 스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 스님의 존재는 그녀의 머리
속에 그 애매모호한 화두와 함께 살아 있을 뿐이었다.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수염은
무엇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없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왜 수염의 있음과 없음에만 얽매이는가. 왜
그 스님의 수염에만 얽매이는가. 그 스님의 발이면
어떻고, 부랄이면 어떻고, 입술이면 어떤가. 왜 하필
달마 스님인가. 사람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한
박달재의 수염이면 어떻고 나를 파김치가 되도록
깔아뭉갠 김창수의 남근이면 어떤가.
그러나 강수남은 은사 스님의 그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는 물음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일즉일체(一卽一切)였다. 여름철에 매미소리
하나만 듣고 있으면 그 소리 속에 우주의 질서, 그
우주의 실상이 담기어 있는 것이었다. 그 화두는 그
하나로 우주의 실상을 깨달으라는 것일 터이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가 않았다.
가스온수기를 통해 나온 물이 욕조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니는 전등사의 부처님을 찾아가기 전에 더운 물
목욕을 했었다. 목욕탕의 북쪽 바람벽에 내놓은
숨구멍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강수남은 그 창문을
들여다보는 하늘과 눈길을 맞추었다. 그 하늘이 웃고
있었다. 그니고 그 하늘을 향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그니는 중얼거렸다.
욕조의 더운 물 속에 몸을 담그면서 그니는
김창수를 생각했다. '개 같은 사람도 있고 사람 같은
개도 있습니다.' 하던 박달재의 말을 떠올렸다.
김창수는 발버둥치는 그니를 어깨에 둘러메고 그의
내외가 거처하는 별채로 달려갔었다. 방문을
벼락치듯이 열치고 그니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그는 그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상을 지으면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그니는 방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방심을 하면 밖으로 도망을
쳐나가려고 그와 닫혀진 출입문을 번갈아 살폈다.
김창수의 눈을 충혈되어 있었다. 코를 벌룸거렸다.
숨을 가쁘게 쉬었다. 그니는 방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아저씨, 이러시면 안 돼요. 나 그런 사람 아녀요.
내 몸 건드리면 죄 받아요."
그니는 그의 이성에 호소를 했다. 그는 그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두 손을 격렬하게 비비면서 몸을
비비꼬았다. 입 가장자리에는 흰거품이 물려 있었다.
"아, 아가씨, 저 좀 살려주시오. 이대로 놔두면은
저 죽어요. 저번에도 이래가지고 병원으로
실려갔었습니다. 지, 지금 꼭 그때같이 아랫배가
뒤틀어 오르는구만요. 고, 고모부가 그러는데 이때
참으면 죽는다고, 차, 참지 마라고 그러셨어요."
이렇게 말을 하는 김창수의 눈은 벌겋게 빛났다.
발정을 한 암캐를 보고 극도로 흥분된 수캐의 눈이
그렇게 빛날 터이었다. 그가 무릎걸음을 쳐서 그니
옆으로 다가왔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할까. 그니는
위기를 직감하고 필사적으로 출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그니의 팔 하나를 움켜잡았다. 몸의
균형을 잃고 방바닥으로 쓰러지면서 그니는 절망했다.
그는 그니의 옷을 벗기며
"저 좀 살려주십시오. 아, 안 그러면은 저 죽고
맙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니는 발버둥치고 몸부림을
쳤다. 그의 손목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덮쳐누르는 가슴을 걷어밀어 보았다. 반항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그는 무쇠처럼 몸이 튼튼했다.
야수같이 억세었다. 농원에 무리져 사는 도사견 수컷
같았다.
그와 살이 섞이었을 때 그니는 눈을 감고 속으로
소리쳤다.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다. 내 뜻으로
말미암았다고 해도 좋다. 이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밀가루 자루 속에 들어온 손가락의
꼼지락거림을 떠올리고, 허공으로 솟아른 장대가
하늘을 휘저어대는 것을 생각했다. 수천 수만의
새들이 허공을 날아다녀도 허공에는 결코 날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허공이기 때문이다. 나도 허공이다.
한데 이상스러운 감응이 그니의 몸속에서 일어났다.
그니는 그 감응으로 말미암아 진저리를 쳤다.
"성(性)을 왜 죄악시합니까?"
어느 날인가 박달재는 말했었다.
"저는 유마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 사람은 번뇌를
죄악시하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번뇌의 대표적인 것은
탐욕스러운 마음(貧), 성내는 마음(塡), 진리에
대하여 어리석은 마음(痴)인데, 밀교에서는 애초에
그것을 부정하지를 않습니다. 번뇌라는 것도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텅 빈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 번뇌가
어디 있고 번뇌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닌 욕망이라는 에네르기에 가득 찬
생명력을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사회에서 활동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원동력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욕심은 위대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 살아가는 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박달재의 조카사위 김창수에게 그 일을 당하고 난
강수남은 배낭을 짊어지고 훅 떠나가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었다. 그니와의 성합을 마치고 난
김창수가 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훌쩍거리며
말했다.
"사, 살려주어서 정말로 가, 감사합니다요. 이 으,
은혜는 지 목숨이 끄, 끊어져도 잊지 않고 기어이,
가, 갚을께요."
그의 눈물 어린 두 눈은 유순한 황소의 큰
눈알들처럼 뒤룩거리고 있었다. 그 눈에서 그니는
진주 같은 진실을 발견했다.
아니, 강수남이 배낭을 지고 구름같이 떠나가버리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김창수에게서 진주 같은 진실을
발견하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그 일을
당하고 나서야 박달재의 농원이 가지고 있는 뜻을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보다 더 분명한
것을 알고 싶었다.
박달재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장모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박달재는 강수남을 불로 앉히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장모 굉장한 부자였소.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집이 세 채나 되고, 포도밭도 사천
평이나 되고, 근처의 논밭이 몇 천 평 되고, 굴리는
돈도 몇 천만이나 되고...... 그런데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 있소? 우리 장모 돌아갈 때 겨우 당신이
마련한 포도밭 한 귀퉁이 땅 한 평밖에는 차지하지를
못하셨어요."
박달재는 또 그가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뒤로
표변해 있는 김창수의 행동거지에 대하여 말을 했다.
"저 자식은 거짓말을 못 하는 놈이오. 자기 속을
내가 환히 뚫어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
자식이 자기 속을 다 뚫어보도록 행동하고 말을
합니다. 내가 없을 때 저 자식이 뭔 짓거리를 했는지
보질 않았어도 훤히 짐작을 할 수 있어요. 강수남 씨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강수남은 얼굴이 화끈 뜨거워졌다.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와 김창수 사이에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을까.
"강수남 씨가 잘 알고 있으리라고 여깁니다만, 저는
성행위가 단순한 생리적인 작용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것과의 결합을 의미하는
종교적인 의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행위뿐만이 아니지요. 우리들이 숨을 쉬는 것, 밥을
먹고 오줌을 누고 똥을 누는 것, 말을 주고받고 울고
웃는 것들도 다 마찬가지로 대우주의 활동과 대응하여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살이나 뼈나 털이나
땀이나 콧물 같은 것도 바람이나 비나 눈이나 산이나
강 같은 것과 대비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생리적인
활동을 통하여 대우주의 활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하 하고 강수남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농원
입구의 풍년여신상을 그런 뜻으로 세웠구나, 박달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성스러운 행위를
자주 치르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암컷들은 이 우주의 근원적인 힘의 바탕입니다.
거기에 수컷의 불이라는 씨앗이 접합되고야 우주의
활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박달재는 한동안 혼자서 킥킥거리고 웃고 나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저보고 변태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저는
외아들입니다. 누님도 없고 누이동생도 없어요. 우리
어머니의 살아 생전 소망이 무엇이었는 줄 아십니까?
우리 부부가 아들딸 많이 낳는 것이었어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마구 욕을 퍼부어대셨어요. 삼신님의 거룩한 뜻을
거역한다는 것이지요. 그 당신이 눈을 감으시면서
한스러워 한 것이 제가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제삿날 밤이면 불을 끄고 우리
부부의 금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성합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포도덩굴의 잎사귀들 사이에서 바야흐로 자잘한
꽃망울들이 맺히기 시작하던 날 저녁 무렵에 박달재는
농원의 모든 사람들을 봉고차에 태우고 시내가
나갔다. 공중목욕탕 앞에 차를 세웠다. 농원의
식구들은 모두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나왔다. 그는
딸 영이와 문희수에게 만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잡혀주면서 시내 쪽을 턱으로 가리켜주었다.
"화끈하게 즐기다가 와. 그래야 풍년이 든다."
강수남에게는 만원짜리 지폐 두 장을 잡혀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 밤에는 우리 농원 안에 독수공방하는 사람
있으면 안 돼요. 여관방에서 자고 들어오시오."
박달재는 자기 아내 임 여사와 김창수 부부보고만
봉고차에 타라고 했다.
박달재는 농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어떠한 행위가
농원의 짐승들이나 과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집안에 말라져 죽어가는 나무가 있으면 안 돼요.
그 나무의 쇠한 기(氣)가 사람한테 미쳐서 집안에
병자가 생기게 돼요. 반대로 생명력이 왕성한
나무들을 심어놓으면 그 나무의 왕성한 기로 말미암아
집안 사람들이 싱싱하게 되는 겁니다."
강수남은 자기의 몸속에 알 수 없는 생기가
넘쳐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김창수와의
몸 교접이 있은 뒤부터의 일인 듯싶었다. 그니의
몸에서는 땀이 흘렀다. 촛불이 절을 하는 그의 몸
움직거림에 따라 조금씩 야울거렸다. 금빛 부처와 그
등뒤 쪽의 탱화 속의 여러 불보살들이 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달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저는 유마를 아주 좋아합니다. 저도 그 사람같이
앓고 싶을 때가 많아요. 이 세상에 못 먹고 못 입고
병들어 있는 중생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보살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랬어요. 중생들이 번뇌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텅 빈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 번뇌가
어디 있고 번뇌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닌 욕망이라는 에네르기에 가득 찬
생명력을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사회에서 활동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원동력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욕심은 위대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 살아가는 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강수남은 혀끝을 깨물었다. 진실로 큰 욕심은
깨끗한 것이다. 나는 진실로 큰 욕심 때문에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가. 나는 남을 위해 살아가는 자리에 서
있는가. 그녀의 머리 속에 순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뛰었다. 순녀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그 여자가 더러움 속에서
몸을 뒹굴리는 것은 그 큰 욕심을 위한 것이므로
성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그 여자는 자기
속에 타는 애욕의 불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몸
전체를 불에 태워버린 좋은 본보기이다. 순녀 그
여자를 미화하는 데 합세하지 마라. 그니는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숨이 가빠졌다. 혀를 깨물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절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니의 의식 속에는 자기의 몸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의 덩어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박달재라는 사람이
제아무리 성행위가 성스럽고 위대한 것이라고 역설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니는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던지, 그것은 죄다. 그 죄에 대한
벌을 스스로 받고 예전의 청정한 자기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김창수와의 몸 관계를 가진 뒤로 자기의
몸속에서 이상스러운 에네르기가 꿈틀거리는 듯싶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대웅전 옆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강수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을 하기만 했다. 들어온
그 사람도 그니 옆에서 절을 했다. 그 사람에게서
샴푸냄새가 날아왔다. 그 사람이 절을 할 때마다
치마폭 속에 담겨 있던 바람이 날아왔다. 그 사람의
몸내가 콧속을 아릿하게 했다. 목욕탕에서 금장 나온
사람한테서 나는 물비린내 같기도 하고 세수비누냄새
같기도 했다. 밤꽃향기 같기도 했다. 분꽃향기 같기도
하고 자귀꽃향기 같기도 했다. 어머니한테서 맡아지곤
하던 그 냄새가 생각났다. 아, 어머니, 하고 강수남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관세음보살 같은
얼굴로 은은히 웃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봉선화의 진홍빛 나는 꽃잎을
붙여 묶어주었다. 실로 친친 감아주는 어머니의
몸에서 날아오는 냄새를 그녀는 조심스레 맡았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리 집 문은 언제든지 열어놓고
있으마. 제발 돌아오너라.' 아버지의 말이 들려오는
듯싶었다. 동새들은 얼마나 자랐을까. 대학을 다
졸업하고 결혼들을 했으리라. 아들딸들을 낳기도
했으리라. 나는 독한 사람이다. 십 년이 훨씬 넘도록
편지 한 통도 보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강수남은 혀를 물었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나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른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가장 위대한
이에게 복종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얻어라. 그러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려라. 뱀이 허물을 벗듯이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려라. 무화과 나무에 꽃이
없듯이 이 세상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을 생존에 얽어매는 것은 애착이다. 그
애착의 허물을 벗어라. 내가 참으로 애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데 나는 왜 이렇게 답답한 것일까.
나는 무엇에 얽매여 있는 것일까. 내가 박달재에게서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팔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절을 하는
강수남이 비틀거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모로
쓰러졌다. 옆에서 절을 하던 사람이 그니를 부축했다.
그니는 오체투지를 하듯 엎드렸다.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옆사람이 말없이 그니의 사지를
주물렀다. 그 여자가 그니를 부축해 일으켰다.
밖으로 나온 두 여자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아니, 이거 누구셔요? 어머 진성 스님!"
부축을 하고 나온 여자가 강수남을 향해 소리쳤다.
그 여자는 이순녀였다. 이 여자를 하필 여기에서
만나다니, 이것은 무슨 기이한 인연인가. 강수남은
슬프게 웃었다. 이순녀가 그니의 두 손을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스님, 어쩐 일이셔요? 언제 환속을 하셨어요?"
하고 물었다. 그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대웅전 앞마당을 건너 갔다. 이순녀가
종종걸음을 쳐서 그니의 뒤를 따랐다.
바람이 계곡의 숲속에서 불어왔다. 햇살이
따가왔다. 강수남과 이순녀는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뒤따르던 순녀가 그니에게
"스님, 우리 여기 그늘에 앉아 잠시 쉬어
가십시다."
하고 말했다. 길 위쪽의 등성이에는 무덤 여남은
봉이 있었다. 무덤들 앞에는 까만 비석들이 햇살을
되쏘았다. 벌 가장자리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울창했다. 강수남이 앞장 서서 그늘 속으로 들어섰고
이순녀가 그 뒤를 따랐다.
"언제 환속하셨습니까?"
이순녀가 물었다. 잔디밭에서 그들은 마주 앉았다.
강수남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자기의 그 웃음
속에 오만이 들어 있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환속을 한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아하, 호호호......"
순녀가 고개를 뒤로 발딱 젖히고 웃었다. 웃음
때문에 순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눈은 실처럼
가늘어졌다. 보조개 두 개가 깊이 패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왔다. 볼이 들어갔다.
살결이 거칠어져 있었다. 눈꼬리에 잔주름이 두어 개
잡혀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질질 끌면서 어리광이
섞인 소리로
"에이, 스님도...... 저같이 자기 미망을 덕지덕지
덮고 있는 사람한테는 손에 잡혀주듯이 쉽게 이야기를
해주셔야지요. 그렇게 선문답을 하듯이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했다. 강수남은 오래 전부터 긴장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산에는 요즘 산삼이 없어요."
그녀는 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뱉었다. 이순녀는 오뉴월
귀뚜라미같이 그니의 말을 알아들었다. 순녀는 그니의
머리가 가발임을 알아보았다.
"진짜 산삼이 산삼을 찾으러 돌아다니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나서 이순녀는 그니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잡았다. 무릎을 꿇었다. 하연 이들을 가지런히
내놓고 웃으면서 말했따.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얼마 전에 또 결혼했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두
살아 계시는 그런 남자한테요. 그 사람하고 살면서
식당을 하나 냈는데 무지무지하게 잘 돼요. 하루
매상이 얼만 줄 알아요? 놀라지 마셔요. 흐흐흐, 평균
삼십만 원이오. 천 원짜리 밥 삼백 상 정도가 팔리는
거예요. 저 무지무지한 부자예요. 그렇지 않아도 진성
스님한테 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어요.
가십시다. 제 남편, 시어머니, 시아버지, 우리 애들
소개해줄께요. 시주도 하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친구들도 소개해드리고 그럴께요. 흐흐흐......"
바람이 달려왔다. 억새풀, 개망초, 띠풀,
명아주풀들이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순녀는
호들갑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흐흐흐, 저한테는 재미있는 친구들이 무지하게
많아요. 포도밭을 하면서 식용 도사견을 키우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하여튼 사람을 늙지 않게
하는 사람이여요. 우리 오빠도 그리 보내서 얼마 동안
머물게 해드렸어요. 스님도 그 사람을 한번
만나보셔요. 분명히 무언가 얻어지는 것이 있으실
거예요."
"저 지금 거기서 살아요. 벌써 몇 달째 살고
있어요."
순녀가 강수남을 향해 눈을 치켜뜨면서
"어머 그래요? 그런데 그 아저씨가 어째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했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응, 그 사이에 내가 식당을 자주 비워서 그
아저씨 만나지를 못했구나."
순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수남이 등성이 위쪽의 무덤들과 주변의 울창한
송림을 둘러보았다. 송림의 그늘 저쪽에서 찬란한
햇살이 날아왔다. 어디선가 뻐국새가 울었다. 순녀의
머리는 길었다. 어깨와 목과 젖가슴께를 덮었다.
"대접 잘해주던가요? 아이구, 제가 주선을 했으면
잘해주셨을텐데, ......그 아저씨는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하는 사람인데....... 예절이고 뭣이고 없는
사람인데...... 거기서 지내시는 동안에 많이
불편하고 불쾌하시지 않았어요?"
"박달재 그분이 순녀 씨를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시던데요?"
강수남은 차갑게 말했다. 내 말씨 속에는
오만스러움이 담겨 있다, 하고 그니는 생각했다. 왜
내가 이 여자 앞에서 오만스러워져야만 하는가. 왜
나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순녀는
어이없어하면서 수줍게 웃었다.
"어머, 그으래요? 나는 그분한테 짐승 먹을
음식찌꺼기를 거저 주고, 가끔식 소주를 한 잔씩
대접한 일밖에는 없는데?"
"그분 아마 나를 순녀 씨한테 보낼 모양이던데요?
제가 세상을 가장 참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보러
다닌다고 했거든요."
순녀는 강수남을 향해 눈을 치켜뜨면서 놀라워했다.
그리고 알 수 없어 했다.
"아니, 설사 진성 스님이 스님 신분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저씨가 뜻 높으신 스님임을
못 알아볼 사람이 아닌데 왜 이때껏 그렇게 모른
체하고 있었을까? 그 양반 정말 관세음보살님한테
종아리 맞으실 일을 저질렀구만 그래."
강수남은 수미산처럼 꿋꿋하고 의젓하게 윗몸을
펴늘이며 말했다.
"나는 대접 받기 위해 이 길을 나선 것이 아니요.
나한테는 상처가 있어요. 그것을 치유하러 다니는
겁니다. 나는 아직도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것은 내
은사 스님이 목에 걸어준 멍에입니다. 의식 속에 박힌
흉터여요. 그 멍에와 흉터를 없애고, 제 의식 속에
살아 있는 은사 스님을 죽이러 다니는 겁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나 이순녀 씨네 식당으로 일을 하러
갈 겁니다. 저를 파출부로 기꺼이 써주십시오."
"무슨 농담의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순녀는 강수남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호들갑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이고, 오늘이 무슨 날일까. 어쩐지 새벽녘부터
이 도량으로 오고 싶어 그냥 미치겠데요. 절을 하고
싶어 미치겠어요. 저는 절을 하면 용기가 나요.
세상이 답답하고 짜증나고 그냥 콱 미쳐버리고 싶고
그러다가도 절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져요. 저는 가끔 교회에 가서도 절을 하곤
해요."
순녀의 금방울 은방울을 흔들어대는 듯한 목소리는
투명한 대기 속으로 날아갔다.
우주 안에는 무수한 생명소(生命素)가 두루 퍼져
있다고 순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뭇잎을 흔들고
달려온 바람에도 그것이 들어 있고, 아기의
울음소리나 자동차의 경적소리나 지나가는 소녀들의
웃음소리에도 들어 있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햇살에도 그것이 들어 있고, 출렁거리면서 소리치는
바닷물결이 되쏘는 빛살에도 들어 있었다. 만나면
그녀의 얼굴과 손과 젖가슴을 쓸고 만지는 그녀의
아들딸들의 숨결과 살결에도 들어 있었다.
조기님한테서 날아오는 상큼한 화장품냄새에도 들어
있었다. 식당에 들어와서 웃고 떠드는 손님들의
옷자락에도 들어 있었다. 꽃잎 속, 나무 그늘, 집
그늘, 수채구멍, 화장실의 변기 속에도 들어 있었다.
여느 때 순녀는 그것을 허기진 듯 호흡하면서
살아오곤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 사이엔지 그것을
빨아들여 활력으로 쓰는 기능이 사라져버리고 없곤
했다. 그때는 그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생명소가 이
우주 안에 흩어져 있는가 하는 것마저
의심스러워져지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그녀의 몸이
바람 빠져버린 풍선같이 쭈그러들어버린 것 같곤
했다.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근처의 아무 교회나
도량으로 달려가 절을 하는 것이었다. 온몸이 땀에
후줄근히 젖도록 절을 하고 나면 무기력이 없어졌다.
우주 안에 흩어져 있는 생명소들을 빨아들이는 기능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오늘 이렇게 진성 스님을 만나려고 그랬던가
보네요."
순녀는 계속해서 호들갑스럽게 말을 했다. 그녀의
가슴은 달아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콧구멍은 커져 있었다.
"스님 잘 만났네요. 그렇잖아도 혼자 궁금한 것이
있어 누구한테 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해왔는데...... 가십시다. 저희 식당으로...... 아참,
얼마 전에 정선 스님도 한 번 다녀가셨어요.
상좌들하고 함께. 이 전등사에서 큰 법회가 있었던가
봐요. 그때 저희 식당에 오셔서 공양을 하고
가셨어요. 제가 거기서 그렇게 식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던지...... 아이고 얼마나
반가울 거예요! 그 스님을 얼싸안고 통곡을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어요. 입적하신 은선 스님을 뵙는 것
같데요."
순녀는 목이 메었다. 눈에도 뜨거운 물이 괴었다.
그녀는 눈물을 말리기 위해 눈을 재빨리 끔벅거리며
말을 이으려다가 고개를 쳐들고 한바탕 소리쳐
웃기부터 했다. 그 웃음소리가 수백 수천의 방울들이
되어 풀밭으로 뒹굴어갔다. 새들이 되어 허공으로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그 새들은 나뭇가지에 앉기도
하고,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x덕도 없고 x복도 없는 년이 무슨 미련이 남아
있어서 시장바닥에서 쉬파리 같이 잉잉거리고
있느냐고 그럽디다. 모처럼 참말로 유쾌하게 한 번
웃었어요. 그 스님이 그러시데요. 아무 때든지
들어오기만 하면 머리를 깎아주겠다고 말예요.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몸이 되기나
하는가요?"
강수남은 빈 손으로 염주알 굴리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음습한 송림 숲속의 자주빛
그늘로 가 있었다. 진흙소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가 어떻게 물속을 헤엄쳐 건널
수 있는가. 어떻게 물어 불어 허물어지지 않고 형체를
유지할 수 있기나 할까.
그니는 그것을 물론 이론적으로 따지고 가릴 수
있었다. 그것은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는 물음이나 같은 것이었다.
"진성 스님, 저는 마을에서 이 사람 저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아가면서 문득 진성 스님을 생각하곤
했어요. 제 머리 속에 떠오르곤 하는 스님의 모습은
항상 깨끗해요. 백합같이 희고 눈같이 깨끗해요.
죄송합니다만 머리 속에서 스님을 벌거벗겨보기도
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가 빚어놓은
작품같이 늘씬하고 아름답고 싱싱하고, 향내가
물씬물씬 나고, 성스러운 빛살도 번져오고......"
순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수남에게서
답답함을 느꼈다. 그니가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를 향하고 있는 그니의 굳어진
얼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진흙소에 대하여 저는 늘 생각을 하곤 해요."
순녀의 그 말이 강수남의 뒤통수를 때렸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순녀가 그니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녀가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강수남은 그녀의
얼굴에 깊이 팬 보조개와 거슴츠레해진 두 눈을
보았다. 이 여자에게는 타고 난 화냥기가 있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순녀는 어리광을 피우듯이 몸을
꼬면서 말했다.
"은선 스님이 저에게 주신 화두가 이것이었어요.
'산에 남아 있는 너의 혼령과 속세를 떠도는 너의
등신 가운데서 네 진짜는 어느 것이냐.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하고 나하고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진성 스님, 아는 체한다고 꾸짖지 마셔요."
솔숲 사이로 하늘이 조각 나 있었다. 그 하늘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녀도 그 하늘에서
입적한 은선 스님의 형형하던 눈을 보고 있었다.
"저는 그 화두를 저에게 내리신 은선 스님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진흙으로 만든 소가
강물을 헤엄쳐 건너가거든요. 흐흐흐......"
순녀는 얼굴을 상기시키면서 말을 이었다.
진흙으로 만든 소는 물속에 들어가면 금방
허물어집니다. 한두 바가지의 진흙탕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떠한 물속에 뛰어들어도
부스러지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는 진흙소가 되었어요.
그 비결을 알았어요. 진흙소는 자기가 물속에
뛰어들어갔을 때 허물어지는 것을 무서워하면 영원히
강물을 건널 수가 없어요. 연(蓮)뿌리가 시궁창물을
더러워하면 꽃을 피워낼 수가 없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의 용맹정진이라야 강물을 건널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화냥기로 말미암은 잦은 남자
바꾸기의 삶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자신만만하군요.' 하고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죄송합니다만, 스님. 가발을 왜 쓰셨어요? 차라리
아주 머리를 길러버리시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필요 이상으로 깨끗함을 고집합니다.
그 깨끗함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를 묶는
그 깨끗함에 대한 미신은 우리를 인색하게 하고
너그럽지 못하게 하고 과감하게 뛰어들지를 못하게
합니다. 계율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계율은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 우리는 그 계율에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맙니다."
마군이 따로 없다. 이 여자가 바로 그것이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이 여자의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에는 승려도 필요 없고, 도량도 소용 없고,
종교적인 의식절차라는 것들도 다 불필요한 것이 될
터이다. 수행도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 결국 어떻다는 것입니까?"
깊고 그윽한 목소리로 강수남은 물었다. 그 속에는
빈정거림이 들어 있었다. 순녀는 어색스럽게 웃으면서
강수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스님."
이렇게 말을 하는 순녀의 얼굴에는 정말로
죄송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논의를 통해 강수남을
자기의 생각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무슨 함정에 빠져 있을까,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든지 자기의 논리에는
설득당하고 만다는 자만에 빠져 있다.
선근마(善根魔)한테 붙잡혀 있다. 이런 사람들은
독선적이기 마련이다.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맹신한
나머지 자기와 다른 이념을 가진 상대를 무시하고
억누르기 마련이다.
자기 혼자만의 왜곡된 생각으로 성인들의 말을
편벽되게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사람들을
시궁창으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칙칙한 자기 미망(迷妄) 속에서 한 치 앞을 제대로
뚫어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나름의 그릇 한 개씩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이 만들어준 것일
수도 있고, 자기가 만든 것일 수도 있어요. 저,
이순녀라는 사람은 화냥년같이 이 남자 저 남자를
따라 삽니다. 그 남자들은 한결같이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이순녀라는 여자는 그
남자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빛 속으로
끌어올려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서투른 보살행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란
말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제가 만든 그러한 '섣부른
보살 그릇'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진성 스님은 어떻습니까? 지킬 계율 다 지키시고, 할
공부 다 하시고, 선방에 들어앉아 참선을 해볼 만큼
다 해보시고, 이제는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어떤
선기(善氣), 말하자면 참삶의 기운 같은 것을
끌어모아 몸에 집적시키려고 다니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하자면, '가장 오롯한 모양의 수행자
그릇'을 스스로 만들어 뒤집어쓰고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순녀는 말을 끊고 또다시 강수남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강수남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너그럽게 웃으면서
"어서 계속하셔요."
하고 말했다. 계곡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이 순녀의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강수남의
머리칼도 흩어졌다. 순녀는 호들갑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스님, 놀라지 마십시오. 꾸짖지 마십시오. 저는
얼마 전에 한 교회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상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절을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가까운 데에 절은 없고, 십자가가
보이길래 그리로 들어가서 절을 했어요. 절을 하는
대상이 부처님이면 어떻고, 예수님이면 어떻습니까?"
강수남은 순녀의 얼굴을 뚫을 듯이 건너다보았다.
순녀의 눈을 충혈되어 있었다. 그 눈이 그늘 저쪽에서
날아온 빛살을 되쏘았다.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그릇, 자기를 속박하는
이데올로기를 깨부술 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이
만들어준 가면 때문에 평생 그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답게 행세를 해야 하고, 너는 저런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사람답게 행세를 해야 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므로 저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너는 저런 사람이므로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건 안 됩니다."
순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강수남은 그늘 앉은
숲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녀는 당당했다. 순녀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절을 하는 대상이 똥치는 막대기이면
어떻고, 부처님이면 어떻고, 예수님이면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여야만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가 강물을
건널 수 있습니까?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습니까?"
강수남은 팽팽하게 켕기어 있는 끈을 생각했다.
순녀와 그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켕기어
있었다. 누가 이 끈을 이어놓았을까. 입적한 은선
스님을 생각했다. 은선과 순녀와 그니 사이에는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어차피 순녀와 한 번은 맞부딪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순철도 순녀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고,
박달재도 그러라고 권한 바 있었다. 이렇게 숲그늘
속에서 마주 앉아 말 몇 마디 해보는 것으로 순녀의
변모를 다 알아버렸다고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님, 꾸짖지 마십시오. 저는 감히
무도량주의(無道場主義)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아니,
개도량주의(皆道場主義)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수도하는 도량이 따로 필요 없다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곳은 다 도량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스님과 마주
앉아 있는 이 자리가 훌륭한 도량인 것이고, 제가
내고 있는 식당 안이 더없이 좋은 도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나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소부재(無所不在) 어디든지 있는 것
아닙니까? 빛덩어리(부처님)도 그렇습니다. 바람에
팔랑거리는 스님의 그 가발의 한 오라기, 불어오는
바람결, 일어나는 물결, 흐르는 구름, 기어가는 짐승,
나는 새, 꿈틀대는 벌레들이 다 저 찬란한 빛덩어리의
뜻입니다."
순녀는 또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강수남 앞에 머리를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진성 스님과 떨어져서 살아온 이래로 어떻게
제가 달라졌는가 하는 것을, 마치 가슴 속에 품어
간직했던 보배를 소중한 사람에게 내보이듯이 꺼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진성 스님을 입적하신
은선 스님의 분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순녀의 말은 더욱 당당해졌다. 소신에 차서 살아온
만큼 그녀의 말에는 알알이 금강석이 박혀 있는
듯싶었다. 그녀는 거인같이 덩지가 큰데, 강수남은
자기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풀줄기같이 왜소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그니는
꾸짖었다. '소 치는 다니야'와 그의 스승이
주고받았다는 말들을 떠올렸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놓았습니다. 마히이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은 지붕이 덮히었고
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얼마든지 뿌리소서.'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迷惑)도 벗어버렸다. 마히이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몸뚱이)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얼마든지 뿌리소서.' 순녀는 '소
치는 다니야'인 것이고 그니 자신은 그의 스승인
셈이라고 그니는 생각했다.
강수남은 또 생각했다. 순녀는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나는 구름의 흐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순녀는 불을 켰고, 나는 껐다. 순녀에게는
가족이 잇고, 각질같이 두꺼운 움막이 있지만, 나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모든 것을 벗어버렸다. 순녀는
개이거나 사람이지만, 나는 사람이거나 구름이다.
"제가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을 때 저는 병원 안을
도량으로 여기고 살았어요. 제가 가는 데마다
빛덩어리들은 꽉 차 있었어요. 제가 마시는 공기나
들이켜는 물이나 덮고 자는 담요에도 그 빛덩어리들은
들어와 있었어요. 요즘 들어서는 우리 식당에
들어오는 모든 손님들이 모두 빛덩어리들로 여겨져요.
저는 그 빛덩어리들한테 손목도 잡혀주고 입술도
내주고 그래요. 보듬으면 보듬는 대로 안겨주고, 가끔
은밀하게 여관행을 하기도 해요. 제가 받드는 남편,
시아버지 시어머니, 맹학교에 넣어 키우고 있는 아들
하나 딸 하나도 모두 빛덩어리들로 생각이 돼요. 저는
그 찬란한 빛덩어리들한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늘
편안해요. 외롭지도 않아요. 보람으로 늘 가슴이
부풀어 있어요."
강수남은 순녀의 손가락이 하늘하늘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햇따. 충혈된 눈에 물이 괴어 있는 것도 보았다.
이 여자는 자기의 편벽된 생각을 광신하고 있다, 하고
강수남은 생각했다. 그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아주 많으시겠네요."
측은해하는 눈빛으로 순녀를 건너다보면서 강수남은
말했다. 입과 눈을 크게 열고 웃으면서 순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저를 둘러싸고 있는 그 빛덩어리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큰 행복이에요."
순녀는 현종 선생에 대하여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현종 선생은 일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사이에 그녀는 면회를 네
차례나 갔었다. 선고공판일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
현종 선생도 그녀를 지켜주고 붙들어매주는 큰
빛덩어리였다. 그가 풀려난다는 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식당으로 가셔요. 끼니 때마다 손님들이
바글바글 끓어요. 와서 본 사람들이 그래요. 한 삼
년쯤 구황이 든 것 같다고. 어찌 된 일인지 저도 잘
알 수가 없어요. 어째서 우리 식당에만 그렇게
사람들이 들끓는지......"
순녀는 강수남의 손 하나를 잡아 흔들어대면서
호들갑스럽게 말을 이었다.
"진성 스님께서 와서 보시면 생각나시는 것이 많을
거예요. 손님들 가운데는 의사도 있고, 회사
사장님들도 있고, 소설가들도 있고, 소리꾼들도 있고,
운전사들도 있고, 공원들도 있어요. 박달재 같은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의 조카사위 같은 사람도 있고,
목사님도 있고, 수녀님도 있어요. 시청 간부들도
있고, 청소원들도 잇어요. 그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제 손목을 잡아보고 싶어해요. 끌어안아보고
싶어하기도 하지요. 흐크크크...... 저한테는
화냥기가 있는가 봐요. 흐크크크크......"
순녀는 목인형같이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가 햇살 쏟아지는 풀밭으로 날아갔다.
순녀는 웃음을 질질 끌면서 말을 이었다.
"다들 저를 한 번씩은 안아보았어요. 사람들은 제
눈이 예쁘면서도 무섭답니다. 제 눈과 마주치면
음심이 솟는답니다. 한데 한 번 안아보고 나면
솟아올랐던 음심이 어느 사이엔지 사그라지고
없답니다. 흐크크크크......"
'빛덩어리!' 하고 강수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 세상은 빛덩어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순녀를 둘러싸고 있는 빛덩어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 그녀가 화냥년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니가 냉엄하게 말했다.
"나 얼마 동안 이 보살님네 식당에서 설거지 같은
것을 좀 해주면서 살면 안 될까요?"
순녀가 고개를 뒤로 발딱 젖히고 웃었다. 웃음을
질질 끌면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스님게서 우리 식당에
한 번 들어오시는 것만으로도 우리 식당은 번쩍번쩍
빛이 날 거예요. 모르기는 몰라도 스님께서 한 번
다녀가시기만 하면 다음부터는 손님들이 정말 발디딜
틈도 없이 들끓을 겁니다."
"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내리깔면서 강수남이 말했다. 정색을 하고
강수남을 건너다보면서 순녀가 맞받았다.
"저도 괜히 지나가는 소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한 끼 얻어먹으러 간다는 것이 아니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종업원 노릇을 하면서 월급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흐크크크...... 그 말씀은 정말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싶네요."
강수남은 눈을 감았다. 순녀의 거부는 모욕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니의 얼굴 살갗에서 솜털들이
흔들렸다. 소나무 가지들이 숨소리를 냈다.
순녀는 눈을 감고 있는 강수남의 얼굴을 보면서
'쌀에 섞인 뉘'를 생각했다. 강수남이 식당에 들어와
일을 하면 식당 안의 질서가 흐트러질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녀가 낸 처용식당은 물같이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은 모두
들꽃같이 털털하면서도 소박하고, 부잣집
큰며느리같이 손들이 크고 오지랍이 드넓은
사람들이었다. 그 아주머니들은 모두가 주인이었다.
음식들을 자기 남편이나 아들딸들한테 먹일 것처럼
만들곤 했다. 아니, 임금에게 먹일 음식을 만드는
궁정의 요리사들같이 조심을 하는 것이었다.
고추가루는 반드시 가장 크고 색깔 고운 고추를
사다가 빻아서 만들었다. 양파나 대파나 시금치나
아욱이나 달래나 쑥은 한사코 싱싱한 것을 가져다가
썼다.
하루에 쓸 나물을 아침 나절에 모두 무쳐놓고 쓰는
것이 아니고, 들어오는 손님의 수를 보고서야 한
사람분씩 무쳐서 내곤 했다. 된장국도 미리
끓여놓았다가 그때그때 데워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오거나 세 사람이 오고나 큰 냄배이 한꺼번에 끓이지
않았다. 반드시 일인분씩 끓여내곤 했다. 참기름도
절대로 장사한테서 사서 쓰지 않았다. 그것을 담당한
안동댁이 직접 기름집으로 가서 짜오곤 했다. 쌀도
최상급의 것을 썼다. 음료수도 수돗물을 쓰지 않았다.
공인된 회사의 생수를 썼다.
그녀의 식당으로 손님들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아무리 천재라도 기역
니은부터 배워야 하고 하나 둘 셋부터 배워야
하는데요. 잘못하면 종아리도 맞아야 하고......
스님께서 그러실 수 있겠어요?"
순녀는 속으로 이미 강수남을 받아들일 생각을 한
터이었다. 만일 강수남이 식당일을 하겠다고
덤벼들기만 하면 그니에게 호되게 일을 부리겠다는
계획까지도 미리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니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니의 결벽증을 깨부셔주고 싶었다. 세상을 망치는
것은 결벽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결벽증은 사람을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게 하고 도도하게 하고 자만하게
만들었다. 계급을 만들고 파벌을 만들고 이데올로기의
골을 깊에 만들었다. 사람을 이기적이게 하고
소승적이게 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받아주신다면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강수남은 순녀의 식당으로 들어가서 순녀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순녀는 고급 창녀일 수도 있었다.
웃음과 영혼을 파는 창녀.
"흐크크크...... 정말이시라면, 저는 주지가 되는
것이고, 진성 스님은 새로 들어온 행자가 되는
셈이겠네요? 이것은 참말로 이상스러운 만다라네요?"
만다라라는 말이 그니의 귀에 걸렸다. 그게 어떻게
만다라더란 말인가. 그러나 그니는 그걸 따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갈까요? 저는 지금 당장 가고 싶은데요?"
"거기는 언제든지 상관없어요."
순녀는 헤프게 웃으면서 고개를 계속 끄덕거렸다.
"풍년농원에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그리로 갈께요."
강수남은 마치 상대에게 도전을 하기라도 하는 투로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순녀가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햇살 속으로 나왔다. 들에서 경운기소리가 들려왔다.
농부가 논을 갈고 있었다. 햇살이 그 농부가 디디고
있는 논의 물에서 번쩍거렸다. 그들은 그 농부의 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무슨 땅을 갈아엎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순녀는
강수남의 묵정밭 같은 영혼을 갈아엎어 비옥한 땅으로
만들 궁리를 하고 있었다.
"먼저 저하고 약속할 것이 몇 가지 있겠는데요."
들길을 건너가면서 순녀가 말했다. 흰구름 한 장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수남은 그 구름에 눈을 묻고
있었다.
"종업원들한테는 저하고 잘 아는 스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물론 그 가발도 쓰면 안
됩니다. 제 식당에는 가짜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가짜, 그래 나는 가짜란 말인가.'
강수남은 얼굴이 화끈 달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수남이 순녀와 헤어져서 풍년농원으로 왔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호수의 둑머리에
임승단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수의 수면에는 잔물결이 일어나 있었다.
수면은 여느 때와 달리 진한 녹색이었다. 오리떼는
둑의 수북한 풀밭에서 털에 기름칠들을 하고 있었다.
강수남이 가까이 다다갈 때까지 임승단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니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발을
멈추었다. 임승단은 눈길을 수면에 박아둔 채
손으로는 풀잎을 뜯고 있었다. 한 줌을 수면 위에
던지고 또 뜯었다. 던진 풀잎들이 수면 위에 푸른
나비같이 앉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하고 물으려다가 강수남은 입을 다물고 그쪽에서
알은 체를 하고 나서기를 기다렸다. 농원 쪽에서
진돗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개는 웃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양미간이 번번해지고, 코가 크게
벌어지고, 두 귀가 목 쪽으로 휘어졌다. 털들을 몸에
찰싹 붙였다. 꼬리를 치켜올리면서 흔들었다. 개는
그녀의 어깨에 앞발을 걸쳤다. 냄새를 맡으면서
핥으려고 들었다. 그녀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밀어내렸다. 개가 임승단의 볼에다가 주둥이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개를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저 지금 아가씨 기다리고 있구만요."
강수남은 임승단의 말을 차분하게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 옆에 주저앉았다. 개가
임승단과 그녀의 목에다 번갈아 머리를 들이밀고
비벼댔다. 그때 농원 쪽에서 다른 진돗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그것은 수컷이었다. 먼저 와 있던 개가
수컷에게로 달려가버렸다. 둘은 서로의 머리와 볼을
비벼대면서 농원 쪽으로 달려갔다. 임승단이 뜯은
풀을 수면으로 날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우리 농원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어요."
임승단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강수남은 눈앞이
아찔했다.
"왜요?"
강수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물었다.
임승단은 풀잎을 더 세차게 뜯었다. 이 여자가
김창수와 나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눈치챈
모양이라고 그니는 생각했다.
"속이 상해서 못살겠어요. 그 사람이 아가씨한테
미쳤어요. 밥을 먹으면서나 잠을 자면서나 일을
하면서나...... 밤이고 낮이고 아가씨 생각만 해요.
꿈을 꾸면서도 아가씨를 불러요. 살려주라고 소리를
지릅디다. 자꾸 한숨만 폭폭 쉬고...... 밤에 잠을
자는 체하면서도 계속 아가씨방 쪽으로만 귀를 대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어디 변소길 한 번 마음 놓고
가겠어요?"
그니는 가슴 속에 바늘이 박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 뜨거워졌다.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슬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승단의
어깨를 툭 쳤다.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알았어요. 오늘 갈께요."
농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강수남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줄지어 선 편백나무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체취가 코끝에 어렸다. 남자의 냄새였다.
임승단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뒤따라왔다. 김창수가
어디에서인가 숨어서 그니를 보고 있다고 그니는
생각했다. 그니와 임승단이 호수의 둑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그가 다 보고 있었을 것
같았다. 조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한다. 개 같은 사람도 있고 사람 같은 개도 있다.
여기는 축생지옥이다.
가건물에 있는 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메고 나오면서 그니는 무슨 냄새인가를
맡았다. 그것은 김창수 내외의 방 쪽에서 날아오는
듯싶었다. 구리칙칙한 냄새였다. 밤꽃향기 같기도
하고 해감내 같기도 했다.
박달재에게 잘 머묵다가 간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포도밭에 있었다. 덩굴을 매주고
있었다. 임 여사, 영이, 문희수도 거기에 있었다.
강수남은 풍년여신상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김창수와 임승단만 포도밭에 있지 않을 것으로 미루어
그들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그니는 생각했다.
박달재의 식구들을 대하기가 면구스러울 듯싶었다.
말없이 그냥 가버릴까 어쩔까 망설이는데 가건물
쪽에서 여자의 앙칼스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김창수가 임승단의 머리채를 끄집어당기고 있었다.
임승단은 낙지발 같은 열 개의 손가락으로 김창수의
얼굴을 할퀴려고 버둥거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디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 해봐."
김창수는 임승단을 끌고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임승단은 끌려들어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발버둥을 쳤다. 김창수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임승단이 유리병을 내던져 깨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매, 고모, 고모오, 살려주소. 이 미친 놈이
나 죽이네에."
그들이 가건물의 부엌으로 들어가자마자 거기에서
툭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릇 엎어지는 소리,
바께스 나뒹구는 소리가 났다. 임승단의 악 쓰는
소리가 들렸다. 안채에서 진돗개들이 껑껑 짖었다.
포도밭 쪽에서 문희수와 영이가 달려오고, 뒤따라서
볼이 부은 임 여사가 뒤뚱거리며 왔다. 강수남은
가건물 쪽으로 가는 문희수와 영이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임 여사가 그니 옆에 와서 발을 멈추었다.
"저 개만도 못한 것들, 오늘 기어이 무슨 일을 내도
내겄구만."
런닝셔츠바람인 박달재가 그니에게로 걸어오면서
허허허 하고 웃더니
"저것도 수컷이라고 뒷다리 들고 오줌 눌 줄은
알구만잉."
하고 말했다.
"잘 머물렀다가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성불하십시오."
강수남은 그에게 합장을 하고 몸을 돌렸다.
"왜 서둘러요? 여기서 처용식당까지는 지척이요.
나하고 이별주나 한 잔 하고, 그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도 좀 하고 천천히 가십시오."
박달재가 강수남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는
낮술에 취해 있었다. 그니가 손목을 뿌리치고 그냥
가겠다고 해도 박달재는 그니를 놓아주지 않았다.
반드시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안채를 향해 가는데 임 여사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쩔고? 승단아, 정신 차려라."
"언니, 언니!"
영이의 혼겁을 한 소리도 들렸다.
김창수의 아내 임승단이 혼절을 한 모양이었다.
강수남은 박달재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손목을
틀었다. 한시바삐 농원을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박달재는 그니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등나무덩굴의 잎사귀들과 주렁주렁 달린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꽃향이 가슴 속으로 폭포수같이
들어왔다. 그 향에 취한 듯 어지러웠다.
"개들은 저렇게 싸우고 나야 정이 더 깊어지기
마련인 법이요. 개를 키우고 사니께 개들 하는
짓거리만 배워가지고 저래요."
그니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난 박달재가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 잔을 내미는 대로 받았다. 그가 건배를
하자고 했다. 술을 한모금 마시는데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멀어져갔다.
"저 미친 것들 병원행까지 하는 모양이다!"
박달재가 술잔을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강수남은 피같이 붉은 술을 들여다보면서 박달재
내외의 장농 속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생각했다. 그
테이프 속에 담긴 서양 남녀의 참담할 정도로 뜨겁고
질척거리는 정사 모습을 떠올렸다. 박달재 내외는 그
비디오 테이프를 언제 돌릴까.
목욕실의 굳게 닫혀진 문을 보았다. 가스
순간온수기로 물을 뽑아 뒤집어쓰는 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발버둥치는 한 여자를 어깨에 메고
달려가는 김창수의 모습도 떠올렸다. 그 여자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파리처럼 두 손을 비비면서
살려달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 구석으로 몸을 피하는
그 여자의 각질 같은 옷을 벗기는 그의 야수 같은
몸짓도 떠올렸다. 한 여자의 젖무덤을 짚어누르는
박달재의 얼굴도 떠올렸다. 강수남은 그 모든 것들을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당한 일들같이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여, 짐승."
임 여사가 들어오면서 투덜거렸다. 목욕실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좋던 금슬이 어쩌면 그렇게도 무참하게
며칠 사이에 저 모양 저 꼴이 될꼬?"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것은 다 마찬가지라."
박달재가 술을 들이키면서 말했다. 변기에 물
쏟아져 들어가는 소리가 나고 세면기에 물 받는
소리가 났다. 얼굴을 씻으면서 임 여사는 혼자서
무어라고 지껄여댔다. 얼굴의 물기를 훔치고 나오면서
임 여사가 말했다.
"에잇 빌어먹을 것들, 참말로 추하다, 추해. 일만
아니라면은 당장 쫓아내버리고 싶구만은...... 원 센
놈의 일 때문에 저 추한 것들 꼴을 보고 살구만."
"이 사람아, 추하기는 뭣이 추해? 그 이상으로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이 어디 있어? 남녀간에
사랑하고 질투하고 사랑싸움하고 그러는 것이
추하다면 되는가? 그런 것 안 하고 살면 그것이
신이지 어디 사람인가?"
박달재가 자기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혼잣말같이
지껄였다. 임 여사가 그를 흘겨보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고 자기 밑이 구리고 칙칙하니께 그 짐승 같은
놈 편드는 것 좀 봐라. 남자라는 것들은 그저
잘났다는 놈이나 못났다는 놈이나 한 저울에
달아보면은 일그램도 안 틀리고 똑같을 것이다."
박달재는 허공을 향해 너털거렸다.
"어허허허...... 그래, 그렇다고.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라, 진리. 안 그렇소, 강수남 씨?"
박달재의 큰 코가 숫말의 그것처럼 실룩거렸다.
강수남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고 그니는 생각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임 여사가 그니 옆으로 와서 앉으면서 박달재가
마시려고 따라놓은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아가씨도 얼른 가시요. 이 지옥 같은 데는 뭘
하려고 왔소? 나도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하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이것은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짐승이 사는 것도 아니고......"
박달재가 임 여사의 말을 가로챗다.
"말 제대로 잘 하는구만 그래. 그래도 우리 사는
것이 아기자기하고 맛갈스러운 줄이나 아시오. 낮이면
고되게 일하고 밤이면 술 한 잔 하고 남편 안고
몸부림치고, ......포도가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영그는지도 알고,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도 짐작을 해보고 벌레들이 왜 꿈틀거리는지도
가늠해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추하다, 추하다, 하고 입에 발린 소리로 말해쌓지
말아요. 그렇게 추한 속에서 힘이 솟는 법이요.
사람이고 짐승이고 결국은 추하게 안고 뒹굴어댈 수
있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당신도 겉으로는
요조숙녀인 체해싸도, 문 꽉 닫아걸고 벌거벗고 이불
속에 들어가면 화류계 여자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어."
"아니, 이 양반이?"
임 여사가 눈의 흰자위를 확대시키면서 박달재를
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허허허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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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보석을 머금어주는 연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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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이여, 외로운 보석이여. 그 외로운 보석을
머금은 연꽃이여, 하고 순녀는 속으로 소리쳤다.
순녀의 몸속에는 피가 억세게 휘돌고 있었다.
울울울울, 피돌기의 혈관들에거 그 소리가 나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오른쪽 계곡 아래로는 내가 흐르고 있었다.
왼쪽에는 산등성이가 들솟아 있었다. 산에서는
뻐국새가 울었다. 그 소리가 계곡을 울리고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물소리와 새 울음소리가 그녀의 모든
세포들을 들썩거리게 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푸나무들은 꼿꼿이 서 있었다.
눈을 감고들 있었다. 모든 것들이 정지해 있었다.
아니 명상을 하고 있었다. 숲 그늘에는 혼령들이 숨을
죽이고들 있었다. 우주가 회전을 멈추고 있는
듯싶었다. 다만 그녀의 가슴이 들썩거릴 뿐이었다.
물을 마시고 싶었다. 여자는 아무데서나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뱀알이 들어 있는 물을
마시면, 난자 속으로 뱀알이 들어가 수태가 된다고
했다. 뱀 아기를 난다던 것이다. 빌어먹을...... 뱀
아기라도 낳고 싶었다.
옹달샘 하나를 찾아냈다. 무릎을 굻고 엎드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배가 불룩해졌다. 시냇물을
내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나무 그늘에 앉았다.
푸나무와 풀잎들이 햇살을 되쏘았다. 아이고, 이
등신, 지금 어디를 싸다니고 있는가. 여기가
어디인가. 한없이 멀고 깊은 하늘에 흰구를 몇 장이
떠갔다.
내 혼령은 어디 있을까. 처용식당에 있을까.
한정식과 한길언이 입원해 있는 병원 안에 있을까.
어느 도량에서 참선을 하고 있을까. 현종이 갇혀 있는
방안에 있을까.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갈까. 일곱
시가 되려면 아직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그녀는 풀밭에 드러누웠다.
......너는 산에 있고 나는 마을에 있고/너는
'도'를 노래하고 나는 '미'나 '솔'을 부른다/물이
다르고 하늘이 달라도 우리는 늘 한 노래를 부른다/내
뜨락에 풀꽃으로 피는 너와/그 풀꽃향에 취한 채 사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향해 그의 시를 외웠다.
얼굴이 햇살 속으로 나갔다. 기지개를 켰다. 여자
노릇을 하고 싶었다. 현종이 나오는 날이었다.
현종에게 남자 노릇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외간남자하고 그래도 되는 것인가.
현종은 외간남자가 아니다. 나와 현종은 여자와
남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로서
만나면 어떠랴.
'너의 떠도는 등신이 네 진짜이냐, 이 도량에 남아
있는 너의 혼령이 네 진짜이야.'
은선 스님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등신도 내가
아니고 혼령도 내가 아니다. 나를 깨끗하게 지키려는
나도 내가 아니고, 나를 더럽게 뒹굴리는 나도 내가
아니다. 더러운 것은 무엇이고, 깨끗한 것은
무엇인가. 나를 위해 이때껏 혼자 살아온 그에게 남자
노릇을 하게 하려는 나의 생각이나 몸짓이 왜
불결하단 말인가. 나는 물이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두레박을 던져 떠마실 수 있는 물이어야 한다.
순녀는 장엄(莊嚴)을 생각했다. 이해 사월 초파일에
그녀는 청맹과니 아들딸들과 조기님을 데리고
전등사엘 갔었다. 전등사 법당 안에는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전등사 마당과 입구에까지
연등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 연등 속에는 전구가
들어 있었고 그것들은 전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화재가 무섭다고 마당 가장자리의 연등에만 촛불을
밝혔다. 신도들은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 연등의
점화식을 보려고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자기가 단
연등 앞에서 합장을 하고 서 있기도 했다.
순녀는 애란과 성근의 손 하나씩을 잡은 채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확성기에서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법당 마루에서는
향불냄새가 번져왔다. 사진작가들은 사진기기들을
조작하느라고 바빴다. 여기저기에서 카메라의
플래시들이 터졌다. 조기님은 성근의 바른쪽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바야흐로 수천 개의 연등들이 일시에 켜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전등사의 법당과 경내의
나무들은 휘황찬란한 거대한 빛덩어리로 변했다.
"연등은 무슨 색깔이야?"
성근이가 물었다. 그 색깔을 냄새로 일러줄까,
음식의 맛으로 일러줄까, 하고 순녀는 망설였다.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그것은 별빛하고 같은
거야."
애란이가 말했다. 조기님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멀리서 보면 별빛하고 똑같을 거야."
순녀는 성근의 손을 힘껏 쥐어주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저렇게 줄줄이 내걸어놓은
거야. 딸기 먹어봤지? 포도도 먹어보고, 사과도
먹어보고, 참외, 수박, 파인애플, 바나나, 귤......
그런 것 먹어봤지? 청사초롱은 포도맛을 생각하면
되고, 연등은 딸기나 참외나 바나나나 수박맛을
생각하면 돼."
"야아, 그러면 여기 모인 사람들 마음이 서로
어울려 한덩어리가 되었겠네?"
애란이가 말했다. 순녀는 쪼그려앉으면서 애란을
끌어안았다. 성근이도 끌어안았다. 그녀는 거대한
연등의 덩어리를 보면서 소리쳐 말했다.
"저것이 장엄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저렇게 빛 한 점씩이 되어가지고 이 세상
전체를 더욱 빛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애란이랑
성근이랑 장차 저런 빛 한 덩어리씩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악기 하나씩을 가진 사람들이고,
음악선생님같이 지휘를 하는 분은 비로자나 부처님인
거란다. 우리들은 무지무지하게 큰 음악을 연주하고
있단다. 이 세상을 빛과 꽃과 향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꾸미고 있단다.
어디선가 벌 한 마리가 날아왔다. 개망초꽃들이
피어 있었다. 벌은 이 꽃 저 꽃 사이를 날아다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꽃에 앉았다. 순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만다라를 생각했다.
벌은 꽃을 맴돌고, 새는 물 주변을 맴돌고,
남자들은 여자 주위를 맴돈다. 참새는 방앗간 주위를
기웃거리고, 달은 지구 주변을 기웃거린다. 지구는
태양을 돌고, 태양은 위성들을 거느린 채 어느 큰
별인가를 돈다. 한정식과 한길언과 시어머니와
청맹과니의 두 아이들은 내 주변을 휘돈다. 현종도 내
주위를 휘돌고 있다. 처용식당에 목을 걸고 살아가는
아주머니들과 조기님도 나를 휘돌고 있다. 거기에
드나드는 많은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휘돌고 있을까.
소리치며 흐르고 있는 저 냇물은 무엇을 휘돌고
있을까. 어디서 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뻐국새소리가
그쳐 있었다. 가까운 데서 꾀꼬리가 울었다.
휘파람새도 울었다. 박새도 비이비이 하고 울었다.
저것들은 무엇을 휘돌고 있을까.
순녀는 허기진 듯 숨을 깊이 들이쉬곤 했다.
푸나무에서 번져나온 기(氣)가 그녀의 내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푸르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싱싱해지고 있었다. 벽돌집 속에서 찌들려
나온 현종에서 싱싱함을 주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곱 시에 풀려 나오는 현종을 이끌고 갈
곳을 미리 생각해두었다. 이 공업도시 안에는 갈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웃의 항구도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와 아무런 부담 없이
만나고 싶었다.
현종을 맞이할 생각으로 그녀는 들떠 있었다.
병원에서부터 허둥댔다. 남편의 아침 밥그릇들을
치우면서 실수를 했다. 물잔을 떨어뜨리고, 들어오는
간호사하고 부딪쳤다.
"오늘은 잊지 말고 매듭재료 사가지고 와, 알겠지?"
남편 한정식의 말에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알았어요."
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오늘도 잊어버리고 오면 그때는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그것 안 사가지고 올테면 아주 여기 오지
말아."
한정식은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다짐을 했다.
"나 오늘 늦을지도 몰라요. 간호사들이 시키는 대로
잘 하고 계세요."
하고 한정식에게 당부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떨림 때문이었는지 한정식이
"이 고생 하지 말고 얼른 남자 하나 점 찍어가지고
날아버려. 들어오지 말어. 보기 싫으니까, 참말로
보기 싫으니까."
하고 말했다.
"며칠간만 좀 참으세요. 제가 지켜앉아 신경을 써서
장사를 어느 정도 일으켜놔야 되겠어요. 제가 안
나가본 사이에 반찬도 형편 없어지고, 손님도 많이
떨어졌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주눅들린 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처용식당에 가서도 순녀는 허둥댔다. 계산대에
앉아보기도 하고, 주방에 가서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도
했다. 화장실엘 가보기도 했다.
조기님은 금전출납부를 깨끗하게 쓰고 있었다.
손님들한테 하는 서비스의 일기가 배추씨 장사의
문서같이 지저분했다. 기록하는 사람 혼자나 알지
다른 사람은 몇 번 뜯어보아도 알 수 없도록
어지러웠다. 전화기와 금고와 껌상자와 영수증철 서랍
주변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참았다.
주방에는 김치 담고 난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짬빵통 시울에 음식찌거기들이 묻어 있었다.
설거지통에 헛물이 넘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머릿수건을 쓰지 않았고, 앞치마도 두르지 않고 일을
했다. 조기님도 그것들을 쓰지 않고 두르지 않았다.
화장실의 소변기 속이 눌눌해져 있고, 대변기 옆의
휴지통에 휴지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대변기 속에는
오물이 제대로 처리되어 있지를 않았다. 세면대가
막히어 있었다. 순녀는 휴지를 비우고, 변기에 물을
끼얹어가면서 손바닥으로 씻었다. 씻어지지 않은 것은
하이타이를 뿌리고 솔로 문질렀다. 세면대의 물 빠져
나가는 곳을 철사로 후벼팠다. 머리카락들이 엉키어
구멍을 막고 있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한바탕 싫은 소리를
퍼부어대려다가 참았다. '내가 언제든지 화장실을
깨끗이 하라고 그랬지야. 거기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라고 그러지 않더냐?' 이 말도 참고,
'어째서 머릿수건도 안 쓰고 앞치마도 안 두르고
그러냐?' 이 말도 참았다. '주방 쓰레기들은 제때
제때에 비우시오.' 아주머니들에게 이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자기의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꺼내 둘렀다.
"손 하나가 비니까 일들이 밀리지요?"
아주머니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쓰레기를
비웠다. 헛물이 넘치고 있는 설거지통의 물꼭지를
잠갔다. 아주머니들과 조기님이 슬금슬금 앞치마를
두르고 머릿수건들을 찾아 썼다. 오늘 하루 내내 여기
붙어 일을 거들지도 못할 텐데 아침부터 종업원들
속만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순녀는 생각했다.
주인이 없는 새에 그들은 열심히들 한다고 하고들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밥 한 숟갈을 먹고 돈을 챙겨가지고 나왔다.
따라나온 조기님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전에 없이
조기님의 화장이 진하다고 생각됐다. 이 아이도
시집을 갈 때가 되었다.
"이따가 오후에나 들를지 어쩔지 모르겄다. 너만
믿는다잉."
"힘들어 죽겄어요. 아주머니들이 말을 안 들어요.
언니 있을 때는 부지런히 하는 체하다가도 없을 때는
제멋대로여요. 안동댁만 놔두고는 전부 바꿔야 할
모양이어요. 청소도 잘 않고, 손님들이 있는데도 홀로
나와 의자에 앉아 있고 쓸데없는 말들만 지껄이고,
테레비젼이나 보고 있으려고 하고......"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속은 검고 겉은 흰
구름장들이었다. 전등사로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길 가장자리에는 억새와 띠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모내기를 하여놓은 논에서
햇살이 번쩍거렸다.
아무래도 시간을 보내려면 절이 제일 좋을
듯싶었다. 허둥대는 스스로를 달래고, 부풀어 있는
속을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았다. 현종이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도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순녀는 길을 걸으면서 풀포기들을 살피고, 근처의
논에서 우는 개구리들을 살폈다. 기는 개매, 날고
있는 나비와 잠자리들을 보았다. 띠풀들 사이에
개망초들이 꽃을 달고 있었다. 명아주들과 비름들이
군락을 이루고들 있었다. 왕질경이들이 깨어진 시멘트
바닥 사이에서 들솟아 있었다. 접붙은 흰나비 두
마리가 철 늦은 찔레꽃 떨기 밑에 붙어 있었다.
법당에는 촛불이 타고 있었다. 향불의 흰 연기가
천장의 비천녀를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혼자서 촛불을 밝히고 향불을 피우고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다/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 없다 싶더니,
아아, 거기 하나 있었구나/혼자서 청수 떠서 윗목
구석에 놓고 촛불처럼 일렁거린다/거기 하나 있는 그
사람을 심지로 해서 내 촛불은 탄다.
현종의 시를 생각하면서 절을 했다. 백 팔 배를
하고 그녀는 탱화 속의 부처님들을 살피고, 부처님
뒤쪽에 서리어 있는 자주빛 그늘들을 살피었다.
부처님의 눈빛과 손가락과 입술과 젖가슴을 보았다.
재를 지낸 사람들이 공양간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그녀는 공양간으로 갔다. 낯익은 공양주보살이
있었다. 작달막한 정 보살이 그녀를 보고 잘 왔다고
하면서 재 지낸 떡 한 사발을 주었다. 그녀는 손으로
떡 한 조각을 집어먹었다.
"아이고, 웬 떡이 이렇게 부드럽게 맛깔스러울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들갑을 떨었다. 속이 비어
있었다. 그녀는 대충 씹어 삼켰다. 비었던 속이
차오르고 있었다.
"정 보살님 혼자서 바쁘시겠어요."
얹혀 답답한 속에 물 한 모금을 넘기면서 그녀는
소리쳐 말했다. 내가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그녀는 슬펐다. 속이 웬만큼 찼는데도 입맛은
계속 당기었다. 떡을 먹고 또 먹었다.
정 보살이 한쪽 보조개를 깊이 파면서 눈을 흘기고
"배가 많이 고팠던가 보구만."
하고 떡 한 덩이를 더 가져다 주려고 했다. 그녀는
손을 젓고, 참외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정 보살의 일을 거들어주었다.
공양상에 숟가락을 놓기도 하고 미역국을 푸기도
했다. 부침개를 놓고, 나물을 놓고 밥그릇들을
들어다놓기도 했다. 슬펐다. 이날 그녀는 자기가 자기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럴까. 그녀는 몸을 가볍게
놀리면서 음료수병을 들어다주기도 하고, 물을
떠다가주기도 하고, 밥을 더 퍼다가주기도 했다.
이렇게저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그녀는 서둘러 절을 나섰다. 미친 듯이 줄달음질을
쳤다.
......이 여름에는 갈대밭 속에서도 연꽃이
피어나게 하자/이 여름에는 우리들의 시장바닥에서도
진주들이 자라게 하자/어머니들의 아픈 가슴 상처
입은 자리에서는 진주가 자란다/나와 너, 삼천 대천
드넓은 바다에서 한 송이 연꽃과 한 알의 진주로
만나는 우리들의 밤은/무엇을 위하여 열려 있느냐. 이
여름에는 갈대밭에서도 연꽃이 피어나게 하자/이
여름에는 우리들의 시장바닥에서도 진주들이 자라게
하자.
저수지둑을 걸어가면서 순녀는 현종의 시를 외었다.
갈대숲이 수면을 덮고 있었다. 물결이 찰랑거렸다.
초췌한 운봉 스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수런거리는 구름을 보는 그 운봉 스님의 쓸쓸한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느희 아버지는 실패했다. 산중에 들어앉아
부처님을 면대하고 자기 한 몸 잘 닦아 극락왕생을
하려 했던 그게 잘못이었단 말이다. 못 먹고 못 입고
박해받는 중생들하고 아픔을 함께 하는 고행에서
얻어지는 그 어떤 것이 가장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네 아버지의 육신에 이미 어떻게
치유할 수 없는 병이 들어박혀 있었단다.'
한길로 나와서 버스를 탔다. 꾀죄죄한 입성들이
가득 차 있었다.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버스는 성난 황소처럼 소리치면서 달리고
있었다. 비린내가 났다. 아낙네들이 떠들어댔다.
포구에서 오는 버스였다. 창문에서는 바람이
청치마자락같이 펄럭거리며 들어왔다. 그 바람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버스는 산언덕을 오른쪽에 끼고 달렸다. 그
산언덕에 해 저물녘의 빗긴 햇살이 화살촉처럼 날아와
박히고 있었다. 거기에 눈송이들 같은 개망초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들꽃에는 바느질 흔적이 없다/석달쯤 수염을
깎지 않았다/박새들은 양식을 쌓아놓고 먹지를
않았다/화장하지 않는 들꽃과 가난한 박새들과
만나면/비로소 진주의 뜻을 알 수 있다/커피를 끊고,
술을 끊고, 여자도 끊고/밥과 시만 끊지
않았다/사랑빛을 감추는 무화과나무가 되기 위하여.
순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빛을 감추는
무화과나무가 되기 위하여, 사랑빛을 감추는
무화과나무가 되기 위하여......' 빌어먹을, 하고
그녀는 투덜거렸다. 전교조에는 뭘 하겠다고
들어갔을까. 조용히 가르치며 시나 쓸 일이지, 왜
앞장을 서서 그 일을 했을까. 그 동안 그 흰 시멘트집
속에 들어박혀 얼마나 몸 고생 마음 고생이 많았을까.
나와서도 또 그 일을 계속할까. 못 하게 해야 한다.
방 한 칸 얻어서 가두어놓고 시만 쓰라고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를 못하게 하자. 나하고만
은밀하게 만나곤 하자고 해야 한다. 아니, 남편
한정식의 말대로, 나는 그 사람하고 어디론가 멀리
가서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갈까. 어느 섬으로 갈까.
도회지 한복판으로 갈까.
철문 앞에 젊은 남자들 다섯과 여자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이 현종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순녀는 생각했다. 현종과 함게 노조활동을 하다가
해직된 사람들일 터였다. 이들에게서 어떻게 현종을
빼앗아갈까.
젊은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시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당당하게 목청을 높여 당국을 비난하고
저주했다. 배신자들을 욕했다. 순녀는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살폈다.
둘은 양복에다 넥타이를 맸고, 하나는 콤비
차림이었다. 나머지 둘은 점퍼 차림이었다. 한 여자는
청바지에 청점퍼를 입었으며, 머리를 짧게 잘랐고
퍼머넌트를 했다. 다른 한 여자는 청치마에 오버
블라우스를 입었고, 머리가 길었다. 긴 머리칼들이
등허리까지 내려왔다. 체구가 작았다. 머리 짧은
여자는 양복을 입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 배신자들을
열심이 짓씹어댔다. 머리 긴 여자는 콤비 차림의
남자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빙긋거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눈망울을 굴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을 짚어보곤 했고, 듣는
사람들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눈과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이어져 있는
듯싶었다. 철문이 열렸을 때 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현종은 혼자 나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현종의 수염은 풀처럼 길었다.
하얀 살빛이 검은 수염 사이에서 눈처럼 드러났다.
바야흐로 땅거미가 졌다. 수은등 불빛이 현종의
수척한 얼굴을 음영 짙게 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현종을 얼싸안았다.
포옹을 풀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다른 양복 입은
남자도 마찬가지로 현종을 얼싸안았다. 콤비 차림은
그의 손을 잡아 흔들기만 했다. 점퍼 차림들이 맨
나중에 그의 앞에 섰다. 콤비 차림이 그들을 현종에게
소개했다. 맨 나중에 여자들 둘이 현종 앞으로
나섰다. 여자들이 현조에게 악수를 청했다. 현종은
이를 허옇게 내놓고 웃었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별로 즐거워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현종이 자기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순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화단 앞에 말뚝처럼 서 있기만
했다.
현종의 눈길이 화단 앞의 순녀에게로 뻗어갔을 때에
사람들이 순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현종이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순녀는
가슴이 차올랐다. 눈앞이 아득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숨이 가빠졌다.
순녀에게로 다가간 현종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순녀도 멍청히 보고 있기만 했다. 순녀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현종은
그제서야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바쁘신데...... 스님들이 면벽 참선을 하는 것은
결국 가장 참된 자기와 만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얼마 동안 자의반 타의반으로 면벽 참선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스님들의 그것에 미칠
수는 없고, 저는 기껏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것을
많이 생각했어요. '우리들의 이 싸움은 무엇이냐.'
이것을 붙들고 살았어요.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여러 후배님들, 당분간 저를 좀 쉬게
해주십시오."
헤어지는 마당에서 현종은 말했다.
마중 나온 아홉 사람이 한 대중식당으로 들어가서
밥에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 주먹을
치켜들어서 칼처럼 펴 하늘을 찌르는 동작을
계속해가며 불렀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앙,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이 노래를 몇 차례 부르고 '아침이슬'을 부르고,
'선구자'를 부르고 '혁명가'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쓴 소주를 화난 사람같이
마셔댔다. 그들은 모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가슴 속에 분노를 가득 담고들 있었다. 그들은 현종의
출감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현종은 쉬고 싶다고 말을 한 것이었다.
방안에는 찬바람이 감돌았다. 두 여자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은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점퍼 차림의 한 남자는 담배연기를
빨아마시기만 했다. 또 다른 점퍼 차림의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 전열에서 이탈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콤비 차림의 남자가 현종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현종이 고개를 저었다.
"전열 맨 뒤에 가서 서겠다는 것이오. 앞장은 젊고
팔팔한 후배들이 서시오. 당분간 나는 나를 좀
정리해야겠소."
눈을 감고 있던 점퍼 차림의 남자가 분연히 일어나
소리쳐 노래를 불렀다.
"비겁한 놈은 갈테면 가거라. 비겁한 놈은 갈테면
가거라."
"야 임마, 앉아. 까불지 말고 앉아 이 새끼야."
양복을 입는 남자 하나가 점퍼 차림의 남자 손을
잡아 앉혔다. 점퍼 차림의 남자는 앉은 채 계속해서
그 노래를 반복했다.
"현 선생님이 잠시 쉬시겠다는 것도 뜻 없는 일은
아닙니다."
청치마에 화장을 짙게 한 여자가 말했다. 동시에
현종이 몸을 일으켰다.
"남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비굴해졌습니다.
그렇지만, 탈퇴각서를 쓰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오해 마십시오. 저는 한 여자하고 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당분간......"
이순녀는 현종 선생이 말한 '한 여자와의 약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죽은 아내와 한 약속이었다. 아내는 시인이었다. 백제
최후의 날에 대한 시를 쓰고, 동학군 최후의 날에
대한 시를 쓰려다가 뜻을 못다 이루고 심장병으로
죽어간 것이었다. 그는 아내 대신에 그 시를
써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누군들 여우 같은 여편네가 사랑스럽지 않고,
생쥐새끼들 같은 자식들이 귀엽지 않답니까?"
콤비 차림의 남자가 빈정거렸지만, 현종은 대꾸를
하지 않고 음식점 문을 나섰다. 아무도 뒤따르지
않았다. 순녀만 그를 따라나섰다.
"비겁한 놈아, 갈테면 가거라. 비겁한 놈은 갈테면
가거라."
그녀의 등뒤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의 노랫가락에
실린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 말이 백번 옳다. 나는 비겁한 놈이다.
묘하게 어쩌다가 얼떨결에 호랑이 등을 탄 덕택에
용기 있는 사람이란 말을 들었을 뿐이야. 새벽녘에 잠
덜 깬 눈을 비비면서 사립을 나서다가 눈앞에 나타난
호랑이를 엉겁결에 끌어안아 타버린 것이란 말이다.
호랑이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그런데 한 번
올라타고 나니까는 어찌할 수가 없어. 호랑이의 목을
놓아버리면 그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에 찢겨죽고,
그냥 그 목을 끌어안고 있자니 한없이 고달프단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호랑이가 등에 올라탄 나를
뿔리치려고 사두사방을 미친 듯이 뛰고 돌아다닌단
말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호랑이등을 타고
있는 나를 향해 박수를 쳐대는 거야. 나는 영웅이
되어버렸어. 이렇게 되니까 나는 한꺼번에 세 가지의
고민이 생긴 것이야. 계속 호랑이등을 타고 있자니
힘이 들어 죽을 지경이고, 끌어안고 있는 호랑이의
목을 놓자니 그 호랑이에게 먹힐 것이고, 또
그러자니, 이때껏 나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사람들한테
하루아침에 무시를 당할 것이고......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한번 들어선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온
거야. 그런데 이번에 그 모든 두려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까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어. 나는 배반자가 되어도 좋고, 사람들한테
무시를 당해도 좋고, 호랑이한테 물려죽어도 좋다.
두려움 때문에 나를 잃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야."
현종은 순녀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말했다.
하늘에는 별들이 수런거렸다. 해변 공업도시의
밤하늘은 맑았다. 차들이 시끄럽게 소리치며
달려가고들 있었다. 그 소리 저쪽에서 별들은 은방울
금방울 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풍물패들의 소리를
내고들 있었다. 수백 수천의 대중들이 사홍서원을
읊조리는 듯한 소리가 아련히 울리어오고 있었다.
순녀의 손은 현종의 큰 손 속에서 붙잡힌 참새처럼
떨고 있었다. 현종이 별들을 보면서 흥 하고 웃음을
쳤다.
"저 별들 봐라. 저것들은 자기 영역들을 굳게
지키고들 있다. 큰 것들이 작은 것들을 거느리고
있다. 작은 것들은 큰 것들 주위를 휘돈단 말이다.
서로 끌어당기고, 그러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너하고 나하고가 그래. 모든 것들은
정치적인 듯하면서 성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이다. 너하고 나하고를 보면 그럴 것이라고 쉽게
이해가 된단 말이다."
순녀는 가끔씩 진저리를 치곤 했다. 현종의 몸에서
날아오는 오징어 덜 구워진 듯한 냄새와 시금한 땀내
같은 냄새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을 쥔
그의 손바닥에서 전류 같은 것이 그녀의 몸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 그려져 있는 무늬와
거기에 배어 있는 끈끈한 땀과 열기가 그녀의 살
속에다 무슨 무늬인가를 새기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 뚫려 있는 모든 구멍들은 문을 열고
있었다.
"봄이 되면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운다. 대개
사람들는 그것들이 짝짓기를 하기 위하여 암컷을
소리쳐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알고들 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법이야. 다른 새들에게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다른 새'라고 말을 했는데
말이야. 그 다른 새는 종류가 다른 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들은 자기가 앉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약 이백 오십 미터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는 거란 말이다. 그 안으로는
휘파람새나 꾀꼬리나 참새가 들어오는 것은 똑같다.
조금 전에 그 사람들하고 나하고의 사이에도 그런
대립갈등이 있었지. 따지고 보면, 너하고 나하고의
사이에도 그러한 대립갈등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
순녀는 다리에 힘이 빠졌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숨이 가빠졌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현종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소리쳐 울어대고 싶었다. 얼른 그럴 만한
어떤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어떤 것은 쉽게 용납을 하면서도
무엇무엇은 절대로 용납을 하려 하지 않았단 말이다."
순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무엇은 용납을 하고
무엇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우리들을
그렇게 얽매이게 했을까. 그녀는 용기를 내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현종을 안에 태우고
그녀가 바깥쪽에 탔다.
"다 깨부수고 살아갈 참이다. 참 자유가 뭣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뒤통수를 의자에 기대면서 현종이 말했다.
"속세를 떠도는 네가 너의 진짜이냐, 여기 내 곁에
남아 있는 네가 너의 진짜이냐?"
택시에서 내리면서 순녀는 돌아가신 은선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말고 좋은 남자
만나서 도망가라고 하던 남편 한정식의 말도
생각했다.
'x덕도 못 보고 x복도 없는 년이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아 있어서 시장바닥을 쉬파리같이
잉잉거리면서 헤매고 자빠져 있냐?'
정선의 말도 생각했다. 흥 하고 순녀는 코웃음을
쳤다. '차나 한 잔 하고 가시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앞에서 여관의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깨부수고, 벗어젖히면 자기
알맹이만 남는다.' 하고 순녀는 생각했다. 알맹이는
걸림이 없다. 가식도 없고, 욕심도 없고, 허위도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므로 두려움 때문에
호랑이등을 올라타지도 않고, 호랑이등에서 내려오는
것을 겁내지도 않는다.
순녀는 현종의 팔 하나를 잡았다. 현종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해 여관 쪽을
보았다. 현종이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서 가거라. 나 여기 들어가서 잘께. 내일 한 번
만나자. 나 피곤하다. 고맙다. 이렇게 나와
주어서...... 식구들이 많이 기다리겠다."
순녀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체했다.
'해원장여관'이라는 네온이 명멸하고 있었다. 푸른
테두리가 꺼지고 붉은 테두리가 커졌다. 다섯 글자가
모두 꺼졌다가 한 글자씩 켜졌다. 현종이 말을
이었다.
"내일 바쁜데 나올 필요 없다. 가끔씩 전화나 하고
그러자. 아니, 나 깊이 틀어박힐 것이다. 거기 전화도
없다. 내가 밖에 나오는 걸음이면 전화하마. 항상
그래 왔을 터이지만, 열심히 살아라. 니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 보면서 나는 늘 용기를 얻곤 한다."
현종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순녀는 말없이 그의 팔을 여관 쪽으로
이끌었다. 속으로 소리쳐 말했다. '저 오늘 밤에 여자
노릇을 하고 싶어요.' 순녀의 가슴은 울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귀가 울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숨이
가빠졌다. 현종은 발을 뻗대면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고개를 저었다. 여관 쪽으로 끌고 있는 순녀를 힘껏
끌어서 반대쪽으로 돌려놓았다. 성난 얼굴로 순녀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 너 딴 생각하면 죽인다!"
순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녀의 고개가 그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뒤로
줄줄 밀렸다.
"그래, 그러면 방만 잡아주고 가거라."
그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가 앞장 서고 그녀가
뒤따랐다.
안내 청년이 닫고 나간 방문의 손잡이가 천장의
형광등 불빛을 반짝 되쏘고 있었다. 그 안내 청년이
놓고 간 쟁반 위의 물주전자와 요구르트 두 병과
치솔봉지와 수건 두 장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잘
주무십시오.' 하고 던지고 간 말이 방안을 휘돌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이때껏 남자 노릇하기를 내팽개치고
살아가고 있으시다는 것,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순녀가 현종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현종이 고개를 쳐들고 허허허 하고 너털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불이 붙은 것같이 화끈거렸다.
"너도 여자 노릇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들어사 다 잘 알고 있다."
현종은 웃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녀는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 여자 노릇 한 번 하게 해주셔요. 저는
가엾은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지, 그 사람한테 여자
노릇을 해주고 싶어요. 아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참답게 남자 노릇을 하도록 해주고 싶어요. 꾸짖지
마셔요. 선생님."
목이 깊이 잠기어 있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한 번 천장을 쳐다보면서 너털거렸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그녀 옆에 걸터앉았다.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이 그녀의 등을 쓸기도
하고 다독거리기도 했다.
"나 모든 것, 감옥에 들어가기 전부터 다 끊고
살아왔다."
현종이 감상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는 자조가
섞이어 있었다.
"커피, 담배, 여자, 술...... 애욕에 관계되는 것,
기호식품들 다 끊었다. 오늘 밤에 너 때문에 파계를
했다. 아까 그 사람들만 나왔으면 술 안
마셨을거야...... 나한테 딸 하나 있다는 것 알고
있겠지? 그 자식도 옥살이를 하고 있다."
순녀는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따님이 왜
옥살이를 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가 목을
끌어안자 그는 모로 쓰러졌다. 그 아이의 삶은 그
아이의 삶이고, 선생님의 삶은 선생님의 삶이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쓰러진 그의 턱밑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의
수염 부수수한 얼굴 여기저기를 그녀의 입술과 코로
짓뭉개댔다.
현종이 고목같이 썩어가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고목 같은 나무등걸에서 새 움이 트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제가 딸 노릇 아내 노릇을 다 해줄께요.'
이 말이 머리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현종
선생은 왜 그것을 모르고 있을까. 병들어 돌아가신
운봉은 왜 그것을 몰랐을까, 하고 순녀는 생각했다.
모든 남자들은 여자의 몸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자꾸
흡입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선생님, 결벽증을 버리십시오. 아까 모든 것을 다
깨부수고 싶다고 그러셨잖아요? 맨 먼저 결벽증을
깨부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왜소하게
만듭니다. 인색하게 만들어요. 옹졸하게 만듭니다.
독선적이게 만들고, 표독스럽게 만듭니다. 생각을
깊이 해보면,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깨끗한 것이라는 것이 깨끗한 것이
아닐 대, 이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닐 때,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이고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이에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어요. 아까, 모든 것을 다 끊었다고 그러셨잖아요?
그 끊었다는 생각까지도 끊어버리십시오. 그래야 보다
자유로워지잖아요? 그러면 끊을 수도 있고 안 끊을
수도 있잖아요? 끊은 것은 무엇이고, 안 끊은 것은 또
무엇입니까? 저는 선생님의 제자로서가 아니고, 남자
여자로서 만나왔었어요. 아니,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좋고, 그랬다고 해도 좋아요. 선생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제 선생님으로서만 살아가려고 하다가
보니까 이렇게 늙고 시들었어요. 죽어간 여자만
생각하고, 싱싱하게 살아 있는 여자 하나도 구하지를
못하고, 딸 하나 있는 것마저 옥살이시키고......"
순녀는 현종을 나이 어린 사람 달래듯이 달랬다.
현종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만 있었다.
그녀가 그의 옷의 단추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녀가
허리띠를 풀었을 때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의 손을
젖히고 손수 옷을 벗었다. 그녀도 자기의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어던졌다.
"옴마니반메훔 아시지요? 연꽃과 다이아몬드와의
관계 말이에요. 이 세상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 둘의
화합 속에서 움터나는 거예요."
현종은 순녀를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과
가슴이 그의 품속에서 조여들었다. 그녀의 목에서
뱀에게 잡힌 개구리의 비명소리가 났다. 그
비명소리로 그녀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
나오는 구멍을 그의 두꺼운 입술이 막아버렸다.
눈을 시퍼렇게 뜬 남편 병원에 눕혀 놓고
외간남자하고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 사람이 왜
외간남자인가. 순녀는 의식을 아프게 침질하는 생각을
없애려고 몸부림을 쳤다. 이 짓을 하다가 남자 하나를
배 위에서 숨져가게 해놓고 또 이 짓을 하다니......
순녀는 눈을 힘주어 감았다. 이 짓은 이 남자의
가슴에 풋풋한 기(氣)를 담아주려는 행위이다. 이
시들어가는 고독한 남자에게 여자 노릇을 해주면, 이
남자는 흰 머리가 검어지고 주름살들이 없어질
것이다. 이 남자는 하고자 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해낼
것이다. 흥, 창녀, 창녀짓, 화냥년, 화냥년짓, 이제는
스승까지 잡아먹으려고 이려냐? 그녀의 속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 소리를 죽이기 위하여 그녀는 새벽의 도량석을
생각했고, 쇠북치기를 생각했다. 운판 두들기기와
목탁 두들기기를 생각했다. 미망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과 지옥 속에서 몸부림치는 기는 짐승, 나는
새, 물 속의 고기들을 일깨우는 그 소리들을
생각했다.
현종의 몸을 귀신처럼 탐하면서 미친 듯이 추는
승무를 생각하고 탑돌이하면서 외는 염불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산 끝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아도
울고 싶고,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아도
가슴이 술렁거리고, 조기님의 머리에서 날아오는
샴푸냄새만 맡아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날 때가
있었다. 애란이와 성근이가 젖을 만지거나 얼굴
살갗을 쓰다듬을 때면 진저리가 쳐졌다. 그때마다
순녀는 '여자의 몸은 타락신'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보련향비구니를 생각했다. 음욕을 혼자서 즐기다가
여근에 불이 나서 죽었다는 여자였다.
나는 그 보련향이라는 여자와 다르다, 하고 순녀는
생각했다. 나는 음욕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다. 이 한
몸으로 시들어가는 사람을 구하려는 것이다. 애욕은
시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극약이다. 뱀의 독은 많이 쓰면 그 쓴 자의 생명을
빼앗지만, 알맞게 쓰면 그 쓴 자의 허물어져가는 몸의
병을 치유한다.
"선생님, '옹'이라는 소리의 뜻 아시지요? '옴!'
말이에요."
순녀는 현종의 가슴에 코를 묻은 채 말했다. 그녀의
머리칼들이 흩어져 그의 어깨와 목과 가슴을 덮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과 목과 가슴팍으로 입술을
끌고 다닐 때마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살갗을 자극했다.
"'옴'은 모든 삼라만상이 새로이 탄생하는 첫
숨결이랍니다. 그것은 '옴'일 수도 있고, '응'일 수도
있고, '아응'일 수도 있고 '윽!'일 수도 있어요.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거나, 자기 몸속에 새 생명을
잉태하려고 불을 지피려 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그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소리를 지르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죽어야 해요.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소리예요. 선생님, 우리 죽어요. 함께
죽어요."
순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활짝 핀 한 송이의
연꽃이 되었다. 그의 외롭게 떠도는 보석을 수용했다.
두 개의 우주가 한데 섞이고 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변증법이어요."
순녀는 물수건으로 땀 젖은 현종의 얼굴과 가슴을
닦아주면서 수줍은 소리로 말했다. 현종이 천장을
쳐다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는 나쁜 놈이야."
그는 순녀를 결코 불량한 여자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안겨오느너 순녀의 껍질 벗겨놓은 흰
고구마 같은 윗몸을 두 팔로 힘껏 안고 있었다.
"저는 포구(浦口)였고, 선생님은 달(月)이었어요."
순녀는 잠꼬대를 하듯이 속삭였다. 그는 자기의
가슴에 안겨 있는 순녀의 등을 도닥거렸다.
"실 끝에다가 돌을 달아서 휘돌리면 돌이 실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휘돌지 않아요? 저는 그 실 끝을
잡고 있는 손이고, 선생님은 실 끝에 묶여 잇는
돌이었어요. 선생님은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했어요. 어째서 나는 그 실을 손가락에 감아가지고
돌멩이가 손아귀에 가까워지게 할 줄을 몰랐을까? 왜
그것을 훔쳐집을 줄을 몰랐을까. 항상 그만큼쯤
떨어진 거리에서 한쪽은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또
한쪽은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싶어하기는 하면서도 멀리 떨어져나가려
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끌어당기기만 하고......"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멀지 않은 곳에 디스코 업소가 있는
모양이었다. 음악의 여진이 방안을 쿵쿵 울렸다.
그것은 마치 심장의 박동 같았다. 순녀는 귀를 그의
가슴에 대고 있었다.
그녀는 포구(浦口)를 생각했다. 돌로 쌓은 부두가
드러나고 갯벌밭이 드러나도록 썰물이 졌다. 해안통
길은 질척거렸다. 부두와 해안통 길이 만나는 사각의
길목 한쪽 구석에 쓰레기더미가 있었다. 갯벌밭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웅의 물은 진흙탕물이었다. 그
진흙탕물 빛의 통통선 몇 척이 정박해 있었다. 잿빛
개웅을 따라 통통선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젓갈시장에는 쉬파리떼와 젓갈장사 아주머니들이
득시글거렸다. 도외에서 관광을 온 젊은 남녀들이
횟집을 기웃거렸다. 횟집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까페들이 개딱지같이 붙어 있었다.
포구는 살아 있었다. 그것은 치마를 걷어 젖히고
누워 있는 여자의 사타구니 같았다. 그 포구 위에
하얀 낮달이 떠 있었다. 한쪽 턱이 찌그러진
낮달이었다. 달은 실 끝에 매달린 돌같이 포구의
주위를 휘돌고 있었다. 달이 뜨면 밀물이 지고, 달이
지면 썰물이 졌다. 밀물이 지면 포구는 물결소리로
가득 차고, 썰물이 지면 바람소리가 갯벌밭을 말처럼
달렸다.
"선생님, 이젠 닻을 내리세요. 차분하게 숙제를
마무리할 때이잖아요?"
순녀가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었다.
"닻 던져서 내릴 배 정박시킬 만한 포구가 없다."
현종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 말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제 바다, 제 포구에 정박하는 거죠 뭐."
현종은 고개를 저었다. 디스코 업소의 음악은 더
빨라져 있었다. 세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누워 있는 방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아니 어디론가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네 포구에는 닻 없는 배들이 넘치고 있어. 포구
밖으로 밀려 나가기만 하면 해류나 풍랑에 휩쓸려
떠나가 파선할 배들이야. 내 배는 너무 덩치가 커. 내
배가 비비적거리고 들어서기만 하면 그 닻 없는
배들은 다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종이배 같은
것들이야."
"아니예요. 제 포구는 한없이 늘어나요. 얼마든지
어떠한 배든지 다 수용할 수 있어요. 염려 마시고
들어오셔요. 아니, 다 몰아내버리고 선생님의 배만
수용하지요 뭐."
순녀는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현종의
옆구리에다 코를 묻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자기가 현종만을 따라 살기 위해 남편
한정식과 청맹과니 아이들 둘과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버릴 수 없는 여자를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종이 자기의 비좁은 포구 안으로
비비적대고 들어오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얽매이는 것이 싫다. 자유가 좋다. 할 수만
있다면 국가라는 것, 제도라는 것, 기존의 도덕이라는
것들도 다 부숴버리고 싶다. 그리고 순리로서만
살아가는 거야. 정부라는 것도 없고, 다스리는 자도
없고, 다스림을 당하지도 않고, ......그냥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니 말마따나
나는 달 같은 사람인가 봐. 내가 교원노조를 한 것도
하두 아니꼽고 더러워서 앞장을 섰다. 묘한
사립학교에서 일을 했는데 말이다. 그 학교
교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모과같이 빡빡한지,
아침마다 직원조회를 하고, 그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게 하고 애국가 봉창을 하게 하고, 그때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소리쳐 읽게 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외게 하는 거야. 다들 고개 숙이고
잘들 따라 했다. 그런데 내가 반발을 했다. 어느 날
아침엔가 내가 교장에게 건의의 말을 뱉았다......
아침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애국심이 더 진해지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염증만
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느냐? 월요일
아침에 한 차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기로 했으면
어떻겠느냐. 그리고 애국가를 부르거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소리쳐 읽지 말고 국민교육헌장도 낭송하지
말자. 국가와 민족, 국가와 민족...... 너무 강조하지
말자. 국가와 민족도 중요하지만 우리 개인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국가주의 민족주의로 옥죄이지만
말고 순수한 인간주의로 자유로워지자. 넉넉해지자.
이렇게 말을 했더니, 그 교장이 그러더군. '당신이
교장 되거든 그렇게 해보십시오. 학교 교육은 교장의
재량에 따라 운영하는 겁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침마다 애국가, 국기에 대한 맹세, 국민교육헌장
낭송을 이행하십시오.' 그런데 내가 주번교사 노릇을
하면서 일을 내고 말았다. 그 학교에서는 언제든지 그
주일의 주번교사가 직원조회나 직원주례나 직원종회를
진행시키곤 한단 말이다. 그런데 화요일 아침에 내가
국기에 대한 경례구령을 붙이고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소리쳐 읽지를 않았단 말이다. 물론 애국가 봉창을
하자고 구령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냥 '국기에 대하여
경례!' 하고 나서는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하고
말을 했지. 그랬더니 교장이 화를 벌컥 내가지고
'다시 하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현종을 말을 이었다.
"교장이 다시 하라니까 다시 했지. 그렇지만 나는
방금 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라고 구령을 붙이기만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소리쳐 읽지 않고 '바로!' 하고 나서는 '이하
생략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하고 말을
했단 말이다. 교장의 얼굴이 벌겋에 달아올랐지. 나를
향해 돌아서서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누구 맘대로 이하
생략이여, 다시 해!'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그러자
내 옆에 있던 학생과장이 재빨리 '차렷! 국기에
대하여 경례!' 하고 나서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하고 소리쳤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했고, 애국가를
불렀지. 그때, 나는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직원조회가 끝난 뒤에 교장실에서 나와 교장과의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순녀는 현종의 어깨에 볼을 붙인 채 반백의
머리칼들을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몇 살일까. 이마와
눈 가장자리에 그어진 잔주름들을 헤아려보았다.
그녀가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새까맣던
머리칼들이 그 사이에 이렇듯 반백이 되다니......
그때 살빛 희고 몸놀림 가볍던 그가 살갗 거칠고
몸놀림 무거운 중늙은이로 변해 있다.
십 년의 세월이다. 그 세월이 어쩌면 이렇게 이
남자를 시들어지게 했을까. 혼자 살아온 때문일까.
생리적으로 적당한 남성의 배설을 하곤 하지 않으면
이렇듯 얼른 늙어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성(性)은 모든 생명체 안에 활력을 솟게 하고 또
그것을 충전시키는 약이다. 그 약이 이 남자의
몸속에서 스스로 생겨나도록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
나하고 살을 비비고 내 냄새를 맡으면 머지 않아서
싱싱해질 것이다. 십 년 전, 그 팔팔하던 미남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저는 육체적으로는 이미 다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직 덜 자란 부분이 있어요.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그 정신적으로 덜 자란 부분이 싱싱하게 한창 자라는
여러분들과 함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녀의 교실에 들어와서 한 인삿말이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쳤었다.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교단에 선 그의
몸에서 날아온 전류 같은 것이 그녀의 몸속을 휘돌고
있었다.
현종이 천장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고, 교사인
나의 반국가적인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당장에
사표를 쓰라고 윽박지르더라. 교장인 자기의 선에서
조용히 끝내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하더라. 만일 내
쪽에서 사표쓰기를 거부하면 안기부에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더라."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째어요?"
순녀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현종이 손을 뻗어
담배갑을 집어들었다. 순녀가 성냥불을 켜대주었다.
현종은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뿜었다.
은하수담배였다. 그 담배연기가 향긋했다. 여느 때
그녀는 담배연기가 역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허기들린
듯 그가 뿜어놓은 연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곤 했다.
현종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교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지. 그 사람은 강한 사람한테는 사정없이
약하지만 약한 사람한테는 처절하고 잔인하다 싶을
만큼 강한 사람이야. 그 사람을 제압하려면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제발
안기부에 말을 하시오. 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너무 잦은 경례와 국기에 대한
맹세 낭독 때문에 그 국기에 대하여 염증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어요. 국기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도록 하는 의식도 비애국적인 처사인 겁니다.
좌우간에 어디 안기부 구경 한 번 해봅시다.' 하고
대들었지. '나도 안기부에 가면 할 말이 아주 많소.
당신 해마다 학생들한테 수재의연금을 얼마씩 거둬서
착복하곤 했어요? 교육청에서는 팔십 퍼센트만
거두라고 했는데도 해마다 일백 퍼센트씩을
에누리없이 거두곤 했어요. 또, 체육선수 양성기금을
마련한다고 봄과 가을 두 차례씩 일천 오백 명의
학생들한테 라면봉지로 쌀을 가득 담아오라고 했지요?
제가 알기로는 그 쌀이 모두 체육선수들한테만 쓰여진
게 아닙디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교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더라."
순녀는 허공에 퍼지고 있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바보같이 웃었다. 사람들은 하잘것없는 것을 가지고도
목숨을 걸어놓고 싸운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는 것과
일주일에 한 차례씩만 하고 다른 날 아침에는 생략을
한다는 것하고는 어떠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떻게 서로를 제압하겠다는 쪽으로 진척되어 서로가
진흙탕 속을 뒹굴며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더란
말인가.
정부는 어찌하여, 교사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노조를 만들면 안 된다고 몰아세우는 것일까.
교사들은 무슨 까닭으로 자기들이 정신노동자이기
때문에 노조를 만들어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맞서는 것일까. 정부와 교사들은 왜 서로의 뜻과
행동을 용인하지 않고, 자기 쪽에서 먼저 기선을
제압하는 쪽으로 일을 몰고 가려고 물리적인 힘을
가할까. 정부는 어찌하여 교원노조 하겠다는 사람들을
모두 해직시키고 주동자급을 묶어넣기까지 하는
것일까.
"교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어떻게 주체하지를 못하고
펄펄 뛰었지. 교감과 교무과장을 부르고, 학생과장과
연구과장을 부르고...... 내가 수업을 하러
들어가지를 못하게 막았지. 그 교장은 파도소리에서
군인들이 착착 발 맞추는 소리를 연상한단다. 인간의
최고 예술은 카드섹션이고, 군인들 수만 명이
하나같이 행진곡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사열 분열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야. 오후 다섯 시에
하기식을 하곤 하는데,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막
흘러나오는 순간에 두 발을 모으고 국기를 향해 서지
않은 학생한테는 주먹뺨을 때리는 사람이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교장의 아버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이야. 그 교장은 또 해방 전에 뭣을 했는 줄
알아? 순사보였어. 청년들을 징용 보내고 징병에
보내고, 면사무소 사람들하고 공출 독려를 하러
다니고 그랬겠지. 지금 국가와 민족을 들먹거리듯이
그때는 얼마나 천황폐하를 들먹거리고 황국신민된
은혜를 들먹거리고, 대일본제국에의 충성을 맹세하고
그랬겄냐? 그 사람은 군국주의 물이 쑥물같이 파랗게
든 사람이야. 또 그 사람이 얼마나 열렬한
반공산주의자인 줄 아냐? 붉은 색깔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하고, 공산주의라고 할 때 공(共)자만 보아도
몸서리를 친다.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정말
악연이었다. 끝내 우리는 화해를 할 수가 없었지.
내가 학기중에 같은 재단 산하의 여중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장은 양쪽 국어선생을
맞바꿈질을 시켰단 말이다."
현종은 말을 끊고 담배연기만 빨아마셨다. 이
남자가 어찌하여 그같이 극장적으로 부딪치곤 했을까,
하고 순녀는 생각했다. 혼자 살았기 때문이다. 현종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맥이 없어졌다.
"나는 아직까지 그 사람하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이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을
몰랐었지. 그런데 이번에 거기 들어가서 알았다."
"아, 그 약속!"
하고 순녀는 중얼거렸다. 문득 현종에게서 차가운
바람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이 남자는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십년 저쪽에 죽어간 그 여자하고 함께
살고 있다. 시인이었다는 그의 아내는 죽었다고
했었다. 그의 아내는 멸망해간 백제의 최후를 시로
쓰고, 동학군들이 우금치에서 패퇴해간 대목을 시로
쓰고 싶어했다던 것이었다.
그 방에 그와 둘이서만 누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여자하고 셋이서 있는 것 같았다. 현종이 담배불을
재떨이에 비벼끄고 말했다.
"그 여자 지독한 민족주의자였어. 내가 그 사람의
시를 써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민족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마찬가지야. 내가 함게 노조를
한 사람들하고 함께 일을 더 해나가지를 못하고 딴
길을 잡아들겠다고 하는 것도 그들 속의 어떤
'주의'를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현종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순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모르겠어, 빌어먹을......"
순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또 수백 수천의
대중들이 읊조리는 사홍서원을 떠올렸다. 그것은 느린
진양조가락으로 울리어왔고 장엄하게 온 우주를 가득
채웠다.
현종은 안간힘을 썼다. 그의 목줄에 힘줄이
곤두섰다. 그의 품속에 든 순녀는 어깨와 가슴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이때껏 그의 속에 앙당그러져 있던 어떤
응어리를 그녀의 깊은 속에다가 억지로 주입할 것
같았다. 승무를 추던 사람이 소매 속에서 딱딱한
부채를 칼처럼 꺼내 휘두르다가 바야흐로 북 앞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북처럼 누워
있었다. 그가 북채를 휘둘러 두둘겨대주기를
기대했다.
수염 무성한 그의 턱과 볼이 그녀의 볼과 목을
더듬었다.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순녀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에 관계없이 그는
그의 충일을 그녀에게 터뜨릴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둥둥둥 치는 대로 울어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순녀는 '싫어요' 하고 몸을 힘껏 뒤치려다가
참았다. 그러면 그가 얼마나 무색해할 것인가.
"잠깐 우리 술이나 한 잔 해요, 선생님."
순녀가 주눅이 들린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현종은 순녀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낙타처럼 등과 허리를 구부렸다.
"모르겠어!"
하고 투덜거렸다. 그의 몸은 미끄럽게 다듬어지지
않고 그 투덜거림같이 우둘투둘하고 꺼끌꺼끌해져
있었다. 그는 초조해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힘껏
뒤치면서 그의 가슴을 떠밀려다가 눈을 감았다.
"선생님, 우리 술이나 한 잔 해요. 맥주가 좋을
거예요."
순녀는 잠꼬대를 하듯이 말했다.
"모르겠어, 빌어먹을......"
하고 현종은 다시 투덜거렸다. 눈을 감은 채 그녀는
고개를 모로 젖히고 말했다.
"이런 '화두'가 있어요. '차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 이 화두, 제가 잘 써먹는 화두예요. 저는
그것을 '술이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 이렇게 고쳐서
쓰고 있어요 흐크크......"
순녀는 호들갑을 떨었다. 현종은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의 등을 끌어안은 그녀의 손바닥과 팔과
가슴과 볼에 그의 몸에서 흐르는 땀이 묻어났다.
그녀는 다시 진저리를 쳤다. 그녀의 몸 위에서 죽어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남자도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전류처럼 그녀의 온몸을 휘돌았다.
그녀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몸부림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살아가기를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화나고
분통 터지고 괴롭고 복잡하고 골치 아플 때면 여유를
가지고 차나 한 잔 하는 심정으로 자기를 다스리며
살아가라는 것이에요 흐크크...... 또, 참으로 여유가
나서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순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심정으로, 말하자면 사형장의 밧줄 앞에 선
사형수같이 엄숙하게 자기와 맞대거리를 해보라는
것이지요. 흐흐흐...... 아니, 우리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을 그와 같이 자기와 맞대거리를 하면서
살아가라는 거예요 흐크크......"
순녀는 별만 총총한 밤,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탑돌이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순녀는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입으로는 앵무새같이
연신 지껄이면서 눈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은선
스님이 입적하던 그 도량의 방안에 남아 잇을 나와
현종과 살을 섞고 있는 나 가운데서 진짜 나는 어떤
것일까. 아니, 그것은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 어느
것도 진짜 나는 아니다. 입원실 두 곳에 남편
한정식과 시아버지 한길언을 눕혀놓고, 맹학교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맡겨둔 채 외간남자하고 정을
통하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 것이다. 그 이외의 나는
모두 내 허깨비이다. 환영이다. 순녀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주막에 들러 목을 축이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나그네 목 축여 주는 한 잔의
차가 되기도 하고, 취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깨어나게
하는 술 한 잔이 되기도 하는 거지요 뭐. 괴롭고 울화
끓어 나면 그렇게 늘 한잔 하는 거지요 뭐. 선생님은
너무 심각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물 말이에요,
물같이 살아가야 돼요. 저는 물이어요. 물은 막히면
차올라 넘어가고,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돌아
흘러가고 그래요."
이제는 현종이 순녀의 품에 안기어 있었다. 그녀는
현종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찍어냈다.
"누구든지 결국 혼자이기는 하지만, 혼자서 가는
길은 팍팍하고 빨리 지쳐요. 저하고 함께 가요.
저한테는 물론 표박아 놓은 남편이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필요를 느낄 때마다 선생님한테 쉬어
갈 쉼터를 만들어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어쩌면 제가 필요하겠기에 그러는지 몰라요.
이러한 저의 생각을 사람들은 화냥기라고 몰아붙일
거예요."
순녀는 말을 멈추고 한동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종은 죽은 듯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벽시계가 열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의 태도는 언제든지 그렇게 불분명한 데가
있어요. 그렇지만 저의 판단은 대개 분명하곤 해요.
선생닙게서 교도소 문을 나오시는 순간 저는
선생님께서 몹시 지쳐 있으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은 사랑 결핍이 그 원인일 거예요. 제가 그
사랑의 샘 노릇을 해야겠다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 저를 통해서 기운을 차리십시외. 죄송하고
외람된 말씀을 드린다면, 저를 이용하기에 따라서
저는 한 사람의 창녀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낳은
여자 같은 한 사람의 성모일 수도 있어요. 저 사는
데서 멀리 떠나가지 마시고, 가까이 살면서 답답하고
괴로우면 우리 식당으로 나오셔서 '술이나 한잔' 하고
가고 그러셔요. 저는 언제라도 좋아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언제 어느 때든지 선생님의 술 노릇 차
노릇 여자 노릇을 해드릴께요. 저와 가까이 사시다
보면 생각들이 바뀌어질 거예요. 무정부주의적이고
감상적이고 퇴폐적이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적인 생각들
속에서 단단한 새 움이 트는 무엇인가가 있을 거예요.
대나무밭에 가서 죽순 보셨지요. 죽순은 썩은 댓닢
속에서 솟아올라요. 무소의 뿔같이 장엄하게 불끈
솟아올라요."
순녀는 현종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제 맨살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차나 한잔
한다.'는 생각으로 이용을 해야지요. 차나 한잔
한다는 생각은 하잘것없는 것인 듯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자굴하고 같아요. 사자는 백수의 왕 아닙니까?
다람쥐, 토끼, 여우, 고라니, 노루, 사슴, 들개,
원숭이...... 모든 짐승들이 그 굴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죽어 없어지는 겁니다. '차나 한잔 한다'는 것도
모든 잡스러운 생각들을 다 잡아먹고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강석이 모든
쇠들을 다 잘라내듯이 그것은 모든 잡스러운 생각들을
다 잘라냅니다. 그게 '화두'라는 겁니다. 잡스러운
생각들이 없어지면 평정이 오지요. 아시겠어요?
분하고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을 때, 괴롭고
따분할 때는 늘 대수롭지 않게 '차나 한잔' 하시고,
보통때 차를 한잔 하실 때는 죽음을 앞에 놓은 것같이
자기를 성난 얼굴로 살피는 것......"
현종은 길 잘 들인 짐승같이 순하게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었다. 순녀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이불 밖으로 드러난
알몸이 천장에서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에 솜사탕같이
부풀어나고 있었다.
"자기를 성난 얼굴로 보면 아플 거예요. 쑤시고
저리고 아릴 거예요. 가슴 답답하고 열이 나고 그럴
거예요. 당연하지요. 세상 돌아가는 이치 다 알고, 그
세상을 위해서 어떤 몫인가를 하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아프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 몸 어느
부분이 아플 때는 반드시 그렇게 아플 만하기 때문에
아픈 거예요. 몸살이 날 때는 쉬어야겠기에 나는
것이고, 손톱 밑이 쑴벅거리는 것은 가시가 박혔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고, 눈알이 아프면서 빨갛게
충혈되는 것은 티가 들어갔거나 병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요. 배가 아픈 것도 음식을 잘못
먹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요. '유마'라는 사람은
자꾸 그렇게 아프곤 한 사람이었잖아요? 문병을 간
사람들이 그에게 그 병고의 연유를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이 세상에서 못 먹고 못 입고 병들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제가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유마' 같은 사람이
많이 있어야 돼요. 대통령도 그 유마같이 자꾸 아파야
되고, 국무총리도 그렇게 자꾸 아파야 되고, 모든
장관들, 국회의원들이라는 사람들도 그렇게 자꾸
아파야 되고, 모든 기업인들도 그렇게 자꾸 아파야
되고, 밥술깨나 두고 먹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자꾸
아프고, ......이 세상의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자꾸 아프곤 해야 해요."
순녀는 한동안 헤프게 시시덕거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는 텔레비젼 브라운관에 나오는 높은 사람들의
얼굴이 팽팽하고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고 늘
놀라곤 해요. 저렇게 아플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못 사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현종이 얼굴을 순녀의 턱밑으로 더 깊이 묻었다.
순녀는 계속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저는 하루에 수백 사람을 만나곤 해요. 그 사람들
가운데는 수미산같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벌레같이 왜소해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만큼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세상의 한 부분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꾸미려고 하거든요. 지치거나 싫어하지 않고 그 세상
꾸미는 일을 꾸준하게 하려 하는 사람은 수미산같이
거대하게 느껴지고, 지쳐가지고 그 일을 외면하는
사람은 벌레같이 왜소해 보이는 거예요."
순녀는 몸을 모로 뒤치면서 현종을 끌어안았다.
현종은 눈을 감고 있었다. 빛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볼과 눈과 코와 목을 그녀의 볼과 턱으로
더듬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지치거나 싫증내지 않고
자기가 차지한 세상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꾸미려고
할까요?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죽이려 하고
죽임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 혼탁한
세상을 버리지도 않고, 거기 빠져들거나 머무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듯 꿋꿋하게 자기의 참삶의
길을 닦아갑니까? 무엇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지치지
않게 부추기는 줄 아십니까? 가르쳐 드릴까요?
흐크크, 바로 이겁니다."
순녀는 현종의 입속에 혀를 집어넣었다. 거대한
문어처럼 입을 크게 벌려 현종의 입술을 모두
머금어버렸다. 두 손끝으로 그의 모든 성감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 수백 수천의
대중들이 읊조리는 장엄한 사홍서원의 소리를 들었다.
이 고통스러운 세계 속의 못 입고 못 먹과 못 살면서
박해받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
구제하겠습니다(衆生無邊誓願度). 끊기 어려운 번뇌가
아무리 많고 많을지라도 그것들을 모두 끊고, 또 끊게
하겠습니다(煩惱無盡誓願斷). 깨쳐야 할 법문이
제아무리 많고 많을지라도 그것들을 다 배우고 또
배우게 하겠습니다(法門無上誓願學). 열반에 이르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기어이 거기에 이르도록 깨닫고,
거기에 들지 못하는 이를 함께 이르도록
이끌겠습니다(佛道無上誓願成).
"선생님, 이 행위 속에 유위무위(有爲無爲)의 모든
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흐크크......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아는 체해서 선생님
화나셨어요?"
현종은 그 말을 못 들은 체했다. 깊이 잠이 든 듯
누워 있기만 했다. 이제는 순녀가 조급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말씨는 빨라졌다.
"저는 절을 하면 제 속에 빛이 충전되어요. 그런데,
제가 삿되어서 그러는지 몰라도 그 빛은 제 속에서
진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진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것이어요. 저한테 무지무지하게 큰
허깨비가 있어요. 관세음보살같이 성모 마리아같이
몸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환상
흐크크...... 웃기지요? 한데 저한테서 그
허깨비마저도 없다면 저는 못 삽니다. 바람 빠져버린
풍선이지요. 지금 이 행위도 선생님을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생각에서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선생님, 힘을 차리셔요. 그런 다음에
유마같이 전혀 새롭게 아파보셔요. 아까 그 사람들을
외면하고 돌아서셨잖아요? 안 돼요. 다시 시작하셔요.
그래야 선생님은 '벌레'에서 '수미산'으로 변할 수가
있어요. 그래요, 네, 수미산 말예요. 아, 네, 그래요,
거, 거대한 수미산 말예요."
순녀는 승무 추는 이가 미친 듯이 두들겨대는
북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을 떴다. 그새 잠이 깊이 들어 있었다. 뜨겁고
어질어질한 환혹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벽시계를 보면서 순녀는 병원의 남편 한정식과
시아버지 한길언을 생각했다. 한시가 넘어 있었다.
남편 한정식은 지금 죽은 듯이 누워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입원실로 들어가면 그녀에게서 딴 남자의
냄새를 금방 맡아낼 것이다. 그래도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와 대면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현종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걸쳐진 그의 팔을 들어 젖혔다. 그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그는 깨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갔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여자 노릇을 한
다음에는 언제든지 그랬다. 속속들이 태워버리는
까닭이었다. 거울 속의 화냥기 철철 흐르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온수를 뒤집어썼다. 비누거품으로
남자냄새를 지웠다. 남편 한정식에게 둘러붙일 말을
준비했다.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둘러붙여도 그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저 가요."
옷을 걸치고 나서 순녀는 현종의 귀에 대고 말했다.
현종이 소스라쳐 깨어 일어났다. 잠 덜 깬 그의
이마에다가 입술을 가져다댔다.
"호주머니에다가 용돈을 넣어놨어요. 아직은 딴일
마시고 푹 좀 쉬셔요. 그리고 글피 시청 앞 광장으로
나오셔요. 선생님한테 꼭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열두시까지. 늦으시면 안 돼요."
현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상같이 앉아
있기만 했다. 순녀는 문을 등진 채 한동안 그를 보고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바람끝이 차가웠다. 별들이
수런거렸다. 차 달리는 소리 사이사이에서 바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길로 나가다가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을 하고 싶었다.
절을 하면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구태여
교회엘 갈 것은 또 무언가. 전주를 향해 절을 하면
어떻고, 그냥 허공의 별들을 향해 절을 하면 또
어떤가. 말장난이다. 허깨비놀음이다. 절을 한다는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생각은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어이 건물 모서리
저쪽에서 빛나는 십자가 하나를 찾아냈다. 그
십자가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그 십자가가 서 있는
건물에서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빛나고
있는 십자가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가지 여기저기에 빨간 십자가들이 우삣주삣 서
있었다. 다방 수보다 교회의 수가 많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뜨락에 한 여자가 우뚝 서 있었다. 교회의 문앞에
걸린 외등이 배광같이 정숙하고 인자해 보이고
성스러워 보이는 그 여자를 비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는 그 여자에게 경배를 하고 싶었었다.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입속으로
'관세음보살'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절을 했다.
교회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실내는
어슴푸레했다. 드높은 천장에서 외등의 불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두 팔을 십자로 벌려 줄지어선
의자들을 더듬거리며 나아갔다. 중앙 교탁 뒤쪽 벽에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교탁 앞에서 발을 멈추고 그것들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교탁 뒤쪽의 벽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남자가 그녀를 측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 부처님의 모습으로 변하고, 그 여자의
모습이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절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절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허위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입원실에 남편을 눕혀놓고 외간남자와 몸을 섞은 나는
나를 어떻게 합리화시키고 있는가. 그 남자를 그의
허무와 무기력 속에서 힘을 차리고 불끈 일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성(性)을 그 남자 부추김의
방편으로 썼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과연
그러한가. 그 남자는 나의 그러한 뜻대로 그의 무기력
속에서 힘을 차리고 불끈 일어날까.
아아, 위대한 당신, 천만 개의 손과 눈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당신(관세음보살), 제 눈앞을
가리고 있는 이 어둠은 무엇입니까.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것도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제
손에 걸리는 사람마다 힘을 차리게 해주겠다는 욕심이
저를 한정식의 가정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것은
감히 위대한 당신을 닮아보겠다는 생각, 어쩌면
과대망상증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허위를
뒤집어쓰게 합니다. 저의 행위를 허위인지도 모른다고
여기기 때문에 저는 당신 앞에 섰습니다. 저는 병원에
누워 있는 남편에게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제 속에 거짓이 들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확실한 신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창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절을 하다가 말고 그녀는 우뚝 섰다. 어디선가
우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냐?"
그녀는 교탁 뒤쪽 벽에 걸려 있는 아물거리는
얼굴들을 우러르며 몸을 떨었다.
"저는 창녀입니다."
"그래, 창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자이니라. 어서 가서 더 많은 빛 없는 사람들에게
네 몸을 촛불같이 태우도록 해라."
아아, 위대한 당신, 하고 속으로 외치면서 그녀는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그때 어디선가 사자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아스라히 들려왔다. 쇠북소리라고 그녀는
직감했다. 어디에서 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일까.
마룻바닥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기다렸다가 듣고 또
기다렸다가 들었다. 그녀의 가슴이 울울 소리를 내며
뛰었다.
순녀는 택시를 탔다. 택시는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달렸다. 바다 저쪽 하늘에 장어 같은 검은 구름장들이
쌓여 있었다. 그 구름장들 틈에 희끗한 빛살이 번져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 먼동 빛살을 보자
그녀의 살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려고
꿈틀거렸다. 혀를 깨물었다. 누구에게선가
두들겨맞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주먹으로 맞고 발로
차이고 깨물리고 꼬집히고 그랬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실컷 울어버리고 싶었다. 괜히 현종을 버리고
나왔다. 그와 함께 어디론가 가버릴 것을 그랬다.
그와 함게 한 웅큼의 어둠이 되어버릴 것을 그랬다.
택시가 병원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현관문
앞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달려가버렸다. 병원 건물은
잠들어 있었다. 응급실 쪽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남편 한정식이 어쩌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를 두들겨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울화를
터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느 새벽녘보다 복도가 더
길고 어두운 것 같았다. 그것은 습한 동굴이었다.
시아버지의 병실엘 먼저 가볼까 하다가 그녀는
한정식의 입원실 쪽으로 향했다. 막상 한정식의
입원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태연스러워졌다. 다른
세 개 침대의 환자들은 모두 자고들 있었다.
보호자들은 보조침대에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남편
한정식 혼자 올빼미만한 등을 밝혀놓고 있었다.
그녀가 사다준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한정식은 그냥 책을 들고만 있을 뿐 읽고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는 순녀를 실은 택시가 식식거리며
달려오는 소리, 현관 앞에 그녀를 토해놓고 달려가는
소리, 그녀가 복도를 밟아오는 소리까지를 다 듣고
있었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지네 기어가는
듯한 시계의 초침소리를 하나하나 세면서 밤을 하얗게
밝혔을 것 같았다. 순녀는 그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여보,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셔요? 간호사가 뭐라고
전해주지 않던가요? 전화를 했었는데? 술을 퍼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릇이랑
술병이랑 주방기구랑을 다 두들겨 부수고, 기님이를
두들겨패놨어요. 그 일 때문에 뛰어다니다가......
죄송해요. 당신한테 죽을 각오를 하고 지금 오는
길이어요. 용서해주셔요. 여보, 오해하시지 마셔요."
순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거짓말을
했다. 그 차분하고 거침없이 내뱉는 자기의 거짓말에
자기도 놀랐다. 그것은 죄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위하여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창녀다. 창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남편 한정식을 내려다보면서 이를 물었다.
한정식이 모로 누워 있던 몸을 뒤척이었다. 바로
누웠다.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으랬어? 고생이 많았겠구만."
한정식은 깊이 잠긴 소리로 말을 하면서 한 손을
그녀에게로 뻗쳤다. 순녀는 손 하나를 그에게
내어주면서 섬ㅉ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손이
차가웠다. 그것은 마치 양서류동물의 표피 같았다.
그녀는 뱀에게 잡힌 개구리같이 몸을 떨었다.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용서해주셔요. 여보, 오해하지 말아요.
정말이어요."
하고 나서 자기의 거짓말을 합리화시킬 말들을
덧붙였다.
"그 자식이 우리 기님이한테 글쎄 흑심을 품고
어떻게 끌고 가려고 하다가 안 되니까는 그런
거예요."
그러면서 순녀는 현종의 시를 생각했다.
......글쎄,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면 좋겠다.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장자의 나비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거짓말이라면 좋겠다. 지구가 돌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고, 고기가 노니 물이 흐르고,
새가 날아가니 깃이 떨어진다는 것도 거짓말이라면
좋겠다. 사람 없을까 했더니 거기 하나 있었다고 한
그 말도 거짓이면 좋겠다.
옆의 오십대 환자가 응 하고 앓으며 몸을 뒤치었다.
출입문 쪽의 젊은 환자가 투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젊은 환자의 보호자가 보조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쪽 창유리에 미명이 어리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 하나가 출입문 밖을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병실 복도의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의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죽어 있던 병원
건물이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그 사람 따라 가버린 줄
알았는데......"
울분을 절제한 목소리로 한정식이 말했다. 순녀는
그 목소리에서 아픈 독기를 느끼면서 진저리를 쳤다.
순녀는 비명을 지르듯이 호들갑스럽게
"제가 왜 안 와요? 누구를 따라 어디로 가요?"
하고 말했다. 그가 빈정거리듯이 그녀의 손 하나를
그의 눈앞으로 들어올리면서 앓듯이
"나는 다 알아. 이 손을 보면 다 알 수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순녀는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쳐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속에
앙당그러져 있는 거짓의 응어리와 그가 속에 다지고
있는 울분의 덩어리가 그녀의 가슴을 터지게 했다.
'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제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 한 분하고 밤을 지내고 왔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용서해주세요.'
하고 고백을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람도 지쳐 있는 사람이고,
시들어가는 사람이어요. 제가 아니면 살아가는 재미를
찾지 못하고 자포자기할 사람이어요. 용기를 주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어요.' 이렇게 이해를 구해야
그녀의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녀가 고백을
하면 오히려 그가 간밤의 외박에 대하여 너그러워지려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참았다. 얼마 전에 시어머니
제주댁이 그녀에게 해준 말들이 생각났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해준 말도 떠올렸다.
'여편네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 살아가다가 보면
여자는 이런 일도 당하고 저런 일도 당하는 법이다.
여자는 늙고 젊고간에 익은 음식이란다. 시도때도
없이 일통을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호젓한 데를 혼자서 가지 않는 법이다. 만일에 참으로
마지못해 호젓한 길을 가다가 짐승 같은 것한테
손목을 잡힌다든지, 아니할 말로 못당할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당해주어야 하는 법이다.
사람이 짐승이 되고 나면 못할 짓이 없어. 살인도
하는 것이라. 그때에는 살고 보아야 하는 것이니께
어쩔 것이냐? 그런디,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잘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당한 이야기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리고 자기 혼자서만 알고는 죽는 날까지
입밖에 내뱉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자기 의사하고
관계없이 이렇게저렇게 해서 더럽혀졌다고 남편한테
고백을 했다가는 그 고백이 칼이 되어 몽둥이가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온다. 그 고백을 듣는 순간에는
남편이 아내한테 동정을 해주는 체하겠지야. 그러나
그것은 못이 되어서 평생 동안 남편을 못 견디게
쑤셔대는 것이다...... 남자가 강제로 한 번
지나갔다고 여자 몸이 더러워지기는 뭣이 얼마나
더러워졌겠느냐마는 사람의 기분이라는 것은 그렇지가
않는 법이다. 술만 마시면은 아내를 두들겨패기도
하고, 아주 다른 여자를 얻어서 살아버리는 수도
있단다...... 그보다 더 험악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웃집에 사는 늙은 총각놈이 붉은 치맛자락
입은 새각시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서 물을 한 그릇
떠달라고 했다. 물을 떠다가준 그 새각시의 손목을
잡고 보듬고 어떻게 하려 했는데 그 총각놈은 집이 빈
기미를 보이면 늘 나타나곤 하는구나. 새각시는 그
일을 곧이곧대로 남편에게 말했다가는 큰일난다.
칼부림이 나지. 그리고 남편은 의처증이 생기고,
이후로 걸핏하면 아내를 두들겨패게 된다. 그러니까
여자는 먼저 자기의 행실을 분명하게 해서 애초에
어떠한 외간남자도 자기한테 흑심을 품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디 행실을 분명하게 했는디도 그러한 일이
뜻밖에 벌어졌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혼자 그 일을
꿀꺽 삼켜버리고 살아야 한다. 길을 가다가 땅가시에
다리통이 한 번 긁힌 것으로 치고...... 내 말
명심해라.'
순녀는 밭은 침을 삼켰다.
한정식은 눈을 거슴츠레하게 뜬 채 두 손으로 잡은
순녀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열 개의 문어발 같은
손가락들이 그녀의 삘기같이 가는 손가락들 다섯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녀의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오른쪽 손아귀에 모아쥐고 무명지와 새끼손가락을
왼쪽 손아귀에 모아쥐었다. 중지와 무명지 사이의
얇은 살결이 흰빛을 띠었다. 순녀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남편이 여느 때 하지 않던 짓을 하고
있었다. 어쩌려고 이럴까. 그의 두 손이 떨렸다. 애써
태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그가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응, 하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손가락들 셋과 둘을 나누어 잡은 두 손아귀와
팔뚝에 힘을 주어 당겼다. 그녀의 중지와 무명지
사이가 삶은 닭의 다리처럼 찢어져버렸다.
순녀의 찢어진 오른손 중지와 무명지 사이에서
선지피가 들솟았다. 순녀가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때 입원실 안으로 환자들의
체온을 재러 들어오던 간호사가 순녀에게로 달려갔다.
피범벅이 된 그녀의 손을 감사 누르면서 위로
치켜올렸다. 입원환자의 보호자들이 몰려와서 순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정식은 언제 순녀에게 그렇듯 혹독하고 잔인한
짓을 했던지 의심이 갈 정도로 태연스럽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흥분을 감추지는 못했다. 가빠진
숨결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다. 얼굴빛은 창백했다. 허공을 향해
지껄여댔다.
"사기꾼 같은 년, 그래도 안 나가고 살면은
이번에는 가랑이를 그렇게 찢어놓을 것이다. 내가 몇
달 전부터 매듭재료를 구해다 달라고 했는데, 내 말을
먹어주지를 안해. 이년아, 밖에서 어느 놈하고 붙어
있다가 인제 들어왔어?"
간호사와 보호자들이 순녀를 부축하여 출입문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치잣빛 햇살이 유리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동녘의 검은 장어 구름장들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환자들은 몸을 일으키고들
있었다. 끔찍스러움에 질려 자기들의 통증을 잊고,
부축을 받고 나가는 순녀와 태연스럽게 누워 있는
한정식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고 흰 스웨터에 갈색의 통치마를
입은 늙은 여자 하나가 허둥지둥 들어섰다. 한정식의
어머니 제주댁이었다. 제주댁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정식아, 느희 아부지 눈 떴다. 눈 떴어. 하품을
하고 기지개도 썼다."
제주댁은 미친 사람같이 손바닥까지 치고 있었다.
제주댁이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순녀와 맞부딪쳤다.
순녀를 얼싸안았다. 순녀는 제주댁을 안은 채
주저앉았다. 동시에 침대에 누워 있던 한정식이 벌떡
일어났다. 침대 밑으로 내려서다가 나무등걸같이
시멘트 바닥으로 꿍 떨어졌다. 잠시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나뒹굴어진 몸을 바로잡았다.
그는 서로 얼싸안고 있는 순녀와 제주댁을 향해
짐승같이 기어갔다.
제주댁과 순녀는 얼싸안은 채 통곡을 하고 있었다.
"에끼, 이 못된 새끼, 죽어라. 죽어. 이런 여편네가
어디 또 있는데, 그렇게도 굴러들어온 복을 떨고
자빠져 있냐?"
제주댁은 두 손으로 순녀의 피범벅이 된 손을
감싸쥐면서 아들 한정식에게 증오와 저주의 말을
퍼부어댔다. 그들 옆으로 기어간 한정식이 어흑어흑
소리를 내면서 두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는 맞붙은 두
여자의 가슴 사이에다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둘러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눈물들을 찍어냈다. 창밖의
시가지는 어둠의 허물을 벗고 있었다. 샛노란 노을빛
한 줄기가 창틀 가장자리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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