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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by Casey,Riley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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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청수 휴먼 에세이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차례

  추천의 글
  책머리에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

  영국에서 날아온 편지
  스위스로 사는 설레임
  캄보디아 평화원탁회의
  낯선 캄보디아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를 가다
  여러 정파 사람들이 초대된 저녁 식사
  '거리의 아이들 집' 낙성식
  당황스러웠던 삼푸메스사원에서의 설법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
  시공을 초월한 데서 불어오는 바람
  난민들과 함께 사는 국회 부의장
  가슴에 박힌 지뢰
  캄보디아에 옷 보내기

    하늘 동네, 히말라야 라닥

  내 인생의 불쏘시개, 라닥 소년들
  지구촌의 오지, 히말라야 라닥
  설산 라닥에 마련된 배움터
  봄베이 사건
  황량한 사막의 땅에 작은 기적을 만들고
  설산 사람들에게 겨울 옷 보내기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 우리의 온정을 띄웁니다
  설산에서 나눔의 축제 
  팅모스감 마을의 인상
  라닥 불교협회 초청
  영구 장학금을 위한 게스트 룸
  장난감 기차 타고 네 번째 히말라야 방문
  거듭되는 상가세나 스님의 요청
  들지도 못할 무거운 짐, 카루나 병원
  설산을 별유천지로 만드는 상가세나 스님

    검은 대륙 아프리카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가다
  아프리카의 첫인상
  에디오피아의 한국인 슈바이처
  아프리카 원주민 동네 방문
  지구촌의 영원한 숙제, 아프리카
  동물의 왕국, 케냐
  케냐에서 만난 한국인 여의사
  거대한 휴화산, 아프리카 원주민 빈민가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아프리카 속의 한국
  일부다처제의 작은 나라, 스와질란드
  인종 차별의 현장,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거주 지역 '블랙 홈 랜드'

    마음 눈으로 본 세상

  수도사의 삶
  소리의 얼굴
  사랑과 자비는 하나
  우리 이제부터라도...
  성 달라이 라마
  통일이 오는 길목에서 
  숨은 도인
  자신에게서 먼저 공들이는 삶
  '나눔' 연습이 통일 준비
  초인적인 헌신의 삶
  젊은 달관자와의 만남
  나의 후원자 우리 어머니
  나의 아버지
  상타워님 영전에 바칩니다
  '수잔'의 슬픈 이야기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

     영국에서 날아온 편지

  영국의 MAR(Moral Re-Armament, 도덕 재무장)지도자 데이버드 영 
씨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편지의 사연은 캄보디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주 캄보디아의 한 친구가 영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영국 방문중에 MRA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MRA 친구 여덟 명과 같이 그를 만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그는 캄보디아 새 정부의 공보처 장관으로 이름은 웽 모리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MRA 대회에 참석했던 캄보디아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점심을 들면서 MRA 사람들이 어려웠던 시절의 캄보디아 사람들에 대해 
베풀어 준 우정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해 얘기했고, 스위스 코에서 
열리는 MRA 세계 대회에 캄보디아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과, 음으로 양으로 캄보디아에 관심을 갖고 도와 준 것이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고마워했습니다. 
  이제 캄보디아는 민주 정부가 수립되어 일을 시작하고 있으나 그들의 국가 
재건을 위해 투자해야 할 자금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서울에서 열렸던 MRA 대회에 참가했던 일을 상기시키자, 그는 당신이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해 모금하여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전해 주었던 관대한 
일을 회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이 스위스 MRA 본부를 통해 캄보디아를 계속 돕고 
있다고 얘기하자 그는 너무 고마워했습니다. 그것은 캄보디아의 화해 조정에 큰 
도움이 외었으니까요.
  웽 모리 씨는 공보처 장관일 뿐만 아니라 내전이 계속되던 지난 20년 동안 
많은 지뢰를 묻었던 지뢰밭에서 그 지뢰를 제거하는 책임도 맡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수백만 개의 지뢰가 묻힌 약 1,700개의 지뢰밭이 있고 그 지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손발이 절단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70퍼센트의 지뢰밭을 확인했을 뿐이라며 나머지 지뢰밭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UN에서 사람을 파견, 지뢰 제거 작업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뢰를 제거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일을 알리면 당신이 지뢰 제거에 대해 기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뜻있는 사람이 이 일을 도울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캄보디아에 어떤 산업적 투자를 할 한국 기업이 있다면 그 
또한 캄보디아를 크게 돕는 또 다른 방법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곤란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람을 모으는 데 능숙하다고 믿기에 이 같은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나의 아내 마고트와 함께 따뜻한 안부를 전합니다.
  1994. 2. 4. 데이비드 영

  편지를 다 읽고 난 나는 '지뢰 제거...'라는 거창한 문제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 일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일, 그리고 어떠한 
시도도 해볼 수 없는 일처럼만 생각되었다. 그런데 데이비드 영 씨는 이 거창한 
문제를 왜 나에게 제안했을까?
  1987년 인도의 판치카니 MRA 센터에서 하루를 묵는 동안 나는 그분을 처음 
만났고, 같은 해 스위스 MRA 마운틴 하우스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 참석했을 
때 두 번째로 만났다. 그분은 그 대회에 참석한 한국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더 
만난 적은 있어도 이같이 큰 문제를 나에게 제안할 수 있는 어떤 확신을 가질 
만한 어떤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일흔이 넘은 노지도자에게 '할 수 없다'는 말로 간단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그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분의 
청에 응답이 될 만한 작은 성의 표시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사실 나는 1개월 전에 캄보디아를 돕게 위해 미화 1만 달러(800만 원)를 
스위스 MRA 지도자 실비아 여사에게 송금한 터였다.

  역사적인 88올림픽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을 때 MRA 세계 대회도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었다. 그 대회에서 여사로 나온 캄보디아의 한 젊은 참가자는 
자기 나라에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지식인과 승려 등 무고한 양민이 200만 명 
이상이나 대량 학살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난민이 된 대다수 국민들도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늠름하고 당당해 보이는 그 젊은이는 강연 도중 
상기된 얼굴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하고 눈물을 삼키느라 큰 눈을 
껌벅거리기도 했다.
  그때 캄보디아의 한 우국 청년의 연설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나는 다른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연설을 들었던 대다수 사람들은 그 젊은이의 
호소에 냉담한 반응이었다.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온정을 
기대하고 찾아왔을 텐데 별 성과 없이 돌아갈 캄보디아 젊은이들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여비까지 들여 우리 나라를 찾아왔는데 
커다란 실망감만 안고 돌아가는 것이 딱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강남교당에 
연락하여 어떠한 돈이든지 100만원만 급히 마련하여 보내 달라고 해서 그 돈을 
전달했던 일이 있다.
  그후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캄보디아를 돕기 위해 매년 스위스 MRA 본부에 
송금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꼭 캄보디아만을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위스에서 
만났던 세계의 훌륭한 MRA 사람들과 내 스스로 정신적 연대감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1987년 스위스 MRA 마운틴 하우스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400여 명의 
참가자와 더불어 10여 일을 지냈던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지구촌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고 그것은 
내가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내 처소의 방문을 열쇠로 잠가 본 일이 
없다. 그것은 마운틴 하우스에 고여 있는 정직성의 신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위스 MRA 마운틴 하우스야말로 세계를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본부라는 
믿음도 갖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화해와 용서만이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며 종교간, 인종간 
그리고 강대국과 약소국의 일체의 보복을 종식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곳은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어려운 문제를 호소하는 곳이기도 
했다.
  MRA 사람들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우려하며 그 문제 해결에 지혜를 모았다.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파리의 MRA 하우스에서 며칠을 묵는 동안에는 라오스 사람들과 레바논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MRA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를 경청해 
주었고, 그들의 문제를 마치 자신의 문제처럼 걱정하며 해결에 힘썼다. 
젊은이들의 진학 문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어른들의 취업 문제, 그리고 
그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힘쓰고 있었다.
  정직, 사랑, 순결, 무사의 네 가지 도덕적 표준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그들은 이론적인 주장보다 구체적인 실천에 더 힘쓰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항상 진지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세계 MRA 여러 지도자들로부터 수많은 감동을 받으면서 나는 원불교 안에서 
나의 일을 할 때 그들처럼 일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세계 어느 
곳에선가 세계와 인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또 용기가 샘솟았다.
  한때 해질 날이 없다던 대영제국의 한 노신사가 작은 나라 한국, 그나마 
남북이 분단되어 더 작게 느껴질 한국의 내게, UN에서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는 지뢰 제거 문제에 대해 왜 관심을 갖도록 했을까?
  한국에서 출현한 원불교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조차도 아직 이해 가 부족하고 
데이비드 영 씨도 나를 통해서 겨우 원불교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교세가 그리 
크지 않은 원불교에 몸담고 있는 나에게, 그리고 세계의 모든 종교가 남성 
중심으로 큰일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성 교역자인 나에게 그렇게 큰 문제를 
제안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지뢰 문제를 이상하다고 여기던 나는 어느덧 지뢰 제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캄보디아의 지뢰 문제를 크게는 해결할 수 없겠지만 
상징적으로라도 지뢰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강남교당 법회 
설교 시간에 나는 영국에서 온 편지 사연을 공개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캄보디아의 지뢰를 몇 개라도 캐내자고 호소했다. 나의 과제로 알고 신념을 
갖고 열심히 모금한 결과 마침내 미화 2만 달러, 1,600만 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나는 데이비드 영 씨에게 2만 달러를 송금하면서 지뢰 제거같이 크고 중요한 
문제에 동참할 수 잇는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2만 
달러로 몇 개의 지뢰라도 제거하여 인명을 보호해 지뢰가 박힌 공포의 땅을 
평화스러운 땅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사실은 지난 1월에도 캄보디아를 위해 
스위스 MRA 본부에 1만 달러를 송금했다는 사연도 적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소개가 될 만한 내용도 썼다.
  북인도 히말라야 라닥 설산에 불교기숙학교가 세워지도록 협력한 것은 지구촌 
사람들의 무지,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고,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등 
12개국에 의약품을 보내는 일은 그곳 원주민들의 질병 퇴치에 대한 염원 
때문이라고 했다. 또 내전중에 있는 캄보디아를 돕는 일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오게 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라고 밝혔다.

  그후 영국의 데이비드 영 씨로부터 다시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오는 8월 스위스에서 열리는 MRA 세계 대회 때 캄보디아 평화원탁회의가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뢰 제거를 위해 보낸 2만 달러는 
캄보디아의 평화를 위한 성금의 뜻을 갈려 캄보디아 평화원탁회의 비용으로 
쓰기로 했다고 알려 왔다.
  평화원탁회의는 캄보디아의 여러 정파 대표를 스위스 MRA 마운틴 하우스로 
초청하여 열리며, 정파간의 이견을 화해 조정하여 캄보디아에 진정한 화합과 
평화가 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나도 그 회의에 참석토록 
초청한다고 했다. 지뢰 제거를 위해 모금한 성금의 용도가 변경된 것은 
섭섭하지만 현실적인 평화 실현에 도움이 되는 것도 매우 뜻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스위스로 가는 설레임

  평화원탁회의에 기대와 관심을 갖고 스위스를 향해 '94년 8월 17일 서울을 
출발했고 언제나 길벗인 신현대 교도가 이번에도 동행했다.
  우리가 탑승한 스위스 항공은 홍콩과 봄베이를 경유하여 다음날 아침 여섯 시 
이십 분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다. 코의 마운틴 하우스에 가기 위해선 
몽트뢰까지 기차를 타야 했다. 공항 밖으로 나와 기차를 타는 동안 내가 접하는 
모든 것들은 이국적인 정취로 다가왔다. 때마침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스위스 사람들의 활동하는 모습은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말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동작에서는 기하학적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어디나 시끌벅적하여 생기가 넘치는 데 비해 침묵 
속에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시선도 주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나에겐 그런 
느낌으로 전해 왔다.

  우리가 탄 기차는 울창한 숲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달렸다. 집집마다 
발코니에 피어 있는 빨강과 분홍빛의 제라늄, 그 예쁜 꽃을 차창 밖으로 보고 
있노라면 스위스 사람들의 아름답고 여유 있는 심성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산정에는 운해가 오락가락하는데 산기슭마다 품안에 안고 있는 듯이 보였다.
  스위스 사람들의 집 한 모퉁이에는 짧게 토막내어 쪼갠 장작더미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 장작더미를 보고 있으니 춥고 눈이 쌓인 긴 겨울이 
연상되었다. 벽난로 안에서 자신의 몸을 태우는 장작개비가 하얀 연기를 굴뚝 
밖으로 토해 내고, 찬바람이 그 하얀 연기를 하늘 멀리 데리고 가는 스위스의 
겨울 풍경이 눈앞에 그림자처럼 펼쳐졌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를 접고 다시 바라본 스위스의 초원에는 평화롭게 풀을 
뜯는 젖소들의 풍경이 펼쳐지고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이 유난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탈에도 계단식
밭을 일궈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 로잔에 이르니 망망대해 같은 레만 호가 
검푸른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 그곳이 바로 MRA 마운틴 
하우스의 아랫마을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마중 나와 있던 데이비드 영 씨가 우리를 반겼다. 데이비드 
영 씨는 손수 운전하여 1,000미터 고지를 굽이굽이 돌아 마운틴 하우스까지 
오르는 동안 캄보디아의 영향력 있는 정파 대표들이 와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캄보디아의 정신적 지주이고,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자인 마하 고사난다 스님과 
외무 장관인 시리부드 왕자도 평화원탁회의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코의 
마운틴 하우스가 가까워지자 잔잔한 설레임이 가슴에 파도 쳤다.
  우리가 마운틴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실비아 여사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그리고 그분 특유의 사려 깊은 잔잔한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실비아 여사를 만나면 그리운 사람 곁으로 돌아온 안도와 기쁨이 샘솟는다. 
우리는 레만 호가 내려다보이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우리가 머물도록 준비된 
안방에는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고여 있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하얀 
베고니아꽃이 우리를 조용히 반겼다.
  실비아 여사의 환영 카드 아래에는 스위스 초콜릿과 우리가 한국에 소식을 
전할 때 쓰도록 미리 준비한 꽃카드가 낮은 옷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탁자에는 사과 주스 병과 컵 그리고 배와 복숭아, 사과와 포도가 예쁜 접시에 
담겨 있었다. 과일을 깎을 과도도 준비되어 있었다. 욕실문을 열어 보니 
분통같이 뽀얀 느낌을 주는 색색의 크고 작은 세 개의 수건들이 걸려 있어 더욱 
정결해 보였다.
  방안에는 50년 가까운 MRA 역사를 지켜본 옛 가구들이 잘 배치되어 있었고, 
쑥색 바탕에 분홍색 큰 목단 꽃무늬의 오리털 이불이 푹신해 보였는데 옥양목 
침대 커버가 유난히 깨끗해 보였다. 실비아 여사의 온갖 배려를 마치 작품을 
감상하듯 하나하나 살펴보니 그분의 따뜻한 마음이 온몸으로 전해 왔다.
  발코니의 문을 활짝 열고 앞을 내다보니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알프스 
연봉들이 멀리 정겹고, 1,000미터 발 아래에서는 레만 호가 넓은 품으로 
반겼다. 실비아 여사를 통해서 그리고 마운틴 하우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8년 만에 다시 느껴 보았다.

  실비아 여사와는 1987년 인도의 판치카니와 같은 해, 이곳 마운틴 하우스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분이 한국을 내방했을 때 강남교당에서 체류한 것이 
인연이 되어 더욱 가까워졌다.
  나는 실비아 여사를 만나면 그분 겉으로 '돌아온 느낌'을 갖는다. 그분은 지난 
8년 간 편지를 보낼 때마다 한결같이 예쁜 카드에 쓰거나, 긴 사연의 편지를 쓸 
때도 아름다운 카드를 반드시 함께 보내곤 했다. 그분에게서 받은 카드와 
편지만으로 앨범을 꾸며도 각종 스위스의 예쁜 산꽃과 아름다운 스위스 풍경 
앨범이 될 것이다. 실비아 여사의 정성 가득한 편지를 받는 기쁨만으로도 나의 
정서는 항상 촉촉한 윤기를 유지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인연인가.
  그분의 편지에는 항상 새로운 세계의 소식이 담겨 있고 우리 나라의 뉴스에 
대한 변함없는 깊은 관심을 갖도록 일깨워 준 분이다. 그분이 한때 한국까지 
방문할 계획을 갖고 일본에 왔다 병이 났을 때, 나는 도쿄를 부산보다 더 
가깝게 느끼며 그분을 문병했었다. 그때 나는 참으로 마음만 있으면 천리도 
지척이란 말을 실감했다.

     캄보디아 평화원탁회의

  평화원탁회의에 참가할 캄보디아의 불교계 큰 지도자 마하 고사난다 스님이 
오시던 날, 마운틴 하우스는 큰 손님을 맞는 분위기였다.
  점심 시간, 넓은 홀의 식당에는 일반 대중과 함께 특별석을 마련해 
캄보디아에서 온 대표자들과 MRA 세계 대표들이 자리를 함께 했고 나도 그 
자리에 동석했다. 평화원탁회의 참석자들은 훈센팩, 뉴틀파티, KNP, 
불교자유민주당(BLDP) 등 4대 정파 중에서 참석했다고 하나, 누가 어느 파에 
속하는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 인물로는 
외무 장관이자 캄보디아의 왕자인 시리부드 씨인 듯 그의 강연은 많은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고 들었고 예우 또한 각별했다.
  평화원탁회의의 진행은 캄보디아 사정에 밝은 파리의 알랭 타트 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위스 MRA 대표 마르셀 그랜디 씨를 중심으로 영국, 러시아, 
수단, 소말리아 등 여러 나라 MRA 지도자들과 캄보디아 각 정파 대표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평화원탁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회의 분위기가 너무 부드럽고 
평화로워 도대체 무엇이 캄보디아의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인지 나 같은 
문외한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공식적인 자리보다 회의장 밖, 아니 마운틴 하우스에 고여 있는 
평화적인 공기 속에서 모든 문제가 절로 해결되고 있을 것이란 믿음이 갔다. 
그뿐 아니라 대립되는 여러 정파들이 모였다고 하지만 불교 국가인 
캄보디아에서 종정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마하 고사난다 스님께 바치는 그들의 
공손한 태도에서는 한 아버지를 섬기는 여러 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보낸 지뢰 제거 성금으로 캄보디아 참석자들의 항공료와 체류비가 
지불된다고 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던 
30명에 가까운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도 평화원탁회의가 열리는 동안 그곳에 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들조차도 4대 정파 어딘가에 속해 서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을 테지만 나에게는 모두 캄보디아 사람들일 뿐이다, 항공료는 각자 
준비했어도 그들 30여 명의 체류비는 역시 우리가 보낸 성금에서 쓰여진다고 
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들 모두는 나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캄보디아가 9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온 탓도 있고 또 대부분 
망명자들이 프랑스에 살고 있어서 영어로 의사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그들은 나에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고 그들의 
순박한 눈빛이 나의 가슴에 와 박히는 듯했다. 특히 젊은 청년들은 조금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나와 가까이하고 싶어했다.
  평화원탁회의 참석 대표자들보다 나라 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그 
평범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선량한 미소와 고마워하는 눈빛에 나는 이미 그들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과의 만남을 제안하여 열다섯 명 정도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영어를 잘하는 한 사람이 나의 질문을 그들에게 통역하고 
그들의 답변을 또 나에게 전해 주었으며, 대화의 내용은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캄보디아의 문제'를 찾는 것이었다.
  현재 캄보디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들 대부분은 
부모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고아들이 문제라고 했다. 그들은 1개월에 미화 
3달러만 있어도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돈으로 2,400원만 
있어도 고아 한 명이 한 달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나라밖에  
도움을 청할 때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지뢰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가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만 대답했다. 외모로 보아 좀 고생한 것 같은 그들에게 언제쯤 
조국 캄보디아로 돌아갈 예정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그때가 언제쯤일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국이 그리우면서도 선뜻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딱하게만 여겨졌다.  
  내가 캄보디아 사정에 밝은 일본의 소마 여사에게 '캄보디아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분은 국민들의 무지몽매함이 문제라며 문맹률이 높은 
국민을 교육시켜 조국의 현실을 온 국민이 깨우쳐야만 캄보디아의 장래가 
밝아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캄보디아는 국민 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많지 않다고 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크메르 루주에 의해 희생되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전 부수상의 미망인 르네 판 여사가 
단기 교육을 통한 교사 양성을 하고 있다며 그를 돕는 것이 캄보디아의 교육을 
돕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캄보디아의 종교 지도자 마하 고사난다 스님께 '캄보디아 문제'를 여쭤 
보고 싶었다. 그래서 르네 판 여사에게 청하여 스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르네 
판 여사는 캄보디아 말로 나를 소개했고 소개가 끝나자 자비가 넘쳐흐르고 
천진스럽기 한량없이 보이는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관세음보살" 하며 
합장하셨다. 내가 깜짝 놀라 스님을 바라보자 스님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며 1990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 탄신 100주년 때 원불교 총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분에 대한 각별한 친밀감을 느끼면서 그분에게 캄보디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그분은 서슴지 않고 '지뢰'라고 대답하셨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지뢰 때문에 나날이 팔다리를 잃고 있다는 딱한 사정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캄보디아가 불교 국가이지만 불경의 뜻을 알고 
신자들에게 불법을 가르칠 만한 승려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많은 승려들은 입으로 불경을 외울 뿐 불경의 참뜻을 모르고 있다며, 
캄보디아의 승려 교육도 매우 시급한 일인데 승려들을 교육시킬 경제적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캄보디아의 문제'를 알아보았지만 문제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달랐다. 대회 기간 동안 기록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영국의 데이비드 체너 씨는 
캄보디아에 대한 또 다른 문제를 제기 했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무고한 지식인, 
승려, 양민이 대량으로 학살당했기 때문에 남편과 자식 그리고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은 지금 분노와 저주로 들끓고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국민 정서 순화가 선결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그 
문제를 덥기 위 해 '압사라의 미소'란 비디오 필름을 제작중이라고 했다. 이 
필름이 완성되면 캄보디아의 3,000여 개나 되는 사원에 제공하여 모든 국민들이 
분노와 한을 삭일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싶다고 했다. 그 필름에는 앙코르와트를 
배경으로 담아 캄푸치아의 찬란한 불교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고 희망찬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했다.
  캄보디아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던 나는 마운틴 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사람과 캄보디아를 알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실비아 여사는 나의 캄보디아 탐구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또 다른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식사 시간을 약속하여 만나게 해주고, 아프리카의 흑백 문제나 
레바논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세계 
MRA의 뜻 있는 여러분들이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는 만큼 나는 세계를 
향해 눈을 떴고 새로운 사명감이 고양되고 있었다.

     낯선 캄보디아 사람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1994년 11월 30일 밤 낯선 한 외국 남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은 아, 태평화재단의 초청을 받고 아시아 태평양 민주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캄보디아 사람으로 이름은 손 수베르라고 했다. 자신의 신분은 밝히지 않고 
이름만 밝힌 그는 나에게 자신의 나라 캄보디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도와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는 MRA 지도자 파리의 알랭 
타트 씨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어도 
캄보디아 사람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매우 
반가웠다.
  지난 8월 스위스 코의 마운틴 하우스에서 열린 캄보디아 평화원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나는 캄보디아의 여러 정황에 밝아진 편이고 또 몇 가지 과제물도 
스스로 정했다. 지뢰 제거 운동, 교육자 양성 후원, 승려 교육을 위한 장학금 
후원, 고아에 대한 관심과 국민 정서 순화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과제들을 기회가 닿는 대로 내 몫만큼 일하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몸은 한국에 있어도 생각과 마음은 미지의 나라 캄보디아를 넘나들던 
바로 그 무렵이라 그에게 나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 캄보디아의 지뢰 제거 
문제에 대해 물어 보았다. 전화기를 통해 전해 온 그의 대답은, 지뢰 제거의 
문제는 앞으로 100년 이상이 걸려야 해결될 문제라며 지금 당장은 '거리의 
아이들'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했다. 보살펴 줄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거리에 
넘치고 그들은 비바람을 피할 집도 없다고 했다.
  우연히 걸려 온 캄보디아의 낯선 남성과 긴 통화를 하고 난 나는 파리의 알랭 
타트 씨도 캄보디아를 잘 아는 분이지만 일본의 MRA 지도자 소마 여사나 
후지다 씨도 캄보디아 사정에 밝은 분들인데 혹시 그분들도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그분들도 잘 아는 친구라고 했다. 언제쯤 한국을 떠날 예정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는 모레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내일 당장 만나자고 
제안하며 시간과 약속 장고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늦은 밤이었지만 일본 도쿄의 소마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한국에 캄보디아의 손 수베르 씨란 사람이 와 있는데 당신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하여 그 사람에 관해 알고 싶어 전화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소마 여사는, "아! 손 수베르 씨, 그는 캄보디아의 전 수상 손 산 
씨의 아들이며 현재 캄보디아의 국회 부의장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도덕성이 매우 강한 친구이니 그와 함께 캄보디아의 일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캄보디아를 직접 도울 길이 없어 스위스를 통해 도왔는데 이렇게 
캄보디아 사람이 직접 나타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 달러를 구할 수 있을까? 내일 
하루밖에 여유가 없는데... 나는 마치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꼭 하루밖에 여유가 없는 실향민과 같은 심정이었다.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라 서랍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미화 5,000달러가 
있었다. 지난 9월 북인도 히말라야 라닥에 갈 때 그곳 게스트 룸 건립 성금으로 
가져 가려던 것이었다. 그때 그 돈을 놓고 간 것은 큰 낭패였지만 지금은 그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고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이나 소중했다.
  남편이 자주 해외 출장을 다니는 교도님 댁에 알아보면 달러가 좀 있지 
않을까? 누구누구의 집에 전화를 걸어 볼 것인가? 그 명단을 적어 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음날은 강남교당의 주부 중심의 법회인 화여 법회 날이기 
때문이었다.
  캄보디아를 돕기 위한 성금을 직접 캄보디아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고 만 하루 만에 그 일을 해내려니 마치 큰 거사라도 앞둔 사람처럼 
긴장되었다. 날이 밝는 대로 5,000달러를 채워서 1만 달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리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심과 궁리로 
지새운 밤이 밝았다.
  나의 속마음이야 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걸 
수가 없어 참고 참았다가 여섯 시 삼십 분부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간도 너무 빨랐던지 전화를 받는 교도님의 음성이 잠결인 것 같았다. 잠을 
깨운 것도 미안하고, 느닷없이 새벽부터 캄보디아 문제를 들먹이면서 달러를 
발려 달라는 것도 이해받기 어려운 일일 것 같아서 나는 말을 더듬고 있었다. 
  "...달러요? ...한 50불이나 100불쯤 있으려나요..."
  불확실한 그리고 기대에 못 미치는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맥이 탁 풀리고 
전신에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그래도 그중 한 교도님이 부군과 의논을 
해 보겠다고 했다. 그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고 고마웠다. 잠시 후에 걸려 온 
전화 내용은 남편 출근길에 따라나가 회사에 있는 대로 가져오겠다고 하더니 그 
교도님이 1,000달러를 구해 왔다.
  1,00달러도 많은 돈이어서 고마웠지만 나머지 4,000달러는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나는 묘수를 찾은 듯 평소 알고 있는 외환은행 지점장 교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많은 달러를 구하려면 남대문 암달러 
상인들한테서 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무리 미국 달러가 급히 필요해도 나 
같은 사람이 암달러상을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하는 내 음성이 
너무 힘이 없었던지 그분은 방콕에서 우리 나라 돈이 통용되는 것만도 큰 
다행이라 여기고 부족한 금액은 원화로 채우기로 했다.
  법회 날, 중요한 법회 전날 밤을 하얗게 지새웠지만 막상 법회 시간이 임박해 
오자 설교를 해야 하는 교무의 자세로 휙 되돌아왔다. 나는 잠이 부족한 사람 
같지 않게 보이려고 내 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모든 것은 긴장의 위력을 
빌릴 때 생기는 힘이다. 법회를 무사히(?) 마쳤다. 어느 누구도 내가 간밤에 
뜬눈으로 지새운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원화로 1만 달러를 채우는 
일은 내가 법회를 보는 동안 윤순명 교무님이 수행하기로 했다.
  법회를 마친 나는 오후 한 시 반 약속 장소인 조선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손 
수베르 씨는 자신의 통역을 맡고 있는 한 아가씨와 함께 나왔다.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그분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젯밤에 전화 통화를 했던 캄보디아 사람을 나는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손 수베르 씨의 인상은 매우 조용하고 온화했다. 우리는 파리의 알랭 타트 씨와 
일본의 소마 여사와 후지다 씨 그리고 지난 8월 스위스에서 만났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과 전 부수상의 미망인 르네 판 여사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다음 준배해 간 1만 달러를 내놓으면서 당신의 
나라 '거리의 아이들', 고아를 위해 써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부는 
원화이지만 방콕에서 교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전혀 뜻밖의 1만 달러(800만 원)를 전해 받은 손 수베르 씨는 매우 
고마워하면서도 많이 놀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 성금을 정의 평화 
발전을 위한 크메르 재단에 기탁하겠다고 했다. 나는 크메르 재단에서 발행되는 
영수증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며 나만 괜찮다면 오늘 밤 캄보디아에서 같이 온 몇 사람과 함께 
강남교당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12월 1일, 그날 밤은 수도회 남성 교도들의 기도날이었다. 내가 기도의 
날임을 밝히자 그는 오히려 그 기도에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나는 도 번 다시 
캄보디아에 성금을 전할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만약 원화를 더 준비해 주면 그것을 단기 교육자 양성 코스를 
운영하는 르네 판 여사에게 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스위스를 통해 송금하는 것도 금액의 제한을 받아 어려운 일인데 지름 이렇게 
직접 그것도 원화로 전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의 캄보디아 과제를 좀더 덜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복잡한 상념의 세계가 단순해질 수 있고, 좀더 단순해져야만 내 
일상의 걱정의 무게를 견뎌 내기가 쉬워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스스로 짊어진 캄보디아의 무거운 짐, 그 짐을 덜어내야 좀도 
홀가분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이 기회에 좀더 많은 돈을 
챙겨 보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세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의 생각은 번개같이 움직이고 나의 몸도 나는 
듯했다. 전혀 터무니없는 나의 청을 임시 변통 형식으로 받아들여 주는 고마운 
인연들이 있어 나는 내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결국 다시 2만 달러인 1,600만원의 현금을 구해 상자 속에 가지런해 넣어 
포장했다. 거리의 아이들, 고아를 돕는 문제를 이번 기회로 끝내려고 몇 시간 
전에 전했던 1만 달러와 새로 준비한 1만 달러는 캄보디아 2세 국민 교육을 
담당할 교육자 양성 기금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돈을 
가져갈 손 수베르 씨가 강남교당을 꼭 방문할 것인가가 불확실하지만 확인 
전화를 해볼 길도 없어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고 기도 시간이 되어 기도를 시작해도 그들 일행은 오지 않았다. 
기도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야 손 수베르 씨 일행이 들어섰다. 나는 낮에 
만났던 통역 아가씨가 불어 통역임을 알았다. 손 수베르 씨는 영어보다 불어를 
더 잘 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캄보디아 손님 네 명을 단상으로 초대하고 
1,600만 원이 담긴 좀 무게가 있는 현금 상자를 손 수베르 씨에게 선물처럼 
전달했다. 그리고 교도 중에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두 교도가 차례로 나와 
간단한 환영사를 하게 했다. 영어와 한국어로도 각기 다른 교도가 환영사를 
했다.
  기도의 순을 마친 다음 손님을 3층 교화의 방으로 안내하여 차를 대접하면서 
1,600만 원, 2만 달러는 고아를 돕는 데 쓰고 나머지 800만 원, 1만 달러는 
국민 교육을 맡을 양성 기금으로 써 달라고 말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지뢰 제거 문제 때문에 언젠가는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캄보디아를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장을 보내 달라고 했다. 우리의 환대에 매우 
고마워하며 캄보디아 손님들이 떠났다. 어젯밤 뜻밖에 낯선 캄보디아 
사람으로부터 받은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길고도 긴 하루였지만 캄보디아에 대한 
나의 과제물을 덜어낼 수 있어 나는 한결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를 가다

  캄보디아 국회 부의장 손 수베르 씨로부터 1995년 1__3월 중에 캄보디아를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적절한 기회를 봐서 방문하려던 계획에 따라 
출국 수속을 밟았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우리 나라와 국교가 없는 적성 
국가여서 그 나라를 여행하려면 해당 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캄보디아 방문 허가를 문체로부터 받으려 하자, 종교인이 종교적인 목적 없이 
정치인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허가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캄보디아로부터 종교적 목적이 포함된 새로운 초청장을 받아 
지구촌에 두세 나라밖에 남지 않은 적성 국가 중 하나인 캄보디아를 가기 위한 
복잡한 수속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출국하기 위한 수속일 
뿐이었고 캄보디아의 입국 비자는 캄보디아 공항에서 발급받기로 했다.

  1995년 3월 15일 열두 시 TG 696편으로 김포 공항을 이륙, 캄보디아를 향해 
떠났다. 캄보디아 방문 동행자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캄보디아에 가는 고건축가 황의수 교도와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신현대 교도였다. 캄보디아 사람과는 아무 인연도 없이 다만 캄보디아가 오랜 
내전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위스 MRA를 통해 지난 6년간 
돕다가, 이제 그 나라의 국회 부의장 손 수베르 씨의 초청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되니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왔다.
  마치 오래도록 그리던 고국땅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우리의 비행기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비행기 트랩 아래에 손 수베르 씨와 르네 판 여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한 번씩 만났던 사람들인데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귀빈실로 
안내되어 잠시 환담을 나누는 동안 신속하게 비자가 발급되어 공항 밖으로 
나왔다.
  호텔을 향해 가는 동안 나는 캄보디아의 하늘도 올려다보고 땅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거리의 행인들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지식인과 승려, 무고한 양민이 200만 명이나 학살당한 킬링필드의 땅,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열 명 가운데 한두 사람은 죽음으로 내몰렸다던 바로 그 현장. 
대량 학살로 남편이나 자식 그리로 형제 자매를 잃은 한 많고 슬픈 사람들이 
사는 땅, 부모를 잃은 어린 고아들이 거리를 방황한다는 캄보디아.
  온갖 불행과 고통만이 연상되는 나의 상념 속의 캄보디아는 하늘과 땅도 
구겨져 있고 태양도 빛을 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드높은 파란 하늘이 의아스럽고 평평한 도로 위로 차가 달리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름 모를 남국의 식물들은 푸르름으로 우거지고 유도화와 보랏빛 
꽃들도 강열한 햇살을 받고 화사하게 피어 있어 평화롭기만 했다.
  나는 달리는 차 속에서 혼란스런 상념들을 정리라도 하려는 듯 손 수베르 
씨에게 프놈펜에 피어 있는 꽃들이 아름답다며 아무 의미없는 말을 했다. 손 
수베르 씨는 꽃은 다 아름답다고 지극히 당연한 말로 응답하며 웃어 보였다.
  우리의 차는 럭키인호텔에 도착했다. 파리의 알랭 타트 씨와 영국의 데이비드 
체너 씨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영국의 데이비드 체너 씨는 '압사라의 미소' 
비디오 필름 제작 때문에 캄보디아에 있을 수도 있지만 파리의 알랭 타트 씨를 
프놈펜에서 만난 것은 너무 뜻밖이었다. 손 수베르 씨는 바로 이 알랭 타트 
씨로부터 나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그에게 무슨 일로 프놈펜에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사려 깊은 눈빛을 
안경 속에서 빛내며 말했다.
  "당신과 프놈펜에서 지내기 위해 삼십 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알랭 타트 씨는 프랑스 MRA 지도자다. 그는 침착한 인상을 풍기는 예순일곱 
살의 노신사로, 20년 전부터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고 여러 정파 지도자들을 
스위스의 코 마운틴 하우스에 초청하여 각 정파간의 화해를 조정하는 평화의 
사도와 같은 인물이다. 내가 1987년에 파리를 처음 여행했을 때 그는 손수 
운전하며 기꺼이 나의 파리 여행을 도와 주기도 하고, 그의 부인 앤 마리 씨는 
맛있는 프랑스 요리로 나를 대접하기도 했다. 특히 스위스를 통해 캄보디아를 
돕는 데 대하여 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캄보디아에 관한 여러 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주기도 했다.
  낯선 캄보디아 땅에서 MRA 지도자들이 반겨 주어 마치 가족들 겉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MRA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에 감동되어 나는 그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데이비드 체너 씨에게는 캄보디아 국민 정서 순화를 위해 '압사라의 
미소' 비디오 필름 제작에 보태라고 우리의 정성 1만 달러를 이미 보냈었다. 
그는 우리가 프놈펜에 있는 동안 필름의 시사회를 갖도록 노력하겠다며 그 일의 
보람을 확인시켜 주었다. 
  캄보디아에서 마련된 나의 일정표에 따르면 맨 먼저 지역 개발청 찬 탈 국무 
차관을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도 잘 모른 채 한 
청년의 안내를 받아 따라갔다. 내 영어 실력이 참으로 번번치 못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캄보디아 정부 관료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국무차관 찬 탈 씨는 서글서글한 중년 남성이었다. 나는 태극선을 선물로 
전하면서 영한 사전도 함께 꺼냈다. 나는 그에게 의사가 잘 통하지 않을 때는 
이 영한 사전으로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매우 사무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캄보디아에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자주 쓰는 단어 중에 '웰'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단어 뜻을 
모르고는 전체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사전을 내밀며 '웰'의 
말뜻을 모르겠다고 했다. 그가 펼쳐 보여 준 'well'은 나도 알고 있는 '잘, 
훌륭히'란 단어였다. 그래도 말뜻은 통하지 않았다. 그 뒤 'well'은 우물이란 또 
다른 단어였다. 결국 그는 캄보디아는 식수가 부족하니 더 많은 우물이 
필요하다는 것과 식수 개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또 학교와 
병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의 그러한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시안에 대해 듣고 있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캄보디아를 방문한 것은 지뢰 제거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나의 목적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지리 문제보다는 우물, 다리, 학교, 그리고 병원이 더 시급하다고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당신의 나라 지뢰가 나의 가슴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 지뢰를 캐내야만 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캄보디아에 지뢰를 몇 개라도 
제거하려고 결심한 것은 나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소 강경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곳을 나왔다.
  그곳에서 마련한 일정표대로 따르다가는 나의 방문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르네 판 여사에게 지뢰를 제거하는 기관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찾아간 곳이 캄보디아 지뢰제거활동센터(CMAC)였고 그곳의 책임자가 
바로 웽 보리 씨였다.
  영국의 데이비드 영 씨도 바로 이 웽 보리 씨의 호소를 듣고 나에게 지뢰 
제거에 동참을 제안했고, 또 1998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 MRA 대회 때 
캄보디아를 도와 달라고 호소했던 그 젊은이, 그때 나의 작은 정성을 건네 
받았던 그가 바로 이  나라 지뢰 제거 책임과 공보처 장관의 중책을 겸직하고 
있음을 현지에 와서 확인한 셈이다.
  참으로 세상이 좁은 것이 아니라 세계가 좁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웽 모리 씨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마흔이 남아서야 결혼했고 
지금은 신혼 여행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지뢰 제거에 관한 많은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지뢰 
하나를 제거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그리고 얼마의 비용을 들이면 
얼마만큼의 땅이 지뢰가 없는 건강한 땅으로 회복되는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다만 지뢰 하나를 묻는 
비용은 5달러라고 했다. 그들이 지뢰 제거 비용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우기와 건기에 드는 비용이 다르고, 같은 면적일지라도 지뢰가 많이 묻혀 
있기도 하고 적게 묻혀 있기도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을 공정가격처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는 지뢰 제거를 위한 비용은 직접 받지 않고 다른 여러 
나라의 지뢰 재단에서 받는다고 했다. 캄보디아로 성금을 보내 주면 지뢰 제거 
현장에서 일하다 희생된 사람이나 또 부상당한 사람들의 보상비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나의 일차 목적을 한 개의 지뢰라도 제거하는 것인데 막상 지뢰의 
밭, 캄보디아 땅에 와 보니 내가 찾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 직원은 진열장에 놓여 있는 각종 지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어떤 지뢰는 발목 절단용이고 또 어떤 것은 더 위협적인 폭파력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지뢰 생산국도 여러 나라였다. 도대체 왜 인명을 살상하는 
지뢰를 생산할까?
  지뢰를 생산하지 않고 수출하지 않고 묻지만 않았더라면 지뢰를 밟아 사고를 
당하는 일도 없고, 또 그것을 제거하는 막대한 비용도 들지 않을 틴데... 나는 
그 사람이 전해주는 지뢰에 대한 두툼한 자료를 받아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여러 정파 사람들이 초대된 저녁 식사

  그날 밤 르네 판 여사는 저녁 식사에 우리와 MRA 지도자들, 손 수베르 씨를 
함께 초대했다. 그러나 그 초대에 모여든 또 다른 손님들은 놀랍게도 작년 
스위스 평화원탁회의에서 만났던 여러 정파의 대표들이었다. 누가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얼굴이 낯익고 또 그들이 나를 반겼다.
  나는 그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에게 태극선을 선물하고 르느 판 여사에게는 
매듭 노리개를 선물했다. 걸걸하고 활달한 그녀는 당장 자기 가슴에 달아 준 
노리개를 여러 손님에게 보여 주며 기뻐했다. 그 순간 나는 손 수베르 씨의 
부인의 선물을 갖고 오지 않은 것이 실수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손 
수베르 씨에게 부인을 만나는 기회에 선물을 전하겠다고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는 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은 독신이라고 했다.
  쉰두 살의 캄보디아 국회 부의장 손 수베르 씨는 꿈꾸는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햇볕에 나가 그을려 보지도 않았을 것만 같은 그가 캄보디아처럼 
정파 대립이 심한 정치 판국에서 어떻게 국회 부의장을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지금 손 수베르 씨의 초청으로 캄보디아에 왔지만 짧은 시간 단 한 번 
한국에서 만났던 것이 고작이고, 일본의 소마 여사가 소개한 대로 도덕성이 
강한 지도자란 것 외에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한국에서 
받았던 첫인상 느낌 그대로 매우 조용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말소리도 
크지 않고 입술에서 스며 나오듯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입지 않은 베이지색 국민복 같은 옷을 혼자 
입고 있어 더욱 검소해 보였다.
  캄보디아의 중요 정치 인사들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파리의 알랭 타트 
씨와 영국의 데이비드 체너 씨는 마치 캄보디아 평화 조정관들처럼 보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주로 불어로 말했고 영어는 잘 사용하지 않아 나는 대화의 
흐름을 잘 알 수 없었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이 나라의 전 부수상이었던 남편이 희생된 르네 판 
여사는, 모든 불행을 떨쳐 버리고 MRA 활동에 열중하며 캄보디아의 여러 정파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서로 대화하게 하고 또 미래를 위해 단기 교육자 
양성 코스를 운영하는 등 열심히 살아가는 듯 했다. 손 수베르 씨를 통해 이미 
받은 1만 달러를 고마워하는 그녀에게 다시 5,000달러를 더 건네 주었다. 1만 
5,000달러, 1,200만 원의 후원은 내 스스로 캄보디아 국민 교육을 위해 정한 
성금이다. 
  처음 먹어 보는 캄보디아 음식을 우리 나라 음식처럼 아무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마치 시루떡을 엎어 놓은 듯한 밥을 조금씩 덜어다 
먹어야 했다. 닭고기 국물로 지었다는 밥에는 부스러기처럼 만든 닭고기가 밥에 
섞여 있었다. 오이와 당근에 생강을 넣은 새콤달콤한 김치도 먹을 만하고 우리 
나라 잡채와 비슷한 음식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음식 가짓수는 몇 가지 안돼도 
모두 입에 맞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시원한 코코넛 물맛은 담백하고 
사탕수수물은 신선함을 더해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도 조심스럽게 지뢰 문제를 화제로 삼아 보았지만 역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캄보디아의 지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비해 그들은 자기 나라 국토에 묻혀 있는 지뢰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거리의 아이들 집' 낙성식

  한국을 방문한 손 수베르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전달한 2만 달러는 캄보디아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소박한 정성이었다. 그러나 손 수베르 씨는 뜻밖에도 그 
기금으로 고아원과 규모가 작은 기술 학교를 마련했다며 내가 캄보디아를 
방문하면 그때 낙성식을 하겠다는 서한을 보내 왔다. 그리고 그 같은 시설을 
마련하는 데는 1만 달러 정도가 부족하다는 내용도 씌여 있었다.
  우리는 도착한 다음날, 고아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된 차량에 나누어 
탔다. 그 고아원은 프놈펜으로부터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캔달스레암필이란 
곳에 세워졌다고 했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 커다란 목조 건물이 세워진 행사장에 
도착했다. 미완성처럼 보이는 1층 건물은 고아들의 주거 공간이라고 했다. 건물 
중앙에는 '서울 원불교 강남교당 후원으로 세워진 고아원'이라고 써 붙여 
있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행사장에 쳐 놓은 텐트가 세찬 바람에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손 수베르 씨 부모님과 몇 명의  스님들 그리고 손 수베르 
씨에게 관심 있는 외국 사람들과 캄보디아 사람들이 모인 듯이 보이고 "프놈펜 
포스트지" 등 언론사에서도 나와 있었다.
  손 수베르 씨가 먼저 경과 보고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았고, 다음은 내가 
인사할 차례였다. 나는 작은 성금 2만 달러가 기초가 되어 부모 잃은 거리의 
아이들에게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기쁘다는 말과, 앞으로 이 집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장래가 밝기를 염원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나의 말은 손 수베르 
씨가 캄보디아 말로 통역했다. 마지막으로 손 수베르 씨의 아버지 손 산 전 
수상이 캄보디아 말로 격려사에 해당하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연설하는 
그분의 모습에서는 경륜 있는 노정치가의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스님들께 예물을 증정하는 순서였다. 나에게도 예물을 
주며 가장 연장자 스님에게 전하라고 했다. 나는 그곳 예절과 풍속대로 절반은 
앉은 자세로 나보다 젊어 보이는 스님께 그 예물을 봉정했다. 나의 예물을 받는 
스님은 마치 목석같이 무표정하게 앉아 그 물건을 받으면서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가벼운 목례마저도 하지 않았다. 손 수베르 씨도 나처럼 예물을 증정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자 나에게 2층으로 오르는 입구의 테이프를 자르라고 했다. 
오색 테이프가 절단되자 가장 먼저 오르는 사람은 스님들이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2층은 칸이 막히지 않은 넓은 공간이었다. 사방이 탁 트여 
맞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고 바닥에는 마루가 까려 있었다. 앞선 스님이 물이 
담긴 그릇에 솔잎을 담가 새집 이곳 저곳에 뿌리면서 독경을 했고 어린 
승려들도 합장하고 줄지어 독경을 했다. 우리도 합장하고 그 뒤를 따랐다. 손 
수베르 씨는 귓속말로 저 어린 승려들과 몸이 부딪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며 
그것이 이 나라의 규율이라고 했다. 열대여섯 살 먹어 보이는 그 어린 스님들도 
권위 의식이 무거운 옷을 입고 있는 듯 표정들이 잔뜩 굳어 있었다. 나는 소승 
불교를 피부로 느껴 보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독경 행사가 끝나자 뒤편 창고 건물 같은 곳에 모여 점심 식사를 했다.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먹어 보이지 않던 음식들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아 
국수가 담긴 그릇만 들고 서서 먹었다. 손 수베르 씨의 노부모님들께서는 나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다며 매우 고마워하셨다. 품위가 몸에 베어 있는 
듯이 보이는 그 어머님께 손 수베르 씨 부인에게 주려고 했던 매듭 노리개를 
달아드렸다.

  때마침 건기여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대지는 바짝 마르고 우기 때 이리저리 
파놓은 굵은 흙덩이들이 돌보다 더 단단했다. 풀들은 마르다 못해 늦가을 
들판처럼 누렇다.
  행사를 마친 우리는 고아원 주변에 있는 난민촌을 방문했다. 태국 국경지대를 
지나던 난민들이 동아와 이제 막 정착촌을 이루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손 수베르 씨에게 무엇인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아직 
생계에 대한 뚜렷한 대책이  없어 막막한 상태임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아무 희망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딱한 사정이 안됐고 
난민들을 직접 만난 기회가 뜻 깊다고 생각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행자 수표를 봉투에 담아 전달하고 그곳을 떠나왔다.

     당황스러웠던 삼푸메스 사원에서의 설법

  프놈펜에 돌아와 르네 판 여사에 의해 안내된 곳은 삼푸메스 사원이었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청중이 모여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르네 판 여사는 
민망하게도 앉아 있는 청중 속을 뚫고 나를 앞쪽으로 안내했다. 또 내가 그곳에 
이르자 앞에서 설법하던 스님은 서둘러 말을 끝냈다. 르네 판 여사는 이제부터 
내가 강연 할 차례라고 했다. 
  그곳 사람들은 나에게 일정표 하나만 건네 주고 자세한 설명도 없이 계속 
진행하고, 나는 허겁지겁 따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일정표에는 '삼푸메스 사원 
담마 교습 시간에 설법 강의'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아무 설명도  
못 들었던 나는 다만 그곳에 참예하여 설법을 듣는 기회가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내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이미 청중들 앞에 인사하고 서 있었으며 르네 판 여사가 캄보디아 말로 
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무슨 말로 나를 소개하는지는 몰라도 순진하고 순박해 
보이는 청중들은 이미 나에게 잔뜩 호감 있는 시선을 보내 오고 있었다.
  겨우 의사 소통밖에 할 수 없는 영어 실력인데도 인도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서도 나를 무작정 청중들 앞에 내세우곤 하더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청중들이 내가 말하는 영어를 직접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할 르네 판 여사가 나의 말을 이해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와는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눈 터라 내가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도 말뜻을 
짐작할 것이라고 믿고 나는 강연을 시작했다.
  준비한 강연 내용은 따로 없어도 지난 5년 간 내 자신이 캄보디아에 관심을 
갖고 했던 일과 어느 날 밤 손 수베르 씨의 전화 한 통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이 나라에 박혀 있는 지뢰 
제거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라는 내용들을 말했다. 토막 말은 그런대로 할 수 
있어도 영어로 원고를 작성하는 실력이 없어서 나는 본래 원고 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단어를 동원해서 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말할 수는 없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의사 표시는 내 나라 말처럼 막힘 없이 술술 하는 것이 내게 
붙은 새 버릇이다.
  르네 판 여사가 말을 보태어 통역을 잘했는지 청중들은 감동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청중들의 반응에 가속이 붙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신이 나서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삼십 분도 더 지나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 특히 대다수의 나이 든 여성들은 머리를 
깎고 하얀 블라우스에 긴 검정 치마 모양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훌륭한 수도자의 모습으로 티없이 맑고 인자해 보였다.
  그러한 청중들과 마주하고 있는 동안 나는 이 나라가 대량 학살이 자행되고 
그래서 증오와 분노가 들끓는 땅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천심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그 선한 눈망울과 
교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극락에 와 있기라도 한 듯한 감동으로 
나를 꽉 채웠다.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모두 따라 나와 미소 짓는 얼굴로 나의 
손을 만져 보려 했고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자신의 손을 잡아 주기를 바랬다. 군중 속에 싸여 있는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데이비드 체너 씨는 통로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를 맞아준 파리의 알랭 타트 씨도 나의 강연이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어쩌면 대중 앞에 나서서 강연을 해야 된다는 아무 부담도 못 느끼고 있다가 
엉겁결에 청중 앞에 서 버렸기 때문에 매우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열정을 다했던 일에 대하여 말할 때는 나는 아마 강한 신념에 차  
있었을 테고 매우 소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어쨌든 뜻밖의 강연을 하고 수백 
명의 청중이 깊이 공감해 주는 경험을 했다는 것은 그간의 캄보디아에 쏟았던 
노력에 대한 보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같은 반응은 지뢰 제거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는 나를 고무시키기도 했다.
  놀랍게도 불교 국가인 캄보디아에는 비구니 승단의 조직이 없었다. 머리를 
깎고 수도복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여성들은 스스로 계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수도자들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캄보디아 여성 수도자들은 어지러운 사회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뜻밖에 한국의 여성 종교인이 자신의 
나라, 캄보디아를 위해 걱정하고 또 그 일을 위해 자기 나라까지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고마웠던 것이다. 사원을 떠나는 나를 서운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독특한 친근감을 느끼면서 헤어졌다.
  그곳에서부터 잠시 걸어서 이른 곳은 스위스에서 처음 만났던 마하 고사난다 
스님이 처소였다.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지난해 스위스에서 열린 캄보디아 
평화원탁회의 때 처음 만났지만 넘쳐흐르는 자비와 천진 면목을 엿볼 수 있어 
그분의 인격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시급한 현안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던 나에게 지뢰 제거의 문제를 제시했었다. 나는 그때 그 
말을 그분의 지혜의 판단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당초 영국의 데이비드 영 씨가 
제안했던 캄보디아 지뢰 제거 문제를 나의 인생의 큰 과제로 받아들였었다.
  나는 캄보디아의 지뢰 저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 나라를 방문했고 또 지뢰 
제거의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에 마하 고사난다 스님을 만나는 
감회는 각별했다. 나는 그분이 계신 2층으로 안내되었다. 그분은 인자한 
미소만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가슴 깊이 묻어 나오는 만남의 기쁨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스위스에서 만난 이후 스님은 회계사 승산 스님의 초청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셨었고 그때 원불교 강남교당에 체류하셔서 어 가까운 인연이 
되었다.
  나는 캄보디아를 방문해서 있었던 일들을 열심히 보고하듯 말씀드렸다. 
말없이 스님과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알랭 타트 씨와 데이비드 체너 씨는 자못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스님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 누구를 대할 때나 항상 
인자한 미소만 머금고 바라볼 뿐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정중히 몇 마디의 
말씀을 드리며 어떠한 영감을 얻고자 할 뿐인데, 내가 아무 스스럼없이 
그분에게 여러 말씀을 드리는 것이 너무 예외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스님 곁을 떠나 오려 하자 스님은 나의 핸드백을 먼저 챙겨 들고  
밖에까지 따라 나오셨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에서는 캄보디아 불교 최고 
지도자의 격식과 권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이 전개하고 있는 
평화 운동 '담마 에트라' 간판이 걸린 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겸손함과 
친절함을 전해 주시는 마하 고사난다 스님과 작별했다.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

  셋째 날, 프놈펜 일정표에 따라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문화, 종교 장관을 
예방했다. 장관실에 들어설 때까지도 나는 누구를 왜 찾아가는 줄도 모르고 
따라갔다. 그러나 장관실에서 나를 반겨주는 헤안 나라트 문화, 종교 장관은 
스위스 평화원탁회의 때도 만났고 바로 그저께 밤에 르네 판 여사의 집에서도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분은 매우 친절했다. 그 자리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분의 스님과 몇 사람이 더 배석하고 있었다. 장관은 격식을 갖추어 나의 
캄보디아 방문을 환영했고 앞으로도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희망한다며 선물까지 
주었다.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던 스님은 오랜 내전으로 사원마다 피폐하여 보수가 
시급하고 승려들의 교육 문제 또한 절실하다며 승려 장학금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했다. 캄보디아 승려 장학금은 어제 마하 고사난다 스님께 
전달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캄보디아에 대한 나의 과제는 오직 지뢰 제거의 
일로 한정하고 있다고 나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나를 환대해 준 장관의 입장을 
헤아려 많진 않아도 성의를 봉투에 담아 스님께 전해 드리며 너그럽게 받아 
달라고 했다.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모여진 성금, 그 공금은 얼마나 소중하고 또 무서운 
돈인가? 그 돈의 사용처를 결정할 때에는 무지와 빈곤, 질병 그리고 평화와 
종교 협력이란 틀 속에서 쓰지만, '갓난 아기가 어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듯한 일은 긴급한 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어렵고 곤란한 곳의 
요청이라 하여 다 들어줄 수 있는가? 그런데도 도움을 청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능력을 잘못 알고 기대를 갖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날도 그 노스님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매우 미안했다.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장관실을 나설 때 그날 아침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갔다. 아침 식사로 토스트 두 쪽에 주스나 커피 한 잔만 마시면 2달러, 
1600원이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 중에 무심히 달걀까지 먹겠다고 주문했을 때 
나는 달걀은 한국에서나 먹지 이 어려운 나라에서는 달걀도 먹지 말자고 
했었다. 자기 경비를 스스로 지불하는 일행에게도 그와 같은 절약을 강요했다. 
나는 한국에서 올 때부터 값비싼 호텔에 들지 않겠다고 하여 말이 호텔이지 
아주 작은 여관과 같은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비싼 호텔에 머물지 않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결같은 나의 여행 습관이기도 하다.
  프놈펜에서 공식 일정을 마친 우리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앙코르와트에 가기로 했고 우리의 안내자는 그곳에 볼일도 있다며 손 수베르 
씨가 맡기로 했다. 어떻든 이 나라 국회 부의장의 안내를 받게 되어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떠나기에 앞서 손 수베르 씨의 안내로 캄보디아 국회 
의사당을 구경하고 그분의 집무실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항공 편으로 
시엠레아프를 향해 출발했다.
  분명 남의 나라인 캄보디아지만 나에게는 내 나라 못지 않게 깊은 관심과 
애정이 가는 캄보디아 땅을 비행기 창 밖으로 내려다보았다. 열대 기후인데도 
산림이 풍성하지도 않고 토양도 비옥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손 수베르 씨의 초청으로 이곳까지 왔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를 이해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 나는 캄보디아의 기후로 화제의 문을 
열었고 그는 열대 몬순 기후인 이 나라의 기후에 관하여 설명했다. 11월부터 
그는 열대 몬순 기후인 이 나라의 기후에 관하여 설명했다. 11월부터 5월까지가 
건기이고 10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에 해당한다고 하며, 5월부터 10월 말까지가 
우기이고 그때는 매우 더울 계절이라고 했다.
  시엠레아프에 도착한 우리는 바이욘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식사를 했다. 
이곳까지 오는 그의 항공료도 우리가 계산하도록 자연스럽게 받아 주었다. 
우리를 굳이 대접하려면 못할 형편도 아니겠지만 우리가 모든 경비를 쓰도록 
하는 그의 아량에서 오히려 청렴한 정치인이라는 믿음이 갔다.
  시엠레아프는 작은 도시로 매우 조용하지만 여기저기 우거져 있는 아름드리 
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흙탕물의 개울에서 
어린이들이 멱을 감으며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 수 캄보디아의 적십자 부총재이기도 한 손 수베르 씨는 시엠레아프 
지부에 들러 그곳 직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보고 받은 후 우리 일행과 두 명의 
직원과 함께 지프에 올라 어디론가 향해 달렸다. 총기를 소지한 대여섯 명의 
군인이 탄 군용 트럭이 우리보다 앞서 달렸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에는 도로가 
따로 없어도 평지이면 아무 곳이나 마구 달렸다. 줄곧 뽀얀 먼지를 피우며 
달리는 군용 트럭을 따라 우리 차도 달렸다. 어디쯤엔가는 차를 세우고 초소에 
들러 우리의 행선지에 대한 안전 여부를 확인하고 다시 달렸다.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정글 지대를 통과할 때는 어디선가 총성이 들려 올 것만 
같아 몸이 더 작에 움츠러들고 절로 숨죽이게 되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과 마주칠 땐 말로만 듣던 베트콩인가 싶어 오싹해졌다. 시골의 
오막살이에 사는 주민들은 우리의 차량을 넋 놓고 바라보았고 꾀복쟁이 
어린이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시간 쯤이나 달려 도로를 건설하는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손 
수베르 씨는 자신의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뙤약볕 아래를 걸으면서 현장 
책임자로부터 보고를 받아 열심히 기록했다. 한참을 더 걸어간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손 수베르 씨는 온화한 음성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격려했다.
  앞 차에 타고 왔던 군인들은 손 수베르 씨를 사방으로 에워싸고 등을 보인 
자세로 총부리를 겨누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마을이 보이지 않는 광야뿐이었다. 어디선가 숨어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무리가 있을 것만 같아 막힘 없는 광야가 허허롭게 느껴졌다. 나는 
긴장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손 수베르 씨를 바라보며 군인들이 당신을 위해 
저렇게 경호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미소 담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당신의 
안정을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생소한 상황을 이리저리 파악하고 나서야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았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일꾼들이 처음 보는 내 모습이 낯설어서인지 
퀭한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참담해 보였다. 
이가 빠진 할아버지, 며칠을 머리도 감지 않고 빗질도 해보지 않은 것 같은 
모양을 한 아낙네들, 고작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 그리고 다박머리 
소녀까지, 온 식구가 나와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 수베르 씨는 세계식량기구의 원조를 얻어 농촌에 도로를 닦고 그 일을 
하는 주민들에게는 식량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일판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큰 공사장에는 현대적인 
기계 장비를 하나도 없고 삽과 괭이뿐이었다. 그리고 삽과 괭이로 땅을 판 흙을 
삼태기에 담아 위로 퍼 올리고 있었다. 흙을 퍼 올려 만들고 있는 넓은 도로 
아래엔 직사각형의 깊은 웅덩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우기에 많이 내린 빗물을 
모아 관개용으로 쓰기 위해 그렇게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웃옷을 벗어제친 채 
삼태기로 흙을 퍼 올리는 어린 소년들이 열심히 일할 때마다 연약한 갈비뼈가 
드러났고 그들 모두는 허기져 보였다.
  그들의 모습이 하도 딱해 보여서 빵이나 과일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 수베르 씨는 빵과 과일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나에게 반문했다. 
안타까워서 쩔쩔매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손 수베르 씨는 한국에 돌아가거든 
히말라야 사람들에게 보내 듯 이 사람들에게도 헌옷이나 모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를 선뜻 아무 대답도 못하면서 '그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라고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때마침 물이 귀한 건기여서 옷을 빨아 
입기도 어려웠는지 허름한 옷차림이 한결 남루해 보였다.
  헌옷을 보내겠다는 대답을 기꺼이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순 수베르 
씨는 자신이 했던 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리고 했던 말을 그렇게 쉽게 거두어 들이는 손 수베르 씨도 너그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이런 교감을 하는 것은 빛이 지나가듯 짧은 순간의 
일이다. 
  손 수베르 씨가 그들에게 나를 뭐라고 소개하는지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친근감이 어린 시선을 보내 왔다. 밀짚모자를 
눌러 쓴 아낙네, 수건으로 태양을 가리느라 아무렇게나 머리를 틀어올린 아낙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궁상맞고 혈색 없는 얼굴들이지만 
미소 짓고 있는 얼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하고, 그들의 까만 눈망울들이 
유난히 빛나고 있어 나는 이이 그들에게 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머리 속은 
빨리 암산을 하는 사람처럼 바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랜 내전을 
치르느라 물자가 귀해서 이 지경에 이른 사람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이 
군중들을 어떻게 못 본 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또 열병을 앓을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헌 옷을 모아 분류하고 포장하여 컨테이너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큰일인가를 나는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도울 때 충분히 경험했었다. 
그리고 당사국으로부터 무환 수출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돕기 위한 큰 결단을 내리려 
하자 어려웠던 옛일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나의 머리 속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는 마치 빠져 나갈 묘수를 찾는 사람처럼 우리 나라와는 국교도 없는 
캄보디아에 어떻게 옷을 보낼 수 있느냐고 손 수베르 씨에게 말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적십자사를 통해 보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이 이미 전해져서인지 그 많은 사람들은 이미 
눈빛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큰 결심을 하면서 흙 묻은 그들 손가락에 
나의 손가락을 일일이 걸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도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캄보디아에 헌옷을 모아 보내는 일을 또 시작한 
셈이다.
  그 사람들과 헤어진 손 수베르 씨는 또 어딘가를 시찰해야 하는지 군용 
지프를 앞세우고 더 깊은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점점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띄엄띄엄 보이는 집들은 야자수 잎을 
엮어 얼키설키 벽을 둘러 비바람만 막을 정도로 약해 보였다. 그리고 집집마다 
물을 저장해 놓고 쓰는 용기처럼 보이는 큰 검정 고무 항아리 같은 것도 
보였다. 나는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원시적인 삶을 보는 듯했다.
  얼마를 다렸을까? 외딴 곳에서 가게 하나를 보았다. 나는 그 가게를 꼭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세워 달라고 하여 가게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엔 
슬리퍼 한 켤레, 가늘고 이리저리 구부러진 양초 몇 자루, 칫솔, 비누, 잎담배, 
소금, 마늘 그리고 멸치보다 굵은 말린 물고기, 사탕, 과자 등이 골고루 놓여 
있었다. 손 수베르 씨는 비닐 봉지에 담긴 것을 가리키며 캄보디아의 김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 김치와 멸치만이 캄보디아의 것이고 칫솔, 양초, 슬리퍼 등은 
모두 태국에서 수입한 것들이라고 했다. 이제 막 전쟁의 혼미 속에서 빠져 나온 
캄보디아는 유리컵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저것 조사하듯 물어 본 것이 민망해서 얼마간의 돈을 가게 주인에게 전해 
주려고 하자, 온화하기만 하던 손 수베르 씨는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며 우리 
국민들에게 나쁜 버릇을 들이지 말아 달라고 냉정한 목소리고 말했다. 그리고 
물건을 사지 않았는데 왜 돈을 주느냐고 따져 물었다. 너무 당황한 나는 
사탕이랑 과자를 주섬주섬 봉투에 담고 정당한 계산을 했다. 내가 손 수베르 
씨에게 정중하게 잘못을 사과하자 그는 그 과자 봉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그는 금세 온화한 음성으로 자기를 호위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그 과자를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도로 공사가 완료된 한 지점을 확인하고서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나는 
그들 민가에서 한 밤을 지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인간의 더 
원초적인 삶과 부딪쳐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되지 않을 일인 줄 알면서도 그곳 
주민들과 함께 지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손 수베르씨는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듯 밤이면 크메르 루주군이 나오기 때문에 불안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캄보디아에 완전한 평화가 오는 날 내가 민가에서 머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오지의 마을에서 다리 하나가 없는 아녀자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는 지뢰 희생자라고 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새 도로를 닦는 동안에도 두 명의 인부가 지뢰로 다리를 잃었다고 했다.
  그 뒤 한 스님이 사원의 개발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손 수베르 씨를 산속으로 
안내할 때는 산길 어디선가 지뢰가 터질 것만 같아 나는 오금이 잘 펴지지 
않았다. 그리고 땅을 밟는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발부리를 세우고 사뿐사뿐 
오솔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시공을 초월한 데서 불어오는 바람

  시엠레아프의 둘째 날은 기대감을 갖고 찾아온 앙코르와트에 가는 날이다. 
그런데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르며 온갖 뒷바라지를 해주고 사진도 찍어 주던 
신현대 교도가 병이 났다. 모과 팔에 가려움증이 심해 약을 구해 발라도 좀처럼 
증세가 수그러들지 않아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손 수베르 씨의 주선으로 
적십자사에 가서 의사를 만나 보았다. 의사의 말은 강렬한 햇볕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그래서 신현대 교도는 그렇게도 가보고 싶어 했던 
앙코르와트를 포기하고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앙코르 지역 유적들은 크메르 왕조의 전성기인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건축된 
사원과 궁궐이라고 한다. 크메르 왕조가 현재의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고 동남 아시아의 최대 강국일 때 이룩한 
위업이다. 그 당시 인도와 밀접한 교류를 갖으며 불교와 힌두교를 받아들였던 
관계로 인도식 문화가 번성했고 그때 앙코르와트가 건설됐다고 한다. 
앙코르와트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사원으로 12세기인 1113년부터 약 
30년 동안에 걸쳐 건립되었다고 한다. 
  해뜨기 전 이른 아침에 찾아간 앙코르와트는 웅장하고 거대한 육안에 들어온 
크고 웅장함은 가히 무엇에다 비유할 수가 없었다. 이집트에서 보았던 
피라미드의 느낌과도 달랐다. 양코르와트와 키를 재려는 듯 쭉 뻗어 있는 
야자수 몇 그루가 앙코르와트와 잘 어울렸다. 인간의 힘으로 이 무거운 
바위들을 어떻게 하늘 높이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
  또 가까이 다가서서 조각품 하나하나를 대할 때는 경이롭기만 했다. 사람의 
힘으로 이 많은 돌들 하나하나에 어떻게 이처럼 섬세하고 정교한 예술혼을 
불어넣어 조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앙코르와트를 접하고 있으면 마치 우주 
전체가 예술품으로 꾸며진 듯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영원히 풀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신비함에 숙연해진다.
  중앙의 탑은 표면으로부터 65미터나 되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 장비를 
빌린다 해도 바위 하나하나를 들어올려 피라미드형으로 탑을 쌓아 올리기는 
오히려 어려울 듯 했다. 특히 끝간데 없이 펼쳐진 1층 회랑 내벽의 얇은 
부조들에 새겨진 힌두교의 신화도는 크메르 건축 미술의 최고의 경지라고 
일컬어진다. 인간의 영감과 예술혼이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다시 깨닫게 된다.
  이같이 위대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종교의 
위력이다. 종교에 대한 갚은 신심의 바탕 없이는 불가사의한 예술품의 완성을 
위한 끈기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힘, 그 극치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뿐이란 생각을 나는 다시 해보게 되었다.
  캄보디아가 태국의 침략을 받아 앙코르와트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정글 
속에서 400년 동안이나 숨어 있는 것을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어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야말로 크메르 
만족만의 것이 아닌 인류 선조들의 유산으로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유적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관광지로 잘 개발하면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선조들의 문화 유산만으로도 잘 살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앙코르와트를 둘러보며 감탄할 때마다 손 수베르 씨는 매우 기뻐하며 또 
만족스러워 했다. 고건축 전문가인 황의수 교도는 앙코르와트의 그 불가사의한 
신비함들이 손에 하나하나 잡힌 듯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사진 찍기에 
바빴다. 
  작렬하던 태양이 서쪽으로 벗어나자 땅도 식고 공기도 서늘해졌다. 그리고 
유적지에서 부는 산들바람은 시공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리도 쉴 겸 그늘진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손 수베르 씨도 함께 
앉았다. 우리는 앙코르와트 석조 건물의 작은 고임돌처럼 느껴졌다. 화제는 
나의 관심사인 오늘의 캄보디아가 있기까지 수난의 역사, 그 시원을 거슬러 
올라갔다. 
  90년 간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던 캄보디아는 1945년 시아누크 국왕의 지도 
아래 독립을 선언했으나, 정변에 의해 1970년 시아누크는 베이징으로 망명하게 
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이 정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역사는 
숨 가쁘게 변하여 1976년 다시 시아누크 측의 핵심 세력인 크메르 루주가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민정부를 수립, 도시 주민의 농촌 강제 이주 정책을 펴는 
바람에 프놈펜은 4년 간이나 텅 빈 도시였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는 이 같은 강제 노동, 공포 정치를 펴는 한편 지식인, 승려 등을 
대량 학살하여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로 불렸고 국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학살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굶어 죽는 사람, 온갖 핍박을 견디다 못해 죽은 
사람들을 모두 합하면 그 희생자 수가 2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 동맹국의 침략을 받아 크메르 루주는 
1979년 전복되었으나 지금도 게릴라전을 꾸준히 펼치며 캄보디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손 수베르 씨는 
1979년 아버지 손 산을 돕기 위해 귀국, 태국 국경 정글에 있던 손 산 망명 
캠프에서 난민들을 돕기 위해 식료품과 의약품을 구해 운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손 산 씨는 4대 정파 중 하나인 불교자유민주당(BLDP)의 으뜸 
지도자이고, 17년 동안 각 분야의 각료 생활을 하다가 1967년 시아누크 왕 
시절에는 수상직을 맡기도 했다.
  UN의 캄보디아 임시 행정 기구인 운탁의 도움으로 1993년 5월 23__28일에 
선거를 치르고 9월 말 손 수베르 씨는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했다. 
캄보디아와 손 수베르 씨 일가에 대한 역사 공부를 마친 나는 좀 하기 어려운 
질문, 그가 왜 독신인가에 대하여 물어 봤다.
  파리에서 정글의 망명 캠프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약혼녀는 결혼을 하자고 
서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결혼하여 가정 생활을 하면 망명 캠프의 
난민들을 돌볼 수 없을 것 같아 나락 안정되면 결혼을 하자고 미루자 약혼녀는 
참지 못하고 떠나 버렸다고 했다. 그의 독신 생활은 캄보디아의 국가 운명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해질 무렵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뒤로하고 떠나려 할 때 어떤 소년이 손 
수베르 씨에게 테이블보를 사라고 졸랐다. 그는 그 물건이 소용이 닿지 않아 
살수 없다며 달래듯 거절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따라다니며 조르자 마침내 
그는 그것을 샀다. 그는 소년에게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느냐며 따뜻한 말로 
소년의 처지를 물었다. 또 영어로 구걸하는 한 소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영어를 참 잘하는구나! 어디서 배웠니?"
  그리고 소녀의 손에 적은 돈을 쥐어 주면서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격려했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가 
캄보디아의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길을 가다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앙코르와트의 경내를 벗어나자 잠시 잊고 있던 지뢰 걱정이 슬며시 나에게 
되살아났다. 나는 시엠레아프에 있다는 지뢰 제거 현장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원래  지뢰 제거 문제가 너무 엄청난 일이어서인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는 그날도 나에게 캄보디아의 지뢰를 제거하는 것보다 UN에 가서 
지뢰 생산국들이 지뢰를 생산하지 않도록 투쟁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시엠레아프에서 지뢰를 제거하고 있는 할로 
재단 사무소를 찾아가 그고 책임자인 영국 사람을 만났다. 그는 지금 
캄보디아는 지뢰와 전쟁을 하고 있다며 지뢰는 잠들지 않는 영원한 적군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캄보디아는 세계 최대 지뢰 매설국의 하나이며 지금까지의 
희생자만도 4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논밭에 묻힌 지뢰가 무서워 경작을 못해 
식량도 부족하다며 지뢰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캄보디아의 경제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한 해 동안 1.500명의 요원이 일하고 있으며 소요 경비는 1,400만 
달러에 이르지만 지금과 같이 일한다 해도 캄보디아의 모든 지뢰를 제거하려면 
300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지뢰 하나를 묻는 데 드는 비용은 
5달러이지만 그 하나의 지뢰를 제거하는 데는 1,000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뢰 하나를 제거하는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하는 것은 내가 알아내고자 했던 
중요 관심사였는데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해주었다.
  영국의 할로 재단은 현재 모잠비크, 아프가니스탄, 보스니아, 앙골라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뢰 제거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프놈펜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가면 모든 자료를 얻을 수 있다며 그곳 전화 번호를 적어 주었다.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하루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이해하고 그리고 
지뢰 제거 문제에까지 접근했으니 소득이 많은 하루였다. 호텔로 돌아와 보니 
빈방에서 하루 종일 가려워도 손대지 않으려고 참으며 고행을 하고 있었다는 
신현대 교도의 피부병 증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고 더 악화되어 있었다. 이 
밤으로라도 프놈펜으로 돌아가야 병세를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지만 다음 날 비행기 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프놈펜으로 돌아온 우리는 병원으로 직행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적십자사의 
의사 말대로 햇볕 알레르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 약을 받아서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의 다음 일정은 바탐방 방문이었지만 신현대 교도의 병 때문에 
프놈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바탐방의 일부는 크메르 루주 거점 기지이기도 
하여 매우 위험한 지역이라며 알랭 타트 씨는 그곳 방문을 적극 만류했다. 그는 
어제도 로켓포탄이 날아왔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했다. 바탐방 방문 계획의 
취소를 주저하는 손 수베르 씨에게 알랭 타트 씨는 단호히 말했다.
  "박 교무는 캄보디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필요한 사람이니 보호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가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바탐방 방문 취소로 인해 손 수베르 씨에겐 여러 모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그는 행 메디첸다 스님이 이끄는 불교발전회와 연결하여 나의 
바탐방 방문을 계획해 왔었고, 그곳 어린이들의 학교 문제와 시골 주민들의 
실정을 내가 직접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의 
경험만으로는 내가 캄보디아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또 나에게 전쟁에서 돌아온 캄보디아의 불교계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어떻든 바탐방을 가지 않게 되어 하루를 벌게 되었고 나는 그 하루를 
유용하게 쓰는 새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프놈펜에 있는 지뢰 제거 
기관 할로 재단 사무실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알랭 타트 씨가 친절하게 앞장서 
주었다.
  찾아간 사무실의 벽에는 각 지역의 지뢰 제거 상황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사무원이 지뢰 제거 현장에서 걸려 온 무선 전화를 받느라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나는 사무원도 많지 않은 사무실을 보고 좀 허술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알랭 타트씨의 생각은 달랐다. 사무실에 돈을 많이 쓴다는 것은 지뢰 
제거 비용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러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할로 재단이 믿을 만한 기관이라며 앞으로 
나의 지뢰 제거 운동 기금은 영국의 할로 재단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자신의 견해를 말해 주었다. 할로 재단 본부는 영국에 있어 우리는 그 주소와 
전화 번호를 적어 왔다. 나는 지뢰 제거 기금으로 마련해 왔던 5,000달러를 
영국의 체너 씨에게 전달하며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할로 재단에 기탁해 
달라고 했다. 나는 지뢰 문제 때문에 캄보디아를 찾아왔고 이제 그 길을 
찾아냈으니 방문 목적이 달성된 셈이다.
  나는 지뢰로 희생된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는 시설을 방문하고 싶었고 알랭 
타트 씨는 기꺼이 안내해 주었다. 지뢰 희생자들은 주로 무릎 아래까지 다리가 
잘린 채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 그들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들처럼 멍해 
보였다.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의 눈빛이 얼마나 암울한 것인가를 그들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해 봐도 그들의 표정엔 아무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그저 좌절의 늪에 주저앉아 있는 듯이 보였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다행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방문하면서 나는 지뢰 제거 의지가 더 강해지고 있었다. 작은 위로가 
될까 하여 더 심한 상태의 사람과 좀 가벼운 상태의 사람들을 구별하여 20달러, 
50달러 등을 손에 쥐어 주고 나오면서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듯한 미안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난민들과 함께 사는 국회 부의장

  호텔로 돌아와 보니 낯선 사람이 손 수베르 씨가 보낸 의사라며 신현대 
교도에게 포도당을 주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돈으로 코코넛을 몇 통 사와 
병세에 도움이 된다며 신현대 교도에게 그 물을 마시도록 권하고 있었다. 그의 
용모로 보아 모든 것이 좀 궁색해 보였지만 매우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한결같이 미고 짓는 얼굴로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서 했다. 주로 
손 수베르 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클린'이라고 
부른다며 그의 청렴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의 집에서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손 수베르 씨는 노부모님을 모시고 난민 50명과 함께 살고 있는 매우 
훌륭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도 영어를 나처럼 잘하지는 못해도 의사소통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손 수베르 씨가 정말 난민들과 함께 살고 
있느냐고 반문하듯 묻고서는 난민들이 살고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순진하게도 앞장을 서 주었다.
  그를 따라간 집 대문 앞에는 두 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어떤 군중(?)과 마주쳤다. 30__40대로 보이는 여러 명의 
남성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불안해 보였고 행색은 초라해 보였다. 그들은 
방금 바탐방에서 올라 온 사람들로 손 수베르 씨에게 직장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불시의 방문이라 큰 결례를 범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그의 아버님 손 산 씨는 외출중이었고 어머님은 낮잠을 
주무시는 중이라고 했다.
  젊은 의사를 앞세우고 난민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개인 가정집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어떤 관청에서 온 것 같았다. 1층부터 마치 
사무실처럼 책상도 있고 프린트물들이 쌓여 있었다. 난민들은 낮 동안엔 일터로 
나가고 일터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의사는 
호기심 많은 나를 안내하는 것이 재미가 있는지 손짓을 하며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그곳은 손 수베르 씨 방이었다. 손님인 내가 봐도 되는지 
모르지만 방문이 열려 있었고 나의 시선은 이미 그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은 넓은 대청 같았지만 손 수베르 씨 처소는 매우 좁은 
공간이었다.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서류 더미, 방안 중앙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엔 늘 사용하는 듯이 보이는 향로와 향이 있었다. 수도자의 방을 
엿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방 한쪽엔 수수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의 
처소를 보는 순간 그의 청빈한 삶 그 모두가 전해져 왔다. 한 번 둘러 본 뒤에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호텔로 신현대 교도를 병문안 온 수베르 씨에게 조금 전에 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며,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으면서 내일 점심을 초대하려고 했는데 하루 먼저 갔을 뿐이라고 
했다. 내가 난민들을 보고 왔다고 하자. 처음에는 망명 캠프 정글에서 돌아온 
200명 의 난민과 세 채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제 모두 자신들의 삶터를 마련해 
떠났고 아직도 갈 곳이 없는 50명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여든세 살의 
아버지, 일흔다섯 살이 어머니 그리고 난민 50명과 함께 살고 있는 손 수베르 
씨의 생활, 그는 캄보디아의 국회 부의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캄보디아의 모든 
어려움을 혼자서 떠안고 사는 큰 자비 보살처럼 여겨졌다.
  그는 프놈펜을 떠나기 전에 살았던 자기의 집이 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인정해 주는데도 정부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프놈펜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집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매달 월세를 내는 집에서 
살고 있는 야당 인사임을 알 수 있었다. 그처럼 어려운 환경과 갖가지의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처럼 평화스럽고 온화한 인품을 유지할 수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의 처지가 하도 딱하게 여겨져서 그에겐 고향과 다름없는 프랑스에 
가서 살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프랑스는 자기 혼자서야 좀더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지만 지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살 이유가 없다고 손 수베르 씨는 대답했다.
  캄보디아를 떠나 오던 날 우리는 점심 초대를 받아 다시 그의 집에 갔다. 
식탁에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모두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매우 
정중하고 극진하게 우리를 대접해 주셨다. 밖의 날씨가 몹시 무더웠지만 그 집 
안엔 에어컨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공항에 가기 전에 한 군데 더 갈 곳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따라간 
곳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베틀 위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현재 캄보디아는 
20년의 내전으로 많은 남성들이 희생되어 여성 인구가 70퍼센트나 된다고 했다. 
손 수베르 씨는 그 여성들에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작은 직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장 옆에는 그 여성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을 맡아 돌보는 어린이집도 있었다.
  현재 캄보디아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손 수베르 씨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으면 그 장래는 매우 희망적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갔다. 나는 그들이 
북질하여 한 올 한 올 짜놓은 천을 몇 필 사서 주섬주섬 싸들고 나왔다. 그대도 
손 수베르 씨는 나에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일 텐데 왜 사느냐며 말리려고 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르네 판 여사와 그리고 파리로부터 와서 나의 
체류 기간 동안 알뜰히 보살펴 주었던 알랭 타트 씨 등이 친절하게 배웅 나와 
있었다. 그분들 모두와 헤어지자니 섭섭함으로 표현할 수 없는 또다른 감회가 
밀려왔다. 나는 비행기 트랩 위에 올라 아래에 서 잇는 여러분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캄보디아의 하늘과 땅을 가리킨 다음 두 팔을 넓게 벌려 허공을 
끌어안는다는 포즈를 취했다. 그것은 캄보디아에 대한 나의 애정의 표시였고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에 대한 약속이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어젯밤에 데이비드 체너 씨가 보여 주었던 '압사라의 
미소' 비디오 필름을 떠올리며 캄보디아의 평화를 빌었다. 그리고 잠시 상념 
속에서 인도의 히말라야 설산 라닥으로 갔다.
  작년(1994년) 9월 히말라야 라닥에서 우리가 보낸 겨울 옷의 '나눔의 축제'가 
있었다. 그때 나는 그곳 책임자 상가세나 스님에게 앞으로 캄보디아는 히말라야 
라닥의 동생과 같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캄보디아를 열심히 
돕더라도 동생인 캄보디아를 시샘하면 안된다고 타이르듯 말했었다. 나는 손 
수베르 씨와의 만남 이전에 그럼 말을 했었다. 다만 한 달 전에 스위스에서 
결심한 나의 캄보디아 과제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때 나는 나에게 여성적인 속성이 있다고 느꼈었다. 여성들이 첫 아이를 
출산하고는 그 고통 때문에 다시는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하다가도 어느 날 
둘째를 가지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듯 나고 히말라야 설산에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를 세우고 여섯 컨테이너 분의 의류를 8개월 동안 모아 보내면서 
어찌나 애를 먹었던지 두 번 다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아무도 시키지 않은 캄보디아의 지뢰 문제를 스스로 끌어안으려는 내 모습이 꼭 
둘째 아이를 가지려는 여성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미 수렁과도 같은 캄보디아에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가슴에 박힌 지뢰

  영국의 데이비드 영 씨가 처음에 캄보디아 지뢰 제거 문제를 제안했을 때, 
지뢰 제거는 UN 같은 데서나 하는 일이자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엄두나 내볼 
수 있는 일인가 하고 마치 태산을 옮겨 보라는 주문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다만 그분의 청을 가볍게 거절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에, 너무 크고 
또 막연한 문제였지만 성의 표시나 해보려 했던 것이 차츰 출발하여 캄보디아 
지뢰 제거 문제는 나의 화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스위스에서 걸려 온 낯선 
캄보디아 사람 손 수베르 씨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캄보디아의 지뢰 
제거 문제에 대해 끈질긴 질문을 했었다.
  오랜 내전을 겪었던 캄보디아를 돕기 위해 스스로 정해 두었던 과제물들을 
하나하나 집중적으로 해결해 나가면서, 그중 가장 큰 문제인 지뢰 제거 문제에 
대해서는 지뢰가 묻혀 있는 그 현장에 가서 상황을 파악한 후 방향을 무색하기 
위해 나는 캄보디아까지 찾아갔었다.
  캄보디아 땅에는 900만 명의 전체 인구 수보다 더 많은 1,0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다. 평균적으로는 하루도 지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날이 없다. 지뢰를 
밟은 무고한 양민들은 성한 다리나 팔을 잃고 맹인이 되어 한평생을 불구로 
살아가고 있다. 캄보디아는 인구 230명당 한 명이 불구가 된 상태라고 
통계자료는 밝히고 있다. 현지에서 지뢰 희생자들을 만나 보았을 때, 그들의 
절망적인 눈빛에서 오히려 살아 있다는 것이 저주받은 인생처럼 느껴졌었다.
  또 캄보디아에 고아가 많은 이유도 지뢰 때문이다. 건강한 가족들이 부지런히 
일해도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데, 부부 중 누군가가 불구가 되면 그 사람을 
한평생 돌보며 살길이 없어 결국 가정이 허물어지고, 그러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거리의 아이가 되어 보호받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지뢰가 묻혀 있는 땅에는 곡식도 심을 수 없다. 지뢰는 인명 살상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난을 부르고 있다. 전쟁을 하면서 적을 방어하기 위해 
잠들지 않는 병사로 지뢰를 묻었다지만, 그 지뢰는 전쟁이 끝나도 영원히 땅 
속에 숨어서 인명을 노리고 있다. 그래서 지뢰가 묻힌 땅은 공포의 땅, 재앙의 
땅으로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지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에서 
캄보디아 지뢰 소식을 접했다. 염소를 몰고 들판에 나갔던 소녀가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었는데, 그 동심은 한 발로 뛰며 고무줄 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또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갔던 남편이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고 돌아와 자신이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되는 불구자가 된 모습을 보았다.
  내가 방문했을 때 캄보디아는 전쟁의 혼미에서 막 벗어나 공장을 가동시키는 
일에는 아직 손도 댈 수가 없어서 유리컵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필품마저도 부족한 캄보디아 형편으로는 지뢰 때문에 나날이 사람이 죽고 
다친다 해도 그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UN이나 이웃 나라의 
도움으로 지뢰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땅속에 묻혀 있는 1,000만 개의 지뢰는 
결국 900명의 전 인구가 몸바쳐 폭파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지뢰가 묻혀 
있던 땅을 건강한 삶터로 바꾸어 거기에다 집도 짓고 농사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새로 태어날 다음 세대에게 남은 100만 개의 지뢰를 
무거운 업장의 유산으로 남겨 주어야 한다. 지뢰 제거를 지금처럼 열심히 
해봐도 100년 내지 30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캄보디아가 지옥과 
다름없이 생각되어 나는 캄보디아 지뢰 제거 운동에 발벗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뢰 제거 운동에 나선다 하여도 그것은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노릇이지 몇 개의 지뢰나 제거할 수 있을까 싶어 
자신이 더 작게만 느껴졌다. 나의 소박한 꿈은 수십 명의 팔다리도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예방 차원에서 지뢰를 제거하려는 것이고, 또 우리의 
노력으로 지뢰를 제거한 땅에 작은 평화의 마을이 하나라도 생겨나는 것이었다.

  나는 강남교당의 두 법회(수도 법회와 화요 법회)의 설법 시간에 캄보디아의 
지뢰를 제거하자고 호소했다. 현재 캄보디아에선 무고한 양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도, 어린 소녀가 염소를 몰고 들판에 나갔다가도 지뢰를 밟아 성한 
다리와 팔을 잃고, 또 파편이 눈으로 들어가 맹인이 되고 있으니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지뢰를 제거하자고 호소했다. 현재 캄보디아 실정으로는 한 
개의 지뢰도 제거할 수 없는 형편이라서 이웃 나라가 돕지 않으면 결국 
캄보디아 온 국민이 몸을 던져 지뢰를 캐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우리의 정성만큼 지뢰를 제거하자고 간절히 호소했다. 자기 수양도 
종교인에게 중요하지만 더 불행한 사람을 돕는 일과 그리고 철없는 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일을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종교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나도 
처음에는 남의 나라에 묻혀 있는 지뢰를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았듯이, 나의 
말을 듣는 우리 교도님들도 그럴 것만 같아 나의 말이 아무 공감도 얻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나는 비교적 판단과 결단이 빠르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기로 한 번 결심하면 
일구월심으로 하고 그 일로 노심초사한다. 때로 나는 지극하고도 간절한 염원을 
갖고 기도하면 그 염원이 하늘에 딱 닿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처럼 한 생각이 사무치고 사무치면 내 마음에서는 보이지 않는 폭풍이 일기 
시작한다. 그러면 강남교당 교도님들과 나의 고마운 인연의 둘레는 그 폭풍권에 
들게 되어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 나와 뜻을 함께 하여 결국 그 일을 성취의 
결과로 만들어 내곤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은 내가 하는 말 때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위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기에 나는 다만 심부름꾼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말에 
'애간장이 녹는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나의 애간장이 녹을 때, 나의 애가 탈 
때, 내가 애쓰고 있을 때 불가사의한 합력의 위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한다.
  나는 북인도 히말라야 라닥에 작은 배움터,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를 세울 때 
노심초사하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었다.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오고 옆구리가 
터질 것만 같은 증세가 생겼다. 어느 한의사는 너무 많은 근심 걱정을 하여 
뱃속에 기가 꽉차고 그 기가 막혀서 생긴 증세라고 했다. 캄보디아 지뢰 제거의 
일을 할 때도 나는 같은 증세가 재발했다. 지뢰 제거의 일보다 더 먼저 생겼던 
일, 하루 만에 손 수베르 씨에게 3만 달러를 챙겨 주고 그 일을 뒤치다꺼리할 
때부터 본병이 도지기 시작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증세에는 다른 
약이 없고 그 일을 이루어 내기만 하면 증세가 저절로 사라진다. 결국 큰일을 
할 때면 나의 건강이 담보로 잡히는 셈이다.

  3월 22일 프놈펜에서 귀국한 나는 5월 4일, 10만 달러(8.000만원)를 
캄보디아의 지뢰 제거에 쓰도록 영국의 할로 재단에 송금 처리했다. 캄보디아의 
지뢰를 제거하자고 호소한 지 40여 일 만의 일이다. 10만 달러의 성금이 그간에 
다 모아져서가 아니라 우선 목표한 만큼의 돈을 보내 보려야 걱정을 슬며시 
놓을 수 있고 그래야만 나의 건강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먼저 저지르고 
뒤에 수습하는 것이 나의 일하는 방식이 되어 버렸다.
  10만 달러는 지뢰를 제거하여 평화의 마을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고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던 목표액이었다. 그리고 그 만큼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몫을 할로 재단에 송금한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캄보디아 지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뢰 숙제는 끝을 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96년 5월에 영국의 할로 재단으로부터 뜻밖의 보고서가 날아왔다. 
우리가 보낸 10만 달러의 경비로 1995년 8월 10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 
캄보디아의 지뢰를 제거한 자상한 내역서였다. 지뢰가 깨끗하게 청소된 면적을 
3만 3.012평방미터로 약 1만여 평의 땅이 건강한 땅으로 회복됐고, 다리나 팔을 
앗아가고 시력을 잃게 하는 지뢰는 쉰여덟 개, 시설, 물자, 인원을 파괴나 
폭파시키는 폭발용 지뢰 UX2 서른한 개를 제거했다고 그 내용을 소상히 밝힌 
보고서였다. 
  우리의 성금으로 제거한 지뢰는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100여 명 이상의 
인명에게 미칠 재앙을 예방한 것 같았다. 지뢰가 제거된 1만여 평의 땅에서 
천진스런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마음이 상상되었다. 나는 캄보디아의 
지뢰 제거 기금을 송금한 후로는 더 이상 지뢰 문제에 대해서 생각되 하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뜻밖에 보내 온 그 보고서를 받아 보고 나는 지뢰 
제거의 큰 보람을 확인하게 됐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꿈틀거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매달 한 
개씩의 지뢰는 제거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살다 보면 1개월이란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 버리는가, 1개월마다 한 개의 지뢰를 꼬박꼬박 제거하면 
1개월마다 한 사람씩을 살려내고 1년이면 열두 명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 그같이 확실하고 좋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한 개의 지뢰 제거 비용 
1.000달러가 많은 돈이지만 만약 건강한 사람이 지뢰 때문에 다리를 잃어 그 
상처만 치료하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비용이 소용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구촌에 박힌 지뢰를 제거하는 일은 이제 내 인생의 과업이 되었고 도 
보람을 가꾸는 소중한 일거리가 됐다. 나는 맨 처음 캄보디아를 돕기 시작할 때 
몇몇 고도들에게 연간 100달러나 200달러씩을 희사해 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정성을 스위스 MRA 본부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님의 부인 신연균 교도의 쉼 없는 정성이 
큰 힘의 원천이었다. 더 많은 분들의 고마운 온정으로 캄보디아의 여러 일들과 
그리로 지뢰 제거의 큰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 교당 교도님들의 외부 
사업 기금을 지뢰 제거 비용에 쓰고 있다.
  남북이 대치중인 우리 나라도 지뢰 대국 중 하나이고 통일의 날이 오면 지뢰 
제거의 큰 과제가 남게 되는 셈이다. 현재 전세계 60여 개국 땅 밑에는 최소한 
1억 1,000만 개 이상의 지뢰가 묻혀 있다고 한다. 그 지뢰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의 발 밑에서 터질지 모른다. 연간 1만여 명 이상이 지뢰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고 있다. UN은 매년 10만 개의 지뢰를 제거하고 있지만 전세계에선 
매년 200만 개가 다시 매설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일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지뢰를 묻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뢰'는 제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아예 지뢰를 
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 더 이상 지뢰를 묻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력할 일이다. 현재 박혀 있는 지뢰는 정직하게 뽑아 내야만 무서운 
재앙을 예방할 수 있을 테니 어렵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지뢰는 반드시 캐내야만 
한다. 이 지상에 평화가 오게 하기 위해서.

     캄보디아에 옷 보내기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우리의 남은 옷을 보냅시다.
  --우리는 남 주기는 미안하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옷들이 장롱 속에 많이 
있는 넉넉한 형편입니다.
  --오랜 내전으로 삶이 고달픈 캄보디아 사람들, 열대의 나라에 살고 있는 
그들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원불교신문"과 "여성신문"에 광고를 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수집할 옷은 여름 옷 봄 옷, 가을 옷, 얇은 겨울 옷(어른, 어린이용)으로 
깨끗이 세탁한 옷을 환영합니다.
  헌 타월이나 여름 모자도 좋습니다.
  신발도 보내 주십시오.
  헌 운동화나 슬리퍼도 깨끗이 빨고 손질해 가져오시면 고맙겠습니다.
  옷을 모으는 기간은 '4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라고 명기하고 문의처는 
강남교당으로 밝혔다.
  캄보디아는 오랜 내전으로 물자가 귀해 수치심을 모르는 아이들에겐 아예 
옷을 입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시엠레아프의 도로 공사장에서 만나 본 
사람들의 입성도 모두 변변치 못할 뿐 아니라 남루하기 이를 떼 없었다. 현지 
사정을 내 눈으로 보고 돌아온 나는 캄보디아에 보낼 옷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은 캄보디아 사람들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또 그곳 적십자 부총재인 손 
수베르 씨의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옷을 가져와 봐도 여름 옷이라 좀처럼 쌓이지 않았다.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위해 옷을 모을 때는 두툼한 잠바나 오버코트 그리고 
담요 몇 장만 가져와도 금방 쌓이는 것 같았는데, 부피가 없는 여름 옷을 모아 
한 컨테이너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헌옷을 모으는 
일은 헌옷을 만드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가 헌옷을 주어 한 
컨테이너쯤의 물량을 채울 수 있을지 그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이 많은 것이다.
  한 교도가 나의 애태우는 모습을 딱하게 여기고 직장 동료에게 우리가 하는 
일을 말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인천의 어떤 복지회관으로부터 한 트럭분의 
헌옷을 희사받게 되었다. 나는 일이 반이라도 이루어진 듯 매우 기뻤다. 그러나 
막상 그 옷을 받아 보니 어느 회사 직원들이 궂은 일을 하는 현장에서 입었던 
단체복이라 우선 깨끗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였다.
  헌옷들이 모여지면 그중에서 입을 만한 성한 옷, 받아서 기분 좋을 만한 
정결한 옷들을 먼저 고른다. 그 일은 우리 교당 교도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 
단체복들은 하도 험상궂어서 일감으로 내놓기마저 민망할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래서 우리 교당의 교역자들, 정녀들이 그 일을 하기로 했다. 순명, 지은, 원공 
교무와 내가 몇 날 며칠 동안을 고르고 추리는 일을 하여 그 많은 단체복을 
모두 정리했을 때는 결국 반 타작밖에 안되어 버려야 하는 옷이 작은 트럭으로 
한 대 분도 더  됐다. 때마침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되던 때라 남은 옷을 
처리하는 일도 큰 부담이었다. 요즈음 옷은 헤져서 못 입을 옷은 없어도 우리가 
받은 단체복의 바지는 페인트 같은 물감이 묻어 있고 웃옷은 어김없이 목 
부위가 누렇게 땀에 절어 있었다.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보낼 옷을 정리할 때는 '이렇게 두툼한 잠바를 
입으면 따뜻하겠다. 이 옷은 질감이 참 좋구나. 이렇게 예쁜 색상의 옷을 
받으면 기분이 좋겠지...' 하며 마음이 기뻤었다. 그러나 열대 지방이라 여름 
옷만이 필요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옷을 고를 때는 모두가 후줄근해 보여 옷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 하던 나의 걱정은 "여성신문"의 광고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삽시간에 사라졌다.
  "여성신문" 독자는 전업 주부만이 아니라 직장 여성도 많아서 광고가 큰 
효력을 내기 시작했다. 직장 여성 누군가가 뜻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일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잠재력이 동원되었다. 충남 농촌진흥지도소 생활 
개선과나 수원시청 가정 복지과에서는 캄보디아에 보낼 옷을 담당 책임자들이 
트럭에 싣고 직접 강남교당까지 찾아와 우리를 감격시켰다.
  더욱이 좋은 옷, 정결한 옷만을 골라 얌전하게 개켜 상자에 담아 포장해 왔기 
때문에 규격 박스에 옮겨 담기만 하면 되었다. 더 좋은 것은 어린이 옷과 남녀 
성인 옷들이 함께 섞여 있고 색상과 옷 모양이 서로 달라 그동안 단체복만 
포장해야 했던 우리들에겐 또 다른 기쁨과 위로가 외었다. 고르고 가릴 두 번의 
일이 없고, 물량이 많아 컨테이너 수량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상지에는 옷을 수집했던 지역 표시가 되어 있어서 수원 시민 모두가 그리고 
충청남도 전 도민이 캄보디아 돕기에 다 함께 나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시민 모두가 뜻 있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더 값지게 여겨졌다.
  서초구 새마을 부녀회에서는 모든 서초구 구역의 주민들의 옷을 모아다 구청 
앞마당에 산더미간이 쌓아 놓고 부녀 회원들이 직접 옷을 정리하여 포장까지 
했고, 좋은 겨울 옷들도 함께 섞여 나와 그 겨울 옷들은 아난다 마가 
명상협회를 통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보낼 수 있었다. 대구의 
가톨릭사회복지회와 결핵 요양원, 홀트대구종합사회복지관 등에서는 정성스럽게 
모은 옷을 용달차에 실어 서울까지 보내 와 일할 용기가 절로 나게 했다.
  계성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옷을 정리할 때는 내놓기에는 아까우리만큼 놓은 
옷들이 정결하게 차곡차곡 챙겨져 있어 학부모들의 고마운 정성이 손끝에 와 
닿는 것만 같았고, 어린이들은 저금통을 털어 송료까지 모금했다. 우리 
어린이들이 불우한 지구촌 어린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자신의 옷과 
저금통의 돈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희사하게 한 것은 최루시아 교장 선생님의 
동정심 기르기의 교육 효과였다.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헌옷을 모아 보낼 때부터 일손을 잡았던 천주교 
대치성당은 캄보디아의 일을 할 때는 아예 그곳이 헌옷 보내기 본부처럼 
분주했다. 구역장들과 여러 봉사자들이 제작된 박스를 대치성당으로 날라다 
산더미처럼 모아진 옷을 열심히 상자에 담아 포장했다. 그래도 쌓이기만 하는 
옷들은 작업하기 위해 김몽은 신부님은 직장에서 퇴근한 남성 신자들에게 
양주까지 대접하며 일을 시킨다고 했다.
  원불교에서 하는 일을 돕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고마워 떡을 간식으로 준비해 나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일이 많고 
애쓰는 것 같아 나중에는 원불교 강남교당 교도들이 대치성당으로 가서 쌓인 
물량을 숙달된 솜씨로 상자에 담아 포장 작업을 하여 그 넓은 대치성당 현관에 
차곡차곡 쌓았다. 거의 컨테이너 하나에 가까운 물량의 상자가 복도에 쌓여 
미사에 참예하러 온 신자들이 좁은 사잇길로 비켜 다녀야만 했다.
  원불교에서 주관하는 일을 천주교 신자들이 기쁘게 한마음으로 옷을 모으고 
그 옷을 손질하여 상자에 포장 작업하던 일, 그리고 나중에는 원불교 사람들이 
성당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내 집처럼 드나들며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보낼 
옷을 열심히 포장 작업하던 일은 종교 협력 운동의 값진 실천 사례로 오래 남을 
것이다. 다른 종교가 주관하는 일을 자기 종교의 일처럼 열성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치성당의 주임 신부인 김몽은 신부님의 지도력과 김 스콜라 
스티카 수녀님의 헌신적인 협력에 힘 입은바 크다.
  숙명여자고등학교 이정자 교장 선생님과 숙명여자중학교의 권명규 교장 
선생님도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옷을 보낼 때부터 가장 앞장서 협력했고, 
오랜 내전으로 물자가 귀한 캄보디아에 옷을 보낼 때도 전교생들에게 또다시 
돕자고 호소하여 여학생들이 가져온 좋은 옷들이 교실 한 편에 가득가득 
쌓였었다. 그 옷들을 사자에 담고 포장하는 일은 우리 교당 청년 회원들이 
숙명을 들락거리며 다 해냈다. 이정자 교장 선생님의 적극적인 협력 그리고 
끝까지 밀어 준 힘은 나에게 자칠 줄 모르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임여심 교도가 자신의 직장인 종이와 연필사로부터 1995년 당년도 다이어리 
5만 부(4.000만원  상당)를 받아 한 트럭 싣고 왔다. 종이가 위한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귀한 선물이 될 그 한 권의 다이어리가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기뻤다.
  강남교당에서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해 5.000켤레의 신발을 주문 생산했다. 
예쁜 어린이 슬리퍼, 남녀 어른들의 새 슬리퍼를 포장할 때는 우리의 기쁨도 
함께 포장할 수 있었다.
  원불교 여러 교당의 합력과 미아 샛별어린이집, 강북구 여러 어린이집에서도 
어린이들의 옷을 모아 주었고, 담배인삼공사와 효성중공업 임직원들, 다 열거할 
수 없는 30여 개 기관 단체 그리고 뜻 있는 개인의 정성이 합해졌다. 마치 
한국의 온정 있는 모든 사람의 정성이 쇄도하듯 밀려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보낼 옷은 2개월 반 만에 15만여 점, 컨테이너 여섯 대의 물량이 생겨났다. 
너도나도 서로 힘을 합하면 그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명이라도 해보이는 것 
같았다.
  대한적십자사 국제부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우리 나라와 수교가 없는 
캄보디아로 짐을 띄우는 일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우리의 정성을 꾸여 담은 
박스의 한가운데는 빨간 적십자마크가 찍히고, 받는 대상은 캄보디아 적십자사, 
보내는 기관은 대한적십자사로 표기되었다. 6월 24일엔 강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님이 강남교당을 내방, 캄보디아로 떠날 컨테이너 여섯 대의 물량이 
지하실에 가득 쌓인 현장을 둘러보며 원불교 교도들의 값진 노고를 치하했다.
  몇 달 동안 옷을 모으고, 추리고, 상자에 담아 포장하고, 그 무거운 상자를 
들어 올려 쌓는 일도 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은 마음만 먹고 몸으로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온정의 짐을 띄울 무렵이 되면 송료의 부담이 큰 
걱정거리다. 인도의 히말라야 설산까지 올려 보낼 때는 2,000만 원이나 
들었어도 캄보디아는 송료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캄보디아에는 수입해 들여 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운송료를 
왕복으로 물어야 짐을 실어 갈 수 있다고 했다.
  여섯 대의 컨테이너 송료는 1.800만 원이나 되었다. 헌옷은 주어도 송료를 
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온정의 짐을 띄울 때마다 송료가 큰 부담이 되곤 
한다. 결국 우리 교당 교도들의 모금으로 6월 28일 캄보디아로 떠날 여섯 대의 
컨테이너가 차례로 강남교당을 떠날 때 나는 시엠레아프의 건설 현장에서 
만났던 캄보디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남루한 옷자락이 
눈에 선했다. 흙 묻은 그들 손가락에 나의 손가락을 걸었을 때 속마음으로 
그들에게 옷을 걷어 보내겠다던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내 마음의 속뜰에는 
양코르와트의 석양 무렵에 불어오던 그 맑은 바람이 일고 있었다.

     하늘 동네, 히말라야 라닥

     내 인생의 불쏘시개, 라닥의 소년들

  남인도 방갈로르에서 열린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창설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을 받고 참석했던 우리 일행은 1991년 여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설살 
라닥을 처음 방문했다.
  비행기를 타고 라닥을 향해 출발할 때는 곧 우주의 신비를 체험할 것 같은 큰 
기대감 때문에 형언할 수 없는 설레임에 빠졌다. 비행기가 델리 상공을 
벗어나자마자 눈과 얼음에 뒤덮인 히말라야 설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꽁꽁 
얼어붙은 험준한 연봉과 암벽들이 얼키설키 산맥을 이룬 히말라야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저도 신성 불가침 영역을 보는 것처럼 
경건했다.
  흙의 땅을 절대로 내어 줄 것 같지 않은 히말라야 설산 위로 사십여 분을 
날다가 내려다본 저 깊은 골짜기에 푸른 숲이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것은 히말라야의 신비와 기적을 
함께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푸른 나무와 숲이 있는 곳에는 몰이 있을 것 같고 
그런 곳에는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푸른 숲이 있는 곳으로 
우리의 비행기는 하강했다. 그곳이 바로 라닥의 중심지 레였다.
  3,600미터 높이로 치솟은 땅,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이곳,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부적합한 이 히말라야 산골짜기에서 최초로 살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가 평지를 버리고 이 높고 춥고 깊은 산중까지 찾아 
올라왔단 말인가?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밟아 본 히말라야 라닥의 땅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라닥은 
인도령이지만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국 등과 국경을 이루고 있어 공항에는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더 많아 스산하고 살벌한 느낌마저 들었다.
  상가세나 스님의 안내로 라닥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맞기 위해 공항에 나온 
이곳 라닥 사람들은 도포 모양의 검정색 옷에다 붉은색 허리띠를 동여매고들 
있었다. 그들 20여 명의 남성들은 도열하듯 줄지어 서 있다가 우리 일행의 목에 
하얀 얇은 스카프를 걸어 주며 환영했다. 대체로 나이 들어 보이는 그 남성들은 
30대 초반의 젊은 상가세나 스님에게 깊은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처럼 보여 
우리는 잠시 상가세나 스님의 왕국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항에서 
승객들에 대한 검문 검색이 철저하고 까다로웠지만 우리들은 그 사람들의 호위 
속에 귀빈 대우를 받으며 무사히 통과하여 대기중인 소형 버스를 타고 
옴마실라호텔로 향했다.
  호텔 입구에도 역시 우리를 환영하기 위하여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테가 
없는 갓 모양의 검정 고깔을 쓰고 조화를 들고 줄지어 서 있었다. 몇 명의 
남성들은 북을 두드리고 피리를 불면서 우리를 환영했다. 그들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사람들이라 강한 자외선 때문인지 피부가 모두 검게 그을려 
보였고, 인도 사람들이지만 아리안족이 아닌 몽골리안이어서 체구나 얼굴 
모습이 우리와 비슷해 보였다.
  해말 3,600미터의 고지인 라닥에서는 분명 땅을 밟고 걸어도 마치 무중력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숨을 쉴 때도 내쉬는 숨이 
모자라 자꾸만 들이마셔야 했고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천천히 동작을 취하라고 계속 주의를 주었다. 고도 적응이 어려워 
잘못하다가는 쓰러진다고 했다.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박하고 정결한 분위기가 방안 가득히 고여 
있었다. 나는 손에서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안정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눈이 부시게 새하얀 풀먹인 옥양목 시트를 잡아당기는 순간, 옛 고향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태곳적의 정적 속에 파묻힌 것처럼 고요한데 
방바닥 밑에서 히말라야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 맑고 은은한 그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순간 별유천지에 와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나는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호텔 정원으로 나갔다. 
청남빛 하늘 아래 만년설을 이로 있는 히말라야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다. 참으로 고요한 우주의 공간 속에 와 있는 듯했다.
  인도의 서북부 히말라야 설산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라닥은 하늘의 정거장이라고 한다. 라닥은 지구촌의 오지 중의 오지로 
1978년까지만 해도 인도 정부의 허가를 받은 학술 조사단이나 갈 수 있었던 
곳이다. 1979년 인도 항공사에서 가장 뛰어난 조종사들이 수십 번의 비행 끝에 
개척한 비행 루트에 따라 1981년 군사 목적으로 라닥의 중심지 레에 공항이 
생겼고, 이때부터 외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물질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채 그들의 고유 전통 문화를 지키며 사는 라닥 
사람들에 대하여 특히 서방 사람들은 깊은 관심을 갖고 찾아온다. 그들은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 설산에서 명상은 하며 물질 문명의 혜택없이 가장 
자연스런 삶을 영위하고 있는 라닥 사람들의 삶과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문명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환경 파괴와 주체할 
수 없는 쓰레기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데 라닥 사람들은 전혀 쓰레기를 
만들어 내지 않아 그들의 삶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연구한다.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 헬헤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 된 미래--라닥에서 배운다"는 
환경 문제에 관심있는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인더스 강물이 발원하여 흐르는 라닥, 그 옛날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번영을 
누렸던 라닥, 히말라야 설산 라닥과 내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매우 단순한 
미로를 통해서였다.
  1987년 나는 젊은 교도 몇 명과 함께 인도를 처음 방문했었다. 지도 한 장을 
들고 안내자도 없이 가고 싶은 곳을 다 찾아다녔다. 그때, 그 옛날 인도의 
지성의 샘이었던 나란다 대학의 유적지와 영취산에 갈 때는 부다가야 대탑의 
아난다 스님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하루의 어려운 여정을 마쳤을 때는 
고마운 도움이 갚을 수 없는 신세처럼 느껴졌다. 만약 어느 여행객이 인도 
사람인 나에게 그곳의 길잡이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면 그곳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절대로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새벽부터 떠난 그 
하루의 여정은 너무나도 고생스러워 여행이 아닌 고행이었기 때문이다. 진종일 
배고픔을 면할 만한 음식도 사 먹을 데가 없고 교통도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그런데 1990년 어느 가을, 히말라야 라닥 상가세나 스님이 부다가야의 아난다 
스님의 편지 한 장을 나에게 전해 주면서부터 히말라야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인편에 보내 온 아난다 스님의 사연은 매우 간단했다. 편지를 전하는 상가세나 
스님은 자신의 사촌형이니 자기처럼 여기고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그 편지를 전해줄 때 또 다른 유인물도 건네 주었다. 한국말로 번역된 
그 유인물의 내용은 히말라야 설산 라닥 사람들의 어려운 실상을 알리고 그곳 
산촌 사람들의 자녀 교육 문제를 도와 달라는 호소문이었다.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그 고마웠던 아난다 스님의 신세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설산 라닥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 무렵, 
강남교당의 김묘은 교도님이 찾아오셨다. 아들 최재필 군이 경문고등학교 
3학년생인데 어머니 마음 같아서는 과외를 시켜 더 우수한 성적을 만들고 
싶지만 아들이 절대로 과외를 않겠다며 , 자신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할 테니 그 
돈은 학비가 없어서 공부 못하는 학생을 도와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묘은 
교도님은 결국 아들의 뜻을 꺾지 못하고 그 돈을 가져왔다며 아들의 뜻대로 
써달라고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돈을 반기며 히말라야 라닥 산촌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쓰자고 제안했다. 내 뜻대로 쓰라며 김묘은 교도님이 
전해 준 봉투에는 2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법회 날 히말라야 소식을 전하며 8개월 동안 눈과 얼음 속에서 살아가는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자고 호소했다. 그렇게 
모금된 성금에다 앞서 받아 두었던 200만 원을 합해 5,000달러, 400만 원의 
장학금을 마련했다.
  국제연등 불교회관에 머물고 있던 상가세나 스님을 초청, 5,000달러를 전하고 
점심 대접까지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체구가 건장했다. 그는 30대 초반의 젊은 
스님이지만 매우 진실해 보였고 진중한 태도여서 믿음직스러웠다. 상가세나 
스님은 편지에 호소문 한 장을 전했다가 뜻하지 않은 5,000달러를 얻고 매우 
기뻐하며, 감격했다. 그가 하도 고마워하기에 부다가야의 아난다 스님에게 입은 
은혜를 당신에게 갚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너무 고마워서였던지 내년 
여름에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창설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가하도록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리고 본 행사를 마치면 히말라야 라닥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에 심취되어 그때 여행을 마치는 것은 
인도 공부의 제 1강좌를 마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제 
2강좌 공부를 하러 가야겠다고 별렀었다. 상가세나 스님의 초청은 제 2강좌를 
알리는 종소리였고, 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히말라야에 가자는 제안은 기름에다 
불을 댕긴 것과 다름이 없었다.

  1991년 6월 남인도 방갈로르에서 열리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창설 10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두 번째 인도를 방문할 때, 나는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히말라야 설산 라닥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 미화 1만 달러와, 쌀 한 가마의 
무게도 넘는 90킬로그램의 옷과 학용품 등을 챙겨 떠났다. 마치 부잣집으로 
시집온 사람이 가난한 친정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알뜰히 짐을 꾸렸다. 그것은 
내가 처음 인도를 방문했을 때 절대 빈곤층의 참상을 보고 느꼈던 충격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공항에 마중 나왔던 상가세나 스님과 함께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 도착했을 
때 맑고 고운 소년들의 찬팅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맑은 소리는 히말라야 
천사들의 소리였다. 히말라야에서 방갈로르에 와 공부하는 소년들이 길 
양옆으로 줄을 지어 서서 손에 손에 꽃을 들고 합장하며 '나무 붓다야, 나무 
붓다야'를 반복하며 노래부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그들 곁으로 지나갈 길바닥에는 하얀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만든 
크고 둥근 수레바퀴, 법륜이 놓여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 아름다운 꽃 
수레바퀴를 차마 밟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감격과 
감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상가세나 스님은 어서 앞으로 걸어가라고 했다. 
나는 그 꽃의 법륜을 조심스레 밟고 계단 아래로 내려서려 했다. 그런데 그 
계단 아래에는 또 빨간 꽃송이들로 'WELCOME'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길 가운데에는 걸음걸음 꽃을 밟고 걷도록 꽃잎을 일정한 간격으로 깔아 놓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이런 환영의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들은 바도 없어서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길을 걷도록 재촉받고 
있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자 꽃송이를 들고 찬팅하면서 서 있던 소년들은 
"나무 붓다야"를 연속해 부르면서 하얀 꽃, 빨간 꽃 한 송이씩을 손 위에 얹어 
주었다. 나는 황홀함의 절정속에 있는 것 같았다. 손에 가득히 받은 꽃을 그 
쟁반에 담게 한 다음 또 다시 새 꽃송이를 받도록 도와 주었다.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다시는 체험할 수 없을 정성으로 수놓은 꽃길과 수많은 꽃송이의 
선물, 그리고 히말라야 천사들의 찬팅 소리는 영원히 나의 영혼에 각인되어 
메아리 칠 것이다. 히말라야 소년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감격스러웠다.
  내가 받은 그 꽃의 모양은 양란인 덴파레 꽃처럼 보여도 꽃송이가 더 크고 
꽃잎이 더 두꺼운 프란지파니란 협죽도과의 관목에서 피는 꽃이었다. 
그곳에서는 그 예쁜 꽃을 사원나무에서 피는 법륜꽃이라고 불렀다.
  히말라야 소년들은 북인도 히말라야 산촌으로부터 부모의 품을 떠나 
서울-부산을 다섯 번이나 왕복해야 되는 1만 리나 떨어진 멀고도 먼 남인도 
방갈로르까지 와서 공부하고 있는 어린 소년들이었다. 다섯 살 난 어린 
소년들로부터 스무 살 가량의 청년들까지 80여 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히말라야 라닥의 중심지, 레에 학교가 있긴 해도 깊은 산촌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들은 그 학교까지 통학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할 수 없는 어린이들이라고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그의 스승 붓다 라키타 
스님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 그처럼 불우한 소년들을 데려다 합숙시키며 연령에 
따라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있었다.
  1990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상가세나 스님은 원불교 강남교당과 원불교 
중앙총부를 방문한 인상이 매우 좋았던지 그곳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원불교를 
소개했고, 그래서인지 그곳 소년들도 이미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를 환영하는 환영식장에 나갔을 때 내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년들이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상가세나 스님은 그간 여러 차례 그곳에서 발행한 
간행물을 보내 주었고 나는 그 유인물에서 그들이 사진을 유심히 보면서 그들이 
입을 옷가지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그들과 마주보고 있으니까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내 눈앞에 다가왔다.
  히말라야 소년들은 인도의 어린이들과 얼굴이 달랐다.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우리 나라 어린이들과 비슷해서 우리말이 그들의 입에서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아 
보였다. 인도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몽골리안이었다. 까만 
눈동자에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호기심과 정겨움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아이들 앞에서 나와 나의 아우 덕수 교무님 그리고 언제나의 
동행자인 신현대 교도를 소개했다. 상가세나 스님이 "너희들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너희들을 만나 보려고 한국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셨다"라고 말하자 
소년들은 기쁜 듯 박수를 쳤다. 그리고 환영의 노래를 몇 곡 연달아 불렀다. 그 
맑디맑은 그들의 노랫소리는 히말라야 깊은 산골짜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귀엽고 사랑스러운 대여섯 살의 어린이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얼마나 집에 가고 싶을까? 한 
번 히말라야의 고향 산천을 떠나 오면 적어도 10년 후에나 가볼 수 있다는 
그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야 할 어린이들의 배움 때문에 너무 일찍 
유학(?)을 떠나 온 사연이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져 왔다.
  1,500여 점이나 되는 한국에서 가져온 그 선물들을 바닥이 나도록 전달하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고 받아가는 그들과 건네 주는 우리 모두가 정말 기뻤다. 
선물을 받아 든 그들은 어린 마음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컸을까? 그 무거운 
분량을 운반해 올 때까지의 온갖 어려움이 그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상가세나 스님은 나를 초청할 때 본 행사 이전에 어린이 캠프가 있으니 사흘 
전에 미리 와 달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었다. 나는 어린이 캠프의 
프로그램을 거들 능력도 없으면서 그의 청이 하도 간곡하여 사흘을 앞당겨 
갔었다. 나보다 앞서 와 있는 망쾅 스님은 대만에서 청소년 지도자로 인기 있는 
분이라고 했고, 네덜란드의 아난다 스님도 어린이들 프로그램에 익숙해 보였다. 
우리는 구경꾼처럼 서 있다가 나중에는 "아리랑"도 가르쳤고 가락에 맞추어 
한국 춤도 가르쳤다. 한국에서는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들 앞에서 나팔을 벌려 
환자들의 흥을 돋우며 그들을 위로하지만 사실 나는 춤을 잘 출 줄 모른다. 
그러나 순진한 동심과 어울린 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다.
  그곳 소년들은 나를 자연스럽게 '마더'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러한 호칭은 
나로 하여금 그들을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 같았다. 히말라야 
어린이들은 모두 비구 스님들이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린이들은 나를 
그리운 어머니로 착각한 건지도 모른다. 부모님 곁에서 자란다면 떼도 쓰고 할 
나이인데, 일찍 철든 아이들처럼 모두 착하고 순종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그런 
모습마저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린 소년들이 너무 일찍부터 자기 자신을 
자제하고 있는 것 같아 어린이가 어린이답지 않게 자랄까 봐 염려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보는 대로 등을 어루만져 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누군가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있으면 어느결엔가 어린이들은 줄지어 서서 내 손길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손길 같은 여성의 피부를 느껴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겉으로는 흔연스레 그들을 사랑했지만, 속으로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캠프의 마지막 날은 그들과 함께 마이소르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로 
옛 궁정과 인공 폭포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러 갔다. 가는 
동안 그들이 탄 차를 우리가 앞지를 때는 모두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나의 
손과 부딪치려고 애썼다. 천진스러운 그들과 참으로 정이 쉽게 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인도의 옛 궁정을 보는 그들은 신기해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사진 찍는 
것도 즐거워했다.
  나는 80여 명의 어린이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그동안 
먹고 싶었던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 모든 음식 값은 우리 나라 돈으로 
8만 원이었다. 인도에서는 1,000원 만 갖고도 어린이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있어 기뻤다.
  히말라야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인도의 인형극도 구경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한 다음 맨발로 그들과 함께 보리수나무 둘레를 
돌았다. 그때는 내 마음도 천진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들과의 닷새를 영원처럼 살았을까, 히말라야 소년들과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떠나려는 나에게 아지타 군은 녹음기를 들고 와서 "아리랑"을 
부르라고 했다. 내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는 그들이 다 함께 "아리랑"을 부를 때 
쓸 교재(?)라고 했다. 나는 떠나려던 걸음을 멈추고 "아리랑"을 불렀다. 떠나야 
되는 시간이 임박해 문 밖으로 나왔을 때 나의 귀여운 소년들은 또 길 양옆으로 
서서 내가 왔을 때처럼 꽃송이를 들고 "나무 붓다야"를 부르며 내 손에 한 
송이씩 꽃을 선사해 주었다. 내 뺨에는 더운 눈물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들과 잠시 작별할 뿐이며, 그들을 영원한 나의 가족으로 느끼면서 
떠나왔다.

  나의 발걸음은 그들의 그리운 고향 히말라야로 옮겨지고 있었고 그렇게 해서 
나는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 갔다.

     지구촌의 오지, 히말라야 라닥

  라닥은 숲이 푸르게 우거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 회색이나 붉은 빛의 완전한 
사막 지대였다.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닿는 것은 푸르고 농사도 
지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모두 사막이었다.
  처음 도착한 날 오후, 옴마실라호텔을 출발하여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어느 
산 아래로 안내되어 갔다.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천막까지 쳐 
놓은 그곳에는 우리 나라 만국기 같은 깃발들이 여러 줄로 쳐져 있기도 했다. 
그곳은 무슨 경사스러운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거기에도 테 
없는 갓처럼 생긴 모자를 쓴 여인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는 꽃을 들고 서 
있었다. 어린이들까지 나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댔다. 나는 히말라야를 
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을 뿐, 그곳에서 어떠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그곳 라닥 데와찬에서는 매우 역사적이고 뜻깊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히말라야 라닥의 산촌 어린이들이 한곳에 모여 공동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를 건립하기 위한 
기공식이 열리고 있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독한 추위, 8개월 간의 겨울을 살아가는 이곳 설산 
사람들에게는 학교를 세울 만한 경제적인 힘이 없다. 그래서 세계 손님들을 
청하여 거룩하게 기공식을 하고, 언젠가는 세계적인 관심이 이곳에 모여져서 
히말라야 라닥 산촌에 흩어져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탄생되기를 바라는 행사였다. 그것은 상가세나 스님의 
구상이고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의 소원이었으리라.
  상가세나 스님은 허허로운 벌판 한곳에 이르러 원불교 의식으로 학교 건립을 
위한 기도를 올려 달라고 했다. 아무 예고도 없던 일이라 좀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원불교 의식대로 그 취지에 맞게 기도를 올렸다. 내 발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표석이 박혀 있었다.
  '이 학교의 기초석은 한국의 서울 원불교 강남교당 박청수교무에 의해 
놓여졌다. 1991년 6월 13일 오후 4시.'
  나무 한 그루 없는 산 아래의 넓은 벌판에 국제명상센터, 도서관 등이 들어설 
위치가 조금씩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건물들의 기공식도 태국의 술락시 등 
네덜란드, 대만 대표들에 의해 그 나라의 말로 자기 종교 의식대로 이루어졌다.
  히말라야 라닥에 교육의 밝은 미래를 여는 기공식을 마친 그날 밤, 큰 축제가 
벌어졌다.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무희들이 파란 터키석이 촘촘히 박힌 
장신구를 머리에서부터 등뒤로 흘러내리도록 치장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곳에서는 여자만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북과 피리에 맞추어 춤추는 그들의 춤사위는 매우 느리고 단조로웠다.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과 어린이들까지 모여들었는데, 
본고장 사람들은 낯선 우리를 구경하는 것이 더 신기한 듯 했다. 
  밤 하늘에는 보석을 박아 놓은 듯한 영롱한 별빛들이 지상의 히말라야 축제를 
내려다보느라 반짝였다. 흐릿한 불빛 사이로 미소짓는 무희들의 눈빛에 어느덧 
지구촌 사람의 정이 흐르는 듯 했다. 히말라야에 초대받아 온 우리도 
어느결엔가 무희들의 비단끝을 함께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며 지구촌 오지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길고도 긴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그 밤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피곤함을 가까스로 견디며 그들과 어울렸던 나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호흡 곤란을 느꼈다. 누워도 일어나 앉아봐도 남아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고도 순응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단단히 경험했던 하룻밤이었다.
  라닥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상가세나 스님은 유서 깊은 몇몇 사원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찬란한 불교 미술의 정수가 
헤미스곰파를 비롯하여 사원마다 건강하게 숨쉬고 있었다. 그 분야에 식견이 
없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그곳 불교 미술은 순수한 히말라야 사람들의 
영감에서 얻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혹독한 추위와 사막의 척박한 땅에서 물욕이 
말끔히 정화된 히말라야 사람들의 예술혼이 담긴 것 같아 불후의 명작을 대하는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수천 년이 흐르도록 아직도 영롱한 색채를 간직한 
물감들은 무슨 소재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 모든 불화의 작품 세계에 설산 
사람들만의 비법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라닥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그 전체가 불교적이어서 라닥 전체가 라마 불교 
그 자체인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설산의 자연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려면 
저절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과학 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입지 
못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 없는 설산 라닥 사람들은 모두 하늘 마음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라닥의 일정을 마치고 떠나 오던 날 아침, 상가세나 스님은 마을 속에 위치한 
마하보디 국제선센터로 우리를 초청했다. 앞으로 데와찬에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가 세워지면 히말라야 산속 깊이 묻혀 사는 총명한 어린이들을 
데려다 합숙시키며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자신의 포부를 말했다. 그러면서 
기숙학교 설계 도면을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상가세나 스님으로부터 학교에 관한 여러 가지 구상을 듣는 동안 내 앞에는 
방갈로르에서 만났던, 이곳에 학교가 없어 1만 리나 떨어진 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히말라야 소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 학교가 세워지면 공부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야 하는 비극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학교 설립에 깊은 관심이 생겼다.
  나는 몇 년 전에 강남교당을 신축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건축도면을 보면서 
질문도 하고 그곳 인건비가 얼마나 되는가도 물어 보았다. 그곳의 인건비는 
미화 2달러, 1,600원이라고 했다. 인건비를 기준삼으면 우리 나라 돈은 
그곳에서 30배의 가치가 있었다. 우리 돈 원화의 가치가 그렇게 크면 그곳에 
한국의 힘을 모아 학교를 세우는 일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 기숙학교 같은 교육 기관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면서 
내가 그 일을 해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 미화 12만 5,000달러, 1억 원을 모금해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일이 되도록 추진해 보라고 했다. 나의 말을 듣던 상가세나 스님은 
너무 기뻐했다. 그리고 막연한 장래에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던 일이 이렇게 당장 
이루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고마워했다. 여러 나라 대표들도 
다 함께 기뻐했다. 나는 지구촌의 오지 히말라야 설산에 나의 일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설산 라닥에 마련된 배움터

  인도의 히말라야 라닥 설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남보다 먼저 알게 된 
나는 귀국 후 우선 강남교당 법회 시간에 본 대로 느낀 대로 그곳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한 사람만 만나도, 두 사람과 만나도, 그리고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그곳 소식을 열심히 전했다.
  8개월 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아무리 부지런해도 열심히 
일할 수 없는 자연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과,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 없고 교육 기관 같은 것을 설립할 수 없어, 자식 교육을 위해 대여섯 살 난 
어린 아들을 품 밖으로 떼어내 1만 리 타향 남인도 방갈로르까지 초등교육을 
시키기 위해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어린 학생들 스스로 
고향을 찾아가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어서, 공부 공부 때문에 부모 자식이 
10여 년 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어린 소년이 자라 여행을 할 수 있을 때나 부모 
자식이 만나더라는 안타까운 소식도 알렸다.
  방갈로르에서 라닥까지 기차와 버스 편을 이용하면 적어도 네댓 새가 걸려야 
3,600미터 고지 라닥의 레에 도착할 수 있고 더 깊은 산촌 마을까지는 하루 
이틀이 더 걸려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이제 우리도 남을 도울 만한 형편이 
되었으니 히말라야 설산에 배움터를 마련해 주어 사랑하는 자식을 품안에 두고 
교육시키고, 또 어린이들은 성장하는 동안 교육 못지 않게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것 아니냐며 자식을 길러 본 어버이 마음에 호소했다.
  마치 계몽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히말라야 설산에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최초로 공개 모금을 한 곳은 미아 샛별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에서였다. 삼성복지재단의 도움으로 이렇게 좋은 어린이집에 자녀를 맡기고 
일터에 나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또 정부가 
지원하고 원불교 강남교당 교도들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어린이들의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주는 묵묵한 봉사가 또 얼마나 고마운 
도움인가, 이제 우리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지구촌 이웃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돕는 온정을 베풀자며 작은 바구니 하나를 내놓고 형편껏, 성의껏 
돕자고 했다.
  그날 학부모들로부터 모인 성금은 17만 6,000원이었다. 어쩌면 자기들과 아무 
상관없는, 그것도 외국 사람을 위해 자신의 돈을 희사하기는 평생 처음이었을 
것이다. 17만 6,000원으로 기본금을 삼아 수많은 사람들의 온정을 보태고 
정성을 합하여 1억 원을 만들 염원을 세웠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거의 습관적으로 히말라야 산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말로 전해 들어서야 누가 
성금을 낼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설산 사람들을 돕는 일도 좋은 
일이고, 또 애쓰는 내 모습이 딱해서 서로 합력을 한다 해도 푼돈을 모아 1억 
원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억 원이란 돈이 나에겐 
히말라야 설산 만큼 높고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열심히 신나게 설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나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갖기 어려운 일을 하는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나는 잠 못 이루는 밤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사람의 
이름을 적는 습관이 생겼다.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는데, 그 
사람들은 히말라야 사람들을 깊이 동정하여 학교가 마련될 수 있도록 내가 하는 
일을 도와 줄 것만 같았다. 나의 수첩에 적힌 사람의 명단 숫자가 늘어나면 
돈이 불어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해오고 있지만 후원회 같은 것도 없고 모금을 
위한 용지를 따로 발급한 적도 없다. 오직 신현대 교도의 자원 봉사와 기회에 
따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뿐이다. 강남교당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그러한 
일들을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돕는 문제를 갖고 회의를 해본 적도 없다. 
회의를 하고 결의를 하면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를 텐데 누가 그런 결의를 도출해 
낼 것인가, 아마 회의를 거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또 개개인에게 권선하지 않는다. 희사할 만한 형편이 못 되는 겨우도 
있겠지만 그럴 뜻이 없는 사람에게 잘못 권선했다가는 공연히 관계만 벌어지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 
누구와도 의논할 대상이 없고 결국 모든 일을 혼자서 결심하고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부담을 갖게 되었다.
  사직교당 시절에는 시각 장애자들에게 많은 열성을 쏟았고, 종교의 울을 넘어 
천주교의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를 돕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남교당에 
봉직하면서부터 특히 나라 밖 여러 나라와 많은 일에 관심을 갖고 열정을 
쏟았다. 강남교당 교도님들은 개개인은 분명한 판단력과 강한 주견을 갖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은 없다. 내가 무슨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교도님들은 잠시 조용히 관망하다가 나중에는 기회에 따라 자신의 
몫만큼 최선을 다해 합력한다.
  히말라야 라닥에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가 세워지도록 후원한 일은 최초로 
나라 밖의 큰일을 한 경우이다. 끊임없이 몇만 원, 몇십만 원의 성금이 들어와도 
1억 원의 목표액을 채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히말라야에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나는 설교 시간에도 곧잘 히말라야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느 날 한 교도가 "요즈음 교무님은 설교 시간에 곧잘 삼천포로 빠진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말 한마디에도 나는 매우 민감했고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곧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딱하게 여겼던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에도 도울 데가 많은데 하필 멀고 먼 
히말라야 설산을 돕겠다며 그 많은 돈을 모금해 학교를 지으려고 저렇게 
애쓰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드려 오기도 했다.
  나는 어느 날 법회 시간에 단호한 어조로 옛말에 동냥은 못 주어도 쪽박은 
깨지 말라 했듯이 희사는 안해도 좋으니 히말라야에 학교를 세우는 일을 갖고 
시비를 말하지 말라고 했다. 어려운 일을 시작한 나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용기를 덜어내는 일이 된다고 말했다. 별 생각없이 시비를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훼방하는 것이 되고 말 테니 참으로 삼갈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허약한 사람은 찬바람만 쏘여도 감기가 들 듯이, 보통 때 같으면 아무 말도 
아니라고 넘길 수 있을 텐데 어려운 일을 시작해 애를 쓸 때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헤프게 하는 말 한마디에도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더 큰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설산 라닥에 학교를 세우는 일을 할 때 나는 기진맥진했었다. 나는 상념 
속에서라도 위로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어두운 밤이 되면 희미한 
불빛이 깜박이는 산촌 사람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마음길로 그렇게 쉽게 
찾아간 곳은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이 사는 라닥이었다. 나를 반겨 준다고 믿을 
수 있는 그들 겉에 잠시 있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내 삶을 
영위하기가 힘들어 거칠어진 호흡이 잔잔해지는 것 갖기도 했다.
  나는 또 피난처를 찾듯이 나를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인도의 
절대 빈곤, 그들의 고달픈 삶을 목격한 사람만이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도 기행"을 써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인도를 알린 법정 
스님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격려의 힘을 보태 주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님에게 전하고, 교육 기관이 필요한 
그곳에 학교를 세우도록 후원하기 위해 모금의 일을 시작했다고 보고 드렸다.
  히말라야 라닥 방문 계획을 세우고 있던 무렵, 법정 스님은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해 주셨다.
  '책 한 소개해 드립니다. 최근에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책입니다. "닥터 노먼 
베쑨"--세계를 감동시킨 한 휴머니스트 의사의 일대기(실천문학사 발행)'
  나는 스님이 소개한 책을 사서 읽었고, 닥터 노먼 베쑨의 삶으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았다. 지금은 생존해 있지 않지만 노먼 베쑨은 나의 독백을 들어주는 
좋은 상담자였고, 나는 그를 가까운 동지처럼 느끼며 힘을 얻기도 했다. "닥터 
노먼 베쑨", 그 한 권의 책은 내가 히말라야 라닥에 학교를 세우도록 결심하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라닥에 관한 소식을 자주 접한 법정 스님은 "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이 
시작되었다니 나도 좀 거들어야겠습니다"라며 1991년 초복 불일암에서 격려의 
서신을 보내 주셨다. 어느 날 아침 스님은 강남교당을 방문하여 100만원의 
성금을 내놓으셨다. 그리고 "남자들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딱하게 
여기다가도 돌아서면 잊고 마는데, 교무님은 여성이라 모성의 본능이 강해서 
이렇게 애를 쓴다"고 격려해 주셨다. 챙겨 주신 성금은 나에게 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돈이 그분의 원고료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 100만 원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거금처럼 느껴졌다.
  내가 라닥을 위해 애쓰는 것은 꼭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만을 돕는 일이 
아니었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지구촌의 절대 빈곤층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인도를 돕는 것이었다. 내가 인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추운 겨울 1월이었다. 
그런데도 집 없는 사람들이 홑이불 하나만 뒤집어쓰고 봄베이 거리에 쓰러져 
노숙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빛과 공기가 통할 것 
같지 않은 움막집으로 기어들고 기어나오는 인도 빈민들의 모습을 본 것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절대 빈곤층의 사람들, 그들 모두를 
기억하며 상징적으로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라닥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인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았던 그 큰 충격을 내 자신으로부터 
주금씩 덜어내기 위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도의 라닥 일을 시작한 뒤부터는 인도양으로 떠날 배가 우리 교당 앞에 
정박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우리의 짐을 싣고 인도로 
떠날 배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라닥에 
배움터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나는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치 임신한 여인처럼 배가 불러왔고 또 배가 부른 임신부들이 
허리춤을 손으로 받치듯 나도 모르게 손으로 허리를 받치는 습관이 생겼다. 
음식 맛도 점점 없어지고 먹어도 소화가 잘되지 않았다.
  나는 1층에서 3층 나의 처소까지 혼자 오르지 못해 도움을 받기도 하고 
나중에는 지팡이를 사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3층을 오르내렸다.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몸에는 특별한 증세가 없다고 했다. 종로 5가 보화당에 찾아갔을 때 
손흥도 원장님은 나의 맥을 짚어 보고 "무슨 걱정이 이렇게 많으십니까? 뱃속에 
기가 꽉 차 있고 기가 막혀서 이렇게 배가 부른 것입니다"라고 했다.
  원장님이 '무슨 걱정이 이렇게 많으십니까?'라고 했을 때 나는 스스로 내 
병을 알아냈다. 나는 히말라야 병에 걸렸구나 싶었다. 진맥하고 약도 지어 
왔지만 보화당을 나오면서 나는 걱정을 정리하고 털어 내야겠다는 큰 결심을 
했다.
  그것이 바로 히말라야 라닥에 학교를 세울 돈을 송금해 버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근심 걱정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는 송금 허가를 받는 
길이 있는 것도 알지 못해 몇몇 교도님들에게 협조를 얻어 개인 송금을 했다. 
8월 27일에 4만 달러, 28일에 3만 달러를 방갈로르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의장 
상가세나 스님 앞으로 송금했다. 그만큼의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는 957만 원이 
부족해 빌려서 채웠다.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지 2개월 닷새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어쩌면 나는 너무 성급한 사람이지도 모른다. 3개월도 못 견디고 병이 
나서 결국 일을 저지르듯 송금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변명을 하자면 누구와도 
그 일을 터놓고 말하지 못한 채 혼자서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해결의 길을 
모색하는 외로움과 부담이 겹쳐 그런 병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2개월 만에 뜻 있는 개개인이 직접 나에게 전해 준 성금이 4,000여만 
원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합력이다. 그때의 출납장을 확인해 보면 외부의 
도움은 작은 일부에 지나치지 않았고, 그 많은 성금 모두가 강남교당 
교도님들의 정성으로 모아졌으니 그 큰 합력의 정성은 놀랍기만 하다.
  7먼 달러를 송금하고 난 내 모습은 마치 썰물이 빠져 나간 바다 모양 같았다. 
그때 마침 법정 스님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어 그간의 일들을 경과 보고하듯 
말씀드렸다. 내가 "이 모양으로 다 죽게 됐는데요..."라고 하자, 스님은 "그렇게 
큰일을 했는데 죽을 지경이 되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일도 공이 안되고 
사람도 겸손해지지 않아요"리고 하셨다.
  나는 그때 그 말씀에서 많은 교훈을 얻기도 하고 또 큰 격려의 힘을 얻기도 
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는 돈도 필요하지만, 그 세정을 알아 주고 격려를 
해주는 것은 원초적인 힘을 북돋워 준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은 송금을 하자마자 밥을 먹은 대로 술술 내려갔다. 마치 
막혔던 곳이 뻥 뚫린 것처럼, 그리고 그 헛배 부르던 증세도 송금과 함께 절로 
치유되었다.

  그런데 인도의 상가세나 스님으로부터 4만 달러는 통장에 입금이 되었지만 
3만 달러는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되지 않는다는 편지가 왔다. 좀더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3만 달러는 영영 오지 않는다는 소식뿐이었다. 송금했던 은행에 
가서 그 사건을 말해 봐도 은행측은 아무 하자가 없다며 송금한 내역만 
거듭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그 돈이 인도에 안 갔을 이유가 없다며 인도에서 
해결하라고만 했다.
  그 일로 걱정을 삼고 7개월 동안 애태우며 오가는 소식이 빗발쳐도 그 3만 
달러는 끝내 해결되지 않아 결국 상가세나 스님이 그 분을 찾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상가세나 스님과 함께 송금했던 은행에 찾아가도 사무적인 답변은 
한결같았다. 나는 무슨 일을 내고야 말 사람처럼 은행 측을 다그쳤다. 
인도에서는 그 돈이 오지 않았다고 하니 송금한 은행에서 그 돈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며 언제, 인도 은행의 어느 구좌로 그 돈이 들어갔는지 책임지고 
밝혀 내라고 했다. 그제야 경유 은행이었던 시티 은행과 협력하여 내가 원한 
결과를 밝혀 주었다. 그 돈은 7개월 전에 인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업무를 담당했던 우리 나라 은행 직원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인도의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경유 은행에서 입수한 자료대로 확인을 하고는 
인도 은행 측에서 착오가 있었다며 미안하다고 얼버무렸다. 작은 돈도 아닌 3만 
달러가 어떻게 7개월 동안이나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 정직하지 못한다 해도, 
그리고 후진국이라 해도 그들은 할말이 없을 것이다.
  7개월 동안 3만 달러를 찾기 위해 애태운 일은 모금하는 일보다 더 막막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쉬바링가 씨란 사람과 함께 와 보름 동안이나 강남교당에서 
돈을 찾기 위해 체류하면서 하루같이 은행을 들락거렸다. 송금한 돈을 찾기 
위해 한국을 내방한 상가세나 스님은 강남교당 법회에서 히말라야 설산에 
학교가 지어질 수 있도록 도와 준 데 대해 감사의 말도 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 소식을 현장감 있게 전하여 교도들로 하여금 
합력했던 일의 큰 보람을 느끼게 했다.
  우리의 도움으로 세워지는 기숙 학교에는 히말라야 산속 깊은 곳에 묻혀 사는 
총명한 어린이들이 합숙하여 공부할 것이라고 했다. 또 그간 방갈로르 유학의 
기회가 오직 남자 어린이들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히말라야에 학교가 세워지면 
먼저 소녀들에게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여성들은 동정심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교육을 받으면 자신의 앞길을 개척할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서른네 살의 젊은 스님이 그같은 뜻 있는 일에 착수한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함께 지내다 보니 정도 많이 들었다. 어느 날 상가세나 스님은 내 나이를 
알고 깜짝 놀라며 자신은 내가 퍽 젊은 사람인줄 알았다고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시다며 내가 만약 괜찮게 여긴다면 
나를 친어머니처럼 섬기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상가세나 스님에게 
남다른 정이 건네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모금된 학교 설립 기금이 있어도 인도 은행을 믿을 수 없어 
송금하지 못했었다. 학교 건립 기금 잔금에 해당하는 2만 5,400달러를 마저 
챙겨 상가세나 스님에게 전했다. 방갈로르에 있는 히말라야 어린이들의 장학금 
1만 5,000달러까지 합해 1억 원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7월로 개교를 앞둔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 최초의 신입생은 스물 다섯 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나라 돈 2만 원이면 그곳 어린이들의 한 달 기숙사비와 
교육 비용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스물다섯 명 학생의 1년 간의 장학금도 
미리 챙겨 상가세나 스님에게 전달했다. 히말라야 라닥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초석을 놓은 때로부터 10개월 만에 학교 신축의 모든 일이 매듭지어졌다.
  1억 원의 성금 중에는 처음에 아들의 과외비 200만 원을 전했던 김묘은님이 
다시 1,000만 원을 희사한 것이 있는데 그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100만 
원이나 몇 십만 원을 희사해 주신 분도 많았지만 5,000원부터 1만 원, 3만 원 
등 수많은 분들의 정성이 합해져 1억 원이 마련되었으니 그야말로 티끌 모아 
태산이란 옛말과 같이 모여진 성금이었다.
  1992년 "중앙일보" 4월 5일자 사회면에 "히말라야 고지에 학교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3,600미터 산록에-7월 개교 예정, 
인 빈민 아동 4,000킬로미터 유학, 불편 덜게'라는 부제와 함께 인도 지도에 
라닥의 위치까지 표시하여 우리가 한 일이 크게 보도되었다. 그 같은 보도는 
그간의 노고를 보람으로 바꾸어 손에 쥐어 주는 듯한 기쁨을 느끼게 했다. 그 
기사를 썼던 문경란 기자는 매월 한 학생의 장학금 2만원을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시켜 주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라닥에 교육 기관이 생겨날 수 있도록 도와 준 이 큰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느냐며 고마워했다. 그때 나는 내가 만약 원불교를 
만나지 못하고 원불교의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면 
나도 고작 내 자신만을 위해 살기에 바빴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히말라야 산촌 
사람을 돕는 것은 모두 원불교 교도님들의 정성이니, 꼭 이 은혜를 기억하고 
싶거든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이고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과 소태산 
대종사님의 영정을 학교의 어느 한 곳에 모셔 두면 그것으로 보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원불교의 은혜를 갚는 길이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상가세나 스님은 법신불 일원상과 대종사님의 
영정을 보시고 4월 10일에 인도 히말라야 설산을 향해 떠났다.

     봄베이 사건

  1993년 8월, 남인도 방갈로르에서 세계종교의회 창립 100주년 기념 대회가 
열렸다. 그러한 국제 회의에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대회 
참석을 명분삼아 방갈로르에 가서 히말라야 소년들을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향 히말라야 라닥에 우리의 도움으로 개교된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도 둘러보고 싶었다.
  나와 신현대 교도는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갈로르를 다시 방문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별채에 우리의 처소를 정해 주었다. 나는 
그곳을 두 번째 방문한 손님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엔 그곳이 내 집 같고 
그 도량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특히 80여 병의 히말라야 소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나의 가족처럼 느껴졌다. 어린 소년들이 사이 놓게 공동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나에겐 기쁨이었다. 회의장을 오가면서 그들을 
볼 때마다 '저 소년들이 내 인생의 불쏘시개'란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이곳에서 저 어린 소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히말라야 라닥과 
아무 인연도 닿지 않았을 테고, 또 그 설산에 학교를 세우느라 애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모 품을 떠나 와 공부하고 있는 그들과의 만남은 나의 열정을 뜨겁게 
타오르게 한 불쏘시개와도 같았다.
  상가세나 스님은 국제 행사에서 불교를 대표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느라 
매우 바빴고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도 많은 단체 손님이 찾아와 분주했다. 
대회가 끝나 갈 무렵 상가세나 스님은 대회에 참가한 한국의 원불교 대표들을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 초청하자고 제안했고, 나도 당연히 내 집 같은 
마하보디에 그 손님들을 초청해야 할 것만 같아 동의했다.
  히말라야 소년들은 마더의 나라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주방에서는 남성들이 성찬을 준비했다. 전팔근 교무님, 고 
변선환 목사님과 이성택 교무님 등 여러분을 맞아 우리 소년들은 손님들에게 
정중하게 꽃목걸이를 걸어 드리고 그 맑디맑은 소리고 "나무 붓다야" 노래를 
불러 손님을 영접했다.
  한국 손님들은 마치 내 집에 오신 손님을 맞이하듯 하는 나를 보고 
놀라워하기도 하고, 히말라야 라닥에 배움터가 마련된 동기가 조 소년들 
때문이라고 하자 새삼 보람있는 일이라며 화제를 삼기도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식후에 법당에서 격식을 갖춘 환영식을 베풀었고 모든 손님들은 천진스런 
히말라야 어린 소년들이 합창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기특해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 곁을 떠나 와 공부하는 그들을 보고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방갈로르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친 나와 신현대 교도는 상가세나 스님의 
안내로 아잔타, 에로라 석굴 사원을 구경하기 위해 새로운 여정에 올라 
마드라스 공항에서 비행기 편으로 봄베이를 향해 떠났다. 우리가 봄베이 공항에 
도착하자 마중 나와 있던 한 신사가 반갑게 진지하게 얘기를 주고받았고 우리는 
봄베이 거리에 눈을 팔았다.
  꽤 오랜 시간을 달려 봄베이의 어느 변두리쯤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목적지에 다 왔다며 내리라고 했다. 내려서 주변을 둘러봐도 호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안내를 맡고 있던 신사는 호텔이 아닌 건물로 우리를 안내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낡은 나무 층계를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속으로 '왜 이런 곳으로 왔을까' 의아하게 여기면서 따라 올라갔다. 우리가 
머물 방이라고 안내된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우선 
화장실이 기계실과 겸용이었고 남녀 공용이었다. 세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우리의 숙소는 대로변에 연해 있었고 방문이 활짝 열려 있어 
방안에는 소음이 가득했다.
  더운 여름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나의 눈길은 방바닥에 놓인 
이부자리로 갔다. 침대도 없이 방바닥에 개켜 놓은 홑이불은 오랜 동안의 
세월을 조용히 말해 주고 있었다. 힘이 쭉 빠져 그곳에 가만히 앉아 보았다. 그 
시트 위로는 굵은 개미가 기어가고 있었다. 또 밤에 모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산을 좋아하는 나는 산에서 야영할 때 허술한 텐트에서도 단잠을 이루곤 했지만 
아무래도 이 방에서는 한 밤도 지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한 끼의 밥을 거르기는 차라리 쉬워도 한 밤의 잠을 설치는 일은 
큰일이다. 그랬다가는 다음날 건강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안색이 
난감해 하는 심정을 들어냈던지 상가세나 스님은 "마더, 오케이?" 하며 나의 
동의를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는 머물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숙박 시설이 갖추어진 호텔로 옮기자고 했다. 나의 
그러한 반응에 잔뜩 언짢아진 상가세나 스님은 호텔을 알아보겠다며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 번 들어간 스님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상가세나 스님이 들어간 
방문을 노크했다. 그러나 아직도 호텔을 알아보는 중이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더 흘렀다. 기다리는 동안 이미 화가 난 나는 상가세나 
스님에게 이곳에서 알아볼 필요 없으니 다시 택시를 타고 가지고 했다. 그러나 
이젠 상가세나 스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소태산의 제자가 아닙니까? 왜 가르침에 따르지 않습니까?"
  질책에 가까운 어투였다.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엇이 소태산의 가르침이냐고 그에게 반문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내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마치 탈출하듯 
그곳을 빠져 나오려 하자 상가세나 스님도 나의 완강함을 이기지 못해 그곳을 
나오고 말았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공항 주변의 호텔로 가자고 했다. 상가세나 
스님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져 있었고 우리의 사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화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택시 안에서 상가세나 스님에게 타이르듯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외국 사람을 대할 때는 국제적인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며 훗날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일본 사람도 대해 보고 여러 나라 
사람을 대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었다고 강변했다. 
대화마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꽉 막혔다.
  봄베이 공항에 도착한 지 네 시간 만에 가까스로 호텔을 정하고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우리가 머문 호텔은 그야말로 일류 호텔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좋은 호텔에 머물러 본 적이 없다. 너무 좋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이제는 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아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말 
이런 호텔에 머물자는 것이 아니었는데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는 듯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다음날 아침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상가세나 스님이 잘못을 사과해도 내가 너그럽기가 어려운 판국인데 오히려 
그가 더 완강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그는 참다못해 나에게 책망하듯 
이렇게 말했다.
  "마더는 수도사인데 왜 그런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지 못합니까?"
  우리가 그곳에 갔던 것은, 그 집주인이 친절하게도 돈을 받지 않고 우리가 한 
밤을 묵도록 해준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도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침묵했다.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 사원이었지만 동행자와 불편한 
관계가 되고 보니 큰 기대감을 갖고 갔던 여행지에서도 아무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때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좋은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깊이 
경험했다.
  엘로라와 아잔타를 다녀와 아우랑가바드에 이르렀을 때 상가세나 스님은 
나에게 어떠한 호텔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침대 시트만 정결하고 더운물만 
나오는 곳이면 더 바라는 조건이 없다고 했다. 하룻밤에 207루피, 5,000원짜리 
숙소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한 밤을 지냈다.
  내 편에서도 그러했지만 상가세나 스님도 계속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불편한 관계로 북인도 히말라야 라닥, 최종 
목적지를 가기 위해 봄베이 공항에서 델리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델리에 도착한 상가세나 스님은 택시를 타고 한 호텔 앞에 이르러 택시를 
멈추게 한 다음 기사에게 대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호텔이 마음에 
드는지 들어가 보라고 했다. 아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또 다른 호텔로 
가보자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나는 우리 나라 여인숙쯤 되는 그 호텔, 한 밤에 
30달러를 지불하면 되는 쉐라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을 크게 정리했다. 히말라야 설산에 학교를 지어 준 
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서로 관계하지 않았던 사이처럼 상가세나 
스님을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히말라야에 쏟았던 나의 열정과 1억 
원이라는 돈 때문에 그리고 잘못하다간 나 스스로 부질없는 번민의 함정에 빠질 
것 같아 오히려 이쯤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이 상책일 듯싶었다. 나는 매우 
냉철해졌고 그렇게 되니 상가세나 스님에 대한 나의 감정은 밉지도 곱지도 
않았다.
  히말라야 라닥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델리에서 하루를 더 
지체해야 했다. 델리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따로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 좋은 
시간을 갖기 어려운 상태여서 나는 인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나 구경할 겸 
주변 마을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내 편에서는 아무 
불편함이 없었지만 사정이 딱하기는 상가세나 스님 편이 더했을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관계로 히말라야에까지 올라가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앞에 난처한 
모습을 내보일 일이 큰일이었을 것이다.
  상가세나 스님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는 신현대 교도에게 
하소연하기를 자신은 밤마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어떻게 하며 마더의 
마음이 풀릴 수 있겠느냐고 정중히 자문(?)을 구하더라는 것이다. 불편한 두 
사람 사이를 원만하게 만들어 보려고 애쓰던 신현대 교도는 자기 입장에서 볼 
때 봄베이 같은 처소로 교무님을 안내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곧 너그러워질 것이니 그렇게 해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가세나 스님은 나에게서 화해의 불씨마저 찾아볼 수 없는 다 
식어 버린 화로를 느꼈을 것이다.
  상가세나 스님은 위에 두르고 있던 가사를 벗고 매우 겸손한 태도로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먼저 풀이 죽어 이런 말을 꺼냈다.
  "마더, 말을 차근차근 할 테니 다 들어주세요.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말은 
저에게 다시 물어봐 주세요. 우리는 필시 서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은 나의 어머니인데 내가 잘못하면 뺨이라도 때려서 가르쳐야지 왜 
이렇게 남 대하듯 하십니까? 제가 빌겠습니다. 잘못했어요. 비구가 지키는 
계율에 승려가 사원밖에 나가 잠을 잘 때는 좋은 잠자리에서 자지 말라는 
계문이 있는데 그 계문만 지키려다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마더... 마더, 우리가 
방갈로르에서 지냈을 때처럼 좋은 사이로 히말라야에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나는 상가세나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번 일이 계율이 서로 다른 데서 
연유한 사건임을 깨닫고 있었다. 훗날 참고한 바에 의하면 원시 경전에서는 
수행자는 집 없는 사람, 삼림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비구의 네 
가지 생활 양식에서는 수하좌를 원칙으로 하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는 잠을 
자지 않도록 밝히고 있다.
  그러나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대종경 교의품 3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거 부처님께서 모든 출가 수행자에게 잘 입으려는 것과 잘 거처하라는 
것과 세상 낙을 즐기려는 것들은 다 엄중히 말리시고, 세상 낙에 욕심이 나면 
오직 심신은 적적하게 만드는 것을 낙으로 삼으라 하시었으나, 나는 가르치기를 
그대들은 정당한 일을 부지런히 하고 분수에 맞게 의식주도 수용하며 피로 
회복을 위하여 때로는 소창도 하라 하노니, 인지가 발달되고 생활이 향상되는 
이 시대에 어찌 좁은 법만으로 교화를 할 수 있으리요. 마땅히 원융한 불법으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 두루 활용되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내 
법의 주체이니라."
  성자의 가르침도 시대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원불교는 남녀 평등 사상이 어느 종교보다 투철하고 여성들도 자신의 역량에 
따라 기국대로 활동하고 있어 때로는 여성의 힘이 남성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소승 불교에서는 여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나의 선입견 때문에 상가세나 스님의 태도에 더 민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가세나 스님이 그러한 틀 속에서 나를 대하고 있다면 이쯤에서 서로 물러서는 
것이 백 번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없게 하기 위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소승 
불교의 성 차별에 대해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상가세나 스님은 
자신은 여성에게 차별심을 갖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나는 자신의 귀한 
어머니이지 여성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마음으로 천둥 번개라도 치듯 심하게 대립하고 
마찰했었다. 그러나 상가세나 스님의 겸손한 태도와 마치 기도하듯 말하는 
태도에서 그의 진심과 진정이 전해져 왔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막혔던 
기운이 통하는 것 같았다.

  1992년 7월,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를 개교한 이후 
상가세나 스님으로부터 자주 그곳 소식이 전해져 왔다. 첫 입학생 스물다섯 
명의 어린 소녀들의 독사진 밑에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써 보내기도 하고, 
그들이 법당에 앉아 참선하는 모습,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노는 모습의 사진도 
보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성적표까지 보내 주어 나에게 기쁨을 주고 보람을 
확인시켜 주었다. 스테진 장칩, 스텐진 지그멧 등 사진 속의 그들은 좋은 
가정에서 자 자란 서양 어린이들처럼 발랄하고 귀여워 보였다. 티없이 맑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총명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의 산촌 어린 소녀들이라지만 궁기 흐르는 아이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사진만 보고 있어도 절로 정이 들고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갈로르를 경유하여 히말라야 라닥을 가는 동안 상가세나 
스님과 봄베이 사건을 치르게 되었다.

     황량한 사막의 땅에 작은 기적을 만들고

  어린 학생들을 만나 보기 위해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 갔을 때 그 보고 싶었던 
어린 소녀들이 나를 맞기 위해 도열해 있었다. 2년 전만 해도 이곳엔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고, 또 살 수도 없을 것 같은 황량한 사막의 땅에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 기공식을 했었는데, 지금 그곳에 건물이 세워지고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가세나 스님은 히말라야 라닥에 기적을 만든 것이다.
  눈앞에 들어오는 건물이 국제선센터라고 했다. 그 건물 앞 국기대에는 노란 
바탕에 붉은색의 둥근 원, 일원강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원불교를 상징하는 
둥근 원이 히말라야 하늘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는 감회는 형언하기 
어려웠다.
  내가 처음 안내된 곳은 마하보디 국제선센터 법당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불단의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함께 모셔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님의 영정을 뵈올 수 있었다. 히말라야 라닥에서 나를 반겨 
주시는 것 같아 대종사님 영정을 뵙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더운 눈물이 
내 뺨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의 등위에서 나의 어린 소녀들과 여러 
선생님 그리고 상가세나 스님이 숨죽이고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줄 알면서도 
좀처럼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두 번의 큰절을 올리고 나서 불단을 
다시 보니 거기엔 법신불 일원상이 담긴 액자도 있었다.
  격한 감정을 가까스로 진정하고 돌아서자 히말라야 풍속대로 어린 학생들이 
하얀 스카프를 걸어 줄 때 나는 와락 그 소녀를 내 품에 끌어안고 뺨에 
입맞추며 또 울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있는 그 낯선 히말라야 소녀들이 모두가 
나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그들 모두를 한 품에 끌어안아 보고 싶었다. 내가 
그처럼 어린 학생을 끌어안고 비비고 하는 것을 모든 대중들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고 서양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어린 학생과 그곳 종사자들 앞에서 나를 소개했다.
  "마더가 아니었으면 오늘날 이곳에 학교가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좌중에 있던 한 노인이 히말라야 설산 사람을 대표해서 이곳 어린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준 에 대해 고맙다는 내용을 영어로 말했다. 나는 벅찬 
가슴을 진정하며 보고 싶었던 히말라야의 총명하고 귀여운 소녀 학생들을 
만나서 반갑고 기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더할 하위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생소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까만 눈망울을 초롱초롱 굴리고 있는 소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나의 말을 라닥 말로 통역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한 서양 여인은 내 겉으로 다가와서 매우 감동적인 
광경이라고 속삭였다.
  나의 어린 소녀들은 한 서양 청년 자원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나를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라닥 말로 합창을 하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고동색의 긴 원피스에 초록색 허리띠를 동여맨 라닥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서려 왔다.

  상가세나 스님의 안내로 나는 어린 소녀들의 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나의 큰 
기대감과는 달리 학교는 아직 짓지도 않았다. 기숙사부터 건축을 하고 기숙사의 
일부를 교실로 쓰고 있었다. 8개월이 겨울이라 건축 공사 기간이 짧은 
그곳에서는 마하보디 국제선센터의 건물과 기숙사 정도밖에 지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단계적으로 학교 건물을 신축할 것이라고 상가세나 스님이 계획을 
설명해도, 학교를 보기 위해 히말라야 설산까지 찾아온 나로서는 서운한 생각이 
앞섰다.
  건축이란 그 나라 그 지방의 문화를 따르게 마련인데도 그 기숙사 건물이 
한국적인 건축 양식과 일치하지 않은 것들이 모두 낯설다고 느껴지는 조금 
과장하면 마치 우리 나라 초가 지붕의 겉모양 같다고 느껴지는 실내 천장 
마감이 더욱 그랬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왜 좀더 훌륭하게 하지 못하고 
방안의 천장을 이렇게 마감했느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나의 그러한 반응에 
당황한 상가세나 스님은 이곳에서는 그런 양식으로 집을 짓지 않으면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나무 한 그루도 자라지 않는 히말라야 
산촌서는 아예 난방 시설이 없다. 영하 30__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에는 
그 같은 천장이 그나마 보온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기숙사 건물은 남향이었고 앞면을 전부 유리창으로 만들어 태양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낮 동안이야 태양열이 도움이 되겠지만 기온이 더 내려가는 
밤에는 우리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딱하고 안쓰럽게만 
생각되었다. 숙소를 둘러보는 동안 그들의 침대나 개인 사물함이 하도 조잡해 
보여서 나는 노골적으로 섭섭해 했다. 그러자 상가세나 스님은 "마더, 여기는 
한국이 아닙니다. 인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정도면 이곳에서는 매우 
좋은 것들입니다."라고 말했다.
  식당에서 나의 어린 소녀들과 함께 다과 형식을 갖추어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한 명 한 명의 학생들이 내 옆에 와서 인사를 했고 상가세나 스님은 
그 학생의 이름과 얼마나 먼 산촌에서 이곳 학교까지 왔는가를 설명했다. 
라다키 말밖에 모르는 어린 소녀들과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한마디의 이야기도 
나누어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인 내 앞에 와서 
차려 자세로 서는 것이 잔뜩 긴장되는지 모두들 어색해 했다.
  나는 한 소녀에게 "엄마가 보고 싶지?"하고 말해 버렸다. 그 말을 상가세나 
스님이 통역했을 때 그 소녀는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내가 그 
어린 소녀의 가슴의 상처를 건드렸으리라. 내 마음엔 그 소녀들 모두가 나의 
분신 같아도 그들과 나 사이에는 아직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학생 한 명마다 소개해 주었던 내용을 참작해 보면, 그들이 사는 깊은 
산골짜기로부터 이곳 학교까지 오는 데는 진종일 걸어 큰 산을 넘어서 어느 
마을에선가 한 밤을 자고 다시 걸어서 이 학교에 오기까지만도 이틀이 걸린다는 
것과, 편부 편모의 가난한 환경에서 커가는 소녀들 가운데 총명한 어린이들을 
선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1년 중 여름 방학에 잠시 부모님을 따라가서 며칠 
동안 집에서 지낼 뿐 그들은 항상 기숙사에서 합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 같은 말을 들으면서 이곳에 학교가 생겨 모든 어린 학생들이 부모 
품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기를 바랐던 생각이 떠올랐다. 기숙학교란 말을 말을 
수없이 하고, 또 흩어져 사는 산촌 어린이들이 모여 공부할 것이라고 내 입으로 
수없이 설명했으면서도 나의 내면에서는 아직 기숙학교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인도 방갈로르에서 보았던 어린 소녀들이 다시 떠올랐다. 부모와 집을 
떠나서 공부하는 어린 소년들이 안타까워 이곳에 학교를 세웠는데도 이곳 
학교에서조차 또 부모와 떨어져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러나 나의 우려와는 달리 소녀들은 처음으로 학교에 와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지낼 수도 있어서 매우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 기숙사의 
식생활이나 거처가 자기 집보다 좋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은 매우 만족해 한다고 
했다. 스쿨 버스를 운행하여 레 지역 학생 일흔여섯 명은 집에서 통학하고 
있다고 하여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했다.
  아침 일찍 이곳에 도착해 국제선센터와 기숙학교를 둘러 본 나와 신현대 
교도는 옴마실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여 이 호텔에 
머물면서 텃밭에서 아욱과 쑥갓을 발견했었다. 히말라야와 우리 나라에서 먹고 
사는 채소가 어떻게 이처럼 같을 수 있을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그 텃밭에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바람에 하늘거렸다.
  그런데 동행자 신현대 교도가 큰 병이 났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고 했다. 또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잠시도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놀란 우리는 의사의 왕진을 청했다. 진찰 결과는 고소 적응이 
안되어 걸린 산소 결핍 증세였다. 얼마 후 커다란 산소통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의사는 산소통에 연결된 가는 호스를 바가지에 떠다 놓은 물에 넣고 산소통 
밸브를 열고 물거품이 얼마나 생기는가를 보고 산소 배출의 정도를 측정했다. 
그런 다음 그 호스를 신현대 교도의 코에다 꽂았다.
  하루 종일 산소 호흡을 해도 증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누워 있는 그녀는 점점 기운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상태로 밤을 
지낼 일이 걱정되었다. 의사에게 연락하여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며 병세를 
의논했다. 히말라야에 왔다가 고소 적응이 안된 사람에게 산소 호흡을 시켜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빨리 산 아래로 내려가는 도리밖에 없다고 의사는 
말했다. 산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저절로 치유된다고 했다.
  나는 호텔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마하보디 국제선센터로 상가세나 
스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의사의 말을 전하며 환자를 위해 내일 델리로 
내려가야겠다고 했다. 멀고 먼 설산까지 찾아왔다가 하루 만에 되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아쉽고 안타깝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환자가 생겼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상가세나 스님과 나 사이에 발생한 봄베이 호텔 사건으로 혼자 
속태웠던 그녀가 히말라야에 도착하자 탈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루 만에 설산 라닥으로부터 델리로 내려왔다. 우리를 
따라 델리까지 내려온 상가세나 스님은 내가 라닥에 오면 꼭 말하려고 했다며,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들의 겨울 헌옷을 한 컨테이너만 모아 보내 
달라고 했다. 그간 대만과 싱가포르에서 혼 옷을 보내 왔지만 모두가 여름 
옷들이라 설산 사람들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상가세나 
스님의 그 말을 들으면서 '남 주기는 미안하고 버리기는 아까운 옷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장롱 속이는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기 
해보겠다고 쉽게 대답했다.
  상가세나 스님이 우리가 인도에 송금했던 3만 달러의 돈이 오리무중이 되어 
7개월 동안 애를 태우다 그 돈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가 3월이었다. 그때 
겨울 옷을 입고 지나는 한국 사람들의 옷을 유심히 보아 두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도 신현대 교도의 도움으로 동대문에서 몇 가지 겨울 옷을 샀는데 
그 옷이 너무나도 가볍고 따뜻하다고 했다. 그는 이곳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이 
입은 그 가볍고 따뜻한 겨울 옷을 입으면 추운 겨울을 지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설산 사람들에게 겨울 옷 보내기

  두 번째 히말라야를 방문했다가 들고 내려온 숙제, 라닥 사람들에게 겨울 옷 
보낼 겨울 옷 모으기 운동을 9월 1 귀국하자마자 시작했다. 
  집집마다 장롱 속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쌓여 있을 테지만 그러한 옷을 
어떻게 모으느냐가 문제였다. 나는 먼저 "원불교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게재했다.

  히말라야 설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겨울 헌옷을 보냅시다. 
  8개월 간의 긴 겨울, 영하 35도의 추위 속에 살면서 짐승털 우장을 쓰고 사는 
히말라야 사람들에게 따뜻한 겨울 옷을 보냅시다. 지구촌의 오지 히말라야에 
한국과 원불교의 온정을 보냅시다. 우리의 헌옷이 그들에게는 고맙고 따뜻한 
겨울 옷이 될 것입니다.
  겨울, 가을 옷을 챙깁시다.
  --입던 옷은 세탁하고 떨어진 단추는 달아서 보냅시다.
  --여러 달 걸리는 배편 운송 과정에서 옷에 곰팡이가 나지 않도록, 그리고 
헌옷을 받는 그곳 사람들이 더 큰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손질하여 보냅시다.
  *보낼 수 있는 것
  1. 가을, 겨울 옷(남녀노소 구별 없이)
  2. 담요, 이불
  3. 모자, 장갑, 목도리, 양말
  4. 신발(아직도 더 신을 수 있는 운동화)

  컨테이너 한 대가 얼마만큼의 물량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 채 겨울 옷 한 
컨테이너를 약속하고 돌아온 나에게, 나라 밖에서 살다 돌아온 한 교도님은 
헌옷으로 컨테이너 하나를 채우려면 어마어마한 물량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외국에 살다 이사 오는 사람들의 경우 여러 집 살림을 합해야만 컨테이너 
하나를 채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그 크고 넓다는 컨테이너 하나를 
어떻게 헌옷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큰 걱정이 생겼다.
  인도에서 돌아와 열흘 째 되던 9월 10일, 우리 교당에서 숙명여자고등학교 
안명경 선생님의 어머니 이현영 존영의 49제 종재식을 올렸다. 그 재식에 
숙명여자고등학교 이정자 교장 선생님이 참석하셨다. 재식을 마치고 다과를 
드는 자리에서 나는 우리 교당에서 히말라야 설산 라닥 사람들에게 보낼 따뜻한 
겨울 헌옷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우리 교당 교도님들의 
헌옷만으로는 컨테이너 하나를 채울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히말라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정자 교장 선생님께서는 "우리 
숙명여고 전교생도 따뜻한 겨울 옷을 모아 보죠. 그것 참 좋은 일이네요." 라고 
하셨다. 그 순간 그분은 나의 큰 걱정을 다 해결해 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나의 간절한 소원도 이루어 주는 분 같았다. 나는 얼른 일어나 교장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이정자 교장 선생님은 "아니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세요. 학생들에게도 더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의 옷을 나누어 주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의 생각으로는 숙명여자고등학교의 전교생이 모두 한 점씩 헌옷을 
가져와도 컨테이너 하나는 쉽게 채워질 것 같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인연으로 원불교에 입문하여 법명을 '명심'으로 받은 안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져온 그 많은 옷을 혼자서 일일이 점검하고, 개켜서 
차곡차곡 쌓느라 큰 수고를 하셨다. 어머님의 왕생극락을 축원하던 49재 말이 
인연이 되어 숙명여고생들이 히말라야 사람들을 돕게 됐으니, 설산 사람들에게 
따뜻한 겨울 옷을 보내는 것이 곧 어머님을 위해 드리는 것 같았을 것이다. 
안명경 선생님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그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이 쌓인 옷을 안 선생님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없게 되어 우리 
교도님들도 학교에 가서 일손을 맞잡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한 교도님은 
학생들이 가져온 옷들이 너무 좋아서 집에 딸이 있다면 갖다 입혀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고맙고 좋아서 내 뺨에는 
어느덧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가볍고 따뜻하고 예쁜 
색상의 옷을 히말라야 처녀들이 입는 생각만 해도 너무 기뻤다. 기쁨의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참동안 눈물을 실컷 흘리고 났더니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인도는 더운 나라이지만, 유독 하늘 높이 솟은 라닥만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세계에서 시베리아 다음으로 추운 곳이다. 라닥 사람들은 그들이 
기른 가축의 털을 깎아 천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천은 두텁고 무거워 보였지만 따뜻해 보이지는 않았다.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이어서 얼굴도 닮았고 체구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가 보내는 옷이 그들에게는 맞춤옷처럼 잘 맞을 것 같았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그들이 입을 생각만 해도 추위에 떨던 내 자신이 따뜻한 옷을 얻어 입은 
듯했다.
  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겨울 옷 보내기 캠페인이 
벌어지자 숙명여자중학교 권명규 교장 선생님도 뜻을 같이하여 여중생들도 옷을 
함께 모았다.
  숙명에서 모은 옷은 5,000여 점이나 되었고, 그 옷들을 강남교당까지 실어 
보내 주었다. 숙명여자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동정심과 소녀들의 예쁜 마음이 
합해져서 숙명에서 모은 옷들은 참으로 좋았다. 그 많은 옷을 운반하여 
강남교당 창고에 쌓았을 때, 나의 눈 짐작에 컨테이너 하나의 분량으로는 좀 
부족해 보였다.
  헌옷을 모으는 일은 성금을 모으는 것과 달라서 뜻 있는 몇몇 사람이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거들어야만 되는 일이었다. 
"원불교신문"에 게재한 광고 효과가 아직 없던 때라 막막한 심경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또 어디에선가 대치성당까지 생각이 미쳤다.
  대치성당은 신자 수도 많다고 알려졌고 주임 신부 김몽은 신부님과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에서 만나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김몽은 신부님께 
전화를 걸러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대치상당을 찾아갔다. 김 신부님께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겨울 옷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경위와 라닥 사람들의 
생활상을 전했다. 그리고 겨울 옷 보내기 운동에 신부님의 동참을 호소했다. 
나의 말을 다 듣고 난 김몽은 신부님은 "그렇게 큰일을 어떻게 혼자 하십니까? 
함께 합시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큰일을 어떻게 혼자 합니까?'라는 신부님의 말씀 한마디에서 나는 
힘겹게 하고 있던 일에 대한 새로운 긍지를 느꼈다. 그리고 '함께 합시다'란 
말을 들었을 때는, 이제 이 일은 되는 일이구나 하는 확신과 함께 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로 큰 곤란에 빠져 있을 때는 
좀 거들겠다는 말 한마디가 구원과도 같았다.
  김 신부님은 겨울 옷 보내기 운동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셨다. 먼저 
포스터를 제작하여 원불교에도 붙이고 천주교에도 붙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운동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많은 천주교인들이 동참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신부님은 당장 그 자리에서 카톨릭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이윤자 국장과 통화를 하고 인터뷰 약속 시간을 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김몽은 신부님과 함께 카톨릭신문사를 방문하여 인터뷰도 하고 광고도 
의뢰했다.
  설산 사람들에게 보낼 옷을 모으는 일로 내가 너무 노심초사하는 듯이 
보였던지 김 신부님은 잘 안된 경우에는 또 아무개의 협조를 받을 수도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김 신부님과 따로 만나 본 적도 
없었다. 설산 사람들에게 옷을 모아 보내야겠다는 일념으로 염치 불구하고 
성당까지 찾아갔는데, 뜻밖에 김 신부님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나니 이젠 
일이 다 된 것 같은 자신감과 함께 안심이 되었다.
  인도의 히말라야 라닥에 우리의 겨울 옷 보내기 운동을 봄가을에 산불 
번지듯이 번져 나갔다. "원불교신문"의 광고도 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불교 전국 여러 교당에서는 옷을 고속버스 편이나 철도 편으로 보냈다는 
소식이 빗발쳤다. 마음씨 좋고 성실한 유웅성 기사님은 부지런히 고속버스 
터미널과 기차역을 번갈아 다니며 전국에서 보내온 옷을 찾아다가 지하실에 
쌓았다.
  우리 교도님들은 받아서 기분 좋을 깨끗한 옷과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날이 헌옷이 산더미같이 쌓이자 이형은 부교무님은 
하루같이 헌옷을 고르고 묶어 다발을 만드느라 지하실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우리네는 옷이 떨어져서 못 입는 것이 아니라 싫증이 나서 못 입기 때문에 
버리기는 아깝고 남 주기는 미안해 장롱 속에 그저 넣어 두었던 옷들을 모조리 
챙겨 보내왔다. 그러나 딱한 것은 히말라야 사람들이 입을 수 없는 
치마저고리와 여름 옷들도 많이 보내왔다. 아무리 좋은 한복과 여름 옷일지라도 
히말라야에 보내기에는 합당하지 않아 모두 문 밖으로 골라냈다. 그렇게 골라낸 
헌옷만도 타이탄 트럭으로 여러 번 실어내야 했다.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보낼 겨울 옷을 모으는 제1본부는 
강남교당이었지만 제2본부인 대치성당에 더 많은 옷이 모이고 쌓였다. 
  그 무렵 10원 어느 날, 삼성 그룹의 신경영 간부 연수팀 스물일곱 명이 미아 
샛별어린이집에 시찰차 내방했었다. 삼성복지재단이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를 
위해 마련한 탁아 시설을 둘러보러 온 그분들에게, 나는 또 어렵게 살아가는 
히말라야 사람들 이야기와 설산 사람들에게 보낼 옷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중에는 동정심 강하고 적극적인 분도 있어서 함께 연수하는 팀의 
옷을 모아 보내 주기도 하고, 집에 가서 부인도 이 운동에 동참하도록 권유한 
고마운 분도 있었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든지 모른다는 옛말처럼 그 연수팀에는 제일합섬의 김상도 
사업 부장님도 함께 있었다. 히말라야 사람들 소식을 알게 된 그분은 회사로 
돌아가 여러분들과 의논해 1만 5,000여 점의 새옷, 시가 1억 3,00만 원어치를 
희사하겠다는 희소식을 알려 왔다. 그 옷들은 그룹 내 사원들의 단체복을 
주문했다가 남은 것들이어서 회사 측에서는 전혀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이지만 
히말라야 사람들에게는 새옷이라 좋을 것이라고 했다.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던 어느 날 제일 합섬 임직원들은 1만 5,000여 점의 새옷을 여러 트럭에 
싣고 와서 그 무거운 상자를 어깨에 메고 묵묵히 지하실까지 운반해 주었다. 
그때는 새옷보다 옷이 담긴 그 많은 상자들을 지하실로 운반해 준 헌신적인 
도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의 겨울 옷을 모야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일원으로 
시작했던 일이 3개월 만인 11월 하순에는 컨테이너 다섯대 분량이 되었다. 그 
많은 옷을 수출용 상자에 담아 포장하는 일은 남자 교도님들도 열심히 함께 
했었다. 워낙 많은 옷이 산더미같이 쌓였기 때문에 함께 사는 여러 교무님과 
나도 수출 공단의 숙달된 일꾼처럼 옷을 담고 포장하는 일에 능숙해졌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지하실에서 옷을 담고 포장하는 작업을 할 때는 참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옷이 가득 쌓인 
그 좁은 공간에서 석유 난로라도 피우는 날에는 꼭 불이 나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불을 피우지 못했다. 냉동실 같은 지하실에서 포장작업을 
했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옷을 포장한 사람은 그 무렵 한국에 온 히말라야 청년 
아지타(원현장) 군이었다. 그는 하루같이 지하실에서 자신의 고향 히말라야에 
보낼 옷을 상자에 담아 포장했다. 그 무거운 상자들을 혼자 들어올려 쌓느라 
너무 애를 쓰다가 나중에는 병까지 났다.
  1993년, 내가 두 번째 방갈로르에 갔을 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히말라야 청년 
아지타 군이 한국에 와서 원불교 공부를 하여 장차 원불교 교역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성실하고 총명해 보이는 아지타 군을 한국에 초청해 
공부하도록 해 그는 그해 12월 말에 입국, 강남교당에 살면서 연세대학교 
어학당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위해 옷을 
모으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곳 소식을 더 자세히 전해 주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이불이 따로 없어서 밤에 잠잘 때는 낮에 입었던 옷을 이불 삼아 덥고 
잔다고 했다.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우리네로서는 혹한의 추위 속에 
불기 없는 냉돌에서 이불도 없이 어떻게 잘 수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설산 사람들을 위해 옷을 모으는 일에 큰 힘을 함께 쏟고 있던 김몽은 
신부님은 그 소식은 전해 듣고, 신부님이 책임 맡고 있는 엠마우스로부터 
엄청난 물량의 담요를 보내 주었다. 가톨릭의 엠마우스가 구호품을 지급하는 
보급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치성당의 협력을 얻는 데는 실무를 담당했던 김 
스콜라 스티카 수녀님의 도움이 컸다. 우리는 서로 타종교인이란 이질감이나 
거리감 없이 오직 히말라야 사람을 돕기 위해 한마음으로 일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김 수녀님은 기쁜 마음으로 겨울 옷과 담요를 모으고 
신자들과 함께 옷을 정리하고 또 상자에 담아 포장했다.
  강남교당 교도님들도 집에서 덮지 않는 두터운 솜이불들을 모두 교당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 모여진 담요와 이불은 1,000좀아 넘었고 새로운 
컨테이너 한 대가 불어나 모두 여섯 대의 컨테이너가 됐다.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위해 옷을 모으는 동안 참으로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계성초등학교 최 루시아 교장 선생님이 '작아서 입을 수 
없는 겨울 옷을 히말라야 설산 어린이들에게 보내자'는 운동을 펼쳐 모은 옷이 
더욱 고마웠다. 많은 옷이 모여도 어린이 옷은 참으로 귀했기 때문이다. 
라이온스 K지구 회원들도 강남교당 지하실에서 모여 회원들이 차량으로 실어 
나르는 옷을 현장에서 가려 포장하느라 북적댔고, 은혜심기본부 최경도 
교부님은 원광중, 고등학교와 원광여상 그리고 여러 교당에서 모은 옷을 한 
트럭 가득 싣고 이리에서부터 서울까지 원정으로 와 우리를 기쁘게 했다.
  서초구 삼풍노인대학, 서울 농촌지도소 텃밭모임, 삼성의료원 중견 사원, 
삼성정관 여직원들의 정성도 고마웠다. 개인의 정성으로는 강남교당의 오명조 
교도님과 천주교 김기수 청량리 할머니의 정성이 놀라웠다.
  헌옷을 모아 멀리 히말라야 설산까지 보내는데 기왕이면 부잣집 옷이 많이 
나와야 좋은 옷이 많을 것 같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께도 
옷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 댁에서는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보내준 
것처럼 좋은 옷을 많이 보내 주었고. 불이회 여러분들의 옷도 모아 보내주었다. 
서울대 백낙청 박사 부인인 한지현 교수도 친구들의 옷까지 모아 오는 큰 
정성을 합했고, 정재문 의원 부인 박영애 여사도 사돈댁 옷까지 모아 왔었다.
  강남교당을 신축한 이후 지하실은 별 쓸모가 없었는데 히말라야 사람들에게 
옷을 모아 보낼 때는 그 넓은 공간에 컨테이너 여섯 대의 많은 의류를 보관할 
수 있어 매우 유용했다. 컨테이너의 옷상자가 가득 찬 지하실의 좁은 통로를 
신비한 미로처럼 생각하며 따로 할 일이 없어도 나는 자주 옷 상자 아래를 걸어 
다녀 보곤 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옷을 모아도 우리 뜻대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도 정부를 대신해 한국에 나와 있는 대사관으로부터 
무환 수출의 허가를 받아야 보낼 수 있었다. 우리가 보내는 물건이 구호 물자로 
떠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무역 거래가 되어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상가세나 스님 측에서 그 헌옷을 받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인도 사람들이 못살아도 자존심이 강한 민족인데 대사관 측에서 우리가 입던 
옷을 자기 나라에 보내도 좋다고 승인을 해주겠느냐며 우려 섞인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만약 허가가 안 나오는 날에는 히말라야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모아놓은 따뜻한 옷을 보낼 수가 없어서 큰일이고, 더 큰일은 이미 
산더미처럼 지하실에 가득 쌓인 헌옷들을 달리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사무적으로 허가받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인도 대사와 친분 있는 
사람이 우리의 취지를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사람을 찾아 봐도 
주변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사무적으로 인도 대사관 측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우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서한을 작성하기로 했다.
  서한에는 우리가 일찍부터 히말라야 설산 라닥과 인연을 맺어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가 건립되도록 후원했고, 현재는 전교생의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썼다. 그러한 일로 관계를 맺게 된 상가세나 스님의 간곡한 요청으로 
우리는 그간 설산 사람들에게 보낼 옷을 모으기 시작했고, 각계의 호응으로 
얻어 이제 컨테이너 여섯 대의 분량이 됐다는 내용과, 아무쪼록 우리의 
온정으로 모은 따뜻한 옷이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잘 전해질 수 있도록 
인도 정부의 승인을 얻고자 한다는 간곡한 사연들을 썼다.
  서한 작성을 마친 뒤 인도 대사와 만날 시간을 약속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서한을 전할 때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함께 가서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 
전달이 잘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도 대사를 만나러 갈 때 
나는 혼자서 갔다. 통역을 잘하는 사람은 나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할 수는 있어도 나의 마음까지 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 실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고 유창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의 본심을 전하는 
데는 나의 서툰 영어가 오히려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인도 대사 집무실에서 만나 본 부파트라이 오자 대사는 기품있는 노신사였다. 
매우 정중히 대해 주는 그에게 나는 먼저 인도 여행을 했을 때 쿠트브미나르나 
타지마할에서 인도의 수준 높은 석조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인도의 간디나 네루 같은 인물을 존경한다고 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북인도 히말라야 설산 라닥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이야기와 서한에 쓴 내용들을 간략히 설명하고, 그 
옷을 보내기 위해 인도 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왔다고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나뿐 아니라 외국어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외국어로 자기 의가 표시를 
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외국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고 말뜻을 이해하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나도 인도 대사에게 내가 해야 하는 말만 일방적으로 했다.
  나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대사의 모습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인도에 대한 나의 깊은 관심과 노력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코라 참사관을 불러 우리가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고 일이 되도록 
도와 주라고 했다. 나는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 그간의 우려를 한 순간 
씻어냈다. 인도 대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코라 참사관을 따라 그의 방으로 
갔다.
  참사관은 부드럽고 편안하게 대해 주면서 우리가 제출한 문건을 검토했다. 
그는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노력할 테니 우리가 보내는 물품을 받을 
상가세나 스님도 잠무 카시미르 주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허가서를 주한 인도 대사관에 제출해야 구호품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전차는 매우 복잡했다. 코라 참사관의 협조를 당부하고 
인도 대사관을 나왔다.
  인도 대사관 측의 요청 사항을 상가세나 스님에게 알리자 그는 보내는 물품에 
새옷이 섞여 있으면 관세를 물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며 절대로 새옷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문제는 고맙게 받아 놓은 제일합섬의 새옷이었다. 나는 그 내용을 
제일 합섬 측에 알리고, 삼성에서 새옷을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돕기 위해 
희사했다는 내용과 수량과 가격 등을 모두 영문으로 작성해 달라고 부탁, 그 
서류도 인도 대사관에 접수시켰다. 좋은 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인도 정부의 승인을 얻는 문제가 걱정되어 대사관 측에 자주 전화를 해보면 
대답은 아직 본국에서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좀 늦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만에 하나라도 승인을 받지 못할까봐 내 가슴은 항상 두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인도 대사관에서 본국으로부터 허가가 났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그때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쁨과 안도감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접한 다음 인도 대사관에 갔을 때 여러 직원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자기들도 이런 일은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잘될까 걱정했었다고 했다. 얼마 후 상가세나 
스님이 그곳 주정부로부터 받은 허가증을 보내와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을 위해 
모은 옷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걱정은 끝나지 않았다. 컨테이너 여섯 대 분량의 많은 물건을 
보낼 송료가 문제였다. 사람들은 헌옷은 주어도 그 옷을 멀리 보낼  송료까지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물건을 희사해 준 제일합섬에 송료 이야기를 
해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산출된 송료는 2,000만원이었다.
  지하에 있는 여섯 컨테이너분의 옷을 지상으로 꺼내는 데 드는 인건비도 예상 
밖으로 많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로, 부산에서 인도 봄베이 항까지는 배 
편으로, 또 봄베이에서 델리까지의 먼 길은 육로로 운반한 다음, 델리에서 
컨테이너를 해체하여 스무 개의 대형 트럭에 나누어 싣고 3,600미터 고지의 
라닥까지 운송하는 비용은 2,000만원이었다.
  '송료가 문제인데 송료를 어떻게 하지...'하는 말이 입 밖으로 절로 새어 
나왔다. 우리 교당에서 발행하는 강남회보는 송료를 모금해야 한다고 속삭이기 
시작했고, 귀가 밝은 우리 교도님들부터 송료가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푼 두 푼 내는 돈으로 송료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 무렵 이마 샛별 어린이집 관계로 삼성복지재단을 방문했다가 새로 부임한 
한용외 전무님과 만나 인사를 한 다음 무심코 속걱정을 털어놓았다. 
제일합섬에서는 옷을 한 컨테이너 분이나 희사하면서 송료는 전혀 주지 
않는다고 고마운 일을 가지고 불평하듯 말했다. 나의 말을 듣던 한 전무님은 
삼성의 또 다른 데서 출연할 수도 있는 문제라며 내게 막연한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처음 만난 분에게 해본 말일 뿐이라서 큰 기대를 갖지 않았었다.
  며칠 후, 한 전무님은 "박 교무님, 송료 일체를 삼성전자에서 내기로 
했습니다. 안심하세요."라는 기쁜 소식을 전화로 알려 주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했던지 나는 수화기에다 대고 수없이 목례를 거듭하며 
감사드렸다.
  이제 송료까지 해결됐으니 내일 모레라도 옷을 실은 컨테이너가 떠나면 된다. 
그러나 히말라야로 가는 길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5월이나 되어야 짐을 
운반할 수 있다는 소식이 설산으로부터 전해왔다. 만약 히말라야의 길이 트이기 
전에 물건을 보내면 인도의 봄베이 항에서 길이 뚫릴 때까지 지체하는 만큼 
사용료를 물어야 한다고 그 돈도 수월치 않다며 눈이 녹을 때를 기다렸다가 
물건을 보내라고 했다.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 우리의 온정을 띄웁니다

  5월을 기다리기까지는 또 세월이 흘러 더디 가고 있었다. 지하실 가득 산더미 
같은 컨테이너 여섯 대 분량의 짐이 히말라야의 눈과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지루했다.
  딴 걱정이 없이 지나던 어느 날, 혼자서 모은 물건도 아닌데 어떻게 나 
혼자서 그 많은 짐을 띄울 것인가... 그래서 함께 애썼던 분들과 발송식을 하고 
짐을 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발송식엔 어떤 손님을 초청할 
것인가에 생각이 미쳤을 때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주한 인도 대사였다. 아주 
소박한 생각을 갖고 인도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초청의 뜻을 알리며 어느 날이 
대사님이 참석하시기 좋은가를 문의했다. 그런데 며칠 후 뜻밖의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발송식에는 어떤 인사들이 참석하느냐는 것이었다. 송료를 전달할 
삼성전자 측에서도 같은 질문을 해왔다. 나는 순간 쉽지 않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인사...' 어떤 인사가 참석해야 인도 대사가 참석할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전 국무총리 이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님께 
전화를 드려 발송식에 대한 계획과, 주한 인도 대사관 측과 삼성전자 측에서 
뜻밖의 문의를 해와 당황하고 있다는 자초지종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바쁘시더라도 발송식에 참석해 주셔야 인도 대사를 초청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이현재 원장님은 상황 판단을 빨리 하시고 발송식 참석을 쉽게 
수락해 주셨다. 그분의 참석을 전하자 주한 인도 대사와 삼성전자의 강진구 
회장님이 발송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알려 왔다.
  이현재 원장님도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옷 보내기 운동에 동참하셨었다. 
포스터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붙여 여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옷을 모으게 
했고, 모여진 옷을 차량으로 교당까지 보내 주셨었다. 부인 김요한 여사는 집안 
대소가의 옷을 모아 다리미질까지 해 보내시어 우리를 감동시키기도 했었다.
  나는 발송식 준비를 하면서 상자에 담았던 옷을 다시 꺼내어 지하 복도에 
진열해 내빈들이 히말라야에 보낼 물품들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전시장처럼 
꾸몄다. 아직 자신이 입어도 좋을 옷인 털 스웨터들, 색상이 고운 여러 가지 
옷들, 히말라야 어린이들을 위해 시장에서 새로 구입한 어린이용 방한화와 새 
잠바, 스키복, 바지, 목도리, 장갑들까지 고루 진열했다. 설산 사람들이 입으면 
따뜻할 옷들 하나하나가 다 좋아 보였고 담요도 큰 선물이 될 듯 싶었다. 
전시된 옷들을 보고, 또 보고, 또 다시 보아도 내 눈엔 모두 값져 보이고 
예술품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 교당 교도님들은 발송식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남자 교도님들은 
현수막을 밖에 내걸고 안에서 내빈을 응접할 사람, 밖에서 귀빈들의 차량 주차 
문제를 책임질 사람 등 역할 분담을 했다. 여자 교도님들은 불단을 꽃으로 
장엄하는 일,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고 마당 입구에서 내빈을 맞아 방명록에 
서명하도록 안내하는 일, 또 지하실의 전시장에서 손님을 맞는 일들을 
분업적으로 나누었다. 그날의 내빈을 대접할 음식은 솜씨 좋은 조대현 교도님이 
준비하고 주방의 궂은 일은 젊은 교도님들이 맡았다.
  1994년 4월 20일 열한 시,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 우리의 온정을 띄웁니다'란 
대형 현수막이 화사한 봄날 우리의 뜻 깊은 행사를 밖으로 잘 알리고 있었다. 
안팎으로 깨끗하게 청소하고 속마음까지 청정하게 단장한 우리들은 부파트라이 
오자 주한 인도 대사와 코라 참사관, 그리고 한국의 저명 인사들이 귀한 
내빈으로 우리 교당을 찾아 주심을 반겼다. 오신 손님들끼리 마당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특히 송료를 갖고 오신 삼성전자 
강진구 회장님은 초면이었고, 2,000만 원의 송료가 마련되도록 주선해 준, 딱 한 
번 만났던 한용외 전무님을 행여 잘못 알아볼까봐 마음쓰기도 했던 일은 나의 
추억 거리이다.
  대치성당 김몽은 신부님, 숙명여자고등학교 이정자 교장 선생님, 
숙명여자중학교 권명규 교장 선생님이 오실 때는 행사의 주인공들을 맞는 
반가움이 컸다. 특히 서로 다른 수도회에서 오신 일곱 분의 수녀님들과 세 분의 
신부님 그리고 네 분의 스님들이 우리 교당으로 들어오실 때는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참으로 보기 좋았다.
  천주교에서는 히말라야 사람을 돕기 위해 만난 김몽은 신부님, 중증 장애자를 
잠시 돕던 인연으로 만난 최기식 신부님,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을 돕느라 만난 
오태순 신부님이 오셨었다. 바오로수도회 베타니아집의 노수녀님들 그리고 소외 
계층에 함께 관심을 갖다 만난 수녀님들과, 옷을 함께 모았던 대치성당의 김 
스콜라 스티카 수녀님과 천주교 신자분들도 오셨다.
  불교 측에서는 법련사의 현호 스님, 맑고 향기롭게 운동 본부의 청학 스님, 
로터스 랜턴의 캐나다 도공 스님과 호주의 지광 스님 등 모두가 종교의 벽을 
넘어오신 귀한 손님들이었다. 교단 내에서도 팔타원 황온순 원로님과 
원광대학교 김삼룡 총장님, 김인철 교정원장님 등 여러 교부님들이 주인 자리를 
지켜 주셨다.
  오신 손님들은 먼저 지하실로 안내되어 그곳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 여섯 대 
분량의 많은 옷 상자와 전시된 물품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우리의 온정이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보람을 확인했다.
  정중하게 초대받아 오신 손님들이 법당에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발송식이 
시작되고 나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은혜로우시고 위력이 자재하옵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오늘 저희들은 히말라야 설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온정의 짐을 
띄우는 발송 봉고를 올리옵니다. 수륙 수만리 머나먼 길, 높고 높은 히말라야 
설산까지 컨테이너 여섯 대의 많은 짐들이 안전하게 도착되도록 위력을 나리어 
주시옵소서.
  40여 년 전에는 고마운 이웃 나라로부터 우리도 구호의 물자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어렵게 사는 이웃 나라를 보살피고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어 
갚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구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형편이 서로 같지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은 못하나, 유리 한 
장도 3,600미터 아래에서 구해 올려 가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눈과 얼음 속에 갇혀 땔감도 없이 8개월 동안의 긴 혹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저희가 모은 따뜻한 옷과 이불과 담요와 방한화는 
그들이 추위를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운동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에게는 자비 실천의 값진 경험을 통해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하여 주시옵소서, 일심으로 비옵나이다."
  기도를 마친 다음, 이어서 8개월 간의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고, 특히 송료가 
부족하다는 보도를 접하고 주님의 교회 이재철 목사님, 천개사 주지 법능 스님, 
원광대학교 한길량 교무님이 모금해 보내 준 성금과 여러분들이 송료를 내어 준 
돈으로는 히말라야 어린이들의 새 신발과 새옷을 샀다고 보고하며 감사드렸다.
  대산 종법사님께서는 이번 일이야말로 모든 성자의 정신인 자비, 사랑, 인, 
은혜를 실천과 협력으로 꽃피운 장한 일이라는 격려사를 내려 주시어 
대독되었다.
  이 운동에 동참한 분들의 소감을 듣는 시간에, 김몽은 신부님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생존 조건이 극한 상황으로 어려운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의 
소식을 알고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명을 구가하는 현대 인류의 수치이고 
죄악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해 원불교와 가톨릭이 손잡고 
협력했던 이번 일은 한국 종교사에 미담으로 기록되어 오래 남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정자 교장 선생님은 4,000명의 숙명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여러 
선생님들을 대신해서 오늘의 보람찬 발송식에 찬사와 축하와 갈채를 보낸다고 
했다. 이정자 교장 선생님은 우리 모두가 절대 빈곤을 경험해야만 했던 부산 
피난 시절 구호품 잠바를 사다 밤새 뜯어고쳐 몸에 맞게 만들어 입고 대학교에 
다녔던 과거를 회상했다. 그리고 우리가 히말라야 사람들을 위해 옷을 모았던 
일은 우방으로부터 입었던 은혜를 갚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그리고 작은 
동참이 이처럼 엄청난 결실을 맺으리란 예측을 전혀 못했었다고 그간의 일을 
회고했다.
  부파트리이 오자 주한 인도 대사는 강남교당에서 라닥에 교육 기관이 
세워지도록 후원하고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보내 준 데 대해 감사한다며, 이번 
각계의 온정으로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을 도와 준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 옛날 해초 스님이 인도를 순례할 때로부터 한국과 
인도는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고 축사했다.
  삼성전자주식회사 강진구 회장님이 2,000만 원의 송료를 전달할 때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축사순에 이현재 원장님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어렵게 사는 라닥 
사람들의 실상을 보았다며 우리가 보내는 겨울 옷이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현재 원장님은 그간 애쓰신 분들의 노고를 일일이 언급하고, 
이번에 펼친 이 사랑의 실천 운동은 우리 나라가 바야흐로 국제화, 세계화, 
개방화 시대를 맞는 데 있어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축사했다.
  보낸 사람을 밝히지 않고 장문의 축전을 읽은 다음 '청와대 손명순'이라고 
사회자가 말했을 때는 영부인의 배려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발송식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한 분 한 
분이 모두 귀빈인데다 여러 종교의 성직자와 수도사들이 서로 다른 복색을 하고 
자기 종교의 향기를 간직한 채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종교의 화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그 광경은 숭고해 보였다.

     설산에서 나눔의 축제

  3,600미터 하말라야 설산 라닥에 우리가 보낸 컨테이너 여섯 대 분량의 
따뜻한 겨울 옷이 무사히 도착하자 상가세나 스님은 우리를 초청하여 '나눔의 
축제'를 열겠다고 소식을 보내왔다. 북인도 히말라야 설산을 마치 우리 나라 
한라산보댜 더 가깝게 여기던 나는 이상철 교도 회장님 등 몇몇 분과 함께 
'나눔의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때마침 휘영청 밝은 한가위 둥근 달을 라닥에서 보게 됐다.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보는 팔월 대보름 달은 가까운 공중에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바위산들은 달빛에 반사되어 온통 핑크빛이었다. 산이라지만 
울퉁불퉁한 바위뿐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정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달나라에 와 있는 곳 같았다. 그 밝고 밝은 달빛 아래서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히말라야 어린 소년들이 벗어 놓은 한국산 방한화 새 
신발이었다.
  히말라야에 옷을 보내기 위해 그리고 어린이들의 새옷과 새 신발을 
마련하느라 애썼던 온갖 사연을 진솔하게 둥근 달님에게 고백하듯 내 속마음을 
열어 보였다. 우리 어린 소녀들이 한국에서 보내 온 새 신발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 지금의 아이들뿐 아니라 매가 알 수 없는 미래의 
이곳 어린 학생들도 똑같은 기쁨을 맛볼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마치 미래의 
행복을 가불하여 맛보는 것 같은 신비한 환상에 젖었다.
  히말라야 라닥으로부터 한국에 와 강남교당에 살고 있는 아지타, 원현장 군은 
나에게 한국 어린이들이 신고 있는 겨울 방한화를 히말라야 어린이들에게 
보내면 좋겠다고 간청하듯 말했었다. 그는 신발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지타 군의 말에 따르면 설산의 어린이들은 겨울이면 
마른풀을 신발 속에 넣어 신고 다니지만 너무 추운 겨울 동안 모두 동상에 걸려 
고생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방한화를 사 보내기로 결심했다. 보통 때는 어린이들이 
신고 있는 방한화에 아무 관심이 없던 내가 히말라야 어린이들의 신발을 사기 
위해 가격을 알아보았을 때 어린이들의 신발이 매우 비싸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방한화 한 켤레를 사려면 적어도 2만 원은 주어야 했다. 지금까지 
지구촌 어디에서도 설산 사람들에게 따뜻한 옷이나 신발을 보내 온 일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의 따뜻한 겨울 옷을 보낼 때 방한화를 사 보내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어린이들의 신발을 사기로 마음을 굳혔다.
  히말라야 어린이들이 몇십 년 동안 걱정없이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사 보낼 
궁리를 했다. 그리고 라닥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헌옷만 나누어 주면 그들의 
동심에 상처를 줄 것만 같아 새옷도 사 보내기로 했다. 그때 문득 우리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농지기 옷감을 오랫동안 농 속에 두고 우리들의 옷을 
지어주곤 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히말라야 기후는 항상 춥기 때문에 오히려 
물건의 품질도 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옷도 수십 년 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가 사 보내는 새옷과 새 신발은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 학생들만이 입고 신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까닭은 그들은 히말라야 어린이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짜기에 사는 더 
가난하고 더 불우한 어린이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더 큰 혜택이 
오래도록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어린이들에게 새옷과 새 신발을 사 보내야겠다는 하나의 생각이 
절실한 염원으로 내 마음에 사무쳤다. 내 마음속에 한 염원이 생기면 보이지 
않는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이 세차게 요동치고 뻗치는 것만 같아 나는 결국 그 
힘에 못이겨 마음먹은 대로 부지런히 행동하곤 한다.
  히말라야 어린이들을 위해 겨울 용품을 사려던 때가 마치 새봄을 맞을 
무렵이라 겨울 상품은 철 지난 재고품이 됐을 때였다. 한 교도님이 남대문시장 
상인들에게 히말라야 설산 어린이들에게 새옷 보내기 운동 소식을 전했다.
  상인들은 동정심에다 후한 인심까지 보태어 4만 원씩 하던 두툼한 잠바나 
코트도 모두 공자도 가격에 주었다. 모진 찬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모자까지 
달린 외투와 두툼한 잠바 그리고 누벼 만든 스키바지를 무려 1,600점을 샀다. 
목도리, 털장갑에 양말도 1,800여 점을 샀다. 신발은 화성상사의 '월드컵' 
방한화 600켤레를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현재의 학생이 46명인데 600켤레의 신발에다 1,600점의 외투, 잠바를 사들인 
것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어도 히말라야 설산 어린이들이 수십년 동안 
따뜻한 옷과 신발을 입고 신고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었다. 
  내 마음속을 훤히 알고 들여다보는 것 같은 라닥의 둥근 달을 바라보자, 조금 
전 이곳 어린이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또 한국에서 히말라야 설산 어린이들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쏟았던 
나의 열정이 객관화되어 파노라마처럼 내 앞에 스쳐 갔다.
  또 어떤 사람들은 헌옷을 보내는 송료가 너무 많이 든다고 탓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새옷을 사 입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며, 마치 자신의 그 같은 
생각이 큰 지혜라도 되는 듯이 큰소리로 말하던 사람들의 소리도 히말라야 
달밤에 내 귀에 다시 들려왔다. 그런 말들은 옷을 모으느라 애썼던 노력들을 한 
순간 맥빠지게 했다. "옷 보내기 운동을 벌였기에 그 옷을 보낼 송료가 
생겼지... 누가 처음부터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새옷을 사 주라고 돈을 
주느냐?"고 항변하듯 말했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아까부터 멀리서 '둥둥둥' 하는 북소리와 맑디맑은 나의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온다. 조들은 내일 '나눔의 축제' 때 선보일 노래와 춤 연습을 하느라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사막의 땅에는 한 사람도 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막의 땅에 배움터가 생겨나고 히말라야 깊은 
산촌의 어린 소녀들이 함께 모여 살며 공부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상가세나 스님의 의지와 노력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말라야 라닥에서 달 밝은 한가위 밤이 깊어갈 무렵 상가세나 스님은 나를 
위해 마련했다는 특실로 안내했다. 수세식 화장실까지 있으니 이곳에선 보통 
특실이 아니다. 침대에는 낯익은 담요가 몇 개씩 깔려 있었다. 우리가 보낸 
담요였다. 내 손으로 꾸려 보낸 우리 나라 담요인데도 그 담요 속으로 나의 
몸을 놓을 때는 마치 벗어 놓았던 헌옷을 다시 입는 기분이었다.
  추석 달을 바라보며 온갖 감회에 젖었던 나는 잠자리에 들어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내 방의 창문은 아주 심하게 덜거덕거리며 흔들렸다. 밖에서는 
세찬 바람이 창공을 휘젓고 펄펄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창공이 
찢어지는 소리 같았다. 그 바람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일 없는 귀신 우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히말라야 밤바람 소리도 나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도록 
깨우고 또 깨웠다.
  몇 겹으로 덮은 담요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추위는 더 깊이 
파고들었다. 몸을 더 작게 움츠려 봐도 전신으로 느껴지는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난방도 없고 침대라야 나무를 잘라 
합판으로 침대 바닥을 깔았는데 그 나무 바닥의 느낌은 냉돌 같았다. 나로서는 
히말라야의 9월 추위도 감내할 도리가 없었다. 잠을 자려고 애써도 추위가 다시 
잠을 깨우곤 했다. 이곳 사람들은 맨바닥에 풀을 깔고 낮에 입었던 옷을 벗어 
덮고 영하 30__40도의 혹한에 이불도 없이 잔다고 하니, 도대체 이런 환경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추위와 싸우느라 잠도 못 이루며 밤을 하얗게 샌 나는 들어서 알고 말로만 
설명했던 히말라야의 추위를 온몸으로 느껴 보았다.

  1994년 9월 18일, 나눔의 축제와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 낙성식이 있는 
날이었다. 내 방 유리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등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짐승 털을 우장처럼 어깨에 두른 아낙네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도포처럼 생긴 고동색 옷에 
붉은색, 초록색의 띠를 허리에 동여맨 남자들도 가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의 의 
복 빛깔은 흙먼지가 휘날려도 쉽게 더러움을 타지 않을 비교적 우중충한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옷감 자체가 짐승털을 천으로 만든 것들이라 고운 색상의 
염색은 잘 안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우리 일행은 시간이 되어 행사장으로 갔다. 라닥에서는 큰 행사가 
있으면 알록달록하게 쪽보처럼 휘장으로 두르는 곳은 행사장을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네처럼 햇볕을 가리지 않고 병풍처럼 옆을 가리는 
것은 갑자기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기 위해 하는 것 같았다.
  나눔의 축제장에는 그 고운 휘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라닥에서 큰 행사를 할 
때면 반드시 자주빛 승복을 입은 라마승들이 단상의 윗자리를 채운다. 나눔의 
축제에는 인도 정부의 장관급이라는 불가촉천민 정부 대표 탐탄 회장, 라마불교 
대표 린포체 큰스님, 인도 정부의 소수민족위원회 위원인 라마 롭상 스님, 라닥 
불교협회 회장 톱스탄 체왕, 여러 수도원의 원장들, 라닥을 대표하는 인사들과 
우리 일행들이 그 넓은 단상에 자리했다.
  나눔의 축제가 시작되자 상가세나 스님은 한국에서 보내 온 옷에 대해 
설명하고, 어려운 설산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따뜻한 옷을 많이 모아 보내 
준 데 대해 감사의 인사말을 했다. 식순에 따라 그곳 주요 인사 여러분들이 
나와 각각 긴 축사를 했다. '코리아 원부디즘'이란 말이 자주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한국의 원불교가 히말라야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
  축사가 계속되는 동안 옷을 얻어 가기 위해 나눔의 축제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의복이 남루하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그들의 손에는 백팔염주가 들려 있고 
마니차(기도 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우리가 남주기에는 미안하게 생각했던 
옷들이 이곳에선 참으로 따뜻하고 고마운 겨울 옷이 될 것 같았다.
  나눔의 축제에 참석한 여러 귀빈들의 축사 다음에 내가 말해야 되는 차례가 
왔다. 나는 히말라야 설산 나눔의 축제에 와서 이곳 주민들을 직접 만나보면서 
우리가 했던 일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더 절실히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이 
따뜻한 옷에서 한국 사람들의 온정도 함께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상가세나 스님은 우리가 보낸 헌옷들을 한두 가지씩 꾸러미를 만들어 정중한 
선물로 준비했고 나눔의 축제에서 우리의 옷을 받아 갈 사람들의 명단도 이미 
작성해 놓았다. 한국에서 옷을 모아 보내는 일도 어려웠지만 이같이 분배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사는 히말라야 사람들, 특히 물이 귀하고 항상 춥게 사는 그들은 머리 
감는 일이 큰일이어서인지 오래도록 머리를 감지 않아 뒤엉킨 머리카락이 
그들의 행색을 더욱 초라하게 했다. 그리고 추운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라 
여인들은 너나할것없이 머리의 보온을 위해 허름한 수건들을 쓰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내 옷을 받아 갈 사람들에게 옷 꾸러미를 나누어 주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더 어렵게 사는 노인들에게 담요가 돌아가도록 배려하는 듯했다.
  담요를 받아든 히말라야 노인들의 눈빛, 처음 보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신기함과 그 좋은 것을 갖게 된 기쁨으로 빛나는 그들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더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모습이 오히려 생소한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또 내가 내미는 손을 서로 잡아 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어떻게든 나와 접촉해 보려고 했다. 내 손만 잡아도 그리고 내 몸과 부딪히기만 
해도 자신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이란 막연한 신심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한 그들 모습은 신앙심 강한 종교인들의 또 다른 모습으로 
여겨졌다.
  이곳에서는 나눔의 축제뿐 아니라 또 하나의 경사로운 일이 있었다. 그간 
기숙사의 일부를 교실로 쓰던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가 여섯 개의 교실과 한 
개의 사무실로 된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낙성식을 하는 날이었다. 단상에 앉아 
있던 인사들과 함께 우리 일행은 설산 사람들의 말없는 미소와 환영 속에 
학교가 있는 곳으로 갔다.
  히말라야 라닥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이기라도 한 듯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낙성식은 학교 건물 입구에서 그 지방 대표들과 내가 테이프를 
자르고 교실 내부로 들어가는 간단한 행사였다. 아주 소박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학교 교실에는 어린 학생들이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작은 책걸상이 놓여 
있었다. 교실 내부에는 한국의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던 히말라야 라닥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건립 후원 기사나 설산 사람들에게 겨울 옷 보내기 
화보로 환경 정리를 꾸미고 있었다.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야말로 한국의 
뿌리에서 돋아나 꽃피운 설산의 교육 기관이란 실감이 절로 들었다.
  '마더 박청수 도서관'이란 표지판이 붙은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는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각종 도서와 우리가 꾸려 보낸 장난감들이 놓여 있었다. 어린이들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것들을 한데 모아 놓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아름다운 
습관이 길들여질 수 있는 공간 같았다. 특히 그 도서관 안에는 사진이 아닌 
나의 초상화가 나보다 훨씬 젊은 모습으로 걸려 있고 아이들이 내 곁에 모여 
있는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있기도 했다.
  그 도서관에는 그곳 산촌 어린이들이 비디오를 시청할 수 있는 시설까지 
헤놓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한국에서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게 겨울 
옷보내기 발송식을 했을 때 MBC 9시 뉴스 시간에 방영했던 자료 테이프와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소개했던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달나라에서 지구촌 소식을 접하는 것 같은 신기함을 느꼈다.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2층으로 어린 여학생들의 된 철제 침대에는 
모두 우리가 보낸 담요들이 깔려 있었다. 그야말로 데와찬 어디를 가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없는 것이 없었다.
  성격이 소극적인 어린이들은 우리가 방안에 들어갔을 때 수줍은 뜻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고, 활달하고 사교성이 있는 소녀는 나의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작은 선물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리고 '마더'라고 
부르며 해맑은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는 그들에게 나는 이미 옛날부터 아는 
사람처럼 정을 주고 있었다.

  학교 낙성식이 끝난 다음에 축제의 한마당이 열렸다. 우리 어린 학생들은 
전통 의상을 여러 가지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나와 어젯밤 늦게 까지 연습했던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노래가사는 한국의 원불교와 마더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솜씨를 선보이는 산촌 소녀들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이며 기쁘고 행복할까. 그들 어린 소녀들의 속마음을 헤아릴 때 그들의 
노래를 듣고 춤추는 것을 보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내 마음속에 고여 왔다.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은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연신 살피느라 자주 
시선을 내 쪽으로 보내 왔다.
  온갖 정성으로 다양하게 꾸민 어린 학생들의 프로그램이 끝나자 이제는 
어른들의 축제판이 벌어졌다. 고지대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춤을 추었다. 
춤사위가 멋있거나 흥겹지는 않아도 그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들은 축제의 한마당에 내가 함께 하기를 원했다. 나도 그들처럼 느릿한 
춤사위로 팔을 벌이며, 그들은 어느덧 그들 특유의 고깔 모자를 내 머리 위에 
씌워 주고 그들의 비단 끈을 함께 쥐어 주며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나눔의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이른 아침, 내 방 앞에서 이상한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놀라서 나가 보니 한 노파가 땅에 주저 않아 중얼거리며 울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다독이며 달래려 하자 그 노파는 다 낡은 홑겹의 
옷을 헤쳐 자신의 가슴팍을 내보였다. 노파 주변에 마하보디 식구들도 
모여들었다. 사연인즉 어제 나눔의 축제에 오지 못해 옷을 얻지 못하게 되어 
원통해서 그렇게 울고 있다고 했다.
  나는 식구들에게 내복과 스웨터 등 몇 가지의 옷을 얼른 가져오게 하여 그 
노파에게 주었다. 그 노파는 받아든 옷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무수히 절을 
하면서 입술을 달싹이며 경문을 외우는 듯했다. 그러기를 마친 다음 노파는 그 
옷을 소중한 듯 가슴에 안아 보며 좋아했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노파는 연신 나를 바라보며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맛보는 기쁨이 천당인 것 같아요.' 하던 청량리 
할머니의 음성이 우렁우렁 히말라야 계곡에 울려퍼지고, 노파는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의 헌옷이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에겐 고맙고 따뜻한 겨울 옷이 될 
것이라며 옷을 모으기 시작했을 때 자신을 '청량리 할머니'라고 하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신문을 보고 알았다며 헌옷을 모아 오겠다고 했다. 자신은 
현재 갑상선암에 걸려 원자력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다리는 성하니까 
히말라야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옷을 모아 보겠다고 했다.
  그후 그분은 몇 차례에 걸쳐 옷을 모아 왔다. 한두 번은 아들 차를 타고 
운반해 왔지만 지하철을 타고 옷 보따리를 운반해 왔다고 했다. 부피가 크고 
무거워 보이는 세 개의 보따리를 받아 반기면서 어떻게 운반해 저 큰 짐들을 
가져왔느냐고 놀라워하며 위로하자, 청량리 할머니는 한 보따리 씩 계단 아래로 
내려놓고 또 한 보따리씩 그렇게 운반해 왔다고 했다. 지하철을 바꾸어 타고 
오느라 지하철 계단을 수십 번 오르내렸다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겉으로는 잔뜩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운반해 온 보람으로 충만한 듯 기뻐하며 
말했다.
  "천당엔 가보지 않아 모르겠어요.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때 맛보는 
기쁨이 곧 천당인 것 같아요."
  나는 그 때 그분에게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의 
시한부 인생에 대한 엄청난 충격과 좌절감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남은 
인생마저도 비탄과 번민으로 괴로워할 곳이다. 그러나 청량리 할머니는 자신을 
'암 체질' 이라며 그간의 오랜 병력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따로 내세우는 
인생관이나 죽음의 철학 같은 것은 없어도 청량리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승리로 이끄는 달관자였다. 히말라야 나눔의 축제에 와서 나는 유독 
청량리 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다.

     팅모스감 마을의 인상

  나는 몇 차례 라닥에 왔어도 몇몇 사원을 구경했을 뿐 항상 레의 중심지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상가세나 스님의 고향 마을 팅모스감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곳까지 가는 데는 세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이제야말로 
히말라야 라닥의 깊은 산촌 마을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팅모스감까지 가는 길은 줄곧 인더스 강물을 끼고 돌았다. 높은 산은 하얀 
눈을 이고 있고 산비탈에는 고산 식물의 작은 꽃이 무리져 피어 있어 그 모습을 
볼 때는 히말라야 산이 알프스처럼 느껴졌다. 또 온갖 모양의 바위산들이 
이리저리 봉우리를 이루고 골짜기가 깊을 때는 이집트에서 보았던 시나이 산을 
닮은 듯했다. 바위산인가 하고 보면 비로 곱게 쓸어 내린 것 같은 모래언덕이 
있고 회색빛인가 하면 담갈색이었다. 구름 사이로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는 
곳은 고운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히말라야는 그야말로 신비롭고 조화가 무궁무진했다. 구획에 따라 산의 
형상과 산빛이 서로 달라 마치 산의 박물관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을 깊이 응시하게 되는 곳에는 여인의 가르마 자국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로가 나기 전에 사람이 걸어 다녀 만들어진 길이라고 
했다. 그 가늘고도 구불구불한 끝을 두르고 있는 듯한 산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팅모스감 마을 뒤로 높이 솟은 산은 하늘에 닿은 듯이 높은데 굴곡도 
없이 한 줄기 시선으로 뻗어 내렸다. 산이 흐르는 곳에는 작은 모래자갈이 계속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마을의 길가에는 풍부한 맑은 물이 흐르고 지형이 
비탈진 곳으로 물이 급히 쏟아져 흐르느라 물소리가 마을을 쿵쿵 울려 마치 
폭포 아래 서 있는 착각을 일게 했다.
  우리가 도착한 마을 어귀에는 화려한 전통 의상에 파란 터키석이 박힌 
장신구를 머리 위부터 등으로 내려뜨린 처녀들이 줄지어 서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레에서도 그런 차림의 여인을 많이 보았지만 팅모스감에서는 숙성한 
여학생들이 복사빛 얼굴에 그런 차림을 하고 있어, 우리 나라의 전통 혼례를 
치르는 신부들이 원삼 족두리 차림을 하고 줄지어 서 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히말라야 깊고 깊은 산촌에서 아름다운 산골 처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나눔의 축제장으로 갔다.
  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학교였고 그 학교는 상가세나 스님이 1학년을 다니다 
중퇴한 학교라고 했다. 그곳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그리고 옷을 받아 갈 
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 먼 곳까지 언제 운반해 왔는지 우리가 보낸 
한국의 겨울 옷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옷을 필요로 하는 
남루한 옷차림의 산촌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학교의 30대의 젊은 승려 교장 
선생님에 의해 나눔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고향 마을에 돌아온 상가세나 스님은 
그 많이 쌓인 옷이 한국에서 보내 왔고 우리가 직접 나누어 주기 위해 이 
마을까지 왔다는 말을 전했다.
  그곳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명단이 이미 작성되어 있었고 이름을 부르는 
대로 앞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 모두는 선물처럼 잘 꾸려진 옷 꾸러미를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우리의 옷이 비록 헌옷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얼마나 
가볍고 따뜻한 겨울 옷이 될 것인가는 그들의 옷차림에서 충분히 짐작되었다.
  산촌 아낙네들은 아기를 담은 소쿠리를 짊어진 채 구경을 하기도 하고 아기를 
담은 소쿠리를 내려놓은 채 보고 있기도 했다.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염주알을 굴리거나 마니차를 돌리는 할아버지도 많이 와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히말라야 사람들과 눈으로 말하는 데 익숙한 나는 순박한 눈빛으로 미소 
짓고 있는 그들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굳이 다른 말이 필요 없이 모든 
교감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들의 그 고마워하는 눈빛을 옷을 내놓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직접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곳 운동장 가득히 모인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제일합섬에서 보낸 
새옷을 나누어 주었다. 새옷을 줄 수 있어 그곳 젊은 청소년들의 자존심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푸짐한 나눔의 행사가 끝난 다음에는 그곳에서도 한판 축제가 벌어졌다. 
히말라야 깊은 산촌 마을에서 건강한 처녀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춤추는 그 
아름답고 풍성한 모습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축제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처럼 보이는 히말라야 산촌 처녀들. 나는 그들의 
싱싱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고 있었다. 우리들도 그들과 비단 끈을 
함께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며 축제의 한마당에 어우러졌다. 웃을 모으던 길고 
긴 8개월이 빙글빙글 춤사위마다 내 눈앞에 스쳐갔다.
  축제를 마친 다음 우리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상가세나 스님의 아버님도 
찾아뵈었다. 부인과 사별한 그분은 온 집안을 깨끗이 하고 화단에는 꽃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의사로 마을 사람들의 병을 고쳐 준다는 그분은 우리에게 
아들 상가세나 스님을 도와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또 하셨다.
  우리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한 회원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 나라 능금보다 
더 작은 빨갛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히말라야에서 과실나무를 보는 기쁨이었다.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 
히말라야에는 사과말고 살구도 열린다지만 살구는 보지 못했다. 이 집 주인은 
내가 몇 차례 히말라야에 올 때마다 만났던 사람이라 반갑게 환대해 주어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응접실에는 이 고장에서 짠 양탄자가 깔렸고 중국 문양과 
색상을 연상케하는 찻상이 손님과 주인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응접실에서 차 대접을 받은 다음 우리가 안내된 곳은 거실이었다. 주방을 
겸한 거실은 듣던 대로 매우 크고 넓었다. 밥솥이 걸려 있는 부뚜막은 은빛 
나는 철제에 특별한 문양까지 놓여진 소재로 단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깨끗했다. 추운 곳이라 불을 펴 화기를 발산하는 곳이 그만큼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방의 선반에는 번쩍번쩍 윤이 나도록 잘 
닦인 놋그릇들이 층층으로 포개져 진열되어 있었다. 주방에서 쓰는 용기이지만 
잘 정돈되어서인지 그러한 그릇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쓰고 있는 가보의 장식품 
같았다.
  그 집의 새며느리는 손님이 오기 때문에 잘 차려 입기도 했겠지만 복식 
자체가 생활복이라기보다 치장을 중시했음을 엿볼 수 있어, 라닥이 그 옛날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번영을 누렸을 때의 사치의 풍속을 지금 보는 듯 했다. 
히말라야 산촌을 벗어나 보지 않은 새댁의 단정한 모습은 교양까지 있어 보여 
조행을 갖추고 사는 그들의 문화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마을이 다른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흙담집을 하얗게 칠하고 
나무의 문틀과 난간들을 조각한 집에서 1층엔 가축이 살고 2층에서는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다. 안내된 3층에는 불상이 모셔진 개인 집 법당이 있었다. 
규모만 작을 뿐 완전한 불교 사원처럼 부처님도 모셔져 있고 벽면과 천장에는 
그들의 수준 있는 불화가 그려져 있었다.
  라닥 사람들은 개개인이 자기 집 법당에서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며 기도하고 참선한다고 했다, 그 집뿐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불심이 장한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화된 불교 문화를 집집마다 
느낄 수 있었다.
  때마침 가을이라 타작 마당에서는 우리 나라 도리께 같은 것으로 곡식을 
두들겨 낱알을 만들고, 삼태기에 검불과 곡식을 함께 담아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그런 모습이 그 옛날 우리네 농경 시절을 연상하게 했다.

     라닥 불교 협회 초청

  라닥의 한 사원 입구에는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조화를 들고 서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모든 행사가 공식적이다 싶을 때는 항상 그런 여인들이 
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이곳 사람들은 손님을 환대하는 예절이 
습관화되어 있는 듯했다.
  사원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남성들이었다. 라닥 
불교협회에서 우리를 초청하여 환영과 함께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였다. 
라닥에서는 손님을 대접할 때 그들의 전통 차와 비스킷 종류의 과자를 차려 
낸다. 손님 앞에는 그러한 다과를 올려 놓을 작은 탁자가 놓인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진행하는 식순은 하얀 전통 스카프를 목에 걸어 주는 것이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일행 모두에게 그렇게 해주었다.
  라닥 사람들은 옷차림부터가 도포 비슷한 전통 의상을 입고 있고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어 모두가 수도자들처럼 보였다. 헤프게 처신하는 사람은 잘 볼 
수가 없다. 특히 그 지역 불교협회 사람들의 모임은 더 정중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무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정부의 
행정력보다 불교협회의 조직과 영향력이 더 막강하다고 했다.
  불교협회장 툽스탄 체왕 씨는 용모가 수려하고 눈빛이 매우 강렬하여 혁명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어쩌면 그는 더 좋은 라닥의 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단상에 나와 매우 열정적인 환영사를 했다. 지구촌 그 
어디에서도 히말라야 라닥 설산에 살고 있는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을 
일찍이 보지 못했었는데, 한국의 원불교가 지구촌의 오지 라닥에 교육 기관을 
세워 주고 또 따뜻한 옷을 많이 보내 주어 이곳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며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멀고 먼 한국과 인도의 설산의 라닥이지만 앞으로 더 깊은 인연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더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자는 내용이었다.
  내가 말할 차례가 됐다. 히말라야 라닥에만 오면 나는 피할 수 없이 말을 
해야 했다. 그래서 원고 없이 영어로 대중 앞에서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영어 연설문을 작성할 능력이 없어서 원고 없이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해야 정직하다. 다만 통역하는 사람들이 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나의 말이 비록 서툴어도 의사 전달만을 잘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도 통역은 상가세나 스님이 맡았다.
  나는 그들에게 히말라야 설산 라닥은 '내 마음의 영토'라고 고백하듯 말했다. 
나의 몸이 한국에 있을 때도 항상 나는 라닥을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를 위해 모금을 했을 때나 이곳에 보낼 겨울 옷을 모았던 8개월 
간은 오직 라닥만을 기억하며 일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때는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에 인더스 강물을 끄어들여 우리 어린 
소녀들이 물이 귀하지 않게 살 수는 없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나 하는 소리일 테지만 나의 귀여운 어린 학생들이 
손을 잘 씻지 못해 손등엔 때가 끼여 있어 손바닥이 끈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물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아 지하 깊은 
곳에 파이프를 묻고 펌프로 물을 올려 쓸 수는 없을까 하고 한국적십자사 
국제부에 의논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상가세나 스님이 그에 필요한 장비도 
델리에서 올려와야 하고 또 그러한 시도를 했다가 물이  안 나오면 큰 낭패라고 
해 더 진전할 용기를 얻지 못했었다.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가 있는 데와찬과는 인더스 강물이 좀 떨어져 있지만 
그 물을 끌어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곤란 없이 쓰고 살아야지, 10리 밖에서 차에 실어 오는 
물로 많은 우리 학생들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꼭 
해결해야만 하는 걱정거리였다. 내가 말한 내용이 설사 터무니없고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그들은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 어린 
학생들에 대한 나의 염려와 애정 때문이라고 이해하였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나와 짧지 않는 환영사와 그리고 감사의 말을 하는 
동안 나는 라닥을 생각하고 있었다.
  '땅이 푸른 동안은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는 그들의 속담은 라닥 사람들의 
여름 한철이 얼마나 바쁜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수확기에는 온 가족이 
하루 열여덟 시간을 노동한다고 한다. 5월부터 시작되는 농사철 4개월 동안에 
보리와 밀을 경작하고, 양과 소와 야크를 기르며, 짐승들의 배설물을 말려 
땔감을 준비하고, 또 짐승들의 겨울철 사료로 건초를 마련하느라 일손이 바쁜 
그들.
  그러나 그렇게도 바쁜 한철이 지나가면 1년 중 8개월 동안이란 길고 긴 
겨울의 한가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영하 20도에서 30도를 
밑도는 추운 겨울 동안, 이곳 불심이 장한 라닥 사람들은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정진 기간을 정해 놓고 일상을 침묵 속에서 지내면서 새벽 네 시부터 사원에 
가서 참선과 기도를 하며 찬팅을 밤 아홉 시까지 한다고 한다. 이러한 수도 
정진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모든 라닥 
사람들의 손에는 백팔염주와 마니차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습관적으로 마니차를 돌리고 염주알을 굴리며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들은 기 겨울 동안 구도자처럼 수도에 정진할 뿐 아니라 바쁜 일철에 
미루어 두었던 혼인 대사도 치르고 보름 동안의 결혼 축제 기간에는 이웃과 
친교를 두텁게 한다고 한다. 라닥에는 매달의 축제를 알리는 축제 캘린더가 
따로 있을 정도로 축제 문화가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고, 헤미스곰파의 축제 
때는 관심 있는 세계 사람들이 모여든다. 물질적으로야 풍요로울 수 없는 
그들이지만 분수에 편안하고 처지에 만족하는 라닥 사람들은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담고 기쁘게 살아간다. 
집 안팎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도 아궁이에 불을 지필 나무가 없는 그들은 
아예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마저도 없는 냉돌에서 지낸다. 그들은 낮 동안 
따뜻한 햇살을 비쳐 주던 태양이 서산으로 지면 이룬 저녁부터 침구도 없이 
낮에 입었던 겉옷을 벗어 이불 삼아 다음날 다시 태양이 솟아 햇살이 퍼질 
무렵까지 잠자리에서 지낸다고 한다. 옷과 이불의 겸용인 그들의 전통 의상은 
그래서 폭이 넓은 도포처럼 생겼고, 남녀노소가 모두 통이 넓어 보이는 모양의 
옷을 입고 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히말라야 사람들, 그들의 눈매는 선량하기 그지없어도 
추위를 견디며 살아온 얼굴의 표정은 고난이 각인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영하 30__40도의 혹한에도 오직 더운 버터 차를 마시며 추위를 
이겨낸다고 한다. 욕심을 내어 보아도 더 채울 것이 없는 추운 땅 라닥. 
그래서인지 그곳 사람들은 모두 천심을 지니고 살아간다. 물질 문명이 발달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양심이 모두 오염되어 혼탁해진다 해도, 라닥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최후까지 인간 분연의 맑고 깨끗한 심성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사람들로 믿어진다. 
  환영식이 끝난 다음 나는 일일이 그분들 앞에 나가 목례로 감사를 표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만은 통하는 것 같았다.

     영구 장학금을 위한 게스트 룸

  상가세나 스님은 참으로 구상 능력이 뛰어나고 일에 대한 욕심도 많다. 그는 
내가 라닥에 도착한 다음날 매우 신중한 태도로 "마더"라고 부르며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마더, 마더가 지금은 건강하고 아직 젊지만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마더도 언젠가는 늙을 것이고 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마더, 그때 이곳 어린이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을 것이며 이 
학교는 또 어떻게 운영될 수 있겠어요. 마더, 그에 대한 대책을 지금부터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마더가 오면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하려고 
했어요."
  8개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울 옷을 마련해 이곳에 보내고 그 
축제에 참석한 나의 기분은 마치 쉼표가 필요한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상가세나 스님은 또 무슨 일을 벌이자는 제안이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나는 왜 이렇게 성급하게 구느냐고 책망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더, 어쩌면 나는 마더보다 더 일찍 죽을지도 몰라요. 사실 나의 건강은 
좋지 않거든요. 위장이 약해서 소화가 잘 안되고 밥도 잘 못 먹어요."
  상가세나 스님과 나는 그가 나를 '마더'라고 부르듯이 나는 마더처럼 행세하고 
때로는 큰소리도 치지만 항상 상가세나 스님의 구상에 따라 그가 조정하는 대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이번 제안도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되었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구느냐고 그의 말을 일축했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영구 장학금을 
조달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라닥에만 오면 나는 새벽 일찍부터 
눈이 번쩍 뜨이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남보기에는 그저 웃고 
편안하게 말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라닥에 대한 근심이 떠날 날이 없다.

  라닥에다 무슨 일을 벌이면 돈이 생길 것인가 하고 궁리궁리하다 상가세나 
스님에게 트럭을 한 대 사서 운소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운송 사업은 매우 모험적인 일이라고 했다. 히말라야의 산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잘못 사고가 나면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사람과 차도 
찾아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소 보험금도 비쌀 뿐 아니라 8개월 동안의 
겨울에는 차를 세워두면서 운전 기사의 월급만 지불해야 된다고 했다. 나의 
궁리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낙망하자 상가세나 스님은 게스트 룸을 짓는 것이 
전망이 있는 일이라고 했다.
  라닥은 지금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게스트 룸을 지어 놓으면 호텔보다 싸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또 마하보디 국제선센터에 오는 사람들도 그곳에 머물면서 선도 하고, 
그들이 내는 비용이 또 고정수입으로 보장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미 그러한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넌지시 나에게 돈이 생길 궁리를 
해보라고 한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로서는 게스트 룸만 마련해 주면 히말라야에 대한 부담과 걱정을 덜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게스트 룸 프로젝트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게스트 룸 30개를 
짓기로 하고 예산을 산출했더니 5만 달러, 즉 4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 
되었다. 나는 또 이번에도 이곳에 왔다가 큰 숙제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라닥에 와 있어도 마음이 번거롭기는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했다. 그럴 때면 유난히 청남빛으로 높푸른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했다. 그럴 때면 유난히 청남빛으로 높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내 영혼도 절로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석양 무렵만 되면 히말라야 만년설 봉우리 아래에 짙푸른 운무가 끼고 
한 번 낀 운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밤사이에 그 운무가 새하얀 
눈이 되어 산을 하얗게 덮었다. 9월의 히말라야 산들은 하루가 다르게 그렇게 
설산의 키를 아래로 낮추고 있었다.

     장난감 기차 타고 네 번째 히말라야 방문

  1995년 7월 8일, 히말라야 라닥을 네 번째로 방문할 수 있는 일이 캄보디아 
때문에 생겼다. 내전의 고통을 겪고 있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우리의 여름 
옷을 모야 보낼 때 오랫동안 보육원을 경영하던 기관에서 보내 온 옷들을 다 
입힐 수 없어 창고에 쌓아 두면서 지내왔다고 했다. 복지 기관에 기증한 
것들이라 함부로 처리할 수도 없어서 그냥 쌓아 두었는데 이제는 너무 오래된 
것들이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거저 주어도 받아갈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구호 물자로 가득 찬 그 창고를 헐고 강당을 지으려 하는데 그 
물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의논하러 왔다고 했다. 때맞추어 잘 
오셨다고 말한 나는 지금 우리는 캄보디아에 보낼 옷을 모으고 있으니 그 
물건들을 캄보디아로 보내자고 했다. 그 원장님은 수십 년 동안 쌓아 두었던 
물건들을 필요한 곳에 주게 되었으니 그 물건을 주었던 희사자들의 뜻을 살리게 
되었다며 매우 기뻐했다.
  창고에 가득 차 있던 해묵은 물건들을 이틀 동안이나 봉고차로 실어 날랐다. 
그 물건들은 다 새것들이었지만 수년을 쌓아 두었기 때문에 이미 헌것들이 
되었고, 필통 같은 학용품은 우리의 기술이 덜 발달되었을 때 만들어진 
것들이라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것들을 한국 제품이라고 나라 밖으로 
보내는 것이 선뜻 마음내키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그 옛날 난방 시설이 좋지 않아 춥게 살던 때 우리가 귀하게 입던 화학 
섬유의 두터운 어린이 내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내복 뿐 아니라 새 
잠바와 예쁜 색상의 목도리와 장갑도 많았다. 그러한 겨울 옷들은 더운 나라 
캄보디아에서는 아무 소용이 닿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라닥 
어린이들에겐 더 말할 나위 없이 따뜻한 선물이 될 것들이었다. 히말라야에 
보내면 좋을 것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아예 방을 하나 정해 놓고 그곳에 
히말라야에 보낼 물건들을 쌓기 시작했다.
  어느 날 숙명여자고등학교 이정자 교장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인형이나 완구들 가운데 한 개씩을 모아 미아 샛별어린이들에게 
주자'란 캠페인을 벌여 모았다며 예쁘고 재미나는 완구들을 모두 히말라야 
어린이들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미아 샛별어린이들이야 부족하지 않지만 
히말라야 어린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인형과 장난감들일 테니 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서였다.
  히말라야 라닥의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로 보낼 겨울 옷과 인형, 완구들이 
방안에 가득 쌓였다. 그러나 그 귀한 선물들을 언제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또 연구 거리였다.
  그러던 참에 인도의 델리에서 1995년 7월 4일부터 사흘 건 베풀어질 
티베트의 성 달라이 라마의 60회 생신에 초청한다는 서한과 함께 초청장이 
날아왔다. 히말라야 라닥 나눔의 축제에서 만났던 리마 롭상 스님이 보낸 
것으로, 지신이 축하 행사 주관자라며 나와 원불교 교도 몇 분이 참석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도 들어 있었다. 세계 사람들이 성 달라이 라마 생신을 
축하한다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영광스럽겠지만 그 일을 핑계삼아 인도에 
가고 싶었다. 인도의 델리에서 40분만 비행기를 타면 라닥에 갈 수 있으니 
히말라야 어린이들에게 내복과 인형을 갖다 주고 싶었다.
  그 무렵 전해 온 또 다른 소식은 스리랑카의 아난다 스님이 "원불교"라는 
책을 스리랑카 문자인 신할리즈 어로 출간하고 출판 기념식 행사를 가질 
예정이니 꼭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스리랑카 아난다 스님은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창설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의 방갈로르에 
갔다가 그 행사를 통해서 만났던 스님이다. 아난다 스님은 그때의 인연으로 
강남교당에 와서 40여 일간 머물며 원불교에 관해 연구했었다. 아난다 스님은 
그 연구의 결과를 델리에서 열리는 성 달리아 라마 생신 축하 행사에 참석한 
다음 히말라야 라닥을 거쳐 스리랑카에 가겠다는 소식을 알리며 출판기념 행사 
일정을 조정하게 했다.
  나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보내온 초청의 소식을 여러 교도님들에게 알리며 
함께 가기를 권유했다. 인도에 가서 성 달라이 라마 생신 축하식도 참석하고, 
델리로부터 40분이면 갈 수 있는 히말라야 라닥에도 다녀오자고 했다. 여러 
교도님들은 그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함께 가기를 원했다.

  인도 여행이 결정되면서부터 히말라야에 보내기 위해 쌓아 두었던 겨울 
내복과 잠바, 인형, 장갑, 목도리들을 여러 개의 큰 가방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그 많은 물건을 꾸려 넣은 여러 개의 가방 하나하나는 무척 무거웠다. 가방마다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 여러 사람이 가더라도 중량이 초과될 것만 같아 
걱정되어 나는 가방 하나하나를 자주 들어 보았다. 우리 일행은 일곱 명이었다. 
나는 개개인의 손에 들고 비행기에 탑승할 가방을 최대한 무겁게 꾸리라고 
했다. 그래야 일곱 명이 부칠 수 있는 짐의 중량 모두를 히말라야 선불에 
배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도로 떠나던 날 공항에 내놓은 히말라야 짐은 우리를 압도했고 과태료 
200만 원을 더 지불해야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억지가 무섭다고 해야 할 것인가, 출발 시간을 앞두고 사건이 크게 
벌어지자 공항 한 편에 작은 산더미 같이 쌓인 히말라야 선물 꾸러미는 주체할 
수 없는 골칫거리였다.
  나는 항공사 측과 협상을 벌였다. 이 모든 것들이 히말라야 설산 
어린이들에게 가져 갈 원조 물자이나 항공사 측에서 크게 봐달라고 간청했다. 
여러 교도님들도 합세하여 부탁과 애원을 거듭했다. 결국 항공사 측에서 크게 
양보하고 우리는 20만 원의 과태료를 물고 그 많은 꾸러미를 모두 비행기에 
실었다.
  델리 공항에서 틀림없이 관세의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하여 관세 통관 절차에 
필요한 서류까지 준비해 갔다. 그러나 인도에 도착하여 달라이 라마 행사 주관 
측에서 부착하라는 표시를 가슴에 달았더니 그 많은 물건들이 무사 통과였다. 
아마 티베트 난민을 돕기 위해 가져온 물건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축하 행사가 열리는 아소카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상가세나 스님도 
달라이 라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라닥에서부터 델리까지 내려와 우리와 
반갑게 상봉했다. 우리는 생신 축하에 참석하여 성 달라이 라마를 뵙는 기쁨과 
티베트적인 것과 또 세계적인 견문을 넓힐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교도님들의 
고운 한복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생신 축하의 공식 일정을 다 마치고 델리에서 라닥으로 갈 때 그 많은 짐을 
택시에 싣고 공항으로 갔다. 인도의 택시는 택시 지붕에 짐을 실을 수 있게 돼 
있다. 인도 국제 항공에서는 라닥에 가는 사람이 몇 명 더 불어났는데도 
상가세나 스님은 우리가 가져 간 그 선물 때문에 과태료를 물었다.
  나의 상념 속에서는 몇 개의 큰 산을 넘고 넘으면 거기에 내 마음의 영토 
성산 라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그래서 나는 멀고 먼 히말라야 라닥을 
그렇게 쉽게 가곤 한다. 우리가 탑승한 비행기가 델리 공항을 이륙했을 때 나는 
설산이 눈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 덮인 히말라야 
설산을 보는 것이 신기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곳이 나의 일순을 기다리는 
일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설산 라닥은 가장 중요하고 은밀한 
소식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수신하는 송신탑이 있는 곳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곳에 전해진 은밀한 소식은 결국 낮은 땅 지구촌 곳곳으로 흘러내려 올 
것이란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 나의 시야에는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둥근 무지개가 히말라야 설산 창공에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지개는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너무도 이상하게 여긴 우리 
교도님들에게 어서 와서 저 둥근 무지개를 보라고 했다. 여러 교도님들은 그 
무지개를 보고 감탄의 함성을 작은 소리로 토해 냈다. 그리고 계속 우리를 
따라오는 그 무지개를 보면서 무슨 상서로운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줄곧 우리를 따라오던 그 둥근 무지개는 한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후 백두산 천지연에서 크기가 더 큰 둥근 무지개를 한 번 더 
보았다.
  비행기가 라닥의 레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공항 밖으로 나왔다. 전통 
의상을 입은 라닥 사람들이 북과 피리를 불며 우리를 환영했고, 테 없는 
고깔모자를 쓰고 전통 의상을 입은 라닥 여인들도 조화를 들고 나와 우리를 
반겼다. 그들은 우리들의 목에 그곳 풍속대로 하얀 스카프를 걸어 주면서 
환영했다. 라닥을 찾아온 세계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했던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여기저기 요란했다.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환영을 받으니 환영받는 
기쁨도 더 큰 것 같았다.
  우리가 탄 차는 불교기를 펄럭이며 데와찬을 향해 달렸다. 피리와 북을 치던 
사람들은 타이탄 트럭 같은데 울라타고 우리 차를 인도하듯 앞에 달리면서 
신나게 북을 두들기고 피리를 불어댔다. 우리가 통과하는 길거리는 작은 
축제라도 벌어진 듯 가는 사람마다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탄 차량의 통과를 
바라보았다.
  라닥의 변화가 레를 통과하여 한참을 달려 천국이란 의미를 가진 데와찬에 
이르렀다. 하얀 칠을 한 큰 철제 대문에는 동근 원상을 그려 놓았고, 다른 쪽 
문에는 법륜을 힘차게 밀어 올리는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 
교도님들은 일원상이 그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히말라야에 와 있는 
원불교 문안으로 들어서는 감격을 맛보았을 것이다.
  차가 멈춘 곳에는 히말라야의 어린 소녀들이 노란 바탕에 빨강색의 둥근 원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믿어지지 않게 그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우리를 맞았다. 우리 일행은 둥근 일원상 기를 들고 서 있는 그들 
모습만 보아도 감격스러운데 그들이 "아리랑"까지  부르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들은 내가 남인도 방갈로르에서 불렀던 "아리랑" 녹음 테이프를 교본 삼아 
"아리랑"을 익힌 듯 했다. 저마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마하보디 국제선센터 국기대에서는 둥근 일원상 기가 하늘 높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국제선센터 법당으로 들어섰다. 상단 중앙에 좌불상을 위로 
모시고 바로 아래 단 중앙에 모셔 놓은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님의 영정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 교도님들은 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다.
  이네 히말라야 설산의 겨울철을 몇 번 지낸 대종사님께서는 히말라야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고, 라닥의 어린 소녀들을 보실 때마다 대종사님의 
'타자녀 교육'의 크신 경륜이 설산에서 이루어짐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만 
같았다. 눈물을 그칠 줄 모르는 우리들의 심정을 상가세나 스님과 그곳 
종사자들은 헤아릴 수 있었겠지만, 어린 히말라야 소녀들은 한국에서 온 마더와 
손님들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눈을 말똥거리며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히말라야 소녀들 쪽에서는 코 훌쩍이는 소리만 크게 들려 
왔다.
  우리가 큰절을 마치고 돌아서자 항상 그러하듯이 공식 환영 행사가 
베풀어졌다. 나는 그곳 어린 소녀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도 항상 너희들을 생각하고 보고 싶어했단다. 이번에도 
따뜻한 내복과 잠바, 예쁜 색 털목도리와 장갑, 그리고 예쁜 인형과 재미나는 
장난감을 많이 가져왔다. 너희들은 그 내복을 입으면 아주 따뜻할 것이다. 예쁜 
인형과 장난감들은 한국의 숙명여자고등학교 언니들이 자신이 오래 가지고 
사랑하던 것들을 너희들에게 보내 준 것이란다. 보고 싶었던 너희들과 잠시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정말 기쁘고 행복하구나. 이번에는 원불교 강남교당의 
여러 교도님들이 함께 오셨다. 그분들은 너희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 줄 것이다. 
많이들 자랐구나! 선생님들께 공부 많이 배웠지? 사랑하는 나의 딸들아!"
  상가세나 스님이 나의 말을 통역했다.
  벌써 세 번째 만나는 학생들은 반갑다는 눈인사를 보내 왔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히말라야 산촌 소녀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도 저들은 내 
마음의 품안에 있는 나의 귀속들이다.
  우리가 잔뜩 꾸려 온 선물들을 의류 창고에 갖고 가 풀었다. 따뜻한 내복이 
쏟아지자 상가세나 스님은 만져보면서 "굿, 굿, 원더풀, 댕큐"를 연발하면서 
기뻐했다.
  새로 만든 의류 창고에는 선반을 만들어 이불과 담요, 새옷, 헌옷, 새 
신발들을 질서 정연하게 진열해 놓고 있었다. 작년에 보낸 물건들은 1년 동안 
나누어 주고도 아직도 큰 창고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여섯 컨테이너의 물량이 
원체 많은 데다 나누어 줄 수 있는 기간은 4개월밖에 되지 않아 아직 나누지 
못한 물건들이 창고에 가득했다. 이 많은 물건들을 이 산촌 저 산촌 깊은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나누어 주려면 아직도 몇 년이 더 걸릴 듯싶었다. 나눔의 
축제 때 와서 그 물건들이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요긴한가를 잘 알게 된 나는 
그렇게 쌓인 물건들만 보아도 기뻤다.

     거듭되는 상가세나 스님의 요청

  나는 2년 전부터 삼성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학생 
전원에게 식비와 학비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보냈었다. 이번에도 그 장학금 2만 
달러, 1,600만원을 상가세나 스님에게 전할 수 있어 기뻤다. 많은 선물과 많은 
돈을 가지고 와서 전해 주는 기쁨도 크고 여러 교도님들과 함께 와서 보람의 
현장을 확인하는 것도 좋아서였던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마냥 
행복한 나에게 상가세나 스님은 "마더"하고 부르며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눈치였으나 말문을 쉽게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나는 상가세나 스님이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뜸을 들인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상가세나 스님은 참으로 뜻밖에 이번엔 라닥에 병원을 세워 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리고 뿌리치듯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절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청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상가세나 스님이 나를 벼랑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나는 돌연 방어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상가세나 스님을 한 순간 빤히 바라다보며 나는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는 학교를 짓자 하더니, 내가 다시 두 번째 
찾아왔을 때는 한국의 겨울 옷을 한 컨테이너를 주문하더니, 내가 세 번째 
나눔의 축제에 왔을 때는 학교의 절반 규모의 예산이 필요한 게스트 룸 서른 
개를 주문하더니, 이제 게스트 룸을 지을 수 있는 마지막 잔금을 챙겨 들고 
게스트 룸이 얼마나 지어졌는가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에게 내복을 갖다 
주고 싶어 옆집처럼 찾아왔더니 이젠 병원을 세우자고 한다. 내가 어떻게 
병원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병원 세우는 게 어디 한두 푼 가지고 되는 
일인가...'
  내가 마음속으로 깊이 저항하며 바라보고 있을 때 상가세나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마더, 이곳 산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병이 나도 병원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더운 물 한 그릇 앞에 떠놓고 부처님께 병이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정부에서 세운 작은 병원이 하나 있긴 해도 레가 
아닌 산촌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마더, 이곳은 정말 병원이 절실히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는 이미 깊은 
산촌에 진료 차로 순회진료를 시작했어요. 이곳은 흙먼지 바람이 많이 불고 긴 
겨울 동안 강한 자외선이 반사되는 설산이라 은세계의 하얀 흰눈과 질환을 앓고 
있어요. 이곳에 만약 병원이 세워지면 자원 봉사로 일할 의사를 얻기가 오히려 
쉬워져요."
  이렇게 상가세나 스님은 나를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병원 시설은 참으로 돈이 많이 필요한데 그런 돈을 내가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질문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는 뜻 있는 한국 기업인이 있다면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상가세나 스님의 그런 발상 자체가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병원을 세우는 일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그 
어려움을 인식시켜 보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여 기업의 
대표를 만나 히말라야 사람들의 비참한 실상을 말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일을 할 만한 기업인도 알고 있지 못할 뿐더러 그런 일을 주선할 만한 기업인도 
없다고 거듭 말했다.
  "마더, 마더와 내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전생부터 불쌍한 
사람들 돕기로 약속하고 금생에 나왔다고 나는 믿어요. 나는 불쌍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히말라야에 태어났고, 마더는 어렵게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을 돕기 
위해 풍요로운 한국에 태어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더가 한국에서 설산 
사람들을 돕는 일이 어려우면 이곳에서 설산 사람들을 돌보세요. 내가 한국에 
가서 열심히 모금하여 마더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후원하겠어요. 
우리 서로 역할을 바꾸어 살아 봐요. 나도 후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살아 보고 
싶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전생사를 이야기하듯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은 그가 나에게 딱한 청을 할 때마다 쓰는 말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병원 이야기를 다시는 말도 꺼낼 수 없도록 단호하게 
거절했는데도 내 마음은 이미 병원 걱정으로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날 밤 홀로 밖에 나와 영롱하게 빛나는 라닥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나는 전생에 히말라야 라닥의 설산 사람들에게 무슨 약속을 하고 나온 
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상가세나 스님이 농담처럼 "마더 한 
번만 더 여섯 컨테이너의 겨울 옷을 보내 줘요." 하던 말도 생각났다.
  그때 그런 말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었다. 도움을 
받는 편에서는 그런 도움을 주기까지의 어려운 과정과 그리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가를 전혀 모른다는 그들은 그 일이 어떻게 해서 되어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몰라 주는 것이 섭섭한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너무 
쉽게 또 다른 일을 주문하고 요청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상가세나 스님에게 '신문을 가위로 자르면 신문 조각이 모두 돈이 
되느냐? 흙을 빚으면 동전이 되느냐?'는 농담을 하면서 모금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도 자신이 실제로 푼돈을 모아 큰 돈을 마련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를 조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상가세나 스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은 내 표정이 무거워 보였던지 
교도님들이 그 사연을 캐물었다. 그래서 나는 상가세나 스님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털어놓았다. 상가세나 스님의 안내로 사원 구경도 하고 라닥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알게 된 교도님들은 이곳에 학교도 필요하지만 병원도 필요한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떠나오기 전날 밤 어린 학생들은 우리가 갖다 준 인형을 하나씩 들고 나와 
좋아하며 우리 앞에서 또 춤을 추고 노래했다. 그들은 나에게 라닥의 전통 
의상을 선물했다. 내게는 품이 작은 옷이었지만 그 옷을 마련하느라 애쓴 그곳 
선생님들과 우리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 옷을 입고 나의 어린 
소녀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나의 어린 소녀들은 나와 들었는지 내가 내일 
떠나면 섭섭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훌쩍훌쩍 울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병원 이야기를 꺼냈다가 내가 화를 내고 쌀쌀맞게 대하자 
여러 사람 앞에서 민망하기도 하고 또 멀리서 찾아온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이 미안했던지 내 마음을 풍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체구가 큰데다가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어렵게 하느라 위엄을 갖추고 처신하지만, 
때로 내 앞에서는 천진스럽기 한량없는 그야말로 귀여운 아들처럼 행동할 따도 
많다.
  그의 그 같은 모습에서 우리 교도님들은 호감과 함께 도움을 받아야만 일할 
수 있는 상가세나 스님의 입장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곳에 머문 사흘 간의 여정을 마치고 떠나오던 날, 김형진 교도님은 상가세나 
스님 곁으로 가서 격려의 말과 함께 병원 프로젝트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병원 프로젝트가 너무 크기 때문에 마더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결국은 
병원 일도 잘 될 겁니다. 너무 걱정 말고 용기를 가지세요."
  상가세나 스님은 그의 말에 그 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댕큐"를 연발하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김형진 교도님이 이 일을 크게 거들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병원은 얼마쯤의 돈이 
드느냐고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35만 달러가 든다고 했다. 원화로 3억 
정도가 소용되는 일이라고 짐작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원상 기를 들고 나와 깃발을 흔들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보내 주는 나의 어린 소녀들을 뒤로하고, 무거워서 들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병원 숙제를 안고 나의 발걸음은 멀리 스리랑카로 향했다.

     들지도 못할 무거운 짐, 카루나 병원

  히말라야 라닥에 있는 상가세나 스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는 항상 그곳 
설산 사람들만 걱정하고 그 일만 열심히 해주길 바라겠지만 나의 형편과 
살림살이는 이미 그렇지가 못했다. 히말라야 라닥에서 스리랑카를 거쳐 귀국한 
이후 6개월 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일은 참으로 많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스리랑카의 어린이들에게 보낼 새 신발과 학용품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경제가 피폐해 어렵게 사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보낼 
여름 옷을 걷기 시작했고,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에게 보낼 옷도 함께 모았다. 
1995년 9월 15일에는 북한 수재민 돕기 성금 1,000만원을 대한적십자사에 
국내에서 가장 먼저 기탁하고, 100년 만의 홍수로 큰 수재를 당한 북한 
동포들에게 식량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대한적십자사를 드나들다가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지뢰로 다리를 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의족 보내기 캠페인이 그것이다. 캄보디아 땅에 묻힌 
지뢰 한 개를 제거하는 데는 1,000달러의 큰 비용이 드는 데 비해, 지뢰로 
다리를 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의족 한 개를 만들어 주는 데 드는 
비용은 고작 1만 6,800원이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재앙을 미리 막기 위해 
영국의 할로 재단에 지뢰 제거 비용을 보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지뢰의 
재앙으로 다리를 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의족을 만들어 주는 비용은 
매우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의족을 
보내는 일은 나에겐 횡재처럼 여겨져 한 개의 의족이라도 더 만들어 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다. 그리하여 1,595개의 의족을 만들 수 있는 성금을 
모금해 대한적십지사에 기탁했었다.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훈춘시 박영숙 부시장이 조선족 어린이들을 위한 
경신소학교 건립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고, 중국의 조선족 동포를 돕는 
일이야말로 당연한 일로 여겨져 약속했던 일도 그 6개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또 마실 물이 귀한 미얀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십사로부터 듣고 미얀마 
사람들의 식수 공급 캠페인을 벌여 196개의 공동 우물을 마련할 수 있는 
성금을 모금하는 일도 그 무렵에 했었다. 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프리카 방문 때 한 통의 식수를 얻기 위해 대여섯 시간씩 허비하는 지구촌의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퍽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공동 
우물을 마련해 줌으로써 히말라야 우리 학생들에 대한 물 걱정과 물이 귀한 
지구촌 사람들에 대한 염려를 조금은 잊고 싶었다.
  그리고 작게는 라오스 난민과 캄보디아 스레암필 고아원을 도왔고, 필리핀 
수재민도 도왔으며, 남아프리카 흑인 어린이집 설립 성금도 모아 보냈었다.
  히말라야 라닥을 떠나기 닷새 전에는 각계의 도움으로 모은 우리 나라의 여름 
옷 여섯 컨테이너를 캄보디아로 막 떠나 보내고 그곳에 갔었다. 나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느끼기만 하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남이 나의 속살림을 들여다보면 내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여긴다.
  사실 우리는 영구 장학금을 마련하는 게스트 룸 30개만 지어 주면 히말라야 
라닥에 대한 돈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줄 알았었다. 그래서 게스트 룸 
건축을 위한 5만 달러, 4,000만 원을 만들 때도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김명숙 교도님은 자신도 영구 장학금 일에 관심과 정성을 쏟으면서 동생인 
상구통상 김양수 사장님에게 우리 교당 소식을 알려 히말라야 어린이들의 영구 
장학금을 마련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유, 전문 화장 비누 1,000상자를 
기증하게 해주었다. 한 상자의 전반 가격인 1만 원을 받고 그 비누를 판매하여 
1,000만 원을 마련했었다. 나는 1,000만 원의 현금을 만들기 위해 1,000상자의 
세숫 비누를 파는 비누 장사였고, 우리 교도님들은 밖에 나가 비누를 팔아 오는 
외판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많은 비누를 다 팔았었다.

  어린이들의 내복과 장난감을 가지고 라닥에 갔을 때는 게스트 룸 30개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가도 보기 위해서였다. 작은 돈을 모으고 비누를 팔아 4,000만 
원을 만드느라 온갖 애를 썼는데 그 게스트 룸은 다 짓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병원의 새 일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설산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보람되지만 참으로 숨돌릴 겨를이 없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캄캄한 밤은 없고 항상 밝은 태양 아래서 일에 쫓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그렇게 큰 부담을 느꼈던 병원 문제를 겉으로는 잠을 재워 
놓고 있었다.
  인도 카루나 병원의 출납장을 보면 히말라야로부터 돌아온 지 반년이 된 
1996년 1월 28일 부천무역주식회사 이시원 사장님의 5,000만 원의 
성금으로부터 모금이 시작되었다. 이시원 사장님은 김형진 교도의 부군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아프리카에 의약품을 보낼 때나 캄보디아의 지뢰를 제거할 
때나 항상 기꺼이 협력을 했던 분이다. 김형진 교도님은 아마 히말라야 
라닥에서 생각하기에는, 남편인 이시원 사장님이 라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병원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의 말만 듣고 그 참담한 실상을 
자신이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기 사업을 꾸려 나가기도 힘겹고 어려운데 그 
큰돈을 전액 부담하여 아내에게 좋은 일 해보랄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을까.
  1995년 11월 5일 상가세나 스님이 라닥에서 보내 온 편지에는 그곳 의료진과 
함께 병원의 규모와 구체적인 제반 사항을 검토하여 산출된 병원 설립 기금은 
95만 8,000달러라고 알려 왔다. 100만 달러에 가까운 고지서가 날아온 셈이다. 
100만 달러, 8억 원이나 되는 돈의 개념도 모른 채 참으로 순진하게 고지서와 
다를 바 없는 편지를 보내와 나는 또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일이나 
다름없는데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병원 규모를 줄이자고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듬해 3월 볼일이 있어 대만에 온다는 상가세나 스님을 한국까지 
다녀가라고 했다. 한국을 방문한 상가세나 스님에게 히말라야 산촌에 연건평 
700평이나 되는 병원 규모는 너무 크다고 말했다. 설사 그렇게 큰 병원을 
마련할 수 있다 치더라도 앞으로 그 운영은 또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병원 규모를 줄이자고 했다. 그 설득 작전으로 규모가 작은 개인 
병원에 환자가 많은 곳을 직접 둘러보도록 했다. 전문성을 달리한 병원 및 
군데를 둘러 보게 한 다음 한국에서는 병원 규모가 크지 않아도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병원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자고 했다. 의료 장비만은 
공간처럼 줄일 수 없을 것을 감안하여 내 스스로 책정한 금액이 55만 
7,000달러였다.

  상가세나 스님이 한국에 오기 전에 문체로부터 해외 송금 허가를 받았었다. 
그런 사무적인 일은 할 줄을 모르지만 따로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무원이 없기 
때문에 신현대 교도의 도움을 받으면서 내 스스로 그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작성했었다. 학교를 지을 때 인도에 큰돈을 보내면서 모두 개인 송금을 했던 
경험이 있는 나는 떳떳하게 해외 송금할 길을 터놓았다.
  병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한국에 온 상가세나 스님이 떠날 때는 20만 달러, 
1억 6,000만 원이 넘는 돈을 송금 수표로 마련해 주었다. 상가세나 스님은 
그처럼 큰돈을 마련해 주자 병원이 다 지어진 것처럼 기뻐했다. 인도의 화폐 
기준으로 볼 때 20만 달러는 매우 큰돈이다. 그곳에서 인부 하루 품삯이 
1,600원, 2달러인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가를 알 수 있다.
  김형진 교도님이 오래 전 자신이 약국을 했을 때 모아 두었던 거금을 기쁜 
마음으로 희사해 부군의 돈과 합해 20만 달러를 마련해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나머지 35만 7,000달러라는 거액을 아 모금하기는 어려울 
것만 같아 한국의 여러 병원으로부터 중고 의료 장비를 얻어 히말라야에 보낼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헌 의료 장비를 얻기 위해 열심히 기웃거리며 또 
구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중앙병원 임상병리과 의료진들에게 교양 강좌 
특강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도 그런 인연으로 해서 헌 의료 장비가 
생길까 싶어 주저하지 않고 가기도 했다.
  병원을 새로 만드는 데 어떠한 의료 장비를 구비해야 되는가에 관하여 나의 
의논 상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민경업 박사였다. 나는 민 박사에게 야전 
병원 하나를 차릴 수 있는 의료 장비 리스트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나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민 박사는 그렇게 해주었다. 그 자료를 히말라야로 보내어 그런 
정도의 의료 장비면 되겠느냐고 문의하는 서류가 오갔다.
  어느 날 의료 장비를 주겠다는 병원이 있어 찾아갔다. 나에게 보여 준 의료 
장비는 마치 쓰레기 더미처럼 쌓아 놓은 잡동사니 옆에 놓인 헌 침대였다. 
너무나도 실망스러워 기진맥진한 상태로 교당에 돌아왔을 때였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위해 보낸 옷을 끝끝내 BLIA(Buddha`s Light International 
Delhi-India)에서 받을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이 팩스로 전해졌다.
  컨테이너 세 대나 되는 옷이 인도에 도착된 이후 2개월 동안의 컨테이너 
사용료와 기차 선로를 사용했던 세금이 8,630달러, 707만 6,600원을 지불해야 
하는 고지서도 보내왔다. 인도에서 보내 온 그 세금 고지서를 보면서 나는 헌 
의료 장비를 모을 생각을 깨끗이 포기했다. 쓸 만한 장비를 내놓는 사람도 
없었지만 고철 더미 같은 의료 장비들이 히말라야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중간 
어디엔가에서 통관이 되지 않아 잘못 얹혀 있는 날에는 참으로 큰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하리잔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나는 물불 안 
가리고 그들을 위해 도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그런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델리의 BLIA로부터 불가촉천민과 델리의 빈민들에게 나누어 줄 헌옷을 모아 
보내달라는 서신이 왔었다. 마침 스리랑카에 보낼 옷을 모으던 무렵이라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돕기 위한 옷도 함께 모았다.
  바로 그때 인도의 라마 롭상 스님이 자신이 불가촉천민을 돌보는 관료가 
되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분은 달라이 라마 생신 때 우리를 초청했던 
분이다. BLIA라는 단체에는 아는 사람도 없어 편지 한 장만 받고 하는 일인데 
롭상 스님은 잘 아는 사람이어서 그분을 통해 불가촉천민을 도우면 더욱 확실할 
것 같았다. 나는 그분에게 불가촉천민을 돕고 싶은데 옷을 모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문의했다. 그분은 대단히 고맙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들지도 못하고 닿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는 의미로 
불가촉천민이라 이름 붙여진 사람들이다. 인도를 처음 방문하여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너무나도 불행해 보이고 안타깝게 여겨졌었다. 
그후로 나는 불가촉천민, 하리잔을 인도로부터 탈출시키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곤 했었다.
  그래서 이미 BLIA의 주소가 표기된 상지에 옷을 담았던 것들을 라마 롭상 
스님 쪽으로 주소를 변경하여 붙이느라 법석을 떨었다. 내 생각에는 BLIA 
쪽으로는 한 컨테이너의 옷을 보내 델리의 빈민들을 돕고, 롭상 스님에게 
보내는 나머지 두 대의 컨테이너는 불가촉천민들을 도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구호 물자를 보내려면 인도 정부의 무관세 통관 승인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아소크 미션이란 자선 기관 이름을 갖고 있는 롭상 스님은 
허가서를 받아 보내지 못하고 BLIA에서는 허가서를 보내왔다. 이미 아소크 
미션으로 주소 변경을 해놓은 두 대의 컨테이너를 다시 BLIA로 
원상복구시켜야 되는 큰 사건이 생긴 셈이다. 그 복잡한 일은 삼성엔지니어링에 
다니는 박명도 교도님이 사내 봉사 대원들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내 뜻대로 
해주었다. 그런 번거로운 과정엔 삼성생명의 김제영 교도님도 직원들과 함께 
와서 그 무거운 상자 하나하나에 주소를 다시 바꾸어 붙여 주기도 했다.
  그 짐이 떠날 때 인도행 컨테이너 세 대뿐 아니라 스리랑카로 떠나는 
컨테이너 한 대까지 모두 컨테이너에 싣는 작업은, 박명도 교도님 주선으로 
삼성엔지니어링 스물두 명의 직원들이 그 어려운 일을 다 해주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써는 것 같았고 나중에는 봉사가 아니라 무서운 고행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런 일을 해본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느라 애 
쓸 때는 고맙다기보다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안전부절못했었다. 삼성에서 
직원들의 자원 봉사를 장려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봉사 대원들이 그렇게 
도와 주지 않았다면 내가 그 복잡하고 힘든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다.
  그렇게 해서 사연도 많았던 그 세 대의 옷 컨테이너는 인도로, 다른 한 
컨테이너는 스리랑카로 각각 목적지를 향해 떠났었다. 인도의 BLIA 측에서는 
컨테이너 세 대가 되는 많은 물량의 옷들을 불가촉천민들에게 나누어 줄 
비용까지도 보내 달라고 했다. 인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세관으로부터 통관 수속이 잘 되지 
않아 그 컨테이너들을 인수하지 못하고 있다면 한국에서 온갖 서류를 다시 
생각해 보내 달라고 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울이 옷에 무슨 세균이 붙어 있을까? 가는 
동안에 잘못될까 봐 좀약까지 다 넣어서 보냈는데... 무균 상태의  구호 물자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히말라야에 물건을 보낼 때는 인도 
정부에서도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었다. 도대체 우리 나라 어디에서 헌옷의 
무균상태를 증명해 주는 곳이 있을까? 아니 그런 수속 절차도 밟지 않고 이미 
떠나 버린  물건을 이제 어디에서 그런 거짓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인도에서는 그 일로 하루도 거르자 않고 팩스가 날아왔다. 나는 결국 그 일을 
선박회사에 부탁했다. 그러나 선박 회사에서는 해보지 않는 일이라며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보낸 물건이 목적지에 가야 되니 무균 상태의 옷을 
운송했다는 증명서를 발급해 달라고 간청하여 결국 거짓 거류를 꾸며 보냈다.
  그러나 인도 정부에서는 BLIA를 좋은 자선 단체로 믿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물건이 통관되자 않은 것 같았다. 인도 정부는 'BLIA가 이렇게 많은 
구호품을 받아 나누어 준 경험이 있는가?' '그렇게 컨테이너의 많은 물건을 
받아 보관할 창고는 있는가?' 등 수많은 조사를 했는데 합당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보낸 물건을 통관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나로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단체라면 
당초에 인도 정부에서 허가서를 발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 한국에서는 인도 
정부를 대신하는 인도 대사관의 합법적 절차를 밟아 보냈는데도 그 물건이 
인도에서 통관되지 않고, 세금 700여만 원이 우리 쪽에 떨어진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보낸 컨테이너의 옷이 결국 통관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한 순간 '무슨 신통 조화라도 일어나 세 
대의 컨테이너에 있는 옷들이 모두 분해되어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를 위해 보낸 것이니 인도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 동안 흘려 보낸 세월을 
나에게 고스란히 세금의 뭉치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BLIA를 통해서 그 옷을 불가촉천민, 하리잔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그 옷이 하리잔에게로 갈 수 있을까 하고 또 
궁리했다. 언젠가 로터스 랜턴의 무진 스님이 인도 푸나에서 하리잔을 돕고 
있다는 스코틀랜드 승려 슈바즈라 씨와 함께 우리 교당을 내방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무진 스님에게 연락하여 그분의 전화 번호와 팩스 번호를 
알아냈다. 나는 푸나의 슈바즈라 스님에게 국제 전화로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급히 허가서를 받아 보내라고 했다.
  델리에 있는 물건이 푸나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지만 그래도 
하리잔(불가촉천민)에게 전해질 수만 있다면 모든 어려움은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하루하루 지체하면 세금이 불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푸나에 쉴새없이 연락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그곳에서도 정부 
당국으로부터 허가받기가 어려워 결국 만들어 보내지 못한다고 했다.
  다시 참담한 좌절감을 느낀 나는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어디로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제 잘못하다간 그 컨테이너 세 대의 옷이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사건이 생길 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때 생각난 곳이 대한적십사였다. 나는 그간 국교가 없는 캄보디아에 옷을 
보낼 때나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를 도울 때 모두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대한적십자사를 매우 가깝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부 
박찬욱 과장님께 전화를 걸어 사건 전모를 보고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컨테이너 세 대의 옷들을 인도 적십자사가 인도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박 과장님은 하루가 지연되어도 세금을 물어야 한다는 나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인도 적십자사와 긴밀히 접촉하여 인도 적십자사 측에서 그 
컨테이너 세 대의 옷을 인도해 가기로 협조가 됐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인도 적십자사 측에서 그 물건을 인도해 가려 하자 이제는 
BLIA 측에서 인수를 포기하지 않아 일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들이 
통관 수속을 밟지 못해 두 달을 넘겼고 그 세금을 한국에서 물어야 되는 줄을 
뻔히 알면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나는 잔뜩 화가 
났다.
  그래서 인도 대사관을 찾아가 '인도 경찰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대사관 
측에서는 놀라워하면서 '왜 그러느냐'고 캐물었다.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매우 미안하게 됐다며 본국에 연락해 일이 잘되도록 
협조하겠다고 했다. 인도 대사관의 개입으로 BLIA 측의 포기 각서를 받아 
냈다.
  인도로 떠난 컨테이너의 운송을 맡았던 조양상선에서는 우리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 두 달 이상의 컨테이너 사용료를 전액 탕감해 주는 고마운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인도의 땅에 세 대의 컨테이너가 두 달 이상 머물러 있었던 인도 땅 
사용료와 그 세금만 깨끗이 청산하고, 불가촉천민들에게 나누어 달라는 
조건으로 인도 적십자사로 그 물건을 넘겼다.

  히말라야 라닥 병원의 의료 장비를 얻어 보려고 애쓰는 동안 발생한 사건으로 
나의 힘을 모두 빼앗겼다. 그러나 폭풍이 지나가고 바람이 자면 그만인 듯 나는 
또다시 병원 일에 열중할 수 있었다.

     설산을 별유천지로 만드는 상가세나 스님

  친애하는 마더 박 교무님.
  당신이 시작한 일을 완성할 힘과 용기를 축복해 주십시오. 1996년 5월 9일, 
카루나 병원 기공식이 열렸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기뻐할 것입니다. 행사는 
간단했지만 거룩함과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라닥 정부의 대표인 스리 툽스탄 체왕 씨가 행사를 주관했습니다. 많은 유명 
인사, 의사, 기술자들이 이 기념비적인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한 축제였습니다.
  그 행사는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의 당신의 딸들에 의해 더욱 빛났습니다. 
그들의 축가와 음악이 연주되었을 때 우리는 당신의 빛나는 얼굴을 그려 볼 수 
있었으며 딸들의 눈에서는 사랑스러운 눈물이 반짝였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꿈도 꾸지 못했던 역사적인 일입니다. 가난한 아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려는 마더 박청수 자선 재단의 목적들은 매우 높이 
평가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는 장래에 당신의 소태산 대종사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지원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지리적 위치, 빈약한 제반 자원을 고려하면 이 일은 어려워 보이지만 창조적 
결심, 이타적 의지, 상가세나 스님과 당신의 축복, 따뜻한 지원은 이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건축은 곧 시작되고 파수꾼처럼 상가세나 스님은 그의 모든 영성을 다해 일을 
감독하고 바로잡습니다.
  1996. 6. 13. 닥터 푼 속

  상가세나 스님으로부터 병원 일을 돌봐 달라는 제안을 받은 푼 속 박사의 
편지에는 병원의 작업 현장 사진도 함께 있었다. 병원 신축 공사장에는 기계 
장비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괭이와 삽과 삼태기 같은 것들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라닥이 인류 
문명권으로부터 100년이나 뒤떨어졌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아무 장비도 없는 곳, 4개월 동안밖에 일할 수 없는 
기후 조건 때문에 카루나 병원은 3년 간의 공사 기간이 필요해 1998년 9월에나 
완공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보내 온 사진들을 보면 견고한 병원 건축물이 
골격을 갖추어 가고 있다.
  라닥은 면적이 6만 5,000평방 킬로미터이고 20만 주민이 살고 있지만 이 
지역에는 작은 규모의 공립 병원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 유일한 병원에는 항상 
환자들로 만원을 이루어서 아주 제한된 사람만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쉰 개의 병상을 갖춘 민간 시설인 카루나 병원이 완성되면 안과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전문 진료가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주민 보건과 예방 
의학에 힘 쓸 것이라고 한다. 또 카루나 병원에서는 티베트 전통 의료 행위와 
요가, 그리고 참선도 건강 증진을 위해 실시한 것이라고 한다.
  상가세나 스님의 구상에 따르면 이 병원은 이동 진료 시설 운영 기지 역할도 
할 것이라고 한다. 마을마다 특별 병동 캠프를 가동하고 마을 단위의 보건 
요원을 훈련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카루나 병원이 완성되면 산촌 
사람들에게까지 현대 의학 혜택이 미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병원 성금 마련에 잊을 수 없는 일은 전남 장성 사창교당 이시인 교무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사만행이다. 후배인 이시인 교무님은 직접 경작하여 수확한 
콩으로 청국장을 만들어 우리 교당에 보내 주면서 한 덩이에 3,000원 씩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판매 대금 전액을 설산 사람들의 병원 마련 성금으로 
쓰라고 했다. 이시인 교무님을 목표 금액을 500만 원으로 잡고 겨우내 끊임없이 
청국장을 만들어 올려 보내 왔다. 농촌 교당의 교무님과 그곳 교도님들의 
정성에 감복한 우리 교도님들은 자신도 고객이 되어 또 청국장 외판원이 되어 
1,800덩이나 되는 청국장을 팔아 530만원을 만들었다. 그 많은 청국장을 만들어 
보낸 교무님과 그 청국장을 쉼없이 판매한 강남교당 교도님들의 정성은 참으로 
갸륵하기만 하다. 뒤에서 그러한 뒷바라지를 해주는 공덕주들이 숨어 있기에 
나는 앞장서서 여러 일들을 할 수가 있다.
  어느 날 성북동에 있는 고 홍진기 회장님(중앙일보 전 회장) 댁을 방문하여 
부인 김혜성 교도님에게 히말라야 병원 설립 계획 진행 과정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언제나 사람을 반기시고 또 상대방의 세세곡절을 통해 주는 따뜻한 
인품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을 가까이 대하고 있으면 작은 일에서도 큰 
보람을 느끼게 되고, 걱정되는 일은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된다. 또 그분을 뵙고 
있을 때면 추운 겨울날 양지바른 곳에서 다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랫동안 투병의 경험이 있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며 병원 건립의 일에 기꺼이 동참의 뜻을 밝히셨다.
  하루는 네 분 아드님으로부터 받은 권선금과 1,000만 원을 건네주시면서 
아무리 걱정을 많이 해봐도 큰 힘이 없어 걱정을 큰따님에게 팔았다고 했다. 
그분의 큰따님 홍라희 여사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인이고 원불교 교도이다. 
나는 한때 우이동 그린밸트 지역 내에서 살던 때가 있었고 정부의 녹지 정책에 
따라 그곳을 떠나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때 홍라희 여사는 현재의 
강남교당 부지를 마련해 준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그리고 아직 삼성북지재단이 설립되기 이전에 삼성그룹이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를 위해 탁아 사업을 전개할 때 홍 여사는 미아 샛별어린이집을 
강남교당에서 맡아 운영해 보라고 제안했었다. 그 분야에 아무 경험이 없었지만 
그러한 시설을 맡아 잘 운영하는 것도 종교의 사회 참여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맡아 돌보는 일을 시작했었다. 현장에서 애쓰는 
여러분들과 주방 일을 돕는 강남교당 교도들의 쉼없는 자원 봉사로 이제 
8년째를 맞아 미아 샛별어린이집이 한국 탁아 복지를 대표하는 보람을 가꾸도록 
해준 분이기도 하다.
  1982년부터 홍라희 여사는 17년 동안 매년 1월 9일이면 나환자들이 살고 
있는 성 라자로 마을을 방문하고 있다. 삼성에서 생산하는 설탕과 햄, 소시지, 
식용유 등을 한 트럭 가득 싣고 가서 전하고, 나환자 개개인에게는 넉넉한 
용돈까지 전달한다. 1월 9일은 이건희 회장의 생신날이고 홍 여사는 부군의 
생신을 불우한 나환자를 찾아 따뜻한 정성을 쏟아오고 있다.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들은 1월 9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17년 동안 그분들이 성 라자로 마을을 
갈 때마다 나는 그 분과 동행했다.
  성 라자로 마을까지 오가는 시간 동안 나는 그분에게 강남교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하듯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강남교당 부지를 
마련해 준 그분의 공덕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그분에게 내가 하는 사업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잘 하지 않았다. 
교당 부지 마련의 일을 항상 감사하게 여길지언정 새로운 부담이 될 일은 
삼가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뉴욕 소재의 TOU(Temple Of Understanding) 소속으로 미국 유엔에서 
일하는 루이스 돌란 신부님이 보스니아 사태가 심각하다며 한국 기업인의 
도움이 긴급히 필요하다고 하루 같이 팩스를 보내왔을 때, 나는 홍라희 
여사에게 그야말로 긴급히 요청해 보스니아에 1만 달러를 도운 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후원하는 단체도 없이 뜻 있는 분들의 온정에만 기대어 여러 나라의 
일을 하는 나에게 히말라야 카루나 병원의 문제는 특지가들의 도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금기 사항처럼 지켜오던 것을 깨고 
홍라희 여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느 날 홍 여사는 한남동 자택에서 1억 원의 
큰 성금을 내게 주었다. 그분은 그 성금을 전해 주며 지신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어머님의 뜻과 나의 청을 
받아들여 큰 힘을 보태어 준 홍 여사의 희사가 아니었으면 설산에 병원을 
세우는 데 나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설산 라닥 병원 설립에는 송월주 스님, 문은자님, 신연균님, 김묘은님, 
유명원님 등의 정성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의 여러 일들이 
이루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라닥 병원의 일도 강남교당 교도님들의 정성이 
합하고 쌓여 볼가능할 것만 같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히말라야 라닥 20만 
설산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이 힘입혀질 카루나 병원은, 라닥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삶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던 김형진 교도님의 갸륵한 뜻과 정성이 
바탕이 되어 그곳 설산 사람들도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게 되었다.

  우리에게 카루나 병원의 문제를 제안했던 그때, 우리가 인형과 내복을 들고 
라닥에 갔던 1995년 7월 8일, 상가세나 스님은 작은 규모의 양로원을 짓고 
개원식을 가졌었다. 그때 상가세나 스님은 히말라야 라닥에 지금까지 이루어진 
일고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상당히 긴 시간을 할애하여 
연설했었다. 그 연설문을 요약해 살펴보면 설산 라닥에 대한 상가세나 스님의 
큰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친애하는 마더 박청수 교무님,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 토그단 린포체 법하, 
캄보디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 고사난다 스님, 미국에서 오신 요가바카라 
라훌라 스님, 라닥 불교협회 슈리 T. 노르부 회장님,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불자 여러분들께 존경을 바칩니다.
  저는 이 경사스런 기회에 여러분 모두를 환영하는 말씀을 올리게 되어 큰 
영광과 특별한 기쁨을 갖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오늘부터 라닥의 
빈곤한 노인들은 잠자고 먹고 의복을 얻고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 지어진 이 양로원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인들은 규칙적인 기도와 선을 하는 종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친절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며, 학교 어린이들은 시간을 정해 노인들 
방문할 것입니다. 우리 기숙학교 학생들은 노인들을 돌보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고 친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 듯이 그 노임들을 모실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도 언젠가는 노인의 길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순리를 알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노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것이며, 그들은 여러 보살들의 이름을 
함께 암송하고 노래도 불러 드릴 것입니다. 노인들은 어린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보답으로 어린이들은 노인들에게 현대 과학 기술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훌륭하신 스님들과 법사님들이 이 집을 
방문하여 법설과 기도를 올려 줄 것입니다.
  데와찬 캠퍼스 전체가 '옴마니밧메홈' 주문 소리와 부처님과 부살 자비의 
가르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모두 심지어 
짐승도 전생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노인들을 우리의 
부모처럼 모시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애정 어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비록 작은 양로원이지만 노인들에게 봉사를 하는 뜻에서 이 집을 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은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기는 어렵고 버리기는 
쉽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순례자입니다. 우리 이 짧은 순례 기간 동안 선업을 
많이 쌓도록 합시다.
  ...부처님은 사랑과 자비, 평화와 행복을 뜻합니다. 종교, 인종, 사상, 국적, 
피부색은 각각 다를지라도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바라는 평화, 행복, 
사랑, 자비는 모두에게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세계는 부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살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부처님의 평화의 메시지가 고통받고 좌절된 인류에게 필요한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습격과 분쟁. 증오와 폭력의 이 세상 부처님의 메시지는 
빛나는 태양과 같습니다, 그 불멸의 메시지를 기억하고 그 가르침의 빛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닦아 갑시다.
  ...이 지구상에서 무지와 가난은 저주요, 고질적인 병입니다. 일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오지에 격리되어 문맹과 가난에 찌들어 사는 라닥 사람들의 
삶이 좋게 여겨질지 모르나, 우리 어린이들을 어 이상 이런 상태에 있도록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관광객들이 우리 마을의 예스러운 삶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해도 우리는 현대 과학 기술의 편리를 더 이상 부정하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어린이들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교육만이 무지와 문맹, 
가난, 착취, 무시무시한 질병을 불식시킬 해결책입니다. 교육을 받고자, 
부처님의 지혜를 찾아 많은 어린이들이 우리 학교에 옵니다. 오늘의 어린이들은 
미래 세상의 희망입니다. 이 아름다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데 함께 힘을 
모읍시다. 이 아이들은 보기엔 더러워도 마음은 맑고 아름답습니다. 이 
새싹들이 자라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도록 도웁시다. 절망의 삶을 축복의 
삶으로 바꿉시다.

  이상은 상가세나 스님의 연설문이다.
  최근에 상가세나 스님이 보내 온 편지를 보면 그는 자신의 계획을 데와찬에서 
뜻대로 이루어 가고 있다.

  존경하는 마더,
  마더의 소중한 염원을 이루고자 하는 저의 과도한 임무로 인하여 정기적으로 
서신을 전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마더께서 인도주의적 자비 
실천에 염려가 많으실 줄 압니다. 
  지금 제가 마더께 전할 수 있는 데와찬의 가장 감동적인 뉴스는 짧은 작업 
기간과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골격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 
구조물은 외과 병동, 다섯 개의 치료소, 진료 센터, 그리고 전통적 약품 센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마더의 이타적 마음과 염원 없이는 가능하지 
못한 일입니다. 마감과 의료 기구 확보는 다음 시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개원식은 1998년 9월이나 10월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준비는 
겨울 동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더, 우리의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는 라닥의 사랑과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딸들이 야채를 재배하고 과일을 가꾸는 농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태학적 조화를 위해 두 마리의 아름다운 젖소도 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당신의 큰 걱정거리인 딸들의 식량에 보태지고 있습니다. 
지금 딸들은 매우 건강하고 유쾌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평화가 넘치는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Put-m-Ki-Do(다르마의 경계에서 오는 진실의 기도)는 기숙사의 당신의 
딸들에게서 대단히 인기가 있습니다. 마더, 저는 당신이 소태산 
대종사님으로부터 위대한 가르침을 받은 이 시대의 9인 제자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마더의 공익 정신, 우주적 연민과 자비를 한이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고귀한 분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너무나 커다란 행운입니다. 
  마더, 저는 당신의 친절한 궁금증으로 풀어 드리기 위해 이곳의 일들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를 동봉합니다.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이곳 201명의 어린 학생들의 안부도 전합니다.
  1997. 9. 19. 상가세나 올림

  상가세나 스님은 학교 교육을 받은바 없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역량과 
뛰어난 지도력을 갖고 있다. 세계 불자들이 존경하는 붓다 라키타 스님이 
상가세나 스님의 스승이다. 그분은 상가세나 스님을 20대 후반부터 방갈로르와 
히말라야 라닥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의 의장직을 맡겨 지도자의 역량을 키웠다. 
1991년까지만 해도 척박한 황무지였던 사막을 상가세나 스님은 
'데와찬(천국)'이라 이름짓고 그곳을 낙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히말라야 라닥에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라닥에 데와찬은 한 해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방문하지 못한 지난 2년 
동안(1996__1997) 데와찬에 과일나무를 포함한 1만 8,50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데와찬에 대한 나의 가장 큰 염려는 물이 없는 것이었는데, 
오아시스가 샘솟기 시작하고 점점 수량이 많아져서 이제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물을 공급하게 되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 사막에 오아시스의 
물이 흐르고 나무가 푸르러 숲이 우거질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상가세나 스님은 "이 사막의 땅에 오아시스가 샘솟게 해주소서" 하고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은 자신은 병원을 지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때 좌선을 하고 있는 중에 "병원에 대하여 마더에게 말하라" 하는 
소리를 듣고 그 말을 꼭 해야만 될 것 같아 나에게 말한다고 했었다.
  척박한 땅, 데와찬 사막에 푸른 나무가 자라고 젖소가 풀을 뜯고, 어린이가 
공부를 하고 불우한 노인들이 양로원에서  지내며, 여승들이 수도원에서 
수도하고 국제선센터에서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찾아와 영성을 맑히고 지혜의 
달을 건지려 정진하고 있다. 이제 또 카루나 병원이 완성되면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쾌유를 얻을 것이다. 한국에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히말라야 설산 
라닥의 테와찬을 상상해 보면 그 천국이란 데와찬 이름 그대로 별유천지가 되어 
가고 있다.
  상가세나 스님은 이제 마흔 살이 되었다. 그는 젊다. 지구촌의 오지, 광막한 
설산 라닥은 상가세나 스님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될 것이다. 상가세나 스님은 
큰 일꾼이고 큰 보살이다.
  히말라야 설산 라닥은 나의 애간장이 녹는 듯한 열정을 바친 곳이다. 그래서 
라닥은 내 마음의 영토처럼 생각된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가다

  아프리카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영국 런던을 길목삼아 한 밤을 
보내고 하루 진종일 기다렸다가 또 밤이 되어서야 동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로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줄곧 아프리카를 상념 속에 머금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다소 미개한 곳일지라도 지구촌의 원시적인 신비가 가득해서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환상적인 낭만과 매력이 넘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1년 전 어느 날, 우연히 펼쳐든 신문에서 '검은 대륙을 돌보는 한국인 
슈바이처'라는 신장곤 박사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미처 기사 내용을 읽기 전에 
무심히 사진을 바라보면서 한국인 의사가 청진기를 대고 진료하는 모습에서 그 
대상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사진 설명을 읽어 보았다.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민족인 피그미족을 진료하고 있다.'
  사진 설명을 읽는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죄 의식의 늪에 빠져 들고 
있었다. 배가 몹시 부르고 키가 아주 작은 한 흑인 임산부의 모습을 잘못 
추측하고 상상했던 나의 생각, 그것은 나 자신의 피부색이 검지 않은 데서 
빚어진 엄청난 착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산문의 전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죄스러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한국에서는 하찮다고 여기는 치료약이 없어서 귀중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 가장 무섭고 고통스럽다. ...어떤 때는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소독용 알코올이 없어 현지인들이 마시는 토속주로 대용한 적도 
있으며, 가제가 없을 때는 붕대를 끊어 쓰고, 붕대가 없으면 가제를 이어 쓰는 
일이 허다하다.'
  신문 기사 중에는 이러한 신장곤 박사의 기자 회견 내용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 기사를 다 읽고 나서도 사진 한 장을 잘못 보았던 꺼림칙한 생각 때문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혼자서 가만히 
기도를 올렸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곳 원주민들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채워진데다 생각마저 헝클어져 혼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그때 번개처럼 스쳐 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의약품이 부족해 생명을 잃고 
있다는 그곳 원주민들을 위해 의약품을 보내면 속죄의 실천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그 기사를 쓴 기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감동적인 
기사를 잘 읽었다는 말을 전한 다음, 아프리카 원주민을 위해 의약품을 보낼 
성금을 조금 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기자의 답변은 신문사에서는 모금을 
하지 않는다며 연결해 준 곳이 국제협력단의 홍보실이었다.
  단순히 불편한 감정을 씻어 내기 위해 걸었던 전화 한 통화가 다시 내 마음을 
얽맸다. 사실 그 신문은 그날 것이 아니라 며칠 지난 것이었는데 국제협력단 
측에서는 아직까지 독자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다고 했다.
  나는 강남교당 법회에서 아프리카 원주민 사진 한 장을 잘못 본데서 연유한 
나의 번민과 신문 기사 내용을 소개하면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질병 퇴치에 
우리의 정성을 합하자고 호소했다. 지구촌의 많은 어려운 나라에 비하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살고 있으며 문명의 혜택도 고루 누리는 형편이니 고통받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뜻있는 분들을 호응으로 1,000만 원의 
성금이 마련되어 나는 국제협력단에 기탁했다.
  우리의 성금으로 마련된 의약품은 우리 정부가 파견한 의료진들이 인술을 
베풀고 있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니제르, 에디오피아, 케냐 등을 비롯한 
12개국에 보내졌다. 그 의약품을 받은 우간다의 의사 유종덕 씨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나에게 보내 왔다.
  '...약과 검사 시설 없이 이론적 회진을 도는 데 지쳐, 실탄 없이 싸우는 
군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고 탄식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병동에서 당일에 일곱 명이나 사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병원에 
수액이 없었기 때문에 당뇨 혼수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원불교의 지원 약품이 도착하여 이곳 현지인들을 
위해 긴요하게 쓰고 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이 이곳에 올 때 가져온 약이 거의 
소진된 형편에서 재충전을 받아 이제 어느 정도 기본적인 진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를 항해 날고 있는 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런 
저런 상념으로 홀로 깨어 있었다.

     아프리카의 첫인상

  아프리카 원주민을 돕기 위해 의약품을 보내게 된 동기는 원주민의 사진 한 
장을 잘못 본 것이 대한 나의 참회였다. 우리가 기탁한 성금으로 아프리카 
12개국에 어떠한 의약품을 얼마만큼의 수량으로 보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코이카(KOIKA)에서 보내 왔다.
  항생제, 해열제, 진통제, 혈압 강하제, 심부전 치료제 등 약의 효능을 짐작할 
수 있는 의약품 목록을 읽어 내려가면서, 약품 하나하나가 아프리카 원주민 
질병 퇴치에 신약과 같은 효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현지에 우리가 보낸 의약품이 도착했을 때 마치 실탄이 떨어진 
전쟁터에 실탄이 보급된 것과도 같았다던 유종덕 의사의 편지 사연도 다시 
떠올랐다.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동참한 보람과 의미가 나의 손끝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국립맹학교 맹인 학생들에게 열정으로 쏟기도 하고, 
성 라자로 마을 환자들에게 종교의 벽을 넘어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도와 
왔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들에게 했던 그 일은 무서운 질병의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낱 정신적 위로만 주었던 일처럼 그 의미가 작게 
느껴졌다. 지금 아프리카에 의약품을 보내는 일이야말로 생명을 구해야 되는 
너무나도 시급하고 절실한 일로 생각되었다. 또 그들보다 건강하고 물질적 
여력이 있는 지구촌 사람들은 고통 받는 아프리카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숭고한 
의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에도 아프리카 원주민 질병 퇴치를 위한 의약품 보내기 
성금을 모아 1,600만 원을 이미 인연을 맺은 코이카에 기탁했다. 성금 전달식을 
마친 자리에서 방쌍용 코이카 총재는 나에게 아프리카 방문을 권유하며, 이번에 
기탁한 성금도 우리 의료진이 일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12개국에 의약품을 
보내질 것이라고 했다. 그중 몇 나라는 내가 직접 방문하여 의약품도 전달하고 
그곳에 파견되어 애쓰고 있는 우리 의료진도 격려해 주면 고맙겠다고 해서 나는 
코이카 홍보팀과 함께 멀고 먼 아프리카를 가게 되었다.
  1993년 10월 11일 새벽, 런던을 떠나 온 지 여덟 시간 만에 맞는 해는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붉은 햇살을 받은 뭉게구름이 발 아래 가득히 
피어 오르고 있었다. 시야에 광막한 사막의 산과 누런빛의 벌판이 보였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에디오피아에 이르기 전에 잠시 '에스메'라는 작은 공항에 
내려 앉았을 때, 황토빛 담장과 야트막한 가옥들이 보여 아프리카의 신비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밖에는 두텁고 빳빳한 
잎의 선인장이 빨간 꽃을 물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탑승하는 승객들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제 같은 허름한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목에 두르고 스웨터를 입은 한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에 
눈매는 퀭해 보였다. 여기가 아프리카라고 나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짧은 시간을 더 비행한 우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착륙했다. 
야자수가 우거져 있는 아프리카의 첫인상이었다.
  공항에는 이곳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유민철 선생님과 우리 공관 
직원이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해발 2,500미터 고원에 위치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날씨는 서늘하고 쾌청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우리는 곧바로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드넓은 식당은 
남국적인 정취가 풍겼다. 나는 식탁 위에 차려지는 음식을 유심히 보면서 
바야흐로 아프리카의 문화를 호흡한다고 느꼈다. 첫 숟가락의 밥을 입에 넣었을 
때 곰팡이 내음이 물씬 나 역겨웠고 밥알이 버슬버슬 입 안에서 겉돌았다.
  나는 유민철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밥에서 무슨 냄새가 이렇게 나죠?"
  "이 나라에서는 쌀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외국에서 원조 받은 쌀이라서..."
  그분은 이곳 사람들은 그 곰팡내 나는 쌀밥도 먹을 형편이 못돼, 우리 나라 
벼농사 지을 때 '피'라고 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주식으로 '뗍'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나마 세 끼를 다 먹고 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부분의 국민이 두 끼 
정도를 먹고 산다고 했다. 그들은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까 잠시 바라보았던 행인들도 모두 무표정하고 웃는 모습의 사람을 보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에티오피아의 한국인 슈바이처

  인도양과 홍해에 접한 아프리카 대륙의 동부 지역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는 
햄족계의 암하라족 등 72개의 종족이 함께 살고 있다. 이처럼 다민족이 어울려 
국가를 이룬 에티오피아는 30년 동안이나 종족간의 내전이 계속되어 수많은 
인명 피해와 국민 경제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는 거리마다 구걸하는 사람이 많았고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에티오피아의 미녀를 모델로 쓸 경우 아무리 밝은 
표정을 지으라고 해도 그녀의 표정에는 우수가 어리어 슬퍼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유민철 선생님의 일터인 블랙라이온 국립병원에 우리의 의약품을 전달하던 
날은 에티오피아 주재 공선섭 대사님과 그곳 병원장 등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달식을 가졌다. 의약품을 받고 인사말을 할 때 병원장을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우리 병원에는 마취제가 떨어져 수술이 중단된 상태였는데 한국에서 
마취제(할로탄)를 보내와 대기중인 수술 환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블랙라이온 국립 병원은 치료비가 무료이고 500개의 침대가 있지만, 평균 
입원 화자는 1,000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 따라서 국가 예산은 낙후되어 
수술중인 수술대 위로 천장을 달리던 쥐가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고 
했다.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끝없는 행렬, 환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암울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을 중 뻔히 알면서도 나이 든 한 여성 
환자의 손을 잡고 그녀 곁에 앉아 위로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금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나의 말뜻을 알아챈 그녀는 배와 옆구리를 가리키며 더욱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그녀의 등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중환자실에 들어섰을 때 신체의 여러 부위에 줄을 얼키설키 연결하고 있는 한 
남성 화자는 매우 위독해 보였다. 그 환자는 절망적인 시선을 허공에 못박고 
있었다. 나는 그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기도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손을 자신의 입술에다 얼른 갖다 대고 내 
손등에다 무수히 입맞추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 절대자를 행해 구원을 호소하는 
듯했다.
  곧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강보에 싸인 수많은 아기 환자들, 
침대도 없이 복도 한 쪽에 눕혀진 가엾은 그들을 바라볼 때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유민철 선생님은 어느 날 한 응급 환자의 복부 절개 수술을 했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수술 부위가 전혀 아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그가 
에이즈 환자임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수술할 때의 정황을 기억에서 더듬어 
보았다고 한다. 수술용 새 장갑이 없어서 헌 장갑을 덧끼고 수술했던 기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고 했다. 혹시 그 환자의 피가 헌 장갑의 구멍을 타고 
스며들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에이즈에 감염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에이즈 검사를 받아 본 적도 있다고 했다.
  현재 에티오피아에는 50만 명의 에이즈 환자가 있고 날로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블랙라이온 병원에서는 하루 평균 쉰 명의 환자를 수술하고 있으며 
수술용 장갑만도 매일 250켤레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는 
의료진들은 자신이 언제 에이즈에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싸여 있다고 
했다.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서는 적어도 수술용 장갑만은 새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한 희망을 나타냈다. 나는 내년에 에티오피아에 의약품을 보낼 
때는 많은 수술용 장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유민철 선생님은 우리를 의과 대학 도서관으로 안내했다. 말이 도서관이지 
서가에는 책이 꽂혀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예산부족으로 도서 구입은 
엄두도 못내 이곳 의대생들은 교수들의 구전 강의에만 의존하여 공부한다고 
했다. 유 선생님은 한국에서 폐기되고 있는 의학 서적이라도 보내 주면 
이곳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학 전문서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성형외과 전문의인 유민철 선생님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으로 봉사하기 위해 
18년 전에 아프리카고 왔다고 했다. 수도자 같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유민철 선생님은 에티오피아의 한국인 슈바이처였다.

     아프리카 원주민 동네 방문

  원주민들이 예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우리 공관 측에 말해 
보았다. 사려 깊은 공선섭 대사님이 한국전에 파병되던 6.25 참전 용사 두 명을 
안내자로 해주고 차편까지 마련해 주어 큰 기대감을 갖고 원시적(?)인 
아프리카를 보기 위해 안내자를 따라 다녔다.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출발하여 20여 분을 달리자 완전히 
도심을 벗어난 농촌 풍경이 전개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서민 주택들은 
아프리카적인 특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함석지붕의 찌그러진 
오막살이들뿐이었다. 흙벽마저도 허물어져 있어 이미 비스듬히 기울어진 것들도 
있었다.
  안내자가 보여 준 그곳 전통 가옥의 지붕은 그 옛날 우리 농촌의 새막처럼 
생겼고 구조도 매우 간단했다. 마을 앞을 지나다니는데 쉬파리 떼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쉬파리 떼는 쫓아도 좀처럼 날아가지 않아 질색이었다.
  어느 골목을 지나다 그야말로 오막살이 같은 집을 들여다보았다. 지난밤에 
사람이 잠을 잤을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그 헛간 같은 곳엔 마른풀이 깔려 
있고, 아침에 무엇인가 끼니를 끓여 먹은 흔적이 있었는데 문 앞에는 아주 
어린아이가 주저앉아 혼자 울고 있었다. 자다가 비라도 오면 그대로 줄줄 샐 것 
같았는데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는 비를 피해 앉을 곳도 없어 보였다. 오직 
아이가 울고 있을 뿐 가재 도구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으니 그것이 그들의 
가난을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터라고, 가정의 보금자리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곳을 보는 순간, 원시적인 모습은 고작 빈곤과 불결함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안내자를 따라 들어선 어느 집은 집이 곧 방이었다. 거적문 같은 것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방안은 어둠침침해 사물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방안에는 
연기마저 자욱했다. 그 방안에 있던 원주민의 두 젊은 아낙네는 우리가 
들어서자 매우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안내자가 무슨 
말인가를 하자 그들은 순박한 미소로 반기며 우리가 앉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은 왕골 같은 것으로 민속 공예 바구니를 짜고 있었고 발치에는 어설픈 
곤로에서 나뭇가지들이 타느라 연기라 나고 그 위의 작은 주전자에서는 커피가 
끓고 있었다. 그래도 이 집 바닥에는 무슨 거적 같은 것이라도 깔려 있었고 그 
아낙네들은 우리에게 커피를 마시겠냐고 권하며 무엇인가 대접하고 싶어했다. 
말이 통하지 않은 채 마주앉아 있어도 그들 특유의 미소 때문에 정이 건네지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난이란 말조차 빌릴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그들은 평화스러워 보였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집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순순히 
내보여 주기라도 하듯 맨 먼저 물항아리부터 보여 주었다. 이곳의 딱한 사정 
중의 하나는 식수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한 동이의 식수를 
구하기 위해 왕복 일곱 시간의 먼 거리를 다닌다는 것이다. 그처럼 물이 
귀해서인지 그들은 물동이부터 열어 모여 주었다. 먼길에서 물을 길어 오다 
넘칠 염려가 없도록 물을 따르는 부위가 아주 좁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집에서 뗍으로 만든 그들의 주식을 보았다. 얇게 쪄놓은 
뗍의 밥(?)은 수수빛이었고 이스트 같은 것을 넣어서 만든 것처럼 생긴 구멍이 
보였다. 내가 그것을 신기하게 들여다보자 그들은 또 먹어 보겠냐며 호의를 
베풀었다. 조금 떼어 맛을 보니 그저 밀가루 음식맛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 골목길에 나타났다 싶어서인지 아예 원주민들이 문을 열고 
나와 나를 구경했다. 내가 들어가도 좋으냐고 몸으로 말하면 그들은 나를 서로 
반겼다. 나를 거부하지 않는 그네들이 좋아 종종걸음으로 이 집  저 집을 
들렸다. 한 집에 들어갔다 나와 또 다른 집에 가 있으면 바로 전에 갔던 집 
주인이 울 넘어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다녀온 집의 한 아낙네는 집 안에 핀 꽃을 주섬주섬 꺾어 이웃집에 와 
있는 나에게 갖다 주며 순박하게 웃었다. 뜻밖의 꽃다발을 받아든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심성은 맑아 
보였다.

     지구촌의 영원한 숙제, 아프리카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비친 아프리카는 한발과 기근과 아사 그리고 
내전과 국경 없는 분쟁 등 온갖 불행한 사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 지상의 
갖가지 비극을 안고 있는 지역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원조를 
한다고 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아서 아프리카는 지구촌의 영원한 
숙제처럼 큰 부담을 안겨 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 끝없는 내전이 계속되고 걸핏하면 국경 분쟁으로 대량 살육이 일어날까? 
그 옛날 포르투갈 사람들과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탐험할 때부터 
아프리카는 비극의 서막이 올랐고 또 아프리카 문명과 역사에는 종지부를 찍는 
일이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로부터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휘말린 아프리카는 350년 동안이나 무자비하게 착취와 수탈만은 당해 왔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독립을 쟁취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훨씬 뒤인 1957년부터이나 신생 독립 국가들의 국경선은 식민지 시대 열강들의 
힘의 구도에 따라 그어진 선 그대로였다.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그때의 열강들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지리적 조건이나 역사, 문화적 배경 
그리고 인종이나 종교 등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들 멋대로 
아프리카를 분할했다. 불합리한 국경선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독립한 이들 여러 
나라는 걸핏하면 종족간 갈등이 있게 되었고 그것은 곧 내전으로 발전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국경 분쟁의 불씨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힘없는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식민 
통치할 때 임의대로 분할했던 그 과오가 오늘날 아프리카를 끝없이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시골의 사바다 마을로 가는 동안 무거운 
나뭇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네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무거운 나뭇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남정네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아프리카 남자들은 
노동을 남성의 몫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30년 동안이나 긴 내전을 
치르는 동안 남자들은 총을 메고 전쟁터에 나가 총부리를 겨누는 일만을 해왔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밭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볼과 100년도 못 되고, 그 
이전까지는 수렵생활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남자들은 밖에 나가 사냥이나 
하고 여자들이 모든 살림을 꾸려 온 인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20여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농작물 품종 개량 연구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농학자 한상기님의 "아프리카인의 부부 생활"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농사를 함에 있어 남자는 숲을 개간하여 밭은 만들어 놓으면 그것으로 남자의 
일은 끝난다. 그 나머지 농사일은 거의 다 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여자가 
밭에 나가서 씨를 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여 집에 날라다가 가공하여 밥을 
지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남는 농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만든다. 
여자는 농사일을 하는 것 외에도 숲에 가서 땔감을 해 나르고  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야 하고 세탁을 해야 하며 아이들을 기르는 막중한 노동을 한다.
  이렇게 뼈빠지게 번 돈은 다 남편에게 바친다. 봉급 생활을 하는 여성도 그 
월급을 다 남편에게 바친다. 그러면 남편은 그 돈의 약 10분의 1일 다시 
부인에게 준다.(이것은 특수한 대우다). 좋은 남편은 이렇게 번 돈을 자기네들의 
생계와 자녀 교육 또는 재산을 늘리는 데 쓰지만, 형편없는 남편은 부인이 애써 
번 돈을 술이나 먹고 도박하는데 탕진하는 예도 많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남자가 생각하는 결혼은 여자를 데려와서 농사일을 하는 인력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불합리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잘살 수 있을까?
  에티오피아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고대 에티오피아 왕국을 건설하고 번영을 
누려 왔다고 한다. 사실 에티오피아 땅은 비옥해 보인다. 그러나 그 긴긴 세월 
동안 관개 수리 시설을 하지 않아 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 전혀 없다. 
작년에도 700만 명에게 식량 지원이 필요했고, 만약 이러한 지원이 없다면 
적어도 200만 명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46세 이고 여자는 48세이다. 그리고 
문맹률은 90퍼센트이다. 1인당 국민 소득은 고작 115달러로 방글라데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힌다. 그들의 오늘날과 같은 비참한 현실은 긴 
세월의 내전 탓도 있지만, 오히려 전통에 사로잡힌 그들의 의식 구조와 
근면하지 못한 국민 생활 태도 그리고 훌륭한 지도자의 빈곤 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나라에야 
그들의 앞날도 밝으리라.

     동물의 왕국, 케냐

  아디스아바바의 짙푸른 숲이 사라지자 건조하고 광활한 반 사막 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동물의 왕국으로 연간 50만 명의 세계인들을 관광객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케냐는 어떠한 나라일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동안 어느덧 
우리의 비행기가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가지고 밖으로 나오다 우리 공관 측과 이곳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는 여의사 양영자 선생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국제 협력단이 주선한 
아프리카 여행에서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스치는 아름다운 숲과 꽃이 우거진 나이로비를 바라보며 나는 
아프리카의 황홀함을 느꼈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는 고층 건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말이 걸맞도록 많은 
빌딩들이 높이 치솟아 있었다. 나이로비를 '꽃의 도시'라 부르고, 유럽으로 꽃을 
수출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게 온갖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케냐의 국화인 자카란다는 키가 훌쩍 커서 마치 오동보라꽃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거리는 자카란다가 가로수로 우거져서 나이로비는 
마치 오동보라의 아름다운 커튼을 두르고 잇는 것처럼 환상적이었다. 
'아프리카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리를 쓸고 
있는 흑인의 살빛마저도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조화로워 보였다. 거기에 백인이 
살고 있다면 어울리지 않을 듯싶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땅에서 살고 있는 
흑인들은 큰 축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아름다운 화면을 바라보듯 나이로비 시가지를 바라보는 동안 우리 차는 
숙소인 켄코에 도착했다. 우리가 들어서고 있는 곳은 호텔이 아닌 큰 저택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시설이라고 했다. 그래서 집 이름도 케냐와 
코리아를 합쳐 '켄코'라 부른다고 했다. 정원에는 남국의 꽃들과 부겐빌리아꽃이 
색색으로 가득 피어 있고, 하늘 높이 치솟은 우람한 나무 숲에서 흘러 나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를 들으니 아프리카 케냐에 온 행복감이 충만해 왔다.
  켄코는 개업을 앞둔 집으로 손님이 전혀 없었고 우리가 첫 손님이어서 새로 
단장한 모든 것들이 마치 우리를 맞기 위한 것처럼 기분 좋았다. 이 집은 
인도인 일곱 형제가 함께 살기 위해 지었던 집으로 스물일곱 명이나 살았다고 
했다. 집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인도의 우애 있는 일곱 형제가 함께 살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점심 식탁에는 콩나물과 도라지, 김과 고추장, 김치찌개 등 온갖 한국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어 반가웠다. 키가 크고 선량하게 생긴 흑인 주방장은 서투르게 
'숭늉' 하면서 물주전자에서 뽀얀 빛깔의 숭늉을 따랐다. 나라 밖에서 우리의 
음식을 먹을 때면 절로 행복해진다.

     케냐타 국립병원에 의약품 전달

  케냐타 국립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양영자 선생님은 여성으로 어떻게 
아프리카에 와서 의료 활동을 하게 됐을까? 한 2년만 일하다 귀국하려 했었는데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말하는 양 선생님은 아프리카에서 인술을 펼쳐 
온 자신의 삶을 자꾸만 축소해서 표현하는 겸손한 분이었다. 케냐의 우리 
공관을 방문했을 때 나원찬 대사와 여러분들이 우리를 반겼다.
  나이로비에 있는 우리 공관은 아프리카 전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공관 규모도 커보이고 일도 많아 보였다. 때마침 소말리아 사태에 투입된 
우리 나라의 평화 유지군들을 위해 군수품을 싣고 온 비행기 두 대가 막 
도착하여 더욱 분주해 보였고, 케냐 공관은 인접국인 소말리아의 지원 본부처럼 
느껴졌다.
  공관을 방문한 우리의 관심은 이곳 의료 활동과 의약품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연간 100만 달러 정도의 의약품이 지원되고, 중국에서도 의약품이 
병원에 지원되고 있는데도 신문에서는 항상 병원에 의약품이 없어 치료가 
어렵다는 기사가 보도된다고 했다. 전달된 의약품들이 암시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나이로비 시내 약국에는 모든 의약품들이 다 구비되어 있지만 값이 너무 비싸 
이곳 원주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라고 했다. 생활이 어려운 원주민들은 민간 
요법으로 치료하다가 병이 악화되기 일쑤이고, 간단히 치료될 안과 질환도 
토속적인 방법으로 진흙 같은 것을 눈에 넣어 결국 실명까지 한다고 했다.
  이 나라 관료들의 극심한 부정 부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다. 아프리카까지 우리의 의약품이 오는 과정을 보면, 코이카에서 
이를 구입하여 외교 행낭 평으로 운송하고 그것을 현지의 우리 공관에 
보관했다가 해당 병원에 전달했다. 안전과 신속을 기하기 위해 값싼 선박 편을 
피하고 외교 행낭 편을 이용한다지만 그 운송료는 예상 밖으로 비싼 것이었다. 
그래서 기탁한 성금 모두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위한 의약품 구입비로 사용되지 
않고 상당히 많은 금액이 약품의 운송료로 지불되는 것도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참으로 값비싸게 치른 우리 의약품이 정작 이곳에 와선 원주민에게 제대로 
쓰여지지도 않고 자칫 개인의 착복을 위해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예정에 따라 우리 정부의 파견 의사 양영자 선생님이 일하고 있는 케냐타 
국립병원에 의약품을 전달하기 위해 갔다. 케냐타 국립병원은 그 규모가 매우 
컸다. 환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상과 의사 300명, 간호사 500명, 
행정요원 200명 등 이 병원에서 일하는 임직원만도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시설이나 의료기가 노후되었다고 하지만 하루 2,000여 명을 진료하고 있다는 이 
병원의 환자들의 모습은 에티오피아 환자들과 비교해 보면 매우 양호해 보였다.
  양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이곳 의료진들은 환자들에게 주사만 하려 해도 
에이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수술용 장갑을 끼고 한다고 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정작 수술을 할 때도 새 장갑을 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는데, 같은 
아프리카이고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두 나라의 사정이 이렇게 크게 달랐다.
  케냐타 병원의 병원장과 약정국장, 양영자 선생님 그리고 우리 공관 직원들이 
참석할 가운데 의약품 전달식을 가졌다. 병원장은 우리가 가져온 의약품을 이곳 
원주민을 위해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겠다고 인사말을 했다. 나는 그분의 
인사말을 모두 믿고 싶었고 그것은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케냐에서 만난 한국인 여의사

  양영자 선생님과 나는 우선 나이가 같은 또래인 데다 두 사람이 다 
독신이어서 사고와 취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분의 너그럽고 자상한 성품은 
나의 케냐 여정을 알뜰하게 챙겨 주었다.
  나는 다른 나라에 가면 문방구를 찾는 취미가 있는 우선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 엽서를 살 수 있고 색다른 학용품 몇 가지를 사면 금세 행복감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양 선생님은 나를 큰 문방구로 안내해 주었다.
  관광 수입을 세수의 큰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나이로비의 상품들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특징 있는 그림 엽서를 골랐고 양 
선생님은 케냐의 자연과 풍물 그리고 여러 원주민들의 모습이 담긴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그 책은 값비싸 보여 부담이 되었지만 케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좋은 자료집이라고 생각되었다. 언제, 어떻게 그 호의를 보답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접어 두고 나는 마냥 기뻐했다.
  나는 그 분에게 아프리카에 오기 전에 케냐를 무대로 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분은 나의 말을 반기며 
영화의 주인공이 살았던 그 집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며 그곳에 
가보자고 했다. 새로운 경험 세계를 여행지에서 찾고 있는 나에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따라 나섰다.
  승용차가 나이로비의 중심가를 벗어나자마자 색다른 아프리카의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 넓고 광활한 산야에 열대림의 숲들이 울창했다. 한참 길을 달리던 양 
선생님은 '이 길이었는데... 이런 길이 아니었는데...' 하며 길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이 골목 저 골목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정말 아프리카에 
매료되고 있었다.
  한 집 울타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둘레를 잡고 있는 호화 저택 
안뜰에는 하늘을 찌를 듯 키가 큰 나무숲이 빽빽이 우거지고, 남국의 각색 
꽃들은 집안의 한적한 분위기를 호흡하며 피어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보고 
느꼈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죽어서 아름다운 케냐에 태어나고 싶다. 흑인이어도 좋아'라고 
나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이 마을에서 어쩌다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어 목적지인 그 
박물관에 다달았다. 정원에는 오랜 세월 동안 인공적으로 가꾼 아름다운 
수목들이 가득했다. 양 선생님이 영화 장면을 상기시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동안 여주인공의 표정이 항상 쓸쓸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곳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아프리카 냄새가 물씬 나는 색상의 사기 촛대 하나를 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양 선생님은 흑인들만 모여 살고 있는 빈민가를 
멀리서라도 보겠느냐고 나에게 물어 왔다. 양 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한 
가이드였다. 빈민가가 보이는 먼 거리에 차를 세운 양 선생님은 '저기'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흑인이 아닌 이곳 
사람들은 절대로 저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요즈음 나이로비의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보통 시민은 해가 진 뒤에는 운전도 삼가는 편이라고 
했다.
  그리도 나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양 선생님은 마지못해 흑인가로 차를 
진입시켰다. 해질 무렵의 퇴근 시간이라 귀가하는 원주민들이 큰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인 그들이 두려운 군중처럼 느껴졌다. 양 
선생님도 숨죽여 운전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고 나도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싸였다.
  낮 동안 화려한 나이로비 도심가에서 백인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만 하다가 
밤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고 가난이 기다리는 곳을 집이라고 찾아드는 그들의 
심경은 과연 어떠할까. 우리처럼 살빛이 다른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자기 
마을을 버젓이 통과하는 것을 보면 격한 울분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선량한 심성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성난 폭도로 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생각들이 돌자 마을 안으로 들어온 것이 무슨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어찌할 수 없으면서도 꼭 무슨 일을 당하고 말 것만 
같은 절박한 생각에 가슴이 조여 왔다. 길을 비켜 주는 군중 속을 헤치고 그 
마을을 벗어났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거대한 휴화산, 아프리카 원주민 빈민가

  아름답고 활기 차 보이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한구석에 비밀리 숨겨 놓을 
것처럼 보였던 원주민들의 비참한 현장이 나를 강열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그곳에 있는 원주민들을 꼭 만나 보고 싶어 켄코 종업원에게 그 마을 방문을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나 원주민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 마을을 방문하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고 경찰의 호위를 받아야만 방문할 수 있다고 했다. 그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자칫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는 모험이라고 했다. 그곳 원주민의 빈민가에는 
케냐의 국법 이전의 법이 있다고 했다. '군중의 정의, 거리의 정의'란 그들만의 
규율이 있어서 만약 그것에 어긋날 경우에는 몰매를 맞아 죽게도 되고 경찰이 
오기 전에 석유를 뿌려서 시체마저도 태워 버린다고 했다. 그 빈민가에서는 
하루에도 두세 명씩은 죽어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겁나는 말을 들어도 그곳을 
방문하기로 한 내 뜻은 굽혀지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 동네를 구경만 하고 돌아간다면 아프리카의 겉만 보는 것이고 
내면의 진실을 영원히 모를 것만 같았다. 나는 또 양영자 선생님께 그곳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양 선생님은 한국식당 
코리아나에서 일하고 있는 그 마을의 원주민인 두 청년들과 동행할 수 있게 
주선이 됐다고 나에게 알려 왔다.
  양 선생님은 손수 운전하여 우리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분은 그 마을 
안까지 들어가는 것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동행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을에는 집집마다 상수도도 없지만 하수도도 없어서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는 시궁창 물이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길도 울퉁불퉁하기 
이를 데 없어서 '길로 헐고 낡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민들이 골목마다 나와 앉아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나는 손을 
모아 합장하고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내 편에서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곤 
했다. 보디가드처럼 우리를 따르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원주민들의 집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몇몇 원주민들의 집 안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그 마을의 집들은 방과 방 사이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집마다 두부 
자르듯 그렇게 나뉘어 있었다. 서너 평쯤 돼 보이는 어둠침침한 그 공간은 온 
가족의 침실도 되고 식당도 되며 또 거실이기도 했다.
  내가 처음 들어간 집은 어설픈 긴 나무 의자가 있어서 거기에 나를 앉도록 
권했다. 그 집 안주인은 탄식하듯 한숨을 쉬며 하소연했다. 남편이 며칠 전에 
실직을 했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면서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며 배가 고파 이렇게 보챈다고 했다. 딱하게 생각된 나는 
당신이라도 나가서 아무 일이라도 부지런히 해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를 
맞길 데도 없거니와 먼 곳에 있는 마을 공동 수도까지 가서 물통 놓고 
기다렸다가 물을 받아다 밥지어 먹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가 
봐도 돈이 될 만한 일을 찾기도 어려운 노릇이라며 또 한숨을 지었다. 그네들은 
물도 한 통, 한 통 돈을 내며 사다 먹고 있었다.
  나는 방문했던 원주민들의 집을 나설 때마다 한 달 집세가 될 만큼의 달러를 
내놓고 나왔다. 그들에겐 큰 돈일 테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금액이었다. 하도 두렵게 말했던 마을 방문이라 잔뜩 긴장이 
되었지만 정작 몇 집을 드나들다 보니 그들은 오히려 소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어서 편안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리고 내 속마음에 저들을 해칠 마음이 
없는데 왜 저들이 나를 공연히 해칠 것인가?
  이들 원주민의 땅 케냐가 나라 밖으로 얼굴을 들키지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저들끼리 이 아름다운 땅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천혜의 미항 도시이자 케냐의 제 2도시인 몸바사를 아랍 
사람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이 번갈아 침입하고, 급기야는 1907년경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백인의 이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특히 기후 
조건이 좋은 나이로비에 정착하여 백인 천국을 만들어 냈다. 1963년 독립은 
쟁취했으나 그간 밀리고 쫓긴 원주민들의 삶은 아직도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주민들의 빈민가는 아프리카의 거대한 휴화산처럼 느껴졌다.  만약에 저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변하는 날에는 참으로 엄청난 화를 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늘의 강자인 백인과 그리고 일부 특권층이 누리고 있는 저 부귀와 영화는 
과연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언제쯤에나 이곳 원주민들도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 하는 생각들로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은 이 지구촌의 심각한 문제의 무게를  그 현장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문명권의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동경하는 것은 원시에 가까운 순수한 자연이 
거기에 그대로 숨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기계 문명 이전의 인간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원주민들의 삶, 그리고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동물들이 대자연의 드넓은 초원에서 마구 달리며 뛰노는 것도 보겠거니 하는 
상상 때문일 것이다.
  나이로비에서 270킬로미터나 떨어진 광대한 자연 보호 지역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 갈 때는 아프리카에 대한 원초적인 기대감이 되살아났다. 영토가 
한반도의 2.7배나 된다는 케냐는 지역에 따라서 지형이나 기후가 전혀 달랐다. 
마사이마라로 가는 길은 지층을 내려서는 것처럼 자꾸만 저지대로 내려가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산야는 황야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는 
것처럼 땅이 건조하고 메말라 보였다.
  이 거칠어 보이는 들녘에서 불쑥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붉은 천으로 몸을 
이리저리 휘감고 한 손에 창을 들고 걷는 마사이족이었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그 원시적인 붉은빛은 왜 그리도 쓸쓸하고 외로워 보일까? 그들은 마을이나 
집도 보이지 않는 황야에서 맨발로 한 손에 창을 들고 어디론가 홀로 가고 
있었다.
  유목민인 마사이족들은 가축 떼와 함께 살면서 다른 부족과는 거의 접촉하지 
않고 그들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굳게 지키며 산다고 했다. 오늘날도 토지 
경작을 거부하고 우유와 짐승의 피를 마시고 동물을 생식하며 산다고 했다. 
그들은 쇠똥과 진흙을 발라서 집을 짓고 살며 잠시도 손에서 창을 놓지 
않는다고 하니, 언제 있을지 모를 맹수의 공격에 대한 대비인 것 같았다. 
마사이족들의 삶이야말로 농경 사회를 이루기 이전의 인간들의 원초적 갊처럼 
여겨졌다.
  우리 차가 달리는 동안 길가에서 한가롭게 노닐던 사슴들이 놀라서 달아났다. 
그리고 키가 크고 목이 긴 기린들이 먼 산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수십 마리의 양 떼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우리는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으며 그들을 관찰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귓불에 
구멍을 뚫고 금속 귀고리를 주렁주렁 단 마사이족 영감이 나타나 불쾌한 
표정으로 무엇이라고 말했다. 차를 몰던 켄코의 안내자는 큰일났다고 했다. 
마사이족 삶의 형태를 사진 찍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우리가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거액의 벌금을 내라고 호통치고 있다고 했다.
  그 할아버지의 인상은 좀 무서워 보였다. 마사이족은 호전적이라는데 그들의 
본고장에 들어와 큰 봉변을 당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우리는 겁이 잔뜩 났다. 
좀처럼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그 영감님에게 나는 도리어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뜻밖에도 그 마사이족 할아버지는 포즈를 취해 주었다. 말문이 
열린 듯하여 얼마간의 돈과 과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제야 길을 비켜 주어 
우리는 가던 길을 다시 달릴 수 있었다.
  나이로비를 출발한 지 여덟 시간 만에야 목적지인 마사이마라에 도착했다. 
깊고 깊은 산속에 둥근 지붕을 파초잎으로 이엉을 엮어 인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우리는 방 배정을 받고 여장을 풀었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허허로운 벌판의 초원에 있을 동물부터 보기 위해 짐 
속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풀을 뜯고 있는 얼룩말, 거구를 뒤뚱거리는 코끼리, 
들판에서 움직이는 검은 반점처럼 보이는 아프리카 들소 떼를 관찰했다.
  석양 무렵 드디어 동물을 구경하는 시간이 되어 차를 타고 초원으로 갔다. 
처음 보는 얼룩말도 신기하고, 수줍은 듯 서 있는 목이 긴 기린, 조용한 숙녀 
같은 사슴 떼도 반가웠다. 물소, 표범,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짐승들이 끼리끼리 무리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서서히 초원을 누비듯 가던 차가 우뚝 선 곳, 그곳으로 다른 차들도 
몰려들었고 거기에는 사자의 암수가 함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차창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사자들, 동물의 
왕 사자는 두려운 것이 없는 듯 여유만만했다. 그러나 사자가 기침 소리(?)를 
내고 달리면 모든 짐승들이 함께 놀라 뛰었다. 특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들소 
떼들은 우왕좌왕 하다가는 체념한 듯 그 많은 무리가 걸음을 딱 멈추고 가만히 
거 있었다. 제발 나만은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기도라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몸집에 비해 다리가 허약한 들소가 표적인 듯싶었다. 우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사자가 사냥하여 식사를 마친 듯한 짐승의 잔해를 많이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가엾은 들소였다.
  사람들은 잔인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싶어 사자가 일어나 어슬렁거리면 어서 
사냥하기를 내심 바라며 숨죽여 관찰했다.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들이 
평화스럽게 뛰노는 초원만을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었다.
  둥근 원통 벽난로에서는 장작불이 빨갛게 타고, 전형적이 아프리카 음식의 
뷔페를 먹는 동안 마사이족 젊은 사나이들이 그들 특유의 괴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면서 민속춤을 추었다.
  초원에 깜장 밤의 어둠이 깔렸다. 파초잎의 띠풀지풍 아래서 동물들의 잠자는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밤, 원시의 미로를 따라 헤매느라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속의 한국

  아프리카의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케냐의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우리는 
이제 발길을 스와질란드로 옮겼다.
  스와질란드 국제 공항은 우리 나라 시골의 간이역 같았다. 우리 곁에 
다가서며 반겨 주신 분은 아프리카에서 24년 동안 의료 활동을 하고 있는 
안효정 선생님 내외분이다.
  "이곳 아프리카 땅까지 우리를 찾아 와 주시다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고맙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안 선생님은 우리의 방문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공항에서부터 이 나라의 
수도 음바바네까지는 사십 여분이 걸렸다. 안 선생님은 아프리카에서 지낸 
세원들을 회상하는 듯 어렵고 힘들었던 이야기와 보람 있었던 일들을 손수 
운전하며 들려주었다.
  우리의 승용차가 이리저리 산비탈을 오르고 아름다운 산들이 그림처럼 
스쳐갔다. 자꾸만 오르는가 싶던 차는 자카란다 오동보라꽃이 만개한 나무 
아래에 멈춰 섰고 그곳이 우리가 여장을 풀게 될 호텔이 있는 곳이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아기자기한 호텔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화병에 꽃이 풍성하게 꽂힌 아름다운 수채화가 
녹색테를 두르고 침상 머리맡에 걸려 있었다. 튼튼한 원목 가구들이 부드러운 
나무빛깔을 자아내고 있어 호텔의 격조를 한껏 높여 주는 듯했다. 얇게 드리운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짙은 운무에 가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눈 아래에는 이름 모를 남국의 꽃들이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있어 더욱 청초해 보였다.
  나는 슬며시 환상에 빠지고 싶었다. 아까 보았던 산과 서구풍 호텔 분위기 
때문이겠지만 꼭 스위스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운 아프리카를 저만큼 
밀어내고 아름다운 상념의 물결을 일구오 여행자인 나에겐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스위스에 와 있다는 착각에 빠지자 촉촉한 행복감이 스며들었다.
  안 선생님 댁에서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곳 의료진들에게는 고국의 
코이카 홍보팀이 고향 사람보다 더 반가울 것이다. 안 선생님 댁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나라 의사 분들이 아프리카에서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 한국의 어느 중산층 가정을 보는 것 같았다.
  방안에는 이국적이 물건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 세원 손때 
묻은 살림들이 예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그분 댁은 아프리카 속의 한국이었다. 
우라 나라 안에서는 오히려 어느 집도 이같이 옛 물건을 아직껏 사용하면서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이 없을 것이다. 저녁 식탁 위에도 모두가 
우리네 전통 음식 그대로이고, 안 선생님 부인의 순박함과 인정 많은 
모습조차도 예스럽기만 했다.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해 버린 우리 나라에서는 
그분과 같은 옛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안 선생님은 1969년 모국을 떠나올 때의 한국적인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사라져 버린 그 옛날의 
풍속도가 아프리카에서 건강하게 숨쉬고 있었다.

     일부다처제의 작은 나라, 스와질란드

  1993년 10월 20일 오전 열 시, 안효정 선생님이 근무하는 음바바네 
정부병원에서 병원장 등 다섯 명이 참석한 가운데 누출한 의약품 전달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병원장은 우리가 전달한 의약품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 나라는 자체적으로 의료진을 배출할 능력이 없는데 안효정 선생님이 
장기간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하고 계심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 간호사를 이 병원에 파견해 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한 희망을 나타냈다.
  음바바네 병원은 350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었으며 병원 시설도 좋아 보였다. 
산부인과 병동을 둘러보았다. 신생아를 분만한 산보와 분만을 기다리는 
임산부들의 모습이 안정되고 평화스러워 보여 보는 이의 마음도 편안했다.
  이 나라는 에티오피아에 비하면 거의 여덟 배나 잘사는 나라라고 했다. 
병원의 환자들만 보아도 그 나라의 국력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루 평균 두세 명 아기들의 출산을 돕고 있다는 안효정 선생님. 
이 작은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안 선생님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와질란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모잠비크를 접경한 나라로 우리 나라의 
전라남도만한 크기에 인구는 70만 명이었다.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단일 민족인 스와지족만 살고 있어 내전 같은 것이 
전혀 없고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된 나라였다.
  나는 안 선생님께 이곳 원주민들이 사는 모습과 시골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분은 교빈 가운데 김군을 안내자로 보내 부었다. 음바바네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우리 나라 강원도 어느 산골처럼이나 한적했다. 산에는 조림된 
펄프목이 울창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눈앞에 그림같이 예쁜 작은 마을이 
나타났을 때 안내자는 차를 세우며 그곳이 펄프 공장에 종사하는 외국이 사택 
마을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의 빼어난 경관에 서구의 문명을 배합시킨 그야말로 
쾌적한 인간의 삶터. 더 바랄 것이 없는 이상촌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울창한 숲속에 띄엄띄엄 작은 집들을 짓고 크지 않은 
정원에는 남국의 온갖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더할 수 없이 맑은 공기 속에 이따금 산새들의 투명한 소리가 
들린다. 이런 곳을 일러 무릉도원이라고 하는가! 서울의 소음과 혼탁한 공기 
속에 지내다 온 나에게는 완전한 별유천지 같았다.
  큰 나무 그늘 아래 식탁에서 자연을 벗삼아 빵과 치즈, 양상추와 토마토 
그리고 커피 한잔을 점심으로 먹고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 앉아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 속에서 스와질란드를 그려 보았다.
  이 나라는 일부다처제여서 현재 스물다섯 살밖에 안된 국왕 음스와티 3세도 
부인이 일곱 명이나 되고, 자녀도 이미 다섯 병이나 된다고 했다. 여든두 살로 
사망한 그의 부왕은 왕비가 60명이고 왕자만도 100여 명이며, 공주는 150명이 
넘는다고 했다.
  이 나라 궁중 풍속에는 매년 새왕비를 간택하기 위해 리드 댄스 대회가 
열리는데, 그때엔 각 고을의 추정들로부터 추천받은 미녀들이 왕 앞에서 거의 
나체로 품을 춘다고 했다. 그중에서 이 나라 미녀의 기준인 입술이 나오고 
엉덩이가 크며 뚱뚱한 몸매의 처녀가 새왕비로 뽑힌다고 했다. 여러 부인과 
사는 부호에게 자녀가 몇이냐고 물어 보면 한참 세다가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린다고 했다. 전설과 같은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아프리카 작은 나라의 
현실이라니 이를 두고 참으로 요지경 속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곳 남성들은 책임감이 없어요. 게으르고 술이나 마시며 세월을 보내죠. 
모두 부인들이 애써서 벌어다 준 돈으로...  이들에겐 좀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이 없어요. 그것이 아프리카의 문제죠."
  '그것이 아프리카의 문제죠. 그것이 아프리카의 문제죠...' 안 선생님의 음성이 
우렁우렁 산울림처럼 메아리쳐 내 귀에 들려 왔다. 또 무표정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아프리카 여인들의 얼굴이 나의 상념 속에서 자꾸만 겹치고 포개어졌다.

     인종 차별의 현장, 남아프리카 공화국

  "구문이어도 좋습니다. 고국 소식 좀 알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신문 좀 보내 
주십시오."
  코이카 분들에게 부탁하던 안효정 선생님의 말씀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나고 있는 내 귀에 메아리 쳐왔다.
  이제 우리는 인종 차별 정책으로 갈등과 반목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 현장으로 옮겨 갔다. 내가 
스와질란드 마운틴 호텔에 있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우리 공과이라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는 김계원이라고 하는 원불교 교도입니다. 교무님께서 아프리카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내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오시죠? 공항으로 나가 
뵙겠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저희 집에 모시겠습니다."
  이역 만리 아프리카에서 누가 나를 기다리고 반겨 줄까? 이곳 전화의 
수화기에서 한국 말씨가 들려 오는 것만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내려 공항 밖으로 나오면서 나를 마중 나오겠다던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싶어 나의 시선은 어느 낯선 분을 찾고 있었다. 그때 
내 곁으로 다가와 반기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전혀 초면의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반가운 친지를 대하듯 우리 짐을 챙겨 차에 싣고 김현경 교도가 차에 
오르도록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까부터 유치원을 다녔어요. 그래서 유치원 행사 때면 
저희들도 강남교당에 갔었습니다. 지금 집에서는 애들이 교무님 오신다고 
좋아들 하며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여러 학부모를 공식적으로 만나는 기회였다면 내가 따로 기억할 리가 없었다.
  "요하네스버그는 지금 치안 상태가 매우 불안합니다."
  운전을 하며 김계원님은 이곳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자택은 이 
나라의 수도 프리토리아에 있다며 그곳은 비교적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분 표정에서 이곳 사정이 매우 긴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몇 시간을 달리는 듯했다. 이렇게 먼 길을 달려 
공항까지 기꺼이 나와 우리를 맞아 주고 있는 젊은 교도 내외분이 한없이 
고마웠다.
  며칠 전에는 LA에서 온 우리 교포가 마로 호텔 앞에서 폭도들에게 허망하게 
희생됐다며 여행자들도 안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해 주기도 했다. 김계원님은 
이곳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우리 공관을 설립하기 위해 최초로 파견되어 그 
기반을 닦는 일부터 했다는 직업 외교관이었다. 이곳 공관은 앞으로 아프리카의 
중요한 거점 공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아 나라의 행정 수도 프리토리아에 도착했다. 매우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을 조는 도시였다. 이곳도 자카란다 가로수가 오동보라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행인들은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그리고 개성 있는 서구풍의 주택들이 
호화로워 보였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집마다 남국의 식물들이 윤기를 내뿜고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어 겉으로 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낙원이었다.
  김계원님 댁도 매우 훌륭했다. 나를 기다려 준 귀여운 꼬마 남매와 만났다. 
여장을 풀고 잠시 이 집의 분위기를 호흡한 다음 정성 가득한 저녁 식탁에서 
김치와 된장찌개가 반가웠다. 나라 밖에서 내 나라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면 
여행자로서는 더 바랄 게 없는 기분이 된다. 마치 내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식사 후 김계원님은 나를 상대로 이 나라의 역사 선생님이 되었다. 상의 
내용인 즉 이러하다.
  흑인 원주민들이 평화스럽게 살고 있던 이 땅에 341년 전(1652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최초로 케이프타운에 상륙하여 물과 식량, 과일 등 동인도 회사의 
보급 기지로 만들면서부터 이 나라에 백인이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후에는 영국인들이 들어와 세력을 확장하면서 영국계 백인과 네덜란드계 
백인들 간에 세력 쟁탈전이 벌여졌다가, 영국계 백인들이 이기자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살고 있던 영토 케이프타운을 양도하고 북진하면서 오지로 밀리게 
됐다. 1910년에는 드디어 이 땅을 영국의 자치령으로 선포하여 식민지를 
만들었다.
  백인들은 차츰 흑인 재산권을 제한하는 한편 흑인들을 도시로부터 격리시키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백인들이 급기야 인종 차별 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블랙 홈 랜드' 열 곳을 지정하여 흑인들을 백은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기에 이르렀다.

     흑인 거주 지역 '블랙 홈 랜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내쫓겨 '블랙 홈 랜드'란 그들만의 촌락에서 
백인들로부터 원격 조정당하며 살고 있다는 원주민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낮 동안에도 16세 이상의 흑인은 10여 종의 증명서를 휴대해야만 백인 
지구에서 머물 수 있고, 만약 그 조회 수첩을 휴대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라도 
체포될 수 있다고 했다. 날이 저물면 백인 지역에 머물 수조차 없고 반드시 
블랙 홈 핸드로 돌아가야 하는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겪으면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곳 원주민들은 
비인간적인 학대를 겪으면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곳 원주민들은 비인간적인 
학대를 견디다 못해 저항하고, 저항보다 몇 배나 무서운 보복을 당하는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흑인 거주 지역은 치안상의 이유로 당국의 출입 금지 조치가 빈번히 취해지고 
있다지만 나는 또 그곳 원주민들끼리 살고 있는 블랙 홈 랜드를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이곳 사정에 밝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원주민들과 접촉이 불가능하여 나를 보살펴 주는 분들에게 상당한 폐를 끼치고 
위험한 부담을 주는 것이 큰 고민이었다.
  그래도 원주민들의 사정을 말로만 듣고 블랙 홈 랜드의 실상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면 아프리카 방문의 핵심을 놓치고 말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까지 
찾아온 의미도 없을 것만 같았다. 나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김계원님 
부부는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무슨 방도를 취해 보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김계원님은 출근을 하고 부인 순관 교도님이 어려운 길잡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순관 교도님은 주방에서 일하는 흑인 아가씨에게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 것 같았고 우리의 방문 계획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흑인 
아가씨는 대낮에 백인의 차가 흑인 마을에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될 것이라며,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겠느냐고 우리의 방문을 만류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순관 교도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아 나를 차에 태우고 블랙 홈 
랜드를 찾아 나섰다.
  프리토리아 도심지를 벗어나면서부터는 곧장 시골길을 진주했다. 좀더 멀리 
왔다고 느껴지는 곳에는 인가도 없을 뿐 아니라 오가는 행인도 없고 차량마저도 
별로 없었다. 이 같은 한적함은 미묘한 불안감을 갖게 했다.
  나의 거리 감각으로는 서울에서 인천쯤 온 것 같았다. 드디어 원주민들의 
주거 지역인 블랙 홈 랜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삭막하고 무질서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삶터가 거기 있었다. 조금 멀리에 차를 세우고 관망하던 순관 
교도님은 그 마을 외곽 지대를 한바퀴 휙 돌아나왔다. 원주민 안내자를 
대동하지 못한 이곳에서는 원주민들의 마을에 내려볼 엄두도 못냈다. 누군가가 
우리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는 황급히 그 마을을 뒤로하고 
프리토리아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얼핏 보았던 그 마을이 눈에 어른거렸다. 사방의 벽(?)이 양철로 둘러지고 
지붕에도 녹슨 함석이 얹혔던 원주민들의 집, 그래도 문에는 자물통이 굳게 
채워져 있던 것이 나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눈이 잠긴 그 집 주인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백인을 위해 어디선가 일하고 있을 것이다.
  많지 않은 돈을 벌어도 자식을 교육시킬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는 그들. 
평생을 벌어도 집다운 집을 가져 볼 수 없는 그들에겐 내일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하여 아무 희망도 가져 볼 수 없어서 오직 오늘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힘들게 일하여 손에 들어온 작은 돈으로 술을 마셔 한을 
달래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백인들은 흑백 차별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라고 우긴다고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인구의 13퍼센트 밖에 안되는 백인들은 75퍼센트나 되는 
흑인들을 전국토의 13퍼센트 밖에 안되는 좁고 척박한 땅, 블랙 홈 랜드로 밀어 
넣었다.
  아프리카 인권 운동의 기수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저항의 상징인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몸을 담고 불평등한 흑백 차별 정책에 
거세게 항거했다. 만델라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젊은 나이로 백인들과 투쟁하기 
시작하여 27년간이란 긴 세월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굽히지 않고 오직 인종 
차별을 위해 외길을 걸어 왔다. 만델라를 비롯한 이곳 인권 운동가들이 끝없이 
전개한 저항과 투쟁의 값비싼 대가를 치른 끝에 마침내 귀중한 승리를 
얻어냈다.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을 포함한 
모든 인종이 참여하져 자유 총선을 치르게 된 것이 그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341년 간이란 긴 세월의 소수 백인 통치가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치욕의 나날을 살아온 이곳 원주민들에게는 영광의 
날이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이 교차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간의 반목과 갈등이 날카롭게 표출되고 있어 사회적 상황은 혼미를 
거듭하고 치안 상태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금과 다이아몬드가 많이 난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토 전부가 광산이라는 
이곳에서 원주민들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날을 염원해 본다.

     마음 눈으로 본 세상

     수도자의 삶

  인간만이 시간의 마디를 나누어 지난해, 새해라 부르며 묵은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설계한다. 새해에도 우리가 살아왔던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나날들이 
반복되면서 또 세월은 우리 곁을 쏜살같이 지나가 버릴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새해를 맞을 때면 큰 희망을 갖기 보다 오히려 위안을 받곤 
한다. 개인적으로 지극히 소중한 생의 한 마디인 1년을 다 써버린 세밑에 서게 
되면 나 자신이 남긴 발자취를 조용히 뒤돌아보게 된다. 그럴 때면 스스로 
당혹감을 어찌할 수 없는 때가 많다. 수도자 본분의 삶에 충실치 못했던 자신을 
발견할 때가 그렇다. 큰 회한으로 밀려오는 지난해의 미흡했던 삶을 보충할 수 
있는 시간의 긴 마디, 365일이 새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내 앞에 마주앉아 있을 
때면 적이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된다.
  남과 다른 서원을 갖고 수도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일 저런 일에 
묶여 살다 보면 세월은 쉼없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 버리고 또 한해의 
세밑에서야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그럴 때면 한 해 동안 관심을 가졌던 
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몇 개의 보람의 열매들도 성에 차지 않는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구도자의 나이테만이 자신을 유난히 왜소하게 만들고 초라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세월을 모두 허송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자기 변화의 적은 
목소리가 들려 오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중생의 속성을 골고루 갖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볼 때는 누구와 눈빛이 마주칠까 봐 두렵기까지 하다. 수도자의 
본분의 삶에 게을렀던 자신을 무섭게 힐책하고 '새해에는...' 하면서 단단히 
다짐해 본 적도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우주 안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의 원리와 원칙이 있다고 믿는다. 그 어느 
한가지도 공들인 바 없이 저절로 잘되고 풍성하게 열매 맺는 법은 없다. 그것이 
인과응보의 진리이고, 이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는 공정하고도 엄격한 
법칙이라고 믿는다. 순리를 삶이란 그 같은 질서를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지런한 농부가 땀 흘려 농사를 지어야 가을의 추수 마당이 풍요로운 것과 
같이, 중생의 옷을 벗어 버리기 위해 발심구도하는 수도자들도 삼독심을 
탈색하는 작업, 수도 정진에 큰 공을 들여야 비로소 불보살의 인격과 인품을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올해도 '수도자의 삶, 그 본분에 충실하라'고 서원의 
자아가 나 자신에게 충고한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맡은 바 전문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자기 몫을 
충실히 꾸려 내야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서로 고맙게 
느껴질 것이다.
  집배원은 우편물을 배달하고, 소방대원은 소방차에 물을 가득 채워 놓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대기하고, 미화원은 거리를 열심해 쓸 듯이 서로 
나누어 맡은 자신의 몫을 해낼 때 이 세상을 건강한 유기체로서 존재 할 수 
있고 모든 일이 원활하게 소통될 것이다. 
  어찌 보면 제각기 자신의 생존과 발전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또 달리 보면 다른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기업인은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노력하는가? 결국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기업 이윤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고 있는 우 리 사회는 서로 각자가 맡은 바를 훌륭하게 이룩해 
주기를 바라고 또 촉구한다. 역시 세상밖에  살고 있지 않은 종교인들도 
세상으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 건강하도록 모든 
종교는 사회의 방부제가 되어 주기 바라고, 세상이 혼탁할 때면 성직자나 
수도자는 신선한 바람과 맑은 물이 되어 정화의 소임을 맡아줄 것을 기대한다. 
또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맑은 거울과 같은 존재의 
성직자나 수도자가 있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삶의 질과 
양을 재어 볼 수 있는 바른 척도와 지혜를 빌리고자 한다. 또 음지의 소외 
계층을 따뜻하게 돌봐 주는 것도 당연히 종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수도자가 본분의 삶에 힘쓰지 않다 몸과 마음이 도에 길들어 있지 않고 
자비심이 부족하면 우리 사회는 종교인을 쓸모없는 연장과 같이 여길 것이다. 
그리고 너마다의 몫, 종교의 소임에 부응할 만한 준비가 없고 또 노력마저 
바치지 않는다면 종교인은 세상으로부터 존경 대신 소외를 면치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이 아무리 소박하고 검소하다 할지라도,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거처와 수용품을 쓰고 사는 것은 누군가가 피땀 흘려 노력한 
그 대가의 일부를 빌러 쓰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수도인이 한눈 팔지 않고 
촌음을 아끼면서 수도에 정진하여 자기 인격의 틀을 바꾸는 것은 사회로부터 
요청받고 있는 종교인의 소임과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준비이고 대비라고 
여긴다. 마치 문밖이 더럽기 때문에 대문을 닫고 자기 집 안만 깨끗이 쓰는 
사람처럼,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자기 수도에만 힘쓴다면 그것은 
세상에 큰 빛을 지는 삶이 될 것이다. 적어도 수도자의 인생이 빚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늘 나 자신에게 타일러 보기도 한다.
  (1993. 1.)

     소리의 얼굴

  23년 전 어느 날 국립맹학교 교양 강좌 시간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었다. 시선으로 반응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청중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어떠한 독백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험해 보지 못한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마친 나는 끝으로 질문을 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질문을 했다.
  "말씀하시는 분의 나이를 알고 싶습니다."
  너무 뜻밖의 질문에 답변이 궁했던 나는 오히려 내 나이가 몇 살일 것 
같으냐고 반문했다.
  "열아홉 살이요."
  질문했던 그 학생이 다시 일어나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은 와르르 웃으면서 저마다 내 나이를 헤아려 보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각으로 모든 분별의 척도를 삼고 있는 시각 장애자들의 
세계를 처음 접해 본 것이다.
  그날의 강연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들의 기숙사를 자주 찾게 되었다. 내 
목소리가 나면 그들은 우선 나를 반기면서 조심조심 걸어나왔다. 나는 그들의 
입가에 번지고 있는 미소로 그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 
본 그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좌절감을 침묵으로 삭이면서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굳어 있는 그들의 표정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다정한 
음성으로 이야기도 해 주고 또 그들과 함께 노래도 불렀다. 그들은 내 소리의 
얼굴에 이끌리고 있어 그들과 나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한 학생이 부탁이 있다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문학 작품을 읽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들의 무슨 소원이고 들어주고만 싶던 
나는 사직교당의 젊은 교도님들과 대학생들로 팀을 구성하여 한때 국립맹학교 
학생들에게 명작 읽어 주기에 열성을 기울였다. 자신들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과 
애정에 확신을 갖게 된 그들은 희망과 용기를 갖는 것 같았다. 그들의 새로운 
제안은 자신들이 읽을 수 있는 점자 책을 만들고 싶으나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순수의 열정으로 그들에게 명작을 읽어 주던 대학생들은 선뜻 그들의 
뒷바라지에 나섰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면 맹인 학생들은 점자 판 위에서 
번개같이 점필을 움직였다. 그들의 그러한 집념과 노력의 결과로 원불교 
점자교전을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루었고, "도산 안창호 전기"를 점역하여 
맹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점필로 한 점 한 점을 찍으면 두터운 하얀 종이 위에는 누에알 같은 점이 
촘촘히 태어났다. 그 단순한 형태의 점자에 맹일 학생들의 손끝이 스치면 
그들의 입에서는 책의 내용이 줄줄 흘러 나왔다. 참으로 신기하고 
대견스러웠다.
  그때 그 맹인 학생들이 성장하여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자녀들을 기르고 있다. 지금 내 주변의 뜻있는 분들은 그들 맹인 가정을 돕고 
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의 장학금을 마련하는 저수지에는 계속 온정의 물길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엄마 아빠보다 더 잘생기고 건강한 그들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그들의 어버이와 함께 갔던 어느 소풍날,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다. 길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피어 있고 바람결에 키가 큰 
코스모스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아주 아름답다...'고 뒷걸음질로 걸으면서 
주변의 정경을 설명으로 보여 주던 일, 무성 영화의 변사처럼 말하던 30대 
초반의 내 모습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린다.
  (1993. 3. 8.)

     사랑과 자비는 하나

  강남교당 '교화의 방'으로 들어가는 복도 한 편에는 예쁜 달걀 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베타니아집과 성 라자로 마을, 그리고 다른 수도원에서 
부활절 선물로 보내 온 것들이다. 각양각색으로 물들인 달걀과, 공예품처럼 
보이는 달걀이 가득 담긴 부활절 달걀 바구니 선물은 신앙을 달리한 사람에게도 
기쁨을 준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는 믿음 깊은 신앙인의 큰 정성이 작은 달걀에 담겨 
있는 그 귀한 선물을 함부로 할 수 없어 한곳에 모아 놓고 1년 내내 두고 본다. 
부활절 달걀 바구니들은 이제 우리 교당에서 사랑받는 실내 장식물이 되어 
버렸다.
  하루에도 수없이 눈길의 머무르는 부활절 달걀 바구니에서 나는 때로 
천주교와 원불교가 서로 통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길'이 있음을 본다.
  명동 바오로수도원의 더 깊은 곳에는 베타니아집이 있다. 값진 헌신의 
삶터에서 그 소임을 마무리하고 은퇴한 노수녀님들이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집이다.
  베타니아집을 찾아 다닌지도 올해로 10년째가 된다. 갈 때마다 온 마음으로 
반기시는 수녀님들, 수도의 세원만큼이나 온화하고 투명한 눈빛을 간직한 
노수녀님들과 함께 있노라면 서로 다른 종교의 거리와 벽은 사라지고 한 가족이 
된다.
  그 단란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 보면 사바 세계 바깥 세상과는 천리만리 
동떨어져 있는 청정함을 느낀다. 도심 속의 명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고요함, 
그리고 노수녀님들의 걸음걸이처럼이나 한가로움이 흐르는 수도원. '박 교무님, 
우리 수도원으로 와요' 하며 따뜻한 정을 주시는 수녀님, '그런 말씀은 마세요, 
실례죠...' 하고 만류하시는 수녀님들 속에 있다 보면 맑은 기쁨이 샘솟는다.
  배타니아집 노수녀님들께서는 4월 하순에 방문해도, 5월 초순에 찾아뵈어도 
한결같이 첫 인사는 '부활축일 잘 지내셨죠' 하며 몫지워 간수해 두었던 부활절 
달걀 바구니를 건네 주시곤 한다.
  지난 부활절에 노수녀님들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호접란 한 분을 들고 
베타니아집을 찾았다. 수녀님들은 부활축일 때 왔다며 여느 때보다 더 
반기셨다. '축 부활절'이란 리본이 달린 난꽃 앞에서 '이 난은 참 아름답다. 너무 
예쁘죠' 하며 호기심 많은 소녀들처럼 좋아하는 그분들 모습을 꽃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하늘에서 가까운 동네 인도의 히말라야 설산 라닥 사람들에게 우리의 겨울 
옷을 보내는 일을 원불교가 주관해 했을 때도 대치성당이 중심이 되어 천주교의 
많은 분들이 합력했었다. 이제는 오랜 내전에 시달리며 모든 물자가 귀해 
헐벗고 사는 열대의 나라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남는 옷을 보내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도 대치성당에서는 부활절 축일부터 캄보디아에 보낼 웃을 모으기 
시작, 온정의 옷이 쌓이고 천주교 신자 여러분들은 그 옷들을 자신의 친지에게 
보내기라도 하듯 정결한 것들만 골라 상자에 담아 포장하고 있다.
  역사가 짧고 교세가 더 약한 원불교가 앞장서서 세계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때마다 마치 한 집안일처럼 손을 맞잡은 천주교에서 '참사랑과 너그러움'을 
배운다.
  유엔은 1995년을 '세계 관용의 해'로 정했다. 국제 사회에서 냉전 체제가 
사라진 이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위기는 종교간, 종족간 갈등과 
대립으로 지구촌 곳곳에서는 총성이 멎지 않고 있다.
  우리 서로 상대방에게 조금만 더 너그러울 수 있다면 지구촌에는 진정한 
평화가 깃들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1995. 5. 7)

     우리 이제부터라도...

  크고 화려해 보이던 삼풍백화점이 폭삭 무너져 내렸다. 너무 충격적인 대형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어 우리 국민 모두의 정서가 불안할 지경이다.
  잘 다독거려 간수한 화롯불의 불씨로 밥솥에 불을 지피고, 아침마다 아궁이의 
재를 알뜰히 긁어 모아 농사지을 거름을 장만하고, 기름이 닳을까 봐 호롱불의 
심지를 낮춘 가난했던 시절을 50대 이상의 어른 세대들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자녀 교육에 희생적인 열성을 바쳐 
국가의 고급 인력이 축적되었고, 온 국민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열사의 나라 
중동의 건설 현장까지 나가 집념 어린 근면과 노력으로 우리는 일찍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오늘날의 풍요로운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씨 뿌리고 부지런히 가꿔야만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던 농경 시대의 그 소박한 순리를 잊어버린 것 같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잇속만 챙길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염치도 불고하게 
되었다. 그래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양심을 쉽게 팔고 순리와 정도가 아니어도 
개의치 않는 풍조가 생겼다. 욕심 때문에 우리들은 어느덧 임시와 눈가림과 
적당히 해치우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 '임시'와 '눈가림'과 '적당히' 했던 
일들의 업보는 끊이지 않는 대형 사고의 참사로 우리를 벌주고 있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이번에도 인재였다'는 말이 꼭 따라붙고 있다. 어떤 
사고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고 운이 나빠서 일어난 것들이 아니다. 모든 
사고는 이미 잉태되어 있다가 때가 되면 터질 뿐이다. 삼풍백화점도 건물의 
부신 시공과 안전 관리 소홀이라는 주원인이 1천 수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를 부른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도시 산업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제각기 다만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것 하나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는 일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다른 사람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은 
일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실수와 무책임이 곧 우리 사회의 대형 사고를 만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도시 산업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치 한 사람의 
인체와도 같아, 어느 분야에서든지 맡은 바 자기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그것이 
원인이 돼 누군가가 큰 피해를 보게 되고, 사회 전체가 충격의 몸살을 앓게 
된다.
  임시로 해둔 것이 영구할 수 없고, 남의 눈을 가린 것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며, 적당히 했던 일들은 '부실이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고 만다. 그리고 
원칙에 따르지 않고 안이하게 했던 일들은 쉽게 허물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원칙을 지키고 순리를 따르는 겸허한 
자세로 살아야겠다. 우리 모두 자기가 맡은 일만큼은 '작은 하자'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책임 있게 일하는 자세만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자금 미래의 
대형 사고를 예방하고 있는 것이다.
  붕괴된 삼풍백화점의 경우 이미 15일 전부터 건물 일부에 금이 가는 등 붕괴 
조짐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고 당일 아침에도 5층 식당 바닥에 균열이 생겨 
백화점 임원들은 긴급 대책 회의를 하고 4층 보석상점의 귀금속은 미리 치웠다. 
그러면서도 인명 피해 대책은 세우지 않고 5층의 큰 백화점이 폭삭 내려앉았을 
때까지 영업을 계속했다니, 우리 사회가 물질에 비해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물질과 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만 
우리의 미래를 밝게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삼풍백화점 참사로 목숨을 잃은 선량한 시민들의 명복을 삼가 빌며 
부상자들의 빠른 쾌유 있으시길 기원한다.
  (1995. 7. 2)

     성 달라이 라마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설산 라닥에는 수세기 전에 
건립된 '헤미스곰파' '알치곰파' 등 많은 사원들이 있다. 그 사원 내, 외부 벽에 
그려진 불화 나만다라는 불교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되어 세계 각국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라닥 티베트 불교 사원의 불단에는 예외없이 제 14대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부처님과 함께 모셔져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 성 달라이 라마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종교, 정치의 최고 지도자로서 현재 인도의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로 중국에 점령당한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달라이 리마의 60회 생일 
축하 행사가 지난 4일부터 6일 까지 사흘 간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베풀어졌다.
  이틀에 걸쳐 세계 각국의 석학들이 모여 '21세기를 위한 비폭력 자비의 
비전'과 '생태계의 조화와 환경 보호의 경각심 호소' 등의 심포지엄을 열었고, 
6일에 열린 그의 생일 축하 행사는 이른 아침 마하트마 간디의 묘소에서 여러 
종교 대표자들의 찬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달라이 라마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사상적 맥을 계승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의 60회 생일 축하연은 인도의 벤카타라만 전 수상을 비롯, 세계 20여 
개국에서 온 하객 등 5,000여 명이 아소카 컨벤션홀을 가득 메운 가운데 
베풀어졌다.
  인도의 인권 위원회 쇠장이 랑가나 미스라 판사는 축사에서 달라이 라마는 
평화와 비폭력의 사도며 사랑과 자비의 화신으로 모든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뛰어난 전사라고 격찬했다. 이어진 축사와 세계 여러 나라 사람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전해 온 
축하 메시지는 한결같이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정신에 깊은 존경을 표하는 
내용들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이날 답례 연설에서 인도 정부가 티베트 민족의 문화와 종교, 
주체성과 자존심을 유지하도록 도와 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으로는 국가나 종족 그리고 종교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비폭력만이 모든 인류의 가치를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질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폭력만은 
배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사람과 자비의 개발이 내적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소중히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의 행복도 커진다며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체험이 담긴 내용을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강연해 많은 청중의 심금을 울렸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추앙을 받고 있었지만 그분에게서는 조금도 권위 의식 같은 것을 발견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사흘 동안의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의 모습이었고, 기념 식수를 위해 마련된 공원의 법좌에서 
찬팅할 때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오르내리자 재미있는 듯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기도 해 도무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처럼 보였다.
  전 세계에 흩어져 세계 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티베트 민족의 종교적, 
정치적 상징이요 구심적 인물이기도 한 성 달라이 리마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이 시대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여겨졌다.
  (1995. 7. 30)

     통일이 오는 길목에서

  유엔개발계획(UNDP)의 두만강 개발 계획에 따라 동북아의 금 삼각지로 
각광받고 있는 중국의 훈춘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바라본 북한은 바야흐로 
개방의 햇살이 비추이고 있고 그 햇살의 위력은 분단의 두꺼운 얼음장을 녹여 
작은 울림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러시아 및 북한과의 접경 지대이고 장차 길림성 대외 개방의 중요한 통로가 
될 훈춘은 해상 실크로드의 보푼 꿈을 안고 있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선봉, 은덕, 새벽 세 개의 군과 마주보고 있는 훈춘에는 주민의 
45퍼센트나 되는 조선족이 살고 있고, 그들은 중국 국적을 갖고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말과 우리 글을 고집스러우리만큼 철저히 사용하면서 
우리의 문화 및 풍속과 전통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우리와 국적은 달라도 
같은 민족의 뜨거운 동포애가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조선족들은 남북 통일의 촉매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요 몇 년 사이 연변을 찾아간 남한 
사람도 많지만 북한과 한국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남북한 
양측의 사정에 매우 밝았다.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하루 속히 남북 통일이 되어 같은 동포들이 고루 
잘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북한 동포들의 어려운 
사정을 아무리 상상하려 해도 그들의 비참한 실상까지는 생각이 미칠 수 
없다고도 말했다.
  그들 조선족이 남한의 자유와 풍요로운 모습을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 
동포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리기만 해도 그것은 북한 동포들의 막힌 귀를 열어 
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 동포들로 하여금 남한의 실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인식 전환에만 힘써도 그것은 바로 통일의 지름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북한도 90년대에 들어서 경제적 살길을 찾아 대결적이고 고립적인 대외 
정책에서 벗어나 대외 협력 추구 정책을 채택하고, 나진, 선봉 지구를 
제한적으로나마 개방하면서 무역 제일주의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지난 9월 4일 
훈춘에선 중국과 북한을 잇고 있는 권하교가 '중국권하조선원정국경공무통로'란 
명칭으로 개통돼 양국뿐 아니라 제 3국 사람들까지 사증없이 왕래할 수 있게 
됐다.
  북한은 장차 이 권하교를 통해 엄청난 개방의 바람을 맞게 될 것이다. 
처음에야 제한적 개방을 전제로 한다 하더라도 점진적인 개방과 개혁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며, 이 같은 북한의 개방과 개혁은 곧 통일이 오는 길목이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북한은 지난 7, 8원에 내린 폭우로 100년 만의 큰 홍수가 9개도, 
145개 시, 군을 휩쓸어 국토의 76퍼센트가 피해를 보았고 520만 명의 이재민과 
총 150억 달러 상당의 피해가 났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0만 가구의 가옥과 
수많은 수리 시설, 도로, 펌프장이 파괴되고 특히 곡물 생산이 감소돼 올해의 
식량 부족 현상은 매우 심각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제3차 남북회담에 참석하고 있는 북측 대표단의 말에 따르면 홍수 지역 
농토에는 자갈, 모래가 1미터 이상씩 쌓여 앞으로 7__8년 동안 경작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울한 소식이 들리고 있다.
  북한 동포가 수재로 큰 피해를 당하고 있어도 우리는 우성호 송환 문제나 쌀 
수송 억류 사건들이 유감스러운 경험 때문에, 그리고 북측의 대표성 있는 공식 
요청이 없이 뜨거운 동포애마저 차가운 공기 속에 차단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동포애를 발휘해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그 수단과 방법을 더욱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통일의 대전제로 생각해 오고 있는 민족 공동체를 실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 같다.
  (1995. 10. 1)

     숨은 도인

  지난 달 87세를 일기로 김명근 교도님이 앉은 채로 영을 날렸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거실에서 말씀을 나누시다 방으로 들어가신 지 20여 분도 못 돼 
방석 위에 단정히 앉으신 채 등을 벽에 기댄 모습으로 입적하셨다고 한다.
  그분의 아드님에 따르면 어제도 여느 때와 같이 원불교 법회에 잘 
다녀오셨고, 아침에도 자신이 출근할 대 웃는 얼굴로 배웅해 줬으며, 한 시간 
전에도 어머님과 정겨운 음성으로 통화했는데, 무엇이 급해 눕지도 못하고 
앉으신 채 세상을 떠나셨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할머님은 지난 30년 동안 한결같이 오전 세 시 삼십 분에 일어나 목욕 
재계하고 네 시부터 방석에 앉아 척추를 칼날같이 세우고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기도, 좌선, 독경으로 정진해 왔다고 아드님은 말한다. 낮 동안 무료하실까 봐 
걱정하면 '나는 심심할 겨를 없다' 하시며 오전과 오후로 시간을 정해 놓고 수도 
정진하셨다고 한다.
  앉아서 영을 날린 것이 신통 묘술이 아니라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점점 
쇠약해지는 건강 상태에서 어떻게 매일 새벽과 낮 동안 쉼 없는 정진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랍고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진다. 중생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수도 
생화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철저한 수행을 고행과 난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큰 원과 뜻을 세운 수도자들도 대부분 수도 공동체 안에서 수도 생활을 
길들인다. 수도자들끼리 규율을 지키며 더불어 생활하는 것 자체가 수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도반이 수도 정진에 게으르지 않도록 선의의 감시자가 돼 
주기도 하고, 분발심을 촉구하는 채찍이 왜 주기도 한다.
  보통 사람의 경우 홀로 수도 생활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육신은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더 편안해지기 원하기 때문에, 그러한 육신의 
청을 완강히 뿌리칠 힘이 없을 때는 나태와 안일의 함정에 빠져 수도자의 
본분을 저버리기 쉽다. 수도란 자기와의 투쟁이고, 훌륭한 수도자라면 자신에게 
철저하고 엄격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30년을 하루같이 수도자의 길을 
걸어오셨던 김명근 할머님의 인품에서 배어 나오는 고결함은 심산의 계곡 
물밑만큼이나 깨끗했다. 특히 사람을 반기실 때면 얼굴에 함박 미소를 지소, 
생기 있는 광채나는 눈빛에 정을 담아 상대방을 바라보시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합장하고 절하실 때면 작은 키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히시어 그 겸손함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더 낮추게 하는 힘을 갖고 있기도 
했다.
  전화하는 일은 할머님의 일상의 일과셨다고 한다. 인연 있었던 여러 
교우님들과 일가 친척, 대소가들에게 소식과 인정을 먼저 건네고 어렵고 힘든 
사람은 다독거리셨다고 한다. 슬하에는 효성이 지극한 한 아드님밖에 두지 못한 
할머님이시지만 그분의 생신 때는 100여 명의 대소가 사람들이 찾아 든다고 
한다.
  요즘 자기 자식과도 깊은 정곡을 통할 수 있는 부모가 적고, 여러 자식을 큰 
사랑과 정성으로 길러 냈어도 늙어 외로워진 어버이를 만족스럽게 섬길 자식이 
드문 세상에, 한 아들을 기르고도 100명의 권속을 품안에 안고 거느리셨다고 
하니, 할머님의 그 같은 비범하신 인격과 큰 덕은 숨은 도인이 갖춘 도력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그간 밖으로 구하고 채우느라 안으로 자신의 인격을 돌보는 일에 너무 
소홀해 너나할것없이 도덕성이 허약한 상태다. 우리는 지금 '자기 자신을 지키고 
다스리나 일'에 크게 실패한 지도자 때문에 나라 안팎이 온통 시끄럽고 민심이 
수습되지 않고 있다. 고결한 수도자로 살다 가신 한 할머님의 이야기가 혼탁한 
우리 사회를 맑게 할 수 있는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었으면 한다.
  (1995. 12. 10)

     자신에게 먼저 공들이는 삶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이 
해는 더불어 사는 이웃으로서 모든 것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힘겨웠던 한 해였다. 우리 온 국민은 올 한 해 동안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평생에 보감이 될 업보경을 읽은 셈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전작 대통령들의 비자금 사건, 그리고 과거 
청산이라는 일련의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우리는 그 모두가 우연이 아닌 패할 
수 없는 필연의 업보임을 깊이 깨달았다. 이 우주의 위력이 살아 숨쉬고 있어 
정의는 반드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음으로 심어 주었다.
  우리는 병자년 새해를 맞으면서 희망찬 새해, 기대가 충족되는 한 해이길 
저마다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소망을 사실적인 결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내용이 곧 내 인생의 새로운 
결과를 초래할 업인이라고 생각할 때 내 인생의 길흉화복을 좌우할 수 있는 내 
자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존재다. 설사 다른 곳으로부터 나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주어지고 있는 듯이 보여도 그것조차 내가 지어 놓은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악업보를 창조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지성으로 공들여 
어떠한 경우에도 선업은 골라 쌓을 수 있고, 해독이 될 악업은 철저하게 삼갈 
수 있는 힘이 있도록 자신에게 공을 들일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악업조차 자신의 성장에 밑거름을 삼을 만한 도량이 있으면 
선악을 다 거울삼을지언정 고통에 깊이 빠지지 아니할 수도 있다. 나에게도 
이미 피치 못할 악업들이 영근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피치 
못할 업보들보다는 내가 새로운 업인을 선택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있다. 
죄업을 피해 갈 만한 힘을 자신이 기르고 보면 나에게 관계된 모든 일들이 
복락으로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내 자신에게서 재앙의 요인을 없애기 위해 나쁜 업을 짓지 말아야 
하고, 소망하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업을 쌓아야겠다. 내 자신의 
마음가짐이 모든 악업의 속성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할  때 그 한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옛 말씀에도 '인심은 유위하고 도심은 유미하기에 유정유일해야 비로소 
중도에 맞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본디 인간에겐 양심적인 세력은 미미하고 
허약하며, 비양심적인 세력은 오히려 강함을 나타낸 발일 것이다. 마치 땅에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잡초는 절로 나서 무성하고, 곡식은 씨 뿌려 가꾸어도 
잘되기가 어려운 이치와 같다 할 것이다.
  그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미미한 도심을 길러 위태로운 인심을 다스릴 수 
있도록 늘 자신에게 공들이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물들은 뿌리를 땅에 박고 살므로 그 씨나 뿌리가 땅속에 심어지면 시절의 
인연을 따라 싹이 트고 자라나며, 동물들은 하늘에 뿌리를 막고 살므로 마음 한 
번 가지고 몸 한 번 생동하고 말 한 번 한 것이라도 그 업인이 허공법계에 
심어져 제각기 선악의 연을 따라 지은 대로 과보가 나타나니 어찌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리오'(원불교 대종경 인과품 3장)
  자신에게 공들인 공덕으로 허공법계에 묻힐 모든 업인이 청정하고 그래서 
청복을 누릴 수 있는 독자 여러분들의 병자년 새해가 열리길 간절히 심축해 
본다.
  (1995. 12. 31)

     '나눔' 연습이 통일 준비

  마더 데레사가 87세로 타개했다. 인도 캘커타에서 오직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한 수도자의 삶을 사람들은 '빈민들의 천사, 
세계의 가난과 슬픔을 온몸으로 감싼 성녀'라고 기리며 애도한다.
  인도의 한 신문은 마더 데레사를 '인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하트라 간디와 
견주었고, 인도 정부는 데레사 수녀의 타개를 애도하기 위해 6일과 장례식 날인 
13일을 공식 추도일로 선포했으며, 종파를 초월해 힌두교, 이슬람교 사람들까지 
애도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극빈자를 돕기 위해 데레사 수녀가 만든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26개국 
600여 곳에 있고 4,000여 명의 수녀들과 수많은 봉사자들이 지금도 그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무소유, 맨발의 마더 데레사의 헌신적 삶이 지금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살아서부터 성녀라 불리던 마더 데레사의 헌신적 삶의 거울에 잠시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자.
  지금 숨쉬고 움직이는 우리도 언젠가는 심장의 박동의 멈추고 죽음을 맞아야 
되는 유한한 존재다. 제한된 인생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떤 값진 삶의 이정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또 지금 그 종간 점검 결과는 
어떤가. 도도한 사랑의 강물을 전세계로 흘려 보내던 마더 데레사는 더 이상 이 
땅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남긴 숭고한 이타적인 삶, 그 헌신적인 
삶을 본받고 배워야겠다.
  사람마다 때로는 자기 자신도 언젠가는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해봐야겠다고 
벼른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아직 그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때가 아니라며 그 
실천을 유보한다. 그리고 또다시 자기 중심적인 삶에 매몰되고 만다. 어쩌면 
그러다가 한평생 남을 배려하고 돕는 일은 해보지 못하고 저승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사랑과 자비는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있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고, 
버려 두면 죽을 것도 살려내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러한 사랑과 자비는 
특별한 능력도 아니고 탁월한 기술도 아니다. 우리의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심이고 연민의 정이다. 사랑과 자비는 우리 모두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 
보물이다.
  그러나 자비의 실천도 연습이 필요하다. 작은 것부터 하나 둘 실천하면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의 관심과 
사랑이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다른 곳에 창조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확인할 때면 숨어서라도 더 열심히 그 일에 매질할 정성이 솟구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푸는 
데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나누고 베푸는 연습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관심이 나라 안 정치에만 쏠리고 있는 종에도 북한 
식량 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을 것이다. 세계 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연명하는 아시아의 극빈층은 10억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극빈층 가운데서도 더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 북한 동포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2년 겹친 홍수에 가뭄마저 들었다고 하니 배고픈 북한 
동포들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북한 동포의 굶주림을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여기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북한이란 '체제'의 제방 안에 담긴 듯 숨겨져 잇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아 사망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우리 한반도에는 지금 큰 
변고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통일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지만 
배고픈 우리 동포들과 함께 살아야만 되는 역사적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믿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전쟁 없이 평화 통일을 달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북한 동포들과는 고통을 분담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통일을 
위해 나누는 연습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1997. 9. 10)

     초인적인 헌신의 힘

  7월 29일로 미아 샛별어린이집이 개원 7주년을 맞는다.
  '엄마들 친정집보다 더 안심하고 맡겨' '달동네 사랑의 둥지' '중산층이 돕는 
달동네 탁아소' '이상형 탁아소' '일하는 엄마들의 희망의 공간' '세계에 소문난 
사랑의 샘터'.
  여러 신문에서 미아 샛별어린이집을 보도할 때 붙였던 고마운 기사 
제목들이다. 나는 본디 유아 교육에 대해서 전문 지식을 가진 바도 없고 탁아소 
운영에 뜻을 갖지도 않았을 때 예기치 않던 인연으로 미아 샛별어린이집의 
원장이 되었다.
  어린이들에게 꿈의 궁전 같은 미아 샛별어린이집은 삼성복지재단이 저소득층 
지역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위해 선진국형 탁아 시설을 마련하여 서울시에 기부 
채납한 것을 원불교 강남교당이 그 운영을 맡게 되었다.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들이 일터로 나가면서 안심하고 사랑하는 자녀를 맡길 만한 탁아 시설 
하나만 운영해도 종교의 사회 참여가 된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미아 
샛별어린이집 운영을 맡았다.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고 어린이들을 보육할 교사를 모집한다 해도 누가 
매일 200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의 점심 식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여 
주방 책임자의 문제로 큰 걱정을 했다. 그때 나의 걱정을 딱하게 여긴 
강남교당의 신심 깊은 오혜성 교도님이 몸과 마음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이 그 일은 해보겠다고 지원했다. 표구 사업을 하던 남편 김덕원 
교도님과 의논하여 자신은 주방을 책임 맡고 남편은 관리의 일을 하기로 하고 
네 자매와 강북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강남교당 어느 법회 날 설교 시간에 '우리가 선행을 하자고 말을 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데, 이제 우리에게는 미아 샛별어린이집이란 보람 
있는 일터가 생겼으니 그곳에서 주방 일을 돕는 자원 봉사를 하여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자'고 했다.
  개원 때부터 서너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강남에서 강북까지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미아 샛별어린이집을 드나들며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간식을 
준비하는 일로 꼬박 1년을 채웠을 때, 나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낸 것처럼 
감탄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 7년 동안 봉사의 정성이 일관되어 자원 봉사자 
연인원이 5,800여 명을 기록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자산이 쌓여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일은 주방 책임자인 오혜성 교도님이 지난 7년 동안 
하루도 점심 식사를 거르는 날이 없이, 언제나 한결같이 마치 처음 시작하는 
일처럼 최선을 다해 어린이들과 직원들의 식사를 차려 냈으니, 그야말로 
초인적인 헌신의 삶 그 사표를 보여 주고 있다. 그만 못한 일을 히도 사람이 
몸살이 나는 수도 있고 불가피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7년을 하루같이 자신이 맡은 일을 
만족스럽게 해낼 수 있었음은 그야말로 고행난행의 결실일 테고, 작은 실수도 
없이 그 일터를 지켜 왔음은 신앙적 삶의 자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음식 솜씨가 뛰어나고 항상 부지런하고 정결하여 그 많은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 방문객마다 감탄한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의 직위에서 대통령을 지내고도 
행복한 대통령이 없다고 개탄한다. 인간은 필요한 만큼의 물질이 있어도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부를 탐내고, 자신에게 고마운 일터가 주어졌는데도 
해야 할 일은 부실하게 하면서 분수 밖의 직위를 넘보고 좇느라 인생을 
허송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지럽고 혼탁하다.
  지난 7년 동안 미아 샛별어린이집에는 미국, 영국, 독일, 인도, 중국, 폴란드, 
이스라엘, 일본 등 세계13개국과 나라 안의 손님까지 191회에 걸쳐 857명의 
내방객이 다녀갔다. 청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이 많은 손님들은 마아 
샛별어린이집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모든 가족들이 꽉 조여진 나사못처럼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방에서 힘들고 
궂은일을 하면서도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는 오혜성 교도님은, 
오늘도 미아 샛별어린이집인 '세계에 소문난 사랑의 샘터'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젊은 달관자와의 만남

  어느 날 광주에서 왔다는 낯선 청년이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다.
  내방으로 들어선 그 젊은이는 나를 보자마자 자기 소개를 했다.
  "전남 광주에서 전화 걸었던..."
  그는 내가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는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수표 한 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그 돈을 히말라야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며칠 전 "여기는 전남 광준데요, 교무님의 책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을 읽은 
독자입니다. 지금도 히말라야 어린이들을 돕고 계십니까?" 라는 매우 사무적인 
음성의 말씨로 전화가 걸려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그렇다고 짧게 대답을 
하자 상대편에서는 잘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었다.
  지금 내 앞에 마주앉아 있는 청년이 그 젊은이임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암울했고 얼굴에는 형언 할 수 없는 고뇌 같은 것이 
서리어 있었다.
  그 젊은이는 시선을 떨군 채 한 곳을 응시하듯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러다가는 훔쳐보듯 나를 쳐다보곤 했다. 그는 나의 책에 나오는 '히말라야 
천사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해발 3,600미터의 높은 곳에 위치한 인도의 라닥,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의 그곳 산촌 어린이들은 공부하기 위해 대여섯 살 때부터 부모의 품을 
떠나 1만 리가 넘는 방갈로르에 가서 상가세나 스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들은 북인도 라닥에서 남인도 방갈로르까지, 가는 데만도 사흘씩이나 
걸리는 먼 곳에 가서 공부를 하다 10여 년 후에나 겨우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게 된다. 그 글은 이러한 히말라야 어린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제는 그곳 어린이들이 배우기 위해 더 이상 히말라야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도록 그들의 땅, 라닥에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가 작년에 건립되었다. 지금은 
히말라야의 깊은 산촌마다에서 선발된 우수한 어린이들이 그 학교의 기숙사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초등 교육을 받고 있다.
  "학교를 세울 때부터 알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히말라야 어린이들의 처지가 마치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 청년은 자기도 깊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 
때부터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꼬박 3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그는 또 소년 시절을 하도 어렵게 지내느라 사춘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성장했다며 지금까지의 지신의 인생을 독백처럼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그때부터 아버지가 하던 
농사를 도맡아 짓느라 모진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후 군대 생활을 하다 
관절염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별 효험을 못 보았다며, 
이제는 자신의 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어 체념했다고 한다.
  오래 서 있을 수도 없고 많이 걸을 수도 없다는 자신의 무릎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그의 표정은 어찌 보면 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나이는 서른 일곱 
살이었고 앞으로도 자기 때문에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한 건강 상태로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족은 20대부터 
악성 고혈압으로 긴 투병 생활만 하느라 아직 결혼도 못한 마흔다섯 살이 된 
형과 일흔이 넘은 병약한 몸으로 자신들의 뒷바라지를 해주기는 노모가 
계시다고 했다.
  대학은 다시지 않았다지만 그 젊은이는 확고한 자기 철학과 남이 굽힐 수 
없는 신념이 있어 보였다. 그는 혼자서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고 불경 
공부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 수만 있다면 
깊은 산속에서 감자 심고 옥수수밭이나 일구면서 홀로 수도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족 부양의 짐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더불어 사는 조화로움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예전에는 어울려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는 사람들을 속 빈 사람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는 
평범한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홀로 사색하며 자기 우월감에 도취되어 살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머리로만 알고 있는 잡다한 지식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모든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그들의 고통을 더는 일에 동참해야겠다는 뜻이 섰다고 했다.
  그는 철없던 세월에는 더 큰 것만 탐내고 단 열매만 찾느라 인생을 방황하고 
허송했다며, 이제는 자신의 여생을 겸허하게 이 세상의 밑거름이 되는 존재로서 
살고 싶다고 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나에게 쉼없이 말을 하던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죽음의 순간이 오늘 오후나 내일쯤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살아 있으면 또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제야 그가 처음에 내 앞에 내밀었던 수표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100만원 짜리 고액권이었다.
  열아홉 평짜리 공무원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그 젊은이는 지기 가족은 
1,000원을 쪼개어 쓰는 검약 정신이 몸에 베어 있다고 했다. 병약한 젊은 
독자의 성금 100만원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참으로 숙연해지면서 마음의 
옷깃이 여미어졌다. 두꺼운 얼음장 위에서 살아가는 히말라야 사람들, 세계의 
온정으로 빈곤과 무지를 녹이는 그들에게 이 100만 원은 헤아릴 수 없는 큰 
돈이다. 그곳 어린 학생의 한 달 식비와 학비는 우리 나라 돈으로 2만 원이면 
된다.
  젊은 달관자의 뜻으로 내놓은 값진 장학금, 그 귀한 돈 100만 원의 가치와 
의미를 자주 가늠해 보는 요즈음이다.

     나의 후원자 우리 어머니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 25거 터졌다. 너나할것없이 어려운 때였지만 
남원 수지 홈실 산골 마을의 기세가 기운 지주의 가정에서 자라던 나는 가끔 
월사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서 학교로부터 집으로 돌려보내져 전주에서 남원까지 
학비를 가지러 가곤 했었다. 교통 편도 어렵던 그 시절, 열서너 살 어린 나이로 
때론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남원까지 가서 다시 30리 산길을 혼자서 걸어 집에 
갔었다.
  방학도 아닌데 딸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어머니는 반기시기보다 먼저 깜짝 
놀라셨다. 월사금 때문에 집에 온 사정을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뒤꼍의 대밭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시곤 했다.
  "대밭이 생금밭인데... 요즈음은 대장수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찾아간 분은 남원읍에서 금융 조합에 다니시던 외당숙이었고, 
그분은 어머니가 급한 사정을 말씀드리면 언제나 기꺼이 도움을 주시곤 했었다.
  그 무렵엔 시골 대학 교육이라도 시키려면 전답이나 소를 팔아야만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기숙사에 있거나 자취 생활을 하던 우리 자매를 위해 
어머니는 무거운 쌀을 머리에 이고 남원을 기차역까지 30리 길을 걸어 
다니셨고, 어린 나도 머리에 쌀을 이고 다녔다.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아버님과 사별하고 그처럼 어렵게 두 딸의 교육 
뒷바라지를 하시는 어머님의 포부는 딸들을 길러 장차 '원불교 교무(성직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님 생각에는 원불교의 교무가 되면 큰살림, 많은 
일일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머님으로부터 투철한 
정신교육을 받은 우리 자매는 딴 맘 없이 원불교의 교무가 되기 위해 정녀의 
외길을 걷게 됐다.
  내가 사직교당이나 강남교당에서 개척 교화를 하며 교당 신축을 하느라 애 쓸 
때면 이렇게 격려해 주셨다.
  "호의호식하며 호강하려고 교무가 되었느냐? 남다른 고생을 해야 그만큼 
보람도 큰 것이다."
  연세가 칠순에 가까워지자 우리 어머님은 남달리 허리가 굽으시고 보행이 
자유롭지 못해지셨다. 젊은 날 우리 자매를 기르시느라 너무 고생하시고, 특히 
두 딸을 전주에 공부시키면서 10년 가까이 무거운 쌀을 머리에 이고 나르느라 
우리 어머님의 몸이 저렇게 망가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우리 자매는 
어머님의 남다른 희생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우리들의 나이가 쉰이 넘었을 무렵 어머님은 갑자기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니가 너희들 환갑을 위해 적금을 들고 있다."
  마치 우리 자매는 등을 떠밀기라도 하듯 정녀의 길로 보내시고, 이제 그 
딸들이 나이가 들어가자 어머님 마음에는 세속의 나이 예순이라는 데 대한 
부담을 느끼셨던 것 같고, 그래서 어머님 스스로 딸들을 위해 준비하신 듯했다.
  평생을 경제적으로 자립해야만 했던 우리 어머님은 가정을 꾸려가려면 
절약밖에 다른 방도가 없으시어 검약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작은 돈도 
당신을 위해서는 절대로 쓰지 못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기본 요금의 
거리일지라도 택시를 안타고 버스만 타신다. 그래도 큰딸인 내가 나라밖에 여행 
갈 일이 생기거나 큰일을 할 때면 목돈을 기꺼이 보내 주신다. 그러한 돈이 
모두 어머님이 한때 하숙생을 돌보시며 저축했던 돈인 것을 우리 자매는 잘 
알고 있다.
  어머님이 '너희들 환갑 적금 1,000만 원...'하시며 나는 단호하게 어머님의 
호의에 맞서곤 한다.
  "어머니, 그렇게 큰돈을 어디에 쓸 일이 있겠어요. 저는 절대로 그 돈 필요 
없어요. 우리에게 그 돈 주실 생각 마시고 어머니 소용되는 데나 아끼지 말고 
쓰세요."
  그러던 나는  작년 3월부터 캄보디아의 지뢰 제거 작업을 위한 모금 활동을 
시작했고, 마치 숨이 넘어가는 응급 환자를 살려 내기라도 하려는 듯 정신없이 
그 일에 몰두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 64개국에는 1억 1,000만 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20년 간의 내전이 계속되어 온 캄보디아에는 
900만 명의 인구보다 더 많은 1,000만 개 정도의 지뢰가 묻혀, 매달 300여 
명이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거나 부상으로 다리가 절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지뢰를 모두 제거하려면 100년에서 300년이 걸린다고 했다.
  만약 외국의 도움이 없다면 캄보디아의 온 국민이 몸으로 전국토의 지뢰를 
폭파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을 때, 캄보디아의 지뢰 제거 문제는 내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여겨졌다. 그 지뢰 공포의 땅에서 한 개의 지뢰라도 제거해야 
되겠다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이 되었고, 나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대로 
지뢰를 캐내는 것은 내 스스로 정한 나의 의무였다.
  한 개의 지뢰를 제작하여 묻는 데는 고작 5달러가 든다지만 그 지뢰 하나를 
제거하는 데는 1,000달러가 든다고 했다. 지뢰 한 개 매설 배용에 비하면 그 
제거 비용이 막대한 것이어서 안타까웠고,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인명 살상 
피해 말고도 지구의 일부를 위험한 공포의 땅으로 만들어 버리고, 또다시 
그것을 평화의 땅으로 회복하는 데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1,000달러만 있으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절단된 다리를 
건강하게 붙여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1,000달러는 오히려 싼 값이라고 
여기면서 나는 지뢰 제거를 위해 혼신의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내가 애쓰면 작은 평화의 마을 하나를 만들 수 있겠지... 적어도 100만 
명만이라도 살려 내야겠는데...' 하면서 애태울 때 우리 어머니는 통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생명을 구하려고 그처럼 애쓰니 너의 환갑을 위해 적금을 들었던 
1,000만 원을 거기에 보태라."
  "감사합니다 어머니..."
  나는 그 1,000만 원을 보태어 10만 달러를 채울 수 있었다.
  1,000만 원, 그 돈은 사람에 따라서는 큰 금액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택시의 
기본 요금도 아끼시는 우리 어머님에게는 참으로 큰돈이다. 아니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뜻이 담긴 돈이다. 우리 어머님은 이렇게 내가 하는 일에 
큰 후원자이시기도 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어머님께 귀국을 알리는 
전화를 걸어 '어머니!' 하면 "워이! 내 새끼 왔는가! 내 새끼가 돌아왔구나, 
건강하냐..."며 어머니는 반가운 목소리로 환성을 터트리신다. 그러고는 안도의 
긴 숨을 내쉬신다.
  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우리 어머님의 사랑의 강보에 싸여 어머님의 소원을 이루어 가는 
딸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계신 곳은 사랑방이었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이 좋아 서성이는 나에게 밥상을 다 차릴 쯤이면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버지께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떨어지면 쪼르르 사랑채로 내려가 아버지가 계시는 
방문 앞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진지 잡수시래요."
  곱돌화로를 끼고 독서삼매에 드셨던 아버지는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그 짧게 
새어 나오는 '응'소리를 듣기 위해 숨죽이고 서 있다가 아버지의 음성을 
확인하면 안채로 뛰어올라 오곤 했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생생한 기억이란 
고작 그러한 것들이다.
  나는 따로 아버지의 정을 기억할 만한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내 나이 
아홉 살 때 아버지는 스물여섯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셨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홀로 되신 증조할머님과 친할머님이 계셨고 특히 
할머님의 법도 매우 엄하고 까다로우셔서 아버지는 늘 조심하기는 것 같았다. 
어린 딸이 사랑스럽고 귀여워도 젊은 아버지가 어른들 앞에서 감히 자식 사랑의 
표현을 해불 수 없었던 것이 그 시절의 가장 풍속도이기도 했다.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가 되어 전주여고를 다닐 무렵 아버지가 쓰시던 
학용품에 내 손길이 닿았다. 결 곱게 깎아 쓰시던 토막 연필들, 둥근 모양의 
지우개, 그 작은 것들에서 아버지의 섬세함과 깔끔한 성품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의 손때 묻은 장서들은 딸이 자라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차곡차곡 쟁여져 있었다. 춘원 이광수의 "흙" "사랑" "무정" 등을 읽을 때는 
책갈피마다에서 아버지의 체취와 숨결이 그대로 전해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깊은 감동을 느낄 때는 '우리 아버지도 나와 똑같은 감동을 받으셨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깊은 시심에서 길어 올린 습작 같은 유고들이 
남아 있었는데, 철이 없던 때라 그 귀한 자료들을 잘 간수하지 못했으니 
안타깝고 죄스럽기만 하다.
  짧은 인생을 살다 가신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많은 사진들을 남기셨고 
사진마다 사연 말을 써놓으시어 그 시절 아버지의 정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사진으로 본 우리 아버지는 거문고를 잘 타시고 정구를 즐기셨으며 신파 연극을 
하셨던 한량이시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은 아버지의 탁월한 친화력과 강한 
흡인력에 대해 입을 모은다.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고들 한다.
  아버지의 묘소 앞에 서 있노라면 문학의 꿈을 못다 이룬 청년의 묘소 앞에 서 
있는 듯한 애절함을 느끼곤 한다. 나는 예술 분야나 문학 방면에 따로 정진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의 핏속에는 아버지의 그러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신비함을 문득문득 느낄 때가 있다.
  원불교에 심취하셨던 우리 아버지는 내가 자라서 원불교 교무가 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오늘날 걷는 이 길이 아버지의 소원도 이루어 드리는 
삶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상타원님 영전에 바칩니다

  상타원님!
  우리들의 육안에 비친 상타원님은 참으로 가냘프시고 왜소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 눈으로는 우러러 뵈어야 하는 거인이셨습니다.
  우리 회상의 정신적 거인 상타원님! 이제 어디로 가시옵니까?
  시끄러운 종로 5가 보화당 한약방 2층, 그 침침한 골방에서 온거하시던 우리 
회상의 숨은 도인 상타원님! 이제 어디로 숨으시옵니까? 
  전무 출신으로 봉직한 40년 동안 지방 교화 4년을 빼고는 36년 간을 줄곧 
중앙 총부를 지키시며 항상 대의를 바루시고 회상 발전의 정신적 초석을 
다지시던 상타원님! 상타원님은 우리 회상의 혈심인이셨습니다. 남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 짜투리 같은 일들을 갈무리하여 온전하게 하는 데 
혼신의 열정을 바치시던 상타원님!
  할 일이 태산 같은 교단의 일들을 어찌하라고 이렇게 훌훌 떠나시옵니까? 
겉으로는 차갑게 보여도 안으로 뜨거운 가슴, 그 품에 뭇 생령을 끌어안고 한 
기운이라도 살려 내려고 알뜰히 챙기시던 상타원님!
  이 늦가을 상타원님의 열반의 비보를 접한 생령들이 스산한 추위 속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타원님의 그 형형한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과 
사심이 있는 사람은 감히 바라뵙기조차 두려운 눈빛, 사불범정의 그 눈빛으로 
이 회상을 지키셨고 또 그 눈빛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지공무사의 거울이셨습니다. 상타원님이 한마음으로 꿰뚫어 부시면 모든 법리가 
밝아지고 바른 질서가 열리었습니다. 상타원님의 냉철하신 판단과 그 강직하신 
모습은 모든 사람의 불의를 예방하는 우리 회상의 방부제였습니다.
  상타원님께서 성업봉찬 잔무위원으로 구타원종사님을 보필하실 때는 그 
법도가 하도 완벽하시어 교단선진을 상봉하는 본을 보여 주셨고, 회상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셨습니다. 초창기에 헌신하셨던 우리 
원로님들을 모신 수도원을 이룩할 때도 상타원님의 이소성대와 근검 절약 
정신이 토대가 되고 천신만고 갖은 노력 끝에 이루어 낸 터전이옵니다.
  상타원님께서는 모든 정녀들이 한평생 사무친 서원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정화단의 바른 위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정화단의 모든 법규룰 제정하고 그 틀을 짜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또 
모든 정녀들을 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수용품을 공급하는 정화제복사를 
만들고, 정녀들의 검소한 수용품을 마련하느라 그 병약한 몸으로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골목을 얼마나 누비셨습니까?
  상타원님은 이 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육십 평생을 살다 간 모든 사람 가운데 
어느 극빈자보다도 최소한의 물질을 소모하고 떠나신 분이라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공사간 아끼고 절약하시는 그 검약 정신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습니다.
  상타원님께서는 자신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긴 구도자이고 
수도자이셨습니다. 상타원님의 올곧으신 한평생은 우리들의 큰 사표이시고 
남기신 자취마다 그대로가 보보일체 대성경이시옵니다.
  종법사님께서는 밤낮으로 견디기 어려운 큰 병을 지니고도 그 많은 일을 
했으니 그것이 큰 기적이며, 만인억래 만신억고의 불과를 나눈 거룩한 생애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또 상타원님은 대종사님 그리고 삼세 제불 제성들이 손꼽을 
제자라 하시며 상타원님의 신성은 구천에 솟고도 오히려 남고, 키우고 키운 
서원은 시방에 두루하고도 넘친다고 하시며 이렇게 인증해 주셨습니다.

  상타원이여, 상이고 상이요 두렷한 일원상이었고,
  밭이 밭이었으나 복혜의 큰 밭이었으며,
  높고 높아 일원대도로 솟았으니 밝고 밝은 빛 삼세와 시방에 두루하리라.

  이제 연화대에 오르신 우리 상타원님! 무량겁을 통해 무량중생 제도하실 
대원정사 되시옵기 저희 모두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수잔'의 슬픈 이야기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베트남, 우리 귀에 유별나게 익숙한 베트남의 옛 
사이공 거리를 거닐다 보면 은밀히 다가와서 한국 사람의 옷자락을 잡는 여인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깊은 호소력을 담고 있는 그 눈빛. 그는 비밀스럽게 
간직해 온 남편 사진과 한국 주소가 적힌 낡은 편지 봉투를 펴보인다.
  "나의 남편은 한국 사람입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나요?"
  빛 바랜 사진과 손때에 절은 주소 쪽지 하나를 들고 무작정 거리에서 남편을 
찾고 있는 베트남 여인. 미안한 마음으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그녀는 곧 실성해 버릴 것만 같은 실망과 좌절의 늪으로 빠져 든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xxx씬데, 고향은 xxx구요. 고모 이름은 xxx.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 아버지에게 연락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며 나달나달해진 주소 쪽지를 디밀며 아버지를 찾는 우리의 
핏줄 라이따이한. 한국말은 서툴러도 자신의 한국 아버지를 찾고 있는 그들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를 빼어 닮았다.
  우리에게는 망각이란 강물을 따라 저 멀리 흘러가 버린 월남전. 그러나 그때 
한치의 앞도 안 보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구촌의 남녀가 나누었던 사랑은 
오늘날 베트남에 '라이따이한'이라는 한, 베트남 혼혈아를 태어나게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두 나라는 국교가 단절되어 그녀들은 그리운 자신의 
남편이 자기들 곁에 올 수 없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길이 트였으니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겉으로 남편이 달려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들. 그 누가 지금 그들 곁으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기다리다 지치고 한국의 남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의 사무친 그리움은 분노로 변할 것이고, 끝내는 한국과 한국 
사람을 저주하게 될까 두렵다. 그녀들은 온갖 핍박과 냉대 속에서 적군의 자식 
'라이따이한'을 끌어안고 키우며 꿋꿋이 절개를 지키고 있다. 행여 집 자리를 
옮기면 찾아온 남편이 가족을 못 만나고 헤맬까 걱정되어 집 자리도 바꾸지 
않고 기다림으로 애태우는 세월을 아직도 그녀들은 살아가고 있다.
  대신영화사가 만든 "라이따이한" 극영화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자 않는 미모의 아가씨 수잔과, 젊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월남 땅을 밟은 한국 청년 창우가 한 아버지의 핏줄인 줄을 모르고 사랑에 
빠졌다가 흘러간 역사의 그물에 걸려 상처 받는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자라 버리고, 덮어놓고 싶어도 더 이상 
덮어놓을 수도 없는 역사 속의 감추어 놓은 우리의 모습이 한, 베트남 혼혈아 
'라이따이한'이란 이름으로 그 실상의 얼굴을 쳐들고 우리의 양심 앞에 책임을 
묻고 있다.
  "라이따이한"이란 극영화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망각하고 있는 역사 속의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고, 우리의 핏줄 라이따이한들이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고맙게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관심과 애정이 그들에게 모아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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