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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나는 다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않을 뿐이다

by Casey,Riley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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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김정일


    목 차
    제1부 일상의 정신병리, 나는 과연 정상일까?
    친구와 커피 마시고 누가 먼저 돈을 냅니까?
    아픈 마음 그 누구도 달랠 길 없다
    술과 모성 콤플렉스
    참는 미덕이 화병을 부른다
    질투
    일상생활의 정신병리
    누구나 정신과 의사
    정상과 비정상
    싸울 줄 알아야 건강하다
    인생은 한 편의 심리극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

    제2부 공상 속의 섹스와 현실 속의 성
    첫남자와 두번째 남자
    첫경험
    혼전의 경험
    성적인 매력
    섹스 공상에 사로잡힌 정신질환
    원초적 본능과 오이디푸스의 회개
    강간, 살인 누구나 가능하다
    알몸에 미치는 색마, 사랑에 미치는 색정광
    약한 것이 악한 것이다.

    제3부 성공하는 결혼과 실패하는 결혼
    궁합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심리
    축복받지 못한 결혼
    신혼의 섹스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사니!
    바람, 바람, 바람
    물 위를 걷는 여자
    홀어머니의 외아들 기피증
    한 정신과 의사의 가출
    육아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
    쎄쎄쎄
    2억 원짜리 이야기
    정신과 의사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영혼의 아내

    제4부 지금 이 순간, 나를 만난다
    진정한 자존심과 쓸데없는 자존심
    영혼을 팝니다!
    나이는 서른, 정신연령은 열둘
    장님들이 사는 세상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영화의 정신의학적 측면
    시나리오와 정신과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와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
    전철에서 만난 어느 광신도
    아빠도 공부하기 싫었다!
    무지개는 반원이었습니다
    과거와 미래에 묶인, 지금 이 순간
    제1부 일상의 정신 병리, 나는 과연 정상일까?
    친구와 커피 마시고 누가 먼저 돈을 냅니까?
  세상에는 참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병원에 있다보면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이 정신병원에 오기까지를
살펴보면 누구나 중장편 소설은 될 만큼 사연이 기구하다.
  가정이 파탄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술독에서만 사는 알코올 중독
환자, 쌍둥이 동생에게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긴 뒤부터 동생의 목소리가
밤새 들려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는 정신분열증 환자,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면서 자기 욕만 하길래 무서워 뛰쳐 나왔더니 길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마저 모두 자기를 향해 욕을 해 견딜 수 없어 강물에 뛰어든 환자
등, 그들의 사연은 어떤 작가의 상상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치밀한 구성과
절박한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때로는 그들보다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 간호사,
보호사들이 더 불행하고 환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성숙한 체하고 인내심이 있는 듯 환자 앞에서 위엄도
갖추지만, 어떤 때는 환자복 대신 흰 가운만 입었다 뿐이지 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마음 고생과 불편함은 환자들이 느끼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때는 환자들보다 더 불행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사회에서 보기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이 모두 천하에
불행한 사람으로 보일는지도 모르지만, 정신병원에는 누구보다도 편안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무수히 재발해서 정신병원에 다시
입원하는 환자들 중에는 사회에서 악착같이 살기보다느 정신병원에서의
편안한 삶이 그리워 스스로 찾아오는 자들도 많으니 말이다.
  이같은 아이러니를 보다 보면 아마도 사람들의 행, 불행은 그 사람의
객관적인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만족과 편안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서나 존재하고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고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불행,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각고의 지혜가 요구된다는 점이 인간들이 안고
있는 비극같이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정신병원에서의 삶과 사회에 적응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과의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가 살아 있는 삶을 사느냐, 죽어
있는 삶을 사느냐 하는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환자들과 상담할 때마다 내가 꼭 물어보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당신은 거절을 잘 합니까?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저녁을 먹고 누가
돈을 냅니까?
  이런 경우 대개의 환자들은 자기는 거절을 잘 못하고, 대체로 자기가
먼저 돈을 낸다고 대답한다.
  거절을 잘 못하고 우유부단함은 자기가 없는 노이로제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사회에 부대끼려 하지
않으며, 대충 노예의 평안이라도 누리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증상에 시달리는 것이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성과는 거절을 잘 하는
습관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난 아직도 거절을 못한다.  아마도
내가 환자들에게 이런 것을 항상 물어보는 이유는 나에게 그런 문제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한 직장인과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직장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길로 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혹시 자기가 비정상이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하여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는 전문적인 치료는 필요없고 정상인지 아닌지만
구별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밑도 끝도 없이 자기의 정신건강을 체크해 달라는 그의 물음에 나는
또다시 예의 그 거절을 잘 하는지, 같이 술 마시러 가면 술값은 누가
내는지 를 물었다.  그는 의아해하며, 자기는 거절을 잘 못하고 술 마시러
가면 자기가 지레 술값을 먼저 내곤 한다고 하며, 그것이 혹시 무슨
문제가 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다시, 그런 일들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물었는데, 그는 자기도 그러는 것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그러는 것이 당시에는 편하다고 대답했다.
  그의 병력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는  적응장애 에 해당하는 상태였다.
 적응장애란 어떤 심리사회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그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삼 개월 이내에 부적응적 반응이 나타날 때 붙여지는
진단인데, 자신이 받는 정신적인 충격에 비해 사회적 직업적 부적응의
정도가 지나칠 때 해당된다.
  이 환자의 경우는 직장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의 직장생활에서의 적응이
더욱 문제였다. 자기의 뜻에 반해 거절을 잘 못하고,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부담스러워하는그의 성격이 결국에는 알 수 없는 적개심을
누적하게 되며, 나중에는 직장 자체를 피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기게 한
것이다.
  거절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자기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느낌, 자기의
판단,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소중히 하고 가꿀 줄 안다는 것이다.  많은
정신질환이 자기에서 소외되면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거절을 할 줄 모르고
남의 눈치만을 살피면서 우유부단하는 자들은 대체로 막연한 적개심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사람이 가장 크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할
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에 적응하며 더불어 산다는 것은 치열한 삶의 길이다.  이
삶의 길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싸울 때는 싸워야 하고, 거절할 때는
거절해야 한다. 막연히 남의 기준에만 맞추려고 하면 당장에는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는 모르지만 머지 않아 스스로가 자기속에
무수히 쌓이는 적개심을 다루기가 힘들어진다.
  사회에서 살려면 적당히 자기를 주장하고 줏대 있게 자신을 내세우고
고집하는 것이, 그래서 거절할 때는 거절하고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될
때는 끝까지 나서지 않는 것이.  그러면서도 자기의 기준에만 집착하지
않으며 타인의 기준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정신병원에서의 만족스럽고 편안한 생활이 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아픈 마음 그 누구도 달랠 길 없다
  아픈 마음은 그 누구도 달랠 수가 없다.  아픈 마음이 스스로 가라앉기
전까지 아픈 마음은 끊임없이 그 사람을 괴롭힌다.  따라서 제일 좋은
것은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아픈 마음이
저절로 아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기란
불가능한 것이고, 그 아픈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는다는 것은 언제일지도
모르는 오랜 세월을 요구한다.
  정신병원은 마음이 아파서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병원의 좁은
공간 속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만을 기다리지만, 그 세월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정신질환자가 급증하는 요즘의 추세는 그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어떤 때 마음이 아플까?
  얼마 전에 마음이 무척 아픈 적이 있었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과
토의를 하는데, 그들이 나와 대화를 하려 하기보다는 무조건 누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내가 왜 마음이 아팠나를 생각해 보았더니 그들의 얘기는 바로
비판적 언급(critical comment)이기 때문이었다.
  정신질환자들에게 가장 나쁘다는 것이 바로 비판적 언급과
적개심(hostility), 과잉간섭(overinvolvement)이다.  기껏 정신병원에서
오랜 세월 고생하면서 치료를 받아 겨우 사회로 나와도 사회나 가정이
그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며, 옳고 그름만을 다지고 적대적으로 대하면 그는
곧 다시 상처를 받아 정신병원으로 돌아오고 만다.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비판적 언급은 어쩌면 상대방을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만큼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고, 무한으로 확장할 수 있는 성질이
있기에 무조건 밀어붙이면 상대를 어떤 식으로든지 이길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비판을 당하는 상대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만다.
  전공의 시절 때의 일이다.
  사이코드라마를 하는데, 주연자로 여자 한자가 나와 자기으
문제를두드러지게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대역을 맡았던 전공의가 그
환자의 문제를 노골적으로 다그치기 시작했다.
   너는 그때 왜 그랬느냐, 너는 너의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시인해라.
네가 가진 아버지와의 문제, 성적인 문제, 과대망상 등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그 태도를 바꿔라….
  전공의가 몰아치자 그 여자 환자는 진땀을 흘리며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그럼에도 전공의는 다그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자 이를
구경하던 환자들 중의 한 사람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소리쳤다.
   당장 집어쳐라.  이게 지금 사이코드라마 하는 거냐.  환자 고문하는
거지!
  그러자 그 여자 환자도 울기 직전의 표정이 되어  나 사이코드라마 안
할래!  하고 소리쳤다.
  결국 그날의 사이코드라마는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한자의 병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이때 무대 위에 뛰어올라가 소리쳤던
환자는 평소에는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태가 무척 나쁜 환자였다.
  정신의학에는 정신치료라는 것이 있다. 이는 면담을 통해 치료하는
것인데, 이때 환자에게 선악을 따지고 비판하고 설득을 하는 것은 19세기
정도의 수준으로, 외과로 얘기하면 붕대감기 정도의 수준이다.  비판이나
설득으로 상대를 이기거나 구속할 수는 있지만, 상대와 마음으로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비판하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피하게 된다.  괜히 그와 어울려서 상처를 받거나 마음의 감옥 속에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고도의 정신치료는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이다.  이 대화는 상대아
이해를 주고받는 대화인데, 상대의 약점고 허점을 까발기고 짓밟기보다는,
이해하고 감싸주며, 그가 스스로 해결하거나 도움을 청할 때까지 친구가
되어 기다리는 대화이다.  그러나 이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수양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이나마 자기나 자기 주위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자유롭게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지지 않으려고 비판하거나
설득하려는 사람들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도 상책이다.  그들은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면서도 자기가 비판당하는 것은 조금도 견디지 못하므로
어떤 식으로든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말기 때문이다.
    술과 모성 콤플렉스
  K라는 환자가 있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난폭하여 정신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의 홀어머니는 그에게 너무도
지극정성이었지만, 그는 항상 어머니에게 난폭하게 행동했다.  어머니는
그 뒷바라지에 견디다 못해 급기야는 일본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제
그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날, 그는 행려병자로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노태우 대통령 운운 하는 심각한 정신병적
상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많이 안정되어 이제는 병실
한쪽 구석에 풀이 죽은 채 앉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는 어머니가 바다 건너로 떠났기
때문에 한가닥 희망이라도 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집도
보호자도 아무도 없고, 특히 우리의 열악한 사회복지 환경에서 사회적으로
재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겠지만, 그동안 그를 향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봉사는 그에게 세상 모르는 편향성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알코올 중독 환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틔어서인지는 몰라도 알코올에 의존해서 일상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을 정신병원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알코올 중독 환자를 치료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정신병원이란
고작 그들을 술과 격리하기 위한 담벽에 불과할 뿐, 그들이 사회에 나가
술과 다시 접하면 쉽게 술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자꾸 재발하는
알코올 중독자들이 입원하게 되면 대개가 여건이 허락하는 한 장기 입원을
시키는 추세이다.
  알코올 환자들이 술을 마시는 양태는 한마디로  죽어라, 죽어라 이다.
보호자들은 환자를 붙들고 의지를 가지라고 애타게 설득하지만, 술
앞에서는 항상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나는 안타까워하는 보호자들에게
가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중독자들에게 있어서 술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발가벗고 곁에 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걸 가만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알코올 중독자의 술에 대한 애착은 이성에 대한
애착을 능가한다.
  알코올 중독 현상은 무의식이 의식을 사로잡아 자아의식이 완전히 이에
의존하는 경우로 해석된다.  자아가 무의식이 지배를 강박적으로 받는
상태를 바꾸어 말하면 무의식 속의 모성에 지배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융은 이를 모성성애의 속박, 즉
부정적인 모성(뜨거운 파괴적 애정, 마취성, 질식할듯한 독점욕,
지배욕등) 콤플렉스라고 말한다.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술이 부정적인 모성의 역할을 하게 되어 어머니가
자식을 삼켜버리듯이 무한히 술에 삼켜져버리는 것이다.
  대위로 예편한 후, 술독에 빠진 한 환자가 있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죽어라 죽어라 소주를 퍼붓는데, 벌써 정신병원에 입원한 횟수도 10여
차례가 넘었다. 그는 일단 퇴원하면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술을 마셔
도저히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즈음 정신병원에 실려 오는데, 일단 술에서
깨어나면 칠순의 홀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는 입원할 때마다 의사들로부터 어머니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말을
하도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터라 어떤 면담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가
병원에서 하는 유일한 일은 어떻게 하면 의사를 졸라 어머니에게 연락해서
강제 퇴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는 임상에서 쉬게 찾을 수 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어던
식으로든지 어머니나 어머니의 대치물인 부인에게 끈끈히 얽혀 있다.
  알코올 중독자의 부인에 대한 어떤 연구는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 준다.
즉, 알코올 중독자의 부인은 남편이 술을 끊으면 오히려 자기가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처녀 때는 알코올 중독 부친과 같은 남편을 택하며,
알코올 중독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하는 경우에도 알코올 중독 남편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의 부인은
자기가 부정적인 어머니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삼켜버릴 만한
의존적이고 유약한 상대를 찾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코올 중독이 아닌데도 일상에서  죽어라 죽어라  술을 퍼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다음날 자기가 취한 상태에서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 잘 기억을 못 하는데, 이대가 사실은 위험한 때이다.
이때 몸을 추스려서 충분한 안정과 절주를 하지 않고 계속 술을 퍼마시면
그는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다.  알코올 중독의 첫 징후가 술을
마시고 행동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bluck out)이기 때문이다.
  술을 여자보다도 좋아하는 남자들은 가끔씩 자기와 어머니와의 관계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평생 엄마(술) 품속에서
헤어나지못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엄마 품을 벗어나서 독립된 성인으로
살 것인지를 빨리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생 엄마 품속에서 살려고 결정한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서의
엄마 품은 늙고 힘도 없고 쭈글쭈글한 품으로, 어렸을 때같이 넓고
포근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는 오히려 엄마가
넓고 건강한 자식 품에 기대고 싶어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은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더 많지만, 일단 알코올
중독에 빠지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고치기 힘들다.  이는 어쩌면 여자의
경우엔 부정적인 어머니에다가 부정적인 아버지으 영향이 겹쳐져 그
삼키는 무의식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술을
남자보다 더 좋아하는 여자들은 가끔씩 자기가 젊고 싱싱한 남자의
품보다는 늙고 쭈글쭈글한 부모의 품에 더 기대려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되돌아보아 유익한 쪽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은 먹어야지, 먹히지는 말아야 한다 는
일상의 격언을 항상 귀담아 새길 필요가 있다.
    참는 미덕이 화병을 부른다
   화 나  열 이란 말은 서양의학보다는 한의학에서 즐겨 스는 말이다.
그러나 환자를 볼 때 나는  화 란 말을 종종 쓰곤 한다.   하 를 집어넣어
설명을 해야 이해를 하거나 수긍하는 환자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외국의 정신질환 진단 분류에는  화병 이란 말이 없다.  대신  전환장애
니  신체화장애 ,  기분장애 ,  불안장애 등의 말이 있는데, 아무래도
우리 실정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는 신경정신과
학회지에도  화병 이라는 말이 가끔씩 나온다.  그러나 아직도 화병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아니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화병은 워낙
광범위한 질환들에 걸쳐 있으니 말이다.
  화병이라고 하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환자들의 증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가슴이 답답하고 속에서 무엇인가
치밀어오르는 것 같고, 밖에 나가기도 싫고, 식욕도 없고, 하루종일 누워
있게 되고, 자신이 미칠 것만 같고, 매사 의욕이 없고 죽고 싶은 생각만
든다.
   열이 나고 심장이 뛰고, 안절부절 못하겠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럽고 정신이 없고, 기억력이없고, 잠을 못 자고, 식사도 못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고, 두근거리고 불안 초조하고,무엇엔가
쫓기는 것 같고, 사람들 만나기도 싫으며 의욕도 없고, 재미있는 일도
없다.
   신경을 쓰면 한숨이 자주 나오고, 숨이 가쁘고 불안 초조하고,
신경질이 자주 나고, 밥맛은 좋은데 속이 답답하고 소화가 되지 않고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고 얼굴에 열이난다.
   손발에 힘이 빠지고, 무엇이 푹푹 올라오고 가슴이 조이고, 생리전후에
불안 초조하고, 목에서 바람이 폭폭 나오는 것 같고, 지하철을 타면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들은 대개 내과에서 종합진찰을 받고 특별한 병이 없다는판정을
받고서 정신가를 찾아오는데, 그 특징은 한결같이 신체적인 고통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은 신체 일부가 고장났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병적인 감정이 병적인 신체기능으로 표현된 경우이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 리포스키는 이러한 증상들에는 우울증의 신체 증상,
불안이나 기타 신경증들에 수반되는 신체 증상, 건강염려증 때에 호소하는
신체 증상, 소위 신체언어로 자신의 감정적 장애를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의사소통하려는 경우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증상들은 대개 자율신경계의 부조화를 통해 초래된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장이나 폐,
위장, 방광 등 각종 장기의 혈관, 점액선, 근육 등에 퍼져 있다.  따라서
자율신경이 자극받아 균형이 깨질 경우 그 영향이 각종 장기의 증상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율신경곌르자극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이고 화다.
  마음 속의 화가 심장이나 폐, 근육 혈관에 퍼져 있는 자율신경계를
자극하여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숨이 가쁘고, 어지럽고 혈압이 오르는 등의
신체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그 원인은 마음에 있고 치료도 그
마음을 향해야 가능한 것이다.
  마음 속의 화가 신체증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화가 나면 누구나 숨이 가쁘고 열이 나며, 가슴이 답답하고,
심하면 몸이 부르르 떨리며, 어지럽고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화병 이란 이같이 화가 났을 때의 현상이 활르 내지 않았을
때도 지속되는 병이라고 생각된다.  화가 쌓이고 쌓여 겉으로는 화를 내지
않는데도 속에서는 화가 들끓는 상태줎.
  임상에서 소위 화병환자들은 대개가 참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사회에서
살아왔던 나이든 여자분들에게서 많다.  젊은 시절 참고 참고 어렵게
살다가 늘그막에 그 쌓인 화를 주체하지 못해 여러 가지 화병증상에
시달리는 것이다.  과거력을 캐보면 대개가 한때 어려운 시절에 무척 마음
고생이 심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병을 초래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과거의 마으 고생보다도 현재에도 과거에 매달려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아직도 마음 아픈 과거를 부여잡고 되돌려 고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40대 초반의 아주머니가 심한 우울증과 신체 증상을 호소하ㅕ 찾아왔다.
 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연신 눈물을 흘렸는데, 이유인즉슨 자기가
혼전에 다른 남자를 사귀었다는 사실 때문에 남편이 자기를 멀리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 사귀던 남자를 스스로 정리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는데, 남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혼 후
아기를 키우며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당시는 잘 몰랐지만, 요즘 여유가 좀
생기자 남편이 자꾸 자기를 멀리하는 것 같고 TV 드라마를 보다가도 그때
일을 생각하며 자기를 빈정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 일은 어찌할 수도 없는데 자기는 이제 어찌 하면 좋으냐고,
살고 싶지 않다고 우울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남편은 전과 조금도 다르없이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과거를 부둥켜안으며 과거의 딜레마
속으로 다시 들어감에 있었다.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약 주고
자기 일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것뿐이었다.  과거를 잊는 거야 세월이
약인데, 아직도 못 잊고 있으니, 잠 푹 잘 자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그만큼 시간이 빨리 가 과거를 잘 잊을 테니 말이다.
  그밖에 화가 쌓이는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할 때, 의존 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완벽성에 사로잡혀 과거까지
철저히 완벽하고자 몸부림칠 때, 열등의식에 사로잡힐 때, 가까운 사람을
상실했을 때, 지나치게 높은 목푤르 세워놓고 그에 이르지 못했을 때,
사회 경제적으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등이다.
  또  화 에 따른 신체 증상에 대한 연구를 간접적으로 보면(민성길,
1981), 상실·이별이 있을 때는 불면증, 피곤감, 식욕부진을 초래하고,
스트레스·좌절이 있을 때는 소화기 장애, 두통 및 어지럼증을,
증오·공격은 신체통증 및 심계항진, 성적 갈등은 성기능 장애, 이상감각
및 심계항진 등을 주로 초래한다고 한다.
  모든 정신질환의 원인은 적개심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화병
이란 모든 노이로제나 정신병에 해당하는 말일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마음 속의 화, 적개심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정신건강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화를 조절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는
환자도 되고 창조적인 성취자도 되기 때문이다.
  화란 그사람을 부정적으로 불태우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불태우기도
한다.  마음속에 쌓인 화가 자기를 향하게 되면 우울증, 알코올 중독,
밖으로 부정적으로 향하면 히스테리, 편집증 등이 되지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창조적인 작업으로 연결하면 현명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몸이 아무 이유 없이 여기저기 아플 때는 일단은 자기 마음
속의 화를 우선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병원에 무작정 찾아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거나 의사의 무심한 한마디에 좌지우지 되기보다는
혹시 화라는 불길이 자기를 태워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
화의 불길은 어떻게 잡아야 할는지를 현명하게 한번 궁리해봐야 할
것이다.
    질투
  어렸을 때 인상적으로 본 만화 중에  땡이 와  그림자 가 나오는 만화가
있었다.  주인공 땡이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놀거나 이웃집에 사는 여자친구와만 놀곤 했는데 그런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받는다.  땡이는 항상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땡이의 발밑 그림자가 저절로
움직이다 떨어져나와 같이 놀아준다.  그 후 그림자는 땡이가 팔짝 뛰면
언제라도 튀어나와 함께 놀기도 하고 신나고 신비로운 일들도 벌인다.
  그러던 중 땡이는 여자문제로 그림자를 질투하여 자기의 하인처럼
학대하며 미워한다.  땡이와 똑같이 생긴 그림자가 여자친구와 더 잘 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슬퍼하며 자기가 너무 오래 논 것 같다며
후회하며 땡이의 발밑으로 다시 들어가버린다.  땡이는 뒤늦게 후회하고
애타게 그림자를 찾지만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미소만 지을 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땡이는 혼자 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 만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나는 이 소재를 사이코드라마에
적용해보았다.  즉, 무대 위에서 주인공의 마음속에 있는 또다른 자아로
그 그림자를 내세운 것이다.  주인공은 보통 땐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자기가 극복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는 그림자가
뒤에서 나타난다(그림자가 보조자아의 역할을 한다).  이제 그는 그림자와
함께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림자는 주인공이 하지 못하는
어떤 일도 다 해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이 끝날 때쯤 되면 그는 다시 혼자로 돌아가야 한다.
그림자와 함께 있던 순간은 꿈 같은 순간이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그는
이제 자기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그림자에대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림자란 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으로 나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은 <피터팬>의 작가나, 그림자를 맡아서 영혼을
빼앗아가는 동화 속의 악마 등일 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도 그림자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림자는 내 육체의 발밑을 따라 다닐
뿐만 아니라, 내 정신의 발밑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육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그림자는 현실적으로 아무 영향도 주지 않지만, 정신이
빛을 가로막아 생긴 그림자는 심리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준다.
  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우리 의식이 빛을 향하고 있을 때 그
뒤에 드리워지는 어둠, 즉, 내가 강조하고 주장하는 측면이면의, 내가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심적인 측면이다.  예를 들어 개성적인 사람의
무의식에는 집단적인 그림자가, 집단적인 사람의 무의식에는 개성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개성적인 사람이란 자기의 개성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집단적인 사람이란 집단의 이익을 우선으로 보는
사람으로서, 자기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더 소중히 한다.  그들은 둘 다
상대방의 성향을 자기 무의식 속에 갖고 있지만 상대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이 그림자 투사로
인해서 생긴다고 한다.  자기가 항상 갖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는 그림자가
상대방에게 있을 땐 괜히 질투하며 화를 낸다는 것이다.
  은행에 다니는 K씨는 어느 날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아왔다.
상관의 노골적인 박해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K씨는 상관의
인간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상관은 직장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배들을 괴롭힌다고 했다.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정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사나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노골적이 비리들을 힘들어했고, 자기도
한번 그러려고 하다가 크게 손해를 본 상태였다.  그는 더이상 견디기가
힘드니 좀 쉬든지 해야겠다고 하며 이 모든 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상관
때문이기라도 한 듯 한 참 상관욕을 해댔다.  그는 문자 그대로 암흑 속에
갇힌 상태였다.
  그러나 K씨의 치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물 치료를 하면서 충분한
수면과 의욕을 회복하자 그는 곧 본래의 직장생활에 복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한동안의 괴로움은 애꿎게 상관을 미워한 데 있었다.  그
상관은 K씨와는 반대 성향의 인물로서, 현실적으로는 악착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합리적으로 직장생활을 해나가면
되는데, 자기도 한번 남들같이 한탕해보려던 것이 실패하면서 유독 그
상관을 못마땅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관은 그 사람 마음속의 그림자로 그가 무시하고 도외시한 심적
측면인 현실에서의 악착같음 을 갖고 있었다.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갖고 있자, 그는 마치 만화 속의 땡이가 그림자를 질투하듯이
자기의 그림자를 미워한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그 상관같은 악착같음이
있었다면 그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치료는 우선 그를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었다.
한동안 약을 먹으면서 푹 자고 나자 그는 자기가 그동안 왜 그렇게 강한
어둠 속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예민하게 미움의 상대를
향하면서 잠까지 설치던 그의 신경이 둔감해지자 그 이면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 또한 약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치료는 그가 그 상관 같은 악착같음을 자기의
것으로 했을 대야 비로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는 자기와 그림자가
하나가 된 때로서 그는 적개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다른 일들도 재밌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이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에 못 견디게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 그 사람에 대한 미운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르며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바로 그림자에
사로잡혔을 때이다.  자기는 분명 그를 미워하는 이유를 줄줄이 댈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스스로를 답답하게 가두는
어둠뿐이다.  이런 때는 한 번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혹시 내가 미워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의 그림자는 아닌지,
그래서 나와 재미있게 놀고 멋진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그림자를 괜히
질투하여 어둠 속으로 쫓아버려 스스로 외로워지는 것은 아닌지… 나 또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 같은 성향이 필요한 것인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
  프로이드는 1901년에 간행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라는 저서에서 보통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실수, 잊어먹기, 실언 등을 모두 무의식적인
의도를 가진 정신병리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찾아가기가 죽기보다도 싫은데, 할 수 없이
가야 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버스를 잘못 타거나 거꾸로 가는 버스를
탄다는 것이고, 또 애인이 토라져서 전화를 걸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리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한다는 것이 잘못해서 그만 애인의 집에 전화를 걸고
만다는 등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 모두를 정신병리 현상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하면,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서구의 정신질환에 대한 기준이나 명칭들을 보면 복잡다단하기가
그지없다.  사회적응을 잘 못한다고 적응장애, 술 많이 마신다고
알코올리즘, 담배 지나치게 피운다고 니코티니즘, 커피 즐겨 마신다고
카페이니즘, 생리 전에 불안정하다고 생리전 증후군, 의심이 많다고
편집증 등등, 우리 생활 전반의 생활 양식을 정신질환 진단으로 뒤덮는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여러 정신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다
그럴싸한 진단명을 한두 개씩은 안고 돌아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옛날 동양 사회에는  정신병 이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기인이니 괴자니 하는 것은 있었지만, 이것은 정신병이니 반드시
치료받아야 한다는 식의 개념은 없었다고 한다.  기껏해야 신병 정도인데,
이것도 정신병이라는 용어에 비하면 훨씬 고상해서 병같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무협지를 무척 좋아했다.  무협지에는 기인이사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기이한 행동이 내게는 참으로 흥미롭고
감탄스러웠다.  어떤 기인은 한 여인과의 사소한 약속 때문에 일생을 깊은
산속에서 혼자 칩거해 살며, 또 어던 기인은 절친한 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일생을 끝없는 복수에 골몰한다. 이들은, 현대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자폐적 정신분열증이나
편집광이지만, 이들을 단순히 정신병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순수한 열정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런데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을
가만히 보면 이와 비슷한 기인이사들이 상당히 많다.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자기 몸을 취하고 떠나간 남자를 잊지 못해
떨어지는 잎새에도 님을 느끼고, 잘못 걸려온 전화에도 님을 만나다가
급기야는 그 남자와 텔레파시로 얘기를 주고받았다는 여자 환자, 학업이고
사회생활이고 다 집어치우고 식음을 전폐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설계
도면만 들여다보다 꼬치꼬치 말라서 입원하는 환자, 일생 동안 아내를
자기 것으로만 하겠다며 온갖 억지를 다 부리다 강제로 끌려오는 의처증
환자 등, 시대만 달랐다 뿐이지 과거 무협시대의 기인이사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의 독특한 개성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만일 지금같이 외형만을
중시하는 서구화된 사회에 있지 않고 각 개인의 내면을 존중하는 과거
동양사회에서 살았다면 그런 대로 한세상 풍류있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스쳐간다.
  그러나 아무리 동양의 전통적인 시각에서 봐준다고 해도 꼭 치료 받아야
할 정신병리 현상은 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정신병으로 돌진하는
경우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건강염려증이다.  이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
못해 스스로 정신병을 뒤집어쓰는 경우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징후를 과장되게 해석하여 자신이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다고 골몰하는 병이다.  이 병은 정신분열증보다도 더 치료하기가
어렵다는 무서운 병이다.
  또 한 예로 쉽게 피해망상에 빠지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얼마전에 한
직장인을 치료한 적이 있다.  그는 직장에서 우연히 실수하고 난 다음부터
직장동료들이 모두 자기를 비웃고 놀린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점점 심해져
이제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이 비웃음으로 느껴지고,
심지어 남들이 서로 얘기하는 것 하나 하나까지도 다 자기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직장인의 경우는 자신의 실수로 인한 분노를
스스로 삭이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면서 피해망상이 시작된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과거에는 며느리나 시어머니
모두 화병 정도의 증상만을 호소했는데 요즘은 피해망상까지 보이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는 화를 속으로 삭히다 못해 화병
증상을 초래했지만, 요즘은 그 화를 밖으로 마구 토해내면서 상대가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는 식으로 망상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는 무수한 정신병리 현상이 스쳐간다.  그러나 그 수많은
병리 현상에 사로잡히느냐, 그냥 없는 듯이 스쳐보내느냐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기 문제와 남의 문제, 자기가 고민해야 할
것과 고민하지 않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하여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에는 쓸데없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병약한 사람은
나와 남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상하다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 현상에서 자기 정신 건강을 굳건히
지키는 길은 이같이  나와 남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 에 있을 것이다.
정신병의 특징은 나와 남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자아 경계의 상실 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정신과 의사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가 두렵다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과 의사는 나의
한두 마디 말에 내 심리를 파악할 것 같아 의사 앞에서는말도 함부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대학시절 때 내 친구의 애인은 만일 그 친구가
정신과를 하면 안 사귀겠다는 얘기까지 노골적으로 했다.  그 이유는
정신과 의사는 심지어 자기 부인의 심리까지 분석한다는 것이다.  미숙한
정신과 의사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을 비워놓는 것이다.  의사의 마음이
섣부른 짐작이나 예측, 분석으로 혼탁해 있지 않아야 상대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이미 온갖 충고와 말의 홍수 속에 시달려온 환자에게 또 다시
어설픈 분석으로 시달리게 하는 것은 이미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고문이다.  그런 고문을 즐겨 하는 정신과 의사는 없다.  그러면 환자들이
안 찾아오기 때문이다.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여린 가슴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녀가 찾고자 하는 정신과 의사는 이런 의사였다.  자기에게 의지를
가지라거나 주변 상황과 싸워 지금의 우울증을 극복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상태에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
다녔다.  결국 그녀는 그런 의사를 만나 우울증을 치료하여 잘 살고 있다.
 그런 환자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떠니, 자아 기능이 어떠니,
현실과 직면해야 하느니 하고 떠드는 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자기의 시행착오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말의 홍수, 심리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어디가나
심리학은 판을 치고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움은 훼손될 대로 훼손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들에게 또 다른 말의 홍수를 끼얹는다는 것은
그를 두 번 익사시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신과 의사라면 그런 횡포를
범하지 않는다.
  나는 때대로 정신과 의사들 밖에서 정신과 의사를 많이 만나곤 한다.
연극인이나 영화인, 작가들 중에서 남의 말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며
자기 말을 효과적으로 자제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이 바로 정신과
의사구나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내가 남의 거울이 될 수 있으면 그가 바로 정신과 의사다.  정신과
의사는 남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정신과 의사를 마나길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갖는 게
좋다.  상처를 까발기는 설익은 분석을 늘어놓거나 환자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정신과 의사는 이미 정신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자기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 환자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면 된다.
    정상과 비정상
  고3 학생을 둔 학부형이 애가 타서 찾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애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입시를 목전에 두고도 그렇게 잠만 자고
공부를 게을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비정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기 아들을 한 번 진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만나봤는데 그는 그 나이 또래의 성장단계를 거치고 있었을 뿐이지
별다른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잡담만 실컷 하다가
헤어졌는데, 얼마 후 다시 그 엄마로부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이 이제는 위험한 길로 빠지는 것 같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학원비를 주니 학원은 안 가고 옷을 사입고, 같이 놀러 온 친구 책가방을
뒤져보니 이상한 책들과 봐서는 안 될 비디오 등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갖고 아들에게 따졌더니 아들은 오히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천장까지 화를 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학입시가 얼마
안 남았는데 큰일났다고 하늘이 무너질 것같이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 엄마의 전화를 끝도 없이 길게 받으면서 나느 급기야 자증이 났다.
  언젠가 내 후배가, 발기가 안 된다고 호소하며 찾아온 환자를 보고 난
후 혼자 투덜거리던 말이 스쳐갔다.   아니, 지가 안 서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나는 속으로  아니, 당신 아들이 공부 안 하는 걸 나보고어쩌란 말이오?
 하는 말이 굴뚝같이 솟아나왔지만 차마 불난 집에 부채질 할 수는 없어
그냥 좀더 기다려보자고 점잖게 들어주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엄마는 다시 예의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기가 막힌 얘기를 했다.
아들의 가정교사로 젊은 여선생을 구했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그
여선생이 오기로 했는데 그러자 아들이 어제부터 신이 나서 열심히 공부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애들은 정말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 엄마가 여선생을 가정교사로 구했다는 것은 내가 볼 때는 너무나도
기발한 착상이었다.  그 십대의 학생이 지니는 왕성한 성에너지를
생산적으로 돌리는 데 여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엄마가 정신과 의사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최근 들어 정신과에 마술적인 기댈르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고 찾아오는 사람, 애가 두 살인데 말을 잘
못한다고 찾아오는 엄마,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딴 여자와
놀아나고 있으니 강제로라도 입원시켜 남편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는 부인,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배우자는 어디 요양원이나 대형
정신병원에 적당한 이유를 붙여서 평생 입원시키기를 소망하는 사람 등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엄청난 것에까지 정신과의 수요는 점차 다양하게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정신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은, 반대로 예전
같으면 혼자서 감당할 수 있었고, 감당해야만 했던 정신적인 문제까지
정신과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앞의
학생처럼 정신과 의사를 찾아도 괜히 시간낭비나 하고 돈만 써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는 거구나 하고 깨닫고 떠나게 된다.
  요즘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혼자 판단을 못 내리고 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배우자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지금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정답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한다.  특히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의문은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이는 환자들에게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리학 책에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정상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 고3 학생의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기에 아들을 위한 최선의 길을 스스로 찾았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길을 갈 수가 있기에 정상적인 삶을
산다.
  한 심한 우울증 주부는 자기를 먼저 사랑해보라는 얘기만 들으면
알레르기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바보같이 삶을 살아온 자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우울증은 어떤 식으로도
좋아지지 않았는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녀가 회복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우울증이란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궁금한 사람은 우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정말 자기를 사랑한다면
정상이라고 자신을 가져도 좋다. 그때는 어느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도
자기 이상의 해답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싸울 줄 알아야 건강하다
  국민학교 때 어떤 동화책에서 본 물리학 얘기다.
  한 과학자가 현미경을 통해 먼지를 들여다보니 그 먼지 안에는 분자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 분자 속에는 개구쟁이, 장난꾸러기, 싸움꾼 등이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아주 얌전하고 착한 분자도 하나
있었다.  그 분자는 수줍게 자기 위치에 자리하면서 조용히 혼자 즐기고
있었고, 주위 분자들은 그 얌전하고 혼자 가만히 놀면서 남들이 건드려도
가만히 있는 것을 잠시 두고 보더니 나중에는 심하게 건드리다가 급기야는
기어코 잡아먹고 마는 것이었다.
  착한 분자가 잡아먹힌 것이, 어린 나에게는 참으로 의문스러웠는데,
분명히 그 분자는 착하고 선량했으며, 남을 해치지도 간섭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왜 그 분자가 잡아먹혀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대끼며 고통을 겪어보니
비로소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연의 진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엄청난 깨달음을 준다. 분자구조를 일종의 사회로 본다면 이
분자운동에 비추어볼 때 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일까?
분명히 혼자 얌전히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가만
내버려두지도 않을뿐더러 결국에는 잡아먹고 말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에는 혼자 얌전히 자기 속에만 파묻히는 몽상가들이 많이
입원하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자기 속에서만 사는데,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 사이엔가 사회에서 밀려나 한적한 정신병원에 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에서 나쁜 짓을 일삼는 깡패, 강도, 악당 등은 절대로
정신병원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도소에는 갈지언정
정신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하기도 하다.  그들은 싸울 줄을 알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일찌감치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자기속에만
있다가 무의식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리는 사람들이다.  갱년기 우울증
환자들은 주어진 사회의 틀에 묵묵히 순종만 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의
틀이 감옥으로 변하자 빠져나갈 생각도 못하고 스스로 주저앉아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많은 노이로제 환자들은 사회와 인간들에 맞서기보다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눈치만 살피다가 스스로 불안, 강박증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들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단 하나
싸움인데, 그것이 그다지도 어렵다.  싸우지 않고 대충 양보하고 피하며
살면 조용히 살 수 있으리라 생각될지는 모르나 그건 대단한 착각이다.
남들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자유는 어쩌면  싸움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운동경기장에서 파이팅 을 외치면서 마음속 가득 신선한 자유로움을
느끼듯,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자기를 가두고 구속하려 하는 틀과 과감히
싸워나갈 때, 그래서 그 시도중에 겪어야 할 불확실한 미래, 위험, 고통,
괴로움 등을 과감하게 짊어졌을 때 비로소 정신의 자유와 건강은 자기
것이 될 것이다.
    인생은 한 편의 심리극
   심리극이란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포착해 그것을
바로 무대에 연결시키는 연극입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대본도, 준비된
연기도 없습니다.  그냥 무작정 여러분과 저와의 만남에서, 지금 이 순간
부딪치는 삶의 현장에서 흘러가는 마음을 따라 형상화하는 것이
심리극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무대는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진부하고 답답한 것이 될지, 아니면
신선하고 창조적인 것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살아 있으므로 미래를 향해 꿈틀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전혀 계획도 준비도 안 된 이 상황에서 우리
한 번 미래를 향해 도전해봅시다.  그 도전은 이 무대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으로, 인류 태고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왔던 이 무대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시험해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미래가 답답한 것이 될지 보람 있는 것이 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미래를 편하게 펼쳐 보이는
데 그냥 위치해 있는 자일 뿐입니다.  또 같이 심리극을 도와 줄 여러
보조자들도 다 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그들은 여러분들의
부모, 괴물, 상상 속의 천사, 신도 될 수는 있지만 절대로 여러분들
마음속에 자연의 길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여기 나의 미래,
나의 인생을 시험해보고 싶은 분은 어느 누구라도 좋으니 이 무대 위로
올라오십시오.
  심리극을 시작하기 전에 관객들에게 하곤 하는 말이다.
  정시을 치료하는 정신의학 속에는 무언가 인간의 정신을 자유로게 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정신의학을 공부한 지 이미 오래건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심리극에 접하면서부터 심리극의 기본원리에 매료되어버렸다.
  심리극이란 한 마디로 불확실성 속에 자기를 내던지는 것이다.  아무런
대본이나 연기 연습도 없이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미래를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간행동을 분석해왔던 정신분석학이나 여러가지
심리학 이론들은 대개 행동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 하고, 그 과거의
깨달음을 통해 정신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래서 심지어
갓난시절, 유아시절까지 그 행동의 원인을 환원했으나, 이는 어찌 보면
인간 정신의 다양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나간 과거의 암흑 속에 가두어
놓는 것으로, 항상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인간들에게 좀더 밝의 자유의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했던 듯싶다.  어쩌면 인간 정신의 자유는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보다는 지금 자기를 가두고 있는 틀에서 과감히 탈출하려고
시도할 때, 그래서 그 시도중에 겪어야 할 위험과 고통과 괴로움 등을
과감하게 짊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유비무환, 미리 준비된 인생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해왔다.  교육환경은 미리 준비된 사람을 미친 놈, 동키호테 같은
괴짜 등으로 터부시하고 도외시해왔다.  그러다 보니 불확실한 미로를
탐색할 수 있는 감각기능은 마비될 정도로 굳어버리고, 남는 것이라고는
레디메이드(ready made) 인생을 그냥 순탄히 밟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다양성,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광활함은 단순히 기계처럼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정신의 무한함을 억압하고 단조로운 삶만을 계속할 때 그는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는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뒤늦게 그 단조로움이 지겨워 자신이 노예처럼 살면서 오랫동안
축적해온 물질, 재산 등을 한순간에 써버리면서 쾌락, 스릴 등을
만끽하려고 추구하나 그때는 아미 늦어, 돌아오는 환희는 대개가 공허하고
일시적일 뿐이다.  물론 불확실성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현실에서
파멸의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성이 높은 것과 비례해
그만큼 더 커다란 기회와 반대급부도 있다.
  혼기에 다다른 한 촉망받는 대학원생이 부모님을 속이고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비극의 운명을 짊어졌다.  그녀의 사랑은 우리 사회의 가족
구조, 결혼관 등으로 볼 때는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이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이 짊어진 비극에 대한 대가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어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시 읽었다.  전에 읽을 때와는
달리 그 말 마디마디가 모두 저리게 내 가슴을 파고들어 한참 울었다.
지금 나는 많은 글을 쓰면서 이 고통을 삭이고 있다.  그러나 펑퍼짐하게
인생을 남의 가치관에 맡기거나, 남들이 보아 편안해 보이는 삶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지금 비록 남들이 비난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택한
삶을 고통스럽게 짊어진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나는 최근 일년 동안
그이를 사랑해왔다.  앞으로 얼마 동안 더 그를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일 년은 단조롭게 살았던 과거의 십수 년보다 더 소중하고 길게
느껴진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미래의 행, 불행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그 미래에 사는 그 인간 마음속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보람이나 그윽한
만족뿐일 것이다.  단조롭게 굳어진 병원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다가 어떤
무심코 가장 불행해 보이는 정신박약이나 만성 정신병, 노인성 치매
환자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한동안 신비로움에 젖어들 때가 있다.  미래를
예측하지도 준비하지도 않는 그들의 흐릿한 눈망울이 너무도 집착에
시달리는 내 소아의 벽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불확실성 속엔느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이 있다.  자신의 거대한 신비로운 잠재성을 항상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심리극은 축소된 인생의 무대에서 이 불확실성을 좇는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와 같지만, 우리 인간의 정신이나 자연의 흐름 속에는
반드시 이 안개를 걷어내줄 통실성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 미로를
과감히 내딛는다.
  이때 심리극에서 유일하게 그 지침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자발성이다.   자발성 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절한 반응 이라고
한다.  미래와 맞닥뜨릴 때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해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순간에 떠오르는 마음의 느낌을 올바르게 포착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연결짓는 것이 바로 자발성이다.
  이는 아마도 노자의 도의 개념과 통할 것이다.  도가 사상에서는
골짜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골짜기가 항상 비어 있지만, 그것은 비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무한한 채워짐이 가능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과거의
모든 집착과 연연함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다 비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실상이 보이고, 그 실상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심에서 도를 구한다하여 일종의 무심지도극이라고나 할까?
  심리극을 하면서 이 원리에 젖다 보니 상당히 마음이 자유롭고
편해졌다.  이제는 과거를 되씹을 필요도, 미래를 궁리할 이유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부딪쳐오는 인연을 소중히 하면서 그 순간에 성실하게
집중하면 자연히 미래는 그 해결책과 보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은 불확실성 속에서 장랠르 연기해야만 하는 한편의 심리극과
같은 것은 아닐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정신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회피 라 할
것이고, 가장 이로운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그는 대학입시를 1년 정도
남기고 심한 두통과 자주 쓰러지는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신경과, 신경외과, 내과 등 온갖 곳을 다녀봐도 병의 원인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학생을 진찰한 정신과 의사는 여러 명이었는데, 어느 정신과
의사는 환자보다는 부모가 치료받아야겠다고 얘기했고, 도 다른 정신과
의사는 참다못해 그 학생을 이중인격자라고 공격했다.
  나 역시 우연히 그를 만나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와 얘기를 하다 보니
그의 병은 치료될 수가 없는 병이었다.  그의 병은 온갖  회피 로부터
발생한 히스테리였기 때문이다.  그의 병을 좋아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게 치료적인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과보호적인 어머니와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나
여자의 섬세함과 복잡함은 지니고 있었으나, 자기가 헤쳐나가야 할 현실에
맞부딪치는 것은 어린애같이 피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입시라는 힘든
현실을 앞두고 골치가 아파 쓰러졌는데, 깨어나서 보니 주위에서는 온갖
정성어린 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를 안 해도 됐고 그 지긋지긋한
피아노 레슨을 안 받아도 무방했으며 오히려 전과는 정반대의 온갖
자유스러운 즐거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가 입시병인 줄 알고
환자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병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악화되었고, 이제는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중병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제 새로 발견한 방식에 맛을 들여 주위 현실을 자기 중심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힘든 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피하고,
지금의 편안한 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학교는
단 하루도 가기가 싫고, 피아노 레슨도 안 받고, 대학도 포기하고, 군대도
정신과 진단서로 빠질 궁리를 하고, 한국도 싫어 미국으로 갈 생각에
골똘하고, 친구들에게는 허황된 얘기를 늘어놓으며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한다.  그에게 힘든 짐을 짊어지우려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그를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런 상황에서
신체적인 증상 은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이제 그를 설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이미 왕히스테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무슨 증상을 호소하든지 그의
병에 관심을 안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다.  주위에서 그에게 관심을 안 보이면 안 보일수록 그는 점점 더
자기의 증사을 과장하고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 주위의 관심을 끌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 안에서 쓰러지든가, 계단에서
아랫사람 쪽으로 넘어지는 식이다.
  무관심이라는 치료 방법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죽거나 다치더라도 나와는 무관하다 식으로 철저히 그의
병에 대한 의존성을 끊어야 한다.  그래서 히스테리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나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이런 방버을 제대로 실행하기란 무척 어렵다.  히스테리
환자들에게 아무리 심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초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도 말이다.
  한 히스테리 부인의 남편이 외국으로 출장을 가려 하자 부인의 증상이
갑자기 나빠졌다.  남편은 부인을 극진히 간호하고 치료하려 했으나
증상은 좋아질 줄 몰랐다.  결국 남편은 외국 출장을 스스로 포기하고
부인 곁에만 붙어 있게 되었다.  부인의 병은 이내 호전되었다.
  히스테리 부인을 가진 남편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인에게 거절을 못 하고 관용적이라는 것이다.   나만 참으면 되지!
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방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히스테리를
키운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히스테리 부인들은 남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신체 증상을 교묘히 이용한다.
  이런 경우 대개는 위 학생의 경우같이 그럴 만한 타당성(대학입시의
중압감에 못 이겨 골치가 아파 쓰러진다.)이 있는 것으로 시작하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자기에게
문제나 잘못이 있는 줄 알고 환자에게 끌려다니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적으로 학습되어 굳어지면 병의 치료는 상당히 힘들어진다.
히스테리 남편에게 정신과 의사가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당신이 부인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것은 부인의 병을 키우는
것이다.  부인의 병이 낫기를 원한다면, 부인이 현실과 직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부인이 감정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제대로 받아들여 실행에 옮기는 남편은 드물다.
그들 또한 히스테리 부인과 심리적인 보완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인의 히스테리에 매력을 느낀다든지 등으로….
  감정적인 성숙은 고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미숙한 유아적 감정의 틀을
깨고 성인이 되려면 성인식이라는 고통스런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성인식은 치르지 않고 성인으로서의 대접만을 받으려 하는 데 이들
환자들의 딜레마가 있다.
  현실을 피해 병으로 달아나는 환자들은 대개 내일 일을 오늘 지나치게
생각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온갖 것들을 궁리하며 혼자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일을 피할 방법에만
골똘하면서 히스테리를 발달시키고, 미리 무서워하거나 불안해하면서
공포장애나 불안장애를, 오늘 아예 완전하게 해치워버리겠다고 집착하면서
강박증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처방으로 나는 때때로
손바닥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 라는 말을 써서 자주 보라고 한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뜬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우리의 머리로는
아무리 파악하고 예측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지금 걱정하고
궁리한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과거의 어둠으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어두의 속성들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에서의 유비무환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 는 것이다.
    제2부 공상 속의 섹스와 현실 속의 성
    첫남자와 두 번째 남자
  한여자가 두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사회에서 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은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사랑한다든지, 아니면 죄책감이나 부담감을 안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 사회도 조금씩 대담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물론 결혼한 다음에도 애인이 있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는 서구와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얼마 전에 TV 드라마에서 본 내용이었다.  한 여대생이 한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자기 언니와 결혼하니 괴로워하다가 새로이 남자를
사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자신을 몹시 자학했는데, 심지어 자기
핏속에 어머니의 화냥기가 흐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남자에게 전에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다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 남자는 의외로 그녀를 결벽증 환자라고
놀린다.  그 정도 나이 먹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여자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사회도 많이 개방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TV 드라마이고, 현실은 이보다 좀더
노골적일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작품을 써서 부인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결혼한 부인이 옛날 첫사랑의 남자를 찾아가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곧 섹스를 하고 회포를 푼 다음 다시 만나기로
기약한다.  그러나 여자는 다음에 만나기로 한 날 못 나간다고 전화를
한다.  마지막 장면은 남자가 여자로부터 이별의 편지를 받는 장면이다.
작가는 자기가 썼지만, 몇 번을 읽어봐도 재미있어서 부인에게 신이 나서
보여주었다.  부인이 읽어보니 역시 흥미로워, 같은 아파트 주부들에게 그
작품의 주제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
  당신이 지금, 헤어진 첫사랑의 연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대부분의 주부들은 쉽게 그 여주인공같이 섹스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작가는 그 얘기에 고무되어 이 작품은 자기가 제작하겠다고
흥분했으나 아직까지 여거니 마련되지 못해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 작가의 작춤에 대한 착상은 단순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첫사랑의 연인을 간직하고 산다.  그러나 결혼은 다른
사람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혼을 하고 나면 섹스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옛날 첫사랑을 할 때는 그렇게
두렵고 힘들게만 생각되었던 섹스가 나중에는 쉽게 이루어지게 된다….
  작가는 넋두리같이 덧붙였다.
  섹스란 악수와 같은 것이다.  무서운 악수이긴 하지만….
  사랑은 하나이고 영원하고 변함이 없다는 것은 마치 무언의 진리처럼
우리의 마음을 짓눌러왔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그 아파트 주부들이 첫사랑의 남자를 만나면
쉽게 몸을 열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은 어쩌면 자기의 사랑과 삶, 이상과
현실을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을 표현한 말일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현실에서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양면성 속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정신병원에는 사랑을 못 잊어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첫사랑에
집착하고 과거의 행복된 순간만 공상하다가 현재와 미래를 잃고
어둠속에서 지내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은 혹시 정신질환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가질 때도
있다.
  상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은행에 취직해서도 학교 다닐 때처럼 은행과 집만을
왔다갔다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남자를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자기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법대생이라고 소개하며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했고, 그들은 그날 함께 여관에 들어가게 된다.  여관에서 그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였고, 그녀는 그 얘기를 굳게 믿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사정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어디선가
반드시 자기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믿으며 그를 마냥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려 그녀가 전화를 받자 상대방은 아무 얘기도 안
하고 그냥 끊었는데, 그녀는 그 전화가 반드시 그의 전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그녀는 집으로 걸려오는 여러 가지 이상한 전화들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전화는 때로는 그냥 끈힉도 했고, 때로는  거기가
꽃집이 아니냐 ,  아무개 씨 댁이 아니냐 고도 했다.  그녀는 길을
가다가도 그가 따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이웃집 2층에서도 그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녀가 돌아보면 그는 근처 골목길로 싹 숨고,
찾아가면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그놈은 도둑놈이고 사기꾼이며, 당신은 속아서 몸만
빼앗긴 것이라고 아무리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녀는 장기간 입원 치료로 망상은
없어졌으나 퇴원하면 이내 재발하곤하여 입원을 수차례 더 반복하다가
지금은 정신병원 외래로만 다니고 있다.
  이에 비해 사랑을 쉽게 옮겨 다니는 여성들은 얄밉기는 해도 현실에
대한 적응은 비교적 잘 하낟.
  한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어떤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다.  친구들
앞에서 그 남자가 바로 자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남자이고,
그는 자기에게 사랑의 진실을 가르쳐주었다고 감격해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식장에서는 그녀는 다른 남자의 팔장을 끼고 있었다.
  친구들을 그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전에도 그런
남자가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를 욕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너무도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들은 어디 두고보자,
조건에 팔려가서 잘사나 보자 하고 벼르지만, 실제로 조건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이 불행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해 결혼했기에, 그 결혼동기가 확고하므로 당사자들은 잘 인내한다.
  작가가 어설프게 추리하는 3류 드라마와는 다른 게 현실이다.  오히려
첫눈에 반해서 결혼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 다 팽개쳐버리고
결혼했다 는 부부가 불행해지는 경우가 더욱 많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대개, 자기의 무의식적인 소망 때문에 강박적으로 결혼에 집착하는
신경증적인 성향이 많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서
받았던 장애를 고쳐보려고 결혼상대를 선택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라면서 줄곧 아버지에게 괄세받고 자라온 여자가 남자가
보여준 대수롭지 않은 작은 친절에 매혹되어 다른 조건을 고려 않고
그대로 결혼으로 골인한 경우가 있다.  이는 상대의 존재를 보고 결혼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는 어느 순간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반항하게
되며, 결국은 파탄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결혼에 있어서 첫번째 남자를 버리고 두번째 남자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노이로제적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어떤 여자가 한 남자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여러가지로 갖추어진
남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 여자는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그 남자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자기를 못났다고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그 남자를 보란 듯이 잔인하게 차버렸다.
 친구들에게 나는 그 남자보다 더 잘났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할
양으로… 그러나 그것은 결국 열등감의 과잉보상으로, 그녀는 나중에
두고두고 그 남자를 차버린 것을 후회했다.
  30대 초반의 예쁜 용모를 지닌 여자 환자가 반복되는 히스테리성 정신병
발작으로 10여 년간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녀와 처음 면담을 시작할
때는 아름다운 사랑의 대사와 사랑하는 연인을 못 잊어 오랜 세월
고뇌하고 있음에 저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좀더 자세히 면담을
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급기야는 그녀와 옷깃이
스쳐간 사람이면 모두 다 사랑의 대상이었음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 주위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녀
또한 할 수 없이 그들의 정성 을 받아들여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녀는 그 사랑의 공상에 인생을 허비하느라고 급기야는 모든 생활의
터전을 잃고, 마지막에는 기도원까지 가게 되고 말았다.  이 환자가 바로
전형적인 색정형 인격으로, 히스테리와 애정망상이 겹친 경우이다.
  결국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사랑해서 행복한 삶을 이루기까지에는 인격의
성숙과 운명의 허락이 요구된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연인들은 사랑의 맹세를 가지고 상대를 다그쳐서는 절대 안 된다.
  나만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평생 책임져라 하고
조르는 것은 애들이 젖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과 같다.  인간 조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맹세에는주피터 신도 웃는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신들이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들은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못한다.  그들은 곧 운명이라는
장난을 쳐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든지, 아니면 <러브 스토리>의
제니퍼처럼 저승으로 데려가버리곤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헤어지는 것은 신들 앞에서 서로 사랑한다고
까불었기 때문이다.  신 앞에서 신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변함없는 사랑의
행복을 인간이 누린다고 뽐냈기 때문이다.
  신은 이미 죄 지은 자에게는 철저하게 냉정하다.  그 까닭에 사랑하는
연인들이 지은 죄를 절대 용서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하게
사랑했다는 죄의 대가로 일생 쓰디쓴 기억과 추억이라는 무거운 쇠창살을
뒤집어쓰고 산다.
  첫남자와 두번째 남자!  사랑과 현실!  어느 누구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지만, 당사자는 사랑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항상
겸허해야 할 것이다.  운명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욕심부리지 않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첫번째 남자하고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해서
평생 노이로제나 정신병이라는 어둠 속에서 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신의
질투의 덫이 무서운 줄을 안다면….
    첫경험
  아아! 인간이 아담의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행과 싸워왔다는 말은 그만두기로 하자.
  낙원의 장소는 아직도 세상에 남아
  에덴의 동산은 사랑의 첫 키스 속에 소생하는 것이어늘….
  사랑은 산비둘기를 타고 날아가는
  먹는 나이는 더운 피를 식히고 아름다움 또한 사라지지만
  가장 그리운 추억은 오히려 깊이 남는다.
  사랑의 첫 키스의 가장 즐겁던 추억만은….
  - 바이런
  사랑의 첫 키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놓고
달아나고….
  눈이 올 것만 같은 찌푸려진 어두운 날씨다.  J는 집으로 들어가는
기나긴 골목길을 걸으면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미안해요!
  그 사람을 강제로 택시에 태워 보내면서 혼자 되뇌인 말이다.
  그 사람은 오늘 저녁 많이 취했다.  전과는 달리 대담하게 나의 손을
붙잡았고, 단 둘이 있고 싶다고까지 얘기했다.  내 태도가 그를 자극한
것이리라.  나 또한 전부터 그에게 호감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에게 작별을 고하자, 그는 대담하게도 길에서 나를 안으려 하였다.
나는 그를 강제로 뿌리쳤고, 취한 그를 서둘러 택시에 태워 보냈다.  아,
그러나 그를 향한 이 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조금도 뿌리칠 수가 없었으니까….
  J의 착잡한 눈앞으로는 어두운 보도만이 짙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인가 눈발이 간간히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J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발자국 소리는 J를
뒤따르기라도 하는 양 J의 발자국과 소리를 같이 했다.  J는 뛰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부지런히 뛰어서 집 골목길을 돌아서 문앞으로 가 초인종만 누르면 뒤에
오던 발자국 소리는 투덜거리며 돌아가곤 했다.
  J는 뛰었다.  뒤의 발자국 소리도 갑자기 빨라졌다.  J는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무작정 뛰어 골목을 꺾어 들어가 재빨리 초인종을 눌렀다.
숨을 쉬고 무심히 돌아보는 순간, 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  그이다.
   한 번만….
  애타는 그의 눈빛이 J의 눈빛을 빨아들였고, 어느덧 그의 입술이 J의
입술을 스치었다.  순간 멈칫하자, 또 다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딪치며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인터폰을 통해
들리는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
   누구요?
  멈칫하는 그.
   저예요, 아빠!  가세요.
  다음날은 어김없이 눈이 펑펑 쏟아졌다.  J는 아직도 멍한 머리를
가누기 힘들어 고개 숙여 걷다가 급기야는 눈 덮인 길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진 J의 주위로 사람들이 킥킥대며
지나갔지만, 정작 J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사랑의 첫 키스!
이 첫 키스는 J의 운명을 바꾸어놓고 말았다.
  J는 대학 시절에 여러 번 남자를 사귄 경험이 있었다.  서클을 통해
만난 남자도 있었고, 미팅을 통해 사귄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한 남자를
세 번만 만나면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줄만 알았던 J는 남자와 계속
만나는 것을 피해왔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막연히 자기 배우자가 될 남성에 대해 공상만을
품고 세월을 보내왔다.  그녀의 회전하는 공상은 결국 혼기에 이르러
사랑의 첫 키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수많의
사랑의 공상은 사랑의 첫 키스 속에 정리가 되었고, 그녀는 그에 대한
그리움에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루지 못한 소망은 그 이루지 못함 때문에 여러 가지 공상을 야기한다.
 우리 일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멀리 있는 부분이 아마도
섹스일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미혼 여성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 심리의 발달에서 섹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섹스에 대한 언급이나 행동을 금기시하고 속된 것으로만
치부해버린다.  잘못 소문났다가는 패가망신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섹스에 대한 경험을 현실에서 갖기까지에는 그 성에 대한 충족은 대개
공상에서 이루어진다.  그 공상은 난잡한 성적 공상에서부터 고상한
사랑의 철학까지 다양하게 점철되지만, 그 화려한 스펙트럼도 사랑의 첫
키스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첫경험!  이것은 우리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에 원초경(primal scene)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원초경이란 부모의 성교 장면에 대한 어린이들의 공상적이거나 또는
실제적인 첫번째의 목격을 말하는 것으로, 이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또는
착각적인 상기는 신경증 발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인간 심리 깊숙이 뿌리 박힌 무의식적인 성적 체험 말고도,
실제적인 첫번째 성적 체험 때문에 인생이 굴절, 고착, 방향지워지는 예는
허다하다.
  정신병원에 10여 년 이상 입원한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극히 불안정한
정설르 보여주는 정신분열증 환자였는데, 그녀의 발병 계기는 바로
첫날밤이었다.
  부모와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만을 받고 건강하게 잘 자란 환자가
시집가서 첫날밤에 갑자기 신방을 뛰쳐나오더니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별별 치료를 다
받았지만, 결국 그녀의 병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만성 정신병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 환자의 경우, 성에 대한 철저한 무지가 첫날밤에
정신병을 발병하게 한 계기로 작용한 듯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하셔서 크게 충격을 받고 한동안
심리적으로 방황했던 한 미모의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의 방황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공허감을 심어주게 되었고, 그녀는 그 공허감을 만나도
자기의 공허감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무의식적 의도는 자기의 공허감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빨리 만나
결혼으로 정착하는 것이었으나, 그녀의 의도는 또 다른 공허감만 더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쉽게 남성을 불러들였고, 그녀는
공허감 때문에 또한 쉽게 남성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으나, 그녀의 깊은
공허감을 채워줄 수 있는 남성은 드물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첫경험을
허탈하게 날려 보내게 되었다.
  결국 그 과정에서 그녀는 인생에 대한 배반감만을 안게 되었고, 그 후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훗날 그녀는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그녀가 선택한 배우자는 공허하게 방황하는
그녀의 마음을 외형적으로나마 가장 안전하게 붙잡아줄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이 확고하게 잡힌 남성이었다.
  첫경험에 대한 기대·공상·환상·호기심 등이 현실에서 긍정적으로
소화되면 인생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가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되지만, 그것이 부정적으로 소하되면 인생에 대해 부정과 불신을 갖게
되며, 결국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철저히 현실적으로
굳어지고 만다. 마치 결혼을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여성들같이….
  그러나 첫경험이 너무 순탄하게 이루어져 온실 속의 화초같이 곧바로
원만한 결혼생활로 진행되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같이
혼탁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별별일도 다
있는데, 고지식하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만을 고집하다 보면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대 극단적으로 반응하기가 쉽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형의 집>에 나오는 로라일 것이다. 로라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현실적으로 안정된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오해가 얽히는 편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여기서 로라는 남편의 이중적인 태도에 커다란 환멸을
느끼고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게 된다.  그녀는 자기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는 아버지의 양육, 신의 문제까지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며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그녀의 행동은 소위 자기를 찾는 여성해방운동적인 측면에서는 긍정적이
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너무 고지식하고 극단적이다.
  그 당시 그녀가 취한 행동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해답을 가진 사람은
바로 사랑의 쓴맛을 아는 친구 린데 부인이다.
  크로그스타트 : 그렇지만 당신이 나를 이리로 불러온 것은 그 편지를
회수하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었소?
  린데부인 : 네, 처음엔 그랬어요.  그렇지만 그때부터 24시간 이상이
흘러갔어요.  그리고 여기 이 집에서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보아왔어요.
  그 불쾌한 비밀 말예요.  그런 것은 마땅히 털어놓아야 해요.  두분
사이에 깨끗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단 말이에요. 언제까지 그런 껍질을
쓰고 그럴싸한 구실을 주워대고 해서는 도저히 집안을 꾸려나갈 수
없으니까요.
  객관적으로 볼 때 로라의 행동의 한계는 아마도 그 정도까지가 적당하고
건강한 해답이었을 것이다.  만일 로라가 린데 부인같이 과거에 사랑의
시련을 겪어본 경험이 있었다면, 그녀는 그 상황에서 좀더 융통성 있고
지혜롭게 대처했을 것이다.
  어쩌면 첫경험은 여성에게는 현실을 깨닫고, 인간을 이해하는 소중한
계기로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에는 첫경험에 담겨 있는
소중한 가치 가능성들을 너무나 쉽게 포기해버리는 경향이 많다.  그것은
대중가요 가사만 봐도 그렇다.  대개의 대중가요 가사는 사랑에서의
극적이 순간, 특히 이별을 많이 다루는데, 과거의 가요 가사들에는 떠나간
님을 못 잊어 모부림치는 내용이 주였으나 요즘 가사들은 갈 사람은 빨리
가고 나는 빨리 잊고 새 사랑을 하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얼마 전에 한 십대 비행 소녀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굘르 중퇴한 여학생이었는데, 집을 나와 본드 등 약물 남용에서부터
카페 종업원, 룸살롱 호스테스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녀와 면담을
하다 보면 그녀의 다양한 언어구사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훗날
간호사를 통해 들려오는 말은 의사가 너무 순진해 말도 함부로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혼율이 급증한다고 한다.  이혼 사유의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성격 차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상대에게 자기 성격을 고집한다는
것은 너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물정 모르고 성장하는 남녀가 늘어나고, 현실의 고통을 융통성 있게
해결하기보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쉽게 문제를 회피하려 하기 때문에
이혼이 증가하는지도 모른다.
  첫경험 안에는 사랑의 환희와 인생의 가치, 영혼의 풍부함이 있다.  이
경험을 소홀히 하고 쉽게 지나쳐버리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며, 쾌락문화가 판을 치고 이혼이 급증하는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첫경험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을 오히려 정신병원에서 많이
만나게 된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젊은 여자들을 보면 대개가 순수하고
고지식하다.  물론 그 중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에 빠져 현실과
담을 쌓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마저도 현실의 좌절로 인해
자폐적으로 철퇴한 환자들이 많다.  사회가 탁하고 어지럽다 보니,
순수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은 같이 어울려 살기가 힘들고 자꾸
정신병원으로 밀려난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이용당하기 때문이다.
  애정망상에 심하게 젖어 있는 여자 환자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확신이 있다.  그 남자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남자의 사랑은 영원해서, 그는 항상 자기 주위에서 자기를 지켜 보며
알게 모르게 신호를 보내온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지, 그가
자기를 떠났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그 남자가 급히 골목으로 숨는 것이
보이고, 모른 척 앞으로 걸어가면 그가 뒤따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들 환자들은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정신은 혼미할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고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추억을 간직하고 아픔을
되삭이며, 과거의 한순간을 영원토록 소중히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대개
그들의 가슴 아픈 순간은 첫경험과 연결된다.
  사회가 믿음이 떨어지고, 혼탁해지면 질수록 사람들은 운명적인
첫경험을 멀리 하는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 가슴 아픈 추억이나 공상에
사로 잡혀 정신병원에 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첫경험을
감당하는 데는 굉장한 자아의 힘의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환희로운 첫경험을 소망한다.  그 첫경험 속에는 현실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환희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천녀유혼>이란 영화가 극장가에서 화제를 뿌린 적이
있었다.  그 영화는 특히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귀신 역의 왕조현은 당시 남학생들에게서 굉장한 인기를 차지했다.
 당시 영화 속의 왕조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이상적인 꿈 속의
여인과 데이트를 하는 듯한 야릇한 흥분을 안겨주었는데, 그때 그녀의
이미지는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몇 년이 흘러 똑같은 배우 왕조현이 거의 벗다시피 한 <반금련>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왕조현이 옷을 벗고 나온다 해도 관객들은
그 영화에 별 호흥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반금련이라는 역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자극적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해도 순수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섹스 문화의 왕국이라고 하는 일본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사진이나
책들을 보면 포르노적인 것도 한결같이 순수해 보이는 소녀 이미지의
여자들이 연출한다.  성적인 흥분을 가능한 최고도로 추구하는 그들이
찾은 것도 결국 순결한 이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그들 또한
첫경험이 내포한 환희로운 순간들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경험 속에는 순결과 순수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첫경험을 못
잊어하고, 일생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바람 피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한다.  대개의 바람
피는 사람들 얘기를 가만히들어 보면, 그들은 영원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보헤미안이다.  그들은 상대에게서 쉬게 자기의 첫사랑을 발견하고,
첫경험의 환희를 기대하며 깊이 빠져들지만, 이내 그 열기는 날아가고,
그들은 또 다시 첫사랑, 첫경험을 찾아 방황한다.
  J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자기가 순결을 바치고 사랑했던 남자가
자기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J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그
사람은 옆에 없어도 그는 자기 속에 항상 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잊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 사람은 J에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가져갔으니까….
  사랑의 첫 키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운명의 지침을 바꾸어놓고
달아나고….
  음울하게 걷는 J의 발길에 다시 눈발이 채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J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발자국 소리는 J를
뒤따르기라도 하는 양 J의 발자국과 보조를 같이 했다.
  J는 뛰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전에도 뛰어가는 나를 쫓아와 붙들고 무작정 내 입술에
키스를 했으니까…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무작정 뛰어 집 문앞의
초인종을 눌렀다.  크게 숨을 몰아쉬고 뒤돌아보는 순간, 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 그이다.
  J의 눈앞에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다림이, 그녀의 오랜
기다림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혼전의 경험
  네 살짜리 딸아이가  아빠, 뽀뽀  하며 조그만 입술을 쪽 갖다댄다. 
아빠가 자기와 뽀뽀하는 것을 좋아하는 걸 알고 딸아이는 가끔씩 기분
좋을 때면 미리 알아서 서비스를 해준다.  부드러운 입술이 갑작스레
다가왔다가 사라지자, 마치 미녀와 키스라도 하고 난 듯 감미로운 촉감이
입술에 따스하게 고인다.
  딸아이를 키우다보니 은근히 걱정이 많이 된다.  혹시 나쁜 남자를 만나
고통이나 받지 않을까, 예쁜 얼굴로 인해 뭇 남성들의 본능의 표적이나
되지 않을까, 자칫 순진한 마음이 잘못 상처를 입어 일생을 두고두고
고통과 번민 속에 보내지나 않을까….  그러나 모든 것은 딸아이의
운명이고 그러한 운명을 내려주신 신의 의도는 항상 따로 있을 테니
아빠인 내가 아무리 주의해도 한계가 있는 일이다.  딸아이가 점점
아름다운 숙녀로 커서 성인이 되고 사랑을 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 뿌듯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지금은 엉덩이를 까발리고 똥 닦아달라고 돌아다니고
아무한테나 뽀뽀하고 있지만, 이제 지각이 들면 첫키스와 첫순결은 너무도
소중한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가 어렸을 때 이미 숱한 사람들과 뽀뽀를 하고 뭇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돌아다녔다는 것을….
   한밤에 풀밭에 누워 크고 반짝이는 별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그 별에
마음을 쏟고 있으면 어느덧 내 몸은 두둥실 떠서 밤하늘로 빨려 들어가죠.
 내 영혼은 육체와는 점점 멀어져 육신은 전혀 못 느끼게 되죠. 
  테스가 클레얼르 만나 식탁에서 시를 읊듯 한 말이다.
  내게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신선한 장면이었다.  테스는
바람둥이에게 농락당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순결한 영혼을 지녔기에
클레어와의 만남에서 순수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도 완벽한 사랑을 꿈꾸었기 때문에 과거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다.  그들이 다시 만나는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그들은 성숙한 성인이 되어 과거를 벗어던진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삶에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고 그들은 열렬히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재회에 이르기까지 클레어는 브라질에서의
모진 고통을, 테스는 홀로 남아 비참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 성숙한 사랑을 하려고 할 즈음 신은 약올리기라도 하는 듯
테스의 목에 밧줄을 걸고 행복을 거두어간다.
   이미 때는 늦었다.  땅 위에서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너희들은 그 기회를 놓치고 뒤늦게 후회하며 무리하게
되돌리려 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다. 
  테스는 19세기 영국의 얘기지만 오늘날에도 테스와 같이 비극을
자초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는 20세기 후반이지만 정신은 19세기나
이조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기 때문에 현대에서 과거와 미래의 정신들이 복잡하게 얽힘으로
인한 불협화음, 긴장, 대립 등은 의외로 많다.  이는 대개 인생을
어른으로 살려고 하는 선택의 순간에 증폭해서 일어난다.
  한 순진해 보이는 여대생이 어슴푸레한 저녁 때, 집 앞 골목에서 애인과
키스를 했다.  그때 그들 너머의 집 옥상에서 누군가가 어렴풋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깜짝 놀라 당황하며 여자에게서 떨어졌지만 그녀는 
흥, 누군지 어떻게 알아! 하고 혼자 내뱉으며 앞서 걸어갔다.  그때
남자는 순간 다소 의아했다.  순진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너무
거칠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마…  정도만 생각하고 곧 그일을
잊어버렸다.  그후 그들은 점점 더 육체적으로 가까워졌지만 서로 선을
넘지는 않았다.  약혼한 후에 육체를 허락하겠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전적으로 동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자를 잔인하게 차버렸다.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두고두고 그녀와의 관계를
반성해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헤어졌을 때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되씹으면서….
  결국 그는 그녀가 자기를 떠나간 이유를 발견했다.  그녀가 떠나간 것은
그의 무분별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무심코 그녀에게 
처녀가 아니기만 해봐라  하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난
몰라  하고 딴전을 피웠고 그날의 대화는 처녀도 첫경험 때 출혈이 없을
수 있다는 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때의 말이 그녀를 부담스럽게 해서
그녀가 떠나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집 앞 골목에서의
일도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래, 어쩌면 그녀는 과거에 순결을 잃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순진하게 그녀에게 너무 부담을 주었을 거야.  그녀는 어쩌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면 너무 화를 낼까봐 두려워서 스스로
떠났을 거야.  그러나 나는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 해도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했을 텐데….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기나긴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그녀가 헤어진 것은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이 아닌 철저한 자기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미 그녀에게는 새로운 애인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그후에도 왜 그녀가 자기를 떠났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정신병
발작 일보 직전에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의 고통은
19세기를 살고 있는 그의 정신이 21세기를 사는 그녀의 정신을 만났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요즘은 결혼 전에 성을 경험할 기회가 많다.  그러나 순진한 처녀,
총각들이 섣불리 성적으로 가까워지다 보면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고통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특히 임신이나 낙태 등으로
이어질 때 그 고통은 단순한 마음의 고통을 넘어 영혼의 고통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 고통을 무리하게 두고두고 간직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정신질환이란 자연스러움을 거부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과거가 현실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는 잊혀진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거의 체험을 옹글게 간직하고 있어 정신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어떤 아주머니는 과거의 체험을 홀로 소화하지 못하자 노이로제 발작을
일으키면서 과거를 남편에게 고백하고, 그것을 남편이 이해해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두고두고 그 고백한 것 때문에 신경을 쓰곤 했다.
  성숙한 인간은 자기 경험을 스스로 소화하며 극복하고 해결한다. 
무작정 자기 과거를 고백하는 것은 솔직하다기보다는 자기 마음의 짐을
덜어보려는 몸짓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강박적이고 완전벽이 있는
사람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
간직하고 있어야만 할 비밀의 고백은 신께 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스스로 간직하며 삭히고 해결해나가는 게 신 앞에서 겸허한, 인간적으로는
더욱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정신질환이란 한마디로 과거의 어둠 속에 사는 것이다.  과거는
어둠이고 미래는 빛이며 현재는 과거의 어둠과 미래의 빛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정신적으로 아이같이 순진한 상태에서 자신의 육체나 사랑이
농락당했다고 해서 일생을 멍에 속에서 살 필요는 없다.  그것은 테스와
클레어가 방황하는 기간이고, 아기들이 크면서 세상을 배우는 성인으로의
과정이다.  아기들이 어렸을 때 발가벗고 돌아다니고 아무하고나
뽀뽀한다고 해서 그들이 불결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는 정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정신적인 성숙이란 나이가
든다고 자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정신의 성인식을
치르어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를 보고 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거기서 한 젊은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잉태된 아기를
죽이게 되자, 괴로운 가운데 바다 속에 표류하는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죽는다.  그를 보고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얘기했다.
  내가 지금 과거의 어둠 속에서 묻혀 살 것인지 미래의 빛 가운데 살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겠지만, 열심히 살 수 있는 생이 남아 있어
과거의 어둠을 현재나 미래의 빛으로 극복할 수 있을 때는 앞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훗날 과거의 어둠을 추억으로 되새겨야 할
순간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더 이상 이 사회에서 도전과 응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늙었을 때, 그때 가서 천천히 과거를 반추하며
반성해도 늦지는 않는다.  그때는 하루종일 두고두고 되씹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성적인 매력
  A씨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에게는 큰
정신적인 이상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얼마 전에 A씨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상적인 여자를 만나 열애에 빠졌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그녀와 고통스러운 이별을 했는데, 이별을 하고 난
다음부터 자기가 좀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여자와
이별을 하고 나면, 그 후에는 애정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같이 그녀만을
그리워하며 추억 속에 나머지 생을 보내야 하는데 오히려 정반대로 여자만
보면 사랑하고 싶고 갖고 싶어지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벌써 실수도
여러 번하여 엉뚱한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고백도 했고, 하마터면
강간범으로 망신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좋아하는 여자의 폭이 전보다 훨씬 넓어져, 아줌마에게도 매력을 느끼고,
아이에게도 성욕을 느낄 뿐만 아니라 용모에 상관없이 여자라면 다 사랑을
느끼고 빠져드는 것이었다.  A씨의 고민은 자못 심각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아직 큰 사고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무슨
일인가 꼭 저지를 것 같았다.
  B감독은 일차 회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남아 있는
여자라곤 여직원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자 같이 2차를 가자고 점잖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달아나는
그녀를 붙들려는 B감독의 관심은 진지하기까지하여 옆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을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볼 정도였다.  B감독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붙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거절하고 도망쳐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다소
민망했는데, 조금 지나니 그녀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그는 그녀를 까맣게 잊고 애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다음날 그 감독은 전날 자기의 행동은 까맣게 잊고 그 여직원을
아랫사람으로 대할 것이다.
  C감독은 10대 여배우의 보호자로 따라온 엄마를 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농했다 한다.
   내가 저 아이하고 같이 잘 때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같이 자자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군. 
  검찰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김보은 양의 의붓아버지는 엄마와 딸과
한 방에서 번갈아 섹스하며 딸보고 엄마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강요했다 한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역겨움을 느끼고 분개할지
모르지만 이런 얘기는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얘기일지도 모른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은 모두
자기도 저지를 수 있는 짓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본능이 튀어나와 학습되면 우리 누구도 능히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인간의 본능을 그럴
듯하게 꺼내 표현함으로써 성공한 영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깡패들이 돌아다니면서 여자를 강간하고,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섹스
장면이 나오는 스탠리 큐브릭의 <클락와이즈 오렌지(A Clockwise
Orange)>, 한 여자를 집단 강간하는 <네 무덤에 침을 뱉지 마라>, 아버지
앞에서 딸과 어머니를 강간하려는 분위기로 시종 긴장감을 유지하는
<케이프 피어>, 남편을 묶어놓고 그 앞에서 부인을 강간하는 <나생문>
등은 내용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모두 좋은 영화들에 속한다.  이런
영화들이 어떤 고상한 것을 함축하든 그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붙들고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 것은 우리가 억압하고 있는 원초적 본능을 솔직하게
이끌어내어 자극했기 때문이다.
  두 명 이상의 여자와도 같이 자고 싶고, 남편을 묶어 놓고 그 앞에서
부인을 강간하고 싶으며, 보통 강간은 물론 집단 강간도 좋아하고,
심지어는 어머니와 딸과 한꺼번에 섹스하고 싶어하는 것이 남자들의
성본능이다.  남자가 일단 탐욕의 길로 빠지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여자를 품에 안으려 한다.  남자들은 처음엔 아름다운
여자에게 이끌리지만 성에 집착하게 되면 그 대상은 무차별이다. 
남자들이 느끼는 성적 매력은 일종의 탐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 계집 싫어하는 남자 없다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남자들의
성본능이 이러하니 여자들은 섣부른 호기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섣불리 기회를 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남자들에게
모두 성적으로 매력적이고 싶어하는 것 또한 여자들이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한 욕망이다.
  동물들이 암컷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엉덩이 한 부분이라고
한다.  개나 원숭이는 발정기가 되면 항문 부위가 커지거나 엉덩이가
빨개지면서 암내를 풍겨 수컷을 끌어당긴다고 한다.  그때 암컷은 힘센
수컷에게 지배당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수컷은 먼 주위를 맴돌며
낑낑거리며 울음 소리를 낸다.  발정기 때 암컷이 끌어당기는 것은 평소
친한 수컷보다는 오히려 강한 수컷이다.  친한 수컷은 평소에나 홀레
붙으려고 할 뿐 발정기 때가 되면 오히려 밀려난다고 한다.
  인간이 성적인 면에서 동물과 다른 점으로 흔히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발정기가 따로 없어 출산 이외의 쾌락을 목적으로도 섹스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뒤로 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섹스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인간의
섹스도 동물의 그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
  발정기는 아니지만 혼기가 되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남성을
도외시하고 사회경제적으로 강한 남자를 끌어당기려는 여성이 의외로
많고, 여자의 성적 매력의 포인트로 엉덩이를 꼽는 남성들이 또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저마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 다르다는 것이 동물과 다른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동물보다는 복잡하게 사고하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한 여자가 선호하는 화장이나 헤어 스타일, 복장, 패션 등은 그녀의
인격을 반영한다.  엉덩이를 흔들며 무조건 더 강한 남자를 끌어당겨서
애기 낳고 펑퍼짐하게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동물적인 성적 매력이 가진
여성이 가는 동물적인 길이다.  이는 동물의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인정될지 모르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동물로 취급될 뿐이다.  인간이라면,
성은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성만에의 집착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무차별적인 남자들의 성본능은 무자비하게 빨리 식어버린다.  그
성본능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거는 여자는 어리석은 여자이다.  그 본능은
일시적으로 반짝하는 불길이다.  그렇지 않고 성본능에 계속 사로잡혀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발달시키지 못한 남자로 그의 감정 또한
유치한 단계에 있어 진지한 인생의 건설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이 자기를 남성의 성본능 젯상의 제물로 끝내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오래 지속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한다.
  성적인 매력을 오래 지속하는 여자는 자신의 엉덩이보다는 외모에,
외모보다는 지식에, 지식보다는 지혜에 매력을 발하는 여자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느끼는 성적인 매력의 근원은 아주 깊은 곳의,
거대한 에너지로부터 우러나온다.  그것은 처음에는 본능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긴 생명의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들의 본능
너머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을 발하는 여자는 그 남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여신이 된다.  불가능한 사랑을 가능하게 만들고 이미
성공한 남자를 끌려고 하기보다는 불확실한 미래지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여자, 그래서 결국에는 함께 성공하여 현실의
성공뿐만 아니라 영혼의 성공도 함께 거두는 여자!  그런 현명한 여자는
얼마나 성적으로 매력적인가!
  A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속의 동물이 점차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예전의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순수했던 만남이 그리워지며 다시는 그녀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다졌다.  B감독과 C감독은 세계 영화제에 나갈
작품의 선정에 골몰하며 어디 감동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이 없나
찾아다녔다.  자기의 동물성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김보은 양의
아버지는 저승의 우리 속에서나마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는지….
  그러나 그들에게 한때 성적으로 매력적이었던 무수한 여인들은 이미
그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의 본능에 이끌렸던 그네들의
성적인 매력은 그들의 삶이나 일, 영혼을 사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섹스 공상에 사로잡힌 정신질환
   가랑비 오는 추적추적한 날씨이다.  늦은 저녁 학교 뒤뜰 공터는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젊은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공터로 뛰어 들었다. 
여자의 옷은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피 묻은 속살이 드러났다.  여자가
혼비백산해 뒤를 돌아보자 검은 그리자가 칼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검은 그림자는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았다.  남자는 그녀를 알몸으로 만든 다음
그녀의 옷으로 그녀의 팔을 뒤로 묶고 그녀를 범하기 시작했다.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두려운 표정이 점점 황홀해지자 그녀의 목에 브래지어
끈과 빨간 블라우스가 강하게 감겼다…. 
  환자는 손에 든 종이를 다 읽고 난 후 초조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환자는 답답한 듯 소리를 질렀다.
   그걸 좀 보십시오, 선생님.  제가 간밤에 꾸었던 꿈입니다.  하성
연쇄살인 사건과 똑같습니다.  제가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똑같은 꿈을 매일 밤 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뭡니까? 
  환자는 주춤거리다가 말하기 부끄러운 듯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강간이죠. 
   강간? 
   끝없는 강간!  이 강간 사건은 저의 은밀한 성적인 공상을 너무도
충족시켜 줍니다. 
   성적인 공상!… 성적인 공상은 누구한테나 있죠.  공상 자체는 반드시
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회가 미숙함으로 인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니까요. 
  실제로 정신과 환자들 중에는 자기 속에 떠오르는 지저분한 성적인
공상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천하에 없는 패륜아, 악당이라고 치부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 죄책감이 때로는 이 환자같이 
자기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라는 망상까지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신병원에서는 한때 자기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환자들이 유행처럼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적인 공상과 환상에 젖어서 산다.  그것은 남녀노소,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공통된 현상인데 아마도 그러한 강력한 욕망이
있기에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누구나 갖고 있는 성적인 공상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거나
심지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느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만이 그런 은밀한 공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
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공상의 내용에 지레 겁을 먹는다.
  공상이라는 것이 원래 이루지 못한 소망을 대리 충족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은 파렴치하고 인간 이하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환자들은
그 공상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마치 자기가 금방 파렴치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라도 될 것 같은 불길함에 혼자 고민하다가 급기야는 정신질환
증상으로까지 발달하고 마는 것이다.
  환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정신과 의사는 섹스에 대해서 좀더 대담해지고
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공상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어둠 속에 있는 환자들의 짐을 덜어주려면, 그 공상을 의사가 밖으로
끄집어내어 희석시켜야 하는데 환자들이 웬만해서는 그 공상을 꺼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청에 시달리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 그들의 환청 내용을 물으면
그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나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얘기가 들린다는 등의
고상한 것만 얘기한다.  그러다 의사가 그 내용 중에는 지저분한 내용은
섞여 있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머뭇머수 수긍을 한다.  의사가 좀더
구체적으로 그 중에는 자지, 보지 등의 욕이 섞여 있는 게 아니냐 하면
그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편해한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은밀한 것들이 의사의 입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자 어떤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은사 한 분은 환자들과 면담할 때 듣는 사람이
쑥스러울 정도로 야한 얘기를 자유스럽게 구사하시곤 하였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성범죄율이 세계 3위라는 보고가 나와, 사람들을
경악케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사회 문화 정책은 성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도록 꼭꼭 눌러놓은 것인데 성범죄는 세계 3위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성적인 억압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적인 억압이
너무 강해 성적인 공상이 많아지고, 그 공상은 자기에게 해를 주든 남에게
해를 주든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을 보고 말기 때문에 성범죄가
늘어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마농의 샘>이라는 영화를 보고 크게 분개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 중간에는 여주인공이 발가벗고 하모니카를 불며 빙글빙글 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은 영화의 구성이나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감동적인 씬이었으나 흐릿한 안개 속에 파묻혀
관객의 분통만을 돋구워주었다.  요즘 우리 관객들이 그 정도 장면을
본다고 해서 흥분해서 길거리로 뛰쳐나오거나 성범죄를 저지를 것도
아닌데도 문화 현실은 얄팍한 베일 속에 숨어 사람 약만 올리고 있다.
  공상이 사회 문화적으로 흡수 소화가 안 될 때 그 공상은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 정신적인 부조화를 일으킨다.  그 부조화는 심약한 사람의
내부로 파고들 때는 정신질환을, 외부로 뻗어갈 때는 범죄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성적인 공상으로 인한 정신질환과 범죄를
줄이려면 성적인 공상을 조장하는 지금의 사회,문 화 분위기부터 좀더
솔직하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정신과 의사나 우리 문화계의 지도자들
중에서 듣는 사람이 오히려 쑥스러울 정도로 야한 얘기를 자유롭게
구사하시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성적인 공상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한 방편일 것이다.
    원초적 본능과 오이디푸스의 회개
  사람들과 얘기하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화제로 꺼내면 금방 다들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범인은 누구일까?  그 범인은 누구이기에 아직도 안 잡히는 걸까? 
혹시 그 범인은 여자는 아닐까?  아니 난쟁이, 경찰, 변태성욕자,
실연당한 순진한 총각, 정신병자, 미군?…등등. 
  그러나 그 범인은 아직도 안 잡히고 있다.  그 범인이 안 잡히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재미있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흔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연쇄살인 사건이
빈번해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그 연쇄살인 사건이 정교하지 못하고 대개는 곧 잡히곤 하였는데
아마도 이는 우리의 도덕 문화가 아직은 깡그리째 실종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성 연쇄살인 사건만은 아직 그 범인이 잡히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의 특이한 점은 범인이 10대 소녀부터 70대 할머니까지 닥치는 대로
강간, 살인하고, 범행 후에는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으며, 그 범행수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하다는 것이다.  그는 살인할 때 피해자의
물품을 이용하며 시신을 철저히 모욕한다.  그리고 세인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질 때쯤 다시 범행을 저지르며 그 후에는 또 다시 아무 일이 없었는
양 자취를 감춘다.
  그는 누구일까?  그는 정말 존재하는 사람일까?  혹시 그는 과거
우리나라가 심각한 도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났다는 불가사리 같이
우리 사회의 타락해가는 정신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 나타난 괴물은
아닐까?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할 것이다.  그는 우리 중에 그 누구일
거라는 사실만은….
  얼마 전에 어느 여성지 광고 문구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은  10여 년간 친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해 6번 유산, 가출, 인신매매,
자살기도…  등의 문구였다.  나는 당장 그 여성지를 사서 그 기사를
읽었다.  그 내용이 애당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파렴치하고
잔인함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아버지는 마치 화성살인사건의
범인같이도 느껴졌다.  화성사건의 범인도 마치 딸과 어머니 같은
여자들을 강간, 살인을 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 이런 일들이 왜 빈번히 나타나는
걸까?  신문을 보면 어머니가 학대에 못 이겨 도망가니 아버지가 홧김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딸을 강간하고, 의붓아버지가 의붓 딸을
강간하는 등 근친상간 사건들이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인신매매,
강력범죄, 타락한 정치, 쇠퇴하는 경제 등으로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한데
근친상간까지 표면화되니 우리 사회가 이제 갈 때까지 갔다는 느낌마저
든다.
  옛날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간주해서 사회 전체가 책임을 느끼고 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로 흉흉한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자기 반성은커녕, 서로 자신한테 불똥만 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몸사리기에만 급급하다.  이제는 사람들이 딸을 갖지
않은 것을 커다란 다행으로 여길 정도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에 전염병이 만연했다.  지독한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어서 도시 전체가 황폐해졌고 사람들뿐만 아니라 곡식과
목장의 짐승들에게까지 죽음의 손이 뻗쳤다.  백성들이 왕에게 와서
탄원을 했고 왕은 아폴로 신에게 신의 뜻을 묻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
전염병은 신의 저주였고 그 저주는 왕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운명적인
근친상간, 살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왕이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오이디푸스 왕이다.  오이디푸스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음과
같이 절규하면서 자기의 두 눈을 찌른다.
   너희들은 다시는 내가 겪고 또 내가 저질러놓은 무서운 일들을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너무 오랫동안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을 보아왔고 내가
알고자 하던 일은 보지 못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어둠 속에 있거라…. 
  그 후 오이디푸스는 자기 어머니하고의 사이에서 난 딸 둘과 함께
일생을 방랑하며 무서운 고뇌의 풍파를 짊어진다.
  우리의 오이디푸스들은 얼마나 회개하고 있을까?  두 딸을 10여 년 동안
강간한 그 아버지는 자기 딸들이 병든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고 오히려
절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 정도가 심각하진 않은 것 같다.  사람들과 그 아버지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그건 아마 기자가 과장해서 보도한 것일 거라고 믿지 않으려는
반응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존재하고 있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누구나 혐오감을 느끼는 이 근친상간은 의외로 우리 사회에 무척 많다고
한다.  부녀보호소에 간 여자들 중의 19.1퍼센트가 근친상간 경험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고, 사생아를 맡아 키우는 단체들에도 근친상간으로
인해 들어오는 아기가 상당히 많다고 하니 말이다.  오빠가 동생을(오빠와
동생이), 사촌오빠가 여동생을(사촌오빠와 여동생이), 아버지가
딸을(아버지와 딸이) 간음하는 식인데 이런 경우 대개 쉬쉬하다가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는 유산도 못 시키고 그냥 낳게 되어 그런 단체까지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어쩌면 전부터 예측되어왔는지도 모른다.  룸살롱,
영계술집, 인신매매 등의 향락문화가 판을 치면서 줄곧 보도된 기사가 
우리의 향락 문화는 젊은 여자만을 좋아하는 남자들에게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어떻게 딸 같은 어린 여자들 술시중을 받을 수 있느냐 
등등이었으니 말이다.
  근친상간이 우리 정신에 미치는 폐해는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을 만큼
크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인간 이하의 동물
같은 행위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는 우리 인간이 성장할
때 누구나가 다 근친상간, 근친살해의 단계를 거친다고 본다.  그 단계는
우리 인격 성장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 시기를 잘 거치면 융통성
있고 건강한 자아를 이루게 되나 잘못 지나게 되면 신경증의 뿌리가
된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이 시기를 오이디푸스 시기라고 명명했는데, 5,6세에 거치는
것으로 보았다.  대개 심리학적으로 7세 이전의 것은 기억하기 힘드니
보통 우리 심리나 의식에서 근친상간이나 근친살해에 대한 소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여 이 시기에
아들이나 딸이 자기가 부모와 섹스할 수 없고 부모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부모와 같으 존재로 커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건강한 성인,
남녀로 자라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7세
이전은 동물 같은 삶이며, 인간이 사회적으로 인간다움을 이루는 것은 7세
이후부터인지도 모른다.
  프로이드는 이 오이디푸스 시기를 인류의 종적인 경험으로까지 확대해
결국은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의 발전도 이 근친상간 욕구의 억압 및
극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근친상간에 대한 소망은 누구나가 다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정신병적으로 붕괴할 때나 정신병적인 상태에서
굉장한 성적 갈등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아의 방위태세가 허물어져
무의식의 억압된 본능적 욕동이 튀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성욕과 살부(殺父)의 본능 때문에 지독한 심적 고통을
겪는데, 이때 정신과에서는 약물을 사용하여 일단 그 본능적 욕동을
잠재운다.  원시시대 때부터 잠재되어온 그 본능을 일단은 눌러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방위가 점점 더 깨진다면, 한 인간의 자아 방위가
무너져 무의식에 잠재된 근친상간, 근친살해의 욕동이 튀어나오듯이
근친상간, 근친살해의 빈도도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이 금하고 저주하고 잇는 것이기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용수철같은 거라 단순히
억압하기는 곤란하다.  어느 순간 용수철이 튀듯 한꺼번에 튀어올라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은 본능대로 인정을
해서 사회 속의 현실이 아닌 공상 속에서는 마음껏 자기를 피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유럽에 갔다왔던 후배 얘기를 들어보니 프랑스에는 TV에 포르노 채널이
독립적으로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태여 포르노 극장엘 가지 않아도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고.  그래서인지 정작 포르노 극장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한 번은 그가 포르노 극장엘 갔다가 무척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기 외엔 젊은 사람들은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젊은 날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런 영화관에 가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반이 지나면 모두 잔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경직된 관료사회의 풍토 속에서 모든 것이 움직여서
그런지 문화 발전에서만은 융통점이 빵점이다.  아직도 포르노 영화관
하나 없고 모든 것을 쉬쉬하고 눈앞에서만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곳에서는 점잖은 일들뿐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고 점점
표면화되어가고 있다.
  포르노 영화나 포르노 소설 등을 접해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두 남녀가 섹스하는 것은 아무리 다양하게 묘사해도 그 재미에 한계가
있다.  전에 어느 작가와 얘기하다가 그가 일본에 가서 본 출판 현황을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다.  일본에는 각양각색의 서적이 다양하게 출판이
되는데 거기엔 포르노적인 내용도 굉장히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 삼중당
문고와 같은 문고판 책이 전부 그런 내용으로 담겨 있기도 하는데, 거기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성관계가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의사와 간호사,
학생과 선생,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등등.  또 최근에는 직장 여성과의
섹스 얘기가 붐이라고 한다.
  언젠가 어떤 유명한 일본 영화를 비디오로 본 적이 있다.  그 중의 한
장면이 섹스를 하는 주인 부부의 침실을 훔쳐본 어떤 머슴이 자기의
성욕을 이기다 못해 예쁘장한 강아지를 붙들고 섹스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들의 공상이 자유롭게 표현됨에 부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어둠 속에서 범죄가 일어날 때는 더욱 참혹하다.  물론 어둠이 낮에까지
침습해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어둠을 없는 듯이 간주하는
것도 큰 문제다.  우리 사회가 공상을 자유롭게 허용하며 문화가 다양하게
성장하지 못한다면 공상은 어둠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어둠의 힘을
입어 온갖 양식으로 활개를 칠 것이다.  그것이 이제 강간 살인과
근친상간 등으로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일들을 개인의 문제만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가 책임을 느끼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때다.  또다시 화성 연쇄살인범 같은 불가사리가 나타나기 전에….
    강간, 살인 누구나 가능하다
  의학의 길에 입문하면서 제일 먼저 넘어야 할 관문이 바로 해부학이다. 
해부학은 실제 인간의 사체를 해부하는 것인데, 첫시간에는 의학 발전을
위해 자기 몸을 기부한 사람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한다.
  이때 해부학 실습장에는 우는 사람, 뛰쳐나가는 사람, 사뭇 경건한 사람
등 가지가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며칠만 지나면 헛된 감상에
젖어드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눈코 뜰 새 없이 시험이 밀려오고,
암기할 것들이 무수히 쌓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눈물지으며 뒷전에서
맴돌던 여학생들도 이내 팔을 걷어붙이고 답답한 남학생들을 제치고
스스로 메스를 들고 인체를 갈라낸다.
  해부는 신체 피부 표면에서부터 뼈 표면까지 한꺼풀 한꺼풀 남기지 않고
발라내는 것인데 신경 한 줄기, 혈관 하나라도 잘못 놓쳤다 가는 두고두고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것들을 철저히 암기하고
소화하지 못하면 수십 명씩 낙제하는 대열 속에 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중하다보니 어느덧 그들은 시체 앞에서도 과자를 사다 먹고
농담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이 의사면허증을 따고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면서 또 한 차례 겪는
관문이 바로 죽음과의 대면이다.  바쁜 병원의 일과 속에서 죽어가는
환자들과 맞부대끼다 보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니, 휴머니티니 하는
이상에 젖을 여유가 없다.  무수히 밀려오는 환자와 순간순간 몰아닥치는
응급상황의 파도 속에서 밥 먹고 잠잘 시간도 없는데, 시적인 감상에
젖어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사치스럽기 때문이다.  어느덧 그들은
환자가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시신 주위에서 통곡하는 가족들을
봐도 무심해질 뿐 별다른 감정이 없다.  그들이 인간의 고통 앞에서
보이는 무심한 태도를 대할 때면, 가끔은 흉악한 살인범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최근 들어 강력범죄가 빈번해지고, 도처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몫 잡자는 풍조가 만연해지고 있다.  이들 풍조는 인간성과 역행하는
것이나, 우리 사회에서 그 기세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범죄에
대해 둔감해지기 시작했다.
  내 조카는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인데, 가끔씩 하는 얘기를
듣다보면 기가 막힐 때가 있다.  주위에서 하도 불량배들이 설치고 돈을
뺏고 하니까 자기도 한 번 지나가는 순진한 학생에게 돈을 빼앗아봤는데,
조금만 겁을 주었더니 알아서 스스로 돈을 내놓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불량배들이 남의 돈을 뺏거나 훔치고 하는 것을 봐도 크게 분노나
혐오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중고등학생의 50퍼센트가 불량배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물건을
털린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같은 풍조가 너무 만연하다보니 너도 나도
쉽게 물들어 이제는 아예 도덕적으로 둔감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실제로 윤간, 살인 등의 경악할 만한 범죄를 저지르는 학생들중에는
평소 성격적으로 조용한 모범생들도 많다고 한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성을 경시하는 이같은 풍조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요즈음같이 사회가 뻔뻔스러워지다가는 조만간 양심이 있고 인간적인
사람들은 모두 다 정신병원으로 피신해야 할 지경이다.  요즈음은 사고의
불똥이 어느 한 부류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부유층, 저소득층을
막론하고 좌충우돌 강력사건들이 터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졸지에 일을 당하는 횟수가
빈번해지고 있다.
  불시에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무슨 죄를 졌기에
이꼴을 당하느냐고… 아무 원한관계도 없는데 딸이 납치를 당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 자식이 무법자의 질주하는 자동차에 목숨을 잃고,
별일도 아닌데 말 시비를 하다가 맞아 죽고…, 결국 일을 당한 사람이나
보호자들은 자기가 재수가 없어 일을 당했으려니 체념하고 상처를 간직한
채 세월을 보냈지만, 정말 그들에겐 책임이 없는 것일까?
  온갖 흉악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그에 편승해서 인간 상상력의
잔인함과 피해망상은 극에 달하고 있다.  그러한 악의 자유로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또 이들 현상에 대한 처방은 어떻게나 내려야 하는
것일까?  혹시 자기만 불똥을 피하려는 안일함이 온갖 악의 기승을
활발하게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피해서 편히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결국 피할 곳을 점점 좁히고 만 것은 아닐까?
  아마도 사고를 당한 사람도 책임이 있는 것이리라.  자기의 안일함에,
자기의 이기주의에, 자기의 배타주의에, 자기의 물질만능주의에, 자기의
소유욕에, 자기의 영혼을 포기했음에….
  결국 이같은 현상들은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을 억압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에 상황에 따라 무한히 잔인해질 수도, 무한히
성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순진한 의과대학 여학생이 해부학
실습에서 시체를 난자할 수 있는 것같이 환경만 허락한다면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곳에서만 허용된 환경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나간다면 이제는 순진한 대다수가 아무런 거리낌이나 죄책감없이
범죄행위에 가담할지도 모른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타락환경이 극에 달하자 보통사람들도 외부인만
보면 동성애를 하려고 덮쳤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분 위기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본능을
억압, 조절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을 다룸에 있어 정신과 임상에서는 우선 공상을 자유롭게
허용해주는 방법을 쓰고 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공상이 떠나지 않아 스스로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환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 없이 끈덕지게 따라 다니는
살부에 대한 공상을 뿌리칠 길이 없어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는데, 그
환자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처방은 아주 간단했다.
   당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공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이다.  당신은 얼마든지 그 공상을 마음껏 해도 좋다.  다만 당신이 그
공상을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공상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한 공상은 누구나 다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상이 자유롭게 허용될 때 인간정신의 극단적인 잔인함은 공상속으로
포용될 수가 있다.  공상이 사회적으로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것은 아마도
문화가 살아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문화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기에 각 개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밀한 공상을 사회와 공유할 통로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그 은밀함은 다가도로 부풀고, 어느 순간 용수철이
튀듯이 튀어나오면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강간, 살인은 누구나 가능하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본능적 경향, 그 경항들을 문화 속의 자유로움으로 포용한다면
사회적으로 굳이 행동화하지 않아도 그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문화 환경이 보다 더 자유로워지고 풍성해진다면 우리 각 개인이
은밀하게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본능도 나름대로 자리를 찾아 만족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대극에 있는 다른 성스럽고 아름다운 빛이 나는
정신도 풍성하게 그 가치를 뽐낼 수 있을 것이다.
    알몸에 미치는 색마(色魔), 사랑에 미치는 색정광(色情狂)
  국민학교 때 어머니, 형과 함께 3등 야간열차를 타고 목포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기찻간에서 굴러 다니는 주간지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잡지에서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야한 글들을 여럿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어떤 잡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글들이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몇몇 내용은
오랫도안 생생하게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씩 몰래
주간지의 야한 글을 읽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글 가운데  그 의사는
색마였다 라는 커다란 부제를 달고 있는, 수기 같은 글이 있었다. 
개인병원 의사가 자기 병원 간호원을 마취제로 마취시킨 다음 강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의사는 그 간호원말고도 다른 간호원과도 성관계를 가졌다는데, 그는
강간당한 채 잠들어 있는 간호원에게  미안하다, 보는 순간부터 사랑하게
돼서 어쩔 수 없었다 는 글을 남겨놓았다.
  그 글을 읽고, 나는 꽤 오랫동안 의문을 가졌었다.  그 의문은 그
글에서 왜 그 의사를 색마(色魔)라고 단정했냐 하는 것이었다.
  강간이면 강간이지 왜 색마일까?  내가 보기에 그 의사는 충동을
조절하는 힘이 약하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류의
인간을 사회에서는 왜 색마라고 부르는 걸까?  나라도 사랑을 느끼는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안고 싶을 것 같은데….
  또 만일 그 의사가 색마라면 그는 왜 자기가 강제로 범한 여자에게 
사랑 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색마라면 색만 탐하면 됐지 구태여  사랑
이란 표현까지 쓸 필요가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 그 의문은 자못 심각했는데, 만일 그 의사를 색마로
단정해버린다면 나 또한 그 색마 대열에 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몰랐다.  당시 나는 몰래 보는 주간지를 통해 그
의사가 행동한 것 이상의 성적인 공상을 즐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찾지 못했지만, 정신의학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그 궁금증을 풀어갈 수 있었다.
  그 의사를 정신분석 용어로 표현한다면 색마라기보다는 색정형(色情型)
인격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색정형 인격이란 프로이드가 분류한 인격형
중의 하나로 자기의 주된 관심이  오직 사랑하고 사랑받는데 있는 사람 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이성과도 쉽게 사랑에 빠지고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데, 새로운 대상에게서 사랑과 성욕을 느끼는 순간순간에는 과거
다른 이성에게 사랑을 맹세한 기억이나 기본적인 도덕성 같은 것은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의사의 경우는 그 정도가 다소 지나쳐 현실 평가능력까지 떨어져
있긴 하지만 색마보다는 색마 가능성이 있는 색정형 인격자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만일 그 의사를 색마로 단정해버린다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색마가 범람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라면서  내가 색을 너무 지나치게 탐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색마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랑을 다룬 아름다운 소설이나 감동적인 영화를 보게 되면 
저들은 저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하는데, 저들과 비교하면 나는
인간도 아니다. 하고 자괴감에 빠져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미리 앞서 기죽을 필요는 없다. 
연약한 인간이 자아의 힘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성욕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욕이란 인간의
생명을 보존, 지속시켜주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으로써, 섣불리 무시하거나
억압하려 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도태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따라서 기죽지 않고 마음 편히 지내려면, 누구나 색마 기질은 다
있는데, 누구는 노골적으로 색마짓을 하고, 누구는 고상하게 색마짓을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도 좋다.
  언젠가 춘원 이광수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읽고 한동안 여러 가지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 소설은  안빈 이란 의사가 부인과 간호원 등
여러 여자와 함께 플라토닉하게 사랑하면서 일생을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내용인데, 스토리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작가는 어쩌면 그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삶을 그려내면서 꽤나 원초적인 본능을 많이
억압했을 것 같다.  만일 어느 삼류 작가가 그 소설의 소재를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고 작가의 인격을 뛰어넘어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면  안빈
이란 의사는 그 주간지에 나온 색마라는 의사와 별다를 게 없이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그 색마라는 의사도 이리저리 여자들의 육체를
탐하면서도  사랑  운운 했으니 말이다.
  색마라느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귀처럼 색을 좋아하는 사람,
색광 으로 되어 있다.  색광을 다시 찾아보면  색에 미쳐 행동이
비정상적인 사람, 색정광 으로 나오는데, 친절하게 영어 주석까지 달려
있는 사전에서는 erotomania라고 번역을 해놓은 것도 있다.
  그러나 마귀처럼 색을 좋아하는 색마와 색에 미친 색정광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마귀처럼 색을 좋아하는 거야 둘 다 마찬가지겠지만, 색에
미친 색정광은 색을 마귀처럼 좋아하는 것 외에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미친 경우 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색정광(erotomania)의 개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  하나는 색마와 비슷한 뜻으로 성적 행동, 성에 대한 생각이나
공상에의 집착, 이성과의 강박적이며 지칠 줄 모르는 성행위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상상 속에서의 사랑, 즉 망상적 사랑의 개념으로 데크레망
증후군(de Clerambault Syndrome), 애인환각 증후군(phantom lover
syndrome) 등이 있다.  데크레망 증후군은, 1922년 데크레망이란 정신과
의사가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건강하고 성적으로도
왕성하며 공격적인 여자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이 증후군은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있는 어떤
남자가 남모르게 자기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주된 증상인데, 시간이 흘러 현실이 그녀의 망상을 부정하게 되면 처음의
남자를 떠나 다른 남자를 찾게 되고, 다시 그 다른 남자가 자기와 사랑에
빠져 있다고 굳게 믿는다.
  외국에서 보고된 임상사  르 보면 다음과 같다.
  35세 된 P주부는 내과 의사인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교외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보다 나이든 부부가
이웃으로 이사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편은 꽤 유명한 작가였다. 
새로 이사온 이웃집 부부는 P주부 가족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그때부터 P주부는 이웃집 남자가 자신의 성적 매력에 굉장히 매혹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후 P주부는 그 남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결국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었는데, 어떠한 약물치료로도 그녀를 예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수개월의 정신치료 끝에 그녀는
억지로나마 다른 집으로 이사가는 데 동의했지만, 수년이 흘러도 그녀의
망상적 믿음은 깨지지가 않았다.
  애인환각 증후군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의 변형으로는 이미 죽었거나 떠나버린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나 멀리 떠난 사람이 아직도
자신에게 사랑을 보낸다고 믿기도 한다.
  이같이 색마와 색정광의 개념은  미쳤다 는 것이 들어가느냐,
안들어가느냐에 따라 다소 다르다.  이를 좀더 따져보면 이러하다.
  색마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파렴치하게 색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파렴치하게 색을 즐기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지위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다 보니 파렴치하게 색을 즐기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많을 것이다.  그러나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적응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병엔 잘 걸리지 않는다.  즉 색마는 이성의  알몸
에는 미치되 진짜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색정광은 진짜 미친다.  
사랑 에 미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작가 부부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부부는
열렬히 연애하다가 결혼한 사이였고, 두 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때
부인이 남편 앞에서  만일 지금 자기에게 과거 사랑의 열정을 불태우던
순간이 다시 온다면 자기는 지금의 모든 것을 다 팽개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고 말했다.  그 부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분은 잘못하면 정신병에
걸릴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도 그 열정 때문에
색마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가정도 버리지
않으면서 젊은 남성의 육체도 즐겨 찾는 가슴이 뜨거운 부인네들하고는
다르기 때문이다.
  순간의 정열을 위해 나머지 기나긴 삶을 혼쾌히 포기하는 사람들이
정신병원에는 상당히 많다.  정신병원에 그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난다는
것은 사실 우리 사회로 볼 때는 비극이다.  사회에서는 정열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색정광들은 어쩌면 단조로운 죽음과 같은 삶이 싫어 일생을 걸고 도박을
시작한  정열의 화신 일지도 모른다.  유명한 작가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망사에 빠져버린 주부도, 첫사랑의 애인이 절대 자기를 떠나지 않았다고
믿는 만성 정신분열증 여자 환자도 어찌 보면 단순히 미쳤다기보다는
정열적인 그 무엇이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이란 어쩌면 정열적으로 값지게 살면 살수록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치는 당장 이 사회나 생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영원히 살아남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자기를 순간에 산화시켜버린
역사 속의 많은 영웅들처럼 말이다.  그들이 받게 될 삶의 가치는 어쩌면
영혼의 안식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승에서 더 방황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한 번의 여한 없는 삶을 살았으니 또다시 삶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색마는 늘고 색광은 줄고 있는 우리 사회는 뭔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색마일까, 색정광일까?  아니 나는 색마가 될 가능성이 큰 것일까,
색정광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일까?
    약한 것이 악한 것이다
  만수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통이 터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런 얘기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만수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시끈거리는 화는 당장이라도 가슴을
비집고 나와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냉장고에 하나 남은 맥주 캔을
꺼내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타는 가슴속을 하얀 연기를 피우며
씁쓸하게 통과해갔다.
   당장이라도 불러놓고 모든 걸 밝혀버려! 
  그러나 그것도 남자답지 못한 일이다.  만수는그런 충동적인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짐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당장은 이득을 줄지 모르지만 두고두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은 내가 아끼는 후배들이 아닌가?  한 여자의 약함 때문에 우리가
서로 반목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실을 밝히고 서로
떳떳해지는 것도 좋으리라.  모든 것은 술에 약한 인간의 의지
때문이니까….
  머리 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갔지만 마음만은 한결같이
억울했다.  엊그제 처음 보는 후배놈은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결심까지
했었다고 하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지만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한탄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나?  죽일 놈까지 되어버렸으니…. 
  만수는 한숨을 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리 정직하게 따져봐도 난 혜숙이를 강간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살갗에 접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강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섹스를
했다면 그건 그녀가 날 강간한 것이지 내가 그녀를 강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전리품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만수 형에게
강간당했다고 떠들며 다닌다.  만수는 기가 막혔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왜 내가 강간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오해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날 만수는 문자 그대로 꼭지가 빠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  얼마전에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진 상처로 자포자기한 채 술을 퍼붓듯이 들이켰던
것이다.  그 자리에 혜숙이가 옆에 있었고, 만수는 곧 의식을 잃었다.
  깨어보니 혜숙이는 옥상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 있었고, 만수는 그녀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옷을 추스려 입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술 취한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그때
옥상에서 굴러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만수에게 스쳐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날 혜숙이와 살갗이 부딪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정도 안했고,
시멘트 바닥 위에서 몸을 부딪꼈다면 또 얼마나 부딪꼈겠는가?  나는 문득
정신이 ㄷ로아오면서 곧 몸을 일으켰는데….
  그런 것이 강간이라는 걸까?  어떻게 나도 기억을 못 하는 동안에
혜숙이는 내 밑에 깔릴 수 있었을까?  내가, 싫다고 몸부림치는 그녀를
강제로 끌고 그 옥상 위까지 올라갔단 말인가?  이 시끄러운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혜숙이는 더럽혀졌기 때문에 장래를 약속한
애인으로부터 스스로 떠나고, 그 애인은 혜숙이를 강간한 남자에게
복수하려고 칼을 간단 말인가?
  만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강간이나 섹스를 했다면 그날
이후로도 계속 혜숙이와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살갗은 접촉했을
망정 제대로 이루어진 섹스는 아니었기에, 또 술이 만취한 상태였기에,
만수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혜숙이 또한 만수를
전과 같이 그냥 선배로 친근하게 대해줬다.
  만수는 때때로 그녀의 시선이 야릇하게도 느껴졌지만 그것을 무시했다. 
그 정도 일 갖고 관계가 새로워질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정도만의 사실로도 그녀가 강간했다고 느낄 수 있고, 그 고통 때문에
장래까지 약속한 남자와 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만수는 잡고 있던 맥주캔을 힘껏 찌그러뜨리고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건… 그건 진실이 아니다.  난 지금 후배들의 사랑놀음의 노리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네들이 악한 의도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네들의 약함이 나에게 악함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때 나와 살결이 닿았다는 사실을 자기의 현실과 방어에
이용하고 있다.  자기는 어쩔 수 없이 당한 가련한 꽃이고, 나는 그 꽃을
무자비하게 꺾은 악당인 것처럼….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에게 현실적으로
득이 되는 길을 가고 있다.  영혼을 짊어질 만큼 강하지도, 영혼을 포기할
만큼 악하지도 않은 한 약한 여자가 현실에서의 자기 입장 때문에
악해지고 있는 것이다.
  만수는 담배를 깊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진희의 얘기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난 평생 강간범이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희의 얘기를 들었기에, 난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억울한 건지 느끼고 있다.
  우리는 같은 대학 선후배들로 이루어진 동아리의 회원들이었다. 
우리들은 책을 읽고 데모를 하고 농어촌 봉사활동을 하며 만남을 수년간
이어왔다.
  혜숙이는 일찍부터 애인이 있었다.  그러다가, 혜숙의 애인은 군대를
갔고, 애인이 곁에 없는 혜숙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혜숙이는 애인만을
기다리며 살기에는 너무도 약했다.  흔들리는 혜숙이의 마음이 향한 곳은
애인의 절친한 친구인 동수였다.  동수도 같은 동아리 회원이었다. 
만수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진희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동아리 회원들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각자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만수는 전날에 마신 술로 속이 찌부둥하여 점심은 얼큰한 걸로
먹을까 하던 차에 진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진희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며 만나서 자기 얘기 좀 들어달라고 했다.  만수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점심이나 같이 먹을 의도로 해물탕집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진희는 정말 밤새 한숨도 못 잔 듯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형, 그동안 아무것도 못 느꼈어요? 
   뭘? 
   저와 동수 씨와의 관계 말이에요? 
  만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사랑도 아파 죽겠는데 남의 사랑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예요.  그런데 어제 동수 씨가 집에 안
들어왔어요.   
  만수는 절로 웃음에 나왔다.  걔는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안 들어가는
날이 더 많아….
   그런데 혜숙이도 집에 안 들어갔어요.  아마도 그들은 함께 밤을 지샌
것 같아요. 
  그제서야 만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제 동수가 혜숙이를
바래다주겠다고 함께 나가더니만….
   틀림없이 그래요.  형.  우리는 이미 깊은 관계인데… 전 어쩌면
좋아요. 
  만수는 우선 많이 먹고 기운부터 차리라고 했으나, 진희는 물만 조금
마시고는 동수와의 관계를 처음부터 모두 털어놓았다.  그후 만수는
진희의 카운셀러가 되었고, 진희는 동수와 혜숙, 자기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따금씩 소상히 알려주었다.  혜숙이는 진희와 동수의
관계를 알고서도 동수에게 깊은 애착을 보였다.  다행히 동수는 곧 그때는
술에 취해 실수를 한 것이라고 그날 밤을 정리하고 진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숙이는 동수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자연히 진희와 혜숙이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  그러던 중 소위 그
강간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 날 진희는 술이 잔뜩 취한 채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한적한
곳으로 만수를 붙들고 갔다.
   형, 내가 취해서 묻는 건데 이해해줄 수 있지? 
   응?  무슨 얘긴데…. 
   형, 정말 혜숙이를 강간했어? 
   뭐?  말도 안 돼!  무슨 강간? 
   혜숙이가 그랬대….  그러면서 동수 씨에게 너무 힘이 드니까 옆에
와달라고 했대. 
  만수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웬 강간…!  그날 만취해서
혜숙이에게 실수한 것은 기억이 나지만 강간은 절대로 아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중심도 못 잡고 비틀거리던 내가 어떻게 여자를
강간할 수 있단 말인가?
  진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퍼부었다.
   흥, 내 그럴 줄 알았어.  걔 동수 씨 붙들려고 거짓말한 거야… 그
술집에서 어디 가서 강간을 해.  거기서 갈 데가 어디 있어…. 
  만수는 진희에게 그날 일어난 일을 기억나는 대로 모두 얘기했다. 
진희는 계속 부끄러움도 모르는 애라고 혜숙이를 욕했다.
  그후 혜숙이는 동아리를 띄엄띄엄 나오다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래,
만수도 그 강간사건을 까맣게 잊었고 혜숙이와는 다시 예전의 선후배
관계로 그냥 그렇게 지냈다.  혜숙이는 곧 다시 애인을 구했는데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중 만수는 엊그제 동수와 혜숙이의 과거 애인을
만났다.  만수는 그날도 동아리 팀들과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옆에 웬
낯선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 인사를 하고 술을 마시는데
그가 불쑥 혜숙이를 잘 안다고 얘기했다.  만수는 어떤 스쳐가는 예감이
옛애인이 아니냐고 물었더니그는 그렇다고 씁쓸하게 대답했다.  만수는
이상한 느낌에, 혹시 내 뺨을 한 대 갈겨보고 싶지 않냐고 자기 뺨을
어루만지며 내밀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혜숙이를 만났지요.  혜숙이는 자꾸 날 피하더니 떠날 무렵에 자기는
강간당했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때는 혜숙이를 강간한 놈을 꼭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세상은 참
고통스러운 것이에요. 
  만수는 갑자기 기가 막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스쳐갔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만수는 앞에 있는 술을 혜숙이 옛애인과 더불어 들이켰다.  술앞에서는
동수도 약했고, 혜숙이도 약했고, 만수도 약했다.  그러나 술 깬 다음에는
약한 순으로 악해져서 나머지를 괴롭혔다.
  동수는 자기 친구에게 혜숙이와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말했더라면 전 애인이 혜숙이에게는 천사 같은 환상을, 만수에게는 악마
같은 환상을 품을 리가 없다.
  만수는 갑자기 모든 걸 밝혀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혜숙이가,
나는 강간당했으니 당신은 내가 떠나더라도 나를 탓해선 안된고 나에 대한
환상을 깨뜨려서도 안 된다라고 의도하는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폭로하고 싶었다.  혜숙이가 너와 가장 친한 친구인 동수와 같이 잔
사실을, 혜숙이가 동수를 자기 옆에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가 강간당했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을, 혜숙이가 동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같이, 당신을 떠나기 위해 그 사실을 또 이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꼭지가 비틀려가곤 있었지만 이번에는 자제했다.  그래도 꼴에는
선배였기 때문이다.
  만수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어루만졌다.  혜숙이의 약함은 하마터면
살인까지 초래할 뻔했던 것이다.  갑자기 만수는 진희가 떠올랐다. 
진희가 얼마 전에 동수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한껏 순수하고 성스러운
표정으로 데이트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대학로를 거닐다가 우연히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동수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였다. 
진희는 온갖 노력을 다해 혜숙이를 미워하고 동수를 차지했지만
조금이나마 더 달콤한 바람이 불자 다시 쉽게 그리로 얼굴을 돌린
듯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상대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약한 것은 악한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강해져야 한다.  약해갖고 사랑을 하려니 남을 모함하고 미워하고
거짓말을 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며 심지어 살인까지 방조한다.
  만수는 갑자기 헤어진 옛애인이 그러워졌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으나
만수가 너무 약했기에 만수는 그녀와의 사랑을 이어갈 수 없었다.  지금
헤어진 이제 와서야 만수는 그녀의 사랑이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되었고,
참을 수 없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만수가 강해지기 전에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일이다.  약한 만수는 그녀에게 악한 짓이나 할
테니 말이다.
  그후 만수는 술좌석에서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나 술 취했을 때 여자는 누구고 내 옆에 가까이 오지 마! 
   여자들은 나를 유혹하지 마… 그러면 무서운 일이 생긴다. 
  만수는 자기가 강해지기까지는 언제까지고 이런 말을 되풀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것은 약한 마수가 약한 여자들과 악한 짓을 주고받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제3부 성공하는 결혼과 실패하는 결혼
    궁합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심리
  나는 평소에 궁합에 대해 신경쓴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궁합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무엇을 써야 하나 이리저리
고민하는데, 아내가 대뜸 당신 첫사랑 얘기 쓰면 되지 않느냐고 다소
비아냥(?)거린다.  그러고 보니 궁합은 내가 무시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내 첫사랑과 결혼이 모두 궁합
때문에 깨지고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한 여자와 서로 사랑을 얘기하고 결혼을 약속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쌀쌀해지면서 아무이유 없이 내곁을 떠났다. 
그때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자기를 버리면 안 된다고 나에게 다짐받곤 했는데….
  그녀가 떠났을 때 혼자서 별별 생각을 다했다.  그녀와 만났을 때 내가
취한 행동, 말 하나하나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면서 그때는 이렇게 행동할
걸, 저렇게 말할 걸 하는 식으로 후회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무수히 회개의 편지를 보냈지만 들려오는 얘기는 그녀가 편지를
찢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가 나를 떠난 이유는
궁합 때문이었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우리는 공원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공원 입구에서 손금과 궁합을 보는 아주머니 점쟁이를 만나 점을 보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궁합을 보더니 둘이 맞지 않으니 헤어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녀를 사랑하느냐고, 결혼할
거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으나, 그 점쟁이는
여간해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점쟁이는 끝으로 남자가 철저히
매달리지 않으면 여자가 도망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국 그녀는 그
점쟁이의 말대로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지 않았다.  그 천 원짜리 점쟁이 때문에 그녀가 나를 떠났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고민하다가 수 년 후 졸업할
즈음에 그녀를 다시 찾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싸늘한 적개심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잘 해준 것은 철저하게 망각하고 섭섭한 것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를 잊기로 하고 집안의 소개를 받아 지금이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첫사랑의 여인에 대해 얘기를 했고,
아내는 흥미있게 들으면서 어떻게 다시 결합할 수 없느냐고 걱정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아내와 결혼하기로 하고 양가가 왕래하게 되었는데, 그때 또
들은 얘기가 궁합 얘기였다.  장모님 얘기가 우리를 서로 소개시키기
이전에 이미 궁합을 보았는데 궁합이 좋더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궁합이 나빴으면 소개조차 안 했을 거라고 단호히 덧붙이시며.
  결국 첫사랑의 여인과 헤어진 것도 궁합 때문이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궁합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궁합이
뭐길래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애당초 궁합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궁합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갓 대학을 졸업한 어떤 여자에게 물으니 그녀 주위엔 오랜 세월
사귀었다가도 궁합 때문에 깨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도 자기 사랑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확신이 없을 때
궁합이 나쁘면 아! 그래서 확신이 안 생겼구나 하고 마음을 먹고 헤어지게
되고, 궁합이 좋으면 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하고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서로 사랑하는 사이면 둘이 미리 궁합을 봐서, 나쁘면
집안에서 궁합을 보려고 할 때 좋은 쪽으로 생년월일이나 시를 바꾸어서
상대방 집안에 가르쳐줘서 넘어간다고 한다.  결국 이는 사랑을 짊어지고
갈 만한 주체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 것 같다.  궁합에 의지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그만큼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과거에 궁합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했었다면 나는 젊은 청춘을 오랜 세월 고통 속에서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궁합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청춘을
낭비하는 젊은이들이 있을 텐데, 그들은 먼저 어떤 사람들이 궁합에
의지하고, 그런 심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인지를 궁리해봐야 할 것이다.
  궁합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심리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를 함께 놓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긍정적인 면은 인간으로서 자기의 한계를 겸허히 인식하고, 알 수 없는
거대한 미지의 운명 앞에 자기를 겸허히 맡기는 점이다.  현대인의
합리성과 효율성은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도
조절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궁합에 따르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힘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허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어쩌면 인간으로서 신성과 연결될 수 있는
바람직한 태도일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의 무의식 저 깊은 곳이나 자연에 있는 신성의 힘을 자기의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 겸허히 따른다는 점에서 이는 창조적이거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야지, 자기의 불안한 심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맹목적으로
점쟁이 말에 따르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는 여러가지로 파생할 수 있다.
  어떤 연인이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가  안돼, 절대
결혼하면 안돼.  남자도 금이고 여자도 금이야.  당신네들은 악연 중에
악연이야.  결혼을 하면 한 달이 못 돼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될 거야.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인들은 온갖 우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이십여 년간 사업도 번창하고 애도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궁합이 틀렸다는 얘긴데,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안을
것이다.  즉, 그 궁합에 나타난 남자의 죽음이라는 것은 어쩌면 재생의
의미가 있는 죽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징의 해석에서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환생의 의미가 있다.  이 남자의 경우 결혼은 곧 과거의
겉껍질은 죽고 새로운 자신이 태어나는 계기로써, 그는 결혼을 기화로
더욱 더 사업도 번창시키고 화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과부가
될 팔자라는 것은 여성의 독립적인 위치의 보장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또 어떤 부부는 궁합이 너무너무 좋아 주위의 온갖 부러움과 축복을
받고 결혼을 했는데, 얼마 안 가서 사고로 사별하고 말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 경우도 궁합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궁합이 너무
좋았기에 이승에서 너무 오래 같이 살 필요가 없었으리라.  잠깐의 행복도
인간이 누리기에는 너무 복된 인생을 살았을테니까….
  아무튼 신의 뜻, 자연의 섭리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난다면 궁합 등의 형태를 딘 상징으로 나타날 텐데,
상징이란 것 자체가 인간의 이성이나 언어로는 절대 그 뜻을 다 밝혀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점쟁이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따른다는 것은 무수히 내포된 가능성은 외면한 채 점쟁이 수준에 맞는 한
길로만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열 군데 가면 열 소리하는 게 궁합이라고
하지 않는가.
  궁합에 의지하는 심리의 부정적인 측면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주체성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외부의 판단에만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잘못하다가는
정신적인 혼돈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정신병 환자들은 대개 자기의 행동이나 판단 기준을 자연 현상이나
자기에게 닥쳐오는 어떤 섭리에서 찾는다.  하늘이 밝아지고 흐려지는 것,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것, 자기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여러가지
현상들에서 자기가 해야 할 지침을 부여받고, 그에 따라 마술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현상 속에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면 남는 것은 자기의
뿌리를 상실한 정신의 혼미일 뿐이다.
  어차피 인생이라 셰익스피어가 얘기했듯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치는 배우들의 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훌륭한 배우는 어떤 연기를
하더라도 자기 속에서, 자기 영혼에서 그 가치를 찾아 훌륭하게 살아 있는
연기를 한다.  그 배우의 연기를 보고 신이라는 연출가는 필요한 대사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그 역할을 조연급에서 주연급으로
바꾸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역을 자기가 맡아서 할 때 한 점쟁이의 혀 끝에 놀아나는
단순한 꼭두각시 같은 역할만을 할 것인지, 무한한 창조주인 신의 연출에
따라 자기가 주연이 되는 창조적인 연기를 하며 마음껏 살아갈지는 자기
취향대로 자기가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나라면 내 사랑을 그렇게 쉽게
무릎 꿇리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비극의 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축복받지 못한 결혼
  누군가가 어느 날 아버지 사업 때문에 지금 사귀는 여자와 헤어져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크게 격분했다.  그가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사귄
여자는 그를 너무도 사랑하고 착했기 때문에 친구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그 여자 집에서는 의당 결혼할 줄 알고 같이 자고 가는 것도 허락한 지가
꽤 되었다.
  결국 그가 진짜로 결혼하게 되었을 때, 함을 지고 갈 친구가 없어
스스로 함을 지고 가야 했다.  그는 결혼식에 사회볼 친구가 없어 내막을
잘 모르는 친구를 겨우 구해 사회를 보게 하고 결혼을 했으나, 그
친구마저 나중에 사실을 알고는  그런 줄 알았으면 사회를 보는 것이
아닌데….  하며 후회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새로 만난 여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애인까지
두고 잘 살고 있으나, 그가 버린 여자는 결혼에 실패하고 정신질환마저
일으켰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그는 두고두고 그 여자에게 미안해했다.  행여 자기 죄 때문에 자기
딸들이 후에 업보를 받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다고 했다.  그는 정말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그녀를 버린 것일까?  축복받는 결혼을 하기
위해….
  한 여자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기는 애인이 있다고 얘기를 했다. 
그녀의 집안과 그 남자의 집안에서도 너희들은 언제 결혼할 거냐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갑자기 지금은 자기에게 무척 중요한 시기니
당분간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다.
  얼마 전에 나는 그녀를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곤 그녀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셔버리는
것뿐이었다.  그 남자의 얘기는 점점 이별의 선언으로 다져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남자는 정말 좀더 자리를 잡은 다음에 축복받는 결혼을 하고
싶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일까?
  이런 얘기는 영화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 중에 사랑과 현실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가요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들의
가사들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하나같이 이별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한을 다룬 것들이 많다.  외국 가요에선 이미 시들해져버린 한스러운
내용이 우리 가요에선 아직도 진하게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왜 우리
가요엔 이같이 애달픈 노래들이 많은 걸까?  아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랑을
좇으며 살기보다는 눈치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사회이닌까….
  애정의 모든 갈등은 결혼으로 그 종말을 고한다.  축복받는 결혼이든,
반대하든 결혼이든….
  축복받는 결혼은 정말 반드시 행복한 걸까?  두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집안에 소개를 하면서 상대의 집안에서 서로 귀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정말 다채로운 안정감과 행복감을 준다.  그러나
축복은 짧고 사랑은 길다.
  부모들은 자식이 축복받는 결혼을 못 하게 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받지만, 당사자는 우주가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받는다.  부모는
자식들이 빗나가는 사랑을 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받지만,
자식은 날카로운 유리로 가슴을 한자락 한자락 베어나가는 듯한 에이는
고통을 받는다.  결국 가장 상처받고 힘든 것은 그 당사자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부모의 고리는 너무도 끈끈하다. 
부모들 중에는 자식이 성장하는 것을 못 견뎌하는 부모가 많다.  그런
부모들은 자식이 자기 품을 떠나려고 하면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붙잡아두려고 한다.  거기서 많이 동원되는 것은 분노이다.  자학적이고도
타학적인….
  청소년들과 사이코드라마를 하다보면 가출상황을 자주 맞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을 잘 들여다보면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청소년이 무대 위에서 부모와의 갈등을 얘기했다.  그는 법대를 가고
싶은 데 어머니는 의대를 꼭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중 상황에서 그는
어머니역을 맡은 배우의 입심을 이기지 못해 할 수 없이 의대 가기로
수긍을 하고 의대로 간다.
  그에게 무대 위에서 20-30년의 세월을 흐르게 하면서 그때그때의 삶을
물으니 그의 삶은 점점 비참해져가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의 마음속은
이미 그의 일생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하고 그를 과거 어머니와의 갈등 상황으로 다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어머니와 격론을 벌이며 자기는 의대가 아닌
법대로 가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완고한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굽힐
줄 모른다.  자기가 죽겠다고 하면서 효를 운운하며 아들을 붙들어두려
한다.  결국 그 연극의 종말은 그 청소년이 가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한 조울증 환자는 재발을 반복했는데 도저히 좋아질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는 과지배적이고 과보호적이어서 아들이 성숙하고
자기 의견을 갖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를 못했다.  아들은 결혼 후 이혼을
했고 자식은 어머니가 맡아 키웠으며 그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했다.
 그의 병의 원인은 자기 주체성을 상실당함으로 인한 엄청난
적개심이었다.  그의 어머니를 면담하니 자식이 상태가 나쁜 것을
한편으로는 흡족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병이란, 나이는
들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어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로서는 자식을 어린 상태로 품안에 가둬두는 데 성공한 셈이다.
   시집은 가는 게 아니고 보내는 거다 ,  결혼은 집안과 집안이 만남이다
라는 어른들의 주장을 자주 듣는다.  현실적으로는 옳은 얘기고 진실일 수
있으나 때로는 자식의 삶을 방해하고, 자식의 삶을 어른들에게 종속시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결혼이란 부모의 왕국을 떠나 자기의 왕국을 새로이
건설해나가는 것이다.
  신화나 동화에는 괴물이 공주를 납치해 동굴 속에 가두면 왕자가 용감히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가 괴물을 죽이고 공주를 구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얘기가 많이 있다.
  이의 상징적인 해석을 보면, 모성적인 의식세계의 뒤엉키고 혼돈된 동굴
속을 성인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들어가 모성의 집요한 일면
때문에 자기 속에 가둬두었던 자신의 여성상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해방을 성취한 후에라야 그는 다른 여성과의 관계에서 참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괴물이란 자신이 어머니에게 매달렸을 때 일어나는 집요한 일면의
상징으로 그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좀더 성숙한 관계, 더 나아가 어른과
성숙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모자관계에 밀착된 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개인의 의식 발달에 있어서 영웅상은 상징적인 수단이며, 영웅을 통해
새로 태어난 자아는 어머니에게 점유되어 온 영아기의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퇴행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영웅과 용의
투쟁은 이러한 성장과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영웅이 없다고도 하고 성인이 없다고도 한다.  삼십대
소년, 모든 것이 미리 다 갖추어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아마 돈과 부모에 종속된 지금 같은 결혼의
풍속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우리 사회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금년도 노벨 경제학 수상자도  결혼은 지금보다
더 부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을 때 하며, 부유한 부부는 가난한 부부보다
이혼할 확률이 적다 고 말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영웅이
없고 어른이 없다는 것은 사뭇 심각한 것 같다.  정치, 사회, 문화
곳곳에서 영웅의 부재, 어른의 부재를 안타까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에서 사랑을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돈과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온갖 고통을 수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지 사회에서 노예처럼 편안히 먹고 사는 것보다는 독립된 자기 국가를
건설하면서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싶은 사람은 과감히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웅이나 어른들이 좀더
많이 나와야 우리 사회에서 한 맺힌 노래들이 점차 줄어들고 희망에 찬
노래들이 점점 늘어나게 될 것이다.
  정말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란 부모나 친지로부터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다.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택한 결혼은 비록 땅에서는 축복받지 못했다 해도
하늘이 축복할 것이며 그런 사람은 일생 자기가 버린 상대 때문에 불안
속에 살며 행여 자기 자식에게 그 불똥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어둠의
짐은 짊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신혼의 섹스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주위에서 많이 듣는 얘기가 있다.   초반에
잡아라 라는 것이다.  초반에 잡아야 일생을 잡을 수 있고 그래야 인생이
편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 얘기만큼 둘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도 없다.  결혼 초반에 신경써야 할 것은 서로가 좀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서로 이기려고 긴장하고 고집부리며
상대를 깔아뭉개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상대가 자기 말에 꼼짝 못
한다고 해서 그다지 기뻐할 것은 없다.  상대에게 잡혀 사는존재는 자기
생명도 줏대도 없기 때문에 그만큼 매력도 가능성도 없을 것이고, 결국
그도 언젠가는 자기를 찾기 위한 반란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이제부터 관계의 시작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따라서
결혼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노력을 해야 할 직업과도
같은 것이다.
  1988년말 한국 갤럽연구조사에 의하면 20-30대 주부의 대략 30퍼센트
정도가 성적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결혼 양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서로가 상대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관계로
가까이 다가가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게다.  섹스의 의미는
쾌락이나 출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인간관계의 도구로써 더 큰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족스런 섹스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우선 드는 것은, 성에 관한 무지이다.
  몇 년 전에 한 여자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  그녀의 망상과 환각은
너무 심하고 오래돼 거의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그녀의 발병은
첫날 밤 너무 놀라 신방을 뛰쳐나온 다음부터였다.  그 후 그녀는 이혼을
당하고 정신병원과 기도원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발병 전에는 그렇게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요즘에는 이렇게 순진한
여성들이야 없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성적인 무지로 인해 고통받는
부부들은 상당히 많다.
  섹스는 감추어야 할 것이고 의당 자연히 잘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커다란 오산이다.  섹스를 잘한다는 건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섹스를 잘하기 위해선 정신의 건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둘만의
공간에서 둘이 하나가 될 때 둘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리
음탕한 대사도, 어떤 동물 같은 행위도 둘의 사랑을 통과하   순수한
대사와 아름다운 몸짓으로 변한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어떠한 짓거리도 아름다운 행위로 만들어주고 둘에게 끝없는 자유와
지고(至高)의 쾌락을 안겨다준다.  그 순간에는 신마저도 부럽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며 권리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에는 서로
대담해질 필요가 있다.  섹스에 대한 얘기나 섹스자체를 점잔 빼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둘이 서로 진지하게 서로의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솔직한 것이다.  거짓이나 가식, 돌려서
얘기하는 것은 모두 섹스를 방해한다.  성치료에서도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문제를 노골적으로 자유롭게 주고받는 것이다.  서로 솔직하게 되면
섹스에 관한 거절이나 굴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고, 발기나 성교에
의한 성적 극치감이 없어도 성행위를 기꺼이 즐기는 것, 여서이 바로
오르가즘에 이르지 못해도 멋진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이 가능해진다.
  신혼 때에는 성적인 무지와는 반대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는 지나친
욕구가 오히려 성을 방해하는 수도 있다.  배우자를 기쁘게 하고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이
오히려 섹스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카프란)
   당장에 발기하고, 오랫동안 지속하지 않으면 그녀는 기뻐하지 않을 것
이라든지, 자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면서까지 남성의 욕구에 좇으려고
하는 강박감,  서둘러 오르가즘에 이르지 못하면 그가 나에게 실망할지
모른다 ,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그가 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 
그에게 성교 자세를 밑으로 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거절할지도
모르니까  등등은 많은 부부의 성적 적응을 방해해왔다고 한다.
  이런 불안들에 대해서는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당사자의 아동기 관계에서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부모를 위해 뭔가를
수행했을 때 인정을 받고 애정을 받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성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대체적으로
상대로부터 거절다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경우로 나타나는데 이런
경우는  이기적 이 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같이 상대방에게 거절당하지는 않으며, 남성은 성적 긴장의 고조에 따라
 이기적 으로 몰두할 때 여성이 거절하기는커녕 남성의 정열을 멋진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모든 여성들은 무의식적으로 강간당하는
꿈꾼다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섹스 중에는 부부가 자기의 감각에 이기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성적 체험에 몰두할 수 있고
상대에게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에 대한 죄책감이나
불안감은 섹스에 광범위하고도 유해한 영향을 준다고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듯이 사람은 첫경험에서 지극한 만족을
체험한다.  어떤 여자는 첫키스에 실신을 하기도 하고, 혹자는 첫애무에
일생 다시 느껴볼 수 없는 엑스터시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만족은 결혼 후에는 잘 체험하기가 힘들다.  마치 천상의 쾌락은 순결한
육체와 영혼에만 깃드는 듯 섹스가 빈번해질수록 그 쾌락은 일상적인
것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면 부부는 첫경험의 환희를 찾아 다른 애인을
구하러 방황할 수도 있다.  대개 바람피는 남자들의 애인을 보면 그들은
자기 부인의 젊은 시절을 닮았거나 대개는 그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스위스의 어떤 유명한 분석가 부부는 수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주위에서
보기에는 마치 항상 새로 만나는 사이 같다고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항상 예의로 대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이지만 상대에 대한 마음씀은 소년, 소녀 같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부부가 서로 솔직하고,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며,
끊임없이 자기 길을 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혼의 부부들은 남의 설익은, 신혼 때 잡으라는 충고에 귀 기울이지
말고 서로 솔직하게 감각을 나누고 존중하면서 각자 자기 길을 열심히
가는 것이 서로 황홀한 첫경험을 계속하며 유지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사니!
  부부는 항상 남이다.  혼인의 서약에는 거창한 약속을 하지만 그것만
믿고 의지하기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너무 간사하다.
  A씨는 신혼여행을 갔는데, 이튿날 결혼반지를 빼서 집어던지며
울부짖었다.
   앙- 잘못 결혼한 거야! 
  A씨가 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신부가 도대체 자기 말을 안 듣고 자기
주장만 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아주 사소한 데서 발생했다.  신부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기 전에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제주도에 가면 로얄제리는 절대 사지 말라고
그러더라.  비싸기만 하고 순 엉터리라고… 그러니 우리도 거기 가면 절대
로얄제리를 사지 말자! 
  그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제주도에 가보니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로얄제리 판매원의
입담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몇 개씩 사는데 자기도
하나만이라도 샀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신부는 계속 신랑을 쿡쿡
찌르며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했으나 A씨는 드디어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A씨는 신부에게 사정했다.  딱 한 개만 사자고… 아무래도 집안
식구들에게 선물은 사가야 하니 아버지 선물로 딱 하나만 사자고 했다. 
그러나 신부는 눈물까지 글썽여가면서 반대했다.
  A씨는 드디어 격분했다.  설사 그것이 가짜라 하더라도 돈이 얼마나
된다고 반대를 해.  필경 이 여자는 남편보다 친구들의 얘기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여자는 나를 무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A씨는 호텔로 들어오자마자 신부는 팽개쳐두고 혼자 빠친코에 들어가
2,30만원을 홧김에 날려버렸다.  그러니 분통은 더욱 치밀어, 한복으로
곱게 갈아입고 자기를 찾으러 온 신부를 째려보고 방으로 들어가 발작을
한 것이다.  신부가 잘못했다고 빌자 A씨는 겨우 화를 추스리고 반지를
찾기 위해 온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B씨는 결혼 일 년 만에 6층 아파트 창문을 열고 부인에게 소리쳤다.
   너, 내 말 안 들으면 지금 당장 뛰어내릴 줄 알아! 
  부인은 입을 뾰족히 오므린 채 들은 척도 안했다.
  B씨는 화가 더 치밀었으나 차마 뛰어내리지는 못하고 다시 경고했다.
   내가 지금 뛰어내리지 않으면 난 오늘부터 바람피운다.  그리고 내가
나중에 성공하면 너 나한테 무시당할 줄 알아! 
  그러나 부인은 여전히 입을 뾰족히 오므린 채 들은 척도 안했다.  B씨는
부인의 그 오므린 입이 꼭 똥구멍 같다고 생각하며, 똥고집쟁이라고
속으로 욕하며 집을 나섰다.  B씨는 부인의 직장 문제로 다툰 것이었다. 
B씨는 부인이 애 낳아서 잘 키우고 애가 좀 큰 다음에 직장 갖기를
원했으나 부인은 지금 당장 갖겠다고 고집을 부려 싸움이 붙은 것이다.
  그날부터 B씨는 인연이 닿는 여자하고는 무조건 관계를 가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B씨의 행적에 아무래도 수상쩍은 느낌을 받은 부인이 B씨를
다그쳤다.  B씨는 모든 걸 사실대로 고백하고 내가 전에 경고하지
않았느냐 하며 당신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이혼을 원하면
이혼을 해주고, 자식을 원하면 자식을 주고, 집을 달라고 하면 집을
주겠다고 했다.
  부인은 원통해 살이 쪽쪽 빠졌으나 자기가 선택한 결혼을 스스로 깨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부인은 B씨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오면 밖에 나가
기다렸고, 다른 여자와 앉아 있으면 그 옆에 가 앉기도 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 B씨를 다시 자기 곁으로 되돌렸다.
  A씨나 B씨 부인의 얘기를 들은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남자하고
사느냐! 고 팔짝 뛰었지만 그녀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남편이 발작할
때는 또 개지랄하나 보다 하고 무조건 참고 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 이성을 회복하면 남편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와
살살거린다는 것이다.
  정신과 임상에서는 가끔씩  이런 사람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고
찾아오는 남녀들이 많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하도 그럴 듯해 어떻게
인간세상에 그런 악마들이 다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시간이 좀 흐르거나 그 배우자를 만나보면 대개는 지나친 과대 상상이거나
피해 공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 말같이 못견딜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고, 그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대 상상이나 공상에 짓눌려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암흑으로
만들어버릴 때 그 결혼은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남편과 이혼한 C양은 자기 주위의 여자들 중에 남자와 불화관계가
있거나, 사귀는 남자에 조금만 흠집이 있으면 문자 그대로 도시락 싸고
쫓아다니면서 말렸다.  C양은 자기가 술까지 사주면서 헤어지라고
설득하거나, 전화비를 써가며 그 남자의 단점을 고자질했다.  C양의
주장은 한 마디로  그렇게 살 바에야 이혼하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런
남자와 어떻게 만나느냐! 였다.  한창 열애중에 사소한 마찰로 가슴을
태우던 한 여성은 사귀는 남자와 헤어지라는 C양의 충고를 듣고 두고두고
그녀를 원망했다.  싸우는 시어머니보다 싸움을 부추기는 시누이가 훨씬
더 미운 것이다.  그러나 C양의 버릇은 가실 줄 몰랐다.  C양에게는 새로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얘기도 들리나 결혼한다는 얘기는 아직껏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사라하고 사느냐 는 말은 결호늘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등 속에 있는 부부들이 그런
충고를 들을 때는 그 충고 내용의 복잡다단한 당위성에만 귀기울일 게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언젠가 <위기의 여자>라는 연극을 보고 난 뒤 가진 간담회에서 한 번
말을 제대로 했다가 한 여자에게 아주 혼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위기의 여자>같이 위기에서 또다른 자기만의 길을 찾아 나가는 것도
좋지만, 지혜를 발휘하여 그 위기를 슬기로이 넘겨 훗날 자식들의 결혼,
자기네들의 환갑도 같이 맞고, 노후의 벗으로 여생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발끈하며 말도 안된다고  그런
남자와 어떻게 사느냐! 고 화를 냈다.  나는 속으로 그런 남자하고 같이
살 수 없으면 같이 살 만한 남자는 친구로 하나 두고 그 남자하고는
결혼의 의무를 끝까지 지키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하지 못했다.  더 혼날 것 같아서였다.
  배우자와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사람들은, 결혼을 실패로 확정짓기 전에
우선 정신과에 가서 정신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혹시 도저히
못 살 것 같다는 이유가 자기 문제에서 비롯된 부풀은 공상과 상상 때문은
아닌지 객관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공상과 상상이 너무
부풀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 그 무게를 줄인 다음에 다시 눈앞의 현실을
판단하는 것이 좋다.  못 견디게 괴롭다고 무조건 안 산다고만 생각한다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나, 다른 한편으로는 두고두고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행한다는 정신치료가 별 것이 아니다.  부부치료니
정신분석이니 늘어놓기 시작하면 한정없지만 정신치료란 한마디로
요약해서  같이 늙어가는 것 이다.  나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같이 늙어가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렸었다.  그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결혼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같이 늙어가면서 서로 치료하며
사는 결혼이다.  실패하는 결혼이란 두마디로 말해서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살아! 라고 하는 자기 문제가 많은 남들의 말에 혹하거나, 피해
공상이나 과대 공상에 짓눌려 자기가 선택한 결혼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결혼이다.
  부부는 항상 남이다.  혼인의 서약에는 거창한 약속을 하지만 그것만
믿고 의지하기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은 너무 간사하다.  따라서 서로
간사한 인간끼리 더불어 사는 결혼 생활에서는 서로의 불완전함이나
실수를 과장해서 느끼기보다는 서로 인내하고 치료해가며 산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자식들의
눈망울을 생각한다면….
    바람, 바람, 바람
  신혼여행을 갔다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얘기는 신혼부부들이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결혼했다.  사랑을 좇아 결혼했다 말들도
많지만 신혼부부들은 정말 서로 닮았다.  투박한 남자 옆에는 투박한
여자가, 곱상하게 생긴 남자 옆에는 그에 맞는 곱상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들을 뒤죽박죽 섞어놓아도 금세 가려낼 수 있다.  그러던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상대를 외면하며 바람을 피운다.
  바람! 바람피운다! 남은 죽네 사네 심각한데, 거기에 붙여지는 우리의
용어는 너무도 가벼운  바람 이다.  외국에는 아마  바람피운다 같은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피운다 라는 말 속에는 이 땅에서 살아왔던
선현들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바람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보이지 않고 결국에 흘러간다는 것이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토록 심각한 외도도 참고 기다리면 흩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남편의 바람을 보고 길길이 날뛰면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이혼한 여자가 날이 갈수록 인생을 힘들어하며 정신과를
찾아오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다.  그러나 그 선악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고 새로 재혼한 부부가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또 바람하면 생각나는 것이 쌩쌩 부는 바람의 경우이다.  크게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찬바람이 쌩쌩 분다고들 한다.  마음 속의 화가 밖으로
바람이 되어 나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 속에는 어쩌면 분노가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부부들은 어떤 때 상대에게 분노하며 그 분노가 바람으로 변하는 걸까? 
아니 어떤 배우자가 상대를 바람 속으로 내모는 것일까?
  한 정신과 의사는 남자들을 바람으로 내모는 부인의 유형을 두가지로
설명했다.
  한 유형은 사소한 것까지 따지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다.  별로 상황에
맞지도 않고 복잡한 일도 없는데 무조건 이론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한다. 
이런 여자들은 일방적인 타당성만을 갖고 몰아붙이기 때문에 이들을
감당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커다란 고통이다.  이런 여자들은 정서적으로
미숙한 여자로 남자들이 상대하고 싶지도, 안고 싶지도 않은 여자들이다. 
이들의 속성은 처녀 때는 재기 발랄한 매력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해서의 일상까지 이런 식이 지속된다면 이를 끝까지 매력으로 봐주는
남자는 드물다.
  또 한 유형은 생명이 없는 여자들이다.  결혼 전에는 남자에게 그런
대로 신경을 쓰나 결혼 후에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간다.  결혼한 후에
모든 것을 친정을 중심으로 남편과의 가정을 재편성하려는 여자들은
남편과의 새로운 왕국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곧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자기만의 여자를 찾아 밖으로 떠난다.
  바람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바람을 몰고 다니는 경우이다.  상대가
잘못한 것도 없고 자기만의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데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이성이라면 탐하고 보자는 이기적인 속성을
선풍기처럼 달고 다닌다.
  이런 사람들의 바람기를 잡는 것은 우리 어머니들 식으로 늙은 다음에
보자고 벼르거나 빨리 갈라지는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끝없이 엄마
젓을 탐하는 아기와 같기 때문이다.  커서도 엄마 젓만을 먹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 젖은 어디 가도 구할 수
없는데 그들은 끝없이 찾기 때문이다.
  인생에 경험 많은 어떤 남자들은 나이 젊은 여자보다는 나이 많은
여자를, 과거가 없는 여자보다는 과거가 있는 여자를, 집안이 지나치게
차이가 있는 여자보다는 비슷한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떠나서 자기만의 사람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보통 서로 닮은 부부로서 상대를 영원히 내 사람으로 만들기를 바란다면
자기가 먼저 상대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상대의 것이 되지 안고 상대만이 자기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비극을 자초하는 사람이다.  현실의 바람은
비극적으로 차가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으키는 바람은 자연의 바람과 같이 어떤 때는 실바람 같고
어떤 때는 노도 같고 어떤 때는 질풍같이 몰아친다.
  상대가 바람을 피우면은 기절하기 전에 먼저 상대가 자기에게 어떤
분노를 갖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봐야 한다.  부부는 서로 닮아 서로
쉽게 자기 사람이 되지만, 상대가 자기 사람이 아닐 때는 그 분노는 곧
바람이 되어 또다른 자기만의 반쪽을 찾아 떠나간다.  물론 그 바람은 곧
현실의 벽을 만나 대부분 스러지지만, 바람이 할퀴고 간 상처는 둘이 평생
동안 간직해야 한다.
    물 위를 걷는 여자
   바람피운다! …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그 당사자들은 바람이 스쳐가듯 가볍게 그 운명을 맞을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끝없이 제기되는 주제!  무수히 반복되는 비극!  영화
<물 위를 걷는 여자>는 또다시 이 진부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여자!  그 사랑은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비극의 길을 걷고 만다.  해결책이 있다면 누군가가 죽거나 떠나야
하는데, 이 영화는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떠나는 것으로 결말짓고 있다. 
비록 진부한 내용이지만 이런 얘기가 끊임없이 우리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먼 나라의 남의 얘기 같으면서도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얘기! 
그러기에 영화와 연극에서도 즐겨 다루는 얘기!  그러나 언제나 그 해답은
찾을 수 없고 문제만 계속되는 얘기!  동양이고 서양이고간에, 인간
사회라면 어디서나 이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또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그 해답을 준비하고 있는
걸가?  이 영화의 종말을 보면서 결국 느껴지는 것은 인생에 대한 짙은
허무감이다.  결국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명예는, 돈은 또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친구인 민희와 난희는 함께 훌륭한 디자이너를
꿈꾸나, 운명의 장난으로 민희는 재벌집 2세와 결혼을, 난희는 계속
디자인을 공부한다.  세월이 흘러 민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난희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남자(민희의
남편)을 사랑하게 되는 비극이다.  결국 비극의 종말은 민희는 남편을
떠나 원래 자기가 원했던 디자이너의 길로 가고, 난희는 그 남자를 멀리
떠나 외국에서 딴 남자와 결혼하고 만다.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신은
인생에서 짙은 아픔을 경험한 두 여인의 벤치에서의 허탈한 대화이다. 
뒷자막이 흘러나오는 가운데서의 허탈한 대화는 점점 활기를 띠며
명랑해지는데 결국 그들은 인생에서 자기 길로 찾아 들어섰다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 인생에서 자기 길은, 한 남자를 믿고 의지하며
그와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을 쏟아부을 때 같은 안정된 행복감도,
이상적인 남자와의 연애에 자신을 불태울 때의 환희로운 행복감도 아닌,
허탈하고 공허한 삶뿐이지만 어쩌면 인간은 그 이상의 행복은 욕심내서도
추구해서도 안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의 양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을 추구했다간 신의 질투를 받아
어떤 식으로든지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현실의 모든 여건을 초월해서 이상적인 이성과 결합하고 싶은 누구나가
갖고 있는 욕망!  그러나 그 욕망은 바람같이 스쳐가는 것으로 아마도 이
땅 위에는 붙들어둘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성현들은 그 욕망을 바람에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끝까지 그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들은 땅 위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는, 가슴을 시리게 하는 마지막을 맛봐야 한다.  마치
물 위로 내닫는 사람들의 운명같이….
    홀어머니의 외아들 기피증
  전무직종에 근무하는 한 여자가 서른이 다 되도록 홀로인 것을 보고
직장 동료가 안쓰러워 사법고시에 붙은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들은
서로 만나서 잘 될 것 같더니 곧 여자와 여자 집안에서 남자를 거부했다. 
남자가 가난하게 자랐고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은 지금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티를 낸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서른이 넘어 도저히 처녀라고는 볼 수 없는 용모와
히스테리컬한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배우자 선택에 이유가
많다.
  우리 옛말에 물과 사람은 고르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  옛날에는 물도
좋고 사람도 좋아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물도 나쁘고
사람도 나빠서 그런지 물도 고르고 사람도 고른다.  혼기에 다다른
남녀들에게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평생 내 인생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고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고를 때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배경을 고른다.  그 중에는 궁합이 안 맞는다는 둥, 고향이
어디라는 둥, 형제 중의 몇째라는 둥, 시부모가 어떻다는 둥, 시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둥, 학벌과 직업이 어떻다는 둥 종류도 하도 많아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지 종잡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야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우리
조상들이 하늘나라에서 잘 살고 있듯이, 이런 잡다한 이유에 신경 안 쓰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잘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결혼의 상대로 사람 이외의 것들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공상에 맡기는 것이다.  마치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공상하며
정신의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암 공상 환자같이 그들은 자기의 앞날을, 이
사람은 이래서 이럴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저래서 저럴지 모른다는 공상
속에서 미리 죽이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외아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외아들은 흔히 과잉
보호를 받고 자라 친구도 사귈 줄 모르고, 이기적이며 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외아들에 대한 부모의 전념은 아들의 인격성장을 촉진하기도
하고 많은 사회적 장점이나 잠재적인 능력의 개발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그가 어느 쪽으로 살아갈지는 같이 사는 여자의 힘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홀어머니에 외아들을 운운하며 결혼상대로 기피하는 이유는
대개가 공상적인 차원이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은 틀림없는 마마 보이일
것이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강한 집착은 아들을 평생 지배하려고 들
것이며 결국 며느리는 고부간의 갈등에 속만 끓이다 일생을 허비할
것이다라고 공상한다.
  이런 공상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과잉보호, 과잉지배, 과잉간섭하는
어머니, 그 밑에서 자란 줏대 없고 우유부단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은 틀림없이 경계해야 한다.  사람
하나 다시 키운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노력해도 불가능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렇게 문제가 많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외아들을 내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홀어머니, 외아들은 외형적으로 아버지가 없고 형제가 없는 경우가
아니다.  형제가 아무리 많고 그럴싸한 아버지가 있어도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경우가 있고, 아무리 아버지, 형제가 없어도 홀어머니의
외아들이 아닌 경우도 많다.  문제는 그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가 없는 홀어머니가 아니라 그 어머니가 과잉지배, 과잉보호,
과잉간섭형의 어머니가 아닌지, 그 아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자기의 간과 영혼까지 빼놓는 형은 아닌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결혼은 둘만의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기에 새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은 혹시 앞으로 우리가 건설해야 할 나라가 다른 힘에 의해
지배되고 간섭받는 것은 아닌지에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대상은 일생을 두고 과잉보호, 과잉간섭, 과잉지배를 하려는 양가
부모, 특히 어머니들(overdomineering, overinvolving, overconcerning
mother)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참으로 변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싸움에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싸워보기도 전에, 아니 상대를 만나보기도 전에 홀어머니,
홀아들이라고 해서 도망치는 것은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혀 노처녀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런 어머니, 그런 아들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디나 널려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선 상대를 정확히
볼 줄 아느냐 하는 것이며, 또한 일생을 같이 살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과잉지배를 하려는 부모들과 싸워서 이길 줄 알아야 한다.
  과잉보호형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두 환자가 있다.  
  한 명은 집안의 막내였는데 약물남용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환자로
그는 외래로 올 때마다 기분을 좋게 하는 항우울제를 좀더 많이 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는 자기 일은 없었고 부모로부터 생활비를 타서 쓰곤
했는데 그의 생활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또 한 환자는 외아들이었는데 조울증 환자였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는
것에 들떠서 마치 의사가 구세주이기라도 한 양 열심히 치료받을 것처럼
나서다가 어느 날인가에는 소리도 없이 임의 퇴원하곤 했다.
  그 두 환자들에게는 그 부모가 과잉보호형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환자는 모두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두번째 환자는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아직도 내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두번째 어머니의 이기적인
눈빛이었다.  그 어머니는 아주 지배적이어서 남의 말에는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가 약을 지어줘도 일방적으로 약을
조절해서 먹였고 자기의 기분에 따라 임의로 퇴원시키거나 치료를
중단시키곤 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들이 공통적으로 앓는
정신질환은 바로 심한 적개심이 그 원인인 정서장애이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 때 가장 화가 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분이라고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어머니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는 자기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부모가
나이들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세계 일주 등을 하면서 자기의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일생 지배하면서 자기의 여생을 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여생은
부모들을 위한 일생이지 자식을 위한 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잉보호형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 결혼 후 이혼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변변치 못한 아들은 고부간의 갈등 가운데 신음하다가 다음과
같은 말로 항복의 깃발을 든다.
   우리 어머니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
어머니를 절대 거역할 수 없다. 
  자식들은 그 후 일생동안, 남겨진 아이를 쳐다보며 고통 속에 보내야
하지만 그 어머니는 득의의 미소를 지을 뿐이다.
  요즘 강남에서는 40대 주부들이 아기를 새로 갖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아이같이 예쁘고 행복한 노리개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노리개에
맛을 들여서 자식을 평생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이 바로 과잉보호,
과잉지배, 과잉간섭형의 어머니들이다.
  정신질환이란, 나이는 먹었으되 심리는 어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평생 보살핌이 요구되는 병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자식이 정신질환으로
일생 고생을 할 망정 그 아들을 자기 품에서 내놓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런 홀어머니, 외아들을 피하고 싶어하는 미혼 여성들의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피하려고 도망쳐간 바로 그곳에 그 피하고 싶은
대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다.
  홀어머니, 외아들을 정말 피하고 싶은 여성은 정말 문제가 있는
홀어머니, 외아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자신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딸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먼저 평생 부모의 사랑이라는 지배에서 허덕이며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빨리 현명한 배우자의 자세를 갖춰야 문제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아들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정신과 의사의 가출
  얼마 전에 난생 처음으로 가출을 한 적이 있다.  고부간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서였다.
  나는 월급의 반은 어머니를 드려서 살림을 하게 하고, 나머지 반 이상은
직장을 다니는 아내에게 주는데, 돈 액수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못마땅해했다.  상대방에게 주어지는 돈이 아무래도 너무 많다고
서로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쪽 얘기를 들으면 이쪽이 옳고, 저쪽 얘기를
들으면 저쪽이 옳은데, 아무래도 둘 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 낑기다보니 견디기 힘들어 뛰쳐나온 게 가출이라는 방법이었다. 
집안에는 이제 우울증 환자들만이 남았다.  그들은 객관적으로는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지만, 그들 내면에는 부족한 것으로 가득 차 있어
조금도 행복을 못 느끼고 온통 짜증과 분노로 서로를 외면한다.
  우울증의 정신치료에 인지치료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돈 만 원이
있으면 만 원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만 원씩이나 있다고 생각하게
하여, 자기들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항상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치료법인데, 이런 치료가 어머니나 아내에게는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다.  마치 어떤 정신과 의사가 자기 아내만은 절대 정신치료가 안
되더라고 푸념하던 것처럼….
  결국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란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내가 사라져버리면 그들은 느낄 수 있으리라.  소처럼 우직하게
일하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이란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출은 난생 처음이었다.  36년을 살았지만 가출이란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나였기에….
  저녁 일곱시 반에 남부터미널에서 대천행 버스에 올라타니 온갖 서글픈
상념들만이 스쳐갔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군중이나 엄청나게 막히는
교통 체증은 조금도 피부에 와 닿지 않고, 속 좁고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분노만이 가슴 가득히 차올랐다.  부모와 아내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는 다짐만을 입 안에서 굴리며 창밖의 검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천안 터미널이었다.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가락국수로 저녁을 때우고 다시 차에
오르니 갑자기 가슴 깊숙이 시원한 자유스러움이 스쳐갔다.  노부모나
처자에 대한 생각은 이제 먼 나라의 얘기 같고, 나 혼자만이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마치 뒤늦게 성인식을 치르는 소년같이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홀가분한 자유로움만이 내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창 밖의 검은 세상은 이제 나의 모든 사회적인
껍질을 무시하고 덤벼들어 세상에서 나의 무게를 가장 자연스럽게
저울질해줄 것 같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벌거벗은 나만의
무게를….
  교통체증으로 밤 열두시가 넘어 대천에 도착하니, 을씨년스런 검은
바람만이 차갑게 나를 맞이했다.  바다로 가려고 해수욕장으로 가는
택시를 잡는데 웬 술취한 사람이 다가와 당신 누구 아니냐고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섬뜩 스쳐가는두려움에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는 서둘러
택시에 올라타 바다로 향했다.
  어두운 길을 달려 대천 바다에 당도하니 까만 밤바다가 잿빛 파도를
내밀어 나를 반겨주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 아래 밤바람만이 세차게
몰아쳐, 나는 맥주를 사들고 서둘로 여관방을 찾아들어 갔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바닷가로 나가니
바닷가 바위 틈새에서 할머니 한 분이 전복 등 해산물을 팔고 있었다. 
어것저것 사먹으로는 할머니의 권유에 곁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식사 대신
전복을 사 먹게 되었다.
   할머니, 정사는 잘 되세요? 
   아니요, 주말엔 좀 되는데, 잘 안 돼요.  여름엔 한 달에 삼백만
원어치씩 팔기도 했는데…. 
   할머닌 지금 누구하고 사세요? 
   나요?  할아버지하고 단 둘이 살지요. 
   자식들은 없나요? 
   왜유, 아들도 있고 딸도 있지요.  다 도회지에서 잘들 살아요.  한
달에 팔구십만 원씩 벌기도 해요. 
   할머니, 자녀분들이 생활비는 안 드리나요? 
   아무도 안 줘요.  내가 아직 벌 수 있다고… 그런데 아가씨하고는 안
왔수?  여기는 다 쌍쌍이 오는데…. 
   저요?  아가씨가 없어요. 
   왜, 결혼은 안 했수? 
   …. 
  그날 하루종일 바닷가를 걷다보니 한편으론 처량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기뻐하는 신랑 신부들, 쌍쌍의 연인들, 추운 바다 위를 세차게
달려가는 모터 보트 등, 평소에는 무심하게 스쳐지나던 모습들이었지만
갑자기 혼자 있어서 그들을 보니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밤늦게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분노에 들끓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고 겸허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날 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 걱정하는 처와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릴 수가
있었는데, 그들 또한 많이 반성한 듯했다.
  영겁을 통해 돌고 도는 세상, 태고 때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  그 앞에서 인간의 조그마한 분노나 욕심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 번의 파도만도 못한 것을….
  그러나 사람들은 분노와 욕심 때문에 쉽게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어떤 영화에서 30년 만에 전신마비에서 깨어난 만성기질성 정신병환자가
사회를 보고 절규한 대사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삶이 무엇인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잃어버렸어요.  그들을
깨우쳐줘야 해요.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가르쳐주어야 해요.  내가
느낀 건 삶의 기쁨이에요.  삶의 자유라고요.  삶의 경이로움…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잃고 살고 있어요.  일, 놀이, 친구, 가족등… 정신병자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에요.  당신들은 미쳤어요! 
  우리 주위에 항시 존재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작은 것들. 
앞으로는 그 작은 것들을 소중히 하면서 행복하게 삶을 가꿔야 하겠다. 
그러기가 힘들면 가출을 반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육아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
  스트레스란 분명치 않은 개념이다.  그러나 비교적 분명한 것은 삶에서
사건이 있을 때 스트레스는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삶에서의 사건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 사건에로의 적응을 요구한다.
  평범한 처녀 총각이 결혼한 지 채 일 년이 못 가서 돌연히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위치로 변한다는 것은 삶의 사건 중에서도 매우 큰
사건이다.  부모가 된 커다란 책임이 하나하나 시련으로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부모가 되어 환희에 차 있을 때 자녀 양육에 대한
기대는 항상 자기 능력에 비해 너무 높다.  따라서 이러한 높은 역할
기대는 뒤이어 좌절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스트레스를 준비한다.  소위
육아 스트레스다.
  자기의 수준에 비해 너무 높은 부모역할 기대는 대체로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되기 일쑤이다.  부모가 되어 처음으로 범하는 커다란 과오는 그
자신의 인간성을 잊어버리는 데 있다고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박사는
얘기한다.
  아이는 부모의 인간다움, 부모의 그대로를 깊이느끼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며 커야 하는데, 부모가 자기의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쫓겨 항상 어떤 교육적인 틀에 자식을 강제로 맞추게 되면, 대개는 그것은
기대와는 달리 부모 자신에게 스트레스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한편, 육아 스트레스는 곧잘 고부간의 갈등으로까지 연결된다. 
며느리는 나름대로 교육받은 가치관에 따라 아기를 키우고 싶은데,
시부모들은 대개 스스로가 인간적으로 학습된 방식으로 아기를 키우려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상대를 볼 때는 상대가 아기에게 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은 첨예하게 증폭하며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애들에게
대하는 인간적인 태도가 너무나 못마땅한 경우가 많다.  윗세대의
육아방식은 며느리가 볼 때, 이론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또 아이들의
신체발달상으로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소위 교육적이고 합리적인 양육을 한다는 젊은 부모들이
제풀에 꺾여 기본적으로 해야 할 양육자세마저도 회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응급실에서 당직을 하는 의사들 얘기를 들어보면, 밤에 아기를
안고 병원에 찾아오는 경우의 상당수가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유아성 콜릭(infantile colic)이라는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증후군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이를 달래려는 인내나 자세가
쉽게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에 회피하려고 찾아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아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고든 박사는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부모도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도 자녀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임을 인정하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언제나 일관성 있는 감정이나 태도를 자녀에게 보이려고 억지로 노력할
필요도 없고, 부모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식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상대를 받아주는 척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이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를 키울 때는 스스로 우러나오는 느낌에 따라 융통성 있고
자유롭게 반응하며 키울 일이지, 어떤 틀이나 선입적인 지식에 구속되어
아이와 자신을 스트레스 속에 가둬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쎄쎄쎄
  내나이는 서른여섯이다.  마음은 그렇지 않는데 벌써 삼십대 후반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서른여섯이라곤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나이느 서른여섯이 아니라
스물넷이었다.  서른여섯에서 의과대학 8년, 전문의 수련과정 4년을 빼야
내 나이인 것이다.  내가 지금 스물넷이라면 수긍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경험 정도엔 그 정도 나이가 잘 어울리니 말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고생을 많이 했다.  낙제도 하고 휴학도 하고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그래서 성적은 항상 바닥을 기었고 졸업도 간신히,
인턴도 간신히, 레지던트도 간신히 남았다.  그만큼 괴로웠던
시절들이었기에, 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것들을 억지로 한 시절들이었기에,
어쩌면 나는 그 시간들을 공백으로 돌려보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12년간의 되돌아가고 싶지 않던 시절!  참고 또 참고 또 참아야 했던
시절!  그래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기가 무섭게 의학을 잊었고, 정신과
전문의 시험을 치르기가 무섭게 정신의학을 잊었다.  정신의학은
기계같이암기만 하던 의학교육에서 유일하게 숨쉴만한 공간이었으나
서양정신의학이기에 우리들의 정서나 감각,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
너무도 많아 이 또한 빨리 잊으려고 노력했다.
  남들은 학창시절을 낭만적으로 회상하지만 나에게 다시 가라고 하면
지옥에 가라는 것쯤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내 생활이
풀어질 만하면 가끔씩 시험에 시달리는, 낙제에 직면하는 꿈을 꾸곤 한다.
 그 꿈을 꾸고 날 때면 문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면 난 다시
그때의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도 내 주변의 게으름을 살펴보곤
하는 것이다.
  내가 정신과 전문의를 획득하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남들보다 좋은
여건에서 세상을 숨쉴 수 있었다.  나를 옥죄이던 의무의 시간들 뒤엔
내가 대접받으며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주위의 여러가지 인연들은 옥죄오기도 했지만 전같이 절박하지는 않았다. 
이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언제 인턴, 레지던트, 군대를 마쳐 어엿한
전문의 가 되나 하는 꿈은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는 소위 치료라고 하는 것들을 냉정히 따져보면
솔직히 중학교만 나와도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환자하고 상담이랍시고
몇 마디 얘기하다가 이리저리 습관적으로 약 지어주기에 바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정도 일하는 데 그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
그 높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아무튼 난
고급스런  정신과 전문의 김정일 이라는 패 뒤에 의젓하게 앉아
전문가로서의 일을 비교적 잘 수행하고 있다.  아마 우리 사회니까 가능한
일이리라….  보다 감시체계가 잘 된 사회라면 나 같은 돌팔이는
생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 전 모 의대 학보사 기자가 나를 찾아와서 자기네 학생들에게
덕담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소신껏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재미있게
살라고, 그리고 의학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내가
만일 다시 의학을 공부한다면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난 지금 정신과
이외의 의학책이나 노트들은 모두 보이지 않은 곳에 쌓아두었지만 한 권도
버린 것은 없다.  그냥 무작정 고생하면서 정리한 것들이니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살다보니 가끔씩은 그것들을 들춰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내가 그 지식들에 좀더 충실했더라면
인간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곤 한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들을 다시 꺼내어 전념하고 싶지는 않다.
  의무의 시간을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운 시간을 맞은 삼십대 초반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나 자신을 찾는 일이었다.  그동안의 오랜 세월을
적응하기에만 급급해서인지 내 감각, 내 느낌, 내 소망등은 여기저기
마비되고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우유부단해지고
주위에 솔깃하고 나의 길을 가기보다는 주위에서 원하는 길로 자기 심장은
빼놓아버리고 가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이런 우유부단함은 2년 전, 군대를 공중보건의로 마치고 새로 직장을
구할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세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기에 주위 선배나
교수님들의 조언에 따라 직장을 구했지만, 막상 가서 보니 여러가지가
맞기도 했고 안 맞기도 했다.  그래도 인연이 닿아서 온 곳이기에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으나 그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세상은
잔인했고 철저히 자기 이해에 따라 움직였으며 상대는 자기 이익에 비하면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철저히 달면 먹고 쓰면 뱉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 현실 속에서도 나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의과대학 시절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그때 막막한 좌절을 느끼면서 앞으론 두 번 다신 현실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반복했던 것이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언젠가누군가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강요하길래 이렇게 대답했다.
   의과대학 때는 하기 싫은 것도 좋아서 해야 했다.  전공의 시절엔 하기
싫은 것은 싫더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기 싫은 것은 절대 안
한다.  그 동안 그렇게 고생한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인데 지금 와서 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란 말인가. 
  그러나 뒤늦게 자기를 찾으려는 작업은 무척 힘들었다.  특히 이러한
나의 노력에 도움을 줄 만한 지침을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주위에는 온통 이상한 빛깔의 거짓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그래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요즘 난 이렇게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꿈을 적고, 출근하면 환자를 보고, 저녁이 되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느낌, 감성을 좇아 만화, 영화, 연극, 비디오 등을
찾아본다.  물론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가급적 모두 만나고 즐겨
사먹는 음식은 순대국이나 국밥, 짜장면! 술은 생맥주를 즐긴다. 
한동안은 연극과 영화에 미쳤으나 최근엔 만화를 즐겨 본다.  중학교
졸업한 후로는 거의 안 보았던 만화가 영화나 연극, 비디오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우리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밤에는 아이들과
한바탕 스트리트 파이터를 하고 자기 전에는 꼭 쎄쎄쎄를 한다. 
학창시절, 아니 중고등학교 시절과 별반 다름없는 생활이다.
  고생해서 돈 벌고 출세하면 기름진 음식에 비싼 술을 마시며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며 살 것 같지만 그것도 어쩌다지 역시 돌아오는 것은
과거 중고등, 대학교 때의 생활패턴이다.  돈이 있어도 내가 찾아가서
즐기거나 사먹게 되지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입에 낯설고 맞지가 않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쎄쎄쎄이다.  아이들과
쎄쎄쎄를 하다 보면 무언가 모르는 친근한 우리의 정서가 느껴진다. 
오락기에만 찌들어 있는 아들놈도,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딸아이도 쎄쎄쎄는 그렇게 즐겨한다.  그래서 능력이 닿는다면 쎄쎄쎄라는
제목의 동화를 한 편 지어서 일본 오락기나 만화에만 찌들어 있는 아들의
국민학교 입학 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에 요즘 골똘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나의 생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나를 생기있게 진하게
이끌며 고무시켜준다.  내가 느끼는 것들을 마음껏 상상하고 공상하며 내
감각, 내 길을 찾아가는 나의 인생!  내가 바라던 인생을 드디어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둔하고 우둔해서 의학과 나의 길을 병행하며
현명하게 살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허겁지겁 졸업만 해라 하고 의대
시절을 보냈지만 가끔씩 어떤 후배들은 훨씬 현명하게 자기 길을 병행하며
꿋꿋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인생길에서 준비라는 것은 없다.  또, 자기가 편히 갈 수 있는 미리
만들어진 길도 없다.  의사가 되는 길은 험하지만 막상 도달해도 자기가
살아야 하는 것은 이전과 다름없는 삶이다.  어떤 의사는 전문의, 박사를
딴 후 시험이 없어지자 스스로 시험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고 한다. 
그는 대학시절 성적이 우수해 시험을 즐겼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가
불태워야 하는 인생은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찾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 꼭두각시처럼 자기를 내던질 의무는 없다.
  아무쪼록 내 후배들은 남의 가치관에 놀아나지 말고 스스로의 길을
뚜렷이 밝혀 재미있고 생기있게 순간순간을 보냈으면 한다.  뒤늦게
의과대학 생활은 내 인생에서 공백이었다고 푸념하는 못난 선배를 닮지
않으려면….
    2억 원짜리 이야기
  무  대 : 방안.  쇼파와 TV, VTR이 있다.
  나오는 사람들 : 아버지, 어머니, 환상 속의 여인, 딸(미선)
  (쇼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과일접시를 들고
등장해 탁자에 과일접시를 올려놓는다.  무심코 그 과일을 집으려는
아버지.)
  어머니 : (아ㅓ지의 손을 탁 치며) 미선이 올 시간이에요.
  (움찔하는 부, 어머니를 노려본다.  어머니,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화를
든다.)
  어머니 : 아, 여보세요.  응, 나야.  뭐 새로운 정보 없니.  뭐라고…
아, 나야 다 너에게서 정보 얻는 거 아니니.  얘는… 그래, 그래 알았어. 
나도 알게 되면 솔직히 알려줄게.  빨리 말해봐… 어머, 그래, 너무너무
고맙다.  난 오늘 처음 알았어.  나만 모르고 있었네.  큰일날 뻔했다,
얘.  고마워, 내가 나중에 근사하게 한턱 쓸게….  그래, 그럼 안녕. 
(전화를 끊으며) 기집애, 이미 다 아는 것 가지고 생색내긴… 학교 다닐
땐 지지리도 공부 못하더니 자식 새끼 하나 잘 나가 가지고 완전히
상전행세하네, 성전.  이젠 상대도 잘 안하려고 하니… 어휴, 내 원
더러워서… (아버지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태평이에요.  애가 안
들어왔는데….
  아버지 : 누구?  미선이?  아직 들어올 때 안 됐잖아.
  어머니 : 과년한 딸이 밤늦게 안 들어왔는데도 걱정이 안 돼요?
  아버지 : 아, 그러면 당신이나 나가봐.  뻔질나게 잘도 나가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어머니 : 누가 안 나갈 줄 알아.  아직 독서실 봉고차가 도착할 시간이
안 됐으니까 그렇지.  남들 아빠는 어련히 알아서 잘 데려오더구만….
  아버지 : 당신, 그렇게 친구한테 쓸데없는 전화질할 시간이 있으면
시부모님께 전화라도 한통 드려봐!
  어머니 : 어머, 기가 막혀.  나보고 쓸데없는 전화질이래.  아니 당신은
애들 대학가는 일이 그렇게 쓸데없이 보여요.  애들이 대학에 쑥쑥 잘
들어가니까 그게 다 거저 된 건 줄 아나봐.  그리고 지금 시부모님 신경
쓸 여가가 어딨어요.  애 뒷바라지하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아버지 : 당신이 애들 대학입시 때문에 시부모님 못 모시겠다고
뻐튕겼잖아.  시부모님 TV 보는 소리 때문에 애들 공부 방해된다고…
그러니 가끔씩 전화라도 올려야 도리 아냐….
  어머니 : 어머, 기가 막혀.  남들이 들으면 순 도둑으로 알겠네.  아니
그러면 내 말이 어디 틀렸어요.  시부모님이 있어봐요.  어디 신경쓰여서
미숙이와 재형이가 그렇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쑥쑥 잘 들어갔겠나.
  아버지 : 그만둡시다, 그만둬.
  어머니 : 아니, 할 말이 있으면 다 해보라구요.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나.
  아버지 :….
  어머니 : 흥, 당신은 우리 미선이가 지방 대학엘 가도 괜찮다는
생각이죠?
  아버지 : (깜짝 놀라며) 돈을 얼마나 싸발랐는데 지방 대학이야, 지방
대학은.  벌써 들어간 돈이 2억이야, 2억!
  어머니 : (역시 깜짝 놀라며) 아니, 뭐, 그렇게 많이 들어갔어요?
  어버지 : 미숙이, 재형이에게 들어간 돈까지 따져봐!  이건 이자 빼고
순 원금만 계산한 거야.
  어머니 : (손가락을 가지고 잠시 헤다가) 어머, 정말 그러네….  (잠시
기가 막혀하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 흥, 돈만 대는 게 뭐 아버지 할
일인가.  자식에게 관심을 가져야지, 관심을.  애들이 사랑으로 크는 것
몰라요.  (사이) 여보, 미선이 수학 과욀르 좀 바꿨으면 좋겠어요.  수학
성적이 영 안 올라서요.
  아버지 : 누구로?
  어머니 : 요즘 혜성같이 등장한 쪽집게 과외선생이 있대요.
  아버지 : 또, 쪽집게야… 건 얼마 들어?
  어머니 : 얼마 안 들어요.  지난 번보다 쪼금 더 투자하면 돼요.
  아버지 : ….
  어머니 : 여보, 뭐, 불만 있어요?  내 누누이 얘기하지만 재수하면 돈이
천만원 들어요.  천만원… 지금 과외하면 백만원이면 되지만 재수하면
천만원이 든다구요.  이게 다 당신의 부족한 월급 봉투를 생각해서 내가
노력하는 거 몰라요.
  아버지 : 알았어.  내가 뭐래.  (신문만 본다.)
  어머니 : 그럼, 이번 달에는 한 장 더 부탁해요.  그런데 당신, 지금
신문 볼 시간 있어요.
  아버지 : 뭐라고?
  (어머니, 아버지를 노려본다.  아버지, 당황하며 얼른 시계를 본다.)
  아버지 : 이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둘러 비디오 앞으로 다가가 교육방송 녹화를 한다.)
  어머니 : (잠시 노려보며 시끈대다가) 한 번만 용서해주겠어요.
  아버지 : 어휴, 이건 벌써 몇 년째 종노릇이야, 한 녀석이 끝나면 다음
녀석이 시작이니.  세 놈이 왕권을 쥐어잡고 서로 번걸아 계승하니 내
차례는 언제 오나….
  어머니 : (계산기를 꺼내들고 두들기며) 백만원 곱하기 2는 이백마원. 
거기다 담임 선생님께 상납할 것… 이거야 밑 빠진 독에 물붓기지. 
차라리 외국 유학 보내는 게 낫겠다.  애 데리러 갔다올게요.  (퇴장)
  (아버지, 들었던 신문을 내려놓고 한숨을 쉰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자
환상 속의 여인이 등장해 쇼파에 앉아 손톱을 줄칼로 다듬는다.  그녀는
진한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아버지 : 벌써 몇 년째야.  아니, 자식 낳고 평생이 이래.  이건 사는
게 아냐.  마누라는 입시 전쟁에 넋이 빠져 있고 애들은 마누라에 의해
완벽하게 조종되는 로봇고… 오직 경쟁, 경쟁… 이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어.
  여  인 : 난 저렇게 안 살아.  자식에게 저렇게 평생 바쳐봐야 남는 게
뭐가 있어.
  아버지 : 내 말이 그 말이야.  아, 미선이 언니, 오빠 봐!  죽을
고생해서 뒷바라지해 줘봐도 지 애미, 애비 한번 거들떠 보기라도 하나. 
대학 들어갔다고 요즘은 아침부커 저녁까지 콧배기 한 번 안보여….
  여  인 : 게다가 자기 짝이라도 생겨봐.  엄마, 아빠는 완전히
찬밥이지.
  아버지 : 찬 밥만 됐으면 좋겠다.  그나마 말아먹으려고 하지만
않았으며….
  여  인 : 그러게, 내가 뭐래.  나하고 편안하게 잘먹고 잘놀고 잘살자고
그랬잖아.  나 봐, 지금 펑퍼짐한 당신 마누라보다는 훨씬 젊고 더
싱싱하지.
  아버지 : 그럴 걸 그랬나봐.  마누라하고 같이 잔 게 언젠지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어마, 아빠가 옆방에 함께 있으면 애가 신경써서
공부 못 한다고 안된다고 하더니 요즘엔 부정탄대나.  뭐, 입시 백일 전
부부관계는 금기 사항이라나.
  여  인 : 그런 게 어딨어.  나 같으면 더 열심히 하겠다.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스트레스를….
  아버지 :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내 딸년이 그렇게 묵묵히 참으며
공부만 열심히 하지 말고 다른 애들같이 본도도 하고 가출도 하고
자살기도도 했으면 하고 말야….  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런 경쟁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묵묵히 순종만 하고 살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마누라가 알면 아마 돌아버릴 거야.
  여  인 : 내 말이 그 말이야.  당신도 그런 악습에 물들지 말고 열심히
돈 모았다가 노후엔 세계일주 여행이나 할 생각해.  아, 내 이생은 나의
것 아니야.  자식에게 내 인생 다 바칠 이유가 어딨어.
  아버지 : 그럴까.
  (책가방을 든 어머니와 미선 등장.)
  어머니 : 글쎄, 왜 그렇게 늦었어.  딴 때보다 이십 분이나 늦었잖아.
  미  선 : ….
  어머니 : 너 엄마 말이 안 들리니?
  미  선 : 아, 자꾸 말 걸지 말아요.  난 엄마가 말 걸 때가 제일
싫더라.
  어머니 : 얘가 엄마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  빨리 오늘 일어났던 일
하나도 빼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 너 오늘 독서실에서 잠만 잤지.
  미  선 : 어휴, 엄만 정말 왕소름이야.
  어머니 : 빨리 말해.  너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나하고
사생결단나는 줄 알아.
  미  선 :독서실 봉고차가 고장나서 버스 타고 왔단 말이야.
  어머니 : 휴, 난 그것도 모르고 별별 생각을 다했지.  너 요즘 한순간
삐딱했다간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다.
  미  선 : 엄마, 쓸데없는 공상은 그만하고 그 일류병이나 빨리 고치도록
하세요.  (아버지에게)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 오, 미선이 왔냐.  수고했다.
  (미선 쇼파에 반쯤 드러누워 과일을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미  선 : 아빠, 대학은 꼭 가야 해요?
  어머니 : 아니, 얘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
  미  선 : 어머니는 잠자코 계세요.  아빠가 얘기해주세요.  대학은 꼭
가야 해요?  아빠!
  아버지 : 왜, 대학에 가기 싫으냐.
  미  선 : 이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학에 가봤자 올바른 사람이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  좋은 대학을 가서 나와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 될 것만 같애요.
  아버지 : ….
  미  선 :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계속 산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고 그냥 매사
귀찮은 생각만 들어요.  정말 어떤 때는 가출도 하고 싶고, 자살도 하고
싶고 그래요.
  어머니 :(기겁을 하며) 뭐라고, 얘, 안되겠다.  너,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빨리 들어가서 푹 쉬거라.  내일 상담 선생님 만나보자.
  미  선 : 아니, 아빠 말씀 한 마디만 듣고 들어가야겠어요.  아빠,
대학은 꼭 가야 해요?
  아버지 : ….
  미  선 : 아빠도 대학 안 나오고 지금까지 훌륭하게 잘 살아오셨잖아요.
 대학을 꼭 가야 해요, 아빠!  아빠가 꼭 그래야 한다면 전 아빠 말에
따르겠어요.
  어머니 : 여보!  (눈을 부라린다.)
  여  인 : 빨리 말해,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니 너 맘대로 하라고.  나도
앞으로는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살겠다고….
  아버지 : ….
  어머니 : (큰 소리로) 여보!
  여  인 : 아까 당신이 결심한 것 있잖아.  나도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네 뜻대로 하라고….
  아버지 : 일단은… 들어가보도록 하거라.
  미  선 : ….
  어머니 : 자, 자, 아빠 얘기 들었지, 빨리 일어나 네 방으로 가. 
쓸데없는 생각말고….
  (미선, 힘없이 일어난다.  어머니, 옆에서 미선을 부축한다.)
  어머니 : 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네가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일단은 먼저 이 사회의 인간으로 한번 열심히 살아보려무나.
  (어머니, 미선과 함께 퇴장.  아버지, 멍하니 그들이 퇴장한 쪽을
바라본다.)
  여  인 : 에구, 병신… 그러니까 나하구 못 살지.
  아버지 : (벌컥 화를 내며) 아, 그렇게 잘났으면 너도 한번 애 낳아서
키워봐!
    정신과 의사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내아들과 나는 생일이 같다.  아들이 예정일을 앞당겨 아빠 생일날에
태어난 것이다.  손자의 이름을 지으러 할머니가 작명소를 찾아 가자,
작명소 사람은 사주를 짚어보더니  이렇게 사주가 좋은 애는 처음 본다. 
이 아기를 열 살까지만 잘 키우면 아주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끄찬하엿다 한다.
  결국 그 극찬 속에 지어진 아들의 이름은  세륜 이다.  현대의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그 작명소 사람의 얘기를 그대로 맹신하다는 것이 좀
그랬지만, 그 얘기만은 철저히 믿기고 했다.  사실 이런 기분 좋은 얘기를
철저히 믿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너는 크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자꾸 추켜주는 바람에 의당 그렇게 되는 줄 알고 기분 좋게 지금까지
기다리며 살고 있는데, 아들까지 또 큰 인물이 된다고 하니 앞으로 나머지
인생은 정말 신나는 일들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러자니 막상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소 두려움이 스쳐간다.
 혹시 이런 천기를 섣불리 누설했다가 부정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나 아내와 나와의 만남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훌륭한 아이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가운데 만나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그 인연을 소중히 존중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섯 살로 성장한 세륜이가 아내와 나와의 인연의
끈을 더욱 강하게 부둥켜 잡고 이끌고 간다.  사실 아내와 나는 서로
성격도 맞지 않고 갈등도 많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자연의 인연만은
소중히 했기에, 하늘이 소중하고 귀한 영혼을 내려준 듯싶다.
  세륜이가 돌을 지날 때 나는 군대에서 군의관 훈련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기도 해서, 집에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훈련소에서는 전화 한 통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밤에 몰래 장교
막사에 숨어들어가 전활르 한 통화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호통소리가
쫓아와 얘기를 다 끝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아들의 돌만
축하할 수 있었다.
  내무반에 돌아와 누우니 허전한 마음이 자꾸 허공을 날고, 결국 한밤중
불침번 때는 그 공상이 극에 달하고 말았다.  쏟아질 것만 같이 총총한
밤하늘의 별들이 너무도 신비롭게 내 공상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 얘기를 자주 하곤 한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하곤 하는데, 내가 세륜이 돌날에 동화를 지어보냈다는
것이다.
  훗날에 나는 그 동화에  별과 소년 이란 제목을 달았는데, 까만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아들의 전생은 어떠했을까 상상하면서 지었다.
  이 세상에는 참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것을 들라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잠든 아기를 찬찬히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빛이라 하겠습니다.
  저녁 때 시골의 작은 동산에 올라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저 멀리 저녁놀로부터 조그맣게 반짝이는 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별은 너무도 작아 어둠이 짙어가면 주위의 밝은 별들에 의해
흐려지지만, 그 별은 여전히 밤하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그 별도 먼 옛날에는 다른 별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반짝거렸다고 해요.  그 작은 별이 저녁놀과 함께 나타났다가 다른 별들로
인해 흐려지게 되기까지는 전해 내려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답니다.
  그 옛날 언젠가 저 별에는 한 쌍의 아름다운 오누이가 살고 있었답니다.
 오빠의 이름은 세륜이었고 여동생은 애정이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별은 아담한 크기의 작은 별로서, 세륜이는 그 별을 엄마별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누이는 낮이면 호숫가에 앉아 다정하게 속삭였고, 밤이면
풀숲에 드러누워 하늘의 별들을 세었습니다.
  별들 이외에도 오누이에게는 한 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있었어요. 
사자와 호랑이는 항상 오누이 곁에서 그들의 벗이 되어 그들과 함께
뒹굴고 뛰놀며,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륜이는 갑자기 자기가 살고 있는 별을 살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별을 죽 따라가보면 무엇이 나올까?  내가 서 있는
이곳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혹시 내가 보고 있는 것말고도
더 아름다운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호기심이 동하자 세륜이는 그 궁금증을 풀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세륜이는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애정이에게 그러한 자기의 결심을 말하니 애정이는 처음 닥치는 이별에
무척 당황이 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륜이에게 떠나지 말라고 울면서 부탁했지만, 세륜이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세륜이는 걱정하는 애정이를 뒤에 두고
사자만을 데리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공상은 좀더 진행하다가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륜이가 여행을 떠나고 난 후 이 년 뒤에는 동생 애정이도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쓸쓸해서 견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동생 애정이가 이 땅에 태어날 때는 그 아이에게  애정 이라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작명소 사람이  애정 이란 이름보다는  지선
이란 이름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천기에 감히 저항할 수 없어 내 두
번째 딸아이 이름은  김지선 이다.  이제는 지선이도 커서 세 살이
되었다.
  아이들이 크고 나니 집에서 아빠가 하는 일은 주로 얻어맞는 역할이다. 
조금이라도 아빠가 이기려고 하면 토라지고 앵도라져서 도무지 화를 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아들놈은 절대 아빠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처남댁 생일이라 처갓집에를 갔었다.  케이크를 자르고
나자 아들 세륜이가 다시 손톱을 치카치카 부딪치면서 덤벼든다.  한판
뒹굴고 싸움을 하고 나니 삭신이 피곤한 ㄱ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케이크 포장 끈으로 세륜이를 꽁꽁 묶었는데, 세륜이가
억울한지 울음을 터뜨렸다.
  놀라 끈을 풀고 안아서 달래는데 세륜이가 내 팔뚝을 세게 무는 것이
아닌가!  화가 풀릴 만하면 어련히 놓겠지 하고 한동안 물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살점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아파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세륜이의 귓볼을 힘껏 꼬집어 떼놓자 이제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 무섭게 덤벼든다.  나 또한 화가 치밀어 세륜이의 뺨을 세게 때리고
다시 엎어놓고 엉덩이를 두 대 힘껏 때리니 이번엔 한바탕 통곡으로
이어지며 계속된다.
  남의 집 생일에 와서 부자가 물고 치고 싸우니 갑자기 생일집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러나 자녀 교육은 자녀가 부모의 인간다움, 부모의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느끼면서 받아들이며 크는 것이 중요하기에 내
수준에 맞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한동안 시무룩해가지고 아빠 주위를 빙빙 돌면서  아빠, 안 놀아 를
되풀이하던 세륜이가 시간이 좀 흐르자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이틀 아빠가 때린 것을 이리저리 따지더니 이내 다시
명랑해져 또 싸우자고 덤벼든다.
  나는 내가 정신과 의사지만 때대로 정신과 의사가 아이를 키우면 어떻게
키울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는 한다.  인간의 발달과정과 심리를 가장 잘
안다는 정신과 의사가 아이를 키운다면 얼마나 별날까해서… 그래서
정신과 동문 가족모임이라도 있거나 하면 소아정신과 선배들에게 아이들을
보여주는데 대개는 아주 잘 키우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생각해도 나는 내 아이들을 너무 개망나니로 키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과 딸은 아빠를 패기 일쑤지,
아빠도 가만히 맞다가 느닷없이 반격해 사정없이 두들겨주지, 딸은 오빠
닮아 서서 오줌싸기 좋아하지, 아빠와 딸은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하며
애무하는 것 좋아하지 등등.
  결국 집안에서 개망나니같이 놀던 습관은 유치원까지 번져 한 번은
세륜이가 지나가는 차에 돌을 던져 11만 원이나 물어준 적도 있었다. 
제대로 크는 애들을 보면서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따로 믿음이 가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지금은 저래도 제대로 건강하게만 크면
세륜이는 점쟁이 말대로 아주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고, 지선이는
엄마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다채롭게 꾸려나갈
테니까….
  오늘 저녁에도 어김없이 세륜이가 손톱을 치카치카 맞부딪치면서
달려든다.  아빠가 늦게 들어왔다고 엄마의 사주를 받아 덤벼드는 것이다.
 애들에게 꼬집히고 얻어맞으면서도 그들이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가 없다.  마치 먼 별나라에서 여행을 온 왕자님과
공주님을 만난 것같이….
    영혼의 아내
  언젠가 당신을 꿈 속에서 보았지요.
  진리를 머금은 듯 그윽한 시선은
  나의 혼을 뒤흔들고
  당신 앞에 바보처럼 서 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어요.
  언젠가 당신을 여인들에서 보았지요.
  당신이 느껴지기에 당신인 줄만 알고
  쫓아가고 매달려도 보았지만
  뒤에 남겨진 건 어두운 그림자뿐이었어요.
  언젠가 당신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지요.
  반드시 나타날 것을, 반드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내 마음은 
  한 겹, 두 겹, 그 그리움을 차갑게 가두어 두었지요.
  언젠가 당신을 미워했지요.
  아무리 쫓고 쫓아도 잡을 수 없기에
  지쳐 쓰러진 내 영혼은 당신을 저주하며 원망했지요.
  언젠가 당신을 농락했지요.
  당신이 보이지 않기에 당신이 없는 줄만 알고
  혼자 당신이 되어 춤을 추며 낄낄대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당신 앞에 무릎 꿇겠어요.
  당신을 빨리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당신을 포기한 즈음
  깊숙한 눈빛을 머금고 나타난 당신은 여전히 나의 영혼의 아내였어요.
  흐르는 눈물은 앞을 가리고 과거의 회한은 마음을
  어지럽히지만 다시 태어나보겠어요.
  당신을 당신의 혼백을 이 가슴에 안을 수만 있다면
  현세의 생명도 어떠한 인연도 다 부질없어요.
  현세에서의 영혼과의 사랑
  가능하다면 살아 있는 죽음인 정신병을 통과하는 길이겠지요.
  그러나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사랑을 놓치진 않아요.
  당신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정신병원이 아니라 무덤 속이라도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정신병이 아니라 죽음이라도 극복하고
말겠어요.
    제4부 지금 이 순간, 나를 만난다
    진정한 자존심과 쓸데없는 자존심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면 마찰만
있을 뿐 그녀를 가까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무조건 항복하면 어느덧 그녀는 내 품에 있다.
 그녀가 내 품안에 있으면 이제 그녀는 꼼짝 못한다.  그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할 것을 약속한다.
  자존심!  자존심이란 어쩌면 현실의 이득을 쌓아가는 데는 하등
쓸모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일즈맨들을 보면 그들은 절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상대에 따라 수시로 변할 뿐 그들에게 일관된
자존심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세일즈하는 데 하등 쓸모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자존심만큼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도 없다.
  언젠가 <공포의 외인구단>이란 만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주인공 
까치 는 사랑하는 여인  엄지 에게 무시당하며 살 바에는 차라리 성공할
때까지 떨어져 있겠다고 하며 먼 바다의 고도로 떠난다.  결국 거기서
그들의 비극은 싹트고, 그들의 사랑은 비련으로 치닫고 만다.  결국  까치
는 자존심 때문에 사랑의 기회를 놓쳤고, 후에 그 사랑을 돌이키려고 온갖
몸부림을 쳐보지만 부딪치는 것은 비극뿐이었다.
  자존심, 자존심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인 정의로는 자기 수용, 자기
인정, 그리고 자기 존중의 태도를 말한다.  자존심은 정신건강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정신분석학에서 자존심이란 상위 자아와의 관계가
원만함을 의미한다.
  자존심의 상실과 그로 인한 자기 무가치감은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울증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만사가 귀찮고
우울한 상태가 아니라 화가 가득 찬 상태이다.  자기 분노에 스스로를
가눌 길이 없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철저히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는
상태다.  자기가 스스로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존중받지 못할 때 그
좌절은 내부에서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고, 그 분노는 정신과 신체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불면증·식욕 상실·우유부단·주의집중 장애·죄책감 등의
우울증상을 초래한다.  알코올 중독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정신병원과 기도원을 십수 년간 들락날락한 환자가
있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서 술을 끊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주 줏대
있고 호기 있는 남자였는데, 일단 퇴원해서 술을 마시는 동기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부인이 사업을 할 수 있게 사무실을 차려주겠다고
하면 그는 그 사무실 배치나 금전관리 등을 부인이 간섭하는 게 싫다고
거저랗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그러다 힘에 겨우면
술을 찾고, 일단 술을 입에 댔다 하면 쓰러질 때까지 마신다.  말짱할
때는 부인 앞에서 예민하게 자존심을 내세워 밀고 당기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술에 만취한 채 정신병원으로 끌려 들어오는 것이다.
  이같이 인생에서의 기회나 적기를 사소한 자존심 때문에 잃어버리고
뒤늦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존심을 앞세우고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들은 대개 현실과 맞부딪치기를 싫어하는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막상 부딪쳐보면 그다지 자존심 상할 일도, 상대가
그렇게 이해심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그 부딪침이 싫어 혼자만의 세계로
도피한다.  그러나 현실을 피하고 혼자 속으로 웅크려 들어간다고 해도,
대체로 만나는 것은 엄청난 적개심뿐이지 그다지 편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존심!  자존심이란 정말 현실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자존심에는 이같은 현실도피적인 노이로제적 자존심
외에도 자기 중심이 있는 줏대 있는 자존심이란 것이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가 돈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자기 중심이 없는 수시로
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 줏대 없느 사람들은 자존심
강하고 줏대 있는 사람들을 정신병원으로 몰아내면서 사회 각처에서 배를
두들기며 큰소리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사회에 초래한 것은 중심이
없는 혼돈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존심을 갖는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자칫 자존심을 잘못 내세웠다가는 엄청난
분노 속에 스스로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는 용이 제대로
꿈틀거릴 수가 없다.  이무기들은 자신이 용이 되지 못한 억울함 때문에
용이 되려는 사람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진정한 자존심 때문에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면서 그
질곡을 혼쾌히 짊어지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진정한 자존심을 갖는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영혼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에는 그같은 영혼을
가진, 빛을 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나 제 한 몸
편하려고 자존심을 버리고 이리저리 도망치며 굴러 다녀봐도 결국
마주치는 것은 드는 나이와 허무함뿐이다.  확실한 미래의 편안을 위해서
현재의 삶에 아무리 투자를 해도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 학실한 투자가 미래를 죽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자존심을 피해 현실을 쌓으려는 노력은 허무한
근심만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치 현실에서 모든 것을 이루었으나
허무감에 시달려야 했던 파우스트의 독백같이… 평소에는 공상이 대담하게
날아 희망에 부풀어 영원한 것에까지 날개를 펴지만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행복이 차례차례 부서져가면 좁은 공간 속으로 움츠러
들어가버린다.  그러면 갑자기 가슴속 깊이 근심이 깃들고, 그곳에
남모르는 고통이 싹트기 시작하여 불안에 몸부림치면서 기쁨과 안식을
깨뜨린다.  이 근심은 계속 새로운 가면을 쓰고 집이 되고 처자가 되고,
불이며 물이며 단도며 독약이 되어 나타난다.  너는, 나에게 관계도 엇는
온갖 타격에 대해서 떨고 결코 잃을 리도 없는 것을 잃을까봐 끊임없이
걱정해야 한다….
    영혼을 팝니다!
  어떤 아파트에 도둑이 들었다.  그 집 패물을 훔쳐간 도둑이 나중에야
훔친 패물들이 몽땅 가짜임을 알았다.  화가 난 도둑은 그 집 안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야, 이 쌍년아, 진짜 좀 갖고 다녀라! 하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안주인도  도둑주제에…  운운하며 욕을 해댔다.  분개한 그
도둑은  너희 집에 고등학교 다니는 딸 있지, 어디 두고보자 고 별렀다. 
불안한 엄마는 2주간을 등하교길에 딸을 데리고 다녔으나 아무 일도
없기에 그냥 협박이려니 하고 따라 다니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딸은 실종되고 말았다.  2주 후 그 딸은 만신창이가
된 채 쓰레기 하치장에서 발견되었는데, 온몸에 뱀 문신이 새겨지고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후, 딸은 학교를 옮기고 성형수술을 여러 번 받았으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는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두 모녀는 심한
피해망상과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을 찾게 되었다.
  한 가정에, 어느 날 갑자기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실종되었다. 
놀란 어머니는 그 아들을 찾아 온갖 곳을 찾아 헤매었는데, 우연히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깜짝 놀라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지금 저쪽에서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으니 모르는 척하고
그냥 갔다가 경찰을 데리고 와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하였다.  경찰과 함께
아들을 구출해놓고 보니 아들은 생으로 다리가 잘려져 병신이 된 뒤였다.
  이 얘기들은 모두 소문만으로만 들은 얘기다.  근간의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경악스러운 인간성 상실의 범죄들은 그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다 보니 소문으로 퍼지는 범죄의 극악성은 우리 인간 적개심의
최극단을 달린다.  이같은 현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최근 우리 사회가 돈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돈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에 대한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소신껏 살기보다는
수시로 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처럼 덤빈다.  이제 우리 사회에 만연된 것은 자기 중심이 없는
혼돈뿐이고 인간에 대한 불신뿐이다.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보다 더 충격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줏대 있게 정도를 걷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절대 믿지 않는다.  돈만 있으면 최고이며,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게이바에 나가 돈 많은
부인네들 잘 모셔 사업자금을 받아내는 것도 괜찮고, 정부기고나에 돈을
먹여 야합하는 것은 당연하고, 돈 있으면 땅에 묶어놔야 하고, 길거리에서
돈을 주우면 경찰서에 가져다 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바보 짓이다. 
그들이 노상 듣고 보는 것이 그러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돈 중심과 자기 중심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돈 중심의 사회는 이토록 살벌한 것일까?  아무튼 돈 중심의
사회로 변모한다는 것은 무언가 돈 중심의 사회가 자기 중심의 사회보다는
힘이 세기에 그리도 쉽게 변모하는 것일게다.
  돈이 눈에 보이는 물질이고 자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라면 진정한
자기 중심을 갖는다는 것은 혹시 영혼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요즘에는 돈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죽은 생명들만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영혼이 물질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현실에서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물질만능의 세상을 사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만 살려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은 보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현실 외에도 항상 따라
다니는 과거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가 있다.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사는 사람들이다.  자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 외에도 항상 함께 있는 과거, 미래를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현재, 과거, 미래가 다 어우러져 있는 살아 있는
세상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를 통해 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현재에 집착하는 인간과 현재, 과거, 미래를
사는 인간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다.
  바그너: 아아, 연구실에 처박혀 있어 세상 구경을 하는 것도 고작 휴일
정도이고 그것도 겨우 멀리서 망원경으로나 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쌍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파우스트 : 자네가 스스로 느끼고, 자네의 영혼 속에서 우러나와 듣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강한 흥미로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면 네가 생각하는
것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아교로 이어
붙이거나 다른 사람이 먹다 남은 찌꺼기 음식으로 잡탕이나 만들고 너의
잿더미 속에서 보잘것없는 불씨라도 불어 일으키고 있거라! 
어린아이들이나 원숭이를 감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너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는 못한다.

  자기 중심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와 현실, 미래의 삶에서 항상 변함없는
자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열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며, 바로
자기의 일관된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신건강이란 주체성이고
자신에 충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 대부분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자기 의 문제이다.  즉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사회적인 대중적 가치관에 휩쓸려 남을
모방하기만 급급하다가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하고, 옹고집으로 자기만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가 자폐적 분열증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문제는 남과의 관계에서 자기 동일성을 제대로
지켜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 자기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정신질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나가야만 할 우선 과제일 것이다.
    나이는 서른, 정신연령은 열둘
  아이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작은 물건을 가지고 논다.  두세 살이
아이들은 모래알 하나, 티끌 하나를 소중히 가지고 놀고, 나이가 들면
차츰 좀더 큰 물건, 더 넓은 장소를 찾아 논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아무리 좋은 옷이나 비싼 장난감을 사줘도 그 나이 또래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면 대개는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된다.
  사실 어린애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사주는 것은 아이들을
유복하게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노이로제 환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어린 노이로제 환자들은 인간 관계에서 지속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자극과 쾌락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반면에 나이가 들었는데도 세상을 넓게 즐길 줄 모르고 계속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도 노이로제 환자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정신적으로 성숙할 줄 모르고 계속 어린 채로 있으려 하는
것도 정신장애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 삼십대 소년이라는 말이 새로이 등장했다.  삼십대가
되었는데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소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마치 자기는 언제나 어린애로 있어서 모든 보호를
맏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한 양, 책임과 의무를 피하고 그저 편하게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한다.
  부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형제간에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든지, 결혼을 사업으로 생각하여 사람보다는 혼수만을 따지는 어른
소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 요즘은 어른다운 어른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책임과 권리를
다하는 성숙한 성인이 드물기 때문이다.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을
맡기고 타협할 대로 타협하여 실리를 챙기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무조건 빠지고 보는 고도의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잘못
매스컴에라도 올라 단죄되는 사람들은 대개가 재수가 나쁜 사람들이다. 
음성적으로는 누구나 다 자기만의 이익을 챙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드물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어린
사람들만 모여서 모래알 하나, 티끌 하나만을 서로 가지려고 다툰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나이를 생활연령과 정신연령, 사회연령 등으로 구분한다. 
단순한 생활연령 외에도 정신적인 나이, 사회적인 나이가 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성숙도를 알아보는 간편한
방법으론 자신의 정신 방어기제를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방어기제란
인격이 자기를 방어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충돌들 사이를 타협시켜 내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심리적 장치를 말하는데, 이는 정신적인 성숙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학자들은 소아나 정신병적인 상태에서는 자기 중심적
방어를, 청소년은 미숙한 방어를, 미숙한 성인은 신경증적 방어를, 건강한
성인은 성숙한 방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아나 정신병적 상태의 방어기제로는  부정 이나  투사 가
있는데,  부정 이란 자기에 맞지 않는 것은 무조건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투사 란 자기 내부의 문제나 결점을 무조건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청소년의 미숙한 방어로는  퇴행 이 있는데, 이는 어떤 스트레스에
부딪쳤을 때 이를 헤쳐가기보다는 과거의 유약한 어린 수준으로 되돌아가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다.
  또 성인의 신경증적 방어로는  억압 ,  취소 ,  분리 ,  반동형성 등이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욕구나 충동, 사고 등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망각하는 것이다.
  성인다운 성숙한 방어로는  이타주의 ,  유머 ,  승화  등이 있다.  
승화 란 자기 속에 있는 원시적이고 용납되지 않는 충동을,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건설적인 유익한 목적을 위해 표현하게 하는 기제로, 각종 예술,
문화, 종교, 과학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죄책감을 수반하는
성적인 욕구가 낭만적인 예술 창작으로 전환되고, 노출증적 충동이 무용을
통해서 새로운 출구를 찾고, 공격적인 충동이 축구 경기장에서 마음껏
발산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적인 성숙도를 알아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아마도
자기가 세상을 얼마나 넓게 보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도 세상을 계속 좁게 보면서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고 있으면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소아나 정신병적인 퇴행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비록 나이는 어리다 해도 세상을 넓게 보면서 이해하고 시야를
계속 넓혀 나가면, 정신적인 연령으로는 이미 성숙한 성인이 된 것이다. 
정신적인 성숙, 정신적인 연령이란,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마음의 눈을 뜨려는 부단한 내면의 노력에 의해서만
도달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장님들이 사는 세상
  장님들이 사는 세상에는 외눈박이가 왕노릇을 한다.  그러나 그곳에 두
눈이 다 박힌 사람이 가면 그 사람은 두 눈을 뽑히고 만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장님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라고 보호자들에 의해 강제로 정신과에
오는 환자들 중에는 사실 보호자들보다 더욱 건강한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다.  단지 그들은 현실적응을 잘 못하고 주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한다 뿐이지, 때때로 그들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오히려 더욱 건전하고 바람직하다.  그들은 어쩌면 장님들이 사는
세상에서 두 눈을 뜨고 살기 때문에 정상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두 눈을
뽑히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달리 파악하고 느끼며
적응할 것이 강요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유복하게 사는 의사 부부 친굴르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그들 얘기로는 이번에 의대를 졸업한 막내동생이 부모님을
경멸하고 미워하며 자꾸 집을 나가려 하는데, 혹시 이게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그 동생이 부모님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면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들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오히려 그 동생보다는 그 부모가 치료를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부모는 아들이 당신들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부모는 돈, 명예, 지위를 중히 여기면서 그 아들이 대학을 선택하는
것부터 여자 사귀는 것까지 일일이 간섭했으며, 심지어는 그 아들이
당신들 얘기를 안 들을 때는 노골적으로 핍박까지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막내동생에게는 생존을 미끼로 자기를 가두고 있는 그 거대한
감옥 같은 가정을 탈출하여 자기가 원하는 길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은 처방일지도 모르고, 그는 나름대로 그 처방을
찾아 제대로 길을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요즘 들어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아마도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내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은 자기
길을 가고 싶은데 여건이 맞지 않고 사회가 용납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이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지금 우리 사회같이
미지의 시련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로 과장된 분위기에서는 대개는 다음과
같은 교과서적인 것뿐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란 뚜렷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충실히 완수할 줄 안다.  또 집단을 위하는 일이라면 정당한
권위자의 결정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러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목표를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알아차릴 줄 안다.  따라서 받아들일만한 다른 사람의 충고는 서슴지 않고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고, 또한 즐길 줄도
알고, 다른 사람의 결함을 이해와 관용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혼자 되뇌기도 한다.  장님들만이 사는 세상에서 너무
건강하려 집착하지 말라고.  한쪽 눈을 뜨는 것까진 좋은데 두 눈 모두 다
뜨려고 했다간 두 눈을 뽑히기 위해 정신과에 올지도 모른다고….
  결국 개인의 정신건강은 사회의 정신건강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으로서 각 개인은 자기의 정신건강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의 정신건강
또한 책임져야 할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정신건강에 대해서 소홀히
하면서 자신의 정신건강이 계속 유지되리라 기대한다면 그것은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보기를 바라는 거처럼 지나친 환상일 뿐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조용한 어둠 속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노라면 흐르는 별들을
따라 무수한 상념들이 스쳐간다.
  어느 누가 얘기했던가!  밤하늘의 많은 별들은 우리 마음 속의 수많은
콤플렉스가 투사되어 배열된 것이라고….  보석같이 박혀 있는 많은
별들을 마주하다 보면 내 몸은 어느덧 두둥실 떠올라 새까만 밤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파란 별을 하나
따서 품에 안으면 어느덧 내 몸과 마음도 파랗게 물들어버린다.
  인가니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또 인간의 정신이란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것인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우주가 있고, 그
우주는 마음 밖의 우주와 함께 돌아간다.  거대한 도의 운행.  그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 인간의 순리이고 도리이리라.
  얼마 전에 사이코드라마 팀들과 함께 <뻐구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감명 깊고 박진감 있게 진행되는 연극은 정ㅅ니병
한자가 수간호사의 목을 졸라 목뼈를 부러뜨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것!  그것은 치료하면 할수록 거대한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다.  아무리 많은 환자들을 접해도, 치료가 숙달되고
익숙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아무것도 몰라 방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료를 게을리 할 수도 없는 것.  내과
의사가 환자를 게을리 보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지지만,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게을리 보면 그이 인간성을 황폐회시키고 퇴행시켜 버린다.
  정신이 황폐화되어 멍청해진 환자가 정신과 의사의 목을 졸라 목  르
분지른다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다.  그는 신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소홀히 했고, 고귀한 인간정신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1988년 5월 경기도 공중보건의로 배속되어 용인정신병원을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은 무처 가벼웠다.  정신과 전문의를 획득하고 어려운
군대훈련을 마친 뒤 용인정신병원의 한 식구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함은
내게는 과분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용인정신병원의 공기를 호흡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면서부터 내 기분은 그렇게 밝게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수련생활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환자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내 기분이 이런 것인가 하고 자문도 해보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신과 의사라는 천직을 가진 내가 많은
환자들을 봐서 고달프다고 기분까지 답답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관비 병동 면담실에 앉아 차트를 쌓아놓고 환자들을 줄세워 한명씩
보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면담을 끝내고 병동을 나서는 내
발걸음에는 어딘가 모르는 찝찝함이 항상 묻어 있었다.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답답함과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은 항상 내 미소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 한 가닥 기쁨의 빛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관비병동 사이코드라마의 착상이었다.  유료병동에는 이미 기존의
사이코드라마가 있어 환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었지만, 관비병동에는
그들이 치료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터였다.
  또 유료병동과는 달리 관비병동의 보호 환자들은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기대, 애착을 보여주는 보호자들이 절대적으로 결여된 상태였다. 
의료보호의 그늘에서 수혜를 받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관심과 의식주만이 제공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신병원의 고통을 장기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신병과 싸우다 지쳐 이제는 스스로 체념하고 정신병과
타협하여 그대로 망상과 환각, 흐리멍텅한 의식 속에서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그들이었다.  이들을 위해서 내가 조그마하지만 무엇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기쁨이었다.
  그 후 관비병동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하면서 환자들과 어우러져 한풀이
굿판을 벌이는 것은 나의 소중한 하루가 되었다.  드라마를 처음 시작할
때는, 만성적 퇴행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드라마가 잘 진행될까 걱정도
했었지만, 곧 기우임이 입증되었고, 환자들은 서로 다투어서 무대 위로
올라오려고 하였다.  정을 받지 못해 병이 생겼고 정을 받기보다는 정
없이 사는 데 익숙하도록 길들여진 그들이기에 그들은 드라마팀의
조그마한 관심에도 크게 감사를 했고, 정을 받을 수 있는 조그마한
기회나마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나 역시도 내가 사이코드라마에 나의 하루를
이렇게까지 바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다.  처음에 나는,
사이코드라마는 보통 정신과 전문의라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치료수단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고, 용인정신병원에서 내가 사이코드라마를
하는 것은 많은 환자들을 맡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진 치료 수단 중
이에 적합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드라마를 진행하면서부터 사이코드라마는 나의 하루의 일부가
아닌 하루의 전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드라마에서 마주치는
환자들의 처절한 삶, 만성적인 정신적 고통,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
등은 나의 사회적 껍질 이면의 무의식 깊은 곳을 자극하여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사로잡곤 하였다.  점차 사이코드라마는 주 2회의 공연하는
날은 물론, 나머지 날들에서도 나의 하루를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사이코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은 아쉬움과 함께 다음의 사이코드라마를
기다리는 준비기간으로 이어졌고, 나의 하루는 무대 위에서의 자유,
평등과 정신병리, 시공을 초월한 영혼의 탐색에로 끊임없이 바쳐졌다.
  빛을 발하는 사이코드라마!  캄캄한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사로잡혀
의식마저 어두운 저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인도할 수 있는
사이코드라마는 정말 가능한 것인지, 또 어떻게 해야 가능할지, 하는
궁리에 나의 하루는 바쁘게 움직여나갔다.  때로는 내가 만일
용인정신병원에 와서 이 불쌍한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나의 하루를 이렇게까지 빼앗기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러나 어떠한 후회나 회한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인연이
나로 하여금 자기에로의 길을 발견하게 하고, 그 노정에서 보다 풍부한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점점 더 크게 느끼면서,
같이 일하는 보조자와 환자들이 무척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사이코드라마에 바쳐지는 나의 하루는 나의 삶을 허비케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의미있게 가꾸어주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조용한
밤하늘의 별들 사이를 한껏 거닐어본다.

    영화의 정신의학적 측면
  영화는 내 어렸을 때의 꿈이었다.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 나는
신길동에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우신극장이라는 조그만 영화관이 하나
있었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부터 거기서 하는 영화는 거의 모조리 다
보았는데, 한 번은 프로가 바뀌었기에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웃통을
발가벗은 채 남녀가 정사하는 신을 보고 깜짝 놀라 뛰쳐 나온 적도
있었다.
  어릴 때는 어머니 지갑에서 간간이 돈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대부분이 극장에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지, 특별히 맛난
음식이나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영화관을 향한 나의 발길도 넓어져 차츰차츰 영등포
중심가, 시내 극장가로 대상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새로 개봉되는 외화를 하나만 놓치기만 해도 신기하게 느낄
정도였는데, 어떤 때는 영화에 대한 광기가 지나쳐 영화를 안 보면 괜히
우울하고 고독해서 일이 손에 잘 안 잡히고, 영화를 판 편 봐야 비로소
기분도 풀리고 공부도 잘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내 삶의
목표는 삶의 하루하루를 영화같이 살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섣장
시절의 이런 경험들이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를 연이틀 계속해서
감명깊게 감상할 수 있게 해준 듯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영화와는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 초년기의 낭만적인 생활은 더 이상 영화 속의 공상이나 환상에
젖어들 여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에 가면 실컷 영화를
보겠다는 당초의 꿈은 사라지고, 나는 한동안 대학 문화의 여러 가지
낭만에 젖어들어 한도안 영화를 잊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영화에 매료하게 된 것은 1991년 8월경이었다.  오랜
세월 의과대학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다가 겨우 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처음 낸 희곡 <프쉬케, 그대의 거울>이 한창 공연되던 중 우연히 희곡을
영화할 것을 제의받았던 것이다.  처음 그들의 제의를 받았을 때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두말할 것 없이 응낙했는데, 훗날 내가 왜 그렇게
흥분했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영화는 내 어렸을 때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면 영화가 어렸을 때의 꿈이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특히 청소년들은 더욱 그러한데, 청소년들과 사이코드라마를
하면서 영화 얘기를 다루면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나하면서 쉽게
극에 몰입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토록 우리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감히
이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제멋대로 상상을 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영화는 우리의 상상이나 공상이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우리 정신의 자유가 있다.  그래서 엄격한 생활의 틀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현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그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영화가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매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은 단순히 공상 속의 자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나는 상들이라면, 어쩌면 영화는 우리의 무의식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매체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유의 정의를 빌린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 이다.  또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이
어던 식으로든지 떠올라 의식과 만나게 되면 의식은 속수무책으로
무의식에 빨려들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우리가 정신 속에 이미
가지고 있으나 아직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지 못한 무한한 것들, 즉
무의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 엄청난 에너지에 무작정 빨려드는
것은 아닐까.
  중학교 때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를 보고 매료되어 그 후 일곱
번이나 그 영활르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를 처음 볼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영화의 여주인공 마리아가 너무도 나의 누이와 닮게
느껴지는 점이었다.  그 배우는 분명히 외국인이었으나 바로 나의
누이였으며, 그 누이는 지금 현재의 나의 누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이
이상적인 나의 누이로 여겨졌다.  그 영화를 보고 나면 무엇인지 모를
신선한 환희 속에서 한동안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 후에도 소위 명화나 관객들이 찾는 영화를 가서 보면 제일 먼저
느껴지는 감정이 친근감과 신바람, 카타르시스 등이다.  조목조목
따져보면 나와는 거리가 먼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갖가지 모습은
너무도 친근하고, 무언가 내 속에 답답하게 간직되어 있는 것들을 신나고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 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내 속에 간직되어 있으나 아직 모르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알기
쉽게 표현해주는 영화!  그래서 관객들에게 친근감과 시원함, 신바람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  이런 영화들이 소위 관객들이 말하는 좋은
영화이고, 이런 영화가 우리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무의식을 의식에 맞게 포착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꿈을 통하지 않고, 의식이 무의식과 만날 수 있는 그럴듯한 길은  느낌
뿐인데, 이 느낌 또한 시시각각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무의식의 소리를 시기 적절하게 제대로 포착하여
형상화한다는 것은 아마 고도의 예술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관객들은
열광한다.  관객들 자신이 너무도 어려워 포기하고 있는 것들을 영화
속에서 가능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좋은 영화가 그렇게 드문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요즘에는 영화제작의 방향이 황당무계한
슈퍼스타의 액션물보다는 복합적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영화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이제는 슈퍼스타들이 더 이상
흥행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 심리의 델리케이트한
면을 흥미있게 다루면서 우리 인간 정신 깊숙이 잠재해 있는 무한한
무의식의 내용물들을 밖으로 표출했을 때 관객들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영화는 심리학이나 정신의학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최근에 개봉된 좋은 영화들을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흥미로운 현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를 간단히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주제까지 히트시킨 <사랑과 영혼>은 초능력, 심리현상, 유령들이 전편에
흐르고, 또 그 줄거리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신의 물질성과 정신병의
환청현상이다.  영혼 샘(페트릭 스웨이지 분)이 지하철에서 영혼을 만나
영혼이 현실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정신의 물질성이며, 오다메(우피 골드버그 분)라는
흑인 영매자가 샘과 대화를 주고 받고, 영화 끝부분에서 몰리(데비 무어
분)가 샘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정신병의 환청현상이다.
  이들 소재를 가지고 전후 줄거리를 그렇게 신선하게 가져가는 작가의
능력에는 분명히 이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나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몰리가 샘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는데,
만일 샘이 저승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몰리는 환청 증상을 가진 정신병자나
오다메 같은 영매자로 일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 정신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초능력, 심령현상, 유령
등의 집단 무의식 내용들을 정신의 물질성이라는 가설과 환청이라는
정신병리 현상을 통해 우리 일상의 사랑과 연결지음으로써 폭넓게
관객들을 흡수했다고 본다.
  1991년도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하여 화제가 된 <늑대와 춤을>이란
영화도 나에게는 우리 정신 깊숙이 잠재해 있는 집단 무의식의 신화적인
층을 끄집어내어 영상화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논리와 언어, 눈에 보이는
물질만을 지향하는 백인들과, 원시적으로 자신들의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인디언들을 대비하면서 우리 현대인들이 지향하고 지켜나가야 할 신화적인
가치를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광란의 사랑>은 처음부터 치매적
느낌(praecox feeling)이 물씬 풍겼다.  치매적 느낌이란 정신분열증
환자를 처음 볼 때 받는 무시무시하고 기분 나쁜 섬뜩함을 말하는데,
정신분열증을 진단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의사의 느낌이다.  이 영화는
3분의 1 이상이 이 느낌으로 가득 찼는데, 후반부까지  어떻게 저런
영화가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광란한 영화였다.
  요즘 소위 잘 됐다는 영화들을 보면서 많이 느낀는 것은, 요즘 영화들은
이제 노이로제의 수준을 벗어나 정신병 현상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노이로제는 개인무의식에 의해 의식이 해리된 것이고, 정신병은
집단무의식에 의해 의식이 해리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즘 영화들은 이제
개인무의식보다는 집단무의식을 다루는 쪽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집단무의식이란 융이 쓰기 시작한 용어로, 그 안에는 종족의 경험과
믿음이 관련되는 본능적인 충동과 원초적 두려움, 느낌, 경향 및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신과에서는 정신치료를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으로
보는데, 영화가 우리 인간의 무의식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굉장한
정신치료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희곡 <프쉬케, 그대의 거울>을 시나리오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 감독 등 여러 부류의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또는 술을 마시면서 영화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도 많이 듣게 되었는데, 밖에서 영화를 보면서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 우리 영화계의 실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려하게 보이던 것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았고, 자유로우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자유롭지 않았고, 솔직하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솔직하지
않았다.  영화인들은 소재에 대한 빈곤을 느꼈고, 제작 여건이 어려운
듯이 보였으며, 좋은 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감각적인 흥행에 많은 신경을 썼다.
  <몬트리올 예수>, <광란의 사랑>등 여러 가지 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감독이 철저하게 자기의 개성에 충실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밖에 있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신경을 쓰거나 구애받지
않고 감독들이 철저하게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느낌에 충실하면서
만든 영화라고 여겨졌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멍하게 넋을 잃거나
이해가 안 간다며 신경질내고 화도 내지만, 그들 작품은 스스로 빛이
났고, 관객들은 오랫동안 그 작품의 개성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좋은 영화에는 반드시 관객이 온다 ,  영화의 흥행은 아무도 모른다 는
상식적인 말들을, 감독들이 철저하게 자기 개성을 가지고 만든 영화들이
입증해준 듯했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을 보다 보면 가끔씩 짜증도난다.  저 정도면 우리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다.  배우가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스펙터클하지도 않으며, 그다지 돈을 많이 들인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고집스럽게 자기 느낌만을 표현한 것뿐인데, 저 정도의
영화도 우리가 수입해서 봐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화가 우리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매체이고, 이 무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 고집과 개성을 가지고 자기 느낌을 옹글게
견지해나가는 것이라면, 우리 영화도 충분히 광기가 번뜩이고, 신화가
빛나는 아름답고 흥행성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같이 심성이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은 없지만,
그들은 무의식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통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어렸을 때의 꿈이었던 많은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 기대를 하는
눈빛으로 충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으나, 아직
안개같이 분명하지 않은 정신의 부분들을 영화인들이 속시원하게
끄집어내어 선명하게 드러내줄 것을….
    시나리오와 정신과
  영화인들의 정신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 개봉되거나
준비하는 작품들을 보면 정신병 환자, 정신과 의사가 주인공이거나
정신병원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다.  <핸드백 속의 이야기>만
해도 그 여주인공이 정신병자다.
  여주인공 석영은 어렸을 때 받았던 성적인 충껴으로 인하여 서을 강하게
억압하며 고지식하게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 사랑에 눈을 뜨면서 억압된
성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정신병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우연히 인연이 닿아 내가 시나리오 감수를 맡게 되었는데,
감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 스탭들과 어울려 밤새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던 것은 시나리오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제작자측에서는 작품이 성에 차지 않으니 자꾸 수정을 요구하는데,
작가측에서는 아무리 작품을 고쳐도 제작자의 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 
제작자가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고쳐봐도 다시 읽어보면 결국엔
제작자도 작가도 불만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감수를 한다면서 이리저리
관여도 해보았지만 작품의 맥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가
같이 작업하던 여관을 탈출하여 집을 잠적해버렸다.  더 이상 이얘기
저얘기 듣다가는 죽는 밥도 안되겠다는 것이다.  결국 그 작품은 작가의
탈출로 인해 완성이 되었다.
  한 편의 시나리오가 초고 및 재고를 거쳐 촬영에 이르기까지 다듬어지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고
철저하게 고민하고 투자하는데 애 좋은 영화가 안 나올까?  그러나 이렇게
고생해도 좋은 영화 한 편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시나리오가 완성돼가는 과정을 보면서 느낀 것은 결국 때가
무르익어야 작품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마치 봄에 모를
심고, 여름에 경작하고, 가을에 추수를 기다려야 자연의 산물을 얻는
것같이 우리 정신도 고생할 대로 고생하고 또 기다려야 그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우리 무의식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자연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은 바깥의 자연과 일치해서 돌아가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글을 쓰고, 상상하고, 공상하는 것이 모두 우리 무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우리 무의식, 즉 마음속 자연이 제대로 산물을 줄
것을 기대한다면, 끝없이 노력하며 주의깊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전공의 시절에 유명한 작가 한 분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와 면담을
하면서 우연히 글쓰는 작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글을
쓸 때 꼭 꿈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고 고민을 해도 다음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그냥 잠을 자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꿈 속에서 자기 작품의 주인공들이
나타나 다음 상황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재빨리 깨서
그것들을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면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허공에는 떠 다니는 느낌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과
감동으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감수성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다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느낀다.  작가느 그것을
선명하게 글로 포착하고, 감독은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포착해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관객들은 자기도 느끼는 그 안개 같은 느낌이 선명하게
드러나면 카타르시스와 신바람,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적당히
타협해서 노력을 중간에서 포기한 것이나 서둘러 대충 추수한 것이라면
금방 불쾌감을 느낀다.  자기의 자연스런 느낌이 인위적으로 차단당하고
단절당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전에 본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영활르 들 수 있다. 
처음에 영화의 전개를 보녀서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영화에 빨려
들어갔으나, 영화의 후반부가 지나고 극장을 나설 때는 무엇인가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일단 영화가 잘 된 것 같다고 같이 간
친구에게 얘기했으나 그 친구도 뭔가는 짐찜한 듯했다.  그후 시간이 흘러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영화에 대해 솔직한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 펼쳐놓고 수습을 못한 것 같다는
얘기였다.
  한국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을 가만히 들어보면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 있다.   너무 설명적이다.  구성이 약하다.  뒷힘이 없다. 
진부하다 는 등이 그것이다.
  언젠가 한 연극인에게  <에쿠우스>라는 작품이 피터 셰퍼 같은 천재가
이 년 반이나 걸쳐서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 참 놀랍다 고 얘기했더니, 그
연극인이 즉시 대답하기를,  그 나라는 작가가 그렇게 써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다가는 굶어 죽는다 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시나리오가 제대로 완성되기까지 기다릴 수
없는 조급함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각바가다 해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지 않을까?  바나나도 밀려드는 세상에 설익은
과일을 내놓고 아무리 우리 것이니 잘 봐달라고 졸라댄다고 한들 누가
눈길이라도 주겠는가!  사람들이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
정신질환을 다룬 영화들이 국내외로 자꾸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제목까지도 노골적이다.  최근에 개봉된 유럽 영화는 그 제목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왕 한국영화가 정신병을
다루려고 한다면 좀더 과감하게 상상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해서 다루면
어떨까 하고….
  정신병자는 살아 있는 신화이다.  정신병적이 될 때 그는 무수한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마치 점쟁이가 되기라도 한 듯 자기가 느끼고
짐작하는 것들이 현실에서 맞아 떨어지고, 자기의 기분에 따라 날이
흐렸다 맑았다 하며 세상이 온통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무의식에 의해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이 밖으로 투사되면 그는 지구 최후,
우주 멸망의 체험까지 하게 된다.
  정신병자가 주관적으로 겪는 체험을 보면 갑자기 다른 세계로 점프라도
한 양, 그의 일상으로는 전혀 추측할 수 없는 비약적인 체험이 많다.  또,
그 정신병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신화적·동화적·민담적
체험이 있다.  이들 체험을 따로 떼어 옹골지게 표현하면 전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동떨어진 장면들이지만,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는 집단 무의식의 상들이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커다란 감동을 내포한다.  <광란의
사랑>에서 오즈의 마법사 장면, <사랑과 영혼>에서 살아 있는 인간과
영혼이 대화하는 장면등은 모두 광기가 번뜩이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로서 브라이언 팔머 감독의 <드레스 투 킬>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한 몸에 남녀 양성이 있어
괴로워하다가 자기를 성적으로 자극하는 여자환자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시나리오가 정신병이나 정신과 의사를 소재로 다룰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작가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느낌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지, 사실
정신과 전문의의 감수니 뭐니 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정신은 예측할 수 없고 또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핸드백 속의 이야기>를 소위 감수하면서 정시과 의사로서
감수했다기보다는 상상하고 공상하는 것이 좋아서 매달렸다.  얼마전에도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시나리오의 대사를 다듬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혼쾌히 응낙했는데, 그것으 정신과 의사로서
전문지식을 전해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또다시 상상과 공상을 만끽할 수
있어서였다.  공중에 떠 다니는 자연의 느낌들을 내 방식대로 잡아보면
어떤 것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에서….
  아무튼 영화인들이 정신병이나 정신과 의사를 다룰 때는 가능한 마음껏
자유롭게 상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 기본적인
겸허함만 유지하고 있다면, 감히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과
의사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와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
  요즘 들어 연극이나 영화, 문학 등에서 정신질환자나 정신과 의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에는 간간이 등장해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드물던 것이 요즘에는 단골 메뉴처럼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정신질환이나 인간 심리에 대한 호기심은 예술
장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어쩌면 현대인의 정신이 정신질환과 그만큼
가까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신질환자를 소재로 다룬 연극들을 보다 보면 정신과 의사로서
부끄러울 때가 참 많다.  작가들은 저렇게 정신과 의사를 고뇌하는 존재로
그리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들이 고뇌하며 짜낸
심리적인 사건들이나 분석들이 정신의학의 현장에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이 상상하는이상으로, 아니 정신병원 현장에 근무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내적 사건들이 정신질환자들에게는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연극이나 영화에서처럼 치밀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신과 현실이다.
  <에쿠우스>에서 정신과 의사는 절규한다.
   나는 이 환자를 치료했지만, 이 환자의 정열을 죽였다.  정신과
치료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신의 아그네스>에서 정신과 의사는 절규한다.
   그녀가 임신한 자식은 어쩌면 신의 자식일지도 모른다.  이 불가사의
앞에 이성과 합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박사를 찾아서>에서 정신과 의사는 절규한다.
   나는 단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연극 속에서 정신과 의사는 어디서나 안타깝게 절규한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절규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지낼 뿐이다. 
아무리 모순된 일을 봤어도, 아무리 환자가 피해를 보더라도 일단은
조용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롭다.  현실이란 괴물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신경정신과 의원에서 불이 나 심십여 명이 질식해 죽었다.
 그 의원의 원장은 정원 이상으로 입원시키는 등의 잘못으로
엄무상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그는 몰려드는 카메라 앞에서 
관례상 더 입원시켰을 뿐이다.  사망자와 그 유족들에게 죄송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정신과 의사면 누구나 다 느낄 수가 있다. 
그가 얼마나 재수가 없는 경우인지를….
  정신병원은 태부족이고, 종합병원에서는 수지가 안 맞는다고 정신과
병동을 스스로 폐쇄하는 시점에서 정부의 정신보건 정책은 비리를
눈감아주는 정책이었다.  정신질환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그들에 대한
복지 차원에서의 정책 추진은 예산 운운하며 생각지도 않고, 환자들을
적당히 많이 가둬놓는 쪽으로 은근히 조장하며 감싸고 돌았다.  그러다
보니 개인 의원에서 의료법 이상으로 입원을 시켜도 눈감아주었고,
요양원이나 대형 정신병원에서 비인도적인 일이 터져도 덮어주기 바빴다.
  대한민국 어디에 있는 정신병원에도 입원환자는 초과 입원이고,
대부분의 환자들이 받는 진료 수준은 감금 이상을 못 넘는 차원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처럼 한가하게
고지식한 절규만 늘어놓을 수는 없다.  원칙이 없는, 어둠의 원칙만을
고수하는 현실에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들은 약 뿌리기만도 바쁘다.  그래서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처럼 깊은 인간적인 고뇌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들도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들같이 멋들어진 절규를 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고 있는 정신질환자를 다루는 연극,
영화 등에 멋진 소재를 제공해주고 싶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들은 단지 이같은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제발 우리나라에서 중세시대에나 어울림직한 사이비 기도원이나
요양원들로부터 어떻게 처리 좀 해달라고…. 

    전철에서 만난 어느 광신도
  의과대학 시절 때의 일이다.  정신 병동에 실습하러 들어가면 항상 듣는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라는 노래였는데 처음에는 그런 대로 들을 만했으나
나중엔 하도 들으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같이 실습 돌던
어떤 여학생은 실습이 끝난 후에도 그 노래만 들으면 진절머리를 쳤다. 
그녀 자신이 크리스찬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가본 다른 정신병원에서도 그 노래는 유행하고 있었다. 
이대의 경험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환자들이 왜 그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는 걸까?  그 노래는 환자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신병의 공통적인 성질을 표현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궁금증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으나 훗날 정신괄르 전공하면서
광신도 환자들을 많이 만나면서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정주부가 어느 날 갑자기 광신적으로 교회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가정 일은 돌보지 않고 교회에만 밤낮으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나 아이들은 굶기 쉽상이고, 급기야는 가정이 완전히
파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저기 심방을 다니며
남들을 구원하기에만 바빴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이 그녀를 갖은
방법으로 설득도 하고 심지어 구타까지 했으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방패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종교 망상에 빠져 있는 환자들과 얘기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이상 가면
항상 벽에 부딪치는 듯한 느낌이다.  치료자가 아무리 그들을 현실로
이끌려고 해도 그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대로 방패 뒤에 숨어
치료자와 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현실 복귀나 정신 건강은
아주 사소한 가치에 불과하다.  그들은 마치 종교의 교리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 삼는 듯 철저히 현실과 유리되어 산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책임도 인간적인 의무도 호소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서에 씌어 있는 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맹신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고도의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말의 어구 그대로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 자체에도 상호 모순된 말들이 이리저러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신도들은 그런 상징적인 측면은 외면하고 무작정 현실의 모든
것에 편리하게 대입하면서 남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기에만 바쁘다. 
이는 소위 하느님의 방패 뒤에서 자기의 신경증적인, 정신병적인 성향을
계속 유지 발달시키는 것으로, 정신병원에서의 오랜 세월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그들만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연약한 사람들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찌할 수 없이 철저히 구속당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신병원에는 종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에 비참한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성서의 어떤 용어들은 너무 무분별하게
강요하다시피 퍼져 있어, 자아가 약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혼란시키는
경우가 많다.
  마음 약하고 고지식한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성서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 감히 그것에 반박하지는 못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못할 때는 커다란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종교로부터 엄청난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볼품없이 퇴행된 만성 정신분열증
여자환자가 어느 날 나에게 시를 한 편 건네주었다.
   10년 전 혼자 자취방에 앉아 선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성경에 나오는 택한 백성이 아닌 줄 알고 지옥 백성인 것 같아서
겁이 나서 행동을 동작에 맞춰서 일부러 꾸며서 했다.  혼자 자위행위를
했다.  일부러 그 절정을 느껴야 되는 걸로 생각했다.  일부러 그 절정을
느끼는 체했다.  바라다보이는 시선이 점인가, 시선이 쏠리는 것이
점인가.  말소리를 들을 때도 그 점이 들어주고 온갖 삶에 있어서 점이
있다.  정기가 점이다.  점이 들어야 말을 듣는 것이다.  시선과 소리가
집중하는 것이 점이다.  작은 점을 확대시켜야 온몸으로 느끼며 거치는
것이다.  꿈에서 깨듯 공상에서 일어나 보면 허공에 혼자 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무섭다.  아무리 정상 생각으로 돌아가려 해도 잘 안 된다.

  이 환자의 경우, 젊었을 때 종교의 교리를 잘못 받아들여 정신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래도록 반복되니 아무리 정상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잘 안된다.  그러나 어쩌면 이 환자는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어느
설익은 목사나 전도사가 무책임하고 섣부르게 선지자, 하느님 배성, 지옥
백성, 성경 등을 운운하며 협박하지 않았으면 이 환자는 그렇게까지
커다란 강박관념과 죄책감 속에서 고통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환자 자체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휘두르는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로라가 자기 삶을 찾아 남편 헬메르를 떠나려
하자 남편은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해 로라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는 아버지,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의무, 교육, 사회, 법률, 정의,
사랑 드디어 종교까지 동원한다.
  헬메르 : 당신은 가정을 가지고 있어.  그 안에서 차지하는 당신의
위치를 똑바로 인식해야 돼.  이런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지시를 내리는
인도자가 있지 않아!  우리들의 종교 말야.
  노  라 : 저는 종교가 뭔지 잘 몰라요.
  헬메르 :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노  라 : 저는 제가 견진성사 받을 때, 한센 목사께서 하시던 말밖에
몰라요.  그는 종교가 무엇이라는 걸 저에게 누누이 말했어요.  만일 제가
현재의 환경에서 떠나 혼자 있게 되면, 그 말을 철저히 규명해보려고
해요.  한센 목사의 말이 옳은지, 아니 적어도 저로서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느지 말예요.
  이와 같이 그릇된 종교적인 영향마저 뿌리치며 자기의 삶을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로라와 같은 혁명적인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쏟아붓는 종교 언어들 중에는 극적인
주장이 많다.  이들 언어들은 정신병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 잘못
부합되면 그의 병을 악화시키거나 굳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지하철 역이나 길을 가다 보면 웬 점잖게 차려입은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 도(道)에 대해 관심이 있느냐고 묻는다.  내 환자 중의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을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가보니 그들의 종교적
분위기와 자기의 망상적 분위기와는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과는 여러 면에서 말이 잘 통했는데, 그들은 그 환자를 묘하게
들뜨게 만들기도 했고, 그 환자가 신묘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부치기기도
하고, 만일 자기네 종교를 떠난다면 재앙이 뒤따를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그 환자는 상태가 더 나빠져 얼마 후 다시 입원하고
말았다.
  종교심리학에서는 종교현상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간 마음속 깊은 무의식에는 누구나 종교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원천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종교적인 신비체험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며 이에 대해 인간이 취해야 할 기본 자세는 종교적인 겸허한
자세라고 한다.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엄청난 에너지에 접해서 오만을
부린다는 것은 마치 악마와 흥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당장은
구세주나 된 것 같은 위세를 누리게 되나 이내 그는 영혼을 상실한 중심이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종교체험이나
종교현상과 마주치게 될 때는 섣불리 혹하지 말고 항상 겸허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신병동을 거닐면서  사랑 을 노래하는 종교망상 환자들을 볼 때마다
이제는 떠오르는 바울의 얘기가 있다.
  나는 내 영혼에게 말한다.  조용히 있어라.  그리고 희망 없이
기다려라!
  네가 희망을 향하게 되면 잘못된 것을 희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도 갖지 말고 기다려라.
  사랑을 향하면 나쁜 것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다.
  이제 성실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성실과 사랑과 희망은 모두 기다림 속에 있다.
  생각도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너는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둠은 빛이 될 것이고 정적은 춤이 될 것이다.
  I said to my soul, be still, and wait without hope
  For hope would be hope for the worng thing ; wait without love
  For love would be love of the wrong thing ; there is yet faith.
  But the faith and love and the hope are all in the waiting.
  Wait without thought, for you are not ready for thought ; 
  So the darkness shall be the light, and the stillness the dancing.
    아빠도 공부하기 싫었다!
  청소년들에게 우리 현실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또 사는 맛이란 무엇일까?
  한 비행 청소년이 부모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오게 되었다.  부모의
얘기로는 하도 집을 자주 나가고 나쁜 짓을 많이하여 할 수 없이 데리고
왔다고 하는데, 그 청소년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무척 건강하고
자유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를 안 나가고, 부모가 야단칠까봐 두려워서
가출하고, 집 나가 돌아다니다 돈 떨어지고 잘 데 없으면 착한 학생을
두들겨패서 돈 뺏고, 술 취한 어른 지갑 훔치고, 그래도 돈 없으면 공장에
가서 막일해서 의식주 해결하고, 남은 돈으로 술 마시고 영화 보고,
나이트클럽 가서 여자를 유혹하고, 그렇게 놀다놀다 재미없으면 산에 가서
본드 냄새 맡고… 그러나 돈 떨어져서 배고프고 잘 데가 없으면 집에
돌아갈까 생각도 해보고, 그러나 야단맞을 게 두려우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공사장에 가서 돌 하나 들어 자기 머리를
내리쳐보고….
  이 청소년의 사는 방식은 사실 비난받을 만한 것은 없다.  그 청소년은
그 삶의 과정에서 충분히 자유롭고 행복했으며, 현대 사회는 바로 그런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돈이 바로 행복이니, 돈만 벌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자기 마음대로,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쓰며 즐기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니 말이다.
  실제로 이 청소년은 그렇게 즐기면서 사는 동안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한 해에 자살하는 청소년이 백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국민학생들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살하는 청소년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민주화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쩌면 저 자살하는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정신구조에 대항해 스스로 자기를 그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비행을 마음껏 저지르는 청소년들을
보면 어쩌면 저들은 영웅적인 혁명가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혼이 없는 사회, 영혼이 없는 이 죽은 사회를 철저히 부숴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행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다.  돈 앞에 무기력한 어른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징 않으려 하고, 자기 소신껏 자기 주장을 펴기보다는, 이리저리
책임을 회피하면서 대충 즐기며 편하게 살아보려고 눈이 벌개진 어른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그런 어른 사회를 보면서 자기가 택해야 할
길을 너무도 빨리 찾아낸다.  더 이상 살아봤자 낙이 없으니 빨리 죽든가,
그런 사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쪽으로….
  얼마 전 신문에서 프랑스의 교육환경에 대한 단신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지금 집단으로 행동을 취하려는데, 그것은 교육환경의 개선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현 교육환경은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히
파라다이스이다.
  그러나 독재체제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투신자살하고 분시자살해도
독재체제는 붕괴되지 않았다.  독재체제를 부순 것은 국민들이 단합해서
힘의 혁명을 이루었을 때뿐이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말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소극적인
자살기도의 투쟁방식에서 벗어나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살아남는 힘의 혁명방식을 택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배부르고 의식이 굳어버린 어른들이 길을 안내해주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 자기의 고집과 개성을 빛내면서
악착같이 자기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낮엔느 빛 가운데서 서로
어우러지며, 감동과 조화, 믿음을 나누며 일하다가, 어둠이 다가오면 그
어둠이 주는 평안과 안식을 조화롭게 누리면서 깊은 수면에 들어가는
삶다운 삶을 누려야 할 것이다.

    무지개는 반원이었습니다
  무지개 너머 어딘가 자장가에 나오는 나라가 있어요.
  저 너머엔 하늘이 푸르고 우리의 꿈이 이루어져요.
  별님에게 빌면 먹구름 없는 곳에 가게 될 거예요.
  걱정이 레몬즙같이 없어지는 곳에 난 가게 될 거예요.
  무지개 너머엔 파랑새가 날죠.  나도 그처럼 날고 싶어요.
  나도 파랑새처럼 무지개 너머에 가보고 싶어요.  
  오즈의 마법사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제가 가사이다.  무지개란
무엇일까?  무지개는 인간 심리에 어떻게 비춰지는 존재일까?
  최근에는 서울에서 무지개를 본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졌다.  아마
요즘 자라나는 청소년들 중에는 무지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지개를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나 또한
자라면서 무지개를 본 것은 손꼽을 정도인데 그래도 무지개라는 소리를
들으면 괜시리 가슴이 설렌다.
  무지개란 무엇일까?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  혹시 그 속에는 인간들의
꿈과 이상, 순수, 허무, 하늘로 향한 길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한 친구로부터 청소년 문제와 관련된 시를 한 편 받게 되었다.

  무지개를 잡으려면 날아봐요.  날쌔게.  잽싸게….
  무지개는 금방 사라져버리니까요.
  무지개는 얄밉게 상큼한 날 잠깐만 나타나니까요.
  책상에 앉으래요.  무지개를 잡으려면.
  대학에 가래요.  무지개를 잡으려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래요.  무지개를 잡으려면.
  그러나 무지개는 잠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죠.
  그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무지개를 뜨게 하려고 
  엄마가, 아빠가, 학교가 비를 만들어요.  무지개를 뜨게 하려고
  아!  그러나 무지개는 곧 사라질 텐데요.
  무지개가 사라지면 허무해서 어떡하죠?
  무지개가 사라지면 무얼 위해 살아야 하죠!
  무지개는 영원히 뜨지 않는 게 좋을지 몰라요.
  무지개가 뜨는 날!  난 그날이 두려워요.  피하고 싶어요.

  무지개의 덧없음!  기성세대의 욕심에 치이며 시달리다가 심지어는
무지개까지 원망하는 청소년의 고뇌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였다.
  무지개를 가만히 그려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무지개는 둥근 원이 아니고 반원이다.
  정신병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들은 마치 현실에서 무지개를
잡으려는 사람들이고, 그것도 반원이 아닌 동그란 무지개를 좇는 것 같다.
 현실에서 동그란 무지개를 본다면, 아마 그 누구라도 미쳐 버리지
않을까?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그래서 현실에서 사랑의 안타까움을 맛봐야
했던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시를 지었다.

  무지개 왼편에 내가 서 있어요.
  무지개 저편에 왕자님이 있어요.
  우리는 어떻게 다시 만날까요.  저 하늘에 무지개가 반원인 것을.
  당신이 올래요, 내가 갈까요?
  그러나 어떡하죠.  무지개가 넘어지면….
  당신도 올라오세요.  나도 올라갈게요.
  그러나 오르기엔 생명이 너무 무거워.
  무지개가 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을 마음껏 만날 수
있을테니….

  반원인 무지개!  어쩌면 이는 현실을 도외시한 지나친 이상주의나
완벽성을 경계하는 하늘의 소리일는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금세 사리지는 반원뿐인 무지개!  이밖에 무지개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 가르쳐줄까?
  어느 꿈 많은 소년이 무지개 동산에 올라가 무지개 나라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여행한다면 그는 무엇을 발견할까?
 
  먹구름 문 열은 하늘
  아스팔트 패이도록 비 뿌리더니 햇빛 축복!
  그 환희, 그 열광 속에 무지개 성이 나타났어요.
  몇백 년 동안 다스릴 자 찾고 있는 기다림의 성!
  또다시 주인없이 사라지고 나면
  색깔 없는 햇빛만이 등등.
  주문을 외워봐요.
   나는 호기심 많은 소년!
  꿈을 현실로…
  간절히 원해요. 
  온 마음을 모으고 다리에 힘주면
  인력의 한계 벗어나 시공을 초월해 끝없는 여행!
  하지만 그곳도 확실한 건 없어, 고정된 것도 없어.
  그곳도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호기심으로 자신이 선택해요.
  안전하지 않고 지름길이 아니면 어때!
  황량한 들판 꼬불꼬불 오솔길이면 어때!
  어차피 무지개는 직선이 아니잖아요.
  색깔만 있는 무지개에 우리 빛을 주어요.

  우리가 꿈꾸어왔던 이상적인 하늘의 나라!  그 나라도 어쩌면 땅 위같이
불확실한,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불완전한 곳일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곳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자기가 선택해서 하고, 서로가 조급하게
경계하지도, 남을 쓸데없이 간섭하지도, 무시하지도, 잡아내리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과거와 현재에 묶인, 지금 이 순간
  퇴근을 해서 책상에 앉으니 여러 가지 스케줄로 인해서 은근히 뒷골이
압박되어온다.  세미나 준비, 원고 정리, 강의 준비 등등으로 인해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만 여겨진다.  갑자기 왜 이리 바빠졌는지 모르겠다.  새
봄이 시작해서 그런가?
  이때 갑자기 두 아이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천진하게 웃으며 아빠에게
놀자고 달려든다.  그러나 나는 지금 걔들과 놀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것저것들을 그럴 듯하게 해서 넘겨야 하는데, 애들과 어울리다간
아무것도 못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모르는 애들은 아빠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주위에 진을 치고 물러설 줄을 모른다.  급기야 아들은 아빠
컴퓨터를 자기가 쳐야겠다며 내놓으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딸은 해맑은
웃음을 연방 짓고, 아들은 아빠 의자로 밀고 올라오고, 거기에 엄마까지
합세해 빨리 애들 씻기라고 성화니 이제 일하긴 다 글렀다.  속으로
걱정을 잔뜩 안고 애들을 째려보니 애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그칠 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 왜이리
고생일까?  행복하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옥황상제도 부러워하는 지고의 행복이 눈앞에 있는데 내가 왜 이것을
버거워할까?  내가 아무리 세미나를 잘 하고 남 앞에서 으시대봐도 그들이
나에게 이런 행복을 안겨줄 수 있을까?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어쩌면 이런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미래에 대해 준비하기를 강요받으며
자라왔다.  그러다 보니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앞날을 위해
공부해라, 공부해라! 는 얘기뿐이고, 논다는 것은 마치 아주 커다란
잘못이라도 되는 양, 숨거나 도망다니며 놀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마음
편히 논 기억들이 별로 없다.  항상 미래를 준비해야 했고, 눈에 보이는
진보를 획득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그 습관이 반복되고 있다. 
무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유가 없고, 무엇을 준비하는지조차 잊은 채
항상 일에 쫓기며 산다.  어쩌다 여가라도 있을라치면 괜히 불안하고
막연하게 죄의식마저 느껴져 괜스레 일을 만들기도 한다.  여가나 휴일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성인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항상 남이 좋다는 것만을 좇으며 거기서
안주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할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밟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우리의 인생은 대부분 과거와 미래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현재는 마치 과거의 이루지 못한 소망과, 미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 그 무엇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에 묶여서 사는 삶은 어쩌면 삶의 참 가치를 모르고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라는 존재는 없고 과거의 그림자와 미래의
환영만이 있을 뿐이다.  현재, 특히 지금 이 순간에는 삶을 영원으로
가져갈 수 있는 엄청난 핵에너지가 잠재해 있다.
  언젠가 어떤 영화인의 얘기를 흥미롭게 들은 적이 있다.  영화는 한
시간 반 이상을 하지만, 만일그 동안에 23초간의 정말 진실된 순간이
있다면 그 영화는 굉장한 감동을 주는 명작이 된다고… 타당한 얘기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순간 속의 엄청난 에너지를 간과하고 순간을 죽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삶은 줏대가 없고 점차 메말라버린다.  눈앞에서 어떠한 돈과
명예를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이 달려들지만 같이 어울리기보다는 알 수
없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그 행복을 포기하고 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순간들!  지금 이 순간들이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
때문에 헛되게 지배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에필로그
    거울나라
    나와 그대, 그리고 우리의 2세를 위하여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기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드래요.  샤바샤바 아이 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샤바 아이 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은선이는 방구석에 혼자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진이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은선이는 저 노래가 무슨 뜻인지 알고나 부르는 걸까? 
  은선이는 계모를 기모라고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여섯 살 난
은선이에게 계모라는 말은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선이는 그
노래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세진이와 은선이가 이 희망고아원에 맡겨진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습니다.
  그 무서웠던 밤 이후, 그들은 무뚝뚝한 고모의 손에 이끌려 이 고아원에
맡겨진 것입니다.  고모는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고는 화난
표정으로 총총히 가버렸습니다.  세진이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날
밤의 일은 정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아원에서는 다행히 마음씨 좋은 원장님을 만나 고생은 안 했습니다. 
원장님은 그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장님이 아무리 잘해주셔도 엄마, 아빠를 보지 못하는 외로움만은
달래지지가 않았습니다.
  세진이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손거울을 꺼냈습니다.  세진이에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는그 엄마의 손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늘
그 손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화장을 하곤 했습니다.  그 손거울을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진이는 마치 엄마 곁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세진이는 엄마가 화장할 때 곁에서 수다떨며 장난감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거울을 보고 있을 때만은 세진이는 엄마
품속에 있었습니다.
   오빠, 뭐해? 
  은선이가 똑똑치 않은 발음으로 오빠를 부르며 다가왔습니다.  세진이는
얼른 거울을 감췄습니다.  은선이가 달라고 떼쓰기 시작하면 큰일입니다. 
은선이는 고아원에서도 유명한 떼쟁이였습니다.  한 번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루종일 울어서라도 기어코 가지고야 마는 애였습니다.
   응, 아무것도 아냐. 
   오빠!  엄마는 언제 와? 
   엄마…? 곧 오실 거야. 
   정말? 
   응! 
   거짓말!  오빠는 거짓말쟁이야.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오빠, 나
엄마 보고 싶다. 
  은선이의 얼굴이 흐려졌습니다.  세진이는 갑자기 은선이가 가엾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안 오시면 오늘 밤에 내가 재미있는 것 보여줄게. 
   정말? 
  은선이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습니다.  은선이는 엄마도 엄마지만
재미있는 걸 보여준다는 말에 신바람이 났습니다.
  은선이는 워낙 개구쟁이라 고아원에 와서도 그렇게 엄마를 찾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친구들과 장난감들 속에서 놀며 곧잘 하루 해를
넘기곤 했으니까요.  간혹 엄마를 찾을 때도 있었지만, 곧 온다고 하면
이내 넘어가고는 했는데, 오늘은 유난히 엄마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세진이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은선이에게 약속은 했지만,
은선이가 거울을 보고 빼앗아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은선이가 떼쓰는 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진이는 아무래도 오늘이 손거울을 보는 마지막 날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아원 뒤뜰에 있는 창고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세진이는
혼자서 마음껏 거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세진이가 어렵게 찾은
자기만의 공간이었습니다.  세진이는 그곳에서 거울을 보며 하루 온종일을
보내곤 했습니다.
  저녁밥을 먹을 때도 엄마는 오지를 않았습니다.  은선이는 엄마가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도 되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세진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세진이는 할 수 없이 은선이를 데리고 창고 방으로
갔습니다.
   보여주는 대신 약속이 하나 있어! 
   뭐? 
   절대 달라고 하면 안 돼. 
   알았어. 
  은선이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보고 나서 생각할 일입니다. 
세진이는 아무래도 찜찜해하며 거울을 꺼냈습니다.
   애개… 거울이잖아! 
  은선이는 거울을 보자마자 금방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루종일
기다린 것에 비하면 너무나 약소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통 거울이 아냐. 
   그럼? 
   응… 요술거울이야. 
  세진이는 엉겁결에 말했습니다.  자기가 소중히 생각하는 것만큼 은선이
생각하지 않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요술거울?  어디 봐! 
  은선이는 빼앗다시피 거울을 가로챘습니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거울을
둘러보다 환희에 차서 세진이를 돌아봤습니다.
   정말, 요술거울이네! 
  세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안에서 엄마가 보여. 
  은선이가 소리쳤습니다.
   뭐? 
  세진이는 깜짝 놀라 자기도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잘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세진이와 은선이는 뚫어져라 거울을 보았습니다. 
사방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세상에는 그 손거울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정말 그 거울 속에서는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엄마, 엄마! 
  세진이가 놀라서 외쳤습니다.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웃기만 하면서
거울 밖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손거울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며 세진이와
은선이를 감쌌습니다.
  얼마나 흘렀을까.
  세진이와 은선이는 아주 밝은 빛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주위는 아주
고요했습니다.  밝은 빛에 다소 눈이 익숙해지자, 앞에 두 개의 언덕이
마주해 있고 그 너머로 파란 땅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언덕
위에는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들 네 명이 마치 조는 것같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입가에는 알듯 모르듯 신비로운 미소가 서려
있었습니다.  세진이와 은선이는 서로 손을 잡고 조심조심 노인들을 지나
파란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륏 인연이 닿아 내가 시나리오 감수를 맡게 되었는데,
감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 스탭들과 어울려 밤새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던 것은 시나리오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제작자측에서는 작품이 성에 차지 않으니 자꾸 수정을 요구하는데,
작가측에서는 아무리 작품을 고쳐도 제작자의 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 
제작자가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고쳐봐도 다시 읽어보면 결국엔
제작자도 작가도 불만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감수를 한다면서 이리저리
관여도 해보았지만 작품의 맥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가
같이 작업하던 여관을 탈출하여 집을 잠적해버렸다.  더 이상 이얘기
저얘기 듣다가는 죽는 밥도 안되겠다는 것이다.  결국 그 작품은 작가의
탈출로 인해 완성이 되었다.
  한 편의 시나리오가 초고 및 재고를 거쳐 촬영에 이르기까지 다듬어지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고
철저하게 고민하고 투자하는데 애 좋은 영화가 안 나올까?  그러나 이렇게
고생해도 좋은 영화 한 편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시나리오가 완성돼가는 과정을 보면서 느낀 것은 결국 때가
무르익어야 작품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마치 봄에 모를
심고, 여름에 경작하고, 가을에 추수를 기다려야 자연의 산물을 얻는
것같이 우리 정신도 고생할 대로 고생하고 또 기다려야 그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우리 무의식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자연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은 바깥의 자연과 일치해서 돌아가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글을 쓰고, 상상하고, 공상하는 것이 모두 우리 무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우리 무의식, 즉 마음속 자연이 제대로 산물을 줄
것을 기대한다면, 끝없이 노력하며 주의깊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전공의 시절에 유명한 작가 한 분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와 면담을
하면서 우연히 글쓰는 작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글을
쓸 때 꼭 꿈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고 고민을 해도 다음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그냥 잠을 자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꿈 속에서 자기 작품의 주인공들이
나타나 다음 상황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재빨리 깨서
그것들을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면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허공에는 떠 다니는 느낌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과
감동으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감수성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다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느낀다.  작가느 그것을
선명하게 글로 포착하고, 감독은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포착해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관객들은 자기도 느끼는 그 안개 같은 느낌이 선명하게
드러나면 카타르시스와 신바람,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적당히
타협해서 노력을 중간에서 포기한 것이나 서둘러 대충 추수한 것이라면
금방 불쾌감을 느낀다.  자기의 자연스런 느낌이 인위적으로 차단당하고
단절당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전에 본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영활르 들 수 있다. 
처음에 영화의 전개를 보녀서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영화에 빨려
들어갔으나, 영화의 후반부가 지나고 극장을 나설 때는 무엇인가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일단 영화가 잘 된 것 같다고 같이 간
친구에게 얘기했으나 그 친구도 뭔가는 짐찜한 듯했다.  그후 시간이 흘러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영화에 대해 솔직한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 펼쳐놓고 수습을 못한 것 같다는
얘기였다.
  한국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을 가만히 들어보면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 있다.   너무 설명적이다.  구성이 약하다.  뒷힘이 없다. 
진부하다 는 등이 그것이다.
  언젠가 한 연극인에게  <에쿠우스>라는 작품이 피터 셰퍼 같은 천재가
이 년 반이나 걸쳐서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 참 놀랍다 고 얘기했더니, 그
연극인이 즉시 대답하기를,  그 나라는 작가가 그렇게 써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다가는 굶어 죽는다 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시나리오가 제대로 완성되기까지 기다릴 수
없는 조급함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각바가다 해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지 않을까?  바나나도 밀려드는 세상에 설익은
과일을 내놓고 아무리 우리 것이니 잘 봐달라고 졸라댄다고 한들 누가
눈길이라도 주겠는가!  사람들이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
정신질환을 다룬 영화들이 국내외로 자꾸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제목까지도 노골적이다.  최근에 개봉된 유럽 영화는 그 제목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왕 한국영화가 정신병을
다루려고 한다면 좀더 과감하게 상상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해서 다루면
어떨까 하고….
  정신병자는 살아 있는 신화이다.  정신병적이 될 때 그는 무수한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마치 점쟁이가 되기라도 한 듯 자기가 느끼고
짐작하는 것들이 현실에서 맞아 떨어지고, 자기의 기분에 따라 날이
흐렸다 맑았다 하며 세상이 온통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무의식에 의해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이 밖으로 투사되면 그는 지구 최후,
우주 멸망의 체험까지 하게 된다.
  정신병자가 주관적으로 겪는 체험을 보면 갑자기 다른 세계로 점프라도
한 양, 그의 일상으로는 전혀 추측할 수 없는 비약적인 체험이 많다.  또,
그 정신병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신화적·동화적·민담적
체험이 있다.  이들 체험을 따로 떼어 옹골지게 표현하면 전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동떨어진 장면들이지만,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는 집단 무의식의 상들이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커다란 감동을 내포한다.  <광란의
사랑>에서 오즈의 마법사 장면, <사랑과 영혼>에서 살아 있는 인간과
영혼이 대화하는 장면등은 모두 광기가 번뜩이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로서 브라이언 팔머 감독의 <드레스 투 킬>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한 몸에 남녀 양성이 있어
괴로워하다가 자기를 성적으로 자극하는 여자환자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시나리오가 정신병이나 정신과 의사를 소재로 다룰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작가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느낌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지, 사실
정신과 전문의의 감수니 뭐니 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정신은 예측할 수 없고 또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핸드백 속의 이야기>를 소위 감수하면서 정시과 의사로서
감수했다기보다는 상상하고 공상하는 것이 좋아서 매달렸다.  얼마전에도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시나리오의 대사를 다듬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혼쾌히 응낙했는데, 그것으 정신과 의사로서
전문지식을 전해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또다시 상상과 공상을 만끽할 수
있어서였다.  공중에 떠 다니는 자연의 느낌들을 내 방식대로 잡아보면
어떤 것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에서….
  아무튼 영화인들이 정신병이나 정신과 의사를 다룰 때는 가능한 마음껏
자유롭게 상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 기본적인
겸허함만 유지하고 있다면, 감히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과
의사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와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
  요즘 들어 연극이나 영화, 문학 등에서 정신질환자나 정신과 의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에는 간간이 등장해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드물던 것이 요즘에는 단골 메뉴처럼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정신질환이나 인간 심리에 대한 호기심은 예술
장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어쩌면 현대인의 정신이 정신질환과 그만큼
가까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신질환자를 소재로 다룬 연극들을 보다 보면 정신과 의사로서
부끄러울 때가 참 많다.  작가들은 저렇게 정신과 의사를 고뇌하는 존재로
그리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들이 고뇌하며 짜낸
심리적인 사건들이나 분석들이 정신의학의 현장에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이 상상하는이상으로, 아니 정신병원 현장에 근무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내적 사건들이 정신질환자들에게는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연극이나 영화에서처럼 치밀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신과 현실이다.
  <에쿠우스>에서 정신과 의사는 절규한다.
   나는 이 환자를 치료했지만, 이 환자의 정열을 죽였다.  정신과
치료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신의 아그네스>에서 정신과 의사는 절규한다.
   그녀가 임신한 자식은 어쩌면 신의 자식일지도 모른다.  이 불가사의
앞에 이성과 합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박사를 찾아서>에서 정신과 의사는 절규한다.
   나는 단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연극 속에서 정신과 의사는 어디서나 안타깝게 절규한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절규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지낼 뿐이다. 
아무리 모순된 일을 봤어도, 아무리 환자가 피해를 보더라도 일단은
조용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롭다.  현실이란 괴물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신경정신과 의원에서 불이 나 심십여 명이 질식해 죽었다.
 그 의원의 원장은 정원 이상으로 입원시키는 등의 잘못으로
엄무상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그는 몰려드는 카메라 앞에서 
관례상 더 입원시켰을 뿐이다.  사망자와 그 유족들에게 죄송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정신과 의사면 누구나 다 느낄 수가 있다. 
그가 얼마나 재수가 없는 경우인지를….
  정신병원은 태부족이고, 종합병원에서는 수지가 안 맞는다고 정신과
병동을 스스로 폐쇄하는 시점에서 정부의 정신보건 정책은 비리를
눈감아주는 정책이었다.  정신질환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그들에 대한
복지 차원에서의 정책 추진은 예산 운운하며 생각지도 않고, 환자들을
적당히 많이 가둬놓는 쪽으로 은근히 조장하며 감싸고 돌았다.  그러다
보니 개인 의원에서 의료법 이상으로 입원을 시켜도 눈감아주었고,
요양원이나 대형 정신병원에서 비인도적인 일이 터져도 덮어주기 바빴다.
  대한민국 어디에 있는 정신병원에도 입원환자는 초과 입원이고,
대부분의 환자들이 받는 진료 수준은 감금 이상을 못 넘는 차원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처럼 한가하게
고지식한 절규만 늘어놓을 수는 없다.  원칙이 없는, 어둠의 원칙만을
고수하는 현실에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들은 약 뿌리기만도 바쁘다.  그래서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처럼 깊은 인간적인 고뇌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들도 연극 속의 정신과 의사들같이 멋들어진 절규를 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행이 되고 있는 정신질환자를 다루는 연극,
영화 등에 멋진 소재를 제공해주고 싶다.  그러나 현실 속의 정신과
의사들은 단지 이같은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제발 우리나라에서 중세시대에나 어울림직한 사이비 기도원이나
요양원들로부터 어떻게 처리 좀 해달라고…. 

    전철에서 만난 어느 광신도
  의과대학 시절 때의 일이다.  정신 병동에 실습하러 들어가면 항상 듣는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라는 노래였는데 처음에는 그런 대로 들을 만했으나
나중엔 하도 들으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같이 실습 돌던
어떤 여학생은 실습이 끝난 후에도 그 노래만 들으면 진절머리를 쳤다. 
그녀 자신이 크리스찬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가본 다른 정신병원에서도 그 노래는 유행하고 있었다. 
이대의 경험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환자들이 왜 그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는 걸까?  그 노래는 환자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신병의 공통적인 성질을 표현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궁금증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으나 훗날 정신괄르 전공하면서
광신도 환자들을 많이 만나면서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정주부가 어느 날 갑자기 광신적으로 교회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가정 일은 돌보지 않고 교회에만 밤낮으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나 아이들은 굶기 쉽상이고, 급기야는 가정이 완전히
파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저기 심방을 다니며
남들을 구원하기에만 바빴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이 그녀를 갖은
방법으로 설득도 하고 심지어 구타까지 했으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방패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종교 망상에 빠져 있는 환자들과 얘기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이상 가면
항상 벽에 부딪치는 듯한 느낌이다.  치료자가 아무리 그들을 현실로
이끌려고 해도 그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대로 방패 뒤에 숨어
치료자와 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현실 복귀나 정신 건강은
아주 사소한 가치에 불과하다.  그들은 마치 종교의 교리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 삼는 듯 철저히 현실과 유리되어 산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책임도 인간적인 의무도 호소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서에 씌어 있는 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맹신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고도의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말의 어구 그대로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 자체에도 상호 모순된 말들이 이리저러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신도들은 그런 상징적인 측면은 외면하고 무작정 현실의 모든
것에 편리하게 대입하면서 남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기에만 바쁘다. 
이는 소위 하느님의 방패 뒤에서 자기의 신경증적인, 정신병적인 성향을
계속 유지 발달시키는 것으로, 정신병원에서의 오랜 세월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그들만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연약한 사람들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찌할 수 없이 철저히 구속당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신병원에는 종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에 비참한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성서의 어떤 용어들은 너무 무분별하게
강요하다시피 퍼져 있어, 자아가 약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혼란시키는
경우가 많다.
  마음 약하고 고지식한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성서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 감히 그것에 반박하지는 못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못할 때는 커다란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종교로부터 엄청난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볼품없이 퇴행된 만성 정신분열증
여자환자가 어느 날 나에게 시를 한 편 건네주었다.
   10년 전 혼자 자취방에 앉아 선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성경에 나오는 택한 백성이 아닌 줄 알고 지옥 백성인 것 같아서
겁이 나서 행동을 동작에 맞춰서 일부러 꾸며서 했다.  혼자 자위행위를
했다.  일부러 그 절정을 느껴야 되는 걸로 생각했다.  일부러 그 절정을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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