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
김인숙
책 머리에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것, 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지... 그렇지만 그 길의 군데군데에 박혀 있는 아픔과 상처는 어떻게 하나,
반문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 역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란 걸 알았다.
지나간 것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보다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먼 길'이라고 붙여놓고, 어이없게도 그 제목에 내 발목이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삶이란... 그리고, 도대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까마득한 '멂'과 그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음'을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글쓰기가 휴식같은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아니, 어쩌면 글읽기가.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고, 돌아보는 것... 그리고 바라보는 것... 까마득한 멀기와 아득한 깊음
사이에서 그렇게 잠깐 쉴 수 있는 일이었으면. 아픔과 상처를 앓는 일에조차도 잠깐은
무연해질 수 있는 일이었으면, 그러나 아직 내 글은, '휴식'이 아니라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자꾸 나를 몰아세우는 것인지... 나는 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도 자꾸
말하려고 든다. 아픔과 상처를 잊지 말아요, 절대로 잊지 말아요, 라고.
1
동안으로 늙어가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요. 왜 그 얼굴이
서글펐을까. 정작, 당자는 자기가 아직도 이십대 중반쯤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토록 자랑스러워했건만.
나는 아마도 당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청년인 당신이...
그러나 세월의 힘만으로도 나이가 들어버렸을 당신이... 어떤 모습인가, 어떤 사람인가...
미안합니다. 이런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느 날 문득, 편지 한통쯤은 보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일
더 편해질 수만 있다면 전화 한 통쯤도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그렇게만 되면
말하리라. 그때, 나는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그러나 나는 이제 압니다. 정말로 편해졌다면
나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정말로 편해졌다면 나는 결코 당신에게 전화하지도
않았으리라. 편지도 하지 않았으리라.
당신을 내 방식으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십시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청년인 당신... 그래서 서글픈 기억... 나는 그것을 붙들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당신의
기억 역시 서글프리라는 생각을 안고, 어떻게 당신에게 편한 체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글픔으로 오그라 붙는 것 같은 가슴으로, 당신께 다만 말합니다. 한때,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잊혀진 기억이라고. 잊음. 그것만이 오직 당신과 나의
서글픔을 씻어줄 수 있으리라고...
어느 세월의 한 모퉁이에서 한때는 당신의 아픔이었던, 서연이... 이만 줄입니다.
포트멕콰리로 떠나기 전날, 한영은 서연의 편지를 받았다. 자그마치 석 달만에 돌아온
회신이었다. 한영은 그 편지를 가만히 접어,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거리의 쓰레기통
옆에 이르러 다시 그 편지를 꺼냈다. 그는 조금쯤 웃는 신중을 지어 보였다. 그저, 그
정도의 여유는 보여야 할 것 같았기에. 그러나 그는 이내 쓰레기통 옆에 쭈그려앉았고,
그 편지를 손아귀에 틀어쥔 채로 목구멍 깊숙이에서 울려오는 신음소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우연히 맞아떨어진 일이기는 했지만, 여행을 떠나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잊음.
그것만이 오직 당신과 나의 서글픔을 씻어줄 수 있으리라 했던 서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한영은 고통스러운 숨을 길게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 하늘을 향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속삭였다. 어리석은 일은 이쯤해서 그만두자. 그리고 그는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포드 팔콘 한 대가 빠르게 그의 앞을 지나쳐갔다 그 속도감에 떠밀린 듯, 한 번 더
휘청거리는 듯싶던 그의 눈에 비로소 그가 알고 있는 거리의 풍경이 살아올랐다. 잔디로
뒤덮인 보도, 갓 물청소를 끝낸 듯 말갛게 씻겨져 있는 2차선도로, 그리고 햇살. 그는
햇살에 부신 눈을 오래 깜빡여, 그 햇살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나라를
또 하나의 인종 전시장이라고 했던가. 백인과 동양인이, 이태리인과 영국인과 호주인이,
그리고 타일랜드인과 필리핀 사람과 중국인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거리와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연의
편지보다, 편지를 쓴 서연보다, 바로 자기 자신을. 잊혀진 존재로서의 그 자신을. 또는
잊혀져야 할 존재로서의 그 자신을.
2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사위는 어느새 희끄무레한 여명으로 밝아져 바다는 더 이상
검푸른 빛깔로 죽어 있지 않았다. 여명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
바다는 드높게 달겨드는 파도의 흰 이빨뿐만이 아니라 그 파도에 실려오는 섬세한 결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바다가 그 거대한 몸뚱이로만 움직이지 않고 섬세하고 여린 결로도
움직인다는 사실은 매우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밝아오기 시작하면 그 여린
결들은 제가끔의 몸짓으로 찬란한 황금빛을 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새벽 바람이 선선해 겹겹이 껴입었던 옷들을 조금 풀어헤치며 한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딱딱한 억양으로 떠들어대고 있는 한림의 목소리
때문인지, 한영은 입 안으로 스며드는 호흡 속에서 반갑지 않은 습기를 느꼈다.
한림은 그의 배를 타려고 했던 승객들의 승선을 포기시키기 위해, 소나기가 내릴 거라던
일기예보의 심각성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느닷없이
쏟아져내리곤 하던 소나기를 상기시키고, 오늘도 그렇게 비가 내린다면 자기로서는 큰
고기를 잡게 해주리라는 보증을 할 수가 없노라고, 그렇게 엄살을 떨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바람을 얘기했다. 선착장의 바람이 옷깃을 날리면 큰 바다의 바람은 태풍처럼 여겨질
거라는 것이었다.
"하루벌이 놓치고 일주일 굶는 거 아니야?"
승객들이 끝내 승선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한영은 한림의 옆쪽으로 다가섰다.
배가 불룩 솟아나온 비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강한 햇볕에 그으른 검은 피부색깔 때문에
한림의 모습은 젊고 건장해 보였다.
뭐야? 형은 아직도 젊잖아!
그의 윤기나는 검은 목덜미에 그렇게 찬사를 던져주고 싶던 한영은, 그러나 그의
목덜미에 오밀조밀 잡혀있는 잔주름들을 뒤늦게야 발견하고 말았다. 하긴, 한림은 어느새
사십의 반고개를 넘겨버린 나이였다.
"내가 저 얼간이 같은 양놈들을 상대로 공갈이나 쳤다고 생각하냐?"
한림이 배 쪽으로 걸음을 옮겨 걷기 시작하며 웃음소리로 한영의 말을 받았다. 한영은
그가 자신을 겁주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먼 바다를 다시 한번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잔영처럼 남아 있던 어둠의 빛깔은 빠르게 흩어져가고 있었고 그 사이로 새벽 하늘이 그
청명한 살결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한영의 시선에는 안도가 담기지 않았다.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눈 앞에 두고도 등 뒤에서는 번쩍이는 번개가 내리꽂히는 곳이 바로 이 나라였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예상된다던 일기예보를 오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사실
전혀 없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폭풍우, 산산조각이 나버린 난파선의 잔해... 한영은
터무니없게도 그러한 생각들을 떠올렸다.
"왜 겁나냐?"
한림이 조롱을 하듯 한영에게 다시 말했다. 한영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식구들끼리 놀러갔었던 경복궁에서 그는 연못을 보았었고, 그 연못의 수면 위를 부유하는
보트를 보았었다. 한영이 열한살일 때 이미 스무살이었던 한림은, 한영에게 보트를
태워주겠노라고 했었다. 그때도 그는 아마 그렇게 말했었을 것이다. 왜 겁나냐? 겁난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었고, 그리고 보트가 뒤집혔었다. 끔찍한
기억이었다. 물 속에 빠졌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그로 인해 열한살 나이에 느닷없이
생겨버렸던 야뇨증의 기억까지도.
어쨌든, 그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배라는 것이 무서웠다. 한림이 낚싯배를 몰기 시작한지
이태가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그가 아직껏 단 한 번도 한림의 배를 타본 적이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나 이날 한영의 걱정은 자신에게만 있지 않았다. 그는 아직껏, 승용차의 문에 기대어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는 명우를 돌아보았다. 셔츠와 점퍼를 겹겹이 껴입은 그의 몸매가
흡사 상체만 잘 발달한 기형아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망연자실 홀로
서있었다.
"저 친구는 왜 저래? 어디 아파?"
한영의 시선을 쫓아 같이 명우가 자신의 기대와 너무나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것 때문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이날 새벽에야 명우를 처음 보았으나 그러나 우연치
않게 명우의 속사정을 다 알아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한영이 바로 그, 명우와 함께 자신의
배를 타러 오겠노라고 연락을 해왔을 때, 그가 이미 예약되었던 승객들과의 약속을 다
취소시켜 버리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을 좀 못잤거든. 어젯밤 모텔에 열 한시에 도착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피곤하기도 할 거야."
"일단 한두어 번만 사까닥질 해보라고 그래. 잠이 싹 달아날 테니."
한림이 웃으며 갑판으로 올라섰고, 한영은 명우를 향해 돌아섰다. 배를 타야겠다고 말할
작정이었으나, 명우는 어느새 천천히 걸음을 옮겨오고 있는 중이었다. 한영이 먼저 한림을
쫓아 갑판으로 알라섰다. 그가 올라타자마자 배의 후미에서 덜덜거리는 모터소리가
요란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빨리 탑시다!"
한림이 명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명우는 천천히 옮겨 걷던 걸음을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달음박질을 놓기 시작했다.
"그 정도밖에 못 뛰겠소?"
장난을 치는 게 분명한 목소리로 한림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명우의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싶었다. 그는 몇 발짝 앞으로 다가온 배를 향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속도를 높였다. 공연히 다급해진 한영이 그를 향해 손을 길게
내뻗었고, 그는 달리던 탄력을 쫓아 한영의 손을 냉큼 붙잡고 배 안으로 뛰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한 진동과 함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착장에 마지막 남아있던 어둠을 내팽개쳐버리며, 요란한 포말이 배의 후미를 쫓아왔다.
빠르게 방향을 틀어버린 배 때문에 선착장의 모습은 이내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대신
선착장 근처에 떠 있는 모래섬에 펠리컨 몇 마리가 모여서 큰 눈을 껌뻑거리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첫인상의 기괴함이 사라진 대신 볼수록 순하게 느껴지는 새가 바로
펠리컨이었다.
"이런, 젠장! 파도가 만만치 않잖아!"
난간을 억세게 붙잡고 있었음에도 곤두박질하듯 내리꼳혔다가 다시 떠오르곤 하는 배의
요동에 이리저리 몸을 쏠리며 한영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선착장의 파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아 안심을 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모양이었다. 승선 정원이 고작 열두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배는, 파도의 크고 작은 움직임을 고스란히 타고 있었던 것이다. 선착장의
바람이 옷깃을 날리면 큰 바다의 바람은 태풍일 거라던 한림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그러자
사타구니게가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용케 중심을 잡고 있는
명우를 홀깃 바라보았다. 파리해 보이는 낯빛이 아무래도 자꾸 마음에 걸려, 그는 자신이
제의했던 이 여행을 어제부터 내내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더랜드 가서 데몬이란거 타봤지? 그쯤으로만 생각하면 즐길 만하지. 오줌 싸지 않게
조심하라구."
한림이 쓰러질 듯한 한영의 어깨를 잡으며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한영은, 젠장!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코 중심을 잃었고, 중심 잃은 그의 몸은 명우의 어깨를 때리며
쓰러져내렸다. 중심을 잘 잡고 있던 명우마저도 한영의 무게에 밀려 무너져버리고 마는
순간이었다. 그가 어찌나 나무토막처럼 쓰러져버리는지, 한영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우는 바닥에 쓰러진채, 창백한 얼굴에 가녀린 웃음을 띠고
있었다.
"들어가자. 너, 아직 우리집 구경도 못 했지? 들어갑시다. 안에 들어가면 좀 나을 거요."
한림은 명우가 어느새 멀미를 시작하고 있는 거라고 판단하는 듯싶었다. 명우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한림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한영은 명우의 뒤를 쫓아 선실로 들어섰다.
선실 안에서 키를 잡고 있던 백인청년이 그들을 돌아보며 흰 이빨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림과 같이 일을 한다는 청년인 모양이었다.
"누가 또 있군요?"
"그럼 이 배가 자동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소?"
명우의 어리숙한 질문과 한림의 어이가 없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명우는 모든
것이 다 혼란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전 이런 배는 처음 타봅니다. 굉장히 많이 흔들리는군요."
"이 정도로 흔들린다고 말하면 곤란한데? 저 친구를 좀 봐요. 저 친구는, 태풍 한가운데서
블루스를 추라고 해도 출 수 있을걸? 배나 낚시에 관한 한은 베테랑이지. 인사 좀 할까?"
한림이 청년의 이름을 조셉이라고 부르며 명우를 인사시켰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조셉은
날씨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어 시간 뒤쯤이면 비구름이 이쪽으로 몰려올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세게 분다면 비구름도 빨리 왔다가 빨리 가버리겠지만, 이 정도의
바람으로는 비를 꽤 오래 맞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끝에 조셉은 명우를
돌아보며 배를 많이 타봤느냐고 물었다. 명우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그는 선실 한쪽에 있는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는 세심하고도 친절하게, 몇 번이나 반복해가며 변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저 친구, 오바이트 때문에 저러는 거요. 차이니스들, 지뱃속에서 나온 찌꺼기를 그대로
놓아두신단 말씀이거든. 염치없기는 짚신들이나 차이니스나 똑같지."
"오바이트 나오기 시작하면 화장실 갈 시간이 어디 있어? 배 밖으로 대가리만 처박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한영이 한림의 말을 대신 받았다. 명우가 한림의 말을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정작 명우는 한림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같은 동포를
염치없는 짚신이라고 표현하는 한림의 말에 대해서도 그랬다. 사실, 한림의 그런 식의
표현은 동생인 한영에게조차도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명우는 붙박이 소파에 앉아 선실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배를
처음 타보기는 한영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한영의 시선도 명우의 시선을 쫓기 시작했다.
작고 아담한 선실이었다. 붙박이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주방시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조종칸이, 또 그 아래에는 화장실과 침실 시스템의 작은
방이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그 방은 한림이 먹고 자는 그의 집이기도 할 터였다. 혼자 실기
시작한 이후로, 한림은 따로 집을 구하지 않은 채로 캐러밴(숙소 겸용 차)과 그 배를
번갈아가며 대충 기숙을 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한영은 한림의 그 심란한 삶의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그를 찾아오고 싶지가 않았었다.
"배가 생각보단 괜찮네..."
사실은 심란하기가 짝이 없는 기분이었으나 애써 참으며, 한영은 말끝을 길게 늘였다.
명우도 있는 앞에서 한림의 사는 꼴을 면박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였다. 그런데도 왠지
켕기는 기분이 들어, 한영은 명우를 흘깃 돌아보았다.
명우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멀미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술까지 점차로 흰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질린 낯빛이
안쓰럽게 느껴질 지경이었으나, 일단 한영은 명우의 멀미를 아는 체하지 않기로 했다.
"바다에서 바라보니 육지 느낌이 또 색다르군요?"
한영은 멀어져가는 해안선에 먼 시선을 둔 채로 명우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침묵이 불편해서 했던 말만은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는 육지는 뜻밖에
평화의 느낌을 주었다. 집, 돌아가야 할 곳, 식구들... 그리고 정착의 느낌이었다. 혹시
명우도 이러한 느낌을 느낄것인가.
"정말 괜찮겠어요?"
끝내 한영은 명우에게 우려의 말을 건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멀미약을 먹여두는 건데...
그런 후회도 생겨났다. 바다낚시에 미친 사람같이 보이길래 멀미 같은 건 안할 줄 믿었고,
사실 배에 관한 공포는 자신의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지난밤 한잠도
이루지 못하는 명우를 바라보며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가
오래 해왔다는 밤일의 습성이 남아 있는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버렸었다. 그는 지난밤
명우에게 가져야 했던 모든 불길한 느낌을, 다 그런 식으로 무마시켜 버렸었다.
어쩌자고 파도는 점점더 거세지기만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출렁이는 파도가 창문까지
올라왔다가 내려앉곤 할 때마다 한영과 명우의 몸도 같은 높이로 붕 떴다가는 내려앉곤
하는중이었다. 테이블을 잡고 있는 명우의 손등에 힘줄의 점점 더 굴곡 선명하게
돋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의 희게 질린 입술은 윗 이빨에 의해 지그시 물려져 있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구토를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멀미약을 좀 권해볼까. 한영은 자기 혼자 먹고 챙겨두었던 멀미약을 주머니
속에서 가만히 만져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명우의 아랫입술을 덮은 윗이빨은, 점점 더
억센 힘으로 이빨자국을 새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배가 심하게 솟아올랐다가 툭
떨어져내리는 순간, 명우의 윗이빨이 그힘을 놓쳐버렸고 그의 입이 크게 벌어지자마자였다.
그때 그의 입 밖으로 솟아나온 것은 터무니 없게도 비명소리였다.
"저 친구, 오줌 지리게 생겼네, 정말."
한림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한번 터진 비명소리는 연쇄적이었다. 그때부터
명우는, 배의 크고 작은 요동 때마다 번번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한림의 비유처럼,
원더랜드의 데몬이라는 걸 처음 타본 사람처럼.
원더랜드의 데몬.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어린이 대공원의 청룡열차였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악마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정말 악마의 등에 묶여버린 사람들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 데몬의 가장 급격한 추락지점에는 컴퓨터 사진촬영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촬영기는 비명을 내지르며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동으로 촬영, 현상한 뒤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팔기 위한 것이었다.
데몬의 등에서 떨어져나와 비로소 사람들은 악마의 등에 묶여 있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극도로 겁에 질려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공포의 표정들... 명우의 표정은 그에 비한다면
너무 가벼울까. 으악, 악, 으아아악.... 그의 비명소리는 멈춰지지 않고 있었다.
한림은 명우의 그러한 비명소리를 진짜라고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한림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표현이 다른 조셉마저도 명우의 비명소리를 유쾌한 장난이라고만 믿는 듯한
눈치였다. 사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한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그냥 데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나 어느 순간붙어 한영은, 그의 비명소리가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이나 찾고자 애썼다던 환청 속에서의 그의
비명소리가 아닌가.
우기가 아니었음에도 비가 잦았던 얼마간, 비는 밤마다 천둥과 번개를 함께한 채로
떨어져 내리곤 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밤마다 그는 그 비명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는
그 비명소리가 시작될 때마다 벌떡 이러나 커튼을 열고 또 블라인드를 걷어올린다고도
했다.
창 밖에 누군가가 서서 그렇게 소시를 질러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는 그것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절벽 위에 선 그의 창문에는 번개와 천둥에 실린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고 했다.
불면의 날은 오래 계속되었다. 위스키를 반 병씩이나 비운뒤에 드러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고, 대낮처럼 밝아져가기만 하는 정신으로 그는 또다시 그 비명소리를 듣곤 했다. 그는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또 창문을 열고, 그리고는 그 창문을 넘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이한 괴성의 정체만 밝힐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창문을 열면 늘 바람소리와 빗소리뿐이었다. 비명과
괴성소리는 그가 창문을 닫고 축 늘어진 어깨로 침대에 돌아오는 순간부터 다시
반복되었다. 악, 으아악, 아악... 그것은 고통과 쾌감과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발작적인
비명소리였다.
-아마도 병인가봐요. 한인 의사한테 가본 적이 있었는데 스페셜 닥터를 찾아가보라고
하더군요. 영어도 딸리는데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관뒀어요. 수면제
도움을 받으면 가끔은 편하게 자기도 하니까...
"이제 좀 괜찮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늘어져 앉아 있는 명우를 바라보며 한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명우는 웃어 보이려고 애썼으나 얼굴근육이 다 이완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형은 멀쩡하네?"
한영이 명우를 대신해 말을 받았다. 명우 같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도 한바탕 속이 뒤집힌
뒤였다.
"뱃놈보고 멀미하느냐고 묻는 인간도 있군 그래. 난 아무래도 천성이 뱃놈인 모양이야.
내가 이래봬도 청춘의 꿈이 마도로스 였다는 거 아니냐. 포경선 타고 고래 한 마리
잡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젠장, 고래는 관두고라도 이렇게 쓰잘데기없는 낚싯배나 끌고
있으니."
햇볕에 그을은 얼굴에 희벌쭉한 웃음을 띠어보이는 한림을 바라보며 한영도 비죽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그 웃음의 의미는 한림의 그것과는 물론 달랐다.
70년대 초반인가 중반인가, [고래사냥]이라는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을 때, 한림은
박한이라는 예명으로 통기타 가수생활을 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딱 한 장의 앨범을
냈었는데, 그 앨범의 타이틀곡이 금지곡이 되면서 [고래사냥]같은 히트곡 한번 내보는 게
소원이었다던 그의 꿈도 그냥 막을 내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뒤늦게야 인기를 얻었다. 비록 대중적이지는 못했지만, 각 캠퍼스에서, 그 캠퍼스 근처의
싸구려 막소주집에서 그의 노래는 감당할 수 없는 설움의 음조로 불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명한 이념과 투쟁성의 노래들이 운동권을 장악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아직 한국에 있었던 한영은 끝 이미 이민을 와 있던 한림에게, 그의 노래가 뒤늦게
얻고 있던 인기의 소식을 전해준 바 있었다. 마침 학생 노래패들이 녹음을 한 테이프에
그 노래가 담겨 있길래 어렵게 구해 보내주기까지 했었는데, 한림의 반응이 그때 그를
기가 막히게 했었다. 그의 반응은 '개새끼들이' 하나뿐인 자기 노래를 '다 망쳐버렸다'는
것이었다.
"너, 아냐? 가끔은 여기서 진짜 고래를 본단 말이야. 그 놈의 큰 꼬리가 수면을 차고
솟아오를 때마다 진짜 오금이 저리지. 난 정말, 이깟 배 체질이 아닌데 말이야. 어차피 배를
타려면 외항선 정도는 타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야."
"정말 고래가 나옵니까?"
명우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한림에게 물었다. 목소리는 미심쩍은 대로라도, 눈빛만큼은
정말 고래를 보게 될까 하는 기대로 차 있는 듯한 것이었다.
"공갈을 칠 게 따로 있지. 조셉한테 물어보쇼. 어떤 땐 고래가 떼거리로 몰려드는데 그거
장관이지 그대로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릴 때면, 미친다니까.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지."
"헛소리 말고 고래나 보러 나갑시다."
한영은 한림의 고래타령을 듣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했으므로 한림의 말을 그렇게
잘라버렸다. 한영에겐 이제 한림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한림이 가수생활을 하던 시절, 아직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그에게 한림은 거의
우상과 같은 존재였었다. 한림은 까까머리 중학생으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신비의
세계에 존재했고, 그래서 무조건 그가 좋았었다. 그것은, 그가 대마초 가수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채, 일찌감치 가수생활을 접어버린 뒤에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대마초라는
것조차도 어쩌면 신비의 세계였으므로. 한영이 그랬던 그에 대한 환상과 신비를 모두 다
벗어버린 것은 정작 이 나라에 와서야였다. 그는 한림을, 자기 인생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역마살 낀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림이 먼저 선실 밖에 뱃전으로 나섰으나 한영은 잠시 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망설였다. 명우가 아직 그 상태로 선실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라도 멈췄으면
좋으련만... 그는 키를 잡고 있는 조셉을 돌아보았다. 아직 배는, 낚싯대를 드리울 만한 곳을
못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착장을 떠난 지가 꽤 지나, 느낌만으로는 큰 바다
한가운데에라도 나와 있는
듯싶은데, 그래도 조셉은 배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셉이 키를 잡고 있는 조종칸
바로 옆에는 컴퓨터 모니터로 연결이 되어 있는 어군탐지기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다 밑의 고기떼를 탐지해주는 기계라고 했다. 그것인 호신호를 보내올 때마다
한림의 낚싯배를 타는 낚시꾼들은 팔뚝만한 고기들을 잡아올리게 마련일 터였다. 킹피쉬,
스내퍼, 딥시 부림, 또는 조운드 따위들을.
한영은 낚시가 시작되면 명우의 상태도 나아지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낚싯대만
드리워놓으면 세상만사가 다 편안해진다는 낚시광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영이 한림의 낚싯배를 타러 가자고 했을 때 명우는 뜻밖에도 그 제의를 응낙했던 것이다.
한영으로서는 아직도 그가, '한림'보다는 그의 '낚싯배'쪽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중이었다. 만의 하나, 설령 명우가 한림에 대해 관심을 갖는 바가 있을지라
도, 그것은 한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림의 노래에 대해서일 뿐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기도 했다. 그것도 그냥 노래가 아니라 한림의 표현대로라면, 개새끼들이 다
망쳐버린후의 노래를 말이다.
한림을 찾아 여행을 떠나오기 일주일쯤 전의 일이었다. 그날 형수의 미장원에 들렀다가
머리를 이발하러 온 명우를 우연히 만났던 한영은, 그곳에서부터 괘 먼 거리에 있는
하버까지 나가서 그와 술을 한잔 했었다. 그가 낚시광이라는 것을 거기서 알았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열풍이 시작돼 끔찍한 더위 속이었던 그날, 명우는 밤이 깊도록 계속해서
낚시 이야기만 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밤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기세등등히 내뿜어댔고, 그래서 그들은
마치 있는 힘껏 몰아쳐오는 히터 바람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만 같은 몰골들이었다. 땀이
줄줄 흘러 목덜미를 적시고 끝내 못 참고 단추를 풀어헤친 앞가슴까지 땀이 흥건히
고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 형편없이 지친 모습이었다. 게다가
거기에 얹혀진 알코올 기운이라는 것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그만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명우가 바다를 향해 걸음을 멈춰 세웠다.
한영을 향해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멋쩍은 것 같은 웃음이 잠깐 새겨졌다.
-형님이 유한림씨죠?
느닷없는 질문이어서 한영이 그 질문의 의미를 새기기도 전이었다. 명우는 다시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감당할 수 없는 설움의 애조로 그 노래가 불려지기 시작했다.
한림의 노래, [먼 길]이었다.
당혹스러운 한영의 시선 앞에서 명우는 그 노래를 세 번쯤 반복해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돌아섰을 때, 그의 얼굴은 마치 눈물 같은 땀으로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그
상태로 그가 말했다.
-영주권을 받던 날... 비자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을 잃었어요. 아마
흥분 때문이었는지... 계속 같은 길을 뺑뺑이 돌 듯 돌았죠. 그렇게 먼 길을... 그렇게
먼 길을...
그는 목이 메인 것처럼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한영씬,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이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인데, 이미 시작된 그 길이 끝없는 먼 길처럼만 보이는 거... 한영씨한테 설명할 수
가 없어요. 정말,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안타깝게 자신의 말끝을 붙들고 한영을 쳐다보던 명우의 눈, 한영은 그때 그가 울고
싶어하는 게 틀림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달쯤 전의 일이었다. 박변호사로부터 받은 주소를 가지고 명우를 찾아갔을 때, 명우는
자다 깬 듯한 얼굴로 두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그를 만나러 나왔었다. 그의 집, 정확히는
그의 형의 집 현관 앞 정원에는 벤치가 몇 개 놓여있었다. 한영은 아직 덜 익은
바나나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바나나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아직 덜 잠근 셔츠단추를 마저 채우며 한영에게로 다가왔다.
-누구신지...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한 한영에게 시선을 맞춘 채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의 주소를 알려주었던 박변호사는 강명우라는 사내가 무척 대하기 어려운
사람일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 설명이 없더라고, 한영에게는 벌써부터 그에 대한 신비감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던 터였다. 한영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는데,
내 뻗어진 자신의 손에 터무니없게도 경외감 비슷한 것이 서려 있는 것 같아서 불쑥
무안감이 들 지경이었다.
-저는 유한영이라고 합니다. 교민잡지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내뻗어진 손에 명우의 손이 닿아오지도 않았음에도 한영은 또 한 손을 서둘러
움직여 명함을 찾아냈다. 그 명함에는 그의 직함이 기자라고 되어 있었으나, 사실 그야말로
이름뿐인 명함이었다. 교민잡지사는 그의 선배가 운영하고 있는 잡지사로, 그는 번역 따위를
해주며 잠시 편집일을 보조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5년간이나 다니던 현지
건축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근 1년간이나 빈둥거리던 룸펜생활을 하던 끝에 그가 찾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직장이기도 했다.
-교민잡지사에서 저한테 무슨일로...?
명우는 한영이 내민 명함은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은채, 경계심이 번뜩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순간 그때까지도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듯하던 그의 얼굴은 대낮처럼
살아올랐고 그 대낮 같은 표정 위에, 날카로운 경계심이 다시 과장되었다. 그의 경계어린
표정이 어찌나 섬뜩했던지 한영은 자신이 잡지사 일로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심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라는 말을 미리 해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생각을 곧 포기해버렸다. 경계를 받아야 할 것은
오히려 '개인적인 관심'쪽이 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연히 강명우씨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난민신청으로 영주권을 받으셨다는...
한영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한영은 명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던 것 같다. 무섭게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은 이내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마치 급격스러운 빈혈에 휘말린 사람 같아 보일 정도여서, 한영은
그가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한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을
멈췄고, 명우가 입을 열었다. 희게 질린 입술이 드러나게 경련하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사, 사람을... 자, 잘못 찾아오셨군요.
그는 아주 미숙한 거짓말쟁이였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웅변하는 것이다. 다름없었다. 한영은 물론, 그가 고분고분히 자신의 관심에
대해 응답을 해주리라고 믿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불행히도 그러한 상황에 대해 미리 준비해둔 바가 없었다. 어차피 정보제공자가 그의
이민 수속을 대행해주었던 박변호사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그냥 내치는
대로 말을 하기로 했다.
-강명우씨의 사례를 이민법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뭐랄까...
강명우씨가 겪었던 일들을 통해 한국적인 상황을 재조명해보는 것은 어떤가, 그런
생각인데...
굉장하군. 그는 자신이 말을 잘못 풀어가고 있다는 것을 꼈다.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그런 쪽으로 가 있다고는 그 자신부터가 생각지 않는 일이었고 또 명우라는 사내가 그러한
일을 즐길 거라는 기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은 난 언젠가 내 회고록을 써야겠다는 생각인데...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는 것일까. 그가 말을 끊은 채 잠깐 망설이는 사이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전, 바빠서... 일을 나가야 합니다.
-일을요?
그때 시간이 오후 일곱시였다. 그런데 그는 일을 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네. 일을 가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다시 알아보시죠.
그는 한영이 뭐라고 말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그의 등을 덮은 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명우는 현관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아직껏
바나나나무 아래에 서 있는 한영을 돌아보았다.
-사람을, 잘못, 찾았어요. 아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한 음절 한음절이 뚝뚝끊어지듯, 선명하게 울려왔다. 그리고 그 말 끝에
한영은 명우의 시선에서 번뜩이고 있는 적개심을 보았다. 한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환영받을 것이라고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개심까지야... 그는 무언가 자신에게도
해명할 말들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얼핏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명우는 완강하게 닫힌 현관문 안으로 사라져 들어가 버렸다.
닫힌 문. 그것이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한영은 이미 오래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면전에서 닫혀버리는 문은 그 문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의 뺨을 호되게 갈기고,
뺨맞은 사람의 비명조차 듣지 않은채 침묵해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얼마나 지독한
폭력인가.
그러나 한영은, 명우가 닫아버린 현관문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느사이 일종의
매저키스트가 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누구에게라도 한번 실컷
두들겨맞아봤으면 좋겠다는 심정... 그 즈음의 한영이 그러했다.
그는 푸른색의 바나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 아래의 벤취에서 홀로 담배를
피웠다. 어쩐지 얼얼한 것 같은 뺨의 느낌을 쾌감처럼 느기며, 그러나 그는 이게 무슨
어줍잖은 짓인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어줍잖은 짓. 그 즈음, 그의 일상은 모든 어줍잖은 짓으로만 메워져 있었다. 그는 어줍지
않게도 이미 8년 전에 헤어졌던 여자, 서연에게 편지를 띄웠었고 그 편지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명우의 집, 닫힌 현관문 앞에서 그의 뺨을 갈기듯 돌아서버린 명우를
생각하지 않았고, 한때 그의 여자였던 서연에게 띄웠던 편지를 생각했다. 뭐라고 썼었던가,
아직도 너를 생각한다. 때때로... 아니, 아주 자주... 아니, 거의 늘. 이해할 수 없다. 네가
아직도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게 왜 희망처럼 여겨졌는지. 관계를 맺는 모든 일에
실패만을 거듭해왔던 지나간 내 삶이, 왜 그렇게 느닷없이 축복처럼 여겨졌는지...
도덕적으로 네게 편지를 띄울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가.
어줍잖은 짓. 그것은, 그가 서연에게 썼던 편지에 '도덕적'이라는 낱말을 썼다는 데에도
있었다. 그 단어만 쓰지않았더라도 조금은 편안하게 서연의 답신을 기다려볼 수도
있었으련만... 답장이 왔어야 할 시기가 이미 한 달쯤이 흘러버렸던 그때, 그는 서연의
답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명우를 찾아왔던 것은 혹시,
그 속절없는 기다림으로부터의 마음돌리기였던가. 그는 다시 한번 닫힌 문을 돌아본 뒤,
오래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버리고, 비로소 천천히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3
한영이 강명우라는 사내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은 교민잡지사 내에 떠돌던
희한한 소문으로부터였다. 그 소문은, 한국사람이네ㄷ 난민신청으로 영주권을 받은 사람이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사람으로 난민비자를 받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일이었다. 난민비자라는 것이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같은, 진짜 난민들에
게도 잘 주어지지 않는 것이었던만큼 한국인이 자신을 난민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설득적인 상황이 있지 않는 한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때는 한국을 독재국가라고 설명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80년 광주의 경험은, 자신을 난민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효과적이고
유리한 것일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반정부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반독재투쟁 경력을 설득해낼 수 있었고 망명의 의미인 난민비자도 신청항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위 문민정부라는 것이 들어선 이후로, 한국사람들에게 난민비자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현지 티브이에서 아무리 한국의 부당한
노동상황과 노동운동에 관한 특집프로를 방영하고 또는 북한과의 대치상황에 대한 분석
프로그램을 방영한다고 할지라도, 문민정부인 이상 한국은 더이상 난민지역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해가 갈수록 한국은 이 나라의 아주 중요한 무역대상국으로 부상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난민신청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주요 무역대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이나라로서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민신청으로 영주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한영은 도대체 그가 얼마나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행운인지 어쩐지, 그의 영주권 신청을 대행했던 이민
변호사는 그의 형, 한림의 친구였다. 그를 찾아갔던 한영에게 박변호사는, 명우의 주소를
적어주면서 자신에게서 알아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사실 그로서는
스스로의 입으로는 발설할 수 없는 의뢰인의 내력을, 잡지사에서 대신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말하자면 소 안 대고 코를 풀어보자는 심보였다. 난민비자를
성공시킨 경력이 그의 명성을 높게 하리라는 것은 깊이 생각 안 해봐도 뻔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박변호사의 교활한 생각은 처음부터 방향이 틀려있었다. 한영이 명우라는 사내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잡지사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에게 유일한 직장이 되어버린 교민잡지사, 그러나 그는 정식채용이 된 사람도 아니었고
그러므로 정식 보수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그는 아직도 실버수당을
받을 자격이 있는 룸펜의 신분이었다.
그가 1년 가까이나 빈둥빈둥 놀던 끝에 도와달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선배의 잡지사
근무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도 규칙적인 일상성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5년간이나 다니던, 조건 좃ㅎ은 현지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왔던 이유가 그 끔찍할 정도로의 규칙성과 그로 인한 호흡곤란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할때, 참으로 기가 막힌 변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는 아마도 그곳이 한국인들끼리만 모여서 하는 교민잡지사인 데다가, 그곳에 머무는
한은 온갖 종류의 한국사람들을 계속해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엉뚱한 허공을 붕붕 떠다니는 부유물 같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술이민으로 와서 이민 오자마자 조건 좋은 현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고 두어 번 직장을
옮기기는 했지만 내내 괜찮은 직장의 건축사였던 그에게 그런 고민은 터무니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민 오자마자 방황 한번 없이 그만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 행운에
속하는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직장을 때려치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이랬었다. 아니, 그 좋은 직장을!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무기력감을, 또는 자신의 숨막힘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느새 8년째 이 나라에 살고 있었고 이 나라에서 일을 하고 이 나라에다 세금을
내고, 또 이 나라의 사람들을 친구와 동료로 두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친구들에게 초대받아
파티에도 참석했고, 이곳의 친구들과 부시워킹(Bush Walking) 따위의 여행을 함께 가기도
했다. 또한 이 곳의 친구들은 그에게 한국이란 나라의 특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고, 이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그 역시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의 거의 모든 부분을 그들로부터
배웠었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의 동료 건축사였던 엔드류 케일라. 지성을 무시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과격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을 그는, 아시안 이민들이 그들의
근로환경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늘 불만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권리의
주장을 잃어버린 아시안들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말하곤 했었다. 아시안들은 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노동하지 않는가? 아시안들의 노동은, 자신들을 송두리째 팔아버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퇴근시간인 다섯시 종만 울리면, 마지막 콤마만 찍으면 정리가 다 될 서류일지라도
그대로 덮어둔 채, 자기가 쓰던 볼펜 뚜껑조차 그대로 놓아둔 채 퇴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바로 그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섯시에서 일 분만 지나도, 그것은 그들이
받아야 할 급료에 포함이 되지 않는 개인적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랬다. 아니,
그들은 그랬다. 점심시간이 되면 회의를 하다 말고도 일어서야 했고, 만일 회의가
길어진다면 그것은 당연히 연장수당을 받아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물론 아무도 연장근무를
강요할 수 없었고, 만일 강요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유니온에 고발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정확함이라니... 그들은 퇴근시간을 정확히 지키듯, 그들의 여유를 그렇게 지켰고,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렇게 지켰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의 구분이 너무나 정확해서 서둘러야 할
이유도, 정신없이 바빠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참여했던 교각 수리건축이, 한국에
서라면 두어 달이면 끝날 일을 1년이 넘게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으리라. 세시만 되면
박던 못도 그대로 놓아두고 망치를 던져버리는 노동자들을 데리고 무슨 건축을 한단
말인가!
한영이 언제부터 그들의 정확함에 숨막히는 듯한 호흡곤란을 느끼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건 단지 '시간이 흐르면서'부터라는 표현이 가장 옳을 것이다. 그들의 삶을
쫓아가는 동안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문제들, 그들은 결국 이 나라 사람들이고 자신은
결국 남의 나라에서온 이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시간이 흐르면서부터 그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조차도 사실은 제대로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어람나 사소하고 또 얼마나 설명불가한 존재들로 다가오는 것인지... 만일
자신과 똑같은 조건의 사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사람과조차도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일고 있는 붕괴의 느낌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그의 입사 초기에 그의 성을 유(You)라고 표기해놓고
이곳의 친구들이 깔깔거려대던 일, 그것이 5, 6년 또는 7, 8년 세월이 흘러서야 모욕으로
다가오고 수치로 느껴지는 느낌따위의 말이다. 그것을 누가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엔드류 케일라가 그에게 여자
친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다 말고, 당신이 이런 내 고민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왔을 때, 그 낭패감을 말이다. 아니, 엔드류에 대한 낭패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는 그 동안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똑같은 경험을 해왔던 것이다. 때로는
언어 때문에, 때로는 삶의 방식 때문에, 때로는 전혀 우습지도 않은 것에 배를 잡고
깔깔거려대는 그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의 차이 때문에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것이 보다 거창한 괴리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의 절망은
늘상 사소했다.
엔드류가 그의 여자친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는 새 키우는 걸 좋아하는데
자기 여자친구는 반드시 고양이를 키워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결혼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왔을 때, 그 어이없던 절망감. 이민 와서 1, 2년쯤이 지났을 때였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엔드류가 말했던 버드(Bird)나 키튼(Kitten)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심오한
다른 뜻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말했을 것이다.
이해한다고. 어떻게 그런 비장한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고.
문제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언어를 이해하는 것과 그 언어 속의 느낌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언제부턴가'는 언어를 익히는 일에 더이상
문제를 느끼지 않게 된 이후, 그때부터였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리고 1년간의 룸펜생활 끝에 교민잡지사라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었다. 그놈의 교민잡지사라는 데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잡지를 펴낸
이유가 그 잡지를 통해 영주권 스폰서쉽 장사를 해먹는 데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더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이리라. 그는 단 한가지도, 정말 단 한 가지조차도 정확한 것이 벗는
그놈의 교민잡지사의 일이라는 것에 일찌감치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은 물론
이거니와, 정규 직원의 숫자도, 그 직원들의 보수내역도, 심지어는 잡지의 내용과 그 내용을
채운 맞춤법조차도 아무것도 똑 떨어지게 정확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을 시작하자
마자 때려치워버릴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었으나, 그 순간 그를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이러다가 자신이 아주 영영, 한국사함도 아니고 이 나라의 사람도 아닌 기묘한 상태의
이방인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우려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언젠가 자신의회고록을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민 와서 8년 동안, 이 나라 사람들과도 또 내 나라
사람들과도 통할 수 없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남다른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하지 못한 그 이야기들을
그대로 묵혀두었다가는 어쩐지 그게 영영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어쩐지 그게
영영 상처가 될것만 같았다.
자신의 회고록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
게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겨났다.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은
왜 자기 나라를 떠나와 이 엉뚱한 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지... 쉽게 얘기되어지는 그 숱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마도 그들 역시 그 자신처럼 표현할 수가 없어써 애가 타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갖고 살리라 하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굳이 뭘 어쩌자는 의도도
아니었고, 다만 견딜 수 없는 관심이었다. 언젠가 회고록을 쓴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게 될지 그것도 사실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강명우라는 사내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충동처럼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즈음 그가 고나심을 갖기 시작한 그 숱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그 역시 선택되었을 뿐이
었다. 물론 그가 운동권의 경력을 가진, 좀 특별한 사내라는 점이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민 비행기를 타러 김포공항으로 가던 길, 8년 전의 그때, 시위대열의 투석과
전경들의 최루탄으로 막혀버린 길 한복판에서 그는 얼마나 막막한 절망감을 느꼈었던가.
그는 내 나라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결코 그런 것으로 채워넣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것도 마지막이여. 실컷 보고 실컷 맡아두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겄지. 딴 나라 가서야
어디 이런 걸 보겄어. 비행기야 늦으면 내일이라도 다시 타면 되는 것이고.
큰아들에 이어 남은 아들까지 먼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늙은 아버지의, 뜻밖의
의연하기 짝이 없는 말이 었다. 아버지는 마치, 비행기라는 것을 막차 놓치면 내일 다시
타도 되는 무슨 시외버스 잡아타기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그 말은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울고 싶을 정도로 지독했던 최루가스와 비명 같은 구호들 사이에
서도 아주 잠깐은 편안했다. 순식간에 절망이 사라져 버린 상태의 고요... 그 상태에서,
어쩌면 그는 생각했었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 작별은 아니야.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라고.
그리고 그때 한영은 그 여자, 서연을 생각했을 것이다.
어둡고 좁던 골목길. 그 막다른 골목에 서서, 그를 향해 두 손을 내젖던 여자. 마치,
무기들린 여자처럼 손을 훼훼 내저으며 그에게 외치던 소리
-가! 떠나라구! 다신 돌아오지 마! 다신 돌아오지 말란 말이야!
4
"뭐야?"
한림이 릴을 감아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ㅋ면서 한영은 자기 낚싯대를 놓아둔 채
한림에게로 다가갔다. 억센 장정과 같은 한림의 팔뚝에 울끈불끈 힘줄이 숫아나고 있었다.
"명우씨! 와봐요!"
적어도 1미터는 족히 됨직해 보이는 물고기의 그림자가 수면 가까이로 튕겨오르고 있었다.
그놈은 끌어올려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악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낚싯줄이 이쪽
저쪽으로 휩쓸려갔고 어린아이 손목 굵기만한 낚싯대가 휘청휘청 휘어지고 있었다.
"크다!"
조셉이 환희에 찬 함성을 지르며 선실 외벽에 걸렸던 작살을 가져왓다. 그러나 이내
끌어올려질 것 같던 물고기는 배 밑전으로 낚싯줄을 끌어갔다. 역시 자기 낚싯대를
놓아둔 채로 한림에게로 다가와 있던 명우가 달려가 자신의 낚싯줄을 감아올렸다. 배
밑바닥에서 낚싯줄끼리 서로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인 모양이었는데, 역시
낚시꾼다운 모습이었다.
"이놈! 용깨나 쓰는군!"
힘에 부치는 듯 릴을 감는 것을 잠깐 쉬었던 한림이 다시 억세게 릴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땡볕에 그을은 그의 이마에 진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결결이 빛을 뿜고 있는 수면 가까이로 거대한 물고기의 그림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몰려들었던 물새들이 원을 그리며 공간을 넓혔다. 그놈의 고기가 아무래도 자기들의
먹이감은 못 될 거라는 것을 판단한 듯, 물새들은 다시 정어리 미끼가 던져지기를
기다릴 태세였다. 한영의 미끼를 낚싯대 끝에서 세 번이나 채가버렸던 그 중 큰 물새는 ,
아예 한영의 낚싯대 주변을 떠나가지 않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그놈은 배가 몇 번이나
이동을 하는 동안에도 내내 그 배를 쫓아와 먹이를 구하고 있는 놈이었다.
"우와! 엄청나군요!"
기어코 수면을 박차고 거대한 물고기의 몸통이 드러났다. 몰려드는 먹구름 사이에서도 아직,
길고 강한 빛살을 내뿜고 있는 햇볕을 받아 그놈의 몸통은 찬란하게 아름다운 은빛이었다.
스내퍼였다.
"크다!"
조셉이 소리를 지르며 그놈의 등허리에 작살을 꽂았다. 그놈은 이제 작살에 꽂혀
끌려오고 있었고, 그놈의 온몸을 찬란히 아름답게 만들었던 은빛은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괜찮은데."
작살에 꽂힌 채로도 온몸을 뒤틀어 퍼덕이고 있는 곤므의 아가리를 벌려 낚싯바늘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한림의 얼굴에는 희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어군탐지기의 신호를 받아 배를
멈춘 뒤 쉴생벗이 고기를 잡아올리기는 했지만, 이번 것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기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큰 게 잡혓다 하면 번번히 놓쳐버리기 일쑤였던 한영은 감탄이
사라지지 않는 얼굴로 고기를 다루고 있는 한림을 내려다보았다. 한림은 양손으로 고기의
몸통을 억세게 잡아쥔 뒤, 배의 후미로 다가갔다.
배의 후미에는 바닷물에 삼분의 이쯤이 잠기게 되어 있는 물고기 통이 있었다. 조셉이 줄을
잡아 그 통의 뚜껑을 열자 통 속에 들어 있던 물고기들이 제가끔 꼬리를 튕겨내고 물보라가
튀어올랐다. 한림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그 통 속에 던져놓은 뒤에도 이내 뚜껑을 닫지
않은 채 다시 한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 그 일일텐데도 그는 여전히
고기를 잡고 그 고기를 다루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고 쪽팔리는데. 안그래요, 명우씨? 나야 그렇다고 치고 명우씬 뭐하는 거에요?
낚시꾼함녀 강명우라는데, 그거 혹시 헛소문이었던 거 아닙니까?"
한영이 과장된 목소리로 명우에게 농담을 걸었으나 명우는 그저 비죽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어군탐지기란느 것이 정말 제대로 된 기계인 것인지, 그들이 어군탐지기의 도움을
받아 낚시터로 정한 곳엔느 정말 고기들이 드글드글하는 것 같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낚싯대만 던졌다 하면 고기가 몰려나올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낚시에는 영 젬병인
한영도 벌써 대여섯 마리를 건져올렸으니 명우라고 소식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잡아올린 고기들은 이 넓은 바다의 명색에 비해서는 형편없이 작은 놈들이었다.
한영은 한림의 낚싯대에 걸렸던 고기가 명우의 것에 걸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도대체 이 친구의 얼굴은 언제나 밝아질 것인가…
낚시를 위해 배가 멈춰 선 뒤, 명우의 멀미도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질려 있지 않았고, 이제는 배의 흔들림에 맞춰 대충 중심도 잡고 그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던 때의 그 창백한 표정은 아직도 여전해 보였다 그는 그렇게 악을
써놓고도 아직 덜 내지른 무언가가 자심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고 믿는 것일까.
"왔다…"
한영의 시선을 피해 있던 명우의 얼굴에 잔 꿈틀거림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재빠르게 낚싯줄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낚싯대의
휘어짐이 별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영은, 자신의 낚싯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명우가 고기를 다 끌어올리기까지 그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일렁이는 물결 가까이로 고기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순간 한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를 질렀다. 그 그림자가 너무 선명한 붉은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주
순간적이었다. 한영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등허리에 솟은 비늘을 창날처럼
바짝 바짝 세운 채, 아가리를 딱 벌린, 시뻘건 색깔의 고기 한 마리가 퉁겨지듯 수면 위로
솟아오른 것이었따.
"만지지 마라!"
한영의 외침소리에 다가왔던 조셉이 명우의 등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명우도 잠깐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뻘겋고 그렇게 공격적으로 생긴 고기를 명우도 역시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이건 독어다!"
명우의 낚싯대를 건네받아 조심스레 물고기의 허리를 잡으며 조셉이 중얼거렸다.
"이 가시에 찔렸다가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놈의 등허리에 솟은 칼날 같은 비늘을 가리키며 조셉이 히죽 웃어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는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놈이 맹독성의
독어라는 것은, 그놈의 모습만 봐도 그냥 느껴질 정도였다. 조셉은, 약간 얼이 빠져 있는
듯한 명우와 한영을 웃음으로 한번 바라본 뒤, 그놈의 아가리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바늘을
빼 다시 바다에 던져버렸다. 뱃전으로 올라오면서 조금 죽는 듯했던 붉은 빛이 다시
선명하게 살아오르며 바다 깊숙이로 사라져갔다.
"오늘 왜 이럽니까?"
농담처럼 한영이 명우에게 말을 던졌다. 명우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해, 농담을 받은
웃음조차 그늘져 보였다.
"그만하는 게 좋겠다."
명우의 낚싯대를 걸이에 걸어놓으며 조셉이 한림 쪽을 향해 말했다. 낚시에 빠져 있던
한림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꽤 가까이에 와 있었다.
"금방 올까?"
"벌써 다 왔다."
한림과 조셉의 말이 마치 선문답처럼 오고 갔다. 아마도 소나기를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한영과 명우도 먹구름의 방향을 쫓아 시선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하늘과 바다가
연결되어 있는 비기둥이 보였다. 꽤 선명한 검은색의 기둥이었다. 비가 많이 온다는
증거였다.
"그럼 돌아가는 거야?"
명우가 아직 대어를 못 낚은 것이 신경쓰여 한영이 한림에게 불평을 하듯 물었으나, 한림의
표정은 태연했다.
"비 좀 맞는다고 죽냐? 선실에서 잠깐 피하자. 지금 배돌려서 선착장에 들어가면 어느새
말짱 개어버릴텐데."
"조셉, 저 친구는…"
"저 새끼 사시미 먹고 싶어서 저럴걸."
"사시미?"
"사시미에 환장한 새끼야. 처음에는 날 무슨 식인종쯤 되는 눈치로 쳐다보고 그러더니
한 입 먹어보고는 첫마디가 '뷰티풀'이더라. 비오는 동안 한 마리 잡아서 소주나 한잔 하자.
어떠냐?"
"글쎄…"
한영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명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말끝을 흐렸다. 심한 멀미 뒤끝에 소주가 받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어느새 한림은
조셉에게 사시미칼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한림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던지
조셉은 활기가 도는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선실에서 사시미칼을 찾아 뛰어나왔다. 그는,
한영과 명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사시미가 베리굿이라는 거였다. 조셉과
한림이 갑판에서 사시미를 뜨는 동안 한영은 명우와 함게 선실로 들어갔다. 한림은
벌써부터 이럴 작정을 해두었던 것인지 그의 아이스박스 속에는 맥주 이외에도 진로소주가
몇 병 들어 있었고, 일제 간장과 와사비 튜브도 같이 들어 있었다. 한영은 명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있는 대로 이것저것을 꺼내 놓았다.
"배타고 소주라, 괜찮은데요?"
한영은 그렇게 말했으나 사실은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명우는 한영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창백한 얼굴에 그저 희미한 웃음뿐이었다. 그가 오이쪽을 건드리다 말고 한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그런 소실이 있었는데…"
"낚시에 관한 소실인가요?"
한영이 대답했고, 그런 한영을 향한 명우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짙게 서렸다. 한영이 가볍게
웃었다.
"조세희란 사람이 쓴 소설이라는 거 알아요. 오래 돼서 정확히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왜요? 왜 갑자기 그 소설 생각을 해요? 아까 잡았던 그 독어 때문인가요?"
"그런가 봅니다. 사실은 나도 그 소설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아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일부분이었던가, 아니면 다른 단편이었던가…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그때 그 가시고기의 비유가 아마도 억압받는 민중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 내가 민중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명우씨한테서 민중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그것도 색다른데요?"
"왜입니까?"
명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영은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의도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명우, 그가 가시고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그물에 갇혀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들 자기를 가둬놓은 그물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이 있으랴. 그것은 그 자신에게도,
또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한림에게조차도 다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명우의 질문은 받지 않은 채 회를 뜨고 있는 선실밖의 한림을 내다보았다. 한림이
20년 가까이나 살을 맞대고 살아온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한 것이 3년 전쯤의 일이었다.
교민사회에서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나버렸던 그의 이혼사건은, 그의 아내가 미장원에서
만난 웬 놈팽이와 눈이 맞아버렸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이혼을
선언했으나, 아내의 부정을 빙자한 이혼치고는 갖고 있던 재산 거의 모두를 아내에게
주어버렸던 것이다. 재산뿐만이 아니라 두 아이들의 약육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이혼을 하면 남자만 알거지 되게 되어 있는 나라라고는 하더라도, 이 경우는 아내의
부정이란 것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질이 좀 달라야만 했었다. 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거였다.
한림의 아내, 한영에게는 형수인 그 사람이 진짜로 외간 남자와 놀아나는 짓을 했는지
아닌지는 그 장본인들밖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한림을 잘 알고
있는 한영으로서는, 그의 이혼이 한림 쪽의 의도된 음모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 안달을 부려왔던
사람이었다. 어딘가 떠날 곳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떠나면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을 옭아매놓은 현실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아내를
저주했고 자신의 자식들을 증오했고 밤마다 기어들어야 하는 자신의 집을 못 견뎌했던
것이다.
그가 한때,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통기타 하나만 들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자기 것
같았던 가수였다는 사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하나의 업보인 듯싶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이국살이의 삶이 길어갈수록, 자신의 좌절된 꿈 때문에 폭군이
되어갔다. 그는 자신이 이민을 오게 된 것이 오직 그의 아내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아내의 친정 쪽이 이미 모두 다 이 나라에 이민을 와 있었으므로, 그 여자는 아주 손쉽게
그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고 고민 한번 없이 자신의 남편을 그 길로 '끌어들였던 것'
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때 그 여자는 대마초로
부터 자신의 남편을, 그리고 자신의 가정을 구해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의 노래 [먼 길]이 금지곡이 된 이후로도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흡연하던 그는, 그의 말에
의하면 대마초 대문에 형편없이 느슨해진 감상으로, 이 나라의 꿈을 받아들여버릴 수밖에
없었노라고 했다. 그 시절, 마누라가 어찌나 이 나라의 단꿈만 떠들어댔던지, 어떤
부처님 가운데토막 같은 작자라도 그 공갈에 안 속아넘어갈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살밍 지긋지긋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또 불현듯 아주 오래 손을 끊어왔던
대마초의 환락이 떠오를 때마다 자기의 아내를 저주했다.
-개 같은 년! 지상낙원 좋아하시네. 지상낙원의 시궁창으로 날 끌어들여놓고!
어쨌든, 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호기였던 듯 싶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재빨리 그녀와, 그의
자식들과, 그의 집으로부터 도망쳤다. 어쩌면 그는 이미 사십의 절반을 넘겨버린
나이임에도, 고래잡이를 한다는 것이 다시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잔해볼까?"
일회용 접시 위에 횟감을 수북이 담아가지고 들어오는 한림과 조셉의 등 뒤로 빗발이
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굵고 무겁게 느껴지는 빗발이었다. 한영은 비로소 명우를
바라보았다. 명우는 아직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미루고 있는 한영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한영은 명우의 잔에 술을 채워주는 것으로 끝내 대답을 미뤄버렸다.
"이 친구도 소주 마시나?"
한영이 조셉을 가리키며 한림에게 묻자 한림은 고개를 가로저였다.
"사시미에는 환장해도 소주는 죽어도 못 먹겠단다. 저새끼, 원래 맥주 한 잔만 해도
빙글빙글 도는 놈이야."
조셉의 잔을 비워놓고 소주가 한 잔씩 채워졌다. 조셉은 온갖 종류의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동안,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에 대해서 거의 무감각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이 낯선
동양인들이 뭐라고 지껄대든간에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 얼굴로 회를 집어먹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뜻밖에 젓가락질도 아주 능숙해, 한 젓가락에 두세 점씩 집어먹는 그의
모습이 과연 가관이었다.
"명우씨, 한잔 받으쇼."
한림이 명우의 잔이 비기가 무섭게 또 한 잔을 채워주었다. 명우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한영은, 위태한 느낌으로 명우의 술잔을 바라보았다.
명우는 거절하지 않은 채 두 잔째의 술도 단숨에 비웠다.
"고향주가 좋긴 좋구만."
한림이 석 잔째의 술을 냉큼 비우는 순간부터, 선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소나기의 중심권에 들어서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빗소리를
신경쓰고 있지는 않았다.
"명우씨한테 좋은 일이 있었다는 소린 들었소. 자, 다시 축하주 한잔!"
한림은 어쩌자고 자꾸 명우에게만 술을 권하고 있었고 명우는 그 잔을 거부하지 않고
있었다. 한영 혼자 느끼고 있던 위태로움이 점점 긴장되어가고 있었다. 좋은 일… 명우는
한림의 그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인가. 한영은, 한림의 장난기를 알고 있었다. 한림은,
그가 이미 그 속사정을 다 알아버린 이 왜소한 사내, 강명우를 놀려먹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악의에 찬 한림이었다. 어떤 종류의 꿈을 가졌던 자에게는 이 나라의 영주권 따위가
결코 '좋은 일'일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일터였다.
그는 고래를 잡는 것에 실패한 또하나의 청춘을 조롱하고 싶어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한영은 갑자기 한림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휘말린다.
그가 이혼과 동시에 허물처럼 벗어던진 그의 아이들을 만나러 왔었던 얼마 전의 일이었다.
불행히도 그의 허물들은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대신 대디라고 부름으로써 이혼이 대수가
아닌 이 나라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래서 그는 사라져버린 허물 대신 벌겋게
까뭉개진 알몸의 모습으로 그 도시를 해매고 다녔다. 그의 가장 좋은 술친구가 그와는
해병대 동기이기도 한, 박변호사였다.
흥분만 했다 하면 자신의 해병대기질을 꼭 들먹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박변호사는, 그날따라
한영을 함게 불러내 처음부터 과장된 취기를 보였었다. 그 이유가 명우 때문이었다는 것을
한영은 고작 맥주 두어 병 끝에 알게 되었다.
한영이 명우의 집에 가서 명우를 만나고 돌아왔던 며칠 후, 명우가 박변호사를 찾아왔었다
고 했다. 그는 그렇잖아도 한영에게 명우의 주소를 알려주었던 것이 찜찜했던 차였는데,
마치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섰던 명우는, 당신을 없애 버리고 말겠다는 말만
을 남긴 채 돌아서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가 막혔고 조금있다가는 어이가 없었고
나중에는 미친 듯이 화가 나더라고 했다. 그 새끼-그는 명우를 '그 새끼'라고 했다-영주권
받아주면서 자기가 받은 수임료가 얼만 줄 아느냐고, 그 새끼 형을 봐서 공짜나 다름없게
해줬던 게 바로 자기인데, 그러고도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닌 게 바로 자기인데, 그
새끼가 자기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영으로서는 할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든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든
원인이 자기에게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박변호사는 명우에게뿐만 아니라 한영에게도
마찬가지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그 새끼가
자기를 없애 버리겠다고 말하게 만든 거냐고, 그는 묻고 싶은 것일 터였다.
한영은 개운치 못한 심정으로 그날 명우와의 일을 아주 짧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길게 말할 건덕지나 있었으랴.
-이 미련한 동생아!
한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변호사는 자기 이마를 때리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 꼴통이란 소리를 내가 해줬잖냔 말이야! 기자 신분증 떠억 내놓고 취재네 어쩌네
해서, 그 새끼가 그럼 입을 열어줄 줄 알았냐?
-그럼 어떡합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냐? 그걸 내가 알면 내가 기자 노릇 하겄다!
-왜? 구라쳐서 버는 돈이 얼마 안 되냐?
그때까지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채로 듣고만 있던 한림이 끼어들었고 박변호사가 명우의
내막을 풀어놓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그렇잖아도 명우에게는 기분이 안 좋았던
박변호사였다. 하늘의 별따기라는 영주권을 받게 해줬는데도, 맥주 한잔의 감사표시가
없었던 게 바로 그 새끼였다. 그 새끼는 그새끼라고 치고 누구 하면 다 알아줄 만큼
알부자인 그 새끼의 형이라는 작자도 괘씸했다. 영주권 나오자마자 너 언제 봤냐, 하고
입 딱 씻어버리는 꼴이 정말 한국놈들이다, 싶기까지 했었다.
사실 그건 나올 게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 새끼보다 짱짱한 운동경력 가진 놈들이 이 나라
에 수두룩하다. 누구누구는 북쪽에도 갔다왔고 누구누구는 해외 반정부 세력 리스트 1위에
올라 있는 놈이다. 경우 징역 1년반 산 경력 가진 피라미를 가지고 작품 만들어준 게
누군데, 이 새끼가!
-징역은 왜 살았답니까?
어차피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한 말, 한영은 박변호사를 통해서라도 명우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한림 역시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남에게 뒤처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태어난 나라의 시궁창 같은 현실이 하도 혐오스러워서, 짚신,
엽전들의 꼴이 하도 경멸스러워서, 기회만 닿는다면 그걸 잘근잘근 씹어대야만 했던 것이다.
그가 씹어대고 싶은 상대는 정부세력이든, 그 정부를 반대하는 반정부세력이든
마찬가지였다. 도개ㅈ든, 민주주의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한국적인 이상, 그에게는
모든게 다 똑 같은 시궁창 이었던 것이ㅏㄷ.
-왜 학생애들 점거농성하다가 우르르 달려들어간 사건있었지? 자네들은 잘 모를지도
모르겠다. 한국 떠난 지가 꽤 오래들 됐잖아. 하여간에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전통 때니까,
그런 사건이 어디 한둘인가. 강명우, 걔도 그때 들어갔었지 그때 겨우 대학 이학년이었다니
까 알면 뭘 얼마나 알았겠나. 선배 쫓아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정문 막혀서 못 나오고,
같이 쭈그려앉아 있다가 달려들어 간 거지.
-그래도 일년반이나 살았다면서요?
-하긴 그게 좀 미지수이긴 하더구만. 워낙 많이 달려들어가니까 훈방도 되고 대개는
집행유예로 나오기도 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이 꼴통 일년반이나 살았어. 우리가 서류
꾸밀 때는 그게 그 친구의 선명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애기가 되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새끼가 워낙 꼴통이라서 그랬던 거 같애.
-무슨 소리예요?
-그 친구, 법정소란에다가 교도소난동 혐의까지 얹혀져서 재판을 받았거든.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그게, 그 친구 자폐중의
시초야.
-자페증이라뇨?
-그 새끼 정신병자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서류 넣는 동안 얼마나 헛갈렸는지 하여간에 죽을 지경이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영주권
하나 받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려도 될까 말깐데, 이 새끼는 툭하면 관두겠다고 그러고,
오늘 했던 말 그다음날이면 헤까닥 뒤집고 또 어떤 날은 자긴 반정부운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그러질 않나, 정말 미치고 사까닥질할 노릇이더라고. 그 새끼형 때문에
버텼지 안 그랬으면, 내 손으로 불법체류자 신고를 해버리고 싶을 지경이더구만. 나중에
좀 찬찬히 살펴봤더니, 그놈이 아무래도 정신병적 징후가 있어. 그래, 형한테 슬쩍
물어봤더니 징역 살고 나와서 한 번, 이 나라 오기전에 한 번, 상태가 몹시 안
좋았었다더군. 방안에 틀어박혀서 사흘이고 나흘이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그랬다는 거야. 여기 온 것도, 그 친구 부모들이 그러다간 정말 미친놈 될까봐
억지로 보냈다지. 처음엔 몇 달 여행이나 하고 오라고 보냈던 건데, 그냥 눌러앉았다는거야.
형도 권했고, 본인도 원했다고 하고."
-고문… 후유증 같은 걸까요?
-그랬을 수도 있지. 어쨌든, 우리 서류에는 그렇게 올라갔으니까. 내가 보기엔 영주구너
나온 거, 그 친구 운동경력 때문인 게 아니라 그 정신병 때문이야. 어떤 동정심 많은
담당자가, 그 친구 인생이 눈물겨워서 스탬프를 꽉 눌러 찍어준 거겠지
-고문 후유증이야.
한림이 끼어들었다. 마치 최종진단을 내리는 의사의 단언처럼, 그의 목소리는 분명한 확신에
차서 울렸다. 한영은 한림의 확신이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고문의 땅이라고 여기는 한림이었으니까 말이다.
한림이 그의 노래 [먼 길] 때문에 신원미상의 작자들에게 납치되듯 연행이 되어갔던 때, 한
영의 나이 고작 열일곱살이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던 사흘, 결혼해서 고작 1년이 채 안
되었던 형수는 그가 상습적으로 피우던 대마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고,
사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가 대마초에 취해 뜻밖의 사고만 저지르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그가 돌아왔을 때 그가 들어갔다 나온 화장실의 변기에 피똥이 그득한
것을 보고, 그들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일이 생겼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알았지만, 그는 그의 노래를 작사작곡해 주었던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 작곡가가 반정부운동 조직에 관련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곤경을 치른 것이었던 거였다. 이미 수배중이었던 그 친구를 찾아내기 위해, 그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친구의 이름과 그 친구들의 애인 이름과 또 그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던
창녀촌의 방 호수까지 기억해내고서야 그 밀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후
그의 노래는 금지되었고 그는 노래를 포기했고, 또 자기 나라를 떠났던 것이다.
-나는 간다. 이놈의 땅, 이놈의 돼지우리 같은땅. 다신 안 돌아올 테다.
한림이 이민을 떠나기 며칠 전이던가, 술인지, 대마초인지 알 수 없는 것에 몽롱히 취해
홀로 중얼거리던 소리를 한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는 이민온 지 15년 가까이가 되도록 아직 단 한 번도 자기 나라의 땅을
되밟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 나라에 대한 그의 기억은
일조으이 '원한'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원한을 확인받는 것을 즐겼다.
한국 내의 소식이 이곳 현지언론을 탈 때마다, 그는 드디어 먹이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눈빛이 번뜩였다. 88년 올림픽 소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단 한 차례도 좋은 소식이 없었던
고국의 소식이었다. 그는, 화염병을 든, 마치 무장강도처럼 복면을 한 시위대열들이 도로
한복판을 점거한 시위의 풍경을 접할 때거나, 또는 엄청난 목숨을 앗아간 대형참사 소식을
접할 때거나, 마찬가지로 흥분했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나라가 자신을 제외한 채로도,
탈없이, 멀쩡히 아주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ㅇ벗는 사람 같았다. 그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떠나온 나라는 결코 제 정상이 아니어야 했다. 그것은 시궁창이고,
그것은 돼지우리고, 그리고 그것은 오직 고문의 땅이기만 해야 했다.
-어찌됐든간에, 순 후로끄 같은 자식. 뭐? 정의와 양심을 위해 목숨을 바쳐? 국회의원
출사표에 경력 팔아치운 사일구 세대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 국회의원보다 이 나라
영주권이 더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만큼 약삭빨라진 거고.
박변호사의 마지막 말이 한영의귓가에서 라라지지를 않았다. 슬프고 우울한 얘기였다. 그날,
그들은 모두 제살 물어뜯기를 하고 있었다. 강명우를 향해 후로끄라고 욕설을 한
박변호사는 그의 영주권을 받아내준 사람이었고, 그의 증상을 고문 후유증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한 한림은 15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그의 땅을 되밟지 않은 사람이었다. 모두들
악의에 차서 제살만 물어뜯고 있었다. 그 술자리를 떠나올 때 한영은 온 몸의 살점이
얼얼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강명우란 사내에 대한 섣부른 관심, 그것도 어쩌면 마찬가지의
일이 아닐까.
-그 친구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박변호사와 헤어져 한영의 집 쪽으로 돌아오면서, 한림이 한영에게 물었다. 한영은 한림이
명우에게 보이는 관심이 어쩐지 역겨워서, 그의 관심으로부터 명우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래도 한림보다는 자신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한림이 혼자 말해했다.
-삼 년이 채 안 됐다고 했지? 아직 쉽지 않을 때다. 삼십 년을 살아온 나라, 삼 년 만에
지워지나. 어쨌든 간에 영주권도 나왔겠다 이젠 두 발 뻗고 살게 됐으니, 그 친구도 이젠
사람답게 살아봐야지.
한영이 걷던 걸음을 문득 멈추고 한림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마 묻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
형은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소? 한영의 입이 반쯤 벌어졌으나 그러나 그는 애써 그 말을
눌러 참았다. 한림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한림은 어느 한순간도, 결코 자신을 부정하는 법이 없었다. 만일 그 순간 한영이 그렇게
물었다고 할지라도 한림의 대답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 말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나? 나야 완벽한 자유인이지.
-형, 난 어디 좀 들를 데가 있는데.
반쯤 벌어졌던 한영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한림은 술을 더하고 싶던 차였지만
한영과는 더 이상 술동무를 하고 싶지 않던 터라 오히려 반갑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흔쾌히, 그럼 나중에 보자며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한영은 뒷맛이 개운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그러하듯 한림 역시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세상에 단둘뿐인 형제… 그것도 이국살이를 하고 있는 형제들이었다. 부빌
수 있는 모든 것을 부벼 외로움을 달래도 부족할 판에 이렇게 등 시린 느낌만 간직하며
살아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생각이 감상을 전하기에는 둘의 간격은 너무 멀어져 있었다. 한림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 '자유인'이었고, 한영은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는, 이미
구조 속의 한 나사가 되어버린 '부품적인 인간'이었다. '자유'의 눈으로는 '부품'을
이해할 수 없었고 '부품'의 눈으로는 더더군다나 그 헛도니 '자유'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한영이 찾아간 곳은 명우가 밤일을 한단느 기술학교였다. 명우가 벌써 꽤 오래 전부터
밤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물론 박변호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꽤 큰
기술학교의 청소권을 갖고 있는 그의 형 밑에서 풀타임 청소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청소를 많이 했다. 청소는 대개 두 종류로, 하우스크리닝과
오피스크리닝으로 나뉘는데 가정 청소를 맡아 하는 하우스크리닝은 집주인들이 집을
비우는 대낮에 이루어지는 반면 오피스크리닝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을 한 야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작은 오피스는 두어 시간에 일을 끝내지만 큰 슈퍼나 학교 같은
경우에는 밤새 작업을 해야만 했다.
박변호사로부터 알게 된 명우의 형은, 교포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청소거물이었다. 그는
단위가 큰 오피스의 청소권을 수두룩하게 가지고 있어서 앉은자리에서만 주에 만불이 넘는
소득을 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물론 그가 하는 일은 직접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권리를 갖고 있는 청소권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오피스로부터 청소대금
을 받아 그 대금의 반가량을 자기 몫으로 떼어낸 뒤, 그 나머지 반으로 사람들을 부렸다.
대개의 한국사람들은 그러한 청소권자 밑에서 고용된 노동자 노릇을 하게 마련이었다.
어쨌거나 형이 그렇게 거부인데도, 자기 동생을 노동자로 부리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생 하나쯤은 공으로 먹여살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갖고
있을 것이었고, 만일 그 댕송이 굳이 일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생으로
말려죽인다는 야간작업 같은 것은 안 시키는 게 옳지 않았을가. 지난번 그의 집에서
만났었던 명우의 모습이 떠올라싸ㄷ.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던 두 눈, 자다가 금방
뛰어나온 듯 단추를 덜 여미었던 셔츠깃들이. 그는 밤에 놓친 잠을 그 시간까지 벌충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 시간이 오후 일곱시였거만.
한영이 한 시간 정도 차를 달려 명우가 일한다는 학교에 도착한 때가 밤 열한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학교는 깊은
어둠과 정적에 묻혀 있었다. 한영이 닫힌 교문을 두어 번 흔들자, 아마도 가까운 곳에
있었던 듯 시크리터가 달려나왔다. 그는 시크리터에게 여기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자기 신불을 밝혔고, 시크리터의 연락을 받아 달려나온 사람은 자신을 슈퍼바이저라고
밝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벗어들면서 슈퍼바이저라는 사내가 물었다. 그는 명우를
만나는 일이 뜻밖에 복잡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명우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을때, 그는
그저 명우에게 지난번 일을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명우가 의아해한다면,
그는 자기가 이곳을 지나던 길에 명우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었던 것뿐이라고 대꾸할 작정이었고, 지난번엔 실례가 많았는데 사실, 당신의 일을
기사화할 작정이었던건 아니라고, 그런 말도 지나가는 말처럼 해둘 작정이었다. 그럼
그땐 날 뭐하러 만나러 왔던 겁니까, 만일 명우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는 아마 말이
막혔겠지만, 그러나 충분히 말할 시간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해버릴 작정이었다. 그 솔직한 이야기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채로도, 그는 단지 막연히,
아주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무장갑을 벗어들고 이마의 땀을 닦아내리는 슈퍼바이저의 모습을 보면서야 한영은
자신이 또 한번 터무니없는 짓을 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복잡한 절차로 복잡하게 만나서는, 지나던 길에 생각이 나서 들렀다는 말조차도 우스울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일을 하는 중이었고, 자신의 입에서는 아직도 술냄새가 풍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강명우씨를 잠깐 볼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바쁘다면...
-급한 일이십니까?
-아니, 뭐... 급한 일까지야.
-명우씨는 B동에서 일을 해서요. 식사시간이 아니면 우리도 보기가 쉽지 않아요. 저기,
보이시죠? 저 꼭대기 첨탑같은 거 보이는데, 거기가 B동이거든요.
슈퍼바이저라는 사내의 손가락끝을 바라보니 과연 어둠에 묻힘 첨탑 같은 것이 보였다.
주변이 온통 수풀에 둘러싸인 그 건물은, 슈퍼바이저의 다른 설명이 없어도 꽤 먼거리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안내를 해드릴 수는 없구요. 직접 한번 찾아가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낯이 익은데... 한림씨 동생이시죠?
-어떻게 절 아십니까?
-이 좁은 바닥,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 아닙니까? 언젠가, 마누라 파마하는
데 쫓아갔다가 본 적이 있었죠. 한림씨가 아직 여기 계실 때였으니까, 꽤 오래 전
일이겠군요.
-아아, 네...
한림이 집을 떠나기 전이라면 벌써 3년도 전의 일일 텐데, 사내는 한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한영은 한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고 한림의 아내는 미용기술을 배워,
정식허가 없는 미용실을 집안에다가 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드나들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한영은 그 뜻밖의 친절에 떠밀려 그 정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사내가 하던 일이
있다며 가까운 건물의 입구로 달려가버린 뒤, 한영은 B동의 위치를 가리키는 안내판만을
바라보며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건물마다 청소가 이루어지는 중인 듯, 환한 불빛이 비춰지고 있기는 했지만 건물의
모서리를 돌 때마다 창문으로 스며들던 불빛은 완벽하게 차단이 되었고, 그리고는
풀벌레소리뿐인 정적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럭비 운동장과 그에 연한 드넓은 풀밭이
나오더니, 이정표는 수풀 한가운데로 뻗은 오솔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섬뜩한 어둠 전체를 물리칠 만큼의 밝기는 아니었다.
수풀 속의 오솔길로 접어들면서, 한영의 좁아진 미간에는 찬 땀방울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나라에 와서 얼마쯤 되던 때였던가. 한밤중의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양 한 마리를
치어죽인 적이 있었다. 수풀 사이에서 불쑥 뛰어나왔던 그놈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브레이크를 잡을 여유도 없을 정도였고, 그래서 차는 몇십 미터나 더 달려가
멈출 수가 있었다. 급브레이크 소리의 비명을 지르며 차가 멈추어 섰다. 그는 아마, 3분이나
5분쯤 그 자리에 그냥 멈춰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은 채
내처 차를 몰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을 친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악몽에 시달렸고 이튿날
새벽이 되자마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봐야만 했던 것이다. 도로 한복판에 수십 대, 어쩌면
수백 대의 차랴들이 깔아뭉개고 간 그놈의 시체가 그때까지도 방치되어 있었다. 더이상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지고 짓눌러져, 그것은 시체라기보다는 그냥 던져진
쓰레기 같았다. 한영은, 그 쓰레기가 던져져 있는 저쪽 도로를 이쪽도로에서 바라보며,
불쑥 울음을 터뜨렸다. 왜일까... 누구보다 순조롭게 이민을 왔고 누구보다 순조롭게
이민살이를 하고 있었고, 단 한 번도 깊은 후회는 해본 적이 없었건만... 그런데도 그
새벽 그는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 깔아뭉개진 쓰레기가 마치 자신 같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수풀 사이의 오솔길을 오래 걸은 끝에 다시 잔디밭이 나오고, 아주 고풍스럽게 지어진
건물 하나가 우뚝 그의 시선 앞에 섰다. B동이었다. 한영은 잠시 그 앞에 서서, 불빛이
밝혀져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불빛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왔다갔다하는 것이 보였다.
마포질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그림자는 어거주춤 어깨를 숙인 모습으로 아주 천천히
창문의 이쪽에서 또다른 창무느이 저쪽으로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정말 언젠가는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회고록
때문인 것일까. 한영으 ㄴ망설이며 그 창문 아래에 오래 서 있었고, 어디선가 바람 한줄기가
휙 몰아친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그림자가 우뚝 서더니 창문 밖으로 얼굴이 넘어왔고,
그리고 그 얼굴의 시선이 한영에게까지 와닿았다.
시선은 경악과 공포에 가득 차 이었다. 어둠에 가려진 이쪽이, 불빛에 밝혀진 저쪽만을
바라볼 수 있는 가운데, 시선은 급기야 숨죽인 비명소리를 담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선의
공포가 어찌나 선명한지 한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팔을 내젓기 시작했다. 나, 사람이
오! 난 살아 있는 사람이오!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질러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러나
어쩌자고 입은 꼭 다물린 채 두 팔만 휘저어 지는 것이었다. 창문에서 얼굴이 사라졌다.
아주 재빠른 동작이었고, 어떻게 보면 필사적인 도피인 것도 같았다. 한영은 그때에서야
소리를 지를 수가 있었다.
-명우씨! 강명우씨!
목이터져라 불러댄 그의 외침은, 깊은 밤중의 정적을 울려 마치 메아리처럼 반복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다시 창문 밖으로 얼굴이 드러났다. 아주 조금씩, 창문 쪽으로
들어올려지던 그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을 때, 그 얼굴은 다시 한번 굳었다.
그가 건물 밖으로 모습을 나타낸 건 그로부터 잠깐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는 한영의
얼굴을 가까이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리고는 머쓱한 듯 웃음을 경련처럼 한번 떠올렸다.
-놀라셨죠?
명우에게로 다가서며 한영 역시 머쓱한 목소리를 냈다. 한밤중의 여린 불빛 때문인가,
명우의 얼굴은 파리하고 창백해 보였다.
-여긴 어떻게...
-아, 예. 지나던 길에...
이것도 말이라고 하고 있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리
준비해놓은 바가 그것밖에 없어서 한영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명우의
미심쩍은 시선이 다가올 것이 너무도 뻔해서 재빨리 얼굴을 돌려버렸다.
-같이 일하시는 분은 없나요?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군요.
-혼잡니다.
-이 외진 건물에서 밤새 혼자 일을 하시면, 무섭지 않습니까?
-무섭죠. 어떤 때는 대가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으니까요.
명우의 말을 이해한 것은 명우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였다. 그곳 B동은 미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클래스들이 있었던 것이다. 방마다, 대가리뿐인 마네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잘 오셨어요.
클래스를 지나 교수휴게실의 문을 열며 뜻밖에도 명우가 먼저 그런 말을 열었다. 그는
교수휴게실의 냉장고를 열어 캔 주스 두 개를 꺼냈다. 방금 마포질을 끝마친 듯, 아직
물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타일바닥을 걸어오며, 명우는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잘 오셨어요. 그렇잖아도 한번 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저를 말입니까?
-지난번에 제가 너무 실례를 한 것 같아서.
탁자 위에 캔 주스를 내려놓는 그의 희고 섬세해 보이는 손이 부끄러운 듯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한영은 엉뚱하기 짝이 없게도 사과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받는 입장에
놓여버린 자신을 느껴야 했다.
-일부러 절 찾아오신 분께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 그땐 좀 당황을 했었어요.
-아닙니다. 제가 너무 무턱대고 찾아가서...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하는 쪽은 제 쪽인데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는데요.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사실은 지나가다가 들른 게 아니라, 제 쪽에서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일부러 찾아온 거라니까요. 사실, 전... 기자도 아닙니다.
당황한 김에 말이 두서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떻게 서두를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 부끄러운 듯 앉아 있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그는,
지난번 그의 지에서 자신을 향해 적개심어린 눈빛을 보내오던 그도 아니었고 이날 저녁
박변호사로부터 전해들은 정신병환자나, 약삭빠른 후로끄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한
당혹감이 엉뚱하게도 교민잡지사와 자신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토로해버리고 말았던
것인데, 그 말끝이었다. 한영을 바라보는 명우의 조심스러운 시선에 안도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것을 한영은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일에 방해가 되는 거 아닙니까?
사실 나는 기자도 아닙니다, 그 말을 내뱉어놓은 뒤, 그럼 나느 뭐야? 그런 스스로의
질문에 더할 나위 없이 어이가 없어져서, 한영으 ㄴ쑥스럽게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명우는
조심스러운 시선을 풀지 않은 채로도 웃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일도 꽤 하다보니 요령이 생겨서요. 이제는 시간만큼 일이 많지가
않아요. 여덟 시간 시간급을 받고 있지만, 일하는 시간은 그 반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어떨때는 심심해서, 일부러 구석구석 일할 데를 찾아보곤 하지요.
-이 건물을 혼자 다하시는 거에요?
-대개는 두 사람이 들어가지만 여긴 보시다시피 작은 건물이잖아요. 제가 혼자 합니다.
-밤새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텐데...
-심심하기도 하고, 사실은 겁도 나지요. 아까, 창문 밖에서 선생님 서 계신 걸 보고,
쑥스러운데... 귀신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게 바로 귀신이다,
그런 생각 해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군요.
-이거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경기 생기시는 거 아닙니까?
-경기요?
그가 조금 소리를 내서 웃었다. 분위기가, 어이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풀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까 들어오시다가 마네킹들 보셨죠?
-아닌게아니라 섬뜩하더군요.
-이젠 그것들이 유일한 친구죠. 어떤 땐 식당까지 내려가기가 귀찮아서 밥도 여기서 혼자
먹어버리는데, 그럼 그 놈들하고 얘기를 하죠. 김치냄새 괜찮겠냐 물어보고, 난 이거 없으면
밥 못 먹으니까 니들이 좀 이해해라, 이러는 식이죠.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봤다간 저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그럴 거예요.
농담처럼 하고 있는 말이었는데도 한영에게는 어쩐지 그말이 예사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마도 자폐증, 정신병 운운했던 박변호사의 말 때문인 모양이었다. 한영은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했던 명우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는 시간이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정적 속에서, 그들은 마치 아무런 사연도 없이 만난
다정한 친구들 사이 같은 역할을 배정받고 있었다. 명우가 자신이 혼자 하고 있는 밤
건물의 청소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영은 자신이 그 말 이외에는 들을 것도, 물을 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그가 1년반 징역을 살았던 민주화투쟁 경력의
소유자면 어떻고, 또는 그 경력으로 난민비자를 받아냈다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밤을
보내면서 한영이 할 수 있었던 생각은 오직 그뿐이었던 것 같다.
] ...밤 아홉시만, 그때가 되면 나는 출근준비를 서두릅니다. 열시까지는 학교에 도착을
해서 슈퍼바이저한테 출근보고를 해야 하니까요. 내가 작업복 차림으로 방을 나오면, 형은
언제나 티브이를 보공 ㅣ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있고, 형수는 화장을
지우고 있게 마련이죠. 그 시간의 그 집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형은 단 하루도 일찍 귀가하는 일이 없었는데 집구석이나 밝히는 놈은 문으한 놈이게
마련이라는 그의 인생관 때문이었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형은 한국에서 사업을
했었습니다. 중소업체치고는 꽤 단단한 회사였죠. 전형적인 사업가에, 전형적이
출세지향주의자였습니다. 그런 형이 그때까지도 잘 나가고 있던 회사를 다 정리하고
투자이민을 결심했던 건, 아마 그 즈음의 노동쟁의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형은 노조에
밀려서 신문지상에 사과문까지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를 무척 괴롭혔던 것 같아요.
그는, 그로서는 결코 잘못한 적이 없는 것을 죽을 죄를 저지른 양 사과문까지 발표해야
했던 일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겠죠. 나중에 만나보면 아시겠지만 형은 굉장한
다혈질입니다.
-형이 이민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참 경이롭습니다. 이 나라에
와서 형은 애처가에다가 좋은 아버지입니다. 밖에 나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주 이른 시간에 귀가를 하고 주말이면 가족 피크닉을 나가는 걸 빼먹는 적이
없으니까 말이지요. 이 나라에 와서야, 나는 형도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경이롭더군요. 이 나라의 무엇이, 형과 같은 사람에게조차도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는지... 적어도 가정에서는 그렇습니다. 형이 밖에서는 여전히 악덕 청소업자 욕을
먹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집에서만 보게 되는 형,
경이롭고, 또 억울하더군요.
아, 형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지요. 형이 나한테 일을 하겠으면 사무실 일을 보라고
했는데, 난 싫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형이 좀 불편해서...
난 어려서부터 형을 몹시 어려워했었거든요.
그런 형이랑 사무실에서까지 하루종일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게 불편했고, 형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한 반 년, 놀다가 형이랑 같이 이 학교엘 와봤어요. 형이 청소현장에 들르는
일은 별로 없는 일인데 그때는 아마 무슨 일이 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때 형이 다른
일을 보는 동안 심심풀이 삼아 여기 사람들 일을 도왔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게 되었지요.
마침 그때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한국엘 가버리는 바람에 사람도 급히 필요했고, 그래서
당분간 내가 하겠다고 했던 일이 이렇게 된 거예요.
형은 내게 작은 오피스의 청소권 하나를 주겟다고 해요. 그걸로 시작해서 형처럼 청소를
늘려보라는 거지요. 그렇지만 난 여기가 좋아요. 여긴, 우선 참 조용하고... 정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잖아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밤, 나 홀로, 이 건물에서, 마네킹들이나 벗 삼고... 힘들지도 않게 슬슬
일하는 거... 그러면서 창 밖의 새벽을 맞는거... 난 여기가 정말 좋아요.
내가 괴로운 건 오히려 주말이에요. 우린 금요일 밤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놀아요. 토요일은 정말 괴로운 날이지요. 난 금요일 밤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 새벽에야
귀가하니까, 토요일 낮에도 잠을 자야 하는데 토요일 낮에는 집안이 조용하지가 않거든요.
아이들도 학교에 안 가고,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까 형수도 외출을 안 하고, 형까지도
집에 있지요. 때로는 사람들을 불러 바베큐파티도 하고, 아이들은 학교 친구들을 불러와
수영장에서 시끄럽게 놀라대고... 일요일은 모두 교회에 가고 외식들을 하니까 견딜만한데
토요일은 정말 죽을 맛이지요. 형수가 나 보기가 딱했던지 얼마 전에 지하창고에다가
침대를 하나 놓아주더군요. 습기가 차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끄러운 것보다야 나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사실 낮이 아니라 밤이에요. 일이 없다고해서 밤에 잠이 오는 건
아니니까요. 일도 없이 밤새 집안을 서성거려야 한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럴때 내가 하는 일은, 비디오를 보는 것뿐입니다. 미니시리즈도 보고 주말연속극도 보고,
코미디프로, 가요프로도 빌려다 보지요. 난 그래서, 지난주 가요톱텐 1위가 뭐였는지 한번도
놓치는 적이 없어요.
한국에선 주말연속극 제목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젠 탤런트 영화배우 이름 줄줄이
외우고 살아요. 그것도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는 거더군요. 어떤 때는 비디오를
여섯개씩이나 이어 보다가, 아침이 오는 걸 보기도 해요. 그런 날의 아침은... 여기서
맞이하는 새벽과 아주 달라요. 물론 형의 집도 조용하고 뒷숲이 우거지고, 파도소리도
들리고... 아주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여기하고는 달라요.
이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평화 같은 것이 있어요. 내가 출근할 때 형의 집에선 보곤 하는
평화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뭐라고 할까... 마치 모든 것을 거세해버린 뒤의 순결 같은
평화 말입니다. 그런 새벽마다, 난 여기가 남의 나라라는 사실도 잊어버려요. 여긴, 내가
서서 새벽을 맞이하는 이 자리는, 남의 나라도 아닐 뿐더러 내 나라도 아니지요. 그저,
여긴... 나만의 자리예요. 아무도 전망을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반성을 강요하지 않지요.
서 있는 그자리, 그곳에서 그냥 죽어도... 그건, 그냥 나만의 죽음이지요. 아무도 내 죽음을
분석할 필요가 없는...
5
소주병이 넘어졌다. 왈칵 솟아오른 소주가 선실의 바닥을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그리고 또
한 병의 소주병이 넘어졌다. 이번에는 이미 바닥을 낸 빈병이었으나, 그것은 냉장고에
부딪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젠장!"
한영은 끝내 악을 쓰고 말았다. 그의 앞에서 한림은 히물거리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명우는 고개를 푹 수그린채로 테이블을 잡은 손에 힘만 주고 있었다. 흘러넘친 소주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정이컵과, 그리고 와사비를 뒤집어쓴 간장국물까지... 아니, 또 있었다.
오이쪼가리와 당근이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선실의 이쪽 저쪽으로 달음질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비는 미친 듯이 쏟아부었다. 마치 우박처럼 때려붓는 굵은 빗줄기에, 선실의 창문이
깨져나갈 듯이 울리고, 그리고 파도의 음험한 이빨이 그 창문을 핥아내리고 있었다. 배는
흔들린다기보다는 차라리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만 같을 지경이었다.
"돌아가!"
한영이 악을 썼다. 그는, 경복궁 연못에서 뒤집혔던 보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물의 깊은 속을 바라보았다. 보트가 뒤집히고, 그의 작은
머리통이 그 연못 밑바닥까지 끌려들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물의 깊은 속을 낱낱이 바라보았다.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시뻘겋게 흙탕물이던, 그리고
그흙탕물 속에서 마치 그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던 수초들을. 그 수초들이
그의 발목을 휘어잡기 위해 그를 향해 달려들던 것을.
"그만 돌아가자구! 다 토해버리겠어!"
"토할 것 같으면 바깥으로 나가서 대가리 내밀어."
한영이 악쓰는 소리를 한림은 그렇게 히물거리는 웃음소리로 받았다. 아마도
고통스러운 멀미와 그에 뒤엉킨 취기때문이었을까. 한림을 향한 한영의 눈에 적개심
같은 빛이서렸다. 너 혼자만 뱃놈이란 말이지? 한영은 한림의 턱을 한 대 갈겨주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웃기지 말라구. 고래도 한 마리 못 잡은 주제에! 그
헛도니 고래 한 마리 못 잡은 주제에! 두 주먹을 불끈 쥔 한영의 상체가 한림을 향해
솟구쳐오르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내 기우뚱 기울어졌고, 그는 허리께를 탁자
모서리에 찔리면서 바닥으로 나동그라져버렸다. 한영의 힘 잃은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던
소주병 파편에 떨어져내리기 직전, 그의 팔을 잡아올린 건 명우였다. 명우는 억지로나마
웃고 있었다.
그랬다. 그는 억지로나마 웃고 있었고, 그 억지로나마 웃음 띤 얼굴에는 멀미 따위는
찾아보이지 않았다. 그의 희고 창백하 ㄴ얼굴은 이제 약간의 취기만을 담고 있을 분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의 멀미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비 오는 바다, 이렇게 멋일을 줄 몰랐는데... 저걸 좀 봐요!"
파도의 흰 이빨로 뒤덮여 있는 선실창을 내다보며 읊조리듯 그렇게 중얼거리던 명우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번쩍이는 번개 그림이었다. 번개는 시커먼 하늘 한가운데 번쩍이는
줄을 긋고 바다 깊은 곳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이어 하늘을 무너뜨려버릴 것 같은 거대한 천둥소리였다.
"명우씬... 괜찮아요?"
한영이 묘하게 홀로 소외된 기분이 들어 명우에게 볼멘 소리로 물었다. 명우는 또
한번 웃었다.
"언제 이런 걸 또 보겠어요. 좋은 구경인데, 견뎌야죠."
"이 나라에 사는 한은 얼마든지 보게 될 테니, 염려 놓으쇼."
명우의 말을 한림이 받았고 명우의 시선은 한림에게로 다가갔다. 명우에게 퉁기듯 말을
던져놓은 뒤, 한림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습관 같은 웃음이 베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경멸하고 야유하고 싶어 언제든지 터지기 직전의 그것 같은 웃음...
그가 언제부터 저런 웃음을 갖게 되었는지 한영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이혼을 하면서
부터였을까. 남의 나라까지 와서, 살을 부빌 데라고는 유일하게 가족밖에는 지니지 못한
이민자의 처지를 단숨에 부정해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히 이혼을 해버리고 나서,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였을 것이다.
자신을 고문의 밀실로 가두어들였던 그들을 향해 그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자신에게
그런 노래를 지어준 친구를 향해, 끝내는 그 친구를 팔기 위해 창녀방의 방 번호까지
기억해야만 했던 자신을 향해... 그는, 벌써 그때부터 그런 웃음을 짓기 시작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이민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이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자기 나라의 땅을 밟지 않았던 것일까. 15년, 그
사이 정부가 세번 네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우씨도 이젠 이 나라를 즐겨보도록 해봐요. 남의 나라까지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악착같이 돈이나 벌자고 들었으면, 뭐하러 남의 나라까지 온 거야?
알겠소? 우리, 영주권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영원토록 이 나라를 즐기는 거요."
한림이 창가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어 다시 명우를 바라보며, 여전히 히물거림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그런 충고를 던졌을 때였다. 바깥으로 흘러넘쳐 이제는 빈 잔에 지나지
않을 뿐인 종이컵을, 그때까지도 악착같이 붙잡고 있던 명우의 손이 엷게 떨리는 것을
한영은 보았다. 한영은 잠깐 위태로운 기분을 느꼈다. 즐긴다. 그 말이 아직도 죄악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야말로 한국적인 근성이 남아 있는 탓인 것일까. 한영이 알 수 없는
감상으로 시선을 툭 떨어뜨리는 순간이었다.
"왜... 노래를 다시 안 하십니까?"
전혀 뜻밖의 명우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한림의 폭소 같은 웃음소리였다.
"노래라구? 노래를 말이오?"
한림이 쏟아내듯이 터뜨려댄 웃음은 배의 요동에 맞춰서 선실의 이쪽 벽과 저쪽 벽을
두드렸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피해 이제까지 묵묵히 키만 잡고 있던 조셉이 고개를 돌려,
그의 선주를 바라보았다. 간장국물이 아직 묻어 있는 그의 입매에도 어정쩡한 웃음이
새겨졌다.
"왜 안 해! 난 노래를 아직도 하지!"
"하십니까?"
명우의 목소리가 기대에 차서 울려나왔고 한영은 공연히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림이
노래를 한다는 말을 명우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영이 아는 한, 한림은 결코 노래를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노래'에 관한 한은 말이었다.
"온갖 노래방마다 최고기록이 누구 건지 아시오?"
역시 한림의 빗나간 대답이었고 명우의 표정에는 실망이 새겨졌다. 그리고 한영은
점점 더 한림의 느물거림이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이어진 뜻밖의 한림의
말이었다.
"그뿐인지 아시오? 난 노래를 가르치기도 한다오."
그리고 그는 윙크를 하듯 눈을 찡긋거리고, 이어 조셉을 불렀다.
"내 수제자의노래를 좀 들어보겠소?"
한영과 명우가 당혹감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한림은 조셉에게 '그 노래'를 좀 불러보라고
일렀고, 그렇잖아도 홀로 심심하기 짝이 없던 조셉은 신이 나서 그들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한림이 먼저 요란하게 박수를 때렸고, 멍청한 표정의 명우가 그 뒤를 이었고, 그리고
한영마저 마지못해 손을 겹쳐 때렸다. 조셉이 두 팔을 들어올려 박수를 받는 태도를
지어 보이더니, 소주병을 집어드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네 술상에서 흔히 그러하듯
소주병을 마이크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저것도 내가 가르쳐줬다는 거 아니냐. 스푼이 없어서 안됐는데?"
한림의 표정은 극도로 유쾌했다. 그리고 조셉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You going far away, don't say it's lonley
You please don't be scared
You will have everything someday
"이해하쇼. 저 새끼 한국말로 아무리 가르쳐줘도, 도무지 혓바닥이 굴러야지. 어떠냐?
저만하면 후로끄 번안이라도, 비슷하긴 하잖냐. 먼 길 가는 그대여, 외롭다 말하지 말라,
두렵다 하지 말라, 언젠가는 모든 것을 이루리, 네가 원했던 그날, 그 땅에... 우라질!"
한림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고, 한영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조셉을 바라보고
있었고, 명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빗소리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배는 여전히
이렇게 흔들리건만, 바닥을 굴러다니던 소주병소리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한영은
끝내 벌떡 일어서 선실 문을 열어젖혔다. 기다렸다는 듯이 굵은 빗줄기가 한꺼번에 한영의
앞가슴으로 몰아닥쳤다. 그리고 한영은 선실 밖의 갑판으로 나동그라져버리고 말았다.
갑판은 질펀한 빗물로 고여 있고 그 빗물 위로 사시미 찌꺼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잘려진 대가리, 뼈대만 앙상한 몸통, 그리고 핏방울과 비늘들이. 그 위로 하늘이 흔들리고,
짙은 먹구름이 고꾸라지고, 빗방울이 작살처럼 꼬ㅈ혀왔다. 한영은 자신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선실에서 울려오는 비명소리였다.
악, 으아악, 아악! 그리고 이어진 명우의 비명과 같은 외침소리였다.
"개자식! 영혼까지 팔아먹었어!"
명우의 비명과 같은 외침소리는 곧바로 이어진 구토소리에 파묻혀버렸다.
이미 오래 전의 기억이다 5년이나 6년 전쯤. 아니, 어쩌면 그가 이민을 왔던 첫해, 8년
전의 여름이었을까. 한림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던 한영은, 한밤중에 울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잠을 깼었다. 무언가가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어 분명하게 들려오는
음습한 신음소리였다. 밤잠이 깊은 형수는 절대로 밤에 움직이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림은 그때, 툭하면 하던 짓으로 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집을 부인 상태였었다.
아마도 집안의 유일한 성인남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 며칠 동안 한영은 깊은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소리를 듣자마자 한여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처음에는 도둑이 아닌가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를 쫓아 어둠 속의 복도를 걷는
동안 그는 등줄기에 올올이 솟아오르는 소름을 느꼈고, 그리고는 턱없이 미어지는 듯한
가슴의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1층 홈빠 쪽에서 울려오는 그 음산한 신음소리의 파장은,
그랬다, 서러움이고 고통이고... 그리고는 신열이었다.
형...
1층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한영은 홈빠의 벽에 등을 붙이고 웅크려
앉아 있는 한림의 모습을 발견했다. 달빛이 밝던 밤이었던가. 한영은 한림의 젖은 머리칼을
먼저 바라보았다. 방금 머리를 감은 사람처럼 푹 젖어 이마에 엉겨붙은 머리칼. 그리고 덜덜
떨리고 있는 그의 검은 머리통을.
-형! 언제 온 거야?
부르지 말았어야만 했었다. 조금만 눈치가 빨랐더라도 그를 아는 체하지 말았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한영은 한림을 소리내 불러버리고 말았고 그때 천천히 고개가 쳐들려졌던
남자, 아직은 삼십대였으나 곧 사십이 될 남자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하, 한영이냐...
한림의 입에서는 목소리보다 침이 먼저 흘러내렸다. 거품 같은 침이 흘러내려 그의 턱을
적시고 목덜미를 지나 앞가슴까지 적시고 있었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침을 흘린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거품이 잔뜩 묻어 있는 입을 벌려 웃으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신음과, 거품 같은 침과, 그리고 어눌하게 뒤틀린 목소리... 그 목소리로 한림이 말을 했다.
-괴, 굉장해... 이렇게... 독할 줄... 나... 난, 한물 간 모양이야...
한림은 그때 종류를 알 수 없는 마약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취해 있었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한때 상습적인 대마초 흡연자였던 그는, 이제 늙어 마약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 덜덜 떨리는 얼굴, 거품 같은 침이 흘러내리는 입매와 턱...
그리고 그는 뒤틀려 웃고 있었다. 정도가 지나친 마약의 고통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그가
감당할 수 없었던 젊은의 고통 때문에.
-한영아... 이리... 와... 내 아우... 내 동생...
한림이 뒤틀린 것이 분명한 팔을 억지로 내뻗어 한영에게 손짓하는 순간이었다. 한영은
주먹으로 벽을 때리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개새끼! 나쁜 새끼! 넌 인간도 아니야!
그때... 벌써, 그때 알았어야 했을까. 영혼을 팔 수 있는 마술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그러나 한림이 아니었던 한영은, 어떤 의미로든 개 같은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한림을
다시는 좋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한영으로서는, 한림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믿었다.
한영은 10년 전의 이 나라를 떠올린다. 한강에 다리 하나를 걸어놓은 뒤, 회사에서 받았던
열흘간의 포상휴가가 있었다. 그때 그는 한림의 초청장을 받아 이 나라로 여행을 왔었다.
그리고 그때, 이 나라는 마치 마력과 같은 힘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고작 열흘... 그는 이민을 결심했다. 발붙일 땅을 결코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어디든지 널려 있던 땅과 숲과 잔디와 그리고 바다... 그들은 여유로움으로, 자유로 그를
손짓했다. 그때 그는 그들의 공기 속에 들어 있던 유혹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즐겨ㅘ. 산다는 건 즐기는 거야. 산다는 건, 산다는 건 말이지... 삶을 삶처럼 즐기는 거란다.
고작 열흘... 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민을 결심했다. 경쟁의 필요를 느끼게 하지 않는,
그리고 피를 말리는 저축을 염려케 하지 않는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그를 마술에
걸어버렸다. 이 나라에서 산다면, 그가 경쟁해야 할 것은 오직 얼마나 열심히 삶을
여유롭게 즐기느냐, 그것뿐일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집을 갖기 위해
청춘을 소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노후를 위해 그 나머지 몫을 또 떼어 악착같이 딴
주머니를 만들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는 단지, 매순간 그에게 주어질
여유만을 붙들고 있으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삶이었다. 노동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노동... 삶을 위한 여유, 삶을 위한 자유.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그를 속박할 정치가 없었다. 아침 신문을 펼쳐들 때마다 오만상을
찡그린 채, 그 홀로 젊은을 방기해버리고 있다는 자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책감을 떨구기 위해 밤마다 술을 마시며 그 술자리마다 가장 신랄한
반골의 모습을 띠는 연극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 그 자신이 그 모든 것의 가슴
결리는 느낌을 포기하기 이전에, 그는 떠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선택을 그가
마다해야 할 이유는, 정말이지, 조금도, 아주 조그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2년 뒤, 그는 정말 이민을 왔다. 그리고 이 나라는 그의 이민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그를 환대해 받아들였다. 그에겐 좋은 조건의 직장이 주어졌고, 좋은 조건의 이미자
언어교육이 주어졌고, 온갖 종류의 수당과 무료혜택이 주어졌고... 그리하여, 그가
그토록이나 기대해 마지 않았던 삶의 여유가 주어졌다.
어쩌면 벌써 그때부터 그는, 풀리지 않는 마술의 힘을 기대하고 있었으리라. 그는 시간이
갈수록 나아져갈 것들, 시간이 흐를수록 정다워져갈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은 '아직 적응이 덜 도니 것들'로 취급해버렸다. 그렇게 지난 8년,
확실히 그는 괜찮았고, 여유로웠고, 평화로웠다. 그가 기대했던 마술은 그를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마술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마술을 받아들여야 할 장본인이 정작
경직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마술지팡이의 끝을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마술에 취하지 않은 자신의 본모습이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마술에 취하지 않은...
꿈을 이루기 전의 신데렐라와 같은 본모습을.
-가! 떠나라구! 다신 돌아오지 마! 다신 돌아오지 말란 말이야!
꿈을 이루기 전의 신데렐라와 같은 모습, 그 모습에는 서연의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그 여자는 왜 그래야 했을까. 그녀의 옷자락 하나 못 건드리게 하려는 듯, 무기들린
무당처럼 두 팔을 훼훼 내저으며 그렇게 악을 써대던 그 여자.
어쩌면 그 여자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언젠가는 실패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가 다시 돌아오고 싶어하리라는 것을. 만일, 그랬다면 그 여자는 그때
또 하나 알고 있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고 싶어하는 순간,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패배자가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그가 이미 8년 전의 여자가 되어버린 서연에게 편지를 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시절
서연이 갖고 있었을지도 모를 직감에 대한 호소였을 것이다. 그래, 난 어쩌면 좋겠느냐.
서연이 이미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고 또는 몇 아이의 어미가 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가
그렇게 편지를 띄울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마 그러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줍지 않게도 '도덕적'이란 단어까지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편지에 썼던 모든 말은 고스란히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직도 혼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희망을 느꼈고 지난 8년 이 나라에서 겪었던 모든 관계에의 실패가 불쑥 축복처럼
여겨졌던 것... 그가 조금 더 솔직할 수 있었다면 그는, 그 첫 편지에 서둘러 다 말해버리고
말았으리라. 그가 이 나라에 와서 첫번째 알았던 여자. 형수의 미장원에 와서 늘 단발머리를
자르던 그 여자. 만일 그의 팔자에 결혼이라는 운명이 점지 되어 있었다면 가장 유력했던
기회는 아마도 그 여자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십년을 살았어요.
고작 스물세살이었던 그 여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어떻게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느냐고, 왜 묻지 않으세요?
그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었을까. 묻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그녀 스스로
던졌던 물음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집안에서 영어 한 마디 쓸 때마다 회초리 한 대씩을 맞았죠. 플레이그룹에서, 킨더가든에
서, 그리고 학교에서... 매를 맞는 아인 나밖에 없었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아버지를 불러서
묻더군요. 아이를 때리느냐.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당당했던지. 지 나라 말도 할 줄 모른다
면, 이건 사람도 아닙니다. 그 말을 제가 통역했죠. 쉬 이즈 네버 휴먼비잉 이프 쉬 칸트
스피크 허 네이티브 랭기쥐. 아버지에게 최초로 영어로 말해본 게 언젠 줄 아세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였죠. 아버지의 시신을 두고, 그랬어요. 굳바이, 대디
그녀의 고백은, 그녀를 향해 서서히 열려가는 듯싶던 그의 가슴을 일거에 닫혀버리게
만들었었다. 그는 결코 상처 입은 여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건 다,
바다 저편, 한때 내 나라라고 불렀던 그곳에 모두 다 던져두고 왔다고,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처입었던 그 여자에게서 돌아섰고, 이후 그에게 들려왔던
그녀의 소식은 그녀가 백인청년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이상 영어를 말해도
아무도 그녀를 때리지 않을 곳으로 정착해 들어간 것이었다.
그녀와 헤어졌을 때, 그리고 그녀의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서연을 생각했었을 것이
다. 그를 밀어낸 뒤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던 서연.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이민비자가
나왔다는 소식도, 이민비행키 티켓을 샀다는 소식도, 그 비행기가 몇시 비행기라는 소식도
전할 수가 없었드랬었다.
지난밤, 모텔에서 그는 명우에게 서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명우에게, 무언가라도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여행을
먼저 제안한 사람의 예의인 거라고도 생각했고, 그래서 입을 열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온 말이 가장 먼저 서연이라는 이름이었다.
-서연이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명우씨에게는 애인이 없었는가고,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려는 생각으로부터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연이라는 이름이 입에 담기는 순간, 그는 이제 명우에게
애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이 되었다. 명우가 자신처럼
노총각으로 늙게 될지 어떨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명우라는 사내가 그 자리에 존재하
고 있다는 사실, 그것조차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연은 그이 대학후배였다 학번을 대충 따져보면 적어도 한 한기쯤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을 법도 한데,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을 한 뒤에야 그녀를 처음으로 볼
수가 있었다. 동문들끼리 만났었던 망년회 자리에서였던가. 무슨 모임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술 마시고 노래하고, 대충 그랬던 자리였던 것민아 기억날 뿐이었다.
모두들 노래를 불렀었다. 그런 자리에서 노래를 안 부르면 큰일나는 줄 알았고, 그 중에서
도 운동권가요 한마디쯤 못하면 민족반역자쯤으로 알던 시대였다. 그때 그 여자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그 여자가 운동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많던 사람들 중에 유 일하게
처음부터 끝가지 운동권 노래를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느데도, 그는
그 혼자 생각으로 그렇게 판단을 했었다. 아마, 그 여자의 비극적인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그토록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그렇게까지 비극적일 수 있다는 건,
그런 이유 아니고서야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있는건지... 그는 그랬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이 삶을 겉으로만 살았었다고 새악ㄱ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었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 느꼈고, 그리고 나선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했었다고. 결코
자조적인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최근에 와서야 깨달은 그의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녀는 운동권하고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대학 다니는 동안 내내
대자보 한 번을 안 읽어봤다고 했던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그 여자가 대단히
강심장이 ㄴ여자라고 생각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심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그 여자는 자신의 선천적인 불행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여자한테는 정신박약아인 동생이 하나 있었다. 선천적인 불구였다고 했다. 그 여자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그 동생은 그런 장애아들을 수용하는 기관으로 보내졌고,
그 이후 그 여자가 그 동생을 만나는 일은 일 년에 한두 차례가 고작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괴롭게 만드는지...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어느 한구석 뒤틀림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그림에 숨이 막혀버릴 지경이었다. 그 여자와 처음 같이 잠을 자던 날...
어이없게도 그는, 자신하고 같이 잠을 잔 여자가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의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기이한 환각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래서 떠나자고 했었다. 아니, 그 여자
때문에 떠나자고 했던 게 아니라 떠날 기회가 주어졌으니 같이 가자고 했던거라는 게
옳았다. 그 여자도 그걸 알았을까. 그 여자는 망설임 없이 그를 뿌리쳤고, 그에게 떠나라고
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도 했었다.
-돌아오지 마. 알았어? 돌아오지 말라구! 내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말고 살아!
너 혼자! 너 혼자서 말이야!
-그 여자분을 사랑하셨었군요.
어느 순간, 그의 느낌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었던 존재, 명우가 불쑥 소리를 내 그에게
로 다가왔다. 한영은 슬프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랑했다면... 과연 그랬다면, 혼자 떠나왔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군요.
-사랑이란 건 비로소 그리움으로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던가요.
-시적이군요.
자조적으로 말한 뒤, 한영은 다시 명우를 바라보았다.
-명우씨에겐, 비로소, 그리움으로, 확인된,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요?
-사람이요?
명우는 웃었다.
-만일 예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화를 냈었을 겁니다. 그런 건... 사치스러운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움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구요. 사람을 통해 그렇게 되든... 그리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또
본질적으로 모든 것은, 결국 나 자신의 문제라구요. 아, 본질적이란 말을 너무 쉽게 쓰고
있군요. 과연 내가 그런 어휘를 들먹일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다른 말을 해야겠습니다.
그리움마저 차단되어버린 존재에 대해서요.
한영은 물끄러미 명우를 바라보았따. 명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우가 말하는
그리움과, 어쩌면 자신이 간직하고 있을 그리움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 더 고귀하고 어느쪽이 더 신성한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다르다는 것... 그는, 남의 그리움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척박해진 가슴이 야은 상처로만 덧들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 때문인가, 그는 쓸쓸함으로 명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명우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그러나
영원처럼 멀리만 느껴지는 파도소리가 홀로 밤을 밝히는 가운데, 이야기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한영으 ㄴ대답하지 않았고 명우는 더 깊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영은, 깊이 내리깔려진 그의 시선이 마치 동굴 같다고 생각했다.
6
-나는 왜 이 나라에 왔을가. 어쩌다가 나는 난민이 되어 버린 걸까. 나는 오직 그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평화는 없었습니다.
명우의 목소리는 동굴 속의 깊은 울림이었다. 그 음산한 울림. 습기가 가득 차,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그리고 그 물방울에 부딪쳐 제각기 다른 공명의 소리를 내는 듯한
그렇게 텅 비고 음산한 울림. 한영은 알 수 없는 불길함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밤마다 어디서 울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의 정체를 찾아 헤매야 한다던 그 사내는
이제 단언적으로 '평화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변명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형이 말하더군요. 신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더이상 일을 할
수 없으니, 우선 그것부터 막아놓자구요. 내가 일하던 학교에 도난 사건이 일어나서 일하던
사람들 모두 신분조사를 받아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난느 그때 이미 비자기간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형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당장 강제 추방을 받아야 할 처지였지요. 형은
나한테 화를 내면서, 여기서 아주 살 작정이 아니라면 당장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물론
난 여기서 살 작정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난 돌아갈
작정이었고, 돌아가서 내 나라에서 살 거니까 이 나라의 비자법 따위를 위반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한번 추방되면 다시 못 오게 될지라도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 어차피, 난 이 나라에느 ㄴ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주 살 작정이
아니면 당장 돌아가라는 형의 말을 듣는 순간, 난 겁이 났던 겁니다. 어찌나 겁이
났던지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청므에 올 땐 물론 몇 달 여행만 하고 돌아가게 될 줄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고작 한달을 못 넘겨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리고 도망온
것인지, 그걸 알게 되더군요. 희망을, 미래를, 내가 유일하다고 믿었던 삶의 기둥을...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말입니다. 형이 당장 돌아가라고 했을 때, 나는 그때 막다른 골목을 '
보았습니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그 막다른 골목의 끝으로 계속 걸어가, 여린 손톱으로
나마 그 골목의 막다른 벽을 헐어낼 것인가, 아니면 두 손을 든 채 다시 그 출구로
걸어나올 것인가. 그 두 가지밖에는 없었습니다. 오직 한가지 선택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은 최후의 용기라도 가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두려웠던 겁니다. 겁이
났던 겁니다. 결국, 나는 돌아갈 수가 없었고... 형의 손에 이끌려 이민변호사의 사무실엘
찾아갔었던 거죠. 그는 말하더군요. 내 경우에 가능한 비자는 난민비자밖에는 없다. 물론
난민비자가 접수돼 영주권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라, 이건 단지 비자기간을
연장시키고 강제추방을 방지하는 하나의 편법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비자 신청이
계류되는 동안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는가, 그거나 알아보도록 하자.
변호사의 말은 단순히 시간벌기를 하자는 정도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언젠가는 돌아갈 거고,
돌아가기 전까지는 학교 청소일을 계속하고 싶었던 겁니다. 강제추방이 무서웠던 것도
아니고, 영주권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지 내 발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 필요한 건 오직 시간뿐인 거라고... 정말 시간뿐인
거라고... 20대의 내 청춘을 돌아보고 싶은 거라고, 내 순결했던 청춘이 원했던게 정말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 거라고... 이대로 백기를 들고 싶은 게 정말 아니라고...
세상이 내 생각 밖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 세상 밖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걸 생각해봐야 한다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나 자신을 기만하는 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그걸 알게
되더군요. 돌아갈 수 없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과 정말 다른 거라고.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게 아니라 다만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인 거라고...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네킹 대가리들 사이에서 맞이하는 새벽의 느낌 따위가 그렇게까지 좋았던 걸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숨고 싶었던 겁니다. 더이상은 세상을 주체할 자신이 없어졌던 게
아니라 더이상은 나 자신을 주체할 자신이 없어져서, 나는 이렇게 숨고 싶었던 겁니다. 나와
함께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없는 곳에, 내 구호를 쫓아 시위대열로 스며들었던 사람들이
결코 없는 곳에, 내가 물고 뜯고, 재단까지 했던 내 나라의 역사가 없는 곳에, 나보다
먼저 달려나가 마치 담장 위의 새앙쥐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그 진보라는 것이 없는 곳에...
나는 숨고 싶었던 겁니다. 결국은 마네킹 대가리 사이의 그 어둠 속으로 말입니다.
얼마 전에, 나랑 같이 학교를 다니고 나랑 같이 스크럼을 짰었던 친구 하나가 이곳으로
여행을 왔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 나라의 사회제도에 대해서 대단한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
더군요. 결국,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숨쉴 수 있는 구멍은 이러한 사회구조밖에는 없는 게
아닌가고, 그는 묻기도 했습니다. 난느 그의 논리적은 어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건 글쎄.. 뭐랄까, 내가 두고 온, 내 나라 공항에 잠깐 맡겨둔다는 변명으로 아예
버리고 온 보따리 속의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만일 그가 내 손목을 붙들고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같이 돌아갖고 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겁니다. 아니, 적어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대신 말했습니다. 이민을 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달라고... 그는 지쳤다고, 더이상은 버티고 싶지 않다고도 하더군요.
내게 뭘 묻는 거니.
나는 그때 그에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내게 뭘 묻는 거야. 이제 난민이 되어버린 내게, 난민의 길을 묻고 있는 건가?
어떻게 하면 그 모든 난을 피해 난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그걸 묻고 있는 건가.
보트피플이라도 되기 위해 그 배를 잡아타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달라는 건가? 부탁이다.
배를 타지 말아라. 그 배는 다시 너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그 배가 가는 길은
오직 난민의 길밖에는 없는 거다.
다행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쯤해서 포기를 하고, 다시 귀국 비행기를 탔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가 끝내 난민이 아닌 이민의 길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옳았을까요. 그는 나차럼 얼치기로 운동을 했던 게 아니었노라고, 너는
어차피 얼치기였으므로 난민 밖에는 못 되었지만, 그는 순결로 운동을 했으므로 적어도
난민은 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말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쯤해서 고백합니다. 내가 내 청춘을 얼마나 얼치기처럼 보내왔던가... 그건, 내가
헛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내 길은 헛되지 않았는데 내 삶이
헛되어졌다는 것,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내게 이 나라의 영주권이 나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나는 난민이 되었고 다시는 내겐 되돌아갈 땅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했던
건 결코 영주권 따위가 아니었는데도 이제 와서 나는 오직 그것을 위해 내 청춘의 모든
것을 다 팔아버린 몰골이 되어 있습니다. 내 청춘의 어설픔과, 그 어설픔에 잠깐이나마
어렸던 순결함과, 심지어는 그 청춘에 겪었던 정신병적 징후까지 모두 다 이 나라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먼 길, 끝이 없는 먼 길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으 ㄴ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경멸하고 조롱하게 될 겁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나를 핍박하고 탄압하게 될 겁니다... 나는 그걸 압ㄴ디ㅏ. 불행히도 나는 이제
와서야 그걸 알게 된겁니다...
한영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강명우란 사내가 생각하는 '되돌아가야 할 내 땅'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가 태어난 내 땅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이 고향이란 의미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고향... 언제나 기억 속에 우수처럼 떠돌곤 하는 그 단어, 그것조차 부정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같은 감탄사와 같은 욕설을 지닌 사람들, 같은걸 맛있어하고 같은걸 입 밖으로
뱉어버리는 사람들, 대개는 같은 이유로 핍박당하고 같은 이유로 자유를 절단당한 사람들...
그들이 그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생의 업보로 이민자의 인생을 쫓아오는
쇠사슬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영 그 또한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5년이나
잘 다니던 조건 좋은 현지회사에 사표를 던진 바 있었고, 말도 안 되는 교민잡지사라는
곳에도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우의 말에는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터무니없게도
한영은 그 때문에 소외감을 느꼈다. 당신의 땅과 내 땅마저 다르다면,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땅은 어디에 있는가. 내 시신을 묻어두지 않고 내 영혼을 묻을 우리의 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명우의 것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한림의 것이기도 한
우리들의땅,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리움이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란 명우의
애초의 말은, 끝내 그에게 어떠한 위로도 주지 못했다.
"비가 그칠 모양이다."
어느사이 한림이 한영의 옆에 나와 있었다. 그의 말처럼 먼 곳으로부터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힌 나라의 기가 막힌 날씨였다. 아직도 장대 같은 소낙비는
바다를 뒤흔들고 있는데, 저 먼 곳에서는 햇살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햇살 속에 드러난 육지의 끝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이 가닿는 곳 전부가
모래사장인 해안선, 그 기나긴 해안선의 위에는 레인포레스트가 우거져 있고 또 등대가
있었다.
그리고 갈매기들...
빗발은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기세를 잃어버려 툭툭 떨어지는 잔 빗방울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림은 갑판의 난간에 기대선 채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술기운으로 불쾌하게
달아올라 있던 그의 뒷목덜미도 이제는 다시 잘 그을은 검은 빛으로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게 꿈이었던가? 한영은 한림의 그 태연한 뒷모습에, 그리고 언제 그랬냐 싶게 밝고
화사하게 빛나오고 있는 햇살에, 그만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정녕, 모든 건
꿈이었던가.
"명우씨는?"
한영의 입에서 어눌한 듯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더이상 적의 같은 것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하긴 그랬다. 한영이 한림을 향해 적개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의 혈육이, 자신과는 다란 방향의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분노케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쩌면 정말 모든 건 꿈이었으리ㅈ도 모른다. 불현듯 그를 갈겨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말이다.
"그 친구, 변기통 속에 처박힌 모양이다. 그만큼 참은 것도 용하지. 그 친구, 보기보다
곤조가 있던데, 날보고, 개자식이라고 그랬지? 그 친구가 말이다."
한림은 흐흐 웃었다. 자기보다 까맣게 어린 나이의 사람한테서 개자식, 영혼까지
팔아치웠다는 욕설을 듣고도, 그는 웃고 있었다. 히물거림도, 경멸도, 야유도 없는
웃음소리로... 문득, 알 수 없는 뭉클한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영에게 한림이
고개를 틀어 물었다.
"넌, 고기 밑밥 좀 줬냐?"
"뭘 줘?"
"대가리 처박고 오바이트 좀 했느냐구?"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도 오바이트를 하지 않고 있었다. 뱃속에
서 먹은 게 뒤집혔어도 열두 번은 더 뒤집혔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것들은 그의 뱃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멀쩡한 자신의 위장이 더 역겨웠다. 토사물이 가득 찬 위장...
뱉어내지도 못한 채 그걸 어찌할 것인가.
"다시 시작해볼까?"
한영쪽으로 돌아서며 한림이 물었다. 낚시를 다시 시작해 보겠느냐는 질문이 틀림없었다.
기가 막혔다. 낚시라니... 한영은, 이제 낚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읹데 벌써 관둘 작정이야?"
"형은 질리지도 않아?"
"질리다니? 고래 한 마리 못 잡고 질린단 말이냐?"
"낚싯대로 무슨 고래를 잡는다고 그래!"
한여으이 입에서 버럭 고함소리가 튀어나왔다. 가볍게 농담을 던졌을 뿐이던 한림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이어싿. 한영의 몸이 한림에게로 던져졌다.
한림의 입에서 억하는 신음소리 비슷한 것이 새어나왔고, 그때 한영은 한림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림은 한영을 떼어내려고 했다. 이 새끼가 이거 왜 이래... 그는, 당혹감과
민망함으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한영의 팔 힘이 너무
완강했으므로 그는 끝내 한영의 등을 마주 끌어안아 버렸다.
아...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된 기억... 연탄내가 물씬 풍기던 방안에서 그들 형제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 장난을 치는 형을 이겨보려고, 입술을 악물고, 분한 눈물을 두 눈에
그렁그렁 담고 악착같이 그에게 달겨들던 어린 동생... 한영... 그 모습이 그의 기억에서
오래 맴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당황했다. 정말, 내게도 이런 기억이 있었다니...
한림이 그런 기억에 파묻혀 있는 동안 한영은 한림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거센 소나기에 오래 시달린 끝에 이제는 지쳐버린 듯 잠잠해진 바다. 그
바다는 더 이상 한 몸뚱이로 움직이지 않고 잘고 여린 결로만 움직인다. 그리고, 그 여린
결들은 비에 씻긴 말간 햇살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 전, 그의 형수가
그에게 호소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날 용서해달라고 해주세요. 애들 아빠,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요.
제발, 내 말을 좀 전해주세요.
그러나 한영이 한림의 어깨를 끌어안고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형, 고래는 없어. 이 바다에 고래는 없는 거야. 고래 같은건 정말,
없는 거라구. 그리고 그 말 끝에 그는 아마 목메어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한 대는 그의
여자였으나, 이제는 무엇이라고도 이름부를 수 없는, 그 여자, 서연을.
7
나는 아마도 당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청년인 당신이...
그러나 세월의 힘만으로도 나이가 들어버렸을 당신이... 어떤 모습인가, 어떤 사람인가...
미안합니다. 이런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연의 편지에서, 그를 가장 괴롭혔던 부분은 바로 그 대목이었을 것이다. 세월의
힘만으로도 나이가 들어버렸을 당신이... 어떤 모습인가, 어떤 사람인가.
한영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만일 그가, 서연과
8년 만의 해후를 진심으로 원한 다면 그는 다시 서연에게 편지를 띄울 수 있을 것이었고
그리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모습이 되어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서연에게 편지를 띄울 때 그는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서연에게 바로 그것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8년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더냐? 네가
그것을 안다면 8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나보다 네가 먼저 유추해줄 수 있지 않겠더냐.
서연은 그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간혹 그는 서연을 연상의 여자처럼 바라보았다. 그녀에
겐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서나 보이는, 기묘한 직관 같은 것이 보였다. 뒤틀림으로만
가득 찬 그녀의 그림을 바라볼 때, 그는 그 그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8년 전의 그때, 그는 아마도 탈출이 필요했었으리라. 자로 재어진 듯 그려진 자신의
앞날, 그의 아버지가 그 길을 걸었고 그의 선배들이 그 길을 걸었던... 서서히 늙어가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그 나른한 생존의 행렬.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언제던가, 22층 그의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던 한낮의 거리를 바라보며 불현 듯 가슴이 툭 떨어져내리는 것처럼
충격을 받았던 기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죽음같이 긴 행렬을 바라보며, 그가
느껴야 했던 그 섬뜩한 충격. 그때 그는 소리높여 비명을 지르며, 그 행렬을 깨부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가지 마! 그렇게 가지 말라구! 그렇게 줄을 지어 가지 말란 말이야!
서연은 그녀의 그 천성적인 것 같은 비극적인 분위기를 빼놓고는 나쁜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아니, 때로는 그 비극적인 분위기조차도 괜찮았다. 관계를 치른 뒤, 홀로 돌아
앉아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던 그녀. 그때 그녀의 그 푸르스름하던 얼굴...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자기 아닌 다른 남자가 또, 그 여자의 그런 모습을 볼 수도 있으리란
건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안고 날라버릴 작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연과의 교제를 필자석으로 반대했었다. 서연에게 선천적인 정박아
동생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에 그런 피가 섞여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못 엄숙한 얼굴로, 네 새끼가 병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그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당신'이라고
불렀었다. 당신의 비열함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그러나 그가 아버지에게 그렇게까지 심한 폭언을 퍼부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비로소 그 자신에게도 확인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연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소유욕에도 불구하고, 병신 자식의 아비는 되고 싶지가 않았다.
비열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고 용서할 수 없는 것 역시 바로 자신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서연을 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즈음 그는, 창녀촌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는 일을 하다 말고도, 미친 듯이
창녀촌으로 달려갔다. 한낮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창녀가 채 눈을 부벼뜨기도 전에
그는 창녀의 주름진 뱃살 위에 집히는 대로 가능한 많은 지폐를 던졌고, 그리고 사디즘적인
섹스를 했다. 창녀는 연거퍼 터져오는 하품과, 지폐를 헤아리는 분주함으로 그의 난폭한
행위를 견뎠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다 끝났을 때, 그런 일 쯤은 날이면 날마다 당한다는
듯 별 것 아닌 얼굴로 창녀는 그에게 말하곤 했다.
-잊어버려, 그딴 년.
아마도 창녀는 그가 실연이라도 당한 걸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잊어버려,
그딴 년... 그 말은 그에게 어이없는 화두가 되었다. 그랬다. 그에겐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었다. 서연이 아니라, 그가 젊다는 이유로 한때 품었던 희망. 서연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익명으로 묻혀들어가도 자신에겐 어쩌면 남아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끝내
포기할 수 없던 어떤 것. 서연이 아니라, 그 자신의 집착... 자신만은 결코 뒤틀림의 존재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것.
결정적으로 이민을 결심해 버렸던 것은, 아마도 그 화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잊어버러지' 않고도 새롭게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우너해싿. 새로운 것. 완전히 새로운
것. 그랬다. 그는 그의 성장사와, 그 성장사가 양육한 온갖 종류의 희망과 좌절의 기억이
없는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씨앗을 뿌리리라고 결심했다.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므로. 계획은 없었고 어쩌면 신념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면 오직, 처리하지 못한 서연에 대한 감정뿐이었을 것이다.
때때로 술은 힘이었다. 그는 처리하지 못한 감정을 취기의 안개 속에 감추어둔 채, 서연의
화실을 찾아갔었다. 그림을 그릴 때문 늘 입곤 하는 기다란 앞치마를 걸친 채, 화실 문
앞으로 나왔던 서연. 스무살 나이가 되도록까지 여섯 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정박아의
누이인 여자. 온갖 뒤틀림의 군상들 사이에서 오직 자신의동생만을 행복한 미소로 그림
그리는 여자. 그 여자는 느닷없이 찾아온 한영을 슬프게 바라보고, 그리고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직관이 빛나던 그 여자는, 한여으이 말은 단 한마디도 듣지 않은 채 고개부터
가로저었고, 그 여자의 직관을 믿었던 한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쥐고 호소부터 시작했었다.
-가자, 서연아. 우리, 떠나자구. 우린, 완전히 새롭게 살 수 있을 거야. 거기라고 완전히
행복하진 않겠지만, 그렇지만 새롭게 시작할 수는 이쌎ㄴㅎ니. 여기서 우릴 묶어두었던 끈,
다 놓아버리고 풍선처럼 가볍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럴 수 없겠니?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자, 서연아. 우리 그렇게 해.
그는 서연의 눈에 자신이 비열한 도피자로 비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도피람녀 그것이 어째서 나쁜 것인가. 전선에 선 군병이, 죽음에 이르도록 그 전선을
사수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자신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서연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안타까운 힘을 주며, 애원처럼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도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또하나의 헛된 희망이었다는 것을. 그가 그 땅에서 가졌던 집차고가 그가 그당에서
가졌던 희망을 버리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면서, 그 탈출을 위해 꾸리기 시작한 여장에는
또하나의 미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랬다. 그는 몰랐고 서연은 알았을 것이다. 서연은 슬프게 웃은 뒤, 그의 뺨을
쓸어내려주었던 것이다. 슬프게 떨리던 그 손의 느낌. 그 젖은 손, 그 축축한 떨림의 느낌.
그리고 서연은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풍선처럼 가벼워질 수가 없어요.
오랜 세ㅜ어링 흐른 뒤까지 그는 서연의 그 말을 잊지 못했다. 그녀가 느닷없이 존대를
썼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 느닷없던 말투의 야릇한 느낌 때문에,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던 거라고.
그러나 그는 이제와서 생각한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 우리는 풍선처럼 가볍게 살게
되리라던 말을, 그는 과연 진심으로 했었던 것일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설득의 말이 필요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었던 것은,
이미 돌이킬 수 ㅇ벗게 되어버렸다고 믿었던 자신의 삶이, 완전한 새로움으로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였다. 그랬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괜찮았던 것이다.
장미빛 인생만을 꿈꿨던 것은 아니어싿. 마술처럼 그를 유혹한 이 나라의 모든 환상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장미빛 미래만을 꿈궜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를 만족시켰던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인생에 이제 남은 것을 포기를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뿐이라고 여겨질
즈음에 자신이 무언가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게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청춘의 전 시기를. 8년이라는 세월을. 국적을
버리고, 여자를 버리고, 식습관을 버리고, 웃음과 한숨의표현까지 바꿔버림변서... 그는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다. 그렇게 바쳐진 오늘, 그러나 그는 자신을 풍선이라고 생각했다. 고뇌와
욕망읨 ㅜ게가 없어서 가벼운 풍선이 아니라, 고뇌와 욕망의 무게에 끈이 끊어져버린...
그리하여 호긍을 부유할 뿐인... 어느 지상의 허공인지도 알 수 ㅇ벗는 그 엉뚱한 곳을
헤매어 다닐 뿐인...
그러나 그가 조금이라도 더 현명했더라면, 그는 서연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미 그것을
알아챘어야만 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했었던 것인지. 그 악받치는 소리로,
왜 그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었던 것인지...
이민수속을 밟기 시작하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서연을 만났었다. 그와의 결별을
확실시하려는 듯, 그 사이 화실의 문을 닫아버렸던 서연. 그래서 그는 서연의 집을
찾아갔었다. 아마 6개월이나 7개월 만의 일이었을 것이다. 골목 사이로 몰아쳐오는 바람이
귀신 울음소리를 흉내내던, 한겨울의 밤. 서연은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집 앞으로
들어서다가 그를 발견했다. 그녀는 웃는 듯했다. 그 사이 머리가 많이 자라, 어깨 뒤로
출렁이던 머릿결. 바람에 흔들리는 그 머릿결을 보는 순간, 그는 어이없게도 그녀를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병신 새끼가 나온다면 어떠랴, 너를 다시 안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감상으로 그가 서연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을때였다. 웃는 듯했던 서연이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고, 그가 다시 한 걸음 다가서자 그녀는 몸을 돌려 벽 쪽으로
다가붙었다. 왜 이러니, 서연아. 그가 놀라움으로, 서연과 자신의 해후가 6,7개월 만의
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그렇게 물으려고 했을 때, 서연은 울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뭉개지는 듯한 통증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는 뭉개지는 통증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그날 그는, 술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고,
매운 바람 속에 오래 서있느라 오히려 잔뜩 긴장되어 있기까지 했었건만, 그런데도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우너한다면, 난 떠나지 않을거야.
그는 서연에게로 다가가 서연의 얼굴을 붙잡았다. 눈물로 미끈거리는 뺨. 그 차가운 뺨이
씰룩였다. 그리고 순간, 서연은 그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마치, 영혼 전체를 빨아당기는 듯한
고통스럽고도 끔찍한 입맞춤이었다. 그 입맞춤 끝에 서연이 속상였다.
-넌, 떠날 거야.
-서연아, 난!
그가 서연의 얼굴을 떼어내며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서연이 그의 품안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년느 숨가쁘게 달려 막다른 골목의 끝에 섰다.
-넌 떠날 거야!
그녀는 골목의 끝에 등을 의지한 채로 가쁜 숨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해싿.
-네가 무사히 떠나기를 기도했어! 그게 내일이든, 십 년뒤든 난 네가 떠나는 모습만을
상상했어! 넌, 날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무사히 떠나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알겠어?
-서연아, 난!
그가 다시 서연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디뎠을 때였다. 서연이 무기들린 여자처럼 변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서연으 훼훼 손사래를 쳐가며 그의 접근을 막았다. 마치, 옷자락 하나에도
손을 대게 할 수 없다는 듯이. 방금 전, 그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끔찍한 입맞춤을 했던 그 여자가, 지금은 그를 뿌리치기 위해 손사래를 치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서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당이었다. 그녀는 무당처럼, 그의
앞날을 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년느 무당처럼, 공수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돌아오지 마. 알았어? 돌아오지 말라구! 이쪽으로, 이 땅이 있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말고 살아! 너 혼자! 너 혼자서 말이야!
8
퍼시픽 하이웨이, 그 고속도로의 이름은 그러했다. 끊임 없이 남태평양의 바다를 보여주는
고속도로, 그 한가운데에 한영과 명우가 있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 어쨌거나 그들의 현주소인 곳으로.
고작 하룻밤의 하루낮의 여행. 그러나 그들은 지쳐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지치게
만든 건지도 알 수 없는 채로, 그들은 다시는 바다를 곁눈질하지 않으면서 고속도로의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설핏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료한 듯, 한영이 카세트 테이프를 뒤적거리다 말고 손을 멈췄다. 노래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조셉이 불렀던 [먼 길], 어쩌면 그는 그 제목조차도 영어로 부를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노래가 망령처럼 그를 쫗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망령 같은 소리를 또 있었다. 트렁크에 실어둔 아이스박스는, 그 뚜껑이 제대로 맞지
않아 계속해 덜그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아이스박스 속에는 그들이 잡은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대가리가 잘린 채 쟁여져 있어싿. 그놈들의 대가리과 그놈들의 시뻘건
내장은, 선착장에 도착한 그들의 배를 환영했던 펠리컨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이제, 대가리가 잘리고 내장이 비워진 그놈들만이 아이스박스에 실려 있었다. 덜그덕,
덜그덕,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대며.
"운전... 교대할까요?"
묵묵히 앉아 있던 명우가 한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우도 이내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돌아가면 다시 밤일을 하실 겁니까?"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한영이 명우에게 물었다. 명우가 학교일을 그만둬버린 것이,
그가 명우를 찾아 학교에 갔었던 그 얼마 뒤의 일이라고 했었다. 밤일을 그만둔 대신
낚시와 불면증에 빠져버렸다는 명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한영은 그가 학교일을 그만둔
까닭을 묻지 않았어싿. 마치 그것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왔던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그가 탐닉했다던 마네킹 대가리들 사이에서의 새벽, 그리고 평화... 그것은
그가 이후 밤마다 찾아 헤매고 있다던 비명의 정체보다도 더 희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왜 그만두셨습니까?"
차의 시속을 높이면서 한영은 다시 한번 명우에게 물었다. 그 역시 내내 침묵하고 있었고,
그 역시 명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침묵하고 있는 명우에게 화가났다.
이렇게 늘어지듯 지친 몸에 화를 낼 기운은 어디 남아 있었던 것인지. 그는 자신이 명우에
게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 순간 자신을 휘어잡고 있는
기분이 터무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은 치밀어오르는 울화로 자꾸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그 짧았던 여행이 자신에게
준 감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마구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비디오 때문이었습니다."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명우가 입을 열었다. 한영은 명우의 얼굴을 곁눈질해
살펴보았다. 이 친구는 정말 정신병자일지도 몰라. 한영은 그런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엉뚱하게도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차의 시속이 조금 줄어들었다.
"주말 밤, 비도오를 보고 앉아 있었죠. 제목만 보고 골랐던 비디오 중에 에로영화가 한 편
있더군요. 혼자 앉아서 그 영화를 봤습니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카펫바닥에 앉아서,
이름도 알 수 없는 두 남녀가 뒤엉킨 섹스신을 보았습니다."
느닷없이 비디오에 에로영화의 이야기라니. 한영은 피식 웃으며 명우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그의 그러한 웃음에는 강명우라는 사내를 정신병자로 단정해버리려는 의도가
배어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러한 판단이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긴, 정상적인 사람이 누가 있으랴. 명우를 그렇게 생각하고, 한림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서연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편안해질 수도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거였다. 서연... 도대체 왜 그여자에게 편지를 띄워야 했던 것일까. 그
여자가 아직껏 혼자 살고 있더라는 얘기가, 그의 '도덕심'을 어떻게 자극했더란 말인가.
그는 잊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어쨌든 그는 자신의 현 주소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더 이상은 자신의 현주소에서조차 이방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쳐서였을가.
그는 지난 얼마간 자신에게 어려 있던 그 모든 방황과 혼란을 펠리컨 뱃속에 집어처넣은
물고기의 내장처럼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기까지 했다. 한영은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꾸며 명우에게 물었다.
"여자가 그리웠겠군요?"
"불행히도...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럼요?"
"세벽 세시... 나는 그 에로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카펫바닥에
앉아서, 나는 혼자 그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자극도 욕정도 없이 말입니다. 내
나이 삼십에... 아무런 자극도 욕정도 없이 말입니다. 다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내
나이 삼십, 새벽 세시에..."
그 순간이었다. 한영은 급브레이크를 잡았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명우의 몸이 차창
밖으로 튀어나갈 듯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한영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이 생길 것을 환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약간
더 창백해진 얼굴일 뿐이었다. 한동안의 정적 뒤, 명우의 입이 떨리듯 다시 열렸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던가요?"
명우의 목소리는 자조적으로 울려나왔다.
"처음에 여행을 오는 거라고 생각했었을 때... 다시 돌아가서는 고시 준비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요?"
마치 명우의 목소리 끝을 잡아채기라도 하는 듯이 한영의 목소리는 도발적이었다. 그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 틀림 없어 보였다.
"합격을 할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아니면 수도승 같은 고시생 노릇이 자신이
없었든지요. 도대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왜... 이 나라엘 오게 되었는지, 그걸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미안하지만, 듣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추지 않는 어투로 한영이 내쏘듯 말을 했다.
그러나 정말 듣고 싶지 않았던것일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한 패배한 운동권
청년의 종말과 같은 모습을 명우라는 사내에게서 발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밤마다 찾아 헤매야 한다는 괴성의 정체도, 도는 밤일을 끝낸 뒤 새벽마다 맞이할 수
있었다던 그 평화의 정체도 다 확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패배고 결국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결국은, '그들'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그런데도 한영은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해버렸다. 왜였을가. 그는 언제부터 뒤엉키기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이, 이미 자신의 이성을 뛰어넘어버렸다는 것만을
느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자신이 엉망으로 뒤엉켜 실체를 분간할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들... 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든 결국 패배자인 그들이... 그리고, 또한 그들이... 어떤
희망으로 젊음을 버텨왔든 결국 대마초에 태워버린 헛도니 욕망의 그들이... 그 모든
'그들'이 왜 자신에게 뒤엉켜, 상처에 진물들을 더 깊이 흐르게 만든단 말인가.
"돌아가요, 명우씨."
운전대를 힘껏 잡은 채, 한영의 말이 그렇게 울렸다. 비로소 명우는 한영을 돌아다보았다.
"돌아가라구요, 제발."
복받치듯 울려나온 한영의 말은 거기에서 멈춰졌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명우의 시선이
감당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명우의 간절함보다도 더
큰 당혹감이 한영의 온 몸을 휘어잡았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두 번이나
반복했던 그 말이, 정말로 자기 입에서 나왔던 것인지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아... 그는, 맥없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런 욕정도 자극도 없이, 새벽 세시에
에로영화를 봤다는 명우를 옆에 두고서, 그리고 여전히 고래 한 마리를 꿈꾸고 있다는
한림을 그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온 이 자리에서, 그는 또다시 서연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 몇시였던가. 오후 세시. 아니, 어쩌면 오후
두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땡볕이 내리쪼이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0011 국제전화번호를
누르고 그리고 서연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었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지 못한 편지를
안주머니에 넣어둔 채, 그 얄팍한 편지봉투의 느낌을 가슴 전체의 무게로 느끼면서,
전화번호를 돌렸던 것이다.
-여보세요...
서연의 목소리였다. 단지 세월의 힘만으로도 나이가 들어버렸을 당신의 어떤 모습인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한다던, 서연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세월과는 전혀 사오간없이
8년 전 그때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그는 전화를 걸었으므로 이제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뭐라고 그녀를 부를 것인가. 예전처럼 서연아, 그렇게 부를 것인가. 아니면
지서연씨... 이렇게 부를 것인가. 그는 그와 같이 아주 사소한 문제에 매달려, 사소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다시 한번 그쪽의 목소리가 울려왔을 때, 그는 자신의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내리는 수화기를 느껴야만 했었다. 줄에 매달려 허공에서 흔들리는 수화기, 그 속에서
다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는 쭈그려 앉았다. 쭈그려 앉은 그의 코앞에서 수화기가 흔들리다가, 이내 통화가
끊겼다는 신호음이 뚜뚜거리며 울려오기 시작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수화기 속의 서연을
느꼈고, 오직 서연만이 자신의 물음에 대답해주리라고 생각했었다.
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니. 왜 다시는, 돌아보지도 말라고 했니.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이
었던 거니.
그것을 묻고 싶어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던 자신이, 그리고 끝내 그것을 묻지 못한 채
수화기를 떨구어 버렸던 자신이, 명우에게는 돌아가라고 말을 했던가.
그는 모르지 않았다. 한영, 그 자신에게는 명우가 있어야 할 땅을 지정해줄 자격 같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 말 한마디로 인해,
그의 인생은 또 한번 뒤틀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는 명우에게 돌아가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다시는 주워담지
못할 각인의 흔적처럼 그의 인생에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충동처럼 울려나왔던 그 말이... 어쩌면 한림에게 하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것이었을 그
말이... 그의 인생을 뒤틀어버릴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명우에게 한 말도 아니었고 오직 그 자신을 향해 던져졌던 말은
아니었을가. 시신이 묻혀질 땅이 아닌, 영혼이 묻혀질 땅... 그의 땅, 그들의 땅... 다시는
그들을 이민으로도, 난민으로도 만들지 않을 그들의 땅, 그 역시도 그것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욕망조차도 어쩌면 미망일 터인데,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 그는
악착같이 그것을 붙들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한영은 끝내 핸들 위에 머리를 처박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서른살의 나이, 새벽 세시에
정욕조차 잃어버린 한 사내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일이었다. 명우라는
사내에겐 아직 울 수 있는 정도의 욕망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울고 있는 명우를 바라보며,
한영은 비로소 서연의 편지를 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편지 말미에는 무어라고 써
있었던가.
잊음. 그것만이 오직 당신과 나의 서글픔을 씻어줄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그렇게 썼던가.
그러나 한영은 명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쩔 수 없이 생각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잊는 것이 아니야. 상처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그리하여 그 상처에 온 가슴이 전부
문대질 때까지, 끝끝내 버티는 것...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것일 거라고.
해설
그리움의 힘으로 걷는 먼 길
손경목(문학평론가)
김인숙의 [먼 길]은 한동안 소설 쓰기를 멈추고 있었던 이 작가의 활동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다. 비슷한 연배의 여성 작가들이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마당에, 일찌감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는 김인숙의 짧지 않은 침묵은
그의 독자들을 궁금하게도 섭섭하게도 만들었을 것 같다. 김인숙 소설이 지면에서 사라진
시기는 작가 자신의 해외 체류 기간과 대체로 일치한다. 작가로 하여금 모국을 떠나
있게 하고 모국어로 소설 쓰는 일을 잠정적으로나마 중단케 한 사연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수 없다. 아무려나 중요한 것은 그가 이제 독자들 곁으로
돌아왔으며, 그것도 무게 나가는 작품을 앞세워 문학 현장에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저널리즘의 뒷공론처럼 상복이 없다면 없었던 이 작가에게 문학상(문학상 수상 여부와
작품의 성과 사이에 본질적인 관련은 없다는 것이 곧잘 경험되는 진실이긴 하지만)을
안겨주기도 한 그 소설이 바로 [먼 길]이다.
작가에게는 어떤 체험도 허투루 내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서둘러 증명이나 하는 듯이
[먼 길]은 작가 지신이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이국의 풍경을 밑그림 삼고 있는 소설이다.
그 국적이 종내 명시되지 않는 채 펼쳐지는 이국땅의 풍물은, 그 자체로 무슨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먼 길]의 중심에 놓인 한국인 이민들의 평범치 않은
살과 어울려 이 작품에 이채로운 분위기를 드리워놓고 있다. 낯선 나라에 닻을 내린
이민들을 내세운 소설들이 기왕에도 더러 있기는 했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성취를 이룬
예로서 얼른 떠오르는 이름의 하나는 지난 80년대에 나온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이다.
시공간적 배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먼 길]이 [깊고 푸른 밤]과 맺고
있는, 아마 김인숙 자신 의식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되는 대화적 관계는 우리의 흥미를 끈다.
조국과 새로운 정착지 양쪽 모두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인물들의 혼돈과
자기정체성 확보를 향한 몸짓(그것이 의도적인 자기방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까지
포함하여)을 소설의 전면에 떠올려놓고 있는 점에서 두 소설은 공동의 관심을 나누고
있다고 할 만하다. 더구나 마약 사용으로 활동을 중단당하고 낯선 땅에 흘러들어온 가수가
주요인물로 등장한다는 구성상의 공교로운 일치도 발견된다. [깊고 푸른 밤]과 [먼 길]이
각각 자동차여행과 낚시여행을 소설의 배경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또한 닮은꼴이다.
독자로서는 십 년의 시차를 두고 씌어진 두 소설이 드러내는 문제의식의 같고 다름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유익한 독서경험일 것이다.
[먼 길]은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연대에 차례로 조국을 떠난 세 젊은이의 이국에서
의 만남을 기둥 삼고 있다. [먼 길]은 일차적으로 그들 젊은 이민들(엄밀히 말해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난민'이지만)이 낯선 땅에서 진행하는 길 더듬기의 기록이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세 인물의 시선을 교차시키는 가운데 그들이 두고 떠나온 조국의 현실과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한 어떤 포괄서 있는 성찰의 표현체이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방법적으로 현재형의 묘사보다 소설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 위험까지 무릅쓴 회고적
반성의 어조가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지향에 큰 이유를 둘 것이다. 인물들이 동반하고
있는 회고적 반성의 시선은 단순히 그들이 과거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퇴행적 성격의
인물임을 지시하는 것이기보다, 이 소설이 일탈자의 눈을 빌려 그들이 떠나온 조국의
현실이 제공하고 있는 삶의 가능성, 그 폭과 한계를 새삼 되물어본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씌어졌음을 가리킨다. 그 점에서 [먼 길]은 이민들 특유의 절실한, 그러나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제한된 관심사 안에 가두어진 소설들과 섬세하게 구별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
소설의 부피에 비할 때 [먼 길]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활동의 폭은 넓지 않은 편이다.
이미 비친 대로, 중심인물인 세 젊은이가 낚싯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하루
낮밤 동안의 단촐한 나들이가 작품안에서 벌어지는 사겆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알아볼 수 있듯이, 그 여행은 저마다 착잡한 사연과 심사를 간직하고
있는 세 인물이 상호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무대공간이다. 그러나 그들 서로의
소통 과정은 무척이나 더디고 힘겹게 진행된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자기를 흔연히
열어보일 만큼의 심리적 여유를 갖지 못하는데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 그들이
저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있는 존재들인 점과 관련되어 있다. 가령 작품의 서술이
상당 부분 그의 시선에 기대고 있으며 다른 두 인물에 대하여 관찰자의 구실을 떠맡고
있다고 할 한영의 경우, 자기의 삶이 "관계를 맞는 모든 일에 실패만을 거듭해왔다"는
패배의식에 시달린다. 기술이민을 와서 다니던 조건 좋은 회사를 자기 내부에서 커져가는 "
붕괴의 느낌"때문에 그만둔 그는 지금 한 미덥지 못한 교민잡지사의 직원으로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조국에서 반정부운동을 벌인 바 있으나 지금은 영주권을 얻은
'난민'으로 낯선 땅에 주질러 앉아 있는 명우 역시 자기 삶이 헛되어져 버렸다는 자의식의
소유자이다. 환청을 듣거나 남들로부터 정신병 증세를 의심받거나 하는 것은 생에 대해
좌절한 그의 처지를 돋보이게 하는 세목들이다. 한영의 형이며 왕년의 가수인 한림의
경우에는 앞의 두 인물과 달리 자기 앞의 현실에 태평한 태도를 보고고 있으나, 가족과
헤어져 떠돌이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현재가 평탄한 생활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렇게 보면 세 사람의 모습은 현지생활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이민들의, 좀 유별나기는
하지만 웬만큼 전형성을 갖춘 초상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의 고단한 발걸음이 이민들이
낯선 현실 속에서 으레 겪기 마련일 통과제의적 고충의 범위 안에 일괄 수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 각자의 곤경은 새 정착지의 이런저런 현실적 정황과 계기들에서
비롯될 뿐 아니라, 과거 조국에서의 생체험에 대하여 바람직한 의미의 단절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데 오히려 더 깊은 이유를 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체로
서로 섞여들지 못하는 세 인물을 묶어주는 한 가지 동질성의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
모두가 조국에서의 삶을 통해 나름의 상처 혹은 환멸을 경험한 존재들이며, 또 그것의
기억으로부터 전혀 해방되지 않은 채 오늘의 삶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먼 길]
의 인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상처와 환멸의 경험이 사적인 것이라기보다 사회역사적인
연원을 가진 것이라는 점이 부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수배자를
찾는다는 구실로 무참한 고문을 당하고 그 때문에 "돼지우리 같은 땅"을 도망쳐나온 한림이
나, 감옥 안에서 심신이 피폐해진 명우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보다는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한영의 이민사유에서도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조국의 현실이
허용하고 있는 보편적인 삶이 방식에 대한 절망 혹은 환멸이다.
자로 재어진 듯 그려진 자신의 앞날, 그날 아버지가 그 길을 걸었고 그의 선배들이 그
길을 걸었던...서서히 늙어가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그 나른한 생존의 행렬.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언제던가, 22층, 그의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던 한낮의 거리를 바라보며
불현듯 가슴이 툭 떨어져내리는 것처럼 충격을 받았던 기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죽음같이 긴 행렬을 바라보며, 그가 느껴야 했던 그 섬뜩한 충격. 그때 그는 소리높여
비명을 지르며, 그 행렬을 깨부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민은 그러니까 그의 앞에 주어져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새롭고 충만한 대안적
현실/삶을 향한 갈망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조국에서의 삶이 가져다준 환멸의 극복, 또
'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꿈이 지리상의 다른 위도 위에서
실현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또하나의 미망이었음을 한영은 여덟 해가 흐르는 동안
깨닫게 된다. 그는 새로운 땅의 삶의 방식에 완전히 동화할 수 없는 타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뚜렸한 의지에 따라 이민을 선택한 한영과 경우는 다르지만, 명우가 품고 있는
절망 역시 대안적 현실/삶을 향한 꿈의 좌절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기성의
질서를 타파하려는 운동의 실천가였던 그가 난민이라는 기이한 자리에 서기까지의
소상한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소설 앞부분에 스치듯 나타나는 '문민정부'에
대한 언급, 또 "내가 물고 뜯고, 재단까지 했던 내 나라의 역사가 없는 곳에, 나보다 먼저
달려나가 마치 담장 위의 새앙쥐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그 진보라는 것이 없는 곳에...
나는 숨고 싶었던 겁니다"라는 자조적인 고백 등으로 미루어, 시대 흐름의 변화와 명우
개인의 심경 변화가 어울린 결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명우의 이런 낙차 큰 변화를
그럼직한 것으로 공감하게 할 내용상의 장치가 [먼 길]안에 충분히 마련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볼 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든 명우 당자에게 스스로의 젊은을 걸었던
행동이 응분의 보람을 되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몸과 마음을 망그러뜨리고
만데서 오는 고통은 엄연한 현실이다. 명우가 과거의 행동이 지녔던 대의마저 부정하는
것이 아님은 "내 길은 헛되지 않았는데 내 삶이 헛되어졌다는 것,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와 같은 발언에서 비추어지지만, 그런 분별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방법은 다를지라도 각기 청춘의 무게를 얹고 찾아 헤매던 대안적 현실/삶의 부재로
괴로워하는 한영과 명우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의 가능한 선택이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한림이 스스로 실천하면서 권유하는 대로 현실을 잠자코 수납하고 새 정착지를
'즐기며' 사는 것이고, 또 하나의 선택은 조국으로 되돌아가, 환멸의 경험을 안긴 채 그들을
떠나보낸 현실과 새롭게 대면하는 것이다. 앞의 길은 명우나 한영이 처해 있는 곤경을 쉽게
벗어날 방도일터이나, 그들이 품어온 고민의 알맹이를 무로 돌리는 일종의 자기삭제의
길이다. '자유인'을 자처하면서 세앙에 대하여 자못 초탈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한림에
대하여 한영이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은 이 길이 골라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면 두번째의 길은 한영이 조국에 두고 온 여자인 서연의 존재를 통해
그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환기받고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이 길의 선택 역시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확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는 귀국이 한영이나 명우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바람직한 지양의 계기일 수 있으리라는 어떤 전망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결정은 유예되며 새로운 출발은 아직 시간의 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는 것은 명우의 말처럼 앞길을 가늠할 아무런 수단도 없이 그들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먼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한영이 비감하게 다짐하듯,
손쉬운 해답을 거부하면서 상처를 견디며 시간과 싸우는 일이다.
잊음. 그것만이 오직 당신과 나의 서글픔을 씻어줄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그렇게 썼던가.
그러나 한영은 명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쩔 수 없이 생각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잊는 것이 아니야. 상처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그리하여 그 상처에 온 가슴이 전부
문대질 때까지, 끝끝내 버티는 것...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것일 거라고.
이러한 다짐이 단순히 몇몇 고립된 이민들이 진행하는 길찾기의 결론으로 제한될 수
없다는 데 [먼 길]의 침중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다짐에 이르기까지
[먼 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방황과 모색의 도정은 그들처럼 '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집단적 공황상태를 경험했고 또
여전히 경험중인 근래 우리 현실의 한 특징적인 정황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키는 한편,
전체로서 그 상황에 대한 하나의 개성적인 상징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의지하여
보편성 있는 울림의 폭을 얻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현실 정황에 대한 소설적 접근이 [먼 길]에서 처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반대로, '완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꿈이 안팎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후의 공허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모색의 몸짓은 지난 몇 년 동안의 우리 소설에서
매우 응집력 있는 흐름을 타고 있었던 주제였다. 주로 80년대 변혁운동에 가담했던
인물들의 비감한 오늘에 초점을 맞춘 그와 같은 소설 흐름의 적극적인 의미가 부정될
수는 없겠으나, 적잖은 작품들이 인물들(그리고 작가 자신)의 고통을 과장스럽게 드러내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불만스럽게 지적될 대목이다. [먼 길]의 경우도 그런
함정에서 절대 안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물들이 지닌 상처의 깊이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부자연스러운 심리의 움직임이나 행동을 낳고 있다고
여겨지는 예가 더러 발견되기 때문이다. 가령 명우가 영어로 가사를 바꾼 한림의 노래를
듣고 "개자식! 영혼까지 팔아먹었어!"라는 비난과 함께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나, 한영이
명우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를 해놓고는 바로 이어서 "두 번이나 반복했던 그 말이,
정말로 자기 입에서 나왔던 것인지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대목 등이 그렇다.
치밀하고 집요한 심리묘사의 힘을 자랑해온 이 작가의 세심한 배려가 아쉬운 대목이지만,
이런 세부의 티가 소설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 자체의 무게와 시의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먼 길]은 실존의 차원에서나 역사적으로나 '또다른 현실'을 향한 꿈이 좌절을 겪고 다만
막막한 버팀이 있을 뿐인 풍경을 진지하게 비추어 준다. 작가는 그것이 작중인물들의
현실이자 그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조국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런 작가의
어조는 어둡고 침울하지만, 앞서 인용한 한영의 다짐에서처럼 상처를 견디며 시간과 싸우는
일을 부축할 어떤 힘의존재를 나직하게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움이다. 그 모든 좌절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가령 한영에게서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명우의 것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한림의 것이기도 한 우리들의 땅"에 대한 그리움은
내버려지지 않는다. 그 그리움은 이미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아직 없는, 그러나
있어야 하고 있을 수 있는 현실/삶에 대한 희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슬픔도 힘이 되듯이,
그 그리움의 힘으로 막막히 펼쳐져 있는 '먼 길'을 새롭게 나서볼 만하지 않을까. [먼 길]의
주인공들과 더불어, 생이 아득하게 느껴질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우리들 독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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