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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김정기-애국가를 부르는 뉴요커

by Casey,Riley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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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가를 부르는 뉴요커
김정기

 

  이 엄청난 도시 뉴욕에서 나는 문학이라는 피리를 불고 있었다.
  아픔과 눈물 그리고 쓰라림을 견디기 위해서 가슴에 숨겨놓은 피리를 불
었다. 
  내 가슴 속에서 꺼내 부는  피리 소리는 이민의 응어리를 조금씩 녹여내
고 있었다.
  그 피리 소리가 이 책으로 엮였고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가 되었다. 
  이 땅에서 황당하고도  혐오스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병사에게 주어지는 무기와 같았다.
  이민의 삶은 전쟁(소수를 제외하고는)이었다.
  그래서 그 전쟁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이민자의 품속에는 피리가 있다. 
  그 소리,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그 피리 소리를 여기에 실었다.
  삶의 전장터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글은 나의 피리였다.

  잃어버린 시간

  한국시간 새벽 6시.
  뿌옇다. 왈칵 솟구치는 눈물  때문일까. 혹여 놓칠세라 비행기 창에서 이
마를 떼지 않고 바라보는 하늘. 그렇게도 사무치던 조국의  산하가 온통 뿌
옇다.
  앞으로 30분.
  김포국제공항 착륙 시간을  알리는 기내 방송은 두 번이나 반복된다.  희
붐한 새벽빛 아래 잠에서 막  깨어난 마을들과 길과 나무들이 형체를 드러
내기 시작한다.
  꿈은 아닐까. 
  뉴욕의 하늘을  수시로 가로지르던, 그러나  내겐 금지되었던 그  서울행 
여객기에 지금 내가 타고 있다는 것, 그렇게도  안기고 싶었던 '대한민국'의 
상공에 떠 있다는 것, 이건 정말 꿈은 아닐까….
  17년 6개월.
  그렇다. 꼭 그만큼의 세월을  내주고 나는 잠시 돌아왔다. 엎드려 입맞추
고 싶은 이 흙, 이 땅으로.  오랜 떠돌이의 날개를 접고 안기고 싶은 이 햇
살, 이 바람으로.
  김포공항.
  1979년 4월 22일, 봄빛 부신 그때도 나는 여기에 있었다. 육군 현역 장교
로 유엔한국대포부 외교관 발령을 받은  45세의 남편과 갓 마흔의 나는 중
1, 고1의 빡빡머리 두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참이었다. 반짝이는 연
둣빛 희망에 설레며, 2,3년 후엔 풍성해진 경험을 안고서 돌아와 또 이곳에 
서겠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이 땅을 떠났다. 
  그러나 운명은 결코 예고되지 않는다.
  만추(晩秋)의 익은빛이 출렁이던  그 해 10월, 10·26 사건이 터졌다.  그
건 우리가 하루아침에 낯선  이국땅에 불법체류자로 버려지게 되었다는 느
닷없는 선고였다. 그렇게 17년의  세월, 조국의 역사에 촘촘히 엮어진 우리 
가족의 역사는 태우면 곧 타버릴 종이 시간으로 남았다.
  "두 아드님의 병역 문제도 해결됐고 부군의 복권 문제도 지금 신경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브로드웨이 가게의 한창 바쁜 시간, 영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에
서 열리는 '한민족 문학인 대회' 참석을 위한 여권 문제 때문에 영사관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영사관으로 가는 내게 노란 택시를 잡아주며 그이는 어린애를 물가에 내
보내는 듯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줄곧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택시 기사
는 대뜸  결혼한지가 얼마나 되었냐고  물었다. 34년이라는 대답에  저으기 
놀라는 눈치를 보이던  그 운전사는 자기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기
는 방글라데시  사람인데, 지신의 조국을  사랑하며 돈버는 대로  조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돌아가 살것이라고 몇 번을 말했다. 아마도 그는 몰랐을 것
이다. 비록 굶주릴지라도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를  내가 얼마나 부러
워하고 있었는지를….
  담당 영사는 나름대로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흥분된  감정을 
좀체로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래요. 우리는 그  동안 목숨만 부지했지 죽은 것만도 못한  삶을 살았
습니다. 내가 내 나라에 갈 수 없었고 내 형제가 내게 올 수도 없었습니다. 
10·26 직후 12·12  사건이 터지고서 바로 우리는 소환 명령을  받았어요. 
죄명은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 죄인의  측근  제1호'였지요. 그 당시 대사
였던 윤석헌 씨도 '위험해서 어디 돌아가겠냐'고 하셨어요.
 5·18이 터진  직후 5월 23일에 김재규  부장님이 사형당하셨고, 그  이틀 
후 우리는  어이없이 강등되었어요. 중위로 임관하여  가족도, 젊음도 모두 
바친 22년 군생활이 아무 것도 아니게 흩어져 버린거죠."
  영사실에 틀어놓은 한국 방송에서는  낭랑한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로 뉴
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두환 피고인에게는 사형이 선고되고…"
  딸깍. 라디오는 여기서 꺼지고 갑자기 조용해진 실내에서  나는 아무상관
도 없는 그 친절한 담당 영사를 향해 소리쳤다. 
  "저는 지난 17년의 '시간'을 본국 정부에 되돌려  달라고 하고 싶어요. 반
드시 되돌려 받고 싶어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는 동안  영사관에 갈 때보다 굵어진 빗줄기가 세
차게 내리꽂혔다. 차장에 흐르는 빗물처럼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누구에게
라고 할 수 없는  원망과 술픔이 폭포가 되어 쏟아졌다. 백인  운전수는 나
를 흘끔 한번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담당 영사의 말로 한 달 안에 나오리라던 여권은 삼 개월이 지나서야 나
왔다. 내가 '한민족 문학인 대회'에  참석하기 꼭 두 주일 전이었다. 까마득
한 현기증을 실은 우리 네 식구의 여권이 그제서야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다. 이젠 '한국에 가도 어떤 구속이나 제지가 전혀 없다'는 단서를 달고.
  …… 
  "저기다!"
  공항 출구를 나서자 벌써  중늙은이가 되어버린 조카들과 그들의 아이들
이 보였다. 이제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이 되어 버린  작은언니는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와  울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전숙희 선생님과 조경희  선생
님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상기된 얼굴들이  겹겹이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제법 유복하게 사는 듯 보이는  안산 언니네 집엔 초가을빛으로 물든 나
무와 풀들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큰오빠의 딸들, 작은올케와 아
들, 큰언니의 아들,  딸, 손녀가 모두 모인 반가움의 자리  끝으로 서러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했던가. 그 자리
에 없는 이들, 내가 한국을 떠난 뒤 돌아가신  큰언니와 오빠들을 불러보다 
그만 눈물이 터져 버렸다. 17년 6개월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야 말았다. 그렇게 길고  긴 여정의 피로를 눈물의 강에 적시며  나는 언니 
곁에서 잠이 들었다. 스르르, 어린아이 같이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동서문학상'  시상식장인 조선호텔까지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일
은 내게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 왔던 한 문우(文友)는 내게 달
랑 주소  하나문 묻고도 잘 찾아왔는데,  너무도 변해 있는 서울  거리에서 
나는 오도가도  못하는 완전 촌사람이었다.  곳곳마다 빼곡히 들어선  고층 
아파트가 마냥 낯설기만 했고, 지하철이건 엘리베이터 안에서건  한국 사람
만 가득 쏟아져  나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서량 시인이 서울에 왔을 때  지하철에서 백인 여자를 만나니 그렇게 반갑
더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미국이 외계와 같이 생각되었는데 이
젠 한국이  외계처럼 느껴지다니…. 묘한 서글픔이  번져왔다. 우리의 미국 
생활은 종이 시계에  붙박혀 있는데, 서울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아랑곳없
이 빌딩이 서고 나무가 자라고 올림픽이 열리면서 여전히 봄이 오고 또 가
을이 간 것인가…. 
  반가움과 서러움이 교차되며 맞이하는 고국에서의 첫날 저녁, 우리 '뉴욕 
문협팀'을 대접하는 선배 문인들의  눈길은 마냥 정겹기만 했다. 그 정겨움 
속으로 한 발 깊숙히 내딛으며 나는  이 땅에 서 있는 나를 더듬더듬 다시 
한번 확인했다.
  "똑똑"
  호텔 직원이 두 개의 메시지 봉투를 갖다 주었다.  하나를 열어보니 임성
숙 선생님이 전화를 주신 모양이다.
  "따르릉"
  "여보세요?"
  "난데, 아직도 안 자요? 피곤할 텐데 어서 자요."
  내 건강을 염려하시는 임성숙 선생님의 전화다. 전화선을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에 젖어들면서 두 번째 봉투를 집어들었다.
  '김영희'
  봉투를 뜯고  난 나의 손은 사시나무  같이 떨렸다. 메모지 위에  반듯한 
글씨로 새겨진 이름은 분명히 '김영희'였다.
  김 영 희
  '김영희'
  고(故)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부인.
  내가 그분을 처음 뵌  것은 28년 전 서울 명동의 어느  화식집에서 였다. 
김재규 부장님이 보안사령관이었고  김복동 대령이 비서실장, 나의  남편인 
박기창 소령이 보좌관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날 회식은 김재규  사령관의 부
관 김재창 대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김복동 대령 부인이 마련한 자리였
다.
  그때 까만 원피스를 입고 들어오신 김영희 사모님은 하도 젊고 예쁘셔서 
나는 하마터면 신부인 줄 착각할 뻔했다.
  "저는 박소령의 집사람입니다."
  스물아홉 어린 나는 마흔이 가까운 사모님이 어려워 쩔쩔맸다.
  "아! 그 글 잘쓴다는 이구나. 반가워요."
  그분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나의 손을 잡았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사모님은 그때처럼  나의 손을 잡았다.  자그마치 
28년, 그 댁과 엮이고 얽힌 참으로 견고한 인연의 줄이 느껴졌다.
  호텔은 분주했다. 한국현대문학  1백주년 기념 '96문학의 해' 행사  중 해
외 한민족 문학인  대회의 행사로 한국문협에서 각  분야의 인사들 가운데 
몇 명을 선정해 시상식을 가졌다. 
  나는 그 식장에서 나와 보문동 사모님을 만나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로
비엔 아나운서, 탤런트, 가수, 발레리나 등이 오갔고  모두들 그리로 눈길이 
쏠려 있었다. 우리는 뷔페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문동 사
모님은 곁눈질도 않고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셨다. 회색 스웨터를 입은  사
모님은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단정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이제야 서울에 왔구나. 너무 반가워요. 서울, 많이 변했지?"
  "네, 많이 변했어요. 허나  서울이 제아무리 많이 변했다한들 사모님이나 
저희들만큼이야 변했겠어요?"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지."
  사모님 이마의 선명한  주름살 사이로 햇살이 고였다. 주마등 같은  세월 
위로 사람의 역사는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도 여전히 햇살은 쏟아지고,  바
다의 파도는 울부짖고 있지 않은가.
  …… 
  비가 내렸다. 1979년 10월 26일 뉴욕의 거리에.
  그날 남편과 나는 지금 아프리카  어디 대사로 가 있는 황참사관네의 초
대를 받아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UN 한국대표부 직원들이  새로 
부임한 이들을 집집마다  돌아가며 초대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다 돌고  나
면 새 부임자가 자신의 집으로도 초대하게 되어있었다.  4월에 우리가 부임
하자마자 시작된 초대는 10월인데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이 삽교천에 가셨기 때문이야. 괴한이 나타났나 봐."
  고국으로부터 대통령이  암살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 퇴근한 
남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더이상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하고  걱정과 염려를 안은 채 우리는 약속
대로 황참사관네로 가기  위해 이병학 씨 차에 올랐다. 가을비는  스산하고 
추웠다.
  "큰일났어요. 대통령 암살이 우리 KCIA래요."
  진초록 링컨 차가 우리 아파트  앞 풀장을 벗어나자마자 우리 전임 이병
학 씨는 신임하듯 말했다.
  "…김재규 부장의 소행이래요."
  비는 억수같이 퍼부어 댔고 때맞춰 라디오에서는 긴급 뉴스가 쏟아져 나
오고 있었다. 남편은 쇳덩이로 머리를  맞은 양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나 역
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랫사람에겐 그토록  부드럽고 정의로웠던 그
분이, 그분이 그럴 수는 없었다.
  황참사관네 집은  깨끗하고 화려했다. 오랜  외교관 생활에서 익은  손님 
접대 매너는  일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주인에 대한 인사로  번쩍이는 
그릇에 담긴 새우요리 몇 점을 입에  넣었을 뿐 전혀 입맛을 느낄 수 없었
다.
  보문동 사모님이 어느 추석엔가 사주신 자주색 벨벳 스커트에 장위동 옆
집 은주엄마가 사준 벨벳 조끼를 입은 나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날 엉
망이 된 디너파티를  끝으로 우리의 관직생활, 우리 생애의 모든  사치스러
운 삶은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1990년 9월 새벽에 단이고모(김재규  부장님의 여
동생, 우리는 그녀를 단이고모라고  불렀다)에게서 사모님이 뉴욕에 오셨다
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단걸음에 사모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고, 사모
님은 그이의 늙은 모습과 내 얼굴을 보고는 통곡을  하셨다. 우리는 부둥켜
안은 채 울고 또 울었다. 분명 눈물로 해결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의 현실 
앞에서 달리 어찌할 수 없이 울기만 하였다.
  사모님은 우리 주얼리가게를  둘러보시고, 아직 대학생이던 둘째  건상이
의 책값에 보태라고 봉투 하나를 내려놓으시면서 큰애 준상이의 머리를 쓰
다듬고 쓰다듬으셨다. 
  남편은 새로 빌린 회색 볼보로 사모님을 뉴욕공항까지  모셨다. 거기까지 
가는 내낸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남편은 전에 없이 길을 잃곤 해서 자칫 
비행기 시간을 놓칠 뻔했다. 광활한 뉴저지의 그 끝없는  미로는 우리가 살
아온 길처럼, 사모님이 걸어온 길처럼 뿌연 안개에 쌓여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굳어져 버려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던 때에도 사모님은 결
연했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 보스턴에 있던 김재규 부장님의 외동딸  수영
과 자주 전화 통화를 했다.
  "어머님을 이곳으로 오시도록 하는게 어떨까?"
  "지금은 오실 수도 없지만 또 오시지도  않겠대요. 한국에 참다운 민주주
의가 자리잡고 독재가 없어지는 것을 그곳에 머물러  보시겠대요. 어머니께
선 아버님과 함께  가신 분들의 가족과 아이들을 돌보시느라 늘  바쁘세요. 
그것만이 어머님의 관심사예요."
 그 남편에  그 부인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유난히 많은 관심을  쏟던 
사모님은 얼마 전엔 고(故) 박흥주 대령의 딸이 대학에  입학했다며 그렇게 
기뻐하고 뿌듯해 하실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지  10년이나 지난 후인데
도 말이다. 그 동안  그 아이들 아빠 역할의 십분의 일이라도  하려고 아끼
고 공들이면서 애쓰셨을지가 역력히 보였다.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던  1979년 선명한 봄빛이 부서지던 날, 나는  떠나
는 인사차 장충동 정보부장 공관을 방문했다. 노란색 나무  대문 옆에 달린 
은색 벨을 누르고  비서의 정중한 안내를 받고 들어섰다. 응접실엔  정적이 
깃들어 있고 옆방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 일은 빨리 끝내고 더 이상 끌지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계속 지시하시는 노모님과 "네!"를 연발하는 사모님의 목소리, 어머님 말
씀을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그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밤색 옷차림으로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모님의 밝게 빛나는 미소
는 얼굴 위에 얹힌 초로의 어두운 기운을 말끔히 몰아내고 있었다.
  "떠날 준비는 다 되었나요?"
  맑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네."
  나는 언제나 사모님 앞에서는 어렵고 떨렸다. 그분에게는  범접하기 어려
운 위엄이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닌 따뜻한 존경에서 나오는 떨림이었다.
  "집은 두고 가는 거지요?"
  사모님은 해외에 나갔다고 돌아오지  않는 직원들을 많이 본지라 다짐하
듯 물으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전에부터 많은 생각을 해온  것이 
아님에도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돌아오리라, 부드럽고 다사로운 
조국의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리라….
  "언니가 이사와서 집을 봐주기로 했어요."
  "잘 됐네. 남에게 맡기면 집 버려요."
  정말이지 언니가 와서 집을 봐주는 것은 든든한 일이었다.
  "사모님은 언제 수영이한테 안 가세요?"
  "가고 싶지만 어려워요. 요즘 계속 부장님이  밤을 새워가며 직접 서류들
을 보세요. 그래서 건강도 염려되고. 그 동안 밑에서들 검토하고 보고만 하
던 것을 하나하나 보시니 세상 돌아가는 걸 환히 아시게 되어 걱정이 많으
세요."
  "어떤 점을 걱정하시나요?"
  나는 운동권도, 민중문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
다.
  "유신이 굳어져서  그 반발을 막을  수가 없어요. 유신이 어디  법이었나
요."
  "그렇지요, 사모님."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만 유신에  반대하던 현역 군인의 아내인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입에서는 안  나와야 할 말이 나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 갑자기 환해 보이는  사모님의 얼굴을 일어
나 만질 뻔했다.
  "학생들 한 명을 내놓으면  열 명씩 잡아들이니 이게 어디 민주주의겠어
요?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대통령께 직언했던  분도 바로 부장님이세요. 
그 당시 박대통령은 4선엔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도 그이에게 종종 
영구 집권에 대한  힌트를 보이곤 하셨나봐요. 부장님이 완강한 반대  의사
를 보이자 그때 3군단으로 보냈던 거예요."
  그 일에 대해서는 남편도 말한 적이 있었다.  3군단으로 떠나시는 부장님
이 '그 동안 수고 많이 했네. 강원도 원통에  한번 오게'라며 그이의 어깨를 
감싸안으셨다고. 부장님은 나중에 항소이유서에서 '3군단 철책 울타리를 만
들면서 박대통령이  방문할 때 가두어  두고 하야를 종요하고  싶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신문이며  잡지, TV에서 유신헌법을 발표하는 박대통령의  표정
을 보며 '글렀구나'라는 절망감에 빠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대
통령의 애국심은  집권욕에는 못미친다는 판단  아래 부장님은 지속적으로 
영구집권을 반대했다. 이러한  태도는 점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끝내 
군단장을 끝으로 옷을 벗고서 유정회 국회의원이라는 한직을 받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해요? 한국을 떠나는 게 섭섭하지요?"
  "그럼요, 사모님, 저는  조국과 군인들을 유난히 사랑하는 애국자 아니에
요?"
  "《당신의 군복》작가!"
  우리가 함께 터뜨린 웃음 소리를 따라 장충동 공관엔 새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금년에 몇이지요?"
  "마흔이에요. 늙었어요."
  "아니야, 참 좋은 나이야."
  사모님은 갑자기 수영이가 멀리 있어 그립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나는 
말꼬리를 다른데로 돌렸다.
  "부장님은 김대중 씨  입원을 주선하시고, 김지하 시인의  가족면회와 고
은 시인의 석방을 주도하셔서 문인들이 좋아해요."
  "그 자리에  계시는 동안 정보부의 악명을  조금이라도 벗기려고 애쓰고 
계시죠. 요즘 김추기경님을 자주 만나세요."
  "김수환 추기경님요? 왜요?"
  나의 목소리는 마흔  살 익은 나이의 주부가 아닌  스무 살 호기심 많은 
여학생인 양 들떠 있었다.
  "김추기경님께 많은 조언을 들으시며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화평을 느
끼신대요. 정보부가 중요한 국가기관이긴 하지만 너무 커져  있어 밖에까지 
권력 침범이 되니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조금씩  축소
하려는 의사도 있으신가 봐요."
  "그렇게 쉽게 될까요?"
  중앙정보부는 정말 크고  대단한 기관이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된 건  장
충체육관에서 있었던  정보부원 부인들의  모임에서였다. 남편들의  직업을 
속이고 있어야만 하는 부인들이 장충체육관  그 넓은 곳을 발디딜 틈 없이 
꽉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서늘했었다. 그때 정보부장의 부인
인 사모님은 왕비같이 손을 흔들며 부인들의 인사에 답했다.
  또 한번 놀랜 것은 당시 정보 2부(외무부)에 있던 그이의  부인으로서 국
가에서 시키는  산업시찰을 갔을 때였다.  나는 그렇게나 많은  정보부원의 
숫자와 대우에 기염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라는 명함은 내놓지도  못
하고 그야말로 쪽도 못쓰고 따라만 다녔었다.
  "참, 사모님. 항규씨(김재규 부장님 동생)는 어떠세요?"
  "글세 부장 취임하실 때  동생이 사업을하면 이권에 관계될 수밖에 없다
며 '자네가 사업을 그만두든지, 내가 부장을 그만두든지  담판을 짓자'고 하
여 잘하던 건설사업을 그만두게 하셨잖아요."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져 나는 질문을 멈췄다.
  "여하튼 부장님 건강이 걱정되네요."
  "간이 좀 나쁘세요."
  사모님은 매우 염려하시는 눈치였다.
  "제가 기도할께요."
  "참, 이거 가다가 아이들과  점심이라도 하라고 부장님이…. 아이들과 식
사 한 끼도 할 시간이 없어서…."
  "고맙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장중히 받았다.
  "그리고 이건 깻잎김친데  하나는 수영이네 것, 하나는  박실장네 것이에
요."
  큰 커피병에 담긴 깻잎김치 두 병.
  난 코끝이 매웠다.
  "고맙습니다."
  사모님은 대문까지 나와 배웅하며 말씀하셨다.
  "뉴욕에 가서 즐겁게 살다와요, 즐겁게…."
  메아리처럼 퍼지던  그 음성, 17년 동안  어려운 순간마다 늘 맴돌던  그 
소리.
  그후 참으로 많은  세월을 오가지 못하고 전화를  주고받을 때면 우리는 
한국정세나 그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
의 안부만  묻고 되물으며 국제전화에 대고  울기 일쑤였다. 그 동안  굶지 
않고 뉴욕에서 뿌리를 내린 우리에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거라고 격
려하시던 사모님은 그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울먹이실 뿐이었다.
  "아유 웬일이야, 거기가 어디야?"
  지난번 뉴욕에서 전화를 드렸을  때도 사모님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
다. 
  "뉴욕이에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럼, 박실장님은 어떠세요? 애들은 장가 보냈어요?"
  "남편은 교회에 열심이고 애들도 잘 있어요.  큰애는 하나님 사업을 하고 
있고, 작은애는 월스트리트에서 증권회사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데, 둘 다 
아직 장가를 안 갔어요."
  "아유, 보고싶다."
  울먹임이 배어 있는 목소리, 그 틈새로 비어져 나온  그분의 시간과 우리 
가족의 시간은 전화선 위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
  "사모님, 식사 좀 하세요."
  사모님은 잠에서 깨어난  분처럼 깜짝 놀랐다. 나도 다른 세계에서  돌아
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서울에서 사모님과 마주앉아 
있는 것은 꿈만 같았다.
  "   장군 댁에서는 연락이 있으신가요?"
  사모님은 천천히 고개를 흔드신다. 아, 그렇구나.
  "   장군 댁은요? 가까우셨는데….  그 댁은 사성장군에 장관도  하시
는 거 같던데요."
  "일체 연락 안해요. 내 쪽에서는 더 안하죠."
  "왜 그러세요?"
  "나로 인해 다른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니까요. 그분들에겐 그 나름
대로 길이 있는 것이니 그 길을 걸어가야지요."
  "사모님. 옳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계속길을 가는 것은 나쁜  것 아니에
요?"
  "그것은 그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부모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요?"
  "하기야 자신의 부귀공명을 위해서는 무엇을 못하겠어요."
  "모든 일을 하나님은 아시니까요."
  사모님의 표정은 세상의  것들을 초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동시에  표
현할 수 없는 번민과 외로움도 묻어나고 있었다. 그토록  가까이 지냈던 사
람들이 이제는 모두 길이 달라져 있는 것이다.
  "사모님, 서울에선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갔지요?" 
  "그래요, 그사람들(전두환, 노태우)이 그렇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 
가족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돼요."
  "사모님은 당한 것이 분하지도 않으세요?"
  "아니지요. 내가 당해봤기 때문에 그렇게 안됐고  가슴이 아플 수가 없어
요."
  크게 머리를 젓는 그 얼굴엔 온화한 빛이 고여 있었다.
  "사모님, 저희도 복권되었다  하고, 또    씨는 이번에 재판 받는다던
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더 빨리  일어나지요? 저는 가장 먼저 부장님의 명
예회복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10·26이후 그때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시던 사모님은 서서히 입을여셨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에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백입
니다. 그건 고문이 무엇인가를  실감난게 하는 취조였어요. 너무 무섭고 떨
려서 수없이 기절했었지요. 죽음보다 더했으니까요. 그후 17년 세월이 흐르
는 동안 계속 안경을 쓴사람만 보면 두려운 증상이  생겼어요. 안경을 썼던 
그 수사관 때문이죠. 그러나  그어려움이 어디 그분(김재규)의 고통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겠어요?"
  쓸쓸함이 배어있는 사모님의 말끝으로  한 평범한 아내로서의 사랑과 슬
픔이 물결쳐오고 있었다.
  웅성거림은 줄어들 줄을 몰랐지만 우리의 얘기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사모님께 중요한 질문을 드렸다.
  "제가 오랬동안 여쭤보고 싶었던 건데요…."
  "무슨 얘긴데?"
  "부장님의 아들이 있었다는 얘기 말이에요."
  "나는 남편의 말들 신뢰합니다.  그리고 존중합니다. 부부의 정을 나누고 
산 그분을 못 믿고서 누구를  믿겠어요. 그분은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
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사모님은 침착하셨다.
  "저도 제 남편한테서 아이의 피검사를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검사 결과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남편이 보안사 근무 당시  '글쎄 요정에 몇 번 간 것으로  그분의 아이라
고해서 피검사를 했는데 아니더래'라며 어이없어 하던 생각이 났다. 사모님
은 표정의 동요도 없이 말을 이으셨다.
  "수영이를 낳고 동생이 없어 기다리던 중에  그런 말이 나왔었지요. 그래
서 내가 그 여자를 찾아 갔었어요."
  "선운각을요? 거기는  나라의 높은  분들이 모두 드나드는  곳이라 던데
요?"
  "그래요, 정말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 여자
는 분명히 부장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이런  말은 끝내자고 했었어
요. 그래도 나는 만약에라도 그럴 경우 아이는 생모가  키워야 하므로 내가 
물러나겠다고까지 말했었죠. 그런데 정작 본인들이 아니라 하고, 피검사 결
과도 아니라는 판정이  나자 오히려 집안에서나 검사관들은  실망했었어요. 
집안의 장자 문제도 있고해서…. 거기서 끝난 얘기에요."
  "그런데 사모님, 세상 사람들은 TV 드라마에서까지  그 일을 기정사실화
시키려고 하잖아요. 정말  부장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아니라고  밝혔어야 
하는 건데…."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그 양만은 그것도 자기
와의 어떤 인연이라  생각하며 냉정하게 하지는 못했어요. 나는 그분의  모
든 행동과 말씀을 믿고 따랐을 뿐이고요."
  그랬다. 10·26이후, 신문이며 방송은 조악한 허위기사들로  넘쳐났다. 그
분에게 첩과 아들이 있다느니, 부인은 이혼하고  LA에 있으며 딸도 수양딸
이라는 등속의  거짓들이었다. 또 재산 점검을  한다면서 벽에 붙은 몇  만 
원짜리 그림을 오천만  원이라고 밀어부치는 식으로 해서  몇 억 재산으로 
부풀려 발표했다.
  어느 자리에 있었건 부장님은  설날이나 추석이면 뇌물은커녕 일체 손님
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부하들에게 마음을 써주시던 분이었는데 말
이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빚어진 말들은 계속 이어져 세상을 들끓게  했고 
나중에는 선산의 부호였던 선친의 유산까지 모두 몰수해 버렸다.
  언론의 폭력이 그분의 가정을 강타할 때마다 우리는 미국에서 그저 지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언론에 보
도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달리 해명할 방도도 없었다.  대체 그 거짓들
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따름이었고, 그저 언젠가는  진
실들이 밝혀질 것이고  또 밝혀져야만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소리칠  필
요도 없었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는 바와 같이 김재규 부장님은 사모님을 
극진히 사랑했다. 저녁  모임엔 언제나 함께 다니던 그분들의 가정은  평화
로웠고, 외동딸 수영이는 늘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기 다루듯 염려하고 돌
본다'고 말하곤 했었다.
  부장님은 수영이를 시집보내고 나선  종종 하염없이 유리창 밖을 내다보
신다거나 사모님께 몇 번이나 '딸이란 시집 보내고 나면  이렇게 허전한 것
인가'라며 쓸쓸해 하셨다고 했다.
  겉모습은 아버지를, 체격은  어머니를 빼어닮은 수영이는 유일한  자식임
에도 미국에서 가족들과 열 명  안팎의 사람만이 모여 치른 결혼식은 더없
이 조촐했다. 그때가 그분이  건설부장관으로 계실 때 였는데, 청첩장을 돌
리면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고 극구 반대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그분이 보안사령관 시절에 가끔  가정일이 있어 갈 때면 늘 가정부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했다.  요즘에야 건강식이라고 일부러 그렇게들  먹지만 
모든 음식에 기름한 방울이라도 절약하라고 하고, 한여름에도  가스를 아끼
느라 연탄불을 피우며 휴지 한 장, 김장 때 쓰는  양념 하나도 알뜰히 쓰라
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보부장  댁 일이라고 하면 누구도  곧이 
듣지 않을 터였다. 그런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세상의 얼토당
토 않는 허위와 폭력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
  "우리 음식 들어요"
  여전히 음식엔 손도  대지 않으시면서 사모님은 내게  음식 접시를 밀어 
놓으셨다. 나를 보살펴주고 있던 종손 정호가 지켜보다  안되겠던지 열심히 
음식을 날라와 사모님과 내 앞에  놔주었다 사모님과 나는 마주 웃으며 조
끔씩 음식을 집었다.
  "그 동안 시(時)는 많이 썼어요? 그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요! 나는 그
저 세월 따라 살아오고 있을 뿐이지만…. 아이들에에 인사전해줘요. 그리고 
아빠 건강 잘 보살피고요."
  사모님의 엷은 미소엔 그 당치않은  억울함을 초월한 듯한 빛이 담겨 있
었고, 고난을 헤치고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호텔 로비엔 최종대 씨가 서 계셨다. 온 생애를 보문동에서 지낸분, 예전
에 그 훤칠했던 미남이 이젠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초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꼭 만나요, 꼭 만나야 해요."
  사모님을 태운 차는  나를 뒤로 하고 미끄러지듯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 
차를 따라 달려가고 싶은 내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
다.
  따라가고 싶었다, 나도.
  돌아가고 싶었다, 저 그리움의 물결 파도치는 그 시간으로…. 
  군인의 아내들
  '빠앙-' 클랙슨 소리.
  지난 봄 아는 분이 보내  준 노란 실크천으로 원피스를 촌스럽게 해입은 
나는 황급히 핸드백을 들고 나섰다.
  "건상이 엄마는 또 어디 나들이 가나보네요."
  집안일을 봐주고 있는 경상도 아줌마는 언제나처럼 빈정댔다.
  "웃어른 댁에 인사갈 일이 있어요."
  차는 시내를 빠져나와 서교동으로 접어들었다.
  김복동 장군 댁은 약간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한 집 
들의 꽃들은 내가  오는 것을 반기기라도 하듯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
다.
  그이의 진급이 고마워서 찾아갔던  나는 크고 화려한 응접실에서 적잖이 
당황했다. 들고간 과자상자가 그렇게 초라하고 힘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모님, 지난번에 사다주신 고기, 아이들과 잘 먹었어요."
  "그걸 뭘. 참, 집이  좋더라. 그런데 보일러는 자동으로 고쳐야겠던데. … 
잡지에 나온 사진 봤어요. 계속 글을 쓰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사모님은 오렌지 주스와 일인용  과일접시에 담긴 사과와 포도를 권하셨
다. 몸매가 늘씬해서인지  검정 바탕에 빨간 꽃무늬가 있는 홈웨어가  유난
히 잘 어울렸다.
  "김장군님은 앞으로 한국군의 제1인자가 된다고들 하던데….   정말 곧고 
바른 성품을 가지셨다고 애아빠가 늘 말했어요."
  조금은 아첨이 담긴  말이었지만, 김복동 장군과 함께 일했던 그이의  말
은 틀리지 않았다. 
  "박보좌관님은 정말 진실한 사람이라고 늘  말씀하시던데요. …우리는 중
위일 때 결혼했는데 아침마다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가치씩을 빼내어 모았다
가 줄 정도의 박봉 생활이었지요."
  그 댁의 우아한 응접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말이었지만 지난날은 모두 
그런 생활을 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보문동 사모님은 안녕하시지요?"
  그 사모님은 어김없이 보문동 사모님의 안부를 물으셨다.
  "네, 수영이가 떠나서 좀 쓸쓸해 하세요."
  "그래서 어머니 날은 내가 꼭 기억하고 찾아 뵙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마치 한 가족처럼 뭉쳐 있었다.
  보문동과 김복동 장군댁과는  참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보문동  사모님은 
특별히 김장군댁을 아꼈다. 그 댁이 서교동에 새로 집을  마련했을 때는 당
신이 좋은 집을  마련한 것처럼 기쁘다고 좋아하셨다. 또 김장군  사모님은 
김장 때는 어김없이 보문동을 찾아와 끝없는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었다. 
  김장군 사모님은 나에게도 잘  대해 주셨는데 건빵과 식품을 바꿔먹어야 
했던 신혼 때 가난한 육군 중위의 생활 얘기를 해주시며 격려하곤 했었다.
  가끔은 사람 구하는 문제도 의논했는데 한번은 우리집에 있던 경상도 아
줌마를 그 댁에 소개한 적이 있었다. 김장군 사모님은  아마 시누이에게 경
상도 아주머니를 소개한  모양이었다. 그 당시 한번 만났던 시누이  노태우 
씨 부인은  예쁘지만 찬 느낌이었다. 그런  연고로 내가 한국을 떠날  즈음 
그 경상도 아줌마가 전화를 걸었다.
  "건상이 엄마 덕분에 좋은 데 와 있어요.  노태우 장군 댁인데 지금 청와
대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이 식구들은 내가 음식도  잘한다고 하고 아이들
도 착해요."
  경상도 아줌마는 특별히 우리  작은애가 싫어해서였는지 그 집아이들 칭
찬을 늘어지게 했다. 그후 한국에서 노태우 씨가 부상되고  있을 때 뉴욕에
서고생하던 우리 식구는 경상도 아줌마가 청와대 주방장 되겠다고 웃은 적
이 있다.
  김장군 사모님은 언제나  정답고 따뜻했다. 내가 그 댁을 방문하고  돌아
올 때면 꼭  차를 태워주고 택시값을 두둑하게  주시면서 택시가 골목길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집에 오실 때는  꼭 
고기를 사오셨다. 고기  먹기 어려웠던 시절, 고기를  먹을 때는 꼭 야채와 
먹으라고 친절히 일어주던 분이었다.
  군인의 아내들 사이선 비슷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계모임을 
갖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집집을 돌아다니며 모였는데 그  날은 우리집 차
례였다. 강남에서 온 한 대령 부인, 제기동에서 온  최장군 부인, 보안사 정
보처장 부인,  김재규 사령관의 부관이었던 이소령  부인. 우리집에 모처럼 
다섯 사람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며 마냥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어 갔다.
  "이번 수병풍계는 박실장네가 타게  됐어요. 자주색 바탕이 좋아요, 남색 
바탕이 좋아요?"
  "남색이 좋은데요."
  운전사가 갖고 들어온 병풍은  남색 바탕에 매난국죽이 그림같이 수놓인 
여덟 폭의 비단 병풍이었다. 안방에 쫙 펼쳐 놓으니  한결 아늑하고 화려했
다.
  "오늘은 병풍 덕으로 특별히 맛있는 냉면을 준비했어요."
  우리는 빙 둘러앉아  오이, 토마토, 참외를 보기  좋게 띄운 신식 국수를 
먹으며 남편 자랑, 아이들 자랑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달부터 11기생 부인들이  계를 한대요. 나도 거기  들어갈 
거니까 박실장네도 들어가요."
  "저는 계를 잘 못해요. 모이는 것도 쑥쓰럽고…."
  "아유, 남편 출세시키려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모두들 
여러 사람들을 사귀려는 거지."
  최장군 부인이 적극적으로 권했다.
  "생각해보구요."
  "그리고 우리 보문동 사모님 생신에 꼭 같이들 갑시다."
   언제나 앞장서는 한대령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황대령네도 부릅시다."
  그들은 무슨 맹서를 하듯 했다.    
  오후 3시, 금가루  같은 햇살이 우리집 철망에 피어난 빨간  장미에 무더
기로 쏟아지고 있었다.
  명절때가 되어도 남편과 나는 높은분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은 꿈도 꾸지 
않으며 지냈다. 설날이 되면 우리 내외가 인사차 보문동엘  가는 게 전부였
는데, 그런날 보문동에선 장작 주인들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집안 일을 
맡아보는 최종대 씨가  방명록과 함께 얌전히 차린  다과를 내놓으며 말했
다.
  "여기다 사인해 놓고 가세요."
  그 댁에선  그렇게 굴비 한 두름이라도  절대 받지 않았다. 그건  부하들 
사이에선 이미 널리  퍼진 얘기였다. 오히려 그분은 베풀기를 좋아한  분이
어서 설이나 추석이면 보문동에서 선물이 왔었다.
  어느 해 추석엔가는 송편가루를 빻아갖고 오는데 우리집 앞에 검은 세단 
차가 세워져 있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보문동에서 왔습니다."
  운전사가 놓고 간 상자 속엔  환상적인 노란색 실크 한복감이 들어 있었
다.
  '박실장 부인. 남편 돕기에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고기  좀 보내니 아이들
과 맛있게 한 끼 해드시고 한복 한 벌 해입어요.'
  그랬다. 직위는  제법 괜찮았지만 박봉에만  의지하고 살던 우리는  그때 
고기 한 근 사먹는  게 힘들었고, 파티에도 뻣뻣한 나일론 한복을  입고 나
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공공연한 상납을  얘기하는 부인네들에

  "우리 애들도 사먹이기 힘든 과일을 어떻게 높은댁에 사가지고 다녀요?"
 라고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최대령 부인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애들은 못 먹여도 높은댁엔  잘 사가지고 다녀야 남편이 출세한다는 것
을 알아야 해요."
  젊은 문학도인 나는 그때 이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황영시 장군네도 신장위동  우리 동네에 살았었다. 그 부인은 유난히  나
를 아껴주셨다. 신문에서 내  글을 보았노라고, 남편도 함께 읽었노라고 하
시면서 육군본부 기독장교 부인회에 함께 가기를 권하셨다.  그래서 1976년
부터 79년까지 한 3년간 매주  목요일 아침이면 그 댁으로 가서 함께 육군
본부 교회엘 갔다.
  거기서 전국 각자의  이름난 목사님들은 다 모셔서  설교를 들었고 나는 
그 설교들을 메모하곤  했다. 어느 권사님은 힘차게 기도하며 남편들의  무
운장구를 빌기도 했고, 100 여  명의 기독장교 부인들은 입을 모아 '샤론의 
꽃 예수'를 불렀다.
  그런가 하면 어느 부인은 공공연하게 
  "김재규 부장님 부인 좀 인사시켜 주세요."
 라는 말을 하며 내게 접근해 오기도 했다.
  어느 하루, 보문동 응접실엔 나와 김복동 장군 부인, 최장군 부인이 앉아 
있었다.
  "비서실장 세 분 부인들이 다 모였네."
  보문동 사모님이 밝은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서셨다.
  "사모님, 라면봉사에 다녀왔습니다. 모두들 사모님 병환 걱정들을 하셨습
니다."
  나는 장군 부인들이 하는 라면봉사(신병들이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
방으로 가는 길에 용산역에서 잠시  쉬는 동안 간단히 라면과 김치를 대접
하는 일)에 편찮으신 사모님을 대신하여 몇 차례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 열차에는  장병들이 없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윤필용 장
군 부인이 절더러 복도 많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참  그 댁에다 장병들을 
먹일 김장거리를 잔뜩  쌓아 놓았더니 윤장군님이 저게  다 사람 뱃속으로 
들어갈 거냐고 하시더래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정말, 김장들은 하셨어요."
  김장군 부인은 조금 높은 톤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했어요."
  "저희도요."
  최장군네가 받았다. 
  "그러면 보문동 사모님네만 아직 안 하셨군요."
  "이번 10일에 하신다니까 우리 그 날 모두 모여요."
  서른을 갓 넘긴 앳된 나는  그 부인들과 만나는 것이 어렵고 조심스러웠
지만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았다.
  보문동 사모님은 나를 정면으로 보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미세스 박은 아주 좋은 소질을 갖고 있어요. 계속 시 많이 써요."
  보문동 사모님은 당시 내가 시인으로 등단하고《당신의 군복》시집을 출
간한 걸 염두에 두고 격려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정말 그래야 해요."
  김복동 장군 부인과 최장군 부인도 합창하듯 말했다.
  "《당신의 군복》시집 출판 후  군인 부인들이 저이 만나고 싶어 야단들
이에요."
  최장군 부인의 말이다.
  "누가 그렇게 이런 못난이를 만나고 싶대요?" 
  "11생기들 부인들. 전두환 장군 부인을 비롯해서."
  "싫어요. 저는 그분들 만나고 싶지도 않고 시간도 없어요."
  퉁명스런 대답이었지만  세 사모님들은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 충청도 김치에 대하여《여성중앙》부록에 썼더라."
  "네, 각 도마다 한 사람씩 쓰는  건데 재주도의 김치는 '고려진'이라는 아
나운서가 썼어요. 저는 제가 잊을 수 없는 맛으로  고들빼기 김치와 갓김치 
그리고 눈오는  밤 꺼내먹던 찡한 사이다  같은 동치미 맛에 대해  썼구요. 
충청도 김치는 사실  별 특색이 없어요. 충청북도는 바다가 없어서  생선이 
흔치 않으니까 그저 담백하게 새우젓만 넣는 김장이 허다한데 그것에 대해 
썼지요."
  귤을 까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는 동안 살랑 부는 바람에 실려오
는 햇빛은 부드러웠고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듯했다.
  인간 김재규
  1970년, 그 해 가을은 빨리 왔다.
  보안사령부 부원들이 부부 동반으로 서울운동장 테니스 코트에서 정구대
회를 끝냈을 때 짧은 가을해는 어느덧 붉은 석양으로 물들어 있었다.
  크지 않은 체구에  단단한 몸매, 약간 검은 피부를 지닌  보안사령관님이 
정중하게 똑바로 섰다. 그의 눈빛은 빛났고 강했으며 또 따뜻했다. 그가 바
로 후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엄청난 정권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친애하는 부원과 가족  여러분! 새로운 도약의 시대에 중요한  위치에서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가는 여러분은 한 분 한  분이 참으로 귀한 분들입니
다. 개인을 희생하여 국가를, 소를 희생하여 대를 이루는 우리의 임무를 가
족들이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정의는 언제나 이기는 것이며  힘을 과시하여 
약한 자나 억울한 자를 짓밟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나라의  번영과 정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워야 합
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의 희생이 따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 목숨도 내놓아야 할 각오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젊은 나에겐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박혔다. 나라를 위하여 
개인을 버린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넘쳐 흘렀다.
  그 날 저녁, 사령부 과장급 이상 가족들과 회식이 있었다.
  "우리 오늘 저녁엔 마음 놓고 식사하고 부부끼리 나와 인사도 하고 노래 
한 가락씩도 뽑아봅시다."
  김재규 사령관님은 마음 좋은 아저씨가 되어 식사를 권하면서 한 부부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대공처장 김학호 대령 부부 나오세요. 아주 남자다운 사나이, 공산당 잡
는데 이거지요."
 부장님이 엄지손가락을 우뚝 펴보이며 소개를 하자 대공처장 부부가 나와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몇몇의 소개가 더 있고  나서 우리 차례가 
왔다.
  "오랫동안 비서실 사람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진실한 진짜  사람, 박기창 
실장 부부 나오세요."
  우리 부부는 함께 나가서 인사를 했다. 그렇게 여럿이  인사를 마치고 마
지막으로 사령관님 부부 차례가 왔다.
  "여바요, 저기 앉은 부인 나오세요."
  사모님은 끝자리에서 부끄러워하며 나오셨다.
  "당신이 누구시더라?"
  사령관님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위트  섞인 눈빛으로 사모님을 지그시 바
라보며 나란히 서셨다. 베이지색 수트를 입은 사모님은 우아했다.
  그날 밤은 참으로  화기애애했다. 사령관님은 여자들만 있는  자리에까지 
와서 사모님을 모시고 갔는데 그 모습은 많은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 당시 남편은  그분의 비서실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분이 보안  사령관
으로 계시는 동안엔 비서실장 보좌관  등의 일을 거치며 계속 비서실 근무
를 해왔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을 우리는 그분 가정과 인연의  줄을 엮
어가며 지내왔던 것이다.
  새벽 6 시 반쯤이면 사령관님에게서 꼭 전화가 왔고, 그이에게  그 날 할 
일에 대한 시지 사항을 하명하셨다. 남편은 정확히 10분 전  7시에 집을 나
서곤 했다.
  어느 날 저녁엔 늦게 귀가한 그이가 여간해서는 열지 않던 입을 열었다.
  "이번 국회의원 추천  문제로 황씨가 금품을 들고  사령관님을 찾아왔대. 
사령관님은 물론  돈을 돌려 주었지만  성직자마저 썩었다고 통탄하시면서 
국가가 얼마나 썩어 있으면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말
씀하셨어."
  그러면서 사령관님은 의롭지 못한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고 불같이 화를 
내는 강직한 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려서도 그랬다고 한다.
  1926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금녕 김씨(金寧 金氏) 가문에서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분은 성격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해 어릴 때부터 어려
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한번은 초등학생이었던  그가 책보를 메고  장터 나뭇전(廛)을  지나는데 
순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5전에 팔라구."
  "15전 짜리를 어떻게 5전에 드립니까?"
  "우리집이 저 산등성이니까 거기까지 져다 놔, 5전에."
  "안 가겠습니다.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뭐라고, 이 자식이!"
  순사는 나무꾼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했다.
  이 광경을 보고 의분을 참을  수 없던 소년은 책보를 팽개치고 순사에게 
대들었다.
  "이 도둑놈아!"
  일본말로 소리치고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순사는 소년을 유치장에  넣었다. 차고 단단한 쇠장살의 경험은 소년  김
재규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후일 안동  농림학
교에 들어갈 때  구두시험에서 '의병대장이 되겠다, 일본놈을  때려 잡는'이
라는 말이 되어 나왔다.
  사령관님의 부친은 의를 위해서는 감옥도 마다하면 안 된다고 하시던 엄
한 분이었고, 3남  5녀의 모친은 인자하였지만 자식들의 기강을 위해  장남
에게 많은 책벌을 가하는 분이었다.
  "매 끝에 효자 난다고 하더니 재규는  참 효자다."라는 노모의 말씀에 그
분은 자신은 효자가 못되는데 어머님이 과한 평가를 하신다고 하셨다.
  어느 하루 보문동 저녁 식사에 참석했을 때였다.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요. 아버님이 오래 못 사실 것 같애. 그 동안의 불
효가 말도 못하게 후회스럽더군. 또 그건 10년, 20년 후의 내 모습인 것 같
기도 하고…."
  먹음직스럽던 도라지나물과 고비나물,  무국을 앞에 두고 김재규  사령관
님은 눈물을 훔치며 식사를 못하셨다.
  그런 사령관님이니 10·26이후 생존하고  계신 노모에 대한 염려는 각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그렇게 누를 끼친 불효에  대해 임종의 순간까지 
통탄해 하셨다.
  "오늘 당신들은 나를 심판하지만  먼 훗날 국민의 여론이 당신들을 심판
할 것입니다."
 유장한 역사의 강 어느  구비에선가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 지리라는 
것을 확신하듯 그분은  마지막 군법회의에서 이 말씀을 남겼따. 그리고  곪
은 상처를 도려내는 쓰라림을  온 몸으로 받아 안은 가슴을 옥중  시(詩)로 
남겼다.
  내 목숨 하나 바쳐 
  독재 아성 무너뜨렸네. 
  자유민주주의 회복되었네.
  나의 사랑하는 삼천칠백만 동포에게 
  자유를 찾아 돌려주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10·26 민주 회복.
  국민회복 만만세!
  이종찬 장군과  사령관님은 4·19 당시부터 형제와  같이 가깝게 지내왔
다. 이종찬 장군은 '군대가 학생들에게 발포하면 절대로  안된다. 만일 그렇
게 되면 대한민국은  망한다.'라고 했었는데, 가까운 이들은  평소 이장군을 
존경했던 사령관님이 그의 사상에  힘입어서 10·26을 거행한 거라고 입을 
모았다. 79년 당시 부마사태가 일어났을 때 학생들의 희생을  온 몸으로 막
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거사를 치른 것이라고 말이다.
  남편도 숙연한 자세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사령관님은 옳은 일엔 한 치도 양보  못하는 분이야. 그러면서도 평소의 
그분은 자상하시고 위아래 확실하고 부하를 아끼던 분이었어.  강직하고 선
하신 그분이 그런  일을 할 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있었던 
거야.
  나는 평소에 그분이 몰래  사격 연습 하시는 걸 몇 번  봤어. 건설부장관 
시절 대통령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도 태극기 밑에 권총을 숨겼었다는 것도 
믿어. 정보부장이 되신 후 78년 편제 개편 때 특수  임무를 띤 기동대를 만
드셨어. 그때 보안사 출신의  가까운 사람을 책임자로 두셨어. 그분이 바라
던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런 기구가 필요했던 거지."
  김재규 사령관님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의 헌병장교였던 소령 한분을 뉴
욕에서 알게 됐는데  그분 말에 의하면 김재규  사령관님은 감옥을 지키는 
사람 하나하나까지 그렇게 염려하고 챙겨주셨다고 했다. 그  소령은 김재규 
사령관님이 끝내  처형되는 것을 보고  '그런 애국자가 처형당하는  나라를 
위해서는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미국으로 와버렸다고  한
다.
  10·26이후 재판중 항소문에서 사령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6·25사변 중에도  피고인은 즉결 처분 같은  것으로 사람을 죽인  일은 
없습니다. 또 언젠가 8군 사령관이 엽총을 준 일이 있는데, 그때도 그 총으
로 동물의 목숨을 살생할 수가 없어서 다른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피고인은 이번에 처음으로  생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오죽했으면 동향  출
신에, 동기생인  대통령을 희생시켰겠습니까? 개인 감정이라고들  말하기도 
하지만 피고인은 사람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습니다. 민주회복을  위해
선 이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다. 그분은 유신을 반대하다 보안사령관에서 좌천되어  3군 단장이라
는 한직에 있을 때도 노루 한 마리 총으로 쏴 죽이지 못하던 분이었다.
  10·26이 일어난 건,  사령관님이 일생을 오점없이 충직하게  군인생활을 
한 우리를 후일 유엔  책임자를 만들겠다고 미국으로 보내신지 6개월 후였
다. 그때부터 리버데일에 사는 내내 처음 연둣빛 희망이  반짝였던 바로 그
자리엔 사시나무 같이 떨리는 두려움만 들어찼다. 바람뿐인  뉴욕땅에서 두 
아이들과 생계조차 잇기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조국이 우리를 버렸다는 쓸
쓸함 때문에 그 겨울은 더욱 춥고 배고팠었다.
  그러나 남편은 김재규 부장님을  오랫동안 모셔서 그분의 정의로움과 인
자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주저없이 브루클린 교회 목사님과 함께 구명운동
에 나섰다. 부장님을 함께 모시던 박흥주, 박선호 씨가 그분과 함께 죽음을 
택했듯이. 나는 나대로 아직도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최규하 대통령에
게 편지를 썼다.
  1979년 깊은 겨울이었다.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지금 한국에는 참다운 민주주의의  여명이 비추어오고 있습니다.이 위대
하고 찬란한 새벽빛을 다시 끝없는  암흑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분이 바로 
당신이십니다. 온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만들어 놓은 김재규 
부장의 처형은  즉 민주주의의 죽음입니다. 민주주의의  부활은 이 나라의 
자랑이요, 희망이요, 염원입니다.
  김재규 부장님은 공산주의와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길은 민주주의를 회
복하는 길이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신체제 하에서는 민주회복을 할 
수 없기에 급기야 대통령을 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대통령을  죽이고 그 무덤에 올라서려  할 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고,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봐  온 제 남편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무법천지를 만든 총칼 앞에서 의연히 서십시오. 그 길만이 현군(賢君)으
로 남을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입니다.
  10·26당시 부산·마산에서  일어난 봉기는 수많은  사상자를 냈었고 그 
소요가 서울까지 뻗쳐 4·19를  능가하는 사태로 변해가지 않았습니까. 김
재규 부장님은 더 많은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하여 폭발 직전의 화차를 막는 
크나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치에 계셨던 겁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혼란할 때 충신이 나온다 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법정증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신을 반대했으며, 긴급조치 9
호로 인해 자라나는 학생과 선량한 시민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제
도의 폐지를 여러 번 건의한 바 있습니다. 국가가 정도(正道)를 가지 못할 
때 나라의 녹을 먹는 것은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지요. 명령에 복종해서 거사에 참여한 
뒤 법정에서 답변하는 그 부하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단 한 번도 부장님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관의 
도덕관·인격·신념·사상·인간적인 모든  것을 존경하고  따를 뿐이라고 
증언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라도 흔들리거나 흐트러지지 않는 박
흥주, 박선호, 이기주 피고인들의 태도는 상관이 결행한 일에 대한 정당성
과 정의로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상사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을 느낄 수 있고 목숨마저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신의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부하를 염려하고 사랑
하는 김재규 부장님의 증언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처형되면 다시 
소요가 일어나니 자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많은 젊은이가 다칠  것을 두려워했기에 당신의 목숨을 젊은이들의 
목숨에 대신하고자 한 것입니다.
  산 짐승 한 마리도 죽이기를 꺼려하시던 어진 그분이 대통령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긴박한 사정들,  흑막에 가려저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사
실들이 어서 낱낱이 밝혀지기를  온 국민이 열망하고 있습니다. 날뛰는 신
군부 세력에  넘어지는  대통령이 되지 마십시오. 탄압만이 정치가 아닙니
다. 거기엔 분명 처참한 종말이 있을 뿐입니다.
  뉴욕타임즈 79년 12월 17일자 기사에는 김재규 부장님의 명언이 실려 있
습니다.
  '10·26혁명이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민주회복의 기회가 요원할 것입니
다. 나는 혁명을 완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목표는 달성했습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평화롭게 죽을 수 있습니다.  민주회복을 하려했던 한 
사람으로서, 투사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에 나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
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나를 유신정권으로  처단해 주십시오. 나는 의회민주주의의  편에 선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역사는 거짓을  적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잠시의 오판이나 몸조심으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민족사(民族
史)의 차원에서 정당한 판단으로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준엄
한 심판대에 서 있는 처참한 미래를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밝은 예지의 눈으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는 당신의 양심적인 결
정을 뉴욕에서 저희 가족은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정의만이 대통령께서 살 길입니다.
  군부의 총부리에 손들지 마시옵소서.
  저무는 1979년 뉴욕에서
  詩人 김정기 옮림
  그러나 법이  없던 시절, 광주와 서울이  혼란의 도가니 속에 묻혀  있던 
80년 5월 23일, 그분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다.
  누가 옳은가 
  쏜 자와 맞은 자
  쏘아 버리고 흙이 되려면
  민족의 자유를 가슴에 품고 
  十字架를 지려던 착하고 바르고 사랑 많던 
  不義에는 분노하고 義에는 목숨 바치던
  그분 김재규 사령관님.
  밧줄에 매인 사진이 실린 신문을 감춘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독재는 싫다,
  10·26은 의거다., 혁명이다,
  학생들을 하여 
  내가 죽는다
  3·1운동, 4·19를 거친
  국민의 혼은 살아 있다.
  인텔리, 종교인, 학생은
  나의 처형을
  가슴에 새길 것이다'
  라고 외치던 그분은
  80년 5월 어느 날 처형되었고
  우리는 이 땅에서
  꼼짝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분이 떠나신 지 17년.
  그 오랜 세월 내 나라 땅도  밟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이제야 나혼자 여
기 비맞은 묘비 앞에서 그분을 애도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삼성
공원묘지에 있는 김재규 사령관님의 묘지 앞엔 전남 광주 재야인사들의 모
임인 '송죽회'에서 세운 묘비가 있다.
  '먹구름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칠 때
  홀로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햇살 맞지 못하심이 슬프다.
  만 사람 가슴 찢기는구나.
  아아, 회천의 그 기상 칠색무지개 되어
  이 땅에 길이 이어지리.'
  5월의 태양은 잔인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투명하게 부서지는  그 화
창한 햇살은 잔인했다. 먹고 살기에 힘든 나날 속에서  해마다 그때면 우리
에게 몸살을 않게 해 온 저 햇살.
  5월 23일이면 어김없이 우리는  모였다. 그리고 기억했다. 그이가 낭송한 
추모시에 있는 바대로 우리들의 가슴에서 영원한 '민족의  별'로 뜨는 '김재
규' 그  이름 석 자를,  잃어버린 자유민주주의에의 꿈들을. 우리의  비틀린 
세월은 어찌할 수 없더라고 어떻든 역사는 바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82년부터는 한완상  박사 부인이신 김형  전도사님까지 합세하여 서럽고 
뜨겁고 간절하게 예배를 드렸다.  그것은 어떤 형식이 아니었다. 딱히 김재
규 사령관님의 혼을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그건 그분을  추모한다기보다는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가 그 5월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별
  진흙탕 물살 몸부림치며 흐르는
  유신의 강물에 뛰어들어
  홀로 깃발 들고 
  캄캄한 역사의 횃불이 되어
  고통받는 민족의 별로 뜨신 님이여
  80년 서울의 봄을 창조하시고
  떠나신 지 17년 세월
  우리는 그 동안 억울하고 어려운 시대를
  걸어오며
  매운 바람 찬 이슬 타국 살이에
  목이 말라, 그늘에 가리운 당신의 꿈도
  헤아리지 못했었나이다.
  차령산맥 서럽게 흐르는 낙동강에서
  부산, 마산, 광주에서 부르짖다 죽어간 우리 아들들,
  그 젊은 아들의 목쉰 소리가 삼천리에 퍼지며
  민중의 함성으로 터질 때
  꺼지지 않는 횃불을 드셨습니다.
  동포의 가슴에 자유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으며
  새 땅을 일구고 가신 님이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서울, 뉴욕에서도
  민족의 별로 떠오르시는 님이여!
  한 생애를 사루어 젊은 목숨을 껴안고
  80년 5월 별이 되신 님이여!
  상처뿐인 영혼
  "너무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 김재규 사령관님의 동생 항규 씨와 여동생들이 우리 가게에 찾
아왔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정중하게 항규 씨의 약한 손을 잡았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재규 
사령관님의 손을 잡듯이….
  그이의 눈엔 나도 처음 보는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다가 끝내 흘
러내리고야 말았다. 깊고도 긴 바닷길이었다.
  80년 여름. 우리는 하루  아침에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여전히 낯설기
만 한 뉴욕땅에서.
  그러나 남편은 10·26이후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그분을 원망하지 않았
다. 오히려 박선호, 박흥주 씨처럼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었
다.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기에 한결같이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아무리  이곳에서 고생을 해도 이 고생이  떳떳하고 당당해. 
전씨나 노씨에게 붙어서 조금 잘  살게 된 동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
나 당당하게 가난한가라는 생각이 들어."
  "친하게 지내던    씨.  부관이었던    씨도 5·6공 때  벼슬 하니
씩 하던데요."
  "김재규 사령관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지. 강영훈 씨, 박정
수 씨 등 국회의원들과도  친하게 지내셨고. 정기육사 출신들, 그들은 입을 
못 열거야. 입을 연다는 것은 5공·6공을 부인하는 것이 되니까. 가깝던 장
군들도 많았었지만…. 하지만  정병주 장군(12·12때 특전사령관)을 봐.  그
분은 5공 때 한자리 준다고 해도 마다했다잖아.  사령관님은 정병주 장군이 
찾아오면 유난히 반가워하시며  정담을 나누곤 하셨어. 부하지만  친구처럼 
아주 가깝게  지내던 분이셨지. 결국  산에서 자살했다고 발표됐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지 않아? 옛날부터 역적이 
되면 삼족을 멸한다고 했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 그 삼족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 가족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큰아들이 이곳 어느 신문사 설문 중 존경하는 인물란
에 '김재규'라고 적어냈더니 서울의  서슬퍼런 썩은 정권을 무서워한 그 신
문사는 '이순신'으로 고쳐내라는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형렴이가 대학을 갔어요, 벌써. 원유는 이제 10학년이고 막내가 7학년이
에요."
  "아유, 세월도  빠르다. 그러니 우리가 늙지  않겠니? 형렴이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 철든 어른이던데…."
  시카고에 사는 김재규 부장님의 외동딸 수영에게 틈나는 대로 전화를 걸
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는  동안에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버려 어
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그대로인 것은 그녀의 침착한 목소리와  예
의바른 어투였다. 
  "아저씨도 안녕하시지요? 그리고 아드님들은…."
  "우린 다 잘 있어. 아저씨도 예수님 만나서 교회일 열심히 하고 계시고."
  "그게 제일이에요."
  "어머님은 어떠셔?"
  "어머님은 그냥  건강하세요. … 내  나라에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것을 
꼭 보시겠다고  하세요. 96년도에는 그래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고
…."
  그녀의 말끝으로는 길고도 긴 여운이 남았다.
  삼선교에는 김재규  바장님의 어머님이 작은아드님  가족과 어렵게 살고 
계셨다. 10·26이후  아드님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며 담대히  지내시는 
그분은 아드님의 뜻은 알지만 살생을  하였기 때문에 그 죽음을 순순히 받
아들이신다고 하셨다.
  노모께서는 살고 계시던 반포아파트와  차를 팔아 함께 희생된 가족에게 
나누어 주셨다. 보문동 사모님도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늘 
돌보시고 그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김재규 부장님의  형제분은 3남 5녀가  있었는데 모두 양반이었다.  어느 
하나 비서실 같은 데 부탁이나 폐가 될 일은 절대로  안 하셨다. 그건 사모
님 쪽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남편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 김재규 부장님의 누이동생들을 고모라
고 부르고 사모님쪽은 이모라고 부르며 지냈다. 
  브루클린에 살던 재숙고모는 10·26이후 이만저만 곤란을 겪은게 아니었
다. 우리가 장위동에 살 때 귤을 사가지고 놀러오기도  했던 둘째고모는 10
·26이후엔 가구를 팔아 생계를 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서로  쌀자루를 사다
주며 위로하고 지냈다.  거기엔 장위동 시절의 그 귤향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둘째고모와는 10·26을 맞고  나서 매일 만났다. 우리는 둘 다  가난했기 
때문에 서로 많이 도울 수는 없었지만 나는 뉴욕 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언제나 따뜻했던 그 고모를 많이 의지하며 지냈다.
  김재규 부장님과 많이 닮은 단이고모는 85년도에 두 남매를 데리고 뉴욕
으로 이주했다. 육군 중령이었던  남편이 옷을 벗고 온 것이다. 단이고모는 
브루클린 바닷가에서  커피숍을 한다. 쉴틈없이  바쁘고 고단한 생활  속에 
우리는 좀체로 만날 틈을 내지 못해 전화를 자주했다.
  "서울엔 잘 다녀오셨어요?"
  모처럼 서울에 다녀온  단이고모에게 물었다. 노모님은 건강하신지, 사모
님은 안녕하신지….
  "아유, 서울은 다들 잘살아요, 모두 다! 단지 우리  식구들과 친척들만 못
살아요. 잘사는 사람들, 아유 상상할 수 없이 거들먹거리면서 살대요."
  "그게 부러워요?"
  "아니, 부러운게 아니에요. 우리  가까운 사람들은 여기나 거기나 왜그렇
게 못사는지 그게 안타까운 거죠.
  참, 기자들 왔었어요. 오빠(김재규)에  대해 묻더군요. 비석을 세운 게 우
리 가족들과 밑에 있던  분들이라고 우기기에 '송죽회' 총무 전화번호를 줬
지요. 우리느 송죽회에서 비석  세울 때 최소한의 예의도 못 차린  게 미안
할 따름인데…. 언젠가 오빠의 뜻이 나타날 때가 되면 나타나겠죠."
  단이 고모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작은오빠(항규 씨)에게도  기자들이 자꾸 찾아온대요. 재산 회수 
문제로요. 다른 건 그만두더라도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내려온 선산
만은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선산 빼앗은 것 여태 돌려주지 않았어요?"
  이미 알고 있던 얘기였는데도 새삼 놀랍기만 했다.
  "말도 마세요. 그 당시  벽에 붙어 있던 그림 한 장을 몇  천만원씩 만들
어서 엄청난 재산으로 부풀려 발표했었는데요, 뭘."
  말을 하던 단이고모는 수화기를  멀리하고 '원 햄버거, 포 후렌치후라이!'
를 외쳤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몇 년을 서서  일했더니만 왼쪽 다리 무릎이 부어서 내일  병원에 가요. 
그런데 5·6공은 웬 돈들을 그렇게 많이 해먹었대요?"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단이고모의 말들은 허공에 대고 소리지르듯 흩어지
고 있었다.
  단이고모의 전화에 이어 라디오  한국 방송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뉴스가 준엄한 역사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들려주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피고인에게는 사형 및 무기징역을  구형하였으나 선
고는 사형 및  22년형이 되었습니다. 현대사의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와  잘
못된 과거 유산을…."
  라디오를 껐다. 그리고서 2천 8백 38억 원이라는 숫자를 떠올려 봤다. 그
것이 뇌물이건 상납이건 간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를 움켜쥔 그들의 손을 
사상하는 일은 못내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불경기로 가게세조
차 내기 힘든 우리 처지에서 그런 돈을 셈하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여겨졌
다. 몇 천억씩 먹은 사람들에 대한 분개 이전에 그들에  대해 어쩌고 할 겨
를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 숫자는 내게 거품 같은 단어임을  온몸이 저
리돌고 느낄 뿐이었다.
  여전히 재벌과 정부와 언론은 손잡고 그들의 시대를 공유하며 누리고 있
고, 누구도 그들에게 한  시대에서의 퇴장을 선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조국에게서 느껴지는 배신감과 비애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나는 감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저는 후랭크가 죽어도 울지 않을 거예요."
  어떤 날엔 단이고모의 전화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브로드웨이 우리 도넛숍에서 일하던  쿡 후랭크는 우리가 도넛숍을 그만
둔 뒤 단이고모네로  가서 8년째 일하고 있다. 후랭크는 늘  그막에도 그릇
을 집어던지는 버릇이  여전하고, 친구도 없고, 말도  없어 꼭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같다고 단이고모는 내게 일러바치듯 말했다. 거기에  온르도 팔을 
반쯤 비쭉 들었다 내릴 뿐 같다는 말도 없이 나간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어 김재규 부장님의 얘기를 계속했다.
  "오빠는 평소에도 언제나 단정하셨죠. 우리에게도  부시시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어요. 아무리  새벽이라도 머리를 빗고 나오셨어요. 특별히 언니(보
문동 사모님)한테도 잘하셨고 동생들한테도 자상하셨어요."
  "맞아요. 그래서 함께  계시던 분들이 모두 애처가 아니예요?  그리고 부
장님은 어머님께도잘하셨잖아요? 육군대학 총장 시절 어머님이 방문하셨을 
때도 늙어보이지 않게 하시려고 그  모시 옷에 잉크물 들이신 이야기를 들
었어요."
  "정말 그랬지요."
  김재규 부장님이 호남비료 사장 시절, 현대건설이 독신자  아파트를 날림
으로 지은 것을 알고 곡괭이로 부쉈다는 말을 들은 터라 나는 강하신 분이 
유난히 정이 많다는 것을  느꼈었다. 그 공사 때 건설회사 측에서  돈을 싸
갖고 와도 돌려보냈고 그 당시 24인치  텔레비젼을 갖고 왔을 땐  사장 월
급에서 지불했다는 소분도 들었다. 모든 면에서 엄격하시면서도  사랑이 많
은 분이셨다. 
  "저는 제 오빠라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오빠를  존경해요. 평소 말씀 한마
디 한마디가 교훈이 되었죠.  돌아가신 후에는 그 귀한 말씀을 더  못 듣는
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제가 약혼하고서 하루는 오빠와 얘기를 나눈적이 있었어요.  그때 오빠는 
결혼하면 시댁 식구 생일을  한 사람도 놓치지 마라, 남편 앞에서  싸울 때
도 화난 얼굴을 보이지 마라, 부부라도 벗은 몸을  보이지 말라고 자상하게 
일러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들은 바로는  단이고모 부근께도 초급장교일 때 군대 생활
의 모순을 일일이 적어 놓았다가 고급장교가 되어 다 잊어 버렸을 때 다시 
보라고 하셨다지요?
  그리고 수영이 결혼 때는 축의금을  일체 안 받으시고 돌아오는 길이 그
렇게 홀가분하셨다면서 군인은 물질 앞에서 무릎 꿇으라해도 이겨내야한다
고 하셨다지요?"
  "네! 정말  오빠는 물질 앞에 당당했어요.  6·25후 서울대학교 배속장교 
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한번은 오빠가 출장을 가는 걸  알고 대학총장이 여
비조로 금일봉을 내놓았는데  오빠는 받기를 거부했대요. 부대출장비도  쓰
다 남은 것을  꼭 내놓곤했었지요. 가정 생활이 궁핍해서 친가와  처가에서 
새활비를 갖다 쓸 정도였어도 오빠는 깨끗한 군인의 길을 택하신거죠.
  하지만 당시 부패한 군대에선 청렴하고 강직한 오빠를 좋아하지 않는 장
성들도 있어요. 오빠는 그렇게 곧이 곧대로 순진해서  육사 2기 동기생들보
다 늘 진급도 늦었지요."
  단이고모는 간간히 말을 끊고 나서 "살라드, 이태리안 소스"를 외쳐댔다.
  "고모는 10·26때 서울에 계셨으니 모든 걸 샅샅이 보셨겠네요."
  "네, 거사 전에  큰오빠는 작은오빠를 불러 박대통령을  쏘아야겠다고 털
어놓은 적이 있대요.  작은오빠를 불러 당시 시국과 유신말기 통치에  대하
여 걱정하시면서 박대통령이 계속 권좌에 앉아 있으면 국민의 엄청난 희생
이 따르는데, 그것을 막아닐 길이 없다고 걱정하셨지요. 부마사태가 터지고 
나서 걱정이 된 작은오빠가 찾아갔더니 면회를 거절해서 더 이상 말릴수가 
없었대요.
  '거사 후 채명신 장군을  찾아가라, 그분이 맡아주면 박대통령 산소에 가
서 분향하고 큰오빠는 자살하겠다'고 비밀스런 부탁을 하셨대요. 그런데 유
언에 따라 작은오빠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이었던 채명신 장군에게 그 말씀
을 전했더니 그분은 나설 생각이 없다고 하시더래요."
  "그랬군요."
  "10·26직후 박대통령 장례식날엔 오빠는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을 잃었
어요. 그런데 나중에  깨어나서는 오히려 정신을 잃었던 것이 낫다면서  대
통령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괴로워했었죠. 오빠는 박대통령을  미워한게 아니
었거든요. 그의 방탕과 독재를  싫어했고 국민을 아꼈을 뿐이지요. 그 당시 
박대통령에게 후일 근혜와 지만이가  처참하게 되는 꼴을 어떻게 보시겠느
냐고 몇 번이나 간언하셨었지요."
  "부장님은 그냥  은퇴해서 편히 살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장관에다 중앙정보부장까지 했는데 뭐 더  바랄게 있으셨겠어
요. 편히 사실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시고,  박대통령이 더 이
상 국민의 원망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셨기 에 거사를 치르신 거
라 생각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박대통령을 한국인의 영웅으로  기억하게 
했잖아요."
  "그러나 그로 인한 가족들의 슬픔은 치유되기 어려웠죠.
  오빠가 운명하시기  전날, 작은올케(항규 씨  부인)에게 어머님과 큰올케
(김재규 씨 부인)를 부탁했대요. 어머님께서 소를 끌고 지붕에 올라가자 하
여도 순종하라고, 어머님을 업어드리라고. 그게 유언이 되어버렸어요.
  또 측근들도 너무나 많은 피해를 봤죠. 준상이네도 그렇잖아요. 박대통령 
가족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은 우리를 배은망덕한  원수로 생
각한다지만 우리는 박대통령 유족에 대해, 그분들의 근황에  대해 누구보다
도 걱정하고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지요."
  나는 단이고모의 말을 믿었다. 그분들의 심성을 알기 때문이다. 누구앞에
서 아첨하거나 눈치 살피는 분들이 절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들도 참 힘드셨죠?"
  "말도 마세요. 그때  보안사 측에서 재판을 포기하도록  얼마나 종용했었
는지…. 이유야  불보듯 환하죠. 재판에서 진술하게  되면 자기들 각본대로 
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오빠는 재판정에 들어설 때마다  가족들의 얼굴을 
확인했어요. 재판을 포기하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고 했기 때문에요."
  제법 오랜시간이 지난 일을 듣는 것임에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단이고모
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오빠는 변호사는 필요 없다고 , 혁명에 무슨 변호사냐고 하셨어요. 
그런데 강신옥 변호사를 비롯해 뜻이 있던 분들이 무료로 변호하겠다고 나
섰지요. 오빠  무료변호사 중에 참으로 고마운  분이 많았어요. 태윤기  씨, 
박원호 씨….
  그 중 홍성우  변호사는 애인 만나러 간다고  오빠를 만나러 갔다와서는 
데모하는 학생 같은 순수함을 그냥  간직한 분이 오빠라고 입이 닳게 말했
었지요. 정권의 핵심을  포기하고 한 거사는 진정 훌륭한 것이었다고도  했
고, 안중근 의사가 정권  밖에서 일을 했다면 오빠는 그 중심에서  일한 것
이라고도 했지요. 이런 사람을 보았느냐고요. 그리고 수사관이 변호사 사무
실에 진치고 도청하던 것을 철수시킨 것도 바로 오빠였다는 말을 했었죠.
  반대로 수사관들은 작은오빠와 오빠의  동서인 김복태 씨한테 조사 결과 
큰오빠가 대통령 자리가 탐나서 그런 거였다는 게 밝혀졌으니 순순히 불라
며 으름장을 놓았대요. 하지만 두 분은 넘어가지 않았어요.
  박홍주 씨 부인에게도 남편에게  가서 재판을 포기하도록 권하라고 그랬
어요. 그러면 목숨을 살ㄹ줄 것이라고. 김재규는 누릴 것 다 누렸지만 당신 
남편은 아직도 젊고 앞날이 창창하지 않느냐고요."
  "저도 들었어요. 그 부인이 '남편은  부당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했다면서요."
  "정말 그 부인뿐만이 아니라  그때 희생된 분들의 부인들이 하나같이 참
으로 훌륭했어요. 박선호 씨 부인도 마찬가지로 담대하게 임했었지요." 
  "남편 사후에 그 애통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 부인들은 남편들이 부장
님의 ㄸ을  알고 받들었기 때문에 신념을  갖고 대응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했기에 재판이  가능했던 거고, 역사에 기록될 최후진술이 남을  수 
있었던 거죠.
  여기서도 《신동아》의 육성  테이프를 들었어요. 우리는 재판장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고 담담하게 소신을 밝히는 부장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간 뉴
욕에서의 우리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곳
에서 아무리  어려워도 부장님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되셨다는 굳은 
믿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17년의 세월을 당당하게 이겨내고 있어
요."
  단이고모는 몇 번이나 울음이 나올 듯한 기척을 참는  듯했다. 나는 내가 
들은 것을 얘기했다.
  "고문하던 사람들도 나중엔 '업어드릴까요'라고 했다면서요?"
  "그랬어요. 오빠에겐 살아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까요. 우리도 오빠를 많
이 찾아가지 않았어요.  여러 모로 조심을 했고,  또 오빠 건강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더 누워 있으라고 조심했지요. 수사관들이 우리를  조사하고 나
서는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저 형제들은 바보이거나  엄청 모자라는 사람들
인가 보다'라고  했다지만, 저희들은 물질은 뒷받침할  수 없어도 정신만은 
살아 있어요. 그걸 긍지로 삼았으니까요.
  그 당시 면회나 재판정에 가서  오빠를 뵈면 평소에 없던 표정이 있었어
요. 인간적인 것 말고  수도한 사람들 얼굴에서 풍기는 범할 수  없는 평화
라고 할까 그런 거요. 마지막 면회, 그래요,  마지막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면회를 갔었는데, 이미 돌아가셨죠."
  단이고모는 쓸쓸히 말을 맺었다.
  배를 타고 나가 카지노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브루클린 대서양 바닷가에
서 햄버거를 굽고,  커피를 파는 단이고모의 목소리가 잦아 들면서  수화기 
너머로 겨울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출렁이는 겨울 파도 소리가  내 
귀로 쏟아져 들어와서는 철썩철썩 부서지고 있었다.
  그 날은  모처럼 꽃을 사고 싶었다.  여자가 절대절망일 때 꽃을  산다고 
하던가.
  10·26이 지나고 한 달 후 어느  분이 히아신스를 사왔을 때 그 꽃을 보
며 당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에겐 꽃보다 한  끼분의 빵이 필요
했기 때문이었다.  그 꽃향기는 시드는 날까지  온 방안에 퍼져 계속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옆집 쌤네 가서 흰꽃 한 다발을 샀다. 목걸이  열 개는 팔아야 남는 
돈으로, 나는 그 꽃을 거리에 뿌리고 싶었다. 서울, 1980년  5월 23일 그 서
울을 향하여 마구 던지고 싶었다.
  유배가족
  어둠이 가라앉은 시간, 호텔  밖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모
두 한국 사람들이다. 나는 세계적인 음악가 안트리오의  엄마이자 수필가인 
이영주 씨와 한 방을 썼다. 영주 씨는 우리 미동부  문협 총무이자 서로 아
끼는 문우이다.
  "엘리베이터에도 백화점에도 거리에도 모두 동양인 얼굴들만 있는 게 되
레 생소한 느낌이 들어요."
  내가 영주 씨에게 멋쩍게 얘기하자 영주 씨가 위로하듯 말했다.
  "당연하겠지요. 서울이 17년 만이신데."
  "하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45년, 52년 만에 귀국하는 사람들도 있는
데."
  "그래도 선생님은 달라요. 올 수 없었던 땅 아니예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던 땅, 밖에만 나가면  누구라도 붙잡고 한국말로 
얘기할 수 있고 북어국, 감자탕을 마음대로 골라가며 먹어댈 수 있는 서울. 
다보탑과 세종대왕과  무궁화 그림의  우표가 붙은 편지만  보아도 그립던 
땅. 그러나 내게는 멀고도 멀었던 땅….
  ….
  뉴욕 1996년 1월 22일.
  그날도 나는 남편과 정확히  6시 45분에 새벽기도를 끝내고 성경책을 뒷
좌석에 던져두고  차에 올랐다. 89년형 회색  볼보인 우리 차는 너무  낡아 
가래 끊는 소리르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바라본 그이의  얼굴은 
유난히 피곤하고 수척해 보여  61세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종이호랑이, 어
느새 앞머리가 벗겨진 그이를 바라볼  때마다 떨쳐버릴 수 없는 쓸쓸한 느
낌이 밀려왔다.
  '두드리면 열리리라!'
  그러나 브로드웨이에 불어닥친 불경기는  몇 년째 우리를 이리저리 뒤흔
들며 경제적인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  와중에 '늙음'은 여지없
이 우리를 방문했다.  거기에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며 도대체  모
국어가 아닌 말만 무성한 뉴옥에서  한국말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
려운 일인가를 절감할 때면 시(詩)를 버리든가 과거를 버리지  않으면 미래
는 없다는 생각이  끝없이 떠올랐다.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은 시인의  목소
리가 커지기  때문이라고 목사님은 말씀하셨지만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는 때때로 그 절망의 절정은 자살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크로스카운티 파크웨이에 접어들자  회색과 연갈색이 어우러진 겨울숲이 
나타났다. 겨울을 나기  위해 맨 몸으로 바람을 막아내는 나묻르의  모습이 
그렇게 처절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또 그만큼  진실해서 아름다웠다. 차가 
리버테일에 다다랐을 때 차 안에서 듣는 한국 방송에선 7시 뉴스가 시작되
고 있었다.
  "전두환 씨는 군 형법상  반란수괴 혐의로 공소하며 노태우 피고는 뇌물
수뢰와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입장에서 이번 일을  결정하였으나 자랑스러운 우리 군인들이 존재
한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뉴스를  몇 번이나 의심하며 들었다. 매운 겨울바람이  사정없
이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차는 서서히 맨하튼과 브롱스 사이의  작은다리
를 지나고  있었다. 한국방송은 매해튼에  가까워질수록 더 정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대검수사본부에 
의하면 두 차례에 걸쳐 전두환 씨로부터…"
  22년 군생활에 한 점 오점도  없던 우리에게 오히려 법을 어겼다고 연금
조차 주지  않았던 그들. 우리에겐 갈  수 없었던 조국에서 그들은  총칼을 
들어 불법천지를 만들고 권력을 휘두르며 살았다. 우리는 서빙고의 고문이, 
내 나라의 배신이  두려워 이곳에서 안 해본 일  없이 다 하면서도 조국을 
향한 사랑을 품고  살아왔는데 말이다. 거두어들일 수 없는 과거가  종이시
계가 되어 내 눈앞에 멈췄다.
  차는 허드슨 강을 끼고 파크웨이로 접어들었다. 강물은 고즈넉했다. 17년 
동안 일터와  집을 어가며 바라보던 강이다.  강물을 강물로 볼 수  없었던 
나날들, 저 강이  얼마나 자주 흙더미로 보이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보였던
가.
  "…5·18특별법을 제정한 대겁수사본부는 전두환,  노태우 씨를 정식기소
하면서 전씨의  죄목은 군형법상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 이
탈, 상관 살해, 상관 살해  미수, 초병 살해 등 여섯 가지이며, 노씨의 죄목
도 반란수괴와 반란모의  참여 등 나머지는 전씨와 같습니다. 반란수괴  형
량은 사형이며, 전씨의  경우뇌물수수죄나 내란죄가 추가되지 않더라도  중
형이 불가분하다고 합니다.…"
  세상이 다시 바뀌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당한  17년, 그 어두운 계단에 
이제야 햇볕 한 줄기  새어들어오는 것일까. 우리의 억울함, 영원한 이등병
이 다시 복구될 길은 있는 걸까.
  6번가를 돌면  바로 진남색 바탕에  횐 글씨로 'EDEN JEWELRY'  'LE 
BONG HANDBAG'
이라고 씌인 가게  간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가게문을 열자 단골  손님들이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한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기소되고 한
국의 역사가 바뀌고 있는데도 나는 "Ten달러"를 외치고 있고, 남편은 좁고 
어두운 가게 뒷방에서 부족한  은행 잔고를 메꾸느라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물건을 대주는 회사에 하기싫은 전화를 하고 있다.
  "여보, 세상이 달라지고 있어요."
  나의 이런 들뜬 목소리와는 달리 남편은
  "두고봐야 알지"
  라고할 뿐이다
  "아니요, 두고봐서는  안되지요. 우리도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해야만 해
요."
  어두침침한 가게  뒷방엔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낡은 책꽂이가  있고 
책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탁자위에는 서류더미와 전화,  팩시밀리, 연
필꽂이 등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테이프  하나가 놓여 있다. 12·12사태 
때 수경사와 3군사령부 그리고  육군본부가 서로 통화한 내용이 담긴 테이
프다. 
  지난 10월  어느 저녁, 보안사령부 축신의  교포 백돈현 씨가 숨가  쁘게 
뛰어들어와 우리에게 이 테이프를 전해 주었다.
  "《신동아》에서 테이프가 나왔어요. 들어보세요."
  조금만 참고 가서 들으면 훨씬 깨끗하게 들을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잠
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녹음기가 부착된 라디오를 뒷방으로  들고 가 틀었
다.
  1979년 12·12전야의 울부짖음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옳게  잡아 보려는 
울부짖음이 생생하게 들어  있었다. 남편이 3사단 보안대장  시절, 내 시를 
처음 군인식당에  걸었던 5군단장 이건영 장군의  목소리, 남자 중의  남자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목소리, 또 신문에서 내 시를 보시고  부대마
다 다니며 칭찬하셨던 3군 사령관 김종환 장군의  목소리…. 그 목소리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두환·노태우 병력을 막고 정승화  참모총장을 구하
기 위해 피를 토하면서 전환선에 걸려 있었다.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천근 간은 몸을 끌고  생활(生活)이 아니라 생존
(生存)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에 서서보낸 세월이 너무도  길고 아프
게 느껴졌다. 그 세월,  삶은 진흙밭으로 빠지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정
신 차리는병사에게 승리가  있다는 말을 애써 되새기며  살아왔던 그 세월
…. 12·12때 그 병력을 막을 수만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 소리들과 섞여 어지러이 맴돌았다.
  안개바다에 묻혔던 역사.  그 바다가 벗어놓는 한꺼풀 한꺼풀 마다  숨어 
있던 무늬들이 헐거운 틈새를 비집고 비죽비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날 맨해튼의 햇빛은 눈부셨다. 1979년 4월 22일 아침 9시 TWA항공편
으로 도착한 뉴욕, 착륙  전 상공에서 착륙 전 상공에서 내려다  본 맨해튼
은 그렇게 빛나는  햇빛으로 첫만남을 장식하는 것 같았다. 좌우로  즐비한 
빌딩들은 대개가 100년이  넘은 빌딩들인데다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걸  보
면서 우리 조상들은 100년 전에 뭘했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공항에서 나와 줄지어  가는 차들을 봤을 땐  새삼스런 느낌들이 다가왔
다.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이렇게 활발하게들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있어
야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구나….
  케네디 공항엔  이참사관과 박서기관이 마중나와  있었다. 두 차에  짐을 
싣고 74가에  있는 '에스프라나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우리는 보스턴에서 남매를 낳고  생활하고 있는 김재규 사령관님의 외동딸 
수영에게로 갔다.
  "셔틀이 있어요. 셔틀을 타고 오세요."
  그때 '셔틀'이라는  말은 아주  낯설면서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라과디아 
공항에서 셔틀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에 도착하니 수영은 남편과 함께 세 살
박이 형렴, 그리고 두 살된 원유의 손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가장 아카데믹한 도시  보스턴을 우리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잖이 뿌듯한 일이었다. 하버드 대학을 지날 땐  아이들이 미래에 이 
대학에 다니는 걸  상상하면서 특별히 더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남편
도 아이들도 뚫어지게 바라봤다. 꽃 속에 파묻힌 웰스리  여대는 꿈속의 풍
경 같았고, 5월을 한 주 앞 둔 봄은 한껏 화창하게 웃고 있었다.
  수영이 준비한 조촐하고 맛갈스러운  저녁상엔 며칠이 지나 시어터진 깻
잎김치도 같이 올랐다.  김재규 사령관님의 측근 제1호였던 우리의  황홀한 
보스턴 나들이는 그 깻잎김치 한병이 전부였다.
  응접실에는 딸에게 보낸 김재규 사령관님의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짧고 
간략한 편지였다. 내겐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그 '아버지의  편지' 몇 구절
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목적 있는 하루를 보내기 바란다. 오늘 하루는 결코 되돌아오지 않기 때
문이다 하루를 허비하면 일생을 허비하는결과가 오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
보다 언제나 약한 자  편에 서기를 바란다. 모든 일에 명분을  갖고 일하기
를 바란다. 뜻있고 성실하게  사는 자를 신은 언제나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
  뉴욕에 척발을 딛고  호텔방에서 내려다 본 허드슨  강은 더없이 푸르고 
잔잔했다. 일단 그곳에 여장을 풀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다. 
  "너희들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 남들은 유학도 오는데. 그
리고 검은  사람들보다도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더 무섭대니까 조심해야 
한다."
  수필가 이계향 선생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직 까까
머리 두 아이를 금세 알아보고 반가워하시며 어런지런 말씀들을 해주셨다.
  큰동서 동생 내외분도 초콜릿을 사가지고 오셨다.
  "모두 여기  발령받고 왔다가 눌러 사는데  준상이네도 그런 생각해보세
요."
  그 말에 나는 펄쩍 뛰며 말했었다.
  "아니에요. 우리는 절대 그렇게  안해요 2,3년 뒤에 임기 마치면 꼭 돌아
갈 거예요, 돌아가고말고요."
  무엇엔가 다짐하듯 했던 말….  그랬다. 그건 떠나오기 전 보문동 사모님
과의 약속이자 나와의 약속이기도 했던 것이다.
  첫여름을 맞으면서 남편은 은행빚을 얻어  회색 올스모빌 차 한 대를 사
서 출퇴근을 했고, 아이들과 나는 그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시의 곳곳
을돌아 다녔다. 또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에  아파트 창을 내
다보며 그애들을 기다리는 영일(寧日)을 즐겼다. 성루에서 친구들이 찾아오
기도 했다. 전규태, 박현령, 이정기 씨가 와서 같이  에드거 앨런 포의 집이
며 워싱턴 어빙의 집 등을 가보고 어쩌면 그렇게 작가들의 집을 잘 보존해 
놓았을까 싶어감동 받기도 했다.
  9월 들어서는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땄고,  뉴욕에 살고 있던  건상이의 
초등하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네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에도 갔다. 처음 
보는 아이아가라는 놀라웠다. 나중엔 김남조 선생님을 통해  그 물방울들이 
수만 평의 잔디를 키운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인상 깊어진 곳이었다.
  10월 3일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개천절 기념 리셉션이 있어 백낙
서 공보관과  같이 갔다. 나는 자주색  치마에 자주색 끝동과 고름이  있는 
횐저고리 나일론 갑사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갔다. 내가  미국 온다고 작은
언니가 마련해 준 비싸진 않지만 아름다운 한복이었다.
  행사장엔 유엔한국대표부 윤석헌 대사 부인을 비롯해 이계철  송사 부인, 
이시영 참사관 부인등이 있었는데 모두 유창한 영어로 귀빈들과 대화를 나
눴다. 나만 벙어리였다. 얼굴이 화끈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이의 권유에 따라 바로  UN에서 외교관 부인들만을 위해 마련
한 영어학교에 등록했다.  다른 부인들은 계속 외국으로 다녔기 때문에  영
어를 능숙하게 하는데 나만  못해 부끄럽기도 했다. 시험을 본 뒤  네 개의 
등급 중  겨우 초급을 면하고 중급반에  들어갔다. 거기 입학하고 얼마  안 
되서 견학을 갔을 때 나는 몇 시에 끝난다는 그 한마디만 알아들었을뿐 다
른 말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완전히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그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나이지리아  대사 부인이 내겐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이 유난히 고왔던 그 가을, 유엔한국대표부  가족
동반 피크닉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대사가 된 동료 참사관들과  아이들은 
즐거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고,  그때 한창 유행했던 무비카메라를  돌리며 
모두들 가을을 한껏 만끽했었다.
  "우리가 모두 골프스윙 폼을  잡았는대 윤대사님 말씀이 내 폼이 제일이
래."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이는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그러자 큰애는  덩달
아 신이 나서 말했다.
  "그 직원들은 모두 외국으로 다니며 그래도 골프를 많이 쳤을 텐데 아버
지는 참 운동에 소질이 있어요."
  큰애는 자기가 학교에서  축구선수인데다가 원반던지기도 제일 잘했었다
는 것을 은근히 뿌듯해하는  말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프 한번  칠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을 전혀 모르던 그때 그이와  아이들 그리고 나는 마냥 
그렇게 즐거움에 취해 있었다.
  "학교에서 어떤 사람이 가자고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그럴 땐 경
찰을 불러!"
  10·26 직후 벨소리만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때, 우리 가족을 FBI가 
보호해 주겠다고까지 한 그때, 우리는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거듭 당부하면
서도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할로윈  풍속
이 있는 10월말, 벨은 어찌 그리 많이도 울어대던지….
  그랬다. 그때, 우무것  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때, 우리  가족은 저녁마
다 모여 앉아 성경을 돌려  읽으며 그잡혈갈 것 같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나려 애쓰며 지냈따.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
이 없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김재규 사령관님에 대한  글이며 사진 등
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도청될까봐 전화도 공중전화를 이용했었다.
  증거를 없애려고 비겁하게 모두  버린 것은 서울이나 뉴욕이나 마찬가지
였다. 김재규 사령관님의 일기장, 전화  메모 등은 10·26 직후 겁이 난 가
족들에 의해 모두 소각되었다. 그 일기가 남아 있었으면  한국 현대사를 파
헤치고 10·26의 선명한 목적을 아는 데 큰 자료가 되었을 텐데 참으로 애
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오른팔이  정기네 식구를  감쌍나아 주시어서 타국땅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10·26 이후 임성숙 선생님은 매일이다시피 이런 기도 편지를 보내 주시
고 또 '나중에 부자되면 갚으라'며  적지 않은 돈을 보태 주시는가 하면 우
리 가족을 위해 늘 아낌없는  기도를 해 주었다. 이듬해 봄,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셨을 땐  마중낙나 우리를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장 궁금해할 광주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광주는 흑막에 가리워져 있어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입과 귀를 막고 
있어도 우리는 그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걸요. 말도 못합니다. 몇 백 명이 
죽었다는 말도 있고 몇 천 명이라는 말도 있어요. 단  한 명이 죽었대도 큰
일인 거죠,  생명은 귀한 건데….  여하튼 정기는 여기서  살아남아야만 해
요."
  그 말씀을 듣고서 남편은 힘없이 말했다.
  "벌써 군정권에  붙은 군인들도 눈에  많이 보여요. 옛날 보안사에  있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랬다. 1980년 뉴욕의 봄도 우울하고 답답했다.
  미국 언론에서는  날마다 광주사태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TV뉴스에선 
젊은이들을 굴비두름  같이 엮어 태우는  장면이며,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을 난사하는  장면들이 시간마다 방영되었다. 《뉴욕포스트》1면엔  필흘
리며 죽은 시민을 군화발로 밟고 있는 군인을 찍은 광주의 사진이 전면 칼
라로 실렸다. 뉴욕판 한국신문엔 그래도 한국보다는 상세한  기사가 실렸는
데, 광주의 많은 여자들이 돌을 나르며 데모대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도 씌
어 있었고 '전두환 찢어 죽여라!'라는 플래카드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의 호구지책이었던 바느질감을 들고 버스를 타고 가며 읽
었던 이런 기사들은  내 가슴으 ㄹ갈기갈기 찢어놓았고,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분통이 터져 울음을 터뜨리곤 했었다.
  뒤엉킨 역사에 얽혀 생계마저  막막해진 우리 가정이 걱정되었는지 한번
은 작은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나 아버지는 몸도 약하고 지금  여기선 노동도 할 수 없지? 공산주
의자가 되면 우리 잘살 수 있어?"
  "아니야, 아버지는 일생 동안 공산주의자 잡는 일을 했어. 우리나라를 배
반하는 일을 하면 안돼."
  내가 작은애를 바로보며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큰애 준상이 말했다.
  "우리 사회선생님이 박대통령은  독재자라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  또 독
재자가 있대요."
  학교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되지 
않는 그애는 그러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정부는 미워도 우리나라는 사랑해야 하지요?"
  나는 가슴이 떨렸다.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우리  가족은 끝내 망명이 아닌 사면으로 미국
땅에 살게 되었다. 남편은 변호사 앞에서 '노동허가'만 원했다. 큰애는 가끔 
아무개네는 정보부에 있다가  망명해서 편히 산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망
명이라는 말,  아무리 발음해도 익슥해지지 않는  그 일을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의 본격적인 이민 생활은 꿈이 머물던 리버데일 아파트에 재
봉틀을 갖다놓고 삯바느질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  2개월 정도 삯바
느질로 연명하는 동안 나의 눈물샘은 내내 젖어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갑
자기 이렇게  됐나 싶고, 우리가  조국으로부터 버림받다니 하는  서러움에 
시달렸다.
  그 해 겨울, 끝없이  추락하던 우리 가족은 은행에서 만 불을  빌려 커피
숍을 차렸다. 그거 우리에개 생소한 일이었지만 1년도  안되어 10만불에 팔
라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제법 성공적인 사업이었다. 주인이  세 번이나 바
뀌어도 안 되어  문닫은 가게를 운영해 그만큼이나마  이룬 것은 우리에겐 
기적이었다. 그이와 나,  큰아이, 심지어 건상이까지 우리는  쉴틈없이 뛰었
다. 체인점이기 때문에 일요일도 없이 새벽에 나가 밤이  늦도록 일하고 들
어와 피곤에 지쳐  쓰러지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지친 심신으로 나는  심방
을 오신 목사님에게 하소연하듯 말하곤 했다.
  "뼈아픈 고생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뼈가 아파요."
  대한민국 현역 군인이자 외교관 신분이었던 그이와 대한민국 여류시인인 
내가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는 호칭은 오래도록 낯
설기만 했다. 막 장사를 시작할 즈음 내가 뭘 잘못  했는지 어떤 사람이 시
장 아줌마 대하듯  나를 막 야단친 일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남편을 '박형'
이라 부르느 이가 없었고 나 역시도 문우들이나 친구들끼리는 이름을 불렀
고 또 누구 엄마면 누구 엄마였지 '아줌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아줌마', 마냥 낯설기만 하던 그 호칭은 울컥울컥  서러움을 자아내기에 모
자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점차 나는 겸손을 배워갔다.
  뉴옥에서의 생활은 곤란의 연속이었다. 그 커피숍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도둑이 들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꼬박 선 채로 지키던  가게 
유리창을 깨도 도둑이  다녀간 날 밤, 도둑이 흘리고 간  1페니를 주우면서 
나는 한발 한발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
다.
  여기는 유배지
  수난의 땅
  흑인의 손을 잡고
  스패니쉬의 등을 두드리며
  목에 풀칠하다
  모든 상처는
  시간이 아물려 준다는
  통곡의 땅
  창조의 자궁
  패배자의 무덤
  그리고 이 종말의 거리에서
  아이들은 청년으로 변해가다
  투인도넛 카운터에
  서서 기도 드리다
  이 기도를
  주님이 찾아와 들어주시다
  1981년 ○월 ○일
  조병화, 김후란, 김혜숙, 성춘복, 박정희, 강계순 제씨들. 한국의 시인들이 
펜대회를 마치고  이곳에 들렀다. 그들은  링컨센터나 박물관 등을  나누어 
구경한다고 했다.
  만남은 나에게  반가움의 크기만큼 아픔을  남긴다. 빵장사로 변한  나와 
변하지 않은 그들이 만난다. 쫓기듯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 부
럽다. 발바닥에서 불이 나야  하루를 살 수 있는 나와 그이를  그들은 이해
하지 못하리라. 조국에게 얼마나 항의해야 우리의 멍든 가슴이  풀릴 수 있
을 것인가.
  1981년 ○월 ○일
  허양자, 유안진이 우리집에 오다.  유안진이 우리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
도해 주다. 브로드웨이 91가, 이 땅에 버려진 우리 가족이지만 이곳에 성을 
쌓고 주님을 섬기며 시를 쓰고 돈을 번다. 백이숙제 같이 살자.
  1981년 2월 31일
  뉴욕이 온통 오염된 것 같다.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이  뉴욕의 공기를 흐
려서 나는 숨을 들이마실 수가 없다. 울부짖고 싶다. 세상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시카고에 있는 수영에게 전화하며 한탄했다.
  여전히 나는 조지와 앤디랑 싸우면서 이 전쟁터 같은  가게를 지킨다. 앤
디 대신에 후랭크가 쿡으로 오기로 했따. 우리집 못쟁이  그리스 사람 제방
사 짐이 소개했다.
  준상이 밤마다 일을 한다. 나의 금쪽 같은 아들  준상에게 하나님의 축복
이 있기를 기도 했다. 
  1981년 ○월 ○일
  우리 손님이 다른 집에서 커피를 사가는 모습이 보인다. 마음 이 아프다. 
우리 커피가 가장 신선하고 맛있는데….
  어둡고 긴  하루 하루에 햇볕이  유리문을 통해 들어온다.  셰익스피어는 
어느 소설에서 형틀에 매여 있어도  햇볕이 있는 한 행복하다고 했는데 참
으로 햇볕은 마흔이 넘은 나에게 새 기쁨을 준다. 
  준상과 건상의 사춘기가 어렵다.  오늘 밤도 준상이 늦는다. 학교를 파하
고 가게에 가서 일하고 놀러나간 준상을 기다린다.
  1982년 1월 5일
  바람 속 브로드웨이의 새벽은 어두움의 두꺼운 벽  같다. 7시가 ㄴ머어야 
서서히 회색의 거리에  휴지들이 흩날린다. 우리집 단골들은 6시가  넘으면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집트 사람 도어맨은 인삼차를 즐기고 희고 진한 꿀을  좋아한다. 또 다
른 필리핀인 도어맨은 블랙  커피만 마신다. 이혼한 지 한달밖에 안  된 프
랑스계 언론인은 세  자녀의 아버지로 스크램블 에그를  눈 깜박할 사이에 
먹어치운다. 레귤러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두 시간쯤  앉아서 갖은 수다를 
다 늘어놓는 뚱뚱보  택시 운전사는 그 발음으로  보아 남미인임에 틀림없
다. 키가 크고 마른  노인 필립은 영국 계통의 신사다움 몸짓으로  와서 보
일드 에그(계란  반숙)를 찾는다. 세네갈에서  운동선수였다는 빌리는 검은 
얼굴을 쳐들고  햄샌드위치를 먹는다. 40년  이상 이 브로드웨이  80가에서 
90가를 지킨 찰스 할아버지는 오토밀을 주문하고 앉는다.  홀휫토스트를 먹
고 언제나 책을 읽는 코주부 안경잡이는 올드횃션 도넛에 우유 한 잔을 청
한다. 언제나  안짱다리로 걸어와 카운터  앞에 서서 브랙퍼스트  스페셜을 
시켜가는 건너집  세탁소의 이태리계 중늙은이 제프가  오면 어김없이 8시
다. 인도에서 온 간호원 언니가 오지 않는 아침이면  손님들은 대강 이렇게 
잡동사니 남자들뿐이다.
  오늘은 갑자기 이 투인도넛숍이 낯설어진다. 일하는 후랭크며  알마가 미
워진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바이올린 소리 같기도 한 바람 소리가  들창을 흔
든다.
  브로드웨이 90가에서 투인도넛숍을 할 때의 일기들을 펼쳐보면,  나의 허
욕이 무너진 뉴욕 땅에서 사람들 틈에 뿌리를 내리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곳곳에 얼룩져 있다. 하루종일 먹는 입만 보며 사는  생활이 생소하고 서러
웠던 때, 그이와 나의 하루 해는 40센트 짜리 커피에 익사하곤 했다.
  서러움은 도처에서 나를 공격했다. 우리가 모셨던 윤석헌  대사 이취임식
이 실린 신문을 읽고서 도넛숍에서  감자를 깎는 그이의 모습을 보는 일은 
고통이었다. 뉴욕에 모인  그이의 용산고 동창회에서도 마찬가지였따. 식료
품점 일을 하다가, 옷을  팔다가, 세탁소에서 일하다가 달려온 선후배들 사
이에서 초라한 남편을 보는 일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었다.  나는 심지어 저 
사람이 나를 만나서 일생을 날개 펴지 못하고 그르치며  사는 것이 아닌가, 
이게 남편을 출세  시키지 못한 여자의 아픔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빠지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투인도넛숍은 참으로 많은 식구들의 작은 터가 되
었고, 나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래서 가게를 정리할 때는 지구촌 각 
곳에서 모여든 천 명이나 되는  나의 식구들을 버리는 듯한 죄책감과 허전
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경제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은 내가 
껴안아야 될 식구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투인도넛숍이  있던 그 고풍스러운 거리며 냉장고 소리,  팝
송 등이 그리울 때가 있다.
  1993년 ○월 ○일
  가을이라든가 낙엽이라는 단어가  사치스럽게 들린다. 조국도 친구도  고
향도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것은 신경통과 가난뿐이다.
  투인도넛숍을 팔고  시작한 조사장과의 Healthin(사카린으로  만든 설탕) 
사업은 힘만 들고 돈만 잃었다. 속은 것 같다. 조사장의 좋은 집과 큰 공장
에 유혹되어 우리는 주일을 잘 지키지도 못하면서 번 돈을 모두 거기에 넣
었다.
  준상은 다시  우례옥에서 일하고 건상도  주말에 옷가게에서 일한다.  두 
아들의 얼굴 보기가 부끄럽기만 하다. 그들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랬다. 우리는 3년  정도 했던 그 커피숍을 정리하고 남은  돈을 조호철
이라는 사람에게 몽땅 사기를 당했다. 나는 아이들 눈을  바로 보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웠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꽃가게와 도매상에서  일했다. 6시가 지나면  쓰러질 
듯 피곤한 몸을 기대며 견뎌야만 하는 날들이었다. 꽃가게  일을 마치고 나
서면 저녁 7시가 채 못된 시간. 맨해튼 3번가  42스트리트에서 하늘을 바라
보면 저녁비치 속에 먹구름이  모였다. 흩어지곤 했다. 강의 동편으로 물결
치며 넘어가는 우레 같은 바람 소리가 우레 같이 들릴 때면 우린 언제까지 
방황해야 하는 걸까 싶었고 나무등걸 같은 그이의 모습에 눈시울이 젖어들
었다.
  꽃가게를 할까해서  배우기도 했는데, 한번은  한 꽃가게에 가서  흥정할 
때였다. 그곳 주인이 남편에게 불쑥 물었다.
  "이 꽃 알아요?"
  그이는 그 흔하디 흔한  카네이션도 몰랐따. 그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평
생 군대생활만 한 사람인지라 꽃이름을 알 리 없었다.
  글도 쓰지 못했다.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문학은커녕 아예 쓰지
도 못하는 문학을 하며 지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었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자에게 있어 최후의 존재 표현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
았다. 어중간하게 살  수 없는 사람, 심각하고  철저했던 40대 중반의 나는 
죽음이 마지막 결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이와 아이들
의 눈을 바라보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유배지에  내리는 비는 눈물보다 
뜨거웠다.
  해가 뜨면 다시  몸을 일으키는 날들은 계속되었다. 그이와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델리숍,  세탁소, 제과점, 옷가게, 보석상…. 어디를 다녀
봐도 그이를 세워둘 만한 곳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막막함만이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뛰어든 곳이 'ABC 카스텀 주얼리 도매상'이었다. 그 가게를 하
는 내내 우리는  곧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듯이 그러나 몸부림치며 일했다. 허나 주얼리라는 것이  도무지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품목일뿐더러 이건  완전히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방불케 하
는 것이어서 적응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10전도  남에
게 꿔보지 못했던  나는 물건값이 밀리면 속수무책이었다. 구름 흐르는  하
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모세의 지팡이를 주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어두운 계단을 오르내리는 날들, 시간
들을 살았다. 철저하게 외로웠고 아팠다.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우리는 장신구 가게의 어두운 뒷방에서 한 잠씩 낮
잠들을 잤다. 예전  투인도넛숍을 하던 그때 어둡고 추운 다락방에서  잠들 
듯이.
  그때나 지금이나 뉴욕을 달리는 지하철 소리는 여전하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가게는 닻을 풀고 떠가는  바다 위의 배라는 느낌도  같다. 
영원한 외계, 눈만 뜨면 만나야 하는 각 나라 사람들, 그 인종의 숲에 떠있
는 배.                      
  거기서 우리를 견디게  해준 힘은 따뜻한 이웃의 눈빛이었다. 그곳에  그
리스도가 계셨고, 그리스도를 닮은 이송봉 장로님이 우리를  감싸안고 있었
다.   
  유배 가족 
  우리는 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부서지고 있었다. 
  우리는 넘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는 껴안고 있었다. 
  우리에게서 
  조국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서고 있었다. 
  날아가고 있었다. 조국 산천을 향해. 
  우리는 뉴욕 북부 웨스트체스터 
  남빛 하늘에 
  네 마리 새로 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승부에는 졌어도 
  하늘을 나는 새가 되었다. 
  그대는 망명 군인 
  나는 망명 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군인 
  애국 시인 
  애국 가족으로 날아가고 있다.
  뉴욕 일기
  -아란(김지원)과의 통화
   뉴욕, 나는 매일  아란(소설가 김지원)과 통화했다. 날마다 전화를  걸어
서 나의 일상을 얘기하고, 자잘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곤 했다.
  그녀와 통화를 하고  나면 나는 언제나 편안해졌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들어줄 것 같은 그녀에겐 그 무슨 비밀이라도 다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아란은 단지 "네,  그래요."라는 대답을 무리없이 할 뿐인데도 
말이다. 통화를 하고 나면  이튿날 어김없이 팩스로 보내왔다. 아마도 그녀
느 그 말들 속에서  소설적인 어떤 재료를 꺼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뉴
욕 일기는 그녀가 그렇게 보내온 팩스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이다.
  나는 그녀가 또 뉴욕을  떠나서 몇 달씩 서울에 있을 것을  안다. 여기서
도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뉴욕을 떠나 있는 것은 두렵고 섭섭했
다. 나는 그녀가 되도록 아들 둘이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좀더 뭉개며 
글을 쓰고 있었으면 싶다. 가끔 전화라도 하는 것이 어딘데….
  1
  가게에서 만난 사람들
  1996년 10월 20일
  도넛숍을 어떻게 했냐  하면, 우리 큰아이가 그때 케네디 고등학교를  다
녔을 땐데, 아이  말이 학교 앞에 '투인도넛'이 있는데 거길  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대요. 아보지가 직자을  잃게 되니까 큰아이가 걱정이  되었는지 
와보라고 해서 한 번 갔었어.
  '투인도넛'은 체인점인데 본사는  용커스 어디에 있대요. 거기를  애들 아
버지가 찾아갔어. 사장은  마흔 살쯤 된 그리스 계통의 사람인데  상담하다 
브로드웨이에 누가 하다가 문닫은 가게가 있다고 하더래.  이왕이면 맨해튼
에서 하자고 브로드웨이 상점으로 정했어. 돈이 없으니까  은행에서 빌리구 
저이 동창이랑 반씩 대서 했어. 우린 돈이 하나도 없이 산 거지.
  그리스 사람들이 쿡, 식당업 그런 거 많이 해요.  중국 사람들 같이. 그런
데 거기가 그런 전문가들이 세  번이나 하다 망한 가게래요, 글세. 우린 그
걸 모르고 들어간 거야. 그러니 잘될 리가 없지.
  브로드웨이하고 91가 사이  코너집이었어. 동네는 백인도 있고  스패니쉬
도 있고 아주  험한 데는 아니었어. 거기서부터  위로는 험한 데야. 그래두 
손님 중엔 NBC TV에 나오는 아나운서도 있었구. 간신히 TV에서 보는 얼
굴들이 커피 사러 오구 그랬어.
  가게 열고 처음에는  힘들었어. 새벽 6시에 문을 여는데 5시까지는  가야 
돼. 준비해야 되니까. 그러구서 밤  11시, 12시까지 계속 열었어. 그렇게 일
주일 내내 하는 거였어. 처음에는 계속 안되구 그랬었지.
  우리는 커피를 그  자리에서 금방 갈아서 끓였어. 그래서 커피가  신선하
고 맛있었어. 빵도 그날  팔던 거는 매일 밤 다른 사람들을  주든지 버리든
지 그랬어. 커피는 진하게 끓이지 않고 엷게, 큰 포토에 다 끓이지 않고 작
은 가정용 포트를 써서.  다른 데 커피는 쓴데 여기는 향기롭다고  그런 말
을 많이 들었지. 작은 커피포트  세 개를 놓고서 끓였어요. 퍼키 마시는 사
람들이 라이트, 다크,  블랙 또 설탕을 넣는냐 마느냐, 얼마나  넣는냐 여러 
가진데 맨날 해보니까 손님이  오면 벌써 알아. 아니까 쉽더라구. 처음에는 
그 말 자체를 못 알아 듣겠더니. 
  블랙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대게 백인들. 정신 노동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보통 설탕을  안 넣어요. 라이트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설탕을 
많이 넣어요. 여자들이 라이트  커피를 자주 마시구 그러더라구. 커피에 우
유를 많이 타는 거지. 어떤  남자는 위가 나쁜지 라이트 커피만 마셨어. 저
기서 그가 오면  우리가 벌써 그걸 만들었어. 흑인이나 스패니쉬들은  설탕
을 술술술 따라 부어. 한두  스푼이 아니라 그냥 부어요. 다크 커피 마시는 
사람들은 조금 까다로워요. 손님 중에서도 음식을 까다롭게  먹는 사람들이
야. 
  음식은 쿡이  하잖아. 아침에 브랙퍼스트 스페셜이  있어. 그건 감자하구 
계란하구 소시지, 베이컨 그런 거 넣어주는 건데,  값이 1불 25전이야. 가격
은 별로 안 올랐더라구.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거 하려면 굉장히 바뻐.  너무너무 바뻐서 쿡이 안 오면 골탕  먹는 거
야. 특별 음식은 미리 조금  해놔야 되거든. 스파게티, 미트볼, 후라이드 치
킨, 그런 걸 해놔야  점심에 파는데 평균 손님이 천명쯤 와야  그게 유지가 
돼요. 그러니 그게 얼마나 바쁘겠어, 천 명을 먹이려니.  평균 한 사람 먹는
게 1불이야. 커피하구  도넛 먹으면 75전. 커피가  40전이고 도넛이 35전이
야.
  우리는 쿡이 음식하는 것을 도와  줬지. 감자 같은 건 저녁에 깎아. 쿡이 
그걸 아침에 썰어서 요리하거든. 물에 삶아서 껍질을 벗기는데  쿡이 할 새
가 없으니까 우리더러 하라고 하교 가요. 감자를 저이두  깎구 나두깎구 하
는 거야.
  그런데 한번은 홍윤숙 선생님이 거길 오셨더라구. 한국에서는  남자가 감
자 깎는건 창피한 일 아냐?  홍윤숙 선생님이 그 얘길 누구한테 하니까 여
기서는 그런 게 흉이 아니라구 하더래요.
  처음엔 조그만 애들까지도 저이더러  미스터 박이라고 그러는데 한참 동
안 익숙하지 않고 나쁘더라구.
  첫번째 쿡으로 취직한 애는 쿠바 사람인데 그 동네  살았어. 한국 전쟁에
도 갔었대나봐. 그런데 성격이 굉장히 난폭했어. 니를  조금 다쳤다나. 상이
군인이야. 정부에서 보조금도  받구 그러는데 어머니더 있구 딸 둘에  와이
프도 있어. 그 와이프도 와서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그  이모의 딸 이반이라
는 애도 일했어. 이반은 이쁘게 생겼어.
  그런데 이 사람들이  툭하면 안 나와요. 그러면 우리가 너무너무  당황을 
하는 거야. 이게  조금씩 잘되니까 배짱을 부린다고 사람들이 그랬는데  나
중에 알고보니까 마약을  한 대요. 집단으로 다.  그러니 애들이 뭐가 되겠
어. 그래서 그  가족 때문에 우리가 굉장히 골탕을  많이 먹었어. 1년 동안 
드나들면서 그 사람들이 그랬어.
  그리고 또 하나 웨이트리스 맥달리아라고 스패니쉬 애가 있어.  그 앤 아
홉 살때부터 담배를 피웠대. 그걸 굉장히 자랑했는데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보더라구.  열일곱 
살쯤 됐어. 애인이  군인이었는데 그 사람이 휴가를 나오니까 얘가  반가워
하다가 다시 군으로  돌아가니까 다른 애를 사귀더라구. 걔는 서방이  열둘
도 더 됐어. 그래도 일은 잘했어.
  그러다 쿠바인 쿡을 바꿨어.  새로 온 이는 그리스 사람이었어. 후랭크라
는 백인. 그 사람은 아주 성실했어. 와이프도 이쁘더라구.
  그 사람을 소개한 사람은 짐이라는 제빵사인데 그 사람도 그리스 사람이
야. 참 잘생겼어. 그 사람이  까만 안경을 쓰고 우리 가게에 나타나면 사람
들이 그가 주인인줄 알곤 했어. 그 사람은 밤 1시에  와서 새벽 5시까지 빵
을 만들어요. 빈 가게에서 혼자 일하다가 우리가 오면 가. 
  한번은 그 사람이 우리가  음악 좋아하구 그러니까 나나무스쿠리라는 그
리스 가수 있지? 박인희가 좋아하던 가수.
  그 가수가 링컨 센터에 와서 공연 할 때 네 장을 사서 자기 부인하고 우
리 부부하고 같이 구경했어. 
  그 부인하고는  재혼이었나봐. 결국은 그  부인하고 의가 나빠져  이혼을 
하게 됐는데, 그 부인이  그 동안에 그 사람이 우리 가게에서  훔쳐온 것을 
우리한테 다 이르는 거야. 햄, 계란, 소시지 그런 거를 훔쳤대. 우린 미안해 
할까봐 짐한테 말 안했는데 부인이 싸우면서 우리한테 다 일렀다고 그랬나 
봐. 짐이 미안해서 안 나왔어.
  후랭크는 우리가 가게를 판  뒤에 단이고모가 경여하는 커피숍에 소개했
는데 브루킬린의 바닷가에 있는 가게야. 얼마 전에 가보니까  글세 그 사람
이 아직도 거기서  일하고 있더라고. 지금은 늙었어. 할아버지야.  후랭크는 
화도 잘 내고  그랬어. 쿡들이 화를 잘내고  그러더라구. 그래도 그 사람은 
우리와 맺은 그때 그 인연으로 한국 사람들이 제법 좋았나 봐.
  1996년 10월 21일
  제빵사가 그렇게 나가구  쿡 후랭크는 그냥 우리랑 같이 지냈어.  거기에 
또 윌리라는 훅인애가 있었어. 그리구 린다. 말타라고 하는 두 자매도 있었
지. 
  우리 작은아들이 그때 중학생이라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오후 3시가 되
면 집에 들어왔어. 그래서 오후는 걔들한테 맡겼는데 린다  가 손버릇이 나
빴어. 말타는 깨끗했지. 저녁에 일하는 쿡 윌리까지 걔들 셋 다 흑인애들이
야. 위험하니까 백인애들은 저녁엔 일을 안했어.
  윌리라는 쿡은 잘생기고  진실하고 착했어. 와이프도 있구 애들도 두  형
제나 두었어. 윌리는 손님들 앞에서 애들 자랑도 많이 하구 그랬어. 그러데 
가끔 못 와. 왜 못 오느냐 하면 약을 한대요. 글세 그걸 고쳐주려구 우리가 
무진 애를 썼는데두 안 되더라구. 그래도 윌리는 너무  진실하고 좋아서 우
리가 지금도 못 잊어.
  그렇게 팀을 짜서  제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아침에 일하는 
마리아라는 백인애를 저녁에 썼어. 매니저 비슷하지. 그래서 마리아가 비즈
니스  끝날 때까지 잘했지.
  여태까지는 일하는 애들 얘기였구.  그보다는 비즈니스 가 잘 안됐어. 겉
으로 보기에는 아주 잘  되는 것 같았지. 그런데두 너무 단가가  낮아서 잘 
안 되더라구.
  그때 마침 게임하는 머신, 비디오 게임이 처음 나와서  우리가 그걸 놨어
요. 우리 큰아이가 어딜 가보니 그게 잘되는 것 같다고  해서 두 대를 놨는
데 너무너무 잘되는 거야. 거기서 돈이 막 쏟아지더라구. 머신 주인이 쌤이
라는 사람이었는데 너무 잘되니까  더 놓으라구 해서 두 대를 더  놨어. 그
래서 네 대가 됐어. 거기서 정말  한 주에 천 불 씩 나오더라구. 우리가 나
눠 가질  수 있는게 말이지. 그걸로  생활을 하고 커피숍은 그냥  운영하는 
것밖에 안되더라구.
  그걸 하는 동안에 아이들이  컸어. 큰아들은 인정스럽게 살면서 크구. 작
은 아들은 공부 잘하면서 컸구. 저이두 나두 아주  절망적인 데서도 희망이 
보인다구 그럴 때가 있었지. 
  어느 날 비가 많이 오는 저녁이었어. 쿡이 안 와서  나만 집에 왔다가 비
가 너무 많이 오길래  밤 10시쯤 작은아들 손을 잡고 가게로  갔었어. 유리
창으로 보니까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쿡이 안 왔기 때문에 남편이 진남
색 스웨터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 채 그릴을 하고 있었어. 그걸  보고 있자
니 내  억장이 무너지더라구. 저이가 저런  일을 하는데 나는 무슨  일인들 
못하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의 멀처럼 가장 불운하고 가장  가엾
은 군인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 그때가 가을이었어.
  그때는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이기고 나갈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 있긴 
있었지만 사실 아주 막막할 때였어. 웨이트리스를 새로  뽑으면 울고나가곤 
했는데 울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다 그러구 싶을 때가 많았지.  80년 《현
대문학》5월호에 실렸던 시 〈뜨거운  비〉는 뭐냐 하면 바로 내가 91가에 
서서 뜨거운 비를  맞고 있는 거야. 그런  와중에 여러 사람들이 다녀갔어. 
조병화, 김후란, 김혜숙, 성춘복, 박정희, 강계순,  마종기…. 가게에 오신 건 
반갑지만 부끄럽고 그랬어. 내가 잘하지를 못해 가지구  깨끗하지도 못하구 
그래서 챙피해. 그리구  여기 사는 시인 박영숙 씨가 오셨어.  그이는 '이건 
완전히 소설이다' 그랬어. 우리가 잘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일
을 한다고 해서 그러는 거야. 그 즈음에는 김송희가  새벽에 전화해 가지구 
조연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어느 날은 작은 아들이  한국 친구를 둘 데리고 왔어. 열세 살 그런  나인
데 한 아이는 집에서 야채가게를 하고 또 한 아이는 엄마가 봉제공장엘 다
닌대요. 그 소리를 들으니까 참 이상한 연민의 정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어. 
그 아이들에 대해서두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두 그래. 여기  와서 
다 그렇잖아. 그런 중에 아이들이 자란다는 게 가슴이  아파서 후랭크가 해
온 음식을 실컷 먹으라고 막 퍼다 줬어.
  우리가 커피숍을 할 때 우리 사는 아파트 앞집에 후리지아라는 할머니가 
할아버지하고 단 둘이  살고 있었어. 그 할머니하고 할아버지는 항상  붙어
다니셨지. 복도에서 봐도 그렇구, 빨래하는  데서두 그렇구, 엘리베이터에서
도 그렇구.
  그러던 어느 날  그 할아버지가 입원하셨다구 그래. 골프를 치다가  갑자
기 쓰러지셨대요. 그때  나는 이웃으로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너무  놀래가
지구 맨발로 뛰어나가 좀  어떠냐구 그랬어. 그런데 어쩌면 그렇지? 그  할
머니는 모자 쓰고  목걸이 하고 신발까지도 예쁘게  매치시켜 신고 병원엘 
가더라구. 할아버지는 곧 돌아가실 분인데. 내가 병원에 가봤더니 산소호흡
기를 쓰고 있는데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더라구. 그러다 결구구 며칠  후
에 돌아가셨어. 돌아가시구 나서 그 할머니가 우리 가게에  오셨을 때도 할
머니는 단정한 몸매를 잃지 않고 계셨어. 내가 흉볼라구  하는 말이 아니구 
그게 좋아보이더라구. 일생을  같이 산 남편이 여든 가까이 돼서  돌아가셨
는데 한국 같으면 기본 자세가 흐트러지고 그러잖아.
  커피숍은 사람들이 와글와글한 게 꼭 전쟁터 같이 뭐 생기는 거 없이 바
쁘구 그랬어. 거기  왔던 손님들 중에는 정신적으로 조금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구. 시를 쓴다는  할아버지에, 참 소설가도 한 분 있었어.  유명한 분인
지는 몰라도. 그러구 소프라노 가수도 있었어.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온 이
태리 여자야. 그 사람은 오면 꼭 베이글을 먹더라구. 베이글에 뭐 바르지도 
않고 먹어.  그 여자하구 같이 사는  여자도 왔는데 그이도 왕년에  오페라 
가수였대. 그 여자는 베이글에다가 크림치즈랑 포도잼일 많이  짓이겨 넣어
야 좋아해. 그걸 먹어요.
  한번은 브로드웨이 72가에  있는 집으로 놀러오라고 그러더라구.  음악하
는 사람들 아파트래. 그때 문정희도 같이 갔었어.  문정희가 너무 좋아했어. 
초대를 받구  간 거지. 내가 그이들  오면 좋아하니까 그이들이 초대를  한 
거야. 그 아파트는 피아노를 쳐두 괜찮고 노래를 해두 괜찮대요. 그 소프라
노 가수가 하얀  골동품 피아노를 치면서 자기가  하던 아리아를 근사하게 
뽑았어. 문정희도 노래  한 가닥하구. 뭐더라, 유행가야, 그걸  했어. 그리구
서 앤쵸비를 넣어서 만든  샐러드하고 스테이크인데 양고기인지 그런 맛있
는 것을 대접받았어. 그 사람들 이름이 에쇼터와 클레오였어.
  그리구 손님으로 오는 흑인애들 중에는 우리를 지켜 주는 사람도 있었고 
또 태국 남자도 한 명 있었는데 칼럼비아 대학에  유학온 유학생이었어. 그 
사람 말이 내가  언젠가 도넛 한 개를  더 줬대. 자기가 뉴욕에 사는  동안 
도넛 하나 더 주는 데가  없었대요. 그게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나 봐. 찰
리야, 그 사람 이름이. 찰리는 태국 부호의 아들이래. 호텔왕의 아들이래요. 
그건 나중에 알았어.  그 사람이 우리르 데리구  태국 음식점에 많이 갔어. 
그래서 고급 태국  음식을 많이 먹었어. 우리 작은아들을 너무  예뻐해가지
구 걔한테 전축도 사주고 마치 가족인 듯이 우리를 흠뻑 좋아했어.
  보로니만 먹는 할머니도 있어. 그 할머니를 보로니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이 할머니는 정말  귀신 같애, 얼굴이. 하루 세 끼를  다 우리 가게에 와서 
보로니 샌드위치만 먹어. 기금을  타가지고 사나봐. 얼굴을 보면 참 반갑고 
그이가 안 오면 하루종일 걱정이  돼. 그 할머니두 그런가 봐. 우리가 하루
는 문을 닫았더니 그  다음날 화를 내면서 어저께는 그냥 밥을  안 먹었대. 
딴 데 가서 사먹지를 않구 밥을 안 먹었대요, 글세. 그 할머니 이름이 쉘리
야. 조금 넋이 나간 헐머니야. 말하자면 망령든 거지.  어떤 때 말걸면 자기 
혼자 있게 해 달라구"Leave me alone" 그러구 말이야.
  그런데 정말이지 웃지를 않아. 내가 어떤 때 뭘 물어보거나 '오바코트 이
쁘다'고 하면 몇 달에 한 번은 조금 웃어요.
  추수감사절엔 고구마 구워 가지고  할머니더러 우리 가게로 오라고도 했
어. 고구마를 주고 그래선지 자기가 쓰던 찌그러진 귀걸이를 주기도 했어. 
  그 할머니는 죽었대나 봐, 그후에. 나는 가게를 팔고 나서도 그 할머니가 
계속 오는지 어떤지 그게  참 궁금했어. 그래서 새 가게 주인에게  가서 물
어보니까 이젠 안 온다구 하면서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그래.
  1996년 10월 23일
  실비아라고 신앙이 좋은 할머니가 있었느데 저녁에 와서 남은 도넛을 가
져가요. 버릴 대도 있지만 누굴  준다는 게 그이한테 주는 거야. 이 할머니
는 우리 도넛을 갖다가 교회나 어려운 사람들한테 나눠 주는 거야. 
  우리가 가게문을 11시 반이나 12시에  닫는데 손님이 많을 때는 더 오래
하고 그러거든.  그때는 위험하잖아. 그런데 실비아  할머니는 문닫을 때면 
꼭 와서 지켰어. 흑인 할머니야.  그래서 그런지 흑인들이 나쁜 짓 하러 들
어왔다가도 그냥 나갔었어.
  한번은 정말 나쁜 놈들이  들어왔는데 할머니가 소리치며 경찰에 신고하
겠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막 내뺐어. 우리가 집에  들어오고 없는 시간에
도 할머니는 계속  나와 지켜줬대. 우리가 커피숍을 팔고 나서  1년 후엔가 
길에서 만났는데 그렇게 반가워하더라구.
  그리고 또 생각나는 사람은 우리 커피숍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사람. 
'쟈니 탄'이라구 그 사람은 조금 덜된 사람이야, 좀 바보. 사람들이 그 사람
을 무시하고 그랬지만  사람이 진실하고 일을 시키면 그렇게 좋아해.  굉장
히 성심껏 일을 했어.
  1952년 여름에 한국에 군인으로 갔었대. 우리가 코리안이라고  하니까 나
한테 하는 소리가  한국에는 얼음도 없고 냉장고도 없대. 옛날  의정부인가 
어디 가난한  시골에 있었나 봐. 여름에  갔기 때문에 지금도 얼음이  없고 
냉장고도 없는 걸로 알고  있더라구. 내가 그때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어. 
손님으로 오던 필리핀 여자가 미용사인데ㅐ 매니큐어를 발라  줬었거든. 핑
크색깔. 쟈니 탄이 그걸 보더니 '한국에는 이런 것도 없지' 그래. 나는 그런 
게 억울하더라구. 그래서 내가 한국에는 얼음도 있고,  매니큐어도 있고, 아
파트도 이렇게 크고 좋은  것이 있고, 지하철도 여기 같지 않고  참 좋다고 
그랬어. 여기보다 훨씬 깨끗하고 훨씬 부자다 막 그러면서. 그런 쓸데 없는 
말을 했어. 그거는 좋은 거 아니지.
  그리구 또 백인 할아버지 손님이 있었어. 그 할아버지는  바로 건너편 호
텔에 살아요, 혼자서.  그이는 그 거리에서 한 50년을 살았대.  옛날 사진들
을 가져다 보여 주는데 그 거리가 그땐 참  아름다웠더라구. 높다란 모자들
을 쓰구. 그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와서 끓는 물에다 반숙한 계란, 수란이라
고 하나, 그것만 잡숴요.
  하루는 밍크숄을 두  개 가지고 왔어. 옛날에  자기 와이프가 쓰던 거래. 
와이프가 죽은 것은 아니고 헤어졌다나 봐. 그이가 밍크숄  하나는 그냥 줬
고 하나는 내가 싸게 샀어. 그이도  한 가족 같이 됐어. 몇 년을 매일 오니
까.
  지금도 그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 그때 라디오에서 '링 마이 벨(Ring 
my bell)'이라는 팝송이 자주 흘러나왔는데 지금도  그 노래가 나오면 생각
나구 그래.
  거기서 그  장사를 하면서 큰아이는  운전면허를 따구, 대학엘  들어가구 
그랬어. 그렇게 3년 동안 애들이 컸어.
  나는 거기가 그리워. 그래서  이따금 가는데 남편이나 애들은 싫대, 거기
가. 지겨워서.
  1996년 10월 26일
  그날 그날 특별 메뉴가 있어서 그걸 칠판에다가 써서 유리창에다 걸어놔
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읽어 보고는 들어오게.
  글시는 남편이 썼어. 그이가  붓글씨도 참 잘 쓰지만 영어 글씨를  참 잘 
써요. 내가 그이를 자랑할 건 그거 하나야. 한글 글씨보다도 더 잘 쓰는 것 
같애. 예술적으로 아주 잘  써요. 그거 써가지구 내놓으면 손님들이 와가지
구 저거 누가 썼느냐구 그래. 그러면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스터 박
이 썼다고 그러지, 그러면 손님들이 저이보구 저 위의  칼럼비아 대학에 가
서 교수나  되라구, 여기서 왜 이런  장사를 하고 있느냐구 그런  소리들을 
참 많이들 하더라구.
  후랭크가 치킨요리를 잘했어요.  켄터기 후라이드 치킨은 아니지만  우리
가 한 것이  맛있었는데 '켄터기' 보다 더 가정오리 같애.  후라이드 치킨에
다 감자튀김을 얹어서 줘요.  감자도 아유 뭐라구 그러럴까. 이건 맥도날드
에서 주는 것보다 굵은 거야. 그런데 아주 맛있어. 튀긴 게.
  기름은 식물성 기름으로 신선하게 했어. 얼마만에 한  번씩인지는 잊어버
렸는데 기름을 자주 버리고 오래 안 썼어.
  쩔은내가 안나고 맛이  좋은 후라이드 치킨 외에  후랭크가 치킨 수프를 
끓였었어. 닭 목뼈를 가지고 하는데 거기다 양파,  스파게티국수, 피망을 넣
구 그걸 큰 들통에다 끓이거든. 그러니까 국물이 너무  기름지지도 않구 구
수하더라구. 그 두 가지가 맛있었어.
  어떤 때 내가 할 때는 한국에서 사태를 끓어먹던 식으로 그런 고기르 좀 
사가지구 해. 소고기국이지  말하자면. 비프스프라고 부르지만 그것보단 조
금 말갛게. 거기다가  무도 넣고 야채도 넣고  그게 그러니까 무국 비슷해. 
무 없을 때는 양배추도 넣구 그랬는데 손님들이 그걸  또 좋아하더라구. 처
음 먹어봤다 그러면서.
  우리가게에는 대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와서 먹어요. 그런데 와서  먹는 
이들은 대개 가난해서 식다에도  못 가고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참 잘
해주고 싶구 그렇더라구.
  처음에는 내가 웰던(well-done)으로 구워  달라거나 미디엄(medium)으로 
구워 달라는 소리를 잘  못 알아들었어. 한번은 쿡도 없이 내가  저녁을 하
는데, 그러니까 그게 처음이었어.  햄버거를 완전히 구워 달라는 거를 내가 
좀 덜 구웠어요. 그래서 욕을 먹은 적이ㅓ 있었어.  내각 성격이 급해. 그래
서 뭐라 그럴까,  집에서도 감자 같은 거 볶잖아, 그런  때도 잘 못 익혀서 
남편한테 야단 맞았어. 그런데 거기서두 그랬던 거야. 난 그런 거를 차분하
게 못 해. 왜 그런지 몰라. 
  요리는 그릴에서 하고 그걸 부엌에 있는 스팀으로 뜨겁게  해 놔. 그러구 
도넛은 앞에다가 예쁘게 진열해놓지.
  도넛 종류는 수십 가지나 됐어. '하니딥' 같은 게 제일 많이 팔렸어. 그건 
속에다 뭐 하나도 안  넣은 건데 딱딱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게  맛있어. 아
무 것도 안 넣었으면서 딱딱한 것도 있었는데 그건 올드횃숀이라고 해.
  그 중 제일 맛있는 것은 속에다가 크림을 넣고 길쭉하게 만든 건데 위에
다가 초콜릿을 묻혔어.  '에클레어'라는 건데 요새두 팔더라구.  그게 좀 비
싸.
  '보타이', '에클레어', '애플턴오버'를 진열장 밑에다가  딱 넣어 놔요. 진열
장에다 이름 붙여서 넣는  거는 보통 도넛들이지. 죄다 살찌는 음식들이야. 
우유에 설탕 넣고 그걸  또 기름에 튀기니까. 가게를 팔고 나서는  난 도넛
을 잘 안 먹어. 먹기가 싫더라구.
  거기서 먹던 것 중에서  그리운게 있어. 알락미 볶아 넣은 것  같이 보이
는 음식인데, 보기보다 참 고소하고 맛있었어. 그리구 시루떡 같은 것도 있
는데 밀가루에 고기를 넣구 치즈도 넣구 해서 다섯  번인가 찐대요. 후랭크
가 만들었어. 근데  내가 그 이름을 잊어버렸어. 그게 먹고  싶어. 한국음식
에는 그런게 없는 데도 내 입에 맞았어. 짭짜름하면서도 쫀득쫀득하고.
 그런데 그게 비싼 고급 요리래. 그리스 요리래요. 우리 가게에선 일주일에 
한 번 그렇게  만들었는데 고급 요리라 해도 우리  가게에선 비싸게 못 팔
지. 그건 해놓으면 하나도 이문이  안 남아. 지금 그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저이는 아마 알지도 몰라. 옆집에 가면 비슷한 게  있었지만 후랭크가 만든 
것처럼 맛있지는 않더라구.
  나는 거기서 수프  만드는 거 다 배웠어. 완두콩 수프,  크램챠우더 수프, 
치킨 수프, 야채 수프. 야채 수프는 여러 가지 야채를 많이 넣구 옥수수 깡
통도 따서 넣구 그래.  어떤 수프든지 수프는 버리지 않고 다  팔거나 어쩌
다 남는 건 우리가 먹거나 했었어.
  아이스크림도 팔았어. 아이스크림은 카벨 같은 데서 파는 것, 왜 색깔 요
란한 것 있지? 그거하고는 다르게  아이스라고 그거러 많이 갖다놨는데 여
름에 잘 사먹더라구. 내가 많이 막 퍼줬어. 그래서  이문도 많이 안 남았지. 
아이들이 게임하러 와서 놀구는 아이스크림 먹는 걸  좋아하더라구. 아이스
크림 푸는 일이 힘들어. 팔이 아프더라구. 그걸 전문으로 파는 집이 아닌데
도 그랬어.
  게임머신은 가게  그만둘 때까지 계속해서  했어. 쌤이라는 머신  주인은 
유대인인데 그 사람 말이  그 당시에 뉴욕에서 우리가 제일 잘됐대.  그 쌤
이라는 사람은 기계를 오죽 많이 놔봤겠어. 수백 대를 놨겠지. 그런데 제일 
잘된다구 우리집에도 찾아오구  머신도 하나 줬어. 그게 지금 우리집  지하
실에 있어. 고장났지만.
  사실 그때 우리가 기계를 사 놓으면 더 이익이지. 이윤이 배가 나오니까. 
그런데 그렇게 못하겠더라구. 또 자꾸 새거를 놔야 애들이 좋아해. 그 사람
은 기계가 여러 개 있으니까 자꾸 새걸로 바꿔줬어.
  한국 사람들이 가게에 오면 돈을 못 받겠더라구. 먹는 거라 그런가. 내가 
내 자랑 하는 것  같은데 여하튼 커피 하나. 도넛 하나 사면 돈을  못 받겠
더라구. 그래서 그때 한국 사람들이 손님으로는 거의 없었어.
  1996년 10월 28일
  장은 따로  안 보고  부룽스마켓에서 매일 배달됐어요.  '아이디알'이라고 
유대인이 하는  회산데, 주문을 하면  햄버거부터 계란까지 다 가져와.  햄, 
베이컨, 냉동한 야채,  냅킨, 컵 그런 걸 다  가져오지. 그러구 인제 자잘한 
것들은 우리집 쿡이 옆에 있는 슈퍼마캇에 가서 사왔구.
  '투인도넛' 이름이 새겨진  컵은 본사에서 많이 샀어. 밀가루,  설탕, 도넛 
재료랑 알커피는  본사에서 보내왔어. 그냥  보내오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 
것을 쓰라는 법이 있어서 썼구.
  우리 가게 옆에는 OBT라고  경마하는 데가 있었어. 거기 건달들이 조금 
많이 오더라구. 그 건달들이 우리 가게에 손님으로 많이 왔어. 경마라는 게 
화투나 그런 것처럼 투기잖아. 그 사람드은음식 먹을 때  돈이 없으니까 제
일 싼 것으 ㄹ먹어.
  경마에 미치면  굉장하더라구. 매일 그리로 출근들을  해. 어떤 사람들은 
잃었다구 울상이고. 잃었다는 사람이 많아. 땄다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래
도 그게 재밌나 봐.
  경마장 이층에는 빙고하는  데가 있어. 빙고도 그렇게 많이들 와서  하더
라구. 경마하는 이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해. 나이도 많고 그런 사람들이 매
일 와서 하는데 그거 하는 사람들이 악의는 없더라구. 악착같지가 않아, 세
상 사는 데. 그래서 친해지기도 더 쉽고 그랬어.
  우리 가게 건물  주인이 햄슬리 스피어라고 여기 뉴욕의 부동산  왕이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부터 다 그이꺼지. 그런데 우리가  게임머신에서 돈
을 잘 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우리를 고소했어. 그 사람 자신
이 그렇게 하진  않았겠지. 설마 그 부자가.  하여간 우리가 머신을 놨다구 
해서 고소를 한 게 어떻게 재판까지 하게 됐어. 결국 이겼어, 우리가.
  그이가 재판소에 갔더니 전직이 뭐냐고 그러더래. 재판자  앞에서 외교관
이었다고 그랬다는데 나는  그 말이 좋았어. 재판장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고 그래서 우리가 이겼지. 지면 우리는 쫓겨나는 거야. 내가 사람들에게 맨
날 그러지. 아이구 우리가 햄슬리 하고 싸워서 이겼다구.
  고소당했을 때는 걱정이  되더라구. 서류가 막 오고 그러는데 난  정신이 
하나도 없어라. 나는 변황에 대해서도 그래요. 두렵기만  해. 환경을 바꾼다
든가 그런 게 좋지가 않구 굉장히 두려워.
  우리 물건을  대주던 부룽스마켓에도 한  번 가봤었어. 1934년에  준공된 
건물이라니 60년이 넘었지.  거기가 식품도매소잖아. 그런데도 굉장히 지저
분하게 해놓고 장사를 하더라구. 불결한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렸어.
  우리집에 물건을 대주던  이가 우리더러 그 가게를  사래. 150만 불인가, 
100만 불인가를 내고  사래요. 우리가 커피숍을 할 때 잘되는  걸로 보였나
봐. 매일 물건을  많이 사니까. 우린 돈도 없었지만 그  골치 아픈 것을 할 
맘도 없었어. 아침마다 전화로 주문받거든.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 중에서 귀엽게  생긴 애가 있었어. 그애나  혹은 
그애 엄마가 오면 내가 정신이  없어져. 너무 좋아서 돈도 받기 싫었어. 걔
는 잘생기지는 못했는데 눈이 참 선량하게 생겼어. 얼굴이  길고 귀엽다 그
럴까 그런  얼굴이야. 이름이 헨리야. 그때  대여섯 살쯤 됐을거야.  어떻게 
할 수 없이 예뻐, 걔를 보며는.
  1996년 10월 30일
  오늘은 비가 오지만 어저께 같은 날은 가을볕이 참  좋더라구. 59가 프라
자 호텔 꼭대기에 구리가 녹슨  색깔이 나는데 거기 햇볕이 쏟아지면 다른 
때보다도 가을에 정말 멋있어.
  구한말에 민영환 초대 대사가  트루먼 대통령인가 그런 미국 대통령한테 
신발 벗고 절했다는  곳이야. 대통령이 평복을 입었기 때문에 민영환  대사
가 대통령을 못 알아봤는데, 나중에 누가 말해줘서 알고 큰절을 했대요. 
  민영환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내려 기차를 타고 뉴욕에 왔는데 
다들 도포를 입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서커스단이 온 줄 알고 언제 공연하
냐고 그렇게 물었대.
  나는 이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  이 얘기를 '투인도넛'에 있을 때 들었어. 
우리 가게 앞에 순복음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 다니는 사람이 얘기해줬어.
  조용기 목사남이 그 교회에 오셔서 설교한 적이 있었어.  그 목사님 설교
를 얼마나 잘해. 그이는 어떤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했어. 내가 교회를 안 
가다가 가서 그런가.
  그이는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받았던지. 성령의 능력이  설교하느 교회당 
안에 가득한 것  같았어. 사람들이 그 목사님을 이단이라고 이단이라고  욕
하고들 그러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좋더라구.  15년쯤 전이니까 그분도 
그때는 젊었지.
  그땐 우리가 주일날도 가게문을  열었는데 주말에는 우리 고용인들이 일
을 안 해. 그래서 우리가  일을 했어. 교회앞을 지나오면서 그냥 기도만 하
고, 가게에 서서 기도하고 그랬어.
  주말이면 한국 사람들이 꼭 와요.
  누구냐 하면 곽상희 시인.  그때는 모두 젊었었지. 그이가 순복음 교회를 
다녔었어요. 시도 많이 써가지고 오구 그랬어. 또 한 사람은 시인 김소향이
라구, 그이두 아직까지  변함이 없어. 그이두 교회 가다가 들르는  거야. 그
이는 순복음 교회는 아니구 딴 데 다녔어.
  우리는 순복음 교회에도 도넛을 팔았어. 교회에서는 예배  후에 다과시간
을 갖잖아. 그때 쓰는 도넛을  우리집에서 갖다 썼어. 우리 가게 앞에서 길
을 건너서 네 블록쯤 올라가면 그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없어진 것 
같애. 우리는 예배도 못 보고 그냥 배달을 했어.
 ' 투인도넛'을 하면서 사람들이 밥먹구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런 
거를 알았어. 거기서는  잡담 한번 제대로 못하게  바빠. 등에 땀이 나도록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야 해. 단순노동이야. 노동이 얼마나 정직한 건가 그
런 생각을 했어. 그게 어떤 면에선 좋더라구. 잡념 생길 새도 없구.
  늘 잠이 부족했어. 늘 졸려.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면 잠 좀 실컷 자는 거
였어. 그 얘기를 듣고 간 김후란 선생님이 마음 아파하며 썼었어.
  거기서는 음식으 ㄹ사람들한테 나눠주는 것은 좋았는데 청소하기가 싫었
어. 어떤 때 쿡이 안  오면 음식도 만들고 그랬는데 재밌지 않았어. 똑같은 
일의 반복이니까 그렇지. 그러구  감자나 계란 같은거 까는 일. 에그샐러드 
하려면 계란을 삶아 가지구 그걸  다 까야 하잖아. 쿡이 그런거 까라, 마늘
도 까라 그러는게 참 귀찮았어.
  그리고 거기서 괴로웠던 일은  술주정뱅이들 아니면 이상한 사람들이 와
서 계속 떠들고 안  가구 그러는 거였어. 아주 막무가내로 안  가는 사람들
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예 엎드려서 자.
  1996년 10월 31일
  커피숍을 3년쯤 했는데 그 앞에서 잡화가게를 하던 사람이 와서 계속 팔
라구 그래. 그래서 팔았어. 이것저거서 세금 떼고 하니까 많이 남지는 않았
어.
 한 5만 불밖에 안 남았는데 누가 크게 사업한다고 같이 하자구 해서 했다
가 다 잃었어.
  그게 헬신(Healthin)이라고 뉴슈가 같은 것 취급하는 사업이었어.  많이들 
쓰고 있는 제품인 스윗앤로(Sweet & Low)보다도 암에 걸리지 않는 더 좋
은 품질이라고 그랬어. 그 사업에 다 투자했다가 전부 잃었어.
  그리고 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 이건 참  신앙적인 얘긴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듯긴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쉬라고 했잖아. 그런데  '투인도넛'은 
연쇄점이기 때문에 법이 쉬면 안되게 돼 있었어. 그렇게  주일두 안 지키구 
일주일을 다 열었잖아.  그래서 그 돈을 잃었구나  싶었어. 그 당시 고등학
생, 대학생이던 아이들이  바라볼 때 참 많이  아팠어. 그 아이들도 열심히 
일한 가게였거든.
  그리고서 또 비즈니스를 찾아  다닌 거야. 세탁소를 할까, 옷가게를 할까
…. 그이하고  그렇게 가게를 보러다니는데  정말로 저이를 어디다가  세워 
놓는다고 생각하니까 할 만한 데가 없더라구.
  그런데 우리 앞집에서 우리 가게를  샀다구 그랬잖아. 그 가게 전(前) 주
인이 홀세일(Whole Sale)을 한다구 해서  그게 뭐냐구 물었더니 그게 도매
래. 나는 도매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어. 하도 장사를  몰라서. 그 사람이 자
기 가게를 와보라고 해서 내가 브로드웨이 가게를 가봤어.  그 집에서는 장
신구도 하고 신발도 했는데, 그이가 한 번 배워보라구 그러더라구. 우린 그
때가 아주 어려운 때였어. 여기는 다 그렇더라구. 뭘 하다가 안 하면 다 어
려워지더라구. 그 집이 참 고맙지. 와서 배우라고 그러구 그런 거를 하라구 
그러구. 나는 장신구를 사고파는 것을  배우면서 그 집에 좀 다녔어. 몇 달
쯤 다녔지. 매일은 아니더라도.
  어, 정말 꽃가게도 다녀봤어. 꽃집을 할까 하고. 그것도 힘들더라구. 다듬
고 그러는 게 야채가게보다도 더 힘들어.
  그래서 인제 주얼리가게를 다녔는데 그집이 찰스네야. 한번은  우리 건상
이가 찰스  엄마하고 시장엘 갔는데  한꺼번에 50불어치를 사더래.  우리는 
10불어치씩 사거든.  그게 부러웠나봐,  고등학생짜리가. 그게 굉장히  가슴 
아파.
  그렇게 배우고 있던 1985년 봄이었어. 그때 수필가 김영란  씨가 와서 오
빠가 주얼리가게를 팔려고 그러는데  하겠느냐고 그래서 두말 않고 결정을 
했어. 그분들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여길 왔는데 저
쪽 브로드웨이는 괜찮았는데 6번가 이쪽은 죽은 거리야.  그래도 우리는 열
심히 했어. 애들까지도 열심히 물건을 사오구 그랬어.
  그러니까 그대부터 12년가 ABC 핸드백가게 앞에서 ABC 주얼리를 하고 
있는 거야. 천사 같은  시인 정문혜 권사와 이송봉 장로 곁에서  우리는 같
은 문을 쓰며 폐도 많이 끼치고 있어. 김영란 씨도  자매 같인 늘 미소지으
며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고 있어.
  한국 사람들은 새벽 7시부터 그렇게 뛰어다녀. 마라톤 하는 것처럼. 그러
니가 소매상들이야. 빨리 물건을  사가지구 가게를 열려고 그러는 거야. 아
침에 와서 아우성들이야. 지금은  다들 안정이 돼서 그런지, 불경기라 그런
지 그런 거 없어요.
  하여간 그게 조금조금 잘되기 시작하더라구. 그리고 멀리서도  손님이 많
이 왔어. 아프리카, 남미, 유럽…. 와서 물건을  사가지고 부치는 거지. 말할
자면 보따리  무역가들이야. 천 불 이상의  비행기 값을 들여 호텔에  묵고 
항공으로 물건을 부치는데도  이문이 남나 봐. 그때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 지금도  있어. 다 없어지진 않았어.  뉴욕이 무역 도시라  해가지구 
여기로 많이 모인대.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또 오하이오 그런 
데서도 많이 와.
  우리집은 싼 거부터 비싼 거까지 다 있어. 장신구가  굉장히 민간하게 변
해. 색깔만이 아니고  재료도 빨리 바뀌지. 예를  들어서 어느 해는 나무로 
만든 것이 유행하고,  어느 해는 조개 제품, 어느 해는  사기, 세라믹이라고 
그러지. 어느 해는 구리 같은 금속. 그러구 모양도 큰 게 유향하는 때가 있
어서 귀걸이가 한 두 뼘씩아나 하더니 요새는 다시  작아졌어. 그런데 기본
적으로 안 변하는게 있어. 예를 들어 크리스탈 목걸이나 후프 귀걸이, 그런
건 계속 유행을 안 타요.
  1996년 11월 1일
  요새는 불경기라 특별히 잘 나가는 건 없어. 장사가  잘되는 때는 부활전  
전인 4월쯤. 그땐 물건들이 잘나가.  겨울은 잘 안돼. 1,2월은 잘 안 나가다
가 어머니날  전에 잘  나가지. 간단한  브로치들 위에 'I  Love Mom',  'I 
Love Grandmom'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들, 하트모양에다  'Mom'이라고 
쓴 것들 그런 거지.
  6월은 결혼 시즌이야.  졸업 시즌이기도 하구. 그때는 진주가 잘나가.  진
주 목걸이, 귀걸이,  또 라인스톤이라고 인조 다이아몬드 같은 거.  그건 오
스트리아제가 좋아.
  한여름에는 좀 한가하다가 9,10월부터  다시 바빠져. 크리스마스 때는 조
금 화려한 것들. 아주 비싼 것도 나가. 우리 가게에서 조금 비싸다 하는 거
지. 골드, 실버  그런 걸로 만들어진 천사가 많이 팔려.  크리스마스 색깔은 
초록, 빨강이잖아. 우리가 요새  그런 빛깔 물건을 많이 사. 'I Love Jesus' 
그런 거는 항상 좋아해. 우리가 크리스찬인 걸 아는지  우리 가게에는 거런 
걸 찾는 사람이 많아.
  여기 여자 애들은  열여섯 살이 되면 파티를  크게 하잖아. '스윗 식스틴
(Sweet Sixteen)'이라구. 그건 열여섯 되는  생일날 하는 거니까 계절이 따
로 없지. 그 파티에 쓰는 물건이 계절을 안 타고 많이 나가. 왕관이나 목걸
이가 세트로.
  브라질,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나 바하마, 버뮤다, 자메이카 같은 섬에
서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것을 좋아해요.  그이들은 
번쩍거리는 게 안 들어 있으면 안 사요. 여기서도  스페인계 동네에서 장사
하는 사람들은 그런 물건을 사가. 그리고 귀걸이는 착착 늘어지는 거.
  유럽 계통이나 미국에 있는 백인들은 약간 골통품 색깔  나는 걸 좋아해. 
매트골드라고 탁한 거 그리고 실버도 거므스름한 실버색을  좋아해. 퓨터색
이라고 그러대.  디자인은 섬세하고 정교한 것으로.  백인들은 그리고 동물 
브로치를 좋아허더라구. 동물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 고양이서부터 레이디 
버그라고 풍뎅이,  까만 점이 있는  호랑이, 그러구 저기  뭐야 상어, 백조, 
곰, 또 개구리도 좋아하대.
  뱀은 흑인애들이 좋아해. 아프리카에서 왔든 미국에 살든  흑인들은 약간 
큼직하고 투박하면서  보기 좋게 만든  골드를 좋아해. 그리구  코끼리라면 
다 사 가. 흑인들에겐  코끼리가 행운의 상징이라지. 인도에서 수입하는 물
건 중에는 코끼리가 많아.  상아로 된 것도 있고, 그냥 뼈로 된 것도  있어. 
뼈를 가지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서 구슬하고 같이도 끼고 그런 건데 
비싸지도 않아요. 흑인들이 그  색깔 나는 것을 맣이 사가는 데  흑인 피부
에 예쁘게 맞는  모양이 많아. 필리핀에서 오는  조개 목걸이, 귀걸이 그런 
게 한때는 굉장히 잘 팔렸어. 
  우리 나라에서 오는 것은 싼  거밖에 안 사봤어. 진주도 싼 세트들. 금으
로 장식된 것도 있는데 지금은  우리 나라에서 안 만들고 중국에서 만들어 
와, 회사는 우리 나라지만.
  그리구 사기 제품은  일본에서 와. 세라믹이라는 건데 지금은 유행이  갔
어. 예술 작품  같고 너무 예쁜 게  많았어. 백인들이 그걸 그렇게  좋아해. 
그건 일본 것만 좋아. 딴 데서 오는 것은 못써. 그리고 그건 스페인계나 흑
인은 절대로 안 사.
  장사를 하려면 그런 유행 품목을 빨리빨리 갖다 놓아야  해. 유행 정보는 
쇼에 가서 얻어요.  보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주얼리쇼가 열리거든. 바
로 보스턴  밑인데 거기 제조업자들이 물건을  다 진열해 놓고 모여.  대개 
미국 사람들인데 지금은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더라구.
  거기에 '대인'이라는 미국 회사가 있었어. 그 회사는  물건을 뉴욕에서 우
리한테만 줬었어. 우리 큰애가  그 사람하고 가깝게 사귀어 가지구. 그래서 
우리가 그 물건을 아주  많이 팔았어. 그 회사 물건을 우리가  독점해서 10
년을 더  했어. 그런데 한국 회사에서  카피를 너무 많이 해가지고  지금은 
좀 줄었어. 지금도  그 전만은 못하지만 그집  물건은 땀을 흘려도 괜찮대. 
우리도 한국  것은 변한다고 말하면서 팔고  있어. 어떤 사람은 한국  것이 
쫙 깔린 집 물건은 안 사요. 
  벨벳 목걸이에다가 방울이나 반짝거리는 거 단 개목걸이 같인 생긴 것은 
4,5년 전에 유행했었거든. 그런데 그건 유행이 금방 시들지 않고 아직도 조
금씩 팔려.
  유행이 지나면 아예 안  팔리는 것도 있어. Y네크리스라고 Y자 같이  쭉 
늘어지는 게 유행하다가  1년도 안 가서 딱 끊어지대. 유행을  얼른 파악하
는 게 힘들어. 세일즈맨들이 물건 샘플을 가지고 오는데  한국 사람들이 많
구 외국 사람도 오지. 그 사람들한테서 정보를 많이 들어요.
  1996년 11월 4일
  손님 중에서 아프리카에서 오는 이들은 보통 깎구 그래.  깎는 것을 교육 
받아가지구 와요. 무조건 차이니즈들한테 가면 깎으라고 그런대. 처음 와서
는 안 깎구 좋은데 몇 번 오면 닳아가지고 와.
  깎구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  정이 가. 흙냄새가난다 할까. 뺀들뺀들 하지 
않고 자유인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쉼. 쉼은 쉰
다는 뜻인데 하여튼 그런 것을 느껴.
  나이지라아에서 오는 어티라는 이름의 부부가 있는데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애. 아이들이 넷이래요.  한 달에 한 번씩 오면 대인제품을  많이씩 사가. 
크리스찬인데 얼굴은 부부가 다  험상궂게 생겼어. 기미가 많이 기구. 흑인
의 진고동색  피부에도 기미가 낀 게  보여. 그이들이 왔다 가면  그이들이 
살 물건을 우리가 다시 갖다 놔.
  그이들은 문을 들어서면서 "마마"하고 날  불러요. 어떤 때는 민속의상을 
색깔이랑 잘 맞춰서 이쁘게  입고 와. 그러면 나는 "너 옷 이쁘다." 하기도 
하고, "거기는 어떠냐?" 물어도 보구, "뭐 마실래?" 그러기도 하면서 지내.
  그런데 물건을 살 때는 깎는 게 아주 본전도 안  줄라구 그래. 여기 점원
들하고 내가 지칠 때까지 싸워서 본전 정도는 받아내요.  그이들은 올 때는 
천사 같은 얼굴로  왔다가 갈 때는 악마 같은 얼굴로  가. 그러구는 또 와. 
그이들에게 그 다음에 살 때  불려가지구 깎아 주면서 조금이라도 더 남겨
먹을래도 비슷한 물거을 사가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그래두 하여튼 반
가워, 그 사람들이.
  또 마미두라는 세네갈 사람이 있는데 그 나라엣는 마미두라는 이름이 많
더라구. 이 사람은 많이 깎지도 않고 잘 샀어. 흑인 중에서도 좀 못생긴 사
람이야.
  그 사람은 이슬람교도인데  와이프가 네 명이래. 네 명의 부인한테서  난 
애들이 열 명이 넘어. 열둘인가 그런데 책임감도 있고, 자식들으 ㄹ참 사랑
하더라구. 저번에는 한 아이가 죽었다구 시무룩하더라구. 그이는 오면 선물
을 와이프들 것을 다  사. 그 사람한테 내가 소용은 없겠지만  잔소리를 했
어. 와이프 넷은 나쁘다구. 요새는 잘 안 와. 아프리카 돈값이 떨어져서. 그 
사람은 정이 들었던 사람이야.
  여자 중에는 가나에서 오는 꼭  미치광이 같은 여자가 있는데 이름이 휄
라야. 비행기 값이  천 불이 넘는데 그렇게  물건을 사러오는 거야. 나하고 
거래하며 오가는 중에 그 여자 남편이 죽었어. 별일  없느냐 그러니까 어느 
날인가 남편이 죽었다고  그래. 성격이 법석스러워서 다 흘리고 다니구  그
래도 그  여자가 물건은 시원스럽게 사.  물건은 자기 모습보다 아주  이쁜 
걸 사가요. 그 여자는 한국도 자주 간대.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녀. 그러니까 
여류 무역가야.
  동서고금을 통해서 사람의  성격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거 같애.  내성적
인 사람, 침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향적인 사람, 수선스러운 사람이 있
구.
 또 한 이는 마리아라고 아프리카의 아비자에서 오는데 거기서 가발상점을 
크게 한대. 7년 전에 왔을 때는 30분 내에 몇 천 불씩  사서 여기 직원들이 
그 사람만 오면 설설  기었어. 그이는 아비장 보후의 부인이라 그러더라구. 
그렇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여기 근처 한국  가발무역상이 그러는데 이 사람만 오면 굉장하대.  십만 
불씩 현찰로 사가지구  간대. 그런데 이 사람이 남미 어디에다가  가발공장
을 차렸대. 그래서 요새는 자주 안 와. 그래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훈훈해. 
그이는 빨리 사도 깎을 건 다 깎는데 깎아도 밉지가 않아.
  타이티에서도 많이  사러 와.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두꺼운 게 꼭  고갱 
그림에 나오는 그런 여자 모습이야. 그 사람들한테  100년 전에 프랑스에서 
온 화가  고갱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들은 거의 몰라. 고갱  그림에 
보면 머리에 꽃을  꽂고 그리잖아. 그래서 "너희 나라느 꽃이  많이 피냐?"
고 물으니까 많이 핀대.
  버뮤다에서도 물건을 사러  오고, 바하마에서도, 자메이카에서도 오고 그
러는데 자메이카 사람들이 딴  데보다 대국적이야. 잘지 않고 스케일이 커. 
점잖은 것 같애.
  넬리라고 자메이카에서 오는 여자느느 눈도 아주 잘생겼는데,  물건 사는 
태도가 아주 젠틀해. 부담을 하나도 안 줘.
  버뮤다에서 오는 성질  급한 그랜이란 사람이 있어. 뷰틱숍도 많이  한다
는데 여기 36가에  있는 옷집에서는 한 달에 5만 불어치씩  사간대. 우리집
에서도 많이 사가.  성질이 급해서 이거, 이거, 이거 한다슨씩  사서는 자기
가 가지고 가지도 않아.  값도 안 물어 보고 어디로 보내달라고  하고는 가 
버려.
  나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피곤하다기보다 즐거워. 앉아서  세계 여행하
는 거  같애.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하면 풍속이라든가 문화를  물어보면서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애. 
  그런데 손님하고 너무 친하면 오히려 나쁘다지? 손님이 오기가 부담스럽
대. 나는 말이 유창하게 안 통하니까 거죽으로 그냥 웃고 지내는 거야.
  1996년 11월 7일
  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 오는 할머니가  있어 약방을 하는데 그 약방에 
장신구를 놓고 파는  모양이야. 이름이 엘사로사인데 35살쯤 된 아들이  있
어.
  아들이 머리를  빡빡 깎았어. 사귀게 된  뒤에 왜 머리를 깎구  왔냐니까 
엘사로사가 막 면서 아들이 암이래.  그리구 몇 년이 흘렀어. 한 4년? 엘사
로사한테 아들이 어떠냐구 그러면  그때마다 울면서 기도해 달라구 그러더
니 한번은  아들이 머리가 이쁘게 나가지구  왔어. 그 아들은 아내도  있구 
그래. "머리가 나구 건강해  보인다."고 하니까 엘사로사는 잘 못하는 영어
로 기도로 병이 나았다고,  자기도 너무너무 좋다고 그러면서, 내가 기도해
서 나았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그랬어.
  그런데 오랫동안 안 왔어. 그래서 내가 푸에르토리코로 한  달 전쯤 전화
를 했어. 그랬더니  아들이 죽었다면서 막 울어.  그렇게 가슴 아픈 손님도 
있어. 물건을 안 사도 좋으니까  그 할머니가 한번 왔으면 좋겠어. 죽는 것
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
  트리니다드에서는 화장을 아주 예쁘게  하고 오는 오자라는 여자가 있는
데 아들딸을 다 여기다 유학을  시키고 있어. 성녀 같은 그런 여자야. 녹두
색 옷을 좋아하고 그런 액세서리를 하면 굉장히 잘 어울려.
  한번은 얼굴을 잡티가 없어지는 화장품이 있다고 선전하며 누가 그걸 여
기다 갖다 놨었는데 그걸 오자가 샀어. 그 화장품이 효과도 없더라구. 굉장
히 비싸다면서. 그런데 오자는 그 크림을 써본 후에도 계속 오더라구. 물론 
장사할 물건을  사러 우리집에 오는 거지.  우리집 물건이 딴 집에  비해서 
썩 싸지도  않구 그래도 그이는 아주  기분좋게 사가. 그이한테 내가  한국 
음식을 대접했어. 한 달 반 내지  두 달에 한 번씩 와. 많있씩 사구 그러는 
사람은 아니야.
  브라질에서 오는 사람  중에서 자매 세명이 있어. 한꺼번에 다니는데  머
리가 새까맣구 눈이  새까만 아주 미인들이야. 우리랑 서로 좋아하면서  몇 
년을 다녔어. 자매  셋을 우리집에 초대도 했었어.  이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사구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안 와. 많이 사면 사람들이 안오니까  서운하고 
나쁘잖아. 그래서 우리가 브라질에서 온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우리는 나이
스 피플인데 값이 너무 비싸다고 그러더래. 무역상에서 직접 사면 싸지. 우
린 무역상에서  사가지구 파는 거거든. 그런  사람은 안 사더라도 좀  와서 
얼굴이나 봤으면 싶지.
  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대체로 잘생기구 잘 사는 것 같애.  산
토도밍고, 에콰도르 그런  나라는 좀 어려운 것  같애. 사람들이 와서 물건 
사는 걸 보면 알아. 
  마리아라는 페루 여자도 있는데 그  여자는 아주 여기 살면서 장신구 행
상을 해. 내가 불쌍해서 잘해줬어. 살도 찌구 그랬는데 경찰한테 물건을 압
수당하고 ㅉ기면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밖에서 장사하는게 왜 그렇게 불
쌍한지 몰라. 나이는 한 마흔  가까이 됐는데 결혼을 안 했어. 우리 직원들
이 날더러 도둑질을 하는데두 그  여자를 이뻐한다구 그런 말도 하고 그러
지. 결국은 너무 잘해 주니까 그이가 막 와서 너무  염치 없이 굴구 그러더
라구. 그래서 내가 조금 마음이 변하구 그랬어. 
  나는 장사를 할 때 세계 각처에서 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걸 즐기
면서 하구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야. 노라리로 좋아하면서 하
면 안돼.
  1996년 11월 9일
  한국타운에 음식점이 자꾸 생기잖아. 중국집도 맛있는 집이  하나 생겼다
는데 금방 없어졌어. '한밭'이 설렁탕이  맛있지. 사실 어저께 닥터 곽을 대
접할 일이 있어 거기 갔었어. 한국타운은 점점 유흥의  거리로 변해가는 것 
같애. 룸살롱, 맛사지 하는데, 목욕탕,  그게 뭐 꼭 나쁘다기보다 그런 업소
가 너무 많아요. 다닥다다 붙었지.
  한국타운은 해마다 많이 침체해가고 있어. 자꾸 인도  사람들이 들어오구 
중국 사람이 전보다 많은데 못 당해. 우리나라 사람은  가게를 많이 하는데 
그이들은 무역을 많이해.
  중국 인구가 얼마나 많아. 그리구 그 나라가 얼마나 커. 그이들은 행활력
이 좋구 부지런한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는 중국어를 못하면 안 된다  그러
더라구. 전에 이어령교수가 와서 강의 하시더라구. 한문이 4만자인가 5만자
인가 그런데 앞으로는 편리하게 몇 글자로 하는 문화보다 그 문화가 큰 문
화가 될 꺼라고 했는데, 그 말이 옳은 것 같애.
  중국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물건도 이젠 참 좋아. 전에는  거기서 오는 것
들은 싸고 안 좋게 생각했잖아.  그런데 안 그래. 어떤 물건은 값에 비해서 
너무 좋아서 조금 거저한 얘기지만  직원이 차이나라고 쓴 레벨을 뜯어 버
려요. 이건 차이나로 팔면 안된대.
  우리 물건하러 중국회사에 갔었어, 수입 상회. 몇 년 전만 해도 초라했던 
회산데 지금은 굉장히 기름져 보여. 물건들은 이쁜 걸로  잘 해놓고 직원들
도 생기발라하게 막 일해. 그런데 한국 수입상들이 어렵다는  말을 너무 많
이 들어서 그런지  중국회사를 가서 보면 조금 우울해요. 전체적으로  세계 
경제가 나쁘다는데 한국 사람이 조금 더 고존하는 것 같애.
  우리 나라 인건비가 너무 올라서  한국 수입상도 한국에서 수입을 못 해
와. 중국에서 히와야 돼. 중국 사람이라고 다 잘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ㅇ르
은 끈기가 있고  단결력이 강해요. 그이들은 함께 비즈니스 파트너를  하면 
성공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파트너를 하면 꼭 싸운대.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많이 뭉쳐 있는  것 같애요.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와도 가게 직원들
이랑 자꾸 전도를 하고 그러는 게 있어요.
  이런 말이 있지, 문학은 향수병 같아서 마개를 열면 다 날아간다구. 그런
데 선교는 마개를 자꾸 열고, 입을 자꾸 열어야 되나봐.
  1996년 11월 20일
  손님얘기 하나만 더 할까? 
  이름이 크리스티라는 백인인데 어느날 우리집에 와서 물건을 사다가 '나, 
이혼했어'그러는데 막 눈물이 쏟아져.  자기 남편한테 젊고 예쁜 여자가 생
겼대. 나는 그 남편을 봤어. 전에 크리스티하고 같이 물건도하러 오고 그랬
거든.
 내가 서투른 영어로 '네 남편이 그러면 되느냐,  참 나쁜 사람이다'막 그러
니까 아니래.  자기를 10년 동안 굉장히  사랑해 줬고 자기들 사이에서  난 
아이를 사랑해 줬다구. 그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가  이쁜 아들을 갖게 
되었고 자기는 행복했었다구. 눈에는 눈물이 나면서 ㅇ어.
  남편하고 같이 왔을 때 한 다슨에 5불 50전 하는  귀걸이를 많이 샀었어. 
이 여자가 물건을  다 사가지고 나가는데 머리를 빨갛게 물들였더라구.  그
때가 봄인데, 그 머리에 봄바람이 지나가는게 꼭 구멍  뚫린 바람이 불어대
는 거 같았지. 그 사람 뒷모습이 쓸쓸하면서도 우아하게 보였어.
  난 언제나 사람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손님들에겐 더욱. 내가 부지
런하게 물건들을 잘 갖춰 주지 못하구 그래서. 남편한테두 미안해. 그건 정
말이야. 내가 이렇게  깔끔하질 못해서 이런데서도 정돈을 자랗고 살면  되
는 데 그러질 못하니까.  장사 수오나두 없구, 딴데 마음이 가 있구. 책  같
은 거 좋아하니까 그게 딴 거지.
  그리구 직원들한테도  미안해. 장사 잘하는  주인을 만나서 직장  생활을 
하면 얼마나 떳떳하고 편안하겠어.  물건을 펑펑 많이 사오지도 못하구. 물
건값을 잘 갚아야  좋은 물건이 펑펑 오거든.  그걸 우리가 많이 못하잖아. 
지금은 직원이 두 사람 있어요. 나는 또 친구들한테도 미안해. 주변 사람들
한테서 나는 너무 받는 게 많은 거 같애. 나는 뻔뻔하게 산다구.
  난 절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만큼의  사람이 아니야. 그것도 
사기치는 것 같구. 그러구  아이들한테는 말할 수도 없지. 그러나 무엇보다
도 제일 미안한건 하느님이야. 죄를 많이 지어서.
  2
  우리 동네 사람들
  1996년 11월 21일
  우리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UN전임자가 리버데일에 아파트를 얻어 줬
어. 이십몇 층이 되는 건물 인데 아주 오래된 건 아니지. 거실이 크구 침실 
두 개. 욕실 하나에 다이닝 룸이 조그만 게 있구, 베란다가 꽤 컸어.
  그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아주 끝도 없는 숲이 보였어. 거기가  용커스에 
있는 뱅코트  파크라는데 꼭 지평선을 보는  것 같았어. 여기 미국은  집이 
숲속에 있잖아. 길도 숲속에  있구. 그래서 차도 숲속으로 다니는데 여름에
는 숲이 무성해서 안 보이지만 겨울에는  집도 보이고 차 가는 것도 다 보
였어.
  우리가 일선에 있을 때 우리 휴전선하고 저쪽 휴전선 사이가 비무장지대
였잖아. 그 길이가 4㎞였거든. 리버데일 우리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이 꼭 
거기 같았어. 숲만 자욱한 연기 같이 있는 게 꼭 그랬어.
  베란다에서는 버스  정류장도 보였어. 그래서 내가  오후 3시 반쯤  되면 
밖을 내다봤어. 애들이 학교에서 오나 하구. 그게  조그맣게 보이잖아. 흑인
애가 내리는데도 우리 앤가 하는 때가 참 많았어. 우리가  살 때만 해도 흑
인애들이 거의 없었어. 그런데 이상한 게 백인 애들이  니래면 머리가 노랗
고 그래선지 우리  애들 같지가 않은데, 흑인애들이 내리면 우리애들  같기
두 하고 그랬어.
  그 동네가  괜찮은 동네더라구. 내가 저녁에  너무 마음이 이상하다든가, 
저이하고 싸웠을 때  밖에를 나가. 나가면 봄에는  목련꽃이 많이 펴 있어. 
자목련인데 꽃이 너무 많이 펴서 손으로 잡을 수도 있었어. 그리구 질경이, 
민들레, 그런 것을 길가에서 봤을 때 굉장히 친근감을 느끼게 되더라구.
  우리 아파트에서는 숲의 지평선이 보이는데 반대쪽 아파트에서는 허드슨 
강이 보여. 우리가 처음에 고생 안 할 때는 식구들이  저녁 먹고 거기를 많
이 갔었어. 가다가  후리스 비라고 원반 던지는  것도 했었지. 첫여름은 그 
아파트에 있는  사우나, 수영장, 그런  것을 맣이 이용했어.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10·26사건을 당했잖아. 그러니까 숲이 안 보이더라구.
  생계가 어렵고 그럴 때 아파트에다가 재봉틀을 놓고 바느질도 하고 그랬
었어. 그러기 시작하면서부터 허드슨  강도 안 가보고 수영장, 사우나도 안 
갔어.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 수영장이 현관  앞에 있구 그런데도 안 
가게 되더라구. 그래도 목련꽃  핀 데는 갔었어. 베란다에서 보이는 광활한 
들은 나중에 다시  아름답게 보이더라구. 어느 날인가 폭풍이 왔는데  내가 
낮에 집에 있었어.  그 나무 숲을 강타하는  바람이 정말 무섭더라구. 나는 
한국에서 그런 걸 못  봤거든. 거기서는 겨울바람 소리가 꼭 무슨  우는 소
리 같애. 굉장히 날카로운 그런 소리들이 들렸었어.
  1996년 11월 26일
  리버데일 아파트에 살  때 우리 바로 옆 동에  백남준 씨 작업실이 있었
어. 그이가 혼자는 아니지만 빌딩을  몇 개 가지고 있대. 그리구 이 아파트
도 그분이 산 거야. 그땐 내가 조금 시간이 있구 그랬던 때거든. 그래서 그
이하고 좀 어울려 놀았어. 그 아파트에 살면서 즐거웠던 일 중에 하나야.
  우리집에도 오구 그랬는데 우리  애들보구 아버지도 시를 쓰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했더니 '아이구,  다행이다' 그러면서 아버지까지 시를  쓰면 큰일
날 뻔했지 그러더라구.  집안에서 엄마가 아파 누워 있는 것보다는  아버지
가 아픈 게 낫다는 그런 얘기도 하구. 그이는 얘기가 없잖아.
  우리가 처음 주얼리가게를 했을 때는 가게에도 몇 번  들르셨어. 이 거리
를 잘 걸어 다니신대. 자기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한국 사람들하고 말
을 한 대. 그러면서 ABC라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다가 팔라고 선전하며 다
녔다구 그래서 우리가 박장대소를 했어.
  그분 아파트는  가서 보니까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조그마해. 다  망가진 
옛날 TV 수상기만  몇 대 있더라구. 그리구  진흙 같은 걸로 어떤  형상을 
만든 게 있어. 어떤 작품을  만들다 만 거래. 나중에 문화원에서 전시할 때 
보니까 그 망가진 TV  갖다 놓고 비닐우산 펴놓고 그랬더라구. 우리는  거
기서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어.
  그때 그이가  리버데일 아파트를 세놓고  싶어 했어요. 날보고  누구한테 
세를 놔서 세를 좀  받아달라고. 그게 10년 전인데 보통 그때  시세보다 조
금 비싸게 달래.
  그렇게 지내다가 총여사가자기와 자기 친지들을 초정하는데 같이 가자구 
해서 갔었어. 그이는 똑똑하지만 참 순진하더라구. 그래서 부담이 없어.
  서울올림픽 아트비디오를 해야 하는데 정부에선 돈을 안 준다는 그런 얘
기도 우리 가게에 와서 몇 번인가 했었어.
  그이는 한국에서도 그렇구, 세계적으로도 더 유명해지구 우리는  더 바빠
지구 그래가지구 오랫동안 서로 오가지 못했어. 나도 소식을  못 전하고 그
랬어.
  그러다 얼마 전에 그이가 아프다는  말도 듣구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너
무 반가워해.  '그때 사카린도 했었지'  하는데 나는 우리가 사카린  장사한 
거는 잊어버리고 있었어. 자기가 조금씩 걷구 그러면 ABC 가게에 꼭 들르
겠다구 그래서 혹시나 그이가 딴  데로 갈까 봐 지금은 '에덴'으로 가게 이
름을 바꿨다고 말하고 지나가게 되면 꼭 오시라고 그랬어.
  사람들은 그이더러  천재라구 그러지. 그런데  나는 그이가 천재  같지도 
않구 아주 자상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애.  점심이나 같이 하자
고 내가 그랬더니 별로  먹지를 못한다구, 저녁은 거의 안 먹고  낮에도 조
금만 먹는다고, 먹는 것보다  얘기나 좀 하자구 그러더라구. 건강이 제일이
다, 그런 말도 하구. 
  1996년 12월 4일
  리버데일 아파트에 사는 동안  어려운 일도 겪었고, 고양이도 길렀고, 아
이들도 바로 거기서 사춘기를 보냈지.
  그대 김종율 장로라고  우리랑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10층에 살았
어. 우리집은 6층이구. 우리가 어려웠을  때 그 부인이 시장에 가면 장로님
이 6층 것도 사다드리라구 그런대. 김치거리 같은  건데 돈이 많고적고보다
도 참 고마웠어. 거기 그런 좋은 친구들이 있었어.
  비무장지대 같은 숲이  앞에 보였다고 그랬잖아. 거기를 내가 많이  바라
봤지.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차가 달리는 것도 아른아른  보이고 집도 조금
씩 보였어. 그렇게 보이던  집 중에서 하나를 사가지고 이사한 게  바로 지
금 사는 이 집이야. 지금 우리집 뒷창에서 밤에 어떻게  잘 보면 우리 살던 
아파트가 조금 보여.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우리 살던 아파트 세  동이 굉장히 우아하게 서 
있어. 글세 이 세상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 우아하게  보이는 아파
트 안에서는 알마나 지지고 볶고  싸우고 절망하고 울고 불고 좋아하고 기
뻐하고 그런 게 많아.
  암스트롱이 달에 가서 지구를 보니 약간 푸른 것이 보석같이 아름다웠다
는데 그 안엔 얼마나 많은 전쟁과 인간들의 고통이  있어. 아파트를 보면서 
저 속에서 내가  절망하고 분노하고 염려하고 자랑도  하고 그랬던 것들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이 망밍해진 것 같애. 이젠 그런 감정이 진력이 나. 너그럽게 살아야
겠다 싶구. 너무 아옹다옹할  필요가 없구나 해. 그렇다고 아름답게 생각할 
수만은 없어. 아파트가  나에게 ㅁ낳은 교훈을 준다고 해도 그게  그때뿐이
야. 아직도 뭘 멀리 보고 살지를 못해.
  아쉬운 마음도 있어.  거기서 조금 더 아파트를 이쁘게 꾸며놓고  살지를 
못한 게 후회스러워. 지금도 우리 사는 집을 이쁘게 꾸미고 살진 못하지만. 
나중에 후회하겠지. 그런데 다른 집에서 살게 되는 그 나중이 있을는지….
  리버데일 아파트에선 이웃이라는 게 다 미국 사람들이었어.  바로 옆집은 
유대인이고. 여러  가지로 낯설고 그랬었지. 그러면서도  한국 사람이 옆에 
없다는 게 자유스러웠어. 이상스럽게 꼴을 하고 나가도 한국  사람만 안 보
면 된다 싶었어. 사실을 그 반대라야 되는데 말이야.
  아파트 밑에  후드 엠포리엄(Food Emporium)이라는 슈퍼마켓이  있었는
데 야채부, 과일부  등을 예술 작품처럼 해놨어. 참 예뻤어.  그 슈퍼마켓엔 
가끔 갔지만 갈 때마다  참 즐거웠어.    그옆에 있는 옷집은  20불짜리 치
마라도 굉장히 고급스럽고 무슨 로라애슐리 같은 옷들 같았어.
  10여 년 만에 가봐도 거기 거리는 똑같애. 골목도 똑같구. 목련 나무라든
가 아카시아가 비탈에  있는 것도 그대로야. 거기가 우리 애들이  사춘기를 
보낸 데 아냐. 그래서 나느  그 거리가 안 변했으면 좋겠어. 거기에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 있어서 우리가 많이 사다 먹었어.맛있었구. 맥도날드도 그 
옆에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애들이 좋아하구 그랬지. 나는  그 동네가 미국
에서의 고향 같애. 고향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싶더라구. 어떤 때 저이 
보구 그 동네엘  가자구 그래. 철물점, 스테이크 하우스, 술집은  그냥 있는
데 주얼리 가게는 그렇게 변했더라구.
  1996년 12월 6일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차차 집을 사가지구 이사들을  가더라구. 그러니
까 초조해지면서 우리도 집이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
  이건 현실적인 얘긴데 그때가 막 집값이 올라갈 때였거든.  20만 불에 산 
집이 50만 불이 됐다구 그런 말들도 있었는데다가 미국집은 한국집보다 환
상적인 것 같았어. 거기 드어가보구 싶기도 하고 살고 싶고 그랬었어. 옥심
이랄까, 꿈 같은  게 생겼어. 장차 며느리를 봐도 그렇구,  애들 친구한테도 
그렇구. 지금 생각하면 참 부질 없는 꿈이었어.
  아파트는 그냥 세를 내고 사는  거니까 한국으로 치면 그냥 사글세지 싶
었고, 또 저이가 적극적으로 집을  원했어. 나는 조금 그저 집을 살까 어쩔
까 그런 게 귀찮다고 그러면서 집을 보러 다녔어.
  정말 내가  집보러 다닌 얘길 해야  돼. 집을 보러 다니면서는  엉뚱하게 
가슴이 두근두근한  게 금방 살 것만  같았어. 우리 동네는 사실  비싼데는 
아냐. 스카스데일은 우리  동네하고 붙었는데 거긴 뉴욕 일원에서 제일  비
싼 데 같았어.
  우린 아이들도 다 커서 좋은 학군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또 돈도 없어
서 용커스로 정했어. 나는 용커스라는 이름이 이유도 없이 너무 싫었어. 그
러나 여기가 한 가지 좋은 것은 맨해튼이 가깝다는 거야.
  어떤 언덕에 있는 집을 봤는데  나는 그 집이 좋았어. 집값도 쌌어. 동그
란 나무로 정교하게 잘 만든게  아니고 턱턱 얹은 통나무 울타리가 좋더라
구. 그런데 그이가 그 집은 너무 좁아서 싫다구 그래서 못 샀어. 어디는 가
니까 풀장이 있는 집인데  유령이 나올 것처럼 너무너무 커. 그런  집은 많
더라구. 비슷한 값인데 나는  그런 집은 그냥 줘도 싫어. 너무  무서워. 3층
까지 있는데 맨위층은 완전히 폐허가 됐더라구. 쓸 필요가 없었나 봐.
  지금 우리집은 크지는 않은데 무드가 있다고 그럴까 그런  집이 있어. 용
커스 중에서는 가장 좋은 동네야. 집냄새도 좋았어.  그런게 있더라구. 인상
이라구 그럴까. 어떤 집은 들어가면 노린내가 나요. 또 어떤 집은 들어가면 
시지근한 냄새가 나는데, 이 집은 소나무 냄새가 나더라구.
  우리집은 앞이 나무에 폭 싸였어. 그리고 안정된 느낌이  들게 집 내부를 
브라운으로 꾸몄더라구. 현관부터  부엌까지가 연고동하고 진고동 색깔  타
일인데 나는 그게 너무 황홀하고 좋았어. 그런데 막상  와서 살아보니까 그
런 게  좋구 그런 건 잠깐이야.  생활이 피곤하고 그러니까 대궐에  살아도 
그렇겠다 싶어.
  우리집엔 꽃이 그렇게 많아.
  4월부터 진달래로 시작해서 철쭉, 대그우드. 대그우드라는 나무에는 하얀 
꽃이 피는데,  본홍 꽃도 있어. 우린  하얀 거. 영산홍은 8월까지도  나무에 
꽃이 피더라구. 또 9월에는 파란  열매를 맺구. 어, 정말 목련도 있어. 땅에
는 겨울에도 안 얼어죽는 풀 있지? 그런게 쫙 깔리구.  서재에서 밖을 내다
보면 달빛이 사철나무  잎에 하나하나 다 얹혀져 있어. 그런데  내집이라는 
게 나를 동여맨다는 걸 몰랐어. 청소 그런거는 문제가  아니고 부금을 내야
잖아. 그러니까 내가  일을 더 많이 해야 되구 더  멍에를 지는 거야. 집에 
있으면서도 단 열흘이라도  즐기고 싶었어. 지금 그  집 산지가 9,10년짼데 
여ㄹㄹ도 채 즐기지 못했어. 주말에는 집에 있고 그렇지만 그게 잘 안돼.
  1996년 12월 10일 
  우리 사는 데가 조금  옛날 동네야. 우리 옆집엔 태국 사람이  사는데 남
편은 은행에 다니구 부인은 간호사인데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뒀어. 지금은 
큰아이가 대학교를 다녀. 우리가 이사왔을 때는 아이들이 어렸었지. 부부가 
근면해 보이구 좋더라구. 옆집인데도 왔다갔다할 사이도 없어서  길에서 만
나면 인사나  하고 크리스마스 때  카드나 나누는 정도였어.  우리집하고는 
울타리 하나 사이야. 목련나무가 하나 있고, 그 나무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
에서 주목이라고 부르는 나무로 울타리가 되어 있어.
  그이들을 지난 가을쯤에 봤는데 내가 별일 없냐고 인사하니까 별일이 있
대. 자기 남편이 봄에 죽었대. 여름이 다 가도록 옆집에서 내가 모른 거야. 
  그 집 남편은  심장마비였나 봐. 그냥 쓰러졌는데 일주일만에 갔다고  그
러더라구. 한국식으로 내가  왜 우리를 장례식에 안 불렀냐고 했더니  우리
가 너무 바쁜  것 같아서 그랬다구, 그렇잖아도 생각은 했었다고  그러더라
구.
  그런데 그 후에 그 집 딸아이가 코넬 대학을 다니다가 뉴욕 의대로 갔나 
봐. 남편 사망시 연락하지 않아서 내가 너무 섭섭해  했더니 그뒤로는 무슨 
집안일이 있을  때마다 말해줘. 그 집  아딜은 아직 고등학교 다니는데  그 
뒤로는 걔가 굉징히 측은하게 보여.
  우리 집하고 그 집 울타리 사이에는 한국으로 말하면  참나물이 많아. 그 
집이 우리보다  더맣아. 그 나물이 봄에  나오는데 그 집은 그것을  화초로 
길러. 5월쯤 되면 메밀꽃 비슷한 하얀 꽃이 펴. 그집의 것두 우리가 뜯어다 
먹는데 갑자기 손님이 오면 뜯어다가 무쳐 놓아도 맛있어.
  태국집 다음에는 백인이  살구. 그 다음 집이  굉장한 집이야. 그 집에도 
백인이 사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을 굉장하게 해. 11월말 경 추수감사절  다
음날이면 불을 켜는데, 거짓말하면 안 되지. 아니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대
강 말하면 얼마나 돈이 드느냐 하면,  가설만 하는데 3천 불이 든대. TV에
도 나와, 일본 TV에도 나왔대. 그런 거 처음 봤다고 사람들이 다  그래. 롱
아일랜드 그런 데 가봐도 이렇게 대단한 건 없다고 그래.
  마당에 산타 클로스가 썰매를 타고가는 것도 있고, 다섯  명의 가족의 찬
송가를 불러요. 그게 다 인형인데  사람만큼 커. 어른 들하고 아이 셋이 그
냥 서있는 게 아니라 입을 버리고 노래를 해요, 찬송가도 틀어놨어. 그러구 
그 다음에는 산타 클로스가 기차를 타고 빙글빙글 돌아.  그 다음에는 예수
님 말구유가 있어. 동방박사  셋이 있구 마리아가 있구. 크리스마스가 지나
면 얘기가 말구유에  누워 있어. 지금은 크리스마스 전이니까 말구유가  비
어 있어. 또 나무가 다 불이야. 나무마다 작은 전등이 너무 많아.
  우리가 코너집이니까 저녁이면 우리집 아ㅍ로 그 집 구경하러 가는 차들
이 계속 지나가거든. 그래서였는지  누가 우리집에 와서 그래, 통행료를 받
아야겠다구.
  그 집은 부활절에도 그렇게 하더라구. 부활에 관한 거 많이 해놓구, 할로
윈 같은 때도 보통 집들처럼 호박등만  해놓는 게 아니구 딴 것도 많이 해
놓구 그랬어.
 한번은 최선자라고 연예인 교회에  다니는 믿음이 좋은 이가 서울에서 왔
었어. 내가 그 집 자랑을 막 해놨는데 그날은 불이 안 켜져 있었어. 그래서 
내가 막 가서 벨을 눌렀어. 주인이 깜짝 놀라서 나왔는데, 서울에서 무비스
타가 왔다고 그러니까 주인이 미안하다면서 켰어. 깜빡 잊고 못 켰대. 매이 
ㄹ켜려고 하니까 어떤 날은 잊어버리기도 하겠지. 그러면서  다음에도 그런
일이 있으면 와서 말해 달라고 그래. 그게 그이 보람인가 봐.
  그 집은 전기세가 좀 많이 나오겠어. 그거 장치하는  데도 며칠을 하더라
구. 주인이 하는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와서 하는 거  같애. 뗄 때도 금방 
못 떼고 사람드이 와서 계속 작업을 하더라구. 
  우리 집 앞뜰에도 잘생긴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나무가  있어. 그런데 우
린 그 트리에 불을 안 켜봤어. 그 집이 너무 화려하니깐.
  12월이나 정초나 어떻게 보면 만감이 서리구 후회스러운 일도 많고 쓸쓸
하기도 하고 초조하고  그런 때 아냐? 그런데 그 집  불 켠거를 보면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즐거워져. 그 집에서도 그래서 그렇게 하는 거 같애. 사람
들이 와서 웃으면서 야, 이거 보라고 야단하는 거  보면서 같이 즐거워하는 
게 좋아서.
  1996년 12월 12일
  태국 사람 장례식에는 못 가서  섭섭했지만 여기 와서 다른 사람 장례식
엔 많이  가봤어. 교회분이 돌아가셨을 때랑,  대개들 결혼식보다 장례식엘 
많이 가라고 그러잖아. 그래서 장례식엔 잘 다녔어.
  여기 와서 처음 간 장례식은 친구의 언니 장례식이었는데 가깝게 지내던 
분이었어. 여기는 다 까만 옷을 입잖아. 그리고 죽은 이를 유리 같은 데 넣
어놔서 얼굴을 보이게  해놨어. 나는 그게 사람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만들
어 놓은 건 줄만  알았다가 알고 나서 굉장히 섬뜩했어. 오랫동안  그 장면
을 잊을 수가 없더라구.
  그 후에 우리 교회에서 홍성욱 대사라고 가깝게 지내던 분이 돌아가셨을 
때는 조시(弔詩)를 쓰라고  그래서 내가 조시도 읽고  그랬어. 참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이었어. 부부끼리 나가서 기도하고 분향하는데  난 그분이 
살아서 교회에 온 것처럼, 와서 악수를 하는 것처름 그분을 만졌어. 굉장히 
차더라구.
  어떤 장로  부인이 죽었을 때 간  장례식에선 많이 놀랐어. 그이는  보통 
때도 얼굴이  해맑고 이쁜 여자였어.  죽은 얼굴에다가 화장을  해놓으니까 
약간 미소 짓는 것 같은 얼굴이 보기가 좋더라구.
  그 부인을 그렇게 보내 놓고 장로님은 혼자 있는 걸로 알았는데 내가 어
느 부흥회르 ㄹ저이하고 갔더니 그 장로가 조기 앞에  앉아 있었어. 그옆에 
여자가 있었는데  얼른 보니까 딱 죽은  부인이야. 생긴 것도 똑같고  머리 
모습도 똑같고. 나는 속으로 날라면서 '아, 윤문희 씨가 살아왔구나. 장례식
까지 했는데 이상하다'하고 잠깐 착각을 했을 정도였어. 알고 보니 그 장로
님이 꼭 그런  사람을 사귄거야. 죽은 아내하고 똑같은 사람을  사귀어가지
고 결혼을 했어. 아주 잘 살고 있대.
  장례식엘 갈 때마다 얼굴을 보게  해주는 여기 장례식이 더 좋다고 느껴
져. 한국에서는 관 속에  들어 있잖아. 관속에 들어 있는 건 더 무섭지.  그
걸 뭐라 그러지? 흉한 죽음인 것 같구 그래.
  그런데 나는 죽어서 얼굴을 드러낼 자신이 없어. 살아서도  자신 없는 삶
이지만. 내 자신은 그럴망정 남은 얼굴 드러낸 게 좋더라구.
  우리가 아파트에 살  때 작은아들 친구 중에  패트릭이란 애가 있었는데 
걔 아버지  직업이 죽은 사람 얼굴  꾸미는 거야. 그러니까 시체를  만져서 
수선하는 사람이야.  교통사고로 죽은 얼굴은 굉장하대.  그런 직업을 가진 
아버지인데도 아이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더라구.
  그이한테 누구는 구두 수선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니까 패트릭 아버지 
말이 아닐 거래. 사람  수선을 해도 돈을 못버는데 어떻게 그렇게  돈을 벌
었느냐구. 죽은 얼굴을 잘 만지는 게 굉장한 기술이래. 산 사람들을 화장하
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하는 일보다 더 힘들다고 그러더라구.
  우리 교회에 나오는 어떤 의학 박사는 시(市)에서 시체를  검사하는 검사
관인데 그이가 하는 말이, 참 이상하대요. 사고로 죽은 시체 검사를 해보면 
어떤 날은 키가 큰 사람만 죽는대. 또 어떤 날은  혹인이 거의고 어떤 날은 
백인, 어떤 날은 뚱뚱한 사람, 그런 뭐가 있나봐.  우리두 장사할 때 그런게 
있어. 어떤 날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저쪽  귀퉁이 물건만 사 
가.
  하여간 어쨌든 장례식에서 여기처럼  소리내서 울지 않고 그러는게 좋은 
것 같애. 한국  사람들은  머리까지 풀지. 그 위에다가 새끼까지 두르고 곡
을 하잖아.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때도 그게  참 
듣기 싫었어.
 우리는 계속 기독교식으로 하는 것만 봐서 그런가. 여기 장례식은 예배야. 
목사님 설교가 아주 독특해요.  내용은 대개가 다 비슷하더라구. 우리가 떠
날 세상에 대해 얘기해 주고 있어.
  1996년 12월 17일
  여기서 한국 사람  결혼식에도 많이 가봤어. 우리 손님이었던 외국  손님 
결혼식에도 가보구. 외국 사람들은 잘 살아도 굉장히 간소하게 하더라구.
  금년에 우리 가까운  분 딸이 결혼으 ㄹ하는데 굉장히 우아하던데.  손님
이 가면 남자 들러리들이 팔을 끼고 이렇게 안내를  해줘. 남자 들러리들은 
다 외국인들이었어. 신랑은 한국 사람인데 변호사고, 우리 아는 집 딸은 의
사 공부를 했는데 여자 들러리들은 동양 사람만 일곱이었어.  둘은 한국 사
람이고 다섯은 중국 여자야. 다 학교 친구들인가 봐.
  예식은 우리 교회에서 올렸는데 우리 교회는 옛날식의 크고 좋은 건물이
야. 100년이 넘은, 화려하진 않아도 클래식한 교회지.  주례는 다른 교회 목
사님이 했는데 영국  사람이고 우리 교회 전도사의 남편이야. 전도사는  한
국 사람이지.
  여기 교회의  전도사들은 대개 1.5세 내지  2세들인데 그건 애들이  한국 
말을 못해서 그래. 암만 믿음이 좋아도 한국에서 온  사람들의 말은 애들이 
못 알아들어요. 영어로 해도 발음 이 틀려가지구.
  그 결혼식에서 인상 깊었던 건 주례였어. 목사님이  주례말씀으로 성경을 
읽을 때 보통은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을 섬기라는 데를 읽거든. 그런데 이 
목사님은 구약 룻기를 읽더라구.
  내가 지금 다  기억을 못하는데 대강의 내용은 이래. 시어머니가  이스라
엘을 떠나서 단 데 가서 살면서 아들 둘을 다  잃어. 시어미니 이름이 나오
미야. 시어미니가 그렇게  말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너희들은  남편
도 없고 하니 새출발을 하라고. 나오미는 우리처럼 이렇게  외국에 와서 아
들 둘을 기르다가 며느리만 남게 된 건데 며느리는 종족이 다른 여기 미국 
며느리 같은 거야.
  작은며느리 이름이 룻인데 그 룻이 시어민한테 하는 말을 결혼식에서 읽
은 거야. 대강 이런 말이지.
  '어머님의 고향이 내  고향이고 어머니의 나라가 내 나라며 어미니의  하
나님이 곧 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따라가겠습니다.'
  말하자면 아들이  없는데 내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작은며느리가 
따라간 거지. 그렇게 가서 나중에 룻이 굉장히 축복을 받았어. 다윗왕의 할
머니가 됐어.
  처음에 가서는 하도 가난하니까 룻이 벼이삭을 주웠어.  그렇게 시어머니
를 공경한 거지. 그러다가 벼이삭을 줍던 논의 임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어. 
  그날 결혼식에 왔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주례사를 다  들었을 거 아
냐. 들러리만 해도 여자가 일곱인데. 난 그게 좋더라구.
  피로연은 딴 데 가서 했는데 굉장히 크더라구. 나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게 크게 하지 않으려구 그래. 너무  크게 하면 초대되어 
가도 소외감을 느껴.  어떤 결혼식에는 갔더니 한  500명이 왔더라구. 한국 
사람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왔어. 난 괜히 갔다 싶었어.
  한번은 조그만 피로연에 갔는데  신부가 친정아버지하고 춤을 추면서 그
렇게 많이 울더라구.  참 보기 좋았어. 춤은  신랑, 신부가 제일 먼저  추고 
그 다음에 아들하고 어머니가 추지.
  미세스 민이라는 이는  한국 며느리하고 미국 며느리를 봤어. 한국  며느
리도 여기서 공부한  앤데 시어미니를 미세스 민이라고 불러요. 그거는  미
국식이지.
  식당에 가도 한국  며느리는 아들하고 둘이 싹 들어가고 그런대.  작은며
느리는 이탈리아 계통의 미국 여잔데 약혼했을 때부터 이미 마미라고 부르
고 식다에 들어가도 어머니가 들어올 때가지 문을 열고 서 있대.
  그리고 그 집에 초대받아 갔더니 며느리가 서서 그러지 않고 뒷걸음질치
며 무릎으로 걷더래. 엉덩이를  안 보이더래요.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너
무너무 좋아하는데, 외국 며느리라고 다 나쁜 거는 아닌가 봐.
  그러구 미국 조금 상류사회 결혼식에도 한 번 갔었거든.  상류라는 게 다
른 게 아니라 돈이 많은 유대인 거였어. 그때 저이는  회색 양복을 입고 갔
고, 나는 빨간 실크 윗도리를  입었어. 그런데 여긴 결혼식 정장도 까만 건
가 봐. 미국 남자들은 다 까만 양복을 입었고 여자들도  다 까만 정장을 입
고 왔더라구. 벨벳 이런 것도 다 까만 거를 입었어. 나는 빨강 실크 윗도리
가 창피해서 혼났어. 이쁘게 입고 간다구 그걸 입고 간 건데.
  점점 결혼식이 많아지는데  사실 나는 결혼식에 가기가 싫어. 우리  애들
이 혼기가 넘었는데도 아무도  결혼을 안했으니까 부럽기도 하고 갔다오면 
더 걱정이 돼. 내가 결혼식에 다녀오면 자꾸 속상해하고  그러니까 우리 애
들이 나보고 결혼식에  가지 말래. 그런데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데  어떻게 
결혼식에를 안 가.
  나는 아이들이 아주 결혼을 안하면 안 될,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
길 바래. 그러면서도  결혼식에만 갔다오면 화도 나고 부럽기도 하고  그러
니 내가 의지가 좀 약한가 봐.
  1996년 12월 24일
  여기, 이  동네는 50년도 더 된  꽃시장이 있는데 우리 같은  도매상들이 
들어와서 기존의 꽃집들하고 같이 장사하는 거야.
  내가 집에서부터  가게로 나올 때는 7번가에서  28스트리트로 해서 들어
와. 7번가는 맨  밍크 도매상들이라구. 28스트리트에도 밍크상이  몇 집 있
어. 그 몇 집만 빼놓고는 다 꽃 도매상들이야.
  어떤 집은 앙란만  파는데 밖에서만 봐도 참 이뻐. 하얀색,  자주색 해서. 
그리고 어떤 집은 국화 종류만. 국화 종류도 많더라구. 백일홍 같이 생겼는
데 백일홍보다 훨씬 때가 벗어진 가베라라는 꽃도 국화  종류에 들어가. 실
크플라워만 하는 집도 몇  있어. 그 중에서도 마른 잎하고 마른  꽃만 하는 
집이 있는데 그건 인공으로  하는게 아니고 다 말려서 하는 거야.  장미 같
은 거를 어떻게 기계로 말렸는지 살아 있는 것처럼  이쁘더라구. 화분에 담
긴 관상 식물을 하는  지도 많아. 그런가 하면 왼쪽 맨끝  코너집은 정원에 
놓는 돌과 돌조각들로 가득차  있어. 비너스상도 있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
람' 비슷한 것도 있고 아름드리  돌로 깎은 화분이 가득차 있어. 천사도 많
고.
  6번가에도 무지무지하게 큰 꽃 도매상들이 많이 있어.  꽃 도매상들은 새
벽 4시쯤에 일찍 문을 열어. 아침 7시쯤에 지나가다가  들어가 보면 그렇게 
냄새가 좋은 꽃들이 다발다발 박스에 그냥 있어. 아직 상품이 되기 전이야. 
그래서 꽃이라기보다는 야채 같기두 해. 어떤때는 그런  것들은 기술적으로 
하나도 시들지 않게 하면서 비행기로 운반을 한 대.
  요즘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그런지  소나무 냄새가 많이 나구 포인세치
아로 집집이 덮여  있어 온통 빨갛구 노랗구 거기에  색바랜 것 같은 것두 
있는데 그런 것두  이뻐. 그래도 역시 빨간게  크리스마스 상장이 되지. 이 
때쯤 되면 초록잎이 빨갛게 된다구, 계속.
  크리스마스가 되면 뉴욕은 마법의  도시가 되는 거 같애. 화려하잖아. 록
펠러 센터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2만 개의 오색 전구가 살아나는 것
처럼 빛나구, 천사들이 그 밑에서 나팔을 부는데 참 평화롭고 화려하대. 몇 
년 전에는 호두까기 인형 같은  것을 상점 쇼윈도에서 하는 걸 지나가다가 
봤어. 5번가에 샤넬이라든가  티파니, 구치 같은 데도  얼마나 예쁘게 해놨
어. 기가막히게 해놨잖아.
  그리구 이 때가 되면 이 도시를  온통 음악으로 다 휩쓰는 거 같이 느겨
져. 헨델의 메시아 같은 게 연주되는 거창한 음악회도 많구. 거리엔 어디나 
캐롤 그런게 울려퍼지고.
  그렇지만 나는 이 근처 꽃시장에 꽃을 사러 다니는  꽃 소매상들, 그렇게 
생활하기 때문에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화려한 데보다는 
그런 사람들한테 찾아오시지 싶어.  조그만 선물을 서로 나누고, 음식 서로 
나눠먹고 그런 데가 따뜻하고 좋아서. 나에겐 언제나 함께  있는 따뜻한 이
웃 ABC핸드백의 이장로님 부부가 있어서 더욱 흐뭇한 성탄이야.
  1996년 12월 30일
  내가 참 좋아하는 꽃집이 있어. 바로 옆집인데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쌔미라는 사람이 주인이야. 그  집은 첫째 싼 게 좋고 오래  이웃으로 있다 
보니까 친해서 좋고. 그러구 그  주인이 이 '미세스 박'을 좋아한대요. 내가 
가면 직원들한테 막 화를 내대가도 얼른 그치곤 해.
  그런데 이 꽃집을 3대째 하고 있는 거래. 할아버지서부터 아버지, 아버지
는 아직 살아계신데 가끔 가게에 나오셔. 참 그러고  보니 아들까지 나와서 
하네. 그러니까 4대째네, 지금. 아들은 젊어. 스물 몇 살쯤 됐어.
  꽃집 하는 데가 4층 건물인데 그게 자기 꺼래요. 그  건물은 우리 집에서 
오른쪽 옆집이고, 우리  왼쪽으로는 분위기 좋고 우아한 작은 빌딩이  있는
데 그 발딩도 쌔미네 거야. 굉장하지는 않지만 재산이  그렇게 있는데두 그
이는 참 근면해. 7일을 계속해서 열고 쉬는 날이 없이 일을 해. 그 집 직원
이 스물 몇 명쯤 돼. 배달도 몇 사람이 하고. 크진 않지만  바쁜 집이야. 그
런데두 어저껜가 보니까 장례 꽃 큰 거 둘을이 사람이 번쩍번쩍 들고 그냥 
트럭에다 갖다 넣더라구. 난 그이가 직원인줄 알았어.
  쌔미 부인은 초등하교 교사였다는데 남편보다사람이 섬세하고 우리가 보
기에 우아해. 거기서 일하는 한국 여자 한 사람이 있거든. 그이가 그러는데 
부인이 우울증이 좀 있나 봐. 그래도 참 마음이 곱고 좋대요.
  이런 크리스마스나 무슨 날일 때  나는 그 부인한테 브로치를 하나 선물
해. 거기서는 장미를 보내와. 내  생일 같은 때 우리 아들이 전화를 해가지
구 여기로  꽃배달을 보내는데 그래서 내  생일을 아니 봐. 뭘  받고줘서가 
아니라 참 훈훈하고 좋은 이웃인 거 같애.
  그러구 그 집은 꽃이 딴데 보다 반값밖에 안돼.  도매상 비슷하게 하며서 
소매를 하는  거야. 한국 사람들이 어떤  때는 나를 다리놔서 거기서  꽃을 
사기두 하는데 그러면 조금 더 싸게 줘. 그 집에서  일하는 한국 여자 말이 
미세스 박이 산다하면 쌔미가 특별 가격으로 그렇게 준대요.  내가 뭐 좋아
서라기 보다는 그냥 옆에 오래 사니까 그런 것 같애.
 여기 가게일이 너무  힘들고 불안할 때도 많잖아?  그럴 때면밖에 나가서 
그쪽을 이렇게 바라봐.  그러면 그게 상품이든 뭐든 꽃냄새가 거짓말은  못
하잖아. 꽃처럼 이쁜게 어딨어. 거짓 없는 빛깔, 거짓 없는 향기, 그걸 그냥 
내뿜는 거야.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다 뺏어가지 않고 꽃에다 남기셨어.  꽃이 참 위안이 
된다구. 그게 어디 나뿐이겠어? 다 그렇겠지.
  1997년 1월 3일
  요 브로드웨이 부근에  한국 사람들이 옷가게, 모자가게,  신발가게, 장난
감가게, 가방가게, 또  무슨 잡화(장갑, 머플러) 그런 가게를 많이  하지. 한
국 사람이 거의 다 해. 주얼리도 우리처럼 몸에다 하는  거 말고 머리에 하
는 거 파는 집이 있어. 보우라고 하는 머리핀 이쁘게  한 거며 헤어밴드 집
게 같은 거, 클립이라고 하지 그런 거는…. 우리도 그런 걸 하긴 해.
  하여튼 이렇게 여러가지 가게를 한국 사람이 하고 있는데 금년 연말연초
는 너무 안 춥잖아. 그게 좀 타격이 돼. 모자나 장갑, 스카프   같은 겨울용
품이 많이 팔려야  딴 것두 사구 그런데.  이상하지. 그런게 팔려야만 돈이 
돌아가서 다른 것두 사구 그러는데 금년엔 그게 완전히  스톱 됐대. 금년엔 
전체 경기가 나쁜데다가 날씨까지 더워서 그렇대요.
  또 사회복지금 같은 게 없어지잖아. 법으로 사회복지금이  다는 아니자만 
그게 삭감돼서 시민권이 없으면 못타고 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준대
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불안한 거야. 가난한 사람들은 불안해서 돈을 못
써요. 그런데다가 한국 사람들이  하는 작은 가게들은 비싸대요. 비싸서 오
질 않는대.  메가스토아라고 대형스토아가 많이  생기니까 소상인들은   더 
어렵지. 그게 참 마음이 아픈 얘기야.
 브로드웨이 중심으로 도매상점이 없는 게 없는데 그게  다 활기가 없어요. 
그러구 한국 사람들이 바삐 와서 사던 그런 모습이  없어졌어. 사람들이 가
방두 1년 들던 거 2년 들구, 우리가 하는 이런  장신구는 안 걸으면 그만이
지.
  암만 이렇게 불경기구 그래두 외국에서들은 와. 그  보따라장사들이 오면
은 좀  사가지구 가요. 뉴욕이나 이  근처 사람은 어렵지만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멀리서 오니까  돈으 ㄹ가지고 와서 조금씩이라도 사요. 조금  전
에 세네갈 손님이 왔었는데  안 변하는 거, 안 변하는 거  하면서 사가지고 
갔어. 거긴 땀이 나니까 싸도 변하는  거 팔면 다신 안 와. 진주 계통은 잘 
안 변하잖아. 질이 좋은 거는  까지고 그럴게 없잖아. 그런 걸 사기 위해서
도 많이 와.
  그런데 외국 사람들만 가지고는 50년도 넘은 여기 도매상의 파워라 할까 
그 파는 양을 충족을  못 해. 그래서 사업이라는 게 참  살얼음판 걸어가는 
거 같애.
  그렇게 벌써  한 해가 갔네. 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이즈음은  그런대로 
정초 분위기가 있어.  하다못해 과일이나 와인병이라도 나누고  중국집에서
는 계란이 든  그런 맛있는 중국빵을 주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들 그러
지.
  1월 1일은 다 놀아. 어떤 곳은 3일인 오늘까지도 노는 집이 있어요. 그러
구 또 전에 빌려준  돈 받을 것이 있어도 이럴 땐 조심하고 안  받구 그래. 
내주나 되야지 정상적으로 모든 게 제 궤도에 오를 것 같애.
  1997년 1월 7일
  오늘은 뒷집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 우리 뒷집에 한국 사람이 살아요. 우
리가 이사오고  바로 그이네도 이사를 왔어.  그러니까 만 9년을  이웃해서 
산 거야.
  거기엔 할머니가 계시구 딸이 다섯이라는데 지금은 넷째,  다섯째 딸하고 
살아. 이사왔을 때는 딸들이 30대 초반들이었는데 지금은 40대지. 어머니는 
70이 가까우셨어.사위가 둘에  손주가 각각 남매씩 잇구. 대가족이지.  여기 
미국에서 그런 걸 보기가 쉬운일이 아니어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큰딸네 아이는 용이라구 그러구  막네집 애는 스티브인데 그이네를 부를 
때는 스티브네라고도 그러구,  어떤때는 용이네라구도 불러. 큰딸네는 커피
숍을 하다가 꽃무역을 하구, 작은딸네는 그 동네에서 세탁소를 해.
  그 위로는 딸이 셋이 있는데  맏이가 수녀고 둘째는 꽃가게를 하는데 그 
둘째도 언젠가 딸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서 1,2년을 사랑ㅆ었어. 그집이 커
피숍을 할 때는 가게세서 일하는 남자도 그집에서 방 하나에 살았구.
  그 집은  뒤뜰에 참 좋은 채소밭을  만들었어. 거기서 채소가 철철이  다 
나와. 호박서부터 상추, 오이, 고추, 깻잎, 가지 그리고 배추. 배추는 김장을 
할 만큼만 심어. 우리는 심지도 않고서 계속 얻어다 먹었어.
  그런데 그 막내딸이 4,5년 전에 신장이 나쁜 병에 걸렸어. 애석하게도 못 
고친대.
  용이엄마가 일하면서  살림 다 하고 동생을  봐줘요. 살림도 두 집  돈을 
합쳐서 하니까 경제적이지. 집도 하나 가지고 두 집에서  부금을 내니까 아
파트 얻는 것보다 낫지. 아이들한테는 피아노도 가르치고, 바이올린도 가르
치고, 운동, 태권도도 가르치고 그러는데 그런 것도 한 사람이 데려가고 데
려오면 되잖아. 그런  게 참 너무너무 보기가  좋았어. 그러구 만약에 병이 
났는데 혼자 어디서 살았어봐. 애들은 누가 봐주며 남편이랑 어떡할거야.
 대단해. 딸도 같이 살면 어려운데 사위까지 말이야. 사위는 아들도 아니고 
남인데 장모를  모시고 잘 살더라구.  작은사위는 아침에 세탁소엘  가면서 
쓰레기를 내다놓고  가요. 그게 우리집에서 다보여.  큰사위는 잔디를 깎구 
채소밭을 잘 가꿔.  굉장히 남자답고 서글서글한 경상도 사람이고 작은  사
위는 말이 없구 아주 얌전해. 
  대개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말이 많고 친정어머니 모시구 살아도 그렇
잖아. 그래서 여기 할머니들은 대개 혼자 살기를 원하는데  이집은 너무 의
가 좋구 재미있게 살더라구.  그 할머니는 한 번도 난 혼자  살아야겠어 그
런 말  안하구 항상 웃구 그러더라구.  그 할머니는 딸만 낳아서  이혼하신 
분이야. 영감님은 여기 어디 퀸즈에 사신대지 아마.
  용이엄마한테 내가 물어봤어.  어떻게 그렇게 의좋게 사느냐구. 친형제도 
싸우고 부모자식도  싸우고, 애들끼리는 벌써 사촌  아냐, 그러구 사위라는 
게 남남이구.  그러니까 용이 엄마가  '니꺼 내꺼 없이 사니까  그래요'라고 
그래. 남편도 있구 그런데 불편한 거 없냐니까 자기들은  안 그런데 남편들
은 어떤 때 나만의 가정을 갖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그래.
  그 집에서 횃수로는 10년, 만으로는 9년을 그렇게 산 거야. 각 집에 아들 
딸, 아들 딸이 있는데 아이들이 크니까 방이 모자라서  요새 이사를 간다구 
그래. 누구네가 따로 나가느냐니까 스티브네가 나간대. 어디로 가냐니까 바
로 옆집으로 간대. 그  집은 바로 우리 길 건너집인데 이사가는  집은 뒷집
이야. 용이네하고 스티브네는 마당도 이어 있고 한데 붙은 집인 거지. 이사
간다는 게 방만  늘린 거야. 내일 이사 간대. 내가  그 소릴 들으니까 너무 
좋더라구.
  왜 대개는 서로 뵈기 싫어서 멀리들 가고 그러잖아.  어떤 집은 형수하고 
시동생하고 서로 같은 장사를 하다보니까  우리 가게에 물건 사러 와서 만
나. 그래도 못 본 척해요.  내가 형수 아니냐고 그러면 서로 얼굴이 이상하
게 돼.
  그런데 이런 거 보니까 참  좋아. 정말 그게 가정이라구. 집은 있는데 가
정이 없는 집이 많잖아.
  또 그분들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서 주일날은 다같이 성당으로 가더라
구. 우리 안방에서 내다보면 가는 게 다 보여.
  1997년 1월 9일
  아까 어떤 손님이 한  명 왔다갔는데 프로비던스 근처에서 그린랜드라는 
신부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룰  하는 사람이야. 이름이 '조'라는  폴란드 출신
의 백인이야. 결혼식에 쓰는 거를 많이 하는데 다른 것도 좀 있어. 무슨 가
방이니 그런 것들.
  두 사람이 파트너로 장사를 했는데 오늘 온 사람은 조이고 그 파트너 이
름은 폴이야. 그이들은  우리집에 와서 진주로 된 세트를, 귀걸이,  또 반짝
거리는 왕관같은 것을 사요. 
  폴이 훨씬 더 편안하고 사람이 좋아.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주고 싶어
서 애쓰구, 낭만적이구. 그야말로 자기보다 남을 더 위하는 사람이야.
  우리보구 자꾸 놀러오라고 해서 갔었어. 거기 프로비던스가  주얼리의 고
장이라서 전시장을 보러갔다가 그 집앨 놀러간 거지. 그  집은 뉴포트 중에
도 폴리버(fall river)라는 곳에  있는데 말하자면 '가을강'이야. 그런 동네이
름도 있더라구.
  폴과 조가 조의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참 좋게 살더라구. 폴은 헌신적
인데 조는 굉장히 깍쟁이야.  저이하고 하루를 거기서 잤어요. 오리고기 구
운거 같은 그런 폴란드 음식도 얻어  먹구.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그
이들이 거기 철도왕 밴더빌트의 별장이 있다구 가보자구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었어.
  내가 왜 또 거기를 갔냐하면 시인 전규태 씨가 여길 와가지고 한번 그런 
말을 해. 교환교수로 왔을  때 자기 부인을 초청해서 전 미국을  다 다녔는
데 부인이  제일 충격을 받은데가  밴더빌트 별장이었다구 그랬어.  그런데 
정말 대단하더라구. 바닷가인데 100년 전쯤에 이탈리아에서  재료들을 갖다
가 식다이구 침실이구 온통 대리석으로 해놨어. 굉장해.  화장실, 목욕탕 이
런 곳도 대궐이지. 거기가 아주 관광지가 됐어. 나는 너무 충격받거나 놀라
지는 않앗어. 이런 게 다  허무하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그러구 우린 왔
지, 집으로.
  그리구 나서 얼마 뒤에 폴이 입원을 했다고 그래. 그렇게  한 몇 달이 지
났어. 내가 꽃도  한 번 보내주고, 병원으로  전화도 두어 차례 했어.  폴은 
자꾸 아프다고 그랬어. 병명은 뭔지 잘 모르겠어. 
  그러다가 폴이 죽었어. 이제 폴은 우리 가게에 안 오지. 죽었으니까 조만 
와. 그 사람을 보면 너무 폴의 생각이 나. 죽은 지 2년쯤 됐는데도 나는 그 
사람을 보면 '폴  어딨니?' 그래. 그러면 조는 '노모어(No more)'라고  그래. 
참 평범한 대답이지.
  나는 그게 인생이라고, 그런  소리로 웃으면서 말하고 보내. 보내면서 눈
시울이 뜨거워져. 그사람이  올 때마다 내가 그래. 이상하지. 그  사람이 친
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또 괜시리 조가 미워지기도 해. 그 사람은 폴이  죽었는데도 여전히 장사 
잘하고 있잖아. 아니 그게 당연한 거지. 그런데두 그게  좀 얄미워. 내가 보
기에는 폴 생각은 하는 거 같지도 않구. 그런게  밉다기보다는 세상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서글퍼지는 거야. 지금은 덜한데 전에는 훨씬 더 했었어.
  벼랑을 날으는 독수리
   그 해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록펠러 센터에는 80피트 높이의 노르웨이산 소나무에 수천 개의 불이 색
색이 켜졌고  가지마다 내려앉은 금색의  천사들이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화가들은 허드슨 강과 브로드웨이 거리, 홈리스와 센트럴파크를 그렸다. 그
렇게 뉴욕의 겨울은 터져나올 듯 아름다웠다.
  "누나, 여기가 록펠러 센터야. 크리스마스 트리 멋있지?"
  신선하고 힘찬 젊음을 맘껐  발산하고 있는 대학 1학년 준상이가 운전하
는 차엔 한국에서 갓 온 조카 경미 부부가 타고  있었다. 준상과 건상은 사
촌 매형이 뉴욕에 산다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여기서 공부했지만 
이런 나들이는 오랜만인 듯 차창  밖으로 준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매형에
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며 즐거워했다.
 겨울이 성큼 들어선  도시는 왠지 더 바삐  움지이는 듯했고 우리는 그날 
그 계절의 정취에 흠뻑 젖어들었다.
  "건상이가 워크매을 끼고 거리를 걷는 것이 뉴스에 나왔대."
  "그래? 건사이는 거리에서 음악을 듣는 뉴요커구나!"
  형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건상을  바라보며 경미는 경쾌하게 
말했다.
  경미는 그의 맏형님의 셋째딸이다. 세브란스 의대에서 만난  신랑과 함께 
부부 의사로 뉴욕에 살면서 뒤늦게 두  딸을 낳았다. 이제 만 세 살 반, 한 
살 반인 다영이,  애영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다. 그애들은 
조카의 아이라기보다 내소중한 친손녀딸들 같다. 때때로 너무  보고싶을 땐 
일을 끝내고 포트워싱턴까지 가서 30분쯤 아이들을 보고오곤  한다. 다영이
는 전화를 걸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노래를  불러대더니, 요
즘은 건방이 들어 "작은  할머니, 안녕!"만 하고 그만이어서 서운하기가 이
만저만이 아니다.
  "누나가 뉴욕에 살게 돼서 좋아. 집에 가서 다 같이 저녁 먹자."
  차의 방향을 틀며 말하는 준상은 그 크리스마스날 사촌누나 부부와의 맨
해튼 나들이를 무척 좋아했다.
  장위동집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온통 아이들의 축제였다.  새벽녘 선잠에서 
깨어난 준상, 건상은 머리맡에 놓아 둔 동화책이며 따발  총 등의 선물보따
리를 풀어보고 좋아하며 철썩같이 산타 클로스를 믿었다.
  "박준상, 성경 암송 1등, 전도·출석  1등이에요.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으세요."
  염광교회의 송요섭 목사님이 그래프를  펴며 호명할실 때 준상의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피어났었다. 그렇게 장위동집의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이 자라
나면서 해마다 새로웠다.
  준상이가 세 살 반일 때는 의정부에 살았다.
  건상이가 돌이  지날 무렵, 두 주가  넘어가도록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해 
매일 병원엘 다녀야 했다. 건상이는 등에 업고 준상이는  걸려서 병원에 가
는 길은 진창길일 때가 허다했다.
  "엄마, 물 없는 데로 가. 내가 장화 신었으니까  물 있는 대로 갈게.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지?"
  "응, 시장에 가. 맛있는 것 사줄게."
  "아니지? 아기 병원에  데리고 가는 거지? 병원에 데려가지 마,  주사 맞
으면 아기가 아프잖아."
  병원까지 가는 길에 준상은 몇 번이나 버티고 울어댔다.  동생이 주사 맞
고 아파서 우는 게 안쓰러워 더 크게 우는 형을 달래는 일은 참 만만치 않
은 일이었다.
  "엄마, 머리카락하고 손톱은 안 아프지? 그치?"
  병약한 나를 걱정하며 어릴 때부터  늘 안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확인하
기를 원해 이렇게  묻곤 하던 아이. 어떤  날은 차 안에서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걱정스레 말하곤 했다.
  "엄마, 어떻게 이런 팔로 일을 해? 꼭 인형팔 같아."
  그러면 나는 그애에게 팔을 굽혀 보이며 안심시키곤 했다.
  "엄마 팔이 얼마나 센데. 이거 봐!"
  1970년 ○월 ○일
  준상의 입학식이다.
  빨간 가죽 모자를  쓴 준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슴에 손수건을  매단 
준상은 고사리 손을 뻗어 앞으로 나란히를 한 채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나는 준상이의 앞으로 16년 학창생활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기도드
렸다. 또 그애의 꿈이 실현되도록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도와
주실 것도 함께.
  입학식이 끝나고 준상의 손을 잡고  집에 오는 길엔 금가루 같은 햇볕이 
부드럽고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준상이가 사립이었던 월계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시어머님은 준상이를 
아주 대견해 하셨다. 
  "아이들 중에 준상이만큼 예쁜 애가 없구나."
  "어머님을 닮았어요."
  "준상인 광대뼈도 나같이 안 나오고 얼마나 잘생겼는데."
  준상이는 손자로는 맏이인지라  할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앤 
할머니가 사오신 맛없는 떡도 그 앞에서 싫은 내색 없이 맛있게 먹던 아이
였다. 어머님은 그앨  보며 늘 목소리가 굵고  책 읽는 것을 잘 하니  커서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애는 결국 그 길을 가고 있다.
  내 고향 음성엔 뻐꾹새 울고
  어느 봄날 점심, 어린 새댁이었던 어머니는 삭정이나무를  때서 녹두밥을 
맛있게 지으셨다. 때마침  친정에 온 맏시누와 시어머님께 딱 두  그릇밖에 
안되는 밥을  차려드리고 부엌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방에서는 들어오라는 말씀이  없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빈 밥상
이 나왔다. 왈칵 솟는 눈물이 어린 새댁의 볼을 타고 흘렀다.
  어머니가 열세 살 우리 아버지와  혼인하신 건 열다섯 되던 해였다고 한
다. 가난한 시골 면장이었던 친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서 다듬이질  하는 어
머니를 먼 발치에서 보시고 체구가 실하다고 혼인을 시키신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은  강원도 영월. 부농이었던  그 지방의 의병대장의  딸로 
태어난 때가 20세기의 포문이 막 열리는 1899년이었다. 정든  땅 고향을 떠
나 낯선 곳에  왔을 때 정작 어린 신랑은  새색시만 보면 계속 도망다니며 
공부만 했다.  시집살이의 서러움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만큼 어린 신랑에 
대한 원망은 쌓여갔다.
  다홍치마 날리던 봄바람이 몇 차례 불어가고 나서 아버지는 충주 군청의 
공무원이 되셨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지금도 양복에 단정히 넥타이를  매
고 백구두를 신은  멋쟁이로 웃고 계신다. 일기를 쓰셨던 자상한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하여 정신적으로 섬세하셨다고 한다.
 그리로 이사해서 어머니는 스물셋의 나이로 큰언니를  낳으셨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렸으니 내리 딸만 셋만 낳다가 셋째는 홍역으로 잃고 
넷째에서야 아들인 큰오빠를  보셨다. 그 뒤로는 내리 아들 둘을  낳으셨는
데 잘생겼단 셋째아들 중기를 어려서 잃고 막내인 나를 낳으셨다.
  큰오빠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음성으로 전근하게 되었고 우리집은 그
때부터 음성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지금껏 50년을 살아 온  집은 음성 
장터에 있었다.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ㄱ자 집이었는데  마당에는 미루나무
가 심어져 있었다. 
  명필에다가 평생을 관리로만  보내셨던 아버지는 폐가 나빠  돌아가셨다. 
그 당시 폐가 나쁜 것은  지금의 암처럼 사형선고와 다름 없었는데 아버지
가 작고하신 후 페니실린등이 나타나 가족들을 못내 아쉽게 했었다. 
  아버지 장례 때 나는 어머니나 언니들의 곡성이 무서워 아이들과 한참을 
놀다가 혼났다. 혼자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곡이 끝나면 돌아왔었다. 그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는 그후로 어린 우리 앞에선  눈물을 보인 적이 
없으셨다.
  그나마 초기엔 아버지가 남기신 논밭이  꽤 되어 고생을 많이 하지는 않
으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변이 터지고 나서는 다  잿더미가 되
버려 숱한 고생을 하셨다. 그랬어도 어머니는 담대했다. 땅 팔아서 벌린 사
업이 허공에 떴을 때도 목숨을 구한 것에 감사하신다고 하실 뿐이었다.
  당시 자손이 없던 작은시아버지를 모시고 큰오빠의 두 자녀까지 여덟 식
구가 살아가는 일은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산 입에 거미줄 칠 
리 없다'며 의연하게  생활하시던 어머니와 군청에 복직하게 된 큰오빠  덕
에 우리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마흔 중반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줄곧 흰색과 회색  옷만 입으셨다. 혼
자 사는 여자는 무색옷(물감을  들인 빛깔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유교  정
신 때문이었다. 어렸을 땐 그게 늘 못마땅하고 부끄러워  철없는 짓도 많이 
했지만 그 어머니야말로 내겐 영원한 비너스 였다.
 어머니의 낙이 무엇이었는지, 그  괴로움이 어떠했을지 나는 알길이 없다. 
그래서 배우셨을까, 어머니는 담배를 피우셨다. 가을이면 노란 연초를 구해
서 종이에 말아 피우셨다. 나는 것이 싫어서 가끔  눈살을 찌푸리고 어머니
를 구박하는 말을 하곤 했었다.
  '1959년 4월 12일
  어머니를 위하여 우리가 할 것이 무엇인가.
  환갑에 상을 차리는 것은 우리  세대엔 골동품 냄새가 나는 일이지만 그 
형식치레가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 5남매가  해야 한다. 어머
니의 성스러운 헌신 앞에 우리가  이렇게 엉거주춤한 행동을 하는 것은 불
효다. 흐르는 봄에 내가 서 있다.'
  환갑을 지내고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나는 조금  간호하다가 시
집을 왔다.
  "나는 네가 떠나면 죽을 것 같다."
  어머니는 우둔해진 입으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매정하게 어머니 곁을 떠
났다. 집을 떠나던 날 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끝없이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
도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었다.
  내가 떠나고 더  약해지신 어머니는 늘 창밖을 쳐다보셨다고 한다.  나는 
기도할 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머니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영혼
을 영원한 생명이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유교와 불교 문화권 시대가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것을 나무라진  않으셨
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때 개근상으로 학용품도 타오고  유년 주일학교에서 
1등 상을 타오면 대견해 하시곤  했다. 또 무학(無學)이지만 머리가 뛰어나 
《現代文學》같은 문예지도 아주 흥미있게 다 읽던 어머니는 내가 드린 성
경책을 곁에 두고 읽으셨다. 나중엔 목사님의 심방을 받고 기도도 하셨다.
  그 해 가을, 갈대숲 바람 지나가는 소리는 유난히 스산했다. 지금껏 나의 
등골을 때리는 그 바람 소리를 따라 어머니는 그 가을에 떠나셨다.
  이젠 떠나신 지 32년,  살아계실 때의 불효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
랴. 오직 회개하고 애통해하며  기도할 뿐이다. 천국에 가면 그곳에 어머님
이 계시리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이다. 
  진달래 온 산에 불지르고
  호두기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도 세상 뜨시고
  어진 세월은 흘러
  나도 이 봄 뉴욕땅에서
  당신의 보리밭 사이에
  비단 바람이 되어
  떠나려합니다.
  덕있고 어진 큰언니 남기는 내명(內明)하고 착했다. 경기도 여주 어느 고
을에 교장인 부농의 며느리가 되었던 언니는 6·25때  남편을 잃었다.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며 4남매를 길렀다. 고생 탓에 덥수룩한  큰언니가 나는 늘 
못마땅했고 어린 마음에 부끄러웠었다.
  "저 사람은 누구니?"
  "우리 아줌마."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 했던 이 말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는데 이젠 그 
얘기조차 할 길이 없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우리집 대문에서  눈물을 훔
치던 그 모습이 내게 남은 큰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30세 젊은 나이에 재혼도  않고, 다른 남자를 사귀지도 않은 채  그 젊음
을 다 바쳐 세 아들과 화가인 막내를 길러냈던 언니.  그 어떤 고생 중에도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나의 큰언니. 
  작은언니의 이름은 우기다. 또  딸을 낳았다고 '또 우(又)'자를 넣어 지은 
이름인데 나와는  17년 차로 지금은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혈육이다.  내겐 
언제나 자랑스럽던 언니.
 매사에 헌신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발한가하면 예민하고 섬세했던 작은언니
는 열여덟에 달성 서 씨네로 출가했다. 형부는 체신부에  근무하던 아주 미
남자에 이상주의자였다. 자식들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금성사 상무이사, 작은아들은  신문사 편집국장, 막내딸은 고등학교 교사이
자 시인이며 주부로  잘들 살아가고 있다. 지금 그 자식들에게  효도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언니의 못브은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다.
  큰오빠 성기(聲起)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나를 키워주고, 공부시키
고, 시집 보내준  아버지 같은 오빠다. 내가 어렸을 땐  '큰오빠를 아버지라
고 할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도 한다. 
  음성에서 청주로 중·고등학교 6년을 통학한 큰오빠는 영어와 일어를 잘
했다. 또 특별히  문학에 뜻이 있어 '아꾸다가와 賞'에도 여러  번 응모했었
다. 큰오빠를 생각하면 내겐 사무치는 추억이 너무도 많다.
  증평에서 시집온 큰올케는 남매를  두었는데 오빠는 올케를 싫어하고 멀
리해서 바로 얼굴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곱고 안존한 큰올케는 울면서  집
을 떠났다. 어려서 중매로 한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은  6·25때 어린 남매
를 모두 병으로 잃었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안 같은  큰오빠는 육군사관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아버지 없는 
집의 가장으로서는 움츠린 채 뛸 수가 없었다고 마디마디 안타까움을 실어 
말했다. 그래서  일생을 공무원으로 지내다  독재정권을 싫어해 음성  군청 
문화원정을 끝으로  많지 않은 나이에  관직을 퇴직했다. 재혼한  큰올케와 
다섯 남매를 무던히도 고생시켰던 오빠는 그 뒤로는 일본어로 소설을 쓰며 
여생을 포기한 사람같이 지냈다는데, 내가 미국에 간 지  10년 만에 타계했
다.
  큰오빠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기는커녕  못한 채 나는 미국에 발이 묶
여 장례에조차 올  수 없었다. 맨해튼 거리에서, 라이오 시티에서,  링컨 센
터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큰오빠를 떠올렸던가.
  "오빠, 여기가 유엔 본부야. 여기는 티파니가 있는 휩스에베뉴구, …."
  하면서 오빠를 즐겁게 해드르지 못한 것이 결국 엄청난 무게의 아쉬움으
로 남아 버렸다.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작은오빠 흥기(興起)는 가장 친했고 좋아했던  오빠
다. 음성에도 중학교가 있는데 굳이 청주로 여중을 택해서  간 것도 그곳에
서 작은오빠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심천변에 벚꽃이 구름같이  피면 그 터널을 지나  학교엘 다니던 나는 
오빠와 자취를 하며  고생도 많이 했고, 내 일기장을 훔쳐보았다며  싸우는 
일도 예사였다. 그러나 작은 오빠는 '정기는 똑똑해. 너무 똑똑해'라며 사실 
똑똑치도 못한 나를 언제나 자랑하고 예뻐해 주었다.
  작은올케 명희화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중앙제약 이사로 일하더 ㄴ오
빠는 《비즈니스 영어의  지름길》, 《단절의 시대》라는 저서와  번역서를 
남긴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 오빠가 세상을  떠난 게 벌써 14년  전 일이다. 그때도 나는  뉴욕에서 
부고를 받고 하늘을 보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것
은 오빠도 예수를 믿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 '이 세상 험하고 내  비록 약하나….'를 늘 불
렀더 ㄴ그 오바를  하늘나라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기에.
  나는 아버지가 제천 군청에 재직하실 때 읍에서 10리쯤 떨어진 새터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딸이지만 막내인지라 나는 집안의 기쁨이었다고 한다. 거
기서 음성으로 전근가시는  아버지와 버스를 탔을 때는  내가 박달재를 다 
넘도록 그렇게 울어댔다고  한다. 그때가 백일 때니까 내 고향은  아무래도 
충청북도 음성이라고 해야겠다. 나는 그곳, 음성에서 자랐다.  그래서 늘 그
곳에 그립다. 그곳은 지금 생각해도 언제나 환하고 찬란하다.
  뉴욕 브로드웨이 28스트리트 7번가에서  6번가 사이를 지나가면 꽃 도매
상들이 즐비해 지천으로 쌓여 있는 꽃들을 볼 수  있다. 카바라, 맘, 아이리
스, 버드파라다이스,  양란…. 꿈없는  사람들에 의해 꿈꾸는  사람들에게로 
옮겨지는 상품이 되는  꽃들이 도매상점 안에 다발로  쌓여 밖을 내다보고 
있다. 새벽  꽃시장을 지날 때면 나는  주술에라도 걸린 듯 어김없이  고향 
마을을 떠올렸다. 내 고향 음성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키작은 들꽃들이, 유
년에 뛰놀던 냇가가,  풋풋한 젊음으로 빛나던 친구의 얼굴이 물감  벗지듯 
번져오곤 했다. 특별한 이민 철학도  없이 떠나온 고향과 조국, 이 고된 타
향살이 그 몇 해던가.
  고향엔 나만이 안다고 여겼던 두 개의 산이 있었다. 성재산과 가엽산. 성
(城)이 있다고 성재산이요, 가엽이라는 분이 거기서 도를 닦았다 해서 가엽
산이었다.
  성재산 기슭의 봄눈이 녹으면  버들강아지가 눈뜨고 실개천의 맑은 물소
리가 들리는 곳,  냉이·달래 꽃다지가 논바닥에 빼꼼이 눈뜨면 산과  들엔 
온통 봄의 정령들로 충만했던 곳, 다리 밑에서 사금파리를  깨서 접시를 만
들고 모래를 담아 밥을 지을 때면 역귀풀, 강아지풀이  언제나 훌륭한 반찬
이 되어주었던 곳, 내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빨래하던 이름없는 개울들과 맑은  물가의 조약돌, 
그 옆의 파릇파릇한 보리밭, 제방에 펼쳐 널은 흰  광목필이며 쏟아질듯 빛
나던 별무더기가 있던 곳.  여름날 금강 상류 옥같이 맑은 물에  몸을 담그
며 그렇게 여인들의 알몸도 안아 주는 마법을 갖은  고을이었다. 거기에 단
오날이면 숙고사 남치마에 분홍 저고리를 새로 해입고 날아갈 듯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었다. 그 고향의  창포 향기가 아직도 나의 몸 한  구석에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철들고 학교에  들어갈 때쯤 어머니는 오십  줄에 들어선 노인이었
다. '엄마'라고 부르는 게 부끄럽게 여겨지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엄마가  색깔옷 입기를 원했지만 회색두루마기에 흰치
마를 고수하시는 엄마  앞에서 그건 헛수고였다. 그래서 툭하면 나는  어머
니에게 심통이 나서 말했었다.
  "엄마도 익순이 엄마처럼 분홍 치마 좀 입어봐요."
  익순이, 나의 라이벌!
  그랬다. 익순이는 강력한 내  라이벌이었고, 내 심통의 대부분은 나의 라
이벌을 의식해  일어났었다. 익순이는 우리집  사랑채에 세들어 살던  집의 
큰딸이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위인데도 나와  같이 학교에 입학
했기에 고무줄 넘기나  사방치기 등에서 난 도무지  그애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키가 큰 익순이는 내 머리만큼 높은 고무줄을  흘쩍훌쩍 잘도 넘었
다. 그리고는 그 긴 혓바닥을 내 밀고 나를 놀려대곤 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일시에 만회할 기회가 왔다. 나는  한글을 다 깨치고 
학교에 들어간 덕에 국어책이든 뭐든 간에 줄줄 읽어댈  수 있었는데, 그래
서였는지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급장을 시켰고, 그때만큼은  힘으론 도저히 
못 당하던 익순이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  때는 그 해에 입학한  신입생 중에 남가 아이나 
여자 아이가 첫 인사말을 하게 되어 있었다. 
  '양지쪽 잔디밭에는  오랑캐꽃이 한창이고 들에는  소울음이 한가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우리들의 재롱을 보여드리려 하오니  칭찬 많이 해 
주시고 박수도 많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내용의 인사말을 나는 단번에 외웠다. 하지만 숫기가  없어 끝내 선
생님 앞에서 외운다는 말씀을 못 드렸다. 그래서 몇 주  만에 외운 남자 아
이에게 인사말을 뺏기게 되었는데 내겐 그게 못내 속상한  일이었다. 그 일
은 어머니도 모르셨다. 지금껏 말도 못했던 것이다.
  2학년 때엔가는  극장에서 3·1절  기념행사를 했는데  세일러복을 입고 
'하이킹'이라는 무용을  했다. 그때 작은오빠도 '아름다워라,  3·1절에 방긋
웃는 겨레의 꽃이여!'라는 3·1절 시를 낭송했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어머
니는 '이럴 때 너희 아버지가  생각이 난다'며 엷은 울음기 어린 눈으로 우
리를 바라보셨었다.  그 젖은 모습은 내  가슴으로 들어와 지금도 불현  듯 
눈을 뜨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나도  드디어 S언니를  갖게  되었다.  S언니란 
'Sister'를 의미하는  약자인데, 그 당시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사랑의 표현으로 S언니, S동생을 삼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여학교 2학년이던 용옥이 언니가 나를 S동생으로 점찍었고, 용옥이 
언니의 S언니는  3학년 상희언니여서 우리는  셋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으로 들로 소풍도 다니면서 아주 즐겁게 지냈다.
  해당화가 진분홍 아름드리로 피어  있던 어느 하루, 나는 S언니 집엘 놀
러갔었다.
  "정기야, 이리 앉아. 머리 땋아 줄게."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서  처음으로 황
홀한 사랑을 느끼며 나느 부끄러워  머리를 다 땋을 때까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녀의 눈은 맑게 빛났다.
  "무슨 말인데요, 해보세요."
  나는 더듬거렸다.
  "저기, 사람들이 연오빠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러던데…."
  연이 오빠는 우리 작은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꿈꾸는 나이 열일곱, 
그들은 제모 쓴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연오빠보다도 석오빠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전해줄래?"
  나의 이 말은 봄바람처럼 퍼져서 급기야 연이 오빠는 나를 불러 그게 사
실이냐고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후로 연이 오빠는 공부도 안 하고  몸져
누워 버렸다. 작은오빠는 연이 오빠를 데리고 제방에 나가서  한 시간을 넘
게 얘기를 하며  마음을 풀어주었다. 달콤하고 연한 첫사랑의 상처는  그렇
게 아물어갔다.
  숙이를 기억한다 음성 출신의 내 고향 친구.
  그녀와 나는 여학교 때부터 매일 기차에서 만나면서도 매일 편지를 주고
받던 문학 친구였다. 나보다 한 학년 위로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결혼을 해
서도 교사로 있다가 작가가 되었다.
  어느 해 섣달 그믐,  그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와서 화가인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맞아들여서 두 딸을 그리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울고 또 울었
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12월에 그녀는 청각을 잃었다고 했다. 그래서 교편
생활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나는 '듣기싫은 세상  소리 안 듣고 좋지않
아!'라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과수원 외딴집에서 사막을 걷는 자의 강인함을 가지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몸부림쳤을까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여전히 저리다. 그 후 25년이 지난 겨울, 그녀는 긴 편지를 보내왔
다.
  '남편에게 보낸 두 딸은 모두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았어. 친구와 나는 같
은 시간, 같은 역사 위에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시련을 결코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어. 껍질에서  부풀지 않고 뿌리에서  차올라 
오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
  고국의 12월은 요란하고 당혹스러워. 달동네 닭장집에 꺼진  연탄불을 보
고 전도하러 갔다가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연탄 한 장 임을  알았어. 누
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것보다 그들에겐  방 한칸에 여덟 식구가 비비고 자
야하는 것이  문제이고 관심사야. 친구는  잃은자, 약한 자를  위해 매서운 
시, 맑은 시를 쓰기 바라겠어.'
  그녀가 지난해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리는 '한국 문협  세미나'에 참석 차 
왔을 때는 '미국 전체가 정기 너로 가득찬 것 같아 미국엘 왔다'며 뉴욕 우
리집에서 하룻밤 묵어갔었다.
  나는 신문에서 그녀가 H문학상을 탄 것을 읽었고,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
선 생생한 목소리를 낸 방송도 들었다. 가슴이 벅차고  눈 시울이 뜨거워졌
다. 그 긴 시간의 강 위로 그리움은 봇물처럼 터져 버린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과수원집 딸 동순이.
  그녀는 나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같이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3년 동안 한방에서 자취를 했던 친구다. 부유했던  그녀는 인자하신 아버지
가 계셨고, 나는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동순은 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언니가 보고 싶은 사람은  정기언니예요. 병원에 있어요. 오래 못 살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정기언니를 꼭 보고서야 눈을 감겠대요."
  죽기 전에 보고 싶은 단  한 사람이 '정기'라고 했다며 전화에 대고 울먹
이던 그녀의 동생 목소리는 아직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때
도 한국엘 올 수가 없었고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 해 가을, 뉴욕 우리집 앞뜰에 꽃이 피었다. 내 친구 동순이는 거기 그
렇게 그리움을 뚝뚝 떨구며 가을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곳엔 언제나 해가 떠오릅니다.
  17년 6개월 만에 돌아와  걸어보는 사령부 앞길의 빨간 넝쿨장미는 영화
라고는 할 수 없지만  행복했던 젊은 시절의 그이와 나의 모습을,  그 바람
이 된  시간을 마구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그때 그이가 근무하던  사령부 
검은 철책 울타리에도, 우리집 철망 울타리에도 빨간  넝쿨장미가 피빛으로 
피어 있었다.
  얼마 전에 우리의 34주년 결혼기념일이 지났다.
  언제나처럼 레스토랑에서  먹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불쑥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34주년이 되도록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기억하지 
못하고 뭘 사줄지도  모르는 남편이건만. 이혼이 아니라도 사별할 수도  있
는 건데  34년간을 헤어지는 일 없이  산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이와 떨어져 있는  걸 견디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유엔 50주년 기념으로 '한국 음악의 밤'을  여는 토요일이었다. 남
편과 나는  융네 앞 커피숍에서 6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서,  남편은 
일이 있어 먼저 집으로 갔고 나는 3시 반에 가게문을 닫고 나섰다.
  5시까지 천천히 걸어가다 시간이 많이 남아 어느  교회로 들어갔다. 푸른
녹이 뒤덮인  지붕위로 뾰족히 솟은 십자가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1884년 
건립'이라고 씌인 돌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나는 
마당을 돌면서 예수님께 기도를 드렸다.
  겨울이라 빨리 찾아온 어둠  탓에 4시가 조금 넘으니 거리는 어둑어둑해
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의 상점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6시가 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은데다 거리에서 헤매
는 게 아무래도 허전해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갔다.
  커피숍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책을 꺼내 읽었다. 그러나 못내  허전하고 
빈 것 같은 마음엔  한 시간을 견디는데 10년은 지나는 것  같았다. 웨이트
리스가 몇 차례나 커피를  따라줬다.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왜  이다지도 두
렵고 쓰러질 것만 같은  걸까. 도대체 3시 반에서 6시까지의 시간이  뭐 그
리 긴 시간이라고….
  유리창 밖의 부빛은 현란하고 차가웠다. 6시 정각을  지나도 남편은 나타
나질 않았다.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에 피가 졸아드는 것  같아서 몇 번이나 
일어났다 앉았다. 밖엔 비에 젖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6시 20분이 막 지나는 순간,  반대편 길에 그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일어나선 차렷한 병사처럼 얼어붙어 서 있었다.
  "차 파킹이 어려워서 세 블록 위에다 세웠어."
  감색 양복에 흐르는 빗물을  가볍게 털어내며 들어오는 남편은 아무렇지
도 않게 조금 늦은 걸 미안해할 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조바
심쳤는지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나이에 
겨우 2시간 반 떠어져 있다고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정말 못난이
일 뿐이었다.
  그 일으 나의  삶 속에서 대체 남편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예정된 대답인 듯 남편은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의 90%라는 걸 부정할 여지
가 없었다.  모든 걸 그이에게 맡기고  의지하며 살아온 34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 것이다.
  나는 모든 일에 덤벙대고 성격이  급한데다 불평이 많아 작은 것도 참지 
못하고 퍼부어대거나 감정이  복받쳐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다. 그에  비해 
매사를 관조하고 분석하면서 냉철하게 처리하는 남편은 감정적으로 치우치
는 나를  제어해준다. 온순한 성격으로  쓸데없이 화내는 일도  없을뿐더러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애쓰는 그이는 내대신 해야할 일이라면 심
지어 화장실도 대신 가 줄 사람이다. 평생 동안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내며 이것저것 잘 참아내는 사람,  그이는 나에게는 더없
이 좋은 남편이다.
  ...
  1959년 12월 25일
  눈을 맞으며 상무동을 떠난다. 흔들리는  BUS, 옆에 앉은 오빠의 얼굴이 
끝내 마음에  남는다. '물망초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은오빠와  나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들인지를 알았다.
  "現在는 내것이지만 未來는 정기 네것이야."
  이런 말을 하고 돌아서는 오빠는 옆에 있던 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서울 사는 박 중위야. 함께 가."
  크리스마스 밤, 호남선 열차의 밤은 깊었고 하늘엔 파란  별이 솟아 있었
다.
  박 중위님은 좋았다. 국문과를 다녔고 영어를 잘한다는  배경보다도 그에
게 담겨 있는 예지(叡智)가 좋았다.  오빠와 친할 수 있는 기질이 있는데도 
어째서 광주에서 그를 만나지 못하였을까. 충북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나를 
플랫폼에 말없이 서서 배웅하던 박 중위님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일기장의 겉표지에는 '國語學  槪論'이라고 써 있다. 이것은 '국어교사 
자격시험'을 보러 전라남도  광주에서 고등군사반 훈련 중인  작은오빠에게 
가서 묵다가 시험을 치르고 돌아오던 날의 일기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
다.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시를 써온 나는 토인비와  샤프트르 등을 읽으며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거기다 카뮈의  《시지프스의 神話》는 너무  많이 
읽어 외우다시피할 정도였다. 그래서였는지 청주의 석학들은 나를  두고 문
학(文學)과 철학(哲學)에 대해 말하면 알아듣는 여자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음성에서는 야학을  했는데 구두닦이, 아이스크림 장사하는 아이, 
양복점에서 심부름 하는 아이 등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학교에 못 간 아
이들을 모아 밤마다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청주 고등학교 
송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고시공부(考試工夫)를 시작해 대학 4년을  한 해에 
할 수 있다는 욕심으로 '국어교사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다 그날, 1950
년 12월 25일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날, 박기창 중위를 만난 것이다.
  그는 대위로 재직 중인 오빠와  같은 통역장교 출신으로 함께 훈련을 받
다가 서울 돈암동 집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가는 길이었다.  그날 이후 나
에게 세상은 아주 다른 것이 되버렸다. 깊은 사랑에 바졌기 때문이었다. 하
늘도 땅도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봄이 오기 전 그는 오빠 친구로서 우리집을 방문했다.  휴가 중이었던 작
은오빠가 마침 외출 중이라 자연스레 내가 손님 접대를  하게 되었다. 스피
커 소리 요란한 읍내 극장도 가고 바람을 쐬며 제방도 함께 걸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와 함께 걸었던 걸목이며  방천길을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리움이 너무 진한 아픔으로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박중위는 그
렇게 젊은 나를 뒤흔들어 놓았고, 나의 모든 시간은  그로 인하여 출렁이고 
있었다. 지나간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의미해졌고 바로 지금부터가 내  인
생의 새출발인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던 가족드에 대한  배반 같았지만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암내 나는 고양이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나의 
모든 생각의 길들은 그이를 향해 뚫려 있을 뿐이었다.
  "너는 문학을 해야지, 교사도 해야 하고. 상록수에서 불우한 청소년을 위
해서도 일한다고 하더니  모든 것에 손놓으면 어떻게 하니?  사람이 한 번 
뜻을 세우면 끝까지 가야지 중도에서 포기하면 안된다."
  이웃에 살고 있던 큰언니의 준엄한 나무람도 있었으나 그때의 내겐 소용
이 없었다. 내겐 그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과 그를 만나는 일  외에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가 있는 곳에만 해가 뜨고 있었다.
  박 중위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K사단 사령부에 있었다. 그가 있
는 땅의 흙은 부드러웠고 바람은 향기로웠다. 그 해 4월, 전방부대 옆 보리
밭에 내리는 황홀한  볕과 종달새는 그저 눈부시기만 했다. 20사단이  있던 
신산리를 나는 우리  사랑의 성지라고 불렀다. 면회실에서 면회 신청을  했
을 때 전화 속의 그이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렸고 내 가슴은 설레임으로 
두근거렸다. 어쩌면 그때 나는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면회소에 나타난 그이
의 단정한 군복, 그 군복이 바로 나의 새애를 매는 끈이 되리라는 것을.
  그이의 숙소는 초라했으나 아름다웠다. 그 숙소부터 그이와  함께 살아온 
모든 시간과 공간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결혼하고 신혼 살림을  차렸던 
정릉의 전세방, 속초 바닷가의  셋방, 의정부집, 신산리집, 첫 우리집이었던 
미아리집, 3사단 언덕 위  그이의 숙소, 장위동집, 그리고 리버데일 아파트, 
양커스의 우리집까지 모두가 내게는 해뜨는 집이 되었다. 그  길을 따라 그
이에 대한 어려움과 사랑은 이렇게 34년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그이를 사
랑했고 그랬기에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내올 수 있
었다.
  신혼 초, 그이가 3개월 만에 일본 오끼나와에서  정복학교를 마치고 돌아
오는 날이었다. 둘째형님도, 동생들도  함께 살 때여서 열댓명도 넘는 대식
구들이 모두 모여  그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층방 높은 창문으로  골목을 
내다보며 그이를 기다리던 나느  공항까지 마중 나가셨던 맏형님과 그이가 
골목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그만 뒷방으로  숨어 버렸다. 그 많은  시댁 
식구들 앞에서 그이를 만나는 것이 아무래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모두들 
현관으로 몰려나가 인사를 하는데 정작 나는 나타나질 않으니 작은형님이
  "춘향이는 숨는구나!"
  라며 놀려대 온 가족들이 웃었다.
  우리가 정릉에 살았을 땐 큰댁이 있는 돈암동 언덕길을 많이도 오르락거
렸다. 올망졸망한  집들이 모여 있는  고갯길 막바지엔 시어머님이  권사로 
계셨던 '동암 교회'가  있고 교회를 지나 조금만  더 내려가면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집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큰형님댁이었다.
 을지로에서 건축자재상을  하시던 아주버님(그이의  맏형님)은 참으로  네 
동생의 아버님  같은 분이셨다. 무역업을  하시던 시아버님이 일찍  세상을 
뜨신 후 그 역할을  대신 해온 큰 기둥이셨다. 또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에 
다니는 일을 즐겨하신 큰형님은 시어머님을 잘 섬기셨다.
  "큰아범은 한 번도 내 말을 어기지 않는다. 언제나 예라고 하지."
  라며 늘 흐뭇해하시던 시어머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어머님은 소박하고 선하신 분이었다. 어머님은 학교도 안  다니셨다 한
다. 이모님(이금전)은 김활란 박사와 함께 이화대학 1기생으로 외국 유학 1
호였고, 제1회 나이팅게일상을 수상한석학이셨다. 또 시외삼촌은 초기 영화
계의 거장으로 그 함자를 딴 '금용 영화상'도 만들어져  있다. 그에 비해 어
머님은 형님을 따라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집에 와서 불때고 밥하는 
게 더 재미있으셨다면서 1910년대  개화된 가정의 둘째 따님이셨던 얘기를 
자주 하셨다. 그렇게  시어머님은 아들 넷과 외따님을 기르시며 평탄한  일
생을 보내셨다.
  네 명의 며느리가  다 그 어머니를 좋아했다. 나도 시어머님은  순수하신 
분이었고, 당신의 고통은 내색 하지 않는 분이셨는데, 내가 뭘 못해도 꾸지
람을 하지 않으셨다.
  "갈비도 먹을 줄 몰라?"
  이게 시어머님이 처음으로 나를 나무라신 것이었다. 시골  공무원의 딸로 
자라 그때까지만 해도 갈비를 먹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나는 시집온 
첫해 추석, 갈비를 젓가락으로 쑤셔먹는 촌스런 새댁이었던 것이다.
  나는 시어머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뭐든지 잘 버리는  나와는 달리 어
머님은 알뜰하셨고 반찬  같은 것도 깔끔하게 하셨다. 서울 음식을  잘하셨
는데 어머니가  담근 김치는 참 맛있었던  기옥이 남아 있다. 또  우리집에 
오시면 내가 여기저기 원고를 쓰고 다니느라 오실 때마다 변번이 없었는데
도 말없이 뭘 해놓고 가시는 분이셨다.
  그럼에도 나는 시어머님께 잘하지를 못했다. 그이와 나는  군인으로 떠돌
이 살림을 하는 바람에 잘 모시지도 못했다.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맘으로 
애쓰며 지낸다면서도 손주들이 보고 싶어  가끔 오셔도 다들 그냥 조금 반
가워하거나, 때로 오래 계실 땐 내심 빨리 가시기를 바라곤 했었다. 그런데
도 시어머님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나를 만나셨던 분이다.
  내가 꽤 바뻐  글을 쓰고 다니던 78년 5월, 시어머님이  입원하셨다는 소
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간 세브란스  병원에 어머님은 눈발 같이 흰 머리
칼을 곱게 만지신 채 누워 계셨다. 심근경색증이었다. 평생을 속옷에 때 한 
방울 안 묻히고 사신 어머님께  대한 불효가 죄스럽고 안타까워 나느 며칠
을 그 옆에서 지냈다.
  아들들이 다녀가고 목사님이  오셨다. 목사님께 어머님 병세가  어렵다고 
귀띔했더니 잠드신 모습을  보며 코를 풀면서 우셨다. 자식들보다도 더  애
달파 하시는 목사님,  그분에게 있어 어머님은 개척 교회의 조용한  동지였
던 것이다.
  시어머님은 5월에 돌아가셨다.
  5월 31일 밤을 어머님 옆에서 보내고 주부백일장 심사 차 경복궁엘 다녀
오니 어머님이 별세하셨다. 그 밤이 마지막이 된 것이다. 불효가 겹치게 된 
것이 너무도 애통하였다. 퇴원하시면 식구가 적은 우리집에  모시자고 상의
도 해놓았는데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버린 것이다.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벽제에 갔다. 신록이 우거진 계절, 유난히 새소리가 
맑은 날, 어머님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때를  벗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큰형님부터 막내동서까지 우리는 셋째아이를 가진 시누이가 너무 애통해할
까봐 위로하기에 바빴다. 시누이는 어머님이 참으로 많은  사랑을 쏟으셨던 
외따님이었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님이 모두 가버리신 터에 시어머님마저 떠나시고 나니 이제 진
심으로 우리를 걱정해 주고 아껴주는  분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완전한 고
아가 된 듯  했다. 큰애 준상이가 중학  3학년, 건상이가 초등학교 6학년인 
때였는데도 말이다. 나는일주일간 일절 외출을 안하고 근신하며 지냈다. 세
상의 모든 부귀영화, 기쁨, 슬픔에 대한 허무와 허전함이 물밀 듯 밀려드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지금껏 5월말 경이면  교회 제단에다 꽃바구니 하나씩을 해서 올려
놓는다. 아무도 내가 왜 그 꽃을 올려놓는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시어머니 사진을 방에도, 거실에도 걸어 놓고 그리울  때 마다 바
라보곤 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 내가 이렇게 어려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을 때 나는 그이에게 말했다.  어머
니가 계시면 죽어도  가야 하는데 어머니가 가셨기 때문에 견디고  산다고. 
뉴욕의 길거리나 식당에서 머리가  하얀 사람들만 보면 시어머님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모시옷을  봐도 그랬다. 어머니가 모시옷을 많이 입으
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머님은 떠나셨어도  그 아련한 그리움의  무늬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이가 막 한 돌 지난 작은애와 세 돌이 지난 큰애를 내게 맡겨 두고 월
남전에 대위로 참전했을 때 우리는 매일 편지를 쓰고 일주일에 한 번씩 사
진을 찍어 보냈다. 어떤 날은 한꺼번에 열 통씩 도착하기도 했다.
  나는 작은애는 업고  큰아이는 걸리면서 편지를 부치러 다녔고, 방  안에
서도 그이의 편지를 가지고 오는 우편배달부의 자전거 소리와 그냥 자나가
는 자전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어느 여름날에는 겨울옷을 꺼내 햇볕을 쬐이느라 빨랫줄에 너니까 네 살
짜리 큰아이가
  "엄마, 아버지 옷이다! 아버지 옷이다!"
  라고 소리치곤 옷을  만지며 좋아했다. 오랫동안 안 보이던 아버지의  옷
을 보니까  어린 마음에도 그리움이 뭉클  솟은 것이다. 그러던 중  그이가 
닌호아 백마부대로  간다는 소식이 왔다.  밤이면 베트공의 습격과  포탄이 
빗발치는 곳, 나는 밤마다 아이들을 재워 놓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때 남들은 경제적으로  좀 나아진다는 이유로 서로  월남엘 가길 원했
고, 어떤 부인네들은  남편에게 왜 월남엘 못 가느냐고 닥달하기도  했지만 
나는 반대였다. 우리의 일생에서 1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닐뿐더러 돈
이야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또 젊으니까 열심히 벌 수도 있지만 위험이 목
전에 처해 있는 전장에 나가  헤어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남편은 백마부대의  행정과장으로서 근무를 충실히 마치고,  닌호
아에 휴계소도 짓고서  11개월 만에 돌아왔다. 비행기 트랩에서 손을  흔드
는 그이를 보고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 저기 있다!"
  소리치는 큰아이의 환한 웃음으로 우리는 다시 모였다.
  그때 처음 텔레비젼을 샀다.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
고 큰아이 준상은 제 또래  아이드에게 여기저기 자리를 마련해 주며 목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남편이 흘린 땀을 바탕으로  두 어린 것들과 절약하며 산 보람의 
열매는 성북구 송천동에  마련한 조그만 '우리집'으로 영글었다.  좁은 골목 
한쪽, 방 셋에 부엌과 마루  한 칸이 딸린 빨간 기와집이었다. 마루에는 친
구가 보세품이라고 사준  레이스 커튼이 바람이 일 적마다 살랑거렸고,  장
독대에선 간장, 된장, 고추장이 맛나게 익고 있었다.
  미아삼거리에 가서 마루에 놓을  차단스를 사가지고 짐수레에 싣고 오는 
내내 준상이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엄마, 저거 우리 꺼야? 응?"
  "그럼 그렇구말구. 천천히 가, 넘어질라."
  그애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재차 물어대면서 기뻐했는데 그 달콤한 설레
임을 감추지 못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듬해에는 그곳에서 큰아이가  유치원에도 갔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따뜻한  한 가정을 굳혀가고 있었다.
  1970년 ○월 ○일
  아침 일찍 순이가  휴가를 떠났다. 순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즐겁다. 나는 주부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빨래까지 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목욕탕에 다녀왔다. 
  준상이의 취학통지서를 받고 나니 감개무량하다. 우리 준상이가  벌써 학
교엘 가다니….
  준상이, 건상이가 TV에서 '황금박쥐'를 보면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상
하의 틈바구니에서 지쳐  있을 그이를 위해 나는 이  가정을 잘 지켜야 한
다.
  1970년 ○월 ○일
  수반 우엔 백합이  피고 빠알간 칸나도 냉장고 유리컵에서 웃는다.  준상
이가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 마냥 대견스럽다.
  1전도 떼지 않고 봉급을 타다주는 그이와 두 아들이 탈없이 자라는 오늘
이 너무 행복해서  두렵다. 저녁에 남편은 주스와 초콜릿을 박스로  사오고 
운전사와 함께 식사했다. 오랜만에 어머님이 오셔서 주무신다. 참으로 따뜻
한 저녁이다.
  그랬다. 그때 우리집에네 그런 날들이 숨쉬고 있었다. 햇볕 곱게 들던 우
리 마루엔 〈양지(陽地)에서〉라는  나의 자작시가 그이의 글씨로 씌어  걸
려 있었다. 거기서  어김없이 우리의 해가 떠올랐고 석양이 물들었고  그리
고 또 다시 해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의 조그만 눈 안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마알간 유리창을 닦고
  늦가을 바람에 여무는 풀씨 한 알로
  뒹굴어
  당신의 피로한 옷 자락에
  떨구어져
  생성의 꽃나무로 싹트는
  양지에서
  고드름으로 녹아가리.
  아이들 그림에 피는 꿈의 색깔은
  엄마가 채색한 도화지 위에서
  황홀한 햇빛으로 빛나리.
  "여보세요? 그래 어때? 모든 것 다 괜찮아?"
  남편은 나를 혼자  서울에 보내놓고 여전히 모든  것이 염려스러운 것이
다. 말은 물론이요,  여든 살 노인도 하는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혼자서는 한 발짝도 못나가던 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그이의 그림자인 듯, 마치  그이의 한 부분이라도 된 듯이 그이  없이는 아
무 일도  못했다. 미국에 살면서부터는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더더욱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편은 가끔 내가 문법과 발음이 틀린 말을 주절댈 때면 조심스럽게 
  "그 말은 뒤로 가야 하고 트기 아니고 쯔야."
  라고 교정해 주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편은 나를  펀하게 해 주려 정성을 쏟는다. 또  좋은 남
편이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것임을 새삼 확인시키듯 아이들에게 쏟는 사랑
도 끔찍하고 각별하다.
  그이의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지금, 그이와 나에게 똑같
이 찾아왔다 가는  세월과 건망증의 흔적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
  "그 안경 어디다 뒀어?"
  "언제 내가 뒀어요. 난 아니에요."
  시간은 그렇게  화살같이 우리의 어깨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  건너야할 
난관도 많았던 우리,  그이와 나는 그렇게 시간에게서 당하는 폭력과  배신
을 함께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軍服
  시인 지망생 채지심.
  그녀는 장위동에서 7년을  살았던 일하는 '누나'였다. 애들이  어려서부터 
'누나'라고 부럴 우리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해남의 시골 어느  면소재지에서 왔던 그녀가 자주 하던 애기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무엇이  되고 싶냐는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시인'
이 되고 싶다고 손 든 유일한 아이였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가슴엔 
시를 쓰겠다는 소망이 품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 집에는 현역  시인과 시인 지망생이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으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한국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누나'도 크게  절망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서 시를  쓰고 있
을지. 아니면 전라도 어느 시골 소박한 촌부가 되어 있을지...
  그때 나는 현역 시인으로 뛰고 있는 터라 함께 지내는 데 있어 그녀보다
는 조금 더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힘닿는 데 까지 그  시인 
지망생을 돕고 싶었기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문학(文學)이란 첫날밤 순결을 바치듯  나의 모든 순결을 아낌없이 바쳐
야 하는 작업이다. 그의 삶의 방향과 본질과 존재가 전환되어야 한다. 목마
른 사람에게 한 컵의  물이 되는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시다 .시인은 
사랑의 감각과 결을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작가란 이웃과 사회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지가 되어야 한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말했듯이  시인은 그 시대의 산소측 정기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경제  전쟁이 지나고 문화 전쟁이 시작 될  때 작가는 
21세기의 기수로 그  첨단에서 뛰어야 할 사람이다. 선지자라는 말이  술부
대에서 포도주가 끓어올라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처럼 작가도 끓어올
라 넘쳐야  하는 것이다. 또 시인은  언어와 문자를 뛰어넘어서 있을  수도 
있어야 한다.
  나의 문학 역정의 시발은  아직 6·25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던 국민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들국화>란 동시를  보신 차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그 글을 낭독하셨던 그때로.
  친정 쪽의 식구들 오빠, 언니, 나, 어머니까지 우리  식구는 다 책밖에 몰
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컸으니 나도 문학밖에 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청주여중 1학년,  학교 교정인 '희망원'을 제목으로  '불타듯 끓어 오르는 
희망의 그림자는   …'으로 끝맺는 시를 지었었다. 그 시를 보신 장충근 국
어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그걸 낭송하셨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교내 백일장 장원을 했고 신동문,  민선생님에게 시작
(詩作)을 배웠다. 또 대학 4년 과정을 1년에 마치게  했던 '국어교사 자격시
험' 응시에 추천을 고등학교 송병기 선생님께서도 사사 받았었다.
  그리고 '푸른문 문학  동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문우(文友)들을 
알게됐다. 김문수, 홍기삼이 이 때의 문학 친구들이다.  친구 모혜정과의 인
연은 후에 그녀의 아버님이신 모기윤  선생님께서 내 결혼 주례를 해 주시
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서  '바라춤'으로 유명하셨던 신석초  선생님께 
정식 문학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문학 공부를  하다가 나는 그이를 만났다. 그리고 나서는  그이가 
나의 전부가 되었기에 나는  문학을 잊고 있었다. 몸 한 쪽이  마비되는 것 
같이 아팠고 문득 죽음을 아주 가갑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급해졌고, 다시 신석초 
선생님을 찾아가 문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신석초 선생님은  중학동에 있던 한국일보사 논설위원으로  계셨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작품이 되는 대로 
몇 편이고  들고 가서 세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님은 한 편  꼼곰하게 
봐주시면서 말의 절제를  누누히 설명해 주셨다. 그러면서 한 마디  칭찬을 
절대 잊지  않으셨다. 난ㄴ 그렇게 션생님의  덕을 입고 힘을 추스려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은 초등학교 1학년인 준상이의 소풍 때문에 바쁜  날이었다. 일찍 시
장을 다녀와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시인  임성숙 선생님이 자신의 
첫시집 《우수의  뜨락》을 전해야하니 경복궁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주셨
다.
  거기서 모윤숙  선생님이 주관하는  주부 백일장 생사가  열리는 중이라 
200명에 가까운 주부들이  모여 있었다. 임성숙 선생님은 이왕 온  김에 한
번 써보라고 권유하셨다.  소풍 때문에 마음이 급했던  나는 <그이와 나>, 
<가을 식탁> 두편을 단숨에  써놓고 남보다 먼저 운전기사와 집으로 돌아
왔다.
  "따르릉"
  김밥 안에 넣을  시금치를 부지런히 다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뜻
밖의 전화였다.
  "장원이에요. 빨리 와요."
  경황없이 달려간 시상식장에서 당시 여류문학인회 회장이신 모윤숙 선생
님이 반기셨고 나는 순식간에 수십 명의 기자들에게 둘러 싸였다.
  "왜 집에 가셨습니까?"
  "큰아이 소풍 때문에요."
  "남편의 직업과 근무처는요?"
  "보안사령부 비서실장입니다. 육군소령이구요."
  "아들은요?"
  "아들만 둘이에요."
  나는 그때 유행했던 미니 밤색 원피스를 입고 청와대로  갔다. 그리고 당
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 앞에서 당선작<그이와 나>를 낭랑하게 낭독
하였다. 30세 젊은 엄마의 목소리는 수줍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이와 나
  우리는 작은 무명 헝겊
  그이는 씨줄, 나는 날줄로
  인연의 질긴 올실은
  올올이 짜여져
  바다에서 장미를 가꾸는
  역사를 빨아 말리는
  물독에서 시름을 퍼 내는
  우리 아가들의
  구멍난 배내옷을 기우리라.
  햇볕과 물이 넘치는
  사랑의 골짜기에
  스무개 손가락 마다마디 씻고
  그이의 진한 목소리에
  나는 찌든 옷을 벗고
  별을 깔고 앉은
  알뜰하고 호사스런
  한 송이 목화로 핀다.
  다음날 아침 TV에 나가서 모윤숙 선생님과 대담을 했다. 신문이며  잡지
에 일제히 나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나는 미스크리아라도 된 것 같
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송원고를 비롯해 여성잡지  등에서 원고 청
탁이 쏟아졌다.
  그해에 모윤숙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문학》誌에서  추천 완료를 받았
다. 어려서부터 계속 문학을 잡고 있었다해도 추천 완료를  받고 시인이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기가 되었고, 주부  백일장이 등단을 추진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그때 추천 완료 된 시는 〈우물〉이라는 시였다.
  우물

  오래 전 어느 날
  나는 우물에 빠졌다.
  그 우물 속에도 세상은 있었고
  거기서 물을 긷다가
  다시 우물에 빠졌다.
  거듭 우물에 빠질수록
  물결은 서늘하고 깊고 잔잔하다.
  오늘 마지막 빠진 우물 속을
  헤엄치면서
  풀어질수록 커지는
  어머님 소리에
  아이들 울음에
  깨어지는
  나르시스의 거울을 잡는다.
  우물 밖 신화는 다리를 절며
  지팡일 짚고 
  역사의 뒤안을 거닐고
  두레박 끈에 매인 하루가
  이끼 낀 돌을 le고
  제이, 제일의 우물을 벗어난다.
  이옷은 닫힌 창을 열고
  집안 가득 사랑을 길어올린다. 
  이 시는 우물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철학에 대해 쓴 시였는데 나의 생각
은 이랬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우물에 빠져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그때 
죽었는데 나 없이도 세상은 똑같이 존재하여 그 세상을 내가 지금 살고 있
는 것이고, 그 뒤 결혼해서도 또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도 여전히 세상이 
있다. 우물 속에 세상이 있고 또  있고 또 있고…. 여기 살고 있는 나는 그
러니까 지금 죽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늘 시와 함께 사셨던  신석초 선생님을 존경했기에 여러 군데 편지
를 써서 그분과의  문학 수업을 고백해 방송이 되거나 신문에  게재되었다. 
《시문학》지에서 추천 완료한  뒤 찾아뵈니 선생님은 아주  흐뭇해하셨다. 
나의 시가 너무 천재적이라 결혼도 안할까봐 내심 걱정했었다는 말씀을 하
시면서 크게 웃으셨다.
  국수 한 가락, 회 한 조각을 아무 집에서나 드시지  않는 멋쟁이 셨던 선
생님은 수유리댁을 방문할 때면
  "잘생긴 아들을 낳았구나. 어이 운전사도 들어오라고 해."
  하시며 운전사에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던 분이셨다.
  문단에 데뷔하면서 나는 유명하진  않았어도 왕성하게 글을 썼고 여기저
기 다니면서 시 얘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한 1970년, 그 해를 빛낸 12명의  여성에 들어 《주
간여성》 표지에도 나왔다.
  그때 남편은 중령으로 3사단 보안부 대장으로 있었다.  그이의 숙소는 부
대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고,  방 두 개에 마루 그리고 부엌 
하나가 딸린 집에서  운전사와 요리사 그리고 당번이 함께 살았다.  당번은 
매일 세숫물을 떠 놓고 크림통 뚜껑까지 열어 놓으며 그이를 도왔다.
  나는 토요일마다 김치항아리가 든  가방을 들고 눈비를 맞으며 전방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의정부를 지나 운천에서 내리면 그곳에서  신
수리까지 20분  정도 산록을 타고 가야  했다. 특별히 그이에게 일이  있어 
나올 때는 그이 차를 탔지만 대개는 버스를 갈아타고 갔다.
  신수리의 6월은 유난히 아카시아꽃이 희고 향기로웠다.  전방부대의 이상
기후는 어디나 마찬가지여서 조그만  다방에는 슬리퍼를 끄는 마담이 코먹
은 소리를 내고,  연실 '크레이지 러브'라던가 '서머타임' 같은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 주변엔  군인 가족들을 위한 식품점이 다닥다닥 붙어있느가  하
면, 임시로 지은 집 같은 곳엔 독신 군인들이 투숙하기도 했다.
  전방을 지키는  사병들은 당당해 보였다.  후방에서 상사의 구두  끈이나 
매주며 빈둥대다가 제대하는 이들보다는 돈도 없고 줄도 없는 그들이 훨씬 
장해 보였다. 남편은  높지 않은 직책에 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청탁을 해왔었다.
  "우리 아들이 몸이 약한데 일선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강변에서 모래를 파는 건X사단 소속인데 어떻게 부탁 좀…."
  남편은 한번도 "네"라는  대답을 한 적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었다. 옳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던….
  서울에 있을 땐 사복 군인이었던 남편은 여기선 육군중령 계급장에 군복
을 착용하고 24시간 근무에 들어갔다. 나는 군복을 입은  군인의 아내로 처
신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매번 다짐하듯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전투하는 남편을 가진 아내는 전투하는 태세로 살아야한다. 후방의 느슨
해진 마음가짐과 사치풍조를 본받으면 안되는 것이다. 일선의  군인은 적과
의 싸움에만 마음을 쏟아야지 물질에 마음을 두면 안된다.'
  그렇게 나는 남편에게 다려진 군복을  내주며 내 삶의 많은 부분들에 대
해 결단을 해야 했다. 나는 군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가난 하지만 자랑스
런 군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때 내게 사단보안부대 내의  태극기, 꽤 잘 지은 ㄷ자 막사  옆 테니스
장에 있었던 '휘날리는 태극기'는 전국 방방곡곡의 어느 태극기보다 황홀하
고 가슴 뛰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물겨웠다. 그건 그이와  나의, 우리 
아이들의, 그 부대원의, 아니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가슴 벅찬 태극기였던 
것이다.
  사단장 숙소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던 날이었다. 사단장  이취임식이 있은 
지 꼭  한 주일 후였다. 사단장  이취임식에는 사열 분열이 있었는데  먼저 
전 사단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면 새 사단장이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났다. 참으로 한 번쯤은 별을 단 군이 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었다.
  '저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있는가?'
  그때 나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는 군복  위의 계급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단장 숙소의 밤은 유난히 깊어갔고 소나무가 많은 숲속의 집은 솔냄새
로 그 정취를 더했다.
  제1연대장 황대령이 '보리밭'을 불러제끼고 난 뒤  사단장 부인이 '동그라
미 그리다가 무심코  그린 얼굴….'을 불렀다. 이윽고  그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어느 좌석에서건 노래를 못 불러 찬송가만 했기 때문에 우리 부부 대
표는 늘 그이였다.
  군복 차림의 남편은 영화 '모정'의 주제가를 원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Love is a mony splendor thing…'
  우리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불렀던 그 노래는 그이의 목소리를 타고 달콤
하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때 진한 국방색  그이의 군복은 사십이 채  안 
된 젊은 장교의 쇠사슬이요, 멍에요, 그리고 영광으로 비쳤고 그건 내 가슴
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평소 그이와  가까이 지내던 후
배 치과의사 이장훈 씨, 신문사에서 일하는 손기상 씨, 인쇄업을 하는 백영
환 씨 세 사람이었다.
  이장훈 씨는 우리가 예전에 20사단 신산리에 살 무렵 군의관으로 그곳에 
배속되어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가끔은 우리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기
도 했었는데 바로 그가 친구들과  함께 선배를 보러 일선으로 찾아온 것이
었다.
  "이곳 공기 한 말만 담아갔으면 좋겠어요."
  손기상 씨는 몇 번이나 맑은 공기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이곳에는 많군요."
  그곳에서 잡은 꿩고기를 먹으며 그들은 이곳에 대한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다가 《중앙일보》에 있던 손기상 씨가 내게 말했다.
  "정말 시(詩) 한 편 주세요. 저의 신문에 싣게요."
  《한국일보》 1면에 내는 시만  가끔 썼던 나는 그때 《중앙일보》를 위
해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당신의 軍服〉은 그런 과정들을 겪고서 태어났다. 그때  햇살은 유난히 
눈부셨고 누가 심었는지  빨간 넝쿨장미 한 송이가  철망에 기대어 햇볕을 
쬐고 있었다.
  당신의 軍服(Ⅰ)
  당신의 군복에서
  새들이 우짖는다.
  빨강, 노랑 장미가 피고
  아늑한 저녁 종소리가 난다.
  山脈이 뻗어가고 바다가 넘친다.
  해가 뜨고 달이 진다.
  당신의 군복에서 
  내가 던져져서
  아카시아 그늘에서
  흙을 털고 아픔을 털어내며
  나는 구겨진 군복을 다림질한다. 
  당신의 軍服(Ⅱ)
  당신의 군복에 흐르는 한탄강
  솟아있는 오성산
  우거진 갈대밭
  잠든 10리 비무장 지대 
  당신의 군복에서 애국가를 듣는다.
  영하의 격전지 총성(銃聲)을 듣는다.
  단기 4038년의 
  쓰르라미 울음을 듣는다.
  푸울장에서 떠드는
  우리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다. 
  당신의 군복에서 
  울산공업단지를 본다.
  고속도로, 지하철, 빌딩을 본다.
  시골집 마당에 핀 사루비아를 본다.
  祖國을 본다.
  나를 본다.
  〈당신의 軍服 Ⅰ〉은 1975년 6월 18일자 《중앙일보》의 「중앙 시단」
에 게재된 것이다.  시작(詩作) 노트에도 '나는 군인의 아내로 주말이면  김
치항아리가 든 가방을 든 채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눈비를 맞으며 일선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시를 씁니다'라고 썼다.
  이 신문이 나간 지  이틀 후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어떤  사람이 나
를 찾고 남편의 소속을 물었는데  그분은 당시 별 셋을 단 3군사령관 김종
환 장군이라고 했다. 일선에  있는 남편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3군사령관님
이 남편이 근무하는  사단을 방문하여 남편을 극진히 대하시고, 사단  장교
들에게 〈당신의 軍服〉을 보았는냐고 물으며 그 시를 칭찬하셨다고 한다.
  갑자기 집안이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삶
이란 가끔 이런 만남을 통해 달라지기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직후 그이의 사단장이던  권익검 장군이 시집을내도록 도와줘서 첫시
집 《당신의 軍服》을 내게 되었다.
  '나는 몇 편의 女史의 詩를 읽고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귀중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직능에까지 미치고  있는 김여
사의 그 일상의 마음가짐에 나는 범상치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아내를 
가진 남편의 행복이 눈이 부시게 부러웠다.
  당신의 군복에 내가 던져져서
  바람을 막고
  비를 막고
  총탄을 막으리라
  이런 감정은 군인의  아내들이 가진 일반적인 비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군복에서 애국가를 듣고, 울산 공업단지를 보고,  시골집 마당에 핀 
사루비아를 보고, 조국을 보고, 나를 보는 아내는 결코 흔하지 않다.'
  위에 적힌  서문은 《현대문학》 주간이자  문인협회 이사장으로 계시던 
조연현 선생님이 써주셨다.  체구는 작아도 마음이 크시고 어떤 일에도  구
구한 변명을 하지 않는 남자 중의 남자였던 선생님.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
분이 사시던 정릉 골짜기 언덕배기에 누워 있던 말간 햇살이 떠오른다.
  서문에서 과찬을 해  주셨던 조선생님은 시집 제목도 지어 주셨다.  약간 
연한 벽돌색  표지에 새겨진 '당신의  軍服'이라는 제자(題字)는 그이가  써 
주었다.
  이 시집은 출판되자마자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육군본부는 물론  각 
부대에서 이 시집을 구입했고 3군단과 그 예하부대 식당엔 이 시가 액자로 
걸렸다고 했다. 신문사와  잡지사의 인터뷰가 끊이질 않았고 《조선일보》,
《중앙일보》,《한국일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원주에 있는 군인 
부인들은 이 시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는 전화를  하기도 했고, 특
별히 육사 11,12기생  계모임에서는 이순자 씨 등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는 소리를 여러군데서  들었다. 군인 부인들은 이 《당신의 軍服》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 또  후일 미국에서 만난 이여주 씨는 주부백일장에서  보았
던 그 여자가  또 이렇게 기막힌 시를 썼구나  하고 놀랐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집은 표지 색깔을 달리하며  2판, 3판 계속 찍혀나갔다. 그렇게 《당신
의 軍服》은 당시 군인세도의 파도를 탔다. 매일 수십  통씩 편지를 받았고 
심지어는 일본, 미국, 프랑스에서도 팬레터가 왔다.
  한번은 종로서적에 갔다가 내가  《당신의 軍服》의 작가라는 것을 알아
본 점원 때문에 금방 말이 퍼져 졸지에 우리 부부는 거기서 구경거리가 되
었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백 개도 더  되는 
눈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수근대었다.
  "저 사람이 남편인가 봐."
  "남편이 더 잘생겼다."
  나는 위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아래로 깔고 지나갔다.
  이렇게 그야말로 《당신의 軍服》으로  인하여 세상이 들끓고 있다는 착
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서른네 살 젊은 나이에게는  모든 것이 벅차고 
힘겨울 뿐 그 명예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해 10월 25일 한국일보 13층 송현클럽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월계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이던 준상과 건상은  단정히 이발을 하고서  교복을 
입었고, 남편은 감색 양복을 그리고 나는 연분홍 바탕에  진분홍 꽃수가 놓
인 드레스를 입고서 손님을 맞이했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조연현 선생님이 축사를 해  주셨고, 오학영 문
우가 사회를,  정의홍 시인이 작품평(作品評)을 해  주었다. 그리고 김지향, 
이향아 시우(詩友)가 낭송을 해 주었다.
  그외에도 많은 문단  선배들과 동창들, 3군사령관 부인,  사단장 부인 및 
여러 군인 부인들이 와 주었고  특별히 그이의 동창인 김용호 장군을 비롯
한 동기 후배들이  구름떼 같이 들어섰다. 또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축하의 
꽃다발을 보내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빠, 언니,  조카들도 왔고, 또 흰머리를  쪽지시고 
양단 두루마기를 입으신  홀시어머님과 시댁식구들도 왔다. 시어머님은  쓸
데없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남편을 위해 썼다니 다행이라며 글쓰는 며느
리를 인정해 주셨다.
  "오신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회비까지 받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글
을 쓰도록 도와준 아이들 아빠에게 감사합니다."
 답사를 마치고, 인사를 받고, 사진을 찍으며 나는 온통 화려한 스포트라이
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76년) 봄,  황금찬 선생님을 비롯한  문우들이 일선부대를 견학했
다. 지난번엔 우계숙, 한분순, 서영은 씨가 다녀갔다.
 우리 일행은 부대에서  무말랭이 무침에 된장국, 보리밥을 먹고서  최전방
으로 갔다. 비무장지대(DMZ)는 사단사령부에서 비포장도로로 2㎞를 더  가
야 한다. 그곳을 지키는 유소위를 보고 구혜영 선생이  외국 영화에 나오는 
배우같다고 하여 한바탕 웃기도 했다.
  거기서 앞을 바라보니 기름지고 넓은  땅, 그러나 버려진 땅, 4㎞의 비무
장 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이 있었음직한 자리엔 우물만 보였고  만
개한 복숭아꽃, 살구꽃이  구름처럼 피어 흡사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선
경이었다.
  그러나 망원경의 렌즈에 잡히는 북한의 마을,  햇볕, '속도전'이라는 글자, 
철책 밑의 움막들, 병상의 얼굴, 나를 닮은 얼굴들은 우리의 탄식을 자아내
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또  금강산을 향해 깔린 경원선 녹슨 철교와  그 위
를 달렸을 끊어진 기차의 잔해는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픔을 여지없이 드
러내고 있었다.  오직 새들만이 가로놓인  휴전선 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통일촌엘 들러 예비군 중대장의 간단한 브리핑을 듣고 나
서 진열해 놓은 것들을 둘러보았다. 갈대숲, 억새풀숲에서 파낸 저울받침이
며 접시, 가위, 호미  등속이었다. 지나 겨울 MP모자를 쓰고 '헌병'  완장을 
차고 3.5㎞ 땅굴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가슴이 아팠다.
  오천 년 역사가  물려준 땅을 이렇게 간수하다니, 이념이란 대체  무엇인
가? 부모형제를, 자식을, 부부를 떼어  놓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
인가? 아픈 가슴으로 얼어붙은 들꽃의 잔해들이 박혀 들어왔다.
  그후로 나는 문예지나 신문, 월간지, 기독교 잡지 등에 수없이 많은 글들
을 기고 하면서 여전히 김치항아리가 담긴 가방을 들고  일선을 오갔다. 아
이들을 서울에 두고 일선으로  향할 땐 아이들 걱정이, 돌아올 땐  그이 걱
정이 끊이질 않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일선에 갔다 돌아오는  길, 가을이 짙게 깔린 어느 황혼녘이었다. 
집집마다 백열등이 등꽃처럼 켜지고 있는데 나의 감성은 그 불빛들을 아름
답게만 볼 수 없었다. 어두움에 대한 불안이라 할까, 세상 영광의 무상함이
라 할까. 다시  나를 구속하지 못할 저녁  불빛….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저려왔고, 무엇인가 두렵고 떨렸다.
  영예라는 것이 영니에게 어떤 구원(救援)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끄집어 내어 말할 수 없는  깨달음을 받아 안아 내게서 《당신의 軍服》
의 이 큰 잔치는 이렇게 끝났다.
  모여서 피는 들국화
  볕이 고왔다. 문정희  시인은 점심을 같이 하자며 나를 이끌고  인사동으
로 갔다. 아담하고  조그만 한옥에 들어가 우거지국이 나오는 한정식을  시
켰다. 고국의 흙에서 내 나라 바람을 맞으며 자란  산채와 김치라서인지 특
별히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너무나 맛나서 많이 먹었지만  그 동안 미국에
서 쪘던 살이  더 찔 것 같지는  않았다. '흐린 세상 건너기'라는  찻집에서 
음미하는 솔잎차도 별미였다. 이런 것들이 내겐 새롭고 재미있었다.
  서울에서 문정희 시인과  함께 인사동 골목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 내겐 
각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나에게 남기는 흔적들과 감동은 언제나  굉
장하고 새롭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사로잡히기를 즐거워하곤 했다.
  뉴욕, 그곳에 묻어 있는  그녀의 숨결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브로드웨이 
나의 일상으로, 그 뜨겁게 내리쏟는 빗속으로 그녀가 걸어  왔고 우리는 끈
끈한 유대를 맺으며 행복했었다. 맨해튼 거리나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문정
희 시인이 10년 전 풍기고 간  형용할 수 없는 시간의 향기가 남아 아직도 
나를 감격하게 하고,  그립게 하고, 눈물짓게 했다. 그녀가 그  조그만 손으
로 열어 젖힌 뉴욕의 매력과 신비는 표현할 길 없이 엄청난 부피였다.
  브리커 스트리트 끝쪽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도서관 입구에서 노랗고 
푸른 무늬의 스카프를  두른 30대 중반의 그녀가  팔랑거리며 뛰어나올 것 
같은 착각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그녀가 뉴욕에 유학 중이던 1982년, 나
는 그녀를 각별히 좋아했다.
  그녀는 우리집에 왔을  때 고작 장아찌만 대접했는데도 즐거워 했고,  차
를 샀다며  타고 오는가 하면, 피곤에  지쳐 돌아오는 남편을 보면  태연히 
공부할 수가 없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녀에게 그리니치 빌리지는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엔  가게 하
나 하나가  신비하고 뜻이 있었다. 우리  가게에 쌓여 있는 싸구려  목걸이 
하나에서도 색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감격했고, 조그맣고 예쁜  물건을 
보면 '이건 김영태 시인이 좋아하겠다'라고 소리쳤다.
  서로 가난했던 때인지라 5달러에 세  편씩 볼 수 있는 극장엘 갔고 거기
서 소련 영화를 보며 울었다. 음식점 대신 커피숍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
면서 마냥 새로워 했었다. 또 베르디의 라보엠에서부터  최진희의 노래까지 
우리는 함께 좋아하며 향유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이 빌리지의 공기는 자유 그 자체예요."
  "먼지 카페가 있어요. 그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답지오."
  "폴란드 영화도 영화의 기본이 완전하고 예술적이에요."
  "브리커 스트리트에서 영화를 보았어요. 체코  영화인데 우리나라보다 30
년은 앞섰어요. 일본영화  '라문쇼' 보셨죠. 그것도 50년  전 것인데 얼마나 
잘 만들었어요.
  지금도 나는 영화를 보면  가끔 시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녀의 감
성은 특별히  내 가슴에 와 박혀서  파문을 일으켰고, 그때 우리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함께 돌아다녔다. 그랬다. 모국어로 함께 시를 쓰는 우리는 함
께 목말라했고, 아파했고, 한 방울의 물로도 해갈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진
지하고 뜨겁게 뉴욕을  누리고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는 뜨겁고  격렬
했다.
  그녀는 2년 유학을 마치고서 가족과 함께 뉴욕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두 번쯤 여행을  다녀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도 뉴욕은 여전히  덜컹거리는 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굴러가
고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 문정희이기보다는 그녀가 품고 있는 
시적(詩的)인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녀를 만나면서 내 마음 깊숙
히 주름잡힌 갈피갈피의 얘기들을 모조리 펴보이고 들려주기보다는 그녀의 
젊음과 그녀의 감성에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그녀와 함께 하던 짧은 2년에  비해 내가 그 휴유증을 앓는 기간은 너무 
길었다. 나는 내가 한 일이나 들은 것 모두를  그녀에게 하나씩 보여주어야
만 직성이  풀렸다. 심지어 뉴욕의  눈보라까지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했다.
  무엇을 보든지 문정희 시인이 생각이 났다. 어디에 가서  어떤 물건을 보
면 "아, 이건 문정희 가 좋아하는 물건이야"라고 외쳤다. 함께 듣던 모차르
트며 가수  최진희 노래들을 들으며  그녀와의 추억을 더듬었고,  그리니치 
빌리지를 헤매면서 함께 가던 카페들을 바라보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작년엔 그녀가 아이오와에 왔을 때는  비록 전화일망정 많이 만날 수 있
었다.
  "세계 각국 작가들과의 생활하고 있어요. 색다른 것이 많아요. 이공기 자
체가 다른 것같이 느껴져요. 오늘은 영시 낭송을 했어요. 자작시예요."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면 시가 쓰고 싶어진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
으면 그렇듯이.
  그녀는 한국에서  어머님 장례식을 치르고  편지를 보냈다. 편지엔  입관 
때 성격책을  넣었다고 씌여 있었다. 성경책을  함께 넣은 건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쓰노라고 했다. 어느 해인가 우리들이 주고  받은 편지가 《뉴욕 
한국일보》에 게재되기도 했다. '아아, 뉴욕'이라는 제목으로 쓴 편지였다.
  한번은 한국에서 정이용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향수'를  천에 새
겨 보내줬다.  보드라운 천이어서 나는  스카프처럼 매고 다녔는데  노래를 
들으며 그걸 보면 고향의 정경들이 아련해지는게 푸근해서 좋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돌아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시간은 마술사다.
  지금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는다 해도 우리는 82
년의 가난했지만 황홀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지금 여기 서울 인사동 골목을 누비며 가을 햇살을 쬐고 있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
  귀국 후 첫날은 '동서문학상' 시상식장을 찾는 데 너무 헤매는 바람에 10
분이나 지나서야 시상식장엘 들어설 수 있었다.
  전숙희 선생님이 많은 참석자들 앞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17년 6개월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너무도 많은 얼굴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시간을  내
어 만나기를 원하는 말씨나 표정들도 따뜻했다.
  "잘났다, 잘났어! 정말 잘났어!"
  제대로 만날 시간을 못 내겠다고 쩔쩔매는 내게 정연희 선생님은 이렇게 
웃으면서 소리치며 웃으셨다. 그 선생님의 막내동생인 소설가  정규택 씨는 
뉴욕에서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는 좋은 문우다.
  김규화 씨는 뉴욕에서 내가 한동안 잊고 있던 것들을 낱낱이 되살려주고 
갔던 분이다. 문예진흥원장 부인이자 월간 《시문학》지 주간인  그녀는 내
게 작가는 작품이 말해주는 것이라며 나의 시가 굉장히 감각적이라고 칭찬 
겸 염려를 해주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녀는 부엌에 편지와 봉투를 놓고 갔
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다가 나는 옛날 《문예사전》에선가  그녀가 나와 
동갑이라는 것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이것으로 예쁜 옷을 하나 사야지 생
각했다. 김규화  시인은 나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기 때문에 나도  뚱뚱한 
몸매에 멋 좀 내보고 싶어서다. 그 어느 틈에선가  생활의 고단함을 몰아내 
줄 파릇한 젊은날이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소설가 윤남경 선배는 예전에 한국에  살 때 내게 함께 성경공부를 하자
고 했던 분이다. 둘이라도 하자고 해서 시작했던 성경공부  모임은 내가 떠
나고 난 후  여류문학인 기도회의 기틀이 되었다. 그분들, 김자림  선생, 정
연희 선생님, 또 강유일  씨 등이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기도해  주고 우리 
가정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젠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황금찬 선생님
이 웃음을  머금고 다가오셨다. 그리고 가만히  귀띔해 주셨다. 아랑들롱을 
닮았던 이화대학의 김세익 교수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고.  그 말씀음 일순
간에 세월의 무상함을 몰고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나같은  며느리를 보고
싶다시던 이범선 선생님이 80년대  초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보내고 슬퍼하
셨다던 사람, 이젠  그가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세실
극장에서 '천당간 사나이' 문인극을 맡아 할 때 그분은 주인공 죄수 역할을 
맡고 나는 대포집 여주인 역을 맡아 함께 연극 연습을 하며, 종로2가 '유전
다방'에서 늦도록 이야기 하던 기억들이 그대로인데 말이다. 
  황명 선생은 17년 동안 늙지도 않은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정의홍이 세상을 떠났어요.  예전에 빼빼마른 정의홍과 약간  통통한 여
성 김정기가 디즈니 다방에 나타났던 생각이 났넜요."
  그랬구나. 장위동에선  한동네에 살았고 시(詩)얘기도  많이 했던 정의홍 
시인은 이젠 세상에 없구나. .. 덧없어라, 흐르는 시간이여. 
  무상함의 골은 옆에 있던 김시인의 느닷없는 말로 깊어만 갔다. 
  "처음엔 초청자의 명단에  김정기 씨의 이름이 없었어요.  그게 의아해서 
물었더니 김정기 씨는  오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군요. 그래도 일단  명단에 
넣고 사정을 물어보라 하였지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억울하게 제나라에 돌아가지  못하는 작가를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올 수 있는  사람도 못 오도록 명단에서 빼는 그 알량한 
충성심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조국은 아직도 나를  버려 두려 하는
가? 그런가? 솟구치는 분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신을 찾는 사람은 100명도 더 돼"
  식이 끝나자 임성숙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가까운 사람은 빠지라고  해
서 옆으로 비켜  서 있노라고 하시면서. 서은영, 허영자, 구혜영  선생도 반
갑게 손을 잡았고, 조정래, 김초혜 씨도 오랜만이라고 되뇌었다. 
  저녁, 우리 '뉴욕문협팀'을  대접하는 선배 문인들의 눈길은  정겹기만 했
다. 그분들은 바로 지난  3월 '문학의 기쁨을 해외 동포와 함께'  라는 기치
를 걸고 뉴욕에서 열린 '문학의 밤'에 오셨던 분들이다. 
  그분들은 그때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한 대로 뉴욕을 문학의 물결로 출
렁이게 했고, 여러모로 부족한  내게 특별한 배려를 하고 떠나셨었다. 윤석
진 시인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던 그들을 향해 나는 얼마나 가슴 벅차
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를 외쳐 댔던가. 브로드웨이  32번가 모
퉁이에서 어둠이 차를 삼켜버릴 때까지 손을 흔들고  다시 춥고 어두울 뉴
욕 때문에 그 얼마나 휘청거렸던가.
  식당 용수산에서 나오는 한정식은  이름도 모를 정도로 다양하고 맛있는 
이 땅 산채들의 만찬이었다. 전숙희 선생님은 옆에 앉아  계속 많이 먹으라
고 권하셨다. 
  호텔 아래층까지 오신 김주영  선생은 밤중인데도 이탈리아 음식중 가장 
좋은 것을 시켜  주셨다. 음식이 목에까지 찼다.  나는 몸이 더 무거워지든 
말든 서울의 밤하늘 아래서 과식을 하며 이 공기, 이 하늘, 이 바람을 만끽
하고 싶었다. 내가 서울에서 지인(知人)들을 만나 함께 어울려 웃고 있다는 
것에 마냥 젖어들고만 싶었다.
  그랬다. 조국이, 동료였던 군인, 정치가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을 때, 우
리가 그야말로 폭삭 망했을 때도  변함없이 우리곁에 있어 주었던 나의 문
우들. 나는 그들 곁에서 숨쉬며 머물고만 싶었다. 

  침묵하는 뉴욕

  "김선생님이 책임을 느껴야  해요. 이곳에 문협(文協)이 조직되는데 주축
이 되셔야지요."
  1989년 황동규 시인이 뉴욕에 교환교수로  와 있을 때 우리는 최병현 시
인과 어울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최병현 시인이 우리집을  방문하
여 탁자를 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뉴욕 미동부  문인 협회'는 여기서 시작
된 것이다. 
  모국어권 밖에서  글을 쓰는 것은  자신과의 크나큰 싸움이었다.  사상과 
이념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줄기 문화의  강을 흐르게 하려 할 
때 그에 따르는 진통과 어려움의  한세기를 거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었다. 그러기에 늘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삶의 풍향계를 돌리는데  긴장을 
느추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서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항 글이 나오는  것이
기에.
  그러나 뉴욕은 아무리 두드려도 모국어로 글을 쓰는 나에겐 침묵으로 답
할 뿐이었다. 
  조국에 있는 많은  문우들과 특별히 김만조 선생님  그리고 나를 아껴준 
많은 분들은 언어권을 떠난 시인은 물을 떠난 물고기라고 안타까와하며 염
려해 주었다. 그래서  뉴욕 미동부 문인협회를 건설하는 일은 많은  의미가 
담긴 일이었다. 
  우리는 말이 나온 김에  추진하려고 우선 <뉴욕 한국일보>에 있는 김송
희 시인과 연락하여  문협을 창설하게 되었다. 일단은 한국에 계신  이계향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김송희 시인과 내가 부회장이 도기로 합의 되었
다. 
  이선생님은 연간으로 발행하는 <뉴욕문학>을 네  차례나 내셨다. 여자답
고 정많은 선생님은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고 나 또한 여러모로 그분을 의
지하고 따랐다. 참으로  오랫동안 쌓아온 그분과의 우의를 잊을 수가  없었
다. 
  내게 비로소 시의 배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릴무렵 많은 시우, 문우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란 하였다. 내 몸보다 더 아끼
고픈 귀한 나의  문우들,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지고 껴안는 귀하고  아름
다운 이름들.
  나는 책을 내는 문우들에게 나의 서툰 솜씨로 발문도  써 주었는데, 책을 
낼 때 마다 내가  내는 것만큼 기뻤다. 처음으로 쓴 발문은  이종성 의사와 
허금행 씨의 수필집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또 나를 아껴주는 문우들의  책
머리와 뒤를 스는 일이 나는 마냥 즐거웠다.
  혈육 같이 느껴지는 서량 시인과 또 한 동네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는 윤
석진 시인은 내가  늘 의지하며 지내는 분들이다.  한국 <중앙일보>신춘문
예 소설 부문에 당선한 신상태는 나의 자랑이다. 성공회  신부님 사모인 이
정강 시인은 언제나  틀림없고 예쁜 사람이다. 조라색 옷만 입는  김영란씨
는 나에게 늘 밝은 얼룩을 보여주려고 언짢은 일이 있으면 나를 피하는 신
앙의 자매다. 그  오빠 이봉로 장로(정혜문 시인의  남편)에게도 우리는 한 
가게에서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살았다. 그래도 우리에게  얼굴 한번 붉히
지 않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그래서  나와 우리가족은 이 험하고  아픈 
나날을 견디어 올 수 있었다. 
  회원들은 해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 같이 순정을 바치며 문협을 
사랑 했다. 그러다 6년이 지ㄴ면서 오래된 회원간에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
했다. 너무 오래된  회장단에 싫증이 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원치도 않은 
내가 '미동부 문인협회' 회장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이계향 선생남의 뒤를 이어  4대 회장직을 수락 했을 땐 이계향 선
생님은 이미 문협으로 상처를 입은 후 였기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
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뿐 이ㅏ었다.
  "나는 문인협회가 정말 부담스러워, 정말. 나는 사람들에게 욕 먹으며 하
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아.  성격에 맞지도 않고. 회장이란 말 든는것도 징
그럽고 싫어."
  내가 이렇게 투덜거릴 때 마다  아란은 잘 하면서도 그런다고 말하곤 했
다. 어쩌면 나는 그말로 위로 받기 위해서 자꾸 엄살을 부리는지도 몰랐다. 
하여튼 나는 이 노릇이 부담스러웠다. '나의 가족들에게도 충성하지 못하면
서 무슨 문인협회; 활동을 한다는 것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해 3월 22일에는 우경문화재단 지원 아래 뉴저지 패리사이드 연회장
에서 '문학의 기쁨을 해외의  동포와 함께' 라는 기치를 들고 '문학의 밤'이 
열렸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뉴욕의 동포들과 문인들, 그리고 늘 어머니 같
았던 전숙희 선생님,  78년도 중반 여류문학인회 여핸때 한방에 묶었던  김
후란 이경희  선생님, 작품속에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김원일, 
김주영 선생님, 그리고 친구 김송이   둥과 가수 홍민, 김광일 씨가 어우러
져 역은 그날 '문학의 밤'은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내가 속해 있던 '미 동부  문인협회' 쪽에서도 출현했고 400명도 넘게 모
인 그 자리에서  나는 회장으로서 한분 한분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가 회장이 되고  바로 한국문인협회에서 개최하는 '한국문학의ㅣ  세계
화'란 심포지움이 있었고,  그날 밤 퀸스아스토리아에 있는  '아스토리아 매
너'에서 '문학의 밤'이 열렸다.
  또 같은 날 케임브리지 화랑에서 동시에 개막한 미동부 문인협회 시화전
에는 브루클린의 고모(김재규 부장님의 동생)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왔었다.
  나는 김원숙 그림에 두 작품을 냈다. 달밤 장지문에  여인의 그림자가 비
치고 댓돌 위에 흰 고무신이 놓여있는 그림이었다. 목침에  그린 이 그림은 
아주 앙증맞았다. '문풍지'라는 제목은 옆에다 글씨를 따로 짜서 붙였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모닥불을  쬐면서 부끄러워 엎드려 있는 그림으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를 부인하는 모습이었다.  진자주색이 노
랑과 어울려 배경에 갈린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이 그림에다가 '나는 
베드로입니다'라고 명명하고 시를 써서 역시 옆에 붙였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모닥불을  쬐면서 부끄러워 엎드려 있는 그림으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를 부인하는 모습이었다.  진자주색이 노
랑과 어울려 배경이 깔린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이 그림에다가 '나는 
베드로입니다'라고 명명하고 시를 써서 역시 옆에 붙였다. 
  고모들은 그걸 사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원숙의 그림은 만만한 값이  아
니어서 나는 극구 사양해  그냥 돌아가게 했다. 물론 그런 그림을  사 놓으
먼 가치도 있고 좋겠지만 그댁이나  우리나 그런 여유가 없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나는 결사적으로 말렸다. 
  맨하탄 브로드웨이 32가,  우리가 전시회를 연 화랑은 한국 사람이  운영
하고 있었는데, 그 화랑이 있는  빌딩도 한국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이 화
랑엔 들어서자마자 이상윤 씨 시가  김주상 선생 그림과 함께 오른쪽 벽에 
붙어있어 연이어  순서대로 시들이 붙어있다.  회원들의 시화전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는데, 관람객이 많이 와 주어 그때 우리는  기쁘고 흐뭇한 가운
데조금은 흥분되어 있었다. 
  나는 뉴욕의 어려운 생활 중에도 해마다<뉴욕 한국일보>의 신춘문예 심
사를 10년이 넘도록 해오면서 많은 후배를 배출했고,  '한국어 동화 대회'도 
12 년째 심사하고  있다. 또 1980년 신년벽두면 어김없이 여기저기  신년시
(新年詩)를 썼고, 수많은 신문에 창간시를 썼다. 
  그랬다. 나는 그것이 문학인 양,  동포의 가슴을 여는 일인 양 기를 스며 
지켜 나갔다. 군가가  군인의 사기를 높여 주듯이 이민의 고달픔과  어려움
을 담은 시들이 용기와 힘을 줄 것이라 생각하며...
  이민의 땅.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비인간 적인 것이  공통화 된 이곳엔 
영혼을 감동시키는  이민 문학이 필요하고,  작가에 의해서 이민자의  문화 
생명이 유지될 수 았으리라 생각하며.

  빛으로 열리는 하늘-새해에

  빛의 바다에 배를 띄우며
  아직도 뜨거운 우리의 가슴에 때어나는
  역사(歷史)의 하늘
  은총의 아침이 열립니다.
  이 황야의 위에 환희의 언어로 돋아나는 
  우리들의 풋풋한 약속을 
  향기로운 새벽에 띄웁니다
  참으로 무성했던
  지난날의 사라
  떠나지 말게 하시고
  진실하게 가슴을 여는
  새 땅에 
  처음으로 깨어지는 종소리를 든게 하소서
  저희를 흔들었던 수많은 방황
소나기로 대륙을 적시지 못한 이민의 구름
  첫 풀잎에
  영롱한 이슬 방울로 앉게 하소서
  세계는 은밀한 떨림으로
  당신의 새 잔을 받으며
  정의롭게 살고
  저 하늘 동포의 눈물을 씻어줄 1997년
  다시 떠오르는 태양 위에
  영원한 대지 위에
  첫사랑의 황홀한 입맞춤을 허락 하소서.

  그러나 아무리 신년시나 기념시를 기고해도 원고료는 거의  없었다. 의사
가 인턴, 레지던트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의사가 되듯, 문인도 많은 공부를 
하고 수련을 거쳐온 것인데 이곳 언론은 그것을 나몰라라 했다.
  뉴욕에  있는  이불  씨는 비록  철거  당하기는  했어도  'Modern  Art 
Museum'에 생선을 걸어놓고  그 썩는 과정을 미술의 장르라고  표현할 수 
있었고, 또  이창래 씨는 'Native Speaker'  라는 영어 소설로 미국을  온통 
들썩들썩거리게도 했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는 얼마나 풍요롭고  우아하던
지 우리는 모두 경탄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전위예술이 범람하는 뉴욕에서  한국마로 문학을 한다고 한들 누
구도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뉴욕의 시간은 그림일 뿐이었다. 그림 속
의 뉴욕에서 나는 사랑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뉴욕은 한국말로  시를 쓰고 한국말로 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서는 아무리  흔들어도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황폐하고 척박한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구도의 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마냥 
쓸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냥 외롭지만은 않았다.
  '소파 문학상'을 타신 허병열 선생님도 옆에 계셨고,  참다운 문학을 하고
자 몸부림치며 나를 자극하고 있는 수필가 이영주 씨도  옆에 있었다. 그녀
는 날마다 자신이 읽은 책을 정확히 평하여 이야기해  주거나, 그녀의 특별
한 감각으로 음악에 대해 설명해 주곤 했다. 그리고 아란, 소설가 김지원이 
있었다, 뉴욕에는.
  이 땅에서의 나의  목소리는 비록 모기 소리보다도 가늘고, 우리의  노력
들은 계란을 바위를 치는  형상이라 할지라도 결코 추락하거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참다운 문학은 형틀에 매달려서도 태양만 있으면 행복해  할 수 있
는 바로 그것이고, 죽음의 병 가운데서 구언이 되는 그 무엇이며, 나이아가
라 폭포 물방울이 10만 평의 잔디를 키우듯 생명을 키우는 물기가 되는 것
일지니. 그러므로 나는  문학을 버릴 수 없었다.  문학을 버린다는 것은 내 
인생, 내 신앙을 버리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한국문인협회'가 뉴욕에서  심포지움을 열었을 때,  전정한 
프랑스말은 그 나라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캐나다 퀘백에서 찾듯이 뉴욕이 
한국말이 한국의 영원하  고전이 되리라는 믿음을 가슴에  품은 채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다.
  "저희는 조국에서 태어나  조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타향
에서 피는 꽃은 얼마나 아프게 저의 눈을 찌르고 허드슨 강변의 바람은 또 
얼마나 세차게  저의 머리칼을 헝클어  놓았는지요. 그러나 낙후된  일본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 전후(戰後)가수  '미소라히바리'같이 때로  절망스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교포들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겠습니다. 문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와 모국어가 얼마나 생명력 있게 자라는가를 보여드리겠습니
다."


워킹 뉴욕커

  호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엔 명멸하는 네온사인 속에 십자가
의 붉은 빛이 촘촘히 섞여 있다. 조국의 밤하늘에  떠있는 십자가를 바라보
는 일은 뜨겁고 감격스럽다.
  아마도 남편은 지금 어둠침침한  가게 뒷방에서 기도를 마치고 밝아오는 
밖을 내다보며 물건을 주문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창백한 얼굴로 늘 
부족한 은행 잔고를  메꾸려고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애
써 불경기에 찌든 표정을 씻어내려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고국에 와서 많은 선배와  문우들을 만나고, 이 하루  일도 
하지않고, 서 있지도 않는 것이 도무지 꿈만 같은데, 남편은 나 없이 또 이 
하루 혼자  애쓸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미국  생활.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주일
을 빼고는 단 하루도 쉴 수 없었던 날들.

  아침 7시 반,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면 밖의 빛을 일별한  물건들이 나를 
반긴다. 모두가 가짜 보석들이지만 빛나기는 마찬가지다. 정혜문 시인네 매
니제 빅터가 불을 켠다. 갑자기 환해진 가게의 반은  우리의 주얼리들이 반
은 가방들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물건두ㅡ에게 눈인사를 하고 또  하루를 
지낼 것을 약속하고 뒷방으로 들어간다. 
  우리 직원들은 모두 와 있다. 남편은 10분쯤 후에  차를 주차시키고 샌드
위치를 사들고 가게로  들어선다. 진회색 바바리로 야윈 몸을 감싸고  들어
서면서 언제나 가방쪽을 바라보며 인사하고는 뒷방으로 들어온다. 
  뒷방에서 그이와  나는 차례로 조그맣게  기도를 한다. 아이들과  이웃의 
정혜문 시인네를 위해. 나를 믿음으로 이끌어준 그 분들은  옆에서 12년 동
안 가방무역을 하며  함께 동고동락을 해온 분들이다. 언제나 고마운  마음
으로 그 가정과 사업과 교회를 위해 정혜문 시인의 그 깨끗한 사랑에 감사
하며 기도한다. 또 김영란 집사의 미소띤 얼굴에서 느껴지는  평화와 그 가
정의 축복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둘이 커피를  마신다. 남편은 크림과 설탕을 넣고, 나는 
블랙으로 마시는데  때때로 맛있는 커피는  멀리까지 가서 사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늙음을 확인하곤 한다.  이런것들이 이다
음에 생각날 것 같다. 그러니 왕창 불안하기만 한 삶은 아니다.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중엔 미세스 서가 있다. 그녀는 유학생의  부
인으로 외모도 수려한  뿐더러 활달하고 지혜롭게 우리 상점을 돕고  있다. 
신세대를 막 거쳐서 인지 디자인  감각도 뛰어나 일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에 있었으면 아주 다르게 발전 했었을 여성이다. 쑥색 조끼
에다 검정 스웨터를 받쳐입고 정리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선 30대의 젊음이 
팔랑거리고 있다.
  그녀가 나오고 조금 지나면 스티브가 출근한다. 스티브는  건상이 친구의 
동생이다. 그는 여섯  살에 미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툴러서  알아든
기는 하되 전문적인  용어와 한글 맞춤법에는 약하다. 그러나 70년대  한국 
가요난 소위 '뽕짝'을 좋아할 정도로 한국적인 냄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서 정혜문 시인의 맏딸 지은이가 들어온다. 
  "지은이가 오늘은 더 예뻐보인다."
  나는 싱그러운 젊음이  빛나는 그녀의 보습을 보고  이렇게 인사를 건넨
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간 아버지의 무역사업을 돕고 있는데, 가
슴엔 문학의 꿈을 감추어 두고 가끔 에세이나 단편을 써서(물론 영어로 쓴
다.) 상을 타오기도 한다. 
  "머리를 잘랐어요. 선생님도 잘 지냈어요"
  지은이는 이 나라에서  자랐지만 한국말을 똑똑하게 히고  제 엄마 같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룬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선경과 수경이  들어온다. 바르고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김영란 씨의  딸들이다. 정혜문 시인의 둘째딸 지숙은 화장기  없이도 
선명하게 밝은  얼굴로 화가답게 화판을  메고 들어온다. 그들은  후러싱에 
있는 정혜문 시인의  집에서 밴트럭으로 함께 여기  맨하튼의 가게로 나와 
앞쪽에서 왁자지껄  얘기 하다가 각자  자기의 직장으로 헤어진다.  가끔씩 
이렇게 젊음이 물결치고 있는걸 바라보는 일은 일상에 싱그러움을 더해 준
다.
  이장로님은 맨 뒤에  들어오셨다. 10년을 넘게 한지붕 아래서 지내며  봐
온 그분은 어렵지만 친밀감이 느껴지는 인자한 분이다. 
  "오늘은 눈이 올 것 같지요"
  "옛날엔 눈오는 것이 기다려지고 좋았는데 미국에 와서는 눈도 아름다운 
줄 모르겠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니 이장로님은 그저 웃으셨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장사가 안 되니까요.  눈만 오면 정말 장사가  안 
되잖아요, 사람들이안 오니까. 거기다 길도 막히고 집에 쌓인 눈 치우는 일
도 보통일이 아니에요."
  정말 뉴욕은 눈이 무섭다. 온 교통을 마비시키는데다  비상령까지 발동시
킬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셔서 제가 만든 찰떡 접수세요."
  앞쪽에 앉아 있던 정문혜 시인이 나를 부른다. 그  얼굴에 평화가 넘치는 
듯하다. 그리고 김영란씨가 마른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노는 것이 보인다. 
  "아유, 웬일이에요, 이렇게 일찍…."
  보라색 코트, 보라색 스카프,  반지까지 보라색인 그녀는 구두 역시 단정
하다. 그리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오늘 기독교 방송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녹음했고요, 이 꽃은 주문받은 
거예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는 또 하루를 시작한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내가 현실적인 생각에  치우치지 말아야지해도 
그게 그렇지만은 않아서 가게에 직원이 안 나온다든가 하면 초연해지지 못
하고 안달을 한다. 아주 안달바가지다. 그럴때마다 그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마음가짐을 추스리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문혜 시인, 김영란 씨와 함께 어울려 살며  특별히 믿음으로 도
움을 받기도 하고,  시시콜콜 속상한 얘기도 털어놓으며 지내온 시간은  차
곡차곡 쌓여  어느덧 10년을 넘기고도  한참이다. 정문헤 시인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소천하셨을 때는 오히려 정문혜 씨는 담대한데 나는 흰수염의 인
자하신 모습이 떠올라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가게 안에 진열된 주얼리들은 제각각 감정을 갖고 있다.  때로 내가 가게에
서 책을 펼치면  모든 장신구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책을 접곤 
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진주 세 줄로 철사로 둥글게 엮은  CHOKER는 신부들에게 인기가 많고, 
그냥 한 줄짜리는  들러리나 화동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들은 각기 자기가 
제일인 양 뽐내고 있다.  가짜 금귀걸이, 목걸이들도 천층만층인데 돌로 만
든 것부터 크리스탈,  라인스톤 등으로 만든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나름
대로의 자태가 있다.
  가게 안의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50전짜리 플라스
틱 반지를 고를 것이다.  이 반지는 하나씩은 안 팔고 다스로만  파는데 위
에 금가루 같은 알갱이가 샛노랗게 붙은 하트형으로 사랑스럽게 생겼다.
  Y자 목걸이는 때묻은 벽에 피곤하고 엉성하게 걸려 있다. 그래도 라인스
톤은 제모습을 드러내며  반짝이고, DARIA 물건들은 관록을  드러내듯 중
후하게 누워 있다.  머리에 꽂는 것들도 가지런히 묶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입구 맨바깥에 걸려  있는 인도제 팔찌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며 몸살을  앓고 있는데 게으르고 늙은  주인을 닮은 듯 힘겹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물건들에 더 애정이 가곤 한다.
  제일 밋밋하게 생긴 스페인제 마요카 펄과 이탈리아나 영국제 세트는 진
열장 안에 점잖게 누워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나는  이것들과 10년이 넘도
록 함께 대화하며 지내왔다. 단지 아픈 세월이었노라고만  하기엔 이야기거
리가 너무나 많은 나날이었다.
  가게에서 파는 주얼리들은 여러 사람에세 사는데, 내가  돌아다니지를 못
해 주로  우리집에 오는 세일즈맨들에게  산다. 수석을 채집하시는  박두진 
씨는 수많은 돌  중에서도 눈과 눈이 만난다고 했는데 주얼리들도  그랬다. 
거기에도 만남과 인연이  있었다. 때때마다 마지못해 사는 것도 있었고  물
론 속는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여러 가지 중에서 내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어서 사면 그게 히트를 쳤다. 나는 내 나이나  미감을 무시하고 대담하게 
사는 편이었다. 젊은이들이 보고 "이런 게  팔릴까요?" 그러는 것도 가끔씩 
샀었다. 그러면 그게 이상하게도 잘 팔렸다.
  주얼리쇼에도 갔었다. 그러나  구경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돈이 될  만한 
것을 고르는 것이다 보니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주얼리들이라 해도 지루
하고 머리 아픈 일로만 다가왔다. 다른 이들이 장식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이쁘게 보이다가도 막상 그게  상품이라는 생각에 닿으면 하나도 이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꽃장사하는 이들에게 꽃이 야채보다 나을  게 없는 것
과 같았다.
  고장나는 주얼리도  많았다. 내 분에 그런  게 잘 안 보였는데  사람들이 
종종 뭐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런 건 직원들도 고치고  나도 고치고 어떤 
것은 회사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한국에서 오는 건 부실한 게 많았다. 그게 
많이 부끄러웠는데 그런 건 한국으로 돌려 보내지도 못하고 그냥 버렸다.
  아침 첫손님은  리버데일의 어느 학교  교사라는 흑인 여자였다.  도무지 
교사라는 내새라고는 없는 그녀의 갈색 풍뎅이 모양과 라인ㅅ톤이 가득 박
힌 커다란  거미 모양의 부로치 두  개를 골랐다.미세스 서는 봉투에  담아 
주며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습관적으로 '바이!'라는 이산를 하며 스팀이 들
어올때마다 조금씩 흘로 고인 물을 길레로 훔쳐냈다. 감자기  마음이 이 낡
은 건물과 같이 쇠약해 가는 것 같아서 입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뒤이어 필라델피아에서 장사를 하는 낸시가 들어왔다.
  "낸시야, 너 참 오랜만이다. 한 6달 만이가?"
  아니야, 8달 만에 왔어."
  가냘픈 그녀의 몸매가 더 작아 보였고, 그녀의 눈은  초첨없이 허공을 향
해 있어서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훑어보면서 물었다.
  "낸시, 무슨 일이 있었어?"
  "두 가지 큰일이 있었어."
  "무슨일이야?"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언제?"
  "일주일 전에."
  "건강해 보이셨는데…."
  낸시의 시아버지는 터번을 쓴 인도 노인으로 꼿꼿한 모습이 아주 당차게 
보이는 분이었다. 낸시가 외상을 하고 가면 언제나 당신이  직접 와서는 조
목조목 따져서 갚고 가는 틀림없는 노인이었다.
  "충격 때문이야."
  "무슨 충격인데?"
  "6개월 전에 우리 아들이 총에 맞았어."
  "어머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펄쩍 뛰면서 말했다.
  "우리 아들 알지. 존, 그 아이가 N.Y.U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었어."
  남편이 없는 낸시는 나를 만알  때마다 할아버지를 닮은 존의 자랑을 끝
없이 해댔기 때문에  나는 그애를 한번 보고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보다 큰 키에 눈썹이 검고,  잘 생긴 전형적인 인도 청년 이었다. 피부
가 인더인 답지 않게 백색이어서  황갈색의 어머니와는 아주 다른 모습 이
었다. 어머니가  물건을 사러 올 때마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 다니던  그는 
과묵한데다 신사 같은 위엄이 엿보이던 청년 이었다.
  "여름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날 도와준다고 가게에 나와 일을 했는데 흑
인 강도 총에 맞아서 그만..."
  "어떻게 그럴수가... 너 정신 차려야 해. 그래야 살아."
  "나는 그 아이가 가고 6개월을 꼬박 누워 있었어."
  그녀는 이제 눈이 말랐는지 퀭한  눈으로 자기가 고르고 있는 인도제 구
리 목걸이만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지금은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데."
  " 그게 이상해.  한 8개월쯤 되어서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오히려 이
렇게 일어나 장사도 시작하게 됐어."
  그녀는 주섬주섬 물건을  사기 시작했는데 그게 440불이나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닥쳤던 그 동안의 악운들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 추운 겨울날 아
침부터 많은 매상을 올려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면서 그녀를 보냈다. 
  그리고서 제프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몇 년 동안 오는  단골이지만 빈 밧
스 두 다쓰쯤만  사가기 때문에 거의 말을 않하고  팔기만 하던 손님 이었
다. 
  구런데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부인이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왜 혼자 오셨어요?"
  "다리를 다쳐서 그냥 차에 앉아 있었요."
  "많이 다치셨어요?"
  "그렇지는 않은데 걷기가 좀 힘들어서..."
  할아버지는 부인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는지 자주 밖을 흘
끔 거렸다.
  "실례지만 부인이 몇 살이세요?"
  나는 어떤 때  내 다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나이 차이를 물으려 이런 
질문을 했다. 
  "일흔 두 살이에요. 나는 일흔넷이고."
  "아이고 젊어보이시네요."
  나는 속에  없는 말을 내뱉곤 곧  후회했다. 제프의 표정이 말이  아니게 
쓸쓸해졌기 때문이었다.
  "으리는 결혼한 지 55년이 됐어요."
  "어머나 참 아름다운 일이군요."
  "아내가 열 일곱, 내가  열 아홉 때였지요. 결혼하고 한달만에 나는 징병
으로 끌려  갔어요. 1942년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에 나는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 왔어요. 참 행운 이었죠..."
  제프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50불을 지불하고 갔다.
  "마마, 바라또, 바라또."
  뒤이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페루 출신  마리아 였다. 마리아
는 40대 노처녀  노점상이다. 때때로 경찰에 물건을 빼앗기고 얼굴에  창상
을 입은 채 물건을 사러오곤 해서 몇 번인가 싼값으로  판 적이 있다. 그녀
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더욱 가엾고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때로는 직원들 몰래 목걸이 몇 개씩을 그냥 집어주곤  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노랗게 물들인 탓인지 생기가 넘쳐 보였다. 
  "깐또 곰뿌라(얼마나 사겠어요)?"
  "우나 도세나(한 다스)"
  나는 목걸이 한 다스를 집어주고 24불을 받아서 얼른  금고에 넣었다. 원
래 30불 짜리기  때문에 싸게 팔았다고 직원들에게  구박받을 것 같아서였
다.
  가게에선 날마다 이렇게 각국에서 온 이민 동지들을 많이 만나고 헤어졌
다. 요즘은 타이와 보다  차이나에서 온 상인들이 더 많아졌다. 아프리카나 
타이티 사람들이 오면 대하기가 수월하고 정이 갔다. 닳고  닳은 미국 상인
들보다 순박한 그 사람들이 많이  사고 적게 사고간에 진짜 인간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몇번 오다보면 달라졌다. 어떤 때는 장사군
들이 닳고 닳아서 내가 말려드는 것 같았다. 
  여기 맨하튼의 한인 타운에선 88올림픽 이후 한국인의 긍지가 높아진 것
은 사실이다. 그건 뿌듯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인 타운에서 가장 곤혹스러
운 문제로 세금 문제가 있다. 미정부에서 이렇게 저렇게  매기는 세금이 억
울한게 많아서 피해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좀체로 여유를 갖고  장사
할 수가 없었다.
  아침 풍경을 보면 마치  마라톤 경주 같다. 유독 한국 사람만이  물건 산 
가방을 들고 뛴다. 아침 시간에 맞쳐 가게문을 열려고 뛰는 것이다. 시간이 
돈이니 그러지 않을 수 없다. 그게 가슴이 아팠다.  요새는 더 뛴다. 어떤이
는 숨이 끊어질 듯  달려와서 빨리빨리 달라고 했다. 보는 내가  숨이 가빠 
천천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 해보면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여기
저기서 물건을 사는 일은 마냥  어쩡쩡하고 초조 하기만 한데 급하기는 하
고 어떡 하겠는가.
  인도인들은 제법  여유만만하다. 여기 돈  몇백불만 가져도 인도에  가면 
잘살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벌어도 된다. 그런 것에서 연유한  태도일 것
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소상인이 없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몇 사
람씩은 왔었는데 요샌 없다.  중국인 들도 대국인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다. 
중국인 도매상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대개 자기 빌딩을  갖고 있고 가게
문도 일찍 닫는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7일 내내 열면서도 일찍 닫지  못한다. 장사하는 데도 
서로 경쟁이  아주 심해 이익이 없이  팔다가 서로 망하기도 하고  그런다. 
그래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끼리는 서로 얼굴을 안 볼 정도가
지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옆 건물 스패니쉬  레스토랑을 하던 자리에 새 주얼리 가게
가 들어섰다. 그 주얼리  가게로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샘도 나
고 속도 상했다. 우정을  갖고 대해지지가 않았다. 거기에선 우리하고 같은 
것을 팔면서 더 싸게 팔았다.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이 4불  50전 하는 예쁜 
장신구 박스르르 거기서 4불에 판다고 귀뜸해 줬다.  그 사람들은 소매상이
라 내가 그걸  3불 75전에 팔았다. 한국 사람끼린데도 이렇게  치열한 경쟁
의 대상이 되었고 나도 별 수 없었다. 
  우리 가게에서 가까운 32가를 지나다  보면 그 이름 마느오도 향수를 자
극하는 갖가지 한국  음식들이 즐비하다. 양념 간장에 비벼먹는 콩나물  밥
에 조개시금치국, 된장맛이 일품인 곰탕, 누룽지 밥에 아욱국, 꽁보리밥, 손
칼국수, 쑥국수, 욕쟁이 콩나물국 등속이 후각을 자극하곤 한다. 
  점심은 보통  시켜 먹는데 배달하는 사람에겐  1불씩 팁을 준다.  우리는 
'중원장'의 단골이다. 거긴  한국에 살던 중국사람이 하는  한국식 중국집이
다.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해  종종 한국 음식을 
시켜 먹는다. 그런데  한국 음식을 시켜 먹으면 거추장스러워서 어떤  때는 
샌드위치 같은 걸로 때우곤 한다.  오래 시켜 먹다보면 이게 그거 같고, 그
게 이거 같은데도 막상 점심 때가  되면 벽에다 짝 붙여 놓은 음식 메뉴를 
보고 고르느라 야단이다. 
  한 동안 사는게 힘들어서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다. 오이, 상추쌈, 
콩밥, 고추장 그런걸 가지고  와서 쌈 싸먹고 그러니까 미원도 안  넣고 좋
았다. 아침은 여느 미국 가정과 진배없이 커피와 빵으로  때우고 늦게 끝나
는 날은 닭튀김 등을 사들고 가 저녁으로 먹기도 한
다. 
  토요일은 어김없이  중국 음식을 시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이하고 나는 하나를 시켜  나눠 먹는데 어
떤 때는  그것마저 남았다. 송지영 선생을  따라 몇번 가본 중국  음식점은 
맛이 일품이었다. 선생은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가서 중국말로 광동  음식을 
시켜 맛도 못보던 음식들을 실컥 사 주셨다.
  30가와 31가 사이에는  '조이스 강 미용실'이 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
을 때 나는 거기엘 들러  커트를 하고, 화장품도 사고 그런다. 환장은 많이 
안 하는데 화장품을 사는  일은 즐검다. 한때 나는 옷이나 화장품  등을 포
기하며 늙고 싶기도  했지만 낳이 갈수록 나도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리도 했다.
  옷은 잘 안 사  입는다. 전에는 영국 옷들 같이 고곤적이거나  들꽃 무늬
가 자잘하게 깔려 있는 로라애슐리  옷들을 좋아해 사 입으면 스트레스 해
소도 되고 재미도 있었는데 나이가 든 탓인지 그  재미가 점점 줄어들었다. 
내 몸에 익은 옷들만 입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번은 옷을 사러 갔는데  한국인 노부부가 와서 막 옷을 업어보
고 그러는 모습이  아름답기는커녕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늙으
면 거죽으로 드러내는  건 자제해야지 싶었다. 깨끗하고 단정한 것은  좋지
만 옷을 사러 쏘다닌다든가 하는 건 삼가해야지 싶었다.  그러나 신발은 이
쁜 거 사 신는 게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색동신발도 사 신고 그랬다.
  브로드웨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골목은 밤에 살아나는 곳이다.  그곳 남쪽
에는 600개의 화실이 잇다는  소호가 고풍스런 이름의 깃발을 펄럭이며 뻗
어 있다.  추상화에서부터 조각 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끊임없이  전시가 
계속되는 갤러리가 즐비한 그곳은 동쪽 빌리지와 서쪽 빌리지로 나위어 있
다.
  그리니치는 자유, 그 정장을 벗은 것 같은 홀가분함이 넘치는 곳이다. 영
혼에 통풍을 주는 거리다.  매일 전화통에 대고 내 일상을 끄집어  내어 들
려주는 아란(소설가 김지원)이 사는  거리이고, 10가엔 영문학 박사 최월희
가 살고 있어 더욱 친근한 동네다.
  82년도 뉴욕에서 공부하며 나를  뒤흔들고 돌아간 문정희가 좋아하던 길
들,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은 골목골목들이 살아있는  곳. 조그만 영화관, 
치즈빵이 맛있는 제과점, 목욕탕  물건만 파는 가게 등 어느 하나  놓칠 것 
없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추억의 마을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이에도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를 사랑한다. 거기  조
그만 카페를 사랑한다.  그 카페에서 가끔 잘톰한 재즈를 들으며  어울리지 
않게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싶어진다. 멀고 외롭고 복잡한 세상을  어
떻게 지혜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혼자 조용히 생각하고 싶다.  서울서 온 친
구들을 오헨리가 드나들던 카페 '오헨리'나 관광지가 된 카페 '휘가로'에 초
대하여 이 카페엔 재클린 여사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다녀갔다고 쓸데없
는 자랑을 하는 것도 재미다. 나는 조그맣지만 커피맛이 좋고, 네모난 탁자
에 철의자가 안증맞은,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그런 카페가 좋다.
  그리니치엔 우리집 단골  손님 롼의 작은 선물가게도 잇다. 흰며리의  늙
은 총각 롼은 전형적인 그리니치 예술가 타입의 남자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가게를 샅샅이 뒤져 그의  눈에 띈 그리니치 스타일의 팔찌며 목
걸이 등을 골라간다. 대개가  약간 화려하고 고전적인 모양들이다. 그는 새
벽 2시에야 가게문을 닫는다고 한다.
  빌리지에서 소호보다 더 남쪽으로 가면 금융가인 월스트리트가  있다. 세
계 경제를 주름 잡는  이곳은 '골드맨 싹스', '스미스바니', '메릴린치' 들 굵
직한 금융중권회사들이 있다.  둘째 아들 건상은 '스미스바니'에서  6년동안 
일하다 지금은 '골드맨  싹스'에서 컨설팅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이 자랑
스러워 어떤 사람에게 두 번이나 자랑했었다.
  그곳은 세계 각국의  인종이 모여 살면서 각국의  언어 문화를 고수하는 
만큼 음식도 다양하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59가  로코코풍의 식당
에선 오랜만에 정다운 사람을 만나  담소를 나누며 맛있는 갖가지 외국 정
식들을 먹을 수  있다. 인도 음식, 태국 음식, 이탈리아나  프랑스 음식에다
가 하다 못해 헝가리나 나이지리아  음식까지 맛볼 수 있는 곳이 맨해튼이
다.
  우리는 식당에 다니는 것을 참 좋아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인도 음
식점에 잘  갔는데, 어떤 때는 카레  냄새가 역겹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주 
갔다. 인도는 음식에다 우유를 많이 쓰는데 특히 후식중에  맛있는 것이 많
다.
  각국 음식을 대하면서 발견한  게 있는데, 그건 사람은 어릴 때  먹고 자
란 음식을  못 버린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고요한 음식이 있어서  그게 
아무리 나쁘다 해도 못 버리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우리식당'이라는  데를 가서는 권총 강도를  당했다. 갑자기 
검은 사람 두  명이 들어오더니 각자 권총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들이대었
다. 오금이 떨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네 사람이 갔었는데 우리말고도 몇 무
리가 더 있었다. 강도들은  테이블마다 가서 만자들한테 돈을 달라고 했다. 
나편은 200불쯤 뺏겼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기고 나서도 사람들이 태연히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범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킨 걸 못  먹고 
나왔다.
  40가와 48가 사이에는 다양한 극장들이 많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지  세계최고의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다. 'Cats'나  'The  Phantom of 
Opera' 같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뮤지컬의 정상들을  말이다. 
나는 한동안 10년 이상  공연하는 뮤지컬을샅샅이 관람했는데 그후로는 그 
거리에 가는 일이 뜸해졌지만 볼 거리는 여전하다.
  링컨 센터에서 볼 수 있는 오페라나 발레 말고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구겐하임, 현대박물관 등에서는  주기마다 나라를 바꿔 예술품들을  전시하
기에 각국의 예술픔들을  돌아가며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다. 또  지하철에
도 시(詩)가 있고,  정거장이나 고원에는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젊음이 있
다. 그곳이 내가 사는 뉴욕이다.
  전세계 인종이 모여서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지키려 애쓰는 뉴욕,  39만 
명의 대학생들이  있는 학구열이 높은 도시  뉴욕. 플라자 호텔 푸른  녹이 
입혀진 지붕에 창연한 햇볕을 바라보며  이 땅의 주역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는 곳. 그리고 맨해튼의 밤 명멸하는 불빛은 또 어떠한가.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 뉴욕에서 사는 데 두려웠다.  자다가 깨는 새벽이
면 불안의 정도는  더 심해졌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가 있는 걸까 싶었고, 
꼭 굶어죽을 것 같은  불안을 늘 갖고 있었다. 뉴욕의 범죄만이  불안한 게 
아니었다. 언어, 문화의  차이, 내 땅이 아니라는 것… 그런  원초적인 것들
이 불안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았어도 삶에 대한  주려움은 마찬가지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 핑계를 다 미국에 산다는 것에다 몰아부치는 거였다.
  얼마 전에는 우리 직원 한 명의 생일을 모르고 지냈다가 그 다음날 해피
버스데이라고 쓴 케익을  사다가 조촐한 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케이크를 
자르고 이런저런  드링크를 마시는데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물간은 생활을 해야 한다. 오지 그릇에 담기면 오지 그
릇이 되고, 크리스탈 그릇에  담기면 크리스탈 글릇이, 양철 그릇에 담기면 
양철 그릇이 되는 것다. 백인과 섞이면 백인같이 굴고, 흑인과 섞이면 흑인
같이 굴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의식 속에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마냥 혼한
스럽고 어렵기만 했다. 거게에 화합은 하되 완전 변절은  말아야 한다는 생
각을 더 강하게 하면서 말이다.
  이민의 땅, 브로드웨이.
  수많은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뛰어다니는 곳. 이 곳은 많은  한국인들
이 고생하고 살면서 기존 문화를  버리고 돈버는 데만 시간을 쓰며 자신을 
잃어가는 곳이었다. 자기의 본질을 잃어버리고서 자신의 빈자리를  찾기 위
하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마구  하면서 변해가는 곳이었다. 
그래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야채를  다듬고 햄버거를 구울 수 있는 곳이고 
삶의 고단함에 대해 이런저런 푸념을 하면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이민자의 귀에 들려오는 내 나라는 미국에서 20년 고생한 걸 다 털고 돌
아가봐야 하파트  전세값도 안되는 곳이라고  했다. 백화점에서 천  불짜리 
옷을 만져 보는 교포 여인을 보고  백화점 점원이 그 옷은 미국서 온 사람
은 못 산다고 말해 버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내 조국. 내란 반란죄로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  있는 
곳일지언정 그 땅은 여전히 내 땅이고, 내 조국인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내가 120여 가지의  언어가 통용되
는 인종 박람회 나라 미국에 오지 않고 그냥 충청도 땅에서 안주하며 살았
다면 더 놓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랬다면 정치, 경제 ,
문화 모든 면에서의 나의 고정관념이  정장을 벗는 것처럼 깨질 수 있었을
까? 분명 미국에 ㅇ기에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이 있는  것이다. 되돌아 봤을 
때 평타하게만 살아온 삶은 남는 게 없을 것이다. 이곳의  삶은 뻥 뚫린 것 
같다고 말하긴 하지만,  거기엔 깨어진 발자취가 귀중하게 남아 있는  것임
을 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이민의 정착  과정이 정금같이 귀한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여기며, '오빌'의 순금 같은 나날이 되기를 바라며 지냈다. 비록 몸
은 부서질지라도 그  인종의 숲, 언어의 숲에  기꺼이 파묻혀 지냈고, 때로 
그 숲이 우리의 남루함을 가리워 주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해가는 삶속에서, 뉴욕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종과 언어 
사이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 어려운  틈에
서 화평을 이룰 때 상대방과 자신의 모두 승리자가 되어 새로운 것을 창출
할 수 있고, 그게 이민의 진정한 재창조라 여겨졌다.

  가슴속의 조국

  뉴욕의 가을은 유난히 을시년스럽다.
  우리 가족이 유배의 땅에서 맞는 가을은 해마다 더욱  시리다. 하루 하루 
삶에 허덕여야 했던 우리는 빛고운 단풍을 즐기지도 못한  채 설악산, 내장
산의 불타는 단풍을 그리워만 하였다. 
  찬서리 위에 우리를 버린 조국이지만 가슴 속에서 조국은 언제나 그리움
이며 사랑이었다. 상처받은 시대의 희생 제물인 그이와 나  그리고 두 아들
은 여전히 낯선 땅 뉴욕에서 서로 껴안고 보듬으며 가을을 맞곤 했다. 
  뉴욕 특유의 커피향과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로 인해 그해 가을은 물속같
이 맑고 투명했다. 한낮이 되어가 한가하던 거게에 검은  얼굴이 서넛 나타
났다. 
  "아유 대니스 아냐?"
  대니스는 나이제리아에서 오는  여러 자매 중에 막내다. 큰 체구에  얼굴
이 유별나게 검고 반짝이는 대니스는 
  "이 사람이 그때 결혼한 남편이야"
  라며 남편을 어루만지면서 소개 했다.
  "나는 미세스 박 인데요. 반가워요."
  바른손을 내밀어 데니스의 남편과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은 존이에요 반가워요."
  대니스에 비하여 잘 생기고 양반 같은 인상의 존은 태도와 말씨가 아 주 
준수 하였다. 
  "아유 대니스야 너 신랑 잘 얻었다. 아주 미남인데."
  나는 존을 바라보고 대니스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나는 어때서? 저 사람이 나를 잘 골랐지!"
  퉁명스럽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참, 이 사람은 언니인데, 이름은 애블론이야."
  막 뒤따라온 키 작고 땅따름한 여자를 보며 대니스가 소개했다.
  "넌 여기 처음 왔니? 우리 가게에서는 처음 본 것 같은데..."
  "처음이야, 언니도."
  애블론은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생겼는데 큰 눈이 선량해 보였다. 
  "도대체 너희는 몇 남매냐?"
  "열 명인데 부모가 같아"
  부모가 같은 남매라는 것은 그들의 큰 자랑거리였다.
  "매기는 부르클린에서 미장원을  한다고 했었고, 그럼 다른  형제들은 다 
아프리카에 있니?"
  "응, 큰 언니가  매리, 그다음이 모니카, 여기사는 매기  그리고 지난번에 
같이 왔던 아마, 피이스, 애블론 그리고 오빠는 마크, 월리, 죠지 이렇게 있
어"
  대니스는 진갈색 아프리카 의상에 박힌  노란 점들을 ㅎ어 보며 자기 가
족의 이름을 순서대로 불렀다.
  "이번에는 애블론이 물건을 많이 살거야. 장사를 처음 시작 했거든."
  두 자매는 소쿠리에  귀걸이며 목걸이를 담기 시작했다.크리스탈  종류를 
많이 담는 것 같아서 나는 참견하듯 대니스의 옆으로  갔다. 그녀는 애블론
과 자기나라 말로 쉴새없이 떠들고 있었다. 아프리카에는  프랑스의 식민지
가 많아서 불어를 많이 쓰는데, 그래선지 그들의 말은 좀 색다르다. 
  "너희 부모는 다 살아계시니?"
  "응, 금년이 70이야 오늘이 아버지 생일이라 아마는 못 왔어."
  "오늘이?"
  "응, 오늘이 10월 26일 아냐!"
  10월 26일 이라는 말은일 순간에 나를 허공에 부웅  뜨게 만들었다. 나의 
눈앞에느,ㄴ 김재규 부장님과 박정희 대통령이 아득하게 나타났다.
  여기 오던해  문화원에 가서 뉴스를 볼 때 사열석에서 손을 흔드는 왜소
한 체구의  박대통령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든든해 보였던가.  비록 
유신으로 인하여 국민에게 상처와 수모를 주었을 망정,  지혜보다는 폭력과 
술수로 정권을 찬탈했을망정, 국민은  울분하며 70년대 정치의 악몽, 그 절
망을 버리지 못하여 미국으로 남미로 많이들 보따리 싸가지고 떠났을 망정 
ㄱ는 나에게 조국 이었던 것이다. 그 조국의 기일(忌日),  10월 26일 그분은 
결국 죽음으로 영웅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부신ㅁ 햇살 활짝 퍼지던 오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부
장님은 그 영웅의 뒷그늘에 숨겨져 있다. 지금껏  포승줄에 묶인 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왜 그분이 보통사람이라면 할수 없었던일, 일
신의 영욕을 위해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하셨는지, 그분이  얼마나 
이 나라를 사랑했는지….  또한 우리 가족이 뉴욕에서 갖은 고생을  극복할 
수 있게 한것도  바로 죽음으로써 나라를 살린  김재규 부장님의 정신이었
다.
  10·26 직전에 윤보선 전대통령  관저에 나타난 군복차림의 방문객에 대
한 기사가 떠오른다. '뒷수습을 해달라'는 메모지와 윤  전대통령이 임종 전
에 '그때 군복차림은  김재규였어.'라고 쓴 카피종이가 쇼케이스  위에서 발
견되었다고 했다.
  김재규 부장님의 의거가 우리나라를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었다
면 우리 가족이  희생되고 윤동주와 같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주 시인도 회색감옥에서 순국하면서  가슴
속 조국을 노래하며  나뭇잎 하나에도 별 하나에도  조국을 느끼지 않았던
가.
  그러나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의 나날들은 참으로 시린 날들이었다.  아
침마다 강물이 되어 맨해튼으로  흘러가서는 무턱대고 한강물에 빠지고 싶
던 날들, 조국의  흙에 길들여긴 질경이, 도라지, 쑥을 보면서  그 나물들과 
입맞추고 싶던  날들,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생길 때마다  가슴속에 
조국을 떠올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었던 날들….
  그러나 어느새 검은  얼굴들이 정답게 느껴지게 한 세월, 오랫동안  오지 
않는 코지나 말타가 종말  보고싶고, 남미에서 오는 손님, 아프리카 손님을 
기다리는 날들….

  "미세스 박, 왜 그래?  우리 아버지 생일이  10월 26일인데  무엇이 잘못
됐어?"
  대니스는 생각에 잠긴  나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기에  다그쳐 묻는 걸
까.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나는 속으로 외쳐댔다.
  '대니스야, 10·26이 무엇인지 모르는  대니스야. 너는 모를 것이다. 10·
26으로 인하여 우리  가족이 당한 17년간의 어려움을. 조국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국어가 얼마나 정  깊은 것인지, 가슴속에 조국이 매일같이 얼마
나 얼마나 아우성치고 있는지  대니스야, 너는 모를 것이다. 김재규 부장님
이 누구이며 왜 그분이 총을 쏘아야 했는가를, 내가 울음  울 듯 시를 쓰게
되는지를 대니스야, 너는 모를 것이다.'
  나는 속으로만 이렇게 울부짖으며  가을 색깔 목걸이를 대니스에게 사라
고 권했다. 대니스가 오늘 매상을 올려주지 않으면 그이가  더 힘들기 때문
이다.
  문밖에 가을이, 뉴욕의 가을이 시퍼렇게 널려 있었다.


  다시 뉴욕으로

  떠나왔지만 나의 땅은 당신입니다.
  건너왔지만 나의 하늘은 당신입니다.

  지금 내게 보이는 하늘
  그 하늘도 당신입니다.
  ........

  최정자 시인의 노래는 다시 떠나기 위해, 다시 건너기  위해 이곳에 왔던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꼭 일주일 만에 나는 떠난다.
  10년이 넘으면 정서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알레르기며  낯설음도 적
어지기는켜녕 더욱 깊어진다는  곳, 서울의 엘리트가 야채 다듬는 일을  하
고, 이민올 때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락이  공장에서 바늘에 찔
려 피로 물들기도 하는  곳, 또 그렇게 살고 나면 떠밀어요  떠나기 싫어진
다는 이민의 땅으로.
  스카스데일, 커네티컫, 어빙턴,  로체스터, 핫스데일, 테리타운, 브롱스 등
속의 이름이 이젠  오히려 낯익은 뉴욕, 선명하게 떠오르는 골목들을  끼고 
황랴하고 피페한 가슴이 불을 지피는  사람들이 등 비비며 사는 나의 삶터
로.
  6·25의 하픔도  4·19의 부르짖음도  그리고 5·16의  변천과 10·26의   
그 경악과 혁명도 전혀 모르며  그저 각자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그로인해 때때로 울고 싶도록 샘이 나는 나라.
  모든 것을 가질수도 잇고 버릴 수도 있으며, 대통령과  거지가 같은 음식 
햄버거를 먹는 나라,  가난하다고 누가 깔볼까 해서 전전긍긍하지 않고  잘
살아도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 나라. 
  10분만 차로 달려 시내를 빠져 나가면 한없이 넓은 벌에 끝없는 숲이 우
거져 봄이면 꽃,  여름이면 녹음, 가을이면 단풍이 기막힌 곳.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갈 때  할렘을 지나면서 늘 자연림으로  뒤덮여 있는 센트럴파크를 
볼소 있는 땅.
  쭉 뻗은 5번가엔  고풍스런 청동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들과  싹스백화점, 
구치, 티파니 등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한가 하면 30가 웨스트사이드엔  거
의 알몸을 드러낸 백인, 흑인 창녀들이 무리지어 고객을 기다리는 나라. 브
로드웨이의 쇼와 링컨  센터의 음악회, 도서관 뒤안의 차맛보다는 어느  집
에서 강도를 당했고, 어떤  가게에서는 모조품 문제로 주인이 수감을 찼고, 
또 누구네는  빌딩을 샀는데 모개지  내기가 힘즐어서 건물은  포기했으며, 
매해튼 공립학교는 학교갈  때 몸수색이며 가방 조사를  해서 총기라 없는 
것을 확인한다는 등의 얘기를 나누는 거리.
  아직도 미국 인구의 3%밖에 안  되는 아시안 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우뚝 서야 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이민 2세들이 의사와 변호사
와 계리사로 쏟아져 나와 자랑스레 가슴을 펴는 곳.
  우리 이이들의 2세,  3세의 혈동에 마음이 쓰이고 혹여 자녀가  미국애를 
사귀면 어쩌나 하며  눈치만 보는 부모들이 여전히  김치와 된장국을 먹는 
나라. 뿌리와 가지가 따로 있어 찢어진 나무로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땅.
  음식점, 노래방, 미장원, 선물  센터, 책방 등이 한국말로 쓰여진 32가 한
국인의 거리가 있는맨해튼, 이민의 고달픔이 묻어 있는 브로드웨이. 밥ㅇ을 
먹기 위해 륵인애들  손을 잡고, 스패니쉬의 등을 두드리는 교포들이  웅기
종기 모여있는 곳.  고집스레 한국말로 싸우고 한국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불현듯 여기가  어딘가, 어느 땅인가를  되뇌이며 영어도 못라고  한국말도 
점점 서툴어 가는 자신이  불안해 지는 땅. 한국 가게 간판들이  즐비한 타
관의 거리에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몇 천 불어치씩 물건을 살 때 양말 
하나 사러 갔다가 기가 죽어 나와서 헤매던 곳.
  아침이면 도깨비시장에 나타나는  파키스타에서 온 사피, 패들러와  ㅍ인 
존, 남미네서 오는 키키, 로사, 아프리카에서 오는 허티, 마마두에게도 정이 
붙는 가게,  주근깨 많은 백인 여자  앨리스가 36인치 목걸이를 고르며  새 
물건을 갖다놓으로고 투덜거리는  가게. 불행할땐 불행를그대로 두고  일에 
매진하면서 견디게 해주는 일터가 있는 땅.
  사촌들이 있고 경미의 두 딸이 ABC를 부르며 웃는 나라, 교우들과 옹기
종기 모여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때론 헐뜯기도 하는 곳, 사업을  하는 학
교 후배들을 만날 수  있고, 몇 달에 한 번씩 캔사스에서  뉴욕으로와 우리 
물건을 사며 많은 예기를 하는 여고 동창 이정해를 만날 수 있는 땅.
  그리고 남편이  있는 그곳, 별이 우난히  푸르른 하늘과 5월이면  영화에 
나오는 풍경 같은 정원을 자랑하는 우리집이 있는 곳. 주일  저녁 6시면 어
김없이 미국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오는 두 아들과 된장찌개, 고사리  나물
을 상에 올려 놓고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그립고 그리운 땅.
  그러나 장미, 진달래, 나초가  피고져도 여전히 내 가슴숙 조국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땅, 뉴욕으로 돌아간다. 
  보스턴에 잇는 전직  한국 관리가 교포 내에  변호가, 의사, 박사의 수를 
통계내고 있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듣던  화가 김원숙은
  "장사도 어렵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도 그것을 딛고 살아가고 있
는 사람, 그 어려움 중에서 웃고 사는 사람, 할  것 다하는 여자, 김정기 같
은 사람이 몇 명인가를 통계내시는 게 더 뜻있는 일일 거예요."
  라고 했다며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 주는 동네로 나는 돌아간다. 
  교포사회에서 문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미동부 문인협괴 회장을 맡아 벅
차하는 나를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전 미주 여선교회  지도자 
양성 글쓰기 워크샵에서 3시간씩 당의를 했을 때는 멀리서 온 회원의 눈물
이 내눈에 엉겨붙던곳.  문학적인 분위기를 오랜만에 느껴  본다며감격해서 
부둥껴 안던 여인에게 문학의 길을  가라고 어깨를 감싸안아 주며 지꾸 희
미해져 가는 모국어의 색깔을  다시 한번 악착같이 틀어쥐던 땅. '아쿠다가
와 문학상' 수상 작가인 이희성  선생님을 초청해 들은 '남과 북이 모두 내 
조국'이라는 말이 절절히 공감하는 회원들이 함께 있는 땅.
  오하이오에서 30년간 시를 쓰고 살며 시집을 펴낼 때마다 나를 울려주는 
이, 가슴에 등불을 하나 켜고 있던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을 가진 마종기 
시인이 숨쉬는 땅.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눈물겨운 내력이
  나와 그대에게 숨어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부딪히고 깨어져야만 황홀한 고통을  맛보는 것이라는 그의 노래를 들으
며내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글을 쓰겠다고, 이민의  서러
움을 서로 달래 주고  끌어안겠다고 다짐하던 그 땅. 그리고 매일  한 번씩 
전화하며 우리  문학의 숨통을 틔우고 그  전화한 내용을 아침마다  Fax로 
보내주는 아란이 있는 땅.
  조국의 하늘을 뒤로 하고 나는 돌아간다, 그 땅으로.

  서울 방문 닷새째 날 틈을 타서 큰시아주버님 막내  결혼식에 갔었다. 예
식장 밖에서 나를  알아본 큰조카딸 경옥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나를 
얼싸 안았다. 시누이는  '언니' 라고 부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누이의 
딸들을, 시동생의 작은아들을 어루만지는 나의 손엔 두꺼운  시간이 묻어나
고 있었다. 또 큰  언니의 딸인 조카는 나의 젊은 날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1959년도  일기장을 싸들고와 뭉텅뭉텅  쥐어지는 그리움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우리집이 있던 장위동에도 가봤다. 좁은 마당 한 켠에  자리한 예쁜 화단
은 아스라한  기억의 줄을 끄집어냈다. 아이들의  어린시절이, 그이와 나의 
청춘이, 빨간 넝쿨 장미가 부신 햇살 속에서 너울대던  그때가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장위동 고개에서 묻어나는 행복했던 우리의  보금자리 흔적
은 이곳과 저곳으로, 그때와 지금으로 끊어진 필름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두세 편씩 청탁원고를  쓰고 방송과 문예지,  신문사를 
누비며 다니던 1970년대의  나의 서울은 어디애서도 ㅊ을 슈가 없었다.  경
북궁, 비원, 압구정동,  장위동 언덕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17년  6개월 만에 
돌아온 서울은 내겐 낯선 타향의 거리일 뿐 이었다. 
  낯설지 않았던 서울의 모습은 슬프게도 통일되지 않은 조국의 아픈 모습
뿐이었다. 뉴욕에서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는 린튼  박사는 북
한의 군부대를 방문하고  나서 말했다. 30세 젊은이가 50세쯤으로 보일  정
도로 마르고 이가 빠진 모습이더라고, 배고픈 군인도 먹어야  할 것 아니냐
고, 그들은 굶고 있다고... 조국엔, 이 땅엔  정치가가 아닌 지도자가 필요할 
것일진저.
  나는 정치나 경제를  모른다. 다만 한 대한민국 장교가, 한  외교관이, 한 
애국 시인이 그리고 그 가족이 바다 건너 타국 땅에서 자신의 일거리를 잃
고 얼마나 춥고 배고팠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우리 같이 내  나라에서 군
사문화에 희생된 사람들이  살아나기를, 신문고를 두드리며 조정에까지  그 
절규가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고향 냇가의 방망이 소리, 서울 뒷골목 해장국을  그리워하며 해바라기처
럼 조국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살아가는 500만 해외 동포의 가슴을 헤아려 
줄 정부의 깃발이 꽂히기를 말이다.

  언니는 내가  떠난다고 용돈을 아껴  노자를 보태주고, 조카들은  처음온 
이모를 금칠갑 시킨다.  언니와 공항에 도착하니 둘째 형님이 기다리고  계
셨다. 아랫동서와 시누이가 보낸 해물들을 양손 가득 들고서.
  그리고 보문동 사모님이  멀찌감치 나를 벌견하시고 달려 오셨다. 한  손
엔 선 물 꾸러미를 들고, 감색 슈트를 입은 사모님은  엇저녁 뵈었을 때 보
다 훨씬 더 젊고 활기차 보였다.
  "사모님 뭐하러 나오셨어요, 이렇게 아침 일찍..."
  "미세스 박 한번 더 보려고 왔지. 만나니까  갑자기 ㅇ날 생각이 나고 떠
난 분들이 온 것 같아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사모님의 눈은 내 얼굴에서 남편의 얼굴과 오래전에 
떠나신 김재규 부장님의  얼굴을 찾으셨으리라. 그 물기어린 눈 속에  젖은 
세월 17년의 영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사모님의 손을 꼭 잡았다. 맞잡
은 두 손 위로 간절한 염원들이 배었다.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그리고 뉴욕에도 오세요"
  "가고 말고, 박실장님께 안부  전해줘요. 그리고 박실장님과 함께 한국에 
또 와야지"
  나는 사모님을 꼭 겨안았다.  그리고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언니를, 형님
을 꼭 껴안았다. 이 품안에 조국을 안 듯이...

  트랩에 오른다.
  가야한다.
  겨울이면 얼음꽃이 나뭇가지마다 유리같이 피는 나라.
  허드슨 강이 녹으면 봄이 오는 나라.
  국가(國歌)도 끝까지 외우지 못하는 나라.
  남의 나라, 남의 하늘을 향해 가야한다.

  서울의 하루로 브로드웨이의 1년을 산다고 해도 모자랄  시간, 겨우 일주
일을 머물다 나는 서울발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17년 6개월 전 그 연둣빛 꿈보따리 대신 낮은 담장에 누워 있던 푸진 햇
살 한 됫박을 퍼담아 간다.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도 못하고 떠나는 서울은 내가 없이도 17년 6
개월간처럼 여전히 아파트가  들어서고, 시집이 쏟아지고, 아기들이 태어나
고, 노인들이 죽어가리라. 도도히  흘러가는 역사의 강 어느 언저리에 하늘
은 여전히 프르고 햇살은 맑으리라. 나의 삶이 숨쉬는 곳, 브로드웨이의 하
늘도 여전히 개이고 해가 뜨고 지듯이.

  부웅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나는 어린애처럼 두 다리 뻗고 조국에게 조르고 매달리고 싶다. 
  "싫어요, 난 가기 싫어요. 안 갈래요."

다시 읽는 글들
필자는 1996년 6월부터 1997년 6월까지 미동부 한국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
했으며, 1988년도부터 《뉴욕  중앙일보》와 《뉴욕 한국일보》에 각각 '생
활 隨想'과 '화요칼럼' 그리고  '수요칼럼'을 기고해왔다. 그 기고문 중 인상
적인 몇 편을 골라 재음미 해보고자 한다.

맨발의 톨스토이
《중앙일보》 1990년 6월 8일 생활 隨想

  좁지만 아늑한 나의  서재엔 남창이 있고 창문  밖에는 측백나무와 산철
쭉, 은사시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나뭇잎 위에 달빛이 은은히  머물고 지나며 비가 
오는 날은 빗방울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가 문득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
움을 함께 느끼게 해주곤 한다.
  몇 년 전 이 집에 이사했을 때 식당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내가 좋아
하는 눈치를 알고  가족들은 기꺼이 나의 공간(서재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을 내주었다.
  지난번 집주인이 싸게  팔고 간 통나무 책상도  마음에 들고 고풍스러운 
날개가 달린 전등이나 창문 위에  나무로 섬세하게 짜서 단 덧문도 분위기
를 살렸다.
  도대체 하루종일 노동을 하는 나의  처지와 분수에 맞지 않는 이방은 이
후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글도 쓰곤 하는 방이 되었다.
  도구나 내가 이  방에 앉고 싶어하는 것은 86년도엔가 화가  C여사가 소
련을 방문했을 때 내 생각이  나서 샀다고 전해준 톨스토이의 사진이 있기 
때문인데, 그건 책상에서 바라보기 편하게 걸려 있다.
  흰 수염에 검은 바지 차림인  노문호가 긴 윗도리에 검정 허리띠에다 손
을 찌르고 자갈과 흙이 섞인 땅을 맨발로 밟고 서 있는 사진이다.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문득 톨스토이의 이 사진을  바라보면 나는 나
이답지 않게 피가  끓어오름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가 밟고 잇는 그 땅을 그는 영혼으로 졍작하였다.  진리를 사랑하고 형
식의 신을 벗어버린 맨발의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없이 살고 있는 나
에게 사색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세계문학사에 태양처럼 빛나는 그는 위대한 현인이었고 예언자였고 사도
였고 성자였다. 《전쟁과 평화》에서,  《부활》에서, 《안나카레니나》에서 
만났던 그는 변함없이  작가의 길, 성도의 정신에  방향 제시를 하고 있다. 
영원불멸의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의 사명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타국에 
와서 어렵게 살아가면서 우리가 남겨야할 것은 종포의 방황과 아픔과 울부
짖음이 담긴 진실된 작품이다.
  그가 이 시대의 이민자로 뉴욕에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썼을까하고 상상
해본다. 기계문명 시대가  짊어진 메마름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
는 인간의 이기심과  마찰, 후머니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에 저항하는 폭탄 같은 붓을 움직였을 것이다.
  이 시대에서라면 우부녀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의 사랑은 기찻길에
서 죽어가는 그런 낭만적인 《안나카레니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향기롭고 고귀한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시인
의 허황된 꿈일까.
  브롱스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공원이나 어빙턴에 있는 워싱턴 어빙의 
집을 고국에서 온 문우들과  방문하면서 우리도 후손에 무엇인가를 남겨놔
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진정 형식과 교만의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흙을 밟고 푸른 하
늘을 바라보았을 때 사회주의 혁명도, 레닌도 막지 못하는 참다운 가치, 영
원한 부르짖음을 남길수 있지 않을까.
  초여름의 훈풍에 톨스토이가 맨발로 서 있는 사진 속의 100여 년전 나뭇
잎들이 흔들린다.

  흑인친구 윌리
  <중앙일보>1990년 10우러 13일 생활 수상

  윌리는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일한 흑인 친구다.
  우리가 그 가게를 정리하고 헤어진 지 수삼 년 동안 서로 자세한 소식은 
모르고 지냈지만 풍문에  그는 부르클린 어디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는 그 당시  저녁 쿡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내와  두 아들을 둔 가장이었
다. 한마디로 착하고 참된 친구였다. 
  남미 계통의  약삭바름에 없는, 친근한 미소를  지닌 잘생긴 흑인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에 우리 가족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위리를 가장 그리워하
면서 생각만 해도 흐뭇해 했다.
  장기화로 치닫는 처지애브뉴 사태를  보면서 나는 문득 윌리가 솥뚜껑만
한 손을 불끈 쥐고, '가게 문을 닫고 여기서 떠나라!'고 외치며 데모 대열에 
서 있는 것을 상상하며 오금이 저리는 통증을 참을 길 없었다. 
  위릴는 우리의 충복이었던 반면에 약에  위하여 며칠씩 못 나올 때도 있
었다. 그는 변명하거나 이해를  구하기도 전에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무언의 언어였다. 우리는 그를 이해하고 용서했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얼마나 슬기롭고 부지런하고 치열한 단일 민족인지를! 그리고  우
리는 이곳에서 여명기의 맥박으로 살고 있고 약물을 먹어가며 안일하게 살
아가지 않는 것을...  더구나 한인 사회는 기다릴 수 있는  자만이 이긴다는 
조상이 물려준 순리의 정신을 이어바다 참고 견뎌오면서 오히려 흑인 사회
와의 유대 강화만을 촉구해왔던 것을!
  우리는 호흡과 피가  같은 한민족으로서 살점 한 점  한 점과 혼을 쏟아 
키운 그 사업을 흑인들의  힘에 모려 포기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동
안 우리의  인내심만을 보여왔다면 이제는 우리의  드셈을, 우리의 결속을, 
우리의 빛남을 윌리의 잘생긴 검은 얼굴 앞에 드러낼 때가 온 것 같다.
  텔레지전에서 나오는 얼굴들은  낯선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얼키고  설킨 
관계들을 갖고 있는 우리 친구의 모습이었다. 딘킨스를  후원하고 지지했듯
이, 월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듯이 이 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누리는 
친구로 대화를  받아 주길 원한다,  우리 가족이 브루클린  처치애브뉴에서 
위리를 만나 서로 용서하고 관용하는  눈물의 화해를 하는 꿈을 꾸는 것은 
나의 센티멘탈일 뿐일까.
  우리는 힘 모아서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한에서 '보이콧'의 소음속에 떨
고 있는 형제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힘차게  우리
의 친구 윌리에게 다가가서 9개월간 흔들렸던, 그리고  아팠던 매듭을 지어
야 하겠다. 가을이 가기전에 희 이를 드러내고 웃는  윌리의 뉘우침이 보고 
싶다.

  우리의 하늘
  <중앙일보>1990년 3월 9일 생활 수상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 중에 <하늘>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세 식구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의사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그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속에 집어넣는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그리고 박노해의 겁나는 하늘은  관리들이고, 검은 하늘은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이라 했다. 
  그는 현실 속의  허위와 맞서서 숨막히는 현장의  빼앗긴 삶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외침을 이 시 안에 몰아 넣었다. 
  이역만리 남의 땅에 와서 몸의  익지도 않은 노동을 해가며 살아야 하는 
우리 교포의  하늘은 무엇일까 하고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물론 
사장님도, 의사 선생님도, 또 돈  많고 힘 있고 높은 어른들도 두렵고 겁나
고 검은 교포의  하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포에게는 더 겁나고  두려운 
검은 먹구름의 하늘들이 수없이 많다. 
  첫째로 언어 장벽이라는 길들여지지 않은 답답한 하늘이다.  보통말은 불
편 없이 하다가도  싸움을 한다든가 아니면 아주  전문적인 것을 설명해야 
할 때 우리는 가습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익혀온  내 나라 
혼과 피가 담긴 언어를 바꾸기도  ㅇ거니와 이 나라의 풍습이 담긴 은어나 
전문어 앞에서 망연자실할 때가 많다. 여하튼 영여는 교포의 하늘이다. 
  돈보따리를 싸들고 오지 않는 한 노동자인 우리에게 다음에 두려운 하늘
은 건물주라  할 수 있다. 사업을  하기엔 너무나 생경한 현실적인  모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여 가게가 자리잡을만 하
면 집세를 배로  올린다든가, 당치도 않게 나가라고 하는 유대인  랜드로드
의 맑은 안경 속 날카롭고 매정한 논매는 가히 겁많은 교포의 겁나는 하늘
일 수밖에 없다.
  하늘은 또 있다. 이민국 에서 영주권 인터뷰하는 흑인  여자는 우리의 검
은 하늘이다. 쓰러지지  않는 정신으로 뼈 아프게 일하는 봉제공장이나  식
당, 야채가게 등을 덮쳐서 불법체류자를 조사하고 잡아가는  이민국 직원은 
우리의 피빛 하늘이다. 
  교포의 하늘은 또 많다.
  불친절한 영사관의 높은 뉴욕에 거주하는 교포는 더욱 멸시하며 거지 취
급하는 내 나라의 언론인이나 김포공항 세관일들..
  우리는 이곳에서 스패니쉬, 흑인,  콧대 높은 백인들에게 물건을 팔고 사
며 그들으 ㄹ하늘같이  모시고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조국의 자식인  관리
들을 하늘이라 일컬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낯선 따에 뿌리내리기 위하여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그러나 우
리는 첨예한 모순들과 맞닥뜨려  찢어지고 갈라진 구심점을 통합하여 달구
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가  이땅에서 받아야 하는 수모를  극복하고 
여기에 흘린 땀방울을  돌려받기 위해서 뜨겁게 힘을 모아야 한다.  교포의 
재력도 합쳐져야  함은 몰론이고, 문학,  예술, 언론도 각각의 힘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것이다.
  우리의 두렵고 겁나고  검은 하늘은 우리 교포의  단합과 사랑의 힘으로 
푸른 하늘로 변화하고 기적이 이 아메리카 뉴욕 땅에  전개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서로의 푸른  하늘이 되기를 바란다. 골병들고 짓밟혀도 끝내  푸른 
하늘로 펴쳐지는 한민족의  민족혼을 뉴욕 하늘에 나부끼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뉴욕에 피는 들국화
  《중앙일보》1981년 가을 유필

  어둠이 조금씩 걷히는 새벽 6시, 가을비를 털며  셀비아가 가게로 들어선
다.
  "블랙커피, 노 슈가."
  조금은 여윈 얼굴에 윤기 잃은 눈동자 거기에 화장이나 차림새도 수수하
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첫손님인 그녀에게 커피를 주자 조금 웃으면서 그
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오랫동안 같은 시간에  우리집을 찾는 그녀는 거리의 여자인 듯도  하다. 
그녀가 태어난 고정, 살아온 세월  아무 것도 나는 모른다. 단지 그녀의 얼
굴이 희다는 것과  동정심이 많아서 소리를 질러대는  흑인 거지에게 옷을 
주었다는 것 등을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표정이 천하지 않다는 
것뿐.
  그런데 오늘 아침, 체념 섞인 미소를 띠고 들어서는  그녀에게서 나는 내 
고향 가을  언덕에 피던 들국화를 보았다.  짙푸른 가을 하늘을 이고  선들 
바람 속에서 고고히 피어 있던 연보라빛 들국화를 !
  그녀가 고상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무엇인가 삶을 비켜낸  것 같은 
모든 것을 버릴 것  같은 욕심없는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그런 그녀
에게서 문든 나의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이것은 가을이 주는 예민함과 값싼 감상은 아닌 것  같다. 대리석에 정을 
치듯이 피땀을 흘려가며 온 정혼을 기울여 단지 살아보고자 몸부림쳤던 나
의 뉴욕 생활. 사무침도  한도 희미해질 정도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던 나
날, 나를 취하게 할 시도 눈물도 떠나가던 바짝 마른 정감, 이 해에 한국에
서 가깝게 모시던 두분의 문단  선배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먼 
하늘을 몇 번 올려다 보았을 뿐, 애통함도 빛바랬던 나의 감정 세계.
  이 가을에 나는 다시 나를 찾고 싶은 것일까.
  옛날처럼 아름다운 언어와 사랑의 영혼을 다 바쳐서 미치도록 취하게 할 
시를 쓰고 싶고, 낙엽 색깔의 블라우스와 립스틱과 또  같은 빛깔의 매니큐
어를 바르고 멋 안 나는 몸매에 멋도 내고 싶다. 
  보무의 고생은 알지만 도대체  이렇게 현실적이고 가라앉은 상업적인 분
위기에 뛰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  나의 젊은 두 아들에게 엄마의 신경통이
나 호소하던 걸 참고, 달콤한 음악이나 그림이나 시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은 웬일일까? 가을 탓일까?
  또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는 친정어머니와 충청도 고향산천을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의 부도는 오직 효였음을 새삼 깨달으며….
  나의 어린시절 할머니의 밥상에서  마음대로 반찬을 집어먹지 못하던 것
은 바로 어머니의 효도 때문이었다. 맛있는 것을 자식에게  먼저 주는 지금
의 가치관과는 너무나 다른 우리 어머니는 귀여운 막내딸인 나에게 당신의 
시어머님의 반찬을 집지 못하게 하셨다. 할머님이 밥상을  물리시고야 우리
가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서  이 가을에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된 
두아들을 보며 잘못 비뚤어질까 염려하면서 새삼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가을볕이 내리쬐던 고향 신작로, 들에 익던 콩, 수수,  참깨 등 가을 곡식
들이 오늘따라 그립다. 고향이, 조국이 나를 외면하고 나를 버렸을 때 나는 
이 타관에 들국화로 피었다 찬서리에 져야 하는가.

  마른 나뭇잎과 시퍼런 한 쓸어내는
  바람의 울음
  흔들리는 타향
  찬서리 위에 나를 버렸던 그대
  그래도 그대 찾아 헤매이다
  짓밟혀 깨어진 가을 달

  이것은 졸시  〈가을 뉴욕〉중의 몇  구절이다. 끝없는 방황과  그리움을 
강렬히 서정하고자한 것이다. 조국의 수없이 흩어진 들국화를  감싸안아 줄 
가슴은 없는지. 어쨋든 이  스산한 가을, 고향을 생각하며 어머니를 목매이
게 불러보고 싶다.
  오헨리가 바라보았을 마지막 잎새가 굴러 떨어지는 어느날,  그리니치 빌
리지 어느 찻집을 가보리라. 피곤하고 바쁜 틈을 내어서  중년의 마디 굵어
진 남편의 손을 잡고 헨델이나  모차르트를 들으며 마주 앉아 뜨거운 차를 
나누어 마시리라. 그날은 이렇게 비가 지척거려도 좋으리라.
  나이 사십이 훨씬 넘은 여자가  맞는 이 을씨년스러운 타향의 가을을 여
기까지 색칠하고 있을  때 셀비아는 블랙커피를 다  마시고 쓸쓸한 얼굴로 
가을 빗속으로 사라져간다. 아니다, 그녀는 들국화가 아니라 생소한 이국의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가을 탓에 나는 가끔 혼돈을 하고 즐거운 착각에  빠지곤 하나보다. 어둠
이 걷힌 브로드웨이 거리를 느낌 없이 바라본다. 나는  가을비가 되어서 다
시 살벌한 생활의 터전에 서 있다.
  국제 결혼
  《한국일보》1994년 3월 16일 수요칼럼
  이민 역사가 깊어지면서  2세들이 결혼 적령기에 도달하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본인들 이상으로 국제 결혼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내가 아는 가정은 과년한  딸을 출가시키고도 초청은커녕 결혼했다는 사
실까지도 쉬시하며 숨기고  있다. 그 사위가 어디 모자라는 사람도  아니고 
좋은 학벌에 가정도  온화하며 성격도 좋다고 한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
유만으로 순 경상도 사람인 아버지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반대하였다고 한
다.
  억지로 결혼은 시켰지만 떨떠름한 생각을 버리지 못해 아직도 주위 사람
들에게 체면 손상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몰론 농경  시대
에 집안끼리의 맺음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던 우리 나라 전통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일 수 있다. 더구나 동서양의 다른  피를 바
로 나의 직계가 섞어야 한다는 상상을 하면 아찔해진다.
  그러나 결혼은 본인들이 하는 것이다. 국제 결혼이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인식은 한국 기지촌  여성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수준 
차이에서 오는 결과임을  어찌하랴. 결혼에 이르는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 
남녀들을 이해해 주고 감싸줄 때가 온 것이다.
  작년《한국일보》생활 수기에 당선되었던 SEUAN ALLEN은  오늘 전화
를 통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5월이면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고 기뻐했다.
  국제 결혼한 부인들의 모임에도 가끔 나가면서 족외 결혼이 결코 불행하
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늘 확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모임은 국제 문화
권의 교량 역할을 하며 이 나라  주류 사회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
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며  남편과 상호존중하는 태도로 
화목하게 지낸다고 한다.  시댁과의 관계도 아주 좋고 미세스 알렌은  오히
려 한국인끼리 결혼한 친구보다 시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흐
뭇해 하였다.
  결혼엔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숭고한  사랑
이란 단물을 빨아먹고 버리는  것이 아니므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과 
같은 국제 결혼이 있다면 이 세상에 끝날 때까지 깨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도의 차이만 있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탓에 서로 화
합하기가 어려운 데 국적이 다른  국제 결혼이란 결코 극복하기 쉬운 문제
는 아닐 것이다.
  한국인은 사랑의 표현을 침묵으로  하므로 처음에는 서로 이해를 못하여 
많이 다투었으나 서로 다른 문화를  익혀감으로써 여러 가지 벽을 허물 수 
있었다고 미세스 알렌은 고백했다.
  그리고 국제 결혼을 해 중년이 넘은 한국 부인들이  사우나, 에어로빅 같
은 걸 하며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것을 보며 이민 1세들보다 얼마나 안정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의 노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덧붙였다.
  한 시어머니는 말했다.
  "저는 두 며느리를 맞이했습니다. 큰며느리는 미국에서  자란 교포 2세이
며, 작은며느리는 이탈리아  계통의 미국 여성이었습니다. 큰며느리는 약혼 
시절 나를 미세스 민이라고 불렀는데, 결혼 후엔 그래도 '어깨가 푹푹 쑤신
다. 좀 주물러  다오' 라고 한국말로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탈리아계
인 작은며느리는 약혼  시절부터 나를 꼭 맘(Mom)이라  불러주며 식당 같
은 델  가도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엔 
그 집에 가면 그 큰 엉덩이를  땅에 대고 무릎 꿇고 인사하는 것이 귀여웠
지만 '어깨가 푹푹 쑤신다. 좀 주물러 다오' 라는 말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떤 문제든지 장단점이 있듯이 국제 결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행복이란 시야를 가지고 국제  결혼을 바라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내 고향
  《중앙일보》1991년 2월 16일 생활 유상
  세월의 계절풍은 어김없이 불어와 이 땅에서 다시 우리의 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마다 이맘 때면  문득 지난날이 밀물같이 파도쳐온다. 오랜 기억
을 더듬어 찬찬히 되새겨보면 40년도  더 지난 나의 어린시절의 음력 서날
이 그림같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샘물같이 고여드는  육친의 
정이 사모치게 그리워진다.
  지금 생각하면 세 가지 흰색이 먼저 떠오른다.
  첫째는 내고향 충청도  음성 땅에서 설이면 많이 쌓여 있었던  흰눈이다. 
둘째는 방앗간에서 방금 빼다 놓은 김이 나는 흰떡의  먹음 직한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어머니는 언제나 흰 옷을 입으셨고 설날은 더욱 정하고 눈부신 
흰 옷을 차려입으셨었다.  이 세가지는 진하고 뜨겁고 향기롭게 남아  있는 
추억의 흰 빛깔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물감을 들이고 다듬이질하고 바느
질해서 만들어 주신 다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아니면  연두 저고리를 떨쳐
입고 옆집에 살던 복순이와  서로 실빔 자랑을 했다. 그 아이의  깃과 옷고
름에는 금박무늬가 없어  그앤 내 옷을 바라보며  금박무늬 붉은 옷고름을 
부러워하곤 하였다.
  그 아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어렵게 자라고 있었다.  동
네를 돌며 우리는 함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과 푸짐한 음식상을 받곤 하
였다. 특별히 우리  어머니는 복순이에게 나에게보다 더 많은 세뱃돈을  주
시며 가엾어 하셨다.
  점심 때는 동네 한가운데 널판을  준비하고 널뛰기를 하면서 한 해의 건
상을 기원하곤 다. 오빠들은 제기 차기, 썰매 타기로 오랜만에 휴일을 즐기
며 그 동안 만들었던 연날리기를 시작했다.
  제방 가득히 동네 아이들이 모여  짙푸른 겨울 하늘에 발시린 줄도 모르
고 흰 연을 뛰운다. 방패연,  가오리연 등 이름도 많고 모양도 다른 연들은 
하늘 높이 떠오른다.
  이런 민속놀이는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져  농가에서는 대부분 이 보름 동
안은 완전히 일손을 놓고 쉬는 휴가철이 되었다. 보름  전엔 대보름 달맞이 
쥐불놀이가 정월 초승부터 시작되고  연들은 대부분 보름날이면 연줄을 끊
고 떠나 보낸다.
  어머니는 정월 초하룻날의  세배 때부터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한 해의 
무사를 그때의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선으로 탯줄처럼 이어져 이곳 뉴욕
에까지 넘치게 되었다.
  그때의 풍속들은 먼훗날인 지금까지  아름다운 인정으로 내 가슴속에 남
아 있다. 그래서 동야의 설이라고  인도, 태국, 중국 등에서도 폭줄놀이, 불
꽃놀이를 한다는 뉴스는 여지껏 나이 먹은 나를 들뜨게 한다.
  한국에서도 이 날을 민속의 날이라고 하여 연휴로 쉰다니 이곳에서도 상
점을 닫고 '동양의  설'로 하루쯤 전통 문화를  이어주는 날이 되었으면 한
다.
  지금도 나의 눈엔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난한 이웃들의  정갈스런 한복과 
붐비던 떡집, 명절 기분을 한껏 높이던 풍물놀이의  꽹과리, 징소리들…. 흰 
눈 덮인  고향 신천의 그림 같던  풍경들, 그리고 창호지문 사이로  비치던 
설날의 그 황홀하고 조용하던 햇살이 보고 싶다.
  명절 기분을 내기 위해  퀸즈칼리지에서 하는 음력설잔치는 조상의 숨결
을 잇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어린날 피워올렸던 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읊은 누구의 싯귀처
럼 그 옛날 쏘아버린  나의 화살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늙어가고  있을 복
순이의 가슴에선 지나간 시절의 편린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아름답던 설
날의 널뛰기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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