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프로이트
김정일
꿈, 본능, 무의식 편
저자의 말
내 안의 나-꿈, 본능, 무의식을 찾아서
인생은 고해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렇
다면 지금까지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은 무엇을 했길래 이 세상을 고해로 내버려 둔 것일까? 석가, 예수, 소크
라테스, 프로이트, 융 등 정신적
인 선각자들이 평생을 헌신하여 노력 했음에도 인간의 마음은 변함없이 고해의
도도함을 과시하고 있다. 인간
의 마음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심리학 또한 발전을 거듭해 왔지
만, 인간의 희로애락은 그칠 줄
모르고 현대에 이르러 감정의 문제는 더욱 부각되고 있다. 과학은 바다를 건너
고 우주를 날지만, 심리의 바다만
은 알 수 없는 오묘함에 감탄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마도 인간의 정신은 과학의 잣대로 접근하
기에는 너무나도 깊고 무한하고
개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은 그 세계가 너무나도 깊고 장애해서 섣불
리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려 줄 뿐이다. 그 나머지 모든 것은 각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바다를 건너는 뗏목도, 기선도,
비행기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바다를 건널지, 만약 건넌다면
얼마만큼 건널지를 자기가 결정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심리학, 또 그 자기 심리
학을 가깝게 도와주는 우리 자신
의 심리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걸맞는 실리학을 발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기획한 것이다. 제목은 (아하, 프
로이트)이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에 감탄하며 이를 소개하는 개설서는 아니다. 오
히려 '아하!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그렇다면 나도 이렇게 관찰하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아하, 그렇다면 이
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내 생각은 이래!'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
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누구나 인정하는 정신의학의 대가이지만 난 프로이트를 추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이론을 발
견해 가는 과정은 흥미로웠지만 그 이론을 무작정 공부하고 따르기에는 맞지 않
고 내티지 않는 점이 너무 않았
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융이나 애들러 등 다른 심층 심리학
자의 이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감되는 것은 많았지만 모두가 공감되는 것은 아니었고, 더더욱 그들이 내 마
음의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
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의 고통은 사소한 데 실마리가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나의 도전과 면
상, 깨달음, 표층심리를 통해서였다.
진리는 단순하고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솔직한 자연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일생 동안 최
선을 다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정신분석'이란 업적을 이룬 사람
이다. 그의 이론은 뛰어나고 정치
하며 무수한 마음의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했다. 그래서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이론을 더욱 찾게
된다.
그러나 어떤 뛰어난 기존의 사상, 심리학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
것은 바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
는 지금 이순간과 나의 현실이다. 여기에 대한 응답은 닥쳐오는 현재를 맞는 당
사자인 나만이 할 수 있다. 결국
내 삶에 필요한 것은 체계적 이론보다는 지금 내 일상의 문제를 풀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나의 깨달음, 나의
지혜, 우리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들의 이로을 다 익힐 필
요는 없다고 해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집요한 탐구적 자세, 치밀한 사고, 창조적인 도전의 자세는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나 융은 서로
개념은 다를지 몰라도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끝없이 추적하고 의문점을 파헤치
고 창조적으로 부딪친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들을 위대한 사상가로 만든 것은 그들이 발견한 이로 때문이 아니
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꾸준하고
창조적인 학문적 자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들의 사유
방식은 따르되 그들의 이론을 단
순히 소개한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나 융, 모레노 등의 대 사상가로부터 영향받은 것들에 대해서
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지만 내가 영향받은 만큼만 그들의 이론을 언급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나의 진
료실에 내가 겪고 사유한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프로이트'냐고 한다면, 프로이트는 아무도 엄
두를 내지 못했던 무한한 정신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끄집어 내려고 시도한 최초의 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소중한 상징어가 될 것 같아서
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빌린 값으로 앞부분에는 우리 일상에 닿는 프로이트
의 정신분석 이론을 구체적인 사
례를 통헤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그의 이론이라 해도 우리 일
상에서, 내 안에서 재발견되지 않
은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지식을 원하는 사람
이라면 이미 국내에 범람하고 있
는 수십 종의 프로이트 관련서를 이용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심리학은 깨달음을 도와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심리학 이론은 각자의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고 다양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책
에서 새롭게 도입한 정신의 만유
인력, 현대 물리학과 정신, 정자 무의식과 난자 무의식, 생태적 본능, 다차원적
본능, 수정란 본능 등의 주장을
굳이 고집할 생각은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공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면 그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내 이론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ㅜ 신비로운 인
간 심리의 바다에 다가가려고 한
다. 틀리면 고치면 되는 것을 절대 진리의 환상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어리
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다. 이 책의 서술 방식도 서구적인 입증 방식이 아니라 동양적인 공감 방식을
택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했다.
서구에서는 증명을 해서 들이밀어야 하지만 동양은 공감만 되면 서로 어우러져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우리 심리에 다가가는 데 조그마한 계기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이 (아하, 프로이트)를 자손들, 특히 막내아들의 성장을 위해 평생 고생하고
희생하신 아버님께 마친다.
1996년 6월
김정일
1장 진료실에서 쓴 프로이트 심리학
프로이트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흥미로운 것은, 그 길고 먼 정신과 전문의 수련 과정에
배운 것보다 오히려 대학 시절
내 스스로 찾은 교양 서적을 통해서 탐독했던 것들이 내 정신이나 환자 치료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수련과정에서는 분명 많은 지식을 습득 했지만 정작 환자 치료
에 자주 적용하는 것은 예과 때
방황하면서 읽었던 교양 지식들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우
연히 접했던 책들이 강한 흡인력
을 갖고 나의 정신을 순수하게 고민시켰기에 그렇게 오래까지 남지 않았나 생각
된다.
프로이트 또한 그러했다. 복잡한 원서를 통해 습득했던 것들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고, 대학 시절 우연히 헌
책방에서 구한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책에서 강한 인
상을 받았던 것은 정신에 물리학
을 적용한 부분이었다.
프로이트는 그 비범한 재능으로 '역학의 법칙은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인
간의 퍼스낼리티에도 적용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에 의하여 그는 퍼스낼리티 내부에서
의 에너지 변형과 교환을 연구하
는 역동적 심리학의 창울에 착수했다. 이 점은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며, 현대 과학의 가장 위대한 달
성 중 하나이다. 이는 실로 심리학사의 결정적인 사건이다.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칼빈 s. 홀 저, 황문수 역, 범우사, 1984.
그후, 프로이트는 내 의식의 한편에서 떠나지 않았고, 또 주위에서도 자주 거
론되고 있었다. 정신의학을 공부
하면서부터는 물론 더욱 그랬다. 그러다 우연히 융 심리학에 접하면서 내 인
생은 커다란 격변을 겪게 되었다.
내 인생에 세 번의 전환기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융과의 만남을 그중 하나로 들
것이다.
융은 기존의 경직된 여러 가지 틀에 갇혀 있던 내 사고를 자유롭게 해주었
고, 내 속의 모호한 많은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정리해 주었다. 특히 꿈과 만나게 해준 것은 마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만나 겪는 변화만큼이나
큰 변화를 나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융도 멀리하게 되렀다. 융 학설이 아무리 뛰어난 것
일지라도 결국 시시각각 새롭게
닥쳐오는 미래의 순간들을 맞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프로이트와 융을 공부하기
보다는 내 눈으로, 내 안에서 떠오르는 느낌으로 새상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
던 중에 새롭게 만나게 된 혹자
가 라캉이었다. 글을 쓰면서 라캉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라캉 연구
학회에 들어가 라캉의 이론과 접
했으나 아직 라캉의 속살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의 논리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
아 선뜻 가까이 하게 되지 않았
던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 라캉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나는
내 안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하는
한 그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아무리 그럴 듯한 이론이라도 내 안에서 당위
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이론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정신과에서 후배 레지던트들과 융의 저서 (인간
과 무의식의 상징)을 함께 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것은 맹목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융의
탐구는 존중하되 앵목적으로 따
를 이유는 없다. 각자가 읽으면서 자기 마음에 와닿는 것을 찾고, 그리고 자기가
평소 느낀 것들에 대한 스스로
의 확신을 다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융은 초기에는 프로이트를 벗어나
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고, 서양
의 과학이 대개 그러하듯이 불필요한 반박과 증명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
다.
우리 동양의 석학들은 그렇게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라가 혼란
스럽고 자기를 받아 주지 않으면
차라리 책을 싸들고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정신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라 각자가 스스로 깨닫고 받아들
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서양의 방식과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우리 동양 사상에는 서양 정신의학으로서는 따라올 수 없는 무수한 수
준의 것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들은 외면하고 맹목적으로 과거의 것이나 서양의 양식만을 이해하려고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다."
내가 프로이트와 융, 라캉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이론 중에서 나를 떠
나지 않는 부분만을 내가 소화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리라.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들
전라도 깊은 산골에 어떤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
렇게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어
떤 기자가 설마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의문을 품고 아내와 함께 그 스님을 만나
러 갔다. 그런데 아내는 그 스님
을 보는 순간부터 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줄곧 눈물을 흘렸고, 그 기자도 울음
이 두 눈에 꽉 차오르는 것을 억
지로 참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스님이 한 이야기는 단 두 마디였다고 한다.
"먼길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착하게 살아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신을 접하는 동양의 자세와
서양의 자세는 어떻게 이토록 다
를 수 있을까? 동양의 스님들은 화두를 던져 주고 스스로 고행을 통해 깨닫기를
바라는 반면, 서양의 정신분석
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세세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고 치료하려고 한다. 동
양은 정신을 커다란 하나로 뭉뚱
그려 보는 한편, 서양은 정신을 그 밑바닥까지 세세하게 해부해서 드러내 보려
고 한다. 그래서 동양에서 정신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지만 서양에선 학자마다 전집이
나올 정도로 다양하고 광범위하
다.
현대에서 어느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동양
적인 정신치료 방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동양의 선각자들은 그것을 다 개개인의 몫으로 남
겨 놓았을 뿐, 집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명한 길은 정립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느 일정 부분 이
상으로 깊이 들어가면 개개인의
길은 모두 다 각기 다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양의 정신치료 방식에는 분명
한 주장이 참 많다. 그들의 주장
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어떤 때는 예외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을 보면 이러하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창시하고 그후의 추종자들이 계속 발전시킨 것으로 심
리탐구, 인간 행동에 관한 종합
적 지식 체계, 심리적 질환에 대한 치료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정신분석은
의식 외에 더 커다란 힘을 갖고
있는 역동적 무의식(the dynamic unconscious)의 존재를 강조한다. 정신분석
이 정신을 하나로 보는 동양과는
달리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해서 본 것은 서양 사람들의 합리적인 사고, 눈
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성향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정신의 무한함을 하나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의 합
리적인 사고가 용납지 않았기 때
문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신결정론(psychic determinism)이 있다. 이 이론은 현대의 모든
사건들은 과거에 의해서 영향받
고 결정지어진다는 것이다. 동양 사상에서 찾으면 자업자득이나 인과응보가
아닐까. 프로이트의 정신결정론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훗날에 미치는 영향으로서의 인과 관계이지만, 부교의 인
과응보는 전생과 후생까지 따지니
이 둘의 성질은 다소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빨라져서 인과
응보가 당대에서 일어난다고 하
니까 둘은 근사할 것 같기도 하다.
다음으로 정신분석은 성인기에서 아동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다. 즉 일곱 살 때까지의 경험이
일생을 두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발달 과정을
구순기 (oral stage;출생 후 18개
월까지), 항문기(anal stage;1-3세까지), 성기기(phallic stage;4-5세)로 나누고 각
각의 특징을 세세하게 기술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목표는 어린 시절의 병적인 갈등을 찾아내어 그 갈등을 야
기시킨 마음의 힘들(이드, 자아,
초자아의 불균형)을 보다 건강하고 성숙한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해주는 것이라
고 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아동기론은 인생의 전반기, 즉 30대 후반까
지만 맞고 그 이후에는 맞지 않
는다고 한다. 인생의 후반기를 설명하는 데는 다른 중년의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융 심리
학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니는 그렇게 중요한 구
분 요건이 될 것 같지 않다. 정신
연령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어서 애늙은이도 있고 늙은 아이도 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요즘에는 당돌한 신세
대가 많이 노오고 그들의 젊은 생명의 힘에 대한 수요 또한 늘어나고 있으므
로, 아동기 심리학이나 중년기 심
리학과는 또 다른 신세대 심리학이 필요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다음으로 정신분석의 주요 개념으로는 리비도가 있다. 이는 단순히 성 에너
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분
능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 에너지로 정립되었다. 이 리비도는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정신분석은 다양한 치료 기법을 제시했는데, 그 애표적인 방법이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이다. 이는
르로이트가 압박법(환자의 이마에 치료자가 주먹을 눌러서 집중해 말하게 하는
것), 제반응(J. Breuer가 처음으
로 시도했던 츠료 방법으로,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상기하거나 또는 재연시킴으로써
그러한 경험과 결부되어 있던 억압된 감정을 방출하고 해방한다는 것) 등을 써
보다가 발견한 방법으로, 환자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다.
자유연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비스듬한 침대인 카우치(couch)
를 고안해, 분석가는 침대에 누운
환자의 머리 뒤쪽에서 분석하도록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정신분석은 전이와 저
항을 다루는 치료라고 할 수 있
다. 전이(transference)란 자라면서 의미가 있었던 사람(부모를 비롯한 권위자)
과 유사한 감정을 현재의 사람,
특히 분석가에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저항(resistance)은 무의식적으로 표현하
려는 검정을 표현하지 않도록 하
는 것이다.
환자는 분석가에게로의 전이를 통해 반복되는 아동기 감정 양식을 드러내고,
분석가는 과거와는 달리 그것에
성숙하게 대처해줌으로써 환자가 과거의 병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건강
한 패턴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
와준다. 이를 위해 분석가는 거울 같아야 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분석가라
는 거울이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굴곡이 없으면 없을수록 환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는 분석가에 대해 사적으로 아는 것이 없을수록 좋으며, 진료실
을 벗어난 사회적인 접촉도 없을
수록 좋다고 한다. 또 분석가는 환자의 말에 비판적이어서도 안 되고 가급적 반
응을 해서도 안 되고, 환자의 질
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그것을 분석 자료로 다루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래
서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는 기본
적으로 분석가에게로 향한 전이가 죄절되는 것(transference frustration)을 견딜
수 있는 자나의 힘이 요구된다.
그래야 분석 상황에서 자아가 경험하는 것을 관찰해 자아로 통합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이렇게 전이롸 저항을 적절하게 다루고, 어렸을 때 잘못 받았던 부모로부터
의 영향을 건강하게 극복하기 위
해서는 주 5회 면담을 7년 정도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 말기
에는 주 2-3회로도 가능하고, 7년
이 너무 길면 4, 5년 정도로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거러나 이런 정통 정신분석은 미국에서도 60년대부터 퇴조하고 있다. 아무래
도 현실성이 너무 없기 때문이리
라. 그 긴 기간, 그 엄청난 치료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
이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분석해서 효과적일까 하는 회의도 든다. 정
신분석은 이렇게 치료하면 약을
한 써도 스스로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건강한 인격체로 바뀐다고 하지만
글쎄다. 아무리 과거로부터 벗어
나 새롭고 건강한 인격체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수많은 변수와 스트레스를 다 이
겨 낼 수 있을까?
이렇게 매일같이 진료실에 한 시간씩 틀어박혀 아동기 감정양식만을 찾고 교
정하느니 차라리 큰스님으로부터
화두를 하나 받고 속으로 되씹으며 열심히 현실의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낫
지 않을까? 특히 요즘같이 발빠
른 적을이 요구되는 세상에서는... 그래서 나는 요즘 아동기가 성인기를 결정한
다는 프로이트 이론보다는 이런
제언에 골몰하고 있다. 사람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고...
정신결정론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답답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3세의 여성입니다. 대학을 다니다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회사에서 경리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경리 전임자에 비해 일도 서툴고 실수가 많아서 항상 질책을 듣습니
다. 외모를 전임자와 항상 비교하
면서 머리를 길러라, 머리가 나쁘다느니 그럽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
슴이 답답해집니다.
친구들은 각자 전문대학을 나와 공무원, 디스플레이어, 영양사가 되어 있습니
다. 전문직 여성이 된 친구들은
"뭐하냐, 그런 데서만 있을 거냐!"하면서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고 일이 별로 신
나지도 않습니다
아침에 나와서 한 시간 정도 사무실 청소하고 직원들 커피 타주고 빨래에다
가 일을 할 때마다 휴지 갖고 와
라, 커피 안 주냐, 화분에 물 좀 줘라, 담배 사왈, 구두 닦아라... 일이 한창 바쁠
때도 그러는데 정말 가슴이 답
답합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음식을 사다놓고 배부른데도 계속 먹고 난 후에 손을 넣어
토해 버리곤 합니다. 항상 가슴
에 무엇이 짓누르는 것 같고 생활과 저의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습니다. 동생에
게도(동생은 지금 대학생입니다)
미안하고 엄마한테도 죄송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직장을 그만두고 학원을 다닐
까 생각중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
정과 근심으로 사는 게 답답하기만 합니다.
과거의 끈을 과감하게 뿌리치십시오
프로이트 심리학에는 정신결정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의 사건들은 모
두 과거에 의해서 영향받고 결정
지어지는 것이어서 현재의 인간 행동, 증상 등은 심리학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즉 모든 정
신적 사건과 과정들은 물리적인 과정처럼 어떤 법칙과 일정한 형태의 보편적 질
서에 따른다는 것이지요.
저는 과거에는 이 이론을 무척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
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이
론에 따르기에는 현재와 미래의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또 눈이 돌아
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에 적웅하려면 안일하게 과거만 따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요즘 저는 정신결정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관이 제
대로 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과
거가 현실을 부여잡고 압박할 수 있겠지만, 주관 있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란 흩
어지는 미망과 환상에 불과하다
고... 그래서 저는 미래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관부
터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
각합니다. 그 방법은 아마도 자리를 묶고 있는 과거의 끈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용기와 지혜겠지요.
귀하는 미래를 불안해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도 모르게 과거에 발목
잡혀 현재의 에너지를 미래에 집
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 중퇴의 자기와 전문대를 나온 친구들과
의 비교, 자기 현실에 맞지 않는
엄마와 동생 걱정, 알 수 없는 현재의 중압감 등이 그러하겠지요. 그래서 발랄하
고 미래 지향적인 주관 있는 신
세대 여성이 귀하와 똑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한 번 생
각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23세의 미모의 여성입니다. 대학을 다니다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회사에서 경리 업무
를 보고 있습니다. 경리 전임자에 비해 일도 서툴고 실수가 많아서 항상 질책
을 듣습니다. 외모를 전임자와 비
교하면서 머리를 길러라, 머리가 나쁘다느니 그럽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
다 속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
소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못생겼다고 구박하는 눈 삔 사람들도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는 견뎌 내
지를 못하죠. 웃는 얼굴에 침뱉을 수 있나요.
친구들은 각자 전문대학을 나와 공무원, 디스플레이어, 영양사가 되어 있습
니다. 전문직여성이 된 친구들은
"뭐하냐, 그런 데서만 있을 거냐!" 하면서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지만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걔들이 그
러는 건 다 걔들 현실에서 하는 이야기고 나는 나의 현실이 있는 거니까요.
걔들이라고 뭐 똑 부러진 미래가
있나요. 다 오십 보 백 보지. 남의 돈 먹기 쉬운 직장이 어디 있나요.
아침에 나와서 한 시간 정도 사무실 청소하고 직원들 커피 타주고 빨래에다
가 일을 할 때마다 휴지 갖고 와
라, 커피 안 주냐, 화분에 물 좀 줘라, 담배 사와라, 구두 닦아라... 일이 한창 바
쁠 때도 그러는데 정말 화가 납
니다. 그때는 제 예쁜 눈을 길게 늘여뜨려서 노려보지요. 거러면 겁 많은 남자
들은 수그러들고 싸가지 없는 남
자들은 길길이 날뜁니다. 그러면 전 아무 말 없이 그 싸가지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뚱한 얼굴로 하는
일이 뭐 제대로 되겠어요. 커피는 단팥죽이 되고 화분에는 물이 넘쳐 흐르고
까만 구두에는 빨간 구두약이 덕
지덕지 발라져 있죠. 그래서 불평하면 생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죠.
"잘못했어요. 제가 일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못 해 정말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절대 주의할
게요."
그러나 말만 그렇고 또다시 날 화나게 하면 결과는 마찬가지죠. 그렇게 한바
탕 전쟁을 치르고 집에 오면 식
욕이 막 솟아납니다. 그러나 많이 먹어서 비만증에 걸리면 누가 나를 쳐다보기
라도 하겠어요. 비만증 예방 책을
펼쳐 놓고는 적당히 먹고 에어로빅을 한바탕 하죠. 이렇게 한 번 뛰고 나면 아
무 생각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벌
렁 드러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면 동생과 암마가 집안 걱정 좀 하라고 투덜댑니
다. 참 할 일들도 없지. 내가 왜
집 안 걱정을 합니까? 나 살기도 바쁜데. 자기 인생은 다 자기가 책임지는 거
아녜요. 가끔씩 용돈 주고 생활비
쪼금 내면 되지, 뭘 더 바래!
저는 이 직장을 조금 더 다니다가 돈을 좀더 모으면 학원을 다닐까 생각중입
니다. 큰 물고기는 아무래도 큰
물에서 놀아야 하니까요. 미래에 대한 도전과 희망으로 제 마음은 항상 부풀
기만 합니다. 아, 멋진 내 놈씨는
언제쯤 나타날까?
세 가지 색정대와 정신성적 발달
어떤 사람이 어느 정신과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어제 사랑을 느낀 한여자와 열렬한 섹스를 했는데요, 이상하게
사정까지 했는데도 다음날 몸이
가뿐하고 오히려 힘이 나는 거예요. 그전까지 저는 굉장히 일에 시달리고 지쳤
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는 대하는 부인과 그러했다면 당신은 마아 그러한 활력을 얻지 못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느
끼게 하는 여성과 그러했기에 활력을 얻은 것이지요. 그럿은 바로 의식이 무
의식과 만나 초월 기능이 발휘된
것입니다. 예로부터 노인들이 젊고 생동적인 여성과 섹스하면 회춘한다는 것도
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요."
섹스를 주관적으로 본다면 자기 무의식과 만나는 것이다. 남자의 무의식 속
에는 여자가, 여자의 무의식 속에
는 남자기 있다는 가설도 있으니 말이다. 마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하나가
되듯이 나와 닮은 사랑스러운 여
성과의 합일은 초월 기능을 발휘해 힘과 젊음을 되찾아 준다.
좋아하는 여성과 세스를 하면 정신이 건강해지고 힘을 얻는다는 것은 흥미로
운 일이다. 요즘 남성들은 너무
부인의 눈치를 보고 능력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또 영화나 비디오 등의 영향으
로 LSD(Low Sexual Desire) 신
드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젊은 건강 비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
제도가 있고 특히 간통죄, 혼인
빙자 간음죄 등 망신살이 뻗치는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함부로
젊고 매력적인 여성만을 밝힐 수
는 없는 일이다. 자연히 우리나라 남성들은 결혼하고 나면 젊은 여성을 통해
회춘도 못 하고 그럭저럭 시들어
가면서 자신의 욕구불만을 성기 이외의 다른 쾌감대로 해소한다.
다른 쾌감대라면 입과 항문을 들 수 있다. 프로이트는 사람의 색정대
(erogenous zone)로 입과 항문, 성기를
들고, 이 세 가지 색정대들을 통과하면서 인격이 성숙된다고 하였다. 이
를 정신성적 발달(psychosexual
development)이라고 하는데, 리비도라는 단일 에너지의 근원에서 온다고 보았다.
0-1.5세 사이에는 입이 중심이
되는 구순기를, 1.5-2, 3세 때는 항문이 중심이 되는 항문기를, 아동기 때는 성기
기를 통과한다고 한다.
회춘하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욕망을 이들 색정대를 통해 풀려고 하면 괴이한
일들이 발생한다. 입으로 섹스
하고 항문으로 섹스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입으로 색스하기를 좋아하는 사
람들은 음담패설이나 남들을 욕하
기 좋아한다. 입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거나 상대를 찔러대는 것이다. 이러한 성
향의 사람들을 구순성 성결이라
고 하는데, 그 성격적 특징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이며 매사에 요구적이면서도
남에게 베풀 줄을 모른다. 이러한
성격은 또한 애주나 폭연, 애연, 미식 또는 과식, 과욕 및 거절에 대한 지나친
예민성 등으로 나타난다.
이와는 다르게 항문으로 섹스하는 사람도 있다. 자랄 때 1.5-2, 3세의 항문기
에 너무 고착이 되었을 때 형성
되는 성격이다. 그들은 똥을 부여잡고 안 놔주려고 하는 것처럼 섹스나 그밖의
모든 것에 인색한 것이 특징이
다. 자기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항문 안으로 숨막히게 가두려고 하며 청결, 질서,
정돈, 세밀성 드이나 반대로 불
결성, 완고성, 믿음성 없는 반항적 반응 등을 보인다. 구순성 성격이나 항문성
성격은 모두 여러 가지 노이로제
를 일으킬 수 있다.
사회적인 제약으로 젊은 여자를 통해 싱싱한 활력을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
고 입으로나 항문으로 억눌린 성
욕을 푸는 것도 불건강하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은 항상 싱싱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결국 자기 무의식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젊은 여성과 만나 사랑하는 것이 자기 무의식과 하
나가 되는 것이라면 무의식과 만
나는 길은 자기 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무의식의 소외를 노이로제나 정신병으로 보는 학파가 있다. 무의식과 의식이
함께 다야 하는 존재의 길을 의
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외면했을 때, 무의식은 반발하면서 불안이나 해리
들 여러 가지 증상을 일으킨다
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이 항상 한 곳을 바
라보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듯이... 무의식이 자기 실현을 향
해 지양하는 길을 개성화 과정
(individuation process)이라고 부르는데, 이 길로 가는 사람은 내면이 충실해지
고 성숙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려면 항상 무의식과 만나 함께 가려는 노력을 포기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무의식과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럿은 마아도 자기 느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다음으로
는 미지의 상황에 부닥치려는 노력과 용기를 잃지 않는 길일 것이다. 무의식은
현실을 헤쳐 갈 때 의식에 항상
자기 메시지를 올려보내 준다. 그것은 주로 느낌과 감각으로 파악된다. 의식이
이것을 외면하지 않고 겸허하게
수용해 용기 있게 실행했을 때는 무척 편해진다. 사랑하는 여자와 화목하게 지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외면
하고 오만 가지 잡생각이나 의심으로 달려갈 때 의식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투덜거리고, 급기야는 노골적으로 타박까지 할 테니 말이다.
무의식은 알 수 없는 미래와 같이 항상 수수께끼와 미로로 덮여 있다. 그 미
로를 뚫고 들어가 깊숙이 만나는
길은, 무의식이 사랑하는 연인이니 절대 배반할 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용기
있게 그녀의 느낌을 수용하는 것
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다소 불명확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왜 그런 메
시지를 보냈는지 이해하게 된다.
무의식은 곧 본능인데 이 본능에서 나오는 감각은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
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히 현재
와 미래를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건강은 자기 무의식과 원만한 관
계를 가진 사람, 곧 자기 느낌과
감각에 충실하고 자기 내면과 항상 만나고 대화하고 섹스하려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구순성 성격
내가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아플 때 몸을 움츠리는 것은 내 의지고 가능하다.
내 몸의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이
내 의지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지거나 땀을 흘린다
거나 속이 쓰리거나 발기가 되는
것은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다. 그들은 자율신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은 의식의 통제하에, 자율신경은 무의식의 통
제하에 있다고 본다.
자율신경은 땀샘, 내장근, 혈관벽 등 우리의 온몸에 미세하게 퍼져 있다. 그
리서 무의식이 불안정하여 자율신
경이 자극받으면 온갖 신체 반응이 일어난다. 그리서 신체화 장애
(somatization disorder)라는 노이로제에서는
30여 가지의 정신, 신체 증상이 가능하다. 이같이 우리의 정신과 신체는 밀접하
게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 장기 중에서 정신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곳은 어디
일까? 아무래도 위와 간일 것이
다. 신경성 위염이니, 스트레스로 인해 간이 피로하다느니, 우리나라에 위암과
간암 환자가 가장 많다느니 하는
말이 상식처럼 떠돌고 있으니 말이다. 위는 음식물을 받는 것이고 간은 음식물
을 대사하는 곳이라면, 결국 음식
물과 우리 정신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식물과 정신의 관련성은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1. 음식물은 욕심과 관련이 있다
언젠가 한 전문가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애
석해 했다. 그가 쌓은 학문적, 임
상적 업적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가 젊
은 나이에 암으로 죽은 것은 어
쩌면 그 지대한 업적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양에
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했던 것
이다. 일을 많이 한 것과 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욕심이 많다는
것이고 그 욕심은 마음의 위뿐 아니라 신체의 위까지도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욕심은 곧 자기 속으로
자기가 소화하기 힘든 지경까지 집어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음식물은 사랑과 관련이 있다
(삼공일 삼공이)라는 영화가 있다. 거식증을 다룬 영화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아파트 301호와 302호에 두 여
자가 마주보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홀로 사는 여자들이다. 한 여자는 요리에
너무 미쳐 남편에 이혼당한 여자
이고, 또 다른 여자는 음식물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여자였다. 요리에 미친
여자는 남편이 사랑해 주지 않자
음식물을 마구 먹어 비만해졌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남편의 애완견을 보신탕
으로 만들었다가 이혼당했다. 음
식물을 거부하는 여자는 정육점을 하는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실수
로 냉동칸에 들어자 얼어죽은 아
이를 의붓아버지의 강압으로 토막낸 후 음식에 대한 강한 거부증을 보이게 된
다. 두 여자 모두 음식물을 사랑
과 섹스에 연결짓는데, 영화가 아닌 실제로도 이런 예는 많이 있다. 남편이 사랑
해 주지 않자 그 외로움을 먹는
것으로만 해결하거나, 바람피울 때는 처녀같이 날씬했으나 자식 때문에 가정으
로 돌아온 후 욕구 불만에 마구
먹어대는 주부도 있으니 말이다.
3. 음식물은 의존심, 공격심과 관련이 있다
정신분석학에는 유아기에 구순기(oral stage)가 있다고 본다. 유아는 배고픔을
젖 빠는 행위를 통해 해결하므
로 입은 신체의 그 어느 부분보다도 rhksta, rkarkr alc 활동의 초점이 집중되는
부분이다. 또 입은 무어뜯는 데
서도 쾌감을 제공한다. 이때 처음으로 공격성이 나타난다. 이 공격성은 힘차게
젖을 빠는 에서도 발견할 수 있
다. 성장하면서 이러한 구순기에 고착이 심했거나 좌절이 심했을 때는 구순 인
격(oral personality)이 형성된다
고 한다.
구순 인격은 구순 수용성 성격과 구순 공격적 성격으로 나누어진다. 구
순 수용성 성격(oral receptive
character)은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서 성장한 후에도 우애
적이고 낙관적이며, 관대하고 타
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와 반대로 자랄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적개심이 강하고 비판적이
며, 시기심이 많고 남 욕하기를 좋아하며, 착취적이고 과도하게 경쟁적인 구
순 공격성 성격(oral aggressive
character)으로 발달하게 된다.
구순 수용성 성격은 만일 좌절하게 되면 염세주의적이 되고 마치 세상이 무너
진 것같이 행동한다. 세상은 항
상 자기에게 사랑을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는 마치
엄마 잃은 아이같이 공허해지면
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해 좌절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같이 느끼
는 사람은 실제로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고, 자신이 구순 성격형이라 그렇게
과장해서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야 할 것이다.
이같이 먹는 것은 욕심, 사랑, 의존심, 공격성 등 우리 정신과 밀접한 관련
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많이 먹고 많이 넉이는 것을 유익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음식 패
턴이 우리의 삶을 여유 없고 초
조하고 급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건
강한 사람은 먹고 싶은 것을 구
분할 수 있고 먹고 싶은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항문성 성격
(아침 마당)이라는 KBS의 장수 프로가 있다. 이상벽, 정은아의 콤비로 아침
에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
는 주부들의 일상을 많이 다루는데, 가끔 정신과 상담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출연자
들이 자기 문제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또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공개적으로
토의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식
사를 하면서 가끔 그 프로를 보는데, 어느 날 흥미있는 경우를 보게 되었다.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러했던 것 같다.
아내와 시어머니가 갈등이 있는데, 그 갈 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이 무던히
도 애를 쓰지만 도대체 해결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내는 무척이나 고집이 세서 남편의 중재도 무시하고 시어
머니 쪽에서 화해를 해보려고 해
도 도무지 타협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분가해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는 아예
시어머니는 상대도 하지않으려고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는다. 남편은 돈을 열심히 벌어 오기도 하고 달래
보기도 하고, 심지어 때려 보기
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아내를 만족시키거나 바꿀 수가 없었다.
참석한 정신과 의사나 대학 교수들은 한결같이 남편은 좀더 애정을 갖고 노력
하고, 아내는 좀 양보하라고 조
언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래 좠자 헛일이라고 반발했고, 아내는 그렇게 하고 싶
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대답
했다. 나는 그 부인을 가만히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저 부인은 고
부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다른 여
러 가지 면에서도 남편을 속터지게 할 거라고... 바로 그 부인이 항문성 성격
(anal personality)이었기 때문이다.
항문성 성격은 프로이트의 용어이다. 그는 항문성 성격의 세가지 중요한 양
상으로 질서와 규율, 완고한 고집,
인색함을 들었다. 항문성 성격은 어린이들이 척수의 유수화(myelination)가 이
루어져 항문 괄약근의 조절이 가
능하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전에, 지나치게 일찍 또
가혹할 정도로 배설 훈련을 시킬
때 발달한다고 한다. 항문성 성격은 한마디로 자기의 항문 속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성격이
다. 인색하고 고집이 세고, 청결, 질서, 정돈, 굴종, 세밀함 등의 특징을 보인다.
드들은 상당히 완고한 자기만의
틀을 갖고 있어서 그 틍에 세상이 들어오지 않는 한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다.
앞서의 부인의 경우도 남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오고 시어머니가 항복을
해도 그 부인은 만족하지 않는
다. 그 부인은 남편과 시어머니가 완전히 자기 항문 속으로 들어가 자기 마음
대로 조적이 되어야 다소나마 긴
장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100%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과 다른 사람
들을 자기 항문 속으로 집어넣어야 하는 엄청난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자꾸 엄청난 문제를 일으킨다. 조금이라도 자기 성에 차지 않거
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것
이 자기 항문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고집을 부리며 상대방을 숨막히
게 한다.
그래서 항문성 성격의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
들과 함께 사는 남편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 좁은 항문으로 자기를 끼워 맞추려고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두 손 들고 만다. 그래서
항문성 성격의 부인을 가진 남편들은 밖으로 돌게 된다. 하고 싶은 일과 부드러
운 여자, 다른 취미 생활을 통해
가정에서 못 받은 따뜻함과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영혼
의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아
마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의 경우 그 부인이 항문성 성격인 경우가 꽤 많
을 것이다. 부인이 따뜻하고 사
랑스럽고 부드럽다면 기를 쓰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항문성 성격을 가진 부인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남편이 성공을 해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
는 것은 남편이 완전히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지, 남편이 자기 삶을 성
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래서 항문성 성격은 남편도 잡고 시집도 잡고 자식도 잡는 대표적인 악처들이
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도 악처라
는 것은 알지만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한다. 자리 힘으로 어렸을 때의 왜
곡된 악영향을 교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문성 성격의 부인을 가진 남편들이 한 가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자기의 좁은
항문 속에 틀어박혀 살기 때문에 쉽게 바람을 피우거나 돈을 함부로 쓰면서 자
유롭게 놀아나는 식으로 가정의
틀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강박증
강박증은 항문성 성격에서 많이 발달하며,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다. 자기
도 모르게 손을 자꾸 쌧게 되고,
문을 닫았는지 확인하게 되며, 자꾸 눈이 밑으로 가서 떨어진 무엇을 보게 되
고, 떨쳐 버리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 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강박증의 성격
적 원인으로는 야심을 들 수 있
다. 야심 많은 사람은 완벽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소한 생활에서도 완벅하지
않은 것을 못 견딘다. 누구에게나
조금씩 강박 증세가 있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신같이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본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강박증은 인간의 무분별한 야심에 경고를 주어, 주어진 것에 만족하
게 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긍정적
인 효과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해지려고 하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강박증은 좋아지지 않을 테니
까...
강박증은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는 양성적인 것이 있고, 그 정도가 심하여
일상 생활이나 직업 생활에 심각
한 영향을 주는 병적인 것도 있다. 양성적인 강박증은 인상적인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을 때 그 기억이 두
고두고 떠나지 않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심각하게 진행되는 강박 장애는 전체 신경증 솬자의 약 5%정도로 드
문 편이고, 전체 인구에서의 유
병률은 0.05%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 차이는 거의 없으며,
환자 중 50%이상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또 사회경제적 수준과 지적 수준이 높을수록 발병률
이 높다. 강박증이 나타나는 양상
은 상당히 다양한데, 이를 구체적으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강박적 충동
자기 의지에 반해서 강박적으로 일어나는 행위 충동을 말한다. 가령 집안 사
람이나 가까운 사람을 죽이고 싶
어하는 충동이다. 이러한 강박적 충동은 흔히 불한을 수반하지만, 실행에 옮겨지
는 경우는 거의 없다.
2. 강박적 숙고
생명, 죽음, 그리고 우주와 같은 문제에 대한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의문
에 집착하는 경우를 말한다. 또한
비교적 하찮은 문제에 대한 강박적인 걱정도 이에 속한다. 인간은 왜 태어나는
가, 지구의 기원과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 후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또는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병이 떨
어지면 어떻게 하나, 천장이 무너
지면 어떻게 하나 등이 그 예이다. 강박적 숙고는 감정적 문제나 금지된 충동
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시도로
서 흔히 해석되고 있다.
3. 강박적 의문
강박적 숙소, 의문, 그리고 불확실성 등이며, 이런 증세들은 생각의 성욕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4. 강박적 공상
딸이 겁탈당하는 장면이 되풀이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우와 같이 지속적
인 상상 또는 백일몽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의 강간 장면을 보고, 자기 딸이 그렇게 강간당하지나 않을
까 지속적으로 불안해 하며 자기
생활의 리듬을 잃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5. 강박성 자위행위
쾌감 또는 충분한 성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습관적으로 또 강박적으로 하는
자위행위를 말한다. 긴장과 우울
증을 해소시키기 위한 시도나 도착적 성충동을 회피하기 위해서, 또는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감정 표현을 잘 못
해서 만족할 만한 인간 관계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사외적 만족의 대치 등
과 같은 무의식적 목적을 총족시
켜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강박증은 정신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강박증 환자
들은 바로 그 뿌리 깊은 완전벽
때문에 강박증이 와전히 없어진 다음에야 사회에 복귀하려고 해서 치료하기가
더욱 힘들다. 강박증은 항상 더
불어 가댜 하는 것으로, 아무리 괴로워도 공부하고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흩
어지는데, 일단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치료가 더욱 힘들다. 강박증이 좋아지려면 완전하려고 하기보다는 불완
전한 가운데서 적을하려는 자세
가 필요할 것이다. 최근에는 강박증에 대한 약물이 개발되어 효과를 거두고 있
기도 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K교수는 왜 아버지를 살해했을까? 아직 그 원인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
다. 그가 입을 열지 않고 있기 때
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돈 때문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가치관이나 갈등 때문이
라고 했다. 그가 입을 열면 아버
지를 살해한 이유가 밝혀지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궁금증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아버지를
살해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K교수 자신도 자기
가 왜아버지를 살해했는지 몰라
적당한 이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왜아버지를 살해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이 미스터리를 푸는 데는 오직
상상력만이 필요하다. 이미 고인
이 된 분이나 상처받은 가족, 그리고 가장 심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그를 생
각한다면 아무렇게나 상상한다는
것이 죄송하지만, 그의 행위는 이미 세상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월남한 실향민으로 자수성가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기대를 모으고 태어났던 장남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버지의 눈으로 볼 때는 너
무 약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반면
에 어머니는 약한 아들을 감싸고 돌았다. 아버지가 장남에게 불리한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그 유언장을 파기할
만큼 엄마가 감싸고 돌았다.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자식을 엄마가 감싸고 도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 과보호가
성장 과정에서 줄곧 반복되었다면 그는 마마보이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
측이 든다. 아버지에게 야단맞고
엄마 치마폭 속에 숨는 것이다.
마마보이의 특징은 세상에 약하다는 것이다. 아버지로 대변할 수 있는 것은
가혹한 현실이고, 엄마로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안전한 도피처이다. 아들이 밖에서 맞고 들어왔을 때 엄마는 자식
의 눈물을 닦아 주며 우리 귀한
아들을 누가 때렸느냐고 그놈을 찾아 혼내 주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병신 같
은 놈, 어디서 맞고 들어와 징징
거리냐'고 아들을 혼내 준다.
험악한 세상을 아는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그렇게 크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
다. 마마보이는 어머니의 치마폭에
서 그럴싸한 포장된 아들로 성장한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겉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아들로 자라는 것이다. 그
러나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 아들이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를...
세상에 약한 아들이 사업을 벌인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너는 사업에 맞지 않
는다고 말렸고, 사업 빚이 있다
고 돈을 요구했을 때는 뒷감당을 해주지 않았다.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를 아
는 아버지로서는 그런 아들을 밀
어 주는 것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이고, 결국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
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마보이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수긍하지
못한다. 자라면서 한 번도 자기
를 인정하지 않은 아버지와 경쟁해서 그를 이기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
래서 그렇게 반대하는 사업도 벌
였는데 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것은 또다시 아버지에게 패배함을 자인하는 것이
다.
그러나 세상의 냉혹한 현실은 나약한 그가 아버지를 이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세상의 온갖 승냥이, 하이
에나, 늑대들은 그를 충동질해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아 오도록 부추긴다. 아들
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쓰디쓴 충고보다는 사기꾼들의 달콤한 말이 그에게는 더 위력을 발휘했다. 그
이면에는 자라면서 오랫동안 업
신여김을 받아 왔던 아버지에 대한 잠재된 분노 또한 크게 작용했다.
그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던 것은 아버지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 또한
무시했다는 것이다. 장인 사망했
는데 아버지가 장례식장에 얼굴만 비치고 해외 여행을 떠나 버린 것이다. 아버
지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지만 마마보이인 아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느냐, 장인의 장례식에...
아들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은 자기가 숨을 엄마 품을 상징하는 돈, 아내, 처
가 같은 집단이었지만 홀로 자수
성가한 아버지에게 그들은 그렇게 소중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 홀로 섰는데
나 이상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한 번도 세상에 홀로 서보지 못한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
다. 그래서 그는 칼을 들어 아버지의 목을 내리쳤다.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결국 이것뿐이고, 이것으로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해 주는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이기고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이러한 심리를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적인 희랍 신
화에서 따온 것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3-7세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콤
플렉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
나는 인강의 보편적인 심성이라고 보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프로이트는 이 콤플렉스가 거세 공포와 점차적인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원만히 해결되지 못할 때 신경
증의 근본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이 콤플렉스가 활짝 피지 못하고 도중에 꺾이
게 되면, 그는 다시 퇴행해서 계
집아이 같은 사내가 되어 청소년기에 주체성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다. K교수 또한 너무 강한 아버
지 밑에서 주눅들고 커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미해결이 성격적인 문제이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스트레스와 리비도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리비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적 자극이나 흥분을 유
발하도록 조건짓는 어떤 물리적
이며 구체적인 힘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프로이트
"다음달 8일 개봉을 앞둔 진유영 감독의 (도둑과 시인)이 제작진과 배우 강
문영 간에 가벼운 실갱이가 벌어
져 화제. 문제의 발단은 강문영이 가수 이승철과 결혼 전 촬영한 분량 가운데
최재성과의 두 차례 뜨거운 정사
신을 가능한 한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 강문영은 '촬영 당시는 결혼
하지 전이었으나 지금은 신혼중'
이라며 편집 과정에서의 배려(?)를 요청. 그러나 진유영 감독과 제작자 석래명
감독은 '극중에서 도둑(최재성)이
작업(도둑질)을 하고 나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정사를 나누기 때문에 이
를 뺄 경우 영화 흐름이 매끄럽
지 않다'며 난색을 표명..."
어느 신문에 난 기사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으로 정사를 나눈다는 말이다. 스
트레스를 풀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것은 드러내 놓고 주장하거나 장조되지는
않지만 상식처럼 우리 주위를 떠
돌고 있다. 스트레스에 짓눌린 청소년들이 포르노 테이프나 그림을 찾아 돌아다
니고, 어떤 노총각들은 스트레스
를 풀기 위해 한두 달에 한 번씩 사창가를 찾아가곤 하니 말이다. 한 젊은 여자
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까지 남자와 잔 적은 없다. 그러나 마스터베이션은 많이 한다. 포
르노도 보고 기구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마스터베이션을 하지 않으면 호르몬 배출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다
미용에도 안 좋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기 때문이다. 그 습관이 오래 되다 보니 나는 굳이 남자를 성적으로 밝힐
이유를 못 느낀다. 남자와 섹스
해 봤자 어떤 의미에서는 마스터베이션만 못하고 여러 가지로 성가시기만 하다.
나는 남자하고 섹스는 하지 않
고 그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 이야기는 참 그럴 듯 하게 들렸다. 성욕을 풀지 못해 스트레스에, 욕구 불
만에 찌들려 있는 여성들에 비하
면 그녀는 훨씬 더 발랄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섹스는 스트레스를 푸
는 데, 미용에, 정신건강에 좋다
는 말인데 이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내가 받은 정신의
학 교육에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의과대학 시절 정신과 강의를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의
문을 갖고 있는 것이 있다.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성적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학설이
있지요. 히스테리(hystery)의 어
원이 hystero(자궁)에서 비롯된 것같이 성욕의 적절한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았
을 때 히스테리는 발생한다는 것
이죠. 그래서 한때는 마스터베이션 등의 방법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도 생각했지요. 지
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강의가 끝나고 아직까지도 의문이 남는 것은 왜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했을
까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적절
한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교수님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고 덧붙인 것은 정말 말이 안 돼
서라기보다는 공론화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으리라. 마스터베이션이 치료에 도
움이 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
는 용기 있는 정신과 의사는 아마도 우리 시대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학문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 에너지(리비도)의
사용 가능량은 한정되어 있다는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스트레스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정된 리비도 를
무한히 써버린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비도를 무한하게 쓰는 것이
아니고 앞의 여자같이 적절하게
쓴다면 섹스가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는 말도 안 되고, 그래서 아무도
섹스가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지만, 사
람들은 알아서 섹스를 통해 스트
레스를 풀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터득하는 것이 섹스이고 섹스의 효능이
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레스와 섹스는 실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사람이 가장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는 때가 어
떤 경우인지를 생각해 보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본능이 있다면 다름 아닌
생존과 번식의 본능이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소중히 해서 자기와 똑같은 생명을 창조해 후세에 남기려는 존능
이 있다. 이 본능은 태고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사람의 모든 본능에 우선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이유는 번식을 위해서이다. 그
렇지 않았다면 사람은 이 험난한 자연계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지금까지 생존하
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3-5억 개의 정자들과 경쟁해 지긋지긋하게 달리면서 속으로 무수히 부르짖었을
것이다.
'주여, 만일 저에게 생명을 주시기만 한다면 주의 뜻에 따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열중하겠나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의
안에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 것
은 자식에 대한 생각이다. 자식이 휘험을 당할 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위험
을 가로막은 부모들은, 다름 아닌
이 생명을 재탄생시키는 번식의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
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번식에
대한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욕에 시달리고 갈 등을 하고, 심지어는
그 스트레스에 못 이겨 성범죄까
지 저지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공격을 당했을 때이다. 타인이
나만의 공간, 내가 편안하게 있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공격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잡히면서 엄청난 스트
레스를 받는다. 이때 사람은 자
기도 남들에게 똑같을 공격을 퍼붓고 싶어진다. 이 또한 사람을 지금까지 생
존시켜 준 죽음의 본능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공간을 침범하는 타인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 죽음의 본능은 극도로 제한
받아 왔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공격해 와도 내가 상대를 원시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를 상
징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섹스이다. 섹스의 행위 속에는 사랑 이외에도
상대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의미
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에서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 승리를 얻었을 때 가장 먼저 취하는
것이 섹스였다. 아마도 사람들이
섹스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것은 섹스 속에 태고 때부터의 본능과 그
파생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결
해 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섹스를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강조하지 못하는
것은, 현대 사회는 원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범성욕설
어느 날 지하철 역에 들어가니 존 듀이(실용주의의 창시자)와 젊은 기자가 주
고받은 말이 벽에 붙어 있었다.
"평생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가 묻자 존 듀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평생 산을오르는 심정으로 살았지. 하나의 산봉우리에 오르면 바로 앞에 또
다른 산이 보였어. 그러면 나는
그 산에 오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곤 했지. 내가 쉬
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런 마음 때문이었다네. 젊은이, 만일 눈앞에 더 이상 새로운 산이 보이지 않는
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하게!"
이 대답을 프로이트의 범성욕설(pansexualism;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성적인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
로 옮겨 보면 이러하다.
"평생 여자를 정복하는 심정으로 살았지. 한 여자를 정복하고 나면 바로 앞에
또 다른 여자가 보였어. 그러면
나는 그 여자를 정복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곤 했지.
내가 쉬지 않고 바람피웠던 것
은 그런 마음 때문이었네. 젊은이, 만일 눈앞에 더 이상 새로운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이
라고 생각하게!"
존 듀이가 설마 이런 생각을 하지야 않았겠지만 이런 심정은 많은 남자, 아
니 대부분의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본능이 특히 강해서 바람을 상습적으로 피우는 남자들
은 보통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
다. 첫 번째는 뻔뻔할 대로 뻔뻔해서 늙어 기운이 빠질 때까지 바람을 피우는
형이고, 두 번째는 순진하게 늦바
람을 피우는 형이고, 세 번째는 홧김에 스트레스를 못 이겨 바람을 피우는 형이
다.
첫 번째 유형은 선전적, 후전적으로 바람기가 발달한 사람일텐데, 그들의 턱
징은 아마도 왕성한 생명력을 갖
고 있거나 감정적으로 지천한(shallow) 사람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이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만큼 강한 생명력이 바람기에도 있었기 때문일 테고, 사회
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으면서 계
속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자기의 정돈되지 못한 미숙한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
지 못해 현실감 없이 끌려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로 순진하게 늦바람을 피우는 유형은 대개 젊었을 때는 순수를 주장
하다가 뒤늦게 인생의 맛을 알고
바람을 피우는 형이다. 여자들이 이 남자만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 같
아 선택을 했다가 뒤늦게 뒤통수
맞는 것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이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완전벽이 있는 성격으
로 인생을 고지식하고 좁게 살다
가, 뒤늦게 인생의 넓고 광활한 맛을 보게 되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늦바람에 매달리게 된다. 그들은
바람 속에서 온갖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기 때문에 바람이 가라앉아도 그 맛을
쉽게 잊지 못해 또다시 바람 속
으로 뛰어들곤 한다.
세 번째, 홧김에 바람을 피우는 유형은 약한 사람이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
키는 경우이다. 얼마 전 TV (경
찰청 사람들)을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온다. 휴가철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 아이
들이 피서를 떠난다... 피서지에
서 아내는 아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당신이 돈만 제대로 벌어와 봐요. ...아니 내가 어머
니한테 뭐라 그랬어요."
남편은 주눅들어 눈치만 힐끔거렸는데 아마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꾹 참고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어
쩌면 밖에 다른 애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
해 호랑이 같은 마누라에게 어쩔
수 없이 짓눌려 산다 해도 목숨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밖
에서 바람을 통해 숨구멍을 틔워
놓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마누라의 스트레스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바람을 피우는 형이다.
이같이 바람은 선천적, 후천적, 상대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 바람을 태풍
으로 맞을지 미풍으로 맞을지는
각자의 운명과 재수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을 어떻게 맞을지는 각자의 평
소 지헤와 노력에 달려 있는 것
이 아닐까?
성의 억압과 인간 문명의 발달
사춘기의 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중고생의 성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소새 줄 수 있을까요? 사람들
은 성장에 따라 성에 대한 관심
도 달라질 텐데, 학생은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는 단계이며, 또 어느 정도 관
심을 가져야 하는지요? 우리나라
는 아직도 성에 대해서 감추려고만 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의 발달은 성의 억압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활발하고 무분별한 성을 억압함으
로써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돌려서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
이지요. 이것을 저는 간단히 이
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태고 때 인간이 처음 집단을 이루며 살 때는 성이 참
으로 무차별했을 것입니다. 근친
상간이 성행하고 성 때문에 친족이나 동족을 살해하는 일도 빈번했겠지요. 그
래서 원시인 주에 연장자들은 나
름대로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아무래도 귀찮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기 생명
의 위협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와 섹스하면 안 된다든지 형제
자매끼리 섹스하면 안 된다든지
하는 규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어러한 규칙은 처음에는 가족에서
시작되어 점점 친족, 부족으로까
지 넓혀졌겠지요.
지금도 남아 있는 원시 종족들은 그들의 계율에 따라서 간통한 자들에게는 엄
격하게 벌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규칙을 어긴 자에게는 단호하게 엄벌을 내렸고, 이는 인간의 마음에
초자아로 내재화되어 이를 통해
인간은 점점 커다란 집단으로 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동물보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집단으
로 클 수 있었던 것은 효율적인 성의 억압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아마도 인간
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성의
억압이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은 생명을 이어가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억압만으로 해결되지는 않
습니다. 악압으로 눌려졌다면 오
히려 인간이라는 종은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겠지요. 대낮에, 의식의 세계에서
활발한 성은 집단의 이익을 휘
해 어둠으로, 무의식의 세계로 그 자리를 옮겼습니다. 빛 가운데 활발한 것은
위험한 것이지만 어둠 속에서는
용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성은 동물과는 달리 어둠 속에서 진행
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밤에 하거
나, 낮에 해도 남들이 못 보게 커튼을 치거나 깜깜하게 해놓고 섹스를 하곤하지
요.
이 같은 강한 성적 억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러서, 그 대가로 지불한 것
이 바로 발정기가 없어진 것입니
다.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시시때때로 이성을 그리워합니다. 억압된 성이 항상
비집고 올라오려고 하리 때문이
지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의 억압은 연장자들에
게 더 필요한 이데올로기라는 사
실과 성에 대한 억압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소년기,
특히 중고등학생 때는 성적 충
용이 가장 왕성한 시기입니다. 보통 남자는 10대에, 여자는 30대에 가장 왕성하
다고들 하지만 앞으로 남녀 평등
이 가속화되면 꼭 그러할지는 의문입니다. 젊고 싱싱할 때 자기같이 싱싱한 존
재를 만들고 싶은 게 생명의 본
성일 테니까요. 그래서 청소년에 대한 성적 억압 이데올로기는 잘 맞지 않는다
고 생각합니다. 억압 이데올로기
는 일단 성을 지배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이니까요. 그래서
청소젼들은 자기들의 강한 성적
본능을 한편으로는 억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나름대로 반란을 꾀하면서
포르노 테이프나 다른 성적 일탈
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의 성을 이해하고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는 일단 어른들이 자기 입장에서
벗어나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
도록 해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억압만 요구하지 말고 성교육도 솔직하게 하고,
그들의 성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돌릴 수 있는 놀이 문화, 문화적인 승화의 방식도 만이 개발해야 합니다. 그들
의 반란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자
기와 사회를 해치지 않도록...
삶의 본능
죽음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리비도는 그것과 밸런스가 잡히도
록 확대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리비도는 에로스 또는 삶의 본능이라 불리고, 생존의 모든 본능과 본능적 성동
인 그 자체를 포괄하게 되었다.
-(정신 분석의 이해), D.스태퍼트-클라크 저, 이일철 역, 정음사, 1981, p.199.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감독의 힘인가, 배우의 힘인가! 장선우 감독의 (꽃
잎)의 두 주인공, 엄마(이영란 분)
와 딸(이정현 분)의 연기는 나의 심금을 울리고 또 울린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
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비록 녹
음이 서툴러서 대사가 울리는 옥의 티가 있었지만 이정현이 보여 주는 연기는
거의 완벽했다. 미치광이 연기를
저렇게 미친 여자를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저런 생생한 연기를 해낼 수 있
을까? 거기에 또 진한 무게를 더
해 주는 엄마 이영란의 연기란...
내가 보기에 그 두 모녀는 신들린 듯이 연기를 했고, 둘의 연기는 (꽃잎)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둘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으니까... 아마 나는 그 둘을
보기 위해서라도 (꽃잎)을 찾고 또 찾을 것 같다. 베테랑 배우 문성근은 마지막
에 순간순간 드러나는 깨끗한 이
미지가 오히려 사실감을 떨어뜨렸지만 그 둘만은 정말 위대한 여성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는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줄곧 나를 사로잡았다.
미친 소녀! 소녀는 철저히 정상을
거부하고 악착같이 비정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소녀는 조금이라도 편안한 상
황을 견디지 못한다. 고통을 주면
줄수록 거기에 머물렀고, 사랑과 따뜻함이 주어지면 어김없이 달아났다. 소녀는
고통을 향해 뛰고 또 뛸 뿐이
다.
그녀를 보면서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제니가 자리를 떠나자 그는 몇 년
동안 뛰고 또 뛴다. 제니가 자기
를 떠날 이유가 없는데도 떠난 것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된 것이다.
사랑의 배반! 받아들이기 힘든 그
현실의 고통 때문에 검프는 뛸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의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사랑의 본능에 대한 깊은 상처
는 그로 하여금 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본능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에 본능
의 상처는 무엇보다도 자기부터
아물기를 바란다. 그 앞에서는 현실도 돈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본능부터
아물어야 한다. 육체가 완전히 지
치고 또 지쳐서 본능의 상처가 가라앉을 즈음, 삶의 본능이 떠오르면서 그는 발
을 멈췄다. 그러고는 쉬어야겠다
며 집으로 돌아갔다.
만일 검프가 그대로 끝냈으면 그는 외롭고 우울한 여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
다. 그러나 제니는 돌아왔고 그에
게 아이를 안겨준다. 검프 같은 정신 박약아가 아닌 정상적인 아이를... 검프는
홀로 됨에서 벗어나 해맑은 소년
의 표정을 회복한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자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남자! 그
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를 또 어
떻게 믿느냐! 차라리 홀로 사는게 낫지...' 아내가 바람을 피우자 일본으로 밀항
하여 거지 생활을 하는 남자! 그
는 일류 대학, 일류 집안, 일류 적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실을 떨쳐
버리고 달아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미쳤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본능에 깊은
상처를 받았기에 차라리 홀로 살
면서 육체적으로 자학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행여 육체적인 고통이 마음의
깊은 상처를 달래 주기를 바라면
서... 육체의 고통을 통해 본능의 아픔을 잊어 보려는 몸부림에서...
그러나 육체는 수십억 년 간 내려온 생명의 본능을 달래기가 힘들다. 따라서
본능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
들은 육체를 더욱 진하게 자학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자학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이 떠난 다음 끝없이 술을 마셔대며, 결국에는 죽음으로
돌진하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의 벤(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이해가 간다. 그는 이미 아내와 자식으로부터 깊
은 상처를 받았기에 새로 나타난
구원의 여신 세라(엘리자베스 슈 분)의 손길마저 뿌리치고 술과 죽음을 택한 것
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끔찍한 상처를 보여 주는 현실이 (꽃잎)의 소녀에 있었다.
검프나 벤은 그래도 이성이 남
아 있었지만 소녀에게는 그저 아픔밖에 없었다. 진압군의 총격이 가해질 때는
겁에 질려 엄마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지만, 피투성이가 되어 시체더미 속에 던져졌을 때는 삶을 구하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지만, 그후에 남겨
진 것은 아픔 또 아픔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삶의 본능이 무었보다도
앞서 자신의 삶은 구했지만, 죽어
가면서 붙잡으려는 엄마 손을 발로 짓밟아 떼놓고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더미
에서 뒹굴면서 그녀의 이성은 훼
손당할 대로 훼손당했다.
삶의 본능을 제외한 그밖의 본능(사랑의 본능, 가정의 본능, 죽음의 본능)은
무참하게 상처받고 자극받는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 환각으로 나타나 괴물을 무찌르고 구해 주는,
눈부시게 하얀 천마 탄 왕자님
일 뿐이다.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을 지켜 준 데 대한 무의식의, 생명의
축복일 것이다.
그 소녀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한 고통을 받은 환자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말이 너무 많고 쓸데없이 간섭을
잘하고 화를 잘 내서 병동의 골칫덩이였다. 간호사나 남자 직원들의 어떠한 설
득이나 신체적 강박에도 변화되
지 않났다. 그녀의 과거를 살펴보니, 남편이 자식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후부터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가출해서 길거리를 떠돌면서 부녀보호소, 영세민 정신병원 등을 전전했다. 그녀
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플 때마다 떠돌았고, 갇혀 있는 상황이었을 때는 남에게 야단맞는 자학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딴 집에 누워 그 마을의 남자들이면 누구나 와서 건드려도 괜찮은 소녀,
어쩌다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게 되면 어김없이 박차고 나가는 소녀, 자기를 차고 때리고
하면 악착같이 붙어 있다가 연
민을 느껴 사랑을 주려고 하면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는 소녀! 그녀에게는 사랑
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
나 보내야 하고 배신당하는 것은 지옥 같은 고통이었기에, 차라리 그녀 스스로
그 모두를 떠나는 것이다. 소녀
는 마치 마음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이 좁은 대한민국 땅을 비척거리며 걷고
또 걷고 있다. 어쩌다 만난 남자
뒤를 '오빠-' '히-'하고 쫓아다니면서... 모진 삶의 본능이 이제 그만 자기를 놓
아 주기를 바라면서... 누가 소녀에
게 이토록 깊은 상처를 주었는가!
죽음의 본능
프로이트는 말년에 다음 몇 가지 관찰을 통해 기존의 자신의 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1) 배설을 참거나 성행위 때 사정을 지연시키는 것같이 스스로 긴장과 고통을
찾는 태도가 인간에게는 있다.
2) 전쟁이나 천재와 같은 심한 외적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에는 외상을 일으켰
던 그 사건이 꿈속에 계속 나타
나 불안과 불면증을 초래한다. 꿈은 잠을 보호하고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해 편
안하게 해주는데, 이 경우에는 정
반대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3) 어떤 아이들은 유년 시절에 불안을 일으키는 체험을 놀이로 재체험하곤
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손자
인 에른스트가 어머니가 외출하고 혼자 떨어져 있는 상황을 반복해서 노는 예가
그러하다...
리비도 이론으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런 현상에 대해 프로이트는 '
죽음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도입
했다. 즉 인간에게는 태어나기 이전의 무기물 상태로 복귀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본능은 반복되는 자
살 기도나 무의미한 위험한 모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자기나 주위 사람들
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는 정신병
적인 생활 양식 등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죽음의 본능은 모든 정신분석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호나이
등은 죽음의 본능도, 본능으로서
의 공격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은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언젠가 본 의학
상식에서 우리의 유전자 중에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부분이 있다는 발견을
접하고는 더욱 그랬다.
그 기사는 나이가 들면 사람은 죽게 되는데, 그 죽음은 삶이 다해 죽는 소극
적인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유전자
가 발동해 죽이는 적극적인 것이라 했다. 아마도 그 발견이 맞다면 '죽음의 본
능'의 생물학적인 타당성이 입증
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적인 증명을 떠나서 우리 주위나 정신과 임상에서는 죽음
의 본능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
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끊임없이 자살
을 시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
의 본능에 사로잡혀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사
람은 어떤 때 죽은의 본능에 사
로잡혀 죽음으로 돌진하는 것일까? 내 나름대로의 관찰에 근거해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1. 삶의 끈을 놓았을 때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계시다 돌아가
셨는데 마지막에는 혈액 투석을
하기 위해 호흡 근육을 마비시키고 인공 호흡기를 달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하
루하루 보내는데, 어느 날 형님이
이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버님 기가 많이 빠져 보여!"
그 말을 듣고 섬뜩했지만 사실 그 느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은 84세
의 나이셨지만 정신만은 정정해
서 입원해서도 미소와 농담을 잃지 않으셨는데, 인공 호흡기를 달고 하루 이
틀 보내면서는 갑자기 삶의 끈을
놓아 버린 것같이 약해 보였던 것이다. 그 다음날 아버님은 혈액 투석을 못 견
디고 돌아가셨다.
영화를 보면 죽을 지경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이 최후의 유언을 남긴 후
곧 숨을 거두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리 몸
이 아파도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까지는 삶의 끈을 놓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다. 그러나 정작 그 유언을 하고
삶의 끈을 놓아 버리면 죽음의 본능이 적극적으로 튀어나와 그 상처투성이의 사
람을 순식간에 휩싸는 것이다.
2. "내 눈에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몇 번째 떨어지는 방울인지 셀 수가 없
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6
년 동안 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사람을 만나서 난 얼마나 행복했고, 얼마
나 수많은 시간들을 울어야 했는
지... 잘난 사람이다. 정말 여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너무나 비논리적
이고... 뭐라 해야 좋을지... 죽고
싶다. 정말 죽고 싶다. 내 자식. 예쁜 내 자식... 엄마는 너희를 빼면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단다.
새벽 0시 30분. 돗을 입고 난 무얼 기다리는가. 죽음을 맞기 위해! 자살한 영
혼은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는
데... 그만 울자. 이젠 그만 울자.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 너무나 초라해져...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
게... 아이들도 못 보고 죽어야 하나! 어떡하지? 어쩌지? 이 모든 것이 예정된 것
인지도 몰라! 며칠 전 그랬지...
남편이 잘 해주고 시부모님 좋으시고 친정부모 살아 계시고 자식도 아들 딸 있
고 하고 싶은 일 하고... 내가 제
일 행복한 사람 같다고... 내가... 흐흐... 바로 내가..."
남편의 바람을 발견한 한 여인의 마음은 죽음을 그리는 고통 뿐이었다. 사
랑하는 사람은 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단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하게 되면 드에게 붙들어져 있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게 된다.
그리고 그 찢겨진 끝에는 죽음의 본능이 따라온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배신받으면서 자살하는 경우는 주위에서 흔히 발
견할 수 있다. 연인이 배신하자
그 집 앞에서 분신 자살하는 남자, 연인에게 버림받자 그 연인의 방에서 목매달
아 죽는 여자, 남편의 내연의 처
집 앞에서 분신 자살하는 아내 등, 그 등의 자살은 처절하고 또 잔인하다. 아마
도 죽음의 본능이 직접적으로 자
극받자 참혹한 육신의 고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졌나 보다...
3. 삶의 본능이 정지됐을 때
얼마 전에 (하드 타켓)이란 액션물을 보았다. 이 영화는 돈 많은 사람들의 권
태를 덜어주기 위해 고안한 인간
사냥을 스토리로 하고 있었다. 건강한 한 사람을 도망치게 하고 그를 향해 총
과 활을 마구마구 쏘아대는 것이
다. 서구 사회에 권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권태를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기벽이나 위험한 모험, 알코올,
마약, 예술, 신비주의 등에 깊이 빠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 제3세계의 전쟁터로 달려
가기도 하는데, 아마도 권태 속에 피어 오르는 죽음의 본능을 피하고 삶의 본
능을 자극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부유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 또
한 권태를 못 이겨 극적인 탈출구를 죽음의 유희에서 찾는 것같다. 어느 학자
가 알코올 중독을 만성적인 자살
이라고도 이야기했듯이.
이밖에도 선천적으로 죽음의 본능이 강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죽
음으로 돌진하는 경우는 여러 가
지가 있을 것이다. 뒤르켐이란 학자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
미적 자살로 구분해 설명했다. 이
기적 자살이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때 고통을 피해서 하는 자살로, 요즘 늘
어나고 있는 가수들의 자살이나
청소년 자살, 주부들의 자살이 이에 해당된다.
이타적 자살이란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미가제 특공대같이 다른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을 헌납하는 경우이고,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적응이 돌연 차단된 경우, 예를 들어 중
소기업 사장들이 부도 때문에 자
살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뒤르켐은 자살의 주요 원인을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에서 그를 따뜻하게 받
아들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웬만한 자극으로는 자살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마음
속 깊은 죽음의 본능까지 자극했
을 때 자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참고; (정신분석의 이해), D.스태퍼트-클라크 저, 이일철 역, 정음사, 1981.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16세의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는 트럭에 사람이 치이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
불안정한 감정과 성욕이 항진되
는 등의 정신병이 생겼다. 그에게 왜 그러한 정신병이 생겼을까? 아마도 그는
죽음의 본능이 자극받아서였을
것이다.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은 삶의 본능(에로스)과 함께 우리 무의식을 구
성하는 강한 에너지이다. 그것이
자극은 받으면 그 커다란 에너지가 떠올라 의식의 자아를 빨아들인다. 이에 따
라 자아는 죽음의 공포, 정심병적
인 불안을 유발하며 이와 동시에 성욕 또한 항진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
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무의식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환자는 사춘기로 주체성과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 성장 과제였다.
그는 주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자아의 벽을 쌓으며 스스로 몰두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본능이 자극받으면서
그 벽을 허물어뜨리자 자기를 상
실한 정신병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랄 만한 죽음의 체험을 한 다음 불안신경증이나 히스테리 정신병 등
이 유발되는 경우는 주위에서 많
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 정신과의 이재광 교수는 1989년 신경정
신과 추계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fear for death)이 있다. 그런데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떤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 그것이 활성화(activate)될
수 있다. 죽음의 두려움이 활성화되면 불안이 증가하고 다른 감정까지도 동요되
므로 심한 병처럼 보일 수도 있
다. 이때 안정을 취하고 치료를 잘 받으면 빨리 회복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시
기에 현실적인 다른 문제로 자극
을 더 받게 되면 치료가 지연되고 어떤 경우에는 더욱 더 악화되어 위험할 수
도 있다. 그래서 이때는 주변 사
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와 반대로 스스로 죽음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
나 은근히 우려가 된다. 혹시 그
런 성향이 유행되어 내 주위에까지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그 대표적인
것이 증가하는 외도이다.
얼마 전에 아내가 어떤 유부남과 바람이 나자 남편이 그 유부남의 아내를 납
치해 자기 아내 앞에서 성폭행하
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남자는 지금 수배중이라는데, 이 사건은 일면 끔찍했지
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이 가기
도 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그랬을까? 그 행동의 결과는 상대방의 가정
도 파괴시키지만 자기와 자기 가
정 또한 파괴될 텐데...
사랑이란 큐피드의 화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내가 상대방을 내 심장 안으로
곱게 찔러 넣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하다가 빠져 나갈 때 내 심장은 날카로
운 화살촉에 갈기갈기 찢기고 만
다. 심장이 찢기면 마음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다음으로는 죽음의 본능이 자극
된다. 심장이 찢긴 채로 살 수 있
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 배산당한 사람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다. 현대는 프리
섹스의 시대이고 개방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건은 왜 자꾸
일어나는 걸까? 오히려 요즘 들
어 끔찍한 인질극을 벌이거나 걸핏하면 자살을 하는 등 삶을 가볍게 보는 경향
이 자꾸 늘어나는 것같다. 아마
도 현대 문명의 발달로 삶은 편리해진 반면에 본능을 통제하는 자아의 힘이 약
해져서일 것이다. 자아에는 현실
적응, 본능적 욕동의 조정 및 조절, 방어, 자율, 대상 관계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현실이 편해지면 자아
는 단련되지 않아 약해지게 된다. 현실과 마주쳐서 고생을 하고 개인적 체험이
많아야 자아 또한 강화되고 영
역이 넓어진다. 그런데 발달된 현대 문명이 현실의 어려운 일 등을 대신 해주다
보니 자아는 자꾸 더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 시대 때부터 축적되어 온 본능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강도로 존
재하고 있어서, 이 강한 본능이
약해진 자아의 방어를 비집고 올라오면서 자꾸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이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심
장이 찢기며 솟구치는 죽음의 본능은 두 가지 양상을 띤다고 본다. 하나는 자
기를 죽여서 이 고통스러운 삶을
하직하고 다시 아무 생각 없는 무생물로 돌아가고 싶은 자기 파괴의 마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대방을 죽이
고 싶은 공격심이다. 그래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죽고 싶거나 자기가
받은 고통 이상으로 똑같이 공격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갖게 되는 본능적 태도이다. 그러
나 이러한본능을 그대로 따를때
는 앞의 남자와 같이 경찰에 수배될 수가 있으니 보통 사람들은 대개 그 본능을
꾹꾹 눌러 참거나 현실을 거스
르지 않는 다른 식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통제력이 약한 사람들은 존능의 솟구침을 견디지 못하
고 본능에 지배되고 만다. 요즘
30대 주부들 사이에 애인 만들기가 유행이라느니, 남자에게 전화가 왔는데 누
구냐고 묻는 남편은 가장 간 큰
남편이라느니 하면서 여자들의 바람기가 자꾸 부추겨지고 있다. 그러나 뭣 모르
고 유행만 따를 일은 아니다. 자
칫 어설프게 했다가 발각이라도 나면 남편의 죽음의 본능과 마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함부로 빠져들거나 시험할 일은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능과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
이다. 바람피우고 싶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시도해야 한다.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장애물이지만 많은 노력을 하도록 자극하여 새로운 성취를 가능하
게 한다. 그래서 콤플렉스는 바
로 정신 생활의 초점이다. 우리는 이것 없이 살고 싶어하지 않고, 이것이 절대
로 없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정신 활동까지도 정지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불멸의 연인)이라는 영화는 베토벤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상
처가 평생 남아 있었음을 잘 보
여 준다. 신동인 아들에게 큰돈을 기대했던 아버지는 베토벤이 기대에 못 미치
자 마구 때렸던 것이다.
물론 그 고통을 베토벤처럼 예술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악영
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콤플렉스가 사람의 한평생을 질곡이나 불행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누구나 가만히 자기
인생을 돌이켜 보면 자기 인생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큰 힘 중의 하나가 콤플
렉스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콤플렉스란 도대체 무엇일까? '콤플렉스'란 용어는 1895년 브로이어
(J. Breurer)가 (히스테리의 연구
(Studies on hysteria, 1895))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히스테리의 원
인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 사고
및 기억의 집합체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융은 언어 연상이 정서적 요인에 의하여 지연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의식적
인 통제에 복종하지 않는 무의식
적 심리 내용의 집합체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사전적으로 콤플렉스란 '비슷한
감정적 강도를 갖고 있으면서
우리들의 태도나 행동에 아주 강하게 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된
사고들 또는 충동들'을 말한다.
거렇다면 이 같은 콤플렉스는 왜 생기는 걸까? 내가 보기에는 성장 과정에
서의 상처나 아픔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뚱뚱한 사람이라도 성장 과정에서 놀림을 받고 자
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콤플렉스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콤플렉스의 근저에는 강한 경쟁심이 배태되어 있지 않을까한다. 즉 5억 마
리의 정자 중에서 앞선 한 마리
가 생명을 얻었듯이 사람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갖고 태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
여러 가지로 좌절됐을 때 그는 강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남들을 앞서고자 스
스로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콤플렉스는 성장 과정에서 경쟁심을 심하게 느끼는 청소년이나 신세대들에게
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 것 같다.
그들 사이에서 은어로 또는 농담으로 많이 얘기되고 있는 콤플렉스를 나열해 보
면 이러하다.
. 머리 나쁜 건 용서해도 못생긴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외모 콤플렉스'
. 순간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 남자는 여자 만나기 나름이라는 '온달 콤플렉스'
. 어릴 때부터 착하고 얌전하다는 얘길 들어 왔어요. 그래서 전 늘 착해야 돼
요'라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
. 맏아들은 집 안의 희망이요 태양이라는 '장남 콤플렉스'
. 희생과 봉사만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맏딸 콤플렉스'
. 얼굴로 안 되면 몸매로 승부한다는 '람보 콤플렉스'
. 컴퓨터 박사가 되야 한다는 '컴맹 콤플렉스'
. 외국인 앞에서 영어 한마디도 못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영어 콤플렉스'
. 무엇이든 알게 되면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진리의 메가폰 콤플렉스'
등...
그러나 콤플렉스가 그 사람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삼켜 버렸을 때는 부정
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복잡하
다. 그들은 콤플렉스가 적은 사람
들에 비해 예민하고 생각을 많이 하며, 남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남이 자기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대하는가 등
등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다 보면 대인 관계나 의사 소통도 적절히 이루
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콤플렉스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색안경을
끼고 있는기를 확실히 알아서 적
절히 극복해야 할 것이다. 콤플렉스가 지나치게 해로운 작용을 하는 경우에는
콤플렉스에서 그 개인을 벗어나
게 해야한다. 그것은 오직 콤플렉스의 실질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정신치료로써
만이 가능하다.
정신방어기제
'방어'란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위험은 흔히 외적
으로 일어나는 것만을 생각하지
쉽지만 내적으로 일어나는 경우 또한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말을 하다가 갑자
기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후
려치고 싶고 쳪에 앉아 있는 예쁜 여자를 부둥켜안고 싶은 예에서 나타나는 원
초적 본능은 스스로 잘 방어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커다란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방어는 내적으로는 원초
적인 본능인 성적, 공격적 충동이
의식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아가 이용하는 수단이다. 이를 정신 분석학에
서는 '정신방어기제'라고 한다. 자
아가 내적인 충동에 대해 방어를 하지 않을 경우 이런 충동들은 불안을 야기한
다. 현실적으로 초래되는 다음의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이 방어기제에는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합리화(rationalization), 동일시
(identification), 투사(projection), 부
정(denial), 억제(supression), 억압(repression),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
고립화(isolation), 취소(undoing),
전치(displacement), 퇴행(regression), 승화(sublimation), 상징화(symbolization),
백일몽(daydreaming), 등이 있
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어렸을 때 길을 가다가 어떤 군인 둘이 어깨동무하고 비틀거리면서 지나가다
가 한 군인이 길 가는 여자들을
붙들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을 보았다. 여자들은 깜짝 놀라 저항하다가 넘
어지기도 했는데, 옆에 있는 친구
군인이 뜯어말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여자들은 뒤에서 욕하고, 그 둘은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가다가
맞받아 욕하고 그래도 계속 뭐라고 하면 그냥 못 들은 체 바삐 걸어갔다. 그러
다가 또 어떤 여자를 만나면 한
군인은 덮치고 한 군인은 말리곤 했다. 그들은 술에 취해 보였는데, 특히 덮치는
쪽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갈
지자로 걷는 게 의식이 별로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뒤에서 욕하는 여자를 향해 말린
군인 처음에는 미안해 하다가 욕
이 계속되자 '창녀 같은 게...' 하면서 욕을 맞받아 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강제로 쓰러뜨려진 여성의 웃음이
었다. 그 웃음은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웃음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섹시하
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 일을 정신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우선 길 가는 여자에게 닥치는 대로
키스하는 것은 인간이 기본적으
로 갖고 있는 성적, 공격적인 욕동(이드)이다. 그 욕동은 마치 쓰러진 여자가
웃음짓는 것처럼 항상 그 자신에
게는 시도 때도 없이 유혹적이다. 그러나 이를 무분별하게 행사할 때 다른 사람
들에게 피해를 주고, 이는 곧 다
시 자기 자신에게 피해로 돌아오겠기에 방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해롱해롱 전혀 정신이 없다. 이
미 술에 취해 '퇴행'할 대로 퇴행한 것이다. 그래서 옆의 친구(자아)가 뜯어말
렸다. 이 뜯어말리는 것은 '억제'와
'억압'이라고 볼 수 있다. '억제'는 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고 한다.
이 경우 친구는 그 취한 군인을 강제로 여자로부터 떼놓고 앞으로 밀고 나갔
고, 또 그 취한 친구도 그 밀림
에 순순히 따랐기 때문에 '억제'와 '억압'의 기능이 모두 행사됐다고 볼 수 있
다. 뒤에서 욕하는 여성에 대해 친
구가 창녀 같다고 맞받아 치는 것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는
'부정'과 자기의 받아들일 수 없
는 속성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투사'의 방어기제를 쓴 것이다. 그러다가 뒤
에서 계속 소리쳐도 그냥 모르는
체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은 '고립화'의 방어기제를 쓴 것이다.
정신방어기제는 이같이 기본적 욕동을 조절하는 것 외에도 어떤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이 안심할 수 있
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조절하기도 한다. 남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때 합리
화를 하거나 복잡하게 이론으로
포장하거나(주지화)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 방어기제 중에는 '승화'와 같이 효과적으로 본능적 욕동을 조절하는 것
이 있는가 하면, 성공적으로 조절
하지 못하여 정신적인 긴장 등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있다.
이들 방어 주에 신경증을 일으키
는 방어로는 억압, 전치, 격리, 반동 형성, 취소, 대리 형성, 전환 등이 있고 정
신병을 일으키는 방어로는 부정,
퇴행, 함입, 투사, 병적 동일시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방어기제는 누구나 본질
적으로는 같은 형태를 사용하고
있으며 반드시 병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방어기제의 형
태와 활용 범위 및 인격을 왜곡
시키고, 행동을 지배하고, 적응에 장애를 주는 정도 여하에 따라서 정신건강은
결정될 수 있다.
나르시시즘, 자기애적 인격장애
청소년 시절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재미있는 상상에 빠져 들기도 했다.
저 거울 속의 나는 아무리 봐도
너무 잘생긴 것이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저 모습은 내가 마음속으로 영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많이 닮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이소룡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제임스 딘 같기도 하고... 거
울 속의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잘도 맞춰진다. 바로 청소년기의 주체성 형성 과정에 스쳐 가는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이란 지나친 자기 사랑, 자기애 또는 자기 중심성을 말한다. 이는
리비도가 자기 신체 내부로 향할
때 발생한다. 이런 청소년기의 나르시시즘은 나이 들어서도 간산이 스쳐 가곤
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는 겉모
습을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외모에 감탄하기보다는 정신의 거울을 들여
다보면서 감탄하곤 했다. 이렇게
까지 사고하는 나를 보니 어쩌면 셰익스피어가 환생한 것 같기도 하고 융을 닮
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러둘
을 떠나 현실로 돌아오면 곧 초라하게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아무도 나를 그렇
게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시적으로 스쳐 가는 자기애가 요즘 청소년들이나 신세대들에
게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나
보다. 왕자병, 공주병이란 말이 심심찮게 떠돌고 있고, 또 그들 표현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찍는다고 생
각한다는 도끼병이란 신조어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왕자병, 공주병이란 자기를
왕자, 공주같이 귀한 존재로 생
각하면서도 남들이 자기를 그렇게 받들어 준다고 착각하면서 지속적으로 취해
있는 상태를 말할 것이다. 이를
정신 병리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왕자병, 공주병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다. 이
것이 특히 강하게 지속되는 사람
들은 자기애적 인격장애(narcisstic personality disorder)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중요성 또는 자기 재능과 성취에 대한 과대적 사고의 양상이 장기간
지속
2) 성공, 권력, 뛰어난 재치, 미모, 이상적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공상에의 몰
두
3) 남으로부터 끊임없는 관심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자기 현시적 욕구
4) 비난, 무관심 또는 패배에 대해서 냉담한 무관심이나 분노감, 굴욕감 또는
공허감으로 반응
5) 특권 의식,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
6) 타인의 느낌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것
7) 남을 지나치게 이상화 했다가 느닷없이 평가절하하는 등의 극과 극을 오락
가락하는 태도 등...
그렇다면 현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왜 이런 자기애적인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걸까? 그것은 아무래도 젊은이들
의 미숙성을 들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기애는 자기 신체로부터 쾌감을 얻고 또 자긴에 대한
이상상을 형성하는 초기 발달 단
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것이 나이 들어서까지 지속되는 것은 미숙하고 신
경증적인 사람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에릭 에릭슨은 성장하는 시기마다 꼭 해결해야 하는
특별한 과제가 있어서 이를 만족
스럽게 해결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만약 그렇지 못하면 만성적 적응장애에
빠진다고 하였다.
또한 각 시기에는 앞으로의 발달 과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사람과 결정적
으로 부딪치는 위기가 있다고 했
다. 즉, 유아기에서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서로 주고받는 만족과 불만의 정도
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에
대한 신뢰(trust) 또는 불신(mistrust)의 토대가 설정되고, 조기 아동기에서는
대소변 가리기에 따른 부모와의
관계 여하에 따라 자율성(personal autonomy)이나 수치(shame), 의문(doubt)의
자세가, 후기 아동기에서는 가족
과의 관계에 따라 자발성(initiative)이나 죄악감(guilt)이, 학동기에서는 근면
(industriousness)이나 열등감(sense
of inferiority)이, 청소년기에서는 동년배 그룹과의 관계나 지도자상에 따라 주체
성 형성(identity formation)이나
주체성의 확산(identity diffusion)이, 초기 성인기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
(intimacy)나 고립(isolation)이, 성
인기에서는 생산(procreation)이나 자기도취(self-absorption)가, 마지막 완숙된
성인기에서는 완성(integrity)이냐
절망(despair)이냐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인격 발달을 위해 1차적인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여러 가지
정서를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고, 또한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고 만족할 수 있
는 태도나 행동을 배우는 일이라
고 한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이러한 과제들이나 위기에 맞닥뜨려 건강하게 극복
하지 못하고, 부모의 과잉보호나
돈의 품에만 안주하여 이를 소홀히 했을 때 여러 가지 대인 관계에 장애가 생
긴다. 그중 하나가 어린 시절의
자기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왕자병, 공주병에서 벗어나 남들에게 존경받고 남들을 다스
릴 수 있는 진정한 왕자, 공주가
되려면 거지왕자나 소공녀가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의 길로 스스로 뛰어드는 용기
가 필요하다. 그래야 남과 자기
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테니까...
2장 프로이트와 융을 넘어서
정신의 만유인력
프로이트에게 더욱 깊은 영향을 미쳤던 다른 과학이 있다. 그것은 물리학, 그
중에서도 이 세기 중간쯤에 독일
의 위대한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헤름홀츠가 제창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이
원칙을 요약하면, 에너지도 물질
이 양인 것과 같이 바로 양이며, 형태를 바꾸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소멸해 버리
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
면, 하나의 물체가 식어지면 이웃했던 물체가 더워진다는 식이어서 에너지가
어떤 체계의 한 부분으로부터 없
어지면 반드시 그 체계의 다른 장소에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칼빈 s. 홀 저, 황문수 역, 범우사, 1984.
그후 프로이트는 퍼스낼리티 안에서 에너지의 변형과 교환을 연구하여 역동적
심리학을 창출했다. 그것을 간
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프로이트는 퍼스낼리티 체계를 '이드' '자아' '초자아'로 나누었다. 퍼스낼리
티의 작용에 사용되는 모든 에너지
는 이드에 자리한 '본능'으로부터 얻는다. 본능은 정신적 에너지의 총량으로, 이
드는 이 에너지의 최초의 저장소
라고 할 수 있다. 이드는 긴장을 해소하는 두 과정, 곧 충동적인 운동 계통의
활동과 심상의 형성(소망 실현)만
으로는 생존과 생식 작용이라는 거대한 진화론적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없
다.
반사 작용이나 소망이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고 성욕을 느낀 사람
에게 짝을 찾아 주지는 못할 것
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괴
고, 외부의 현실에 적응하거나 지
배함으로써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내야 한다. 인간과 현실 사이의 이러
한 거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심리
체계, 곧 '자아'의 형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아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즉 이드로부터 에너지가
나와서 자아를 구성하는 잠재적
과정에 들어오기까지는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때까지는 퍼스낼리
티에 선천적이고 잠재적인 경향
으로서 존재해 왔던 새로운 과정에 에너지가 공급되면, 자아는 독립된 체계로서
길고 복잡한 발달을 하기 시작
한다.
퍼스낼리티는 필요한 정도의 에너지만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의 에너지는 없
다. 퍼스낼리티의 한 에계가 에너
지를 가지면 다른 체계들은 에너지를 상실한다. 즉 자아가 강한 사람은 이드와
초자아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퍼스낼리티의 역학은 퍼스낼리티를 통해 일어나는 에너지 분배의 변화로 이루
어져 있다. 한사람의 행위는 그
의 역학에 의해 결정된다. 대부분의 에너지가 초자아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
의 행위는 도덕적일 것이다. 그리
고 대부분의 에너지가 모든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인 이드에 간직되어 있다면,
그의 행동은 충동적일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이러한 에너지의 분배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참고: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칼빈 S. 홀, 황문수 역, 범우사, 1984.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심리학에 연결지어 생각한 프로이트의 착상은 참으로
신선해 보였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혹시 다른 물리학 법칙도 인간의 심리에 적용할 수
없을까? 뉴턴의 만유인력 같은
것도...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우리 심리에 적용해 보았다. 그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정신과 전
문의 를 막 취득한 1989년도였다. 그때 나는 이 이론이 이데올로기에 깊이 사로
잡혀 있던 젊음을 각자 자기 길
로 회복하게 할 수 있는 이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깊이 빠
져들었다. 그때 생각했던 정신의
만유인력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어느 날 TV에서 뉴턴(newton)과 과학 혁명에 대한 프로를 보았다. 만유인
력과 뉴턴의 업적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러하다.
뉴턴과 과학 혁명
<그림 1>에서 볼수 있듯이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돌고 그 지구 주위를 달이
돈다. 이 운동은 원 운동이 아니
라 회전 운동이다(케플러)
<그림 1>
하늘에서 움직이는 달과 땅 위에 떨어지는 사과의 움직임은 서로가 같다.(<그
림 2>).
<그림 2>
여기에서 만유인력을 생각할 수 있다. 만유인력이란 물체 사이 작용하는 힘이
다. 이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
례하고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
지구가 없다면 달은 반드시 간다. 그러나 달은 지구에 의해 딸려 있다. 사과
는 자기가 가는 힘이 없어 뚝 떨
어진다. 그러나 이 사과를 아주 힘껏 던지면 이 또한 지구 주위를 돈다. 이것이
바로 인공위성이다. 즉 사과나
달과 마찬가지 운동이다. 더 힘껏 우주선이 그러하다. 여기서 과학 문명이 매
우 혁명적으로 발달했다. 뉴턴은
정신없이 살았던 사람이다. 장가도 못 가고 지구상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여자를 볼 때만 생각했다. 하나에
빠지면 끝없이 탐구했다.
만유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문득 혹시
이 만유인력을 우리 정신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림 3>
<그림 4>
만일 만유인력을 그대로 우리의 정신에 대입한다면 정신이 강한 사람 주위에
는 정신이 약한 사람들이 인공위
성처럼 맴돌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정신을 가진 자는 그의 정신의 인
력권을 뛰쳐 나와서 자기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융이 프로이트를 떠난 것처럼...
이것은 황당한 이론일지는 모르겠으나 에너지는 곧 질량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정신 에
너지에도 질량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정신의 질량은
물질의 질량과는 달리 아주 섬
세할 것 같다. 정신의 에너지는 질량 자체는 아주 미소하지만 그 파급 효과는
아주 크다. 마치 조그마한 원자에
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듯이...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정신의 질량은 물질같이 맹목적으로 상대를 잡아 끌 수
는 없으리라고 본다. 아마도 자
기에게 아주 밀접하게 향하고 있는 자만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큰
정신, 예를 들어 예수나 석가라고
해도 미천한 중생의 정신을 모두 끌어당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만유인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물질보다는 훨씬 수월할지도 모
른다. 큰 정신을 이루려고 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의 업적, 기존의 큰 정신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발하는 고집이 세고 부정적, 반
항적인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에 대한 인물 연구를 보면 이러하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창조성의 비밀을 밝히는 서한에서, 자신이 미래에 작
곡할 씨앗은 평소 준비되어진 토
양에 갑자기 예외적인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는 설명 이외의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창조에 대해
해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일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참을성이 없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없는 것이 창조에 있
어서 가장 경계해야 될 점이라고
그는 부언하였다...
저자가 이 분야의 약 20여 명의 연구자들이 제각기 내세우고 있는 특징들을
종합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최
소 다섯 명 이상이 지적한 특징으로서는, 주위의 몰이해나 거부, 위험성에 대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의지, 다양한 흥미와 에너지, 강력한 자아 확신감과 자기 주장성,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고 덜 비평적인 면, 노
력, 열중하며 쉴 줄 모르는 부지런함, 사회문화적 외적 압력에 대한 자유로움
등이다. 세 명 이상이 중요시 여
기는 특징으로는, 새롭고 모호하거나 모순된 것에 대한 개방성, 융통성, 호기심,
독립심, 직감력과 감수성, 놀이
정신, 독립적 판단력 등이다.
-<임상예술>, 최헌진, 임상예술학회.
아인슈타인의 사고 방식의 비밀은 모든 고정 관념을 버리고, 사물을 근원부
터 재조명해 보려는 태도에 있었
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고정화된 사고 방법, 일반적인 상식, 절대적인 신앙, 절
대적인 권력, 그는 이런 것을 싫
어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가 실행한 것은 아무에게도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로
운 정신으로, 기존의 생각을 모두
벗어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규명해내려고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엘리트 학습만화 과학백과(24)>, 상대성 이론, 삼성당, 1992, p. 129.
이러한 정신의 만유인력은 큰 정신에 작은 정신이 말려드는 것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
다. 예를 들어 성서에는 예수가 귀신을 물리친 기록이 있다.
예수께서 무리들이 달려와서 모이시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와 귀머거리 귀
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마라 하시니 사
귀가 소리지르며 아이를 심히 오
그라뜨리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거늘 오직 예수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드디어 일어서더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와 가
라사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 가라사대 기도 아니 하여서는 이런 유를
나가게 할 수 없나니라.
-<마가복음> 제9장 제25절-제29절.
이를 정신의 만유인력으로 이해하면 이러하다.
<그림 5>
<그림 6>
<그림 7>
<그림 6>으로 되느냐 <그림 7>로 되느냐 하는 것은 사귀가 가진 에너지와
예수와의 거리에 달려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대개 사귀는 달아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사귀는 예수의 정신에 빨
려들기를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
다. 그것이 싫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나거나 탈출했기에...
무당들이 굿을 통해 귀신을 쫓는 것도 작은 정신에 깃들인 병든 정신을 더
큰 정신으로 밀어 내기 때문일지
도 모른다. 무당들이 칼이나 창을 들고 강한 힘을 과시하고 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김동리의 <무녀도>
에서 모화의 굿거리를 들어 보자.
엇쇠, 귀신아 물러서라!
너 이제 보니 서역 십만리 굶주리던 잡귀신하,
여기는 영주 비로봉 상상봉헤,
깎아질린 들 베랑헤, 쉰길 청수헤, 엄나무 발헤
너희 올 곳이 아니다.
바른손헤 칼을 들고 왼손헤 불을 들고
엇쇠, 서역 잡귀신아, 썩 물러서라. 툇툇!
엇쇠 귀신아 물러서라
당대 고축년에 얻어먹던 잡귀신아,
늬 어희 모화를 모르나냐. 아니 가고봐 하면 쉰 길 청수에,
엄나무 발에, 무쇠 가마에, 백말 가죽에, 늬 자자손손을 가두어
못 얻어먹게 하고 다시는 세상 밖을 내주지 아니하여 햇빛도 못 보게 할란다.
엇쇠, 귀신아 썩 물러가거라.
서역 십만리로 꽁무니에 불을 달고
두 귀에 방울을 달고 왈강달강 왈강달강
벼락같이 떠나거라.
이같이 질량이 큰 정신이 작은 정신을 빨아들이는 것을 나는 정신의 만유인
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질
량이 큰 정신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데올로기 같은 밀도가 높은 정
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의 성인같이 참으로 성숙한 정신이다.
정신의 만유인력을 좀더 탐구해서, 큰 정신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자기를
잃고 사는 사람들이 자기를 용기
있게 찾아길 수 있도록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
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주
인으로 살고 싶지, 노예로 살고 싶지는 않기에...
현대 물리학과 정신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이 고전 물리학이라면 양자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등의
현대 물리학은 인간의 정신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선 현대 물리학을 심
리에 적용한 이론으로는 모레노
의 자발성 이론을 들 수 있다.
모레노는 자발성 요인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상태)을 설명하면서 자연, 곧
우주를 닫혀진 우주와 열려진 우
주로 구분한다. 닫혀진 우주란 새로움이 없는, 절대적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진
우주를 말한다. 즉, 에너지 보존
의 법칙, 원인과 결과가 예측 가능한 결정론적 인과론,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
론과 같은 닫혀진 정신역동 체계
등, 소위 오늘날 말하는 고전 물리학 이론이 지배하는 우주이다.
그곳에서 자발성은 숨을 쉴 수가 없다. 설혹 있다 해도 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열린 우주는 끊임없이 새
로움이 가능한, 어느 정도 예견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세계이다. 우연히 존재하
며 자발적 요소가 살아 움직이는
우주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양자도약(은유적으로 지도 없이 미지의 세계
에 뛰어드는 모험적 행위. 프레
드 울프), 불확정성 원리(principle of indeterminism), 불연속성의 원리가 지배하
는 우주를 말한다.
자발성은 바로 이러한 열린 우주 안에서만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모레노
는 규칙성과 질서(regularity and
order)를 닫힌 우주의 자연법칙으로 묘사하였다. 모든 것을 기계론적으로 합리적
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반복의 세
계로부터, 인간 정신을 부분 개념으로 설명, 해석 가능하다고 믿는 고정된 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 입력
된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반응하는 것이 자발성이다.
-한국사이코드라마 학회지<마음의 극장> 제6호, 최헌진, 1996.
나는 현대 물리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현대 물리학을 정신에 적용한다
면 혹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우리 정신의 신비 현상들, 예를 들어 우연의 일치, 기적, 환각, 환청, 점술, 사주,
성인들의 깨달음이나 성불, 신
비력 등의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가져 본다. 아인슈타인의 상
대성 원리를 우리 아들의 만화책
<엘리트 학습만화 과학백과(24) 상대성 이론>을 통해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러
하다.
움직이고 있을 때와 정지하고 있을 때는 서로 다른 시간이 작용하고 있다(p.
52).
광원에 관측자가 접근할 때나 광원이 이쪽을 향해 다가올 때는 빛의 파장이
짧아진다. 음파일 때는 소리가
높아 지겠지만 빛의 경우에는 보랏빛이나 푸른색을 띤다. 반대로 광원과 관측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때는, 소
리가 낮게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은 붉은색을 띠는 것이다. 이 도플러 효
과는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는 중
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p. 96).
아인슈타인은 소년 시절 '광속보다 빠른 탈 것을 타고 달린다면, 어떤 세계
를 볼 수 있을까' 하고 몽상했다
고 한다. 만약 그런 로켓이 존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타고 창 밖을 보며 과
거 시대를 거슬러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득히 멀고 먼 옛날의 우리 조상들과 또한 원시
인들까지 만날 수 있게 되지 않
을까(p. 110).
특수 상대성 이론은 두 개의 기본 원리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그 한 개는
모든 관성계에서의 물리 법칙은
같다고 하는 상대성 원리입니다... 또 한 가지는 광속 불변의 원리입니다... 다음
에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정지하
고 있을 때에 비해 길이가 줄어들어 보인다고 하는 로렌츠 수축 현상이 있습니
다. 또한 운동하고 있는 시계는
정지하고 있는 시계에 비하면 늦습니다. 이것들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얻어진 귀결이며, 시간과 공간 개
념의 인식에 대한 커다란 혁명이었습니다(p. 130∼131).
일반 상대성 이론은 두 개의 원리를 기본으로 해서 조립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계(가속계도 포함하
여)는 동등하다고 하는 일반 상대성의 원리입니다. 또 한 가지는 가속도계에 의
한 힘(관성력)과 중력이 동등하
며,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등가 원리입니다(p. 133).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의 아인슈타인은 다음의 새로운 도전, 통일장
이론의 연구에 착수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인슈타인이 후반생을 건 이 장대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p.
135).
어느 날 한 만성 정신병환자가 자기가 통일장 이론을 완성했다고 자랑했다.
그는 그 동안 수천 권의 책을 읽
었다고 하며 자기가 발견한 이론은 극비라고 주장했다. 그는 워낙 과대 망상
이 심했기에 또 하나의 병증으로
받아들였지만,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는 정말 그렇게 발견했다고 느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병자들은 그들의 환각과 망상의 세계에서는 풀리지 않는 것, 불가능한 것이 없
기 때문이다.
정신병자들이 또 많이 주장하는 것은 세계 종교를 통합했다는 것과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
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지만, 그들이 자기만의 환각 세계에 빠져 주장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거
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나 또한 그러한 체험이 있었기 때
문이다. 본과 일학년 때 (1979년)
나는 정신과에 열흘 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다. 학생운동과 탄압이 치열하던 그
때 친구들이 줄줄이 감방에 들어
가면서 정신적으로 무척 힘이 들었다. 결국 낙제를 하면서 정신적인 압박감이
극도로 치솟은 가운데 과대망상
에 사로잡히면서 입원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이데올로기와 심리학, 종교를 통합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환희에
젖었으며, 곧 메시아가 될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때 만든 이론을 나중에 보면 그렇게 조악할 수가 없었지면, 당
시에는 그 이론에 깊숙이 빠져들
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느끼고 있고 추측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현실에서 그 이상으로 절
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A를 생각하면 A에 맞는 현실이, B를 생각하면 B에 맞는 현실이 보였고, 내
깨달음을 다음으로 이끌어 가는
신선한 상징적인 자극이 계속 나를 망상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때 내가 혹시 미
쳐 가는 것은 아닌지, 이게 혹시
정신병적인 망상은 아닌지 계속 의심하면서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그러나
절묘하게 튀어나오는 현실은 나의
방어를 깨고 결국 나는 해체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메시아 망상이 무르익던 어느 날, 나는 혹시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병직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일 이 깨달음이 맞으면
내 앞으로 난쟁이가 걸어가리라
생각하고, 만일 난쟁이가 걸어가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다 착각이
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정말 난
쟁이가 내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한 번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내가 타는 저 버스 뒷자리에 거
지가 앉아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거지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보는 사이에 없어지리라 생
각하니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절묘함은 무수히 주변에서 일어났다. 내가 골몰하고 있는 것에 맞춰 라
디오에서 음악과 대사가 흘러나
왔으며, 운전사와 승객이 다툴 것이라 생각하면 그들은 어김없이 다퉜고, 누가
찾아 올 것이라 생각하면 찾아왔
으며, 내 망상과 관계지어진 사람들은 그 망상에 알맞은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뒤를 돌아보면 누가 나를 돌아봤고, 길을 걸어가는 내 앞으로는 파란 불이
알맞게 켜졌으며,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이야기를 했고, 내가 생각을 멈추거나 주저
하면 어김없이 다음의 인식으로
이끄는 자극이 들어왔다.
결국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 극한의 상태
는 죽음과 같은 해체의 상태였다. 내 망상에 따라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컴컴해졌고, 어떤 사람은 긴장된
모습으로 달려갔고, 많은 사람들은 줄지어서 내 앞을 가로 막거나 여기저기서
툭툭 쳤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으
쓱으쓱, 쭈글쭈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겪은 경험을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기하고, 오히려 다른 차원
의 세계로 일시적으로 들어간 것
같은 경험이었다. 의식이 해체되는 이러한 상태에 대해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렇
게 설명한다.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빛이 사방에서 번득이며, 이상한 노인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혹
은 긴장된 모습으로 달려가며, 모든 환경이 이상해져서 이제 이 세상의 마지막
이라고 느끼는 분열증 환자가 가
끔 체험하는 세계 몰락감은, 다름 아닌 그 환자의 자아 의식의 몰락과 위기를
알리는 징조로서 세계의 몰락과
창조를 그리는 묵시적인 혹은 신화적인 표현이다.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신
화의 불길을 통해서 그는 그 자
신의 몰락을 세계의 몰락으로 감득하는 것이다.
-<분석심리학>, 이부영 저, 일조각, 1984, p. 226.
이 이론에 따르면 나는 그때 신화의 거리를 걸었던 셈이다. 그때의 체험을
신화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간다. 그 체험에 빠지면서 나는 평소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종교에 깊이 빠져
종교 망상을 발달시켰고, 내 주변
의 친구나 부모 등에게서 이브, 악마, 악마의 자식, 하느님, 그밖의 여러 신 등
신화적 인물을 보았던 것이다.
나에게 나타나고 보여지는 그들의 신화적인 모습은 철저하게 빈틈이 없어 나는
도저히 현실감을 찾을 수가 없
었다.
정신질환자들이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 빠지는 것은 이와 같은 신비 체험 때
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세상
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체험을 하게 되자 내가 위대해서 그러하거나, 아니
면 세상이 작당해서 나를 괴롭히
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정신병에 빠져들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자기 생각이 전파를 타고
나가 방송이 된다든가, 남들이 모두 자기 생각을 알고 있다든가, 남들이 자기
이야기를 수군거린다든가, 자기
생각이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고 자기 생각이 남들에게 영향을 준다든가 등등
의 현상은 다 이러한 신비 체험
에 빠져들면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달하는 망상은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는
실제로 그렇게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또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신과 약은
내가 신화적 현실에 신경을 쓰려
고 하면 할수록 내 전신의 힘을 쭉 빼내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내 생존에 힘을 쓸 수밖에 없었
다. 다른 데 정신을 썼다가는 몸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은 떨리고 눈
은 가물거리고 마음 속은 안절부
절 못하고... 그야말로 죽을래댜 죽을 수도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고통이었
다. 그 고통은 한 번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고통은 심지어 내가 전에 보았던 것들마저 억지로
잊어버리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생히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
고 노력했다.
1979년 6월 27일 부터 8월 9일 낮까지의 이상한 경험은 모두 내가 착각한 것
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내일 부
터는 절대 착각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저울질하지도 않는다.
-1979년 어느 날의 일기.
아마도 정신병 환자들이 약을 먹고 현실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서
의식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의 영
향을 억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자들의 재발이 많은
것은 의식에 한 번 강하게 색인
된 그 강한 체험을 쉽게 잊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후 정신과 의사가 되어 정신질환자들을 보면서는 이런 절묘한 현상, 신비한
현상을 더욱 많이 보게 되었다.
어떤 환자는 다음날 시험 문제를 미리 환각으로 보았고, 또 어떤 환자는 세상
이 작당해 자기를 몰고 간다면서
절박감에 빠져 스스로 차바퀴에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런 신비한 정신의 현상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왜 앞
날이 현재에서 예측되고, 그들을
정신의 해체로 이끄는 걸까? 융은 집단 무의식, 원형, 신화적 체험으로, 정신의
학에서는 망상적 지각으로 이야
기하지만, 그것들의 실체는 무엇이고 왜그러한 것들이 정신병자의 눈에는 그렇
게 보이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빛과 시간의 상대성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이나, 모든 것은 무질서로 진행된다
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혹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할 실력은
내게 없고 그저 상상으로 적용
해 본다면 이러하다.
우선 내가 경험한 신비 체험들 중에 많은 것은 내가 시간의 흐름을 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일 것이다. 움
직이고 있을 때와 정지하고 있을 때는 서로 다른 시간이 작용하고 있다는 아
인슈타인의 발견같이, 내 속에서
자폐적으로 궁리하고 있는 동안은 외부에서 볼 때는 의외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마음의 흐름은 빛과 같
고 그 흐름 가운데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흐르면서 주변의 여러 가지 것들을 우
연의 일치로 묶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난쟁이가 앞으로 지나갈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기다리는 당시 느
낌은 순간이었지만, 의외로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동네에 사는 난쟁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환희했던 것이다. 또 아인슈
타인은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달린다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 마음은 광속보다도
빠르지 않을까?
우리는 어렸을 때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일까 하는 수수께끼를 내곤 했다. 그
때 어떤 애들은 '빛'이라 했고, 어
떤 애들은 '눈 깜짝할 사이'라 했고, 어떤 애들은 '마음'이라 했다. 정답은 마음
이었다. 마음은 빛보다도 더 빨리
우주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황당한 것 같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육신이나 물체는 빛보다 빠를 수 없지만 마음만은 한 껏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체 이탈
을 하면 마음먹기에 따라 순식간에 어디로든지 이동한다고 하지 않는가? 만일
우리 마음이 빛 이상의 속도를
가졌다면 우리 마음은 시간이나 공간 여행이 가능할 것이다. 몸은 마음을 따라
갈 수 없지만 마음은 과거, 미래,
여기저기의 공간을 자유롭게 가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통해 미래에도
가고 전혀 가보지 못했던 것까
지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마음은 의식의 마음보다는 무의식의 마음일 것이다. 깨어 있는 상
태에서 마음먹는다고 모두 다 보
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엄청난 에너지는 아마도 마음
의 시간이나 공간 여행도 가능케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무의식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현재에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지도 모른다. 마치 점쟁이같이...
그리고 또 하나는 우연의 일치이다. 내가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그렇
게 황당하게 깊숙이 빠지기까지
는 현실의 확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 상황에서는 이상하게도
우연의 일치가 많았고, 그 많은
우연의 일치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커다란 확신을 강하게 심어 준 것이다.
무의식 상태에서 빈번하게 일어
나는 우연의 일치를 분석심리학에서는 동시성 이론(synchronicity)으로 설명한다.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거기에 무의식의 내용이 활성화된다. 그리하여 여
기 의식의 물음에 대응하는 무의
식의 내용의 배열이 생긴다. 이것은 시공의 한계를 넘는다. 마음 안에 배열되는
것이 마음 밖에 배열되는 것과
일치하게 된다.
-<분석심리학>, 이부영 저, 일조각, 1984, p.376.
동시성 이론이란, 감정(emotion)이 올라오는 상황에서 많이 발동한다고 한다.
즉, 사방이 막혔다든지 하여 의
식이 힘을 못 쓰로 감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의식을 지배하는 인과적인 법칙
이 약화되면서 무의식의 힘이 활
성화되다는 것이다.
이때 떠오르는 원형(archeytpe),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은
의식과 같이 시간과 공간에 제약
되어 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원
형은 외부적인 조건과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안팎으로 여러 개로 정렬(constellate)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무의식은 의식과는 다르게 절대 지(absolute knowledge)
를 갖고 있어 절대 지가 올라올
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이
의식을 삼켜 버려 해체하는 정신
병적 과정에서 주관적으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를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
해 보았다.
무의식은 그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자연이다. 마음의 자연, 무의식은 의식과
합리적인 사고가 발달함에 따라
마음의 표면에서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의
식 속의 자연도 자연이기 때문에
이는 인간 이외의 자연과 함께 흐름을 같이하는 경향이 있다.
한 인간이 정신병적인 붕괴 상태에 빠져 그 인간의 무의식이 두드러지게 떠오
르게 되면, 그는 주변의 자연의
흐름과 일치해 흐르는 마음의 자연을 느끼게 된다. 그는 마음 속의 자연과 실제
자연 사이의 상호 교통 속에서
마음 속의 생각과 느낌이 주위와 소통함을 느끼게 되며, 그 주변이 오히려 자
신의 마음을 더 잘 파악하고 그
마음을 한 발 앞서 이끄는 점을 경험하게 된다.
정신병 환자들은 발병 초기에 자신의 마음의 방향이 주변과 너무도 흡사하
게 일치하고, 마음속에 추측했던
많은 것들이 자연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에 놀라고 신기해 한다. 그들은
그 색다른 경험에 사로잡혀 자
신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모두 그 체험에 쏟아붓게 된다. 결과적으로 초래되는
것은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는
상태, 즉 자신의 마음 속의 자연을 제대로 다스리고 경작하지 못함에 따라 미
분화된 자연이 두드러지게 떠오르
면서 주위 자연과 소통하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독립된 개별성이 희석되는 정
신병에 이를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에 더해 정신병자들은 마술적인 사고를 쉽게 또 많이 발
달시키기 때문에 주변의 일들을
더더욱 신비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이러한 정신병자들의 시간
과 공간을 상대화하는 신비 체험
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등으로 언젠가 규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빛의 다가옴이나 멀어짐에 따라 빛의 파장이 바뀌고 색깔이 바뀌는 도플
러 효과도 어쩌면 마음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병자들이 보는 세계가 뭔가 색깔이 다르게 묘사되는 것
은, 그들의 마음의 빠르기가 정상
과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자들이 자기의 망상이
원하는 환각을 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또한 빛의 조화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본 공상과학 소설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 소년이 로봇과 함께
우주 여행을 떠나는데 로봇이 너무 못생겼다고 투덜거리자 로봇이 갑자기 아리
따운 소녀로 변한다. 소년이 깜
짝 놀라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로봇은 소년의 눈으로 들어가는 빛을 조절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소년은 속는 게 기분나쁘다고 로봇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빛은 그 빠르기를 예측할 수 없는 우리 마음과 결합하면 무의식이
보는 대로 보는 것이 가능할지
도 모른다. 그래서 일체 유심조라는 말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내 상상일 뿐이고, 물리학과 심리학의 적용은 좀더 치밀
하게 연구하고 개척해야 할 분야
이다. 물리학과 심리학의 미래에 대해 융 심리학자인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심리학과 물리학의 개념이 지니고 있는 예기치 않은 병행성은 융이 지적한 것
처럼 물리학과 심리학 연구라는
두 가지 현실 영역의 궁극적인 통일의 가능성-예를 들면 모든 생명 현상의 심리
물리적 통합-을 암시하고 있다.
융은 그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무기 물질의 어떤 구조와 어딘가 관련된
다고 확신했다. 이른바 '정신신체
질환'의 문제에서 지적되고 있는 관련성이 그것이다. 현실에 대한 일원론적
개념을 융은 '하나의 세계'(unus
mundus; 그 속에서는 물질과 정신이 아직 구별되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구현
되지도 않는다)라고 불렀다. 그는
원형이 동시적 사건 속에서 나타날 때 그것은 정신양(psychoid)측면 (예를 들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 아니
라 거의 물리적인)을 보인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이와 같은 일원론적 견해를
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와 같은 사건이 내적, 심리적 사실과 외적 사실 사이의 의미 있는 배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이부영 역, 집문당, 1993, p. 322.
정보화 사회와 프로이트
정보화 사회에서 프로이트는 어떤 역할을 할까? 최근 들어 프로이트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졌고 프로이
트로 돌아가자는 움직임(return to Freud)도 활발해졌지만, 그가 정보화 사회에
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아직 미
지수이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정보화 사회에서 프로이트는 악역과 선역,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할 것 같다.
그의 이론은 자기를 이해하고 갇혀진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기도 하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의
적응을 더디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악역을 든다면 그의 이론의 신중함을 들 수 있다. 프로이트는 학
문을 하는 자세가 매두 과학적이
고 압리적이어서 알 수 없는 심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전후가 명확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입증을 잘한다.
그렇게 분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고가 요구된다. 그래서 프로이트 학설을 추
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종함을 볼 수 있다. 성미 급한 사람들이 보면 답답할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한
다. 그들은 분명한 길만 찾아가기
에 그을에게 비약이나 모험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항상 문제에 대한 원인과 동기를
찾으려 하며, 그것으로 현재를 풀어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치
료적 접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해결하면 마치 정신의 많은 문제가 해결된 듯 자신하
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접근
태도는 매우 예리하다.
우리가 보통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정신분석가들의 예리한 눈빛은 먹이(병의
원인)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독수리 눈빛과 같다. 그러나 그러한 신중한 탐구 자세는 미래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오히려 불리할 수
도 있다. 한 가지 명확한 해결을 위해 열 가지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현대를 미친 사회라고 하며 미친 사회에는 미친 조직이 필요하다
고 했다. 알 수 없이 빨리 다가
오는 변화의 순간에 기민하게 창조적으로 대처하며, 지나간 것은 빨리 잊고
앞날에 용기 있게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미친 자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과거와 미래를 정리
하는 그의 학문 자세가 미친 짓을 허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의 신중한 자세는 미래에의 적응
을 방해할 수 있다. 미래에는 원인이 어떻고 과거가 어떻든 우선 적응하고 일을
벌이고, 빨리 다음을 맞는 자세
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프로이트가 빠른 변화의 적응에 항상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빠른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는 가장 좋
은 방식을 본능적으로 대처하는 것일 테니, 프로이트의 본능 이론을 주의 깊게
익혀야 한다. 또 프로이트 심리
학을 통해 자기를 묶고있는 과거의 끈, 특히 성장 과정에서 왜곡되었던 영향 등
을 극복할 수 있다면 미래에 자
기 에너지를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기를 알고 이해하는 심리적
인 자세는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주체적으로 구분해, 건강한 정신을
고양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정확한 정보는 깨달음을 주어 자기 발전을 이루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정보는
불필요한 자극이고 스트레스이
기 때문이다.
또 미래 사회는 개성 있고 창조성이 강한 개인만이 대우받는 약육강식의 사
회, 소외 사회가 될 텐데, 그때에
도 프로이트 심리학은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모든 심리
학은 자기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므로 심리학을 통해 자기 성숙을 이루게 되면 현대의 수많은 소외 속에서도 자
신을 견뎌 내기가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성숙한 현자들은 동굴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혼자 참선을 해도
외로움을 느끼기보다는 충만함을
얻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로이트 심리학을 통해 사람들이 얻어야 할 것은 그의 이
론을 통한 자기 발견이다. 프로
이트의 이론 중에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과감히 외면하고, 자기에게
적용되고 공감할 만한 것은 얄
밉게 소화해 나가면서 자기를 살찌워 나가는 것이 정보화 사회에서 프로이트를
대하는 방법이다.
프로이트와 환자의 비밀 공개
언젠가 병원에 가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화기에 녹음되어 있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운 젊은 여자의
것이었지만 내용은 싸늘했다.
"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 전화했는데요. 어, 익명으로 하죠. 김정일 선생님
병원이죠? 책을 거의 다 읽었
어요. 그런데 독자로서 굉장히 화가 난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면요, 제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환자의 개인적
인 것들이 그렇게 공개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물론 새로 각색을
했고 많은 부분들이 이미 공개
적으로 보여진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판단에는... 그로
인해서 신경정신과를 다니는 많
은 환자들이 비밀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부담감을 느끼게 돼요. 그것은 환자들
에게 훨씬 좋지 않은 어떤 영향
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본인이 좀더 자제를 하고 생각을 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개인의 글쓰기 욕망이라고 했을 때 소설이라든가 다른 형태로
표현을 해야지, 환자들의 비밀이
라든가 상담 내용, 면담 내용들을 그런 식의 글쓰기로 팔아먹거나 상품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것들이 정신과를 찾아오지 못한 많은 환자들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고 생
각하는 측면도 있으리라고 생각
해요. 그것도 분명히 이해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신과를 다니는 많은 환자들에
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면담 내용은 비록 그것을 각색하더라도 책을 읽고 있는 본인들은 그
부분이 자기 내용이라는 것을 알
고 있어요. 그래서 좀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스타가 되고
싶으시면 다른 형태로 해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리고 글쓰기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의사를 때려치우고 본격적
으로 글을 쓰시든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어요. 저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니 오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것이 또 당신에게 합
리화를 시킬 수 있는 계기, 빌미를 줄 수 있는 것이 저는 싫습니다. 정신과 의
사로서 당신은 대단한 금기를 깨
고 있어요.
정신과 의사는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벽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
요. 바로 환자의 비밀을 지켜 주
는 그런 벽이죠. 당신은 그것을 깨고 있으니 정말 의사를 그만두세요. 그리고 글
굉장히 잘 쓰시고 문장력도 좋
으시고 상상력도 뛰어나신데 차라리 전업 적가로 나가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
다. 상업주의에 물들어서 정신과
의사의 본분을 버린다면 당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예
요."
이 말을 듣고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서둘러 출판사에 연락해 그녀의
오해를 일부나마 우선 풀어 주기
로 했다. 근래에 낸 에세이집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에는 환자의 상담 사
례가 많이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지면을 통해 공개 상담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환자 경우인 듯 기술된 것들 중
많은 부분은 나의 체험을 각색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후부터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주가 맨 앞에 실리게 되었다.
'본문에 게재된 상담치료 사례는 <가로수> 신문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질의,
응답한 것입니다. 아울러 상담치
료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명이나 인적 사항은 그분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
하여 임의로 바꾸어 표기, 또는
서술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비록 변명은 했지만 아픈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환자의 비밀을 공개
하지 않는 것은 의사의 기본 윤
리이겠으나 의학 교과서에서부터 일상의 칼럼들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은 환자의
예를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책들은 아예 환자들의 말을 녹음해 그대로 풀어 쓰기까지 한다. 그들은
의사의 윤리를 어겼으나 그래도
할 말은 있다. 진료하면서 얻은 환자의 경험을 공개하자 않으면 자기 같은 시행
착오를 누군가가 또 범할 수 있
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의학의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비밀을 공개한다는 것은 의사
로서는 부담스런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쓸 때 미리 허락을 받고 쓰거나, 영희는 철수는
하는 식으로 다른 이름으로 쓰거
나 각색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환자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대한 부담이
줄지는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을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 항문이라고...
학문 하면 고상할 것 같지만 남
의 비밀이나 지저분한 곳을 폭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의
학의 발전을 이룬 사람들은 환자
들의 항문을 가장 많이, 또 정확하게 폭로한 사람들이리라.
프로이트도 그중 한 사람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안나와 도라로 히스테리를,
꼬마 핸스로 유아 공포증을, 래트
맨(rat man)으로 강박증을, 슈레버로 편집증을, 일마로 꿈을 분석했다. 그의 케
이스 진술은 너무나 상세했고 적
나라했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어머니: 그런 짓을 하면 A선생님을 모셔다가 고추를 잘라 달라고 할 테다.
그렇게 되면 어디로 쉬를 할 테
냐?
핸 스: 엉덩이로 하지.
어머니: 왜 그렇게 흘끗흘끗 보는 거니?
핸 스: 엄마한테도 고추가 있는지 어떤지 보고 있었을 뿐이야.
어머니: 있고말고. 그런 것도 몰랐니?
핸 스: 응, 엄마는 크니까 말만한 고추가 있는 줄 알았어.
-<5세 유아의 공포증 분석>, 프로이트 저, 1909.
이렇게 환자 비밀을 폭로한 그에 대해서 후학의 평가는 이러했다.
프로이트의 증례는 임상 의학계에서는 독자적인 것이며, 의학사적인 면에서
보아도 유례없는 것이었다. 그때
까지 인간의 고뇌가 이처럼 본질적으로 또 임상에 의한 깊은 통찰로 가득찬 말
로써 기술되었던 적이 없었다...
프로이트의 증례를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자세한 부분
에 대한 프로이트의 놀라운 기억
력과, 증례 하나하나의 모든 복잡한 요소에 대처하여 그 요소를 증례에 대한
설명에 인용하는 다양한 가설의
뒷받침으로 사용하는 철저한 능력이다.
-<정신분석의 이해>, D. 스태퍼트-클라크 저, 이일철 역, 정음사, 1981, p.
164, 178.
나는 한참 욕을 먹었는데 그는 극찬을 받았으니 참 부러운 일이다. 프로이
트뿐만 아니라 그 후학들의 글도
환자 케이스로 꽉 차 있다. 그리고 그 관찰로 인해 프로이트 심리학(정신분석학)
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흐름을 연구하면서 이것도 다른 과학과 같
은 방식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경험을 통한 관찰과 그로부터 이끌어 낸 이론이 있었고,
이 이론들이 쌓여감에 따라 관
찰된 것들을 조직화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이 조직화는 자유로은 관찰을 제
한하게 되었다. 새롭게 관찰된 것
들이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기존의 방법이 새로운 여건에 맞지 않을
때는 그에 맞는 새로운 방법들
을 찾았고 새로운 개념들이 도입되었다. 이런 식으로 정신분석은 60년 동안 변
화와 발달을 보이면서 그 시야를
넓혀 왔다.
-《정신분석의 발달》, 찰스 톰슨 저, 이형영 이귀행 공역, 하나의학사.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고도 적나라하게 환자의 비밀을 폭
로할 수 있는 걸까? 허락은 미리
받은 걸까? 아니면 그 나라의 환자들은 이름만 밝히지 않으면 학문의 발전을
위해 그 정도는 참아 주는 것일
까?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솔직하게 밝혀지는 것을 서양 사람들보다
는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
다. 그래서 그 전화 내용대로 '책을 읽고 있는 본인들은 그 부분이 자기 내용이
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
록 익명이고 각색을 하더라도 밝히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가 밝혀지기를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아무래도 집단 중심의 왜곡된 사
회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권위주의나 독재 체제 같
은 강한 집단 중심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솔직하게 자신을 밝히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사회가 개인 중심, 개성
중심으로 바뀌면서 뭔가 달라지겠지만 아직 그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는 나에게는 심각한 것이었다. 만일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
면 나는 어디 가서 혼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질러야 할 판이다. 환자의 비밀을 고해 성사를 치르는
성직자처럼 듣는 정신과 의사는
어차피 자폐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심리에
대한 관찰을 진료실에 언제까지
고 파묻혀 있어야 된단 말인가?
역사가 역사가의 안목에 의해 의미 있게 탄생하듯이 환자의 심리적 사실도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의 눈에
의해 의미 있게 포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프라이버시 침해가 문제된다면,
공개 상담한 사례나 환자 자신
이 봐도 '내 이야기야'라고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일반화해서 공통된 심리 케이
스 정도는 인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문제가 된다면...
그때는 내게 충고를 해준 그분 말대로 픽션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환자
의 모든 이야기를 철저하게 픽션
속의 인물로 용해시켜 바꾸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인류에게는 소설이라는 장
르가 발생했으리라. 안심하로 사
람들의 비밀과 속마음을 마음껏 발산하라고... 그러나 픽션은 아무래도 진실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
늘도, 또 앞으로도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숙제로 남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심리의 세계
나는 그 동한 몇 권의 에세이집을 냈다. 책을 내고서는 독자들로부터 과분할
정도의 성원을 받았는데 참 의
문이었다. 에세이집들을 발표하기 전에 희곡과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두 권은
채 만 권도 팔리지 않았다. 그런
데 유독 에세이집만은 왜 그렇게 호응이 높은 걸까?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독자들은 내 글
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살아 있는
정보를 얻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문학적인 글보다는 정신
의학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는 쪽
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우연히 독자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밑줄친 대
목을 보면 홧병이나 우울증, 무의
식, 정신역동 등 정신의학적인 정보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아직까지는 정신과와
거리가 먼 현실에서 책을 통해
서라도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리라.
독자들이 전문 서적보다는 에세이집을 많이 찾는 것은 아마도 마음에 대한
정보를 보다 알기 쉽게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다른 정신과 의사의 에세이집 또한 많은 호응을 받고
있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한때 출판가에서는 '글 잘 쓰는 정신과 의사를 잡아라'라는 말도 떠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정신
과 의사 입장에서 정신의학 정보를 생각하면 참 막연할 때가 많다. 아직도 정신
에 대한 정보는 구름 잡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외한은 정신의 정보고 굉장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
지만, 정작 그쪽 방면을 접해 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다양하고 각기 다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이를 피터
셰퍼는 《에쿠우스》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희곡의 최종 단계에서 어느 저명한 아동 정신과 의사에게 조언과 전문적
인 비평을 듣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를 통해서 나는 이 사건을 보다 자연주의적 감각에 맞게 사실적으
로 취급하려고 노력했다. 또 한마
디로 정신과 의사라고 하지만 실은 수많은 타입이 있고, 그리고 여러 가지 방
법과 기술을 갖고 작업하고 있다
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에쿠우스》, 피터 셰퍼 저, 신정옥 역, 문학사상사, 1987, p. 18.
그래서 나는 연극이나 영화계 사람들이 정신과에 관한 조언을 구할 때마다 이
렇게 말해 주곤 한다.
"그냥 당신들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자신있게 하면 된다. 정신과 의사가 나오
고 정신과 환자가 나온다고 해
서 뭐 별다를 것은 없다. 그냥 당신들이 느끼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합리적
으로 따라가다 보면 거기에 모든
정신과 이론과 현실이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는 것이 정신의 현실에서는 가
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고 무
언가 전문적인 이론이나 용어를
기대한다. 그러나 더 이상 뭐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정신에 대한 정보는 사
람마다 상황마다 각기 다르게 적
용되는데... 아마도 아직은 정신의 정보에 대한 환상이 깨지지 않아서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구름 잡는 식의 중구난방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 정신은 워낙 깊고 넓고 다
양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획일적으로 선을 긋고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어느 심리학자가 내가 쓴 에세이를 보고는 너무 화가 나서 나를 학회 차원에
서 징계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참 우습지도 않았다. 내가 쓴 에세이는 물론 나의
느낌에 바탕을 두고 쓴 것이지만
그가 분개할 만큼 학문적으로 엉터리는 아니었다. 이론을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고, 설사 내가 분명하게 이
론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찾으면 대개는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 만약 그래
도 없는 것이면 내 이론으로 주
장하면 그만이다.
심리에 대한 글은 대개가 감정을 다룬 것이기에 학자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견도 많고 하나같이 천차만별
들쑥날쑥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융의 분석 심리, 애들러의 개인 심리, 현
존재 문석, 로고테라피, 최면 치
료, 사이코 드라마, 게스탈트 치료, 무용 치료, 드라마 테라피, 음악 치료, 회화
요법, 시 치료 등 심리에 관한
치료 방법이나 학파는 부지기수일 뿐만 아니라, 그 학파 내에서도 이견이 많고
주장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 정
신 분석의 계보만 해도 에이브러햄(Abraham), 페렌치(Ferenczi), 안나 프로이트
(Anna Freud), 랭크(Rank), 라이
히(Reich), 설리반(Sullivan), 호나이(Horney), 프롬(Fromm) 등 정신이 없다. 그
런데 그것을 누가 함부로 엄격하
고 일정한 잣대로 재서 징계 운운할 수 있을까?
현대 심리학에서 중세의 파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교황 같은 권위를 가진
자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과대 망상도 대단한 과대 망상이다. 결국 정신을 다루는 학문은 물리학적으로
분명하게 증명되지 않는 한 관찰
과 경험, 설득력과 공감에 의지하는 상상력의 학문일 뿐이다.
우리가 심리학 용어 대신 생리학 내지 화학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가정한
다면 우리의 기술적 결함은 아마
도 해소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것들도 또한 비유적 언어의 일부임에는
틀림없겠으나, 그것은 우리하고
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친근한 것이며, 또 아마도 가장 알기 쉬운 용어일 것이
다.
_《쾌락 원칙을 넘어서》, 프로이트 저.
프로이트도 자신의 이론을 구조이론(structural theory; 정신을 이드, 자아, 초
자아로 나눔. 정신질환이나 정상
적인 정신 기능이 마음 내부에 있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다고 봄)과 지형이론(topographic
theory; 정신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나눔)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지 않았
던가! 가설이란 결국 그럴 듯한
상상일 뿐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문학이라고까지 이야기했는데 지나
친 주장이었을까? 정신치료의 핵
심은 인격이 인격을 치료하고 정신이 정신을 치료하는 것이라 한다. 곧 치료자
의 인격이 치료의 도구라는 것이
다. 또 진정한 정신의 대가들은 후학이 자기를 모방하고 따르기보다는 각자가
자기 심리학을 개발하기를 원한
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의 정보는 끝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어떤 고정된 형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접하는 개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무한한 정신에 대한 깊은 확신을 심어 주어 자신감
과 용기, 겸허함을 북돋워 주는
가변적인 형태의 것이다. 아마도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후학들을 착취하기
나 하는 권위적인 심리학은 세상
이 솔직해지면 솔직해질수록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프로이트를 넘어서
영석! 편지 잘 받아 보았네. 후배에게 제대로 관심도 못 가져 줘서 항상 미
안한 부담감이 떠나지 않더니만,
이제 우리가 다시 인연이 닿나 보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항상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
라네. 우리가 연이 닿아 대화를 나누게 되어도 언제 또다시 나는 자기만의 벽을
쌓고 돌아앉을지 몰라서 나 자
신도 내가 밉기도 하네! 그러나 이런 나를 그대는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막연
한 느낌에서 말일세!
영석이 자괴 어린 편지라고 자평하고 있네만 나 또한 자신의 부족함, 편협함
에 항상 괴로워하고 있네. 그러나
우리 이 모든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얘긴 떠나서 미래적인, 창조적인 이야기를
한 번 나눠 보지! 공격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영석과는 달리 항상 나의 페르조나(persona; 사회적 가면) 때문에 고민
을 해왔네. 그러나 나는 내가 페
르조나에 집착하는 성향을 해결하는 길이 단순히 집착을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네. 그 길이 옳네만 마음먹
는다고 버려지지가 않는걸. 그래서 나는 내 부족함의 한계를 인정하고 페르조
나와 타협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
으로서 겸허한 길이라고 결정내렸네. 그러나 이 또한 지속적으로 나를 형태짓는
가치관은 아니네.
영석! 나는 요즘 사이코 드라마에 심취해 있네. 사이코 드라마의 연극성
보다는 그 기본 원리인 자발성
(spontaneity)이 나를 사로잡네. 모레노는 자발성의 정의를 '미지의 새로운 상황
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하
였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별로 새롭지 않았으나 요즘 갈수록 이 개념에 끌리
고 있네. 지금 이 순간에 미지의
새 삶을 맞이하면서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무었일까? 그건 바
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
오는 신의 소리를 듣는 거라네.
그 신의 소리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표층으로 떠올라 오면서 처음에는 느
낌(feeling)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행동에서는 자발성으로 이어지네. 마음 속의 신의 소리, 느낌, 자발성에 따르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네.
이제는 장래를 계획하고 준비할 필요도 없고 단지 그 순간에 떠오르는 느낌만
을 소중히 여겨서 사회와 연결짓
는 용기만이 요구되네. 물론 이 자체는 덧없이 비난받아 물거품으로 되어 버릴
지도 모르겠으나 요즘 나는 이현
상을 미신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네. 이것이 신의 소리이고, 바로 도이고, 그 느
낌이 신의 부름, 도의 운행이고,
그 결행이 사회적으로 나를 편안하게 외롭게 지켜 준다네.
영석! 인간이 창조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에릭이 이야기한
생산적 퍼스낼리티란 도대체 어
떤 것일까? 이제는 이런 것의 의문에 답을 구하려고 방황하지 않는다네. 다만
내 느낌을 풍요로이 간직하면서
사는 삶은 결국 예술적, 종교적인 삶으로 진행되는 거구나 하면서, 헛된 관계
에 자신을 허비하지 말고 외롭게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진다네. 이제 나의 미래
가 어떻게 전개될지,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아무도, 나 자신도 모른다네. 아마 미래의 내가 그 순간에 결정짓겠
지.
영석! 우리는 벗어 버릴 끈들이 너무 많네. 이 끈들을 벗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지. 정신에도 만유인력이 작용한다는 거야. 질량이
큰 물체에 질량이 작은 물체가
딸려들듯이 정신에도 그 밀도가 높은 정신에 밀도가 낮은 정신이 딸려든다고 생
각하네.
예를 들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제대로 인생의 시행착오를 겪어 보지 못한 설
익은 청년들이 빨려들어 신봉자
가 되지만, 불교나 도교 등 종교적 체험과 눈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을
주지 못함이 그것이지. 이큰 정
신은 반드시 앞서가는 정신이어야만 한다고 생각지는 않네. 많은 시행착오를 겪
은 밀도 높은 정신은 어느 것이
나 다 흡인력이 있다고 생각하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아닌가 하네.
정말로 참다운 큰 정신은 자기
에게 이끌려 주위를 도는 작은 정신들에게 자기 힘을 갖고 나갈 수 있게 자극을
주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
각하네. 이 큰 정신이 바로 불타의 큰 정신이 아닐까?
영석! 이제 나는 이 깨달음을 소중히 여기네. 그래서 더 이상 섣불리 큰 정신
에 접하지 않기로 했네. 하늘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인연이면 나름대로 성실하겠으나, 구태여 큰
정신을 찾아가서 배운다는 생각
은 하지 않기로 했네. 그 위선됨이 이제는 만족을 주지 못하네. 나는 여러 학회
를 다니고 개인 분석도 받아 왔
지만, 요즘 이 모든 것을 끊었네. 나는 이제 홀로 자신과 마주서며 내 마음의
느낌을 읽고, 그 부름을 쫓으며
나의 길을 가려고 하네.
작은 정신이 큰 정신의 위성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그 작은 정신은 제대로 자
기 힘을 크게 할 수 있는 큰 정
신을 만나거나, 아니면 섣불리 큰 정신에 접하지 않거나, 아니면 맹목적인 고집
을 가져야 할 거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이 맹목적인 고집은 사회와 인간을 연결할 수 있는 의미 전달마저 거부
할 수 있기에 이는 위험한 도전
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영석! 훌륭한 스승을 만나거나 스스로 자기 속에서 길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
라고 생각하는 요즈음, 나는 더
이상 서구의 정신 의학에는 집착하지 않기로 했네. 그들의 약물이나 용어는 편
리하니까 이용한다고 해도, 더 이
상 그들이 가는 식으로 지식을 축적하거나 눈을 뜨지는 않기로 했네.
전공의가 되기 전인가 내가 무척 좋아하던 열역학 법칙이 있었네. 아마 엔트
로피의 법칙인가 그랬지. 즉 모든
물체는 다 흩어지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거지. 지금 내가 일견하는 영석의
상황이 다소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갖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이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나는
이 흩어짐, 나태함이 두려워 여
러 정신치료학회에도 가입하고 분석도 받았지만, 결국 종착역은 나 홀로만의 상
황이었으니까...
아직 처자, 부모마저 저버릴 정도의 성숙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제 굳이 찾
아 나서는 것에 그다지 초조하지
않네. 영석 또한 자기 내부의 생명력이 타오르니 의미 있는 순간들을 발견해 엮
으리라고 믿네.
글을 쓰고, 내 스스로에게 자꾸 창조적인 활동의 부담을 짊어지우는 것도 마
치 이가 시린 듯한 돌발감을 주
네. 이런 시도 또한 내가 나를 추스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 요즘 나는 별자
리 정신극회를 만들어서 사이코
드라마 상황을 계속 시험하고 있네. 그럼 이만...
심진송 씨의 신기에 대한 분석적 접근
김일성 사망을 맞춰 유명해진 무녀가 있다. 바로 심진송 씨다. 그녀는 그후 일
약 스타가 되어 베스트 셀러 작
가도 되고, 이제는 영화까지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항간에는 그녀의 예언이
틀렸다고 수군거리곤 한다. 음
력 시월에 삼풍 백화점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아직 일어나
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궁시렁
궁시렁 말도 많지만, 우리가 무녀를 만나고 그들의 점괘를 대할 때는 필요한
자세가 있다고 본다. 바로 점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살찌우고 정신을 건강하게 성
장시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
이다.
요즘같이 불확실한 시대에는 자꾸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점을 찾는 사람들
이 부쩍 많은데, 그 점괘를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점괘가 미래에 맞느냐 틀리느냐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그 점괘를 통해 자기를 성숙시키
면 점괘가 어떠하든 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어느 잡지사의 요청으로 심진송 씨를 만나서 그녀의 점괘를
받고 영향받은 것을 밝히면 이러
하다.
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심진송 씨가 이미 돌아가신 지 며칠이 지난 아
버지에게 다가가 '이젠 일어나시
지요!' 라고 말한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가 꿈틀거리더니 일
어난다. 나는 깜짝 놀라 아버지께
갔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좁은 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갔다. 신길동 집인 듯하다. 아버
지는 전에 보았던 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전히 죽은 사람같이 딱딱한 감은
있었지만 아버지는 다소 부드러
웠다. 어쩌면 생시 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는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백년해로하신다.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사신
다. 현실 같은데 너무 기이해 현
실일까 생각한다. 심진송 씨가 이야기한다. 꿈과 현실이 다를 게 워가 있냐고...
꿈이다! 어제 심진송 씨로부터 받았던 강한 인상이 꿈에까지 지속된 듯하다.
아버님은 95년 7월 8일에 돌아셨
다. 8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지만 워낙 정정하셨기에 소홀하게 대해 드린 것과
홀로 남으신 어머님이 너무 안타
까웠다. 그런데 그 한이 이 꿈으로 모두 풀린 것이다.
이런 꿈의 현실까지 거쳤는데 더 이상 욕심을 부려 안타까워한다면 나는 아
마 천리를 거역한 중죄인이 되리
라. 나중에 심진송 씨에게 전화를 해 신기한 꿈 이야기를 했더니 심진송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와 만난 사람들이 항상 복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녀가 내 꿈에 들어와 내 한을 풀어 주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꿈 속의 심진송 씨는 내 마음 속
의 무녀가 인격화되어 나를 새로운 체험의 세계로 안내한 것이리라. 그러나 내
마음 속의 심진송 씨가 꿈 속의
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현실의 심진송 씨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그날의 만
남에서 그만큼 나의 무의식을 자
극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나는 두 기자와 함께 경기도 시흥에 있는 심진송 씨의 신당을 찾
아갔다. 며칠 전에는 김금화 만
신도 만난 적이 있어 심진송 씨와의 만남도 묘한 기대감을 주었다(김금화 만신
은 큰 무당, 경험 많고 학식 높
고, 성숙한 큰 정신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집 밖에는 잘 익은 커다란
돼지가 놓여 있었고, 안으로 들어
가니 비서가 반갑게 맞아 준다. 어디선가 돼지가 어느 방향으로 놓였는지 보라
는 큰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을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귀띔을 해준다. 심진송 씨는 손님을 보는데
한 시간 이상 시간이 걸린다고...
잠깐 보는 다른 무당들과는 달리 그녀는 충분히 손님과 대화를 한다고...
방에서 걸쭉하고 탁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손님인
지 심진송 씨인지 모르겠다. 신묘
한 무당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묘한 상상이 떠올랐었다. 그 무당은 나의 모든
것을 신통하게 맞히고 나를 신비
의 세계로 안내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은 나뿐만은 아닌지 병원 식구들은 너도
나도 생년월일시를 써서 나에게
안겼었다. 자신의 점괘 좀 알아봐 달라고.
대화를 시작한 것은 5시경이었다. 그 대화는 너무 재미있어서 저녁식사, 술자
리, 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날 나눈 이야기는 녹음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만큼 그녀는 나에게 깊은 인상과
자극을 주었다. 그중에 몇 개의 인상적인 대화와 그것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이러하다.
'신기'는 무의식의 강한 힘을 의식에서 받아들이는 것
나: 신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봅니다. 신기란 어찌 보면 우리 집단 무의식
의 작용이니까요. 그러나 그 신
기를 의식으로 받아들여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대
개는 그 신기에 사로잡혀 의식
이 혼란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신기에 사로잡히는 환자들에게 잠을 통
해 신기를 가라앉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정도 잠을 주무시고 의식을 혼란시키는 신기를 어
떻게 조절하시는지요?
심: 저는 잠을 별로 안 잡니다. 두세 시간 정도나 잘까요. 방금 말씀하신 것같이
신기로 인해 혼란될 수도 있지
만, 그런 경우에 우리는 신들을 진정시키는 좌정굿을 합니다. 실제로 신이라
고 해서 항상 올바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는 신들도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저는 그
신들과 3년 동안 따지고 씨름
했습니다. 그제야 신들도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거짓말을 거두었지요. 그리고
저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천
일 기도, 백일 기도를 하지요. 기도를 할 때도 눈을 뜨고 합니다. 타는 촛불
을 언제까지라도 응시할 수가 있
지요. 그래서 저는 미래나 사람에 대해 보이는 게 많은가 봅니다.
분석: 좌정굿이라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
의 힘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약
로 가라앉히지 않고도 조절할 수 있다니 말이다. 정신병 발작을 하는 환자들
을 정신의학으로 접근하는 방법
은 약물 투여이다. 약물을 투여해 의식으로 떠올라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
의 영향을 다시 제자리로 자라앉
히면 환자는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나 무당들은 한껏 춤을 추게 하거나 노
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게 해
풀어 주고, 더 나아가 좌정굿까지 한다니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효과가 어느
정도가 될지, 춤을 추게 허용
하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은지 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무척 건강하고 현실 판단도 올바르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을 안 자고 무의
식의 힘을 그렇게 의식에 받으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그녀는 좌정굿과 기도 또는 일
상 생활에서의 절제를 통해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전혀
안했으며, 신을 모시고 신의 뜻
을 전달하는 이외에는 별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다.
그녀가 잠을 안 자고 기도를 하고 신들과 따지고 대화하는 것을 고도의 적극
적인 명상이라고 여겨졌다. 무의
식과의 대화는 환청이나 환시 등의 적용으로 굉장히 위험해 대개는 겁을 먹고
피하게 마련인데, 그녀는 3년이
나 시달리면서도 그 대화를 계속해, 결국은 무의식의 강한 힘을 의식에서 받아
들이고 있는 듯했다.
인간의 외로움과 불안을 달래 주는 무속
심: 그런데 선생님은 자기를 도와주고 있는 힘에 대해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나: 네. 저는 항상 그런 힘을 느끼고 삽니다. 글을 쓸 때도 구성을 안 하고 무
조건 써내려 가지요. 그래도 별로
두렵지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집중을 하다 보면 마무리를 시켜 주는 상념
이 스쳐 가니까요. 그건 저의 힘
이라 생각지 않는데, 그것이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심: 바로 증조부 영입니다. 증조부가 선생님의 뒤에 계십니다.
나: 맞는 말일 겁니다. 저의 아버님도 항상 말씀하시기를 증조부가 저의 뒤에
있다고 하셨지요. 할아버지는 북
한에서 한의사를 하셨는데 아버님이 그 대를 못이어 항상 자식들을 의사를 만들
고 싶어하셨습니다. 결국 그 대
를 제가 이었고요. 선생님께서 쓰신 책에서 신도 옛날에는 인간이었다는 말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심: 신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 신이지요. 그래서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
하곤 합니다. 조상을 잘 섬기라구
요. 종교는 다 각기 뿌리가 있는 것으로, 어느 한 종교만을 믿어야 한다고 강제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되지요.
분석: 무당이 현대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조
상 모시기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다. 현대는 개성 중심의 시대로 옮아 가면서 개인은 자꾸 강해지고 있으나 가
족이나 집단은 급속도로 와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한 개인들도 외로뭉이나 고독이라는 추위에 떨고 있다.
무당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느
끼는 것이 서로 나누는 따뜻한 정이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가들은 환자와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심리적인 근
친상간이라 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다. 그러나 큰 무당들은 약하고 의지하고 싶어하는 환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어머니라 부르게 하고 가깝게 둔
다. 그러다 그들이 홀로 서고 강해질 때면 서서히 그들을 밀어낸다. 그들은 이
제 독립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환자를 그렇게 포근하게 받아 줄 수 있음은 그들의 가족이나 집단 이데
올로기가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
이리라. 사람은 죽어도 신이 되고 가족에게는 그만한 영혼의 가치가 있으니
서로 아껴야 한다는 것은, 눈앞의
물질적인 이해 타산을 초월해 한 인간의 외로움이나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인간
의 불안을 달래 주는 것이 아닐
까?
시간의 인과 원칙에 지배되지 않는 무의식, '신통력'
심: 선생님의 사주를 보니, 개띠이고 술시에 태어나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이 많
고 맑은 영을 갖고 있습니다. 부
인과는 작년, 재작년, 올해에 걸쳐 두세 번의 이혼 위기가 있었는데 절대 이혼
은 못 합니다. 자식들이 위 아래
에서 두 분의 팔다리를 꽉붙잡고 있기 때문이죠.
나: 그렇습니다. 저희는 성격적인 차이로 많이 싸웠지요. 이혼도 많이 생각했고
요.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헤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제 아내는 범띠라 개띠인 제가 감당하기가 힘들어 많이 뛰쳐
나가곤 했지요.
심: 범띠와 개띠가 살면 개띠가 견디기가 힘들지요. 제 사주에는 범이 네 마리
있습니다. 저는 요즘 신체의 투
시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위장은 아주 안 좋아 보입니다.
나: 맞는 말입니다. 저는 제 속이 안좋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고 있지요. 속
은 들끊고 몸은 더 이상 편치가 않지만, 검사도 받지 않고 약도 먹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지은 죄도 많아 자포
자기한 면이 많습니다.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심: 그러나 사실 길은 있습니다. 양약보다는 한약을 쓰십시오. 선생님은 83세까
지 사실 것입니다. 저는 79세까지
살고요. 저는 소원이 있다면 저 같은 염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만드
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무당
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눈을 부리부리 뜨고 다니면 속이 환히 비춰져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이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굿을 더 이상 미신 취급만 할 것
이 아니라 염력이나 정신력의 현
상으로 받아들이고, 그 길로 가야할 사람들에게는 그리로 안내할 그런 무당 학
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
다.
분석: 나는 그날 여러 사람의 사주를 가져갔는데 심진송 씨는 거침없이 그 사주
를 보면서 예언을 했다. 그 예언
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면서 신통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것은 아마도 그녀의 직관이나 예지 능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사주풀디 등을 통해 예측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맞히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어떻게 정신 현
상 속에서 가능할까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 왔다.
이에 대해 융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은 의식과는 달리 시간의 인과 원칙에 지
배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심진송 씨는 성장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극단적인 고난으로 인해 의식의
한계를 넘는 집단 무의식의 체
험을 많이 해서 이러한 예지 능력이 발달한 것으로 어겨졌다. 그러나 어느 누
구도 인간의 육체를 건강하게 가
지면서 예지 능력을 계속 강하게 유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림굿을 처음 받을
때 예지 능력이 가장 강하다고
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심진송 씨는 부단한 자기 노력과 적극적인 명상을 통해
예지 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
는 듯했다...
그날의 만남으로 나는 아주 강한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다. 그녀의 예지와 나
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와 위로
는 커다란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스스로 자심감을 갖게 하
는 것만큼 유익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는 앞으로 국내에 대한 예언은 안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도면서 각 나라에 대한 예언을
하고 싶다고 한다. 옳은 생각이라고 여겨졌다.
점은 이성의 힘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한 번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정확히
맞나 안 맞나를 떠나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그 사람의 인성 발달
에 매우 유익할 수도 있다. 대개
점은 삶을 겸허하고 용기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은 내 생각으로는 보는 순간에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 점이 아주
훌륭해 그 순간의 연장된 미래
까지 예측할 수 있다고 해도, 순간순간 무수히 갈리는 다차원의 삶을 모두 포용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당들이 점괘가 나쁘다며 굿이나 부적을 권하는 것도 어쩌면 그 사람의 삶의
자세를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동안 반복되어져 왔던 삶의 자세를 굿이나 부적에 의지해
조금만 달리 바꾸어도 그 사람
의 삶의 차원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협박하는 선
무당들도 많겠지만...
우리 사회도 이제는 예지력을 가진 사람을 음성적으로만 양성하지 말고, 보
다 공개적으로 이해하고 분별했으
면 하는 바람이다. 그 사람의 점괘가 맞느냐 안 맞느냐에만 신비적으로 귀기울
지 말고...
사주의 심리학적 풀이
"심각하군. 남편이 여자 있어. 알아? 남편은 56세까지 바람피워! 먼저 찼어야
하는데... 나중에 차이니 분하지?
자기보다 못난 남편이 바람피울 줄은 몰랐지? 그래서 지금 괴로운 거야. 분해
서 이혼 못 하는 거구. 이혼하면
당신은 잘살아. 당신은 활짝피니까... 그러나 애는 불행해져... 둘 중에 하나 선택
해."
"사업하면 안 돼. 36, 37세 때 죽을 고비가 있었는데 그때 운이 달아났구만. 호
프 장사? 그것 좋지. 나이트 클
럽이나 여자 데리고 하는 장사하면 좋아. 마흔셋넷에 또 운이 좋을 거야."
"당신 남편은 여자가 스트립쇼를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해! 일편단심 민들레
야! 당신만 사랑해!"
"부모의 업이 있어 애는 평생 안 좋아져. 빨리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해! 아
들은 틀림없이 건강할 테니까...
아들 둘 중에 한명은 병신이 될 사주야."
"이 여자는 소심하고 사람을 피하는 성격일 거야. 이 여자는 결혼하면 안
돼! 반은 신기가 있어. 도의 길을
가야 해!"
"당신 속이 아주 안 좋아. 백설탕과 백소금, 밀가루 음식을 삼가고 술도 마시
지 말도록해!"
한 무당이 사주만을 보고 거침없이 내뱉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
다.
"난 솔직한 것 빼면 시체야."
그 사주풀이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용하다고, 족집게라고 감탄하기 바빴
다.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맞히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에 넋이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 무당은 자기 예언을 듣
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내가 용한지 안 한지 어떻게 아느냐'고 화를 벌컥 낸다고 한다.
어떻게 그토록 예언에 자신만만할
수가 있을까?
생젼월일, 시만을 보고 현재와 미래의 삶을 알아맞힌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
했다. 사주가 통계라고도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틀리는 셈이다. 프로이트는 태
어나서 7세 때까지의 경험이 평
생을 두고 반복된다고 했는데 사주는 태어날 때부터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주를 심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액운의 예언을 듣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액땜을 위한 굿이나
부적, 이틀 동안 입은 남편의 옷가지 등을 무당들은 이야기하는데 그건 또 어떻
게 이해해야 할까? 사주를 심리
학적으로 이해한다면 일단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융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갖
고 있다. 자기만의 길을 잘 밟아
가면 그는 한평생 건강하고 보람차게 살아가지만, 그 길을 회피하거나 다르게
가면 무의식의 반란에 직면한다
고 한다. 개성화 과정의 길은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가는 정신의 길인데, 의식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그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무의식에서 불안과 해리 등의 증상을 의식에 띄워 보내 다
시 원래의 곳으로 가도록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주풀이는 어쩌면 그 사람의 정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오랜 경험과 직관
을 통해 무당은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의 길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불길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액
땜이나 부적 운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전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한 것일
지도 모른다. 고집스럽게 지켜 온
이전의 삶의 태도가 바뀌면 그 사람에게는 또 다른 삶의 지평이 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당들이 사업, 운수, 결혼, 인간 관계까지 예언하는 것을 보면 재주치
고는 참 대단한 재주다. 큰 무당
들이 사주를 풀면서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마치 심리 상담을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그들
은 사주풀이를 통해 상당한 권위와 이해를 갖고 손님들이 자기 삶에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겸손하도록 가
르치니 말이다. 물론 설익은 무당들은 그것을 통해 상대를 협박하면서 굿이나
부적 등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무당들의 사주풀이는 전통적인 동양식, 한국식 정신치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서양의 정신
치료는 과거에서 현재의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복잡하게 과거를 분석한
다. 즉 과거를 통해 현재를 치료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미래의 예시인 점이나 사주, 즉 미래를 통해 현재를
치료한다. 현대가 아무리 합리주
의와 과학 문명이 발달했다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동양식의 치료 방
식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유명한 점쟁이의 한달 수입이 수억은 된다는데 아무리 유명한 정신과 의사라도
수입이 억을 넘어섰다는 이야기
는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정신과 전문의 트레이닝 교과 과정에 서
양의 정신치료 방식만 복잡하게
연대 순으로 나열하지 말고, 우리의 사주나 굿, 점술, 주역 등도 좀 넣었으면 어
떨까 하고... 그러면 한국의 정신
과 의사들은 과거도 분석하고 미래도 짐작하는 전천후 정신과 의사가 될테니 말
이다.
파라노이아
학창 시절에 〈파라노이아〉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때에는 '
파라노이아'라는 말이 풍기는 뉘
앙스가 좋아서 그냥 멋도 모르고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파라노이아라는 말
은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겉보기
에는 멀쩡하나 엄청난 일들을 저지르는 사람들 중에 파라노이아가 많으니 말이
다.
파라노이아(paranoia)란 편집증을 말한다. 편집증은 문자 그대로 어느 한 가
지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해 망상
으로까지 발달하는 경우이다. 편집 망상과 더불어 남들이 자기 이야기를 수군
거린다는 관계사고, 사회적 고립,
은둔, 괴벽, 의심, 증오, 폭력 행사 등을 수반한다. 잘 알려진 편집증으로는 의처
증이나 의부증을 들 수 있는데,
그밖에도 색정 편집증(erotic paranoia), 과대 편집증(grandiose paranoia), 피해
편집증(persecutory paranoia),
소송 편집증(litigious paranoia)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 병은 질서 있고 명료한 사고를 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망상이 계속되는 것이
본질적인 양상인데, 일상 생활
면에서는 다른 정상인들과 별차이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편집증 환자들이 망
상을 못 견뎌 이따끔씩 저지르는
폭력은 정도를 넘어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행등들이 많다. 그들이 그러한 것은
상대방에게 깊이 사로잡히면서
나와 상대방을 분간하지 못해, 상대방의 사정이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사이코 스릴러들 중에는 편집증을 다룬 영화가 많다. 그들은 겉보기
에 멀쩡하다가 예기치 않은 잔인
성을 보이기에 영화의 소재로는 딱 좋은 것이다. 〈미저리〉나 〈어둠 속에 벨
이 울릴 때〉,〈위험한 정사〉 등
이 그 예이다.
그런데 요즘 환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현대 사회에 이 무서운 편집증이 늘어나
고 있지 않나 하는 불길한 생각
이 들 때가 많다. 여자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직장도 때려치우고 여자를 잡으러
다니며 붙들면 꼭 죽여 버리겠
다고 벼르는 남자, 아무래도 여자가 바람피우는 것 같다고 시시각각 여자의 얼
굴과 몸에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 남자를 죽이는 여자
등 현대인의 편집장애는 자꾸 늘
어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대에 들어와서 편집증은 왜 늘어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이 특히
편집증에 잘 사로잡히는 걸까?
그건 아무래도 현대의 불신 사회 풍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도 있듯이 현대 사회는
인간 상호간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게 깔려 있다. 이는 아마도 인정이나 함께
나누는 사랑, 인간 사이의 신뢰보
다는 돈을 취우선 가치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삭막함이 빚어 낸 결과일 것이
다.
편집장애의 본질적인 양상은 근거없는 의심이므로 현대 사회는 편집장애를
키우기에는 아주 비옥한 토양이
다. 또 현대는 도시화의 발달로 인간 사이의 거리가 워낙 좁혀져서 서로 충돌
하고 부대끼는 일이 많다졌다. 이
는 사람들 내부에 경계와 적개심도 높여 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눈이
맞고 사랑하고 인연짓는 기회도
많아졌다. 그래서 아무리 내 애인, 내 남편, 내 마누라라고 해도 방심할 수가 없
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이 불신
사회에서 저 사람이 언제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서 나를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결혼해서도 외도로 이혼하
는 게 다반사인데, 처녀 총각들의 경우는 특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모두 편집증에 취약한 것은 아니다. 편집증에 특
히 잘 빠져드는 사람은 아무래도
성장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신뢰를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임상적 관찰에 의하면 편집장애자
들은 어렸을 때 부모와의 따뜻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대개 단속을
지나치게 하고 유혹적이면서도 거절적이고, 아버지는 쌀쌀하고 융통성이 없고
가학적이거나 또는 허약하고 무
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장하면 결국 주의 환경은 항상 자기에게 적이라는 태도를
발달시키게 되어 인간 관계에서
믿음이 없어지게 된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을 강화시켜 편집증으로 빠뜨리는
상황은 그들 스스로 자신감이 떨
어질 때 의처증이 많이 발달하고, 여자들은 폐경기 때 의부증이 많이 생긴다.
또 어떤 남자는 자식도 부인도 다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첫눈에 반해 버린 여
인과 결혼했는데, 그 여인에 대
한 의심과 구타가 끊이지 않았다.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자기는 이제 남
은 것이 없는데, 행여 달아나기라
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불신사회에서 편집증에 걸리지 않는 길은, 자기 스스로의
자신감을 지켜 주는 자아 정체감
(identity)을 잘 지키고 자기 길을 열심히 가는 것이다.
한 여자는 굉장한 미인인데다 학벌도 좋아 항상 도도하게 자랐는데, 어느 날
한 남자에게 깊이 빠졌다. 그는
그렇게 학벌이 좋은 것도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순수한 열정으
로 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쏟
아부으며 사랑했다. 이상하게 그 남자에게만은 도도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녀가
그에게 빠진 이유였다. 그 남자
도 처음에는 그녀 못지않게 열성을 쏟았으나 점점 그녀가 권태스러워지기 시
작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녀를 멀리하다가 급기야는 헤어지자고 선언했다.
이때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그를 죽이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전자는 편집증이 분노 폭발이고, 후자는 우울증의 자기 혐오이다. 그녀
를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것은 그녀가 자기 주체성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하고, 상대는 그 여인을 일생 동안 책
임져야 한다는 것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옛날 이야기이다. 현대는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내 주체성까지 모조리
상대에게 쏟아 주어서는 안 된
다. 현대는 이미 생존을 넘어서 자기 삶의 실현을 위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상대방이 내 인생을 실현
시켜 줄 수도 없고, 내 존재의 가치를 채워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데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구시
대적인 맹목적인 사랑은 언제 스스로 자신감을 상실하면서 우울증이나 편집증에
빠질지 모른다.
따라서 연인을 항상 의심하며 자기 곁에만 꼭 붙들어 두려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주체성이 강하고 자기 길을 열심히 가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감이 있어서
상대가 아무리 성공하거나 다른
이성을 기웃거려도 초조해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가 가봐야 어딜 가! 대한민국에서 나만한 여자가 있는 줄 알아!'
이것이 아마 견강한 현대 여성의 사랑일 것이다.
죄책감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은 사실에 있어서 죄가 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해명이
다. 인간은 성향으로 보아 범죄
인이다. 그의 범행은 공상과 유년 시절의 죄스런 소망 속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본능은 이러저러한 방식
으로 어떤 만족을 요구하고 그것을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자아는 바로 죽
음의 본능을 일으키는 동인이다.
우리에게 죄가 없게 되면 될 수록, 다시 말해 우리가 공격적인 본능으로부터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것은 초자
아에 봉사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초자아는 우리를 더 괴롭힐 수 있다. 그런 까
닭에 바로 가장 죄 없는 사람이
가장 무거운 죄책감의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옥타브 마노니 저, 고영석 역, 행림출판사, 1981, p.218.
요즘같이 청개구리라는 말이 마음속 깊이 박히는 때는 없는 것 같다. 바로 내
가 눈앞의 현실을 그대로 못 봐
아버님의 임종을 맞았으니 말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행
동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는 두려
울 것도 없고, 온통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얼마 전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바둑계에 조훈현의 시대가 물러가고
유창혁과 이창호의 시대가 도래
했는데, 그게 모두 한 수 차이라고 한다. 유창혁과 조훈현의 왕위전 7번기에서
조훈현이 한 수를 삐걱함으로써
그는 4대 3으로 패퇴했고 새로운 강자 유창혁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바둑
에서 한 수가 대국의 판도를 망
쳐 버린 것이었다.
판단에서의 순간적인 한 수 삐걱거림이 일생을 망치고 평생 잊지 못할 한을
남기게 된다. 삼풍 백화점 붕괴
당시 기업주들은 한 수 삐걱했기에 갑부에서 거렁뱅이로, 떵떵거리는 호세가에
서 천하의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
았다. 자기들도 분명히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음에도, 자꾸 얄팍한 생각에 다른
길을 찾다 보니 백화점은 무너
지고 그들 손에는 차가운 수갑이 채워진 것이다.
눈앞의 것을 정확히 보고 제대로 판단해서 용기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면서 국민은 전반적으로 우울증에 빠졌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서였으리라.
나 역시 우울증에 빠졌다. 항거할 수 없는 하늘의 기운도 느껴졌고, 이대로
강제된 모순의 업을 짊어지고 살
아야 하나 하는 한탄스러움도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구조 현장에 뛰어가
정신과 의사로서 일 하고 싶었
고 구호 손길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주저했고 나는 일상의 수
레바퀴 속에서 역시 예전같이 바
쁘게 지냈다.
그런데 이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삼풍 백화점에서 죽은 사람들의 한이 사무
쳤는디, 자기들의 한을 풀기위한
대상을 골랐는지, 결국 나에게도 불행이 닥치고 만 것이다. 평소같이 바쁘게 살
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니 연로
하신 아버님이 근심하며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늦게 들어가면 항상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던 분이시라 별 대수
롭지 않게 '다녀왔습니다' 하고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며칠 계속 늦게
들어갔다.
한 번은 삼풍 붕괴현장에서 미화원 24명을 구하는데, 나는 편안하게 그들
이 구출되는 것을 방송으로 듣고
TV로 보고 있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들이 구출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
기도 했지만, 그들의 아픔보다는
내 일, 내 만족이 우선이었다. 그날도 늦게 들어가니 아버님은 역시 나를 기다리
고 계셨다.
그때부터 아버님은 속으로 앓으셨던 것 같다. 삼풍 같은 엄청난 참사에 커다
란 스트레스를 받은데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마저 매일 늦게 들어오니 더 힘드셨던 것이다. 아버님은 가래가
목에 걸려서 숨쉬기가 힘들다고
호소하며 내과에서 새로 종합검사도 받고 약도 새로 지어 드셨다. 그러나 증세
가 호전되지 않자 병원 약은 약
하다고 약국 약을 독하게 지어 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소에 워
낙 건강하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국에 가서 녹화를 하는데 아무래도 아버님이 마음에 걸렸다. 불현
듯 인턴 돌 때 내과 레지던트가
'respiration problem(호흡 이상)이 제일 무서워!'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녹화가 끝나고 바로 아버님을 모시고 응급실로 갔으나 그때는 이미 늦어, 아
버님의 여러 장기는 심하게 손상
된 뒤였다. 원인은 generalized hypoxemia(전반적인 혈액 내 산소 부족)로 인
한 multiple organ damage(여러
장기 손상)였다. 그 이면에는 감기와 심장병이 있었다.
일주일을 중환자실에 계신 후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치료받는 도중 호흡기를
달 때 아버님은 너무도 고통스
러워하셨다. 그러나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버님을 차마 보기 괴로워서 그 자리
를 피해 나왔다. 그러나 지금 생
각하면 그때 피하지 말고 의사를 불러 마취를 하고 호흡기를 달았으면 훨씬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은 스스로 참지 못하고 호흡기를 떼셨고, 의사들은 그
제야 호흡 근육을 마취시키고 다
시 편안하게 호흡기를 달았으니 말이다.
아버님이 앓는 과정에서 내가 만일 아버님의 상태를 제대로 보고 판단하고 행
동했다면 아마 아버님은 적어도
10년은 더 사셨을 것이다. 아버님 유언이 나보고 빨리 들어오라고, 너 때문에
10년은 감수했다고 하시니 말이
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깊은 슬픔 속에서 집에도 일찍 들어오고 저녁도 먹으
며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시
원한 찬 공기를 쐬기도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는 어떻게 전달할 수가
없다. 나는 앞으로 아무리 잘해도
냇물가에 무덤을 만들고 비올 때마다 울부짖는 청개구리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쁘게 살았을까? 아버님과 함께 저녁식사 한 번 편히
같이 못 해보고 일에만 쫓겨서...
무슨 업을 짊어졌기에... 결국 청개구리가 되고 말 것을... 만일 내가 현실을 있
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판단해서
행동했더라면 이런 슬픔과 후회는 맞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만 자꾸 든다.
노이로제와 1백 미터 달리기
이상하게도 난 고등학교 때 했던 체력장이 생각났어. 바로 1맥 미터 달리기.
출발 전에는 정말 불안하기 이를
데 없지. 오만 가지 생각, 그것도 불길한 생각만 나거든. 내가 스타트를 너무 빨
리해 모두 재출발하지는 않을까,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출발 신호가 들리고
오른발을 힘껏 내딛고 나면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호흡으로 인한 벅찬 심장의 고통만이 나와 함
께 했지. 그런데 그 고통은 정말
묘한 구석이 있었어. 이상하게도 야릇한 쾌락을 가져다 준 거야. 나는 즐기고
있었어. 목표가 가까워질수록 거
기서 멀어지고 싶었던 거야. 심장이 터지는 고통을 계속 맛 보고 싶었어. 더 멀
리, 더 오래, 더 빨리 뛰고 싶었
어. 그렇지만 그럴수록 결승점은 가까이 다가왔지. 정말 싫었어. 이율배반이라고
나 할까. 나는 그것을 느꼈어!
이기원 추리소설 〈레터 앤 폰〉의 한 대목이다. 이대목을 읽는 손간 정말
노이로제를 너무도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이로제가 바로 1백 미터 달리기 하기 전 순간과 같기 때문
이다. 출발선에 선 학생들이 흔히
갖는 불안, 오만 가지 생각, 불길한 생각이 뛰지 못함으로써 굳어지면 불안은
불안신경증으로, 오만 가지 생각
은 우울증이나 강박신경증으로, 불길한 생각은 공포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 1백 미터 달리기의 교훈은 노이로제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성
공과 실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
할 수 있다. 바로 1백 미터 달리기를 해야 할 순간에 제때 달리는 사람은 사회
적으로 성공하지만, 거기서 주저
하고 물러앉는 사람은 사회적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떤 여자는 자기는 사회적 패배자(social loser)와는 절대
상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것은 그들이 가난하고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패배자는 어딘가 빌붙
으려 하고 주위를 피곤하게 해서
어떻게든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왜 문제가 많을까? 바로 뛰어들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우외하면서 다른 방법으로만 현
실을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이로제 환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1백 미
터 달리기는 하지 않고 다른 방
법으로만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
노력, 고통을 쏟아붓는다. 아무리
그것이 문제라고 확인을 시켜 줘도 그들은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다. 뛰어드는
순간에 바로 병은 없어지는데도
말이다. 바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로 뛰어들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이
불안해 하면서 그 불안에 지배되
어 사는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어느 남자가 정신과를 찾아왔다. 그는 직장에 들어가 연수
를 받는 도중 잠을 못 자고 힘이
빠지는 등의 증세가 생겨 연수를 포기하고 찾아왔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잠
도 잘 자고 무기력한 증상도 많
이 없어졌지만, 좀처럼 깨끗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의 한결같은 걱정은 어떻
게 하면 직장에 들어가나였지만,
막상 직장을 선택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증상이 생겨 취직할 자신이 서지 않았
다.
그러나 그가 좋아지는 유일한 길은 직장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잠이 안
오면 약을 먹고, 기분이 가라앉
거나 우울하면 항 우울제, 항불안제를 먹으면서라도 직장에 뛰어들어 버텨야
그의 증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바
로 남들과 같이 뛰어야 할 때 뛰어야 하는 것이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맞아야 할 때는 빨리 맞는 게 정
신적 고통도 줄이고, 다음 단계의 현실을 새롭게 맞을 수 있다.
최근 40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트 조사에서, 과거의 선택을 후
회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
다고 밝혀졌다. 바로 1백 미터 달리기 같은 인생의 선택길이 주어졌을 때 뛰지
못하고 주저한 것이 평생의 후
회로 남는 것이다. 1백 미터 달리리에서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서는 스타트가
좋아야 한다. 뛰어들 때 주저하지
않고 뛰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사람
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사람일수록 인생에서 기회를 놓
치지 않고 넓혀 갈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순간에 살아 있어야 한다. 지나간 과거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순간을 소홀히 스
쳐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순간순간을 있는 기대로 맞을 수 있을 때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프랑스 유학생은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느 날 프랑스로
여행할 수 있는 길을 알선해 달
라는 가까운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한 번 두 번 응해 주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
은 고맙다고 그에게 1백만 원, 2
백만 원의 돈을 건네주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그 돈은 너무도 큰 돈이었다. 그
래서 그는 학위 받는 것을 뒤로
미루고 여행사를 차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국내 굴지의 여행사가 되었다.
그는 순간에 살아 있었고 용기
있게 그 순간 속으로 뛰어들었기에 앞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1백 미터 달리기는 닾에서 인용한 추리 작가의 묘사처럼 처음에는 긴장되고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일단 달리
기 시작하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뛰어드는 사람에게 고통은 쾌감으
로, 불확실한 현실은 성공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결국 직장에서나 가정, 자기의
삶에서 보람된 시간을 가꾸기를
원하는 사람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서 순간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용기
를 잃지 말아야 한다.
연애와 결혼에 영향을 미치는 부성, 모성 콤플렉스
"나는 26세의 처녀다. 나는 그 동안 남자들을 도도하게 대해 왔다. 내 눈에 차
는 남자가 없어서 나는 그냥 내
생활만 열심히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
게 깊이 빠졌고 그는 나를 지배
했다. 그에게만은 도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
었고, 우리는 사랑과 장래를 약속
했다. 그런데 그의 집안에서 나와의 결혼을 반대한다고 한다. 그가 주저하는 것
을 보고 나는 크게 상처받았다.
그때부터 죽고 싶은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
고 기분은 늪 속으로 한없이 빠
져든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택했다. 나를 유일하게 지배했던 그와 헤어지는 것
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두렵
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와 헤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덜 무서웠기 때
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연애에 실패해 자살한 영혼의 고통과 아픔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이
야기를 어떤 남자에게 하자, 그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느냐며 그 자살한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묻는다. 여
자라고 하자 그러면 통쾌하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전에 여자에게 차인 적이 있는데 여자가
남자한테 차여 자살했으니 통쾌하
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한 여자에게 하자 그녀는 펄펄 뛰며 흥분한다. 요즘
남자들은 너무 약하다며, 자기
같으면 같이 죽으면 같이 죽었지 혼자는 못 죽는다고 한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외향적인 여자는 남자가 자
기를 버리면 자기는 그에게 가장 잔인한 짓을 하겠다고 한다. 그건 바로 그를
떠나는 것이다.
연애는 이같이 삶과 죽음, 한, 행복과 불행, 자존심 등이 얽혀 있어서 결혼
을 앞둔 젊은이들의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고 사로잡는다. 바로 연애와 결혼은 처녀, 총각들에게는 멋지고 그럴
듯하게 성취해야 하는 인생의 중
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현명하고 슬기롭게 잘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하고
일생 동안 허덕이며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연애와 결혼을 잘하고, 어떤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것일
까? 아마도 인격이 성숙한 사람
은 연애와 결혼을 잘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연애와 결혼에 질질 끌려다닐 것
이다. 그렇다면 성숙이란 무엇이
고, 성숙한 사랑과 결혼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성숙이란 독립된 어른, 현실과
이상에 책임감 있는 어른됨을 말
할 것이고, 성숙한 사랑은 어른다운 사랑을 뜻할 것이다.
연애와 결혼에 골치를 썩는 사람들은 대개 미숙한 사랑을 하는 자들일 텐데,
어떤 사람들이 그러할까? 바로
모성 콤플렉스와 부성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들이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가 이
혼을 했거나 어느 한 쪽이 일찍
돌아가신 경우, 부모로부터 변덕스럽고 심한 대우를 받았던 경우 그 상처는 깊
은 콤플렉스가 되어, 원만한 연애
와 결혼을 방해하곤 한다. 이들 콤플렉스는 자녀들에게 공허감, 외로움, 예민함
으로 작용하여 이성 관계에 비현
실적인 영향을 미치곤 한다. 예를 들어보자.
A는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깊은 상처와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었
다.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자 그
외로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많은 남자를 사귀었다. 그러나 뛰어난 미모로 인
해 연애를 시작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속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관계가 깊어지면 그녀 스스로 가까워
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 관계를
끊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자와의 사랑이 깊어지다가 행여 헤어지기라도 하면 받을 상처를 미
리 예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
마를 잃었을 때 받았던 그 끔찍한 아픔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
녀가 남자를 끊는 것은 아주 잔
혹해서 그녀는 마치 자기를 두고 떠나간 엄마에 대한 복수를 그 남자에게 하는
것 같았다.
A는 그후 많은 남자를 다시 사귀었으나 그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A가 감정적
으로 성숙하지 않는 한 깊이 있
는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변덕스러움에 가족마저도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그 동안
자기가 사귀었던 남자들에 비해 인물도 학벌도 훨씬 떨어지는 남자를 소개받아
별 사랑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B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 충격으로 자살기도까지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죄
책감은 무척 심해서, 그녀의 삶에서 먹구름이 가실 줄을 몰랐다. 임종 전에 아버
지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이 그
녀의 깊은 한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녀는 역시 A같이 그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서둘러 관계를 청산했다. 그녀 또한 쓰라린 이별의 아픔을 또다시 경
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버지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안 두었으면 안 두었지 사랑하는 사람과
또다시 이별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B는 헤어진 후 외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다시 그 남자를 찾았다.
그 남자에 대한 B의 사랑은 이
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것이다. 그후 둘의 사랑은 계속 발전했으나 어느 날 B는
다시 그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
갔다. 그 남자가 자기를 소원하게 대하는 것 같자 서둘러 관계를 끊고 만 것이
다. 그 남자는 B에게 중요한 것
은 서로 신뢰하는 마음이라고 했으나 B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 남자도
은근히 화가 났다. 그리고 조그
마한 것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감수성을 작용시키는 그녀는 연인으로서
는 어울리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
게 되었다.
C는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여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하도 어렸을 때 이혼
했기에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부재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C는 남자를 사귀
는 것이 두려워 노처녀가 될 때까지 남자를 사귀지 않았다.
그러다 C는 한 남자를 만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으나 그 남자는 그녀와의
결혼을 주저했다. 그 남자는 예
술을 하는 사람으로,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
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난다
거나 그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살
생각만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D는 자랄 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고 어머니는 히스테리컬하고 아버지는 난
폭하여 안정적인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대학에 간 후 자기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찾았다.
예쁘고 귀여운 얼굴로 인해 주
위에는 많은 남자들이 몰려들었으나 그녀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자기의 이상에 맞는 한 남자를
드디어 발견했다. 그 남자는 감수성이 풍부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예민하게 충
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 남자를 며칠 동안 못 보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여러 곳을 찾아보았으나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름하던 차에 그녀의 눈앞으로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그가 다른 여자와 웃
으면서 교정을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후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냉정하게
끊었다. 그가 아무리 변명하고
사죄하고 빌어도 그녀의 뜻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자기를 그렇게 섬세하게
아껴 준 그 남자를 잃은 데 대
한 충격이 너무나 커서 그 후 그녀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야 했다.
이같이 부성 콤플렉스나 모성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 주
위에 굉장히 많다. 지금의 신세
대는 어떤지 몰라도 대개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생존하기에 바빠 자녀들을 등한
시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들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되면 정신적으로 자유롭거나 성숙하기가 힘들어 현실
에서 상처받기가 쉽다. 또 연애
와 결혼에서 자기에게 걸맞는 상대를 고르기보다는 노이로제적으로 상대를 고
르기 쉽고, 더 나아가 잘못하면
바람둥이에게 농락당하고 비참한 결말을 초래할 수도 있다. 어린애 정도는 쉽
게 갖고 놀 수 있는 어른들이 현
실에는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바람둥이 진우가 농락하는 여자들은 대개 부성 콤플렉스가 강한 여자들이었
다. 성장하면서 안정되고 지속적
인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 끝없이
헤매는 집시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이 원하는 그러한 사랑을 진우는 줄 수 있었다. 진우는 그녀들의 이상적
인 아버지처럼 맹목적으로 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있었다. 물론 그 사랑은 다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이긴 하
지만...
얼마 전에 만났던 영신 또한 그러했다. 진우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곧 그의
끈질긴 바람둥이 능력으로 영신
을 함락할 수 있었다. 섹스가 끝난 후 영신은 진우에게 아버지 같은 포근한 품
을 느꼈다. 진우는 정신과 의사같
이 영신의 여러 가지 고민들을 충분히 들어주었는데, 역시 그녀에게도 깊은 부
성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녀의 아
버지는 어렸을 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면서 나가, 그녀는 항상 아버지의 사
랑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이다.
진우는 옷을 입으려고 발가벗고 섰다가 문득 스쳐 가는 말이 있어 입밖에 내
놓았다.
"어, 당신 아버지 영혼이 주위에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우리 둘의 사랑을 축
복해 주려나 뵈!"
영신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진우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따. 이야기를
하고 나니 전에도 써먹은 적이
있던 말이다. 아무래도 효과가 좋아 다시 떠오른 듯했다. 이제 그녀는 진우가
떠나기 전까지는 진우 곁을 떠날
수 없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진우는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보낸 운명적인 연
인인 것이다. 그렇게 진우는 많은
여자들을 사랑의 포로 수용소 안에 가두고 즐겼다.
바람둥이 미선이 농락하는 남자들은 대개 모성 콤플렉스가 강한 외로운 남
자들이었다. 물론 총각, 유부남을
가리지 않았다. 남자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
혼한 남자가 진한 외로움을 느낀
다는 것은 아내가 신통치 않든가 아내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런 외로운 남자들은 대개
모성 콤플렉스가 있다. 미선이 그런 남자들에게 즐겨 써먹는 수법은 '칭찬 수
법'이었다. 그저 칭찬하고 부추겨
주기만 하면 그들은 정신없이 미선에게 빠져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애들에게는 그저 칭
찬해 주는 것이 최고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미선의 포로가 되고 만다. 미선은 그 동
안 그런 수법으로 수많은 남자를
자기의 사랑의 포로 수용소 안에 가두고 즐겼다. 남자들은 나중에는 미선의 사
랑을 얻기 위해 자실기도도 하고,
심지어는 집 앞에서 밤을 새우거나 담장을 뛰어 넘어오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못 받았던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받게 되자 그들은 다시는 그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미선의 사랑에
매달렸다. 미선은 그 수법으로
한 번도 외로운 남자들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미선은 이제 자기보다 얼굴도
학벌도 뛰어난 친구들보다 더 나
은 사람과 결혼할 자신이 있었다. 걔들은 남자들을 자기같이 애 다루듯 하지는
못할 테니까.
연애와 결혼이란 이 사회에서 새로운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이다. 이
왕국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건설
하자면 필연적으로 인격의 성숙이 요구된다. 성장하면서 받았던 부모로부터의
여러 가지 악영향을 극복하고 부
모로부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독립하여 어엿한 성인 됐을 때 비로소 새로운 왕
국의 모든 자치권과 행복은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연애와 결혼에 돌입할 때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항상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얼마
나 성숙해 있는지, 지금 정말 성숙한 판단을 하는 것인지, 성숙한 상대를 구한
것인지 겸허하게 돌아보면서 현
실과 이상에 맞는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도외시
하고 단순히 열정에만 사로 잡혔
을 때는 자칫 판단을 그르쳐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상
대와 함께 산다는 것만큼 지옥은
없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신 분석가들 중에는 이혼한 사람들이 많다. 분석을 공부하면서 정
신적인 성숙을 이루다 보니 자기
아내와 맞지 않는 점이 자꾸 늘어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과 보조를 맞춰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녀는 맞지 않는 상대가 되어 밀려날 수밖에 없다.
현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화 사회로 이전 같은 정체된, 집단 중심적인 사
랑의 가치관은 점차 호소력을 잃
고 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날 책임져라'라든지 '결혼했으니까 너는 내
거야'라는 말은 이미 설득력을 잃
은 지 오래다. 상대가 나에게 맞지 않거나 내가 상대에게 맞지 않으면 언제든
지 버릴 수 있고 버림받을 수 있
는 세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 각박한 소외와 변화의 사회에서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를 편
안히 가꿀 수 있는 길은, 각자가
자기 계발을 등한시하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비록 지
금 당장 만족할 만한 성숙을 못
이루어도 항상 노력하는 인간에게 성숙의 빛은 따르고, 그 빛은 서로를 편안하
게 지켜 주기 때문이다.
3장 심리의 바다, 무의식과 꿈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
어느 작가에게 이런 전화가 왔다.
"내가 여러 책을 읽고 정리한 바에 의하면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의 차이는
이러하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부정적인 형태로 보아 무의식의 억압에서 벗어나야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고,
융은 무의식을 창조적이고 역동
적인 에너지로 봤다. 맞는 말인가?"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는 의식을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 무의식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나머지 부분이라 했고, 융
은 의식을 바다에 떠 있는 섬, 섬을 제외한 나머지 바다가 무의식이라 했다. 프
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평
생을 두고 반복된다고 했고, 융은 태고 때부터의 경험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
친다고 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기억이나 의식에 없는 것을 무의식으로, 융은 거기에 더
해 태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기
억이나 의식에 없는 것을 무의식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융은 창조적인
것으로 봤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의 주장은 확연해 다른 것 같으면서
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사고하는
등의 면에서는 일치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창
조적인 것으로, 융이 무의식을 위
험한 것으로 본 부분도 많을 것이다."
심리학을 무의식의 학문이라고 할 만큼 무의식에 대해서는 말 들이 많다. 지
금은 무의식이라는 말이 마치 길
에 굴러 다니는 '돌'을 그냥 '돌'이라 부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
지만, 프로이트는 자기의 한평생은
무의식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아마도 무의식
은 아직도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무한히 밝혀져야 할 '알 수 없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무의식의 존재를 믿으며,
또 그 무의식이 나의 일상과 아
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내가 일상에서 무의식과 연결짓는 방식은
이러하다.
무의식은 의식에 끝없는 영양분을 제공하는 뿌리로서 의식은 항상 겸허하게
무의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의식의 뿌리가 의식의 가지까지 연결된 모세관은 자기 느낌, 자기 감각
이다. 이 감각은 상황에 따라 절
로 우러나오는 것으로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주의 깊게 신경을 기울
여야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떠오르는 감각을 흐리게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생각, 남을 의식하는 것이다. 인
간은 말과 글이 생겨나 논리적으
로 생각하지 이전에 이미 오랜 시간을 본능과 감각, 즉 무의식에 의지해 살아
왔다.
그런데 최근에 발달한 의식, 생각만을 신봉할 때, 또 남을 너무 의식할 때 무
의식에서 떠오르는 느낌이나 감
각을 놓쳐 버려 무의식과의 연결이 끊어질 수 있다. 이때 그의 삶은 생명과는
거리가 먼 허허로운 삶이 되고
만다. 따라서 내가 창조적이고 건강하고 또 생명이 빛나는 삶을 살려면 자기
안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느낌이
나 감각을 항상 소중히 여겨 무의식의 거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무의식에 호소하는 버릇, 벼락치기
벼락치기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항상 벼락치기로 시험 준비를 했는데 성인이 된 지금도 그 버릇
이 남아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간이 임박해서야 하기 때문에 이따금 스릴을 맛보기도 하지만,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고쳐
질까요?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융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에는 절대 지(absolute knouledge)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은 모든
걸 이미 다 알고 있어,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
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작곡을
할 때 한 번도 고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작곡을 하는 이외의
시간에는 개구쟁이같이 행동했습
니다. 그의 삶의 방식을 보면 신중하게 생각하거나 준비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모차르
트는 그의 창조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만일 그가 신중하게 따지고 고민
하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그런 위대한 작곡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철학 교수는 짧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말합니
다. 글은, 특히 새롭게 창조적으로
써야 하는 글은 많이 안다고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음속에서 떠오
르는 것들을 부여잡는 명상과 집
중을 통해야 쓰여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원고 청탁이 오면 마감
일까지 미루다가 마감 시간에 쫓
기면서 글을 씁니다. 그가 그러한 것은 평소 바빠서라기보다는 그래야 글이 써
지기 때문입니다. 워낙 고급 물건
이라 하나만 팔아도 큰돈을 버는 어느 세일즈맨은 물건을 팔기 전에 자기가 갖
고 있는 돈을 모조리 탕진해 버
립니다. 그래서 한계 상황에 도달했을 때 비장한 각오로 세일즈에 나섭니다.
이런 예들은 모두 비합리적인 방
법, 즉 무의식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해결할 때 미리 준비를 하고 머리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는 뺀질뺀
질 놀다가 일이 눈앞에 닥쳐야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자는 주로 의
식의 힘에 의지해 사는 사람으로
분명한 것, 눈에 보이는 것, 합리적인 것들에 많은 가치를 두는 사람입니다. 후
자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함에
의지하는 사람으로 창조적이거나 예슬적인 것들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인 일, 예를 들어
암기가 중요한 시험이나 장시간의 준비가 필요한 일을 할 때에는 전자의 사람
이 유리하지만, 창조적이거나 순
발력 있는 일을 해나갈 때에는 후자의 사람들이 유리합니다.
귀하는 어느 쪽의 일을 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의 성격에 따라서 귀하의
태도도 신축성 있게 조절하는 것
이 어떨까 합니다. 순간적인 집중을 요구하는 일에서는 지금과 같은 귀하의 태
도를 유지하고, 계획성 있게 처리
해야 할 일에서는 지금 같은 태도를 자제하고 좀더 치밀하게 노력한다면 현실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자발성은 무의식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적극적인 사고가 인생을 바꾼다! 요즘 들어 많이 듣는 말이다. 적극적인 사고
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에 대
한 책도 많이 나오고 말도 많지만, 왜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과 성공한 사
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걸까?
아마도 말만큼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성공한 사람
들로부터 그들을 성공으로 이끈
표면적인 모습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적으로 그렇게 자기 실현을
성취할 수밖에 없었던 무의식적
인 충동이나 본능 또한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심적 구조를 가졌기에 적극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우
선 적극적으로 살아가려면 자발
성(spontaneity)이 뛰어나야 한다. 자발성이 뛰어나야 적극적으로 나서고 부딪
치고 도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
발성이란 말은 사이코 드라마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사이코 드라마에서는 '미
지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란 뜻으로 사용한다. 즉 자발성이란 단순히 잘 나서고 부대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적절
하게 반응하여 그 상황의 정답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발성이 정
답을 제대로 찾아갈 때 창조성과
카타르시스, 일상의 업무로 이야기하면 해결과 기회,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발성을 높이려면 순간순간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 있는 도전이
필요하다. 어쨌든 일단 부딪치는
자세에는 복잡한 의도나 생각, 주저함은 모두 큰 적이다. 그때그때 부딪치고 처
리해야 미지의 상황에서 무조건
떠오르는 대로 순순히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몸을 던진 순간부터 미
로찾기가 시작된다. 이때 필요한
자세가 용기화 자신감이다. 내가 이 미지의 상황을 풀 수 있는 있다는 것을
자신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으면 미로는 어떻게든 열린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에
대한 자신감으로 설명한다. 내
무의식에는 엄청난 에너지, 심안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현실에 부딪치면 눈앞
의 현실뿐만 아니라 다음의 현실
까지도 감안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중요한 이유는, 그 자신감으로 인해 자신이 그 상황의 주체적인 리
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지의 상황, 미래에 자신 있게 몸을 던지면 그 상황에 연관된 사람들도 미지
의 상황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이
때 상황에 연관된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대 자발성(counterspontaneity)이 유발
된다. 그래서 그 상황에 대한 자
발성이 모두 높아질 때, 자신감이 있어 집중하고 밀고 나가는 사람에게 그 상
황을 여는 열쇠가 주어지므로 다
른 사람들은 그뒤를 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 무의식에 확신을 갖고 도전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일단은 자기 무의식에 내재하
는 무한한 힘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 이외에도 우리를 구
성하고 있는 육체와 정신은 무한
한 생명과 에너지를 갖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의식과의 연결만이
아니라 무의식과의 연결을 통해
세상에 부닺칠 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커다란 힘이 발휘된다는 점을 기대
해야 한다.
무의식과 만나는 길은 바로 자기 내면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열린다. 내 안에
는 모든 해답이 있다. 그러니 주
저할 것 없이 부딪치고 보는 것이다. 부딪치면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내 안
의 무의식은 적절하게 고개를 들
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다. 마치 자연이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자연의 선물을
주고, 신이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듯이. 그래서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도 나온 것이 아니겠는
가!
그렇지만 무의식에 확신을 갖고 신의 뜻을 받아 길을 헤쳐 가는 데도 필요
한 자세가 있다. 바로 순백 같은
자세이다. 무당이나 제사장이 신의 뜻을 받을 때 하얀 제단에서 기원하듯이, 일
상 생활에서 무의식의 힘을 빌리
자면 하얀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끝내지 않은 일
(unfinished buisiness)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에 이것저것 담고 있으면 현재의 일에 집중하거나 도전할 수가
없다. 일이 밀리지 않게 그때그때
처리하고 이미 지나간 일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의 일뿐
만 아니라 마음의 일 또한 그러
하다. 대개 끝내지 않은 마음의 일이란 과거의 분노 감정이 많은데, 그 감정의
찌꺼기들을 자기 방식대로 슬기
롭게 다스리는 것이 좋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꽁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내 성
격이었다. 괜히 꽁한 사람이 꽁하지 않은 척해 봤자 남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
이다. 실제로 남들은 나보고 꽁하
다느니 마음이 좁다느니 하면서 자기들 이익을 우선 챙겼기 때문이다. 꽁한
사람은 꽁한 대로 대범한 사람은
대범한 대로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는 불길과 같아서 일단 활활
타고 나야 비로소 가라앉는다. 불
꽃이 활활 타오르지도 않았는데 남들이 꽁하다고 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화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은 불씨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다. 화는 자기 방식대로 풀어야 한다. 나에게 부당한 공격
을 가해 내 감정을 상하게 해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내 안에서
불길이 스스로 가라앉으면 그때
가서 화해를 해도 늦지 않다.
현재의 끝내지 않은 일에는 미래의 일 또한 포함된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부
딪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
개, 미래의 복잡다난한 계획을 이것저것 담고 있으면서 우유부단해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이것저것 골머리 앓게 생각만 하고 계획
하고 있기에 오히려 현실의 중요
한 순간들을 놓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에 충실할 때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이 주어지
는 가장 큰 목적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현실에 충실했을 때 가능
하다. 과거에 사로잡히면 과거의 어둠이, 미래에 사로잡히면 예측할 수 없는 미
래의 수많은 생각들이 그를 짓누
른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거나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
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자면 평소에 헛되고 유치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헛
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의 현재에 만족하면서 다음의 미래를 바라보면 된다. 현
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할수
록 자꾸 과저 탓을 하거나 먼 미래만 바라보게 될테니까. 결국 적극적으로 사
고하고 성공하는 습관을 지니려면
현상적인 성공 테크닉을 익히기에 앞서, 자기의 무의식에 대한 강한 믿음부터
키워야 할 것이다.
무의식의 미로를 통과하려면
얼마 전에 미국의 심리학 박사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정통 사이코 드라마 워
크숍을 한다고 해서 2박 3일 동
안 다녀왔다. 워크숍을 통해서 여러 가지 세세한 사이코 드라마 기법과 노하우
를 배운 것도 많았지만, 가장 놀
랍고도 인상 깊게 배운 것은 저럴 수도 있구나 할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였다.
나는 사이코 드라마를 한 번 하
면 워낙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 하루에 여러 번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
지 하루에 두 번 해본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 워크숍 담당자는 하루에 네
번을 하고 거기다 강연까지 하
는 것이 아닌가. 상식으로는 불가사의한 에너지였다. 그래서 나는 한 번만 해도
진이 다 빠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많이 해보면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저분과 나의 사이코 드라마가 다르니까 에너지 소모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자위도 해보았지만, 그 동안 내
스스로 에너지를 한정시키고 그것에 주눅들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바로 나는 열등생의 위치에
서, 후진국의 위치에서, 아랫사람의 위치에서 스스로 자족하면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훗날의 결과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이대로 간다면 그분은 계속 자기 능력을 계발해 나가겠
지만 나는 더 이상 발전도 성과
도 없이 속절없이 세월만 보낼지도 모른다.
사실 그때 나는 사이코 드라마에 지쳐 있었다. 너무 힘들고 낙도 없고 나이
들어 무대 위에서 재롱떠는 것도
무안해서 이제 사이코 드라마를 그만둘까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워크
숍에서 나보다 나이도 많은 여자
가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정도가 내가 지닌
한계라고 한정했던 나는 자꾸 더
위축되어 갔지만, 끝없이 한계에 도전한 사람은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모아 발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수시로 경험했지만 간
사한 사람의 마음은 자꾸 그 경
험을 잊고 그저 겉만 편한 채 한 자리에 맴 돌게 한다. 이같은 경험을 가장쓰
라리게 겪었던 것은 의과대학 때
였다. 경쟁이 치열한 그 시절, 나는 한때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잠도 몇 시간
안 자고 내가 보기에도 대견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했다. 그러나 시험 결과 꼴지에서 십여 명 정도가
해당되는 재시험 대상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그때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도 안 자고 죽어라 공부했는데 더
이상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보
나마나 요령이 부족해서 그랬을 것이다. 남들은 약게 공부하는데 나는 우직하
게 공부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
서 남들이 공부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더니 그들은 실제로 나보다 더 열심히 공
부하고 있었다. 눈은 반짝거리는
게 철저히 집중하고 있었고, 공부하는 시간이나 챽을 보는 양도 나보다 많았다.
그때 나는 내 한계를 너무 일찍 설정해 주저앉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의과대학 도서관에 남아 그
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그들에게 매일 내 한계를 뛰어넘는 자극을 받아 가면서
경직된 내 경계를 넓히고 나서
야 비로소 재시의 대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넓혀진 경계속에서
나는 너무 힘들어 쓰러진 내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
면 대학 입시 때도 나는 스스로
내 한계를 설정해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전교 1, 2등이나 하는 저런 데
를 가! 난 이 정도가 최선이야!' 하다가 엉거주춤 퇴보하고 만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 능력은 무한하다고 한다. 무의식의 힘이 무한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
기의 힘이 무한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 그 앞에 주저앉
고 만다.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의식의 잠재 능력은 그 힘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무의식
의 잠재 능력은 각 개인이 자기
안에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무한한 에너지를 간직한 마음 속의 보물창고라고 한다면 그 보물창
고로 들어가는 길은 어떻게 생겼
을까? 바로 미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분석 심리학에서는 의식이 자아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무의식적인 것을 깨달
음으로써 본연의 자기를 실현시
키는 것, 즉 자기의 전체 인격을 실현시키는 것을 자기 실현 또는 개성화라고
부른다.
-《분석심리학》, 이부영 저, 일조각, 1984, p. 43.
이 개성화 과정이 시작될 때 무의식은 복도, 미로, 미궁, 지하 세계의 여러 가
지 문, 어두운 숲속 등으로 상징
화된다고 한다.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이부영 역, 집문당, 1993, p. 175, 288.
미지의 곳을 헤쳐 들어가야 궁극적인 보물창고, 무의식의 원대한 능력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로는 어떻게 헤쳐 들어가야 할까? 수수께끼를 풀 때 우리는 합리적인 생각
보다는 스쳐 가는 영감에 의지한
다. 머리를 쥐어짜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가 우연히 떠오른 기발한 아
이디어에 의해 풀리는 것을 자주
경험하곤 한다. 이처럼 스쳐 가는 영감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손익을 따지는
계산이나 합리적인 계획보다도
미로를 여는 데 뛰어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또 미로는 그 앞에서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는데 열릴 리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신화나 민담에서 미로
를 통과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웅
이 많다. 아마도 미로에 부딪쳐 나가는 영웅적인 용기가 미로의 통과를 가능하
게 한 것 같다. 그리고 미로의 마
지막에는 꼭 결정적인 위기가 나타나는데, 이 위기 상황을 통과하는 것은 커다
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를 인상적으로 보여 준 영화로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3편〉이
있다. 주인공은 지도를 따라 마
지막 절벽까지 오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막다른 곳이어서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지도에는 그곳에
서 발을 뻗으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그 밑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일 뿐이다. 그러
나 주인공은 눈을 딱 감고 절벽
으로 발을 뻗는다. 그러자 그 발 밑으로 유리 길이 드러나며 주인공을 건너편
으로 안내한다. 주인공은 그 건너
편에서 신화의 인물을 만난다. 이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다. 결국 미로의 마지막
관문은 무의식에 대한 믿음, 자
기의 무한한 잠재 능력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점을 보
여 준 것이다. 전혀 길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절벽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미로를 통과해 마지막 능력을 얻을 때는 보다 높은 정신을 향한 겸허한 자세
가 필요하다. 《소년 정글북》에
서 모글리는 깊은 정글의 보물창고에서 수많은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 주위
에는 욕심을 낸 사람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다. 모글 리가 보물 주에서 탐이나는 칼을 하나 주우려 하자 그 창고
를 지키는 커다란 뱀이 모글리를
공격한다. 모글리는 그 뱀을 물리치고 칼을 얻지만 뱀은 모글리에게 그 칼은
불행을 몰고 다닌다고 말한다. 결
국 모글리는 그 칼이 탐났지만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 칼을 던져
버린다. 미로를 통과해 정신의
가장 소중한 빛을 얻으려는 사람은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의 무한한 잠재 능력을 믿고 그 힘을 발휘하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지레
겁을 먹고 자기의 한계를 좁게 설정하지 말 것, 둘째는 눈앞의 계산에만 의지하
지 말고 자기의 스쳐 가는 영감
역시 소중히 할 것, 셋째는 용기를 갖고 문을 두드릴 것, 넷째는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잠재 능력, 무의식의 무
한한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확신할 것, 다섯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물질적인
헛된 욕심에 집착하지 말고 보다
큰 뜻을 품을 것 등이다.
〈쥬라기 공원〉과 집단 무의식
언젠가 내가 영화감독이 된다면 꼭 찍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자폐아 이야
기다. 자폐아는 모래알 하나, 티끌
하나를 갖고 놀지만 어쩌면 그들의 체험 세계는 무한히 신비로울지도 모른다.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재미있는 체험을 하고 있기에 세상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는 자폐아의 눈 속으로 우연히 들어가, 그가 겪고 있는 신비의 세
계를 영화로 볼 수 있다면 참 재
미있을 것 같다.9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것이다.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가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
다. 그후 그는 잡자기 자신이 없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잘 적응하
면서 지켜 왔던 교수직이라는 것
도 다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그에게는 이제 한 가지 희망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그것마저 무위로 돌아가면 자
살할 생각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란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것이
었다. 이 극심한 혼란을 정신과를
통해서도 해결할 수 없다면 삶이란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고 더 이상 살 의욕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찾은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이런 진단을 내렸다.
"당신의 깊은 슬럼프는 자기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적응하는 데
만 너무 열중하여 자신을 돌아
보는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신은 이제부터 자기
느낌, 자기 감각에 충실할 필요
가 있다."
그후 그는 다시 자기 감각에 집중해 슬럼프를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슬럼프에서 벗어나자 정신과
의사는 곧 치료 종언을 선언했다. 이제는 정신과 의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감각대로 자기 길을 가라는
것이다. 그는 그후 많은 일을 열성적으로 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평소 갖고
있었던 꿈인 문학 창작도 병행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자기는 사회적으로 큰일을 해낼 것 같다는 자신
감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가 발견
한 것은, 자기 느낌은 불확실해도 그 느낌 안에야말로 가장 확실하게의지할 만
한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 그
길에는 여러 가지로 자기를 채울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서 다시 슬럼프에 빠지
는 것조차 두렵지 않았다.
이같이 슬럼프란 자기 감각을 잃었을 때 초래되는 무기력증, 공허감, 의욕상실
로서, 막연하게 신이 나지 않고,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며, 어떤 때는 알 수 없는 적개심에 젖기도 한다. 또 갑
자기 우유부단해지고, 남들이 많
이 의식되어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일
에 부딪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때 우울증이나 대인 공포증, 강박신경증 등이 많이 발생하
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2. 슬럼프는 어떤 때 생기나?
K는 일류대학을 졸업한 학생이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고 아직까지 슬럼프에서 헤
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슬럼프에 빠진 것은 가치관을 바꾸면서부
터였다. K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활발하고 정력적일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많은 일을 했도 성적도 우수했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그때 그의 생활 방침은 그저 생각없이 주어진 상황에 따
라 그때그때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별로 힘든 줄을 몰랐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류대학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
가 분명한 것에 의지해 살고 싶은 것이다. 그때부터 K는 생활 방침을 바꿔 생각
도 많이 하고 책도 열심히 찾아
읽고 남들도 의식하면서 살지 시작했다. 그러나 그후 오히려 K에게는 슬럼프가
찾아왔다. 갑자기 사람들이 지
나치게 의식되고 부담스러워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만 것
이다. 이 슬럼프는 점차 심해져,
심지어는 남들이 자기 이야기로 수군거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K는 이를 극복
하기 위해 열심히 책도 읽고 생
각도 했으나 증상은 가라앉지 않았다.
K는 급기야 정신과 까지 찾게 되었다. 의사는 K에게 예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충고했다. 고등학교
때 같이 생각 없이 살면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K는 그말
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불확실한 삶이어서 많은 일을 건강하게 했지만 왠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왜 이
엏게 슬럼프에 빠지게 됐는지 철저하게 원인 규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
과 의사는 그것이 K의 욕심이라
고 지적하며 불확실한 것 속에 오히려 확실한 길이 있으니,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그 길을 다시 한 번 가볼
것을 충고했다. 아마도 그가 확실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한 그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
다.
이 같은 슬럼프는 자기 감각에 대해 회의를 품으면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슬럼프는 또 너무 바빠서
자기 에너지를 너무 고갈시켰을 때도 생기는 것 같다. 한창 잘 나가던 운동 선
수나 유명인이 갑자기 슬럼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보도되곤 한다. 이는 아마도 무의식의 뜻
을 받는, 본능에 충실하려는 의식
의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에 나는 어느 케이블 TV에서 MC를 보면서 속으로 무척 당황한 적
이 있었다. 너무 바빠 대본을 한
번도 읽지 못한 것이다. 대본을 그 자리에서 부분부분 읽으면서 진행을 하자
니 어떻게 말은 연결이 되었지만
전체 분위기는 산만했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기에 내 안에서 떠오르는 느낌
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러
다 보니 전체를 원만히 볼 수 없어 토크쇼를 활기차게 이끌어 가지 못한 것이
었다. 그러나 그 다음 녹화는 다
소 시간이 있어서 대본을 한 번 충분히 읽어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대본을
덮고도 차분하게 진행할 수 있었
다. 바로 마음의 준비를 했기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잡아 상황에 적절
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1)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
우리나라 남성들의 높은 사망률은 과로가 원인이라는데, 아마도 효율적으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 그러할 것
이다. 잠자고 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고 쉬는 데도 이것저것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피곤하면 자야 한다.
자도 자도 피곤하다면 계속 잔다. 그렇게 자다 자다 보면 결국 끝이 보인다. 더
이상 자는 게 귀찮고 짜증난다.
그때 놀이를 찾고 여행을 가고 가정을 돌보면 된다. 그러기 이전에 눈치보다
쓰러지면 자기도 손해고 주위도
손해다. 나는 이것이 슬럼프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휴식은
자기 감각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
고, 그중에서도 잠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2) 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자기 느낌에 집중하라.
슬럼프에 빠지면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우유부단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을
못 내리고 판단을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대개 상황은 물 건너간 뒤이다. 특히 순간을
다투는 운동 선수의 경우 판단이
늦어지면 치명적으로 뒤처질 수 있다. 대개 유명한 운동 선수들 중에 자기 멋
대로인 성격이 많은 것은 그들이
판단을 빨리빨리 하기 때문이다. 자기 느낌에 따라 판단을 빨리 하다 보면 실
수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는 활기찬 기회로 연결되는 경우가 더 많다. 뒤로 움츠려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세로는 빠르게 지나
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번지 점프를 해라.
번지 점프란 원주민들의 성인식으로 도입된 것이라 한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그 고장에서 제일 큰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발에 끈을 묶고 가장 땅 아래로 떨어지는 자가 용맹한 어른
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번지
점프란 죽음의 체험을 통해 아이의 껍질을 벗고 성인이 되는 것이다.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은 어찌 보면 아이
같이 웅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괜히 세상이 겁이 나고 남의 시선이 두
려우며 이것저것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이때는 과감하게 목숨을 건 운동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것을 통해 몸
과 마음이 다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슬럼프란 자기 속에서 떠오르는 느낌과 생기 있게 만날 수 없을 때
초래되는 자기 소외감이다. 따라
서 슬럼프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은 항상 자기 느낌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정자 무의식과 난자 무의식
서구의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무의식은 결국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외
의 다른 무의식은 없을까? 태고 때부터,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축적된 것 이외
의 다른 체험이 우리 인간의 감
정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없을까? 내가 상상하기에는 또 다른 무의식도 존
재한다. 바로 인간의 생명이 만
들어지는 결정적인 순간,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그러하다.
내가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때 였던 것 같다.
그 당시 기술 선생님은 우리 인
간은 수억대 일의 경쟁을 뚫고 일 등을 해서 태어난 존재이므로, 개개인은 모
두가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잇
다고 말했다. 아마 그때 일등으로 난자와 만난 정자가 나라는 것에 대해 인상적
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인간은 수
억 마리의 정자들 중에서 일 등을 해서 태어난 존재이므로 그만큼 능력이 있다
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의외로 사람들은 그 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
마도 우리는 정자 달리기의 인상
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5억 마리의 정자가 한 개의 난자를 향해 달려가 그중 한 마리의 정자가 난자
와 결합하는 것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이 험난한 자연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모든 체험이 축약되어 있다. 그렇
게 해서 얻어진 생명체가 아니면
이 자연계에서 적응하면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계에서 험난하게 부
둥켜안는 생명의 경험은 생명이
만들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인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이것은 막 태어난 생명들에게
정자와 난자의 만남처럼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순리에 따르는 길임을 알려
주는 본능과 무의식으로서 작용
한다. 즉 정자가 난자를 향해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간 것은 우리 인생에 무
의식적으로 영향을 주고 재현이
되는 것이다.
이 무의식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나아가거나 주춤거릴 때, 다른 무의식의 경
우와 마찬가지로 빨리 무의식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기 존재의 길을 가라는 신호를 내부로부터 받게 된다. 즉,
마음의 불편함, 심지어는 조이
로제, 정신병에까지 시달리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마
치 짝을 찾지 못한 정자, 난자가
되어 자연계에서 힘든 일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정자 무의식, 난자
무의식이라 부른다.
정자와 난자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다는 사실은, 현대에 이르려 점차 삶이 편
안해짐에 따라 더 이상 악착같이
자연계에 적응하지 않아도 되자 정자의 수가 감소한 사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
다. 남자들이 한 번 사정할 때 생
기는 정자 수는 매년 2퍼센트씩 감소하고 있다. WWF(World Wide Found
For Nature; 자연을 위한 세계 기
구)는 1996년을 '세계 정자의 해'로 선포해, 날로 심각해지는 정자 감소 현상에
대해 세계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
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이 정자, 난자의 움직임과 만남을 생각하면 기존의
심리학이 주장하는 여러 가지 가
설들이 쉽게 이해되기도 한다. 먼저 정자, 난자의 만남에 대한 생물학적인 관찰
결과를 인용해 보면 이러하다.
성교 중에는 5억 개가 넘는 정자가 질 속에 사정된다. 그중에 많은 수는 질
밖으로 흘러나오고 2천 개 정도
만이 살아남아 자궁 경부를 통해 자궁 안으로 들어가 나팔관에 도달한다. 정자
가 상대적으로 거대한 난자에 도
달하면, 그 주위에 원을 그리며 둘러싼다. 정자는 꼬리로 헤엄치며 난자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 가운데
한 개의 정자만이 난자의 벽을 뚫을 수 있다. 순간적으로 난자는 더 이상 정자
를 유인하지 않고 바깥 벽을 단
단하게 함으로써 나머지 정자가 지나가 버리게 한다. 사정에서 수정까지의 과정
은 보통 한 시간 안에 이루어진
다. 난자가 수정이 되면 수정란은 세포 분열을 시작하고 여러 개의 세포로 증
식하면서 나팔관을 통해 여행을
시작한다. 결국 이것이 자궁벽에 착상하여 태아가 되는 것이다...
-《함께 배우는 성》, 미리엄 스토퍼트 저, 홍강의 역, p. 223.
최근에 발표된 어떤 보고에 의하면 난자는 가정 먼저 도달한 정자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정자들 중에서 비교적 강한 놈을 선택한다고 한다. 처음에 질 속에 사
정된 정자들은 제각기 다른위치,
다른 길에서 달리기를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길을 갖고
태어난다는 개성화 과정, 태어날
때부터 받은 천명으로 재현된다고 본다. 또 정자들은 주어진 길에서 피할 수 없
는 여러 가지 통로를 거치게 된
다. 이를 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또 정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최고가 되기
위해 부단히 달리기를 시작한다.
최고가 되려는 시도는 생명의 탄생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이며, 이 본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최고를 향한 끝없는 욕망, 남보다 뒤처졌을 때 받는 극심한 열등감,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고 하는 승부욕 등으로 드러난다.
정자들의 빠른 달리기는 인간의 속도에 대한 욕망, 빠른 정보화 사회에서의
정신건강, 폭주족 등의 심리를 이
해하게 해주고, 쉼 없는 달리기는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 지를 보여 준다. 대개의 정신
질환은 삶이 고여 있을 때, 머물러 있을 때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
신질환이 발병을 해도 열심히 사
는 사람에게는 면역성이 강해 잘 견뎌 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아마 달리기
를 포기한 인생은 난자에게 다가
가지 못하고 말라죽는 정자와 같이 생명력의 끈을 놓아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정자 무의식 속
에는 강한 삶의 본능이 잉태되어 있는 것 같다. 또 난자는 자기만의 정자를 소
중히 선택하고 그밖에는 아무리
잘나도 거부하기에, 자기만의 사랑을 향한 인간 고유의 성향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괜히 저 사람이 싫어요
유난히 그 사람만 싫습니다
저는 23세의 직장 여성인데요. 회사에 가기가 너무 싫어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매일 마주치는 사람을 대
하기가 무척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 사람이 날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미워요.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서
로 의견차가 심한 것도 아닌데 미묘하게 서로 껄끄럽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왠지 그 사람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갈수록 더 힘이 듭니다. 같이 있으면 숨쉬기도 거북합니다.
왜 그럴까요? 솔직히 털어놓자니 멋쩍기도 하고, '내가 왜 이러지? 이럴 이유가 없는데' 싶어 그냥 지나칩니
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일 없이 지나면 또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사소한 일 같아 말 안 하고 그냥 있자니 답
답하고, 말하자니 또 내가 너무너무 웃기는 사람 같고 그래요.
그냥 싫다는 이런 감정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조용하게 둘만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 먼지 떨어지는 소리
까지 들릴 정도로 우리는 침묵입니다. 난 다른 곳에서는 참 밝고 명랑한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선배에
게 싫은 내색을 하기도 미안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성숙을 위한 진통의 순간입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데 아무 이유 없이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모든 것을 훤
히 비춰 줄 것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평소에 별로 의식하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그러한 특질에 대해 예민하게 주의를 환기시키며 나도 모르게 그것을 의식하게 하곤 합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 특히 열등한 부분까지 노출되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 사람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없었
으면 마음 편히 살 것을, 괜히 저 사람이 있음으로써 나 자신을 자꾸 되돌아보게 되고 남을 의식하게 되니 말
입니다.
그 미움은 점점 눈덩이처럼 부풀어 나중에는 정말 그 사람이 미치도록 보기 싫어지게 됩니다. 그 사람은 마
치 내 뒤를 따라 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떨쳐 버릴래야 떨쳐 버릴 수도 없고 어둠 속에서 반짝거
리는 눈만을 뜨고 있어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관찰하는 존재입니다. 귀하가 바로 이러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귀하는 지금 마음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shadow possesion). 융 심리학에서는 '나'의 어두운 면, 즉
의식의 뒷면에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내용들, 다시 말해 의식될 기회를 잃어서 무의식에 미분화된 채로 남아
있는 심리적 경향이나 특징들을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림자는 곧잘 밖의 대상으로 투사되는데, 이때는 강렬한
감정이 수반되어 자아는 그 대상에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집착하게 됩니다. 또 투사는 무의식
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자아는 그 감정을 분명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은 보기만 해
도 싫다, 거북하다'고 할 때 그림자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자를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열쇠는 자아가 무의식에 있는 그림자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그 존재를 깨달으려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앴다로 합니다. 그림자가 깨달아질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며, 그림자
의 부정적 작용 또한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속 그림자들을 소화하는 만큼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넓어지
며 자기 자신의 통찰도 깊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는 인격 성숙의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마 귀하가 그분과의 무의식적인 갈등
때문에 고통을 받는 지금은 성숙을 위한 진통의 순간, 자기 반성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
지고 자기의 그림자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도록 용기 있게 의식의 경직성을 완화한다면 귀하의 고통도 줄어들
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꿈의 해석
정신치료자에게는 자기 분석이라는 공부 과정이 있다. 환자를 치료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
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기 심리를 들여다보는 힘부터 키워야 상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자기 분석의 과정은 정신치료 학파마다 다양한데, 내가 받은 것은 융 심리학파에서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3년
정도 맏았는데 분석은 모두 꿈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동안 꾸었던 꿈을 적어 가서 그 꿈의 내용을 연상하고
꿈의 상징을 분석가 선생님의 지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분석을 받으면서 나는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무엇보다도 꿈을 통해 나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
이 인상적이었다. 꿈은 신기하게도 나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나의 길을 인도했다. 분석을 받으면서 인상적인 볓
가지 경험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한 번은 발바닥이 아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러자 분석가 선생님은 당시 2만 5천 원 하던 분석료를 2만
원으로 깎아 주는 것이었다. 발은 땅과 가까이 있으므로 아마도 꿈속에서 발바닥이 아픈 것은 현실의 아픔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때의 고마움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고마움을 갚는 길은 나 또한 그분
같은 인간적인 정신치료자가 되는 것이리라. 쫓겨 다니는 꿈을 꾸고 기분나빠 하자 쫓아다니는 사람이 나와 친
해지려고 그러는 것이니 피하지만 람고 그 심적 특성을 의식에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라든지, 전쟁 꿈은 갈등
상황, 물은 무의식, 동물은 본능을 상징한다는 등 꿈에 대한 분석가 선생님의 접근과 이해는 무척 놀라운 것이
었다.
또 한 번은 분석가 선생님과 섹스를 하는 꿈을 꾸고는 혹시 나에게 동성애 성향이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는데,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이제는 정식으로 분석가 코스로 들어가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꿈 속의 분석가는 현실의 분석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분석가 상이고 섹스는 두 존재의 합일을
의미하니 이제는 분석이 진전되었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연상
이지, 획일적으로 이 꿈의 상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고 했다.
분석을 받으면서 꿈을 통해 무의식이 의식에 떠올려 보내는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여 내 전체가 지향하는 길
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분석을 받고 있지 않지만, 아직도 꿈
은 매일같이 가장 먼저 적고 있다. 꿈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분석가이기에... 요즘 내가 꿈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꿈에 주의를 기울이며 항상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꿈은 매일같이, 아니 시시각각 내 안에서 새롭게 울리고 있
기 때문이다. 그 꿈에 대한 분석은 꿈을 대했을 때 떠오른 내 첫 느낌에 의지하고, 꿈이 제시하는 의미는 철저
히 소화하고 그 의미에 따르도록 노력하는 것이 요즘 실행하는 나의 꿈 분석이다. 최근에 내가 꾼 꿈 중에 가
장 인상적인 꿈은 이러하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내리게 되는 기회가 생김. 나는 낙하산 줄을 잡아당겨야 펴지는지, 아니면 저절로 펴지
는지가 의문. 내 앞에서 사람들이 하늘로 뛰어내림. 이어서 내가 뛰어내리면서 물음. 낙하산 줄을 잡아당겨야하
는지, 저절로 펴지는지... 거기 있던 사람이 저절로 펴진다고 함. 나는 감히 뛰어내릴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번
지 점프 하는 기분으로 뛰어내림. 곧 낙하산이 펴짐.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빨리 떨어짐. 떨어
지면서 보리 풍선 몇 개가 묶인 채 떠다님. 나는 위로 올라가서 그것을 잡으려고 하여 잡고서 떨어짐. 풍선을
잡으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천천히 떨어지는 듯. 나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데 땅 위로 떨어지지 못하
고 바다 쪽으로 떨어짐...
이 꿈을 해석하면 한없이 복잡하겠지만, 꿈을 꾸고 나서 곧바로 든 생각은 하늘에서 본 땅이었다. 나는 그 당
시 사소한 일에 대해 마음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넓고 광활한 땅을 내려다보니 조그마한 것들에 사로잡
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꿈을 꾸고는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대범한 손길
을 뻗었다. 그것이 꿈이 제시하는 의미이기에...
오래전부터 꿈속에 남편 아닌 남자들이 나타납니다
결혼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스스로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결혼한 지 3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아이가 없는 것이 걱정일
뿐 다른 일은 별 문제 없이 잘 지내 왔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어요. 언제부턴지 모르겠는데 꽤 오래전
부터 남자들의 꿈을 꿔요. 상대는 옛날에 만났던 사람이거나 아니면 TV에 나오는 사람일 때도 있고, 전혀 뜻밖
의 사람이 등장할 때도 있어요. 깨고 나면 재미있기도 하고 좀 민망하기도 해서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못했어요.
남편에게 무슨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로맨스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꿈을 꿀까
요?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입니다
먼저 '꿈의 해석' 기법에 땨라 귀하가 꾼 꿈을 연상해 볼까요. 귀하는 꿈에 나타난 남자들에 대해 생각나는
것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들의 성격, 인간성,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생각, 그들과 나와의 관련성 등을... 다음으
로 남자 이외의 나머지 꿈의 자료, 꿈의 줄거리 등에 대해 연상을 해보세요. 내가 그 남자와 만나 연애를 했는
지, 섹스를 했는지, 남자 이외의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할
거예요.
다음으로 이 꿈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해석하려면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요. 첫째는 객관 단계의
해석으로, 그 꿈에 나타난 남자나 다른 내용들이 최근에 일어나는 자기 일상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가를 보는
거죠. 그러나 귀하의 글에 따르면 그들은 귀하의 일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인 것 같군요. TV에 나온
남자들의 꿈 사연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음 방식인 주관 단계의 해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주관 단계의 해석이란 꿈에 나타난 모든 상을
자기 인격의 부분들로 보는 거예요. 즉 꿈속에 나타난 남자는 일상의 남자가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는 남성
이 인격화된 상이죠. 융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남성상을 아니무스(animus)라고 부른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반
대의 성을 자기 인격에, 무의식에 갖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남자는 자기 무의식에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남성에게도 여성 호르몬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정 호르몬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
다고 합니다. 남성은 남성 역할로, 여성은 여성 역할로 키워졌기에 그들의 무의식에는 반대 성이 잠재해 있고,
이 반대 성은 의식에 강조된 성과 만나 의식화되기를 바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몸에 자웅 양성을 가
진 허마프로이디티즘(hermaphroiditism)을 완전한 인격의 상징으로 보죠.
귀하가 꿈속에서 지금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외간 남자를 만나 섹스를 했다고 가정하고, 이를 주관 단계로
해석해 봅시다. 그 외간 남자에 대해 귀하가 만일 예의바르고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연상을 했다면,
귀하는 그런 자신의 심적 측면과의 합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 남자가 용감하고 거침없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라면 자신의 그런 측면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섹스란 단순히 성적인 쾌락만이 아닌, 두 인격이 하
나가 되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꿈속에 남자가 나타난 것만으로 죄책감이나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만난 것이
니까요. 심지어 근친상간의 꿈을 꾼다고 해도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융 심리학자인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여사는 근친상간의 꿈은 대개는 긍정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바로 자기가 친밀감을 갖고 있는 자기 인격의 측면
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주장한 것 같습니다.
꿈 속의 사랑
내가 아버님께 돈을 드리고 있다. 문득 의아스럽다는 생각이 스친다.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그러나 그런 의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생생하게 나의 돈을 받으신다.
놀라 일어나니 꿈이다. 너무 생생해서 현실처럼 느껴진 꿈이었다. 너무도 생생해서 다소 두렵기까지 했다. 내
가 아버님 사진을 갖고 다녀서 아버님의 영혼이 나를 못 떠나는 것은 아닐까... 영혼은 그리워하는 사람의 품에
있다는데...
아버님은 작년 7월 8일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깊은 자책감에 빠졌다. 그것은 아버님 살아
생전에 용돈을 충분히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심으로는 개업을 하고 집을 옮기면 여유 있게 용돈을 드리려
고 작정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깊은 후회 속에 어머님께 드리는 용돈을 대폭 올려 드렸다. 그러나 돌아가신 아
버님께는 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느 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살아 생전에 한 번은 행복한 기회가 온다는데 그것이 지금인 것 같다."
평생 돈 때문에 고생만 하신 분이기에 여유있게 돈을 가지게 된 것이 그렇게 행복하신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버님이 꿈속에서 나타나 살아 생전 돈을 주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님
께 조금만 더 여유 있게 돈을 드렸더라면 아버님은 어머님같이 돈 때문에 고생한 평생 한을 풀고 행복하게 지
내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일을 못 해드린 것이다. 여유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비좁은 마음에...
그런데 아버님이 꿈속에 나타나 내 돈을 받으신 것이다. 그것도 현실과 다름없이 아주 생생하게... 처음에는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두렵기까지 했지만, 곧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속에서 내게 사랑을 행사하신 것임을 깨
달을 수 있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셔서도 사랑하는 자식의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 주시려 했던 것이다. 이제는 아
버님께 못 다한 아쉬움을 어머님께 돌리면서 그 안타까움에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버님이 바
라시는 것이 그것이기에...
악몽과 사이코 드라마
유모차를 몰고 아기 엄마가 산책을 한다. 유모차 속에는 귀여운 아기가 재롱을 떨고 있다. 갑자기 그 아기의
얼굴이 하얀 백설기(떡)로 변한다. 눈이 있는 것에는 건포도 두 개가, 코가 있는 부분에는 밤송이 한 알이, 입
부위에는 대추가 박혀서 그대로 아기의 모습을 빼닮았다. 은경, 시장기를 느껴 그 떡을 몇 점 떼어서 먹는다.
그러자 아기 엄마가 아이를 살려 놓으라고 호통을 치면서 달려든다. 은경, 엉겁결에 입속에 있는 떡을 토해서
2^34,34^3 정도 남아 있는 백설기를 원형대로 붙여 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해도 떡이 제 모습대로
맞추어지지 않는데, 2^34,34^3 가량 남아 있는 떡이 아기 울음소리를 낸다...
은경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렀다. 은경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10월
27일 오늘은 정신과 의사 이지연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다. 벌써 1년째 은경은 분석 치료를 받고 있었다. 대인공
포증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은경은 서둘러 꿈을 적었다. 이 꿈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은경과 이지연 선
생님의 만남은 오후 늦게로 잡혀 있었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지연 선생님은 은경
의 꿈을 받아들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같으면 이런 꿈은 평생 가도 못 꿀 거예요."
"이 꿈은 여태껏 꾼 꿈들 중에서 제일 무섭고 고통스런 꿈이에요. 너무 힘들어요. 선생님! 이런 꿈을 꾸고 나
면 정말 살 맛이 안 나요. 사람도 만나기 싫고..."
"은경 씨 마음속에는 엄청난 적개심이 숨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은경 씨의 표정은 너무나 맑고 순수하죠.
아마도 은경 씨는 그 적개심을 억압하려고 의식적으로 너무 애쓰고 있는 것 같군요."
"..."
"어때요, 은경 씨... 우리 좀 더 솔직해 보는 게..."
지연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아마도 은경의 용기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지연은 항상 은경에게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부딪칠 것을 촉구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대인공포증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어떻게요..."
은경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마음 속에 있는 분노, 증오심, 화를 마음껏 터뜨려 보는 거예요."
은경은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 들었다.
"그런 것 없어요. 저에겐..."
"은경 씨도 더 이상 이런 꿈에 시달리고 싶지 않죠?"
"네... 전 빨리 병을 고쳐서 남들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면 제가 하자는 대로 한 번 해보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지연은 은경을 사이코 드라마 무대로 데리고 갔다.
"은경 씨, 이것은 연극이에요. 사이코 드라마라는 말은 들어 봤겠죠?"
"네..."
"지금 은경 씨가 맡은 역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마녀의 역할이에요. 마음껏 마녀의 연기를 해보세요."
보조자아들이 지연의 지시에 따라 불쌍한 사람의 역할로 무대에 등장한다. 거지, 눈 먼 장님, 구걸하는 할머
니로 올라가서 은경에게 매달린다. 은경은 주저하다가 그들의 요구에 따라 돈은 꺼내 주는 시늉을 한다. 거지가
갑자기 벌컥 소리지른다.
"야, 너 나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내가 거진 줄 알아!"
은경은 거지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어쩔 줄 몰라 한다. 할머니도 따라서 소리를 질렀다.
"너 늙은이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엉! 내가 너한테 뭐 빚졌냐!"
장님은 볼 수 없는 눈으로 더듬거리며 은경의 멱살을 쥐었다.
"너 내가 앞 못본다고 괄세하는 거야? 엉!"
이때 지연이 무대 밖에서 소리쳤다.
"이것은 '분노 표현 기법'이에요. 은경 씨가 악한 짓을 하지 않는 한 저들은 계속 은경 씨에게 화를 낼 거예
요."
은경은 머뭇머뭇하다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화를 한 번 내본다. 은경이 화를 내자 그들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은경은 점차 화를 고조시키더니 잔인한 장면을 능숙하게 잘 해낸다. 구걸하는 거지를 내쫓기도 하고, 할머니를
때려 눕히기도 한다. 보조자아들은 은경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면서도 고마워한다.
한 여자가 요람을 끌고 등장한다. 은경, 주저하다가 요람에 있는 아기를 뒤집어 버린다. 여자는 깜짝 노라다
가 이내 박수를 친다. 지연, 박수를 치며 은경에게 올라간다. 은경은 부끄러워하나 상기된 얼굴이다.
"재밌네요, 선생님! 그러고 보니 저도 참 잔인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이 잔인하죠. 단지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감출 뿐이지... 이 연극을 잘 이용하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요?"
"은경 씨의 꿈을 무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거죠. 할 수 있겠죠?:
은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지연은 웃으며 은경의 손은 꼭 잡았다.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이미 한 거예요. 굳이 그 지저분한 연기를 할 필요는 없죠. 수고하셨어요. 앞으로는 좀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은경의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문득 앞으로는 그런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꿀 때
의과대학 본과 일학년에 다시 들어감. 나는 다시 공부해야 하는 듯. 공부를 아무리 해도 학점을 딸 수 없는
듯. 나는 앞자리에 가서 앉음. 예전 같은 극심한 괴로움은 없으나 그래도 여전히 괴로운 듯. 앞자리는 칠판이
잘 안 보여 나는 뒤로 감. 뒤편에 자리가 있음. 앉으니 옆에 앉은 후비가 주저하다가 나에게 자리가 있다고 함.
그러나 앉을 수 있는 듯. 한 친구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아니냐고 함. 나는 다시 생각해 보니 열심히 하면
올라갈 길이 보임. 진급할 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님.
캄캄할 정도로 답답해 하다가 눈을 떠보니 꿈이다. 꿈속에서와 같이 극심한 괴로움은 없었으나 정말 괴로웠
다. 본과 일학년 시절이면 내가 낙제와 휴학을 연거푸 했던 시절이다.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괴로운 시절은 없
었으리라. 의과대학 공부에 시달리는 꿈은 전문의가 되고 개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빚쟁이처럼 꼬박꼬박 되풀
이해서 찾아오곤 한다. 이는 나만이 그런 것은 아닌 듯 주위 의사분들도 괴로웠던 학창 시절의 꿈을 간간이 꾼
다고 한다. 그만큼 의과대학 시절은 스트레스가 많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스트레스 외에도 꿈은 나
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통 꿈은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하고, 특히 반복해서 꾸는 꿈은 의식에서 충분히 무의식의 메시지를 받아들
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아마도 그 꿈은 내가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좀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의과대학 시절 나는 한계에의 도전을 무수히 강요받았으니까...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좀더 현실감을 갖고 살아가기를 촉구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뒤늦은
사춘기로 인해 욕심 많게 이상을 추구하다가 많은 에너지를 흩뿌렸으니까... 앞으로의 인생에서 또다시 본과 일
학년 때와 같은 쓰라림을 맛보지 않으려면 이 반복되는 학창시절의 꿈이 떠올려 주는 메시지를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 같다.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꾸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다른 꿈보다도 특히 유의해야 할 중요한 꿈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 꿈의 의미가 아직 의식에 의해서 충분히 고려되고 소화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식되어지기를 촉구하
는 뜻에서 꿈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원인이 되는 사건을 흔히 반복적으로 꿈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전쟁터에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자주 전쟁 꿈을 꾼다든가, 뱀에 물린 사람이 그것을 꿈에서 여러 번 겪는다든
가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런 경우는 그 꿈의 주제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꼭 무의식적인 문제를 깨닫도
록 촉구하는 꿈이라고 하기보다는,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꿈이어서 그 꿈의 주관적인 의미가 덜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 이부영 저, 일조각, 1984, p. 184.
4장 사랑의 본능, 생태적 본능
생태적 본능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는 덜 중요한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의심한다.
-프로이트
7, 8세 즈음이라고 기억된다. 그보다 몇 살 위였을 때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으니까... 그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 누워서 마구 열변을 토했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사랑 타령이 많냐고. 유행가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왜 하나같이 사랑, 사랑뿐이냐,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사랑 이야기들만 하고 있는데 쑥스럽
지도 않느냐, 할 일도 많은 세상에 쓸모없이 느껴진다고. 나의 열변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때 내가 느낀 것 이상으로 잘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 또한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 의문은 자연스레 풀렸다. 아마 7, 8세의 어린 시
절을 지나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랑과 성욕이라는 강한 본능을 무시하고 감히 맞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
리라. 나이 들면서는 솟아오르는 성욕을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사랑'만큼은 순수하게 지조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20대가 저물 때까지 '사랑'은 정말 한 사람에게만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으
니 말이다. 이런 생각은 그 시절의 나 같은 젊은이만의 생각은 아니다. 성적으로 개방됐다는 요즘의 청춘 남녀
들 또한 '사랑'이라는 말만은 무척 아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도 점차 순수함을 상실해 가고 있고, 또 성적 파트너가 바뀌거나 많아지면서 점점 변질돼간
다. '사랑'이란 말이 점점 '욕정'을 표현하는 말로 변해 가는 것이다. 언젠가 이태원에서 예쁜 여자 후배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지나가는 어느 젊은 외국인이 후배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I love you!'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
었다. 그의 얼굴은 탐욕스런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예스'라고 한마디만 하면 내가 옆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당장이라도 채갈 것만 같았다. 마치 후배를 진실로 사랑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의 눈빛은 누가 봐도 욕정이지 'love'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랑과 욕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니, 정말 차이가 있는 걸까? 나는 그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 생각한다. 사랑과 욕정의 차이는 본능에서부터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이 행동을 형
성한다고 보았다. 본능(instinct)은 선천적으로 미리 만들어진 잠재력으로, 출생하면서부터 나타나는 것이라 했
다. 그른 이 본능을 리비도 혹은 에로스(eros)와 공격성(agression)으로 구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두 본능 외에도 인간에게는 생명을 지키고 영위하고 이어가기 위한 무수한 본능이 있을 것이다.
여자 몸 속에 사정된 5억 개의 정자가 난자를 향해 달려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난자가 그 중에 하나를 받아들
이는 일대 일의 접합 순간도, 생명이 태어나는 가장 극적이고 기본적인 순간으로 우리 삶의 강한 본능으로 자
리잡고 있다. 즉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을 선택해 그에게만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다. 그리고 정자도 가장 뛰어난 난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난자도 5억 개의 정자 중에 가장 뛰어난 정자와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이 인생에서의 사랑 역시 결국 자기가 선택해서 받아들인 차선에 만족해야 하고
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하나만의 사랑은 `8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되는 것으로, 나는 이
것을 생명이 태어날 때의 본능이란 의미에서 생태적 본능이라 부른다.
생태적 본능은 난자가 정자에게 문을 열 듯 굳게 닫힌 자기 마음의 문을 한 사람에게 여는 것이다. 그 안에
는 둘이 하나가 되는 지극한 환희와 아울러 잘못되면 심각하게 상처를 입는 아픔도 있다. 생태적 본능은 심장
에 꽂히는 큐피드의 화살처럼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를 자기의 심장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
가 자기를 배신할 경우에는 심장이 찢겨나가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래서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확인하려면 그가 나를 얼마나 따뜻하게 대하고, 나의 아픔을 얼마나 함께 아파하는지를 관차하면 알 수 있다.
내가 상대의 심장 가까이에 있으니 상대는 나의 조그마한 보살핌만으로도 너무 감격하고, 반대로 사소한 소
홀함이나 외면에도 너무나 아파하고 실망하는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집착하고 항상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
고 조그마한 일에도 의심하고 토라진다고 해서 상대를 편집적인 성향이라 생각하지만 말고, 상대가 자기를 심
장 가까이에 두고 있다는 점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 본능에 따르는 사랑은 상대에게 심장을 맡기고 목숨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현실적
인 것으로 크게 좌우되지는 않는다. 상대가 나에게 모든 것을 쏟고 기울일 때, 또 내가 상대에게 모든 것을 쏟
고 기울일 때 바로 생태적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서로 소중하고 고귀하게 그 사랑을 아끼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정자와 난자가 딱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것과 같이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내가 생태적 본능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개인적인 경험과 임상에서의 관찰 때문이었다. 현대 사회가 아무리
성적으로 개방되고 인스턴트 사랑이 난무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마음에 부합되는 것은 하나만
의 사랑이었다. 주위를 돌아봐도 그렇고 또 나를 봐도 하나만의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좌절하고 집착했지, 수많
은 사랑에 집착하며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애인이 나이트 클럽에 가서 부킹을 하겠다는 농담 한마디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강박증
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 무수한 여자 남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연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
배반의 아픔을 지레 겁먹어 차라리 먼저 떠나 버리는 젊은이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바로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만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려 한다는 생태적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생태적 본능
은 남녀의 사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본능이다. 사랑의 아픔, 외도의 상처, 배신의 분노, 불신의 아픔 등은 모두
이 생태적 본능이 상처를 입어 깊고도 길게 또 불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근거 없는 의심 또한 끊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생태적 본능이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본능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생태적
본능은 한 사람이 정리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으로 옮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정리가 되기 이전에는 아무리 많은
이성을 만난다고 해도 본능적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무수히 하고 또 아무리 많은 섹스를 한다
고 해도 정작 그 사람 마음에 간직되어 있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을 향한 생태적 본능은
정말 상대가 내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을 때 비로소 정리된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선택하지 않고 내
앞에서 분명히 다른 사람을 선택했을 때, 그것도 몸과 영혼, 현실까지 쏠리면서 선택했을 때는 그 사람을 향한
생태적 본능이 정리되고 그 본능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K는 두 아이를 두고 부인과 이혼했다. 둘은 아이를 각각 한 명씩 맡아 키우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이혼하고
나니 K는 후회가 되어 재결합하자고 부인을 쫓아다녔다. 아이 때문에라도 같이 살자고 애걸복걸을 했다. 그러
나 부인은 재결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말을 듣지 않자 K는 부인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부인은 K에
게 '나에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 그 남자와 같이 잠까지 잤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K는 부인에게 창녀라
고 욕을 퍼붓고 나서 그후 일체 연락이 없었다.
부인이 얼마 후 아이가 보고 싶어서 K의 집에 전화를 했으나 부인의 목소리임을 확인하면 그냥 끊곤 했다.
그리고 K또한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부인은 그런 남자하고는 이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츰 이혼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너무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돌린 그 둘 사
이를 예전으로 되돌릴 길은 없었다.
그래서 자기 짝으로 상대를 선택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순결과 믿음을 지키는 것이 좋다. 그것은 서로가
원하고 서로에게 내재된 생태적 본능을 지극히 만족시켜 주면서 더욱 지속적이고 안전된 사랑과 현실, 미래를
보장해 줄 테니 말이다. 내가 저 사람을 외면하고 상처를 주지 않는 한 나는 저 사람에게 항상 소중한 존재로
남을 테니 말이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를 버린다면 상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
니 내가 최선을 다 하는 이상, 상대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먹고 살 필요는 없다. 또 설령 내가 일시
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고 해도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필요는 없다. 그
것은 상대의 일차적인 본능에 너무나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테스의 고지식한 고백으로
엔젤 클레어가 떠나가듯이... 그래서 바람피우는 것보다 바람이 밝혀지는 것이 더 나쁘다고 하지 않던가.
생태적 본능을 저버리고 다른 본능적 충족만 꾀하는 인생은 편안해질 수가 없다. 아버지가 바람피우는 것을
보고 자란 딸은 커서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여러 남자를 동시에 사귀지만 그녀를 따라 다니는
것은 공허감과 외로움이었다. 아무리 다채롭게 남자를 사귀어도 그들은 그녀를 외로움에서 구해 주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기대고 의지할 한 사람이 필요한데, 그 한 사람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으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삶은 편안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는 무수한 유혹과 자극으로 선택해도 여기저기 더 나은 선택의 기회가 널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
의 본성에서 가장 강한 것은 생명을 이루는 일대 일의 사랑이다. 이것을 포기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는 아
무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일생을 외롭게 방황하다 끝낼 수도 있다. 짝을 만나지 못해 생명을 이루지 못하고
빛을 잃은 정자와 난자처럼...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의 상처
"선생님께서 그러셨죠. 선생님은 아직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
마음을 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지금까지 똑 같은 병을 앓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병이 삶을 얼마나 외롭고 삭막하고 허무하게 만드는지도 잘 압니다. 전, 선생님이 그 병을 꼭 치료해서 누군가
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상대가 비록 제가 아니라도 꼭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도록, 선
생님의 그 병만은 꼭 치료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드릴께요.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난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
다'라고 느끼신다면 그것처럼 비참하고 슬픈 삶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는 저도 선생님 못지않은 중증의 환자였으니까요...
종규는 편지를 받아들고 깊은 상념에 빠졌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안개처럼 스쳐 갔다. 종규는 지금 여러 여
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 동안 자기와 인연이 닿는 여자라면 닥치는 대로 만나왔던 것이다.그렇게 물불 가리지
않고 만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 구차한 변명이고, 선천적인 바람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종규는 새로 사귄 여자 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럽기까지 하면서 어떤 전율이 스쳐 가는 것이 느껴
졌다. 그녀의 말이 종규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종규는 우울하게 자신을 돌아봤다. 왜 나는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여러 여자들을 만나는 걸까? 육체를 탐해서? 그건 분명 아니다. 서로 원하
지 않거나 상대방이 원치 않을 경우 같이 잔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녀들을 만나면서 무엇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겠다고 할 때는 언제라도 흔쾌히 보내 줬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도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왜...
종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종규에게 의 모습이 떠올랐다. 적극적인 듯하면서도
소극적이고, 외향적인 것 같으면서도 내성적이며 발랄한 이면에 깊은 슬픔을 간직한 그녀! 그녀 또한 외형적으
로는 종규 못지않은 바람둥이였다. 종규 이외에 여러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한 남자라도 더 만나기 위해 종규
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규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원망의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랬다. 어쩌면
서로 닮은 꼴이었기에 상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런 편지를 받은 것이다. 종
규는 비로소 그녀와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봤다. 그녀와 자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왜 우리들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까? 선천적으로 바람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선천적인 바람기
때문이라면 살아 생전에 구원받을 길은 영영 없지 않은가? 한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사회적으
로 비난받을 사랑만 되풀이하다가 일생을 외롭게 하직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원인은 무엇일까?
종규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첫사랑의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녀와 종규는 과거에 쓰라린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한 사람만을 열렬히 사랑하다가 그 상대가 떠나 버리자 오랜 세월 동안 지긋지긋
하게 고통받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고통속에서 외로워하며 그 사람만 그리워하며 보내
던 시절! 바로 그 오랜 고통이 종규나 그녀를 바람둥이로 만든 것이다. 다시는 사랑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
에...
종규는 얼마 전에 본 〈데미지〉란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상처받은 사람은 위험해요.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견뎌 내니까요."
그때 종규는 그 말을 이렇게 들었다.
"상처받은 사람은 위험해요.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짓이라도 하니까요."
후에 신문에 실린 그 영화의 광고 카피를 보고 자기가 잘못 봤다는 사실을 안 종규는 왜 자기가 잘못 봤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상처 때문에 지금 어떤 짓이라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득 종규는 최근에 본
〈볼멸의 사랑〉이라는 베토벤의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를 보면서 종규는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영화에서 베토벤은 사랑하는 한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영혼, 나의 분신인 당신..."
아마도 종규의 그 넘치는 눈물 속에는 그렇게 사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회한과 베토벤에 대한 부러움이 복
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종규는 그 편지를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다시 한 여자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여인이 나의 사랑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까? 그녀
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자기가 아픈 만큼 치료할 수 있는 게 마음의 상처니까...
이별의 파이팅
인연이란 정말 무섭더군요
안녕하세요. 벌써 엽서 아닌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게 되었군요. 누군가에게 펜을 들어 지금의 제 심정을 털
어놓고 작은 위로라도 받을까 해서 이렇게 사연을 적어봅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별
을 경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더군요. 지금은 혼자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별로 예쁘지는 않았지만 나를 생각해 주던 그 마음만은 너무도
아름다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친구가 되고 애인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었지요. 누군가
나를 믿고 생각해 준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들의 반대로 힘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
니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제게 입영 영장이 나오기 전까
지는요. 그래도 전 26개월이 우리 사이를 갈라 놓지 못할 거라고 믿었죠.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제 곁에 없습니다. 나의 믿음이 무참히 깨져 버렸더군요. 둘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 힘든
것이지만 나에게는 너무 쉽게 다가왔고, 또 너무 쉽게 멀어졌습니다. 왜 나를 떠났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만
한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한 동안 그 일로 힘들어하며 지내다가 그 친구를 잊기로 하고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잊으려는 몸부림이 더욱 힘들더군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작은아버지의 소개로 어느 사무실에 이력서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
런데 알고 봤더니 그 사무실에 그녀의 언니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무슨 기가 막힌 인연입니까? 겨우 잊는다 싶
었는데 이렇게 그녀와 인연이 닿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 인연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더군요. 어떻
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좋은 해결책이 없을까요? 누군가와 터놓고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상대가 나에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시원하군요. 먼 훗날 이 일들이 추억으로 남겠지요? 그땐 그녀와
의 만남이 좋은 추억으로 생각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주 크게 파이팅이라고 외쳐 주시겠어요?
글로 써서 푸십시오
저는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글 치료라는 것을 만들어 볼 작정입니다. 물론 정신과 치료 방법 중에 시 치료라
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생각을 끝없이 수필이나 소설로 쓰는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요. 글
을 쓰면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많이 비우고 정리합니다. 글에 모든 것을 토해 내면 구태여 마음에 담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가 이 치료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제가 바로 글을 씀으로써 스트레스를 풀고 제 자신을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이미 자기 마음의 고통을 글을 씀으로써 많이 해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의
답도 귀하는 알고 있고, 이미 행동에 옮기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의식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적이나
본능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과거의 그분을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
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게 간사해서 자기 암시 속에 또다시 헷갈리는 고통으로 스스로 뛰어들 수도 있
으니 간단히 정리해 보도록 하죠.
사랑이란 서로 기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은 사람은 서로 기대는 두 사람을 의미
한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사랑을 뜻하는 글자라고 봅니다. 사람에게는 기대고 의지할 만한 한 사람이 필요
한 것이지요. 결국 평생에 의지할 상대가 자라면서는 부모님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평생에 의지할 한 명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겠지요. 이 사람 '人'자는 두 획이 서로 에게 기울어져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한쪽
이 빠지면 넘어지게 됩니다. 평생 기대야 할 사람이 떠나 버려 넘어졌을 때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은 어마어마합
니다. 그가 다시 일어서지 않는 한 그는 사람 구실을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을
만한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바로 사랑이죠.
그러나 점점 믿을 만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물론이고 10여 년을
같이 살아도 배신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요즘 흔한 외도가 그렇겠지요. 믿고 오랜 시간 같이 지냈는데 어
느 날 상대방이 자기를 떠났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받는 고통은 귀하도 겪었듯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것은 마
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받는 고통과 유사하지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점점 더 어
려워지고 심지어는 불가능하게까지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어 심신이 약해졌을 때 배신당해 넘어지면 다시 일어
서기가 힘드니까요.
아마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연히 혼자가 되고 또 죽으면 각자 자기 길을 가나 봅니다. 홀로 자기 길
을 간다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니, 어차피 인생이란 궁극적으로는 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러나 젊
었을 때 도인인 체하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애늙은이 짓이겠죠. 젊음의 특권은 바로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젊음이 있으면 상대가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젊었으니까 사랑
도 할 수 있고 기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사랑이라고 해도 믿고 선택한 사람이 떠나가는 경우에는 정말 혼이 빠져 나갈 것같이 아
픕니다. 그 아픔은 젊으나 늙으나 다 똑 같은 영혼의 아픔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빠져 나갔을 때 제일 먼저
겪는 고통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히는 것입니다. 의지할 대상도 없는데다가 넘어지기까지 해서 정신이 없는
것이지요.
거기에 또 상대로부터 차가운 무시나 모멸, 경멸을 받게 되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넘어
진 채 등을 짓밟히는 것이지요. 그 고통이 크다 보니 젊은 사람들 사이에 차일 것 같으면 먼저 차라는 말도 나
왔을 것입니다. 차는 것이 아무 준비 없이 넘어지는 것보다는 충격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넘어진 사람은 그
때부터 홀로 일어서려는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 홀로서기가 너무 힘들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상대를 급히
구하기도 합니다. 결혼한 사람들의 '맞바람'도 그 일종이지요.
그러나 귀하는 아무 도움 없이 홀로서기를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술이나 친구들의 도움은 있었겠지만 무분
별하게 다른 여자들을 사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마음의 고통은 더 컸겠지요. 비틀거리다가 다시 넘어지
고 하는 고통을 무수히 겪었을 테니까요.
숱한 마음의 고통을 겪고 홀로 서면 이제 세상은 달라집니다. 그녀에게 의지했을 때 그녀가 없다는 사실은상
상만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홀로 섰을 때 그녀가 없는 상황은 그냥 평범한 보통의 현실입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의지하지도, 의지한 필요도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그녀는 이제 수많은 여자들 중의
한 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그녀를 다시 선택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죽음 같은 고통을 안겨 준 그녀를 다시 선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에게 다시 기댄다는 것은
또다시 그 지옥 같은 고통을 각오해야 하니까요. 보통 연인들이 배반당했을 때 받는 고통은 영혼의 고통입니다.
그런 고통을 진하게 한 번 받게 되면 나중에 다시 되돌릴 기회가 왔다고 해서 냉큼 다시 선택하게 되지가 않습
니다. 바로 영혼이, 내 무의식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혼 사유 중의 일 순위가 배우자의 바람이고,
떠난 사람이 뒤늦게 다시 사랑을 회복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상대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꾸 자기를 피하고 외면하니까요. 바로 다시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하는 사무실에서 언니를 통해 그녀와의 인연을 다시 발견했을 때 곧 담담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추억과 파이팅을 외칠 정도로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떠나 버림으로써 많은 아픔의 시간을 보냈
지만, 그 아픔을 통해 홀로서기를 하면서 많이 의연해진 것이지요. 이제 귀하에게 남겨진 것은 새로운 선택입니
다. 이미 하나의 사랑은 정리가 된 것이니까요. 나의 영혼이 그리워하는 사람의 품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부여잡
고 있기만 한다면 귀하의 마음은 항상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정리를 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금 당장은 홀로 된 외로움만이 주위를 맴돌겠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가운데서 더욱 신뢰하고 사
랑할 만한 새로운 대상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녀와의 추억만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순수와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기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테니까요. 비록 미숙하고 어리석기는 해도 열정만은 아무 꾸밈이나 사심이 없는 사랑 그 자체였
을 테니까요. 아마도 앞으로 다시 그때같이 사랑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한 번 아픔을 겪은 사람이 예전같
이 순수해지기란 아주 힘든 것이니까요. 그래서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아직 젊습니다. 그리고 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분으로 여겨집니다. 아마 귀
하는 다시 사랑을 하게 되면 좀더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힘들긴 하겠지만 다시
사람을 믿고 사랑을 해나간다면 이전의 순수했던 열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하가 앞날에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귀하를 위해 아주 크게 파이팅이라고 외쳐 드리겠습니다. 파이팅!
추신: 참고로 제가 사랑을 잃었을 때마다 찾았던 법구경의 한 구절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행여 또다시 마음의
고통이 진하게 떠오를 때 참고하도록 하세요. 어차피 사랑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도를 닦는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느니...
이 목숨 태어남은
한 조각 뜬 구름 일어남이오
이 목숨 스러짐은
한 조각 뜬구름 사라짐이라
뜬구름 그 자체가 원래 없던 것
인생의 오고 감도 그와 같으니...
아, 아, 이 몸은 오래지 않아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
정신이 한 번 몸을 떠나면
뼈만이 땅에 버려지리라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쉼없이 타고 있는데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의지하랴
이 세상 모든 것은 물거품인데...
만약에 신이 있다면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 있을 거야
언젠가 사이코 드라마에서 관객 몇 명을 차례로 무대 위에 세우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다섯 번 던
진 적이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관객들은 처음에는 직장이니 학교니 돈이니 이야기를 꺼내지만 똑같은 질문을 다섯 번쯤 진지하게 물으면 대
개는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것을 초월한 순수하고 환희로운 멋진 사랑, 평생 믿고 의지
하면 한 곳을 같이 바라보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랑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걸까? 내 생각으로는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
렸을 때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애들은 왜 순수한 걸까? 그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무한히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향한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데 비좁은 현실에
끼여들면서 순수를 더럽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점점 선택할 현실의 폭이 좁아지면서 이런 순수함은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장래를 걱정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이상과 현실, 순수와 타협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현실에 적응하
게 된다. 장년기, 노년기로 접어들어 힘도 더 빠지고 현실도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면 이제는 자기가 움켜쥔 것
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늙으면 돈이 있어야 된다든지, 늙을수록 더 탐욕스러워지는 것은 자기가 가진 능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늙어서 더 이상 삶을 선택할 수가 없는데 돈이라도 없으면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순수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현실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에너지가 강해,
나이가 들어서도 많은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빌 게이츠나 스필버그 같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도 어린애 같은 순수한 꿈을 현실에서 과감히 실현할 수 있는 것도, 나이 들어서도 지니고 있는 엄청난 현실적
인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나이가 들고 약해져서 더 이상 순수와 꿈을 추구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슴속에는 힘이
팔팔 넘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소망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순수에 대한 꿈, 모
든 것을 초월해 순수하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소망일 것이다.
이 소망을 멋지게 형상화시켜 공상으로나마 충족해 준 영화가 있으니, 바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는
〈비포 선라이즈〉이다. 이 영화는 제목 자체가 그렇듯이 태양이 뜨기 전에 모든 줄거리는 끝나고 만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하룻밤 데이트를 하고 다음남 고단하게 헤어지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그러나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분) 두 사람이 하룻밤의 만남을 소중하게 가꾸는 모습은 참으
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순수하게 서로를 소중히 하며 가까워지는
모습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계산이 앞서고 사랑과 순수가 뒷전으로 밀려난 시대에, 그들의 사랑은 한여름의
청량제처럼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고 한겨울의 차 한잔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그들은 하룻밤 짧은 사랑을 한 다음, 서로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6개월 후에 만나자며 각자 차를 탄다. 각
자 차 안에서 간밤의 피로를 못 이겨 꾸벅꾸벅 조는 모습은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현실 앞에 겸허
한 젊은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젊은이들의 사랑이지만, 그들이 상대를 대하는 모습이나 주고
받는 대화는 상당히 성숙한 면모를 보여 준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엔 없어!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 있을 거야!"
이런 대사는 많은 정신적 체험이 없었다면 나오기 힘든 대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들은 이미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만큼 감전적으로 성숙한 에너지가 있었
기에 자신있게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같은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젊은이들
은 줄리 델피 같은 미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탓하기 이전에, 강하고 성숙한 정신력을 배양하는 것부터 힘써
야 할 것이다.
운명의 선택을 주저하는 여자들의 심리
운명의 상대란 자기가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상대이다. 일단 선택을 했으면 재고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충실해야 운명적으로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성혼 선언문에 '비가 오자 눈이 오나 가난하나 부유하나 건강하나 병들거나 항상 변함없이 사랑하겠는가?'라
고 묻는 대목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에 대한 각오를 묻는 것이리라.
요즈음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품고, 더 나아가 선택하는 것마저 주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문명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운명을 거역했을 때 인간이 치러
야 할 대가는 끝없는 방황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운명의 남자를 거부하는 독신파
요즘 처녀들의 결혼 시기가 자꾸 늦어지고 있다. 전에는 혼기를 놓치면 노처녀로 늙을 수 있다 하여 가장 예
쁘고 싱싱할 때 서둘러서 결혼했다. 그러나 요즘엔 빨리 시집가서 남자 시중 들고 애 키우고 고부 갈등에 시달
릴 필요 없다며, 하고 싶은 일 충분히 하고 가겠다는 것이다. 남자가 초조해서 결혼을 서두르면 여자는 기다릴
테면 기다리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고 한다. 이런 심리가 조금 더 강해지면 독신으로까
지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 사회가 지니는 강한 남녀 불평등에 대한 불만 등 여러 이유로 독신을 주장하는 여자들이 많다.
심지어 어떤 인텔리 여자들은 우리나라 남자들과의 결혼은 답답하고 고리타분해서 싫다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도 사랑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애인에 대해서는 인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들은
평생 한 남자를 믿고 의지하며 기대는 것보다는 자기 일을 믿고 의지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중에는 마음의
문을 열고 한 남자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리거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며 자신을 배신하
면 받게 될 상처의 고통이 두려워서 아예 처음부터 운명의 남자를 거부하기도 한다.
2. 운명의 날인 결혼식 직전에 도망가고 싶어하는 변덕파
큐피드의 화살이 꽂힌 하트 모양의 과녁은 무엇을 상징할까? 분명히 성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위의 불
룩한 두 개는 엉덩이고 아래의 뾰족한 끝은 꼬추일까? 그러나 그것은 비약이고, 하트 모양은 말 그대로 우리의
심장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이라는 화살이 나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의 심장
을 상대방에게 맡긴다는 뜻도 된다. 상대방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을 평생 맹세하고 살아야 하는 결혼은 커다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인들이 결혼을 스트레스 순위 7위(Hlomes & Rahe, 1967, 스트레스 43개 중에서)로, 한국인들이 12위(홍
강의, 정도언, 1982)로 순꼽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혼식 직전에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다음 세 가
지 경우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결혼 자체가 주는 중압감에서 비롯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도망가려는 경우이고, 둘째, 아직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을 자기 심장으로 받아들일 준비가3 안 된 경우, 셋째, 영화〈졸업〉에서와 같이 원치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주위의 분위기 때문에, 특히 우리나라처럼 부모나 친지들이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몰
고가는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경우.
3.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남편이 과연 운명의 남자인지 의심하는 갈등파
우리의 결혼 문화가 지니는 큰 문제점은, 아직 결혼할 만큼 정신적으로 독립하거나 성숙하지 않았는데 결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을 책임지고 끌고 나가려면 갖추어야 할 정신적인 자질이 많
은데, 그러한 것을 갖추려고 하기보다는 혼수감만 부지런히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하면 둘이 좋을 때는 소꿉 장난 같아 별 문제 없지만, 정작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며 탓하고 원망하게 된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은 아버지같이 보든 것을 믿고 용서하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기를 바라서인데 너는 왜 그러지 못하느냐...
그렇게 티격태격 오랫동안 싸우다 보면 자연히 상대방에게 미움의 감정이 싹트게 되고, 이사람이 정말 나의
상대로 적합한지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나의 장단점 모두를 이해하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아
버지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꿈꾸게 된다. 아마도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갈등파들
은 아빠 품에서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파파걸들이 많지 않을까.
저 몰래 결혼한 남자를 포기할 수 없어요
결혼식을 형식일 뿐이잖아요
저 혼자서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선생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2년 간 교제하고 서로 결혼까지 약속한 남
자가 있었어요. 저는 당장 결혼할 수 없는 형편인데, 그 사람은 또 빨리 결혼을 해야 할 입장이었어요.
그러다가 며칠 전에 그 사람이 저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한 걸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는 배
신감을 느꼈지만 차츰 제가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락을 해서 우리는 그냥 예전처럼 다시 만나고 있어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
고, 또 그까짓 형식적인 결혼식이 뭔데 만나서는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도저히 그 사
람을 포기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안타깝군요. 순간의 선택을 잘못해 두고두고 고뇌를 짊어지게 됐으니... 처음 귀하가 결혼할 수 없는 형편이라
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준 딱 감고 결혼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귀하는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자기 인생을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당장 결혼할
수 없다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시간을 끌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
과 결혼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지금쯤 귀하는 다시 한 번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절
대 그 남자를 놓치지 않으리라 후회를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되살려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요즘 두 가지 일로 크게 상심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 아버님이 돌라가시고 장모님이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두 분에 대해 제가 좀더 적절하게 판단하고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두 분이 앓고
있는 순간에 좀더 빠르게 판단하고 대처했더라면 두 분을 좀더 오랫동안 사시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사
무치곤 합니다. 순간의 판단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지요. 지금 같아서는 한 열흘만 시간
을 되돌린다면 아버님과 장모님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을 돌릴 길이 없군요.
그 후회 때문에 저는 밤마다 꿈속에서 아버님을 만나곤 합니다. 그러나 막막한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고, 지나
간 시간은 되돌릴 방법이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번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내 아내
나 어머니, 주위 사람, 자식들에 대한 판단에서는 다시는 실기하지 말자고요.
귀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한, 그 남자를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전의 귀하 앞에 있던 그가 아니니까요. 지금 귀하가 만나고 있
는 그는 꿈속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꿈이 깨고 나면 자기 옆에서는 사라질 사람이지요. 현실에
서는 귀하 곁에 없을 테니까요. 마치 제가 꿈속에서 아버님을 자주 만나듯이 말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혀 무리하게 되돌리려고 하면 노이로제나 정신병, 지독한 현실적인 고통에 빠지게 됩니
다. 악마의 시험에 들거나 유령하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요. 아무리 귀하가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막막한 현실 앞의 무기력한 몸부림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귀하는 앞으로 또다시 그런 기회
를 맞을 때 실기하지 않도록, 다시는 전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용기 있고 결단성 있고 주의 깊게
미래를 맞는 것이 주요하지 않을까요.
여대생과 남고생의 사랑
딸아이가 연하의 남고생과 만나고 있습니다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인 딸을 둔 어머니입니다. 저는 지금 딸아이의 이성 문제로 많은 고민과 갈 등을 겪고
있습니다
쇼핑을 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아주머니와 자녀의 교육 문제로 대화를 하다가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었습니
다. 그 아주머니의 아들은 중3인데 학원에 아니며 과외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딸의 이야기를 듣더니 과외 지도
를 부탁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리지만 남학생이라 딸 가진 입장에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딸도 과외 지도
를 내키지 않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이 중3이지만 막내라 아직 어리다며 자꾸 부탁을
했습니다. 결국 10개월 정도 과외 지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공부하다가 키스도 하고 서로 편지도 주고
받는 것이었어요. 딸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썼고, 서로 결혼까지 약속을 했더군요. 지금 현재 그
남학생은 고1이 되었고, 딸도 과외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를 속이면서 아직까지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으로 편지도 써보고 야단도 치고 납득이 가도록 이야기를 해도 딸의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저
는 자식들에게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사람이 되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커다란 실망만 안겨 주는군요.
저는 요즘 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고 싶은 의욕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부모는 어떠한 고
생이라도 보람을 느끼며 살아야 할 텐데, 공부를 떠나서라도 올바른 사람을 만들어야 할 텐데 제 가슴에 큰 실
망만 안겨 줍니다.
고1과 대학 2년생, 네 살 연상인 딸과 아직 판단력이 흐린 고등학생의 관계를 보면 좀더 생각할 수 있는 딸
아이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
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발 딸아이의 마음을 돌려 주세요. 그리고 아직 아이 아버지는 이 사실을
모르는데 알려야 하나요?
정열만큼 간사한 것도 없습니다
사연을 읽고 만일 제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딸아이는 지금 일곱 살인데 그야
말로 금이야 옥이야지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엽고 예쁜 딸이 만일 대학 2학년 때 고1 남학생을 사랑한다면... 전 일단 제가 딸을 어떻
게 키웠는가를 생각할 것 같습니다. 딸아이가 그렇게 선택한 데는 제 교육의 영향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는 일단 딸아이를 믿을 것 같습니다. 제 교육이 틀리지 않았다면 딸아이가 섣불리 충동적으로 선틱하지는 않
았을 테니까요.
딸아이가 만일 유부만을 사랑하고 불가능한 사랑으로 돌진한다면... 그래도 저는 딸아이를 믿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당하는 순간에는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막막하겠지만 저는 자식을 믿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딸아이가 불가능한 사랑으로 뛰어들어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면...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면... 그래도 저는 딸아이를 믿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키운 게 아버지인 저 자신과 제가 책임져야 하
는 아내니까요.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으로 돌진했을 때 딸아이가 헤쳐 가야 할 현실은 어떠한 것일까요? 아마도 만
만치 않은 어려움의 소용돌이일 것입니다. 그때 제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딸아이가 선택한 만
큼 선택에 책임을 지게 내버려 둘 것 같습니다. 대학 2학년생이 인생을 가볍게 보고 한 짓이 아닐테니까요.
딸아이가 고통 속에서 저에게 손을 내밀고 구해 달라고 요청하면 그때는 기꺼이 딸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구
덩이 속에라도 뛰어들겠지만, 딸아이가 구원을 요청해 오지 않는다면 저는 딸아이를 하염없이 내버려 둘 것 같
습니다. 혼자 해결하도록 말입 니다. 지금 막막하게 보이고 끝이 안 보이지만 그 칠혹 같은 어둠 속에 또 다른
빛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내버려 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저대로 제 일을 열심히 하고
딸에 대한 사랑도 변함없이 간직한 채 말입니다.
지금 어머님의 글에는 다른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딸아이가 무조건 그 남자아이와 관계를 끊고 어머님 뜻대
로 나아가는 것만이 정답이고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면 사랑도 거두고 자신
도 죽어 버리겠다고 가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열은 강압으로 가라앉지 않습니다. 강압적으로 가라앉힌 정열은 어떤 식으로든지 대가를 치르고 맙
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 오필리어의 정신병, 자포자기로 죽음으로 돌진하는 삶 등은 모두 정열이 억지로
꺾였을 때 초래되는 비극적인 결과들입니다. 물론 강압을 했을 때 부모 뜻대로 잘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정열을 쉽게 포기한 사람은 평생 부모 눈치나 남의
눈치만 보면서 사니까요.
만일 저라면 일단 따님을 내버려 두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려 보겠습니다. 정열만큼 간사한 것도 없으니까요.
연인들의 맹세는 하늘을 뚫고 바다를 가르고 산을 무너뜨리지만 그들은 한 번의 실망에, 소홀함에, 비웃음에,
의심에 쉽게 그 맹세를 저버리고 방황합니다. 제 마음이 정 불안하면 딸아이에게 그 학생이 성인이 되어 장래
를 정말로 약속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말 것을 요구하고,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면 피임이라도 확실하게 하라고 약속받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고집을 피운 딸아이에게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말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겠지요. 만일 제가 어머님이라면 굳이 딸아이를
위해 쉬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 또한 딸아이가 짊어지고 헤쳐 가야 할 현실이니까요. 딸아이가 자신의 정열
에 당당하다면 정열을 현실화시키는 데도 당당히 어려움과 맞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고집을 피우고 부
모님을 외면한다면, 그에 맞는 역풍도 마땅히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제 딸아이가 이리저리 남의 눈치나 보면서 적당하게 사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딸아이가 정열을 갖고
그 정열을 밀고 나갈 확신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딸아이를 믿고 기다리고 뒷받침을 해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딸아이가 눈앞의 순간적인 쾌락이나 무분별한 정열에만 눈이 어두워 현실을 그르친다면 그 어리석은 판단에 대
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충분히 지워 줄 것입니다. 그래야 딸아이는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성인으로 자라날 테
니까요.
늦바람이 부리는 히스테리의 양면성
사람은 어떤 때 가장 행복할까? 기분 좋고 흥분에 차 있을 때? 쾌감과 열락에 들떠 있을 때? 포만감이 가득
하고 만족스러울 때? 아마 이들이 골고루 섞여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한쪽 치우침은
반대편 치우침을 요구한다. 흥분을 진정을, 들뜸은 가라앉음을, 포만은 배고픔을, 만족은 불만족을요구한다. 이
들이 모두 골고루 지나치지 않게 유지된 상태가 아마 가장 행복한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편한 것이라
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사람은 어떤 때 편안할까? 아마 감정이 자극받지 않을 때, 격정에 휘말리지 않을 때, 포근한 사랑을 받
을 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로울 때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이 편안함은 꼭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외부적으로는 아무리 편안한 상태가 주어져도 스스로 격동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불편해 하는 경우
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안함에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감정의 깊이가 요구된다.
감정은 물과 같아서 감정의 깊이가 얕은 사람은 외부의 자극이나 내부의 자극에 쉽게 흔들린다. 그러나 감정
이 깊은 사람은 깊은 물이 흔들리지 않는 것같이 내외의 자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성숙한 사
람, 감정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깊이 있는 감정의 상태, 감정적인 성숙
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에서 많은 희로애락, 감정적인 격변, 수많은 사람과의 부대낌을 극복
해야 깊이 있는 감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러한 감정적인 성숙, 깊이에 닿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
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부대낌은 많아졌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각자 외로움 속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힘들어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불완전한 두 사람을 서로 보완시키고 충족시키면서 서로의
얕은 감정을 위로하고 성장시킨다.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미녀의 사랑에 유순하고 씩씩한 왕자로
변한다. 참다운 사랑은 야수를 왕자로 바꿀 만큼 감정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 사랑은 그 자체로 환희롭다. 사랑하는 순간에는 인생의 고달픔은 어느새 흩어지고 사랑의 열락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생명은 자기의 생명을 후손을 통해 연장하려는 노력에 가장 커다란 환희로 답하나 보다. 그래서
사람은 편안한 삶, 행복한 삶, 환희로운 삶을 위해 사랑을 갈구한다. 자기의 감정을 깊고 편안하게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을...
그러나 현대에서 그러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 많이 헤맨다.
그것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선택은 했지만 살아 보니 상대는 나를 편안케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보다는 요구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어나는 게 외도가 아닐까 한다.
외도는 나이를 불문하고 늘어나 50대, 60대가 가까워도 식을 줄 모른다. 1백 점짜리 남편이 어느 날 여자에게
빠져 평생 안하던 거짓말, 폭언, 폭력을 휘두르고 조강지처에게 잔인해지는 것을 흔히 접하게 된다. 나이가 들
어서도 외도에 눈이 머는 사람들은 과거의 집단 중심주의의 고정된 틀 안에서 자기를 누르면서 살다가 개성 중
심의 자유로운 현대에 접하게 되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달려들기 때문이리라.
외도는 또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지는데 마음은 더 허해지는 것 때문에 늘기도 한다. 생존에 필요한 절실한
욕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풍요로 인해 생존을 위해 아득바득할 일이 줄어드니 삶의 본능이 약해지
고 그뒤에 숨어 있는 죽음의 본능, 허무의 본능, 외로움의 본능, 퇴행의 본능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사람은 삶의 절정에 달했다가 점점 시들게 되면 성장의 순서를 역으로 밟게 된다고 한다. 나이는 들지만 몸
과 마음은 자꾸 어려지는 것이다. 더 이상 삶에 도움이 안 되니 자연, 무생물, 북음이 다시 거둬 가는 것이리라.
그래서 생존의 절실한 욕구가 약해지면 사람들은 죽음의 유혹과 마주치게 된다. 이제 아득바득 살 필요가 없으
니, 더 이상 삶을 위해 할 것이 없으니 편안히 안식이나 취하라고 죽음은 여러 가지로 그를 유혹하게 된다.
그것은 삶의 진행을 방해하고 퇴행시키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쓸모없는 공상, 이유 없는 강박
증, 과거의 상처에 대한 집착, 어린 시절의 의존심, 엄마 품에로의 회귀 등으로 나타난다. 현재에서 더 이상 미
래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과거를 되씹으며 주저앉고 퇴행하는 것이다. 현재의 절실한 일이
없는 한 그 죽음의 유혹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데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외도로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이다.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삶의 자극을 찾으려고...
외도의 또 다른 이유로는 현재가 안정됨에 따라 과거의 이루지 못한 소망, 활짝 피워 보지 못했던 한이 고개
를 들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현재가 안정되었을 때 현재에 피드 백으로 세차게 다가오는 것이 과거의 이루
지 못한 소망, 끝내지 못한 일이다. 주부들이 과거에 이루지 못한 소망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젊은 시절 한때
꽃피웠거나 꿈꾸었던 자유와 사랑일 것이다. 지금은 30, 40대의 중산층 주부들은 한때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활
발하게 지낸 적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라는 자유로운 시기에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보냈던 때
를...
지금 내 나이 전후의 30, 40대의 여자들은 대학 시절 모두 내 선후배였다. 그들은 그때 한껏 당당했고 도도했
으며 인간적으로나 사랑으로 자유를 마음껏 구가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서는 곧 구세
대의 경직된 질서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자녀 양육이나 웃어른 등의 오랜 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 때
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만난 그들은 의외로 우리 엄마 시대의 아줌마들로 많이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
나 드들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다시 홀로 있게 되자 과거의 활발했던 순간, 삶에 차올랐던 순간, 자유롭게
사랑을 구가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쉬움으로, 한편으로는 그리움으로 자리하면서
그들을 사로잡게 된다. 이것이 지나치면 외도로 비약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도를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르러나 어떤 이유로 외도를 시작했든 외도로 사
랑을 채우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쫓아 외도 전선에 나선 사람들이 주로 만나는 상대는 히스테리들이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비슷하다. 히스테리는 처음에는 화려하고 명랑해 마치 사랑의 화신처럼 매력적이다.
감정 또한 얕아 쉽게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당사자는 히스테리의 이면의 속성인
지배욕, 의존욕, 조종욕, 자기 중심성, 나르시시즘에 같혀서 고달프게 신음하게 된다. 스래서 비정상적인 사랑을
쫓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히스테리의 화려함에 빠져들었다가 나중에는 히스테리의 의존심과 적개심으로 고달프
게 끝내곤 한다. 표면적인 사랑만 성급하게 찾아 나선 결과이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따스한 봄기운이 인다. 그것은 삶의 기운, 생명의 기운,
활기찬 기운이므오 사람들을 사랑으로 몰게 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봄을 맞아 너무 서두르거나 성급하면 깊이
있는 안정된 사랑보다는 히스테리적인 지천한 사랑을 만나 결국 피곤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정상적으로 성
장을 했다면 30대 후반, 40대로 넘어가면서의 사랑은 외부의 이성을 만나 즐기는 객관적인 사랑보다는 자기의
무의식과의 결합을 통해 정신의 영역을 넓혀 가는 주관적인 섹스가 더 어울린다.
우리 사회에 늦바람이 많은 것은 아마도 젊었을 때 사랑의 억압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봄기
운이 떠올라 사랑의 욕구가 강해질 때 자기에게 맞는 사랑의 상대를 안팎에서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현명할 것
이다. 사랑이 주는 진정한 편안함과 행복을 맛보려면...
결혼과 성의 심리학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에 대해서는 유사 이래로 무수히 많은 말들이 있어 왔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항상 새
롭게, 또 처음 결혼을 맞는다. 수천 년을 반복해 오고 그에 대한 기록이 여기저기 녈려 있어도 결혼 생활을 지
혜롭게 영위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현대에 들어오면서 벌떼처럼 일어나는 외도의 불길은 젊은이
들 사이에서 결혼을 불필요한 고통으로 받아들여 기피하는 경향까지 만들었다. 배우자가 바람피울까 봐 불안해
서 결혼 자체를 부정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필요악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마도 우리가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
기 위해서는 결혼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 결혼해야 비로소 공개적으로 허용되는 성의 의미, 출산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짐해 봐야 할 것이다.
나는 결혼이야말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 얻어지는
가정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거기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 또한 사람의 본능에 가장 부합되
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이르러 합리주의가 발달하면서 결혼이나 가정의 구속보다는 개인의 자유, 다양한 만남, 이상적인 상대
를 선택하고 싶은 욕망이 당연한 듯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과도기이고, 결국에 사람들은
기본적인 본능의 흐름을 찾아 결혼과 가정에 순응할 것으로 본다. 외로운 인간의 삶에 그 이상의 대안은 없기
때문이다.
결혼을 기본적인 본능의 발현으로 보는 이유는 인간의 생명이 바로 결혼을 통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여자
의 자궁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5억 개의 정자는 한 개의 난자를 향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거기서 일등으로 골
인한 정자들 중에 난자는 쓸 만한 정자에게 문을 연다.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면 즉시 난자벽의 화학적 구
성이 변하여 다른 정자에게 문을 닫아 버리는데, 반쯤 머리를 박고 있는 정자도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일대 일로 결합한 정자와 난자(수정란)는 세포 분역을 시작하면서 나팔관을 따라 내려가 자궁 내막에
착상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주위에 강한 벽을 쌓아 다른 정9나기가 힘듭니다. 죽마고우도 가족도 일과 관련
되지 않는 한 별 소용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이고 정보화 사회에서 최고
의 가치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집단은 더 이상 돈과 정보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개인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발빠르게 자기 능력을 키우는 것만이 미래를 보장해 줍니다.
그러나 여자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여자는 나와 가정을 이루고 평생 함께 길을 가는 나의 대화 상대,
섹스 상대, 외로움을 달래는 상대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고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는 한 바뀌지 않을
진실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좋은 여자, 신뢰할 수 있는 여자, 정말 사랑하는 여자, 서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담기 위해 자기 그릇을 부단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습니
다.
귀하가 주체하지도 못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소중한 여자를 스스로 멀리함은 자업자
득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하는 그 영혼을 담을 만한 그릇을 스스로 좁히고 더럽혔으니까요. 귀하는 철저히 고통
을 되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져서 귀하의 그릇이 넓어지면 귀하는 다시 소중한 영혼을
담는 것이 버거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람은 아무나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둥이는 여러 여자를 똑같이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그런 정도의 수준은 아니고 또 그런 바람둥이를 지향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맞는 길, 자신에게 맞는 여인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본능 차이
옛 남자를 친구로 만나고 싶습니다
저는 30대의 주부입니다. 결혼 전 장래를 약속하고 사귀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와는 집안의 반대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 사
람도 결혼을 했다고 친구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여름, 동창회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
었고 그 이후 옛 친구라는 명목으로 몇 번 더 만났습니다.
저에게는 그 사람이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저에게 육체적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물론 저는 거절하
고 다시 연락을 끊었습니다만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저는 그 사람이 저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은 그 사람에게 가 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고,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야망입니다.
남성의 성본능과 여성의 성본능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성에게는 안드로겐이라는 남성 호르몬이 있기
때문이죠. 물론 여성에게도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라는 여성 호르몬이 있지만 이 호르몬들은 성욕을 높
이는 것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성들에게 남성 호르몬을 주입했을 때 여성들의 성욕 또한 높
아지죠.
안드로겐은 성욕뿐만 아니라 남성의 공격성, 용감성 등의 남성적 특질에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요즘 여성
들이 자꾸 남성화가 되면서 성적으로도 항진되어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남자도 소량이지먄
여성 호르몬을 갖고 있고, 여자도 소량이지만 남성 호르몬을 갖고 있는데, 자꾸 남성적으로 바뀌어가니 남성 호
르몬의 분비도 증가되어 성욕도 높아지는 거지요. 그러나 귀하는 아직 그렇게 남성 호르몬의 분비가 활발한 상
태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직은 보수적인 여성성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남성의 강한 성욕을 이해하지 못해 당하는 여성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단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만 하고 싶다
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따라 들어갔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자는 성적인 측면에서는
자기 느낌이나 기분만 따라서는 안 됩니다. 남성의 느낌은 온통 그곳으로만 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남성의 성욕을 억누르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인류는 성이나 공격성 등의 원시
본능을 억압하면서 문명을 발달시켜 왔으므로 성의 무분별한 노출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죠. 특히 빛 가운데서
의 노출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여전히 활발한 것이 성입니다.
귀하가 그분을 친구처럼 만나고 싶다면 귀하는 아마 여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밝은 데서 만나고, 행
여 어두운 데로 가서 무리한 요구를 당하면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성폭력으로 고발하겠다고 협박도 하고, 만일
을 대비해서 항상 패드를 착용하고 만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남성들은 생리하는 여성에게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지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여우가 될 자신도 없고 몸도 주고 싶지 않으면 마음을 비우세요. 지금 귀하의 머릿속에 항상
따라다니는 그에 대한 생각은 일종의 강박적인 반추인데, 대개 그러한 강박증의 이면에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
려는 야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그 강박증도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행여 못 견뎌서 바람이라
도 피워야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 남자와의 사랑을 이루려는 야망을 현실에서 실현할 만한 용기
와 각오가 되어 있는지... 내 안에 그만큼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는지...
섹스 어필의 심리
A양은 명문대학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큰 고민이 있는데 아무리 해도 적당한 짝을 구할 수 없는 것이
다. 그것은 A양의 외모에 남자들이 별 호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A양은 충실한 효녀로 자랐고, 돈도 악착같
이 절약했으며, 지금도 수시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집안 경제에 보탬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착하고 알뜰한 양가집 규수인 A양에게 요즘 남자들은 관심이 없다. A양은 점점 들어가는 나
이에 급기야는 쌍거풀 수술도 하고 코도 높여 봤으나 원래 모습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A양은 이제 남자
생각만 하듯 여기저기 남자들을 구해 봤지만 한 해 두 해 나이만 들 뿐이다.
B양은 전문대학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늘씬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있다. 게다가 자라면서 제
멋대로 자란 끼도 있어 늘 사람들 눈에 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불안정하게 자랐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패
션 디자이너의 눈에 띄어 TV출연도 했고 번듯한 직장도 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류대학을 나온 남자가 죽자 사자 쫓아다니고 있다. 그 남자는 주위에서는 모두 놓치기
아까운 남자라고 하지만, B양의 눈에는 별로 차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를 바꿔 볼까 생각도 해보고, 그대로 버
리기는 아까워 가끔씩 만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B양은 일찍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서른이나 되면
결혼할까 생각중이다. 그전에 결혼하면 자기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A양과 B양의 대조적인 처지는 바뀌어 가는 오늘의 세태를 반영한다. 바로 요즘에 인기 있는 여자는 학벌, 집
안, 재산 불문하고 섹스 어필한 여자이다. 지금 60대 이상이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한 세대라면, 50대는 중매로
결혼한 세대, 40대는 학벌이나 집안을 따지고 결혼한 세대, 30대는 학벌, 집안, 성격, 미모 등을 골고루 따져 결
혼한 세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20대는 어떠할까? 아마도 그들은 섹스 어필을 최우선 가치로 원할 것이
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 경향은 미국 사회를 많이 닮아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국 사회가 남녀 관계에
서 섹스 어필을 가장 중요시하는 나라이다. 이는 미혼일 때뿐만 아니라 기혼일 때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느 사
회 학자는 미국 사회에서의 부부는 섹스 어필이 끝나면 깨지는 관계라고 말한다. 결혼한 미국 남자들이 부인을
극진히 존중하고 매너를 지키며 수시로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부러운 정경일지 모르지만, 속으
로는 당신이 아직도 섹스 어필하다는 것을 스스로와 상대방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한다. 자기나 배우자가
섹스 어필하지 못할 때 부부 관계는 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도 앞으로는 섹스 어필하지 못하면
시집만 못 가는 게 아니라 설사 결혼해도 버림받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항상 자신의 섹스 어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리고 그 추세는 이미 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주부들의 가치관의 변화이다. 이제 주부들은 집안이나 자식, 남편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 봤자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생과 허무함뿐이기 때문이다. '강남에 애인 없는
주부가 없다' '요즘 애인 없는 주부는 바보다'라는 말이 심심찮게 떠도는 것은 우리가 심각하게 따져 봐야 할
의미가 있다. 그들은 이제 미래를 위해 자기의 삶을 억누르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즐기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을 즐기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섹스 어필'은 중요한 가치로 대두한다. '섹스 어필'이란 개인의 삶의
다차원적인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섹시하게 엉덩이와 허리를 흔들며 요염하게 웃음짓는 모델
을 보면서 살맛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개인 중심의 사회로 바뀌어 가면 갈수록 섹스
어필의 가치는 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집단 중심의 사회에서의 섹스 어필은 어둠 속에서나 대우받는 천한 가
치였겠지만, 개인 중심 사회에서의 섹스 어필은 개개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각광받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스킨십
"우리 애인 되는 기념으로 그 영화 속의 주인공들같이 뽀뽀나 한 번 합시다."
민우가 뾰족하게 입술을 만들어 책상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멈칫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건 싫어요. 전 아직 보수적이라... 그리고 키스를 하면 키스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어서..."
민우는 머쓱하니 물러앉았다. 처녀가 별걸 다 아네. 그럼 이것도 알까? 남자들이 처음 여자의 손을 잡을 때
여자의 그곳을 만지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을... 혀를 넣다가 빼는 키스나 성기를 넣다 빼는 섹스가 다를 바 없
는 것같이, 손을 잡는거나 손과 똑같은 피부로 이어진 그곳을 만지는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언젠가 쓴 소설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 남자들이 스킨십을 할 때 이런 상상까지야 하지 않겠지만 스킨십이
곧 섹스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상상 못 하는 현대 여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느 피부과 의사가 이야기했듯이
피부만큼 강한 성적인 기관도 없다니 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면역 반응이 있다. 이물질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물질도 자꾸 접하
게 되면 어느새 친숙해져서 거부감이 줄어들고 어느덧 나의 일부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독사를 많이 다루는 사
람들은 독에 대해서도 큰 부작용을 보이지 않는다.
스킨십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것 같던 상대의 살결도 자주 닿게 되
면 친숙해지고 어느덧 나의 일부같이 느껴지게 된다. 따뜻하고 잦은 스킨십은 상대에 대한 마음을 편하고 여유
롭게 만든다. 아마도 사랑하는 연인들이 스킨십을 좋아하는 것도 상대와 좀더 가까이 있고 싶고, 궁극적으로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고 싶은 욕망에서 그러할 것이다. 처음에는 거부하다가도 자꾸 접하게 되면 나중에는
옆에 없으면 못 견딜 지경에까지 빠지게 하는 것이 사랑의 면역 반응이니까... 그래서 육정이 무섭다는 것이 아
닐까?
사람들이 스킨십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를 행동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행동 과학자인 스키너
(Skinner)와 훌(Hull)은 욕동 저하(drive reduction), 즉 아픔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유일
한 행동의 동기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성을 만났을 때 정신적인 긴장감으로 고통을 느껴 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
성과 단둘이 은밀한 곳에 있을 때 강간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성욕이 주는 긴장감과 고
통을 경감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소 사람은 사랑하는 이성과의 만남에서 뇌의 긴장감과 고통을 경감하
는 쪽으로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것이 처음에는 스킨십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단순히 만지는 정도로도 어느 정
도 긴장감은 완화되고 고통을 줄일 수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만지고 싶어지는 것은 그녀로 인해 유발된 뇌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또 제임스 올드(James Old)는 뇌의 변연계의 특정 영역에 쾌락 추구를 자극하는 중추가 있음을 발견했다.
또, 히스(Heath)는 뇌의 중격부를 자극하면 참을 수 없는 쾌락과 동시에 애정과 그리움이 함께 느껴지며 분노
와 초조 감정이 가라앉는다고 하였다. 마음을 끄는 이성의 존재는 이와 같이 뇌의 변연계나 중격에 있는 쾌
과 사랑의 중추를 자극해, 상대에 대한 그리움과 스킨십이나 섹스 같은 사랑의 행도으로 이끄는 것이리라.
여성 불감증
우리 사회에는 불감증 여자 환자들이 많다. 아마 심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원하지 않는 섹스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부인이 원하지 않을 때 남편이 강압적으로 하는 섹스는 강간이라고 하지만, 아직 우리나
라에서는 요원한 이야기이다. 그렇게까지 여자들이 자기 주장을 하면서 살 만한 분위기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선진적 입장을 도입해야 하느냐에는 의문도 따른다. 우리나라같이 여자들은 조신해야 한다는 전
통을 가진 나라에서 여자가 스스로 원할 때까지 섹스를 뒤로 미루었다가는 언제 사랑이 무르익고 언제 결혼하
고 언제 부부 생활을 하게 될지 모른다. 순진한 처녀나 부인들은 여간해서는 섹스하자고 나서지 않을 테니 말
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묵시적으로 남자의 과감한 성접근을 허용해 왔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성폭력이지먄
어쩌면 보수적인우리 현실에서 남자들이 생존하는 적응 양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담하지 않았다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는 항상 용감한 다른 놈팽이가 채갔을 테니 말이다.
어렸을 때 이런 동화를 본 적이 있다. 동화치고는 너무 비극적이고 섬뜩하다고 느꼈는데, 첫 장면은 품팔아하
는 아이가 얼어죽은 장면부터 시작된 듯하다. 아이는 편안하게 미소지으며 죽었는데 그 미소 속에는 이런 슬픈
사연이 담겨 있었다.
해방 후 정치가 혼란했던 시절에 단란했던 한 정치인의 가정을 정적이 공격해 그 가장을 죽게 만든다. 그 음
모에 적극 가담했던 남자를 미망인은 몹시도 미워하는데, 어느 날 그는 미망인 집의 담을 넘어 강제로 그녀를
겁탈한다. 미망인이 아침에 치마가 찢겨진 채 흐느껴 우는 것을 아이는 의아하게 바라본다. 얼마 후 아이는 엄
마가 어느 여관에서 자살했다는 현실에 접하게 된다. 그 남자는 엄마를 서울로 데리고 갔다가 버리고 달아난
것이다.
이 동화를 보고 오랫동안 의아해 했던 것은, 엄마가 몸이 더럽혀졌다고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여자에게 정조란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몸이 더럽혀졌을 때 그 남자에게 정복당하고 지배당하는 것
은 우리 여인들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던 습성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습성은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어서
비록 과거처럼 어리석게 당하고 살지는 않지만 여전히 자기 감정을 만족하게 표현하고 살지는 못한다. 그 때문
에 성생활에서 불감증이 많은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성생활을 참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의식적으로는 용인되지
만 무의식적으로는 허락이 되지 않아 자기 느낌을 상실한 불감증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물론 불감증의 원인도 단순하지는 않다. 과거의 괴로웠던 추억이나 마음에 다른 남자를 두고 있을 때, 무조건
섹스는 싫은 강한 성적 억압이 불감증을 부추기기도 한다. 또 어떤 여자는 불감증이면서도 계속 섹스를 하려는
기현상도 보인다.
여자가 남자보다 불감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마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
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감증은 어떻게 고쳐야 할까? 성치료 전문가인 마스터스(Masters)와 존슨(Johnson)은 다
음 3단계 방법을 제시한다.
1. 관능 집중 훈련
일정 기간 동안 성교를 중지한다. 그 대신 서로의 몸에 부드럽게 접촉하여 애무만 한다. 애무는 여성이 먼저
해주도록 한다. 그후 역할을 바꾸어 여성이 애무를 받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성은 불감증 때문에 뭔가 행해지
고 있다는 죄책감 및 그 결과 거부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사라진다.
아마도 불안 감정에 의해 정신이 흩어지는 일 없이 남편의 애무에 의하여 생기는 감각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많은 여성들은 비로소 성적인 감각을 체험하곤 한다. 또한 이로 인해 여성은 자기 자신의
성적 쾌락에 적극적으로 책임을 갖고, 자기 주장을 해도 남편에게 거절당하지 않음도 발견하게 된다. 관능 집중
훈련을 순조롭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사정 욕구를 늦춰야 한다.
2. 성기의 자극
관능 집중 훈련에 의해 성적인 감정이 느껴지면, 성기를 가볍게 흥분시키는 자극 훈련을 진행시킨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애무한 뒤 젖꼭지, 크리토리스 주변, 질 입구를 부드럽게 만진다. 이때 강요적이고 오르가슴을 유
인하는 자극을 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성기의 애무가 너무 자극적이어서, 남성이 욕구 불만 상태가 되
면 여성은 손이나 입으로 남성이 사정하도록 도와준다.
3. 강요하지 않는 성교
만약 성기의 애무에 의하여 예상대로 반응이 일어나면 다음에 성교로 진행한다. 이 경우도 처음에는 오르가
슴을 일으키려는 압력을 배제하고 여성의 감각과 감정에 따른다. 특히 관능 집중 훈련과 부드러운 성기 자극으
로 성적 흥분에 충분이 도달한 후에 여성이 성교를 시작한다. 성교 운동도 처음에는 천천히 확인하듯이 하고,
급속하고 격하게 강요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여성은 발기한 음경의 느긋한 전후 운동에 의하여 질에서 생기는
신테적 감각에 주의를 집중한다. 또 전후 운동을 할 때 치골미골근을 수축시키도록 여성에게 지시를 준다. 만약
여성의 전후 운동이 한창인 때에, 남성의 사정 욕구가 너무 강해지면, 부부는 몸을 떼도록 충고한다. 남성의 흥
분감은 급속히 소실된다.
남성은 성교를 중지하고 있는 동안, 손으로 여성을 애무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한 뒤 여성이
오르가슴에 이를 것 같으면, 이를 남성에게 알린다. 만약 적당한 시간이 경과해도 여성이 오르가슴에 이를 기미
가 없으면, 부부는 그대로 성교를 계속하고 남성의 사정을 유도한다. 많은 여성들은 이 애태우는듯한 느긋한 성
교체험이 강한 쾌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성치료》, 카플란 저, 이근후·성금영·박영숙 역, 하나의학사, 1990.
그러나 이런 느긋한 성교는 우리나라 남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성미 급한 남자들은 대개 삽입만 서두르
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자들은 섹스를 할 때 애무를 오래 해 여자를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우리나라 여자들에
게서 불감증이 많은 이유는 그 만큼 여자의 감성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주는 남자들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아직도 남자라고 아직도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는 전통이 그게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프랑스 남자들이 하는 것을 한국 남자라고 못할 리는 없다. 결국 아내의 불감증을 치로하고 아내가 항상 나를
향해 있게 만드는 길은 아내에게 좁더 관심을 갖고 아내의 섬세한 감정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마치 애
인처럼...
비상구 없는 성적 억압
영철은 엄마 손에 이끌려 정신과를 찾았다. 엄마는 아연실색이었다. 그러나 영철은 정신과 의사에게 별로 할
말이 없엇다. 아마도 어머니가 다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했으니까... 정신과 의사는 영철에게 이겻저것
물어 보았으나 영철은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괜찮은데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성적은 상위권이에요."
의사는 이것저것 묻다가 지쳤는지 그만 나가고 엄마를 들어오라고 한다. 영철은 초조하게 밖에서 기다렸다.
엄마는 아마도 줄줄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 부끄러운 이야기를...
"저는 제 아이가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제 아이는
학교에서도 우등생이고 반장도 해서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아줌마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어요. 우리 아이가 몰래 자기네집 딸들을 훔쳐 보고 그 아이들의 속옷이나 신발들
을 훔쳐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아이를 경찰서에 고발하겠다고까지 하는 거예요. 전 절대 그럴 리 없다
고 했어요. 우리 아이가 그런 짓을 하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예요.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
어요. 그 아줌마가 아이가 감춰 놓은 그 집 딸아이의 속옷가지며 신발들을 아파트 옥상에서 발견한 거예요. 아
이도 그것을 시인했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제 정신으오는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역시 엄마는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닥달한 이상으로 고해바치나 보다. 얼마 후 영철은 면담
실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의사는 안경을 손에 들고 영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앞서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럴 만하지. 영철은 고개를 떨구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
었다. 엄마가 진단서라도 끊어서 제출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하여 억지로 끌려온 것이다. 이 의사
는 어떻게 나를 야단칠까? '너 왜 그랬어? 너 죽고 나 죽자'고 울부짖는 소리는 들을 만큼 들었는데... 잠시 침
묵이 흐르더니 의사가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드님에게 자유를 주는 것 이상으로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 나라인가요? 죽을 듯 살 듯 공부를 해도 될까 말까인데..."
"어머님이 원하시는 게 뭔가요? 자식의 건강과 행복인가요, 아니면..."
엄마가 아무 말도 없었다. 곁눈으로 흘끗 쳐다보니 엄마는 눈을 반짝거리는 게 무언가 의사의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자유는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철 군! 만일 영철 군에게 주말에 무엇
을 하든 부모님이 상관하지 않는다면 공부를 잘할 수 있겠습니까?"
영철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지옥 같은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그것은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엄마는 겉으로는 나를 이해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샅샅이 간섭하고
지배하곤 했으니까...
"저는 이번 영철 군의 행동이 이어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성적이 떨어졌을 때 이어폰을 엄마
가 빼앗았던 것 기억나죠?"
"뺏은 게 아니에요. 대화를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거예요. 성적이 떨어졌으니 성적이 올라갈 때까지는
음악을 듣지 않기로..."
엄마가 황급하게 끼여들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는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독재자나 다름없습니다. 독재자와 힘없는 민중과의 대화란 처음
부터 불공평하죠. 제가 보기에 청소년들은 음악을 통해서 그들을 가두는 주위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탈출합니다.
그 유일한 통로마저 없앴으니 영철 군은 그러한 비정상적인 탈출구를 찾은 거지요."
영철은 진료실을 나오면서 무언가 속이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말에 자유 시간을 갖는다는 것
은 꿈 같은 이야기이다. 이어폰이나 돌려받으면 다행이다. 그 선생님 말씀대로 부모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독재자라면 어느 독재자가 한두마디 이야기로 자기 권력을 냉큼 아랫사람들에게 양보하겠는가.
역시 엄마는 처음에는 좀 자유를 주는 것 같더니 또 지능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속이 다시 답답해져 왔
다. 전에는 이런 때면 새벽 한두 시에 나가 남의 집 누나들을 기웃거리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그러나 지
금은 불가능하다. 엄마의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하기만
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야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영철은 아파트 창문을 열어 보았다. 저 멀리 아
래로 사람들이 두런거리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엄마는 이 창문만은 통제하지 않고 있다. 내 책가방이나
그밖의 모든 것은 샅샅이 뒤져 보지만... 만일 이 창문마저 잠긴다면 나는 정말 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밖에서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감시하러 오는 발걸음이다. 마치 감방에 갇힌 중죄인을
감시하는 간수의 발걸음처럼... 영철은 귀를 막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자살은 사방이 꽉 막힌 것같이 느끼는 급성 불안, 초조의 우울증에서 특히 많다고 한다. 요즘 청소년들의 자
살이 많은 것은 그만큼 사방이 꽉 막혔다고 느끼는 청소년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철의 경우 사방이 꽉 막혔을
때 두 가지로 탈출을 시도했다. 하나는 자살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옷 벗는 것을 훔쳐 보는 관음증과 남의 속
옷 등을 훔쳐서 성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물품 음란증이다.
사방이 꽉 막힌 현실에서 자살로 탈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강한 성적인 돌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억압은 본능을 억압하는 쪽으로 지향하기에 당사자는 본능을 해방시키는 쪽으로
탈출을 모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바람둥이와 마누라만을 아는 고지식한 남자 중에 고지식한 남자 쪽이 더 성적인 공상을 많이 한다
고 한다. 바람둥이는 자유롭게 섹스를 하기 때문에 성적인 공상에 매달릴 이유가 없지만, 고지식한 남자는 일상
의 성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성적인 공상에 더 매달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이면에 성이 들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점잖은 체면에 성개방은 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본능은
주체하지 못해 성에 매달려 허덕이며 사는 것이다. 억압이 성을 자극하는 것은 자기가 어떤 때 주로 성적인 공
상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나는 한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강연은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라 무슨 상을 수상
하게 되어서 억지로 듣게 된 것이다. 맨 앞줄에 앉아 억지로 강연을 듣자니 무척 지루하고 괴로웠다. 그러자 머
릿속에서는 성적인 공상만 아른거렸다. 과거에 성적으로 애틋했던 순간, 인상적이었던 성적인 자극 등이 떠올라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한동안 너무 바빠 성적인 공상에 빠질 겨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흠씬 빠져 버린 것이다.
바로 주위의 억압적인 상황이 인내를 강요하자 내 본능은 짜릿한 성적 공상으로 그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청
소년들이 억압적인 환경에서 성적인 공상이나 자극으로 탈출구를 찾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은 본능의 해방과 직결되는 것으로, 사정을 하고 오르가슴을 느끼면서 본능의 긴장으로부터 놓여난다. 그래
서 청소년들의 성의 일탈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어른들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태도를 반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소년들의 일탈은 마치 독재 체제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민초들의 반항과도 같기 때문이다. 독재
자들은 민초들을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놈들이라고 비난하지만 그 민초들이 세상을 민주와 자유의 광장으로 이
끌어 간다.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어른들은 그들의 권위적이고도 일방적인 독재 자세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자살과 폭력, 음란 비디오, 본드 등에 중독 되는 청소년들이 더 늘어나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에...
보통 어른들이 청소년들의 성본능을 맹목적으로 억압하는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청소년들이 잘못
성에 접하면 그것만 눈에 아른거려 공부에도 지장을 받을 수가 있고, 모방 범죄가 늘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성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온갖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이지, 일단 빛 가운데로 노출해 있으면 급속하게 그 기
세가 감퇴된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청소년 단체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손에 통계 자료를 들고 항의를 할 수도 있
다.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접한 청소년들을 조사한 바로는 모방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보다 더 높았다고...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은 음란물을 안 봐도 문
제를 일으킬 것이고, 대다수의 건강한 청소년들은 나름대로 그 성적인 자극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어둠 속의 성에 놀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끌어낼 것에 대해 심각하
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청소년 단체에서 성교육을 시킬 때 아예 포르노 테이프를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고무적으로 들렸다. 음성적으로 은밀히 봤다면 오랜 시간 공상과 죄책감에 시달렸겠지
만 노골적으로 공개된 가운데 함께 본 것이면 오히려 건강한 성으로 발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부들이 남편 아닌 이성을 찾는 이유
"요즘 이성 친구를 가진 주부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주부들의 이성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
까?"
"주부들이 이성 친구를 갖는 게 좋으냐 안 좋으냐를 획일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실제 현실
들이 있으니까요. 자기 현실을 무시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따르다가는 자기 현실을 잃을 위험도 있지요.
실제로 자기 일에 열중하는 어떤 주부는 자기가 하도 바쁘다 보니 차라리 남편이 바람이라도 나서 다른 여자와
사귀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 여자에게 무척 고마울 것이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사랑하
지 못하는 것을 그 여자가 대신 사랑해 주고 있으니까요. 이같이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각자 자유롭게 살 것
을 허용하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박적이고 결벽적이면서 자기 스스로도 이성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어떤 남편들은 자기 부
인이 일탈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이혼하는 경우는 대개 그런 남자
들 때문인 경우가 많죠. 이런 남편을 가진 주부들이 이성 친구를 가지려는 것은 자기 현실을 잃어버릴 높은 위
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우리 사회에서의 가치관은 극에서 극에까지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간통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겉은 경직되어 있고 안으로는 외도 문화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이중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적응하느냐는 각자의 현실에 맞게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개
인주의 성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정이라는 집단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려면 개인주의 성향은 어느
정도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포레스트 검프〉의 주연을 맡은 톰 행크스가 말한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는 열 가지 방법
중에 배우자가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을 허용할 것 등이 있었는데, 가정도 지키고 개인도 존
중하는 현명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성 친구를 가지고 있는 주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까? 정신과 임상에서는 어떻습니까?"
"어느 아파트에서는 주부들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이구동성으로 극도에 달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과거와 생활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이제는 피부로 느끼는 것이 전과는 달리 답답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겠지요. 마치 날씨는 봄날이 왔는데 주변 상황은 여전히 자기에게 겨울 옷 껴입기를 강요하고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요.
실제로 전과는 달리 남편이 바쁘게 살고 주부가 가정을 지키고 있을 때 주위 친구나 아파트 동료가 남자친구
를 소개시켜 주는 일도 있습니다. 때로 어떤 대담한 주부는 자기 애인을 데리고 친구들의 모임에 나타나는 일
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체로 소극적인 우리 주부들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희망 사항에다가 일시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사귀더라도 어느 선 이상을 넘는 것은 자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남에 애인 없는 주부 없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주부들이 마음놓고 이야기
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성 친구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경향은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 학창 시
절 때의 애인을 찾는다든가 마음놓고 이야기해도 괜찮은 대상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는 주부들이 늘어나고 있습
니다."
"그런 현상에 대해 남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예전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기본 추세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남편들은
자기가 바람을 피우면 여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점점 인정해 가고 있습니다. 전같이 이기적으로 가정에서
군림하는 것이 점차 설득력을 상실해 가고 있으니까요."
"주부들이 이성 친구를 가지려는 이유는 뭘까요?"
"결국 남편에게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을 충족받으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방황하는 주부들은 무언가 감성
적인 충족을 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음악이나 문학적 감성, 낭만, 예술적 감수성 등에서 좀더 충족받기를
원치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또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성 친구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삶이 어느 정도
안정에 이르면 그 다음으로 심각하게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권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
로 이끌어 주는 이데올로기의 공황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 주부들은 안정된 가정을 스스로 벗어나려는 위기 속에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위기라기보다는 변화에 대한 적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례로 자기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자 남편
은 부인과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해서 남편은 상대 남자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습
니다. 그러나 상대 남자는 자기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자기가 그 부인을 건드린 게 아니라 그
부인이 자기를 건들렸다는 것이지요. 그 남편은 결국 앓아 눕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가정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그처럼 당한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던 것이지요. 가정을 지키려는 남자는 앓아 눕고 아내와 놀아난 남자는 뻔
뻔하게 잘 살아가고... 변화하지 않으면 다가올 시대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예입니다. 우리
주부들이 급변하는 가치관을 자기의 현실에 맞게 잘 수용하느냐에 따라 위기의 기간이나 정도는 결정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에로 문화
〈젖소 부인 바람났네〉라는 영화가 있다. 하도 말들이 많아 비디오 가게에서 몇 번 찾았으나 항상 대여되어
있어서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겨우 나중에 구해 보니 별 특이한 점은 없었다. 유부녀가 남편에게 만족을 못
하자 젊은 남자와 바람난다는 아주 흔하디흔한 내용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여주인공 진도희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미인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영화로 진도희는 스타덤에 올랐다고 하니, 그녀의 매력이 한껏 어필
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젓소 부인 바람났네〉가 그렇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보기에는 좀 미약하지 않나 하
는 생각이 들었다. 〈원초적 본능〉같이 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짜임새 있고 파격적인 영화들도 많으니 말
이다.
혹시 유부녀의 바람 이야기를 담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돌아 다니는 세미포르노
영화들, 예를 들어 〈금지된 정사〉같은 것을 보면 아직도 유부녀의 바람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가장 흥미 있는 섹스가 남의 마누라와 자는 것이고, 그 다음이 처녀라고 하더니 그 은말한 유혹을 공상으로나
마 충족시키려고 그런 영화를 선호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편히 볼 수 있는 포르노의 수준이 그
정도이기 때문일까?
어느 한 가지 이유를 꼭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무언가 굳건한 가
족 중심, 부부 중심적인 성 모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부부의 외도
로 그려지다가 점점 우리의 현실, 늘어나는 러브 호텔, 불륜 등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지금 우리 주위에는 영화나 연극, 잡지, CF 등에서 에로물이 범람하고 있다. 그 수많은 발가벗은 남녀
의 사진은 어쩌면 공상의 불륜(기혼자뿐만 아니라 연인들의 불륜도 포함)을 조장하고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여자, 자기만의 남자, 하나만의 여자, 하나만의 남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이성을 구하니까. 이런 심리 상태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융 심리학자인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여
사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흔한 아니마의 표현은 색정적 환상의 형태를 취한다. 남자들은 영화나 스트립 쇼를 보거나 외설적인
것들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것은 아니마의 거칠고 원시적인 측면으로서, 남자가 자신의 감정 관계를 충분히 개
발하지 못했을 때만, 즉 생에 대한 그의 감정적 태도가 유치한 단계에 남아 있을 때에 비로소 강박적인 것이
된다."
아니마란 융이 붙인 용어로, 남성의 무의식에 있는 여성적 요소가 인격화된 상을 말한다. 아니마가 분화, 발
달하지 못했을 때 남자는 색정적 자극에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현대에는 에로 문화가 범람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현대는 많이 발전한 것 같지만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감정이 유치한 수준에 머무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자본주의의 물
질적 풍요로움이 감정적으로 원숙할 수 있는 통로인 정신적인 고통을 박탈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람은 돈
만 있으면 더 이상 고통받을 일이 없다. 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만원 짜리 수표 한
두 장만 있으면 언제든지 예쁜 여자를 찾아가 섹스할 수 있는데 더 이상 잘나지도 않은 한 여자를 향해 고뇌하
며 밀고 당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 돈 많은 집 남녀들이 바람나면서 안락한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드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돈으
로 얼마든지 쾌락을 누릴 수 있는데 괜히 고통스럽게 인내하며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아픔이 따르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깊이 있는 성숙은 이루어지
지 않느다. 고통이 없는 가운데 형성되어 감정적으로 얕아진 사랑은 자극이나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충분히 쾌
락을 누릴 수 있는데 괜히 고고한 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적인 얕음이 인간에게 지속
적인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에로 문화를 따르며 수많은 이성을 선
호하는 사람들이 항상 느끼는 것은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자와 난자가 일대 일로 결
합해서 만들어졌듯이 자기만의 남자, 자기만의 여자를 본능적으로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의지할 한 사람이 필
요한 것이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깊이가 없어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자기 또한 신뢰
할 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는 기댈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니 그는 수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방황하며 지내야
한다.
난 처음에는 홀로 설 수 있고, 혼자 살 수 있고, 혼자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에로 문화가 만족과 행복
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에 힐튼 호텔 나이트 클럽에 갔다 온 후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젊은 여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남편이 바람피울까 봐 결혼을 안 하고, 만일 결혼을 해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면 맞바람을 피우겠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스스로 흔들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감정적으로 깊이가 없으니 다른 깊이 있는 사람을 신뢰해 안정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
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에로 문화는 이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편안하고 쾌락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면서 나타나
는 과도기적 현상인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에로 문화는 다시 공상의 수준에 머물면서 적당히
현실과 거리를 두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 한 명의 자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대 일의 만남으로 인간은 만들어졌기에...
남자들이 정력제를 찾는 심리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왜 우리나라 남자들이 유별나게 정력제를 밝히냐는 것이
다. 정력 팬티, 지렁이, 곰발바닥, 물개 거시기, 뱀 등 정력에 좋다고만 하면 눈이 벌게져서 밝히고 있으니 말이
다. 남자들이 이들을 밝히는 심리는 합리적이거나 이론적인 근거보다는 원시적인 사고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즉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낳는다' '일단 접촉했던 것은 멀리 떨어져서도 영향을 준다'는 동종 요법이나 모방
요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력을 밝히는 것은 우리나라 남자들만의 특징적인 현상만은 아니고 전세계 남자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
이다. 남자들의 타고난 본능이 가급적이면 강한 정력을 가져서 많은 여자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청난 수량의 곰발바닥 수입이나 외국에 가서 유별나게 정력을 밝히며 나라 망신을 시키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서 특히 우리나라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정력에 관해 무언가 독특한 문화, 심리적 현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
다.
주위를 둘러보면 정력에 그렇게 열성적인 사람은 대개 돈 많은 사람들이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은 정력 보
강에 그렇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돈 잘 버는 어떤 사람은 정력이 떨어진다고 시골에 가서 뱀을 1백여 마리나
잡아먹고 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돈 잘 버는 사람은 모두 정력제를 밝힌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
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겸허하게 살며 죽을 때까지 열심히 자기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정력제를 밝히고 어떤 사람이 밝히지 않은 걸까?
내가 남자들이 정력제를 좋아하는 것에 의문을 품어 온 것은 정력제를 먹고 정력이 좋아 봤자 남자들이 좋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짜릿한 엑스터시는 있겠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그렇게 헌신적으로 정력제를 찾
는 것일까? 엑스터시는 자위 행위를 통해서도 얻어지는데... 그렇다면 남자들은 자기보다는 여자를 즐겁게 하지
위해서 정력제를 먹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여자를 만족시키고 흥분시키고 굴복시켜 남성적 본능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리라. 또 회춘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젊은 날의 왕성한 생명력으로 돌아가고 싶은
추억에서도 정력제를 찾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의문스러운 것은 그렇게 여자를 충족시키면 정말 여자들이 만족하고 굴복할까? 아마도 그렇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정력제를 밝히는 것이겠지. 그러나 여자를 굴복시키는 힘이 정력에만 있지는 않
다. 여자들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오르가슴에 빠지고, 분위기나 감성적인 충족만으로도 충분히 남자의 지배를 원
하고 따르곤 한다. 오르가슴은 육체적 섹스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감성적 섹스, 문화적 섹스, 영혼의 섹스, 문학적
섹스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특히 그러한 육체적 섹스 외의 오르가슴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예민하고 풍부해지게 된다. 우리나라 남
자들이 특히 정력제를 많이 밝히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육체적 섹스 외의 오르가슴을 찾는 데는 둔감하기 때문
이리라. 그것은 또 우리 사회의 메마른 문화, 예술 환경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내 성감대 좀 찾아 줄래요
꺾은 꽃은 시들고 시든 꽃은 다시 보지 않는다! 연애 때는 누구나 여자를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해 안달이지만
정작 자기 여자가 되고 나면 연애 때 같은 열정은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마누라가 미인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마누라가 미인일수록 열심히 바람피우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일단 꺾고 나니 꺾기 전 같
은 황홀감과 기대감, 신비감은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연애 때같이 항상 정돈되고 예쁜 모습이 아닌,
하품하고, 화장실 가고 부스스한 모습 또한 자주 보게 되니 예전같이 동하지 않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서 새로운 꽃을 찾아 나서면서 외도가 시작된다.
'요즘도 마누라하고 섹스하는 사람 있어요'라는 영화 대사가 나올 정도이니 요즘의 외도 문화는 피어날 대로
피어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노골적으로 애인하고는 잘되는데 배우자하고는 잘 안 된다고 말하는 사
람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이런 생각도 스쳐 간다. 부부는 꼭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는 것
이 아니라 원수가 만나기도 한다고...
원수가 만나 부부 생활을 한다면 아마도 섹스는 고통스러운 것이리라. 그리고 애인에게서 지극한 쾌감을 느
낀다면 어쩌면 그 애인이 진정한 배우자일지도 모른다. 서로 연대가 안 맞아서 지금은 애인으로 만나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 속궁합이 맞는 부부일 테니까...
그러나 자기에게 맞는 진정한 배우자를 시기적절하게 만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서로 성숙하
는 정도에 따라 만나고 영그는데, 각기 성숙하는 정도나 시기,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는 연
인을 만났을 때는 어느새 서로 먼길을 돌아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아이들이 삐약삐약거리
며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부부는 어차피 인류가 생존을 위해 차선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이다.
부부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 원수처럼 소원하게 살고 싶지 않다면 부부는 서로 상대에게 더 잘 맞는 연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노력도 부부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게 절실한 필요
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데, 이미 정복하고 꺾어 놓았는데 그것을 위해 또다시 열심히 노력하고 싶지는 않기 때
문이다.
그것은 단지 섹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과 여가 선용으로도 확장해 생각할 수 있다. 할 일도 많고 레크리
에이션도 많은데 굳이 배우자에게 에너지를 허비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복한 땅도 잘 관리하지 않
으면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 있다. 서로의 경계가 자꾸 허물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정복한 땅도 철저
히 자기 것으로 다져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성만큼 강한 것은 없다. 성이란 두 사람이 하나가 되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부부가 만족스러운 성을 위해 에너지를 투자할 필요가 점점 늘어날 것이
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상대가 나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또 좀더 나의 것으로 다지기 위해 수없이 입에 달
링을 달아 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부부는 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우선 나는 꺾인 꽃이 아니고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당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좋다. 한 남자는 열심히 바람을 피우면서
울며 매달리는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모질게 마음을 먹고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선언
하자 갑자기 크게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내의 새로운 모습에 다시 눈이 떠졌다. 며칠 후 그는
아내를 짐승같이 덮쳤다. 마치 새로운 예쁜 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그후 그는 애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아내에게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새롭게 태어난 이상 새로운 꽃은 아내이고, 이미 꺾은 꽃은 애인이기 때문
이다.
또 성이란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깊어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이 깊어지기 위
해서는 일단 서로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열린
대화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최고로 야한 당신의 성적 공상을 말해 봐요. 제가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내 성감대가 어딘지 찾아 줄래요. 당신의 입술로 말이에요."
"난 항상 당신이 입으로 해주었으면 했지만 말할 용기가 없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왠지 말하고 싶어지네요."
6장 가정의 본능, 수정란 본능
수정란 본능
얼마 전에 아버님 묘소에 가보았다. 곱게 단장한 묘지 앞에 세워진 비석 뒤를 보니 아내, 자식들, 며느리, 손
녀, 손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새겨져 있었다. 아버님은 평생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셨는데, 그 결과 자손들이 풍
성하게 번식된 것이었다.
아들을 목욕시키다 보면 문득 신기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님 등에서 보던 지도형 반점이 아들의 등에도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래서 소중한 것 같다. 인간의 의식에서 볼 때 자식과 나는 단절되어 따
로따로 존재하지만 무의식이나 영혼으로 볼 때는 자식의 생명과 나의 생명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가정을 소중히 여김을 통해 생명은 번식
한다.
이것은 마치 난자가 정자를 만나 이룬 수정란이 세포 분열을 하는 것과도 같다. 수정란은 처음에는 2분열을,
다음으로 4분열을, 다음으로 8분열을 하는데, 그것은 나로 인해 자손이 번창하는 것과 같다. 수정란은 분열을
거듭해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부부는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가정을 이룬다. 그래서 가정을 소중히 하고 아끼
는 것은 수정란이 분열하듯이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나는 수정란 본능이라고 부른다.
삶의 본능, 죽음의 본능, 신화적 본능이 생명을 얻은 후 생명을 발달·진화시키기 위한 3대 본능이라고 한다
면, 수정란 본능은 생태적 본능, 다차원적인 본능과 아울러 생명을 얻기까지의 3대 본능이다. 따라서 이들 본능
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짧고 유한한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 수정란 본능은 가정이 외부의 위협을 받을 때 틱히 강해진다. 전시나 찢어지게 가난할 때 부모들이 가정
에 쏟는 헌신적인 노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삶이 힘들 때는 수정란 본능이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발동된다.
그러나 풍요로운 삶으로 인해 수정란 본능이 쉽게 충족되면 다른 본능, 특히 다차원적 본능이 강하게 발동되
는 것 같다. 그것은 돈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 별 걱정이 없게 되자 끊임없이 밖으로 도는 현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돈 많은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늘어나면서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요즘 들어 망설임 없이 외도하고 이혼하면서 쉽게 가정을 깨는데, 이혼의 장기적인 선악은 아직 밝혀지지 않
았다. 그러나 내가 추측건대 가정이 깨졌을 때 받는 아픔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것은 본능
이 깊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 수
정란 본능은 가정을 이루기 전부터, 자기가 사귀고 있는 상대를 일생의 배우자로 결정했을 때부터 발동된다고
본다.
학창 시절 때 일이다. 죽마고우가 미팅에서 말을 굉장히 잘하는 여자를 만났다며 같이 만나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녀와 나는 영화는 안 보고 실컷 토론만 했다. 친구는 묵묵히 우리가 떠드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친구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다음에 친구와 그녀를
다시 만난 적이 있는데 친구는 갑자기 나를 몹시 경계하는 것이었다. 전 같은 토론은 고사하고 말도 제대로 못
건네게 했다. 나는 좀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의아하기도 했지만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려니 했다.
친구의 결혼을 앞두고 우리는 함께 신라 호텔 나이트 클럽에 놀러갔다. 이틀 후면 결혼할 사이인지라 나는
축하하는 의미에서 신부에게 블루스를 신청했다. 그런데 나중에 친구들이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
저 친밀감과 축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신랑은 상당히 언짢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네들은 예의를 지
며 신부에게 블루스 신청을 안 했다나... 왜 언짢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나 배운 것 같았다.
또 한 친구는 학창 시절 커플이 되어 오랜 시간 연애를 했다. 항상 같이 다니길래 나도 그의 애인을 자주 봤
는데 한 번은 함께 고고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 친구의 애인에게 블루스를 신청했
는데 애인을 건네주는 친구의 시선이 다소 당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시간이 흘러 그 친구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어느 날 교정 벤치에 앉아서 여러 친구들
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대련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놀자는 줄 알고 마주섰
는데 그는 갑자기 험상궂게 공격을 해왔다. 한참 후퇴하다 교정 저 건너 구석까지 밀려가니 그제야 친구는 공
격을 멈추었다. 저 친구가 왜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예전에 그의 애인과 블루스를 춰서 그런 게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말고 자신의 애인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격을 했
다니 말이다.
결혼을 약속하기 전까지는 대범하던 사람들이 결혼을 약속하면서 좀스러워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아마
도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으니 주변 경계를 강화하는가 보다. 이것은 정자가 난자 속으로 뚫고 들어가면 난자는
바깥 벽을 단단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난자
는 반쯤 벽을 통과한 정자에게도 문을 닫아 버린다고 하는데, 말이 문을 닫는 것이지 그야말로 잔인하게 정자
의 목을 내리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탄생했기에 인간에게는 수정란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결혼할 상
대에게는 그 누구도 가까이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 본능이 강한 사람들은 연애 단계에서도 노골
적으로 타인들에게 적개심을 보이기도 한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툭하면 발칵 짜증을 내며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커플도 있으니 말이다.
A는 B여인을 두고 선배 C와 삼각 관계였다. A는 B에게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시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바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A는 C와 식사를 하다가 C가 그 여인과 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A는 너무 분이 솟구쳐 C를 죽어라고 두들겨팼다. 그러고는 식당 밖 대로에 주저앉아 목놓아 엉엉 울었다. 결국
은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는데 A는 경찰서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A는 그때 말 그대로 돈 상태였다고 한다.
이런 것은 좀 심한 경우이고, 대개 수정란 본능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거나, 결혼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경우에 강하게 발동한다. 이 수정란 본능은 처음에는 연인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차츰 가정을 지키고 자
식을 아끼고 번식하는 본능으로 확대된다. 수정란은 2분열, 4분열, 8분열을 하면서 생명으로 키워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공적인 일로 여자 동창네 집에 전화를 걸게 되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누구
냐고 거세게 따졌다. 괜히 겁을 먹은 내가 동창이고 공적인 일임을 줄줄이 밝히자 그제야 아내를 바꿔 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반응이 다소 기분나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남편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내나 가정은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아내나 가정, 자식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편하자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능의 힘을 무시하고 오만해질 때 사람은 자기도 통재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는다.
개방적인 남편을 둔 아내는 어느 날 자랑스럽게 자기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디를 놀러가고 무엇
을 하고... 이에 대한 남편의 반응은 의외로 아주 속좁은 것이었다. 남편은 아주 유치한 소리, 근거 없는 의심,
폭력까지 휘둘러 가면서 아내를 달달 볶았으니 말이다. 아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방적인 내 남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오히려 남편이 그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지 않은 것을 탓할 줄 알았는데... 그러
나 남편의 반응은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의 말에서 본능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자와 난
자가 일대 일로 만나 두꺼운 벽을 쌓아 다른 정자들을 외면하는 수정란 본능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본능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길길이 날뛰게 된다. 본능은 인간의 의지나 이성에 비하
면 너무나 커다란 에너지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 아내는 남편의 이성만 너무 믿은 것이다. 이성이 발달하면
서 사람들은 본능의 가치나 위력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배우자에게 이성
친구가 있어도 용납할 수 있다는 오만을 부리기도 한다. 또 요즘 주부들은 공공연히 남편 앞에서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이 말로 끝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현실이 될 때는 당사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크
다. 배우자는 발달한 이성의 힘으로 말은 받아들이지만, 현실은 엄청나게 강한 본능이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 따라서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이 자기 배우자를 항상 나만의 사람으로 소중히 이끼고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
이나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대로 들어오면서 이성만 믿고 함부로 가정을 일
탈하는 짓을 하면 전혀 예기치 않은 비극이나 부담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의 수정란 본능에 깊은 상
처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을 지키고 가꾸는 것은 이성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본능의 길이다.
못된 신랑 초기에 때려잡기
몇 년 전에 연극을 할 때 일이다. 제작자가 연극인이 아니라서 연출과 배우를 구했는데 제작비에서 서로 의
견이 맞지 않았다. 연극인들은 제작자가 예상하는 비용의 두 배 이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갈들이 증
폭됐는데 연극인들은 제작자를 때려잡아서라도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한다고 자기들끼리 주장하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제작자는 그 연극인들과는 냉정하게 손을 끊고 다른 연극인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다른 연극인들은 무리하게 돈을 요구하기보다는 제작자를 살살 달래고 구슬러서 합작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결국 막은 오르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나, 새로 맡은 연극인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처음 맡았던 연극인들
은 쓴맛을 볼 수밖에 없었고, 심지여 어떤 연극인은 오랫동안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
래도 제작자의 버릇을 때려서라도 고쳐 놓겠다는 발상이 무리였던 것 같다.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마음과 타
협할 줄 아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화합이 주는 선물이 돌아갈 리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어떤 여자들을 보면서 분통이 터졌던 것은 그들의 이중 잣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온갖 방식으로
남자들을 계산하면서 남자들이 그러려고 하면 여지없이 속물로 격하시켰다. 여자들은 남편감, 아니 남자를 사귀
는 조건으로 학벌, 가문, 재산, 성격, 형제 순위, 시부모 등등 따지는 것도 많지만 남자들이 조금이라도 따질 낌
새만 보이면 가차없이 순수니 사랑이니 인간성을 들먹이면서 폄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이중 잣대를 들이
대는 여자들치고 잘사는 사람은 못 봤지만(너무 약게 굴기 때문에 대개는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소중한 사
랑을 놓치거나 버리거나 잃곤 한다).
그런 성향은 여자들이 다소 강한 것 같다. 자기를 돌아보기보다는 상대를 비난하고, 자기가 어느 수준에 오르
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상대에게만 어느 수준 이상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부 여자들의 이기적이거나
보수적인 경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남녀 불평등 때문에 남자들에게 현실적으로 기대는 것이 많은 우리 사회
의 구조적 모순에도 책임이 클 것이다.
이러한 이중 잣대가 결혼해서까지도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부부의 불화가 심각해지고 이혼으
로까지 치닫게 된다. 상대방의 단점만 보면서 상대방만 뜯어고치라고, 더 나아가서는 앞서의 연극인처럼 아예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나섰다가 결국에는 역공격을 받아 아예 갈라서고 마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나약해서 그런지 부부 싸움을 못 견디는 경우가 늘고 있다. 칼로 물 베기였던 부부 싸움이 점차
칼로 목치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결혼 초반에 상대의 가치관이나 습성, 버릇을 못 견뎌 부부 싸움이 더욱
치열한데,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어가는 실질적인 지혜가 요구되는 시기이다.
남편을 초장에 때려잡기보다는 남편을 못 견디는 자신을 처음부터 바꾸어 남편을 존중하고 갈등을 타협해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어느 광고 문구는 인
간 사이의 갈등을 푸는 데도 아주 멋진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신혼 초에 신랑의 버릇을 처음부터 바꾸어 놓는
신부들의 슬기로운 지혜를 나름대로 상상해 보면 이러하다.
1.마마보이형
마마보이인 남편의 버릇을 고치려면 우선 아내가 마마걸이 아니여야 한다. 자기는 친정엄마나 아빠에게 온갖
것을 의지하면서, 남편에게만 부모에게서 독립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자에 비해 고통을 많이 받고 자라나 남자보다 더 성숙한 경우가 많지만, 요즘 들
어서는 보호받고 자란 마마걸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결혼 초에 부부의 갈등이 심해져 이혼까지 가는 경우
는 대개 마마걸과 마마보이가 만나 애 들 싸움을 벌이다 감당하지 못해서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 속은 아이지
만 덩치는 큰 두 사람이 싸우니 속내용은 유치하지만 상처는 크고도 깊다.
이때 자식을 독립시킨 성숙한 부모라면 너희들은 이미 어른이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겠
지만, 결혼시켜서도 자식을 치마폭에서 내놓을 줄 모르는 엄마들은 싸움에 끼여들거나 전면으로 나서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그 결과는 누가 이기든 상처만이 남는다.
아이는 어른, 특히 이상적인 어른(ideal ego)을 동일시하면서 성장한다. 남편이 마마보이라고 탓하기보다는 자
기가 먼저 어른임을 보여 아이인 남편이 자기를 동일시해 스스로 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
현대는 남녀평등이므로 결혼하면 시가에 신경쓰는 만큼 친정에도 동등하게 신경쓰자고 주장하는 신부는 남편
의 마마보이 버릇을 고치기가 힘들 것이다. 그것은 서로 마마걸과 마마보이로 평행하게 나가자는 것이니까... 결
혼해서 우선 쟁취해야 할 것은 둘만의 가정이다. 따라서 남편이 정신적으로 어려서 엄마 슬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더라도 나부터 성숙하여 친정에서 독립하는 것이 남편의 마마보이 성향을 고칠수 있는 빠른 길이다.
2. 폭력형
요즘 가정 폭력에 대한 문제가 자꾸 사회 문제가 되면서 여자가 처음 맞았을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등의
이론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고지식하게 그 이론에만 따랐다가 현실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 괜
히 서로 치고박고 하다가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증폭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남편의 폭력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그 반복성과 습관성이다. 습관적으로 때리는 경우에는 경찰에 고발
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러나 어쩌다 아내를 못견뎌 때리는 경우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남자들은 여자와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정말 속터질 때 어쩌다 한두 번 손이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 10년 동안 아내를 딱 두 번 때린 것 같다. 한 번은 가볍게, 한 번은 심하게... 아내가 견지기 힘들
때는 대개 집을 뛰쳐나가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정말 못 견디게 힘들 때, 또 아내가 못된 짓을 했을 때는 때리
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남자란 본래 여자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굴복당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예라도 언젠가는 반란을 꾀한다. 남편이 아내의 지배에 정말 어쩌
다 쿠데타라도 하듯이 한두 번 구타한다면 아내는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내가 정말 남편을 너무 못 견디
게 몰아세운 것은 아닌지...
3. 꽁생원형
꽁하다는 것은 사전적인 정의로는 '말이 없고 마음이 좁아 무슨 일을 잊지 아니하고 속으로 언짢아히다'이고,
꽁생원이란 '매사에 꽁한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다. 남자란 대범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여자보다 속이 좁고 꽁
하다는 말을 여자들이 자주 한다. 왜 그런 말이 자꾸 나오나 싱각하다가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결혼해서 여자들이 중오시하는 것은 현실이다. 물론 최근의 신세대 여성들은 감정과 쾌락도 중요시하지만 이
제까지 대부분의 주부들은 가정의 현실을 중요시했다. 돈과 현실이 중요시되면 감정은 무시된다. 좋은 게 좋다
고 넘어가다 보면 속이 곪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꽁하다는 것은 그때그때 감정 처리를 잘 못 한다는 것
이다.
어떤 상황에서의 감정이 충분히 해결되지 않았는데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면 감정이 쌓인다. 그러나 현실적이
고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일단 상황이 지나가면 쌓인 감정을 잊고 다음 상황에 충실하지만, 의미와 가
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감정을 쉽게 잊지 못한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이 꽁하다는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서 현실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란 남녀 모두 쉽게 처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정말 깊은 마음의 상처에서는 남녀 모두 한이 맺혀 꽁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쉽게 꽁해지는 남편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감정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부부 싸움이나 갈등
상황에서 해결을 위해 타협하고 억압할 수밖에 없는 상대의 감정은 나중에라도 충분히 풀어 줘야 한다. 그냥
표면적으로 화해했으니 상대방의 감정이 다 풀렸으리라 생각하다가는 꽁생원형 남편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 꽁생원 남편은 언젠가는 억압된 감정의 불길을 어떤 식으로든지 내뿜기 때문이다. 시모느 보부아르 작 《
위기의 여자》에는 이러한 남편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바람난 남편에게 아내가, 당신은 이기주의자라는 등으로 마구 퍼붓자, 남편은 당신도 이기주의자라고 다양하
게 예를 들며 맞받아 친다. 기가 막힌 아내가 울면서 묻는다.
"당신이 그토록 나를 나쁘게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아직도 나를 사랑할 수 있죠?"
남편이 내뱉듯이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10년 전에 싸운 후로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됐소. 내 진실을 이야기하리다."
8년 전부터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동안 여러 여자들과 잤다고 한다. 나이
어린 팰르랑과 2년, 아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어떤 남아메리카 여자 환자와도, 그리고 또 병원의 간호사와도.
그러다가 지금의 노엘라와는 18개월 전부터라는 것이었다.
이런 식이다. 소설 속의 남편은 아내가 자기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은 데 대해서도 꽁하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남편의 대사들이 이를 잘 묘사해 준다.
"내 보기에 당신은 내 일과 관련되는 생활에 별로 신경쓰지 않은 것 같은데..."
"대중을 상대로 쓰는 기사도 당신은 읽지 않잖소."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은 가져 줘야 하는 것 아니오?"
따라서 이러한 꽁생원형의 남편과 살 때는 남편의 일상적인 감정을 존중하고, 갈등이 생겼을 때는 그의 억압
된 감정을 주의 깊게 살펴 그 감정이 확실히 풀렸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개 꽁생원들은 겉으로는 대
담한 척하기 때문에 몇 번 감정을 물어 주면 자기 만족에 스스로 감정을 풀고 만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을 게
을리했을 때는 위기의 여자가 될 수도 있다. 꽁생원형 남편을 대하는 가장 편한 길은 겉으로라도 관심을 많이
갖고 칭찬을 많이 해주는 것이다. 스스로 감정 처리를 잘하지 못하는 미숙한 어린아이에게는 칭찬이 약이기 때
문이다.
4. 맏아들로 지나친 효자형
어느 효녀와 결혼한 남편이 이렇게 마누라 얘기를 늘어놓았다.
"내 아내는 무척 효녀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처가집으로 달려가곤 해 나와 많이 다퉜다. 그 이유는 나는 나
의 여자를 원하지, 남의 첩자를 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하면 이미 독립된 왕국을 이룬 것이데 여전히
남의 왕국에 마음이 가 있다면 나의 왕비가 아니라 간첩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치열하게 싸워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내는 나와 안 살면 안 살았지 부모님, 오빠들
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나에게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 줄 때는 내
가 그녀의 부모들에게 잘해 주었을 때뿐이다. 그러나 아내의 효녀 스타일에 말려들었다가는 평생 처가집 시중
이나 들면서 살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온갖 방식으로, 심지어는 야수같이 무식한 방법까지 써가며 아내에게 남편의 소중함을 입증해
주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똑같은 방식의 보복뿐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자기 집안을 모욕하는 내가 경멸스럽다고,
오히려 자기가 먼저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도 이혼을 결심하고 어느 남 아내 앞에서 결
혼 사진 몇 장을 찢어서 던져 주었다. 아내는 큰 충격을 받고 몸져 눕더니 그때부터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이 끝없는 효녀 스타일이 끝나리라고는 생
각지 않는다. 부모 자식은 천륜이지만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인, 장모가 돌아가셔야 아내는
점차 나의 여자가 될 것 같다."
이 남편이 효녀인 아내에게 쓴 방식은 자기의 소중함을 아내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나친 효자 남편
과 사는 아내의 경우도 자기의 소중함을 남편에게 알리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 방법은 이 남편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야만적인 방법을 썼다면 아내는 여성다운 부드러운 방식을 쓰는 것이 효과
적이지 않을까? 결혼 사진을 찢는 우악스러운 방법보다는 내가 얼마나 가치있고 예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남
편에게 새록새록 알리는 방법 말이다. 그 방법은 남편이 나에게 어떤 매력을 느껴서 나를 선택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 다음에 그 매력을 한껏 발휘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자기부터 맹목적인 효녀에서 벗어나야겠지
만...
5. 가사일 사사건건 간섭형
정신과적으로 간섭을 분석하면 개인의 정신에 치명적인 위해를 줄 수도 있는 가혹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 사
회는 지금까지 집단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움직여 왔기 때문에 집단의 공통된 가치를 향해 상대방을 설득하고
충고하고 간섭하는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많이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앞으로의 개성 중심의 사회에서 간섭
은 서로의 관계에 치명적인 위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간섭과 설득을 미덕으
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남편이 그러할 때 남편에게이렇게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그러는데 지나친 간섭은 사람을 미치게까지 할 수도 있대... 당신 그렇게 사사건건 간섭
하다간 평생 정신병 걸린 마누라 시중이나 들고 살아야 할지도 몰라!"
6. '침묵은 금', 시종일관 무뚝뚝 과묵형
어떤 여자는 명랑한 집안에서 발랄하게 자라나 남편만은 듬직한 과묵형을 원했다. 그래서 자기 이상에 맞는
근사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정작 결혼하고 나니 그렇게 불행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도대체 아기자기한 재미가
없고 더 나아가 섹스까지 듬직하게 안 해주는 것이다. 신부는 크게 실망해 남편을 무척 미워하고 저주했다. 연
애할 때는 매력으로 비치던 점이 결혼한 후에는 서로 안 맞는 것으로 나타나 티격태격 원수같이 다투는 경우가
많다.
'침묵은 금, 시종일관 무뚝뚝 과묵형'도 마찬가지이다. 연애할 때는 그 남이 좋았는데 결혼하고 나니 그 점이
안 맞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선택한 이상 어쩔 수 없다. 맞지 않는 남편의 특성을 무리하게 뜯어고치려 욕심
내지 말고 그에 맞추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내성적·외향적인 성격은 타고나는 것으로 후천적으
로는 잘 안 바뀐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자기 성격도 뜯어보면 남편이 못마땅해 하는 잠도 있을 테니 너무
자기만 손해라고 극단적으로 과장해 생각할 것도 없다.
7. 집안 일은 절대 사양하는 귀공자형
내 사주는 천귀이다. 하늘에서 귀하게 여기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막내로 귀엽게 자란 나의 일상 습관
에 자부심과 이데올로기를 불어넣어 집안일은 절대 사양하는 전형적인 귀공자형이 되었다. 내 기억에 결혼할
때까지 이불을 개본 적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내게 손끝 하나 까딱 안 한다고 탓한 것은 단 한 번밖에 없는 것 같다. 아마 그때 어머니 몸이 안
좋았나 보다. 아무튼 그렇게 귀여움을 받고 자라서 결혼해서도 같은 습관을 지속했다. 다행히 착한 아내를 만나
고 또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 별로 손에 집안일 안 묻히고 잘살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머님이 분가하시겠다고 해서 분가시켜 드리면서 작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집안일
을 아내와 내가 맡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천귀인지라 모르는 척했는데 아내는 나에게 설
거지를 맡아서 하라고 한다. 내가 난감해 하자 아내는 그러면 식기 세척기를 사달라고 한다. 나는 무조건 찬성
하고 부엌을 비롯해 집안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요즘은 좋은 기계들이 많이나와서 그런지 이것저것 들여놓으
니 나는 여전히 집안에서 빈둥거리며 살 수 있었다. 단지 밥 먹으면 내 밥그릇을 물에 담가 놓는 수고를 제외
하고는...
만일 남편이 '집안일은 절대 사양하는 귀공자형'이라면 무리해서 남편을 집안일로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바깥
일을 더 열심히 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 와 집안을 21세기 미래형 주택으로 바꾸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남편이
벌어 온 돈을 팍팍 써서 집안일을 한결 줄이면서 남편에게는 돈 많이 벌어 어라고 바가지를 박박 긁는 것이다.
8. 겉치레형(자동차? 최고로, 양복? 최고로, 술값? 내가)
얼굴이 예쁜 사람은 화장을 안 하고, 용모가 뛰어난 사람은 겉치레를 안 하며, 정신이 빛나는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화장이나 겉치레, 자기 과시에 신경쓰는 사람은 무언가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을 철들게 하기란 쉽지가 않다. 겉치레는 허악한 그들의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철나려면 겉치레 과정을 진하레 한 번 거쳐 그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남편의 자존심을 항상 존중하면서 그들이 겉치레에 지치거나 피곤해 할 때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 주는 것이 효
과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 남편들의 겉치레에 끌려다니면서 뒷감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겉치레
가 심한 남편들이 집요하게 요구하면 집요하게 거절하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거짓말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면
서...
9. 담배와 술 없인 난 못 살아!
담배와 술은 기호 식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약물이기도 하다. 담배는 불안을 경감시켜 주고 기분
을 다소 호전시키며 집중력을 높여 주고, 술은 자기 억제를 완화시켜 소심한 성격을 대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의지가 약한 사람일수록 담배와 술에 많이 의지한다. 만일 '담배와 술 없인 난 못 살아!'하는
남편이 있으면 애교스럽게 '당신 평생 정신과 약 먹고 살 거야!'하고 물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0. 리모컨형(쉬는 날 리모컨과 베개만 끼고 있는 형)
하루 일에 지쳐서 집에 돌아가면 아내와 무드 있게 맥주 한잔 기울인다는 것은 잘 생각되지 않는다. 하루 종
일 사람들 만나고 일하느라 신경썼는데 또 아내와 생각하거나 신경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는 소파에 누
워 베개 끼고 리모컨만 돌리게 되는데, 요즘에는 케이블 TV까지 등장해 리모컨도 한참 돌려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대개 정해져 있다. 바둑 아니면 아무 신경 안 쓰고 볼 수 있는 음악 프로 정도이다.
쉬는 날 남편이 리모컨만 끼고 있으면 리모컨을 뺏을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얼마나 생각하기 싫으면 저럴까 이
해도 해주어야 한다.
이런 형의 남편들은 아마도, 남편이 게으름을 피울 때 부엌에서 일만 하는 아내보다는 옆에서 같이 뒹굴면서
유쾌한 말을 종알대는 아내를 더 사랑스러워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싫어 혼자만 있겠다고 하면 증세가 좀 심
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남편이 게으름을 피울 때는 옆에서 함께 확실히 게으름을 피워 남편의 피로도 풀고
자기 피로도 푸는 여유가 필요하다. 강박적으로 설거지만 끝내려 하지 말고...
하나를 위한 이중주
총총하게 별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아빠사자와 아들사자가 같이 뒹군다. 이들은 아빠에게 말한다.
"우린 아직 친구죠?"
아빠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에게 부드러운 사랑과 신뢰의 미소를 보낸다.
만화 영화 〈라이언 킹〉의 한 장면이다. 눈물이 절로 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나도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는 아빠이기에 감동은 더욱 컸다. 가정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기에 그렇게 커다란 감동으로 하나로 묶
어 주는 걸까?
〈라이언 킹〉에서는 이렇게 노래로 대답한다.
"인생의 순환 속에서 우리의 장소를 찾을 때까지... 우리 중 몇몇은 길가에 낙오하고, 우리 중 몇몇은 별나라
로 솟아오르고, 우리 중 몇몇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해. 이 세상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받아들일 일 믾고
지금까지 발견된 것보다 발견해야 힐 일이 더 많지요. 그러나 태앙은 높이 구르면서 사파이어 같은 하늘을 통
해 크고 작은 것들을 끊임없이 돌아가게 하지요."
아들은 바로 나의 분신이면서 나의 생명을 영원히 연장시켜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
면 아들은 이미 나의 분신이 아니다. 나와 아내의 몸을 빌려 태어났을 뿐, 아들이 보여 주는 신비로움은 형언할
수 없다. 책을 읽고 오락을 하고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은 어렸을 때의 나이면서도 또 내가 아니다. 그런 아들에
게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친구로서만이다. 나는 아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아들이 자기 길을 갈 수 있게
보살펴 주는 이상은 할 수 없다. 효도하고 복종하는 부모 자식 관계! 끝없이 돌봐 줘야 하는 상하 관계! 당치도
않다. 끝없이 존중하고 이해하고 노력해야 가까워질 수 있는 친구 관계일 뿐이다.
이것은 꼭 아들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딸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부모, 형제 모두 그렇다. 혈연이니 지연
이니 아무리 앞세워도 서로 존중하고 노력하지 않는 한 가까워질 수 없다. 친구가 될 수 없다. 청소년들은 친구
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꼽는다. 친구만큼 자기를 이해하고 놀아주고 돌봐 주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친구의
존재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앞으로의 가족 관계는 친구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아내에게 혼이 났다.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할 때 아내가
성가시게 하면 일단 감추고 본다. 고지식하게 시시콜콜 다 이야기했다가는 시작부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래서 일을 벌일 때는 온갖 달콤한 말로 아내를 안심시키고 나서 나는 나대로 일을 벌인다. 그러다 들통나면 야
단을 맞는다. 그러나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아내는 혈압이 올라 잠이 안 온다고 가까이 오지도 말라고 화를 내더니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화를 푼다. 그
리고 섭섭해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도 이해했을 거라고 하면서... 아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아내에 대
한 불신이 아내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좀더 친한 친구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오랜 세월 살을 섞고 산다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
에 대한 존중과 이해 속에서, 상대를 받아 주고 상대의 길을 따뜻하게 지켜 볼 때 비로소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마도 아내와 나, 아들과 나, 딸과 나, 부모님과 나는 이러한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 가운데서 '하나를 위한 이
중주'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원시 시대의 일이다. 남자들이 사냥을 하고 동굴로 돌아왔더니 여자들이 아이를 안고 있더란다. 그때 남자들
은 여자들에 대한 두려움,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언젠가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이 있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대단히 창조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진이 빠져 다른 일상에서는 남자들처럼 창조
적인 것 같지 않다고...
어떤 박사는 자기 나이가 30억 년이라고 한다. 생명이 탄생된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지 이어져 온
생명이 자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평생에서 지금까지 내려온 생명의 연속성을 바꿀 확률은 80^34,34^30억 년일
것이다. 그렇다면 30억 년까지 끈질기게 내려온 생명 복제의 본능은 엄청나게 우리 생활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
고 보면 〈쥬라기 공원〉이나 캥거루 등의 일상을 보면서 내가 혹시 저 공룡이나 캥거루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나마 스쳐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의 이미지는 어머니처럼 친근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특히 생명을 탄생시키고 보존하는 여자의 삶이란 지식을 통해 생명을 영속시키는 작업
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남자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보금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본능이 강하
지만, 여자는 보금자리를 가꾸고 자녀를 건강하게 키우는 일에 누구보다도 강한 애착을 가질 것이다.
확실히 자녀에 대한 애착에 있어서는 여자는 위대한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언젠가 집 앞에서 사내아이가 차
안에 들어가 놀고 있었다. 나와 딸아이는 차 밖에 있었는데 그 아이가 시동을 걸어 차는 앞뒤로 제멋대로 움직
였다. 앞차를 들이박고 뒤차를 들이박으면서 차는 무섭게 웅웅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 아내부터 찾았다. 운전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파트 정문을 나서다 이 광경을 보고 황급히 달려돠 차로 뛰어들어 시동을 껐
다.
아내가 어떻게 그 웅웅거리는 차 안으로 뛰어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
차가 앞뒤로 박을 때 그곳에 나나 딸애가 서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끔찍하다. 특히 딸애가 그 길에 서 있었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계속 아내만 부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얼마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중문해수욕장에서 아홉 살 난 아들놈이 수영을 하고 있
는데 자꾸만 바다 안쪽으로 들어간다. 바다가 얕아서 일단은 내버려 두고 딸애와 바닸가 동굴 쪽으로 걸어갔는
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특히 조그만 애라 파도에 빨려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고 있는데 아이는 점점 조그마해지면서 멀어져갔다.
설마 설마 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뛰어갔더니 벌써 위험을 느끼고 젊은 두 남자가 아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은 바닷속으로 들어갔으나 문득 겁이 났다. 그래서 아이에게 소리지르면서 빨리 나오라고 했다. 내
앞에 가던 남자가 먼저 아이에게 다가갔다가 나를 보고 다소 물러난다. 그때 아이가 다가오면서 말한다.
"아빠, 왜 그래! 재밌는데..."
마침 썰물 때라 의외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얕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안도했지만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을 느
겼다. 아이를 구하기에 앞서 겁을 먹은 게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아이를 구히기 위해 다가간 두
남자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이야기도 못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내라면 어땠을까? 아마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뎌자들의 삶은 아이와 떨어져
서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아이를 위하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여자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다. 그
리고 그 이면에는 태고 때부터 내려온 생명의 고고한 생존 본능이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과 상
담 창구를 통해 봐도 명확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 어쩌니 해도 결국 여자들의 고민은 아이와 연관되어 있
다.
우리 사회에는 자녀 때문에 참고 산다는 여자들이 많았다. 자기는 홧병에 걸릴지언정 아이들을 위해 참고 살
았던 것이다. 서구의 개인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는 그런 모습이 어리석게 취급되기도 했지만, 요즘은 새롭게 재
인식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가급적 이혼하지 말자는 풍조가 새로이 생기고 있다니 말이다.
전에는 정신분석 학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부부 사이가 나쁠 경우 참고 그냥 사는 것은 자녀에게 더 해가 된
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부 사이가 나빠 이혼했을 경우 자녀가 받는 상처는 엄청나고 , 또 그렇게 헤어진 부부
가 잘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여자들의 삶은 희생적인 면이 많다. 그 삶에 대해 남자들이나 자식들은 고마워하고 있
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몰라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하는 여자의 삶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
다. 수십억 년을 내려온 생명의 영속성이 인간의 조그마한 이기심으로 쉽게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부 외도의 이모저모
단조로운 삶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던 두 주부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자기들 같은 방황을 확실하게 연장
한 한 여주인을 만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다들 서른이 넘었지? 그 나이구나... 난 그 나이 때 거의 미치는 줄 알았지. 그래서 집을 나왔어. 아이
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어. 아이 생각을 하며 아이 생각을 하며 매일 밤 눈물도 엄청 쏟았지. 하지만 크니까 제
어미라고 찾아오대...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그때 불량 주부였던 거야. 아무리 애써도 살림에 취미를 가질 수가
없고 늘 가슴이 답답했어. 매일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어 미치겠더라구. 아무리 착한 남편이라도 몇 번 가출을
하니 이혼을 해주더라구. 다 내 팔자지, 뭐... 여기에 오는 남자들, 다 예술가야. 매너도 좋고, 삶에 대한 열정으
로 가득 찼지. 화가, 작가, 영화감독, 교수들이 많이 와. 애도 다 키워 놨겠다, 저녁에 놀러와. 그런 사람들하고
대화도 하고, 세상 보는 눈도 넓히고... 돈도 벌고..."
"나가자."
문 밖에서 은희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뭐 저런 미친 년이 다 있어?'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차현숙 작 《나비의 꿈》중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뭐 저런 미친
년이 다 있어?'였다. 아마도 자식까지 있는 가정을 뛰쳐나온 여주인의 모습에서 어떤 섬뜩함,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주부들의 방황, 외도가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다. 40대
남져의 불륜을 다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으니 말이다. 남녀 평등으로 인해 여자들
의 권리가 신장되면서 여자들 또한 남자들같이 삶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주부들의 외도 양상도 카바레에
서 제비족에게 빠져 몸 버리고 신세 망치던 과거의 무분별한 열정과는 달리 부담 없이 즐기고 편안하게 가정으
로 돌아가는 남자와 같은 패턴이 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외도를 갈망하는 걸까? 외도에 어떤 긍정적인 가치가 있길래... 아마도 외도 속
에는 청춘이 있고 젊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이성을 만나 낭만적인 대화를 나누고 감미로운 키스
를 하며 황홀한 섹스를 나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떨리는 흥분을 준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젊음이 영원
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수록 외도를 통해 자기의 젊음과 삶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진다. 남편이나
아내는 이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안을 수 있는, 젊음과 신선함이 상실된,
함께 늙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도는 현실을 걸어야 하므로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다.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외도를 꿈꾸는 주부들의 큰 고민은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믿을 만한, 번듯한 남자친구를 사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주부들은 차마 남자를 찾아
나설 만한 용기는 내지 못하고 혼자 가슴 태우다 세월만 보낸다. 그러다 나이를 먹어 인생에 대해, 사회에 대해
눈이 떠지고 자신이 생기면 점차 용기를 내어 외도 전선으로 달려 간다.
그러나 아무리 외도가 유행이고, 외도하는 데 주의를 한다고 해도 외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
도는 작두날을 걸을 수 있는 신기가 있거나, 살얼음을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지졌거나, 카페 여주인같이 한 보금
자리에서 마음 편히 살지 못하는 방랑벽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런 끼도 없으면서 외도를 꿈꾸고 실행했다가
는 괜히 피해만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주부가 섣불리 외도에 접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면 이러하다.
30대 초반의 주부인 는 남편과의 단조로운 삶이 지겨워서 대학 시절처럼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만남을 꿈꾸며
애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육체만 요구할 뿐 대화나 감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
국 그녀는 당하기만 하고 외출을 끝내야 했다. 그 후 는 오랫동안 외출을 삼갔다.
그러나 40대가 다가오니 아무래도 이대로 젊음을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육체가 뭐 그리
소중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감성적인 충족을 위해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전히 육체만 요구했고 그녀는 흔쾌히 남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낭만적인 관계로 진전되
길 꿈꾸었으나, 남자들은 욕구를 채우자 잠만 자거나 자기 현실로 돌아가기 바빴다. 그녀는 다시 허탈감에 빠져
남편과 자식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밀림의 왕자 레오와 야생의 엘자
아침 잠결에 아홉 살 난 아들 세륜이의 호통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나 밥 빨리 안 줄 거야! 빨리 안 주면 나 밥 안 먹고 그냥 간다."
뒤이어 "간다, 간다"하는 할머리의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린다. 보나마나 밥을 들고 뛰는 것이리라. 나가 보니
아들놈은 방바닥에 책을 놓고 읽고 있었고, 할머니는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정성스레 김밥을 싸서는 입에 넣
어 주고 있었다.
"어머니, 세륜이 성격이 꼭 할아버지 닮았죠?"
무심코 던진 말에 어머니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꼭 지 할아버지야. 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똑같다니까..."
아들놈이 어머니를 너무 부려먹는 걸 보면 가끔씩 짜증도 나지만 대견한 마음도 든다. 얼마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홀로 된 어머님께는 손주놈이 아버님같이 호통치고 어머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외로움과 슬픔
을 달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곧바로 우리 부부는 세륜이를 어머니 옆자리에서 자게 했다. 세륜이는 그후 아버
님의 빈 자리를 철저히 파고 들었다. 잠자는 것에서부터 부려먹는 것까지... 물론 그 습성은 아버님이 돌아가시
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러나 할머니는 손녀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파고드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다. 손자
는 할머니를 때려도 용서할 수 있지만 손녀는 칭얼거리는 것조차 용납이 안 됐다.
그날 저녁에 아내와 나의 언쟁이 벌어졌다. 나는 내 판단에 아내가 관여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아
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쥐잡듯이 아내를 잡는다. 아내와 마주앉아 목소리가 높아질만하니까 일곱 살 난 딸아이
가 그 사이로 끼여들어 와 앉는다.
"아빠! 또 싸우려고 하는 거지!"
"아냐! 엄마와 대화하는 거야!"
"거짓말! 그런데 왜 목소리가 또 높아! 지난번같이 또 싸우려고 하는 거지!"
딸아이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다 드디어 흘러 내린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봐! 아빠 큰 소리 안 치잖아..."
딸아이는 내 무릎에 한참 앉아 있다가 건넌방으로 갔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힐끔힐끔 우리
부부를 살펴본다. 결국 그날의 싸움은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 버렸다.
다음날 저녁 아들놈과 딸아이의 싸움이 벌어졌다. 컴퓨터 오락을 하고 있는 딸아이의 자리를 뺏지 못해 안달
이 난 세륜이가 드디어 소리를 지르며 싸움을 건 것이다. 엄마, 아빠가 딸아이의 편을 들면서 싸움은 곧 끝이
났으나 아들놈의 시위가 시작됐다. 괜히 문도 쾅쾅 닫고 소리도 지르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곧 엄마의 호통 소리와 매질에 의해 가라앉고 말았다. 그 결과 세륜이는 한동안 컴퓨터 오락을 자진
포기해야 했다. 물론 내가 나서서 징계를 완화시켜 주긴 했지만...
아들을 야단치고 돌아온 아내가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다고 심각하게 말한다. 이사를 가든가 뭔가 집안을 깨
끗이 치우며 살고 싶은데 어머님 때문에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어머님이 어디 한 달만 나갔다 오시면 지저
분한 것들을 싹 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원한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런 우리 집안을 보면 화목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이 마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집안 분위기를 화목하게 바꾸려는 노력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화목하게 하려면 할수
록 나만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화목하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집안이 항상 시끄러운 것은 아내나 어머니, 아이들, 내가 각기 자기대로의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원칙을 포기하고 상대의 원칙에 지배되어 살게 되면 그때부터는 지배자의 명령을 기다리며 눈치만
보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을 약하게 하고 우유부단하게 하며, 심지어는 우울증에 걸리게까지 한다.
각자 자기 원칙을 고수하면 그 가정은 서로 약한 상대를 쫓아 다니는 밀림처럼 변해 버린다. 아내는 아들을,
아들은 할머니를, 할머니는 딸아이를, 딸아이는 아빠를, 아빠는 아내를 잡아먹지 못해 쫓고 쫓기는 먹이사슬이
연출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겉보기에는 콩가루 집안일지 몰라도 이 안에서 자란 내 아들, 딸들은 아마
야수처런 강하고 건강한 정신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밀림의 왕자 레오나 야생의 엘자처럼...
가족의 해체와 극복
병들었을 때 가족이나 자식이 없는 것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고 한다. 젊었을 때 너무 멋쟁이라 마누라를 서
넛씩 바꿔 가며 화려하게 인생을 구가했던 사람도 나이가 들어 풍을 맞거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만큼 시
들어 가면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는다.
우리 옛날 영화에서도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다가도 늙어서 돈도 없고 힘이 빠지면 찾는
것이 조강지처가 있는 가정이다. 물론 개중에는 차마 면목이 없어 계속 거지로 떠돌아다니다가 일생을 마치는
양심적인 사람도 있지만, 정신마저 흐려질 정도로 약해지면 누구나 가정을 그리워하고 찾게 된다. 그래서 가정
이란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이다. 비록 평소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지치거나 힘들 때는 누구나 가정
의 품을 그리워한다. 가정이란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늙으면 아기가 커가는 과정을 거꾸로 밟게 된다고 한다. 아기가 요람에 누워 있다가 기
어다니다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듯이,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처음에는 말을 잃고 다음으로는 걷지를 못하고
결국에는 누워서 꼼짝도 못하다가 죽는다. 불교의 윤회 사상이 맞다면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마도 아기
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자궁 속일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자랄 때 엄마가 꼭 있어야 하듯이 노인이
늙어 죽음을 맞을 때도 엄마가 꼭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자랄 때는 엄마가 보살피는 것을 자연이 허락하지만 노인에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
마도 활기찬 생명의 가능성을 보살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반대는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라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대개의 노인들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연계의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인간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다른 동물들은 쓸모가 없게 되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늙어서 이빨 빠진 호
랑이를 왕으로 계속 대우하는 동물 세계의 법칙은 없다.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면 가정의 품에 계속 안주하는 것은 나연의 섭리에 맞지 않는다. 젊고 힘 있는 개인은
가정을 떠나 자기의 인생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또다시 가정을 이루면서 번식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 아이를 보호하고 기르는 엄마 품, 곧 가정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가정의 역할이 자꾸 촉소되고 있다. 이혼, 패륜이 늘어나고 선진국에서는 아
이를 버리는 부모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휴가철에 아이를 집에 버리고 가는 부모, 차
위에 아이를 태우고 가다가 차에서 아이가 굴러떨어져도 모르고 여행을 떠나는 부모들 때문에 한때 사회 분제
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아주 엄격하고 독립적인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독립적으로 크지 않으면 가정을 소홀히 하는 부모 아래서 자라기가 점점 더 힘
들겠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현대로 들어서면서 자꾸 가정이 홀대받고, 가정의 유대가 깨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가정
이라는 집단에 비해 개인의 힘이 월등히 커져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개인은 가정을 그렇게 필요로 하
지 않는다. 특히 성인이 된 다음에는 가정을 그렇게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리고 현대의 성인들은 옛날처럼 쉽게 늙지 않는다.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젊은 노인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현대의 테크놀로지이다. 현대의 발달한 컴
퓨터나 첨단 기술을 이용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충분히 젊은 사람들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젊고 힘 있을 때
가정이나 고향을 돌아보지 않은 것과 같이, 늙어서도 젊고 힘이 있게 되자 현대인들은 가정의 소중함을 자꾸
잃어버리고 있다.
특히 노인을 홀대하는 가정에 늙은이가 기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장한 후, 또 늙어서도 별로 가정에
기댈 이유가 없으니 자연히 아이를 기르는 가정의 의무에도 소홀하게 된다. 그런 추세에서 자식을 어렸을 때부
터 빨리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가정은 나약한 자들이나 숨고 웅크리는 피난
처같이 되어 버렸다. 강한 자들은 가정을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약한 것에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약한 동물이다. 아무리 현대의 테크놀로지가 강한 힘을 주
어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햑하고, 누구나 노쇠할 수밖에 없으며, 누구나 가정 같은 엄마 품을 그리워한다. 특히
힘에 의지하는 현대 사회는 개인간의 신뢰가 떨어지고 개인의 소외가 극심하므로 가정의 소중함은 다시 대두될
것이다. 소외되고 나약해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가장 의지하는 것이 바로 가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가정이 해체를 피해 보다 더 응집력을 갖추려면 가정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더욱 새롭게 가꾸
어져야한다. 그길은 아마도 나이나 권위, 맹목적인 가족 우석주의의 수직적인 가정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나
개성을 존중하고 실리면서 서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수평적인 가정으로 탈바꿈하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
된다.
서두르는 쪽이 먼저 당한다
며느릿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평범한 주부입니다. 며칠 전, 장성한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며느리가 될 아가씨를 인사시키더군요. 아들은
착실하고 순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전 평소부터 며느리가 될 아기씨는 살림을 알뜰하게 할 수 있고 참해야 한
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살림을 잘할 것 같지도 않고, 외모나 그런 것들
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요. 시어머니가 될 사람들은 아마 모두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처음엔 아들도 그다지 그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제가 반대를 하니까 역반응이 나오더군요.
전 정말 그 아가씨가 싫은데 어쩌면 좋을까요? 아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냥 물러나 있어야 하나요? 분명히 안
어울리고 좋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요?
섣부른 개입은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총각일 때 어머니로부터 어머니 같은 여자가 있으니 한
번 만나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별로 탐탁지가 않았습니다. 자기 어머니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내는 어머니같이 보수적이기보다는 뭔가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뜻대로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여자의 고집이 너무 세서 남편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둘은 이틀이 멀다하고 싸웠고, 냉전 속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고집쟁이 며느리를 보면서 이혼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이까지 생기고 나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아들은 드디어 바람이 났습니다. 다른 여자를 사귀었고 임신까지 시킨 상태였습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그는 지금 아내와 이혼하고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때 그가 내세운 주장은 새로
사귄 여자는 어머니를 닮은, 정말로 자기를 위해 주고 순종하는 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의 뺨을 힘껏 때렸습니다. 정신 차려라, 두아이까지 있는 놈이 무슨 이혼이냐고요.
아들은 의아했습니다. 마누라의 고집에 시달리다 못해 말 잘 듣는 여자를 구한 것인데 어머니가 반대했으니
까요.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런 아내와 사는 것은 네 운명이고 그 때문에 손자들 장래까지 망
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결국 새로 사귄 여자와 헤어지고 다시 아내와 살기로 했습니다.
그후 아내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편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쓰고 전같이 고집부리는 일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끔찍하게 위했습니다. 그제야 아들은 어머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고집스런 여자
였던 아내는 어느새 어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별 여자 없듯이 아내만큼 자기 가정을 무
난하게 이끌어 갈 만한 존재는 다른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어머니는 자기 욕심보다 자식의 행복
을 원했던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같이 복잡미묘하고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주위에서 잘못 개입하면 부모 자식 사이라도 평생 원
수가 되곤 합니다. 사랑이란 이루지 못한 소망 같은 것이라서 이루지 못했을 때 더욱더 절실하게 마음에 새겨
집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아드님의 사랑과 결혼에 섣불리 개입하는 것은 두고두고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결혼이란 불완전하고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성숙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니, 슬기롭게 기다리고 지
켜 보시면서 아드님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고, 더 나아가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게 어떨까요.
대개 갈등이 생겼을 경우 서두르는 쪽이 먼저 당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아내와의 섹스
직장 생활과 아내 모두에게 충실하고 싶습니다
저는 20대 후반의 남성으로서 결혼 생활과 직장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부끄럽게
느껴지는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부부의 성관계에 있어 충실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이야기를 해도 아내는 '괜찮다, 상관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직장에서 퇴근에 저녁 9시나 10시에 들어가 씻고 밥 먹고, 다음날을 생각하면 금방 피곤을 느낍니다. 그리고
직장 상사들이 회식하자는 날에는 12시, 1시에 들어가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기도 미안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부 사이에 대화나 성생활에 대해서는 결혼 생활 초보자인 저에게 힘든 고민 중 하나입니다. 어
떻게 직장 생활과 아내에게 충실할 수 있는지 인생 선배로서 상세히 알려 주십시오.
아내를 믿고 솔직하게 행동하십시오
우리는 부부의 성생활에 대해 그릇된 상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부는 꼭 활발하고 환희에 찬 성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자신이나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열심히 성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영화 속이나 섹스 마니아말고는 없습니다. 왕성한 성욕을 발산하지 못해 성적 공상에 내
내 시달리는 청소년들말고는 부부가 그렇게 섹스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가정을 이룬 일상에서는 사람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발정기를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은 동물처럼 일
정한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쑥불쑥 부정기적으로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밝히며 살 수는 없
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본능에 따르는 사람은 섹스 외에도 생명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요. 따라서
부부의 섹스는 그저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다가 때때로 발정기가 찾아오면 그때그때 행사하면 됩니다. 이런 생
명의 섭리는 아내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아내도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믿고 하나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편히 지내지
못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지옥으로 직행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못 믿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불신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믿지 못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내 재산과 생명, 미래와 아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아내 앞에서 편하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아
내의 종이 되고, 아내를 모시려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면 귀하는 사랑하는 아내를 믿고 편하고 솔직하게 행동해
도 됩니다.
우리 동양은, 아니 한국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아내를 믿어도 됩니다. 밥먹듯이 이혼하는 일부 서양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해 입에 '달링'이라는 소리를 달고 다니고 상대를 만족과 쾌락으로 붙들기 위해 육체적인
섹스에 온갖 신경을 쓰지만, 우리는 말을 안해도 서로에게 끌리는 그윽한 믿음과 육체적으로 힘을 빼지 않아도
주고받는 정신적인 교감, 정신적인 섹스가 있습니다.
부드럽게 스쳐 가는 한마디에도, 당신을 믿고 나의 모든 것을 맡기다는 허허로움에도, 하루 일과에 지쳐 아무
말 없이 픽 쓰러져 잠드는 초라한 모습 속에서도 만족스러운 정신적 오르가슴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 오르
가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신뢰할 수 있다면 섹스를 안 해도 충분한 성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러나 신뢰할 수 없다면 섹스를 해도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창녀하고 아무리 섹스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창녀
가 아내같이 가까워지겠습니까?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자기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괴로워서 매일 아내를 붙들고 격렬하게 섹스를 했습니다. 아내는 환희에 차서 그를 붙
들었지만 그는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아내를 붙들려고 하는 자신이 유치하고
치욕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픔이 가라앉자 그는 아내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아플 때는 아내를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놓기 위해 강박적으로 섹스를 했지만, 차차 아물게 되자 자기를 그렇게 아프게 한 아내를 더 이상
붙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섹스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여 남편이 자기를 버리기라도 할까 봐
아내는 열심히 남편에게 성적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섹스도 이미 깊게 금이 간 둘 사이의 신뢰의
틈을 붙여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부부의 신뢰는 사랑이지 섹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내를 믿고 사랑한다면 자기 일상에 맞게 편하게 지내십시오. 만일 아내가 정 괴롭다면 남편에게 성관계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정기 외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은 그대와 만나고 싶어한다
아내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 흐르는 눈물을 따라 자국이 새겨지고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잠을 깬다. 꿈이다. 아내의 얼굴을 살피려고 아내를 찾았으나 아내는 저 멀리서 잠자고 있었다. 간밤에 늦
게 들어왔다고 삐져서 돌아누워 자는 것이리라. 꿈은 아내가 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 하고 있는지를 암시
하는 듯했다.
아내와 내가 만난 지 11년째이다. 의사고시 끝난 다음다음날에 형수님 소개로 만나 인턴과 레지던트 1년차
시절은 바빠서 감히 결혼할 엄두를 못 내고, 레지던트 2년차 봄에 결혼했다. 2년 이상 교제하면서 아내와 나는
무던히도 싸웠다. 2남 1녀의 막내인 아내와 3남 1녀의 막내인 나는 서로 자기만 최고이고, 자기만 위해 달라고
요구하며 싸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 싸움을 끊임없이 했어도 한 번도 헤어진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이
신기했다. 아마 부부란 다 연분인가 보다.
교제할 때의 싸움은 곧 결혼 후로 넘어갔다. 결혼 후의 싸움은 더욱 만만치 않아서 신혼 여행 때 선물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내의 직장 문제, 고부간의 갈등, 아이들의 양육 문제, 소비와 절약, 병원 인테리어에 이르기
까지 파란만장하게 싸웠다.
그 싸움의 와중에 나는 술도 마시고, 가출도 하고, 다른 여자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글·연극·영화에 빠지기
도 하는 등 화려하게 외도를 하며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아내에게도 홀로서기의 고통을
준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싸워도 이혼까지 가는 것만은 서로 자제해서 아름답고 씩씩한 두 아이의 성장을 축
복 속에서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 10여 년을 돌이켜 보면 고비마다 한두 가지 지혜만 있었어도 그렇게 마음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
을 괜히 사서 고생한 것들이 많다. 그리고 부부 갈등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며, 심지어는 암까지 생기는 환자들
을 보면 부부 생활의 지햬는 정말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배울 만큼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 말들은 많이 해도,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오히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친정부모, 시집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란다면 고부의 갈등이 왜 생
기겠는가?
그렇다면 부부들은 어떤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일까? 우선 감정적인 지혜를 배워야 한다. 대개 부부의 불화
나 갈등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정적인 지혜는 아주 유치하고 사소한 데
있다. 체면을 중요시하고, 대도무문을 주장하는 겉치레를 아직도 주장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소한감정을 언급하
는 것을 점잖게 보지 않는다. 그런 사소한 것은 소인이나 상놈들이 고민할 일이다. 양반이나 대인들은 사소한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체면에만 신경쓴다. 그래서 부부 문제나 여러 가지 인간 관계의 문제들을 솔직하게 다루
기보다는 다 겪어 보면 안다는 식으로 쉬쉬하며 방관해 왔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고민을 해도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의 문제를 깊이 언급하는 것을 회피해왔다.
우리의 감정 교육은 고통받을 대로 받은 후 알아서 깨달으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소한 것, 유치한
것에도 신경을 써서 배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혼이 급증하고, 스트레스 속에 급사하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아이들이 유치한 부모들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남이 볼세라 쉬쉬 할 게 아니라 우리의
유치한 감정과 사소한 갈 등에 좀더 솔직하게 주의를 기울여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체면의
틀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을 이제는 솔직히 빛 가운데로 끌어내어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때이다. 그래서 내가 결
혼 생활을 하면서, 또 부부 문제로 갈등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발견한 것들을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 톱으로 인연 썰기이다
부부 싸움은 한 번 잠자리를 하고 나면 자연히 해결될 걸로 생각하는데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난 후 섹스로 해결하려는 남편을 속으로 경멸하는 주부들도 많고, 자기가 아이의 엄마라고 기고만
장해 함부로 싸움을 거는 아내를 마음 속에서 멀리하는 남편들도 많다.
싸움은 어떤 식으로든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승자는 기고만장하지만 패자는 억울한 마음에 재기를 노리며
이를 갈게 된다. 따라서 부부 싸움으로 인해 앙금이 생기게 되면 그만큼 부부 사이의 인연은 멀어진다. 부부 싸
움은 꼭 필요할 때, 예를 들어 상대가 나를 무조건 지배하고 간섭하려고 할 때는 격렬하게 싸워야 하지만, 그렇
지 않은 사소한 문제일 때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 톱으로 인연 썰기
이기 때문이다.
2. 사위는 백년 손님이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처가집 가면 딸 고생시키지 말라고 사위를 길들이는 장모가 있다.
밥을 먹고 나면 밥상을 사위가 들고 가게 하고, '요즘 남자들, 다 아이를 배에 안고 다닌다네!' 하면서 사위보고
아이 안고 다닐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위가 자기 딸을 사랑하기보다는 사위가 자기 딸을 모시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사위는 아내를 모시기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다.
그렇다면 처가집에서는 사위를 존중해 줘야 하고 그 존중이 자기 딸에게 사랑으로 가기를 희망해야 한다. 항상
손님을 맞듯이 대해야 하는 것이다.
3. 고부간의 갈등과 외도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가 성숙을 위해 걷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우리나라는 남녀 불평등이 문자 그대로 무식하게 심해서 여자들이 받는 괄세와 억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는 여자들어게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불행을 초래한다. 남녀 불평등이 남자들의 성숙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엄마가 된 후 그토록 한맺히게 받았던 남녀 불평등 때문에 자기가 낳은 아들을 극진하게
키운다. 엄마는 아들 때문에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과의 동일시, 공생을 심하게
하여 아들을 자신의 품에 붙들어 놓는다. 남자아이가 자기 품을 떠나면 엄마는 다시 괄시받는 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은 대부분 마마보이 신세를 못 면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전까지는 아무리 마마보이라 해도 사회 적응에 별 무리는 없다. 오히려 엄마들이 온 힘을 모아
키워서 그들은 체격도 좋고 학벌도 좋으며 다양한 성품도 지녔다. 그러나 결혼하면서 그 미숙한 본색이 드러난
다. 고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헤매게 되어 그 갈등을 더욱 증폭시킨다.
자기 아내와 자식을 지킬 만한 성숙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가 끊임없이 지배하려는 것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고통이 몇해 동안 지속되면 남자는 불쑥 큰다. 고부 갈등은 남편이 어른이 되지 않으면 영원히 지속되
기 때문이다. 이 시련이 잠잠해지면 고개를 드는 것이 외도에 대한 충동이다. 보이(boy)로 자라 현실에 대한 책
임감이나 분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남자는 특히 첫 번째 외도에 깊이 빠진
다.
이미 결혼해 희소가치가 떨어진 아내에게서는 별 매력을 못 느끼고 새로운 여자에게 금방 눈이 돌아간다. 그
래서 죽네 사네, 사랑이 최고네 운운하다가 현실의 모진 바람에 눌리게 되면 그는 다시 불쑥 큰다. 이제는 현실
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아이일 때는 현실에 대한 판단도 미숙하고 책임감도 없어 함부로 열정 속으로 뛰어들
었으나, 이제 어른이 되고 나니 현실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현실에 영
향을 주는 바람은 피우지 않는다.
그래서 고부 갈등과 남자의 외도가 터졌을 때 무조건 이혼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남자가 성
격장애자가 아닌 이상 기다리다 보면 그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나중에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치 야수가 왕자로 변하듯이... 그래서 결혼 후 필연적으로 겪는 고부 갈등과 외도는 아예
우리 사회에서 남자가 성숙하기 위해 걷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4. 여자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이 말은 불변의 진리이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정확한 말이다. 많은 부부 갈등이 서로 지지 않으려는
데서 생겨난다. 특히 여자들이 남자에게 지지 않으려는 욕망은 선천적·후천적인 것으로, 심지어 남자가 성공하
는 것도 못 봐주는 아내들도 많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욕망이 선천적으로 강한 존재이다. 이 험난한 자연계에서 생명을 유지하
기 위해 생명이 선택한 원리가 경쟁 원칙이기 때문이다. 여자 몸에 뿌려진 5억 개의 정자 중에 단 하나만 난자
와 만나 생명을 얻은 것처럼 사람은 5억 대 1의 경쟁을 통과해야 태어난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경쟁하지 말고 남들에게 양보하고 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이것이 점차 노골적으로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 정보화 시대이다. 자꾸 세상이 좁아져서 경쟁을 자극하기 때문이
다. 이 경쟁력,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첨예하게 갈고 닦아 온 사람이 바로 여자들이다. 우리 사회의 뿌
리 깊은 남녀 불평등 구조 속에서 남자들에게 치이며 자란 여자들의 한평생 소원은 남자를 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자라면서 여자들에게 미안하면 미안했지 싸워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결혼해서
싸우게 되면 남편은 도무지 아내를 이길 수 없다. 아내들은 질 것 같으면 오랜 세월 동안 닦아 온 인내심을 발
휘하여 남편을 숨막히고 못 견디게 만들어 결국 항복을 받아 내고 만다. 그후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살
아야 한다. 그것이 결국 요즘 유행하고 있는 간 큰 남자 시리즈의 이면에 있는 역동일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이기고 사는 것도 좋지만 그럴 때 남편들은 허탈한 마음이나 억압된 적개심을 내외부로 돌린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부로 돌리면 그들은 생명력이 약해지고 외부로 돌리면 바람이 나게 된다. 남편 또한
누구에게라도 지고 싶지 않은 5억 대 1의 생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부의 갈등과 고비를 넘기는 감정적인 지혜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할 말이 많지만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
면 이럴 것이다.
"아내들이여, 남편은 그대와 만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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