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와 담론이론: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1.맑스주의와 ‘담론’ 개념
우리는 여기서 푸코의 ‘담론discourse이론‘과 그것의 변화를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특히 맑스주의 붕괴 이후 매우 자주 언급되고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담론’ 혹은 ‘담론형성체discoursive formation’의 개념을 기존 맑스주의 전통의 유물론과 대비되는 맥락에서 사용했던 몇몇 사람들의예컨대 라클라우Laclau/무페Mouffe와 힌디스Hindess, 허스트Hirst 등이 대표적이다. Laclau/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Verso:1985, 김성기 외 역, ?헤게모니와 사회변혁?, 터:1990, Hindess/Hirst, Mode of Prodution and Social Formation, Macmillan:1977; Philosophy and Methodology in Social Science, Harvester Press:1977
라클라우/무페의 discoursive formation를 국역자들은 ‘담론구성체’라고 번역했지만, 우리는 이 개념이나 푸코의 formation discoursive 모두를 ‘담론형성체’나 ‘담론적 헝성체’라고 번역했다.
영향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라클라우/무페인데, 그들에 따르면 담론형성체 외부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담론형성체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이런 의미에서 담론형성체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라클라우/무페, 앞의 책, 131-139쪽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담론’이란 개념 자체를 반맑스적인 관념론으로 간주하고 비판하는 것예컨대 T. 이글튼Eagleton, Ideology: An Introdution, Verso:1991, 강내희, ?언어와 변혁:변혁의 언어모델 비판과 주체의 ‘역동일시’?, ?문화과학? 제2호, 1992
은 차라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맑스주의와 연관해서 담론의 개념이 문제로 되는 지점은 여기다. 대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론이론의 ‘혁신성’으로 유물론의 고식성을 비판하는 양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푸코가 문제되는 것은 여러가지 지점에서지만, 이 지점에서 그의 이름을 에둘러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알다시피 그의 전반부 작업 전체를 특징짓는 단어를 들라면 그 중 하나로 ‘담론’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라클라우가 ‘담론형성체’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푸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라클라우/무페, 앞의 책, 132-134쪽. 이는, 나중에 보겠지만, 전혀 근거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적어도 푸코에게 그러한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특히 두드러진 것은 Foucault, Naissance de la Clinique: Une Archeology du Regard Medical, PUF:1963, (홍성민 역, ?임상의학의 탄생?, 인간사랑:1993)과 Foucault, Les Mot et les Chose: Une Archeologie des Sciences Humaines, Gallimard:1966,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1986)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오직 담론형성체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푸코가 그대로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라클라우와 달리 모든 것을 담론이나 담론형성체 내부로 환원하는데 반대하며, 오히려 담론 외적인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예컨대 담론형성체 개념을 정식화하고 있는 ?지식의 고고학?과 ?담론의 질서?가 그렇다. M. Foucault, Archeology du Savoir, Gallimard:1960,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1992) 제2장, M. Foucault, L'Ordre du Discours, Gallimard:1971, (이정우 역, ?담론의 질서?, 새길:1993)을 참조. 이하에서 푸코 저작의 인용은 국역된 것은 국역본을 따른다. 단 번역어나 번역문은 국역본에 그대로 따르지 않으며, 상이한 경우에도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실제로 라클라우는 푸코의 이런 관점을 비판하며라클라우/무페, 앞의 책, 134쪽
, 자신의 ‘담론’개념은 데리다의 그것과 가장 친근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라클라우/무페, 앞의 책, 139-140쪽; 라클라우, ?은유와 사회적 적대?, 라클라우/무페, 앞의 책, 270쪽.
푸코와 데리다의 담론개념이 갖는 이러한 차이는 데리다에게는 역사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는 푸코의 비판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한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와 달리 푸코의 담론 개념은 다른 텍스트나 담론들에 의해 결정되는, 개방적이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주체와 대상, 개념과 전략을 갖는 불연속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즉 푸코가 보기에 특정한 형태의 담론형성체는 다른 담론형성체에 대해 개방되어 있지 않으며, 자기 고유의 전략과 지배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담론의 폐쇄성과 내적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담론형성체의 의미는 다른 담론형성체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라클라우의 테제는라클라우/무페, 앞의 책, 140-141쪽 참조.
, 한 텍스트의 의미가 다른 텍스트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데리다의 테제와 이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담론 이론의 문제설정에 충실한 다른 저자와 달리, 푸코는 담론개념 자체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긴장을 유지하며, 자신이 이룬 이론적 성과를 파괴하며 나아간다. 따라서 푸코의 담론 개념 그 자체가 지속적으로 변화된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한편 우리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푸코의 담론개념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며, 그 변화가 담론 개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가 ‘고고학’이라고 불렀던 작업에서 ‘계보학’이라 불렀던 작업으로 옮겨간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변화의 도정은 달리 말하면 담론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입장 자체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푸코의 담론 개념이 그처럼 변화해간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차라리 그의 담론 개념을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구조주의 이후의 철학적 흐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준거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푸코의 변화된 담론 개념의 기초에서 우리는 맑스의 근대 비판을 가능하게 했던 ‘실천’이라는 근본적 범주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새길:1993, 4장 1절을 참조.
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담론이론의 문제설정을 맑스적인 지반 위에서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거나 ‘전통적인 것’일까?
2.‘언어학적 전환’과 표상체계 패러다임
알다시피 ‘담론’의 개념이 확산되고 중심적인 개념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이른바 ‘언어학적 전환’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통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소쉬르 식의 언어로 그 중심 테제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기호는 자의적이다F.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Ed. par Ch. Bally et A. Sechehaye, 최승언 역, ?일반언어학 강의?, 민음사:1990, 85-87쪽
. 예컨대 ‘나무’라는 기호는 실제 나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를 ‘대상없는 기호’라는 말로 요약해 두자. 둘째,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같은 책, 136-140쪽
. 바꿔 말하면 의미란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기호들의 관계 속에서, 기호들의 망 속에서 정의된다. 이를 ‘대상없는 의미’라고 요약해 두자. 셋째, 의미들을 조직해내는 언어는 객관적 실재다. 즉 랑그라고 불리는 언어적 법칙의 망은 그것을 개별적으로 사용하는가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반대로 사회적 약속, ‘사회적 사실’로서 존재하는 랑그가 개인들의 사용을 규정한다같은 책, 20-26쪽. 소쉬르의 이러한 언어적 실재관은, 사회적 사실을 ‘외재성과 강제성, 구속성’을 갖는 실재로 취급하라는 뒤르켐 방법론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은 것이다.
. 이를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요약해 두자.
구조주의 언어학의 관점에서 의미론에 관한 문제를 본다면 우선, 사고란 외부의 대상을 모사한 것이라는 실증주의적, 반영론적 관념은 소박한 것이다. 사고와 판단, 의식은 의미들로 조직되며, 그 의미들은 기호들의 망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대상도 사실은 언어를 통해 의미로 전환되는 것이고, 따라서 언어의 망이야말로 대상을 분절하여 사고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인 셈이다. 경험은 이러한 분절 속에서 행해지며, 따라서 그 분절의 체계 속에 있다. 이로써 세계는 오직 기호들의 망 속에, 혹은 그것의 특정한 형태인 ‘담론’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기호, 또는 담론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다.
다른 한편 의미란 주체가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는 생각이는 신칸트주의자들이나 현상학에 의해, 좀더 근본적으로는 칸트에 의해 근대의 지배적인 사상적 흐름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역시 소박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란 주체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기호들의 망 속에서 정의되며, 개인들은 그처럼 존재하는 의미를 취해서 사용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더 이상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 그것들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의해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것이다.이런 점에서 주관의 작용으로서 ‘의도’를 표현한다고 간주되는 현상학적 차원의 의미와, 기호 간의 상호작용signification에 의해 형성되는 기호학적 차원의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프레게G. Frege가 의미를 Sinn과 Bedeutung으로 구별했던 것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재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라는 주관적 현상조차 이제는 의미작용을 통해서, ‘대상없는 기호’를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셈이다. 누구든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은 그 기호들의 망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치 대상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처럼. 이제 주체는 담론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담론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더욱 강한 의미에서 제기될 수 있다.흔히 사회적 구조와 행위주체 간의 관계를 중심주제로 삼는 이론(예를 듦면, 사회학)의 경우, 행위주체인 개인들이 어떻게 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 가지고 있던 모델은 의미란 행위주체가 부여하는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객관적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난점이 있었다. 의미와 행위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한 가장 멀리까지 간다해도 ‘유형화’를 통한 ‘이해사회학’(베버) 이상 나아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유형화를 통해 포괄할 수 있는 범위는 얼마나 제한된 것이고, 이해란 방법 자체는 또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베버가 말하는 사회적 행위의 ‘의미’ 개념에 대해서는 M. Weber, ?사회과학의 기초개념?, Gesammelte Aufsatze zur Sozialwissenschaft, 양회수 역, ?사회과학논총?, 을유문화사:1983, 76쪽 이하를 참조)
따라서 의미란 동감sympathy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개개인의 행위주체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려면 항상-이미 존재하는 이 의미의 망 속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발상은 ‘사회’라고 불리는 거시적 구조와 행위주체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길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구조주의 언어학과 언어학적 패러다임은 인문 사회과학 전역으로 확장되며, 나아가 언어가 그 자체로 중요한 하나의 변수로 되었다.
이러한 ‘전환’을 흔히 ‘언어학적 전환’이라고 하는데, 이는 종종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되기도 한다.C. Levi-strauss, Anthropologie Structurale, Plon:1958, 김진욱 역, ?구조 인류학?, 종로서적:1983, 82쪽
이 ‘거대한 전환’은 ‘구조주의’라고 불리는 하나의 흐름으로 가시화되었는데, 여기서 언어학과 인문 사회과학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였다. 야콥슨을 통해 구조언어학의 성과를 직접 흡수할 수 있었던 그는 언어학적 방법론을 인문 사회과학의 일반적인 것으로 승격시키고,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그것의 유효성을 탁월하게 과시했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사는 문화라는 말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 질서, 혹은 인간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해주는 보편적 규칙의 문제였다. 이러한 보편적 규칙이나 질서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조건(가능성의 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만약 존재한다면, 이것은 다양한 사회의 밑바탕을 이루는 심층구조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모든 인간의 삶이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기초란 의미에서 일종의 ‘인간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언어학의 효과를 철학적이고 방법론적 차원에서 좀더 ‘확장’해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우선 첫째로, 그는 의미의 객관화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객관적인 것이라면, 개개인의 삶이 항상-이미 존재하는 객관적 의미의 네트웍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제 이들 개인이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의 네트웍을 자신의 것으로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즉 주체는 구조의 효과며, 주체의 행동이나 사고는 구조로 환원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의미가 객관적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즉 그것은 의식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의식을 좌우할 수 있는 층위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의식이란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트루베츠코이 등에 의해 체계화된 음운론이 음운현상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정의한데서 나온 발상이지만, 레비스트로스는 프로이트를 통해 이를 한층 일반화한다. 즉 음운현상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의 네트웍은 무의식적인 것이며, 따라서 연구대상 역시 무의식적 하부구조로 옮겨가야 한다고 한다.Levi-strauss,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구조분석?, 앞의 책, 33쪽
셋째로, 음운론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떤 소리가 음운현상 속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소리와의 관계 속에서며, 구조란 이 요소들의 체계화된 관계로 정의된다. 이를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문화적 현상이나 사실들에 대해서까지 확대한다. 즉 어떤 개별적인 사실이나 현상이 뜻하는 바는 그 자체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며, 따라서 현상이나 사실들 간에 성립되어 있는 관계는 경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경험적 사실들을 체계화하는 그 본질적 관계를 연역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스트로스는 대수학(群이론)과 위상수학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결국 그가 찾으려는 보편적 질서란, 다양한 문화 들 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수학적 동형성isomorphism으로서 정의된다.
한편 그는 사회관계를 현성하는 보편적 질서를 친족관계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려 한다. 그가 보기에 친족관계란 여자를 교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교환관계다.그는 세가지의 기본적인 사회관계를 교환관계로서 설정하는데, 하나는 언어적인 관계로서 의미의 교환관계로 정의된다. 둘째는 경제적인 관계로서 상품교환관계로 정의된다. 셋째가 바로 친족관계로서 여자의 교환관계로 정의된다. 레비스트로스, ?민족학에서 구조의 개념?, 앞의 책, 281쪽; ??구조인류학? 3,4장의 후기?, 앞의 책, 82쪽.
즉 여자의 교환을 축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무의식적인 질서를 연구하며, 나아가 그러한 교환관계의 ‘하부구조’에 있는 지반을 찾으려 한다. 가족이나 친족이란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문화에 공통된 규칙이 있으리라고 보는데, 이는 인류학적 연구에 의하면 ‘근친상간금지’다. 이것이 바로 이 모든 인간관계의 지반을 형성한다. 무의식적 질서의 연구를 위해 프로이트를 끌어들인 것은 이로써 거꾸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이것이 보편적 사회질서의 지반이다.
다른 한편 사회관계의 이같은 무의식적 지반은 또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사고구조와 연관된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대상을 분절하는 체계로서, 인식과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를 이룰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식가능성의 무의식적 조건’이며, 보편적인 ‘표상체계’다. 이를 뒤르켐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집합표상’representation collective이다. 이처럼 보편성을 갖는 이 무의식적인 표상체계를 그는 ‘야성적 사고’la pensee sauvage라고 부른다.
레비스트로스와 뒤르켐은 표면적인 유사성을 넘어서 개념적 ‘동형성’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개개인이 좌우할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이며, 그 안에 포섭된 개인들의 사고와 의식을 규정하는 무의식적 지반이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사실로서 존재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를 통해 개인들의 행위나 사고를 연구하려는 흐름은 이후 지배적인 것이 된다. 그것을 ‘타자’l'Autre란 차원에서 도입하든(라캉), 담론이나 에피스테메 차원에서 도입하든(푸코), 혹은 이데올로기란 차원에서 도입하든(알튀세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뒤르켐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는 표상 패러다임은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일반화되고 확산되었던 셈이다.여기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 이후 프랑스 학계를 지배한 흐름이 뒤르켐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적 전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뒤르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뒤르켐은 언어학적 전환을 통해서 다시 인문?사회과학으로 되돌아 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런 의미에서 구조주의가 프랑스에서 발흥한 것이 우연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요컨대 그는 근친상간금지라는 보편적인 규칙을 통해 보편성을 갖는 무의식적 표상체계와 무의식적 사회질서를 동시에 찾아낼 수 있었던 셈이고,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언어학과 함께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패러다임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을 구조언어학과 결합하려 했던 라캉에 의해 더욱더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앞의 라캉에 대한 장을 참조하시오.
3.푸코의 담론이론
(1)표상체계로서의 담론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푸코는 18세기 말엽을 전후한 의학적 담론의 변화를 추적한다.
“18세기 중엽 폼이라는 의사는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10개월동안 10시간 내지 12시간 동안 목욕을 시켰다. 신경조직이 마르지않고 환자의 열을 내리게 하기 위해 목욕을 하게하는 동안 그는 물기에 젖은 양피지조직을 관찰할 수 있었고, 오른쪽 요관의 일부가 점차 허물을 벗게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Foucault, ?임상의학의 탄생?, 15쪽
그런데 폼이 ‘발견한’ ‘물기에 젖은 양피지조직’을 발견하거나 언급하는 의사들을 19세기에 와서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과학에 요구되는 객관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물기젖은 양피지조직’이란 표현과 19세기 의사들이 사용했던 ‘뇌 주위를 감싸고 있는 황간막’이란 표현을 두고 “한쪽은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주관적인데 반해, 다른 한쪽은 좀더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푸코는 질문한다(?임상의학의 탄생?, 18쪽).
이러한 질문은 단지 부분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의학적 담론 전체에 해당되며, 질병의 체계에도 해당된다. 질병을 정의하는 방식이나 치료하는 방식, 질병을 설명하는 방식 상에 커다란 단절이 19세기에 들어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예전에는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던 것이 질병으로 간주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질병은 중립적인 언어 아래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새로운 의학적 시선이 마주치는 곳으로 끌려나와 재편성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와 말해지는 대상 사이에 맺고 있던 지식의 태도와 그곳에서 재주를 피우게 된 언어의 새로운 모습일 뿐이다.”(같은 책, 17-18쪽)
이처럼 어떤 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질병을 다른 시대에는 보이게 만드는 것, 또 전에는 보이던 질병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푸코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의학 상에 나타난 돌연한 태도변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누던 지식의 경계가 변화했다는 데 기인하며,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의학적 지식의 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하던 대상들이 의사들의 시선과 언어에 포착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같은 책, 20쪽) 따라서 푸코가 주목하려는 것은 “인식된 대상을 일정한 방법으로 구조화하는 언어의 분절화현상”이며(같은 책, 19쪽), 이것이 바로 “언어와 질병의 관계를 특정한 방법으로만 분절하는 담론구성의 법칙”(같은 책, 19쪽)이다.
푸코에 따르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단하고 분절하는 ‘분절의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분절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는 담론 속에서 대상이 정의되고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이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분절의 체계며, 그 위에서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하게 하는 규칙의 체계다. 이는 푸코 말을 빌면, ‘말과 사물을 이어주는 고리’(같은 책, 20쪽)요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같은 책, 28쪽)인 셈이다.
그렇다면 ‘물기젖은 양피지조직’이란 표현이 19세기 이후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 결과 사실은 의학적 담론 안에서 더 이상 사용될 수 없게 된 것은 이러한 ‘말과 사물을 이어주는 고리’의 변화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을 합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늘날 의학적 담론에 의해 배제된 것일 따름이다. 담론은 이렇듯 “시대감각에 맞는 언표는 포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하는” 분절의 규칙이다. 즉 어떠한 대상도 담론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볼 수 있고, 언표될 수 있으며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푸코가 보기에 “언어적 표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언어가 사물을 포착하려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 즉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의 모습을 변질시키려 하는 언어적 횡포다.”(같은 책, 30쪽)
이상에서 본 것처럼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정의되고 있는 담론 개념은, 대상은 언어적 의미의 고유한 망 속에서 파악되며, 그것을 통해 보이게 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고 보는 점에서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의미한다. 즉 특정한 방식으로 대상을 분절하여 표상하게 해주는 특정한 ‘표상체계’인 셈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정의되는 담론의 개념은 정확하게 언어학적 전환의 효과 아래 있는 셈이다. 물론 그러한 대상의 분절이 단일한 어떤 랑그나 언어의 차원에서 정의되는게 아니라 다양한 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 속에서 정의된다는 점에서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와 다르다고는 해도.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푸코가 추적한 것은 의학적 담론이 19세기를 중심으로 보여주었던 불연속과 단절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불연속과 단절이 단지 의학적 담론 안에만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푸코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단절은 의학은 물론 생물학과 언어학, 정치경제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발견된다. 더우기 그러한 단절의 시기가 거의 동일하고, 단절의 양상이 동형성을 보여준다면, 차라리 다양한 담론들의 불연속과 단절을 규정하는 인식의 틀 자체의 불연속과 단절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특정 시기 모든 사람들에 대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고 특정한 방식으로만 표상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분절의 체계를 정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문제설정에서 푸코는 ‘동일자’의 역사를 쓴다(?말과 사물?, 22쪽).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식을 특정한 형태로 질서지우며, 이런 점에서 그 시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동일한 형태로’ 방향지우는 보편적인 표상체계의 역사를. 그것은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조차 제약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해내는 인식의 조건이다. 그것은 인식 이전에 존재하며,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분할하고,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분절해주는 무의식적 조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식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특정한 형태의 담론들이 출현할 수 있거나 출현할 수 없게 해주는 조건이며, 특정한 방식으로 담론을 조직하고 질서지우는 조건이기도 하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episteme에피스테메를 ‘인식소認識素’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음운론의 기본단위인 ‘음소’phoneme라는 개념의 접미사인 eme을 이용하여, ‘신화소’mytheme, ‘요리소’### 등의 단어를 만든 것을 따라 번역한 것 같은데, phoneme의 -eme과 episteme의 -eme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음소’가 언어학에서 가장 기본 단위인 일종의 ‘원소’ 같은 것이라면, 신화소나 요리소 역시 신화나 요리분석에서 일종의 ‘원소’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에피스테메는 인식의 어떤 원소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을 가능하게 방향짓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조화’하는 조건이요 지반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번역한다면 ‘인식틀’이 더 정확할 것이다.
라고 부르는데, 이는 ‘말과 사물’을 분절하는 가장 일반적인 구조인 셈이다. 그것은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인식의 질서’고, 결국은 사물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질서지우는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이 말은 이미 ?말과 사물?이란 제목의 책이 있었기 때문에 제목을 변경시켜 달라는 영역본 출판사측의 요청에 따라 푸코가 ?말과 사물?이란 이름을 대신하는 것으로 직접 고른 제목이기도 하다. M. Foucault, The Order of Things: An Archaeology of the Human Science, "Publisher's Note", viii쪽
다.
푸코는 에피스테메의 분석을 통해서 서구의 역사를 크게 세 개의 시기로 나눈다.
첫째, 르네상스 시대:사물을 유사성에 의해 질서지우던 시기다. 예를 들면,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질 것이란 생각은 호두와 뇌의 유사성에 의해 가능한 판단이다. 거대한 풍차와 거인을 ‘거대한 몸집’의 유사성으로 동일시한 동키호테의 사고방식도 그렇다. 이 시기의 ‘인식가능성의 조건’을 푸코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
둘째, 고전주의 시대:16세기를 전후해서 시작하는데, 사물을 표상으로 환원하던 사고방식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가 그렇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지각된 것이다”고 말한 버클리가 그러하며, 표상을 질서지우는 언어의 일반법칙을 연구함으로써 진리의 기초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포르-루아얄 논리학?의 이념이 그렇다. 이를 ‘표상의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 그런데 표상의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즉 동키호테의 사고방식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그리하여 동일성과 차이를 분별해서 사물을 질서지우는 ‘이성’이 인식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며, 린네의 분류학이 보여주듯이 동일성과 차이의 체계는 하나의 분류표로 귀착된다. 이런 점에서 표tableau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요약해준다고 한다.
셋째, 근대:18세기말부터 나타나는데,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가 인식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예컨대 표상 외부에 있으며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체로서 칸트의 ‘물 자체’가 그렇고, 부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이 그러하다. 생명이나 언어(의 굴절) 역시 개인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관적 실체로 간주된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의 에피스테메’라고 부를 수 있겠다물론 푸코가 이런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체’라는 말이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백락이 있기 때문에 이 말의 사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지만, ‘표상의 에피스테메’나 ‘유사성의 에피스테메‘에 대비하여 편의상 ’실체의 에피스테메‘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노동, 생명, 언어라는 실체의 집약점이 ‘인간’이라는 인식이며, 그 결과 인간이 사고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인간’은 이런 점에서 근대의 산물이며, 동시에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집약해주는 집약점이다.
푸코는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단절을 통해서 생물학이나 언어학, 정치경제학 등의 담론에 나타나는 근본적 단절을 설명한다. 즉 사물을 분절하는 담론의 규칙과 특성을 인식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에피스테메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에피스테메는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서구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기초지우고 있던 일종의 보편적 사고구조요, 사고의 심층적 구조다. 이런 점에서 담론이론이 갖고 있는 표상체계로서의 특징을 가장 심층적인 구조로까지 환원한 것이며, 서구인 전체의 가장 심층적인 표상체계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피스테메를 추적하는 푸코의 작업은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심층구조(‘야성적 사고’)를 찾아내려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작업과 유사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심층구조를 가정하고 그것을 도출하려 한 반면, 푸코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상이한 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푸코의 작업을 ‘역사적 구조주의’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다.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새길:1994, 295-300쪽
레비-스트로스와 분석의 방법이나 분석대상이 다르다는 특징을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식가능성의 조건을,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구조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표상체계 패러다임’이란 연속성을 갖는다. 더우기 이것은 이전에 푸코가 가지고 있던?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푸코는, 어떤 것에 대한 언표enonce는 “시대감각에 맞는 것은 포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하는, 말하자면 언표와 언표 사이의 교묘한 분절의 차이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라고 한다(27쪽). 담론의 불연속성을 시대감각에 의해 이해하는 이러한 발상은 ?말과 사물?의 작업을 예시해주는 요소를 보여주는 셈이다.
담론이론의 문제설정이 갖는 표상체계 패러다임으로서의 특성을 오히려 좀더 명확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2)담론을 벗어난 담론이론
이러한 담론의 개념은 사물의 질서나 사고의 질서를 언어라는 분절의 체계 안에서 정의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적 전환’의 효과 아래 있다고 하겠다.라클라우가 ‘담론형성체’란 개념을 푸코의 이름을 빌어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한에서 근거없는 것만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68년 혁명을 거치면서, 아마도 그 혁명의 영향일텐데, 푸코는 담론에 대한 문제설정을 변환시킨다. 이는 이전의 자기 저작에 대한 방법론적 해설이자 일종의 자기비판이기도“이 책은 적지않은 교정과 내적인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광기의 역사?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심각하고도 수수께끼같은 부분을 동반하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익명적이고 일반적인 역사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에 얼마나 가까이 머물렀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임상의학의 탄생?에서는 종종 유혹적인 구조[주의]적 분석에 의거함으로써, 제기된 문제의 고유성과 고고학에 고유한 층위niveau를 지워버리게 될 위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과 사물?에서는 방법론적 지표설정의 부재로 인해 그 분석들을 문화적 총체성에 의거한 것으로 믿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역, 민음사:1992, 39쪽)
한 ?지식의 고고학?(1969)과 <콜레쥬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인 ?담론의 질서?(1971)에서 명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 두 저작은 담론의 개념을 주요한 대상으로서 삼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개념적 전환을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푸코의 담론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①담론의 새로운 정의
이전에 담론이 사물을 재단하는 특정한 방식으로서, 그리하여 인식을 제한하는 특정한 표상체계로서 정의되었다면, 이제 담론은 그것이 포괄하는 개인들의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제약하는 조건을 통해 정의된다. 즉 특정한 담론을 형성하는 관계(담론적 관계)는 “담론이 사용하는 랑그나 담론이 그 내부에서 펼쳐지는 바 상황이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담론 그 자체를 특정화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78쪽. 강조는 인용자)
예를 들면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이제 특정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정신병으로서 정의하고 그들을 정신병자라는 ‘대상’으로 정의하며, 그 ‘병’을 이유로 그들을 특정한 장소에 감금하고, 나아가 그들에 대해 특정한 조치를 함으로써 그들의 행동과 실천을 특정한 것으로 만들어내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그 담론에 포괄되는 사람들에 대해 특정한 형태로 실천하고 사고하게 한다. 즉 담론적 형성체는 담론적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이 경우 담론적인 분석이란 예컨대 “담론들을 기호들의 집합으로서 다루지 않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의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실천으로서 다루는 작업”(같은 책, 82-3쪽)이다. 이런 점에서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이 정의되는 담론에 대해 우리는 ‘효과를 지향하는 언표집합’이라고 재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담론 안에서 언표들은 “담론적 실천을 특정화하는 규칙들”(같은 책, 98쪽)과 관계 속에서 조직된다. 이러한 담론적 실천의 형성규칙을 통해 우리는 어떤 담론을 특정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신병리학이나 경제학, 생물학이나 사회학 각각을 다른 담론과 구별해주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들이 어떠한 효과를 지향하는가, 그것이 어떻게 실천을 조직화하는가에 의해 구별된다. 각각의 담론 내부에서 작동하는 형성규칙은 특정한 형태로 실천을 형성해낸다.
“형성formation의 규칙들은 그들의 장소를 개인의 ‘심성mentalite’이나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담론 자체 속에 가진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일종의 균일한 익명성에 따라 이 담론적 장champ 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개인에게 부과된다.”(같은 책, 99쪽)여기서 푸코는 ‘심성’이란 말에 따옴표를 쳐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푸코의 담론 개념 변화와 관련해 중요한 것인데, 바로 이전의 저작인 ?말과 사물?이 아날학파의 심성사 연구와 보조를 함께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표상의 무의식적 지반으로서 에피스테메란 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하는 일종의 ‘심성’이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담론을 표상체계로서 정의하려던 초기 입장에 대한 ‘내적인 비판’인 셈이다.
한편 이정우는 김응종을 언급하면서 에피스테메를 심성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이정우, ?담론의 공간: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 민음사:1994, 147쪽). 하지만 이른바 제2세대 아날학파나 그 주변의 아리에스Ph. Aries같은 역사가들이 주목하고 추구하던 ‘심성사’가 단지 의식과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시대 전체를 밑바치고 있는 무의식적 ‘망탈리테’를 추적하려는 시도며, 그것 역시 “브로델이 ‘장기지속’이라고 이름붙인 역사 연구의 새로운 단위”(같은 책, 146쪽)임을 이해한다면, 에피스테메의 연구가 그것과 거의 유사한 맥락에 위치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응종, ?아날학파?, 민음사:1991; 최갑수, ?미셸 보벨의 역사세계:사회사로부터 심성사로의 이행?, ?역사가와 역사인식?, 민음사:1989; 이시재, ?필립 아리에스의 심성사 연구?, 한국 사회사 연구회 편, ?사회사연구의 이론과 방법?, 문학과 지성사:1988; 김영범, ?망탈리테사:심층사의 한 지평?, 한국 사회사 연구회 편, ?사회사연구와 사회이론?, 문학과 지성사:1991 등을 참조.
정신병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좋든 싫든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을 통해서, 그것의 형성규칙을 통해서 행해질 수 밖에 없다. 어떠한 개인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든 개인에 대해 익명성의 형식을 따라 부과되는 규칙인 셈이다. “이 규칙들의 집합은 각각의 영역에서 고유한 개개의 담론적 형성체를 특정화하기에 충분히 특이하다specifique.”(같은 책, 99쪽)
한편 푸코는 이러한 담론적 분석을 언어학적 분석으로 환원하는데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한다. “‘물 자체’의 계기를 생략하는 것이 반드시 의미작용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담론 대상의 형성에 대해 기술할 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담론적 실천을 특정화하는 관계구성les mises en relations이다.”(같은 책, 81쪽) 이제 중요한 것은 담론이 언어를 통해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어떤 의미구조나 표상방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개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밖에는 실천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실천의 양태와 그러한 실천을 강제하는 규칙이다. 이를 푸코는 ‘역사적 아 프리오리’a priori historique라고 부른다. “역사적 아 프리오리란 담론적 실천을 특징짓는 규칙의 집합으로서 정의된다.”(같은 책, 185쪽)
②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
요약하면 푸코는 특정한 형태로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 단지 담론만으로 완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담론적인 것 뿐만 아니라 비담론적인 것과의 연관 속에서 만들어진다.
“[푸코의] 고고학은 두가지 유형의 실천적 형성체로 나아간다. 하나는 언표를 포함하는 담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환경environment을 포함하는 비담론적인 것이다. 예컨대 18세기말의 임상의학은 담론적인 형성체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과 인구에 관계되어 있는데, 그들은 ‘제도나 정치적 사건, 경제적 실천들 및 과정들’ 같은 비담론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다른 종류의 형성체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환경은 또한 언표를 산출한다. 마치 언표가 환경을 결정하듯이. 하지만 사실 이 두가지 형성체는 이질적이다. 심지어 그것들이 서로 겹칠 경우에조차도.”G. Deleuze, Foucaul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1988, 31쪽. 이하에서는 ?푸코?로 약칭한다.
이처럼 두가지 유형의 형성체를 구분한 것이 ?지식의 고고학?에서 보여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고 들뢰즈는 평가한다.(?푸코?, 31쪽) 이제 푸코는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형성해내는 메카니즘을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론의 대상을 형성하는 실천의 경우, 단지 담론 안에서만 정의되고 형성되지 않는다. 실천을 형성해내는 이 관계들은 “제도, 경제적 내지 사회적 관계, 행동의 형태, 규범의 체계, 기술, 분류유형, 특성화양태 등등의 사이에서 수립된다...이 관계들이 정의되는 것은 그 내적인 구성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타나도록 해주며 다른 대상과 병치되고 그것들과 관계 속에서 자리잡도록 해주는...외재성의 장un champ d'exteriorite속에서다.”(?지식의 고고학?, 77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푸코는 “모든 담론들과 독립적으로 제도, 기술, 사회적 형태들 사이에서 서술될 수 있는 관계”를 ‘<일차적인primaire> 관계’라고 하며, 이와 달리 “담론 자체 내에 공식화되어 있는 관계”를 ‘이차적인second 관계’라고 하여 구분한다. 그리고 “담론적 실천(을 형성하는) 규칙들의 어떤 집합의 조직화는...역사라는 요소 속에서 규정될 수 있다”고 한다(같은 책, 98쪽. 강조는 인용자). 즉 담론적인 것의 형성규칙은 역사라고 불리는 비담론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담론 개념에 관한 또 하나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사물의 질서란 오직 담론 안에만 있다는 명제를 비담론적인 것의 도입을 통해 차라리 담론 자체도 그 ‘외재성의 장’을 통해 사고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담론의 외부는 없으며 모든 것을 담론을 통해 존재한다는, 언어학적 전환의 그늘 아래 있으며 구조주의적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명제는 기각되고, 담론이론은 담론을 넘어선다. 이제 담론은 개인의 인식과 사고를 지배하고 규제하는 표상체계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사고할 여지를 마련한 셈이다.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나 실천을 규제함이 분명한 비담론적인 것이 담론이론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인 형성체 간의 관계는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푸코는 다시 담론적 형성체/비담론적 형성체라는 이원론의 심연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사건’evenement과 ‘실증성positivite’이란 차원에서 양자의 관계가 정의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사건’의 차원. 푸코에 따르면, 담론의 문제설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표를 그 사건의 구체성과 고유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 그것의 존재조건을 결정하는 것, 그것의 한계를 적절히 고정시키는 것”이다.(같은 책, 54쪽) 예컨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근대 초기에 유럽 전역에 나타났던 ‘거대한 감금’이란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건의 효과 아래서 성립되었다. 여기서 감금이란 사건이 어떠한 담론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 수행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신병리학과 같은 특정한 담론으로 환원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정신병리학과 같은 특정한 담론이 가능하게 해주었던, 그리하여 정신병자에 대한 어떠한 언표가 가능하게 해주었던 ‘존재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사건을 통해 담론적 형성체가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담론들은 우선 담론적 사건의 집합들로 다루어져야 한다.”(?담론의 질서?, 45쪽)
나아가 감금이라는 사건은 거대한 감금장치라는 ‘비담론적 형성체’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금이라는 ‘사건’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적 형성체와 로피탈 제네랄l'Hopital General이나 정신병원같은 비담론적 형성체들이 교차하고 결합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사건은 담론적 형성체 안에 있는 비담론적인 것이다. 사건을 통해 “담론의 현실적인 형성”(같은 책, 49쪽)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사건은 담론적인 것에 대한 비담론적인 것의 효과를 지시한다.
이런 점에서 사건은 “실체도, 우연적인 존재도, 성질도, 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것이 효과를 가져오는, 그것이 효과인 물질성의 수준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의 장소를 가지며 또 그것은 물질적 요소들의 관계 공존 분산 교차 축적 선택에 의존한다...그것은 물질적 분산의, 또는 분산에서의 효과로서 생산된다.”(같은 책, 45쪽) 따라서 ‘비물체적인 것의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의 철학은 담론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점이며,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간극을 제거할 뿐아니라 오히려 그 양자의 겹침을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다.(같은 책, 45쪽)H. Deyfus/ P. Rabinow는 이 문제에 관해 적지않은 혼란을 보여준다(Deyfus/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Harvester:1983, 서우석 역, ?미셸 푸코;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나남:1989). 그는 ?지식의 고고학?을 인용하면서 푸코가 “비담론적 요인들이 담론적 요인들을 유지하고 둘러싼다고 말하는 듯하”지만(131쪽), “일차적 관계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푸코는 담론의 자율성을 고수하고 그래서 [그와] 아주 대립된 결론에 이르고 있다...비담론적 실천들은 담론적 실천들이 일어나는 요소 또는 지평이라기보다는 담론적 실천들이 취해서 변형시키는 요소들인 것 같다”고 쓰고 있다(131-132쪽). 그리고 이러한 자율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푸코를, 비담론적 요소를 강조하는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등에 대비시키고 있다(132쪽). 이는 담론적 실천의 문제로 담론이론을 재정의하고, 비담론적인 것의 ‘일차성’을 강조하던 푸코의 주장과 상반된다.
한편 그들은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의 관계를 다루는 이러한 쟁점들이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고 하며, 이는 그것이 초기(?고고학을 포함하는)의 어떤 저서의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일 ?담론의 질서?에서 그가 ‘사건의 철학’이라고까지 불렀던, ?지식의 고고학?에 고유하고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를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알다시피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근대의 인문과학이 근대적 감시와 규율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Gallimard: 1975, 박홍규 역, ?감시와 처벌?, 강원대 출판부:1994, 288쪽
즉 감시와 규율이라는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감시와 처벌을 행하는 감옥이라는 비담론적인 장치로부터 인문과학이라는 다론의 현실적 형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식가능성의 조건’을 이루는 표상체계(에피스테메)로부터 담론 내적인 구조 속에서 인문과학의 탄생을 설명했던 ?말과 사물?의 설명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 ‘계보학’과 ‘고고학’이라는 상이한 방법론으로 귀착되는 이러한 차이는 바로 ‘사건의 철학’에 의해 가능했던 담론개념 자체의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둘째, ‘실증성’의 차원. 푸코는 담론적 형성체를 ‘실증성’의 형태로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지식의 고고학?, 182쪽) 여기서 푸코가 ‘의도적으로 실증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들의 영역(그에 대해 우리가 참되거나 거짓된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을 구성하는 힘”이다. 예컨대 피와 포도주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신병자라는 대상으로 정의된다. 그가 이러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한 정신병리학은 그에 대해 강제성과 구속성을 갖는 실제적인 힘을 갖는다. 그가 아무리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외쳐봐야 그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는 철창이 있는 병원의 보호실에 갇힐 것이고, 때로 저항하겠지만 그때마다 매를 맞거나 진정제를 맞게될 것이다. 주체인 의사가 그에 대해 지시하는 어떠한 조치도--때로는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을 그런 조치도--‘치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이처럼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그 대상이 되는 증상과 환자를 정의하며, 그 정의에 포함된 사람에 대해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구속력과 강제력을 갖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게 한다. 마치 형법이나 핵폭탄이 시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의 조치는 환자에게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그러한 ‘치료’의 대상을 정의하고 그것을 당사자의 뜻과 무관하게 ‘환자’라는 대상을 구성하고, 그 안에 포섭된 개개인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과 강제력을 행사하는 ‘실증적’인 힘이다. 즉 담론의 실증성이란 그것이 개인들에 대해 효과를 갖고 작동하는 힘을 의미한다.이는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적 사실’이란 개념을 떠올리면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담론이 갖는 효과를 지시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을 묵살한 채 강제되는 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참이란 이름으로 개개인이 받아들이게 되거나 적어도 당연시되는 전제다. 정신병동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해석되고 그 담론 안에 있는 규칙에 따라 실천이 이루어진다. 치료를 하는 조치든, 치료를 받는 조치든 간에. 이런 점에서 실증성의 형태 아래 다루어지는 담론적 형성체는 “하나의 담론적 실천을 특성화하는 규칙들의 집합”으로 정의된다.(같은 책,185쪽) 이를 푸코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판단이나 실천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 프리오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역사적 아 프리오리’다.(같은 책, 184쪽)
푸코는 과학적인 담론들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즉 그것이 개인들에 대해 미치는 효과라는 점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의학적, 정신의학적, 사회학적 담론들처럼 과학적인 담론들이 형벌체게를 구성하는 규범적인 담론들과 실천들의 이 집합에 가하는 효과를 측정”하려 하며, “정신감정과 형벌제도에서 그것들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담론의 질서? 48쪽)
이런 점에서 ‘실증성’이란 이미 단순한 ‘말’의 영역을 넘어 서 있는 것이고, 단순히 ‘담론적인 것’에 머물러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비담론적인 것에 대한 담론의 효과를 지시하며, 이런 의미에서 비담론적인 것 속에 있는 담론이다. 그것은 ‘사건’과는 반대방향의 효과로서 담론적 형성체와 비담론적 형성체를 관계지우고 있는 셈이다.
결국 푸코는 사건과 실증성이란 두가지 방향에서 ‘담론’을 다루고 있다. 사건을 통한 담론의 현실적 형성이란 면에서 담론은 분명 담론적인 형성체며, 역으로 실증성이란 면에서도 담론은 특정한 규칙을 통한 특수한 형태의 실천을 형성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담론은 담론적인 형성체다. 결국 담론적 형성체란 사건과 규칙을 통해 실천을 포섭해내고 실천하는 개인을 포섭해내는 메카니즘인 것이다.
③담론적 형성체의 4가지 차원
그렇다면 담론적 형성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효과를 지향하는 진술들의 집합으로서 담론적 형성체는 고유한 형성규칙을 통해 만들어진다. 푸코는 이 형성규칙을 4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첫째, 대상의 형성. 푸코 말대로 광인을 정의하고 그 정의에 따라 어떤 사람들을 ‘환자’로 포섭하는 것은 가족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법률이 정하는 바도 아니다. 정신병의 대상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된다. 경제학의 대상이 경제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되며, 사회학의 대상이 사회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되듯이. 편집증, 정신분열증, 신경증, 간질병 등등 다양한 증상과 병들, 그것에 대한 정의와 설명, 그것들 간의 관계와 분류체계가 만들어진다.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나 현상이 이처럼 분류된 증상들의 정의에 포섭되기만 하면, 그는 이제 ‘환자’로서 정신병리학적 담론의 대상이 된다. 그가 동의하는가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대상의 정의를 통해 정신병리학이라는 담론의 한계가 그어진다. 그것은 이 한계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둘째, 언표행위 양태의 형성, 혹은 말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 푸코는 질문한다. “누가 말하는가? 모든 말하는 개인들의 집합 속에서 이러한 이러한 종류의 언어를 취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한 직함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지식의 고고학?, 83쪽)
이러한 주체란 사실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라, 담론 안에 마련된 ‘자리’인 셈이고,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만이 주체가 될 수 있다. 그 자리를 통해서만 말은 발언이 되고 효과를 갖는다.
예컨대 정신병원에서는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의사와 간호사만이 발언할 수 있다. 즉 정신병리학적 담론에서, 그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언표할 수 있도록 정의된 ‘주체’만이 발언할 수 있다. 환자는 물론 그 가족이나 참관자의 발언 역시 침묵에 묻히며 들리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는 발언하고 판단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의사의 판단만이 허용되며, 그 판단은 환자에 대한 전적인 지배력을 갖는다. 즉 주체는 지배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력을 보장해주는 것은 단지 담론만은 아니다. 의사의 발언은 병원이란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며, 병원 안의 체계화된 장소에서 행해진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 판단하고 그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명령할 수 있는 제도와 공간 속에서 주체의 발언은 물질적인 힘을 갖추는 셈이다. 결국 담론은 특정한 제한된 사람들로 주체를 제한한다. 이런 점에서 주체는 희박하다.
셋째, 개념의 형성. 담론 안에서 언표들은 특정한 개념들로 조직된다. 정신병리학에서 정신분열증이나 그 환자에 대한 서술과 판단은 의사의 개인적 사고가 아니라 정신병리학이 제공하는 개념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개념들은 나름대로 다른 개념들로 이어져 있어서,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한 판단이나 조치는 그 개념들의 연쇄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근대 의학의 담론 안에서 주관적인 상상이나 상징적인 표현들이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은 이와 연관된 하나의 예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담론은 그 안에서 언표들을 계열화하고 조직화하는 규칙의 집합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언표규칙의 집합은 역사의 요소 속에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같은 책, 98쪽).
넷째, 전략의 형성. “경제학, 의학, 문법, 생명체의 과학 같은 담론들은 개념들의 일정한 조직화, 대상들의 일정한 재분절화, 언표행위의 일정한 유형들을 생겨나게 한다. 이들은 그 정확성, 엄밀성, 안정성에 따라 테마들이나 이론들을 형성한다.”(같은 책, 100쪽) 예들 들어 가치론이니 공황론이니 생산이론이니 분배이론이니 하는 상이한 테마가 상이한 유형의 경제학적 담론을 만들어내며, 과소소비론이니 과잉생산론이니 불비례설이니 이윤율저하설이니 하는 상이한 이론이 특정한 테마 아래서 또 다른 유형의 경제학적 담론들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상이한 테마와 이론적 입론들을 푸코는 ‘전략’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100쪽)
담론의 대상, 주제, 언표행위의 형성체계가 허용해주는 담론적 공간 안에서 특정한 목적과 이론적 도구를 통해 새로운 계열의 개념을 형성해내며, 그 위에서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겨냥하는 것이 바로 이 전략이다. 이 전략은 각각의 영역에서 다양한 담론적 형성체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 간에 대립과 연합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이룬다. 경제학적 담론의 공간 안에서 여러 학설들이 대립하고 각 학설마다 주요하게 여기는 주제가 별도로 정의되는 것은 이러한 전략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학의 대상, 언표방식, 개념들의 형성체계가 허용하는 가능한 전 공간을 차지하는 담론적 형성체는 없다. 그 각각은 나름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그 공간 안에서 고유한 담론의 유형을 생산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담론적 형성체는 그 안에서 전개되는 상이한 전략의 형성체계가 정의될 수 있을 때 그 고유성을 획득한다.”(같은 책, 106쪽) 그리고 그 고유한 전략은 여러 경로를 거치면서 그 대상에 대해 특정한 효과를 산출한다.
요약하자면, 푸코의 담론이론은 담론이란 영역을 넘어선다. 심지어 그는 이원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비담론적 형성체’를 담론이론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투’의 결과 발생하는 이원론의 긴장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는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겹침을, 그 겹침의 효과를 주목하게 되며, 사건과 실증성이란 개념이 담론이론에서 중요하게 부각되게 된다. 이처럼 담론이 갖는 사건적 특성과 실증성을 다루기 위해 그는 니체적인 계보학으로 전환하게 된다.
(3)계보학적 전환
푸코는 <콜레쥬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에서 자신이 이후 하려고 하는 작업을 세가지로 요약한다. “우리의 진리의지를 문제삼는 것, 담론에 그 사건적 특성을 복구시켜 주는 것, 마지막으로 시니피앙의 지고함을 제거하는 것”(?담론의 질서?, 41쪽) 우리는 푸코의 담론이론에서 계보학적인 전환의 계기를 이와 연관지어 세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진리의지를 문제삼는 것.
개개 명제나 담론 내부적 과정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떠한 언표도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두고 평가된다. 각각의 담론은 그것이 진리인가 여부를 가리는 개념이나 규칙을 가지며, 이 규칙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언표와 발언은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실증주의 경제학에서 노동가치나 잉여가치라는 개념은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으며, 그러한 개념을 근거로 한 임금계산이나 축적이론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잉여가치란 개념이 실증주의 경제학이란 담론에 의해 배제되는 것은 그것이 실증주의적 담론이 마련해 둔 진리의 규칙와 장치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편집증이 개인적인 성적 경험에 의한 것이란 명제는, 그것을 반증하는 몇개의 사례들에 의해 반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랜 동안 관찰하고 실험하고 측정하여 분류한 정신병의 개념과 진리규칙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담론을 통해 특정한 사고나 판단을 배제하고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이 지구 위에 그려지는 어떠한 삼각형도 그 내각의 합이 180°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한 것처럼. 즉 진리의지는 담론을 통해 금지와 배제, 억압이 ‘진리의 추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게 하는 중요한 근거인 셈이다.
“이러한 진리의지는, 배제의 다른 체계들이 그렇듯이, 어떤 제도적 토대에 입각해 있다.”(같은 책, 21쪽)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기회는 오직 기존의 담론이 용납하는 진리규칙의 범위 안에서 허용된다. 경혈에 대한 이론이나 기氣를 근거로 한 병의 치료법이 (서양식) 의과대학에서 가르쳐지거나 임상의학자들의 학회에서 발표될 가능성을 찾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에 가서 참치사냥을 하는게 더 낫다. 이처럼 진리의지는 지식이 어떤 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가치를 부여받고 사용되며 분배되고 때로는 강요되기도 하는 방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나아가 특정한 유형의 주장이나 지식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고 사람들의 삶에 강요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요소인 셈이다.
요컨대 진리의지를 통해 억압과 금지, 배제와 강제가 작용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진리의지는 담론을 통해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인 것이다. 즉 “담론은...존재하자마자 단지 실천적 적용에 국한되지 않고서 권력의 물음을 제기하는 속성(재산)property, 자연히 정치적 비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는 속성인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173쪽) 따라서 진리의지를 문제삼자마자 담론의 분석은 권력의 문제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②담론의 사건적 특성을 복구하는 것.
앞서 본 것처럼 근대의 거대한 감금, 혹은 피넬이나 듀크가 대표하는 ‘대개혁’이란 사건이 없었다면 근대적인 정신의학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담론마다 고유한 형성규칙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담론의 형성을 지배한다면, 어떠한 담론 내부에서 그것과 단절한 새로운 담론이 탄생하리라고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한 단절을 구획하는 담론 자체의 변화, 나아가 새로운 담론적 공간의 출현은 담론 외적인 것을 통해서, 좀더 정확하게는 담론 내의 담론 외적인 것인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외재성의 공간이 없다면 담론의 변환은 사고할 수 없다.
예컨대 맑스의 이론이 야기한 경제학적 담론의 변환은 단지 스미스나 리카도의 담론에 대한 담론 내적인 비판만으로 과연 가능했을까? 스미스와 리카도의 담론적 공간에 머물러 있는 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 공간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규칙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정치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단절은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에피스테메나 ‘심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경우 맑스의 경제학적 담론은 리카도에 비해 그다지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맑스의 경제학적 담론을 평가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방식으로다. 그는 스미스에서 보여진 근대적 단절의 징후가 리카도에 이르러 명확한 이론적 형태를 갖춘다고 보며, 맑스의 비판은 이러한 리카도의 단절 아래 있고, 바로 그렇기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말과 사물?, 308-309쪽)
그러나 맑스에게는 분명 리카도나 스미스로 환원되지 않는 근본적인 새로움이 있으며, 그것은 단지 ‘서서 보는 지점’의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즉 맑스에게서 보이는 리카도와 스미스의 개념들조차도 상이한 형성규칙과 상이한 개념적 지위, 상이한 전략과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고전경제학과는 상이한 다수의 담론들을, 결국은 담론적 공간을 창출했으며, 그것은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상이한 실쳔의 형태들을 조직해내는 ‘실증적’ 효과를 가졌던 셈이다. 이처럼 그 효과나 구성이란 면에서 맑스의 담론이 갖는 근본적 단절과 새로움은 단지 이전의 지배적인 담론 내부에서 출현하지는 않는다.푸코에게서 담론이론의 변화는 맑스의 담론에 대한 평가의 변화를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담론을 오직 담론을 가능하게 해준 공간으로서 에피스테메 속에서만 고찰하는 ?말과 사물?과 달리,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맑스에게서 볼 수 있는 잉여가치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같은 개념들은 (?말과 사물?에서 그랬듯이--인용자)이미 리카르도 저작 속에 존재하는 실증성의 체계로부터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전혀 다른 담론적 실천과 함께 복귀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곳에서 고유한 법칙을 따라 형성되며, 전혀 다른 위치를 점하며 동일한 얽힘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아니다.”(244-5쪽)
한편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나 적어도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라는 ‘사건’은 오히려 기존의 지배적인 맑스주의와 불연속적인 새로운 담론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 줄 조건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차라리, 맑스에 따르면 1848년을 전후해서 전면화된 계급투쟁과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이와 연관해 맑스가 ?자본?의 1권의 ?제2판 서문?에서 고전경제학이란 담론의 퇴락과정을 유럽에서 계급투쟁의 발전이란 ‘사건’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K. Marx, Das Kapital Bd.1,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상), 비봉출판사:1989, 11-13쪽
또 앞서 본 것처럼 담론 내에 있지만 결코 담론적인 것만은 아닌 사건은 비담론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의 연관을 드러낸다. 즉 담론을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담론의 사건성을 복구한다는 것은,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연관 속에서 담론의 형성과 작동을 분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사건의 일차성을, 즉 담론적인 것 안에서 작용하는 비담론적인 것의 일차성을 복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형법학이라는 담론이나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에 대해, 감금하고 처벌하며 감시하고 훈육하는 사건의 일차성을.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인 형성체가 함께 결합하여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생활을 생산하는 것 역시 이러한 사건의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이질적인 두가지 형성체가 야기하는 ‘복합효과’를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실천과 생활방식으로 길들이고 강제하는, 동시에 기존의 담론과 제도에 부합하지 않는 실천과 생활을 금지하고 배제하는 권력의 메카니즘인 것이다. 즉 담론의 사건적 특성을 복구함으로써 푸코는 이후 ‘권력’개념으로 이어질 실천적 효과를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③시니피앙의 지고성을 제거하는 것.
담론을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을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적 의미체계로 정의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즉 담론을 오직 담론 내적인 기호체계로 정의하지 않으려는 점에서 다르며, 또한 그것을 단지 사물을 분절하는 의미구조로 제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언표가 ‘반복가능한 물질성’을 갖는다고 한다(?지식의 고고학?, 150쪽). ‘언표의 물질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표가...사물 또는 대상의 지위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결코 결정적이지는 않아서 수정가능하고 상대적인, 그리고 언제라도 다시금 의문에 부쳐질 수 있는 지위” 말이다. 물론 “언표가 물질의 한 조각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동일성은 물질적 제도들의 복잡한 규칙과 함께 변화한다.” 여기서 “언표들이 필연적으로 복종할 수 밖에 없는 물질성의 규제는 시공간적 위치지움의 질서에 속하기보다는 제도의 질서에 속한다.”(같은 책, 150-151쪽) 다시 말해 언표 가능성의 공간이 제도적인 것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그는 ‘언표의 물질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물론 앞서 본 것처럼 담론을 형성하는 규칙에 의해 언표가 제약된다는 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얼핏보면 ‘시니피앙의 물질성’이라는 라캉의 테제와 유사해 보인다. 라캉에게서 시니피앙의 물질성이란, 시니피앙으로 조직된 언어적 법칙들이 외부적인 존재일뿐 아니라 강제적이고 물질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의 물질성 속에서, 의미구조의 물질성 속에서 사고하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시니피앙의 물질성이란 일차적으로 시니피앙 자체의 법칙과 얽힘이 갖는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어학적 전환’의 중심테제인 셈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테제는 라캉에 대한 반대요 비판이다. 즉 그는 의도적으로 담론이나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즉 ‘시니피앙의 물질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언표의 특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언표의 물질성이란 그것의 사건적 특성을 통해 정의되는 바 물질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시니피앙의 지고성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여기서 그의 담론 개념이 표상체계의 패러다임과 갈라지는 또 하나의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시니피앙의 전제주의’ 비판을 통해 푸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담론의 분석이 단순히 인식이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지반을 보여주는 것이어선 안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호나 의미가 문제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갖는 사건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언표들이 갖는 ‘가치’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러한 언표들을 만들어내며, 다른 언표들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러한 언표의 강제와 배제가 야기하는 효과는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이 형성체를 통해 동시에 작동하는 권력을 보는 것이다. 언표의 물질성이란 바로 이런 권력의 물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4)표상으로부터의 탈주
결국 푸코가 담론 개념과 연관해 보여준 ‘계보학적 전환’이란 담론을 무의식적 표상체계로 정의하고, 그 안에 말과 사물을 몰아넣는, 그리하여 모든 것이 표상체계의 물질성--예컨대 시니피앙의 물질성--으로 환원하는 문제설정으로부터의 이탈이요 탈주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표상으로부터의 탈주’라고 할 수 있는 푸코의 이러한 이론적 변화는 담론적인 것과 담론외적인 것의 복합효과를 사고할 수 있는 계보학적 공간으로 귀착된다.
우리는 푸코 자신의 이러한 탈주를 통해서, 표상체계 패러다임의 한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언어학적 전환’ 아래 머물러 있기를 거부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처럼 탈주에 성공한 푸코는 이전에 자신조차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기호학적-언어학적 패러다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을 기초로 우리는 상징체계나 의미행위의 구조의 영역에 안주하는 분석을 거부하고 세력관계나 전략의 개방 또는 전술 따위에 강조점을 두는 계보학적 분석방법에 귀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석의 근거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언어나 기호라는 진부한 모델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같은 역동적인 모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규정했던 힘은 언어라기보다는 전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를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지요...기호학은 갈등을 언어와 대화라는 고요한 플라톤 식의 형태로 환원시킴으로써 광포하고 피에 물들어 있으며 치명적인 성격을 띠는 갈등의 참모습을 역시 외면하고 있습니다.”M. Foucault, "Truth and Power", C. Gordon ed.,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홍성민 역, ?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와의 대담?, 나남:1991, 147쪽
우리는 푸코의--그리고 들뢰즈Deleuze/가타리Guattari의G. Deleuze/ F.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renie 1, Minuit:1972, 최명관 역, ?앙띠-오이디푸스?, 민음사:1994, 제1장 및 제2장 참조
--이러한 평가에 동의한다. 이는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이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언어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우리의 평가기도 하다. 나아가 이러한 평가는 ‘계보학적 전환’의 이론적인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어쩌면 ‘언어학적 전환’ 자체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푸코의 개념이나 문제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특히 계보학적 권력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난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 개념의 난점을 들어 이러한 ‘전환’의 의미를 놓쳐선 안된다. 또한 그러한 난점이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이와 연관해 우리는 푸코의 권력개념이 갖는 고유한 난점이 바로 말년의 그로 하여금 ‘윤리학’적 문제설정으로 넘어가도록 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이에 대해서는 ?푸코의 계보학적 권력개념?이란 논문을 통해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저항을 사고하기 곤란하다’는 것이 푸코 권력이론의 근본적인 난점으로 지적되었는데, 대개는 이것이 푸코가 계보학과 권력개념을 빌어온 니체에게, 즉 니체의 ‘구성적인constitutive 권력개념’으로 소급된다고 주장한다(예컨대 P. Dews, Logic of Disintegration, Verso:1987, 188-189쪽).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니체적인 권력개념을 사용하는 들뢰즈의 경우 결코 저항을 사고할 수 없는 난점에 빠지지 않으며, 푸코처럼 윤리학적 문제설정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점, 거꾸로 ‘맑스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푸코와 들뢰즈의 이러한 차이 역시 ?푸코의 계보학적 권력개념?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는 푸코의 권력개념이 니체나 바타이유보다는 보들레르같은 미학적 아방가르드들의 ‘경험주의적 전통’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편재적 권력에 대한 저항을 사고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J. Habermas,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이진우 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1994, 335-338쪽). 그러나 “저항을 사고하지 못한다”는 거의 상투화된 비판의 ‘기원’이 된 이같은 비판은, 규범적 토대와 그 보편성이라는 근대적 문제설정으로 회귀하려는 것이어서, 그것을 벗어나려는 푸코에겐 거의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물론 “편재적 권력과 보편적 규범의 부재”라는 것만으로 저항을 사고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올바로 비판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 차라리 중요한 것은 그 난점을 통해 계보학적 전환의 효과을 더욱 멀리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맑스주의와 푸코의(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분석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푸코의 ‘이론’보다는 그의 이론적 ‘변화’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4.계보학과 담론
푸코는 자신의 담론 개념을 네가지 개념과 관계지운다. 전복retournement, 불연속성discontinuite, 특정성specificite, 외재성exteriorite. 이를 기초로 해서 마지막으로 푸코의 담론 개념이 갖는 몇가지 특징을 요약해보자.
첫째, ‘불연속성’이라는 특징. 앞서 본 것처럼 담론들 안에서 개념과 전략은 서로 다른 계열을 이룬다. 이로 인해 각각의 담론은 서로에 대해 불연속적이며,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언표나 실천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다양한 담론들 간에, 혹은 심지어 하나의 제목을 붙일 수 있는 공간 안에서도 상이한 전략을 갖는 담론 간에는 소통과 대화가 아니라 비소통과 단절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상이한 담론적 실천들 간에 배제와 단절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미시경제학에서 다루는 생산의 개념이나 그것이 지시하는 생산행위에 대해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은 무시하거나 배제한다. 따라서 “담론들은 서로 교차하며 종종 서로 이웃하고 있는, 그러나 또한 서로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불연속적인 실천들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담론의 질서?, 42쪽)
한편 “접합적 실천에 의해 구조화된 전체”를 담론으로 정의하는 라클라우/무페의 담론(형성체) 개념은(?헤게모니와 사회변혁?, 131쪽), 담론(적 실천) 간의 불연속성과 단절성보다는 연속성과 개방성에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잠정적인 고정점의 역할을 하는 적대를 통해 담론적 실천들 간에 적대적 분할이 발생하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등가equivalence적인 접합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적대와 등가에 의한 접합을 그는 중층적 결정이란 개념으로 재정의한다. 따라서 담론형성체는 이러한 중층적 결정에 의해 그 의미와 효과가 결정되는 “개방적 성격”(!)을 갖는다(같은 책, 144쪽. 강조는 인용자). 다시 말해 담론은 각각의 고유한 형성규칙에 의해 지속적 효과를 재생산하는 불연속적인 형성체가 아니라, 개방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것과 적대하는 담론적 형성체에 따라, 그리고 그 적대의 선을 한편에 두고 등가적으로 접합하는 다른 담론형성체들에 따라 그 의미나 효과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연속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라클라우에게서 ‘주체’란, 푸코처럼 담론의 형성규칙에 따라 특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접합의 양상에 따라 가변화되는 ‘주체위치’에 불과할 뿐이며, “모든 담론의 개방적 성격을 공유한다”(같은 책 144쪽). 다시 한번 대비해서 말하면, 푸코에게 ‘주체위치’는 특정한 담론에 의해 고정되고 그 담론이 허용하는 불연속성 안에서만 ‘주체’의 실천이 특정화되는 것인 반면, 라클라우에게는 접합의 양상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주체’의 위치와 실천이 정의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인민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담론형성체가 다른 계급의 담론형성체와 어떻게 교차하는가에 따라 혁명적 인민주의로 되기도 하고 파시즘적 인민주의로 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E. Laclau, 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 NLB:1977의 4장을 참조
즉 담론형성체는 서로 뒤섞이며 융합된다는 이러한 주장 속에서 라클라우의 ‘전향’은 이미 예비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로써 담론의 대상과 주체, 개념 및 전략의 불연속성을 통해 실천을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화하는 담론의 효과에 대해 사고하려는 문제설정은 ‘우연성’과 ‘비고정성’, ‘개방성‘의 논리를 위해 제거된다. 하지만 어떤 담론, 예컨대 아직 의미나 효과가 확정되지 않은 인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파시즘에 포섭되면서 파시즘적 인민주의가 되고,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서 혁명적 인민주의가 된다는 주장은, ‘순수한’ 이데올로기를 상정하는만큼이나 순진한 이데올로기 아닐까? 적어도 여기서 푸코적인 담론이론의 고유한 문제설정이 ’개방성‘과 ’우연성‘의 해체주의적 논리와 충돌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특정성’이라는 특징. 이는 사물을 특정한 형태로 보게 만들고,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생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근대경제학이란 담론에서 임금은 노동의 댓가고, 노동하지 않으면 임금은 지급되지 않아야 하기에, 일을 하지 않는 파업기간 동안에는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야 한다. 근대경제학의 담론 안에 있는 한 이러한 판단은 강제된다. 그것은 자본가와 노동자들에게 특정한 형태로 판단하고 실천하게 하도록 부과되는 “일종의 폭력”(?담론의 질서?, 42쪽)이다. 즉 그것은 어떤 담론에서든 특정한 형태의 발언과 ‘소통’만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 담론 안에서 파업을 정당화하는 발언이나 잉여가치의 착취를 주장하는 언표는 발언될 수 없으며 ‘소통’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특정성은 어떤 담론 안에서 특정한 것만이 ‘소통’될 수 있게 하는 규칙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실증성으로서 담론이며 담론이 갖는 실증적 효과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처럼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나 왜곡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담론 자체의 ‘이상적인’ 소통가능성을 전제하며, 단지 그것을 왜곡하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그러한 상태가 가능하리라고 본다는 점에서 푸코와 정반대되는 담론 개념을 갖고 있다. 로데릭R. Roderick에 따르면, “하버마스는 ‘담론’이란 용어를 ‘만일 논의과정이 충분히 개방적으로, 그리고 충분한 시간에 이루어진다면...합리적으로 동기부여된 합의가 원칙적으로 달성할 것이 참여자에게 개념적으로 가정될 때’ 사용한다”.R. Roderick, Habermas and the Foundations of Critical Theory(1985), 김문조 역, ?하버마스의 사회사상?, 탐구당:1992, 144-5쪽. 강조는 인용자.
이는 체계적으로 의사소통이 왜곡된 것으로서 이데올로기와 구분된다(같은 책, 193쪽). 즉 그의 담론 개념은 이상적 발화상황을 (규범적) 기초로 하여 성립되고 있으며, 그 소통행위에 참가하는 자들은 “의사소통합리성을 통해 그들의 단순한 주관적 관심을 극복하고 합리적으로 동기화된 신념의 상호성에 힘입어 객관적 세계의 통일성과 그들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을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같은 책, 144쪽). 따라서 이러한 담론 개념에서 오해나 왜곡, 기만은 있다고는 해도 다만 파생적 성격을 지닐 뿐이며(같은 책, 195쪽), 제거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를 푸코와 연관지어 표현하자면, 하버마스에게 담론은 ‘특정성’이 아닌 ‘보편성’을 갖는다고 하겠다.--단 그것을 왜곡하는 요인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양자의 담론이론이 전혀 상이한 문제설정에 입각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버머스에게 그것은 대화하고 토론하는 장의 외연적 확대로서, 의사소통을 통해 보편적 규범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기어드는 왜곡이나 오해는 충분히 토론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적어도 이데올로기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제거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이상적 담론상황’에 도달할 수 있다.우리는 이러한 담론 개념은 이상주의적인 만큼이나 관념적이라고 생각한다. 담론은 단지 의미작용의 놀이가 아니라는 푸코의 지적도 여기에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의 보편규범적 기초를 찾으려는 ‘비판이론’이 사실은 사회나 담론에 대한 합의모델에 기초하고 있으며, 담론을 통해 보편적 합의에 도달하려 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이 소통을 방해하는 왜곡과 기만이라는 요소가 제거된 이상적 상황이란 유토피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과연 과장에 불과한 것일까?
반면 푸코는 심지어 의사소통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조차도 그것은 담론이 정의한 규칙에 따른 것이며, 거기서 발언할 수 있는 주체는 소수로 제한되고, 그 발언의 대상은 담론 내에서 이미 정해진 특정한 실천을 강제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합의가 아니라 ‘왜곡’이나 ‘기만’--이 말들은 올바름을 가정하기에 사실 부적당하다--이 담론에 내재적이며, 그것이 없는 중립적이고 ‘이상적인 담론상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왜곡을 제거하고 어떤 ‘보편적 합의’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특정한 실천을 강제하는 담론형성체의 ‘전복’이다. 이런 점에서 ‘비판’이라는 동일한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매우 상이한 입지점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셋째, ‘외재성’이란 특징. 이는 담론이 단지 담론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적 조건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담론의 현실적인 형성’을 다루는 계보학에게, 담론이 형성되는데 관여하는 외부적 조건은 단지 ‘조건’이라는 단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사건이 담론적 형성체에 내적인만큼이나 담론 자체에 ‘내적’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역사라는 요인이 담론적 형성체를 다루는데 결정적이라고 보며, 담론을 단지 담론으로서 다루는 데 대해 비판적이다. 마찬가지로 담론적 형성체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입장 역시 그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또한 푸코가 자신의 입론을 스스로 깨면서 성취한 이론적 발전 전체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데리다의 비판에 대해 ‘역사’라는 차원을 상기시키려고 한 푸코의 반비판을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은 “담론적 실천을 텍스트의 흔적으로 축소시키고,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책읽기를 위한 지시들만을 얻기 위해 생략하고, 주체가 담론 속으로 연루되는 양태를 분석하지 않기 위해 텍스트 뒤에 있는 목소리들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행해진 변형의 영역 속에 담론적 실천을 다시 위치시키지 않기 위해 원초적인 것을 텍스트 속에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해진 것으로 설정하는 체계다.”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 Gallimard:1972, 602쪽, 김현, ?시칠리아의 암소?, 문학과 지성사:1990, 119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한마디로 푸코가 보기에 데리다의 입론은 “담론적 실천의 텍스트화”다(같은 책, 119쪽).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이성이 추론적 입증적 이성이라면, 푸코의 그것은 역사적 구성적 이성”이라는 김현의 해석은 정당한 것이다. 김현, 같은 책, 120쪽.
R. Boyne 역시 푸코와 데리다 간의 논쟁을 점더 집중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양자 간의 이러한 논점을 보여주고 있으며(R. Boyne, Foucault and Derrida: The Other Side of Reason, Unwin Hyman:1990, 71-87쪽 참조), 이는 이후 양자가 주목하는 지점이 텍스트와 신체body의 대립을 통해 일관되게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같은 책 90-122쪽). 그는 이러한 대립의 근저에서 ‘차이와 타자’라는 논점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양자가 서로 보충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손쉬운 화해로 마무리한다(같은 책, 166쪽). 그러나 근본적으로 상이한 이론적 전략과 문제설정을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화해시키는 것보다는, 대립을 대립 그대로 두고 차라리 그 각각이 산출할 수 있는 상이한 효과를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이 지점에서 ‘역사’라는 요소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단지 담론에 외부적인 어떤 조건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 속에서 담론을 정의하려는 푸코 자신과, 단지 담론을 단지 텍스트로서만 다루려는 데리다 간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한 것인 셈이다.
넷째, ‘전복’이라는 특징. 이는 담론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기 보다는 앞서와 같은 특징을 갖는 담론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푸코 자신의 문제설정의 특징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기존의 담론을 전복하고 그것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것을 드러내며 그것이 강제하는 실천을 넘어서려는 ‘비판적 문제설정’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는 예전에 자신이 ‘고고학’이라고 불렀던 것을 “비판적 집합”이라고 부르며, 고고학이란 말을 지워버린다.이는 자신의 과거 작업을 정리하면서 이후 새로운 작업을 예고하고 있는 ?담론의 질서? 전체에 특징적이다. 특히 위의 책 46-49를 참조.
나아가 그것은 앞서 3가지 특징으로 요약한 담론을 공략하기 위한 자신의 입지점인 셈이다. 푸코가 ‘비판적 집합’과 대비하여 사용하고 있는 ‘계보학적 집합’(?담론의 질서?, 46쪽)에 대해서도 “계보학적 비판”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같은 책, 49쪽)은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결국 담론이 같는 이상과 같은 특징이란 담론이 그것이 부과될 대상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의 작동을 조건짓는 조건이기도 하다. 즉 푸코는 이러한 특징을 통해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작동하고 있는, 혹은 그것과 관련하여 작동하고 있는 권력을--니체 용어로는 ‘권력의지’를--드러내며, 그것의 전복을 사고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인 형성체는 권력(의지)이란 개념을 통해 그 이원성을 극복한다.(?푸코?, 38쪽) 즉 양자 모두 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이며 메카니즘인 것이다. 요컨대 ‘계보학’이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표상으로부터 탈주하려는 푸코의 시도가 도달한 지점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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