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자(상) - 김병총
----- 차 례 -----
작가 소개
주요 등장인물
1. 어둠 속의 불씨
2. 새벽별
3. 물보라
4. 먹구름 모이다
5. 숲 속의 바람소리
6. 떠오르는 해
주요 등장인물
赤頭老師 / 빨간 머리털을 가진 무림의 最高手.
芳遠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山野에 숨어, 네 명의
제자들에게 각각 비밀스런 임무를 부여한다.
施覺大師 / 적두노사와 쌍벽을 이루는 무림의 國手.
전통 무예의 완성자로서, 왕천을 훌륭한 무예자로
키우는데......
天照翁 / 하얀독수리가 찾아 헤매는 무림의 악명
높은 괴력의 살인마.
하얀독수리(최동) / 성실한 인생관을 지닌 지모
출중한 流浪의 무사.
흑사마귀(정창) / 방원의 手下私兵 중 우두머리.
무사로서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때문에 결국
그는 미치고 마는데......
불여우(윤호) / 정도전의 오른팔. 무과 벼슬을 하게
되나, 그 잔인성으로 인하여 화를 자초하게 되고.....
족제비(김해간) / 갈매기섬에 묻힌 보물의 지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칼잡이들의 표적이 된다. 여색을
지나치게 탐하다 끝내는......
삿갓(박진) / 왜구에의 증오가 가득하며, 보물섬에
대한 집착이 강한 패기만만한 불운의 무사.
무예도장을 일으키고 권력과 결탁하나 모두
실패하고......
굴림의자 / 소아마비를 앓아 앉은뱅이 신세로
의자를 굴리고 다니나 바늘 뿌리기와 표창 던지기의
명수. 주역에도 밝은 소매치기 두목.
왕천 / 멸망한 고려 왕씨일족의 마지막 왕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무술을 연마하고, 기어코 전통무예와 近邦 무술을
통합해 <武藝大寶>를 완성하는데......
유화 / 아름답기가 선녀 같은 고려 사직의 불행한
처녀. 난세에서도 기품이 꺾이지 않는 왕천의 연인.
1. 어둠 속의 불씨
이태조(李太祖) 삼년, 갑술(甲戌)년 구월.
보름달이 중천에 차갑게 떠 있다. 축시(丑時)에
접어들면서부터 개경(開京)의 인적은 더욱
드문거렸다.
언제부터인가 개경 백성들은 한양(漢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고려가 기울어지고 새 왕조의
도읍지가 한양에 서고부터는, 인심도 자연히 옛
도음지를 버리는 듯이 보였다.
나라에는 흉년이 들었고, 새 권부(權府)는 아직
정치적 기반을 다지지 못해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었다.
고려의 마지막 세 왕들이 이성계에 의해 차례로
내쳐진 이후, 백성의 어버이였던 충신 최영. 정몽주.
이색 등이 하나씩 살해되거나 혹은 유배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음 왕좌에 앉기 위한 왕자들의
세력다툼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나라 바깥으로부터의 어지러움도 민심을 한없이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왜구(倭寇)들이 바닷가를
들락거리며 노략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북쪽의
오랑캐들 역시 불안한 백성들을 집적거리며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륙의 신흥 명나라의 사신들이 와서
조선의 마필과 비단과 금은보화 등을 사정없이
훑어가지고 떠났다.
피곤에 지친 민심은 더이상 멸망한 사직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았다. 백성들은 새로운 세력이
지난날의 귀족들인 왕씨(王氏) 일가들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차라리 불행했던 지난날들을 잊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이제 과거의 일들은 끝났다. 배를 타고 새로운
삶터를 찾아 떠나던 왕씨 일족들은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면서 모두가 수장(水葬)되고 말았다.
이렇게 고려의 영광은 끝이 났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그 백성들이었다. 새로운 사직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모진 목숨의 남은 기운을 불태우며
한양으로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멸망한 사직의 터밭이었던 송도(松都)는
졸지에 폐허가 되었다. 여말(麗末) 삼은(三隱) 중의
하나였던 길재(吉再)는 그 황량한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煙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모두가 한양으로 살길을 찾아 떠나가고 있을 때,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개경을
빠져나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깊은 야음을
틈타 도망치기라도 하는 듯이 사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갈색 두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매었고, 그의 갈색 수염은 산들바람을 타고
잔잔히 흔들거렸다.
그의 행색을 살펴보면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바소쿠리 없는 지게를 등에 졌으며, 그 위에는
궤짝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다시 그 위로는 괴나리
봇짐 한 개가 동발 위쪽에 매여져 노인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렸다.
궤짝은 관곽(棺槨)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낌새로
보아 시체를 매장하러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관
속에는 시체 아닌 비밀스런 무엇이 들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푸른 달빛을 받은
상록의 이파리 그늘을 타고 조심조심 숨어나갈 이유가
없을 일이었다.
갑자기 풀벌레 소리가 몇발치 앞에서 뚝 소리를
죽였다. 노인은 멈칫하고 서서 앞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리는 금새 뒷쪽에서 크게 들려왔다.
풀벌레가 먼저 기척을 깨닫고 숨을 죽인 듯했다.
노인은 나무그늘 밑으로 숨으려다가, 요란한 소리가
말발굽소리인 것을 알아채고는 태연한 척하며 큰길로
다시 나섰다.
"서라앗! 거기 서랏!"
마상의 한 사내가 소리치고 있었다. 노인은 못들은
척 몇 발자국 걷다가, 사내가 재차 소리지르자
엉거주춤하면서 길 옆으로 비켜섰다.
어느새 노인 곁으로 바짝 다가온 사내들이 후다닥
말에서 뛰어내렸다.
"영감, 귓구멍이 막혔소?"
빨간 두건의 사내가 거칠게 소리질렀다.
"예에?'
노인은 계속 애매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달빛에
번들거리는 그들의 차림새를 곁눈질했다.
누군가의 가병(家兵)들인 듯했다. 그들은 모두 세
명이었다. 다른 두 명은 흰 두건을 이마에 동여매고
있었다.
"귓구멍이 막혔냐고 물었소."
빨간 두건이 다시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아, 예에......"
"뭐요, 이건?"
빨간 두건이 등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환도(環刀)를
뽑아들고 관곽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관곽이옵죠."
"관곽?"
빨간 두건은 골살을 찌푸렸다.
"빈 관짝입죠. 범내골에 사람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지금이 몇 점이나 된 줄 아슈?"
"축시는 실허게 됐겠습지요."
"알긴 아누먼."
"나리들, 좀 봐 주십쇼. 자시(子時) 이후엔
나다니지 말라는 나랏법을 소인인들 어찌
모르겠습니까요. 염할 시각이 하도 바쁘다기에......
더구나 관짝이나 팔아먹고 사는 늙은이가 한밤을
틈탔기로서니 설마 나쁜 짓이야 벌이겠습니까요."
"어쨌건 지게나 내려 보슈."
"예에?"
"정말 빈 관짝인가 열어 봐야 되겠수다."
다른 사내가 나서며 말했다.
"에이, 나리들. 그런 농담 그만 두시라요. 일없이
관짝을 뒤지면 부정탄다는 얘길 못 들으셨소?"
"글쎄......"
그들은 노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나리들께선 무언가를 찾고 있으시나 본데......"
빨간 두건이 노인의 말에 대꾸는 않고 환도 끝으로
관곽을 툭 쳤다.
"이건 또 뭐야?"
"아이구, 아서시요. 관짝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실려구 그러시오. 팔아먹긴 다 틀려 버린다우."
"이 봇짐 속에 뭐가 들었냐니까?"
"수의(壽衣) 말고 또 뭐가 들었겠습니까."
사내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에게 묻는 듯했다.
"영감, 이 쪽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걸 못봤소?"
"예에?"
노인은 빨간 두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조그만 사내놈이오."
"아, 그러니까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시구먼요."
"그럼 우리가 똥개 새끼라도 찾는 줄 알았소?"
"천만엡쇼. 혹시 금은보화라도......"
"금은보화보다도 더 값나가는 놈이지. 그래, 그런
녀석 보지 못했소?"
"혹시나 포도청 나으리들헌테 들킬까 싶어 조심조심
숨어온 주제에......"
"숨어왔다구? 영감이 어디 나쁜 짓이라도 했소?"
빨간 두건의 사내가 금새 눈알을 빛냈다.
"잘못하고 말구요. 자시 이후의 통행금지를
어겼으니까요."
"글쎄, 누가 지나가는 걸 못봤냐니까?"
아무도 만난 일이 없습지요. 쥐새끼 한 마리도
못봤습지요."
"무슨 기척도 없었소?"
"기척이라뇨?"
"영감처럼 누군가가 숨어서 도망치는
그림자라도......"
"아아뇨. 기척이라면 달밤에 수풀 속에서 숨어 우는
풀벌레 소리뿐이었지요. 그나마 나으리들의 말발굽
소리에 놀라서 뚝 그쳐 버렸지만요."
빨간 두건의 사내는 빼어들었던 환도를 칼집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공연히 시간만 허비했군. 어서 가서 자운교 근방을
뒤져 봅세. 정말 어린 놈이 들쥐 새끼처럼 빠져나갔단
말야."
빨간 두건의 사내가 먼저 말등으로 재빠르게
올라탔다. 다른 두 사내도 동시에 등자에다 발을
얹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에선가 수상한 기척이 났다.
관곽 속이 분명한 듯했다.
노인이 갑자기 긴장했다. 세 사내도 거의 굳어버린
자세로 귀를 곤두세웠다.
"무슨 소릴 들었지?"
빨간 두건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침소리처럼 들렸습지요."
흰 두건을 맨 텁석부리가 말했다.
"바로 이 쪽 숲 속인 것 같기도 했습죠."
칼눈을 한 흰 두건이 맞장구쳤다.
"소인도 들은 것 같습니다만, 필시 부엉이소리가
분명할 겁니다요."
노인도 재빨리 거들었다.
"영감도 들었소?"
텁석부리가 다그쳤다.
"사람의 소리는 아니었습죠."
"그걸 영감이 어찌 그토록 자신있게 말할 수 있소?"
"아따, 육순이 되도록 밤길만 다녔습지요. 달밤엔
부엉이가 그런 목소리로 하품을 잘 하지요. 그런데
찾고 있는 양반은 어디 끔찍하게 몹쓸 짓이라도
저질렀던가요?"
"그건 영감이 알 필요없어. 아주 조그만
아이놈인데, 나라에서 비싼 상금까지 내걸고 찾고
있는 걸 보면 어김없이 지독한 놈일 테지."
"설마 아이놈이......"
노인의 대거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까의 그
기침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동시에 세 사내의
칼집으로부터 환도가 날쌔게 달빛을 쪼개며
빠져나왔다.
"여기야, 분명히 관짝 속이었어!"
빨간 두건이 소리지르며 마상으로부터 날아내렸다.
흰 두건의 두 사내도 어느 틈에 노인의 뒤쪽으로
돌아가서 칼끝을 목덜미에다 겨누고 있었다.
"영감, 이젠 속이지 못하겠지?"
빨간 두건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무얼요. 소인은 나으리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짐작도 할 수 없는뎁쇼."
"잔소리 말고 어서 그 지게를 내려놓아."
"지게를요?"
"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영감 목부터 자를테다!"
노인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기색이었다. 노인은 별
수 없다는 듯 한쪽 편 소나무에다 지게를 기대
놓았다.
"예에, 실은 강아지 세 마리가 이 속에 들어
있습죠. 범내골에 가는 길에 전부터 약으로 쓰겠다며
부탁하던 사람에게 전하려고......"
"어서 열지 않으면 관짝을 두 동강이 내버릴 테다."
빨간 두건이 소리질렀다.
이제 노인은 체념한 듯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노인은 세 사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잽싸게 사방을 살핀 후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그가 지게의 받침작대기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소나무에 지게를 기대 놓은 이유를 세 사내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왼손에 든 작대기로 관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뚜껑을 딸 작정이십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어서 영감이 열어 봐."
"싫소이다!"
"뭐, 싫어?"
"몸소 열어 보시든지......"
"이 영감태기가!"
"실은 말씀입니다요. 염병 앓다 죽은
송장이라......"
세 사내는 잠시 흠칫했으나,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듯 빨간 두건이 일부러 목청을 돋우어 소리질렀다.
"이 미친 놈의 영감이! 우리가 또 속을 줄 알구!
자네가 열어봐. 관짝이 잠겼거든 칼로 잘라 버려!"
빨간 두건은 노인의 말을 무시한 채 칼눈에게
명령했다.
"자넨 저 영감의 목을 단단히 겨누고 있어.
이제까지 지껄인 거짓말이 탄로나는 순간에 결딴을 내
버리란 말야."
"예엣!"
텁석부리가 대답하며 노인의 등 뒤로 돌아갔다.
칼눈은 환도 끝을 관곽의 틈새로 들이밀고는 뚜껑을
여느라고 낑낑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노인이 들고 있던 지게받침작대기 속에서 날빛이
번쩍했다. 그와 동시에 칼눈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노인의 손놀림은 나이에 맞지 않게 무섭도록
재빨랐다.
칼 끝을 노인에게 겨누고 서 있던 뒤쪽의
텁석부리나 앞쪽의 빨간 두건 역시 눈 깜짝할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잠시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이놈이!"
빨간 두건이 신음처럼 내뱉았다. 그러면서도 노인의
작대기 안으로부터 빠져나온 칼날을 조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칼놀림은 너무도 전광석화
같았기 때문에 가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달빛 아래에서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를 두고 하늘의 뜻이라는 거다. 자네들이 곱게
지나쳐 갔더라면 내 칼날을 피할 수 있었으련만.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네놈들 목숨은 내가
가질 수밖에."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어냐?"
빨간 두건은 칼을 치켜든 채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로 칼 끝을
바꿔들었으나, 그의 손목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선 네놈들의 정체부터 대라."
노인이 소리쳤다. 요약세(遼掠勢)로 칼 끝을
비스듬히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노인의 손목에도
긴장이 서려 있었다. 사내들은 대꾸 대신 노인을
사이에 두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노인은 가만히
섰다가 틈을 보아 관곽 옆에 엎어져 죽어 있는 사내
너머로 살짝 건너뛰었다.
찰나 텁석부리의 칼날이 노인의 어깻죽지를
비스듬히 그리며 지나갔다.
"으아악--."
그러나 비명을 지르며 무너진 것은 노인이 아니라
텁석부리였다. 그는 노인의 등 바로 뒤에서 칼을
떨구었다. 칼 끝이 땅에 꽂히며 서너 번 요동을 쳤다.
노인의 칼날은 이미 텁석부리의 허리 밑으로 지나간
지 오래였다.
털썩하고 텁석부리가 자빠짐과 동시에 노인의
피묻은 칼이 빨간 두건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
"흥, 제법인걸. 그렇지만 나도 만만치가 않아.
더구나 내 부하들을 벤 영감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영감의 목숨이 결딴나기 전에 미리
묻겠는데, 도대체 영감의 정체가 무어냐?"
빨간 두건은 냉정을 되찾은 듯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잠깐 비쳤다.
"꼭 알고 싶다면 말해 주지. 아까 말했던 대로
관짝이나 지어 짜서 팔아먹고 사는 어진 백성이야."
"실토하지 않을 작정이군. 그럼 저 관짝 속의
사내놈은 어디서 줏은 거냐?"
"빈 관곽이라니까."
"빈 거라면 어째서 열어 보지 못하게 했지?"
"정체도 모르는 녀석들이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겠다고 하는데 당신인들 참을 수 있겠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 애들을 죽일 것까지야
없잖았소."
"그건 얘기가 다르지. 당신네들이 날 꼼짝 못하게
칼 끝을 겨누고 있었다는 게 옳지 못한
행동이었거든."
"이거 얘기가 사뭇 통하질 않는군. 대체 영감의
정체가 뭐요? 보아하니 칼솜씨도 예사롭지
않고......"
"그보다 당신의 정체부터 대 보시지. 싫다면 내가
먼저 가늠해볼까? 필시 왕세자의 사병(私兵)이겠지?
지금 눈알을 시뻘겋게 뜨고 찾고 있는 아이는 고려의
왕손이겠다?"
"맞소. 그걸 알고 있는 당신은?"
"그보다 왕씨손을 몰살시키려는 저의가 뭔가?"
"새 왕조는 단단하게 다져져야 하오. 고려의
반도(叛徒)들이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한
백성들만 고통을 당하게 되지. 어디까지나 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상감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상감의 뜻? 권좌를 꿈꾸는 왕자들의 수족이겠지."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쨌건 이제 영감의 정체를 댈
차례다. 부디 조선왕조의 안정을 위해서 협조해 주길
바라오. 그러니 저 관짝 속의 아이를 돌려주시오."
"빈 관곽이라니까.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겠다면
죽어 자빠진 저 녀석들처럼 자네도 용서받을 수 없게
되지."
그때였다. 관곽 속에서 아까보다 훨씬 심한
기침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관곽의 뚜껑까지 잠깐
흔들렸다.
"자, 이젠 영감도 더 버틸 수가 없겠지?"
"어림없는 소린 그만 둬. 강아지라니까."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빨간 두건은 에잇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칼을 휘둘렀다.
노인의 가슴 근처로 흰 달무리가 동그랗게
그려졌다. 동시에 노인의 몸이 왼쪽으로 약간
비켜섰다.
"어림없는 짓. 이젠 자네마저 용서할 수가 없게
됐군......"
헛칼질을 해 버린 빨간 두건은 얼른 다른 자세를
취했다.
"음......, 몸받음을 할 작정이군. 내가 힘없는
노인인 것을 노리고 씨름을 걸겠다? 어디 해 보시지.
기술로는 자네가 날 당할 수가 없을 테니까."
심전(심戰)이라고 한다. 시기를 보아 왼발부터 뒤로
물러서는 척하다가 뒤통수나 손목을 치는 수도 있다.
상대를 돌려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넘어뜨리던가
돌려 밀던가, 스스로 물러나던가, 아니면 몸을
피하던가, 이 중에서 하나를 신속하게 선택해야 될
처지에 이르렀다. 노인은 모른 척하며 빨간 두건의
의도에 맞추어 몸 가까이 붙어 섰다.
몸받음이란 말할 것도 없이 육탄으로 상대의 몸에
부딪치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태세를 무너뜨리고
틈을 얻기 위해서라든가, 적의 기세를 꺾기 위해,
혹은 지금 상태에서 적이 불리하도록
전도(轉倒)시키려 할 때 사용된다.
빨간 두건이 몸받음을 걸려는 의도는 필시 노인의
허(虛)한 힘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역시 버티고 있는 노인의 칼이 밀리고 있음을 눈치
챈 빨간 두건은 옆으로 비스듬히 빠지며 재빠르게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걸었다.
노인은 넘어지며 칼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빨간
두건의 멱살을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 빨간 두건의
칼도 공중을 날아서 숲속으로 떨어졌다.
"자, 이젠 곱게 항복하시지."
빨간 두건은 노인을 깔아뭉개며 뇌까렸다. 승리가
이미 끝난 것처럼 입가에는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건 이 쪽에서 해야 될 얘긴 걸."
노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지금까지의 자세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밑에 깔린 빨간
두건은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실하군."
"내가 아직 젊다는 증거지."
"그렇다면?"
빨간 두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른 노인이 갈색
수염을 잡아당겼다. 어이없게도 수염은 힘없이
떨어져나가 빨간 두건의 손아귀에 움켜쥐어졌다.
"앗! 당신은!"
빨간 두건은 심하게 목이 죄었을 때보다 훨씬
괴로운 신음소리를 뱉아내었다.
"으하하하...... 내가 누군가를 이젠 아셨단
말이지?"
노인이 아닌 건장한 장정이 빨간 두건의 가슴
위에서 호기롭게 웃고 있었다.
"틀림없어! 하얀독수리!"
"그건 내 별명이고, 협사(俠士) 최동(崔東)이 내
본명이야. 자네들이 날 잡으려고 시뻘겋게 눈이
뒤집혀 쫓고 있다기에 잠깐 변장을 했을 뿐이지. 내
정체를 알았으니 도저히 자네를 살려둘 수 없군."
"그렇다면 관곽 속의 아이놈은 왕손인 왕천(王天)이
틀림없겠다?"
"이 마당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나. 나는 저
분을 너희들의 손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으로
모셔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하얀독수리도 두문동
떼거리들과......"
"말을 삼가하라. 그분들이 계신 이상 아직은
너희들의 주인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 찰나였다. 빨간 두건의 입에서 갑자기 짧은
기합소리가 새어나왔다.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단검 한 자루가 파란 무지개를
그리며 하얀독수리의 등짝을 향해 찔러들었다. 그
간발의 순간에 하얀독수리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동시에 빨간 두건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바람 빠지듯이 새어나왔다. 자기가 휘두른 칼로 그만
자신의 심장을 찔러 버렸던 것이다. 빨간 두건은 쭈욱
뻗어 버렸다.
"어차피 내 정체를 안 이상 살려둬선 안될
놈이지만......"
하얀독수리는 몸을 일으키며 흩어진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사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달빛이 주검
위에 말없이 머무르고 있었다. 세 마리의 말들은 타고
왔던 주인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얼른 지게 앞으로 다가갔다.
"이젠 밖으로 나오셔도 되겠습니다. 많이 놀라고
갑갑하셨겠지요. 뜻하지 않게도 왕손께서 타고 가실
말이 생겼습니다."
하얀독수리는 관곽 뚜껑을 서둘러 열었다. 그제서야
관곽 속에 누워 있던 여남은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는 왕천이었다.
"어떻게나 기침이 나오던지.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소."
왕천은 귀한 집 자제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맑은 이마에 총명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어서 떠납시다. 놈들이 다시 몰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연히 일이 시끄럽게 될 지도
모르니까요."
하얀독수리는 서둘러 널려 있는 시체들과 지게.관곽
등을 숲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가장 못생겨
보이는 말 한 필도 숲 속으로 몰아 넣었다.
흔적을 모두 없앤 후 말에 올라탄 두 사람은
오솔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계곡으로 접어들자
말발굽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폭포소리가 들려왔다.
"박연폭포만 지나면 일단은 놈들의 추격권을 벗어난
셈이 되지요."
하얀독수리는 고삐를 잡아 말의 속력을 늦추며
말했다.
"박연이라......"
왕천은 감회가 깊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역시 속력을
늦추었다.
박연폭포는 후일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의 삼절(三絶)이라 일컫게 되는 절경이다.
폭포수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는
당분간 이 절경을 구경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조천 상류의 강변을 뛰어다니며 마악 풍류를
배우려던 왕천이었지만, 당분간은 천마산 기슭에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고맙소. 궤짝 속에서 귀공의 신분을 들어 알게
되었소. 죽지 않고 뜻을 이루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게요. 그런데 저의 가친과는 전부터 친분이 있던
관계였는지요?"
"전연 그렇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어떤 분으로부터
천마산 북쪽 기슭까지 도련님을 모셔다 드리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어쨌건......, 그럼 저의 가족들이 모두 붙잡혀
배를 타기 직전에 나 혼자만 최협사(하얀독수리)에
의해 구출된 것이구려."
"그것은 도련님의 가친의 뜻이었을 뿐입니다."
"가족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소?"
"불행한 일입니다만 모두 수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천의 눈은 깊은 슬픔을 감추려는 듯했고, 비장한
결심을 다지는 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친께서 유달리 잘 보관하라던 이 검의 뜻을
이제사 알겠구려."
소년답지 않은 의젓함이 왕천의 몸에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갈까 합니다. 도련님께서는
어디로 가시게 되는지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가친의 엄명이
계셨지만......, 최협사에게는 귀띔해도 괜찮을 듯
싶소. 가친께서는 개골산 명연담으로 가서 누군가를
만나라 하셨소."
폭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달빛에 섞여 부서지는
물보라는 마치 뿌우연 안개와도 같았다.
"자, 여기서 헤어져야 할까 보오. 최협사, 우린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하얀독수리는 허리를 굽혀 절한 뒤 괴나리봇짐을
풀어 왕천의 말고삐에다 옮겨 매었다.
"노자와 변복하실 옷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산길을 가실땐 특히 맹수를 조심하십시오."
왕천은 잠깐 손을 흔든 뒤 말머리를 돌렸다.
을해(乙亥)년 봄에도 연등회(燃燈會) 행사의 기운은
여전했다. 비록 전 국토에 걸친 불안과 궁핍이 서민에
이를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지만, 모처럼 찾아온
봄날의 잔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도읍지가 한양으로 천도되면서 일기 시작한
백성들의 이동행렬 역시 아직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 길목마다 주막과 장터가 설 것은 뻔한 이치였다.
살 길을 찾아 이주하는 백성들의 엷은 주머니마저
약삭빠른 장사치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연등회 행사로 부산한 틈을 탄 대목이기도 했다.
밤이면 절간으로 통하는 길가의 나뭇가지에
청사초롱의 불빛이 밝혀졌다. 주막에도 길손의 출출한
뱃속을 유혹하는 등불이 밝혀지고, 주모가 아양 섞인
웃음으로 사내들을 불렀다.
북한산성의 터가 남아 있는 산마루 밑은 한양으로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이었다. 이동 행렬들은 일단
거기서 짐을 풀고 고된 다리를 쉬었다.
자연히 산성 밑은 행객들의 때 아닌 밀집으로
부산스러웠다. 더구나 연등회 잔치를 이틀 앞둔
처지여서 시전(市廛)거리는 무작정 흥청거렸다.
햇살이 서산마루에 뉘엇거리는 파시쯤 해서 한
사내가 산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갈한 차림새로 보아 돈푼께나 있어 보였다.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 유달리 엷은 입술도
무자리(揚水尺=기생)깨나 후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흔한 괴나리봇짐 하나 가진 게
없었다. 단지 그가 지닌 물건이라고는 등에 비스듬히
메고 있는 큰 칼뿐이었다.
동자 한 놈이 그 유별난 손님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그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손님 손님, 손님도 한양으로 가십니까요?"
"그래."
사내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내리 걸었다. 동자도
바싹 따라붙었다.
"지금 시각에 출발해선 어차피 한양에 못
닿으십니다요."
사내는 땅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쉬어 가실 양이면 저희 주막으로 드시지요. 마음씨
좋은 주모에다 술맛 또한 기가 차며......"
"시끄럽다, 이놈아."
"오늘 처음 들어온 무자리 또한 절색이지요. 열
여섯인데 아직 손님 쏜때가 한 번도 묻지
않았다구요."
사내는 그제서야 조금 반응을 보였다.
"너희 주막이 어디냐?"
"바로 저기에요. 모서리에 있는 주막인데......,
뒤쪽으로 별당이 따로 있습죠. 딱 두 냥만 내시면
제일 좋은 침방에 제일 좋은 주안상이 올라갑죠.
게다가 다시 딱 두 냥을 더 내시면 제일 이쁜
무자리를 끼고 잘 수도 있습죠."
"일 없다."
"손님두 무예청에 벼슬 따러 올라가시는 게
틀림없죠?"
"너희 주막에 들고 싶다만 돈이 없는걸."
"에이 손님두. 손님이 벼슬 따러 한양 땅을
밟으려는 게 틀림없다면 차림새로 봐서 돈 쌈지가
든든할 것두 틀림없구만요."
"이놈아, 벼슬하구 쌈짓돈하구 무슨 상관이냐?"
"처억 보면 다 알지요. 근데 손님, 무예 가지구
벼슬하시려면 무예청으로 가 봐야 모두
헛일입니다요."
"뭐라구?"
입술이 엷은 사내는 그 자리에 뚝 섰다.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따라붙던 맹랑한 동자도
예상 밖의 반응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놀라십니까요?"
"다시 말해 봐라. 무예청 벼슬이 어째서 신통치
않다는 거냐?"
동자는 그제서야 주저하기 시작했다.
"아니야요, 손님. 그저......"
"겁낼 건 없다. 내가 암행을 하고 있는 벼슬아치로
보이느냐?"
"제가 공연히 주둥아리를 놀렸나봐요. 무예청
벼슬이 신통치 않다는 얘기가 아니구요."
"그럼 무슨 얘기냐?"
"이런 주막거리에 몇 달씩 있어 보면 그런 소문은
쉽사리 듣게 되는 걸요."
"그런 소문이라니?"
"무과(武科) 벼슬하기보다는 가병(家兵)으로 뽑히는
게 출세가 훨씬 빠르다는......"
사내는 이마를 찌푸렸다.
"알았다. 너희 주막으로나 안내해라."
어스름이어서 행인들은 잠자리를 찾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손님의 칼을 보니까 솜씨가 뛰어나 보이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 시전거리에
방(榜)까지 나붙은 걸요. 모일 모시에 무예시합을
벌인다는......"
"누구의 가병모집이란 말이냐?"
"도장(道場)끼리의 시합이라지만 내용은 그게
아니라니까요. 보나마다 왕자 나으리들이 모집하는
가병이 틀림없겠죠."
"왕자 나으리들의?"
"소문에는 왕세자 나으리의 가병이 되는 게 제일
좋다는 소문이더군요. 아니면 넷째나 다섯째 왕자의
......"
동자는 주막 앞에 도착하자 잠깐 말을 끊었다.
"손님, 어떤 곳에 자리를 잡을까요?"
"어떤 곳이라면?"
"잡손님들이 득실거리는 쪽보다 값은 좀 비싸지만
별채가 조용해서 좋지요."
"그럼 별채로 하자. 주안상과 술 따를 무자리 하나
하구. 그리구...... 앗따, 수고값이다. 자, 받아라."
사내는 허리춤에서 두 푼을 꺼내어 동자에게
주었다. 동자는 싱글거리며 돌아섰다.
"얘야, 잠깐 보자꾸나."
"예에?"
"누가 날 찾을지도 모른다. 오늘 내일 중으로
말이다. 절대로 내가 있는 곳을 함부로 알려 줘선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할깝쇼?"
"우선 찾아 보겠노라구만 얘기하구 은밀히 내게
와서 일러다오. 아마 족제비 닮은 사람을 찾을 거다."
"그러면 손님이 족제비......?"
"그래. 그리구 저쪽은 ......, 흑사마귀거나
하얀독수리 ......"
"하얀독수리! 게다가 흑사마귀까지! 그들은 무서운
자들이라고 하던데......"
"쉿! 떠들지 마라. 자, 이건 비밀을 지키는 값이다.
내 얘기를 잘만 들으면 나중에 다시 후한 상을
주겠다."
"녜에, 녜에. 어련히 알아서 하겠습니까요. 저희야
뭐 ......"
다시 두 푼을 더 받아 쥔 동자는 허리를 다섯
번씩이나 조아렸다.
"자, 이쪽으로 따라오십쇼."
사내는 주막 앞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별다른
낌새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몸을 안으로 숨겼다.
족제비라는 사내는 아침에 눈은 뜨자마자
허리춤부터 살폈다. 간밤에 데리고 잔 무자리는 언제
떠났는지 옆의 이부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끼워 두었던 쌈지 속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낡은 종이 한 장이었다. 너무
낡아서 모서리 쪽이 떨어져 나가 너덜거렸다.
족제비는 종이 위에 그려진 이상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바위와 소나무와 갈매기와 동굴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어떤 섬의 지도인 듯했다.
그는 몇 점이나 앉아서 종이가 뚫어져라 살폈다.
드디어 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손님, 아직도 기침하지 않으셨나요? 해가 벌써
중천에 솟았구만요."
동자의 목소리가 여닫이문 바깥으로부터 들려왔다.
족제비는 지도를 접어 후다닥 속으로 감추었다.
"왜 그러느냐. 오래 전에 일어나서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동자는 여전히 딴전을 피웠다.
"그런데 밤내 재미가 많으셨는지요?"
"글쎄...... 이놈아, 허튼 소리 그만 하구 어서
세숫물이나 놓아라."
"허지만 손님, 저로선 손님의 아침문안 때 반드시
밤동안 재미가 있었던가 없었던가를 여쭤보는 게
임무로 돼 있걸랑요."
"허어, 그놈 참. 그래, 재미가 있었다구 치자."
"그럼 오늘 밤에도 들여보낼깝쇼?"
"그 어린 놈이 더럽게 까지기도 까졌군. 잡소리
그만 집어치우고 어서 세숫물 놓아라."
"예에-- 예. 그런데 진지 드시고 나들이를 나가실
겁니까요?"
"그럴 생각이다."
"지가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구 간섭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조심하셔야 되겠습니다요."
"아니 왜 그러느냐?"
족제비는 그제서야 여닫이문을 벌컥 열었다.
"새벽 심부름 갔다오다 보았는뎁쇼, 이상한 방문이
붙었더구만요."
"방문이?"
"저희야 뭐 까막눈이어서 글귀를 알아볼 수
있나요."
"그래서?"
"그래서, 옆에 점잖은 어른께 여쭤봤습죠. 그랬더니
나라에서 이러이러한 남자를 잡으라는 방이라던뎁쇼?"
"어떤 자를 잡으라던가?"
"상금이 이천 냥이나 걸렸다던뎁쇼. 노인으로
변장하고 칼을
등뒤에 비스듬히 짊어진 ......"
"변장하고 칼을?"
"예에. 살인을 하구 도망친 자라던데요. 아무튼
조심하셔야겠습니다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더래도 칼은 그냥 두시고 나가시는 게
시끄럽지가 않을 텐데요."
"고맙다. 별달리 수상한 변고가 있거든 다시
알려다오."
늦은 아침을 들고난 족제비는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동자의 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인지 환도를 메고 있지 않았다.
시전거리는 아침부터 온갖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나와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들로 복잡거렸다. 그
와중에 흥정이 잘못되었는지 서로 멱살을 쥐고 흔들며
큰 소리로 싸우는 자들도 있었다.
족제비는 그런 사람들의 뒤를 돌아 한 떼의
구경꾼들이 몰려 있는 데로 다가갔다.
구경꾼들의 어깨 너머에서는 무예꾼들이 봉술과
태껸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모아 무술묘기를 보인 뒤 약을 파는
모양이었다.
족제비도 구경꾼들 등 너머로 하릴없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내가 마주서서 곁눈질로 꼬나본 뒤에 갑자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접근해 간다. 서로의
어깨를 툭 부딪치는가 했더니 그냥 스쳐가 버린다.
그러다가 어느새 곧장 되돌아와서 다시 접근한다.
이번에는 한 사내가 다른 사내의 발목을 툭 찬다.
그러자 발목을 채인 사내가 포가세(抛架勢)를
취하는가 싶더니 상대의 어깨를 덥석 잡아 나꿔챈다.
그런데 잡힌 사내는 물구나무서듯 밑으로 재빠르게
빠져 상대의 뺨에다 발길을 날린다. 구경꾼들은
박장대소하며 그들의 묘기에 감탄을 자아냈다.
이번에는 봉술이다. 다른 두 사내가 나와서 막대기
한 개씩을 들고 마주선다. 중란세(中欄勢)를 취한 뒤
각각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는다.
두 사내는 짜임새 좋게 한 판씩 부딪치며 마당
가운데를 빙빙 돈다. 대당세(大當勢)와
대전세(大剪勢)며 대조세(大弔勢)와 도두세(倒頭勢)로
수없이 어울리며 막대기의 딱딱 부딪는 소리에 맞추어
멋지게 춤을 춘다.
섬요전세(閃腰剪勢)가 되어 한 사내가 상대의
허리를 막대기 끝으로 느닷없이 찍는다. 상대는 픽
자빠져서 죽은 시늉을 한다. 구경꾼들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넘어졌던 사내가 일어나 옷에 뭍은 먼지를
툭툭 턴 뒤 구경꾼들에게 절을 했다.
구경꾼 모두가 칭찬만 하는 게 아니었다.
"우라질 녀석들. 저깐 기술로 구경꾼을 모아서
엉터리 약을 팔아먹겠다니. 속는 것들이 더욱 바보지
뭐......"
그들의 무예를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족제비는 후다닥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살며시 잡아 당겼기 때문이었다.
족제비는 그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허리춤부터 뒤졌다.
없다. 누가 훔쳐갔는지는 모르지만 그토록 소중하게
간수하던 쌈지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족제비는 순간적으로 조금 전 소매를 끌어당기던
자의 멱살부터 쥐었다.
"내놔!"
족제비는 낮았지만 강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상대는 동자였다. 주막집 동자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사내아이놈이었다.
그런데 동자는 멱살을 세게 잡힌 채 조용히 웃기만
했다.
"어서 훔친 걸 내놔!"
족제비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금새라도 동자를
박살낼 듯한 눈길이었다.
"쉿!"
동자는 침착하게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족제비를
진정시킨 뒤 모지(母指)를 들어 간들간들 흔들었다.
필시 따라오라는 시늉이었다.
족제비는 긴장한 상태로 동자의 뒤를 바싹
뒤쫓았다. 이상한 아이놈이라고 생각했다. 쌈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과 초조 가운데서도 이 이상한
동자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시전거리를 벗어나오자 동자는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웬놈이냐. 웬놈이길래 남의 쌈지를 훔치고서는
나를 여기까지 불러내느냐?"
"나으리, 그렇게 화부터 내실 건 없으시구먼요.
조용히 제 말부터 들으시지요......"
"뭐, 화를 내지 말라구? 지금 사정이 화를 내지
않게 됐느냐? 그게 어떤 쌈지인데 겁없이 훔쳐내느냐.
좌우지간 우선 쌈지부터 이리 내라!"
"하하하......"
동자는 소리내어 웃었다.
"엇? 이 녀석 봐라. 소매치기 주제에 웃기까지?"
"웃지 않을 수가 있나요?"
"뭐라구?"
"제가 소매치기라니까 웃지 않을 수가 없구먼요."
"네놈이 소매치기가 아니라구?"
"아닌뎁쇼."
"이놈이 끝내 그냥......"
족제비는 아이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허리춤과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까지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없다.
"아하하하, 어르신네 이러지 마시라구요. 간지럽단
말입니다요. 찾으실려면 잃어버린 쌈지나 찾아내실
일이지 남의 불알까지 어쩌자구 주물러 터뜨리려
그러십니까요......"
족제비의 얼굴을 금새 창백해졌다. 동자에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쌈지가 없어졌다는 게
더욱 절망적이었다.
그는 엷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얘야, 제발 내 쌈지를 돌려 다오."
이제는 사뭇 애원조였다.
"찬찬히 제 얘길 들으시려면 우선 잡으신 이
주먹부터 풀어 주시지요."
"응, 그래 그래. 내 쌈지만 돌려주면......
그러니까 내 쌈지를 네가 갖고 있단 말이지? 훔치려면
돈이나 훔치지 하필이면 쌈지더냐?"
"그 쌈지가 그토록 소중한 건가요? 그러시다면 더
깊이 숨겨 놓으실 일이지......"
"그래, 얘야. 그 쌈지야말로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거란다."
동자는 잡혔던 멱살을 추스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그 쌈지는 제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요."
"뭐라구? 네놈이 훔티지 않았다구?"
"훔치지 않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요."
"그럼, 그게 누구 손에라도 들어갔다는 얘기냐?"
"나으리는 정말 성질도 급하십니다 그려. 그토록
사리분별이 없으셔서 어떻게 앞으로 큰 일을 ......"
"뭐야?"
"지가 나으리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을 땐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게 분명하지 ㅇ습니까요."
"아, 그래그래. 그랬었지."
"더구나 제가 나으리를 찾지 않았다면 그 쌈지는
영영......"
"그래, 그랬구나. 네가 시침 뚝 따고 도망쳐
버렸었다면 내 쌈지는 ......"
"그래서 이제 말씀드립니다요. 제가 그 쌈지를 훔친
이유를요."
"그 이유가 뭐냐. 이유보다 먼저 그 쌈지가 있는
곳을 네놈이 분명 알고는 있겠지?"
"그러믄요."
"그래서, 그게 어디 있ㄴ,냐?"
"제 스승님 손에요."
"스승님 손에 너의 스승이 누구냐?"
"그보다두 나으리가 족제비임에 틀림없겠죠?"
"아아니! 내 정체까지!"
"그토록 놀라와 하실 건 없습니다요. 아까 제
스승님께서 약장수들의 엉터리 무예를 구경하고
계시는 나으리를 가리키며, 저 분의 허리춤에 혹시
검정 가죽쌈지가 있을지 모르니 그걸 가져오라구
이르셨었거든요."
"이놈아, 그러구보니 네 스승이란 작자가 소매치기
두목인게 틀림없구나. 지금 어디 있느냐!"
동자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족제비와 대거리를
계속해나갔다.
"지금은 스승님을 만나 뵐 수가 없습니다요."
"뭐, 만날 수가 없다구?"
"그 대신 오늘밤 자정쯤에 산성문 밖에서 만나
뵙자는데요?"
"자정에 산성문 밖에서?"
"가만히 오시라던뎁쇼. 남의 눈길이 많으니까
...... 그럼 저는 물러갑니다요."
"가만 가만. 네 스승이 대체 누구냐?"
동자는 씨익 웃기만 했다.
"혹시...... 네놈이 아까 나의 별명을 알고
있었겠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스승님께서 가르쳐 줘서 알았을 뿐입니다요."
"그래...... 그 스승의 생김새가 어떠하시더냐?
아니지 ...... 이건 부질없는 물음이겠지.
혹시......, 아냐 아냐......, 물론 네 스승도 혼자
나오시겠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러실테지요. 그럼
다시......"
"얘야, 분명히 네 스승이 약속 장소에 나오시렷다?"
동자는 고개만 끄덕인 뒤 뒤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을
해 놓고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가 장꾼들 틈으로
숨어버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족제비는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터덕터덕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동자놈에게
어처구니없는 조롱을 받았기 때문에 입맛이 썼지만
그토록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 스승이라는 자는 필시
흑사마귀거나 하얀독수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쪽의 정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으며, 이
쪽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쌈지를 알고 있을 자가
없으리라. 더욱이 그런 확신이 서는 것은, 만일 그
쪽이 관군들이라면 현상붙은 사내를 쌈지만 빼앗고
곱게 그냥 놔둘 리가 없을 일이었다.
다만 자정에 만났을 때 그따위 심한 장난을 친 두
친구에게 마냥 욕설을 퍼부어 주면 그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만!"
족제비는 걷다 말고 문득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만에 하나 쌈지를 빼앗아간 자가 연등절 자정에
성문 밖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 두 친구가 아니라면?
족제비는 갑자기 긴장을 느꼈다.
그럴 가능성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가늠했던 두
친구 중의 하나였다면 굳이 쌈지를 뺏아가는 장난은
하지 않아도 좋았을 일이었다. 그런 일은
관군으로부터 추적받고 있는 자들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장난이었다.
어쨋거나 족제비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한사코 동자를 쫓아가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까의 그 동자를
다시 찾는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었다.
어차피 자정에 북한산성 성문 밖으로 나가서
소매치기의 스승을 만나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반드시 나온다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쌈지를 훔쳐가고 나서 아이를 시켜
집적거릴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족제비는 그렇게
믿으며 엷은 입술을 서너 번 빨았다. 그는 잠깐
후회했다. 어젯밤 무자리 하나를 사서 그토록 정력을
빼지만 않았어도 이토록 판단력이 흐리멍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터덕터덕 걸어서 주막으로 돌아왔을 때 언제
보았는지 주막의 동자가 쪼르르 달려나와 조심스런
목소리로 일러주는 것이었다.
"손님 손님, 어디 가셨다가 이제 오셔요. 아까 어떤
사람이 와서 나으리를 찾으시던데요?"
"그래, 뭐라고 전하더냐?"
족제비는 으례 누군가가 찾아왔을 거라는 투로
동자의 얘기를 받았다.
"뭐라구 전하다뇨?"
"날 찾아왔었다면 무슨 말이 있었을 게 아니냐?"
"어허, 손님두. 누가 찾아오면 모른다구 얘기하라
일러주고 가셔놓구선."
"아, 그랬었던가."
"그래서 그 비슷한 손님이 들긴 들었습니다만 다시
돌아올지 어떨지도 모르겠거니와, 손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분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면서 쫓아
보냈습죠."
그제서야 족제비는 찾아왔었다는 사람에 대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래, 무얼 어떻게 나에 대해서 물어보더냐?"
"이러저러한 사람이 혹시 들지 않았느냐구......"
"이러저러하다니. 좀 자세히 말해 봐라."
"등에 칼을 멘 젊은 사내를 찾던뎁쇼?"
"어떻게 생겼더냐?"
"덥수룩한 수엽에 나이는 마흔 댓 돼 보이고 아주
인상이 험상궂더구먼요."
"그으래......, 족제비를 찾지 않더냐?"
"아아뇨. 전연......"
"찾지 않았다구?"
"무엇 때문에 그토록 놀라십니까요?"
"그래, 다시 뭐라 하더냐?"
"댁이 뉘시냐구 했더니 알았다면서 다시
찾아오겠노라는 얘기만 한 뒤 떠났구먼요."
"혹시 하얀독수리나 흑사마귀라는 얘긴 않더냐?"
"그렇잖아두 그런 어르신네냐구 물으려다
그만두었습죠. 그런데 조금 이상스런 데가 있었죠."
"어떻게 말이냐?"
"혹시 주막 손님이 돌아오면 무슨 얘길 전할깝쇼
하구 물었더니, 째째하게 한 푼을 집어주면서 절대루
누가 왔더란 얘긴 말라던데요?"
"그래서?"
"그러마구 그랬습죠,뭐."
족제비는 다시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언가가 심상치가 않은 것이다. 하얀독수리나
흑사마귀는 이제 스무 너댓 살밖에 안된 젊은이인
터이다. 그런데 마흔 댓살이란다. 혹시 변장을 했었단
말인가.
"그래, 족제비를 찾지 않더란 말이지?"
"말씀드린대롭죠. 족제비란 족자두...... 손님,
오늘 밤에도 무자리 하나 올릴깝쇼? 젖통이
수박만큼씩한 게 오늘 들어왔는뎁쇼......"
다른 때라면 이 맹랑한 동자에게 꾸중이라도 한
마디 내뱉음직했지만 족제비는 참는 듯했다.
"오늘 저녁엔 쉬도록 하자. 자, 종일 내 심부름을
잘해 준 수고값이다. 받아라."
족제비는 세 푼을 동자에게 주었다. 그는 좋아서
끼득끼득 웃었다. 족제비는 별채 쪽으로 걸었다.
동자에게는 별다른 부탁을 더 하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족제비는 아무도 몰래 별당을 나와 밖으로 나갔다.
흥청거리던 시전거리도 이젠 조용하였다. 연등회를
즐기려던 사람들도 예년에 비해 흉흉한 인심과 흉년
탓인지 일찌감치 문을 닫고 들어앉은 듯이 보였다.
몇 발치 앞으로 산성의 돌무덤이 소나무 사이로
삐죽 나와 있었다. 등에 멘 칼자루를 한 번 어루만진
족제비는 산성 그림자 쪽으로 가만히 들어섰다.
엷은 달빛이 솔잎 사이에서 흔들거렸다.
족제비는 산성문 밖으로 얼른 벗어났다. 따스한
바람이 귓바퀴 옆으로 어루만지듯 지나갔다.
무너진 서터의 돌무더기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정이 되기를 가늠하며 기다릴 참이었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한참 동안을 기다려도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인기척이었는데?'
족제비는 수상스러워하며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아무 소리도, 얼씬거리는
그림자조차도 없었다.
소매치기의 스승은 한사코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하고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 몇 점이나 됐을까?'
사내는 숨어 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쪽의
움직임을 나타날 상대에게 알리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족제비가 나타나는 때를
신호로 삼았는지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부스럭거렸다.
다가오는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또한 지척의
인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족제비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상대가 몇 명인가를 세고 있었다. 기(氣)를
모으고 발자국 소리를 통해 다가오고 있는 그들의
무술이 어느 정도인가도 가늠해 보려고 애를 쌌다.
'일곱 명인걸? 그런데 저 놈들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족제비는 환도를 휙 소리나게 뽑았다. 그와
동시였다. 한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저 놈이다, 바로 저 놈이야. 저 놈을 잡아랏!"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횃불 한 개가 확
댕겨졌다. 불빛속으로 턱수염이 더부룩한 중년 사내의
험상궂은 얼굴이 나타났다.
족제비는 침착하기로 했다.
"뉘신지요? 혹시 사람을 잘못 분별한 게 아니시요?"
"꼼짝마라 이놈아. 내가 잘못 보았을 리가 있느냐.
네놈이 필시 나라에서 뒤쫓고 있는 족제비가
틀림없겠다? 네놈의 칼솜씨가 대단하다지만 오늘에사
주인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라, 이놈아."
족제지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음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상대가 누구이든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상하군. 자네들은 대체 누구길래 내 정체를
그토록 빨리 알아챘으며, 내가 여기로 온 건 또
어떻게 알았는가?"
"그거야 네놈의 주둥이로 알려준 게 아닌가."
"내가?"
"주막의 아이놈이 귀띔해 주었지. 족제비란 놈이
들었다구."
"그랬었군."
"네놈이 어리숙하게도 그런 아이놈을 믿고 족제빕네
하구 떠벌였던 게 이처럼 황천길을 재촉하게 된
걸세."
"그건 분명히 내 실수였군."
"더구나 네놈이 하얀독수리와 흑사마귀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도 아이놈을 통해서 알게 됐단 말이다.
그쯤이면 네놈이 칼솜씨에 비해서 얼마나 사려가 깊지
못하다는 걸 알겠지? 덕택에 성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두 놈을 베어 버렸지만......"
"뭐라구?"
족제비는 기겁을 했다. 흑사마귀나 하얀독수리의
무예가 어느만큼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정작 놈의 말대로 이들이 두 무사를
베었다면 예사 고수(高手)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으하하하, 몹시 놀라는군. 그러나 사실이란
말일세. 한 놈은 북쪽 샛터에서 베었고, 또 한 놈은
한양 근처에서 때려잡았단 말일세......"
덥석부리가 호기롭게 소리지르고 있었다.
족제비는 속으로 가늠을 해 보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하얀독수리와 흑사마귀가 살해될 턱이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저들의 말이 사실일 경우 자신도
저들의 칼날로부터 쉽사리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정작 두 친구는
살해되었을까? 쌈지를 훔쳐간 자는 또 누구인가......
모든 일들이 수수께끼의 연속이었지만, 족제비는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때 죽더라도 이들과 한바탕 겨루어
보고 죽는게 옳을 일이었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다만 수상한 점은 이들이 쌈지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어쩔 셈이냐?"
족제비는 그들을 쭈욱 둘러본 뒤 짐짓 여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덥석부리가 대꾸했다.
"어쩌긴 이놈아! 네놈도 내 칼날에 떨어질
이슬이지. 이제 족제비만 처치하면 사문도(四門徒) 중
세 놈을 베는 것이 되지."
"그럼, 아직 하나는 ......"
"그래. 네 늙은 사부영감이 병아리깐 네 놈 중
불여우만 잡으면 우리 나으리께선 편안히 쉴 수가
있게 돼."
"그럼, 네놈들은 누구의 수족이냐?"
"수족이란 따위의 말 함부로 쓰지 말아라. 우린
사직을 안정시키려는 의로운 무사일 뿐이다."
족제비는 더이상 따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적들은 어둠 속에서 가만가만 기어 나와 족제비를
둘러싸고는 빙빙 돌아가며 두목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족제비는 선제공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상대들의 몸놀림으로 보아 최고의 칼잡이들임엔
분명한 것 같지만, 기회를 보아 두어 놈쯤 처치하면
일단 도망갈 구멍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칼끝을 아래로 추욱 내려뜨렸다. 싸울 의사가
없어 보이는 족제비의 태도에 저들은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분명코 저들은 주의력을 느슨하게 푸는
듯했다.
족제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위 위로부터 휙
날아 내리며 환도를 바로 앞의 사내 얼굴을 향해
느닷없이 내질렀다.
"으아악!"
불시에 저격을 당한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쓰러졌다. 생각보다는 저들이 쌓은 벽은 엷어 보였다.
족제비는 다시 자세를 가누잡았다. 그런데 저들은
패거리 중 하나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고하게 감싸며
조여들었다.
그러더니 동시에 왁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족제비는 간신히 칼날을 피해 소나무
옆으로 기댔다.
'예사 놈들이 아니었구나. 아아, 허망하다......'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족제비는 탄식했다.
저들의 칼날 두 자루가 이번에는 족제비의 목과
허리를 향해 동시에 양쪽에서 찍어 들어왔다.
족제비는 반사적으로 다람쥐처럼 굴러서 앞으로
피했다. 머리 위로 지나간 칼날은 작은 소나무를
때리며 베어 넘겼다. 그 자의 검력(劍力)은 무서웠다.
헛칼질을 해 버린 저들은 다시 족제비를 뒤쫓아와
재빠르게 둘러쌌다.
'아, 여전히 피해나갈 길이 보이지를 않는구나!'
절망적이었다. 저들의 칼끝은 귀신의 피묻은
손갈퀴처럼 죽음의 바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파고들고 있었다.
이제 스물 네 살. 노(老) 사부께서 십여 년에 걸쳐
가르쳐 왔던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사부는 홀연히 어디론가 숨어 버리기 이전에 네
명의 제자들을 따로따로 불러서 한 가지씩의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족제비에게 내려진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곰가죽으로 만든 검은 쌈지를 간직하는 일이었다.
"......언젠가 이 쌈지의 임자가 나타나서 찾을
것이다. 너는 그때까지 목숨을 걸고 이것을 지켜야
한다. 너의 수중에 이같은 쌈지가 있다는 사실을 같은
문도들에게도 비밀로 하여라. 그리고 적들은 너의
생명을 노릴 것인즉 이 시각부터 이름 대신
족제비라는 별명을 사용하도록 해라. 그 동안에 해야
될 또다른 임무는 ......"
그런데 사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 귀중한
쌈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
있더라도 나중에 그 주인이 나타났을 경우에 내놓을
물건이 없으므로 면목을 세울 길이 없게 되었다.
어쨌건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후에 혹시 사문의 형제들이 자신의 시체를 뒤질지라도
이미 그 쌈지는 없어져 버린 후가 아닌가 말이다.
족제비는 맥이 탁 풀렸다. 이미 살아 있을 이유조차
잃어버린 듯했다.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고, 모든
과정이 불찰의 연속이었다.
족제비는 드디어 죽음을 각오한 일전을 벌이기로
했다. 스승이 가르쳐준 모든 무예를 다 사용해서
명예롭게 최후를 마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명이 길어 이 위기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팔도를 헤매서라도 소매치기 동자를 찾아
쌈지를 되찾으리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족제비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기합소리가
터졌다.
두 줄기의 달무리가 족제비의 몸 주위로 아름답게
그려졌다. 한 사람이 으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적을 하나 더 베었다는 기쁨은 잡깐이었다.
벌써 족제비의 심장 밑으로 간발의 틈을 노린
덥석부리의 칼끝이 닿고 있었다.
"아아......"
놀라운 일이었다.
응당 비명소리를 질러야 하는 족제비 대신에
덥석부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아아......
그의 긴 신음소리에 맞추어 무릎이 꺾어졌고, 그의
두 손아귀로부터 칼은 속절없이 풀려져 나왔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와주는 게 분명했다. 족제비는
갑자기 힘이 솟구쳤다. 그는 여세를 몰아 앞의 또 한
사내를 절묘한 자세로 베었다.
새롭게 나타난 적을 향하여 두 사내가 엉겨 붙고
있었다. 어둠 속이어서 족제비는 그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무예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내들은 그 쪽과 싸우면서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새로 나타난 괴한에 대해서 불평이라도 한
마디 했음직 했지만 불안하고 지친 상태인지 무조건
칼만 휘젓고 있었다.
다시 족제비가 한 명을, 정체불명의 구원자가 한
명을 베었다.
하늘엔 달이 떠올랐고 별무리가 맑게 퍼져 있었다.
성문 밖 숲 속에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지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족제비는 숨을 헐떡이며 피묻은 칼은 들어 죽어
자빠진 자의 옷에다 훔쳤다.
천천히 칼을 납검하며 그제서야 저만치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달빛에 흰 이빨을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자네였군. 하얀독수리......"
"지나치다 보니 자네가 한바탕 붙고 있더군."
하얀독수리가 되받았다.
"어떻게 자네가......?"
"왜? 우린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왜
있었잖은가."
"자넨 분명코 귀신이 아니지?"
"귀신이라니? 오랜만에 칼춤을 추고 나더니 자네
머리가 좀 이상해진거 아닌가?"
"분명코 자넨 죽었다던데?"
"누가 그러던가?"
"이 자들이. 하얀독수리와 흑사마귀까지......"
"하하하하......"
하얀독수리의 겁없는 웃음소리가 솔바람을 타고
흘렀다.
"웃긴. 난 정말인 줄 알았다니까."
"나도 그런 소문은 들었네. 나하구 흑사마귀는
죽었다구. 잘 됐지 뭔가? 이제 귀신의 몸으로
활보하고 돌아다닐 수가 있게 됐으니까. 아마 어떤
놈들이 우리들 별명을 사칭해서 거덜거리다가 맞아
죽은 게 분명해. 그건 그렇고......, 흑사마귀는 왜
보이지를 않지?"
족제비는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아침부터 일어났던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다. 더구나
검은 쌈지의 행방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네! 자네는 어제 저녁부터 내
뒤꽁무니를 숨어서 따라다니고 있었지?"
"아니, 내가 왜?"
"사실대로 말해주게. 너무나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그러네. 내가 이 자들에게 정체가 탄로난
것도 수상하단 말이야."
"누구에겐가 자신의 신분을 무심코 내뱉은 것일
테지. 이 곳에도 관군의 끄나풀들이 쫘악 깔려
있거든."
"그럼 자네가 아니었나?"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군."
족제비는 그제서야 실색하는 듯했고, 하얀독수리는
짐짓 뜨악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자네 혹시......, 열 두서너 살 되는 동자를
거느리지 않았나?"
"동자?"
"그 애를 시켜 내 검정 가죽쌈지를 훔치게 하구."
"쌈지란 또 뭔가? 이건 금시초문인걸? 이봐,
족제비. 자네 지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족제비는 하얀독수리의 눈빛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열심히 어둠 속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가 아닌가?"
족제비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자네의 얘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제."
"아아, 나는......"
드디어 족제비는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족제비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부께서
도장을 해체하면서 각자에게 한 가지씩의 중요한
임무를 맡겼는데, 족제비는 쌈지를 책임 맡았었다.
그런데 그것을 허망하게 빼앗긴 것이다.
사부는 네 명의 제자들 중에서 특히 족제비를 두고
경망스런 녀석이라며 자주 꾸중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도 중대한 임무를 맡긴 터였다.
부족한 제자였지만 중요한 사명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런
불상사를 감안하면서 일을 맡긴 것일까?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족제비는 동문에게
도움을 청할 수빡에 없었다. 몇 가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라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얀독수리에게 그간에 있었던 사정을
띄엄띄엄 설명했다. 무자리를 끼고 잤다는 얘기만 쏙
빼고서.
그러나 하얀독수리도 별 수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장난을 벌였겠나. 듣고
보니 이거 예삿일이 아니로군 그래. 사부님의 실망도
보통이 아닐걸세. 그건 그렇고......, 이렇게 한탄만
하고 앉아 있을 일이 아니네. 한사코 찾아낼 방법을
생각해야지."
하얀독수리는 족제비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동자놈을 쫓아가지 않았던 이유가 뭔가?"
"나는 자네 아니면 흑사마귀의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친구 보게나!"
"모두가 나의 불찰일세."
"가만있자. 근데 흑사마귀는 왜 오지 않는 거지?"
"글쎄? 별무리를 보니 벌써 인시(寅時)는 실하게 된
거 같은데?"
"분명코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형제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도대체가
이제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정이 수수께끼 투성이야.
자네가 밀고된 사정도 예사 심상치가 않아. 일단
자리를 옮기세."
둘은 사방을 살핀 뒤 솔밭 속으로 들어갔다. 성내로
들어간다는 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았다.
"죽은 저 녀석들은 그대로 둘까?"
"치울 시간도 없잖은가. 괴적들이 나타나지 않는걸
보아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건 확실해. 그렇지만 어서
이 곳을 뜨는 게 좋겠어. 자네 숙소의 동자놈도
수상쩍고. 필시 관군의 끄나풀인게 틀림없어."
그 때 어둠 속에서 칼바람이 일고 있는 장면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어쨌건 둘은 멋모르고 서둘러서 계곡을 돌아
강도(江島) 방향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산성으로부터 얼마큼 거리가 멀어졌을 때 족제비는
여전히 풀죽은 목소리로 하얀독수리에게 물었다.
그것은 전혀 엉뚱한 질문이었다.
"자네는 사부님으로부터 어떤 임무를 부여받았나?"
족제비의 말에 하얀독수리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사부님께선 부여된 사명을
서로 모르게 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셨지 않은가......"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사정이 있어서 그러네."
"이해 안되는 사정이란 게 뭔가?"
"나중에 누군가가 와서 그 쌈지를 인수해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
"그으래?"
"그게 누구겠느냐 말야. 불여우는 우리 셋보다 일찍
도장을 떠났으니 그렇다 치구, 이 곳으로 오겠다고
약속한 흑사마귀는 왜 소식이 없느냐 말야."
"그러니까 흑사마귀가 그 쌈지의 인수자일 거라는
얘긴가?"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일찍 떠난 불여우라고 해서 그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다곤 말할 수가 없지. 전연 엉뚱한 놈일 수도
있겠고."
"전연 모르는 녀석?"
"그 쌈지를 가졌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자넨 입이 가벼운 친구니까."
"아픈 곳을 자꾸 건드리지 말게나."
"그래, 이제 앞으로 어쩔 셈인가?"
"일단 흑사마귀부터 찾을 테야."
"북한강 물 속에서 오리알 찾기로군. 그런데 자넨
그 쌈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를 알고 있었나?"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무슨 보물지도
같았어. 동굴과 소나무와 갈매기며...... 너무
신기해서 자주 들여다보다가 머리 속에 화안히 그려
두게 되었지만 ......"
"보물지도라......"
"사부님께선 나중에 쌈지의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잘 간수하라 그러셨지만, 도대체가 그 임자조차도
오리무중이란 말일세. 정말 그 쌈지를 훔쳐간 자가
바로 쌈지의 주인일 수도 있을까?"
"그건 희망에 지나지 않아. 쌈지의 주인이 설마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고 훔쳐갈 리가 있겠냐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어쨌건 그 지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사부님은 그것을 어디에서
입수했으며 왜 나한테 맡겼는지,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데다 끝내는 훔쳐간 녀석도
깜깜하고, 그 놈은 또 지도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훔쳐가고......"
"가만있자. 결국은 지도의 비밀을 알고 있는 놈이
훔친 게 아니겠나? 그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그렇겠군. 그놈이 누굴까?
혹시......?"
족제비의 반짝하는 표정에 하얀독수리는 관심을
보였다.
"혹시라면?"
"사부님이 혹시......"
"예끼, 이 사람!"
"아니라면 내가 검은 가죽쌈지의 밀명을 받을 때
누가 사부님의 거실 바깥에서 엿들은 게 틀림없어."
"엿들었다면? 결국 제자인 우리 셋 중에서......"
"자네가 아니라면 흑사마귀와 불여우 중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뾰족한 결론은 끝내 얻을
수가 없었다.
"자,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나는 다른 임무를
수행해야 되니까."
하얀독수리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족제비는 느닷없이 망연해졌다.
"그래야겠지...... 그래 어디루 가게 되나? 아니지,
그건 물어서 안될 거구......"
"그럼, 자네는 이제부터 무얼 할 텐가?"
하얀독수리는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
"쌈지를 찾아야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뭐."
"어떤 식으로 찾을 생각인가?"
"우선 그 어린 도둑놈을 찾아야겠어. 아이놈의
스승이라는 녀석도 잡기만 해 봐라!"
"성질만 가지고 찾아지는 건 아니라구...... 머리를
쓰게, 머리를."
"머리를?"
"지혜를 짜내란 말일세."
"지혜를...... 글쎄, 머리고 발바닥이고 먼저
소매치기 아이놈을 붙들고 나서의 얘기가 아닌가."
"물론이지. 그렇지만 만나는 방법이 문제되는 게
아닌가?"
"그건 그래. 어디, 자네에게 무슨 묘안이 없겠나?"
"묘안이라기보다 내 생각으론...... 물론 내가 이런
충고를 함으로써 도움보다 오히려 고생을 시키게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뭐든지 말해 주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지 않던가."
"그나마 주저하는 건 사부님이 자네의 밀명을
도제들에게도 누설하지 말라는 엄명이
계셨기에......"
"여보게! 자네마저 정말 이러긴가. 나의 어려움을
모두 듣고 난 처지에......"
"하하하...... 너무 고까와하진 말게. 어련히
얘기하지 않겠나. 자네의 난감한 처지를 보고 웃은
점도 사과하겠네. 다만......"
문득 강 저쪽에서 거룻배 한 척이 갈대숲으로부터
나타났다.
하얀독수리는 큰 소리로 불렀다.
"여보시요, 사공. 건너마을까지 좀 태워다
주시구려."
이 쪽의 요청이 전달되었는지 사공은 부지런히 노를
저어왔다.
"다만 뭔가?"
족제비는 초조한 듯 물었다.
"아참, 그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 글쎄,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상상이고 망상이고 뭐든 괜찮네."
"그렇담 말하지. 참고는 될지 모르니까. 첫째,
자네는 나까지도 의심하는 마음이 필요하네."
"자네에게 의심을?"
"꼭 이 하얀독수리에게 혐의를 두라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의심해야 된다는 뜻이지. 불경스런 말이지만
심지어 사부님까지도."
"무슨 뜻인지 알겠네.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는
의미겠지. 그리구?"
"그리고 두번째는 더욱 가혹한 얘기지만, 자네가 그
검정 가죽쌈지의 비밀을 이미 알고서 슬쩍
먹어치워놓고 그런 연극을 꾸민 것이 아니기를
바라네."
"뭐라구?"
"화내지 말게. 자네를 격려하고 충동질하는 뜻으로
말하는 거니까. 셋째는 강이나 바다쪽으로 가 보는 게
좋을 듯하네."
"그건 왜?"
"갈매기가 있었다면 바다일 가능성이 높고,
섬이라면 더욱 근사하겠지. 쌈지를 훔친 자는 필시
그것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일 터이고, 그렇다면 그
쪽으로 달려갔을 게 틀림없지 않겠나."
"바다와 갈매기와 섬......"
족제비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해 주게나."
족제비는 다급한 목소리로 하얀독수리의 말을
받았다.
"혹시 쌈지를 훔친 자를 만나게 되면 자넨 어쩔
셈인가?"
"어쩌긴! 우선 요절부터 낼......"
"그러니까 안된다는 게야. 그 자에게 쌈지가
자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내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건 어째서?"
"그 쌈지의 가치를 그 자를 통해 알 수가 있거든."
"그럴듯하군!"
"무조건 쌈지를 찾겠노라 대들었다간 되려 자네
목숨만 위험해 질거야. 어쨌건 그 자가 자네를 살려둔
건 자네가 필요해서 그랬던 거니까!"
"흥!"
"동자를 시켜 집적거린 것도 자네더러 따라오라는
암시겠지. 놈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건
틀림없어."
"그렇다면 지난 밤 만나자는 약속을 해 놓고도
나타나지 않았던 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치기 위해 시간을 벌려던
계산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되네. 정작은 알 수가
없지만, 혹시 놈이 근처에 왔다가 우연히 싸움판을
목격하고는 슬그머니 사라졌는지......"
"도대체 쌈지 속의 지도가 어떤 가치를 지닌 걸까?"
"알 게 뭐야. 알 필요도 실상 없구. 무엇보다
쌈지는 사부님께서 자네더러 잘 보관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라 하신 것이니 무조건 자넨 그걸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원, 제에길헐! 어떤 놈이 그 망할 놈의 쌈지
주인인지 알 수가 있나."
거룻배가 뭍 가까이로 다가오자 하얀독수리는 빠른
말로 얘기했다.
"그리구 앞으론 어딜 가나 별명 따위를 사용해선
안될 걸세. 왜냐하면 쫓기는 몸이니까. 더구나 자네가
지난 밤에도 살인한 것을 안 이상...... 그런데
우리가 벤 그 관군이란 자들도 실상은 그 쌈지의
비밀을 알고 뺏으려 들었던 게 아닐까?"
"설마!"
"다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거지 뭐."
"여러 충고 고마왔네."
"무얼...... 그럼 몸조심하게. 다시 만날 때까지
침착하게 그리구 용기를 잃지 말고 사부님이 내리신
분부를 잘 지키도록 하게."
"그래.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거룻배가 와 닿았다. 하얀독수리는 배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노인은 가늘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잘 가게."
하얀독수리가 손을 흔들었다.
"자네도 잘 가게. 몸조심허구."
족제비도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노인은 그들의
이상한 이별장면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님, 꼭두새벽부터 강마을엔 무슨 일로 가시지요?
처음 뵙는 분인 거 같은뎁쇼?"
"예에, 그렇게 됐군요. 아는 분이 여기 계신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하얀독수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노인의 덧없는
질문을 막았다.
"차암 이상도 하지. 며칠 새에 낯선 손님들이 벌써
넷씩이나 지나갔걸랑. 꼭두새벽에만."
노인의 끈질긴 중얼거림에도 하얀독수리는 대꾸를
않았다.
족제비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는지 반쯤 손을 들었다가 내리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그런 족제비를 외면해 버렸다.
하얀독수리와 헤어진 족제비는 혼자서 길을 걸었다.
방향을 정해 놓고 걷는 것이 아니었다. 초조함과
걱정과 외로움이 범벅된 채 하염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기도 했다. 어쩌자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강도질을 당했는가 하고 자책해
보았지만, 역시 결론은 자신의 못난 모습뿐이었다.
다시 여자 생각이 났다. 걱정이 내리누를 때는
여자의 품 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욕망만큼은 족제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자리를 끼고 잠으로써 후회할
일도 생겼지만, 막상 쌈지를 잃어버리고 나서는 그런
후회도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무조건 의심을 해야 된다구?'
족제비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얀독수리의 충고를
되새김질 하던 중이었다. 유유히 자신의 임무를 가슴
속 깊이 감추어 둔 채 떠나가던 그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약간의 질투심도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오늘
밤에도 이쁜 무자리나 하나 사서 푹 쉰 뒤 내일 일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제서야 그의 발걸음은 막연하나마 방향이
정해졌다. 바닷가쪽으로 돌아 한양 땅으로 슬그머니
들어설 생각이었다.
"바닷가?"
문득 바닷가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섬과 갈매기도 떠올랐다. 소나무와 동굴마저
나타나며 그가 잃어버렸던 쌈지 속의 지도에 대한
기억이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해 쪽으로 들어가는 길도 나쁘진
않겠지!"
어쩐지 바닷가로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기만
했다.
"한양으로 간대서 뾰족하게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바도 아니구. 그렇다면 서해안으로 가 보는 것도
좋겠지."
족제비는 가던 길을 되돌아 아까의 그 강 쪽에
도달했다. 강을 건너야 서해로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독수리를 건네주던 거룻배가 그새 다시 손님을
싣고 되건너 왔는지 이 쪽 뭍에 닿아 있었다.
"노인장, 강 좀 건넙시다. 삯은 푸짐히 드릴
테니까."
"그러시우."
노인은 예의 그 파리한 웃음을 지으며 족제비를
맞았다.
"앞에 가신 손님을 뒤따라 가시려구요?"
노인은 하릴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족제비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 밝은
빛살이 지나간 것은.
'하얀독수리도 이 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제
말처럼 그 친구를 의심해 본다면!'
족제비의 가슴은 무작정 뛰었다.
"예에. 그 친구한테 꼭 전해야 될 말을 그만 깜빡
잊었기 때문에...... 값은 실허게 드릴 테니까 빨리
저어 갑시다요."
노인은 대꾸 대신 입속말을 우물거리며 웃었다.
족제비가 뱃전으로 건너뛰어 마악 자리를 잡으려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한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삿갓을 깊이 눌러 썼지만 스님은
아닌 듯했다. 필시 배를 좀 태워 달라는 소리인 것
같았다.
"어떡할깝쇼?"
노인이 물었다. 족제비는 그 손님이 누구이든 함께
배를 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대로 하십쇼."
사내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숨을 헐떡거리며 배
위로 뛰어 올랐다.
"미안합니다......"
사내는 점잖게 말한 뒤 선수 쪽 모서리로 가서
족제비를 외면하고 앉았다. 삿갓 밑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그의 나이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목소리로 보아 스무 살쯤 됐을까 말까한
젊은이인 듯했다.
다소 맥이 빠져 있던 족제비는 오만 잡생각 때문에
처음에는 거룻배로 서울러 올라탄 삿갓에 대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삿갓이
뱃사공 노인과 몇 마디의 대거리를 주고받는 걸
들으면서 비로소 상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손님두 강도(江島) 쪽으로 가시우?"
사공이 노를 저으며 물었다.
"예에."
삿갓은 강심을 굽어보는 자세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허어, 별일이여. 요즘 젊은 양반들은 한양 아니면
강도로 간다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뭘."
삿갓은 가볍게 웃었다.
"글쎄, 난 그 이유를 알 수 없단 말여."
"뭘 말씀이신지요?"
"한양으로 몰려가는 이유야 먹고 살 길을 찾아
떠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강도 쪽으로 가는
이유는 도시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야 뻔하지요."
"그럼 젊은 양반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이요?"
"어떤 소문 때문입지요."
"소문?"
족제비는 번쩍 정신이 들며 귀를 곤두세웠다.
"예에, 소문요. 그런데 우리같은 사람이 한양으로
몰려가는 사정은 조금 전 노인장께서 막연히 거기로
몰려간다고들 한 것과는 내용이 많이 다르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인가요?"
"나는 장사치가 아니거든요."
"그럼 칼잡이겠네."
"맞습니다. 무예 가지구서 출세를 하려면 어차피
한양땅으로 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젊은이는 지금 강도 쪽으로 가는가 본데?"
"예에."
"거기는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요?"
"바로 그 소문 때문입니다만...... 뭐, 강도
건너편에 있는 갈매기섬에 수십만 냥어치의 황금이
묻혀 있다더군요."
"갈매기!"
그렇게 소리칠 뻔했던 것은 족제비였다. 이런
얘기를 듣게 된 것은 뜻밖의 횡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 속에 살아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탓도
있겠지만, 무슨 사정에서인지 살인을 저지르기 전부터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을 귀담아 들을
기회가 없던 탓도 있었다.
"아, 그 때문에 젊은이들이 그 쪽으로 몰려들
가누먼. 한양땅으로 가서 무술로 출세를 하든가,
갈매기섬으로 가서 황금을 찾아내던가......"
"그렇지만 아직 아무도 갈매기섬에서 살아 되돌아
나온 자는 없다더군요."
"오오, 그래요...... 그건 왜?"
"그야 모르지요. 그건 가 봐야 알겠지요. 살아나온
자가 없었으니......"
"젊은 손님은 그런 소문을 어디서 엿들었는가요?"
사공의 질문에 삿갓은 대꾸 대신 선미 쪽의
족제비한테 신경이 쓰이는지 그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손님도......"
사공은 족제비 역시 당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듯한
눈짓을 해보였다.
족제비를 유심히 쏘아보던 삿갓은 금새 긴장을
풀고는 다시 사공과 대거리를 계속했다.
"보물섬 얘기가 흘러나온 건 아주 오래 전부터지요.
그러나 요즘 들어 그 얘기가 부쩍 흥미를 일게 한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지요."
"내가 그 사정을 알면 안되겠소? 나도 노젓는 일에
진력이 났구만."
"노인장도 보물섬으로 가시게요?"
"농담이겠네만......"
둘은 잠시 쿡쿡 웃었다.
삿갓은 다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말하는
품으로 보아 성격이 아주 담백스러워 보였다.
배는 강 중간쯤을 건너고 있었다.
"고려에 왔었던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를
기억하시는지요?"
그야 기억하다마다요. 나라의 변란이 시작된 큰
원인인데요.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다 압록강변에서
괴한에게 맞아 죽었지 아마."
"그때 고려의 금덩이를 빼앗듯이 쓸어갔던 얘기도
기억하시겠네요?"
"그래 그래. 그 때문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 금덩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구."
"그 금덩이가 갈매기섬에 묻혔다는 겁니다."
"아아, 그랬었구나!"
"어떤 경로로 압록강변에서 서해의 외딴섬
구도(驅島)의 동굴속으로까지 흘러갔는지 그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어쨋건 그 때문에 지금까지
황금은 오리무중인 채 안전하게 보관되게 된
꼴이지만요. 그런데 근래에사 그 황금이 묻힌 섬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 거지요."
"어떤 이유로 갈매기섬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을까요?"
"보물지도 때문입지요."
"글쎄, 그 보물지도라는 게 뭔데요?"
"바로 그 황금이 묻힌 장소를 상세히 그린 지도가
요즘사 세상에 나타났다는 얘깁니다요."
족제비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쌈지 속의 지도는 바로 그
보물섬의 지도일 가능성이 엄청나게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저고여가 황금을 어딘가로
빼돌렸다는 소문은 전혀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그래."
"그런 셈이지요. 긴가민가 했었지만 이젠 확실히
밝혀진 셈이지요. 그러나 지도를 찾기 전에는 묻은
장소를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그럴 테지. 묻은 자가 어련히 깊숙히 묻었을라구.
근데 그 지도는 누가 가지고 있다던가요?"
"개경의 적두노사(赤頭老師)께서 보관하고
계셨다더군요."
'아, 그렇다면 틀림이 없구나' 하고 족제비는
탄식했다. 삿갓의 입에서 족제비의 사부 이름이
들먹여지고 있는 것이다.
"무예로써는 그 분을 당할 자가 없지요. 때문에
방원 왕자께서 그분을 회유한다는 소문도 있더라만."
"그러나 붉은 머리의 노인장께서는 새 사직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시고 홀연히 사라지셨거든요."
"그렇다면 갈매기섬을 찾아내어도 보물을 찾는 일은
말짱 헛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그렇지가 않게 되었지요. 보물지도는 다시
다른 자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으니까요. 결국
보물섬의 정체가 드러난 탓도 적두노사께서 다른 자의
손에 지도를 넘겼기 때문이지요."
배가 뭍에 닿고 있었다.
족제비는 저 삿갓을 쓴 젊은이가 대체 누구이기에
저토록 보물섬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가에도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또 삿갓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도 의심이 갔다. 더구나 그게 사실이라면
사부께서는 왜 쌈지의 비밀을 자신한테만 감춘 채
세상에다 소문을 퍼뜨렸을까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하산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건들이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반드시 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뒤따라붙는
게 옳을 듯했다.
거룻배에서 내린 삿갓 쓴 사내는 족제비 쪽은 본
척도 않고 쓱쓱 걸어서 갈대숲을 빠져나갔다.
족제비는 슬며시 그를 따라붙었다. 갈대숲을
빠져나오자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보시오, 앞에 가시는 양반."
족제비가 큰 목소리로 불렀지만 삿갓은 대꾸가
없었다. 귀도 먹지 않았을 터인데 대답을 거부하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고 족제비는 잠깐 당황했다.
"여보시오. 가는 방향이 비슷한 모양인데
길동무라도 합시다."
그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족제비는 그제서야
약이 바짝 올랐다.
'건방진 자식. 어린 지까짓 게 뭔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삿갓의 뒤로 바짝 붙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삿갓이 발걸음을 멈추는가 싶어니
휙 바람소리를 내며 팽이처럼 돌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엇! 왜 이러셔?"
족제비는 간신히 몸을 피한 뒤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빙긋 웃고 있었다. 그의 웃는 모습에 족제비는
더욱 약이 올랐다.
"이봐! 칼솜씨에 자신이 없으면 아예 빼지를 않는
법이야!"
"자신이 없다구?"
삿갓은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되받았다.
"그래, 이 비겁한 자식아. 네가 진정한 무사라면
통성명이라도 하고 나서 당당하게 대결하는 법이야.
이게 무슨 짓인가?"
"사과하지요."
금새 사과하는 삿갓에 대해 족제비는 다시
당황했다.
"사과? 사람을 죽일 듯이 덤벼들어 놓고선 그따위
한 마디로 용서를 빌면 일이 다 되는 줄 알어?"
"그토록 화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뭐야? 화낼 일이 아니라구?"
"난 형씨가 환도를 등에 지고 있던 걸 진작
보았소."
"그래서?"
삿갓은 단검을 품 속으로 넣으며 다시 웃었다.
"그래서 필시 솜씨는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었지요."
"그래서?"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 본 거요."
"그랬더니?"
"생각보단 솜씨가 보잘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지요."
"뭐야?"
"당신의 앞섶을 살펴 보시요."
족제비는 삿갓이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가슴께가 예리한 칼날로 베어져 있었다.
"엇?"
"내가 단검을 좀 더 깊이 좀 더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애초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족제비는 입이 따악 벌어졌다. 스승을 떠나온 이후
많은 사건을 겪었지만 이런 솜씨는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었던가,
정작 우물 한 개구리였던가!
족제비는 깊은 자책감에 빠져 고개를 떨구었다.
"난 형씨가 좋아졌소.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그 태도 말이오. 가는 방향이 비슷하다니
함께 걸으며 얘기합시다."
삿갓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족제비는 그런 삿갓을 멍청한 시선으로 보고 섰다가
미적거리며 함께 걸었다. 삿갓에 대한 신뢰도
그렇거니와 실상은 그가 무작정 두려웠다. 더구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떠시요? 길동무라도 하겠다던 마음이 변했소?"
삿갓이 돌아보며 말했다.
"아, 아니오. 함께 갑시다."
족제비는 그제서야 조심조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씨도 갈매기섬으로 가는 길이요?"
삿갓이 물었다.
"그래볼까 하오."
"까마귀떼들이 많이 몰려들겠군."
"예에?"
"아, 아니오. 그보다 이젠 우리 길동무가 됐으니
형씨 제안대로 통성명이라도 합시다."
"그러지요......"
족제비는 잠깐 머뭇거렸다. 사부께서는 본명을
감추라고 엄명하시며 별명을 대신 지어 주셨다.
그나마 별명이 소문나자 도제인 하얀독수리는 그
별명까지도 감추라는 충고를 주었었다. 그렇다면
무어라고 이름을 대 주어야 하나 하고 고민에 빠졌다.
족제비는 생각 끝에 아무 이름이나 대어 버리자고
결정했다.
"김도(金島)라구 부릅니다."
"황금의 섬이라는 뜻이군요. 좋은 이름이구려.
행운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김해간(金海幹)이라구
부르죠. 바다의 줄기라는 뜻으로......"
"옛?"
"왜 그리 놀라시오?"
"아, 아닙니다. 귀에 익은 성함이기에......"
족제비는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어떻게
상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먹여진다는 말인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를 당할수록 침착하라던
하얀독수리의 권고가 생각났다.
'머리를 써야 한다. 지혜롭게 처신해야겠다.
그리하여 상대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고, 잃어버린
쌈지를 되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족제비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삿갓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한바탕 웃어젖혔다.
"아하하하...... 이거 본의 아니게 김협사에게 다시
무례를 저질렀구려. 실상 그건 제 이름이 아니니까요.
아시다시피 김해간이란 놈은 족제비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족제비......"
"그러니까 협사께서 족제비의 이름을 듣고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놈의 칼솜씨는 그
악명만큼이나 유명하다거든요."
"그렇다더군요."
"내가 왜 그 놈의 이름을 대용하는 줄 아십니까? 다
이유가 있어서 당분간만...... 가만있자. 제 이름부터
말씀드려야겠지. 제 본래 이름은 박진(朴辰)이라구
쓰죠. 별 진......"
"박진......"
"별명은 삿갓으로 통하지만 역시 당분간만 족제비를
대용해야 합니다."
"그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 자를 잡아야 하거든요. 제 이름을 도용하고
다닌다는 걸 알면 불같이 화가 나서 나타날 게
아닙니까?"
"하필 족제비를 도용한 이유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 자가 보물지도를 가졌거든요. 이 쪽으로 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직 얼굴은 알 수 없지만
강도(江島)까지만 가면 틀림없이 만날 수가 있을
테지요."
족제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돌한 삿갓은
자신의 별명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 쪽이
바로 그 족제비 김해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것일까.
그의 칼솜씨 역시 두려웠다. 그가 사용하던 단검
하나만 보아도 예사로운 무예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박협사께선 족제비를 만나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그를 베고 지도를 뺏어야지요."
"그러구선?"
"족제비를 베는 건 두 가지 이득이 있지요. 하나는
보물섬 지도를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벰으로써
출세길이 열리게 되는 거지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가 족제비인 걸 알게
되죠?"
"그래서 저는 칼을 멘 자에게 무조건 시험을 해
봅니다. 아까 제가 김협사에게 해 본 것처럼. 상대의
무예실력으로 그가 족제비인가 아닌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죠."
"제가 족제비가 아니라는 점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삿갓은 대꾸 대신 싱긋 웃었다. 둘은 잠시 입을
다문 채 걷기만 했다. 역시 궁금증이 발동한 쪽은
족제비였다.
"박협사의 무예는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한테서 배운 겁니까?"
"저는 스승이 따로 없습니다. 소년시절부터
송림산으로 입산해서 혼자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솜씨를 익혔죠. 뭐 대단한 무예랄 건 없지만 나한테
당하고 도망친 놈들이 그러더군요. 저렇게 괴상한
단검 솜씨는 첨 본다면서...... 김협사는 어떠시오.
어디 스승이라도 계시는지요?"
족제비는 또다시 거짓말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술을 배우면서 거짓말과 속임수를 배운
적은 없건만, 이 무서운 상대로부터 목숨을 보전키
위해서는 꾸밈말도 불가피했다.
"아 예. 워낙 미미한 스승이라서...... 말씀 드려도
알 턱이 없지요. 조하검사시라구, 장검을 잘 쓰셨죠.
지금은 돌아가시고 계시진 않지만......"
삿갓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는 땅을 보며
걸었다.
족제비는 그를 베어버릴 궁리를 해 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틈이 엿보이지 않았다. 이미 기세가 꺾인
족제비로소는 상대의 헛점이 보일 리가 없었다.
삿갓을 어디까지 따라붙을 것인가도 생각해 보았다.
그를 따라붙음으로써 귀중한 쌈지를 되찾게 되는
계기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덧없이 생명을 잃게 되는
위험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만사가
힘들다고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무사로서 오직 칼 하나에다 인생을 걸고 모험을
계속해 나갈 것인가.
일찍이 사부께서 말씀하셨다.
"......무술은 확실히 이기는 것을 가르친다.
인간은 모든 싸움에서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인간의 일생을 통한 투쟁 가운데서 가장 중대하고,
가장 안전을 강탈당한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우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족제비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이기에, 또
삿갓이 알고 있는 비밀의 근원을 캐기 위해서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따라 붙기로 작정했다. 가슴
속으로 소용돌이치는 두려움의 뿌리를 뽑는 연습을
남몰래 계속하며.....
2. 새벽별
어느새 한양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새
역사는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혹은 꿈틀거리며,
그런 와중에서 음모의 씨앗이 뿌려진다. 을해(乙亥)년
3월.
다섯째 왕자 방원(芳遠)은 사냥길에서 갓 돌아왔다.
측근인 듯한 자가 가까이 다가와서 아뢰었다.
"대장군 박포(朴苞)장군께서 조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방원은 말고삐를 하인에게 물려준 뒤 측근의 전달을
들은 둥 마는 둥 안채로 들어가려 했다. 측근은 그가
제대로 듣지 못했는가 싶어 다시 아뢰었다.
"사랑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은 몹시 바쁘다고 전해라."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걸로 보아 방원은 필시 박포를
꺼리는게 분명했다.
"아니올시다, 전하. 대단히 초미한......"
"대체 무슨 일이라더냐?"
방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긴급히 은밀하게 말씀드리겠다는
전갈이옵니다만......"
방원은 주립(朱笠)과 화살통을 벗었다.
"그냥 돌아가시게 해라."
잠깐 망연히 섰던 측근은 급하게 허리를 굽혔다.
"분부대로 전하겠나이다."
측근이 종종걸음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가만 있거라!"
"예에, 전하."
"혼자 오셨더냐?"
"아니올시다. 젊은 무사 하나와......"
"아, 그랬었지. 대장군과 함께 술을 들겠다. 별당
후원 정자에다 자리를 만들어라."
"예에. 내당에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젊은 무사라는 자에게는 따로 자리를 잡아
주고 저녁을 잘 대접하도록 해라."
측근이 물러가자 방원의 얼굴에는 금새 지친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근래 들어 무엇엔가 몹시
노심초사하는 기색이었다. 작은 일에도 바싹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대왕의 계자(季子) 방석(芳碩)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방원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졌다.
그는 만사에 심사가 뒤틀렸다. 그럴 때마다
사냥터를 다녀오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날도 그는
하릴없이 사냥터를 다녀온 것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둠을 가늠해서 찾아온 대장군 박포! 그는
대왕의 총애를 받아 개국공신으로 대장군에 오른
자로서, 권력의 향배를 따라 잘 움직이는 그런
인물인데, 언제부터인지 방원의 곁으로 슬금슬금
접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왕자 전하, 측근에는 믿을 만하고 날쌘 아이들을
반드시 거느리고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그가 충언처럼 귀띔해 준 말이었다.
"그런 애들이야 장군이 아니면 누가 구하겠소.
장군만 믿고 있겠소. 그런 아이를 꼭 찾아 주시오."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곧 잊어버렸었다.
개국공신과 밀착해 있는 점도 그렇거니와,
경망스럽고 난폭하며 협량한 데다가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그의 성품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단성에다 지혜까지 갖춘 방원의 머리는
대장군 박포의 그것보다 훨씬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달빛이 환히 비치는 후원 정자에는 방원과 대장군
박포 둘만이 앉아 있었다. 수복의 동남쪽을 튼 곳에는
작은 연못이 보였다. 때때로 잉어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곤 했다.
"여기가 내 집에서는 가장 지밀한 데지요. 별달리
뜻이 있는 얘기가 아니라, 술로써 세상만사 시름을
잊고 청담(淸談)으로 지내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이란
뜻이지요. 허허허......"
방원은 호기롭게 웃었다. 박포도 다소 억지스런
웃음으로 따라 웃었다.
"요즈음 지내기가 어떠하시오?"
방원은 술 한 잔을 권한 뒤 정색을 하고 물었다.
"왜구놈들의 노략질에다 여진 것들이 북방을 들쑤셔
놓는 바람에 쉴 날이 없지요. 성은을 입고 있는
주제에 보국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황공스럽기 이를
데 없소이다."
"무어, 대장군께서야 작금의 공로 하나만으로도
만대에 큰 봉록을 받아 마땅하지요. 그런데......"
방원은 문득 말미를 끊었다. 박포가 갑자기
긴장하는 몸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장군, 왜 그러시오?"
"무슨 기척이 가까운 데서 났기에......"
"그럴 리가. 땅두더지거나 무언가를 갉아먹으러
나온 다람쥐겠지요. 여긴 내 집이외다. 부르기 전엔
후당으로는 일체 잡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는데 무얼
그렇게 놀라시오?"
"다람쥐가 분명한가 봅니다."
박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려운 기색을 버리지
못했다.
"요즘 정영상께서는 어떠하시답니까?"
정영상이라면 영의정 정도전을 일컫는다.
"무부(武夫)가 자세히 알 도리가 있겠습니까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라는 큰 일을 끝내셨다는
소문입니다."
"그 얘긴 이미 들었습니다만......"
박포는 방원이 어떤 얘기를 요구하는가 하고 가만히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방석 왕세자 전하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신다는......"
"국사를 맡은 우두머리가 후일의 왕이 되실 분과
머릴 맞대고 나랏일을 걱정한대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하지만?"
박포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다. 방원은 두어 번
기침소리를 쿨럭거렸다.
그때였다. 숲 속으로부터 칼을 빼든 무사 스무남은
명이 정작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정자 곁으로
몰려들었다. 칼날은 달빛을 받아 살기로 번들거렸고,
그들의 침묵은 더욱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새 박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먼저 소리친 것은 방원이었다.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칼잡이들 중의 하나가 물었다.
"이놈들이! 내가 언제 너희들을 불렀더냐. 여기가
사냥터인 줄 아느냐! 한잔 술에 사레가 들어 잠깐
기침소리를 낸 것 뿐이니라. 어서 돌아들 가거라.
대장군께서 나를 해치려는 괴한들인 줄 알고 몹시
놀라셨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얼씬도 말아라."
가병들이 돌아간 뒤에야 박포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허어, 사소한 사고 때문에 장군의 술맛이 모두
달아났겠구려. 내가 사과하리다. 자, 앉으시오."
방원은 여전히 여유있는 태도로 박포를 붙들어
앉혔다.
"송구스럽소이다. 전하 앞에서 숨겨온 칼을
빼들었으니."
"대장군의 경계심이야 으례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박포는 그렇게 말하는 방원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자, 하시던 얘기를 계속하지요."
방원이 넌즈시 재촉했다.
"보고 들은 대로 말씀올리지요. 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은 데가 있사옵니다."
"심상치가 않은 데가?"
방원은 짐짓 놀라는 체했다.
"이 쪽의 가병이 얼마나 되는가도 조사해 갔다는
소문입니다."
"그 고연 사람들이로군!"
"무엇 때문에 그걸 염탐하고 갔는가를 먼저
이해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주위가 하도 어수선해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방도로 가병 고작 몇 명 둔 걸 가지고......"
"허나 그들은 왕자 전하께서 야심을 품고
있으리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야심이 없소!"
방원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사 전하께서 권력에
무욕하시더라도 남들은 아무도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그건 왜 그렇소?"
"전하의 혁혁한 공훈과 또 영민하심이 그들에게는
두려움일테죠."
"그러면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된다는 말씀이오,
대장군."
"왕자 전하의 진실된 심중만 제게 밝혀 주십시오."
"무얼 말하는거요?"
"믿지 않으시는군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소."
"제가 전하를 해칠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종자(從者) 하나만으로 단신 야음에
문안드렸겠습니까?"
"그러나 대장군은 칼을 품고 있었소."
"전하께선 제 검의 용도를 벌써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빨리도 눈치를 채셨군. 사과하리다."
"당연하실 테지요. 만일의 경우에 당하여 제 생명을
보존하려던 의도 말고는 검을 숨겨온 다른 생각은
전연 없었습니다. 정작 야심을 품고 숨겨온
검이었다면 전하를 위협해서 가병들을 내쫓도록
했겠지요."
"자, 이젠 모두 지나간 이야기! 그래 대장군은 무슨
일로 찾아 오셨소."
"염탄하러 온 건 결코 아니외다. 차라리 전하의
생명을 염려하는 저의 충심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 표시로......"
"아, 무사 한 명을 데리고 오셨다더군요."
"그렇습니다. 아주 쓸 만한 놈입니다. 지금
행랑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못하는 무예가 없을
뿐더러 특히 쌍검에 능한 자이올시다. 전하 곁에
두시면 마음 든든하실 겁니다."
"그런 자를 왜 하필......?"
"제가 데리고 있어야 할 필요보다 왕자 전하께 더욱
쓰임새가 있겠기로......"
"그럼 우선 시험해 보아야겠구려."
"마음대로 하십시오. 혹시 시험을 잘못해서 이 집
아이들이 다칠까 싶어서......"
"그렇게 무서운 놈이오?"
방원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러자 대장군
박포는 신이 나서 떠벌리기 시작했다.
"훈련원 모병(募兵)때 삼천 명의 무사 중에서
가리고 가려 그 첫째되는 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내일이면 왕세자 전하께서 필시 필요하시다며 데리고
갈 것이 뻔하옵니다."
"마침 잘 하셨구려. 고맙소."
"더구나 어떻게 저 아이를 냄새 맡았던지, 넷째
왕자 전하의 수하도 몰래 부탁을 해 왔었지요."
"벌써?"
"그래서 이미 나라의 기밀한 부서에 배치가
되었노라며 딱 잘라 버렸지요."
"참으로 잘 하셨소. 그런 아이를 빼앗겼다면 우리
쪽이 속깨나 썩을 뻔 했겠구려."
"당연히 그렇지요."
"그럼, 그토록 무섭다는 무사의 내력이나 미리 들어
봅시다. 자, 우선 술이나 한 잔 더 드시구."
"직접 불러서 물어보시는 게 어떠하올지요?"
"아니올시다. 면전에서 칭찬을 하면 쑥스러워할까
싶어서 그렇소."
"그러면 대강 말씀 드리지요. 무사의 이름은
정창(鄭昌)이라 부릅니다. 나이 스물 넷인데, 제
말로는 흑사마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답니다."
"흑사마귀 정창......이라?"
"혹시 듣지 못하셨는지요?"
"지금 쫓기고 있는 자가 아니오?"
"잘 아시고 계셨군요. 바로 왕세자 전하께서 한사코
잡아 죽이려는 자이옵니다."
"그런데?"
"상처난 맹수에겐 다시 화살을 겨누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하나 국법이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지를
않소?"
"왕자 전하의 생각은 국법보다 우선할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만일 그 자가 반기를 든다면? 더구나 적두노사의
제자라는 자가 아니오?"
"그들 사제지간의 의(義)는 끊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노인은 노쇠하고 이미 죽을 자리를 찾아 홀연히
사라져 버렸지요. 왕자 전하의 회유를 마다한 이유도
제 몫을 해낼 수 없다는 사실과 두문동파와의 의리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왕자 전하께서는
일찍이 정포은 선생께도 일단은 회유해 보신 도량이
계셨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요. 과감하게 사직을 굳혀갈
때입니다."
"그럼 어떡하시겠습니까?"
방원은 잠깐 생각에 파묻혔다. 일개 무사 하나를
두고 그 처리 문제로 심사숙고하기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방원은 입을 꽉 다물어서 자신의 결연한 태도를
표시했다.
"죽여야겠소."
"예에?"
"화근은 미리 뽑아 버리는 게 좋소."
"그러하오나......"
"적이 되어도 불편하고 내 편이 되어도 어려울
처지라면 없애버리는 게 가장 안전하오."
이번에는 대장군 박포가 생각에 잠길 차례였다.
그의 태도는 방원을 믿고 흑사마귀를 데리고 온 것을
몹시 후회하는 듯했다. 저런 무사 열 명이면 천년
사직도 무너뜨릴 수가 있는데 하는 아쉬움의 기색이
그의 표정에 흘렀다.
차라리 왕세자가 마다하면 방간(芳幹)에게 붙여줄
것을 하고 후회했다. 그렇다고 이런 마당에서
흑사마귀 정창을 다시 데리고 나가겠다는 말은 엄두도
못낼 터이었다. 대장군 박포 자신부터가 이미 방원의
저택으로 들어올 때부터 포로의 입장이었다.
상대에게 신임을 얻고 이 쪽의 성의로써 방원을
설득시키려 단신 찾아든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질타하던 대장군의
신세도 현금의 사정에서는 독 안에 든 쥐새끼
꼴이었다.
박포는 방원에게 증오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뿐이었지 실제로는 어쩔 수가 없는
신세였다.
박포가 처음 흑사마귀를 만난 사정은 이러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훈련원 입원생들은 나름대로
한가닥씩 한다는 무예자들이었따.
창술.마술.봉술.검술.태껸.씨름.단검술.궁술, 게다가
중국이나 왜구한테서 배웠다는 도끼쓰기와 철퇴쓰기
등등의 괴상한 무예자들까지도 모두들 자신이
최고입네하고 으시대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조용하지만 냉소적인 미소를 띠고
묵묵히 뒷전에 앉아 있던 흑사마귀가 천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장검과
단쌍검(短雙劍)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무예로
출세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환했다.
최종 서른 명의 정예병들이 가려졌을 때 별기군을
지휘하는 대장군 박포와 훈련원 지사(知事) 둘이서
그들의 최종시험을 관전하게 되었다.
출신성분을 뒤지고 족보를 따졌으며, 학문이
있는가를 가려내었고, 얼마나 정통무예에 가까우며 또
그를 키워낸 스승이 누구인가조차 조사하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흑사마귀의 차례가 되었다.
"좌우를 일단 물려주십시오. 저의 과거에 대해서는
대장군께 은밀히 아뢰고자 합니다."
그의 당골한 제의에 박포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훈련원 지사는 몹시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괘념치 마시오, 조지사(趙知事). 필시 저자에게는
누구하테 함부로 말 못할 과거가 있는 듯하오. 더구나
저토록 뛰어난 무예를 지닌 것을 보면 어떤 배경이나
사정이 있을 법하외다."
박포는 그렇게 양해를 얻고 흑사마귀만 남게
하였다.
"나에게 은밀히 할 얘기가 있다구?"
"예에. 소인 흑사마귀 정창은 대장군께......"
"뭐라구? 흑사마귀?"
"예. 틀림없이 흑사마귀올습니다."
"네, 이놈!"
"국법을 어긴 죄도 없이 잘못 스승을 섬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를 벌주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처단하여
주옵소서!"
하도 당당하게 나오는 흑사마귀의 태도에 박포 역시
소리는 질렀지만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토록 어지러운 때일수록 저런 무예자가 몹시도
소중한 터이다.
사실 흑사마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새
사직에 불만을 품고 무예의 힘을 빌려줄 것을
거부했다 해서 적두노사의 제자들까지 죄인취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특히 적두노사의 무리들을
멸하려고 전국토에 그물을 치고 있는 것은 왕세자
방석의 개인적인 사정이었다
박포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거두어 주시면 결초보은하겠나이다."
"정말인가?"
"사부께선 무림으로부터 떠나셨지만 저희더러
조선에 번역하라는 엄명은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으래?"
박포는 신음소리를 섞으며 반문했다.
"대장군께서 소인을 아껴 주시기만 한다면 위급할
때에 목숨을 대신 던지겠나이다."
"자네는 어찌하여 굳이 나를 겨냥해서 이런 밀담을
계획했는가?"
흑사마귀는 모든 대답을 미리 준비라도 해온 듯이
거침없이 쏟아 놓았다.
"대장군께서야말로 별기군의 우두머리시며, 소인은
그 수하에서 일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일찍이
갈망하고 있었나이다."
"그게 진정인가?"
"그렇습니다. 더구나 공훈이 혁혁하시고 영민하신
방원 왕자 전하와 친분이 두텁다 하시기에 더욱
대장군을 만나 뵙기를 원했나이다."
"그건 왜인가?"
"남아는 주인을 섬기기 전에 우선 선택을 잘 해야
하는 것인 줄 아옵니다."
"으음......"
박포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흑사마귀를 이용하면 방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붙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 자를 잡아 왕세자에게 넘김으로써 얻는
이익과 방원에게 넘겨줌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의 두
갈래 타산을 치밀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역시 방원 쪽의 세력이 막강하다는 판단이 섰다.
왕세자는 간단하게 흑사마귀를 죽일 것이다. 오직
그뿐, 박포 자신이 얻는 이익은 별달리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방원쪽은 사정이 달랐다. 방원은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그를 환대할 것이다.
동시에 박포 자신은 흑사마귀에게 은총을 내려
심복으로 만든 뒤 방원의 수하에 두어, 방원측의
동정을 살피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크나큰
이득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여보게."
박포는 흑사마귀를 점잖게 불렀다.
"예에."
"내 생각 하나에 자네의 생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네를 죄인으로 다스릴 수도 있고 출세의
지름길로 달리게 할 수도 있겠고......"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자네의 재능은 익히 보아 알고 있네. 스승의
기술을 이어받아 무예가 신출귀몰하다는 것이
헛소문은 아니었구먼."
"과분하신 칭찬이옵니다."
"내 너를 귀중하게 쓰겠다."
"감읍하옵니다."
"그 대신."
"분부하십시오."
"방원 왕자 전하께 너를 보낼 터인즉 그분을 섬길
때에 한시라도 나를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다시 일러 무슨 말씀 사뢰겠나이까."
"그럼 함께 가 보자."
박포는 자신만만했다. 방원이 몹시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만일 흑사마귀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자신은 방원의 측근이 될 것이며, 또한 아무리
왕세자일지라도 감히 방원에게만은 흑사마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동시에 박포
자신까지도 그런 처사로부터 면책되는 바라고 믿었다.
그런데 만사가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방원은
흑사마귀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설사 흑사마귀를
죽인다 하더라도 이번 일에 대한 자신의 책임문제는
어떻게 추궁되어질 것인가.
박포는 생각할수록 앞날이 암담했다. 흑사마귀를
데리고 오지 않았느니만 훨씬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꽁무니를 뺄 처지도 아니려니와, 오히려
방원에게조차 미움을 받는 결과를 자초하고 만 것이
못내 억울했다.
'아아, 이는 운명이로다!'
박포가 자탄하고 있을 때였다.
후원 정자 주위의 우거진 수풀 속으로부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포는 긴장했지만
방원은 태연했다. 오히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우리집 아이들이 이제사 돌아오는군.
장군, 대단히 죄송하외다. 내가 잠시 대장군을
속였소."
"예에? 무슨 말씀이온지요?"
"장군의 성의를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소."
"그러시다면 흑사마귀를 거둬 주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건 그 아이 자신이 결정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로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이온지......?"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만 내가 우리 가병들을 시켜
흑사마귀를 시험하라 일렀지요."
"예엣?"
"아까 보셨던 스무 명의 무사들은 모두 조선 땅에서
내노라하는 자들이지요. 대장군께서 흑사마귀를 하두
칭찬하시길래 얼마나 무예가 출중한가 한번 두들겨
보라 일렀지요. 손님으로 온 무사에겐 안됐지만,
기왕에 가병들과의 친분과 또 위계문제까지 미리
고려해서 그래본 거지요. 심히 괘념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병신만 되지 않았다면 제가 거두어 쓰도록
하지요."
방원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박포는 우선 자신의 처지만큼은 안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병들이 흑사마귀를 얼마나
두들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작 죽여 버리지나
않았는지.
"내 앞으로 나서거라. 그리고 행랑채에 있던 손님의
무예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설명해 보아라."
그제서야 수풀 속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자곁의 관솔불 아래로 누군가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잠시 후였다.
"아아니!"
"엇!"
방원과 박포의 입에서는 동시에 탄식이 흘러
나왔다.
"저게 누군가!"
방원이 소리질렀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러나 태연한 자세로 꼿꼿이 서 있었다.
"자네, 이게 무슨 꼴인가! 일이 어떻게 된 건가!"
박포도 덩달아 소리질렀다. 그는 흑사마귀
정창이었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장군님의 신변이 걱정스러워
무례함을 무릅쓰고 예까지 들어왔나이다."
흑사마귀는 허리를 굽혔다.
"자네가! 그렇다면 우리 가병들은......?"
방원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왕자 전하께도 소생 문안드리옵니다. 소생은
정창이라고 하옵니다. 저희들은 정정당당하게
겨루었습니다. 모두 일당 백의 무예자들이었습니다만
소인의 기술이 조금 앞섰던 것 같았습니다. 본의가
아니었은즉 깊이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겸손하게 말하는 흑사마귀를 방원은 넋을 잃고
굽어보았다. 어느새 방원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구나! 두려워 말고 이리로 올라오너라."
방원은 손을 저어 흑사마귀를 불렀다. 박포는
가만히 구경만 할 뿐이었다.
"왕자 전하의 안전에서 감히......"
흑사마귀는 일단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렇지 않다. 이리로 올라와서 술 한 잔 받아라.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박포도 곁에서 얼른 거들었다.
"전하의 말씀을 심히 사양하는 바도 무엄한
짓이니라. 이리 올라오너라."
"그럼 명을 받잡고 가까이 오르겠나이다."
방원은 흑사마귀의 분명하고 정중한 태도까지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흑사마귀는 정자로 올라 방원의 곁에 꿇어 앉았다.
핏방울이 옷의 곳곳에 튀어 있었다. 그렇건만 방원은
곁의 사내가 조금전까지 가병들과 격전을 벌이고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한 태도였다. 마냥
흡족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대장군, 이런 인재를 나한테로 보내줘서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소."
"거두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저는 큰 은혜를
받은 것으로 아옵니다."
박포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흑사마귀가 아까웠다. 실상은 곁에 두기가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무리하게라도 그냥 곁에 두고 아주
요긴할 때 부렸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넘겨버린 보물이었다. 다만 이런
기회에 한 가지 다짐해 둘 일이 있었다.
"전하, 아뢰온대로 정가에게는 불편한 사정이
있음을 통촉해 주십시오."
"아, 쫓기는 신세 얘기구려."
"그렇습니다."
"그 얘기라면 하등 괘념치마시오. 내가
책임지리다."
"감사하옵니다."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하는 바요. 자, 정협사.
그대는 지금 이 시각부터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가 주는 술을 받아라."
방원은 흑사마귀에게 술잔을 내민 다음 잔 가득히
술을 부었다. 흑사마귀는 잔을 받아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래, 자네와 밤새도록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구나. 어떻게 그런 무예를 배울 수 있었더냐."
"모두 사부님의 은혜올습니다. 실상은 재주가 원래
비천하여 가르쳐 주신 공로의 만에 하나도 이룩하지
못하였나이다."
"그대의 말은 결국 스승의 무예를 칭찬하고 그
깊이를 칭송하는 것이로구나."
"그러하옵니다. 차제에 제 사부께서 전하께 협조해
드리지 못하고 은거하신 사정을 제자가 대신하여
용서를 비오니 널리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헤아렸다. 그런데 다른 너의 도제(徒弟)들은
지금 어디에들 있는고?"
"아직 있는 곳을 알 길은 없사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그 장소로 가는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그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만날 길이 있을 듯도
하옵니다만......"
"그런데 그들도 무예가 너처럼 출중하냐?"
"소인보다 나으면 나았지 한 가지도 못하는 바가
없는 인재들이옵니다."
"허어, 그래. 그들도 꼭 만나보고 싶구나."
방원은 흑사마귀 정창을 데리고 온 박포 앞에서는
한껏 두 사람에 대해 고마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박포가 떠나고 흑사마귀만 남게 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방원은 위엄있게 말했다.
"이제야말로 비밀한 소임을 맡길 만한 인간을
만나게 되었구나."
"과찬의 말씀이옵니다."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집으로 데리고 온 아이치고
가병들에게 흠씬 얻어맞지 않은 자가 없었느니라.
너는 끄떡없이 버텨낸 것이다. 그런데 그게 너의
조그만 실수였던 바이다."
"예에?"
"우리집 가병들이 너한테 진정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슬슬 봐 주는 것
같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힘껏
상대한 것이......"
"괜찮다. 백전의 용사들인 가병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드리긴 했지만 그게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부께서는 저희들에게 무(武)를 행할 때 우롱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검(劍)은 정직하기 때문에 상대를
얕보거나 겁내거나 혹은 조롱하거나 양보할 경우를
두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얘기다. 어쨌건 너는 잠시 떠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 정직한 검으로 내가 처음으로 내리는 중요한
소임을 다해 주기 바란다. 오늘 밤 강도(江島)로
떠나라."
"예에?"
"때 아닌 문전성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
이유를 들었느냐?"
"헛소문을 가지고 그런 줄 아옵니다."
"만일에 헛소문이 아닐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탐자의 말을 빌면 그 금을 찾는 무리의 성분이
불순하다는 것이다. 새 사직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자금으로 생각되는 그 많은 황금이 저들의 손으로
넘어갈 경우를 생각해 보았느냐?"
"그 무리들이 누구온지요?"
"바로 그 자들을 목베라는 뜻이다."
"소인이 말씀입니까?"
"왕씨(王氏)들과 밀맹(密盟)하고 있는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너에게 초료(草料)를 주선해 줄 사정은 못되나
노자는 넉넉하게 주겠다."
"누구를 베라는 말씀이옵니까?"
"바로 금을 찾고 있는 자들의 목을."
"예에? 만일 수백 수천의 인간들이......"
"모두 베라는 뜻이 아니다. 어차피 강한 자가
금궤를 찾을 테니까 너는 그 자를 베면 되는 것이다."
"......"
"물론 위험한 소임이지만 너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만일 네가 맡은 소임을 무사히
마친다면 큰 벼슬을 주선하겠다. 더구나 그럼으로써
네 사부가 내게 대했던 전날의 섭섭함이 풀어질
것이며, 쫓기고 있는 네 도제들에 대한 오해도 풀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니라......"
흑사마귀로서는 그 자리에서 달리 무엇을 더 판단할
겨를이 있을 수가 없었다. 사부께서도 말씀하셨다.
가소 카로써 벼슬을 몸소 마련하라는.
'왕씨들과 그 왕씨들의 끄나풀들을 모조리 벤다.'
흑사마귀가 마음 속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삿갓 박진과 함께 강도에 도착한 족제비 김해간은
산성 밑에다 숙소를 정했다.
주도인 강화도와 서른 세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곳은 옛적 고구려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았다.
중국과의 교역처로서 적합하며, 외적의 침입 때는
피난처로서도 안전하며, 특히 몽고인들의 침략 때에는
물에 서툰 그들을 쉽사리 물리칠 수가 있어 백성들이
붐비는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섬 중의 하나인 갈매기섬에
묻힌 황금의 전설 때문에 그것을 노리는 인간들로
더욱 복작거릴 기세였다.
사람들은 강화도를 근거지로 하여 들끓었다. 새
장터가 서고 낯선 내지인들이 슬금슬금
흘러들어왔으며, 숙소를 곁들인 새 주막들이 날이
지날수록 곳곳에 더욱 많이 생겨났다.
삿갓과 족제비 역시 황금을 찾으러 내지에서 스며
들어온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었다. 때문에 본거지
주민들에 비해서 행동거지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신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황금을 찾으러
섬으로 상륙하든가, 아니면 그것을 찾아 나오는 자를
죽이고 보물을 뺏으려는 전국의 무서운 칼잡이들이
득실거리는 마당에서 일각이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도착 이틀 전의 살인사건은 이처럼 으스스한 섬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산 사내가 낡은 궤짝을 한 필의 말에다 싣고 섬을
빠져나가려던 일이 있었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어떤 자의 입으로부터 보물이 흘러나가고 있다는 말이
퍼뜨려졌다. 사내는 그날 밤 섬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었다. 중국인과 교역을
마치고 내지로 돌아가던 그의 궤짝 속에 든
잡동사니가 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잘 말해
주었다.
"황금을 갈매기섬에서 가져나오더라도 내지로
운반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것이 칼잡이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케 하는
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런 소문 때문에
황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포기는커녕 뗏목을 만들어
매일같이 갈매기섬으로 저어 가고 있었다. 풍랑으로
혼줄이 나서 되돌아온 자들도 다음날이면 다시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갔다.
삿갓과 족제비는 현지의 사정을 며칠 동안 관망하는
축에 속했다. 그들은 황금을 찾으려는 자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 갈매기섬에
접근할 것이며, 다시 보물상자를 어떻게 찾아 또 어떤
식으로 실어내어 내지로 반출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삿갓이나 족제비의 속셈에 불과한
것이었다. 단 하번도 그런 속사정을 서로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으며, 어떻게 협력하자는 약속조차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족제비는 삿갓의 심중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고 섣불리 물었다가 혹시 이
쪽의 정체가 탄로날 것도 두려웠지만, 삿갓이 이
쪽에다 협조를 요청하는 경우에도 난감할 뿐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삿갓이 반응을 보일 때까지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기로 작정했다.
족제비가 삿갓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강도에
접근하고 있을 때 삿갓이 족제비에게 묻지도 않은
얘기로 운을 띄었기 때문이었다.
"김협사, 어차피 강도에는 우리 둘 다 초행길이니
숙소를 함께 정해도 괜찮을 것 같구려."
족제비는 처음에 삿갓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몰라 망연히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구요, 서로가 심심하지도
않고 방을 함께 쓰면 비용도 적게 들지 않겠소."
"아, 그거야 좋지요. 우리가 목적은 같으면서
이유없이 외면할 필요는 없겠지요."
족제비는 황급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와 함께
기거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일이 더욱 수월해
질 것이고, 상대의 정체를 알아낼 기회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족제비는 애초에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쉽게 올지도
의문이었지만, 무엇보다 삿갓과 같은 인물을 쉽게
죽여서는 안될 것 같은 묘한 매력을 느껴 그를 해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강도까지 걸으며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김협사, 내 실제 나이는 스물 둘이지요. 틀림없이
김협사가 나보다 연상이겠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두어 살쯤."
"김협사가 무술을 배우고 나서 얼마나 실전을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경험이 있지요."
"아, 그러셨군요."
"십육칠 세 때였으니까 소년의 때를 마악 벗어날
즈음이었지요. 저의 선친께서는 그보다 오륙 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참 안됐습니다."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생각입니다."
"원수를요?"
갑자기 뱉어내는 격앙된 삿갓의 어조에 감짝
놀랐다.
"살해되셨습니다."
"살해를요?"
"왜놈한테요. 싸움터에서 돌아가셨다면 이토록
원통하게는 생각하지 않을 겝니다."
"그렇다면......?"
"예에. 양민으로서 무자비하게 살해됐지요.
모친께선 어린 저를 간신히 피신시켰지만......
그때부터 어린 가슴은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했지요."
족제비는 달리 위로할 말이 없어 그냥 듣고만
있었다.
"기사(己巳)년 정월에 경상도 원수 박위 장군께서
쓰시마를 정벌한 적이 있지요."
"그랬었지요. 왜선 삼백 척까지 불태웠다는......"
"그 전투에 제가 참가했지요. 모병 때 어거지로
붙여 달래서 간신히 병졸이 됐지요."
"어린 나이에 참으로 용맹한 일을 하셨습니다."
"용감했다기보다는 복수의 집념 때문이었지요."
"......"
"나는 왜구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습지요. 이백 명은
될 겁니다. 그러나 놈들의 모가지를 벤 게
아니라......"
"예에?"
"주로 단칼에 생식기를 잘라 버렸죠."
"놈들의 남근(男根)을?"
"씨를 말린다는 뜻이 있었지요. 전투가 끝난 뒤 그
때문에 장군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그럴테니까요!"
족제비는 웃을 수도 없어서 한사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족제비의 눈에는 삿갓이 괴상한 사내로 비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괴상함을 미워할 수 없는게
별스러웠다.
삿갓은 복수를 뒤로 미루고 지금 강도로 온 것이다.
그가 보물을 찾으려는 이유가 왜구에의 복수전에
사용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했지만 그런
질문은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두 사내는 오직 객지로 흘러들어와 각각의 목적을
심중에 품고 있는 동숙인일 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일을 찾아 아침에 숙소를 나섰다가 저녁에
돌아와서도 정보를 교환하거나 앞으로의 행동에
보조를 맞추자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강도에서 이레가 지나가고 있었다.
족제비의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풍항이 거센
도깨비섬 구도로 건너가는 배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뿐만 아니라 한번 건너간 자가 다시
되돌아 나오지 못한 이유를 수소문하느라고 고심했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금궤를 실어나오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비록 보물지도는
잃었지만 그의 머리 속에서는 너무나 똑똑히 금궤가
묻힌 장소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의 문제만 해결되면 삿갓에게 넌즈시
협조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 금궤를 무사히
찾아나온 후 기회를 보아 그를 없애고 황금을 검정
가죽쌈지 대신 주인에게 돌려 줌으로써 사부님이 내린
임무를 수행케 되는 바라고 믿고 있었다. 족제비의
생각은 그토록 단순했지만 별다르게 뽀족한 다른
방법도 생각될 건더기가 전연 있을 수 없었다.
그날도 족제비는 숙소를 나와 시전거리 쪽을
어슬렁거렸다. 개경의 위성 부(府)로서 뿐만 아니라
고려 때 임시 수도였던 강도(江島)로서의 면목이
그대로 남아 있어 흥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민간신앙도 민속놀이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유의
세시풍속은 이 곳에서도 여전히 활기찼다.
족제비는 시전거리를 약간 빠져 조금 음산한
가옥들이 들어선 쪽으로 걸었다. 거기는
점복가(占卜家)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족제비는 점이라도 쳐
보는 게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맞아도
그뿐이고 맞지 않아도 그만인 부담없는 접을 친다는
건 하릴없는 사람들에겐 더할 수 없는 심심풀이
놀이였다.
족제비는 점복가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저만큼
대문에다 육사괘(六四卦)라고 써붙인 푯말이 눈에
들었다.
점괘야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었다. 이런 동네에서
갈매기섬의 신비한 사실들을 얻어듣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족제비의 발길을 더욱
끌었다. 반쯤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자 저만큼 눈앞에
미닫이문이 보였다.
"계시오?"
족제비는 우선 정중한 목소리로 불렀다. 분명히
섬돌 위에 놓인 가죽신발로 보아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대답이 없자 조금 당황했다.
"점을 치러 왔습니다. 누구 안계신가요?"
그제서야 굳게 닫혔던 미닫이문이 슬며시 열렸다.
"점괘를 놓아 보실려구요?"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빛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족제비는 무조건 섬뜩했다. 그 괴이한 눈빛도
그렇거니와 버티고 앉아서 이 쪽을 노려보는 폼이
평범하게 점이나 치고 앉아 있을 그런 사내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구려."
눈빛이 날카로운 점복가는 질린 채로 마당에 서
있는 족제비에 대고 재촉했다.
족제비는 일개 복술가한테 속절없이 위축되고 있는
사정을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심장을 꿰뚫는
듯한 그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일까.
족제비는 엉거주춤 마루로 올라섰다.
"여기 앉으시지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점치러 왔소."
족제비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모로 꼬고 앉았다.
"손님 얼굴에는 필시 깊은 고민이 서려 있군요."
"고민이 없다면야 무엇 때문에 점을 치러 오겠소."
"그러실 테지요. 하나 그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게
우리 점술가들의 일이지요. 한 냥만 내십쇼. 어떤
점을 치시렵니까?"
"어떤 점이라뇨?"
"점에는 종류가 많지요.
맥근점(麥根占).농점(農占).떡점.뫼점.삼점(삼占).좀
생점.윷점......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요."
"많기도 하오. 나는 아무 거나 좋소. 좋을대로
하시구려."
"그게 그렇지가 않은뎁쇼. 알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점을 선택해야 하거든요."
"당신 생각에는 내가 무슨 고민이 있을 것 같소?"
복술가는 대꾸하기 전에 잠깐 씨익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몹시 불쾌했다.
"우선 생년월일시를 대 보시지요."
"나는 그런걸 모르오."
"물론 모르실 테지요.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으니까요."
"뭐요?"
"관상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뭐 관상이래야
인상(印象)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건
부모의 덕이 전연 없구먼요. 천애고아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출생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를 밖에요.
맞았습니까, 손님?"
"틀렸소. 생부모는 안계시지만 부모 이상으로 날
거둬 키워주고 가르친 분이 계시오."
"그렇게 된 건 사주(四柱) 덕택이지요. 내가 손님의
사주를 찾아 드릴까요?"
"그걸 찾았대서 무슨 의미가 있겠소."
"손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려."
"무슨 뜻이오?"
"칼을 찬 사람은 언제나 생사의 고비에 서
있으니까요."
"내가 무사(武士)라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눈에 살기가 번쩍거립니다. 일전에
살인을 했군요."
"무사래서 꼭 살인을 한다는 법은 없지 않소?"
"예에. 살인을 하거나 아니면 살해되는 거지요.
그걸 살기(殺氣)라 이릅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얘기구려."
"지금 손님은 위험 속에 있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여러 개 따라다니고 있지요."
"산통도 흔들어 보지 않고 그걸 어떻게 아오?"
"아는 수가 있지요. 손님은 이 곳 분이 아니지요?"
"그렇소."
"그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곳에 왔겠구려."
"그 목적이 무엇인지 당신의 관상법으로 알 수
있겠소?"
족제비는 어느새 점술가에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점술가는 무언가를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틀려도 괘념 않겠다면 말씀드리죠. 아무리 신통한
점복가의 영력(靈力)도 때때로 흐트러지는 수가
있으니까요."
"이해하겠소."
족제비는 그의 앞으로 반뼘쯤 다가앉았다.
"손님은 무엇을 찾고 있어요."
"그렇소."
"그 물건은 굉장히 귀중한 것이오."
"맞았소. 내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거요. 다시
찾아야 하오. 그게 어디 있소?"
"그건 나도 모릅니다."
점복가의 말에 족제비는 절망적인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대서 지나치게 실망하실 건 없습니다. 혹시 그
물건이 손님의 손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하는
점괘의 결과에 따라......"
"그게 정말이오?"
"아직까지 내 점은 한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발 가르쳐만 주시오. 다섯 냥을 내겠소."
"복채를 불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 손님이
잃었다는 물건이 영영 손님의 손으로 되돌아 가지
않더라도 내 책임은 아닙니다."
"알겠소."
"그리고 그 물건이 운좋게 손님의 손으로 되돌아갈
경우엔 어떻게 하겠소?"
"어떻게 하다뇨?"
"그토록 값진 물건을 독차지할 작정입니까?"
"내 물건이 아니니까 나도 거기에 손댈 수가 없소."
점복가는 다시 기분 나쁘게 씨익 웃었다.
"자, 그럼 점을 치겠습니다. 우선 그 물건의
생김새가 어떤가부터 알아야 하겠구려. 손님은 가만
앉아 계시면 됩니다. 육효 점(六爻占)의 하나죠. 자,
손님은 내가 산통(算筒)을 흔들 동안 자신이 알고자
하는 바를 간절히 외우고 계십시오."
점복가는 곧장 자세를 가누더니 산통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덟 개의 향나무로 만든 산가지가
점복가의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딸각딸각 소리를 내었다.
얼마간 산통을 흔들더니 그것을 딱 멈추었다. 그런
후 왼손으로 구멍 속에서 세 번 산가지를 끄집어
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괘상을 만들고
꺼내어진 세 번의 숫자로 초(初).중(中).종(終)의 각
괘(卦)가 만들어졌다.
"어허!"
점복가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나왔소?"
"이거 이상하구려. 참 신통한 물건도 다 있구려."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그 물건이 새털같이 가벼우면서도 수만금의 무게를
지녔구려. 그러니까 이상하지 않소."
족제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바로
보물지도이다. 이 괴상한 사내가 귀신같이 잃은
물건을 알아낸 것이다. 이 정도의 신통력이라면
물건이 있는 곳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족제비는 그의 앞으로 더욱 다가앉았다.
"혹시 그게 수형(手形)이거나 귀중한 문서가
아니오?"
"대강 맞았소."
족제비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족제비의 궁금증은 또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점복가를 흔들어 깨우듯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뒤쫓아다니는 자는 대체 누구요?"
"손님의 성품은 정(靜)이 아니고 동(動)에 속하오.
극양성(極陽性)이지요. 스스로 괘를 만드는 게
낫겠습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윷점을 칩시다. 원하는 바를 속으로 빌고 윷을
던져 괘수를 만듭시다. 그래야 손님의 괘상이
나오지요. 바로 지금 손님이 처해 있는 입장이
나타나지요."
"그럽시다. 한 냥을 더 내리다. 잘 봐 주시오."
족제비는 점복가가 꺼내주는 윷을 들어 세 번씩
던져 괘를 만들었다.
"점사(占辭)를 해석할 테니 잘 들어 보십시오."
점복가는 잠깐 눈을 감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빛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괴이하게
느껴졌다.
"사이일(四二一)의 괘상은 암중견화(暗中見火)요."
"무슨 뜻이지요?"
"좋아요, 좋아. 깜깜한 밤길에 불빛을 만났으니."
"잃은 물건을 되찾겠다는 점괘요?"
"그러나 사방이 어둡소이다."
"뭐요?"
"칼을 겨누고 있는 자가 많구려."
"공연히 겁주지 마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내가 부적을 만들어 드리지요. 몸에 지니고 다니면
화를 면하게 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가장
가까이에서 믿고 있는 사람한테서도 칼부림을 당할
수가 있지요. 그런 경우를 닥치면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족제비는 가장 가까이서 믿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생각했다. 삿갓이 얼른 떠올랐지만 그나마
허황된 결론이었다.
"그 부적을 몸에 지니면 틀림없이 화를 면하게
된다는 거요?"
"믿으십시오."
"그럼 그 부적값이 얼마나 되오?"
"오십만 냥."
"얼마라고 했소?"
"오십만 냥."
"당신 지금 미쳤소?"
"손님의 목숨값에 비하면 훨씬 싸지요."
족제비는 지금 상대가 정작 미쳐 버리지 않았나
해서 그의 괴이한 눈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더구나 손님에겐 도화살(桃花殺)까지 끼었구려."
"당신 못하는 소리가 없구먼. 도화살이고
망신살이고, 더구나 나한테 오십만 냥의 돈이 있다면
미쳤다구 갈매기섬의 황금을 꺼내려고 목숨을
걸었겠소. 그렇지 않소?"
"아, 그러고 보니 손님도 그 때문에 강도로
건너오셨구먼요."
"그렇소!"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갈매기섬의 황금 때문에
이곳엘 왔노라고 떠들고 다니시는 건 더더구나
위험합니다. 손님이 아무리 훌륭한 무예를 지녔다
해도 그렇지요. 자, 그럼 부적 얘기는 그만해 둡시다.
지금 당장 부적값을 내라는 게 아닙니다. 며칠 동안
생각해 보신 후에 결정해도 늦진 않습니다. 다만
부적값을 나중에 지불하는 건 좋지만 값을 깎아서는
아니됩니다."
점복가는 족제비를 외면해 앉았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 괴상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점복가였다.
족제비는 그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왠지 불쾌했다. 차라리 그따위
곳에는 들르지 않은 것만도 못하다는 후회가 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불쾌한 기억도 사흘이 지나면서는
스름스름 잊혀졌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나흘째
오후였다.
해변을 거닐며 멀리 파도 속으로 춤추듯이
들락거리는 갈매기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은
희뿌연한 안개를 주위에 두르고는, 그 쪽으로
건너오려는 많은 야심찬 사내들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족제비는 바다 쪽을 나갈 때는 반드시 칼을 메고
나갔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낯선 사내들의 이상한 눈초리들 하며, 심지어
동숙인인 삿갓조차 이 쪽의 정체를 깨닫고는 칼을
들이댈 가능성도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저 쪽을 건너갈 배라든가 큰 뗏목을 구하는
일이며, 어떻게 건너가야 하며 또 항해 때 필요한
뱃사람의 선정 따위도 머리아픈 것들인데, 괴상한
살기를 느끼며 몸을 사려야 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족제비로선 더욱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점술가의 그 이상한 예언, 어둠 속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자가 많다는 목소리까지 은근히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무료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다가 역시 허망스런
기분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촌락 근처에서 한 동자가 천천히 걸어나와서는
시전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예사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자의 걸음걸이며 옆모습이 뭔가 머리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다는 느낌이 얼른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족제비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앗! 저놈이닷!"
족제비는 다른 생각의 여유없이 그 쪽으로 달렸다.
복작거리는 시전으로 숨어들어가기 전에 동자놈을
한사코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아이였다. 꿈에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검정 가죽쌈지를 소매치기해서 가지고 달아난 그
놈이었다. 아이는 숨바꼭질하듯 인파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족제비는 동자에 대한 몇 가지 수수께끼를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쌈지 속에 보물지도가 있다는 걸
알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감쪽같이 훔쳐갔으며, 놈의
스승이란 자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그날 밤
북한산성 바깥에서 만나자고 했으며, 결국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의문들에 집착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쌈지만 찾으면 그뿐이었다. 갈매기섬으로
건너갈 궁리를 했던 것은 편법에 지나지 못하였다.
실상은 아무도 살아서 되돌아오지 못한 그 무서운
섬에 아무리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다 한들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겁이 앞섰던 것이다. 쌈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갈매기섬으로 건너갈 궁리를 해 본
것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제 저 동자놈을 잡아서 쌈지를 되찾아 슬그머니
강도를 빠져나가 사부께서 말한 쌈지의 주인에게
그것을 돌려주면 그뿐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소매치기 동자는 이 쪽이 뒤쫓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시장의 물건들이며
장꾼들의 거래광경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전연 바쁠
일이 없다는 태도였다.
족제비는 비좁은 사람들 틈을 잽싸게 빠지며 동자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갔다. 아이놈이 모르게, 또 막상
그를 붙들었을 때 족쳐댈 것인가 달랠 것인가 하는
궁리까지 해보는 여유를 가지고 동자의 뒤를 쫓았다.
족제비는 슬며시 동자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잽싸게
허리춤을 쥐었다. 동자는 깜짝 놀라며 족제비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아이였다. 그러나 상대가
족제비라는 사실을 안 동자는 마치 찾고라도 있었다는
듯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족제비는 그것이 더욱 어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붙든 다음 슬슬 달랠 작전을 세워 두긴 했는데, 막상
동자가 전연 겁을 먹지 않는 것을 보자 수상하기도
하고 약도 올랐다.
"이놈아, 이번에는 도망칠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말아라!"
"도망은 왜 합니까요. 나리를 찾느라고 며칠 동안
애를 먹었는데요."
동자는 씨익 웃기까지 했다.
"이놈아, 그런 식으로 또 수작을 부릴려고 하겠지만
어림없다. 내가 두 번씩이나 속아넘어가는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지요."
"어쨌건 저번에 훔쳐간 쌈지나 돌려다오. 쌈지만
그대로 돌려준다면 남의 것을 도둑질해 간 죄하며
그동안 내 애를 태운 것하며 거짓말한 죄까지 일체
묻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쌈지를 내놓지 않을
경우에는......"
"나으리, 이 허리춤이나 좀 놓으시고
말씀하시라요."
"뭐야? 또 도망치려고?"
"제가 언제 도망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나요?"
"저번에 도망친 건 도망이 아니고 뭐냐?"
"어림없는 소리 그만하시와요. 그날도 도망친 일은
결코 없었구만요."
"그렇다 치더라도 날 보고 밤중에 나오라구 해
놓고선 소식이 없지 않았느냐."
"그런 건 저두 몰라요. 제 스승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그래, 네 스승놈과의 약속 때문에 내가 죽을 뻔
했지!"
"제 스승님한테 놈 놈 하지 마시라우요."
"어쨌건 네 스승한테로 가자. 네놈을 그 놈
앞에서......"
"소리를 질러 버릴까부다!"
동자가 처음으로 몹시 기분 나쁜 표정으로
저항했다.
"소리를 질러?"
"그러믄요. 사람살려라아. 죄없는 나를 이 어른이
잡아먹으려 한다아 하고 소리치면 나리는 어떻게 되는
줄 아시나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누가 날 보구 아이놈
잡아먹는 문둥이로 알아보아 줄까 싶어 그러냐?"
"흥! 이 사람이 바로 족제비라는 말
한마디면......"
"뭐야?"
"나으리를 노리는 칼잡이들 손에 무사하지
못하실걸요?"
"......?"
"모두가 쌈지는 아직 족제비 손에 있다고들
안다구요. 잃었다구 아무리 변명해 봐야 통하지가
않을 테니까요."
족제비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동자가 정작 족제비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동자를 풀어 주었다가 또다시
떨궈버릴 경우라도 그것은 정체가 탄로나는 것보다는
나으며, 설사 동자가 도망치더라도 강도의 길목만
지키고 있으면 절대로 섬을 빠져 나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 정말 도망가진 않겠다는 말이지?"
"도망은 왜 가요?"
"어쨌건 쌈지는 돌려주겠느냐?"
"그건 저두 몰라요."
"모르다니?"
"스승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야요."
"그럼, 지금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 작정이냐?"
"어디긴 어디겠어요. 스승님한테지요."
"그으래? 너의 스승이 이 곳에 있단 말이지?"
"어서 허리춤이나 놓으시와요."
족제비는 그제서야 동자의 허리춤을 놓아 주었다.
동자는 무어라고 입속말로 투덜거리더니 흐느적
흐느적 앞서 걷기 시작했다. 도망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족제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동자를
뒤쫓았다.
시전거리를 완전히 벗어나왔다.
"너의 스승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만나 보면 아실 거예요."
"나를 데리고 오라구 너한테 심부름을 시켰단
말이지?"
"그러믄요. 근처에 계실 테니까 찾아보라
말씀하시길래 나흘을 꼬박 찾아 헤맸단 말씀이야요."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도 내가 알 도리가 없사와요."
"어쨌건......"
족제비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한번 들렀던
바로 그 복술가가 즐비한 곳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얘야, 너의 스승은 참 이상한 곳에도 있구나. 점을
보시는 분이냐?"
이번에도 동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몇 걸음 앞으로
쓱쓱 걸어 나가더니 문득 되돌아 서며 족제비에게
말했다.
"나으리, 누가 우릴 뒤따라 왔는가부터 살펴
보시와요."
"미행을?"
"스승님은 미행당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시거든요."
"참 이상한 스승이로구나. 글쎄, 우리가
미행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만."
"그럼 됐어요. 바로 저 집이야요."
뭣이?"
족제비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 집이다. 며칠 전에
점을 치러 왔다가 해괴한 제의와 불길한 얘기만 듣고
도망치듯이 나온 바로 그 점술가의 집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동자의 스승이라는 자가 바로 그 점술가란
법은 없었다. 굳이 그 자만 이 집에 살고 있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섬돌을 올라가셔서 곧장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시와요."
동자의 말에 족제비로선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의 스승은 점을 치시는 분이신가?"
동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네가 나를 점치러 온 손님으로 밀어넣고 도망쳐
버릴 염려는 없을까?"
"아휴, 나으리두. 의심두 많으셔라.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스승님께 나으리께서 오셨다는 통문안을
여쭙지요. 스승님, 여기 나리를 모셔온뎁쇼?"
동자는 안쪽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나서 안으로부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서 드시라 해라."
동자는 방문 쪽으로 손짓을 한 다음 뒤뜰로 쪼르르
달려가버렸다.
족제비는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점술가가 동자의 스승이라면 불쾌한 일이었고, 또한
그 점술가가 쌈지를 훔쳐간 장본인이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그 자가 보물지도를 쥐고 앉아
흥정을 또다시 해올 일이라면 더더구나 살려 두어서는
안될 터이었다.
족제비는 어깨 너머 환도의 손잡이를 잠시
어루만졌다. 그렇다. 제가 아무리 보물지도를 쥐고
앉아 큰소리쳐 봐야 이 쪽에서 칼로 위협한다면야
그것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을 일이었다.
족제비로서는 그를 해치는 건 급할 게 없었다.
점술가가 쌈지를 훔쳐가지고 무슨 꿍꿍이 속으로 이
쪽을 불러들인 게 분명하다면, 우선 그 의도를 안
뒤에 일단 들어주는 척하면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목적은 쌈지를 찾는 일이니까.
족제비는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기다렸소."
그는 괴기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면서 족제비를
맞았다.
"다시 만났구려. 당신의 그 맹랑한 제자가 나를
찾으러 다녔다면서요?"
족제비는 냉소 섞인 목소리로 내뱉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 손님이 김협사라는 건
알아챘지만......"
"그런데 왜 다시 불러들이는 수고를 자초했소?"
"어렵고 중대한 일일수록 일의 순서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해야 되는 법이오. 나는 김협사가 이 쪽의
정체를 알고 이 집을 찾아든 게 아니었나 탐색했던
거요."
"그런데?"
"결국 우연히 찾아오셨다는 걸 알게 됐소. 전날
내가 그만큼 낌새를 채게 했는데도 영영
못깨달으시기에 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라는 걸 알았소."
"진작 그걸 당신이 알았다면 그날 바로 나한테
당신의 정체를 까발렸어도 괜찮지 않았겠소?"
"그건 그렇지가 않지요. 그래 내가 저번에 제의한
건(件)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습니까?"
"무슨 건 말이오?"
"부적값 오십만 냥."
"생각할 필요도 없소. 난 당신의 속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이해해야 하오. 보물지도는 지금 내 수중에
있으니까."
"아, 그러니까 그것을 찾아 반씩 나누자는 얘기군."
"쉽게 말해서 그렇지요."
"싫다면?"
"싫다뇨? 당신이 싫대서 이득이 될 게 하나도 없을
텐데요?"
"천만에. 당신이 훔쳐가지고 간 그따위
보물지도라면 벌서 내 머리 속에 환히 그려져 있소.
나 혼자서도 황금이 묻힌 동굴을 찾아갈 수 있단
말이오."
"그런데 홰 황금을 찾으러 떠나지 않았지요?"
"내게 필요한 건 황금이 아니라 그 자도가 든
쌈지인 거요. 어서 곱게 돌려 주시오."
"그보다 내가 왜 훔친 지도를 가지고 갈매기섬으로
진작 떠나지 않았는가를 알고 싶지 않소?"
그것은 족제비에게 진작부터 궁금한 일이었다. 혹시
그가 그것을 가지고 벌써 황금을 찾아 도망치지
않았나 하고 얼마나 전전긍긍했었는지.
"알고 싶은 건 그뿐만이 아니지. 북한산성에서 나를
어떻게 알아봤소?"
점술가는 픽 웃고 나서 대답했다.
"점을 쳐서 당신이 족제비라는 걸 알아맞혔소."
"어처구니가 없군. 내 품 속에 그런 귀중한 쌈지가
들어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요. 김협사가 나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다음에지요."
"그렇다치구, 왜 그날 밤 약속 장소에는 나타나지
않았소?"
"거기에는 갈 계획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럼 거짓말을 했단 말이오? 난 괴한들한테 맞아
죽을 뻔했단 말이요."
"오, 그런 불상사가 있었군요. 난 전혀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짐작도 못했소. 이제 말하지만 나는
김협사를 꼭 만나야 했던거요. 그런 암시로 거기서
만나자는 전갈을 했던 거고, 결국은 당신이 이 곳으로
와서 나를 만나게 된 게 아니겠소?"
"글쎄, 나를 이 곳으로 불러서 꼭 만날 이유가 뭐냔
말이오?"
"당신 없이는 보물지도도 소용이 없으니까."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지도를 훔쳤으면 당신
혼자서도 충분히 황금을 꺼내올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렇지만 이제는 글렀어. 당신한테 어떤 이유가 있든
당신이 나를 만나려고 한 계획은 굉장한 실수였단
말이야. 내 등에 뭐 보이는 게 없소?"
족제비는 등짝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환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언제라도 당신을 찌를 수
있다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점술가 조금 당황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 이제는 내게 황금 오십만 냥을 부적값으로
내놓으라는 따위의 위협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요. 더구나 일단 내 물건을 훔쳐간
자를 요행스레 만난 이상 내가 그냥 물러갈 수야
없지. 내 물건을 찾아가야 되겠다는 얘기요. 목숨이
아깝거든 곱게 말할 때 그 쌈지를 내놓는 게
어떻겠소. 이제까지 당신이 나한테 걸어왔던 장난은
모두 불문에 붙여 주겠소. 자, 어서 그 쌈지를
내놓으시지."
그래도 점술가는 방바닥에다 눈길을 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파리 서너 마리가 날고 있었다.
점술가는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족제비는 그가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꺼낸 씸지에는 바늘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점술가는 그 중에서 세 개의 바늘을 꺼내 들었다.
"당신 지금 뭣하고 있는 거야. 내 말이 들리지가
않소?"
그는 대꾸 대신 갑자기 허공으로 손바닥을 홱
뿌렸다. 바늘 세 개는 족제비의 귀 밑을 지나 뒤족
벽이 후두둑 소리를 내벼 박혔다.
"원 파리떼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군......"
점술가는 중얼거렸다.
족제비는 깜짝 놀랐다. 날아다니던 파리 세 마리는
어김없이 바늘에 관통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나......"
점술가는 파리들을 눈여겨 보며 장난치듯 말했다.
족제비는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점술가의 바늘
던지기는 무서운 내공력(內功力)의 소산이었다.
일종의 차력무공(借力武功)의 하나인 것이다.
족제비는 입을 따악 벌리고 바늘 끝에 찔려
바둥거리고 있는 파리들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를 동시에, 그것도 날고 있는
파리를 어김없이 관통시킨 것이었다.
무예를 닦은 자는 상대의 실력도 알아보는 법이다.
앞에 앉아 있는 괴상한 점술가는 실상 비상한
무예가인 것이다. 족제비는 무림(武林)천하에서 또
하나의 무서운 고수를 만난 것이다.
'아아!'
역시 하늘은 높았고 자신은 우물 속에서만 놀던
개구리였다.
족제비는 점술가가 취한 행위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이 쪽에 대한
위협이었다.
족제비는 자신의 무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처량할 정도로 절실히 느꼈다. 벌써 칼을 빼들기도
전에 상대에게 진 것이다. 감쪽같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족제비는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쌈지를
찾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고 느껴졌다. 동시에 또
하나의 의문이 솟구쳤다. 이런 무예의 고수가 무엇
때문에 미미한 자신을 끌어들여 황금을 찾게 하고,
반씩 나누자는 제의를 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가 갈매기섬을 겁내어 대신 자기더러 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계산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이 쪽의 실패는 곧 그의 실패와도 같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족제비는 이제 작전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점술가에게 황금을 가져내올 수 있는 묘안이 있다면,
어차피 지도를 찾지 못할 바에야 그의 제의에 일단
동의한 뒤 보물을 몽땅 가지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파리들은 하나같이 살아 있군요."
족제비는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죽일 수도 있었겠군요."
"그렇지요."
"대단한 무예를 지닌 분인 줄 몰랐습니다."
"무얼요. 그 정도 가지구서."
"제자의 솜씨도 스승한테서 배웠겠군요."
"상대의 기(氣)를 흐리게 하여 주의력을 일단 다른
데로 돌린뒤, 몸에 지닌 물건을 훔쳐내는 것도 일종의
무술이지요."
"절묘하십니다. 이제 저더러 어떡하라는 겁니까.
쌈지를 되찾기는 다 틀렸겠지요?"
"아니지요. 돌려드리지요."
"예에?"
"물론 아까의 약속을 승낙해 주시고, 또 일이 끝난
다음이라야 되겠지요."
"저의 사부님께서는 황금을 꺼내 오라는 분부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금을 꺼내 오지 말라는 분부도 하지
않았을걸요?"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꺼내지 않아도 누군가가 꺼내 갈 건
분명합니다. 그럴 바에야 우리가 먼저 모험하는 게
낫지요."
"그렇기도 하군요. 그런데 조금 전부터 하나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선생처럼 무예가
뛰어나신 분이 어째서 하필 나같이 어설픈 사람을
갈매기섬으로 들여보낼 생각만 했지 몸소 섬으로 가서
그 황금을 차지할 생각을 안 했는지요?"
족제비의 질문에 점술가는 아까처럼 괴기하게 씨익
웃었다.
"그 대답을 드리기 전에 우선 제 소개부터 하는 게
옳은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김협사야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요."
"누구한테서 들으셨는지요?"
"적두노사의 네 제자들에 관한 소문은 벌써 전토에
파다하게 알려졌지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시오? 김협사의 스승이 홀연히 어디론가
숨으시고, 또 제자들이 하산을 함과 동시에 보물지도
얘기와 더불어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짐작하십니까?"
"저도 아직 그 의문은 풀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떠벌리고 다녔다는 건 분명합니다. 소문을
낸 그가 누구라는 것도 아직 확실하지 않구요. 우선
그 문제는 당분간 덮어 둡시다. 의문은 언젠가
풀리겠지요. 그건 그렇고 제 소개를 하지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흔히 무림에서 굴림의자라고들
부르지요."
"의자를 굴린다는 뜻인가요?"
"그렇지요. 제가 외출할 땐 나무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굴러다녀야 하니까요."
그제서야 족제비는 점술가의 두 다리에 신경이
갔다.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애기발처럼 작고 가느다란
발이 바지 밑으로 조금 삐져나온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걸어다니거나 서 있는 자세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제가 혼자서 갈매기섬으로 갈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요. 김협사가 대신 가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나는 김협사가 황금을
찾아나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드리지요. 배와
또 딸려보낼 내 부하 몇 놈과......"
"그러나 내가 선생의 거동이 블편한 점을 기화로
황금을 실어와서 혼자 도망칠 수도 있다는 점을
가정해 보셨습니까?"
"물론 해 봤지요. 결국 김협사는 도망을 못갈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지요?"
"황금을 노리는 칼잡이들이나 내 부하들이나 심지어
나라에서 밀파시킨 암행군졸들까지 시퍼렇게 눈을
뜨고 감시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자 강도를
빠져나가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이번 일을 성취한 뒤 이 곳을
빠져나갈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있지요. 감족같이 사라지는 방법이 마련돼 있지요.
지금은 일러드릴 수가 없지만요."
"알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제가 갈매기섬으로
떠날 수밖에 없군요."
"그런 셈이지요. 황금이 묻힌 정확한 장소를 아는
분이 김협사밖에는 없으니까요. 더구나 출중한
무예까지 갖추었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적격자지요."
"과분한 칭찬의 말씀이옵니다. 그런데 저한테
딸려보내시려는 동업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요."
"양보다 질이겠지요. 튼튼하고 노련한 뱃사람 몇
명과 김협사가 직접 부릴 무사 한 명이면
족하겠지요."
"그럼 단둘이서?"
"숫자가 많아지면 배당금이 적어집니다."
"그렇지만 그토록 위험한......"
"위험하지 ㅇ다면 모험도 하지 않지요. 그럼 내일
정오에 다시 뵙겠습니다."
굴림의자라던 점술가. 그가 싹 돌아앉는 것을 보며
족제비는 점치는 동네로부터 물러나왔다.
착잡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도
같았다.
죽음에의 길이 될지도 모르는 갈매기섬으로 한사코
찾아가야 하는가. 보물지도를 되찾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삿갓에게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옳은가. 만일 삿갓이 이 쪽의 말을 진실로 믿어 주지
않을 경우의 반격에 대비하여 일전을 불사할 결심을
굳히는가. 차라리 굴림의자와 맞붙어서 쌈지를 되찾을
방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그것도 아니면
굴림의자와 삿갓을 싸움 붙여 한 쪽을 제거한 뒤에
강한 쪽에 붙어 보물이나 지도를 되찾을 방도를 찾는
게 또 어떨까......
그는 숙소로 되돌아가는 대신 주막 족으로 걸었다.
주막에 가서 무자리나 하나 끼고 푸욱 쉬고 싶었다.
그에게는 일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마다 여자에게 파묻히는 버릇이 있었다.
주막은 족제비의 눈앞에 즐비해 있었다.
"주모, 술 한 잔 마십시다요."
족제비는 큰 소리로 말하며 손님들이 앉아 있는
평상 쪽으로 향했다. 그때 이 쪽으로 걸어나오는
낯익은 사내가 있었다.
바로 동숙인인 삿갓이었다. 피차가 무슨 일로
강도에서 소일하고 있는지를 까마득히 알 수 없는
그런 사이였다.
족제비는 무작정 반가웠다. 함께 한 잔 나누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이 쪽의 눈치를 알아차린
삿갓은 남들 몰래 무심한 척 손짓을 했다. 삿갓
밑에서 빛나고 있는 그의 눈이 족제비의 얼굴을 훑어
지나치며 문 쪽으로 향했다. 때문에 그가 주모에게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족제비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필시 삿갓이
어떤 이유가 있어 모른 척했겠지만 족제비로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서 앉으세요. 어째 망연히 서 있기만 하셔. 자
자......"
주모는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며 족제비의 소매를
붙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한 상 잘 차려 보슈. 이쁜
무자리도 하나 잡아 올리구."
족제비의 지금 심사는 아무라도 걸치적거리기만
하면 한바탕 싸움질을 벌일 기세였지만, 주막의
술꾼들은 아무도 이 쪽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에그 손님두, 강도에 무슨 무자리가 있다구."
"앗따, 사람 사는 곳에 여자 없을라구. 과부라도
하나 사 오지 그래?"
"과부라면 더 귀하지요. 손님, 정말 애 하나 불러
드릴까?"
주모는 갑자기 은근해져서 족제비를 끌었다.
"글쎄, 아무나 불러 오라니까. 치마통만 걸쳤으면
누구라도 괜찮다니까."
"그렇지가 않지. 알짜 한량들은 반드시 가려서
잡아먹지...... 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주모는 그새 해라를 하며 족제비의 눈치를 살폈다.
"별당이 있으면 좋겠는데. 다섯 냥이면 너무
후한가?"
"어서 짐이나 푸셔, 무사 양반......"
족제비는 주모가 이끄는 뒷채로 들어갔다.
그는 정작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점복가가
도화살이니 뭐니 일러 주던 얘기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사를 잊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럴 동안 주막 밖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막을 벗어나온 삿갓은 누군가를 열심히 뒤쫓고
있었다. 상대는 강도에서 처음 보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의 몸짓과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대단한 무예를 지닌 자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어다. 술을 마시다가 낮은 토담
너머에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그를 발견한 삿갓은
필시 그 자가 찾고 있는 족제비가 틀림없다고 믿어
버렸다. 마악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쫓아 나가려던
순간에 주막으로 들어서는 족제비를 만났던 것이다.
낯선 사내는 북쪽 해변을 향하고 있었다. 소나무가
울창한 오솔길을 조심스런 태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삿갓은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낯선 사내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해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누군가를 뒤쫓고 있는 태도였다.
'거 이상하군. 도대체 누굴 뒤쫓고 있단 말인가!'
어느덧 사내는 해변에 다다랐다. 그 쪽은 암벽이
무서운 모습으로 우뚝우뚝 소아 있는 곳이었다.
사내는 낮은 바위 뒤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살그머니 돌아나가고 있었다.
"게 누구냐!"
해변에는 또 다른 사내가 있었다. 그 쪽에서 먼저
인기척을 느끼고 소리친 듯했다. 낯선 사내는
대꾸없이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삿갓은 낯선 사내가 멈춰 섰던 바위 뒤로 숨으려다
말고 얼른 소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멀리서도 그들의
수작이 분명하게 엿보였다.
어느새 둘은 칼을 빼들고 싸우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무슨 이유로 싸우는지 둘 사이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어쨌건 그들의 칼부림은
장관이었다. 최고수의 무술이었다.
거의 스무 합이나 부딪치고 나서였다. 먼저
도착했던 사내가 쓰러지고 있었다. 낯선 사내는
칼날에 묻은 핏자국을 쓰러진 사내의 몸에다 두어
차례 씻어낸 뒤 천천히 납검하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내 뒤를 쫓아온 놈도 나서 보시지!"
낯선 사내는 소나무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삿갓은 상대의 예민한 기(氣)가 아주 당연하다고
느꼈다. 저 정도의 무예라면 백 보 거리의 기척은
충분히 잡아낼 만한 수준이라고 믿고 있었다.
삿갓은 소나무 위에서 한 바퀴 회전을 돌며 사뿐이
뛰어내렸다. 벗겨져 공중을 날고 있는 삿갓은
뛰어내리며 나꿔채어 발이 땅에 닿기 전에 되찾아
썼다.
"숨어 있었던 게 아니오. 당신들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뿐이오."
삿갓은 사내 앞으로 나서며 먼저 말했다.
"웬놈이야?"
낯선 사내가 물었다.
"놈 놈 하지 마시오. 당신만큼은 나도 칼을 만져
봤소이다. 전연 수 인사도 없이 상대를 욕한다는 건
무사로서 결례가 아니겠소?"
"......미안하게 됐소. 그래, 무슨 일로 나의 뒤를
밟아 왔소?"
"당신의 칼솜씨를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오."
"뭣이?"
"저 자를 왜 죽였는지 몹시 알고 싶군."
낯선 사내는 얼마 동안 삿갓을 노려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건 몹시 거슬리지만
질문에는 대답해 주겠소. 당신도 여기 죽어 자빠진
자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고, 만일 그렇다면
당신도 무사할 수가 없을 테니까. 다만 조건이 있소."
"말해 보시오."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당신도 무슨 일로
나를 미행했는가를 솔직하게 마래 주어야 공평할 것
같지 않소?"
"그러지요."
"그럼 말하리다. 나는 강도에 와서 보물을
찾는답시고 얼쩡거리는 놈은 어떤 놈이든 베고 있소."
"그럼 저 자도 보물을......?"
삿갓은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소. 죽기 직전에 그렇다고 실토했소. 설마
당신도 황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자는 아니겠지요?"
"그렇다구 대답하면 어떻게 되오?"
"내 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건 겨뤄봐야 아는 거구. 자, 그러면 당신의
질문에 내가 답변할 차례군. 나는 당신이 내가 찾고
있는 놈인 줄 알았소. 그래서 뒤쫓아 왔을 뿐이오.
그러나 당신이 내가 찾는 족제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소."
"이제 막 뭐라고 말했소?"
"당신이 족제비 김해간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는
얘기요."
"족제비!"
"왜 그토록 놀라시오? 그 놈을 잘 알고 있소?"
"......무엇 때문에 그를 찾고 있소?"
"그 놈이 보물지도를 간직하고 있거든. 바로 그
놈을 잡아야 돼. 당신도 보물을 찾는 모든 놈들을
베겠다구 이유도 알쏭달쏭한 칼부림을 하고 있지만,
그선 아무 뜻도 없는 살인에 지나지 않소. 보물지도
없이 갈매기섬으로 건너가 봐야 어차피 살아서 돌아올
수가 없거든. 아직 살아나온 자는 한 놈도 없으니까."
낯선 사내는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족제비가 지금 강도에 와 있다는
말이요?"
"틀림없소. 어떻소? 당신도 그 놈을 찾고 싶은가
보군."
"보물지도가 족제비 손에 들어있다는 소문이
확실하오?"
"확실하지. 적두노사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임무를
맡길 때 보물지도가 든 검정 가죽쌈지를 족제비한테
맡겼거든."
"그건 누구한테서 들었소?"
"내가 왜 소문의 출처까지 말해야 하지?"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런 다음에 확실하게
갈매기섬으로 떠날 생각이오. 그건 그렇구, 당신은
보물에 눈독 들이고 있는 나도 벨 작정이오?"
"아니오, 생각을 바꿨소. 나도 우선 족제비부터
만나야겠소."
"그건 안돼. 그 쌈지는 내 손에 들어와야 돼.
당신은 손대지 마시오. 경고해 두지만 만일 족제비의
보물지도가 당신 손에 들어가는 날 당신 생명도
온전치가 못할거요."
"말이 지나치시오. 이런 얘기가 오가지 않았으면
벌써 당신 목숨은 내 칼에 결딴났을걸? 자, 난 먼저
가 보겠소."
"기왕에 이렇게 만났으니 서로 통성명이나 하고
헤어지는 게 어떻소?"
"내가 족제비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오. 인사는
다음에 하지. 다시 만나게 될 거요......"
낯선 사내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동안에도 족제비는 세상
모르고 폭음을 했으며, 무자리까지 끼고 질탕하게
정사를 나누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머리가 몹시 아팠다.
그런 와중에서도 굴림의자와 만나기로 약속한
정오가 되지 않았나 해서 허둥거렸다. 그러니까
계산하고 판단하고 결론지을 수 있었던 모든 시간적
여유를 술과 여자에게 허비한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는 흐리멍텅한 머리로 점복집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그를 미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굴림의자는 예의 그 자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일을 시작해야지요?"
족제비가 상대를 떠보는 기분으로 먼저 ㅇ을
열었다. 굴림의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혀만 끌끌
찼다.
"그새 마음이 변했소?"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사정이 변했소."
"무슨 뜻이오?"
"살해당했소."
"살해당하다니. 누가?"
"당신과 함께 갈매기섬으로 떠날 차비를 차리던 내
부하놈이 말이오."
"언제 그랬소?"
"어제 저녁 때인 것 같소."
"어디서?"
"배를 숨겨둔 곳이오. 북쪽 송림 밖 해변에서."
"누가 그랬소?"
"그걸 안다면야 벌써 복수를 했겠지. 허나 그 놈은
무예가 상당한 놈이었던 것 같소. 내 부하놈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쉽사리 당한 걸 보면. 더구나 무엇 때문에
내 아이를 베었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단 말이요. 벤
이유를 한시바삐 알아 보라고 다른 녀석들을 풀어
놓긴 했지만. 김협사는 혹시 짐작가는 바가 없소?"
"전혀......
"낭팬걸."
"그럼 계획을 포기하는 거요?"
"천만에. 며칠 동안만 연기할 뿐이오. 나도 이런
실패는 처음이오. 필시 어떤 임무를 가지고 강도에
나타난 자인 듯 싶소. 그렇지 않고서야 어부를 가장한
내 부하를 함부로 죽일 이유가 없거든."
"만일 계획이 포기되면 당신은 내 쌈지를 돌려줄
생각이오?"
"계획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을 뿐더러, 황금을
꺼내오는 날까지는 보물지도를 돌려줄 계산도 전혀 해
보지 않았소."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거요?"
순간 굴림의자는 긴장하는 듯했다.
"당신 미행당하지 않았소?"
굴림의자의 말에 족제비도 긴장하며 바깥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다가 미닫이문을 왈칵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신경과민이었던 것 같소."
"그럴지도 모르지만...... 만일 누군가가 바깥을
엿보고 갔다면 그는 필시 무예의 고수일 거요. 평범한
손님으로서는 그토록 날렵한 몸놀림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혹시 내 부하를 벤 놈이라면......
어쨌건 괜찮소. 적어도 내가 이 방에 앉아 있는 한
난공불락이니까."
점복가는 다시 심술궂게 웃었다.
"나는 돌아가 있겠소."
족제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고만 싶었다.
"그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구려."
"뭘 말이오?"
"죽은 내 부하놈을 대신할 믿을 만한 동업자
말이오."
그때였다. 밖에서 노골적인 인기척이 들려왔다.
굴림의자와 족제비는 긴장하며 재빨리 방어태세를
취했다.
"밖에 누구냐?"
굴림의자는 소리쳤고, 어느새 그의 손바닥에는
바늘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족제비 역시 벽
쪽으로 붙어서서 환도를 빼들고 있었다.
"동업자요."
바깥으로부터 들려온 소리였다.
"동업자?"
"당신들의 얘길 모두 엿들었소."
"비겁하게 남의 사정을 정탐이나 하고 다니는
인간과는 동업을 할 수 없소. 누군지 썩 나서서
정체를 밝히시오."
"아아, 아직 방문을 열지 마시오."
"뭐라구?"
"당신의 수리검치기와 바늘뿌리기의 명수요."
"잘 알고는 있구먼."
"그걸 나한테 뿌리면 내 눈이 멀 가능성이 있지."
"그래서?"
"그래서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거요. 더구나
당신은 거기 죽치고 앉아서 난공불락이니 뭐니 하고
떠들고 앉았지만 너무도 맹랑한 소리인 것이오."
"이 놈이 감히!"
"앉은뱅이 주제에 내가 화공법(火攻法)을 사용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당신은 속절없이 타 죽은
멧돼지 신세가 되는거요."
"저 놈이!"
"사이좋게 협상을 합시다. 조금 전에 당신들은
동업자를 구하고 있지 않았소?"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냐?"
"삿갓이오."
"뭣이?"
소리친 것은 족베비였다.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다 싶었다.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거만한 젊은 무사 박진. 그의 무예는 대단히 무섭다.
그가 이 쪽의 정체를 깨달은 이상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몹시 궁금해졌다.
"어떻게 하겠소? 당신들이 나를 해치지 않고, 나
역시 당신들과 손을 잡는다는 조건만 합의되면
오손도손 함께 앉아 일을 수월하게 꾸밀 수도
있겠는데."
굴림의자가 먼저 입을 떼었다.
"천하의 굴림의자와 무림의 명사 족제비가 무엇이
겁나서 나를 경계하는 거요?"
"실상은 그렇지......"
굴림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족제비가
말했다.
"무장을 풀고 조용히 들어오시오."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삿갓은 스스럼없이 걸어
들어왔다.
"난 또 산형술(散形術)이나 부리면서 우리를 조롱할
줄 알았지."
굴림의자의 말에 삿갓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는 삿갓을 벗었다. 맑은 이마에 눈빛이 형형했다.
"그 유명한 삿갓을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소.
지리산에서 십 년 수련으로 무예의 달인이 된 한
젊은이가 한양으로 들어 온다는 소문은 일찍이
들었소. 그런데 강도에까지......"
굴림의자의 정중한 말에 오히려 족제비만 옆에서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렇게도 유명했던지
동숙인이면서도 까마득히 몰랐다는 게 한심했다.
삿갓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굴림의자의 말에
대꾸했다.
"실력보다 소문이 훨씬 많이 난 거지요. 강도로
건너온 건 젊은 놈이라면 한번쯤 모험을 걸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도움이
되실 것 같으면 저도 한몫 끼워 주시지요."
족제비는 각기 다른 꿍꿍이속을 가진 사내들이 모인
이 3자회담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저, 김협사께 먼저 사과를 드려야 되겠군요."
삿갓은 생각에 잠겨 있는 족제비를 일깨웠다.
"사과라면 오히려 제가......"
족제비는 황급히 대꾸했다.
"협사께서 족제비란 사실은 뒤늦게사 알게
되었습니다."
"예? 언제부터?"
"물론 강도로 한께 건너올 때까지는 까마득히
속았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알아차라미 거지요."
"그럼 왜 내가 족제비란 걸 알면서도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지요?"
"보물지도를 잃어버린 족제비란 나한테는 무의미한
존재였으니까요. 미안합니다."
"아, 그렇게 됐군요."
"지도를 찾을 때까지 관망만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자 굴림의자가 얼른 끼어들었다.
"전부터 두 분이 친교가 있던 사이였군요?"
"동숙인이죠."
"예에?"
삿갓의 말에 굴림의자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의
용의주도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족제비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장작
장본인이 나타나지 않기에 동숙인인 김협사에게
의심을 품어 봤지요. 역시 예측이 맞았습니다.
그때부터 유심히 감시하던 중 검정 가죽쌈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탐지해 냈지요."
"그래서요?"
족제비가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아주 우연히 이상한 인물을 만났지요."
"이상한 인물?"
"나는 그가 바로 족제비이거나 지도를 훔친 자가
아닌가 하고 뒤쫓았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주막에서
김협사를 만나 그냥 지나친 것도 그를 뒤쫓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를 붙잡았나요?"
"무슨 짓을 하려나 하고 가만히 미행했더니
느닷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겠습니까?"
"살인을!"
굴림의자가 내뱉았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엿듣고 깨달았지만 굴림의자
선생의 부하는 그 놈 손에 죽었습니다."
굴림의자는 끄응 하고 신음했다.
"왜 죽였답니까?"
"보물을 찾느라고 얼쩡거리는 놈들은 무조건
벤다나요?"
"그래서 박협사께서는 구경만 하셨습니까?"
"싸움을 피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왜 피했을까요?"
"족제비란 이름을 들먹였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를 찾으러 부리타케 도망쳤지요."
"거, 이상하군. 그 놈이 누굴까?"
"어쨌건 별의별 이상한 칼잡이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해졌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굴림의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맥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삿갓은 여전히 떠벌렸다.
"그 놈이 족제비가 아니라면 김협사가 족제비인 게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밤에 숙소로 돌아오시지
않기에 주막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뒤쫓아온 거지요.
굴림의자선생이 제자를 시켜 그 절묘한 소매치기
수법으로 김협사의 쌈지를 훔쳤다는 건 정말 천만
뜻밖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나로선 어제의 그 괴한
덕분에 두 분과 동업자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만......"
삿갓은 이미 동업자가 된듯이 행동했다.
족제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쌈지의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주인인 양 행동할
수 없었다.
보물지도는 지금 굴림의자의 품 속 깊숙이
감추어져서 보물을 찾아오지 않는 한 되돌려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보물을 찾아 버림으로써 그것이
휴지쪽지가 된다 해도 쌈지를 보관하라던 사부의
엄명이 있는 한 그것은 되찾아야 되는 물건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굴림의자의 말대로 갈매기섬을
다녀와야 한다.
그리고 저 젊고 거만하고 무서운 검객 삿갓 역시
그의 집요함으로 보아 보물섬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이 쪽을 위협해서라도 앞장세워
갈매기섬으로 건너가자고 할 것이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졌다. 보물을 찾으러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 섬으로 건너가는 일만 남았군요."
족제비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지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까마귀떼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듭니다. 황금을 찾으려는 자, 게다가
금을 찾는 자를 베러 온 녀석, 별별 사내들이 강도로
모여들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굴림의자 선생도 함께
가시죠."
여전히 힘있는 목소리는 삿갓뿐이었다.
"나는 배편만 마련해 드리고 그냥 여기에
남겠습니다."
굴림의자가 손을 저었다.
"제가 금을 찾은 뒤 김협사를 따돌리고 혼자
도망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삿갓은 위협하는 말씨로 물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굴림의자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왜 그렇지요?"
"강도를 감쪽같이 빠져나가는 길은 나밖에
모르니까요."
"그러고 보면 우린 모두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약점을 붙잡고 있는 셈이군요."
"그렇지요."
"차제에 우리가 일을 성공시킨 뒤 금을 배분하는
문제까지 거론해 두는 게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약속은 분명해야 되겠지요. 삼등분이
가장 공평하겠지요?"
굴림의자는 싫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삿갓이 잘라 말했다.
"그 쪽 현지 사정이 어떨는지 모르지만 보름 내로
돌아오셔야 되겠습니다. 보름 뒤가 바로 만조가
되니까요. 그쯤 알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겠습니다."
이튿날 출발하기로 정하고 족제비와 삿갓은
굴림의자의 점복집으로부터 물러나왔다.
족제비는 어쩐지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죽음에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하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끼며 그는 무작정 주막을
향하고 있었다.
3. 물보라
개골산 명연담 근처.
소년 왕천(王天)이 나무막대기를 쥐고 계곡을
건너뛰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선 암벽을 기어올라
등성이 쪽으로 내닫는다. 숨이 가쁘다. 며칠 전부터는
사부님의 지시에 따라 양쪽 발목에다 모래주머니까지
매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참아내야 한다. 왕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등성이 위에는 자작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씨가 뿌려지고 싹이 터서 점점 자라더니
가을쯤에는 제법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왕천은 팔짝 뛰어서 나무의 키를 넘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쉽사리 뛰어넘을 수가 있었는데,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감고부터는 도무지 날렵하게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왕천은 한사코 그것을 해내려고 했다.
사부님이 시키지 않더라도 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자작나무의 키를 넘을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오는 하산하지 않겠노라고 결심도 했다.
그래서 무거운 발이 나뭇가지에 걸려 나뒤굴어지고,
바위에 부딪쳐 무릎이 깨어지고, 모난 돌에 맞아
팔굽에 피가 흘러도 왕천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늘을 힘껏 날았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야 한다.
누군가가 가족을 몰살시켰다.
복수다. 자신의 일가족 모두를 살해한 그들을 베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어려움쯤은 버텨내야 한다.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시련이 남아 있을 터인데 벌써
지쳐 나자빠진다는 건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용서치
않는다.
"이건 시작에 지나지 않는 훈련이다. 요 정도의
첫걸음에 이길 자신이 없으면 보따리를 싸 들고 산을
내려 가거라!"
사부님의 엄한 질타가 없더라도 그만 둘 왕천은
아니었다. 가슴 속에서 복수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며
수월하게 놀고 먹을 수가 있겠는가?
"예잇!"
왕천은 공중을 휘익 날며 목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허공만 갈랐다. 큰 소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를
두들기기에는 너무나 까마득하다. 다시 시도한다.
"야아아앗!"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심하게 나뒹굴어진다.
"무술은 언제부터 배워 주실까?"
왕천은 엎어진 자세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든 걸
어서 배우고 싶은 만큼 그의 마음은 항상 조급했다.
"아직 칼쓰는 법을 배워서는 안된다. 몸쓰는 법부터
먼저 익혀야 한다."
언젠가 혼자서 나뭇잎사귀를 베고 있을 때 뒤로
다가온 사부께서 한 말이었다. 그 분은 이렇게
훈계까지 하셨다.
"무도(武道)의 최대 미덕은 참고 견디는 데에 있다.
그래서 무(武)란 차라리 평화인 것이다. 본래
창[戈]을 멈춘다[止]는 뜻에서 온게 아닌가. 오로지
증오심만으로 무모하게 돌진만 하려드는 너의 행동은
용(勇)과는 거리가 먼 폭(暴)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다시 해보라......"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천천히 익히라 했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고
응어리진 증오심을 풀었다면 이런 고통의 나날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왕천은 이 곳으로 와서 사부를 만나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잠깐 떠올렸다.
왕천의 부친은 우왕(禑王)의 조카로서 초야에 묻혀
지내던 전 상서령(尙書令) 왕각(王珏)이었다.
어느 날 밤에 이상한 젊은 남자가 찾아들었다.
부친은 그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왕천은 두 사람의 거동에서 심상치 않은 무엇을
느끼고 살금살금 뒤따라가서 장지문 밖으로 엿듣게
되었다.
"주위의 사람을 물리쳐 주십시오."
젊은이가 꺼낸 첫 마디였다.
"이 집에는 외부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소. 설사
엿듣는다 해도 우리집 식구겠지요. 최협사를 뒤따라온
그림자만 없다면요."
부친의 말이었다.
어린 왕천의 마음에도 방 안의 젊은이가 예사
무예를 지닌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되어 가슴이
덜컹했다. 그는 이 쪽의 작은 기미를 벌써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최협사라는 젊은 무사는 조용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새 사직은
왕씨(王氏) 일족에게 새 삶터를 마련해 주겠다는
거지요?"
"그걸 믿어도 좋을 것 같소?"
"제 소견으로는 반반입니다."
"나로선 저들의 권고가 믿음직스럽지가 못하오."
"그러시다면 가족을 데리고 일시 피난하심이
어떠하올지요?"
"그건 결코 쉽지 않소. 벌써 개경은 겹겹이 저들의
첩자들로 둘러싸여 있소. 도망치다 붙잡히면 더욱
극형을 면키 어렵소."
"하지만 가민히 앉아서 당하느니 무슨 수라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친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가 불행한 상황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지
저들에게도 일말의 자비심이 있을지도 모르겠소. 정작
새 삶터를 마련해 줄 지도 모르지 않소."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위험한 도박이라면......"
"포은 선생과 최영 장군의 남은 측근들까지도
그들은 몹시 귀찮아 하고 있소. 때문에 우리 왕씨들과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따로 떼어 놓을 생각인 것
같구려."
"아마 작은 섬으로 모두 보낼 생각이겠지요?"
"그런 소문은 이미 들었소."
"그러시다면 저들의 권고가 있을 때까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소인으로서도 대감의 저택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차제에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무얼 말씀이옵니까?"
"내 외아들 천이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일을
최협사께서 대신 좀 수고해 주시지 않겠소?"
"대감의 분부시라면 무슨 일인들 거역하겠습니까.
더구나 제 사부님께서는 대감의 부탁을 어김없이
받들라는 엄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박연폭포까지만 벗어나면 안전할 거요. 천이를
맡길 만한 곳이 있어서 그렇소만......"
부친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일어나더니 책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아이의 소지품이오. 천이를 불러
오겠소. 오늘 밤 안으로 데리고 떠나 주시오."
"아버님, 소자 여기 있사옵니다."
장지문 밖에서 나는 아들의 대답에 왕각은 깜짝
놀랐다.
"네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느냐?"
"왕손의 법도로 엿듣는다는 것이 나쁜 일인 줄
아오나 일이 초미한 것 같사와 부득이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때가 때인지라 왕각은 아들의 잘못을 엄하게
다스리고 싶지가 않은 듯했다.
"어서 들어오너라."
왕천은 쪼르르 달려가 부친 앞에 꿇어앉았다.
"너를 박연폭포까지만 데려다 주실 분이다.
인사드려라."
왕각은 아들을 최협사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이 장검은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다. 잘 간수하여라."
"부모님은 어떻게 하시고 저 혼자 떠나라는
것인지요?"
"사내놈이 부모와 잠시 이별하는 걸 가지고 그따위
마음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가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그때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이는 듯했다. 최협사가
먼저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잠깐 나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최협사가 나간 뒤 부친은 왕천에게 서둘러
타일렀다.
"앞으로 어떻게 사태가 바뀔지 모른다. 우리에게
무슨 변고가 있겠느냐마는, 만에 하나 너한테까지
허망한 일이 일어나서야 되겠느냐. 개골산 명연담으로
이 서찰을 가지고 가서 시각(施覺)대사를 뵈어라.
너를 잘 이끌어 주실 것이다."
바깥을 정탐하러 나갔던 최협사가 황급히
달려들어왔다.
"놈들이 왔나 봅니다."
"아니, 벌써?"
"일이 초미해진 것 같습니다. 어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서둘 건 없소. 내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인도해 주리다. 뒷일은 최협사만 믿을 수밖에 없소.
아들을 부탁하오. 때가 이르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소. 자, 봉창문으로 나가면 후원이 있을 것이오.
은행나무 밑을 보면 작은 굴이 감춰져 있소. 이런
때를 대비해서 몰래 파 두었소. 깊은 오십 보 밖 송림
속으로 나있소. 감시꾼들을 조심하기 바라오.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테니까 가급적이면 멀리 떠나
있기를 부탁하오......"
왕각은 최협사와 아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왕천이 본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송림을 빠져나와 최협사와 왕천이 숨은 곳은 들판의
외딴집이었다. 먼 데서 군졸들이 횃불을 들고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도련님은 꼼짝 마시고 여기 계십시오. 개경을
탈출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설사 누가
여기로 닥치더라도 들켜선 아니 됩니다. 위급하다고
생각되시거든 외양간 대들보 위로 올라가 숨으십시오.
바삐 돌아오겠습니다."
최협사가 떠난 다음부터 어린 왕천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폐가의 문이 어둠 속에서 삐걱거릴
때마다 도깨비가 나오는 것같은 착각으로 몇 번씩이나
까무라칠 뻔했다.
바람소리에도 혹시 군졸들이 잡으러 오지 않았나
해서 오금이 저렸다. 다리를 깨물고 지나가는 들쥐
때문에 비명을 지를 뻔도 했다.
부모님은 어찌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어린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불안과 공포와 굶주림과
수면부족으로 왕천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왕천은 잠깐씩 새우잠을 잤다.
최협사가 돌아온 것은 이틀 수 한밤중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사람의 목소리에 왕천은 후딱 깨어났다. 앞에 우뚝
서 있는 자의 목소리는 분명히 최협사였지만,
희끄무레한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분명히
노인이었다. 그의 행색까지도 희한했다.
"앗!"
왕천은 속절없는 비명을 질렀다.
"놀라지 마십시오. 잠싼 변장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 당신은......"
"예에. 감시가 하도 심해서......"
노인으로 변장한 그는 틀림없이 최협사가 분명했다.
"간 떨어질 뻔 했어요."
최협사는 관곽이 얹힌 지게를 풀어내렸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개경을
벗어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관곽쟁이
영감이 되는 것입니다. 도련님은...... 도련님은
대단히 죄송하오나 강아지가 되십시오. 이 관곽 속에
들어가 누우셨다가 바깥의 동정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되실 때만 강아지 울음소리를 내십시오. 무사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으니 용서하시고 잠깐만
참으십시오."
왕천은 그까짓 거야 별로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궁금한 건 다른 일이었다.
"제 부모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유별난 변고야 있겠습니까. 무사하실 테니
걱정마시고 어서 관곽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부모님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들으셔도 늦지 않으십니다. 자
빨리......"
왕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언가 불길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서는 사실상
그런 걸 깊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왕천은 관곽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뚜껑이
닫혀졌다. 최협사가 주먹으로 가급적 소리를 죽여
뚜껑을 때려박고 있었다. 얼마간 갑갑하기는 했지만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몇 군데 보이지 않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지요."
최협사가 일어서고 있었다.
"이 관짝은 어디서 구했소?"
왕천이 속에서 물었다.
"관곽은 목수집에서 훔치고 수염은 사당패들한테서
훔쳤습지요. 자 이제 바깥으로 나갈 테니 제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는 어떤 소리더 내선 안됩니다."
관곽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잴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더더구나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최협사가 무사히 폭포까지 데려다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만 거기서부터는 새로운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부친의 또다른 엄명이 있었다. 개골산까지는 혼자
걸어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먼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일에 비하면 지금의 이런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최협사의 무예는 대단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듬직하게
느껴졌다.
누구의 가병들인지는 모르지만 한바탕 칼싸움이
지나가고 있었다. 비명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 전율스런 순간들이 왕천에게는 사뭇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는 관곽 속에서 최협사의 신분을 듣고
알았다. 부친도 일러주지 않던 비밀이었다.
소년 왕천은 모래주머니가 달린 무거운 다리를 들어
다시 자작나무를 넘고 등성이를 치달렸다.
물론 아직까지 사부께서 무예를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어쩌면 영영 가르쳐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왕천이 부친의 서찰 하나를 품에 넣고 개골산에
은거하고 있는 시각대사를 천신만고 끝에 만나게
되었을 때, 대사는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몇 번 좌우로 저었다.
"사부님으로 뫼시라 하셨습니다. 무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잔심부름이나 시키는 사부에게 참다 못한 왕천이
어느 날 대들 듯이 말했다.
"무어? 무술을 가르쳐 달라구?"
"예에. 무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어린 왕천의 눈은 증오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술은 배워서 무얼 하려느냐?"
"무사가 되겠습니다."
"무사가 되어서는?"
"나쁜 자들을 베겠습니다."
"나쁜 자들이란 대체 누구인가?"
"저의 가족을 몰살시킨 자이옵니다."
"그렇지가 않다. 나쁜 자는 따로 있다. 너의 가족을
몰살시킨 자가 아니라 세상의 불의(不義)가 너의
원수였느니라."
"예에?"
"그 뜻을 몸소 깨닫기 전에는 손에 막대기 하나도
대어서는 안된다."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불인(불인)의 검자(검자)는 자신의 칼에 스스로의
몸을 상처낼 뿐이다."
"......?"
"더욱 큰 뜻을 품어야 한다. 더욱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리는 법부터 배워라."
"......?"
"너는 벌써 무예를 닦고 있는 중이다......."
시각대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앉았다. 어린
왕천으로서는 사부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어언 일년이 지난 것이다.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아 주고 자작나무나
뛰어넘게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린 왕천은
오로지 복수심 하나만으로 그런 고난의 순간들을 버텨
나갔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이 수없이 일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유달리 갈 곳도 없었던 것이다.
왕천의 또다른 의문은 부친과 시각대사와의
관계였다. 단 한번도 어떤 관계인가를 이 밖에 낸
적이 없었다. 부친의 서찰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모르는 한, 의문을 풀 길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각대사가 과연 무예를 알고
있는가조차도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떠나올 때
부친으로부터 그에게서 글공부와 무예를 열심히
배우게 될 것이라는 언질은 받았지만, 사부가
대막대기 하나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무예를 아예 가르쳐 줄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해서 왕천은 답답하기가 이르 데 없었다.
그런 무료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왕천은 드디어 사부 앞으로 불려 나갔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가르쳐 주겠다."
"예? 정말이옵니까?"
기쁨으로 눈이 반짝 뜨여지는 왕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각대사의 눈에는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도 무예공부가 소원이었더냐?"
시각대사의 말에 왕천은 두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너무나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시각대사는 두어 번 머리를 끄덕였다.
"자작나무는 열심히 뛰어넘었느냐?"
"하루도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자라서
힘에 벅차옵니다."
"모래주머니를 풀고서 뛰어 봤느냐?"
"명령이 없었기에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함께 그 곳으로 가 보자."
그래서 둘은 등성이로 올라갔다.
"어서 뛰어 보아라."
왕천은 이를 악물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앞으로 내달았다. 자작나무의 중간 가지에 걸려
왕천은 엎어지고 말았다.
"다시 해 보아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천은 숨을 헐떡거렸다.
정강이가 석편에 찔려 피가 흘렸다. 사부는 모른
척하고 다시 명했다.
"모래주머니를 풀고 뛰어 보아라."
왕천은 시키는 대로 했다. 이번에는 한 마리의 잽싼
매처럼 자작나무 위로 날았다.
"됐구나."
"몸이 날 것처럼 가볍습니다."
"그러면 저 쪽 바위 위로 가서 앉아 보아라."
사부는 편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자, 이런 자세로 앉아라."
사부가 가부좌(跏趺坐)를 하며 왕천에게 일렀다.
"숨이 가쁘냐?"
"예. 나무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그 가쁜 숨을 붙들어야 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힘이 숨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백 리를 뛰고 나서도
헐떡거리지 않아야 진정한 무예자라 할 수 있느니라.
우선 배꼽 아래 하복부에다 힘을 주어라. 건강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단전(丹田)호흡법이로군요."
"아는 체 마라. 정신을 집중해서 내 말을 잘
들어라. 서 있는 인간의 중심이 바로 단전이다. 모든
힘의 근원은 단전에 있고, 모든 활동은 단전에 중심을
두고 있다. 강해진 단전의 힘의 중심을 두게 되면
정신이 맑아지고 사물에 놀라지 않게 되며 기민한
인품을 가지게 된다. 뭐든지 머리로만 해결하려 드는
경우엔 머리만 커져서 버티고 하반신에 힘을 주는 걸
잊게 된다. 이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병의 근원이
된다. 제대로 좌상(坐像)이 안정되면 다음 훈련을
계속할 것이고......"
왕천의 본격적인 무예훈련이 시작되었다.
왕천이 갓난아기였을 때 복관(卜官)이 사주(四柱)를
풀어 올린 일이 있었다. 처음에 복관은 계해(癸亥)년
오월 열 이튿날 축(丑)시에 태어난 왕천의 사주를
풀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왕각의 엄며에 따라 복관은 어쩔 수 없이
왕천의 사주를 이렇게 점쳐 올렸다.
"파성(破星)이 운명이 비치니 파가하고 천리타향
떠나다 귀인을 만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수성조명(壽星照命)하니 장수할 것이고, 날이 갈수록
권세와 귀함이 도련님을 감쌀 것입니다."
그만하면 좋은 운명을 타고났을진대 복관이 어두운
얼굴로 사주 해설을 회피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왕각은 사뭇 궁금했었던 것이다.
다시 봄이 왔을 때 시각대사는 왕천에게
나무막대기를 손에 쥐게 했다.
"자, 뒷마당으로 나오너라."
왕천은 좋아라 하고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칼쓰는 법을 가르쳐 줄 낌새가
아니었다.
"내 앞에 마주 서 보아라."
"그렇지만......"
"어려워할 것은 조금도 없다. 어서 그 나무토막을
칼이라 생각하고 나를 견주어라."
왕천은 지팡이를 짚고 선 사부를 향해 나무막대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칼 쓰는 법을 한 번도 배운 적은 없지만 사부 몰래
산등성이를 뛰며 풀과 나뭇잎을 베고 나는 벌레를
쳐서 떨어뜨린 기억은 수없이 많았다. 때문에 앞에 선
스승이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머리나 어깨를 때려
맞힐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디 때릴 만한 곳이 보이느냐?"
"예, 모두가 헛점 투성이입니다."
"그러면 때려 보아라."
"그러시다면......, 에잇!"
왕천은 사부의 왼쪽 어깻죽지를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사부는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칼이 빗나갔구나. 다시 해 보아라."
왕천은 다시 이를 앙다물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힘차게 사부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아......"
왕천은 탄식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나무막대기는
허공 속에서 공허한 바람소리를 내며 땅을 때리고
있었다.
"모두가 헛점 투성이로 보인다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닙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아주 조그맣게
보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 마음이 작기 때문에 내가
작게 보일테지. 다시 해 보아라."
이번에는 나무막대기를 다른 방향에서 내지를
궁리를 했다. 그래서 왕천은 사부의 오른쪽 허리에서
수평으로 나무막대기를 뻗었다.
"에잇!"
사부는 여전히 꿈쩍 않고 서 있는데도 나무막대기는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용서하십시오. 내 눈에 보인 상대의 헛점이 실상은
자신의 헛점인 것을 이제사 깨달았습니다."
왕천은 막대기를 내던진 후 꿇어앉았다. 사부는
잠깐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왕천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자, 일어나거라. 네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그것이 지금은 중요하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면 더욱 좋다. 우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너는 이제야말로
붓끝에 먹물을 찍어 흰 종이 위에다 마악 사군자라도
친다고 생각해라. 저기 바위가 보이는구나."
사부는 왕천을 작은 바위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소매 속으로부터 콩 한 알을 꺼내어 바위 위에다
놓았다.
"이게 무어냐?"
"작은 콩알이옵니다."
왕천은 뜨악한 시선으로 사부와 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마나 크게 보이느냐?"
"새끼손가락 끝을 벤 것만한......"
"작은 사물을 작게 본다는 건 정직한 마음이다.
그러나 무사에겐 그러한 생각이 적당치가 않다.
손톱만한 물건을 집채만큼 크게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예에?"
왕천은 사부를 우러러 보았다.
"너는 오늘부터 막대기를 치켜들고 저 작은 콩을
들여다 보아라. 몇 날 며칠, 아니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마음을 집중해서 저 콩알을 노려보아라.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저 콩알이 바위만큼 크게 보이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이 둔탁한 막대기로
콩을 내리쳐 두 쪽으로 갈라낼 수가 있을 것이다. 자,
당장 시작하도록 해라......"
왕천은 그의 일과 중에서 바위 위에 놓은 작은 콩을
노려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막대기를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채 그 콩이
커다란 바위처럼 보일 때까지 노려보며 끝없이 서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어느 날 왕천은 시각대사의 서재로 불려갔다.
사부는 종이를 꺼내놓고 붓 끝에 먹물을 찍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왕천은 곁에 굻어앉아 사부가 그리고 있는
동그라미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무엇 때문에
원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그라미가 전혀
모나지 않고 완벽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신기할 뿐이었다.
"이게 무어냐?"
사부는 붓을 놓고 왕천을 쳐다보았다.
"동그라미올습니다."
"그릴 수 있겠느냐?"
"그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것이다. 다만 마음과 몸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는 한 둥글게 그릴 수 없다는 사실만은 속일 수가
없다."
사부는 어린 제자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 보았다.
총명한 소년이었다.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 이치를
깨달았다. 증오심으로 이글거리던 눈길은
가라앉았지만 무언가를 한사코 이겨내려는 다부진
투지만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불타올랐다.
"인간의 마음은 모나지 않고 둥글어야 한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동그라미를 네 눈앞에서 그려 보였느니라.
그러나 그 뿐이 아니다. 잘 듣거라. 우주가 둥글다는
걸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지상의 모든 생성사멸도 이치에 따른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렇게 배웠습니다."
"강물이 아래로 흐르듯 세상의 이치에도
순리(順理)가 있음을 알겠느냐?"
"예에."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계절도 물결처럼 힘을 따라
흐른다. 세상의 인심도 그러하느니가."
"?"
"무예에도 순행(順行)의 법칙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이르는 말이다."
"가르쳐 주십시오."
"우선 자연계의 변화부터 깨우쳐야 한다. 천지가
개벽되지 않고 건곤(乾坤)이 미분(未分)해 있을 때,
태역(太易)에 생수(生水)하고 태초(太初)에
생화(生火)하고 태시(太始)에 생목(生木)하고
태소(太素)에 생금(生金)하고 태극(太極)에
생토(生土)하여 천지만물이 형성되었느니라. 고로
모든 존재를 수화목금토로 설명하니 곧
오행(五行)이라 말한다. 신비의 오의(奧意)에 직입해
그 기본의 대강(大綱)을 세운 것이 바로
음양오행설이니라......"
왕천은 사부의 새로운 가르침에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귀 기울였다. 사부의 강론은 매일을 두고
계속되었다.
"......서양에는 동서남북밖에 없지만 동양의
방향에는 가운데가 하나 더 있어 이를 두고
오방(五方)이라 한다. 다섯 개의 축을 둥글게 가지고
순조롭게 굴러갈 수 있는 틀이 이렇게 되어 마련되는
것이니라.
오시(五時).오기(五氣).오상(五常).오색(五色).오장(
五臟)의 근원도 모두 오행을 축으로 엮어진 것이다.
잘 엮어진 상태를 상생(相生)이라 하며 그 반대를
상극(相克)이라 하니, 순조로움은 생명에 힘을
불어넣고 역행은 서로의 생명을 갉아먹어 힘을 쇠잔케
만드는 법이다. 무기를 손에 들고 섰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의 실력과 인품을 모를지라도 이
쪽이 순조로우면 내가 해를 입지 않으며, 심지어
상대의 헛점도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로 나의
검술에는 하나의 철학이 깃들게 되는데......"
왕천은 꿇어앉아 더욱 눈을 맑게 뜨고 사부의 입을
바라본다.
"......계절이 순조롭게 바뀌고 강물이 자연의 힘을
따라 유유히 흐르듯이 검자(劍者)의 몸도 그 길을
따라 흘러야 된다는 뜻이다. 자, 나를 보아라......"
사부는 마당으로 후루룩 날아가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땅 위에 계십니다."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이 지팡이를 칼이라 생각해라. 어떻게 보이느냐?"
사부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하늘과 땅 사이를 지팡이로 버티게 하는 것과
같았다.
"천지간(天地間)에 서 계시는군요."
"잘 보았다. 바로 그것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니
나는 무슨 글자인가."
"공(工)이 되겠지요."
"공이라...... 그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람들은
무슨 글자인가?"
"무(巫)가 되겠습니다."
"그렇다. 그 내용은 무당의 신통력을 얘기하고
있다. 땅의 정기를 딛고 서서 하늘의 정기를
불러모으는 자야말로 진정한 무자(巫者)이며 곧
무사(武士)가 되는 것이니라."
"어떻게 불러모으는지요?"
"공(工)의 글자 선을 따라 걸어라."
"예에?"
"순순히 응해라 오행의 화수(火水)가 상극이듯
걸음의 순서가 틀리면 곧 나의 헛점이 되는 것이니라.
이렇게......"
시각대사는 몸소 몸놀림을 해 보였다.
그는 공의 선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하나도
헛점이 보이지 않았다. 수십 명의 칼잡이들이 동시에
그를 찌르려 해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몸을 건드릴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여름에서 겨울로 바로 뛰는 계절의 반역이
없는 오시(五時)행로처럼,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바도
상생의 음양오행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술의 한
가지이니라......"
그제서야 왕천은 막대기를 들고 사부 앞으로 나와
섰다.
"우선 자세가 중요하다. 지금 내가 배워 주는
검법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무예이다. 네 마음이
무념무상하지 않으면 배울 수도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보아라. 내 마음이 흔들린다는 건 곧
상대에게 허(虛)한 곳을 보여 주는 꼴이니라......"
왕천은 사부의 자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부는 두 다리를 대지 위에 우뚝 딛고 꼿꼿이
섰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팡이 끝이 공중을
향한 채 오른쪽 겨드랑이로 건너갔다. 오른팔이
꼿꼿이 하늘로 솟고 왼손이 지팡이의 끝을 쥐었다.
지팡이는 천천히 하늘로 치솟았다. 그와 함께
왼다리가 땅으로부터 가만히 떨어져서 따라 올랐다.
"아아!"
왕천은 탄식했다. 사부의 자세는 바로 무념무상 그
자체였다. 한 치의 틈도 없다. 벌써 상대는 얼어붙을
듯이 압도되어 버린다. 한번도 상대한 적이 없거니와
처음으로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데도 이 쪽은
여지없이 주눅이 들어 버린다.
'아아......!'
왕천의 입에서는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 자세는 주위에서 보고만 있어도 벌써 얼어
버린다. 수백명이 대들어도 당해낼 수 없는 자세이다.
다음 동작을 상상도 못하게 하면서도 여지없이
목덜미로 칼 끝이 젖혀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될 터이다. 이게 무슨 검법인 줄 아느냐?"
"모르옵니다."
"어떤 느낌이 드느냐?"
"솟아오르는 태양과 같습니다."
"진정 그렇게 보이느냐?"
"예에. 어둠이라는 적들이 꿈쩍 못하고 쓰러지는
형상이 나타납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자세에다 이름을 붙여야
되겠구나. 바로 네가 지은 이름 말이다."
"예에?"
"조천검법."
"조천검......?"
"솟아오르는 아침 해와 같다고 했잖느냐?"
"아, 조천검법(朝天劍法)!"
"술법의 이름에만 너무 현혹될 것도 없다. 적어도
삼개 성상을 네가 이 자세와 씨름하지 않으면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섣불리 배운즉 오히려 해를 당하니
수련에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권법(拳法)도 배워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태껸은 그 몸놀림에서
보듯이 유연한 흥청거림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듯 갈지[之]자로
자유자재롭게 걷는다. 그러나 선(線)의 자유자재한
동작도 실상 우주를 포용하는 오행의 원리 속에
있느니라. 고로 아까와 같이 공(工)의 선을 따라
행함으로써 태껸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이는
일기(一技)로 백기(白技)를 당해내는 철학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시다면 백기(白技)는 누가 쓰는 것이옵니까?"
"중국인들이다. 그들의 무예 철학은 백기를 배워
적들과 상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기보다 백기가 더 나은 것이 아니온지요?"
"여기서 말하는 일기니 백기니 하는 것은 기술의
종류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 곧 무예 철학을
이름이다. 고로 일기자와 백기자 중에서 누가 더
강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차라리
일기에 통하면 백기를 누를 수 있는 심오함이
자랑스런 우리의 무예인 것이다......"
사부의 무궁무진한 무예에 관한 가르침은 어린
왕천의 가슴을 끝없이 설레이게 했다.
사부는 왕천을 앞에 두고 무예를 다시 강론한다.
"......중국인의 백기(白技)의 무예를 우리가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무예의 체계를 세워 놓았다. 우리보다 먼저
그것을 정리했고 그것의 완성을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무예자가 많다. 더구나 약 백여 년전의
금대(金代) 각원상인(覺遠上人)은 소림사
십팔나한수(十八羅漢手)에서 칠십 두 수의 권법을
만들어 오권(五拳)의 창시자인 백옥봉(白玉峰)과
협력해 일백 칠십 수에 가가운 권법대계를
완성했었다. 오권이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실상은 우리나라의 은자(隱者)들이 일찍이 정리해
두었던 권법인 터이다."
"그 오권을 알고 싶습니다."
"앞으로 대륙의 검자들과도 상대할 일이 있을
것인즉 배워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러나
실제의 정리자는 고려의 은자들이라는 걸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첫째는 용권(龍拳)인즉 자세는 이러하다. 몸을
대범하고 자연스럽게 놓는다. 서서히 정신을
통일하고, 동작할 때에는 용의 몸이 우렁차고
활발하게 하늘을 나는 것처럼 웅대하게 행한다. 고로
용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는 호권(虎拳)이니
동작은 이러하다."
"호랑이의 몸씀과 같이 한다는 뜻이겠군요."
"그러하다. 전신동작은 팔과 허리를 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너는 성난 범이 먹이를 향해 숲
속에서 뛰쳐나오는 모습을 보았느냐? 그 자세는
살벌할 정도로 세찬 것일수록 좋다."
"모든 동작이 동물의 자세에서 연유되고 있습니까?"
"그렇다. 더구나 날렵한 동물일수록 그 선천적인
몸놀림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다음이
표권(豹拳)인즉 이러하다. 표범이 갑자기 뛰어오를
때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다. 그러면서도 땅으로 내릴
때는 가뿐하기가 고양이같고, 동시에 다음 동작으로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네번째가
사권(蛇拳)이다."
"뱀 말씀입니까?"
"독사의 영기(靈氣)를 전신에 넘쳐 흐르게 해서
신체는 부드럽지만 주먹을 쓸 때에는 팔꿈치와 허리에
힘과 기운을 채워넣는다. 상대는 영락없이 허물어질
것이다."
"마지막은 무슨 권법입니까?"
"학권(鶴拳)이다. 그 가느다란 다리를 가지고도
학은 완급(緩急)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 정력(精力)이
다리에 깃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身)만 앉아
있어서는 안되고 정(精)과 신이 조용히 통일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 고로 용권은 신을 주로 한 것이고,
호권은 뼈[骨]를 주체로 하며, 표권은 힘[力]이,
사권은 기(氣)가, 학권은 정(精)이 그 요소로 되어
있다."
"의미심장하옵니다."
"동물을 보고 이런 발상을 얻었다는 것은 곧 자연과
인간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무예 철학의 창조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의 우주를 포용하는 철학에는
뒤떨어지나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의술(醫術)도 익혀야 할 것이다. 급소라는 것
때문이다. 급소를 모르면 공격이 무미하고 방어에도
무력해진다. 내외공(內外功) 모두의 수련원리도
따지고 보면 급소의 이용이라 말할 것인즉......"
사부의 강론은 계속되었다.
갈매기섬으로 타고 갈 배는 제법 컸다. 뱃길도
그날따라 파도가 잠잠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섬에 도착하겠지요?"
족제비는 초조한 목소리로 삿갓에게 물었다. 그는
아침 안개가 자욱한 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라리 어느 쪽이 좋을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삿갓은 여전히 시선을 그 쪽에다 고정시킨 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느 쪽이라뇨?"
"밝을 때 도착하든가 해가 지고 나서 살짝 섬으로
오르든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습니다."
그의 태도가 대단히 신중하다는 사실을 이런 데서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결정을 족제비와
의논 한 마디 없이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또
그렇게 명령하는 그의 태도에 아니꼬움을 느꼈지만,
이 쪽에 뾰족한 묘수가 없는 한 가타부타 할 수도
없었다. 어쨌건 그가 어느 사이에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이 무리의 대장이 되어 있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배에 탄 사람은 단 제 명이었다. 동업자인 두
사람과 노젓는 건장한 어부 두 사람이 전부였다. 두
어부는 고물 쪽에서 바람을 먹지 않는 돛폭을 다소
원망하며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족제비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에
비해 삿갓은 많이 긴장해 있는 듯했다. 평소에 말이
많은 그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점만 보아도 그의
심정을 얼마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요?"
족제비의 반문에 삿갓은 대꾸하지 않고 어부한테로
시선을 돌렸다.
"술을 좀 실어왔는가?"
"예에. 갑판 밑에 두 말들이 통에 빚은 막걸리가
있습죠. 안주로 돼지머릿고기도 썰어
왔습니다만...... 지금 드릴까요?"
젊은 어부가 말했다.
"내가 챙겨 먹지. 당신들도 쉴 틈이 나면 한 사발씩
들고서 노를 젓게."
그러면서 삿갓은 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술을
끌어내고 옆에다 안주를 펴놓았다.
"이리 오시오, 김협사.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소.
초조해 한다고 해서 풀릴 일이 안풀리고 안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겠소."
그의 말은 차라리 자신에게 던지는 듯했다. 그는
쪽바가지에다 가득히 술을 담았다.
"먼저 드시지요."
삿갓은 술잔을 족제비에게 내밀었다.
"여기선 우리들의 대장이니 박협사께서 먼저
드시지요."
약간 비꼬는 투로 말했는데 삿갓은 괘념않고
있었다. 차라리 빙긋 웃고는 두 말 않고 벌컥벌컥
그대로 마셔 버렸다.
"하아, 맛이 좋군. 김협사도 드시구려. 이럴 땐
술이란 게 제일 좋지요."
삿갓은 입술을 문지르고 나서 풋고추를 된장에다
찍어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헌데 박협사. 사실은 궁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뭘 말인가요?"
"과연 갈매기섬에 보물이 있는 것일까요?"
"으하하하......"
삿갓은 우선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왜 웃지요?"
"웃겼으니까 웃지요."
"예에?"
"그런 의문처럼 바보같은 의문은 없을 테니까요."
삿갓의 알쏭달쏭한 대꾸에 족제비는 여전히
바보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삿갓은 다시 한바탕
웃고 나서 족제비를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있지요."
"뭐가요?"
"김협사가 없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던 그 보물이
기다리고 있지요."
"어째서 그런 장담을 할 수가 있지요?"
"아직 아무도 황금을 찾아간 사람이 없으니까요."
"허어, 참......"
"그것이 묻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김협사밖에
없지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 지도를 챙겨가지고
있는 굴림의자놈도......"
서슴없이 욕하다 말고 족제비는 어부들을 흘낏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쪽의 대화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열심히 노만 젓고 있었다.
실상 어부들은 굴림의자가 주선해 준 사람들이었다.
섬에 도착해서 그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든 삿갓의
생각에 달려 있는 이상 특별히 의심의 여지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족제비는 손수 막걸리 한 바가지를 퍼 마신 다음
다시 떠들어댔다.
"......뿐만 아니라 박협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도를 제게 건네 주신 저의 스승 적두노사께서도
보물이 묻힌 곳을 알고 계시는 게 되지 않겠소?"
그러자 삿갓은 또다시 한바탕 웃어젖혔다.
"왜 자꾸 웃기만 하는 거요?"
족제비는 불만스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김협사가 지나치게 골똘히
풀려고 하기에 웃는 거요."
"뭐가 수수께끼라는 거요?"
"김협사가 그 검정 가죽쌈지를 건네받고 나서
소문을 퍼뜨린 적이 있소?"
"무슨 소문?"
"내가 보물지도를 가지고 있소 하는 발설 말이오."
"그런 일 없소."
"그런데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보물지도의 정체를
알아 버렸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상하지가 않소?"
"뭐가요?"
"소문을 낸 장본인의 정체 말이오."
"......?"
"소문을 낸 자의 정체도 수상하지만 왜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가 하는 점은 더욱 모를 수수께끼란 말이오."
"생각하면 뭘 하오. 머리만 어지러뤄지는걸."
"그래서 말이오. 나는 그 두 가지를 이제껏 곰곰
생각해 보았던 것이오. 발설자가 누구인가, 왜 발설을
했는가......"
삿갓이 잠깐 말을 끊는 것을 보고 족제비는
초조해졌다. 실상은 족제비로서도 그런 사실에 의문을
가져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도
오리무중이어서 수수께끼를 푼다는 일은 진작
포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삿갓이 지금 그것을
풀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풀기라도 했다는 얘기요?"
"반은 푼 셈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풀었소?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삿갓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삶은 돼지고기를 한
점 소금에다 찍어 입에 털어놓고는 오물거렸다.
"김협사가 들으면 놀라든가 화를 내든가 둘 중의
하나일 거요."
"글쎄 난 박협사의 해답을 단단히 신용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심심풀이로 말해 보시오."
"어쨌건 이제 와서 문제를 풀어 봐야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삿갓은 머리에 쓴 삿갓을 만지작거리며 말 끝을
흐렸다.
"......나는 이렇게 문제를 풀었소. 세상에
보물지도가 나돈다는 사실의 발설자는 바로 당신의
스승인 적두노사라고......"
"뭣이!"
족제비는 앉은 자리에서 튀읏이 일어났다.
"어허! 화낼 일은 아니라고 미리 부탁하지 않았소.
더구나 김협사가 내 풀이를 믿지 않아도 그뿐인
거고."
"그건 당치도 않소. 사부께서는 내게 쌈지를 맡기실
때 결코 발설하지 말라는 주의를 단단히 주셨소. 그래
놓고......"
"어찌 됐든 지금 조선 전토에 보물 얘기가 파다하지
않소. 그럼 그 소문은 누가 낸 것 같소."
"다만 그 때문에 나의 사부께서 소문을 퍼뜨렸다고
단정하는 거요?"
"예에."
"예에?"
"왜 보물지도를 내 놓으신 다음 세상에 퍼뜨렸는가
하는 게 문제지요."
"그래서 그 문제는 어떻게 풀었소?"
"그 의문은 섬에 도착하면 곧 풀릴 것이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양반이군. 결국은 아무
수수께끼도 풀지 못한 것이 되지 않소?"
"그렇지가 않소이다. 분명히 적두노사께서 어떤
음모의 덫을 놓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무어라고? 도저히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족제비는 환도를 휙 뽑았다.
"쯧쯧......, 참으시지요. 이제 와서 우리끼리
다퉈보았자 서로에게 아무런 득이 될 게 없소. 어쨌건
관가에서는 왕자들까지도 보물섬 얘기를 알고 있소."
족제비는 몇 번 씨근대더니 가까스로 참는 듯했다.
"나라에서는 왜 보물을 찾으러 갈매기섬으로 떠나지
않는가하는 점도 수수께끼요."
"보물을 찾으러 벌써 떠났는지 그것도 모르지
않소."
"그 의문도 갈매기섬에 도착하면 풀리겠지만 아무도
살아서 되돌아 나오지 못했다는 점과 관가의 태도에
사뭇 이상한 맥락이 연결되는 기미는 있소."
"정작 모를 소리들 뿐이로군."
"결국은 갈매기섬에는 누군가가 보물을 껴안고
있소."
"그가 누군란 말이오?"
"적두노사."
"흥!"
"두고 봅시다. 내 몫의 보물을 다 걸어도 좋소."
"만일 적두노사께서 거기 계시다면 당신도 살아서
돌아가기는 어려울 걸?"
"그런데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씀이야."
"그건 왜 그렇소?"
"나한테는 훌륭한 인질이 있거든."
"그가 누군데?"
"족제비라는 사나이."
"뭐요?"
"이제 그쯤 해 둡시다. 김협사를 노하게 할 의도는
전연 없었소. 실상은 나도 어떤 단정을 내릴 수가
없소. 다만 여러 갈래로 어떤 가능성을 늘어놓고
막연히 진단해 본 것에 지나지 않소. 목숨을 건
모험길인데 무슨 얘긴들 지껄이지 못하겠소. 화를
내게 했다면 용서하오. 모두 취소하겠소. 가만있자,
벌써 반쯤은 저어 왔을까......"
삿갓은 섬 쪽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일까, 아니면 농담에 지나지 않을까.
농담이라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이 쪽을
화나게 만들까.
믿을 수 없는 얘기들 뿐이지만, 믿지 않으려니
그래도 석연치 않은 진실이 그의 말 속에 엿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할 거요?"
족제비가 하늘과 눈앞의 섬을 번갈아 보며 삿갓에게
물었다.
"무얼 말이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잖소."
"바로 도착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만일 섬에 사람이
있다면 벌써 우리 배를 보았을 테니까."
"그래서 떳떳하게 상륙하자는 거요?"
"숨어서 기어든다는 건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소."
족제비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다소 불안한
시선으로 눈앞의 갈매기섬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살아서 되돌아 나온 사람이 없다는 신비의
섬! 섬 둘레에 자색 안개가 노을을 받아 괴기한
느낌을 주며 어려 있는 돌섬! 말이 갈매기섬일 뿐이지
갈매기 깃털 하나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섬! 배를 댈
곳조차 보이지 않는 괴암절벽들......
"섬 주위를 조금 돌아보자. 배를 댈 만한 곳이 있을
거야."
삿갓이 뱃사공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파도가 사나워지누먼......"
족제비는 중얼거렸다. 바로 앞에서 금새라도 적이
나타날 것 같아 칼자루를 쥐어 칼을 반쯤 빼 본 다음
도로 꽂았다.
"저 쪽이 어때?"
삿갓이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는 파도가 없어
선착장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괜찮겠나?"
족제비가 뱃사공에게 그 쪽에 대어도 좋겠느냐는 듯
물었다.
"저어 보죠, 뭐."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요?"
족제비가 뱃사람들을 가리키며 삿갓에게 물었다.
삿갓은 대꾸대신 뱃사람들한테 지시했다.
"자네들은 배가 닿거든 바로 그 자리에서 기다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멀리 떠나있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젊은 뱃사공이 대답했다.
배는 의외로 쉽게 도착했다. 선착장을 제대로 찾은
듯했다.
"밤이 되도록 돌아오시지 않으면 저희들끼리 불을
피워도 괜찮을까요?"
삿갓은 사공의 말에 무언가를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만 끄덕였다.
삿갓이 먼저 뭍으로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자, 김협사가 진로를 잡아 보시죠. 보물이 묻힌
곳은 협사의 머리 속에 잘 그려져 있겠죠?"
"어쨌건......"
"아까 내가 한 말들을 모두 농담으로 돌려 두시오.
심심하던 차에 그런 궁리를 해 봤던 거요."
"농담치곤 너무 끔찍한 농담이었소. 그런 상상은
앞으로 삼갑시다."
"미안했소. 아하하하......"
족제비는 삿갓의 의미 모를 웃음소리를 들으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숲이 우거져서 작은 언덕을 찾기가 힘들겠소.
지도에는 삼형제 언덕이라 적혀 있었지만......"
족제비는 중얼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우선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소?"
"가만!"
족제비는 삿갓을 제지했다.
"뭐가 있소?"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서두르는 게 옳을 것 같소. 횃불을 밝힐 용구도
준비돼 있으니까."
불안했지만 삿갓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위험은 어차피 낮밤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동굴이 근처에 있다는 얘기군."
삿갓이 중얼거렸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찬바람이 바로 동굴의 위치를 신호하고 있는
거요."
"그렇지만 삼형제 언덕부터 찾지 않으면 출발부터
길을 잘못들게 될 거요."
"그게 어떻게 생긴 어덕이지요?"
"나란히 길다랗게 뻗어 있었소. 그 중간 언덕에
다시 삼형제 바위가 있소."
"삼형제 바위라......"
"그 중간 바위에 올라서서 동쪽을 바라보라 했소.
거기서 백 척 가까운 거리에......"
"거기서 뭐가 보인다고 그랬소?"
"아, 저기 있다. 삼형제 언덕......"
과연 거기에는 세 줄의 낮은 언덕이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있었다.
둘은 숲을 벗어나와 가운데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은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나뭇가지들과 잡초들
틈으로 삐져나온 돌멩이들로 해서 걷기에는 힘든
길이었으나, 무공으로 닦인 무사들의 걸음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목표가 정해지자 훨훨 날듯이 언덕을
건너뛰었다.
"김협사!"
삿갓이 느닷없이 불렀다.
"예에."
"이런 얘기 하나 물어 봐도 되겠소?"
"무엇이요?"
"보물을 찾게 된다면......"
"그래서요?"
"우리들의 몫이 정해지고 무사히 강도를 빠져나가게
될 때, 그것으로 무엇에 쓸 참이오?"
엉뚱한 질문에 대한 묘한 반발이 족제비의 가슴에서
뭉클하고 솟았다.
"실상은 그걸 내가 묻고 싶었소. 박협사는 어디에다
쓸 생각이오?"
"이게 되게 한방 얻어맞는군. 내가 쏜 화살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 꼴이군. 좋지요. 궁금하다면
말씀드리지요. 나는 도장(道場)을 열 생각이오."
"그거 신기한 궁리를 하셨소 그려."
"내 제자들을 키워 부하로 만들고, 내가 이제까지
갈고 닦은 무예를 가지고 나의 문도(門徒)들을 통해
하나의 유파(流波)를 이룩하고 싶소."
"꿈은 야무질수록 좋지요."
"김협사는 아까부터 계속 빈정거리기만 하지만 나의
계획은 엄숙한 거요."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요."
"김협사의 생각?"
"나같으면 그토록 번거로운 인생을 살 생각은 없소.
넷째 왕자나 다섯째 혹은 여덟째 왕자의 가병이 되어
출세할 길을 모색하겠소."
"그러니까 김협사가 그렇게 하시겠다는 얘기요?"
"아닙니다. 내가 박협사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거죠.
그만한 무예자라면 유파를 이룩할 필요도 없이 대뜸
그들 편에 붙어도 장군 자리 하나는 손쉽게 따먹을 수
있을 텐데."
"그럼 이번에는 김협사의 계획을 좀 들어 봅시다."
삿갓은 얼마간 불만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새 해는 꼬박 져서 사방은 어둠이 짙게
몰려오고 있었다.
여자의 젖무덤을 닮은 세 개의 바위가 그들의 눈에
잡히고 있었다. 바로 삼형제 바위인 듯했다.
"이것인 듯하오."
족제비가 중얼거렸다.
"삼형제 바위라면 이것들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삿갓도 중얼거리며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탐스럽게 솟아오른 세 개의 바위는 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중간에 있는 바위로 올라가서 동쪽을 바라보면 백
척 거리에서 무엇인가 나타나겠지요."
삿갓이 기억해 두었다가 한 말이었다.
"기억력까지 비상하구려."
족제비가 대꾸하고는 훌쩍 뛰어서 중간 바위로
올라섰다.
"뭐가 보입니까?"
삿갓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오. 보이지가 않소. 너무 어두워서......"
"그럼 불을 당길까요?"
"소용없는 일이오. 갈라진 암벽 틈새로 소나무 한
그루가 상투처럼 삐져 나와 있을 거라 했소. 여기서
불을 밝힌데서 그것이 나타날 리가 없소."
"그럼 어떡하는 게 좋겠소?"
"이 정도 찾았으면 보물이 묻힌 장소는 거의 다
찾은 거나 다름없소. 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떻겠소?"
삿갓은 족제비의 말을 음미해 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소. 달이
뜰 시각까지 기다립시다."
"달이 뜨면......?"
"갈라진 암벽 사이로 달이 떠오를 테지요. 그렇다면
필시 그 소나무가 나타날 거요. 동쪽의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우리를 반길 게 틀림없소."
"......정말 박협사는 끈질기기도 하구려. 그럼
여기서 기다려봅시다."
삿갓은 족제비의 동의를 얻어 내고는 대꾸 대신
옆의 바위를 향해 사뿐 떠올랐다.
"처녀의 젖무덤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 놓고 삿갓은 킥킥 웃었다.
둘은 동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삿갓이 먼저
말문을 다시 열었다.
"자, 심심한데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합시다. 달은
곧 뜰거요. 비오는 날이 아닌 것만 해도 우리에겐
행운인 셈이지요."
"아까 하던 얘기라면......"
"보물을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 하는 미래의 계획
말이오."
"아, 그것이라면...... 난 아직 한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소."
"생각해 본 일이 없다니...... 그게 정말이오?"
"지금 생각 같아서는 멋지게 탕진해 버리겠소."
"아하하하...... 그것도 훌륭한 계획 중의
하나이겠지요. 그래, 어떤 식으로 멋지게 탕진을
하죠?"
"일테면, 처녀를 백 명쯤 사서......"
"아하하하...... 알겠소. 역시 그것도 사내로서
호탕한 삶이 될 것 같소이다. 김협사에 비하면 내
계획이란 것이 고작 너무 고지식해서 우습게 되어
버렸구려."
"박협사!"
"예에?"
"실상은 보물 따위에는 난 관심도 없소."
"예에? 그것 정말 뜻밖이구려."
"보물지도를 되찾아 사부님의 명령을 지며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만 고심해 왔을 뿐이오."
"보물을 찾게 되면 그 지도란 휴지 조각밖에 안 될
텐데?"
"설사 그렇더라도!"
어느새 달이 돋고 있었다.
"아, 보인다!"
족제비는 부지중 소리를 질렀다.
"어디?"
삿갓도 족제비가 서 있는 바위 위로 올라왔다. 멀리
백 척 거리에 암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한
곳에 가느다란 선이 달빛을 받아 분명하게 떠올랐다.
"암벽 뒤가 바로 바다라는 얘기겠군요."
삿갓이 말했다.
"그런 셈이지요. 저 소나무 밑에 동굴이 있어야
지도와 꼭 맞는 것이 되오. 자, 가 봅시다."
둘운 언덕을 내려와 계곡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개똥벌레들이 어우러져
도깨비불처럼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무인도인 것 같구려."
족제비가 말했다.
"그것ㄴ 알 수가 없지요. 분명히 무슨 수수께끼는
있을 것 같습니다. "
"낌새가 그렇다는 뜻이지요?"
"아니지요. 되돌아 살아나온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괴기스런 전설을 제대로 믿었을 때 하는
말이지요."
"그 전설은 정말일까요?"
"글쎄요?"
"어쨌건 갈매기섬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삿갓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동굴이 가까워질수록 족제비의 가슴은 야릇한
고동으로 떨었다. 불안과 혹은 환희와 호기심, 그리고
모험심...... 계곡이 끝나면서 밑에는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갯내가 물씬거리고 찰싹거리는 물소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암벽 밑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어온 것으로
짐작되었다.
"저 소나무 밑으로 동굴이 나 있을 겁니다......"
족제비가 속삭이듯 말했다.
"쉿!"
삿갓이 갑자기 제지했다.
"예?"
"무슨 기척을 못 느꼈습니까?"
족제비는 긴장하며 사방을 둘러본 다음에 말했다.
"작은 파도소리였겠지요."
"그럴 지도 모르죠. 신경과민 탓인지...... 하지만
분명히 사람의 고함소리 같았습니다."
"고함소리라면 나도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먼 데서 울려오는 듯한......"
둘은 징검다리를 건너듯 몇 개의 작은 바위를
훌쩍훌쩍 건너 뛰어서 소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이게 동굴 입구인 듯 하지요?"
삿갓이 물었다.
"이것 밖에 달리 없으니까요."
"이젠 우리가 만일의 위험에 대비해서 소리를
죽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미리 위치를 말씀해 주시면 머리 속에
기억해 두겠습니다."
족제비는 별로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구에서 일백 오십 보를 걷습니다. 거기서 왼쪽을
보면 작은 동굴이 나 있습니다."
"다음엔?"
"거기서 다시 작은 동굴 속으로 서른 발자국에 멈춰
서서 천장을 보라 했습니다. 낮이라면 햇살이 있을
것이고 밤이라면 별이 보일 테지요. 비오는 날이라면
빗줄기가 스며들 것이구요. 사방을 돌아보면
해골바가지가 네 개 걸려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요?"
족제비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만일 거기서 해골바가지만 찾게 되면 보물은 이미
우리 수중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지요."
"해골바가지하고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삿갓은 족제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알려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어느 해골바가지 밑을 파야 보물이 있다는 사실은
잠깐 묻어 두고 싶은데요?"
삿갓은 족제비의 말을 곰곰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문득 빙긋 웃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옳으신 말씀이오. 우리가 거기까지 도착할 수
없다면 보물이 그냥 널려 있어도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될 테니까. 자, 어둠이 시작되니 관솔에다
불을 붙이겠습니다."
삿갓은 말을 끝내고 부싯돌을 꺼내어 때리기
시작했다. 솜특에 불기가 어렸다.
훌륭한 횃불이 만들어지고, 사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삿갓은 횃불을 족제비에게 건네었다.
"자, 우선 백 오십 보를 걸으시지요. 만일의 위험에
대비해서 나는 칼을 빼들고 김협사의 뒤를 따르지요.
김협사는 앞에서 혹시 날아올지도 모르는 화살 따위에
신경을 써 주십시오. 자, 출발하지요."
"화살이라면 인간의 것이겠군요?"
"만일에 대비하자는 뜻입니다. 우린 아직 이 섬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그 정체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그런 셈이지요......"
족제비는 발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바닥 곳곳에는 물이 괴어 질척거렸다.
동굴 속에서는 찬바람이 워워 소리를 내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소리도 메아리쳐서 귓속으로
되돌아왔다.
구십 여덟 구십 아홉 백...... 족제비는 잠시 멈춰
섰다.
동시에 찍 하는 소리가 났다. 삿갓의 칼이 간발의
틈도 없이 허공을 베었다. 윙 하는 칼소리가 울렸고
무언가가 두 동강이 난 채 투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쥐를 보고 놀랬군. 소리를 느끼고 그것을 벤
것인데......"
삿갓은 제 삿갓을 만지작거리며 이제의 행동을
설명이라도 하는 듯 중얼거렸다.
족제비는 삿갓의 그 빠른 솜씨에 혀를 내둘렀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양쪽으로는 여러 개의 다른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칫 잘못 들어서면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가만있자, 박쥐에게 놀라는 바람에 몇 보를
걸었는지 까먹었군."
족제비는 혀를 찼다.
"내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백 보를 걸으신 게
아니오?"
"백 보...... 아, 그랬던 것 같소. 바로 백 보의
발이 떨어진 순간에 박쥐가 날아나온 듯 싶었소.
그렇다면 곧장 오십 보를 더 가야 되겠구먼요......"
둘은 그 자리에서 왼편으로 난 작은 동굴 속을
들여다 보았다. 종유석 일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데군데 고드름같은 작은 돌기둥이 내려뜨려져
있거나 혹은 죽순처럼 자라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서른 발자국......"
족제비의 말이 마악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에선가 여자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오호호호......!"
"앗!"
"헉!"
족제비와 삿갓은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무인도라 짐작했던 곳에 인간의 목소리라니. 더구나
그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라니.
간드러져서 더욱 요괴스러운 여자의 웃음소리는 긴
여운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그렇게 울린지도 모르오."
"귀신의 소리......?"
족제비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소!"
삿갓 역시 몹시 긴장한 목소리였다.
"혹시 여우가 짖어댄 것이 아닐까요?"
"여우라면 꼭 한 번만 짖었을 리가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웃음소리가 났을까요.
분명히 입구 쪽에서 난 것 같지 않소?"
"아니오. 저 안쪽인 것 같소. 메아리는 부딪쳐서
돌아오니까."
"그럼 해골바가지가 있는 쪽?"
"그럴 수는 없소. 그 곳은 바로 저기 보이는
데니까."
"어쨌든 소리가 들려온 쪽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구려. 이제
어떡하겠소?"
"어떡하다뇨?"
"만일 그 여우의 목소리가 진짜 인간의 목소리라면
비록 여자라고 해도 섣불리 대해선 안될 것 같소.
분명히 무슨 음모가 이뤄지고 있을 것 같단 말이오.
오늘은 철수한 뒤 내일 밝을 때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철수한대서 저 쪽이 해칠 생각을 애초에 가졌다면
우릴 그냥 돌려보내겠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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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강행합시다."
"보물을 파내자는 뜻이오?"
"그렇소. 우리 정도의 무예자가 여자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사내일지라도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냥
베어 버리겠소."
"박협사, 이제까지 아무도 이 섬에서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었소?"
"그건 사람 나름이오."
"진정하시오."
"난 계속해 보겠소."
"할 테면 혼자 해 보시구려."
"김협사는 어부들 있는 데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김협사의 몫은 포기하셔야겠소."
"난 목숨과 바꿔서까지 황금을 넣을 생각은 없소.
만일 당신이 내일까지 살아 있다면 내 몫을
포기하겠소."
"그럼 말해 주시오."
"뭘 말이오?"
"보물이 묻힌 곳을."
"어려울 건 하나도 없소. 네 개의 해골바가지
중에서 북쪽으로 걸려 있는 것을 떼내어 보시오."
"그러면?"
"그렇게 해 보면 무슨 반응이 있을 거요. 해골에
달린 끈을 통해 바위가 움직일 것이고, 돌문이 열리면
갈매기 한 마리가 보일거요."
"살아 있는 갈매기가?"
"돌을 쪼아 만든 갈매기일 것이 분명하오. 그것을
들어내면 보물은 그 밑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소. 자,
꼭 혼자서 해 보겠다면 어서 들어가 보시구려."
횃불을 삿갓 손에 쥐어준 족제비는 어둠 속을
더듬어 밖으로 나왔다. 왜 그랬는지 자신도 확실히는
알 수가 없었다. 삿갓과 헤어진 것이 단순히 겁먹은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가 몹시 서둘러대는 삿갓의 태도가 기분
나빴다. 어쩐지 그와 함께 일을 도모하면 곧 재앙을
불러들일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보물을 찾아간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내노라
하는 팔도의 검객들이 아무리 무서운 칼바람을 휘둘러
설쳐대도 그 보물의 주인은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보물 발굴을 시도한 많은 인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의 임자는 따로 있는 것이다. 그
임자는 후에 나타날 것이다. 사부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자야말로 보물을 차지할
자격이 있으며, 그 자야말로 그것을 차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삿갓으 무모한 행동이 족제비한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도에 남아 있는 굴림의자의 태도도 기분이
나빴다. 보물지도를 숨기고서는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는 것이다. 꿍꿍이속을 깊이 감추고 그 보물을
앉아서 고스란히 차지할 궁리만 열심히 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족제비가 생명을 걸고서 보물을
찾아야 할 필요는 도무지 없다고 판단되었다. 다만
지도를 되돌려 받을 수가 없는 게 다소 억울했지만 그
문제는 달리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테면
나중에 나타날 쌈지의 주인에게 사정을 말하여 훔친
자를 함께 공격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족제비는 동굴 밖으로 완전히 벗어 나왔다. 그동안
아까의 그 여자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환청이나 동물의 울음소리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삿갓을 섬에 남겨둔 채 떠나 버리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묻힌 장소를 그에게 정확하게 알려준 일이
가슴에 꺼림직하게 남아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가
보물을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상하게도
신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지도 뒷면에 쓰여진 암호를 풀지 못하는 한
천하의 삿갓이라도 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嚴則是太極 큰 바위는 곧 태극이라
王壓右角陽 왕은 위에서 陽의 우측 모서리를 누르고
他推左角陰 다른 자들은 아래에서 陰의 좌측
모서리를 민다.
지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굴림의자는 이 곳에 오지 않았다. 삿갓은 그런
글귀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또 그런 암호문이
장난으로 긁적거려졌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필시 금궤를 여는 결정적인 열쇠인 것처럼 느껴졌다.
삿갓에게 그런 글귀가 있었노라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뱃사람들한테는 삿갓이 화를 당했다고 말할 것이고,
어서 이 섬을 빠져나가도록 독려할 생각이었다.
강도의 굴림의자한테도 보물 발굴에 실패했다고 일러
주면 그뿐일 터이었다.
삿갓이 설사 무사히 보물을 캐내더라도 배가 없는
한 무인도에서 되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고, 보물은
그대로 갈매기섬에 남은 것으로 될 것이었다.
족제비는 사부에 대한 우직할 정도의
충성스러움으로 쌈지를 잃어버린 데에 대한
보상으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족제비는 이런저런 궁리로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밝은 달빛이 어둠을 완전히
없애고 있었다.
멀리 선착장이 보였다. 그들이 모닥불을 밝히고
있지 않는 것이 다소 불안했지만, 달빛 때문에 불빛이
필요없기 때문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족제비는 아까의 그 선착장에 도착했다.
"어?"
수상쩍게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배도 어부들도
흔적이 없었다. 혹시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하고 다시 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바로 그 해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달빛은 여전히 밝고 파도조차 잠잠해서 사방은
요요한 느낌을 주었다. 족제비는 섬뜩한 기분으로
잠시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다.
'정말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꼭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인걸. 틀림없이 이 녀석들이 배를 저어
밤낚시라도 나갔겠지. 그렇지만 움쩍 말고 기다리라고
아까 삿갓이 분명히 일러두지 않았던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절벽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거기에는 인적이 있었다.
찰삭거리는 바닷물 소리에 간간이 섞여 사람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들이 여기 와 있었구나.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족제비는 인적이 있는 큰 바위 뒤로 가만히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있자. 이건 여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것도
여러 명의 여자......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들은
여자의 웃음소리도 역시......? 그러면 뱃놈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리고 이 여자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인 건 확실하군.'
족제비는 중얼거리며 바위 뒤에 착 붙어서 너머의
동정을 살폈다.
'앗!'
족제비는 깜짝 놀랐다. 그녀들은 벗은 몸이었다.
생각보다는 먼 거리였지만 그녀들은 해수에
알몸으로 멱을 감은 뒤 역시 알몸으로 달빛을 받으며
마악 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열두 명이었다. 나녀(裸女)들은 뭐라고 재잘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동굴의 입구가 나녀들 앞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에서는 우유빛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나녀들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족제비는 가슴이 뛰었다. 이상한 환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혹시 꿈이 아닌가 해서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그러나 꿈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
족제비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눈앞에 나타났던 장면은 분명히 변괴에
속하는 일이었다. 무인도로 알고 있었는데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의외였지만, 그들이 알몸의
여자들이란 사실도 곤혹스러웠다.
또한 함께 온 어부도 배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삿갓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궁금했다. 어쨌든 이
괴상한 사건 앞에서 혼자 판단하고 행동할 자신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족제비는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졌다. 섣불리
나녀들을 뒤따라 가서 무언가를 확인할 처지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마냥 멍청하게 몸을 드러내
놓고 있을 사정도 못되었다. 뱃사공을 찾으러
나선다는 것도 위험할 것 같았다. 삿갓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 역시 신통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족제비는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어딘가에다 몸을 숨겨야 될 것 같았다. 뱃사람들이
다시 나타나고, 또 삿갓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저
궁금한 나녀들의 동태를 지켜보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게 날이 샐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족제비는 숲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낙엽수
사이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보였다. 족제비는
소나무 위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몸을 숨겼다.
새벽까지 그러고 있을 작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깜박 졸았다고 느낀 족제비는 여자의 목소리에 얼른
정신이 들었다. 솔잎 사이로 가만히 내다보았다.
아까의 그 열두 나녀들이 웃고 떠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해변에서 달빛을 온몸에 받으며 즐거워하는 모양이
족제비의 눈에는 요괴스럽기도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여간 요염해 보이지 않았다.
나녀들의 몸짓 하나하나는 어떤 남자라도 사정없이
뇌쇄시킬만큼 요염했다.
그동안 별다른 상황의 변화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달이 조금 기울었을 뿐 뱃사람들도 삿갓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물론 다른 남자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나녀들 앞에 나타나 저들의 정체를 물어 볼까?'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얼마간 고혹적인 나녀들의 춤을 훔쳐보던 족제비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아......!"
그것을 신호로 나녀들의 춤이 뚝 멈춰졌다.
"그만 멈춰라! 누군가가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녀들은 순식간에 몰려 섰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족제비는 순간 당황했지만
숨을 죽인 채 나녀들을 계속 훔쳐보았다.
"분명히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우두머리 격인 듯한 나녀는 그렇게 말한 뒤
앞장서서 아까의 그 동굴로 발걸음을 빨리해 걸었다.
족제비는 어쩔 바를 몰라했다. 이제는 지척에
남자가 있다는 기미까지 드러내 놓고 말았다.
지경이 이렇게 되었으니 떳떳하게 몸을 나타내어
정면으로 부딪쳐 볼 것인가, 아니면 더욱 깊숙이 숨어
버릴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더욱 깊숙이 숨는다는 일은 신통치 않을 것 같았다.
삿갓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덧없는
계산이었다. 어차피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보시오--."
족제비는 크게 소리친 후 소나무에서 후루룩
날아내렸다.
나녀들은 동굴 입구에 멈춰 서서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놀라워 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족제비는 그들이 여자라는 사실에 다소 깔보는
기분이 들었으나, 어떤 음모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잠깐 말 좀 묻겠습니다."
나녀들 앞에 우뚝 선 족제비는 필요 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우유빛 안개가 하얀 명주 비단처럼 나녀들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우두머리 나녀가 전혀 정감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 낭자들은 물론 이 갈매기섬에
살고 있겠지요?"
"갈매기섬이라니요?"
우두머리 나녀의 반문에 족제비는 당황했다.
"바로 이 섬이 갈매기섬이 아니었던가요?"
"저희들은 모르옵니다. 육지에서는 이 곳을
갈매기섬으로 부르던가요?"
족제비는 우두머리 나녀의 말을 들으며 나녀들이
생각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나녀들을 더욱 깔보게 만들었다.
"아하, 그럼 이 곳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섬의
이름도 모른단 말이지."
"그러나 무사께서는 방금 이 섬을 갈매기섬이라구
부르셨잖아요."
"그렇소. 갈매기섬......, 그런데......"
열두 나녀들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동굴 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안개로 알몸을 감으며 달빛 아래 서
있었다.
"낭자들!"
"녜에."
역시 우두머리 나녀가 대꾸했다.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대답해 주겠소?"
"그러시지요. 뭐든지......"
"이 섬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요."
"우리 열두 자매하구 할아버지하구......"
"할아버지라면......"
"녜에. 저희들을 이 곳으로 데려오신 분이죠."
"그 분의 이름을 혹시 아십니까?"
"모릅니다."
"언제 낭자들은 섬으로 건너왔는지요."
"삼 년 전입니다."
"삼 년 전이라......"
"저희들로선 무사님께 더 말씀드릴 게 없는
듯하옵니다."
"한 가지만 더...... 옷들은 왜 벗고들
있는지...... 그걸......"
족제비는 조금은 수줍어하며 물었다.
"수련 중입니다."
"수련?"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런 날에는 춤을 추어야
한답니다."
"무엇 때문에 춤을 추는가요?"
"이것도 일종의 무예에 속하죠. 그래서 수련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흐음......"
족제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을 더 도와드릴까요? 할아버지께선 섬에
상륙하시는 분에게 친절히 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친절히......"
족제비는 속으로 흐흠하고 다시 웃었다. 처녀들의
몸을 대접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란 분을 만나뵐 수 있습니까?"
"그선 안됩니다."
"왜 그렇죠?"
"지금 수련 중이십니다. 몸소 저희들을 부르시기
전에는 만나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할아버지도
무예자이시겠군요."
"그렇지요."
"이 섬에 대해서 의문이 많습니다."
"어떤 의문인가요?"
"일단 상륙하면 아무도 살아서 내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상한 전설이 있더군요."
"금시초문인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섬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우리라니요?"
"나 말고 세 사람."
"글쎄요. 전연......"
"뱃사공 두 사람과 배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구려."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허어 참, 그 이상하군......"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집으로?"
"동굴 속이 저희들의 집이죠."
족제비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이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까?"
족제비는 열두 나녀의 알몸들을 슬쩍슬쩍 훑어보며
질문을 계속했다.
"무슨 얘기던가요?"
"이 섬에 황금 수십만 냥이 묻혔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런 얘긴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시다면 무사께선
보물을 찾으러 갈매기섬을 방문하셨군요."
"그런 셈이지요."
"......그럼, 저희들은 그만 돌아갈까 합니다.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두머리 나녀가 마악 되돌아서려는 시늉을 했다.
"자, 잠깐!"
"......?"
"낭자들의 집을 잠깐 방문하면 안될까요?"
"원하신다면."
의외로 순순히 허락을 받아낸 족제비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다만......, 꼭 지키셔야 할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규칙?"
"저희들의 방으로 들어오시는 이상 반드시
동침해야만 합니다."
"예에?"
너무나 뜻밖의 말에 족제비는 깜짝 놀랐다. 혹시
잘못 듣지나 않았나 싶어 되물어 보았다.
"낭자들과 동침해야 된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야......"
속으로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흥분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족제비는 나녀들 앞으로 다가섰다.
우두머리 나녀는 입가에 약간 비웃음을 띠우며 다시
족제비에게 말했다.
"진정 저희들의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시다면 두번째 규칙까지 말씀드리지요."
"또 지킬 일이 있습니까?"
"저희들의 허락 없이는 동굴 밖으로 다시 나가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예에?"
"하루 이틀이 될지 보름이 될지 그건 저희들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몇날 며칠이고 나를 가두어 두겠다는
말이요?"
"가둔다는 의미보다도 저희 집을 방문하시는
무사님의 예의가 되겠지요."
"무슨 뜻인지......?"
"무사께서는 저희 열두 자매와 모두 동침해 주셔야
합니다."
"한꺼번에 열두 명의 여자?"
아무리 여자를 밝히는 족제비였지만 열두 명의
여자를 한꺼번에 상대하라는 말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상대하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두 시간마다 한 사람씩 상대해 주십시오."
"그건 왜 그렇지요?"
"저희들은 무사님과의 동침을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아니라니요?"
"방사(房事)도 저희들에겐 일종의 무예 수련에
속하는 거랍니다."
"예에?"
"시(時)마다 인체에 급소가 있다는 말을 무사라면
알고 계실 겁니다. 축시(丑時)에는 인중혈(人中穴),
인시(寅時)에는 태양혈(太陽穴), 신시(申時)에는
단전혈(丹田穴), 술시(戌時)에는 낭심혈(囊心穴)
따위의 얘기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열두 명인 거처럼
열두 시에 따라 맡은 바 급소를 자극하는 훈련을
분담해서 하고 있답니다."
"그럼 내 몸은 여러 낭자들의 수련용이 되겠군요?"
"배우기는 했어도 남자가 없는 섬이라 실지로 해
보지는 않았으니 저희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실전
기회가 되겠지요."
"급소를 얻어맞는다는 건 내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도박이 아니겠소?"
"설마 살상(殺傷)이야 하겠어요. 성교(性交)시의
급소 공격에 대한 반응만 엿볼 뿐이니 결코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약속하지요."
"약속이라면?"
"남자는 정기(精氣)가 빠지면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일차적으로 내공의 힘으로 이겨내야 하시겠지만
기절하지 않도록 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런
기회에 무사님께서는 약차력(藥借力)의 효과를 시험해
보는 바도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글쎄...... 열두 여자를 교대로 끊임없이......"
그제서야 족제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무서운 모험이었다. 틀림없이 나녀들은 교대로 한
남자를 공격해 올 것이다. 급소를 어루만지며
성욕(性慾)을 끊임없이 샘솟게 하여 정력(精力)을
소모시킬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모험일까.
"주저하시는 걸 보니 자신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우두머리 나녀는 여전히 정감 없는 목소리로 입가에
비웃음만 띠운 채 다그쳐 왔다.
족제비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실상은 이미
나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깨달아야 했다. 열두 나녀가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갑자기 요괴스런 몸짓을 시작하더니 족제비의 신경이
극도로 흥분되도록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한번 해 보겠소."
"얘들아, 어서 무사님을 방으로 모셔라."
우두머리 나녀의 말에 다른 여자들은 금새 하던
몸짓을 거두었다.
족제비는 어느새 판단력이 마비되어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갈매기섬으로 왔는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삿갓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두 뱃사공과 배는
어디로 갔는지...... 족제비는 열두 명의 아름다운
나녀들에 홀려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도화살(桃花殺)이 끼었소. 특히
여색(女色)을 조심하시오."
언젠가 굴림의자가 일러 주던 말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두 나녀가 잡아끄는 대로 족제비는 안개 속을
헤엄치듯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맹수의 부드러운 털가죽이 잘 깔려져 있는 방으로
인도된 족제비는 금새 나녀들에 의해 환도가 풀려지고
의복이 벗겨졌다. 금새 알몸이 되었다.
그렇지만 족제비는 열두 명의 여자들을 금새라도
모두 해치울 기세로 원기왕성했다.
자신 있었다. 급소를 찔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시(時)따라 움직이는 급소 정도는 사부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웬만하면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자, 만일에 대비해서 이 약을 좀 드시지요."
우두머리 나녀가 작은 그릇과 호리병을 들고 왔다.
"그게 뭐요?"
"이건 강정제(强精劑)구요, 이건 보정주(補精酒)라
합니다."
"싫소. 아직은 괜찮소."
"정말 자신 있으신가요?"
"여색으로 몸을 망치진 않을 거요."
"무사님 혼자서 한 여자와 열 번의 정사를 치르는
것과 열 명을 교대로 한 번씩 열 번을 치르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알고 있소. 여자가 바뀔수록 쉽다는 원리쯤은 알고
있소."
"그러나 정력을 무심코 많이 배앗긴다는 원리도
알고 계시겠죠?"
"시험해 보면 알겠지요."
"그럼 시작해 보세요. 결코 이런 수련으로 해서
후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무사님께서
자초하신 거니까요. 약은 두고 나갈 테니까 필요할 때
잡수세요."
우두머리 나녀는 침방을 나서면서 소리질렀다.
"얘, 셋째야. 지금이 묘시(卯時)쯤이니 너부터
시작해라. 백희혈에 급소가 있다는 건 잘
알겠지......"
셋째라 불리운 나녀가 안개 사이로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흔들며 들어왔다.
"자, 시작해 보세요."
"원, 제기랄! 참 이상한 경험을 다 해 보는군.
낭자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었소?"
셋째 나녀는 무언가를 잠시 곰곰 생각해 보고 나서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명령이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우린
덤으로 아기를 갖기 원한답니다."
"흥!"
족제비는 오기 같기도 하고 투정 같기도 한
몸짓으로 알몸뚱이의 여자를 덥석 껴안았다.
그로부터 스무날 후. 거지꼴의 삿갓이 점치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계시오?"
삿갓은 한 점복집 앞을 기웃거리며 동시에 주위를
살폈다. 안으로부터 대꾸 대신 동자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누굴 찾으시는가요?"
"점을 치러 온 사람이다."
"점은 보지 않습니다."
"뭐라구?"
"요즘 스승님께서는 심기가 불편하셔서 휴양
중이십니다."
"언제부터 그런가?"
"며칠 되었습니다. 심기가 불편하게 되면 점괘가
나타나질 않죠."
그러면서 삿갓의 남루한 의복을 잠깐 훑어본 다음
한 마디 덧붙였다.
"무사님의 모양을 관찰해 보니 설사 제 스승님이
점을 봐 주신다 해도 제대루 ㄱ돈이나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뎁쇼?"
"뭐라구?"
"사람의 행색만 가지고 쌈지 속 실속은 따질 수
없다지만, 제가 보기엔 무사님한테는 쌈지는
물론이거니와 땡전 한 닢 숨겨둔 게 없어 보입니다."
맹랑한 동자의 말에 삿갓은 무슨 소리로 대들려다가
참는 기색이었다.
"그래, 네놈의 말이 맞았다. 주머니엔 땡전 한 닢
없다. 그래서 너의 스승한테 구걸이나 할까 하고
찾아왔느니라."
"진작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그래, 지금 어디 계시냐?"
"송도 쪽으로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그럼 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렷다? 그럼
밥 한 술 얻어먹기도 틀렸구나. 돌아오시거든 삿갓이
들렀더라구 말슴드려라."
"옛! 무사님이 삿갓?"
"그래.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놀라느냐?"
"틀림없이 무사님이 삿갓이란 말씀인가요?"
"틀림없대두."
"그러시다면 그냥 돌아가지 마십시오. 스승님이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우선 안채로 들어가 여장을
푸십시오. 식은밥이 있으니 급한대로 요기라도
하시면서......"
동자는 삿갓의 팔을 끌었다. 삿갓은 마다할 하드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꼭 만나 뵙고 가십시오. 요행히 스승님이
가 계신 데를 짐작하고 있으니 반 나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라."
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뜰로 돌아 들어갔다.
그는 동자가 받아온 세숫물로 얼굴을 씻은 뒤 찬
없는 식은 밥을 움켜 넣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동자는 그새 지척에서 사라진 듯이 보였다.
사지를 뻗고 초라한 밥상 곁에 누웠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을까. 문득 가슴에 답답함을 느낀 삿갓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면서
단검으로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놈, 꼼짝 마라. 허튼 수작 하는 순간 네놈의
목숩은 없다."
"왜 이러시요? 나요. 삿갓이란 말이오. 혹시 사람
잘못 본게 아니오?"
삿갓은 여전히 깔린 채로 소리질렀다.
"내가 어떻게 사람을 잘못 보았겠나. 네놈은 분명히
삿갓 박진이야."
"그렇소, 삿갓 박진이오. 근데......?"
"근데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느냐?"
"어디에 가 있었냐구? 당신이 주선해 준 배로
갈매기섬에 보물을 찾으러 갔었던 게 아니겠소?"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그 보물을 어디로 빼돌렸어?"
"빼돌려?"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거렁뱅이 차림으로 날
찾아와......"
"이거 보통 오해가 생긴 게 아니군."
"오해는 무슨 놈의 오해. 내 부하 두 놈과 족제비는
어떻게 됐어. 네놈이 보물을 찾은 뒤에 모두 죽였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며 나를 안심시킨 뒤, 네놈
혼자서 슬쩍 가지고 도망칠 궁리를 해두고 있겠지.
그렇지만 어림두 없어. 네놈 정도의 무예 가지고서는
강도를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아야지.
어때? 순순히 보물을 내놓고 애초 약속대로 사이좋게
나누는 게?"
"좋소. 당신 생각대로 하시오. 그렇지만 내 얘기는
한 마디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기만 하니
해도 너무하잖소."
"좌우지간 보물은 어디에다 숨겼지?"
"보물은 찾지 못했소."
"그걸 누가 믿어?"
"수수께끼 투성이의 섬이었소. 내가 살아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오. 자, 찬찬히 설명할 테니 듣고 나서,
내가 정작 보물을 숨긴 것 같은 기미가 보이거든 그때
질책해도 늦진 않소. 자, 칼을 좀 거둬 주시오."
"그럼 박협사의 얘기를 한번 들어 보겠소. 한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야!"
"내가 진정코 보물을 건졌다면, 그리고 나 혼자
독식할 생각으로 함께 간 그들을 죽였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찾아왔겠소? 가만히 숨어서 도망칠
궁리나 했겠지."
"당신 혼자서는 강도를 빠져나갈 방법을 모르니까!"
"어쨌건 그런 의심은 지금에 와선 아무런 의미가
없소. 보물을 못가지고 온 건 확실하니까."
"혹시 어디에다 숨겨 두고 홀몸으로 강도를
빠져나갔다가 나중에 살작 찾아가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지?"
"숨길 곳이나 있는 줄 아슈?"
"그렇긴 하지만......"
굴림의자는 그제서야 단검을 거두었다.
"허어, 참......"
삿갓은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나 앉았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욕심을 내게 할 만큼 큰
거금이라 일단 박협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소.
약속한 기일도 지켜지지 않은데다, 더구나 네 명이
나가서 혼자 돌아왔다니 어찌 수상쩍다고 하지
않겠소. 자 그럼, 어떻게 된 건지 한번 들어 봅시다."
삿갓은 잠깐 멈칫하며 어두워지고 있는 바깥쪽을
두려운 시선과 지친 듯한 태도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지난 날들이 무서운 악몽과도 같았다.
삿갓은 한참만에 굴림의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상은 경과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보물을 찾지 못했으니 면목도 서지 않고 해서 그냥
슬그머니 사라지려 했소. 허나 배도 고픈 데다가,
섣불리 사라져 버리면 당신이 오해하겠다 싶어 이렇게
굳이 찾아들었던 것요. 당신도 자초지종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구......"
굴림의자는 대꾸 대신 침을 꼴깍 삼켰다.
"해 지기 전에 섬에 도착한 건 좋았소. 갈매기섬은
마치 죽음의 섬처럼 괴기스러웠지요. 김협사와
의논해서 도착 즉시 보물이 묻혔다는 동굴을 찾기로
했지요. 뱃사람들을 선착장에 남겨 놓은 뒤 횃불을
준비해서 삼형제 언덕과 삼형제 바위를 찾아 마침내
동굴을 찾아냈지요."
"그래서요?"
"우리는 거기가 무인도라고 착각했더랬습니다."
"그럼 사람이 살고 있더란 얘기요?"
"들어 보세요.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데 박쥐란 놈이
뺨을 때립디다."
"난 지금 사람이 살고 있었느냐고 묻고 있소."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사실 사람의
발자국도 보지 못했소."
"......?"
"동굴 속 샛길로 접어들려는 순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소."
"사람의 소리?"
"가슴이 섬뜩했지요. 여자의 웃음소리였으니까요."
"그런데?"
"족제비가 겁을 집어먹었던 것 같았소. 날이 밝거든
다시 시작하자고 그러더군요. 그러나 나는 기왕에
우리의 움직임이 노출된 이상 강행하자고 우겼지요.
밤새 하릴없이 지내면 뭣합니까. 일단 보물을 찾아
놓고 적이 나타나면 그때 대처해 나가는게 옳다는
판단을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족제비는 제 몫을 포기할 테니 나 혼자
해보라더군요."
"허어 그 참......"
"결국 그것이 제 명을 재촉하게 됐지만......"
"죽었소?"
"네에. 족제비는 죽었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도 나중에사 알게 됐지만......
어쨌건 그로부터 보물이 묻혀 있는 위치를 자세히
들은 뒤, 횃불을 들고 혼자 동굴속을 헤매게 됐지요."
"족제비는?"
"그는 되돌아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혼자 보물이
묻힌 곳을 발견하게 된 것까진 좋았는데......"
"보물이 있긴 있습디까?"
"족제비가 일러준 대로 북쪽으로 걸린 해골바가지를
건드렸지요. 그 순간 돌무더기가 우박처럼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습니다. 내가 재빨리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쥐도 새도 모르게 암장이
되었을 테지요."
"으음......!"
굴림의자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입구는 막히고 횃불은 꺼지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쥐새끼 한마리 나오지 않더군요. 아까 들었던
여자의 웃음소리 역시 늑대나 귀신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고 체념해 버렸지요...... 내가 돌무덤을
헤치고 밖으로 빠져나오기까지 꼭 사흘이 걸렸습니다.
바위 틈새에서 나오는 물로 배를 채우며 한기와
허기와 싸우느라고 기진맥진이었어요......"
삿갓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선착장으로 돌아와
보니 족제비도 당신의 그 두 사공과 배까지도
흔적조차 없더란 얘깁니다."
"어디로 갔던가요?"
굴림의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엔 분노했지요. 동굴에 갇힌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은 것까진 참아줄 수 있었지만, 나만을 따돌리고
놈들끼리만 훌쩍 떠나 버렸다는 게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글쎄 그들이 어떻게 됐다는 얘기요?"
"그새 혹시 보물이라도 찾아서 먼저 떠나 버리지나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상상으로 애간장도 타고
불안하기도 했지요. 어쨌건 일행도 찾고 먹을 것도
해결해야 되겠기에 섬을 돌아보기 시작했지요.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들한테서 사정도 엿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보물상자는?"
"배도 보이지 않는데 찾아 봤자 무엇으로 실어
나릅니까. 그보다도 혼자 힘으론 도저히 무너진
돌무덤을 헤치고 보물상자를 꺼내올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군사 수천이 가서 본격적인 도굴 작업을
벌인다면 또 몰라도......"
"분명히 보물은 그대로 묻혀 있는거요"
"내 짐작으로도 아무도 보물상자를 파내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지간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열흘씩이나
버티다 간신히 찾아낸 것이......"
"찾아낸 것? 무엇을 말이요?"
"시체!"
"시체? 누구의?"
"두 뱃사공!"
"아아!"
"목이 깨끗하게 베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지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습니다.
더구나 두 사공을 벤 자국을 봐서는 보통 무예자의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족제비의 솜씨라는 가정도 해 볼 수가 있지
않겠소?"
"근데, 그게 그렇지가 못했다는 얘깁니다."
"어째서?"
"이튿날 나는 바닷가에 버려진 또 하나의 노인
시체를 발견했거든요."
"노인의 시체?"
"지금도 확실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곁에 버려진
옷과 칼을 보고서야 그가 족제비인 줄 알았지만, 그는
분명히 앙상하게 일흔 노인의 알몸으로 죽어
있었지요."
"오오!"
"이상한 병을 얻었든지, 혹은 다른 무예자의
술책으로 그렇게 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이상 두
뱃사람을 그가 베었을 거라는 가정은 희박해질
도리밖에 없지요."
굴림의자는 무엇엔가 골똘히 생각이 멈춰져 있는
듯했다.
"노인의 몸이었다구요?"
"분명히 늙어바진 몰골이었소."
"그토록 여자를 조심하라구 일렀는데도......"
"예에?"
"많은 여자들로부터 한꺼번에 공격을 당했을
겁니다. 아무리 절륜의 무예를 쌓아도 며칠을 두고
계속 시달리면 정기는 사라지고 피부는
노쇠하고...... 아까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분명히 섬에는 무리들이 살고 있소."
"무리들이라면?"
"이상한 무리들이지요. 섬에 들어온 이상 아무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삿갓은 굴림의자의 단언에 흠칫 떨었다.
"그럼 내가 갈매기섬으로 갔다가 유일하게 살아
나온 셈이 되겠군요?"
"그런 셈이지요."
굴림의자는 모처럼 쿡쿡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강도로 되돌아올 수 있었소?"
"참,그걸 아직 얘기 안 했군요. 모든 일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앞일이 캄캄해지더군요.
갈매기섬으로 돌격해 들어갈 때의 야심이 부질없어
보였고, 더구나 육지로 쉽사리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지요."
"당신 같은 무사가......"
"무예가 절륜하면 뭣합니까? 족제비로 쉽게
무너졌는데. 어쨌든 불가항력같은 무서운 힘을 섬에서
느꼈다고나 할까요?"
"섬의 크기는 얼마나 되던가요?"
"엄청나게 컸습니다. 손바닥만하다고 판단한 건 큰
오산이었지요. 보물이 묻힌 곳에서 느껴진 오싹한
전율도 그렇거니와, 섬 구석구석에서 뿜어져 나오던
괴상한 공포가 더욱 기를 죽게 하더군요. 우리같은
무사 이백 명쯤이 한꺼번에 몰려가면 혹시
모를까......"
"그래서 다시는 재공략할 용기가 사라졌다는
얘기군요."
"당분간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마침
우리가 타고 갔던 배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난 자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만 덩그러니 남았더란 얘깁니까?"
"그렇지요. 아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할까요?
천운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그들이 왜 나는 공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스란히 살려 보냈으니 말입니다.
내가 내지로 나가서 다시는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지
못하게 소문을 내라는 의도로 살려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삿갓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굴림의자는 의미
모를 혀를 찼다.
"그럼 박협사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굴림의자였다.
"글쎄요.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정대감한테나 박포
대장군 아니면 왕자들의 가병으로 들어가서
벼슬길이나 찾아볼까 합니다만......"
"하기야 박협사 정도의 무예라면 누구든지 탐을
내겠지요."
"그러나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 누구한테 몸을
의탁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군요. 천천히 좀
생각해 보아야겠어요. 나는 그렇다치고 굴림의자
선생은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소. 여전히 갈매기섬의
보물에 미련을 두시겠지요?"
"이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일을
도모해야겠지요."
"보물지도가 선생의 품에 들어 있는 점을 기화로
장사를 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지만......"
"지도로 장사를?"
"위험한 도전보다는 적당히 받고 팔아넘기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요."
"글쎄요......"
"자, 그럼 이 삿갓은 일어나 보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반드시 재회하기를 바랍니다. 적지만 가시는 길에
노자나 하시오. 한양 가서 출세하면 이 굴림의자를
잊지나 마시구려."
그러면서 굴림의자는 엽전 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고맙소......"
삿갓은 일어나기 전에 굴림의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말없이 팔을 흔들었다.
4. 먹구름 모이다.
무인(戊寅)년 봄.
한 젊은이가 개경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남의 눈에 잘 띄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빨간 두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맑은 이마 밑으로는 검은 눈썹이 살쩍까지
뻗었으며, 주사 같은 입술이 백옥 같은 얼굴 위로
또렷이 나타났다.
호랑이 털을 벗겨 만든 반저고리를 입었고, 등 뒤로
비스듬히 빚겨 멘 장검의 칼집에는 보석들이 박혀
햇살에 반짝거렸다.
또한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우뚝한 콧날
밑으로 꽉 다문 입에서는 뭔가 결의에 가득찬 듯한
긴장미가 시종 넘치고 있었다.
젊은이는 폐허가 된 개경을 묵묵히 돌아다 본 뒤
발길을 돌렸다. 귀족정치로 영화로웠던 고려왕조의
오랜 사직이 멸망하면서 그 영광은 잡초 속으로 숨고
말았다.
그는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서산 마루에서
뉘엇거리는 해를 바라보았다. 갈 길이 먼 듯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인가 족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가래야 폐허같은 들판에 대여섯 가옥의 앍은
기와집과 초가가 섞여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
주막이라고 써 붙인 초롱이 눈에 띄었다.
젊은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괴상한 차림의 무사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풍모는
귀한 집 자제로서의 기풍이 넘쳐 흘렀다.
젊은이는 주막 안으로 쑥 들어섰다.
한 떼의 칼잡이들이 대청마루를 차지하고 앉아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당 한족
구석에 놓여진 평상으로 가서 앉았다.
칼잡이들은 떠드는 중에도 한 사람씩 교대로 바깥을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주모가 젊은이 앞으로 다가왔다.
"무얼 들갔시요, 젊은 양반?"
"예에, 밥과 술을 좀 주시오. 그리고 잠자리를 얻을
수 있을는지."
젊은이의 말에 주모는 대답 대신 약간 골살을 팠다.
"먼 데서 오시는가 봅네다?"
"예에, 아주 먼 데서. 한양으로 갑니다만, 해가
저물고 있으니 쉬어갈까 합니다."
"그렇지만......"
"왜 그러지요. 잠자리가 없습니까?"
"그게 아니라......"
주모는 칼잡이들 쪽을 살피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밥과 술은 드릴테니 어서 자시고 떠나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무엇 때문에요?"
"저 자들이 보이지 않나요?"
"무엇하는 사람들인지요?"
"산적들입니다."
"권부가 어지럽고 나라에는 흉년이 들었으니 저런
놈들이 생겨나지 말란 법이 없지요."
"젊은 무사 양반은 저 놈들이 무섭지도 않나요?"
"글쎄요. 나를 해치지 않는 한 피할 필요는
없겠지요."
"돈 깨나 있어 보이면 가차없이 길손의 목을
따지요."
"그런데 아직은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무슨
이유지요?"
"오늘은 무어 크게 한탕을 한다나요. 노비들이 이
쪽으로 끌려 간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아침부터 길목을
차고 앉아 저렇게들 기다린다구요."
"노비들을?"
"오늘은 죄다 암컷들이래요."
"탐낼 만도 하군요."
"어쨌든 저들의 눈에 띄기 전에 갈 길을 재촉하는
게 좋을 듯합네다만......"
주모의 권고를 다시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 본 다음
젊은 무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걱정은 마시고 밥과 술을 좀 주시오. 고기까지
있으면 더욱 좋구요. 종일 굶었더니 배가 몹시
고프구려."
주모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젊은 무사는 산적들이
떠드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나라에서는 올 여름부터 노비의 가격을
정한다는 소문이더구먼."
"글쎄, 그게 어떻게 정해지는지 알 수가 있나."
"아따, 수컷은 물건의 크기로 정해지고, 암컷은
엉덩짝 크기로 정해지는 게 아니겠나."
그래 놓고 그들은 왁자그르 웃어젖히고 있었다.
"근데, 오늘 잡아가는 년들은 두목님께서는
산채에다 풀어 놓으실 작정인가 봐. 수청도 들게
하구......"
"알 수 없지. 그동안 우리 공로도 있으니
마누라감으로 한 년씩 나눠 주실지."
"허허, 이 사람. 미리 김치국부터 마시지 말게.
두목님이 잘도 자네같은 게으름뱅이한테 여잘
맡기겠다."
그러는 동안 주모가 주안상을 젊은 무사에게 날라
왔다.
"어서 자시고 떠나시는 게 좋아요. 저 놈들이
발작하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까."
"저 놈들의 숫자가 지금 몇이나 되오?"
"아마 스무 남은 명은 실히 될 것 같습지요. 지금은
관군들이 데리고 가는 노비들한테 정신이 팔려서들
그렇지, 해 지기 전에 노비들 행렬이 지나가지 않으면
그 화풀이로 손님한테 행패부릴 게 분명하외다."
"고맙소."
젊은 무사는 짧게 대꾸한 뒤 호리병 속의 막걸리를
잔 가득히 채워부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였다.
뒷간으로 가던 졸개 하나가 젊은 무사에게 신경이
갔던지 그 앞에서 멈칫 섰다.
"이봐!"
졸개는 벌겋게 취한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이놈아, 귓구멍이 먹었냐?"
"나를 불렀소?"
젊은 무사는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이놈 봐라! 여기 지금 네놈 말고는 아무도
없잖으냐?"
"그렇구만요."
젊은 무사는 사방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대답했다.
"그래, 넌 뭣하는 놈이야?"
"그냥 지나가다 들른 손님놈이올습니다."
"뭐라구?"
"초면이 분명한 길손한테 놈 놈 하시는 건 확실히
실례가 아니겠소?"
"하하, 이 놈 봐라!"
"개도 밥을 먹을 땐 때리지 않는답니다. 난 지금
바쁜 끼니를 때우고 있소. 할 얘기가 있으면 상을
물린 뒤에 하는 게 어떻겠소?"
"그래, 네놈의 말도 옳다. 허나, 네놈의 대답하는
입솜씨가 돼먹지 않았단 말야. 뭐 지나가다 들른
손님놈이라구?"
"사과하지요."
"어떻게 사과할테냐?"
"별다른 사과야 있겠습니까? 피차가 불손하게
대했으니 각각 조금씩 물러서는 기분으로 돌아앉으면
되겠지요."
"허어, 이 놈 봐라. 그따위 사과론 어림없다. 품
속에 든 돈냥이나 있으면 모두 꺼내어 놓아라."
젊은 무사는 대꾸 대신 묵묵히 술만 따랐다.
"야, 이 놈아! 어째 대꾸가 없냐?"
졸개도 화가 났던지 밥상을 들고 앉은 젊은 무사의
멱살을 확 나꿔챘다.
그 순간 졸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눈 깜짝 할 순간이었다. 젊은 무사의
손가락이 움질한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가슴패대기를
아프게 밀어버린 것이다.
"다리를 못 가누는 걸 보니 많이 취하신가 보구먼."
젊은 무사는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여전히 유유한
태도로 잔을 들이켰다.
졸개는 자빠진 자세로 젊은 무사를 쏘아보았다.
"이봐 자네, 이제 막 날 밀었겠다?"
"아아뇨."
졸개는 상대의 조금 전 행위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태도로 눈을 껌벅였다.
"......다시 묻겠다만 무엇하는 놈이냐?"
"보시다시피 개골산에서 사냥이나 하며 지내던
자올시다."
"으음......, 네놈의 등에 걸린 장검은 어디서
생겼느냐?"
"제 아버님께서 주신 거외다."
"사냥꾼 주제에 그토록 좋은 칼이 어디서 생겼느냐
말이다."
"좋은 칼이란 걸 알아보시니 고맙습니다. 어디서
생긴 건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칼집에 박힌 게 모두 보석이 아니더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 이리 내놔 보아라."
"안됩니다."
"뭐라구?"
"남의 가보를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바도
잘못이지요."
"내놓지 않으면 빼앗겠다."
젊은 무사는 졸개의 위협에 대꾸는 않고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날이 어떻게나 날카로운지 당신같은 남정네들의 목
열 개도 한꺼번에 벨 수가 있지요. 나는 이 칼을
가지고 한양으로 가서 작은 솜씨를 보여 주고 무과
벼슬자리나 얻을까 해서 지금 그 쪽으로 가던
길이지요......"
자빠져 있던 졸개가 씨근덕거리며 무슨 소린가를
내뱉으려던 순간, 싸리문 바깥을 망보던 졸개 하나가
뛰어들고 있었다.
"왔다, 왔다!"
그것을 신호로 산적들은 후다닥 일어서서 싸리문
바깥으로 몰려나갔다. 자빠져 있던 졸개 역시 제 칼을
챙겨들고는 그들을 뒤따랐다.
젊은 무사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꼿꼿이
앉아 수저를 들었다.
"얼마나 놀랬다구요. 멀리서 보니 한 녀석이
손님한테 시비를 걸데요. 벌써 서두는 짓거리가 심한
행패를 부릴 기미였다니까요."
다가와서 서두는 주모의 말에는 대꾸 않고 젊은
무사가 물었다.
"저 놈들은 매양 이 곳으로 나와 사는 모양이지요?"
"그런 셈이지요. 나라 사정이 어지러우니 관군도
힘이 없어 저들을 어쩌지 못한다나요. 관군이래두 별
수 없지요. 차라리 한통속 패거리가 되어 민폐를
끼치니까요. 게다가 작년 봄 선주(宣州)의 왜구들
침입 이후 올해도 놈들이 쳐들어 왔다믄서요.
잘못하다가 나라에 큰 난리라도 나면 어찌해야
될지...... 좌두지간 손님은 저 놈들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이 자리를 어서 뜨시는 게 좋겠어요."
"내 걱정은 마시오."
젊은 무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저녁을
들었다.
갑자기 주막 앞쪽이 시끄러웠다. 필시 노비들을
끌고 지나가는 관군들과 아까의 그 산적들 사이에
시비가 일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느새 주모도 싸리문 바깥으로 쪼르르 달려나가고
없었다. 젊은 무사는 바깥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태연히 앉아 수저를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새 아우성은 더욱 커지고 쨍그렁 칼 부딪치는
소리와 아녀자들의 비명 소리가 바로 문앞에서
들려왔다.
그때 주모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뚱거리며 달려
들어오더니 뒷간 뒤로 암탉처럼 도망쳐 숨고 있었다.
그런데도 젊은 무사는 천하태평이었다. 그새 그는
호리병의 술을 모두 비우고 밥을 들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바깥이 조용해졌다. 그 틈새에 졸개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왔다.
"관비(官婢) 일곱을 고스란히 건졌으니 두목님이
몹시 좋아하시겠다!"
그러자 다른 졸개가 그 말을 받았다.
"반반한 얼굴하며 흰 살결로 보아서 혹시
사대부(士大夫)집 아낙들이 아닐까?"
"그래봤자 자네 차지는 될 턱이 없으니 좋아할 것두
없어."
"쳇, 누가 아니래. 어쨌건......"
"자, 해 지기 전에 산채로 돌아가야지. 다른
군졸들이 몰려닥치면 공연히 시끄러워질테니."
"무어 서둘 것도 없다니까. 수행군졸하고 다 미리
짜고 치른 짓이니까. 놈들은 슬슬 도망치며 우리가
멀리 달아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끌어 줄거여."
"그건 그려. 그럼 마시던 술독이나 쫘악 비우고
떠나 보도록 하지......"
산적들이 다시 주막으로 몰려 들어왔다.
놈들의 옷에 핏방울 한 점 없는 걸로 보아 군졸들과
미리 짜고 비속들은 넘겨받은 게 분명했다.
그들의 태도는 의기양양했지만, 끌려들어온 일곱
명의 여자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서리맞은
참새새끼들처럼 모두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끌려왔을 뿐 한 마디의 반항도 엄두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심한 두려움
속에서도 체념으로 자신을 가누려고 애쓰는 듯했다.
산적들은 선 채로 바가지 술을 철철 흘리며 목을
축였다.
"자, 우선 뺏어온 물건들 하고 저 년들부터
수레에다 싣게나."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지시에 따라 졸개들은 술
바가지를 집어 던지며 부대자루를 어깨에다 맨 뒤
여자들을 끌고 나섰다.
그때였다.
그동안 잠자코 음식상을 비우고 있던 젊은 무사가
낮지만 엄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잠깐 기다려라!"
그제서야 산적 일행은 젊은 무사의 존재를
의식했는지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저 놈은 뭐야?"
우두머리 산적이 소리질렀다.
그러자 아까 젊은 무사에게 떠밀렸던 졸개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우두머리 산적에게
고자질했다.
"저 놈이 아까부터 내 신경을 건드리더니, 이젠
제법 큰소리까지 치고 나오누만. 부두목님. 저 놈의
목을 댕강 잘라 버리고 떠납시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인가 봅니다."
"아까부터 여기 있었다구?"
부두목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졸개를
돌아보았다.
"그러믄됴. 저것 보시구려. 죽치고 앉아 술 한 병에
밥 한 그릇까지 깨끗이 비웠잖아요."
졸개는 젊은 무사의 음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놈 참 배포 하나 집채만하군. 그 난리통에도
뱃대기에 음식을 쳐넣고 있었다니. 죽을지도 모르고
저승길 행차 준비를 하고 앉았으니 바보가 아닐까.
그래, 이놈아. 무슨 일로 우릴 불렀느냐?"
부두목의 말에 젊은 무사는 평상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섰다.
"저 여인들을 나한테 맡기고 떠나라."
"뭐야?"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터진 소리였다.
"두 번 말해야 하는가? 너희들은 산적들인 모양인데
물론 먹고는 살아야겠지. 어진 백성들의 재물을 턴
것이 분명할테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봐 줄테니 그것만
가지고 어서 떠나라. 그러나 이 여인들은 내가
가져야겠다."
"어헛! 이놈, 이 어린 것이! 지금 뭐라구 주둥아릴
놀리고 있는 거냐? 죽고 싶으냐?"
"죽고 싶은 생각은 전연 없다. 다만 이 여인들을
나한테 양보해 달라는 얘기만 했을 뿐이다."
"안되겠다면?"
"그런 대답처럼 큰 실수는 없지."
"실수?"
"저 여인들을 양보할 수 없다면 대신 너희들의 목을
가질 수밖에......"
젊은 무사의 당돌한 말에 산적들의 입에서는 거의
동시에 폭소가 터졌다.
"으하하하하...... 저 놈 좀 보라구. 어쨌건
애숭이와 입씨름을 하느라고 공연히 시간만
지체했구나. 자, 누구 나서서 저 미친 놈을
베어버리고 어서 떠나자."
부두목의 말에 두 졸개가 환도를 빛내며 젊은
무사의 목과 허리를 동시에 내리쳤다.
"엇!"
순간적으로 소리친 것은 부두목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두 졸개가 환도를 치켜든 채 비명소리도
없이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거냐?"
다른 졸개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숨통을 따진 않았다. 잠깐 기절했을 뿐이지만,
너희들이 정작 그 장난감같은 칼을 계속 휘두른다면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뭐라구?"
부두목이 참지 못하고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너희들, 이 놈을 에워싸라! 다소 솜씨는 있어
보이지만 한꺼번에 숨통을 조여들면 결코 살아서
도망치진 못할게다 얼른 원형진(圓型陣)을 만들어라!"
부두목의 호령에 산적들은 들었던 짐짝들을
내팽개치며 삽시간에 젊은 무사를 에워쌌다.
그러나 젊은 무사는 아직 등 뒤의 칼을 빼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정말 살인을 원치 않는다. 온갖 나쁜 짓으로
세월을 보내는 너희들이지만 나와 직접 관계 없는
일은 탓하는 성미가 아니다. 그러나 저 여인들의
일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 그건 나와 관계가 있는
일이니 말이다. 잘 알겠느냐. 어서 어설픈 행동을
중지하고 떠나도록 해라."
이번에는 산적들도 젊은 무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아ㅆ.
적의에 가득찬 눈초리로, 그러나 얼마간 긴장한
태도로 칼들을 높이 쳐든 채 젊은 무사 앞으로
조심조심 다가들었다.
죄어오는 산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젊은 무사는
여전히 우뚝 선 채로 한 마디 던졌다.
"어서 덤벼 보아라. 스무 명이 한꺼번에 말이다."
아무리 칼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오합지졸들이지만 앞의 늠름한 상대에게는 기가
질리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내가 자네들의 일에 참견할 때에는 반드시 사연이
있어서 그러는 법이다. 제발 피를 흘리지 말고
여인들만 두고 물러가다오."
"이 놈이, 잔소리가 많다."
소리친 졸개 세 명이 한꺼번에 칼날을 번뜩였다.
"아앗!"
"으아악!"
"헉!"
윙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비명소리는 달랐지만 세
졸개의 몸뚱이가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새 젊은 무사의 손에는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가 칼을 언제 뺐으며, 어떻게 휘둘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흠, 솜씨가 제법인걸!"
부두목이 신음처럼 내뱉았다. 그렇지만 쉽게 물러갈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싸울 생각이냐?"
젊은 무사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다섯
명이 동시에 칼질을 했다.
"어? 이 놈이 어디로 사라졌나?"
한 졸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칼을 휘둘렀는데 눈 깜짝할 순간에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기 계신다, 이놈들아. 이것이
은신술(隱身術)이라는 무법(武法)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나를 베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덤빌테냐?"
젊은 무사가 그들의 몇 간 뒤에서 웃고 있었다.
"별 것 아니다. 모두 한꺼번에 목을 겨누어라!"
부두목의 독려에 그들은 다시 원을 죄어가며 칼끝을
내밀었다. 순간 졸개들 네 명의 입에서 다시
비명소리가 터졌다.
"이번에는 네 명만 베었지만, 다음에는 다섯 놈을
베겠다!"
그제서야 산적들도 겁이 더럭 난 모양이었다.
부두목이 먼저 소리질렀다.
"안돼겠다. 이쯤에서 물러가자. 어서 짐을 들어라."
"어림없는 소리. 너희들이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의 칼은 일단 피를 본 이상 끝장을 내는
버릇이 있다. 어서 네놈들의 목을 내놓아라."
그 말에 산적들은 정작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보따리를 챙겨들 엄두도 못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싸리문께로 내달았다. 그러나 젊은 무사는
그들을 뒤쫓을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다.
"어디 두고보자!"
부두목의 마지막 고함을 신호로 그들은 시야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칼을 납검시킨 젊은 무사는 그제서야 대추나무밑에
몰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걱정할 것 없소. 모두 앞으로 나오시오.
그런데 어인 신분의 낭자들인가요?"
젊은 무사의 말에 한 여인이 용기를 낸 듯
미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뉘신지 모르오나 위기에서 구해주신 은혜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실은 저희들은 계집종들이
아니올습니다."
"관비들이 아니라구요?"
젊은 무사는 그 여인에게 되물었다.
"예에. 어째서 저희들이 관비들이란 얘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젊은 무사는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여염집
아낙들일 것이리라. 심보 고약한 관군이 산적들에게
속여 팔아넙긴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럼......"
젊은 무사는 목례하며 여인들을 일별했다. 할
얘기가 없어졌으니 그만 떠나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일곱 명의 여인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얼굴이 있었다. 초록빛 장옷 아래로 살짝 가려진
얼굴. 흰 이마에 눈은 샛별처럼 까맣게 빛났다. 오똑
다듬어진 코와 앵두같은 입술. 그 여인은 아까부터
유심히 이 쪽을 보고 있었지만 젊은 무사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만일 그녀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치면 그만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어, 잠깐만요......"
기어코 장옷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올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무얼요. 의로운 일을 아는 무사라면 누구라도
보고만 있지 않았겠지요."
젊은 무사는 가까스로 대꾸했지만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장옷의 여인이 입을 열자 이제까지 그녀를 감싸듯이
하던 여섯 명의 여인들이 길을 터 주었다. 그녀의
자색에는 결코 여염집 처녀일 수가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만
던지고 떠난다는 건 인사가 아닐 듯 하옵니다.
그렇다고 저희들이 지금 무사님께 마땅히 보답할
입장도 되지 못하니 우선 성함이나 알아 두고 떠날까
합니다."
"예에, 저는......"
젊은 무사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런 다음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대단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성함이나 들이밀며
생색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성함을 말씀드려
보았자 본색이 개골산 사냥꾼의 아들이니 기억하실
리가 없지요. 차라리 그 쪽의 본색이나 가르쳐
주실런지요."
그러자 장옷의 여인은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하오나......"
처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본색을 드러낼
처지가 못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습니다. 다만 낭자의
본색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바와 같이,
저에게도 본색을 드러낼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낭자들은 어디로
가는 중이었습니까?"
"예, 대흥사로 탑돌이를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면 서둘러 길을 재촉하시지요. 어두워지는데
밤길이 어떨런지요."
"부지런히 걸으면 가까운 동네에는 닿을 수
있겠지요."
"모셔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갈 길이 저와는
정반대 방향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 곳에서
오늘밤을 묵을 작정이니 쉬면서 추격꾼들을
막겠습니다.어서 가 보십시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겠지요."
"그럼......"
장옷의 여인은 몹시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여섯 명의 여인들도 묵묵히 목례한 뒤 장옷의
여인을 감싸고 싸리문을 나섰다.
젊은 무사! 그는 이미 열 여덟 살의 건장한 사내로
자란 왕천(王天)이었다. 개골산에서 무예를 닦은 뒤
한양으로 향해 가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난세에 습관 들기 위한 출발에 불과했다.
조금 전에 본색을 감춘 일단의 여인들이 밤길을
다투어 어딘가로 도망친 것도 바로 어지러운 세상을
잘 말해 주는 사건이었다.
탑돌이를 가는 여인들을 잡아 산적들에게
팔아넘기는 관군들의 소행도 난세의 표본이다.
백주 대낮부터 민가로 내려와 술을 퍼마시며
부녀자들을 거리낌없이 희롱할 수 있는 산적들의
작태만 보아도 어둡고 어지러운 세월임에는
틀림없었다.
왕천은 주막 마당 한쪽에 보이는 섬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만치서 조금 전에 죽은 산적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시체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들은
나쁜 놈들이었으니까.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었으니까.
왕천의 생각은 그처럼 단순했다.
그런데 그의 가슴은 왠지 야릇하게 뛰고 있었다.
필시 조금 전에 보았던 장옷의 아름다운 여인
때문이리라. 사대부집의 따님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탑돌이를 위장해서 어딘가로 도망을 치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규중에 머물지 못하고 밤을
이용해서 숨어 갈 수밖에 없는 곡절이 있으리라......
'정말 어지러운 세상이로구나!'
왕천은 중얼거렸다.
'낭자는 누구일까? 어느 집 규수일까?'
싸리문을 걸어나가면서 살짝 곁눈질을 보내던
여인의 애타하던 표정,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과
가느다란 허리 아래로 풀잎처럼 흔들리던 둔부......
왕천은 눈을 감았다. 사직이 바뀌지 않았다면
당당한 대감집 자제로 성장하여 장옷의 여인에게
매파라도 보낼 수 있었을 어제의 권문세가!
그러나 지금은 쫓기는 신세이다. 뿐만 아니라
장옷의 여인에게 본색조차 드러낼 수 없는 처지였다.
언제 뜻을 이룰지, 아니면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덧없이 세상을 버리게 될는지...... 결국 그
장옷의 여인을 다시는 만날 수가 없는가......
"저, 무사님......"
누군가가 뒤에서 조용히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듯하던 장옷 여인의 목소리는
분명코 아니었다.
"젊은 무사님이 그토록 놀라운 솜씨를 가진 줄
몰랐다우."
주모였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이제사 슬금슬금 나타난
것이다. 주모의 호칭에는 어느새 님자가 하나 더
붙었고, 없던 교태까지 서른이 갓 넘었을 법한 여인의
몸매에서 베어져 나왔다.
왕천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얘기를 모두 엿들었겠구려."
장옷 여인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 주모에게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런 외딴 동네에서 혼자
술을 팔고 있는 겁없는 주모에 대해서 문득 의심이
갔다.
"엿듣다니요. 싸우는 소리만 꿈인 듯 생시인 듯
들었지요."
"무슨 얘길 들었소?"
왕천은 섬돌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그, 무서워라. 그렇게 흉악한 얼굴을 지을
것까지는 없구먼요."
주모는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왕천은 갑자기 장검을 휙 하고
뽑았다.
"악!"
주모는 부지중 비명을 질렀다. 칼을 빼든 왕천은
주모의 가슴께로 칼끝을 겨누었다.
"나으리, 왜 이러십니까요?"
"바른대로 대시지!"
왕천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냉정하게 다그쳤다.
"무얼 말씀인가요, 나리!"
"저 놈들과 한 패거리라는 걸 실토하란 말이다."
"천만에요. 한 패거리라니요. 내사 개경과 한양
사이를 오가는 길손에게 밥과 술을 파는 여편네에
지나지 않습니다요. 한 패거리라니요. 나으리의
오해를 저로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요."
"이해할 수가 없다구?"
"저야......, 술파는 장사치가 아무려나 산적들한테
술 좀 팔았기로서니...... 나으리가 그걸 가지고
오해하셨나 본데......"
주모의 호칭은 어느새 나으리로 변해 있었다. 실상
주모로서는 왕천의 돌연한 태도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산적들한테 술을 판 걸 탓하는 게 아니다. 더구나
나는 오해 따위를 한 적도 없다."
주모는 뒤로 반쯤 자빠진 채 손을 내저었다.
"무엇이 무사 나으리를 화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흉폭한 산적들한테 나으리가 혹시 해나 입지
않을까 싶어 귀띔한 죄밖에......"
"이런 허허 벌판에 누굴 믿고 술장사를 벌였는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요. 관군들한테도
산적들한테도 술과 밥을 팔고 있습니다요. 그게
죄라면 죄이겠지요."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자네는 산적들에게서 술값을 받지 않았다."
"그건......"
"자네는 한 떼의 낭자들이 탑돌이하러 지나갈
것이라는 귀띔을 군졸 끄나풀한테서 듣고는, 그
정보를 산적들한테 팔아 넘기지 않았는가?"
"무슨 근거로......"
"미리 알았기에 여기서 한사코 기다렸겠지."
"설마......"
"게다가 자네는 나를 위하는 척 하면서 내게
돈푼이나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밖으로 내몰려고 하지
않았느냐!"
"억울한 누명이야요."
"산적들 중 바깥 경비 책임자가 자네
기둥서방이었지? 그 자에게 나를 슬쩍 귀띔해 주고,
밖으로 나를 내몰아 그 자에게 내 돈을 빼앗고 또
공을 세우게 하려 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천만에굽쇼."
"거짓말 마라.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에서 입에 풀칠
하기 위해 이것 저것 좋은 일 나쁜 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진 백성의 목숨까지 빼앗아 가며 자네 배를
채운다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나으리, 진정하시와요."
"산적들이 왜 순순히 달아났는지 너는 그 이유를
알겠지?"
"그걸 소인네가 어찌 알겠습니까요?"
"끝까지 너는 숨기려 드는구나. 뒷간으로 자네가
도망치는 척 하구선 모든 걸 엿듣고, 다시 그
놈들에게 낭자들의 행방을 알려주도록 모두 짜고 한
짓이 아니냐?"
"아아, 나의. 제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닥쳐라. 너희 주막에서 키우는 깜둥이를 찾아
보아라."
"예에?"
주모의 얼굴은 금새라도 까무러질 듯이 파랗게
질렸다.
검정 색깔의 개는 아니나 다를까 마당 한구석에
죽은 듯이 곱게 잠들어 있었다.
"저 개는 무엇 때문에 저토록 곱게 잠들어 있느냐?"
왕천의 말에 주모는 두 손을 싹싹 비볐다.
"나으리, 나으리, 무조건 한번만 용서해 주시와요.
이 년은 아무 것두 모르는 일이긴 하나......"
"어허! 주모는 한사코 진실을 숨기려 하는구려.
진작 실토를 했더라면 목숨만은 붙여줄
생각이었는데......"
"나으리, 무사 나으리, 이렇게 빌고 있사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저한테......"
"그럼 네 죄를 말해주마. 너의 소행이 수상스러워
자네 몰래 밥덩이를 깜둥이에게 던져 주었느니라."
"!"
"아니나 다를까, 짐작대로 깜둥이는 편안하게
잠들었다. 나 대신 죽은 것이다. 독약을 넣었더란
얘기다!"
"나으리, 그럴 리가!"
"네가 준 술은 아직 입에도 대지 않았다. 자,
진정코 자네에게 죄가 없다면 이 술을 마셔 보아라."
왕천은 따로 부어 두었던 술을 꺼내왔다.
"술에다 독을 타지 않았다면 너는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너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겠다. 자,
내 앞에서 마셔 보아라."
주모는 이제사 별 수 없었던지 바쁘게 두 손을
비볐다.
"나으리, 용서해 주시와요. 한번만 용서해
주시와요.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 한번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요!"
"시키는 대로 어떻게 다 할 것이냐?"
"나으리가 시키는 대로...... 용서만 해
주신다면...... 오늘밤 나으리께 이 몸을
대접하겠사와요."
"에잇, 더러운 년!"
왕천은 칼끝을 휘둘러 주모의 가슴패기를 쳤다. 그
통에 저고리의 고름이 끊어지면서 하아얀 젖가슴이
벌어졌다.
"에그그......!"
"자, 어서 마셔라. 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억지로
마시게 해 주겠다. 그래도 입을 벌리지 않으면 이
칼을 다시 피로 더럽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테냐?"
"나으리! 으흐흑......"
주모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운다고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 설사 나는 네가 준 밥과 술을 먹었다
해도 죽지는 않는다. 그 정도의 내공력(內功力)은
벌써 익혀둔 몸이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날뛰는
잡것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너를 응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 산적들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너부터 깨끗이 주어라. 자, 어서!"
왕천은 술잔을 주모 앞에 내밀었다. 주모는 한사코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주모는 그러다가 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벌리고 술을 부어 넣었다. 주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변하더니 점점 검은 빛깔이 되어갔다.
얼마 후 주모는 비틀거리고 일어나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하던 주모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녀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잔인하지만......, 응분의 죄값이다. 너로 인해
죽은 수많은 백성들의 재물인 줄 알아라.'
중얼거린 후 왕천은 일어섰다.
어둠이 사방으로 덮쳐왔다. 어둠 속에서도 아까 그
장옷의 여인 얼굴이 더욱 또렷이 떠올랐다.
왕천은 칼을 재빨리 납검했다.
그는 어둠이 깔린 길을 나서서 한양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북한산덩을 끼고 한 떼의 군마가 치달리고 있었다.
스무여 기(騎)의 선두에 선 것은 불여우라는 별명이
붙은 젊은 장수 윤호(尹浩)였다.
산악을 끼고 오르다가 중턱쯤에서 말을 멈추었다.
"잠깐 멈춰라."
선두의 불여우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의 직위는 경기 도호부사(都護府使). 뿐만 아니라
기마대장(騎馬隊長)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세자
방석(芳碩)의 호위대장이고 영의정 정도전의 충실한
부하이다.
"칠 기는 우편으로 돌고, 육 기는 좌측을 뒤져라.
나머지는 나를 따르도록. 놓치면 안 된다. 놈들은
얼마 가지 못했다. 걸음이 느린 대신 감쪽같이 잘
숨는 놈들이니까 바위 틈새나 나무 밑둥지 근처를 잘
살피도록."
그의 서슬 퍼런 목소리는 역시 우렁찼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알은 부리부리했다. 위로 치켜진
검은 눈썹과 꽉 닫혀진 입이 장수로서의 위엄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의 전포(戰袍)는 붉은 빛깔이었으며, 군데군데
화려한 수를 놓아 자신의 우용을 더욱 과시했다.
뒤따르던 군졸 하나가 불여우에게 일렀다.
"태백 쪽에서 이사해 온 놈들 같습니다. 두 어미와
다섯 마리의 새끼라면 그것들이 틀림없습니다. 겨울을
지내려고 이 쪽으로 건너온 바는 필시 굶주림을
면하려고......"
"허튼 소리 그만 지껄여라. 일곱 놈 모두를 잠을
궁리나 해라. 어미 곰은 죽여도 좋다. 새끼 곰들은
가급적 사로잡도록 해라."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마군졸들은 화살통을
흔들며 말고삐를 당겼다. 불여우는 얼마큼
군졸들로부터 뒤떨어져서 등성이를 훑었다.
불여우 윤호가 그토록 출세하기까지에는 특이한
사연이 있었다.
남루한 옷에 장검 한 자루를 등에 지고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솔밭 저 멀리에서
뿔피리 소리에 섞여 시끄러운 인마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불여우는 그래도 긴장하지 않았다.
팔짱을 가슴에다 끼고 묵묵히 걸으며 여전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척에서 큰 집채만한 것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간발의 차이였다.
그 간발의 순간에도 무사로서의 육감은 그것이
엄청나게 큰 맹수라는 사실을 느꼈으며, 그 맹수가 이
쪽을 공격하고 있고, 또한 저들의 아우성이야말로 이
거대한 맹수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불여우는 본능적으로 등에 진 장검을 빼어
후리쳤다. 움직임도 번개처럼 빨랐거니와 그의
칼솜씨는 아름다울 정도로 맵시가 있었다.
약간 허리를 굽힌 머리 위로 거대한 물체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호랑이였다.
그런데 불려우로서는 그 놈의 생사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뒤따라 방금 전에 베어 넘긴 크기의 다른
호랑이가 뻘건 이빨을 모질게 드러낸 채 마악 비상의
자세를 취하던 중이었다.
조금 전의 순간보다 여유는 조금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벗어 번개처럼 화살을
메겨 순간적으로 시위를 당겼다.
거대한 호랑이는 끽소리 한 마디 못하고
나뒹굴었다. 화살은 정확하게 호랑이의 인당골에
박혔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떼의 인마는 불여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비켜라! 영상대감의 사냥행차 길이시다. 길을
비켜라!"
앞서서 달려온 군졸이 마상에서 소리쳤다.
불여우는 재빠르게 납검한 뒤 활을 비껴 메며
옆으로 물러섰다. 대장인 듯한 중년의 사내가 황금
전포자락을 번득이며 뒤따라 들이닥쳤다.
"이런 산중에 웬놈이야. 그래 조금 전에 이 쪽으로
커다란 호랑이 두 마리......"
대장은 문득 말미를 끊고 있었다.
불여우는 다음 하회가 있을 때까지 허리를 굽힌 채
한쪽 옆으로 비껴나서 가만히 서 있었다.
"여봐라!"
대장의 입에서 말이 다시 떨어진 것은 한참 후였다.
"어서 대답하여라. 영상대감 나으리께서 뭐라고
묻고 계시지 않느냐!"
다른 군졸이 옆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영상대감이라면 정도전 나으리다.
불여우는 여전히 얼굴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예에."
"저 두 마리의 호랑이가 어떻게 된 거냐?"
"예에, 소인이 황급하여 베어 버렸습니다. 한
마리는 활을 쏘아 죽였습니다."
"한꺼번에 두 마리를 ?"
"영상대감 나으리의 유쾌한 사냥놀이에다 흥을 깬
죄 죽어 마땅하오나, 소인은 그것이 나으리의 행차인
줄은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깊이 통촉하옵소서."
"너를 꾸짖는 게 아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정말 두 마리를 한꺼번에 네가 죽였느냐?"
"틀림없이 두 마리를 거의 동시에 잡은 건
사실이오나......"
"이건 보잘 것 없는 솜씨가 아니다. 어디 얼굴을
들어 보아라. 너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말해
보아라."
"소인의 출생은 알 길이 없고, 다만 어려서
적두노사님의 무문에 들어......"
"적두노사?"
"예에."
"계속해 보아라."
"스무 해 가까이 무예를 닦은 뒤 한양으로 가서
나라를 위해 미력이나마 바치라는 스승님의 명을
받들고 이렇게 하산하는 길이옵니다. "
"그래......"
정도전은 잠깐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너의 솜씨가 이러하다면 네 스승의 솜씨는
소문보다 엄청나겠구나?"
"그러하온 줄 압니다. 다만......"
"다만?"
"다만 스승님께서는 두 번 다시 무예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얼마 전에 모습을
감춰버리셨습니다."
"몸을 숨겨?"
"어디로 가셨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줄로
압니다."
"그 아무도란 누구란 말인가?"
"사부님의 네 제자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세 제자들은 어디에 있느냐?"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저와 비슷한 소명을 받을
줄로 짐작되옵니다."
"그런데 세 명의 네 동문 형제들도 너처럼 무예가
뛰어나더냐?"
"황공하옵니다. 바른대로 말씀드리면 사부님께서는
소인의 기술이 가장 빼어나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으래......!"
그런 사건이 불여우에게는 절호의 행운이었다. 바로
그 길로 정도정에게 발탁된 것이다.
앞장서 가던 군졸이 절벽 쪽을 향해 소리질렀다.
"곰 한 마리가 이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불여우는 손을 들어 해를 가리며 군졸이 가리키는
편을 바라 보았다.
"한 마리?"
"예, 어른 곰 한마리만 보입니다."
"그 이상하다......"
그러자 아까의 그 군졸이 말을 받았다.
"틀림없을 겁니다. 처자식을 살리려 혼자 죽으러
오는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가가도 놈이
도망치지 않으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저런
애비 곰을 죽였다간 재앙이......"
"닥쳐라!"
"그런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
뿐입니다."
"무사가 한 마리의 곰을 죽였대서 재앙을 입어?
사람을 죽였다간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겠구나.
네놈은 어째서 아까부터 계속 마음 약한 소리만
지껄이느냐?"
"황공하옵니다."
"두 번 다시 그 따위 불쾌한 소릴 지껄이지 마라."
호통을 끝낸 불여우는 말에게 채찍을 가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숫곰을 향해 치달렸다.
수풀이 시작되고 있었다.
"원형진을 만들어 사방에서 죄어들도록 해라. 우선
저 놈부터 해치운 뒤에 어미 곰과 새끼 곰을 잡도록
한다. 멀리 가진 못했을게다."
세 패로 갈린 군졸들은 숫곰이 사라진 수풀을 향해
조심조심 죄어들었다.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저 쪽에서 소리질렀다.
"조심해서 접근해라. 엄청나게 큰 숫곰이다. 화살을
단단히 메겨서 주의를 게을리하지 마라."
불여우가 소리친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불여우가 탄
말이 삐걱했다. 쿠루룩 소리가 나며 동시에 말이
비명을 질렀다.
손쓸 사이도 없이 불여우는 재빨리 자세를
가누었다. 동시에 거대한 숫곰의 앞발이 그의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붉은 입을 쫙 벌린 숫곰의 날카로운
이빨이 불여우의 목을 노리며 순간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놈이!"
불여우는 몸을 반쯤 잽싸게 비끼며 단검을 꺼내어
곰의 목을 먼저 찔렀다.
숫곰은 킹 비명소리를 냈으나 그대로 뻗지 않고 두
발톱을 날카롭게 빛내며 불여우의 면상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불여우도 만만치 않았다. 단단히 어깨에다
기합을 넣은 불여우는 곰의 인당골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퍽 소리가 난 듯했다. 곰은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큰일날 번했다. 큰 바위덩이만한 놈이 몸은
어떻게나 날쌘지!"
불여우는 투덜거리며 땅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으리, 다치시진 않았습니까?"
군졸들이 그제서야 몰려들었다.
"네놈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느냐. 이 놈이
나한테 대들었기에 망정이지 네놈들을 공격했다면
필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말을 끊은 불여우는 숫곰의 목에 박혀 있는 담검을
다시 빼서는 배를 좌악 갈랐다.
검붉은 피가 좌르르 쏟아졌다. 불여우는 생간을
뜯어내더니 두 손바닥에 움켜쥐고 맛있게 빨았다.
군졸들은 파랗게 질려서 대장의 아귀같은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불여우는 곰의 생간을 씹어먹고 있었다.
"쓸개는 따서 말려라. 정영상 나으리께 바칠
선물이다. 가죽은 너희들이 알아서 나눠 가져라.
그리고 다른 곰들은 어떻게 됐느냐?"
불여우의 호통에 그제서야 정신이 든 군졸들은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깊은 굴 속으로 숨었거나 멀리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포기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동물에게도
육친의 정이 하물며 이러하거늘 그 가족마저
살해한다는 건......"
군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곰을 잘랐던 단검이 휙 소리를 내며 날았다. 군졸은
가슴에다 수리검을 맞고 끽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허튼 소리를 계속 지껄이면 너희들도 이 꼴이
된다. 내 앞에서는 말조심해라. 잘 알았느냐?"
타던 말을 다친 불여우는 죽은 군졸의 말에 훌쩍
올라탔다.
"자, 나머지 곰들을 찾도록 해라."
군졸들은 대장의 잔인성에 골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탓할 자가 없었다. 차라리 그를 간하다가
이제 막 죽은 동료처럼 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난세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무예훈련 때 불여우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던
정도전이 의미있는 웃음을 흘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불여우는 다섯 명씩 상대하게 해 놓고는 막대기를
휘둘러 봉술(棒術)의 진수를 보여 주었는데, 그의
막대기부림이 어떻게나 혹독했던지 상대한 군졸들은
하나같이 병신이 되거나 큰 부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선지 누구라도 그와 상대하기를 꺼렸다.
평소의 대장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군졸들로서는
그의 명을 조금도 그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까지 반드시 놈들을 찾아내도록
해라. 놈을 발견한 자에게는 어미 곰의 생간을 빨도록
해 주겠다."
말을 끝낸 불여우는 말고삐를 쥐고 흔들며 산허리를
먼저 돌아 나갔다.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고 있었다. 뿔피리 소리가
휘익휘익 들려 왔다. 집합 신호였다. 목표물을
발견했던가 아니면 다를 명령이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군졸들은 호각 소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불여우가 호각수와 함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 아무도 찾지 못했느냐?"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태백 쪽으로 숨어간
듯합니다. "
한 군졸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네놈들이 게으른 탓이다. 오늘은 예성강을 건너
석산에서 쉬고 내일은 그 쪽 산에서 사냥을 하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 저녁은 네놈들이 게으름을 피운
벌로 밥을 주지 않겠다."
"저어, 나으리."
한 군졸이 주뼛거리며 나섰다.
"왜? 저녁을 굶는 게 억울하다는 얘기냐?"
"아니올시다. 그보다 석산에서 내일 사냥을
하신다는게......"
"왜, 거기서 사냥하면 누가 안된다고 하더냐?"
"그 쪽은 황해도입니다. 관찰사 나으리의 허락
없이는......"
"그런 걱정은 말아라. 내가 책임을 지겠다."
군졸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새벽부터 기마대의 선두에 선 불여우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해주 쪽을 향해 치달렸다.
연백을 지날 즈음에는 거의 아침을 먹을
시간이었다.
"나으리, 어제 저녁을 굶었습니다. 저희들은 허기가
져서 더 달릴 수가 없습니다. "
"조금만 참아라. 진수성찬을 먹도록 해 주마."
한 군졸의 말에 불여우는 내뱉듯이 말을 받았다.
"그런데 나으리, 저희들의 목적이 사냥이라면 이 쪽
길에선 들토끼 한 마리 구경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한 군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큼지막한 사냥감은 원래
예상을 뒤엎고 이런 야산에 숨어 있는 법이다."
"예에?"
"배들이 고플테지. 저기 큼지막한 기와집이
보이는구나. 가서 아침을 얻어 먹도록 하자."
"그런데 나으리. 이 곳이 황해도라는 걸 잊지는
않으셨겠죠?"
"알고 있다."
"그래도 허락 없이 사냥을 하시렵니까?"
"그럴 참이다."
"만일에......"
"물론 모두 내가 책임을 진다. 너희들은 내 명령만
따르라. 그리고 이 곳을 사냥터로 잡은 이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를 말아라."
정작 불여우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군졸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물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지금 두목이 사냥만이 목적이 아니며, 무슨 임무를
띠고 굳이 이 쪽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었다.
권부가 채 안정되기도 전에 세자 책봉을 둘러싼
왕자들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은 시절이었다. 누가
누구의 편이며 누가 누구보다 더 엄청난 음모극을
벌이고 있는지 군졸들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다.
다만 앞서서 달리는 불여우가 왕세자의 호위대장으로
있고, 정도전 영상의 두터운 신임 아래 있기에 필시
어떤 중대한 밀명을 띠고 이 쪽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는 것이었다.
기마대가 큰 기와집 앞에 도착했다.
"이리 오너라."
불여우가 먼저 대문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안으로부터 곧장 하인 하나가 달려 나왔다. 그는
전포로 감싼 일단의 기마대를 보자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 계시냐?"
"예에, 계시긴 합니다만......"
"사냥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 도호부사
일행이 잠시 신세를 지겠다고 말씀드려라."
"에그머니, 도호부사 나으리라구 말씀하셨나요?"
"그렇다."
"경기도에는 여덟 도호부사가 있다고 소인네는
들었습니다만, 어느 부사 나으리라고 말씀드릴깝쇼?"
"어허, 이 놈 봐라. 그래 네놈의 주인은 대체
누구시냐?"
"아무 것도 아니십죠. 벼슬은 없지만 근방에서는
덕망이 높아 김영감님으로만 불러도 우리 주인님이란
걸 금방 알게 되죠. 때문에 목사나 관찰사 나으리도
부임길에 이 곳을 지나면 존경을 드리고
떠나십니다요."
"잘 알았다. 나도 너의 주인께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내 신분에 관해선 주인께 따로 말씀드리겠다."
그제서야 하인은 대문을 열어 주었다.
대문을 열어 주면서도 하인은 불여우 일행에게
주의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말들은 모두 바깥에다 매어 두시고 들어오시와요.
우리 주인님의 땅에서는 모두가 조심해야 하니깐요.
아마 나으리들이 새벽부터 밟고 오신 땅 모두가 우리
주인님의 땅이겠지만요......"
주절거리던 하인은 이 쪽의 말은 더 듣지도 않고
안채로 달려가 버렸다. 수십 간은 돼 보이는 엄청나게
큰 기와집이었다. 때문에 하인들이 몇이나 되며 또
누가 살고 있으며 주인의 거실은 어디쯤에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불여우는 부호 김영감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다소 조심스런 몸짓으로
하인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하인놈한테서 소식
들었습니다.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지요."
노인은 불여우 앞에서 공손히 절을 했다.
불여우 역시 노인에게 읍하며 대답했다.
"경기 도호부사 윤호올습니다. 하루쯤 신세를 질까
합니다. 저희들은 어젯밤에는 야영을 했고 줄곧
굶었습니다."
"아침 진지를 곧 지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장을 푸시고 세수를 하시지요. 얘들아, 군관들은
사랑채로 모시고 부사 나으리께서는 별당으로
듭시도록 해라. 나와 함께 아침을 들겠다."
네 명의 하인이 등대해 있더니 주인의 명령을
받들어 부산하게 움직였다.
군졸들로서는 대장의 의도를 이해할 길이 없었다.
부호 노인의 접대야 그렇다치더라도 대장이 이 집에서
하루씩이나 묵겠다는 이유도 아리송했다. 더구나 이
곳은 근처에 사냥할 데가 없는 들판이었다.
그러나 군졸들은 그 이유 역시 물을 수가 없었다.
대장은 이미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별당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려우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걸었다. 덕망 있는
지방의 부호 김노인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들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생각만 있다면 그가 누구 편에
가담하든 가담된 쪽에 훨씬 승산이 있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불여우에게
은밀히 내려진 임무는 물론 김노인의 의사를 타진하는
데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이 곳을 지나치면서
그의 의사를 슬며시 알아 두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루를 묵고 가겠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세 개의 담장을 건너는 샛문을 지나 별당으로
안내된 불여우는 하녀들한테로 인계되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꽃같은 모습들로서 몸에서는
향기가 풍겨났다. 두 명의 하녀가 시중들게 되었는지
늘어서 있던 다른 하녀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뒷걸음질로 물러가 버렸다.
두 하녀 역시 말없는 가운데 불여우의 칼과 활을
벗기고 전포를 벗게 했다.
"너희들은 통 말을 하지 않는구나."
"묻지도 않은 물음엔 대답하지 말라는 가르침
때문이옵니다."
한 하녀가 공손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집안에 법도가 제대로 섰구나."
불여우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김노인이 웃으면서 불여우의 거실로 들어왔다.
"귀하신 분을 누추한 곳에다 모셔 놓고 빈약한
음식상을 올리게 된 점 송구스럽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갑자기 불청객으로
들이닥쳐 대접받는 것만도 죄송할 뿐입니다. 국록을
받는 자의 민폐같아서 다시 한번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무얼요. 남루하나마 손님 접대를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 늙은이인데요. 자, 반주부터 한 잔
드시지요. 스무 해 묵은 매화주이온데 매우
향기롭습니다. 우선 제가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노인은 하녀들의 시중을 마다하고 호리병을 들어
불여우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문득 열려진 뒷문 너머 낮은 담장 저편으로 이 쪽을
흘깃하는 여인이 있었다. 무심한 척 이 쪽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여인의 눈과 마주친 불여우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화용
월태(花容月態)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깐 사이였지만 그녀에게 홀려버린 불여우는 그만
잔을 삐딱했다.
"아, 이거 실수했습니다."
김노인이 먼저 사과했다.
"아니올시다. 저의 잘못입니다. 별당 밖으로
누군가가 지나가기에......"
"어떤 놈인가? 어떤 놈이 귀하신 어른의 아침
진지상을 어지럽게 했는가?"
김노인은 하녀들을 돌아보며 짐짓 화를 냈다.
"아리따운 낭자였습니다."
불여우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대꾸했다.
"낭자?"
"여기 선 아이들처럼 하녀 복색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조카 딸년인가 봅지요. 아비 잃은
딸년을 내가 기르고 있습니다만, 우리 가문의 법도를
배우기에 그토록 게을렀나 봅지요. 손님의 시야를
어지럽힌 벌로 나중에 엄하게 꾸중할까 합니다."
"아니올시다. 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이 쪽의
잘못으로 낭자가 까닭 모르게 벌을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김노인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침상을 받으면서도 불여우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잠깐 사이에 지나간 그 여인의 고혹적인 자태
때문이었다. 조카딸을 한번 더 보여 달라고 말해
버릴까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참았다.
차라리 총각인 점을 빙자해 혼사를 이루게 해
달라며 졸라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역시 너무
이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서 미적거릴 동안 한 번 더 그 여인을 만날
기회가 있을 법도 했다. 설사 만나지 못하더라도
목적한 일을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 곳엘
들러 그 일을 끄집어 내도 늦지 않겠다고 자위하였다.
불여우는 차라리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
"어르신네는 요즈음 시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에? 요즘 시국이라니요?"
김노인은 도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 사직도 다져지지 않은 차제에 역적들은
상감마마와 왕세자 나으리에게 흉포한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실정이 아닙니까?"
불여우의 눈빛은 제풀에 펄펄 화를 불태우고
있었다.
불여우는 말을 꺼내 놓고 김노인의 입에서 어떤
얘기가 나오는가를 조바심하며 기다렸다.
"산야에 묻혀 농사나 짓는 늙은이가 나라의 큰 일을
어떻게 시시콜콜 알겠습니까?"
"하해같은 덕망으로 근방 인심을 쥐고 계신 분이
나라의 큰 일을 전혀 모른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한적한 곳이라 길손도 드문드문하고,
설사 묵고 가시는 손님이 있다 해도 정치 얘기는
도무지 꺼내 놓지를 않더군요."
"그러시다면 더욱 제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방원 왕자의 움직임 말입니다.
나라에서는 엄연히 상감이 계시고 법도가 있거늘,
공공연히 무리를 모아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소란은
물론이거니와 법으로 추대한 세자의 존위를 엿보며
권부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어찌 나라의 대임을 맡은
자들로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이 그러하다면 나으리께서는 어떤 포부를
지니고 계시는지요?"
"국법을 엄히 하고 국권을 다지기 위해서는 왕세자
전하의 수하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
"고려의 잔당들도 반역을 도모하고 있고, 왜구의
침입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이 때, 나라가
집안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이 또한 큰
근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면 이 늙은이는 정치에 관심이
없기로 이렇다 저렇다 할 포부를 말씀드릴 겨를이
없구려."
"그럼 어르신네는 나라가 어찌 되어도 무관하시다는
말씀이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백성도 무사할
수 없다는 이치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많지 않은
재물이오나 나라가 궁핍하고 백성이 배를 곯을 때 이
늙은이는 재산을 모두 바칠 각오가 돼 있는
바입니다."
"권부의 다툼은 곧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것이죠."
"그야 사실이지만 집안 싸움은 결국 나름대로
결론이 날 것으로 사료됩니다. 문제는 난세의
어지러움을 틈탄 외적의 침입이 큰 일이니 집안
싸움을 거들기보다는 본분에 충실해서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이문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장사하는 법을 조금 터득한 장사치의 좁은 소견이오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김노인은 불여우의 말에 말려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더욱이 안된다고 판단해서인지
격앙되는 분위기를 요리조리 피하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애썼다.
"하루를 어떻게 유쾌하게 보내실 계획인지요.
관찰사의 허락없이 사냥은 금지돼 있기로 저로서는
도와 드릴 방법이 없지만, 들놀이라도 나가시겠다면
술과 안주를 보내드리지요. 가무에 능한 저희 집
하녀들도 있으니 딸려 보내서 흥을 돋우도록
하겠고......"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불여우는 벌떡
일어섰다.
"주인장, 과분하신 대접 고마웠습니다. 하루쯤 묵을
계획이었습니다만 소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세를 다시 지겠습니다. 역시 나랏일이 급하여
떠날까 합니다."
"그러시다면......"
김노인은 그를 붙들지 않았다. 어디로 갈 것이며
언제 다시 들를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세심한 인물이었다.
불여우를 선두로 한 이십여 기의 기마대는 다시
해주로 향해 들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해지기 전까지 해주에 도착하실 셈입니까?"
우두머리 군졸이 불여우에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동안 불여우는 곧장 말을 달리면서도 무슨
생각에 잠겨서 몇 시간 동안이나 묵묵히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깊은 침묵에서 깨어난 불여우는
우두머리 군졸을 돌아보았다.
"글쎄다...... 자넨 내 가까이로 붙어 서게."
"예."
불여우는 속력을 늦추며 우두머리 군졸이 말머리를
가지런히 붙여올 때까지 기다렸다.
"자네들은 나한테 아무 것도 물어 오지를
않는구나."
"무얼 말씀입니까?"
"해주에는 무엇 때문에 가느냐구."
"......"
"사냥은 왜 하지 않느냐구."
"......"
"왜 너희들한테는 아무 임무도 내리지 않느냐구."
"실상은 그것이 궁금합니다."
"하지만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묻지 말라 했겠다?"
"그렇습니다."
"너희들은 훈련원서도 일당 백의 무예자들로 뽑힌
군사들이겠다?"
"직위가 없으니 사병이라고 말해야 되겠지요."
"무어 어떠냐.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아마 너희들한테
큰 벼슬이 내릴 것이다. 설사 벼슬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왕세자 마마의 근위병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냥길에 나서면서 전장으로 가는 전포를 왜
입었느냐고도 묻지 않았지?"
"그것 역시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큼지막한 사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래,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자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실상 나는 어떻게 작전을 펴고 어떻게 수월히
임무를 완수해야 되는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고
있다."
"우둔한 저희들 머리에서 무어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겠습니까마는, 혹시 수행하여야 할 임무를 미리
가르쳐 주시면 하찮은 계획이나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불여우는 다시 묵묵히 한 마장
가까이나 갔다.
"여보게, 군장."
"예에."
"이게 무언가?"
불여우는 느닷없이 말의 등 위로 우뚝 섰다.
"주마입마상세(走馬立馬上勢)죠."
"자네한테도 이 정도의 솜씨는 있겠지?"
갑자기 채찍을 가해 말을 달리기 시작한 불여우는
안장에 매달려 거꾸로 물구나무를 섰다.
"조금은...... 지금 나으리께서 하시는 수법은
도립식정마경지좌세(倒立植頂馬頸之左勢)입니다."
"이건?"
이번에는 달리는 쪽의 저편으로 완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당리장신입니다. 훌륭하십니다."
군장은 불여우가 임무를 발설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대장의 말타기 솜씨나 칭찬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마상재(馬上才)를 피우던 불여우는 털썩
안장으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군장."
"예에."
우두머리 군졸은 다시 서둘러서 불여우 곁으로
다가갔다.
"아까 김노인네 저택에서 말야."
"예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지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지."
"예에?"
"아침을 들고 있는데 열려진 장지문 뒤쪽 낮은 담장
너머로 웬 낭자가 지나가더란 말이야."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떨려서 음식이 입에 들어가야지."
"그 댁에는 하녀들이 많으니까......"
"아니야. 영감이 제 조카딸년이라구 말은
했지만......"
"그토록 나으리께서 마음에 드셨다면 당당히 나서
보셨을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말야."
"나으리의 신분으로 보면 김영감이 아무리 덕망
높은 시골 부호라지만 제 딸도 아니고 조카딸을 내
놓는 정도라면 감지덕지했을 텐데요."
"그게 아니란 말일세."
"아니 된다고 거절했단 말입니까?"
"그 영감이 갑자기 당황하더란 말일세."
"그야......"
"수상해!"
"무언가......"
"제 조카딸년이 아닐지도 몰라."
"역시 하녀......"
"숨어 사는 여인일 수도 있어."
"......"
"돌아가는 길에 한사코 밝혀내야겠어. 두문동과
중신의 딸일 수도 있어. 좌우지간 너무나 아름다웠어.
보석처럼 눈이 부셨다니까!"
한참을 주절거리던 불여우는 갑자기 입을 꽉
다물었다.
"자, 이쯤에서 덫을 놓도록 하겠다."
"쉬는 겁니까?"
"이 놈아, 사냥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사냥이라면......"
"들고양이라도 좋다. 눈에 보이는 짐승은
무엇이든지 죽여라. 가축이라도 놓치면 안된다."
"옛! 가축까지도?"
"명령이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자,
모두 흩어져서 사냥을 시작해라. 군장과 호각수만 내
뒤를 따르라."
말을 끝낸 불여우는 야산의 숲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장끼 한 마리가 푸드득거리면 하늘로 날았다.
불여우는 누구보다 먼저 화살을 메겨서는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횡소리를 내며 날아가서는 장끼의
목을 꿰뚫었다.
"호각수는 내가 짐승의 목을 화살로 꿰뚫을 때마다
호각을 불어라.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로......
명중했음을 알리란 말이다."
회색빛깔의 들토끼가 수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윙 소리가 났다. 저쪽 편대의 군졸이 쏜 것
같았다.
"저 놈들이...... 누구의 노획이든 호각을 불어
주어라. 허어, 토끼의 뒷다리를 맞쳤군.
어쨌건......"
한 시간 가까이 웃고 불어제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사냥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잠시
사냥놀이를 쉬고 있던 참이었다.
별안간 군장이 소리쳤다.
"나으리! 저길 보십시오. 한 떼의 군마가 달려 오고
있습니다!"
불여우는 군장이 가리키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군장은 다소 근심스런 표정으로 불여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 있거라. 저들이 무엇 때문에 오는지 물어
보아야겠다."
"보나마나입죠. 관찰사 나으리의 허락 없이 사냥을
했으니 그 죄를 물으러 오고 있겠지요."
즈음해서 삼십여 개의 기마군이 불여우 앞으로
다가왔다.
"게 있거라! 웬놈들이냐. 웬놈들이 허락 없이
사냥을 하고 있느냐. 연락을 받고 네놈들을 잡으러
왔다!"
"네놈들이라구 했는가?"
기마군의 우두머리가 소리쳤고, 이 쪽의 군장이
화를 벌컥 내며 되받았다.
불여우는 묵묵히 팔짱을 낀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네놈들이라 그랬다.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관찰사 나으리의 허락 없이 사냥하는 자들을 놈이라고
부른 게 어디 잘못이냐? 어, 이 놈들 봐라. 까투리
장끼 암노루 들돼지 암송아지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을 어긴 자는 잡아 가두겠다. 그래,
네놈들은 어디서 굴러온 잡것들이냐?"
"이 쪽의 신분을 밝히기 전에 그렇게 큰소리 치는
네놈의 정체부터 어디 밝혀 보아라."
군장이 지지 않고 소리질렀다.
"보면 모르겠느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고을
현령(懸令)이다. 나의 벼슬이 어떠하든, 그리고
네놈들의 직위가 아무리 높아한들, 법을 어긴 엄연한
증거물이 있는 이상 용서할 수가 없다. 자, 모두
포승을 받아라."
"종육품 주제에......"
"뭣이?"
"결박되기를 거부한다면?"
"거부를 해? 대체 너희놈들은 어디서 온 누구냐?"
"설사 법을 어긴 죄인일지라도 그렇게 함부로 이놈
저놈 해도 괜찮은 게 현령의 예법인가?"
"이 놈이 말이 많구나."
"그래 좋다. 이 쪽의 신분을 먼저 밝히겠다. 놀라
자빠지지나 말아라......"
이때 잠자코 있던 불여우가 군장을 저지하며 불쑥
나섰다.
"내가 우리 기마대의 책임자이니, 책임 있는 대답은
내가 하겠다. 우리는 한양에서 왔다."
"한양에서?"
"비밀 임무를 띄고 왔기 때문에 신분을 밝힐 수가
없다."
"신분을 못밝힌다구? 허락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사냥도 비밀 임무 중의 하나더란 말이냐?"
"그렇다."
"뭣이라구?"
"조용히 돌아가 주길 바란다. 우리는 사흘 동안 이
곳에서 임무를 계속한 다음 가만히 돌아갈 작정이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불법 사냥을 얼버무릴
생각일랑 말아라. 정체를 밝히기 싫거든 어서 포승을
받아라."
"정히 당신이 곤란하다면 관찰사를 직접 만나겠다."
"뭣이라구?"
"관찰사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감히!"
"현령 따위에게 국가의 기밀을 밝힐 수는 없다.
어서 가서 아뢰어라. 굳이 내 신분을 묻거든 경기
도호부사라고만 전해라."
"도호부사라구?"
"여기서 기다리겠다."
그러자 현령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대강 짐작이 간다. 그렇지만
도호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범법을 했으니 더욱
용서받을 수가 없을걸."
"마음대로 해라. 어쨌든 관찰사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겠다."
불여우는 내뱉듯이 말한 뒤 현령을 외면해 버렸다.
현령은 기마군을 이끌고 바람처럼 돌아가 버렸다.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현령은 도호부사라는 직위
앞에서도 좀처럼 존경을 표시하지 않았다. 위계질서가
세워지지 않았던 만큼, 누가 누구보다 권력이 강하며
누가 누구보다 더 음모에 능한 가를 가늠할 수 없다는
암울한 시대의 표상이기도 하였다.
현령 일행이 떠난 뒤 군장은 역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불여우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 건방진 현령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기를 잘 했다. 그 따위를 베어서 유익할 건
하나도 없다. 우리는 더 큰 사냥을 하러 이 곳에 온
거니까. 자, 모두들 가까이 모여라. 이제야말로
중대한 임무를 맡기겠다. 실수 없도록 하길 바란다."
말에서 내린 군졸들은 모두가 불여우 앞으로
모여들었다.
"우리의 목적은 관찰사의 목을 베는 일이다."
"예엣?"
모두의 입에서 신음같은 대꾸가 터졌다.
"놀랄건 없다. 조관찰사는 방원 왕자의 오른팔이다.
일천의 경기군(輕騎軍)을 비밀리에 양성하고, 여차할
때 세자궁으로 밀어닥칠 것이라는 첩자의 보고가
있었다. 이를 미리 제거하라는 영상대감 나으리의
밀명이시다. 뒷일은 모두 그분이 책임질 것이다. "
"하지만......"
군장이 어물거리며 나섰다.
"왜 그러느냐?"
"상대가 일천의 기마군이라면......"
"이 겁장이 놈아. 미리 겁부터 내서 어떻게 할텐가.
내게도 다 생각이 있느니라. 자, 너희들은 관찰사
나으리가 나타나면 모두 나만 믿고 고분고분하게
굴어라. 예절과 존경을 표시하며 그를 안심시키도록
해라. 그를 쉽게 베기 위해서 이런 야산으로 유인해
낸 바이니 모두 명심하도록 해라."
"어떻게 벨 것인지요?"
"우선 사냥을 함께 하자고 권할 참이다. 숲 속을
달리다가 실수한 척 화살로 관찰사의 목을 꿰뚫을
참이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즉 그들이 정신을 채
차리기 전에 우리는 바람처럼 달아나야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아라. 설마
일천의 경기군을 모두 데리고 올 리는 없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의 행동이 재빠르다면 그들도 별 수
없을 것이다.물러가는 일차 지점은 아까의 그 김노인
저택까지이다. 자, 무장을 단단히 해라. 틀림없이
저들이 곧 나타날 것이다......"
스무여 기마군들의 얼굴에는 심각한 긴장감이
떠돌았다.
정오가 지날 때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군졸들은 불여우의 도깨비 놀음같은 암살작전을
이해할 길이 없었지만 그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냥한 동물들을 불에 구워 요기를 했다.
몇몇은 풀밭과 바위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겼으며,
몇몇은 숲 속에서 오줌을 갈겼다.
문득 서적으로부터 한 떼의 군마가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사 오는가 봅니다."
군장이 말했다.
"모두 일어나서 저들을 공손하게 맞을 차비를
해라."
불여우는 명령한 뒤 전포를 여몄다.
기마군은 일백여 기(騎)였다. 그에 앞서서 십여
기의 선발대가 앞장서서 뭐라고 소리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 쪽으로 곧장 달려오는 게 분명하군요."
군장이 속살거렸다.
저 쪽 선발대장의 목소리가 점점 똑똑히 들려왔다.
"예를 갖추어라. 엎드려라. 도관찰사 나으리의
행차이시다. 거기 있는 기마군들은 움직이지
말아라......"
불여우는 전혀 감정 없는 표정으로 허리를 약간
굽혀서 옆으로 비켜섰다. 군졸들도 불만스럽지만
대장의 태도에 맞추어 열을 지어 섰다.
한사코 대열은 불여우 앞으로 다가왔다.
"한양서 오신 도호부사라고 들었는데 누구신지
앞으로 나서시오."
불여우는 그렇게 말하는 마상의 얼굴을 재빠르게
살폈다. 필시 조수응관찰사였다.
듣던 대로 늠름한 체구에 힘깨나 쓰게 생겼으며
눈빛에서 만만찮은 야심과 지모가 번득였다.
'함부로 덤벼들었다간 큰코 다치겠구나......'
불여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관찰사의 서두르지
않고 정중한 대면 또한 불여우에게는 다소의 경계심을
유발기키는 점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으리의 관할지역에 와서
작으나마 소란을 피워서 황공무지로소이다. 하오나
일이 하도 초미하여 허락을 받기 전에 사냥을 하게 된
점 깊이 통촉하십시오."
"이미 짐작한 바는 있소. 허나 관할의 민심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서 외부인의 소란으로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죄는 묵과할 수가 없구려. 그대의
신분과 어찌하여 허락 없는 사냥을 감행했는지 변명을
듣고 싶소."
"우선 저의 신분을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경기
도호부사의 직함에다 왕세자 나으리의
호위대장이옵고, 기마대장까지 겸하고 있는
윤호올습니다."
"오호! 그렇소? 그러나 부사의 말만으로는 사실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겠구려. 세상에 하도 가짜가
많기로......"
"여기 있습니다. 제 직함을 증명하고 또한 띄고 온
임무까지 밝히는 첩지이옵니다."
불여우는 품에서 직인이 찍혀 있는 봉함된 봉투를
꺼내어 마상의 관찰사에게 건네주었다.
관찰사는 흘식 불여우를 노려본 뒤 그것을 뜯어
읽었다.
"그런데 영상대감의 고지라 할지라도 허락 없는
사냥은 이해할 길이 없구려."
"바로 그 점이올습니다. 아시다시피 상감마마의
병환이 쾌차하지 못하여 긴급히 약을 구해야 하겠기로
허락의 순서가 바뀐 점 널리 양찰하시길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미 숫곰의 쓸개는 구했습니다."
불여우는 군졸이 들고 있는 보따리를 가리켰다.
관찰사는 인당을 찌푸렸다.
"내의원(內醫院)의 처방이 곰의 쓸개라면 저토록
많은 잡동물을 때려잡은 이유는 또 무엇이오?"
"조제에 필요한 부품들입니다."
"더구나 곰 사냥은 태백을 따라 개골산 쪽이 나을
거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겨울이면 모르되 숲이
무성해지는 여름까지는 서방(西方)이 안성맞춤이라
하옵니다."
관찰사는 대꾸 없이 한참을 불여우를 노려보고
있더니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얘들아, 이 수상한 자들을 당장 묶어라."
관찰사의 명령에 백여 명의 기마병들이 창을
거머쥐며 불여우 일행을 둘러쌌다.
그러나 불여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미력한 병력으로 나으리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이 늦어 만에 하나라도
상감마마의 옥체에 불행이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은
관찰사나으리께서 면키 어려울 것이옵니다. 오죽이나
급했으면 영상대감께서 친서로 이런 구급약을
구해오도록 했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관찰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지나친 장난을 용서하시오. 그대의
충성심을 잠깐 시험해 본 것에 지나지 않소. 그런데
나한테 이상한 소문이 들어와 있구려."
"이상한 소문이라면?"
"그대가 세자 나으리의 호위대장이라면 상당한
무예자가 아니겠소?"
"과분하신 칭송입니다. 그나마 남들보다 조금
재주가 있기로 그런 소문이 난 듯합니다. 그러나
세자마마를 모시는 충성심만큼은 어느 누구한테도
못지 않을 듯합니다."
"가상한 일이오. 그러면 대왕마마를 향한
세자마마의 효심이 그 호위대장인 그대를 시켜
곰사냥을 나서게 했겠구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관찰사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런데 말이오!"
문득 관찰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예에."
"또 이런 소문도 내 귀에 들려옵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나를 해치려는 자객이 한양으로부터 은밀히
떠났다는......"
불여우는 속으로 아차했다. 관찰사가 이 쪽을
떠보기 위해 하는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왕자들과
개국공신들과 또 공훈 있는 장수들이 각각의 파벌을
이루어 서로 으르렁거리는 시절이었기에 보고를 받고
있을 것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황해도 관찰사가 암살
대상이 되어 있다는 소문쯤은 충분히 그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금시초문이옵니다!"
불여우는 간곡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림이나 했겠소만, 사실 나는 그 소문 때문에
밤잠을......"
"설마 우리 일행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일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불여우는 일이 잘못 되어간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결코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자신의 신분을 떳떳이 밝히고 베러 오는
자객이 천하에 다시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런 백주
대낮에......"
"무어 그렇대서 부사를 굳이 의심하는 건
아니고...... 아하하하......"
갑자기 그는 호기롭게 웃었다.
"상감마마의 약이 시급합니다."
"그토록 위급하오?"
"기밀이오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요즘 한양의 사정은 어떠하오?"
"도호부사 주제에 궁중 지밀한 곳의 움직임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임무가
바쁘옵니다. 세자마마께 나으리의 수고와 충성심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어서 사냥길을 재촉해 주십시오."
불여우의 말에 관찰사는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렇게 하시구려. 나도 부사의 사냥을 도와
드리리다."
"황송하옵니다."
불여우의 등짝으로 한 줄기 식은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관찰사가 실상은 이 쪽의 사냥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시하기 위해서 짐짓 그런 생색을
낸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관찰사의 신호로 기마병의 울타리가 풀렸다.
"부사의 사냥 솜씨를 옆에서 구경하고 싶소.
아니지. 세자마마 호위대장으로서의 솜씨라고 말해야
그럴 듯해지겠구려."
관찰사는 다소 비꼬는 투로 말하며 불여우 옆으로
붙어섰다.
"자, 너희들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관찰사
어른의 특별한 배려로 다시 사냥을 하겠다. 알겠지만
상감마마의 약재로 쓰이는 것이니 정성을 다해서
잡도록 해라."
불여우가 먼저 명령하며 말 위로 올랐다.
그는 관찰사 암살 작전을 재고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예 역시 예사롭지가 않을 것이며,
백여 명의 기마병들이 눈을 번득이며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한 그를 죽인다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사 죽인다 하더라도 살아서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다?'
불여우는 말을 달리면서도 생각에 골똘했다.
관찰사는 방원의 야심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그는 특수임무를 띠고 특수병력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는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별동부대인 터이다.
방원의 신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반대편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를 제거해야 되는 것이다.
떠나올 때 불여우는 은밀히 정도전 영상대감에게 불려
갔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베어 버려야 한다. 비록
그 자가 무서운 무예를 가지고 있긴 하나, 자네의
솜씨라면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만
없앤다면 저 쪽도 날개 잃은 독수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 자의 죽음 때문에 시끄러워지더라도 뒷일은 모두
내가 책임을 지겠다. 아무 걱정 말고 그 자를 베어
버리기만 해라...... 너의 임무는 그토록 막중한
것이다."
막중한 임무. 자신을 그만큼 믿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각오하고 관찰사를 베어야 하는
것이다.
윙하는 화살 소리가 났다. 불여우는 깜짝 놀랐다.
화살은 자신의 귓바퀴를 스쳐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가 먼저 나를 해칠 작정인가?'
찰나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관찰사의
웃음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아아하하...... 호위대장이 산노루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내가 한번 쏘아 보았소."
노루 한 마리가 저만치서 목을 맞고 나뒹굴고
있었다. 역시 관찰사의 솜씨였던 것이다.
불여우가 미처 칭찬의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관찰사의 말이 갈기를 맞으며 쏜살같이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이번에는 창을 곤두세워 수풀 속을 찌르고
있었다.
"역시 사냥은 즐거운 놀이구려. 더구나 상감마마의
약재로 쓰일 물건을 잡고 있으니 더더욱 신이
나는구려."
관찰사는 웃고 있었다. 그의 창끝에는 토끼 한
마리가 꿰어져 있었다.
"놀라운 솜씨입니다."
불여우는 짐짓 칭찬해 마지 않았다. 때가 이를
때까지 그의 호감을 사 두는 일도 과히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어느덧 산의 능선을 타고 있었다. 기마병의 편대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도 별로 괘념치 않는 걸로 보아
이 쪽에 대한 경계를 푼 듯이 보였다.
차라리 그는 사냥의 즐거움에 빠져서 무엇엔가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해치운다?'
불여우는 눈에 살기를 띠었다. 그를 해치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쉽사리 죽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성사되더라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불여우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기병대는
일제히 긴장한 표정으로 대장을 향하고 있었다.
'기회는 이때다!'
그는 직감했다. 관찰사의 호위기는 불과 팔 기.
불여우는 번개같이 빠른 솜씨로 화살을 메겨서는
활줄을 놓았다.
"으아악!"
관찰사는 목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불여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날렵한
환도가 햇살에 번뜩하더니 관찰사의 등을 향해
빛줄기를 그었다.
팔 기의 호위병은 이 불의의 사태에 대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태도로 잠깐 주춤거렸다.
"무엇을 하느냐! 저 자들도 없애 버려라!"
그렇게 고함친 순간 스무 기의 기마병 화살로부터
일제히 살이 날았다.
"으아악!"
"엇!"
관찰사의 호위병들은 일제히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숨을 끊어라! 저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빨리!"
불여우는 독려하며 죽어 넘어진 기마병들의 목을
부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홉 개의 시체가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됐다. 어서 나를 따르라!"
불여우는 산허리를 되돌아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떼의 군마가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모른 척해라. 대꾸는 내가 하겠다. 사냥을
계속하는 척 내처 달리기만 해라."
불여우는 졸개들에게 재빠른 소리로 지시했다.
기마병들이 다가왔다.
"관찰사 나으리는 어디 계시오?"
한 병졸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글쎄. 조금 전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우리도
지금 어디 계신가 하고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서쪽 야산으로 달려들어 가신 게
관찰사 나으리의 기마대가 아니었을까? 이 쪽 길을
찾아 보아라."
불여우가 반대편으로 손짓한 수에 바쁜 듯이 말을
몰았다.
이제부터 들판의 시작이었다.
"죽고 싶지 않거든 내 뒤를 힘껏 따라오너라!"
소리친 불여우는 바람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갑자기 산허리로부터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저 놈들을 잡아라아--. 절대 놓치지 마라.
나으리를 살해한 놈들이다. 무사히 도망치게 해서는
안된다--."
소리가 나는 듯싶더니 우박이 퍼붓듯 툭툭 소리가
나며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아악!"
한 군졸이 화살을 맞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직
마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비척거렸다.
그것을 발견한 옆의 군졸이 그를 부추기려고 했다.
"그냥 두어라. 궁시에 하필 맞은 놈은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길이 바쁘니 너를 데리고 갈 수도
없구나. 설사 저 놈들에게 붙들리더라도 우리가
관찰사를 해쳤다는 얘긴 절대로 입 밖에 내선
안된다."
그렇게 주의를 준 불여우는 몇 걸음 앞으로 말을
달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부상한 졸병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더 달리지 못하겠느냐?"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세자마마를 위해 영광스럽게
목숨을 버렸다고 기록해 주마. 잘 가거라."
말을 마친 불여우는 환도를 휘둘러 병졸의 목을
쳤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연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격꾼은 보이지
않았다.
"김노인의 저택으로 가자. 잠시 말을 쉬게 하라."
"곧 뒤따라올텐데요?"
불여우의 말에 군장이 대꾸했다.
"걱정 마라. 이 쪽 말이 피곤하면 저 쪽도
마찬가지다. 새 기마군이 추격해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저기 벌써 저택이 보이는구나."
불여우는 헉헉거리는 말을 독려하며 김노인의
저택으로 곧장 향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명령했다.
"물을 먹이고 편히 쉬게 하라. 곧 출발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우리가 예성강만 건너면 저들도
추격할 명분이 없어진다. 더구나 우리를 마중할
군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까......"
말미를 끊은 불여우는 김노인의 저택으로 달려
들어갔다.
"주인장 계시냐?"
"예, 계십니다. 별당 후원을 거닐고 계십니다. "
하인이 대꾸하고 나섰다.
"그냥 두어라. 내가 직접 가서 뵙겠다."
김노인은 손수 마당을 빗질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바삐 되돌아가야 될 몸입니다만 아까 신세를 진
감사 말씀이나 여쭙고 가야겠기에 들렀습니다."
"그 때문이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만...... 바쁘시지 않다면 하룻밤이라도
유하시고 떠나시는 게 어떨는지요?"
"다음에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런데 어르신네의
그 조카따님을 잠깐 대면하고 싶은데요? 규방 처녀에
대한 예의범절이 아닌 줄 압니다만......"
"그야 어렵지 않지만, 어떻게 하지요?"
"예에? 그새 몸이라도 앓고 있지는 않겠지요?"
"병이 든 게 아니라 정오쯤에 금산사엔가 뭔가
탑돌이를 갔구먼요. 나으리께서 하루만 유하시면
하인을 시켜 불러올까 합니다만......"
"그 역시 차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대면하려는 이유는 다음에 말씀 올리지요."
불여우는 경계의 눈빛을 노인에게 보내며 저택을
물러나왔다.
열 대여섯 명의 군졸들이 청루(靑樓)에 평민 복색을
하고 모여 있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까마득한데
그들은 벌써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별채에 들어가신 나으리는 벌써 이틀재 콧빼기도
안 보이시는구먼, 끄윽."
"글쎄 말여. 기집년들이 벌써 여섯 명째 번갈아
들어갔다는데 성한 몸으로 나올지나 모르겠는걸."
"그럼 누가 병신이라도 되어 나온다는 거야?"
"알 수 있나. 워낙......"
"아니,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냐?"
"누군 누구겠어, 우리 나으리시지."
"에게게. 나으리의 정력이 어떠신데 고까짓 계집
여섯 상대하구선...... 헌데 말야. 기생 할멈의
귀띔을 들어 봤더니 나으리의 신경질이
여전하시더라는군."
"뭐라구? 이틀 새에 여섯도 모자라서?"
"그게 아냐. 마음에 꼬옥 드는 계집이 없는가봐."
"아, 알겠어. 저번에 해줏길에 올랐을 때......"
"쉿!"
"왜 그래?"
"몰라서 물어? 그따위 곳엔 간 적은 물론 들은 적도
없다구 딱 잡아떼라 말씀하셨잖았는가?"
"차암, 그랬었지. 그건 그렇구, 나으리의 심사를
다시 곱게 해 드리려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아직은...... 지금 좋은 계책을 생각해 보는
중이야. 청하골 안과부는 어떨까?"
"허어, 이 놈 봐라. 물론 젊고 잘 생기긴 했지만
벌써 네놈이 손을 댔잖아."
"모르는 소리. 원래 여자란 독이 있기 때문에
밑엣놈이 먼저 슬쩍 맛을 본 뒤 나으리께 올려야
제법이라네. 이봐, 주모. 어서 술 가져와......"
그들은 거의 너부러져서 술을 보채고 있었다.
"역시 나으리는 해줏길 김노인네 집에서 봤다는
낭자 생각이 간절한가 봐......"
"간절해 봤자지 뭘......"
둘은 다시 술타령을 계속했다.
별채의 나으리. 그는 불여우 윤호다.
황해도 관찰사의 암살사건으로 조정은 끝없이
술렁거렸다. 백주 대낮에, 그것도 이 쪽의 신분을
여지없이 밝힌 상태에서 상대를 죽인 것이다.
보고는 즉각 방원의 귀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방원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왕세자와 정도전 일파들이 은밀하게
모의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 후 불여우를 불렀던
것이다.
"자네의 공적은 반드시 기록해 두겠네. 그러나
지금은 근신할 수밖에 없겠어. 혹시 일이 커지더라도
꿈에도 그런 참혹한 일이 없었노라고 잡아떼란
말일세.구설수에 올랐다고만 주장하란 말야. 뒷일은
다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자, 어디 가서 며칠 푹 쉬고
오게나. 함께 갔던 놈들을 모조리 데리고 가는 게
후환이 없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헌데, 자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겠네만......"
"무슨 소식이온지요?"
"흑사마귀란 놈을 아는가?"
"정창이 말씀입니까?"
불여우는 정도전의 입에서 뜻밖에도 동문인
흑사마귀가 들먹여지는 사실에 깜짝 놀랄 밖에
없었다.
"그래, 자네와 무예를 함께 배웠다더군."
"맞습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요?"
정도전은 불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씹어뱉듯이
대답했다.
"방원 왕자의 수호로 들어갔어. 자네를
베겠다더라."
"옛?"
"그 때문에 저 쪽의 동태가 조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설마......"
"어떤 경로로 그 쪽에 붙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역시 그 놈이 자네를 베겠다면......"
"그럴 리가......"
"자넨 동문의 의리를 먼저 생각해서 가만히
당하고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쨌건......"
"베겠습니다. 제가 먼저 그 놈의 목을 따겠습니다."
"물론 비밀리에 해야 하네. 관찰사 일만 해도
시끄러운데, 또 하나의 저 쪽 인간을 해칠 경우
문제가 많이 심각해지거든. 감쪽같이 해치우게.
자네가 온전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제거해야 한단
말일세."
"어김없이 그 놈을 베겠습니다."
말은 그랬지만 크게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흑사마귀의 실력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뿔뿔이 헤어졌지만
무예를 배우던 그 각고의 기간 동안에 쌓아올린 정
또한 형제의 그것 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이 쪽을
해치려 한다.
그렇다면 이 쪽도 그를 가만히 놓아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서로 해치지 않을 수 없도록 편이
갈라져 버린 운명을 슬퍼해야 한다.
불여우의 마음은 몹시 뒤숭숭했다. 막중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와서 마냥 쉬고 있는 참인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기녀들을 마구잡이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불여우는 장지문 바깥쪽을 향해 소리질렀다. 옆에서
발가벗은 채 잠들어 있던 두 여자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나으리, 여기 있습니다. 웬일이옵니까. 아이년들이
나으리의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요?"
말이 기생할멈이지만 이제 서른이 조금 넘은 청루의
과부가 바깥에서 대답했다.
"그게 아니다. 잠깐 나들이를 하겠으니 차비를
해라. 우리 아이놈들은 모두 어떻게들 있느냐? 모두
일어나라고 해라."
말을 마치자 두 기녀가 재빨리 달려들어 불여우의
여장을 거들었다. 불여우 역시 평민의 복색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군졸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으나 아무도 마중하는
자가 없었다.
"이 놈들아, 어떻게 됐느냐?"
그러자 두 군졸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아, 나으리. 그새 기침하셨구먼요."
"글쎄, 저 놈들은 어떻게 됐느냐?"
불여우는 술에 취해 나뒹굴고 있는 군졸들을
가리켰다.
"이틀 동안 술만 퍼마셨으니 아마 모레까지는
한밤중일 겁니다다요."
대꾸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불여우가 불쑥 말을
꺼냈다.
"너희 둘만 내 뒤를 따르라. 바람을 쐬러
가야겠다."
말 위로 번개같이 뛰어오른 불여우는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두 군졸도 비틀거리며 말에 올라
대장의 뒤를 따랐다.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가마행렬이 눈에 띄었다.
"저게 무어냐?"
불여우는 옆의 군졸에게 가마를 가리키며 물었다.
"가마이옵니다."
"이 놈아, 누가 가마인 줄 모른다더냐. 무슨
행차인가를 물은 거다."
"친영(親迎)의 예(禮)를 마치고 신랑집으로
신행(新行)가는 가마인 것 같습니다. "
"가마 속엔 누가 들었느냐?"
"틀림없이 신부가 들어 있겠죠."
"그래? 그렇다면 저 속을 들여다 보고 싶구나."
"아이구, 나으리. 민간의 풍습을 해치는
일입니다요. 참으십시오."
"말이 많다. 목이 달아나기 전에 어서 저 가마를
세워라."
두 군졸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말에서 내려
가마 옆으로 다가갔다.
두 사내가 가마를 메고 유모인 듯한 처녀와 노인이
앞장서고 있었다. 조촐한 행차인 걸로 보아서 서민의
딸이 신랑의 집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거기 가시는 양반, 가마를 멈추시오."
"뭐요?"
"우리 나으리께서 가마 속을 엿보자신다."
"이 양반이 미쳤나? 신행길의 신부 가마 속을
엿보자는 놈 또 평생 처음 보네, 안된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 국법을 어긴 자가 이
길로 빠져 나간다는 소문 때문에 단단히 단속하자는
것뿐이오."
"그렇지만...... 당신들은 누구요?"
군졸은 대꾸 대신 가마발을 휙 걷어 안을 살폈다.
"나으리, 보십시오. 별다른 기미는......"
이때 달려온 노인이 군졸의 따귀를 갈겼다.
"이런 놈의 후레자식이 있나! 이 놈이......"
그러자 다른 군졸이 노인의 명치를 때렸다. 노인은
꽥 소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가마꾼 네놈들도 어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거라.
만일 국법을 시행할 때 이를 방해하는 놈은 그냥 두지
않겠다. "
두 가마꾼은 조금 전의 그 무서운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엉거주춤 가마를 세웠다. 불여우는 천천히
가마 속을 눈여겨 보았다. 아름다운 신부였다.
"음...... 신부를 끌어 내려라. 조사를 해
보아야겠다. 말에 태워 저 쪽으로 가자."
"안돼요 나리. 살려 주세요, 나리. 봉례는 아무
죄도 없어요."
유모가 달려들며 외쳤다. 그러자 따귀 맞은 군졸이
유모를 저만치 밀어던져 버렸다. 유모는 논바닥에
거꾸러졌다.
"자, 네놈들도 덤빌 테냐?"
노인을 때려눕힌 군졸이 가마꾼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들은 대꾸 없이 부들부들 떨고만 서
있었다.
신부는 속절없이 끌려 내려져 입을 틀어막힌 채
말에 태워졌다. 그런 다음 순식간에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저기 사당인지 헛간인지가 보이는구나. 저리로
데리고 가자."
빈 사당으로 들어온 뒤에도 신부는 태연했다.
"나으리들, 소녀를 돌려보내 주시와요.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요."
신부의 목소리도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음, 곧 돌려보내 줄 테니 내 말만 잘 듣거라."
불여우가 말했다. 그러면서 틈도 주지 않고 저고리
고름을 후두욱 뜯었다. 신부의 뽀오얀 젖살이 탄력
있게 솟아 나왔다.
신부는 젖가슴을 여미며 소리질렀다.
"어마앗! 나으리! 용서해 주세요. 이러지 마시와요.
난 아무 죄도 없어요. 그냥 가게 해 주세요......"
불여우는 사당 안의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 위에서
나뒹굴고 있는 신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나 닮았다......"
"예에?"
불여우가 중얼거리자 옆의 군졸이 되받았다.
"전날 사냥길에서 얼핏 보았던 그 낭자와 말일세."
"아, 그 낭자요...... 설마 그 낭자는 아니겠지요?"
"그야 물론이지."
"그럼 어떡할깝쇼, 나으리?"
군졸을 빙글거리며 불여우와 신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불여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신부는 무슨 틈새라도 발견했는지
후다닥 문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가서
두 군졸에게 붙들렸다.
"요년이! 어딜 도망칠려구. 나으리께서 너한테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니 가만 있거라."
"놔요, 놔. 그냥 보내 주세요."
"허허, 참. 잠자코 말만 고분고분 들으면 으례 보내
줄려구. 자자, 소리지르지 말고...... 나으리, 이토록
바둥거리는데 혼절시켜 버릴까요?"
"아니다. 여자의 그것은 바둥거릴 때가 제격인
것이다."
"그야 여자에 관한 한 나으리보다 더......"
"시끄럽다."
"그럼......"
"나가 있거라."
"예에?"
"바깥을 지키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두 군졸은 히죽거리며 사당 밖으로 나갔다. 문은
다시 밖으로부터 닫혀졌다.
"자, 내 말을 잘 듣거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옷을 ㅉ고 너를 탐하겠다. 어쩌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나으리, 살려 주세요.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누가 보내 주지 않는다더냐?"
"나으리. 그냥 보내 주세요."
불여우는 신부의 원삼을 벗겼다. 족두리를 비틀어
비녀를 뺐음에도 신부의 저항이 더욱 완강해지자
불여우는 치마를 후두둑 뜯어 버렸다.
"아아앗!"
불여우는 다시 신부의 속치마 속적삼 속바지
버선까지 벗겨버렸다. 신부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지푸라기 위에서 한번 굴려진 후 몸을
웅크리며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자, 이리 오너라."
신부는 더욱 흐느끼며 몸을 사렸다.
"반항해도 소용이 없다. 네가 하도 잘 생겼기에
탐하는 거다."
"잘 생긴 것이 소녀의 잘못인가요?"
신부는 비로소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여우는 이제 대꾸하지 않았다. 신부의 팔을 휙
낚아채며 끌어당겼다. 그녀의 얼굴이 발딱 젖혀졌다.
동시에 그녀의 팔이 불여우의 얼굴로 향해 날았다.
뺨을 얻어맞을 불여우가 아니었다. 날아오는 신부의
손목을 붙든 불여우는 신부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아앗!"
순간 신부는 벌어진 입으로 불여우의 코를 물어
뜯었다. 불여우는 그것을 재빨리 피했다.
"이 년이!"
소리친 불여우는 완강한 손바닥으로 신부의 뺨을
때렸다.
"반항해도 소용없다. 살고 싶거든 고분고분 말을
듣거라."
신부는 잠시 혼절한 기색이더니 문득 입을
다물었다. 불여우는 그제사 여자가 남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로 생각했다.
문득 여자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가
했는데 신부의 온몸에서 스르르 힘이 풀려나갔다.
순간 불여우는 깜짝 놀랐다.
"어!"
따스한 액체의 느낌이 볼에 느껴졌다.
"이 년이 혀를 깨물었구나!"
신부의 입 가장자리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여우는 기분이 상했는지 부스스 일어났다. 여자는
사지를 뻗고 죽어 있었다. 산발한 여자가 피를 입가로
흘리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얘들아!"
불여우는 바깥을 향해 소리질렀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아마도 멀리 떨어져 있겠거니 했다.
불여우는 여자의 시체를 내팽개쳐 둔 채 사당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 놈들아!"
불여우는 소리를 질렀다.
두 군졸은 가지런히 문짝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뭣들 하고 있느냐? 누가 잠을 자라 했느냐? 이제사
술기운이 오른단 말이지. 그래 내가 시원하게 깨도록
해 주마!"
불여우는 한 군졸의 허리를 들고 찼다.
"앗!"
불여우는 비명을 질렀다. 걷어 차인 군졸이 스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은 죽어 있었다.
그것도 불여우가 전연 낌새조차 챌 수 없도록
누군가가 지척으로 다가와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감쪽같이 칼을 썼다는 뜻이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 자들을 베었을까? 보통
무예자가 아닌건 확실해. 내가 아무리 여자의 육체에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감쪽같이
처치할 수 있었을까? 이 놈들도 예사로운 애들이
아닌데 비명 한번 지르지 못했다니......'
불여우는 사방을 휘둘러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방은
들판뿐이었다. 타고 온 세 마리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군졸들은 그 누군가가 다가올 때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죽었다. 더구나 두 군졸을 공격했던 이유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당안에 불여우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공격을 피해갔다는 점도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내가 두려워서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여우는 그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5. 숲 속의 바람소리
한 젊은이가 시냇물에다 칼을 씻고 있었다.
목이 마른지 재빨리 등뒤에 메고 있는 칼집에다
납검한 뒤 허리를 구부려 입을 물에다 대었다.
'가만!'
젊은이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가까운 데서
이 쪽을 노리고 있음을 느꼈다.
'우선 모른 척해야 되겠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곧
나타나겠지.'
젊은이는 왕천이었다. 그는 모른 척하고 물을
마시려던 처음의 행동을 계속했다.
괴나리봇짐을 간추린 다음 왕천은 천천히 일어났다.
한양으로 빠져들어가는 오솔길 말고는 주위엔 온통
숲이었다.
'요 근처에 숨어 있겠다?'
왕천은 상대가 가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종내 모른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럿은 무예의 고수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술법이었다. 인적을 짐짓 보여 주면서도 어디에
그 실체가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도록 흩어 버리는
산형술(散形術)과 같은 것이었다.
왕처은 내심 의문을 느꼈다. 분명히 상대는
살기(殺氣)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숨어서 이 쪽을 감시하고 있는 터였다.
오솔길을 바쁘게 빠져나가던 왕천은 비로소 점잖은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나오너라! 나무 뒤에 숨어서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네가 무예의 고수라는 바도 벌써 알고
있다. 제법 산형술까지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갑자기 상대의 목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나 역시 자네가 고수라는 걸 알고 있지. 하지만
내가 어디에 있다고 말했나?"
상대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왕천도 얼른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신기(神氣)를 가다듬었다. 들려오고 있었다.
상대의 실체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제법 산성술법(散聲術法)을 부리고 있지만 난 벌써
네가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그으래? 역시 대단한 무예자였군. 헌데......"
"알아맞춰 볼까?"
"그렇게 해 보시지."
"나무 뒤에 있는 게 아니라 나무 위에 꼭
원숭이처럼 앉아있군 그래?"
"원숭이처럼?"
"기분 나쁘다면 도둑놈처럼 숨어서 엿보고 있다고
말해 줄까?"
"그렇다고 자네가 날 찾아낼 순 없을걸?"
"천만에. 당신 나이는 스물 예닐곱쯤 됐겠다."
"그래서?"
"점심 때 돼지 고기를 구워 먹었지?"
"뭣?"
"기막히게 알아 맞췄다는 뜻이겠군!"
"그런데?"
"당신의 숨소리가 들려. 서편 자작나무 중간쯤에
걸터 앉아 있겠군."
잠깐 대꾸가 없더니 갑자기 상대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하하하...... 아주 제법이다. 내가 졌다."
"그 보라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나를 이기지 못한 게 있어."
왕천은 상대의 자신만만한 대꾸에 호기심을 느꼈다.
"내가 지다니? 그게 뭔데?"
"물론 당신은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이겼는지도
모르겠군."
상대는 여전히 숲 속에 숨은 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허풍을 떨어 봤자 내가 믿어줄 것
같은가?"
"아마 믿고 말걸?"
"그렇다면 말해 보라. 그까짓 목둔술(木遁術)
하나로 날 이겼다고 으시대는 건 아닐 테지."
"천만에. 둔신(遁身)의 술법쯤이야 목둔뿐이겠나.
화토금수인금수어충(火土金水人禽獸魚蟲)둔술은
물론이거니와 일월운무뇌풍(日月蕓霧雷風)둔술에도
몹시 기민하지."
"일 없다. 그까짓 거야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나를 보지 못했을까?"
"보지 못했다니?"
"난 벌써 다 봤지."
"뭘?"
"두 녀석을 베는 걸."
"뭣이?"
"멍청한 놈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솜씨 좋게 칼을
휘두르는 것 하며......"
왕천은 잠깐 기가 질렸다. 그의 말은 맞았다.
주위에 분명히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보고
있었다니.
왕천은 자탄했다. 기(氣)가 흔들렸기 때문이리라.
이성(理性)으로 베지 않고 잔뜩 증오심을 담아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어서 항복해라."
"우선 한 가지 묻겠다. 내가 왜 그들을 베었는지
아는가?"
"나하고 상관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부터 나를 미행했지?"
"미행이라니? 우연히 지나다가 당신의 운신(運身)을
보았을 뿐이지."
"그럼 내가 왜 그놈들을 베었는지 그 이유까지는
몰랐겠군."
"알아서 뭣해. 다만 당신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꼈을
뿐이라니까."
"사당 안에 몇 놈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나?"
"한 놈 뿐이었어."
"그건 틀렸다."
"뭐라구?"
"당신은 말이 세 필밖에 없다는 걸 알고 그런
엉터리 셈을 했겠지?"
"그럼 누가 또 있었나?"
"여자!"
"여자?"
"왜 그들까지 베지 않았느냐고는 묻지 마라. 얘기가
길어진다. 더구나 당신한테까지 보고할 이유도 없구."
"물론 물을 필요도 없다. 어쨌건 우리는
결국......, 비긴 게 되나?"
"어쨌건......"
둘은 다시 대화를 중단했다.
왕천이 먼저 제의했다.
"자, 이젠 나무 위에서 내려오는 게 어떻겠나?"
"글쎄......"
"나한테 호기심을 느낀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그랬었지. 같은 무예자끼리 인사를 나눈대서 나쁠
건 없지. 혹시 당신이 내가 찾고 있는 못된 놈이라면
한 판 겨룰 수밖에 없는 거구."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상대는 숲 속의 나무 위에서
독수리처럼 날아 내렸다.
그는 왕천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서로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앗!"
동시에 두 사내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졌다.
"최협사가 아니오!"
"아, 도련님!"
상대는 하얀독수리 최동이었다.
왕천은 그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감격해 했다.
"이거 도대체 몇 년 만이오?"
"그동안 무사하셨구려. 아, 이토록 우연히 만나 뵐
수가 있었다니! 정말 건장하게 자라셨습니다."
"그래, 그동안......"
"도련님은 그래서......"
둘은 손목을 붙든 채 말을 잃었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런
얘기도 꺼낼 수가 없는 형편들이었다. 더구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사이였다. 상대의
눈물겨웠던 과거도 서로가 환히 알고 있는 처지였다.
서로가 헤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무예는 어떻게 연마했으며 언제 하산을
했으며 무슨 소임들을 가지고 산길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 무엇 때문에? 어쩐지
서로는 떨어져서 안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왕천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협사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소?"
"강도로 갑니다."
"예?"
"왜 놀라십니까?"
"어째서 방향이 이토록 같지요?"
"아, 그렇다면 역시 도련님도......"
"그 쪽으로 가야 되는 목적은 가면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합시다. 아! 우리가 이토록 만날 수가
있다니. 정말 기연이구려. 방향이 같다는 사실도 정말
인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나오게 하는구려.
난 지금 배가 고프오. 어디 가서 요기라도 합시다.
최협사와 만났으니 약주 한 잔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럽시다. 저 언덕을 넘으면 주막이 있을 겁니다.
어서 가 봅시다."
둘이서는 그제서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걷기
시작했다.
"최협사의 차림을 보니 새 왕조에서 벼슬은 하지
않았구려."
왕천의 말에 하얀독수리는 싱긋 웃었다.
"차림만 보고 그렇게 판단하실 수야 없지요."
"그럼 숨은 임무를 띤 벼슬자리라도?"
"백수건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하도 밀명자(密命者)가 많아서 차림만으로
판단했다간 큰코 다친다는 얘기죠."
"최협사가 여전히 백수건달이라면......"
"예에, 놀고 먹는 신선이죠."
"그 좋구려. 그렇다면......, 가만!"
우뚝 걸음을 멈추는 왕천을 보며 하얀독수리는
덩달아 긴장했다.
"왜 그러십니까?"
"바로 아까 그 자가!"
"그 자라니요?"
"사당 안에 있던 놈!"
"그 놈이 왜요?"
"밀명자가 아닐까?"
"밀명자라면?"
"벨 걸 그랬소!"
"참으십시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밀명자를 다
벨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허나, 그 자가 밀명자라면 살려둔 게
아까운데. 놈은 여자를 탐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베지 않았군요."
"......할 수 없지. 그 일은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언덕 너머에 있다는 주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좌우지간 최협사를 만나니까 든든하기 그지
없구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절륜의 무예를
닦으셨습니까?"
"무어, 대단한 기술은 못되오. 사부께서는 십 년
수련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지만......"
왕천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깐 말미를
얼버무렸다.
"아직 십 년이 못됐죠?"
"마음이 조급해서 일찍 하산했소. 때문에 항상 나의
무예에 대해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소."
"얼마 안된 세월에 그토록 훌륭한 무예를 닦으신 건
도련님의 심신이 선천적으로 우수한 데다 사부님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이겠지요."
"사부님은 정말 뛰어나신 분이었소."
"어떤 분이시던가요? 초야에 묻힌 무예자 중에
의외로 출중하신 분이 많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시각대사(施覺大師)란 분이 있소."
"시각대사?"
"신분을 숨기고 사셨소. 그 분의 본명은 아무도
모르오."
"혹시......"
"혹시 짐작가는 이름이라도 있소?"
"아니, 아닙니다. 저의 스승 적두노사에 버금가는
또 한 분이 계시다는 얘긴 들었지만, 두 분 모두
홀연히 세상에 이름을 묻어 버리신 게 이상하군요.
혹시 그분이 아닌가 해서......"
왕천은 더 묻지 않았다.
둘은 다시 묵묵히 걸었다.
멀리 몇 채의 인가가 나타나더니 주막이라고 쓴
초롱이 한 초가집 처마끝에 매달린 것이 보였다.
"그래, 최협사께선 그동안 어디서 무얼하고
계셨소?"
왕천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스승의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그 명령을 물어도 되겠소?"
"도련님한테야 말 못할 것도 없지요. 어떤 자를
찾아서 베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지요.
천조옹(天照翁)이라는 늙은이인데 아마도 깊은 원한이
있었던가 봅니다."
"천조옹?"
"예에."
"아직 찾지 못했소?"
"오리무중입죠."
"가만있자. 협사의 스승이 깊은 원한을 가질 만한
상대라면 필시 무예의 고수자가 아닐까요?"
"그건 모르지요. 다소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무림의 법도란 그런 거지요. 무예로 상대할 만한
인간이 아니면 적을 삼지 않는다는......"
"그런 궁리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승께서
별다른 언질을 더 주시지는 않았지요."
"그럼 최협사가 강도로 가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무술의 고수급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니까 혹시나
거기 있을까 해서......"
그러자 왕천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최협사. 나한테까지 그런
거짓말을 할 셈이오?"
"거짓말이라뇨?"
하얀독수리는 어리둥절해져서 왕천을 돌아보았다.
"갈매기섬에 묻혔다는 보물 때문이 아니겠소?"
"아, 그 때문이라면...... 그건 오햅니다. 난 다만
겸사겸사로 친구를 찾으러 갈 뿐이요. 바로 그 보물섬
지도를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친구를 만나러......"
"뭣이?"
왕천은 놀라서 소리지르며 우뚝 섰다. 하얀독수리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토록 놀라시는지요?"
"분명히 보물지도를 가진 자를 알고 있소?"
"저희 도제 중 하나이지요. 몇 해 전에 헤어질 때
그는 보물 지도가 든 쌈지를 도둑맞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도 쪽으로 갔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도 만날 겸 강도로 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도련님도 보물지도 때문에 강도로 가시는 겁니까?"
잠깐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왕천은 화난 듯이
대답했다.
"그 쌈지는 내 꺼요!"
"예에?"
"내가 그 지도의 주인이오."
"뭐라구요?"
"선친께서도 그러셨고 나의 사부께서도 말씀해
주셨지요. 가서 찾으라는 권고로 이렇게 강도로 가는
거요. 그럼 쌈지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최협사의
동문을 만나야 되겠구려."
"그래야겠지요. 그러고보니 온갖 게 의문
투성이군요."
"무엇이 의문스럽다는 거죠?"
"저의 사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몇 년 후
쌈지의 주인이 나타날 테니 그때까지 잘 간수하고
있으라는......"
"동문 형제는 누구요?"
"족제비라는 무사죠."
"음......"
"도련님의 사부이신 시각대사나 선친께서는 어떻게
가죽쌈지를 알고 계셨을까요? 더구나 애초 그것을
소지하고 계셨던 저의 사부님과는 또 어떤 관계가
되실까요?"
"나도 지금 그런 궁금증을 풀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소."
"참 수상스럽기만 합니다."
"어쨌건 난 최협사의 친구부터 만나야 되겠구려."
둘은 주막으로 들어섰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주모가 나와서 둘을 반겼다.
"어서 오시와요. 손님들......"
둘은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평상에 걸터 앉으며
술과 고기안주를 시켰다.
왕천은 하얀독수리가 묻지도 않은 말을 불쑥 꺼내
놓았다.
"난 지금 고민이 많소."
"도련님께 고민이?"
"원수를 갚아야 하지만 힘이 미약하구려. 요즘에는
누가 원수인지조차 희미해졌구려."
"무슨 뜻인지요?"
"내 부모를 죽인 원수 말이오."
"뻔하지 않습니까. 새 사직의 주인들과 개국공신
모두......"
"그 모두에게 칼을 휘두르다간 몇 죽이지 못해서 내
목숨이 끝장날 거요. 그래서 방법을 바꾸기로 했소.
보물을 찾아 거사자금으로 쓰겠소. 우선 사병을 모을
생각이오. 물론 최협사도 도와 주시겠지요?"
"그러지요. 내 임무가 일단 끝난 다음에는......"
"고맙소. 요즘의 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심사가 뒤틀려 치사한 인간들만 보면 모조리 죽여
버리고 있소."
"큰 일을 앞두신 분이 그런 송사리같은 인간들에게
칼을 휘둘러대시면 어떡합니까? 어렇대서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도 아니구요."
"그야 그렇지만......"
"그래서 아까도 그런 기분 때문에 그 자들을
베었나요?"
"그렇소. 오래 납검해 둔 칼은 녹이 스는 법이오.
연습으로서도 의미가 있었소. 그러나 갑자기 의심이
생깁디다."
"의심이라면?"
하얀독수리의 반문에 왕천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바로 최협사가 말씀하신 그런 이유지요.
송사리떼들을 베어서 무엇에 쓰나 하는...... 그래서
사당 안에서 여자를 희롱하는 놈은 베지 않았소. 그
자는 재수가 좋은 놈이오."
하얀독수리는 얼마간 심사가 비뚤어져 있는
왕천에게 씁쓰름한 미소를 흘려보냈다.
"너무 걱정마시오. 최협사의 권유처럼 이젠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는 않을 거요. 그렇지만 보물지도는
반드시 찾아야 되겠소."
"보물지도의 주인이 도련님이라면......"
하얀독수리는 전날 족제비한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왕천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술과 안주가 날라져 왔다.
하얀독수리는 왕천의 잔과 자신의 잔에다 철철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자, 재회의 기쁨을 위해서 축배를......"
말은 그랬지만 어쩐지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쩐지 젊은 나이를 허송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비감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사부 적두노사는 홀연히 사라졌다. 불여우 윤호는
왕세자의 근위대장이 되어 설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물론 제 갈 길을 찾아간 폭이겠지만, 황해도
관찰사를 베었다는 소문으로 해서 조정을
시끌시끌했고 그런 소문은 듣기에 좋지 않았다.
어쩐지 그를 가까이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러다간 화를 당하고 말걸.'
그런 기분 때문에 그를 찾아가서 만날 때의 기쁨도
포기한지 오랜 일이었다.
흑사마귀 정창은 또 어떤가.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방원의 오른팔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세자를 싸고
도는 정도전의 세력이 욱일승천의 기세여서 방원의
측근이라면 무작정 처단하려는 기색이다. 그 역시
목이 떨어지든가 아니면 동문인 불여우와 맞서게 될
입장이었다.
슬픈 일이었다. 그와도 역시 가까이하기가 싫었다.
흑사마귀 역시 숙명적으로 자신의 갈 길을 그렇게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보고 싶은 도제는 족제비 김해간뿐이었다.
그는 스승이 내리신 분부를 지키려고 무예자로서의
출세길도 마다하고 주인이 나타났을 때 건네기 위한
검정 가죽쌈지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형제를 돕는다면 족제비뿐인 것이다.
그런데 왕천이 나타나서 쌈지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징표라도 있는 것일까? 만일 족제비가 그동안 잃었던
보물지도를 되찾아 가졌다치고, 그는 과연 왕천에게
그것을 순순히 내놓을 것인지 그 점도 의문이었다.
의견이 달라 싸우기라도 한다면...... 역시
걱정스러웠다. 사부께서는 일찍이 왕천의 목숨을
부지시키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이 싸운다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게다가 하얀독수리 자신의 처지도 한심스러웠다.
사부에게서 천조옹이라는 괴물을 찾아 반드시
베라는 밀명을 받았지만 그 역시 찾을 길이 없었다.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왕천의 말대로 사부가 두려워할
정도의 고수라면 베기는커녕 이 쪽이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영영 그 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왕천의 표독스러워진 태도도 과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득이 동행은 하지만 그와의 강도행이
유쾌할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토록 골똘히 하시오."
왕천의 말에 하얀독수리는 퍼뜩 깨어났다. 왕천은
마루 쪽에 어느새 들어와 앉아 있는 손님을 보라는 듯
눈짓을 하고 있었다.
"주모, 술 한 상 차려 주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차림은 남루했지만 목소리만은
또랑또랑 했다. 그는 삿갓을 쓴 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칼을 짊어지고 있군......"
하얀독수리는 무감동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혹시 밀명자가 아닐까요?"
왕천도 낮게 물었다.
"글쎄요?"
"우릴 미행해 왔다면 용서할 수가 없겠는데?"
이 쪽에서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삿갓은 전연
개의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아서요!"
"어째서 말리는 거요?"
"그가 미행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밀명자라 해도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조용히 지켜봅시다."
왕천도 별 수 없었는지 그 쪽으로부터 눈길을
떼었다.
"어줍잖은 솜씨로 벼슬길을 찾아가는 비렁뱅이
녀석이겠지."
내뱉듯 말한 왕천은 남은 술을 왈칵 비워 버렸다.
"엽관(獵官)운동이 하도 극심한 세상이라서......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이 재정된다죠?"
"허기사 이런 어수선한 세상에 벼슬하나 얻지
못하면 차라리 병신이지. 어떻소, 최협사. 우리도
신분을 숨기고 권력 좋은 놈한테 빌붙어 보는 게?"
"원, 농담두. 도련님의 나이 벌써 성년입니다. 뜻을
단단히 세울 때가 되었습니다. "
"하하하...... 내가 농담이 지나쳤나 보군요.
미안하오. 최협사의 뜻을 알 길이 없고, 게다가 아까
보니까 갈 길을 정하지 못해 침울해 하는 것 같아서
그래 본 것이오."
"독심술(讀心術)까지 연마하셨군요."
"다소 연습해 두었지요."
"그렇다면 저토록 자신만만하게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삿갓의 마음은 어떻게 읽지요?"
"그래서 한술 떠 보느라고 비렁뱅이 녀석이라며
시비를 걸어봤지요. 헌데 놈은 요지부동이구려."
"만만한 무예자는 아닌 것 같은데요?"
"얼마간 솜씨는 닦았겠지요. 그래서 밀명자가
아닌가 생각했던 거요. 그렇지만 제까짓 게......"
"말소리를 낮추시지요. 뜻밖에 밝은 귀를
가졌을지도 모르니까요."
"쳇! 제까짓 게 화를 내 봤자......"
그 순간 일단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사내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섞여 들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저 놈들은 또 뭔가?"
왕천은 술맛 떨어진다는 듯이 신경질을 내었다.
그에 비해서 대청 쪽의 삿갓은 혼자 유유자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혹시 저 놈이 끌고 온 군졸들이 아닐까?"
왕천은 긴장해서 삿갓과 바깥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때였다. 담장 너머로 주막 안을 기웃하던 사내
하나가 소리질렀다.
"별장(別莊)나으리, 이 놈들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세 놈이 맞습니다. 역시 멀리 가진 못했을 거라는
짐작을 했습니다만, 이토록 한가롭게 술까지 퍼마시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소리가 들리더니 별장인 듯한 자의 호령소리가
났다.
"주막을 에워싸라.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라. 민심을 소란케 하고 국법을 어긴
자들이 여기에 있다!"
"뭐라구?"
왕천은 소리지르며 왈칵 일어서려고 했다.
하얀독소리는 얼른 그를 제지했다.
"필시 무슨 오해가 생긴 듯합니다. 가만 계십시오.
혹시 사당 앞의 두 사내를 벤 것을 따진다면 달리
도망칠 방도를 생각해야지요."
그때 칼과 창을 빼어든 일단의 사병들이 열려진
주막 싸리문안으로 밀려들었다.
별장이라는 사내가 소리질렀다.
"이 놈들, 정말 태평성대로구나. 끔찍한 살인자들!
어서 일어나서 모두 포승을 받아라."
"뭐요?"
왕천이 대꾸하고 나섰다.
"우리는 신호위(神虎衛) 소속 밀명꾼이다. 네놈들의
죄는 모두 알고 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베라는
대장군의 엄명이시다. 순순히 포승을 받고 죄를
가볍게 함이 유리할 것이다. 어서 일어서라!"
그러자 하얀독수리가 침착하게 나섰다.
"혹시 무슨 오해를 하신 게 아닌가 봅니다."
"뭐야?"
"우리에게 무슨 혐의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혐의가 없다구? 신행가던 가마꾼들이 와서 모두
일렀다."
"우린 그런 것 모릅니다."
하얀독수리는 싹 돌아앉았다.
"노인과 유모가 죽었다. 그리고 신부는 어디로 끌고
갔느냐?"
"정말 모릅니다. 더구나 세 명의 남자가 일을
저질렀다고들 그러는데 우린 단 둘 뿐입지요. 저기
삿갓 쓴 손님은 초면일 뿐입니다."
"이 놈이 아주 싹 잡아뗄 작정이로구나. 얘들아, 저
놈들이 포승받기를 거절한다면 가차없이 베어
버려라."
사병들은 칼과 창을 꼬나들고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대청 쪽의 삿갓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삿갓은 여전히 얼굴을 삿갓 속에 묻은 채
태연하게 술을 들고 있는 게 다른 점이었다.
"사당 앞의 일은 아직 모르는가 봅니다."
하얀독수리는 낮고 재빠르게 왕천에게 속삭였다.
"이 자들의 정체도 모호하오. 누구 편인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도 서슬 퍼렇게 달려드는 것으로
보아 가차없이 벨 모양이오. 어떻게 한다?"
"도망칩시다. 때리기만 하고 목숨은 해치지 맙시다.
그래야 후환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 놓는
일도 무모한 짓이고......"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서로에게 눈짓을 교환했다.
순간 비호처럼 날며 앞에 선 사병의 면상을 발로
찼다. 두 마리의 독수리가 떴다 하는 순간 네 명의
칼잡이들이 나뒹굴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둘은 솔개처럼 날아 담장을 넘었다.
집 둘레에도 창잡이와 칼잡이 들이 울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날아 나오는 두 마리의 인간
독수리를 채 깨닫기도 전에 포위망을 풀고 말았다.
"잡아라아--. 저 놈들이 도망친다아--."
아우성들이 들려오고 있었따.
둘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그들은 축지법을
행사하고 있었다. 도약술을 부리며 여우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발걸음 소리와 고함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공연한 봉변이로군!"
왕천은 혀를 찼다.
왕천이 얼마쯤 말없이 달리던 하얀독수리를
기웃하며 물었다.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난 모양이죠?"
"실상은 그렇습니다. 놈들의 정체말입니다. 신호위
밀명꾼일 수는 없습니다. 진짜 밀명꾼이라면 본색을
밝히지 않는 게 규칙이지요."
"그렇다면?"
"확실치는 않지만......"
그러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얀독수리의
상상력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삿갓 쓴 놈은 어떻게 됐을까?"
왕천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지금쯤 봉변을 당하고 있겠지요. 그 자의 정체도
신비스럽군요. 분명히 밀명꾼들과는 한 패거리가 아닌
것 같고 창날이 목을 겨누는데도 그 요지부동하던
자세도 괴이하고......"
"그런데 최협사."
"예에."
"솔직히 말해서 난 아까 그 삿갓 쓴 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왜 그렇지요?"
"이유는 확실치가 않지만...... 눈길을 숨긴 채 온
신경으로 주위를 탐색하는 태도하며, 우리를 얕잡아
보는 듯한 그 당당한 꼴하며, 어쨌던 기분이
언짢았소."
"아하하하...... 잊어버립시다. 도련님의 분풀이는
그 밀명꾼이라던 놈들이 벌써 해 줬을 테니까요. 자,
어서 강이나 건넙시다. 마침 나룻배가 기다리고
있군......"
둘은 강가로 다가갔다.
뱃사공 노인은 무료한 표정으로 이들을 태운 뒤
뭍에서 배를 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기 잠깐만 기다리시오, 뱃사공 양반.
건너마을까지만 좀 태워다 주시오."
"어?"
소리치며 달려오는 사내를 바라본 왕천은 놀랍다는
소리를 냈다. 아까의 그 삿갓이었다.
"저 활량이 다시 강도로 건너갈 모양이군......"
뱃사공은 이들의 농담에도 아랑곳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삿갓이 말이오?"
하얀독수리는 노인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그
말을 되받았다.
"언젠가 강도로 가서 보물을 찾는다더니 혼줄만
나고 빈털털이로 되돌아왔나 봅디다."
"그으래요?"
노인의 얘기를 더 듣기도 전에 삿갓은 강변에
도착했다. 그는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훌쩍 날아서
뱃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말도 않고
고물 쪽으로 가서는 다소곳이 앉아 버렸다.
세 사람은 그런 그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허어, 참!"
왕천은 혀를 찼다.
배가 강 복판에 갈 때까지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하얀독수리였다.
"저, 삿갓 양반. 보아하니 댁은 밀명자인 것
같구려."
"아니오."
삿갓은 여전히 강물 속을 들여다 보며 짧게
대꾸했다.
"행색이 칼을 메었으니......"
"댁들도 칼을 등에다 메었구려."
"우린 그따위 인간이 아니오."
"나도 그런 인간이 아니오."
"허기야 등에 칼을 졌다 해서 모두 밀명자라고 말할
순 없지."
하얀독수리는 뒷머리를 긁었다.
왕천은 삿갓의 거만한 태도에 비위가 상했다.
그래선지 왕천의 목소리는 격하게 되어 나왔다.
"그렇다면 비렁뱅이 무사가 틀림없겠군!"
그 말에는 삿갓도 대꾸하지 않았다.
얼른 왕천을 손으로 제지하고 나선 하얀독수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삿갓 무사 양반, 괜찮았소?"
"뭐가요?"
"밀명꾼들인가 하는 자들한테 말이오."
"아무 일 없었소."
"그 이상하군. 아까는 댁의 목에다 그 자들이 칼을
대고 있던데?"
"찌르진 않았소."
"난 당신이 밀명자인 줄만 알았소. 우리를 미행해
오지 않았나 의심했는데......"
"난 하릴없이 남의 미행이나 하는 놈이 아니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역시 당신들이 불쌍한 백성들을
베었나 보군. 도망치는 솜씨가 무척이나 빠릅디다."
"뭣이?"
왕천이 다시 왈칵 나섰다.
"아니라면 왜 그렇게 도망쳤소?"
"공연히 시간 낭비할 수가 없어서 도망쳤을 뿐이다.
우리가 살인자라는 속단은 말아. 이 건방진
삿갓놈아!"
"함부로 놈 놈 하지 말어. 내가 솜씨가 없어 가만
있는 줄 아는가?"
"그럼 왜 가만 있느냐.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칼을
빼 보시지."
"칼은 빼지 않겠다. 당신이 겁나서는 결코 아니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아까 그 자들이 너희들을 더 이상 뒤쫓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야 우리들의 걸음이 빨랐기 때문이 아닌가. 너도
우리의 재빠른 주행술을 보았겠지?"
"걸음이 빠르긴 했지만 그 자들이 더 이상 추격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이유가 뭔데?"
"너희들의 도망치는 솜씨로 보아 범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억측이군!"
"더 자세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다만 너희들이
떠난 뒤 그 우두머리인 자가 나한테 말했다. 무작정
목을 따고 볼 작정이었지만 네놈은 운이 좋았다고."
"정말 운이 좋았군."
"다급했다면 나도 도망칠 작정이었지. 그러던 차에
어딘가로 다녀왔던 자가 두목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거든."
"뭐라고 속삭였는데?"
"난 귀가 밝아. 살인자는 자기들 편의 높으신
어른이었다고 하더군."
"그 높으신 어른이 누군데?"
"말하지 않았다. 저희들끼리 고개만 끄덕거린 다음
물러갔으니까. 그렇지만 너무 안심하지는 말어."
"왜 그렇지?"
"놈들은 다시 너희들을 추격해 올 테니까."
"무엇 때문에?"
"지금쯤 돌아가 저들의 두목한테 호통을 맞고 있을
게 분명해. 왜 너희들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그럴 듯하군."
"나 역시 너희들 때문에 수배될 게 뻔해. 그래서
얼른 자리를 파했지. 억울하단 말야.자네들 때문에 이
삿갓이 표적이 되는게 말일세. 어쩔 수 없지 뭐. 세상
조용해질 때까지 한적한 데 숨어 지낼 수밖에 없겠지.
잠시 삿갓을 벗고 말이지......"
배는 어느덧 건너편 뭍에 닿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삿갓에 대해서 또다른 호기심이
일었다. 더구나 그는 강도에 갔었던 인물이었다. 혹시
족제비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저만한 무예자라면 찾고 있는 천조옹에 대해서도 무슨
단서를 꺼내 놓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 사내는 배에서 내렸다.
"저, 삿갓 무사.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귀찮소."
삿갓은 하얀독수리의 말에 짧게 대꾸하고는 몇 걸음
앞서 걸어 나갔다.
"이봐!"
왕천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옆에서 버럭
소리질렀다.
그래도 삿갓이 이 쪽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그냥 걸어가버리자 왕천은 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놈아! 건방진 놈아! 한번 겨루자니까!"
어느새 왕천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고사평세(高四平勢)를 취했다.
"허어, 고연 놈이로군. 아무리 갈 길이 바쁘지만
이런 놈의 버릇은 반드시 고쳐 놓고 떠나는 게
옳겠다. 어디 덤벼 봐라, 이 애숭이야!"
삿갓은 마주 서서 칠성권세(七星拳勢)를 취했다.
하얀독수리는 말릴 틈이 없었다. 둘은 금새
어울려서 한바탕 때리고 부수고 날고 굴렀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그들의 공방(攻防)은 눈부셨다.
하얀독수리는 잠깐 망연히 서서 그들의 권법(拳法)을
바라보았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끼리 부딪치는 권격이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자 감정은 사라지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태껸의 순수한 기예를 춤추듯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일격 일격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어서
어느 한쪽이라도 잠깐 삐꺽했다간 목숨을 잃을 게
틀림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토록 격렬하게 싸워야
될 만큼 원수 사이도 아닌 것이었다. 다만 서로에게
어떤 호기심을 느끼고 그 호기심의 정체를 찾기
위해서 맞서 보는 일에 지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얀독수리는 그 황홀한 싸움을 말려야 될 것
같았다. 화급한 성질만 아니라면 왕천의 저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무예에 일단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또한 무명의 젊은 무사 삿갓의 절묘한 무예에도
감탄을 해주고 싶었다. 그럴수록 삿갓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물씬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 그만해 두시오!"
하얀독수리가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각각 두어 걸음씩
물러났다.
"정말 멋진 권법들이었소. 유파(流派)는 다르지만
절묘한 어울림이었소. 서로의 실력을 충분히 보여
주었으니까 이제 그만 두시지요."
하얀독수리의 말에 대꾸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씨근덕거리던 두 젊은 무사는 그제서야 자세를
풀었다.
왕천이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네가 두포세(頭砲勢)로 들어올 때 헛점을
보았지만 주먹을 내밀지 않았다는 건 알아 둬."
삿갓도 지지 않았다.
"그만 웃겨라. 자네가 취하던 그 복호세(伏虎勢)는
허술하기가 이를 데 없더라. 때리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라."
"자, 그만 그만. 서로가 이긴 것으로
생각하시고...... 바쁘시지 않다면 삿갓 무사께 몇
마디 정중하게 물어볼 말이 있는데요."
하얀독수리는 다시 한번 간청했다.
"물어보시구려. 갈 길이 바쁘니까 짧게......"
삿갓이 이번에는 마다하지 않고 퉁명스럽게나마
대답할 기미를 보였다.
"갈매기섬에 갔다 오셨다구요?"
"뭐요?"
하얀독수리의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짓던 삿갓은 점차
의아스런 태도로 바뀌었다.
"아까 그 배를 젓던 노인이 말합디다."
"아, 그랬었군. 내가 스스로 떠벌이고 다녔으니까
그런 소문이 난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데 무얼
알고 싶소?"
"정말 갔다 오신 건지?"
"사실이오."
"보물은 찾지 못한 것으로 들었는데 왜 찾지
못했을까 하는......"
"그런데, 그걸 꼬치꼬치 캐묻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아, 이것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초야의
무사...... 그런데 설마 댁이 밀명자는 아니겠지요?"
"밀명자라면 좀전의 그런 녀석들에게 쫓겨다니겠소?
그러고보니 당신도 이름을 숨겨야 될 만큼 죄를 지은
게 분명하구려."
"지은 죄는 없지만 이름을 내놓고 다닐 만한 처지도
못 되지요. 저는 최동이라구 하얀독수리라는
별명을......"
"아, 당신이?"
"놀라시긴요?"
"놀랄 수밖에요. 이런 곳에서 뜻밖에 무명(武名)이
높으신 분을 만났으니까. 저는 삿갓이라구 부릅니다."
"아, 바로 삿갓이었군요. 소문은 들었습니다."
"본명은 박진이라구 합니다. 그러면 좀 전에 내가
실례를 범했던 저 분은......?"
삿갓은 왕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만......
왕천이라고 부릅니다."
하얀독수리가 왕천을 소개하자 삿갓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왕천은 외면해 버렸다.
"어쨌건 반갑습니다. 박협사는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은 강도로 가는
길입니다."
"강도로료? 거긴 왜요?"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선
나의 동문인 족제비 김해간이나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옛?"
삿갓은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섰다.
"왜 그토록 놀라십니까?"
"아직 모르고 계셨던가요?"
"뭘 말이지요?"
"족제비는 죽었습니다."
"옛?"
이번에는 하얀독수리가 놀랄 차례였다. 옆에서
무심한 척 따라붙던 왕천도 이제서야 이 쪽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몇 해 전이더라? 좌우지간 우린 강도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지요. 최협사를 거룻배에서 만난 인연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적두노사의 네
제자를 베려고 벼르던 때였지요."
"그건 왜요?"
"그래야 출세길이 열릴까 해서요. 아하하하......
이젠 모두 덧없는 일이 됐지요. 그를 베긴커녕 서로를
도우며 갈매기섬으로 상륙까지 했지요."
"그럼, 거기서......"
"예에. 괴기스럽고 수상한 섬입니다요. 분명코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족제비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온 육신의 살과 정기를 불과 며칠 사이에 빼앗기고
노인이 되어 죽어 있습디다."
삿갓의 말에 왕천이 다시 나섰다.
"거짓말 마라. 그런 죽음이 어디 있느냐? 저 놈이
그를 벤 게 틀림없어!"
"참으십시오, 도련님. 이분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분이라는 건 벌써 도련님의 독심술로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뭔가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신데."
하얀독수리의 만류에 왕천은 꾸욱 참는 듯했다.
"우리가 헤어져서 보물을 찾게 된 것이 그런 불행을
당하게 된 시초가 아니었던가 짐작됩니다만, 운명이랄
수밖에요. 그건 그렇다 치고 역시 강도로 가실
작정입니까?"
"글쎄요......"
하얀독수리는 잠깐 방향감각을 잃은 듯했다.
"묻힌 장소를 원하신다면 쉽사리 발견할 수가 있을
겁니다. 제가 홀로 떠나면서 무덤을 산소하게나마
만들어 뒀으니까요."
"고맙습니다.그토록 허무하게......"
"칼잡이들의 말로란 다 그런 거지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삶이 곧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되는 게 우리같은 칼잡이들의 숙명이 아닐까요?"
"사려 깊은 말씁입니다. 그런 생명이라면 또 다른
목적을 가져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보물지도는 어떤
경로로 얻게 되었는지요?"
"얻게 되었다기보다 족제비가 굴림의자와 합세해서
보물을 찾게 되었을 때 내가 거기 뛰어든 셈이지요."
"그럼 그 굴림의자가 족제비의 쌈지를 훔친
겁니까?"
"그렇습니다. 무예와 머리는 비상하지만 다리를
쓰지 못하니까 우리 둘을 갈매기섬으로 보낸 거지요.
결국 그 쌈지는 굴림의자가 갖고 있습니다."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강도에 남아 있을지 혹은 보물지도를 다른 자에게
팔아넘겼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분명히 그가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건 더 묻지 마십시오. 내가 그와 원수진 사이가
아닌 이상 그를 번거롭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해하겠습니다. 헌데, 이런 제의를 하면
받아들이겠습니까? 함께 가서 보물 찾는 일을 다시
한번 더 시도해 보실 의향은 없으신지?"
"싫습니다. 보물의 반을 준다 해도 나는 싫습니다.
진절머리가 납니다. 더구나 그것은 무모한 모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험이란 원래 무모함을 다소 동반해야 되는 게
아닐까요?"
"이건 사정이 틀립니다. 계란으로 바윗돌 깨기와
같습니다. 나는 그만 두겠습니다."
"많이 놀라셨던 모양이구려."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갈매기섬은 일만 군사의 힘을 합친
것과 같은 괴력의 한 도사(道士)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만 명의 군사가 반수의 희생을
각오하든다, 아니면 최협사 정도의 정예 무예자 이백
명 정도가 함께 쳐들어가면 혹시 모를까? 몇 명이
가서 보물을 찾겠다고 나섰다간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내 느낌이 그랬다는 것 뿐입니다. 허황하게
들릴지라도 솔직하게 나의 느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자, 이제 더 할 얘기가 없군요.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몸조심 하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삿갓은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삿갓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게 서 있던
하얀독수리가 기어코 고개를 떨구었다.
'아, 그가 죽다니......'
십 년 넘게 함께 수련하던 형제같은 사이였다. 막상
족제비가 죽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하얀독수리를
상심토록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최협사, 저 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마시오.
나한테 앙심을 품고 우릴 놀리려고 그런 엉터리
얘기들을 늘어놨는지도 모르지 않소?"
"아닙니다. 그의 말에는 진실이 있었습니다.
도련님도 쌈지를 손에 넣거든 조금 전에 삿갓이 하던
얘기를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는 하겠소. 자, 어서 갑시다. 해가 지고
있구려."
왕천은 침통해하는 하얀독수리를 재촉했다.
하얀독수리는 왕천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강도에 가면 천조옹이라는 괴물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무엇보다 굴림의자를 찾게 되면 족제비에
관한 또 다른 소식이나 유물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를 강도로 이끌고 있었다.
금새 해가 지고 초원 저 먼 데서 호롱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몇 채의 인가가 있을 법했다.
"저기서 여장을 풀도록 합시다."
왕천의 말이 거의 떨어지자 마자였다. 느닷없는
말발굽 소리가 뒤쪽에서 울려왔다.
"앗? 이건 또 뭔가?"
왕천이 놀라며 말했다.
"추격병인지도 모르죠. 일단 몸을 숨깁시다."
"우리가 유달리 잘못한 일도 없지 않소?"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못됩니다. 삿갓의
말대로 신행가는 가마를 습격한 자들을 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언제......?"
"물론 우리가 한 짓이 아니지만, 놈들은 우리에게
올가미를 씌울 수도 있으니까요."
"쳇! 음......"
왕천은 마지못해 하얀독수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숲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백의 기마병들이 달려왔다. 그런데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선두의 기마대장이 부하에게
말하는 소리는 들렸다.
"뱃사공 영감의 말대로라면 여기쯤 있을텐데......
그러나 서두를 건 없어. 삼천의 장창부대가
뒤따라와서 이잡듯이 뒤질테니까. 우선 강도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변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해라.
두건 쓴 두 놈과 삿갓 쓴 한 놈이다. 알겠느냐?"
"예에, 그렇게 다시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곧장 뒤쫓아서 베어 버릴 걸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무어라더냐, 이놈아! 무작정 묶든가
베라지 않더냐?"
"워낙 몸들이 빨라서......"
"닥쳐라. 세자마마의 호위대장 나으리께서 몸소
왕린하시겠다더라. 그 이전에 놈들을 잡아 그 공을
우리 것으로 해야 한다."
이백여 기의 기마병들이 다시 말을 몰아 달려갔다.
"우릴 추격해 온 게 틀림없군!"
왕천이 중얼거렸다.
"저들의 얘길 들으니 삿갓도 아직 붙잡히지 않은
듯한데...... 그건 그렇고 세자마마의 호위대장이라면
불여우 윤호 아닌가! 그가 나서야 할만큼 신행가마를
습격한 무리가 중죄인이었더란 말인가!"
하얀독수리가 엉뚱한 탄식을 하고 있는 동안
기마병들은 대장의 지시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하얀독수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깐 것 이백 정도라면 우리 둘이서 해치우는 게
어떻소?"
왕천이 자신있게 말했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최협사는 겁이 많구려."
"겁나서가 아니라 그런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강도에서 일을 수월하게 하려면
저들과 부딪칠 게 아니라 일단 저들의 눈을 피하는 게
바람직하지요."
"혹시 최협사는 불여우가 온다니까 두려운 게
아니오?"
"두렵다기보다 난처하지요."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이 곳을 다시 벗어납시다."
"이 밤중에?"
"야음을 타는게 더욱 좋겠지요. 도련님께서는
수영술에도 능하겠지요?"
"난 여기서 버티겠소."
"그건 무모한 짓입니다. 제 얘기를 듣고 찬찬히
판단해 보십시오. 그런 대부대가, 더구나 불여우까지
우릴 찾으러 온다는 건 사리에 맞지가 않습니다. 필시
산행가마 습격자를 쫓는다는 건 명목일 뿐이고,
아마도 다른 목적이 있을 게 분명하단 얘깁니다."
"그렇다면 더욱 우리가 피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그렇지가 않지요. 대부대 이동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도 그들은 우리를 반드시 죽이려 할겁니다."
"쳇!"
"도련님! 저한테도 생각이 있으니 잠자코 저를
따르십시오. 확실하지는 않지만 보물을 찾으려는
강도의 수많은 칼잡이들을 처치하겠다는 음모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기왕지사 그들이 보물을 손에 넣을 수가 없을
바에야, 그것이 흘러나가 반란군의 자금으로 쓰이는
것만은 막으려고 하겠지요."
"그럴 듯하지만...... 만일 강도의 칼잡이들이
소탕당한다는 걸 가정할 경우 천조옹도 굴림의자도
위험하겠군요?"
"짐작에 지나지 않지만 많이 들볶이기는 하겠지요.
자,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몸을 피할 궁리부터 합시다.
북쪽으로 숨어 나갈까요?"
"굴림의자가 만일 보물지도를 빼앗긴다면......?"
"삿갓이 설마 그가 가졌다고 발설이야 했을라구요.
굴림의자에 대한 의리가 대단한 걸로 보아서......"
"그럼 왜 최협사한테는 말했을까요?"
"그건 족제비에 대한 의리를 나한테 대신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제서야 왕천도 미적거리며 하얀독수리를
뒤따랐다. 강도는 자갈과 수풀이 가득한 섬이었다.
간간이 소나무들이 서 있기도 했지만 그것은 금새
지나쳤다.
파도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쉿!"
하얀독수리가 입술에다 손가락을 대었다. 왕천도
이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 놈이군......"
"군졸 두 놈과 뱃사공 하나인 듯하오."
"저 배를 훔쳐 타면 감쪽같이 강도를 빠져나갈 수가
있을 텐데......"
"잠시동안 숨어서 동정을 엿보는 게 좋겠습니다.
기회를 보도록 하지요."
해변가에는 창을 든 두 군졸과 뱃사공이 안개 속에
서서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하얀독수리와 왕천의 앞으로
얘기를 끝낸 두 군졸이 나란히 지나쳐갔다.
뱃사공은 거룻배를 뭍에 대어 놓고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뱃머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저 녀석을 해치우는 게
어떻겠소? 배를 뺏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겠는데......"
왕천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면 공연히 시끄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냥
헤엄쳐서 건너는 게 어떨까요?"
"수둔술(水遁術)을 쓰잔 말이죠?"
"예에."
"깔대기라도 물고 건너야 되겠는데요?"
"글쎄, 겨우 십 리 길 정도라면......"
둘은 강 건너편 뭍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재어
보았다. 그러다가 하얀독수리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왕천의 팔을 얼른 붙들었다.
"왜 그러죠?"
왕천은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합니다."
"뭐가요?"
"저 뱃사공의 행동이."
"......그렇군."
"이런 밤중에 손님을 기다린다는 자체가 수상할
밖에요. 더구나 무장군졸과 쑥덕거리고서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한다?"
"기왕에 주위가 심상치 않을 바에야 모험을 걸
수밖에요."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배를 탑시다."
왕천은 대꾸 대신 무슨 뜻이냐는 듯 하얀독수리를
쳐다보았다.
"뱃바닥에 바싹 엎드려 군졸의 눈을 피한 뒤 사공을
위협해서 노를 젓도록 합시다."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군......"
둘은 강가로 살금살금 걸어나갔다. 두 군졸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횃불을 켜지 않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사공은 뱃머리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소리없이 날아서 뱃속으로
숨어들었다.
"떠들지 마라. 소리를 지르든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이 단검이 네 목을 꿰뚫는다는 걸 명심해라."
"옛?"
"조용히 하라니까!"
사공은 하얀독수리가 겨누고 있는 칼날을 보더니
얼굴빛이 새파래졌다.
"예에,예......"
"우린 바닥에 숨어 있겠다. 너를 감시하면서
말이다. 어서 노를 저어라."
"예에?"
"강도를 빠져나갈까 한다. 조용히 노를
저으라니까."
왕천도 옆에서 거들었다.
"네 행동이 수상할 땐 알지? 이 단검이 날아가서
심장에 박힐 것이다."
왕천도 어느새 단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분부대로 합지요. 한데......"
"한데라니?"
"저들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하얀독수리가 얼른 말을 받았다.
"강도에 비상이 내렸습니다."
"그건 알어."
"나가는 손님은 태우지 말라는 대장군의 엄명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느냐? 누굴
기다리던 중이었냐?"
하얀독수리의 추궁에 사공은 잠시 입술만
실룩거렸다.
"어서 말하라니까!"
"예에 예, 말을 합죠. 제발 이 칼 좀 치워 주십쇼.
겁이 나서 입술이 다 얼어붙었구먼요."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말고 어서 그 이유를
대라니까!"
하얀독수리의 엄포에 뱃사공은 몸을 한 번
움츠렸다.
"예에, 댑지요. 실은......, 소인이야 강도로
오가는 손님한테 뱃삯이나 받고 태워 주며 입에
풀칠하고 사는 인간이 아니겠습니까요?"
"그래서?"
"초저녁에 느닷없는 징발령이 내립디다요."
"징발령?"
"요상한 징발이었습죠. 손님은 태우지 말되
강가에서 대기하라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강변에
죽치고 앉았습죠. 다른 때 같으면야 집에 가서
보리밥이라도 한 그릇 된장국에 말아 먹고 여편네
무릎이나 베고 잠이 들었을 시간이지요."
"필요한 얘기만 해라."
왕천이 옆에서 쏘아붙였다.
"그뿐입니다요. 좀 전에 저 놈들한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국법을 어긴
중죄인을 잡을 때까지 징발한다더군요."
"그럼 너는 강도를 몰래 빠져나가려는 손님을
유인하기 위해서 짐짓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얘기냐?"
"그런가 봅니다."
"그렇다면 배가 뭍을 떠나는 순간 어딘가 숨어서 이
쪽을 감시하는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겠구나."
"그러나 달도 아직 뜨지 않았고 이렇게 안개가
짙으니 제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저들이 알 턱이
없죠."
"그렇다면 우릴 저 쪽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얘기냐?"
"이토록 위협을 하시는데 전들 별 수 있습니까요.
다만 뒷책임은 제가 질 수 없습니다요."
"뒷책임이라니?"
"허락없이 배가 강심으로 나가면 틀림없이 화살이
비오듯 날아올 테니까요. 아니면 상류쪽에 있는
수군(水軍)의 군선들이 몰려올 지도 모르구요."
"군선들도 있느냐?"
"서른 척은 쉬이 될 걸요?"
"아무튼 어서 노를 저어라. 물결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얀독수리와 왕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전연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저들에게 잡힐 경우
온전치 못할 것이 뻔한 마당에서는 한사코 탈출을
감행해야 되는 사정이었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뱃바닥에 바싹 엎드려 몸을
숨기고, 사공은 조심조심 배를 밀어낸 뒤 노를 저어
나갔다.
"자네는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있느냐?"
하얀독수리가 고개를 약간 내밀며 물었다.
"국법을 어긴 중죄인이겠지요. 몰래 배를 강탈해서
야간도주를 하시는 걸 보아서는."
"자넨 겁없이 말하는구나."
"죽긴 마찬가지가 아닙니까요. 나으리들한테 칼맞아
죽으나 군졸들한테 몰매맞아 죽거나......"
"어쨌건 우리 말을 들어 줘서 고맙다. 어서 젓기나
해라."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요."
사공의 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변의 안개 속으로부터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거기, 뱃사공! 배를 띄우지 말라고 했잖느냐.
어서 돌아와. 돌아오지 않으면 화살을 퍼붓겠다.
어서!"
군졸의 다급한 목소리로 보아서는 배를 다시 뭍에
대지 않을 경우 화살이 비오듯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뱃사공도 다급한 목소리로 노를 쥔 팔의 힘을 풀며
물었다.
"어떡할깝쇼, 나으리들? 저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소인이 맞아 죽습니다요."
하얀독수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단언하듯이
말했다.
"뛰어내려라!"
"예에?"
"물 속으로 뛰어내려라. 내가 배를 젓겠다."
"그렇게 되면......"
"어서 헤엄쳐서 뭍으로 올라가라니까. 가서 배를
강탈당했다고 말하면 네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합지요. 물살을 타고 하류 쪽으로 저어
가면 다소 멀긴 하지만 빨리 도망칠 수가 있을
겁니다."
뱃사공은 말을 마치자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거의 동시에 강변에서 횃불이 피어올랐다. 강심까지
확 밝아져 왔다.
"내가 노를 잡을 테니까 도련님이 화살을 막아
주십시오."
하얀독수리는 왕천에게 말하며 바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강둑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사공, 거기 어떻게 된거냐? 대답하지 않으면
쏘겠다!"
동시에 화살 한 대가 날아와서 사공의 옆에
떨어졌다.
"사람 살려어--.쏘지 마시오. 배를 강탈당했소.
저놈들이 도망가고 있소......"
"지금 뭐라고 말했느냐?"
"......잠깐만 기다려 주시구려. 숨이
가빠서......"
"배를 끌고 나가는 놈들은 누구냐?"
두 군졸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며 물었다.
"도둑입니다요. 내 목에다 칼을 대고 배를 뺏어
도망쳤습니다요."
그제서야 군졸은 눈치를 챈 듯했다.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는 배를 바라보더니 횃불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저 쪽에서 횃불을 밝혀든
궁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칼을 빼어든 왕천은 이물에 우뚝서서 강둑을
노려보았다.
"아직은 사정권 내에 있소. 그러나 화살쯤은 겁낼
필요가 없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살은 안개 사이로 휙휙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벌써 궁수들의 행동이 개시된
듯했다.
왕천은 화살이 나느 소리만으로 검을 휘둘러 살을
막아내었다. 화살은 왕천의 칼날에 어김없이 두
동강이 났다.
"자, 빨리 빨리! 살줄기가 점점 거세어지는구려."
왕천은 화살을 막으며 하얀독수리를 독려했다.
화살은 거룻배의 곳곳에 날아와서 박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지없이 부상을 입고 말 지경이었다.
하얀독수리는 더욱 속력을 내었고 왕천의 화살
가르는 칼부림은 더욱 바빠졌다.
잠시 후 궁력이 떨어진 것으로 보아 뭍에서 꽤 멀리
저어나온 것으로 짐작되었다.
"궁수들이 적어도 오십 명은 돼 보이는구려."
왕천이 한숨 놓았다는 듯이 말하는 순간이었다.
"어?"
노를 젓던 하얀독수리가 신음같은 소리를 내었다.
"저건 수군들의 군선이 아니오?"
왕천은 안개 너머로 뚫어보며 말했다. 불을 환하게
밝힌 돛배들이 이 쪽을 향해 전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일곱 척...... 우릴 꼭 잡겠다고 작정한
모양인데요?"
"어떻소?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한바탕 맞붙는
길밖에 없지 않겠소?"
"소문으로는 강도에 배치된 수군들이 병조의
정예병들이라 들었습니다. 우리 둘이서는 저 많은
숫자를 당할 재간이 없지요. 그리고 설사 저들을
이긴다 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뿐더러, 만에 하나
잡힐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수둔술을 씁시다. 저들을 이
배로 유인하고 우리는 상류 쪽으로 헤엄을 치면
되겠죠."
"최협사 의견이 옳을 듯하오."
왕천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하얀독수리는 얼른
포대기 두 장을 찾아내어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거룻배 중간에 세웠다.
"자, 저 놈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뛰어내립시다."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두 사내는 옷을 입은 채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건너편 뭍은 한참 먼 거리에
있었다.
거룻배는 주인도 없이 흐느적 흐느적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 쪽을 향하여 일곱 척의 군선은 무서운
기세로 다가가고 있었다.
둘은 열심히 헤엄을 쳤다.
"안개 때문에 안성맞춤이구려."
왕천이 말했다.
"그러나 불이 밝혀지면 우리 형체는 곧 드러나고
말겠지요."
"그땐 물고기처럼 물 속 깊이 숨을 밖에요. 삿갓은
어떻게 됐을까?"
"약은 놈이어서 감쪽같이 숨어 버렸겠지요. 우리를
뒤쫓고 있다는 그 친구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난 도대체 그 녀석의 상판대기가......"
왕천이 그렇게 투덜거렸을 때 저 쪽 거룻배에
도달한 수군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속았다. 놈들은 얼마 가지 못했을 게다
주위를 샅샅이 훑어라."
불행히도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동산
마루에서 달이 뜰 기미마저 보였다.
"이거 야단났는 걸. 좀 더 속력을 냅시다."
하얀독수리의 독려에 왕천은 팔을 더욱 힘차게
뻗었다.
무예자의 수영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오릿길을
헤엄쳐 가도 별로 숨차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천은
불평을 계속 늘어놓기까지 했다.
"최협사, 이렇게 도망맡 칠 것이 아니라 저들과
한바탕 맞붙어 보는 게 옳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소."
"글쎄, 무모한 짓이라니까요."
그순간 수면 위가 불빛으로 확 밝아졌다.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수중으로 숨어들었다.
군선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횃불을 켠
군선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며 강물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기어코 달이 솟았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조심스럽게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배영을 하며 주위를 살펴 보니 군선들은
벌써 지척에까지 와 있었다.
"당황해 할 건 없어요. 강변이 가까웠으니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하얀독수리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수심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왕천은 군선 위에서 우왕좌왕하며
화살을 먹이고 있는 수군들을 흘겨본 뒤에 뒤따라 물
속으로 기어들었다.
얼마나 오래 잠영을 했을까. 왕천이 다시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하얀독수리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닌가?'
다소 불안을 느끼며 왕천은 계속 팔을
허우적거렸다. 바로 그때 군선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바로 저기에 한 놈이 헤엄치고 있다!"
동시에 화살 몇 대가 날아와서 수면에 푹푹 박혔다.
왕천은 지쳐 있었다. 하얀독수리가 사라졌다는
걱정에다가 수군들에게 들켰다는 사정이 그를
맥빠지게 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강변이었다. 물이 짜지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해변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흘러
해수와 만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화살은 비오듯이 날아왔다. 그는 다시 잠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악 잠수하는 순간 등에서 툭
소리가 났다. 괴나리봇짐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이놈들, 두고 보자. 막상 잡히게 되면 혼자서라도
상대해주마.'
왕천은 중얼거리면서 뭍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쳐갔다.
'이놈의 살이 목에 박히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지.'
날아오는 화살과 떠들어대는 수군들의 소리때문에
왕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낼 처지도 못되었다. 그는 다만 운명을 하늘에
맡기며 하염없이 헤엄을 칠 뿐이었다.
군선은 거의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뭍으로 기어올랐다. 지금은
하얀독수리를 염려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완전히
몸을 뭍 위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아앗!"
왕천은 비명을 질렀다. 왼편 어깻죽지 위로 콕 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화살 한 대가 날아와서
사정없이 박힌 것이다.
'아아......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가......'
그는 탄식했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아무리 지쳤지만 화살 몇 대
피하지 못해서 구차한 목숨을 구걸할 처지가
되다니......'
그는 비틀거리며 갈대숲 속으로 기어들었다.
'시각대사께서 하산을 말리실 때 그 분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이럴 때 하얀독수리가 같이 있었으면......'
그는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수군들이 첨벙거리며
물살을 딛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숲 속에 몸을 숨긴 왕천의 의식은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왕천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운기(運氣)를 조절했다.
그러자 가쁜 숨결이 잠잠해지고 의식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러나 어깨의 통증은 여전했다.
'우선 이놈부터 뽑아야겠구나.'
왕천은 옷을 부욱 찢어낸 다음 어깨에 박힌 화살을
비틀었다. 피가 푹푹 쏟아졌다. 옷은 벌써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찢어낸 옷자락으로 어깨를 동여매며 피를
막았다. 통증 때문에 왼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군선에서 내린 수군들이 횃불을 밝혀들고 갈대숲을
뒤지고 있었다. 왕천에의 지척에서 갈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사리며 장검에다 손을
대었다.
'아아, 하얀독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수중고혼이라도 된 건 아닌지. 상처 입은 몸으로 내가
저 많은 군졸들을 당할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아, 이 얼마나 어이없는
실수인가.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목숨인가. 차라리
자결이라도......'
그때 바싹 옆으로 다가오는 군졸들이 있었다.
그들은 3인조씩 무리를 지어 넓은 갈대숲을 헤치고
있었다.
"음...... 여기에 핏자국이 있군. 멀리는 못갔을
게다. 필시 사나운 놈일 테니 모두 조심들 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아니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부모의 원수는
어떻게 되는가. 쓰러진 사직의 회복을 꿈꾸던 원대한
꿈은 어떻게 되는가. 아니다. 난 허무한 죽음을
당해서는 안돼. 이대로 끝나서는 안된단 말이다. 싸울
힘이 있을 때까지 버텨내야 해......'
군졸들은 장검을 빼들고 있었다. 근처에는 세
명밖에 없었다. 왕천은 그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칼을 빼든 왕천은 숨을 죽였다. 횃불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왕천은 휙 칼을 휘둘렀다.
"욱!"
횃불을 든 군졸이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동시에 왕천은 횃불을 뺏어들었다.
왕천은 옆에서 달려드는 두 군졸에게도 틈을 주지
않았다. 번개처럼 칼을 휘둘러 그들의 목을 잘랐다.
"으아악!"
두 군졸 역시 비명을 지르며 모로 쓰러졌다.
"거기 무슨 일인가?"
멀리서 다른 군졸들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왕천은
얼른 대꾸했다.
"별일 아니네. 발이 수렁에 빠졌을 뿐이야."
저쪽에서는 왕천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는 듯했다.
횃불을 치켜든 왼팔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왕천은 질척거리는 수렁에다
횃불을 꼬나박았다.
횃불이 꺼지자 주위는 다시 달빛으로 인한 희뿌연한
빛살만이 있을 뿐이었다. 갈대숲을 무사히 빠져나가자
저만치 작은 길이 난 숲이 보였다.
'옳지. 우선 저리로 달아나야겠군.'
왕천은 다시 힘을 가누며 어둠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군졸들로부터는 제법 멀어진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도 동료가 죽은 것을 안 이상 이쪽으로
방향을 잡을 게 뻔하였다.
왕천은 피를 많이 흘러 거의 기진맥진하였다. 그의
멍멍해진 귓속으로 갑자기 군마의 발굽소리가 울렸다.
그는 맥이 탁 풀렸다.
왕천은 이제 속절없이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마군까지 동원돼 몰려온다면 기력이 완전히 탕진된
왕천으로서는 그들과 대적할 여력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아, 나의 한많은 생명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아버님 어머님, 정말 죄송하옵니다. 불초소생, 원수도
갚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저승에서 뵈올 면목도
없으나 천명이 다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스승님께도
죄송합니다. 만류하시던 손길을 뿌리치고 보잘것 없는
실력에 자만해서 일찍 하산했다가 이제 환난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러나 이것이 저의
천운인 듯 하옵니다. 자, 그럼......'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소리로
보아 사십 기는 충분히 돼 보였다.
왕천은 아까 뱃사공을 위협하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은 자결할 힘뿐이었다.
그는 목에다 단검 끝을 갖다 대었다.
왕천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가운데서도 자신을
베러 오는 자들을 향해 비웃음을 던져 보냈다.
'그래, 이놈들아. 너희들이 나를 발견했을 땐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더러운 조선의
군사놈들한테 내 생명을 맡길 수는 없지......'
왕천은 소로를 더듬어 오고 있는 수군들의 횃불을
바라보았다. 빛살에 반짝이는 그들의 칼날에서는
살기가 번쩍거렸다.
다시 왕천은 기마군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황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 역시 왕천을 단칼에
죽이겠다는 성난 소리로 울려왔다.
'서로가 공을 다투겠군!'
왕천은 중얼거린 뒤, 단검 끝으로 목을 마악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기마군들은 왕천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왕천을 발견했을 터인데 그들은 조금도
멈춤이 없이 해변가로 치달리는 것이었다.
'저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얘긴가? 그렇다면
나는 다시 살 길이 생긴 건가......'
왕천은 잠시 단검을 떨구며 지나치는 기마군들의
말엉덩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얼마 못미친 곳에서 기마군들과 수군들이 마주치고
있었다.
"거기, 누구냐? 웬놈들이 한밤중에 수풀을 뒤지고
야단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기마군의 우두머리가 소리치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달려오던 수군들도 뜻밖의 기마군들에 당황했는지
한쪽으로 우르르 모여 들었다.
"그렇게 소리치는 너희들은 누구냐?"
수군의 우두머리가 되물었다.
"보면 모르느냐? 황해도 병영 소속 기마부대이다.
자, 이번에는 너희들의 신분을 대라. 수상한 자라면
가차없이 베겠다.!"
"우리는 강도 수군 소속 병사들이다."
"강도의 수군들이 여기는 웬일이냐?"
"사냥을 하러 왔다."
"뭣이, 사냥?"
"멧돼지가 아니라 인간 사냥이니 걱정 말아라."
"걱정 말라니. 자네의 말대꾸가 몹시 건방지구나.
짐승이고 인간이고 허락없이 사냥하는 놈은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황해도
관할 지역이란 말이다. 허락없이 사냥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아느냐?"
"우리는 지금 국법을 어기고 도망친 중죄인을 쫓고
있다. 갈길을 방해해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라.
이번 임무는 왕세자 전하의 호위대장이신
윤호장군께서 지휘하시는 일이다. 도망자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뭣이? 윤호장군?"
"그렇다. 이제야 알겠느냐?"
"그렇다면 너희들을 더욱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니?"
"그는 살인자이다. 여기까지 와서 관찰사 나으리를
벤 자이다. 그를 빙자해서 허튼 수작을 부리겠다면
우리도 너희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럼 우리의 갈 길을 막겠다는 뜻이냐?"
"꼭 중죄인을 잡겠다면 상감마마의 어명을 받들고
오너라. 그것 없이는 누구의 명령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왕천은 그들의 이상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군사들의 힘이 통일돼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세자와 방원의 세력이 팽팽이
맞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천은 자결을 잠시 멈춘 채 수군과 기마군들의
얘기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더구나 우리들로서는 중죄인이라는 자의
수색에 협조할 생각도 없거니와, 우선 너희들의 이 곳
상륙부터 응징해야 되겠다. 죽기를 원치 않거든 열을
셀 동안까지 배를 타고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한 놈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다."
"뭣이?"
기마군의 말에 수군의 우두머리는 발칵 화를
내었다.
"자, 숫자를 헤아리겠다. 하나......"
"웃기지 마라. 우리가 네까짓 볼품없는 지방
군사들에게 당할 성싶으냐. 어디 할 테면 해 보라지."
"네놈들이 어디 황금 갑옷이라도 입고 내려온
천군(天軍)이기라도 하더냐?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기마군의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수군
쪽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살은 기마군 대장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숲 속으로 날았다.
"저놈이!"
그것을 신호로 기마군들은 칼을 빼들고 수군들
사이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수군의 우두머리가
고함을 질렀다.
"얘들아! 이 잡병들을 가차없이 베어라. 중죄인
탈출을 도운 자들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기마군도 지지 않았다.
"잡병들이란 바로 네놈들이다. 여봐라, 저놈들을
무찌르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수군놈들이란
육지에서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겁내지 말고
가차없이 베어 버려라. 뒷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그들의 칼싸움이 시작되었다.
죽음 직전에서 이 희한한 전투를 보게 된 왕천은
정신이 번쩍들었다.
'아, 아직은 나의 운이 다하지 않았나 보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저들이 싸우고 있는 틈에 도망을 쳐야
한다. 자, 힘을 내자.'
왕천은 쨍강거리는 칼소리와 비명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수목이 달빛을 가리고 있었다. 싸움소리도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푸드덕거리는
산새소리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돌뿌리에
채이고 가시에 할퀴며 언덕 밑으로 나뒹굴었다. 피가
얼마나 쏟아지는지조차 감지할 기력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어왔을까. 점점
의식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문득 귓가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혹은 그것이 짐승의 울음소리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러나 기력이 쇠진된 왕천으로서는 설사 그것이
맹수일지라도 상대할 힘이 조금도 없었다. 잡혀
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조용히 잠들고 싶을
따름이었다.
왕천은 픽 쓰러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의 비명소리를 그는 듣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그는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왕천이 혼수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은 것은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장지문
바깥으로부터 들려왔다.
그는 호사스런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왕천은 사방으로 눈을 굴리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지를 살폈다. 도대체 이 곳은 지옥인가
극락인가!
어깨의 통증은 아직 여리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져 따스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분명히 그가 누군가에 의해 목숨이 구해진 것은
확실했다. 그러면 그를 구한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인지 정말 고마운 분이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곧 알 수 있겠지.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그는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깨의 여린 통증은
고사하고라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풀먹은 솜처럼
푹 녹아들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말똥말똥한 건 의식뿐이었다.
왕천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의 지난 일을 기억해
보았다.
'어떻게 내가 구출될 수 있었을까? 산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얘긴가. 혹시 하얀독수리가
뒤따라와서 나를 구했을까? 싸움을 끝낸 수군이 나를
살려냈을 턱을 없고, 그럼 아까의 기마군들이란
말인가.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렇다면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사냥꾼일까. 어쨌던 고맙기
이를 데가 없군.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겠다. 나는
어차피 생명을 새로 부여받은 몸이다. 어처구니
없었긴 했지만 죽은 몸이 되살아난 셈이다.
경망스러웠던 지난 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새로
설계하자.'
왕천은 꺼칠꺼칠해진 입술을 빨았다.
사방은 새소리 말고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몹시
큰 저택이라는 것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한심스럽게도 나는 복수만을 생각하고
살았구나. 나를 도와준 사람을 위한 보은같은 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 우선
하얀독수리...... 만일 그가 살아 있어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를 도울 일을 생각해야지. 그리고 사부
시각대사님...... 얕은 기술만 탐했을 뿐 그 분의
깊은 학문은 외면했었지. 일어나면 다시 개골산으로
떠나야겠다. 섭섭하게 한 스승에게 용서를 빌어야지.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무예를 닦아야겠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은혜갚는 일도 잊지 말자.
이제까지는 인간의 도리를 외면했었지......'
왕천은 자책하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심신이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어쩔 바를 몰랐다.
'그리고 나를 구해 준 사람의 은혜도 망각해서는
안되지. 그런데 나는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을까......'
그런 상념으로 뒤척이던 왕천은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오래 잠들었을까.
꿈인 듯 생시인 듯 왕천의 귓가로 작은 인기척이
났다. 머리맡에서인 듯했다. 뿐만 아니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그가 가가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천은 간신히 눈을 떴다. 옆으로 다가앉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 처녀였다. 그녀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본듯도 했다.
"이제사 깨어나셨군요."
처녀의 목소리 또한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영롱했다.
"여기가 어디인지요?"
왕천이 그렇게 물을 때만 하여도 처녀가 지상의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는 필시 저 세상의 선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어쩌면 벌써 죽었으며 혼백만 떠돌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닷새를 꼬박 혼수상태로 계셨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의원님도 말씀하셨지요."
"......"
"오늘쯤에 깨어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얘깁니까?"
왕천의 말에 처녀는 고개만 끄덕이며 가만히
미소지었다. 왕천은 다시 그녀의 미소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낭자는......?"
"기억이 나시는지요?"
"어디에선가 본 듯하외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분명코 두 번째 만나는
것입니다. 이상한 인연인가 봅니다."
"어디서였더라......"
"기억해 보시지요."
처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왕천은 기억해
내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앗! 그럼 낭자는!"
왕천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질렀다. 처녀는
그러는 왕천을 얼른 말렸다.
"무리하시면 아니 됩니다. 아직은 그냥 누워
계십시오."
그렇다. 개경 근처 주막집에서 산적들에게 끌려갈
뻔했던 처녀였다. 산적들 몇 명을 베고 그녀들을
구했었지. 대흥사로 탑돌이를 간다고 했었던가. 일곱
관비들 중의 하나였었지.
"전날에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막연했었는데
이렇게 도련님을 다시 만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게 될 줄이야...... 그나저나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셨나 봅니다."
처녀는 조용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죽어가는 나를 구해 주신 일 고맙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 속에서 쓰러진 이후의 일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는게 유감이구려."
"그 역시 부처님의 자비인 듯합니다. 저희들은
산길을 지나 탑돌이를 가던 중이었거든요."
"저희들이라면?"
"전날 도련님한테서 구원받은 일곱 처녀들이지요."
"그럼 낭자들의 깊은 불심(佛心)으로 해서 내가
소생된 셈이구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지요?"
왕천은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녜에. 바로 도련님의 생명을 구해 주신 분의
저택이옵지요."
"그렇다면 또다른 생명의 은인이 계시다는
뜻입니까?"
"도련님의 생명의 은인은 저희들이라기보다 차라리
그분일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아니었다면 도련님을
살릴 길이 없었으니까요."
"어떤 고마우신 분이시온지요?"
"곧 이리로 납실 것입니다."
왕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 처녀와 두 번씩이나
만나면서 서로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이만한 인연이라면 은밀히 사정을 주고받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나는 왕천이라 부르오. 낭자한테는 비밀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소녀의 이름은 유화(柳花)라 하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오. 낭자가 누구인지를 묻기 전에
우선 나를 밝히는 게 순서일 것 같소. 대강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배에 태워져 수중고혼이 된 왕씨손들
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왕가(王哥)입니다.
우(禑)대왕의 조카 전 상서령 가(珏)자의 아들
천(天)이라고 하지요. 이번엔 낭자의 비밀을 들어도
괜찮겠소?"
"그러지요. 하오나 이는 지극히 비밀로 하지 않으면
소녀의 생명이 위태로우니 통촉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소. 결국 우리는 모두 쫓기는
몸들이구려."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겠지요. 소녀의 아버님은
금오위(金五衛) 상장군이셨습니다. 한(韓)씨 성에 큰
대(大)자 어질 량(良)자."
"아, 그분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새 사직에
협조하지 않으셨다 해서 사약을 받으신 분이
아니었던가요?"
"때문에 어머님과 오라버님들은 변복해서 어딘가로
떠나셨고, 소녀는 몸종 여섯과 이곳으로
숨어들었나이다. 관비로 팔려가던 당시에 관원은
저희들은 세력있는 산적에게 다시 넘겼고, 때마침
도련님께서 구해 주신 것이 그간의 경위이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오. 좋은 세상이 와야 살아 남은
가족과도 다시 만날 수가 있을 텐데......"
"도련님이 누워 계신 이곳은 황해도
연백땅이옵니다. 일찍이 이 저택의 주인이신
김어른께서는 부친과 은밀하게 친교를 맺어 왔던
사이기로, 소녀는 그분의 조카딸로 신분을 감춘 채
보호받고 있나이다. 모친과 두 오라버님이 이곳에
함께 숨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저택 역시 저들에게
감시받고 있기 때문이죠. 밀명자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으며 저번에는......"
"쉿!"
왕천이 얼른 유화의 말을 막았다.
"녜에?"
"인기척이 났소."
왕천은 갑자기 긴장했다. 이제까지야 무사했지만
밀명자들이 수없이 드나든다는 사정으로 보아 아직은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왕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댁 어른은 어떤 분인가요?"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대대로 지방 토호로서 이
인근에서는 존경을 받아온 분이옵지요. 그분의 덕망은
관찰사나 목사까지도 감화시키기 때문에 도련님이
이제껏 무사하신 것도 모두 그분의 은덕이온
듯하옵니다. 소녀의 소청을 들어 도련님을 구해주신
것까지도 어르신네의 결정이었으니까요."
"어쨌던 오래 신세를 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구려......"
그때 마악 밖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왕천은 다시
긴장했다.
"주인님이 납시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화가 얼른 일어나며 속삭이듯 말했다.
장지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질게 보이는 노인
하나가 환한 기색을 떠올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이제 깨어나셨나 보구려. 위험한 고비는 넘겼나
봅니다."
노인은 허허 웃었다. 왕천은 얼른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아니됩니다. 그대로 누워 계십시오. 의원말이
사흘은 더 누워 계셔야 기동이 가능해진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왕천은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치사는 여기 조카딸년에게 하시지요. 저야
뭐......"
"저에 대한 어르신네의 고마우신 배려는
유화아가씨한테서 잘 들었습니다."
"네가 공연한 말을 했구나. 너는 어서 나가서
준비한 미음을 가지고 오너라. 깨어나셨으니 허기진
속을 우선 따뜻하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예에......"
유화는 공손히 절한 뒤 나갔다.
이제는 김노인과 왕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왕천의 곁으로 다가앉은
김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지러운 세상이라 젊은이나 늙은이나 환난이
많구려. 저 애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도련님의
장검을 보고 조금은 짐작을 했소이다."
"예에? 제 칼을 보시고서?"
"사연이 있는 칼이외다. 때문에 도련님의 가친이
누구시라는 것까지 짐작하게 됐지요."
"아아, 어쩌면......"
"정말 기이한 인연인 것이오. 유화를 산적들로부터
구해준 것도 인연인 것이고, 유화가 도련님을 산
속에서 구해낸 것도 인연인 것이오."
"정말 저로서도 저간의 상황들이 너무도
이상스러워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허나, 인연의 길은 아직도 머나먼 길...... 실상은
일이 다급해져서 의논을 좀 해야겠소이다. 때맞춰
의식도 회복되었으니까 망정이지......"
"놈들의 손길이 여기까지 뻗쳤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늙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도련님의 신변이 더욱 문제지요. 경기 도호부사라는
직함에다 세자마마의 호위대장이라는 윤호란 자가 두
번씩이나 다녀간 이후......"
"아, 불여우!"
"유화의 정체를 얼마큼 감지했는지, 은근히
협박까지 하면서 애를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그놈이!"
"마음을 격하게 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불여우가
매파를 놓아 정식 청혼을 해온다면 쉽사리 거절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 않습니까. 놈의 세력은 하늘을
찌르고 있고, 지금은 때가 때인만큼......"
"제가 그 놈을 베겠습니다!"
"아서요. 때가 좋지 않습니다. 궁중 안팎이
뒤숭숭한 시절입니다. 저한테도 요량하는 바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유화를 다시 피신시킬
곳을 나름대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보다
도련님이......"
"결코 어르신네를 더 괴롭히지는 않겠습니다."
"자, 이 늙은이가 도련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다 했다고 짐작됩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인지요?"
김노인과 왕천의 밀담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나흘 후 밤. 저택의 뒤편 아름드리
자작나무 밑에서 길손 차림의 왕천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후당의 샛문이 열리면서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나오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아, 낭자!"
왕천은 얼른 그녀를 알아보았다.
"도련님,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밀명자인 듯한
자가 지금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르신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만 여차하면
가택수색도 불사할 기색이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시간이 오리라는 예측은 했소이다.
제깐 놈들 몇 백명이든 오라지! 하지만 어르신네께
욕뵈 드리게 할 수야 없지. 그보다 낭자, 그백할 게
있소이다. 저는 낭자를 사랑하게 되었소!"
달빛 아래로 당혹스러워 하는 유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정이오. 때를 기약할 수야 없지만 기다려
주시오. 뜻을 이룬 뒤에 반드시 찾아와 아내로
맞이하고 싶소. 낭자의 생각은 어떻소? 무슨 말이든
해 주시구려."
유화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이 감돌았다. 저고리
고름을 일없이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난세에 유랑하는 몸...... 도련님
역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하오. 반드시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그러한 믿음 없이는 난세를
버텨낼 힘도 없어지는 것이오. 더구나 어디엔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오늘의
고난을 이기게 만들고 내일의 바램을 더욱 뜻깊게
하며 매일의 삶을 한없이 경건케 하도록 격려하는
원천이 될 것이오. 낭자, 약속해 주오!"
그때 저택 본채에서 소란이 이는 듯했다.
"어서 떠나십시오, 도련님!"
"난 가지 않겠소. 낭자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그럼...... 기다리겠사옵니다."
"고맙소!"
왕천은 지체없이 유화의 허리를 껴안았다. 유화
역시 다소곳이 왕천의 가슴으로 잠겨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라! 어디엔가 상처를 입은 놈이
숨어 있을 게다!"
소란은 더욱 가까와지고 있었다. 유화가 먼저
왕천의 가슴 속으로부터 벗어나왔다.
"사정이 초미합니다. 도련님, 어서 떠나십시오."
"걱정할 것 없소. 내 걸음은 놈들의 승마 속도보다
훨씬 빠르오. 그런데 낭자는 어디로 보내진다고
그럽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작은 암자로 보내질 듯합니다."
"언젠가 찾아와서 어르신네께 물으면 되겠구려."
"그러나 그때까지 그분이 살아 계실지......"
"그토록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요. 내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뜻을 세워 찾아 오리다."
"그럼 도련님은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요?"
"혼자만 짐작하고 있구려. 개골산 명연담으로
되돌아가야 될 듯하오. 자, 안녕히 계시오. 몸조심
하시오. 유화낭자!"
"도련님도 몸조심 하십시오."
뒷채가 횃불로 확 밝아졌다.
"이쪽이 수상하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병졸의 목소리였다. 유화는 그 자리에 오똑 서서
눈은 꼭 감아버렸다.
6. 떠오르는 해
무인(戊寅)년 팔월 심야.
방원은 별당 정원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밤의
무더위 때문인지 낙엽수들이 추욱 늘어져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연못 속으로 반짝거리는
별들이 보석처럼 떠올랐다. 방원은 수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상 그는 연못을 살피고 있지
않았다. 다만 건성으로 그쪽에다 눈길을 보내며
우너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의 엄숙한 표정과 얼어버린 듯한 자세는 미동조차
없는 수면과 그럴 듯하게 어울렸다. 더위에 고기들도
지쳐 버렸는지 혹은 잠들었는지 꿈쩍도 않고 있었다.
본채로부터 별당을 가로지르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흑사마귀 정창이었다. 흑사마귀 역시 긴장한
표정에 장검을 들고 있었다. 다른 때와 차림이
다르다면 목에 검은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말없이 방원의 곁으로 다가섰다.
"두 분 동시에 납시었습니다."
흑사마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뒤돌아선 채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방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뒤따라온 자가 있는지 그것부터 살펴
보아라."
"벌써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거라."
태풍전야의 잔잔함일까. 방원은 다시 경직된 자세로
돌아갔다. 얼마 후 흑사마귀는 평복 차림의 두 남자를
데리고 왔다.
"오, 어서들 오시오."
방원만 짧게 말했을 뿐 두 남자는 허리만 가볍게
숙인 뒤 가만히 서 있었다. 방원이 흑사마귀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모두 준비되었는가?"
"예에, 분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돌아가 있거라. 부를 때까지 별당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도록 해라."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흑사마귀가 돌아가자 방원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밤이 몹시 무덥구려."
"그렇습니다. 마마."
두 남자! 갓을 쓴 사내는 대장군 박포이고 평복에
두건을 두른 사내는 충청도 관찰사
이숙번(李叔蕃)이었다.
방원은 먼저 이숙번에게 말을 건넸다.
"먼 길에 수고가 많았소. 이관찰사의 가담은 큰
힘이 됐소."
"마마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고맙소. 그래 아이들은 몇 명이나 데리고
왔습니까?"
"솜씨 좋은 아이들만 사백 명입니다. 우린 출발
때부터 흩어져서 왔습니다. 아무런 귀띔도 주지 않고
자정까지 남산 중턱에 모이라고 일렀으니 지금쯤 모두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잘 하셨소. 박장군은 어떻게 준비하셨소?"
이번에는 박포가 나섰다.
"삼천군을 동원시킬까 합니다. 완전무장시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으리께서는 어떤 작전을
쓰실 참이신지요."
"거사의 성공을 위해 빈틈없는 점검이 필요하오.
우리의 작전은 저쪽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질 밖에요.
그런데 오늘 중요한 정보가 입수되었소."
"그게 무엇인지요?"
"상감의 병세가 위독한 것을 기화로 우리 육형제를
궐내로 불러들인다는구려."
"예에?"
박포와 이숙번은 그것이 거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해서 벙벙한 표정으로 방원을 건너다 보았다.
"하필 우리 육남들만 불러들인다는 게 수상하잖소?"
"그렇군요."
"잘못하다간 거사도 하기 전에 우리가 떼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마께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일이 초미하게 됐소. 그래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거요."
"어떤 계획입니까?"
"정도전 일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거요."
"예에?"
박포와 이숙번이 동시에 말했다.
"여섯 왕자들의 살육을 계획하고 있다는 명분을
세워서 우리가 먼저 습격하고 변란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거요."
"좋으신 계책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세력이나
방비도 허술하지 않을 텐데요?"
박포가 물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우리 계획을 알아차리기 전에
공격하자는 게 아니오?"
"그러시다면 오늘 밤에?"
"모두가 잠든 심야가 좋소. 축시(丑時)가 알맞을
듯하오. 방비가 소홀할 시간이니까. 그런데 저쪽의
솜씨 있는 아이들은 어떤 놈들이오?"
"세자의 호위대장이라는 놈이 정대감 저택으로
들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필시 오늘 밤에도 야경을 설
듯합니다."
"불여우는 우리 흑사마귀한테 맡기면 되오. 내가
흑사마귀를 데리고 갈까 하오."
"저희들은 어떻게 할까요?"
"저쪽이 힘을 모으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도
분산시킬 방법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박대장군은
이조판서 심효생(沈孝生)의 집을 습격하시오."
"세자의 장인을......"
"뒷책임은 내가 지는 거요. 저항하거든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시오."
박포는 대꾸 대신 고개만 서너 번 끄덕였다.
"그리고 이관찰사는 의성군(宜城君)의 집으로
쳐들어 가시오."
"남은(南誾)대감의 저택 방비도 허술하지가 않을
텐데요."
"어려운 일이기에 특별히 이관찰사한테 부탁하는
거요."
"해 보겠습니다."
"가차없이 베도록 하시오."
방원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정도전의 집으로 가겠소. 자, 모두들
실수없도록 하시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헤어진 후
축시를 기해 일제히 각자 맡은 가택들을 습격하도록
합시다."
박포와 이숙번은 방원의 저택으로 숨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을 틈타 사라져 갔다.
방원은 다소 이상한 차림이었다. 전포를 껴입긴
했지만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장검을 찔러 차고서 왼손으로 그것을 꽉 쥐고 있었다.
방원의 차림을 곁에서 거들던 민씨 부인은 남편의
결연한 표정을 보면서 손을 가늘게 떨었다. 남편은
지금 중요한 결단을 내린 듯하였다. 그 표정이 하도
엄하고 비장했으므로 섣불리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무장이 갖추어지자 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별일 없을 거요. 걱정마시오, 부인."
말은 그랬지만 그의 마음은 조바심으로
소용돌이쳤다.
"예에......"
"기회는 왔소. 이때를 놓치면 차라리 죽음이 있을
뿐이오. 건곤일척(乾坤一擲)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오."
"오늘 밤이옵니까?"
"그렇소. 오늘 밤...... 아이들은 어디에 있소?"
"작은 아이들은 잠든 지 오래이고 큰 아이는 글을
읽고 있습니다."
"음...... 아비의 엄명이라 이르시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니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어디로 피하라는 말씀이오이까?"
"이런 지경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 두었소. 별당
뒤켠 북편쪽에 곡간이 있을 거요."
"예, 알고 있습니다."
"빈 광이라 자물쇠도 없소. 거기로 아이들과 함께
숨으시오."
"거기는 안전할까요?"
"안으로 들어서면 보리 짚단이 쌓여 있는 게 보일
거요. 그걸 밀어내면 바닥에 독 뚜껑이 보이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면 운내골로 통하는 솔밭이 되오.
그러나 적들의 침입이 없는 한 멀리 도망칠 필요는
없소. 바깥이 소란스러워질 경우에만 몸을 피하시오.
아무 일이 없으면 내가 돌아와서 부르겠소. 아이들
모두에게 이르되 그 이유는 묻지 말라 타이르시오."
"그토록 위험한 일이오니까?"
"아바마마의 힘조차 정도전 일파의 세력에 한없이
밀리고 있고 사직의 기틀은 아직 다져지지도 않았소.
모든 사정이 분명치가 못하오. 그래서......"
방원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만약 일이 잘못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소. 내 편의 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자, 다녀오겠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내가 이른 대로 이행하시오. 우리가 집을 나서거든
곧 움직이시오. 물론 시종들까지도 알지 못하게
숨겨야 하오."
"예에."
방원은 방을 나서서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방원의 목소리에 사병들이 거처하는 후당
쪽으로부터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방원은 장검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칼을 휙 뽑아들었다. 달빛에
날빛이 갈라졌다.
그 앞에 우뚝 멈춰선 것은 흑사마귀였다. 그는
주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보이느냐? 이 칼날이!"
"네에,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얼 말씀이온지요?"
"이 장검을 빼어든 내 마음을."
"마마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을 앞에 두시고
소인들에게 보여 주시려는 결연한 마음의 표시인
듯하옵니다."
"잘 알아 보았다. 오늘 밤 자네의 활약에 기대를
걸겠다. 두렵지 않느냐?"
"무사의 생명은 칼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 말엔 혼이 깃들어 있지 않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마의 하시는 일이 의로운
것인즉 우리는 승리의 피를 맛볼 것이며, 패할지라도
남을 탓하지 않는 게 또한 검자의 도리이옵지요. 칼에
혼이 없다면 나뭇잎사귀 하나도 베어지지가 않지요.
소인의 칼은 이미 마마의 혼을 얻어 하늘 높이
의기(義氣)를 드날리고 있나이다."
"믿음직스런 말이로구나. 딴은 너의 말이 옳을
듯하다. 그럼 모두 이 뜰로 불러들여라."
"예에. 얘들아, 모두 이쪽으로 건너오너라."
흑사마귀가 소리치자 무장한 사병들이 우르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은 듣거라. 모두들 각오는 되어 있느냐?"
흑사마귀의 물음에 다른 수장(首長)이 대답했다.
"왕자마마와 운명을 함께 하겠나이다."
"고맙다. 오늘 밤 나를 위해 죽는 자는 그 의로운
이름을 청사에 남겨 주고 가족을 보살펴 주겠다. 물론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오늘
밤 살아 남는 자는 나중에 후한 벼슬자리를
책임지겠다."
"감읍할 뿐이옵니다!"
수장이 대신 대답했다.
"자, 내 뒤를 따르라. 모두들 횃불을 준비하고
복면할 채비를 해라. 작전은 목표한 저택에 당도해서
세우겠다. 선봉장은 흑사마귀 정창이다. 세세한
지시는 이미 그에게 모두 일러 두었다. 자, 떠나자!"
수백의 복면사병은 소로를 따라 사직골로 향했다.
밤길은 어두웠지만 그드르이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흑사마귀가 방원의 곁에 붙어 섰다.
"마마, 기마군을 동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말발굽 소리는 민심을 소란케 만든다. 이런 거사는
조용히 재빨리 해치우는 게 좋다. 어둠을 틈타서
말이다."
"저쪽의 숫자는 수천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당 백의 정예병 앞에 숫자가 문제겠느냐. 또한
작전을 잘 세워야 할 것이야. 병서에 적장의 목부터
베라고 했다. 자네가 그 임무를 감당해야겠다. 몸이
빠른 자 다섯만 데리고 먼저 저택 안으로 숨어들어라.
잠깐 뜸을 들였다가 우리는 바깥에서 시비를 걸고
소란을 떨겠다. 그때쯤 아마 정도전이 모습을 나타낼
게 틀림없다. 때를 놓치지 말고 그를 공격해라.
뒤따라 증원될 일천의 군사가 저택을 에워싸고 불을
지르게 될 것이다."
정도전의 저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길을 따라
조용조용히 숨어갔으므로 이들을 방해하는 군졸은
아무도 없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방원이 뒤돌아보며 흑사마귀에게 말했다.
"예에."
"저 언덕 너머에 그 자의 집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횃불을 밝힐까요?"
"아니다. 너희들이 안채로 숨어들 때까지는 소란을
떨어선 안된다. 그보다 너한테 하나 묻고 싶다."
"뭐든지 하문하십시오."
"불여우란 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뭐라구?"
"저와는 무문(武門)의 형제입니다. 지금 그가 적이
되어 있어 상대하기가 저으기 주저되었으나 이제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원래 성격이 포악해서 동문 시절에도 자주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벼슬자리를 얻고 나서는 더욱
악명을 떨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를 벤다 해서
거리낄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와 상대했을 때 실력은
어떤가?"
"겨뤄 볼만 합지요. 그러나 주색에 곯아 있다는
소문이니, 아마도 그동안 무예 연마를 게을리했을
테지요."
"그게 바로 자네가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이유인가?"
"그의 약점이라는 뜻이옵니다."
"알겠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라."
정도전의 대저택이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일렁거렸다. 횃불을 밝혀든 군졸이 솔밭 사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방원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게 했다.
"오백 군사는 실하게 되는군."
방원이 중얼거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흑사마귀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면을 하고 뒷담을 넘어라."
흑사마귀는 이미 점찍어 둔 날렵한 사병 다섯을
손짓해 불렀다. 그들은 빠른 몸짓으로 흑사마귀 곁에
다가왔다.
"복면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내 뒤를 따르라."
명령한 뒤 흑사마귀 일행은 저택 왼쪽 숲길을
가만히 빠져들어 갔다.
방원은 어둠 속에서 다시 장검을 빼어 들었다. 그는
칼을 곤두세워서 입 언저리로 가져갔다. 뒤따르던
사병들도 주인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 그들도 말없이
칼을 빼어 들었다.
모두들 칼자루를 입에 대고서 눈을 감았다. 말없는
가운데 이 무서운 밤의 결의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자, 내 말을 듣거라. 잠시 후면 저택 내부로부터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횃불을 지피고
동시에 저택을 에워싸라. 부싯돌은 미리 준비가
됐겠지. 그리고 함성을 질러라. 소리가 클수록 좋다.
저쪽이 당황하도록 말이다. 기마군이 대들거든
수리검을 쳐서 떨어뜨려라. 창을 든 자는 앞에 나서고
횃불을 든 자는 사정없이 불을 질러라.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맡은 바를 실수없이 이행하도록 해라.
자, 모두 준비하여라......"
어둠 속에서 잠깐 정적이 흘렀다. 달은 잠시 후에
일어날 살육의 기색을 알기나 하는지 한가롭게 솔가지
위에 걸려 있었다.
한편......
불여우 윤호는 네 명의 측근 무예자를 데리고
밤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얘들아, 어디 좋은 데로 가서 밤새도록 실컷
마시자꾸나."
"나으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좋은 일? 암, 좋은 일이 있고 말고.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나는 대장군이 되는 걸세."
"예에, 대장군?"
네 명의 무예자가 동시에 소리질렀다.
"왜 그토록 놀라느냐? 내가 대장군 될 자격이
없다더냐?"
"자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격이야
출중하옵지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하기야, 젊은 나이가 다소 문제가 되긴 하지.
그렇지만 뭐 어떨라구. 세상 일이란 항상 실력 문제
아닌가."
"그야 그럽지요."
한 무예자가 잽싸게 대꾸했다.
"내일이면 나한테 엉뚜한 벼슬자기가 떨어질걸세."
"내일 대장군이 되신단 말입니까?"
"너무 서둘지 말게. 내일은 우선 궁성
수비대장이라는 첩지가 내려진단 말야."
"소인들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나으리의
신변에 그런 영광이 줄을 잇게 됐으니 기뻐하기에
앞서 어안이 벙벙할 밖에요."
"그럴테지. 그러나 영광에 앞서 한바탕 큰일을 치뤄
내야 한단 말야!"
초저녁부터 불여우 윤호는 은밀하게 정도전의
저택으로 불려 갔었다.
"어디 특별한 소식이라도 듣지 못했는가?"
정도전이 꺼낸 첫말이었다.
"말씀 아뢴 것 말고는 별로......"
"알겠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네. 모레 아침에
결행할 계획이네."
"예에?"
"상감마마의 병세가 좋지 못하이."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빌미로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이도록 돼
있네."
"왕세자 마마까지?"
"아닐세. 전비 한(韓)씨 소생의 여섯 놈만......
제깐게 뭘 했다구 너무 거들먹 거린단 말이야. 내가
굳이 누굴 지칭하는지 알겠느냐?"
"유달리 방원 왕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옵니까?"
"옳게 보았다. 그러나 여섯 모두를 거세할
작정이다. 이것은 지극히 조심해야 될 극비 중의
극비이니라."
"하늘에 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 대신, 자네는 내일 궁성수비대를 책임맡게 될
것이다."
"예에?"
"미미한 벼슬자리라고 섭섭하게 생각 말아라. 모두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
"결국......"
"그들이 입궐할 때 트집을 잡아 모조리 베어
버려라. 그것이 너의 임무인 것이다."
"과연 소인이......?"
"성공만 하면......,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
성공한 다음에는 너의 신상에 큰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너의 허물을 덮어 준 것처럼, 이번의 네
활약에 따라 영광을 내릴 것이니라. 대장군 자리를
생각하고 있다."
"예에?"
"왜 그러느냐?"
"소인이 대장군을 ?"
"물론 일이 성사된 다음이다."
"한사코 해 보겠습니다!"
불여우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후
정도전의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 보았다.
"저한테 몇 명의 군사를 주시겠습니까?"
"오로지 너의 측근 무사만 데리고 가거라."
"예에?"
"걱정할 것 없다. 이만의 대군이 대궐을 에워쌀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쪽 밀명자들의 보고로는 저쪽에
붙은 군사가 기껏 삼사천이다. 더구나 그들 중에서
정예무예자들이란 오십 명도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정규군인데 비해 저쪽은 직위도 없는 사병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쪽이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서 있다는 뜻이니라."
"하오나 만일 기밀이 새어 먼저 저쪽이 대군을 밀고
들어올 기세라면......"
"그것은 대역죄에 해당되지!"
"어쨌든 싸움은 이겨놓고 보아야 하겠거늘 수십
명뿐인 소인의 측근 무사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묘미 아닌가. 어렵지 않다면야 무엇 때문에
자네 머리 위에 대장군이란 직위를 내릴 것이며,
그토록 중대한 일을 맡기겠는가. 자네가 끌고간
무리의 숫자가 적을수록 저쪽한테 의심을 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제사 짐작이 가옵니다."
"그러니 무심한 척 직책을 수행하는 듯하다가
삽시에 그들을 베라는 뜻이다. 트집은 뭐든지 좋다.
때를 엿보아 우리는 대군을 휘몰아 갈 테다."
"세자마마의 신변은 누가 돌보게 되는지요?"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계책은 완벽하게
마련해 두었다."
"이제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소인을 염려해 주시는
대감님께 감읍할 뿐입니다. 이번 일을 생명을 내걸고
한사코 성공시키겠습니다."
불여우는 그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더 주의를 듣고
계책을 의논한 뒤 정도전의 저택으로부터 물러나왔다.
술렁거리는 시절임에 비해서 밤은 조용하기만 했다.
간혹 순라꾼의 딱딱이 소리만 먼데서 들렸다.
네 명의 측근 무예자는 주인이 나라의 무서운
실력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으리, 좀 더 상세한 계책을 들을 수가
없습니까?"
"안된다. 큰일을 치룰 날짜와 시각은 미리 알려 줄
수가 없다. 좌우지간 오늘 밤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하하하......"
불여우는 호탕하게 웃었다. 자신의 앞에 환하게
열린 출세길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를
바드득 깨물었다.
"뭐, 날 베겠다구? 흑사마귀놈!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이 내 앞에 나타나는 날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일
게다!"
"나으리,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십니까?"
"아, 아니다. 오늘은 멋진 데서 질탕하게 놀고
마시자꾸나!"
불여우는 밤길을 다투어 걸었다. 얼마쯤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숲 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가만!"
불여우는 얼른 한쪽 팔을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옵니까?"
한 무예자가 물었다.
"듣지 못했느냐?"
"무얼 말씀인지요?"
"저쪽 숲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저 언덕 말씀입니까?"
무예자가 가리키는 언덕은 오백 보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무예로써는 오백 보 밖의 기척을 감지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사오백의 인명이다."
"저희들은 듣지를 못했습니다."
네 명의 무예자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수상한 일이다. 일단 그늘로 숨어라. 저들의
거동을 좀더 두고 보자."
"오위군 소속 군사들의 야간훈련이 아닐까요?
우리편 군사가 아니랄 수도 없잖습니까?"
불여우는 소나무 밑으로 숨으며 말했다.
"나도 지금 그걸 생각 중이다. 허지만 저쪽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볍다."
"훈련이니까요."
"만일의 경우 우리편 군사가 아니라면...... 그런
경우를 가정해 봤느냐?"
"?"
"그렇다면 수상한 자들의 움직임이 된다. 사오백의
인명이 된다는 사실도 수수께끼다. 더구나 저토록 먼
데서부터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지
않느냐?"
"어떻게 하시렵니까, 나으리?"
"좀 더 기다려 보자."
불여우 일행은 숨을 죽이고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한동안 저쪽의 움직임도 끊어졌다.
"나으리께서 뭔가 잘못 들으신게 아니온지요?"
"조용히 해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놈이
수풀 사이로 일렁거리는게 보여. 필시 수상한
자들이다. 벨 준비를 해라."
불여우는 그 쪽으로 열심히 눈길을 쏘아 보냈다.
하나 둘 셋...... 갑자기 수십의 검은 그림자들이
긴장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들이 지나온 방향이 어디냐?"
불여우는 옆의 무예자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세자궁 쪽......은 아닌 듯합니다."
"그럼 정대감 나으리의 저택으로 가고 있는게
아니냐?"
"혹시......?"
"이거 야단났다! 필시 자객들이다. 그쪽을 지키러
가는 자들이라면 저렇게 숨어서 기어들지 않는다.
누구의 졸개들인지는 모르지만 인왕을 넘어와서
사직골로 가고 있다. 너!"
"예에!"
불린 무예자가 불여우 앞으로 다가왔다.
"세자궁으로 가거라. 힘껏 뛰어라. 가서 말을 몰아
모두 데리고 오너라. 여차하면 내가 시간을 끌어
보겠다. 자, 빨리!"
"그 사이 세자궁이 위험하다면?"
"어차피 도박이다. 다음 조치는 다른 애한테
해두겠다."
"알겠습니다."
한 무예자가 다람쥐처럼 달려 나갔다. 얼마 뒤 숲
속의 검은 그림자들은 수십 보 앞까지 걸어 나왔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불여우는 이제야말로 어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림자들 앞으로 썩 나섰다.
"누구냐? 이 시각에 무엇하는 자들이냐?"
불여우의 호통에 그림자들은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잠시 몸이 얼어붙은 듯 꿈쩍을
못했다.
잠시 후, 한 사내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오위군 소속 군사들의 야간훈련이오. 그렇게 묻는
당신은 누구요?"
불여우는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두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저쪽의 당돌한
되물음에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건방진 놈들이로군.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되묻고
있다니?"
"오위군 소속이라 그랬잖소. 더구나 당신은 말도
타지 않고 지위를 알리는 기면(旗面)도 없이 심야에
평복으로 나서서 누구냐고 묻고 있으니 그쪽이 더욱
결례가 아니겠소?"
"그래 딴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심야에 복면을
하고 도둑고양이 같이 살금살금 금지구역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너희들은 필시 수상한 자들이
아니겠느냐. 때에 따라서는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겠다. 나는 세자궁을 지키는 책임자에다
내일이면 궁성 수비대장의 임무를 맡게 된다.
이쯤이면 내 직권으로 누구든 포박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궁성 수비대장?"
저쪽이 다소 의아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 불여우라는 별명을 들었을 것이다."
"불여우 윤호!"
저쪽의 몇 명이 신음처럼 내뱉았다.
"알고는 있군. 자, 이제는 네놈들의 소행의 뜻을
알아차릴 차례이다."
복면의 사내들은 다시 잠깐동안 침묵을 지켰다.
저쪽의 정체를 안 이상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궁리하는 듯했다.
"좋다. 우리의 사실상 임무와 정체를 밝히마. 우린
충청도 지역을 지키는 특수 보졸부대원들이다."
"충청도 관군이 한양에는 웬일인가?"
"작전은 때에 따라 전토에 걸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 자네가 책임자인 듯한데 그 이름을 대라."
"관찰사 이숙번이다."
"이숙번!"
불여우 윤호도 이번에는 깜짝 놀랐다.
"그래, 소속을 알렸으니 이젠 훈련을 계속하겠다."
"가만!"
"왜 그러느냐?"
"병조의 허락서장을 보여주시오."
"그런 것 없다."
"그렇다면 기다리시오. 작전의 이유를 알아본
다음에 통과시키겠소."
"네놈이 무엇이길래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네놈이라구 했소?"
이숙번은 애가 탔다. 시간이 바쁘다. 이렇게 지체할
때가 아닌 것이다.
"당장 저놈들을 베어라."
그것을 신호로 사백여 명의 복면무사들이 불여우
일행을 에워쌌다.
"으하하하...... 이놈들이 내 칼맛을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모양이군. 어디 덤벼 보아라."
불여우도 지지 않고 호탕하게 웃으며 장검을 쑥
뽑아 들었다. 옆에 있던 세 명의 무예자도 함께 칼을
뽑아들었다.
네 명의 복면무사가 불여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다른
복면무사들은 무예자들을 겨냥해 덤벼들었다.
불여우는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이 이 자리에서 온전할 것 같으냐. 내 칼도
무섭지만 잠시 후면 세자궁 소속 기마대가 도착할
것이다. 몰살당하기 전에 어서 칼을 버려라."
불여우의 그런 호통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숙번도 북면무사들에게 서둘러 질타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저들을 베고 약속된 장소로
달려가야 한다. 자, 서둘러라!"
불여우의 칼이 달빛에 번쩍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으아악!"
"윽!"
"헉!"
"으음......!"
네 명의 복면무사가 거의 동시에 거꾸러졌다.
이숙번은 뒤에서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다. 뭣들 하느냐. 저 놈을
겹겹이 에워싸라. 끊임없이 죄어들어가라."
그러나 그들은 불여우의 검술 솜씨를 익히 듣긴
했지만, 한꺼번에 꺾어지는 동료들을 보자 더욱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정예군들의 체면 문제도 있었다.
이번에는 여덟 명의 복면무사들이 한꺼번에
불여우한테 달려 들었다. 그러나 금새 두 명이
거꾸러졌다.
불여우 편의 세 무사 중 하나도 쓰러졌다. 서로
등을 대고 빙글빙글 돌던 불여우 일행의 원형진에
빈틈이 생겼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들어온
복면무사에 의해 불여우 일행은 대열이 흐트러진
것이다. 두 무예자는 솔밭 쪽으로 뛰고 있었다.
"도망치지 마라! 아니다! 세자궁으로 가서 이쪽의
위기를 알려라."
소리치면서 다시 복면무사 두 명을 베었다.
그때였다. 문득 복면무사들이 몇 걸을 뒤로
물러났다. 불여우는 상대의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사람으로 울타리를 친 복면무사들의 한
쪽으로 달려드는 척하다가 공중으로 날아 울타리
바깥으로 사뿐 내려앉았다.
무서운 무예자 불여우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사태가 이러하고 보면 어쩔 수가 없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해라. 화살을 쏘아라. 궁수들,
무엇하느냐!"
이숙번의 호통과 함께 화살 몇 대가 날았다. 쉽사리
살에 맞을 불여우가 아니었다. 장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살들을 꺾었다. 그는 다시 겹겹이 울타리를
쳐오는 복면무사들을 무찔러 나갔다.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위기에서도 침착하게
산형술(散形術)을 부리며 그의 모습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였다.
그러나 혼자서 사백 명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불여우를 살려둘 기미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의 목숨을 결딴내고 말겠다는
기색이었다.
불여우는 두번째 복면무사들의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솔밭이 지척에 있었다. 목둔술(木遁術)을
사용해야 했다. 중과부적일 때 나무나 수풀을
이용하면 몇 명의 구실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수풀 쪽을 지켜라. 그쪽으로 숨어들지 못하게
막아라."
이숙번의 독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벌써
복면무사들은 불여우의 칼에 스무남은 명이 맞아
넘어졌다. 그러나 불여우에게 있어서 상대는 끝없이
밀려오는 거센 파도와도 같았다. 그들 역시 제대로
칼을 쓸 줄 아는 정예병들이었다.
"앗!"
불여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화살 한 대가 그의
왼팔에 와서 꽂혔다. 점점 위기감이 다가왔다.
재빠르게 세번째의 인간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솔밭을
지척에 두고 네번째의 울타리를 공중회전으로 다시
뛰어넘었다. 간신히 수풀 속으로 몸을 피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엇!"
또하나의 화살이 오른쪽 허벅지로 와서 박혔다.
불여우는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숙번은 저쪽의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알아보았다.
"칼잡이들은 뒤로 물러서라. 궁수들, 무엇하느냐.
어서 저 자를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아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궁수들은 숲 속으로
달아나는 불여우를 향하여 살소낙비를 뿌려댔다.
"빨리 처치해라. 술시가 가까왔다. 한시바삐 대감의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숙번의 독려에 화살이 다시 숲 속으로 뿌려졌다.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은 불여우는 그래도
고꾸라지지 않고 뛰고 있었다.
"무서운 놈이다. 과연 듣던 대로 괴력의
사내로구나."
그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뒤쪽에서 일단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나으리, 누군가가 이쪽으로 옵니다."
한 무사가 고함질렀다.
이숙번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불여우를 죽이는데만 매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다가는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었다.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상대의 집을
공격하도록 계획이 서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절대절명의 궁지에 몰린
불여우를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의 목숨이 결딴나는 것을 보기
전에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무예는 너무나 뛰어나다. 저렇게
상처를 입고도 이쪽의 칼잡이들을 번개같이 베고
있으며, 곤두선 고슴도치의 털처럼 화살을 맞고도
살아 남으려고 뛰고 있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해야 될까? 저쪽에서 달려오는
기마군은 우리편이 아님이 분명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게 확실해. 정해진 시각에 목적한 곳을
습격하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렇다면......, 제 아무리 불여우라도 저쯤 상처를
입고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끈질기게
목숨이 긴 놈이다......"
이숙번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얘들아, 무기를 잠시 거두고 북악으로 방향을
잡아라. 도착이 늦으면 만사를 그르치게 된다. 불여우
저 놈은 이제 그냥 두어도 살아남지 못할 게다. 자,
말을 달려라!"
이숙번의 명령에 궁수와 칼잡이들은 불여우를
버리고 이숙번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마군들이 도착하기 전에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달빛 아래에는 격전의 흔적을 웅변이라도
하듯 널브러진 시체 몇 구와 핏자국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불여우는 숲 속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한사코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한 생명에의 욕구 때문에
호흡을 가늠하며 운기를 통해 의식을 되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공력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싸울
힘이 도무지 없었다. 누구에게 발견되는 순간 생명은
끝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라리 이 고통으로부터
벗아나 편안한 잠에 빠지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래, 누군가가 와서 나를 편안하게 죽여
다오......'
불여우는 기다렸다. 그가 일찍이 꿈꾸어 오던
세속에서의 화려한 출세에 대한 열망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다만 그는 갑자기 조용해진 주위를 의아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 上卷 끝 >
대검자(하) - 김병총 저
----- 차 례 -----
작가 소개
7. 불꽃은 타오르고
8. 설야의 피
9. 밤안개
10. 수평선 너머로
11. 지는 달 뜨는 해
후기
작가 소개
1939년, 마산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문학사상 제1회 신인상 <빨간 雨傘> 당선으로 데뷔.
창작집:『불칼』,『이별연습』,『달빛자르기』
장편소설:『샤론여자고등학교』, 『내일은 비』,
『달려라 풍선』, 『칼과 이슬』, 『춤추는 맨발』,
『화요일의 사내들』, 『흔들리는 새』, 『검은
휘파람』, 『평역 사마천<사기>』(전10권) 등 다수.
7. 불꽃은 타오르고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태조의 병세는 많이 호전된 듯이 보였다.
"밖에 누가 있느냐?"
태조는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이 싫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몸이 가뿐해지는 기미를 느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누군가가 침실 바깥에서 대답했다.
"상감마마, 승정원 승지 이감숭이 대령했나이다."
"이승지라구?"
"예에."
"이승지가 웬일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의관(醫官)은 어디에 있느냐?"
"전의시(典醫侍)에 다니러 갔습니다."
"음...... 정영상은 어디에 있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뭣이? 아직 입궐하지 않았단 말이냐? 왕자들의
입궐은 어떻게 되었느냐?"
"역시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모두 문병하러 입궐하게 되어 있지
않았느냐?"
"그렇게 되어 있었지만, 그만......"
"무슨 변괴라도 일어났단 말이냐? 세자는 어디
있느냐? 지금 몇 점이나 되었느냐?"
"정오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감히 나라의 큰일을 소인으로서는
말씀드리기가......"
"이리 가까이 오너라."
태조의 음성은 낮았지만 근엄했다.
얼마 후 이승지는 장지문을 열고 들어와 침상 옆에
굻어 엎드렸다.
"바른대로 아뢰어라. 필시 어떤 변괴가 생긴 게
분명하구나. 추호도 거짓없이 설명하여라. 조금이라도
숨기는 사실이 있다면 온전치 못하리라."
"하오나......"
"변명하지 말아라. 내 몸이 불편하다 하여 심기마저
병들지는 않았다. 어서 말하라. 무슨 일이 있느냐. 왜
이토록 궐내가 조용하느냐?"
이승지는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벌서 궁궐은
방원의 군사들로 대치되었다. 정도전의 수하들은
현장에서 맞아 죽든가 어딘가로 끌려갔다.
왕의 긴급하회를 기다리던 대신들도 근처에 있을
수가 없었다.
방원에 의해 이승지만 왕의 측근에서 기다리도록
명령받았었다. 더구나 그는 왕이 깨어났을 때 대답할
수 있는 몇 가지 답변 이외에는 입을 열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오늘은 조회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조회를 할 수가 없다는 거냐. 나라의
중임을 맡은 대신들이 아무도 입궐하지 않았다는
뜻이냐?"
"입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변란을 획책하다 사전에 일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뭣이!"
태조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현기증을
느꼈는지 다시 푹 쓰러졌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이승지는 황급히 태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만 두어라. 이승지는 어서 말해 보아라."
태조는 외면한 채 손을 저었다. 그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잠시 그는 분노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승지는 다시 부복했다.
"어떤 변란이냐?"
태조는 노기를 자제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영상 대감과 남은 대감과 세자마마의 장인이신
심대감이 주동하셨답니다."
"뭐라는 게냐? 그럼 그들이 누구를 죽였다는
말이냐?"
"결국은 죽임을 당하셨지요."
"어떻게?"
"칼과 창으로 가족 모두가 몰살된 셈이지요."
"음......!"
태조는 신음소리를 냈다. 뭔가 심상치가 않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일이 크게 벌어질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자초지종이야 어쨌든 일을 벌인 건
필시 방원일 게 분명했다. 강한 성격에 눈이
부리부리하고 야심이 가득한 인간이 아니던가!"
이승지는 지금 방원의 편을 들어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저러나
벌어진 일은 수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한쪽 얘기지만 사건의 과정은 들어 두어야 옳을
듯했다.
태조는 잠깐 생각에 잠기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인 자는 누구인가?"
"영민하시고 활달하신 다섯째 왕자마마께서......"
"왜 죽였다더냐?"
"아니옵고 먼저 일을 꾸민 쪽은 정대감 나으리
쪽이었지요."
"어떻게?"
"정대감 쪽에서 일찍부터 다서째 왕자님을 경원하고
있던 중, 아무래도 그냥 두셨다간 세자마마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했는지 말씀 아뢴 아까의 두 분과
모의하여, 마침 오늘 상감마마께 왕자들이 문병
입궐하게 되어 있는 사실을 계기로 일시에 살해하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렇다면 일이 사전에 탄로가 났다는 뜻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방원 왕자님께서 이를 미리
감지하시고 부득이 변란을 획책한 그 분들을 처단하신
것으로 알고 아룁니다."
"어쨌든 예삿일이 아니다. 어서 사람을 보내어 두
사람이 함께 입궐하도록 해라."
"누구 누구 말씀이온지요?"
"누구랄 것 있느냐. 앙숙이 되어 동기간에 서로
물어뜯고 있는 방원과 세자 말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미 세자마마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뭣이?"
태조는 아까보다 훨씬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동안 혼절한 듯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한참만에 태조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방원이 세자를 쳤다는 말이냐?"
"일곱번째 왕자마마께서도 돌아가신 것으로
아옵니다."
"아아!"
"변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을 보내던 중 방원 왕자꼐
저항 하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으로 아옵니다."
"물러가거라."
"방원 왕짜께 전갈을 보낼까요?"
"그만 두어라. 꼴도 보기 싫다. 세상에 왕의 자리가
그토록 좋다지만, 어떻게 동기간에 눈썹 하나
까딱않고 그렇게 처참하게 죽일 수가 있는가! 짐은
외롭고 또 괴롭구나. 세상이 싫어졌다."
"황공하옵니다."
"어디 두고 보아라. 내가 옥쇄를 내놓는가. 먼
곳으로 떠나겠다. 차비를 놓아라."
태조는 부들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궁궐 안은 죽음 같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방원의 난이 끝날 무렵, 삿갓 박진은 황해도
영양까지 흘러들어가 있었다.
삿갓을 벗고 이름을 숨긴 채, 게다가 자신의 무술
역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몰락한 귀족의 땅을 일구어 주며 머슴처럼
행세하고 지냈다. 아무도 의심하거나 찾는 사람이
없었다. 삼천 냥의 현상금이 붙은 방도 사라지고,
아예 그런 자를 찾는다는 일조차 백성들은 잊고 있는
듯했다.
"이랴!"
삿갓은 커다람 황소를 질타하며 밭갈이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
삿갓은 쟁기질을 잠깐 멈추며 먼 들판의 끝을
바라보았다.
어지럽기만 한 조정. 어이없이 쫓기고 있는 신세.
황금을 찾느라고 갈매기섬으로 기어들었다가 봉변만
당하고 쫓기 듯 도망치던 지난날. 그리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오늘. 젊은 무사의 찬란했던
무지개빛 꿈도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나날들......
그는 방원의 난을 풍문으로 듣고 있었다. 누구
누구가 죽었으며, 권력은 누구의 손으로 옮겨갔는가에
대한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누구의 손에 마지막 칼이
쥐어질 것인지는 아직도 미지수였다. 때문에 그는
아직 세상에 나서서는 아니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화살은 원치 않는다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 법이다.
문득 들판 끝에서 아이 하나가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삿갓은 그 아이가 누구라는 걸 금새
알아보았다. 언젠가 한번 본 기억이 있는 이 집
도령이었다. 반짝이는 눈빛과 또랑또랑한 음성과
다부진 입이 인상에 남는 아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부친은 황해도
관찰사라는 직위에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의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여우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었다.
그런 후 관저를 내놓은 그 가족들은 향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된 터였고, 삿갓은 우연히 그 집
머슴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있던 처지였다.
아이는 손에 막대기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삿갓을 발견한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삿갓은 아이가 달려오는 이유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얼른 고삐를 잡으며 소를 몰기 시작했다.
"이랴!"
어느새 아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삿갓 곁에 서
있었다.
"이봐!"
그는 삿갓을 큰소리로 불렀다.
"예에."
삿갓은 무심한 척 대답했다.
"잠깐 하던 일을 멈춰라."
"해 지기 전에 밭을 모두 갈아야 합니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마님의 분부가 추상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걱정은 말라. 내가 책임을 지겠다. 나는 우리
가문의 주인이니까."
당돌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밉지는 않았다. 삿갓은
쟁기질을 멈췄다.
"무엇 때문입니까? 도련님?"
"자네 혹시 검술에 대해서 좀 아는 게 있는가?"
뜨끔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머슴살이 하는 주제에 검술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어디 잠깐 나서서 상대해 보아라."
"예에?"
"심심해서 그렇다."
삿갓은 아이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와서 칼싸움을
하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쟁놀이라면 도련님
또래의 아이들과 하십시요."
"모두 상대해 보았지만 나한테 이기는 애가 아무도
없는걸?"
"그렇대서 어른인 저한테까지......"
"아버님의 군사들도 내가 꽤 소질이 있다는 얘길
전부터 하더라. 아이라고 해서 얕보는 게 아니다."
"그야 그렇지요. 얕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냐? 상대 않겠다는 얘기냐?"
삿갓은 아이가 쉽게 물러설 것 같지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좋습니다. 제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다만 칼싸움을 정식으로 할 때에는 그에 따르는
의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의식?"
"예에. 우선 서로의 성함을 통하지요."
"통성명을 한다는 얘기지. 그래 좋다. 나는
조원준이라 한다. 그대는?"
"저는 박......"
하려다가 삿갓은 아차했다. 그는 얼름 변성명을
했다.
"돌쇠라 부릅니다."
"돌쇠......"
"다음에는 스승이 누구였다는 걸 알립니다."
"난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서 스승이 없다. 굳이
누구한테서 배웠느냐고 묻는다면 돌아가신 아버님의
무사들과 몇 차례 겨뤄 본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검술을 배운 적이 없기로
스승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고하신 아버님께서는
도련님이 칼장난 하시는 걸 꾸짖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자 원준은 처음으로 발칵 성을 냈다.
"무예자의 의식이라는 게 그런 사실까지 주고
받아야 하는가?"
삿갓은 원준을 지나치게 얕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질문을 취소하겠습니다."
"용서하겠다. 자, 어서 나서 봐라."
원준이 던져준 막대기는 참나무로 잘 깎여진
것이었다. 딱딱하고 묵직해서 맞으면 필시 멍깨나 들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를 어서 돌려보내려면
대적하는 척하다가 두어 대 얻어 맞고 항복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요령껏 약하게 맞는 일이
중요했다.
"자, 오십시오."
삿갓은 짐짓 나무칼을 번쩍 높이 치켜들어
맹호은림자세를 취해보였다.
"자, 간다. 이얏!"
원준의 나무칼이 느닷없이 삿갓의 가슴패기를 향해
짓쳐 들었다. 아이의 솜씨치고는 무척 절묘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당할 삿갓이 아니었다.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끼며 슬쩍 원준의 허리 쪽에다 칼을
내질렀다. 그러나 원준도 만만치가 않았다. 칼등으로
왼쪽 허리를 황급히 막아내더니 금새 삿갓의 머리
쪽으로 휘둘러왔다.
'이 녀석한테는 필시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장난으로 시합을 청해온 게 아니냐.'
삿갓은 중얼거리며 맹렬하게 짓쳐들어오는 원준의
칼을 몇 번 피하다가 이제는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준의 칼이 삿갓의 어깨로 날아왔다. 막대기는
아프게 어깨를 때렸다.
"아얏!"
삿갓은 실수해서 당하는 척하느라고 일부러 크게
비명을 질렀다.
원준의 칼을 맞고 막대기를 슬쩍 떨어뜨렸던 삿갓은
다시 막대기를 주워 화가 난 듯이 원준에게 대들었다.
원준은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삿갓이
후려치는 막대기를 받았다. 그러면서 복부 쪽으로
역습을 해왔다.
삿갓은 원준의 솜씨를 보면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수련을 받지 못해 서투른
솜씨였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증오심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무인 출신 관찰사 조수응의 핏줄이기 때문인가.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벌써 마음 속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원수, 복수......!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이런 아이가 성장해서 무사가 되면 아무한테나
칼부림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복수는커녕 칼부림을 하다가 결국 제 아비처럼 칼의
제물이 될 것이다.
어쨌든 원준과 이런 장난을 오래 계속하고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원준의 막대기가 이번에는
정수리께로 날아들었다. 삿갓은 솜씨가 모자라
얻어맞는 척 슬쩍 오른쪽 어깨를 들이댔다.
"아구구, 아구구......"
삿갓은 아파서 죽어가는 듯한 시늉을 했다.
막대기를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제가 졌습니다. 아구구, 항복입니다요. 도련님의
검술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또래의 아이들이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는 게 당연하지요. 그만한
솜씨라면...... 소인을 좀 슬슬 봐 주시지 않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때밀면 어떡합니까. 아파
죽겠습니다. 아구구......"
"정말 자네는 형편 없구나."
"예에?"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토록 엄청난 허풍을
치다니."
"아닙니다. 이것 보십시오. 어깨에 퍼렇게 멍까지
들지 않았습니까? 이러다가 병신이 되면 밭갈이도
못하게 됩니다. 자, 이제 상대를 해드렸으니
돌아가십시오."
"알겠다 헌데, 돌쇠야."
"예에?"
"조선 제일의 검술가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에?"
"자네가 떠돌이 생활을 했다면 어디선가 그런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그야 작고하신 도련님의 아버님이실 테죠."
원준은 삿갓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짓말 마라."
"예에? 거짓말이라구요?"
"불여우에게 당하신 것만 봐도 너의 말은 틀렸다."
"그것은 실수했기 때문이죠."
"절륜의 무예를 지닌 무사라면 벌써 스스로에게
실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여우 역시 당했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우수한 무사란 있을 수가 없지요."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래, 자네가 들은 바로는
조선에서 누가 가장 검술이 뛰어나냐?"
"글쎄요. 소문으로는 적두노사를 치지만, 그분은
오래 전에 종적을 감추셨다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도련님도 무술을 배우시려고요?"
"그래."
"무엇에 사용하시렵니까?"
"복수하고자 한다."
"예에? 원수가 누구인데요?"
대답은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던 원준은 문득
발길을 돌렸다. 어린 그의 발걸음에서조차 전율스런
증오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삿갓은 망연히 서서 밭이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뒤를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원수라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원수는 몰살되었을 터인데, 살인은 원수를 만들고, 그
원수는 다시 이 쪽의 피를 부르고, 또다시 칼을 맞은
편은......'
삿갓은 무심결에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삿갓의 거처는 헛간
옆이었는데, 고된 밭갈이를 끝내고 저녁밥을 먹자
마자 곧장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삿갓은 아무리 깊은 잠에 빠졌다 하더라도
상스러운 기척을 잡아낼 수 있는 고수였다.
그는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잠에서 퍼뜩 깨어나서 미닫이문 너머의 동정을
살폈다. 누군가가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처음에는 소도둑인가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필시 아이의 발걸음이었다.
'아이라면? 이 집 도령 원준인가? 그가 왜? 더구나
이런 한밤중에?'
삿갓은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상대가 누구든
그가 무예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였다.
살그머니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어둠을 타고
조심조심 다가왔다. 삿갓이 실눈을 뜨고 살펴보니
원준이 손에 단검을 쥐고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삿갓의 독심술로는 원준이
살기(殺氣)도 없이 칼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죽일 생각도 없이 검을 쥐고
있다는 뜻은? 결국 무언가를 두고 날 위협하겠다는
뜻이겠구나. 그런데 위협하려는 이유는 다시
무엇일까......?
삿갓은 역시 잠든 척하기로 했다.
원준은 느닷없이 삿갓을 타고 앉으며 담검을
들이댔다.
"엇!"
"눈을 떠라, 돌쇠야!"
"누구시오?"
삿갓은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다. 원준이."
"도련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단도를 소인의
목에다 들이대시고서......"
"자넨 날 속였지?"
"예에?"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
"소인이 도련님께 무엇을 속였다는 겁니까요? 저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정말 끝까지 이럴텐가?"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 소인은 알 길이
없습니다."
"내가 말해줄까? 자네가 날 어떻게 속였는가를?"
"말씀해 보시지요."
"자네가 없을 때 내가 자네의 소지품을 뒤졌네."
"옛!"
삿갓은 원준을 밀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느새
달이 구름 사이를 빠져나왔는지 봉창문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 밀려났던 원준은 단검을 떨구며 삿갓
앞에 넙죽 엎드렸다.
아까 들어올 때의 그 당당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잘못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
"예에, 스승님."
삿갓은 원준의 돌변한 태도를 의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이 또한 무슨 짓입니까? 이러시면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어서 일어나 앉으십시오."
삿갓은 부복해 있는 원준의 손목을 끌었다.
"아닙니다.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승낙하실
때까지 이러고 있겠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군요. 제 소지품을 뒤졌다느니,
게다가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단검으로 스승의 목을
겨누지를 않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소인은 평범한 이 집의 머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엉 사양하시겠다면 위협을 할 수밖에 없군요."
"위협?"
"단검으로 스승님을 겨눈 것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십시오."
"확인해 봤더니요?"
"역시 무예자가 아닌 척 짐짓 거짓 행동을
하셨습니다. 낮에 제가 목검으로 대들었을 때 끝내
져주시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무예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도련님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가 보는데......"
잠깐 묵묵히 있던 원준은 불쑥 고개를 치뜨며
삿갓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결코 물러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는 스승님의 괴나리봇짐도 엿보았습니다."
"옛?"
삿갓은 깜짝 놀랬다. 정말 원준이 봇짐을
엿보았다면 이 쪽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 뻔하였다.
그러나 당분간은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장검이 있더군요. 무예자의 장검."
"그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느 장터에서 주운
것에 불과합니다."
"삿갓도 발견했습니다."
"예에, 그것은 방랑생활을 할 때 해가리개로 쓰던
갓일 뿐입니다."
"스승님은 별명이 삿갓인 무예자 박진
어른이십니다."
"어림없는 짐작이십니다. 성씨도 못가진 돌쇠라는
머슴에 지나지 않지요."
"저엉 그러시다면 밀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구요?"
"언젠가 해주 장날에 장터로 구경을 갔었지요."
"그랬더니요?"
"약장수들이 엉터리 무예를 보여 주며 가짜약을
팔고 있습디다."
"?"
"그들 중의 하나가 한쪽 담장을 가리키더군요."
"거기에 무엇이 있던가요?"
"있었지요. 스승님의 얼굴이."
"예에?"
"삼천 냥의 현상금이 걸린 방이 붙었습니다."
"아......"
"그런데 그 자가 스승님을 잡아서 관가에
넘겼노라며 떠벌리더군요. 자기는 그래서 훌륭한
무예자라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일이
벌어졌지요."
"어떤 일이?"
"구경꾼들 중의 하나가 앞으로 썩 나서더니
다짜고짜 그 자에게 싸움을 걸더군요. 지팡이를
들고서 말입니다. 약장수는 화가 나서 장검으로
대들고 말입니다."
"행인은 누구이며 왜 싸움을 걸었을까요?"
"모르지요. 다만 몇 번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약장수를 간단하게 때려눕힌 뒤 호통을 치더군요."
"어떤 호통을?"
삿갓은 원준의 말이 흥미로워서 바짝 귀를
기울였다.
"네깐 놈이 그 무서운 삿갓을 잡아 넘겼을 턱이
없다. 엉터리 약을 팔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건 용서할 수 없다. 그런
호통이었습니다."
"그가 누굴까?"
"그래서 그 행인의 뒤를 살며시 따라갔지요.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저는 그 무사에게 물었습니다.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없느냐구."
"그랬더니요?"
"딱 잘라 거절하더니 꼭 무술을 배우고 싶다면
스승으로 모실만한 분을 소개해 주겠다더군요.
좋아라고 넙죽 엎드리며 졸라댔지요. 그랬더니 바로
삿갓 어른에게 가서 배우라지 않겠어요?"
"그가 삿갓의 행방을 알고 있더라는 얘깁니까?"
"아닙니다. 그도 삿갓을 찾고 있는 중이랍니다. 절
보고도 몸소 찾아 보라더군요. 그래서 실망하고
돌아섰지요. 그런 중 저는 스승님의 모습과 행동에서
농사일이나 하는 머슴이 아니라 바로 삿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소인이 삿갓이 아니라는데두요."
"끝끝내 저를 속이시는군요."
"설마 제가 삿갓일지라도 도련님을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구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도련님은 무예를 닦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칼을 배우면 그 검술은
자신을 해치게 되지요. 우선 속에서 이글거리는
증오심부터 없애야 합니다."
"......"
"차라리 소인은 도련님께 병서(兵書)를 읽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
"아무리 칼을 잘 사용해도 한 명만을 벨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병법을 익히면 수만 군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 충고를 벌써 두 번째 듣게 되었군요."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장터에서 만났던 바로 그 무사가 저에게
그런 식으로 타이르더군요."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필시 대단한 무예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무술을 배우시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글공부를 열심히 하시고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다른 뜻을 펴십시오."
원준은 별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무예를
배우겠다는 뜻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일단 물러간 것 뿐이었다.
삿갓은 한참을 곰곰히 생각했다. 어느새 자신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죄인으로서 체포령은 시효를 넘겼지만, 그래도 정체가
드러난다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 이튿날이었다. 삿갓이 밭을 갈고 있는데 두
군졸이 삿갓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왜 나를 찾을까? 길을 묻는 정도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긴장이 되었다.
아침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두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수고가 많구려."
삿갓은 그렇게 말을 붙이면서 다가오는 두 군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삿갓은 그들 두 군졸이 이 쪽에 대해 별다른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 궁금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삿갓은 의외로 군졸이 공손한 어투를 쓰는 데에
다시 한번 의아해했다.
"예에."
"참으로 용케 숨어계십니다."
"예에?"
"이토록 감쪽같은 변색을 하시고선 만인을
속이시다뇨."
삿갓이 그들의 눈을 통해 읽는 독심술로써는 벌써
이 쪽의 정체를 환히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어제 원준에게 하던 태도와 같이 이들에게도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소인은 군장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벌써 다 짐작하고 모시러 온
걸요."
"예에. 삿갓 선생이라는 걸 환히 알고서 찾아뵙는
걸요."
"누가 그랬습니까?"
"보석에 흙이 묻었다고 해서 보석이 아니라 할 수
없고, 태양이 구름에 가리워졌다 해서 태양이
사라졌다고는 말하지 않지요."
"대단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원래 세상에 떠도는 풍문처럼
허무맹랑한 것도 없지요. 소인은 삿갓이 아닙니다.
어제도 이 집 도령이 절 보구 삿갓과 닮았다고
그럽디다만, 실상은 떠돌이 남정네에 지나지가
않습지요."
"정 잡아떼시겠다면 저희 대장군께 일러바친 수밖에
없겠습니다."
"대장군?"
"박포 대장군 말씀입니다. 지금은 방원 세자의
은혜에 힘입어 죽성군(竹城君)에 피봉되시고
지중추부사가 되셨지요. 지금 대임을 맡아 나라와
사직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는 이런 때일수록
귀공과 같은 인물이 절대 필요하시다며 꼭 모시고
오라는 분부였습니다. 이래도 가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사나이가 뜻을 펴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됩니다만, 아마 큰 벼슬이 내려질
것입니다. 삿갓 선생님, 꼭 동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쯤 나오는 데에는 삿갓으로서도 더 잡아뗄 수가
없었다. 정체를 감추는 일도 이제와서는 무의미했다.
더구나 사나이로 태어나서 일찍이 무예를 익히고 뜻을
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 아니었던가!
변복하고 숨어 지내던 자신이 이미 탄로가 난 이상
하릴 없는 머슴살이만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듯싶었다.
그러나 선뜻 따라 나서기에도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생각해 보겠소."
"역시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흘 후에 다시 오시겠소?"
"그건 곤란합니다. 즉시 모시고 오라는
분부였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급하시오? 나에게도 여기서 처리할
일이 있구려."
"그럼 처리할 일이 끝날 때까지 곁에서 시중을
들겠습니다."
"끈질기기도 하구려."
"대장군 나으리의 지엄하신 분부였기로......"
"좋소, 그럼 당장 떠납시다."
"감사합니다."
두 군졸은 허리를 굽실했다.
삿갓과 두 군졸은 그들이 끌고온 세 필의 말에 각각
올라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삿갓으로서는 궁금한 점이 아직도 많았다.
"근데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그야 간단합지요. 상금을 탐낸 백성이 투서를
했습지요."
"예에? 그런데두 왜 날 잡아가지 않았소?"
"그게 묘미라는 겁니다. 바로 삿갓 선생의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뜻이오?"
한 군졸이 생각에 잠기는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작고하신 조관찰사께서 어떻게 돌아가신 줄은 알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소. 방원 세자의 오른팔이었는데 정도전
대감의 심복 불여우에게 불행한 살해를 당하지
않았소?"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니까 삿갓 선생은
어지러운 시절에 억울한 쫓김을 당하고 계셨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불여우의 죄상을 삿갓 선생한테
뒤집어 씌었다는 걸 저희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요. 그렇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의
세력은 욱일승천 기세였기로 말입니다. 그러나 민심은
천심이라, 아니면 삿갓 선생의 운수때문이었는지 숨은
곳을 고발한 데가 바로 우리 쪽이었단 말입니다.
불여우 편에 고발되었다면 고발자는 상금을 탔을
것이고 선생은 척살되었을 테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황해도민이 그들의 관찰사를 불여우가 죽인 데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가 봅니다.
그러니까 불여우가 쫓는 삿갓 선생을 그들이 알고서도
모른 척했을 거라는 짐작입니다."
"글쎄......"
"정국의 급격한 변화는 선생을 찾는 일 따위에
심혈을 기울일 수가 없게 만들었지요. 그런데 이제
방원 세자께서 정권을 잡으시게 되고 나라가 안정
되자 세력을 단단히 묶어야 되겠다는 각성이 시작된
거지요. 그 때문에 삿갓 선생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 때문에 나를?"
"예에. 아마 무술사범을 제수하실 것 같습니다.
오위군이나 세자의 별기군이나......"
"세자의 별기군 무예사범은 흑사마귀 정창이
아니오?"
"그렇긴 합니다만...... 어쨌든 대장군께서 어떤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들판을 지나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삿갓은 두 군졸을 돌아보며 말했다.
"좀 쉬다 가도록 하지요."
"아닙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인가가 나오지요.
주막에 들러 편히 쉬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렇지가 않소. 내가 탄 말이 기진맥진해서
그렇소."
"아, 어쩔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군졸의 동의가 채 있기도 전에 삿갓은 벌써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을 말고삐에다 단단히 묶은 삿갓은
장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린 다음 삿갓에 손을 대어
단단히 가누어 썼다. 두 군졸 누구도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숲 속에 들어가 소피를 좀
보고 나오겠소."
"그러시지요."
역시 삿갓에 대해서 두 군졸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풀밭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저 편히 쉴
궁리부터 하는 것이었다.
삿갓은 두 군졸을 뒤에 두고 어슬렁 어슬렁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정작 소피를 신나게
끝냈다.
허리춤을 단단히 여민 삿갓은 그제서야 숲 속
바위틈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이리 나오너라. 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길래
아까부터 우리를 미행하고 있느냐. 어디 내가 모를 줄
알고 있었느냐. 자, 무엇 때문에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는지 썩 나서서 말해보아라."
삿갓은 저 쪽의 두 군졸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조심조심 소리지르고 있었다.
삿갓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저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오지 못하느냐? 너의 몸놀림으로 보아서
고수급 무예자란 걸 벌써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어림없을 걸. 정작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면 내가 그 쪽으로 가겠다. 가서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 내가 누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네놈은
내 뒤를 따랐을 테지? 자, 숨바꼭질은 그만하고 어서
나오너라."
문득 흠흠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숲 속이
꿈틀대면서 복면의 사내가 삿갓 앞으로 나타났다.
"기분 나쁘군. 얼굴싸개는 벗어줬으면 좋겠는데."
삿갓의 말에 저 쪽도 얼른 대꾸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
삿갓을 좀 벗어줬으면 좋겠는데?"
"뭐라구?"
"실례는 피차 저지르고 있으니까."
"가만있자. 저 목소리는......"
"벌써 알아봤소?"
"하얀독수리 최협사가 아니오?"
삿갓은 반가운 김에 너무 큰 소리를 냈다가 흠칫
놀래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새 하얀독수리도 복면을 풀고 있었다.
"역시 박협사의 무예도 무섭구려. 목소리만으로
나를 알아내다니."
"과찬의 말씀이오. 조금 전에 욕설을 했던 건
장난이니까 용서하시오."
"괘념치 마시오. 전날엔 정말 고마웠소. 놈들이
쫓고 있다는 귀띔말이오. 박협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가 죽을 뻔했지만......"
"나 역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야 했던 신세였소.
헌데, 그 말썽꾸러기 동행인은 어디 있소?"
"왕천 말씀이군요. 종적이 묘연해졌소. 나 역시
그를 찾고 있소. 수중에서 헤어졌는데 죽었다는
소문은 아직 없으니 어딘가에 엎드려 있을게요.
그런데......"
"가만있어 보시오. 내가 소문을 들은 바로는 두
사람 중 한 구의 시체가 강 위로 떠 올랐다던데."
"그나마 믿을 수는 없지요. 그날 강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적어도 수백 구는 강을 타고 바다로
흘러들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최협사는 어떻게 살아남았소?"
"화살이 비오듯 해서 수중 깊이 숨었지요. 그때
왕천과 헤어지게 됐어요. 머리를 들었더니 군선들이
섬으로 몰려갑디다. 그런 후 저 쪽 병사들과 곧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틈에 나는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요."
"참으로 다행이었소. 존경하는 최협사가 이토록
건재해 있으니 정말 마음이 놓이는구려. 그건 그렇고
무엇 때문에 아까부터 나를 미행해 왔는지요. 그리고
내가 영양골에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요?"
삿갓의 질문에 하얀독수리는 잠깐 침묵을 지킨 뒤
입을 열었다.
"저 놈들이 알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슬슬
뒤따라 오다가 기회를 엿보아 얘길 하려고 했지요."
"그럼 저 군졸들이 알아서는 곤란한 얘기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뭔데요?"
"저들을 떼어 버리라는 얘깁니다."
"떼어 버려요?"
"예에."
"그건......"
"난 박협사께서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지?"
"죽음에의 길입니다. 그것도 허망한 죽음이지요.
박협사 같이 출중하시고 사려가 깊으신 분이 하찮은
벼슬자리가 탐나서 거기로 가시는 건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참 좋은 충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예를 닦은 사나이가 어지러운 세월만 탓하면서
초야에 묻혀 있을 수만은 없잖습니까?"
"그러나 바른길이 아니라고 짐작됩니다. 뜻을
펴려거든 주인을 제대로 찾아야지요. 시기도 좋지
않으려니와 박협사 같은 분이 박대장군의 수하로
든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째서 그렇지요?"
"그는 불만이 많은 자입니다."
"그가 누구에게 불만을 품었다는 뜻이죠?"
"방원 왕자에게죠."
"글쎄요. 저번에 박대장군이 세운 전공으로
죽성군에 지중추부사라는 직위에 오르지 않았나요?"
"그 직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그것이 불만으로
나타난거죠. 그는 병조(兵曹)의 책임자 자리를
원했거든요."
"그래서요?"
"그 때문에 그는 모반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정작 모를 소리뿐입니다."
"초야에 묻혀 지냈으니......"
그래 놓고 하얀독수리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렇다는 근거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방과 왕자께서는 세자위에 오르셨지만 실제로 왕이
되실 분은 방원 왕자입니다. 짐짓 그는 욕심이 없는
척 세자위를 사양했지만 그건 작전일 뿐이구요.
언젠가는 그가 그 자리를 노릴 것입니다."
"그 사실과 박대장군의 모반과는 무슨 관계가
있지요?"
"들어 보시오. 때문에 우린 나름대로 방원 왕자를
그냥 세자로 불러 버리지요. 두고 보십시오. 곧
세자로 책봉될 테니."
"그렇다면 박대장군의 입장에서는 방원 왕자에게
대항할 처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얘기지요. 대장군이
넷째 왕자인 방간 왕자를 내세워 방원 왕자를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두 왕자의 사이가 다음 세자위
때문에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거든요."
"오, 그러고 보니 최협사의 하고자 하는 말뜻이
짐작됩니다. 박대장군이 모반에 필요한 하수인으로 이
삿갓을 필요로 했다는 말씀이군요."
"간단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최협사 얘기는 박대장군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걸고 있다는 뜻이겠고."
"그렇지요."
삿갓은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얼마간 침묵을
지키던 삿갓은 다시 입을 열었다.
"박포 대장군이 방원 왕자를 이길 수 없다는 보장은
어디있지요?"
"불을 보듯 환합니다. 저번 왕자의 난 이후 방원
왕자의 세력은 막강해졌습니다. 모든 왕자들이 다
힘을 합쳐도 방원 왕자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장군은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방원 왕자를
우습게 보게 됐지요. 또 내 동문인 흑사마귀가 자기의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림없는
얘깁니다. 나는 흑사마귀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압니다.
방원 왕자를 배반할 인물이 못됩니다. 박대장군은 큰
오해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수하에 삿갓만 있으면
그만큼 든든하게 생각할 것이고, 이 쪽에서 쳐들어갈
때 흑사마귀가 대응해 오면 간단하게 방원 왕자를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지만, 벌써 자기
편이 아닌 자를 자기 편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체부터
큰 오산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어떻습니까? 차제에 내가 흑사마귀와 한 판 겨루게
되는 기회인데......"
"무의미한 싸움이지요. 누가 이기든......"
하얀독수리는 지체 않고 대꾸했다. 삿갓은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니까 최협사는 저 놈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이길 수 없는 주인을 따르다가는
죽음이 있을 뿐이지요."
"그럼 어떻게 한다?"
"가지 않겠다고 말해버리시죠."
"부득부득 고집을 부린다면?"
"저들을 베라고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만은
박협사가 알아서 하십시오."
"이토록 나를 생각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절륜한 무예와 호쾌한 인품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달리 뜻을 펼
길을 찾으십시오. 꼭 벼슬을 하시겠다면 방원 왕자
편이 낫겠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흑사마귀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수하에다 배치시키겠죠."
"그건 싫은데요."
"그러니까 이번 일에는 뛰어들지 마십시오. 이 권유
때문에 영양골에서 여기까지 뒤따라온 바입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영양골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저 두 군졸이 삿갓의 인상착의를 묻고 다니기에
박협사가 근처에 계시다는 걸 알고 그들 뒤를
밟았죠."
"그랬었군요. 난 또 주인집 아들 녀석이 내 소재를
흘리지 않았나 생각했죠. 나한테 무술을 가르쳐
달라구 어떻게나 졸라대는지......"
"아, 그 꼬마가 조관찰사의 아들이었군요.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랬죠. 무술을 배우려거든
삿갓을 찾아 보라구."
"역시 최협사였구먼요."
그때였다. 두 군졸이 황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기다리다 오지 않으니까 수상히 생각하고 달려온
듯했다.
"여기 계셨군요. 소피하시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저 자는
누구이옵니까?"
한 군졸이하얀독수리를 가리키며 다소 경계하는
태도로 물었다.
"아, 우연히 여기서 만난 옛 친구요. 그래서 한참
재미있게 옛날 얘기를 하느라구 그만......"
눈인사만으로 하얀독수리와 헤어진 삿갓은 속으로
하얀독수리의 친절에 감사했다. 무예자의 길에서도
그렇지만 사나이로 살아가는데 있어 좋은 친구를
만난다는 일은 행운에 속하는 것이다.
그가 단번에 오랜 친한 벗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의혹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팔도강산을 헤맨다.
불여우나 흑사마귀보다 무예가 못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출세길을 찾지 않는다.
무예로써 나라에 봉사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오로지 권력탈취의 방편으로서만 존재가치가 있는
무예자의 운명, 불여우와 같은 인생의 종말을 걷지
않도록 고마운 충고를 전해 준 하얀독수리......
삿갓은 하얀독수리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이제
막 헤어졌는데도 다시 그리워졌다. 불안한 벼슬자리를
따러 갈 것이 아니라 고생스럽더라도 하얀독수리와
함께 어떤 뜻을 세우고 싶었다.
가지런히 말을 몰아가던 삿갓은 옆의 군졸에게 문득
말을 걸었다.
"이런 말 물어도 되겠소?"
"예, 말씀만 하십시오."
"군장의 직위가 무엇인지요?"
"예에, 저희 둘다 호군(護軍) 직위에 있습니다."
"호군? 호군이라면 정사품(正四品)직위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거 이상하군. 군장같이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을
나같은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키다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삿갓 선생같이 우수한
무예자를 모시기 위해서는 박대장군께서 몸소 와야
되겠다고 하셨지만, 워낙 국사에 바쁘신 몸이라
결례를 무릅쓰고 저희들을 대신 보낸 것입니다."
착잡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극진한 대접이다.
이들의 겸손한 태도로 보아서 대장군 앞으로 불려갔을
경우 장군 자리 하나쯤은 따놓은 당상일 게 틀림없다.
이토록 좋은 기회를 버리고 다시 하얀독수리와 유랑의
길을 떠난다?
"군장께서는 하얀독수리라는 별명을 들어 본 적이
있소?"
"물론 있지요. 삿갓 선생과 함께 현상금이 붙었던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분의 무예말이요."
"그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불여우와 흑사마귀와
더불어 굉장한 무예자들인데요."
"그럼 왜 하얀독수리를 부르지 않소?"
"흑사마귀가 꺼리니까요."
"뭐요?"
"대장군 나으리의 표정에서 그걸 읽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어디 갔다오실 데가 또 있습니까?"
"아까 숲에서 만난 사람 있지요."
"그가 누굽니까?"
"하얀독수리!"
"옛?"
"꼭 해야 할 말을 잊고 떠나왔던 거요. 이 말은 꼭
전해야겠소. 친구에 대한 예의요."
말을 마치자 마자 삿갓은 말머리를 돌려 아까의
하얀독수리가 있던 곳으로 달렸다.
"선생, 삿갓 선생......"
두 군졸도 소리치며 뒤따라왔다.
그가 있던 숲은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삿갓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독수리의
그림자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박포 대장군 앞으로 불려간 삿갓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가 박진인가?"
"예에, 소인 박진이옵니다."
"그대의 이름은 일찍이 들었다. 나라를 위해
수군으로 참전해서 왜구까지 무찔렀다는 소문도 이미
알고 있다. 그대 같은 인재가 초야에 묻어 썩고
있다는 건 말이 안된다. 어떠냐. 나를 도와서
다시한번 나라를 위해 일해 볼 생각은 없느냐?"
"미천한 재주를 그토록 과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거둬 주신다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과연 용사의 기개로구나. 그대의 담백한
의사표시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특히 자네를
우대하여 측근으로 두고, 가병들의 무술을 가르치도록
하겠다. 그러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큰 벼슬을
내리도록 상주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미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삿갓이 박포의 수하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박포를 연줄로 해서
무관으로 출세해 보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것은 하얀독수리의 충고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삿갓은 역시 갈매기섬의 보물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그것을 다시
찾으러 가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미 실패한
적ㅇ이 있기 때문에 혼자서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나름대로 수백의 부하를 만들어 다시
보물섬에 도전해 볼 작정이었다.
다만 편법으로 박포의 힘을 빌어 쓸 뿐이라는
은밀한 계획은 가슴 깊숙이 감추어 두어야 했다.
"예에, 우선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소인이
대장군 나으리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각오를 다짐하는
나름으로 부탁이 있습니다. 하오니 불손하다 생각
마옵시고 소인의 소청을 들어 주십시오."
"알겠다. 그대의 생각대로 하라. 얘들아, 모두
멀찌기 물러가거라."
박포의 신호에 따라 수하의 군장들과 무사들이
일제히 물러갔다.
삿갓은 섬돌 아래에 꿇어 앉아 박포를 올려다
보았다.
"소인이 대장군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을 미리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서 말하라. 의심스러운 점이라면?"
"우선 소인보다 무예가 한 수 위인 흑사마귀를
어째서 대장군 나으리의 수하에 두시지 않으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 점을 의심스럽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구나. 내 생각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짐작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인은 대장군께서 흑사마귀를
방원 왕자 나으리께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할 게 없지 않느냐? 내가 방원
왕자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흑사마귀로 인해 소인의 공적이 적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하하하...... 원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그는
그고 자네는 자네아닌가. 그대가 큰 공적을 세운다면
흑사마귀와 관계없이 자네에게 그만한 보상이
내려진다는 건 자연스런 이치가 아니겠느냐."
"소인이 불민하여 공연한 근심을 했습니다."
삿갓은 박포의 기꺼워하는 표정을 보면서 그가 이
쪽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 궁금한 점이 또 있느냐? 있다면 어서 말해
보아라."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장군 나으리의 가병이
현재 얼마나 되는지요?"
"이백의 정예들이 지금 수련을 하고 있다."
"이백이라고 하셨습니까?"
"왜? 적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그대는 나의 직위가 무엇인지 모르느냐? 병조의
명령없이도 전 국토의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하오나 측근 무사에 비하면 그런 숫자는 허망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냐?"
"대장군 나으리의 신변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어째서 그런가?"
"모두가 사병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모두란?"
"대장군 나으리의 세력을 견제하는 무리들
말입니다."
박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다.
""너의 말이 옳다. 그러니까 날쌔고 믿음직한
무사들을 많이 키우자는 뜻이렷다?"
"예에."
"마음대로 하려므나.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소관이
아니겠느냐?"
"고맙습니다. 오백의 정예병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엇이냐?"
"대장군 나으리의 사병을 당분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건 무슨 뜻인가?"
"어수룩한 무사들을 강한 훈련으로 고수의 무예자로
키우기 위한 나름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도록 해라. 그러나 사병들은 항상 내 곁에
두도록 해라."
"그렇지가 않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사병들이
대장군 나으리의 곁에 있어 봤자 백해무익한
것이지요. 오위군 소속 병사들에게 번을 서게 하시고,
그동안 저희들은 은밀한 데로 가서 훈련을
쌓겠습니다."
박포는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지금 삿갓이 어떤
꿍꿍이속으로 그런 제안을 하는가 하고 궁리해 보는
듯했다.
"그러면 훈련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한 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해씩이나?"
"한 해씩이라뇨?"
"아니다. 너무 오랜 세월처럼 느껴져서 그런다."
"걱정 마십시오. 무사로서의 자질과 훈련 여하에
따라서는 반 년으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조선 일급의
무사들로 키워 놓겠습니다. 그동안......"
"그동안?"
"저희가 숨어서 훈련을 하게 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대장군 나으리께서는 몰래 힘을 키우게 되니까
아무도 장군님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이익이 그
하나입니다."
"다음은?"
"정예병 오백이면 조선 제일의 사병집단이 되는
거지요."
"이놈!"
박포의 입에서 갑자기 호령이 떨어졌다.
"나으리, 제가 나으리를 진노하게 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네놈은 필시 내가 사병을 길러 역모라도 꾸미지
않는가 하고 짐작했겠다?"
"그건 오해이옵니다. 소인은 어디까지나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훈을 세우신 대장군 나으리의 고귀한
신분이 보호될 수 있도록 아뢴 것뿐이옵니다."
"정말 사심없이 내뱉은 의견이렷다?"
삿갓은 박포가 다소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을 기다려
대답했다.
"소인의 처지에서 어떻게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노기를 푸시옵소서. 실상은 나으리께서
오해하신 것과 똑같은 오해를 당할까 싶어 주위를
물리쳐 주십사 하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실상은 나도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자네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기라도 한듯이 말을 하기에 나
역시 자네의 생각을 살피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역모를 꿈꾼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어찌 나의
세력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꾸밀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세력을 키우셔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자네를 초빙해온 게 아닌가?"
"하오나 소인이 나으리의 가병을 책임진
무예사범으로 소문이 나면 전날의 죄과를 트집잡아
소인에게는 물론 나으리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소인이 당분간 몸을
숨기고자 하는 바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럴 듯하다......"
"그런즉 나으리께서 기왕에 소인을 부리시려면 오늘
제가 이곳에 오지 않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그건 왜 그러하냐?"
"이 곳의 가병은 거느리지 않겠습니다. 공연한
소문만 날 뿐입니다. 오백의 정예무사는 오백의
정예무사는 소인 혼자 뽑아 몰래 훈련시킬까 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대장군 나으리께서는 소인에게 몰래 물자와 자금만
대 주십시오. 은밀하게, 아주 은밀하게......"
"자네의 그 생각도 그럴 듯하다만...... 그래,
무사들은 어떻게 모을 작정이냐?"
소인에게 모두 요량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훈련을 하겠다는 것까지도 나에게 알릴
수 없겠느냐?"
"아니올시다. 장소는 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도라...... 왜 하필이면 강도이냐?"
"강도라면 보물을 찾으려는 미친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때문에 무술의 기본이 어느 정도 돼 있는 놈들을
쉽사리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예훈련을 하고
있더라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무술도장을 열어 놓으면 소인의 제자를 훈련시키는
정도로 모두들 이해하겠지요."
"딴은 옳은 의견이다. 그럼 그렇게 하자. 내가
은밀히 너를 도우겠다."
"소인을 도우시는 게 아니라 나으리의 야망을 위한
준비과정입지요."
"그 말도 옳다. 그럼 자네 말대로 즉각 강도로
떠나도록 해라. 문 밖 여인숙에 묵고 있으면 오늘 밤
자정에 믿을 만한 아이들을 시켜 네게 군자금을
보내도록 하겠다. 긴급하고 특별한 소식은 나의
밀명자를 이용해 서로 연락하도록 하자. 그럼 너와
나의 관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소문을
내겠다."
"감사하옵니다. 그럼 대장군 나으리의 가병을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알고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하하하...... 자네는 무예 뿐만 아니라 머리 역시
예삿놈이 아니로구나."
박포는 진정 유쾌하게 웃었다.
연백의 토호 김노인은 후당 정원의 연못가에서
금붕어가 노닐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뒷짐을 진 채 공연한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들어 자주 수심에 잠기기도 했다.
"나으리,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젊은 손님이온데 어르신네를 뵙고자 합니다.
무사 차림이지만 밀명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인의 설명에 김노인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묵고 가시겠다는 손님이라면 사랑채로
모셔라.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구나."
"알겠습니다, 나으리.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하온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입니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라구?"
"예에."
"누구시라더냐?"
"이름과 신분은 주인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평범한 방문객이 아닌 듯 정중한 태도로
주인님을 만나 뵙고자 했습니다."
"정중한 태도였다구?"
"예에. 나으리를 일컬어 생명의 은인 운운
하셨습니다."
"가만 있거라. 젊은 무사였다구 했었냐?"
"예에. 강원도 포수 차림에 장검을 등에 지고
있었습니다."
"맞았어. 그 양반이 틀림없어. 곧 만나 보겠다.
어서 이리로 모셔 오너라."
"그 나그네가 누구이옵니까?"
"짐작되는 바가 있어서 그렇다. 너는 한사코 모른
척해라. 얼굴이 기억되더라도 말이다. 어서 이리로
모시라니까."
"곧 모셔오겠습니다, 나으리."
하인은 부리나케 대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김노인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며칠 동안
얼굴에 쌓여 있던 수심을 단박에 날려 버린 듯했다.
잠시 후 나타난 날렵한 걸음걸이에 늠름한 태도의
젊은 무사는 김노인이 예상했던대로 왕천이었다.
"생명의 은인이신 어르신네께 삼가 왕천이가 문안
드리옵니다."
왕천은 김노인의 무릎에 넙죽 엎드렸다.
"오, 도련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생명의
은인이라니요. 생명의 귀함을 아는 사람이기로
도련님이 아니었더라도 지난 번의 그런 환난에서는
마땅히 구원되었을 것입니다. 이게 몇 해 만입니까?
정말 건강하게 지내셨구려. 반갑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르신네도 무고하신지요?"
"나야 뭐 항상 그렇지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얘야, 어서 안채에다 주안상 놓도록
이르고, 너는 도련님의 세숫물을 놓아라. 아주 귀하신
손님이시다."
김노인은 하인에게 명한 뒤 왕천의 손을 잡아
끌었다.
왕천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한 번 휘둘러본 뒤
김노인의 뒤를 따랐다.
"저를 숨겨 주셨기로 어르신네께서 봉변이나 당하지
않으셨는지요. 당시엔 하도 다급하여 어르신네의
신변을 염려할 틈도 없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결국은 이렇게 편안히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득 김노인은 아까의 그 수심어린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왕천은 김노인의 표정에서 집안에 근심거리가
있다는 점을 직감했다. 그래서 유화낭자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실상은 명연담으로 가서 다시 무예수련을
받는 동안에도 유화낭자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정말 마침 잘 와 주었소. 이럴 때 도련님이 찾아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왕천은 김노인의 말 꼬투리를 잽싸게 잡았다.
그래야만 김노인의 수심의 정체와 유화낭자의 근황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르신네의 집안에 분명히 우환이 생겼다고
짐작됩니다. 소생은 이 저택을 들어서는 순간 그것을
느꼈습니다. 지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오니, 소생의 힘이 필요하시다면 서슴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우환이라면...... 그렇지요. 도련님이 떠난 날부터
수상스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지요."
"소생 때문에 어르신네께 심려를 끼치게 해 드려서
죄송한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수상한 일이 어떤
것인지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기왕에 일어났던 일, 그렇게 서둘 필요가
없소이다. 저녁을 드시고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아니올시다. 소생으로 인해서 일어났던 일이라면
더욱 분하고 갑갑해서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아직 피곤하지도 않고 배도 고프지 않으니 어서
그간의 일을 상세히 알려 주십시오."
그럴 즈음에 세숫물이 나오고 뒤따라 단촐한
주안상도 준비되었다.
후당 안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왕천은 먼저
김노인에게 술을 따라 권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려. 괴상하기도
하려니와 어떻게나 끔찍한지......"
김노인은 술을 들기 전부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어떤 일이 일어났던지요?"
"우선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부터 설명해야겠구려.
내 친조카 딸처럼 거두고 있던 유화 있지 않습니까?"
"아, 유화낭자! 그 낭자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들어 보십시오. 우리 집안 아이들만 알고 있는
은밀한 데다 숨겨 두었지요."
"그러니까 유화낭자는 이 곳에 계시지 않군요?"
"그런 셈이지요."
왕천은 무작정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유화낭자 역시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신변에 일이
생겼다면 이 칼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천은 옆에 놓인 칼집을 잡아 보였다.
"글쎄 말씀입니다. 그 수상한 그림자의 정체를 알고
있기나 하다면 속이나 후련하게요."
"그럼 낭자의 신변에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직 유화의 신변에까지는 일이 생기지
않은 걸로 압니다. 확실히 모르긴 해도...... 어쨌든
때맞춰 도련님이 잘 오셔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도련님의 출중한 무예라면 유화를 검은 그림자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화낭자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개경 북쪽 개정암에 가 있습니다. 개정사의 스님을
전부터 잘 알고 있기로 안심하고 맡겼습니다.
변복하고 변성명시켜 탑돌이 간 여인처럼 행세하라고
일렀지요. 두 하녀를 딸려 그 곳으로 보낸 게 일년
전입니다."
김노인은 잠시 말을 끊고는 잔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커어, 술맛까지 쓰구려. 그동안 그 딸아이로
해서 얼마나 노심초사 했던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천은 허겁지겁 물었다.
"유화와의 소식은 그동안 집안의 날쌘 가병 두 놈을
시켜 연락이 되도록 했지요. 은밀하게 이 곳과 암자
사이를 오갔기 때문에 아무도 유화가 그 곳에 있다는
걸 알 턱이 없었겠지요. 그런데......"
왕천은 김노인의 입술을 열심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소식도 궁금하고 옷가지도 따뜻한
게 필요할 것 같아 한 보름전에 두 가병 편에
봇따리와 소식 몇 자 적은 편지를 넣어 보냈는데, 두
가병놈들이 돌아올 시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더란 얘깁니다."
"그들은 왜 바삐 안 돌아 왔답니까?"
"모르지요. 영영 입을 다물고 말았으니......"
"예엣?"
"그래서 다른 가병 두 놈을 다시 급파했지요."
"그랬더니요?"
"역시 강원도 포수 신세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들은 소문으로는 네 놈 모두 어떤 자의 칼에 맞아
죽었더랍니다. 개경 근처 산 속에서 암자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떤 놈이 가병들을 베었을까요? 만일 굳이
어르신네의 심부름꾼을 골라 베었다면 유화낭자의
은신처를 알려고 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놈이
누구이든 사실이 그렇다면 낭자의 신변도 위태롭기가
이를 데 없겠군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도련님이 제때에 도착해 주신
거지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 가병을 베었으며,
그 범인이 누구라는 게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구 왕조의 대신들을 핍박하는 일도 이젠
없어졌고, 권력자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세월이라
한적한 지방에 눌러 사는 구신들 자제에게까지 그들이
신경쓸 여력도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지요. 기껏
상상해 본 상대는 전날의 세력가 불여우 윤호가 우리
유화를 ......"
"불여우!"
"지분덕거린 적이 있지만 그는 전날 변란통에
죽었다는 소문이고, 설사 살아 있다 해도 이미 날개
잘린 독수리 신세여서 권력을 빌미로 우리 유화를
달라고 할 계제는 되지 못하지요."
"불여우가 죽었다는 게 확실합니까?"
"모르지요.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고 죽었다는
소문은 있지만, 정작 그놈의 시체를 확인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요."
"만에 하나 그놈이 살아 있다면 유화낭자를 탐낼
수도 있겠군요?"
"만에 하나 살아 있다면......, 은밀히 납치해 갈
수밖에 없겠지요. 욕심은 남아 있고, 얼굴을 내밀고
나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니고......"
"그럼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아니, 일어나다니요?"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필시 유화낭자의 신변에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제가 곧장 가서 낭자의
안전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말리진 않겠소이다. 그러나 기왕에 가시려거든 몇
가지 참고말과, 그쪽으로 갔을 때의 후속조치를
우리가 미리 의논해 두는게 옳을 것 같구려."
"그렇군요. 만일 유화낭자가 안전하다면 어떻게
할까요?"
왕천의 질문에 김노인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얼마 후 김노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젠 그 애를 숨길 만한 곳도 없습니다. 차라리
유화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는 게 어떨까요? 당할때
당하더라도 곁에 두고 걱정하는 게 낫지, 정말 멀리
두고는 근심스러워서 못살 것 같구려."
"그럼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
"만일......, 그럴리야 없겠지만 유화가 납치라도
되어 갔다면?"
"소생이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유화낭자를 찾으러 떠난 것으로 알아 주십시오."
"그럴 수밖에 없겠구려. 그리고 수개월 전에 이런
일도 있었지요. 참고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하인들이 일터에서 돌아오다가 발견했다는데, 어떤
어수룩한 자가 저의 집 주위를 멀찍이서 빙빙
돌아다니더라나요?"
"염탐꾼?"
"밀명자는 아닐 겁니다. 요즘 밀명자란 것들은
대체로 당당히 직함을 들이밀며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게 보통이거든요."
"하인들이 그자를 보았답디까?"
"보았지요.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어서 얼굴까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는데......"
"그 수상한 자가 불여우는 아니더란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우리집 하인들은 모두 불여우의
얼굴을 알고 있거든요.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는군요.
꼭 한가지 특징이라면 왼쪽 뺨을 비스듬히 가로지를
칼자국이 나 있더라는 거예요. 제가 아까 말한 검은
그림자란 바로 그런 놈들까지 합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인들은 그자더러 웬 녀석이냐구 물어
보지도 않았답디까?"
"왜 안물어 봤겠어요. 웬놈이길래 남의 집 담너머를
기웃거리느냐구 다짜고짜 멱살을 잡았다나요?"
"그래서요?"
"허어, 그놈이 글쎄......, 빙긋이 웃더랍니다.
수상한 놈이니 뭘 좀 알아봐야겠다면서 집으로 끌고
들어오려니까 여남은 명의 우리집 하인들을 단박에
주먹으로 때려 눕히고는 유유히 사라지더라는 거예요.
그 솜씨로 보아서 대단한 무예자일 거라고 입을
모으더군요."
"그러니까 흠씬 얻어맞기만 하고 그자가 누구인지
알 겨늘도 없더란 얘기군요."
"그렇지요.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지요. 만일 우리
가병들에게 들켰더라도 그놈은 가볍게 해치웠을
겁니다. 차리리 맞부딪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정말 두려운 세월을 사셨겠군요."
"그러나 이제 도련님이 오셨으니 이 늙은이의
마음이 얼마나 놓이는지요. 제 생각으로는 이번에
유화가 돌아오면 돌련님과 혼사를 치르도록 설득할까
합니다. 어떠신지요, 도련님의 의향은? 우리 유화가
마음에 드신지요?"
왕천은 얼른 대답을 못했다. 졸지의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그애를 떠맡을 때부터 혼사 문제까지 책임을
졌지요. 자, 그러면 더 붙들지 않겠습니다. 어서
유화에게 달려가 보십시오."
김노인의 집에서 하룻밤도 묵지 못한 왕천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미래를 약속했던 유화, 그리고 유화의
혼례까지 책임지고 있던 김노인으로부터 성례까지
시켜주겠다는 언약을 얻은 왕천의 발걸음은 바빴다.
어서 그녀를 보고 싶었다. 만나서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고 몇 해 동안 풀지 못했던 회포를 풀어야
했다.
시각대사로부터 혹독한 무예훈련을 무사히 끝낸
왕천은 전날보다 훨씬 완숙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고,
더욱 고급한 무예자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의
육체는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축지의 행마도
날쌔고 밤눈도 밝았다. 그를 지키는 칼 한자루가 등에
짊어져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왕천은 개정사로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일부러
김노인의 가병들이 두 차례씩이나 베어졌다는 길로
굳이 방향을 잡아서 달빛 요요한 산길을 더듬어 길을
재촉했다.
'어떤 놈이든 나오너라. 제발 김노인댁의 가병을 벤
놈들이라야 할텐데. 내 생명의 은인이신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놈이라면 어떤 놈이든 용서
않겠다!'
왕천은 감정을 자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산길을 걷다 문득 사부로부터
재수련을 받던 일을 떠올렸다. 재수련은 너무도
힘들었다. 더욱 난처했던 점은 스승의 만류도
뿌리치고 하산했던 왕천이 다시 입산했을 때 보인
사부의 태도였다.
"일 없다. 스승의 말은 임금과 부모의 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군사부일체이다. 더구나 인고(忍苦)를
낙으로 삼아야 되는 무예 수련자가 기술은 물론
정신도 제대로 닦기 전에 스승의 말을 거역하고
하산했던 놈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 아예 용서를 빌 생각일랑
말아라. 어서 돌아 가거라."
그래서 왕천은 사흘 밤 사흘 낮을 사부의 거소
앞마당에 꿇어 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빌었다. 그러나
사부는 바깥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왕천은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꿇어 앉아
있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참고 기다린 그
자체가 훈련의 일부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전혀 새로운 경험을 했다.
화급(火急)이 부른 지난날의 실패와, 인내를 통한
숭고한 마음가짐을 동시에 깨달은 것이다.
재수련을 통해 조천검법을 완성한 것도 크나큰
성과였지만, 태껸의 완숙한 묘를 터득한 것이 더욱
그의 무예를 알차게 만들었다.
"......그래서 태껸은 인간이 자연에서 얻은
신체만을 이용해 싸우는 투기이니라. 손발이라는
무기는 누가 주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단련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 둘 일이 있다. 즉 태껸이라는
무기는 신(神)이 우리에게 주고 부모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고로 인간의 수족(手足)에는 신이 깃들고
인류발상의 때부터 전해 내려온 선조의 피가 흐르고
있느니라."
시각대사는 다시 강론을 계속한다.
"......비록 태껸이라는 무기가 도검(刀劍)이나
창과 같은 효과를 지닐지라도, 그것은 우선 인간을
다정하게 껴안기 위한 손이며, 더불어 함께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기 위한 발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때문에 수족을 무기로 함은 부당한
힘으로부터의 생명과 자유를 지킬 때다. 또 마음에
간직한 신과 부모가 우리에게 명했을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사부로부터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언질을
받고 하산하던 날, 왕천은 다시 사부 앞으로
불려갔었다.
"......그래, 내가 전에 찾아보라던 보물지도는
어떻게 되었다더냐?"
왕천은 몇 해 전 하산하던 때처럼 사부가
보물지도에 대해 관심을 보인 점이 이상했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그동안의 경과를 대략 말씀드렸다.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적두노사님의 제자라는
하얀독수리 최동을 만났었지요. 제가 세속에서 맺은
인연 중에서 결코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하얀독수리입니다."
"너를 사지(死地)에서 구하여 이리로 보낸 인물
말이냐?"
"예에."
"자네가 나한테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하얀독수리가
알고 있더냐?"
"처음 입산할 때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친의
엄명 때문이었습니다."
"너의 아비와 하얀독수리는 처음에 어떻게
연결되었다더냐?"
"전쟁통에 고아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던 어린
하얀독수리를 부친께서 거둬 주신 것이 그 첫째
인연이 된 걸로 압니다."
"그 다음엔?"
"뜻을 세우고 집을 나간 하얀독수리가 적두노사의
문하로 우연히 들어간 것 같습니다."
"너를 처음 이곳으로 보낼 때 너의 아비와
하얀독수리는 어떻게 접선했다더냐?"
"그건 알지 못합니다. 그가 하얀독수리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으며 그 이후에도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으음...... 그래서 그 다음에는?"
"명연담 시각대사로부터 무술공부를 했었다고 다시
만났을 때는 얘기했지요. 그렇지만 무심히 들어넘기던
눈치였습니다."
"그의 무예 실력은?"
"최고수급이었습니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결국 제가 다시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무엇하러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더냐?"
"스승의 명령을 받고 누굴 베러 나섰다고
하더군요."
"상대가 누구인데?"
"천조옹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뭣이?"
"왜 놀라시는지요?"
"어떻게 감히!"
"예에?"
"천조의 무예는 무섭다. 어디 감히 하얀독수리
정도가 그를 베겠다는 건가?"
"천조옹은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는 죽었다더라. 병사했다고 들었다."
"다행이군요. 차라리 하얀독수리가 헛고생을 하는
게...... 사실은 하얀독수리도 천조옹의 정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더군요.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시던가요?"
"적두노사도 겁을 냈으니까."
"그랬었군요. 그래서 하얀독수리와 만나 떠돌아
다니다가 우연한 장소에세 삿갓을 뒤집어 쓰고 다니던
건방진 무사 한놈을 만났었지요."
"음!"
"그놈이 갈매기섬의 보물을 털려다 혼이
났다더군요. 적두노사의 제자 중 하나인 족제비와 또
굴림의자라는 앉은뱅이와 합세했다가...... 결국은
족제비는 섬에서 죽고 지도는 굴림의자의 손에 들어
있다고 떠벌립디다."
보물지도에 대한 시각대사의 집념은 끝이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굴림의자라 하는 자는 어디로 가면 만날
수가 있다더냐?"
"삿갓놈이 말해줄 수 없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그러나 갈매기섬으로 건너가는 전진기지인 강도에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지도이니라. 그 지도의
임자는 바로 천이 너이니 꼭 되돌려 받도록 하여라.
만일 쌈지를 찾거든 나한테로 달려오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가친께서도 그
쌈지의 주인은 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력을
말씀해 주실 수가 있으신지요?"
"아직은 이르다. 네가 쌈지를 찾은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다."
"......?"
그것 뿐이었다. 보물지도가 담긴 쌈지의 비밀에
대해서는 사부도 더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왕천이 지도를 되찾는 일은 세속으로 내려와서
해야 하는 일 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달리 해야 될 일이 너무 많았다. 유화를
만나는 일도 그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였다.
강변이 끝나고 다시 계곡을 지나 숲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남은
명의 살기 띤 무리들이 앞쪽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왕천은 다소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무심한 척 걸으리라
마음먹었다.
'가만있자. 김노인네의 사병들이 결딴난 곳도 이
근처였겠다?'
단순히 그런 생각만으로도 왕천은 분한 느낌이
들었다. 산적이건 비적이건 화적떼이건 용서해선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숲을 빠져 얼마쯤 더 걸어나가자 문득 빈터가
나타났다. 금잔디가 깔린 그곳엔 달빛이 쏟아져내려
대낮같이 밝았다.
슬슬 따라붙던 무리들이 한사코 모습을 드러냈다.
왕천의 앞길을 막으며 말없이 포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온통 검은 옷에다 검은 천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복면의 무리들은 열두 명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낀 채 우뚝 섰다. 등에는 환도를
꽂고 있었다.
"아니, 누구시온지요?"
왕천은 가급적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상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갈 길이 급해서 야간에도 서두를 수밖에 없는
가난한 나그네올습니다. 나으리들, 저를 그냥 보내
주십시오."
그래도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잠시후 그들 뒤로부터 두목인 듯한 자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검은 복면자들과 같은
차림이었지만, 입은 가리지 않고 범의 가죽을 벗겨
만든 조끼를 입고 있었다.
두목의 얼굴에는 온통 검은 수염이 거칠게 돋아
있었다.
이놈이일 것이다. 이놈들이 김노인의 가병들을
베었을 것이다. 유화에게 가는 심부름꾼들을 벤
놈들일 터이다.
'괘씸한 놈들......!'
그러나 왕천은 아직도 싸울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왜 두 차례씩이나 김노인의 가병들을
해쳤으며, 무엇하는 무리들인지 알기 전에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점이었다. 아무리 다급하고 화를 돋구는
일이 있더라도 함부로 인명을 해치지 않게 된 것이
전날의 왕천에 비해서 확연히 달라진 점이었다.
왕천은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두목을 위시한 열세
명의 복면자들을 왕천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모두들
칼깨나 쓰는 자들임엔 틀림없지만 고수급 무예자는
아닌 것이 그들의 몸씀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과연 이들이 김노인댁의 가병들을 벤 자들일까?
왕천은 우선 그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점을 알아내야
했다. 그 사실이 확인만 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자들이라면, 이를테면 길손의
봇짐을 터는 산적들이라면 적당히 혼을 낸 뒤에
따끔하게 훈계해서 옳은 삶을 살도록 타일러 줄
생각이었다. 왕천은 그만큼 살생을 삼가는 인품이
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저 두목이라는 사내. 처음에는
김노인댁 저택을 염탐하던 자가 아닌가 생각했으나,
얼굴에는 흉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자는 아닌 듯이
생각되었다. 다만 그의 운신(運身)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무예만은 다른 졸개들에 비해 출중해
보였다.
"가난뱅이 나그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소생을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오."
왕천은 다시 한번 간청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왕천 역시 끝없이
침묵하는 상대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드디어 두목이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손님도 우리가 찾고 있는 분은 아닌
것 같소."
"예에? 그럼 누굴 만나기 위해 길목을 막고
계셨구먼요."
"그렇소. 그렇지만 손님한테도 몇 마디 물어야 될
것 같구려."
왕천은 저들의 태도가 의외로 공손한 데에 놀랐다.
그러나 경계심을 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질문에
응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이쪽에서도 저들의 정체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십시오."
"손님은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가요?"
"개경 북편입니다."
"무슨 일로 가고 있소?"
"집안의 사사로운 일 때문이지요."
"등집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도
관심이 없소. 우린 길손의 봇짐이나 털어먹는
산적들이 아니기 때문이오. 다만 손님의 등에 걸린
장검에 대해서는 관심이 가는구려. 손님은
무예자인가요?"
"그런 셈이지요. 아직 미천한 재주에 지나지
못하오만."
"그 장검을 보여줄 수 없겠소?"
"그건 곤란합니다요."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같구려. 그렇다면 그
장검으로 우리 앙이들을 한 수 가르쳐 줄 수는
없겠소?"
"그야 어렵지 않지요. 무예자로서의 예의만 갖춰
준다면."
두목은 왕천의 당당한 태도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더니 곧 온화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제자로서의 예의를 갖추란 뜻은 아니겠지요?"
"그야 물론입니다. 다만 진검(眞劍)으로 다루다가는
다칠 염려가 있으니 목검으로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좋으시다면 응해 드리지요."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얘들아, 누구
목검으로 상대해 보아라."
"아니올시다. 그쪽에서는 진검으로 상대해도 괘념치
않겠습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네 명 정도면
좋겠지요."
"한꺼번에 네 명씩이나? 그것도 진검으로?"
왕천은 한꺼번에 모두 대들어도 좋다고 말하려다가
저족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예에, 한꺼번에 네 명 정도...... 싫으시다면 한두
명씩이라도 좋구요."
"그렇다면 진검으로 우리 모두가 대들어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
"서로가 해칠 생각이 없고 오직 연습뿐이라면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두목의 얼굴에는 잠시 감동하는 빛이 어렸다. 그런
상대의 표정까지도 왕천에겐 의아할 뿐이었다.
"좋습니다. 애초의 약속이었고 하니 진검으로 네
명이 상대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얘들아, 이분한테
막대기 한 개를 드리고 네 명만 나서 봐라."
목검 한 개가 왕천에게 건네지고 네 명의
복면무사가 준비하는 동안 왕천은 꼿꼿이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복면의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대체
이들은 무엇하는 무리들일까......!"
산적떼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녹림에 숨어
난세를 피해 사는 무리들 역시 아닌 것 같았다. 만일
이들이 그런 무리들이라면 야밤에 한 나그네를 붙들고
무술연습을 자청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왕천은 이들에게 요구할 참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뇨?"
두목이 반문했다.
"소생이 다행히 검술로써 이길 경우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하는데, 약속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두목은 흔쾌히 승낙했다.
왕천은 괴나리봇짐과 장검을 그대로 진 채였다.
"자, 네 명씩 나서 보시오. 슬슬 봐 주는 척 안해도
좋습니다. 있는 기량껏 전력으로 대들어 보시오."
순간, 네 명의 복면자들은 똑같이 칼을 빼들었다.
날빛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자, 어서."
왕천이 말했다.
순간 네 자루의 칼이 왕천의 머리와 허리와 어깨와
복부로 짓쳐들었다.
"야잇!"
왕천의 기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리고는
그뿐이었다.
졸개들이 들고 있던 칼들이 어느새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때렸나 보구려. 다치지는
않았소?"
왕천은 네 명의 복면자들이 손목을 감싸 쥐며
아파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
두목 이하 나머지 졸개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막 본 것도 같고 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한 그 황홀한 검법을 되새김질 하려는 듯이
꼼짝않고 서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실상 왕천은
이들 열세 명 모두를 단칼에 벤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술이라는 것은 상대를 상처내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베는 것이 최고의 술법이니라......"
사부가 언젠가 말했었다.
복면자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한참 후였다.
두목이 소리 질렀다.
"얘들아, 어서 이분 앞에 꿇어 엎드려라. 이제사
진짜 우리 어른을 만나 뵙게 됐구나. 어르신네,
누구시온지 알 수는 없으나 조금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철부지들의 부질없는 장난이라
여기시고 저희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왕천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다시 당황했다.
"아니, 왜들 이러시는지요. 제 기량이 여러분들보다
조금 나았다 해서 이토록 난처한 대접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왕천은 맨 앞의 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는
완강하게 꿇어 엎드려 있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오래전부터 어르신네
같이 우수한 무예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물리치지 마사고 산채로 드시어 스승님이
되어 주십시오."
왕천은 이때다 싶었다.
"이거 황당하기가 요량할 길 없는 부탁이구려. 대체
여러분들이 뉘시온지요. 뉘시기에 산 속에 거하며
복면을 한 채 길손을 붙들고 무술시험을 시키는지요."
"예에 예, 어차피 아셔야 할 것인즉 하나 하나 모두
말씀드리지요. 저희들은 예성강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강산을 무대로 살고 있는 무리들이지요."
"그렇다면 비적(匪賊)이 틀림없겠구려."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죠. 저희들은 새 왕조에
쫓기는 옛 사직 구신들의 자제들입지요. 모두가
문신들의 자제들이라 생명을 보전하기가 힘들어 이런
식으로 떼를 지어 살면서 훌륭한 무예자를 찾고 있던
참입니다. 저희들이 조심스럽게 싸움을 걸어 본것도
약탈이나 살생이 목적이 아니고 훌륭한 무예자를
선책해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 것 뿐입니다. 부디
혜량하시어 불쌍한 저희들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거 참 기특한 얘기구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함부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요?"
"누구신지는 알지 못하나 새 사직의 권력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사료됩니다."
"그걸 어떻게 안다는 말씀이오?"
"젊은 무예자로서 권력자들의 앞잡이가 된
흑사마귀나 불여우의 얼굴은 저희들이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르신네는 하얀독수리나 삿갓이나 족제비나
굴림의자들 중의 한 분이겠지요."
"하하하......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들 중의
누구도 아니도!"
"어르신네가 누구라면 어떻습니까? 저희들에게
필요한 건 어르신네의 훌륭한 무예입니다."
"난 당신들한테 무술을 가르칠 의무도 없을 뿐
아니라, 지금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시간조차 너무나
아까울 만큼 바쁜 몸이오. 정작 무예를 배우고자
한다면 다녀오는 길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그런데 복면들은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 거요?"
"저희들의 얼굴이 알려지면 곧장 잡히게 되지요.
그래서 가급적 복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겠소. 헌데 근래에 근처에서 사람을 해친
적이 있소?"
"없습니다."
"달포쯤 전에 말이오."
"살인은 커녕 근처에서 살해를 당했지요. 동지 한
명이 말입니다."
"한 명?"
"예에. 지나가는 무예자에게 아까 어르신네께 했던
것처럼 싸움을 걸었지요. 그랬더니 웬걸요? 우리 동지
한 명을 가차없이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린
아연했고 분했지만 그의 무예가 하도 뛰어나기에 감히
대들지를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자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뺨따귀에 빨갛게 난 칼자국에다......"
"뭐요?"
왕천은 긴장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자가 이곳에
나타났었다는 것이다.
"예, 왼쪽 뺨을 비스듬히 가로지른 칼자국이 그자의
특징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스승이 돼 주십사고 부탁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자도 우리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싸늘하게 비웃기만 하고는 서둘러
떠나더군요. 우리 동지 한 명만 가볍게 베어버린
채......"
왕천은 두목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틀림없이
김노인의 저택 주위를 염탐하던 자일 것이 틀림없을
일이었다.
"그자를 어딜 가서 찾는다?"
"찾아서 어쩌시려구요?"
"여러분의 동지를 벤 자이기도 하지만 진작부터
내가 찾고 있던 놈이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자세히 물어봅시다. 근래 내가 아는 분의 가병 네
명이 이 근처에서 살해되었는데 여러분들은 듣지
못했소?"
"네 명씩이나!"
"두 명씩 며칠 간격으로 죽였다더군요."
"가만있자. 그런 소문을 듣긴 들었습니다만 시체를
보지 못했으니 사실여부를 알려 드릴 길이 없구먼요.
혹시 그 뺨따귀에 칼자국 있는 놈의 소행이 아닐까요?
그자의 칼솜씨나 기분 나쁜 눈초리로 보아서는 능히
그들을 해칠 만도 합니다."
"어쨌든 지난 일이니까...... 그건 그렇고, 그놈은
어디로 갔지요?"
"개경 북편으로 방향을 잡는 듯했습니다."
"개경 북편?"
"어르신네가 아까 그쪽으로 가신다기에 바로 그놈과
한패이거나 아니면 뒤쫓지 않나 생각했지요. 그건
그렇고 어르신네의 존함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어, 말해보았자...... 그러지요 저 역시
여러분들과 처지가 비슷하지요. 전 상서령으로 계시던
왕자 각자 되는 분의......"
"예엣?"
두목을 위시한 그들의 갑작스런 반응에 왕천이
오히려 당황했다.
"저의 가친을 잘 아시는지요?"
"그러니까 그분의 자제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왕씨손이 몰살당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천이올습니다."
"왕천...... 참으로 용케 생명을 보전하셨군요.
저희들은 정작 왕씨는 멸손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토록 훌륭한 무예를
익혔습니까?"
"어디에 계신 누구라는 것은 스승의 명령이
있었기로 가르쳐 드릴 수가 없군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다만 고려의 쫓기는
후손들이라는 점에서는 어르신네나 저희들이나
동병상련의 처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하니 기왕에
그토록 훌륭한 무예를 닦으신 어르신네께서
저희들에게도 무예를 가르쳐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배워서 무엇하시겠소?"
"원수는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들의 생명만은
보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단히 소견있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멸망한
사직을 새로 일으킨다는 뜻을 고수할 생각까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이런 난세에 살아 남으려면 어느
정도의 무예는 익혀야 된다는 생각에 동감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딱하게 됐군요. 갈 길이 급해서
여러분께 무예를 가르쳐 드릴 수가 없으니......"
두목은 왕천의 말에 몹시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정히 그러시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다만 같은
처지의 저희들이 언제까지나 어르신네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십시오. 이 한유성(韓柳成)이
삼가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한유성...... 기억해 두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이
있다면 그땐 반드시 저의 적은 재주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급한 무예를 익히는 것만으로도
불운하게 타계하신 아버님의 한을 만분의 일이라도
풀어드리는 것이 되겠지요. 더구나 저의 가친께서는
금오위 상장군이라는 무반(武班)이셨거든요."
"옛!"
왕천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젊은 두목의 이름을
듣고 전광석화같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째서 놀라십니까?"
"당신의 가친이 금오위 상장군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자 량자......"
"그럼 당신이 유화낭자의......"
"예에? 유화? 어르신네께서 어떻게 유화의
이름을......? 그 아이를 알고 있습니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번에는 두목이 놀랄 차례였다.
"아, 그러니까 한협사가......"
"맞습니다. 제가 그 애의 오라비입니다. 일찍이
연백의 김노인댁으로 보낸 후, 만에 하나라도 그 애의
신상에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가족들은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서로가 변복 변성명해서 모른 척하고 지내자고
했는데, 어르신네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왕천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인연이었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구려. 한협사가 유화낭자의
오라버니시라니...... 실은 지금 유화낭자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예에?"
"연백에 숨겼다가 관가에서 냄새를 맡고
들락거리기에 노인장께서 개정암으로 옮겨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럼 지금 그 애가 개정암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불안한 처지입니다."
"불안한?"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물어
보았던 바로 그 네 명의 가병이 바로 노인장의
가병이었거든요. 유화낭자한테 가는 심부름꾼이었는데
차례차례로 베어졌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그 칼자국 흉터를 달고 다니는 놈의 짓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 그놈이!"
"그러니까 어서 개정암으로 가 보아야 합니다.
다행히 낭자가 무사하다면 다시 연백으로 모셔 오라는
김노인장의 분부를 붙잡고 이렇게 바삐 달려가던
중입니다. 저로선 한협사가 네 명의 가병을 베지
않았나 하고 잠시 오해했었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지체할 수가 없겠군요.
어떻습니까? 기왕에 어르신네께서 그런 일로 가신다면
우리도 동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아이의
오라비이기도 하니까요."
"그도 그럴 듯합니다.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모두
함께 가시죠. 유화낭자가 몹시 반가와 하실 겁니다."
"얘들아, 이런 경우를 기연(奇緣)이라고 하는 게다.
자, 어서 왕협사의 뒤를 따르자."
한유성의 명령에 복면자들은 일제히 왕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자, 이제는 모두 복면을 벗어라. 왕협사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아무 것도 없지 않겠느냐."
왕천과 한유성과 그의 무사들은 새벽을 다투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왕천의 입장에서는 한유성을 만나게 된 것이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유화낭자의
오라비이기 때문이다. 실의와 낙담 속에 있는 그의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은 바로 유화낭자를 기쁘게 하는
바이기도 했다.
왕천은 많은 이야기를 한유성에게 해야 될 것
같았다.
"한협사, 제가 유화낭자를 만나게 된 경위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물론 궁금하지요. 그렇지만 제가 한번 어떤 경로로
왕협사께서 누이를 만났는지 알아맞춰 볼까요?"
"맞춰보시지요."
"김노인장께서는 길손이라면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고 사랑채에 묵고 가도록 배려하는 분이지요.
그러니까 왕협사 역시 어느 날 우연히 그쪽을
지나다가 노숙할 곳을 찾아 그 집으로 들었겠지요. 제
누이도 거기서 만나게 되었을 테구요. 제 말이
맞았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유화낭자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
"오늘 한협사를 만날 수 있었던 인연보다 훨씬
기이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허어 참, 몹시 궁금하구려."
"전날 불여우가 득세하고 있을 때, 그자가 신행가는
신부를 습격해서 능욕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 우리한테 그 죄를 뒤집어
씌워 현상금을 붙였지요."
"그런 소문은 들었습니다. 심지어 저희들한테까지
죄를 뒤집어 씌워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더군요. 우린
꼼짝 못하고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자들의 하는 짓거리란 게 대체로 그런 식이지요.
그러니까 결과가 좋지 않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조금전에 우리라고 하셨는데 그 우리가
누구인지요?"
"아, 그 우리란 하얀독수리 최동과 삿갓
박진입니다."
"옛!"
"하얀독수리는 저한테는 역시 또 다른 생명의
은인이지요."
"아, 그 무서운 무예자들을 그토록 잘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왕협사가
무예를......"
"아닙니다. 저의 사부는 그들보다 훨씬 고수의
무예자입니다."
"어쨌든......"
"삿갓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저와 만날
때마다 으르렁 거렸죠. 그러나 나중에는 감정을
풀었습니다.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왕천은 지난 날의 사연들을 한유성에게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한유성은 한숨을 길게
내어 쉬었다.
"정말 기이하고 기구한 운명이었군요."
"유화낭자가 정작 무사하셔야 할 텐데. 아무래도
노인장의 가병들이 살해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부디 그런 사고가 유화낭자와 연관되어
있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천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유화와 언약을 맺었던 일이라든가, 그녀를 데리고
오면 성혼을 시켜 주겠다던 김노인의 약속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개정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왕천은 한유성에게
앞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를 알고 싶었다.
"한협사, 그동안 저토록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어떻게 사셨습니까?"
"부끄럽습니다. 모두가 귀한 집 도령들이라
농사짓는 일들을 배우지 못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불쌍한 양민들을 괴롭힐 수도 없고, 장사꾼들의
봇짐을 털기 위해 칼을 휘두를 만큼 마음이 모질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탐관오리에게 가는 봉물을 털
만큼 힘도 없고...... 그러니까 모두가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 가지고 온 보화들을 팔아 연명해 온
셈이지요. 그나마도 바닥이 나서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던 참이지요. 배고픔이 우리들을 얼마나 약하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현재로선 막막할 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예를 익혀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왕협사 같은
무예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예를 닦은 다음에는 무었을
하시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바는 아닙니다. 비록 궁여지책이지만
말입니다. 솜씨가 괜찮아지면 일단 강도로 갈까
합니다."
"강도에는 왜지요?"
"갈매기섬에 묻혔다는 보물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물론 위험이 따르겠지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지 않습니까?"
왕천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고수급
칼잡이들이 보물을 찾으려다가 하나같이 실패하지
않았다던가!
왕천은 한유성에게 그가 두려워하는 삿갓도
굴림의자도 족제비도 갈매기섬의 보물에 도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려다가 차마
그 말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지고 희망이 사라져 뿔뿔이 흩어질 것이
안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매기섬의 보물은 왕천 자신의 것이라는
말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현재로서는 그런 얘기가 허망할 뿐이었지만, 어차피
그 보물을 찾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언젠가는
필요할 것도 같아 긍정적인 쪽으로 격려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었다.
"좋은 의견이군요. 저 역시 유화낭자를 모셔 놓은
뒤에는 여러분들이 가겠다는 강도로 건너갈까
합니다."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무예수련을 하기에도 그쪽이 좋지요.
도장(道場)들이 많은 곳이니까 역모를 꾸민다는 등의
터무니 없는 오해는 받지 않을테구."
한유성은 몹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만일 갈매기섬의 보물을 얻게 될 경우
어디에다 쓰시려고 하십니까?"
"그야 왕협사의 요량이겠지요. 저희들을 부하로
삼아주신다면 우두머리이신 왕협사께서 당연히 알아서
사용하실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겠군요. 하하하...... 그러나 보물을
찾는 일은 아직도 요원하니 그동안 좋게 쓸 방도나
생각해 둡시다."
벌써 새벽이었다. 안개 속에서 개정사의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한협사,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올라가면 저들이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상 이렇게
많은 숫자가 절터를 밟을 이유도 없구요."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기다리게 하고 우리 둘만
들어가 보지요."
경내에는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왕천과 한유성은
가만히 별당쪽으로 다가갔다. 어디선가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주지스님을 뵈온 후 유화낭자를 만나는 게
옳은 순서이겠지요?"
"그렇지요. 우선 여기서 잠깐 기다려 봅시다.
누군가가 나타날 테지요."
얼마 후 뒷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동자
하나가 나타났다.
"뉘시온지요?"
"주지스님 지금 어디계시냐?"
왕천이 대꾸했다.
"예에, 지금 법당에 계십니다요. 곧 나오실 테지만
어떤 분이 만나 뵙잔다고 말씀올릴까요?"
"우리는 연백 땅에서 왔으며 김노인장의 심부름으로
온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려라."
"연백에서요?"
"그렇다니까."
"거 참 이상도 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아, 아니올시다. 곧장 주지스님께로 달려가서
손님이 오셨다구 아뢰옵지요."
동자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참 이상하군요, 한협사. 저는 독심술을 좀
합니다만 저 동자는 분명히 우리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의심을 하지요?"
"글쎄 말입니다. 주지스님이 나타나면 모든 게
밝혀지겠지요."
다시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본당쪽으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스님이 염주알을 굴리며 왕천과 한유성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무관세음보살...... 어서 오십시오. 제가 주지로
있는 몸이외다. 저를 만나시겠다구요?"
왕천이 얼른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에, 연백땅 김노인장의 서장을 갖고 온 왕천이
삼가 문안 올립니다. 이쪽 분은 유화낭자의 오라비가
되시는......"
"철없는 제 누이를 보살펴 주시느라고 얼마나
심로가 많으셨습니까? 그 오라비 되는 한유성이 삼가
감사를 올립니다."
한유성이 얼른 허리를 굽혀 합장하며 말했다.
문득 주지스님의 표정에 수심이 깃들었다.
"연백에서들 오셨다구요?"
"예에."
왕천이 대꾸하며 김노인이 써준 서간을 품에서
꺼내주었다.
주지스님은 그것을 읽는 둥 마는 둥 훑어본 뒤에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불민하여 이런 불행이 생겼구려."
"예에?"
"내가 보낸 행자를 만나지 못했습니까?"
"언제 보내셨는지요."
"사흘 전에 보냈습니다."
"저희들은 어제 출발하여 지금 곧장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일이 괴이할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왜 몇
달째 아무 소식을 주시지 않았는지요?"
"실상은 소식을 드렸으나 두 차례나 보낸 가병들이
중도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기로, 저희들이 이제사 그
연유가 궁금하여 찾아뵙는 것이옵니다."
"역시 그런 일이...... 나무관세음보살......"
"역시 유화 아가씨의 신상에 불행한 일이
생겼구먼요."
"숨길 필요가 없기에 바로 말씀드리지요. 낭자는
나흘 전에 암자에서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어
갔습니다. 두 시녀와 함께 반항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로
없어졌기에, 만에 하나 허락없이 집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고 차라리 그랬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역시 납치된 것이 분명하군요."
"아아!"
왕천과 한유성은 동시에 신음소리를 냈다. 누가
납치해 갔는가? 어디로 갔을까? 굳이 유화를 데리고
간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녀들은 살았는가, 혹은?
한유성은 얼굴을 감싸며 체면 없이 소리내어 울었다.
남매의 불행한 인생이 더욱 서러워져서 우는 것일까.
"누군가가 데려갔음 직한 아주 작은 단서나마
없을까요?"
왕천은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것이 있다면야 짐작이라도 해 보겠지만."
"혹시 가까운 절에 탑돌이라도 떠난 게 아닐까요."
"아닐 겁니다. 아직 한 번도 허락없는 외출은
없었으니까요."
"아 그렇다면!"
"굳이 단서가 된다면...... 물론 이것도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모르지만, 낭자가 증발되기 하루
전에 웬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밥 한끼를 먹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유랑거사의 특징은 왼뺨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는 겁니다."
"오! 바로 그!"
왕천은 소리쳤지만 정작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사정과는 아랑곳없이 태양은 사정없이 동편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날씨가 차가웠다.
마니산 중턱으로부터 내려온 사내는 강도의
시전거리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이름은 장쇠.
등에다 괴나리봇짐을 져서 평범한 길손처럼 보였다.
그만큼 그의 행색에서 유별난 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장쇠는 고개를 수그러뜨린 채 토시 속에 두 주먹을
끼워 넣고는 묵묵히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머머 나으리, 장쇠 나으리가 아니신가요?"
문득 길 옆의 주막에서 소리부터 달려나왔다.
주모였다. 그녀는 어느새 장쇠를 발견하고는 몹시
반겨 맞았다.
"어어, 주모."
"아니 글쎄, 무정하게도 우리 주막 앞을 그냥
지나시기우? 소문에는 장쇠 나으리가 무과급제하기
위해서 요즘 열심히 쇳대기를 휘두르고 계신단 얘긴
들었습니다만, 그래 그 좋아하시던 술까지 끊으셨수?
더구나 이 쇤네까지 잊으셨단 말이우?"
장쇠는 골살을 찌푸렸다.
"난 바빠."
"아이, 아무리 바쁘시더라두 잠깐이나마 들어오셔서
손이라두 녹여 가셔야지요. 자자, 어서 들어와요."
주모는 장쇠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허, 지금 바쁘다니까."
"글쎄, 날씨도 추운데 쇤네가 옛정을 생각해서
나리께 딱 탁주 한 잔 공짜루 대접하려는데 그조차
마다하시려우? 자, 잠깐만 들어오시우. 부탁드릴 일도
있구......"
주모의 간청에 장쇠는 별 수 없이 주막으로
끌려들어갔다.
"딱 한 잔만이야."
"아따 쇤네가 어디 돈 내라 그랬수? 정말 놀라운
일이신 게야. 술꾼 장쇠 어르신네께서 술을
마다하시다니. 역시 무예를 배우시니 인품까지 녹록치
않게 되셨구랴. 아무래도 저번 삿갓 어른한테 혼이
난......"
"그래, 부탁이란 뭔가?"
장쇠는 연거푸 골살을 파며 주모의 말을 끊었다.
"요 주둥아리가 장쇠 나으리의 아픈 데를 다시
건드렸구먼요. 자, 우선 별당으로 드시와요.
차근차근히 부탁 말씀을 올립지요. 어머머, 제법
눈발이 굵어지네."
정작 흐린 하늘에서는 눈발이 드문드문 날리기
시작했다. 장쇠가 별당으로 옮겨 앉아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였다. 주모는 술상에다 안주를 가득 차려서
몸소 가지고 들어왔다.
장쇠의 잔에다 호리병을 기울여 가득 탁배기를 채운
주모는 상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자, 우선 한 잔 드시우. 그래, 나으리께서는 지금
어디를 가시는 길인가유?"
"한양......"
"한양에는 뭣하게요?"
장쇠는 대꾸 대신 잔술을 쭈욱 들이켰다.
"그래, 부탁이란 뭔가?"
"안채에 말이지요......"
"안채에? 거기 누가 있는데?"
"보물이 있사와요."
"보물?"
장쇠의 눈은 번쩍 떠졌다.
"오호호호...... 귀한 거라니까 나으리는
그냥...... 오호호호......"
"글쎄, 어떤 보물이냐니까?"
"처녀."
"처녀?"
"절세가인이라우. 열여덟 살밖에 안된
숫처녀라니까. 우리 청루의 간판으로 키울 생각이우.
강도 제일의 무자리가 될 게 틀림없다우."
장쇠는 주모의 다음 얘기가 나올 때까지 가만
있었다.
"올 데 갈 데 없이 거리를 떠올아다니던
계집아이인데 우연히 우리 주막으로 굴러들어왔지
뭐유."
"굴러들어와? 그래 낭자의 출신성분은 알아
보았나?"
"알아 볼거 뭐 있어유."
"글쎄, 어디서 무얼 해먹던 낭자인 줄도 모르고
숫처녀니 뭐니 하며 나한테 비싸게 팔려는 수작이지?
난 돈 없어. 땡전 한 푼 없는 비렁뱅이라니까. 더구나
계집이라면 이젠 흥미도 없으려니와, 설사 숫처녀라도
머리 올려줄 형편이 못된다 말야."
"아따, 어디 나으리더러 머리 올려 달랬수? 저런
호박이 통째로 그냥 굴러 들어왔으니 너무나 신바람이
나서 나으리한테 자랑해 본 건데...... 그러니까
나으리가 어디 적당한데에 알선해 달라니까유. 돈
쌈지가 듬직한 영감 말이우. 틀림없이 우리 아이를
보면 홀딱 반할 거유. 논 열 마지기는 실하게 받을 수
있을 꺼유."
"내가 매파를 놓으란 말인가?"
"잘만 해 주신다면 내 수고값으로 톡톡히 내리다."
"일 없어."
장쇠는 옆에 놓인 괴나리봇짐을 집어 당기며
일어나려고 했다.
"여봐라, 주막에 아무도 없느냐?"
문득 바깥으로부터 호령치듯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잠깐만 계시우, 나으리. 저 양반이 또
찾아왔구려."
"누구인가?"
"글쎄, 쇠푼 땡전도 없는 작자가 며칠째 찾아와서는
우리 그 아이를 내놓으라고 지랄치는 게 아니겠수?
그러니 쇤네가 나가서 오늘은 따끔하게 말해 돌려
보내야겠어요."
"가만, 내가 나갔다 오지."
"나으리가요?"
"저놈이 무예가라면 더욱 좋지. 내가 그동안 닦은
무예실력도 한번 가늠해 볼겸 저놈을 아주 혼을 내서
쫓아보내 주겠소."
"그거 좋으신 생각이구려. 그러나 살짝 때려서
내쫓으시구려. 살인이라도 났다간 술집 문 닫게
되니까유."
"알았다니까."
장쇠는 미닫이 문은 벌컥 열어 젖히며 바깥을 향해
소리질렀다.
"어느 놈이냐. 어떤 놈이길래 주인 어른 술 마시는
데까지 기어 들어와서 떠들고 야단이야. 어디 썩 나서
보아라."
"어떤 놈?"
덥석부리 사내가 마당 복판에 우뚝서서 말을
되받았다.
장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길을 보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바탕 큰소리를
치고 나온 이상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래, 어디 내가 잘못 말한 거라도 있는가? 나로
말할라 치면......"
"가만, 낯이 익은 얼굴인데......"
덥석부리가 갑자기 누그러졌다.
"낯이 익다구? 그래, 이 강도를 주름잡던 왕년의
파락호 장쇠다."
"오, 장쇠 형님!"
"장쇠 형님? 그렇게 말하는 너는 대체 누구냐?"
"이거 몰라뵙고 죄송합니다. 형님이 이곳에 계신건
정말 천만 뜻밖입니다. 저, 개경 문 밖에 살던
수돌이올습니다."
"수돌이!"
"예에. 그러나 저 주모 말씀입니다. 못된
년입니다요.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안채에다 감춘
낭자 있지 않습니까요. 그 낭자의 임자는 원래......"
장쇠는 수돌의 말에 금새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수돌의 말을 안에서 듣고 있었던지 주모가
발칵하고 달려나왔다.
"뭐라구? 낭자가 자네 거라구? 저런 미친 놈 봤나.
아무리 세월이 어지럽다지만 천하의 법도도 모르는
놈아. 그래 나라법은 멀리 있어도 동네 법도는 가까이
있다. 동네 무서워서 나쁜 짓 못한다는 얘길 네놈은
아직 못 들었느냐? 장쇠어른한테 맞아 죽기 전에 썩
물러가거라. 알겠느냐? 안채의 낭자는 장쇠어른께서
차지하시겠다잖느냐. 알았으면 어서 돌아가라니까."
주모의 발악은 장쇠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눈발은 더욱 굵어져서 마당을 덮기 시작했고 수돌의
머리에도 쌓여져갔다.
"둘다 조용히 해라.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으렷다?
내가 차근차근히 물을 것인즉 묻기 전에는 주모와
수돌이는 입을 닫고 있거라. 만일 묻기 전에
주둥아리를 놀리면 둘 다 그냥 두지 않겠다."
주모는 아직도 장쇠를 공연히 불러들였다는 생각은
않고 있었다. 장쇠는 그녀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때문인지 장쇠의 호통에도 회심의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우선 이쪽으로 올라오너라."
장쇠는 수돌이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장쇠. 그가 삿갓을 만나게 된 경위는 특이했다.
그는 강도의 주막들을 주름잡는 불한당이었다. 힘이
장사여서 씨름으로는 그를 당할 자가 없는 데다 무술
또한 날렵하여서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때문에 무위도식을 업으로 삼는 그로서는 서민의
등을 치며 일상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주막거리는
모두 그의 손아귀 속에 들어있었다. 그의 허락없이는
기생매매나 술장사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만일
어떤 주막에서 장쇠 몰래 무자리를 빼돌린다거나
술장사를 했다간 그날 밤에 그 주막은 대들보가
뽑히고 마는 것이었다.
혹자가 관가에 고발하는 수도 있었지만 금새
풀려나온 그는 아예 그 술집 주인을 반병신이 되도록
패주기 때문에, 매가 겁이 나서라도 모두들 그에게
굽신거리고 그를 두둔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주막이 선다던가 참한 무자리가
들어오면 술집 주인들은 우선적으로 장쇠에게 선을
보이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강도의
주막가에서 장쇠는 가히 제왕이었다. 아무도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는 임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바로 삿갓이었다.
"여보슈, 주모. 행랑채에다 주안상 걸게 차리고 이
주막에 있는 계집애들을 몽땅 불러주슈."
어느 날 저녁 어스름녘에 삿갓이 작정이나 한 듯이
이 주막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주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행랑채에는 그 무서운
강쇠가 술판을 벌여 놓고 무자리들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저 여리고 가냘픈 삿갓이
완강하게 요구하고 나설 경우 그 무서운 장쇠가
기필코 가만 있지 않을 게 틀림없을 일이었다.
심하게는 삿갓이 겁없이 덤비다가 장쇠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쪽 사정을 전혀 모르는지 삿갓은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 여기 열 냥을 내리다. 어서 행랑채에다 술상을
차리고 무자리들을 모조리 불러들이라니까."
주모로서는 열 냥의 돈이 탐이 났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삿갓한테로 장쇠의 여자들을
빼돌릴 방법이 없었다.
"손님, 죄송해요. 벌써 행랑채를 차지한 손님이
계신걸요. 다른 주막으로 가 보셔요."
"어허, 왜 이러나, 주모. 그 행랑채를 차지했다는
손님이 어디 주모의 기둥서방이라도 되는가? 더구나
열 냥씩이나 내겠다는 손님을 다른 데로 가 보라리.
그럼 저 행랑채 손님은 백 냥쯤이나 내고 들어
앉았다는 얘긴가. 어디 그것 뿐인가? 제깐 손님이
얼마나 정력이 좋고 호탕하며 돈푼깨나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계집들을 모땅끼고 앉았다는 건 또
어떻게 된 사연이야?"
"쉿! 조용히 하시라요, 손님."
"뭐, 조용히 하라구?"
"저기 손님이 들어요."
"들으라지."
주모는 사색이 되어 있었고 삿갓은 겁없이
떠벌렸다.
"쇤네 사정을 설명할 테니까 저쪽으로 가시와요."
"싫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그
연유를 듣도록 하겠네."
"그럼 할 수 없죠 뭐. 말씀드리지요. 나중에 손님이
어떤 봉변을 당해도 쇤네는 몰라요."
"봉변이라니. 내 돈 내고 술마시겠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어. 어쨌든 그쪽 손님한테 양해를 구해서
무자리 몇 명만 내보내라고 말씀드려라. 난 계집이
없으면 술맛이 안나는 사람이다. 어서 내가 앉을
자리부터 안내해 보아라."
"글쎄 손님, 저기 계신 손님이 누구신 줄 알고나
계슈?"
"그런 건 몰라."
"장쇠 나으리라면 이 강도 바닥에선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구요."
"글쎄, 난 그런 이름 듣지 못했다니까?"
"그러니까 딱하지 않겠수. 힘이 천하장사여서 그를
당할 자가 조선 천지에선 없다잖겠수."
"그게 술맛하고 무슨 관계라도 되느냐?"
"그분이 우리 주막에서 주안상을 대하고 계신 한
어떤 손님도 받지 않아요."
"왜?"
"그분이 싫어 하시니까요."
"거 고약한 법도 다 있군."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가 보시라니까요."
"좋다. 그 대신 몇 마디 묻겠다. 묻고나서 자네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면 물러가겠다."
"물어보시와요."
"저 행랑방 손님과 주모는 어떤 관계냐?"
"아무 관계도 없어요."
"둘째, 저 손님이 술값이라도 낸 적이 있느냐?"
"......"
"공짜 손님이란 뜻이군."
"외상술을 마실 뿐이지 공짜 손님이 아니야요."
"세째, 만일 행랑방 손님이 주안상을 대하고 있을
때 누구든 바깥에서 술을 마시겠다고 부득부득 우길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장쇠 나으리가 노하시어 틀림없이 그런 손님에겐
손찌검이 내리겠지요."
주모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어서 도망치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불한당이 틀림없구나. 자네는 그런
파락호의 주먹이 겁이 나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접대하게 되는 거구."
"그렇지만 쇤네에게 이익이 되는 일도 있거든요."
"이익이라니?"
삿갓은 주모의 눈길을 받으며 되물었다.
"쓸 만한 무자리가 들어오면 우선적으로 우리
주막에 배당해 주신다거나, 손님이 외상값도 갚지
않고 주막에서 행패를 부린다거나 했을 때
장쇠나으리한테 일러 주면 곧장 오셔서 그런
술손님들을 혼내 주지요."
"내가 듣고 온 소문은 조금 다른걸."
"어떤 소문을 들으셨길래요?"
"여기 주막에서는 어떤 무지막지한 놈이 공짜술을
퍼마시고, 새로 들어온 무자리는 모두 그놈에게
상납되어야 하며, 그런 불문율을 어길 경으 주막의
대들보를 빼어 버린다나?"
"누가 그랬어요?"
"또 있지. 강도의 주막 모두가 어수룩해 보이는
술손님이 들어오면 술 한되 내놓고 한말 술값을 받아
낸다던데?"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냈어요?" "그래서
손님이 대들기라도 했다간 그 고약한 놈이 나타나서
갈비 몇 대를 부러뜨린다던가. 바로 그놈이 장쇠란
말이지. 그래, 그 장쇠란 놈이 지금 행랑방을
차지하고 있으렷다?"
"그래요."
주모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때였다. 장지문 안에서 이런 대화를 끈기 있게
듣고 있던 장쇠가 비로소 반응을 나타냈다.
"으흠! 으음......, 이거 듣자듣자 하니까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군. 어떤 놈이냐. 죽여놓기 전에
낯짝부터 보아 두어야겠다."
"오, 바로 네놈이 장쇠란 놈이란 말이지?"
밖으로 나서는 장쇠를 삿갓은 꼼짝 않고 서서
바라보았다.
주모, 그리고 장쇠를 뒤따라 나오던 무자리 다섯 명
모두가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가냘픈 선비풍의 삿갓이 저 무지막지한
털보 장쇠에게 붙잡혔다간 금새 황천길로 떠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나를 두고 이놈 저놈 했겠다?"
장쇠가 분노를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말했다.
"들은 그대로다."
"뭐라구? 네놈은 내가 어떤 어른인 줄 알고
있으렷다?"
"조금 전에 주모한테서 지루할 정도로 잘 들었다."
"그러면서도 네놈은 겁도 없이 지분거려서 어른의
술맛을 떨어지게 했겠다?"
"천만에. 열 냥씩이나 내겠으니 무자리 몇 명과
주안상 걸게 한 상 차려 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
주막이 네놈의 것이 아닐진대 술손님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가 아니겠는가?"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면?"
"누가?"
"내가."
"그럼 들어 주도록 억지를 써야지."
"네놈이?"
"그래."
"어떻게?"
"귀찮게 굴면 네놈의 갈비뼈 두어 대쯤 분질러
버려야지."
"뭐라구? 이제 뭐라구 말했나? 지금 네놈이 제
정신으로 시부렁거리는 거냐?"
"아직 탁주 한잔 못마셨으니 정신은 말짱하다고
말해도 괜찮겠지?"
"으음!"
갑자기 주막 안마당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장쇠의 입장에서는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조선 천하의 제일가는 장사 장쇠가
아닌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겁없이 대들고 있는
저 비리비리한 삿갓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상대가
누구이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제 아무리
무예가 출중하기로 이제까지는 장쇠의 힘을 당해내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놈이 나하구 힘을 겨루어 보겠다는
말이지?"
"아니."
삿갓은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라면?"
"몇 번 말해야 알아 듣겠나? 아까 내가 부탁한
그것만 들어 주면 네놈하고 싸울 필요가 없게 되지."
"들어 주지 않겠다면 싸움을 걸어오겠다는 얘긴가?"
"아니."
"아니?"
"네놈이 싸움을 걸어오면 내가 상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이지."
"어차피 비슷한 얘기가 아닌가."
"분명히 다른 얘기다. 누군든 공연한 싸움을 걸어온
쪽이 질 경우에는 큰 망신을 당하는 꼴이 되거든."
"그래서 내가 싸움을 걸면 네놈이 이길 것 같아서
하는 얘기겠다?"
"그래. 섣불리 대들지 말라는 얘기다. 망신 당하지
말고 가만히 행랑방을 내놓고 물러가라는 말이다."
"어헛, 이놈이!"
장쇠는 팔뚝을 걷어 올렸다.
"잠깐. 기왕에 싸움을 할 바에는 한 가지 조건을
붙이자."
"뭐라구?"
장쇠는 소리치며 멈칫 섰다.
"이제까지는 장쇠란 놈이 강도의 불한당
우두머리짓을 하고 있었겠지만, 만일 나하고 겨뤄
패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패할 리야 없겠지만 만일 지기라도 할 경우 내가
행랑방을 양보하지."
"안돼. 그 정도 조건으론 부족해."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강도를 떠나든가 내 부하가 되라."
"강도를 떠나? 네놈의 부하가 되라구?"
"둘 다 싫다면 황천길로 보내 버리겠다."
"뭣이!"
범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지른 장쇠는 주먹
한방으로 아예 박살을 내려는 듯이 삿갓을 머리
위에서부터 찍어내렸다.
주모와 무자리들은 동시에 눈을 감았다. 멍청히
서서 장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 채 가라앉아 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다가 단박에 황천길로 가 버리는
구경은 그녀들 눈으로 보기에는 두려운 사건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쪽은 오히려 장쇠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삿갓은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장쇠는 조금 전의 그 기세등등하던 태도와는 달리
화단 쪽에 대가리를 쳐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술이 너무 취해서 제대로 몸을 못 가누누만."
삿갓은 비양거렸다.
장쇠는 다시 일어나서 머리를 몇 번 좌우로
흔들었다.
"이놈이!"
장쇠는 두 손을 펴들고 이번에는 아예 삿갓을
뭉개버릴 듯이 돌진해 갔다.
그러나 그 양양하던 기세도 소용이 없었다. 삿갓의
손가락 두 개가 장쇠의 가슴에 닿는다 싶었는데 벌써
장쇠는 솔개처럼 날아서 담장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삿갓은 두 손바닥을 털며 말했다.
"어허, 천하 제일의 장사라는 놈이 저 모양이니
허풍을 떨어도 너무 심하게 떨었군. 자, 주모.
보았겠지만 이제 장쇠놈은 담장 밖으로 멀리
도망쳤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걸세.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내가 행랑방을 차지해도 불만이 없겠지.
자, 무자리 너희들도 모두 들어와서 내 술잔에다 술을
채우도록 해라. 주모 뭣하구 있어. 아, 어서 한 상
가득히 차려 오라니까."
그제서야 주모도 정신이 들었는지 허리를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아, 예에 나으리. 어르신네를 몰라 뵙고 아까는
손님의 심기를 불편케 해 드렸사와요. 예에 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장 걸게 한 상 바쳐
올리겠나이다."
주모는 바지런을 떨며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
삿갓은 그녀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걱정하지 말아라. 아까 약속대로 열 냥의 술값과
무자리들의 품값은 따로 내놓겠으니 걱정말고 차려
오너라."
그러는 삿갓을 무자리들은 아직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마루 위에서 벌벌 떨고만 서 있었다.
행랑방이 정돈되고 주모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주안상을 차려왔다.
삿갓을 벗은 박진은 행랑방을 차지하고 앉아
무자리들이 부어 주는 술을 벌컥벌컥 받아마셨다.
"어허. 그 술맛 좋군. 이 집 술맛이 그만이라던
강도의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던가 봐."
한 무자리가 삿갓의 무릎 가까이로 다가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님, 손님은 누구시온지요?"
"내가 누구냐구? 그냥 술 손님이지."
"평범한 손님이 아닌 것 같아서 여쭙고 있는
것이야요."
"그럼 무엇을 알고 싶다는 얘기냐?"
"조금 전에 담장 밖으로 날려 버린 장쇠나으리로
말할라 치면......"
"장쇠놈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많이 들었다."
"그의 무지막지한 힘만큼 악명도 높았지요."
"그렇지가 않다. 실상은 벌써 그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찾아온 것이니라. 인간이 배운 게 없어서 제
힘만 믿고 얼마간 나쁜짓을 했겠지만 앞으로는 인간이
달라질 것이다."
"예에?"
"나는 장쇠 그놈의 좋은 성품까지 짐작하고
있단다."
"나으리, 소녀는 나으리께서 장쇠를 물리치신 후에
지금 어떤 뜻으로 다시 칭찬까지 하시는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나으리의 신분에 대하여 더욱
호기심이 갈밖에 없사옵니다."
"네 신분에 대해선 알 필요가 없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장쇠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예에? 그러시면 무엇 때문에 장쇠를 길바닥으로
쫓아 보내셨나이까?"
"아니다. 두고 보아라. 세수를 하고 나서 곧장
이리로 올 것이다."
"예엣?"
무자리들은 다시 두려움에 흠칫 떨었다. 삿갓의
힘을 분명히 보았긴 했지만, 이미 장쇠의 힘을
오랫동안 눈여겨온 그녀들로서는 다시 두 사내가
맞붙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하고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었다. 주모의 조심스런 음성이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손님. 장쇠 어른께서 나으리를 뵙자구 지금 여기
마루 아래에 서 계십니다요. 어떻게 할까요?"
"장쇠가 나를 뵙잔다구?"
삿갓은 주모의 말에 거드름을 피우며 대꾸했다.
"예에, 지금 바로 방문 앞 마당에......"
"거기서 장쇠가 무엇하고 있다는 얘기냐. 나한테
패대기쳐진 분풀이로 도끼나 장검을 들고 다시
쳐들어왔다는 얘기냐."
"아니올시다, 나으리. 추운 마당에 꿇어 엎드려
나으리께 조금 전의 잘못을 사죄하고 있는
중이올습니다요."
"사죄?"
"어르신네를 몰라 뵙고 불손하게도 대든 죄 죽어
마땅하오나 한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나으리를 위해
앞으로 결초보은하겠노라 사뢰고 있는가 봅니다."
"그토록 지극히 용서를 빌겠다는 자가 어째서 직접
나서지 않고 주모를 통해서 나한테 이르느냐."
"그 역시 이유가 있는 줄 아옵니다. 문을 열고
내다보십시오. 담장너머로 패대기쳐진 순간 심하게
입을 다쳐 쉽게 말문을 열 수가 없기로 쇤네한테 그런
통문을 놓았습니다."
"알 만하다. 그러나 내 아직 장쇠놈의 심중을
제대로 알 수가 없기로 용서를 못하겠으니, 반나절
만이라도 거기서 꿇어 앉아 진정으로 나에게
항복한다는 정성을 표시하라고 일러라."
삿갓은 말을 끝낸 다음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모의 얘기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삿갓은 술잔이 탁 소리가 나게
놓으며 옆의 무자리한테 말했다.
"불러들여라."
"예에?"
"마당에 앉아 있는 장쇠 말이다."
"그를 나으리 곁으로 불러들이라구요?"
무자리들 역시 다소는 안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조금전만 해도 그녀들은 장쇠를 모시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삿갓이란 양반이 나타나서 그
무서운 장쇠를 몇 수만에 때려 눕히고 대신 행랑방
차지를 하게 되었고, 무자리들 역시 삽시간에 주인을
바꿔 모시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아까의 주인은 지금 마당에서 눈발을 맞으며 새
주인의 엄명이 내릴 때까지 참회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는 물러가거라. 술상을 새로
차려오도록 주모한테 이르고 내 명령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우리 방 앞에 얼씬하지 말도록 일러두어라."
일단 술상을 물린 삿갓은 뒤로 물러앉아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얼마 후 주모는 새 주안상을 들여
놓았고,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을 턴 장쇠는 눈에
젖은 무릎을 한 채 삿갓 앞으로 기어들었다.
그는 상투자리에서부터 턱을 헝겊으로 감싸고
있었다. 담장 밖으로 떨어질 때 어디엔가 부딪쳐
턱뼈라도 다친 듯했다.
주위는 금새 조용해졌다.
삿갓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장쇠에게 잔을
내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난 남의 마음도 읽을 줄 아는 독심술을
배웠거든. 자 우선 술부터 한 잔 받아라. 실은 자네를
위해서 주안상을 새로 들인 것이다."
장쇠는 턱이 아픈지 상을 찡그리며 내미는 잔을
받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요. 삿갓 나으리신 줄 몰라뵙고
아까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삿갓은 몸소 장쇠에게 호리병의 술을 기울이며 다시
부드럽게 일렀다.
"내가 삿갓이 아니고 보통 술 손님이었다면
자네한테 혼이 났을 게 아니냐?"
"혼이 났다기 보다......"
"그따위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자네는 이제까지
약한 자에게만 혹독하게 굴었다. 그런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자네 스스로가 잘 알겠지."
"예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을 알았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나 역시 자네가 두 번 다시 강도의
불한당이란 이름을 낼 수 없도록 단단히 가르칠
것이다."
"예에, 예......"
"그래 턱뼈가 부러졌느냐?"
"예에, 조금......"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장쇠가 더무룩한 수염을 내밀자 삿갓은 양뺨을
감싸고 있던 헝겊을 풀어 버렸다. 그러더니 하관과
교근(咬筋) 쪽을 몇 번 슬슬 만지고 누르더니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자, 이제 어떠냐. 깨어진 게 아니라 잠시 빠졌을
뿐이다."
장쇠는 턱뼈를 전후좌우로 몇 번 흔들어 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이렇게 신통할 수가 있습니까요. 통증이 씻은
듯이 가셔 버렸습니다요. 감사합니다, 나으리."
"그래, 내가 삿갓이란 걸 어떻게 알았느냐."
"예에, 처음에는 까마득히 몰라 뵈었지요.
소문으로만 듣던 삿갓 어른께서 이처럼 불쑥
나타나시리라고는 꿈에도 짐작 못했거든요. 그런데
하도 당당하게 나오시기에 조금은 긴가민가한 느낌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세상에 가짜가 너무 많아
소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삿갓 어른께서는 도무지
무예자로는 보이지가 않습디다."
"그래서? 건드렸더란 말이지."
"예에, 그렇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말씀드리면 설사
어른께서 삿갓이라 할지라도 무예가 출중하면 얼마나
출중하겠느냐 싶어 시기심에서라도 한 번 겨뤄보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요."
"그래서?"
"그런데 처음에 소인이 화단으로 굴러갔을 때만
해도 소인의 실수인 줄만 알았지 나으리의 그 출중한
무예 때문인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담장
밖으로 뜬 순간......"
"그제서야 내가 삿갓인 줄 알았더란 얘긴가?"
"아뿔사 했지만 때는 늦었지요. 소나무 밑둥에
부딪쳐 곧장 까무라치고 말았으니까요.
어허허허......"
"그래, 세상에선 삿갓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더냐?"
"물론 조선 제일의 고수급 무예자라고 말들을
하지요."
"다른 얘기는?"
"갈매기섬의 보물을 빼내 가셨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요."
"그건 헛소문이다. 바로 얘기하자면 도전했다가
실패했었다."
"아아니, 나으리 같으신 분도......"
"그래,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영 포기한
건 아니다. 언젠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냐."
"나으리의 제자가 되어 무예를 닦고자 합니다.
받아주시기만 하신다면......"
"나로선 함부로 자네 같은 놈을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다만......"
"?"
"자네한테 딸림 부하놈들이 몇이나 되느냐?"
삿갓이 무슨 뜻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싶어
장쇠는 뜨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하라니요?"
"네놈이 혼자서 강도의 주막들을 손아귀에 넣고
흔들었을 턱이 없지 않았겠느냐>"
"아, 그야 그럽지요. 스무남은 명의 못된 동생들이
있긴 있습니다만, 쓸 만한 놈은 한 놈도 없습니다요."
"그래도 갈도 닦으면 못쓸 일도 없으렷다. 그놈들
말고 내 제자가 되겠다는 놈들이 이 강도에는 또
없겠느냐?"
"모르긴 해도 백여 명은 모을 수가 있겠지요.
그토록 많은 제자를 두어서 어디에 쓰시렵니까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다. 마니산 쪽에 터를 보아
두었으니 산채를 짓고 우리들의 본부로 삼을까 한다.
"
"도장을 여실 생각입니까요?"
"그렇다."
"그런 무리들을 거느리자면 많은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건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한테 요량이
있으니 오백의 인명만 모아 오너라."
"오백 명씩이나......"
"어느 정도 훈련이 되면 기마군으로도 키울
생각이다."
"그러자면 더욱 많은 돈이......"
"어허,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니까. 자, 내가
몇 자 글을 적어 줄 테니 지필묵을 준비하여라."
"그것을 어디에다 쓰시게요?"
"시전거리 북편으로 점치는 동네가 있는 걸 알고
있으렷다?"
"예에, 알고 있구 말굽쇼."
"시전 초입에서 헤어나가 여덟번째
점술가(占術家)를 찾아가거라. 가서 내가 써 준
서간을 내밀면 우선 일천 냥의 돈을 내줄 것이다."
"예엣?"
"내가 맡겨둔 것이니 어려워할 것도 없다. 그것을
받아 오늘부터 당장 터를 물색하고 산채를 짓도록
해라. 마니산 중턱이다."
"그런데 나으리."
"왜 그러느냐?"
"만일 그 많은 돈을 받아 소인이 도망이라도
친다면......"
"어허, 그놈. 만일 네놈에게 그런 심보가 있어 돈을
훔쳐 달아난다 해도, 나는......"
"잡으러 나서셌지요?"
"아니다. 똥강아지한테 물린 셈치고 웃고
지나가야겠지. 그러나 자네의 마음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벌써 다 짐작하고 있는걸."
"그러시다면 나으리께서는 벌써 소인에게 그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작정하고 주막에 찾아오신 게
아닌가요?"
"그렇다고 해두자."
"어허, 참......"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자네 고향은
개경이라고 듣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강도로까지 흘러들어 왔느냐?"
"먹고 살지 못해 이쪽으로 굴러들어 왔습죠."
"강도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다더냐?"
"허망한 꿈이었습죠. 갈매기섬의 보물을 캔다는
것이...... 어르신네께서도 실패하신 일을......"
"희망을 버리지는 말아라. 그리고 다시 조심해 둘
일이 있다."
"무엇이옵니까?"
"우리의 집단은 오로지 무예를 닦는 무리일 뿐이다.
엉뚱한 소문이 나면 안 된다는 얘기다."
"그건 왜 그러합니까?"
장쇠는 삿갓을 향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칫 소문이 잘못 났다간 역신죄로 몰릴 가능성도
있느니라. 그토록 어지러운 시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요. 조심하겠습니다. 보물을 캐기 위한
무리도 아니고 오직 나라를 위해 무술을 닦는 무리일
뿐이라고 소문이 나야겠지요."
"그렇다. 그러니까 나의 제자들은 제각기 생업에
종사하는 놈들이라야 된다."
"예에?"
"형식이라도 좋다. 어부고 농부고 대장장이고
돗자리 짜는 놈 푸줏간에서 고기 써는 놈, 직업이
무엇이든 다채로울수록 좋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한테 형싯적이나마 무술을 배우는 댓가로 달마다 한
푼씩 바치도록 해야 된다."
"그렇게 방을 붙이겠습니다요."
"그리고 내일부터 자네를 내 수제자로 삼겠다."
"예에? 정말이옵니까?"
"왜? 감당할 자신이 없느냐?"
"아니올시다. 충심으로 나으리께서 시키시는 일을
다할까 합니다요. 감읍하옵니다요."
장쇠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에 대한 호칭부터 바꾸어라.
나으리니 어르신네니 모두 가당찮다. "
"그럼 어떻게 불러 올릴까요?"
"사부님으로 불러라."
"예에, 사부님."
"그리고 자네는 이제부터 주색에서 손을 끊도록
해라."
"예에?"
"과음 과색을 삼가라는 뜻이다. 무예를 닦는 자의
기본자세이기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강도의
주민들로부터 자네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존경을 받는 대신 그들에게 두려움을 준다면
우리가 닦는 무예도 모두 허황된 것일 수밖에 없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사부님."
"자, 지필묵을 이리 꺼내어라."
삿갓과 장쇠와의 밀담은 그런 식으로 끝났다.
장쇠는 삿갓이 하고자 하는 모든 짓거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힘도 없었다. 다만 그를
존경할 따름이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조건
위대할 것이고, 그의 가슴 깊숙이 담겨 있을 꿈은
찬란할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제가가 된다는 사실은
기막힌 행운에 속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무엇을
알아내려고 캐물어 볼 필요도 없을 일이었다.
그로부터 그 무서운 무예를 수련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실상 얼마나 굉장한 행복인가. 소문으로만
듣던 삿갓이 어느 날 갑자기 장쇠 앞에 우뚝 나타났던
것이다.
어쨌든 장쇠는 삿갓의 말대로 일을 착착 진행했다.
그의 부하가 되었고 제자들을 모았다. 마니산
중턱에다 산채를 열고 은밀한 무예장을 개설했다.
수백의 제자들이 깊은 수림 속에서 삿갓으로부터
무술을 닦았다. 그 혹독한 수련을 통해 오합지졸들은
어느새 실력이 향상되어 무예자로서의 기틀이
잡혀지고, 어느 틈에 생긴 무예자로서의 긍지는
그들의 인품까지 새롭게 변모시키고 있었다.
어언 한 해가 지났다.
그해 겨울 늦은 밤에 한 밀명자가 삿갓의 산채로
조심스럽게 찾아들었다. 그는 장쇠에 의해서
삿갓한테로 인도되었다.
장쇠는 스승 삿갓이 그 밀명자와 무슨 밀담을
나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삿갓은 밀명자를 거실
깊숙한 데로 데리고 들어갔던 것이다.
장쇠는 삿갓의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밀명자는 아직도 삿갓의 거실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장쇠는 어쩐지 긴장을 느꼈다. 삿갓의 전에 없이
초조해 하던 태도라든가, 일개 밀명자 하나를
거실로까지 끌고 들어가 오랜 시간동안 밀담을 나누는
일 하며......
다른 때라면 장쇠도 제 거실로 돌아가 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시름시름 내리는 섣달의 눈발을
바라보며 본당 툇마루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었다.
"이봐, 장쇠!"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장쇠는 벌떡 일어섰다.
삿갓이었다. 그의 옆에서 밀명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 어째 여기서 졸고 있느냐?"
"예에, 저 그냥......"
장쇠 자신도 무엇 때문에 여기서 서성거리다가 잠이
들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었다.
"알 만하다. 자네의 무예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진전을 보았다는 뜻이다."
"예에?"
"그렇지 않고서는 나의 긴장을 자네도 느꼈을 리가
없다. 나의 초조한 마음을 자네가 무심코 전달받았기
때문일 게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잡고 보니 사부님이 초조해
하시는 걸 보고 소인도 무심코 불안해져서 이곳을
서성거렸나 봅니다."
삿갓은 금새 밀명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 보시오. 협사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린 아무
얘기도 없었는데 이심전심이 있었던 거요. 내
수제자인 장쇠란 인물이오. 심기를 읽는 수법만
보아도 그의 무예 실력은 대단한 것이오. 사백여 내
제자들 대부분이 저 정도인 것이오."
"대감께서 몹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 치사에는 대꾸하지 않고 삿갓은 다시 장쇠에게
말했다.
"마침 거기 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를
참이었다. 이분과 인사를 나눌 것까진 없어도 서로의
얼굴을 익혀 두어라.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테니까.
그땐 우리 편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삿갓은 잠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역시 두 사람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장쇠는 우선 이분 협사에게 잠자리를 드리고 곧장
나한테로 돌아오너라. 먼 길 떠날 차비를 하고서
말이다."
"예에? 먼 길요?"
"그래. 오늘 밤 안으로 떠나야 한다. 그러니까 어서
이분께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내 거실로
들어오너라."
삿갓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의문 투성이였지만 더 질문할 수가 없었다.
정체 불명의 밀병자에게 잠잘 곳을 내준 장쇠는
사부의 엄명대로 괴나리봇짐만 단출하게 짊어진 채
삿갓의 거실로 들어갔다.
삿갓은 장쇠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잠자리를 보아 주었느냐?"
"예에, 이렇게 여행 떠날 차비까지 하고 왔습니다."
"여비는 여기 있다. 자, 어디 가서 한 보름쯤 쉬다
오너라."
"예에?"
"아까의 그 밀명자한테 들켜선 안 된다."
장쇠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부님, 소제는 아까부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밀명자는 누구한테서 왔으며, 저더러
여행을 떠나라시더니 이번에는 그냥 보름쯤 놀다
오라시질 않나. 그나마 그 밀명자한테 들키지
말라시니......"
장쇠가 장황하게 늘어 놓는 불평을 듣고 있던
삿갓은 아까의 그 회심의 미소를 다시 머금었다.
"너무나 복잡하고 조심해야 될 사정이어서 자네한테
모두 설명할 길이 없구나. 그렇지만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될 테지. 그러니까 이상 더 묻지 말고 그냥
쉬엄쉬엄 돌아다니며 보름쯤 유쾌하게 놀다 오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소제 더이상 묻진 않겠습니다만 이거
원 명령이 하두 괴이해서......"
장쇠는 그 길로 마니산 산채를 떠났다.
졸지에 받고 본 엉뚱한 명령이라 방향 감각이
모호해졌다. 두둑한 노자돈에 유람도 좋지만 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며 보름을 지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는 졸립기도 해서 수련장으로 사용되는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 숨 맛있게 잠을 잔 후, 정오
즈음해서 서둘러 하산을 했던 것이다. 백설이 강도의
천지를 덮고 있었다. 그는 하릴없는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어디로 가서 주어진 기간을 소비해 버릴까를
열심히 궁리했다. 졸지의 명령은 장쇠를 여전히
당황케 만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우선 시전거리로 가서 국밥이나
한 그릇 말아 먹은 다음 갈 곳을 정하자.'
그렇게 되어 시전거리로 들어선 장쇠였다. 작년
삿갓한테서 혼이 났던 바로 그 주막으로 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었는데
곧바로 주모한테 잡힌 것이며, 또다시 뚱딴지 같은
사건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막 별당 안으로
수돌이를 불러들인 장쇠는 곁에 앉아 있는 주모한테도
꼼짝말고 기다리라는 엄포를 놓았다.
"자, 우선 주모부터 먼저 말해라. 나중에 대질시킬
때까지 수돌이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 기회를 충분히
줄 테니까. 알았지?"
"예에, 그럼요."
"그럼 주모부터 어떻게 해서 그 보물 같은 낭자를
얻게 되었는지 차근차근히 말해보아라."
"말씀드리지요, 나으리. 그러니까 보름쯤 전이야요.
어떤 무사 양반이 저 낭자를 데리고 왔지 뭐에요.
와설랑 백 냥에 사라지 뭡니까요. 가만히 자색을
보니까 강도 제일의 간판 무자리가 될 만큼 아주
그만입디다요. 그러나 백 냥 돈이 어디 강아지
이름입니까. 탐은 나지만 너무 비싸서 흠을 잡아 값을
깎고 깎아서 오십 냥에 사들였지요. 그뿐이야요."
"아닙니다, 형님. 시뻘건 거짓부렁입니다요!"
"넌 아직 가만 있으라니까!"
수돌의 말에 장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돌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면서도 장쇠의 주먹이 무서워
한사코 참아내는 듯했다.
장쇠는 얼마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주모한테 다시 물었다.
"주모, 그럼 저 수돌이는 어떻게 되어서 숨겨둔
낭자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느냐?"
"그건 말입지요. 쇤네가 낭자를 사들이고 그 무사가
떠나자 곧 뒤따라 들이닥친 저놈이 조금 전의 낭자가
제 여동생이라면서 내놓으라고 하잖아요, 글쎄."
장쇠로선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장쇠는 이번에는 수돌이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수돌이가 그 낭자가 네 것이라고 주장할
차례다.
차근차근하게 거짓없이 말하렷다. 너 내 주먹알지?
조금이라도 허튼소리 했다간 박살이 날줄 알아라."
"예에 예. 어떤 형님이라고 면전에서 거짓을 말하여
올리겠습니까. 그럼 바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서 말해 보아라."
"제가 개경에서 일거리를 찾아 이쪽으로 출발한
것은 달포 전입니다."
"그래서?"
"노자가 몇 푼 없으니 어디 여인숙엔들 들겠습니까.
그냥 산속에서 땔나무에 불을 지펴 추위를 막게
하고선 마악 잠이 들려는데 바로 그 낭자가 이쪽으로
달려들지 않겠습니까요."
"그건 왜?"
"쫓기는 몸인데 숨겨만 주신다면 그 은혜를 반드시
갚겠노라지 않습니까요."
"그래서?"
"낭자의 자태가 곱기 때문이거나 나중의 보상
때문에 그녀를 구해 준건 결코 아닙니다."
"자네가 구해 주었다는 얘긴가?"
"결국 그런 셈이지요. 바로 제 잠자리 뒷쪽에
곰굴이 있었거든요. 거기 숨으라고 그랬죠. 낭자가
숨는 걸 보고 저 역시 자는 척 했죠."
"그랬더니?"
"한 놈이 씩씩거리며 뒤쫓아 왔더군요. 등에다
장검을 메고 왼쪽 뺨따귀에 시뻘건 흉터가 있는
놈인데......"
"뺨따귀의 흉터?"
"칼자국이 분명했습니다. 그놈이 낭자가 지나가는
걸 못 봤느냐구 묻길래 난 모른다구 딱 잡아 떼었죠.
그리구선 다시 잠이 든 척했지요. 이튿날 정오까지
낭자는 토굴 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요. 왜냐하면
그 고약한 무사가 근처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죠. 나중에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재빨리 낭자를 끌어내어 이쪽으로 달려왔습죠."
"무엇하는 낭자라더냐?"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자기 말고 또 두 명의
낭자가 함께 잡혀 왔노라고 나중에사 얘기하더군요."
"어째서 이곳엘 오게 됐느냐 말이다."
"한양도 위험하고 개정사에도 연백에도 갈 수
없다며 중얼거리더군요. 그러니 자연히 이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요. 그동안 줄곧 그 낭자들 제
여동생으로 가장시켜 데리고 다녔죠. 밥을 사주고
잠자리도 구해 주며 강도까지 흘러왔지만 낭자나 저나
사실 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요. 노자돈은 거의
바닥나기 시작했었으니까요."
"좋다. 그럼 낭자가 여기 주막에 들게 된 경위를
말해라."
"그건 아까 쇤네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모는 가만 있으라니까!"
장쇠의 고함소리에 주모는 기겁을 하며
기어들어갔다.
"바로 이 주막으로 들어와 밥술이나 얻어 먹고
가려했던 게 잘못이지요. 우린 바깥 평상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국밥을 들면서 의논을 했지요. 이제
돈도 떨어졌으니 낭자를 더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다면서...... 바로 그때 우리 얘기를 엿들었는지 저
주모가 낭자더러 오갈 데가 없으면 당분간이라도 주막
일을 거들어 달라고 넌즈시 말을 걸어온 겁니다요."
이번에는 장쇠가 수돌의 말을 받아 주모를 향해
얘기를 이었다.
"그런즉슨 주모는 수돌이가 맡긴 낭자가 탐이 나서
낭자를 빼돌리고 수돌이를 떼어 버릴 생각이었지?"
"아니야요, 나으리.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야요. 실인즉슨 그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저
년을 팔아 넘기고 간 것이야요. 저 놈의 말은......"
"시끄럽다, 이년아. 내 아직 누구의 말도 곧이
곧대로 믿는 바는 아니지만 가만히 양쪽의 송사를
들어 보니까 수돌의 말뽁에 훨씬 마음이 쏠린다. 그건
그렇고, 지금 곧 그 낭자를 내가 만나 보겠다. 만나서
얘길 들어 보면 금새 누구 말이 맞는지 들통이 날 게
아니냐. 만일 그때 주모의 통정이......"
"왜 이러시와요, 나으리. 실은 그년의 자색이
아까와 꼭꼭 숨겨 두었다가 나으리한테
바치려고......"
금새 아양을 떨고 나오던 주모가 흡뜬 장쇠의
눈망울과 마주치자 다시 자지러졌다.
"관가에 일러 거짓 송사를 일으키는 것까지는
주모의 자유다. 그러나 그랬다간 나중에 내가 가만
있지 않겠다. 거짓말은 그만하고 어서 낭자가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해라."
"예에 예, 나으리, 아무래도 그년은 나으리께서
차지하셔야지요. 허나, 그동안내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한 비용은 나으리께서 참작하셔야 합니다요."
"물건을 보여 주고 이를 말이다."
장쇠는 여행 첫날부터 당하는 기이한 사건 앞에서
그나마 신이났다. 아직 강도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어쩐지 이번 여행은 자신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아가야, 내가 전날 얘기해 준 바로 그 어르신네가
널 만나러 오셨다. 일어나 앉거라. 널 팔자 고치게 해
주느라고 내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는 줄이나
아니......"
주모가 여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절거렸다.
장쇠는 생각하고 있었다.
낭자에게는 어떤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다르게 할 일이 없는 여행길에 오른 장쇠로서는
낭자의 어떤 사연이라도 듣는 게 즐거움일 성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모와 수돌이 역시 주위로부터
물리치는 게 옳을 듯했다. 단둘이 앉아야 이야기가
제대로 술술 나올 것이었다.
빠끔이 열린 무틈으로 눈부신 듯한 눈매로 이쪽을
기웃거리는 낭자가 보였다.
불안한 듯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태가 낭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듯했다.
"주모와 수돌이는 다른 데로 가지 말고 바깥채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 저 낭자와 단둘이서 할 말이
있는 즉 나중에 너희들을 불러 그 결과를 알려
주겠다. 자, 둘은 어서 물러가거라."
바깥이 조용해지자 장쇠는 비로소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낭자에게 입을 열었다.
"낭자는 이 세상에서 내가 본 여인네들 중 가장
아름답소. 그러나 내가 이곳에 온건 낭자의 자색이나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기이한 인연이지만 만나기
전부터 왠지 낭자에 대하여 호기심이 물씬
일었던거요. 나를 두려워말고 낭자의 사연이나 얘기해
주구려. 남녀 유별하여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긴 하나 사정이 그렇지 못한 즉 양해하길
바라오. 난 장쇠라 부르오."
낭자는 장쇠의 정중한 예의에 다소 안심을 했는지
수심 가득했던 얼굴에 희미한 화색을 떠올렸다.
"소녀로선 별로 아뢸 것이 없나이다. 비록 산중에서
목숨을 구해 주고 이곳까지 소녀를 데리고 온 수돌이
오라버니께 말씀드릴 만한 것은 모두 아뢰었거늘 달리
무얼 더 나리께 일러바치겠습니까. 다만......"
"주저말고 말하시오."
"무례한 질문이오나 나으리께서는 어떤
분이온지요?"
"나 말이오? 하하하...... 하긴 그렇구려, 내
소개도 없이 낭자의 신분부터 캐려 했다니......
진정으로 말해서 별 다른 신분도 없소이다. 사직이
바뀐 데다 시절마다 야단스럽다 보니. 하기야 양반
쌍놈 노비의 구분조차 모호해졌지 않소. 물론 낭자가
알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니겠지요. 난 개경 근처에서
농사를 짓다 이리로 왔지요. 지금은 조선 제일의 검사
문하에 들어 있는 수제자입지요."
"그 스승의 존함은?"
"그건 말해선 안 됩니다."
"혹시 왕천......?"
"왕천? 못 듣던 이름인데."
"혹시나 해서요. 소녀의 이름은 유화라 합니다."
장쇠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유화는
곧장 가문의 내력과 그동안의 기구했던 지난 세월을
낱낱이 장쇠에게 발설해 버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나친 비밀을 말하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괴로움을 달랠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장쇠에
대한 신뢰감이 컸기도 했었다.
"......그 이상하구려. 뺨따귀에 흉터 난 놈
말이오. 그러니까 세 낭자가 잠든 새에
몽혼약(夢昏藥)을 먹여 개정암으로부터 보쌈해
나왔더란 얘기지요. 그놈은 대체 누구이며 하필
낭자들을 겨냥한 이유 또한 무엇일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지요."
"어쨌든 낭자는 앞으로 어떻하겠습니까?"
"연백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흉악한 자들이 많아
길이 무섭고, 또한 이곳 주모의 감시 또한 극심한
데다 무엇보다 저희들을 끌어내온 그 얼굴 상처 있는
자의 추격이 두려워 선뜻 판단하기가 어렵사옵니다."
장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신분 높은 이 아름다운
낭자를 위해 그럴 듯한 일을 한다는 건 좋을 일이다.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역경에 처해 있는 인간을
보살펴 준다는 일도 얼마나 사나이다운 행동인가!
유화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어지러운 세월이
유죄일 뿐이다. 그녀를 무사히 제 고향으로 데려다
주자. 무엇보다 장쇠의 지금 입장이 목적지도 없는
여로에 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연백땅을 목적지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낭자!"
"예에."
"낭자를 연백의 김노인네 저택까지 무사히 모셔다
드릴까 하오."
"무사님께서요?"
"좋은 일이오. 더구나 난 지금 보름 동안이라는
휴가 중에 있소. 낭자를 위해 길을 떠나 본다는 것이
나의 가장 뜻깊은 휴가가 될 것 같소."
"그러나 소녀 때문에 어르신네께서 중도에 화라도
입으실 경우......"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힘깨나 쓸줄 알고
최고수의 스승 밑에서 칼솜씨를 배운 자요. 자,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흔쾌히 대답하는 장쇠를 보며 유화는 무작정 기쁨에
들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백의 어르신네께서 몹시 감사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서 자청한 일이 아니란 것만 낭자는
분명히 알아 주시오."
"고맙습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하오나 소녀에겐 지금 수중에 노자가 한 푼도
없습니다. 야밤에 보쌈되어 끌려나온 몸이어서."
"돈은 무엇에 쓰시려오?"
"주모한테 신세진 값하며 수돌이 오라버니의 쌈지를
축내게 한 것이라든가......"
"아하하......, 그것이라면 염려 마시구려. 내가
미리 대납하고 연백으로 가서 되돌려 받지요. 그나마
낭자께서 굳이 되돌려 주시겠다면 말이오."
"너무나 감사합니다."
유화는 미처 인사말을 끝내지 못하고 목이 메었다.
"여봐라. 주모, 그리고 수돌이."
장쇠는 여닫이문을 열고 나서며 큰 소리로 불렀다.
"예에."
그들은 반은 주눅이 들고 반은 호기심 어린
얼굴들을 하고 장쇠 앞으로 달려왔다.
"내가 이 낭자를 사기로 했다. 서로가 그렇게
합의를 보았다."
"예에."
수돌이와 주모가 동시에 올려다 보았다.
"이상한 얼굴들로 바라보지 말아라. 내가 이 낭자의
집을 알고 있거늘 내일 아침에 모시고 떠날까 한다.
고귀한 신분의 따님이시다. 주모는 그것도 모르고
무자리로 팔아넘기려 했으니 그 죄를 관가에 물으면
곤장 백 대 감은 되겠으나, 전날에 나한테 한 온정도
있고 하여 눈감아 주겠다. 그 대신 잘 치장시키고
여로에 불편 없도록 옷가지 등을 잘 보살펴 드려라."
"예에."
주모는 억지 대답을 하는 듯했다.
"그동안 저 낭자를 보살펴 준 댓가로 오십 냥을
주겠다. 이만하면 됐는가?"
"예에 예, 나으리. 충분하고 말굽쇼. 이렇게 많은
돈을......"
주모는 금새 입이 함지박만큼이나 벌어져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리고 수돌이 자네."
"자네는 지금 곧장 대장간으로 가서 장검을 한 자루
갈아 오너라."
"칼은 무엇에 쓰시게요?"
"낭자를 보호하려면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동안 자네가 낭자를 보살펴 주느라고 애를 많이
썼겠다. 물론 보상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겠으나 그
기특함을 보아 내가 우선 오십 냥을 주겠다. 객지에
와서 돈이 없으면 구박받을 게 뻔하고 나쁜 짓 하기
십중팔구이니라."
"고맙습니다. 장쇠 형님. 이토록 궁하지가 않다면야
받지 않아도 좋으련만...... 그럼 곧장 대장간으로
달려갔다 오겠습니다요."
"그래라. 그리고 내가 보름 후에 다시 이곳에
나타날테니 그동안 일자리를 구해 보고 신통치가
않거든 나한테 일러라. 새 호구책을 마련해 보든가
아니면 내 부하로 써 줄지 모르겠다."
"예에 예,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만 믿겠습니다."
장쇠는 가슴이 뿌듯했다. 벌써부터 시작한 좋은
일을 무사히 끝냈다는 기분가지 들어 마냥
유쾌해졌다.
"주모, 이젠 주안상을 올려라......"
8. 설야의 피
삿갓은 며칠 동안 고민에 싸여 있었다. 하루종일
침울한 표정이 되어 거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무렵이었다. 당직 제자가 달려와서는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달하는 것이었다.
"누구라더냐?"
"죄송하오나 이름을 댈 수가 없는 게 유감이라구
그랬습니다."
"이름을 댈 수 없다구? 건방진 손님이로군. 혹시
우리 도장에 도전장을 던지러 온 것은 아니더냐?"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등에 장검을 멘 것으로 보아
무예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시비를 걸러 온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좌우지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려보내라."
"예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성함을
들이밀 수는 없지만 사부께 전날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만 전하면 아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삿갓은 얼핏 머리속으로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 그는 한양에서 온 밀명자가 떠난 후부터 정체
불명의 사내라면 무조건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좌불안석하여 오로지
초조하고 신경질만 날 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은혜 입은 사람이라면서 조용히 만나잔다.
"글쎄, 내가 은혜 입힌 인간이 없는데? 혹시......
그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장문 옆에 서 있습니다."
"데리고 오라. 어디 낯짝이나 구경하자."
얼마 있지 않아 제자는 문제의 그 사내를 데리고
왔다.
"오, 이거 누구시라구! 요즘 저는 사람 만나는 게
겁나서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이거 큰 실례를
범할 뻔 했소이다."
하얀독수리 최동이었다.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삿갓은 진실로 기뻐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랠길도
없고, 또 답답한 가슴을 풀 수 있는 상대도 없어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중에 마음으로 존경하는 하얀독수리를
만났으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시 하얀독수리는 뒤엉켜 있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 확실하였다.
"어쨌든 잘 오셨소.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오. 그래,
너는 멀찍이 물러가거라."
제자를 물리친 삿갓은 하얀독수리를 끌어서 거실로
안내했다.
"정말 반갑소이다. 은혜입은 사람이라기에 무슨
얘긴가 했지요. 신분과 성함을 밝히지 못한 최협사의
처지가 조금은 이해가 가는구려. 그래,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지요?"
"박협사가 강도에 숨어 힘을 기르고 있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전토에 쫙 퍼졌지요."
"소문이 났다구요?"
"그나마 요란하기만 하더군요."
"어떻게요?"
"누군가가 뒤에서 박협사를 밀어주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유리할 게 전혀 없는
소문이지요."
"음......"
삿갓은 골살을 팠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귀공이 대단한 고민 속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작으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찾아왔소이다."
삿갓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만일 하얀독수리만 아니었어도 베어버렸을 터이었다.
그만큼 삿갓의 비밀은 신중한 것이었다.
"최협사의 말씀이 옳소. 제가 박협사에게 도움을
드린다기보다 다소의 참고가 될 만한 얘기거리를
가져온 것밖에 없소이다."
"지금의 저한테는 최협사의 방문이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천군만마의 우군이 도착한 것과
같소이다. 그래, 세상에서는 저를 두고 어떻게들
말하고 있습디까?"
"예, 우선 박협사한테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소문을 얻어 들은 경로부터 밝혀야
되겠구려."
"좋지 못한 일?"
"그렇습니다. 물론 그 소문의 진부야 확실히 가릴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얘긴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누구 밑으로 갔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최협사의 고정관념 때문은 아닌가요?"
그래 놓고 삿갓은 공허하게 껄껄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얀독수리는 자신 있게 웃었다.
"그럼 제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저의 동문인 흑사마귀가 귀띔해 줍디다."
"흑사마귀! 그는 지금 다섯째 왕자 나으리의
오른팔이 아니오?"
"물론이지요. 박포 대장군의 심복이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박대장군께서 소문을 내신 거군요."
"결국 그런 셈이지요."
"최협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저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그토록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흑사마귀도
저한테 귀띔했으니까요. 그런데 박협사께서는 역시
박대장군의 은밀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게
사실이겠지요."
"이 지경에 와서 숨겨 무엇하겠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을 때부터 저한테는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이란 건 남의 돈으로 자신의 힘을 길러
갈매기섬의 보물에 다시 도전하시겠다는 거겠지요?"
"귀신같이 짚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나중의 일일
뿐입니다. 현금의 사정이 다급하다는 겁니다."
"박대장군이 방원 왕자 나으리께 반기를 들테니
협조하라는 밀명이 왔겠지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려는 전날
최협사께서 저와 헤어질 때 귀띔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역시 그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로선 지금 어떻게 처신해야 옳을는지요."
"그보다 지금 어떻게 조처를 취하고 있는가
그것부터 알고 싶군요."
"뻔하지 않습니까. 박대장군의 후의로 제 힘을
키우고 있으니 그분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섣불리 군사를 동원할 수가 없고, 하지
않으려니 저의 모가지는 그문의 손에 잡혀 있는
상태이고...... 그러니 어떻게 하면 이런 처지로부터
도망치느냐 하는 궁리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고 있군요."
삿갓은 그러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제가 몇 가지 도움될 만한 말씀을 드리지요."
"제발 도와 주십시오."
삿갓은 하얀독수리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한양으로부터 밀명자가 왔겠지요."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박대장군께서 은밀히
보냈습니다."
"문서로 보냈던가요."
"도중에 잠복하고 있을 방원 왕자 나으리의
부하들에게 빼앗길 염려를 했던가 봅니다. 그런
물증을 남기면 곤란하지요."
"그래서요?"
"밀명자가 구두로 전갈해 왔습니다."
"내용은 무엇인데요?"
"어떤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대가 직접 오든가
아니면 가장 믿을 만한 부하를 내게 보내라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궁여지책이었습니다. 그 밀명자가 보는 앞에서 제
수제자인 장쇠를 먼저 보내는 척했습니다."
"보내는 척하다니요?"
"그래야만 제가 박대장군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되니까요. 그러나 일단 장쇠가 그분 앞에 나타나면
필시 위험한 밀명을 줄 것이기에 보름쯤 쉬엄쉬엄
놀다 오라구 그냥 내보냈지요."
"그건 일시적 모면은 되나 문제해결책은 아니잖소?"
"그렇기에 애만 태우고 있는 게 아니겠소."
"이번 거사의 주모자가 누구란건 알고 계시겠죠?"
"네째 왕자이신 방간나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원나으리에 비해 인격과 공훈과
위세가 뒤떨어지지요. 그러니까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최협사께서는 어떻게 생각됩니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같은 처지에
놓인 흑사마귀가 다칠까 싶어 제가 직접 찾아가
만났었지요."
"같은 처지라니요?"
"방원 왕자께 흑사마귀를 추천한 건
박포대장군이시거든요."
"그러니까 이 편도 저 편도 들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의리 때문에 몹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사 날짜는 다가오고."
"거사일까지 알고 계시나요?"
"정월 대보름을 기해 거병한답니다."
"누가 먼저 칼을 뺀다는 얘깁니까?"
"박대장군 쪽이죠. 그러니까 그쪽에서 박협사한테도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아마 오늘 내일 말씀입니다."
"정말 난처하군요. 공연한 싸움 편들었다가
실패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래,
흑사마귀는 어떻게 하겠답디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나 아마 방원나으리
쪽으로 붙을려는가 봅디다."
"그럼 저더러도 방원나으리 쪽으로 붙으라는
뜻입니까?"
"아니죠, 지금 당장 가병들을 이끌고 사냥을
떠나라는 얘깁니다."
"사냥이라니요?"
"박대장군의 성화 같은 독촉이 있기 전에 모른 척
사냥을 떠나라는 얘깁니다. 그 시일을 넘겨 버리라는
뜻이지요."
"그럴 듯하군요."
"참고해 두시오. 결전장은 개경이라니까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하필 개경입니까?"
"대상왕의 진노가 크시어 한양을 피하는가 봅디다."
삿갓은 다시 하얀독수리에게 물었다.
"만에 하나 방간 왕자나으리 편이 이겨서 거병을
회피한 죄를 저한테 물어올 경우 어떻게 대답해야
되지요?"
"이쪽에서 밀명자를 보냈으나 정체불명의 자객에게
중도에서 살해되어 명령을 받자올 수가 없었노라
대답하십시오."
"그렇게 밖엔 대답할 길이 없군요."
"자, 그럼 저는 일어설까 합니다."
"아니 왜요? 다만 하루라도 편히 쉬시고
떠나야지요."
"그러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 드나드는 것조차
벌써 저들의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죠. 목숨이 걸린
일이고 보니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붙잡을 수가 없군요."
"그러니까 박협사께서는 늦어도 내일 중으로 행방을
감추셔야 합니다."
"그렇게 할까 합니다. 그런데 최협사는 지금 어디로
가시렵니까?"
"발길 닿는대로 바람 부는 대로 떠나렵니다."
"고생이 많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차제에 저와
손잡고 보물이나 찾는 것이 어떨는지요."
"저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협사가
굴림의자와 손을 잡고 모종의 일을 꾸민다는 게
사실인지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저번에 말씀하셨죠. 그래서 어림잡아 말해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조심해야 할 겁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가차없이
상대를 차 버리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저한테도 요량이 있습니다. 여러 모로 감사합니다.
그럼 최협사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한 달쯤 뒤에 다시 여길 들르겠습니다."
"한 달쯤 뒤라면......"
"모든 일이 결판났을 때지요. 자,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하얀독수리는 떠났다.
그가 떠나자 삿갓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성질이 다른 한숨이었다. 이번의
것은 어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쉬는 안도의
한숨소리였던 것이다.
한편 장쇠는 유화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낭자, 바람이 차갑습니다.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강화만을 건너 풍덕으로 해서 도보로 연백으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거룻배에서 내려 가능하다면
마필을 구해 유화를 태우고 갈 작정이었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바닷물은
그것을 순식간에 집어삼켜버리고 있었다.
장쇠로서는 조금도 삿갓의 명령을 이해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불가사의를 그토록
괘념하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유화를 데겨다 주는
일이 마치 삿갓이 명령을 내려 행하는 일처럼
느껴지기조차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유화를
모시는 일에 충실할 것을 몇 번이나 다짐하는
것이었다.
해상은 백설의 천지였다.
거룻배가 피안에 도착하자 곧 들판이 시작되었고,
거기에도 역시 하얗게 눈더미가 덮여 있었다.
정강이까지 눈 속에 빠질 지경이었다.
"유화낭자, 어려워 마시고 제 등에 업히시지요.
마침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군요, 낭자의
걸음걸이로는 해 저물기 전에 마을까지 도착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요."
몇 번씩 넘어지던 유화는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였다.
"자, 어려워 마시고 업히십시오."
장쇠는 유화 앞을 막고 앉았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소녀 지금 체면 불구하고
업히겠습니다."
장쇠의 짐을 대신 받아 쥔 유화는 염치 불구하고
장쇠의 등에 업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가뿐할 수가 없군요. 소인이 원래 씨름을
업으로 삼았었기로 낭자의 몸무게 정도는 솜뭉치 한
줌 든 기분으로 밖에는 안 느껴지거든요."
장쇠는 유화의 마음을 헤아려 어려워 하지 않도록
일부러 껄껄 웃기까지 했다.
백설의 망망대해는 계속되었고 마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날은 저물
것이었다.
사람은 커녕 강아지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도대체가 살아 있는 것의 움직임이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장쇠는 얼마만큼 불안해 지고 있었따. 세찬
추위에도 불구하고 유화를 업고 눈길을 헤쳐 나가는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힘드실 텐데, 소녀 내려서 걸어 볼까 합니다."
"힘들다뇨? 아직 전혀 힘들지가 않으니 어려워
마십시오."
장쇠는 더욱 속력을 냈다. 들판에는 두 개의
발자국만 점을 찍어 나가고 있었다.
"어머!"
갑자기 유화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낭자?"
유화가 가리키는 앞을 보니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한 개의 검은 점이 꼼지락 거리는 게 보였다.
"오, 틀림없이 사람이군요. 그러니까 인가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백설의 천지
위에 우뚝 서 버린 검은 그림자에 대한 야릇한
공포감이 몰려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든 겁날 것은 없었다.
천하장사의 힘을 가졌고 조선 제일의 고수 삿갓의
수제자이며, 이럴 경우를 대비해 백 명의 장정들도
무찌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장검이 허리에 부착돼
있는 것이다.
'누구든 오라지! 내가 유화아가씨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모셔 놓기 전에는 상대가 누구이든 용서하지
않겠다.'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면서 장쇠는 더욱 부지런히
눈길을 걸었다.
백설의 천지 위에 온통 검은 복색을 하고 우뚝
버티어 선 그 괴상한 사내는 이 쪽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듯 꼼짝 않고 노려 보고
있는 것이었다.
"무어 저런 괴상한 놈이 다 있을까?"
장쇠는 내면의 불안을 물리치려는 듯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이오이다. 소름이 끼치옵니다."
유화도 가늘게 떨며 부르짖었다.
"걱정 마십시오."
"소녀 잠시 내려서 걷겠습니다."
이번에는 장쇠도 유화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백 보 거리 앞의 괴상한 사내가 마치 이쪽을 향한
공격 준비를 모두 끝내고 기다리기라도 하듯 두
다리를 대지 위에 깊이 박고 서 있는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쪽에서도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십시오. 잠시 몸도 푸실겸 조금만
걸어가시지요."
장쇠는 말하면서 장검 손잡이를 서너 번
어루만졌다.
주위는 허허로운 백설의 들판이었다. 한 그루
외롭게 선 소나무도 육중한 눈더미를 이고 있어서 그
밑으로 우뚝선 검은 사내처럼 그토록 빈약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장쇠는 앞의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는 온통 검은 복색에 머리에도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가려진 이마 밑으로 눈길이 날카로웠다.
그런데 먼저 상대를 알아 본 것은 유화 쪽이었다.
"어맛!"
유화는 기겁하는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시오, 낭자. 저 사람을 알고 있소?"
장쇠는 우뚝서서 얼어붙어 버린 듯한 유화와 소매
속에 손을 묻고 팔짱을 낀 채 칼을 부여 안고 있는
검은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파랗게 질린 유화는 입조차 얼어버린 듯
아무 말을 못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방향을 잡을 게
틀림없으리라 짐작했었지."
검은 사내는 누구한테인지도 모를 말을 뱉어냈다.
"나한테 이른 말인가?"
장쇠가 대꾸하고 나섰다.
"누구한테든."
검은 사내가 맞받아왔다.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저 낭자한테 물어봐."
장쇠는 잠시 어리둥절해져서 유화를 다시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거요?"
"저, 저것보세요. 얼굴의 상처......"
"오, 짐작이 가는군!"
그러고 보니 그자의 왼뺨 비스듬히 가로지른
칼자국이 눈에 들었다.
정체 불명의 사내, 뺨의 칼자국, 유화를 끌고 갔던
사내, 무서운 칼솜씨, 다시 유화를 잡아가기 위해
마중 나온 듯이 미리 길을 막고 기다리고 있는 괴상한
사내!
장쇠는 이 사내와 어떤 대거리를 해야 되는지 잠깐
막막했다.
그가 누구든 단칼에 때려 부술 수도 있지만, 검은
사내에 대해 오랜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유화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면 고운 말로 타협을 보아서
탈없이 작별하는 방법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를 알고 있나?"
"유화낭자를 탐내서 도둑고양이처럼 보쌈해
데려갔다던 장본인이겠지?"
"그래. 그러니까 낭자를 내놓고 가라."
"안된다. 그 전에는 당신 것이었는지 모르나 벌써
소유권이 내게로 옮겨져 왔다. 강도의 주막에서 오십
냥을 주고 내가 샀기 때문이다."
"으하하하......"
검은 사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쁘게 웃지 마라. 초면에 뜻 모를 웃음을
손님 앞에서 웃는다는 건 실례 아닌가."
"실례? 난 그딴 소리 키워 본 적이 없어."
장쇠는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참았다.
"어쨌든 좋다. 적어도 지금의 입장에서는 이 낭자는
내 소유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든 당신이 소유하게
된대도 그럴 만한 이유와 절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절차?"
"그래. 그렇대서 절차 같은 것은 키운 적 없다는 말
가지고는 내가 승복 못한다."
검은 사내는 짧게 땅쪽으로 눈을 주며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말하는 절차란 어떤 것인가?"
"우선 당신이 이 낭자를 데려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대라."
장쇠의 말에 검은 사내의 눈은 금새 달라졌다. 기분
나쁘다는 뜻이었다.
"어떤 자격 말이냐?"
"아까도 말했지만 소유권 문제 말이다."
"내가 먼저 차지했던 물건을 잠시 도둑맞았었는데
네가 그걸 지금 장물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원래
주인인 나 한테 돌려 주는 게 원칙이다."
"어림없는 소리. 고보다 더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
나도 당신도 아니다. 그래서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기
위해 지금 그쪽으로 가는 길이다. 도둑이라면 차라리
당신 아닌가."
"돌려주든 말든 그 역시 먼저 소유했던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거든."
"좋다. 그럼 당신 신분이나 알아두자."
"신분 따윈 없다. 내 신분을 알려주지 않는 게 나의
예절이다."
"내가 누구라는 걸 당신은 알고 싶지 않은가?"
"내가 누구라는 걸 말하기 싫어하듯 나도 남의 신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장쇠라는 사람이다."
"그런 걸레 같은 이름 들어 본 적이 없는 걸."
"조선 제일의 씨름꾼이지."
"힘센 만큼 대가리는 텅텅 비었겠지."
"나를 모욕하는 말은 하지 말라. 내가 칼솜씨가
없어 당신한테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인거야."
"내 성질이 그런 걸 어떡해."
"그만 싸우자. 당신은 이 낭자를 포기하는 게
신상에 유리할 게야. 자. 우리는 가겠다."
"못가!"
"뭐야?"
"혼자서 가라. 살고 싶거든."
이쯤 나오면 피를 보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이름을 들었을 게다. 삿갓 박진이라구."
그 말에는 잠깐 흠칫했다. 그러나 검은 사내의
표정에는 다시 냉소가 흘렀다.
"그 애송이 말이지."
"뭐, 애송이라구?"
"언젠가 나한테 아주 혼난 적이 있지. 그래, 그
애송이가 자네와 무슨 관계냐?"
"그분의 수제자이다. 만에 하나 내가 죽게라도
된다면 당신 역시 온전치 못할 게다."
"흥! 언제든지 오라지. 이번엔 아주 끝장을 내
줄테니까."
"당신은 내 스승까지 모욕했어!"
"원래 내 성미가 그래."
장쇠는 기어코 참지 못했다. 장검을 휙 뽑아내었다.
은색이 반사되어 차갑게 눈부셨다.
"이 허풍장이야. 이제야 말로 내가 널 용서할 수가
없어. 어디 칼을 빼보시지."
"흐흐흠......"
검은 사내는 음흉하게 한바탕 웃었다. 그런 다음
안고 있던 칼집에서 천천히 장검을 빼어들었다.
"낭자! 내 걱정은 말고 어서 저쪽으로 도망치시오.
아녀자가 피를 보는 건 좋지 않지요. 이 녀석을 크게
혼내 준 뒤에 곧 뒤따라 갈 테니까 어서 피하시오."
장쇠의 말이 하도 위엄스러워 유화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은 사내는 유화가 도망치든 말든 무심한 척
장쇠만 건너다 보는 것이었다.
장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검은 복색의
사내와 거리를 유지한 뒤 칼 끝을 수평으로 세워
상대를 겨누었다. 그것은 방어 자세였다.
그런 후 멀어지는 유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까마득히 사라질 때까지 장쇠는
싸움을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건방진 사내를
단숨에 해치울 수도 있긴 했지만 만에 하나 이쪽이
해를 입을 경우 유화가 위험할 터이었다. 그런 경우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유화가 멀리 도망가서 숨을 때까지
싸움을 끌어야 했던 것이다.
불행한 처녀, 고려 사직이 무너지면서 가족과
뿔뿔히 헤어져야 했던 운명! 그나마도 신분을 숨기고
양부 아래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던 운명! 그나마도
부족하여 숨어 있던 곳에서 정체 불명의 사내에게
끌려왔던 몸! 몸종들과도 떨어져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나와 강도에서 숨어 지내던 수모의
나날들......
다행히 구원자를 만나 양부 품으로 되돌아 가던
길에 다시 만나야 했던 그 무서운 얼굴.
'유화낭자, 부디 잘 가시오. 혹시 내가 해를 입거든
어진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한 젊은 사내가
불의와 싸우다 숨져갔다는 사실을 세상에
전해주시오.'
장쇠는 속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장쇠는 칼 끝에 기(氣)를
모으면서 검은 사내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다.
유화의 모습은 벌써 언덕을 넘어갔는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
"아녀자가 보는 데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거든."
장쇠는 검은 사내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는 냉소를
입가에 담고 있었다. 그는 장쇠의 행동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는 대들어 보시지. 우리 유화낭자는 멀리
멀리 도망가서 자네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어
버렸을테니까. 그러니까 낭자를 포기하란 말일세.
그리고 이제야 말로 자네 목숨이 아깝거든 칼을
버리고 도망을 쳐야 하지 않을까?"
장쇠의 말에 검은 사내는 다시 한바탕 흐흐거리며
웃었다.
"바보 같은 놈은 어쩔 수가 없군.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는가? 사방 백리가 벌판이란 말일세. 제깐 년이
눈길을 아무리 달려 보았자 십리 안팎일테지. 더구나
눈발이 그치면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제년이 하늘을 날아가지 않은 이상 내 손아귀에 든
것과 마찬가질세. 자 이제 자네의 명복을 스스로 빌
때가 되었군."
검은 사내의 말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사코 상대를 베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움이란 겨뤄 봐야 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당신이 유화낭자를 굳이 끌고 가려는
이유는 뭔가?"
그러나 검은 사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칼날이 장쇠의 머리를 향해 무섭게 날아왔다.
장쇠는 그것을 재빨리 피했다. 피하면서 상대의
허리를 있는 힘을 다해 수평타법으로 갈랐다.
"으으윽!"
누구의 입에선가 신음소리가 나왔다. 거구는 천천히
무너졌다. 백설 위에 빨간 피가 꽃처럼 수없이
피어났다. 검은 사내는 칼을 거두면서 말했다.
"내 탓이 아냐."
그날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삿갓은 무언가를 생각하느라고 거실에 틀어박혀
며칠동안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저녁이었다. 당직 제자가 장지문 밖에서 소리쳤다.
"언젠가 한번 찾아오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사부님을 뵙자는데요?"
"누구라더냐?"
"무예자인 것 같은데 이름을 밝히지 못해
유감이라더군요."
"이름을 밝히지 못해? 그렇다면......"
삿갓의 머리속으로 얼른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틀림없이 하얀독수리 최동일 것이었다. 전에도
찾아왔을 때 이름을 디밀지 못해 유감이라고 했었다.
어쩐 일인지 삿갓이 고민하고 있을 때마다
하얀독수리는 꼭 찾아왔었다. 오늘도 그가 온 것은
이쪽의 고민스러운 일을 처리해 주기 위해서 나타난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시냐?"
"수련장 뒷뜰을 거닐고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라 하여라. 아니다. 내가 몸소
나가서 맞겠다."
"예에?"
"주안상을 차리라 이르고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도록 모두에게
전해라."
"수련장에서 도제 몇 명이 훈련 중인데 모두
도장에서 물러가도록 이를까요?"
"아니다. 그냥 두어라."
그러니까 벌써 한 달이 지난 것이다. 하얀독수리는
한 달 후에 이곳에 들르겠노라 말하고 떠났던 것이다.
커다란 싸움에 말려들지 않는 묘책을 일러 주고는
떠났었다.
'오늘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왔는지 궁금하군.'
삿갓은 중얼거리며 수련장 쪽으로 걸어나갔다.
도장안으로부터 기합소리가 두어 번 흘러나왔다.
태껸 연습중인 것 같았다. 그런데 찾아왔다던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봐라, 손님은 어디계시냐?"
삿갓의 소리에 아까왔던 당직 제자가 달려왔다.
"아아니......? 이곳에 분명코 계셨는데요?"
"그으래? 어딜 가셨을까?"
다시 도장 안으로부터 기합소리가 터져나왔다.
삿갓은 안을 기웃해 보았다.
"오, 여기 계셨군. 그런데......?"
그런데 하얀독수리는 그새 봇짐을 벗어놓고 삿갓의
제자들과 한판 붙고 있었다.
그것은 흥미있는 일이었다. 하얀독수리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었으나 그의 몸놀림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옆의 제자에게 쇳소리로 주의를
주고는 가만히 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네 명의 제자들을 상대로 그는 대련을 하고 있었다.
각허세(脚虛勢)로 좌우 연발차기로 돌면서
칠성권세(七星拳勢)와 도압세(倒押勢)로 연결되는
절묘한 몸놀림은 과연 일품이었다. 그의 명성은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삿갓은 황홀한 눈으로 그의 몸놀림을 바라보았다.
네 명의 제자들을 감쪽같이 피하며 때에 따라 그들의
눈 앞에서 주먹과 발로 위협을 주곤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를 공격해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 때문에 하얀독수리가 이런
짓거리를 벌이며 어떤 경로로 해서 이런 싸움이 붙게
됐느냐 하는 점이었다.
분명코 이것은 싸움이었다. 삿갓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제자들의 온몽이 불덩이처럼 달구어져서 살기
마저 띤 채 하얀독수리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반면 하얀독수리의 표정은 편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네 제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정없이 대드는
것에 비해 하얀독수리는 마치 아이들을 상대로
장난이나 치듯 그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강한 듯
혹은 유하게, 유한 듯 혹은 강하게 제자들의 실력을
평가해 보려는 듯한 태도로 상대하고 있었다.
삿갓도 하얀독수리의 의도를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설사 아직 설익은 제자들의 실력을 하얀독수리가
굳이 가늠하고 있다 할지라도 기분 나빠할 처지도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삿갓은 슬며시 도장을 빠져나왔다. 뒤따르던
당직 제자가 사부의 기분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사부님, 허락없이 싸움을 걸어온 저 손님은 도대체
누구이옵니까?"
"그만 두어라, 너는 다시 도장으로 되돌아가서
손님의 솜씨는 충분히 보았으니 우리 아이들을 다루는
일을 그쳐 주었으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도제들한테는 진정하라 이르고 배워 주신 기술에
감사한다는 정중한 예를 차리도록 일러라."
"예에......, 하오나......"
"어서 달려가 보아라."
당직 제자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도장쪽으로
뛰어갔다. 삿갓은 그의 거실이 있는 본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하얀독수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 이거 반갑습니다."
삿갓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돌아왔지요. 별고 없었습니까, 박협사?"
"예에, 덕분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삿갓은 제자에게 눈짓해서 물러가게 한 뒤 거실을
향해 앞서서 걸었다.
"한양 사정은 어떻습니까. 방원 왕자께서
대결전에서 승리하셨다는 소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대로지요."
"물론 쌍방의 피해가 컸겠지요?"
"그렇지만 볼 만했습니다. 만일 박협사께서 방간
왕자 편에 가담하셨다면 결과가 뒤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역시 가담하지 않았던
게 좋았지요."
"그렇지만......"
삿갓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거실로 들어갔다. 삿갓은 하얀독수리에게 자리를
권하며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최협사, 협사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저한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셨겠지요?"
"아니,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지요."
"좋지 않은 일이요? 아, 그러고 보니 박협사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구료. 그래, 어떤 일이
있었는지요. 아무튼 제가 가지고 온 소문도 모조리
우울한 것밖에 없습니다만......"
"헌데, 최협사께서 우리 도장 제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신 것도 이유가 있어서 였던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번 대들어 보라며 시비를
걸기에 사양하지 않았지요."
"우리 아이들이 먼저 싸우자고 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대서 제자들을 너무 나무라진
마십시오. 훌륭한 솜씨들이었습니다."
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허락없이는 도장 안에서
외부 사람과 결코 시합을 못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얘기였다.
삿갓의 입장에서는 제자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내 명령을 어겼군요."
"그렇지만 흥분시킨 건 저였습니다. 그런 솜씨로는
허수아비 하나도 때려눕힐 수 없다면서
비양거렸거든요."
"최협사께서요?"
"예에. 물론 사정이 있어서 그랬습니다만, 우선
도장의 질서를 외부인이 깨뜨린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어 참...... 하얀독수리 최협사가 용서를 비니
재고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런데 어째서 그런
시비에 응하셨는가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다 말씀드리지요. 우선 저와 협사님의
제자들을 용서해 주신다면."
"용서하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감사합니다. 도장이 폐지된다지요?"
"그렇습니다. 벌써 한양에서 폐쇄하라는 전갈이
내려왔습니다. 무리지어 하는 무예수련을
금한다구요."
"그랬을 겁니다. 방원 왕자께서 세자위에 오르시고
곧 등극하시게 되면 사병제도까지 폐지시킬테니까요."
"그런데 그 사실과 우리 제자들과의 시합과는 무슨
관련이 있지요?"
"갈매기섬으로 가려면 우선 실력이 얼만큼 되는지
알아 두어야 되지 않을까요?"
"예에?"
"도장이 폐쇄된대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라는 말은
차마 제자들에게 못하겠지요?"
"정말입니다, 바로 저의 고민이 그겁니다."
삿갓은 무릎을 쳤다. 후견인이었던 박포대장군도
살해되었으니 사백 여 제자들을 먹여 살릴 길도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흩어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에 무너지지 않고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자 애쓰는 게 삿갓의 의지였다. 다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얀독수리가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온 것이다.
"옳으신 가르침입니다. 최협사, 저희들과 함께
행동해 보시겠습니까? 굴림의자 얘기를 들으셨을
테지요. 우리와 함께 합세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습니다."
"권고는 감사하오나 저에게는 할 일이 아직 하나
남아 있습니다."
"역시 스승의 명에 따라 천조옹을 찾는
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찾을 길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희들이 협조해 드리지요. 그 대신 보물을 찾는
일에 합세하셨으면 합니다."
"글쎄요......"
하얀독수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삿갓은 더 권유하지는 않았다. 걸게 차린 주안상이
날라져 왔다.
"자, 한 잔 받으십시오. 팔도유람자라도 좋은
팔자만큼은 또 고생이 되지요. 그래, 한양 쪽 사정은
어떻게 되어 간답디까?"
삿갓은 하얀독수리한테 잔을 내밀며 짐짓 물었다.
"방간 왕자는 유배되고 박포대장군은 살해되었으며
방원 왕자께서 세자위에 오르신 정도지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우리가 입은 피해도 크지요."
"아니 최협사에게 무슨 피해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삿갓은 무슨 얘긴가 싶어 뜨악한 표정으로
하얀독수리를 건너다 보았다.
"좋은 인재의 손실은 곧 우리의 손실이기도 하지요.
내 형제 흑사마귀 정창이 미쳤답니다."
"미쳐요?"
"짐작컨대 방원 왕자나 박포대장군에게나 모두
은혜를 입은 처지였거든요. 두 사이가 갈라짐으로써
흑사마귀의 처지도 난감하게 되었던 셈이지요. 누구를
도울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습니다."
"쯧쯧. 그래 만나 보기는 하셨습니까?"
"이상한 점은 미쳐서 산발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는 소문 이후 어딘가로 잠적해
버렸다는군요."
"그렇다면 일부러 미친 척한 게 아니었을까요?"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러나 그게 아닐 겁니다.
헛소리처럼 기밀을 누설하고 돌아다녔다니 정작
미쳤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거사 직전이었으니까 양쪽에서 그를 살해하려고 몇
명의 칼잡이들을 움직였다는군요."
"그런데요?"
"미쳤지만 그의 솜씨는 살아있어서 오히려 그들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흑사마귀는 사라졌지요.
암살자들만 시체로 남긴 채......"
"허어, 그 참......"
"그리고 제가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섭섭한 소식
하나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박협사의 수제자인 장쇠라는......"
"예엣? 그 녀석의 소식을 들었다구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죽었습니다."
"뭣?"
"백설 위에 쓰러져 있었답니다."
"얼어 죽어요?"
"날카로운 칼날에 베었지요."
"누가 죽인 겁니까?"
"그건 모르지요."
"아아......, 보름 쯤 잘 놀다 오라고 노자까지
듬뿍 줘서 보냈는데 이 추위에 객사를 했다니......
도대체가 왜 장쇠 같은 아이를 죽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난세니까요. 장쇠 정도를 단칼에 벤 실력이라면
고수급 칼잡이로 보아야겠지요?"
"그렇군요. 그놈이 누구인지!"
"언젠가는 나타날 테지요. 그러나 이제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게 됐으니 그런 놈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르구요."
"아아, 장쇠......"
삿갓은 갑자기 비감해지는 것이었다. 장쇠의 죽음은
분명히 그에게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실상 제가 박포대장군을 속이고 강도로
들어와서 아이들을 모아 훈련을 쌓은 것은
갈매기섬으로 들어갈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장쇠란 놈은 조금 더 실력을 쌓으면 굉장한 재목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삿갓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과거의 모든 것은 흘러갔습니다.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겠지요. 나라에서는 무사들의 공공연한
살인을 엄격하게 금할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장이야 어떨라구요. 보물찾기에 성공하면
그것으로 무예자를 키워 다시 왜구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갈 생각입니다. 부모의 원수이니까요."
삿갓은 갑자기 비감해져서 술 마시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한편 왕천은 열세 명의 초라한 유랑자를 거느리고
강도로 향하고 있었다. 유화의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에서 한동안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서 여동생을 찾아야 하죠?"
왕천은 그녀의 오라비인 한유성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한유성 역시 뾰족하게 짚이는 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중얼거리는 왕천을 보며 한유성은 오로지 왕천이
어떤 방법으로든 결단을 내려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망망대해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줍는 꼴이지요.
그러나 저는 유화가 제 운명대로 살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왕천은 자기 여동생의 실종에 대해서까지 체념의
정신을 배워버린 한유성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유성을 포함한 열세 명의 문관 자제들은
결코 생을 포기할만큼 의욕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나마 왕천을 무예 스승으로
받들게 된 것만으로도 인생에 있어서 큰 행복을
쟁취한 것으로 믿고 싶어했다.
그런 그들에게 왕천은 실망을 줄 수는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들에게 희망을 북돋워 주고 할 일을
찾아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럼, 강도 쪽으로 가 봅시다."
무리들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천은
한 마디 덧붙였다.
"유화낭자의 행방을 알려면 아무래도 그쪽이
좋지요. 강도란 온갖 전국의 무뢰한들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무슨 낌새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곧장 개경 쪽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아침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때려오고 있었다. 계곡을
빠져서 들판으로 들어섰다.
문득 들판의 끝으로부터 뽀오얀 먼지가 일고
있었다.
"뭘까요?"
한유성이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리며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기마군들이군요."
왕천이 대답했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몸들을 피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몸을 피해야 됩니까?"
"그렇군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한유성은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세월 동안 패배만을 경험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습관이었다.
왕천은 얼른 생각했다. 우선 이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미 두목이 되어 있는 자신부터 두려움
없는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왕천은 보란 듯이 어깨를 펴 보였다.
"무예를 닦은 이유도 부당한 핍박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지요. 사내라면, 특히 무사라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를 보고
비겁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왕천은 벌써 사부로서의 정신적 지도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마군의 숫자는 스물이었다. 그들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일직선으로 왕천 일행 쪽으로 달려왔다.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앞에서 번쩍 왼손을 들자
뒤짜르던 기마병들도 말을 멈추었다.
"모두 멈추어라."
군장이 왕천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벌써 멈춰서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당신들이
일으키는 먼지 때문에 말이다."
왕천은 얼굴 쪽으로 몰려오는 먼지를 피하느라고
고개를 모로 꼬며 대꾸했다.
"뭐라구? 어떤 놈들이기에 말대꾸가 그 모양이냐."
"너희들은 무엇하는 자들이기에 무작정 이놈
저놈하고 부르느냐."
"아하, 이놈들 봐라. 우리가 누구라는 걸 보면
모르느냐. 오위군 소속 기마군이다."
"그래서?"
"이런 비렁뱅이 무사들 봤다. 그래, 너희들은
무엇하는 놈들이냐?"
"네 말대로 비렁뱅이 무사일 뿐이다. 그래서
밥이라도 한 끼 먹여 주겠다는 거냐?"
왕천의 대꾸에 군장은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뭐야?"
군장이 소리치며 허리로부터 장검을 뽑아들었다.
왕천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기마군들을 훑어 보았다.
"나라의 녹을 먹는 군사들이래서 다짜고짜로 행인을
붙들고 이놈 저놈해도 된다는 법이 어디있는지
그것부터 대라."
"물론 대고 말고. 네놈들은 이미 범법자들인
것이다. 범법자한테 이놈 저놈하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됐다는 거냐."
"범법자라구?"
"아직 방을 보지 못했느냐?"
"무슨 방?"
"관군이 아닌 자는 누구도 칼이나 활을 차고
다녀서는 안된다는 엄명말이다."
"무장해제란 뜻이군. 누가 그런 엄명을 내렸는가?"
"그동안 무예자란 것들로 인해 억울한 피해가
너무나 많았다. 양민을 하릴없이 죽이고 사소한
감정으로 결투라는 명목을 빌어 상대 도장의 무사들을
도륙하고......"
"우린 그런 적 없어."
"어디 그뿐인가. 방을 붙여서 관군으로 편입해
달라는 부탁을 마다하고 칼잡니들끼리 작당해서
산적질을 하질 않나......"
"그 얘기 역시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잔소리 말고 끝까지 들어라.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에 진정한 무사라면 북방의 오랑캐나 해변으로
침입하는 왜구들을 물리치기에 힘을 기울려 줄 만도
했거늘, 나라를 걱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민폐를 더욱
극심하게 끼친 무리들이 칼을 찬 놈들이었으니......"
"나도 한 마디 하겠다."
"해 봐라."
"도를 닦듯이 조용히 무예훈련을 하고 있던
무예자들을 더러운 권력다툼의 현장으로 끌어들인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말 잘했다. 정말 조용히 무예수련이나 할
일이지 어째서 권력이나 탐해서 그런 무리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단 말인가."
"그런 무리들이란 누굴 지칭하는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무리들은
죄값을 받아 모두 죽었다. 이제는 새 임금을 맞아
나라를 안정케 해야 될 때인 것이다. 사병의 피해가
너무나 극심했다는 얘기다. 이제는 성군이신
태종대왕이 등극하시면서 이의 피해를 통감하시고
사병제도를 없앤다고 선포하셨다. 물론 칼을 차고
다니는 자도 인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럴 듯하다."
"이제사 내 말을 알아 듣겠느냐? 그렇다면 모두들
등에 멘 칼들을 벗어놓아라."
"그것은 곤란하다. 도적이 들끓어 목숨 부지하기가
힘든 이시절에 무기를 풀라는 것은 곧 죽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방도 붙였고 무리지어 다니는 칼잡이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지 않느냐."
"칼을 쓰지는 않겠다. 이 칼은 아버님이 가보로
내려주신 것이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얘기다."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당신 말대로 우리는 지금 강도로 가서 조용히
무예나 닦으려고 하고 있는 중이니 모른 척해다오.
다시는 칼을 차고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 나중에
외적이 침입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언제고
세상으로 달려나오겠다. 그런 때를 감안하드라도 우리
같은 은둔 무사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야 말로
나라의 힘인 것이다."
기마군 군장은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왕천에게
다시 물었다.
"나의 권한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우선 신분이
분명해야 겠다. 네가 무리들의 우두머리인 듯한데
너는 누구냐? 들어서 인정할 만하다면 너희들이
강도로 갈 때까지 눈감아 주겠다."
"그렇게 해 주면 정말 고맙겠다. 우리도 나라의
법을 어길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실상은 우리는
가솔을 납치해간 무뢰한들을 뒤쫓고 있는데 무기가
없으면 정말 난처하다. 그러하니 서로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이름은 왕천이다. 왕천......"
"뭣, 왕천?"
"이젠 놀랄 필요는 없을 거다. 이미 고려 구신들의
가솔들에 대한 체포령은 나라에서 거두어
들였다니까."
"......그건 네 말이 옳다. 왕천...... 너의
신분이라면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전 상서령
왕각의 아들이렷다."
"잘 알아 보았다. 그리고 여기 서 계신 분은 전
금오위 상장군의 아드님이시다."
왕천은 한유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뭣! 그럼 한대량 장군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다. 여기 있는 무사들 모두가 그런 구신들의
자제분들이다. 그렇대서 새 사직에 반기를 든다든가
양민을 해친다든가 하는 짓거리를 한 적은 한번도
없다. 다만 우리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새 사직이
우리들을 받아들이는 좋은 세월이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들도 조선 백성이 아닌가.
모두가 쓸만한 이재들이니 옛 원한을 풀고 나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상부에 우리들의 충정을 알려 주길
바란다. 지금의 우리들은 한없이 피곤하고 약하다.
어차피 강한 새 사직이 우리들을 관용으로 받아
주어야 될 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왕천의 말에 군장은 눈매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가지 묻겠다. 모두가 소문처럼 무술 솜씨가
왕천과 같이 고수급들인가?"
"그렇다. 차라리 나보다 더욱 우수한
무예자들이지."
"그래......"
"그럼 애초의 약속대로 우리들을 강도로 가게
해달라."
"그렇게 하지......"
군장은 고개짓으로 왕천들을 둘러싸고 있던
기마군들의 포위를 풀게 했다.
왕천은 군장에게 짧은 예를 올린 뒤 서둘러서 가던
길을 떠났다. 그 뒤를 열세 명의 사내들도 말없이
뒤따랐다.
잠시 후 기마군들의 날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동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한유성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왕천에게 물었다.
"저 놈들이 정말 우리들을 풀어 준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예엣?"
"우리는 잠시 후 아까보다 훨씬 더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왕협사나 저의 성함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더욱 위태로워진 것이 아닐까요?"
"그 반대입니다. 나는 독심술을 익혔습니다. 일부러
신분을 밝힌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무예를 겁내 품고
있던 살기를 절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조금전 끝끝내 우리의 신분을 감추었더라면 그놈들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들 중 몇 명도
희생되었을 테지요."
한유성도 왕천의 말에 두려운 기색을 떠올렸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한유성은 두려운 눈을 하고 왕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조치를 취해
놓았으니까요."
"정말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그러니까 저놈들이
곧장 이쪽으로 되돌아 온다는 얘기지요?"
"그렇습니다. 개경쪽으로 가서 별기군들을 불러올
게 틀림없습니다. 그쪽으로 달려갔으니까요."
"별기군이라면!"
"궁수들이지요. 오백 보 거리에서 백발백중으로
맞춘다는 현왕의 친위대지요."
왕천의 말에 한유성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대로 있다가는 틀림없이
몰살당하게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있어선 안되지요. 그러나 서둘 건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을 뒤쫓아 오려면 준비하는
시간이 다소 걸릴 테니까요."
"어쨌든 왕협사만 믿습니다. 역시 강도쪽으로 갈
생각입니까? 말이라도 있으면 타고서 도망칠 터인데."
"없는 말을 탓해서 무엇합니까. 그보다 우리가
목적지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럼 강도로 가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가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갈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자칫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간 몰살당할
게 틀림없으니까요. 문제는 이겁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뿔뿔히 헤어져 각각의 살 길을 찾든가, 아니면
죽든 살든 함께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결정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야 두 번 말할 필요없지요. 이미 왕협사의
부하가 되기로 작정한 우리들로서는......"
말을 끊고 잠깐 생각에 잠기던 한유성은 문득
고개를 들어 뒤따르던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모두 들었겠지. 살기 위해서 뿔뿔히
헤어지든가 아니면 죽든 살든 왕협사를 우리의
무예스승으로 모셔 이분의 지휘 아래 뭉치겠는가
모두들 각각 결정해라. 시간이 없으니 금새 작정해
주어야겠다."
한유성의 말에 무리들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함께 대답했다.
"왕협사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럼 좋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왕협사에게 드리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이에 그만한 의식이 있어야겠다. 즉 사부님으로
모시자는 얘기다. 모두 꿇어 엎드려 제자로서의
의식을 갖도록 하자. 시간이 촉박하여 제대로의
예의는 갖출 수 없으나 우선 그 충심만이라도 보여
드려야 하겠다. 모두 칼을 빼어서 자신의 머리맡에
놓고 꿇어 엎기러 왕사부님의 하회를 기다리자. 자,
모두 꿇어 엎드려!"
한유성의 명령에 무리들은 장검을 일제히 빼들었다.
칼날은 햇살을 받아 황금빛을 발했다.
"저희 무리 열세 명은 이 순간부터 왕천 협사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부디 외로운 저희
심중을 헤아려 문도(門徒)로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유성이 소리치며 마지막으로 왕천의 발 앞에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소리와 짓거리를 왕천은
아까부터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왕천은 얼른 승낙할
수가 없었다.
절대절명의 사정에서 일시적으로 몸을 의탁할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천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일단
사양하는 척했다.
"아니올시다 여러분. 저로는 인격으로나 학문으로나
도저히 여러분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여러분의 생사여탈권을 쥘
처지도 못되는 것이 지금 적들이 몰려오면 어떻게 될
것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여러분의 우두머리로서
무사히 살아날 묘책을 강구하고 있는 처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살아날 방도가 없다면
사부님과 더불어 저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겠습니다. 비록 멸망은 했으나 사대부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제들로서는 비겁하게 도망치며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도무지 없습니다. 굽어
살피시어 어서 저희들을 제자로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유성은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한 후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왕천은 가부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때가 초미한지라 이런 일로 이들과 다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리의 뒷쪽에 부복해 있는 한 사내를 유심히
쏘아본 뒤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뜻은 모두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자로 한 번 입문하면 영원히 그 스승의 제자라는
딱지가 붙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달프고 위험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어버이가 자식에게 내리는 사랑이라 믿고 스승의
명령을 죽음으로써 지키겠습니까?"
"지키겠습니다."
모두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 너희들은 나의 제자인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해라를 할 것이며 너희들이
부를 나에 대한 호칭은 왕사부님인 것이다."
왕천은 지체 않고 칼을 빼어 한유성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그리고 열세 명 모두의 어깨를 그렇게 때려 제자인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젠 됐다. 모두들 일어나거라. 시각이 촉박하니
저들이 몰려오기 전에 어서 피할 궁리나 하자. 저
지평 쪽을 모두 바라보아라. 거기에 무엇이
보이느냐?"
왕천의 말에 한유성이 대표로 대답했다.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듯합니다."
"옳게 보았다. 모두들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라."
그러면서 왕천은 앞서서 걸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의심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왕사부님, 그쪽은 강도 쪽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까?"
"이유는 묻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느냐!"
왕천의 꾸짖음에 사내는 흠칫 놀랄 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시 행진을 계속했다. 왕천이 아주 느리게
걸었으므로 무리들도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천천히
걸을 도리밖에 없었다.
무리들과 한유성 역시 사부가 미적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몹시 답답해 하면서도, 조금 전에 호되게
꾸짖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서 어떻게 되물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흐느적 흐느적 걸어가던 왕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뒤따르던 한유성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부르셨습니까?"
다가온 한유성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왕천 역시
한유성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가만히 듣거라. 맨 뒤에서 두번째로 따라오는 자가
있지 않느냐. 눈치 채지 않게 살짝 내게 귀띔해
보아라. 어떤 신분의 자제인가를 말이다."
한유성은 우선 뒷쪽을 한 번 바라본 다음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물으려다 말고 급히 자제했다. 이미
스승과 제자 사이인 것이다. 제자는 스승이 질문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아무런 의문도
표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유성은 그런 의문을 자신의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는 것으로 대신한 다음 가만히 대답했다.
"국자감(國子監) 종삼품 제주(祭主)이신 강국기
어르신네의 자식인 강진익이옵지요."
"함께 유랑생활을 해온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삼년 반 전에 우리들을 찾아와서 합류했습니다."
"그동안 너희 무리들과 어울릴 때 별 다른 점이
없었느냐?"
"유별난 점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고
희생정신이 강해 벗들의 일까지 도맡아 해 주는
열성을 보이곤 했습니다. 모두들 강진익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특이한 점이라면 과묵하고
침울한 것이겠지요."
"알았다."
"물어 주신 이유를 가르쳐 주신다면 거기에 맞추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 없다."
왕천이 입을 닫았으므로 한유성도 말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농부는 중년의 사내였다.
왕천은 사내 앞으로 다가가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물었다.
"수고하십니다. 우리들은 지금 강도로 가고 있는데
질러가는 길을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왕천의 말에 농부는 쟁기질을 멈추며 무사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강도로 가신다구요?"
"예에, 바삐 갈 수 있는 샛길이 없나 해서요."
"질러가는 길이 없는 바는 아니나 해 지기 전에
해변에 도착할 수 있을느지요. 그 길은 인가 한 채
없는 계곡과 들판 뿐이거든요."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저희들의 임무는 강도에
한시바삐 도착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시다면 일러드리지요. 개경으로 가는 큰 길로
들어서지 말고 오른편 토성으로 빠지시면 됩니다.
거기서 두어 점쯤 더 걸어가면 예성강이 나오고, 강을
따라 포구로 내려가면 선착장이 나오지요. 거기서
배를 타십시오. 늦어도 자정까지는 강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예에, 고맙습니다."
왕천은 다시 느린 걸음으로 가던 길을 계속했다.
한유성을 위시한 다른 무리들은 여전히 왕천의
태도에 초조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뒤따라 기마군이
들이 닥쳐 화살을 쏘아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왕천의 의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쟁기질하던 농부가 완전히 보이지 않고서였다.
왕천은 옆에 따라오던 제자들 중의 하나를 불렀다.
왕천은 가만히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제자는 이렇다 저렇다 인사 한 마디 없이
갑자기 어딘가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유성 외의 다른 제자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달리는 동문의 뒷모습과 왕사부의 얼굴만 아연한
표정으로 번갈아 볼 뿐이었다.
얼마쯤 다시 묵묵히 걷던 왕천은 조금전에 하던
그대로 다른 제자를 가까이 불렀다.
여전히 다른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도록 귀엣말을
했다. 무슨 언질인가를 받은 제자는 역시 일행에게
인사 한 마디 없이 어딘가로 향해 달려갔다.
그런 식으로 왕천은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몇
마디의 귀엣말로 언질을 주어 각각 떠나게 했다.
마지막으로 한유성 혼자 남게 되었었다.
"자, 한협사. 우리도 이젠 슬슬 몸을 피할 때가
됐군요."
"예에? 이미 제자가 되기로 한 놈에게 해라를 하지
않으시구요......"
"이건 예외입니다. 단둘만 있을 때에는 제가
존댓말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사제지간이 아니라 처남과 손 아래 매부 사이가
되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제사 이런 얘길 해서 죄송합니다. 유화낭자는 제
생명의 은인이었고 제가 구원받고 나서 헤어질 때
우리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혼례식을 올릴 계제는 못 되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성혼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협사,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용서고 뭐고 있나요. 이거 원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우리 유화를 왕협사께서 거두어 주실
날이 반드시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만 지극하면 반드시
유화낭자를 만나게 될테지요. 그러나 지금 강도로
간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 강도로 가는 게 아닌가요?"
"가는 척 해놓고 엉뚱한 데로 빠져야 합니다.
유화낭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한협사보다 제가
훨씬 더하지요. 그러나 유화낭자가 강도에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또 생명을 부지하기가 다급한
이때에 섣불리 막연한 기대만 갖고 그쪽으로 향한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그래서 일단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왕협사는 제자들을 미리 빼돌린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나중에 모두 만나게 됩니다. 한놈만
빼고서 말입니다."
"한놈만 빼고서?"
"그 한놈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한협사는
나중에사 이해하실 겁니다."
"혹시 그놈이 배반이라도......?"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배반할 작정이라면 생명을 잃게 되지요. 배반하지
않으면 그도 살게 될 테구요. 결국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얘기가 된다고 할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요. 그런데 그놈이
누구입니까?"
"그건 아직도 확실치가 않아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배반을 해 주어야 제 짐작이
옳다는 것이 됩니다. 동시에 한협사도 그의 배신
현장을 보시게 될 테고......"
"왕협사의 짐작이 옳다면 그 독심술은 무서운
것일테지요."
"독심술이란 육감과 같은 것이지요. 무예자는
오감(五感)을 뛰어넘어 육감을 체득해야 고수란 말을
듣습니다."
"과연 그렇겠지요."
한유성은 무작정 감탄하고 있었다.
한유성으로서는 무리 중의 한놈이 배반할 것이라는
왕천의 짐작을 확실히 이해할 길은 없었다.
다만 조선 제일의 고수급 무사로 성장해 있는
왕천의 육감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었다.
"개경 밖 십 리쯤 근처에서 일단 몸을 숨깁시다.
우리는 이제 굉장한 구경거리를 보게 됩니다."
왕천의 말을 한유성은 역시 이해할 길이 없었지만
그가 웃고 있었으므로 하등 걱정스러운 구경은 아닐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시 얼마쯤 걸어가다가 한유성은 왕천에게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결국 우리는 아까 밭갈이하던 농부가 가르쳐 주던
길로 해서 강도로 가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실상은 개경을 통과해서 강도쪽으로 향해야
옳지요. 바보가 아닌 다음에댜 누구든 그쪽 길로 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토성을 비껴나가는 오솔길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기마군들이 우리가 간 쪽으로 뒤쫓아 올 수
있지요."
"옛? 그럼 우리의 목숨은......"
"그러니까 숨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불안하군요."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 저기 숲이 보이는군요.
소나무 위로 올라가 숨어서 기마대가 우리를 추격하는
꼴이나 구경합시다."
"우리를 추격해요?"
"농부가 우리들이 간 곳을 알려주었을 테니까요."
왕천은 한유성이 뭔가를 더 묻기 전에 먼저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숲 속으로 걸어갔다.
한유성이 뒤따라 갔을 땐 왕천은 벌써 소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같은 나무 위로 올라갈까요?"
"그러시죠. 이쪽으로 올라오시죠. 놈들 지나가는
것도 잘 보일테고, 우리들의 몸도 감쪽같이 숨길 수
있도록 돼 있군요. 아, 벌써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왕천의 말에 한유성은 다람쥐처럼 빠르게 왕천의
곁으로 기어올랐다.
"우린 그렇다 치고라도 아우들이 걱정이 됩니다."
한유성이 작은 한숨을 섞어 쉬며 중얼거렸다.
"왜 그렇죠?"
"아우들 걸음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저
기마군들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거든요. 더구나 농부가
길목을 가르쳐 주었다면 얼마 못가 속절없이 잡힐
테니까요."
"공연한 걱정입니다. 아우들은 아무도 농부가
가르쳐 준 곳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예에? 그럼 아무도 강도로 가진 않았다는
얘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왜 우리가 이런 위험한 길목에서 기마대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해야 옳지요?"
"아까 내가 기마대장의 마음을 읽었던 게 옳게 맞아
떨어졌는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걸 확인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의 독심술이 정확했다면 한협사의 아우들 중에
배반할 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도 확실해지는
겁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뭐가요?"
"왕협사의 독심술이나 아우의 배신이나......"
그 즈음 기마대의 세찬 말발굽 소리가 가까운 데서
울려왔다.
한유성은 목을 잔뜩 웅크린 채 솔잎 사이를
주시했다.
기마대는 씽씽 바람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앞 들판을
치달려 나갔다. 사백여 기의 기마대가 질풍노도처럼
달리는 광경은 과연 볼만했다.
"장창으로 아예 일자세(一刺勢)를 취하고 달리는 걸
보면 저놈들이 얼마나 살기가 등등한가를 알 수 있죠.
단창에 우리를 찔러 죽일 기세니까요. 그들의 만용만
믿고 강도쪽으로 흐느적거리고 떠났다간 모두 도륙을
당할 뻔했습니다. 새 사직은 역시 아직도 이 왕천이나
한협사들을 용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앗!"
한유성의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금새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지 못했습니까?"
"기마군들 말입니까?"
"선두 무리들 중에서 강진익이를 본 것 같습니다."
"눈이 좋군요......"
말하는 왕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왕협사도 보셨군요."
"보기 전에 벌써 어울려 몰려올 거라는걸 알고
있었죠."
"그가 왜 저들과 함께 달려가고 있는 걸까요?"
왕천은 이번에는 한유성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 이제 안심하고 내려갑시다. 한협사의 아우
강진익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요."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건지요?"
"풍덕이나 영정쯤 가면 무슨 소식이 있을 겁니다."
한유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진익이가 배신을 한 것이 됩니까?"
"그런 셈이지요."
"그놈더러 그쪽으로 오라고 명령했습니까?"
"그랬지요."
"그렇지만......"
"혼자 몰래 풍덕을 지나 영정에서 기다리라고
했지요. 기마군들을 데리러 가라는 얘긴 하지
않았지요."
"아, 진익이 그놈이!"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그놈을 잡기만 한다면!"
"한협사의 아우이기 이전에 이미 내 제자란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그렇군요. 어쨌든 왕협사한테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놈을 잡게 되면 왕협사는 어떤 처벌을 내릴
생각입니까?"
"이미 벌은 주었습니다."
"예에?"
"기마대는 속은 줄 알고 진익이를 죽일 겁니다."
"아, 그것까지......"
"자승자박이죠."
"그런데 우리가 영정까지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도로 갈 생각이 없는 데다가 배신한
진익이가 이미 벌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내가 거기서 기다리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데디러
가는 것 뿐입니다."
"아, 그건......"
한유성은 착잡해져서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왕천,
그는 역시 무서운 고수 무예자인 것이다. 상대가
배반할 것도 알았으며, 또한 일단 내린 명령은
서릿발처럼 차갑다는 걸 한유성에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왕천은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사지로
들어서려는 것이다.
왕천과 한유성은 다시 길을 걸었다.
얼마가지 않았을 때였다. 아득한 지평선에서 다시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되돌아오는군......"
왕천의 중얼거림에 한유성은 다시 의아해했다.
"저들은 또 누구인가요?"
"자, 빨리 몸을 피합시다. 바로 그 기마대들인 것
같습니다."
"그럼 강진익이도......?"
되물었을 때 왕천은 벌써 숲 속으로 내닫고 있었다.
잠시 후에 기마대는 지친 걸음으로 왕천과 한유성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기마대장인 듯한 사내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앗!"
한유성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쉿! 저들이 듣소."
"마상에 늘어져 있는 자가......"
"그렇지요. 강진익입니다."
"죽었군요."
"예. 놈들이 죽인 것 같습니다."
정작 강진익은 기세 좋게 달려가던 아까와는 달리
이미 죽어서 말 등에 너부러져 있었다.
기마대가 개경 쪽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유성은 고개를 수그린 채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로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를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왕천의 그 무서운
예언이 한 가지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협사, 미리 강진익을 구할 방법이 없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까?"
왕천의 질문에 한유성은 화들짝 깨어났다.
"예에? 아, 예에...... 실은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게 아니라 배신하지 못하도록 미리 묘책을 쓸
수 없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몇 해 동안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는 동안 정이 듬뿍
들었거든요."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무서운 함정을 파고
때를 엿보아 한협사네들을 관군에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을 테죠."
"그럴 리가 없어요. 진익이가 무엇 때문에 우릴
관군에게 넘기겠습니까. 그랬다간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게 빤하다는걸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아하하하...... 그런데 그자가 진짜 강진익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에? 그가 그럼 진짜 진익이가 아닙니까?"
"바로 관군에서 투입시킨 밀명자였습니다."
"설마!"
"기회를 얻지 못해 고발을 못 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왕자 나으리들의 싸움 때문에 한협사네들을
잡아 넣을 만큼 정신도 없었겠구요."
"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제사
배반할 것이라는 건 더구나 깨닫지 못했구요. 그런데
왜 오늘에사 배신하게 됐을까요?"
"기회도 없었겠지만 이 왕천이라는 큰 고기까지
잡아 넣으려고 더욱 기회를 노린 거겠죠. 나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짐짓 그 밀명자한테 주었구요."
"다른 밀명자는 우리 무리 중에 다시 없을까요?"
"없습니다. 있었다면 진작 내통되어 전멸했을
거니까요."
"한가지 이상한 점은 저놈들이 왜 가짜 진익이를
죽였을까 하는 점입니다."
왕천은 숲 속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한협사, 걸으면서 얘길 합시다. 이쪽에서 오래
지체하는 것은 유리할 게 없으니까요."
"그러지요. 이 벌판이 왠지 섬찍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까 한협사가 왜 밀명자를 그들이 죽였는가를
물었던가요?"
"그랬었지요. 한패라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나로서도 확실한 해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그자가 등에 화살을 맞고 죽은 것으로 보아 사정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한유성은 왕천의 추리에 몹시 궁금증을 가지며 그의
옆으로 붙어섰다.
"우선 그 밀명자는 내가 준 정보가 진짜인 줄 알고
슬쩍 개경으로 새어 들어갔었지요. 나는 그의 눈을
읽고 이미 다른 제자들을 엉뚱한 데로 빼돌렸었지요.
그를 믿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농부한테 샛깃을
물었구요."
"그랬었군요."
"그 다음엔 기마군을 이끌고 우리 앞을 지나 모두
집결해 있다는 풍덕으로 갔을 겁니다."
"늦게사 허탕친 줄을 알았겠군요?"
"화가 난 기마대장이 밀명자에게 책임을 물었을
테고, 그는 그 책임이 두려워 도망치다가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까 대장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내용이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야 일당들이 도망친 데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며 궁수들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대장은 밀명자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엉뚱한
곳으로 기마대를 끌고 갔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놀랄 만한 짐작이시군요. 그런데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한유성은 멈칫 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밤길을 걸어서라도 백운산까지는 가야 합니다."
"백운산이라면......?"
"꽤 멀긴 합니다만...... 한협사의 아우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쪽으로 모두 빼돌리셨구먼요. 그런데, 왜
그쪽으로......?"
"한협사,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린 이내 강도로는
갈 사정이 못됩니다.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저의
스승이신 시각대사님께 무예를 가르쳐 주십사고
부탁할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말입니다."
"시각대사라면......?"
"모르실 겁니다. 소문으로는 이미 유명하신
적두노사와 버금가시는 무예자입니다."
"적두노사님과 버금가는 무예자라면...... 세상에
그 정도의 무예자가 숨어 계셨다니!"
"그렇기에 독불장군이란 있을 수가 없죠."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왕협사보다 더욱 고수급의
무예자가 세상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뭐랬습니까. 나는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구...... 그러나 스승께서 무예수련을 거부하실
경우에 대비해서 내가 우선 사부의 책임을 졌던 거죠.
그러나 내가 꾸중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동지들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십사구 부탁드려 볼 참입니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바쁜 하루였다.
그들은 오솔길로 들었섰다.
여기는 다시 강도.
신사(辛巳)년 봄.
굴림의자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바늘들이 한 웅큼 쥐어져 있었다.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방에 가만히 앉아서도
점을 치러오는 사람의 무공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굴림의자였다. 그러니까 소매치기 동자가 손님이
왔노라며 일어주지 않아도 그가 몇 살쯤 되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무예자인지 평범한 서민인지
심지어 지체가 어느 정도인가조차도 쉽사리 알아내는
굴림의자였다. 그만큼 그의 내공력(內功力)은
무림에서 몹시 두려워 할 만큼 알아주는 고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인적은 전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날아내렸는지 땅에서 갑자기 솟아 올랐는지
느닷없이 방문 바로 앞에서 인간의 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무예의 고수 중에서도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상대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는 얼마쯤이며 지체가 어느 정도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동물인지 어떤
물체인지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히 가늠할 수 없는 그
이상한 힘이 방문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것이다.
"밖에 뉘시오. 난 벌써 누가 온 줄 다 알고 있소.
정체를 밝히시오."
굴림의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막강한 힘만 느껴져 올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삿갓의 무예도 이렇지는 않았다. 하얀독수리의 것도
이토록 강력하지는 않았다. 전날에 죽은 족제비도
이런 무예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대체 누구란 말이요?"
굴림의자는 중얼거리며 언제라도 바늘을 뿌릴
자세로 미닫이 문을 확 열었다.
"아!"
굴림의자는 부지중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마당. 햇살 아래로는
아지랭이만 한가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를
따라 한느로 증발해 버렸는지 강력한 힘의 정체도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누구일까? 대호(大虎)라도 그런 막강한 힘을
내뿜을 수는 없어!'
굴림의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직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런 일은 평생 처음이었다. 이토록 무서운
힘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적두노사나 천조옹이 살아 있다
해도 무엇 때문에 나한테까지 와서 이런 장난을 칠
것인가? 아니다. 이건 공연한 상상일 뿐이야. 그런
무예자가 혹시 나한테 볼 일이 있다면 당당하게
나서서 용무를 말할 것이지, 이런 식으로
숨어들어왔다가 도망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조선에도 이토록 무서운 무예자가 있었더란
말인가. 그가 누구이든 무엇 때문에 내 집에까지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왜 그냥 사라진
것일까......'
굴림의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다. 멍청히 앉아 있는데 소매치기 동자가
어슬렁 어슬렁 걸어 들어왔다.
"얘야, 이리 오너라. 그동안 어딜 갔다 왔느냐?"
굴림의자의 말에 동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어딜 갔다 오다뇨, 나으리?"
"뭣?"
"내처 저기 돌담 위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는뎁쇼?"
"그게 정말이냐?"
"물론 정말이었습죠."
동자는 더욱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굴림의자는
다시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정작 아까부터 거기 앉아 있었다는 얘기냐?"
"그럼요. 부르시지 않기에 그냥 봄 햇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요."
"내가 고함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느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요. 나으리, 오늘 정말
이상합니다요."
"누가 이상해?"
"누구긴요. 나으리가 이상하다는 얘깁지요."
"내가 왜?"
"소리치시는 걸 듣지 못했느냐는 둥 소인이 내내
거기 있었느냐는 둥 재삼 재사 확인을 하지
않으시나......"
"그럼 우리집에 온 손님도 없었더란 말이냐?"
"손님은 커녕 강아지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요. 아, 있다면 햇병아리 두어 마리가 이쪽
마당을 얼씬거렸지요."
"허튼 소리 그만 두어라."
"그러니까 아침나절 내내 손님 하나 없었구먼요.
그런데 누굴 쏘려고 손에 바늘을 쥐고 계신가요?"
"어, 이거? 음......"
굴림의자는 얼른 쌈지 속에다 바늘을 감춰 넣었다.
"거 이상하다......"
"나으리, 혹시 낮잠을 주무시다가 꿈을 꾸셨거나
아니면 비몽사몽 간에 헛것이라도 보시지
않으셨는지요?"
"예끼 이놈! 스승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죄송하옵니다."
정말 비몽사몽간에 헛것을 보았든가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소리를 지른 것까지 동자놈이
듣지 못했다면 이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굴림의자는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등줄기로
소름이 싹 끼치고 지나갔다.
"애야, 그런데 넌 조금 전에 바깥으로부터 걸어
들어오고 있었지 않았느냐?"
"대문 바깥으로 나가진 않았습니다요 나으리.
심심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 본 뒤에 나으리께서
때맞춰 방문을 왈칵 여시기에 무얼 시키시려나 하구
다가오던 길이었습니다요."
"허어 별일이다!"
"그건 나으리께서......"
동자는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굴림의자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얘야, 심부름 좀 해라."
"예에, 어딜 다녀올깝쇼?"
"마니산 삿갓 어르신네께 얼른 다녀오너라."
"가서는요?"
"긴하고 은밀하게 의논드릴 일이 있으니 급히 와
주십사 하구 아뢰어라."
"편지나 한 장 써 주시지요. 그쪽 산채는 경비가
하두 엄해서 쉽사리 들어갈 수가 없더구먼요. 도장
폐지령이 내려진 이후부턴 일 없는 손님은 대면조차
않는다던데요. 그러니 소인이 가서 나으리의 얘길
아뢰 보았자 의심만 하고 오시진 않을걸요."
"딴은 네 말이 옳다. 내 급히 몇 자 적어서 줄
테니......"
동자는 전에 없이 허둥거리는 스승의 거동을 정작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간 기다려서 동자는 굴림의자의 서간을 받아
품에 넣고는 대문을 나섰다.
동자가 삿갓이 있는 산채로 올라갔을 때 도장
안으로부터 야잇 하는 기합소리와 휙휙하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지하는 무사가 없었기 때문에 동자는 호기심을
느끼며 도장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관목이
벌어져 있는 틈 사이로 안을 엿보았다. 금새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도삽세(倒揷勢)로 넘어가며 때린
오른손 주먹에 제자 한 명이 넘어지고 있었다. 동자의
눈에도 그들의 스승인 삿갓이 몹시 흥분해 있는
듯하였다.
"밖에 누구냐! 엿보는 애가 누구냐?"
갑자기 벼락치듯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욱 놀란
것은 자신을 두고 아이라는 사실을 꼭 꼬집어 말하는
것이었다.
동자는 놀란 나머지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가까이 오너라. 누가 널 보냈느냐?"
그제서야 동자는 도장 출입문 쪽으로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예에 나으리. 저희 나으리께서 이곳 어른께
전하라시면서 서신을 주십디다요."
"굴림의자가 너의 스승이렷다."
"예에."
"몰래 엿보는 일은 옳지 못하다. 물론 너의
스승께서 가르친 것은 아니겠지. 어디 서찰을 이리
내놓아라."
"죄송합니다요. 편지는 여기 있습니다."
동자는 떨리는 손으로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놓았다.
삿갓은 제자들을 쉬게 한 뒤 동자가 내민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읽어가는 삿갓은 점점 곤혹스런
얼굴이 되어갔다. 몹시 착잡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얘야, 그래서 지금 굴림의자 어른은 어떻게 하고
계시냐?"
모두 읽고난 삿갓의 물음이었다.
"어떻게 하고 계시다뇨?"
"상처라도 입지 않았는가 말이다."
"상처를 입다니요? 편지에 그렇게 적혔습니까?"
"어허 그놈 참, 이토록 놀란 마음을 적어 보냈으니
그렇게라도 묻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래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지!"
동자는 다시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승인 굴림의자도 아까 마치 혼나간 사람처럼
서둘기도 하고 멍청해지곤 했었는에, 저 무림의 고수
삿갓까지도 편지를 펴 보는 즉시 안절부절 못하면서
또 다시 저렇게 머엉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아니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나으리."
"......응?"
"가서 저의 나으리께 뭐라 말씀 올릴깝쇼?"
"먼저 떠나거라. 내가 곧 뒤따라 갈 테니까. 가서
그렇게 전해라."
"예에......"
동자는 허리를 굽신 거린 뒤 도장으로부터 나왔다.
공연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동자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얘야, 어디루 그렇게 바삐 달려가느냐?"
돌아보니 얼굴이 붉은 노인이 서 있었다. 머리에는
쪽빛 물을 들인 두건을 쓰고 있었다.
"노인장께서는 거기서 무얼하시나요?"
대답 대신 노인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삿갓은 굴림의자의 집에
도착했다.
미리 짐작한 듯 안으로부터 먼저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박협사인가요?"
"예에. 서신을 받고 놀란 마음으로 이렇게 달려오는
중입니다."
굴림의자의 말에 그렇게 대꾸한 삿갓은 가죽신을
벗으며 마루로 올랐다.
"어서 들어오시오. 그런데 동자놈은 어디
있습니까?"
"예에? 벌써 보냈는데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전거리에서 광대놀음
구경이나 하고 있겠지요. 심부름을 보낼 때마다 자주
그랬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가만 계셔요!"
삿갓은 그의 삿갓을 벗으며 갑자기 긴장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건 좀 예외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뭘 말씀입니까?"
"분명히 동자더러 먼저 달려가서 내가 곧
도착한다고 말씀드리라 일렀거든요."
"그런 다급한 언질을 받고도 늑장을 부렸으니
돌아오면 혼을 내 주겠습니다."
굴림의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으므로 삿갓도
동자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
"워낙 수상스런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어서......
그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찰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상 더 설명해 드릴 건덕지도 없는 게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 무서운 힘은
처음입니다......"
굴림의자는 부르르 떨어 보였다.
"그 이상하다!"
"역시 삿갓 어른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뿐 아니라 저의 도장에서도 그저께 수상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에?"
"우리 아이 하나가 마니산 계곡 중턱에서 맞아
죽었습니다."
"제자인가요?"
"꽤 실력이 있는 놈이었지요. 그런데 깨끗하게
인당골이 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왜요?"
"그 이유를 안다면야 범인도 찾을 수 있을 게고, 또
복수도 했겠지요."
"살인자는 오리무중이란 얘기군요. 왜 그랬을까요?"
"지금 곰곰 그 점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벌써 내 제자를 둘씩이나
없앤겁니다. 지난 겨울 장쇠와 이번의 수봉이와......
어쩌면 이번 굴림의자 어른의 집안으로 침입했던 그
괴상한 힘의 소유자와 내 제자들을 죽인 그놈과 어떤
맥락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만일 내 동자놈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과
일련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됩니까?"
"일단 그렇게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삿갓과 굴림의자 어른의 공동 작전에 쐐기를 박는
것이 됩니다만......"
"공동작전......"
"만일 내 도장에 대한 도전이라면 그렇게 숨어서
일을 꾸미진 않겠지요. 수봉이를 때린 타법으로 보아
예사로운 고수가 아니었거든요. 그런 고수라면 반드시
정정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 도전해 올 것이지......
수봉이는 외상(外傷)하나 없었습니다."
"공동작전이라......"
굴림의자는 여전히 그 생각만 하고 있는 듯했다.
"암중모색(暗中摸索)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군요. 어허허허......"
삿갓은 그래 놓고 공허하게 웃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깊이 빠져 있던 굴림의자가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 때문이라뇨?"
"가죽쌈지."
"보물지도 때문에?"
"그 때문에 누군가가 내 집주위를 빙빙 돈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 그림자가 누구일까요?"
"결국 한 사람씩 가상인물을 도마 위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선 내가 보물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밀을 알고 있는 무예자일 테죠. 하얀독수리
최동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삿갓은 펄쩍 뛰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차라리 한 식구 같은
사람입니다. 보물지도에는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욕심이 있었더라도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탈취해갈 리도 없으며, 천하의 굴림의자가 당황해 할
만큼 고급한 무예를 지니지도 않았습니다."
"생각하니 그렇군요. 그럼 누구일까?"
"족제비 김해간은?"
"그는 삿갓 어른과 함께 갈매기섬으로 가서 죽었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굴림의자가 펄쩍 뛰었다.
"아 참 그랬었지. 내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나
원......"
"그러면 내가 보물지도를 소지하고 있다는 비밀을
아는 자가 또 누구일까요?"
"고려 사직의 왕손인 왕천이란 애송이가 또 알고
있겠지요."
"왕천? 얘긴 들었습니다. 새로 나타난 출중한
무예자라더군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요?"
"어린 왕천을 하얀독수리가 구해 주었고,
하얀독수리의 입에서 굴림의자 어른의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도 없거든요."
"그자의 무예가 그토록 출중하던가요?"
그렇게 되묻는 굴림의자의 말에 먼저 얘길 꺼냈던
삿갓이 오히려 펄쩍 뛰었다.
"아니오, 아니오. 왕천 따위일 리가 없습니다. 내가
그놈과 연습삼아 한 번 겨뤄 본 적이 있지요. 그때,
생각만 있었다면 초죽음을 만들어 놨을 겁니다. 그새
그놈의 무예가 설사 아무리 나아졌다 하더라도......
더구나 하얀독수리에 대한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그와
친한 우리를 그 따위 식으로 위협할 리는 없겠지요."
"그럼 누구일까요? 그 무서운 괴력의 무예로
보아서는 우리가 모르는 제3의 인물일 가능성이
많군요. 이를테면 천조옹이나 적두노사라든가......"
"천조옹과 적두노사라......"
"그들은 사라졌을 뿐이지 죽었다는 얘긴 아무도
듣지 못했잖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무림의 대선배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시시한 방법으로 약한 무리들을 납치하고
죽이면서까지 보물지도를 탐내야 합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결국 오리무중으로 되돌아 가는군요.
그럼 어떻게 앞일을 대처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번을 세울까요?"
"그것도 우스운 얘기지요. 상대의 정체도 모르는
상태인데다 또 생명의 두려움을 느끼고 칼잡이를 시켜
번을 서게 했다면 이 굴림의자가 무림에서 놀림을
받게 될 테고......"
굴림의자와 삿갓은 결국 그들이 나눈 이제까지의
얘기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시 허탈감에 빠졌다.
한참 만에 굴림의자가 눈을 빛내면서 입을 열었다.
"결국 내 동자놈도 그 괴력의 그림자한테
납치되었나 봅니다.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심보겠지요. 삿갓 어른네의 도제가 살해된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우선 며칠 낮밤
동안만이라도 저의 도제들을 선생 집 주위에다
매복시켜 놓고 감시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역시 제가 지휘를 맡아야겠지요?"
"그러면 더욱 든든하지요. 나는 안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그 괴력의 그림자를 유인하겠습니다.
그가 멋 모르고 침입했을 때 내가 소리를 쳐서 신호를
보내면, 삿갓어른은 그때 도제들을 동원해 내 집을
포위하게 하고 일시에 들이닥치면 그자를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그 다음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하도록 하지요.
아, 역시 갈매기섬을 다시 찾아가야겠지요?"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제자들 정도의
숫자와 실력이라면 한 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두렵긴 하지요. 허나
누군가가 보물지도를 탐내고 있는 이상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공연히 때를 기다린답시고 하염없이
기회만 엿보다간 보물지도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니까요. 가죽쌈지는
잘 보관해 두었겠지요?"
"그럼요. 감쪽같이 숨겨 두었지요."
"하얀독수리가 오겠다는 약속 날짜가 거의
됐습니다. 역시 그를 우리 일에 끌어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삿갓어른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번 거사에는
본인도 참여할까 합니다."
동자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스름녘
손님처럼 가장해 들어왔던 삿갓의 제자가 이미
굴림의자의 집 주위는 물론 점복가 일대를 살피고
있다는 전갈까지 주고 갔었다.
굴림의자는 든든했다. 제 아무리 무림의 고수라도
이젠 섣불리 침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의 무덤을
팔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봄비가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호롱불 한 개를
방 한쪽으로 밝힌 굴림의자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어떤 발자국 소리라도 잡아내려는 듯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런 낭패스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천하의
굴림의자가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곤혹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점차 은근히
화가 치밀었고, 끝내는 복수심 같은 감정이 일었다.
톡톡히 망신당하고 있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듯했다.
몇 차례 후둘거리던 빗소리도 지나간 듯 잠시
조용해졌다. 긴장도 다소 풀리고 얼마쯤 피곤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굴림의자는 뻣뻣한 무엇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거다! 바로 그 무서운 힘이 다시
나타났어!'
자세를 고쳐 앉는 굴림의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우선 침착하기로 했다. 우려워 할 것은 없다. 바로
대문 밖에 삿갓과 그의 뛰어난 도제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누구냐, 하고 고함소리 한 마디면 그들은
지체 않고 뛰어들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저 괴력이 가까운 데서 느껴지는 전율스런
힘 때문에 잠시 아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대서 상대를 확인도 않고 밖으로 신호를
보낸다는 건 신중하지 못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문 앞에 아무도 없을 경우 소리를 듣고 뛰어든
삿갓한테 겁장이란 말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호는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내보내도 늦지 않는
것이다.
굴림의자는 침착하게 말했다.
"밖에 누구냐?"
그러나 대꾸가 없었다. 힘의 위치조차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두려운 상황이었다.
굴림의자는 날렵하게 팔을 놀려 미닫이 문을 발칵
열었다.
"누가 거기 있소?"
얼만큼은 바깥의 삿갓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마루에도 마당에도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들보 위와 마당의 대추나무 위도 훑어 보았다.
역시 아무데도 인간의 그림자는 없었다.
인간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굴림의자의 눈은 밝다. 어둠 속이건 숨어 있건
안막으로 혹은 감각으로 상대 물체를 보며 또
잡아낸다. 그러나 오로지 강력한 힘만 가까운 데서
느껴질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전신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괴력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굴림의자는 마루에 앉아 끄응 신음소리를 냈다.
대문 옆 담 너머로부터 무언가가 솔개가 병아리를
채려고 내리듯 획 날아들었다.
"신호를 보냈습니까?"
그는 삿갓이었다.
"글쎄요...... 이 무서운 힘...... 앗, 벌써
사라졌소!"
그토록 오랫동안 가까운 데서 팽팽하게 지탱하던
힘이 삿갓의 등장과 함께 삽시간에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굴림의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왜, 무얼 보셨소?"
"바로 그 힘이었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가깝게 느껴졌는데...... 박협사, 그래 바깥엔 별일
없었습니까?"
"정작 들고양이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이젠
어떡하죠?"
"그럼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 있겠습니다. 그 힘이
느껴지는 순간 신호를 하십시오. 우선 집 안부터
샅샅이 뒤지도록 합시다. 뒤뜰과 지붕 위와 골방과
뒷간까지 살펴 보지요. 설사 이 집 안에 숨어있다
하더라도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제
아무리 무림의 고수라도 이 삿갓의 눈과 육감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럼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굴림의자는 지친 듯한 표정이 되어 안방으로
향했다.
삿갓은 세 명의 도제들을 불러들여 아까 말한
집안의 곳곳을 뒤지느라 부산을 떨었다.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대문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괴상한
그림자는 잡아야 합니다."
격려까지 해 준 삿갓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집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비도 그친 듯했다.
굴림의자는 호롱불을 껐다. 이불도 펴지 못하고
문갑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깐 깜박 졸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엉덩이를 툭툭 찬다는
느낌이었다. 굴림의자는 얼른 일어나 앉았다.
"누구요?"
굴림의자는 돌연한 사태를 당한데다 공포감이
엄습해 와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떠들지 마라. 소리쳐도 소용없어. 네 친구라는 그
애송이 삿갓도 이미 내가 조용히 잠들게 했으니까.
그러니까 불러봤자 구원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전율이었다. 삿갓을 잠들게 할 만한
무공이라면 도대체 누구를 믿을 것인가.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어느새 달빛이 봉창문을 통해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서는 불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놔."
"뭘 말씀인지요?"
"그 검정 가죽쌈지 말이다. 네놈이 훔쳐갔다는 걸
알고 수소문해 찾느라고 힘깨나 들었지."
굴림의자는 이 거부할 수 없는 힘 앞에서 결국은
쌈지를 내놓아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그러나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어르신네, 부디 그것만은......"
순간 노인의 손이 날아와서 굴림의자의 왼뺨을
때렸다.
"이놈아, 원래 그것이 너의 것이더냐? 너도
훔쳐오지 않았느냐!"
"하오나, 무장해제를 당한 우리 무림의
사내들한테는 이 보물지도야말로 유일한
희망이옵기로......"
"잔소리가 많다. 더 매맞기 전에 어서 꺼내
놓아라."
굴림의자도 고수급 무사이다. 때문에 상대의 육중한
무공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노인의 신경을
건드려서 태풍 같은 일장(一掌)을 얻어맞을 경우
즉사한다든가 아니면 병신이 될 게 틀림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하오나 보물지도를 가지고 가시겠다는 어르신네의
존함이라도 알아 두어야, 그래도 무림에서 힘께나
쓴다는 굴림의자의 명예를......"
"뭐, 명예? 네 놈의 실력을 가지고 그래도 무림에서
활개를 쳤단 말이지? 우습구나. 공부좀 더 하여라.
자, 시각이 급하다."
"그런데 어인 일로 저의 동자와 삿갓의 제자들을
해쳤는지요?"
"무슨 잔소리를 그렇게 하느냐? 나완 무관한
일이다."
"그럼 그 말씀 믿겠습니다. 그런데 무림의
대선배이신 것 같은데 저희 같은 후배들을 그런
식으로 겁 주시고 이젠 지도까지 뺏어 가시겠다니,
존함도 알려 주지 않으시고......"
네 놈따위에게 알려 주려고 가진 성이 아냐."
이젠 굴림의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문갑
쪽으로 가서 검정 가죽쌈지를 꺼냈다.
그것을 나꿔 채듯한 노인은 왼손을 들어 이번에는
굴림의자의 오른뺨을 후려갈겼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그래 내가 그따위 보물이
탐나서 이걸 달래는 줄 아느냐. 섬을 꿰차고 앉아
나를 기다리는 그놈을 찾아야겠기에 이걸 당분간 빌려
달라는 것뿐이야. 반드시 돌려줄 테니 걱정말아라."
노인은 문을 여닫고 휭하니 사라졌다.
바깥은 적막이었다. 달빛만 요요히 마당에 깔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꿈인가 하고 허리를
꼬집었지만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9. 밤안개
날씨가 더웠다.
하얀독수리 최동은 주막에 앉아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한양은 새 사직이 기틀을 잡아가는 동안
경제와 문화도 안정을 기하는 듯이 보였다.
시전거리는 언제나 인파들로 득실거렸다. 장날이
아니더래도 인근에서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로 해서
도읍지로서의 물량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얀독수리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스승의 문하를 떠난 지 벌써 십 년. 사부의 명령을
이행할 길이 막연한 가운데서 어느새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수중에 지녔던 귀중품도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사부께서도
너무하셨다. 그 천조인가 뭔가 하는 괴물의
얼굴이라도 알려 주셨어야 내가 이런 고생은 하지
않지. 그를 어디에 가서 찾아낸담. 그건 그렇고
사부께서는 왜 아무 연락이 없을까. 연락장소도 정해
놓지 않았으니 연락할 수 없는 바도 무리가 아니지.
그런데 벌써 십 년이라는 기한도 차 가고...... 혹시
그새 천조라는 괴물은 죽었을지도 몰라. 게다가
사부께서도...... 한데, 사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하얀독수리는 주모가 날라다 준 국밥도 들지 않고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보게, 젊은이. 국밥은 식기 전에 먹어야
제맛이라네."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참견을 했다.
"예에, 예."
깊은 생각에서 화들짝 깨어난 하얀독시리는
숟가락을 들어 얼른 국밥을 입으로 퍼넣었다.
그러면서 날짜를 세어 보았다. 삿갓과 만나기로 한
날짜에서 벌써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 그렇구나. 그새 무슨 소식이라도 얻어 듣고
있을지 모르겠다. 해 지기 전에 그쪽으로 곧장
가야겠다.'
그런 궁리로 하얀독수리는 점심을 끝내고 있었다.
"여보게."
아까 그 노인이었다.
"예에."
"자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네 그려."
"예에?"
하얀독수리는 무예자의 본능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그제서야 느꼈다. 결코 예사로운 노인이 아니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네만......"
"그렇습니까. 허기야......"
그렇게 대꾸하며 심기를 가다듬었다.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있는 노인의 눈알은 번쩍번쩍 빛났다.
하얀독수리는 긴장했다.
"아닐세. 내가 괜히 실없는 소릴했네."
노인은 그러면서 주청으로부터 내려가고 있었다.
'이상하다!'
하얀독수리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심기를 가다듬어
노인의 속마음을 읽어 내려 했으나 도무지 오리무중인
것이 더욱 이상했다.
'혹시 천조라는 괴물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하얀독수리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무림의 고스인 것 같은데 그런 기운을
상대가 느끼지 못하게 하는 수법을 익혔다면 이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일단 따라붙어야겠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게다.
노인이 실없이 나한테 수작을 붙였을 턱은
없어......'
하얀독수리는 밥값을 치른 뒤 얼른 주막 밖으로
달려나왔다.
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전거리를 활보해
가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바짝 긴장하며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싹 따라붙었다.
'노인은 무예자가 아닌지도 몰라. 발걸음이
평범하거든. 정작 관상을 보는 노인인지도
모르지......'
하얀독수리는 달리 바쁜 일도 없고 당장에 할 일도
없었으므로 노인을 따라 붙는다는 게 나쁠 것도
없었다.
노인은 양쪽 점포 안을 기웃거리며 할 일 없는
노인처럼 시전 바닥을 한참 구경하고 다녔다.
하얀독수리는 다소 맥이 풀렸다.
'신경과민이겠지. 나도 어지간히 할 일 없는
놈이군. 조금만 이상한 인간을 봐도 천조로 착각을
해버리니......'
중얼거리면서 아주 잠깐 한눈을 팔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엇!'
진짜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노인은 눈 앞에 없었던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방금 눈 앞에 있었는데!'
하얀독수리는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근처의 점포
안과 길바닥과 인파들을 재빠르게 눈으로 살폈다.
그러나 노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가만 있자, 이건......!'
하얀독수리는 멈춰서서 잠깐 생각에 잠기었다. 최고
무예자란 무예가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무공과 속마음을 상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무예자인지
아닌지를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노인은...... 평범한 서민일까.
아니다. 그럴 수가 없어. 찰나에 하얀독수리의 눈을
피해 갈 정도라면 예사로운 무예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궁리도 아무 짝에 소용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벌써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기어들었는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얀독수리는 잠시 망연해졌다.
'자, 이젠 어떻게 한다?'
노인을 찾는다는 일도 부질없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찜찜한 게 남아 있었다. 어쩐지 그가 그토록 오래
찾고 있는 괴물 같기도 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가 천조는 아니겠지. 세상에
자만한 무명의 무예자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설사 그가 천조라 해도 나의 무예로써는 당할 수가
없겠는 걸. 역시 세상은 넓어. 노인이 천조가 아니길
바라지만......'
그러고 섰는데 동자 하나가 다가왔다.
"나으리."
"응?"
이번에 또 뭔가 싶어 하얀독수리는 동자를
굽어보았다.
"나으리가 조금 전에 주막에서 국밥을 드신
분인가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좌우지간 국밥을 드셨는지요?"
"들긴 들었지."
"그럼 틀림없군요."
"뭐가?"
"전 두 푼 받고 심부름 해 드리는 것 뿐입니다요.
아까 그 주막으로 되돌아 오시래요."
"누가?"
"저어기 계신......"
뒤돌아 보던 동자가 몹시 당황해 했다.
"저기 누가 있었는데 그러냐?"
"참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저기 서 계셨는데?"
동자는 시전거리 한쪽에 보이는 우물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해 했다.
"네가 말하는 그분이란 이마에 흰 두건을 두른
노인이 아니더냐?"
"맞습니다요."
하얀독수리의 말에 동자는 공연히 반가워했다.
"나를 주막으로 되돌아오라구?"
"예에. 그렇게 말씀하십디다요."
"알겠다. 알려줘서 고맙다."
"어서 가 보세요. 그래야만 제가 돈 받고 심부름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 꼭 가 보겠다."
하얀독수리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인이 만나자고 한다. 이유는 알길이 없지만
이제까지 두려워했던 그가 만나자는 전갈은 확실히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조심해야겠다. 노인의 정체를 알 때까지 나의
목적을 꺼내 놓아서는 안 되겠지. 그가 고수급
무예자라는 사실은 벌써 알았고......'
하얀독수리는 서둘러서 아까의 그 주막으로
되돌아갔다.
"어서 오시우, 손님."
"국밥은 아까 주모가 말아줘서 먹었구......"
"아, 그럼 노인장을 찾으로 오신 손님이구먼요."
"그렇소. 바로 그 노인장을......"
"뒷채 별실로 들어가 보시우. 내 곧 술상을 보아
가지고 들어가지요."
"뭐요?"
하얀독수리의 놀람에도 아랑곳없이 주모는 서둘러서
부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뒤뜰로
돌아나갔다.
방 앞에 이르자 마루 밑으로 노인의 가죽 신발이
보였다.
"관상을 보아 주신다기에 아까 그 젊은 놈이
노인장을 찾아 왔습니다."
"아, 어서 들어오게나. 난 산보삼아 시전거리를 한
바퀴 돌고 왔지."
하얀독수리는 조심스런 몸짓으로 노인이 든 별당에
들어섰다.
"앉게."
노인은 그새 지필묵을 꺼내 놓고 뭔가를 쓴 뒤에
봉합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다소의 무예를 닦은 듯한데 누구한테
배웠는가?"
노인이 꺼낸 첫 질문이었다.
하얀독수리는 스승의 이름을 섣불리 댈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노인이 천조옹이어서
스승이 그를 베라는 엄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발설하게
되는 순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이 틀림없게
되는 터이었다.
"신통치가 않은 기술이지요. 저 같은 놈에게 스승이
있겠습니까. 그저 혼자 숨어 조금 연마했지요.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이나 부니할까 하고......"
노인은 벌써 하얀독수리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하얀독수리는 바싹 기를 곤두세워서 노인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노인은 천하태평이었다. 상대의 이러한
의도를 전혀 개의치 않고 정작 무예 근처에도 못가 본
노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진짜
고수인지 아닌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까 술청에 있을 때 보니까 몹시 근심 있는
젊은이로 보이더군. 안 그런가?"
"잘 보셨습니다."
"그걸 나한테 말해 줄 수 있겠나?"
"무어 노인장께 말씀드려 보았자 큰 도움을 얻을
만한 내용이 아니겠기에."
"자존심이 강한 젊은이군. 벼슬을 못 해 안달이라면
내가 추천해 주지. 요로에 아는 인물이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하오나, 지금으로선 벼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즈음에 주모가 술상을 날라왔다. 제법 그럴 듯하게
차린 상이었다.
"저, 어르신네. 술을 따를 무자리라도 한 년
들여보낼까요?"
"아니, 그만 두어라. 난 이 젊은이와 중요한 의논을
해야 하니까."
노인의 말에 주모는 하릴없이 물러나갔다.
하얀독수리가 물었다.
"저한테 의논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네. 의논이라기 보다는 실상은 내가
젊은이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네."
"그래서 술상까지 미리 준비시켰군요?"
"물어 보지도 않고 그렇게 한건 미안하이. 그렇대서
뭐 나쁠건 없잖은가. 싫으면 자네가 거절하면
그만이니까. 자, 우선 한잔 받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보아 주신다던
관상은......"
"아, 그걸 말해 주지. 자네가 지금은 고생께나 하고
있지만 나중에 귀한 사람이 될걸세.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네."
"그 잘됐군요. 그러면 언제쯤 이 고생이 끝날까요?"
그 말에 노인은 대꾸 없이 다시 하얀독수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번쩍번쩍 빛났고, 그의 무거워 보이는
무공은 역시 쉽사리 상대가 가늠할 수 없도록 감추고
있었다.
"......때가 오면 될 테지. 내 부탁이란 다름이
아니고 편지 한통을 전해 달라는 걸세. 내 노자는
톡톡히 주지. 등용 못한 무사란 가난한 법이거든.
어떤가, 용돈도 벌고 개골산 구경도 하고......"
"예에? 개골산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거긴 경치가 아주 좋지. 무사 수업을 제대로
하려면 풍류도 즐겨야 한다고 들었네만."
"그렇게 하지요.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람삼아
떠나보는 일도 무사 수업에 나쁠건 없지요. 그래
개골산으로 가서 누굴 만나야 합니까?"
"내가 나이가 들어 그쪽으로 갈 기력이 없어서
그러네. 명연담으로 가면 파계승 시각이 있을걸세."
"시각대사?"
"내 어릴 적부터 친구이지. 자네가 무술을
배우겠다면 내가 추천해 주도록 할까?"
하얀독수리의 머리속으로 번개같이 스쳐지나는 게
있었다. 시각대사라면 왕천의 사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 시각대사의 친구라는 이 노인은
누구인가.
"말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르신네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온지요?"
그것은 떨리는 물음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노인
자신의 입을 통해 천조옹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베기는 커녕 도리어 죽게 되지나
않을까.
"뭐 이름을 대어도 자네는 알 도리가 없지. 산천을
떠도는 하릴없는 노인이니까. 시각이 나를 부를 땐
길대 영감이라 부르지. 길할 길자에 큰 대자라구 내
아호일세."
하얀독수리는 한숨을 쉬었다. 노인이 천조가
아니기를 바랬었다. 설사 그가 천조라 하더라도
천조라고 고백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지금 명연담에 계실까요?"
"보름전에 만났으니까 지금도 있을걸세. 그러나
그새 시각이 유람이라도 떠났다면 그의 제자놈한테 이
편지를 전하게."
"그럼 이 편지를 제자분이 개봉해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그 제자가 누구온지요?"
"조심하게. 아직도 쫓기는 신세이거든. 왕천이라구
부르던데."
"왕천이 지금 명연담에 있다는 얘깁니까?"
"틀림없이 있을걸세. 보름전에도 무예수련으로
여념이 없었으니까."
"그럼 시각대사의 문하에는 몇 명의 제자들이
있는지요?"
"수제자는 왕천이지만 요즘에는 여남은 명이 더
붙었다더라."
"어르신네께서는 소생을 다소의 무예를 닦은 인물로
보셨는데 그렇다면 어르신네께서도
무예자이시겠군요."
"아냐 아냐. 보는 눈이 좋대서 그만한 무공을 꼭
지니라는 법은 없잖은가."
"그렇긴 하군요. 그런데 어째서 굳이 저를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는지요."
"아까도 말했었지. 가는 길이 험해서 다소의 무공이
없다면 이 편지가 무사히 전달될 수가 없겠지."
하얀독수리는 잠시 생각해야 했었다. 자신의 정체를
슬쩍 내비치고 저쪽의 반응을 엿보는 게 어떨까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발언이었다.
만일 노인이 천조옹이어서 왕천의 입을 통해 그를
베러 쫓아다니는 하얀독수리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했을 때 노인이 선수를 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여보게, 젊은이."
"예에?"
"난 자네가 누구이든 상관할 바가 없네. 내가
무예자가 아닌건 분명하니까."
"그렇겠군요."
"그러니까 젊은이의 이름을 대도 내가 알 리도
없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네. 다만 내 심부름을 해
주겠는지 거절하겠는지 그것만 궁금할 뿐이네."
"명연담으로 가 보겠습니다. 본 지가 오래 돼서
왕천도 보고 싶고......"
"뭐라구? 왕천을 알고 있나?"
"어렸을 때의 왕천을 알고 있죠."
"가만 있거라!"
갑자기 노인은 생각에 잠기는 기색이었다.
"무슨 짐작이라도 있으신지요?"
"어린 왕천을 알고 있다면 그럼 자네가 하얀독수리
최동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얀독수리는 긴장했다. 이미 이쪽의 정체가 노출된
이상 어떤 반응이든 있을 것이었다.
"그 참 기연이구먼."
"예에?"
"시각을 통해 자네 얘길 들었네. 왕천을 구해서
오늘의 무사로 만든 장본인이 하얀독수리였다구. 이거
정말 마침 일이 잘됐네 그려. 그럼 어서 가 보게나."
하얀독수리는 얼마간 어리둥절해졌다. 노인조차
이쪽을 알고 있는 것이다. 노인이 천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렇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까 시전거리에서 어르신네의 뒤를 쫓았지요."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걸 그때사 알았지."
"홀연히 사라지시더군요."
"자네가 한눈을 팔았을 테지."
"그것은 무공이 아니었습니까?"
"천만에."
"소생은 어르신네가 천조옹인 줄 알았습니다."
"허허허...... 내가 천조였다면 자네는 벌써 죽었을
걸?"
"예에?"
노인은 다시 호기롭게 웃었다.
"내가 천조는 아닐세. 자 한 잔 더 마시고 길을
떠나 보게나."
하얀독수리는 노인의 반응이 그러한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독심술을 아무리 발휘해 보아도 노인의
마음은 무심무사해 보일 뿐이었다.
길대노인과 헤어진 하얀독수리는 길을 떠났다.
노인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진 않았지만 그렇대서
의심할 만한 뚜렷한 건덕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왕천을 만나 보면 모든 것이 환히 밝혀질
것이었다. 노인의 정체는 물론이거니와 왕천을 오늘의
훌륭한 무사로 키워낸 시각대사의 정체도 확연해 질
것이었다.
이런 위험은 있었다. 노인이 건네준 편지가 이쪽을
난처하게 만들 우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왕천을 믿고 떠나보는 수밖에 없었다.
왕천과는 원수진 일도 없거니와 전날에 혹시 모르는
감정이 있다 할지라도 어린 왕천을 구해준 인연이
있었기로 그것으로 상쇄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터이었다.
하얀독수리가 개골산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만
이틀 반 만이었다.
구룡폭포의 낙숫물이 고막을 때렸다. 어둠 속에서
내리꽂히는 하얀 포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얀독수리는 옆의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는
폭포를 유심히 내려다 보았다.아홉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인가.
얼마간 감개어려하는 하얀독수리의 귓가로 무슨
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응?'
그것은 기척이라기보다 살기였다.
'호랑이닷!'
하얀독수리는 중얼거렸다. 등 뒤로 비스듬히 걸린
자신의 칼에다 손을 가져갔다.
원개 동물한테서는 살기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그쪽이 인간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할지라도 동물은
인간의 살점이 목적일 뿐이지 증오심 따위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엄청난 호랑이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슬금슬금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개골산 호랑이는 무섭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대호(大虎)는 포악하고 영악스럽기가 인간의 그것보다
더하다고 했다. 대호는 어느새 동물이 가지고 있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인간의 그것에 훨씬 가깝게
접근시킨다는 얘기를 전날 스승한테서 들은 바도
있었다.
'어떤 놈일까?'
하얀독수리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솔밭사이를
쏘아보았다.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이 돌연한 방문객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배를 땅에 깔고 앉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독수리는 위기를 느꼈다. 이토록 기세가 엄청난
호랑이를 만난 일이 없었다. 살기를 품고 있는 동물
역시 처음이엇다. 놈이 달려들었을 때 무사히 단칼에
벨 수 있다해도 그 육중한 힘에 밀려 벼랑 아래로
떨어질 위험도 있었다.
'저 놈은 필시 내 마음을 읽고 있을 게다.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안 수간 지체 없이 달려들 테지. 한
치의 빈틈도 내보여서는 안 되겠다. 개골산 일급
포수나 궁사들도 많이 당하지 않았다던가......'
하얀독수리는 바위 위에 가부좌하고 앉았다. 조용히
칼을 빼서는 무릎 앞에 놓았다.
'최소한 뒤로 밀리지는 않겠지.'
하얀독수리는 호랑이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놈이
쏘아보는 눈길보다 더욱 맹렬하게 쏘아보았다.
그러면서 기세로 물리칠 것인가 아니면 슬쩍 이쪽의
허함을 보여 주어 공격을 유도한 뒤에 한 판 붙을
것인가를 두고 궁리했다.
만일 기세로써 이겼을 경우 호랑이는 일단
물러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틈을 보아 습격해 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죽기 살기로 한판
붙어서 끝장을 내야할 법도 한 것이다.
태껸에 있어서 호권(虎拳)은 호랑이의 몸놀림에서
유래가 되었기로 그 형(型)의 으뜸은 역시 호랑이인
것이다. 인간이 동작이 아무리 기민하다 치더라도
공격을 목적으로 전력 질주하는 놈의 기술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하고자 한다면 지혜를 가미하는
것 뿐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적과
대결할 때 희노애락의 그 어느 감정이든 하나를
가지고 맞선다. 그러나 맹수는 그렇지 않다. 증오심
같은 일방적인 공격성 하나로 돌진한다.
인간이 맹수를 이기는 방법은 기를 모아 어느
감정이든 하나로 통일하는 길 뿐이다.
하얀독수리는 결심했다. 자신은 반드시 살아야 하고
상대는 반드시 베어야겠다는 정신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호랑이의 이마에는 주먹만한 하얀 반점이 있었다.
그것이 놈의 살기등등한 눈빛 위에서 위엄을 더했다.
하얀독수리는 잠깐 궁리했다. 주먹을 뻗어 놈의
하얀 반점을 노려 골을 찌를 것인가. 아니면 비스듬히
몸을 비끼며 칼로써 놈의 배를 가를 것인가......
역시 이쪽의 팔이 짧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 섰다.
하얀독수리는 일단 상대를 유인하기로 했다. 이쪽이
겁을 집어먹는 양 뒷걸음질을 치면 놈이 때를 만난 듯
달려들 것이었다.
하얀독수리는 삼십 보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 쪽으로 댓 걸음 다가갔다. 호랑이는 긴장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이쪽이 도망치려는 듯 바위옆으로
비껴 서자 놈은 번개같이 빠른 솜씨로 몸을 날리며
이쪽을 덮쳤다. 간발의 순간이었다.
하얀독수리는 간수세(看守勢)로 칼을 꼿꼿이 세워
내민 뒤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비꼈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오른쪽 뺨을 할퀴며
지나갔다. 동시에 육중한 힘이 칼끝에 느껴졌다.
하얀독수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송아지만한 호랑이는 자신의 머리를 넘어 바위 쪽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져갔다. 필시 놈이 죽었을까?
문득 폭포 저쪽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웃고
있었다.
"으하하하......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솜씨인걸!"
하얀독수리도 어렸을 때 스승인 적두노사로부터
환청술(幻聽術)을 배웠다. 폭음 속에서도 기척을 듣는
기술이었다.
하얀독수리는 식은 땀을 채 느끼기도 전에 폭포
저쪽에서 웃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한
번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폭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저쪽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하얀독수리는 얼른 반응을
보였다.
"거기 누구요?"
역시 폭음을 뚫고 대꾸가 왔다.
"개골산 주인이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인가?"
"그쪽이 이 산의 주인이라면 나는 손님이
되겠구려."
"그러나 손님이라면 의당 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옳은 법!"
"그토록 무례한 손님은 아니지요. 미처 인사할 틈도
없이 맹수부터 달려들었으니......"
"아, 그건 우연히 보았소. 그 솜씨만으로 인사를
대신 받은 것으로 하지요."
그런 수작들이 오간 후 얼마 뒤에 저쪽의 일행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그동안 뒤를 돌아다 보았다. 큰
호랑이는 뱃가죽을 벌린 채 죽어 넘어져 있었다.
오른쪽 뺨이 쓰리고 아팠다. 피가 가녀리게 배어져
나왔다. 호랑이의 발톱이 할퀸 상처였다.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일행들이 나타났다.
"앗!"
저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왕천 도령이구려."
"아아니, 최협사가 여긴 웬일이오?"
"손님으로 왔지요. 개골산 풍치가
절경이라기에......"
"유람이라도 오셨단 말입니까?"
"겸사겸사해서요."
"너무나 뜻밖이구려. 정작 실감이 나지 않아요.
생사조차 알길이 없어 그동안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우리가 헤어진 후로 저한테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정말 할 얘기가 많습니다. 좌우지간
반갑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이 붙들고 반가워하는 동안
왕천을 따라왔던 네 명의 사내들은 바위 뒤로
돌아가서 죽어 넘어진 호랑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지요?"
왕천이 하얀독수리의 뺨을 보며 물었다.
"정작 엉뚱한 환난을 당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최협사와는 이상한 기연이 있습니다."
"뭐가요?"
"우린 이놈을 쫓고 있었거든요."
"이 호랑이를!"
"우리의 적입니다. 우리 동지 하나가 며칠 전에
저놈한테 먹혔습니다. 복수하기 위해서 구룡폭포까지
뒤지고 있던 중입니다."
"그렇다면 도련님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제가
저놈을 피하는 게 옳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소리칠까 했지요. 그런데
건너편에서 가만히 보니까 누군가가 대왕호(大王虎)와
대결 자세를 취하길래 잠깐 구경하기로 했지요. 어디
혼 좀 나 보아라 하는 기분으로...... 죄송합니다.
최협사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최협사
정도의 무예가 아니면 저놈을 상대해서 이길 수도
없었겠지요. 우린 저놈을 개골산의 대왕호라
부른답니다. 이쪽 산야를 주름잡으며 얼마나 많은
인명을 해친 놈인지......"
"그렇게 무서운 놈이었습니까?"
"무예수련자, 여행자, 포수, 스님까지 줄잡아
저놈에게 당한 숫자는 이백을 넘는다지요."
"그러니까 그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 제가 복수를
해준 꼴이군요."
"이젠 명복만 빌어 줄 따름이지요. 그런데......"
왕천은 네 명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인사를 시켜 드리도록 하지요. 제 제자들입니다.
고려 사직의 자손들로서 때를 얻지 못해 이쪽으로
숨어들어와 제 제자가 됐지요. 얘들아 이쪽으로 와서
이분께 인사드려라. 내가 여러번 얘기했었지. 바로 그
고명하신 하얀독수리 최동 협사이시다. 내 생명의
은인이시고......"
"아, 하얀독수리......"
네 명의 무사들 입에서는 동시에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몰라 뵈었습니다. 그러나 명성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한유성이라고 합니다."
한유성이 먼저 나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하얀독수리도 한유성을 위시한 네 명의 무사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왕천은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최협사께서 대신 치러
주셨으니 우린 이분께 고마움을 표시해야겠지. 산채로
돌아가서 잔치를 벌이도록 하자."
"유달리 제가 여러분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놈이 나한테 공을 세울 수 있도록
가슴으로 뛰어든 것 뿐입니다."
하얀독수리의 겸양스런 말에 모두는 기꺼운 듯이
웃었다. 왕천은 다시 말했다.
"너희들, 죽은 대호를 잘 운반해라. 최협사의 옷이
낡았으니 가죽은 벗겨서 이분의 의복을 지어 드리도록
하자."
"아닙니다 도련님. 저보다는 도련님한테 더
어울릴것 같습니다. 선물로 드리지요."
"선물로......"
"예에. 개골산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왔지만 마침
선물거리를 장만했으니 잘 됐지 뭡니까. 환대해
주시는 댓가로 드리고자 하오니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하얀독수리의 간곡한 부탁에 왕천도 크게 마다하진
않았다.
달빛이 계곡을 덮었지만 이들이 걷는 험한 오솔길은
나뭇잎으로 가려져 어두웠다.
"산채는 여기서 먼가요?"
"천천히 걸어도 자정까지는 닿을 수 있겠지요."
"섣불리 명연담을 찾느라고 헤맸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얀독수리의 말에 왕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명연담을요?"
"도련님이 거기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무작정 이곳으로 유람 오신 게 아니던가요?"
"그토록 한가한 몸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이
하도 뜻밖이어서요."
"물론 도련님도 뵙구 시각대사님께 서신도 전하려고
왔지요."
"저의 사부이신 시각대사님을 만나시려구요?"
"예에. 지금 명연담에 계시겠지요?"
"불행히도 지금 계시지 않습니다."
"분명히 지금쯤 계실거라고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보름쯤 전에 길을 떠나셨지요. 어디 급한 볼 일이
계시다면서......"
"계시지 않아도 됩니다. 실상은 꼭 뵙고 싶었던
분이지만."
"애석한 일이군요. 언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을
아니 하셨으니...... 그런데 저의 사부님이 지금
분명히 이곳에 계실거라고 말한 분이 누구신지요?"
"한양의 시전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분이지요.
대사님과 어릴 적부터 친구분이라시더군요. 길대
노인이라고 말씀드리면 금새 아실 거라고
말씀하십디다."
"길대 노인?"
왕천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그런 노인장을 도련님도 모르신다는
얘깁니까?"
"처음 듣는 아호입니다만......"
"보름 전까지 이곳에서 벗이 되시는 시각대사님과
함께 계셨다던데요?"
"예에?"
왕천의 반문에 하얀독수리는 다시 당황했다.
"분명히 그 노인장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보름전에
이곳에서 한양으로 나오셨다구. 시각대사님과 왕천
도련님도 만났었고 지금도 계실거라며 소상히 이곳
사정을 알고 있던데요?"
"그 이상하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입니까?"
"제가 알기론 적어도 한 해 동안은 아무도 우리
산채로 접근한 인물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요? 그럼 길대 노인이라는 이름도 처음 듣는
거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어째서 왕천 도련님과 또 제자분들이 여나문
명이라는 숫자까지 일러 주실 수 있었을까요?"
"여나문 명의 숫자까지?"
"예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무거운 호랑이를 메고 오며 낑낑거리던 젊은
무예자들이 동지를 죽인 대호가 미운지 죽은 호랑이를
막대기로 딱딱 때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정말 저로서도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편지를
개봉하면 그분이 누구였는지 곧 아시게 되겠지요."
"편지를 주시겠습니까?"
"시각대사님께 전하라고 이릅디다. 만일 대사님이
계시지 않을 경우 왕천 도련님이 개봉해도 무난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제가 개봉해도 좋다구요?"
"예에. 분명히 그렇게 일러주셨습니다. 편지는 여기
있습니다."
하얀독수리는 품 속으로부터 봉서를 꺼내어
왕천에게 내밀었다.
"저쪽 달빛 비치는 곳으로 가서 읽어 보겠습니다."
왕천은 몇 발자국 걸어나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얘들아, 잠깐 쉬어가도록 하자. 저쪽 바위 근처로
가자. 다른 맹수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누어
번을 서도록 하여라."
말을 끝낸 왕천은 서둘러서 몇 발자국 앞서
걸어나갔다. 하얀독수리는 그런 왕천에게 얼른
덧붙였다.
"참고하시지오. 노인은 저의 성명과 별명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의 도련님을 구해 냈던
사실까지도 착실하게 말해줍디다."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알고 있기로는......"
말하던 왕천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잠깐만 계십시오......"
그곳은 나무가 없는 곳이었다. 키 작은 억새풀만
달빛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는 수목의 천지여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벼랑의 꼭대기만 밤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솟아 보일 뿐이었다. 왕천이 편지를 읽고 있을 동안
하얀독수리는 한유성 쪽으로 다가갔다.
"귀하신 신분의 자제들로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모두가 운명이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를 두고
전화위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백성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었으니까요."
한유성이 대표해서 공손히 대답했다.
하얀독수리가 한유성 등과 어울려 잡담을 즐기고
있는 동안 왕천은 저쪽 작은 바위 위에 올라앉아
편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는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글줄의 길이나 편지지의
두께로 느끼기로는 왕천이 벌써 편지를 읽고
일어났어야 옳았다. 읽었다 해도 이미 열 번은 읽었을
만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왕천은 그 편지를 들고 뚫어져라 읽고 또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글귀 속에 감춰져
있는 심각하고 심오한 그 무엇을 완전히 터득한
이후에나 읽기를 끝내겠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달빛을 받고 있는 왕천의
얼굴을 편지를 읽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편지를 펴든
채 망연히 딴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씌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하얀독수리는 궁금해졌다. 그러나 왕천의 태도가
하도 엄숙하게 굳어 있었으므로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얼마간의 순간이 다시 흘러갔다. 달이 한덩이의
구름 속으로 숨고 있었다.
"최협사, 이리 가까이 오시죠."
왕천이 정신을 차렸는지 편지를 움켜쥐며
하얀독수리를 부르고 있었다.
"불렀습니까, 도련님?"
"예에. 그런데 도대체 저로서도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발신자의 신분 역시 알 수 없다는 뜻입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선 최협사께서도 이걸 읽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남의 편지를 읽으라구요?"
"다시 달빛이 밝게 비치는군요. 이 수상한 편지는
혼자 읽어서는 안될 것 같군요. 함께 읽고 연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얀독수리는 왕천이 내미는 편지를 별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왕천이 보아라.
내 이미 너를 키워 무림의 새 고수로 내보내려던
뜻은 나를 대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악행을 응징하고
선행을 보살피도록 하기 위함이었느니라.
이는 내가 숨음으로써 나의 악연(惡緣)은
세속으로부터 사라지고, 내가 가진 무예만 너를
통하여 의롭게 표시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허나
세상의 질서가 나의 편이 아니었던지 한사코 세속으로
몸소 나아가 내게 지워진 인업(人業)을 치르도록
만들고 있구나.
팔월 대보름 자정에 갈매기섬의 보물이 묻힌 장소로
건너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도제들과
하얀독수리도 함께 오도록 하여라. 그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법하다. 그가 찾는 천조옹도 그날
현장에서 만날 것이라 짐작된다.
너의 사부 시각이 씀.
모두 읽고 난 하얀독수리도 역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게 모두 무슨 뜻일까요?"
"저도 줄곧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확실한
뜻은 여전히 이해할 길이 없군요."
"그럼 분명한 점은 제가 만나 뵌 길대 노인이
시각대사이심에는 틀림이 없겠구려."
"그런 셈이지요. 어째서 변성명을 하셨고 서둘러
가셨으며 무슨 일로 그쪽으로 모이라는 건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하얀독수리는 왕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려운 느낌이 드는군요. 도련님은 그쪽으로 가실
겁니까?"
"사부님의 엄명은 지엄한 것이니까요."
"팔월 대보름이라면 얼마 남지 않았군요. 저 역시
날짜에 맞추어 가야 될 것 같습니다. 천조옹이 거기
나타난다는 귀띔을 받았으니 안 갈 수도 없지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뭡니까, 그게?"
"보물이 묻힌 장소로 오라고 쓰셨는데 알 수가
있어야죠."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리죠. 강도로 가면 지도를
갖고 있는 굴림의자를 만날 수가 있고, 또 실패는
했지만 한 번 다녀온 삿갓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들이 과연 응해 줄까요?"
"그들이 안내해 줄 수밖에 없도록 충분한 미끼를
던지면 됩니다."
"미끼라면?"
"그들은 보물을 탐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일을 보고 그들은 보물을
찾게 한다는......"
"동병상련이랄까요. 원수라 해도 한 배를 타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있을 겁니다. 우리의 힘을
절대로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요."
"오월동주(吳越同舟)라......"
"그런데 그 보물지도는 원래 도련님의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사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보물 얘기는 전혀 적혀 있지를
않으셨으니...... 더구나 내게 지도가 없는 줄 빤히
아실 텐데 그쪽으로 건너오라는 둥......"
"어쨌든 그곳을 찾으면 그 뿐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더구나 갈매기섬으로 가면 그 보물지도가 어째서
도련님의 것이냐는 사실까지도 확실해지겠죠."
"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들도 풀어지겠군요. 어쨌든
강도로 가는 채비를 서둘러야겠습니다."
나흘을 왕천의 산채에서 머문 하얀독수리는 그들
모두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동안 그들은 침묵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을 않는다고 해서
생각조차 중지된 상태는 아니었다. 차라리 그들은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겨 많은 궁리들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한양의 시전거리에서
만난 노인이 시각대사가 틀림없다 치더라도 어떻게
하얀독수리를 만났으며, 또 편지까지 심부름시킬 수
있었던가. 갈매기섬으로 오라는 확실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거기로 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시각대사는
왜 그쪽으로 가야만 했던 것일까......
일행이 길을 떠난 지 사흘째였다. 왕천과
하얀독수리 외의 무사들은 아직 축지법을 쓸 줄
몰랐으므로 바삐 길을 재촉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자주 쉬어야 되는 처지였다.
소양강 모래밭에 앉아 강바람을 쐬던 왕천이 문득
생각난다는 듯이 하얀독수리에게 말했다.
"최협사, 제 소망은 이러했습니다. 새 사직에 대한
복수심이란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요."
"그게 소망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결국 고려 사직의 멸망은 저희 가친의 세대가
책임져야 하는 업보와 같다는 뜻이지요."
하얀독수리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상감의 현명을 흐리게 하고 왕실을 잘못 보필하여
자신의 피까지 흘려야 하는 파국을 맞은 것도 어차피
사대부들의 책임이라는 거지요."
왕천은 더욱 열을 내며 하얀독수리에게 말했다.
"새 사직이 들어서고 새 권부가 자리를 잡아서
인간의 법도를 새로 마련한다 해도 땅은 옛날
그대로의 땅이며 백성 역시 그대로의 우리 백성이
아니던가요?"
"그렇지요."
"오랑캐나 왜국놈들한테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할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고려 사직의 멸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는 뜻이로군요."
"좋은 귀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 권부 역시
나라의 힘을 집안 싸움으로 허비해서 외부의 적에게
먹히는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고려 왕손의 고난은 당연한
것이지요. 우리 어버이들이 남긴 유산이니까요.
그러니 고난을 극복하는 힘을 복수심으로 대신하지는
않겠다는 얘깁니다. 차라리 과거의 것은 모두 과거의
잘못으로 흘려 버리고 이 궁핍한 백성들을 위해
무언가 값진 일을 모색해야 되겠다는 뜻이지요."
하얀독수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새로운 일거리가 어떤 것일가 하고 저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지요?"
하얀독수리도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과 벼슬도 좋지요. 배운 도둑질이라더니 우리가
갖고 있는 재주란 무예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무예를 더욱 익히고 갈고 닦아 국토의 방비에 훌륭한
쓰임새가 되도록 힘을 저장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새 사직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벼슬길은 다
틀린것 같습니다. 그 대신......"
왕천은 잠깐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착잡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얀독수리도 가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 소망을 말씀드리지요. 무관직 벼슬보다
훨씬 소중한 어떤 일을 이룩해 놓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오랑캐들과 왜구들을 끊임없이 무찌르는 데
근본 힘이 돼 왔던 옛 우리 선조들의 무예, 그것을
완성해 놓겠다는 꿈 말입니다."
"훌륭한 꿈이지요!"
하얀독수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희같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고 있으면 새
사직에서도 구원(舊怨)을 풀고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있을 것이며, 설사 우리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많은 후배 무예자들을 길러 놓으면 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재목감을 넉넉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자부심과 긍지만은 남게 되는 거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두꺼워서 이 꿈을
실현시키기가 무척 힘이 들지요. 그런대로 생각해 낸
것이 갈매기섬의 보물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젊은 무예자를 모으고 산채를 짓고 잊혀진
무예자료를 수집하고 진정한 무도(武道)의 뜻을
정리하는 데에 쓰고 싶습니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
"보물 말인가요?"
"예에. 무일푼으로 큰 일을 꾸미기는 힘들지요.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내 뜻에 따르겠다는
동지나 제자들이 있다면 조용한 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농사와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작은 규모로
일을 착수할 수는 있지요. 무엇보다 내 정혼녀를
찾아......"
"정혼녀라니요?"
하얀독수리는 왕천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예에. 저한테는 혼인을 약속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얀독수리는 이런 와중에서도 정혼을 했다는
왕천의 말이 신기하기만 했다.
"연백 갑부 김노인의 수양녀이지요. 그리고 저기
앉아 있는 한유성과는 남매지간이구요."
"그러니까 한협사와는 처남매부지간이 되겠군요.
역시 한협사를 통해서 그런 인연이 맺어진 겁니까?"
"천만에요. 모든 일이 우연과 수수께끼의
연속입니다. 전날 최협사와 죽음의 강을 탈출했을 때
인사불성이 된 나를 그 낭자가 구해줬던 일이
인연이구요. 그리고 저 무사들은 우연히 만났을
뿐이지요."
"그럼 언제 연백으로 가서 인연을 맺을 셈입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낭자는 정체불명의
괴한한테 납치되어 갔습니다."
"납치를 당해요? 혹시 금부에서라도......"
"그렇지는 않아요.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딜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결혼을 해서 산으로
들어가 아이도 낳고 농사와 사냥도 하고 무예도
닦고...... 소박하지만 그런 꿈도 꾸었었지요."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지요."
하얀독수리는 마지못해 그런 식으로 위로하는데
그쳤다. 왕천도 자신의 넋두리를 더이상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일행은 강도에 닿았다.
왕천은 걱정스런 얼굴로 하얀독수리에게 말했다.
"사부님과 약속한 날자가 이제 겨우 보름밖에 남지
않았군요. 굴림의자와 삿갓을 만나 그 험하다는
갈매기섬으로 건너가야 하는데다, 또 보물이 묻혔다는
현장까지 찾아 내려면 시일이 너무 빠듯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서둘러야죠. 그러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삿갓이나 굴림의자와 우의를 나누고 있었던 게 모두
이럴 때를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좋은
충고를 줄게 틀림이 없습니다."
"제발 그래야 될 텐데. 모쪼록 최협사만
믿겠습니다. 강도에서의 모든 일의 진행이나 계획은
최협사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여인숙에다 여장을 푼 일행은 모두 탁주라도 한 잔
하고 싶다는 눈치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하얀독수리는
모두에게 말했다.
"여독도 풀 겸 여흥거리를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사정이 못 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이 강도가 지닌
지리적 의미를 깨닫는다면 제가 조심시키는 이유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불안하고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전국의 행패꾼들과
못된 장사아치들과 비적들과 무자리패와 내노라하는
칼잡이들과 또 한가락씩 한다는 무술도장패들에다,
이를 기화로 질서를 잡는답시고 마구잡이로
때려잡아가는 서슬퍼런 관병들...... 아무튼
자중하시고 숙소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
생각됩니다. 재수가 없다보면 매일 밤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공연히 말려들 염려도 있거든요. 우리의
목적은 아무 말 없이 갈매기섬으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그럼 보름 동안 꼼짝 없이 방에 갇혀 지내라는
뜻입니까?"
누군가가 불평스럽게 말했다. 왕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못박듯이 소리쳤다.
"그렇다. 보름동안 꿈쩍 말고 방에서만 수양하도록
해라. 답답한 것을 참는 일도 무사의 수련에 속하는
일이다. 보름 후, 그래, 우리의 자중이 때를 얻고
그토록 갈망하던 섬의 보물을 캐내어 나오는 날
너희들의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고생도 끝이 나는 날이
되는 것이다. 다 된 밥에 재뿌리듯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한 잔 탁주와 기생년 엉덩짝이나 만지겠다는
생각을 품는 건 너희들의 사부인 내가 우선 용서할
수가 없다. 작으나마 일이 생기면 우리의 계획이
용이치 않다는 최협사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모두들 왕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은 후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밖으로
나왔다. 짙은 안개 때문에 사위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토록 신신당부했는데도 한 놈이 속으로
투덜거리더군요. 말을 안 듣는 제자를 보니
이제까지의 내 수련방법이 나빴나 보지요."
왕천의 불평에 하얀독수리가 대꾸했다.
"나도 독심술로 그걸 읽었지요. 그러나 그토록
신신당부를 했으니 설마 명령을 어기고 밖으로야
나가겠습니까. 별일 없겠지요."
"제발 그랬으면...... 그런데 지금 어디로 나가는
중입니까?"
"우선 삿갓한테로 가서 의중을 떠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도를 가졌다는 굴림의자가 아니구요?"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니까 이럴땐 그나마
친분이 더욱 두터운 삿갓 쪽을 먼저 만나는 게
낫지요."
"친분으로 치면 나하고가 더 절친하지요."
왕천은 그러면서 웃었다. 몇 해 전 일이지만 삿갓과
왕천이 다투던 일이 생각나서 하얀독수리도 덩달아
웃었다.
"큰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킬 만큼 작은
인물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도련님도 옛날의 감정을
먼저 푸시도록......"
"저야 뭐, 옛날에 다 잊어버린 사건이지요."
"다행입니다. 삿갓도 지금은 멋적어할 겁니다.
그리고 삿갓은 전부터 굴림의자와 혈맹관계에
있습니다. 보물 때문이지요. 그러나 갈매기섬을 다시
찾지 못하는 이유는 당시에 너무도 혼이났기
때문이지요. 제자들도 그 일 때문에 기르고 있지만
우리의 실력도 한사코 필요로 하고 있거든요. 오늘의
삿갓으로 힘을 기르는데 좋은 충고를 해 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를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조심할 것은 보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좋습니다. 도와 주기는 하겠다. 다만
스승만 만날 수 있게 그 장소만 가르쳐 달라, 그렇게
의견을 내십시오. 저야 어찌 됐든 저들을
갈매기섬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일차적
목적이 이루어 지는 것이 되거든요. 보물지도를 그냥
빌려달라고 한다면 그들은 필시 벌컥 화를 낼 게
틀림없습니다. 벌써 다 왔습니다. 적어도 4백의
부하들을 수련시키고 있지요."
왕천은 긴장했다. 비록 곁에 그와 친분이 두텁다는
하얀독수리가 있긴 하지만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안개와 어둠 때문에 접근자가 무차별 공격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으로부터 산채의 거대한 덩어리가 날개를
저으며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으로부터 화살 한 대가 씽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뭐라 신호를 보내야 되겠군. 우릴 몰라보고 안개
속에다 화살로 인사를 대신하고 있으니......"
하얀독수리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앗! 저들이 무더기로 활을 쏘는군요. 마치 땡벌레
몰려오듯 살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아름드리 나무 뒤로 숨었다.
화살은 후두둑 도토리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나무에
꽂혔다.
하얀독수리는 당황했다.
"그 참 이상하네요. 안개와 어둠에 갇혀 있는 우릴
발견하는 눈을 가졌다면......"
"우수한 무예자가 많다는 얘기군요."
"어쨌든 소리를 쳐서 신호를 보냅시다."
하얀독수리는 나무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쏘지 마시오. 나는 하얀독수리 최동이라
하오."
하얀독수리의 목소리는 솔바람을 따라 산채 쪽으로
달려갔다.
비오듯 하던 화살이 뚝 끊겼다. 잠깐 정적이
계속되었다.
"눈이 밝은 만큼 귀도 밝다는 뜻인가......"
왕천은 중얼거렸다.
하얀독수리는 다시 소리질렀다.
"방문을 허락한다면 횃불 한 개를 흔들어 주시고
거절한다면 화살 한 대를 더 쏘아 주시오. 그러면
우린 곧 물러가겠습니다."
다시 얼마간을 더 기다렸다.
왕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최협사, 전에도 삿갓의 산채로 들 때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까?"
하얀독수리는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심지어 도장 가까이로
가서 그들의 훈련 현장을 엿볼 때까지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른척 했는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오늘의 이런 삼엄한 경계는 무슨
뜻일까요?"
"그래서 아까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을 품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일단 물러가야 옳을 것 같습니다.
방문하더라도 밝을 때가 좋겠습니다."
"저쪽에서 횃불을 들어 올려도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서둘러서. 왜냐하면 산채에
어떤 변괴가 생긴 것으로 짐작됩니다."
"변괴라구요?"
"보십시오. 저들은 횃불도 화살도 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산채에 변괴가 생겨 어떤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을 경우를 가정한다면 우리도 위태롭게
되지요."
"그렇군요. 저쪽에서 횃불을 들어 우리를 반기든
화살을 보내어 물러가게 하든 저쪽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말려들어서는 안되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자, 물러간다면 가급적 빨리 피하는
게 좋습니다."
하얀독소리와 왕천이 마악 몸을 움직이기 시작할
순간이었다.
"엇? 저기 보십시오. 횃불이 오르고 있습니다."
왕천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두 개, 세
개, 다섯 개, 열 개...... 횃불은 삽시에 언덕을 온통
밝히려는 기세로 켜지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어서 밑으로 뜁시다."
하얀독수리는 외쳤다.
하얀독수리의 외침이 다시 끝나기도 전이었다. 화살
한 대가 씽 소리를 내며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신호에 불과하였다. 잇달아 화살은 숲을
헤치듯 앵앵거리는 모기떼처럼 쏟아졌다.
고수급 무예자인 왕천이나 하얀독수리가 아무리
안개 짙은 어둠 속이라 해도 맞을 까닭은 없었다.
그들은 숲 사이로 요리조리 피하며 산 아래로
도망쳤다.
산채의 적의에도 불구하고 하얀독수리나 왕천은
결코 불평하지는 않았다. 괴롭고 오랜 방랑생활에서
터득한 냉정함과 인내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릴 습격해 뒤따라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군."
"그건 하얀독수리란 이름을 겁내서 그랬겠지요."
하얀독수리의 중얼거림에 왕천은 그렇게 맞받았다.
안개지역을 벗어나왔다. 뒤돌아 보이는 산채 쪽은
어둠 속에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정말 봉변입니다. 이놈이 나를 맞힐 뻔했지요."
하얀독수리는 손아귀에 잡혀 있는 화살 세 개를
왕천에게 내밀었다.
"그렇다면 나를 더욱 집중공격했다는 뜻이
되겠군요."
왕천도 움켜진 여남은 개의 화살을 하얀독수리한테
보이며 밝게 웃었다.
그들은 귓바퀴와 겨드랑이와 허리와 등과 가슴
어디든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으면서 하산했던
것이다. 그나마도 어둠과 안개 속에서 소리의
감(感)만으로!
"자, 이젠 어떡하지요?"
왕천은 화살 묶음을 버리며 하얀독수리를 돌아
보았다.
"그보다 저들이 어째서 우릴 추격해 오지 않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단순한 위협 사격이겠지요. 환영도 거절도
아닌......"
"왜 그런 의사표시를 했을까요? 삿갓이 나를 그토록
적대하도록 내가 그를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추측컨대 산채에 어떤 변괴가 생긴 게
분명합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전거리로 들어갑시다. 점복가엘 가면 굴림의자가
있지요. 그와도 친분이 있으니까 그를 만나는 것도
좋겠지요. 거기 가면 삿갓의 근황도 알게 되겠지요."
"그렇군요. 그러나 저로선 아직 초면이 되는데
박대하지나 않을는지요."
"박대는 왜 합니까?"
"찜찜한 사이가 아닐까요?"
"예에?"
"나의 보물지도를 훔쳐갔으니까."
"보물의 임자라고 주장하는 무사가 어디 도련님 한
분 뿐입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설사 도련님이
굴림의자를 만나더라도 지도 얘긴 꺼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건 왜지요?"
"그가 지도를 내놓지 않으면 그뿐이거든요. 차라리
그들을 유도해서 함께 갈매기섬으로 건너가는 일을
우리의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 게 옳지요."
"뺏으려 해도 그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것이란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뺏으려는 계획을 한다 해도
지금 실행하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참을 수밖에요. 그런데 굴림의자의 무예는
소문만큼 그토록 무섭습니까?"
"무섭지요."
"그의 특기가 무엇인데요."
"바늘 후려치기죠. 표창치기에다 활에도 능합니다."
"그의 스승은 누구랍니까?"
"굴림의자의 스승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왕천의 물음에 대꾸한 하얀독수리는 앞서서 마을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가 무림에서 무명을 떨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보다 그의 손바닥 감각이 더욱 일품이지요."
"손바닥 감각이라면......"
"그러니까 소매치기의 대왕이 아닙니까. 일종의
내공(內功)도 되지요."
"언젠가 제 스승께서 이런 말슴을 하십디다. 사람이
지닌 물건을 몰래 빼내려고 할 때는 손바닥 감각과
최면(催眠)을 동시에 걸어 사용해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차력이라고도 하셨지요. 그러나
그만한 공력(功力)은 무예를 지닌 웬만한 사람한테는
안통한다잖아요."
"그렇지만 내 동문 족제비 김해간은 빼앗겼지요."
"그건 당시에 족제비가 경계심을 풀은 탓이겠지요."
"어쨌든 굴림의자도 더욱 공력이 강한 무사한테
물건을 도둑맞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까?"
"그렇지요. 빼앗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만.
이를테면 굴림의자보다 공력이 센 무림의 강자가
다짜고짜로 어떤 물건을 내놓으라고 지시했을 때 그는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두 눈 뻔히 뜬 채 제 손으로
물건을 내놓게 되지요."
"도련님의 무예정도라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뺏을 수도 있고 빼앗기지
않기도 하고...... 시각대사님의 공력을 아직 따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굴림의자에게 공손히 하십시오.
기(氣)의 남발은 역시 자신의 기세를 갉아먹는
폭이거든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느새 점복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하지요. 굴림의자가 무림에서
무명을 떨치게 된 경위 말입니다. 도련님이 그것을
듣고 싶어 한다면."
"그를 대할 경우 참고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들은 대로 얘기하지요.
서경출신이라는데 홍건적의 침입 때 눈 앞에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보고 어린 가슴에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 이후로 특별한 이유없이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되었고 친척집에 얹혀 살면서도
가족을 죽인 원수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갈고
살았다나요. 무예는 아마 당시에 터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앉아서도 적을 상대할 수 있는 무예지요.
굴림의자를 만들어 타고 다니게 된 것도 오랑캐들의
침입이 하도 잦고 보니 피난갈 때를 대비해서
친척들이 만들어 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서경으로 다시 쳐들어온 홍건적을 피해 친척들이
피신을 가게 되었을 때입니다. 굴림의자는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버티더래요.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모친
때문이라나요. 나중에 알려진 얘기지만 어린
굴림의자가 보는 앞에서 모친이 홍건적들한테 능욕을
당하더란 얘깁니다. 좌우지간 혼자 집을 지키던
굴림의자 앞으로 홍건적 여남은 명이 들이닥쳤지요.
그는 그동안 혼자 갈고 닦은 표창술과 바늘 던지기로
순식간에 그들을 모살시켰다는군요. 다소는 분이
풀렸던지 어린 굴림의자는 그 이후로 굴러다니는
의자를 타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와 개경에 머물다가
강도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입니다."
"한(恨)이 많은 사내로군요."
왕천이 응수했다.
굴림의자의 거처 앞에 도착한 하얀독수리는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기도 했지만 집안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서 무작정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상하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빈 집인가 봅니다."
하얀독수리의 중얼거림에 왕천이 그렇게 맞받았다.
"분명히 안에서 인기척이 없죠?"
"그런가 봅니다."
"무엇 때문에 집을 비웠을까? 삿갓의 산채가
그러하고 굴림의자의 거처까지 괴기스러운 느낌이
드는 걸 보니 그새 필시 어떤 변괴가 일어난 게
틀림없군요."
"내가 걱정하는 건 그들이 강도를 떠나 버려서
갈매기섬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딴은 그렇군요. 제발 멀리 가지나 않았어야 할
텐데."
둘은 잠시 망연해져서 굴림의자의 집 대문 앞에 말
없이 서 있었다. 하얀독수리가 먼저 의견을 꺼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가서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밝을 때 다시 이들을 찾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설마 그새 벼슬자리를 얻어 떠났든가 갈매기섬으로
보물이라도 캐러 떠나진 않았겠지......"
"아침이면 모든 게 밝혀 지겠지요. 내일 걱정은
내일 하도록 하고......"
둘은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유성과 또 다른 무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밤이 깊었는데 자지도 않고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왕천은 이미 제자들의 마음을
읽고서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있었다.
"글쎄 말입니다, 사부님. 그 녀석이 한사코
사부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바깥 나들이를 나가고
말았습니다."
한유성이 일러 바쳤다.
"그 녀석이라니. 누구 말이냐?"
"정순도 말입니다."
"순도가? 혼자서 말이냐?"
"예에. 따분해서 못 견디겠다면서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며......"
"왜 너희들은 말리지 않았는가."
"말렸지요. 그런데 뒷간에 가는 척하고 내빼버렸지
뭡니까."
"그게 언제냐?"
"두 분이 떠나시고 곧장입니다."
"그럼 초저녁이겠네?"
"그런 셈이지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뭘까?"
"글쎄요. 모르긴 해도 아마 기생집에 너부러져
있겠지요. 그놈은 여자를 몹시 밝히는 성격이니까요."
"허어, 저런 고연 놈 봤나. 강도가 어떤 덴 줄
알고...... 그런데 최협사,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죠?
명령을 어겼으니 벌은 주겠지만......"
"벌 주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저로서는 이만저만
걱정되는 게 아니군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
"사고라도 당했다고 짐작되십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곳은 특히
밤길이 위험하답니다."
"그럼 어떡한다? 아이들을 풀어서 찾는 게
옳겠지요?"
"아니지요. 공연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둘이서만 조용히 갔음직한 데로 찾아
나서 봅시다."
없어진 정순도는 보름 동안 갇혀 있으라는 말에
제일 먼저 불평하던 무사였다. 성격이 괄괄해서 항상
염려스러웠는데 기어코 일을 저지른 듯싶었다.
"최협사, 공연한 일로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따위 일 아니래도 최협사한테 폐를
끼쳐 드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왕천은 몹시 송구스러워 했다.
"그토록 미안해할 건 없습니다. 짐작컨대 귀한 집
자제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 보니까, 이런
번화스런 곳에 나오면 당연히 마음이 들뜰 수도
있겠지요. 별탈 없을 겁니다."
하얀독수리는 그렇게 달래면서도 마음은 그리
편안치가 않았다.
둘은 시전 쪽으로 들어서서 청루들이 즐비해 있는
언덕 쪽으로 걸어 올랐다.
청사초롱에는 불이 켜졌고 봉창 너머로 기녀들의
노래소리와 거문고 가락들이 거리로 흘러 나왔다.
가히 불야성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아들들이나 돈깨나
있는 난봉꾼들이라면 충분히 유혹될 만한 장소였다.
"이상하지요. 몇 년 동안 이 강도가 졸지에 번창해
버렸단 말입니다.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사람들은
갈매기섬의 보물을 캐러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이라나요."
하얀독수리의 중얼거림에 왕천은 막연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둠 속으로부터 젊은 여자 하나가 달려나왔다.
길가 숲 속 아무데나 소피를 보고 나오는 듯싶었다.
"이봐요, 손님들. 잠깐만요."
둘은 멈칫 섰다. 꼬부라진 혓바닥 하며 차림새가
청루의 무자리 기생인 듯했다.
"정말 건장하시고 잘도 생겼어라. 손님 잠깐
들어가서 놀다 가세요. 다섯 푼이면 아침까지 술을
드실 수 있거 두 냥이면 톡톡히 재미도 볼 수
있다구요. 자, 어서 들어가요. 꽃 같은 무자리들이
수두룩해요......"
왕천은 여자에게 잡힌 팔을 얼른 털어내며 점잖게
소리쳤다.
"일없다. 우린 바쁜 볼일 때문에 잠깐 지나가던
길이야."
"아이, 그러지 마시라니까. 북쪽 청루로 올라가
봐야 그게 그건데 뭘. 그냥 우리집엘 가요. 젖통이
수박만한 애도 있고 가랑이에 자라뚜껑 엎은 계집년도
있다니까요."
하얀독수리가 왕천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어서 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다간
기둥서방이라는 왈패들이 달려나와선 마시지도 않은
술값을 내랄지도 모르니까요."
하얀독수리의 신호로 왕천은 얼른 기녀를 떨쳐
버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뭐라고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참 흉악한 동네로군요."
"무법천지지요. 내가 없어진 도련님의 제자를
걱정하는 바도 청루에 빌ㅂ어 먹고 사는 무뢰한들한테
걸려들지나 않았나 해서지요. 잘못 걸렸다 하면
속옷까지 홀라당 벗기우고 몰매까지 맞고 쫓겨
나오거든요. 관졸들이 있어 보야 그것들과
한패거리여서 양민들만 피를 보게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내지에서 멋 모르고 이런 델 왔다간
비렁뱅이가 되어 쫓겨나기 꼭 알맞은 데로군요."
"그렇지요."
둘은 그런 말들을 나누며 한참을 걸어 올랐다.
언덕 비스듬한 데서 청루가 끝나고 있었다. 분명히
술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아닌 어떤 무리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우측 청루 모서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둘은 긴장했다.
거기에는 마을 사람들과 근처의 청루 기녀들과
몇몇의 술꾼, 그리고 관졸들까지 길거리로 나와서
울을 치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하는 사람들일까요?"
왕천이 물었다.
"글쎄요.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나 봐요.
과음해서 뻗어 버린 술꾼이겠지요. 그가 누군지
우리도 한 번 들여다 보고 갑시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이미 지쳐서 정순도를 찾는
일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뒷길로 해서 일단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실상 이토록 번화한
강도에서 그를 찾는다는 일은 강물에 빠진 바늘
찾기와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었다.
"못 본 얼굴인데? 내지 사람인가봐. 차림으로
보아선 무사인 것 같고......"
마을 사람인 듯한 노인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육모방망이를 찬 관졸이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누구 아는 사람 없소? 이 사람과 함께 온 사람
누구 없소?"
그러나 아무도 선뜻 아는 얼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사람의 울타리
위로 얼굴을 밀어넣었다.
횃불 아래에서 한 사내가 자빠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눈까지 반쯤 뜬 채 움쩍 않고
있었다.
"앗!"
"엇!"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동시에 낮게 소리질렀다.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이들의 비명은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넘어져 있는 자는 틀림없이
정순도였던 것이다.
순간 관졸이 다시 소리질렀다.
"여기 의술을 아는 사람 있소? 내가 보기엔 이자는
죽은 것 같은데 의생이 있으면 좀 확실하게 진단해
주구려. 원, 제기랄. 곱게 술 쳐마시고 죽어 자빠질건
뭐람......"
관졸이 투덜거릴 동안 왕천은 재빨리 하얀독수리의
귀에다 낮게 속삭였다.
"모른척 해요. 내가 하는대로 가만 내버려 두시죠."
그런 후 왕천은 그 관졸을 향해 소리질렀다.
"시생이 의술을 조금 압니다.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해 드릴깝쇼?"
"댁은 의생이오?"
"예에."
"여전히 댁도 못보던 얼굴인데?"
"어제 내지에서 왔지요."
"무슨 일로 왔소?"
"강도에 자리를 잡아 의술이나 펼까 하고 터를 보러
왔습지요."
"그래? 어서 감정이나 해 보시구려."
왕천은 구경꾼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요?"
"어떻게 되다니?"
왕천의 물음에 관졸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이 행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러자 아까 그 노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저기 아래 청루에서 술을 마시고 비칠거리며
나오던 걸 내가 봤지. 그러려니 하고 외양간으로
들어가 소 여물을 주고 되돌아 나오다가 담 너머로
보니까 웬 사람이 길바닥에 누워 있데 그려."
노인의 설명에 관졸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여보쇼, 노인장. 공연히 보았다고 자랑삼아 떠들지
마시오. 행인이 진짜로 죽기라도 했다면......"
노인도 관졸의 협박에 은근히 화가 났는지 큰
소리로 떠들었다.
"원, 이런 봉변이 다 있나. 보았으니까 보았다고
말했지. 그럼 이 행인이 진짜 죽기라도 했다면 내가
살인이라도 했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묻지도 않는 말 공연히 아는 체
나서지 말란 말입니다. 바로 말하지만 만일 행인이
아래 청루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그쪽에서 증언할
경우 노인장은 관부로 가서 별 수 없이 조사를 받아야
된단 말이오. 무슨 얘긴지 알겠소?"
"내가 알게 뭐람. 아래 청루에서 나오는 걸
보았으니까 보았다고 그랬지 뭘......"
노인도 다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우물쭈물
하더니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왕천은 가만히 정순도의 맥을 짚어 보았다. 끊겨
있었다. 눈을 까뒤집어 보았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죽은 자처럼 흰 창을 드러낸 채 눈을 반쯤 뜨고 숨져
있었다. 가슴의 심장 박동도 멈춰 있었다.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과음으로 인한
심장마비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본
것이었다. 술을 마신 흔적도 기색도 전연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허리춤을 까뒤집어 명치께로 밀어 올렸다.
'그렇구나. 여기를 쳤구나. 어떤 무예가 절륜한
자의 소행이다. 명치 한 방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왕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관졸을 한참 동안 노인과 입씨름을 하고 나더니
왕천을 향해 소리쳤다.
"의생 양반. 그래 이자는 죽은 거요, 산 거요?"
"죽었습니다."
왕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말 죽었소?"
"심장도 멈춰지고 맥도 끊겨 있군요."
"내 생각이 맞았군. 그래, 왜 죽었답디까?"
"술이 과했나 보지요."
왕천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손을 털고 일어선
왕천은 하얀독수리에게 눈짓했다. 어서 이 자리에서
떠나자는 신호였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올
때까지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사코 모른 척해 버릴 겁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하얀독수리였다.
"어쩔 겁니까. 죽은 건 죽은 거니까요."
"그렇군요."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들이를 나간 벌이지요. 저런
놈 때문에 큰 일을 앞둔 우리의 목적이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지요."
"그렇기야 하지요......"
하얀독수리의 입장에서도 왕천의 결단을 찬성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죽은 정순도와 일행이며 그를
묻어 주겠다는 식으로 나갔을 때 일이 귀찮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피곤하군요. 숙소로 돌아가 쉬도록 합시다."
왕천이 뇌까렸다.
"그럽시다. 그러나 두 개의 의문은 남는군요. 누가
그를 죽였으며 왜 그가 죽어야 했는지......"
"의문은 어디 그것뿐입니까? 강도에서의 모든
사건이 다 그렇지요."
숙소로 돌아온 둘은 일행에게 정순도가 죽었다는
간단한 전달만 한 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은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에 열중했다.
"오늘의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다시 가 봐야죠. 맑은 날씨니까 어젯밤에 있었던
일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겠지요."
왕천의 말에 하얀독수리가 대꾸했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야죠?"
"글쎄요. 내 생각엔 차라리 굴림의자의 집을 먼저
방문하는 게 옳을 듯 싶네요."
"그건 왜 그렇지요?"
"가서 굴림의자를 통해 산채의 변괴스러움도 미리
알아야겠고......"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다소간의 시끄러움이 따르더라도 삿갓을 먼저
만나는 게 예의가 될 듯한데......"
"그렇다면......"
"최협사의 친분을 보더라도 삿갓 쪽이 우선이
아닐까요? 얼마간 소원한 굴림의자를 먼저 만났다는
사실을 삿갓이 깨달을 경우 많이 섭섭해 하겠지요.
게다가 지도를 가지고 있는 굴림의자보다는 삿갓을
먼저 만나 저쪽의 사정을 미리 감지해 두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만......"
얼마간 생각에 잠겼던 하얀독수리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산채 쪽으로 먼저 가 보도록 합시다."
둘은 빈 몸으로 방을 나섰다.
"그런데, 잠깐만......"
왕천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얀독수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제자들이 거처하고 있는 뒷채로 돌아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일어났느냐?"
왕천의 말에 방문이 열리면서 아홉 명의 제자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예에. 아침식사까지 끝내고 무엇으로 하루를
소일할까 하고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하셨는지요."
한유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래, 잘 먹었다. 그런데 너희들한테 일러 둘 말이
있다."
"바깥 출입을 하지 말라는 당부라면 이제 더
필요없습니다. 저희들은 사부님의 명령을 철저히 지킬
것을 이미 약속했거든요."
"아니다. 그 반대되는 새로운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너희들을 보자고 한 것이다."
"예에?"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과 왕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젯밤 내가 얘기했었지. 정순도는 죽었노라고."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젠 뉘우치고 자시고도 없다."
"무슨 말씀이온지?"
"어쨌든 내가 정순도의 시체를 검시한 바로는
대단한 무예자한테 정통으로 명치 한 방을 맞고
살해되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정순도의 무예 역시
평범치가 않거늘 얼마나 무서운 무예자한테 걸렸기에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졌느냐 하는 점이다."
"과음했기 때문에 힘을 쓰지 못했겠지요."
"그런게 아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는 얘기다."
"그럼, 말짱한 정신으로......!"
"그러니까 두렵다는 것이다. 그가 누구이며 왜
죽였는지조차 지금은 모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정순도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왕천의 설명에 제자들은 무작정 떨고 있었다.
하얀독수리도 지금 왕천이 무슨 얘기를 꺼낼 것인가
하고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천은 제자들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내가 밤새 궁리한 결과로는 이렇게 된다.
정순도가 만에 하나 우연히 맞아 죽은 게
아니라면......"
"그럼, 우리들 모두를 상대로 의도적으로 공격한
것이 됩니까?"
한유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꼭 그렇다는 단정은 하기 어렵다. 만에 하나 그런
가정을 해봤을 때 우리는 태도를 달리 취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서 보름 동안 숙소에 쳐박혀 지내라는 명령은
이로써 철회한다."
"예에?"
"너희들은 이제 가냘픈 옛 사직의 문신(文臣)의
자제들이 아닌 것이다. 시각대사님의 제자이기도 하고
이 왕천의 훌륭한 제자들인 너희가 어떤 간악한 자의
표적이 된 채 마냥 몸조심이나 하고 앉아 있으라는
명령은 도저히 내릴 수가 없겠다는 것이다."
"그럼 저희들더러 이제부터 밖으로 나가서 순도를
살해한 자를 잡아들이라는 말씀입니까?"
"꼭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미 상대의
무예를 가늠하고 있기로는 너희들의 적수가 아닐
것이다."
"그런 상대라면......"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느냐.
언젠가 말했었지. 무예란 때때로 무예 그 자체보다
투혼을 간직한 기(氣)를 유지함이 첫째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죽을 땐 비겁하지 않게 죽으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그러나 경말한 행동으로 의미없는 죽음을
자초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상대가 비겁하면
이쪽에서도 비굴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우리 모두 정순도의 죽음을 복수하러
나가겠습니다."
제자들의 결연한 표정을 읽고 있던 왕천은 다시
일렀다.
"바야흐로 중대한 일을 목전에 둔 우리들인 것이다.
초반부터 기가 죽어 버리면 나중일은 보나마나일
터이다. 정도전 대감의 소시적 일화를 기억해라.
집채만한 호랑이가 달려들기에 꼭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화살을 쏜 것이다. 살을 받고 자빠진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더라지 않더냐.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아무리 화살을 쏘아 대도 바위를 뚫지 못했어.
이것은 무엇이냐. 기의 승리라는 의미다. 기를 모을
때라야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들은 어떻게 할까요?"
"겁내지 말고 마을 어디에고 돌아다녀 보아라.
장터에도 나가보고 술도 적당히 마셔라. 청루 쪽으로
구경나가는 것도 허락하겠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될 일이 있다."
"그건 무엇입니까."
"반드시 두세 명씩 짝을 짓고 다닐 것. 해 지기
전까지 전원 숙소로 돌아와 있을 것. 순라꾼들에게
붙들려 혹시 조사를 받게 될 때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러 강도에 왔노라고 적당히 얼버무릴 것. 다만 일
없이 시비 걸지 말고 혹자가 시비를 걸어 오더라도
가급적 피할 것. 혹시 시비가 붙더라도 잽싸게 먼저
몸을 피할 것.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가 너희들이
이제까지 쌓아온 수련의 실습장이기도 하다. 검의
휴대 역시 금한다. 이상 질문이 있거든 지금 해라."
왕천의 파격적인 조처에 모두는 다소 얼얼한
표정이었다.
의논 한 마디 없이 해치워버리는 왕천의 태도에
하얀독수리 역시 어리둥절해 했다.
한유성이 다시 물었다.
"저희들이 마냥 시비를 피하기만 한다면 수도를
죽인 자를 만날지라도 복수를 못하게 되는 게
아닙니까?"
왕천이 대답했다.
"언제 내가 무작정 피하라더냐. 시전잡배들의
공연한 시비만 피하라고 그랬지. 그것은 혹시
너희들이 그런 자를 때려서 목숨을 끊어 놓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내 말듯을
그래도 이해 못 하겠느냐?"
일장 훈시를 마친 왕천은 다시 앞채로 돌아나왔다.
"죄송합니다. 의논 한 마디 없이 그런 처사를 한
것을......"
왕천의 말에 하얀독수리가 얼른 맞받았다.
"아닙니다. 도련님의 생각이 옳았습니다. 까짓
사소한 사고가 나면 어떻습니까. 도련님의 뜻을
저들에게 단단히 전했으니 이럴 때 저들의 지헤로움도
시험해 보아야겠지요. 어리석은 자는 자연히
도태되어도 어쩔 수가 없지요."
"내가 정순도의 시신을 거둬들이지 않은 의도를
저들이 이해한다면 스스로들 알아서 몸조심
하겠지요."
하얀독수리와 왕천 역시 홀가분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곧장 삿갓의 산채가 있는 마니산 중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요즘 시국에 대해서 더 들은 게 없습니까?"
왕천이 따분했던지 입을 열었다.
"글쎄요. 특별한 건 전에 다 말씀드렸고, 그
이후에는 줄곧 도련님과 행동을 함께 해 왔으니 어디
별 다른 얘기를 줏어 들을 기회나 있었나요."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진작에 왕자의 난리는
정리가 된 것이 됩니까?"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왕의 기세가 워낙 당당해서
다른 무리들이야 감히 고개를 들고 나오겠어요?"
"권부의 안정은 바람직하지만 구 사직에 대한
경계를 아직도 풀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곧 관용이 내리겠지요. 사병제도를 없애고
무예자들의 무기휴대까지 금지시킨 것은 반란자들을
사전에 없애려는 의도이겠지요. 칼이 없는 반도는
있을 수가 없고, 반도의 힘이 무력해지면 자연히
관용도 베풀어 줄 게 아닙니까?"
"그나마 우리 같은 무리가 떼지어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만도 감사해야 될 지경이군요."
왕천의 다소 빈정거리는 말투에 하얀독수리는 웃어
보였다.
어느새 둘은 숲 속으로 들어섰다. 어젯밤의 그토록
짙은 안개와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살벌한 화살비와
도깨비처럼 불쑥 머리를 내밀던 횃불이 있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가로웠다.
산채 가까이로 다가가도록 어젯밤과 같은 저항은 전혀
없었다.
"하룻밤 새 작전을 바꾸었다는 뜻인가?"
"혹시 우리가 위험 속으로 빠지도록 유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얀독수리의 중얼거림에 왕천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그럴라구요.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함정이
있다면 싸울 수밖에요. 천하의 왕천과 이
하얀독수리가 모처럼 몸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요."
하얀독수리는 짐짓 웃어 보였다. 왕천도 조심성
있는 표정으로 하얀독수리의 말에 덩달아 웃었다.
그렇게 웃음으로써 불안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대서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왕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협사가 계시지 않은 동안 삿갓의 마음이 변할 수
있을 만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을까요. 어디
짐작되는 그럴만한 사건이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어떤 변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지요. 만일
도련님 말씀대로 삿갓의 생각이 달라져서 나를 죽일
생각이라면 어젯밤과 같이 무지막지하고 노골적인
방법으로는 대적하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그런데...... 아,
저들의 수련하는 목소리가......"
정작 도장 쪽으로부터 기합 넣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다른 때와 꼭 같군요. 어젯밤의 사건만 빼고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저들의 연습 광경을 한
번 구경하시렵니까?"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삿갓의 도장 규칙은 외부인과 허락없이 시범훈련을
할 수 없다는 것일 뿐 구경은 해도 괜찮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삿갓의 제자들과 한 판 겨룬
적이 있지요."
"그랬더니요?"
"검술은 어떨지 모르지만 태껸의 실력은 그저
그렇고 그렇더군요. 이는 저들의 실력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도, 삿갓의 무명을 욕되게 하려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만."
"그럼 됐습니다."
"됐다니요?"
"최협사께서 겨루어 보셨다면 저도 뭐 그
비슷하겠지요. 그 한수 아래이거나."
"겸손의 말씀. 어쨌든 훈련 모습은 구경하지
않겠다는 얘기군요."
"삿갓과는 전날 찜찜하게 헤어졌는데 조금이라도
예의에 거슬리는 행동을 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가 않군요."
"아, 도련님의 마음 알겠습니다. 더욱 큰 목적을
위해서 지금은 극기하시겠단 뜻이군요."
어느덧 산채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지요?"
하얀독수리가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삿갓한테 그토록 많은 재산이
있었던가요?"
"재산이라면 굴림의자가 더 많지요. 삿갓이 박포
대장군과 손을 잡기 이전까지는요."
"그럼 삿갓은 박대장군의 재물로......"
"현 왕에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키웠지요.
비밀결사대의 하나가 바로 삿갓이지요."
"박대장군이 무너진 지금까지 삿갓이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그게 묘하게 된 겁니다. 내가 삿갓한테 박대장군을
배반하라고 귀띔했지요."
"최협사께서?"
"그래서 삿갓은 내게 대한 그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답니다. 섣불리 박대장군의 편이 되어 도저히
부술 수 없는 방원 왕자에 대항했다면 지금의 삿갓은
있을 수가 없지요. 삿갓은 결정적인 순간에 싸움에
가담치 않고 피신해 버렸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권부에서도 삿갓의 산채를 모른
척해 주고 있는 게 되겠군요."
"그런 셈이지요."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더니......"
하얀독수리는 대문 쪽을 향해 서더니 곧장 큰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누구 거기 있느냐. 이리 오너라."
하얀독수리의 소리가 있자 얼마 안 있어 무사 한
명이 달려 나왔다.
"아, 최협사님이시군요."
상대가 먼저 알아보았다. 이토록 반갑게 반길 줄
아는 산채의 무사들이 어젯밤에는 어째서 그토록
맹렬한 공격을 했는지 정작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쪽은 왕천 협사. 지금 박협사께선
계시오?"
"예, 계십니다. 들어오시지요.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후원에서 잡담이나 즐기고 있을 테니까
주무시거든 깨우지 마시오. 기다리지요."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꾸중이라도 들으면 어떻게
하지요. 하기야 요즘은 몹시 심기가 불편하셔서 사람
만나는 일은 꺼리십니다만 최협사님은 예외겠지요."
"아무튼."
그러다가 하얀독수리는 그 무사를 황급히
불러세웠다.
"잠깐만."
"예에?"
"심기가 좋지 않으시다 했는데 요즘 어디 그럴만한
일이라도 있었는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인데요?"
"그건......"
잠깐 머뭇거리던 무사는 간단하게 잘라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릴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얀독수리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삿갓을
만나기 전에 그의 기분을 이해해 두려면 이 당직
무사를 통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왜 그랬지요?"
"어제라니요?"
"밤에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온지?"
"어젯밤에 우리가 이곳을 방문했지요. 융숭한
환대를 받긴 했지만."
당직 무사는 하얀독수리의 말을 빈정거림으로도
농담으로도 이해하지 않는 듯했다. 하얀독수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젯밤에 오셨던가요? 그러나 저의 사부님을
만나시진 못했을 터인데요?"
"사부님이 어젯밤에 계시지 않았던가요?"
"진작 어딘가로 가셨다가 조금 전에 돌아오신걸요."
"아, 그랬었군. 어디에 언제 가셨더랬는데요?"
"그건 말씀드릴 수도 없거니와 설사 알더래도
발설해선 안됩니다."
"그럼 어젯밤의 소란은 무엇이었던가요?"
"아, 그것 말입니까? 사부님도 계시지 않는데 웬
괴한이 산채를 습격하지 않았겠어요. 안개를 틈타서
우릴 몰살시키려고 불을 지를 계획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괴한을 붙들었던가요?"
"아아뇨. 화살을 퍼붓고 횃불을 밝혀드니까
놀랬는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건 우리들이었지요."
"예엣?"
"습격온 것은 결코 아니었지요. 내 별명까지 대며
선처를 요망했으나 산채 쪽의 대답은
화살들뿐이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단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요."
"아, 그러면...... 그런데 우린 왜 최협사님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까요?"
"크게 소리를 냈었는데요."
"아아뇨. 듣지 못했습니다. 모습은 보았지만......"
"모습을 보았다구요?"
이쪽의 모습을 보았다는 당직무사의 말에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요. 확실히 보았다구요."
이쪽의 모습을 보았다는 당직 무사의 말에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하네요. 우린 어둠과 안개에다 거리조차
멀어 산채 식구들을 한 사람도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하얀독수리의 말에 당직 무사가 대들듯이 말했다.
"복면을 하셨으니까 피차를 못 알아 볼 수밖에요."
"복면까지!"
"그럼 아니셨던가요?"
"우린 지금의 바로 이 차림이었소."
"사실이 그렇다면 다른 침입자가 틀림없군요.
어제의 그 복면한 괴한은 한 놈이었으니까요."
"그 이상하오. 우린 정체를 알렸는데 그쪽에서
알아듣질 못했고, 또 화살은 어떻게 우리 쪽으로만
퍼부을 수 있었으며...... 모든 게 의심스럽소이다.
우리는 두 사람이었으며 복면한 적도 없고......"
하얀독수리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제서야 후딱
정신이 든듯 당직 무사가 소리쳤다.
"제가 불필요한 얘길 너무 많이 지껄였나 봅니다.
사부님께 최협사님의 예방을 곧 알리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직 무사가 달려가고 나서였다.
몇 번 머리를 갸웃거리던 왕천이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하얀독수리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순간에 우리 말고 다른 인물이
산채에 접근해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결론은 그렇게 나오는군요."
"그러니까 산채 식구는 듣지 못했어도 복면의
괴한은 최협사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그자가 다급해지니까 우리들 쪽으로
튀었을 가능성도 있구요. 그래서 그자 대신 우리가
화살 소나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고......"
"우린 왜 그자의 움직임을 전혀 몰랐을까요?"
"글쎄 말입니다. 걱정되는 점은 그자가 우리의 강도
상륙을 알아채어 우리를 곤궁하게 만들고 심지어
정순도까지 살해하지 않았나 하는......"
"지나치게 비약할 건 없습니다. 우선 삿갓을 만나면
어느 정도 이 혼란의 면모는 알게 될 테지요.
그러니까 최협사님의 예감처럼 산채에 변괴가 있긴
있은 게 됩니다......"
그 즈음에 본당으로 달려갔던 당직 무사가
되돌아왔다.
"어서 뫼시고 오라십니다. 몹시 반가워하시더군요.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오?"
하얀독수리가 대꾸했다.
"조금 전에 제가 최협사님께 드린 여러 가지
말씀들은 듣지 않으신 걸로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건 왜 그렇지요?"
"제가 그런 부질없는 얘길 지껄인 걸 아시면
사부님한테 혼이 납니다."
"알겠소. 참고해서 무사께서 야단맞지 않도록
하지요."
얼마간 안심하는 표정으로 돌아온 당직 무사는
하얀독수리와 왕천을 서둘러 데리고 갔다.
"아, 최협사. 어서 오십시오. 약속 날짜를 훨씬
넘기시기에 영영 저로부터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삿갓은 맨발로 달려나오며 하얀독수리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삿갓의 반가워하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많이 지쳐서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저만치 뒤에 서 있던 왕천이 먼저 삿갓한테
인사했다.
"삿갓어른의 산채로 방문하게 된 점 몹시
영광스럽습니다."
"누구......시더라?"
삿갓은 왕천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하얀독수리는 둘 사이가 편안치 않다는 걸 아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초조해했다.
"왜 아실 텐데요. 훌륭한 스승한테서 절륜한 무예를
배워 이제사 하산한 왕천 협사......"
"아, 왕협사!"
하얀독수리의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삿갓은 얼른
왕천을 알아 보았다. 그의 표정은 처음에는 당혹감과
경계심으로 일그러지듯 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새 밝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얀독수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뜻까지 알아 보았다.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사정이로군......'
하얀독수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삿갓이
지금 몹시 곤궁한 사정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오, 왕협사.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우리가
좀 더 젊었을 적에는 젊은 혈기 때문에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우정은 세 번을 싸워야
가능하다 했듯이 이제사 우리는 좋은 우의를 나눌 수
있게 되었구려."
"그렇게 이해해 주시고 환대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에요. 더구나 최협사와 우의를 나누고 있는
분이라면 저로선 누구든지 환영할 뿐입니다."
그런 수작들이 오간 뒤 셋은 삿갓의 거실로
들어갔다.
얼마 뒤 간소한 주안상이 날라져 왔다.
"낮술이라도 한 잔씩 나눕시다. 믿을 만한
분들이니까 서로 취해서 실수해도 큰 허물은 아니
되겠죠."
삿갓의 말에 둘은 함께 웃었다.
어렵지 않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는
듯싶었다. 술은 말없는 가운데 몇 순배씩 돌았다.
먼저 얘기를 꺼낸 쪽은 삿갓이었다.
"최협사, 요즘 같아선 꼭 죽고 싶을 따름입니다."
"무슨 그런 마음 약하신 말씀을. 더구나 절륜하신
무예를 소유한 삿갓어른께서 말씀입니다."
"말씀마십시오. 역시 세상은 넓었고 하늘은
높았습니다. 나의 무예가 그토록 하잘 것 없다는
사실을 요즘에사 깨달았다는 거지요."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한 하얀독수리는
그러나 여전히 시치밀 뚝 떼고 그의 근황을 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시죠? 제가 없는 동안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고 말고요. 그것도 죽을 뻔했습니다."
"예에?"
"실체조차 보이지 않는 괴상한 그림자한테 이
천하의 삿갓이 꼼짝달싹 못 하고 당했었지요."
"원 농담도...... 그런 무예자가 지금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적두노사님이나 왕협사의 사부
되시는 시각대사라면 모를까."
"농담이 아닙니다......"
내뱉는 삿갓은 벌써 맥이 쑤욱 빠져 있는 상태였다.
"농담이 아니라구요?"
"그 괴력의 정체가 적두노사님이나 혹은 그에
버금가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은 벌써 해
보았지요. 그러나 그분들이 무엇 때문에 이 약한
삿갓을 괴롭히겠습니까?"
"그럼 그 괴력의 그림자에 대한 정체는 까마득히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하얀독수리는 진정으로 호기심을 느끼며 삿갓
앞으로 한 뼘쯤 다가앉았다. 그런 호기심은 왕천도
마찬가지였다.
"정체를 알기만 했어도 이런 고민만 하고 앉아 있진
않았겠지요. 차라리 그분 앞에 꿇어 엎드려 제자
되겠노라 호소했을 테고 잘못이 있었다면 용서라도
빌었겠지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왕천도 관심을 기울였다.
"차근차근 말씀 드리지요. 들으시고 도움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부터 제가 두 분 협사께 드리는 말씀은
한 가지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사실을 꼭 유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최협사는 아시지요? 저 굴림의자
말입니다."
"예에, 알지요. 그분 역시 편안하게 계시겠지요."
"편안치가 못하다고 말씀드리면 역시 믿지
않으시겠죠. 천하의 굴림의자가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뺨까지 얻어맞았으니까......"
"예에?"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동시에 반문했다. 삿갓의 얘기
서두만으로도 놀라운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굴림의자가 뺨을 맞았다구요?"
"그럼요. 그것도 두 대씩이나!"
삿갓의 지나치게 겁먹어 하는 태도를 보면서도 둘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괴상망측하면서도 무서운 사건인 것이다.
"두 대씩을!"
"얘기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정체불명의
인간한테 내 부하 한 놈이 이유없이 죽은 데 대해
분해하고 울적해 하고 있을 때 굴림의자가 동자를
보냈더군요. 도와달라구요."
"어떤 일이 일어났었군요."
"물론이지요. 굴림의자한테는 무서운 일이지요."
하얀독수리는 역시 굴림의자한테 어제 미리 가
보았다는 얘길 꺼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래야만 삿갓이 그에 대한 얘기도 샅샅이 불어 줄
터이었다.
"그래서요?"
"어떤 무서운 힘이 가까운 데서 그를 압박해
든다는군요."
"예에?"
"사실 난 처음엔 코웃음만 쳤지요. 세상에 그런
힘이 어디 있느냐, 더구나 보이지도 않는
물체한테서......"
"저 역시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어쨌든 오래 전부터 우정을 나누던 벗이라 그의
부탁을 소홀히 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내 부하놈
수십 명을 풀어 굴림의자 저택을 방비했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의 동자가 심부름 도중에 증발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것도 놀랍지요?"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왕천도 모처럼 대꾸했다.
"어쨌든 이틀째 밤에는 저도 불침번을 섰지요. 나는
부하들과는 멀찍이 떨어진 소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지기 내 뒷덜미로부터 괴상한 힘이......"
"어떤 힘인데요?"
"불가항력이라 할까요?"
"그래서요? 저항은 했나요?"
"아뇨. 나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하하하...... 몹시 피곤하셨던 게지요."
하얀독수리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삿갓은 전혀 웃지
않았다.
"눈 깜짝할 순간에 혈도(穴道)를 찔렸던 것입니다.
그 다음 일은 나는 모릅니다."
술을 연거푸 두 잔을 다 들이킨 삿갓은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이틀 뒤에
깨어나서 굴림의자한테 들은 얘깁니다."
"이틀씩이나 혼수상태에 계셨다구요?"
왕천이 끼어들었다.
"그럼요. 그나마도 살짝 혈도를 찔렸기에
망정이지......"
"과연 삿갓어른을 그 정도로 잠재울 수 있는
무공이라면 대단한 고수급이 틀림없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굴림의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했지요, 뭐."
"역시 혈도를?"
"아아뇨. 뺨을 두 대씩이나 얻어맞고 빼앗겼지요."
"빼앗기다뇨?"
"검정 가죽쌈지 말입니다."
"예에? 보물지도 말입니까?"
하얀독수리가 벌컥 나섰다.
"달라는데 꺼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군요."
"산채의 경비꾼들은 모두 무얼하고
있었기에......!"
"놈들의 두목인 나까지도 당했는데 그놈들이야 별
수 있었겠어요?"
"혹시......, 굴림의자가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박협사한테 거짓말을......"
"아닙니다. 내가 느낀 그림자의 괴력과 그가 느낀
괴력은 똑같은 것이었으며, 그가 본 괴한의 모습과
내가 본 괴한의 모습이 꼭같았습니다. 굴림의자가
거짓일 수가 없지요."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보물지도는 잃어버린
겁니까?"
"글쎄요. 잃어버린 건지 빌려준 건지......"
"무슨 뜻이지요?"
"괴한이 말했다더군요. 내가 미쳤다구 이런 너절한
보물에 탐을 내는 줄 아느냐. 보물을 꿰차고 앉아
나를 부르고 있는 그놈을 처치하기 위해서 지도가
필요하다나요. 나중에 돌려 준다는 알쏭달쏭한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죠."
왕천과 하얀독수리는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보물지도를 잃어버렸다고 하니 이제까지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터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무언의 걱정스런
물음이었다.
잠깐 생각 속에 잠겨 있던 하얀독수리는 삿갓에게
물었다.
"강도에 도착하자마자 여기 왕협사의 부하 한
사람도 살해되었지요."
"살인 사건이 어디 한두 건이라야죠."
삿갓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왕천은 얼마간 약이
올랐다.
"그럼 어젯밤에 복면을 하고 침범했다던 산채의
괴한은 누굴 해치려고 그랬을까요?"
"뭐요? 난 금시초문인데?"
"부하들이 보고하지 않았던가요?"
"하긴...... 내가 산채에 없었고 보고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두 분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는 어젯밤에 산채를 방문했었지요. 그러다
화살 소나기를 받고 물러났지요. 아까와서 물어
보니까 복면을 하고 오지 않았더냐고 묻습디다."
대화를 가로챈 하얀독수리의 설명에 삿갓은 다시
피로한 기색을 떠 올렸다.
하얀독수리는 내친 김에 말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굴림의자님의 거처로 방문했지요. 빈
집이었습니다."
"그야 나와 함께 어디로 갔었지요. 그보다 두 분의
예방을 부하놈들이 그렇게 대한 건 제가 사과
드립니다."
하얀독수리와 왕천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삿갓이 두 사람에게 무언가 도움을 청하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기회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하얀독수리는 얼른 만류했다.
"물론 미력하나마 힘이 되어 드려야지요. 여기
왕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운한 무사들끼리 무슨
이해관계가 따로 있겠습니까. 이유없이 협조해야지요.
그러나 보아하니 박협사께서 오늘 무척 피곤해 하시는
것 같군요. 그러니 오늘은 그만 우리들이 물러가고
내일 다시 와서 구체적인 의논을 하도록 하죠. 그럼
물러 가겠습니다."
삿갓은 다른 생각에 젖어 이들의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보였다. 산채를 나와 언덕을
내려오면서 하얀독수리는 왕천에게 물었다.
"자, 이젠 모든 계획이 원점으로 돌아간 꼴이군요.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옳은지 가늠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저들을 괴롭힌 괴한의 정체는 물론,
순도를 죽인 살인자의 정체도 오리무중이니 결국
우리가 강도에 와서 얻은 소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려. 역시 굴림의자한테는 갈 필요가 없겠지요."
"지금 사정으로서는 그렇지요. 계획을 다시 세우기
전까지는......"
"백 번 계획을 다시 세운데도 갈매기섬으로
건너가야 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기진맥진해 있는 저들을 어떤 식으로
달래서 갈매기섬으로 데리고 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의논해야 되는 알맹이지요."
"날짜도 다급하고...... 결국 굴림의자나 삿갓이
우리의 힘을 과신하게 만드는 길밖에 없겠죠?"
"그거 그럴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안해 하는
저들이 우릴 믿지 않을 테니까요. 갈매기섬으로
가자고 하면 펄쩍 뛰며 뒤로 빠질 것입니다."
"맞아요. 우리의 무공이 강력하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게......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생각해 보면 좋은 방법이 나오겠지요......"
시전거리로 나오자 둘은 갑자기 아무 할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구경이나 슬슬 할까요? 도련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나 살피기도 할 겸......"
"그게 좋겠군요."
왕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장터는 다른 때에 비해 덜
북적거렸다.
왕천이 제 그림자를 밟으며 몇 걸음 걸어가더니
여전히 땅에다 눈을 준 채 중얼거렸다.
"요즘 와서는 유화낭자가 더욱 보고 싶어집니다
그려."
"만날 날이 있겠지요. 뭘......"
"연백의 김노인댁으로 달려가서 무슨 소식이 없는가
하고 묻고 싶지만 그럴 형편도 못 되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잘 되겠지요. 만사가 뒤틀리던
사람의 운수란 원래 그렇다나요."
"그게 희망을 품고 살라는 뜻이겠지요."
"그렇더라도......"
"그림자 그림자......, 그림자?"
혼자 중얼거리던 왕천이 우뚝섰다.
"그림자!"
"예에?"
"좋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하얀독수리는 밝아지는 왕천의 얼굴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10. 수평선 너머로
강도는 한동안 조용했다. 아무 사건도 생기지
않았다.
살인 사건도 사소한 싸움거리도 없었다. 왕천의
제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어느 누구하나
시비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마치 태풍이 불고
지나간 뒤의 정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굴림의자의 거처에서 네 명의 고수 무예자가
회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천과 하얀독수리와 삿갓 그리고
굴림의자였다. 하얀독수리의 제안에 따라 그들 모두가
갈매기섬에 건너가기로 합의를 보기까지에는 많은
애로들이 있었다.
모두가 각각의 이해타산에 사로잡혀서 처음에는 한
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갈매기섬으로 갈 것을 거부하는 굴림의자의 입장은
이러했다.
그 많은 보물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포기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물을
찾겠다는 나의 계획은 집요했습니다. 더구나 천하의
굴림의자라는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별 수 없이 보물이고 뭐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나는 보물지도를
잃어버린 상태이고, 더구나 그것을 빼앗아간 괴물이
갈매기섬에서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한 나는 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삿갓도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었다.
"남의 생각을 함부로 바꾸겠다는 계획은 그만
두시지요. 여러분들이 달래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마음이 움직여질 내가 아닙니다. 갈매기섬의 보물은
일찍 포기했습니다. 애초에는 나의 문하생들을
훌륭하게 수련시켜 재도전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그들의 우두머리인 내가 한낱 노인한테 그토록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무예자란 걸 깨달은 이상 꿈을 버릴
수밖에 없지요......"
하얀독수리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도련님의 사부이신 시각대사님의 말씀만
믿고 거기로 무작정 달려간다는 사실도 무모한
일이지요. 천조옹이 거기 있다지만 계획없이 섣불리
달려갔다가 공연히 목숨만 잃게 될지도 모르겠구요.
무엇보다도 천조옹을 베라시던 제 스승의 명령이
계셨지만, 십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명령을 주신 사부
역시 살아 계시는지 어디에 계신 지도 모르는
상황이어서 만사에 주저되는 바가 많지요......"
모두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왕천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을 하나씩
설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제가 갈매기섬으로
꼭 가야겠다는 이유는 결코 보물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구요?"
굴림의자가 펄쩍 뛰었다.
"그렇습니다. 보물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이라구요?"
이번에는 삿갓이 벌컥 나섰다.
"여러분들이 설령 그만한 무예를 가지시고서도
정체불명의 괴력에 눌렸다 하지만 그토록 맥없이 뒤로
꽁무니를 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예자란
겁을 내서도 안 되고 남의 목숨을 가벼이 보아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목숨을 엄하게 다루어야 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아닙니까? 이는 떳떳하고 정의롭게 살다
죽는 것이 무사의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겁을
내다니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는 게 훨씬
명예롭습니다......"
왕천의 웅변은 계속되었다.
"......보물이 수단이고 목적이 아니라는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보물이 목적이라 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삿갓어른은 저 많은 문하생들을
그냥 내버려 둘 셈입니까?"
"제 갈길을 찾아 나서겠지요."
"그것처럼 무책임한 처사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를 하겠습니까? 왕협사가 제
입장이라면."
"우선 갈매기섬에 보내겠습니다."
"또 보물 얘깁니까?"
"그것도 원하는 사람들만 가도록 하십시오. 설사
나중에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들은 훌륭한 보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물을?"
삿갓은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경험이라는 귀중한 보물!"
왕천은 단언했다.
"그거야......"
"물론 생명의 위험은 따르지요. 그 점은
박협사께서도 경험하신 바대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는 바입니다."
"주저하는 게 이상합니다. 전날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성공하도록 건곤일척해야지요."
"건곤일척이라......"
"더구나 이번에는 성공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오백 명에 가까운 무예자를 데리고 가는 데다, 여기
혁혁하신 굴림의자와 하얀독수리와 저 역시 가세하면
호락호락 당할 세력이 아니라고 짐작되는데요?"
잠자코 있던 굴림의자가 나섰다.
"그토록 갈매기섬으로 건너가려는 왕협사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진실하게 말씀드리지요. 저의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며 사부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단지 저 혼자 건너갈 수 없는 이유는 보물이
묻힌 장소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물을 발견했을 경우에는?"
삿갓이 나섰다.
"나는 필요없습니다. 맹세합니다. 다만 우리
제자들도 있으니까 응분의 사례만 해주십시오. 그것
뿐입니다."
"최협사는?"
굴림의자가 하얀독수리를 돌아보았다. 이제껏
잠자코 있던 하얀독수리는 기회를 얻었다는 듯이
자신있게 나섰다.
"나는 갈매기섬으로 가는 일에 동의합니다.
무의미한 세월에 싫증이 났습니다. 내노라 하는
무예자들을 곯려 주고 있는 그 괴물을 찾기
위해서라도 가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사로서의
자존심이지요. 보물이 없다 해도 가고 싶은데, 하물며
내가 찾는 그자가 거기에 있는 이상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서도 꽁무니를 빼는 건 수치이고
비겁이지요."
"그러니까 최협사도 보물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겠군요."
굴림의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응분의 제 몫만 주십시오. 다만
보물에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만은 진실입니다."
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독수리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끌어넣기 위해 짐짓
갈매기섬행을 주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굴림의자와 삿갓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떻습니까. 굴림의자 어른의 생각은?"
삿갓이 먼저 입을 떼었다.
"가겠습니다. 내 뺨을 때린 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도!"
굴림의자의 발언은 자못 격렬했다.
어쨌든 이번에는 삿갓의 결심만이 남은 사정이었다.
다시 생각에 잠겼던 삿갓의 입에서 떨어진 결론은
이러했다.
"모두의 생각이 그러할진대 나 역시 마다할 도리가
없군요. 실상은 정체불명의 괴한이 우리 제자들을
살해하질 않나, 복면의 괴한이 산채에다 불을 지르려
하질 않나...... 이제까지는 방비에 급급해서 오금을
펴지 못했지만 역시 무사는 겁에 질려 물러설 것이
아니라 저쪽의 도전에 대항해서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단칼에
상대를 베듯 만사에 딱 부러지게 행동하는 모험
정신이 필요한 게 무사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종합하여 판단해 본 결과 어떤 무리가 왕협사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도전해 오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갈매기섬에
있다 해도 좋고 한양 모처에서 파견된 무예자라 해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나로서는 그 정체를 파악할
때까지 수비태세만 취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의
태도가 틀려먹었다고 생각됩니다. 습격당하는 건
습격당하는 거고 우선 어떤 목적을 세워 용감하게
전진하는 행위가 진정한 무사의 자세라고 이제사
깨달았다는 뜻이지요.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보물이
목적은 아닙니다. 우선 괴물이 갈매기섬에 진치고
앉아 있다고 가정해 두겠습니다. 내가 당한 수모는 꼭
복수하겠습니다. 틀림없이 굴림의자어른을 공격했던
자가 나를 해치려 한 자와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 단단히 무장하고 갈매기섬으로 뛰어듭시다.
죽느냐 복수하느냐,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훌륭하신 결단입니다."
왕천이 흡족하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일은 그렇게 되어서 강도의 무예자들이 총출동하게
된 것이다. 사백여 명의 삿갓의 제자들과 왕천의
제자들도 합세했다.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모두는 단단히
무장을 했다. 물론 한 달치 식량도 준비했다.
향도선에는 역시 삿갓이 타기로 했다. 네 명의
고수급 무예자들의 실력이야 다들 비슷했지만 우선 한
번 다녀왔던 물길이었기에 지리를 잘 알고 있을 그가
선로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범선에는 굴림의자와 하얀독수리가 함께
타기로 했다. 마지막 배의 지휘자는 왕천이었다.
자신의 제자들을 태우고 나머지 자리를 삿갓의
제자들로 채웠다.
오백에 가까운 무사들의 대규모 출항이었다. 팔월
대보름을 나흘 앞둔 새벽이었다. 물결은 잔잔하고
하늘은 맑았다.
출항 직전에 삿갓은 세 척의 배에 나뉘어 탄
부하들에게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
역시 너희들 스스로가 선택한 길! 왕협사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사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무작정 우리들에게 대적한다면 우리는 명예로운 칼을
빼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뿐이다. 두렵거든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하선해도 좋다......"
삿갓은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하선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
대출범! 대결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갈매기섬! 안개 속의 섬, 비밀의 섬, 죽음의 섬!
그러나 보물이 묻혀 있는 신비의 섬! 세 척의 범선은
여명을 뚫고 출발했다.
삿갓은 뱃머리에 앉아 뚫어져라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우했던 소년 시절. 생사지경을 끊임없이
넘나들었던 군졸 시절. 정치 권력의 변화에 따라
파란만장하게 변신해야 했던 청년 시절. 야망을 품고
갈매기섬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무장으로
출세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 난처한 상황에 몰려
있었으나 다시 과감하게 재도전해 보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뱃길......
"사부님, 이런 날씨라면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게
될까요?"
수제자의 질문에도 삿갓은 입을 꽉 다물고만
있었다.
두 번째 범선의 굴림의자나 하얀독수리도 자못
비장감에 젖어 있었다. 막상 갈매기섬을 향해 떠나긴
했지만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뱃길이었다.
"내가 족제비한테서 보물지도를 훔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요?"
굴림의자는 자못 초조한 목소리로 하얀독수리에게
말했다.
"이런 일이라니요?"
"갈매기섬으로 끌려들어가는 사정 말입니다."
"지도가 없었더라도 결국은 갈매기섬으로
상륙했겠지요."
"예에? 무슨 얘깁니까?"
"그게 모험을 해야 되는 무사의 숙명이거든요."
"그랬을까요. 그런데 정말 보물은 있을까요?"
"있다는 확신 없이는 상륙해서 적과 대적할 수가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설사 혹독한 시련만 겪게
될지라도 무예자한테는 행복한 경험이 되겠지요."
굴림의자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입 안에서 투덜댔다.
하얀독수리의 입장에서도 착잡한 그 무엇이 있었다.
사부의 엄명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십여 년을
유랑했다. 그러한 나날들이 자신을 위해 얼마만큼
가치 있는 세월이었을까 자못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을 내린 사부의 깊은 배려를 믿고
싶었고, 그것이 허망한 것일지라도 갈매기섬에
상륙함으로써 일단 사부께서 내린 엄명을 이행하는
것이 되는 터이다. 어쨌든 갈 수밖에 없는 기약 없는
항로!
왕천의 경우는 어떠한가.
내심 이상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출생의 비밀과
고난의 이유와 스승의 배려와 그리고 유화와의 앞날이
갈매기섬에 일단 도착함으로써 확연해질 것 같은
믿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무리한 과정을
거쳐 어려운 출항을 해야 될 이유가 없는 바였다.
스승의 편지 한 장만 달랑 들고 그 사정을 믿으며
갈 필요가 없는 터였다. 하얀독수리 편에 보낸 편지는
받지 않은 것으로 해버리면 그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죽음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며 초조해하고 있는 그 외로운
섬으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언젠가 보았던 내 사주(四柱)가 생각나는구려.
명(命)이 끈질기다도 했지요......"
한유성의 말에 왕천도 덧없이 중얼거렸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갈매기섬을 뒤덮고 있는 안개
뭉치가 멀리서 아른거렸다.
어둠 속에서 횃불 한 개가 오르고 있었다. 안개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향도선의 삿갓은 여전히
긴장된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일렀다.
"모두 경계를 철저히 하라. 활에다 살을 매겨서
준비하고 기다려라."
"횃불 쪽에다 겨냥할까요?"
"그건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내 허락없이는
누구든 화살을 쏘아 보내서는 안된다. 공연히 저쪽의
신경을 건드려서 우리가 불필요한 화를 입어서는
안된다."
"저 섬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요?"
삿갓은 제자의 물음에 잠깐 흠칫했다. 그것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누가 살고 있는지는
물론이려니와 정작 누가 살고 있기나 하는지, 몇
명이나 갈매기 섬에 틀어 박혀 사는지는 여전히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해 전의 그 해괴한 사건과 저토록 겁없이
횃불을 켜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누군가가 틀림없이
살고 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나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해괴하고
위험한 섬임에는 틀림이 없지. 어쨌든 뒷편으로
따라오는 배들에도 신호를 보내서 경계를 하도록
해라."
배는 다시 반 시간쯤 더 전진해갔다. 횃불은 안개
속에서 더욱 또렷이 밝아지고 있었다.
"음......, 선착장 쪽이군. 불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어."
삿갓은 바짝 긴장했다. 실상 그가 갈매기섬에서
인간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림자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이쪽에서도 횃불 한 개를 올려라."
삿갓의 명령에 횃불 한 개가 얼른 당겨졌다.
"모두들 몸을 숨기고 경계태세를 더욱 강화해라."
"육지가 지척인 것 같은데 돛을 내릴까요?"
"그래, 아직도 돛을 내리지 않았느냐? 그리구 노를
저을 준비도 해라."
삿갓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
범선은 서서히 선착장 쪽으로 다가갔다. 횃불
곁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부님, 누군가가 선착을 유도하고 있군요."
"......그의 행동에 순순히 따르는 척할 수밖에
없지. 다만 방심해선 안된다. 뒷쪽 수풀 속에
궁수들이라도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언덕너머 안개를 뚫고 둥근 달이 붉게 떠오르고
있었다.
"거기 선착장에 계신 분은 누구시오? 누구시길래
우리 선단들을 인도하는 거요?"
삿갓이 안개 속으로 소리질러 보냈다. 저쪽에서
잠깐 뜸을 들이는 척하더니 곧장 소리를 보냈다.
"그렇게 소리치는 사람은 누구요?"
삿갓은 잠시 망설였다. 이쪽의 정체를 알려줄까
말까 하는 판단이 아직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혹시 그 배에 협사 왕천 도령이 타고 계시지
않으신지요?"
삿갓은 잠깐 궁리한 뒤에 대꾸했다.
"그렇소만. 뒷배에 타고 계시지요. 그렇게
질문하시는 걸 보니 우릴 마중나오신 게 틀림없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흑사마귀 정창이라 합니다."
"옛?"
삿갓은 기겁을 하고 놀랬다.
흑사마귀 정창이라니. 방원 왕자의 오른팔로서 한때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하던 사나이. 박포 대장군과의
사이에서 의리로 고민하다가 거사가 있기 직전 미쳐서
거리를 떠돌던 사나이. 미친 상태로 겁없이 양쪽의
기밀을 불고 다니다가 어느 편에서 보냈는지는 모르나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던 사나이. 흑사마귀가 왕자들
간의 알력을 불어 버림으로써 그 사실이 태조의 귀에
들어가고, 그로 인해 인간사의 허망함을 느낀 태조가
함흥으로 떠나도록 유도한 장본인. 어쨌든 흑사마귀
정창은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그가 여기에는
웬일인가. 저자가 정작 흑사마귀 정창임에는
틀림없을까.
삿갓이 더욱 의심스러워하고 있을 때 흑사마귀가
다시 소리지르고 있었다.
"불안해 하실 건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해칠 생각은
전연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의 대사부(大師父)께서는
여러분을 안심시키도록 저 혼자 마중나가라고 일러
주셨지요. 횃불을 밝히고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정작 흑사마귀 정창 어르신네가
틀림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정창입니다. 자, 똑똑히
보십시오."
그는 횃불을 들어 자기 얼굴을 내비쳐 보였다.
선두의 범선은 어느새 선착장 가까이에 멈춰 서
있었다. 다른 두 범선은 저만치 뒤따라오고 있었다.
"대사부님의 명령이라 하셨는데 그분이
누구신지요?"
"그건 아직 밝힐 수 없습니다. 아마 그분은 직접
여러분들을 대면하실 겁니다. 그런데 말씀하시고
계시는 무사님은 누구신지요?"
"예에. 인사가 늦었습니다. 무림에서는
삿갓이라고들 부르지요."
"오, 삿갓 박진 협사시구먼요. 잘 알고 있습니다."
"미미한 명성이지요. 그리고 찾고 계시는 왕천
협사도 곧 도착할 겁니다."
"먼저 내리시지요. 선착장이 비좁아 배를 비켜야
다음 범선을 선착시킬 수가 있거든요."
딴은 옳을 듯한 제안이었다.
일행에게 완전무장을 귓속말로 전달한 삿갓은
조심스런 몸짓으로 먼저 뭍으로 뛰어내렸다.
요요한 사방. 살기(殺氣)는 없어 보였지만 전날
당했던 그 괴기한 사건들이 생각나서 여전히 긴장해
마지 않았다.
역시 흑사마귀는 혼자였다. 삿갓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륙에서는 흑사마귀 어른이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지요."
삿갓이 말했다.
"살해된거나 다름없지요."
흑사마귀가 대답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살해된 제가 왜 살아 있는지 저 역시 말씀드릴
방법이 없군요. 그 비밀은 대사부님밖에 모릅니다."
"예에......"
삿갓은 애매한 대꾸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갈매기섬으로 오신 손님의 숫자는 어떻게
되는지요?"
"약 오백입니다. 그런데 대사부님이시라면 역시
적두노사님이시겠지요?"
삿갓의 끈질긴 되물음에 이번에는 흑사마귀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새 두 번째 범선이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하얀독수리 최동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긴가민가 하는 표정을 하고 흑사마귀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흑사마귀 역시 애매한 표정으로
하얀독수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분명히 이쪽은 자신이 흑사마귀라고 말했다. 그가
하얀독수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동문인 그들은 서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겠군. 한데, 만약 서로가
몰라본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삿갓은 불안한 표정으로 두 사내의 상면 찰나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물에 우뚝 서 계시는 저분이 누구신지요?"
흑사마귀는 하얀독수리를 향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었다.
"모르시겠습니까?"
삿갓은 조금전 대사부의 정체를 실토하지 않던
흑사마귀에게 분풀이라도 하듯 비양거리는 어조로
되물었다.
"글쎄요......, 어두워서...... 긴가민가한데, 곧
확인되겠지요."
삿갓은 다시 궁리에 몰두했다. 만일 서로가 정작
동문임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현재로서는 흑사마귀가 왕천만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얀독수리 쪽에서도 흑사마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물론 수상한 비밀들은
점차 하나씩 풀리게 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보물은
과연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픈 사건이었지만
삿갓의 형편으로서도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속 편하게 구경이나 하자. 전토의 최고수
무예자들이 몽땅 모여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모였을까? 어떻게 될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있을 때 흑사마귀와
하얀독수리의 입에서는 동시에 비명같은 소리가
터지고 있었다.
"엇!"
"앗! 흑사마귀!"
"하얀독수리가 웬일인가!"
"흑사마귀는 무슨 일인가!"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삿갓은 무작정 한숨을 푸욱
쉬었다.
"하얀독수리가 초대된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흑사마귀가 살아 있었다니! 이건 도저히 믿을 수
없군!"
"난 분명코 살아 있네."
이물에서 뭍으로 뛰어내린 하얀독수리는 흑사마귀를
덥석 안았다.
"기막힌 일이군. 자네가 살아 있었다니! 그런데
이제 막 초대운운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확실한 것은 나도 잘 몰라."
"잘 모른다구?"
"진정이라네. 말해선 안 되는 몇 가지 비밀도
있고......"
"이해하겠네. 어쨌건 오백이나 되는 많은 손님이
유숙할 곳이 섬에 있을까?"
"그런 준비는 전연 없네. 내가 연락받은 건 왕천
협사가 온다는 것뿐이라네."
"누가 명령을 했는데?"
"나를 살려서 섬으로 데려온 분인데 아직 얼굴도 뵌
적이 없다네."
"그게 사실인가?"
"언제 내가 거짓말하는 걸 보았나. 저기 앉아
계시는 분은 누군가?"
"아, 저분...... 듣긴 했을 테지. 표창 던지기와
바늘 뿌리기의 명인 굴림의자일세."
"굴림의자!"
굴림의자는 흑사마귀와 하얀독수리가 나누는 얘기를
들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러다가 의자를 툭 치는
듯하더니 공중으로 떴다.
바퀴가 팽글팽글 돌고 있었다. 그곳의 무예자
모두가 굴림의자의 공중회전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젊은 무사들은 동시에 탄성을 울렸다.
굴림의자의 의자 바퀴가 흑사마귀 앞으로 굴러왔다.
"처음 뵙습니다. 고명하신 분을 이런 데서
뵙다니요. 그리고 실례가 많습니다. 보시다시피
앉은뱅이라서......"
굴림의자는 미소를 지으며 흑사마귀한테 손을
내밀었다.
"실례라니요. 오히려 저로선 영광입니다. 이렇게
많은 고명하신 무예자들을 한꺼번에 뵙게 될
줄은...... 그럼 마지막 배에는 왕협사 말고 또 어떤
분께서 타고 있습니까?"
"고수 무예자라면 왕협사뿐이지요. 여타의 고수
무예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 만한
무예자는 모두가 갈매기섬에 모였군요. 우연이라기엔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군요. 그런데 정협사께서는
돌아가신 걸로 되어 있는데......"
"왜 살아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나중에 한꺼번에
설명해 드리지요."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삿갓이 나섰다.
"노숙한대서 나쁠 건 없지만 누구한테서든 습격받을
위험은 없을까요?"
"습격이라니요?"
흑사마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무림의 고수 족제비도 여기서 죽었습니다. 저 역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고......"
삿갓의 두려워하는 표정을 눈여겨 보던 흑사마귀는
입가에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더구나 내 제자들은 아직도 무예가 신통치가
못해......"
"한데, 무슨 일로 이런 대부대가 건너오셨지요?"
"보물을 캐러 왔지요."
삿갓은 일부러 또박또박 대답했다.
"보물이라...... 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쨌든 특별한 위험은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저 혼자 거처를 마련해서 몇 해 동안
살았지만 아직 맹수의 습격같은 것은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맹수가 아니라......"
"사람 구경은 더더욱 할 수가 없었지요."
"그건 흑사마귀 어른의 사정이지요. 전날 제가 왔을
땐......"
"인간 구경을 했었단 말씀이군요?"
"소리만 들었지요."
"소리만이라면......"
"그 소리의 임자가 누구냔 말입니다. 난
그게......"
"잠깐. 이 섬의 보물을 캐러 오신 분 치고는 너무
용기가 없군요. 설사 위험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감수해야 보물을 손에 쥘 수가 있지 않을까요? 더구나
이렇게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오셔서......"
삿갓과 흑사마귀는 대화를 멈추었다.
선착장으로부터 왕천이 탄 마지막 범선이 도착한다는
신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드디어 초대 손님이 도착하시는군요. 어서
오십시오, 왕협사!"
흑사마귀가 손을 흔들자 왕천은 어벙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삿갓이 얼른 나섰다.
"흑사마귀 정창어른이시랍니다."
"예에?"
왕천은 더욱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왕천이 탄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해변은 갑자기
시끌시끌 해졌다. 안개는 걷히고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대보름을 며칠 앞둔 탓인지 달덩이는
둥글고 밝았다.
흑사마귀가 말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있습니다. 뭐 특별한
변괴는 없을 줄로 압니다. 박협사의 제자들과
왕협사의 제자들은 선착장 부근에다 간단한 거처를
마련하도록 하고, 네 분 어른께서는 저의 숙소로
드시도록 하지요. 변변치는 못하지만 대사부님의
명령을 받들어 정성껏 대접해 올릴까 합니다. 자,
가시지요."
왕천과 하얀독수리, 삿갓, 굴림의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오백여 부하들에게 선착장 부근 해변에다 간이
거처를 마련토록 명령한 삿갓은 떠나기 직전에 한
마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너희들 듣거라. 우리들은 저 언덕 너머에 있는
흑사마귀 어른의 거처에서 유할까 한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만일 무슨 일이
생기거든 달려와서 우리들한테 알려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개인행동은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득이 거소에서 멀리 갈 일이 있거든 여남은 명씩
떼를 지어 다니도록 해라. 생명이 아깝거든 내 명령을
우습게 듣지 말라."
네 명의 무예자는 흑사마귀 정창을 앞세우고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얀독수리는 아까부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로서는 도대체 흑사마귀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흑사마귀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여보게 흑사마귀,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일세."
흑사마귀는 마치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있는가 하는 거겠지?"
"바로 그 점일세!"
"그리고 죽었다던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까지도."
물론 그것도 의문이고."
"그럴거야. 처음에는 나도 어리둥절했으니까. 나는
잠시 정신이 이상해졌지만 대사부님의 도움으로 병도
낫게 되었고, 죽을 고비에서도 구원을 받았지."
"글쎄, 그 대사부님이 누구냐니까?"
"적두노사님."
"아, 역시!"
"그러나 지금은 만나 뵐 수가 없네."
"그럼, 돌아가셨다는......"
"천만에. 다른 데로 출타하셨거든. 대보름
자정까지는 섬으로 돌아오신다고 하셨네."
잠자코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왕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의 대사부님이신 시각대사님도 이곳에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오셨는지도 모르죠.
시각대사님께서 왕협사님께 어떤 명령을 주셨다면요."
왕천은 흑사마귀의 말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어떤 명령이라면 무엇일까요?"
"설마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고 갈매기섬으로 오신
건 아닐테죠?"
"물론입니다. 보물이 묻힌 장소에 대보름 자정까지
도착하라는 명령을......"
"그럼 그대로 이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보물이 묻힌
장소는 알고 계십니까?"
"저는 몰라도 여기 계신 삿갓어른과
굴림의자어른께서 알고 계시죠."
"그래요? 그러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삿갓이 흑사마귀한테 물었다.
"힘들다는 건 잘 알고 있죠. 보물이 묻힌 장소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섬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건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다뇨?"
"대사부님께서 그런 건 일러 주시지도 않았고, 저의
행동반경을 선착장에서 거처까지로 한정지어
주셨으니까 섬을 둘러볼 엄두도 낼 수 없었거든요."
"그렇다면 명령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열흘 전에 제 거처로 오셔서 왕협사가 오실 테니
잘 모시라고만 일러 주셨습니다."
"어떻게 왕협사를 알고 계실까요?"
"그런 의문은 만나 뵙고 직접 물어 보시죠. 저 역시
새롭게 받은 명령은 대보름 자정까지 보물이 묻힌
장소에 도착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럼 정협사께서도 보물이 묻힌 장소를 알고
계시겠구먼요."
"그게 그렇지가 못하죠.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무조건 찾아오라는 말씀만 하셨으니까요. 결국 장소를
아시는 분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됐지요."
그새 일행은 흑사마귀의 거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모두 여장을 푼 뒤 우선 몸을 씻었다. 단촐한
저녁이나마 맛있게 얻어먹은 일행은 다시 큰 방으로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팔월 대보름까지는 이제 불과 사흘밖에 남지
않았군요. 역시 일은 당장 시작하는 게 좋겠죠?"
흑사마귀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굴림의자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삿갓과 저는 바쁠 게 없는 몸입니다. 굳이 보름
자정까지 대어갈 이유가 없다는 얘기죠."
딴은 옳은 말이었다. 굴림의자의 반론에 아무도
대꾸를 못했다. 한참동안 묵묵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분열의 조짐이 엿보이는
터이었다.
소피를 보러 가는 척하고 일어서는 하얀독수리의
눈짓을 받은 흑사마귀는 뒤따라 밖으로 나왔다.
"여보게 흑사마귀,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뭘 말인가?"
"모두의 꿍꿍이속 말일세."
"자네가 모른다면 난들 알겠나.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여길 오게 됐지?"
"시각대사가 준 왕천의 편지에 이곳에 천조옹이
있다는 걸세."
"천조옹이?"
"사부님한테서 그를 찾아 베라는 명령을 받은 몸이
아닌가."
"그래서 오게 됐다는 얘기군."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하면 저들의 의견을
통일시키지?"
하얀독수리의 물음을 곰곰 되씹고 있던 흑사마귀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사부님께서 조선의 고수
무예자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처럼
대보름 자정까지 그곳에 모일 수 있는 배려도 충분히
해 두셨을 걸세."
"그 점도 일리는 있군. 그러나 삿갓과 굴림의자는
하필 그날 자정에 모이라는 명령에 대해 잔뜩 의심을
품고 있단 말일세. 혹시 사부님이 저들을
몰살시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일세."
"그런 의심을 품을 만도 하겠군. 그렇다면 저들은
제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겠지?"
"그것도 어려울 걸세. 우리 협조 없이는 보물을 캘
수 없을 테니까."
"그들에게 던져줄 수 있는 미끼는 결국
보물이겠군."
"그런 약속은 이곳에 오기 전에 벌써 다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생각들이 달라지고 있나 봐."
"어떻게?"
"저희들끼리라도 아무 때나 보물을 찾겠다는
생각이겠지 뭘."
"그렇게 되면 참으로 곤란하게 되는 걸. 우리는
아무도 동굴 입구조차 모르고 있는 처지이니......"
"일단 몸을 좀 쉬고 보세. 자고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르니......"
결국 회의는 더 계속되지 못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숙소로 돌아갔다.
아침이 밝았다.
그토록 짙던 어젯밤의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쾌청한 날씨였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착장 부근의 젊은 무사들한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침상을 받은 다섯 무예자들 앞에서 꺼낸
삿갓의 발언은 자못 엉뚱한 것이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어젯밤에는 저와
굴림의자가 공연한 고집을 부렸던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들과 협조하기로 다시 합의를
보았습니다."
"대보름 자정까지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협조하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왕천의 물음에 삿갓은 흔쾌히 대답했다.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우린 그날 밤은 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시각이 불길한 운명의 날짜인 것
같아서...... 그러나 저는 밤새 이상한 경험을 했고
그 순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한 경험이라니요?"
흑사마귀가 물었다.
"혼자 동굴 입구로 갔었지요. 그런데 그곳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버티고 서 있더라는 얘깁니다.
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바위산입니다."
"역시 이상한 일이군요."
"우리 오백의 무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치우기
힘들 것같은 그 바위를 보고 제가 느낀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절망이 아니라 도전의
욕망이었습니다. 결국 그 바위는 나의 사욕을 거둬가
버렸고 불길한 운명에 대한 도전의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혼자 취했던 밤새의 행동에 용서를
빕니다. 이제부턴 여러분들과 항상 함께 행동할
것입니다."
삿갓의 말에 다른 무예자들은 한동안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오백의 무사가 달려들어도 치우기 힘든
바윗덩어리를 그럼 누가 거기에다 옮겨 놓았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따질 처지가
못 되었다.
아침상을 물린 다섯 무예자는 다시 머리를
맞대었다.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일에
착수해야겠지요."
삿갓이 서두르고 나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굴 입구에 있다는 그
바위부터 옮겨 놓는 작업을 하는 것이."
하얀독수리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 왕천이 다른 제안을 했다.
"물론 바위를 치워야 보물이 묻힌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선 그곳의 지리를 미리 파악해
두어야 작전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께
몰려가든가 조를 짜서 몇 패가 다른 시도를 한다든가.
게다가 오백 무사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투입하는
방법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긴데......"
굴림의자가 나섰다.
"그럼 왕협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방법이 어떨까 합니다. 우선 우리
다섯만이라도 동굴로 가는 지형을 자세히 알아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삿갓 어른이나 굴림의자어른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우리가 공동작전을 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왕천의 제안에 삿갓이 나섰다.
"어떻습니까, 굴림의자어른?"
"좋습니다. 삿갓어른이 설명해 드리지요."
"그렇다면......"
그래서 삿갓은 보물이 묻힌 장소로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일러주기 시작했다. 삼형제 언덕의 중간
언덕에서 삼형제 바위를 찾고, 그 중간 바위로 올라가
동쪽을 바라보면 백 척 거리에 무엇인가 나타날
것이라는 삿갓의 얘기를 모두는 신중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지도의 기록에 의하면 달이나 해가 뜰
무렵이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갈라진 암벽
틈새로 소나무 한 그루가 상투처럼 삐져 나온 것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되거든요."
"소나무가 어떤 표시겠군요."
흑사마귀가 물었다.
"그렇지요. 그 밑에 바로 동굴의 입구가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만일 삿갓어른이나 굴림의자어른이
아니었다면 그 입구조차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겠습니다 그려."
삿갓은 열심히 전날 그가 몸서리치게 당했던
위험까지 다소 엄살을 섞어가며 설명했다.
"어쨌든 모두가 입구의 바위를 치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되겠지요."
하얀독수리가 제안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날씨가 좋아 다행입니다.
그럼 오백의 무사 모두를 동원할 수밖에 없겠군요."
흑사마귀와 함께 오백여 무사들이 삼형제 언덕과
삼형제 바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동굴 입구에
도착한 것은 정에 조금 못 미친 시각이었다.
"어렵쇼! 어떻게 이렇게 큰 바위가 동굴 입구를
막고 있을까? 오백이 아니라 오천의 무사가 힘을
합쳐도 꿈쩍 않겠는걸요!"
굴림의자가 탄식하듯이 주절거렸다.
그것은 굴림의자만의 탄식이 아니었다. 나머지 네
무예자와 오백의 무사들 역시 그 엄청난 바위의
육중함에 질린 나머지 입만 따악 벌리고 서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실망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모두 힘을 합쳐
바위를 한 번 움직여 봅시다. 제 생각으로는 언덕
위의 바위를 굴려 의도적으로 동굴 입구를 막아 버린
듯한데......"
그들은 곧 왕천의 생각대로 큰 바위 앞에
개미떼처럼 엉겨붙어 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로(徒勞)에 불과했다.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떡한다?"
하얀독수리가 중얼거렸다.
"우리 다섯이 합쳐서 바위를 때려 부수면 어떻게
될까요?"
흑사마귀의 제안이었다.
"때려 부숴요?"
"차력무공을 사용하자는 얘깁니까?"
모두가 한 마디씩 했다. 그 말 속에는 부정적인
뜻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차력무공은 한꺼번에 강한 힘을 내뿜을 경우 만일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오히려 힘을 사용한 측이
미치거나 죽거나 바보가 되는 위험한 무술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왕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일의 시작부터 이런 장애가 있다는 건
맥빠지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물러설 수야 없지
않습니까. 비록 산 같은 바위지만 반드시 때려 부술
수 있다고 믿으면 될 것도 같습니다. 실망하지 마시고
우리 다섯이 힘을 합쳐 바위를 깨뜨려 봅시다. 우리가
이제껏 닦아 왔던 무예의 시험장이 될 것도 같고요."
그렇게 해서 부하들은 뒤로 물러나고 다섯 무예자가
바위를 향해 대치해 섰다.
그들은 긴장했다. 천천히 기를 모아서 주먹에다 온
정기를 끌어모았다. 산 같은 바위를 때려부순다.
얼굴엔 힘줄이 서고 벌겋게 피가 상기되었다.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배웠거나 혹은 자기 스스로가
터득한 차력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큰
바위를 깨뜨린다는 건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토록 어려운 벽 앞에 서자 차라리
도전의 의지가 샘솟는 것이었다. 다섯 무예자의
손바닥과 주먹에 온 기세가 모아지고 호흡이 중지되며
할나의 힘을 뿌리기 위한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
"으아아아악--."
그들의 거센 장풍들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다. 돌부스러기만 공중으로 튀었을 뿐 바위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숨을 헐떡였다. 바위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바위는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요지부동으로 서 있었다.
"약간 힘이 모자랐을 뿐인데......"
하얀독수리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두 무예자의 힘만 더 가세해 준다면
바위는 부서질 것이라는 느낌을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두 명의 힘이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보지요."
왕천이 격려하고 나섰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삿갓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였다. 뒤에 서 있던 삿갓의 부하 하나가 놀란
듯이 소리질렀다.
"사부님, 해변 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요. 우리 일행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흑사마귀가 재빨리
걸어나와 절벽 옆으로 나섰다.
"나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인데?"
흑사마귀가 어리둥절해 하자 모두는 긴장했다.
적두노사인가, 시각대사인가, 혹은 천조옹이라는
괴물인가, 아니면 보물을 캐러 강도에서 건너온
자인가! 그조차 아니라면......
"어?"
맨 먼저 상대를 알아본 것은 삿갓이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왕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귀신이다!"
"귀신?"
"족제비 김해간이 살아서 걸어오고 있소!"
"설마!"
"노인이 되어 죽은 걸 분명히 확인했었소. 그런데
어떻게 족제비가......!"
삿갓이 뒤로 비틀거렸다.
그대신 흑사마귀와 하얀독수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저쪽에서 마주 오던 족제비가 이쪽을
발견하더니 우뚝 서 버렸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족제비가 틀림없군!"
하얀독수리가 중얼거렸다.
족제비가 먼저 소리쳐 왔다.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은 내 동문 흑사마귀와
하얀독수리가 틀림없는가?"
"틀림없는 형제들이네. 그렇다면 그대가 족제비란
말이지?"
"물론일세. 족제비 김해간이네. 그리고 뒤에 서
계신 분들은 삿갓과 굴림의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김협사는 늙어 죽지 않았던가?"
굴림의자도 멈칫거리며 저쪽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족제비는 대꾸 대신 웃기만 했다.
얼마 뒤 다섯 무사가 사정은 제쳐놓은 채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동안 왕천만 멍청하게 뒤에 서
있었다. 수수께끼였다. 벌써 죽었다던 두 사내가 살아
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제 곧 그 수수께끼는 풀릴 테지만 누가 그를
죽였으며 또 살려냈는가. 왜 그런 짓거리를 해야만
했었는가. 죽었다던 족제비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냈단 말인가.
"자, 우선 인사나 하게. 여기 서 계신 젊은 도령이
왕천협사라구."
하얀독수리가 족제비에게 왕천을 소개하자 족제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다면 자네가 구해 줬다는 어린 왕도령."
"그렇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정작 이렇게 만나뵙게 될
줄은......"
왕천이 나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족제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노인의 모습으로 죽었다던
삿갓의 말과는 달리 그는 말짱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흑사마귀가 물었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말하자면 며칠 밤을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걸세. 어쨌든 지금 나는 저쪽
외딴섬에서 건너오는 중일세. 대사부님한테서 벌을
받고 며칠 전에야 풀려 났었지. 팔월 대보름까지
갈매기섬으로 건너오라는 명령을 받고 되돌아오는
길이네만...... 그런데 자네들은 여기 웬일인가?"
족제비의 되물음에 모두는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웬일이라니? 대사부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던가?"
하얀독수리가 나섰다.
"특별한 말씀은 없었네. 다만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는 언질은 주셨지. 그게 자네들을 만난
줄이야......"
"그 말씀 말고는?"
"그들을 도와 보물이 묻힌 장소까지
들어오라시더군.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것밖에
없어."
"허어, 그 참......"
"내가 그동안 벌을 받게 된 것도 저기 굴림의자어른
때문이었다네."
그러면서 족제비는 악의없는 눈을 흘겼다.
"아니, 왜 나때문이란 말이오?"
"내 보물지도를 훔쳐갔기 때문이지 뭐. 사부님께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아시오?"
그러나 족제비는 열두 나녀 때문에 일이
벌어졌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삿갓이 나섰다.
"김협사,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려.
당신은 분명히 죽었는데!"
"내가요?"
"그것도 일흔 노인의 모습으로 말이오."
"설마."
"내가 갈매기섬을 탈출하기 직전 그것을 확인했었단
말이오. 분명히 김협사가 입고 있던 옷을......"
"잠깐, 그러니까 생각이 나는데 그 열두
나녀들이......"
족제비는 무심코 여자 얘기를 뱉아버린 사실에 놀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떤 비밀이 있나 보군요. 그것을 말해주지
않겠소? 모두 지나간 일인데. 더구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기 위해서 어떤 비밀도 가져서는 안
되는 사정이란 말씀이오."
삿갓의 설득에 족제비는 얼마동안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거 부끄럽소이다. 이제야 여러 동지들에게
실토를 하지요. 실상 나는 열두 무자리들과 매
시간마다 교대로 성교를 나누었지요. 그들이
암무자리란 건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무튼 그녀들의
색정이 어떻게나 강한지 열두 명을 차례로 정복해
나가다가......"
"그건 정복이 아니라 정복당한 걸세."
흑사마귀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좌우지간 나는 여덟 번째의
여자한테 가서는 거의 기진맥진했거든요. 그때
우두머리 여자가 약차력의 효과를 돕는다는 두 가지의
약을 주어서 그것을 마신 나는 정신을
잃었는데......"
"그때의 노인이 바로 김협사의 모습이었단 말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노인의 모습으로 내가
죽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얘기요. 나는 며칠 동안
처절한 싸움을 계속했거든요. 그녀들의 몸과 말이오.
나는 기어코 열두 시를 세 번씩, 그러니까 서른 여섯
명의 여자와 연속 성교를 해도 이겨낼 수 있는 체력을
체득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대사부님께서 나타나
나를 다른 섬으로 유배시켰던 거죠."
"그렇다면 이 섬에 여인네들도 있다는 셈이군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녀들이 나를 찾아오긴 했지만
나는 그녀들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신비의 섬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 모두가 대사부님의 어떤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삿갓이 중얼거렸다.
"그럼 죽은 노인은 누구였을까? 뱃사람 두 명을
죽인 범인 역시......"
그 사실 역시 아무도 확실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왕천이 말했다.
"저의 생각으로는 대사부님께서 족제비 어른에게
어떤 무예자로서의 사명을 그렇게 주신 것 같습니다."
"사명이라니요?"
족제비가 되물었다.
"아무리 정력을 낭비해도 지치지 않는 내공력
말씀이지요."
"그러고 보니......"
정오가 훨씬 지날 때까지 호흡을 가꾸고 운기를
가다듬던 여섯 무예자들은 다시 일어섰다.
하얀독수리가 제안했다.
"이제 족제비가 바위 깨는 일을 거들 수 있게
됐으니 의외로 일이 수월케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격파 작업을 해 볼까요?"
여섯 무예자들이 다시 바위 앞으로 나섰다.
"자, 다시 한꺼번에 힘을 모아 바위의 중심을 때려
봅시다."
하얀독수리의 말에 굴림의자가 덧붙였다.
"꼭대기에서 하단까지 수직선을 그어 힘을 분담하는
게 어떨까요?"
"그럴듯 합니다. 바위를 두 쪽으로 깨려면......"
여섯 무예자들은 다시 운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오백 무사들은 숨을 죽이고 뒤에 서서 고수들의
격파 작업을 살피고 있었다.
돌멩이가 튀고 먼지가 일었다. 불꽃이 별빛처럼
잠깐씩 흩어졌다. 무예자들의 기력은 탕진되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졌다. 눈동자에는 힘이 빠지고
사지는 흐느러져 갔다.
"도저히 안되겠소. 누가 이런 장난을 했을까."
굴림의자가 불평했다.
"보물을 얻기가 그토록 쉬운줄 아슈?"
흑사마귀가 비양거렸다.
"아, 그렇게들 싸울 것 없습니다. 도전하다 보면
좋은 수가 생각나겠지요."
"좋은 수라니, 무슨 좋은 수가 있단 말이오?"
왕천의 달램에 삿갓은 신경질을 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동굴 초입에서 날을 모두 보내게
되겠군......"
"만일 적두노사님과 시각대사님이 이런 장난을
했다면 약속한 날에 그곳에 도착 못하더라도 우리
책임은 아닐세."
모두의 입에서 한마디씩 불평이 터져나왔다.
날이 저물어 갔다.
"자, 돌아들 가세. 여기 더 있어 보았자 쓸 기력도
없으니 내일 다시 해 볼 수밖에......"
누군가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것을 신호로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다.
"혹시 동굴의 다른 입구가 없을까요?"
하얀독수리가 아무나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삿갓이 팩 쏘았다.
"어림없는 소리.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치더라도 내가 살핀 내부 구조로 봐서는 입구는
여기밖에 없소이다!"
하얀독수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앞서 가던 무사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그들 중의
하나가 선착장 쪽을 가리키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횃불을 흔들고 있다아!"
"횃불이라구?"
"대체 누구지?"
흑사마귀가 소리쳤다.
"이상한 일이군!"
족제비도 거들었다.
"아니 족제비와 흑사마귀가 모르면 누가 아는가?"
하얀독수리가 따지듯이 물었다.
"나도 유배지에서 이제야 돌아온 몸이 아닌가.
아무튼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면 알 게 아닌가."
그때 횃불 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왕천이
말했다.
"이번에는 네 사람이군요."
"그렇군요. 아이 하나와 어른 셋."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앗! 세 명은 여자."
하얀독수리의 대꾸에 왕천이 다시 소리질렀다.
그들은 정작 아이 하나와 세 명의 여자들이었다.
아까부터 일행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왕천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여자라면 조심해야 됩니다."
족제비가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횃불 쪽에 먼저
도착한 왕천은 여자들 앞에서 우뚝 섰다.
"앗!"
"어맛!"
불빛을 받은 서로의 얼굴을 살피던 왕천과 저쪽의
여자 입에서는 탄식같은 소리가 동시에 새어나왔다.
"낭자, 유화낭자! 유화낭자가 틀림없구려!"
"도련님, 왕천 도련님이 틀림없으신가요?"
그녀는 유화가 틀림없었다. 초췌해진 얼굴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왔다. 그녀는 꿈 속에서조차 뜻하지
않은 이 곳에서 만날 것이라는 상상을 못해 본 바로
그 미래의 낭군을 만난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왕천이오!"
"도련님이 여긴 웬일로......!"
"그보다 낭자가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소. 나는
아직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길이 없구려."
그러는 사이에 오백여 무사들 중에서 한 사내가
달려나왔다.
그는 한유성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유화가 아닌가!"
"아, 오라버님!"
"틀림없구나! 유화, 네가 여기엔 웬일이냐. 널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여기 왕협사와
함께 너를 찾기 위해서 헤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널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그래,
도대체 네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며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단 말이냐. 대체 누가 너를 납치해
갔었단 말이냐!"
왕천과 더불어 남매가 기뻐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른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굴림의자와 동자와의 만남이었다. 횃불을
들고 세 여인과 더불어 나타난 아이는 바로
굴림의자의 동자였던 것이다.
"그래, 이 녀석아.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더란
말이냐. 대체 누가 너를 데려갔었더냐. 평소에 넌
불평이 많은데다 게으른 녀석이어서 내 말을 잘 듣지
않더니 그게 싫어서 슬그머니 도망이라도 친 줄 알지
않았더냐. 대체 어디에 가 있었더냐?"
"아유, 말도 마시와요, 나으리. 그동안 나으리와
헤어져서 고생한 걸 다 말씀드리자면......"
동자는 주인을 만남 반가움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너스레는 여전하였다.
모두들 한바탕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부산을
떨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적두노사와
시각대사와 정체불명의 어떤 괴한에 의해
일어났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그들의
의문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다.
날이 저물고 힘도 빠진 무예자들은 새로 나타난 네
명을 데리고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반드시 찾아야 될 사람들을 만난 것이 기쁘긴
했지만 그간의 사정을 통해 괴상한 납치사건의 전말을
파악해야 했다.
우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여섯 무예자 앞으로
불려간 첫번째 인물은 제일 먼저 납치당했던 유화의
두 시녀였다. 왕천이 그녀들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질문을 시작했다.
"두려워할 일은 하나도 없소. 안심하고 그간의
사건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얘기해 주길 바라오. 우선
개정암에서 납치된 경위부터 설명해 주겠소?"
한 시녀가 여섯 무예자들을 한 번 둘러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저희들은 당시 연백의 김어르신네의
당부를 받고 유화아씨와 개정암에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떤 괴한 하나가
달려들어 저희 세 명의 급소를 찔러 혼절시킨 뒤
자루에 넣어 어딘가로 데려갔습니다. 어쨌건 이튿날
깨어난 우리는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어수룩한
여인숙에 놓여져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놈이 낭자들한테 손은 대지 않았소?"
족제비가 거들고 나섰다.
"그는 무서운 인상에 비해서 이상하게도 친절히
대해 주었습니다. 여인숙 옆의 주모한테 많은 돈을
주어 구워 삶았기 때문인지 주모 역시 저희들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고 좋은 음식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놉이 무엇 때문에 납치했답니까?"
하얀독수리가 나섰다.
"물론 물어 봤지요. 그러나 그 괴한도 주모도 아무
대꾸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희들이 허락없이
도망을 치는 경우 저번처럼 급소를 때려 영영 잠들게
하겠노라고 위협을 주었습니다. 그 무서운 엄포
외에는 한번도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한 놈도 다 있군.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을까?"
삿갓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무서운 괴한이 저희들한테
물었지요. 유화낭자가 누구냐구......"
"뭣이?"
왕천이 울컥 나섰다.
"저희들로서는 이미 아씨의 안전에 대해 세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기로 제가 썩 나서서 내가
유화아씨라고 대답해 버렸죠. 그 이후로 괴한은
저한테만 유독 경계를 철저히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그자가 우리더러 어딘가로 떠나자고 하더군요.
저희들이사 어디 반항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다만
기회를 엿보아 도망을 치자는 약속은 돼 있었지만
도무지 기회가 와야죠. 별 수 없이 끌려온 곳이
강도였지요."
"강도엔 돼?"
굴림의자가 물었다.
"어딘가로 끌고갈 셈이었겠죠. 그런데 강도에
도착해서 탈출할 좋은 기회가 생겼던 거죠. 그자가
방문을 자물쇠로 채우지 않았고 주모 역시 경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우리는 각각 여인숙을
나섰는데......"
시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선 각각 흩어져 도망쳐서 연백에서
모이자는 합의만 본 뒤에 일단 여인숙에서
달아났었지요. 그러나 이튿날 저는 잡히고
말았습니다."
"다른 여인네들은?"
왕천이 물었다.
"다시 강도로 끌려 왔더니 저 애가 먼저 잡혀와
있지 않겠어요?"
그녀는 옆의 시녀를 가리켰다.
"그러나 저희들은 속으로 안심을 했지요.
저희들이야 어찌 되었든 아씨만 무사히 숨어 갔으면
그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부디 아씨가 괴한의 손에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쳐 갔기를 속으로 빌며
그자가 가자는 데로 끌려갔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지요. 그러나 제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라니?"
굴림의자가 되물었다.
"이제쯤 아씨는 무사히 도망쳤을 것이다 싶어 그만
저희들의 실상을 실토해 버렸거든요. 우리들은
시녀이고 진짜 유화아씨는 무사히 도망친
분이라며......"
"아뿔사!"
"저런!"
"괴한은 몹시 화를 내며 저희들은 때리더군요. 그런
후 괴한은 사라졌는데 며칠이 지나자 유화아씨가
그자의 손에 되잡혀 오지 않았겠습니까. 그 이후로
저희들은 동굴 속에 갇혀 쭈욱 같이
있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는 아까의 그 동자가
와서 저희들의 잔심부름도 해 주었구요. 지금은
괴한이 이쪽으로 저희들을 쫓아 보내 여기로 오는
걸음이었습니다."
두 시녀가 물러간 후에 제각기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그 괴한은 무엇 때문에 여인들을 잡아
갔을까? 또한 그녀를 어떤 연유로 알게 되었을까?
그러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화가 불려왔다. 유화는 여섯 무예자들
앞에 단정히 앉았다.
"낭자, 낭자를 부른 이유를 알겠지요? 우리들은
지금 갈매기섬으로 모여들 때까지의 모든 짓거리가
의문투성이라는 사실에 골머리를 앓고 있소. 나의
스승과 다른 무예자들의 스승 되시는 분으로부터
이곳으로 오라는 막연한 명령만으로 이리로 몰려오게
됐지만, 그 이유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입장이오.
더구나 낭자가 어떻게 붙들렸으며, 왜 잡혀
왔는지조차 우리는 알지 못하오. 굳이 낭자의 피납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 피납 경위와 이유를 통해 이
해괴한 음모의 전모를 파헤치고자 하는 게 지금
우리들의 의도인 것이오. 그러하니 걱정 마시고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질문에 따라 대답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소."
"물론 여러 어르신네들께 도움이 되도록 성의있는
대답을 해올리지요. 더구나 감출 이유도 없으니까요.
다만 저 역시 많은 사건에 휩싸이긴 했지만 그 사정을
도무지 알고 있지 못하니 미리 그 점을 양해하시고
물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천의 말에 유화는 정중한 태도로 답변할 의사를
밝혔다.
얼마동안 침묵이 흐른 뒤 유화가 먼저 또렷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서부터 말씀을 올릴까요?"
왕천이 대답하고 나섰다.
"다른 얘기는 낭자의 시녀한테 자세히 들었으니
우선 시녀들과 헤어져서 고생한 얘기며 그 괴한한테
잡힌 사정과 또 이곳으로 오게 된 동기와 경위를
설명해 주시오."
"우선 시녀들과 헤어지고 나서 생긴 일부터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산길을 헤매던 중
수돌이라는 어진 사람을 만나 괴한에게 쫓기던 몸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화는 그러면서 동굴에 숨었던 일과 질 나쁜
주모를 만나 무자리패로 오인되어 기생으로 팔려갈
뻔했던 일들을 소상하게 엮어 나갔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는 왕천의 얼굴 근육이 때때로 심하게
일그러지기도 했다.
"......그런데 소녀를 보살펴 주던 또 한 분의
의로운 무사를 만났었는데 그분의 존함은 장쇠라
불렀습니다."
그때였다. 삿갓이 옆의 칼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섰다.
"이제 막 누구라 하셨소?"
"장쇠......"
"장쇠!"
삿갓의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모두들 어리둥절할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정의
전말을 그나마 알고 있는 무예자는
하얀독수리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지하고 나섰다.
"참으시지요, 박협사. 물론 애지중지하던 제자가
어떤 괴한의 칼에 죽었으니 분통도 터질 만하지만
사건의 자초지종은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좌중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참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박협사와 장쇠와의
관계를 우선 말씀드리지요......"
그렇게 되어 하얀독수리가 삿갓과 장쇠와의 관계를
좌중에게 설명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릴 동안
삿갓은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자, 다시 유화낭자께서 말씀을
계속하시지요......"
하얀독수리가 다시 유화의 얘기를 재촉했다.
"......그런 사정이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쨌든
그 고마우신 장쇠어른께서는 강화만을 건너 풍덕으로
해서 도보로 연백을 향할 계획을 세우고 계신
듯했습니다. 눈발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아......!"
삿갓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유화는 삿갓의 괴로움을 모르는 듯 차분하게 장쇠와
이별하게 될 때까지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유화는 몇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장쇠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간의 고생스러웠던 일들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리라.
왕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자의 특징이 어떻소?"
"특징이라면......, 글쎄요. 왼뺨 비스듬히
가로지른 칼자국이 있었지요."
"그자! 그자가 지금 어디있소?"
삿갓이 또다시 불쑥 나섰다.
"동굴 속에 갇혀 있지요."
"동굴? 동굴이라면 어느 동굴?"
"우리가 살던 동굴입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흐르는
격류 때문에 나올 수는 있어도 쉽사리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낭자들과 그자도 들어간 곳인데 우리들인들
못들어 갈 리야 없지 않겠소?"
"그러나 일이 그렇지가 못한가 봅니다. 그 엄청난
격류를 뚫고 들어간 사람이 아직까지는 아무도 없다는
얘기를 괴한이 중얼거리던 걸 들었습니다."
유화의 답변에 하얀독수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섰다.
"그 이상하군. 그런데 낭자들과 괴한은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여기 박협사와 똑같은 질문입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요.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매달 꼭 한번씩 만조 때 물살이
가볍게 역류가 되어 흐른다더군요. 모르긴 해도 아마
그런 때를 이용해서 드나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쪽으로 가고 싶어 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까?"
"때를 맞추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저희들이 이쪽으로 나올 때만 해도 뗏목을 엮어
만들어 타고 격류에 시달리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거든요. 나오는 길도 하물며 그러하거늘
들어가야 되는 경우는 아무리 무예의 고수라도 생명을
걸어야 되지 않을까 짐작됩니다."
유화의 답변이 끝났다. 더 묻고 싶어도 왕천을
의식해서 깊은 질문을 퍼부을 수가 없었고, 왕천 역시
다른 무예자들이 있는 데서 은밀한 사건들을 캐내기가
싫었다. 왕천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유화낭자를 무엇 때문에 그곳으로
데려갔답디까?"
"그 이유는 도무지 들려 주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를 만나서 다그치지 않는
한 입을 열지 않을 듯합니다."
"잘 알았소. 피곤할 텐데 가서 쉬시지요......"
끝으로 불려나온 사람은 굴림의자의 동자였다.
동자는 그간의 괴상한 사건들조차 하나의 유쾌했던
모험으로만 생각하는지 피로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동자에 대한 질문은 굴림의자가 간추려서 필요한
부분만 묻기로 했다.
"굴림쇠야. 여러 어르신네들이 알아야 할 일이
있으니까 묻는 말에 네가 알고 있는 바를 정직하게
말해 주기 바란다. 그래, 아까 네가 말한 노인의
신분이 누구라더냐?"
"모릅니다요. 가르쳐 주지도 않았구요. 저를
혼절시켜서는 섬으로 데려왔는데 깨어나 보니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놈의 배가......"
"알았다. 그래, 그 다음은?"
"저기 계신 아씨들 시중이나 들고 있으라더군요.
언제 집으로 보내 주시겠냐고 물었더니 너의 주인이
와서 데려갈 테니 걱정말라고 그러더군요. 그게
언제냐고 했더니......"
"그랬더니?"
"그랬더니, 팔월 대보름께가 될 거라더군요. 그래서
소인은 벌써 나으리가 노인장과 의논이라도 다 되어
있는 줄 알았습죠."
"허어, 그놈 참. 그래, 그동안 너는 무얼 하고
지냈느냐?"
"낮에는 동굴 북편 바위 틈새로 빠져나가 바닷가엘
가서 고기를 잡았지요. 몇 마리는......"
"몇 마리는 큰 놈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게지?"
"예에. 나으리가 그걸 어떻게 아셨지요?"
"내가 네놈의 속마음을 진작에 몰랐을까보냐.
그런데......"
굴림의자는 말을 끊은 뒤 다른 무예자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얀독수리가 먼저 굴림의자의 마음을 알고 말했다.
"그러니까 노인은 벌써 굴림의자어른도 이곳으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죠. 그러나 결국
이 동자를 통해서도 우리가 궁금해 하던 것은 한
가지도 알아낼 수가 없구려."
그런 대화를 엿듣고 있던 동자가 불쑥 한 마디
내뱉았다.
"무엇이 궁금한데요?"
"얼굴에 상처난 괴한도 궁금하고 그 노인장의
정체도 궁금스럽고......"
"아, 그거요? 노인장은 대보름 밤에 만날 수
있을걸요."
"그렇게 말하더냐?"
"예에. 얼굴에 흉터 난 어른이 귀띔하더군요."
"그래...... 그런데 그 상처 있는 어른은 나오지
않겠다더냐?"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나올 수 없다던데요."
"뭐, 나올 수가 없어?"
"무서운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그분이 그렇게
명령했대요. 넌 나쁜 일을 많이 했으니까 이곳에서
벌을 받고 있거라......"
"너한테 그런 말까지!"
굴림의자는 놀라 마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무예자들은 은연중에 긴장하는 태도였다.
"그런게 뭐 대단한 얘긴가요. 게다가 그 어른은
이런 얘기까지 들려 주대요."
"어떤 얘기를?"
"그 할아버지 말씀이 누가 나의 힘을 필요로 해서
협조를 요청해 오지 않는 한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거라구 했다나요."
"뭐야?"
무예자들은 그제서야 그들의 힘만으로는 산더미
같은 바위를 깰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흑사마귀가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여러분들, 이건 정말 귀신이 곡할 만큼이나 잘
계산된 사정의 연속이구려. 저 동자의 얘기대로라면
우리가 한두 사람의 고수 무예자 힘이 모자랄 것을
미리 짐작하고 동굴에 갇힌 괴한을 구해서 힘을
요청하라는 암시가 든 말이라고 짐작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저로선 내 수제자 장쇠를 죽인
그자를 용서할 수가 없소이다. 요청은 커녕 만나기만
하면 금새 칼을 뽑을 작정이오!"
삿갓이 펄펄 뛰었다.
잠자코 있던 왕천도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자를 용서하고 힘을 요청하자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히 고수 무예자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제 정혼녀가 그자한테서 수모를
받았지만 일단은 용서할 작정입니다.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우리들의
시급한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죄는 나중에 물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 나쁜 놈을 구하러 낭자들과 동자가
나왔다는 수중동굴 속으로 들어가자는 얘깁니까?"
"그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설사 우리 여섯 모두가 만장일치로 그렇게 하자고
약속해도 왕협사의 정혼녀 말씀으로는 수중동굴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삿갓의 그런 반격에는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어른들의 언쟁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동자가
다시 얼른 참견하고 나선 것은 그때였다.
"수중동굴로 들어가는 길목 말씀인가요?"
동자의 반문에 하얀독수리가 말을 받았다.
"그렇단다. 물살이 세어서 쉽사리 들어갈 수도 없는
길이 아니냐."
"아닙니다요, 나으리. 내일 오후면 들어갈 수
있어요. 그건 소인이 잘 알아요."
"뭐라구?"
모두의 입에서 되물음이 동시에 터졌다.
"만도때 꼭 두 시간 동안만 물이 거꾸로 흐르지요."
"내일이 바로 그날이란 말이냐?"
"그러믄요. 아침에, 그러니까 진시(辰時)에 물살이
역류하지요. 그 시간만 놓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구요."
"그 참 이상하구나. 꼭 우리더러 때맞춰 들어오라는
듯이 내일이 바로 그날이라니......"
하얀독수리의 말에 모두는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정작 괴한을 찾으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했다.
왕천은 괴한을 용서했지만 삿갓과 굴림의자가 그를
용서할 것인가는 심히 의심되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동굴 입구의 바위를 함께 부술 협조자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 싸움이야 어찌되었든 일단은 괴한을
만나는 일이 급선무로 짐작되었다. 왕천이 나섰다.
"아침에 수중통로로 들어가서 그자를 만납시다."
왕천은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괴한을 벨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덧붙이지
않았다. 나름으로의 요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왕천은 다시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굴림의자어른과 삿갓어른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죠.
저희 넷만 들어가서 괴한을 잡아오도록 하지요."
"아니오. 나도 가겠소."
삿갓이 분연히 소리쳤다.
"나도 가겠소. 그자가 나를 모욕한 놈일지도
모르오."
굴림의자도 소리질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까 드린 말씀대로 이 한
가지는 약속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어떤 약속 말입니까?"
"데리고 나와 바위를 깰 때까지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
"그거야......, 삿갓어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난 그놈의 낯짝부터 보고 나서 얘기하겠소."
"그건 안되겠습니다."
"왕협사, 당신이 뭔데 된다 안된다 하며 나서는
거요?"
"내가 작금의 우두머리도, 이 일의 인도자도 물론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목적이 동굴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그때까지는 싸움을 유보시키자는 겁니다.
사감(私感)으로 친다면야 박협사보다 제가 훨씬
깊습니다. 그런 저도 일의 막중함 때문에 참고
있거늘......"
"알겠소. 참지요. 단 바위를 깰 때까지
뿐이오......"
오백의 무사들을 동원해 큰 뗏목을 서둘러 만들도록
했다.
여섯 무예자와 동자를 태운 뗏목이 수중돌굴로 향해
출발한 것은 물살이 마악 역류를 시작하는
즈음이었다.
동자는 한번 들어갔다 나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제법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나으리들, 수중동굴의 길이가 약 십 리는 될
겁니다요. 게다가 물살은 빠르고 어두워서 코빼기를
돌벽에다 처박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을 하셔야 될
겁니다요."
"네놈이나 조심해라. 정신없이 떠들다가 네
주둥이가 돌벽에 부딪치면 적어도 달포 동안은 하고
싶은 얘기도 못할 뿐더러 끼니도 걸러야 될 게다."
"에이, 어르신네두......"
하얀독수리의 핀잔에 잠시 머쓱해졌던 동자가 다시
떠들었다.
"수상한 점은요, 그 괴물이 어르신네들을 무엇
때문에 그쪽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는 거여요."
"끌어들여?"
"어제 저희들이 나올 때 함께 나왔어도 될 것을 그
양반은 그냥 혼자 주저앉았거든요."
"왜 그랬었다고 생각되느냐?"
"그걸 안다면 소인이 진작에 말씀드렸지요. 앗! 저
물살, 물살을 조심하셔요. 이제부턴 어두운 동굴
속입니다요."
뗏목은 수중동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물살은 점점
빨라졌다. 낭자들과 동자의 말대로 지금은 물결이
확실히 역류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두어 시간 후에는
다시 물살은 거꾸로 돌아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괴물은 그동안 어떻게 하고 지내더냐?"
하얀독수리는 다시 동자에게 수작을 붙였다.
"그야 괴물의 할아버지한테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 벌을 받아야 당연하겠지요."
"글쎄, 어떤 벌을 받고 있더냐는 얘기다."
"땡볕 아래에 꿇어 앉아 종일 눈을 감고 있더군요.
땀을 줄줄 흘리면서......"
"또 다른 벌은?"
"배따라 폭포 앞으로 가서 폭포수를 머리로
얻어맞으며 숨을 죽이고 있더군요."
"숨을 죽이고?"
"모르긴 해도 그런 짓거리들 모두가 무예수련의 한
방법 같기도 했걸랑요."
"네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그는 필시 무예를 닦고
있었을 게다."
"벌을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죠?"
하얀독수리는 동자의 말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괴한은 어떤 연유로 무예수련을 체벌로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뗏목이 출렁거렸다. 물살을 따라 동굴 벽에
끊임없이 부딪치며 떠내려갔다. 어둠 속을 밝게 볼 수
있는 무예자들이어서 내려뜨려진 석순에 눈이
찔린다거나 머리를 부딪치지는 않았다.
"이토록 위험한 데로 연약한 여자와 어린애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느냐?"
하얀독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운수가 좋았을 뿐이지요. 괴한의 말대로 죽은듯이
바싹 엎드려서 나왔기 때문에 뗏목이 벽에 부딪치는
충격과 물소리 말고는 기억할 수가 없지요. 간혹 나는
머리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긴 했지만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죠. 누님들만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게 보일
뿐......"
수중동굴은 지루했다. 칠흑의 어둠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저만치서 희미한 광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굴림쇠야, 일어나거라. 그래, 저기가 동굴의
끝이냐?"
굴림의자가 동자의 등을 툭 쳐서 파묻고 있는
머리를 들게 했다. 그제서야 거의 까무라쳐 있던
동자는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맞습니다요, 나으리. 저기가 바로......"
뗏목은 수중동굴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물결은 이미 잔잔해져 있었다.
잠시 긴장하던 여섯 무예자들은 서로에게 눈기을
보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해답을 얻기도 전에 그들은 건너편
해안 언덕 위에 우뚝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저기 저......, 바로 저 사람이야."
동자가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저놈이 그 괴한이란 말이지?"
삿갓이 칼을 빼들며 소리쳤다.
"약속이 그렇지 않았소!"
왕천이 강하게 제지했다.
"저것 좀 보시오. 저놈이 우릴 비웃고 있지 않소!"
아니나 다를까 괴한은 이쪽을 향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의 몸에는 칼은 물론 나무작대기 하나 든
게 없었다.
"맨손으로 붙어 보자는 뜻이겠지. 좋아, 내
주먹으로 저놈을 그냥......!"
삿갓이 흥분하고 있는 동안 뗏목은 천천히 해안에
닿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괴한이 먼저 반겨 맞았다.
"당신은......?"
하얀독수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 자네는 나를 알아보는군."
"틀림없이 자네는 불여우인가?"
"분명히 불여울세. 그걸 자네는 어떻게 알았나? 내
목소리 때문인가?"
하얀독수리는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뗏목에서
뭍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렇지만 자네 얼굴은 불여우가 아닌걸?"
흑사마귀도 덩달아 소리쳤다.
"게다가 자넨 왕자의 난 때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죽지 않았던가?"
"......설명을 하자면 길다네. 난 이렇게 살아
있네. 어쨌든 반가우이. 이게 몇 년 만인가."
불여우 윤호가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으므로
삿갓 역시 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분노로
씨근거리며 적두노사의 도제들이 어떻게 서로를
확인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허, 이거 참 말도 안돼. 자네의 얼굴은 분명히
불여우가 아닐세."
하얀독수리가 그의 손을 잡으며 부르짖었다.
"옛날보다 더 잘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어쩌다 이렇게......?"
"사부님께서 완전히 망가졌던 내 얼굴을 새롭게
고쳐 주셨네."
"뭐, 사부님께서?"
"뭐 그렇네. 나도 본래의 내 얼굴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까지에는 이태가 걸렸었지."
"그건 그렇고......"
"자네들이 온다는 말씀은 특별히 없었지만 틀림없이
자네들이 이곳에 올 것이란 짐작은 했었네. 그래
자네들마저 나를 벌줄 셈인가?"
불여우는 말하면서 여섯 무예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갔다.
하얀독수리가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실상 자네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네. 우리 셋에게는 그렇다 하더라도 저기 세
무예자한테는......"
그러면서 하얀독수리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굴림의자와 삿갓과 왕천의 순으로 인사를 시켰다.
그러나 세 무예자는 적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 모두 쟁쟁한 고수들만 오셨구려. 저기
굴림의자어른만 빼놓고 모두 나하곤 옛적에 한바탕씩
실력 가늠을 했었지? 모두 안녕들 하시우?"
불여우의 건방진 태도에 씨근거리던 삿갓이 썩
나섰다.
"이 건방진 놈. 칼이 아니라면 주먹이라도 좋다.
그래, 네놈이 벌을 받는 중이라기에 얼마간 용서는 해
줄 참이었는에 네놈의 버릇없이 굴리는 입술 때문에
참을 수가 없다. 어디 나서봐라!"
"어허, 참으시라니까. 나도 당신한테는 빚을 갚고
싶지만 형편이 아마 우리가 싸우도록 그토록
한가롭지가 못할걸?"
"무슨 소리냐?"
"동굴 입구의 바위를 치우는 방법은 나밖에
모르니까."
"뭐야? 그걸 자네가 알고 있다구?"
하얀독수리가 나섰다.
"물론 알고말고. 사부님께서 내 생명을 보존케 하는
방법으로 일러 주셨다네."
불여우는 갑자기 입을 다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는 불여우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여우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뱉어낸 말이면서도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왕천이 천천히 나섰다.
"원한으로 치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과거의 모든 고난을 내일을 위한 중요한 수련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보면 이해가 갑니다. 이 왕천이는
윤협사께서 바위를 치우는데 협조만 해 주신다면 지난
날의 원한을 깨끗이 잊고자 합니다."
"그렇게 생색낼 건 없수다. 내가 벼슬살이 할 때의
입장은 피차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왕협사의
정혼녀를 납치한 건 내 뜻이 아니었소."
"윤협사의 뜻이 아니었다구요?"
"그렇소. 두 노인장의 의도였소."
"두 노인장이라면?"
"제 사부님과 왕협사의 사부겠지요."
"이해할 수가 없소."
"내일 자정에는 이해될 거요. 삿갓 양반의 제자를
벤 건 내 실수겠지만 납치하자니까 별 수 없었소.
그놈이 워낙 완강했거든."
하얀독수리가 다시 나섰다.
"그럼 천조옹은 누구인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
"뭐?"
"사부님께서 자네더러 그를 베라고 명령한 까닭은
내일이면 밝혀지겠지. 그러나 우리 모두가 두
노인장의 손에 농락당했다는 건 사실일걸세."
"함부로 속단하지 말게. 다 뜻이 있어서 그랬을
거야. 그건 그렇고, 자네 그 사실도 알고 있나?"
"뭘 말인가?"
"굴림의자어른의 보물지도를 훔쳐간 인물이
누군가를."
그 말에 불여우는 통쾌해 죽겠다는 듯이 듣기에
불쾌할 정도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알고는 있지. 그러나 그게 뭐 대수인가.
족제비와 삿갓과 굴림의자가 제 집처럼 알고 있는
장소를......"
하얀독수리는 불여우의 말을 끊었다.
"자네한테는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큰 참고가 되네. 알려줄 수 없겠나?"
"그래? 어려울 건 없지. 시각대사님일세. 왕협사의
사부님 말이야."
"그분이 왜?"
"그분이 우리 사부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그
지도가 한사코 필요했거든."
"그래...... 그런데 자네가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저 동자놈을 나한테 넘겨주면서 중얼거리시더군."
"그럼 저 동자도......"
"물론이지. 어떤 필요에 의해서 데리고 오신거지."
"한 가지도 확실하게는 이해할 수가 없군.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나. 사부님의 명령은 내일 자정까지는
보물이 묻힌 장소까지 도착하라는 것이었는데 자네
협조 없이는 그곳으로 가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단
말야."
"글쎄."
"애태우게 하지 말고 함께 가세."
"저 양반들의 얼굴을 보니 협조할 생각이 싹
가시네."
불여우는 왕천과 삿갓과 굴림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더라도 자네가 가지 않으면 안될걸?"
"무엇때문에?"
"사부님으로부터 받은 형벌은 우리한테
협력함으로써 면죄될 수 있을 테니까."
"어림잡아 때렸지만 실상은 그렇네. 그러나
협조하는 대신 두 가지 약속을 해 주게."
"그게 뭔데?"
"나한테 원한을 가지지 말 것."
"그야 벌써 이해하지 않았는가. 다른 약속이란?"
"바위를 치우는 일만 도와 주겠네."
"그럼 자네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얘긴가?"
"그보다 책임지기 싫어서 그러네."
"책임이라니?"
"열두 명의 여인네들이 동굴 속에 살고 있다더군."
"아, 그 여자들은 내가 잘 알지!"
족제비가 썩 나섰다.
"그런데 사부님의 말씀은 그 여인네들의 구출을
족제비한테 맡기라고 하셨네. 그 이유는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게. 짐작컨데 그녀들은 사부님의
명령을 어긴 일이 있어서 동굴에 갇히지 않았나 하는
것뿐일세."
"어쨌건, 자네가 책임지기 싫다는 얘긴 뭔가?"
"그녀들이 지금 위험한 장소에 놓여 있는데 보물이
묻힌 장소까지 도착하기 위해 자네들이 마구잡이로
들이닥칠 것이라는 얘기지."
"그러다가 여인들이 다칠 것을 우려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그녀들 중 한 명이라도 돌에 깔렸다간
자네들도 온전치가 못할걸?"
"좋아. 자네 마음대로 하게. 우리가 여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고, 자네한테는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할 것이야."
"최선 가지고는 안되네. 사부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다니까. 여인네들을 한 명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걱정말게. 짐작컨대 사부님께서 설마 여인네들이
함부로 다치도록 방치해 두셨을라구......"
물살이 다시 역류하기 시작했다.
일곱 명의 무예자들과 동자가 다시 동굴 입구 바위
앞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시간이 없군. 내일 자정까지는 늦어도 보물이 묻힌
장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하얀독수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서둘러 봅시다. 이젠 윤협사도 가세하게
됐으니 제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깨어지겠지요."
왕천의 독려에 바위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불여우
윤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참 알 수가 없군......"
"뭐가 이상합니까?"
"언젠가 사부님께서 그런 언질을 주셨습니다.
종(縱)이 어려우면 횡(橫)으로 자르라구......"
"이 바위를 횡으로 잘라야 한다구? 그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야."
흑사마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알 수 있나요. 상하좌우의 폭이 똑같거니와 석질로
보아 횡으로 잘라야 제대로 될 지 누가 압니까?"
왕천이 다시 참견하고 나섰다.
모두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더구나
바위를 깨는 작업은 두려운 일이었다. 일시에 기를
모아 바위에다 투사했다가 만일 물체가 파괴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 강력한 반동이 가격한 자의 기운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무예자들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 어차피 우린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윤협사의 말씀대로 횡대로 서서 한꺼번에 가격해
보도록 합시다."
왕천의 격려에 잠시 머뭇거리던 무예자들은 바위
옆으로 몰려가 섰다.
그들은 천천히 기를 모으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붉은 기운이 감돌고 주먹과 팔과 어깨와 허리와
다리에까지 힘줄이 곤두섰다.
그들의 타격 준비자세는 거의 반시간 가까이나
진행되었다. 문득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나온 야잇
하는 신호와 함께 일곱 무예자의 주먹이 바위를 향해
날았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엇? 아무 반응이 없잖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
굴림의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오. 금이 갔소! 그 신통하군. 종으로는 안되고
횡으로 갈라지다니."
그것은 정말이었다.
"얘들아, 어서 준비한 밧줄로 바위를 묶어
끌어내도록 해라."
왕천이 오백여 무사들한테 소리쳤다. 그들은 환성을
지르며 바위 쪽으로 달려갔다.
"자, 이젠 어떡하지요?"
하얀독수리가 삿갓한테 물었다.
"저 부하들까지 한꺼번에 진입시키기에는 도굴이
너무 좁지요."
"그야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일곱만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럴 동안 오백 무사들은 바위 반쪽을 밀어내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가 반쯤 입을 벌리고 나타났다.
다시 나머지 반쪽 바위덩어리를 치우는 데도 한
시간이나 허비했다. 삿갓이 나섰다.
"너희들은 다른 지시가 내릴 때까지 동굴 입구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우리 일곱만 들어가도록 하겠다.
자, 준비한 횃불을 이리 다오."
오백의 무사들은 일곱 고수 무예자들의 긴장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뒷전에 있던 굴림의자가 말했다.
"나는 들어가지 않겠소. 바깥에서 보물을 운반할
준비나 시키고 있겠소."
모두는 굴림의자의 다리쪽으로 눈길을 보내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뒤따라 불여우도 소리쳤다.
"내 임무도 끝난 것 같은데."
"싫다면 권고할 수는 없지."
삿갓이 내뱉았다.
역시 선두에는 삿갓이 나섰다. 굴 안쪽은 칠흑의
어둠이었다. 앞장서서 갇는 삿갓은 무언가를 웅얼웅얼
중얼거리고 있었다. 발걸음 수를 세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삿갓이 소리질렀다.
"여기요!"
"여기가 보물이 묻혀 있다는 데요?"
흑사마귀가 물었다.
"그것이 아니고...... 저 소리를 들어 보시오."
"음......, 여인네들의 신음소리로군. 저쪽인 것
같은데?"
"서둘다간 큰일납니다. 여인네들을 구하려다
돌무덤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그렇지요. 그럼 어떻게 한다?"
그 즈음에 왕천이 작은 동굴들의 입구를 기웃거리고
있다가 한 곳에 멈춰 섰다.
"저깁니다. 젊은 여인네들이...... 모두 열두
명입니다. 연못 건너편 벽 쪽에 멍청히 앉아
신음소리를 내고 있군요. 가서 구해내야겠지요?"
"안됩니다. 저길 보세요. 지도에 적힌 대로라면 이
동굴의 연못에는 독기가 있어 물이 살갗에 닿으면
금새 썩어 버립니다."
족제비의 말에 다른 무예자들은 멍청히 발 앞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독기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인들은 스무 척 건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절륜한 무예를 지녔어도
스무 척 거리의 연못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돌무덤 말씀은 있었지만 독기 있는 연못 얘기는
처음인걸."
하얀독수리도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삿갓이 나섰다.
"저 여인네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오. 그냥
지나칩시다."
"그냥 놔 두면 몇 시간 못가서 독기에 질식해
죽습니다."
왕천이 반대했다.
"그렇대서 뾰족한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때였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생각에 잠겨있던
족제비가 불쑥 말했다.
"여러분들, 내가 해 보겠소."
"자네가?"
흑사마귀가 천부당 만부당이라는 어조로 말했다.
"걱정할 건 없어. 독극물을 이겨내는 방법을 나는
내공력으로 터득해 두었으니까. 이제 생각하니
사부님께서 나를 그토록 윽박질러 차력 훈련을 시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가 봐. 내가 건너가서
여인네들을 하나씩 운반해 오도록 하지......"
그러면서 족제비는 벌써 연못 앞으로 다가가 운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아무도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한 예감 때문에 모두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족제비는 그새 물 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족제비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무예자들을
돌아보며 불쑥 말했다.
"저 여인들은 멋대로 지어먹은 약 때문에
음심(淫心)이 극도에 달해 있는 걸세. 혼미한
정신으로 남정네라면 무지막지하게 달려들걸세. 아마
그 때문에 진노하는 대사부님께서 저들을 벌주고 계신
것 같아. 나는 여인들의 음심을 진정시키는 비법을
알고 있다네. 사부님께서 나를 닥달해서 의술(醫術)의
여러 비법까지 가르쳐 주신 것도 오늘을 위해
준비하신 것 같아."
족제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녀들은 이미
족제비와 여러번 몸을 섞었던 여자들이다. 때문에
족제비는 그녀들이 비몽사몽간에 그에게 달려들어도
그녀들을 달래는 비법을 알고 있으며, 그가
의생(醫生)으로서의 무예까지 닦았다면 그녀들에게
해를 입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기맥(氣脈)이나 혈도(穴道)를
찌르든가 약을 먹이든가 어쨌건 독기를 풀어 주고
음심을 진정시키도록 자네가 책임을 지게."
하얀독수리가 그렇게 단안을 내리자 다른
무예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써 족제비는 연못을
건너 한 여인을 공중 높이 번쩍 들어 운반하고
있었다. 그 여인이 족제비의 목을 휘감자 그는 재빨리
여인의 혈도를 눌러 까무러치게 했다.
"여인들이 바둥거리다가 몸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려니까 도리가 없어......"
족제비는 변명처럼 말했다. 족제비는 열두 명의
여인을 모두 운반한 후 이들을 깨워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전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삿갓이 다시 우뚝
섰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군요! 찬바람이 불었소.
전날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그것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굴림의자의 집에서
그림자처럼 엉겨붙던 그런 힘을 주위로부터 느꼈다.
"뭘까? 저 힘이?"
하얀독수리가 속삭였다. 흑사마귀가 대꾸했다.
"이해할 것 같아. 그림자도 속임수도 아니야.
예감이야."
"예감?"
"죽음의 그림자라는 거지. 곧 동굴이 내려앉을
징조일세."
"그럼 우리가 지금 위험에 빠져 있다는 얘긴가?"
"두려워 말게. 난 벌써 대사부님한테서 그것을
물리치는 비법을 배워 두었네."
그러자 왕천이 나섰다.
"저도 저의 사부님한테서 조금 익혔습니다. 상대의
힘을 깨는데는 손바람을 쓰라고 하더군요. 힘이
쏟아져 나오는 방향을 장확히 잡아 힘껏 손바람을
찍으면 무슨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앞장서야겠습니다."
하얀독수리의 말에 왕천과 흑사마귀가 한쪽 벽을
향해 방향을 잡고 섰다. 그들 둘은 정확히 힘의
출처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때려 봅시다."
흑사마귀가 왕천에게 말했다. 둘은 힘을 모으더니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앗--"
흑사마귀와 왕천의 기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저만치 천장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돌무더기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어서 뒤로 비켜!"
누군가가 소리질렀다.
동굴 속은 먼지가 자욱했다. 한동안 먼지 때문에
서로를 확인할 수 없었다. 얼마쯤 지나자 서로의
윤곽들이 되살아났다.
삿갓이 중얼거렸다.
"신통하군. 그 거대한 힘이 사라졌어. 그렇다면
전에 우리가 느꼈던 힘도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던가......"
그 소리를 엿들은 왕천이 대답했다.
"힘은 인간의 의도적인 저항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자연의 저항도 이쪽의 무공에 따라
힘으로 느낄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어떤 힘을 예감할
수 있다는 얘기는 그 사람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뜻도
되지요."
그러나 삿갓은 여전히 왕천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돌무더기를 거둬낸 무예자들은 다시
전진을 계속했다. 그새 여인네들을 무사히 밖으로
내보낸 족제비가 천둥벼락 같은 소리에 놀라
달려왔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보시다시피."
삿갓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꾸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전진은 계속되었다. 얼마간 앞장서 걷던 삿갓이
소리질렀다.
"여기인 듯싶소. 백 오십 보를 걸어왔거든."
"틀림없소?"
흑사마귀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입구가 분명하오."
왼편의 작은 동굴로 다시 서른 발자국은 더
들어가야 보물이 묻힌 장소가 나온다. 천장에 네 개의
해골바가지가 있으며, 북쪽으로 걸린 해골바가지를
건드리면 어떤 반응이 있을 것이고, 그 밑에 보물이
묻혀 있을 것이다.
기억력 하나만을 더듬어 보물을 찾아 나선
그들로서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에
그려진 입구를 찾지 못해 자칫 옆길로 들어섰다간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화기(화기)가
있는 물건을 가지고 엉뚱한 동굴로 들어서면 폭발할
염려가 있으며, 또 다른 동굴로 들어서서 잘못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금새 물바다로 변해 제
아무리 고수라도 수장 당하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되는
터이다.
삿갓은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전날 그는 이곳에서
여인의 웃음소리에 몹시 놀랐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삿갓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왜 그러시오?"
족제비가 되물었다.
"부하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작업을 해야 될 거요."
"왜요?"
"장소는 바로 저기입니다만......"
"틀림없소?"
"돌무덤으로 보아서 바로 저 너머가 틀림없소. 내가
전에 이곳에 왔을 때 해골을 건드리는 순간 돌더미가
내려 앉았소. 빠져나오는 데만 사흘이 꼬박 걸렸소."
"그렇다면 그 구멍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소?"
모두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들이 돌무덤을 헤쳐서 빠져들어가는 구멍을
찾아낸 것은 한참 후였다. 정신적으로 초조했고
육체적으로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이 막상
보물이 묻혔다는 석벽을 찾아냈을 때에는 모두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모두는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힘이
빠져 있기도 했지만 이제 찾게 될 엄청난 값어치의
보물을 생각하자 갑자기 긴장이 몰려온 때문이었다.
그것은 가슴 떨리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자, 우리가 보물을 찾게 되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족제비였다.
"물론 내 몫이 제일 많아야 될 거요."
삿갓의 대꾸에 족제비가 왈칵 나섰다.
"뭐요?"
"왜? 뭐가 불만이오?"
"무엇 때문에 당신 몫이 제일 많아야 된다는 거야.
애초에 보물이 묻힌 장소를 알고 있던 자는 나였소.
내가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보물을 찾는 일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단 말야."
"천만에! 김협사는 처음부터 보물지도의 가치를
모르고 있지 않았소? 그 값어치를 알고 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일을 추진한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오? 그러니까 내 몫이 제일 많아야 한다는 거지.
난 이미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을 답사했던
사람이오. 더구나 대부분이 내 제자인 사백여
무리들이 이번 일에 가담한 공로까지 생각하면 그토록
야박스런 분배는 못 할 것이오."
모두 힘을 합치자던 지금까지의 결의가 황금 앞에서
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자코 있던 왕천이 일어선 것은 즈음이었다.
"잠깐 제 의견을 들어 주십시오. 우선 여러
협사들의 그런 주장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공평치
못하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일은 우리
일곱이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발굴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를 깰 때부터 일곱의 힘이
아니고서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보물을 찾게 되면 우리 모두의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옳소. 옳아요. 그게 싫다면 지금 당장 포기하도록
합시다."
흑사마귀 정창도 끼어들며 떠들었다.
이렇게 왈가왈부하고 있을 때 석벽의 구석구석을
밀어보고 있던 하얀독수리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부질없는 싸움이오. 보물상자는 끄떡도
하지 않소. 철벽 그대로요. 우리는 영원히 열 수가
없을 것이오."
"뭣이, 정말이오?"
모두의 입에서 터진 탄성이었다.
몇몇은 곧장 달려가서 보물궤짝처럼 생긴 석벽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모두의
표정에는 다시 절망적인 그림자가 스쳤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사부님을 뵐려면 이 문을 열고 들어서야 하는데?"
"뵙지 못하면 그뿐 아니겠소? 그쪽에서
나오라시지!"
또다른 불평들이 터지고 있었다.
그럴 즈음에 뭔가 생각에 골똘해 있던 족제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보시오들. 보물이 있는 석벽은 비밀의 글귀를
풀어야 열리도록 돼 있는 게 아니오?"
"무슨 얘기야?"
하얀독수리가 물었다.
"보물지도 뒷면에 '巖則是太極 王壓右角陽
他堆左角陰'이라고 적혀 있었다네. 그 글귀가 바로 이
석실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그렇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석실을 열겠소!"
삿갓이 내뱉았다.
하얀독수리는 지치지도 않고 암호문을 푸느라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큰 바위는 곧 태극이다. 왕가는 위에서 양의 우측
모서리를 누르고, 다른 자들은 아래에서 음의 좌측
모서리를 밀어라? 무슨 말일까......"
"글쎄? 무슨 뜻이지?"
"도대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 투성이로군!"
"귀한 보물이니까 깊이 감춰진거겠지."
다시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만있어 봐요!"
갑자기 소리친 쪽은 흑사마귀였다.
"왕가는 누군가? 혹시 왕협사를 지칭하는 게
아니겠소?"
"맞았어! 이것 보라니까. 이 거대한 바위를!
태극무늬를 그리며 틈이 갈라져 있구려. 윗 부분은
양이고 아랫부분은 음이 아니겠소?"
그렇게 소리친 무사는 하얀독수리였다.
"뭐요?"
모두는 달려가서 곤태극과 건태극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 기왕 이렇게 된 것 우리 한 번 밀어나 봅시다.
왕협사는 건태극의 오른쪽 모서리를 누르고 나머지는
곤태극의 왼쪽 모서리를 밀도록......"
하얀독수리의 제안대로 해보았으나 석벽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모두는 다시 실망하면서 제각기
흩어져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흑사마귀가 툭 쏘듯이 내뱉았다.
"왕협사, 왕협사의 장검 손잡이에 혹시 금강석이
붙어있지 않소?"
"그렇습니다만......?"
"대사부님께선 그런 언질을 주셨던 것 같소. 왕이
바로 왕협사를 지칭한 것이라면 금강석이 붙은 장검의
끝으로 밀어야 된다며 열 번은 더 혼잣말을 하십디다.
그것이 뭐 왕협사가 지닌 장검의 비밀이라나?"
흑사마귀의 말에 모두는 다시금 마지막 희망을 갖게
되었다.
"자, 그럼 우리 다시 시도해 봅시다. 당장......"
하얀독수리가 서둘러서 석벽 앞으로 다가섰다.
"모두들 잠깐만!"
흑사마귀가 다시 소리질렀다.
"왜 그러나?"
하얀독수리가 물었다.
흑사마귀는 하얀독수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왕천에게만 눈을 고정시킨 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대사부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소. 칼끝으로
금궤를 여는 자를 우리들의 우두머리로 삼을 것을
권고했소.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왕협사의 수하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소. 다만 난
보물을 찾아서 내 몫을 가지고 마음대로 떠나고 싶을
뿐이란 얘기요. 그래도 괜찮겠소?"
"할 수 없지요. 어차피 제가 여러분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은 없는 몸이니까."
"겸손으로 생색낼 이유도 없는거요. 정작 우리들의
공력 없이는 저 금궤는 열리지 않을 테니까......"
다른 무사들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뭔가를 곰곰
생각하는 눈치였다.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석벽부터 열어
제낍시다!"
삿갓의 제의에 모두는 정신이 들었는지 서둘러서
석벽 앞으로 붙어섰다.
한편 두 노인이 동굴 속에 앉아서 호리병을
기울이며 술을 대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토록 유쾌한지 때때로 소리를 높여
껄껄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를 따라 실내를 밝히고
있는 작은 기름불이 흔들거렸다.
두 노인의 머리 위로는 네 개의 해골바가지가 웃는
듯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머리에 빨간 두건을 쓰고 수염이 허옇게 된 노인이
적두노사이며, 가발을 벗어 던진 머리가 반들반들
빛나는 장삼의 스님이 시각대사였다.
"지금 몇 점이나 됐을까?"
시각대사가 중얼거렸다.
"오후쯤이겠지. 자정이 되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될 거야."
"그렇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네. 제자놈들은
돌무더기를 파헤치느라고 지금쯤 한참 땀을 뻘뻘
흘리고 있겠지? 비밀의 글귀는 풀기라도 했을까?"
"자, 술이나 한 잔 더 듬세. 암, 저놈들의 지혜가
합쳐지면 어떤 암호도 풀어낼 수가 있지. 난 그걸
믿네. 그리고 왕천의 칼이 태극의 석실을 열 수
있다는 뜻을 풀게 되면 쟤들도 천이를 지도자로
받들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네."
"무언가?"
"아이들의 수련을 위해서 자네가 그런 방법으로
혹독하게 다룬 일이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는가?"
"물론이지. 자네도 내 의견에 동감했기 때문에
왕천에게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야......"
"나는 내 문도(門徒)들의 성품을 잘 아네. 무예는
가르칠 수 있었지만 그 성품들을 옳게 교정하기는
쉽지 않았다네. 놈들은 도대체 단결력도 없고
본성들이 탐욕스러워 고민께나 했지. 결국 아이들의
무예를 옳은 일에 사용토록 하기 위해 각자에게 한
가지씩 임무를 주어 경험을 쌓도록 했지. 그
과정에서는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스스로에게 좋은 교훈이 됐을 걸세.
뭔가를 많이 느꼈을 테고 말야.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나?"
"정말 그렇네. 그래서 보물상자에다 무어라고 적어
넣었는가?"
시각대사는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적두노사를
바라보았다.
"신중히 생각해서 보물을 값지게 사용해라.
삼라만상도 너희들에겐 다 보물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이제까지 닦은 무예도 바로 보물인 것이다. 너희들이
힘을 합쳐 마지막 석실을 열었던 것처럼, 너희들이
힘을 합해 지금까지 닦은 무예를 책으로 엮고
제자들을 키워 앞으로 있을 국난에 대비토록 하여라.
그 책은 「무예대보(武藝大譜)」라고 이름 붙여라.
그런 식이었지."
"그럴 듯하군. 그런데 무슨 심사로 나를 천조옹으로
만들었는가?"
"진짜 천조는 내가 여기서 없애 버렸네. 놈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놈이었거든. 비록 그의 무예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위험한 것이었거든. 천조를 죽여
족제비가 늙어 죽은 것처럼 꾸몄지. 놈은 실상 제
죽은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었다네. 보물을 캐려는
칼잡이들을 태우고 온 뱃사공을 걸치적거린다고
죽이질 않나......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어.
속임수를 써서 그를 없애 버렸지. 자네를 천조로 만든
것은 하얀독수리가 그렇게 알고 있어야 그를 베러
이리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네."
"듣고보니 그렇군. 자네 부탁으로 내가 천조인
것처럼 냄새를 풍기긴 했지만...... 그런데 자네가
어째서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는지 그 이유는
아이들한테 알려 주어야 할걸?"
시각대사의 질문에 잠깐 침묵을 지키던 적두노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고려 조정은 이미 다시
일으키기에 너무 늦었을만큼 썩어 있었고, 새
사직마저도 백성을 위하기보다 권력쟁탈의 암투만을
벌이고 있으니 어디 자네나 내가 들어설 곳이던가."
"나 역시 그 때문에 산 속으로 숨어 버렸지만......
자네 아이들의 도움으로 왕천이라는 쓸 만한 재목을
하나 얻은 게 그나마 큰 기쁨일세."
"왕천을 구하도록 한 나의 계산에는 큰 의미가
있었네. 그것은 바로 정의(正義)였거든. 고려의 강한
후손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새 사직도 이를
경계할 것이고, 나라를 다스림에도 긴장할 것이
아닌가!"
"자네는 정말 사려가 깊네. 어쨌건 이제까지는 우리
생각대로 잘 되어 왔지만, 저놈들이 과연 우리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잘 되어야 하고 또 잘될 것이라고 믿네. 이제 우리
시대는 끝났네. 앞으로 나라가 잘 되고 못 되고는
저들 시대의 책임일세. 그 이상의 것은 우리가
간섭해서도 안 되지. 우리 임무는 끝난 것이야."
"그런데 오랑캐와 왜구들의 침입이 요즘에 와서
부쩍 늘었다지 아마?"
"훌륭한 무예를 닦아서 어디에 쓰겠나? 우리
제자들만으로도 국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걸세."
"이 보물지도는 이제 어떻게 할까?"
"자네가 돌려 준다고 약속했다면서?"
"그렇다면 보물궤짝 속에 넣어 두지."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애들을 이 동굴 속으로
들어오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겠나?"
"그걸 내가 왜 모르겠나. 고난을 함께 겪으며 우리
백성의 성품 중에서 가장 결점인 단결심을 북돋워
주고......"
"또 있지."
"각각의 개성에 맞는 무예를 노출시킴으로써
무림에서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자
함이었네."
"게다가......"
"게다가 이제까지 닦아온 무술을 실전처럼 사용케
함으로써 하나의 완성된 무예로 정리해 주려는 뜻도
있었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무술의 효용까지 가르친 셈이로군. 자, 우린
그만 일어서야 할까 보네."
"그렇군. 쿵쿵거리는 소리가 가까운 걸 보니
돌무덤을 거의 다 파고 이제 마악 석실을 열고 있는
모양인걸."
두 노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자, 이쪽 비밀통로로 해서 빠져나가세. 아무도
모르게 배를 준비해 두었지."
두 노인은 작은 땅굴을 빠져나와 해변에 다다랐다.
"저 애들이 우릴 발견했을 땐 벌써 배는 저 바다
한복판에 떠 있을걸."
"이번에야말로 정말 우리는 사라지게 되는 건가?"
"그래, 영원히......!"
범선은 바닷바람을 받아 바다 한복판을 향해 바삐
달렸다.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11. 지는 달 뜨는 해
보물상자는 모두 다섯 개였기에, 다섯 명의 무사가
각각 한 상자씩 운반하기로 했다.
족제비가 선두에 서서 동굴 밖으로 나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 뒤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르던 삿갓이 앞정선
족제비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여보시오, 김협사. 당신이 그 보물궤짝을 들고
있다고 해서 그게 몽땅 당신 거라는 환상에는 젖지
마슈."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족제비는 대꾸를 않았다.
그 뒤로 흑사마귀 정창이 무거운 상자를 날렵하게
공중으로 던져 올리기도 하면서 역시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다만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왕천과
하얀독수리였다. 왕천은 하얀독수리가 자신과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그런 느낌이
싫어서 왕천은 하얀독수리에게 전연 엉뚱한 질문을
불쑥 던졌다.
"최협사. 어차피 보물은 각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할 것입니다."
"글쎄요. 분배하는 방법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우리 사인방 제자들이야 약간씩 양보하도록
설득할 수 있겠지만, 굴림의자나 삿갓의 욕심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문제로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최협사께서는 분배받은 보물을
무엇에다 쓰시려고 하십니까?"
"저는 보물에 손대지 않겠습니다."
"예에?"
"저의 양보로 저들의 욕심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당연한 자기 몫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제 몫이 돌아온다면 도련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투자하도록 하죠."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지만 보물에 욕심이 없다는 제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도련님께서는
배당금을 어디에다 투자하시겠습니까?"
"우선 유화아씨와 혼례를 치루는 일에
투자하겠습니다."
그래놓고 둘은 흔쾌히 웃었다.
동굴을 벗어나오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세상이 대낮처럼 밝았다.
"모두들 우리가 돌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겠군요."
"보물상자를 보는 순간 모두들 만세를 부르겠지요?"
왕천의 말에 하얀독수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언덕을 넘어서자 곧바로 해변이 나왔다. 범선들이
해변에 정박해 있으므로 굴림의자와 불여우를 포함한
일행들도 모두 거기에 모여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맨 앞에서 걷고 있던 족제비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며 소리질렀다.
"앗! 저게 뭐냐?"
모두들 서둘러 족제비 옆으로 다가섰다.
괴이한 광경이었다. 백사장 둘레에다 횃불을
밝혀놓고는, 검은 복색을 한 무사 이백 여명이
선착장을 등진 채 배수진을 치고 우뚝 서 있었다.
"못보던 놈들인데! 마치 까마귀떼처럼 몰려왔군."
삿갓이 중얼거렸다.
"앗, 유화아가씨랑 다른 여인네들이 돛대에 묶여들
있네!"
족제비가 소리질렀다.
검은 복색의 무사들 앞으로는 더욱 신기한 장면이
나타났다.
"어랍슈! 저 굴림의자가 앉은뱅이가 아니었군
그래!"
희안했다. 굴림의자는 검은 무사들의 대장인듯
장검을 가슴에 끼고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불여우로군!"
흑사마귀가 신음처럼 내뱉았다.
그들과 삼십 보 정도를 사이에 두고, 왕천의
부하들과 삿갓의 부하들이 언덕쪽을 등진 채 상대에게
접근을 하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칼만 겨누고
있었다.
"반란이군."
"벌써 한바탕 붙었었나 보지. 드문드문 시체들이
널려 있는 걸 보니."
흑사마귀의 말에 삿갓이 대꾸했다.
잠자코 상황을 살피던 하얀독수리가 입을 열었다.
"상황을 짐작하건대 검은 무사들은 굴림의자가
데려온 듯합니다. 유화아씨와 여인들은 인질로 납치해
미리 배 위에다 묶어 놓은 듯하고......"
"그 때문에 우리편에서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있겠지요."
왕천이 대꾸했다.
"불여우놈. 끝끝내 저쪽으로 붙었군!"
흑사마귀가 다시 내뱉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족제비가 돌아보았다.
"별 수 없지. 어차피 한바탕 피를 보아야 정리가
되겠군."
삿갓이 대꾸했다.
상황판단을 끝낸 다섯 무사들은 백사장으로
걸어내려갔다. 정적이 감돌았다.
"보물을 찾아왔는데도 어째 환영행사가 없지?"
삿갓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굴림의자가 되받았다.
"잔말 말고 보물을 모두 내려놓고 물러서시지.
그렇지 않으면 왕도령인지 개도령인지 하는 네 놈의
정혼녀가 온전치 못할 테니까."
불여우가 덧붙였다.
"여기까지 납치해 올 때부터 벌써 이런 계산이 서
있었지."
삿갓이 나섰다.
"유화아씨는 나하고 상관 없어. 죽이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근데 굴림의자! 당신이 나한테까지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난 삿갓이 내 편인 줄 알고 있었는데?"
"싫다면?"
"어리석긴."
하얀독수리가 끼어 들었다.
"몇 가지 의문이 있소. 이런 사태를 벌인 건 순전히
보물 때문이오?"
"꼭 그렇다고만 말할 순 없지."
굴림의자가 대꾸했다.
"앉은뱅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껏 우릴 속인 건
뭐요?"
"몰라서 물어? 천조옹, 적두노사, 시각대사......
그런 도사들을 내가 어떻게 당해. 병신인 척 앉어서
그대들을 이용해 보물을 찾은 뒤 내가 독차지하려고
했지."
"사기꾼이군."
"천조옹이 적두노사에게 당한 걸 안 뒤부터 나는
자신을 갖게 되었지. 그리고 남은 두 영감이 배를
타고 이 섬을 떠나는 걸 보고서는 이 보물들이 모두
내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어."
"그렇게 믿기엔 너무 이른 걸."
"잔소리 그만하고 상자를 건네준 뒤, 그대들은 섬에
남게나. 우린 떠날 참이네."
"그런데 저 검은 복색의 무사들은 대체 누구인가?"
"이 시대의 마지막 사병(私兵)들이지.
금상(今上)폐하께서 처치곤란하여 고민하시기에 내가
요청했더니 정예무사들만 보냈더군. 그렇지만 이들을
살려서 돌려보내라는 하명은 없었어."
일순 검은 무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으나,
굴림의자는 개의치 않았다.
"굳이 우리와 한바탕 붙겠소?"
왕천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한다면."
불여우가 대답했다.
"저들이나 우리쪽 무사들이나 무슨 죄가 있어 이
싸움에 끼어들겠소. 우리들끼리 의논해 대표 한
사람씩 내서 결판을 보는 게 어떻겠소? 물론 이긴
쪽에서 보물상자를 모두 갖기로 하고."
굴림의자와 불여우가 서로 눈길을 마주친 다음
동시에 대답했다.
"좋다!"
"우리 쪽에서도 이의가 없겠지요?"
왕천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노을 속으로 여섯 명의 그림자가 걸어 가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인이었다.
앞장선 왕천은 사흘 전의 피비린내 나던 혈투를
되씹고 있었다. 불여우가 족제비와 흑사마귀를
죽였고, 굴림의자는 삿갓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하얀독수리는 굴림의자를 죽였다. 왕천은 불여우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싸움이 끝난 후, 왕천은 보물상자 두 개를 열어
검은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어째서 그대들의 두목이 위험한데도
나서지 않았는가?"
"두목이 우리들을 배신한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가지고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짓고
장가들고 잘 사시오."
"감사합니다."
삿갓의 부하들과 한유성의 일행에게도 보물상자 두
개를 풀어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부디 배운 무예를 잊지 말도록."
왕천과 하얀독수리와 한유성 그리고 유화와 두
시녀는 목적지를 함께 하기로 했다.
왕천은 굴림의자가 탔던 의자 위에다 다친 삿갓의
태워 보내며 말했다.
"잘 가시오."
삿갓이 눌러쓴 삿갓 밑에서 힘없이 말했다.
"행복하시오.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유화아씨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던 전날의 내 말은 진심이
아니었소."
"벌써 알고 있었소."
천지에 놀이 빨갛게 내리고 있었다.
< 下卷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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