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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 사상

by Casey,Riley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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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實學派 文學思想 

- 朴趾源. 정약용을 중심으로 -

朝鮮後期는 思想的인 면이나 文學的인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朱子學的인 세계관의 동요, 이완, 해체 과정에서 그 과정내의 일부로서이거나 또는 그 과정과는 무관할 수 없는 力學關係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 변이의 양상들에 대한 인식은 일단 朱子學的 文學思想을 기점으로 해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朱子學的 文學觀은 주지하다시피 道文一致의 그것이다. 朱子學的 文學觀은 그 가치와 表裏關係를 가지는 도의 배타적 절대화, 특히 사림파에 있어서의 내향편중, 그리고 규범성 및 보편지향성과 같은 역작용을 불러일으킬 속성들이 있었다. 이 속성들에 의해 文學에 있어서 가장 효용론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朱子學的 文學觀은 현실과 유리하게 되었으며 人間 감정의 다양한 질 가운데 특정의 것만 수용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民族의 차원에서의 개성, 독자성의 구현을 둔화시키는 부정적인 측면들이 뒤따르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朝鮮後期 實學派 文學思想의 변이는 朱子學的 文學觀의 극복과정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朴趾源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1. 朴趾源의 文學思想
朴趾源의 文學은 朝鮮後期 漢文學의 가장 정채있는 波高로 되어있다. 그는 漢文學 주류의 말폐적 흐름에 대해 일대 반성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文學的 입장을 새로이 정립하려 했고, 그래서 우리 나라 文人들 가운데 文學論에 관한 저술도 비교적 많이 남기고 있다. 朴趾源은 예사람을 흉내낸다든가 古法에 구애된다든가 해서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대의 진실을 문제삼으려면 상스러운 말도 버릴 수 없다고하여 復古的 思考方式과 결별하자는 주장을 明確히 나타냈다. 당시에 이미 『연암체』라고 일컬어진 朴趾源의 文章은 정통에서 벗어난 稗官雜書 따위에 머무른다고 貶下되는가 하면 文風을 어지럽히고 질서를 혼란시킨다는 점을 우려한 정조가 이른바 文體反正을 일으켜 금지 시키기까지 했다. 朴趾源의 作品 중에서는 熱河日記가 가장 주목되는데 단순히 見聞記로만 보아서는 않되고 당시의 시대적 제약 때문에 한 文學家가 복합적인 구성과 심각한 主題意識을 가지고 자기의 심정을 서술한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또 이것은 당시의 文學 기준을 무너뜨리는 획기적인 文體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朴趾源의 文學思想을 조동일은 현실의 批判, 공격에 목적을 둔 文學觀을 정립하여 내용을 선행시키면서도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직설법을 배격하고 비유, 억양, 반복등 계획적인 表現方法을 두루 동원하는 태도와 풍자로서의 戱文觀을 가졌다고 말했다.    

2. 丁若鏞의 文學思想
정약용은 처음에 정조의 文體反正에 동조해서 패관잡서의 小說률 배격했던 입장을 가졌으나, 18년 동안의 귀향살이가 끝난 후 현실을 재인식하여 당시 學問의 거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批判的인 논리를 전개했으며 文學하는 자세로 철저하게 가다듬었다. 그는 『五學論』에서 헛된 이치를 캐거나 表現을 수식하는데 힘쓰는 文章을 극력 배격하고, 文章을 천지의 正理에 통하고, 만물의 象情을 두루 갖춘다고 하는 客觀的인 근거를 가지고, 그대로 덮어둘 수 없을 만큼 절실한 경험을 했을 때 외부적인 자극에 따라 < 바닷물처럼 출렁이고 번개치듯이 찬란하게 뻗어나게 된다.>고 했다. 즉 이것은 文章이 天人合一에서 유래하고 거기 귀결된다는 儒學의 오랜 이론을 충실하게 이어서 자아와 세계의 부딪침이 文學으로 발로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시를 文學창작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中國詩가 아닌 朝鮮詩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中華思想에서 탈피한 民族的 주체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우리나라 방언을 漢字化해서 쓴 시어, 우리나라 고전에 의거한 用事, 그리고 당대 현실 ( 農民의 삶 )을 노래한 것이 그의 詩精神이고 그의 文學이 가지는 큰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朝鮮 後期 實學派 文學의 양상을 朴趾源 정약용을 중심으로 간단히 서술하였다.
實學派 文學의 두 정점이라고 하는 朴趾源과 정약용은 서로 대조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散文을 새롭게하며 小說까지 내놓은 朴趾源은 도시 시정인들이 商工業의 발달과 함께 활기를 띄는 社會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그 동안 경직되었던 사고방식을 깨트려 놓고자 했다면 정약용은 漢詩를 통해 농촌에서의 경험과 고민을 밀도있게 부각시킨 점이 각각의 文學의 특색이라고 할수 있겠다.

★ 허균의 文學思想    
허균은 명문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능으로 일찍 과거에 급제해서 순조롭게 진출했으면서도, 당시 지배질서에 깊은 반감을 품고 이단을 숭상하고 예교에 어긋난 짓을 함부로 했다. 性理學의 명분으로 합리화된 통치질서에 대해서 모든 가능한 方法을 찾아 거역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 佛敎, 道敎는 물론이고 서학 ( 천주교 )에도 호감을 가졌다. 性理學에 근거를 둔 文學觀에서는 惡할 수도 있는 점에 휩쓸리지 말고 善하기만 한 性을 실현해야 참다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인데 허균은 이러한 주장을 반대로 뒤집어 놓아 허위에 찬 구속에서 벗어나 험란한 경험을 하는 情이야말로 文學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는 근거라고 했다.
허균의 한시에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다루고 하층민의 고난을 문제삼는 것이 적지 않아 주목되지만 논설형식의 散文에서 더욱 적극적인 주장이 나타난다. 그는 『豪民論』에서 “천하에 두려운 것은 백성이다” 라고하여 복종만 하는 백성이 원망을 하게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이 들고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선명하게 제시했다. 『遺才論』에서는 “하늘이 사람에게 재능을 균등하게 부여했는데 재능을 한정하는 것은 하늘에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런 논리는 밑으로부터의 외침을 반영한 것이며 아무도 터놓고 발설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균은 또한 김시습의 전례 정도나 있는 小說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면서, 漢文小說과 國文小說 양면에서 기발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장생전>, <장산인전>, <嚴處士傳> 등의 漢文小說에서는 대단한 인재가 社會的인 제약 때문에 멍들면서 반발하는 것을 반어적인 구조로 그려냈고, 國文小說 <洪吉童傳>에서는 도적의 무리를 이끄는 주인공이 지배질서와 맞서서 싸우는 과정을 긍적적으로 그려 민중적 영웅을 동경하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러한 허균의 文學觀은 方外人의 文學觀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그의 이러한 면은 實學派의 文學觀에 까지 이어지게 되어 朝鮮後期 反朱子學的 文學觀의 선봉적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退?栗의 哲學 比較

栗谷의 理氣論을 중심으로

한국의 性理學은 본래 中國의 程朱學에 의해 출발한 것이지만 16세기에 退溪?栗谷에 이르러서는 독자적 이론을 창출 (四七論的 理論世界의 展開)하면서 程朱學 이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 두 정점인 退溪와 栗谷의 哲學에 대하여 살펴보는데 여기서는 存在論 (理氣論)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退溪의 哲學

孟子가 착한 本性을 仁義禮智로 보면서 이것들이 각기 惻隱, 羞惡, 辭讓, 是非의 마음으로 드러난다고 하였고, 朱子는 性卽理의 전제에서 仁義禮智信 (五常)이 親義別序信이라는 五倫의 도리로 발현된다고 하였다. 退溪는 이러한 傳統思考를 모두 繼承하면서 孟子의 四端에 초점을 맞추어 理氣論의 해석을 가하고, 그 四端의 實際的 구현을 역설했다. 退溪의 四端七情論은 특히 四端의 해석에 역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이론 중 四端을 理發視한 대목이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반론적 난제를 많이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高峯과 나눈 그의 四端七情論辨에서 四端七情을 각각 理發氣發로 해석하였다가 高峯과의 論辨 끝에 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 라 수정한 것도 그러한 것이다. 高峯은 退溪가 形而上의 理의 실제적인 發動, 發出까지 역설하는 것을 큰 표적으로 삼았던데 비하여 退溪는 끝까지 理發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그가 仁義禮智의 본성을 理로 볼수 있다는, 본성이 四端의 마음으로 드러난다는 孟子의 性善說을 그가 따르기 때문이며, 결국 善한 本性의 발현을 믿는 일종의 理性信賴, 理性尊重思想에 해당된다. 즉 그는 理貴氣賤의 입장에서 理의 能動性을 강조하여 善의 根源性을 理發의 개념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2. 栗谷의 哲學 

① 氣發理乘一途說 : 栗谷은 退溪의 理氣互發說을 반대하고 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退溪의 理氣互發說을 理氣의 二元化로 파악하여 批判하는 것이다. 즉 理와 氣가 相互 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理와 氣는 時間的 先後關係나 空間的 離合關係에 있어 無始無端의 존재인 陰陽動靜에 始端이 생겨 理氣의 二元化가 된다는 것이다. 栗谷은 理와 氣를 一而二 二而一의 不相離 不相雜의 關係로 파악한다. 이때 一이란 理와 氣가 時間的 先後나 空間的 離合이 없는 不相離의 一元的 關係임을 의미하고 二란 理와 氣가 一元的 關係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기능적 측면에서 고유한 특성을 지녀 결코 서로 혼동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二元的 一元論인 그의 氣發理乘一途說이다. 즉 栗谷은 氣의 현실을 떠나서는 理가 실현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氣의 작용속에 所以然으로서의 理를 내재시킴으로써 理를 벗어나지 않는 氣의 현실을 확립하려는 신념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② 理通氣局 : 栗谷의 理通氣局說은 그의 독창적인 表現으로 程朱의 理一分殊에서 유래한 것이다. 理一分殊란 근원적 理一이 參羞不齊한 氣속에 내재됨 (分殊)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을 栗谷은 『 一本의 理는 理의 ?요. 萬殊의 理는 理의 用이다. 』라고 말하여 體用의 關係로 파악하고 또理一은 본체의 所以然으로 分殊는 현상 속의 所當然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栗谷은 理通氣局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理는 형체가 없고 氣는 형체가 있는 까닭에 理는 통하고 氣는 국한된다 <理無形而氣有形 故 理通而氣局>이라하여 변화하는 현상속에서 자칫 은폐되기 쉬운 理의 근원적 보편성을 理通氣局의 논리로 확립함으로써 氣의 현실성과 함께 理의 순수성을 堅持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退溪와 栗谷의 理와 氣의 특성을 살펴보았는데 栗谷은 理氣의 關係에 있어서 氣重視的 입장은 화담과 유사한 듯 하나 화담이 氣一元論에 빠져있음을 批判하였고 理의 순수성을 확립하려는 입장은 退溪와 비슷하나 退溪의 理氣互發에 理와 氣를 二元化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理氣論적 특성이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氣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理를 조화시키는 理氣之妙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朝鮮後期 ( 19C ) 委巷 (閭巷)文學

실무 기술적인 직책에 대대로 종사하는 서울의 주인은 士大夫에 버금가는 身分으로서 직무수행에 필요한 것 이상의 교양을 지니고 경제적인 여유를 누렸다. 이들을 委巷人, 閭巷人이라고 부르는데 낮추어보자는 뜻이 들어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委巷人들이 나타나게 된 背景과 작자를 중심으로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朝鮮朝 後期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도시로서의 서울이 크게 활기를 띄게되자 委巷人들은 직책을 이용해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모으고 또 당시는 身分制가 흔들리던 때라 身分階層의 공백을 이용하여 이들이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委巷人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지위상승을 꾀하는데 따르는 위신을 갖추고자 해서 시집을 펴내, 士大富豪의 精神的인 지향을 실현하는 한편 現實認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作品世界를 개척하기도 했다. 이들은 훌륭한 作品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은 身分의 貴賤을 떠나 누구나 구비하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文學 담당층의 확대를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과거를 보아 진출할 수 없는 身分적 제약 때문에 文學的 취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 즐기자는 文學을 정착시켰으니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委巷人 文學은 士大夫 文學과 시민 文學의 特徵을 그 나름대로 잘 나타내준다 하겠다. 委巷文學의 연원은 최기남에게서 시작된다고 한다. 궁노출신으로서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委巷人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六歌雜詠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그 외에 홍세태, 고시언, 천수경 등이 유명하며 문집으로는 昭代風謠, 風謠續選, 風謠三選 등이 있다. 閭巷文學에 대한 평가도 두가지 견해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긍정적 평가로서 『 閭巷文學은 우리나라 중세 末期의 근대를 창조하기 위한 歷史的인 운동과정에서 새로운 特徵으로 등장한 것이다. 』라는 견해를 내보이고 있으며 부정적 평가로는 閭巷文學의 성립 자체를 하층 階層의 상층文化에 대한 동경과 모방에서 출발한 것 이라 못박고 『 委巷文學의 성장은 양반文化의 하층지향적인 확산 현상이며 그러한 상층文化의 저변 보급은 전반적인 文化수준의 평준화로 풀이될 수도 있다. 』라고하여 閭巷文學을 士大夫 文學의 아류 또는 주변 文學으로 평가했다. 閭巷文學을 어떠한 시각에서 보는가에 따라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보다 깊은 연구가 이루어짐에 따라 시각차이는 해소될 것으로 보이며 委巷文學者들이 身分이 높지않았다는 점에서 근대 시민文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며 文學階層의 보편화를 열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고 하겠다.


漢文 敎育의 問題點 및 改善 方案

現行 우리나라의 漢文敎科敎育의 目標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언어 기능적 영역 ( 漢字?漢字語 )과 
둘째는 언어 文化적 영역 ( 漢文 )이다. 
漢字 敎育이라 함은 실생활의 어문생활에 필요한 漢字語彙를 學習하는 현대의 國語 敎育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漢文은 實際的인 言語 생활에서는 활용되지 않는 古典語로써 漢文敎育은 우리 조상이 남긴 文化遺産을 발전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고등가치 창조를 위한 基礎學問이다. 우리나라의 語文學史는 그동안 일관성없는 어문정책 때문에 한글전용, 漢字제한, 漢字폐지, 漢字병용 등 중심을 못잡고 흘러왔다. 특히 1948년 10월 9일에 공포된 『 한글 사용에 관한 법률 』은 우리나라의 모든 공문을 한글로 쓸 것과 필요에 따라서는 漢字를 병용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하되 당분간 漢字를 병용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背景으로 해서 常用漢字가 제정되었으며 그후 1970년에는 중고등학교에서 漢字 敎育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漢字를 전혀 배우지 못한 세대가 나오게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여도 전문서적과 經書는 물론 잡지나 일간신문마저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語文政策이 어떠했던가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문 정책이 유구한 東洋歷史와 전통의 文化에 비릇되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民族文化의 저변에 깔려있는 漢字의 影響力을 인정하고 國民敎育 정도를 漢文敎育의 보편화, 일반화, 대중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에 몇가지 漢文敎育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 一貫性있는 語文政策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해방이후 우리의 語文政策은 七次에 걸쳐 변해왔다. 語文政策上의 변화로 인한 漢文敎育의 뚜렷한 지표가 없었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일관성있는 어문정책의 실시가 필요하며 漢文敎育에 대한 뚜렷한 目標와 방향성을 제시해야할 것이다.
둘째 : 전공교사에 의한 漢文敎育이 필요하다.
漢文敎育의 정상화가 이룩되려면 전공교사에 의하여 敎育함으로써 敎育의 내실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동안 많이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비전공 교사에 의하여 敎育目標나 교과서의 편찬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적당히 시간을 배분하는 식으로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며 지금도 많은 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敎育의 중심이 교사에 있다고 볼 때 그 교사의 열의와 관심이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됨은 필연이다. 하루 빨리 완전한 漢文敎育을 위해서 전공교사에 의한 敎育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 : 수업운영 실태의 개선이다.
漢文敎育의 주당 배정시간은 대부분 학교가 敎育部 단위 배당기준의 최저단위를 배당하여 운영하고 있는 실태이다. 中等學校에서 漢文敎育의 효과를 얻기위하여는 배당 기준이 상향조정 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敎授方法도 연구 개발되어야 할것으로 본다.
넷째 : 中學校 漢文敎科가 선택에서 필수로 바뀌어야 한다.
제6차 敎育과정 개선안에 中學校의 漢文이 선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실로 漢文敎育의 황폐화와 부실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中學校에서 漢文을 배우지 않는 학생이 지금의 고등학교 책으로 수업이 과연 가능할 것이며 같은 班안에서도 中學校에서 漢文을 배운 학생과 안배운 학생이 섞여 잇어 수업에 막대한 지장을 줄 것이다. 이로 인한 수업상의 문제점은 상당할 것이며 이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 早期敎育의 필요성이다.
지금 초등학교에서는 전학년 모든 교과서에 漢字를 병기하지 않음으로써 漢字가 아니면 설명이 어려움을 초래하는 개념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복잡한 해석과 설명이 부과되고 있으며 이것은 자연히 학생들에게 기억상의 부담이 될것이고 또한 사고력의 저하로 연결된다. 국민학교에서의 漢字敎育의 효과는 中等學校로 올라갈수록 無窮無盡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초등학교에서 200~300字 정도의 漢文敎育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섯째 : 한글 專用論者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과거 일제시대때 한글은 民族의 자존심이요. 애국의 길이었다. 그러나 한글 전용은 그런 차원의 문제는 떠났다고 본다. 古朝鮮 때부터 우리 民族과 같이 살아온 漢字가 남의 것이라면 결국 우리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한글과 漢文은 서로 배타적인 關係가 아니라 훌륭한 補助關係임을 인식하여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같이 발전해 나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漢文敎育의 문제점과 개선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위에 예를 든 여섯 가지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다섯째 조기敎育의 필요성이며 그 다음으로는 한글 전용론자들과의 대토론에 의한 상호이해의 증진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글 전용론자들과의 지루한 논쟁을 끝내고 특정집단 (國民學校)에서 시험적으로 漢文을 병기한 敎育과 한글만 가지고 敎育한 경우 어느것이 국어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실험學習을 할 것을 제의한다.


麗末?鮮初의 官人 文學과 處士文學

최씨 무인정권이 넘어지고 신진관료들은 점차로 新興 士大夫 계급으로 발전해 가면서 그들 중심의 文化를 전개해나갔다. 이 시대는 우리 文學思想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복잡다단한 양상을 띄게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원?명의 交替期, 대내적으로는 王氏와 李氏의 易姓革命, 思想的으로는 유불의 交替期, 文學면에서는 詞章 위주에서 道 위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내포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高麗에서 朝鮮으로의 交替는 단순히 王朝交替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文學史적인 면에서 文學의 내용과 형태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시대의 文學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원명과 王朝 交替期에서 현실에 참여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官人들의 文學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을 거부하고 逸世의 정취로 자연과 융합된 삶을 구가하는 處士적인 文學이다.

1. 麗末 鮮初의 官人 文學

① 高麗末 :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留元文人인 이제현, 이곡이 있다. 이들의 文學활동을 보면 그들은 주로 대외적인 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 이는 당시 高麗가 처한 내외환경을 살피면 쉽사리 이해된다. 당시 원나라의 실질적 지배하에 있던 高麗는 원나라의 끊임없는 內政干涉과 국토까지 없애려는 것을 이제현이 역설하여 면하게 되었으며, 이곡은 高麗의 처녀를 구해가는 것을 民族的인 또는 국가적인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적극 저지하게 된다. 당시의 文人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文學도 民族의 주체성을 살리고 나라를 빛낼 수 있는 文學으로 經國할 수 있는 것이 기본精神이었다.  
② 朝鮮初 : 高麗末 文人들이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면 朝鮮初 文人들은 대내적인 활동을 많이 한 편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정도전, 권근, 하륜, 변계량 등이 있다. 정도전은 朝鮮 창업후 군사제도의 개혁, 병법의 개혁, 佛敎에 대한 批判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권근 같은 이는 文學의 기능을 『 文者 載道之器 』라고하여 문은 도를 싣고 있는 그릇이라는 載道文學觀을 말했다.

2. 麗末 鮮初의 處士文學

士大夫는 본래 나아가면 官人이요, 물러나면 處士가 되는 까닭으로 麗末 鮮初의 士大夫 文學에는 官人으로서의 文學과 處士로서의 文學의 양면성이 있다. 그런데 이 處士文學은 高麗末 은둔思想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王朝交替期에 새 王朝에 타협하지 않고 은둔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많은데 한 예로 『 隱 』字를 호로 가진 사람들이 많은 걸로 보아서 당시에 은거하려는 풍조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대부분 초야에 묻혀 지냈기 때문에 文學作品은 많지 않다. 그러나 남아있는 몇 作品을 보면 많이 등장하는 人物이 백이, 굴원, 도잠 등이고 소재는 採薇, 採菊 등이다. 이런 현상은 절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정몽주의 文學에 잘 나타나며 그 밖의 高麗末 유신들에게서도 쉽게 눈에 띈다. 특히 麗末 鮮初의 시조들을 보면 그들의 思想을 잘 알수 있는데 원천석의 『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 길재의 『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고하여 옛王朝에 대한 회고를 나타낸 시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길재는 본격적으로 處士文學을 연 분으로 高麗가 망하기전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의 친화와 은일 수도적인 면을 많이 내포한 文學作品을 다수 남기고 있다. 그의 作品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으로 이어져 朝鮮에 오면서 강호에 묻혀 자연을 노래하는 處士文學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상으로 麗末 鮮初의 官人 文學과 處士文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앞서도 말했듯 士大夫는 나아가면 官人이요, 물러나면 處士가 되는 양면성이 있다. 그러나 官人 文學자들의 文學이 經國을 위주로 하는 文學의 측면이 많고 處士文學者들의 文學은 자연과 개인의 실정을 表現한 것이 많다는 점이 이 시기의 文學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道學派의 文學 ( 朝鮮中期 ) 

李滉을 중심으로

道學의 目標는 우주 인생의 진리를 탐색하고 부단한 자기 수양을 통해 窮極的으로 이 세상에 儒道를 구현하는데 있다. 그 때문에 道學은 哲學的이요, 道德的이며 실천적이요, 宗敎的이다. 그리하여 道學者는 窮理 修身을 통해 聖人 化民하려는 일에 집념한다. 原道의 道學과 緣情의 文學 가운데서 道學者가 原道의 文學 쪽에 서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道學者의 文學에 관한 생각으로 道는 本이요. 文은 末이다. 라는 말이 있다. 朱子는 『 사람이 의리를 강론하는 일에 나아가지 않고 이미 第二義에 멀어진 것 』이라고 批判했고 李滉도 『 시는 학자에게 가장 간절하지 않은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말이 文學의 존재의의를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왜냐하면 반드시 本과 末, 始와 終이 있는데 本末의 關係는 결국 본은 먼저 할 일 인데 대해 末은 나중에 할 일이며 本을 이루고 나면 末은 저절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지 결코 末을 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道學者의 文學觀과 그 구체적 전개를 16C에서 살피고자 하거니와 이 글에서는 더욱 그 범위를 좁혀 李滉의 文學觀의 일단을 살펴보는 것으로 한정한다. 李滉은 진정 道學者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李滉의 文學觀을 살핌으로써 그 시기에 다른 학자의 견해도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李滉은 당초부터 文章에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文學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李滉은 文學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로 詩書를 공부하지 않는 理學이 있을 수 없다. 文學은 正心의 효용을 가진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詩書가 道學을 하는데 필요하며 文學을 통해 마음을 바꾸어 본성의 실현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李滉은 또 立言乘後라는 말을 하였는데 立言은 말을 세우는 것 즉 창작의 과정이고 乘後는 뒷사람에게 전하는 것 즉, 文學의 필요성이다. 李滉은 또 제자들에게 儒學者의 文學을 하도록 권면한다. 그러면 儒學者의 文學은 무엇인가 ? 이학자의 일은 修己治人이므로 文學도 상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文學은 學問意思를 담아야 한다. 
이것은 文學이 곧 載道的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文學이 자연을 읊조리기만 하거나 허장되게 자부하거나 기이한 것을 추구하거나 詭辯을 늘어놓거나 난잡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규계권면하는 내용이 담긴 文學을 한다는 것이다. 

2) 文學은 본성의 선을 계발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孔子가 아들에게 <周南>, <昭南>을 읽으라고 했듯이 文學의 기능이 궁극적으로 正心하여 선을 이루는데 있다는 뜻이다.

3) 體, 格에 맞아야 하고 많은 단련을 해야한다. 
文學은 한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하나의 公器이다. 더구나 그 글이 후세에 전해져서 뭔가 유용한 일을 한다면 體格이 무시될 수 없으며 또한 많은 推敲와 단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文章을 아름답게 꾸미는 彫飾에 힘쓰라는 뜻이 아니다. 좋은 文章을 짓기 위한 단련과정이 일종의 자기 수련의 과정과도 一脈相通하고 있는 것이다. 
결 : 이상으로 李滉의 文學觀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보았다. 李滉의 文學이 16C 道學者의 文學이 전부 일수는 없지만 退溪가 16C 道學者의 代表的 人物이라고 볼 때 상당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道學者에 있어서 文學의 의미는 道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고 또한 도를 얻어 그 즐거움을 읊고 서술하는 데 필요한 器의 역할이라고 본다.   



儒家思想의 特色

  儒家는 先秦時代 諸子들 가운데 가장 重要한 學派의 하나이다. 이 儒家의 조종이라 할 孔子의 思想은 그의 뒤를 이은 孟子의 思想과 함께 儒家 思想의 根幹을 이룬다. 여기서는 이러한 孔孟의 思想과 儒敎에서의 重要한 텍스트인 論語, 孟子, 中庸, 大學 等을 中心으로 儒家思想의 特色에 對하여 敍述하고자 한다.

1. 家族, 鄕黨 秩序의 흐름

  中國의 古代 社會는 夏나라 以前의 原始 社會로부터 殷, 周의 封建制度로 發展하면서 宗法社會制度를 確立시켰기 때문에 家族이 그 社會組織의 中心을 이루고 있다. 家族은 父子, 兄弟가 主要한 成分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合理的인 關係가 이룩되어야 하며 合理的인 關係를 持續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家族間의 秩序가 必要했던 것이다.

2. 賢賢과 親親
  이러한 1次的인 集團인 家族내에서는 孝, 弟가 要求된다. 年長者를 尊重하고 親戚들과 親히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家族關係를 維持하는데 優先的인 課題라 할 수 있다.

3. 人治主義, 人之主義, 人道主義, 人間中心의 思想體系
  『 仁 』은 孔子思想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觀念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家族關係에서는 孝弟가 무엇보다도 重要하며, 그 基本要所는 『 사랑 』이어서 이로 말미암아 『 仁 』이 産出되는 것이다. ( 孔子는 孝弟가 仁의 根本이 된다고 하였다. )  이  仁의 德은 그 含意가 대단히 廣範圍하여서 마침내는 人道의 根本이 되었다. 孔子는 仁은 人이라고 하였다. 人이란 바로 實際的인 個體이며, 仁은 實際的인 個體가 갖추고 있는 本質的인 德, 이른바 人道(爲人之道)인 것이다. 個人이 모이면 무리(社會)가 되는데 반드시 돕고 사랑하여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人道의 基本 原則이다.

4. 禮樂과 敎化
  앞에서 仁에 對하여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仁을 追求하는 方法이 있을 것이다. 孔子는 克己復禮爲仁이라고하여 自己를 이기고 禮로 돌아가는 것이 仁이라 하였다. 己는 스스로 天性에 依하여 自然스럽게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性은 (孟子는 착하다 하였고 性理學에서는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나눈다.) 한쪽으로 치우쳐 너무 强하거나 柔하거나, 너무 기뻐하거나 激情하거나, 內向的이거나 外形的이기 쉽다. 이러한 自己를 다스리고 中正에 맞도록 하여야 할텐데 그 標準이 되는 것이 客觀的인 合理이다. 바로 合理的인 標準이 되는 것이 禮인 것이다. 樂의 效用은 마음에 凝結된 것을  풀어냄으로써 理致에 맞고 調和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完全한 人格을 이루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禮는 밖에서 抑制하고 樂은 안에서 調和시키는 技能을 한다. 禮樂에 依한 敎化는 儒家思想의 主要한 特性이라 하겠다.

5. 修濟治平의 原理
  앞에서 自己를 이겨나가는 過程이 重要하다고 이야기하였다. 儒家의 重要한 經典의 하나인 大學에서도 이러한 것이 나오는데 바로 八條目이다. 大學은 大人之學으로 大人이 되기 爲한 過程을 說明한 것이 며 格物致知, 誠意, 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關係는 人格完成의 過程이며 統治의 原理이기도 하다. 그러고 마지막 段階인 平天下는 仁의 效用이 極大化 됨을 말한다.

6. 正名論
  孔子는 大變革期에 살았던 분이다. 周代의 文化와 制度가 허물어져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子路의 물음에 “ 名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말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 刑罰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刑罰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人民은 손발을 놀릴데가 없다” 라고 答하여 名과 實狀이 符合되어야만 제대로 된 政治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7. 保守性과 革命性  
  從周意識으로 똘똘 뭉친 孔子는 混亂했던 春秋時代에 옛것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述而不作) 이것은 必然的으로 保守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를 이은 孟子는 天命思想의 一環으로 王이 自己 任務를 다 못할 때는 天의 命令을 받은 代行者가 그 職位를 廢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保守性과 革命性은 儒家 思想의 兩面이라 하겠다.

  이상으로 儒家思想의 特色을 簡單히 살펴보았다. 勿論 以外에도 時中之道라든가 老莊의 本體論에 比較할만한 現象論 等 많은 思想의 特色이 있지만 여기서는 省略하기로 하겠다. 앞에서 例를 든 이러한 儒家思想의 特色들은 오늘날 價値觀 倫理觀이 破壞되어지는 이 時點에서 새로운 次元에서 現代에 다시 살펴보는 것도 意味있는 作業이라고 하겠다. 그 作業을 儒家思想의 不變的 要所와 可變的要所와의 一元的 調和에서 現代社會에 再照明하는데서 始作되어야 할 것이다.


老莊 哲學의 根本 思想 ( 儒家와의 比較 )

序 : 儒家와 道家思想의 二大思潮는 中國思想의 근간을 이룬다고 하겠지만 儒敎는 政治思想, 倫理思想, 敎育등 現實的 側面에 있어서 그 主役을 擔當했다고 하면 道家思想은 宗敎的인 신앙과 繪畵, 詩文등 藝術的인 文化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것이다. 孔孟을 中心으로 하는 人道主義 合理主義的인 儒敎에 비하여 老子을 중심으로 하는 形而上學的 性格과 神秘主義的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內容이 多樣하다. 여기서는 老子의 道德經과 莊子의 南華經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本論  

老子 
1. 自然觀 : 儒家의 思想이 人本主義 思想으로 禮樂的 人文主義 文化를 강조하고 仁義道德을 根本으로하는 人爲主義的, 肯定的 積極主義 임에 대하여, 老子는 이와 반대로 自然無爲를 주장하는 自然的 否定的인 성격을 가진 것이 그 特徵이다. 老子는 虛僞와 假飾과 粉牆으로 人慾과 私知와
激情을 순화하고 정화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적극적일수록 도리어 人間社會와 自我에 惡影響을 줄 뿐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억지로 하지 않는 것 (無爲), 자동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人本主義의 노출이 다름아닌 自然인 것이다. 그래서 老子의 思想를 自然主義 思想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無知, 無慾, 無爲, 無名 등은 老子의 道와 접근하는 關門이요, 方法이다. 그러나 이 無爲와 無知는 단순한 文盲主義나 人間의 根源的 積極性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肯定하는 방편인 것이다. 老子는 지혜가 나옴으로써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世間의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날뛰게 못하는 것을 爲無爲라고 表現한 것이다. 따라서 爲無爲가 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이 모두 잘 된다고 하는 적극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 儒敎의 人文主義 禮敎主義 )

2. 人間觀 : 周代 末期의 文化의 弊害가 虛僞虛飾에 흘러 人間의 천진성을 상실하고 도리어 爭亂의 혼란상을 목격한 老子가 儒家가 말하는 人爲的 禮敎主義는 道에서 어긋나는 것이라고 본데서 연유한다. ( 물론 儒敎의 본질이 人爲的 虛禮虛飾이란 뜻이 아니라, 당시인의 타락상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 老子는 이제의 人間적 기교를 탈피하고 自然의 순진성을 보장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므로 人爲를 벗어버리고 소박한 근본바탕인 自然性을 回復하는 것이 참다운 人間形成이라고 보았다.

3. 價値觀 : 老子는 世間에서 찬양하는 價値觀의 약점을 폭로하고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부정적인 것에서 도리어 가치를 발견하고 그 의의와 효용을 찾으려한 데 그 특색이 있다.
老子는 動보다는 靜을 滿보다는 虛를 進보다는 退를 巧보다는 拙을 白보다는 黑을 雄보다는 雌를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보았다. 感覺的인 상대의 세계보다 內明한 人間의 소박한 自然性을 강조하고, 所有의 有보다 存在의 有를 價値있는 것으로 보았다.
莊子
1. 本體論 : 老子의 思想을 無로 집약한다면 莊子의 思想은 無에서 一步前進하여 廣漠한 虛의 世界를 逍遙하고 있다. 老子의 道는 까마득한 이데아와 같은 求心的 性格의 道라고 한다면 莊子는 도의 遍在說을 말하였다. 이같은 無所不在의 本體論에서 天地萬物은 差別과 是非와 眞僞와 美醜가 있을 수 없다. ( 萬物이 절대 平等하고 天地와 나는 같이 生하며 萬物과 나는 一體라고 하였다. - 齊物論 ) 즉 是非眞僞의 差別이 있게되는 것은 온통 전체를 보지않고 모든 현상은 空間的으로, 時間的으로 相因關係에 있으므로 萬物의 절대 平等論을 주장한 것이다. 즉 “ 鶴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 ”는 뜻으로서, 다른 말로는 天均이라고도 쓰며 孔孟의 正名思想과 相反되는 것이다.

2. 人間觀 : 莊子의 超脫說은 現實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人間의 편견을 벗게하고 근본으로 돌아가 진정한 人間과 社會를 本源的으로 자리잡게 하자는 것이다. 名과 功과 己를 버리지 않는 데서 유래한다. ( 逍遙遊篇 ) 자기가 있으므로 자기를 標準하여 利害와 得失을 판단하여 萬物平等의 理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偏見을 벗어버린 바람직한 人間상을 莊子는 聖人, 신인, 至人이라고 말한다. 無己라고 하는 것은 즉 피아의 상대성을 넘어서 自然의 眞性으로 復歸하게 되는 길이다. ( 자기의 否定→絶對肯定의 境地에 到達→無何有의 世界에 노님 )

결론 : 이상에서 老子의 哲學과 人間觀을 略述하였다. 孔孟의 正名思想과 명분론은 차별의 세계를 중심으로 보편적 진리를 추궁해 것이라 하면, 老子의 哲學思想에 있어서 무지, 무욕, 무명의 세계는 무차별한 절대평등으로부터 모든 萬有가 必分과 物化의 現實로 조명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 老子은 現實否定, 孔孟은 現實肯定→相互矛盾, 그러나 窮極에서는 共通된 境地→天下國家 경륜 )


朱子學과 陽明學의 比較 硏究 
中國 性理學의 發達史 

序 : 朱子學은 주렴계→정명도?정이천 (二程子)→장횡거로 이어져 展開되어온 새로운 思想, 즉 當時의 用語로는 道學이라고 불리워진 동아시아의 思想史에 劃期的인 영향을 준 思想(學問)이었고, 陽明學은 陸象山→王陽明으로 이어 내려온 一名 陸王學이라고도 불리워진 一種의 心學이다.
여기서는 朱子學에서의 存在論(理氣論), 倫理學 乃至 人間學(性卽理) 및 方法論(居敬,窮理)과 陽明學에서의 心卽理,知行合一, 萬物一體의 仁, 致良知 등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두 學問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영향을 준 여러 가지 요인 즉, 朱子學에 있어서는 佛敎나 道敎의 영향, 古代儒敎와 朱子學 사이를 이어주는 한유의 原道, 朱子의 思想 형성의 기반이라고할 주렴계, 정이천, 정명도, 장횡거, 소강절의 思想과 朱子와 陸象山사이의 무극이太極 논쟁, 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本論 
1. 朱子學
1-1. 存在論 (理氣論) : 朱子에 의하면 存在하는 것은 모두 氣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이 氣는 運動을 함으로써 그침이 없으며 이것이 곧 動靜이다. 氣가 움직임의 상태에 있을 때 즉 運動의 정도가 클 때 그것을 陽이라하고, 고요함의 상태에 있을 때 즉, 運動의 정도가 작을 때 그것을 陰이라 한다. 그렇다고 陽의 氣, 陰의 氣,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계속하여 모든 존재는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朱子는 말하길 至於天下之物 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라 하였다. 이와 같이 있어야 할 모습을 부여해 주고 있는 “ 당연한 법칙 ” 이외에도 “ 그런 까닭 ”이 理라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宇宙?萬物의 근거이며 宇宙로 하여금 있어야 할 모습을 부여해주고 있는 原理(太極)이며 個別的으로 개개의 事物을 개개의 事物로 만들어 주고 있는 原理(天命之謂性)이다.

1-2. 倫理學 ( 性卽理 ) : 朱子學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倫理學 혹은 人間學 부분이며, 存在論은 그 밑바탕에 지나지 않는다. 朱子의 倫理學은 이른바 性卽理다. 性이란 “ 마음은 性과 情의 統一體 ”의 성, 요컨데 개별적인 존재에 있어서의 리를 말한다. 性은 다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이 대립하고, 人間의 倫理的 과제는 氣質의 性에서 本然의 性으로 돌아가는 즉 처음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 性은 내용적으로는 仁,義,禮,智,信의 五常일 따름이지만 아직 發하지 않은 未發 고요함이며 體이다.

1-3. 方法論 : 朱子學에서의 學問의 方法은 요컨데 聖人이 되기 위한 方法, 즉 하늘의 이치를 있게하고 人間의 욕망을 버리기 위한 方法이다. 이에는 두가지 있다. 첫 번째가 居敬, 두 번째는 窮理이다. 경은 한가지만을 주로하는 것 그 한가지란 無適 즉 마음을 오직 한곳에 집중시킨 상태로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단 朱子는 格物致知에서 治國平天下까지 모두 敬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고하여 學問에서 경의 중요성을 극도로 강조하였다. 窮理는 理致를 窮究하는 것 大學의 용어로 말한다면 格物致知라는 것이다. 大學의 欲誠其意者 先致其志 致知在格物 이라고 하는 의미는 事物의 이치를 그 궁극적인 데까지 탐구한다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 이론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 朱子의 유명한 格物補傳이다.

2. 陽明學
2-1. 心卽理 : 陽明은 陸象山의 心卽理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陽明은 처음에는 朱子學에 몰두했다가 그 한계에 부딪쳐 죽음을 무릅쓴 사색 끝에 비로소 心卽理라는 원리를 끄집어 낸 것이다. 陽明이 대나무를 格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朱子의 格物致知의 方法을 의심하게 된다. 즉 陽明은 “ 天下의 모든 事物을 窮究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설혹 초목을 窮究하여 이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뜻을 진실되게 할수 있는가 ? ” 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고 또 朱子의 格物說을 결국은 결국 外로 內를 보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즉 窮極的인 存在, 絶對者로서 영맹한 內가 斷片的인 外部로 부터의 견문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고하는 사실이 도저히 참을수 없었을 것이다.

2-2. 良知 : 陽明이 말하는 마음이라는 것 즉 良知라는 것은 人間에게 고유한 道德的 直觀力혹은 直觀的 道德力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것처럼 본래적으로 생기있게 살아움직여 그칠수 없는 (生生不息) 것이다. 이와 같은 說이 主觀唯心論의 전형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를들어 孝를 놓고 볼 때 이것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父母에게 있는 것인가 ? 답은 내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 父母에게 있다면 父母가 돌아가셨을 때는 자연히 孝도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父母가 돌아가신다고 효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2-3. 知行合一 : 陽明의 知行合一은 格物致知의 해석에서 유래한다. 그는 格物致知에 대하여 朱子가 格을 至라고 해석한 것과는 다르게 正으로 보고 物을 맞닥뜨린 사태이며, 또 意志가 지향하는 것이며, 致는 지극히 한다는 의미이고 知는 外面的인 지식의 의미가 아닌 先天的인 良知로 보았다. 즉 내 의식의 지향하는 곳을 바르게하여 선천적 良知를 지극히 하는 것이 格物致知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하는 것을 行의 範疇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색깔을 볼 때 이미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즉 知는 行의 시작이며 行은 知의 完成인 것이다

2-4. 萬物一體의 仁 : 陽明은 朱子의 大學章句를 물리치고 禮記에 있는 古本大學을 취했고 親民을 있는 그대로 百姓을 親하게 한다라고 읽었다. 즉 陽明은 大學을 대인의 學問이며, 대인의 學問은 明德을 밝히는 것이며, “ 대인은 天地萬物을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天地萬物을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결코 의도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仁이 본래 그런 까닭이다. 다만 소인은 그 私慾에 가리어 그 스스로 仁을 왜소화하는 것이며 本來 없는 것은 아니다. 즉 明德은 陽明에게는 良知일 따름이며 그 明德이 仁이라는 것은 독특한 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에서 朱子學과 陽明學을 간략하게 比較해 보았다. 오늘날 中國學界에서는 朱子學에서의 陽明學에로의 歷史를 다시 말하면 性理學의 歷史를 內面主義의 展開라는 견지에서 파악하고 있다. 즉 陽明學을 陸王學이라고 稱함으로써 象山學問의 繼承이라고 把握하여 陽明이 朱子學에서 出發했듯이 朱子學과는 極端的으로 對立하는 形而上學으로 보는 立場을 拒否하고 그보다는 오히려 陽明學을 朱子學의 展開이고 發展이라는 것이다. 결국 朱子學과 陽明學은 中國 性理學의 發達史에서 後者가 前者를 深化 發展시켰다고 볼 수 있다.        


實學의 發達史

序 : 實學이란 단어는 歷史상의 어느 한 시기에 특정한 한 學問을 가리켰던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에 있어서 현실성 내지 현실적 의의가 있는 學問을 가리켜 實學이라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면 高麗末期 신흥 儒學者들이 타락한 佛敎를 배척하고 인륜도덕의 실천적 규범인 禮學을 내세워 그것을 實學이라고 불렀고, 李朝 初期의 儒學者들이 浮虛無實한 詞章學에 대해 자기들의 道學 (性理學)을 實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李朝 중엽으로 들어서면서 봉건社會의 모순이 누적되고 지배 층의 분열과 禮學의 의식화와 性理學의 관념화는 번잡한 이론상의 시비만을 불러일으킬 뿐 국가, 社會를 위한 현실적 의의는 희박해 졌다. 그후, 임진, 병자호란을 겪은 후의 체제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朱子學的 世界主義 속에서 각 民族의 몰자각적 현상이 계속되다가 영, 정조 시대에 들어 현실성을 상실한 學問을 바로 잡고 그리고 자아의 자각으로 우리나라의 현지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세우기 위해서 신 학풍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實學인 것이다.
여기서는 實學의 社會, 學問的 背景과 발전의 순서를 서술하고자 한다. 

본론  
1) 社會的 學問的 背景 - 중세 末期에 접어들면서 봉건 敎學의 절대적 권위主義와 朝鮮 後期에 들어오면서 특수 집권층 즉 閥閱의 이익 독점 그리고 민중 생활의 피폐는 뜻있는 학자들의 현실 批判意識과 問題意識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그리고 社會的으로 소외된 계층의 반감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① 學問的 背景 
*. 유형원의 반계수록 : 分田定稅節目에서 土地 개혁의 필요성 역설  
*. 율곡 : 論當今之勢와 論安民之術에서 당시의 폐단을 지적

② 社會的 背景 : 朝鮮 初期 身分社會는 네 개의 계층 즉 士農工商의 체제가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세이후로 士大夫의 수는 자꾸 증가되고 관리 후보자는 늘어나는 반면 관직의 자리는 한계가 있어서 자리 다툼이 치열해 지면서 士禍와 黨爭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 이익 - 과전합일에서 과거제도의 모순점 지적 ) 즉 여기서 士大夫 계급은 집권층과 비집권층(士)으로 나뉘게 되었다. 후자는 身分的으로는 집권층과 다를 바 없었으나 현실적 처지 ( 특히 경제적 문제 )는 庶民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서울 및 경기 지방의 士들은 어느 지방의 士보다도 앞서서 자기 자신의 문제와 더불어 정치 社會的 현실의 개조와 農工商에 관한 문제 즉 經世致用의 學과 利用厚生의 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自我의 자각에 따르는 民族文化에의 주체적 인식과 實證的 精神에 의한 온갖 사물에의 客觀的 관찰이 가능했다. 이래서 實學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③ 實學의 전개 및 발전
주동 人物 및 시기를 기준으로 세 개의 學派로 분류된다. 
*. 제 1기 經世致用派 (18C 전반) - 성호 이익을 大宗으로 土地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學派
*. 제 2기 利用厚生派 (18C 후반) -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商工業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學派. ( 특히 연암이나 다산은 課農小抄와 田論에서 “ 士의 學問은 農工商의 원리를 포함하여야 한다. 農工商이 제대로 못되는 것은 士가 實學을 갖지 못해서이다. ” “ 士는 土地를 가져서는 안되고 農民의 자제를 敎育해서 그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라고 말하며 士가 갖는 특수 목적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 
*. 제 3기 實事求是派 (19C 전반) - 완당 김정희에 이르러 一家를 이룩하였고 경서 및 金石, 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學派이다.
결론 : 이상으로 實學의 발달사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近代 啓蒙期 ( 구한말, 일제초 ) 의 선각자 ( 박은식, 신채호 등 ) 들은 實學精神을 바탕으로 주체적 자각으로 歷史, 社會, 文化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韓國 性理學의 特徵

한국 性理學의 特徵을 論할때는 中國 性理學에 비하여 다른 特徵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한국 性理學이 中國 朱子學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 큰 테두리는 유교의 범주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여섯 가지면에서 다뤄 보고자 한다.

첫째 : 程朱學 爲主의 성격이 짙다.
한국의 儒學者들은 주렴계,정명도,정이천,장횡거,소강절,주희로 이어지는 朱子學에만 집착하였고,육상산,왕양명으로 이어져 내려온 陽明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朱子學 이론에 조금만 달라도 斯文亂賊이라하여 극도로 배척하였다.

둘째 : 主知主義的 특성을 지닌다.
朱子學의 特徵은 주지적이고,陽明學은 주정적 特徵을 지닌다. 한국 性理學이 朱子學을 신봉하였기 때문에 이 또한 한국의 性理學도 주지主義적 측면이 강하다.특히 16세기 四七論的이론세계의 심화 및 18세기 人物性 同異論을 두고 論辨한 것을 보면 극단적으로 들어난다.

셋째 : 禮 숭상의 풍토를 지닌다.
한국 性理學이야 말로 ‘예론탐구와 그 실현’을 위해 전개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극단적 예를 추구하는 경향이 보이며 17세기 禮訟논쟁은 많은 사화까지 일으키게 된다.이로 인한 폐해는 윤리도덕의 化石化(윤리적 규범이 人間 본래의 자율성을 해치고 그 결과로 人間의 행동이 고착화되고 굳어져서 예절의 실체적 내용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넷째 : 한국 性理學은 명분론적 사고가 짙다.
유교는 원래 合理主義를 존중하여 경문지향적인 공맹이해의 전통이다.그러나 이러한 명분主義적 合理主義가 형식적인 데로 흘러서 형식적인 合理主義로 고착화되며, 관념화의 길로 치달아 경험과 실험을 중시하는 科學精神의 세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다섯째 : 주리론의 보수성을 띠고 있다.
朝鮮 性理學의 이론이 결국 主理와 主氣의 理氣문제로 집중되었음은 다 알고 있다.그런데 氣는 감각적인 변화의 세계를 나타내는데 비해 理는 초 감각적 불변의 원리를 나타낸다.이러한 思想체계에서 主理를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명분에 집착하고 현실문제는 소홀히 처리했다. 이것은 다시 변화에 적응하는 생동성과 탄력성을 잃고 보수화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여섯째 : 人尊精神을 지향한다.
人間존중의 思想은 공,맹의 思想에서 시발되고 한국 性理學자들이 공,맹을 거의 광적으로 崇尙했던 것을 봐서 이러한 人間精神이 朝鮮 性理學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 것은 틀림없다.또한 四七論,人物性同異의 이론서계의 전개로 모두 인존精神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韓國性理學의 特徵을 여섯가지 면에서 살펴보았다.이것이 모두 한국 性理學에만 있는 고유한 特徵으로 불 수는 없지만 中國 및 일본 性理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한국 性理學의 特徵이라고 할 수 있다.



儒敎의 現代的 意義와 課題

序言 : 어느 서구의 東洋학자는 ‘ 儒敎 르네상스 ’라는 관점을 취하면서 ‘나는 유교는 ?社會의 원리 그 자체이므로 死滅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復活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精神만은 살아있는데 그 것은 죽은 유교의 永安室에 보존되어 있다. 이 永安室이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 미디어인 漢字의 體系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학자는 또,유교가 결정적으로 사멸하여 버렸기 때문에 近代化와 모순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思惟樣式속에 그 精神은 재 투자 할수 있다. 유럽에서도 기독교과 쇠약해졌지만 福音主義의 精神이 남아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本論 :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유교는 과연 죽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儒敎資本主義와 儒敎社會主義 또는 심지어 儒敎共産主義다라는 造語가 과연 죽은 뒤의 精神이 再投資속에서 생긴단 말인가? 아니면 완전히 사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말들이 생겨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인가 ? 儒敎思想의 새로운 體系構成을 통해 死滅없이, 산 채로 精神의 재 투자는 불가능한 것인가 ?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保守的 시대착오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잔당들의 가치관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것은 영영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기서 유교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敎育의 特徵을 들면서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헤 보고자 한다.

첫째 : 王道, 民本, 愛民을 위주로 한 政治思想이 완전한 자유의 단계를 지나 平等社會로 나가야 한다.
둘째 : 士農工商의 身分질서와 農本主義 經濟體制가 완전한 분배의 정의 실현이 이루어져야한다.
셋째 : 宗法秩序社會와 봉건사회체제가 민주,평등사회,시민사회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 보여주기 위한 從屬문화가 보기위한 주체적,적극적 참여문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 충효의 논리,대가족과 差別愛등이 사랑의 평등적지향이 이루어져야한다.
여섯째 : 有敎無類.政敎一致의 敎育思想이 敎育의 현대화 작업을 통해 완전한 의무敎育의 실현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상 여섯가지점에서 유교가 현대에서 다시 살아숨쉬기 위한 제조건을 서술해 봤다. 서구 개인主義 思想이 들어와 가치,윤리관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것을 극복해 나갈수 있는 한 方法이 ‘유교의 부활’이라고 본다. 단지 고대의 무덤에서 유물을 끄집어 내듯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유교의 불변적 요소와 가변적 요소(현상,현실)의 일원적 유기체적조화에서 새로운 방향성과 미래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완전한 이상사회에 근접할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孔子의 正名論
序論 : 고대 中國의 思想을 대표하는 것중의 하나로서 적어도 初期의 유교를 들 수 있다. 즉 孔子의 思想은 고대 中國을 대표하는 것중의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다. 고대 中國의 思想에는 본래 원시적인 미신이나 주술(呪術)적인 것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이미 그 원형이 완성되어 있던 論語등에는 그러한 원시적인 불합리한 요인은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지극히 합리적인 인생관,자연관,정치관이 성립되었다.그 중에 하나가 正名思想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先覺者로서의 歷史意識 또는 主人精神이라 말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정명의 출처와 정명의 논리적 측면 또 주지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本論
1. 正名의 출처
제자인 자로가 묻기를 [ 위나라 왕이 선생을 초빙하여 정치를 시키고자 한다면,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자 합니까 ? ] 라고 물으니 [ 必也 正名乎 ]라고 대답했다. <子路>이것이 (正名)의 출처이다.
孔子는 <명을 바르게 하는>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명이 바르지 못하면 언어가 불순하다(名不正則 言不順)
2).말이 불순하면 아무일도 성취되지 않는다.(言不順則 事不成)
3).아무일도 성취되지 않으면 예의,음악도 성립되지 않는다.(事不成則禮樂不興)
4).예악이 성립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되지 않는다.(禮樂不興則刑罰不中)
5).형벌이 적중되지 않으면 민중이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2.論理的 側面
논리학에서는 개념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여서 그것이 定義라는 작업이다. 定義라는 것은 실물에 상응하도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이름을 부여한후에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그 경우에는(正名)은 행위의 규범이된다.
孔子는(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왕이라면 그 명에 어울리는 인품이나 행위,지위를 해야하며 신하라면 이것 역시 그 명에 걸맞는 인물이며 행위며,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名以召實 實以應名>즉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정명이 갖는 행위의 규범이다.

3.主知主義的 側面
正名思想은 고대 中國思想의 실천중시에서 온 당연한 결론인데, 그 사회적 실천을 지적인 矯正이라는 작용위에 확립하려 하였다. 호적이<지적인 재조직>이라고 表現했듯이, 그것은 정치,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의 主知主義的 측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結論 : 이상으로 정명을 論理的 側面과 主知主義的 側面으로 살펴보았다.孔子는 꿈에 주공을 만나볼 정도로 周의 문화와 전통을 사모하였고 이것은 그리 從周思想이며 춘추시대를 살아가는 역사의식이었다.그리고 그의 합리성과 논리성을 고대 그리이스의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통해 바른지식을 획득하려고 했던것과 같이 논리학의 제일보를 내딛었다고 볼 수 있다.
 

孟子의 革命思想

[ 民爲貴(백성이 가장 귀한 존재)]라고하여 民本主義를 주장한 孟子는 殷湯王,周武王의 放伐을 論함에 있어서는 [仁道를 해치는 자를 賊이라 하고 義理를 해치는 자를 殘이라고 하며 殘賊을 일삼는 자를, 이것을 一夫라고 한다. 一夫 紂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양혜왕 장구)]라고 하면서 易姓革命을 시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 民本主義와 革命思想은 그것이 孟子에세서 獨創된 것은 아니다. 詩와 書經또는 孔子思想에 [천자는 하늘의 命을 받아 下士에 임해서 天意를 대행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인데(唯一者로 선택된 天의 아들),天子가 그 직무를 廢하여 虐政을 하고 따라서 民心을 잃으면 天은 民心을 토대로 그 天子를 폐하고 他姓의 인물로 대치한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易姓革命인데, 여기서 우리는 天命思想과 民本主義에 의하여 합리적인 사실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詩,書이래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孟子가 유독 혁명적 기질을 소유하여 易姓革命을 독창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孟子의 易姓革命思想이 어떤 것이며,그 의의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문제점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즉, 그의 易姓革命 思想이 적극적으로 학정에 시달리는 당시의 인민을 향하여 政權의 交替를 선동하는 [人民蜂起思想]에서 출발한 것인가, 아니면 학정을 일삼는 통치자에게 학정을 중지하고 善政을 베풀어 民心을 얻지 못하는 한 [天使]즉 天의 命을 받은 王者에게 멸망당하고 만다는 것을 일러주어 善政으로 돌아오게 하는 , 즉 소극적인 警戒理論에서 나온것인가 답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孟子는 봉건 지배체제의 질서확립과 옹호를 위해서 君子와 소인의 두 사회적 집단을 엄격히 구별하여 君子가 소인계급의 경제적인 기생충이 되는 것을 [天下의 通義]라고 한 정도이니,身分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그가 원하였을리는 없다.곹 孟子의 역성혁명思想은 인민봉기선동思想에서 출발한 것이기 보다는 소극적 경고성의 의미를 띈다고 하겠다.
그의 역성혁명이면에는 또 요,순의 二帝와 夏禹,殷湯,周 文王의 삼왕을 절대적으로 숭앙하고 있어,이들중 殷湯,周武의 放桀伐紂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미화하지 않을 수 없고,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유교에서 古之聖王이라고 하면 그것은 곹 二帝三王이요 王道라 할 때의 왕은 二帝三王이요 王道의 道는 이제 삼왕이 다스리던 方法인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에 의미부여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상에서 孟子의 역성혁명思想의 의미와 문제점,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또한 孟子의 역성 혁명思想이 갖는 의미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고 명쾌하게 문제를 적발,당당하게 소신을 밝힌곳에서 孟子의 특이성이 있고, 또 孟子의 역성혁명思想이 明末淸初의 황종의의<明夷待訪錄>의 原君(君主論)에 서술되어 후대에 까지 임금 또는 통치자들이 하여하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孔子思想의 현대적 이해 

- 그 재인식을 위한 하나의 접근 -

** 先秦儒學과 性理學의 관계**
序言 : 근대이후 孔子思想에 대한 批判의 이유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서구문명이 孔子思想을 배경으로 한 東洋文明을 압도한 현상에 대한 원인론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근대화,현대화의 문명추세에 漢文文化圈의 유약한 것을보고, 그 책임을 孔子思想에 돌리는데서 批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思想을 막론하고 일정한 思想이 초시대적으로 장점만 갖는 것이 어디 있었으며 반대로 단점만 갖고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孔子 思想 역시 예외가 아니다.그러므로 孔子思想의 特徵은 일정한 시대와 환경에따라 그 장단점이 상대적으로 평가 될 수 잇는 것이다.특히 그 思想의 보편적 진리로서의 불변적 요소와 특수 진리로서의 가변적요소에 따라 그 평가에 있어서 계승 불계승의 요소의 갈림길이 있다.(이러한 논거에서 우리는 孔子思想중 어느 측면이 어떤요소가 오늘의 우리생활에 도움이 될 것인가 마땅히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本論 : 孔子思想은 그 이전 유가의 전통 특히 예의 전통을 계승하여,.그것을 처음으로 이론화,첵계화 및 합리화 한 것이다.그리하여 그 이후 儒學의 발판이 되어 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서은 내용과 경향에 있어 그 이후의 유교내지 儒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로는 孔子의 思想을 批判한 것을 예로 들고 그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한다.

첫째 : 孔子思想을 가리켜 空理的 空疎性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孔子이후의 儒學, 특히 개신儒學(neo-confucianism)과 동일시 하는 데서 비롯된다.
孔子는 ‘아랫것데서 배운 다음 윗것에 도달한다(下學而上達)’면서 일상적인 실생활의 공부에 무엇보다도 머저 충실할 것을 가르쳤다.또 ‘선생께서는 이상한 힘이나 불가사의한 신의 문제를 말하지 않으셨다.(不語怪力亂神)라든가 ’선생께서 성과 천도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수 가 없다.(夫子之言 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등에서 알 수 있듯이 孔子는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둘째 : 孔子思想이 허례허식을 찾는 이른바 형식主義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孔子는 예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예가 아니면 설수 없다”(不知禮 無以立也) 등 예를 중시하고 합례적인 행위를 열심히 가르친 것으로 그는 누구에게도지지 않는다.그러나 우리가 主義해야 할 것은 孔子가 이렇게 예를 중시했지만 예의 형식 측면을 경시했고,배척하였다는 것이다.그는 예의 근본精神,예의본질을 중요시 했지, 그 형식의 측면을 중요시하지는 않았다.그 증거로“예가 사치를 더불어 가져오는 것이라면 차라리 예 없는 겸손함이 낳다.”“사람으로서 仁하지 않는다면 예는 무엇하며,사람으로서 仁하지 않는다면 樂은 해서 무엇하랴(禮 與其奢也 寧儉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등 예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 孔子의 思想이다.

셋째 : 孔子思想이 전근대적이고 봉건적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대 내지 현대의 특성이 과학와, 산업화,민주화의 기준으로 규정되어진다고 한다면,孔子思想에 이러한 성격의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다.과학화의 기반을 이루는 사유경향은 경험적,합리적精神이며 산업화의 사유기반은 대량생산을 위한 실제적 실용의식이라고 할수 있다. 孔子는“사람은 섬길줄 모르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人間의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경원해야 앎(知)이라 할 수 있다.”등 현세치중 및 실제지향의 생각을 가졌던 분이다.그러므로 적어도 孔子思想이 근대화,현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볼수는 없다.마지막으로 민주화의 문제인데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써 섬겨야한다”고 말하며 군주제를 인정 하였고 또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라고하여 ‘愚民政治’로 오해받을수 있는 말들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主義해야 할 것은 이것이 孔子思想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孔子는 政은 正,즉 ‘바로잡는 일’이라하여 군주제를 인정하지만 ,정치내용은 어디까지나 德治,禮治이어야 한다는 것이 孔子의 생각이며 덕치,예지가 곧 군主義 수양과 그 인격의 강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또 이것은 군주개인의 이익을 도모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즉 民本爲民에 그 본래 취지가 있다고 하겠다.따라서 孔子思想에는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의 사고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민주적 성향의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볼수 가 없다.

結論 : 원래 孔子의 思想에는 핵심이 되는 근본 개념 내지 근원적 원리가있다. 그것이 바로 仁思想이다. “뜻있는 선비로 어진이는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여 인을 성취한다.(志士仁人 無求生而害人 有殺身以成仁)”무릇 인이란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신이 도달하고 싶으면 남을 도달시켜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이러한 것으로 볼 때 孔子의 思想이 얼마나 人尊精神,人本主義의 특색을 지닌것인가 알 수 있다.오늘날 기계,민주,기능 위主義 과학적 문명속에서 人間상실,人間소외의 精神的 위기를 조성해 나가는 이 시대에서 孔子의 仁思想이야 말로 현대사회에 다시금 재요청되고 있다고 보여지며 현대사회에 공헌도 할수 있을 것이다.


이규보의 現實認識과 文學

한 사람의 사회현실 의식과 文學에 대하여 제대로 알려면 당시의 시대사조라든가 정치현실,작자의 시대의식, 인생관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여기서는 일체의 作品연구는 생략하고 이규보의 對 농민의식과 小中華思想 및 국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차레대로 서술하고자 한다.

1. 對 農民意識
白雲은 高麗 사회의 계층구조를 긍정하고 변화를 바라지 않았으며,자신은 전생,현생,래생에 모두 文筆로 명성을 날리고 사회에 봉사할 인물로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확신이 사회현실 인식의 근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류층에 속하는 그는 하류층에 속하는 농민을 자신과 대등한 인격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상류층이나 중류층의 농민 수탈을 비난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농민에 대한 지나친 착취가 高麗의 사회체제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고, 공평한 과세와 부역이 儒學적 통치 이념에 합치 되었기 때문일 뿐이요,농민의 입장에서서 농민 편을 든 것으로 볼 수 없다.그러므로 地方官으로 있을 때나 국정에 영향을 끼칠만한 중앙의 고위 관직에 올랐을 때나 농민의 困苦를 해소 시켜주려는 시책은 시도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2. 小中華 思想
그는 高麗를 中華에 버금갈만한 문명사회라고 자부하는 小中華思想을 가지고 있었고 高麗는 고구려를 계승한 正統國家로 절대로 멸망해서는 안 될 나라라고 생각하였다.이런 민족의식이 高麗에 침입한 유목민족인 몽고족을 야만인으로 보고,국가의 시련을 감내하고 독립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종화思想이 高麗를 중화세계와는 별개의 乾坤으로 보고 中國의 華夷思想까지 본받아 中央인 開京一圓만을 문명사회로 생각하고 그 외의 각지방은 미개사회로 생각하여 문명인이 살기어려운 ?氣가 끼는 고장으로 未開人인 사는 고장으로 , 얕잡아 보기도 하였다.이런 생각은 국민의 一體感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어 각 지방의 民亂을 촉발시키는 동기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3. 사회현실인식
한편 각지의 민란빈발,몽고의 침입으로 이한 국토황폐,농민의 流移民化,집권층의 전횡 및 퇴폐적인 생활등 사회의 모순점이 많이 등장하였고,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할 경륜을 가지고 있었으나 국정의 一役을 담당하는 요직에 오른 후에도 이를 실현하기위한 노력은 한 일이 없으며 집권층과 영합하여 일신의 안일을 누리기에 급급하였을 뿐이다.이는 가장 포악한 무인집권자였던 李義旼을 제거하고 집권한 최충헌,최우 등의 정권을 사회를 안정시킨 세력으로 보고 그에 협력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백운의 文學이 벼슬하기 이전과 이후에 사회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 이미 지적한 백운의 현실관 때문이었다.백운의 청년시절 未宦期의 文學作品에는 당시의 사회 현실의 모순을 批判하고 자신의 불우를 괴로워하는 시문들이 나타나지만 士宦期의 文學作品에는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려는 노력을 엿볼수 없고,지聖人으로서 용인하기 어려운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고 이에 안주하려느 자세를 취하였다.혼탁하고 비리가 충만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곳에서 영화를 누리려한 백운에게서 현실 개혁의 의지를 찾아보려는 것 자체가 무리이며,그가 노후에 에써 仙化하기를 바라고 佛經과 老莊에 침잠한 것도 功成名遂하고 身退한 후 안주를 위하여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ㅎ나 그의 현실관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제 실시가 漢文學에 미친 영향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호족연합정권이라고 불리워지는 엉성한 통치방식의 약점이 거듭 노출되었다.그러다가 4대 광종이 들어서면서 과거제를 실시하게 된다. 과거제 실시의 직접적 동기는 광종이 지방에 할거하고 있는 호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정부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자기 주변의 인재를 얻자는데 있었다. 광종이 과거제를 실시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더욱 서둘러 신라 육두품출신의 지식인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지방호족의 자제라도 가능하면 중앙정부로 포섭하여 왕권강화의 이중장치를 마련하는데 과거제는 참으로 긴요한 구실을 했다.
과거제는 두가지점에서 평가할 의의를 지녔다.첫째는 지배身分에 속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천인이 아닌 양인이라면 누구나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 명분이었다.둘째는 文學을 통해서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이다.文學을 통해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이.거기에 소용되는 文學이 과연 옳은것인가 하는 후대의 논란이 있었지만,무쳑쟁패를 통해 지배력을 뺐고 뺏기는 중세사회에서 文學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는 점에서 과거제가 文學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하겟다.
과거제도의 영역은 크게 4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進士,明經,卜業,?業이다.진사는 漢文으로 글을 지을 수 있는 文學的 능력을 시험하자는 것이고 (일명 제술이라고 한다.)명경은 儒學의 경전에 대한 이해를 묻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문 기술교과를 뽑기 위한 것이다.
초중에서도 진사과목은 詩,賦,頌,時務策인데 그중엗 시와부를 더 중요시했다.시와 부는 漢文學의 정수에 해당된다. 시와부를 잘 지으려면 자기 스스로 느낀 바가있고,말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어야 그럴 듯한 창작을 내놓게 된다. 과거는 요컼대 글 짓는 능력을 보아 인재를 뽑자는 것이다.글짓는 능력은 무엇보다도 시와부를 보면 알 수 있는것이다.시와부를 잘 지으면 글이야 저절로 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사고방식은 운문위主義 중세적 文學觀을 잘 나타낸다고 하겠으며,과거를통해 文學갈래들 사이의 우열관계가 쩨도화된 셈이다,또한 시,부를 중요시한 것은 통치와도 관계가 있다. 散文은 아무래도 길게 늘어져 통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 시는 조화롭고 엄격한 형식을 기본적인 속성으로 삼는다.이것은 통치자의 의지와도 맞아 떨어진다.
또한 高麗시대의 과거제의 特徵은 지공거란 과거의 시험관이 과거를 좌우하는 것이다.지공거가 맡은 구실은 과거에 응시한 사람의 글이 기준에 합당하는가를 판정하는데 있지만,기준의 객관성과 함께 자기 정계의 취향이 또한 크게 작용하였다.즉, 누가 지공가가 되느냐에 따라 文學의 풍조뿐만 아니라 정계의 판도까지 좌우됬으니,이것이 사제관계로 이어지고,私學으로 이어져 문벌귀족의 득세를 조장할 수 있는 요소가 처음부터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 우리나라 과거제도와 漢文學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과거는 신라의 독서삼품과에서 시작되지만,보편적인 과거는 광종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변화 발전하여 과거제도는 점점 구체화되어 무과와 잡과까지 실시하기에 이르렀으며 문과는 과거중의 과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주류를 이루었다.이로 인해 우리나라 漢文學이 급작스럽게 성해질 수 있었으나 後期에는 지나치게 미사여구에만 치중하여 우리 漢文學을 부화한 것으로 몰락시켰으며,6운,10운,18운 등의 특수한 시형식을 강조하여 순수한 文學이 건전하게 발달하는데 커다란 해독을 끼친 것이 단점이라 할 수 있겠다.전체적으로 보면 漢文學의 수준을 올려놓는데 과거제가 크게 공헌을 하였다.
儒學의 敎育思想
--中庸, 대학을 중심으로--
序 : 무릇‘가르친다’는 말은 이미 누가 ‘무엇을 알고 있음’즉 차르쳐지는 내용이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물론 이때의 내용은 사실레 대한 眞僞의 문제일 수도 있고,행위에 대한 선악의 문제일 수도 있다.儒學의 정통적인 敎育思想을 알아보는데도 또 方法論的인 문제가 제기 된다.여기서는<中庸>과 <大學>이라는 유가의 두 책에 담긴 敎育思想을 살피고자 한다.예로부터<中庸>과 <대학>은 儒學의 ‘敎育성격,내용,이상 및 學習方法’을 근본적,체계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모든 儒學者들로부터 인정받기 때문이다.

本論 : <中庸>에서는 우선 敎의 대체적은 뜻을 밝히고 있다.<中庸>에 의하면 교는 ‘도를 닦아 익혀주는 것(修道之謂敎)이며, 명으로 말미암아 성하게 되는 것(自明誠,謂之敎)이라 한다.修道之謂敎부터 살펴보면 ,여기서 道란 孟子의 ’五倫‘과 같은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군신,부자, 부부,형제 ,붕우간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義,親,別,序,信‘등이 바로 천하에서 가장 좋은도(天下之達道)라는 것이다. 이러한 도는 <中庸>에서 ’성을 좇는것‘(率性之謂道)이라 하고,그리고 성이란 ’천이 명명한것(天命之謂性)이라 한다.이것은 ‘모든 사물이 생성초에 본질적으로 그 사물의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생성됨’을 뜻한다.(따라서 人間에게도 人間의 본성이 있음을 뜻하게 된다.)그러한 본성을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人間으로 하여금 본성에 의하여 가장 人間다운 人間,본성을 실현하는 人間 즉 聖人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自明性 謂之敎를 살펴보면, 誠이란 원래 의식의 긴장상태를 뜻하는 것으로서 인식작용 및 도덕행위의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다.또 中庸에서 ‘誠’이란 天의 道요, 성하는 것은 人間의 도(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也)라. 이것은 誠은 천 또는 천명과 같은 우주원리로서 하늘의 도리인 誠을 본받고자 사람이 誠으로 가는 과정이 敎라고 말할 수 있겠다.이상과 같은 도덕哲學의 特徵을 살피기 위하여 구체적인 學習과목들을 더 상세히 드는 것이<大學>이다.대학에서는 儒學의 學習이 八條目으로 지적된다.‘格物 致知,誠意, 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그것이다.대체로 격물,치지란 人間을 포함한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을 확충 명백히 하는 것이며,성의,정심, 수신이란 사물로 향하는 마음의 방향성(意)를 성실히 하고,그 마음을 바르게 하며,그 마음이 깃들어 있는 몸을 바로하는 즉,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심리 및 행위를 도덕적 법칙에 맞도록 조절하는 것이며,제가,치국 평천하란 개체에서 전체로 확충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그리고 이러한 팔조목을 좀더 요약한 동시에 學習목적이 되는 것이 ‘三綱領’즉, 明明德,親民,止於至善이다.明明德이란 德이 得이라 해석되듯이 본연의 본성을 뜻하며 人間이 스스로 자신을 성찰함으로써,자기의 타고난 본성을 자각,발현케 하는 것이고,新民이란 자신의 본성을 자각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본성도 자각케해주는 확충의 과정이며,止於至善은 본성에 대한 파악과 그 실현(盡其性)이 가능한 최대의 한계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그렇게하여 극한까지 이르면,人間의 자율적인 행위는 곧 모든 자연의 생성,변화를 돕는 것이되며 자연과 더불어 宇宙의 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이른바 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結論:儒學이 타고난 본성을 자각 실현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면 일상적 人間의 심성은 일단 가려져 있는 것으로 말 할 수 있다.그리고 그 본성이 學問에 의하여 찾아질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 본다면 일상적 人間은 學問,또는 가르침으로 인해 본래적으로 改變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人間에게 천부의 본성이 있고,그 본성에 의하여 人間은 자연과 합일될 수 있으며,그 본성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곧 도덕이 된다는 젋이다.오늘날 人間은 스스로 많은 기계문명속에서 人間성, 人間가치를 상실당하고 있고,그래서 人間성의 회복과 人間 가치의 확립이야 말로 오늘날의 문제이고 보면,儒學의 敎育思想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遣唐派의 역할에 대하여
--三崔--를 중심으로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치다가 돌아온 육두품 출신 文人 중에 三崔가 있다고 하는데 자료에 따라서 조금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최치원,취승우,최언위이다.
이들 三崔는 통일신라에서 高麗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일정한 분량적 역할을 하였으며 여기서는 최치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한다. 최치원이 우리 文學史에 끼친 영향은 시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그는 어려서 아바지의 권유로 당나라에 儒學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황소의 난때는 절도사 고변의 문하에서<檄황소서>를 지어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그러나 당나라에서의 출세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세계제국의 국제인이면서 또한 변방 외국인기도 했기 때문에 느껴야 했던 소외와 고독은 그로 하여금 마침내 귀국을 하게 했으며 처음에는 상당히 환영받았다.고위관직을 제수받아 時務策을 올리며 국정에 참여 했지만 실권을 쥐고 있는 구족층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난세를 비관하다가 가야산에 은둔하고 만다.이에 후삼국의 정패가 벌어졌을 때 신라를 위하여 끝까지 자기를 바쳐야 할 이유가 없고 그렇다고 백제나 高麗를 택하는 용단을 내릴 수 없는 처지에서 은거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겟다.최치원이 지은 글은 아주 많다.수십권이 되는 문집이 있었다고 한다.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계원필경>과<사산비명>등이 전하고 <동문선>에 실려있는 신라인의 作品 192편중 최치원의 作品이 146편이나된다. 中國인의 안목으로 보더라도 흠잡을수 없는 수준에 오른 최초의 작가이며 후대에는<東國文宗>으로 추앙받기까지 하였다.이렇듯 최치원이 우리 文學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였다.최치원은 思想적 입장을 뚜렸이 세우지 못한채 精神的 방황을 거듭하며 일생을 보냈다.儒學을 내세우기는 해도 확신이 없었으며.佛敎에 호감을 가졌지만 미지근한언설을 늘어놓는 정도였다.당나라 중심의 천하관에 깊이 빠져들어가면서도 자기가 신라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신라문화의 저통을 정리할때는 당나라에서 설정한 기준을 사용해야 客觀的인 논술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좋은 예이다.결국 실패한 인생이고 무엇하나 이룬 것이 없다고 할 지 모르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최치원만큼 고민한 사람도 쉽게 찾기어렵다.
최승우는 귀국한 다음에 후백제 견훤을 섬겼다는 것이 특이하다.후삼국의 쟁패과정에서 견훤의 휘하에 들어갔고 최언위는 귀국해서 신라의 벼슬을 얻었지만 후삼국의 쟁패과정에서 高麗로 가서 왕건의 신하가 도어 통일과업을 성취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최언위를 위사한 신라 육두품출신 儒學者들은 더 이상 신라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수 없었다고 보아 신라를 버리고 高麗를 택하였다.억압받던 身分에서 벗어나 최고지배층으로 상승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꿈도 실현하게 되었다.신라文學이 高麗로 이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최언위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당나라에 儒學했던 신라 육두품출신의 세학자들중 최치원은 思想적 방황을 거듭한 끝에 가야산에 은거하였고,최승우는 후백제를 택하였고,최언위는 高麗를 택하여 각 각 다른길을 갔지만 이들이 우리文學에 끼친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즉, 아직 미약한 漢文學의 수준을 질량 모두 中國과 대등한 수주으로 올려 놓았고,당나라에 儒學하여 얻은 지식을 高麗王朝의 정치이념이나 文學역량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게된다.또 그것이 高麗 漢文學으로 이어지게하여 통일신라에서 高麗로 넘어가는 시기의 文學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이 그들 견당儒學생들이었다고 하겠다.


高麗시대 漢文學의 特徵 
1. 高麗시대 文學의 思想的 배경
高麗시대는 儒學이 思想계를 지배한 듯 하나 실은 표면적인 거세 불과하였다.高麗시대 儒學은 대체적으로 淺近하여 다만 經書의 意義에 통할 뿐이었다.儒學을 닦는 人士라 할지라도 佛敎에 通涉하는 경우가 많다.高麗의 漢文學은 유,불 야대思想에 근간으로 해서 산출된 것이었다고 말할수있다.

2. 高麗文人의 文學에 대한 관념
高麗시대의 文人들이 文學을 하는 제 일의 목적은 科擧를 위하고 管路를 개척하는데 있었다.그러나 高麗의 전시대를 통하여 문사들의 文學 활동을 한 목적이 개인의 영달을위한 功利的관념으로 써 많은 아니다.武臣집권이후 임춘,이윤보같은 이들은 文學이 입신출세상의 이용물임을 거부하며 文學은 인생과 더불어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고,文學은 아름다움을 규명하는 존재임을 밝히는 審美的文學觀을 갖고 있었다.

3. 文學의 特徵
개국초에는 신라말의 文風이 계승되어,晩唐시풍을 딴 今?詩文學이 발전했고,四六文이 유행되었으나 한편으로는 <文選>을 교본으로 삼는 古體詩文學의 勢가 여전하였다.그러던 것이 광종때 과거제를 시행하면서부터 文人들이 거의 今體詩만을 존중하는 바람에 고체시는 미약하게 되었고,또한 漢文學을 존중하며 신라시대에 이룩한 吏讀文學도 사라지게 된다.
高麗시대는 다양한 분야의 文學활동이 일어나는데.賦文學이 일어나고,評論文學이 성립되었으며 小說文學의 시초라 할 假傳體文學 作品도 나오고 隨筆의 作品도 나오게 된다.


정지상,김부식文學의 特徵
정지상과 김부식은 정치思想이나 文學전인 면에서 서로 대조적인 特徵을 갖고 있다.이자겸의 난이 평정된후 개경파와서경파 사이의 대립이 생겼다.개경파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유서깊은 문벌귀족이며,서경파는 서경을 기반으로하여 진출한 신진세력이었다.이후 세력간에는 도읍을 옮기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다가 마침내 천도파의 지도자인 묘청이 난을 일으키게된다.개경정부쪽에서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결국 싸움은 김부식의 승리로 끝나고 천도파의 일원이었던 정지상도 죽음을 당하게된다.

1. 정지상의 文學
정지상의 시에는 자기고장인 서경에 대한 자부심과 서경에 사는 사람들의 고난을 表現한 것이 많다. <送人>이라는 시에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이별의 아픔을 섬세한 가락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漢文學이 정착된 이래로 수많은 시인이 나타났지만 정지상만큼 삶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그것은 나타내야할 절실한 경험이 없이 시를 바라고,말을 다듬느라 순수한 마음을 저버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정지상은 그러한 관습에 깊이 반발한 사람이다.유가의 기풍을 버리는 노장적인 취향을 지녔고, 自主義識을 지녔으며,민중의 아픔을 노래했고,“또한 근체시의 고정된 격식을 어기고 拗體를 택하기도 하였다.

2. 김부식의 文學
김부식의 文學觀은 한마디로 “文學은 儒學의 경전을 모범으로 삼아야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 한마디에 文學의기능.내용.表現에 관한 주장이 두루 들어있다.기능을 말하자면 文學은 영달하기 위한것도 아니고 재주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며 도의와 명분을 바르게하는데 소용된다는 주장이다.내용도 이에 따라 규범이 될 수 있는 바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表現은 공허한 수식을 삼가고, 질박하면서도 전아한 고문을 택해야 한다면서, 그동안 성행한 변려문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세가지 중에서 表現을 중시했는데 儒學이 性理學으로 나아간 후대의 文學觀과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김부식은 또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였다.물러가기를 청하는 글에서 재주가 없고,대단치 못한 수준에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 점을 강조한 것은 자기 文學에 대한 자부심이라도봐도 지나친 추론은 아닐 것이다.
김부식은 儒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데서 정치를 하거나 文學을 하는 기준을 설정하고자 했다.이런 김부식을 文學에서도 귀족적인 규범을 수렴하고자 한 사람이라면 정지상은 그러한 풍조에 반발하고 자기 향토의 정서를 살리면서 절실하고도 아름다운 表現을 마음껏 구사한 것이 特徵이다.


孔子의 敎育思想

1. 序論 : 夏,殷,周 三代에는 학교가 모두 官에 속하여 있었다.孔子에 이르러 平民인 私人으로서 講學하기 시작하여 詩,書와 六藝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다.그렇기 때문에 孔子는 中國최초의 大敎育家임을 역사가들이 共認하는 바이다.孔子는 말하였다.(人能弘道 非道弘人)즉 孔子는 敎育의 주체는 사람이고,사람이 능동적,주체적 ,자발적으로 사람된 도리를 밝히는 것을 중요시하게 생각햇다.여기서는 孔子의 敎育思想에 대하여 施敎원칙,교재,敎育方法등을로 살펴보도록하겠다.

2. 本論  
가)施敎原則 : 孔子는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라고 말하였다.道는 朱子가 말했듯이 <人倫日用에서 마땅히 행하여야만 할 것>이다. 즉.道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곧 이러한 원리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目標로 삼았다는 것이다.또 德이라는 것은 道를 행하여 마음에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대학에 明明德이라 했듯이 선천적으로 구비되어진 밝은 덕에 근거하여 행한다는 것을 말한다.그리고 仁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敎育의 이념이자 人間존중의 思想이다.敎育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人間존중의思想에서부터 출발된 것이다.藝라는 것은 禮,樂, 射,御, 書,數의 육예로 오늘날의 교과서에 해당된다.이상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學問을 하는 차례를 말한것으로써 첫째는 원리또는 이상을 제시했고 둘째,세째는 人間성에 대한 신뢰를 예기한것이고 넷째는 그 배우는 과목을 얘기한 것이다.(孔門四科--덕행,언어,정사,文學)또 完美한 인격(君子,聖人)을 완성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孔子의 立敎의 목적이자 궁극적 敎育목적이라 하겠다.

나)교재 : 기본교재는 六經의 글,곧 詩,書,禮,樂,易,春秋로써 하였는데 특히 이중에서도 詩,禮,樂에 중점을 뒀는데 孔子는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이라 하였다.이것은 사람이 몸을 닦고 品德을 양성함에 있어서 詩로써 사람의 情志를 興起시키고,禮로써 사람의 행위를 수립하고 樂으로써 사람의 덕성을 완성함을 말한것이다.이세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관련을 갖고,끝까지 일관되어 완전한 인격을 조성함으로써 人文敎育의 요점이 된다.

다)敎育方法 : 고대의 대敎育가들은 반드시 자기만의 독특한 敎育方法이 있었다.예를 들면 그리이스의 哲人소크라테스의 産婆術같은 것이다.孔子에게는 啓發法이라는 해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孔子는 擧一隅而不以三隅反則不復也)이라고하여 노력하거나 새각하지 않는자에게는 다른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이것은 學習성취도에 따라 學習目標를 주는 단계적 學習方法이라 할 수 있다.또 <有敎無類>라하여 최소한의 예만 갖추고 찾아온다면 身分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베풀었던것이다.이것으로 그의 汎愛思想과 仁德을 실천하는 진정한 人文敎育精神을 엿볼수 있다.

3. 결론 : 孔子는 中國고대의 가장 위대한 敎育가였다.그는 敎育을 통하여 이상을 체계지었고 계획을 완성시켰고 施敎方法을 다듬어 완전한 人文敎育哲學思想을 이룩하였다.그가 후대에 끼친 양향과 세계에 미친 공혼으로써 인륜의 師表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君子---완성된 인격
     知--사물의 조리에 밝은 것으로써 是非를 분별하는 표준-->선악을 분별 미혹되지 않는다.  
     仁--克己復禮,사람을 사랑하고 하늘을 즐기고 命을 알아서 지극한 덕의 조화를 밝히고 사람           들과 자기를 하나로 인식한다.
     勇--義를 보면 나아가고 危難을 피하지않는 것이니 두려워 하지 않는다.


武臣執權期의 文學的 전환
-武臣집권이 文學史에 끼친 영향-
의종 24년(1170)에 武臣란이 일어났으며 구 후 한세기 동안 武臣政權이 지속되었다.문신이 결정적으로 몰락한 탓에 문신이 담당하는 文學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나타난 것 같으나 사실은 그 반대로 文學활동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활기를 띠었다.그 기간동안에 등장한 文人들은 왕성한 창작의욕과 날카로운 비평의식을 가지고 文學을 새롭게 했으며 그 결과 文學史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 이유를 설명하는데는 크게 세가지견해를 들 수 있다.
첫째 武臣란때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文人들이 현실도피를 하면서 文學에 탐닉하다보니 文學이 융성해졌다는 견해다.오세재,임춘,이인로, 등의 경우가 해당되지만 이규보, 등의 文人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둘째 武臣정원의 성격변화에서 문제해결의 단서를 찾자는 견해이다.최충헌등은 정중부와는 달라서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 문신들을 등용하면서 文學이 발전했다는 견해이다.그러나 이견해는 武臣政權이 문신을 등용하고 포섭한데서 文學이 다시 일어났다면 武臣란 이전보다는 미약할 수밖에   없을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이다.
세째.武臣란 이전의 文人과 武臣란 이후의 文人은 동질적인 文人이 아니라는 견해이다.武臣란이 일어나자 신라 이래의 오련 연습을 지켜보며 대대로 춴력을 독점하고서는,외세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민족의 의지를 약화시키고,자기들의 안일을 도모하는데 몰두하던 문벌귀족이 몰락하면서,특권의식,사대의식,형식主義 등을 特徵으로 삼는 문벌귀족의 文學도 청산되게 되었다.문벌귀족이 국권을 장악한 기간 동안에는 진출이 억제되어 있던 지방 향리 또는 종소지주층에 기반을둔 文人들이 중앙정계로 까지 등장해서 새로운 文學을 이룩하는 주체가 되었다.이드은 신흥사대부 또는 신진사류라고 한다(이우성)
신흥사대부가 정치나 文學에서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武臣政權이 무너진 다음의 일이었지만,그 전부터도 선구적인 활동은 주목할 만하게 나타났으며.이규보의 경우는 그렇게 이해해야 마땅하다.이러한 신진 사인층의 등장과 사대부계급 형성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이 시기 文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반드시 考慮해보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실로 인정되며,文學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武臣政權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에 몽고의 침략이 닥쳐왔다.최씨 정권은 과거의 문벌귀족이 외세의 침략에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던 것과는 달리 끝까지 몽고와 줄기차게 맞섰다.오랜 기간 동안 나라를 지키려는 투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새 시대의 文人들은 최씨정권의 항쟁을 지지하고 민중의 애국적인 역량을 조직하고 동원하자고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武臣란과 몽고란은 거푸 닥쳐온 수난이었지만 새시대의 文人들은 이 두 수난을 겪으면서 결정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출신에서부터 일반 민중과 가까운 위치에서 있었던데다가,국난 극복의 거대한 경험을 통해서 현실을  재 인식할 수 있었다.이런 이유에서 신흥사대부가 담당한 高麗後期文學은 高麗전기 문벌 귀족의 文學과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武臣란 이후에 나타난 高麗後期 文學은 위기에 처한 중세적인 가치관을 현실의 움직임에 맞게 재편성하는 것을 과제로 삶고,그런 방향에서 文學觀을 재검토하고,새로운 表現양식을 찾으면서 한동안 활기에 찬 시험을 계속했다.그 성과는 朝鮮전기까지 이어지게 된다.그러나 武臣政權이 곧 文學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역사의 전개와 함께 미족의식이 성장하고,文學담당층이 交替되고 세계관이 바뀌면서 삶의 총체적인 변화에 따라 文學은 새로 낙아갈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에는 또한 일반 민중의 역량과 의식의 성장이 그 시대 文學의 발전에 작용하고 있으며,.이러한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 武臣집권기가 文學史에 미친 영향이라 할 것이다.


許生傳에 반영된 實學思想
<허생전>은 연암 박지원의 小說중에서도 대표적인 作品이다.<열하일기>의 <옥갑야화>에 실려있는 이 作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허생전은 일련의 허생의 행적으로 이루어져있다.허생이 집을 나서서 몇가지 자기의 뜻을 시험해본 뒤 다시 종적을 감추기까지  몇가지 행적들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는 연암이 허생ㅢ 스토리를 통하여 무얼 얘기 하고자 했는지 연암의 實學思想과 관련 지여 알아보고자 한다.

1.富의 문제
허생전에서 제일 먼저 제기된 것은 부의 문제이다. 가난과 처의 성화에 못이겨 집을 나선 허생이 장안 갑부 변씨에게서 돈을 꾸어 안성과 제주에서의 매점매석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든인다. 결국 그는 많은 돈을 바닷물에 던져 버리고 말았지만 여기서 박지원이 말하고자 한 것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첫째,나라에 물물교환의 수단인 수레가 다니지 아니하여 물자유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이다.당시 문물이 발달한 청나라에 다녀온 연암은 商工業의 발달이 나라를 막강하게 한다는 점을 보고 느꼈을 즉 물물교환을 통한 商工業의 발달에 필요한 역설하고 있다.둘째 대자본에 의한 부의 독점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말하고 있다.유통구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만약 대자본가가 매점매석한다면 부의 편향과 독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이것은 근대 자본主義의 문제와도 연결된다.세째  양반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당시 허생같이 무위도식하면서 경제활동에 전혀 나서지 않는 몰락양반층은 실제로 많았으리라 본다.연암은 이 小說을 통해 實學精神에 의한 현실문제 접근을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네째 외국과의 무역을 주장하였다.일본의 장기에까지 가서 쌀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긴 허생의 일화를 통해 폐쇄적인 경제체제를 개방해 나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2. 선비의 道와 유토피아
허생이 변산반도의 도적들을 모아 이상향을 찾아 간 것은 바로 이상적 공동체 건설을 꿈꾸는 연암의 내면세계를 허생을 통하여 발로한 것이라고 보아야한다.그는 계속해서 섬안에서 최소한의 예절만 남겨놓고 문자까지 파괴해 버린다.이것은 원시적인 공동체 사회가 人間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고 있으며 당시에 문자를 알고 있는 당시 사대부들이 과연 필요한 존재인지조차 의심해 보고 있는 것이다.양반 식자층에 대한 공격도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3. 북벌론의 批判.
허생이 批判의식이 집약적으로 들어난 글은 이완과의 대화이다.당시 북벌론의 선두격인 이완을 통하여 북벌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공격하고 있다.당시 朝鮮은 小中華의식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기며 모멸할 뿐만 알았지 북벌론의 모순점을 간파하고 진성한 북벌은 北學에 있다고 보고 명나라를 숭배하는 이념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상에서 허생전에 나타난 박지원의 思想을 부의 문제와 선비의 道와 유토피아 그리고 북벌론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그는 허생전을 통하여 理想國건설을 시험해 봤고 북벌론을 批判하면서 당시의 위정자들을 통렬히 꾸짖는다.그리고는 사대부들에게 富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역설하고 있다. 허생전은 당시의 북학파들이 實學精神이 文學的 表現이라고 보여진 짧은 글속에 實學思想이 응축되어 있다는 점이 허생전이 갖는 의의라 할 수 있다.

朝鮮전기 外方人 文學
序 : 王朝 交替까지 해서 중세적인 문화구조를 재확립한 朝鮮 전기의 사대부는 漢文學으로 지체를 판별하고 규범을 수립하는 작업을 과거 어느때보다도 철저하게 수립했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거부반응이 작용하고 있었다.사대부중에서도 혜택에서 제외된 반발을 하고 나서거나 이단思想의 지류와 연결되어 文學의 질서까지 어지럽혀졌다.과거를 보아 입신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면서도 文學을 익혀 불만을 털어놓는 예외자가 생겨나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그런 조건에서 관인文學,사림文學과 구별될 수 있는 方外人 文學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方外人 文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김시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本論 : 方外人은 체계밖의 인물이다.지재체제 안에서 주어진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을 보이며,이념적으로도 이단을 택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方外人은 훈구파에 대하여 적대적인 관계를 가질뿐 아니라,사림파에도 동조하지 않았으니,뚜렷한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 동향이 주목되는 바 있다.사림파는 물러나 있으면서도 중심지주로서의 안정을 누릴 수 있기에 지배이념의 강화를 주장하고 나아가서 경륜을 펼 것을 염원했지만,方外人은 지체에 결함이 있는 말단 사대부 또한 그 이하 위치여서 진출을 바랄수 없는데다가 자기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반발을 촉진해서 방황과  批判으로 일생을 보내기 일쑤였다.
이러한 方外人 文學인으로 대표되는 사람은 김시습이라 하겟다.김시습은 文學의  어느 한가지 방향만 택했던 것은 아니다.특히 시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듯한 特徵을 지닌다.思想적인 방황도 아울러 했다.사회적인 규범선정의 원리를 제공하는 정통儒學에 대해서 계속 반발하면서,반발을 儒學者체의 논거로 체계화하기도 하고,승려 노릇을 했던 만큼 佛敎로 대응책을 삼았음은 물론이고,道家思想에도 적지 않게 심취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儒學의 논거에 의해서 정통儒學의 批判이 가장 주목되는 성과이다.<神鬼設>,<生死設>,<太極設> 등을 써서 천지 사이에 하나의 기가 풀무질하고 있어서 太極이 理라는 것도 陰陽의 기일뿐이고 귀신이나 생사 또한 기가 陰陽으로 나뉘어 운행하는 양상일 뿐이라고 했다.이런 논거는 後期에 서경덕에게로 계승되기도 한다.김시습이외에 方外人들로 홍유손,정희량,어무적 같은 사람들이 체제 批判的인 思想을 가졌다.이상의 方外人들은 남아있는 文學작풀들이 별로 없다.

結 : 方外人들은 현실권으로부터 이탈하엿을 때 그들이 서있을 다른 현실이 어디에 마련되어 있는것도 아니었다.그들이 살고 있는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부정할 힘을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다.<방외형>人間의 자기 모순이 여기에 있다.이러한 方外人 文學의 셰계는 심각한 精神的 갈 등의 술회로부터 일전하여 아웃사이더로서 현실을 바라본 [玩世의 情操]내지 현실을 회피하려는 [忘世의 情操]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것이 외방인 文學의 特徵이며 方外人들의 思想은 후에 허균으로 이어져 체제批判的인 文學作品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

이백과 두보의 비교
두보 : 두보의 시는 이전 사람의 모든 형식을 계승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룬 것으로서 그는 각종 詩體를  익숙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 그의 5언 고시는 사회의 어지러움, 민생의 고통과 개인의 유랑을 묘사함에 뛰어났으며, 7언 고시는 情懷를 나타냄과 정치에 대한 견해를 서술함에 뛰어났다. 또 그의 5언 율시와 7언 율시는 감정이 아주 깊고, 격조가 뛰어나 唐代에 있어서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 그의 절구는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품격이 높아서 당대의 절구에 뛰어난 사람과 아름다움을 비교할 수가 있다. 두보의 시 내용은 광범하여 만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크게는 時事를 펴 늘이고 산천을 모방하여 그려내고 작게는 꽃, 나무, 대나무, 돌과 새, 짐승, 벌레, 물고기에 이른다. 오직 약삭빠르거나 얕게는 쓰지 않는다. 그의 시집을 펴보면, 벼슬아치들의 사치, 군사를 일으키는 포악성과 백성의 고통을 볼 수가 있고 황량한 변경, 엄숙한 군대모습과 장정들을 떠나보내면서 우는 처참한 광경을 볼 수가 있고, 또 웅장한 산과 언덕, 달리는 강물, 소슬한 가을 전경, 쓸쓸한 달밤, 농염한 봄꽃, 탁월하게 춤추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시인의 사랑은 恨, 슬픔, 격정과 함께 한가지 일, 한사물을 묘사하는 가운데 융합된다. 그리하여 작품 속에 무한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 그 광채와 정열을 느낄 수가 있고 그가 시대의 운명을 아파하면서도 자신의 평탄치 못한 일생으로 시대에 처했던 개인의 어려움을 증명하고 있다. 두보가 현실에서는 좌절했어도 시에서는 영광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李白 : 이백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낭만 시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생애 사적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이한 것으로 줄곧 유랑을 통하여 특수한 생명의 정조를 표현하였고, 풍부한 상상력과 달관한 夢幻的 성격이 배합되어 수많은 시 작품속에서 독특하고 기이한 문학의 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비록 開元과 天寶 시대의 흥망성쇠를 겪었고, 유리되어 벼슬길과 포부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현실생활의 고통이나 정치적 비리 등을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을 이러한 복잡하고 무상한 인간의 현실에서 뛰쳐나오게하여 仙界의 높은 곳에 서서 속세를 굽어 보듯 자유롭게 기분에 따라 마음껏 술을 마시고 기녀를 옆에 끼고 즐겼으며 혹은 칼을 잡고 협계에서 노닐고 천리를 홀로 다녔으며, 明月을 바라보기도 하고 情을 산과 강에 기탁하기도 하였고 때와 장소에 연하지 않고 마음껏 지내면서 자신의 본래 특성을 잃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 사람은 詩仙이라 일컫는다. 이백의 시풍은 거리낌이 없이 자유로우며 과장표현에 뛰어날 뿐 아니라 평이한 언어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선의 세계, 협객의 기상과 음주의 정취를 빼어나게 그려내었다. 이렇듯 진실한 자신의 품성이 드러나고, 조금도 수식되지 않은 그의 작품은 自我의 才情과 정신의 동경을 전개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옛부터 오늘날 까지 많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공 자 의 역 사 관

<殷은 夏의 禮를 기초로 하였으니, 거기에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周는 殷의 禮를 기초로 하였으니, 거기에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혹 周를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백 세 후라도 알 수 있다.> 한 것이다. 이것은 子長이 십세 후의 일을 알 수 있느냐고 물은 데 대한 공자의 답인 것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우선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은 공자가 역사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자가 역사발전을 보는 눈은 근본적으로 <損益>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는 인격완성의 준거가 되며, 또 사회적으로는 신분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예는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결국 어떤 시대와 사회를 평가하는데 있어서,거기에서 어떤  예가 행해지고 있었느냐가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유가의 전통상,예는 형식이요,그 예가 극진하게 행해지기 위하여서는 그 예를 행할 만한 덕 있는 인물이 요구되지만, 그것은 한 왕조 내지 시대를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그러하기에 공자는 10대 뒤의 일을 알 수 있느냐는 子長의 물음에 예를 준거로하여 답을 한 것이다.
주례는 지금까지 있었던 예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예이며,또한 시대적으로 가장 가까워서 비교적 완성된 체계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지향하여야 할 지고한 이상은 도이지만,현실적인 표준은 주례인 셈이다.
역사 발전의 영원한 지향점은 도의 완전한 실현으로,미래에 있다.그리고 현실에서 증거할 수 있으며, 문화적 집적을 거쳐 가장 완비된 형태로 남아서 전범으로 삼을 수 있는 예가 바로 주례인 것이다.
주례는 일단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어내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준거가 된다. 그리고 주례에 의해 유지되었던 주의 사회는 공자가 생각하였던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 상황을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에 접근한 주례에의 복귀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며,그것이 바로 정명사상의 근간이다.이 정명사상은 직접적으로 (論語)에 나타나지만,그것을 구체적인 역사에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春秋)라 할 수 있다.춘추의 이런 모든 포폄,평가는 바로 이 정명사상의 발휘이며, 결국 신분질서의 확립이라는 근본명제에 입각해 있다.
맹자가 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亂臣賊子가 두려워하였다.라고 한 것에도 춘추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춘추의 褒貶은 많은 것들이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현실적인 진행이 어떻게 어그러지고 있는가를 말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어떤 결과가 어떤 원인에서 왔는가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역사 변화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분명 夏,殷,周가 역성혁명에 의해 왕조가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그것을 도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순조로운 계승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유의하여야 한다. 이런 입장에 선다면 삼대의 교체는 그 사회적 모순이 극대화되어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통치자 한 개인의 실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된다.
도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진행이 얼마만큼 인간의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얼마만큼이 命에 달린 것인가, 또한 그 명의 근원적으로서 천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주어질 때 공자의 역사관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目    次
朝鮮後期 實學派 文學思想 1
허균의 文學思想     3
退?栗의 哲學 比較 4
朝鮮後期 ( 19C ) 委巷 (閭巷)文學 6
漢文 敎育의 問題點 및 改善 方案 7
麗末?鮮初의 官人 文學과 處士文學 9
道學派의 文學 ( 朝鮮中期 )  11
儒家思想의 特色 13
老莊 哲學의 根本 思想 ( 儒家와의 比較 ) 15
朱子學과 陽明學의 比較 硏究  17
實學의 發達史 20
韓國 性理學의 特徵 22
儒敎의 現代的 意義와 課題 24
孔子의 正名論 25
孟子의 革命思想 26
孔子思想의 현대적 이해  27
이규보의 現實認識과 文學 29
과거제 실시가 漢文學에 미친 영향 31
儒學의 敎育思想 32
통일신라의 遣唐派의 역할에 대하여 33
高麗시대 漢文學의 特徵  34
정지상,김부식文學의 特徵 35
孔子의 敎育思想 36
武臣執權期의 文學的 전환 37
許生傳에 반영된 實學思想 38
朝鮮전기 外方人 文學 39
李白과 杜甫의 比較 40
孔子의 歷史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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