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 과학의 아버지 (1997. 8. 13)
수학사를 읽어 보면, 17세기 전반에 있어서의 최대의 수학자라 하면 해석기하학의 창시 자로 유명한 르네?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로 되어 있는데, 그는 수학사에서 뿐 만 아니라 철학사에 있어서도 근세철학의 시조로서도 이름이 높다. 또 물리학은 물론이고 의학 연구에도 훌륭한 업적을 쌓아,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제, 근대수학의 기초를 이룩한 대 수학자 데카르트의 과학자적인 생애를 더듬어 보기 로 하자.
2. 라 플레슈에서의 유년 시대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의 토오레느주의 매혹적인 한 작은 도시 라에이에 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귀족으로서 대대로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다. 부친은 브레타뉴 의 법관 귀족의 상담역으로 있었으며, 모친은 르네가 태어난지 한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르네는 그 모친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는데, 이것이 후년 르네가 경제적으 로 자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르네는 어려서부터 체질이 약했기 때문에 그리 장생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그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이 악 조건을 오히려 공부에 대한 초기의 정열을 충족시키는 데 선용 했다.
10살 때, 그의 부친은 그를 유태인이 관리하고 있는 라 플레슈(La Fleche)의 학교에 입학 시켜 그 곳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8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면서 르네는 논리학, 윤리학, 물리학과 형이상학, 유클리트 기하학과 새로운 대수학 및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최신 업적에 이르기까지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르네는 평생을 통하여 변하지 않았던 하나의 습관이 몸에 붙게 되었다. 즉, 그 는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어도 된다는 특별한 허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독한 집중적 사고라는 선천적인 습성에 충분하도록 몸을 담글 수가 있었던 것이다.
3. 베에크만을 만나다
20세 때, 르네는 쁘와띠에(Poitiers) 대학에서 법학사의 학위를 받고 나서 파리로 돌아왔 다. 그곳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젖기도하여 사교계의 플레이보이가 되기도 하였으나 얼 마 가지 않아 이에 실증을 느끼고, 원래대로 수학과 철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르네가 다시금 용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한 수도사 메르센느였다. 르네와 메 르센느는 라 플레슈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으며, 메르센느가 죽을 때까지 르네와는 아주 절 친한 교우 관계를 유지 하였다. 1628년 르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떠난뒤에도 메르센느 는 그에게 최신의 과학 뉴스를 파리로부터 계속 보내 주었던 것이다.
1618년 르네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장교로서 복무하게 되었는데, 그의 과학적 흥미는 장 교로서 적합한 처지였다. 그리하여 탄도학, 음향학, 투시법, 군사기술, 항해술 등에 많은 관 심을 보였다.
1618년 11월 10일, 르네는 우연히 길에서 어떤 수학 문제의 풀이로 인해 당시 수학자의 지도자였던 베에크만(Isaac Beeckman)을 만나게 되었다. 베에크만은 청년 르네의 뛰어난 수 학적 재능을 즉시 인정하고 그를 칭찬했다. 이로부터 르네는 다시 이론적인 문제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동안에 베에크만은 르네에게 낙체(落體)의 가속도에 관한 수학적인 법칙을 찾 아내는 것이 어떤가 하고 제기 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은 이미 갈릴레이가 이 문제를 풀었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낙체운동에 관한 해법은 1632년 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아직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는 갈릴레이와는 다른 가정에 바탕을 둔 해법을 몇 가지 구하였다. 그는 그 때까지 수학적 해석과 실험과를 연결하는 방식을 몰랐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보아도 낙 체가 실제로 낙하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서술이 없었다.
르네의 생애 중 이 시기에 대한 이야기는 1905년에 발견된 베에크만의 일기에의해 알려 졌다. 이 시기는 문자 그대로 르네의 자기 발견의 시기였다. 청년 르네의 정신은 극히 다양 한 문제에 대해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4. 해석기하의 발견
1619년 3월 26일, 데카르트는 베에크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연속량 또는 불연속량으로부터 야기되는 어떠한 종류의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을 본래의 성질에 일치하도록 일반적으로 풀 수 있는, 전연 새로운 과학을 발견하였습 니다. 이로써 기하학에 있어서 발견해야 할 일은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 다."
이것이야말로 데카르트 자신이 그 해석기하의 발견을, 혹은 볼테에르(1694~1778)가 말한 바와 같이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의 발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새로운 과학」을 163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판하였고, 그 때는 그의 논문 「기하학」중에 그 원리의 설명과 몇가지 특수한 응용도 포함시켰다. 또 그 중에는 이 방법의 일반성이 아폴로니우스의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 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추곡선에는 고대 천문학자의 원, 케플러의 타원, 갈릴레이 가 포물체의 궤도를 서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포물선 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데커르트의 이 최초의 발명이 자연 철학자들에게 강력한 이론을 제공해 주었음은 분명하다. 만일 이것 이 없었다면 뉴우튼 자신이라 할지라도 곤란한 장애에 부딪혀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해석기하학은 확실히 데카르트의 가장 불후의 업적이며, 이에 의하여 역학 법칙을 대수 방정식의 꼴로 나타내는 방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데카르트의 생애를 통해서 한 마디로 그의 이론적 전개 방식을 말한다면, 그는 가장 작은 수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미 알려 져 있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고, 더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이끌어 주는 그런 하나의 체계를 이룩했다는 점이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의 모든 이론물리학은 이 단일 이론 체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 왔다고 할 수 있다.
5. 데카르트의 회심(回心)
베에크만을 알게 된지 1년 후에 데카르트는 유명한 '회심'-아마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극적인 경험-을 겪게 된다.
그는 30년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프랑스 군에 속해 있는 바바리아 공(公)의 군 대에 참가하여 다뉴브 강변의 먼 땅에서 겨울 3개월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해의 11월 10 일 그는 난방이 잘 되어 있는 방 안에 혼자 틀어 박혀서 많은 사색을 거듭하고 있었던 중 그는 두 가지 중요한 결심을 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물리학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과 기타 일체의 정리된 지식을 우선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어떤 출발점을 자명한 것으로 놓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과학을 다시 금 구축해 보자는 것이었다. 둘째로, 예술이나 건축의 완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의 거장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이 모든 프로그램도 모두 그 자신이 수행하지 않 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17세기의 데카르트의 전기를 쓴 작가 아드리앙 바이에(Adrien Baillet ; La vie de Monsieur Descartes <1691>)에 의하면 그날 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꿈 세가지를 꾸었다고 한다. 첫번째 꿈에 의하면, 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 쪽 다리가 약하기 때문에 서 있을 수가 없었는데 그 근처에 있는 동료는 아무 일 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한 번 눈을 떴으나 다시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두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뇌성이 들리고 방은 번갯불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잠에 빠졌을 때는 꿈 속에서 테 이블 위에 사전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의 다른 책에서는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 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그의 눈에 들어 왔다. 그와 동시에 낯 선 사람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Quiet Non'( ; 피타고라스로부터 나온 말로서, 데카르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에 있어서의 참과 거짓」으로 해석하였다.)이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몇 개의 시를 보여 주면서 그것을 강권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마지막으로 눈을 뜨기에 앞서 이미 이들 꿈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꿈은 그의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라 생각했다.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식에의 길을 여는 것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바이예가 매우 복잡하게 묘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 컨데 그것은 참된 지식에의 정당한 접근법에 대하여 데카르트 자신이 확신한 증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6. 데카르트의 우주론
데카르트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기획의 주된 방향과 그 경과를 차례차례로 써나간 그의 주요한 저서 중에 보이고 있다. 1618년으로부터 1628년에 걸쳐서 휴식없는 군대 생활과 여 행과 방탕 생활을 하는 사이에 그는 참된 과학의 개념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고도의 합 리주의적인 방법을 만들어 냈다. 이것들을 최초의 역작인 「정신 지도의 규칙」에 서술하 고 있으나, 1628년에 완성되어 있었으면서도 출판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들에 대한 방법론을 전개한 것은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로 옮겨 간 다음에 쓰여진 「방 법서설(方法序說)」에서였다. 그 사이, 1628년까지에 데카르트의 탐구는 그 다음 단계에 도 달하고, 제 1원리의 발견에 다다른 것이다. 이것을 그는 1641년에 출판된 「제 1철학에 대한 성찰(省察)」에서 전개해 보였다.
제 1원리로부터 그는 급속히 우주론의 마무리 단계로 향하여 마침내는 1933년에 「우주 론」으로 완성하였다가, 갈릴레이가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보도를 듣고 그 출판을 취소해 버렸다. 데카르트는 이 저작을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라고 하는 어느 정도 완화된 코페르니 쿠스적인 견해로 고쳐서 만들고 ㅁ말았는데, 그 개정판이 1644년에 와서야 「철학원리」란 이름으로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었다.
7. 데카르트의 와류(渦流)이론
혹성이 어찌하여 그 궤도 상에 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데카르트는 저 유명한 와류이론을 추진시켰다.
그 이론에 의하면 에테르의 미소한 입자들이 혹성이나 태양 주위에 거대한 회전흐름, 즉 소용돌이 속에 떠 있는 어린이의 보트와 같이, 이 태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반되고, 달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위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외라고 생각되는 것은 데카르트 가 그의 물리학의 체계의 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이, 혹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세 법칙으로 표시되는 사실과 일치하는가를 조사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와류이론을 분쇄한 것은 뉴튼이었다. 사실 뉴튼이 「수학적 원 리」라는 책 이름을 붙인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대한 도전을 표명하기 위한 목 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뉴튼은 와류이론을 유체역학에 속하는 문제로 간주하여 그것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8.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학에서 눈을 생리학으로 눈을 돌리면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을 알 수가 있다. 그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주제를 취급할 때에 빠져 버린 정성적 전제가 데카르트에 의하여 보다 더 근사한 여러가지 결과를 낳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윌리암, 하베이와 나란히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확실하다. 하베이가 실험적 분석의 대가인 데 반하여 데카르트는 전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한 것이 다.
데카르트 자신의 편지에 의하면, 그가 네덜란드에 머무른 긴 기간 동안에 가장 많은 시 간을 들여서 손을 댄 것은 인체의 해부인 것 같다. 기계론적 원리에 의해 그가 설명을 도 입시키려 한 모든 분야 중에서 생물학이 가장 힘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정보를 입 수하기 위한 것과 타당한 설명을 선택하는 데는 실험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생물학 분야였다. 그는 혈액 순환에 관한 하베이의 발견을 받아들이고는 있었으나 심장 의 작용의 기구에 대해서는 하베이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데카르트 쪽에 불리 하였으며, 두 사람 다 각각의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중요한 실험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결과는 데카르트가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한 가지 본질적인 논점(論點) 만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즉, 심장의 작용의 완전한 설명은 오직 그 것이 고동을 치고 있 다는 사실만 가지고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며, 종국적으로는 모든 물질에 공 통되는 운동에 의하여 설명하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에와서 이 애매한 현상에 대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설명은 오히려 지나치게 소박 하다고 하겠지만, 육체 전체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 따위는 근대적 생리학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설적 모델 방법이 바로 그 것이다. 데카르트의 생리학적 저작 중에는 눈의 깜박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 현상의 멋진 많은 관찰과 약간의 우수한 기계론적 설명이나 보행과 같은 복합 동작에 있어서의 여러 가 지 근육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9. 뉴튼과의 비교
데카르트는 구심적인 사상가로서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주로 하나의 확고한 중심적 이론 을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갔는데, 이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뉴 튼과 같은 사상가하고는 아주 대조적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아마츄어 과학자이기도 한 폰트넬은 뉴튼의 방법과 데카르트의 방법이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묘 사하고 있다.
'이처럼 대조적인 두 사람의 위대한 인물은-그러나 동시에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모 두 제 1급의 천재이며, 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지성의 왕국을 찾아내도록 숙명적인 운명을 타고 났다.
http://www.suwon.ac.kr/~alna/philo-descartes.htm
데카르트
<근세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1596년 3월 31일 뚜렌느(Touraine)의 명문 가정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의회의 고문이었다. 1604년에서 1612년까지 데카르트는 앙리 4세가 세운 라 프레슈(La Fleche)의 예수회 학교에서 수학과 논리학 그리고 철학을 배웠다. 이 학교는 마지막 3년 동안 그에게 주로 철학교육만 시켰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더욱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 학교를 떠나기 전해에 배운 수학과 대수학에 관한 칼비우스(Calvius) 신부의 논문이었다. 1612년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자 파리의 사교계에 나가 청년시절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아 그를 다시 책 속에 묻히게 했다. 1616년 그는 프와티에르에서 법률학 학사시험(licence)에 합격하지만 그의 법학공부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법학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제부터 <삶>이라는 책을 공부하기 위해서다. 1618년 그는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동맹국인 네덜란드로 가서 오랑쥬(Orange)의 왕자, 낫소의 모리스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당시에 수학과 수리물리학의 문제에 몰두했다고 한다.
1623년부터 1625년까지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로레토(Loretto)로의 성지순례에도 가담했다. 1626년부터 2년 동안은 파리에 머물면서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했다. 그가 미완성 논문인 『정신지도의 규칙』(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을 쓴 것이 이 기간동안이었다. 이때 그는 올라토리오회의 창시자인 베륄르(Berulle) 추기경과 사귀면서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베륄르의 신앙형식은 절대적인 신중심주의였다. 그는 신과의 인과관계 속에서 인간의 독자적인 실체성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에로의 완전 몰입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데카르트의 실체관에 영향을 주면서 그의 형이상학, 특히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도 "완전한 것을 가정하지 않고는 불완전한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오라토리오회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그 논리적 근거를 둔 데카르트의 신의 존재증명이었다.
1628년 말에 그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은둔생활을 하며, 저술에 몰두했다. 1629년 로마에서 관찰된 환일(幻日)현상에 대한 그의 사색은 항성들, 중력, 밀물과 썰물을 비롯한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인간과 인간의 육체에 대한 설명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 동안의 생각을 정리하여 1633년에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완성했다.
1637년에는 자연연구의 성과를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이라는 세 가지 부분의 시론으로 묶어 『방법서설』에 덧붙여 익명으로 출판했다. 이를 나중에 다시 고쳐 『자기의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모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 및 이 방법의 시론인 굴절광학, 기상학, 그리고 기하학』이라고 했다. 그후, 프랑스어로 쓰여진 『방법서설』이 탄생했다. 이 책은 아직가지도 스콜라 철학이 지배함으로써 속단과 편견이 이성적 판단보다 우세하던 당시의 상황하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할 규칙을 이성에 의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1644년 그가 자신의 철학을 체계있게 정리하여 라틴어로 출판한 책이 『철학원리』(Principia philosophae)이다. 전체가 4부로 되어 있는 『철학원리』는 제1부『인간 인식의 원리에 관하여』와 제2부『물질적 사물의 원리에 관하여』가 이 책의 핵심이다.
한편 이때부터 데카르트는 윤리적인 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여러 사람과 많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다. 당시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던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엘리자벳(Elizabeth) 에게 최고선(最高善)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이것이 1649년에 출판된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철학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의회의 탄압을 받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철학은 새롭다. 둘째, 그것은 젊은이들을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셋째, 그것은 여러 가지 거짓되고 불합리한 견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결국 데카르트는 1949년 네덜란드를 떠나서 스웨덴 왕 크리스티나의 개인교수가 되었다. 그당시 그가 쓴 『평화의 탄생』(La Naissance de la paix)는 "평화가 다시 오면 사람들은 마을을 다시 세우고 / 씨를 뿌려 숲을 다시 이루고 / 성을 쌓으며 / 밭을 비옥하게 하니"와 같이 지상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 후 폐렴에 걸려 1650년 2월 11일 54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http://math.kongju.ac.kr/math/bag/1funbag.html
함수의 이론적 배경
1. 함수의 그래프의 역사
함수야 말로 우리의 주변 현상의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법칙이나 규칙을 연구 표현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함수를 좌표평면에서 그래프로 나타내기를 시도한 사람은 데카르트(Descartes, R. 1596-1650)이다. 그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기하학과 해석학을 하나로 묶는 오늘날의 해석기하학을 창시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기하학적 내용을 대수적 방정식으로 나타내어 그 결과를 기하학적으로 다시 번역하는 것이다. 또한 함수의 개념을 명확히 곡선의 방정식으로 나타내는 획기적인 표현법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의 본질은 좌표 (x,y)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직선에 의한 양수와 음수를 표현함으로써 기하학과 대수학이라는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수적 방정식을 그래프로 나타내어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다.
2. 1차함수와 2차함수의 역사
갈릴레오(Galileo, 1564-1642)는 여러 가지 운동을 연구하는 중에 "비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일차함수의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등가속도 운동과 같은 변화하는 물리적인 현상을 이차함수를 사용하여 시간과 거리의 관계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갈릴레오의 관찰에 의하면 높이가 같고 기울기가 다른 경사면을 따라 어떤 물체가 내려올 때 걸리는 시간은 경사면의 길이에 비례한다. 또한 등가속도 운동을 하는 물체가 움직인 거리는 그 거리까지 움직이는데 걸린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것을 식으로 표현하면 시간을 t , 경사면의 길이를 m , 거리를 s라 할 때
t = am
s = bt 2
으로 나타낼 수 있다(a, b : 상수). 이것이 1차함수, 2차함수의 실제적인 표현이다.
http://www.mathlove.co.kr/pds/materials/episodes/decart2.htm
데카르트 2 : 식과 도형을 연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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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수학에서 일차방정식, 이차방정식과 같은 대수 문제는 쉽게 해결하면서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도형 문제에서 해를 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특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보조선을 그어야 풀 수 있는 도형 문제는 수학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학생들에게조차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비논리적 비약'에 불만을 느낀 데카르트는 일찍이 대수학에 관심을 두었다. 대수는 기하와는 전개 방식이 좀 다르다. 기하학이 종합적인 데 반해 대수학은 분석적, 또는 해석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정식을 풀 때, 그 값을 알지 못하는 미지수를 x라 놓고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여 '2x+3=7'와 같은 결론을 얻으면 그 후의 순서는 기계적 조작만으로 그 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대수학의 기호화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처럼 상수는 미지수는 으로 나타내었다. 와 같은 기호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전에는 과 같이 간단한 표현을 'A quardratum, B solidum' 또는 'AA, BBB'와 같이 사용하였다고 하니 그의 기호법이 얼마나 간단하고 시각적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하나로 묶은 '해석기하학 덕분에 변화의 개념은 없고 도형의 성질만을 연구하던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가 극복되었고 수학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근대 과학의 터전을 닦은 그는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스웨덴으로 간지 몇 달 후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는 평소의 그의 말처럼 54세의 일기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http://www.kotima.com/KOREAN/artcollge/mihak/mihak2.htm
이 글은 John Hyman의 The Imitation of Nature (Oxford: Basil Blackwell Ltd, 1989) 제1장 'The Cartesian theory of vision'의 번역이다.
제1장. 데카르트의 시지각 이론
1) 은유와 유비는 과학의 비계설치scaffolding이다. 케플러의 망막 이미지 이론은 눈과 암상자camera obscura 간의 유비 없이는 건축되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백오십년 후에 다윈은 ≪종의 기원≫의 첫 장 대부분을 비둘기 기르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에 바쳤다. 다윈과는 달리 케플러는 자기 자신의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이 이미지 혹은 화상picture은 어떻게 망막과 [시]신경 속에 위치한 시지각 능력에 결합되어지는가와, 그것은 뇌의 공동(空洞)cavity 속에 있는 영기spirit에 의해 시지각 능력의 영혼soul 혹은 법정tribunal 앞에 나타나도록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시지각 능력이, 영혼에 의해 파견되어진 치안판사와도 같이 마치 하급법정에라도 내려가는 양 뇌의 회의실을 나와서 시신경 혹은 망막으로 내려가 이 이미지를 만나는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게 되었다(Kepler, 1939, pp. 151-2).
2) 망막 이미지 이론은 중세 광학의 핵심적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했다. 이제 비계설치는 그 목적을 다했으며 철거되어졌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러는 대신 케플러는 그것을 건축물의 일부로 잘못 보았다: 그가 과학적 문제라고 해석했던 것은 은유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써, 그리고 그의 주목할 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지각 이론을 혼동의 상태에 남겨놓았다.
3) 이 첫 장에는 나는, 그러한 혼동을 근절시키고자 한 데카르트의 혁신적 시도를 기술할 것이다. 나는 데카르트가, 시지각 이론을 그 시초부터 지배해 왔었던 한 쌍의 유비들을 조작
함으로써, 그리고 지금까지 정설이 되어 있는 하나의 묘사depiction 이론을 내놓음으로써, 시지각 이론을 혁신시켰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첫 번째 유비의 지지자들은, 세계를 보는 것은 세계의 화상들을 보는 것과 같다고 제안한다; 케플러에 의한 눈과 암상자 간의 유비는 --이 유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예견되어졌던 것이다--이 테마에서의 한 변이이다. 두 번째 유비의 지지자들은 시지각을 지팡이의 사용에 비유한다: 공기는, 지팡이가 압력들을 손에 전달함으로써 어둠 속에서 우리가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가시적 대상의 인상을 눈에 전달한다. 앞으로 내가 보여주게 될 것이지만, 지팡이 유비 쪽을 편든 데카르트의 화상 유비pictorial analogy 거부와 그의 묘사 이론은, 고가의 진주인 케플러의 망막 이미지 이론을 그것의 어두운 세팅으로부터 구출해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4) 데카르트는, 케플러의 망막 이미지 이론은 눈의 광학을 정확히 기술하는 반면에 화상 유비는 오도적인 것이며 기계론적 지각 이론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목적했다.
당연하게도, 데카르트가 직면한 주요 장애물은, 케플러의 이론이 전통적인 내향 전달주의의 주장들을 입증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가정되어진다는 점이었다. 내향전달주의란, 방사
radiation는 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첫째로, 내향 전달주의자들에 의해 설정된 형상form 혹은 닮은 상species은 망막 위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케플러가 확증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동의되어졌다. 그리고 둘재로, 그것이 눈까지 그리고 눈을 통해 전달되는 방식을 정확히 기술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동의되어졌다.
5) 근대의 시지각 이론은 케플러와 더불어 시작한다고 일반적으로 가정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크롬비Alisdair Crombie는 자신이 '기계론적 가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케플러가 포용했기 때문에--즉, 그가 시지각 이론을 기계론적 생리학의 제약 내에서 설명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눈의 광학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는 제안을 한다. 크롬비의 설명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모든 설명들과 구성물들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이유들로 인해, 눈의 굴정 광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의 시지각에 대한 분석은 알하젠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알하젠과 동일한 이유에서, 똑바로 서 있으며 좌우 방행이 올바르게 된 이미지를 산출할 물리적 배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Crombie, 1967, p. 39) "논이 이미지를 형성하는 굴절광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1603년의 케플러의 발견은, 그 야심에 있어서나 결과에 있어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생리학에의 새로운 접근의 긴밀한 부분인# . . . 한 문제를 다루었다(ibid, p. 3).
6) 사실상, 케플러는 그는 망막 이미지의 역전과 반전에 당혹해 했다. 이것을 피하고자 했던 그의 고투와, 이것이 실패했을 때 그가 '왜 역전된 망막 상은 역전된 시지각을 초래하지 않는가?'의 질문에 대해 제공하는 설득력 없는 답변은(p.7# 참조), Crombie의 주장에 의혹을 던지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망막이 민감한 시각 기관임을 최초로 인지한 사람은 펠릭스 플레터Felix Flatter1536-1614))였으며, 렌즈가 눈의 앞 부분에 최초로 그려진 것도 그것과 거의 동시에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발견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눈의 광학은 정확히 설명될 수 없었을 것이다. 크롬비는 중세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재정식화되어야 했다는 제안을 했다. 과학사에 어떤 절대적 끝과 시작도 없는 반면에, 이장의 주된 목적은, 케플러가 중세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테카르트는 그 해결을 재정식화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7) 내향전달주의는 원자론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옹호되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에 따르면 지각이란, 어떠한 양상에 있건, 하나의 발산--그 발산의 원천인 지각적 대상과 질적으로 유사한--에 의해 야기되어지는 것이었다. 시지각의 경우 이 얇은 원자막--루크레티우스는 이를 뱀의 표피에 비유했다--은, 대상의 냄새나 소리 혹은 맛 보다는, 대상의 가시적 속성들--형태와 색깔--을 운반한다. 모든 감각들 가운데서도 시지각에 철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므로, 데모크리토스가 유사물(deikelon)이라고 불렀던 것은 곧이어 이미지eidolon라고 불리워졌다. 리키움Lyceum의 아리스토텔레스 후계자인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는 "대다수는 시지각이 눈 속의 이미지의 결과인 것으로 주장한다"라고 썼다. 그런데 그가 가리키고 있었던 이미지란, 분명, 각막에서 볼수 있는 이미지였다.
8) 그리하여 고대의 내향전달주의는, 관찰자와 대상 간의 어떠한 형태의 접촉이 시지각을 허용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가시적 대상의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어지는 접촉을 설정함으로
써 답했다. 직접적인 시각적 지각과, 대상의 거울 이미지에 의해 혹은 그것의 외관의 인공적 복제물에 의해 매개되는 그 대상의 간접적인 시각적 지각 사이의 이러한 유비는 역설적이게도 시지각을 설명하는 데 봉사했을 뿐 아니라, 감각들의 힘에 관련한 회의론을 표현하는 데도 봉사했다: Sextus Empiricus의 기록에 따르면 "Anaxarchus와 Monimus는 현존하는 것들을 무대 배경 그림에 비유했으며, 그것들이 잠잘 때나 미쳤을 때 경험되는 인상들을 닮았다고 가정했다."
9) 외향전달주의--방사radiation가 눈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론--은 유클리드에 의해 제안되어졌으며, 프톨레미(Ptolemy)에 의해 발전되었다. 하지만 유클리드의 시지각 이론은 물리적 기준들에 의해 평가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비록 프톨레미는 그 이론이 결여하고 있는 진지한# 물리적 내용물을 제공하고자 노력했지만); 그것은 수학 이론이었으며, 시지각장 visual field에 대한 기하학적 정의를 제공하고자 의도되었다. (4장을 참조할 것.)
10) 내향전달주의에 대한 물리학적 대안은 영매적mediumistic 광학 이론이었는데, 이에 따르면 시지각은 눈과 지각 대상 사이에 있는 공기 혹은 투명 매질에 있어서의 질적인 변화들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이론의 (아주 상이한) 버전을 옹호했던 반면, 그 이론을 이끄는 유비는 스토아 철학자에 의해 제공되었다. 갈렌이 기록하기를, 스토아 철학자는 "<우리는, 지팡이를 지닌 것과도 같이, 대기surrounding air에 의해 본다>고 이야기한다." 눈과 지각 대상 사이에 있는 공기 원뿔cone of air은 그 바닥면에 대상의 인상이 찍혀져 있으며, 이것은, 지팡이가 압력을 손에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즉시 눈에 전달되어진다.
11) 수학을 제쳐 놓고 본다면, 이 두 강력한 유비는 고대의 시지각 이론이 낳은 가장 영속적인 열매였다. 그렇지만 시지각 이론은 1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서 그것의 근대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이슬람 세계의 가장 진지한 광학 연구자인 알-킨디al-Kindi(d. c.866)는 외향 전달주의자였다. 그는 내향 전달주의--그가 믿기에, 그것은 유클리드의 것을 제외한 모든 시지각 이론들을 오염시켰다--을 거부했는데, 이는 내향전달주의가 관찰자와 관련하여 가시적 대상의 공간적 정향성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향전달주의적 형상은, 단지 관찰자와 마주하는 표면만이 아닌, 가시적 대상 전체를 표상하는 하나의 완전한entire 유사물로서 고안되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형상들의 방사를 설정하는 시지각 이론은, 알-킨디의 생각으로는, 예컨대 옆얼굴과 정면얼굴에서 보여지는 머리head의 상이한 측면들aspects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공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내향전달주의는 투시의 법칙들laws of perspective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12) 이러한 반대가 결정적이건 그렇지 않건--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반대를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바 왜냐하면 그들의 시지각 이론은 결코 수
학적 기준들에 의해 판단되어지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알하젠(c.965-1039)은 그러한 반대에 잘 대처하는, 그리고 시지각 이론에 대한 가장 위대한 중세의 공헌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내향전달 이론을 고안해 내었다. 알하젠의 이론은 눈 속으로의 방사에 대한 색다른 개념을 포함시켰다. 즉, "임의의 빛에 의해 조명되어진, 모든 유색의 물체의 각각의 점으로부터, 그 점에서 시작하여 그어질 수 있는 모든 직선을 따라서, 빛과 색이 방사되어 나온다"는 원리에 기초한 개념을 포함시켰다. 응집된 방사--완전한integral 형상들의 방사--의 개념이 아무리 알-킨디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만일 가시적 대상의 표면에 있는 모든 점이 모든 방향으로 방사하는 것이라면 눈 속의 모든 점은 사실상 시지각장의 전부로부터 나오는 빛과 색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 하므로 그 결과물은 전적인 혼동일 것이라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형상들의 방사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비응집적 방사가 어떻게 응집적 시지각을 낳을 수 있겠는가?
13) 문제는 단지, 너무 많은 광선ray들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응집적 시지각을 위해서는, 결정액#glacial humour(이것을 알하젠은 민감한 눈기관이라고 믿었다)의 표면에 있는 각각의 점이 시지각장의 오로지 한 점으로부터만 광선을 받는 것이 요구되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지각장 안에 있는 점들과 눈 안에 있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있어야만 한다. 알하젠은, 어떤 주어진 한 점으로부터 나오는 광선 가운데 눈의 표면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을 제외한 모든 광선을 무력한 것으로서 내버림으로써,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과녁을 향해 똑바로 발사된 화살은 비스듬한 각도에서 과녁을 맞추는 화살보다 더 깊히 관통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지각 능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수직 광선이 지닌 바로 그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이러한 수직 광선들은 피라미드 혹은 원뿔을 형성하는데, 그것의 정점은 눈의 중심에 있으며 그것의 바닥은 보여진 대상들의 표면에 있다.
14) 이러한 방식으로 알하젠은--굽은 표면에 의한 굴절에 대한 연구를 한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바--눈의 해부학과 생리학에 기하학적-광학적 모델을 부과하였으며, 눈과 이미지 생산 기계 사이의 유비를 케플러가 성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고대의 광학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세 전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알하젠은 시지각 연구를 위한 수학적, 물리학적, 의학적 접근방식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포괄적 이론으로 만들었다. 가시적 대상의 이미지를 파편화시키고나서 눈 안에서 그것을 재조립하는 교묘한 방편을 통해 그는, 가시적 대상의 점형태punctiform 분석 및 시지각장의 점과 눈 속의 점의 일대일 대응이라는 요구조건에 기초한, 내향전달 scheme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우세를 점하고 있는, 시지각 이론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15) 수직의 광선들은, 시지각을 책임지고 있는 바, 굴절 없이 눈으로 들어오며 눈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지만, 형상은 glacialis#의 표면으로부터 신경의 공동cavity으로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자신의 부분들이 지닌 고유한 위치를 보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선들은 눈의 중심에서 수렴하며, 일단 직선으로 뻗어나가게 되면 그 중심을 지나간 그것들의 위치들은 뒤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오른쪽인 것은 왼쪽일 될 것이며, 왼쪽은 오른쪽이 될 것이다. 위인 것은 아래가, 아래는 위가 될 것이다. (Alhazen, 1572, 2권 1장 2절)수직의 광선들은 눈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는 바,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하나의 점으로 축소되어질 것이고 가시적 물체의 질서(order)는 상실되어질 것이다; 혹은, 그것들이 중심을 지나서 계속 나아간다면, 이러한 질서는 역전되고 반전될 것이다. 알하젠의 내향 전달 scheme은 이러한 난점을 고려에 넣고 있으며, 광선들이 눈의 중심에 도달하기 전에 광선들
이 굴절함을 보증하고 있다(Linberg 1975, 4장 참조). 분명, 이러한 난점은 알하젠이 내향 전달주의와 수학적 시지각 이론을 융합시켜 놓기 전까지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닮은상의 역전과 반전 문제--버클리의 말을 빌자면, "전(全) 광학 이론의 주요 지점"이 될 운명이었던 문제--고려한 최초의 시지각 이론가였다.
16) 일대일 대응의 문제는--많은 시도들이, 역전되고 반전되는 이미지로 귀결되어지는 해결책의 선험적 배제에 의해 방해받은 이후에--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에 의해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 해답은 처음에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케플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참으로 나는, uvea의 구멍을 통해 지나갈 때 교차하는 원뿔들이 유리액#vitreous humour 가운데 있는 수정액#crystalline humour 뒤에서 다시 한 번 교차하며 그리하여 망막에 도달하기 전에 또 한 번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동안 스스로 괴로운 작업을 했다."(1939, p. 185) 그 두번째의 교차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케플러는 역전된 이미지가 왜 역전된 시지각을 낳지 않는가의 문제에 대한 긴 일련의 답변들 속에서 첫번째 교차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케플러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이 이 화상의 역전 때문에 괴로워 한다면, 그리고 이 역전이 역전된 시지각을 낳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을 고려해 볼 것을 요청한다. 시지각은 능동작용[actio]이 아닌 바, 이는 단지 조명illumination이 능동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시지각은
감각[passio], 즉 능동적 작용의 정반대이다. 따라서, 작용이 가해진 것들[patientia, 즉 망막의 화상들]은 그것들에 작용을 가하는 것들에 반대로 놓여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서로의 위치가 대응하게 된다. 이제 위치는 마주보는 점들을 연결하는 모든 선들이 동일한 중심을 통과해 지나갈 때 완벽한 반대가 되는 바, 화상이 똑바로 되어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러므로 화상이 역전될 때, Witelo를 기겁하게 했던 부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 . . (Kepler, 1939, p. 185)이러한 해결에 대해서는 거의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무익하며, 임시변통적이며ad hoc, 단지 케플러의 몰이해를 드러내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17) 이미지 생산 기계로서의 눈이라는 케플러의 개념은 이미지 수용을 위한 기관으로서의 눈이라는 전통적인 내향전달주의적 개념과의 단절을 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와 지각 대상 사이의 어떠한 형태의 접촉이 시지각을 허용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케플러의 답변 방식은 내향전달주의자들이 그 문제에 언제나 답해왔던 방식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시적 대상의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어진 하나의 연관을 설정했다. 이런 식으로 케플러는 직접적 시지각과, 거울 이미지나 지각 대상의 화상에 의해 매개되어지는 간접적인 시지각적 파악 간의 고대 유비에 호소했던 반면에, 데카르트는 스토아적 유비에 의지했다. 분명 여러분은 깜깜한 밤에 울퉁불퉁한 땅 위를 걸어가야 했던 경우를 당한 적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인도할 막대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 막대기로 여러분 주위의 다양한 물체들을 느낄 수 있음을, 심지어는 그것들이 나무인지 돌인지 모래인지 물
인지 풀인지 진흙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그러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오래동안 가져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종류의 감각이
약간은 혼동된 것이고 분명치 않은 것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타고날 때부터 눈이 멀어서 그것을 평생토록 사용해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점을 고려해 보기 바랍니다 . . . 나는 여러분이 이른바 '발광하는' 물체들의 빛을 단지 어떤 움직임이라고, 혹은 아주 빠르고 활발한 활동이라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장님이 마주치는 움직임이나 저항이 지팡이를 통해 장님의 손에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기와 여타의 투명한 물체들의 매개를 통해 우리의 눈에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Descartes, 1953, pp.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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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1596-1650)
1. 근대철학의 아버지
근대철학의 아버지이며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갈릴레오와 동시대인이었으며, 새로운 과학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견책을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자연의 빛 이외의 어떠한 지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교회의 권위나 다른 철학자의 철학은 물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여 얻은 결론 이외의 어떠한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점에서 그는 중세철학자들과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 이전의 모든 사변의 결과들은 그 결과들을 측정할 수 있는 명료하고 의심할 수 없는 원리가 세워질 때까지 제쳐 두거나 보류되어야 한다. 그러한 원리들의 도움 없이는 과학적이건 형이상학적이건 어떠한 체계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그가 읽었던 어떠한 책에서도 그러한 기초 원리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사고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적 사고만을 믿겠다는 데카르트의 태도는 결국 신의 관점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개개인의 관점에서 철학을 하게된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은총을 입은 계시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에 의해 부여받기는 했지만) 스스로가 가진 자연의 빛인 이성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철학적 관점의 전환을 통해 스콜라 철학의 쇠락을 가져다 준 급진적인 지적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것이다.
데카르트 저술의 주요 맥락이 되는 세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가 저술활동을 한 시기는 아직 카톨릭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있던 시대였으며, 데카르트 역시 예수교(Jesuit)의 신학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혁명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적 권위주의의 분위기 안에서 수행된 것이었다. 둘째, 새로운 과학(New Science)의 발전은 지식의 본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물음을 다시 묻게 했다. 우리가 현상세계에서 보아왔던 것에 대해 믿어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곧 우리가 지식을 얻는 것에 대한 방법에 물음을 제기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되었다. 세째로, 당시 유럽 종교계의 난맥상은 데카르트를 무척 괴롭혔는데, 그는 이성(reason)에 호소함으로써 당시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던 종교적 분쟁의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의 첫 주요 작품은 "방법서설"(1637)로서 불어로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진리의 체계적 발견과 오류의 제거에로 그의 이성을 경주하려는 그의 생애의 목표를 제시했다. 다음으로 그는 "제일 철학에 대한 성찰"(1641)이라는 걸작을 펴냈다.
2.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대만 해도 아직 철학과 과학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 자신 물리학에 전문적 지식을 가졌으며 수학적 천재성을 지녔던 데카르트 자신도 그러한 차이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곧 그는 인간의 지식이 나무와 같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나무의 줄기는 물리학이요, 뿌리는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형이상학을 통해서만 인간의 지식의 기초가 드러나게 된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의심의 방법'(method of doubt)을 통해서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감각과 기억이 보여주는 증거들은 의심할 수 있으며, 과학적 사고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가정들도 의심할 수 있다. 예를들어 나는 공간안에 있는 대상들의 세계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다. 내가 알고있는 모든 것, 혹은 내가 알고있다고 믿는 모든 것은 한같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해볼 수 있다. 또한 데카르트는 여기서 어떤 천재적인 악마(evil genius)가 있어서 나로 하여금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도록 속이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고 한다. 내가 지금 경험하는 세계가 그런 악마에 의해 유도된 착각이 아니라는 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의 상식적인 세계관 역시 악마에 의해 유도된 착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통해 데카르트가 도달한 결론은 그는 그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곤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절대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 지식의 유일한 기초는 따라서 어떤 이유에 의해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형이상학은 그저 명백할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자명한 진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생각은 연역(deduction)이라는 수학적 방법의 사용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연역에서 모든 원리는 다른 원리나 전제들에 기초하여 이미 확립된 선행하는 원리들로부터 도출된다. 궁극적으로 모든 원리는 근원적인 일련의 정의(definition)들과 공리(axioms)들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리란 증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진리를 의미하며, 정의나 공리에서 원리들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은 원리들이 자명한 진리로부터 도출된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원리로 여길 수 있는 것은 확실한 토대에서 출발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의 출발점은 더 이상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지식의 전제가 될 수 있는 공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바로 그 공리는 '나는 생각한다' 혹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표현되는 명제이다.
3. Cogito, ergo sum.
데카르트에 의하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참이 아닐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이것은 필연적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틀릴 수도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 왜냐하면 설사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의심한다 해도 바로 나의 그 의심이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확증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는 명제다. 그저 그 명제를 생각한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그 명제의 진리성이 확보된다. 그래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 명제에서 데카르트는 그가 원하던 신념의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의심할 수 없는 기초를 발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강조하듯 이 명제가 순전히 이성의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진다는 점이다. 즉 누구든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과정에 의해서 알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빛의 존재는 임의의 가정이 아니다. 어떤 생각의 진리성이나 논증의 타당성을 이성이 쉽게 알아내기 위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다음의 예를 보자. 나는 'p 그리고 q'라는 명제에서 p가 귀결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자연의 빛의 기초적 작용이라 설명함으로써 데카르트는 'p 그리고 q'와 'p' 사이의 관계를 내가 명석(clear)하고 판명(distict)하게 인식하는 무엇이라고 한다.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모든 것은 내가 이성의 자연의 빛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와 자연의 빛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한 후에 그 자신의 본질에 대해 반성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사고하는 것은 틀림없다. 게다가 나는 나 자신을 사고하는 것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은 나의 본질이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모든 의식작용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생각하는 것 외에는 나의 본질이라고 할만한 속성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하는 것(thinking thing)으로 존재한다. 예를들어, 내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나 자신을 이 몸 없이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이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도 그러할 것이냐는 신앙적인 문제이긴 하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계속 존재할 것이다. 불멸성의 가능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은 여러 점에서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철학에 있어서 몇백년 동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몸과 마음에 대한 진정한 구분이 있다는 데카르트주의적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4. 신 존재 증명
그 자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논의한 다음 데카르트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가 가지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다지려 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그가 확립한 자신의 존재와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본질은 이른바 '일인칭적 사례'(the first person case)는 된다. 그러나 이제 일인칭 관점을 벗어나는 존재에 대한 논증이 필요하다. 즉 객관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그의 사고나 지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그 세계는 어느때건 그에게 나타나는 것 이외의 것일수도 있는 그런 세계로서 그 세계의 본질은 부단한 탐구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일인칭 관점의 특색은 존재와 나타남 간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의식적인 마음의 상태는 그것이 나에게 보여주는 바 대로이며 주관성을 넘어서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질서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 자신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존재를 최소한 하나 확립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한 존재와 관계하여 그는 그 자신을 객관적인 대상 세계의 일부로서 위치시킬 수 있어야 했다. 여기서 그는 신의 존재를 확립하게 되며, 여기서 그의 선택이 가지는 방법론적 중요성은 지대하다.
데카르트는 이른바 우주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이 두 논증은 그가 중세철학의 전통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중세적 개념들에도 참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론적 논증은 다음과 같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다. 내가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않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장 완전한 존재, 즉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결과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인에도 실재성(완전성)이 있다는 것은 이성의 빛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가장 완전한 존재의 관념은 가장 완전한 관념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념의 원인 역시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나에 의해 나온 것일 수 없다. 그 원인은 완전한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바로 신 자신이다. 이 논증에 결정적인 전제로서 결과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인에서도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에 포함된 것은 존재론적 논증에 의해 요구되는 가정들로서 실재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사물의 속성 (술어)이라는 것과 실재 (존재)는 일종의 완전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 가정을 허용한다면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논증은 곧바로 이어진다. 나는 가장 완전한 것의 관념을 가진다. 나는 그런 존재가 모든 완전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한다. 따라서 이 관념은 존재를 포함하며,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논증을 우주론적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현실 세계에 관한 전제 (내가 신의 관념을 가진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는데 있다. 이러한 논증의 일반적인 유형은 그저 지금 상태로 있는 세계의 원인을 계속해서 찾아 나가는 것으로서 이를통해 제일 원인에 도달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원인 causa sui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가짐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론적 논증은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존재론적 논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존재론적 논증은 어떻게 신이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신존재증명을 통해 데카르트는 이제 그가 원했던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먼저 데카르트 자신이 조그마하고 유한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속이지를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외부세계가 있다는 것을 신이 속일 이유가 없다. 그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5. 정신과 물체
데카르트는 정신은 생각하는 것이지만 연장적(延長的)이지는 않은 반면, 물체(신체)는 연장적이지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생각 또는 사고한다는 것은 의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저 '생각하는 것' 외에 '느끼는 것', '지각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연장적이라는 것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은사고하는 실체이며, 물체는 연장적 실체인데, 어떠한 실체도 사고하며 동시에 연장적이지는 않다. 이러한 생각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무척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물론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잘 비켜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일뿐 아니라 분명 공간을 점유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질은 사고하는 것이라 하고 있지만, 인간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것은 어떠한 실체도 동시에 사고하고 연장적일 수 없다는 데카르트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듯 하며, 인간은 실체인가 아니면 실체들로 이루어진 것인가의 문제와 더불어 이른 바 심신문제(the mind-body problem)라는 골치아픈 철학적 문제를 일으킨다.
심신문제는 분명 데카르트 자신을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신의 경우 연장적이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정신이 위치를 가진다고 할 수 없다고 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두뇌의 일부인 송과선(the pineal gland)가 바로 정신이 위치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가 합하여 개별적 인간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 이 경우 서로 별개의 실체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데카르트가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른 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하여 현대의 심리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
데카르트 철학의 또다른 중요한 측면은 이제 형이상학이 인식론에 종속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는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질문의 귀결로서 그의 사고는 내적으로 향하게 되고, 그의 마음의 내용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대두되는 문제가 일인칭 특권(first-person privilege)의 확실성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다는 것을 특권적으로 알 수 있다. 이 특권은 내가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질 때 부과되는 어떤 특권과도 매우 다르다. 나의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나만이 가장 확실하게 안다. 내가 어떻게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남이 어떻게 느낄까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은 내가 나의 마음상태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지식이다. 이를테면 내가 치통을 느낄때 나는 나의 치통에 대해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너무나도 확실하게 내가 치통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안다. 반면, 나의 친구 A가 느낀다고 주장하는 치통에 대해서 나는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A가 치통을 가지는지의 여부에 대한 확실한 지식 조차 가질 수도 없다.
이런 나의 마음상태의 확실성은 확실성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확실성의 정도에 따라 체계적인 세계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 스스로 이러한 지식의 기초(foundations of knowledge)에 대한 관점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성주의적 신존재 증명에 의존함으로써 일인칭 특권이 아니라 코기토의 특수한 논리적 위치를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사고에 중요한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관점이 완전하게 발달되어 나온 것은 경험주의의 전통이다.
이러한 견해는 근대 이후의 인식론과 20세기의 심리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는 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나는 확실히 알 수 있고, 사물에 대해서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대조는 나는 비물질적인 실체적 존재로서 몸에 우연적이고 임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실체이지만 물리적인 실체는 아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견해는 많은 철학자들에게 작용했다. 라일은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 1949)에서 '기계속의 정령'(the 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듯이, 데카르트적 관점은 거의 모든 인식론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착각으로 여겨질 수 있다.
http://www-2.knu.ac.kr/~sophia/html/desca.htm
方法的 懷疑의 哲學者 - 데카르트의 思想
? 목 차 ?
Ⅰ. 데카르트 철학성립의 시대적 배경
Ⅱ. 데카르트의 생애와 저서
Ⅲ. 데카르트의 사상
1. 데카르트의 방법
2. 방법적 회의
3. 회의의 반전과 cogito
4. 진리의 기준
5. 신(神)의 존재
6.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
Ⅳ. 데카르트의 영향
Ⅴ. 맺 는 말
Ⅰ. 데카르트 철학성립의 시대적 배경
17세기는 인간의 삶의 구석구석과 유럽전역을 강타한 위기의 시대였다. 서구는 임금의 하락, 해고, 기근 등 경제 위기에 휩싸였고 그로 인해 서구는 불안정 상태에 빠졌는데, 이는 유럽 어디에서나 동일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었고, 가능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날로 심각해 졌다. 더불어 프랑스에서는 압력단체들이 국가를 파국으로 몰고가고, 지방과 도시에서는 이따금 소요가 발생하는가 하면 영국의 의회는 왕과 충돌하는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문화 또한 위기를 맞이 하였다. 감수성은 과잉속에서 바로크 예술로 귀결되었고, 도덕적?종교적인 위기가 도래하였고, 이어 인식의 위기 상태로 이어졌다.
17세기에 과학은 실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역학에 의해 실재를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리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체계에 타격을 가했다. 운동보존의 법칙이 1613년에 세워졌으며, 1628년에는 영국 의사 하비(Harvey)가 피의 순환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운동이 우주를 관장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 체계는 여전히 공인받고 있었다. 어떤 개념도 그 체계를 대신하지 못했으며 어떠한 전체적인 시각도 정신을 만족시킬수 없었기 때문에 이때를 인식의 위기의 시대라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인 위기와 인식의 위기라는 혼동속에서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1637)을 저술했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 이전의 사유를 종합하였고,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주의가 17세기의 철학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후 데카르트의 체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대체하게 되었고 이는 근대를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데카르트적 방법의 시대를 창출했다.르네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창시자', 혹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간주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따라서 17세기 근대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중심점에 자리한 데카르트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Ⅱ. 데카르트의 생애와 저서
「근세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1596년 3월 31일 투렌 지방의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1604년에서 1612년까지 데카르트는 앙리 4세가 세운 라 플레슈(La Fleche)의 예수회 학교에서 수학과 논리학 그리고 철학을 배웠는데 이 학교는 마지막 3년동안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철학교육만을 시켰다. 첫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인 《오르가논》을, 둘째 해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에 관한 책들을, 그리고 마지막 해에는 그의 《형이상학》과 《영혼론》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서도 데카르트가 더욱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 학교를 떠나기 전해에 배운 수학과 대수학에 관한 칼비우스(Calvius) 신부의 논문이었다. 1612년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여 잠시 파리의 사교계에 나가 청년시절을 만끽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다시 책속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1616년 그는 프와티에르에서 법률학 학사시험에 합격하지만 「삶」을 경험하기 위해 그는 법학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다. 1618년 그는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동맹국인 네덜란드로 가서 오랑쥬(Orange)의 왕자, 낫소의 모리스 군대에 입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카엔대학의 의학자인 베크만과 만나게 되었는데, 베크만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당시에 수학과 수리물리학의 문제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이듬해엔 국왕에 대항하여 가톨릭 계통의 바바리아 맥시밀리안 공이 만든 군대로 들어갔으며 그후 그는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에 옮겨 프라하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경이로운 과학의 기본원리들」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경이로운 과학의 기본원리들」이란 제반 과학에로 통일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1619년부터 1628년까지는 그의 여행기간이었는데 1623년부터 1625년까지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로레토(Loretto)로의 성지순례에 가담했었고, 1626년부터 2년동안은 파리에 머물면서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했었다. 이때 그는 오라토리오회의 창시자이자 절대적인 신중심주의였던 베륄르(Berulle)추기경과 사귀면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베륄르는 신과의 인과관계 속에서 인간의 독자적인 실체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에로의 완전몰입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데카르트의 실체관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형이상학, 특히 기회원인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628년 말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다시 은둔생활을 시작했는데 이후 1649년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 기간은 데카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데카르트는 전에 자신이 방법을 발견했을 때 생각해 두었던 노선에 따라 자기의 철학을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그는 물리학에 관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채택하여 1633년에 집필한《세계론》을 프랑스어로 완성했으나 같은 시기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소식을 접하게 됨으로써 출판하지 않았고, 그가 죽은 후 이 책은 출판되었다. 1637년에는 자연연구의 성과를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이라는 세가지 부분의 시론으로 묶어 《방법서설》에 덧붙여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기하학에 관한 논문인데, 이 글에서 데카르트는 해석 기하학의 원리를 설명하고 응용해 보이고 있다. 1644년에는 엘렉터 팔라틴의 딸인 엘리자베드 공주에게 헌정한 《철학의 원리》가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형이상학과 자연연구가 간명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한편 이때부터 데카르트는 윤리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여러사람들과 서신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당시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던 보헤이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엘리자벳에게 최고서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영혼의 정열에 관한 책으로 엮어졌는데 이것이 1649년에 출판된 《정념론》이다.
데카르트가 저술한 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경계심이 강한 네덜란드에서 많은 논박을 당했다. 이는 논쟁으로 확산되어 더욱 가열되었기 때문에 우트레히트 의회는 1642년 3월 17일 새로운 철학에 관한 논의를 전면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첫째, 그 철학은 새롭다. 둘째, 그것은 젊은이들을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셋째, 그것은 여러 가지 거짓되고 불합리한 견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비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데카르트는 1649년 2월 네덜란드를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샤뉘의 주선으로 수웨덴 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그녀의 개인교수가 되었는데, 여왕은 정신이 맑은 이른 새벽에 훌륭한 철학을 배우겠다는 요청을 했고, 이것은 은둔적 기질이 강했던 데카르트에게는 오랜 습관을 깨뜨려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650년 2월 1일, 이날 역시 데카르트는 이른 새벽 여왕에게 아카데미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고 돌아온 후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스웨덴의 추운 겨울 한밤중에 일어나야 하는 철학과 전혀 무관한 이 의무는 결국 데카르트가 이겨 낼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후 열흘뒤인 1650년 2월 11일 새벽 4시, 54세의 나이로 그는 결국 외롭고 고독했던 스웨덴 생활을 청산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Ⅲ. 데카르트의 사상
데카르트에 의하면 「최고의 선이란 신앙의 빛 없이 자연적 이성에 의해 고찰하는 한, 제1원인들에 의한 진리의 인식, 즉 지혜 이외의 다른것도 아니요, 이 지혜의 탐구가 철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지식을 관통하는 인간정신의 기본능력이 곧 자연적 이성이며 이것에 의해 탐구된 최고의 지식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이성의 빛이 밝혀낸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이성, 즉 「자연의 빛」이 찹아낸 확실한 지식이다.
데카르트의 주된 관심은 지적인 확실성의 탐구였다. 이를 위해 그는 권위를 버리고 이성을 취했으며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과거와 단절하고 철학을 새롭게 시작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진리체계를 자신의 이성능력으로부터 도출하려 했기 때문에 과거의 철학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았고, 사상이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상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이성 속에서 지적 확실성의 기초를 발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힘을 통해 인식할 수 있었던 진리들만을 다른 모든 지식의 토대로서 사용함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올바른 진리탐구의 방법, 즉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진리를 논증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참된 원리에서 또 다른 원리에로 쉽게 옮겨갈 수 있게 하는 확실한 방법을 통해 원리들 서로가 연결되는 확실하고 잘 정돈된 하나의 사상체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방법이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진리의 집합에 도달하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이 진리들을 「이성적인 틀에 맞도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의 첫 작업은 이성적인 틀, 즉 방법을 세우는 일이었다.
1. 데카르트의 방법
데카르트의 방법은 궁극적으로 수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분석적 방법을 사용하여 얻어진 단순한 방정식에 의거하여 온갖 종류의 곡선의 성질을 기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방법이 수학에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다른 분야에도 확장될 수 있으며 다른 분야의 탐구자도 수학의 확실성과 똑같은 종류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학자체가 방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법의 좋은 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수학을 통해 인간의 정신활동에 근본이 되는 방법으로 발견한 것은 진리란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파악되는 것, 즉 절대적으로 명석하고 판명하게 알수 있는 것이지 감각적 경험이 형성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수학이 추론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 나가듯이 우리도 우리가 알고있는 것으로부터 질서정연하게 추론해 나감으로써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정신작용은 직관과 연역으로 구성되며 이 두가지 정신작용이야말로 지식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데카르트는 말했다.
이 역시 직관과 연역이 곧 방법이라는 말은 아니며, 그가 말하는 방법이란 「진리에 위배되는 과오를 피하기 위해 직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지식에 이르는 방식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연역해야 하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직관은 연역적 추론을 필요로 하며 연역은 직관에로 환원 가능하다. 직관과 연역의 유사한 점은 양자가 모두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직관에 의해 우리는 완전하고 직접적으로 단순한 진리를 파악하며, 연역에 의해 우리는 「정신의 연속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행위」를 통한 진리에 도달한다. 직관과 연역의 이러한 관계가 바로 종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인 삼단논법과 데카르트 연역법의 다른점이다. 삼단논법은 어디까지나 「개념들」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데카르트의 연역법은 「진리들」상호간의 관계를 타나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직관과 연역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규칙들로 이뤄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규칙들이란 정신이 추론을 위한 적당한 출발점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안내자 들인 셈이다. 수년간 체계화하여 데카르트가 만든 규칙들은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에서 21가지, 《방법서설》에서 4가지가 있다. 이중《정신지도를 위한 규칙》에서 중요한 네가지 규칙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규칙 3〉우리가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고자 할 때 우리의 탐구방향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놓은 것이나 우리 스스 로가 억측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알 수 있고 확실히 연역할 수 있는 것으로 향한다.
〈규칙 4〉이것은 다른 규칙들이 엄격하게 지켜지길 요구하는 규칙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정확히 관찰한다 면 우리는 거짓인 것을 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정신의 노력을 헛되이 허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 5〉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한 명제들을 점차 더욱 단순한 것들로 줄여나가고, 더 이상 단순하게 되지 않는 명제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해서 이와 똑같은 단계에 의해 다른 모든 ㅁ여제들의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정확히 그 방법에 따르게 된다.
〈규칙 8〉탐구해야 할 문제들 속에서 우리의 오성이 충분히 잘 직관적인 인식을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거기에서 잠시 멈추어야 한다.
이보다 9년뒤에 나온 《방법서설》에서의 4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고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 판단속에 넣지 말 것.
〈둘째〉내가 검토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나의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 듯 위로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간에도 순서 가 있는 듯이 자연스럽게 단정하고 나아갈 것.
〈넷째〉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게 열거하고 전체적으로 재검토 할 것.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단지 그의 이성적인 힘만으로도 모든 철학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재견할 수 있으며 그가 제시한 규칙에 따라 그것들을 지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정신이 대상을 차츰 더 분명하고 판명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됨을 느꼈으며, 또한 그 방법을 어떤 특수한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수학문제에 적용한 것처럼 다름 학문들의 어려운 문제에도 똑같이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가 생각해온 목표는 철학 전체의 체계를 수학과 기하학의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의 실현을 위해 그는 철학을 완전히 새로운 기초 위에 세우려 했는데 그 새로운 기초, 즉 새로운 출발점이 바로 절대적 회의이다. 다시 말해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써 과연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그의 철학이 추구하는 제1의 과제였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반성과 회의의 작업을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먼저 부과했으며 또한 그는 지금까지 감각을 통해서 배워온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서 알아온 감각적 지각 내용은 참되고 확실한 인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점으로 미루어 우리의 감각능력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천문학, 의학, 생물학 등 기타의 자연과학들은 매우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학문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반해 대수학이나 기하학은 어떤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감각을 통해 발생되는 「외래관념」은 의심의 대상이 되지만 수학적 진리처럼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보이는 분석명제들는 확실히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에 의존한 모든 경험명제가 다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다. 2+3=5와 같은 수학적 명제가 아무리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명제라 할지라도, 그리고 경험명제가 도저히 의심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믿도록 했을지 모를 신의 기만을 그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데카르트는 그가 전에 참이라고 믿었던 것들 가운데 이제와서 어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회의는 회의를 위해 회의하는 소극적인 회의가 아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동요없는 토대 위에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적극적인 방법으로서의 회의였다.
3. 회의의 반전과 Cogito
데카르트의 목표는 회의가 아니라 확실한 진리의 발견이다. 그의 회의는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회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 회의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로 나아가려는 수단이었으며, 회의의 반전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동요하지 않는 진리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의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이 회의는 한가지의 절대적인 진리에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그는 회의의 절대적 한계점에 서게 된 자신을 보게 되는데 이와 같은 회의의 극점에 이르러 데카르트는 극단적으로 그가 기만을 당하고 있다거나 모두가 환상이고 거짓이라 해도, 그러한 사실을 회의한다 해도 그가 전혀 회의를 가질 수 없는 마지막 한가지 사실이 남게 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즉 「생각한다」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지하며,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상상하며 감각하는 것으로써 이렇게 사유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어떤 무엇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리가 매우 명석하므로 「Cogito, ergo sum」은 사색하는 사람들에게 질서정연하게 일어나는 모든 것 중에서 제1의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그의 사색 반전의 결과인데 이것은 그가 체계 있게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철학의 토대이자 출발점이 되는 철학적 합리화였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는 명제의 본보기이다. 이 명제는 나의 사유와 나의 존재간의 관계를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확실하며 더 이상 추론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이다. 이처럼 사유하는 나의 존재는 추리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한꺼번에 주어진, 즉 직관을 통해 발견된 진리이다.
4. 진리의 기준
데카르트의 cogito는 직관이 발견해낸 자명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공리처럼 그것이 추론이나 논증을 통한 증명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cogito의 자명성(철학의 제1원리)으로부터 진리의 기준을 일반화 하였다. 이와 같이 명석 판명한 지각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본질직관에 있어서는 한가지의 관념이 그 내용에 있어 명확하고 올바르게 파악될 뿐만 아니라 다른 관념들과 뒤섞이지 않고 그 자체의 동일성 안에서만 보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데카르트에게 있어 진리의 기준은 명석과 판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이 아무리 명석 판명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의 기만 앞에 그대로 노출된 셈이며, 그러한 관념의 참됨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기만하지 않는 신의 존재가 전재되어야만 한다. 때문에 데카르트에겐 기만하지 않는 신의 존재가 또 하나의 조건으로서 필요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실체론)과의 관계일 것이다.
5. 신(神)의 존재
데카르트에게 있어 명석과 판명이 진리의 기준이라면 신은 그러한 진리의 원천으로 제시되지만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중세의 방식과는 달랐다. 데카르트는 신관(神觀)에 있어서도 인식론적 문제나 자연학에서처럼 단순하고 자명한 논리를 전개했기 때문에 당시 신학자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외부세계에 대한 사실들에 기초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세의 방식과는 달리 그의 인식론에서도 그랬듯이 자신의 존재와 그 내면적 사유에 대한 합리적 인식에 의해서만 신을 증명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관념은 나와 함께 태어나기도 하고, 나에 의해 창출되기도 하며, 어떤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를 두고 그는 「어떤 것들은 생득적인 것이요, 어떤 것들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온 외래적인 것이요, 또 다른 어떤것들은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세가지 관념들 가운데 외래적 관념과 인위적 관념은 나 자신속에 그것의 기원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신에 대한 관념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나에게 주어진 관념이라는 말이다. 자연의 빛(이성)에 의한 이러한 생득관념의 인정은 사실상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이 정말 현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내 본성이 현재와 같은 것일수 없다는 것이다. 즉 내가 내 속에 하나님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존재증명은 「나」와의 관계에서 그 논거를 찾는 인과론적 증명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특징적인 증명방식 이외에도 아우구스트누스나 안셀무스처럼 존재로적 증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우리가 삼각형의 속성들을 인지하지 않고 삼각형에 대해 생각할 수 없듯이 신의 관념이 명석하게 신의 존재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존재는 완전성의 필연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신의 완전성 속에는 당연히 그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6.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
데카르트의 철학은 실체의 철학이다. 그는 무한한 실체, 즉 신과 유한한 실체를 구별하며 유한한 실체도 정신과 물체로 다시 이원화한다. 이 두가지 다른 실체들이 가지는 속성은 곧 사유와 연장이며, 사유와 연장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정신과 물체라는 두가지의 실체도 각기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의 주요한 속성을 생각하는 것이라 했다. 이는 정신적 실체는 언제나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즉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것이다.
물질적 실체의 주요한 속성은 연장성이다. 우리는 연장성 없이는 물질적 실체의 형태와 활동을 생각할 수 없지만 형태나 활동 없이도 연장성을 생각할 수는 있다고 한다. 사실상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물체의 속성은 연장성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연장성은 물체의 다양한 속성들(크기, 형태, 수, 운동성, 빛, 맛, 소리, 냄새 등)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데카르트는 그러한 성질들은 모두가 물체의 진정한 성질이 되지 못하므로 연장성만이 물체의 참된 속성이라 하였다.
데카르트가 이상과 같은 정신과 물체라는 두 실체에 대한 논의를 인간에게로 옮겨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데카르트가 보기엔 인간이라는 존재도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분리된 실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스콜라 철학에서는 인간존재가 형상과 질료로서의 정신과 육체의 관계와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통일체로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육체와 관련지워 정신에 대한 인식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육체도 정신과 무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물심이원론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제까지 명석과 판명의 기준을 이용하여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서 정신과 육체간의 구별을 강조해왔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은 육체를 일종의 부대적인 운송수단이나 도구로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정신과 육체는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사실상 데카르트는 두 실체간의 상호작용을 부인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이원론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두 실체는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교섭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고 자신의 이원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야 했다. 이후 데카르트의 추종자들은 정신과 육체간의 관계설정에 있어 불안했던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로 아놀드 괴링크스의 기회원인론 또는 심신병행설이 있다. 여기에서는 정신과 육체 사이에 있는 것처럼 믿게 되는 인과적 관계는 우리의 감각이 그렇게 속고 있는데 지나지 않으며, 사실은 그 배후에 신의 조화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Ⅳ. 데카르트의 영향
위에서 살펴본 데카르트 철학은 그 영향이 17세기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의 철학적 영향으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철학적 반성과 과학과의 밀접한 연관성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철학의 진정한 체계의 소유는 인간생활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추구한 것이 객관적 확실성과 자명한 진리이다. cogito의 발견을 통해 그는 물질계의 존재보다도 더욱 명백한 의식세계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나 의심하는 나의 존재가 아무리 확실하다 해도 의심하는 사실은 불완전함의 상징이었다. 불완전자는 완전자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또한 그는 신이 창조한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본질을 연장성으로 해석함으로써 기계론적 자연과학의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Ⅴ. 맺 는 말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보면, 그의 철학이 근대 정신의 발단이 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데카르트는 양식 또는 이성에서, 명증의 자연스런 빛에서 진리의 근거를 찾았으며, 인간의 이성은 모든 존재에 현존하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의 생득적인 지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철학하고 추론할 수 있다고 했다. 즉 그의 철학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에 호소했던 철학이었다. 이후 데카르트 주의는 17세기 정신적인 욕구에 부응했으며, 그 커다란 영향력으로 인하여 스피노자, 라이르티츠, 말르브랑슈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회의적 방법은 계승되어 나갔다.
http://my.dreamwiz.com/inaporia/frame2.htm
르네 데카르트,『방법 서설 外』,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방법서설>
( 원제 :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 서설)
*차례 제 1부 - 학문들에 대한 고찰
제 2부 - 방법의 주요 규칙들
제 3부 - 몇 가지 도덕 격률들
제 4부 - 형이상학의 토대
제 5부 - 자연학적 문제들
#논의사항
제 1부 - 학문들에 대한 고찰
1. 양식(bon sens)에 대하여
-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사람도 그것 만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각각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을 따라 생각을 이끌고, 동일한 사물을 고찰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 이성 혹은 양식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짐승과 구별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므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동일한 종의 개체들은 그 우연적 성질들에서만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그 형상들 혹은 본성들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2. 저자의 의도
- 이성을 잘 인도하기 위해 각자가 따라야할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이성을 인도하기 위해 '내'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학문들에 대한 고찰
- 모든 학문을, 아 주 미신적이고 거짓된 학문들조차도 그 정당한 가치를 인식하고 또 기만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해 음미해 본다.
① 우화 : 있을 수 없는 것을 마치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한다.
② 역사 :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상황들은 거의 대개 생략해서 나머지 부분들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게된다.
③ 시와 웅변 : 배움의 산물이기 보다는 정신의 타고난 재능이다.
④ 수학 : 그 근거의 확실성과 명증성 때문에 마음이 끌리나 단지 기계학(mecaniques)에만 응용된다... 그 토대가 확고부동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지금까지 이 위에 더 탁월한 것을 세우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⑤ 도덕을 다운 고대 이교도돌의 저서 : 덕(vertus)을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으나 덕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지 충분히 알려주지 않고 있다.
⑥ 신학 : 계시 진리는 우리 지성의 역량을 넘어서 있다.
⑦ 철학 : 철학에는 논쟁의 여지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따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한가지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참된 의견만 있을 터인데 아주 않은 의견들이 학자들에 의해 실제 서로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단지 그럴듯 하게 보이는 것을 모두 거의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다.
제 2부 - 방법의 주요 규칙들
1.이성적 판단의 확고함
- 책속에 있는 학문들(적어도 개연적인 근거만 갖고 아무런 증명도 갖지 않는 학문들)은 많은 사람의 의견들로부터 조금씩 구성되고 불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학문들은 양식있는 사람이 현전하는 사물에 대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단순한 추리만큼은 진리에 가깝지 않다. ...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와 스승의 지배아래서 가지게 된 유아기의 습관은 종종 서로 상충되며, 최선의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이성을 온전히 사용하고 이성에 의해서만 인도되어온 경우만큼 우리 판단이 순수하고 확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2. 참된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
1) 전부터 자신의 믿음속에 스며든 의견들을 모두 내던지는 작업(-->의심)을 시작했다.
① 논리학 - ⓐ삼단 논법 및 다른 규칙들은 모르는 것을 알 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설명해주는 데 도움이 되며 룰루스의 기예처럼 자신도 모르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데 모움이 될 뿐이다. ⓑ참되고 좋은 규칙은 많지만 해롭고 불필요한 규칙들도 그 안에 많다.
② 고대인의 해석학 - 도형을 구찰하는 일에 매달려 있어 상상력을 지치게 하지 않고서는 오성을 활동시킬 수 없다.
③ 근대인의 대수 - 몇몇 규칙과 기호에만 우리를 잡아매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계발하는 학문이 아니라 정신을 당황하게 만드는 애매모호한 기예로 전락한다.
----> 그리하여 논리학/해석학/대수의 장점을 겸비하면서 그 결함을 갖지 않는 어떤 다른 방법을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 논리학의 규칙들 대신에 충분히 믿을수 있는 4규칙
①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것. 즉,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②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③ 내 생각의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으로 나아가고 본래 전후 순서가 없는 것에서도 순서를 상정하여 나갈 것.
④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3) 수학(해석/대수)적 탐구 방법
- "나는 물론 수학이 정신으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희망을 품게하고, 잘못된 근거에 만족하지 않게 하는 데 익숙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 외에는 수학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 수학적 탐구의 유용성은 정신을 훈련시키는데 있다.
① 수학으로 불리는 개별 학문들은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여기서 발견되는 다양한 관계 혹은 비례(proportions)를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음을 본다.
② 비례 일반(proportions enqeneral)만을 검토한다.
③ 그 인식을 나에게 보다 쉽게 해줄 수 있는 대상 속에서만 그런 비례를 상정하는 것이 보다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이 비례를 그 대상에게만 결부시키지 말고 이에 어울리는 다른 모든 대상에게도 나중에 더욱 잘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보다 좋겠다고 생각했다.
④ (나아가) 비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떤 때는 그것들을 각각 고찰할 필요가 있고 또 어떤 때는 마음속에 간직하거나 여러개를 동시에 파악할 필요가 있다.
⑤ 그 각각을 더욱 잘 고찰하기 위해 그것을 선(lines)으로 상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는 선보다 단순하고 또 선보다 더 판명하게 상상력과 감각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⑥ 그러나 이 비례를 마음 속에 간직하거나 혹은 그 가운데 여러개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간략한 기호로 그것을 표기해야 하고 또, 이로써 기하학적인 해석과 대수가 갖고 있는 장점을 모두 취하면서 양자가 지닌 결함들을 상호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규칙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두 학문(해석/기하학)안에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 해결.
제 3부 - 몇가지 도덕 격률들
1. 몇가지 격률로 된 도덕을 잠정적으로 마련
①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고, 신의 은총에 의해 배워온 종교를 확고하게 견지하며,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려깊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취하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먼 의견에 따라 나를 지도함.
② 행동에 있어서 가능한 한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리 의심스런 의견이라도 일단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따라야 함.
③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세계의 질서보다는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생각 밖에 없으므로, 우리 외부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데 익숙해지는 것.
2. 결론
- 다만 자신의 이성을 계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치고, 진리 인식에 있어 자신이 규정한 방법에 따라 가능한 한 계속 나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제 4부 - 형이상학의 토대
1. 의심(방법적 회의)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고자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직하여 던져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① 감각을 의심
- 감각 은종종 우리를 기만한다.
② 기하학적 문제를 의심
- 기하학적 문제는 추리를 잘못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자신 역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리하여 전에 증명으로 인정했던 모든 근거를 거짓된 것으로 여겼다.
③ 깨어있음을 의심
- 깨어있을 때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다.
④철학의 제일원리 발견
- " ...이런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⑤ 의심하는 '나'의 현존
- 신체도, 세계도, 장소도 없다고 가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상할 수는 없고,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것의 진리성을 의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귀결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⑥ '나'의 본질과 정신
- 상상했던 나머지 다른 것들이 설령 참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단지 생각하는 것만 중단한다면,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게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없다. 이로부터 "나는 하나의 실체(une substance)"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장소도 필오 없고 어떤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 즉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정신"은 물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며 심지어 물체보다 더 쉽게 인식되고 설령 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신은 스스로 중단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2. 한 명제가 참되고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봄
("방금 확실한 것을 하나 발견했으므로, 확실성의 근거가 어디인지 알아야겠다.")
①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
- 만일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명석하게" 알지 못했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있어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확신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우리가 아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② 명석판명한 인식의 어려움
- "그러나 우리가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아는 데는 얼마간의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3. 명석판명한 인식의 근거
①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의 관념"의 원천 ; 신
- "계속해서, 내가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또 의심하는 것보다는 인식하는 것이 더 큰 완전성이므로, 내 존재는 아주 완전한 것이 아님을 반성했다. 그런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서 나보다 더 완전한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고찰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실제로 더 완전한 어떤 본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증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만일 참된 것이라면 내 본성이 어떤 완전성을 갖고 있는 한 내 본성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면 무로부터 얻었다는 것, 즉 그것은 내 결함 때문에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의 관념은 이에 해당될 수 없다. 그 관념을 무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 관념은 실제로 나보다 더 완전하고, 나아가 모든 완전성을 자신안에 갇고 있는 어떤 본성에 의해, 단적으로 말해 신에의해 내 속에 넣어진 것으로 보아야 했다."
② 인과론적 신증명
- "...이에 덧붙여,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완전성들을 알고 있으므로 나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의존하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부여한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③ 존재론적 신증명
- "...그리고 나는 기하학적 대상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몇가지 증명들을 살펴 보았다. 이때 나는 모든 사람이 이런 증명에 귀속시키는 저 커다란 확실성은 우리가 그것을 명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만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 그 대상의 현존(existence)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은 그 안에 전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삼각형을 상정한다면 당연히 그 세 각의 합은 두 직각과 같아야 하지만, 이 세상에 삼각형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은 이 증명 속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내가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다시 고찰해 보았을 때, 삼각형의 관념 속에 그 세 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고, 또 원의 관념 속에 그 모든 부분이 원 중심으로부터 똑같은 거리에 있다고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명증적으로 완전한 존재의 관념 속에는 현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따라서 나는 이 완전한 존재인 신이 있다는 것 혹은 현존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어떤 기하학적 논증 못지않게 확실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 "우리가 아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명제의 진리성조차도, 신이 존재 혹은 현존한다는 것, 그가 완전한 존재라는 것, 또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모두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보장"된다.
→ " 우리 관념들 혹은 개념들은 명석 판명한 것인 한에서 실재적인 것이고, 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래서 참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제 5부 - 자연학적 문제들
*『세계 및 빛에 관한 논고』의 내용을 요약
1. 빛에 대해 생각한 것만을 개진
- "...필요할 경우에는 빛은 거의 모두 태양과 항성에서 나오므로 태양과 항성에 관해, 천공은 빛을 전달하므로 천공에 관해, 유성, 혜성 및 지구는 빛을 반사하므로 유성, 혜성및 지구에 관해, 특히 지상의 모든 물체는 및깔을 가졌거나 투명하거나 빛을 발하고 있으므로 물체에 관해, 끝으로 인간은 이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이므로 인간에 관해 역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2. 신이 상상적 공간에서 구성한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 현재의 이 세계(ce monde)는 학자들 간의 논쟁에맡겨 버리고 반면에 "신이 만일 지금 상상적 공간들 어디엔가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기에 충문한 물질을 창조하고, 시인들이나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물질을 갖가지 부분들을 질서도 없이 다양하게 움직여서 뒤죽박죽의 혼돈상태를 만든 다음에, 자연에게 자신의 통상적인 협력만을 베풀면서, 자신이 확립한 법칙에 따라 자연이 움직이게 하는 일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이 새로운 세계에서 일어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만 말하자고 다짐했다."
3. 지구에 관한 고찰
- "신은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 속에 무게를 주지 않았다고 분명히 가정했음에도, 어떻게 해서 그 부분들이 똑같이 중심을 향해 끌리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지구 표면에 물과 공기가 있어서 하늘과 별의 위치, 특히 달의 위치로 인해 우리 세계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모든 점에서 유사한 밀무로가 썰물이 일어나는지를, 또 우리가 열대지방에서 볼 수 있는, 물과 공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과정을 설명했다..."
4. 불의 본성에 대한 설명
- "...불은 어떻게 생겨나고, 자라며, 불이 어떻게 때로은 빛이 없이 열만을 갖고, 또 때로는 열 없이 빛만을 갖고 있으며, 불은 어떻게 상이한 물체에 다양한 색깔과 성질을 초래하고, 어떻게 해서 불이 어떤 물체를 녹이고, 어떤 물체를 단단하게 만들며, 불이 어떻게 해서 거의 모든 물체를 태워 재와 연기로 변하게 할 수 있고, 끝으로 불이 어떻게 이 재로부터 단지 그 작용의 힘만으로 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5. 신의 세계 창조?보존 작용과 물질적인 것의 생성
- " ...신이 지금 이세계를 보존하는작용은 이 세계를 창조한 작용과 완전히 동일한 것임이 확실하고, 또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신이 애초에 그저 혼돈(chaos)의 형태만을 이 세계에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세계에 자연의 법칙을 세우고, 통상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협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창조의 기적을 손상함이 없이도 오직 이로써 모든 물질적인 것은 시간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을 종결된 상태로 고찰하는 것보다 점진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6. 무생물 및 식물에 대한 서술
7. 동물, 특히 인간에 대한 서술 ; 인간 신체와 이성적 영혼에 대한 가정
-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즉, 손이나 발 같은 외형적인 면 및 기관의 내적 구조에 있어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과 아주 유사한 인간의 신체를 만들었는데, 이때 신은 앞에서 기술한 물질만으로 이 신체를 짜맞추었고, 아울러 이성적 영혼은 물론이고 식물적 혹은 감각적 영혼으로 사용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처음에는 그 신체안에 집어넣지 않았으며, 앞에서 설명한 빛 없는 불만을 그 심장 안에 붙여 놓았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만족했다.......나는 신이 이성적 영혼을 만들고, 이것을 내가 기술한 방식으로 이 신체와 결합시켰다는 것을 가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 기능들을 모두 거기서 밝혀 내었던 것이다."
8. 심장과 동맥운동에 대한 설명
9. 인간과 짐승간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두가지 수단
- "......아무리 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미쳤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다영한 말(diverses paroles)을 정돈할 수 있고,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티기 위해 이야기(un discours)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반면에, 다른 동물들은 아무리 완전하고 태생이 좋더라도 그런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 까치와 앵무새는 우리처럼 지껄일 수 있지만, 우리처럼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을 보여 주면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선천적으로 귀가 먹고 벙어리닌 사람이 말을 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관을 짐승과 비슷하고 혹은 더 심하세 결여하고 있을지라도, 자기 나름대로 기호(signes)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고, 이 시호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배울 시간이 이쓴ㄴ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이해시킨다. 이는 짐승이 인간보다 적은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이성적 영혼과 영혼의 불멸
- "....나는 이성적 영혼을 기술하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다른 것과 마찬가디로 물질의 힘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창조된 것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성적 영혼은 선원이 배 안에 있는 식으로 인간의 신체 속에 깃들어 있다는 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 우리 영혼이 신체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게된다면, 우리 영혼은 본성상 신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ㅣ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들을 훨씬 잘 이해할 것이며, 아울러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원인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영혼 불멸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다."
※ 논의 사항
1)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라"는 데카르트의 도덕 격률은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인 신분상으로 공적인 업무를 다룰 위치에 있지 않으면서도 어떤 새로운 개혁을 노상 머리속에 그리는 주제넘고 침착치 못한 기질의 소유자"라는 사회개혁자들에 대한 비판에서 그 본심을 드러내는 바, 데카르트는 오직 "내 자신의 생각을 개혁하고 내 수유의 땅에 건물을 세우려고 한 것 외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의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인간 정신과 인간 사회를 철저히 분리시키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태로가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2)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철학의 제일원리가 "진리"이기 위해 데카르트가 기댄 "완전한 존재의 관념"의 원천은 "신"이다. 여기서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점을 지적해보자. 또한 데카르트의 "신"존재 증명을 따라가보고 증명과정의 헛점을 비판해보자.
3) 데카르트 철학의 진리를 보증해주는 것인 "신"인 만큼 데카르트의철학이 다소 신학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데카르트 철학은 스콜라철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데카르트의 어떤 점이 중세 철학과의 연속이고 또 어떤 점이 중세 철학과의 차이인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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