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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스피노자

by Casey,Riley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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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스피노자에 관한 독해

-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음. 마슈레이는 표현 개념이 스피노자의 것인 동시에 스피노자에게는 없는 들뢰즈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는 것이라고 함. 마슈레이의 글은 매우 재미있는 것이기에 다음에 다시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들뢰즈와 가타리를 묶어주는 테마인 내재성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과 행위의 문제를 중심으로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을 개괄하고자 함. 이 글이 제대로 펼쳐지기 위해서는 구성과 행위(agency)의 문제를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동작업에서 나타나는 됨(becoming)의 문제와 연결시켜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 단초만을 제시해 놓았음. 이는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각종 소개 및 요약글들을 보면 더욱 잘 이해되리라 생각됨.
- 1988이라 함은 들뢰즈의 <스피노자 : 실천철학>의 영어판을, 1992라 함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영어판을, 1987이라 함은 <천의 고원>의 영어판을 지칭하며, 뒤의 번호는 모두 쪽수를 가리킴.
- 스피노자의 저서의 경우 1951A는 <신학정치학논고>를, 1951B는 <정치론>을, 1951C는 <서한집>을 지칭하며 이는 모두 R. Elwes의 번역본을 참고함. 그리고 1985년 <에티카>를 지칭하는데 이는 E. Curley의 번역판을 사용하였음.

- 들뢰즈는 내재성 개념을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에 기초를 두고 발전시켜 옴. 내재성이라는 주제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주의에 있어서 ‘반-사법적’ 경향이라는 동기를 통해 탐구됨. 이러한 ‘반-사법주의’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에 관한 독해를 통해서 행위(agency)와 구성(composition)이라는 관계 사이에 정립한 연결관계와 관련해서 나타남. 바로 이러한 개념에 기초를 두고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후기 작업에서 이러한 스피노자적 개념들의 전유와 변이가 나타나게 됨.

- 들뢰즈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적 별종>의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네그리의 기획에 대해 설명. 네그리의 기획은 스피노자의 저작과 관련해서 들뢰즈 자신의 관심사와 몇가지 점에서 일치. 들뢰즈는 네그리와 자신의 공통적인 접근방법을 ‘반-사법주의’의 한 형태라고 기술. 사법주의의 근본 원리들을 기술하면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적 사유의 틀 안에서 인간 행위를 개념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새로운 정립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으로 기능하는 개념들을 전개하고 있음.
- 사법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것. ① 힘들은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② 힘들은 그 힘에 적합하게 일치하는 관계들을 만들기 위해서 사회화되어야 한다. ③ 그래서 권력(Potestas)의 매개가 있다. ④ 그 지평은 위기, 전쟁 혹은 적대와 불리불가능하며, 그것에 대해 권력이 해결책으로, 그러나 ‘적대적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사법주의를 이렇게 특징화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홉스를 연상할 수밖에 없음. 이하에서는 간단하게 홉스와 스피노자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함. (홉스를 매개로 하여 푸코와 들뢰즈를 탐구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주제일 것임).

1) 홉스와 스피노자
-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편재해 있는 상태. 자연상태 혹은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은 개인들의 욕망어린 추구에 대한 규범적 억제, 제한의 부재임. 원리상 자연상태에서 모든 개인은 자연권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으며,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추구할 수 있음. 그러나 실천적으로 볼 때, 욕망하고 있는 재화를 보호하고 사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다른 개인들의 활동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음. 따라서 자연상태에서 홉스식의 개별자가 자신의 욕망들을 규칙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의 권력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의 여백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임. 즉 자연상태는 각 개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타자들에 대한 지배의 관계를 세우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해당. 항구적인 위협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러한 상황의 불안정성은 개인들로 하여금 시민사회의 안전을 위해 결국 자신의 자기결정에의 자연적 권리를 양도하게 만듦. 자연상태에서 시민상태로의 이행은 자기이해관계의 합리적인 계산의 산물이며, 이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자기결정에의 권리를 제3자, 즉 주권에게 양도하게 만듦. 이러한 계약을 통해서, 혹은 개개인의 자연권의 소외를 통해서 무질서한 자연상태와 절대적인 단절이 일어남. 계약이라는 수단에 의해 창출된 주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지배하려는 충동을 전유하며, 그것을 결정된 한계들 내부에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절대적인 의무의 형태로 개인에 반하여 행사됨. 그러므로 주권이 부과하는 사법적 질서는 반-역량으로서, 즉 역량에 반하는 역량의 일종으로 작동하며, 바로 이것이 시민 개인간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듦. 왜냐하면 그것은 합리적 수단에 의해서 인간 정념의 본래적인 파괴적 본성을 억제하며, 따라서 법률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사적인 이해관계들을 중재(매개)함. -- 이 사적인 이해관계가 자연상태에서 억제되지 않았을 때에는 서로서로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되어 있음. 홉스는 인간의 사회성 문제에 대한 ‘적대적인 해결책’으로 사회계약과 사법적 질서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음. 

- 홉스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계는 약간 복잡함. 스피노자는 홉스의 정치철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자연권 사상가들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음. 그러나 그는 또한 아주 중요한 지점에서 홉스에 대립함. 스피노자가 홉스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와 관련한 이들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임. 홉스는 국가의 권리 혹은 권력의 정당성을 합리적 개인들의 동의와 관련해서 정의하고 있는 반면, 스피노자는 국가의 권리는 단순히 자기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현실적인 권력에 불과하며, ‘주체들의 권력에 대한 권력의 초과’일 뿐이라고 주장.(스피노자, 1951c: 369). 스피노자는 국가권력의 초월적 정당성에 관심을 두지 않고, 특수하고 역사적인 국가들을 산출하는 내재적인 권력관계들에 관심을 둠. 홉스의 경우 국가의 형성은 자연과의 절대적인 단절, 그리고 자연권의 인위적인 제한을 내포하고 있음.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 국가의 형성은 자연권의 발전에 상응하며, 이는 정념적인 생활과 연속되어 있는 순전히 자연적인 과정으로 제시. 홉스에 반대하여 스피노자는 자연권의 완전한 소외를 의심함. 스피노자에 따르면 개인의 자연권은 단순히 그/녀의 현실적 역량(potentia) 혹은 실존을 보존하려는 노력일 뿐이며, 따라서 권리/역량의 절대적인 소외는 개인의 실존의 파괴와 똑같은 것임. “어느 누구도 자신의 역량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전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권리를 이전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기를 그치게 된다. 또한 어느 누구도 모든 가능한 소망을 실행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최상의 역량을 가질 수도 없다.”(스피노자 1951a: 214). 즉 홉스의 계약은 원리상 스피노자적 틀 안에서는 불가능함. 스피노자는 사실 적어도 그의 초창기 정치저작에서는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 이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을 낳는 동의의 원리를 지시하기 위한 것임. 그러나 이 때의 계약은 홉스처럼 제3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계약당사자들의 집합체에 의해 형성된 전체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짐. 그러므로 이 전체의 역량은 주권적 권력을 보유한 자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그 ‘당사자들’의 집단적 역량임. “최고 권력의 통치의 권리는 자연권 자체에 다름 아니다. 자연권 자체는 한 사람의 권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된 대중(multitude)에 의해 결정된다”(스피노자 1951b : 301). 스피노자는 계약 속에서 제3자로의 역량 혹은 권리의 이전의 동력을 발견하려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는 개별성과 사회성의 관계에 대한 그의 배치(configuration)와 연결되어 있음. 
- 스피노자의 경우 자연상태에서 시민상태로의 이행은 단절이나 불연속성을 통해서는 표상되지 않음. 사회화는 홉스처럼 자연에 대립하며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전-사회적 이해관계의 장으로부터 초월적인 사법적 질서의 개입에 의해 일어나지 않음. 스피노자의 경우 ‘반-사회적’ 개인들을 사회화하기 위해서 계약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외재적 규범으로 부과하면서 어떤 의무감을 창출하는 자연권의 전이도 없으며, 사회적 관계의 기원에 어떤 의무적인 명령의 힘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의 정념적 질서와의 합리적인 단절도 존재하지 않음. 즉 스피노자의 경우 인간의 사회성 문제에 대한 홉스적인 ‘적대적인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음. 오히려 스피노자는 시민사회로의 이행을 이성의 자연적 역량을 포함하는 자연권 혹은 역량의 실행 및 집단적 발전과 연속적인 과정으로 제시. 이러한 집단적 발전은 순전히 자연적 법칙들에 따라 진행되는 역량들의 자발적인 사회화의 기능으로 제시됨. 결과적으로 스피노자는 홉스적 계약론이 전제하는 추상적인 물음, 즉 어떻게 사회적 관계들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우회함. 대신 스피노자는 실천적인 물음, 즉 어떻게, 그리고 어떤 한도 내에서 자연상태에서 살아온 삶의 수동성과 무능이 능동성으로 변형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이성의 삶과 공명을 일으키게 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 

2) 존재론적 구성과 역량들의 내재적 지평
- 네그리가 생각하는 스피노자의 ‘반-사법주의’의 중심적 주제 : 스피노자의 반-사법적 사유의 힘은 고전적 형이상학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이미지, 즉 사물의 능동성을 초월적 질서에 예속시키는 조직화의 원리로서의 권력이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옴. 이러한 이미지에 반대하여 스피노자는 존재론적인 구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구성을 통해 자발적으로 발전하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역량들 혹은 힘들의 순전히 내재적 지평을 제시. 조직화와 구성간의 이러한 구별은 반-사법적 얼개를 구성하는데, 들뢰즈는 바로 이 속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를 전개하고 있음.
- 조직화와 구성간의 차이를 규정하면서 들뢰즈는 신체들을 인식하는 두 가지의 상반된 방식, 신체들과 이것들의 역량들에 관한 지도를 그리는 두가지 방식에 대해 언급. 
① ‘조직화의 구도’,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모든 조직화를’ 포함하며, ‘초월을 지시함’(들뢰즈 1988 : 128). 이것의 주된 특징은 형식의 발전과 주체들의 형성을 직접 목표로 한다는 점. 이것은 은폐된 구조적이고/거나 발생적 원리이며, 이는 그 형식과 기능, 목표를 통해서 신체들을 조직하고 규정함. 
② ‘내재성의 평면’, 이것은 스피노자의 개별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됨. 개별로서의 자연은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무한히 많은 다른 개별자들로 이루어져 있음. 따라서 내재성의 평면은 ‘자연의 구성의 구도’임. 조직화의 구도와는 반대로 이러한 종류의 구도는 “어떠한 보충적인 차원도 지니지 않는다. 구성의 과정은 그것이 부여한 것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이 부여한 것 속에서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도/평면 위에서 신체들은 신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의해서만 규정될 것임. 즉 신체들의 역량에 의해서, 신체들이 다른 신체들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맺게 되는 관계들에 의해서만 규정될 것임. 이러한 평면은 이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역량들과 관계들의 연속적인 변이 속에서만 주어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 평면은 항구적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되게 됨. 스피노자적 방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평면 위에 자리를 잡아야 하며, 능동적으로 그것을 구성해야만 함. “왜냐하면 동시에 그것은 내재성의 평면이며, 그것은 구성되어야만 한다.”(1988: 123) 내재성의 평면을 구성하는 것은 실험적으로 결합하는 역량들에 의해서, 상이한 관계들로 들어감에 의해서 그 평면을 규정하는 구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 이러한 방식에서만 특수한 신체의 역량들과 능력들이 발견될 수 있음. 구성에 의한 이러한 실험 과정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능동적이-됨의 방법을 구성하는데,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발전된 행위 개념에 아주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3)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
-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행위 개념을 합리론이 제시한 자유관념과 대립시킴. “우리가 합리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진리와 자유는 무엇보다도 권리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권리들을 잃고 오류를 저지르게 되는지 혹은 우리의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다”(1992: 149). 
- 스피노자는 아담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 즉 아담을 자유롭고 합리적인 최초의 인간의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을 거부함.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행복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이미지에 반대하여 스피노자는 아담을 무능력하고 예속되어 있고 무지한 사람으로 제시. 아담은 우연한 조우에 따라 살아가며 따라서 작용역량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음. 아담은 무능력하고 그의 지식은 부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초월이라는 착각의 제물이 되며, 따라서 자신의 신체에 (선악과가 아니라) 과일이 끼치게 되는 해로운 효과를 목적인(final cause)이라고 상상하며, 그 효과를 초월적 신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에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함. 이러한 효과를 과일이 자신의 신체와의 비호환성의 자연적 결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담의 상태는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그는 능동적이라기보다는 필연적으로 수동적이며, “필연에 의한 것만큼이나 이성에 의해 전제된, 천천히 일어나는 학습 과정을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1992 : 263). 
- 자유를 주체적 권리로, 미리 주어진 것으로 보는 합리론적 가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감은 경험주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분석. 경험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놀라운 것은 인간이 때로 진리를 이해하며, 때로는 서로 이해하고, 때로는 자신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하려고 한다는 점”.(1992 : 149). 이러한 경험론적 관점은 스피노자가 행위를 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개별자가 자신들의 작용역량과 이해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과 일치하는 신체와 정신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실천적인 활동성의 산물로 간주하고 있는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남. 

- 모든 인간이 아담과 마찬가지로 무지와 상대적인 무능력의 상태로 태어나고 또 우연한 조우에 예속되어 있고 정동작용의 참된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신체에 관한 외재적 신체들의 효과를 수동적으로 등록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능동적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들이 그 원인인 바로 그러한 관념을,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자신들의 작용역량과 사유역량을 어떻게 증가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윤리적 물음은 개별자가 자연상태에서 시민상태로 이행하는 정치적 과정에 관한 스피노자의 견해와 관련되어 있음.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치사회의 형성에 관한 모든 설명은 인간 실존의 정념적 특성을 고려하고 있으며, 상상과 정념들 속에서 사회의 현실적인 토대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임.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어떻게 개별자들이 정념들에 예속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이들이 서로의 권리/역량에 대립하고 그것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역량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는가 하는 문제임. 
- 그러나 이러한 정식화에 따르면 이 과제는 역설적인 것으로 보임. 이것은 그것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 즉 인간의 합리가능성(reasonableness)을 가정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임.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은 항상 본성에 일치하게 된다.”(1985 : 제4권, 정리 35)고 말하기 때문임. 따라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과제를 재규정해야만 함. 즉 증명되어야만 하는 것은 정념적 삶의 투쟁들과 불협화음 내부로부터 어떻게 이성의 자연적 역량이 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임. 즉 어떻게 동의가 산출될 수 있고, 어떻게 역량들이 결합될 수 있으며, 어떻게 역량들간의 관계들이 서로를 제한하기보다는 서로를 도와주며,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임. 
-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행위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상호관련되어 있는 운동을 작동시켜야만 함. 이 운동은 한편으로 수동적 실존양태로부터 삶의 능동적인 형식으로의 이행이며, 다른 한편으로 구성적 신체들의 형성 과정의 문제임. 행위에 관한 전통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설명은 자유를 개체주의적인 용어로 이해하려는 것. 즉 고립된 개별자의 권리나 ‘사적인 소유’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음. 이에 반해서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는 행위를 환원불가능한 집합적 혹은 결합적 과정으로 설정함. 들뢰즈의 일차적인 탐구 목표는 개별자들이 더욱 큰 역량과 복수성의 구성요소가 되거나 결합하는 것을 산출하는 동시에 더욱 커다란 개별자들의 양태성으로서의 개별자들을 산출하는 집단화의 과정임. 행위의 성장은 ‘능동적이 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호환가능한 개별자들 및 사물들의 역량들과의 결합을 통해서 ‘개별적’ 역량의 증가와 고양으로 이루어져 있음. 

4) 공통통념 이론
-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의 공통통념이론과 결합시키고 있음. 들뢰즈는 공통통념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열쇠라고 주장. 공통통념은 “기술, 윤리학 자체의 기술이다. (공통통념은) 좋은 조우들을 조직하며, 관계들을 구성하며, 역량들을 형성하며 실험한다”(1988 : 119). 들뢰즈는 공통통념의 실천적 차원과 기능을 강조함. “공통통념 안에는, 우리의 능동적이 됨 안에는 전체적인 학습의 과정들이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에서 이러한 형성적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마지막의 보편적인 공통통념들로부터, 우리가 처음으로 형성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1992 : 288). 이 정식화에서 들뢰즈는 공통통념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법을 말하고 있음. 즉 공통통념은 그 형성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탐구되어야 함. 즉 우리의 능동적이 됨의 실험적 방법으로서 탐구되어야 함. 어떻게 공통통념이 획득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의 개별자 개념부터 탐구해야 함.
- 스피노자에게 개별자는 우선 역량의 영원한 본질 혹은 수준으로, 즉 신이나 자연의 역량의 강렬한 부분으로 정의됨. 이 본질에는 특징적인 구성, 즉 정지와 운동의 특정한 비율로 유지되는 부분들간의 관계가 상응함. 실존에 있어서 개별자의 본질에 상응하는 역량의 수위는 코나투스나 욕동(appetite)으로, 즉 부분들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결정됨. 개별자의 보존노력은 자신의 역량이나 본질의 긍정이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물 및 개별자들과 연결시킴. 따라서 “신체는 보존되기 위해서는 더욱 커다란 많은 다른 신체들을 획득하며, 바로 이것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재발생된다”(1985: 2권, 보충 7, 주석)고 스피노자는 지적. 코나투스의 관계적인 성격 때문에 스피노자는 또한 코나투스를 다른 신체들에 영향을 끼치고 또 다른 신체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함. 이 능력은 필연적으로 현실적 정동작용(affection)에 의해 채워지지만 이 정동작용의 본성은 다양하며 두가지의 유형으로 나눠질 수 있는데, 이 두가지 유형이 바로 능동과 수동임. 능동은 영향을 받은 개별자의 본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고 직접적으로 개별자의 작용역량을 표현하는 신체의 정동작용임. 다른 한편 수동은 단지 외재적 신체의 효과만을 지시하며, 영향을 받은 신체의 현재적이고 가변적인 구성만을 지시하는 정동작용임. 정념들은 그 자체로 보았을 때 영향을 받고 있는 신체가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신체에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에 따라 즐거울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음. 개별자는 그 특징적 관계들과 연장적 부분들이 결합하면서도 보존될 수 있을 경우에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음. 관계들의 선택적 결합이 관계들의 구성의 법칙(자연의 영원한 법칙)에 일치하여 발생할 경우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즉 더욱 커다란 역량과 복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개별자를 산출함. 그러나 개별자들의 관계가 서로 결합하지 못하는 질서 속에서 서로서로 만나게 될 때 하나 혹은 양자의 관계 모두가 이전의 관계의 보존과 양립하지 못하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서기 위해서 파괴될 것임. 이 경우 개별자는 불일치하다고 말해짐. 개별자들간의 일치와 불일치로부터 결과하는 즐거운 정념들과 슬픈 정념들은 역량의 동학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함. 즉 즐거움은 개별자의 역량의 증대이며 슬픔은 그 감소임. 
- 지금까지 우리는 연장, 특히 연장 속에서 신체라는 관점에서 개별자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살펴보았음. 그러나 개별자의 코나투스는 신체의 작용역량으로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님. 코나투스는 정신의 사유역량과 앎의 역량으로서도 표현됨.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의 엄격한 평행론을 설정함. 즉 정신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의 관념으로서 이해되어야 함. 스피노자의 견해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어떠한 실질적인 인과성도 존재하지 않음. 왜냐하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단지 사유와 연장이라는 자율적인 속성들 하에서 인식되는 것에 불과함. 결국 신체는 “정신으로 하여금 사고하게 결정할 수 없으며, 정신은 신체로 하여금 운동하고 정지하게, 혹은 그 밖의 다른 것으로 결정할 수 없다”(1985 : 3권, 정리2)고 스피노자는 지적. 그러나 정신과 신체는 상응관계가 있음.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하나이다.”(1985: 3권, 정리2, 주석). 따라서 신체에 대한 정신의 발산이라는 데카르트의 개념화에 반대해서 스피노자는 정신에서의 능동은 신체의 능동이며, 정신에서의 수동은 신체에서의 수동이라고 말함. 개별자의 사유역량과 앎의 역량은 따라서 개별자의 작용역량과 평행을 이룸. “비율에 있어서 한 신체가 다른 신체보다 동시에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만큼 그 정신 또한 동시에 다른 정신보다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다.”(1985: 2권, 정리 13, 주석). 신체가 외재적 신체에 의해 영향을 받을 때, 이 정동작용은 정신에 있어서 그 외재적 신체의 관념에 의해서 달성됨. 자연의 공통적 질서(조우들의 질서)의 수준에서 실존의 조건 하에서 정신이 가지는 관념은 항상 그 대상에 일어난 것의 관념, 즉 신체에 일어난 것의 관념임. 이 관념이 외재적 신체들의 효과와 영향을 받은 개별자의 현재적 상태를 지시하거나 포함하는 한, 관념들은 부적합하다고 말해지며 상상을 요청한다고 할 수 있음. 이러한 관념에서 뒤따라나오는 감정-정서들은 결과적으로 수동이며, 이 수동은 영향을 받은 개별자의 본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음. 한편 적합하거나 참된 관념들은 그 원인을 ‘표현’하며, 개별자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개별자의 바로 그 본성과 사물들의 본성을 ‘표상’함. 적합한 관념들은 그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에 합치함. 적합한 관념들은 개별자의 사유역량과 이해역량에 의해 표현되는 관념들이며, 이 역량들을 자신들의 근접한 혹은 내부적 원인으로 지니고 있음. 이러한 관념을 성취하는 정서는 능동적인 즐거움임. 스피노자에게 슬픔은 항상 개별자의 작용역량의 축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능동적인 슬픔도 존재하지 않음. 
- 정신과 신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지식에 관한 스피노자의 개념화와 관련해 볼 때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님. 스피노자에게는 “지식은 주체의 작동이 아니라 정신에서 관념의 긍정이다... 지식의 종류들은 실존의 양태들이다. 왜냐하면 앎은 의식의 유형들과 그 의식에 상응하는 정서의 유형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전체적 능력이 채워진다”(1988 : 81-2)고 들뢰즈는 주장함. 앎은 명석판명한 관념들의 체계의 소유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역량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관한 개념화를 획득하고 보다 고차적인 인간의 본성을 얻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1992 : 129). 
- 스피노자에게 사유라는 사건은 항상 신체들간의 조우의 결과이며, 지식의 생산은 사유가 동시적으로 긍정하는 신체들의 운동과 만남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 즉 적합한 지식 혹은 참된 지식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에 의해서 달성되어야만 하는 것임.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물에 관한 적합한 지식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포획하는 관념들이 사물들의 질서와 똑같은 필연성의 질서에 의해 전진하게 되는 한에서 적합하게 되는 것임. 이러한 의미에서 적합한 지식의 생산과 신체가 능동적으로 되어가는 수단인 과정은 절대적으로 일치함. ‘보다 고차적인 인간 본성’의 획득은 부적합한 지식의 초월이 아니라 변형을 요구하며, 부적합한 지식이 전제하고 내포하고 있는 수동적 실존양태들의 변형을 요구함. 부적합한 종류의 지식에서 적합한 종류의 지식으로 이행하는 것, 삶의 수동적 형태에서 능동적 형태로의 이행과 관련해서 공통통념 이론이 그 작동영역을 발견한다고 들뢰즈는 주장. 
- 스피노자의 작업을 검토하게 되면 이성에 대해 상이하게 접근하는 것에 따라서 공통통념에 관한 두 개의 정의가 드러난다고 들뢰즈는 주장. 우선 공통통념은 형싱적인 정의로 제시되며, 이성의 보편적 관념으로 제시됨. 이 경우 공통통념은 신체들의 특징적 관계들, 이러한 관계들의 결합, 그리고 구성의 법칙을 적합하게 표상하는 관념임. 이러한 정의와 관련해 볼 때 이성은 자연의 긍정적 질서에 관한 지식으로, 즉 구성적 관계들의 구성을 지배하는 법칙의 지식으로 나타남.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의 모든 다른 관계들과 법칙들이 연역됨. 그러나 이성을 공통통념의 지각과 이해력(comprehension)으로 정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함. 합리적인 상태로 태어나지 못한 개별자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함. 따라서 들뢰즈는 공통통념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떠한 조건 하에서 형성되는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주장.
-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자연상태에서 실존의 자연적 조건 하에서 개별자의 상황을 상기해 보는 것이 필요. 자연상태에서 개별자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은 불가피하게 수동적 정동작용, 두려움과 슬픔에 의해 전적으로 소모되며, 그 역량이 최소화됨. 마찬가지로 사유역량과 앎의 역량도 개별자로 하여금 사물과 법칙에 관한 부적합한 지식만을 가지도록 결정하는 조건 하에서 실행됨. 즉 외재적 신체들을 구성하는 관계의 법칙에 대한 지식이 없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외재적 신체들의 효과에 대한 부적합한 지식, 즉 그 효과의 원인들에 관한 지식이 없이 부적합한 지식을 가지게 됨. 그러나 자연상태에서 개별자가 대부분 작용역량과 앎의 역량을 고갈시키는 우연한 조우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참된 지식의 싹을 가지고 있음. 그리고 이 싹이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의 형성, 즉 이성을 구성하는 공통통념의 구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줌. 이 관념은 바로 유용성이라는 관념임.
- 유용성이라는 관념은 개별자들의 코나투스적 노력과 관련되어 있으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개별자들이 행하는 모든 노력들로 이루어져 있음. 코나투스 혹은 자연권 덕분에 개별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외재적 신체들에 대해 저항할 수 있도록 결정됨. 자기보존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이것이 우연한 조우들이 부여하는 기회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개별적인 사태로만 남아있는 한 제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뿐이라고 들뢰즈는 지적. 그러나 유용한 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호환될 수 없는 신체들을 파괴하기 위한 개별자의 노력에 의해서도 결코 없어지지 않음. 이러한 노력은 또한 다른 유형의 능동성을 내포함. 즉 자신의 보존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것을 제거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다른 신체들, 비슷한 신체들과 동맹을 형성하려는 개별자의 노력을 내포하는 것임. 들뢰즈에 따르면 이성의 첫 번째 단계에 대한 정의로부터 이러한 두 번째 유형의 노력을 도출할 수 있음. 이성이 인간의 참된 유용성과 내재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한 그것은 “좋은 조우들을 선택하여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즉 “우리의 것들과 구성의 관계로 들어서며 우리에게 즐거운 정념들을 고무시키는 양태들의 조우를” 선택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남.(1988 : 56). 따라서 공통통념의 형성은 조우들을 조직하고 또 슬픔에 대해서 즐거움을, 수동에 대해서 능동을 보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신체들과 결합하는 개별자의 노력과 일치하는 것임.
- 결국 공통통념의 발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음. 우리가 우리의 것에 일치하는 외부의 신체와 만날 때, 그리고 구성적 관계를 지닌 어떤 신체가 새로운 관계 하에서 또 다른 개별자를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신체와 합성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작용역량과 이해역량의 증가를 표시하는 즐거운-정념이라는 정서를 경험하게 됨. 우리 역량들의 증가를 통해서 우리는 이들 신체들 사이에서 공통되어 있는 것에 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됨. 이 관념이 바로 공통통념임. 즉 외부적 신체와 우리 자신의 신체의 일치 혹은 구성의 관계에 관한 적합한 지식이 바로 공통통념인 것임. 그러므로 공통통념은 존재하는 신체들의 구성을 표현하며, 그러한 구성요소들의 현실적인 생산이라는 사건에서만 형성되는 것임. “공통통념은 그것이 모든 정신에 공통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공통통념이 신체들에, 모든 신체들(연장, 정지와 운동)이든 몇가지 신체들(적어도 두 개의 것, 즉 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이든 간에 이것에 공통되어 있는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이다”(1988 : 54). 우리가 공통통념을 형성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작용역량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됨. 그러므로 이때의 즐거움은 필연적으로 능동적인 즐거움임. 즉 그것은 적합한 관념의 형성으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이며, 적집적으로 우리의 작용 역량을 표현하고 있는 것임. 즐거움은 수동적인 즐거움과는 다름. 수동적인 즐거움은 우리의 것과 일치하는 신체와의 조우에 의해서만 산출되는 반면 능동적인 즐거움은 우리가 스스로 산출하는 것임. 그러나 우리는 공통통념을 형성하게 하는 좋은 조우들의 도움이 없다면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지 못하고 능동적인 즐거움을 산출하지도 못할 것임. 따라서 공통통념은 우리의 역량과 관련해 볼 때 실천적인 관념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임. 왜냐하면 공통통념을 형성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의 역량에 대한 적합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임. 즉 우리의 역량과 관련하여 능동적이 되기 때문임. 공통통념이 형성되는 방식에 관한 들뢰즈의 설명은 능동적이 됨, 자유롭게 됨, 합리적이 됨의 과정이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임을 내포함. 즉 공통통념들은 필연적으로 구성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임. 우리의 지식과 행동의 조건에 관한 이해를 얻음으로써만, 즉 우리의 관계가 삽입되고 우리의 관계가 의존하는 관계들의 상호작용적인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를 획득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의 작용역량과 앎의 역량을 소유할 수 있음. 그리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다른 신체들과 합성하지 못하고, 우리의 것과 일치하는 다른 개별자들과 합성하지 못하게 되면 그러한 이해를 얻을 수도 없고 우리의 작용역량과 앎의 역량을 증가시킬 수도 없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 미리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진 조우, 주어진 배치, 주어진 결합에 있어서 신체나 정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1988 : 125). 따라서 공통통념의 기술은 ‘우리의’ 즐거움에 관한 실험적 발견을 내포함.

5) 들뢰즈와 가타리의 스피노자 이용
-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공통통념 형성 이론에서 발견해 내고 있는 이러한 ‘실험의 기술’은 들뢰즈의 후기 저작에서 계속 변이되어 나타남. 개별자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미리 정립된 관념들에 의해 방향을 지니는 것이 아닌 개별자의 신체와 다른 신체들간의 결합이라는 관념,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이라는 관념, 그리고 미리 주어진 구도에 따라 이것들을 조직하기 보다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조우들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관념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됨’에 관한 개념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표면을 이루고 있음. 반-사법주의, 구성과 행위라는 개념은 ‘비정통적인’ 스피노자라는 매개를 통해 나타남. 스피노자의 공통통념에서 성취된 행위 -- 세계에 관한 적합한 관념의 체계의 형성을 통한 정신의 역량의 표현 -- 는 이제 더 이상 분석대상이 아니게 됨. 오히려 행위는 이제 능력들의 형성과 기능, 그리고 그 한계를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 개별자에 관한 생물학적, 정신의학적, 정치적인 정의를 회피해 나가는 운동에 의해서 인식됨. 그리고 공통통념의 형성에 관한 개괄은 이제 ‘됨’이라는 관념에서 판별할 수 있게 됨. 
- 들뢰즈와 가타리가 됨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에 두 개의 정체성으로 인식된 것들간의 유비나 모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 즉 ‘몰적인’ 범주화의 질서 하에서 인식된 신체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 스피노자는 이러한 범주들을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부름. 왜냐하면 이것은 신체를 규정하고 또 신체가 행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정서들을 규정하는 관계들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순히 유사성과 상상적인 보편성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임.(1985: 2권, 정리 40, 주석). 됨은 관계들과 정서들의 공통성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임. 됨은 행동과 사유 모두에 있어서 실험적 구성과 ‘비자연적인 분유’를 통해서 ‘공유된 요소의 추출’을 표상하는 것임. 공통통념과 마찬가지로 됨은 행동을 통해서 관계들의 구성에 관한 관념의 발견을 표상하는 것. 즉 이러한 행동-관념은 새로운 역량과 정서를 산출함에 있어서 몰적인 정의의 조직화하는 평면을 피할 때에만 능동적인 것임. 그러한 행위는 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주체성의 실험적 발명으로 이루어져 있음. 이러한 관념이 반-사법주의(매개하는 권력에 의한 사적 역량들의 홉스적인 종합에 대한 거부)에 대한 이해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네그리가 ‘구성적 존재론’, 즉 역량의 존재론이자 역량들의 내재적 구성의 존재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스피노자의 반-홉스적인 이론정립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영토화’의 미시정치학의 정립에서 분명하게 나타남.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스피노자적인 신체들의 구성과 마찬가지로 됨은 다른 것이 됨의 정치적인 과제로 우리를 이끌며, 우리의 역량에 대한 다양하게 조직화된 제한에 저항하고 이것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그리하여 이러한 한계자체를 변화시키게 할 수 있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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