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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플라톤 이해

by Casey,Riley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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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플라톤과 플라톤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플라톤주의라는 것은 바로 니체가 플라톤을 들먹이며 비판하는 그것이죠.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비롯하긴 하지만 플라톤을 많은 부분 기독교적 시각에서 해석함으로서 성립된 일련의 주장 또는 주의를 가리킴니다. 토마스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교부철학을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근본적으로 현상과 실재(이데아)를 구분하고 현상을 실재에 대한 허상으로 해석하는 대개의 관점은 모두 플라톤주의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고 봐도 될 겁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플라톤 주의에 대한 반격인데, 근본적으로 보면, 현상과 실재, 생성(변화)과 존재라는 식으로 대립시키는 사고에 대한 반격이죠. 들뢰즈는 이런 이원론에 대해서 생성을 존재의 자리에 놓고, 현상-실재의 대립은 정신의 활동에 정신 자신이 속은 것일 뿐 그런 대립은 변화로서의 실재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비판하죠. 이런 면에서 들뢰즈는 존재로서의 힘(puissance)만을 실재로 인정하는 일원론자라고 볼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리 간단하진 않은 것 같네요. 왜냐면 니체나 스피노자도 이 점에서 비슷한데, 생성하는 것을 힘이라고 파악하는 것 또한 바로 우리 정신이기 때문이죠. 표현이라고 부르는 것은 힘이 정신을 통해서 표상될 때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실 표현만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힘은 그저 세계자체라고나 상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힘의지(volonte de puissance)도 그렇고 둔스 스코투스나 스피노자의 일자-자연도 그렇고. 그래서 들뢰즈가 따르는 계보의 철학자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원론은 우리에게 드러난 것을 기준으로 볼 때는 오히려 무한한 다원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반면 플라톤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는 사실 부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플라톤 전문가도 아니고요. 하지만 플라톤을 새롭게 해석하는 몇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데, 시뮬라크르에 대한 해석이 그런 것이죠. 여기서 플라톤은 플라톤주의에서 생각한 견해와 달리, 존재를 파악하는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 철학자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죠. 
들뢰즈가 플라톤을 다시보는 계기로는 다음의 두 가지 주목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텍스트 자체의 해석을 두고도 플라톤 대화편으로부터 플라톤의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않다는 점에 대한 주목이 그것입니다. 대화편들에선 보통 상반되는 두 주장이 펼쳐지고 그 중 하나에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붙이는데, 종종 쉽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곧 플라톤의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쩌면 그렇게 두 가지 주장이 맞서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맞섬자체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내는게 플라톤의 의도였다고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것이죠. 일종의 파라독스에게 까지 밀고 가는 과정은 결국 이성적 사유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낸다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두번째의 관점을 정당화하고 심화시키는 부분이 바로 대화편에 줄곧 등장하는 신화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 플라톤 속에 나오는 소크라테스가 꼭 핵심에 가면 종종 신화를 통해 문제를 얼버무린다는 것이죠. (물론 얼버무리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져.^^) 신화로 유명한 것 중에는 메논에 나오는 레테의 강 어쩌구하는 상기설도 있고, 향연인가에 나오는 사람은 어떻게 남녀동체에서 분리되 가지고 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메게 되었나 하는 얘기도 있고 참 많지요.) 물론 이 신화들을 꼭 소크라테스가 꺼내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일단 신화들이 등장하는 곳마다 논리 전개상 중요한 매듭이 하나씩 만들어지는데 있어요. 다시 말하면 그런 신화를 바탕으로 막혔던 논의가 다시 이어진다는 것이죠. 대화편이 보여주는 이런 구조는 한편으론 이성적 사유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론 결국 그 이성적 사유가 근거하고 돌아갈 곳은 언제나 또 다른 신화일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을 플라톤주의자들이 생각하듯 그냥 이성주의자라로만 해석하는 것은 뭔가 모자란 해석이란 들뢰즈의 생각이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왜냐면 플라톤의 신화들과 그것이 하는 역할은 바로 이성적 사유가 끊어지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前이성적 사유세계의 역할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성적 사유의 영역이 지닌 그 한계선을 그려 드러냄으로서, 그러한 한계 내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철학자에게 소위 반이성주의 반주지주의라고 불러야할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면에서 들뢰즈가 플라톤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일방적 비판도, 일방적 긍정도 아니라고 보아야 옳을 겁니다. 오히려 철학사 전반을 대하는 들뢰즈의 태도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게 더 쓸만한 평가를 우리에게 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아래에서는 좀 횡설수설이긴 하지만 들뢰즈와 그가 다루는 철학자들과의 관계를 개괄적으로 소개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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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어떤 철학을 접함에 있어서도 기존의 철학사가들이 취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철학사를 다룹니다. 보통의 철학사는 때로는 어떤 개념들을 주축으로 그 개념이 시대를 통해 변형하면서 연속하는 과정을 살피거나, 또는 어떤 하나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각 시대나 각 철학자마다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반면 들뢰즈가 여럿의 철학자들을 거치는 과정에서 하는 일은 그런 작업과 얼핏 비슷해 보일수 도 있지만 사실은 상당히 다른 작업입니다.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론(적어도, 차이와 반복에 이르는 기간까지는), 즉 생성을 존재로 정초한 존재론이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중심으로 철학사를 헤집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재주가 뛰어난 자동차광이 멋진 새로운 차를 만들기위해 이곳 저곳 부품가게를 뒤지고 다니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그 부품들은 종종 언젠가 옛날에 굴러다니던 차에서 쓰였던 중고일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데 그 부품들이 들뢰즈 손에 들어오면 원래 있던 차에서 하던 기능은 그대로 간직하지만 사용되는 곳이나 그 주변적 관계가 종종 변형되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들뢰즈가 둔스 스코투스라는 영국의 중세 철학자를 대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죠. 이 철학자는 아퀴나스의 철학이 지배하던 중세철학의 주류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이지요. 아퀴나스가 영혼과 신체를 나누는 이원론의 대가로 데카르트의 할아버지 격이라면, 이 사람은 일자인 존재가 표현되는게 우리가 관찰하는 세계라는 의미에서, 존재는 그 표현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나지만, 결국 그건 단 하나의 존재가 내는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하여 소위 일자의 단성성 (L'univocite de l'Un)이란 것을 주장합니다. 즉 지성이 다양성을 통해 포착한 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고 존재는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라는 생각이죠. (스피노자는 이 생각을 거의 그대로 이어 발전시켰다고 볼수 있겠죠. 니체도 멀리 떨어져있지 않죠. 근데 존재와 표현을 잇는 문제는 곧 정신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도를 포함하게 될 수 밖에 없어서, 그의 철학은 기존의 이원적 세계관에서 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중세사람한테도 참 낯설고 어려웠나 봅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묘한 현자(Docteur subtil)이라고 불렀으니말이죠. 참고로 토마스 아퀴나스(불어로 발음이 재밌어요, 쌩또마다깽 Saint Thomas d'aquin 이거든요.)는 천사현자(Docteur angelique) 라고 하죠. (* 좀 나은 번역어가 있으면 좋겠는데 제가 모자라서리… 좋은 번역어 생각나면 알려주시면 안잡아먹지~~~. ^^ ) 
노자사상을 미묘한 사유라해서 玄學이라 부른 것과 둔스 스코투스를 서양에서 비슷하게 불렀다는 것을 보면 내용적 측면에서 둘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는 점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일치인 것 같네요.) 어쨌건 둔스 스코투스는 수도사였기에 그가 말하는 일자는 바로 신 그 자신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모순투성이로 보여도, 그 속엔 일자로서의 신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신의 관점에서는 결코 모순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논리를 이어나갑니다. (이 생각은 뒤에 라이프니쯔가 다시 다루는데 충분한 이유의 원리(충족이유율)라는 것과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의 원리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들뢰즈는 이 미묘한 스승의 그런 기독교적 가르침엔 별 관심없습니다. 들뢰즈가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부분은 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수도사가 말하는 일자와 표현, 즉 단성성의 문제에 주목하죠. 당연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표현의 문제 또한 주목하겠죠. 스피노자는 힘과 신체의 문제를 통해 표현의 문제, 즉 단성성의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다룹니다. 다시 말하면 베르그송의 철학은 들뢰즈가 그의 책 베르그송주의에서 다루는 것 보다 상당히 넓은 영역에 관계합니다. 그래서 베르그송 전문가 중에는 들뢰즈가 보는 베르그송은 전혀 베르그송이 아니다라고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철학이 아니라 베르그송주의라고 책제목을 정하는 것으로도 드러내듯 베르그송이라는 사람이 일궈놓은 넓은 숲에서 자기가 필요로하는 부분을 심도있게 정리해 나갑니다. 결국 들뢰즈가 베르그송에서 궁극적으로 참조하는 영역은 베르그송의 시간관과 그에 따른 존재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차이와 반복이란 그의 저서에서 논의되는 많은 부분은 지속의 개념을 바탕으로한 존재와 시간의 관계 그리고 그런 전제하에서, 그것들을 표상하는 사유의 지위와 역할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정확히 이해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들뢰즈를 공부하며 느낀 좋은 점이자 어려운 점은 서양고대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스토이즘을 들뢰즈가 어떻게 다루는 지 좀 보고 넘어갈까합니다. 그 전엔 제 자신 스토이즘에 대해 거의 아는게 없다고 해야할 수준이었고 지금도 사실 별로 많이 알지도 못하지만, 그럭저럭 스토이즘을 접하면서 제가 놀랐던 부분이 참 많아요. 스토이즘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언어가 갖는 구조와 논리를 아주 꼼꼼하게 분석한 점입니다. 서양문법의 시조라는 세간의 헌사가 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이들이 펼치는 사유세계에서 우리와 들뢰즈의 눈을 혹하는 아주 기가 막힌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고하니 존재를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즉 변화생성을 존재의 자리에 놓고, 그런 바탕에서 언어를 분석하는 거예요.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논리학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원하는 것인데, 거기서는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하고, 또 그래야만 논리학이 가능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억을 떠올리면, 그 옛날에 이미 이런 생각에 정면 도전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고, 나름대로 깊이있게 그 연구가 진행되었었다는 점이 경이롭게 느껴지더군요. 각설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항-존재의 논리라고 본다면 이들은 명제-존재의 논리를 구성한 것이죠.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도 명제논리가 들어가지만, 여기서는 존재는 주어가 가리키는 것이고 이 주어가 가리키는 사물이 어떤 집합에 속하나(빈사) 또는 어떤 성질을 갖나(속성) 설명하면서, 주어항에 들어가는 것을 존재로 놓고, 문장간의 논리적 포함관계를 따지는 것과는 달리, 스토이즘에서는 아예 존재하는 것은 주어+술어 즉 명제(사건)로 표현되는 생성이고,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어떤 성질을 지속적으로 담지할 존재자(보편자, 일반명사, 고유명사가 지시하는 것)를 부정하더군요. 당연, 노련한 엔지니어는 이런 부품가게를 그냥 지나칠리 없겠죠. 여기서도 들뢰즈는 이 사람들이 얘기하는 윤리론 문제에 대해선 직접적으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떨게 변화로서의 세계를 존재로 정초하는 존재론을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니까요. 스토이즘은 들뢰즈에겐 생성의 존재론을 기반하는 논리학적 부품인 셈이죠. 의미의 논리라는 책은 스토이즘에서 말하는 사건이 지니는 언어논리적인 면을 베르그송적인 시간의 관점과 연계하며 연구한 저술입니다. 차이와 반복이 생성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파고든다면, 의미의 논리는 그러한 존재를 파악하는 우리의 논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성격들을 다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얼핏 다른 곳에서도 언급했지만, 생성을 존재의 자리에 놓고 사유하고자 할 때 결국 부딪히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존재를 마주한 사유의 역할입니다. 신체와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사고에서 그러한 구분을 뒷받침해주고 사유의 진리능력을 담보하는 문제는 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해결됩니다. 즉 이성적 사유가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진리에 다가설 가능성은 우리의 경험세계 너머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보장되는 구조인 셈이죠. 그러나 생성을 존재로 보고 진리의 이성성( 이성이 어떤 변하지 않는 토대에 근거해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을 부정하는 입장에 선다면, 이는 곧 사유자신이 사유에 의해 의심받고 그 진리담지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면, 이제 ?이성에 근거한 판단을 할 때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부터 벗어나, 이성이라고 불리는 그것 자신이 어떤 습관이나 삶의 필요에 기인한 것일 뿐 세계를 드러내고 파악하는 것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흄, 니체)는 관점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로부터 이성이니 감성이니 하는 기존의 구별은 약해지고, 그렇게 이름붙일 어떤 것들이 우리 정신에 있다하더라도 이제 그런 것들의 역할과 상관관계가 다시 자리매김되어야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들뢰즈는 ?대담?(지금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 에서 자신의 철학은 일종의 noologie라는 말을 한 적인 있는데, (cosmologie는 사물(cosmos = 세계)을 다루는 학문을 가리키고 noologie는 사유(nous = 이성, 넓은 의미의 이성적 사유)자신을 다루는 학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들뢰즈가 이런 자기 규정을 하는 것을 우리는 그의 존재론적 기획을 이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제가, 부품을 모아 전혀 새로운 차를 만드는 엔지니어의 비유를 들뢰즈의 연구방법을 가리켜 했는데, 최근 나온 연구서에서 어떤 사람은 사건을 풀어나가는 탐정의 관점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더군요. 대충 제가한 얘기랑 비슷한 면도 있지만, 좀 다른 면을 부각한 점도 있어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비유한 사건은 작게는, 개념이 새롭게 고안되고, 새롭게 정초되거나한 일들을 가리킵니다. 스토아철학에서 사건(lekton)이란 개념이 고안된 사건, 둔스 스코투스가 단성성개념을 통해 일자와 다자의 합일점을 고안한 사건, 베르그송이 지속이란 개념을 통해 기존의 형이상학을 새롭게 정리한 사건 등등의 사건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큰 사건은 바로 이런 자그마한 사건들을 통해 들뢰즈가 정리해 놓을 수 있었던, 생성의 존재론이 가능해진 사태가 아마도 발생했다고 말할 때의 그 사건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들뢰즈의 철학여행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사건을 감지하고 그것의 전모를 파헤치기 위해 의심스런( !) 용의자들인 철학자들을 탐문했던 과정이고, 그런 탐문의 기록이 바로 여러 철학사적 저술들이라는 것이죠. 결국 그 사건의 전모를 밝혔는지의 여부와 정말 그 큰 사건이 일어났는지의 여부는 물론 또 따른 판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 될 겁니다. 예를 들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평가하는 작업이 될 수 있겠죠. 들뢰즈의 철학사 연구가 갖는 성격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 말하고자 한 것이니 여기서는 이 정도로도 저와 다른 새로운 관점에 대한 소개는 충분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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