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THE MIRACLE OF MIND POWER
단 카스터
}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와
즐거움을 향한 욕구입니다. 이 두 가지 욕구가 순조롭게 채워지고 있는 동안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고 환경에도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딘가에서, 자기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이 두 가지의 욕구가 나란히 채워지지 않으면, 그 채워지지 않는 욕구 외의 것에서도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 주변의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아무 고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진정 행복하게
한평생을 살아가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현재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하여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성공시킬 자신감도 없다고 한다면, 지금 곧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 책은 당신의
것으로 간직해야 하는 것들, 즉 건강, 행복, 번영, 마음의 평화, 그밖에 자기 존중이나
만족감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자신의 정신을 사용함으로써 그 것들을 간단하고 쉽게 모두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기술한 것입니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여기에 쓰여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실행한다면 당신은 곧 이 모든 욕구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당신을 위해서 쓰여진 최고의 책입니다. -저자의 말 중에서
단 카스터(DAN CUTER)
미국의 유명한 목사이며 정신치료가. 평범한 시민이 행복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는 자기 속에 있는 정신의 힘을 사용하면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
여러 가지 기적에 가까운 일을 나타내기도 하며 인간정신의 위대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데 큰 활약을 했다.
[머리말]
정신과 의사이면서 교사인 나의 아내 루실 카스터는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나와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녀의 이름도 마땅히 이 책의 공저자로서 나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저자리에 올려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이 책이 인생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많은 사감들에게 시원한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 우리 부부가
이 책을 집필하는데 어려운 상담에 기꺼이 응해 주고 자료를 제공해 준 많은 연구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분들의 '병례'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어 졌음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매주 우리의 강연을 듣고서 만족스런 효과를 얻었다고 사례를 보고해 주고
이 책에 넣을 만한 귀중한 제안을 해준 많은 청중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우리 부부는
이 책을 독자 여러분과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될 모든 좋은 일들에게 바칩니다. 이 책을
바로 여러분을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DAN CUSTER
[저자의 말]
[두 가지의 큰 욕구]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의 커다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와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 두 가지 욕구가 뜻한 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으며,
환경에도 잘 적응해 갈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딘가에서, 그것이 자기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이 두 가지 욕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그 바라는 욕구 외의 것에서도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즉, 양심이나
육체, 대인 관계, 혹은 돈 등의 일들로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 주변의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아무 고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진정 행복하게 한평생을 살아가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현재 행복하지 못하고 건강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하여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어떤 만족감이나 무엇을 성공시킬 자신감도 없다고 한다면, 이
책은 바로 당신을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에도 해결 방법은 있다]
당신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가 그 어떠한 것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해결 방법이나 대책을 이 책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처음부터 당신에게 그런 희망이 없었다면, 즉 무엇인가 좋은 생각이나 암시, 그리고
어떠한 방법이라도 알아내어 그것에 의지하여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커다란 행복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 만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당신은 아예 이 책을 손에 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욕구보다도 더 좋은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는 것을 바라고 싶은
지도 모릅니다. 혹은 당신의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는
순결한 것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이 세상의 가장 큰 힘]
당신이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을 때, 이 세상에는 당신이 원하고 있는 것을
충족시켜 줄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의 힘이며 마음의 힘입니다. 마음은 세계
제일 가는 힘입니다. 그런데 바로 당신 자신이 세계 제일 가는 그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사용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이며 시인인 R.W.에머슨(EMERSON.
RALPH WALDO: 1803~1882)은 정신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마음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공통된 하나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전체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 이 보편의 정신에 접촉한 사람은 실존하는 모든
것, 또는 행하여 질 수 있는 모든 것에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오직
하나뿐인 최고의 힘이기 때문이다."
지난 백여년 동안 마음의 힘에 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들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좋은 효과를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떠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
소극적인 사고에서 적극적인 사고로 방향을 바꿀 것인가 하는 내용의 책을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의 정신 속에 무한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을 어떻게 써야 가장 만족한 성과를 얻을 것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무엇을 사고할
것인가를 알고 싶을 것입니다. 결국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 좋을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
당신 자신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친구, 돈, 가족, 혹은 불사의 생명까지도 만일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이 체험하는 세계는 모두가 바로 당신 자신에게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란 당신으로서도 알 수 없는 깊은 신비스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용구와 갈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건강과
사람과의 조화에 있어서 대생명력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더 큰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실행하고, 몸에 익히고 또 소유해야 합니다. 즉, 훨씬 더 큰 만족을
얻기 위해서 먹고, 자고, 즐기고, 사랑하고, 배우고, 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 살고자 하는 욕구에 응하는 당신 자신의 모든 행동에는 어떤 정신적인 행위나 어떤
결심이 선행 되게 됩니다. 당신은 어떤 결과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무엇을 체험하고 있든지 간에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는 바로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일까요? 정신이란 것을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데까지는 정신력을 사용하여 가능한 한
최대의 성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정신에 대해서 완전히 알고 있지 않다고 하여 정신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전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기에 대한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다만 알고 있는 데까지의 지식을 구사하여 빛이나 열,
또한 동력 등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지식이 높아지고 과학이 발달되면
지금보다 한결 좋은 효과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구를 처음 발견한
미국의 발명가인 에디슨(EDISON, THOMAS ALVA: 1847~1931)에게 '선생님, 전기란
도대체 무엇입니까?'하고 편지로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에디슨은 '전기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 그냥 사용하십시오.'라고 한마디로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겨자씨 만한 아주 작은 다갈색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자라서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는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다행히 씨앗을 뿌리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배워서 알뿐입니다. 그러므로 전기나 씨앗이나 정신은 모두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정신 또는 전기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워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바로
상식인 것입니다. 자연계가 당신에게 선물한 도구를 현명한 방법으로 적절하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좀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우며 드릴(THRILL) 만점의 성공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드릴로 가득찬 모험]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여기에 쓰여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실행한다면 당신은 놀랄
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아무리 의기 소침해 있거나, 지난날에 어떤 쓰라린 체험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 책을 통해서 필요한 도움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손을 한 번
들어올리는 정도로 간단하게는 완전한 성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약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이며 문필가인 H.D. 솔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속에서 절망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불행하고 불운한 사태가
계속해서 자신의 생애에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한 채 막연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괴로운 생활을 잊기 위해서 알코올이나 과로, 또는 과식이나 깊은 잠
같은 것에 은둔처를 구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병상에 누워 버리게 됩니다. 도피하는 것이 용기를 내는 것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저항을 합니다. 어디에서나 넘쳐흐르고
불타오르려고 하는 우주의 대생명력에 계속해서 대항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 자체가 바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가까운 우리 주위에는
실패자나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럽고도 나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간에 어느 편에서나 모두 정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실패자를 자초하는데 정신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공이든 실패이든 간에 그 차이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마술적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실패하거나
약자가 되어 의기 소침해 하고, 불행을 감수해 가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가난하고, 슬퍼하고, 고독감을 안고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책은 간단하면서도 알기 쉬운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당신이 가질 자격이 있는 것들,
즉 건강, 행복, 번영, 마음의 평화, 그 밖에 자기 존중이나 만족감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자신의 정신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손안에 놓을 수 있는가를 기술한
것입니다.
[저자에 대해서 한 마디]
이제 독자인 당신과 저자인 나는 이제부터 귀중한 몇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으므로
당신도 당연히 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이 책을 과연 나의 체험을 통해 권위에 입각해서 썼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일, 즉 자기의 생애로서 실증해
본 일이 없는 무엇인가를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직접 시험하고 관찰하고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잘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충분한 체험을 통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추측에만 의존한 단순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나는 어떤 매우 심각한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에 골몰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년시절에는 남달리 강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시가지의 제일 번화한
거리로는 가지 못하고 언제나 뒷골목이나 옆길을 찾아 다녔습니다.
20세때는 생명보험에 가입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심장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던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나는 너무나 열등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열등한 사람이다라는
이 자각이 나를 지나치게 격하된 인간이 되게 하여 그 때문에 많은 불쾌한
입장에 쫓겨다녀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중대한 사고에 봉착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두 다리와 한쪽 팔과 턱에 중상을 입었고 그 육체의 장애는 평생을 따라 다니며 나를
괴롭혀 왔습니다. 성공을 너무나 조급하게 생각한 나머지 건강을 거의 돌보지 않았고,
무리한 노력을 계속했기 때문에 마침내 신경이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경이 파괴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신경 쇠약이었습니다. 나는 고장난 정신과 망가진
몸을 가지고 있다는 열등감에 장래는 암담하고 희망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30세 때에는 이미 쇠약한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칠순의 나이가 넘었지만 나는 젊고 활기에 차 있으며 정력이 넘쳐서
행복하기만 합니다. 지난 30여 년이란 세월 동안,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생명력이 나에게
잘 적용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많은 재화를 갖고 있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나 역시 충분히 가졌으며, 세상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실지로 나는 부에도 많은 복을 받고 있습니다. 30여 년 동안 나의 몸은 잘
움직여 주는 기계였고 일도 잘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육체와 정신의 힘이 나의
일생동안에 오늘처럼 완전한 때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세상 여러 사람들의
필요에 응해서 지난날보다도 더 많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자유스러워서 '거의
만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생애가 가장 건강하고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 책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이 몸소 체험하면서 얻은 자료와 함께 병들어서 비참하고
불행한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오는 동안 관찰하고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밝힐 것입니다.
나의 심리학적 소양은 오랜 목사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에 행복하고 성공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식을 만들어 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식을 얻는 세 가지 방법]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한 과학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체험을 통한
관찰과 실험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 철학적인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지와
사고에 의지하여 지식을 찾는 것입니다. 또 종교가 사용하는 신비적인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느껴 아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은 모두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만을 취해서 그것만을 의지하고 다른 두 가지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체험은
과학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또 철학자 중에는 잘못 된 전제로부터 추론을
전개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직감이나 마음속의 지도라는 것도 그 사람의 내심의
욕구가 속삭이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함께 모아서
사용해야 비로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긴 세월을
통해서 알아낸 것입니다.
나는 어느 특정한 교파에 속해 있지 않은 성직자로서 오랜 세월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상점가에 있는 가장 큰 극장에서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설교를 계속해 왔습니다. 나의
강연에는 그 주 안에서는 가장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었습니다. 몇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몰려와 자기 자신의 일이나 일상 생활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모두 건강과 행복과 번영을 얻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나의 강연 내용을 실천해 보고 실제적인 효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렇게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 극장에 몰려드는 일을 계속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8년 동안 나는 매일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귀에 친해졌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내가 들려주는 마음의 과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들은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한결 행복하고 더 풍족한 생활의 열쇠를 얻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편지를 매일매일 수천 통씩을 나에게 보내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의 힘을
한결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알고 나서는 그들은 더욱 건강하고, 더욱 행복하고, 더욱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생활을 체험 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출판사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30여 년
동안 사용해 온 마음의 구사법에 대한 철학과 과학과 기술을 여기에 한 묶음으로 모아
보기로 한 것입니다. 출판사 측의 주문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을 매일 실행에 옮겼을 때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가를 기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행복과 마음의 평화와 순결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창고의 열쇠를
당신에게 주고 나서 당신이 어떻게 그 창고의 문을 열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인생이란 가슴 뛰는 모험]
당신과 나는 이제부터 가슴을 뛰게 하는 미지의 대륙으로 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넘쳐흐르고 어디에서나 불타오르는 대생명력과 사람의 정신과
인격 등의 사이언스를 연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당신 마음의 밑바닥을 탐구하여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밝혀 낸 다음에 당신의 최대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배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생명력이란
무엇이고, 마음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또 무엇입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는 아직 그러한 질문에 완전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또 이렇게 덧붙여 말을 해 줄 것입니다. "우주의 대생명력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화하십시오. 인간이란 그 대생명력 속에서 자각을 갖고
살고 있는 하나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인식하십시오! 정신은 대생명력의
법칙이며, 생명이 작용하는 방법이고, 창조를 위한 대생명력의 도구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구를 최대한 사용하십시오!"
[정신은 마술과 같은 것]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생명력의 자각 있는 포인트(POINT)로서, 당신은 정신을 끓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그 힘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됨에 따라서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은 누구나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정신을 사용하는
자가 바로 당신이므로 당신은 마술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언제나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이 도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일은 모두 알아두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많이 알아야 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이 위대한 도구인 정신을 당신에게 설명해 주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면
건강과 행복과 성공을 얻을 수 있는가, 또 당신의 심중에 있는 최대의 욕구까지도 손안에
넣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에게 보여 주는 나의 이러한
제언을 연구하여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게 된다면 이것을 이미 사용한 수많은 사람들처럼
당신도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당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은 수학적인 확실성]
성공적인 삶의 법칙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용을 한다는 것도 의심할 바 없는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려는 성공에 이르는 삶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사용한다면 성공은 수학적인
확실성으로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주부가 맛있는 과자를 굽기 위해서 적당한 재료를 모으고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처리해
낸다면 맛있고 좋은 과자를 굽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운이나 불운이라는
우연은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학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나 나, 혹은 그 누구라도 성공과 행복과 좋은 생활을 위해서 적당한 재료를
모아 유효한 방법으로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바꾸어 말하면 만일 우리들이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생명력의 이미 알려진 법칙을 과학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에 의해 착실하게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의심의 여지도 없이 우리가 바라는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지금부터라도 훨씬 더 부유하고 훨씬 더 만족한 생활을 위해서 문호를
개방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당신이 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당신이 이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만
가능할 뿐입니다. 혹은 그 노력을 하도록 당신을 격려하는 정도는 나도 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는데 쓰는 도구는 당신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외부에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또 어떠한 것에도 기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에게 어떠한 자세로
있어 달라던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이며 일에 필요한 무엇이든지 모두 바로 당신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당신의 어깨 뒤에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홀가분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부터 당신의 사고를 어떻게 조정하고 새로운 형의 사고방식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성공에 이르는 생활 방식의 열쇠를 건네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어떻게 사는 가이다]
당신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충실한 생활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아는 일입니다. 불쾌감이나 실패, 불만 등의 고통은 당신이 당연히 가져야 할
생각하는 여러 방법과 행동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갖지
못한 것을 자연계는 당신에게 고통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 고통은 생명의 법칙을 불건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통고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와 반대로 당신이 행복과 부유함,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보답하는 자연의 섭리인 것입니다.
이 책은 추리 소설을 읽듯이 대충 읽어도 되는 책이 아닙니다. 깊은 연구와 심사
숙고하는 자세로 주의 깊게 생각해 가며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이 가르쳐 주는 것은
생각하는 방법의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한 부분으로 되고 몸에 녹아들 때까지
조용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십시오. 이들 사상으로 하여금 당신의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영감을 주도록 한다면 머지 않아 곧 당신은 당신이 원하고 있는 욕구를 채울 수 있게
것입니다. 실용적으로 성공의 길을 따라 방향이 정해진 당신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낡은 삶의 사고방식은 저절로 사라지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사닥다리를
한단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상에 도달했을 때 당신은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게 될까요!
[천국은 단번에 갈 수 없다]
"오르기 위한 사닥다리를 만들어 세워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낮은 지상에서 둥근
천장의 하늘까지 사닥다리의 가로 목을 한단 한단 올라가야 하는 곳이지요."
- J.G. 홀랜드(HOLLAND, JOSIAH GILBERT 1819~1881: 미국의 저널리스트, 작가) -
우리들은 여러 대를 살아오면서 조상들로부터 신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지금까지의 믿는 방법을 바꿔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설적으로
상상력을 활동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소리를 우리들은 들어 왔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하면 개조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의 자세를 바꾸라고 역설하는 사람은 많아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상담을 해 오면서 경험한 예를 보아도 가장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지적인 사람들은 정신 활동의 이면에는 어떠한 철학적 이치가 있는가를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일 먼저 어째서 자기가 곤란에 빠졌는가를 궁금해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몸안에 있는 힘을 알고 싶어하며, 또 그 힘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이해하고 타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면 좋은가, 왜 인간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
있는가, 그 체험을 어째서,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그 변화를 어떠한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인가를 당신도 알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그릇된 사고방식의 결과이다.]
당신이나 내가 환경 속에서 겪고 있는 고난, 즉 병이라든가, 실패라든가, 불행 같은
체험은 몸안에 있는 무엇인가의 잘못에서 비롯된 증상입니다. 그것은 그릇된 사고방식에
따라서 나온 것이며 그릇된 행동에 빠지게 된 결과인 것입니다. 그것을 빨리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고통스러운 증상만을 떼어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의 핵심을 파고들지 못하는 일입니다. 불행한 상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원인만 고치게 된다면 효과는 저절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건강의
효과적인 원인만 확립해 놓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병을 고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 사람이 행복을 발견하는 즉시 불행은 스스로 물러나게 됩니다. 성공의 인자만을 잘 뽑아
모은다면 이 미 실패의 걱정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어디에서나 불타오르는 대생명력의 의의를 알고, 그것을
당신의 몸안에서 어떻게 당신을 위해서 운행시킬 것인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즉 당신
자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왜 여기 있는가를 알며, 당신 마음의 내부적인 능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면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대생명력에 따르는 생활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환경은 저절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국가, 모든 문화에 있어서 남자든 여자든지간에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은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과 순조롭게 대결하여
자기를 잘 평가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여 자기 스스로에 만족하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며 자기 주변의 세계와 잘 어울리고, 성공과 자유와 마음의 안정과 평화에 이르느냐
하는 그러한 어려운 문제와 대결하여 왔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병, 고난, 불행,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의 부조화 등의 고통을 자초하여 찾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또한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선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대생명력이 제공하는 선한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쾌락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든 것은 우리들 자신의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사람은 필요한 조건만 갖추기만 한다면, 인간으로서 가질 자격이
있는 대생명력의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전등을 켤 때는 전구를 끼우고 스위치를 돌립니다. 만일 전등이 켜지지 않는다고
하여 전기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전기의 기술적 법칙을 저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고 어디에서 접촉이 안 되는 가를 조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을 다 해 놓으면 전등은 반드시 켜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의 경우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당신 생애의 어딘가에서 바라고자
하는 체험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연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유일한 문제는 바로 우리들 자신]
성공적으로 사는 데 있어서 오직 한 가지 진정한 문제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흔히
우리들의 고난을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든가, 주위의 환경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다루는가, 그들과 어떻게 보조를 맞출 것인가 하는 다시 말하면 그들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의 문제이며 그때 그때의 사태에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개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으르렁대며 짖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꼬리를
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사람들 각자가 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1부에서는]
이 책의 제1부에서는 당신 자신을 연구하게 될 것이며 당신은 자신의 위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환경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며 당신의 육체가 당신의 태도와
사고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해서 당신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과의 분야에서보다 원인의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제2부에서는]
제2부에서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힘을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고, 당신
개인의 육체적 건강과 다른 사람과의 접촉, 번영, 올바른 사고들을 가지고 먼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떻게 해서 열등감과 신경질을 극복할 것인가, 나쁜 버릇을
어떻게 하여 좋은 습관으로 바꿀 것인가, 어떻게 마음을 활동시켜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모두를 알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제 3부에서는]
여기에서는 당신이 얻은 새로운 마음의 위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다루기로 합니다.
각 장은 당신을 격려하여 보다 더 커다란 성공에 이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거듭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을 변경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 환경과 체험도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행동에 격려와 영감이 나올 만큼 완전한 마음의 통어가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지니는 방법을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은 재미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 여행에는 열매가 있고 가치가 있고
여러 가지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슴 뛰는 모험입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은
미래에 대해서 정말 열정을 가지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1부 당신의 내부에 있는 힘]
[1 당신은 무엇인가?]
어느 일요일, 나의 강연이 막 끝났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빈틈없는 매무새에 지적인
얼굴을 한 어떤 부인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강연에
처음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백 마일이나 떨어진 먼 도시에서 살고 있답니다.
선생님이 이곳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거예요. 그 까닭은 저의
사촌오빠인 J. 로버트가 놀랍게도 아주 많이 달라져 있거든요. 선생님으로부터 강연을
듣고 난 뒤부터는 반년전의 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연 딴 사람이 되어 있어요.
선생님께서 하시는 강연의 내용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사람을 그렇게 갑자기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궁금하고 알고 싶어서..."
이 부인의 이야기는 사실이었습니다. J.로버트는 6개월 전과 비교하면 전연 딴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름도 전과 같으며, 집도 전에 살고 있던 집에서 그냥 살고
있습니다. 직장도 6개월 전과 다름없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육체는
이제 건전해져 있습니다. 그가 사는 세계는 전과는 아주 다른 좋은 방향으로 일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 하는 것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새롭게 발견한 새로운
지식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당신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하고 한 번이라도 물어 본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의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습니까? 만일 당신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생애를 살고 싶다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나와 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다루고 있으며 당신의 소질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여기에서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존재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시렵니까. 자기 보존은 자연계의 제 1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면, 또 당신에게도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생명력에도 당신이라는 포인트가 빠져서 없다면 무엇을
체험할 '당신'은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세계의 모든 것은 당신이 있으므로
비로소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의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체험하는 세계의 놓여 있는 모든 것, 즉 사랑, 가족, 돈,
성공, 또는 여행 같은 것 등은 모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무엇인가 당신의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신에게 하나의 놀라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라고
가르침을 받는 수도 있습니다. 자기라는 것은 훌륭한 것도,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역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나
좋은 일을 바라는 것은 결코 불건전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만 좋은 일을 바란다면
그것이 불건전하다는 것뿐입니다.
영국의 시인인 A. 테니슨(TENNYSON, ALFRED: 1809~1892)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존중, 자기 인식, 자기 통제의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자주적인 인생으로 이끌게
된다."
[당신 자신을 건전하게 표현하라]
물론 사람이 이기적인 것은 큰 잘못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무엇인가 이득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며
또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기 표현을 설명하는 것이지 결코
이기적으로 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성이 강하면서도 성공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표현에
자기 스스로가 힘을 써야 합니다. 그 개성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위대한 대생명력에 건전한 흥미를 연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 자신과 또 나의 힘과 사랑과 열정을 쏟아 넣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원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돈이 없으면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한푼도 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위대한 교사중의 한 사람인 예수께서는 만일 당신이
선량하고 행복하고 싶다면, 즉 종교적인 표현으로 천국이나 극락에 가까이 가고 싶다면,
이웃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사람을 위해서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담긴 깊은 뜻으로는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 지극히 옳은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친해지지 않는 한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생명력과도 사이좋게 친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참다운 가치를 찾고 싶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고 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믿을 수가 없으며, 결국에는 신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히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말할 때 당신이 가리키는 것은 마음입니까, 육체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감정입니까? 여러 가지 신변 잡사입니까? 직업입니까, 가족입니까? 아니면 지난날의
체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의 정신, 육체, 감정. 여러 가지 신변 잡사는 당신이
말하는 '나'가 사용하고 체험하는 것이지 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당신은
당신의 육체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육체를 사용한다,'하는 등의 말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나'란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육체가 자기라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는 육체나
물질의 견지에서 모든 일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몸안의 위력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자기라고 믿는 그들은 육체가 요구하는 일에 쫓기고
육체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음식이나 집이나 감각적 향락을 달라고 외쳐 대면
그것에 응하느라고 시간과 노력을 온통 쏟아 넣게 되는 형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그들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육체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분명히 우리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주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고 잇지만 반대로 우리들도 육체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신념만 있다면 육체를 통제하며 육체 위에 지배력을 미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감정인가?]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 자기라고 믿고 있습니다. 즉 사랑, 증오, 공포, 믿음 등이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체는 감정이나 정신의 명령 아래에 있으면서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신체가 감정에 호응하는 방법을 알고 감정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고
감정, 즉 사랑, 증오, 공포, 믿음 등이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체는 감정 혹은
정신의 명령을 받으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감정을 지배하거나 명령하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잘못 된 생각을 지니고 감정의 입장에서
만사를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그들 또한 노예인 것입니다. 즉 감정의 노예인 것입니다.
[당신은 지적 존재인가?]
또 자기 스스로를 지적인 존재라고 믿는 사람을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육체의 기능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원만하게 운전하며
또한 고도의 능률을 가진 기계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성과 지성, 혹은
편의주의 내지 방편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능률이 매우 높은 돈벌이 기계일
수는 있겠지요. 또 창작 미술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밖의 무엇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즉,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어디에서나 불타오르려고 하는 대생명력 속의 정신을 교묘하게 쓰는
포인트(POINT)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정신을 사용하는가를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의 활동 같은 것은 본래부터 정신의 기계적 활동보다 우수한 그들 자신 속에
있는 포인트의 명령에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아직도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모든 것을 거느리는 심오한 포인트를 여기서 '혼'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당신은 영적인 존재인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를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정의는
'자신에 눈을 뜬 어떤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보다 깊고,
보다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눈을 뜬 포인트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자기란 대생명력에 속하며 무엇이든 자기의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에 눈을 뜬 완전체입니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의식하며 자기 마음에 명령을 내려 선택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해결해야 할 문제나 새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해 줍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이와 같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종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하고도 만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일부의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지성의 힘과 추리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의 운행까지도 뜻대로 지배 할 줄 아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감정과 나아가서는 자신의 육체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 수 있고, 자신의 혼을 향해서도 명령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재능과 힘을 갖춘 사람은 권위 있는 지위에 오른 사람이며 '나'를
정복하고 '나'를 복종시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진실로 자기 집의 주인으로서 왕좌를
차지하고, 그 높은 비밀의 세계에 주거하며 거기에서 생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라는
그 세계에 군림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결국 잠을 자면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자유 의사를 가진 완전체인 것을 알고 자기의 정신에 명령을 내리고 감정을
조정하고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기까지는 잠을 자면서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명의 배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망각
속에 내버려둔 채 언젠가는 체험의 세계와 환경을 지배하게 될 자신의 힘도 의식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이나 자신의 세계 위에 지배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에 다한 이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당신이 '나'라고 부를 대 의미하는 당신 자신의 그 포인트는 의식을 갖는 생명의 한
점이며, 정의하기 어려운 비물질적인 포인트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처리하는 중심점입니다. 그 중심의 '나'에 있으면서 의식하고 깊이 생각해서 바라는
목적의 어느 것을 향해 정신을 움직일 대상이 선정되면 대생명력의 창조를 관장하는
정신은 감정이라는 '발전소'에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다시 신체, 즉 육체라는
긴요한 기능을 움직이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델포이에 새로 건립한
사원의 비명으로 새길 문구를 찾고 고르던 중에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능한 한 많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긴요한 기능에
대해서도 가능한 데까지 많이 알아야 하고 또 방향을 정하는 감정의 힘에 대해서도 알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아서 자기
자신을 충분하게 그리고 건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들 각 개인에게 있어서 자신이란 존재는 분명히 놀라울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그 한 부분을 나누어 우리들을 창조했으며, 우리들 각 개인의 표현을 위해서
다른 곳에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방법을 생각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은 모두가
한결같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어떠한 사람도 구석구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은 동기나 같은 배경을 가지는 일은 없습니다. 어느 두
사람을 놓고 보아도 똑같은 방법으로 대생명력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어느 두
지문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인류가 생긴 이래 오늘날까지의 역사 속에 있었던 다른 어느 사람과도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느끼고 그 특이성을 의의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생명력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당신이라는 존재로
태어났으며, 또 당신이 전 세계에서 다른 어떤 사람도 차지하지 않았던 공간과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즉 대생명력이 그 위력과 본성과 재능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어 당신이 되게 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의 내부에서는 틀림없이 깊은 자기
감사와 자기 존중이 용솟음쳐 오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산다는 일에 의의를 느끼게 되고
생활의 목적을 충족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자신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 개인은 모두 대생명력이 사람으로 화신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대생명력의
인격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자기 자신 속에 대생명력의 지혜와 위력과
재치와 표현의 긴요한 도구 등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풍요함은
우리 모두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또한 그것을 우리들이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가 좋은
것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누구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누구나
무엇이고 희망하는 것을 그의 생애에 가져올 수 있는 긴요한 도구를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긴요한 도구란 바로 정신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생각 할 때는 곧
정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은 대생명력의 위대한 창조를 맡고 있으며, 대생명력의
도구 또는 그 대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운명을 만들 수 있다]
우리들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 무엇을 가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든지 기획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예기치
않은 충격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이 진정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기력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나 결정의 책임을
아버지나 어머니, 자매, 남편, 목사, 친구 등 누군가가 대신 떠맡아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상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생명력의 화신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성실하고, 또 우리들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우주의 대생명력에
성실하려면 생활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채택하고 결정하는 포인트에서는
실로 대생명력, 즉 무한대의 대생명력이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부리고 있는 정신이 실은 대생명력의 정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결단을 내릴 때마다 그 배경에는 대생명력의 지혜와 위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체험의 세계에서의 모든 가능성, 그 중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무엇을 체험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람이 선택해 주기를 바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이 어떠한 체험을 할 것인가 하고
선택하는 일은 각자에게 하나의 드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 개인은
대생명력 속의 자각 있는 한 포인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위력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야 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걱정할 것도 없고, 의심하고 망설일 것도 없이 거기에 따라서 행동해야 합니다.
채택의 힘은 우리를 한 사람 한사람 인간으로 나누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채택하는 데 따라서 우리들에게 무엇이 일어나는 것인가, 우리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행복이 올 것인가 불행이 올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눈이 부실 만큼 행복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해 있는 어느 부인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녀가 처음
나에게 찾아 왔을 때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녀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한
고민 속에 빠져 있다가 누군가의 소개로 나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진창에
빠진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느끼며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저에게 죽을 힘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자살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요."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그때 그녀의 어느 것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손을 쓸 기초가 될 만한 그
어떤 기력이나 신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쇼크 요법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죽는 데 무슨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까? 죽는 데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은 살아 보겠다는 용기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덧붙여 강경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인생살이가 그렇게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것이라면 살아가는 보람이나 즐거움도 없을
것입니다. 쉬운 것이라면 용기도 '결단'도 필요 없습니다."
이 '결단'이라는 낱말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자포자기'한 기분이 되어서 비극적인 지금의 상태를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 또는 그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이서 한동안 이야기하는 사이에 모든 문제가 잘못 된 생각에서
나온 그릇된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나는 나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첫 상담에서 그녀는 '무엇인가 희망이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의 기분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계속된 며칠 동안의 상담에서
그녀는 하나님이 자기를 학대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또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학대한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어려움을 하나하나를
드러내 놓고 객관적으로 검토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포자기에 있던 그녀의 사고도 조금은
조리에 맞는 분석을 할 수 있도록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인생에 의의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조처의 사례를 되돌아보면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역할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스스로를 발견하게 한 일 뿐이었습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그녀는
대생명력을 대표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그녀의 자신은 대생명력이
표현하고자 하는 일의 완전하고도 긴요한 도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대생명력도 그녀의 진실하고 활발한 협력을 얻게 되어 그것은 그녀에게 눈에
보일 만큼 가치와 보수를 가져오는 일을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하는 일거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고, 인생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성공하여 그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주변의
누구에게나 영감을 주면서 생기에 넘쳐 행복하면서도 열의가 있는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게 되면 당신도 벅찬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어디에나 넘쳐 흐르는 대생명력을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 가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자신이 가진 신념에 따라
열정이 되기도 하고 공포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면, 또 만일 나약하거나 좌절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당신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활동하고, 소유하고, 그리고 존재한다는
일에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욕구의 해결을 외부세계에서 찾아내도록
가르침을 받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힘이나 정력, 그리고 행복을 늘
외부 세계에서만 찾아 왔습니다. 대생명력의 전부, 즉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거나 일부러 거기에 주목하는 것을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서구문화에 누구보다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최대의
교사인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느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뜰 때가 온 것입니다.
[2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마술적인 힘]
발명가 에디슨, 수학자 아인슈타인, 음악가 베에토벤, 시인이며 사상가인 에머슨, 또는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 등이 사용한 마음의 힘이 당신이 쓰는 마음의 힘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실제로 몇 세기에 걸쳐 많은 위인들이 사용해 왔던 것과 똑같은 마음의 힘을 당신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통된 하나의 정신력이 있다.'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됩니다.
우주에는 하나의 정신력이 실재하고 있으며 우리들 각자는 그 정신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
당신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인이나
기적을 행하는 성자들에게 어떻게 나를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역시 이렇습니다. "그들도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정신력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은 당신보다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정신력을 활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보다 많은 일들을 이해하고 또 정신력을 유효하게 쓰려고 노력한다면 당신도
지금보다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고, 지금보다 우수해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들은 지금 실제로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이해와
지식과 견문을 넓혀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또 우리들이 사용해야
하는 정신이라는 이 뛰어난 도구에 대해서도 당신이 알 수 있는 최대한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얼마 전에 한 젊은 부인이 자신이 작곡한 대중가요의 원고를 갖고 나의 연구소를
찾아 왔습니다. 그것을 출판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그 누구도 선뜻 출판을 맡아 주겠다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원고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출판하겠다는 마음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그녀를 격려해 주며, 그 노래를 출판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믿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상상력 속에서
그 노래 책이 몇 백만 부가 팔리고 라디오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그 노래가 불려지고
있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부부와 함께 자신의
상상력으로 성공의 그림을 수없이 그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대해서 마음속의 직감에 의지하였고, 가장 깊은 잠재의식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안 가 그녀의 노래를 출판해 주겠다는 출판업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부인의 성공은 어느 순간부터 기정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먼저 성공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고 그 새로워진
마음을 꿋꿋하게 간직하면서 깊은 마음속의 지혜에 따라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간 것입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빌이라는 남자는 상업 지구 등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과중한 저당에 잡혀 있었습니다.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사업을 지나치게 확장했던
것입니다. 채권자가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아서 그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습니다. 걱정과 불안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파산이 그의 눈앞에 와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 마음의 불안 때문에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재산을 지키고 싶은 생각으로 여기저기 별로
가망도 없는 곳을 찾아 뛰어다녔으며, 그가 아는 모든 객관적 수단을 다 동원하여
문제의 해결을 꾀해 보았지만 단 한 가지도 성사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실책에서 또 다른 실책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그는 사뭇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보이는 것 같이 내 눈앞에 선합니다. 그는 이미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듯 했습니다. 벼랑에 마지막 선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는 그에게
돈을 빌려 준 많은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재산의 강제 집행을 해 올 태세인데도 어떻게
해볼 방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빌, 자네는 왜 채권자에 대한 자네의 생각을 고치지
않는가? 그들을 지네의 친구로 생각해 보게나. 같이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실제로 그러한 상업적 모험을 자네에게 시키기 위해서 자금을 빌려 준 것이니까 알고
보면 공동 출자를 한 동업자가 아닌가? 그리고 자네의 친구들이 아닌가? 그들은 자네를
신용하고 있는 것일세. 그렇지 않다면 돈을 추가해서 빌려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그들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자네의 그 땅에 대해서 권리가 있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자네는 자네 편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그들의 관점에 서서 객관적으로 모든 사태를
내다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빌 자네는 자기를 사랑하는 바와 같이
그들도 사랑해야 하네. 그리고 자기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야."
그리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었습니다. "여러 채권자들과 회합을 열기
전에 자네의 마음을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사용하도록 만들어 놓으란 말일세. 어떠한 회합에서도 자네의 이익과 함께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 좋단 말이야." 그 뒤로 빌의 태도는 눈에
보일 정도로 변했고, 우리의 회합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물론 채권자가 빌을
대하는 태도도 일변했습니다. 이야기를 줄이기 위해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결론만을 말하겠습니다. 제일 큰 채권자인 은행은 빌의 전 재산에 대해서 재 융자를
해주었으며, 얼마 뒤에 빌은 그 은행의 중역이 되었으며 부동산 부문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재정은 구제가 되었고 장래 역시 보장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념을 갖고 이웃 사람을 사랑하고, 채권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함으로써 풍족한 배당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변화된 빌의 마음의 태도는 그가 체험한
세계를 모두 일변시켜 놓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던 것에서 자기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쪽으로 태도를 바꿈으로써 남들도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J.드레이크라는 사람은 연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의 사업도 지나치게 크게
벌여 놓았던 것입니다. 한 때는 가진 것을 전부 잃고 맨 몸뚱이만 남는가 싶을 정도
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민으로 수척해 졌고, 아무런 기운도 없이 꼭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술로만 지내다가 나에게 상담을 하러 올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와의 상담을 통해 나는 그에게 그렇게 실패를 체험한 것은 부정적이고 그릇된
사고방식 때문이며, 만일 무엇인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다면 틀림없이 그 반대의 좋은
성과를 얻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충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갖는 것뿐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신뢰하는 일과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고 믿는다면 그 올바른 사고방식을 곧 나에게 오게
된다 이 말이군요." 내 말의 뜻을 이해한 그는 지금까지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마음과
몸을 느긋하게 먹고 자기 마음속의 지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획이 완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용기와 끈기와 결심이 필요했지만,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대생명력이 그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힘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그 기획이 성공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은 지난날보다도 더 많은 돈을 모았으며, 현명하고 한결
행복한 남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아주 달라지고 나서는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용하고 그와 거래하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기적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인과의 법칙을
사용했을 뿐인데도 이 법칙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원인을 만들었고
그 결과로 전과는 새로운 체험의 세계를 얻었던 것입니다.
[생각은 정신을 쓰는 일]
생각(그것은 정신을 쓰는 일)을 통해서 새로운 원인이 만들어지고 그 원인은 활동을
계속해서 그것에 상응한 결과를 낳는 법입니다. 대생명력 세계에서는 모든 일에 걸쳐서
그러한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겨자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반드시 겨자를
얻게 됩니다. 겨자씨를 뿌렸는데 엉겅퀴를 얻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꼭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겨자를 갖고 싶어서 그 씨앗을 땅에 뿌린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어느 결과를 기대한 것입니다. 당신은 겨자를 갖고 싶은 거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겨자를 갖고 싶은 생각에 겨자 꽃이 피어 있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겨자의 씨앗을 뿌리면 겨자가 손에 들어온다는 신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겨자가 갖고 싶다면 겨자 씨앗은 당신이 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모든 일에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일입니다. 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은 모두 정신이 작용한 최종의 결과인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들은 자기
스스로를 단순한 육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두뇌나 순환 계통, 그 밖의 육체적 기능의
모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뇌나 몸의 배후에 있는
자각을 가진 대생명력의 포인트라고는 생각해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뇌나 몸을
활동시키는 것일까요? 뇌나 육체의 존재는 원래 무엇에 기초한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높은 곳에서나, 아니면 우주 공간의 밖에 있는 위대한 신이 마술의 조화를 부리거나
지상의 위대한 힘을 가진 신이 무엇을 흔들음으로써 생겨난다고도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애에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외계에 있는
조물주의 탓으로 돌려 왔는지도 모릅니다. 또 일부의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는 나쁜
신에게 죄를 되짚어 씌워 오기도 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은 진리와 마주 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가슴 아픈 불행한 체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창조의 위력은 우리들 각자가 얼마든지 이용하고 싶은 대로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정신은 창조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대생명의
힘을 얼마든지 끌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생각하는데 따라서 자신이
바라는 것도, 바라지 않는 것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하면 자기가 잘해서 그 영예를 안았다고 하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또는 무엇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고난에 봉착하여 신을 책망할 때는 그다지 심한 욕설은 쓰지 않지만
이런 정도는 소리내어 말하거나 생각할 것입니다.
"아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만일 신이 내가
건강하기를 바라셨다면 왜 나에게 병을 주었겠는가. 만일 나에게 부자가 되게 해 주고
싶으셨다면 이러한 가난뱅이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셨을 거야." 이런 말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말하자면 알리바이(도피)에 지나지 않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의 책임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나에게 이런 항의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저자)은 왜 만능의 신에게 말씀을 드려서 신의 의사가 실현되는 방법을 배워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가?"
자, 그것이 바로 내가 이제부터 하고 싶고 바라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기대에 꼭
들어맞는 방법과 부합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차츰 알게 되겠지만 신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의 실체, 즉 당신이
날마다 사용하고 있는 힘, 그것이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도록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딘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외계의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나 나나 언제나 바로 옆에서 쉽게
기댈 수 있는 신의 힘, 즉시 그리고 언제 어느 때나 우리가 쓸 수 있는 커다란 힘,
날마다 써서 보다 더 크고 좋은 일을 우리들의 생활에 가져올 수 있는 힘을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신의 위력을 쓸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깨닫게 되기까지 그 능력을 높일 수 있도록 나는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즉, 당신 속에 신의 무한한 힘과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당신이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 힘은 당신의 생각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당장 그것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
힘을 더욱 잘 이해하면 당신을 위해서 여기서 말하는 대생명력, 또는 이른바 신이
당신의 생각의 중요한 경향이나 태도, 신념, 신앙에 대해서 언제나 응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력을 갖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언제나 당신의
신념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고에 유의하라]
당신의 사고, 당신의 태도, 당신의 신념 등, 그런 것에 유의하십시오. 그러면
대생명력의 힘이 어떻게 당신의 정신 상태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신비롭게, 불가사의하고, 추상적인 신을 화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뜻하고, 마음속에 살고 있으며, 누구나 바로 쓸 수 있고, 실증할 수 있고, 그리고 지혜도
있는 대생명력의 사랑에 찬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은 전 우주의
대생명력일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실재하고 있는 대생명력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과 신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3 당신 속에 있는 신의 나라]
당신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가사의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깊은 인상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정말 흥미를 느낀 일이 있습니까?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이며, 인간이란 존재는 이 혹성 위에서 대생명력이 최고의 형태를 가지고 출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높은 가치를 인정하고, 옛날, 어느 선생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말과 같이 '아아 훌륭하다. 훌륭하다. 나는 정말 훌륭하다!'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한 말을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
당신 자신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대생명력의 포인트가 '내가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 자신의 속을 보고 있다.'하고 말하는 것이 들립니까? 그 '나'는
대생명력의 포인트로서 그것 자체를 인식하고, 그것 자체에 방향을 줍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에게 지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복잡한 기구입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뜨고 그 포인트로서 살고 싶다, 존속하고 싶다,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행복하고 자유스럽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살고 싶다, 언제까지나 살고 싶다, 넉넉하게 남아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지고 호화롭게 생활하고 싶다는 욕구에는 한정이 없습니다.
당신의 욕구는 여러 가지 형태를 갖습니다. 그러나 욕구의 어느 하나가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 욕구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손에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욕구가
본질적으로 무한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의 욕구는 종말이
없습니다. 불사의 것입니다.
[욕구는 정신의 한 형태]
욕구는 자연계의 모든 것에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또한 자기 자신을 체험하고 싶다고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싶어합니다. 나무는 자라기를 바라고, 새는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적 존재인
당신의 속에 있는 욕구는 사실은 대생명력의 욕구를 통해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라는 것은 대생명력 그것과 마차가지로 종말이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욕구를 갖는 그곳에는 또 하나의 신념도 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응답이
있다.'하고 믿는 것입니다. 때와 기회가 주어지면 어떠한 욕구도 응답을 얻는 데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만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어떤 욕구에 따를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욕구는 당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
신념이 당신을 이끌고 가는 곳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당신은 신념의 힘을 아직까지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념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념은 정신의 한 모습입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욕구하고, 신념을 갖는 그 포인트에는 상상력이라는 또 하나의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계획이라는 그림을 묘사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계획하는 짜는 부문이며 당신의 지휘에 따릅니다.
상상력을 사용하는 당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한의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효과 있게 쓰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쓰여질 수
있도록 당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생각이나 하나의 체험의 기억을 되살려서 그것을 다른 생각이나 기억에
연결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당신은
연상하고, 상상하는 일을 통해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길잡이가 있다]
당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또한 마음속의 길잡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육감에서 오는 직감이나 영감에 의해서 갑자기 이성을
초월하여 아무 사전 지식도 없이 무슨 일이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느낌이 생겨 그
방향으로 가보면 과연 그대로였던 경우가 지금까지 당신에게도 몇 번인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수준이 문제이며, 이것이 당신을 인도하여 바른 때에 바른 것에 있게 하고, 바른
말을 쓰게 하고, 바른 방법으로 바른 일을 하게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인정하고
완전히 그것에 의지한다면, 즉 만일 그것에 대해서 성실하고 그리고 그것을 사용한다면,
이 길잡이의 당신을 인도해 나가는 능력에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무한의 능력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양심이란 것에 대해서 때로는 '억제의 심리 과정'이라고도 하고, 또는
잘못된 일을 하지 않게 하는 마음속의 정신 능력이라고도 합니다. 양심은 당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게 하고 당신 몸 안의 대생명력의 법칙에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양심,
이것 또한 무한의 능력인 것입니다.
당신 자신 속에는 이지와 지혜도 있습니다. 이 특성은 누구나 만족할 만큼 많이 가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지혜를 써서 체험하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무한의 이지와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란 것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이나 물건을 사랑합니다. 잘못 된
방향으로 사랑의 충동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우리들은 그것의 특질을 한없이 체험함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는 평화라는 특질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면서 우리들이 그것을 체험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이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표현하든 평화라는
것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당신의 내부에는 또 아름다움을 향하는 특성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 특성의 표현을 어느
한곳에 국한시킬 수도 있고 또 위대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많은 미를 표현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오히려 그 이상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특성이 남아 있으며 한계라는 것은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특질도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표현하고 체험할 만한 기쁨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당신을 통해서, 또 당신에 의해서 기쁨이 표현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언제나 무한하게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안의
내부를 대충 훑어보아도 무한하고 끝이 없는 특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끝없는 지성,
지혜, 평화, 아름다움, 기쁨 등 참으로 당신이 체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무엇이든지
모두 당신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신 속에는 이러한 특성들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있습니다. 즉, 욕구, 신념, 상상력, 이성 및 지도력(길잡이) 등이 그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라]
그러한 대생명력의 특성에 따라 당신 자신도 자신의 생애에서 체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또 그것들을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능력 등이 당신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사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성을 가진
불사의 끝없는 능력들이 화신이 되어, 당신의 본질로써 당신의 참된 개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수긍이 가지 않습니까? 당신 자신과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는 재능에 대한
이해가 늘어가고, 대생명력의 그러한 특성을 당신이 표현함에 따라서 그 표현이 깊어
갈수록 당신은 무한의 신성을 가진 대생명력으로 확대해 간다는 사실이 수긍이 가지
않습니까? 당신의 신념과 상상력에는 끝이 없고 이성의 힘에도 끝이 없으며, 그리고 사랑,
평화, 위력, 아름다움과 기쁨에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로 이루어
지고 있는 당신은 사실상 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들의 몸 안에서 찾아낸 능력이나 특성 말고도 우리들의 몸 안에는
무엇인가를 채택하고 결심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그 능력을
사용할 것인가를 당신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무한의 특성들 중에서
어느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 가도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선택과
결심하는 힘을 가지고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인품과 성격을 쌓아 올릴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선택하는 마음속의 힘뿐 아니라 선택한 방향에 따라서 행동하는 힘도 당신에게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성장함에 따라서 당신이 사용하고 표현하고
체험하는 모든 정신 능력과 영적 특성도 같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특성들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과 함께 우리가 사용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몸안의 저장고나 동력원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표현이나 체험은 당신이 그것을 억제하지
않는 한 그 어디 것에도 국한이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독한 바보라면 또 모르겠지만 대생명력이 당신에게 보내주는 축복을 고의로
거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축복의 선물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갖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여기에 일 백만 달러의
자기 앞 수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잇거나 또는 일 백만 달러라는 돈의 가치를
모른다면 그 일 백만 달러라는 돈은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행복하려면 이 자원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곧 대생명력입니다. 그 대생명력의 능력과 특성의 화신인 것입니다.
우주의 대생명력 속에 있는 것은 모두 당신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몸안에 대생명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에게도 몸안에 대생명력을
갖게 하여 주셨느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로다.'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중심 포인트는 당신이 '나'라고 말할 때에 가리키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대생명력의 특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당신의
신념을 불안과 공포로써 표현하는 것도 당신의 마음 대로입니다. 좋아하는 것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의 그림을 상상력 속에 그려 넣는 것도 역시 당신의 자유입니다. 사랑을 미움으로
표현하고 즐거움과 기쁨의 표현을 거부하는 것도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당신의 재능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선택 포인트에는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있을 수 있는 셈입니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것을 만들어 낼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로마의 황제이며 철학자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의 말입니다. 앞에서 '혼'을 자신의 눈을 뜬 그 힘이라고 말했던 것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당신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중심인 '나'는 자기 자신에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혼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몸안에 있는 신입니다. 그것은 생각하고 또 선택하는 포인트로서 거기에서
당신은 체험의 세계를 창조하는 지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대생명력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혼이 자연계에 넘쳐흐르는 힘을 지휘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신성에 눈을 뜬 하나의 포인트로서 신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고 신의 특성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에 '호흡보다도 밀착되어 있고, 손발보다도 가까운
곳' 몸안 깊숙이 있는 신을 당신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대생명력의 위대한 힘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좋은 욕구를 만들어 내기 전에,
즉 우리들이 하겠다고 기획한 우리들의 세계를 동어하기 전에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근본적이고도 기초적인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나'라고 자각한
포인트가 바로 신의 대생명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과 가까이 하라]
우리들은 이제 신성의 대생명력, 신성의 위력, 신서의 이지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재능과 책임, 우리들의 의무와 특권 등을 인식한 다음에 건강,
행복,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평화와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정신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로 합시다. 찬란한 삶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예수의 말씀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의 참뜻을 잠깐이나마 엿보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발전소에서 일하고 있는 J.바함이라는 중년의 남자가 일에 의욕을
잃고 자기 생활에 향상이 없는 것을 고민한 끝에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 자
신이 사실은 신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었더니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각하는 포인트에서는 분명히 신성의
대생명력이 그 자신이라는 인간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인간적 존재로서의 자기가 된
대생명력을 자각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그의 사고방식에 걸려 있던 많은 장애물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해를 한 그는 마음이 활기에 넘치고, 매일 아침
일터로 나갈 때는 '지금 신이 일하러 나가신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대발전소의 스위치를 넣을 때에는 '지금 신이 이 도시에 빛을 보내신다.'고 하였으며,
스위치를 뺄 때는 '지금 신이 이 도시의 빛을 거두고 계시다.'라고 혼잣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항구적이고도 무한한 힘의 자각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뀌었고, 지혜와 지성과 힘을 나타내기 시작,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띄게 되어 그는 결국 2년 후에는 큰 공공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정신은 생명을 창조하는 인자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건설적, 적극적, 창조적으로
마음의 보편적 힘에 방향을 주어 욕구 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실행할
권리와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신성을
가진 대생명력이 화하여 만들어진 화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마음이 작은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당신의 생명력은 바로 신의
대생명력입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정신은 창조하는 신의 무한한 정신으로 그것은 천하
만물을 실재 속에 있게 한 정신인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깊이 심사숙고할 만한 놀라운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인식하십시오. 당신에
대해서, 당신이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다면 그 정도에 따라서 당신은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게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허약하다,
두렵다, 걱정스럽다라고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한없는 힘이 그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그 자신이 올바르게만
받아들인다면 무엇이든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난심으로 마음이 쉽게 꺾이고 무지와 자기 연민에 빠져 그들 자신의 몸밖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신을 향해서 구걸을 하고 헐값으로 사들이려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얻는 데는 악전고투가 필요치 않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신의 힘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 마음이 허약하게 되고,
낙심으로 의기가 꺾이고 불행을 느끼곤 합니다. 여러 종류의 수용소를 다녀 보면
낙심하고 있는 사람과 용기를 잃은 사람들로 만원입니다. 교도소 역시 그런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들이 신의 위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것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은 일이나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만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살펴보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격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선택하고
통어 하지 못하고 공포나 미움, 질투, 탐욕 등에 휩쓸리도록 그대로 내맡겨 놓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을 행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서, 또 대생명력을 그들이 믿는 정도에 따라서
그것이 응답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위해서는 악전고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나쁜 꼴을 겪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웃 사람이나 고용주,
혹은 사용인보다도 자기만의 좋은 일을 바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서 투쟁이라는 것을 없애고, 사람들마다의 고난을 없애려면 사람들마다
자기 속에 자리잡고 있는 놀랄 만한 가치와 위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각자의
신성과 불사를 알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와 자기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생명력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좋은 일을 손에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 법칙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한 격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주에는 원래 기근이라는 것은 없는 법입니다. 한없이
많은 좋은 일들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성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들의 몸안이나, 아니면 주위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지와 오해 때문에 그러한 혜택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대생명력이 그들에게 자동적으로 응답해 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데 따라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신념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인간관계의 기본 법칙, 즉 불변의 원칙인 황금률(신약 성서 마태 복음 제7장
제12절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과 사랑의 법칙, 인과의 법칙 등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그 때문에 보통
사람은 투쟁을 하게 되고, 실패와 불행에 봉착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위대한 입법자이며, 이스라엘 민족 통일자인 모세(MOSES)는 일찍이 '나는
존재한다.'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대우주에 자신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나, '나는 존재한다.'라고 깨달은 것은 우주의 대생명력이 인간적 존재가
되어 자신에 눈을 뜬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신을 자기의 몸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우주의 대생명력이 바로 그 자신의 생명력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일은 당신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성자 바울(PAULOS 본명:
SAUL)도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언제나 가르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체험의 중심입니다. 당신의 체험의 세계는 당신 자신의 개인적 사고의
포인트로서 당신에 의해서 형성이 되고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욕구에
자극되고, 상상력에 의해서 계획안이 세워져, 그것은 다시 당신의 신앙이나 신념을
통해서 체험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정신의 보편의 법칙은 당신의 체험을 당신이
마음에서 생각하는 입법을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 근본의 심리를 매일매일 조용히 묵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높은 인식을 얻는 데 따라서 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근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몸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4 믿음의 마술]
여기 자기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믿는 것이
맞고 안 맞고는 별문제로 하고, 그렇게 믿는 것만으로도 벌써 직장을 갖는 것을 방해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가족을 부양할 돈도 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자리를 얻는데 대해서 희망을 갖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구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잡지 않으면 안될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부정적인 것을 깊게 믿고 자기는 무기력하고 불완전하다는 신념을 굳게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은 미리부터 자신감을 잃고,
대생명력에 정면으로 매달려 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부정적인 사고방식]
이 사람이 만일 자시라고 반드시 패배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데 따라서 대생명력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시다.
자기에게는 참된 학문이 있고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재능이 있으므로 실업계의 어느
곳인가에서는 반드시 자기를 찾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또 자기
자신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대생명력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신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시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대생명의 힘은 이미 그의 요구에
상반되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더욱 깊게 알게 되면
될수록 그의 신념은 부정적인 신념에서 긍정적인 신념으로 변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과 자기 자신의 역량에 대한 신념이 점차 변해 감에 따라서 그의
체험의 세계도 틀림없이 변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신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이미 가졌던 부정적인 신념의 방향만을
바꾸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신념이 그로부터 좋은 일을 밀어내고 있었는데,
적극적인 신념이 그에게 좋은 일을 제공하면서 좋은 일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와 상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나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서 큰 일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이미 몇 개월 동안 일자리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세 아이를 부양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그는 몇 개월 동안을 일자리를 얻지 못한 고민 때문인지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홀쭉하게 마르고 지쳐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격려했습니다. 살아 있는 이상
그를 위한 일자리는 반드시 있다는 것과 대생명 안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 가족이
있으므로 그 사람들의 필요 때문에라도 그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를 찾고 있는 고용주도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스스로 대생명력의 의지의 힘에 이끌리고 있다고 믿으며 아무 의심도 없이
마음속의 지도에 따른다면, 또 만일 그가 대생명력은 어느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그를 만들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가 아무 거리낌없이 대생명력의 목적에
순응한다면 대생명력은 그를 반드시 이끌어 주고 또 지켜 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 상담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나의 연구소를 나선
지 채 두 시간도 못 되어 훌륭한 일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의 의지가 그
일자리로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갔을 때 바른 말을 쓰고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상담을 청하러 왔을 때는 나를 찾아 올 때보다 더 많은
신념을 가진 것 도 아니었지만 내 연구소를 나설 때의 신념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극적인 확신으로부터
그것은 해결될 것이라는 적극적 확신으로 신념의 전환이 생겼던 것입니다.
신념은 우리들 각자의 생활 속에서 분명히 실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자세에 딸려 있습니다. 종교를 가져 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흔히 신념을 가지라고
강조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미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념이 없으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념을 사용하지 않고는 단 한 시간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겪게 되는 모든 체험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엇인가에 신념을 갖는 능력
때문에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들은 자가 자신의 천국과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누구나 무엇인가에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신념을 가지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그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뿐 입니다. 아마 우리들이
갖는 가장 소중한 자산은 다름 아닌 믿는 힘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믿습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신념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지 않는 것으로부터
바라는 것에 대한 신념으로 바꿔 놓는 일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놓았을 때에 우리들은
'깊숙한 성소'의 굳게 잠긴 문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부 텍사스 주에 살고 있다는 어떤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녀의 딸이
S시의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의
딸에게 뇌출혈인 중풍성 질환이 있을 뿐 아니라 심장도 매우 나쁘다는 진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제인이라는 처녀는 거의 절망 상태에 빠져 있다면서 자기의 딸을 위해서
우리 내외가 원거리의 정신치료를 해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 치료나 과학적인 기도의 덕택으로 우리 내외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었으며, 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처녀의 몸안에 있는 대생명력이라는
자연의 위력은 뇌의 조직을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또 지성이 있는 대생명력은 처음에
그 처녀의 심장을 만들었으므로 언제라도 그것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생명력의 이지적 위력이 지금 처녀의 완쾌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상상 속에서 지금 치료가 한창 진행 중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상상력과 신념을 통해서 대생명력은 완전한 회복의 방향으로
움직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내외는 이틀인가 사흘이 지난 뒤에 그 처녀는 완쾌가
되어 직장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녀의 자신에
대한 신념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또 적극적인 신념의 분위기에 둘러싸였기 때문에,
우리들 내외가 가족과 협력하여 그 처녀가 신념의 분위기에 싸이도록 마음으로 빌면서
대생명력의 법칙과 그 처녀의 혼이 불멸이라는 것에 신념을 두었기 때문에, 또 자연계와
적극적으로 조화하고 협력하였기 때문에, 또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대자연의 치료의 위력을 정신의 힘이라는 신념과 상상력을
통해서 자극했기 때문에 결국 그 처녀의 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처녀는
매우 건강합니다. 자연계가 우리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작용을 해서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는가는 그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의 씨앗에서 어떻게 무가
생겨 나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자연계와 협력하여 마음 쓰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대생명력 속에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좋은 것을 한결 더 많이 가지는 체험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에는 어떻게 하면 씨앗에서 채소를 만들어 내는가를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당신의 몸을 어떻게 하면 고치고, 회복시킬 수 있는 가를 터득하는 지성의 위력이
있습니다. 자연계는 농부가 믿는 정도에 따라서 수확을 가져다줍니다. 만일 농부가
수확이란 것에 신념을 갖지 않고 있다면 그 농부는 씨앗을 뿌리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농부는 계속해서 잡초만을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농부는 결과에
신념을 두기 때문에 농작물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제인이란 처녀가
완쾌되리라고는 눈에 보이는 모든 외관 상황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일단 지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그 처녀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이 사물의
외관에만 짓눌려 있었다고 하면, 그 처녀가 완쾌될 것이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며, 신념 또한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처녀와 가족들의 신념이 옳은 방향을
잡지 않았더라면, 또 어느 하나라도 세상 사람들이 믿음의 방식이나 체험을 초월하지
않았더라면, 그 처녀는 오늘까지 살아 건강하게 지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인 예수나 석가모니, 그 밖의 철인들이 사물의 외관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일 것입니다.
[신념이란 무엇인가?]
신념이란 확신입니다. 하나의 정신적인 인식입니다. 신념은 오관이 우리들에게 말해 주는
것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관이 전해 주는
것은 물질계의 외관뿐이기 때문입니다. 신념이란 분명히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도 하고 병을 나게도 합니다. 예수께서 말한 '산을
움직인다.'는 신념이란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오늘날에도 증명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입니다. 에머슨은 '그가 보고 또 체험한 모든 것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육체의 오관에만 의존하여
추리하는 사람, 그것에만 기대어 지식을 얻는 사람,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잇는 것들만 믿는 사람은 외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을 놓고 생각해 보아도 인생이라는 것은 그 자신도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생명도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생명력이 할 일을 다해 놓은 뒤라면 우리들의 눈에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그 참된 정신적 자아를 뒤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과 서로 익숙하게 알고 지내야 합니다. 대생명력의 자각 있는 포인트로서의 인간에게는
어떠한 사태에 마주쳐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관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 같은 외계의 무엇인가에 정복되거나 지배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바로 이 보이지 않은 본질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고, 맛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어떤 사람도 만져 볼 수는 없지만 실재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본 일이 없는데도 정신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어디서나 넘쳐흐르고, 어디서나 불타오를 듯한 대생명력을
시험관에 넣거나 자로 재어 볼 수는 아무도 없지만 대생명력이 실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두 실체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자기 자신의 몸을 통해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인 것입니다. 당신은
성대를 사용해서 나에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몸이나 행동은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 또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서 사실은 당신의 혼이 나의 혼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세상에서만 생활하는 사람은 오관이 알려 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측정하며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는 사물의 겉모양에 영향을
받으며 그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나 내가 병이나 가난 등의 겉모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신념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병이나 가난 등은 체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주위 도처에서 부정적인 무서운 힘을 봅니다. 산다는 일에 성공하고
평화롭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유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기의 힘보다
한결 더 큰 힘이나 지성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일생동안 물질적인 것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거나 또는 무엇 하나
우리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는 시대가 언젠가는 도래하게 됩니다.
이 고난에 대처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핵심 있는 영구적인 것,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영원한 느낌을 주는 것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물질적인 것이 아니어서 측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사실에 있어서 알아야 합니다. 대생명력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들 역시
실재합니다. 대생명력은 꺾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우리들 역시 꺾이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본질은 신성이고, 한계가 없으며 불사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진리를 알면 알수록 사고방식은 한결
더 자유스럽고 한계가 없는 것이 되어 갈 것입니다.
에머슨은 개인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나
넘쳐흐르는 보편의 대생명력은 스스로 개인으로 변화해서 우리들 각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 자신은 개인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보편의 대생명력이라고 그는 설파 한
셈입니다. 우리들은 이 보편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가치와 항구성을 갖는 보편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의
대생명력으로, 즉 하나의 위력이나 지성으로서 한계가 없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면 우리들이
건강과 성공, 그리고 번영을 체험할 가능성에도 한계가 없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현대의 가장 권위 있는 심리학자이며 정신병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위스의
융(JUNG, CARL CUSTAV: 1875~ 1961)박사는 30여 년간의 의사 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자가 신념으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신경증이 치료된
전례는 없다."
신경증은 원래 걱정이나 부정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융박사의 이와 같은
지적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으며, 우리들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본래부터
뛰어난 의사는 우리들에게 어느 구체적인 모습이 있는 특정의 신을 믿는 특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라고 권한 일은 없습니다. 그의 환자들은 전세계의 온갖 종교 단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므로 모든 종교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완전히 신뢰를 할 수 있는
무엇인가 근거가 확실한 것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진정한 뜻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생명력의 성실함과 완전무결함을 믿어야 하고 자연계의 법칙에
신념을 바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는 재능과 능력도
우리들의 몸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들 각자에 있어서 무엇인가 친밀감이 가고 매우 가까우며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도발할 것 같은 자극을 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무엇인가 이상하고
좋지 못한 체험이나 재난을 만나고, 그리고 무엇인가의 손실 등으로 고통을 받아서 모든
세상이 시꺼먼 암흑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갑자기 악하게만 보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나온 일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될 수 있으면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해 가며 아무쪼록 유쾌하게
살아가자고 결심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신은 세상은 악마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곳에서 당신이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새로운 사상,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신념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보다 크고, 보다 선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불행을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 줄 무엇인가가 자기 몸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감각적인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우리들이나
대생명력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몸보다 이상
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물의 내부에 있는 원인의 세계와 사고와
이상과 동기의 세계를 눈여겨보는 것을 잊기가 쉽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눈앞에 보이는 환경이나 사태의 겉모양에 몰두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혼의 가치를 과소 평가 하기가 쉽습니다.
한 집안 식구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건강하고 한 사람은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성공했는데 한 사람은 실패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음식을 먹었지만 한 사람은 건강하고 한 사람은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손실의 체험으로 패배자가 되어 실패의 상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낙오자로 생각하고 실패의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똑같은
손실의 체험을 겪고 나서도 그것을 격려의 힘으로 삼고 새로운 사색의 높이로 자신을
끌어올려 놓고 거기에서 다시 성공에 대한 불길을 태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보통 사람의
체험보다 높은 곳으로 자기 자신을 끌어올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며 그 믿음이 실패의 체험보다 높은 곳으로 그 사람을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 두사람의 체험이 서로 다른 것은 그들 각자의 신념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이나 정신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의 위력에 대해서 당신은 한시 바삐 몸에 밴
결론과 신념에 이르러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현실입니다. 당신의 신념은 당신의 손이나 발과 마찬가지로 현실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심장이나 마찬가지로 현실입니다. 당신의 행복은 당신의 소화 기관과 똑같이
현실입니다. 무릇 생물학적 수준에 머물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면 당신은 단지
생물의 한 부분인 인간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수준을 가지고 사는 것일 뿐입니다. 즉, 어떤 때는 병을 앓고, 어떤 때는 건강하고 또
어떤 때는 가난하고 어떤 때는 그럭저럭 때워 나가며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평범한 인간으로서 체험이 당신의 체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수준에서만 사는 사람이나 감정의 수준에서만 사는 사람도 자기를 범 인간적
체험의 테두리 밖으로 끌어올려 주는 위력이 몸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관이
보내 주는 지각을 초월하는 한결 더 높은 체험의 수준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자기 몸안의
위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겉모양만 보고 살아갈 때 당신은 주변의 사물을 움직이려면
힘을 들여서 밀고 당기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건은 몹시 크게 보이고 그에 비하여
당신 자신은 너무나 초라해 보이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이 꺾이고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좌절감을 극복하려면 당신 자신에 대해서 특별한 사고방식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신념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파트 두 채를 소유하고 있던 그리인이라는 여자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녀의
아파트는 한 달 이상이나 세를 들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이
아파트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간혹 아파트를 보러 오는 사람은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세를 들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딱한 사정을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아파트의 빈방들이 많아요. 제 아파트보다도 훨씬 좋고 훌륭한 것이
많거든요. 그러니 누가 제 아파트 같은 데에서 살겠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 집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까?" "물론 제 집이에요. 하지만 저당에 잡혀
있어요. 매달 빌린 돈의 이자를 갚고, 또 제 생활비를 마련하자면 아파트에서 세를 받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에요. 사실 저는 이 아파트만 쳐다보고 살고 있거든요." "세를 들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내가 물었습니다. "두 사람이면 돼요." 그녀가
대꾸했습니다. "그러면 제 말씀을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상당히 큰
도시입니다. 때문에 두 사람이란 숫자는 그다지 많은 숫자가 못됩니다. 당신이 그 아파트를
살 때는 아파트의 위치라든가, 크기라든가, 건축의 구조라든가 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산
것이겠지요? 사실 그때 당신께서는 그것이 당신에게 알맞고, 또 그 아파트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해서 충분한 신념을 가지고 사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나의 의견을 말했더니 그녀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네, 그랬어요. 살 때는 그 아파트가 좋다는 신념을 갖고
샀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 신념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녀에게 아파트의
상태는 처음 살 때와 전과 변함이 없고, 그녀가 구하고 있는 세를 들 사람은 겨우
두사람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나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큰 대도시니까 그 위치라든가,
또는 그 아파트의 구조라든가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두 사람쯤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좀 앉아요. 그리고 그 아파트가 마음에 들어 싱글벙글 웃으며 세를
들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세들 사람이 당신의 아파트에
만족하고, 집세도 알맞고 해서 자기들이 지금까지 마음먹고 찾아다니던 아파트라며
좋아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하면서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세들 사람이 자신의 아파트에 만족하는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신념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열의를 갖게 되었고, 새로 세 들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 당장 공중을 날아서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헤어질 때 나는 그녀에게
이런 주의를 주었습니다.
"무리하게 서둘지는 마십시오. 당신은 언제든지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의 지혜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누가
당신이 없을 때 찾아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다시 올 것입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간장을 풀고, 푹 쉬었다가 적당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집에 돌라간지 한
시간도 못 되어서 세를 들겠다는 사람이 찾아왔고, 이층 아파트를 보고는 매우
만족해하면서 꼭 자기가 구하고 있는 조건과 맞는다며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집세를
치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사흘 동안에 세 사람이나 집을 보러 온
사람이 있어서 맨 위층에 있는 다른 아파트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집을 다
빌려 준 뒤에도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보고는 집세를 더 내겠으니 꼭 자기한테 달라고
조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녀의 아파트처럼 가정적 분위기에서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이 지역을 온통 돌아다니면서 찾았는데, 이 아파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어디에도 이런 아파트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의 계약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도리어 사정하여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일을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인이라는 이 부인은 자기의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신념의 자세를 바꾼 것뿐입니다. 아파트에 꼭 들어와 달라고 사람들에게
억지를 쓸 필요가 없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신념을 바꾸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아파트는 샌프란시스코 시의 어느 아파트보다도 세들 두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일을 이해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신념에는 반드시
대답을 해주게 마련인 대생명력이 그녀의 신념에도 바로 응답해 준 것입니다. 마치
그녀가 그 전에 자기의 아파트는 좋지 않다. 다른 사람의 아파트가 훨씬 더 좋다고 믿고
있었을 때 그녀의 대생명력이 부정적인 결과로 반응하였던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신념이 바뀌면 체험의 세계도 바뀐다]
당신은 당신의 신념대로 무엇이고 받게 됩니다. 당신의 믿음을 바꾸면 당신 체험의
세계도 따라서 바뀌게 됩니다. 대생명력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에게 보이지 않으면 신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신념은 당신의 정신보다 진실성이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념이란 정신의 하나가 존재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일에 대한 동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빗물질적인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그 일이 진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되면 당신은 정말 파괴되지 않는 불사의
것이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결코 육체나 환경, 또는 신변의 여러 가지
일의 노예가 아닙니다. 당신은 결코 외계와의 경계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의 완력과 위력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신념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강하다고 믿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강한 것입니다! 의심을
가져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약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실체가 있는 물질적인 수준보다 높은 곳이나 저편에 있는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또 그것에 신념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의지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 대다수를 보면 늘 자기 자신의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고 상상력의
앞길에 돌덩이를 쌓아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각에서 브레이크를 풀고,
우리들의 상상력 앞에 쌓아 놓은 돌덩이, 즉 장애물을 치운다면 우리들은 자유인 것입니다.
신념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힘을 쓰거나 주먹을 틀어쥐거나,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걱정한다고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믿으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념은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기초를 바탕으로 삼을 때 신념은 서며,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서
행동으로 밀고 나갈 때 굳어지는 것입니다. 가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일은 나의 지식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이성은 그것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고 또 행동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현명한 사람을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신념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의 완전한 뜻은 당신의
신념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며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신념은 활용시킬 때
비로소 활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라. 그러면 나는
존재할 것이다." 대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어디서나 불타오르려는 이 주위의 세계는
사랑과 응답의 세계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을 돕고 당신에게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때는 그렇게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파괴시킬 수 없다고, 만일 이성이 당신에게 알려준다면 대생명력의 화신인
당신은 무로 돌아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즉, 당신은 파멸을 하는 법이 없다고 이성이
당신에게 말해 준다면, 그때는 신념의 밑에 있는 기초에 불사라는 것을 가져다 놓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당신이 불사의 사람이 되도록 행동하십시오. 틀림없이 당신은
언젠가 또 하나의 다른 체험의 세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만일 당신이 불사신이라면 당신은 정말 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바로
지금 고통과 번뇌를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을 장래의 언젠가로 미루기보다
바로 지금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좋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만일 진정으로 당신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죽을 준비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살아갈 준비를 하겠지요. 또한 당신의 행동과 생각 하나 하나가 당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간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불사의 미래를 생각하여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세심하게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걱정이나 부정적인 신념도 정신의 한 형태입니다. 신념은 이해, 즉 이성을 통해서
바꾸거나 방향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신념을 행동으로써 계속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의 희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의 신념에 따라서
반응을 합니다. 당신의 신념은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믿는 일을
진실이라고 믿고 행동하십시오. 그것이 진실로 알고 행동하면 당신의 체험 속에서
그것은 현실의 사실이 됩니다.
위대한 스승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은 기도할 때
그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믿어라. 그러면 그것을 얻느니라." 그는 법칙을 말해 준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의 신념에 따라서 반응하고 당신이 상상력 속에 갖는 그림에 따라서
반응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의 당신의 확신, 즉 당신이 실제로 믿는 일에
따라서 당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믿는 범위만큼 당신의 생활에
있어서 그것은 생명이 담겨지는 것이 됩니다.
성서 속에서 욥(JOB: 헤브라이 전설의 인물)이라고 하는 인물은 많은 손실, 상해,
걱정, 실패를 겪은 뒤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던 일이 나에게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신념 속에 가지고 있었던 그 재앙들, 그가 확신하고 있던 사태 내지
조건이 그를 찾아와서 실제로 그의 체험이 된 것입니다.
[인생의 네 가지 기본]
당신이 적극적 신념을 쌓아 올리는 데 기초가 되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대생명력, 즉 신의 선량함, 완전함, 성실함, 그리고 신뢰성, 민감성 등에 적극적으로
신념을 바치는 일입니다. 지성적이고 선량한 사랑의 대생명력이 당신을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 때는 하나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목적이 있어 만들었으니까 대생명력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당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관심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일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한다면 의심 없이 그것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나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것이란 것을 당신을 믿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일은 당신의 생각이 잘못 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고, 좋은 일을
그렇게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에게
적대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법칙과 그 행하는 일에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당신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신상에 관한 일을 의논해
주는 선생들은 당신이 대생명력을 무서워하는가, 혹은 그것에 적극적인 신념을
연결시키는가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에 신념을 가진다면 당신의 고통과 번뇌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당신은 스스로 위대한 인간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신성을 가진
대생명력이 인간으로서 변화하고 또 인격화한 것이므로 인간이라는 위대한 것이 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당신 자신이 대생명력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면, 그리고
몸안에 대생명력의 모든 능력이 갖추어져 있어서 당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고,
당신은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선택하고 그 자질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신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신념을 당신 스스로 갖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근본은 모두가 선량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의 신념의 움직임은 무엇인가 당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몸밖에
있는 어느 힘으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선택할 힘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자기를 단순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당신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도 높이 평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단순한 고기 덩어리가
아닙니다. 불사의 혼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행동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있어서도 그 신념에 따라 응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는 그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보게 된다면 다음 사람들도
역시 당신을 그렇게 대우 할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행동도 하찮은 것이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당신을 하찮은 인간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자기는 훌륭한 사람이고, 대생명력이 자기에게 좋게 되도록
작용을 하고, 자기는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고,
당신이 차지하게 되는 그 장소도 소중한 곳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당신은 대생명력의 법칙에 대해서 적극적인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꿔서
말한다면 운이 좋고, 나쁘고, 하는 모든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근대의 과학자가
우리들에게 보여준 바에 의하면 이 우주에는 법칙이 행해지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운이 좋고 나쁘고를 믿는 사람은 불행의 바람이 부는 대로 자기 자신은
내맡겨 두는 사람입니다. 한편 대생명력의 법칙은 자기에게 도움을 주고, 또 자기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곧 자기가 운명에 방향을 지시하고 또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에 대해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대생명력의 흐름
속에 스스로 새로운 원인을 부어 넣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새로운 체험을 가질 수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넷째로, 당신은 당신의 인격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당신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나는 영원히 사는 존재이다라고 믿을 때 즉, 죽음이 종말은
아니다라고 믿을 때 당신이 가진 어려운 문제는 언젠가는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장래의 언제 대처하기 보다 지금 곧 대처하는 것이 좋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고 상식이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가지고 있는 신념보다 더 많은 신념을 손안에 넣어야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신념의 방향만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의 기본적인 일, 즉 신, 사람, 법칙, 불사에 대해서 적극적인
신념을 가진다면 당신은 무엇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신념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일이나 모든 사태는 무슨 방법으로든 이 네 가지의 기본
사항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한 성인 남자 학교의 클럽에서 '삶을 위한 과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현역 실업가와 직업인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질의 응답은
곧잘 신념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도급업을 하고 있는 실업인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통해서 나에게는 신념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제대로 안 되는
것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노력도 많이 해보았고 고민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신념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이상의 신념은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가진 신념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대생명력을 적극적으로 믿는 일입니다.
당신은 대생명력이 화해서 된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대생명력이므로 모든 사람과 같은 대생명력에 의해서 뒷받침을 받고 있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당신은 그 대생명력이 선이냐 악이냐 동지냐 적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대생명력입니다 이른바 신이란 것은 대생명력이므로 당신은 신성이 있는
대생명력입니다. 만일 그 대생명력의 정직성과 신뢰성에 신념을 두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 중에서 당신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생명력을 신뢰하게 되면
당신에게 응답해 주기 때문에 기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매 분마다
그것에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우주 만물이 됩니다. 우리들은 채택의 힘이 있으므로 정신, 즉 대생명력의
법칙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거기서 대생명력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들의
체험 속으로 가져오도록 채택할 수 있는 셈입니다. 누구라도 무한의 대생명력에 신념을
연결시켜 놓을 수 있습니다. 그의 몸안에는 신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한의
실재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는 모든 제한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또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눈앞이 캄캄하다는 당신의 그 불행한 병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생활이 조각조각
무너져 있는 동안은 당신은 목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야
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뒤를 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한 몸이 동시에 사방으로 뛰어갈 수는 없습니다. 설령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에 적극적인 신념을 두면 나는 힘이 약하다든지, 뭔가 채워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씻은 듯이 없어집니다. 당신이 무한의 대생명력과 무한의 위력이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힘이 약하다든지 하는 등의 느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응답해주고,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대생명력이 당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공포심이나 부정적인 신념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이나
공포심이나 부정적인 신념은 인류 최대의 적인 것입니다.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신념의 지향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은 날마다
시간마다 분마다 신념이 있으므로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족스럽고 그리고
적극적인 신념으로 발걸음을 옮겨가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깊이 믿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십시오. 동력적인 신념을 얻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5 선택의 무한한 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택할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의식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다른 하등동물과는 다릅니다. 선택하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산다는 일에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
인간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생명력의 에너지를 비생산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사용
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향한 결과 잘못 생겨난 산물입니다. 소위 악인이란 대생명력이라는
신의 은혜인 마음과 몸의 힘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반대로 착한 사람, 또는
올바른 사람은 그 힘을 건설적이고 생산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대생명력
자체가 가진 힘이나 에너지나 위력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선이나 악은 그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으며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인간 자신은 원래 타고난
근본이 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지와, 두려움과, 마음의 좌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생명력의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무지 같은 것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전기라는 것을 집안을 밝게 하기 위해서 쓸 수도 있고, 우리들은
감전시켜 죽게 쓸 수도 있습니다. 믿는 힘도 자기 자신을 해치게 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게 쓸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이라도 누구나 선택할 나름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때 믿는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게 됩니다. 걱정이나
두려움은 의심할 것도 없이 마음의 부정적인 상태로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입니다. 그러나 신념이나 마음의 긍정적인 자세는 인간의 가장 큰 동지입니다. 신념이나
긍정적인 사고는 그를 적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입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의 일입니다. 한 낯선 부인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날 저녁
강연이 있기 전에 2~ 3분이라도 좋으니 잠깐 동안만 시간을 내서 자기를 만나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10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내가 강연할 강당의 한쪽
구석방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녀는 나와 마주 앉자마자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진단한 의사가 내가 암에 걸렸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나에게 이야기하러 왔습니까?"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요." "만일 내가 기도해 드리면 당신은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고 믿어요. 저의 마음에는 한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만일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서 기도만 해 주신다면 제 병은 반드시 나을 거예요. 절대로 믿어요."
그녀의 확고한 신념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단지
이것뿐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나는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라고 할까, 또는 정신 치료
라고 할까 하는 일을 매일 계속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녀의 암종은 어느 사이에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1년 전에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 동안
몇 년을 사뭇 건강하게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신념에 의해서 병이 낳은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기도해 주면 병이 낫는다고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떠한
기도를 하든 그것은 마찬가지의 결과가 된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방법으로 해서 적극적인 신념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그 신념에만 도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성공이냐, 실패냐, 건강이냐, 병이냐, 평화냐, 혼란이냐에 대해서 아마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말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너의 믿음에 따라 그대로 되리라.'는 말일 것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자기의 체험의 세계를 만든다]
신념이나 신앙은 당신의 정신적 자세이며, 정신은 대생명력의 법칙입니다. 만일 당신이
성공에 신념을 두고 있다면 당신은 성공할 것이며, 실패에 신념을 두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실패할 것입니다. 당신은 쉬지 않고 창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나 어떠한
형태로든 신념을 갖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그 생각이 뜻하는 같은
종류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체험의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당신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있는 창조하는 하나의 정신을 다만 당신이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 유일한 정신은 오늘날까지 만물을 만들어 왔으며,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으며
고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은 그대로 당신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사고는 대부분 통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사고는 가끔 잘못된 방향
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사고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방향을 잘못 짚은 사고는 좋지 않은 일을 체험의 세계로 가져오게 됩니다.
만일 신이 자신이 무엇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만일 당신 자신에 대한 진리를
어렴풋이 나마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 자신에 대한 사고를 통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진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체험으로 되는 것이므로 생각하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을 통해서 당신의
체험을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을 쓰는 일입니다.
모든 사물의 형태, 우리들의 행동이나 체험들은 어떤 수준, 어떤 방법으로나 정신이 활동한
결과입니다. 나에 대해서나 또 이 책에 대한 당신의 체험은 따지고 보면 결국 당신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이 책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그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지각속에
있습니다. 당신의 체험은 당신 속에 있는 사고하는 포인트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나에 대해서 다른
체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체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또 넓은
대생명력의 세계에 대해서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체험은 모두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강연을 들을 때 그 강연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소득입니다. 똑같은 강연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의미의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강연에 대해서 그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남편이나, 아내, 아니면 일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한 당신의 체험은 아주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생각한 결과인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으로는 따질 수 없는 대단히 심오한 사상입니다. 그 의미는 당신이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상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체험은 당신으로부터 확대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과 결심은 당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물을 추리하는 것도 당신
속에 있으며, 당신의 만족도 당신 속에 있습니다. 그처럼 당신의 평화나 행복 모두도 무한한
당신(당신은 무한한것입니다.)속에 있습니다.
고요한 숲 속을 거닐거나 아름다운 뜰을 보고 즐길 때 '이곳은 평화롭고 좋은 곳이군!'하고
당신이 입밖에 내어 감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당신이 체험하는 평화는
당신의 마음속, 당신 자신의 느낌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야, 이건 참 아름답구나!'하고 말하며 마음을 빼앗긴 채 미칠 듯이 기뻐하며 영감적인
감동에 잠기기까지합니다. 그러나 같은 저녁노을을 보면서 다른 한 사람은 '햇빛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가 없군!'하며 불만스러워 합니다. 그 어느 편도 자기를 지배하는 사고의
형태에 따라서, 즉 자기 자신의 이해와 채택에 따라서 그 체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 수 있는 사랑의 모든 것도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다 많은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당신 자신이 한결 많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당신 속에 있으며
또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생명력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응답을 합니다. 얼마나
복잡하고 재미있는 존재입니까! 당신은 대생명력의 하나의 포인트로서 대생명력 그것을
체험하고, 또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대생명력에 있어서, 즉
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는 몸이나 주위의 모든 일에 나타난다]
어떤 큰 분노를 터뜨리거나 몹시 걱정을 한 뒤에 병을 얻었던 체험이 당신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노나 걱정은 정신의 한 자세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한 신념의 자세이고
병은 그 신념에 따라서 생긴 것입니다. 당신은 공포나 걱정의 충격을 받은 뒤에 허탈한
느낌을 가진 적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마음이 혼란할 때는 세상의 모든 일이 나쁘게만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당신의 믿음에 따라서 생긴 일들입니다.
어느 날 나는 라디오방송을 하기 위해서 방송국에 가려고 연구소를 나섰습니다. 그날 아침은
걱정되는 일이 조금 있어서 생각에 혼란이 있었습니다. 보도에서 큰길로 승용차를 몰고
나오는데 뒤에 있던 다른 차가 내 차의 펜더(FENDER: 자동차의 흙받기)를 스칠 듯이
앞질러 나갔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내 차의 한쪽을 조금
우그러뜨려 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아, 길 한
쪽에 승용차를 잠깐 세워 놓고 생각을 좀 정리하는게 어떻겠나!"
그리하여 몇 분 동안 자문자답을 한 끝에 가까스로 나의 생각이나 행동을 통제하는 힘이
생겼고 침착성을 되찾았습니다. 마음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내 마음 안의 투쟁이 해소되어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누가 내 발을 밟는다 해도
잠자코 있는 것이 제일인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자못 언짢은 기분도 마음의 한
자세입니다. 만일 남들에게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협조해 주기를 바란다면, 자기 자신의
기분을 부드럽게하여 마음의 상태를 좋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미소짓는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굴에 미소를 띄지 않은 사람을 아직 예복을 다 차려입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이 웃는 얼굴도 우리들이 채택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성공이나 실패도 모두가 우리들의 정신 자세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나 우리들 자신에 대한 사고의 결과, 즉 다른 사람이나 우리들 자신에 대한
태도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과 동정심을 갖고 있으며 단골 손님 이외의
손님에게도 관심을 갖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공명하고 믿음을 주어 장사도
잘합니다.
우리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 어느 부인의 일을 생각하여 봅니다. 가령 그 부인의
이름을 메리라고 합시다. 메리는 일찍 결혼하여 가정 밖에서는 일을 해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뒤에 어떻게든지 생계를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11월에 그녀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시의 대형 백화점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물건을 파는 일 같은 것은 해 본적이 없었지만 천성이
붙임성이 있고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철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그 대형 백화점의 스카프 판매장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녀로서는 그것 역시 전혀 경험이 없었고 그 매장의 세일즈 걸에 지나지 안았지만 곧
누구보다도 많은 매상고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장사라고는 처음인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상품을 팔 수 있는가 하는 호기심에 어느 날 백화점에 들러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가 물건을 파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판매장에는 또 다른
여점원이 시무룩한 얼굴로 싫증이 난 듯이 손님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손님도 뭔가 신통치
않은 눈치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스카프 몇 장을 손에 들고 어느 것을 살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반시간쯤 지나자 그 여점원은 마침내 메리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님 좀 맡아 주시겠어요? 잠깐 커피 한잔 마시고 좀 쉬고 오겠어요."
그 여점원이 자리를 뜨자 메리는 이 손님을 맡아서 방긋 웃는 얼굴로 어느 것을 살까
망설이고 있는 부인의 눈을 정답게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젊은 분의 것인가요? 아니면 조금 나이 드신 분의 것인가요?" 그러자 부인이 금세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여러 장이라도 필요해요."
"그러시면 그분들이 좋아하시는 빛깔과 어떤 모양의 옷을 입으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은
스카프를 골라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금방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손님은 마음이 느긋해져 허물없는 태도가 되었습니다.
"이 스카프 곱지 않으세요?"
메리는 아름다운 스카프를 하나 골라서 부인의 목에 둘러 주고 방긋이 웃으며
지켜보았습니다. 부인도 메리의 친절에 흡족해 하며 같이 미소지으며 그 스카프를
샀습니다. 조금 뒤에 한 다스나 되는 스카프를 사든 그 부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12월 중, 이 백화점의 판매 실적을 보면 메리의 판매고가 모든 점원을 제치고 최고였습니다.
2월초에 그녀는 그 판매부의 부장으로 승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 백화점이 생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의 태도는 사실 몸을 통해서 주위의 여러 가지 일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들이
부지런하게 좋은 일을 밖으로 내보내면 다시 좋은 일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욕구나 동기나 채택 등은 정신의 자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병에 걸리면 마음이 초조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대개의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초조하거나 무서워 할 때, 혹은 정신이 혼란할 때에 몸은
병의 증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우리들의 육체는 마음의 자세에 반응하며 상대방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반응을 합니다. 우리들이 싫다는 기분으로 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우리들에게
불쾌하게 반응해 옵니다. 그 기분이라는 것이 바로 정신의 자세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을 신뢰하기로 결정하면, 또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사랑하고
또한 좋게 평가하고 사귀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의를 표현한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에 있어서나 상대방도 훨씬 더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마술과 같은 결심의 힘]
불안정한 마음이나 주위의 혼란한 사태에서 신속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질서를 되찾으려면
즉석에서 결심하고 그 결심을 변경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결심의 중요함]
의식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합리적인 전제로부터 결심에 이르고, 그 결심에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당신은 자기의 생활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실행하기 전에는 당신은 물위에 떠다니는 나무 조각 같은 신세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의식하고
걷는 발걸음도 없고 목표도 운영도 없이 허둥거리다가 결국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치에 맞는 올바른
결정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개인적이 일이고 개인의 책임이며 또한 특권입니다.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또 어디에서나 불타오르려고 하는 대생명력이 인격화되고 개인화 된
것이 인간입니다. 철인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생명을 받은 우주의 한
조각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눈을 뜨고 자기를 자각하는 우주의 한 조각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나 나라고 불려지는 대생명력의 포인트는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있는 대생명력 속의 지각할 줄 알고 채택할 줄 알고, 자유 의사를 가진
포인트인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생명력이 건강, 행복, 조화 등에 표현되면 소위 천국과 극락이 됩니다. 우리들이
건강, 행복, 조화 등에 있어서 대생명력을 표현하면 그것은 곧 천국, 극락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기도문 속에서 천국이 우리들의 세계에 표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지혜, 사랑, 평화, 위력, 아름다움, 행복 등의 보편적 특질이 각자의 생활에 표현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대생명력의 화신이므로 그가 어떻게 대생명력의 법칙을 사용하느냐, 그가 원하는 위의
여러 가지 것들을 어떻게 대생명력에게 요구하느냐는 그 자신이 결정할 일입니다. 그가 결심할
때 그는 이미 대생명력이 어떻게 그를 위해서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오후 네 시경까지 외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연구소에
돌아왔습니다. 연구소에 돌아와 보니 어떤 중년의 남자가 나를 만나러 와서 온종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 그는 연구소 안의 마루 바닥을 오락가락 걷고 있었습니다.
24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을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날
밤 그는 낡은 승용차를 몰고 군항인 S.D시로부터 밤새도록 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핏발 선
눈초리에 살기가 도는 것처럼 무섭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편안하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고
먹을 것을 시켜다 주었더니 한마디 한마디 비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직장을 잃어 실직 중에 있으며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어딘가에서 일이 꼬이는 바람에 폭주하게 되었고, 결국 딴 여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입니다. 고용주 몰래 명의를 도용해 몇 장의 공수표를 발행하고 돈을 빌어 쓴 것이 탄로나
지금은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짐을 챙겨 북부에 살고 있는 친정
어머니한테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게 되자
그는 결국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할 방법도 없고 앞길이
캄캄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를 만나러 오기 전날에 독약을 사서 그것을 먹고 자살할 생각으로 S.D시의 어느 길가
공중 화장실에 들어갔었다고 합니다. 자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화장실의 조그만 테이블 위에 잡지가 한 권 놓여 있기에 집어들어 펼쳐 보니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 방법은 있다'라는 기사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제 밑에는
'어떤 어려운 사태에도 빠져나갈 길은 있는 법이다.'라고 부제도 붙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호기심을 끌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글의 필자였으니 그가
어째서 내게 달려왔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나에게서 직접 강연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자살할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나를 한 번 만나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설령 다른 사람들은 비참한 사정에서 빠져나갈 길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는 아무래도
좋은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자살이란 당신의 아내와 딸을 도와주는 일이 결코 되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비참함을 더해 줄뿐입니다."
자살이란 이기적인 일로서 그 자신에게는 빠져나가는 길이 될지 모르지만 그를 의지하고 사는
가족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정말 좋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내 태도가 변하고 침착성을 되찾은 듯했습니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음식으로 배도 불려졌기에 자기의 곤란한 사태를 얼마쯤 객관적으로 살펴볼 여유가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몇 시간이나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동안에 그는 자기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하나의 결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를 빨리 찾은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실행하면
마침내는 올바른 행동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 온다는 말에 그는 용기를 얻어서 나의 연구소를
나설 수 있었습니다. 대생명력의 법칙에 의지해서 자기 자신의 채택에 따라서 구원을 받겠다는
결심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KRATES: B.C. 469~399)의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은 오지
않는다.'라고 말과 다윗 왕이 '정직한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함께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를 환히 내다보고 어떤 일이 올 것이라고 명확하게
예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한다면 당신의 체험의 세계에는
반드시 올바른 일이 오게 되리라는 것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는 S.D시에 돌아가 아내에게 용서를 빌 결심을 했습니다. 그녀가 그를 버리고 가는 데는
그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는데도 그녀가 그를
용서해 주지 않고 아주 버린다 하더라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용서를 해 준다면, 만일 다시 한 번 그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는 최선을 다하여 그녀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또 전의 고용주에게 찾아가서 (고용주는
그를 교도소에 보낼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 자기를 교도소에 보낸다 하더라도 자기는 조금도
나쁜 감정은 가지지 않는다고 고백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일을 계속해서 자기의 부채를 갚겠다고 말할 결심도 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그것을 정말 그대로 실행할 결심을 한 후 그 결심을 굽히지
않겠고 마음을 먹고 나니 어느 정도의 침착성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가 있었습니다. 그런 뒤
그는 나의 연구소문을 나섰습니다. 정말로 옳다고 생각한 일을 실행하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독약이라도 마시겠다고 결심했던 몸이 아닌가. 가야 한다면 교도소라고 가겠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책임만은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고 결심하고 죽겠다던 일만은 일단
포기했던 것입니다. 먼저 그는 가족들과 정직하게 대면하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첫 행동은 딴 여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일이었습니다. 술도 끊겠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이름을 도용했던 고용주에게 정직하게
대면했습니다. 그의 아내도, 돈을 빌려준 사람도, 고용주도 그의 진심을 인정하고 그의 마음이
일변한 일에 반응하여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년도 채 못되는 사이에 그는 빚을 말끔히 갚았습니다. 회사에서는 종전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와 그 아내와도 더욱 다정해졌고 새 집도 사게 되었습니다. 두 딸은 음악과
무용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이 변화는 모두가 하나의 정신적인 행동의 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요즘도 자주 밤늦게 나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 와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결심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해 준 덕택으로 자기 인생에 멋지고 훌륭한 좋은 일들이 나타났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곤 하는 것입니다.
[결심은 주변의 공기를 맑게 한다]
어떤 곤란한 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고 있던 한 부인이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2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먼 곳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빌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슈퍼마켓에 세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딩에 세를 들고 있던 슈퍼마켓
주인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어 빌딩을 새롭게 단장해 주고, 또 집세도 어느 선까지 내려 주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슈퍼마켓을 차리기에 적당한 또 하나의
빌딩이 같은 지역 내에 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말하기는 시간의 여유가
너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슈퍼마켓 주인의 편지는 불과 며칠 전에 왔기 때문에 지금은 30분
뒤에는 그 슈퍼마켓 주인과 만나 자기의 결정을 말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도
빌딩을 어느 정도 수리를 한 후 집세를 적당한 선으로 내려 주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상대편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 그대로 그 요구를 다 들어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앉아서 이 문제를 그녀 자신의 입장에서 뿐 아니라 세든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또 빌딩의 수리나 집세를 낮추는 것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생각하여 어느 선까지 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느껴지는 가를 자세히 종이에 써서, 그것을 세든
사람의 앞에 펴놓고 자기가 어떻게 결정을 했으며, 그리고 어째서 그것이 옳은 가를 차분히
설명해 주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만일 그녀가 결정한 내용이 정직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 든 사람의 입장을 위해서도 생각을 한다면 지금 세 든 사람이 설혹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나의 연구소를 나간 지 한 시간만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세 든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결정을 적은 종이를 그의 면전에 놓고, 이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선이며
정당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든 사람은 그 명세서를 보고는
그녀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새로 계약합시다."
이것은 그녀의 올바른 결심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한결 높은 수준의 정직성과 고결함을 가지고 행동하고
자기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한다면, 그리고 올바른 결심이나
적극적인 신념, 동정, 사랑을 통해서 대생명력은 좋은 것만을 우리들에게 보내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때는 반드시 올바른 결과만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전화 회사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어느 여성 중역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16세 난 딸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남편을 사별하고
최근까지 딸과 친정 어머니, 이렇게 여자 3대가 한집에 같이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가정교육은 대체로 그 외조모의 책임으로 되어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외조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부터 딸아이는 집안 일을 거들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방의 청소마저도 하지
않으며,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곤 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상담하러 오던 전날 밤에도 딸은 말썽을 피웠다고 합니다.
"왜 나를 때리는 거예요! 그만 좀 때리세요." 딸아이는 일부러 이웃에 들리도록 큰소리를
쳐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를 심하게 학대하는 것처럼 들려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종이 한 장에다 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어머니의
입장과 딸의 입장을 고려해서 전반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바르게 쓸 것, 딸이 해야 할 일을
자기 바의 청소까지 포함하여 어느 선까지 가사를 도와야 하는가를 쓸 것, 외출을 해도 반드시
몇시 까지는 돌아와야 하는가, 그 밖에 보통 날의 귀가 시간이나 필요한 일들을 모두 쓰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였습니다. 만일 그런 것을 쓴 종이를 딸에게 보이면서 그대로
실천하라고 한다면 딸은 아주 집을 나가고 말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결심에서는 올바른 행동이 생길 뿐이라고 지적해 주었더니, 나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그녀는
자기와 그 딸을 위해서 완전한 일의 분담을 정하고 그 일과표를 작성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것은 정당한 것이니까 딸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고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그것을 딸의
앞에 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결심을 하고 나의 연구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채 못돼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염려스러운 것이 아닌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집에
도착하니 딸이 대문 밖까지 나와서 기다리다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며 뺨에 키스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딸이 이렇게 애정을 나타낸 일은 몇 주일 동안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녀는 일과표를 딸에게 보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일과표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에만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그녀에게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표를 보여줄
일이 그 뒤로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딸이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고, 또 공부와 집안 일도 그전과는 딴판으로 아주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상냥하고 알뜰하게 집안 일을 돕고 자기 방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그
뒤 이 두 모녀는 내가 강연하는 강연장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모녀의 모습을 일요일마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딸아이의 착한 행동의 변화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어머니가 좋은
결심을 한 결과였습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확신이 무의식적으로 딸에게 느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태가 정말 올바르다고 확신할 때 대생명력의 법칙은 기대하는 대로
실현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들은 그것이 실현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비결인 것입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샌프란시스코 시에 있는 '카란'이라는 극장에서 결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연을 했습니다. 다음 날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는 어느 부동산 실업가 한 사람이 나를
찾아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이익을 붙여 자기 부동산을 사겠다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
부동산을 팔아야 할 것인가, 팔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몇 주일을 두고 깊이 생각을
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의 강연을 듣고 나서는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에게도, 사는 사람에게도
정당하다고 느껴지는 가격으로 부동산을 팔아야겠다는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 부동산 가격은
상대방에서 제안한 것보다 상당히 웃도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연구소를 나서자
마자 곧장 부동산을 사겠다는 사람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가격을 솔직하게 상대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틀 뒤에 상대방은 그 제의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부동산은 자기 자신이나 매입자의 양편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
왔습니다. 수백만 달러가 넘는 이 거래는 매도자의 명확한 확신과 결심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거래였던 것이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자기가 만든다]
결심, 상상력, 신념, 동기, 이것들은 모두 정신의 상태, 곧 마음의 자세로써 우리들의 체험에
힘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들의 속에도 있고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기도 한 발전기(DYNAMO)와 같은 힘을 가진 대생명력을 움직이고 또 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신의 나라는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어디서나 넘쳐흐르고 있는 대생명력은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힘입니다. 그 힘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힘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대생명력이 개성화해서 우리들 각자가 된 것입니다. 그
하나의 대생명력을 당신이나 내가 알게 되고, 또한 체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는 '나의
생명'이나 '당신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그 속에 있습니다. 정신의 그 무한한 소질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우리들이 사고하는 곳입니다. 우리들 자신 속에 신의 정신이 있고 우리들이
신의 힘을 사용하여 그 정신에 방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힘을 성공보다도 실패에, 건강보다도
병에, 평화보다도 혼란으로 향하게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언제나 당신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니까 자기가
중요하고, 또 문제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를 깊이 살펴보면 거기에는 무한한
소질과 끝없는 능력의 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아마 당신은 제대로 완전하게 사용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의 소질과 능력은 당신의 발견이나 지향이나 사용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지금 그 힘을 사용할 것을 결심하지 않으십니까? 이 무한의 지력과
위력은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결심을 통해서, 상상력과 신념을 통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속에는 또 추리하는 힘도 있습니다. 선택하는 재능도 있습니다. 당신의
몸안에는 대생명력을 바라는 대로 풍부하게 다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른바 도구도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그 도구들을 아는 일과 어떻게 사용할 가를 배우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재능을 무시하지 말라]
당신 자신을 에누리해서는 안됩니다. 헐값으로 팔아서도 안됩니다. 당신은 놀랄 만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의 법칙은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
정신의 법칙을 통해서 대생명력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를 배우고, 그 정신의 법칙을 다시 건강과
픙부한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용하면 좋은 가를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게 되면 당신은 건강과 부유한 생활에 들어가는 비결을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 자신에게 반항하고 최선의 이익에 상반하여 그것을 사용하여 왔느냐 하는
것은 이제 와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오늘 당신은 지금까지 사용해 온 대생명력을 착하고
건전한 체험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당신의 생애라는 꽃밭에 함부로 아무렇게나
돋아났던 지난날의 잡초나 가시덤불이나 엉컹퀴를 뽑아버리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지 않은 한
잡초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을 뽑아 버리고 다시 고쳐 심기만 한다면 빠르게
새로운 모습의 아주 다른 화원으로 바꿔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7 누구나 기분좋은 사람, 좋은 곳에 마음이 끌린다]
당신도 즐거운 사람 옆에 있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나 당신의 주위를 즐거운
곳으로 만들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신 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기분 좋은
사람이고 당신 주위가 기분 좋은 곳이면 모두 당신을 에워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게 되면 모두가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존중의 중요성]
사람을 끄는 것은 정신의 작용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한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에게 반응하는 것을 당신 속에 있는 정신의 어떤 자세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또 인식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잘 다루어
나갈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들과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되는 것은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싶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또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은 도피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데도 그 결점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자기가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변명을 늘어놓고 자기의 실패를 합리화하려 하고, 그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만은 평화롭고
정신의 조화를 간직하면서 생활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노여움이나 비난을 퍼붓고 싶은 것입니다. 자연히 이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향해서 화를 내게 만들고 또한 비난하도록 만듭니다.
당신의 인격은 감정과 태도에 드러납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고 유쾌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거칠어지는 대로 내버려두고
마침내는 감정이 당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시렵니까? 즐거운 기분으로 있을 때가 몸의
컨디션에도 얼마나 좋은 줄 아십니까? 두려움과 걱정, 미움과 질투 같은 것은 표정, 안색,
말, 태도 등에 드러납니다. 걱정을 하는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발걸음 또한
무겁습니다. 그러나 즐거울 때는 자신의 일을 매우 잘 처리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과도 훨씬 잘 응대하게 됩니다. 그때는 자기 자신에게 신념을 갖게 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념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신뢰할 때, 또 대생명력을
신뢰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당신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사람이나 외계의 체험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정신의 자세이고, 자각의 자세로서 당신은
그것을 인정하고, 가꾸고, 느끼고,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념과 마찬가지로 몸안에 있는
것으로 가꿀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슨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긴다던가, 또 병이 완전히
낫는다던가, 누구 적당한 사람과 결혼한다던가 하지 않으면 행복하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성취하기까지는 행복하게 되는
것을 보류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앞에다 수레를 다는
일과도 같은 것으로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들의 안에 있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꾸로 생각하는 셈이 됩니다. 행복은 어느 일이 성취되거나
어느 상태의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행복 그 자체가
사물을 성취하게 해주고 달성하게 해주는 중요한 원인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즐거운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으면 성공적인 체험이 우리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는 자동적으로
사물이 성공에로 형세가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면 우리들의 주위에 좋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즉, 친구를 당신에게 끌리게 하는 것입니다.
[정신은 라디오처럼 작용한다]
마이크를 사용하셔서 말을 해보십시오. 당신의 목소리는 수백 마일 떨어진 데까지도
들리게 됩니다. 마치 당신이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듣는 사람에게 똑똑하게
들릴 것입니다. 내가 처음 방송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나와 청취자가 같은 방안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내가 대하는 마이크라는 작은
도구는 아주 차갑고 두려운 물건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작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내 눈에는 물론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다이얼을 돌리던 사람도 지금
곧 끊어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사이에 이 모든 청취자들이
나의 친구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그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상상 속에서 그들이
나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을 보는 것같이 되었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대중과 긴밀한
미소를 보내는 것을 보는 것같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몇 천장의 편지를 받았고 그 중에는
내가 직접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친근한 개인적인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쓴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과학자들로부터 우리들 자신이 라디오의 발신기며 수신기라는 말을
듣게됩니다. 몸과 두뇌의 어떤 세포들은 발신의 임무를 하고 어떤 종류의 세포들은
수신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몸안의 사고를 하는 장소에서 분명히 일정한 진동파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 그에 상응한 어떤 반응이 자기 몸안에, 또는 다른 사람들의 사고나
행동에 나타나는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대생명력의 놀라운 힘을 깊이 알아 감에
따라서 이런 일은 하나도 놀랄 만한 일이 못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하나의 정신, 하나의 매개체, 즉 어디서나 넘쳐 흐르고 있고 창조하는 대정신이며,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므로 의심할 것도 없이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정신 속의 한 포인트에 활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에머슨은 '모든
개인에게는 공통된 하나의 정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고는 현실의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사고를 발동시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몸이나 신변의 일들이,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사고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쉽게 보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일은 환경에서 반사되어
되돌아옵니다. 우리들이 믿는 것처럼 그것들도 우리들에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런 반응은
우리들의 육체와 주위의 일,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 사실일 뿐 아니라, 바로 대생명력의
전부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사실입니다. 당신이 기르고 있는 개도 당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서 반응을 합니다. 개를 미워하게 되면 사랑을 할 때와는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식물까지도 식물을 향한 당신의 사고에 따라서 반응을 합니다. 최근에 어떤 과학자가
식물에 대해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밭의 식물은 사랑하고 다른 밭의 식물은
저주했다고 합니다. 사랑 받고 또 축복 받은 식물은 이상하게도 빨리 생장하고, 저주받은
식물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말라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원을 사랑하고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미워하고, 화를 내고,
혹은 무관심하게 지내는 사람들보다는 너무나 다른 체험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과학 실험은 식물이 있는 곳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행해졌는데 실험자가
축복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유럽에서는 '저 사람은 초록빛 엄지손가락을 가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과 만나 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식물이 반응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남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오렌지 농장의 농부는 이웃
농장에서는 병충해를 막기 위해 모두 뿌리고 있는 농약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대신 날마다 과수원 안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축복하고 열매를 무겁게 매달고 있는
나무에게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 이름이 붙어졌으며, 그 나무 하나
하나에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감사를 느꼈다고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말을 듣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이 농부가 수확기에 은행에 돈을 맡기러 갈 때 나도 함께
따라가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은행 사람에게서 이 농부가 이 지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확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사랑에 반응한다]
우리들의 몸은 사랑과 감사에 반응을 나타냅니다. 백 살 가까운 나이의 B.란단이라는
노인은 70세 되었을 때 심장병으로 앓아 누웠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었습니다. 의사가
그의 심장을 진단해 보고는 심장이 거의 소모되었으니 아마 열 시간,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고했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을 알고 있는 그는 자기의
심장에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활동해 준 일을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욕설을 잘 참고 견디어 주었다. 때로는 지독한 악용까지 하였건만 얼마나
훌륭하게 운전을 계속해 주었던가!'하는 말을 심장에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심장이 만일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어 준다면 앞으로는 모든 정성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심장에 대해서 전과 다른 사랑과 감사의 태도로 나왔기 때문에 심장은
완전히 회복되어서 그 뒤 25년간이나 그를 위해서 잘 움직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당신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그대로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일과 사업도 당신에게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 또한 당신의 몸이나 세상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처럼 살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정신에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기의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의 생각을 통해서 체험의
세계를 창조하고 또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는 아마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운수회사의 매표소에서 일하는 어느 부인이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종일 참으로 변덕스럽고 모두 제멋 대로이며, 어리석은 질문을 해오고 그녀로서는 할
수 없는 일까지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몹시 피로해져서 밤에는
집에까지 오는 것이 힘에 겨워서 가까스로 기어오게 되는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보면 어떻겠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자기를 찾아오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하는 일을 재미나는 오락이라고
생각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태도를 바꾸어 볼 것을 결심하고 창구에 찾아오는 아무에게나
친근한 미소를 보이고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해 주기로 했습니다.
정류소에 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노력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정류소에 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첫날에는 피곤하다는 느낌도 없이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유쾌한 밤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도 한결 인상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런 변화가 온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가 자기의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에 익숙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세상사람들도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H.V. 다이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이 만일 성적을 참된 것으로 하고 싶거든
네 가지를 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첫째, 혼란 없이 생각하라, 명확하게.
둘째, 동료들을 사랑하라, 진실하게.
셋째, 올바른 동기에서 움직여라, 순수하게.
넷째, 신과 천국을 믿어라, 확실하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 우리들의 동기와 신뢰도 모두 정신의 상태입니다.
정신은 대생명력 속의 커다란 창조의 근본입니다. 우리들이 의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의 상태, 또는 신념의 생태를 통해서 창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엇이든 당신을 위해서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 몸안이나 다른 사람들, 또는
주위의 일 같은 것에 대해서 체험을 즐기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정신과 신념의 상태와 태도를 바꾸어 보십시오. 그러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체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과학적인 기도인가]
만일 신념의 그릇된 자세가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신념의 올바른 자세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정신적 치료, 또는 과학적 기도는
당신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당신의 신념을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전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면 저쪽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운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정신이
저쪽에서도 운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정신을 바꾸어 보십시오.
그러면 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장한 인간적 존재로서 당신은 스스로 채택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의 상태, 즉
당신의 신념의 상태를 의식하여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당신의 운명을 사실로 만들어
내고, 또 방향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의식하고 사용하는 것으로써 당신의 세계를
재건하고 고칠 수도 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신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전혀 본능에
의지하여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대생명력속에서 최고의 인격화된 존재이며,
의식하는 사고의 힘과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제 8 시편에 쓴 것처럼 당신은 하늘을 나는 새, 바다의 물고기 같은 짐승들 위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모든 것은 당신의 발 밑에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얼마나 자각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세계는 당신의 지배 아래로
들어옵니다. 정신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는 위대한 도구입니다. 그것을 당신이 가장 좋은
일을 위해서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8 무엇이든 창조해 내는 상상력의 마술]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림이나 모형이나 계획안 등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응답하는 성질이 있는 대생명력은 그러한 그림이나 모형이나 계획안에 따라서 당신의 체험
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마음에 이와 같은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가 바라는 일이나 또는 바라지 않는
일의 계획안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각한 끝에 이것을 하겠다고 생각하여 결정한 마음의 그림은 당신이 대생명력에 보내는
계획안입니다. 이러한 계획안에는 신념이 방향을 제시하고 또 통제를 합니다. 신념은 마음
속의 확신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진실하다고 확신하는 것, 당신의 신상에
일어나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진실하다고 믿고
정말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이나 계획안을
결정합니다. 그러면 그 그림은 대생명력에 자동적으로 시동을 걸고 행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상상력은 당신의 마음을 기술로 이끄는 부분입니다. 즉, 계획을 만드는 부분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라]
만일 당신이 바라는 체험 속에 대생명을 흘러들게 하고 싶다면 먼저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그 계획에 꼭 매달려야 합니다. 그 계획이라든가 그림은 새롭고 순순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그 형에 흔들림 없는 신념을 가지고 매달려 있으면, 그것을 언젠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의 그림을 만든 뒤라해도 만일 바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없다고 느끼거나, 자기가 바라지 않은 것의 그림이나 형을 그 위에
덧붙이게 되면 당신이 원하는 것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 '가졌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대는 받으리라.'고 말씀한 것은 바라는 것의 분명한
마음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라는 의미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이 내심적인 느낌, 즉 가지고 있다는 것의 확신을 유지할 때에는
대생명력의 창조를 맡고 있는 정신은 우리들을 그 욕구가 달성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들의 욕구는 채워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상상할 때, 성공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당신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생명력은 자동적으로 당신을 그 방향으로 움직여
주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대한 자신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는 땅 위의 어떠한 힘도
당신이 건강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대생명력의 정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라면 무엇이고 당신에게 가져오기 위한 통로를 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의식적으로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을 합니다. 분명한 마음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라는 존재의 모든 힘은 자동적으로 완성됩니다. 즉,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상상의 재능은
다른 자연의 재능과 같이 방향을 정할 줄 압니다. 그것을 억압하거나 표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상상력을 우리들이 욕구 하는 체험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가 있고, 또
향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잊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상상력은 무엇이고 만들어 내는
재능입니다. 강한 힘입니다.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상상의 방향으로 움직여 갑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상상해야 할 것인가를 조심성
있게 살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이 많은 사람들의 집회에서 연설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당신이 만일 아무런
준비도 없고 말문이 막히거나, 말더듬이 노릇을 하여 창피한 꼴을 보이면 어쩌나 하고
상상만 한다면 그 연설은 대개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는가! 내 옷차림은 제대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어?"
이와 같이 당신이 속으로 중얼 거리고 있을 때 당신은 이미 대단히 큰 신경적인 공포를
자기 속에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으로 잘못된 그림을 만드는, 매우 그릇된
계획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힘을 다하여 자기를 격려하고 힘을 내어 '어떻게
해서라도 이 연설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애써 보았자 그것을 거의 소용없는
노릇입니다. 대개는 틀림없이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의 투쟁 때문에 병이 되는
일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가정합시다. "누구라도 서서 한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백사람이건 또는 천 사람이건 그 앞에 서서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연설을 듣기
위해서 여기까지 올 까닭이 없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나
자신에게 흥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더 자세히 안다고 믿고들 있는
것이다. 나는 준비가 잘 되어 있다. 생각도 깊이 해 보았으며, 물론 여기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그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여기에 선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여 청중에게도 나와 같은 지식을 갖게 해야겠다."
만일 이런 상상력을 가진다면 당신은 걱정이나 두려움 때문에 혼란해지는 일이 없어
침착하게 좋은 강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명하고 적극적인 그림을 상상력 속에 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면 금방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에도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도 어떻게 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나 잘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럽다든지, 손해를 봤다든지, 어찌할 바를
모른다든지 하는 느낌이 그녀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그림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치기 위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얼굴이 붉어지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일은 그치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심리학자이며 정신치료가인 쿠에(COU, EMILE: 1857~1926)는 '나는
모든 면에서 하루가 다르게 좋아져 가고 있다."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자기에게 그렇게 말하면 상상력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고,
당신은 저절로 보다 나아지고 더욱 건강하게 되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큐에는 상상력에 대해서 또 하나의 멋진 설명을 했습니다. "폭이 30센티 정도 되는 길고
평평한 판자를 땅 위에 놓아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예사로 그 위를
걸어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 판자를 빌딩의 10층쯤 높이의 허공에 걸쳐져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 위를 건너가겠다는 용감한 사람은 거의 없다. 상상력이
자기가 떨어지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높이면 사람은 현기증을 일으킨다. 생각만
해도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과 똑같은 판자이고 똑같은 폭이지만 30미터나 높은
공중에서는 강한 상상력이 제압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정신 속에 그림과 계획을 만드는 부분, 즉 이 상상력을 창조적 활동의 모든 것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낡은 습관을 버린다든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고
한다면 이 상상력을 사용하여 실행하면 매우 쉬울 것입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나의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담배를
끊을 수도 있고 또 계속 피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정말
담배를 끊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습관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을 마음의 그림으로 그려보았답니다. 담배를 끊게 되면 자기의 생애가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하는 이점을 마음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돈을 절약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그림이 그의 상상력 속에 확고하게 굳어지자 그의 생활의 모든 면이
이 새로운 그림에 따라서 실현되었고, 낡은 습관이 자동적으로 고쳐졌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느 사이에 담배를 피우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무리하지 말고 차분히 상상만 하라]
옛날 사람들은 의지라는 것을 매우 존귀한 것으로 여기고 숭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의지력을 기르려고 했습니다. 의지력이 대생명력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일과
무엇인가 관련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때로는 자기에겐 의지력이 없다고 믿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정신과학은 의지에 대한 이상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지 오래입니다. 사실 '의지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거의가 견해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전에 의지력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도록 강요하는 일, 즉 감정적 욕구에 상반되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상력이 창조하는 능력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일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는 일이 없으면서도 그들에게는 무엇이나 순조롭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바쁜 듯이 보내면서도 별로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하고 싶은 일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너무 바빠서 못살겠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자기 행동의 결과로서의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상력이 노력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밀쳐 내려 하고 서두르고 다투며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덤비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잠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몰아내고 온종일 자기 자신을 마구 끌고 다니면서 자기의 마음에 무엇인가 생각을 무리하게
강요하며, 몸에는 행동을 억지로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갈 곳 못 갈 곳 다 가서 밀쳐도 보고 당겨도 보고 내
자신을 재촉하고 채찍질하느라고 야단을 쳤건만 거의 소용없는 일뿐이었어."
이러한 사람들은 막대한 에너지를 쓰면서 자기의 온 몸을 갈기갈기 찢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상상력을 사용함으로써 쉽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그의 노력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치를 분명하게
상상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은 상상 속에서 자기의 욕구가 채워지고 있는 광경을 그려야 합니다. 그러면 일에
열중할 수 있고, 또 에너지도 거의 쓰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외투와 모자를 집어들기 위해 몸을 억지로 움직일 필요도 없고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차고에 가서 자동차를 끌어내어 집에 돌아가는 것같은 피로를 느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집에서 가정의 모든 즐거운 일에 싸여 있는 자신을 열심히 상상하고 그리고
자기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 유쾌한 체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진행 될 것입니다. 잠재의식, 즉 정신 속의 민감한 창조를 행하는 부분은,
당신이
결과를 상상할 때, 열의에 불타오를 때, 그때 비로소 만사를 도맡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라지 않는 것의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병이나 실패나 불행에 빠져 있는 경우를 상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자기의 병이나 걱정이나 고난에 열을 내면서, 그 불행이나
실패가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고난을 묘사하는 데 열심이고
보면
그 고난을 더욱더 굳게 자기 자신에게 옭아매는 일이 됩니다. 우리들이 걱정이나 손실이나
병이나 실패 등에 집중하는 열의를 만일 건강이나 성공 들 자신의 목표 달성에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체험을 얻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의 젊은 은행장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별다른 연줄도 배경도
없는 젊은이인데 보통 행원으로서 은행장의 지위까지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올라갈 수
있었는가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은행에 취직하는 순간에 자기를
은행장이라고 상상했던 것입니다. 창구에서 손님을 대할 대 은행은 은행장으로서 일하는
자기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어떠한 일을 할 때에도 은행장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은행장의 의자에 언제든지 눈독을 들이다보니 결국 아주 빨리 정말로 그
의자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는 누구를 시기하거나 험담을 늘어놓고 다니거나 하는
공격적인 태도는 전혀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 지위에 행하도록 창조적인
상상력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였을 뿐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기 자신을 상상한
일로부터 대생명력의 힘이 그를 통해서 이 새롭고 보다 좋은 체험쪽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전임 은행장이 정년 퇴직을 하자 그 후임으로 이 젊은 사나이가 뽑힌 것입니다.
만일 이 젊은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나는 이제 이 커다란 은행에
붙잡혀 들었군! 내 주위에는 몇 백 명이나 되는 종업원이 있지. 모두들 나보다는 훨씬
오랫동안 이 은행에 있어 왔단 말이야. 이들은 나보다 더 높은 소양을 가지고 있고
교육수준도 높을 테지. 나보다 일도 능숙하게 잘 하고 인맥이 있을 테니 내가 승진의
기회를 잡으려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겠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운을 가지고 있는데
나만이 언제나 불운하단 말이야!"
만일 그가 그러한 패배의 그림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면, 또한 그가 그러한 그림을
그려내는 상상력을 가지고 그러한 비관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면 정녕코 커다란 행운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동차 왕 헨리 포드(FORD, HENRY: 1917~)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면 무엇이고 당신은 가질 수가 있다."
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안에 들어왔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그것을 얻으리라."
당신은 상상력에 활력을 넣어 주고, 그것을 좋은 목적에 상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가지고 있다는 자각 아래 생활하십시오. 그것을 지금
당신의 것이라고 상상하십시오. 성공, 건강, 행복, 그 밖에 무엇이든지 당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 가졌다는 실감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땅 위의 어떠한 힘도 그 욕구가 채워지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한테 끌려 올 것입니다. 또 당신은 그것이 있는 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상상력은 선을 위해서도 악을 위해서도 쓸 수 있다]
당신은 상상력을 써서 자신을 끌어내릴 수도 있고 또 끌어올릴 수도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상상력이 공포와 불안과 분노(부정적인 하나의 신념)에 이끌리고 있다면, 당신이
바라며 또 틀림없이 당신에게 돌아갈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자기 자신을 멀리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바라고 있는 좋은 것을 얻지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새로운
형의 사고를 확립하고, 모든 좋은 일이 당신에게 속한다는(사실 그렇게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통해서 상상력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신념을 굳게 가진다면 당신이
바라는 좋은 것을 그 누구도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자기의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는 어느 부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거리는 물론이고, 자기의 집 뜰에도 나가지 않습니다. 대문 밖을 나설 생각을 하면
그 순간 모든 무서운 일이 닥쳐올 것 같은 상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장
공포증이라고 해서 넓게 트인 곳에 나가기를 겁내는 병입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상상력을 지배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녀가 상상력에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폐거
공포증이라고 하여 문닫은 곳에 들어앉아 있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공포가 이런 사람들의 상상력을 멋대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공포에 대한 상상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공동으로 출자를 해서 사업을 시작한 두 사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두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그 체험 때문에 완전히
의기가 꺾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패배자라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패배자로 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 체험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일평생을
패배자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손실과 실패와 세상 사람들이 그를 패배자로 보고
있다고 믿는 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의욕을 잃고 자기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켰습니다.
그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그 일을 실현하고 만
것입니다. 그의 동료인 다른 한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사업에는 실패했지만 마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양심과 자신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업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업은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패배자가 아니다. 지난날의 경험을 유효하게 살려서
다시 한 번 일어서 보자. 이 실패를 교훈으로 삼고 운명을 다시 재건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실제로 자기 신념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는 자기를 성공자로
보았고, 그리고 그는 결국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훌륭한 사업을 이룩하고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칭송 받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이들 두사람은 처음에는 똑같은 체험을 가졌으나 그 체험의 반응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상상력은 부정적이었고 또 한 사람의 상상력은 긍정적이었던
것입니다. 상상력이 긍정적이었던 사람은 성공과 함께 인류의 위대한 은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상상력의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선택과 결심의 힘을 통해서 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신념은 좋은 일을 위해서 긍정적으로 사용하면 성공과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고 또 두려움을 갖고 부정적으로 사용하면 병이나 실패를 초래할 수도 있는 정신 활동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의 기본적 정서인 사랑도 미움으로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만 사용하면 사랑은 최대의 은혜인 것입니다.
대생명력이 하나 하나 갈려져 나가 자각있는 포인트(POINT)가 된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선택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하는 두 사람은 똑같은 대생명력에 둘러싸여
있었고, 첫 경험 역시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창조력은 백일몽이 아니다]
백일몽에 빠져 있는 공상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실제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합니다. 설령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그림 속에 그 자신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의 위치에서 서성거리는 것입니다. 즉 '나는
몽상에 잠기는 것으로 만도 만족한다. 꿈은 즐겁다. 아무도 나에게서 꿈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꿈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 바라는 좋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신념으로써 믿는다면, 당신이 그 좋은 일
속에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상상한다면, 그리고 당신의 상상속에서 당신이 바라는 것을
믿는다면, 만일 더할 수 없이 좋은 대생명력이 당신이 바라는 대로 틀림없이 당신을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백일몽을 꿈꾸는 공상가가 아니고 창조하는 사람,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개척자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상상 속에서 자신이 속박되어 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스스로를 속박 속에
두는 것입니다. 정신상의 잘못된 계획에 따라서 우리들의 몸을 노예의 쇠사슬로 묶고
인생을 노예로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선택해서 사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사고 속에,
그리고 상상 속에 이상의 이미지를 굳게 가진다면 이상의 목적지로 자신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정신력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곧 올바른 방법으로 정신력을 쓰기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암흑 속에 앉아 있었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밝은 곳으로 나온다든지 등을 밝히면 어둠은 당장에 흩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상력 속에서 우리들 자신을 옭아매는 계획을 버리게 되면 우리들을 묶고
있던 밧줄도 고난도 모두 끊어져 버립니다. 신념의 방향을 다시 잡고 새로운 형의 자유를
정신 속에 창조하면 정신은 우리들을 위해서 새로운 체험을 창조하게 됩니다.
우리들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또 풍족함이나 건강, 성공, 평화 행복 같은 것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낡은 속박감을 믿고 스스로를 속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감옥의 벽은 저절로 무너져 나갑니다. 바깥 세계는 언제나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상태대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 사랑과 신념이 상상력을 좌우한다.]
당신은 이제 정신의 마술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어째서 마술사인가를 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정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생각하는 일이 곧 사물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일은 정신을 쓰는 일입니다.
정신이란 다시 말하면 대생명력의 창조를 맡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에나
하나의 정신, 또는 창조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사고나
신념, 정신 속의 이미지 같은 것을, 즉 당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당신의
체험의 세계에 나타난다는 것이 이제부터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림, 계획, 형으로써 생각한다.]
당신이 대생명력에 제공하는 마음의 이미지는 감정의 한 자세인 사랑에 의해서, 또는
신념에 의해서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상상력 속에서 만드는 계획이나
이미지는 보통 당신이 자각하는 지식과 정신의 지령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일 희망한다면 의식적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대로 그것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림, 즉 청사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굳게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에 있는 것을 이미 이룬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정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대생명력은 자각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들어 굳게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서는 그것을 발견하고
성취시키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제부터 당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상력을 잠재우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수단을 다하여 반드시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상상력에 일거리를 주십시오. 마음속에 일에 대한 계획안을 짜고 그것에 모습과
형태를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 이미지를 사랑하고 자신감을 갖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굳게 가지기를 지속하십시오. 억지로 마음에 갖거나 억압으로 간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생명력을 내걸고 그것이 달성될 것을 완전한 신념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그 계획안은 대생명력에 의해 발견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당신은 대생명력의
창조의 법칙을 이끌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마치 당신이 이 땅에 식물의 씨앗을 뿌려 놓고
사랑으로써 가꾸면 자연은 식물이 생장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대생명력은
당신에게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바라지도 않는 것의 상상도를 그들
마음속에 그려 넣고는, 그 그림을 매우 끈질기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지도 않는
것의 이러한 그림은 부정적인 신념과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를 건전하게 사랑하지 않을 때, 그리고 자기를 대생명력으로부터 거부당한
쓸모 없고 결함이 많은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는 패배자로서의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사랑이 없는
태도를 갖는다면 자기 자신을 병든 사람으로 그려 놓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상상
속에서 자기 뒤에 개가 따라오는 것처럼 고난이 따라 다니고, 앞길에는 더욱 더 큰
괴로움이 가로놓여 있는 그림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생명력은 어떠한 것이든
즉시 응답을 해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생명력은 당신이 보내는
이러한 형에 따라 그대로 무엇이고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서 속에 있는 욥의 이야기를 읽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욥은 부자이면서도 건강하고
사랑스런 가족이 있었으나, 어느 사이인가 병적인 인간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는 몇
가지의 중대한 과실을 저지르고 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몹시 비판적인 사람이 되어
가족은 물론 소나 말, 기르고 있던 가축 떼, 저축한 돈까지도 모두 잃어버리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아 자기 혼자만이
외톨이가 되어 버린 채 친구도 없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 정말 그대로의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결국 가족도 친구도 재산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곤경에 빠지고 나서는 자기가 정당하다는 이유를 붙이고, 또
실패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위해서 친구를 비난하고 신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비난이나 호언 장담, 그리고 광란도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끝없는 창조의 힘을 자기 자신이
악용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을 깨닫고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나에게
떨어졌다.'라고 하는 잊을 수 없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몰락으로 빠뜨리게 한 바로 그 힘을 만일 건설적으로 사용했더라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두뇌가 명석했던 욥은 상상력 속에서 전과는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또는 친구에 대해서 그리고
대생명력에 대해서 그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속인 친구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신념을 부정적인 자세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바꾸자 얼마 안 가서 재산도, 운명도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욥에 대한 기록은 훌륭한
가족을 가지고 처음보다도 두 배나 되는 소와 말과 양과 낙타와 그리고 많은
친구를 갖게 되었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는 정신의 창조하는 힘을 인식하고, '너는 한 가지 일을 선언하라! 그러면 그 일은
너에게 확립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현대어로 쉽게 고친다면, '당신이 무슨
결심을 하게 되든지 그 결심은 그대로 된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계획은 감정의 자세에 따라서 좌우된다.]
당신의 상상의 도면이나 계획안은 당신의 태도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해서,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법칙이나 운명에 대해서, 제4장에서 기술한
불사에 대해서 당신이 진심으로 어떤 신념을 갖는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만일 미움이나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면 마음의 이미지도 틀림없이 그러한 감정의 자세에 좌우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닫고 공포감이 마음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갖고
싶은 어떤 모습이나 하고 싶은 일을 도면과 계획안으로 만드는 노력을 한다고 해봅시다.
당신이 무리하게 자기에게 강요를 하면 당신은 그 도면을 잠깐 동안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그 무리한 강요를 그치게 되면 공포와 의심 등은 그 도면을
부수어 버리고 어느 사이에 바라지 않는 다른 도면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잠재의식
속에 강렬한 것이거나 혹은 감정의 자세 등이 결국 당신의 상상력 속의 계획안을
지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꾸는데 효과적이고도 손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당신 자신에게 건전하고 동정적인
흥미를 갖기고 결심했다고 합시다. 혹은 또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건전하게
사랑한다고 합시다. 또 신의 능력이나 성질이 각자가 그것을 인식하고 안하고는 별문제로
하고 각 개인에게 화신이 되어 들어가 있다는 신념에 이르렀다고 합시다. 그리하여 그
결과 당신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즉, 다시
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훌륭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령 주위의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어디에서나 불타오르려고 하는 대생명력의
사랑이나 그에 즉시 응답하는 힘을 인정하고 이것은 저마다의 인간적 존재의 각자에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가령 사람마다 창조의
정신력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신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저절로 새로운 신념의 자세에 따라
도면이나 계획안을 만들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나
감사의 건전한 감흥에 불타면서 당신은 창조하는 신의 그 계획안에 바로 응답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거절할 줄을 모르는 대생명력은 반드시 응답을 해줍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념, 마음의 자세에 언제나 응답을 해줍니다.
만일 당신이 열등감이나 죄악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면
당신은 진정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마음의 그림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즉, 다시없는
대생명력의 변해서 된 당신, 그 굉장한 신성이 있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그림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서'중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Solomon B. C.
990경~ 932경)이 썼다고 전해지는 전도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보라! 신은 사람을
바르게 창조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많은 발명품을 생각해 낸 것을 나는 다만 볼뿐이다."
당신이 자각을 하고 당신 자신의 태도를 바꿀 때, 신념을 바꾸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또 존중할 때, 마음속의 그림은 바꾸어지고 체험의 세계도 바꾸어집니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에 상반하여 무리한 강요를 한다면 그러한 그림은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만 무의미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사랑은 감정의 위력입니다. 우리들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고 저절로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좋은 일을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먼저 건전하게 사랑하는 일을 배우고 그 사랑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대생명력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과 대생명력에
신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건강하고 또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낡고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 보다 높은 곳으로 자기 자신을 끌어 올려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흙 구덩이 속에 허우적거리며 인생을 몸부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몸이나 일이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너무 많은
장해를 가지고 삽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낡고 부정적인 신념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걱정이나 두려움은 긍정적인 신념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오래된
상처나 지난날의 좌절감이나 실패감을 벗어 던져 버리고 우리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건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들의 신념에 영향을 주고 신념은 우리들의 상상력에 방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 바울이 '사랑은 법칙을 행한다.'고 말한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법칙이란
우리들의 상상력이나 우리들 주위의 모든 일을 지배하는 신념의 법칙입니다. 우리들의
신념은 우리들의 관심과 자세를 바꾸면 바꾸어집니다.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흥미를
가짐으로써, 또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대생명력을 위해서 좋은
것을 바람으로써, 또 일과 기쁨에 관심을 가지고 대생명력 그것의 해명과 표현에
흥미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들의 신념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의식에 굳게 정착하면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거느릴 수 있고, 자신을 거느릴 수 있게
되면 체험의 세계도 거느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죄를 용서하는 것, 다시 말하면 낡은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버리고,
거기에 새로운 형태의 마음을 들여와 그것을 쉽게 간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정신은 형태를 주고 또한 창조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정신을 유효하게
사용하려면 걱정과 공포, 미움, 저주, 분노, 혹은 저항 같은 것의 낡은 자세를 제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모든 부정적인 사고, 신념, 생각, 감전 같은 것은 정신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기 쉬우므로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과 신념은 창조하는 힘을
바르게 인도합니다.
진실로 '사람은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그대로의 사람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10 기도와 용서의 마술]
만일 당신이 자기 마음으로 바르게 조종만 한다면 무엇이고 얻을 수 있습니다. 무한한
지혜를 가진 위력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또 스스로 그것에 가까이 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응답을 해 주고 당신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틀림없이 최상의 만족일 것입니다.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은 정신을
창조하는 힘, 또는 대생명력의 법칙을 어떻게 써서 당신이 요구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가의 방법을 알아내는 일입니다.
[응답이 있는 기도와 응답이 없는 기도]
끝없이 지혜로운 창조의 힘과 접촉하고 서로 교신하여 그 것을 사용하여 일하는 것을
우리들은 보통 기도라고 합니다. 그것을 영혼 또는 정신의 치료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뭐라도 칭하든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그것을 한동안 기도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에 의해서 사람은 자기의 세계 위에 지배권을 미치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배권을 펴 보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을 마음속에 느낍니다. 역사를 통해서, 또 각 민족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 위에 지배권을 얻어서 건강과 행복과 만족을 누렸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생명력이 어떤 특수한 사람들만을 뽑아서 그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풀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스스로
성공 속에 살아가는 법칙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용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성경에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빌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잘못 빌기 때문이니라."
이 말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이런 말이 됩니다.
"당신이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요구 방법을 사용하고 잇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 모든 국가. 그리고 모든 종파의 사람들은 평화와 만족과 성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신은 사람에 따라서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이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이 의식했든 못했든 이 세계에는 지혜가 있고, 응답해 주는 큰 힘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생명력으로부터 어떻게 얻어낼 수 있는가를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고하리라. 무엇이나 그대가 기도하여 구하는 것은 그것을 이미
얻었다고 믿어라. 그리하면 얻게 될 것이니라."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에 대한 신념,
대생명력에 대한 신념과 또 상상력의 활동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것은
손이 닿는 곳에 있으나 그 좋은 것을 가질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신념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예수께서는, '그대가 가졌다고 믿으면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다음의 항목에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서서 기도할 때에 만일 너희가 누군가에게 마음에 거슬리는 무엇인가를 마음에
가졌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늘에 계시는 너희의 아버지, 즉 대생명력은
너희가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효과 있는 기도의 두 단계]
첫째는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난날의 모든 피해의 실수, 죄악감과
손실감 등을 모두 던져 버리고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당신이
용서하고 난 다음에는 대생명력이 필요한 것을 이미 당신에게 주었다고 믿고 그것은 이제
당신의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이 두 가지의 정신적인 조작으로 창조의 법칙은 당신이 바라는 것을 무엇이나 당신에게
가져다 줄 동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때에는 가질 권리 내지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마음속의 저항을 깨끗이 없애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좋은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먼저 믿지 않으면 당신은 정직한
대생명력이 자기에게 그것을 건네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대생명력의 법칙은 당신에게 좋은 것을 가져올
것이라고 가장 확실하게 믿어집니다. 만일 지난날의 상처 등 모든 죄악과 강한 충격의
뒷맛을 모두 던져 버리면 당신이 가지는 권리에 의심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한다는 것은 창조하는 정신이 당신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데 장애물을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지난날에만 얽매어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미움과 지난날의 상처와 실책 같은 것의 기억으로 뒤끓고 있다면, 바르게 효과적으로
사고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들 자신과 이웃 사람과 신을 사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잘못을 범하고, 실패를 하였다는 무엇인가의 느낌을 가슴에 안고
잇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계속하는 동안은 몇 번이고 낡은 체험을
거듭하게 됩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가르쳐 줍니다. 열 사람 중에 적어도 일곱 사람까지는 일생을 통해서
죄, 또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을 받기란 매우 어려운 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는 느낄 수 없으므로 아예 그런 것은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설령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애원을 하고 울며
매달려도 결국은 좋은 것을 자기 스스로가 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자연계의 법칙]
자연계는 언제나 용서를 해주고 있습니다. 자연계는 최대의 것을 주는 존재이면서 또
용서를 해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당신이 예리한 칼에 손을 베었다고 하면 자연의 힘은 곧
그 상처를 고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손을 벤 것은 과실이지만 자연계는 그 상처를 고쳐
주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바로 당신을 용서해 주고 그 자리에서 상처를
고치기 시작합니다. 만일 당신이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소화 기관에 탈을 냈다면
자연은 당장에 그 탈난 곳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나쁜 음식을 먹은 것은 과실이지만
당신은 그 때문에 일생동안을 소화 기관이 탈난 그대로 살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은
싸움 때문에 황폐해진 전쟁터까지도 풀과 꽃으로 덮어서 고쳐 줍니다.
우리들의 사회 구조에 있어서도 용서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해서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때에도 파산법은 실업인에게 있어서 방법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경제적으로 일을 너무 많이 벌여 놓았거나 또는 실수하여
다른 사람의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그는 판사를 찾아가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이 빚은 판상하여 치르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재출발하여 존경받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생활을 재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채의
무거운 짐은 그의 어깨에서 내려지게 됩니다.
자연계 전반에 걸쳐서 용서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을
되찾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사고나 또는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병이 생겼을 때
자연계는 그것을 용서합니다. 자연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본분을 다하면 이전에 가졌던
조화와 건강 그리고 행복과 평화를 되돌려 줍니다. 그러므로 용서한다는 것은 자연의 일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고 싶으면 자연에 대해서 진실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평화롭고 자유스럽고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는 본질에 충분한 표현을 주고자
한다면 부정적, 또는 상처 입은 지난날의 기억으로 대생명력의 자유스러운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뒤죽박죽된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좋은 결과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사랑과 긍정적인 신념으로 바꿔 놓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또 무엇인가에 반항하여 품은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말한 예수의
말씀은 매우 실제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누군가에게'라든가, '무엇인가에'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도, 모든 사람도, 모든 지난날의 체험도 그리고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거시에는 물론 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11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
수년 전에 나는 K주 P시의 기독 청년회 강당에서 일요일 밤마다 몇 차례 강연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강연에는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은 젊은 남자가 두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언제나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집회가 끝난 뒤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몸을 어떻게 고쳐 볼 수는 없겠습니까? 저는 9년 동안을 의사가 말하는
관절염으로 시달려 왔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치료를 해 보았지만 도무지
효과가 없습니다."
나는 그의 사고방식이나 신념의 자세를 어떻게든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필요할까요? 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만"
나는 그에게 나쁜 사고방식만 바꾸면 된다고 말하여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신념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우리들에게 일어나므로 만일 무엇인가 잘못된 신념을 가졌다면 그것으로 인해
신체에 장해가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그릇된 신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정신을 바꾸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의 시대에 재산에
얽매여 살던 어떤 젊은 부자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천국을 체험하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재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러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슬픈 얼굴을 한 채 가 버렸다는 일이 성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재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을 고수하며, 그것이 건강과 성공과 행복을 체험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차라리
낡은 믿음을 그대로 지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영적 자만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들은
안이함에 젖어 온 낡은 세계가 뒤집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박하지 않는 동안은 결코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자기를 자유스럽게 해방시켜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아울러
알아야 합니다.
[죄책감이 병을 부른다]
앞에서 이야기 한 관절염을 앓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그의 병은 수년
전 경제 공황 째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그 병은 걱정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걱정을 그치지 않는 한 병은 낫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그 때 재산을 탕진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지금은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좋은 집과 조그만 목장을 가지고 착한 아내와 함께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 관절염은 낫질 않습니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관절염을 계속 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쩐지 나에게 사정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괴로운
원인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모두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가슴속을 깨끗이 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주저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저의 아내에게조차 말한 적이 없는 일을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경제 공황이 한창일 대 그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돈을 횡령한 것입니다. 그 뒤에 그 돈은 곧바로
변상을 했기 때문에 아무도 피해를 당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일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그 '죄'라는 의식을 마음에서 몰아낼 순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관절염을 앓고 있는 것도 틀림없이 그 죄에 대한 업보이며,
그 값어치만큼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를 바라면서 필사적으로 기도를
했지만, 아무래도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으며, 결코 해방감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가를 묻고 만일 그가 자신을 용서하기만
한다면 죄는 용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으므로 나는
성경의 '마태복음' 9장 첫머리의 8절, 예수가 중풍을 앓고 있는 환자를 고쳐 준 대목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느끼자마자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다만 '아들아 기뻐하라. 너의 죄는 사하였도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가 이
환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는 말을 놓고 어떤 학자(서기관)들은 예수가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것은 신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낡은
머리를 가진 그들 학자들은 죄를 사하는 일은 외계에 있는 신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소홀히 넘기기 쉬운 '마태복음'
8절을 관절염 앓는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예수의 기적에
경탄하고 인간에게 그렇게 용서하는 일과 병을 고쳐 주는 힘을 주신 신을 찬양했다.'는
의미의 말이 씌어 있습니다.
곧 이 관절염을 앓고 있는 그는 용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낡은 기억을 잊어버리고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또 올바른 일을 하는
것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는 '마태복음'의 8절도, 도
9절의 '그러나 사람의 아들(예수)은 지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위를 가졌다.'는 대목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의 기쁨은 그 어떤 기쁨보다도 컸을 것입니다. 그 다음
일요일 저녁 때 그는 강당의 출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절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요일 오후 그는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9년 동안 나는 하루 종일 완전히 일해 본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난주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날마다 온종일 일을 했습니다."
분명히 그는 건강해질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그의 기대, 그의 믿음에 따라
그에게 준 것입니다.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고 있는 동안은 사뭇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할 권리, 또는 건강할 자격을 가졌다고 믿었을 때 대생명력은
그에 응답하여 그에게 건강을 주었던 것입니다. 죄책감이 정신이나 또는 신경의 가장
큰 장애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몸안에서 여러 가지기능 장애가 되어
나타납니다. 죄책감이란 양심의 고뇌라고 말합니다. 확실히 하나의 고뇌하는
양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나쁜 일을 했다고 하는 느낌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은 마음에 긴장과 무리가 있고 그것이 반드시 당신의 몸안의 장애와
고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한다는 것이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지난날의 죄에 대한 기억이 눈앞에 또렷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호소해 왔습니다. 3년 전 우리 내외가 모두 알고 지내는 한 훌륭한
부인이 내게 상의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의 첫마디는 이러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미칠 것만 같아요."
이 부인은 좋은 집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여 착한 아들
형제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압도될 만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그녀는 그다지 선량한 처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직 어릴 때에 죽고, 그 뒤 그녀는 제멋대로 내버려진 채 자랐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시절에 함부로 도색의 유희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월이 몇 년인가 지나간 뒤에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녀도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행복한 생활 속에서 지난날에 대한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나 그녀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는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아내로서 또 이렇게 착한 아들들의 어머니로서의 자격이 자기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어진 편안함과 사치스런 생활에 스스로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자책을 느낀 것입니다. 그녀는 많은 병원의 의사를
찾아다녔으나 모두가 허사였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녀는
정말 비참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지금은 선량한 부인이시겠지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물론이죠! 결혼한 이래 저는 한결같이 선량한 아내이며 어머니랍니다."
그 때 나는 그녀에게 폭탄을 안겨 주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현재 당신이 진정 선량한 부인이시라면 지난날 나쁜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을 정도로 그야말로 선량한 것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이 말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래서 나는 되풀이해 말했습니다.
"만일 지금 당신이 선량하다고 한다면 당신은 선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뿐입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착한 아내이고 착한
어머니라면, 당신은 지금 선량합니다. 그것이 당신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당신에게 오는 좋은 것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지난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난날의 잘못에 꼭 달라붙어서 자기 자신은 괴로워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말고는 지난날은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온몸에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어깨에서 무엇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요. 몇 년을 두고 지난날의 과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으로 생각해 왔어요. 지금 만약 제가 선량하다면 저는
선량한 것이니까 지난날의 과실 같은 것은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비로소 안심했습니다.
이 몇 마디가 그녀를 지난날의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하는 데 필요한 전부였습니다.
오늘날 그녀는 매력있고 행복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품위가 있고 빛나는 부인이며, 착한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외로운 젊은 처녀를 돕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이와 똑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무엇이든 지금의 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들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과거란, 우리들이 오늘날 만들고 있는 과거입니다.
그것은 오늘은 내일이 되면 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들에게 선한 일을
하고 법칙에 기대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선량하다면 그 사람은 선량한 것입니다.
신은 우리들에게 유감을 갖지 않습니다. 신에게는 질투도 없고, 누구에게나 벌을
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우주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깨고 스스로
자신을 벌하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을 용서하면 대생명력은 언제나 우리들을 용서합니다.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그치고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만이 온다는 것을 알고 바른 일을 실행하면 자연계의
인과의 법칙은 우리들의 생활에 좋은 일을 가져다줍니다.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얻으려면 그 잘못을 외면한 채 올바르게 생각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넉넉합니다. 우리들은 자기의 마음속에서만 자기에게 상반되는 노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만이 죄의 용서와 해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죄와 해방은 우리들이 죄를 느낀 지난날의 체험이 무지에 기인한 과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대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우리들은 더욱 넉넉하고
한결 행복하고 건강한 생활로 옮겨갈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의 모든 보상을 다 한 뒤에 지난날의 잘못을
마음속으로부터 외면하고, 바른 것의 원리에 의심스러운 타협을 주지 않겠다고 굳게
결의하면, 지난날의 과오를 초월하는 일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벌서 의식적으로나
잠재 의식적으로나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난날의 악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좋은 의도를 가졌을 때, 자기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할 때 자기를 용서하게 됩니다.
진리는 우리들이 모두 신이라고 하는 일입니다.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
(Browning, Robert: 1812~ 1889)이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떡잎이 모양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은 신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의 속에 있는 좋은 것을 찾아내십시오. 좋은 것을 표현하고, 좋은 일이 당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십시오."
[12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당신은 지난날 누군가에게서 '나는 용서할 수 있으나 잊을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못하는 한 정말로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한다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하는 일입니다. 낡은 것을 장래의 참고를 위해서 간직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용서한다는 것은 진실한 소멸입니다. 즉, 어떤 일을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발족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죄를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용서를
받았을 때 그것은 누구에게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며, 또 우리들이 누군가를
용서해 줄 때 그것은 아무런 개인적인 공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건강과 진보에 소용되는 실용적인 일상 생활의 근본 방침인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흐르는 물길을 막는 장애물을 없애서 대생명력이 완전한 표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기술이 몸에 배기까지는 행복하고 건전한 생활에 깊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방하여 자유스럽게 해줄 때 우리들 자신도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서 공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우리들을 해쳤다고 느낄지라도
그 사람을 향해서 늘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람과 다시는 교제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교제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우리들 자신을 그 불쾌한 체험에 묶어 두는
일이 되며, 또 그 사람에게 매어 놓는 것이 됩니다. 결국 그 상처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한 번 속은 것을 용서하지 않으면 천 번을 속았다는 느낌이 들것이며, 천
번의 쓰라린 체험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해방하여 자유롭게 해주면 우리들
자신도 그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고 아픔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해쳤다 하더라도, 그가 나를 용서하면 그는 해방이 되어 자유롭게 됩니다.
그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 편에 있어서의 정신활동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를
해쳤기 때문에 죄악감을 계속 가진다면 비록 그 사람이 해방되어 자유롭다 하더라도
나는 해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해방하지 않는 동안은 고통은 계속되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의 개인적 체험을 하나 말하겠습니다. 어느 날 나는 한 친구에게 해를 주었다는
생각 때문에 매우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가 나를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죄악감 때문에 자연 나도 그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어느 날 나는 그를 찾아가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매우 잘못되었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군요. 나는 당신이 내게 좋지 못한 일을 했다는 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당신이 나를 피하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왜 당신이 나에게
그러는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아무런 불쾌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나 혼자만의
느낌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우정이 끊겼다는
느낌이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내가 스스로 우정을 끊었기 때문에 나만
이상한 꼴이 된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최선을 다하다가 그렇게 된 줄을 알면서도 실수한
사람에게 유감을 갖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우리들은 동정심을 갖고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당신을 나쁘게 다루었다고 생각하고 만일 그 사람을
책망하고 용서하지 않고 그를 이해하지도 해방도 해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진정한
평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결코 정말 올바르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체험을 버리고 그 사람을 해방시켜 주고, 사정이 같은 처지라면 당신이
그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생각과 같은 생각으로 당신이 그를 대한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황금률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최선이라고 정직하게 믿고
한 일에 대해서 누가 유감을 갖는다면 당신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그는 당신을 해친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도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의심할 것도 없이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믿으면서도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는 약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기가 쉬웠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당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압박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같은 사정에서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거와 같은 대우를 그에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가 정말 고의가
아니고 실수한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십시오. 어쩌면 그가 계속 당신을 박해할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형제를 몇 번 용서하십니까?
일곱 번입니까? 예수는 일곱 번의 70곱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런데 우리들은 당신 자신의 좋은 일, 당신의 마음의 평화를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과 같이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기대하는 바와 같은 마음씨를 그에게 가지십시오. 그래야 당신은
해방되어 자유롭게 됩니다. 당신은 그의 죄를 벌주어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왜 벌을 주어야 합니까? 벌을 주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죄를 저지른 사람이
결과를 두려워하여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도록 그 사람에게 벌을 씌우려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잘못을 깨닫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미 그것을
뉘우치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에게 벌을 주기를 계속하거나 그를 피하거나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니까? 만일 그가 태도나 견해를 바꾸고 있었다면 벌을 계속
줌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
간디(Gandhi, Mahatma: 1869~ 1948)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을 더 상하게 한다." 우리들은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새겨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분노는 용서함으로써 풀린다]
어느 고등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는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중년 부인인 베이커씨가
나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사는 일이 온통 귀찮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만족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몇 년 전에
남편은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쓸쓸하고 또 적은 봉급으로 생활을 억지로 맞춰 가자니 잠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부인들은 좋은 집과 사랑하는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지만, 대생명력은 그녀 자신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같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베이커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의 전 남편은 무엇인가 몹쓸 행동을
계속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특히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전 남편과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상당한 금액의 은행 수표에 보증을 서 달라고 해서 배서를 한
일이 있었는데 남편이 그것을 지불하지 않아서 서로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가
봉급에서 조금씩 떼어 그 부채를 갚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
남편이 상당한 돈을 가졌으며 그 빚쯤은 충분히 갚을 수 있는데도 갚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는 그녀를 무시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수표는 벌써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법정에 고소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원한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가 폭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몹쓸 행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요. 저도 이젠 나이가 많아서 새롭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바랄 수도 없을 것 같고."
나는 그녀에게 전 남편과 이혼하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혼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아마 법률적으로는 그렇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아직 미움과 노여움의 끈으로 그와
굳게 맺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재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를 해방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난날의 낡은 체험에서 당신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주십시오. 그를 축복하고 그의 성공과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기도해 보십시오."
나의 이러한 충고는 그녀에게 쓴 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삼켰습니다. 내
말을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몇 가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나를 전화로 부르더니
곧 만나러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나의 사무실에 글자
그대로 뛰어들어오더니 내 책상 위에 많은 달러의 지폐를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묻고는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전 남편을 위해서 그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아시다시피 지난 7, 8년 동안 그이와는 만난 일도 없고 편지 내왕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오늘 그이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하더니 곧 찾아왔어요. '요 며칠
동안 나의 가슴엔 참회의 물결이 일었소.' 그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많은 달러의
지폐를 저의 무릎 위에 놓지 뭐예요. 그리고 나서는 '지금까지 너무나 미안했소. 만일
무엇이든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찾아와요.'라고 하는 거예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죠? 정말 꿈만 같아요."
당신은 '기적'이라고 말하실 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녀가 노여움을
버리고 그를 용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녀가 원수라고 생각하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를 용서하고
그는 그녀가 용서한 일에 반응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 이야기와 상반되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이 베이커씨를 도와주고 있을 때, 어느 실업가의 상담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실업가의 아내는 어느 음악 교사와 뜨거운 관계가 되어 남편을 버리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 살면서 몹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분노는 그의 장사에도
나쁜 영향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앞의 베이커씨의 경우와 똑같은 충고를 그에게 해 주었습니다. 즉, 아내와
이혼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자기는 이혼한 지가
벌써 4년이나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속에 아직 전의
아내와 인연을 끊고 있지 않다는 것, 또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욕구하고 있는 거와 똑같이 그녀의 행복도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찾아다닌 지도 꼭 1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장사도 잘 되고 주변의 모든 일도 잘 되어 갑니다.
저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평온합니다. 먼저 아내를 용서하고 나니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기분입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마음에 맞는 사람과 결혼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녀와
그녀 남편이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금 와서 보니 지난날의 쓰라린 체험은 신문에
난 한 줄의 기사 거리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가 나의 연구소를 막 나가려 할 때 앞에서 말한 교장인 베이커씨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현관에서 두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물론 당신은 결과를 짐작하시겠지요. 2주일
가량 뒤에 나는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도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가르친 2천여 년 전의 어느 현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말하나니 원수를 사랑하라. 그대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그대를 업신여기며 부리는 자와, 그대를 괴롭히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무슨 까닭입니까? 당신의 천국을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기도에도 반응이 없는 것은 적극적인 신념의 기도가 아니고 미움이나 노여움이나
거부, 그리고 열등감을 가진 채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의 정신
활동의 통로는 쓰레기와 깡통 같은 것으로 막혀 있습니다. 그것을 치워 버릴 필요가,
즉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러한 인격상의 장해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만일 흐름을 가로막은 채로 내버려두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아무리 정신을
써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해도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해쳤다고 해서 그 상처받은 기억을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간직한다면 대생명력의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됩니다.
60세가 되는 애리슨씨는 28년 전에 그와 공동 출자한 동업자가 자금 전부를
횡령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그 뒤로는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다고 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평생의 실패를 모두 이 옛날 동료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이 옛날 동료를 용서해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실패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런 뒤 2년인가 3년이 지난 어느 날 내가
강의하고 있는 '대인관계' 클래스에 이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클래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을 통해서 그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돈을 갖고 달아난 동료의 탓이라고 26년 동안이나 생각해
왔었는데 내가 그에게 했던 충고로 지난날의 일을 용서하고 오랜 세월 동안 만난 일도
없는 그 동료의 좋은 일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원하는 모든 좋은 것을 그를 위해서 축복하기로 결정하고,
거기에서 나의 마음으로부터 진지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는 언제나 좋은 자동차를
갖고 싶고 좋은 여송연을 피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상상으로 이 옛날의
동업자가 고급 세단차에 타고 앉아 멋진 여송연을 입에 물고 시가지를 달려오고 있는
그를 그려보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명랑한 어조로 그를 불렀습니다. 그는 멈추었습니다.
무언가 조금 난처해하는 눈치였습니다만 나는 그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습니다. '빌! 뭘
난처해하는가? 이젠 다 잊었어. 나는 알고 있네. 용서하고 있어. 자네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네. 자네의 성공을 기뻐하네. 내가 좋아하는 물건 그대로를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좋군. 지난 일은 용서하고 잊어버렸단 말이야. 자네는 이제
해방되어서 자유일세. 그것을 나는 기뻐하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을 해방시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란 말일세.'하고 말했습니다."
에리슨씨는 말을 계속하여 그 뒤 얼마 안 있어 그의 사업이 호전이 되어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좋아져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는 지난 일을 당신의 의식 안으로 들여와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분석해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완전히 이해하고 나면 용서할 것은 벌써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되면 당신 자신에게 바라는 모든 좋은 일이 오기를 바라는
만큼 지난날 당신을 해친 사람을 위해서 축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당신은 노여움의 토대를 완전히 헐어 버릴 수 있고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다시 친구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친구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바라는 것 같은 건강과 행복을 그를 위해서도 축복하십시오. 당신이
그를 향한 마음의 태도를 바꾸면 당신에게 좋은 것이 오는 통로는 바로 그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위치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완전히 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에서 지난날의 원한을 깨끗이 씻어 버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일은 완전해집니다.
당신을 해친 사람을 해방시켜 준 뒤에 그 사람이 당신의 마음에 나타나거든 '신이여
그에게 축복을 주십시오.'하고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말하십시오. 그리고 잊으십시오.
그러면 일은 깨끗이 끝난 것입니다. 이내 당신은 그 죄를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완전히 해방되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시험해 보았습니다만 그만 단념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고난 없이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당신의
미워하는 마음과 노여움을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가고자 하십니까? 당신은 어느 쪽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해친 사람을 용서해 주려고 정말 애써 보았으나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습니다.
"진정 정직하게 애를 써 보았습니까?"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럼요.
진정으로 애써 보았습니다."
나는 또 물었습니다.
"그 사나이에게 가서 '조오지, 난 자네를 용서하네.'하고 말했습니까?"
그러나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다시
끈덕지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자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비네, 조오지.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돌려버리세. 나는 자네에게 아무런 유감도 가지고 있지 않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럼 무엇인가 다른 일을 한 것은 있습니까?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다던가
생일을 축하하는 엽서라도 보낸 일이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역시 '아니오.'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상대를 용서해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의자에 기대앉은 채
자기의 미움과 노여움이 자기 몸을 소모하도록 내맡겨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념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소유라고 느끼는
어떤 것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가정합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러한 일은 우리들의
인생에서는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약간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당신의 체험이라고 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체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주위에는 당신이 장래에 사용하게 될 것보다 훨씬 좋은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차피 우리들에게 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땅 위에 있는 동안만 사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지상에는 돈도 많이
있고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고 당신도
자유스럽게 되십시오. 당신이 노여움을 갖고 있는 동안은 우주 연쇄에 따르는 마음의
쇠사슬이 당신을 해친 사람에게 묶어 놓고 그 해를 당신에게 묶어 놓는 것입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들은 어렸을 때 자기를 해쳤다고 느끼는 누구에게
노여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우리들의 야심을 꺾어 놓은 사람이라든가,
또는 우리들이 가진 오늘의 열등감이나 성공하지 못한 데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누구에게 노여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 나의 부모가 나를
충분히 귀여워해 주지 않고 부당하게 다루었다고 느낀 일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어째서 그렇게 다루었는가는 우리들이 그 자세한 사정을 알 때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만 되면 용서할 수가 있고 우리들의 체험은 어둠에서 광명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바꾸어져 갑니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 자기에게 너무 엄격하거나,
너무 응석을 받아 줌으로써 자기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부모를 40년 동안이나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를 이해하는 순간에 우리들을 때린 부모 역시
그 자신이 어렸을 때 누구에게 매를 맞았거나 응석을 부리며 자랐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기의 꺾여지고 상처받은 체험을 우리들에게
풀이함으로써 어떤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현명하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이란,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그리고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사랑은 아픔을 고쳐 주는 이 세상 최고의 영약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들은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미움과 복수심과 노여움, 또는 원한으로 향하던
힘이 우리들의 몸안에서 사랑, 동정으로 변하여 훈훈하게 흐르게 되고 많은 재화나
예기치 못한 은혜를 가져옵니다.
[13 과거를 용서하는 것]
늙은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던 처녀가 실업가로서 성공한 헨젤씨와 결혼했습니다.
홀어머니는 결혼한 그 두 사람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헨젤씨는 자주 업무상
여행을 했는데 언제나 아내를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때문에 헨젤씨 부부가
여행하고 있는 동안은 누군가 그 집에 와서 어머니를 돌봐 드려야 했습니다. 어느 날
딸이 남편과 여행하고 있는 사이에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딸은 마땅히 자신의 책임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못했다는 생각으로 깊은 죄책감에
빠져 여러 해 동안이나 괴로워했습니다.
[죄책감은 정신이나 육체에 병을 가져온다]
어머니를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과 남편에 대한 성실성을 지켜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의 틈에 끼어 그녀는 신경성 소화불량으로 괴로워했고, 후회와 불만으로 생긴
우울증이 발작적으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녀가 나의 연구소를 찾아왔을 때에는
신경쇠약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녀 자신이 비참한 꼴인
것은 물론이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모두 참담한 생활 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미 10대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은 죽은
그 어머니의 처지에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고, 딸은 당신의 처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내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딸이 오늘의 부인과 같은 사태에
있다고 한다면 부인은 딸이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딸아이가 남편과 함께 가도록 하겠어요. 나를 돌봐 주기 위해서
집에 남아 있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어요."
거기서 그녀는 문득 자기의 어머니가 자기보다 자비심이 없고 사랑도 친절한 마음도
자기만 못한 사람이며, 자기가 한 일을 용서하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후회가 사라지고 자유롭게 되자 그녀는 생활을 잘 조정할
수 있게 되고 지금은 건강하고 행복한 부인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행동을 나중에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내가 왜 그때 그렇게
했을까?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할 일이었어. 정말 뻔한 일을 가지고 어째서 그런
일을 했을까?'하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비쳤을 수도
있지만, 그때로서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입니다. 누군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무슨 일을 했을 때 뒤에 그 결과가 나빴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 자신에게도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이해는 치료다]
우리들이 진상을 알고 나면, 즉 이해하고 나면 거기에는 이미 그 이상 용서하지
않으면 안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상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 나 자신을 갖다 놓고 본다면 그 사람의 배경도 알 수
있고, 어째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는 사정도 알게 되어 동정심도 솟고
자동적으로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명한 솔로몬 왕은, '네가 얻는 모든 것으로써
이해를 얻어라.'고 말했습니다. 용서하는 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심한 근시안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용서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해칠 뿐입니다.
한 번 해 버린 일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 않았던 일로 되돌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오지 한가지 현명한 길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용서하고 그리고 의식에서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비난을 계속하고 있는 한, 즉 우리들을 해친 사람을 용서해 주고
해방시켜 주고 또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 한 우리들은 결코 평화로워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해친 사람 편에서는 우리들이 잊지 못하고
있는 일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아마 제멋대로의 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바꿔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그대로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을 해친 사람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려고 애를 쓰지만 도저히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들이 이해를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기 자신을 놓을 줄 모르고 자기만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되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멸시하며 부리고 또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
세 아이의 어머니인 조지 부인은 20년 동안이나 간질병으로 발작을 정기적으로
되풀이했습니다. 그녀의 말로는 아직 소녀였을 때 그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체험도 아버지를 용서했기 때문에 지금의 병의 원인은
아니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상담하러 온 때로부터 10여
년쯤 전에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는 무서운 과오를 모조리
고백했습니다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도 다같이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어 그 뒤로 그녀는 그와 사이좋게
살아갔습니다 가족 전원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용서하는 방법이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무엇인가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대로 세심하게 실행을 하면 반드시 병은 나을
것이라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두 번씩 어두운 방안에 들어가 무릎
꿇고 앉아서 아버지를 위해서 큰소리로 기도할 것과 그녀가 자기를 위해서 바라는
모든 좋은 일, 즉 건강, 평화, 행복, 그 밖의 것을 그 아버지가 가질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할 것을 그녀에게 권했습니다. 이것을 그녀가 실행했더니
그 뒤로는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무릎을 꿇는 일과 아버지의 좋은 일을
위해서 기원하는 그녀 자신의 소리를 스스로 들음으로써 용서한다는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0세가 지난 아놀드 부인은 정신과학으로 병을 고쳐 주는 정신치료 전문가였으나
그녀 자신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혼란한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어느
계곡 사이에 좋은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버리고 도시로 이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엔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을 잃은 뒤 시내의 가옥을 팔고
시골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시골이 싫어져서 이번에는 도시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지만 언제나 바라는 마음의 안정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이상한 감정 상태를 나타내므로
나는 그녀에게 불사라는 것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말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단히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말씀이 너무 심하군요! 저는 정신치료 전문가예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당신의 바깥양반이 아직 살아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당신의 마음에 안정성이 없는 것은 그 일에 대해서 무엇인가
의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동의했습니다.
한동안 대화가 계속된 다음 나는 인간의 불사에 대한 확증을 그녀에게 보이고 나
개인도 불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에
혼란이 없어졌습니다. 다시는 시골집을 팔지 않기로 했으며, 그 뒤 다시 만났을 때는
부지런하고 즐겁고 그리고 침착해져 있었습니다. 마음의 혼란이 주위의 온갖 일을
혼란으로 이끄는 것은 사실입니다.
60세를 넘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데리고 나를 찾아 왔습니다. 아내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아내를 나에게 맡겨 둔
채 그는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장래의 일이 두렵습니다. 남편이 죽고 내가 혼자 몸이 될 것이 두려워요."
나는 남편은 건강이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떠하냐고 물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예 잘 보셨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
그런데 저에겐 다른 가족이 없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남편은 사업
관계로 여행하는 일이 많았고, 그녀는 언제나 남편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한
사정으로 이 두 부부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지금의 마음속에 지닌 고통은 그녀가 아이를 낳지 않은 죄책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그녀에게 알기 쉽도록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자기를 살인범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일은 그때의
사정으로는 최선의 길로 알고서 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자기를 스스로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어서 지금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매일 조용히 앉아서 자신을 향해서 다음의 것을 말하며 그것을
참된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나는 지난날의 모든 불쾌한 체험과 그 체험에 관련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해준다. 나는 그들을 나의 사랑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나의 상상력 속에서
나에게 바라는 것과 같은 좋은 것들을 모든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갖는 것을
마음속에 본다.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내와 똑같은 본질로써 만들어져 있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들 각자는 커다랗고 무한한 대생명력의 일부로써 대생명력은 실재의
전부이다. 그 대생명력 속에 우리들 모든 것은 살아 움직이며 실재하고 있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내가 행한 모든 잘못에 대해서 나 자신을 용서한다. 또 크건 작건
나를 해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한다. 용서하면 모든 체험에서 좋은 일만이 나에게
온다고 알기에 내가 행한 하나 하나의 잘못은 보다 큰 이해와 보다 큰 기회를
위한 디딤돌이기에 지난날의 모든 체험을 나는 축복한다. 어떠한 지난날의 체험도
오늘이나 혹은 미래에 있어서 나를 해치지 않는다. 내가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14 신을 용서하는 것]
여기까지 우리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 지난날을 용서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여 왔습니다. 여기에서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조물주의 죄라고
생각되는 체험을 생각해 내어서 신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고난과 전쟁과 병 등은 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괴로운 세상에 대한 책임은 모두 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일 자기들이 우주 경영을 맡아서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멋지게 해낼 수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혼란한 세계의 현상을 보고 신이 경영을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세계의 그러한 불쾌한 현상은 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잡초와 독초가 만연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상태는 부정적인 사고방식, 즉 인간 자신의 부정적인 신념 속에서 자라고 또
만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고난과 고뇌에
대해서 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신을 책망해 왔던 것입니다.
소중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비통해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신은 질책되어
왔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와 괴로움에 대해서 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신을 몹시 원망하고 신을 향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자기
스스로 나쁜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는 천국에서 쫓겨나 땅에 떨어진
천사를 시켜서 인간을 괴롭힌다고까지 믿어 왔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나에게
'신이 나에게 덮어씌운 고통과 가난 때문에 나는 신을 미워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신에게는 조금도 영향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고통과 가난에 자기를 잡아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행복하게 되고 싶다면,
만일 번영과 건강과 만족한 인생을 보내려고 한다면, 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악행이나 무정 등의 좋지 못한 일은 자기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무슨 외계의 힘이 자기에게 가져다준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무지와 경험 부족으로 저지른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잃은 것도, 가족이 일찍 죽은 것도, 즉 비탄이나 걱정이나 공포의 씨가
된 충격 같은 것도 모두 그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이
그들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 자신이 선택해서
일부러 불건전한 가정이나 환경 속에 태어난 것은 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고, 진리를
발견하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이나 그리고 자기 자신 이외의 바깥 세계의 어떠한
힘에 대해서도 노여움이나 저주를 버리게 될 때까지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을 그칠 때까지는 적극적, 창조적, 조화적, 그리고 건강한 활동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돌은 사람을 넘어뜨릴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하게 되면 우리들은 보다
많은 힘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장래에 다른 더 큰 문제와 대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좋다, 또는 나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느 어려운 문제를 대할 때
그것을 하나의 기회, 또는 격려해 주는 도전이라고 본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약하게 만들거나 무능하게 만드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태는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디디고 건너갈 수 있는
진창 속의 디딤돌입니다.' 모든 진보는 무엇인가의 문제를 정복하고 무엇인가의
도전에 싸워 이긴 결과입니다. 대생명력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격려의 도전을 해
오고 있으며, 우리들의 몸안의 힘에 어떤 작용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성공은
도전에 응하여 성장하고 발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가끔 어려운 문제가
우리들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대생명력은
우리들의 몸안의 힘에 호응하기를 강조합니다. 식물의 씨앗은 눈이 트면서부터 흙의
딱딱한 지면을 뚫고 중력에 항거하면서 새싹이 되어 돋아나옵니다. 만일 이것이
자연계에 있어서의 성장과 발달의 기획이라면 대생명력이 우리들 눈앞에 던져 주는
어려운 문제와 도전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교육을 통해서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규 교육을 받고 받지
않은 것이 대생명력을 표현하고 행복의 기회를 잡는 데 반드시 한계를 긋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위대한 자선가들 중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려서 사랑이나 감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의 성장에 장애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느낌을 일생 동안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습니다. 한편 어려서
불우하게 자랐지만 온 가족이 협력하며 노력함으로써, 그리고 가족간의 사랑의
가치와 긴밀한 조화를 더욱 깊이 인식하여 그것에 힘입어 어린 시절의 역경을 이겨
나간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체험에서 귀중한 교훈을 배웠으며
그 때문에 자기의 어린 자녀들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깊이 사랑합니다. 그들은
쓰라린 어린 시절의 체험을 좋은 일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모든 체험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역경은 기회의 씨를 갖는다.'고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당신이 가진 지난날의 상처나 타격이나 손실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러한
체험의 결과로서 당신의 생애에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도표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불행한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찾아오지 않았을 좋은 일의
여러 가지를 거짓없이 표로 만들어 보는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거의 앞을 못 보던 파머 부인은 성질이 몹시 까다롭고 화를 잘 내
다른 사람이 접촉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사회적
열등감이나 그밖에 신체상의 장애도 있었습니다. 희미하게는 볼 수 있었으나 사람을
알아낼 수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녀는 만일 방안 여기저기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게라도 되면 비상한 주의력으로 귀를 기울여 사람들을
분간해 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앞을 거의 못 본다는 사실은 아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가끔 이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어제는
거리에서 만났으면서도 왜 모른 체 하고 지나갔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말이야."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사실을
말하지 않고 핑계를 대서 순간을 넘겼으므로 자연히 자기가 앞을 잘 못 보는 것에
대한 노여움이 더해 갈 뿐이었습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생애에서 찾아온 좋은 일들이 있었던 것을
적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제일 먼저 그녀를 깊이 사랑해
주는 좋은 남편을 만난 일, 그 외에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겪은 좋은
일은 많았습니다. 그러한 좋았던 일에 마음을 돌리고 보니 그녀의 노여움의 밑바닥은
허물어졌습니다. 그녀는 눈을 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
졌습니다. 사람됨이 매우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욱 놀랄 만한
변화는 눈이 보이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보통 사람과 비슷한 시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련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때까지 좋지 않았던 일을 좋은
일로 크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매우 행복하고 조화 있고
건강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행복이나 성공은 우리들이 어떻게 체험에 반응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사슴이 빠른
동물이 된 것은 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자기의 몸안의 힘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몸안의 힘에 의지하여 자연계로부터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
추리와 지성을 발달시켰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특권입니다. 즉, 받아들여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용서하고 그럼으로써
해방되어 자유로워지고 그리고 전진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노여워하고 자신을
슬퍼하고 작기만을 생각하고 그리하여 아주 비참하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어느 것이 해야 될 건전한 일이냐에 대해서는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인류를 위한 최대의 은인이 된 선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몸에
지닌 것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과학자
카버는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할 만도 했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지성이 높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는 자기 중심으로 하여 미움을 기르는 대신에 사람들의 세계에
봉사할 것에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신의 가족의 한 사람, 곧 인간 가족의 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링컨도 소년 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원망할 만도 하였으나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원망만 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사랑 받는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일할 필요가 없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 조화하여 생활할
노력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일생을 망쳐 버렸다고 말하는
여러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접하는 모든 상황과 주위의 사태는
우리들의 이해에 도전해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재능과 책임을 가지고 대생명력과의
조화 있는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 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들은 훌륭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화 있는 조정이 건강을 낳는다]
육체의 완전한 건강은 육체의 수준에 맞춰 조정을 한 결과입니다. 음식, 기후,
물질계와 교묘하게 조정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정신의 건강은 조화롭게 생각하는 일,
올바른 생각과 정신적 조화의 결과입니다. 혼의 건강은 대령(우주에 생명을 주고 전
인류의 영혼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에머슨이 처음 지어낸 말)에 대한 조정을
의미합니다. 대령은 직접 우리들의 환경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들은 살고 움직이고
그리고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잘못, 손해, 충격들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하나
하나의 체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해방시켜 줌으로써 자유롭게 되고,
그리고 다시 건강한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신은 우리들을
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원인과 결과의 자연계 법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때 벌은 저절로 그치게 됩니다.
지난날을 잊고 올바르게 다시 출발할 때 대생명력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모든 생의 도전은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들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만일 지난날의 잘못과 피해를 마냥 물고 늘어진다면 우리들을 심적으로
괴롭히던 지난날의 기억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들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 놓는 셈이
됩니다. 우리들의 책임은 대생명력을 풍부하고 완전하게 표현하는 일입니다.
지난날과 우리들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렇게 해서만이 공포, 번민, 걱정, 거부감, 열등감, 노여움, 자기 연민
같은 것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오게 할 권리가 있다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오게
할 권리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만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믿을
수 있으면 그때야말로 우주의 자연의 법칙을 신뢰하고 그것을 가지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함으로써 신념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만이 우리들의 지난날을 깨끗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만족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얽매여 놓은 지난날을 버리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나의 좋은 친구 I. 수탄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한 계단 위로 오를 때는 아래
계단에서 손을 떼라. 그렇지 않고는 위로 오를 방법은 없다. 아래 계단에서 손을
떼라. 위로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더욱 눈부신 빛과 더욱 큰사랑의 태양이 보인다.
위의 계단에 오를 때는 아래 계단에서 손을 떼라.
[15 자기 분석과 재교육]
이 장에서는 당신의 자기 분석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당신에 대해서, 또는
당신의 어려운 문제나 괴로움에 대해서 의논하고 그리고 응용 심리의 견지에서
그것들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여기에 이 장을 마련한 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 스스로에게
능률이 있고 가치 있는 소중한 인물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여러 방향에서 될 수 있는 데까지 많은 빛을 비쳐 봄으로써 당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하고, 당신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까닭을 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제2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자는 것입니다.
제2부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또
당신의 소중한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정신이라는 위대한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하는 방법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부정적인 정신은 많은 병의 원인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 의학자이며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 박사는 인간의 몸안에
있는 대생명력의 발전기처럼 동적 충동을 억압하면 몸에 병이 생기거나, 혹은
인격상의 장애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한 동적인 충동을 의식적으로 바른
방향에 돌려놓지 않으면 가끔 나쁜 통로로 흘러들어 정신과 몸에 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마음의 부정적 자세나 또는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콤플렉스, 즉 정서적인
관념의 복합은 보통 이런 동적인 충동을 나쁜 방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가지 고장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정신 속에 콤플렉스 같은 이상한 것의 우성 상태가 생기는가,
그리고 그것이 잠재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무엇이 생기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가령 당신의 마음의 하나의 우물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시골길을 걸어가다 보면 들
한 쪽에 돌로 벽을 쌓은 직경이 다섯 자 내지 여섯자 가량 되는 우물에 물이 거의
가장자리까지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그 우물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우물의 밑바닥은 우리들이 무한의
생명력이라고 부르는 물로 가득찬 큰 바다에 통하고 있다고 생각합시다. 대생명력의
바다 바닥으로부터 물이 그 우물을 통해서 올라와서 그 수면에 나오면 인간의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물을 볼 수 있는 유일의 장소, 물을 체험하는 유일의 장소는
우물의 수면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하나의 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수면은 당신의 현재의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하고 있는 곳, 체험을 느끼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하는 마음이라고도 불려집니다. 그 의식하는 수면, 혹은 대정신의
표면 바로 밑에는 잠재의식이라고 불려지는 구역이 있습니다. 마음이 잠재하는 부분에
당신은 매일 사용하는 심적 이미지의 전부를 감춰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곱셈의 구구단표, 당신의 이름, 친구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을 당신이 언제나
현재의식에서 늘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것은 거기에 넣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쉽게 의식의 표면으로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들, 현재 및
잠재의 수준 아래에는 위대한 물기둥이 우물의 벽까지 가득차 있어서 그것이 당신
자신의 커다란 부분, 당신의 무의식적인 부분으로서 그것이 직접 대생명력의 대해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또 그것에 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콤플렉스는 왜 생기는가?]
당신의 의식의 표면, 혹은 현재의식의 수준에서 지각을 동반하는 체험을 갖게
됩니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가령 깊은 상처의 체험을 가졌다고 합시다.
가족 중에서 기둥으로 믿던 누구를 잃었다던가, 또는 재산이라든가,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던가, 혹은 몸에 부상을 입고 낫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 기억을
당신 자신의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의 부분에 떨어뜨려 넣어 줍니다. 그 뒤 또 다른
별개의 상처를 받으면 그 기억도 당신의 마음 밑으로 떨어져 가서 전번의 상처의
기억에 엉켜 붙게 됩니다.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상처를 계속 받게 되면 그 모든
피해의 불쾌한 기억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자기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콤플렉스(나쁜 정서의 복합)가 생기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자기에게는 불친절하다.
그리고 세상 만사나 세상 인간들 모두가 자기에게 적대적 태도를 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상처뿐만 아니라 잘못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합시다. 그것을 잊어버리기를 바라면서 대정신이 작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 '지나간 일이야 다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깨끗이 잊어버리고 생각지
말기로 하자.'라고 자기에게 스스로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일을 잊어버린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실상인즉 당신 자신의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의 부분 속에 넣어 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뒤에 당신이 또
다른 잘못을 저질러서 그것을 마음속 깊이 들여보내면 역시 전번의 여러 과실은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거기에 이미 와 앉아 있던 한 과실만 손을 잡게 됩니다.
다른 과실도 차례 차례로 모여져서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유죄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이라고 믿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억압된 이런 기억은
없어진 게 아니라 모두 활동성을 띤 채 숨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용기를 가지고 현실에 효과적으로 마주설 수 없어서 나는 못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리하여 대생명력과 마주 대하지 못하고 자기는
약자라고 결론지으며 실패로 끝난 일이나 실업의 기억 등을 잠재의식에 들여보내게
되면 그것들은 못난이라는 열등감의 콤플렉스가 됩니다. 또한 해결하지 않고 내버려
둔 이러한 콤플렉스는 대생명 속에서의 당신의 성공과 행복에 대한 당신 자신에
신념을 가지는 일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험에 있어서도 최초의 상처는 큰 감정에 의해서 전기를 띄게 되며, 그와
같이 체험의 여러 가지 기억으로서 최초의 상처와 같은 곳에 보내진 것은 잠재의식
속에 부정이 우세한 마음의 상태를 만듭니다. 콤플렉스는 그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니 콤플렉스는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감정적인 기억들입니다.
그것들은 보통 불쾌한 경험이나 또는 오해된 체험이 연속적으로 들어가서 한데
뭉쳐져서 형성이 되고 잠재의식 속에 집어넣어져서 거기서 묻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그 체험을 나는 이미 벌써 잊어버렸다.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의 결과인 감정은 현재의식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지만 그
기억의 감정은 현재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감정의 원인이었던 처음의
체험을 깨끗이 잊어버린 지 상당히 오래된 뒤까지도 홀연히 수면에 떠오르게 됩니다.
시골의 우물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우물의 밑바닥으로부터 수면(즉, 의식하는 마음)에
솟아오르는 맑은 물은 열등감이나 공포나 걱정이나 죄책감 같은 것의 부정적인
콤플렉스 때문에 그 표면에서 묘한 빛깔로 착색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착색된 물을 수면(의식하는 마음)에 떠올라 와서는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갖게
만듭니다. 그 결과 병, 불행, 좌절, 고난 등의 체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괴로운 체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정적 경향이 우세한 사고의 자세를 어떻게 해서든지 신념, 사랑, 선의,
행복 등의 긍정적 경향이 앞서는 상태로 바로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서 대생명력의 맑은 물줄기가 우물(당신)의 밑바닥에서 수면으로 올라올
때 그것이 투명하고 순수한 물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생명력이 위로
솟아 올라오면서, 잠재의식을 통과할 때 착색이 되지 않고 맑은 물 그대로
올라와야만 비로소 건강과 아름다움의 물줄기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잠재적인 부분에서 상처나 손실, 공포, 노여움 같은 콤플렉스가 깨끗이
청소되어 정화하는 데는 많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쓰든 거기에는 용서한다는 일의 어느 형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잠재의식에 가로놓여 있는 부정적인 콤플렉스는 우리들의 인생의 표면에 떠올라
불순물을 만들어서 객관적인 맑은 체험의 모든 것을 혼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만일 우리들이 평화롭고, 건강하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바란다면 이
불순물이 생기는 원인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신념의 자세를 의식적으로 바꿈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의 힘이 끊임없이 우리들 속에, 우리들을 위해서, 우리들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일에 신념을 가질 때까지는 우리들이 잠재의식의 깊은 수준으로부터
공포와 열등감과 우울과 좌절과 실패들의 콤플렉스를 없앨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몸이나 주위에 불쾌한 체험이 계속되는 것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모두 정리되고 이해하고 용서되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많은 우물, 즉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는
부정적인 콤플렉스를 함유하고 있는 것도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우물의
물은 몹시 오염되어 우리들의 우물로 스며들어 오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의
우물의 벽을 적절히 보강하여 오염된 물이 스며들어 오는 것을 막아 내지 않으면
안될 경우도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은 조심성 있게 자신들을 그러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떼어놓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과는 전혀 별개의 개인으로서 인생을
살면서 자신 내부에서 이끌어 주는 것에 따라서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자신의 의식이나 개성을 침해받지 않도록 스스로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부정적인 콤플렉스를 제거할 것인가?]
해로운 콤플렉스는 심리적 분석에 의해서 의식하는 마음의 표면으로 끌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손을 뻗쳐 병균을 뿌리째 몽땅 잡아 밝은 햇빛 속으로
끌어내다가 그 정체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정체를 알아냄과 동시에 정서적인 내용물인
콤플렉스는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분석을 담당한 사람이 솜씨가 있는 의사라면
이것은 매우 좋은 치료법이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이와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선의와 신념과 행복 같은
것을 우물 위에서 끊임없이 부어넣는 일입니다. 이 방법도 해로운 콤플렉스의 전부를
완전히 제거시켜 줍니다.
예를 든다면, 당신이 흙탕물이 들어 있는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 흙탕물을
깨끗한 맑은 물로 바꿔 넣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흙탕물을 쏟아 버리고
새로 맑은 물을 부어 넣는 것이 한 방법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은 흙탕물 병을 그대로
둔 채 위에서부터 맑은 물을 끊임없이 부어 넣어서 물 전체가 완전히 맑아질 때까지
계속하는 일입니다.
[공포나 미움을 없애는 두 가지 방법]
사랑과 신념과 선의를 당신 자신을 위해서, 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자꾸 부어 넣으십시오. 당신의 모든 체험을 좋은 체험이 되도록 하십시오.
공포나 미움의 원인을 이해로써 분석해 내십시오.
당신이 누군가에게, 또는 당신 자신에게 노여움을 가졌을 때, 만일 누가 당신을
해치거나 혹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해쳤을 때, 공상에 잠기거나 또는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은 마음의 문에 빗장을 늦추어 놓기 쉽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던
지난날의 기억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밀고 나오려고 할 것입니다. 또 당신이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탁 풀어놓고 있을 때 당신을 해친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계가 당신에게 그 소용없는 불건전한 기억을 없애버리라고
경고하는 한 방법입니다.
콤플렉스는 또 곧잘 꿈을 통해 나타납니다. 마음의 표면에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밑바닥의 무엇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숙련된 정신 분석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나 아래쪽에 있는 것에 물들여졌거나 혹은 영향을 받습니다.
만일 당신이 정신 분석가에게 꿈이나 습관으로서 마음에 생각하는 것, 당신의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준다면 그는 연상의 법칙을 통해서 당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어 당신의 부정적인 콤플렉스를 찾아낼 것입니다.
[정신의 본능은 건전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대생명력은 자기를 표현하려는 의욕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종족을 영속시키고
싶은 섹스의 욕구, 자기 보전의 욕구, 목적 달성의 욕구 등은 모두 정상적인
욕구들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본능(욕구)에다 건전한 표현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상적인 것이나 본능적인 것은 무엇 하나 나쁜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악이라 생각하는 것의 근본은 원래 선한 것을 오용하거나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악덕은 선덕을 거꾸로 한 것입니다. 이해하고 또한 적절하게 방향을 주면
섹스의 욕구는 아름다운 가정 생활로 우리들을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욕구의 방향을
잘못 잡거나 또는 적절한 방향도 없이 그것들을 표현한다면 그 결과는 골치 아픈
일들을 야기합니다.
정상의 본능들은 억압하면 반드시 우리들의 건강이나 행복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모든 정상의 본능들은 될 수 있는
데까지 최고의 수준에서 표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연의 충동(본능)은, 만일 잠재의식이 죄악감이나 나쁜 신앙이나 공포
때문에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들은 그 자연의 충동에게 건강하고 건전한 방향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이 표현하는 네 가지 방법]
대생명력은 당신을 통해서 네 가지의 중요한 방법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그 하나는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의 일에 의해서 대생명력은 자기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레크리에이션입니다. 당신의 오락을 통해서
대생명력은 자기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셋째는 대생명력은 당신을 통해서 사랑으로
나타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생명력은 정신적으로 또는 지적으로 성장할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의 십자가는 네 개의 가지의 길이가
똑같습니다. 이 십자가로 당신의 인격을 나타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가지의
끝에 '일'이라고 쓴 종이 조각을 붙이십시오. 둘째 가지에는 '오락', 셋째 가지에는
'사랑', 넷째 가지에는 '숭고'입니다. 균형이 잡힌 인격은 일에서도, 오락에서도,
사랑에서도, 숭고에서도 각각 길이가 같고 도 완전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균형이 잘 잡힌 건전한 인격을 바란다면 이들 네 가지 면에서 골고루
대생명력을 표현할 뿐 아니라, 어느 것도 건전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국
한 가지의 수행은 바로 다른 한 가지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이란 창조적 활동입니다. 당신은 창조하고 있지 않은 동안은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났을 때에 '나는 무엇을
창조했다. 나는 무슨 일에 쓸모가 있었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면 당신에게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만족한 일, 직업 또는
창조적 활동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락, 즉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락은 생명의 자유스러운
흐름입니다. 오락을 즐긴다는 것 또한 생명의 자유스러운 흐름입니다. 오락을 즐기는
것은 삶의 간소한 기쁨, 대생명력의 개방된 표현입니다. 놀이는 햇빛의 춤, 흐르는
강물의 잔물결, 나뭇잎의 속삭임, 새의 노래, 어린이의 웃음입니다. 그것은 표현의
순진한 기쁨입니다. 움직이는 대생명력의 환희, 사는 것과 표현하는 것의 기쁨
이외의 그 자체에 아무런 목적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타산이나 공리적인
계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일과 오락과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을
대생명력에 감정적으로 내맡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무언가에, 또는
누구엔 가에 무제한으로 감정적으로 내맡긴다는 일, 자기 자신을 무언가에 감정적으로
주어 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숭고는 당신에게 재충전과 같다]
만일 당신이 잘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무엇인가 이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참다운 존경과 숭배는 당신의 혼에 전기를 충전하는 일을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깊은 본질에 표현을 주는 일입니다. 대생명력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당신의 혼과 주의를 둘러싼 위대한 생명력은 에머슨이 말한 대령과의
친밀한 교섭입니다. 즉, 대생명력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과 추리가
성장하는 일, 즉 당신의 정신의 전개입니다. 스스로를 혼이 있는 존재로서 인식하게
되고 자기보다 더 큰 대생명력과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에 도달합니다. 존경과 숭배는
당신 자신을 한층 깊은 수준에서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무슨 방법으로 당신의 참다운 본질을 어떻게 해서라도 존경과 숭배를 통해서 표현하지
않으면 당신의 참된 본질은 억압되는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도대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무엇 하나 불편한 것이 없건만 그런데도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 만족하지
못합니다.'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당신은 들은 적이 있으시겠지요. 그것은 인생의
네 가지 정면에서의 그들의 표현에 어딘가에 균형이 잡히지 않은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무엇인가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활동은 당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서
그 일에 대한 활동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최고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의 일에 표현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의 내부에서
양심의 투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존중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병이 나는 법입니다.
가령 당신이 창조적인 활동에 흥미가 없어지면 도박을 시작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길치고는 아주 그릇된 길입니다. 어떠한 도박꾼도 결코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도박을 직업 삼아 하는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자기가 하는 짓이 반사회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의 밑바닥 한구석에서 느끼며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레크리에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건전하게 놀이를
즐겨야 합니다. 불건전한 오락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대생명력은 무엇인가에 또는 누군가에 그 자신을 잡아매어 놓습니다 하다못해 자기
자신을 향해서 자기애를 하여서라도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잘못된 사람이나 잘못된 물건을 사랑하다가 쓰라린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정도가 아니건만 오히려 당신은 그대로 사랑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사랑에 건전한 길을 제시해 줄 수가 있으며,
그럼으로써 당신은 행복해질 수가 있는것입니다. 존경과 숭배에도 많은 그릇된 점과
미신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흔히 공포, 실패, 무력감, 그리고 곧잘 병을 불러들입니다.
일과 놀이와 사랑과 숭고함을 잘못된 방법으로 표현되는 대로 방치해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네 가지 면에서 모두 대생명력이 표현되어 있다면 당신은 행복하고
신뢰감과 의의를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도표를 만들라]
그리스 십자가의 각 네 개의 정점은 저마다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분석하여 자기는 네 가지의 어느 것이 너무 짧고 어느 것이 긴가를 찾아내십시오.
혹시 당신은 너무 지나치게 일하지나 않는가, 너무 놀이에 빠져 버리지 않았는가,
사랑이 정도를 넘지나 않았는가, 숭고함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아니면 부족하지나
않은가를 찾아내십시오. 대생명력의 표현에 있어서 어디에 불균형이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이 도표를 완성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의 눈으로 살펴본 뒤에 이번에는 당신
자신의 이상적인 초상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이라고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자기를 표현할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십시오.
이 이상의 그림과 비교하면서 당신 자신을 분석하여 당신의 인격에 균형을 가지게
하려면 어디를 도와주면 결함이 보충될 것인가를 알아내십시오. 내가 아는 어떤
의사는 이제는 환자의 증상을 살피는 것보다도 환자를 완전히 균형 잡힌 인격자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고 진단을 내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현대적이며 진보된 좋은 진단법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완전한 인격자로 하겠다고 계획한다면 무엇을 바꿀 필요가
있는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위에서 말한 이상을 당신이라고 인정한다면, 자기가
저절로 그쪽을 향해서 걸어가는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계획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대생명력의 위력에 새로운 방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의 이미지]
그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대생명력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어떻게 대생명력에서
후퇴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떻게 보이는가,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들 자신이 생각하는 마음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우리들은 자아의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행이나 실패, 혹은 성공, 질병이나 건강 같은 체험을
겪음에 따라서 우리들은 그러한 그림을 그리게 되는 원인이라고 일직이 우리들은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앞에다 수레를 매는 것과
같이 앞뒤가 뒤바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냐하면 우리들에게 관계되는 그 그림은 대생명력에 형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대명력은 반드시 그 형의 형태에 따라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에 자기에 대한 그림을 간직하게 되면 그 그림이 우리들의 체험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 체험이 그 그림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의 그림은 결과가 아니고 원인인 것입니다.
[자아 이상]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아 이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은 의욕이
있고, 채택할 줄 아는 지각적 존재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어떻게
되고 싶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을 선택했다고 합시다. 그 이상의 그림을 당신의
새로운 자아 이미지라고 인정하였다고 가정합시다. 마음속에 이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습,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형 속에 당신 자신을 던져 넣으시오.
이상을 만들어 내는 당신의 일부분은 초자아, 또는 상위 자아라고 불려지는 것으로,
이상의 계획이나 그림을 창조합니다. 이것은 당신을 감시하는 무의식적인 양심이기도
합니다. 이 초자아는 이상의 분야에 자기 자신을 던져 넣습니다. 이 새로운 그림,
당신 자신의 이 새로운 초상을 자기의 이상에 기초를 삼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낡은 자아 이미지를 이 새로운 자아 이상으로 바꿔 놓으십시오. 이것이 인격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시대의 기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아 이미지를 이상적인
자아 이상으로 바꾸십시오. 당신이 지금까지 이것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의
입장에서가 아니고 이상의 입장에서 당신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그 이상의
자아라고 믿으십시오.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믿으십시오. 일에 있어서, 놀이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생활에 있어서, 존경과 숭배에 있어서 지적 및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생애에 있어서 자기를 건전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제 당신은
상상력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실행해야 할 일의
사고가 저절로 당신에게 떠오를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동을 시작하십시오! 만일 끈기
있게 열심히 행동을 계속해 나아간다면 이것으로 당신이 바라는 욕구의 성과가
당신의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조그마한 메모 수첩을 준비하십시오. 당신이 실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온갖 것을,
즉 일, 오락, 사랑, 숭고함 등의 항목으로 나누고 항목에 따라 표를 만들어
기록하십시오. 그 표를 자세히 검토하여 그 표에 적힌 것이 당신에게 실재하는가
아닌가,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또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 표를 하루 세 번 네 번이고 거듭 읽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동안
당신은 표에 기록한 것을 가질 수 있고 또 당신은 그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이 새로운 그림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에 대해서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움직여 갈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생애를 위한 이상적인 계획을 창조한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실제의 이미지에 등을 돌리고 당신은 이렇게
되어야겠다고 생각되는 이미지를 향해서 나아가십시오. 즉, 자아 이미지로부터 자아
이상으로 나아가십시오. 만일 당신이 이것을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자기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 자기의 잠재의식 속에 가로놓여 있는 건전하지 못한
몇 개의 콤플렉스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두려움을 소중하게 지키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열등감이나 또는 죄책감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자기는 죄인이라는 생각을 아끼고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일 전체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괴상하고 야릇한
만족감을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하면 좋다는 것을 알아낸 뒤에도
오히려 자아 이상을 잘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사에게서 약을 받고도
먹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혹은 심리치료 전문가에게 가서 '이것은 그
사람의 과실입니다. 나의 문제는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힘을
발견해 놓고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약점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 바울은 늙은 자기를 벗어 내던지고 새로운 자기를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에 집착하는 자위심을 당신 자신에게 주지
마십시오.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해야겠다고 알고 있는 이 일을 어째서 안
된다고 당신에게 말하는가, 그 생각의 정체를 밝히십시오. 일이나 놀이나 숭고함이나
또는 성장 발육에 있어서 내가 해야 할 방법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믿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내가 하지 못하는 일에 정말 정당한 무엇인가의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고 당신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은 언제든지 많은 변명으로 일관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명이 정당한 이유를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일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당신이 자신에게 어떠한 변명을 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당신은 어떻게든 자기를 일부러 회피하고, 이해되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아 자기의 나약함을 지키려 하고, 자기의 신경증을 소중하게
아끼고만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이상을 향해서 움직여라]
진화의 과정에서 동물은 인간으로 변해 감에 따라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스스로를 인식하는 일로써 자기가 실재한 것을 알고,
또 자기가 욕구 하는 일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그 욕구의 충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써야 하는가 그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에 도달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는 진화와 성장을
촉진하는 수단으로서 우리들의 천성 속에 타고난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최대한의
즐거움에 도달하려고 하는 욕구는 우리들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강한 충동입니다.
만일 최대의 선과 최대의 기쁨을 우리들이 희망하고 또한 채택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최대의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은
대생명력의 가장 화려한 체험으로 우리들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각하는 일은 당연히 자각하고 선택하는 재능을 수반합니다. 우리들은
감정보다도 뛰어난 이성을 발달시키고 있기 때문에 한결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감정의 방향을 채택할 줄 알기 때문에 내일 후회할 일을 오늘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이 있으므로 우리들의 중심에 있는 감정의 힘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밖으로 향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최대량의 좋은
일과 즐거움으로 향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성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힘을 모아서 하는 좋은 사업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응답이다]
이상은 최대의 선을 우리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이 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이유는 곧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이웃은 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협력에 의해서 고통을
적게 하고 즐거움을 많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신, 즉 대생명력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신을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모두 사랑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고 반항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좋은 것, 당신의 최대의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은
도덕입니다. 도덕이란 건전한 표현 법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최대의 좋은 일은 당신 이웃의 최대의 좋은 일과 따로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최대의 좋은 일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없으면, 당신의 마음 안에서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마음의 어떤 내부 과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들은
마음 안의 이 본능적 과정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의 양심이 당신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지적인 존재입니다. 당신이 만일 고통을 버리고 최대의 즐거움에
이르고 싶다면 당신은 이상을 향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능에만 이끌리는
동물처럼 산다면 당신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누군가를 죽이는 데 아무런 주저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이 없으면 양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순한 본능적인 자기 의식에서 성장해 가면, '나는 아직도 그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만일 내가 그를 죽이면 그의 친구들은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당신은 추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죽이는 일로는 최대의 즐거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자랐기 때문에 당신에게 고통을 줄 일은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음속에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그
욕구가 여전히 마음 안에 있는 것을 그냥 허락해 준다면 혹 언제 뒤에 가서 그를
죽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방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갖는 한, 즉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한 당신의 몸안에는 투쟁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일은 언제나 해야 할 일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감정을 이성과 양식에 비춰서 제어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리하여 성장의
다음 단계에 올라서면 당신은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그와 협력함으로써, 또 그와 그의 친구들의 협력을 얻음으로써 한결
큰 좋은 결과로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계는 의식적으로
감정, 즉 몸안의 본능적 충동을 자기 뜻대로 휘어잡아 이상에 비춰서 생각해 낸 추리의
힘으로 방향을 돌리기까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너 자신에 진실 하라. 그러면 밤 뒤에는 낮이 있듯이 너는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거짓일 수 없게 되는 일이 계속되리라.'는 말 그대로인 것입니다.
당신 자신 속에 죄악감, 공포, 미움, 노여움 등의 콤플렉스를 가지는 한, 당신
자신에게도, 이웃 사람에게도, 신에게도 성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그러한
것이 우세한 상태에 있으면, 거짓들이 당신이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끔 당신을 밀어
넣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깨끗이 씻어 버리지 않는 한, 자신
속에 투쟁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병, 불행, 혼란, 실패 같은 것이 표현되는 마음의
투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만일 본능의 충동(감정)이 우리들을 고난에 빠지게 하여 무엇인가 여러 가지 시끄럽고
재미없는 불쾌한 사태를 빚어낼 것 같은 형편이면 그 충동을 재교육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정과 이성 사이에 투쟁이 있을 때는 결국은 감정이 이기게 마련입니다. 감정, 즉 본능은
추리력보다도 이전부터 있어 왔던 우리들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므로 그것을
재교육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근대의 문명 사회에 있어서 양심의 투쟁 없이 살려고
한다면 본능적인 감정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포와 노여움은 우리들이 대생명력을 완전하게, 그리고 건전하게 표현하는 데
곧잘 방해가 됩니다. 그것들을 신념과 사랑으로 바꿔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당신이 삶에 열의를 가지고 전진하고 싶다면 그러한 내부의 콤플렉스나, 투쟁이나,
열등감, 충족되지 않는 느낌, 공포, 저항 같은 것을 모두 치워 내는 대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한 커다란 진리를 알고 스스로를 자각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일이나 놀이나 사랑이나 숭고한 생활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일들을 건전하게 실행해 가는 길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치워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도피를 하게 되고 궤변을 짜내고
핑계를 대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상처 위에 눈가림으로 고약을 발라 놓는 일이며
결코 근본적 치유는 안됩니다.
대인관계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고소하고 동업자를
고소하고 심하면 마침내 자기 아내까지 법정에 끌어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혼을 허락 받기도 하고, 혹은 동업자와는 합자 관계가 해제 받겠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는 오히려 골치 아픈 일들만 자꾸 야기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든지
자기가 가는 곳이면 자기 자신을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내부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서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 일은
상대편에서 잘못한 거야. 나의 잘못은 아니야.'하고 언제나 변명을 일삼을 것입니다.
그는 또 모든 구실을 다하여 자기의 체면을 세우려고 애쓸 것입니다.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말썽을 일으키게 타고났단 말이야. 생긴 대로 살아갈 수밖에
내게 어떻게 할 방법은 없는 거야.'라고도 말할 것입니다. 그는 또 곧잘 자기를
동정함으로써 양심에 진통제를 발라 놓겠지만 물론 그것이 근본적인 치료법은
못됩니다.
[표면의 증상]
초조나 싸움, 오해, 불행, 환경, 다른 사람과의 마찰, 술주정, 좌절감 등은 모두
표면에 나타나는 증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험들은 모두 마음속 깊숙이
간직된 잠재의식을 밖으로 비쳐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만, 신경질, 이기심,
거부감, 자기 연민, 의기 소침 등도 바로 잠재의식에 가로놓인 어떤 것의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표면에 나타나는 증상들만 아무리 치료를
한다 해도 별 효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실재 원인을 찾아내
그것을 뿌리째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신과 육체의 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표면에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좋지 않은 것들이 마음을 조정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불행한 체험들을
알아내어 인정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 불행한 체험들을 우리들 내부에서 해방하여
내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앞의 몇 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용서하고 또 이해하면 치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에서 해방되면 만족한 목표를 보게 되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된 관점에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가령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거나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당신이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대생명력의 입장에서 보아도 열등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시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난 존재라고 당신은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들이 알게 된 것과 같이 사실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뒤떨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힘을 다 가진 강력 존재인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무한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존재이지만, 당신은 스스로가 열등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실은 착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대생명력이고 대생명력은 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죄지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엔가에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고, 그 느낌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한 번 열등하다고 믿거나 혹은 죄인이라고 믿게
되면 당신이 하는 무엇이든 모두가 그 생각이 스스로에 대해서 믿는 바대로 착색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결국 그처럼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믿는 그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신념에
따라 당신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진리는, 당신은 대생명력이고 대생명력은 선입니다. 이것이 당신에 대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서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열등하다고 믿을 때는 잘못된 중심점, 잘못된 관점에서 보고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고방식이 진정한 진리로부터 당신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분열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의 분열]
모든 신경성 환자는 인격 분열증입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믿으며 옳지 못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열된 것에서 고장이 생겨나고
그것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믿고 있는 일을 분석하여 진리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 당신 자신을 참다운 관점에서 보게끔 되면 내부의 투쟁도 없어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용서함에 따라서, 그리고 당신이 그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완전한 대생명력의 중심
사상의 둘레에 당신 자신을 재집결함에 따라서, 당신에게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개방되고 바른 방향으로 유효하게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공포 대신에 추리력과
지성에 의해서 통제되어 지금까지처럼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가는 것과는
달리 반듯하게 목표를 향해 앞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공포의 전면에 서서는 누구나 전진하고 또한 건강하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당신은 공포 때문에 쫓기어 들어갈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두 갈래로 찢어 놓는 것입니다. 판단력은 당신을 달성하고 싶다는 욕구
쪽으로 끌고 가고 공포심은 본능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무엇인가 형제에게 반항하는
것을 마음에 가졌거든 바로 그 형제에게 가서 그와 화해하라."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용서해 주고 어떤 일이든지 모두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구하여 기도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미움과 공포의 기도를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노여움을 버리십시오. 만일
누구에고 또는 무엇에게 공포와 노여움을 가졌으면 먼저 마음과 감정을 깨끗이 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당신 자신 속의 위력의 핵심을 발견하십시오.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인 위력은 모두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목표와 이상을 정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은 그것을 향해서
움직일 것입니다. 당신 몸안의 정신 속에 욕구와 그것의 달성 두 가지가 다 있는
것이므로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나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해답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을 욕구할 까닭이 없습니다. 당신의 욕구는
대생명력 그것이 지금부터 당신에게 주거나 혹은 당신이 이제부터 될 어떤 것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약한 느낌이라든가 열등감이라든가 노여움,
미움, 또는 공포 등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다면 당신은 욕구 달성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혼란은 당신의 기도를 중간에서 막아 버립니다.
마음의 평화는 당신이 자기 마음 안의 모든 투쟁을 자기로부터 거두어 버린 때,
즉 신념, 사랑, 용서 등을 확립했을 때에 찾아옵니다. 그것은 대생명력의 본질인
무한한 신성의 불사의 본질과 당신의 개성이 한 덩어리로 되었을 때에 옵니다.
당신이 자기의 부정적인 생각의 방법, 믿음의 방법, 태도의 모든 것을 해방하여
내보내 버리고 긍정적인 좋은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놓았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용서하라]
잠들기 전에 당신의 하루를 뒤돌아보고 낮에 있었던 모든 일을 깨끗이 정리하십시오.
자기자신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해친 무엇이든 모두 용서하십시오. 그러고 나면
당신의 마음은 긴장이 풀리고 몸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하루의 상처들이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잠재의식의 일부를 이루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 하나 찾아서 모두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아직
객관적인 형태를 가지고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동안에 조처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에게 달라붙게 됩니다. 결국 고질적인 부스럼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고질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무슨 처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본 뒤에 처치를 시작하십시오.
당신은 마음속에서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하루 동안의 일들을 모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완전히 깨끗이 했습니다. 그 상처들은 단 하나도 밤새도록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잠을 못 자게 하거나, 신경을 긴장시켜서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없겠지요. 불면증 같은 것이 있다면 그 대부분은 오늘 받은 상처와 내일의 걱정을
지닌 채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날 하루를 용서한 뒤에 '나의 하루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내일을 준비하자.'라고
마음속으로 말하십시오. 내일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건강하고 열의를 갖고 일어나는
당신을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당신이 실행하려고 생각하는 이상안을 짜십시오.
계획한 것을 하루종일 열심히, 자신감을 가지고, 쉽게, 훌륭하게 일하고 있는 자신을
마음속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십시오.
"나는 오늘을 끝냈다. 내일의 계획도 세웠다. 자! 잠들자. 평화롭게 쉬고 즐거움
속에서 일어나자. 나는 언제나 풍요와 건강과 자유 속에서 살고 있다."
[16 당신 속에 있는 창조의 힘]
자기 속에서 권위의 포인트를 발견한 사람은 사고나 감정이나 행동에 깨달음을 가진
높은 포인트로부터 지휘하는 사람입니다. 즉, 그는 신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세계인 대생명력의 통솔자로서, 운명의 결정자로서, 자기라는 배의 선장으로서
그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이야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것, 장래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이론이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지금은 아직 우리들이 만져 볼 수도 없는 것이지만 무엇인가 형체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또는 부분으로 존재하면서 일류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의 기계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1장에는 천지 창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누군가 영감 있는 천재로서 인간의 창조력에 대한 진리를 통찰한 사람이 쓴 것일
것입니다. 땅은 형체가 없고 빈 동굴이었는데, 신의 영이 물위를 움직이고 있었다고
씌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신의 창조하는 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창조할 수 있다.]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지각의 중심 포인트에서 당신은 혼입니다. 창조하는
대생명력 바로 그것이니까 당신에게 창조력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생명력의
지각 있는 포인트로서 대생명력의 법, 즉 정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포인트에
있어서는 당신은 세상의 신입니다. 대생명력의 영인 당신은 물위를 움직여서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발견한 것처럼 당신 스스로의 '나는 있다'는 대생명력이나 신의 '나는
있다.'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는 형체가 없고 빈 동굴로서, 무엇인가
손이 가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당신의 내부나 당신의 주위에는 지성, 활력, 아름다움, 즐거움, 사랑, 평화, 위력
등의 신이 갖는 소질은 무엇이나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형체가
없고 당신의 채택과 결심과 상상력을 가지고 그 소질에 형체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으로서, 형체가 없고 텅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형체를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림으로써,
혹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의
채택이나 마음의 그림, 그리고 행동에 의해서 지금까지 형체가 없었던 것을 객관적인
체험의 세계에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체인 미, 즉 아름다움은 누구를 위해서도
실재합니다. 당신의 관심을 그것에 모으고 상상력에서 형체를 주고 신념과 사랑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그리고 아름다움 체험으로써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가령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환경, 아름다운 인생 같은 것으로.
이렇게 설명을 해봅시다. 연필을 한 자루 가지고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보십시오,
물론 처음 그려보는 동그라미는 완전한 동그라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려보십시오. 먼저 것보다 조금 잘 그려졌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려보십시오.
그리는 동안 거의 완전에 가까운 동그라미가 될 것입니다. 동그라미를 한결 깊이
생각하며 다시 연습하면 눈앞에 나타나는 체험은 한층 완전한 것이 됩니다. 신념과
실증 없는 연습에 따라 완전을 향해서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동그라미라는
것이 어딘가에 실재하고 있을까요? 있습니다. 분명히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속 이미지는 완전한 동그라미지만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에 신념을 두고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신적으로 그
생각에 파고들어서 싫증을 모르는 연습을 거듭하면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완전에 비슷한 것을 체험하려고 생각한다면 마음에 완전한
동그라미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할 때 삼각형을 마음속에 갖거나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동그라미를 그리는 데 아마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반드시 동그라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동그라미를 바란다면 사각형이나
삼각형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완전한 동그라미를 생각하고 그 동그라미를 몸안에 부어
넣어서 욕구에 형체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일에 관심을 모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감정을 팔과 손끝에 흘려 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이상을 조용히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실체입니다. 종이 위에 쓰는 것은
마음의 실체, 또는 이상을 가진 당신의 체험입니다. 당신의 사고는 그것에 형체를
주고 대생명력의 자동적인 행동을 통해서 현실의 위험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채택, 결심, 관조, 묵상, 신념, 사랑, 지속 같은 것을 통해서 당신은 체험의 세계에
끌려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동그라미를 경험할 가능성은 있고 또한
지금까지도 언제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지난날에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의
지난날의 사상을 지금 당장 바꿀 수가 있으며 당신의 행동에 따라서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날에는 언제나 삼각형과 사각형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동그라미를 체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그라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생각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그렇게 하면 곧 욕구의
결과를 얼마간 체험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완전한 동그라미의 실체를 우리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과 간이 이상적이
사업이나 장사도 우리들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부실한
사업이나 쇠퇴해 가는 장사, 부당한 경쟁 등을 생각하게 된다면 당신이 지휘하는
창조적 정신은 완전한 사업을 당신에게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사업을
신념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묵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완전한 사업의 가능성은 이미
마음속에 실재하고 있습니다. 체험의 세계에 그것을 가져오는 데는 정신의 활동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 이상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결심해서 마음속의 안내가 이끄는데 따라서 행동할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하고도 완전한 대인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완전한 대인관계도
만일 부조화, 고생, 혼란, 논쟁, 싸움 같은 것을 묵상하게 되면 체험의 세계는 결코
나타나지 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직 조화된 완전한 대인관계, 협력, 성공적인
체험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채택과 신념에 따라서 대생명력을 지휘하십시오. 사랑과 신념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을 체험하는 세계에 당신을 인도하는 것이 대생명력의 성질입니다. 이상적인 완전한
육체라는 것도 실재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체험해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병, 허약함, 부조정 같은 것을 묵상하게 되면 체험의 세계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건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이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건강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그 생각을
기르십시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낡은 사고와 이미지를 버리고 하고싶은 것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바른 행동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업, 주변의 일들, 대인관계, 육체 등에서 완전히 바른 행동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좋은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믿어집니다. 당신 자신을 그것에
빠져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조용히 생각하고 사고를 감정이나 육체를 통해서
행동으로 흘러내리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바라는 성과는
당신의 체험의 세계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완전이라고 하는 것의 이상은 이미 실재하고
있으며 누군가가 그것에 손을 대서 형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정신을 통해서 작용하고 당신의 채택과 신념에 따라서 무엇이고
창조하여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의 일부분이다]
무한한 대생명력이 화신하여 당신이 되고 그것이 갖는 창조의 위력이 당신에게도
나누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의 체험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대생명력의 긴요한 도구도 가지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놀랄 만한 위력을 당신은
많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것을 당신은 오늘날까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모르고서 이상의 도구 등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여, 바라고 싶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일을 해 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언제든지 신이 주신 그 도구는 바라고 있는 것을 위해서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실패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성공하고 싶다고 선택할 때에는 언제든지 성공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순간부터 전과는 다른 새로운 체험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계속하면 체험은 시시각각으로 좋은 것으로 바뀌어 갑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의
걸음을 계속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그 힘은 무슨 힘입니까? 그것은 대자연의 힘이며 신의 창조의
위력입니다. 신은 만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은 만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은 모든
위력을 가집니다. 신은 전지 전능합니다. 모든 지혜를 가졌습니다. 신은 전지
전능합니다. 모든 지혜를 가졌습니다. 신은 편재입니다. 어떤 곳에도 있습니다. 그
위력이나 전지함을 당신이 사고하는 포인트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의
정신과 신의 소재는 곧 바로 당신 자신의 그 정신과 당신이 있는 곳입니다. 당신이
생각할 때 당신을 위해서 완전한 동그라미를 창조하는 그 힘은 바로 대생명력의 무한한
힘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힘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 힘을 적당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그것은 어떤
희망의 체험이라도 당신의 생애에 가져올 수가 있고 또 반드시 가져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안에 있는 지성 있는 위력은 수목을 성장시키고 머리의 털을 자라게
하고 뜰에 풀을 나게 하는 힘과 같은 힘입니다. 그 힘은 육체를 자라게 하고 부러진
뼈를 다시 이어주고 손상된 심장을 치료해 줍니다. 그 힘은 바로 대자연, 즉
대생명력의 신인 것입니다.
[17 정신치료의 준비]
당신 자신, 친구들, 신, 법칙, 대생명력의 영속성 등에 대한 당신의 신념은 행동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줍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알고 모르고는 불구하고 당신이
받는 모든 일에도 영향을 줍니다. 당신의 생활 전반의 유형, 당신이 느끼고 말하는
일의 전부, 육체의 건강에서 가계나 대인관계에 따르는 모든 체험에 이르기까지
앞에서 말한 중요한 일들에 대한 당신의 신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냐에 따라서 그들은
당신에게 응답해 옵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마음의 자세에 따라 반응합니다. 몸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대생명력에 대한 당신의 일반적 태도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몸은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분 아니라 모든 생물, 동물, 그리고 식물까지도
그것들에 대해서 당신이 어떠한 신념을 갖느냐에 따라서 반응을 합니다. 가족, 친구,
동료, 단골손님, 나아가서는 거리에서 스쳐 가는 아무 안면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당신의 태도나 생각에 반응을 하고, 당신의 마음속에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신앙이나 신념에 반응해 옵니다.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태도를 바꾸면 당신의 모든 체험도 바뀌게 됩니다.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면, 만일 당신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일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신념이나, 주의나, 자세를 바꾸는 것이 좋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도 올바른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상상력은 건설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결과를 얻을 목적에서 의식적으로 정신을 바꾸는 일을 정신치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치료를 하려면 육체, 정신 그 어느 쪽을 치료하건 얼마
정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정신치료에서의 이 준비를 우리들은 흔히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묵상이란 무엇인가]
묵상이란 마음을 어떤 조용한 상태에서 오래 두는 일입니다. 그것은 정신치료의
근본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당신은 자기 마음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신념,
즉 확신에 도달합니다. 묵상을 통해서 당신 자신, 세상의 모든 사람들, 신, 정신의
창조력, 또는 세계 등에 대해서 적극적인 신념의 자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고에 대해서도 손질하여 노여움, 저항, 근심, 번민, 미움 등을 없애 버리는
일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사랑, 마음속의 평화, 자신감 및 대생명력의
즉응성에 대해서 굳은 신뢰를 확립하게 됩니다.
묵상은 우리들의 감정을 완전히 정화하고 방해물을 깨끗이 치워 주기 때문에 세상이
좋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사태에서 있어서 좋은 일이 존재하고 나날이 좋은 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모두가 선인 신의 무한한
대생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이 당신 자신의
실체일 뿐 아니라 당신을 둘러싼 대생명력의 실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과 정신치료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묵상은 정신치료의 밑바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신치료는 창조하는
힘을 특수한 행동에 집중시켜 바라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묵상의 중요성]
만일 당신이 '나는 죄인이다. 악한 인간이다.'라고 믿고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좋은
체험을 갖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매우 얻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나는 죄가 있다고 느끼면 불행한 체험이 우리들에게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저절로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불행한 체험에 부딪칠 죗값이 있다고 스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념을 가지고는 바라는 좋은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신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용한 묵상에 들어가서 동기나 당신 자신을 분석함으로써 그 신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진정 무엇일까요? 묵상을 통하면 자기 자신이 인간의 형태를
가진 한 한 사람의 신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용서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또 지난날의 체험은 사실상 악한 것도, 흉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습니다. 지난날의
그러한 체험은 당신이 지금부터 좋은 일을 많이 끌어낼 수 있는 좋은 교훈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생명력에 대해서, 대생명력의 즉응성에 대해서, 또 우리들 자신의 위력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하다고 믿는다면,
만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반대하고 있어서 자기를 따돌린다는 느낌이 있다면, 만일
세계가 근본적으로 당신에게 반항하고 있다고 믿어진다면 그대야말로 좋은 일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기 전에 그러한 부정적인 신념을 마음에서 깨끗이 청소해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여 정상적인 정신으로 해 놓은 뒤라야만 정신치료, 즉
과학적 기도에 효력이 나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에서 부정적인 사고와 신념과 태도와
동기 등을 깨끗이 청소해 버리지 않으며 설혹 무의식적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해서 기도하는 꼴이 되기 쉽습니다. 대생명력은 무엇이나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체험을 가질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지 않는 동안은 대생명력이
그러한 좋은 체험을 가져다준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병 때문에 그러한 좋은 체험을
가져다준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병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 정신력을 사용하는 등의 일은 이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신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는다던가 아니면 신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믿기도 하고 공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념의 자세, 즉 공포, 죄악감, 열등감 같은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묵상은 긴장감을 푸는 일, 이해하는 일, 용서하는 일,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묵상 그 자체는 창조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가 이루어질 정신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신의 자세를 통솔하는 정도에 따라 정신치료가 됩니다. 정신을
바꿀 수 있고 또한 바꾼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효과 있는 정신
치료법을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당신의 의식 속에 깊이 넣어 두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바꾸고 바꾼 그대로 간직하는 일은 마음이 맑아서 평화롭고 긴장도 긴박감도
없다는 상태가 아니면 실제로 불가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자유와 신뢰와 평화가 비결입니다.
묵상을 함으로써 미움, 근심, 번민, 분노를 깨끗이 씻고, 그것을 사랑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공포는 적극적인 신념을 막는 것입니다. 묵상을 함으로써 당신은 자각적인
채택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선택하여 결정한다는 이 힘은 아마 신이
당신에게 준 최대의 위력일 겁니다. 당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믿을 가를
선택하는 힘, 무엇을 사랑할 가를 선택하는 힘, 상상력을 향해서 무슨 계획을 보낼 가를
선택하는 힘, 이것은 당신 자신의 천국 또는 지옥을 만드는 힘입니다.
[18 고치는 힘]
우리들은 지금 육체의 상태나 인간 관계 등을 개선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료하는 힘, 고치는 힘은 무엇인가?'에 의문을 가지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생각할 때 신념의 자세를 바꾸고
상상력의 흐름을 바꿀 때, 무엇인가의 힘을 유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은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뿐인 고치는 힘]
어떤 의사도, 심리학자도, 정신치료가도, 혹은 정신과학 시술자도 아직까지 환자를
고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직하고 자존심 있는 의사라면 '내가 환자의 병을
고쳤다.'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상처를 깨끗하게 해줄 뿐입니다. 그러나
신은 환자를 고칩니다. 정직한 심리학자나 정신치료가라면 누구라도 누구를 고쳤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대생명력이 정상적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길에 가로놓인
물건을 치워 버려서 환자의 몸안을 건강이라는 형태로 흐를 수 있도록 대생명력을
자극한 것뿐이므로 그 자신이 치료한 것이라고는 결코 입밖에 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고치는 힘이 있을 뿐입니다. 그 힘은 대자연, 대생명력, 신의 섭리,
무한의 지성, 사랑 등,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상관이 없으나 오직 힘이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 대생명력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해물을 치워 버리고 대생명력을 개방하여 전진시키며 그것에
방향을 주고 자극해서 행동하게 할뿐입니다. 대생명력이 완전한 행동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길을 막은 장해물을 치우는 데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또
대생명력의 위력을 자극하는 데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생명력의 위력만이
정신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것입니다. 그 힘은 모든 것의 속에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의 속에도 있습니다. 만일 적당하게 방향을 주면 당신의 몸과 모든 병상을 나타내는
당신의 주변의 모든 일들을 그 힘은 고칠 수가 있고 실제로 고쳐 줍니다. 당신이 어떠한
인종이거나 어떤 종교에 소속하고 있거나 그 위력은 당신을 위해서 활동합니다. 종파와
신심에 상관없이 그것은 활동합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당신의 베인 손가락 상처를
대자연이 고쳐 줍니다.
대생명력의 내부적인 창조의 위력을 바울은 '예수'라고 부르고,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했으며, 심리학자는 '잠재의식'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것이 당신의
상처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무한하고 지성이 있고 위력과 의도를 가진 대생명력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본질이며, 또 우리들이 그 대생명력을 의식하고 사용하면 당장에
응답해 준다는 사고방식에 예수는 비상한 인상을 받은 것같이 보입니다. 그는 그
대생명력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몸안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대생명력은 당신의 아버지이며 당신의 기원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당신을 창조했으므로 그것은 당신을 돕습니다.
당신의 요구에 응답합니다. 대생명력에는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대생명력을 특히 당신의 필요를 위해서 사용하려고 생각한다며 하나의 무한한 위력과
지성으로써 그의 실재를 인식하고, 또 당신이 신념과 신앙과 사랑에 따라 응답해 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그만 방에 들어가거나 조용히 문을 닫고 바깥 세계의
잡음을 몰아내며 마음 안에 잠재한 지성의 위력을 인정하여 그것을 활동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당신의 요구에 응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예수는 가르쳤습니다. 기도할 때는
하고자 하는 일의 결과를 이미 받은 것으로 상상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한의 대생명력인 아버지는 당신의 자각에 의거한 채택과, 자각에 의한 요구에 응답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알아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근대의 정신 과학자가 정신치료의 조처를 할 때 행하는 일입니다. 겨우
하나의 같은 대생명력이 그 도구라고 할까, 대리라고 할까 하는 정신을 통어 해서 모든
것, 즉 나무, 풀, 바람, 땅속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살아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들이 지성과 위력이 있는 대생명력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들
주위의 어디서나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속에서는 그 대생명력은
개인으로서,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자각에 스스로 눈뜬 것입니다. 지성이 있는
대생명력은 동물, 광물 및 식물계에도 본능으로서, 경향의 법칙으로서, 성장의
법칙으로서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자연계의 이 대생명력은 그것
자신에 눈뜬 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대생명력의 자각 있는 포인트로써,
특히 자기 자신의 좋은 일을 위해서, 또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대생명력의 무한한 위력이
있는 본질 속에서 무엇인가를 골라내서, 결정하고 방향을 정하는 일을 해도 좋은
것입니다. 결정과 방향을 정하는 이 정신의 활동이 정신적 치료, 또는 과학적 기도라고
불려집니다.
[선택하는 힘은 누구나 타고나 것이다]
대생명력은 오랜 시대에 걸쳐서 발달하고 진화해서 오늘날처럼 자기를 자각하는
개개인의 활동 무대에 나타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에 눈을 뜬다는 것은, 자각하여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택하는 힘은 각 개인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자각적으로 선택하고 또한 방향을 정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오직 하나인 힘, 즉 신의 위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힘은
무한입니다. 신의 힘은 신의 지혜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지혜일 뿐
아니라 당신 속에 있는 지성입니다. 바로 당신의 지성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의
자세를 통해서 상상력을 자연계의 힘, 또는 신의 힘에 방향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 일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치료의 힘, 성장의 힘, 진화의 힘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의식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 존재로서
당신, 즉 대생명력의 자각하는 포인트가 당신을 위해서 대생명력에 무엇을 시킬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는 힘도 인간에게 주어져서 그들의 믿는 바에 따라 대생명력은 그들을 위해서
활동합니다. 사람이 자유 의사를 가지는 일과 그가 믿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눈부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 또는 신념의 자세를 자각하여 선택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어떻게 가능한가를 볼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동물이나 식물의
수준에서 생활하고 대생명력의 여러 가지 위력에 자각하여 지휘를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동물이나 식물의 수준에서 생활하고 대생명력의
여러 가지 위력에 자각하여 지휘를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패, 무력감, 불행,
실망 등을 믿으며 그러한 믿음 때문에 인류로서의 평범한 체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력(마음속의 기술 부분)에서 당신이 만들 이미지를 어느 것으로
할까 선택하느냐 하는 간단한 문제에 달려 있으며 그로부터 그의 새로운 이미지를
계속적으로 연달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계속 하게 되면 당신을
위해서 대생명력은 객관적 체험 속에 무엇이든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한편 당신이
자각을 하여 마음을 지휘하지 않는다면 대생명력은 당신의 잠재의식 속의 사고에 따라서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하는 일,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계와 고난과
실망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러한 상태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한 부정적인 신념이 아니라 긍정적인 신념을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 속에 깊숙이 있는, 지휘하는 포인트에 눈을 뜸으로써 당신 자신에게도
또 당신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 기도, 또는 정신치료 조처란 무엇인가?]
심적 또는 영적 조처란 자기가 체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사고와 생각의
형태나 계획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일입니다. 사고 또는 생각의 형태는 정신의 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고와 마음의 그림을 만드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치료의 조처는 다만 사고를 바꿔 놓는 것으로써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버리고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기도 또는 정신치료의 조처는 어느 결과를 얻기 위해서 마음의 자세를 자각해서
선택하고, 계속 그 마음의 그 상태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정신적 또는 영적 치료 조처는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하는 일정한 정신 행동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수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마음을 특수한 상태로 이끄는 일입니다.
정신의 조처는 당신의 사고를 확대하는 일입니다. 가령 백 달러라는 당신의 생각을
확대해서 십만 달러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액수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십만 달러가
실재할 뿐 아니라 백만 달러도 실재합니다. 당신은 얼마 정도의 액수를 믿으십니까?
얼마 정도면 납득이 가겠습니까? 당신을 위해서 사실상 얼마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완전한 육체나 완전한 사업도 실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신념에 따라서, 당신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정신적
또는 영적 조처의 일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신변의 모든 일을 통어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 평범한
체험보다 훨씬 뛰어난 체험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약한 자나 실패자나
고난에 짓눌린 인간이 될 이유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잭 라이트라는 가명을 가진 사람이 동창생에게 이끌려서 내게 찾아왔습니다.
잭을 위해서 무엇인가 치료 조처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잭은 정신도, 혼도 병이
들었을 뿐 아니라 몸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공연히 시간을 허비해서 무슨 치료를 해보았자 쓸데없는 노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알코올이 그를 아주 정복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알코올의 노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책상 위에 세워 놓고 그에게 그 책을 위스키 병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말을 걸어 보라고 시켰습니다. 그 위스키 병에도 대고 '나는 너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할 수 있지만 너는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하라고 권했습니다. 나의
강력한 지시에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라고 또 권했습니다.
"나는 너의 노예가 아니다. 나는 너를 어떻게 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룰 수가
있다. 너를 하수구에 부어 버릴 수도 있고, 만일 내가 마시기로 작정한다면 너를 마셔
버릴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할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어떻게 라도 너를 처리할 수
있다. 내가 명령권을 갖는 것이지 네가 명령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나는 한 시간 이상이나 그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침내 자기가
생각하려고 선택한 일이면 생각할 수 있고 느껴 보겠다고 선택한 일이면 느낄 수 있으며,
행동하려고 선택한 일이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채택의
위력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신념에 도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존귀하다고 인정한 그는 알코올이나 또는 다른 무엇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릇된 자기의 믿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고
선택하기만 하면 그것은 자기 것이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와 단 두 차례 만나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는 나와 헤어진 뒤에 직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알코올이 그를 지배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2주쯤 지나자
그는 더 좋은 일을 얻었고 6개월이 지나서는 상당히 큰 공장의 공장 감독이 되었습니다
가족과 다시 살게 되었고 자존심 있는 훌륭한 가장이 되어 동료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채택의, 그리고 결심의 그 포인트, 그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그 포인트는 당신의
몸안에 있는 혼의 포인트입니다. 당신 자신의 심오한 중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그 깊은 혼의 중심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생 동안에 건전한 지휘를
해 주는 대생명력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인가 알코올의 노예였던 또 한사람을 나는 바로 요 며칠 전에 만났습니다.
4년 전, 나는 그에게 그의 몸안에 있는 채택과 결심의 중심을 찾아내게 하고 그것을
활동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존, 당신은 돈도 많이 벌고 건강도 몹시 좋아 보이는군.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나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내가 보스라고 결심한 뒤부터는 만사가 잘 되어 갑니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자유의 열쇠는 바로 당신의 속에 채택하고 결심하는 힘
속에 있습니다.
[19 적극적 신념에의 단계]
깊은 인상을 받기 위해서 우리들은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해보기
합시다. 그것은 근대의 정신과학의 치료가나 근대 심리학자가 말하는 교훈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고 네가 바라는 것을 기도할 때는 이미 그것을 얻었다고 믿어라. 그러면
얻어지느니라."
또 기도할 때는 그 기도에 긍정적인 응답을 바란다면 미리 용서라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믿거나 하는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예수가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묵상에 의해서 지난날의 잘못을 풀어 버려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은 열등한
존재이고 대생명력으로부터 거부당한 자라고 믿는 일은 이제 씻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는 근본적으로 죄가 있는 사람이며 자기 속에는 아무 것도 좋은 것이 없다고 하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무한한 대생명력이 당신의 생명력이며, 대생명력의 재능 모두가 자신의 몸안에
포함된다는 신념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나의 상상력을 바르게 사용하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현실에서 정말로 가진다고 믿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대생명력은 나에게 응답해 준다는 이치는 나도 알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어떻게 가졌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 부정적인 사색가였다면 적극적인 신념의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도 신속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느 종류의
정신적 단계를 한 걸음 한 걸음 밟고 올라감으로써 비로소 적극적 신념의 수준까지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무엇인가를 요구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건강, 행복, 번영을 희망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과 행복과 번영이 그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의 것인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추상적
관념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먹을 것을 원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는 식료품 점에 가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배가 고픕니다." 어떤
종류의 식료품이 필요하며 어느 정도 필요한가를 분명하게 주인에게 말해서 요구를
만족시킨다는데 필요한 음식물을 정확히 주문합니다.
욕구는 실현의 기초가 되는 주춧돌이지만, 우리들의 욕구는 무엇인가 특정한 것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들의 조처, 또는 기도는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욕구를 분명히 드러내는 일에 너무나 겁을 냅니다. 올바르게 선택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그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과를 얻고
싶다면 책임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실하고 정직한 의도로, 또한 높은 목표와
어울리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저절로 올바른 선택에 인도되는 것입니다. 최대로 좋은
것을 욕구하면 언제나 그 겨냥이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 뒤에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응답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라는 것을 이미 가졌다는 신념에 이르기 위한 네 개의 단계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적어 봅니다.
1. 당신의 욕구에 대한 응답이 어딘가에 실재한다고 믿으십시오.
2.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으십시오.
3.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4. 그것을 가질 자격이 믿으십시오.
당신은 진정 무엇을 실현하고 싶은가, 어째서 그것이 당신을 위해서 실재한다고
믿는가, 어째서 당신은 그것을 가질 자격 내지 권리가 있는 것일까 등을 종이에 적어서,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즐거이 힘쓰겠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창조하는
법칙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셈이 되므로 당신의 욕구는 그것에 따라 실현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 가를 쓴 것과 응답이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을 쓴 것을 하루에 두
번이나 세 번쯤 되풀이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이미 가졌다는 확신이 들게
됩니다. 신념을 통해서 실현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종이에 써 가지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나의
신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 종이쪽을 보고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며
'물론 나는 이것들을 가질 수가 있다. 나는 그것을 가진다. 그리고 세상에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단연코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종이쪽에 적음으로써 그의 생각이 자기에게도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실현의
가능성을 확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신념에 행동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이 단계들을 분명히 보라]
당신이 바라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확신, 또는 신념에 도달하는 제 1단계에서 자기
자신이 이렇게 물어 보는 일입니다. "응답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실재하고 있는가?
실현은 가능한가? 그것은 대생명력에 포함되어 있는가? 물론 지금 나는 그것을
체험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일 속에서 구하는 것, 특히 그 일, 또는 특히 저 수업, 그 건강 상태, 그 우정, 또는
사랑은 어딘가에 실재하고 있는 것인가?"
욕구가 있음과 동시에 응답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생명력 속의 것은 무슨
일이라도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어떠한 것으로도 되어집니다. 응답의 것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매우
재치 있는 말을 했습니다.
"욕구란 무엇인가가 자신을 소유하기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다." "그것은 실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음에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봅시다. "내가 욕구 하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먼저, 좋은 집이라는 것이 사물의 보편적 기획 속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으나 그것이 실지로 나를 위한 가능성으로서 실재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한 것이 인생에서 나의 체험 속에 포함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한, 다음의 단계로 나아가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인종이나 가문이나 초기에 받은 교육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욕구 하는 것은 실재한도고 믿더라도,
그것들로서는 그것이 자기들을 위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일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자기는 대생명력에 거부되었다는 느낌을 가지므로 좋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체험이라도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체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조금만 더 검토를 해보면 사실은 열등하다든지 우수하다든지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비록 떡잎의 형태로 있을지라도
신이다.'라든가. '그들은 모두 신이며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가문, 인종, 초기의 교육 등으로 제한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날의 체험은
우리들의 참된 개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안에 신성을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입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두각을 나타낸 많은 사람들도 금수저를
입에 물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조그마한 시골
마을의 주민이었습니다. 과학자 카버는 흑인이었고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무엇이나 다
인류 전체의 것입니다. 우주의 좋은 것은 피부의 색이나 민족이나 어린 때의 체험 같은
것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골고루 주어져 있습니다. 링컨은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났으며, 그리고 다윗은 양치기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나 어느 일정한 요구를
했기 때문에 대생명력은 그것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대생명력은 똑같은 일을
해줍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하는 방법을 수정하여 '이것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가?'의
물음에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하게 될 때까지 노력합시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가질
권리 내지 자격이 있다고 믿는가?" 이러한 대목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들의 욕구는
실재한다는 일,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일 등에 동의된 것 같으나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직 믿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에게 권리가 없다고
믿으면, 대생명력의 법칙은 정직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들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질 권리가 없는 것을 바른 법칙이 가져다준다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해서 좀 자세히 검토해 봅시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우리들을 위해서 좋은 것을 실현시킬 권리는
분명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좋고 그것에 관계 있는 사람 모두에게도 좋은 것을 가질
권리는 분명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이것은 전반적으로 좋은 것일까?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어떤 종류의 직업, 어떤 같은 것에는 권리가 있으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일을
빼앗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신을 쓰고 싶지는 않겠지요. 우리들 각자에게 바른 직업이
실재하고 정당한 보수가 존재합니다. 바른 집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난날의 과실
때문에 무엇인가 특수한 좋은 일에는 권리가 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은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 좋은 것을 내주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죄와 과실을 그만두고 좋은
일을 하면 지난날의 잘못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은 상식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악을 떠나서 착한 일을 하라.'하는 말을 우리들은 듣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느 상거래를 하거나 또는 무엇인가 재산을 팔려고 할 때 '이 거래를 하는 것은 바른
일인가?'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바라는 일이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 모두에게 바르다고 믿지 않는 한, 우주 정신이 우리들을 위해서 움직여 주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바른
행동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을 때 우리들은 좋은 일을 체험 속에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도 좋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만일 우리들이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몸안에 있는 지도 부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바라는 좋은 것과 적당한 접촉을 하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은 올바른 행동에 인도되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서
대생명력이 우리들이 바라는 금액의 돈을 제조하여서 무릎 위에 떨어뜨려 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생각이 바르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바른 정신이 우리들에게 일깨워 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특수하게 좋은 것을 가질 권리가 우리들에게 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해야 할
것이라고 아는 모든 일을 하고 우리의 체험 안에 바라는 좋은 것을 가져오려 한다면
그것은 당장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즐기고 있는 특수한
좋은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 올 일은
없습니다. 여기는 풍부한 세계입니다. 우리들 각자를 위해서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욕구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좋은 것은 실재하고
있으며 또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또, 대생명력과 그 법칙은 완전무결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우리들의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직하고 지성 있는 우주의 힘이
우리들이 가질 권리가 있는 그러한 것을 건네주지 않거나 건네줄 수 없다거나 하는 일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권리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제
우리들의 것입니다. 적극적 신념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한 네 가지 단계가 이것으로
설명이 다 되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해도 좋다면 나의 생애에 가장
위대한 순간의 하나는 이러한 때입니다. 즉, 무엇인가 하나의 좋은 것을 가질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내가 알면 그 좋은 것은 반드시 나에게 오거나 내가 그것이 있는 데로
인도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대생명력의 완전 무결성을 믿을 수가 없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입니다. 우리들이 욕구 하는 그것들을 실현하는 것은 무슨
기적을 나타내려고 시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마술의 냄새는 조금도 없습니다.
정신의 법칙은 물리의 법칙처럼 명확합니다. 사실 문제로서 대생명력이 활동하는 것은
법칙 그대로입니다. 모든 법칙은 초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이지만 절대적으로 신뢰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신뢰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지만 그것이 하는 일은 우리들에게도
보입니다. 창조의 법칙은 신념에 의해서 방향이 정해집니다. 대생명력에 대한 신념과
우리들의 신념의 사용법에 따라서 대생명력은 응답을 해줍니다.
[20 정신적 치료의 기술]
정신적 조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그릇된 사고를 바른 사고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 자기 마음의 자세를 자각하고 선택하며 계속 그 마음의
상태를 간직하는 일입니다. 어떤 특수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마음을 특수한 상태로 놓는
일입니다. 즉, 정신적 조처란 자기의 사고를 확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일 백
달러의 생각을 일 십만 달러로 확대하는 일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그것에 대한 신념과 태도에 따라서 응답이 오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과학적 기도, 혹은 정신적 조처는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정신을 조처할
때는 마치 단골 의사나 치과 의사, 변호사 등을 방문하거나 혹은 아내 또는 남편을 부를
때와 같이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마음으로 정신, 즉 창조하는 우주의 본질에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것의 창고를 다루는 것이므로 어느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 요구할 때는 신중하게 의식해서 요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창조의 작용에도 일정한 순서가 필요합니다. 정신과학은 물론 과학적이 아니면
안됩니다. 당신의 조처가 성공하려면 마음의 자세를 바꿀 수 있고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뿐인 숭고한 힘'인 창조하는 정신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특정한 성과를 얻을
수 있게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랄 만한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그 힘에
신념을 두고 또 그것을 향해서 나아갈 권리와 재능이 당신에게 있다고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신은 마치 중력처럼 그 쓰여지는 곳에서 개별화되고 있습니다. 또는 수학의
원리처럼 보편적이어서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사물의 형체는 유동적입니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 사이에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형체, 시간, 공간은 의식 안에 있는 심적인 구조물입니다. 또 우리들의 체험은
모두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은 바깥의 저기에 체험을 갖는 것이 아니고, 내부의 여기에 체험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밖의 저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은 외부의 저기에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은 정신 속의 체험인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그것을
객관화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과학은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철학은 그것을
긍정합니다. 신비주의자는 그것을 오랜 세월을 통해서 알아 왔습니다.
[정신은 창조적이므로 당신의 정신 또한 창조적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나의 인격으로 화한 대생명력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창조적 정신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정신의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생명력이 그 자신에 눈을 뜨고 창조하는 하나의 포인트입니다. 그 '나'는
대생명력, 즉 신이 개성화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위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위대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발견할 때 위대한 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 안에 산다면 나의 말이 너희 안에
살리라."
이 말을 바꿔 말한다면 '당신이 만일 당신 자신이 우주의 위력과 지혜와 더불어
하나인 것을 아는 자각을 가졌다면, 당신이 정신을 사용하는 재능을 가진 것을 아는
자각을 가졌다면, 그때는 바라는 일을 갖겠다고 마음먹어라. 그것은 당신에게
주어지리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그것을 실증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당신 자신의
체험 속에서 그러한 일을 목격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께서는 위대한 예외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실례였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창조의 본질을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정신은 기계, 당신은 기사]
'나'는 대정신을 사용합니다. 정신은 기계이고 '나'는 기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나'는 위대한 혼이 선택을 하고, 요구를 하고, 그리고 창조하는 정신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신적 조처를 할 때 당신 자신이 무슨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는 것은 안에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정신의 창조하는 법칙, 즉
잠재의식이 당신에게 봉사하여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당신에게
응답합니다. 당신은 의사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사물을 조작해 주는 것 같은 무엇인가의 실체가 바깥 세계에 있다는 등의
생각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은 다만 창조의 법칙을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응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가진 본질입니다.
당신의 잠재의식은 당신의 의식이 결정을 하면 그것에 따라 갑니다. 그것은 가령 이런
일과도 같습니다. 당신의 정원에 싫은 잡초가 있으면 뽑아 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갖다
바꿔 심는 조처를 취합니다. 당신이 원인을 바꾸기 전까지는 잡초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잡초는 인간이 가진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정원이 싫은 물건은 파내 버리고 언제든지 당신이 선택하는 때에 당신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을 바꿔 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원질에는 그것이 잡초든 감자든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잡초가 나면 잡초가 자라게 해주고 감자를 갖다 심으면 감자를
자라게 해줍니다. 당신의 정원에 감자를 심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심을 수가 있습니다. 정원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습니다. 성장의 법칙에도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응답할 뿐입니다. 당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체험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당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체험을 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객관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이나 부조화나 결핍의 체험을 마치 잡초가 나는 대로 내버려두는
사람처럼 거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또 태도를 바꾸어 '이러한 상태로 계속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 해보려고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방향을 지시하는 심오한 포인트는 '혼' 또는
'나'입니다. 그것이 출발점으로서 당신 자신에 눈뜨고 있는 장소입니다.
혼이란 그 자신을 아는 힘이며 선택하는 일을 하는 힘입니다. 당신의 소재 중심에서는
당신은 사물이 어떻게 있어야 할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조용히
생각할 때 당신은 창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대생명력에게 계획, 즉 형을 주는
것입니다. 예의 '나는 있다.'는 내가 조용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림을 바꿉니다.
당신은 사물의 모습이란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당신은
천지 창조의 법칙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조물주입니다.
신이 하나의 개인으로 화한 존재인 당신은 자기가 그렇다고 믿는 범위 안에서만
체험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다른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것같이
느껴지는 만큼 당신은 신입니다. 당신의 개성에 대해서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도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낳은 독생자'인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요구할 때에는 대생력이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욕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통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당신 속의 추리가 발달한 것은 대생명력의
욕구를 번역하여, 그것을 높은 수준에 끌어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은 정신적 조처를 할 때 분명하고 또한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각이
맑지 않으면 창조하는 정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조처는 당신의 의식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업을 조처할 때에도 당신이
생각하는 바의 포인트에서 조처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처할
때에도 확실히 당신이 생각하는 곳에서 조처하는 것입니다. 저쪽의 그곳, 또는 바깥의
저곳의 어느 곳이나, 혹은 누군가 다른 사업이 있는 곳 같은 데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곳, 곧 의식 안의 당신이 포인트 이외의 어떤 곳에서도 그것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신적 조처]
정신적 조처란 최면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을 내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한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고를 통해서, 당신이 의식한 사고의
형태를 통해서 대생명력의 법칙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믿음으로써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고는 무엇인가 라디오의 전파처럼 실려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마이크에
대고 말할 때에는 백 마일 떨어진 곳에 무엇인가를 일으키려고 내가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의 법칙은 저절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방송국 기사는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데 불과합니다.
정신적 조처를 할 때 당신은 억지로 무엇인가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에게 '만일 나에게 1천 달러를 주신다면 그 반액은 구세군에게 기부하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물론 무엇인가의 실재를 향해서 거래나 계약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애원하고 탄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음에서 혼란을 쓸어버리고
깨끗이 하여서 신, 즉 창조하는 정신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곳에, 또 무엇인가를
일어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의 정신이
두 곳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 점으로 당신은 그것을 지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일어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정신이 있고 그곳에서 당신이
준 지휘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각 있는 사고에 의해서 무슨 행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는 그곳의 행동을 지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쳐지지 않는 것은 없다]
대생명력은 무엇이라고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대생명력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대생명력이 다룰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결코 고칠 수 없는 사태가 있다는 등의 일반적 사물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의사가 '이것은 결코 치료할 수 없습니다.' 하는 말도 믿어서는
안됩니다. 변호사가 '당신은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빠졌군요. 이러한 궁지에서는 아무도
빠져 나올 수 없는데요.'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됩니다. 어떠한 곤경에도 또 그
곤경이 아무리 크더라도 반드시 빠져 나올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몸안에서 운행되고 있는 정신, 창조하고 지성 있는 정신은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가를 알고 있으므로 방향을 돌려놓기만 하면 그것을 해냅니다. 무한의 정신 앞에는 크고
작고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방송을 마친 뒤 내게 전화를 걸어 온 어느 부인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자기의 집에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중대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있었습니다. 나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얼굴 위에는 조용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해 동안을 계속
병상에 누워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달쯤 전에 의사는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리며 음악 방송을 찾다가 우연히 나의 방송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의 흥미를 끌어서 나의 방송을 매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사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병이 나을 수 있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병이
완쾌되면 무엇을 할까 하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일요일의
강연에도 머지 않아 출석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1개월 뒤에 그녀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여러 해 전의 일로서 그녀는 지금까지도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건강도 아주 원기 왕성합니다.
물론 우리들은 제이 아담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녀도 대학을 나오자마자 곧
의사로부터 앞으로 여섯 달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왕에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의 한순간 한순간을 뜻 있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짧은
자기의 생애를 온 힘을 다해서 가치 있게 살겠다고 의사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시카고 시에서 복지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여섯 달이 지났지만
그녀는 죽기에는 너무나 바쁜 몸이었습니다. 죽을 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유명한
'할 하우스'라는 빈민 구제 사업으로 집을 세우고 보람된 일을 하면서 오래도록
살았습니다.
이렇듯 어떠한 어려운 문제에도 해결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모든 고난에는 빠져나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 치료 조처의 다섯 단계]
당신이 효과적인 정신적 치료 조처를 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친 것처럼 조용하게, 치료하는 존재는 만능이며,
전지하고 편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그 커다란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조처하려고 하는 상태는, 만일 그 조처의 대상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조처를 베풀려고 하는 상대편의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당신과 같은 대생명력의 것으로
같은 대정신속에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치료의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 위력은 또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당신이 바라고 있는 그 자리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을 당신의 생각, 즉 상상력을 통해서 지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되었다고 인정하십시오. 그것을 해방하십시오. 손을 떼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이 일을 실행한 때에 정신치료는 끝난 것입니다. 그 일이 다 잘 된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치료 조처의 다섯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몸과 마음의 긴장을 푸십시오.
2. 창조의 원질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 무한의 힘을 인정하십시오.
3. 그것과 하나가 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인 것이다.'
4. 당신의 희망이 채워졌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채워진 것을 상상하십시오! 그것이
채워진 것을 아십시오!
5. 그 일을 당신의 손에서 놓아주고 감사하십시오. 열의를 가지고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몇 년 전에 나는 골프 교습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골프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내게
왼팔을 똑바로 펴고 눈을 공에서 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서는 자세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을 모두 한꺼번에 생각하려고 하니 공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적당하게 공을 쳐서 페어웨이의 저편 끝에 있는 그리인 중앙의
작은 컵을 향해서 공을 몰아가려면 그런 일 모두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물론 그러한 단계를 의식하면서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과
자기 자신을 다루어 가면서 익혀 가는 동안에 차차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러자 드디어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이 저절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유를 가지십시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푸십시오! 먼저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중국에는 '훌륭하게 무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매달리지 말고,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다루어 보려고 하는 문제를 객관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오늘날까지
'나는 병을 앓고 있다.'라고 말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병은 나의 한
부분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병이란 것은 불쾌한 체험이지 기분
좋은 상태는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 인간의 한 부분은 아닙니다. 하나의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상태를 정신적으로 조처하는 데 그것을 우리들 자신에게서 떼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아마 그 체험을 계속할 것입니다.
'나는 힘세고 건강하다.'고 믿고 또 말하는 것은 잡초가 나 있는 곳에 채소의 씨앗을
뿌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곤란하다.', 이러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성을 가진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불쾌한 또는 성공적이
아닌 체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자신의 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것을 계속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몸과 마음의 긴장을 모두 풀고 여유 있는 기분이 되면 사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당신 자신밖에 그것을 놓고 잘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은 그것이 체험이라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결코 당신의 뗄
수 없는 일부가 아닌 것입니다.
[특정적인 것이 되게 하라]
당신의 조처는 특정적이어야 합니다. 즉, 그 어떤 일에 닥 들어맞게 구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팔에, 당신의 위장에, 당신의 다리에 완전한 행동을 시키십시오. 다른
사람의 건강, 혹은 당신의 사업 등을 위해서 조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드레스, 새
자동차, 또는 가옥을 갖는 것이 소원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가슴이 답답한 환자를
치료할 때 '그대의 가슴을 펴라.'고 말했습니다.
긴장을 풀고 여유 있는 기분으로 다음의 단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위력이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위력입니다. 즉, 그것은 당신의
대생명력이며 또 치료 조처를 베풀고 있는 상대자의 대생명력이기도 한 오직 하나의
대생명력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정신이 어디에서나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대생명력이 당신의 몸에도 당신의 사업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력
속에는 악 같은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쁜 일이라면 신, 즉 대생명력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던가 혹은 그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일이 나쁜 것일 뿐입니다. 대생명력은
악하지 않은 것이므로 당신의 치료 조처에 저항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에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예스'이며 '아멘(그렇게 될지어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대생명력의 한 포인트이며 선택할 권리를 가지며 그 선택의 성과를 체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채택을 거부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의 말이
대생명력의 위력에 방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신은 당신의
심복입니다. 그것이 자연계의 법칙인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모든 긴장을 풀어 포근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무한의 지성과
위력이 동일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당신이 치료 조처를 베풀려고 생각하는 상대방이나
또는 사태도 그 무한한 것과 동일합니다. 이 힘은 당신이 사용하는 힘입니다. 빨리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고난에 빠진 사람이나 병에 걸린 사람은 대생명력의 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인 방탕아처럼 먼 나라에 가서 고난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 믿은 신념, 즉 이별을 믿게 된 그 신념이 그와 그가 바라는 좋은 것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의 좋은 것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돌아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같이 대생명력은 참새에게도 먹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또 들에 핀 백합꽃에게도 입어야 할 고운 의상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든가 공간이라든가 사물의 형상이라든가 하는 실체물이 우리들에게 오는 좋은
것의 길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도 공간도 형상도 모두 자기 마음속의
구조물입니다. 정신이 어느 종류의 형상, 또는 체험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상이나
체험은 그 원인이 된 낡은 사고나 관념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새로운 사고를 가지고
그것을 바꿔 놓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고난, 병, 어려운 문제는 당신 자신의 정신의 자태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잡초를 뽑아 버리고 채소를 심지 않는 한 당신은 잡초를 언제나 키우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신에게 맡기겠습니다.'라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나는 지금 여기에서 행동에 옮긴다. 그것을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보자.
나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하자.'고 말하십시오.
[좋은 일을 당신의 체험에 가져 오라]
당신의 마음을 바꿈으로써 현재의 사태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정신은 당신의 정신이면서도 동시에 조처를 베풀고 있는 상대방 사람이나 사태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같은 정신, 같은 법칙이 어디서나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하고 또 끊임없이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받기 위해서 '저 먼 곳'에
손을 내밀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다만 정신의 법칙에 인상을
주고 방향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를 당신은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되어질 가를 특정하여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정신은
두 개가 아니고, 법칙도 위력도 두 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이나 조처하려는 사태도 그 하나에서 분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일은 완성된 것이라고 당신은 인정하고 혹은 상상합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그 그림(계획)을 만들고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인식에 도달한 셈입니다. 당신이
마음의 눈으로 본 그 그림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을 상상하시오. 그것을 느끼시오!
마음속에서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은 창조하는 정신 속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미 받아 쥐었다고 믿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상상력 속에서
그것이 지금 성취된 것을 보십시오. 당신의 심장은 튼튼하게 고동치고 몸의 각 기관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상태대로 되어 있는 것을 보십시오! 건강하고 행복한 당신 자신을 보십시오!
[당신이 바라는 것만 생각하라]
무엇인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치워 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바라고 싶은 것을 가지고,
바라고 싶지 않은 것을 마음속에서 바꾸십시오. 거부하지 마십시오. 무엇인가를 거부할
때에는 그것이 실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당신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부하는 일
때문에 당신의 사고가 그것 위에 머물러서 그것을 당신에게 매어 놓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을 받아들여 실현된
것으로 아는 경지에 도달할 때 당신에게 평화가 옵니다. 실현은 마음속에서 지금 되는
것이지 장래의 언제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되어졌다고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당신의 눈이 미래를 보는 동안은 그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언젠가 부자가 되겠지, 언젠가는 몸이 좋아지겠지.'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언젠가'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바라는 일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미래에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도 회답을 미래로 보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에 당신의 계획을 주고 그것이 지금 곧 된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대생명력의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방식입니다. 그것과 같은 정신적인 것을
제공하십시오. 정신의 법칙을 활동시키십시오. 당신의 씨앗을 뿌리고 그리고 그것이
자라난다는 법칙을 신뢰하십시오.
무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씨앗을 파헤쳐서 그것이 자라고 있는가 어떤가를
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장의 법칙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대생명력에 주었던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신념. 즉, 부정적인 신념입니다. 먼저 심은
씨앗 위에 또 하나 다른 씨앗을 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십시오. 한
번 씨앗을 심어 놓으면 어떻게 그 씨앗을 식물로 성장시키는가는 정신이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당신에게 좋은 것을 가져올 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씨앗을 심었습니다. 당신은 계획하고 그것을 실체의 대정신. 즉, 하늘의
아버지에게 내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상상력 속에서 당신의 바라는 수확을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서 열의를 가지십시오. 가장 중요한 일은 열의를 갖는 일이니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열의만큼 대생명력에 활기를 주고 또 자극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감사의 힘]
감사하는 태도는 믿는 일을 도와줍니다. 당신이 가졌다고 믿지 않는 한 무엇인가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감사를 나타냈을 때 일을 끝낸 것입니다.
이제는 조처를 마치고 났으므로 뒤를 향해서 당신의 일상의 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선 뒤 만일 당신이 의심하면서 다시 뒤를 향하는 형편이라면 또 한 번
처음부터 조처할 것을 권고합니다. 만일 필요가 긍정적으로 될 때까지, 당신에게 확신이
솟아오를 때까지 하십시오.
[초조하지 말라]
걱정을 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채소의 씨앗 위에 잡초의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주먹을 불끈 쥐는 것 같은 일을 한다면 아마 사물이
성취되는 것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급하게 서둘거나 초조하게 구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이 씨앗을 뿌리고 나면 대생명력의 법칙이 가져다 줄
일에 대해서 신념을 가지십시오. 그것을 믿으면 결코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무한한
위력은 우리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써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강요하거나, 채근하거나, 애원하거나, 하소연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무리하게 강요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신념이 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너무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뒤를 돌아보고 당신의 욕구를
다시 점검해 보십시오. 감정에 거슬리는 조처를 하려고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사실은 당신이 병을 앓고 싶어하면서도 건강해지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건강해 지려고는 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걱정해 주고 돌봐 주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아는 어느 치료가는 어느 부인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몸이 좋아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발 저의
치료를 중지해 주세요. 너무 좋아져서는 곤란해요. 제 남편은 식모를 두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그녀는 자기가 파티에 나갈 수 있을 만큼 몸이 좋아지고 싶었지만, 식모를
두어야 될 만큼은 병을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신적인 치료의 조처를 취할 때는 우리들은 대생명력의 창조적 본질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있는 한도까지 최고의, 그리고 최대의 가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신적인 치료의 조처를 취할 때는 의지의 힘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기를
쓰거나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상상력과 신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 할 때 자동차를 팔로 미는 쓸데없는 짓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핸들을
힘주어서 미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을 한다 해도 차의 속도는 조금도
빨라지지 않습니다. 속도를 내는 힘은 차체 속에 있기 때문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얌전히 좌석에 앉아서 편안한 기분으로 가고 싶은 방향으로 핸들만 조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차는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전화 박스까지라도
들어갈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도의 태도를 간직하라]
적극적인 신념의 태도, 즉 기대하는 자세를 계속 간직하십시오. 의식과 잠재의식의 물이
일치하였을 때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식과 잠재의식에도 부정이 없을 때,
우리들은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 논의를 벌이거나 억지를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몸을 땅
위에 세우기 위해서는 중력 내지 지구의 인력에 힘을 보태 주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물을 언덕 위에서 흘러내리게 하는 데 힘을 보태거나, 자라나는 씨앗의
성장을 잡아 끌어올리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방향을 주는 일 뿐입니다. 당신은 자연의 법칙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한
아무 것도 자라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의지력은 자기의 적극적인 신념을 계속
간직하는 것 말고는 아무 데도 적용할 데가 없습니다.
치료 조처를 마치고 난 뒤에 되돌아보고 '이 치료 조처의 결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가?'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만족하게 대답할 수 없거든 그 때 자기는 효과 있는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자기 자신을 조처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조처해서 자기는 효과적인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져야 합니다. 당신의 사고를 바꿀 수 있는 권리와 재능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의식하여 정신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의식하여 대생명력의 위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언제 이것이 일어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가?'하고 자기에게 물어 보십시오. 상상력 속에서 이것이 이미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없으면, 그 때는 다시 한 번 정신적 치료의 조처를 하십시오.
법칙은 내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을 알뿐입니다. 에머슨은 '이 순간은 영겁
전체 속의 어느 순간이나 마찬가지로 고귀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언제나 나를
감동시킵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낙심 천만'해 있을 때, 혹은 나의 체험 속에 무엇인가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내가 그것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일
때, 만일 '이 순간은 영겁 전체 속의 어느 순간이나 마찬가지로 고귀하다.'라는 말이
생각나면 이 순간에 좋은 것을 골라 가지는 것이 나의 임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조처할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마음의 혼란이 있을 때, 만일
채택의 권리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심이 날 때, 혹은 만일 좋은 치료 조처를 했는지에
대해서 의심이 날 때, 그 외에 어떠한 의심이라도 나면 그 때는 다시 한 번 조처를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새로 조처하십시오. 그러면 이윽고 아무 의심도 일어나지 않으며,
마음대로 편하고 자유스럽게 조처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신념은 신의 신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를 조처하십시오. 이
말에 아무쪼록 충격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신념은 신의 신념인 것입니다!
신의 신념은 이 세상에 있는 신념의 전부입니다. 하나의 대정신, 즉 신의 대정신, 바로
당신이 사용하는 대정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념은 그 대정신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신념은 신의 신념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신념에 믿음을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
당신의 치료 조처가 유효하다는 확신에 이르면 그 마음의 자세를 계속 간직하십시오.
당신은 유효하게 조처, 또는 기도할 권리가 있고 재능도 있다는 신념을 계속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조처하는 일에 그 때마다 수속의 단계를 의식적으로 밟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만일 너희가, 신은 살고 있다는 의식을 늘 지니는
자세로 살면 그 때는 너희가 바라는 것을 구해도 좋다. 그 구하는 대로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그는 저 높은 곳의 은밀한 자리에 있으며 전능한 신의 그늘 속에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대생명력에 요구하여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산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바깥 날씨가 나쁘다고 집안으로 뛰어들어올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는 거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가 있는 곳에 살 수도 있고 혹은
방탕아처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시간의 낭비입니다. 마음의
적극적인 자세를 계속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진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단을 올랐다가 2단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생명력을 신뢰하라]
당신을 인간으로 화신하게 한 대생명력을 신뢰하십시오. 당신을 받쳐 주는 대생명력에
의지하십시오. 당신 속에 창조할 수 있는 힘. 병을 고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힘은 당신에게 가까이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별하지 않고 치료해 주고, 또
생기를 주기 위해서 당신을 통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아십시오.
당신을 통해서, 당신을 위해서, 당신이 되어서 활동하는 그 힘에 의지하십시오. 당신의
소화 기관, 심장, 허파를 신뢰하십시오. 당신의 동료를 믿으십시오. 대생명력에
의지하십시오. 당신이 중력이나 수학 원리에 의지하는 것처럼 치료하는 힘에
의지하십시오.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법칙이 그것을 가져다주는가에 대해서
당신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누구도 어떻게 해서 그것이 진행되는가 모르며, 또 왜
그것이 그렇게 되는 가도 알지 못합니다. 5의 5배가 왜 25배가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손으로 그것이 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대생명력을 법칙에 따라서 운용할 뿐입니다. 대생명력은 언제나
긍정적인 자세로 응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만일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건강, 올바른 행동, 부유, 표현, 그리고 직감을 얻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조처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위해서라도 치료 조처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생명력은
당신, 또는 다른 누구든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어떠한
것이든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 즉 대정신력에는 일이 크고 작고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조처를 적어라]
만일 욕구의 성과를 분명하게 마음의 눈으로 보기가 어렵거든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당신의 조처를 적어 보십시오. 나는 가끔 그렇게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성과가
달성되었다는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는 때때로 그것을 글씨로 써서 자주 봄으로써 나의
잠재의식에 인상을 지어 줍니다. 가끔 쓴 것을 큰소리로 읽고, 그 말소리를 나의 귀에
들리게 합니다. 나는 나의 몸안의 신경 계통을 통해서 정신에 인상을 주고 특히 내가
그것을 믿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일이 따르지 않는 신념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속에 있는 치료하는 큰 힘은 지각의 자세, 정신의 자세이며 거기에서 당신은
모든 대생명력의 통일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대생명력은 통합된 하나의
실체입니다. 당신은 그 대생명력입니다. 사물은 무엇이든 위대한 혼에 속합니다.
당신의 좋은 것을 법칙에 따라 취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첫째, 마음과 몸의 긴장을 완전히 푸십시오! 둘째, 대생명력의 창조적 본질을
인정하십시오! 셋째, 그것과 하나가 되십시오! 넷째,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가졌다고
인정하십시오! 다섯째, 열의를 가지고 그 일에서 손을 떼야 일을 마무리짓고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이들 다섯 단계를 밟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효과 있는 정신적 조처를
다 마친 것입니다. 신은 모든 것의 지혜와 사랑과 힘입니다. 신은 모든 것의 선과 진과
화와 미입니다. 나와 나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입니다.
[제 2부 정신력의 활용]
중세기 페르시아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사디(1184~ 129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의 법칙을 배우고도 그것을 한평생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밭을 일구어 놓고도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과 같다."
밭을 잘 일구어 놓고도 씨를 뿌리지 않아서, 수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성자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 모든 것을 실증하라."
우리들은 지금까지 제 1부를 통해서 지혜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높은 관점에서 우리들
자신을 관찰하고 자기가 놀라운 위력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하늘의 아버지가 가진 것은 모두 나의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생명력이
우리들을 위해서 갖추고 있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이 책의 제 2부에서는 지금까지 배운 원리를 응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의 법칙을 건강, 행복, 번영, 마음의 평화라는 것에 적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바라고 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을 하나 하나 실현하는 일에 착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1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마음]
정신과학에 대해서 우리들이 배운 새 지식을 응용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는 마땅히 몸의 건강에 대해서라 하겠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을 보존하고, 만일
병에 걸리면 그것을 극복하여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력이 용솟음치는 건강한 몸은
분명히 대생명력이 인간에게 보내준 최대의 선물입니다.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특권이며 책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용솟음치는 육체의 건강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건강은 우리들의 대생명력이고 대생명력은 건강과 활력과 정력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들 자신이 대생명력을 완전히 표현해야 할 것이라면, 완전한
건강을 체험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됩니다.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은 병을 몰아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병이라는 생각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열심히 완전한 건강을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생명력이 곧 당신이므로 건강이 이미 당신의 몸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건강은 당신의 것으로, 당신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기다리면서 당신의 몸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언제나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건강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주면 무엇이라도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끌어내어 그것에 표현을
주면 더욱 더 큰 표현을 가져옵니다.
만일 불쾌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면 건강이 나쁘다는 일에 주의를 보내는 대신 곧
당신이 가진 건강이란 것에 관심을 보내십시오. 불쾌의 '불'자는 무엇인가가 없거나
빠진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불쾌는 마음에 기쁜 일이 없습니다. 즉, 건강이 빠져
있다는 뜻이므로 건강과 활력과 에너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병의
체험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게 됩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아십니까?
병을 생각하면 병이 자라나고 건강을 생각하면 병이 사라진다. 가난을 생각하면 가난이
자라나고 부를 생각하면 가난이 도망친다. 고난을 생각하면 고난이 자라나고
융화를 생각하면 고난이 사라진다.
방안에 빛을 가져오면 어둠은 저절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당신은 건강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상상력
속에 완전한 건강에 대한 마음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건강의 그 그림을 창조력을 가진
잠재의식, 즉 당신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으십시오. 마음의 눈으로 똑똑하게 보십시오.
대생명력은 당신입니다. 건강에 적극적 신념을 둠으로써 질병에 대한 신념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의 상태가 신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신념 그대로 당신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활동하며, 당신의 신념에 따라 건설하고, 재건하고, 창조하고,
재창조합니다. 건강하지도 못하고 정력도 위력도 없는 것보다는 그 반대로 건강에, 정력에,
위력에 신념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이 바라지 않는 어떤 것이 되었다고는 결코 스스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보다는 '나는 이미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 되어 있다.'고 말하고 또한 믿으십시오.
대생명력이 당신 속에 있는 것이므로 몸과 마음의 건강도 당신의 것입니다. 건강과 건전한
활동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당신을 통해서 개방되는 무한한 대생명력의 위력과 에너지를
자극하고, 그 에너지는 당신의 몸을 통해서 빛나는 건강으로서 또는 생기 넘치는
위력으로서 물결처럼 굽이쳐 올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력과 활력이 있는 개인으로
깊이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마음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마음에 그 이상의 그림을 분명하게
그리고 그것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완전한 건강을 표현하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십시오. 모든 일을 쉽게, 그리고 열의를
가지고 실행하는 사람, 음식물을 완전히 소화하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고요히 안온하게 당신 자신을 그 그림의 한가운데에 갖다
놓으십시오. 대생명력의 그러한 성질을 표현하는 그 사람과 동일한 대생명력인 당신
자신을 상상하십시오. 당신의 몸안에 완전한 지성이 몸의 각 부분을 수리해 주고
완전하게 고쳐 준다는 사실을 자각하십시오. 그 지성은 원래 완전한 몸을 창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성은 당신의
몸을 고치는 방법을 알며, 생명력의 법칙은 당신을 고치기 위해서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그 지성있는 위력은 당신 속에 있는 신의 정신입니다.
당신 자신의 새로운 마음의 그림을 창조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활력 있고 건강한,
싱싱한, 정력 있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이것이 나다. 내가 지난날에
체험한 일은 지금 아무 관계도 없다. 건강은 바로 나의 것이다.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온 몸 속을 건강이 맥박치며 움직여 가는 것을 느낀다. 나의 몸의 모든 기구나, 모든
조직, 모든 기능은 눈부신 건강과 활력과 위력으로 충만해 있다. 대생명력이 이제는
나의 속에서 창조하는 정신을 통해서 활동하며 재건해야 할 조직은 재건하고, 정신과
육체의 온갖 장해를 없애고 완전한 건강에의 체험에 나를 인도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완전한 건강을 거부하는 나의 모든 사고는 지금 나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
"내 자신의 무한한 정신은 내 몸의 외부로부터 음식물을 섭취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소화와 동화라는 신기한 방법으로 나의 몸안의 살아 있는 조직으로 바꾸어
간다. 무한의 정신은 나의 속에서 끊임없이 기적을 행하고 있다. 지혜로운 대생명력은
식물과 공기와 햇빛과 물을 결합시켜서 나를 위한 완전한 육체를 만든다. 나의 육체
속의 모든 원자와 세포 내의 지성 있는 위력인 지상의 지혜는 나의 허파를
호흡시키고, 심장을 고동 시키고, 피를 순환하게 하고, 소화 기관을 운행시켜서 그
어느 것도 서로 조화시키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신뢰하고,
거기에 신념을 두고, 그것을 축복하고 있다. 그렇게 지혜를 가지고 효율적으로 나에게
봉사해 주는 것을 감사한다."
"대생명력은 이제 나의 모든 부분을 청소하고 정화하고 활력을 주고 있다. 나는
튼튼하고 유쾌하다. 대생명력에 불가능은 없다. 나는 대생명력이다. 대생명력에 의지하고
또한 신뢰한다. 대생명력의 치료하는 힘이 내 몸의 병을 치료하고, 튼튼하게 하고,
완전하게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나는 공포와 근심의 온갖 느낌을 모두 내던져 버린다. 아늑한 기분이 되어
대생명력으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나의 몸안에서 일하게 한다.
나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편안한 기분이다. 몸의 온갖 조직을 통해서 대생명력은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순환하고 있다. 모든 세포는 완전한 건강으로 혈기가
왕성하다. 나는 건강에 감사한다."
"완전한 대생명력이 나의 눈을 통해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디에서나 대생명력의 아름다움 모습을 본다. 시력은 완전하다. 분명하고 완전하게
보인다. 나의 귀는 좋은 말만을 듣는다. 힘 안 들이고도 들린다.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완전히 듣는다. 듣는 힘은 예민하고 또 또렷하다."
"내 몸의 온 기관은 완전한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 나는 몸을 사랑하고 몸에
신념을 두고 있다. 나는 몸과 그의 모든 부분을 신뢰한다. 나의 몸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든 사태에 대해서도 좋은 사태만을 생각한다. 좋은 말만을
듣는다. 좋은 일만을 보고 또 좋은 일만을 하도록 노력한다. 나는 지혜와 사랑과
이해를 가지고 말한다."
"나는 나의 몸과 마음의 긴장을 완전히 풀고 포근한 기분이 되어 긴장이나
긴박함도 없이 필요한 일, 해야 할 일을 자신과 신념을 가지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한다. 무한한 대생명력이 나의 사고를 통해서, 나의 육체를 통해서 그 풍부한
자원으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고요히, 그리고
평화롭게 잠들 수가 있다."
"나는 튼튼하고, 유쾌하다. 그리고 자신이 있고, 또 포근한 기분이다. 나는 화평하다.
나는 건강하고 또한 부유한 대생명력인 것이다."
[22 경제를 안정시키는 마음]
경제의 안정은 인간의 행복에 없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안정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당신은 '돈이란 대생명력이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은혜의 하나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돈은 당신의 생활에 커다란 선을 가져다주는 수단으로서 올바르게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선을 가져다줍니다. 돈은 부와 풍성한 생활을 상징하고
자유와 위력을 나타냅니다. 대생명력의 어느 은혜와도 같이 금전도 감사를 가지고
받아들여서 이것을 즐기고 좋은 목적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공기와 햇빛과 같이
당신의 손에 들어옵니다. 주고서 받는다는 간단한 자연계의 법칙을 사용하면 돈은
당신을 둘러싸며 당신의 것이 됩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라고 생각하는 방법을 명시하십시오. 당신은 어떤 일이든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의 가능성을 조용히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왜 돈을 좋아하는가? 돈을 구하는 일에서의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의 동기가 올바르고 비난의 여지가 없다면, 만일
정직하고 선량하다면, 마음속에서 돈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느끼십시오. 그리고 만일
권리가 있으면 당신은 분명 그것을 얻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 또는
어떠한 좋은 것이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얻거나 혹은 무엇인가 파괴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하면 불행한 결과가 되지만, 그러나 그 죄는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동기와 돈의 부당한 사용에 있습니다. 일부의 사람은 빈곤과 결핍을 삶의
도덕이라고 믿고 있지만 건설적인 면에서 좋은 일에 사용하는 한 대생명력이 주는
어떠한 좋은 것이라도 인간으로서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핍이라든가 국한이라는 체험의 훨씬 윗자리에 올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신념에 따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선에, 대생명력의 건전한
표현으로서의 당신 자신에, 당신에 대한 대생명력의 사랑에 찬 즉응에 당신을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봉사하는 풍부한 사고에 신념을 두십시오.
최근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출판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골치가 아팠고 곤경에 잠겨 있었으나, 예수의 유명한 말씀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만일 겨자 씨앗만큼의 신앙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해서
저쪽으로 가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 산은 옮겨가리라. 너희에게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느니라.'고 말한 것을 그는 거듭해서 읽었습니다. 이 생각이 그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겨자씨를 안에 넣은 작은 플라스틱의
구슬을 제조한 꽤 큰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주머니에 넣는 구슬을 만들었지만
곧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겨자씨를 반지, 팔지, 귀걸이, 넥타이 핀 등에 넣어서
몇 백만인지 모를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오늘이 있게 한 원인은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은 세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 실용적으로 제공한 좋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당신도 이러한 착상에 마음을 쓰십시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면 누구나 머리에서
솟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솟아날 때는 경솔히 취급하지 말고 그
아이디어를 사용하십시오! 그 아이디어를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도 세상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당신 자신 이러한 질문을 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나는 가장 효과 있게 이 세상에 봉사할 수 있을까? 어떠한 고안,
어떠한 재능이 나의 속에 잠자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을 마음속에 끊임없이 계속하여 가지십시오. 그 답을 기대하고 있으면
무엇인가의 착상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거든 무엇이든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성 있는 대생명력이 당신을 인도할 방향을 마련해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의 동방 이야기는, 착상을 얻고 그것을 사용하는 일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대적인 번역을 한다면 이러한 것입니다. 예언자 협회의 한 회원의 아내가
엘리자라고 하는 예언자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하인인 나의 남편은 죽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영원한 신을
숭배하였건만, 이제 빚쟁이가 찾아와서 저의 두 아들을 붙잡아 종을 삼는다고 말합니다."
엘리자는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집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당신의 하인 집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올리브 기름이 한 병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대답을 하자 엘리자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웃 사람들 집에 가서 빈 그릇을 많이 빌려 오십시오. 당신과 아이들이
집안에 앉아서 그 기름을 빌려 온 그릇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빈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찰 때마다 옆으로 내놓으시오."
엘리자의 말을 들은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함께 집안에 들어앉아
엘리자가 일러준 대로 빈 그릇에 기름을 따랐습니다. 아이들은 그릇을 가져오고
그녀는 기름을 따랐습니다.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차면 그녀는 아이들에게 '빈 그릇을
또 하나'하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릇이 하나도 없어요.'하고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거기서 기름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엘리자를 찾아가니, 엘리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곤궁을 어떻게 극복하고 번영으로
인도할 것인가를 가르친 하나의 교훈입니다.
과부, 또는 여성은 잠재되어 있는 마음, 즉 정신의 창조를 맡은 부분을 가지고
사고하고 선택할 때 객관적인 부분이나 의식적인 부분과 대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편 또는 남성은 객관적인, 혹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정신입니다. 과부의 창조적이고
주관적인 정신은 공포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들이 겁낼 때는 추리를 잘 추진시키는
힘이 없어집니다. 큰 고난에 있을 때는 똑바로 사물을 생각할 수가 없고, 또 무슨 일도
성취하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잠재의식이 우리들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사고에도 형체를 만듭니다. 우리들이 또렷하게 추리하는 힘, 또는
감정을 통어 하는 힘을 일시적이나마 잃어버리면 상상력 속에 공포의 이미지를 만들어
몹시 무서워하던 일이 몸에 몰려듭니다. 공포, 즉 빈곤과 고난과 실패의 무서움에
사로잡히면 명백한 추리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깊은 부채와 고난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가치의 관념을 모조리 잃고 감정에 의해서 통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과부가 고난에 빠져 엘리자라는 예언자를 찾아갔습니다. 남성은
정신 속에 추리하는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성을 보일 뿐 아니라 직감과
영감의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는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이성을 잃고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모를 때는, 마음을 침착하고 평온하게 하여 우리들 속의 영감을 자극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공포, 지나친 걱정, 깊은 근심 등으로 이성을 잃었을 때는 누구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과부가 한 것같이 우리들은 고도의 정신적 영감으로 회답을
구해야 합니다.
과부에게 주는 회답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생산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고난에서 벗어나려면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회답은
바로 당신의 집에 있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고 격려해
주고 또는 이끌어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바른 생각과
성취에 필요한 힘을 얻는 곳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몸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과부인
그녀와 마찬가지로 오직 우리들 자신의 힘과 연구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우리들이 현재 이용하는 것을 잊고 있는 무엇이 있을까?
봉사와 성공의 생각은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쏟아 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부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고와
착상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 과부가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밖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붙잡아
오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은 끌어 주는 '줄'에 매달리려고 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생각을 공급하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누구나 부를 자기의 몸안에, 자기의
집안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잘 조직해서, 행동으로 끌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부인 그녀도 조그만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영감은 그것이 그야말로 세상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많은 빈 그릇을 빌려 오라고 격려를 했던 것은 그녀의 기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던 자동차 왕 H. 포드는 만일 그가 갑자기 모든 재산과
사업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가 새로 생각해 내서 그
필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값싸고 한결 효과적인 것을 공급하여 5년 이내에는 다시
몇 천만 달러의 대부호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봉사할 좋은 기회는 우리들의 주위에 가득차 있습니다. 좋은 기회는 모든 사람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좋은 기회를 잡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만 하면,
우리들은 빚을 갚고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대생명력은 필요한 모든 것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 과부가 기름을 붓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은 기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이나 내가 생각하고, 궁리하고,
에너지, 좋은 기회를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더 많은 사고와 에너지가 솟아 나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쏟아 내기를 그만두면 흐름도 그쳐
버립니다. 처음에 과부는 자기가 가진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봉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조그만 생각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필요를 채워 주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누구나 세상을 위해서 사용할 가치 있는 기름 단지를 몸안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알려면 혼란과 지나친 걱정과 근심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깊숙한 마음 안을 향해서 조용히 영감을 구하고, 우리들이 가진 것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가를 물어 보아서 자신의 활동을 인도하게 할 때, 가진
것을 쏟아 내는 방법이 발견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가 되고 자기 자신의 이익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면 그것이 돌고 돌아서 자기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좋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봉사를 위한 사고, 즉 건강과 행복과 성공에
이르게 하는 바로 우리들의 몸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시간을 내서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도 있도록 하는 재능, 그리고 그 사람들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당신이 가진 재능에 대해서 표로 만들어 보십시오.
돈을 버는 것만을 기획한다는 것은 창조적인 일도 못 되고 현명한 일도 아닙니다.
정직하고 또한 현명하게 대생명력에 봉사하면 큰 노력이 없어도 돈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고 행복과 만족을 가져오게 됩니다. 신선하고 맑은 공기는 언제나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들은 그것을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면 풍부하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결핍이라는 것이 결코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해의 부족으로
자기를 위한 좋은 것을 볼 수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에
봉사하여 그 까닭에 의해서 봉사를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자질과 재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안정과 행복은 대생명력의 위력과 에너지를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질 권리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고 또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이 자기의 것이라고 믿을 때 그것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어질 때 대생명력은 우리들에게 봉사해 줍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것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으로 무슨 일이라도 하십시오. 상상력 속에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더 많은 봉사를 하고 있는 그림을 보십시오. 이 봉사가 당신에게 더 많은 부를
가져오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상상 속에서 당신의 이기적이 아닌 봉사의
결과로서 대생명력이 응답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세계의 어떤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당신에게도 쉽사리 돈이 흘러 들어올 것을 믿으십시오. 얼마의
액수라도 그것이 올 때는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받고 감사하면서 지혜롭게 사용하십시오.
돈은 세계적으로 보편의 물질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풍부하게 가질 수 없다든지,
가져서는 안 된다던가 하는 등의 잘못 믿는 방법을 깨끗이 버리십시오. 돈은 당신을
통해서 대생명력의 충분하고 자유스럽고 행복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나는 돈을 건전하고 건설적인 좋은 방법으로 아낌없이
쓴다. 공기나 햇빛에서 얼굴을 돌리거나 거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에서도
얼굴을 돌리거나 거절하지 않는다. 대생명력이 아낌없이 나에게 주는 선물을 나는
열정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나는 돈의 노예도 아니라, 돈을 나의 하인으로 본다.
그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도 좋은 것을 가져오도록
쓴다. 올바른 나의 사용 방법에 의해서 세상 사람들은 복지를 받는다. 창조적인 생각이
나의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서 끊임없이 나에게로 온다. 이기적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더욱 많은 좋은 것을 구할 때 대생명력의 모든 통로, 즉 사람들이나 주위의
사태나 조건은 더욱 많은 돈을 나에게 갖다 부어 준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나는 가치를 찾고 또한 발견한다."
"내 속에 있는 대생명력의 무한한 힘에 의해서 나는 해야 할 일을 열의를 가지고
성공적으로 실행하자. 나를 위해서 성공이 실재하며, 나는 성공을 찾을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지식과 재능의 최선을 다해서 이 지상에서 나의 운명을 채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대생명력을 충분하고 건전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날마다
용기와 이해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필요한 돈을 많이 벌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세상에 돈이
부족하다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돈은 영적인 물질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대생명력이 나에게 응답하는 힘은 무한하다. 대생명력은 1달러를 만들어 내는 것과
똑같이 쉽게 1백만 달러를 만들어 낸다. 나의 신념에 따라서 내가 받을 액수를 정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나의 존재의 모든 길을 모조리 열어 놓고
풍부한 부를 내보내고 또 받아들인다."
"나는 돈을 끌어당긴다. 돈은 쉽게 자유롭게 풍부하게 몰려온다. 그것은 모든 무한의
원천에서 나에게 흘러오는 것이다. 나는 부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고한 마음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넉넉하고, 가득하고, 충족해서 호화롭게 생활하기 위해서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의 돈을 모두 가진 나 자신을 본다. 부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커다란 기쁨을 느낀다. 나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열려져 있다. 나의 손은 언제나 받아들이기 위해서 열려져 있다."
"나는 현명하고도 안전한 투자를 한다. 그 하나 하나는 풍족한 배당을 가져온다.
돈을 만들 좋은 기회는 매일 닥쳐온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예상하지 않은 때에
찾아온다. 부를 얻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기가 마치 호흡과 같은
것이다. 나는 부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가장 좋은 것이 있는 곳에 나는 그것을
사용한다. 은행의 예금 잔고를 늘어나게 할 생각이 끊임없이 나에게 솟아오르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 하나를 나의 좋은 것을 위해서 활용한다. 이기적인 일이 아니고
한층 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과 봉사를 위해서 활용한다. 나의 성공은 확실하고도
끊어지는 날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번영한다."
"나의 고결성은 믿음직스럽고 풍족한 수입에 있다. 세상 사람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계속 사용하면 다시 더 많은 것으로 내게 돌아온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부를 좋은 일에 사용하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한층 더 큰 좋은 기회를
나에게 제공한다."
"돈을 만들기 위한 착상은 나의 상상력 속에서 쉽고 자유롭게 형성된다. 그것은 더더욱
늘어가는 형세로 부에 부가 계속되면서 나의 체험 속에 나타난다. 부는 이제 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감사한다. 나의 업적에 감사한다. 나의 것인 부에 감사한다.
[23 수양을 위한 마음]
영어로 쓴 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깊이 존경받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의 시편 제
23편입니다. 신이 마치 양치는 목자가 양을 이끌고 지키는 것처럼 자기를 돌보아 주었다고
다윗이 말한 대목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몸안에 지도하는 원질이 평화와 행복한,
그리고 이익을 낳는 곳에 그를 인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시련에
부딪칠 때에도 그 지도는 그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대생명력을
믿고 대생명력을 믿는 그의 신념에 응답한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 속에 있는 신성인 지혜의 힘입니다. 당신
속에 있으며 당신을 받쳐 주며 현명하고 목적에 차 있고 또 창조적인 원질입니다. 신성의
지혜는 당신의 대생명력입니다. 그것은 결국 당신 자신의 본질입니다.
신과 같은 내부의 지도하는 본질에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또는
스스로의 지성과 지혜에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감을 갖는 일이며 공포나 겁이나
낙담이나 열등감 등의 반대입니다. '사람이여, 너 자신을 알라.'는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대생명력입니다. 대생명력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의
표현의 도구로 하기 위해서 당신이 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대생명력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 중요성을 뜻 있게 할 수 있도록 대생명력은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당신을 버텨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깊이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굉장한 생각이 아닙니까? 대생명력은 그의 표현의 수단으로써 당신이
된 것이므로 당신에게는 대생명력을 위해서 해야 할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니 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 세계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과도 틀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다르게 보입니다. 생각도 다릅니다.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과 다른
천성이 있고 다른 것에서 유례가 없는 재능이 있습니다. 특수한 방법으로
대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고 전세계의 다른 누구도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대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고 전세계의 다른 누구도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특별히 몸에 지닌 것이 있기 때문에 만일 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하면 당신의 운명 또는 존재의 이유를 만족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것을
성취하십시오. 그러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행복 그것입니다.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대생명력은 꼭 그 정도만 표현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중요합니다. 그 중요성을 인정할
때 대생명력이 내어 준 숙제를 수행할 때, 대생명력에의 당신의 분담을 다할 때, 전력을
기울여서 대생명력의 생활을 영위할 때, 즉 당신의 제자리를 차지할 때, 자기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반드시 내부 지도와 높은 가치 존중을 느끼게 됩니다.
만물의 우주 구성의 설계 속에서 당신은 중요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제일 먼저 대생명력이 당신을 창조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생명력 스스로의 소질과 재능, 신념, 상상력, 추리력, 채택과 행동의 위력
같은 것을 부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대생명력으로써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대생명력이 가진 활력, 에너지, 평화, 사랑, 침착, 행복 등을 자기의
화신으로써 당신에게 부어 넣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의 앞에 숙제를 내놓았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당신이
그 숙제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도 주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을 통해서
특수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빛나게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을 만들어 냈을 까닭이 없습니다. 당신 혼자의 방법으로 대생명력을
충분히 표현할 때 대생명력은 한결 완전하게 표현되는 것이므로 당신은 행복하고
성공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당신에게 행복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해야 할 것을
한 것에의 보수입니다.
동기가 바를 때, 바른 방법으로 바른 일만을 욕구할 때, 욕구가 바른 행동에 있을
때에 내부의 지도력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른 사람은 저버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른 것을 구할 때는 풍족함과 자기 존경의 느낌이 있습니다. 만일에
당신의 동기가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주고 싶을 뿐이라든가, 당신의 자기를
치켜올리기 위한 것뿐이라든가, 혹은 돈을 위하는 것뿐, 또는 무엇인가 다른 물질적
보수를 위한 것뿐일 때는 그러한 느낌이 올 수가 없으며 또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른 일을 위한 봉사에 최선을 다한 때는 물질적 이득보다도 훨씬 높은
보수를 얻습니다. 당연히 당신은 물질적인 보수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그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는 일이 없는 것은 깊은
내부의 만족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과오를 범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에 있어서 잘못에
빠진 일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실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동기가 바른 때에는 과오를 성공의 디딤돌로 바꿔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지난날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하십시오. 당신의 손을 기다리며 앞에 가로놓여 있는 사물을 처리하고 당신이
알고 있는 최선을 다할 때 구출되어지며, 안도되고, 지휘되고, 지지되고,
보호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에
대한 공포도 사라질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할 때 당신과
함께 또, 당신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대생명력의 모든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손이 깨끗하고, 당신의 주장이 바르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자각할 때
용기라는 이름의 높은 언덕 위에 성공이라는 깃발을 꽂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십시오. 모든 수단을 다해서 자신에
감사하고 자신을 잘 지도하고 있다고 칭찬하십시오. 물론 자기가 알고 있는 최선의 일,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당신이 최선의 일을
최대로 했다고 생각하면, 내일은 오늘까지 몰랐던 그 이상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해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두려워할 때, 무엇이 일어날 가를 걱정할 때, 일의 성과보다도 당신 자신에
모든 주의를 기울일 때는 혼란이 오고 마음이 위축되고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못하며 용기는 쇠진할 것입니다. 대생명력이 당신에게 시키기 위해서 당신을 창조한
그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에 진실할 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공포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는 일에 있어서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며 대생명력의
지혜 있는 전능의 위력에 의지하여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노력과 기획으로 그의 사업을 크게 발전시켰지만 심한
과로로 스러져 사업은 하루아침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거액의 부채는 늘어만
가고 누가 보아도 완전한 실패에 직면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사업은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하기에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생명력이 그에게 사업을 준 것은 대생명력의 목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것에 의해서 대생명력은 자신의 종업원과 세상의 여러 사람에의 봉사를 수행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깨달을 때, 긴박감은 사라지고 그의 건강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대생명력의 좋은 것을 위해서 그 사업을 운영하는 지배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신감이 다시 생기고 사업이 다시 번창해서 이제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사람들 각자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당신 속에는 뛰어난 권위의 포인트,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지각의 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지각의 그 포인트는 어떠한 외계의 소란과 혼란에도 지배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실패를 모릅니다. 그 포인트로 채택하는 것입니다. 자기에는 결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할까, 어떻게 감정을 방향 잡을까, 어떻게 몸을 움직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지혜의 위력과 그 놀랄만한 극비의 장소,
외계의 어떤 체험도 접촉할 수 없는 그 장소를 깊이 생각하고 그 중심에서 외계를
향해서 사십시오. 외계로부터 안을 향해서 살겠다고 결코 시도하지 마십시오. 그 지각의
중심 포인트는 당신 자신의 개성의 중심이며 당신은 무한한 대생명력이 개인화 되어
당신으로 된 것입니다. 당신의 속에 있는 이 높은 지혜와 위력의 포인트를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신변의 모든 일이나 활동에 대해 당신이 완전한 지배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외계의 어떤 것도 당신을 지배할 수 없고 또 지배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눈앞에 가로놓인 일은 무슨
일이든 당신 자신에게 승인을 얻어야 실행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십시오.
매일 저녁 조용히 앉아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여유 있는 기분을 가지십시오. 당신이
얻은 성과에 만족감과 희열감을 가지고 하루를 회상하십시오. 이것을 매일의 습관으로
삼으면 오래지 않아 평화를 느끼고 마음속에 약동하는 힘을 느끼면서 매일 매일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나고 완전한 자신감을 갖고 살게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내부에 무한한 지혜가 숨겨져 있는 장소에서 모든 결정이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인 확신을 가지고 당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나는 평온하고 포근하며 청결에
자신이 있다. 내게 오는 모든 사태에 조용하고 확실한 태도로 대처할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대생명력의 무한한 지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대생명력을 믿으면서
의지한다. 나의 속에 있는 신의, 무한한 대생명력의 지혜는 필요한 때 의식의 표면으로
나온다. 그것은 어떠한 문제라도 나 자신의 밖으로 내놓을 수 있으며, 그것을 나 개인에
구애 없이 평정하게 관찰할 수 있다. 나는 거기에서 내가 어떻게 다룰 수 있는 어떤
사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쉽고 완전하게 처리할 수 있다."
"나는 어려운 문제를 분석할 때, 그것에 대한 진상을 안다. 위에서 주위에서 그것을
꿰뚫어 본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도전이며,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의 기지로 그것을 처리한다. 어려운 문제는 나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 그것은 일시적인 체험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를 지배할 수도 없으며
해결은 간단하고도 용이하다."
"나는 나의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숙제를 냉정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깨끗하고 확실성
있게 처리한다. 언제나 나의 속에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아는 지혜와 그
힘의 중심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신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나 해내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는
나의 재능을 믿고 있다. 나 자신을 믿는다. 자연계의 대생명력은 나의 생명력이라고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 날마다 냉정함과 확실성을 가지고 보낸다. 나의 결정에
신념을 가진다. 왜냐하면 무한의 지혜와 자각 있는 저 높은 신의 수준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재능을 언제든지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대생명력에 대한 나의 신념은 나로 하여금 용기가 있고, 자신감이 있고, 기지가 있고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내가 말하는 일은 무엇이나 완전한 자신과 정확성을 가지고
말하고 하게 된다. 나의 다리는 용수철을 단 것처럼 경쾌하고, 눈의 관찰은 날카롭다.
나는 머리를 높게 치켜든다. 목소리는 힘있고 완전히 나의 뜻대로 소리를 낸다. 나의
외모는 사람들의 존경을 부르고, 나의 사고는 조용하고 정확하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말이 유창하게 나오고 전하려는 사상이
언제나 그림처럼 선명하게 전해진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열심히 듣기를 좋아한다. 친구와 동료들은 나에게 협력한다.
그들의 복지에 내가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상냥하기 때문에 많은 친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존경한다. 내가 그들을 존경하고 또, 나 자신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판단에 자신을 가지며 정직하고 믿음직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력과 위력과 용기를 느낀다. 자신감이 있고 침착하다. 자기에게 신념을 두고 스스로를
존경한다.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나의 성취에서 다음의 성취로 전전해 간다.
그것이 나에 관한 진실이다."
[24 편안한 마음]
마음과 몸의 긴장을 푸는 것은 스피드와 긴장과 소음과 혼잡이 가득차 있는 현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근한 마음 자세를 가지면 그것은 바로 육체에
반영되어 몸의 긴장을 풀어 줄 것입니다. 포근한 마음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일이나,
또는 좋아하지 않은 일에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도 그것이
현실이면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것으로
해결됐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포근한 마음이란 우리들의 힘에 넘는 상황인 것입니다.
체험은 어쩔 수 없다고 하여 방치해 두고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좋은 세계이므로 모든
일이 결국은 잘 되리라고 납득하는 일입니다. 긴박감이나 긴장은 건강의 적입니다.
창조하는 정신의 원활한 작용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긴장을 하게 되면
간단한 일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긴장이 머리에 꽉 차 있으면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까지도 혼란에 빠지게 만듭니다. 결국은 인간 관계가 유쾌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됩니다. 긴장은 정력을 낭비하고 생명을 단축시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최고의
스피드로 살아가는 것이 도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언제나 서둘러 뛰고 당황하고 차를 급하게 몰며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키면서 자기의 몸을 학대합니다. 언제나 회전 목마에 탄 것처럼 급히 돌아갑니다.
그러한 마음의 긴장은 그대로 근육 조직에 나타나 소화 기관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대생명력은 창조하는 정신에 기댐으로서 비로소 당신의 몸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만일 당신의 긴장과 같은 해로운 간섭을 하지 않는다면 대생명력은 당신의 몸이
원활하게 조작해 나가도록 해줍니다.
마음의 긴박감은 대개 두려움이나 노여움 때문인 것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걱정과 공포, 혹은 지난날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노여움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선수를 쳐서 공세에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을 해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당신의 마음의 긴장을 푸십시오. 모든 사람,
모든 사태, 모든 상황에서 당신에게 고통과 걱정과 노여움의 원인이 된 것을 모조리
용서하십시오. 지난날의 모든 피해를 마음 밖으로 쫓아내고 지난날의 모든 잘못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누구라도 잘못은 있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처럼 당신 자신도 용서하십시오. 과오라는 것은 그다지 중대한 것은
아닙니다. 과오를 되풀이하여 거듭하는 것이 해로운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렇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잘 주의하자. 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던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적어도 이 일에서 무엇인가
좋은 일을 끌어내자. 이제 지난날과는 완전히 손을 떼자. 지난날은 이제 나에게 아무
힘도 미치지 못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생명력의 좋은 것을 인정한다. 대생명력이
나를 창조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지킬 수 있고 지금도 지켜 주고 있다. 나는 대생명력을
신뢰한다. 대생명력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대생명력을 사랑한다. 나는 대생명력에 신뢰를
가진다. 나는 이제 용서한다. 노여움과 공포감의 모든 것을 해방한다. 사랑과 이해와
신념의 마음 자세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간직한다. 긴장이나 긴박감을 모두 떼어 낸다.
이제 나는 포근하고 여유 있는 기분이다. 세계를 내가 조종해 보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을 것이다. 내 의지의 힘으로 세계를 모두 묶으려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또 자기에게 이렇게 물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 일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건설적인 일을 해 보려고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며 불안과 초조를 계속할 셈인가?"
만일 업무가 당신을 지배하고 있다면 당신은 긴장 때문에 몸을 풀 수 없을 것이며
피로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당신이 업무를 지배하고 있다면 당신은
몸이 풀리고 한가로우며 느긋하게 업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몸의
지배 아래 있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혼란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몸을 지배한다면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때의 환경이
당신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환경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환경의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가끔 우리들은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많은데 할 수 있는 시간의 짧음을 생각하고
긴박감을 느낍니다. 어느 유명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의 걱정과 어제의 실패에다가 오늘의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짊어진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견뎌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현재의 순간 속에서밖에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현재의 순간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므로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앞길에 좋은 일을 기대하고 하루하루가 더욱 더 좋은 일을 가져오리라고 진심으로
믿도록 노력하십시오.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몸에 말을 걸어서 포근한 기분으로 느긋한 태도를
가지라고 부탁하십시오. 좋아하는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어깨의 짐을 내리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조용히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의 안면 근육은 느긋하다. 어깨의 힘도 풀려져 있다. 두 손도, 손가락도 포근하다.
발과 발가락도 포근하다. 몸 속의 하나 하나의 신경이나 근육도 포근하다. 나의 어려운
문제의 하나 하나,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문제의 모두도 내던져 버렸다. 나를 괴롭히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토해 내면서 마음에 걸리는 어려운 문제를 그것과
함께 모두 토해 내봅시다. 마음도 몸도 내던져 버립시다.
긴장을 푼 당신이 빨랫줄에 걸쳐진 젖은 타월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고
상상하십시오. 개가 두서너 바퀴 돌고 나선 온몸을 땅에 내던지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눕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조용히 물의 흐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작은 개울이 작은 산의 기슭을 이리저리
굽이돌면서 초원으로 흘러가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작은 개울의 물은 큰 바닷물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기류를 타고 하늘로 올라, 거기서 구름이 되고 엉키어서
비가 되어 내립니다. 빗물은 산의 정상으로 떨어져 흘러 찰랑거리는 맑은 흐름에
모여들어 목적지인 바다로 여행을 떠납니다 흐름은 싸우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변함없는 걸음걸이로 인내성 있게 앞으로 앞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바위를
돌고, 나물을 돌고, 작은 산을 굽이돕니다. 아무 것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고 절망도
시키지 않습니다. 물은 장해물을 만나도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장해를 피해서
지나가거나 그 위를 지나가거나 합니다. 끈기 있고 참을성 있고 인내력이 강하고 그
위에 무저항이지만 물은 그 앞길에 있는 무엇이고 깎고 닳게 합니다. 그 흐름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대생명력이라는 그 큰 흐름과 같습니다. 당신의 근원도 역시
커다란 바다입니다.
당신 속에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태를 처리하는 위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한 번에
하루를, 한 번에 일순간만을 살며, 한 번에 한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당신에게 가져오는 것은 언제나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과 부딪칠
때는 지난날의 모든 피해를 던져 버리고 눈앞에 나타나는 어려운 문제는 모두 처리할
힘이 있다고 인정하면 느긋하게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자신감이 솟아올라 다음의
순간에는 다시 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무한한 대생명력의
흐름입니다. 걸음을 방해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을 통해서 흐르는 대생명력의
수류는 작은 개울의 무저항한 물과 같이 변함없는 흐름으로 대생명력이 움직이는
길에 가로놓인 어떤 물건도 쓸어버립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확언하십시오. "이제 긴장이 모두 풀려 나의 마음도 몸도
포근하기만 하다. 조용히 자신을 가지고 나의 좋은 것과 만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대생명력이 좋은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이 가져다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불안한 생각과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를 모두 해방시켰다. 깊은 평화가 나의 모든 신경,
모든 근육, 모든 기관에 골고루 퍼진 것을 느낀다. 몸의 모든 부분이 포근하다. 깊은
평온을 느낀다. 마음은 안온하고 고요하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완전한 평화의 모습이 상상력을 가로질러 간다. 날씨는 따뜻하고 기분 좋고
평화스럽다. 나는 혼자서 소리 없는 숲 속을 걷고 있다. 부드러운 미풍이 머리 위의
가지를 흔들고 반짝이는 햇살이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들어 발아래 싸늘한 푸른
이끼에 그림자를 던진다. 잡초 우거진 속의 오랑캐꽃 향기는 코를 싱그럽게 한다. 여름의
평화를 느낀다. 천천히 걷노라면 숲 속의 고요한 연못가에 있는 자신을 본다. 이
아름다움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으면 청순함과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도 몸도
위안이 되어 치료되고 아늑함 속에 있는 것을 느낀다."
" 이 화창한 여름날에 대자연의 모든 평화와 청순함을 느낀다. 호수의 수면에는
잔잔한 물결조차 없다. 모든 것은 평온하다. 평화와 청순함이 있을 뿐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호숫가에 조용히 앉아 있으니 부드러운 미풍이 뺨을 스친다. 자연계의
아늑하고 깊은 평화를 느낀다. 태양은 따뜻하다. 몸의 모든 부분에 포근한 기쁨이
스며들고 고통이 사라진다. 이 침묵의 숲, 고요한 호수, 따뜻한 햇볕 아래에 서서
대생명력의 청순함을 느낀다. 나의 주위의 그림자에도 머리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나뭇잎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본다. 나는 포근하고 평화롭다."
"내일 아침 충분하게 자고 나서 눈을 뜰 때 나는 상쾌함을 느낄 것이고 자신감에
넘칠 것이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어떻게 쉽게 자신감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날의 모든 순간 순간을 즐기리라. 매일 좋은 일이 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매 순간은 영겁 속의 순간이며 매순간마다 영겁 속의 다른 어느
순간과도 같이 좋은 일을 가지고 있다. 나는 포근하고, 맑고 평화스럽다. 자신감을
가지고 더욱 풍요롭고 영광스런 생애를 누려 보자."
[25 대인관계에 성공하는 마음]
누구나 가장 기분 좋은 곳으로 마음이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사람도 친절하고 기분 좋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파우스트 부인이 몇 년을 두고 겪는
문제는 대인관계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이웃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과도 언제나 문제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는 가장 인기 있는 부인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답니다. 그것은 몇 년 전에 선생님이 강연에서 말씀하신
한 마디를 듣고 나서부터 였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저를 위해서 벨을 울려 준
셈이에요. 그때 선생님의 말씀은 '누구나 가장 기분 좋은 분위기에 끌리게
마련이다.'라는 말씀이었지요. 저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집으로 돌아가서 제 주위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일에 착수했었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제 분위기에
끌려오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할 때, 당신에게 신뢰를 가질 때, 당신의 지식을 신임할 때, 그리고
당신이 열심일 때에는 반드시 반응해 옵니다. 만일 그들이 당신을 믿기를 기대한다면,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에게 신뢰를 가질 것을 그들에게
비치신다면 당신 자신에게 신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지식에 신뢰를
가지기를 그들에게 요구한다면 당신이 안다는 것을 스스로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의 지식에 당신 자신이 신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만큼 갖지 못하고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믿는 방법은 외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의 외관에 따라 끌려들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약하고
내성적인 사람은 걸음걸이와 의복 입는 솜씨와 말하는 태도에서 외관적으로 그것을
입증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투쟁적인 태도라든가 오만, 또는 뽐내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간파되고, 또한 느껴지게 되어 자동적으로 그에 대해서
방어의 태세를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누군가가 당신과 마주칠 때,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느낌은 그의 첫인상의 외관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는 당신을 보고 무의식중에 결정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어떻게 보이는가?
어떻게 나오는가?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가? 어떤 복장인가? 무의식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당신이 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또 당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외관을 본 뒤 당신의 말을 들어보고 당신에 대한 첫인상을 만듭니다.
말하는 속도로, 말하는 억양으로, 또는 목소리가 좋은가, 아니면 귀에 거슬리는가 등을
판단 자료로 삼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등에 의해서 당신을
판단하게 됩니다. 당신의 외관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을 쫓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도 그 사람들의 외관에 의해서 반발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 옷 입는 솜씨, 동작 같은 것에 의해서, 또는 당신이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쫓아 버리기도 합니다. 당신의 동기는 얼굴 표정과 몸짓에, 또는
말하는 모습에 드러납니다. 말하는 일뿐 아니라 말하는 방법에 의해서 판단됩니다.
태도는 외관에, 말씨에 표현되어 세상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반응할 가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신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
자신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협력하겠지요.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좋아하게 되면 더 잘 협력해 줄 것입니다.
사람들의 협력을 얻고 싶다면 그들이 당신을 믿고, 당신의 인간성에 신뢰를 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 당신은 말하고 있는 일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이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 자신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하는 협력이 당신
자신을 위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바르고 좋은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에 대해서 당신이 분명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시하는 일에 열의가 없으면 안됩니다. 열성과
동시에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보듯이 그에게 보이기에 넉넉할 만큼의
기술도 필요합니다. 간단한 일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상대방을 당신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더구나 먼저 당신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하고 있으면 일이 매우 쉽습니다.
상대방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속에 그 일에 대한 그림을 당신이 보는 만큼은
분명하게 그려 주어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며 그것이 절대로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 가장 나쁜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내게 이렇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반발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그들의 반항심을
유발시킬 뿐입니다. 우리들의 요구는 사는 일, 체험하는 일,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방 사람도 당신과 똑같은 일을 욕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우리들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지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도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소유되는 일을,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과 협력하고, 우리들의 욕구에 동의하는 일이 이익이라고 알면
친절하게 협력해 줍니다. 무엇인가가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것이라고 알게 되면 저절로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결정하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결정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채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진리가 되는 누구나 아는 자명한 것뿐입니다.
어떠한 진리를 우리들이 가졌다고 해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받아들이고,
또한 사용하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을
위해서, 혹은 우리들 서로를 위해서 해야 할 무슨 일이거나, 우리들이 그에게 시키고
싶다고 바라는 무슨 일이거나, 그가 그것을 그 자신을 위해서 또,우리들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느끼지 않는 한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쌍방에
좋은 일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그것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에만 진리는 그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서로에게 좋은 일을 무엇인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그것을
당신이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해주기를 나는
고집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당신 자신에 확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어딘지 모르게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 자신에게 확신이 있을 때는
오만하지 않고, 위압을 주지 않고, 뽐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공포나 저항이 없을 때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사랑하고 또 협력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실재의 법칙을 알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 요령은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처지에 두는
일입니다. 그것을 하는 데는 꽤 높은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동기가 바른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바른 동기는 다른 사람에게서
욕구의 회답을 가져온다고 아십시오. 만일 당신이 미움, 공포, 소유욕, 관념 같은 동기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그저 어려움 속에 머리를 처박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과
동정과 서로의 이익이 되는 욕구에 의한 동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양 각색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미로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멋지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협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바라는 협력을 얻는 방법은 그들에 대한 적당한 태도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서로가 건전한 협력을 바라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데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를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은 그 경멸과 비난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저항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누구라도 자기 자신에 소원해 있는 한,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건전하게 사랑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안됩니다. 자기
자신과 어울려 가지 못하고서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어려운 문제가 늘 협력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인간 관계를 위한 충고로는, 예수께서 말한 '우리들 자신을 사랑함과 같이 이웃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보다 나은 말은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하고 그 위에 이웃 사람을 우리들 같이 사랑하십시오.'라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그 뜻은 당연한 일로서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이어서 우리들
자신의 복지를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이웃 사람의 복지에도 감정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활발한 협력에서 손을
떼버립니다. 그는 자기만을 사랑합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자기와 같이 살아가는 일을
배우면 그는 벌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협력합니다. 다른 사람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하여 물론 사람들과 잘해 갑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그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자기애는 다른 사람들을 소유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건전한 자기 표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힘있고 건강하고 활력에 차고 자존심이 많은 인격일수록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나갈 수
있습니다. 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장 잘 돕는 사람이고, 가장 동정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깊은 사랑을 가지는 상냥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존중되어지기를 생각한다면 먼저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를
열등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대생명력이 그의 앞에 놓는 시련에 대면해서 약해지고
또한 두려워합니다.
우리들은 자기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가지도록 생각하며 또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화를 내거나 또는 두려워해도 안됩니다. 자기에게, 다른 사람에게
또 대생명력에 신뢰하는 느낌이 없으면 안됩니다. 만일, 우리들이 죄인, 즉 약하고,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잘해 갈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자기를 지키려고만 들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까닭이
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대개의 어려움이란 우리들 자신의 죄악감과 거부감, 결핍감,
열등감을 상대방에게 투입하여 마치도 그가 죄를 짓고 거부를 하고 결핍되었고
열등하다고 느끼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기분 좋고 행복한 인간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사랑과 협력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때만이 그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는 한, 가질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잘 어울려 나가는 인간 관계는 바른 동기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인 정당한 동기는 우리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바른 동기를 갖는다는 것은 자기에 대해서 순진하고, 또 건전한 사랑과
접촉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약속하십시오. 나는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신을 인정한다. 나는 건강과 행복과 번영을 이야기한다. 나는
인종과 신앙의 어떤 것을 묻지 않고 모든 사람들 속의 신성과 아름다움을 인정한다.
나는 내일이 보다 더 좋은 날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그것에 대비한다. 나는 나의
성공에 열심인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서도 열정을 갖는다. 나는 지난날의
잘못이나 손실에 신경 쓰지 않고 미래를 향해서 즐거운 시선을 보낸다. 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시간이 없을 만큼 사랑과 봉사를 표현하는데 바쁘게 활동한다. 나는
걱정되지 않을 만큼 건전한 마음이고, 겁내지 않을 만큼 현명하고, 겁내지 않을
만큼 지성이 있고, 고난을 인정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좋게
생각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것을 널리 사람들에게 알린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것을 널리 사람들에게 알린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고 신뢰하며, 그 신뢰가 틀림이 없기를 그들에게
기대한다. 나는 좋은 것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좋은 일을 위해서
협력하고 있다는 신념 아래 산다. 나는 신이 나의 곁에 있기 때문에 나에게 반항하는
것은 무엇하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혼은 오늘날 평화에 가득차 있다. 나는 신과 그리고 모든 신의 아들과 하나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에는 적도, 이방인도, 낯모를 사람도 없다. 신의
어떠한 부분에도 나는 노여움이나 저항을 가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포함한 사랑의
원둘레를 의식하여 그린다. 나로부터 사랑과 선의가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만이 나에게 돌아온다. 모든 불안한 사고방식에서 개방되어 나는 자유이다. 내가
표현하는 신의 완전한 사랑이 모든 적의와 투쟁과 혼란을 치료해 준다. 나의 세계에서의
모든 사태, 물건, 사고는 서로 잘 조화되어 있다. 이 아늑함과 평화의 상태 속에서 나는
편안히 숨쉬고 있다."
[성공적인 결혼의 법칙]
결혼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최대의 모험입니다. 성공적인 결혼은 사랑과 상호 협력의
기대를 확실한 동기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각 배우자는 서로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혼도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하고 싶다면 남편을 얻고 싶다고 바라보기보다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싶다고 바라야
할 것입니다. 혹은 아내를 얻고 싶다기보다는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고 바라야 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소유하겠다고 바란다면 당신 자신이 좌절할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소유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소유하면 당신은
소유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당신에게 붙들어 매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붙들리어 매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주위에 벽을 둘러쌓는다면 자기가 그대로 갇혀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당신이 나를 붙잡으려고, 나를 소유하고, 나를 지배하거나 자기의 것으로
하려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빠져나갈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저절로
끌려오게 할 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끄는 것은 우리들의 태도에 달린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와 같은
종류의 삶을 끌어들입니다. 거짓말쟁이는 언제나 다른 거짓말쟁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다른 불행한 사람들과 가까워지며 행복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결혼은 일종의 협동조합 계약입니다. 인생의 모든 면에 걸쳐서 조합원 동료가 되는
것입니다. 제 15장에서, 대생명력이 그 자신을 표현하는 데 네 가지 중요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일(창조하는 것), 놀이(레크리에이션), 사랑(자기를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숭고(지적 및 영적 성장)의 네 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창조(일)의 면에서 협동하여 사업을 수행하면 그들은 창조적 활동에 있어서
조합의 동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짝이 되어 협력하면 그 결과로서 두 사람은
모두 먼저 번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전보다
많은 것을 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사무를 처리하고 배달도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외교를 해서 일거리를 맡아 오는 식으로 협동은 두 사람에게 모두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결혼에서는 두 사람이 표현의 네 가지 면에서 생애를 통해서 조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최대의 성공은 그 활동을 가장 완전하게 합쳐졌을 때에 옵니다. 물샐틈없이 긴밀히
조화되어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존경할 때에 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얻으려고 하지만 주기를 싫어하는 것이 많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결혼 생활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상담을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바른 동기에서 결혼한 사람이 매우 적은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대부분은 무엇인가의 보상을 바라고 결혼합니다. 그들이 의식을 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한 조합의 동료가 되는 것보다도 개인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낙심 천만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어떤 부인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도대체 제가 무엇 때문에 존 같은 인간과 처음부터 결혼이란 것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들은 너무나 엄청나게 서로가 달라요. 아무리 해도 이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마음이 맞아서 마주보는 일이란 무슨 일로든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어요."
그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태도에 있어서, 동기에 있어서
건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부부가 될 까닭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각자는 무엇인가 내부적으로 결핍한 것의 보충을 구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신경질적이었던 것이라고 우리들은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의 콤플렉스를 가진 부인은 열등감을 가진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뽐내 보고 싶은 자신만의 자아를 고양하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그와 같은 뽐낼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가진 남자는
우월감의 콤플렉스를 가진 부인, 누군가 자기의 머리를 숙이지 않게 잡아 버텨 줄 것
같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반년도 못
가서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 같은 일에 싫증이 납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코를 꿰어 끌려 다니는 것 같은 일에 넌덜머리를 냅니다. 만일 그들이 정신적으로
병적이어서 무엇인가 그 병적 요구의 충족을 찾고 있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그러한
상대자에게 흥미를 가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와
걸맞지 않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건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는 서로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건전한
마음이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결혼 상대자를 끌어옵니다. 흥미를 연결하는 가장 넓은 공동의 광장이 있는 경우에는
성공과 행복의 최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꼭 같은 흥미의 광장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들의 경우에는 약간의 조정만으로도
쉽게 어울릴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건전한 사람은 자기의 결함을 채워 줄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협력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아를 만족시킬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허전한 사람이 복잡한 것을 얻기
위해서 아내를 찾고 남편을 찾는 것이지 건전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성적 만족을 위해서 결혼하거나 난폭한
부모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또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들은 장래를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일하는 데 싫증을 내고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합니다. 무엇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혹은 무슨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바른 동기로 결혼하여 일, 놀이, 사랑과 숭고에 있어서, 일생 동안 조합의
동료가 될 때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의 좋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고 또 권리를 갖게
됩니다. 가령 재산을 모았다가 뒤에 실패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협력하고
일해서 다시 재산을 쌓아 올립니다. 재산을 없앤 것에 대해서 서로 싸우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조합의 동료인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해서
다른 한 사람이 신경질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모아 완쾌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올바르지 못한 목적으로 결혼했다고 하면 결혼의
목적으로 한 것이 어느 사이에 사라져 없어지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돈
때문에(그녀 자신은 그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결혼했다고 합시다. 뒤에 가서 남편이
어떤 불운으로 재산을 모두 날려 버렸다고 하면 그녀는 '이게 웬 말이야. 이젠 나의 기대는
틀렸구나.'하고 잠재의식 속에서 생각합니다. 물론 그녀는 진짜 동기는 입밖에 내지 않지만,
정신과 의사나 변호사에게 가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이에게 더 참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저에게
고통이에요. 글세 매일 아침 방 한복판에 그이는 잠옷을 마치 뱀이 허물 벗듯 해 놓지
뭐예요"
또 만일 남자가 아내에게 무엇인가 애정적으로 불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녀는 참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언제고 바깥에만 나돌아다닙니다. 집안에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란 집안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녀의 부모도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서로 '참고 견딜 수 없다.'는 진정한 이유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며 싸움을 시작하겠다는 구실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남자는 그의 아내가 치약의 튜브를 언제나 끝에서 짜내지 않고
복판에서부터 짜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더 참고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부인은 남편이 코를 골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화를 낼 만한 진짜 이유가 못됩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이유는 훨씬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좌절감을 가진다던가, 속임을
당하였다던가, 바보 대접을 받았다던가 하는 느낌을 가질 때는 보통 화를 내게 됩니다.
그 노여움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방법으로 표면에 나타납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도
노여움의 한 가지 표현입니다. 어떤 남자는 무슨 일로 자아가 움츠러들게 되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그 자아를 재건시켜 주기를 열심히 기대를 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는
'그대가 나의 원하는 일을 해주기까지 나는 그대를 물고 늘어질걸. 그대가 그걸 하기까지
나는 그대를 못살게 굴 테야.'라고 생각합니다. 잔소리를 자꾸 하는 것은 언제나
누구의 기분을 잡쳐 놓거나 마음을 엉망으로 구겨 놓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내에게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도 아내가 해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명령을
거듭한다면 그것이 바로 시끄러운 잔소리가 됩니다. 아내가 나의 요구를 알면서도 그것을
하기 싫어한다고 내가 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떻게 해서라도
아내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질 것입니다. 아내가 그것을 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도 나의 요구를 아내에게 시키려고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무시를 당했거나, 위신이 실추됐다고 느낄 때, 반응하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은, 마음이
토라져서 까다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토라진다는 것은 노여움이 활활 타지
않고 연기만 내며 타는 일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것을 '바보 인디언 콤플렉스'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태도는 지나치게 공손하지만, 마음이 토라져서 본심은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 있는가 보다고 당신에게는 짐작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그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지금의 결혼 생활을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결혼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든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올바른 것이건 잘못된 것이건 지금은 배우자와 감정적으로 맺어져 있으며
자녀들도 생겼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결혼을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방법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결혼 생활을 좋게 진행시킬 수는 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상 상담에 응하다 보니 많은 부인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나에게
가져왔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그녀들에게 둘이서 이 조합 동료 관계의 생활을
성공시키고 싶은가 어떤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녀들은 영락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요. 지금 같은 형편으로는 너무나 불만이 많지만 전 남편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녀들의 남편을 만나 봅니다. "당신은 지금의 결혼 생활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생활에는 무엇인가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공으로 끌어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 그 결혼을 성공시키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부부를 한꺼번에 만나 봅니다. 앞에서 한 사람 한사람에게 결혼은
조합의 동료 관계와 같은 것으로, 각자는 각각 개인적인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그들이 일치하지 않는 여러 점을
조정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생활의 각 부분에 있어서 생애의 조합 계약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고, 이 기구를 어떻게 설립하여 어떻게 운영을 할까 정하고
그리고 두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 분명하고 알기 쉬운 계획을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두 사람과의 면담이 시작되면 각각 네 장의 종이를 주고 거기에 일, 놀이, 사랑,
그리고 숭고 등 네 방면에 있어서, 그들이 어떻게 생활을 표현하려 하는가를 자세히
써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은 먼저 계획을 세웁니다. 어떻게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의 생활을 쌓아 올릴 것인가, 각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
때 두 사람은 다같이 중요한 존재입니다. 창조적 생활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그들의 오락을 계획합니다. 아내가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해서 남편에게도
골프를 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아내 역시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카드놀이를
친구들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만일 남자가 아내를 포함하지 않은 어떤 경기 활동을 하고 싶다면 아내도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쌓아 올린다는 점에 있어서는 두 사람은 함께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가정
생활의 계획은 무엇인가? 성장과 숭고의 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두 사람을
만족시키고 두 사람이 동의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방법에 의해서만
성공적인 결혼 생활의 프로그램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조합 관계도,
실업계의 조합 관계나 마찬가지로 계획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나는 보통 그
계획(그것을 서약서라고 부릅니다)에 두 사람의 서명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새로 출발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다시 결혼한 것이라고 나는 선언합니다.
"두 분은 서로가 남편과 아내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모두가
상대방을 조합의 동료로서 맺는 것입니다. 이제 두 분은 두 분이 세운 계획을 하나 하나
실천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제언으로서 나는 두 사람에게 오른손을 들게 하고 지난날을 입밖에 내지 않을
것과 사랑에 넘치는 협력으로써 앞에서 서명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것을 약속하게 했습니다. 이 방법에 의해서 만족하게 되지 않은 예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어느 쪽인가가 그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 예는 있었습니다. 남자가
'아니 나는 단념했습니다.' 혹은 여자가 '저는 그이를 믿지 않아요. 그이와는 조합
동료가 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합의 조합원이 되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 의사로 그 지위에 나아가지
않는 한, 누구도 당신을 조합의 조합원으로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합의 동료가 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니면 그것은 좋지
못합니다.
만일 각자가 정직하면, 만일 각자가 상대방을 소유한다던가 상급 조합원이 되어서
상대방을 부리겠다던가 하지 않고 다만 보통의 동료 조합원이 되려고 한다면, 만일
각자가 상대방과 같이 중요한 조합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결혼 생활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 계획은 모든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작용합니다. 당신은 이웃 사람을 당신 자신과 같이
사랑합니다. 당신들의 이해가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가 이 진리를 보고 그것을
승인한다면 굉장한 일이겠지요. 장사든 결혼이든 세계적인 사건이거나 간에 조합원 관계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모든 조합원의 이익이 상호적이 아니면 안돼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이익도 상호적이 아니면 안됩니다.
만일 내가 사업에 있어서 한 사람의 조합 관계의 동료를 가진다면 틀림없이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1달러를 벌면 나는 반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이익은 상호적입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상인과 손님의 관계도 같습니다. 자본과
노동의 이익도 그와 같습니다. 아마 언젠가 그러한 일이 인정될 때가 올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해 관계는 전국에 걸쳐, 그리고 널리 전세계에 걸쳐서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반드시 세계의 지도자들이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일은 협동조합 기업입니다. 이기심이라는 것은 성공적인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한 관계에 있어서는 예속이란 느낌은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진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그에게
이익이라고 믿을 때 그리고 그가 조합 동료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만 그는 진실한
것입니다. 각 개인은 어디에 그의 최대의 가치가 있는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최대의 가치는 협동 조합의 사업에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가 혼자서 갈 때 너무 먼길을 가지 못한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료가 될 것을 결정하고 조합의 계획을 세울 때는, 지난날은 결코 입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틀림없이 행복하게 생활해 갈 수 있고 건전한 기업을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결혼할 때에는 예속이 아니고 자유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생활의
중요한 영역에서 소위 '독신의 자유'보다도 훨씬 많은 자유가 기대됩니다. 이 훨씬 더 큰
자유에 도달하려면 어느 분량의 자유를 바라는 일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거리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 붉은 교통 신호에는 차를 정지합니다. 당신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지 신호의 결과로서 당신은 실지로 훨씬
많은 자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만일 붉은 신호가 없었다고 하면 안전도 자유도 거의
없어집니다. 만일 붉은 신호에서 정지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전혀 자유가 없는
신세가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얼마만큼 포기하고 훨씬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그들대로의 의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생각하게 하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로 행복하고 싶거든 상대자의 사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가 하는 대로 자유로 맡겨 둡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쪽에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예속감에서도 그들을 개방하여
자유로 해주어야 합니다. 만일 종속시켜 놓는다면 조만간 그들에게서 저항이 생길 것은
누구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조합의 동료에게는 신뢰와 존경을 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업상의 조합원 사이는
서로 신뢰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 사람의 동료가 물건을 판매하러 나간 시간에
사무실에 있는 다른 한 동료는 다른 동료가 카드놀이를 하거나 술집에서 술타령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합의 조합원 동료 관계는 의무는 아닙니다. 자기의 책임을 수행할 때를 빼놓고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조합의 조합원 관계는 특권입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바란다면 받을 뿐 아니라 주는 것을 생각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남편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조합원
동료가 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기라면 행복한 결혼 생활에의 권리가
있습니다. 거기서 당신의 인력을 세밀히 검토하고 또 분석하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나는
결혼해 볼까?'하고 물어 보십시오. 스스로를 잘 살펴보고 당신의 인격에 무엇을 쌓아
올릴 것인가를 아십시오. 자기에게 손질하여서 '나는 훌륭한 귀중품이다. 나는 이상의 사람,
이상의 배우자로부터 귀중품으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그 이상적인 상대자는 나와 조합
동료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다듬으십시오.
당신이 조합 동료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는 한 조합 동료가 될 권리가
주어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고투로서,
고투로 얻은 것은 고투에 의지하여 보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수 년 전 어느 날 밤, 나는 성공적인 결혼에 대해서 강연하고 있었습니다. 결혼하는
사람은 조합의 동료 조합원이 된다고 생각해야 하며 자기가 귀중품이라고 생각될 만큼
스스로를 손질해서 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했었습니다.
나의 강연에 언제나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던 한 여자가 어느 날 남자 친구와 함께
왔습니다. 나의 강연에는 처음이었던 그 남자 친구는 돌아갈 때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 나는 이제 할 일이 한 가지 생겼군."
그녀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 남자는 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동안
무슨 일로 한동안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녀는 1년 반 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6개월 동안이나 서신 왕래가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연이 끝난 뒤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강연에서 들은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누구와 조합 관계가 되어야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사람과 조합 동료가 되려고
생각하니 그 남자 친구가 자기에게 꼭 알맞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훌륭한 조합의 조합원으로 만들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남자 친구가
진정으로 자신과 조합 동료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열심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새벽 세 시경 그녀의 집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 전화는 어떤 시에서 온 장거리
전화였으며, 그녀의 남자 친구로부터 걸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들의 사이를 차단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느낍니다. 우리 두 사람은 하나로 맺어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비행기표를 보냈으니 우리 서로 의논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좀 와 주실
수 없겠습니까? 내가 그쪽으로 간다는 것은 지금 형편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난처할 지도 몰라서 왕복표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가겠다고 대답했고, 물론 왕복 기행기표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그녀는 그 남자 친구의 부인이 되어서 그 시에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최근의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즐거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곡예사의
재주넘기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일을 쉽게
이해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결국 생각해 보면 마음은 우리들 몸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공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그 남자
친구를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있으니까 공간을 초월해서 그 남자
친구의 마음에도 무엇인가 일어난 것입니다. 당신과 누군가 다른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같은 일을 같은 시간에 말하기를 시작한 것 같은 일이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채택의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선택하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개성을 주는 일입니다. 만일 그 선택하는 권리를 누군가에게서 빼앗는다면
그 사람은 화를 낼 것입니다.
만일, 현재 당신의 결혼 생활에 잘 어울리지 않는 일이 있으면 상대방을 재발견하십시오.
남편과 결혼할 때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당신이 존경할
만한 몇 가진가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좋은 성질을 표를 만들어
필기하여 보십시오. 그것은 어른이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결점에는 눈을 주지
마십시오. 그의 좋은 성질에 주의를 보내십시오. 당신들 두 사람의 서로 틀리는 점을
부정적인 자본으로 하여 출발한 때 고난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서로
틀리는 점이 인생을 흥미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에 당신의 흥미를
연결하십시오. 어른이 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일에 시종
치우치고 맙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어서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누가 사랑 받는 누구와 함께 산다는 것은 특권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에 소속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 사람은 관련시킵니다마는 예속을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사람에의 특권을
우리들이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사랑의 표현에서 우리들은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두 사람이 다 좋은 일이 아니면 안됩니다.
날마다 나는 사랑의 놀랄 만한 힘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을 배웁니다.
끊임없는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은(신의 사랑) 당신의 인격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우주의 사랑은 당신의 머리 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언제나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공기, 햇빛, 토양, 이러한 형태로, 그런데도
신은 무엇에 대해서도 보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신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소유한다는 것을 빼 버린,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것을 아낌없이 방출하십시오. 당신에게는 나누어 받은 몫도 많고 나누어 줄 것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사랑의 우물이 마르는 날은 절대로 없습니다.
자기는 누구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고 친구도 없다고 생각하는 결여감 속에 있는 깊은
콤플렉스는 거부하는 것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당신이 무엇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아마 그들은 그런 것은 생각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고 있으면 당신이 생각하는 일이 바로 그것인 것이므로 그것은 당신의 신념에
따라 당신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즉 지레짐작하는 당신의 그 병을 고쳐야 합니다.
나이에 대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당신의 외관이 늙어 보이기 때문에 언제나 당신에게
손해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떨어버리십시오. 경쟁의 관념을 버리십시오. 당신 자신에 신념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의 일이라도 당신에게 돌아와서는 곤란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말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제 12장 36절, 37절에 보면, '어떤 실없는 말을 하든지.' 당신은 이
말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이해 대한 심판을 받으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말에 의해서 우리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림, 즉 영화를 만들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판결을
받습니다. 그 판결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자연법이 작용한 단순한 결말인 것입니다.
결코 다른 사람을 개혁하거나 바꾸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그가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보려고
합니다. 자기의 결점과 죄악감, 피해 의식 같은 것을 그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사고 속에 있는 모든 종류의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점을 덮어 버리고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의견을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을 개혁하겠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개혁이 필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가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가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을 개혁하여 고쳐 주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덕적인 노여움, 다른 사람들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상대방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몸안에 청소를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우리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는 그런 생각은 잘못이며 고쳐야 하는
나쁜 일로서 개혁한다고 하는 생각은 우리들 자신의 결핍감이나 내부적인 불 만족감을
그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거운 짐에서 자기를
구제해 내려고 시도하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이기적인 동기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잘 덮어 씌워도
눈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숨겨 보았자 헛일이며 오로지 사랑만이 그것의 참된 회답일
뿐입니다.
미소로써 따뜻하게 우정이 담뿍 담긴 선의를 베푸십시오. 악수를 할 때는 당신의 우애가
당신의 손을 통해서 상대방의 손으로 전해지고 그가 그것을 느낀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나의 친구여, 당신에 대한 나의 좋은 느낌을 나는 의식하고 있다. 이 악수를 통해서
당신은 그것을 느끼고 그리고 나의 미소에서 그것을 볼 수 있으리라. 우리들의 이익은
상호적인 것이다. 서로 이해하자! 우정이 우리들 각자로부터 나가고 또 각자에게로
되돌아온다."
[구애를 위한 정신적 조처의 하나]
"나의 눈은 모든 사랑스러운 것을 위해 열려 있습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나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나의 마음은 사랑에 응답합니다. 나는 신의 위대한
사랑으로 하여금 몸안에 넘치게 하고, 사람들을 접촉함으로써 그에게 흘러가 그의 병을
고치게 하고 축복을 해주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수한 갈래의 길을 통해서 다시
나에게 흘러 돌아옵니다. 나는 모든 인류와 마음, 육체, 영적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것만을 보고, 사랑의 음악만을 듣고, 또 사랑의 말만을 말합니다. 나는
사랑의 구현입니다."
"나는 거짓 예언을 듣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에게 바른 친구만이 나의 인생을 완성시켜 주고, 내 속에서 완전함을
찾아내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나는 바른 인간입니다.
나의 사랑은 지상의 먼 끝에 있는 사람도 끌어오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랑의 법칙은 바른 행동만을 가져옵니다. 이상을 향한 사랑은 완전한 나의
길동무, 내가 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나를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을
나에게 데려다 줍니다. 나는 신의 무한한 선의에 신념을 둡니다. 나의 사랑은 확실하고
순결하고 참된 사랑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럼으로써 나에게도 좋은 것만이 돌아옵니다. 대생명력으로 하여금 나에게 사랑을
가진 사람을 반드시 올 것을 나는 신념을 갖고 기다립니다. 그것이 대법칙입니다.
"사랑은 결코 그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h:마음을4e
[26 강인한 인격을 어떻게 쌓을 것인가?]
인격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이 다른 사람과
교신하는 수단입니다. 인격은 진짜 그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을 보고,
접촉하고, 듣는 한은 그 사람입니다. 인격은 대생명력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당신은
인격을 통해서 표현되는 무한의 대생명력입니다.
대생명력은 다채로운 여러 가지 소질과 동적 재능 같은 것을 모두 가지고 당신으로
화신한 것이며, 무한한 대생명력이 당신으로 화신한 것이며, 무한한 대생명력이 당신으로
인격화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당신의 상상력을 통해서 대생명력의 이러한 소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몸안의 활력으로써, 또 외관상의 매력으로써, 개인적 위력으로써, 또
전인격의 자력으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격은 진정한 자기를 표현하는
도구 또는 통로입니다. 만일에 당신의 인격이 색채가 없는 볼품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대생명력의 소질을 극히 한정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색채가
눈부시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또한 힘찬 인격이라면 당신은 대생명력의
무한한 소질을 한층 더 풍부하고, 한층 더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성격에 충성, 진실, 정직, 재간, 침착, 호의, 정중, 아름다움 등
무엇인가의 특징을 쌓아올리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자기의 좋지 못한 경향을 없애고
그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대로의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완전한 인격의 모든 요소가 이미 당신의 속에 있으며,
이들 요소나 특질은 그 어느 것이나 당신이 채택하는 데 따라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이 체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어떤 적극적 특질을 표현하겠다고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채택의
힘은 당신 속에 있습니다. 대생명력과 그 자세를 전부 활발하게 표현하면 할수록 당신의
인격은 한층 더 위력을 가지고 동적이며 자력적인 인격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의 사랑, 대생명력에 대한 사랑은 당신의 눈을 통해서, 목소리를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당신 내부의 행복은 고요하고 우정에 찬 미소에 나타납니다.
당신의 선의는 굳센 악수에 의해서 표현됩니다. 당신의 자기 평가는 깨끗한 인격과 매력
있는 개성에 의해서 표현됩니다. 이러한 내부의 성질을 활발하게 하여 그것을
자동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인격 그것에 있어서의 객관적 변화를 만들려고 하기보다도
훨씬 좋은 방법입니다. 가령 당신이 실제로는 행복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쾌활을
가장하고, 또는 마음 안에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발걸음에 용수철을 단 것처럼 힘차게
걸으려고 하면서 객관적 변화를 조작하기보다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내부의 힘은 상상력에 의해서 방향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이랬으면 하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상상하십시오. 분명하고 뚜렷하게 세부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영상을
만드십시오. 활력이 있고 매력이 있고 자력적이며 위력적인, 그리고 현명한 채택을 하는
당신 자신을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포근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고 자신감이 있고,
당신도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당신 자신을
보십시오. 이 이미지를 계속 마음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 이미지는 이내 현실의 모습을
갖추고 당신의 체험 속에 형성될 것입니다.
건전한 사람은 늘 상대방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웃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생명력에
반항하고, 화를 내고, 그것과 싸웁니다. 하지만 훌륭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대생명력을
사랑하며 열의를 가지고 자기를 대생명력에 맡깁니다.
잠깐 이런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손으로 땅에 심은 작고 까만 나팔꽃 씨앗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씨앗은 대생명력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중심입니다. 그 씨앗
속에 한 식물의 형이 있습니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흙, 물, 광물, 공기, 일광 등 모든
생산의 요소는 그 씨앗 위에 모여 씨앗에 흘러들어 갑니다. 씨앗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고 모두 와서 씨앗을 돕고, 자연계는 그의 계획, 즉 하나의 창조에 따라 꽃이 피는
식물을 완성하는 것이며, 씨앗은 그 운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역시 대생명력이 그를 통해서 스스로를 표현하려 하는
하나의 포인트입니다. 사람은 씨앗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효과적인 훌륭한 인격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니 씨앗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씨앗으로 흘러 들어가 꽃을 피우는 것처럼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그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고 어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도 또한 자연계와 좋은 흙과 그를
사랑하고 그와 협력하며 그에게 좋은 것을 갖다 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대생명력은 그에게 봉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씨앗은 말없이 받아들이는 데 사람은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논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환경과 싸우지 않습니다. 거슬리지 않고 화내지 않고 싸우지 않습니다.
무서워하거나 도피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흙에 주어 버리고 모든 일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하기로 계획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생명력이 그것을 통해서, 씨앗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가끔 두려워합니다. 도피하려 합니다. 그는 협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대생명력은 그에게 좋게 대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이 그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좋은 것으로부터 그는 달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 저항할 때 자신의 주위에 성벽을 쌓아 대생명력이 좋은
것을 그에게 건네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씨앗보다도 훨씬
은혜 받은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유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채택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는 훨씬 쾌적한 환경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씨앗은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뿐이니다. 우리들은 씨앗에서 교훈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약진하는 힘을 가진 힘찬 사람은 대생명력이나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합니다. 자기를 둘러싼 좋은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것을
봅니다. 발전적인 사고를 합니다. 대생명력에 있어서의 그의 의도는 진실합니다.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대로 주어지는 무한의 착한 대생명력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좋은 것에 대한 적극적인 신념에 의지하여 지탱됩니다.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진 인간입니다. 푸근하고 여유가 있으며, 친절한 태도를 가집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들을 돕는 것을 언제나 즐겨 합니다.
여기서 나는 어떤 부인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60세가 넘었지만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나도 저절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젊은 시절에 커다란 비극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고로 약혼한 남자를 잃고 그녀 자신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녀는 5년 동안이나 어두운 방 속에 누워서 사람을
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고, 마침내 세상에
봉사를 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를 바칠 결심을 하고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보다
더 밝고 영광에 차고 약동적인 그러면서도 침착한 사람을 만나 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친구인 J.H로부터 꼽추로 태어난 한 소녀의 눈물겨운 미담을 들었습니다. J는
미술가 지망생들에게 통신 교수를 해주는 학교를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교재를 파는 일인데, 어느 날 올리버라고 하는 한 부인으로부터
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가 보았습니다. 그녀의 17세 되는 딸이 교재를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기 딸은 미술에 재능은 있었지만 매우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신경질적이고 우울하며 비통한 마음이 되어 집에서
나가는 일은 거의 없고 자기는 세상에서 따돌려졌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소녀가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꼽추라는 것이며, 그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비뚤어져
인생에 대한 태도는 빈정거림으로 꽉 차 있으며, 가족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J는 미술가일 뿐 아니라 정신과학의 진지한 연구생이었습니다. 그는 정신의
위력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가장 특수한 방법으로 구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J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심술궂고, 무뚝뚝하고 사람을 믿지 않으며 또한 투쟁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그녀가 분명히 흥미를 나타내는 미술에
대해서 지도해 줌으로써,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에마였는데
그녀는 자기를 싫어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이름까지도 매우 싫다고 짜증을 내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현명한 J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 이름을 바꿉시다. 어떤 이름이 마음에 듭니까? 어떤 이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그녀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패트리시아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좋고 말고요. 이제부터는 당신의 이름을 패트리시아로
합시다. 패트리시아 올리버,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어머님과 의논해서 법률의
절차를 밟아 개명하기로 합시다."
그녀의 어머니도 협력적이었으며 이윽고 에마의이름은 곧 정식으로 패트리시아가
되었습니다. 이 일만으로도 그녀는 놀랄 만한 변화를 보였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아름다움과 동일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끼고
행동했습니다.
J는 내가 쓴 책을 비롯해서 몇 권의 책을 그녀가 읽도록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갔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패트리시아와 J는 창조한는 정신의 위력에 대해서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J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트리시아, 당신은 이제 그렇게 귀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이름을 가진 소녀는 당연히 이러한 자세일 것이라고
당신에게 생각되는 초상을 유화로 그려보면 어때요? 물론 당연히 당신 자신의
초상입니다.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이 당신을 닮은 육체적
특징에서 비쳐 나오도록 그려보십시오."
패트리시아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몇 달이나 걸려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냈고 수정할 때마다 초상화는 더욱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녀가 심오하고 참된 자기를 깊이 탐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패트리시아의 초상화가 미술 전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패트리시아는 전혀 새 인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인가 지나
그 소녀의 모든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눈부실 만큼 밝은 성격의 사람이 되었고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에 진출하여 유행 예술가로서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녀의 성공은 어느 사이에 확고한 것이 되었고, 그녀의 화실에는 언제나 그녀의
애호가들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J는 그녀와 교우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새로운 친구들은 패트리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자세히 지켜보면 패트리시아는 정말로 육체의 결함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너무 밝고
화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녀의 결점을 몽땅 잊어버리게 된답니다.
그녀의 내부의 아름다움이 태양처럼 빛을 내고 있는 거죠."
잘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보기 싫은 인격적 특징의 껍질로 자기 자신을 싸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인격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1812~1889)은 말했습니다.
"진리는 우리들 속에 있다. 당신이 무엇을 얻든지 바깥의 것으로부터 그것이 고양되는
일은 없다. 우리들의 모든 것에는 저마다 심오한 중심이 있으며 거기에 진리가 완전한
터전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는 벽이 층층 에워싸고 거친 근육이 그것을 가두어
놓고 있다."
그리고 브라우닝은 또 말했습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오히려 이 유폐된,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 안에서부터
빠져나가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밖에 있다고 생각되는 빛을 위해서
입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이미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몸안에 있으며, 우리들은 그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조그마한, 아니면 엄청나게 많은 것을 구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건전하고 발전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완성이라든가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을 잡아다가 꽁꽁 묶어 놓습니다. 그 사람의
인정 없는 생벽의 그물로 자기 스스로를 열 겹 스무 겹으로 둘러싸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우리들의 과제는 사고와 행동 위의 나쁜 버릇을 좋고 온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바꿔 놓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습관과 버릇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본능적으로 아는 일은 우리들 내부의 지도력이
행동으로서 완전한 방향에 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귀를 기울입시다.
당신은 사고의 버릇에 의해서 속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지
않으렵니까? 당신의 진정한 내부의 자기는 지혜와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당신
자신을 신성의 실제로써 인정하면 자기의 생활에 방향이 정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고와 태도와 신념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체험의 속에 좋은 것을 가져올
것입니다.
따뜻한 웃음을 띄고 눈을 통해서 사랑과 선의를 표현하는 당신 자신을 상상하십시오.
다음과 같이 자기에게 정성껏 말하면서 다른 사람과 인사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상상하십시오.
"나의 눈, 미소, 악수는 나의 호의와 우정을 그에게 알린다. 나의 인격은 건실한 좋은
느낌과 이해를 표명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나의 호의를
느끼리라. 나의 좋은 외모는 상대를 끌어당기며 나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곁에 있으면 그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가장 즐거운 곳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나는 자신감이 있고 정중하고, 재간이 있고, 친절하고 쾌활하고 열성이
있다. 내가 곁에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열심히 듣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고 그들의
고난에는 동정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선택하는
바와 같이 달성되게 한다. 나는 지배와 통솔을 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우정이 있기 때문에 친구를 이끌리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과 권리를 존중한다. 어떠한 사태에도 좋은 일이 올 것을 기대한다. 확신에 찬
악수를 굳게 한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자력적이고 왕왕 울린다. 나는 품위가 있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나의 외관은 내부의 자신감과 힘을 반영한다 몸의 각
부분은 깨끗하며 결점이 없고 인간적 자력이 맥박치고 있다. 언제나 손질이 완전하게
되어 있다. 옷을 입을 때는 주의 깊고 현명하게 선택한다. 그것은 조용하고 침착하며
강한 인격을 반영한다. 나는 성실하고 정직하다. 나의 상상력 속에는 나의 이상적인
인격의 뚜렷한 그림이 있다. 나는 그 이상을 나 자신으로 깊이 생각한다."
[27 새로운 습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우리들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말하는 것을 배웁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배웁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에게 습관이라는 것이 붙지 않았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차를 운전할 때 어디에 어떻게 앉는가를 잊어 버렸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습관을
붙이는 능력이 우리들에게 없다고 한다면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동시에
자기의 다음 활동을 계획하는 일 같은 것은 도저히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가지 일을 배우면 그것을 잠재의식 혹은 몸안의 신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부터 일일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동적인 습관과 행동은 정신 기구의 놀랄 만한 능력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를 운전하는 일, 걷는 일, 쓰는 일을 배울
때는 그 조작 방법 하나 하나를 의식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배우고 난 뒤에는 몸안의
잠재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 뒤부터는 잠재의식이 버릇으로서 우리들의 몸을
사용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의 버릇을 의식적으로 새로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습관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여 봅시다.
사람은 자유 의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이건 채택하는 대로 자기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일이나 하는 일에서 좋은 버릇이나 나쁜 버릇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의 힘을 파괴적으로 사용한다면 결과는 괴로워해야
합니다. 모든 악덕은 도덕의 안팎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
모두는 무엇인가 좋은 일을 잘못된 방법으로, 혹은 잘못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념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에게 거슬리는 연모의
정을 잘못된 목적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고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대생명력의 위력에 잘못된 방향을 주도록 상상력을 써서 실패의 체험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의식적 사고는 신념이나 사랑이나 상상력을 건전한 방향으로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몸의 힘이나 팔의 힘을 누군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도, 또는 그 사람을 도와 일으키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건설적인 습관을 만들 수도 있고 또는 파괴적인 습관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습관을 만들어 내는 일은 우리들이 지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습관에 지배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나는 들었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습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한 습관에 지배되는 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만든 것은 정신이 고쳐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습관 없이는 살 수도
생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습관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습관이야말로 우리들의 심부름꾼이 돼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건설적인
습관을 쌓아 올렸을 때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습관이 우리들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바꾸는 데 필요한 수단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으로부터 주어진 선택의 권리를 소홀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몸안에는
재 방향을 돌려놓는 힘과 몸안의 창조하는 힘을 의식적으로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대생명력에서 후퇴하여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므로 나는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함을
표명하는 말입니다. 채택하고 결정하는 각자의 힘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술주정하는 습관을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누구도 원래부터
술고래는 아닙니다. 그는 사실은 채택의 위력을 가진 완전한 인격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나쁜 습관에 빠진 것입니다. 그가 시작한 일이므로 그가 그것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습관은 그 사람 자체의 한 부분은 결코 아닙니다. 낡은 길목에서
그대로 제자리걸음을 할 것인가, 새로운 길을 열고 전진할 것인가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기적인 사람이란 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돌보지 않고 손에 넣으려고 하는 악습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원래 오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뽐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실패한 영락자는 없습니다. 실패를 습관처럼 가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게으름뱅이는 원래 게으름뱅이가 아닙니다. 흥미를 느낄 만한 건설적인 활동을 아직
그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가리는 힘, 생활의 방향을 고쳐 잡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좋은 것이고 다른 얼마쯤은 바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충고를 해 둔다면 당신은 절대로 습관을 무리하게 파괴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보다도 새로운 습관으로 바꿔 놓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무리하게
습관을 파괴하려고 하면 습관 편에서 도리어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바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당신 본래의 힘을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떤 습관이라도 없앨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소년 시절에 썰매를 타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간 일은 없습니까? 먼저 썰매를 언덕
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눈 위에 내려놓고 잘 미끄러지지 않는 것을 눈 위에 자국을
만들면서 밀고 갑니다. 다시 한 번 언덕 위로 가지고 올라가면 이번에는 썰매는 이전의
자국을 따라서 먼저 보다는 쉽게 빨리 내려갑니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자국이
굳어져서 썰매가 지나가는 훌륭한 길이 됩니다. 그 뒤는 언덕 위로 가져가서 그 길 위에
썰매를 놓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노력도 없이 썰매는 저 혼자서
길을 따라 미끄러져 갑니다. 그러나 맨 첫 번째에는 의식하여 방향을 잡는 것과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얼마쯤 참고 견디는 일도 필요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무엇이나
골라잡았다면 그것을 위해서 자국이나 길을 내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낡은 자국이 당신을 고난에 빠뜨린다던가, 또는 지금까지와는 틀린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든지 하고 생각할 때에는 의식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두뇌 속에 바야흐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생리학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뇌와 신경 계통에 육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아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신경은 전선줄입니다. 지각 신경은 정보를 두뇌에 전달합니다. 그렇게 하면 운동
신경은 근육에게 행동하라는 통신을 가지고 서두릅니다. 신경이 뇌의 어느 부분에 정보를
가져오면 그 정보는 다른 부분에 보내지고 거기에서 분석되어져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 내리는 것입니다. 이 결정은 중뇌에 보내지고 중뇌는 어떠 어떠한 방법으로
행동하라는 지령과 함께 이것을 근육에 보냅니다. 이러한 것이 간단하게 한 도식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떤 일을 말했다고 합시다. 그 정보는 귀로 들어갑니다. 그 정보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분석하여 어떠한 회답을 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이 정보는 어느 뇌
중추에 가고 거기서 지령이 음성 기관의 중추에 중계되고 어떤 일을 어떤 방법으로
말하도록 명령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명령은 안면 근육에 가서 얼굴을 찌푸리도록, 혹은
미소하도록 명령할지도 모릅니다. 뇌에 들어오는 정보 하나에 대해서 대답하는 방식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미워하던가, 도피하던가 그것에
맞서거나입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그것과 싸우는 것도, 혹은 무엇인가 의견을
진술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채택하는 가능성은 무한으로 있습니다.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는 것은 당시의 추리력, 감정, 지난날의 경험, 그 외에도 많은 인자들이 결정에 작용을
합니다.
지난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그것을 분석하고 결정을
내려 어떤 행동으로 나갔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와 같은 일을 또 겪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처음과 똑같은 명령의 말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행동을 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의식의 활동도 적습니다. 이것은 습관의 흔적이 뇌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차차 의식을 덜 쓰면서 같은
명령을 자동적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습관은 자동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의식을 수반한 채택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신경 학자는 섬세한 전기적 연계가 뇌
속에 있고 정보가 들어오는 한 점으로부터 명령이 나가는 한 점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 습관이 이루어져 버리면 의식적인 사고는 필요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을 저절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또
습관에 따라서 그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의 두뇌 속에는 그러한 연락 방법이 몇 백만 개씩이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기구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을 보면 얼굴을 찌푸리는 습관이 당신에게
있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얼굴을 찌푸리면 지금까지 좋은 결과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습관을 고치겠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을 보면 찌푸린 얼굴을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지만 그때는 조심하게 됩니다. 그 충동이 옛날에 닦아 놓은 길을
차단시키고 새로운 연계를 만들어 시작합니다. 그래서 웃으라는 새 명령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만날 때 웃는 일이 처음보다 쉬워집니다. 그러는
동안에 새로운 연계 작용이 생겨서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한동안은 조심스럽게 의식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상태가 지나면 마침내는 옛길은 차단이 되고 의식적 사고 없이도 새로운 길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위스키를 과음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썰매'를 몇 번이나 과음의 길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마음의 썰매를
과음의 길로 몰고 미끄러져 내려갔기 때문에 그 길은 반들반들하게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끔 '썰매'는 통제력을 잃고서 도중에서 눈 더미 위로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술을 조금만 마시자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만사가 다 그렇듯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서 그가 하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집을 나와서 술친구들과 어울려 정말 조금만 마시고 나면 금방 취기가 돌아서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게 됩니다. 내 마음을 억제할 깃이 없습니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어떻게 걷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조금만 마시고 그런 소란을 중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왜 그렇게 되는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우리들은 이 문제를 '썰매'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썰매'를 옛날의 낡은 길을 따라 조금만
밀었던 것입니다. 그 썰매가 저 아래까지는 내려가지 않고 조금만 가다가 멈춰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길이 너무나 반들반들하고 잘 미끄러져서 썰매가 멈추어
주지를 않고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던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그 길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옛길은 잊게 되면 과음할 위험이 적어져서 한 잔만
마시고도 그만둘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래도 위험하니 한동안 술을
마시는 '썰매' 길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데는 그렇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일을 우리들은 확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식의 종교에서 확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의심을
가지지 않고 믿는 일입니다. 사람이 확신을 할 때는 결심을 한 것이 됩니다. 그래야만
그는 새로운 행동 계획의 출발입니다. 결심이 서지 않으면 낡은 길의 답보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결심하고 난 뒤에는 새로운 길이 닦아지고 충분히 미끄럽게 될 때까지 그
길을 애써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새 길도 옛 길처럼 쉽게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의 다른 설명을 한다면, 활력과 건강의 표본 같은 친구를 당신이 만났을 때,
그는 그 건강을 매일 아침 냉수 마찰을 하는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고 합시다. 그의 말을
듣고 매일 아침 냉수 마찰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당신이 생각하게 된다면, 그
친구가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효과를 당신도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결심하게 됩니다. 다른 친구에게도 냉수 마찰의
습관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거기에서 의논하고 채택합니다. 결국에는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결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은 계속하여 효과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욕구하는 일에 좋은 결과가 있다고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심을 하면
감정의 에너지를 그 방향으로 해방하게 됩니다. 결심은 이미 일을 반쯤 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결심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내일 아침부터 나는 냉수 마찰을 한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자명종을 15분 빠르게 감아 놓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누군가 약속을 어길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공언하여 약속합니다. 그것은
마치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에게 약속합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바로 자기에게 인상을 강하게 넣어 주려고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당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기회에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이 결심하였으면 당신 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그 결심에 찬물을 끼얹어
그만 두게 하기 전에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시작하는 날을 자꾸 미루면 미룰수록
그것을 시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결심한 뒤에 길게 끌고 있으며 미루는 것이 습관으로
됩니다. 자기에게 변명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너무 춥다.'라든가,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하는 따위의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오늘이 그날이다.'하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최초의 냉수 마찰을 한 것은 오랫동안의 현안을 실행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에는 몸이
벌벌 떨렸습니다. 그러나 이튿날은 조금 쉬워지고, 그 다음날은 훨씬 쉬워졌습니다.
계속함에 따라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집니다. 아직 몸 속에는 낡은 습관을 그대로
계속하려는 부분도 있어서 그것은 '생활을 어째서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하는
거야?'하고 말썽을 부릴 것입니다. 사흘째의 아침쯤은 '오늘은 마음놓고 편안히 쉬어
볼까?'하며 중얼거려 질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에
걷던 길을 걸어가는 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습관을 만드는 데는 이렇게 하는
것이 긴요합니다. 누구라도 대상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른 일을 할 때에는 만족감을 얻을
권리가 있습니다. 출발이 잘 되었을 때에는 자기에게 무엇이나 한턱 내십시오. 우리들은
모두 인정되고 감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십시오. 캔디를 한 상자 산다던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한턱을 낸다는 기분으로 감사의 뜻을 표명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새로운 습관을 만들 때 밟는 대강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냉수
마찰을 하는 일이거나 낙천적인 인간이 되는 일, 정직하고 유쾌하게 사는 일, 선량한
인생을 보내는 일, 그 어느 것에나 통하는 일입니다.
확신-새로운 습관이 바람직하며,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
결심-시작을 하겠다는 결심. 준비-시작을 위한 준비. 시작-행동의 개시. 지속-행동이
자동적으로 될 때까지 계속한다. 감사-자기를 찬양하고 위로하는 것. 자기에 대한 감사.
달성의 기쁨을 가질 것을 자기에게 허락한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과학자이며 문필가였던 프랭클린(1706~1790)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매주 하나의 새로운 습관을 정해서 실천했습니다. 어떤 주에는 청결, 다음 주에는
절제, 또 다른 주에는 쾌활이라는 식으로 차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때로 예전의 낡은 습관의 길에 되돌아가서 고난과
실패를 부르는 일이 있다면 그러한 일을 계속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달에 한 가지나 또는
일년에 한 가지를 하더라도 한 가지 새로운 습관을 확립하여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상상속에 분명히 보고 의식하여 과학적으로 착수하여
간다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보십시오.
"나는 내 인생을 지배하도록 되어 있다. 무한의 대생명력이 인간적 존재로 된 것이
나이기 때문에 나는 창조자이다. 대생명력은 신, 즉 신성을 표현하기 위한 지각하는
포인트로서 신의 재능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낡은 습관과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목적과 명료한 시력을 가지고 더 좋은 일을 위해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겠다. 지난날을
회고하거나 옛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안다. 나의 행동은 자유롭다. 대생명력의
능력은 내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내가 지령하는 것이다. 감정의 힘은 내가
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신이 가진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대생명의 위력은 나의
선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의식하여 선택하는 힘이 있다. 행복, 번영,
건강에의 길을 지향할 수가 있다. 새로운 행동 계획을 가지고 출발하면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질 때까지 지속하겠다."
"천국(극락)을 구하면 병도 가난도 저절로 물러난다. 노여움은 없어진다. 자기 통솔과
침착성을 성격의 일부로서 확립했기 때문이다. 증오나 질투는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사랑과 자기 감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운명의 결정자이고 내 영혼의 주인이다. 모든 일을 신을 통해서 수행하기
때문에 나는 강력하다. 신은 내 속에 사는 신성 있는 위력이다."
"나는 채택하는 힘, 행동하는 힘을 가진다. 대생명력 속에 있는 소질, 활력, 이해, 지혜,
평화, 위력, 미, 환희 등 모든 것을 대생명력으로부터 끌어내는 특권을 나는 가지고 있다.
이제는 제한된 생각을 버린다. 결핍된 사고는 조금도 없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다. 또 신을 내 힘으로 받아들여 수행할 수 있다."
[28 젊음을 간직하는 마음]
대 생명력은 결코 늙지 않습니다. 대정신도 혼도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것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젊다는 것은 대생명력의 본질이고 게다가 우리들은
대생명력이므로 늙어서 쇠잔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지구 위에 살아 있는 동안 젊고
활기가 넘치고 활동적일 수 있도록 마음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를 떠날
때가 가령 몇 살이 될지라도 오히려 젊음을 느끼고 있다고 할만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대생명력의 개성화된 포인트입니다. 정신을 쓰는 우리들은 늙은 것처럼 보이는
육체를 오늘까지 자신이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육체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몸은 부단히 갱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과학자는 우리들의
육체 조직에는 1년 이상 묵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일찍이 육체는 7년마다 갱신
된다고 들은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정신이 잠재적으로 활동을 해서 몇 개월마다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준다고, 신뢰할 수 있는 학자가 보고한 바 있습니다. 모든 신경,
선, 뼈, 근육 등은 1년 동안에 새로운 세포로 재 건조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조직은
언제나 젊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시각에 쓰고 있는 조직은 한 살 난 어린이의
것처럼 젊은 것입니다. 정신은 늙지 않습니다. 정신은 오직 하나뿐인 무한의 정신을
개인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한 살 이상 나이를 먹는 일이 결코
없으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젊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에 의하면 나이를 먹었다고 하는 체험은 그렇게 마음먹은 사람들의
탓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어 줍니다.
대체로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연령에 대해서의 우성적인 형, 즉 연륜이 쌓여 감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이 받아들이는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청년과 같은 마음의 상태로 간직하면 그 사람은 청년의 자발성과 활발성과
건강 등의 체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청년의 사고방식을 잃고 노인의 습관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청년과 같은 태도와 외관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청년의 모습은 우리들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이 먹었다고 해서 그 때문에
지각을 둔화시키거나 창조적 활동을 그치지 아니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보기만 하여도 젊고 싱싱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글래드스턴(1809~ 1898)은 85세에 영국의 수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미술가
티치아노(1490~ 1576)는 90세 때 일생의 가장 좋은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미국의 법학자 호움즈(1841~1935)는 80대에 미국 최고 법정의 의자에 앉았고, 90대에
'무엇인가에 신념을 가질 때 당신은 정신적으로 젊음을 간직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청년의 자세를 간직한다는 것은 어떤 특징을 갖는다는 것일까요?
청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청년의 한 특징은 야심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젊다 하더라도 만일 그에게 야심이 없다면
그는 이미 노인입니다. 연령으로는 노인일지라도 만일 야심이 있다면 그는 정신에 있어서
아직 젊은 것입니다. 이미 건설이나 창조나 성장을 바라지 않게 되면, 그저 표류하는 대로
그날 그날을 보내는 데 만족하게 되면 그는 늙음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
가진다는 일에 욕구가 없어지면 그는 노인입니다.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야심이 없는 사람
들보다 한결 오래 살고 해마다 뜻이 깊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더욱 완전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에 지쳤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싫증이 났다, 지나간 해도 오는 해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데 지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형에 박힌 듯 구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매력이나 스릴이 있는 목표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생에 진절머리를 내는
것입니다. 당신이 몇 살이든 삶에 열의를 가지려고 한다면,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목표를 언제나 가져야 합니다.
청춘은 다채로운 체험을 가집니다. 연령에 따라 그 체험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넓고 다채롭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벗을 만들고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롭고
또한 재미있는 행로를 찾아 모험해야 합니다. 단조로움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늙게
만듭니다. 변화는 인생의 향료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히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며, 그 밖에는 어떤 것이고 영구히 변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랄 만큼
흥미에 차 있는 우주 안에서 대생명력으로 하여금 단조롭게 만들어 둔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청춘은 성형하고 적합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에
반항하기보다는 그것에 순종하여 진행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무와 같이
탄력성이 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강하지 않고 아래쪽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반발합니다. 마음과 몸을 활동시키지 않으면 당신은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의 타이어처럼
금방 질의 저하가 되는 것입니다. '사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잃어 버려라.'하고 자연계는
말합니다. 사용하는 일, 활동하는 일과 바꿀 수 있는 대용품은 없습니다.
청춘은 언제나 새로운 사고의 문호를 개방해 놓고 있습니다. 그 위에 다시 그 새로운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모험을 겁내지 않습니다. 예감과 직감, 내심이 지혜에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험을 하고 난 뒤에는 비꼬임에 기울어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젠가 지난날에 있어서 손해를 본 일이 있었다는 것만의 이유로
새로운 생각은 위험하다든지, 성공할 수 없다든지, 야심을 가지지 말라든지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조금도 위축될 것은 없습니다.
주목할 만한 목표를 마음에 묘사함으로써 풍부하고 만족한 장래를 내다보는 습관을
기르지 않겠습니까? 현재를 즐기고 장래의 유쾌한 예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나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예전의 즐겁던 때'의 일을 생각하고 또 자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젊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실패는 물론이고 지난날의 성공에
대해서도 커튼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 성공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장래에 다시
더 큰 성공과 만족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서 손을 뻗음으로써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나이든 사람의
단점은 패기가 없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나이먹은 사람들도 생산적 작업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젊은 사람은 희망적인 태도에 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춘은 언제나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보며 전진합니다. 누군가가 '희망이 죽으면 늙음이
달려든다.'하고 말했습니다.
다음의 생각을 종이에 적어 책상 위나 또는 세면대의 앞 벽에 붙여 놓고 때때로
읽어보십시오.
"나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인다. 내가 믿는 일, 내가 생각하는 일은 정지하고 있지
않다. 이 우주는 확장과 성장의 세계이다. 그것이 나의 본질이기도 하다. 나는 이 본질에
충실하다."
청춘은 이해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청년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청년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지 않습니다. 결점을 찾는 것은 나쁜 습관,
늙기 쉬운 습관입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찾을 때 그들은 좋은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당신을 알고 당신이 나를 알면 만일 우리 두 사람이 똑똑히 본다면 그리고
내부의 신성의 시력을 가지고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의 의미를 알게 되면 우리들의
어긋남은 정녕코 적어지리라. 그러므로 우정으로 손을 맞잡자. 우리들의 생각은 즐겁게
일치한다. 만일 내가 당신을 알고 당신이 나를 알며.
극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의 확실할 정도로 색채가 있으며, 따뜻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력적이고 동시에 비판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보아주는 사람을 우리들은 가장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최선의 것을 찾아보면 그들은 무엇인가의 최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우리들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끌립니다. 우리들의 좋은 점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다면 그들의 행동에 있는
좋은 의도를 인정해야 합니다. 결점을 찾기보다는 보물을 찾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
어느 것도 습관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늙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젊어지게 만듭니다.
청춘은 진보적이고 연구가 많고 전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청년은 쉽게 변화를
일으킵니다. 습관의 그물로 자기를 굳게 얽어 놓으면 늙습니다. 습관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필요하면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습관에 다루어지지 말고 습관을 다루어야
합니다.
청춘에는 '열심'이 있습니다. 열심(Enthusiasm)은 신성을 가진 취기라고 합니다. 'en'은
'속', 'thefts'는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enthusiasm'은 '신의 속', 즉 당신의 속에 있는
신의 지식 또는 신의 속에 있는 당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깨어지지 않는 불사,
그리고 신성의 것입니다. 청년은 그의 생각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노년은 기운이
가라앉는 시대입니다. 청춘은 열정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노년은 눌려 뭉개지고 민감하고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청춘은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보고 있습니다.
청춘은 사랑 속에 있습니다. 사랑은 젊어지는 위대한 약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사랑이
없으면 불행입니다. 대생명력이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사랑을
살려 두며 죽여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에 응답을 하건 않건 사랑 속에 사십시오.
몸안에 사랑의 감정이 움직이고 있으면 모든 병을 고치고 희망을 되살려 줍니다. 사랑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당신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을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특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도
사랑하십시오. 사람들, 자연, 당신의 일, 생각, 이상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신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일은 당신 최대의 특권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체험에 잘못된 체험을 주면서 대생명력의 속을 걷는다고 하면, 우리들
자신을 저주하고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습관을 몸에 지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주하는 사람은 단단하고 취약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생명력은 반항적입니다. 그 까닭에 육체적
및 심리적인 장애를 일으킵니다. 비난과 노여움은 몸에 독을 끼칩니다. 그 독은 천천히
조직을 파괴하고 신체의 관절을 폐쇄하고 심장 장해와 신경질과 소화불량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한 잘못된 습관이 없어지지 않으면 젊음을 간직하여 몸을 부드럽게 할 수가
없습니다.
청춘의 느낌을 간직하려면 인생에 대해서 만족한 철리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사는
일에 무엇인가의 의의를 아는 것이 필요하며 미래에 신념을 가지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불사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따위의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격려하고 영감을 부어 주는 무엇인가를 앞날에 볼 수가
없다면 의기소침해져 버립니다. 이 현재의 존재를 불사의 대생명력의 체험으로써, 발달의
한 형태로서 신성이 있는 계획의 일부로 볼 수가 있으면 열을 올려 미래에 향해서 손이
뻗쳐지는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근심과 걱정의 주름살을 가진 노인의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80세 노인의 육체도 사실은 한 살 이상은 더 늙어
있지 않다는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그의 육체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그의 혼은 연령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젊음을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젊다고 인식만 하면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의식하고 생일을 계산하는 것은 나이가 드러나 보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러는 동안에 대생명력은 자동적으로 우리들에게 응답하여
노인의 외관, 즉 흐려진 눈, 주름살이 잡히고 빛이 퇴색된 피부, 우두둑 소리가 들릴
듯한 관절을 우리들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시간이 없는 것과 왕성한 에너지의
부족을 두려워하며 새로운 활동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할 것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지난밤의 꿈 이상의 진실성도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은 늙고,
또 죽고, 썩는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어째서 힘이 쇠퇴해짐을 믿고
몸의 각 기관의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믿는가? 60세나 70세 때는 20세 때보다도
우리들의 신체에 신이 적게 존재하는 것입니까? 신은 서서히 우리들에게 물러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존재하는 것입니까? 혹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신을 가지는 것입니까?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신은
서서히 우리들에게서 떠나가는 것입니까?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신은 서서히
우리들에게서 떠나가는 것입니까? 이런 바보 천치 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스스로를 고치지
않으렵니까? 우리들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상상력을 잘못된 파괴적인 일에
사용하는 일입니다. 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대생명력을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언젠가 우리들은 이 육체에서 벗어날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사는 것을
그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노인으로서도
혹은 젊은 사람으로서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상상력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노년형
대신에 청춘과 활력의 스탬프를 찍지 않으렵니까?
청춘은 인생의 단계가 아니고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혈색이 좋은 얼굴, 붉은
입술, 날씬한 다리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질이 문제입니다. 감정의
강도입니다. 무서움을 극복하는 용기입니다. 공포와 무료를 이기는 모험심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해의 수효대로 늙은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상을
국한하기 때문에 늙는 것입니다. 경험의 세월은 당신의 피부에 주름을 접어놓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정을 버리면 당신의 혼에 주름살이 잡힙니다. 근심, 의심, 자기
불신, 그리고 절망은 당신의 머리를 무겁게만 하고 그것들을 취하는 것은 영혼이
당신으로부터 달아날 곳을 찾게 합니다. 당신의 느낌대로 젊고, 당신의 공포와 같이
늙는 것입니다. 당신의 희망과 같이 젊고 당신의 절망과 같이 늙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사랑과, 아름다움과, 희망과, 쾌활과, 용기와, 환희에 타고 있는 한 당신은 젊은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대생명력의 혼인 청춘, 그것의 화신으로 내가 되어
있다. 나의 인간적인 체험은 바로 불사에서의 체험에 틀림이 없다. 이 '나'는 파괴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불사신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이제 나의 참된 본성에 쫓아 행동할 것을 결정한다. 나는 불사이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답게 행동한다. 나는 종말 없는 대생명력을 알고 있다. 대생명력의
위력과 에너지로 하여금 활력, 활동, 평화, 완전한 사고로서 나를 통해서 활동하도록
하게 되면 세상의 일을 하면서 나는 언제나 활동적이고 싱싱하고 자각하여 지각한다."
"나는 연령에 대한 느낌을 버렸다. 이제는 영원한 청춘, 영원한 활력, 정신, 건강 및
대생명력의 완전한 표현이라는 사고방식을 몸에 지녔다. 신의 모든 소질이 나에게
화신되어 있다. 달성을 향한 길에 종점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전개된 길이기 때문이다. 신은 나에게 어떤 것이라도 아낌없이 준다. 나의 욕구의
만족은 지구의 근저로부터 나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욕구와
기대는 사는 일, 그리고 영원히 사는 일임을 나는 안다"
[29 근심과 공포를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근심과 걱정은 인간 최대의 적입니다. 근심과 공포는 인간의 진보를 방해합니다.
지난날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공포와 미래에 대한 공포는 전진을 가로막습니다.
몇 년 전에 나는 중환자인 C씨로부터 상담을 받았습니다. 상담을 오래 하지 않고서도
그의 병은 미칠 듯한 공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에 잘못을
저질러 그 죄과로 교도소에 들어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석방된 뒤에도 그치지 않는
공포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난날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겁을 먹고 살아온 것입니다. 지난날을 조사해야 하는 지위라면 실업계의 어떠한
좋은 의자에도 결코 앉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회사를 가끔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디서나
지위를 올려 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결혼하여 좋은 가족을
가지고 가정에 마음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병이 나기 몇 달 전부터 매우 큰 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의 능력은 급속히 그의
지위를 향상시켰습니다. 만사가 순조로웠지만 승진이 눈앞에 다가오자 신원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 두려워 공포증이 생긴 것입니다. 나는 그의 상사인 사장을 만나서
그의 병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은 그 병의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포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말을 해주셔도 좋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이력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그는 지난날의 일은 지난 일로 돌려버리고 지금은 완전히 개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우리 회사의 귀중한 사원으로서 모두가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난날이 우리
회사에서는 아무 출세의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몇 년이라는 세월을 그는
비참한 노예처럼 생활을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밤중에 잘 웁니다. 잠이 안 들면 무서워지기 때문입니다. 침대 밑에 곰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침대 밑에 곰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면
안심하고 다시는 겁내지 않으며, 조용히 잠듭니다. 주위의 상태는 변하지 않았지만
어린이의 믿는 방법이 변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포는 누구라도(어린이나
어른이나) 정신 상태의 노예로 만듭니다. 정신은 당신이 가진 최대의 힘입니다. 신념에
의해서 당신은 언제나 정신의 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는 힘은 당신의 최대의
재산입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는 대생명력이
당신에게 준 최대의 선물입니다. 정신을 사용함에 따라서, 사고의 습관에 따라서 운명을
지향할 수 있고, 또 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 병, 실패 혹은 불행을 믿는 것은 무한한
정신력을 당신 자신에게 거슬리게 쓰는 일입니다. 건강과 상공과 대생명력의 좋음을
믿고, 거기에 신념을 가지는 것은 바로 정신력을 당신의 좋은 것을 위해 쓰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신념에 따라, 그 신념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대생명력은
정직하게 응답하여 옵니다. 옛날 '구약성서' 속의 인물 욥이 '두려워하던 일이 드디어 나
자신에게 The아져 내렸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은 모든 사람의 체험을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에게 쏟아져 내린 일은 그의 정신의 사용 방법, 즉 그의
부정적 방법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공포와 그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신념을 확립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마음은 언제나 활동하고 있으므로 늘 무엇인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언제나 무엇인가를 믿고 있습니다. 신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마치 당신의 두 다리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념은 마음의 존재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념의 방향을 다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불쾌한 체험을 하고 있다면 그 신념은 다른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체험을 다른 결과로 가져갈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재미없는 사태 속에 있거나
또는 탐탁하지 않은 체험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쾌한 체험 속에도
좋은 것을 찾아냄에 따라, 또는 거기에 선이 있음을 아는 데 따라,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지속하는 데 따라서 그 불쾌한 체험을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예 불쾌한 것에는
등을 지고 무엇인가 딴 것, 무엇인가 당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 무엇인가 당신이 희망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리고 상상력 속에 그 사고의 모습과 형체를 만들게 함으로써
체험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일을 하면 창조의 법칙은 이 새로운 계획에 따라서
움직여 가기 시작하고 당신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줍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왜
나는 부정적인 신념을 가지는 것인가? 왜 나는 겁내는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사고의
습관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나의 신념을 정말로 분석해 본 일이 있는가? 나의 현재의
신념은 합리적인 기초 위에 있는가?'하고 물어 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적인 습관에 빠져서 의식하여 선택하는 일도 없이 까닭 없는 공포를
가지고 전 생애를 마쳐 버립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 시간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 4장 '믿음의 마술'에서 우리들은 대생명력의 네 가지의 면에서 적극적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째, 우리들을 둘러싼 위대한 무한의 대생명력에 대한 신념.
둘째, 다른 사람들과 우리들 자신도 포함한 인류 전체에 대한 신념.
셋째, 대생명력의 법칙, 인력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대한 모든 운이나 불운에
대한 공포를 없애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연한 찬스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므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신념.
넷째, 불사에 대한 신념.
이들 네 가지의 기본 원칙에 바탕을 둔 신념은 모든 공포의 토대를 제거해 줍니다.
'나는 무한한 대생명력을 믿는가? 그리고 그것을 신뢰하는가?'라고 당신 스스로 자문해
보십시오. 만일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지성 있는 대생명력은 모든 것, 즉 식물, 동물,
광물 등의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를 하든 대생명력은 모든
위력과 지혜입니다. 이 대생명력은 모든 성장을 맡고 우주 안의 조물주입니다. 당신은
창조의 활동을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조물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무에서 무엇이 나타난다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시계를
보면 시계의 메이커가 없어서는 안되는 일, 그리고 그 메이커가 시계의 그 복잡한 운행
조종을 기획한 것이라는 일을 알게 되겠지요. 어떻게 하든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무한의
조물주, 즉 대생명력에 대한 적극적인 신념을 확립하십시오. 당신이 무에서 생겨났을
까닭이 없으므로 당신은 실재하고 있으며, 대생명력이 당신이 된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대생명력은 당신 자신에게 당신을 주고 당신의 복리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공기, 일광, 음식, 친구 등, 그것들 모두는 당신의 것이며 이것들을
가지고 쓰고, 즐기는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그것에 협력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봉사하여 줍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을 위해서
그의 모든 것,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더 많은 일을 해주는 것이므로 그것에 신념을
두십시오. 신뢰하십시오. 당신은 대생명력이므로 당신 자신에게도 신념과 신뢰를
가지십시오. 모든 사람도 당신과 같이 대생명력이므로 당신과 같이 건강과 행복과
성공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들에게도 또한 신념을 두십시오. 당신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때,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협력할 때, 그들도 또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협력하는 것입니다. 토라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여 보십시오. 그 좋은 것을 생각하며
특히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친절히 하면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기다려 보십시오. 아마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간다는 사업에 있어 조합 동료로서
협력하며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고용주와 고용인이 그것입니다. 서로의 신뢰와 존경 이상의 호의와 협력을 낳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바라는 것과 같은 좋은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바랄 때 비로소 대생명력이
반응해 성공적인 대인관계의 원칙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황금률인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이루어지게 하라.'하는 한 예수의 말씀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과학은 대생명력이 모든 것에 있으며 불변의 법칙을 따라서 움직이고, 또한 지배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운이라든가 불운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화학, 수학, 중력,
전기, 또는 정신 등 모든 것은 법칙에 지배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법칙의 사용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의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든 알고
있지 않든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의 법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 또는 불행을 가져오기 위해서, 성공 또는 실패를 가져오기 위해서 당신이 그 법칙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수학의 법칙에 신념을 둘 수 있을 때까지 위에서 말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운이나 불운에 대한 모든 공포는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당신은 대생명력이고 그리고 대생명력은 불사입니다. 종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불사라고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물론 당신도 지금의 육체를 탈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사의 대생명 속에서의 또 하나의 다른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말
없는 불사의 대생명력이라는 것이 믿어질 때까지 이 일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하여
보십시오.
대생명력에 대해서 말한 네 가지 면, 즉 대생명력 그 자체가 당신 자신을 포함한 전
인류, 대생명력의 법칙 및 불사에 대해서 적극적 신념에 도달하면 모든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적극적 신념의 길을 자유롭게 전진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대생명력은 보편적인 선이며, 자기 자신을 나에게 기울여 부어 준다. 그래서 내가
무엇일지라도 나는 선으로 둘러싸여지고 있다. 대생명력이 내가 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나를 버티어 준다. 나는 지금 좋은 것을 받아들인다. 아무 것도 겁낼 것은 없다.
나의 생각에는 좋은 것만이 나에게 끌려온다. 왜냐하면 나에게 좋은 것,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호흡하는 공기 속에 대생명력의 선을 느낀다. 만나는 사람 하나 하나의 얼굴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모든 사태 속에 좋은 기회가 들어 있는 것을
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좋은 것을 어디서나 발견한다. 언제나 그것을 찾고,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을 가지고 찾을 때는 찾는 것은 언제나 찾아낸다."
"나는 청순하다. 자신을 가진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운이라는 것은 없음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체험한다고 알고 있다."
"나는 불사의 존재라고 알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불리는 체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나의 영원한 대생명력 속에서 새로운 하나의 체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마치 나의 출생을 대생명력 속의 새로운 체험의 시작으로 받아들인 것과 같이
대생명력을 신뢰한다. 대생명력의 법칙의 정직성과 고결성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신념을 둔다.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신념을 둔다. 나는 대생명력이므로."
[30 열등감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마음에 깊이 뿌리를 박은 열등감은 창의를 유린하여 버립니다. 이것은 용기의
반대입니다. 열등감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결정을 하지 못하면 성공도 하지 못할 것이며, 지도자도 되지
못합니다. 열등감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전진을 방해합니다. 전진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걸어갈 생각도 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겁만 내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그 얼굴 표정에, 입는 옷에, 좋아하는 색깔에, 몸의 자세에 그것이
드러납니다. 목소리에도 나타납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훨씬 늙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몸에도, 마음에도 투쟁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대생명력은 끊임없는 투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억지로 전진시키려고 애쓰지만 공포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까닭에
감정적으로 분열되어 버립니다.
적어도 다섯 사람 중에 네 사람까지는 무엇인가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생이나 대학교수, 은행장과 은행원, 근로자와 노동계의 보스 사이에도 열등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의 특별한 수준이나 산업, 또는 지식층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감정의 병증입니다.
당신의 감정은 발전기와 같은 힘을 가진 위력입니다. 그럼으로 이 살아 있는 수원을
막아 놓을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막아 놓으면 언젠가는 둑을 터뜨리고 튀어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억지로 결함 없는 인간인 양 꾸미려고 하지만
거의 소용없는 노릇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감정의 상태를 의사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강제함으로써, 또 스스로를 감정에 상반되는 방법으로 행동시킴으로써, 혹은 무엇인가
믿지 않는 일에 신념을 가지라고 강요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하여도 그것은
소용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혼란을 더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있고, 없고, 그리고 성장하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종족을 영속시키는
일과 자기를 보존하는 일을 바랍니다. 자연계는 젊은 사람을 대생명력 속으로 나가게
하여, 결혼하여 가족을 만들고 직장을 얻어 세계적인 일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자연계는
끊임없이 모든 사람을 새로운 생활의 분야에 들여보내어 주위의 사태에 이겨내도록
강조합니다. 갓난아기가 갖은 애를 써서 자기 발가락을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등의 대
건조물을 짓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것은 확증이 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의 힘, 그리고 자연계에서 그를 둘러싸는 대생명력을 잘못
해석하고 또 가끔 자신의 체험을 잘못 이해하여 스스로 열등한 것처럼 믿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인생은 넓고 강대하고 보기 싫은 함정으로 가득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대생명력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용기를 가지고 나가면 대개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향해져서
표류하는 대로 내맡겨진다면 그 자신과 그의 능력에 대해서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도피하거나, 무턱대고 투쟁하거나 하는 습관을 만들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기의 키가 너무 작은가, 너무 홀쭉한가 너무 뚱뚱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
아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지 않거나, 자신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도록 지도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믿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그 믿음이 일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어떤 수단으로든 그것을
시정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어린아이가 걸핏하면 부모에게 뛰어오는 등 언제나 보호받으려 한다면, 또
자신의 싸움에 편을 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면, 그 아이는 자기가 약하다고
스스로 믿는 나쁜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지원을 청하고, 신과 정부와 이웃 사람에게 구원을 바라는 습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너는 그렇게 힘이 없어! 다른 아이들을 좀 봐.'하는 등의 말을 하면,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약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어떤 부모는
자기적인 사랑의 태도, 즉 아이를 완전히 소유해 놓고는 독립을 주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으로서 저절로 약한 아이로 만듭니다.
남자아이는 멋쟁이인 형보다 자기가 열등하다고 느끼고, 여자아이는 자기보다 훨씬
예쁘게 보이는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굴욕감에 고민하고 있는 어른도
있습니다. 가족 중의 누구인가가 면목없는 일을 한 것에 대해, 또는 자기가 형편없는
집안에 태어났다는 데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낍니다. 그 밖에도
교육이나, 명망이나, 지위가 없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피해 의식을 만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굳어져 콤플렉스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소수의 사람들은 어떠한 열등감도 모두 치료하여 고치고, 만족하고 열의에 찬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편 많은 사람들은 공포와 부족감의 희생물이 되어 대생명력의
좋은 점을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생명력의 충동은 어떤 사람이라도 활동의 속으로 밀어 넣으며, 또 사람이 전진해
가는 것을 희망합니다. 그 사람이 힘과 용기를 느끼게 되면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진할수록 더욱 멋지게 이것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주저하고 뒷걸음질치는 습관을 만들면 그는 계속 두려움을 참아 가면서 그럭저럭 때워
넘기며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공포와 부족감은 그에게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너무나 크고, 너무나
두렵게 보이는 것에서 도피하려고 시험할지도 모릅니다. 도피하는 일은 실패라고 알면서도
'나는 피해자다. 가서 혼자서 살자.'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걱정과 공포를 눈앞에 두고
전진하는 노력은 그에게는 힘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고독을 찾습니다. 그러나 도피하여도
그의 전도는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약에 의지해서, 혹은 술에 의지해서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자기자신에게서 도피하려 하며, 또는 자기가 영웅이 되었다는
백일몽과 같은 환상을 습관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으로서 일종의
대용품적인 만족감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웅장한 망상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행으로 도피하여 언제나 새로운 곳과 새로운 풍경을 찾아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언장담을 늘어놓다가 앞뒤가 맞지 않자 어떻게 수습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몸을 숨겨 버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그들은 열등감 때문에 갖게 된
실패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인가 자극을 찾습니다. 혼자 있기가 두려워서
언제나 재미있는 친구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혹은 간단히 항복하여 쉽게 손을 털어 버리고 부랑자가 됩니다. 어느
사람은 대생명력에서 몸을 빼고 고행자가 되어서 세상을 등지는 은둔자가 되기도
합니다. 공포의 노예가 되어 혼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극단의 도피는 자살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는 미국에서 최고의 자살율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가 알코올 중독율도 최고라는 것은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무엇인가 거짓이라도 주어 보태서 조정해 보겠다고 자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생명력이 그를 활동하라고 등을 밀어냈지만, 그러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기
위한 잘못된 방어 벽을 쌓아 올린 것입니다. 그들은 거만하게 큰소리를 쳐서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잘난 체 하다가 나중에는 비뚤어진
인간이 되고 맙니다.
열등감에 대처하는 데는 도피와 방어는 둘 다 잘못된 방법입니다. 도피하는 사람은
겁쟁이로서 부끄러워하지만, 대생명력에 향해서 자기를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사람은 허세를 부리고 공연히 싸움을 하곤 합니다. 대생명력이 그에게
반항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싸우는 자세로 나오는 것입니다.
객관적 조정은 결코 문제의 핵심에 파고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로부터
도피와 방어로 반응하고 있는 동안은 그는 늘 마음 안에 자기는 약하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결코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포, 그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비록 교양과 제물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조정으로는 거의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또 결혼하고, 인생에 있어서 권력을 잡고, 혹은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런 외부적인 성공은 내부의 상처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조정은
내부에서 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위력과 안정의 내부적 원천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고난의 원인은 그들의 외부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기의 고용주, 이웃 사람, 가족, 부모, 정부 같은 존재가 자기에게 덮어씌운 것이라고
믿는데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가 환경에 있다고 믿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파괴되고 감정이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신경과민이 되고 자기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는 자기가 대생명력에게 질이 나쁜 농락의 목표가 되었다고 느끼며 그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습니다. 대생명력은
자기에게 이바지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대생명력은 자기에게만 특히 잔혹하며, 신은
자기를 선택해서 특별한 고뇌를 주는 것이라고 불평을 터뜨린 후에야 얼마 정도의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도 무엇인가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느낌이 있어서
불쾌한 뒷맛 때문에 입이 쓴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성취한 것도 아니고 건전하게 그의
운명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을 그의 외부의 무엇인가에 덮어씌우고
있는 동안은 결코 유쾌해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은 패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패배에 대한 걱정과 공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걱정과 공포,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결코 대상에서가 아니고 우리가 대상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사고는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중심은 바깥에
나와서 대생명력과 대면하려고 하는 충동과 대생명력에 대면하는 일의 두려움 등이
모순되어 투쟁하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진하려고 하는 욕구가 가는 것을 겁내는 두려움과 충돌합니다. 이
투쟁은 가끔 정신이나 육체의 장해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이 객관적으로 조정을 할 때에는
그 사람은 증상만을 처리하는 까닭에 정신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경감할 뿐입니다. 그가
그 자신의 사고 속에서 조정하지 않는 한, 외부에서 그가 아무리 사물을 휘둘러보아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자기 바깥에 있다고 믿는 한 자기를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주위의 사정 때문에,
가족 때문에, 혹은 대생명력이 그를 다루는 방법을 탓하겠지만, 대생명력과 대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하는 외의 방법밖엔 별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도피, 또는 방위는
영속적인 구제가 못됩니다. 가치 있는 조정은 어느 것이나 각 개인의 내부의 힘을 끌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문제는 생각하는 방법과 믿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념이 새로운
방향을 잡아 주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회고해 보고 이러한 마음의 잘못된 상태가 최초에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그 죄의 시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곧 용서하는
일입니다. 만일 사람이 고장의 원인인 것을 용서할 수가 있다면 실패에 대한 그의
변명의 원인을 제거해 버린 셈이 됩니다. 누구라도 결함과 실수가 있었다고 하며
이해로써 고치거나 초월하거나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구라도 대처해야 할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양치는 소년이었으나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주워 온 고아였지만 고대의 위대한 입법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카버는 흑인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영국의 대시인 밀턴(1608~ 1874)은
장님이었고, 대음악가 베토벤은 귀머거리였습니다. 링컨은 독학자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환경의 도전에 좌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힘을 지각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흔히 속담에 말하는 부잣집
아들이 아닙니다.
부유와 빈곤, 어떠한 조건도 사람이 어떻게 그것에 반응하는가에 따라 저주도 되고
축복도 됩니다. 열등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내가 보내는 충고는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를 마음에 그려 놓고 그 사람에게 어떠한 충고를 할까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처리해야 할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의 창의와
연구를 요구하는 도전이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어려운 문제는 사실에 있어서는 그의 한
부분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는뛰어난 사람이나 열등한 사람이라는 것이 달리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누구도 대생명력의 포인트이며,
대생명력의 원질을 그 자신의 몸을 통해서 어떻게 방향을 갖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객관화해서 그 사람 자신의
바깥에 놓고 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당신이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상상력 속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당신의
위치에 놓아 보십시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당신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대답을 당신에게 하십시오. 또 하나 다른 제안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자기의 이력을 한 번 제삼자의 입장에서 써 보는 일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하고 당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일을 쓰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는 일을 믿는 사람에게서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문제에서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 무엇인가 좋은
충고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잘 전망함으로써 어려운 문제로부터 당신을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어떠한 열등감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소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나 당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를 만족시킬 만한 방법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거나 혹은 화장을 합니다. 그리고
나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그 일을 '잘했다.'고 말합니다. 옷을 입습니다. 이어서 자기를
바라보며 그것을 '잘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침 밥상에서 당신을 돌아보며
'나는 참 잘 먹었다.'고 말할 수 있게 잘 먹자는 것입니다. 그날을 하루 종일 어떤
사태에 있어서도 '내가 한 일에 찬성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엇인가 잘못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며 '아무튼 나의
동기는 올바른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층 더 잘해 보려고 한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사흘 동안을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놓고 자기 자신에게 '나는 내가
한 일에 찬성이다.'하고 말할 수 있게 일을 실행해 나가고 보면 사흘째가 되는 마지막
날에는 어깨를 뒤로 활짝 젖히고 '나는 나 자신을 시인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으로써 모든
열등감은 극복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약속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대생명력과 경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비교는 오늘 당신이 있는 곳과 어제 있었던 곳을 비교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 나는 나 자신을 시인한다. 그리고 내가
진정 나 자신을 시인할 때 세계는 나를 시인할 것이라고 알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가 나에게 내리는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만이 아닙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시인하지는 않습니다. 오만은
방어의 자세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열등한 사람은 아닙니다. 열등하다고 스스로가 잘못 믿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신의 화신이며 신은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사람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같은 재료로 되어 있어서 같은 정신, 즉 신성 있는
대정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의 법칙을 당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세계에 어떤 사람과도 같이 당신에게도 응답합니다. 당신 속의
대생명은 예수나 링컨 속에 있었던 대생명력과 같은 대생명력입니다. 세계 최대의
위인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창조하는 정신을 당신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혼이 있는 존재로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채택하는 포인트로서 정신, 감정,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과 몸은 당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을 당신이 지휘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탄 배의 선장이라는 것을
알고 위력감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핑계 같은 것을 대지 말고 사십시오. 있으면서 없다고
할 필요도 없고 핑계를 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건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잘 처리합니다. 재능과 지혜의 위력은 그 자신을 다루기 위해서 그의
몸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는 처리되는 것입니다. 그는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조종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의 내부의 힘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치유는 깨달음과 믿음에서 옵니다. 깨달음은 마음을 바꿔 넣는 일입니다. 믿음을
바꾼다는 것은 방향을 바꾼다는 일입니다. 당신이 마음을 바꿔 넣고 방향을 바꿀 때
자기 자신에게 공포도 곤란도 없이 대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대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만이 아니고 자기 충실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생명력을 두려움도 겁냄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불사신이고 신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신념이 가져집니다. 대생명력의 성실성에도 신념을 둘 수
있습니다. 세계에는 우정이 있고 대생명력과 세상 사람들과 당신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의 존재이고 모든 남녀는 불사의
존재라고 봅니다. 당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그들에게도 관심을 보냅니다. 세상
사람들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대생명력도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법도에 모든 법칙도 깨달음도 걸려 있다. 이렇게 하면 그때는 살게 될
것이다.'하는 등으로 씌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대생명력의 신성 있는 대정신이며 화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생명력은 다른
어떤 사람으로 된 것과도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내가 된 것이다. 나는 다른 데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나의 앞에 있는 일은 누구보다도 나에 의해서 더
잘되어지는 것이며 또 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대생명력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이다. 대생명력은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나를 창조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 목적이
바르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 자신을 시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며,
이젠 아무런 열등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내부에는 대생명력의 모든 소질과 재능이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으며, 모든 결여감과 국한감을 초월한다."
"대생명력은 모든 것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또 나의 체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의 상상력을 통해서, 나의 창조적 사고방식을 통해서 대생명력을
건전하고 충분하며 완전한 표현으로 인도한다. 건강과, 활력과, 에너지와, 사랑과,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추구하는 나 자신을 본다. 대생명력이 사랑과 행복과 풍부함을
가지고 나에게 응답할 수 없다든지 또 응답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신념은 모조리
버린다. 대생명력의좋은 것을 받아들인다. 이제 바야흐로 그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31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그치게 하는 법]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한다는 것은 아직 눈앞에 닥치지도 않은 고난에 대해서 미리
마음을 쓰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미래를 걱정함으로써 미래에 닥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예는 없습니다. 그것과는 반대로 파괴적입니다.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짐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의 사업에 생길지도 모를 어려운 일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몹시 어지럽습니다.
누구에게 몽둥이로 실컷 얻어맞는 것 같은 이 괴로움에서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두려운 걱정이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 차분하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합니다.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고 위장병까지
생겼습니다. 어떻게 나를 고칠 수는 없겠습니까? 고치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만일 내가 이 걱정을 그만 둘 수만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문제의 해결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치고 싶지만 고쳐지지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온몸이 병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그 사업의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 그것은 아직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일 때문에 밤낮없이 괴로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걱정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지나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됩니다. 자신을 한층 더 약하게 만들어 어려운 문제가 정말 닥쳐온다면
그것에 대처할 힘도 약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도 없이 정말 그 어려운 문제를
그에게로 끌어당겨 놓는 셈이 되며, 그렇더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걱정하고 있는 어려운 일을 실제로 유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걱정이 그에게 군림하고 있는
한 그것을 처리한다는 것은 도저히 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가진 이러한 진짜 문제는 미래에 닥칠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지나친 미래에 대한 걱정, 즉 그의 정신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믿는 방법이 잘못되어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대생명력 위에, 그리고 자기 자신 위에 통치력을 가지고 신의 나리에서 자기에게 주는 일은
신의 즐거움이고, 그 왕국은 자기의 정신과 육체 내의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된 신념에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나친 걱정이라는 악마를 통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 놓습니다. 세균에 의한 병 이외에 지나친 걱정이 발병 원인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고 의사들은 말을 합니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병균이 무서운 일을
저지르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만들어 내며, 또 연령의 위력을 우리들의 몸에 확실히
못박아 놓는 것입니다.
지나친 걱정은 정신 속의 나쁜 기능입니다. 이것은 정신이 잘못 작용하거나 나쁘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못 사용하면 병을 부릅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일으키고 사람의 개성을 찢어 놓습니다. '지나친 걱정은 법칙에 위반된다.'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말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나친 걱정은 건강과 행복의
법칙을 유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우리들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행을
줍니다.
불교도는 '감정의 왕국의 두 악마는 노여움과 무서움이다. 노여움은 불타는 걱정,
무서움은 얼음이 언 것 같은 격정이다.'라고 말합니다. 노여움, 분노심, 저항은 지난날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비건강적인 반응입니다. 지나친 미래 걱정은 미래에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음산한 비건강적 반응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날 것이라고 겁내는 것입니다. 지나친 미래 걱정을 하는 것은 고난을 찾아 미래에
손을 뻗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고난에 굻주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지나친 걱정의 악순환을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조그마한 통증을
느끼면 그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걱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병적인 불안과 지나친 걱정은
그 통증의 원인이 됩니다. 그 증가된 통증은 다시 더욱 걱정을 증가시켜서 머지않아
회전 목마에 탄 것처럼 자꾸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지나친 걱정은 난장판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 악순환은 어디에서든 잘라 버려야 합니다. 자칫하면 지나친 걱정을 그칠
수가 없다는 일에 대해서도 지나친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한 짐이라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 할 뿐 아니라
그가 지나친 걱정을 그칠 수 없을 것 같다는 일에 대해서도 또한 지나친 걱정을
했습니다. 이 상태를 정신 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정신병적인 사고형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단조로운 규칙성을 가지고 되풀이한다.'하고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부정적인 상태에 의해서 통용되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몇 번이고 끝도 없이
되풀이합니다. 병적인 사고는 단조로운 규칙성을 가지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한참 동안 계속되면 우리들의 정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집을
나와서는 가스 밸브를 잠그고 왔는지 어쩐지 걱정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까지
되돌아가서 밸브가 닫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됩니다. 또 집을 나와서는
문을 잘 잠갔는지 어쩐 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또는 두 장의 편지를 서로 바꿔서 봉투에
넣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정신 조종의 과정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의심하게 되면 우리들의 의지가 될 만한 것이 무엇인가
없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 바울은 '신은 우리들에게 공포의 혼을 주는 일이 없고 위력에 찬 사랑의 건전한
마음과 혼을 주셨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공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걱정과 공포는 자꾸 쌓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체험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쌓여 가는 것입니다. 잘못하는 일을 그만두고 언제든지 바른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대로 하면 그 결과로서 좋은 일이 온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약하고 무능하고 열등하며 대생명력은 우리들에게 반대하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적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의 체험은 우리들의 사고나
행동의 결과인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우리들의 사고에 좋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생명력은 곧 바로 응답합니다. 우리들이 내보내는 것과 아주 동일한 것을 대생명력은
돌려보내 줍니다.
건강하게 마음을 통합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깊은 중심인 혼의 본질에서 생각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포인트에서 사고를 선택하고 생각하는 통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감정을 통어하고 감정을 통해서 몸과 신변의 온갖 체험을 통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제일급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나는 곧잘
'아 그러세요. 그러한 이유로 지나친 걱정을 하시는군요? 한달 전의 오늘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보통 '나는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분명히
무엇인가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우리들 대개의 사람은 '일
개월 전에는 무엇에 지나친 걱정을 하고 있었던가?'하고 자기에게 물어 보는 것은
좋습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대개는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잘 대처해 왔다는 것과 잘 대처하는 데는 지나친 걱정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 지나친 미래에 대한 걱정을 그치고 싶은가?'하고 물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개중에는 지나친 걱정에서 무엇인가 병적인 만족감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해치고 싶어합니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무엇이든 결과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째서인가?'하고 물어 보십시오. 그 대답을 쓰십시오. 무엇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는가, 어째서인가, 또 그 지나친 걱정을 그치고 싶은가 아닌가를
적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태를 객관시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자신의 밖으로
내모는 셈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그 대답이 발견될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무엇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는가, 어째서인가를 적어 보고는 감상적인 웃음을 띄며 '이 무슨
못난 짓이었지!'하는 정도로 끝나 버립니다. 한 번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보면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하잘것없는 단순한 사태에 불과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건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과 같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다른 것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은 스스로 어려운 문제에
다루어지게 만들지만 건전한 사람은 스스로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어려운 문제의 편에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에 말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조처하고 그리고 자신을 조처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처리해 냅니다. 그는 어려운 문제로 하여금 자기의 내부에 파고들거나 그를 다루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 자신을 여유 있는 견지에서, 또 어려운 문제를 처리하는 그의 역량의
견지에서 바라봅니다. 자기 자신을 합리적인 채택을 행하는 대생명력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어떠한 상태에 봉착해서도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채택할 수
있다고 알 수 있습니다.
지나친 걱정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 당신은 무능감과 열등감이라는 소용없는 물건을 끓어
넣었으나 그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진실은 아니고 다만 잘못된 견지에서 자기 자신을
보내 왔다는 것뿐입니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자기 자신의 이력을 필기할 때 무엇인가 작은 악마의 방해가
마음속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대는 패배하여 결국은 바보
천치가 되겠다는 말인가? 그것을 맞받아 내지 못한단 말인가? 조그마한 걱정의 짐에
견뎌 내지 못한단 말인가? 걱정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그 외에도 많다는 것을
모르는가? 만일 그대가 지금 넘어지면 낙오병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너는 일평생
패배자가 되는 거야. 가엾은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란 말야!"
그러나 당신은 이 어려운 문제를 처리하겠다고 결심했으므로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어라. 나는 신이라는 것을 알아라.'든지, '악마여 내 뒤로
물러서라.'라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친 걱정은 법칙에 어긋난다고 앞에서도
말했습니다. 사실 지나친 걱정을 할 때는 우리들이 바라지 않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게
하므로, 원하지 않은 체험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화의 역사와 의식의 발달 과정을 살펴보면 두뇌에서 추리능력을 가진 부분만이
지나친 걱정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추리한다는 것은 연상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상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지나친 미래 걱정을 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나치게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추리력의 굉장한 위력을
단순히 파괴적인 방법으로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념을 만드는 이 놀랄 만한 재능을
잘못된 사고를 얻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 연상하면 할수록 지나친
걱정이라는 잘못된 일을 더욱 더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한 성격일수록 가장 뛰어나고
지나친 걱정일 수 있는 셈입니다.
우리들은 추리의 힘을 건설적으로도 파괴적으로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강한 성격의
사람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제일 잘 한다고 하면, 지나친 걱정을 하는 우리들은 일을
시작하는 데 가장 강력한 자료를 가진 셈입니다. 사실 자신을 병들게 할만큼 지나친
걱정을 할 수 있는 그런 굉장한 집중력을 가졌다는 것을 뒤집어 본다면 그야말로 고마운
일로서 우리들은 놀랄 만한 힘을 가진 셈입니다. 이 집중과 추리의 위력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을 가엾은 패잔병의 신세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나친 걱정을 하는 사람이 행하고 있는 노릇입니다. 이 추리의 힘을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하면 얼마나 훌륭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노예의 굴레를
만드는 대신에 영광에 찬 생활을 설계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겠습니까?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 최고의 지능지수를 가진 일부의 사람들 중 가장 지나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타고난 것만은 절대 아닌 그들입니다. 그것은
본성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체험에 잘못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추리에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몹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 직장을 잃었습니다. 새로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십시오.
회사에서 엄청난 실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는 곧 보고를 내고 회사에서
파면시키기 전에 퇴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실업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당신의 직장 상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윗사람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제 실수가 보고되기 전에 나는 나와 버렸거든요."
"그러면 사표가 수리된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틀림없이 사표가 수리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문점도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회사에 돌아가서 상사를 만나 직접 보고하라고 권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그 회사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가기만 하면
의자나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내게 집어던질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완강하게 그를 밀어붙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시 한 번 돌아가라고 권했습니다.
그가 다시 회사로 돌아갔을 때, 그 사람의 상사는 그에게 뭐라고 말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저지른 일은 큰 손해를 보게 한
과실이었네. 자네는 다음부터는 반드시 조심하게 될 걸세. 빨리 자네 자리로 가서
일하게. 서류가 자꾸 밀리고 있어."
에머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은 몇 차례의 피해를 거듭했습니다. 그 가장 혹심한 것을
참고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결코 일어나지도 않았던 슬픔의 고민을 어떻게 당신은
참고 견디어 냈습니까!" 모든 어려운 문제에는 해결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회답을 볼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친 걱정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는 동안은 당신에게 안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회답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내부를 보며 다음과 같이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화평한 요소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평화롭다. 그리고 계속 평화 속에 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오면
나는 부딪치겠다. 그 어느 것도 나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어떠한 사정 아래서도 나는 깊고
조용한 평화를 가진다."
걱정하고 무서워할 때에는 우리들이 진정 무엇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둘러싼 사랑의 대생명력을 인정하는 일을 태만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은 협조해서 활동한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대생명력이 여기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대생명력은
당신을 여기에 데려 왔기 때문에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분명히 그 자신을 무엇인가 다른 데 유례가 없는 특별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은 까닭에
당신으로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과 완전히 같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목적이 불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아예 상식
밖입니다. 당신을 여기에 데리고 와서 대생명력이 스스로 당신을 통해서 불행하게 되겠다고
생각했을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을 끊임없이 해치고 야심을 방해하고 희망을 좌절시켜
괴롭힘으로써 대생명력 스스로가 불행하게 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지성 있는 대생명력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당신이 됐다고 한다면 대생명력은
당신의 지지자일 수 있으며 또 지지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참새까지도 대생명력이라는
아버지에게 부양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들에 핀 백합도 아름다운 옷이 입혀졌으며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 있는 대생명력은 그 이상 얼마만큼이나 당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을까요? 인간은 이 지구 위에서 대생명력의 진화의 정점입니다. 대생명력은
당신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정녕코 대생명력은 그 최고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지하기에 충분한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지자를 신뢰할 수 없을까요?
당신은 현재 자기가 있는 곳에서 눈앞에 해야 할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수행하십시오. 지혜 있는 대생명력의 원질은 당신을 통해서 대생명력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대생명력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십시오. 그 다음 그 일을 시작하십시오.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어려운 문제를
대생명력으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필요한 것을 당신에게 오게
하십시오. 당신을 그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게 하십시오.
'시편' 제 37절에서 다윗은 '초조하지 말라.'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생활에
있어서 기본입니다. 허둥대지 말아라! 초조하지 말아라!입니다.
"법칙을 신뢰하고 좋은 일을 하라. 그러면 너는 이 땅에 살 수 있으며 네게는 진실로
양식이 주어질 것이니라." 당신은 이 말이 믿어집니까? 인과 법칙의 올바름에 신념을
두고 당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 일만이 당신에게 온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가령
다른 사람들은 해를 받는 일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당신에게 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아아, 나는 얼마나 신의 법칙을 사랑하는가?'하고 말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무한, 불변, 정확,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범했을지 모르는
잘못도 악을 떠나 신에 나아가면 벌써 그 이상 아무런 힘도 미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택하면 곧 새로운 결과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너와 같이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와 '사랑은 법칙을 가득하게
한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으로써 법칙을 다스리면 어려운 문제로 보이는 것에서 집착된 주의를 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무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언제나 고뇌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에
대해서 '만일 그가 아주 짧은 동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떼기만 하면,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는 제 정신이
들텐데....'하고 우리들은 곧잘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관심의 최중심으로 삼는 따위의 병적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생각과 노력을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돌립시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훨씬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시다.
'모든 것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에의 선을 위해서 경합하며 활동한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대생명력입니다. 이것은 약속으로 하는
일은 아닙니다. 법칙의 묘사인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법칙에 의해서 작용됩니다. 만일
대생명력을 사랑하고 있다면, 만일 당신이 대생명력의 표현을 사랑하고 있다면, 즉 모든
사람, 모든 것(물론 당신을 포함하여)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당신의 좋은
것을 위해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수학적 법칙을 통해서 당신의 고용주, 종업원, 배우자, 아이들, 이웃 사람,
친구들, 모든 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좋은 일을 위해서 힘을 합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법칙의 위에 뛰어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만일 행복하고 충분히
표현되기를 바란다면 사랑과 신념과 황금률의 법칙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대생명력을 가졌다던가 또는 법칙이 당신을 위해서는
다르게 활동한다던가 하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인가의 잘못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에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대생명력에 있어서도 소중합니다. 신은 당신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므로 당신은 그 도구로서 신의 손이며 손가락입니다. 그 두 손가락을 쓰지 않고
퇴화시켜서는 안됩니다.
대생명력은 그 자신을 위해서만 우리들을 만든 것이므로 그 대생명력을 우리들이 충분히
표현하지 않을 때는 고난에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목적에 통합되지
않는 한 우리의 심정은 굶주립니다. 우리들은 대생명력에게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 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성에
알맞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공포, 걱정, 노여움, 저항 같은 것 때문에 거의 가치 없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중시함에 따라서, 우리들의 목적을 이룸에 따라서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한에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들은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근거가 확실한 생의 목적을 승인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쏟아 놓을 수
있을 만한, 그리고 정신이나 혼이나 육체의 힘을 모두 끌어낼 만한, 인생의 목적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상을 위해 성실할 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므로 대생명력은 좋은 것을
건네준다고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공포와 지나친 걱정이 우리들에게서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게 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자유스럽다. 나는 내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계획된 일을
실행하고 있다. 가족, 친구, 이웃 사람, 동료를 사랑하고 있다. 대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나에게 돌아오는 것도 최선만이 돌아온다. 사랑과 선의가
끊임없이 나를 통해서 흘러 나간다.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내가 처한 모든 환경을
축복한다."
[32 모든 사태에 배당을 낳게 하는 법]
사물이란 그저 우연하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모든
체험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진정한 원인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요? 인간이 접촉하는 모든
일에는 무엇인가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대생명력 속에 일어나는 일의 모든 것은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때야말로 우리들은 모든 체험에서 좋은 것을 뽑아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좋지
못한 사태에 빠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내주도록 하는 방법이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있기 편안하지 못한 사태에 빠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내주도록 하는 방법이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있기 편안하지
못한 곳에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을 깨닫는 수가 있습니다. 정말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을
듯했으나, 희망하고 기대했던 것만큼 결과에는 이르지 못했을 때, 우리들은 가끔
실망합니다. 어딘가에 도달해 보면 본래 있던 곳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일도 있습니다. 그
사태를 어떻게 해서 최선의 것으로 바꾸느냐, 그 속에서 어떻게 좋은 것을 끌어내느냐,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이 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태 속에는 좋은 기회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매우 비효율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력과 시간을 크게 소비하면서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좋은 것을 가져오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시간과 마음을 다 바치고 거기에 가치 있는
것을 하나도 끌어내지 못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는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에
끊임없이 좋은 것을 놓아주지만 그것을 볼 줄 모르는 우리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모임에 나가서도 거기에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인정하고 또한 사용하기만 하면 주위의 어느 곳에도 놀랄 만큼
좋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그것을 하나도 찾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숱한 좋은 기회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들은 가장 좋은 기회를 가려내야 하며 또한 그 좋을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친구와 이웃 사람과 직장 동료 등과의 접촉에서도 저마다 좋은 것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혹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태에 건네줄 수 있는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의하면 지중해의 크레테 섬에는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욕심이 많기로
악평이 높은 주민들이었습니다. '저 친구는 크레테 섬사람들처럼 거짓말을 잘 한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서, 예수보다 7백여 년이나
전에 크레테 섬에 살았던 에피메니데스 '크레테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며 사나운
짐승 같고 대식가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교회를 건설하고 또 조직한 바울은 크레테 섬에 여행하여 티토스라는 이름의
사나이를 남겨 놓아 기독교 사회를 그곳에 건설하게 했습니다. 이 젊은 사나이는 그 임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명백합니다. '구약성서' 속에는 티토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대를 크레테 섬에 남겨 놓았다. 그곳에서 그대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것은 티토스가 바울에게 원조를 청한 것에
대한 회답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티토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아나 '부탁합니다. 저를
이곳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동물에게도 인간에게도 여기는 좋은 곳이 아닙니다.' 하는
등의 사연을 써 보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티토스는 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서 어딘가 다른 데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빨리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답장은, '크레테 섬이 낳은 철학자까지도 섬사람들을 거짓말쟁이,
사나운 야수, 탐욕스럽다고 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대는 그 섬에 남아 있으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긴 이야기를 요점만 말한다면, 티토스는 결국 이 섬에 머물렀습니다. 그 섬에 대한
도전은 그에게 우대할 만큼 좋은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크레테 섬의 옛 폐허가 발굴되어 장엄한 교회와 아름다운 사원의 초석이
밝혀졌습니다. 그곳에 누구의 이름이 교회와 사원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룰 기리어 그것들이 세워진 것일까? 티토스! 성 티토스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좋은 기회를 인식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좋은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들의 생활은 놀랄 만큼 개선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환경에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멀리 북방의 북국권내에 살았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험가인 그는
그곳 원주민 여자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곳에 있기가 몹시 싫어졌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 이제는 일각도 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을 하소연했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버리고 도망쳐 미국에 돌아가 작가가 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는 '지금 그대가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물러 사십시오. 멀리 북방의 일,
당신이 내면적으로 잘 아는 분야를 소설로 만드십시오.'라고 회답했습니다.
친구의 충고를 따른 그는 북극 이야기의 작가로서 성공했습니다. 모든 잡지는 그의
작품에 열을 올리고 비싼 고료를 지불했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태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들이 길을 오가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의 이유가 있어서
서로 만나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마 의식적으로 목적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째서 좋은 기회가 제공되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이
보통입니다. 백 번에 한 번도 '이 사태에서 어떻게 하여 나는 가장 좋은 일을 찾아낼 수
있을까?'하고 자기에게 물어 보는 일은 없겠지요.
나의 친한 친구 G. 하먼은 세계 각국의 재화를 모으는 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 전에 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태는 그것이 어떻게 나쁘게 보일지라도, 만일 그것은 좋은 무엇인가가 전혀
틀렸다고 보일 때, 내가 놀랄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될 때, 그 사태를 바라보며
'그렇다. 나는 이 속에서 좋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좋은 것은 그 속에
있다. 만일 여기에 정직하고 사랑이 담긴 주의를 보낸다면 좋은 일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하고 말할 줄 알게 되었네."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하면 어떠한 사태도 그의 축복으로
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모든 접촉에 있어서 좋은 평가를 하고, 그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일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면 굉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우주는 우연한
만남이나 운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잡다한 이간 만사도 모두 태양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운영의 배후에 있는 계획은 우리들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계획은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배후에 사고하는 의식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들을 위해서 골고루 마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접촉도 모두 성장을
위해서, 이해와 체험을 위해서 우리들에게는 오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는 좋은 것이 많이 보이지 않지만 길에서 가다 오다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속의 좋은 기회와
발전성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은 은하계의 별들의 움직임처럼 확실히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성취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속에는 충족되기를 기다리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몇 번인가 우리들은 의식적인 지식 없이 내심의 지성이 풍부한
지혜에 이끌려 교훈을 배울 목적으로 여러 가지 사태와 상황 속에 들어갑니다. 어느
사태에 직면하는 것을 거부할 때. 거기에서 벗어나 도피하려고 애쓸 때, 그 사태, 또는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이 몇 번이고 우리들 앞에 나타나서 드디어는 그것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체험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처할 때, 교훈을 배워서
얻을 때보다 좋은 것으로 우리들은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 년 전, 내가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방송국의 어느 젊은이가 자기의 앞길에는 장래성이
없다고 확신하며 아주 지치고 몹시 따분한 기분으로 투덜거렸습니다. 모두 인맥으로만
승진되는 판인데 자기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회사에서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한 일은 없는가, 지금 무엇인가 안되고 있는 일은 없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자네는 그 일을 해보지 않는가?" 내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위해서 회사가 저에게 돈을 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저히 안될
일입니다." "그것은 전연 딴 문제네. 만일 자네가 해야 할 무엇이 있다면 왜 자네가 그걸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자네는 그것을 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하게. 노력 이외의 자네에겐 조금도 금전상의 손해는 없는 것이니 한 번 해보게나. 그리고
또 이것도 시도해 보게. 자네가 자주 만나는 누구누구를 기쁘게 해주게. 이 회사 안에서
누구와 어떤 일로 접촉하더라도 그때마다 그 사람을 즐겁게 하지 않고는 떠나지 말도록
하게. 그를 미소짓게 하는 무슨 말이든 하게. 그 사람의 그날을 조금이라도 명랑하게
해주게. 그것을 일주일 동안만 계속해 보게."
내가 그러한 제안을 할 때 그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생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거의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 그는 약간 의심스럽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였으나 일주일 동안 그 일을 시험해 볼 것을 다짐했습니다. 두 주일이 채 못돼서 그는
그 방송국에서 전보다 훨씬 좋은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그가 다른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잭, 자네는 성내며 매사에 생기가 없네만 들어보게! 자네의 찬스는 자네가 지금 있는
데스크 그곳에 있는 것일세. 여기를 나가 어디 다른 곳에서 훨씬 잘해 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쓸데없어."
그리고 그는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계획을 잭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대정신의 자기를 자각하는 포인트이기 때문에 채택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제공되는 대생명력 속의 온갖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 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들 좋은 기회를 붙잡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패배자가 됩니다. 그러나 자연계는
우리들에게 좋은 것입니다. 하나의 좋은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또 하나, 그리고 다시
또 하나, 이렇게 제공해 줍니다. 하나의 좋은 기회를 포착하기까지는 일천 개의 좋은
기회를 보지 하고 놓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자연계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들이 배울 때까지 대생명력은 좋은 것을
계속 제공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접촉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최대의 가치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어떤 모임에 출석할 때 어떻게 하면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갖고 돌아올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일을 언제나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즉, 주는 기대와 얻는
기대입니다. 당신이 만나는 누구라도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졌고, 당신도
그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는 일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받는 일을
기대하십시오. 그 사람은 안 받을지도 모릅니다. 교환할 수 있다는 일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좋은 것을 손에 넣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기대함에 따라, 또는 좋은 것을 주는 태도로 당신은 그것을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개 강연 같은 데 나오는 사람들은 좌석에 앉으면 옆자리의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 주고
선의를 사방으로 뿌려 즐거운 분위기를 높입니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좋은 것이 흘러
나가도록 문을 열어 놓고, 또 좋은 것이 흘러 들어오도록 문을 개방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옛친구 M.D. 스미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변호사이며 훌륭한
연설가였습니다. 아메리카 금주 연맹이 자금을 모으는 운동을 하고 있을 무렵,
연맹에서는 그를 초빙해서 자금을 모으는 일을 의뢰했습니다.
어느 겨울 일요일의 저녁 때, 동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그는 연설할 예정이었습니다.
바람, 눈, 진눈깨비가 섞이는 사나운 날씨여서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강연
장소인 교회에는 누구도 오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천후를 무릅쓰고
강연할 것을 결심하고 호텔을 나서서 교회로 향했습니다. 교회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사환이 있을 뿐이었으나 그는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몸집이 작은 노부인 두 사람이 와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다시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호텔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람을 모아서 트럼프 놀이라도 할까 하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때 모든 도전에는 좋은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나는
여기에 강연하러 온 것이므로 단연코 강연을 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는 이 두 노부인으로부터 그의 어느 강연 때보다 더 많은 자금을 모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나를
초대하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누구도 결코 저를 초대해 주진
않아요. 저의 초대를 반갑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에요."
나는 그녀가 자기 집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초대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쓸쓸할 때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기의 쓸쓸함을 달랠 줄은 알았지만 초대된 사람들의 쓸쓸함을
위로해 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협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먼저 당신 편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 각자를 우주의 생명력의
통로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에게서 좋은 일이 흘러 나가면 다시 좋은 일이
흘러 들어옵니다. 우리들 속에서 막히면 안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면 진공이 되기 때문에 더욱 많은 것이 흘러들어 옵니다. 자연계는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신의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태도를 가지고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마음대로 하도록 놓아두면 다른 사람이 당신 쪽으로 좋은 것을 흘려 보내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자발적으로 좋은 것을
나누어주면, 그들도 역시 즐겨 당신에게 기꺼이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좋은 것은 우리들 누구에게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유통시켜야 합니다. 좋은 것을 나누어주면 더욱 많은
것이 흘러 들어오는 법입니다.
모든 도전에서 좋은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인 친구로 보는 사람,
모든 순간을 하나의 모험으로 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33 아침의 묵상]
아침은 하나의 신선한 출발입니다. 하루는 새롭게 말들어지는 세계입니다.
오늘은 하나의 새로운 날입니다. 오늘 나의 세계는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날이 오기까지 나의 전 생애를 살아온 것입니다.
이 순간, 이 날은 영겁 속의 어느 순간이나 마찬가지로 좋은 순간입니다. 이날은,
이날의 어느 순간이든 지상의 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좋은 기회의 날
입니다. 오늘에 대처할 수 있도록 신이 나에게 주신 도구의 모든 것을 고맙게 생각
하고 될 수 있는 한도까지 효과 있게 사용합시다.
나는 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축복받고 있습니다. 그것에 기댈 수 있습니다.
내 몸의 기관 하나 하나, 세포의 하나 하나는 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깊은 지성에
지휘되며 완전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 육체는 훌륭한 도구의 하나이며 그 에너지와
숙련성은 무엇이고 필요한 일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필요에 응해
줍니다. 이 몸에 절대의 믿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대생명력의 영원한 에너지를 가지고 만들어져 있습니다.
나의 정신은 훌륭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나의 정신은 오직 하나의 정신
(그 정신은 모든 것은 알고, 모든 것을 보고,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으로써 그것을 내가 사용하는 일입니다. 모든 개인에게 공통된 하나의 정신이 있으므로
나의 정신에는 약점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소크라테스, 플라톤, 셰익스피어, 링컨,
에머슨, 에디슨에게 있었던 그 정신입니다. 이날에 대처하여 성공하기 위한 모든
도구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지난날 나의 생애에 있었던 것보다 더욱 위대하고 참다운 자산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없었던 만큼 위대한 활동으로 오늘은 전진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있어야 하고, 또한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나의 생애에 일찍이 있었던 것 이상의 경험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또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다 좋은 이해를 가지므로 한결 더 많은 정신력이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나는 매일 전진합니다. 대생명력은 탐험되어야 할 커다란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앞에는 여행해야 할 가장 흥미있는 길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나의 앞에 가로놓인 그러한 모든 일을 효율과 힘과 용기와 열을 가지고 수행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어서 대생명력으로 건전하고 또 연관 있는 표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오늘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가? 어떻게 나는 누군가의 고통, 괴로움
두통 같은것 을 치료해 줄수가 있는가? 어떻게 대생명력에게 봉사할 수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나는 저 위대한 교사와 함께 '그들의 대생명력을 얻기 위해서 나는
온 것이다.'하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봉사가 또 나의 목적입니다. 몸을 바쳐 봉사
하면 나는 그보다 더 놓은 봉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제까지 해 온 것보다도 더욱 좋은 방법으로 눈 앞의 숙제를 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면 나 자신의 행복은 더욱 강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이 이전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결의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들을 보다 위대한 희망으로, 신념으로,
자유로, 행복으로 가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가 20세이건, 40세이건,
60세이건, 혹은 80세이건 오늘 나로서는 새로운 인생인 시작됩니다. 이날을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보냅시다. 나의 사고를 세심하게 검토합시다. 나의 정신의 집을 지키고
어떠한 부정적인 사고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합시다.
나의 동기는 비난을 초월한 저편에 있습니다. 행동은 심오한 지성과 지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 자신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한층 더 깊게 나의 일에
대해서도, 나의 필요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성서에도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신은 나의 목자이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없으리라. 신은 나를 고요한 물가로 인도
한다. 그는 나의 혼을 불러들인다. 그는 정의의 길에 나를 인도한다. 어떠한 악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의 지팡이와 회초리는 나를 안락하게 한다."
깊은 잠재의식, 나의 대생명력의 신, 또는 법칙은 나를 올바른 곳에 인도합니다.
그것은 나의 육체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육체 라는 도구를 받쳐 주고 주위의 모든 일에
방향을 줍니다. 그것을 나를 통해서 생각합니다. 그것을 나를 지휘하고 유도합니다.
그것은 나를 창조하고 나를 받쳐 줍니다. 나는 바른 생각을 가지며 힘도 가집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생명력이신 아버지, 즉 대자연의 무한한 정신이
내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실패할 까닭이 없습니다.
큰 자제력의 그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위험도 나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순간마다 나는 버티고, 유지되고, 지휘되고, 인도됩니다.
나는 모든 일을 신을 통해서 할 수가 있고 신은 나에게 힘을 더해 줍니다.
신은 내 속에 있는 신성의 힘, 또는 대자연의 힘, 또는 대생명력입니다.
나는 몸 안의 이 힘에 의지합니다. 내가 그힘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마치 바다에서
파도를 분리할 수 없고 태양에서 일광의 방사선을 떠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깊은 지혜의 소리에 자세히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나의 속에 있는 신성을 가진 정신은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 '잠재의식'을, 다른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 '신' 또는 '창조하는 정신' 이라고 불려지며 그것은 신의 위대한 하인
이며 상담자이고 보호자 입니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위해를 끼칠 염려가 있는 것이나 또는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막아냅니다. 나를 인도하고 안내해서 언제나 바른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나의 사고의 근원이며 평화의 길에 인도합니다. 나는 공포, 염려, 혹은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 따위에 결코 지배되지 않습니다. 나는 세계의 모든 문제를 이 무한의
깊은 정신에 의해서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소화에 의지하고, 심장의 고동, 혈액의
순환에, 나의 몸이 운행하는 모든 기능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올바른 때에 올바른
곳에 있도록, 그리고 올바른 일을 하고 올바른 일만을 말하도록 그것이 지휘하는 것을
채택합니다. 나의 깊은 잠재의식, 오직 하나인 무한의 정신은 이날부터 앞으로 나를
안전하게 인도합니다. 내가 이날에 전진할 때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며, 어떤 노여움도,
누구에게 대해서도,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가지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은 투명합니다.
마음에 미움도 없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없습니다. 긴장은 풀어지고 두려움도 없습
니다. 오직 완전한 신뢰감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나에게 위대한 좋은 것이 오는 날이므로 그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감사합니다. 나의 가족들과 그 밖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역시 떡 같은 무한의 창조하는 정신에 인도되고 잘 다루어지고 지원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들을 둘러 싼 무한한 대생명력의 위력과 지혜에 인도되고,
지원되고, 지켜지는 것입니다. 무한한 대생명력의 사랑이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내고
있는 까닭에 그들은 지원되고 지켜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누구도, 무엇도 그들과 나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나의 하루를 대처하기 위해서 집을 나올 때 나는 모든 위해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나는 두려움도 미움도 노여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생명력에의 신념, 대생명력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오늘의 나의 슬로건입니다.
나는 오늘 나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나는 모든 사태의 주인입니다. 나의 밖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욱 더 강력한 것이 내 속에 있습니다. 내가 오늘 발을 옮기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더 많은 좋은 것을, 위한 한결 더 큰 행복의 방향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은
장차 올 성공에의 빛나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날에의 만세! 이날에 내가 희망하는 것은 그것이 대생명력, 대생명력 속의 진정한
대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의 경과 속에 존재의 모든 진실성이 가로 놓여 있습
니다. 성장의 무상한 기쁨, 행동의 영광, 미의 광채, 이제 어제는 꿈이며 내일은 환상
입니다. 오늘을 좋게 살면 모든 어제는 행복의 꿈으로 되고, 모든 내일은 희망의 환상
으로 됩니다. 이날은 대생명력이 나에게 보내는 멋진 선물입니다.
[제3부 새로운 정신력의 유지]
[34 저녁의 묵상]
이날은 이제 끝났습니다. 지난날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다시 살아 볼수는 없습니다. 오늘 나는 그때 가장 좋았다고 생각한 일을 했습니다.
나의 가장 좋은 일이 나에게서 나갔으므로 제일 좋은 일만이 나에게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날 내가 한 일이 좋고 성실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내일은 오늘의 체험의 위에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나는 한결 더 큰 이해를 갖게
되므로 내일은 오늘보다도 훨씬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시련의 대처했으므로 나의 상은 그만큼 커진 셈입니다. 오늘 나는
최선을 다했으므로 오늘밤은 평화롭습니다. 나의 정신은 평온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대생명력에 봉사했습니다. 얻는 일에만 힘쓴 것은 아닙니다. 주는 일에도
힘을 썼습니다. 내가 대생명력에 봉사했으므로 대생명력도 나에게 봉사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나는 무한한 창조의 법칙을 써서 누군가의 좋은 것을 빼앗으려고 투쟁한
것이 아닙니다. 한결 더 좋은 것을 창조하려고 하였으므로 나는 평화롭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날의 사명을 성취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잠기고, 밤의 그림자가 세계를 덮을 때 포근한 기분이 되어 몸도 마음도 고요합니다.
이날의 체험 하나 하나에 감사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일이 몇 가지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나의 좋은 일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동기는
좋았으므로, 올바른 일만을 하려고 하였으므로 모든 사태로부터 결국 좋은 일만이
나에게 옵니다. 모든 역경에도 좋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패인 것처럼
보이던 불탄 자리의 잿더미 속에서도 새로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기회를 보내 준 좋은 기회라든지, 괴로움과 불행을
얼마만큼이라도 완화시키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날의 몸의 건강에 대해서, 매시간을 무사하게 지나게 해준 정력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내심의 잠재의식으로부터 나온 좋은 생각에 대해서, 영감의 반짝임에 의해서 내가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에 있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나로 하여금
바른 일을 바른 방법으로 할 수가 있도록 속삭여 준 직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혼란함의 고뇌속에 있던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친절한 말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합니다. 이웃 사람에게 좋은 방향 전환을 줄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합니다.
내가, 또 나의 가진 물건을 내던졌기 때문에 얻는 행복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대생명력의
행정을 나와 똑같이 걷고 있는 동료들로부터 사랑과 선의를 받은 일을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이 걷고 있는 길을 슬픔과 탄식의 길이 아니고 성공과 행복의 길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의 오늘의 모든 행동이 영원히 움직여 가는 것이
라는 것, 또 그것이 영구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나의
미소는 어떤 모르는 어느 사람에게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나에게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격려 받았으므로 그 사람은 또 누군가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그 사람은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이어집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미소를 언젠가는 느껴 얻을 것입니다. 나의 따뜻한
악수는 무궁한 세월을 통해서 길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 하나의 행동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나의 생명은 커다란 반향을 가집니다. 내가 하는 무슨 일은 무슨
일이 되었든, 세계에 힘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오는 세대들은 무의식적
으로 오늘의 나의 좋은 행동에서 힘을 느껴 얻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소비한 1달러는 상인에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그 상인은 도매상에게
은혜를 주고 도매상은 다시 메이커를 은혜를 줍니다. 나의 것이었던 1달러는 농민, 광부,
근로자,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로 돌고 돌아서 교육이나 치료의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은 살기 좋은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비한 돈은 대생명력의 물질로써,
즉 신의 사자를 봉사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라고 나는 인정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봉사했지만 이제는 이루 헤아릴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몇 대에 걸쳐서 봉사할 것입니다.
오늘 나는 대생명력에 대한 나의 임무를 성취했으므로 이제 이날에서 손을 떼고 아름다운
회상으로 돌립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를 용서했습니다. 오늘의 회상은
조금도 괴로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좋은 일, 참된 일, 아름다운 일만을
회상합니다. 이날을 돌아보며 나는 괴로웠던 일은 모두 즐거운 회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해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던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또 용서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자아적인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 자신은 신성을 가진
대생명력의 화신 이므로 아무리 나빠 보여도 단순히 자아적으로 행동한 데 불과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자아적인 것은 하나의 습관이며 그의 덕성의 편이 훨씬 우세합니다.
그 동안에 그도 또한 사랑과 선의로서가 아니면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는 선인입니다. 그의 행동만이 그릇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나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희망하듯이 나도 이웃 사람의 온갖 잘못을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오늘 하루의 커튼을 내리고 휴식을 준비합니다. 나의 상상력 속에서 내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완전한 휴식에서 정력과 활기와 생기에 넘치는 나 자신이
일어라는 자세를 봅니다. 나의 상상력 속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수행하고 무슨 일이고
해야할 일은 하고 모든 행동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을 주고 나도 그들에게서 좋은 것을 받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태마다 용기와 신념과 열심을 가지고 대처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내일의 눈부신 성적을 예견합니다. 오늘은 끝났습니다. 대생명력이 내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의 커튼을 내렸습니다. 오늘밤은 잘 휴식하고
내일을 위해서 에너지를 축적합니다. 좋은 체험은 나의 신성한 권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신과 신의 불변 법칙을 신뢰합니다. 지난날에 저항하지 않고 미래를 겁내지
않습니다. 내일의 도전은 내일 대처합니다. 나의 잠 속에는 어떠한 긴장도, 어떠한
슬픔도, 어떠한 탄식도 어떠한 손실감도 없습니다. 모든 잘못을 용서했습니다. 지금은
평화로운 수면 속에 포근한 기분입니다. 포근한 기분은 유쾌하고, 잠은 달고 편안합니다.
밤의 어둠은 그의 평화와 고요함을 가지고 나를 깊고 안온한 잠 속으로 유인합니다.
나는 대생명력을 완전히 신뢰합니다. 이제 졸립니다. 나는 나의 모든 일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전부의 일을 위대하고 무한하고 사랑에 찬 대생명력, 그것의 품속에 맡깁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나도 지켜지고 또한 지탱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성을
가진 대정신에 이끌려 나는 정말로 바른 때에 바른 것에 있으며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를 던져 버리고 완전히 전부를 저 무한의 지성이 있는
위력에 맡깁니다. 이 위력은 태양과 별들을 그 곳에 있게 하고, 새에게 나는 방향을 주고,
길 잃은 개를 그 집에 찿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무한의 대생명력은 나를 그의 사랑으로
둘러싸고 그의 영원한 팔을 요람으로 하여 나를 재워 줍니다.
나는 잠에 감사합니다. 내 속에 있는 무한의 지성이 나를 살리고 나의 온갖 일을 건전하게
간직하여 주는 것을 신뢰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대생명력 그것이므로 그것들을 모두
무한의 지성에 의해서 방향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신의 면전에 있는 것을
의식합니다. 좋은 것이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신의 나라는 내 속에 있습니다.
이제 모든 문제를 무한의 지성에게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너를 보호하는 사람은 잠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완전한 자신감과 신뢰속에서 잠들고
있습니다.
[35 나는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한다]
어려운 문제의 크고 작음을 물을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틀림없이
우리들 자신 속에서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고 싶다, 도는 이렇게 있고
싶다고 생각되는 일 중에서 오늘까지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 대생명력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는 욕구에서 좌절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세계를
사실에 있어서 방어하고 있습니까? 이들 문제의 해답과 그것을 해결하는 힘은 당신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그 해결은 당신이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인식하는데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가지의 여러 장에서 정신의 창조적 수준의 것, 즉 잠재적 또는 주관적 수준에서
활동하는 정신을 정원의 흙에 비유했습니다. 잠재 정신은 우리들의 잠재하는 개성으로 개성
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의식하는 존재로서 우리들 각자는 정신을 의식하는 포인트이며
무엇을 가지려 하는가, 무엇으로 있고 싶은가를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머슨은 자기 신뢰에 대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넓은 무주는 좋은 일로
가득차 있으나 자양분 있는 옥수수는 경작하도록 주어진 일정한 경지 위에 사람이 노력
을 쏟아 넣음으로써 손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살아 있는 힘은 자연계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며, 그 사람이외에는 아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른다."
우리들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씨앗을
잠재의 땅에 심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씨앗은 그 씨앗 속의 형에 따르는
모양으로 자라게 됩니다. 잡초의 씨는 잡초가 되고 채소의 씨는 채소가 됩니다.
병, 빈곤, 불행 등의 부정적인 사고의 씨는 위대하고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매개체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내버려두면 그것이 자라서 병과 빈곤과 불행의 체험이 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올바른 사고의 씨앗을 선택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땅을 갈고
식물을 지배하는 일을 배워서 올바른 체험의 과실로 성숙하게 해야 합니다. 사고와
신념과 정신의 이미지는 씨앗입니다. 모든 것은 그 종류에 따라서 묘가 되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신적으로 무엇인가와 동일화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들에 대해서 무엇인가가 진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병이라든가, 건강하다든지, 돈이 있다든지,
가난하다든지 하고 꽤 긴 시간에 걸쳐 우리들은 흔히 자기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므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가령 '기분이 나쁘다.'고 할 때
그 생각은 상상력에 받아들여집니다. 잠재의 정신, 또는 창조하는 경지는 자연력과 같이
비인간적인 것이므로 우리들의 의식하는 마음이 제안하는 일이면 그 말 그대로
잘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체험으로 재생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고대인은
위력을 갖는 어떤 종류의 언어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잊어져서 근대인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그 말의 중요성을
백 사람 중에 한 사람에게도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매일 몇 번이고 사용하는
말이며, 우리들이 말하는 낱말 속에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시간마다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하고 믿고 또 말합니다. 우리들의 그 선언은 정신을
창조하는 마음의 밭에 심어지면 정원의 경지 위에 심어진 씨앗처럼 싹이 나고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입밖에 낸 말 또는 상황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나는 불행하다.'든지 또는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면 창조하는 정신에게 행동을 위한
명확한 형을 주는 것으로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되는데 우리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는 실패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믿고 있으면 무의식 중의
마음에다 실패의 그림이 그려지고 몸안의 창조하는 힘은 그 그림을 구체화 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어떠한 성공자도 지난날 '나는 실패다.'고는 생각한 일도 없고 말한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부정적인 사고와 동일화하는 대신에,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사고와 동일화하는 일을 배웁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동일화한 그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또한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 최고의
이상을 동일화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들의 인생은 완전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대생명력이다. 나는 몸안에 완전한 대생명력의 모든
소질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한의 신, 즉 대생명력의 화신이다. 육체의 참된 위력, 신변의
모든 일의 위력은 태양과 달과 그리고 별을 제각기 자기 자리에 있게 하는 것과 동일한
힘이다. 그것은 장미의 꽃을 피게 하는 힘인 것이다. 바람의 배후에 있는 힘,
내가 호흡하는 힘인 것이다. 저 무한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나에게 개인화한 것이다.
내가 의식하는 마음을 통해서 몸에 있어서, 신변의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그것을 올바른 동작
에 지향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내가 선택하는 힘을 거부할 수가 없다."
누구나 필요로 하는 힘의 모든 것은 그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곧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그 사용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속의 지성은 무한한 정신의 지성이다. 그 지성에
한계는 없다. 그것은 끝도 없고 바닥도 없다. 내가 실재하는 그 포인트로서 무한한 것이다.
보편의 정신은 내가 사용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필요하면 어떠한 것이라도 나에게
그것이 필요한 만큼 나타내는 것이 신의 힘이며 나의 힘이다. 신의 실재는 나의 실재처럼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무한한 존재와 동일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진리로 받아들일 때 저절로 우리들은
대생명력을 향해서 체험을 얻기 위한 더욱 완전한 형을 주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그것 스스로에게 선언할 때, 잠재의 정신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가 신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렇게 하면 우리들의 체험은 새로운 형에 따라서 전개해 나가고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성공이다.'라고 하거나 '나는 부유하다.
나는 지성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렵니까? 그렇게 하면 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씨앗을
심는 것이 됩니다. 우리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진리를 이야기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인 베드로에게 '그대의 몸은 바위이다. 그 바위위에 교회를 세우라. 그렇게 하면
지옥의 문은 그것을 당해 내지 못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일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믿음성 없는 남자였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예상을 할 수 없는 알맹이 없는 사내였습니다.
이 베드로가 자기에 대한 새로운 신념이 부과되었을 때, 바위같은 흔들리지 않은 성질과
동일시 되었을 때 그는 신념과 힘의 바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유태어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에 대한 위대한 인식이나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들은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구한 대생명력의 화신이므로 나에게는 가지게 되며, 하는 일은
정상적인 것이다. 또한 그 권리 있는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있으며, 모든 것으로 있을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내가 체험해야 할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나의 참다운
자기는 영구의 존재이다. 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될 수 있다."
이것은 멋지고 굉장한 사상이며 감정, 즉 정신의 창조하는 부문에 심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총괄적인 개념으로 유일하고 올바른 것입니다. 신이 나에게, 나로서 확신했다는 것은
나자신에 대한 진리이며, 그 사실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일을 믿고 또 말할 권리를 주게
됩니다."나에게 할 권리가 있는 일을 나는 할 수 있다. 나에게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을
나는 가질 수 있다. 나는 있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있을 수가 있다. 나에게는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될 수 있다." 지성과 위력을 가진 것을 알고 잇는 까닭에 '나는 한다.
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한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언제나 이 세 가지의 정신적 단계를 밟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한다.' 이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들의 당면한 사태는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위력에 대한 도전이며 우리들이 누구이고 무엇이냐의
인식에 대한 하나의 도전인 것입니다.
인간의 체험 속에 최대의 악의 하나는 자기는 연약하고 무엇인가 모자란다고 느끼면서
눈 앞에 다가오는 도전에 맞설 만한 적당한 도구를 갖지 못했다고 믿으며 전진을 두려워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무한의 창조적 정신을 사용하는 무한한 대생명력의
화신이라고 드디어 인정할 때, 의식의 통로를 무한의 지성과 위력과 지도를 향해
열어 놓을 때, 우리들은 글자 그대로 초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모든 사람이 이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간단한 말, 즉 '나는 있다. 나는 한다.'를 이해하고
이것을 계속하여 사용함으로써 생활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을 나는 보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 당신이 아는 진리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모든 행동에
그것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당신의 풍채와 체험을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할 때
당신은 우주를 창조하는 정신의 지성과 위력, 즉 존재하는 한도까지의 위력의 전부를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반항하는 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는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한다!
[36 건강과 행복과 번영의 열쇠]
우리들은 위대한 우주 정신과 대생명력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이 '나'라는 대생명력이 개성화된 것으로써, 스스로를 자각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할 때마다 대생명력의 정신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우주정신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과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우주정신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정신으로서 우리들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유일한 대생명력 속에 있는 지각 있고, 사고하고,
지휘하는 포인트며 정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각자가 선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철학 체계는. 그것은 사실은
전세계의 대부분의 큰 종교의 철학과 같은 것이지만 두 가지의 근본 전제 위에 구축되고
있습니다. 그 두가지의 근본 전제란, 신이 인간으로 화신했다는 것과 생명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속한다는 사상 위에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인 신과 사람과의
동일화에 근본을 이루었고, 그 까닭에 사람은 불사와 신성을 가졌다는 사상이 된것입니다.
이 사상은 세계 최대의 미술에 반영되었고 그 확신이 영감이 되어 최대의 시도로
몇 편인가 쓰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신이므로 인간이 가진 대생명력은
결코 종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원자핵을 분열시켰으므로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그가 우주의
주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원자를 분열시킬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사람은 자기의 신성을 믿어 왔던 것입니다. 신념이 과학 연구를 인도한
것입니다. 신념이 성공으로 이끈 것이며, 성공이 신념으로 이끈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위에서 논술한 두 가지의 전제, 즉 사람은 신의 화신이며 불사 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확실히 사람은 자연계가 창조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스스로를 맏었다면 지구 위에서 할당된 한계 있는 수명을 가지고 위대한 성공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자가 원자를 분열시켰을 때 놀랄 만한 일이 발견 되었습니다.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속에 대생명력 그것이 있었다고 하는 일이 경외감을 가지고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주위의 형체 있는 세계가 존재에 나타나는데 근본을 이루는 지성의 에너지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발견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인 신성을 알고, 무한의 대생명력
그것과 인간이 하나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도 사고력이 있는 한 위에서 말 한 두가지의 기본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들은 벌써 의견의 문제는 아닙니다. 신과 사람과의 절대 융합은 우리들이 실재하고
있는 사실과 같은 정도로 틀림없습니다. 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실, 즉 신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실은 애당초 시간의 태초부터 우리들이 그것에 대해서, 또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하지 않고는 관계없이, 이해하고 못하고에 구애됨이 없이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뒤에 한결 더 진실성이 증가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것을 발견한 뒤에는 목적을 가지고 그 사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합일에 관한 한, 무슨 일도 절대로 그것에 대해서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둘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무지만이 그것이 가져오는
이익을 거부할 뿐입니다. 대생명력 속에는 우리들은 몰아서 자기의 발견에 향하게 하려는
강한 갈망이 있습니다. 오늘날에 이것이 단순한 종교 이론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용적인
정신과학입니다. 근대의 과학자가 가지는 물질계의 개년은 백년 전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과학자는 이제는 물질은 에너지로서 '에너지와 물질은 똑같은 것이며
동일물이고 서로 옮겨 갈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질의 우주는 진실한 세계의 모습이
비쳐진 것이며 진실의 세계의 표면적인 외관입니다. 물질은 정신과 하나이며, 물질은 또
우주적 에너지와 하나인 것입니다. 근대 심리학은 성서의 '그의 속에 우리들은 살고
움직이며 그리고 우리들의 존재를 갖는다.'라고 한 말의 진리를 다시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의 속을 한 번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 자신의 진실을 당신 자신이 깨닫고
있는 것을 발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인가의 본체를 파악하는 데 비해서도
더 먼 곳입니다. 그 포인트에서 당신은 무한의 대생명력, 그것과 하나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실들을 잡아서 그것을 산 현실로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해서 실생활을
개선할 수 있단 말입니까? 봉급을 올리고, 소득세를 물고, 새 집을 사고, 나의 생애에
사랑과 우정을 가져올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무한의 대생명력과 하나라고 아는 일과
내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까?"
분명히 모든 위력, 모든 에너지, 모든 지성, 모든 대생명력 등 세상에 있는 것 전부와 하나가
되면, 우리들이 대생명력의 개성화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한결 깊이 알면 체험의 수평성을 훨씬 저편으로
밀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봉급을 올린다? 환경을 개선한다? 사랑과 우정을 찾아낸다? 물론입니다!
당신은 다만 우주와 자연계의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 보상의 법칙, 증가의 법칙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법칙은 물리, 화학, 전기, 수학 등의 법칙과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또 문명을 건지는 일, 또 개인으로서 우리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은
모든 생명력, 전 인류, 그리고 모든 것의 통합을 인정하는 일, 우리들이 하나의 우주에
산다는 일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들은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든지 낮다든지 하는 믿음을 고집하고 있는
한 만족한 진보를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민족의 우성과 열성에 믿음을 두고
있는 한 세계는 분쟁으로 분열되어 있을 것입니다. 인류는 민족, 피부의 색깔, 언어, 지리적
위치 같은 것이 다르지만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든지 열등하다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사고와 동기가 뛰어난 개인이 나올 수가 있다는 것 뿐입니다.
대생명력속에 있는 좋은 것을 찾는 욕구에 있어서 우리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훔쳐 올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가는 데 충분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불행하게 하는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행복하고 활력을 가지고 살고 있을 때만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어떠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한 이미지를 우리들은 창조하는 정신에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념은 긍정적인 것이거나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하거나 동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의 그림은 선명하거나 흐려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들의
신념을 통해서 상상력 속에 현실의 계획이 세워지고 그것을 통해서 대생명력이 우리들을
위해서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념에 따라서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가난과 극한의 환경속에서 자랐다고 합시다. 그 때문에 아이는
극한적인 체험이 정상적인 체험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는 극한적인 미래를 마음에
그리게 됩니다. 극한적인 상황이 그의 잠재의식 안에서의 사고형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의
기회에서 그가 그 사고의 형을 바꿀 때까지 빈곤은 그의 체험으로서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그런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으로
그 계획을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 아이가 어려서부터 병을 많이 앓고 늘 고생을
하며 자랐다고 합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가 자기는
언제나 병약하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사람은 건강한 것이 정상적이라고 하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아마 병이 정상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병이나 불쾌감의 신념이 그의 상상력을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사람은 좋든 나쁘든 타고난 팔자대로 사는 것이며,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다고
합시다. 만일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운명에 지배되고 있는 것처럼 일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인류의 보통 사람들의 체험이 우리들의 체험이라고 믿는다면
결국 우리들의 일생은 평균의 법칙에 지배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란 나쁜 조정의 결과입니다. 즉, 영적이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며 대개의 경우에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잠재의식
안에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경향의 것이 우리들의 몸이나 주위의 사태에 반영되게
마련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자신이 의식한 사고를 통해서 정신의 새로운 잠재력
존재 상태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집니다. 우리들이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형의 사고를
만들었을 때 극한 의식이나 고난의 속박은 비로소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념에 새로운 방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만들고 만들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낡은 신념에 속박되어 있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적극적인 정신의
자세로 그것을 바꿔 놓으면 일련의 새로운 체험을 창조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자유와 풍요와 건강과 성공과 평화와 행복에
우리들 자신을 동일화시키면 감옥의 벽은 저절로 무너져 버립니다.
바깥 세계는 우리들의 내부 세계의 반영입니다. 바깥의 체험은 표면적인 외관에 불과합니다.
그 표면의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것에 실체를 주는 것입니다. 대생명력은 위대한
실체입니다. 대생명력의 법칙은 정신입니다. 형체는 관찰할 수 있는 장으로 가져온
대생명력입니다. 객관의 세계는 그 배후에 주관의 세계가 있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정신과학자는 이 원인의 분야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며 독자인 당신과 필자인 나는 많은 것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가장 긴장감 넘치는, 그리고 풍부한 체험의
세계에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정신의 위력을 위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당신이 되고 싶고
또 하고 싶은 것이 될 수가 있고 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당신의 정신의 힘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쓰는
그 힘은 당신 자신의 속에 있습니다. 그 힘을 찾기 위해서 어디 다른 곳으로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열쇠는 당신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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