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남곤은 따라온 종을 시켜 해당 그림을 자기 집에서 가져와 김정의 앞에 놓았다.
김정으러서는 깊이 생각하여 이 귀중한 그림에 어울리는 좋은 글을 써 주어야만 할 입장에
놓인 셈이다. 하나 김정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남곤은 마치 놀기만 좋
아하는 한량 같은 식으로 묘사하며 성의 없는 태도로 아무렇게나 시 한수를 휘갈겨 쓰는 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남곤이 재삼 이렇게 말은 했으나 마음속에서
칼을 갈았을 것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비추어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두 사람 사이는 순탄치 않게 되어 갔다. 남곤으로 말하면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정광필과의 사이를 생각해서도 정의 인척이 되는 김정을 좋게 대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난날에 만들어진 감정의 앙금들이 어쩔 수 없이 인사와 관련된 그의 업무상 행위
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을 깨끗한 선비로 지부해 온 남곤이다. 그는 뇌물을
받는 등의 이익을 좇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대체로 양식에 부합되는 논의를 펴기에 힘써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은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조광조로 말하면 자신이 26세 때 관련된 박경의 사건을 당국에 고발한 남곤을
호의적인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터에 김정과도 이처럼 개인적으로
불쾌한 사연이 과거에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남곤과 김정은 다 같이 문장에 능한 사람들이다. 남곤의 만장이야 세상이 알아주는 것이
지만, 김정도 훗날 허균(홍길동전의 저자)에 의해서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장길에 비
교될 만큼 탁월한 시재를 가지고 있었다. 남곤의 글이 그의 유언에 의해서 불태워 없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를 전체적으로 함께 다루어 품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근근히 남아 전
하는 그의 여신영개음일수(신용개에게 한 수 읊어서 줌)라는 시를 보면 사물의 모습과 정취
를 그대로 담아 낸 듯한 감을 느끼게 한다. 내용을 보면 어느 날 신용개가 그의 집을 방문
했을 때 술잔을 주고 받으며 지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버드나무 짙게 그늘지고 낮닭은 울리는데(양유음음욕오계)
갑자기 궁벽한 골목에 수레 소리 울려 놀랬어라.(홀경궁향일륜제)
신용개로 하여금 크게 탄복하고 남곤을 대제학에 천거하도록 만든 작품의 첫 연이다. 그
는 시를 그 자체로 즐기고 사랑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하면 김정은 시를 인간의 자연적인 성정을 담아 내는 것으로 본다. 시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도 거기에 있는 진상(진실된 모습)과 지음(아주 참된 소리)을 포함하
여 나타내는 데에 시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
라 생활속에서 사물의 진상과 지음을 오랫동안 탄미하다 보니 시가 생겨났다고 한다. 요컨
대 진실된 이치를 추구하는 도학파의 입장에서 시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교, 수식
의 과다 등 너무 인위적인 시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의 시에 대한
미의식을 일러 '소산정묘', 즉 고요하고 꾸밈이 없는 상태에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사물의 참된 묘미를 드러내는 것으로 평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서로 틀어질
사단도 있었지만, 이러한 문학관의 차이도 두 사람의 갈등을 낳는 데 한몫을 했으리라.
인간관계에서 친구의 적은 내게도 적이기가 쉽다. 김정과 이토록 드러나게 사이가 나쁜
남곤이 김정과 친밀한 조광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일단 호의적으로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
다.
아) 지치와 현실 문제
지치를 이루는 근본은 왕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는 것이 조광조와 그 동료들의 변함
없는 생각이었다. 왕이 지치에 뜻을 두어 하고자 하면 실제의 일은 말단에 불과한 것이어서
쉽게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성리학의 기본 정치관이자 조광조가 알성
시책에서 밝힌 바도 있다. 그렇다고 민폐를 끼치는 여타의 문제들이 조광조와 그 동료들의
마음에서 전혀 외면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데 조광조가 응교로 승진된 7월 말의 족
강에서 시독관 김구가 제기한 문제를 보면 그들이 현실 문제에도 상당한 개혁 의지를 가졌
던 것을 알 수 있다. 김구로 말하면 어릴 때에 김광필에게서 배우고, 동문의 조광조보다 6년
이나 어리면서도 과거에는 오히려 2년이나 앞서 장원으로 합격한 수재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선 내수사의 혁파를 주장한다. 내수사는 궁에서 사용하는 쌀과 여타
의 곡식, 포목 및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 토지를 비롯한 왕실 재산, 그리고 노비 등
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이다. 그동안 장리를 놓는 문제가 내수사의 폐단으로 크게 논
란되다가 그것이 폐지된 이후로는 한동안 이 관청에 대한 논의가 잠잠해 왔었다.
그러나 토지의 겸병 문제와 관련된 내수사전의 폐단은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내수
사전이란 물론 내수사에서 관리하는 왕실 소유의 토지를 말하는데, 법에 의하여 면세지로서
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이 토지의 경작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 담당하였으며 수확물은
병작반수(수확물을 토지 주인과 경작자가 반씩 나누어 가지는 것)의 형식으로 분배되었다.
그런데 내수사전을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각종 나라에서 부과하는 역을 면제받는 특전이 주
어졌다. 그러므로 농민들로서는 다투어 그들의 토지를 내수사에 바치면서 경작에 참여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내수사전의 규모는 나날이 커지게 되었다. 왕실이 특권을 이용하여 농민
들의 토지를 빼앗아 배를 불려 가는 형편이 되었으니 양식 있는 사람이 본다면 딱하고 한심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직한 김구가 아니라도 누군가 벌써 한마디쯤은 제기했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김구가 지치를 하려면 마땅히 내수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하자 조신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
고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권력 있고 가진 자들에 의한 토지 겸병이 나날이 늘어나 빈부 격
차가 심화됨으로써 민생이 어려워만 가던 때에 명분상 누구라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다. 내수사전의 폐해! 그것은 토지 겸병의 핵을 이루는 셈이었고, 이에 관한 백성드르이 응
어리진 원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토지 겸병의 폐단을 막으려면 내수사전
이 거론되게 마련이어서 당연히 그것은 내수사 혁파의 중심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었다.
김구가 잇달아 토지 소유의 제한을 들고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의 제
시라고 할 수 있다. 소유 규모에 상한을 설정함으로써 내수사전을 포함하여 토지 겸병의 문
제를 근원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누구도 반대
할 이유가 없었다. 참찬관으로 조강에 참여한 이행이 우선 겸병을 막아야 한다는 방법상의
예기를 했지만 이것도 한전을 반대하는 입장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즉각 해결
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날은 문제 제기에 그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토지를 비롯하여 민생과 관련된 문제는 신진들에게 깊은 관심사로 따라다니고 있
다. 8월 초의 조강에서 검토관으로 참여한 기준이 토지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를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전토를 가진 자가 얼마 안 되고 조금이나마 가진 자도 생계 유
지가 어려워 유랑하는 형편이니 나라가 장차 무엇에 의지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
이 농사보다 상공업에 종사하기를 더 좋아하는 세태에 대하여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농사 짓는 것보다 그쪽이 더 많은 이익을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어떻게 해야 백성들로 하여금 농토로 돌아가 즐거이 농사를 짓도록 할 수 잇을
까?
이날의 조강에서 나온 대책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하면 된다는 신
용개의 주장과 국가가 용도를 절약해야 한다는 기준이 주장이 그것이다. 이들 주장은 모두
타당성이 있고 상호 관련된 점이 있다. 국가가 용도를 절약하면 주로 농민들이 부담하게 마
련인 조세도 가벼워질 수 있고 부역, 예컨데 각종 공사에 따르는 요역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서로 본다면 용도를 절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서
로 본다면 용도를 절약하는 것이 더 앞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준의 이러한 주장
은 그 개인만의 주장이 아니라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들 사이에 논의도니 견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술자리 등 자주 어울리는 그들만의 친목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될
수 있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용도를 절약하기 위한 방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재정 지출을 강요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거시, 말하자면 소격서의 혁파라든가 잘못 책정된 공신록의 개정 등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준에 의해서 제시된 농업 장려와 관련된 신
진들의 정책은 훈구 세력과의 마찰을 가져올 소지가 있게 될 것이다. 물론 훈구 세력과 신
진들 사이에 마찰이 반드시 이에 근거해서만 예상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요인들도 작
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절약을 만약 실천적으로 이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히 신,구 세대간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기준은 이 자리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무리 자기네들이 가진 것을 덜어 아래
에 보태주고자 하더라도 실제로는 자기들의 이익 추구에 기울기 쉽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기
도 한다. 그렇다면 상층부가 가진 것이 하층부의 이익이 되고 분명히 정의로운 것이라면 그
와 관련되는 문제를 강도 놓게 추진할 수 있는 것도 예상될 수 있음직하다. 그래서 공신록
의 개정도 그런 차원에서 의미 있는 개혁 작업으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왕 신용개와 기준의 말을 열심히 듣고 개혁에 대한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던 것 같
다. 공안(거두어 들여야 할 공물의 품목을 적어 놓은 장부)의 개정 문제를 스스로 제기하고
나설 정도였으니까, 해당 지역에서 나지 않는 공물을 생산되는 것으로 바꾸어 줌으로써 백
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자는 취지였는데 그러나 일은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나고 만다. 여러
지역의 특산물을 자세히 조사하는 등의 절차를 필요로 하는 이 일에 왕이 과단성 있는 조처
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제기
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균관의 유생인데, 얼굴은 못생겼지만 학문과 행실에는 불 만
하게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 사이에서 존중되는 편이었고 조광조를 비롯한 조정의 신진들과
도 교유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왕의 재위 12년째이던 8월 7일에 비교적 긴 분
략의 상소문을 왕에게 올렸는데, 내용은 정몽주와 김굉필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학문과
덕이 있는 인물의 신주 모시는 것 )하자는 것이었다. 정몽주는 성리학에 밝을 뿐 아니라 충
효와 예절에 뛰어났으며 교육을 일으켜 후세에 끼친 공로가 크고, 김굉필은 바른 행실과 교
육으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으니 이러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쉽게 예기하자면
정몽주와 김굉필을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로 선정해서 일종의 역사적 보상을 함
으로써 사회를 도덕적으로 진흥시키는 계기를 삼자는 것이다.
원래 이 논의는 성균관에서 진작부터 있던 바였다.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 등이 주동이 되
어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일을 추진하자고 나선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도 정몽주에 대해서는 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김굉필에 대해서는
달랐다.
"대유(김굉필의 자)는 두드러지게 드러난 바가 없으므로 갑자기 일을 하기보다 차차 보아
가며 일을 합시다."
대다수의 의견이 이랬지만, 안 등은 계속 강경한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이 일은 어
디로 보나 조정에서 결정할 문제였으므로 말하자면 권전이 총대를 메고 나선 셈이었다.
그 취지는 누구인들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왕도 권전의 뜻을 칭찬하
면서 곧 신하들에게 논의를 해보도록 지시하였다. 뜻은 나쁠 것이 없다는 게 누구나의 생각
이었다. 저들(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들)의 뜻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여 그것을 정
신적 축으로 삼아 하나의 당을 만들자는 데 있는 것이다. 다만 김굉필만 내세우면 너무 속
이 보이는 것 같고 논의의 비중도 약할 것이므로 정몽주를 끌고 들어간 것이겠지 이렇게 색
안경을 끼고 보았던 것이다. 왕이 이들 두 사람의 문묘종사에 대한 문제를 논의 사항으로
제시했음에도 대신들이나 조광조 등의 신진들 어느 쪽에서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부 견해를 서로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왕이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을 때에야 비로소 말문들을 열었는데, 진작부터 드러난 각자의 특성과 입지는 이 문제
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정몽주와 김굉필에 대해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신중론을 주장하는 정광필과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훈구파의 인물들. 정몽주는 우리나라 이
학의 종주이고 김굉필은 중국의 정자나 주자와도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니 당장 문묘에 종
사해야 한다는 기준과 그를 적극 지지하는 조광조등의 신진들. 대체로 이렇게 두 갈래로 나
뉜 상태였다. 논의는 쉽사리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자 남곤이 나섰는데 그의 일종의 절충적
입장을 들고 나왔다. 정몽주의 충효와 공로는 누가 보아도 이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문묘에
종사토록 하자, 그리고 김굉필의 경우는 학행과 교육상의 공로가 있다 해도 아직은 좀더 신
중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의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우대하는 정도로 하는 것이 좋
을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역사에 예법을 두루 상고하며 나온 말이어서 설득력이 있
었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는 조광조 등의 열렬한 주장이 있었음에도 이번에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만다. 돌아간 스승에게 커다란 명예를 드리고, 겸하여 나라에 올바른 도의의 기풍을
세우고 싶었던 조광조로서는 납덩이가 가슴에 얹힌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지치의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마음으로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이번 정, 김 두사람의 문묘종사건도 그래서 제기했던 것인데 결과는 실망뿐이었다. 왕이 지
치에 뜻을 두고 경연에도 열심히 참석하는 것은 고무적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실
망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학문에 임하는 왕의 태도가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
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왕은 학문에 대한 공경의 자세가 부족해 보이고, 그래서 잡
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정, 김 양인의 문묘종사
에 관한 건이 한창 논의중이던 때엣는 세세한 사항까지 왕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전하, 우뚝하게 단좌하시고 기대어 앉지 않으시면 사사로운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한결같
이 언어와 동정이 바르게 되실 것입니다. 또 글을 읽는 것은 단지 문자만을 보아서는 안 되
고 그 뜻을 깉이 새겨 체득해서 하늘의 바른 뜻과 통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학술이 바로 된 뒤라야 정치도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니 유념하시옵소서."
조광조는 왕의 역할을 단지 정치적 지도자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유교의 정치관이 그렇듯
이 그 역시 왕이 스승의 기능까지 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이었으므로 왕의
태도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는 선천적으로 자기의 주의, 주장에 타인이 따라오도록 강권하는 성향이 없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혹은 이게 절대적으로 옳은 길인데 하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에 여기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그는 이를 고치도록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왕에 대하여
시시콜콜한 점까지 들추어 가며 말씀을 드린 것도 결국 이러한 성향이 시킨 것이었다.
조광조의 이러한 성향은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자를 관례에 따라 잠시 민가
에서 보양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도 여러 면에서 그가 적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왕
에게 추천하지 않은 터였다. 정암(조광조의 호)의 집에서 보양될 경우 그가 자기의 기준에
따라 세자를 너무 구속할 테니 곤란하다. 정광필, 신용개 등의 대신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 남곤, 이계맹, 김전, 안당 등을 추천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신들이 이때 조광조
와 함께 이자, 김정 등도 적임으로 생각했으나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세자 보양의 임무에서
이들을 제외시켰다.(중종실록, 권28, 12년 7월 29일 참조)
차) 지방관이 되기를 원함
이즈음 조광조에게는 많은 지식인들의 존경이 한몸에 모아지다시피하고 있었다. 그의 학
문적 성향과 태도를 어설프게 흉내내고자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시며 문장 짓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성리학에 뜻을 두는 자가 많이 생겨난 것이 그 예이다. 또, 성균관 등에서는
의리를 강구한다는 명목으로 하루종일 책상 앞에 무릎꾾고 앉아 참선하듯 시간을 보내는 사
례들도 있었다. 이런 학생들이 있을 경우 선생으로서는 민망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
나 그렇다고 조광조를 탓하며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조광조는 왕의 신임을 가득히 받
으며 떠오르는 태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촉망받는 일단의 신진들 사이에서도 단연 중심 되는 존재였다. 나이로나 관직의 경
력으로 칠 때 그보다 앞서는 선배들이 있기는 해도 그만한 인품과 사람을 끄는 힘,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은 없었다. 그는 과연 개혁을 주도해 가는 중심이었다.
사림은 그를 칭찬했고, 세속은 그와 관련된 온갖 미담들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그가 술과 여자를 멀리할 줄 안다는 예기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그와 여자에 관
한 내용으로 이러한 얘기가 전해진다.
조광조의 나이 아마 20도 채 안 된 때였던 것 같다. 여행을 하고자 집을 나서 저녁 나절
에 숙박할 집을 정하여 들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먼저 온 손님으로 젊고 예쁜 여자가 있었
다. 그녀는 준수한 용모의 이 양반집 자제를 보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은근한 추파를
보내며 접근해 오는 것이 아닌가. 아차, 이것 안 되겠구나. 조광조는 따라온 가노(집에서 부
리는 종)을 재촉하여 짐을 싣고는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역시 마음에 동요가 없지
않았으나 의지로 이를 참아 낸 것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참으로 첫눈에 반한 모양인지 옮겨
가는 그에게 가노를 시켜 부득부득 자신의 머리비녀를 빼서 주기까지 하였다. 정표로 준 것
일 텐데 조광조의 철저함은 이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새로 옮겨간 숙박업소의 벽에 이를 걸
어 놓고 떠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 그가 여자에 깨끗했던 사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나타난다. 고관직을 지냈으면
서도 평생 첩을 두지 않았던 것 같으니 이것도 당시로서는 예외적일 만큼 드문 일에 속한
다. 관직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양반이면 첩 하나쯤 두는 것
은 예사였고 사회적으로도 허용되는 때인데도 정실부인만을 알고 지냈던 것이다.(좀 뭣하지
만 참고로 얘기하자면 율곡 이이의 경우는 첩이 둘이나 있었다. 이이는 그래도 높은 관직에
라도 있었지만, 그렇지도 못할뿐더러 노상 밥을 굶기도 했던 화담 서경덕도 첩을 두고 있었
다. 이들 모두가 축첩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로 보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인물들임을
생각할 때 조광조의 처사는 확실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이면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도덕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여자를 무조건 멀리하자는 게 조광조의 신조는 아니었다. 이보다 뒤의 얘기가
되겠지만 이듬해(중종13년) 5월 19일의 주강에서 왕에게 아뢰는 말로 분명하게 언급한 바
있다.
"남녀가 때에 적합하게 서로 만나서 정도를 잃지 않는다면 이는 도심(도의를 추구하는 마
음)이지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며, 도에 지나치게 거절을 한다면 이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남녀간의 정욕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조광조는 특
이한 인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주색이라는 말이 흔히 붙여다니듯이 남자들에게 흔한 병폐의 하나가 여자 외에 바로 술
이다. 조광조는 이 문제에서도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술을 전혀 못하는 편은 아니었
으나 술로 인한 동료들의 실수를 자주 보고 나서는 철저하게 절주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
야말로 공사의 어느 면에서나 도학의 정신을 투철하게 실천해 간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
을 것 같다.
이러한 그의 성실한 생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지 왕은 다시 그를 전한(종3품 관직)으로
승진시킨다. 단계를 뛰어넘어 응교가 된 지 불과 한 달여 만인 8월에 내려진 조처이니 초고
속 승진인 셈이다. 조광조는 특진의 연속이 기쁘다기보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
심에서 이를 사양코자 하였으나 이번에도 왕은 자기의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조광조
는 수심이 가득찬 표정이 되었고, 이러한 모습으로 왕 앞에서 물러나는 그를 많은 동료 관
원들은 볼 수 있었다.
할 수 없다. 잠시 관직을 떠나거나 지방관으로 내려가서 한 고을을 맡아 다스려 보도록
하자. 어떻게 하든지 왕의 곁을 떠나 중앙 정계에서 멀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그는 이
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정, 이자, 김식 등의 동료들에게도 사석에서 이같은 뜻을 자주
털어놓았다.
"상감께서 바야흐로 학문이 고명하시고 한창 지치에 뜻을 두시는데 이대로 측근에서 모신
다는 것은 안 될 것 같소. 한 몇 년 더 공부한 뒤에 나와서 관직에 종사하게 되면 더욱 잘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또 이런 말도 하였다.
"궁벽한 고을을 맡아 5에서 6년쯤 다스리면서 한가한 때에는 학문도 연마하며 지내다가
행여 버리지 않고 중앙으로 불러 주시면 백성을 다스리고 학문을 일으키는 데도 얼마간 보
탬을 드릴 수 있을듯하오."
해서, 같은 취지의 말을 왕께 아뢰었으나 허락이 내려지지 않았다. 왕은 조광조를 태산같
이 의지하는 눈치였다.
카) 사장이냐 경학이냐
조광조를 전한으로 임명하는 인사명령이 있던 때에 남곤은 우천성, 심정은 형조판서가 되
었으며, 그 며칠 뒤에는 도승지로 있던 이행이 이번에는 대사헌으로 전임 명령을 받았다. 이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새로운 보직을 받았는데, 양차에 걸친 인사 내용에서 조광조를 비롯
한 그의지지 세력들은 상당히 중용된 흔적이 보인다. 왕을 아주 가까이서 모시는 홍문관에
주로 포진하였고, 언론을 담당하는 간원에도 몇 명 배치되어 조정의 언론을 이끄는 데 유리
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인사 개편이 있을 때마다 간원에서 그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직책상 늘 하는 일이다.
이번에도 역시 같은 논의가 제기 되었는데, 그 표적은 이행이었다. 사간원에서 이행의 대사
헌 취임은 잘못된 인사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박상, 김정에 의한 신비복위 상소
에 대하여 이행이 죄를 주고자 한 이래 사림이 그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언관을 통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그 뒤에도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들의 입
김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이행을 가리켜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라고 했고,
조정에서 화합하지 않는 기운이 있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수원부사 이성언이 상소문을 올려 이행을 변호하고 대신들도 이행을 두둔
하는 태도로 나와 한동안 논의가 끊이지 않게 된다. 정광필, 신용개, 권용, 장손순, 신벙, 김
전등 대신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한결같이 이행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조광조 등 신진들의 급진적인 개혁 자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자신들의 속
마음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예컨데 심정은 이번 일을 두고 이행이 뚜렷한 잘못이 없는데
도 악평을 듣게 되어 세상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상태라고 했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신진들
에 의해 탄핵을 받은 김응기의 경우도 효성과 염치, 재주와 행실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건만
물의의 대상이 되어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왕에게 이러한 말도 덭붙인다.
"지금 정치를 함에 있어서 너무 모든 것을 고치려고만 하지 말고 대신들에게 맡기면 세대
간에 분쟁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 말은 평소 신진들이 대신들의 보수적이고 미온적인 자세를 공격한 테 대하여 대신들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평소 사교적이고 문무의 재능이 있다고 하여 죽은 성
희안으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고, 한때 조광조, 김식과 더불어 친교도 있었던 심정이다. 그러
나 근래 들어 이 두 사람을 비롯한 신진들이 그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였으므로 심정도 이들
에 대하여 호의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말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이행을 편들고 나선 사람들 모두가 적극적인 반 조광조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
다. 그러나 그동안 신진들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비판을 받아왔으므로 이들 대부분의 감정
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음과 양으로 조정에 등의 기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
산이 이행을 공격하면서 조정에 화합하지 않는 기운이 있다고 한 것도 그렇게 보면 근거 없
는 말은 아닌 것이다. 심지어 이행을 변호한 상소문의 주인공 이성언을 처벌하라고 주장하
던 신진의 이약빙은 이러한 말도 했음에랴.
"군자는 남김없이 다 해야 하는데, 혹 이말로 대신의 미움을 불려일으켜 화가 제 몸에 미
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창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들에게 기울어 있는 왕도 이행에 대한 대간의 강한 비
판에 놀라고 있었다. 곁에 두고 있어서 나름대로 이행을 잘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왕
이다. 그런데 그가 나라를 그르칠 소인이라니. 왕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정에서
화합하지 못하는 기운이 있다는 데 대해서는 놀라움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파당이 조성
되고 있다는 얘기로 들려 왕으로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이후 한참 이 문제로 군신간
에 논란이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간언 하는 글이 가지기 쉬운
특성상의 표현으로 보아 유아무야로 끝나고 만다. 대신이나 신진측 모두가 이 문제의 확대
를 원치 않았으므로 왕에게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아뢰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행은 결
국 대사헌의 지위에서 교체되고 만다. 10월 들어 그는 호조 참의를 제수 받았다.
조정이 화합되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문제는 대신들이나 신진측 모두
에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 이다. 대신들은 신중론을 추구하는 나머지 기존의 법제를 그
대로 지키려고만 하는 면이 없지 않았고, 조광조 중심의 신진측은 너무나 원칙론을 고수하
며 서두르는 면이 없지 않았다. 7월에 새 왕비를 맞아들인 후 논난을 벌인 묘현(결혼한 왕
비가 종묘에 알현하는 것)의 일만 해도 그랬다. 왕이 응당 종묘에 가서 새 왕비 맞아들인
사실을 고해야 한다는 신진측의 주장에 대신들은 반대를 했는데 여기에도 그들의 입지가 잘
나타나 있다. 조광조의 말을 빌리면 묘현은 고도에 맞는 것으로 예중의 큰 것이요, 만일 이
것을 하지 않는다면 왕이 왕비를 맞아들인 친영의 예도 그 정성이 의심될 수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대신들의 입장은 달랐다. 고도가 좋다고 해서 오늘날 모두 그것들은 그대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세종, 세조, 그리고 성종대에 걸쳐 만들어진 국조
오례의였다. 이 책은 중국의 예법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지만, 친영 뒤의 알묘에 관해서는 빼
고 싣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를 근거로 그것은 다 고금의 시대적 차이와 나라가 다른 데 따
른 시속의 마땅함을 참작한 것이니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신들은 묘현을 하지 않는 것이 이론적으로도 잘못된 점이 없다는 것을 마하고 있기도
한데 이 부분은 남곤이 맡고 나섰다. 그가 말한 요지는 이러했다. 대혼의 예가 바르다면 묘
현을 하지 않더라도 시의에 어긋나지 않거니와 왕후의 묘현은 경전에 실려 있지도 않으니
묘현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론에 밝은 그다운 말이라고 하겠으나, 왕의
뜻도 궅이 묘현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그 낌새를 채고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인
다. 왕은 이에 앞서 부인의 묘정 알현은 어려운 일이고 국조오례의에도 실려 있지 않으니
다시 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우리들 선대부터 지켜 온 법제가 있는데 왜 구태
여 중국의 고례를 새삼 들추어 내어 일을 벌일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짜증 섞인 반대가 대신
들에게는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신진측에서는 옳다고 생각되면 기왕에 해
오던 법제라도 고쳐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 근거를 중국의 고례에서 찻았던 것이다. 그러나
묘현의 문제는 결국 왕과 대신들의 생각대로 낙착되고 만다.
이행에 대한 논난은 공론에 부합되지 못한 과거 전력과 함께, 문학에 능한 그의 특기도
신진들의 비위를 거슬려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들은 사장
을 가볍게 보고 경학을 중시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문장에 특출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성향은 왕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는 참이었다. 9월 9일에 왕은 관례에
따라 승정원과 홍문관에 재직하는 신하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지만, 과거와 같은 시작
은 없었다. 조광조 등이 늘 왕은 시를 지어서는 안 되고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해
서도 안됩니다 하는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성종때만 이날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지으
며 잘 지은 시에 대해 상을 주며 즐겼는데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사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화하다 하는 비평은 조광조 등이 늘 하는 말이었다. 이에 대
하여 정광필이 반박을 한 바도 있지만 그는 문장가가 아니었으므로 반감을 가지고 이러한
말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 교육과 관련하여 남곤이 같은 내용의 말을 왕 앞
에서 할 때 그의 마음은 정광필과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조야의 어디에
서나 자타가 공인하는 문장의 대가였다.
"사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부박하고 경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화하지 않습니까? 사
장과 경학은 함께 해야 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경학을 한다는 사람들을 겨냥한 듯 이러한 말도 덧붙이고 있다.
"정치를 말하는 자들은 삼대의 정치를 즐겨 말합니다만, 삼대의 보좌가 있고서야 그 정치
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얻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더 이상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문장에 능하고 경사에서 밝은 그로서는 경학만
이 최고인 듯이 여기는 신진들의 태도가 적이 않게 못마땅햇을 것이다. 더구나 문학에 대한
취미로 해서 가까이 지내고 있는 이행이 그들에 의해서 또 다시 떠밀려나는 광경을 목도하
면서 이행에게 마음 깊이 동정하는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이 점은 그 역시 문학을 좋
아하며 이들과 친분을 맺어 온 심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조광조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도 그랬
지만, 언어며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조광조는 과연 시경에서 말하는 유비군자(문채가 있는
군자, 즉 내면의 덕성이 용모에 드러나서 훌륭하게 보이는 군자를 말함)라고 해도 좋을 풍
도가 있었다. 이자, 김정, 김식 등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도 다른 무언가 우뚝한 면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나 그는 중심인물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였고, 함부로
하기 어려운 어떤 분위기가 그를 감싸며 돌고 있었다. 해서, 그의 개혁론에 반대하는 사람이
라도 마음으로는 그에게 왜 그런지 공경하게 되고 어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는 하였
다. 한마디로 그는 수퍼스타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를 높이 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
다.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그의 뛰어난 인품과 태도에 어느 한편 거부감을 느끼며 괜히 원수
처럼 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11. "우리나라에 기쁜 해가 솟아오르네"
조광조 이전에 그만큼 왕의 신임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 인물은 없었다. 그야
말로 조광조는 양식을 가진 대다수 지식인들의 희망이요,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우상이
었다. 배움을 구하는 젊은이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투어 그를 찾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자신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한창 바쁠 때였지만, 숭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
는 젊은이들을 조광조는 될 수 있는 한 모두 만나보고, 할 수 있다면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
였다. 자신의 개혁 사업이 하루 이틀에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똑똑한 젊은이들을 육성
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원래 유교에서는 군자가 할 일의 두 가지를 크게 보아
정치와 교육에 두었으므로 양자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그에게 제자가 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조광조의 나이 35세를 전후하여 그와 인연을 맺는
다. 높이 우러르는 마음으로 직접 찾아 오거나 아는 사람의 소개로 오는 등 그들이 조광조
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계기는 일정치 않다. 그러나 도학을 배워 뜻있는 일을 해보고자 하
는 데 있어서는 그들 모두의 생각이 대체로 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한
창 날개롤 펴 가는 이 인물에게 잘 보여 출세의 길을 얻어 보려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옥석은 어디서나 있는 법이고 당장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들
을 개별적으로 용인에 있는 자신의 초당이나 사은정 등에서 만나 지도하며 큰 즐거움을 느
끼고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말하면 이즈음은 국정에서도 얼마간 맛을 보고 있는 그였다. 나랏일을
하는 데 잇어 괴롭고 세력들 중에 붕당을 이룬다는 쑥덕거림으로 신진들을 미워하는 사람들
도 있엇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광조 자신은 사명감을 느끼며 나날을 보낼 수 있었고, 그것은
일하기 좋아하는 그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36세. 앞길은 아직
도 창창했고 왕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지금까지 뚜렷하게 이루어 놓은 것은 없지만, 미래
에 대하여 무언가 기대를 부풀어 있는 그였다. 반대 세력들이 신진들에게 명예를 좋아한다
는 비평을 했을 때 여유있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마음 상태 때문이었으리라.
그에 의하면, 지방의 수령이나 관청의 어떤 공무원이 명예를 좋아하면 고을이 잘 다스려
지고 당해 관청은 그 덕을 입게 된다고 한다. 이는 명예를 헌 신짝처럼 버린채 오로지 재물
을 모으고 뇌물 받기에 급급한 공직사회를 염두에 두고 평소의 지론을 말한 것으로 해석된
다. 그는 뇌물이 성행하는 선비들의 습관적 병폐를 아주 미워하였다. 그가 보는 바에 의하
면, 세조와 성종시대에 훈구 계열의 관료들이 조정에 들어차면서 이같은 풍토가 형성되었다.
이어 연산군 시대를 걸치면서 더욱 그 폐해가 극심해졌고, 지금 많이 깨끗해졌으나 한시바
비 이를 뿌리뽑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11월 20일의 석각에서 한 이 말 끝에 조광조는 인의의 도를 행하여 임금과 백성을 요순과
그 시대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대신들이 앞장서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기도
하다. 지치에 뜻을 두고 있다고는 해도 왕이 그의 기대에 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욱 불
만스러운 것은 대신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을 이해해 줄 만한 정광필이며 신
용개가 기존의 법계에 사로잡혀 일마다 소극적 태도로 나오는 데는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
았다. 간원에서 이행의 대사헌 임명을 반대하고 이행을 지지한 이성언의 상소문을 규탄하고
나왔을때도 그들은 이행과 이성언의 편을 든 바 있었다. 또, 조광조와 그 동료들에게 반대하
는 세력들은 신진들이 지나치다며 공론이 대각에 있으면 나라가 어리러워진다고 극억은 하
는데도 그들은 분명한 태도 표명이 없었다. 공론을 두고 한미디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
음인지 이날의 발언에서 열정적인 태도로 공론에 대해서도 조광조는 언급하고 있다.
공론이 공경대신에게 있지 않으면 대각에 있고, 대각에 있지 아니하면 초야에 있기 됩니
다. 공경에게 있으면 다스려지고. 대각에 그것이 있으면 어지러워지며, 환시에게 있으면 망
한다고 합니다만, 대각에 있으면 어지러워진다는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공론이 삼
공에게 있지 않은 고로 대각에 돌아가는 것이고, 대각에 있지 않으면 자연히 초야에 돌아가
게 마련인데, 초야의 미천한 선비라도 요순 같은 임금과 백성이 되게 하려는 뜻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어찌 조정의 일을 논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공론인가? 개인의 사사로움을 떠난 정당한 논의가 공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양식에 비추어 그렇게 인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공론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반드시 사람들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경우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자연과학
의 세계와 달리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다른 논의가 가능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옳고 그르고의 차원을 떠나 무엇이 더 나으냐의 범주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경
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광조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옳고 그르고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유교
가 그에게 가르쳐 준 '의'의 관념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옳은 논의가 공론
인 것이다. 그가 볼 때 공론은 언제나 있게 마련인데, 요는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이다. 가장
좋은 것은 공경대신인 삼공들에게 있게 되는 경우이다. 그들이 공론을 잘 헤아려 왕에게 진
달하여 국정에 반영시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공론은 자꾸 밑
으로 내려가게 된다. 대각으로 가고 거기서도 공론이 형성되지 않으면 결국 초야, 즉 재야의
민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론을 말하고 논하는 것은 일반 백성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분수 안의 일이므로 이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경우 민심은 곧 천심이 되는 것이니
두려워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조광조는 이러한 뜻의 말을 한 뒤에는 이행을 지지했던 이성언의 상소문을 비난하고 나선
다. 분명히 그 소의 내용은 사악한 뜻을 지닌 것이고, 그래서 이성언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
이 공론인데, 대신들이 그것을 옹호하는 쪽으로 나갔으니 대각에서 공론을 주장하고 나온
것이 아니냐 하는 요재의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이성언을 처벌하는 것이 공론이
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상 반대의견을 어떻게 보든 그것
도 제기되고 논의될 여지는 분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왕이 이때한 말마따나 이성
언이 제기한 소의 내용이 마땅치 않다면 버려두고 채택하지 않으면 그뿐인 것이다. 그에 대
하여 유죄의 유무를 실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당사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굳이 처벌
을 주장한다면 일종의 언론독재가 아니겠는가? 바로 2년 전 신비 복위 상소문을 올린 박상,
김정을 구태여 유배시킨 이행에 대하여 조광조가 반대하고 나선 논리도 바로 그것이 아니었
던가? 그런데 지금은 딴판이 되어 어떻든 처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앞서 말한 이약빙
은 물론 정언 양팽손이며 대사간 이성동, 장령 권벌, 헌납 김구 등 조광조를 추종하는 세력
들이 중심을 이루어 이 주장을 밀고 나갔지만 이성언의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진들
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텁고 조정의언론을 장악한 듯이 보여도 그들이 매사를 좌지우지할
수 잇는 정치세력으로는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를 보스로 하는 이들 세력의 위세는 지위와 상관없이 인사 문제에서도 그들
의 의지를 십분 발휘해 가고 있었다. 이 무렵 고형산이 대사헌(이행이 물러간 뒤 남곤을 거
쳐 고형산에게 이 자리가 주어졌었다)의 자리를 물러나게 되어 후임을 논의할 때였다. 인사
문제를 주관하는 이조판서 한세환은 참판 김극핍과 협의 끝에 조계상을 가장 적임자로 생각
하여 왕께 결재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같은 부서의 정량으로 있는 신진 한충은 상관인
이들의 뜻을 도외시한 채 김안국을 대신 올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윤세환은 격국 이러한 식
으로 후보를 정해서 왕께 올린다. 첫째가 한세호, 다음은 김당,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조계
상이었다. 결과는 한세호가 대사헌이 되기에 이르는데, 한세호는 조광조 계열이었고 조계상
이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였다.
이로부터 대략 20여 일이 지난 같은해(중종 12년)의 12월 13일에는 신진들의 약진이 더욱
뚜렷해 보이는 인사가 발표되었다. 조광조는 전한에서 직제학으로 승진되었고, 그의 전임으
로 비게 된 전한에는 역시 같은 계열의 공서린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도 김정은 승정원의
동부승지, 신광한은 부응교, 유용근은 교리, 정응은 부교리, 기준은 수찬으로 되었다. 그러니
까 이번 인사에서 신진 세력은 승정원에 김정이 포진한 것을 비롯해서 조광조와 그를 따르
는 주요 인문들이 모두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는 홍문관에 배치된 셈이다. 잇달아 12월
26일과 이듬해 1월 5일의 인산에서도 그들의 약진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최숙생 우참찬,
문근 동부승지, 이청 헌납, 이희민 저작등이어서 의정부에서부터 승정원, 사간원에 고루 진
출하였다. 더구나 사헌부에는 대사헌 윤세호를 위시해서 권벌이 장령으로 재직하고 있었으
니 간원에서 여전히 힘을 쓸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1월 5일의 인사 후 열흘이 지나서는
조광조를 다시 부제학에다가 참찬관과 춘추관의 수찬관을 겸직시키는 인사 발령이 난다. 조
광조로서는 직제학이 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다시 승진을 한 것이다. 직제학과 부제학은
비록 정3품의 같은 직급이라도 서열상 부제학을 위로 치는 형편이었으므로 누가 보든 놀라
운 승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부제학 승진은 이조판서인 남곤이 손주를 제 1의 후보
로 하고 조광조는 그 다음의 후보로 올렸던 것인데도 왕의 결재는 이렇게 났던 것이다.
반면, 역시 남곤이 함께 이조에 근무하는 정랑 한충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행을 충청도의
관찰사 후보로 올린 결재는 실현되지 않았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이행을 동정하여 남곤으
러서는 큰 마음먹고 올린 것인데, 이에게 주어진 자리는 병조참지였다. 관찰사는 종2품인데
비해 병조참지는 정3품이었으니 조광조의 파격적인 승진에 비하면 눈에 뜨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후 남곤은 신진들에 비판적인 권균, 홍경주, 장순순을 우찬성 후보로 올렸는데,
이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왕의 직접 임명으로 신진들에게 호의적인 이계맹에게 자리가 돌
아간 것이다.
조정에서 지치를 추진하는 조광조의 세력이 커 가고 있음에도 민생의 어려움은 여전히 제
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마다 불안한 마음에 무격을 찾았으며, 노역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치는 공사천(관청이나 개인 집에서 일하는 노비)의 증가로 군 정원의 숫자도 날
로 줄어들고 있었다. 군에서 도망친 탈영병들이 세력있는 집에 의탁하여 처벌을 면하는 일
도 적지 않았다. 풍속을 순화시키고자 설치한 지방의 유향소며 경재소도 본래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폐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주민들과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들에게 부당한 간
섭과 요구를 하여 괴로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과세면에서도 보면 경작하지도 않은 농지
에 세금을 물리고, 빚을 못 갚는 빈민들에게 부호들이 가혹한 연체이자를 강제로 징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빚 때문에 가구, 집, 의복, 농지, 가축 등을 빼앗긴 농민들은 빈털털이가
되어 사회면에서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촉진되어 갔다. 이 밖에 나라 재정도 날로 형편이
어려워 갔으므로 긴축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고 토지 겸병의 문제도 늘 현안으로 논의가
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한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었다.
조광조도 물론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일들은 언제
고 고쳐져야 할 폐단들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다. 근본이 바로 서야 만사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는 평소대로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치를 하려는 왕의 마음에
변화가 없고 계속 학문에 열심히시라면 그러한 일들도 결국에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조
광조! 해서, 신진들이 조광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다닌다는 이유로 주위에서 붕당을 이룬
다는 등 구설을 해대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하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않은가.
그의 나이 37세가 된 2월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떠나는 안처순에게 준 시에 이 당시
의 조광조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안처순은 현직이 홍문관의 박사였는데, 노모가 남원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직을 청했었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고향 근처의 구례현감자
리를 주었으므로 조광조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가까이 지내던 김정, 김식, 기준, 최숙생, 김
구, 양팽손, 이자 등 여럿이 모여 송별연을 베푼 뒤 조광조는 안처순과 따로 자신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나이는 비록 안이 11살이나 아래였지만 조광조는 그의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씨를 좋아하여 가까이 지내온 터였다. 안처순은 마음이 유독 약했고, 목소리도
매우 작은 편인데다가 말을 하면 지리하고 앞뒤가 분명치 않아 듣는 사람이 말뜻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같은 신진들 사이에서도 그를 탐탁치 않게 보는 사람이 많
았으나, 조광조는 이러한 점을 개의치 않고 '순지, 순지' 하면서 그와 친교를 맺어 오고 있
었
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므로 아마도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를 마지막 잠을 보내면서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종의 돌아가는 이야기며 백성들의 어려운 실정 등 화제는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광조는 마침내 헤어지는 섭섭함을 겸하여 자신의 심정을 다섯 수의 시
에 담아 안처순에게 준다. 시 짓기를 얼마나 싫어하였던지 월과(한 달에 한 번씩 문신들에
게 시를 지어 바치게 하던 일)를 후배 유생들에게 대신 짓게까지 하던 그로서는 이색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주께서 이제 막 교화를 펴 가시니(성주방전화) 우리나라에 기쁜해가 솟아오르네(동구흔
일출).
첫 번째 시의 한 구절인데 왕에 대한 지치의 기대가 한껏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
을 붕당으로 모는 등 반대 세력의 비평도 적지 않음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두 번
째 시에서는 이렇게 읊고 있기도 하다.
대도가 오래도록 적막하더니(대도구적막) 다른 논의가 지금은 높고 험하구나(이의금쟁영).
혼혼한 천길 높이의 물결에(혼혼천장파) 흙탕물이 맑은 물을 덮치려 하네(황류욕엄청). 왕의
은택 막혀 아래에 미치지 않아(왕택체막하) 쇠잔한 백성들은 자생할 수 없다네(잔맹무자생).
이 시는 정국의 돌아가는 움직임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연산군의 폴정 아래에서
대도, 즉 왕도는 어디서도 들어 볼 수 없을 만큼 적막하였었다. 그 때문인지 지금 우리들(조
광조와 안처순을 비롯한 신진들)이 지치를 하려는 데 대햐여 그것은 어렵다는 등 다른 논의
가 대체 얼마나 많은가. 여보게 순지, 보라구. 그것은 탁하게 흐르는 천길 높이의 물결이 되
어 흙탕물로 우리가 이끄는 맑은 물결을 덮치려 하네그려. 그러니 생각해 보게나. 임금님의
은혜가 어디 저 밑의 백성들에게 미칠 수 있는가. 불쌍한 우리 백성들, 그들은 혼자 힘으로
살 수가 없을 정도 아닌가. 이렇게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나머지 시들에서는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마음을 밝게 하여 국정에 임하겠다는 것과
남으로 떠나는 안처순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주로 해서 말하고 있다.
12. 개혁을 위한 준비
가) 기대, 불안
지치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고는 해도 조광조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잘못
된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것저것 헤아려 보고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어니 해도 역시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왕의 마음이었다. 개혁을 이룸으로써 지치를 달
성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왕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 왕의 마음에 미덥지 못한 면이 있었다. 말은 언제나 긍정적인 왕이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그와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컨데 왕이 자산의 재위 13년째가 되는 이해 4월
에 내린 대사의 반포만 해도 그랬다. 나라의 경사를 이유로 죄인들에게 자주 사면을 내려주
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신하들이 말씀드렸을 때 왕은 이에 동의하는 의사표시를
했었다.
"대사란 소인에게는 다행이요 군자에게는 불행이니 임금이 즐겨할 일이 못된다."
경연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새 왕비(문정왕후)를 맞은 데
대하여 명나라에서 승인하는 고명이 내리자 왕은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당일로 대사면을
반포하였다. 지난해 친영 때의 대사에 이어 또다시 수많은 죄인들에게 사면의 은전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법의 권위를 가볍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범법자들에게 재범의 기회
를 높인다고 보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죄를 지어도 나라에 무슨 경사가 있으면 사면으로
또 풀려날 수 있겠거니 하는 믿음이 있는 한 재범을 두려워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을 것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광조를 위시하여 많은 신하들이 대사면의 전후에 이를 힘써 반대했
지만 왕은 자기 고집대로 하고 말았다.
온순한 성격을 지닌 왕이다. 그러나 별스레 고집은 강한 데가 있었다. 이희옹이란 자가 있
었는데, 이 사람은 연산군이 혁명으로 쫓겨나던 날 승지로 있었다. 혁명군이 궐내로 밀고들
어오자 그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연산군을 뿌리치고 하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간
자이다. 그렇게 해서 슬그머니 혁명군의 대열에 끼어들어 엉뚱하게도 정국공신에 올랐는데,
이렇게 된 경우로는 그말고도 같이 승지로 있던 윤장이란 자도 있었다. 그런데 윤장은 나중
에 문제가 되어 공신록에서 말소되었지만, 이희옹은 개정되지 않은 채 특혜를 누리고 있었
다. 누가 보나 불합리한 일임은 불문가지. 그래서 정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그의 공신록 삭훈
을 몇 년에 걸쳐 주장해왔으나 왕은 불윤(신하들이 아뢰는 말에 대하여 왕이 타당성이 없다
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불윤을 거듭, 대사면의 문제가 논난되던 이때까지도 고쳐지지 않
고 있던 터였다.
이제 31세가 된 왕. 지치를 바라지만 말과 실천이 다르다는 점에서 볼 때 개혁에 적합치
않은 면이 분명 있었다. 게다가 고집이 이토록 세고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할 때
엉뚱한 화란인들 어찌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직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들을
신임하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보수적일 뿐 악의는 없
는 정광필이며 신용개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치자. 그러나 홍명주, 장순손, 신정, 조계상 등의
인물들은 언제라도 일을 꾸밀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형산이며 김전, 남곤 등도 만약 일이
벌어지면 그들의 정치권내의 위치와 성향으로 볼 때 여기에 가세할 수 있으리라.
개혁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정치를 그만두고 재야로 물러나 학문을 더 연구
하거나 지방의 외직으로 나가고 싶어했던 조광조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허락치 않고 있다.
하기야 막무가내로 떨치고 가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왕이 보여
주는 신임도 그렇지만 개혁에 대한 조광조 사신의 열정이 그를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이
런저런 생각이 함께 복합되어 37세가 된 해의 상반기 들어 그의 마음은 기대와 불안, 그리
고 개혁에 대한 초조감으로 조급해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된다.
"기강이 없는 상태에서 만일 위란이라도 있게 되면 땅이 무너지는 듯한 사태를 어떻게 막
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취지의 말을 왕에게 드리는가 하면
"전하의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시고 대신들이 협조적이라 할 수 없으니, 신들은 진실로 그
끝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이렇게 한탄과 우려가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4월 28일의 석강에서는 왕이 지루
할 정도로 길게 아뢰는 가운데 이러한 말을 한다.
무릇 군자와 소인은 빙탄불가상용(얼음과 숯불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 소인들은
반드시 군자를 죽여 없애거니와 끝내는 자신들도 보전하지 못하니 그들 역시 우매하다고 이
를 만합니다. 옛말에 '죄를 씌우고자 하면 구실로 삼을 말이 어찌 없겠는가'하였듯이 소인들
이 군자를 모함하는 데 있어 어찌 덮어씌울 말이 없겠습니까?
불안한 마음의 일단을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참찬관으로 같이 경연
에 참여하고 있던 김정도 조광조에 잇달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지금 군자를 공격하는 자들이(개혁을 추진하는 저희 신진들은) 왕안석(중국 송나라 때의
개혁정치가)과 같은 무리들이라고 하여 임금님의 마음을 현혹시키려고 하니 성상께서는 더
욱 주의해서 살피셔야 하옵니다."
그렇다면 조정에 지금 굉장한 알력과 갈등이 있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그러나 딱히 누가
자신들을 반대하는지 밝혀 말하고 있지는 않다. 왕도 묻지를 않고 있다.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러나 이날 조광조는 평소 그랬듯이 많은 말을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말도 그중에는 들어 있다.
(소인들이)만약 하루아침에 그 원한을 품게 되면 사림의 참화가 필히 죽음에 이를 것이옵
니다. 착한 일을 하는 선비들도 참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다만 성명(왕의
총명)이 위에 계심을 믿고 일을 할뿐입니다. 그러나 선사들의 형세는 외롭고도 약해서 만약
주상께서 한번이라도 소인들에게 쏠리게 되면 폐조 때와 같은 참화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
되옵니다.
전하, 끝까지 저희들을 믿고 맡겨 주시며 만일의 사태가 없도록 보호하여 주십시오, 하는
뜻이 이 말에는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왕이 조광조의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
지는 않다. 조광조가 다른 때와 비슷한 말을 또 하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덤덤하게 지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조광조야 물론 심각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이지만, 그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장애에 대한 예언을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우가 더
러 있다는 사실을.
이날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할 기회를 채 주지 않는 가운데 이러한 말도 하고 있다.
"성상께서 흥기시키는 도를 아시기 때문에 선비들 역시 분발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당신에게 기대할 무엇인가는 있기 때문에 이것저것 어려운 가운데도 일을 하고 있
습니다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 함께 불안은 그의 내면을 언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취지의 말도 연이어 하고 있다.
지금 나라를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기상은 마치 이른봄의 풀과 같아서
느닷없이 서리라도 맞으면 말라죽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데 주상께서는 시사를 잘 헤아리셔
서 좋아하고 싫어하심을 분명히 하시고 빨리 할 일은 빨리 하시며 천천히 할 일은 천천히
하소서.
왕의 춘추는 지금 한창 나이인 30대 초반이다. 사름은 대개 40이 넘으면 보수적으로 되기
가 쉽다. 그러므로 이때를 놓치면 개혁은 어렵다. 후에 신진 중의 한 사람인 한충이 20대는
너무 어리고, 40대는 기력이 쇠진하며, 30대가 개혁을 하기에는 가장 좋은 나이라고 말한 것
에 조광조도 동감이었던 듯하다. 실제로 그는 왕에게 학문을 권하면서 지기(뜻과 기운)가 쇠
약해지면 학문을 해도 이익될 게 없을 거란 말을 하였으니 지치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가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에 따라 빨리 할 것은 빨리 하자고 재촉하고 있는 셈이다. 그
래야 민생의 구제도 하루속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개혁세의 강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조정에서 힘을 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
은 주로 간관을 주축으로 삼는 비판적 기능에서 그러할 뿐 정책의 집행 단계에서는 아직 약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슨 문제건 대신들의 단계로 올라가면 정광필과 신용개 등 보수
적 성향의 인사들에 의해서 저지되기가 일쑤였다. 의정부에 우리를 도와줄 정승 하나 심어
놓아야 한다.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들이 진작부터 해온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좌
의정 김응기의 적임 여부를 논난하여 이 무렵에는 마침내 영중 좌의정으로 올라 앉아 현재
는 우의정직이 비어 있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우리들과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안당이 앉아
야 한다. 조광조등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안당이 과연 정승의 재목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온건
하고 양식은 있었으나 통솔력이 별로 없었다. 이조와 호조 등 그가 기관장으로 취임했던 어
느 관청에서나 직원들에 대한 그의 장악력은 그래서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몰락 이후 소생하는 사림들의 의견을 정치에 잘 반영한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성균관의 유
생으로 있던 조광조를 조정에 적극 천거한 바 있고, 신비 복위 상소문으로 박상과 김정이
함께 처벌받게 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신
진들을 위해 호의적인 배려를 늘 아끼지 않았다. 소속 관청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김
식의 등용에 관심을 쏟았고, 조광조에게 내려진 승정원 부승지로의 인사를 본인이 싫어하지
취소하는 데 힘써 주었다. 조광조를 부승지로 임명한다는 왕의 명령은 조의 나이 37세이던
애해 5월 2일자로 내려졌다. 승지라면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에 해당되는 직임이니 왕을 가
까이서 모시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나 경연관으로서 왕을 학문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홍문관의 관원된 입장보다는 아무래도 조광조의 기질에 맞지 않는 점이 있
었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이를 사양하고 있었는데, 안당이 왕에게 그의 바라는 바를 적극
아뢰어 결국 현직대로 부제학에 유임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안당 또한 그동안 조광조 등 신진들의 덕을 본 점이 없지 않았다. 예컨데 그가 이해 3월
에 우찬성이 된 경우도 그랬다. 당시 이조판서이던 남곤은 권균, 홍경주, 장순손을 후보로
올렸을 뿐 안당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왕은 신진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는
기미를 알고 직접 우찬성으로 발탁해 올렸던 것이다.
안당이 우의정이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장애가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직의 두 정승, 즉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신용개가 그의 인물 됨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
은 이계맹, 김전, 남곤을 마땅한 후보감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단지 인물
에 대한 평가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열로 보더라도 안당은 이들보다 아
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명권자인 왕은 은근히 안당에게 마음을 두고 정광필에게 의향을 물은 바 있다.
이에 웬만한 성품의 정광핑은 왕의 심중을 헤아리고 평소 적임자로 생각한 이, 김, 남의 3인
에다가 안도 무방한 것으로 말씀드렸으나 비중은 물론 안 외의 3인에게 있었다. 마침 좌의
정 신용개는 병 때문에 조정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왕은 그에게도 주서로 있는 윤구
를 보내어 생각을 물었다. 그러자 신용개도 이, 김, 남의 3인을 적임자로 보고 있었으나 중
간에 일은 묘하게 달라지고 만다.
윤구가 신의 의사를 확인하고 승정원에 돌아오자 승지로 있는 이지와 김정이 내달으며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물었다.
"그래, 무어라 하시던가? 좌상께서도 이판대감(안당을 말함)에게 뜻을 두고 계시겠지?"
완전히 안당에게 유리하도록 대답을 해 올리라는 유도의 말인셈이었다. 같은 관청의 상급
자인 이들의 말은 윤구에게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그
들의 뜻을 반영시키는 내용으로 왕에게 아뢰고 만다. 이계맹, 김전, 남곤에다가 안당도 적음
으로 생각한다는 취지로 전해올린 것이다. 그러나 법규상 후보가 3인 이상은 될 수 없으므
로 이 네 명중 누구든 한 사람은 빠진 상태에서 선발을 해야 한다. 누가 될 것인가? 보수세
력과 신진들이 모두 긴장된 상태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결말은 어렵지 않게 나고 말
았다.
"이조판서 안당이 정승으로합당하니 단망(한 사람만을 후보자로 올리는 것)으로 서계(글
로 써서 아뢰는 것)하여 올리라."
왕의 지시가 이렇게 내려졌기 때문이다. 와아, 신진들은 기뻐하였고, 안당은 과분한 인사
에 몸둘 바를 몰랐으며, 보수 세력들은 씁쓸한 기분을 맛보는 가운데 갈등은 한층 골을 깊
이하게 되었다. 윤구가 좌의정 신용개의 말을 왜곡시킨 사실이 차츰 알려지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윤구는 김정 등 상급자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꾸며서 말을 한 이
후 괴로운 마음을 삭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관 심사손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역사를 기록할 때는 참작해 써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심은 보수 세력내의 꾀
돌이라 할 수 있는 심정의 아들이었으니 그후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갔을까는 짐작하기에 어
렵지 않다. 더구나 윤구가 좌의정 신용개와 만날 때 사관 유희령도 다른 일로 왔다가 현장
에 같이 있었으므로 일의 잔상은 잘 알려질 수 밖에 없었다. 왕이 안당에게 처음부터 기운
바가 있었으므로 윤구가 신용개의 말을 바로 전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수 있다. 그
렇더라도 절차가 바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누구라도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인사가 있을 때마다 걸핏하면 직임에 적합치 않다는 이유로 많은 인물들이 신진들
로부터 공격을 받아 온 보수 세력으로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왕이 직접
내린 결정이라 드러내놓고 항변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양측의 갈등은 엉뚱한 것을 계
기로 한동안 시끄러워지고 만다. 지진! 이 천재지변이 그 계기를 만든 것이다.
지진은 안당이 우의정에 임명된 5월 14일의 저녁 나절과 그 이튿날의 새벽 한 시경, 그리
고 16일에도 연이어 일어난다. 그 결과 수많은 민가의 집과 담이며 성의 밀부가 무너졌고
종묘의 난간까지 떨어져 나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5월 16일에는 심정이
형조판서로 임명되었으니, 정치의 잘잘못과 관련지어 지진을 해석하자면 정파간에 다른 해
석은 얼마든지 가능하게 된 셈이다. 당연히 신진들은 평소 눈의 가시처럼 보고 있던 심정과
병조판서 장순손, 그리고 예조참판 조계상에게 그 탓을 돌렸다. 지진의 원인에 조정에 있는
소인들 탓이라고 보는 여론의 뜻을 반영한 것이다. 심과 장은 인격으로 보아 그 직에 합당
치 않다는 것이요, 조의 경우는 마침 그가 왕에게 아뢴 말이 빌미가 되었다. 조계상은 14일
에 일어난 지진의 원인을 두고 조광조등에 대하여 평소 품어 온 감정을 왕 앞에서 유감없이
터뜨리고 만다.
"소인은 있다고 해도 진실로 알아내기가 어려워서 겉으로는 군자이지만 그 속은 소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임금이 옛 성현을 좋아하는 것을 좇아 현금 당세에 시행할 수 없는 것임
을 생각지 않고 겉으로는 고도로 인도하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좋아하는 것을 관철하
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무리들은 인화가 아니면 천형을 받아서 참화로 인한 패배를 면
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독한 악담이라고 하겠는데, 여기서 그가 소인으로 지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는 뻔하
게 드러나 있는 셈이다. 이와 함께 그는 이번의 지진이 우의정 인사의 잘못 때문임도 감추
지 않았다. 신진들과 가까운데다가 그들의 업혀서 우의정이 된 안당에 대하여도 그는 감정
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휴가를 얻어 용인의 선영에 있는 초당과 사은정에서 조욱등의 제자들과 학문을 하며
지내고 있던 조광조는 조계상이 한 말을 전해듣자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16
일에 일어난 지진의 원인에 대하여 그는 보수파에 속하는 심정을 지목하고 있었던 터였다.
"지진이 일어난 것을 보니 심정이 형조판서가 된 게로구나."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한 이 말은 신기하게도 그대로 맞았으므로 모두가 놀라던 차에 조
계상의 말이 전해온 것이다.
조광조는 심정을 꾀는 많아도 간사란 사람으로 쳐서 가볍게 보고 있었으며, 조계상은 성
격이 바르지 않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공명심이 너무나 강해서 언젠가는 무슨 일
을 저지르고야 말 인물로 평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또, 조계상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을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지방수령들에게 자녀들
의 혼수감을 요구하는 경우가 하도 잦아서 도대체 조계상의 자식들은 몇이나 되느냐는 불만
의 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조계상은 당연히 신진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김식은 그를 가리켜 임
금을 시해할 수도 있는 자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공격에는 보수파에 속하면
서도 중후한 인품의 소유자이며 유능한 재정 전문가였던 대사헌 고형산도 가담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조계상은 파직되고 만다. 그로서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다. 정광필 등 보
수파내의 중도적인 인물들이 장순손, 심정, 조계상에 대하여 애써 변호를 하기도 했으나 ,
그들은 한결같이 크게는 파직, 작게는 교체되거나 혹독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조정의 언
론을 신진들이 잡고 있는데다가 왕의 마음이 아직은 그들 편에 있고 보니 장, 심, 조로서는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판세 위에서 이제 조광조는 한층 세차게 개혁을 추진해 갈 모
양인데,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까?
정치에는 투쟁이 있고 때로는 음모도 있어서 그것은 생사를 거는 싸움을 연출하기도 한
다. 그럼에도 정치가 인간생화에 언제나 없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불가결한 인간생활의 한
부문이기 때문이리라. 생각과 말이 한번 세워지면 그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인간생활의 한 속성이거니와 그렇기에 정치는 필연적으로 반대를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왜
냐하면 정치는 이상이라는 하나의 생각을 상징적인 각종의 말(뜻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
시)로써 표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치라는 이상을 가지고 조광조는 지금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있다. 소인을 물리쳐야 한다
는 주장도 그중의 한 가지이다. 과거 이행을 공격한 것이나. 이번에 장순손, 심정, 조계상을
공격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말의 표시이다. 말, 말, 말. 정말 말로써 말이 많고 인간세
상이고 흥망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정치판이다. 이제 조광조는 개혁을 도모하면서 그가 해온
말들을 실천해 가고자 노력하게 된다. 37세이던 이해에는 뒤를 이어 갈 둘째아들 용이 태어
나기도 했으니 아직은 행복한 운세가 떠나지 않은 셈이다.
13. 개혁의 길
가) 소격서를 없애다
1518년의 7월, 이달 11일자로 조광조에게는 부제학의 본직에다가 겸동지성균관사의 직책
이 더해진다 여기에다 기왕에 맡고 있던 경연 참찬관과 춘추관의 수찬관도 겸하고 있었으니
왕의 신임은 그대로 두터운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성균관의 동지성균관사는 상임직이 아니므로 그 때문에 특별히 바쁠 일이 없는 자리이다.
그러나 나라의 인재들을 키워내는 최고 국립 교육기관의 고위직이니 그렇게 가벼운 자리로
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계속되는 이 초고속 승진의 출세가도는 조광조에게 박
혀 있던 평소의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집안에서도 숙부를 비롯하여 모두가 이제 화
가 아침 저녁으로 닥치게 되었다며 걱정하고 우려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사
양하기를 마지않는데, 그 정황을 보면 참으로두려움에 젖어 있는 듯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
내고 있다.
"만약 이 직임을 그대로 받을 경우 인화가 없으면 천벌이 있을 것이므로 신이 필연코 몸
을 보전하여 관직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뢰기도 했고, "분수에 지나치면 조물조
도 시기할 것이니 끝까지 보전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이런 식의 애걸에 가까운 간청도 하
고 있다.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사양하엿으나 그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지 않는 왕! 왕은 지난 6월
초의 어느날 주강에서 조광조가 한 말을 나름대로 유의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나오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주강에서 조광조는 이런 말을 했었다.
"왕이 훌륭한 신하를 얻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신하가 착한 임금을 만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때나 그런 신하, 그런 임금이 쉽지 않을 것인데, 조광조는 그런데로 착하고 훌륭한
임금을 만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개혁하기에 다시없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 조광조의 생각이었다. 기존의
것을 지키기 좋아하고 개혁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 누구나의 마음일 수 있다. 또,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조정에는 책임지고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기 한몸의 이익만을 생각
하며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요순의 도를 너무나도 높고 멀어서 금세
에는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외면하고 있으니 군신 상하간에 서로 마음을 닦고 반성하
는 의미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그날의 자강에서 조광조가 한 말인데, 이제
정말로 개혁을 하나씩 해나가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탓일까? 평소에도 장황하던 그의 말은
이날따라 더욱 길게 이어졌다. 좌중에 지루한 감이 돌았으나 물론 그 자신은 그런 분위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치의 이상! 그것을 위한 개혁은 그의 신앙이었으니까.
7월 말. 왕에게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부 직원들이 합동으로 한편의 상소문을 올렸다. 요지
는 소격서의 혁파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는 조광조가 커다란 개혁 과제로 삼아 오던 것이었
다. 소격서의 혁파, 즉 그것을 없애는 일이 거론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산군을
몰아낸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이 문제는 줄기차게 도마 위에 올려져 온 터였다. 그러나
존치된 기간이 길고 유래 또한 오래되고 보니 없애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왕의 재위 초
기에 성희안 같은 원훈 공신에서부터 간원의 신하들까지 애써 이를 없애려고 했어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교에서 유래된 간청이므로 이단이라는 점은 알면
서도 인간의 보수적 성향이 이를 가로막아 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소격서의 기원은 고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예종 임금때 중
국에서 생성된 도교의 기도 대상인 천존상을 모시면서 유래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신격전
이라고 불렀었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소격전 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관청으로 존속하
였으므로, 세조 때에는 명칭을 소격서로 바꾸여 지금까지 내려오는 터였다. 주임무는 하늘과
산천, 별자리 등에 제사지내고 왕실의 병을 낫게 하며 가뭄이 끝나도록 기원하는 등의 일로,
소재지는 지금의 삼청동, 소속은 예조의 산하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삼청동에는 성제단을 마
련해 놓고, 일월성신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상청, 태청, 옥청을 위하여 초계 지내는 것을 거
르지 않았다. 관원으로는 종4품의 영한명을 위시하여 별제 두명과 참봉 두명에다가 잡극직
까지 합쳐 총 15명이었는데, 이들은 일정한 제복을 입고 경문을 외는 등 매우 엄숙한 태도
로 제사를 지내고는 하였다.
미신을 배척하는 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소격서가 마땅치 않은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
다. 한마디로 배격해야 할 이단인 것이다. 게다가 생각하여 보라. 제사는 그저 냉수만 떠놓
고 지낼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격서에서 치르는 수많은 제사 때마다 제물이 쓰이게 되고
이는 백성들이 낸 세금에서 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소속 관원들에 대한 인건비의 지출도
물론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조신들 대부분이 이 문제에 관한 한 정파를 떠나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간원에서 소격서 혁파의 상소문을 올리자 언제나 신중론을 내세우던 정광필, 신용개 등 대
신들까지 "잘 한 일이야" 하면서 환영하는 빛을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한동안 뜸하던
소격서의 혁파 문제가 수면 위로 본격 떠오르게 되었지만, 누가 이것을 주도하여 현안을 해
결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에 그랬듯이 왕은 간원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고도 "조종조에서
하시던 일이니 나로서는 가볍게 고칠 수 없다." 이런 말만 주문처럼 외고 있는 판이었다.
8월 들어서부터 소격서의 혁파 문제는 본격화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왕과의 지루
한 말싸움에서 조광조가 주도자로 나서게 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가피한 형세였을 것이
다. 조정 내외에서 우뚝해 보이는 모습, 의(정의)와 이(이익)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전자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투철한 도학적 세계관, 그리고 신하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
언을 할 수 있는 용기 등 이 모든면에 있어 그는 군계일학이었으니까.
지난 2월의 경연에서 중국 후한 시대 당고의 화를 논하면서 조광조는 이렇게 말한 바 있
었다.
그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국시를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 화한을 헤아리지 않은 채 감히
하는 사람이 바른 선비로서의 마음씀입니다.
지금 소격서는 어디로 보나 국시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로서는 자신이 공언
하고 생각해 왔던 바를 실천으로 나타낼 기회를 맞이한 셈이다. 정의와 이익을 구분하는 입
장에서 보더라도 소격서의 존치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에 합치되지 않고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지금 민생은 극도로 곤핍하여 굶주리며 전국을 유랑하
는 백성들이 한둘도 아닌 때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국가재정을 낭비하게 만드는 소격서, 이
것이 과연 필요하단 말인가? 역시 같은 2월의 경연에서 공물의 과다 징수로 인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왕에게 아뢰었던 그다.
우리나라 전세가 30분의 1이라고는 해도 공물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 때문에 민생이 날
로 곤궁해지니 경비의 용도를 헤아려 마땅히 줄인 후라야 어느정도 백성들이 편안해질 것입
니다. 지금 각 읍의 공물을 보면 토산품이 균일치 않아서 또한 모두 방납으로 하니, 한 되의
납부를 한 말로 징수하고 한필로 납부할 것을 세필로 징수하는데, 묵은 폐단이 쌓에 이퍼럼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렀으니 조정에서 어찌 백성들이 생계를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물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그것에 대한 조광조의 특별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원자보양관
으로서 한 말에도 공부와 군액이 무엇보다 잘 되어야만 다스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고 본 바 있다. 요컨대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익하게 경비만 들어가는 소격서는 당연히 혁파되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
다. 그런데도 왕은 조종조에서 지켜오던 것이니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평소의 말을 이번에
도 되풀이하며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조광조는 그
때 한 말이 있었다.
나라의 법제는 비록 가볍게 고칠 수 없는 것이나, 학문이 고명하셔서 사리를 밝게 비추시
니 대신들과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셔서 덜 것은 덜고 보탤 것은 보태서 융평을 기필코 이룬
후에야 조종께서 만드신 법을 바르게 준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해오는 법과 제도를 그저 치키기만 하는 것이 잘 하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 일
의 돌아가는 이치에 따라 융통성 있게 빼거나 더해서 현실에 맞게 해야 한다는 말인 것이
다. 그러니까 융평의 법제의 개혁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당치 않거
나 현실에 맞지 않는 내용은 없애거나 축소하고 부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새로이 넣어서 법
제를 적합하게 만들어가는 일종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세제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요소가 있을 때 그에 해당되는 내용들을 빼고, 분배의 형평화를 강화하는 내용을
넣는다면 그것이 바로 융평인 것이다. 융평은 법제의 개혁을 위한 절차적 방법롭이지 본체
적인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광조는 융평을 말하는 자리에서 함여유신을 강조한 바도 있다. 글자 그대로 모두가 더
불어 힘을 합쳐 새롭게 해아 한다는 것이다. 법제를 마땅하게 새로이 하고, 마음을 새로이
하며, 그렇게해서 새로운 정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후삼국 시절에 후
백제의 2세 임금 신검이 주장하고, 고려 때의 인종 임금도 외쳤던 유신이라는 용어! 그 말
이 이제 조광조에 의해서 다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현실속에서 어느 때라도 제
기됨직한 하나의 구호이자 목표일 수 있는 유신!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이루기란, 과거 미
래를 막론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어떻든 누구도 앞장서 과감하게 바른 말을 하고, 민생의 괴로움을 그 이상으로 아프게 생
각하는 사람이 없는 이상 조광조는 이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1일에 소격서의 혁파를 겨냥하여 올린 그의 상소문은 참으로 긴 가운데 격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소격서의 설치, 존속은 사도를 가르침이니 올바른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 이미 그것의
혁파르 주장한 기일이 오래 되었다는 것, 성상께서는 조종대에 만든 것이니 함부로 없앨 수
없다 하시지만 옳지 않은 것을 가지고 조종을 들어 말함은 선왕들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
어서 불경스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왕은 역시 거절의 뜻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사간 윤은필을
비롯한 사간원의 관원들과 사헌부의 여러 관원들이 들고일어났다. 성종께서도 혁파하시려다
가 한명회 등의 반대로 이루시지 못한 일인데 이제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
직임에 맞추어 조광조는 바삐 움직였다. 홍문관의 관원들을 모아 다시 혁파를 간언하는 한
편 대신들에게도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한 차례씩 간절하게 아뢰었으나 왕의
반응은 역시 거절.
안 되겠다 싶었던지 이번에는 윤은필을 비롯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이 모두 사직을
청하고 만다. 왕이 불러 일을 하도록 설득해도 이들은 막무가내. 이들의 시위를 무기 삼아
조광조가 홍문관의 관원들과 함께 다시 십여 차례를 더 아뢰었으나, 고집통이 왕은 역시 들
어주지를 않았다. 보다 못한 승정원의 승지들까지 나서 세 차례나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
였으나 이것도 성과는 없는 상태.
마침내 정광필, 신용개, 안당의 세 정승이 나서서 다시 아뢰고 조광조와 여타의 신하들이
일제히 수도 없이 아뢰었으나 소득은 여전히 없었다. 왕도 나중에 지겨웠던지 이런 식의 방
패막이 말을 한다.
"세종과 성종께서 태평의 정치를 이룬 것이 우연이 아니것만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으셨
으니 지금 그것을 꼭 없앨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신광한을 대사간으로 임명하는 등 간원의 인원을 다시 짜고자 하였으나 이들 또
한 사직을 청하고 만다. 소격서를 상감께서 혁파하지 않으시는 한 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라에서 실시하기로 공고한 과거 시험 날자도 다가오는데 간원이 비어 있으니
시럼을 연기하든가 해야 할 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일부의 종친들과 예문관 및 성균관 생
원들까지 가세하며 공방은 계속 이어지되 매듭은 풀리지 않는 답답한 나날. 왕으로서는 소
격서가 오래된 관청인데다가 거기서 주관하는 각종의 제사도쉽사리 폐지할 수 없다고 보았
다.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는 일은 상례화된 일이요, 왕이나 그의 지친들이 하늘에 대하여
병의 쾌유나 개인적인 기원을 드리는 일이 자주 있다. 특히 이 후자의 일은 주로 왕의 비빈
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방해 공작은 치열했다. 남성인 왕에게 이들
'치마 부대'의 압력은 당연히 막강했고, 그래서 왕은 소격서를 간단히 없애기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나 왕의 뛰는 고집도 조광조의 나는 고집 앞에서 마침내 손을 들 수밖
에 없을 날이 왔다.
가을 밤이 깊어가는 9월 초의 어느날. 조광조는 크게 결심하고 예문관 봉교인 조언경과
함께 승정원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는 한 절대로 물러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일과 시간중에 시작된 농성은 모든 관원들이 퇴근한 뒤에도 물론 끝
날 줄 몰랐다. 승정원은 왕이 정무를 처리하는 비현합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일과중에 왕은
이들이 아뢰는 소리를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어서도 조광조 등은 꼿꼿한 자세를
앉은 채 결연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밤이 삼경으로 접어들자 그들과 이야기를 나
누던 당직 승지 두명도 지겹다는 생각을 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든 상태. "전하, 소격서를 혁
파하소서."
깊이 가는 밤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계속 주장을 펴는 이들의 소리가 침전에까지 들리지는
않았겠으나 왕의 마음도 편할 수는 없었다. 당장 그들이 농성을 하고 있대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허락을 내리지 않는다면 조광조의 성격을 보아 계속 농성을 하고도 남을 위인이기
때문이다. 왕은 자리에 들었어도 여러 생각으로 몸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고, 왕의 그런 동정
을 아는 환관들이며 비빈들은 조광조를 지독한 인간이라고 욕을 해대었다.
밤이 깊을수록 계속되는 군신간의 팽팽한 긴장상태! 마침내 심약한 왕은 견디지 못하고
한밤중에 홍문관과 예문관에 교지를 내린다.
"지금 국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세 대간이 취임하지 않으니 이런 작은 일 때문에 어찌
국시를 물리겠는가? 대신이 입궐하면 내가 물어서 처리하겠노라."
기어이 왕이 물러서고 만 것이다. 소격서의 혁파가 이루어지게 되었구나. 승지를 통해 왕
의 말을 전해들은 조광조는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이렇게 아뢰었다.
"비록 벌을 받더라도 반드시 성상의 뜻을 돌리기로 목표를 삼았는데, 이제 전교를 들으니
정말로 감격이 큽니다."
이렇게 말한 뒤 행여 왕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덧붙이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금 밤이 깊었으나 대간을 불러서 그러한 뜻을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아침이 되자 왕은 정광필을 비롯한 의정부의 대신들을 불러서 그들의 뜻도 조광조와 같음
을 확인하고는 지체 없이 소격서 혁파의 지시를 내렸다.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던 숙원 사업이 해결된 것이다. 조정의 신하로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김정국처럼 우려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잘된 일이오만, 상감을 그토록 강박하다시피하여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 좀 어떨 듯하
오. 장차 무슨 화라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들의 말은 대체로 그런 것이었다.
조광조 등의 신진들을 미워하는 쪽에서는 아마 더욱 비난을 하고 다녔을 것이다. 8월 하
순에 의정부와 사간원의 대문에 화살을 쏜 사람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조광조와 김정 등의
신진들을 욕하는 글쪽지가 달려 있었다. 화살을 쏜 신원 불명의 그런 무리들이 여기에 속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겉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왕도 이번 조처를 내리면서 결코 유쾌하지 못했을 것은 분
명한 일이다. 조광조에 대하여 지겨운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나) 천거과의 실시
모든 부문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인재의 확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주로 과거를 통해 필요한 인력을 충원해 왔지만, 조
정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결코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숫적으로 부족한 것도 그
렇지만, 인격과 업무 능력을 고루 갖춘 인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
이다.
정광필이나 남곤등이 항시 주장해 왔듯이 과거제는 인재의 선발 방법 중에 그런대로 무난
한 것으로 생각되어 이제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이에 나타나는 문장만을
보고 선발하는 방법이므로 당사자의 실무 능력이나 인격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단
점이 있었다. 더구나 문과 시험의 과목과 시험 방법을 보면 문학에 능한 사람에게 유리한
면이 있었다. 4서 5경을 가지고 제술과 강서를 하는데, 어느 경우에나 문장을 평소에 잘 연
습하고 기계적으로 외우며 읽기를 많이 한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
므로 과거 출신지들은 대개 문학에 능한 경우가 많았으나, 반면 국정 운영에 필요한 응용적
사고는 약하지 않겠느냐는 비판을 어느 때나 받을 여지가 있었다.
과거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유용한 인재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그 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
다. 재야에 있는 숨은 인재를 중앙이나 지방의 관원들로 하여금 천거토록 하여 관직을 주는
제도, 이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이나 행실, 효성들을 주된 기준으
로 한 이 방법은 그러나 문제가 없지 않았다. 과거를 중시하는 조정의 인습화된 사고와 태
도가 과거 출신자에 비해 천거받은 재야 인사들을 푸대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광조
가 성균관 유생으로서 천거를 받았을 때도 종6품의 사지였다. 외형상으로는 단번에 종6품을
주었으니 파격적인 대우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속은 지극히 한직인 조지서
에 불과히지 않는가. 아마도 그가 알성시를 쳐서 정식으로 관직에 나오지 않았다면 호문관
이나 간원 등의 장래성 있는 관청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예는
조광조와 젊을 때부터 친구로 지낸 제일인자로 꼽히고 인격이 훌륭하다는 평을 듣던 김식이
다. 그래서 역시 천거로 관직을 받았지만, 처음 간 곳은 관원들의 봉급을 관리하는 광흥창이
아니었던가. 말처럼 덕 있는 자를 높인다면 이처럼 중요시되지 않는 관청에 그를 배치해서
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간 곳도 여전히 별 볼일 없는 장원서. 화초, 과실, 원예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김식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의 동료들이며
안당이라는 선배가 말고 이끌어 주었으므로 곧 사헌부 지평으로 옮겨갈 수 있었지만, 이러
한 인사는 예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천거인에 대한 조정에서의 처우는 그
저 상징적인 수준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훌륭한 학문과 밝고 행실이 있는 자, 흔히 하던 말
로 경명행수(학문에 밝고 행실이 닦였다는 뜻)의 인물을 조정은 존중하고 있다는 표시의 극
히 의례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치를 하려면 조정에 군사들이 많이 모여야 하고, 그러자면 결국 덕 있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가득 선발하여 관직에 배치해야 한다. 조광조는 진작부터 이런 생각을 늘 해오던 터
였다. 문장에 대한 그의 심한 시피증까지 겹쳐 과거가 아닌 특별시험의 형식으로 그가 바라
는 인재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왕께 아뢰어
보기도 했는데, 늘 인재를 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왕은 원론적으로 찬성의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그의 나이 37세(중종 13년)이던 3월 11일에 정
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다. 장소는 이날 조강이 열리고 있던 경연 석상, 그러나 말의 단서
를 연 것은 조광조가 아니라 그와 함께 참찬관으로 참여하고 있던 이자였다. 인재를 얻기가
어렵다고 한탄하는 왕에게 그는 비록 지방에 있는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올려도 과거를 거
친 사람과 달리 대우하니 그 사람들이 계속 관직에 있지 않으려 한다고 아뢰었다. 실상을
그대로 보고 드린 것이다. 그러자 조광조가 공손한 태도로 왕에게 아뢴 말은 이러했다.
"이자가 전하께 아뢴 말은 신 등이 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방의 경우는 감사와 수령
이, 경중의 경우는 홍문관, 육경(6조의 판서를 말함), 대간이 모두 함께 재행(재능과 행실)이
있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대정(대궐의 정원)에 모아 친히 대책으로 시험을 보이시
면 인물로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종께서 하지 않던 일로, 한나라의 현량방정
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덕행은 여러 사람들이 복수로 천거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헛되거
나 잘못되지 않을 것이고, 또 대책으로 그 당사자가 하려는 앞으로의 방법을 알게 될 것이
니, 두가지 모두 손실이 없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로다. 그러나 천거에 혹 빠지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왕도 이렇게 즉각 회답을 함으로써 일은 의외로 빨리 진척될 기미마저 보였다. 그러나 이
번 경우에는 보수파의 반대는 적지 않았다. 과연 천거되는 사람들이 말대로 적합한 인물들
임을 보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좌의정 신용개는 원론적으로 그래도 찬성하는 입장이
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우려 섞인 반대를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악의 없이 신준론을 제기
해 온 영의정 정광필은 이번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성균관의 유생들 중 천거받지 못
해 응시의 기회를 갖지 못할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천거가 함부로
이루어지는 데서 올 수 있는 뒷날의 폐단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제도의 전
례가 되는 중국에서도 자기의 아들을 천거하는 등 폐해가 있어 마침내 과거제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광필은 요컨대 과거를 위주로 하면서 천거를 수시로 병행, 인재
를 등용해 쓰는 현재의 방식이 가장 무난하다고 보았다. 천거를 일종의 과거별시처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반론은 남곤으로부터 나왔다. 조광조가 천거과에 대한 논의를 제기
한 후10여 일이 지난 3월 22일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조리 있게 제시하고 있다.
천거과의 의논이 나온 뒤로 신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까 하여 널리
고사를 참고해 보았습니다. 향리에서 천거하여 선발하던 삼대의 제도가 폐지된 때로부터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현량, 방정, 역전 등의 과가 있어 20만호를 기준으로 2,3 인을 취하였으
나, 이 역시 고제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주현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 9품중 정이라고 하
였는데, 그후 부정하게 함부로 남발되어서 진나라 때는 당시 사람들이 상품에는 한미(가난
하고 집안에 배경이 없는 것을 말함)한 가문이 없고 하품에는 세적(대대로 권세 있는 지위
를 가진 집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호명(답안지의 응시자 이름을
풀칠한 종이로 붙여 가리는 것)의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공정을 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당 태종 때는 삼례, 동자 등의 과를 만들었으나, 명경과 진사과를 최고로 쳐서 당시의 큰 인
물이며 착한 선비들이 모두 이 과의 방목(합격자의 이름을 적은 책)을 거쳐 나왔고 송나라
때의 소위 진사라는 것 또한 천거해서 뽑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천거를
거쳐 대정에서 책으로 시험으 본다면 예전의 현량과며 방정과와 가까운 듯합니다만, 그러나
부득히 지방에서 모두 천거하게 하자면 반드시 남발될 것이고, 사람들이 같이 천거할 수 있
는 사람인즉 지극히 적을 것인제다 또한 잘못 천거한 사람들 아울러 죄준다면 이 또한 어려
운 일입니다. 과거로 사람을 뽑는 법은 단지 우리나라만 이러한 것이 아니고, 수나라 때 이
후 모두 그러합니다. 비록 과거로 사람을 뽑더라도 선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의 도리
를 다할 것입니다. 향거리선지법(향리에서 천거하여 선발하던 제도)을 비록 오늘날 다시 시
행하려고 합니다만, 그 사람을 천거하는 자들이 어찌 삼대의 사람들과 같겠습니까? 천거로
사람을 뽑는 것은 비록 한 번을 할 수 있겠지만, 늘 행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박식한데다가 이조판서를 오래 하여 인사 문제에 밝은 그다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지는 천거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과거처럼 선
량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또, 전체적으로 보자면 여러시행 과정을 거
쳐 제도로서 자리잡은 현존의 과거제도에 대한 강한 지지가 나타나고 있다. 별나게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 기존의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여 인재를 선발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남곤의 반론이 있은 3일 후 같은달 25일의 조강
석상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있다. 29세 때 자신이 처음 성균관의 유생
으로 들어가서 체험했던 비학문적 분위기를 언급한 뒤 그러나 세상은 지금 많이 변했다고
하였다. 8,9 년 동안에 세상의 습속이 크게 달라져서 천한 노예들이라도 부모가 돌아감ㄴ 3
년복을 입을 정도라는 점을 말한다. 남곤이 지금 세속의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한 데
대한 반론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정도로 달라진 세상이니 사람들이 천거를 함에 있
어서도 무책임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끝판에 가서는 이러한 말도
곁들인다.
"천거로 사람을 뽑는 일에 대하여 신을 필히 성상께서 이를 시행하라는 것이 아니옵고 때
미침 말이 나왔기에 아뢰었던 것인데, 그때 신용개와 최숙생이 모두 천거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평소 말이 강경하던 그의 태도에 비하면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보인 점이 눈에 뜨인다.
더구나 보수파에 속하는 신용개가 찬성하고 있는 사실마저 곁들이고 있어 화술의 노련미도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보수파의 신하들 반대가 수그러든 것도 아니어서 이 문제는 4월에 들어서도 조
신들 사이에 왈가왈부가 계속된다. 4월 25일의 조강에서는 강혼, 장숭손, 김잔, 남곤, 고형산,
이유청, 손주 등이 천거과의 시행을 반대하고 안당과 최숙생은 이를 지지하는 등 격론이 다
시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천거과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던 왕이 단단히 쐐기를 박음으
로써 이 문제는 실현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시행해도 무방할 것이니 이를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
왕은 이렇게 전교를 내린 것이다. 남곤 등 반론이 이후로도 더러 제기되곤 하였으나 화살
은 이미 시위를 떠나 있었다.
왕은 이제까지의 과거제보다 천거파가 인재 선발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이
에 기대를 걸거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파들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정말로 유용한 인재
가 천거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안당의 말마따나 중앙에서야 이목이 많으므로 잘못 천거
될 가능성이 적겠지만, 지방의 경우는 사람들이 잘못 알거나 지방관의 자의적인 판단 때문
에 잘못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하여 여러 모로 계속 논의가
이루어진 끝에 마침내 천거의 절차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천거의 경로가 중앙과 지방이 다르며, 중앙의 경우도 한 가지로만 되어 있지
않다. 중앙에서는 우선 4관(성균관, 예문관, 교서관, 승문원)에서 천거하는 길이 있다. 대상은
아직 관직이 없는 일반 유생이나 이미 관원으로 근무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덕행과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면 된다. 이 네 곳에서 천거한 인물들은 모두 성균관으로
보고되고, 성균관에서는 이들의 천거한 인물들은 모두 성균관으로 보고되고, 성균관에서는
이들의 명단과 천거 사유를 적어 예조로 올린다. 이 밖에 중추부, 6조, 한성부, 홍문관에서도
적합한 인재가 있으면 역시 예조로 천거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지방에서는 그 절차가 비교
적 단조롭다. 유향소가 본읍 수령에 천거하면 수령은 다시 이를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
사는 인물을 심사하여 예조로 올리는 형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예조에서는 중앙과 지방
에서 천거된 인물들을 모두 취합, 그들의 인적 사항과 천거 사유 등을 적어 의정부로 올리
면 이후에는 궐정에서의 책시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마침내 120명의 인물들이 전국에서 천거되었다. 이중에는 개성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화담 서경덕처럼 천거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거에 응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거에
응하여 책을 통한 시험까지 치르는데 그 일자는 4월 10일, 조광조가 38세이던 기묘년(중종
14년)의 신록이 무르익어 가던 때였다. 예정대로 대궐의 정원에서 치러진 대책의 과제는 조
광조가 4년 전에 치렀던 알성시책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왕인 내가 지금까지 14년 동안 요순 시대와 같이 훌륭한 정치를 해보려고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인심은 점차 경박해지고 민생은 날로 곤궁하여지니 내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하
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고 물자를 풍부하게 하며, 풍속을 변화시켜 요순 시대와 같은 다
스림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이에 대하여 잘 알 것이니 남김없이 말하도록 하라.
결과는 4 일 후 왕의 재가를 받아 발표되었다. 합격자는 총 28 명. 갑과 1인과 을과 1인,
그리고 병과 26인으로 갑과 1인은 김식, 을과 조우였으며 병과의 1등은 이연경이 차ㅣ하였
다.
이번 천거과의 시험 결과를 조광조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네들의 세력이 그만큼 강화되
는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28인의 합격자 중 많은 수가 그들 세력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예컨대 이연경, 안처근, 처겸,
처함, 안정, 권전, 정완, 송호지, 김대유, 박훈, 경세인, 이영이 모두 이런저런 연고로 조광조
와 인연이 닿고 있었다. 친구, 제자, 혹은 같은 세력내의 자제거나 그와 가까운 사이, 아니면
정치적 견해가 같다는 등등 여러 인연으로 나머지 합격생들 중에도 조광조 등의 신진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많았다. 반대파에서 보내는 의구와 질시의 눈을 잠재우기 어렵게 된 결과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조광조 등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여론
과 지방관청에서의 취택 등 여러 절차가 그들의 의도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천거를 받게 되는 인물이란 그 성향으로 볼 때 아무래도 훈구 계열
보다 사림파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았고, 조 등 신진들의 정치적 기반이 사림파였다는 점에
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천거과의 시험 결과는 조광조 등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천거과의 구조적 특성에서 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조광조 등의 신진들이 천거과의 이러한 특성에 따른 결과를 예상하고 이 제도를 밀어붙였
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치가 어차피 세의 싸움이고 보면 그랬을 가능성도 없
지는 않다. 6조에서 천거한 인물도 조광조가 타당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추천 대상에
서 삭제하였다는 불평이 있었고 보면 그렇게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중종실록, 권 37, 14
년 12월 3일의 내용 참조)
다만 그럴 경우에도 조광조의 의도가 순전히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권모술수적 차원에
서의 그것이라고는 보기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에는 그가 너무나 순진한 이상주의자였기 때
문이다. 그의 근본 생각은 어디까지나 조정에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재가 모이기를 바란 것
이어서, 그로 인한 반대 세력의 위축은 그 결과일 뿐 그가 사전에 의도한 주목표는 아니었
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곤, 심정 등 조광조에 대한 적극적 반대파는 물론 그외의 보수파에 속하는 다수
인들 견해는 물론 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세 아들인 처근, 처겸, 처함이 모두 천거파에 합
격되었다고 해서 우의정 안당이 집에서 자축연을 열었을 때다. 왕으로부터 축하의 술과 고
기가 내려지고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모두 참석해서 성황을 이룬 이 자리에서 한쪽에 앉아
음식을 들던 한형윤의 말이 있었다.
"이게 참으로 급제한 것이라면 대단히 좋겠지만..."
과거에 비중을 두던 인습적 사고에서 나온 말이지만, 천거과를 떳떳한 도리에서 나온 것
으로 보지 않는 관점도 거기에는 있어 보인다. 한으로 말하면, 연산군 때에 왕의 잘못을 과
감하게 지적하여 유배를 당하고, 중종대에는 청백리에 뽑히는가 하면 경기도 관찰사와 형조,
공조판서이면서도 온건한 축에 속했는데, 천거파에 대한 견해는 이러했던 것이다.
천거파 출신들은 정식의 과거 합격자들에 비해서 우대를 받은 면이 있다. 이 과의 병과
합격자들이 과거 시험의 병과 합격자들보다 우대를 받은 것은 물론 과거 시험의 갑과 장원
이라야 받게되는 정6품보다 높은 정5품의 품계를 받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정구선, 위의
책 참조) 이 점은 천거과 출신에 대한 왕의 거래를 반영하는 것이자 당시 정계의 실세로서
행세하던 조광조 등 신진들의 힘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광조의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듯이 법에 규정된 품계를 몇 단계씩 뛰어넘어 관직
을 주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관직이 너무 천하다는 비판이 종종 있기도 했으므로
이 점도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종실록, 권 34, 13년 11월 23일 참조) 연산군 때
많은 인재들이 희생된 데다가 막상 자리가 있어 사람을 쓰려 해도 적임이 드물었으므로 이
같은 고속 승진의 예가 자주 있게 된 것 같다.
어떻든 천거과의 신설과 이를 통한 인재의 충원은 조정에서 조광조 세력의 힘을 강화시켜
주는 대신 보수파에게는 그들 힘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행, 조계상, 장순송 등 보수파의 인물들이 신진들의 탄핵을 받고 모두 은
둔 상태로 들어가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장광필이 왕의 재위 14년째이던 1월 4일에 왕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아뢴 적이 있다.
"요즈음 조정에는 정치적으로 잘못이 없으면서도 나이 들고 오래된 신료들이 벼슬을 않은
채 시골로 물러날 생각만을 하니,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강에서 올린 말인데, 수상인 그로서는 조정의 돌아가는 상태에 우려를 품고 한 말일 것
이다. 조광조 등 신진들이 저토록 거세게 조정을 주도하여 구신들을 몰아내다시피하고 있으
니, 한시바삐 무슨 조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그 말을 그러
니까 수상인 자기로서도 이미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까지 신진들의 세력이 커졌다는 반
증으 담고 있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왕은 동문서답의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물러나는 일도 가상한 일이니 물러나는 사람들을 책할 필요는 업소."
아둔해서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인가? 아니면 조광조 등 신진들이 쏙 마음에 들기 때문에
늙고 공래된 구신들은 물러가도 좋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든 신하들로서는 쉽게 믿고 대할
수 있는 왕이 못 된다.
양과 질 면에서 자파 세력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조광조의 본래의도에서 볼 때 천거과는
그가 생각한 것의 일부를 실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인
재라면 누구나 등용할 것을 목표로 했었다. 천거과의 설치를 공식적으로 발의하던 날에 그
는 이러한 말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땅이 작아 본래 인물이 적은데다가 여기에 또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그들
은 쓰지를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고루 쓰지 못함을 걱정하는데 항
차 작은 우리나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양반, 상민, 천인, 첩의 자식을 가리지 말고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다면 과감하게
천거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 그의 본래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벽은 너무나 두꺼
우므로 어쩔수 없이 천거 대상을 양반 계층에 국한시키는 데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신분 철폐를 주장하는 그의 이러한 논의 때문인제 아주 파격적인 일화가 그에게 따라다니
기도 한다. 그가 한창 득세하던 때다. 도성 안에 남다른 인격을 지닌 피장(가죽 제품을 만드
는 공업 기술자. 보통 '갓바치'라고 부름)이 한 사람 있었다. 조광조는 진작부터 그 인물
을
알아보고 학문에 관해서 묻거나 같이 자면서 시국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등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피장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관직을 주선하려고 했으나, 그는 조광조의 제의를 사양한 후 종내 장취
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름 석 자도 알리지 않은 채. (문집, 부록, 권 1 사실 및 연려실기술,
권 8, 중종조고사본말 참조)
다) 정국 공신의 개정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 주어진 훈작이 정국공신이다. 사람 가운데 엉터
리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혁명 후 얼마 안 돼서 공훈록을 바르
게 고쳐야 한다는 논의는 늘 있어 왔다. 그러나 조신들의 열의 부족과 왕의 거부로 그럭저
럭 세월에 묻혀 차츰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시들해 가는 추세이던 때에 이 문제는 다시 공
론으로 제기된다.
그 주창자는 물론 조광조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신진들이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개정
이유는 뚜렷했다. 대체로 볼 때,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사람마다 공을 탐내고 이익을 탐내
여,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탈취하는 일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니,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지게 하려면 먼저 이익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조광조의 나이 38세이던 해의 10월 25일에 대사헌이던 그가 대사간 이성동과 양사 합동으
로 왕에게 아뢴 이 내용에는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약에해 보인다. 이익을 멀리하고 정의는
높임으로써 착하고 아름다운 이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성리학적인 이상세계관이 거기에 용틀
임을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단지 정국공신만이 개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종
때에 있었던 좌리 공신이며 현왕의 집권 후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정난공신도 예외는 아니
다. 더 올라간다면 수양대군이 김종서등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한 결과 주어진 정난 공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개정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좌리공신은 1471년에 주어진 것으로
명분은 왕을 성심껏 보필하여 정치를 잘 하였다는 이유인데, 별다른 설득력이 없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현왕대에 주어진 정난고인도 뚜렷한 명분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과가 정
국공신으로서의 관직이 높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왕의 아우인 견성군 돈을 왕위에 앉히
려던 음모를 사전에 적발한데 대하여 주어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 . 그래서 이 정난공신
록은 이미 2년 전에 개정된 바 있다. 이치로 따지면 수양대군에 의한 정난공신과 성종대의
좌리공신도 개정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선왕들이 한 일이므로 지금 함부로 고칠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생각하면 이들 공신록은 불의하고 명분이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이익에 눈
이 어두운 무리들이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고 무언가. 그러한 정난공신과 좌리공신도 그러
나 정국공신처럼 심하게 남발되지는 않았었다. 정난공신의 수가 총 43명, 좌리공신도 73명이
전부이다. 그런데 정국공신의 수는 모두 합쳐 117명에 이르렀으니 해도 너무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합리화시켜 만들어진 정난공신은 이익을 위해서 임금을 몰아내고 죽
이는 일까지 마참내는 예사로 했고, 좌리공신들은 탐욕을 부린 나머지 명분도 없는 공신록
을 눈 딱감고 받았다. 그로 인하여 나라에는 정의가 사라지고 근거 없는 무고를 예사로이
하는 등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습성이 조성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정국
공신의 남발을 가져온 배경이라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것의 개정은 한시바삐 이루어
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관료사회에 늘 있는 뇌물의 습속도 이것의 개정을 토
앻서 부대적인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그래서 조광조등은 오래전부터 미결로 내려오던 이
과제를 기필코 해결하겠다고 별러 온 터였다. 이 논의가 조에 의해서 공식으로 제기된 며칠
후 대사성 김식이 왕 앞에서 한 말은 그간의 사정과 이를 제기하게 된 배경은 좀더 명확하
게 알려 준다.
이 일은 갑자기 발의된 것이 아닙니다. 정국공신은 그 외람됨이 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실로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 지금 이것이 발의된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 고치면 이원이 방지되어 국맥이 영구할 것이니, 마땅히 그 이해를 헤아려 결정할
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과연 고칠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가부의 판단은 차차로 드러나겠거
니와 막상 이 논의를 제기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조광조 자신은 사생결단의 강한 의지
로 뭉쳐 있었다. 지난 9월에 힘껏 밀어붙여 마침내 성공을 거둔 소격서의 혁파건에서 왕의
결단을 이끌어 내는 일종의 노하우를 터득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생간에 신하는 극형에 처해지거나 찬축에 이르러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인데, 신의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이처럼 구구하게 아뢰는 것은 이것이 실로 국가의 큰 일이기 때문입
니다.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평소 사석에서도 농담을
하는 일이 없는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이고 보면 과연 이 말에 나타난 그의 결의는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개혁도 인간 생활으리 일부일 뿐인데,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
까? 개혁도 시간과 상황이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며 추진하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다. 여유가 없는 태도는 사람을 싫증나게 만들고, 화나게도 하며, 자칫하면 당사자에게 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어서 그는 이 중대한 시기를 당해 남곤이 보여준 행태를 아울러 비난하고 있다. 남곤은
이때 예조판서를 맡고 있었는데, 영픙의 제향에 쓸 향목이며 축문을 받들고 가는 자격으로
여주에 가고 없었다. 예조판서이므로 의당 갈 법한 일이기는 핟. 그러나 지금 온 저종이 정
국 공신의 문제로 떠들썩한 판에, 꼭 자신이 직접 가야만 한단 말인가. 조광조가 이러한 남
곤을 가리켜 큰일을 당해 일부러 피하여 간 것으로 보아 간사한 인물이라고 규탄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왕의 태도는 남곤 편이었다.
"그가 향사가 되어 간 것이 꼭 이를 피하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11월 1일의 일이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좀처럼 있기 힘든 일이 나타난 셈이
다. 과거 같으면 대체로 무슨 일에건 왕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소격서
의 폐지 이후 조광조에 대해서 달라지고 있는 왕의 마음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간 정국공신의 개정 문제가 발의된 이래 조정은 폭발을 예고하는 화약교와도 같았다.
대사헌 조광조가 장으로 있는 사헌부는 물론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성균관, 그리고 의정부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곳곳에서 악의에 찬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왕에게 간청을 드리
고 있었다. 개정을 요구하는 신하들과 이를 거절하는 왕사이의 지리한 말싸움은 보름여에
걸쳐 계속되는데, 그 과정은 그야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사간원 직원들이 사직을 되풀이
되고, 군신들간에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논하는 일도 벌어지는 등 감정적인 장면도 등장한
다. 왕은 처음에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극히 일부만을 개정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구는 집요했고 왕은 마침내 정광필, 안당 등의 대신들과 홍경주등 정국 1등
공신으로 녹훈된 신하들을 불러 개정 작어을 마무리 짓는다. 여기서 삭훈된 사람들의 수는
무려 76인. 이에 앞서 여러 이유로 삭훈된 12명이 있었으므로 이 결과 삭훈된 총수는 88명
이 된다. 이제 29명만이 정국공신으로 남게 된 것이다.
조광조며 그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번의 결과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나라가 잘 되어 갈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서로 축하하기를 마지 않았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삭훈으로 인해서 종래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된 사람들로서는 이를 갈아도 시원치 않을 일이다. 공신의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해당자들이 공신록을 자진해서 반납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이 어디 마음에
서 우러나와 한 일이겠는가. 왕도 삼경이 되도록 신하들에게 포로가 되다시피하는 상태를
여러 번 겪으면서 이번 결정을 내렸고 보면 마음속에 불쾌한 앙금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의 정국공신 개정 문제는 김식이 말한 바와 같이 천거과의 신설 계획과 함께 조광조
를 비롯한 신진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온 일이었다. 그래서 기미를 눈치챈 관원
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하던 터인데, 그 점은 김우증의 형사 사건을 통해
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김우증은 조광조의 5촌 아저씨 뻘이 되는 사람이다. 평소에 말을
함부로 하고 성질이 고약한 편이어서 위태위태해 보이던 참에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정국공신의 한 사람인 신평균, 강윤희등 몇 사람과의 대화에서 공신록이 취소되고 하사된
토지도 모두 환수될 것이라는 얘기를 함부로 하고 다닌 것이다. 또, 천거과가 실시되면 신진
드링 조정에 가득차게 되면서 구 시대의 신하들은 모두 제거될 것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말이 섞여 문제가 되면서 김우증은 결국 유배형을 받게 되는데, 이때
가 조광조의 나이 38세이던 해의 3월. 정국공신의 개정 문제가 본격 거론되기 7개월 전의
일이었다. 개정에 적극 반대할 수밖에 없는 공신들이며 그 이해 관계자들에게 이 정도의 기
간은 반격의 계기를 잡는 데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라) 여악폐지, 향약실시
도덕사회의 실현은 유교의 이상이자 조광조의 꿈이기도 하였다. 남년간의 윤니라 엄격하
게 이루어지고 삼강오륜등의 예절이 잘 지켜지는 사회! 이것이 조광조가 바라는 사회였다.
그가 여악을 폐지하고 향약을 실시하고자 한 것도 근원은 물론 여기에 있었다.
조선조에서 오랫동안 개혁의 문제로 떠올랐던 여악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주로 궁중 연회
에서 여자들이 노래와 춤을 주는 놀이를 연상한다. 그래서 그 정도까지 꼭 문제를 삼았어야
했느냐고 시비 아닌 시비를 거는 현대인들도 있다. 사실 여악을 그렇게 보는 한 있을 법한
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들이 여악에 문제 삼고 나온 까닭은 그토록 산단한 것
이 아니다. 단순한 연회석상에서의 일만이 아니라 특히 지방의 경우 남녀간의 불건전한 관
계가 이로 해서 이루어지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악에 동원되는 여자들이 주로 기생
일 경우가 많고, 지방에서는 더 낮아져 창기들도 적지 않았고 보면 이러한 폐단은 불가피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악을 개정하는 일은 궁중의 놀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
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남녀간의 풍기를 바로 잡는 일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야 한
다.
여악의 핵심적인 과제는 궁중의 경우 남악으로 대치하는 일이 곧 그것이다. 이에 대한 논
의는 태조 이성계때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이후 남성 중심의 놀이에서 여악의 요구는 자연
스럽게 받아들여져 관습처럼 내려오던 터였다. 그러던 것이 현왕 1년에 김세필이 그것의 폐
지를 주장하면서 가끔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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