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옛날에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가 스승인 공자에게 인에 대하여 묻고 배우던 태도
에서 그 방도를 찾아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4대와 5상을 알게 됨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같은 배움의 태도에서 비롯되고 거기서 더욱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
자면 4물이라는 네가지의 하지 말아야 할 것에 힘써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살아가는 일일
텐데, 잠깐이라도 그에 충실하여 성대함을 지닌다면 계절로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봄이라는 것이다. 봄이 4시의 근원이듯이 4물, 즉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며, 예가 아
니면 듣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에 힘써 인을 이루
는 상태가 모든 도덕적 자기완성의 근원이요 시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통해 그는 이렇게 매듭짓고 있다.
하늘에 있어서는 봄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인이로다.
모두가 태극을 근본으로 하여
다르면서도 같거니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재천혜춘 재인혜인 개본태극 이이동혜 식차하인
봄도 인도 태극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말은 성리학적인 견해이다. 자연과 인간의 모든
근원, 음양과 그에 따르는 온갖 이치가 태극을 모태로 한다는 것이 성리학의 견해인 것이다.
사실 조광조의 춘부는 그 본문의 시작에서부터 성리학적인 이와 기의 용어를 가지고 시작하
고 있다. 그의 이기론적 견해도 알려 주는 이들 표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음양이 교대로 변함이여
이기의 묘한 요체에 의거함이로다.
이가 기를 타고 서로 느낌이여
원이 원으로 돌아가 소멸치 않는도다.
유음양지교변혜 우이기지묘요
이승기이상감혜 원복원이불소
이 내용만을 놓고 보면 조광조의 이기론은 후에 그를 사숙했다고 볼 수 있는 율곡 이이와
매우 비슷한 데가 있다. '이기지묘'나 '이승기'라는 표현 모두가 이이에게서도 나타나고 있
기
때문이다.(이이에게서 '이기지묘'란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물로 되어 있으면서
도
결코 하나로 섞이지 않는 상태로 묘하게 함께 있다는 것을 이름이요, 그의 소위 '기발이승'
이란 '기'가 발생하면 거기에 '이'가 타는데, '이'는 '기'가 발생하는 근거가 되고, '기'는 '
이'가
자신을 드러내는 의지처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율곡집, 권 9, 권 10에 나오
는 답성호원의 여러 내용을 참조할 것)
조선조에서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대에 와서 집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황의 경우는 '이'와 '기'에 대한 견해가 일관되지 못했던 데 비해서 이이는 이른
바 '이기지묘'나 '기발이승'의 입장을 명확히 하여 그의 특색 있는 이기론으로 인식되고 있
는 실정이다. 그런데 춘부에서 거의 같은 용어가 부의 형식을 통해 나타나고 있으니 조선조
성리학의 전개와 관련해서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일 것이다.
다만 '이'(안간의 본연성, 보편적 이치, 정신)와 '기'(기품, 기질, 기운 또는 물질적인 것)
에 대한 도덕적 차원에서의 가치론적 판단에서는 '이'우위의 정신철학을 강조하는 이황과
가까운 것이 조광조의 입장이다. 훗날 그가 37세이던 해의 경연에서 "사람이 착하지 않은
것은 '기'의 시키는 바에 의한 것"이라 했고, "'이'를 주로 삼아서 '기'가 '이'의 시키는 바
가 되면 옳다"고 한 말에서 이를 알 수가 있다. 뒤에 보게 되듯이 정치인으로서의 그가 법
제의 개혁에 앞서 국민의 정신적 기반을 개혁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물질
보다 정신을 그는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조광조는 춘부로 진사 시험의 1등을 차지했는데, 시험관들이 모두 놀라고 친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다) 계속되는 자기연마
이후 그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34세까지 대략 만 5 년 동안 유생으로서 지내게 된다. 그러
나 이 기간중에 모친의 별세로 부친 때와 똑같이 3 년의 시묘살이를 했으므로 성균관에서의
수학 기간은 2년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균관 시절에도 그는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경
치 좋은 곳을 찾아 더욱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기도 개성 일원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그리고 양편군에 있는 용문사 등을 찾아가 불철주야 쉬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가 천마산과 성거산의 여러 산사를 찾아가 공부한 것을 29세가 되면 5월, 그러니까 진
사 시험에 합격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곳을 찾은 그는 우뚝우뚝 솟은 기암괴석
과 하늘을 가릴 듯 울창한 숲이며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절경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인적이 들러서는 조용히 책을 읽어도 하고 눈을 감은 채 의리의 심오한 이치를 곰곰 따져
보기도 하였다. 그 모습은 차라리 속세를 잊고 이곳에서 지낼 듯한 면모이기도 했는데, 과연
천마산과 성거산의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만든 것일까?
이 두 산은 모두가 해발 800미터 가까이 되는 산들이다. 천마산은 기암괴석이 곳곳에 서
있고 높은 봉우리가 많아 그 정상에 올라서면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산과 간들이 연이어 펼
쳐지는 장관을 보게 된다. 또, 성거산은 유명한 박연폭포를 안고 있을 만큼 계곡이 깊고 물
줄기가 곳곳에 작은 못을 만들며 울창한 숲을 휘돌아 흘러내리는 산이다. 그 물은 흘러흐러
마침내 임진강과 합류하게 되거니와 산의 아룸다움을 더하는 계곡의 물소리는 그대로 세속
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천마산과 성거산을 잇는 계곡은 그야말로
검은 숲으로 뒤덮여 있어 한낮에도 조용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김복영, 보
낼 수 없는 편지, 세훈, 1997의 관련 내용 참조)
여기야말로 세속의 모든 것을 잊고 공부할 만한 곳이로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자 조광조
의 타고난 집중력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산보하고 사색하는 외에는 하루종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정돈된 자세로 우뚝하게
앉아서 경전을 읽는 모습은 한곳에 붙박인 사람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을 정도였다. 시간
은 또 그렇게 아낄 수가 없었다. 밥 먹는 시간과 변소 갈 때 외에는 온통 책 읽는 데에 빠
져들었으니까. 밤에도 늦게까지 책과 더불어 살았다. 삼경(하오 11시-오전1시 사이) 전에는
절대로 자지 않았고, 5경 가까이 되어서나 비로소 옷을 벗고 자리에 들고는 하였다. 음식도
절의 중들과 똑같이 담박한 것을 먹으려 지냈다. 학문에 대한 매일의 강행군을 생각하면 확
실히 소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도에 정진하는 도리(지체 높은 귀한 집 아들
로서 절에 들어와 중이 된 사람을 이르는 말)라도 능히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나, 그는
익숙한 듯이 이를 잘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종의 고행이 조광조라고 쉬운 것일 수만을 없었다. 10여 세 아래인 제
자 기준이 이때 따라와 함께 지냈는데, 어느날 같이 거닐다가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선비로서 이같은 고생을 하기란 역시 힘들지 않겠나?"
서로 격려하는 뜻에서 한 말이라고는 해도 은연중 사서 하는 고생의 어려움을 거기에 담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여러 절을 옮겨 가며 공부했다. 서산사에서도 지냈는데, 조광조
는 여기서 특히 맹자에 나오는 호연장을 새삼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었다.
호연장은 공손추 장구상편에 들어 있다. 맹자가 제자인 공손추와 대화하는 가운데 사나이
의 호연지기에 관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그것인데,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 기운팀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어서 곧게 길러도 해로움이 없다면 천지간에 가득할
것인데, 그 기됨이 의와 도에 짝한 것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허탈해진다. 이것은 의를 모아서
생긴 것이지 의가 밖에서 엄습해 와 지니게 된 것은 아니어서 행함에 마음에 맞지 아니함이
있게 되면 허탈해진다.
기위기야대지강 이직양이무해 즉색우천지지간 기위기야배의여도 무시뇌야 시잡의소생자
비의습이취지야 행유불겸어심 즉뇌의
맹자의 이러한 설명을 들어 보면 호연지기는 마음의 상태이지만 행동과 매우 긴밀한 관계
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의와 도에 짝하는 것이므로 행동에서 이같은 방향을 충족시
키지 못한다면 마음에 유쾌하지 못하여 당사자 스스로도 무언가 부족함 감을 느끼게 될 것
이다. 그렇다고 일을 함에 있어 호연지기를 억지로 발휘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맹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기약하지 말며, 마음에 잊지 말되 억지로 조장히지도 한다.
필유사언 이물정심물망물조장야
즉, 이것은 매사를 순리에 따라 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허연지기가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 필요한 인격적 바탕이라면 순리에 따라 일으 처리해 가는 것은 최선의 현실적인 추
진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조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호연장으 가을에 한성으로
돌아오기까지 근 한 달여에 걸쳐 되풀이 읽으면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말처럼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가 과연 얼마나 터득할 수 있었을는지...
33세에는 경원 부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는 숙부(조원기)를 배웅한다. 3 년 전에 모친마저
돌아가심으로써 이제 집안의 제일 가는 웃어른이 된 숙부이다. 그는 대사간까지 지낸 숙부
가 국경지대의 외직으로 나가게 된 것을 문무를 모두 갖춘 학자이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
는데 사실 그렇다. 대사헌을 거쳐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낸 신용개가 경원으로 떠나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 조원기를 위해 송별시를 읊은 데에도 그 점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조원기는 비록 활쏘기를 배우지 않았지만, 가슴속에 무장한 병사 j천만 명을 담고 있
을 만큼 군략에 관한 식견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원에 가면 인자함으로 야인들을 포용
하고, 위엄으로써 두렵게 하며, 신의로써 맺음을 이루고, 조용한 가운데 저들을 진압할 것이
라고 조원기에게 높은 신망을 보내고 있다. 시 특유의 과장기가 있기는 해도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관심을 끄는 것은 조광조가 숙부에게 드린 송별시 송숙부부경원진(경원진으
로 부임하는 숙부를 송별함)에 나타나 있는 약간의 내용이다. 그는 말하기를, 야인들이 비록
교화시키기 어렵다고 해도 근본적인 마음에 있어서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
므로 도리와 덕으로써 대하면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그의 말은 인간의 본성이 같다는 성리학적인 견해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는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이라고 한다"고 했거니와 이는 바로 본성이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본래 착하다고
볼 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성리학적인 해석을 빌리자면
그것은 각자의 기질이 다른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착한 본성이 기질의
혼탁함에 가리워져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조광조가 야인들을 복종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이 기질적인 면을 도리와 덕으
로써 순화시키면 그들 본성의 착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본다면 이세상에 갈등과 대립이 생길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착함이 분명히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낙관적 입장이니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유
교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군자와 소인의 다툼도 기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쉽게 해소될 여지가
없이 않을 듯싶은데, 그러나 실제에서의 그 가능성은 과연 어떨는지... 뒤에 조광조를 통하여
이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34세가 되던 을해년은 조광조가 날개를 다는 운명의 해다. 그러나 그를 역사에 등장시키
는 섭리의 손길이 찾아오고 있던 이해의 상반기에 그는 양평의 용문사에 와 있었다. 뜻이
맞는 2,3명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절 입구의 울창한 숲
과 경내의 5백여 년이나 된 은행나무는 휴식과 볼거리로 안성맞춤이었으나, 밤을 새다시피
하는 조광조의 지독한 학구열은 다른 친구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바이다.
라) 성균관의 괴짜 모범생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생도들을 유생이라고 부르는데, 그 구성은 상재생과 하재생의 두 가
지로 되어 있다. 전자는 소과 시험을 거쳐 올라온 생원과 진사들로 구성되는데, 그 인원은 2
백 명이다. 그리고 후자는 4학에서 일종의 진급시험인 승보시를 거쳐 입학한 생도들로 구성
되었다.
상재생은 문과 시험을 보기 예비생으로, 이들에게는 문과 초시에 해당되는 관시와 알성시
(왕이 공자 등을 모신 문묘를 찾아 절을 한 후 실시하던 문과 시험) 및 별시에의 응시가 보
장되어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상재들은 누구나 3백 일만 공부하면 이들 문과 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또한 가두시위에 해당되는 소행과 동맹휴학인 권당 및
왕에게 상소를 할 수 있는 권리도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오늘날의
단순한 국립 대학생 자격을 넘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여론을 대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로써 보면 무리가 아니다.
29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조광조가 성균관에 들어오기 전후의 이곳 상태는 과연 어떠하
였는가? 이 시기에 성균관의 실무 책임자였던 대사성 유승조는 생도들에게 절의와 염치가
없다고 보았다. 교육을 책임진 입장에서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화려한
의복만 좋아하고 책을 가지고 다니고 일이 드물다는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연산군이 폐
출된 이후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때는 성균관에 인원이 넘쳐나던 경우도 있었
다. 그럴 때는 밥 대신 죽을 배식하거나 육식을 내지 못하는 기간이 오래 될 때도 없지 않
았다. 물론 이러한 급식 상태에 대하여 누구나 마음이 즐거울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
치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유교의 기본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배움을 구하는 유생으로서
는 이에 대하여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논어 이인편에서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 좋지
않은 옷과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족히 더불어 도를 의논할 수 없다"고 한 공자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늘상 급식에 불평이 있는 것은 예사이고, 생활관인 재 안에서는 몰래 고
기를 먹으면서도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얻는 데는 대부분이 눈을 밝혔고 세
력 있는 사람과 연줄을 대는 데는 행여 뒤질세라 너도나도 열심이었다. 학문도 경전은 구두
점을 찍는 데 그칠 뿐 의리를 탐구하는 데는 관심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오직 문장을 화려
하게 꾸미는 데만 온갖 정신을 쏟았다. 거기에다 숭배한다면서도 그를 본받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에도 무리지어 헐뜯고 비웃음을 보내는 성균관의 유생들!
(중종실록 권 10부터 권 23까지의 성균관 관련 내용 참조)
이러한 당시의 성균관에서 조광조는 좀 이색적인 존재였다. 괴짜라고나 할까, 그러나 나무
랄 데가 없는 모범생이었다. 친구 김식 등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하는 몇몇들은 확실히 남
다른 데가 있었다. 말으 함부로 하지 않고 아무 때나 관대를 벗지 않으며, 온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강의 시간 외에 하는 일이라고는 책 읽고 그 내용을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함께 지
내는 관생들을 대할 때는 또 어떤가.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이 은근하면서도 품위 있는
태도! 그래서 비웃음을 받기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기에는 사람을 끌게 하는 바가 있었다.
그들을 헐뜯는 무리들도 있어 이러한 말을 퍼뜨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즉, "조광조 등이 건
방지게 자신들을 '4성'이며 '10철'로 일컫고 다닌다"고.
4성이란 누구인가? 중국 고대의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복희씨,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 그리
고 공자의 네 사람을 말한다. 10철은 공자의 제자들 중 여러 면에서 뛰어난 10명의 제자들,
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아, 자공, 염유, 계로, 자유, 자하가 그들. 어디로 보나 당시
로서는 굉장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조광조 등이 자기네들을 이들 4성 10철에 비
유하였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구설이 따를 것은 당연하리라. 때문에 성균관
당국이 예문관, 승문원, 교사관과 의논하여 이들을 징계할 움직임을 보인 것도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는 왕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강에서까지 제
기가 되었으나 참찬관 김세필의 합당한 결론으로 끝을 맺고 만다. 김이 한 말의 요지인즉
지금 선비들의 습속이 크게 무너진 세상에서 조광조 등의 근실한 행동은 그 뜻에 있어 장려
할 일이므로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중종실로그 권 12, 5년 10월 10일의 내용
참조)
9. 관직에 나아가다
가) 천거를 받음
1515년(중종 10년) 6월에 조광조는 성균관에 의해서 조정에 천거된다. 김식, 박훈과 함께
였는데, 조광조는 이들 3인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천거되었다.
성균관이 조광조를 천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4년 전인 1511년에 이미 그의 뛰
어난 학문과 인품을 평가하여 천거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동안 조정에서는
그를 받아들여 쓰지 않았던가? 이해의 4월 주강에서 그의 천거를 두고 논의된 내용을 보면
그 이유는 이렇다. 즉, 조광조의 마음과 행실이 타인과 다른 점이 있어서 특별히 천거를 받
았으니, 이는 어디로 보나 주위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관직을 주
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더욱 높은 덕을 쌓게 하여 뒷날 크게 쓸 인물로 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이것이 당시 왕을 모시고 있던 신하들 대부분의 의견이었으므로 조광조
에게 특별히 장려하는 포상을 내리는 것으로 그치고 만 것이다.(중종실록, 권 13, 6년 4월
18일의 내용 참조)
이번에 천거를 받은 조광조 등 3인에게 조정은 처음에 참봉 정도의 관직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자 이조판서 안당은 즉각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에게 참봉(종9품직)을 제수하는 데 그친다면 비록 10년이 되더라도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선무량(종6품관직)으로 삼아 주부(종6품관직)에
준하는 직책을 주어서 그 재능과 행실을 보아 그에 합당한 자리를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
니다."
이 결과 주어진 자리가 조지서 사지. 조지서는 글자 그대로 종이를 만드는 관청으로 사지
(종6품관직)는 이곳의 우두머리가 된다. 직위로 보면 대접을 한 셈이나 업무 내용으로 보자
면 그야말로 한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든 영예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서 조광
조도 기쁜 마음이 없지 않았겠으나 차츰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부러움과 시기에 찬 세간의
빈정거림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를 놀려 대는 노래까지 시중에 나도는 판이었
다.
일부라도 소학을 열심히 읽어라
사치의 공명이 자연히 오느니라
일부소학수근독
사지공명자연래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본래 이익과 영달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던 이 뜻밖의 일을 만나게
되니 부득이 과거를 거쳐서 도를 행하는 단계를 통해야겠다. 만일 그 헛된 영예를 이용하여
세상에 드러난다면 나로서는심히 부끄럽다."
이런 생각 끝에 정식으로 과거시험을 보아 관직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한편, 성균관의 천거를 받는 등 조광조의 영예가 갑자기 높아지자 그의 집안에는 축하와
격려의 말이 때를 만난 듯 밀어닥쳤다. 특히 집안에는 축하와 격려의 말이 때를 만난 듯 밀
어닥쳤다. 특히 집안의 어른이 되는 숙부 조원기에게는 더욱 그러한 말들이 많이 들려왔다.
"훌륭한 조카를 두셨으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정말로 축하를 드립니다." 이런 식의 인사
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숙부가 기쁜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었으나 걱정도 없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이상이 너무 높고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아이가 아닌가. 옛 성현을 흠모해서 현
실은 생각지 않고 세상이 자기의 뜻과 같지 않음을 탄식만 해 오던 광조이다. 가문의 영광
을 위해서는 싫어도 과거를 보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끄덕 않은 채 자기 고집대로
공부에만 힘쓰던 성벽! 이러한 광조가 과연 이 험악한 관직 사회에서 해를 입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정식의 과거도 아닌 천거의 과정을 거친 상태로말이다. 여기까지 생
각이 미치자 조원기로서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촉망되는 이 조카에게 대
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내기에 이른다.
효직(조광조의 자)이 이번에 천거를 받았다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구나. 이
름이 크게 나는 곳에 실상이 그대로 부응하기 어렵고, 영예가 있으면 할뜯음이 있는 것은
고금을 통한 근심이야. 조심하여 앞에서 신중하게 걸어가더라도 어려운데 만약 얼굴과 말에
교만한 빛이 있다면 몸을 망치게 됨을 경계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물론 이러한 말은 네게
당치 않은 주의인 줄 알며, 나의 우려하는 바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대저 사람으로서
천지간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데 있어 중뿔나게 높이 날거나 멀리 달릴 수 없는 것
이니 반드시 세속과 조금은 동화되고 많은 사람들의 미움은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형님
(조광조의 부친을 말함)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너희들 3형제가 모두 유자로서의 학업을 하고
있다마는 아직은 학문이 다 성취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옛적에 성인들이 벼슬살이를
시퍼런 칼날 위에서 춤추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이번의 천거는 기쁨이 아니라 근심이다. 주
위로부터 미움이 없고 칭찬도 없다면 이야말로 몸을 보호하는 길이니 명심하여라.(문집, 부
록, 권 5, 연보 참조)
나) 알성시 합격, 그 책문에 담긴 이념
조광조가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조지서 사지가 된 이해 가을(음력 8월)에 알성시가 실시
되었다. 석전제가 있는 달을 택하여 실시된 과거였다. 그 결과 1등군에 속하는 갑과의 1등은
유학(과거에 합격하지 않는 유생)인 장옥이 차지했고, 조광조는 그 2등으로 합격이 되었다.
비록 전체의 수석은 놓쳤지만, 좋은 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 내용은 책문(정치
와 관련된 정책을 논하는 글)을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책제(책의 제목)는 다음과 같은 긴 문
장으로 되어 있다.
왕이 너희들에게 말한다.(논어 자로편에서) 공자님은 만일 나를 등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몇 개월로도 어느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어찌 단지 말로만 했으리요. 그 규
모와 베풀 방도에서 행하기 전에 반드시 미리 정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남
김없이 법도가 이미 모두 퇴락했는데, 부자(공자를 말함)께서는 오히려 3년이면 목표를 성취
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만일 3년이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만일 3년이 지난다
면 그 정치의 효과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역시 이미 행한 자취에 볼 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성인이 지나면 감화되고 있으면 신성해진다는 묘리는 쉽게 허용되는 논의가 아니다. 내가
적은 덕으로 조종의 기업을 계승하여 정치에 임해서 잘 다스리고자 하기를 지금까지 10년이
되었지만, 기강은 세워지지 않은 바요, 법도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와 같다면 목표한
바의 효과를 성취하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여러 유생들은 공자님을 배운 사람들이라
모두 요순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을 것이니 3년이면 목표한 것을 성취한다는 데 그
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때를 당하여 만일 옛날의 융성했던 정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무엇을 먼저 힘써야 할 것인지 남김없이 말하여 보라.
크게 보아 이 문제는 두 가지 묻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첫째는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성인 공자가 자신이 말한 대로 정치를 하고자 했다면 어떠한 방도로 했겠는냐 하는
것과 그 결과는 과연 볼 만한 바가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와 관련해서 16세기
초반의 조선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겠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다.
연산군을 혁명으로 몰아낸 후 10여 년 동안 정치를 잘 해 보려고 불철주야 노력을 해왔던
왕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강과 법도의 어느 하나도 만족스럽게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여서
훌륭한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앞으로 기대한 바의 정치를 이
룩할 수 있겠는지 의견을 제시해 보아라 하는 것이 두 번째 질문의 요지인 것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질문은 물론 두 번째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의 질문에 대한 답변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에 대하여 명쾌한 견해를 제시하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
다. 첫 번째의 질문은 외형상 공자의 일을 빌어 묻고 있지만 결국 그 내용은 유교의 실효적
이상정치론을 진술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러니까 책제가 바라는 궁긍적인 질
문의 요지는 공자에게서 기대될 수 있었던 유교의 실효적 이상정치론에 비추어 현실정치에
대한 개선 방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에 대한 조광조의 답변은 세 가지 부문으로 짜여 있다. 첫째는 원론적 입장에서 자기
견해를 밝히는 서문, 그리고 책제에 대한 답변으로 되어 있는 본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
괄하는 결론이 그것이다. 본론에서는 물론 두 가지 사항의 질문에 맞추어 답변도 두 가지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유교와 그것을 철학적으로 심하시킨 성리학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
는 사람이라면 조광조의 책문은 그 서문부터가 알기에 쉽지 않다. 어리둥잘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기가 십상이리라. 그 내용이 이렇게 있으니까말이다.
하늘과 사람은 근본에서 하나라, 하늘의 이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임금과 백성도 근본은 하나여서, 임금의 도가 백성들에게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들은 천지의 큰 것으로써 만백성들을 하나로 삼았을 뿐이니 그 이치를 보고 그
도리에 따라 대처하였습니다. 이치로써 보는 고로 천지의 뜻을 짊어질 수 있고 신묘하고 밝
은 덕에 통달할 수 있었습니다. 도리로써 대처하는 고로 정밀하고 거친 사물의 몸체를 잘
이루고 윤리상의 예절을 이끌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로 해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
르며 착한 것은 착하고 악한 것은 악해서 나의 마음에서 벗어난 바가 없었습니다. 천하의
일이 모두 그 바른 이치를 얻고 천하 사물이 모두 그 평안함을 얻으니 이것이 만 가지 변화
가 서는 까닭입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도리는 마음이 아니면 의지할 데가 없고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또한 의뢰해서 행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되는 사람이 진실로 하
늘의 이치를 봄으로써 그 도리에 따라 처리하고 그 정성스러움을 통해서 그 일을 처리한다
면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위의 알성시책)
언뜻 보면 굉장히 난삽한 이야기인 것 같으나 누구라도 잘 생각해 보면 그다지 어려운 내
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유교 본연의 자연과 인간을 통일적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하늘과
사람에게 동일한 이치가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 우선 여기에는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민
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하늘의 이치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고 알 수가 있게 된다.
임금과 백성이 근본에서 같다는 말도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양편이 각기 지위
는 달라도 하늘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임금
이 하는 정치란 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이 하늘의 이치를 도리로 삼아 하는 데 지나지 않는
다. 그러자면 마음을 정성스럽게 가져 이치를 살피고 도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며, 그것이
된다면 정치상의 모든 일에 어려움이 없다는 취지인 것이다. 결국 조광조의 주장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지도자인 왕, 그의 마음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공자와 관련
된 본론에서의 첫 번째 답변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이미 여기서 드러나 있는 셈이다.
부자(공자를 말함)가 내세운 천지의 도리이며 부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입니다. 천지의
도리라, 만물이 많다고 해도 이 도리를 따라서 완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지의 마음이어
서 음양의 감응함 역시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조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만물이 도리를 따라 완수된 후에는 어느 하나의 사물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
그 사이에 조리가 정연해서 구별이 있습니다. 하물며 부자는 본래 가지고 있는 도리로써 인
도하니 그 효과를 얻기가 쉽고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써 감응시키니 그 효험을 얻기도
쉬운 것입니다.(위와 같음)
이 말을 이해하려면 조광조를 진사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시킨 글 춘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글의 서문에서 조광조는 이런 말을 했었다. 즉,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을 운행하
여 4시를 이루나 사람은 욕심이 있어 인을 상실하여 4단이 충분해지지 않는다"고.
직관적이고 지나치게 비약적인 견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처럼 욕심이 없는 하늘의
마음, 자연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 성리학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말처럼 성인 중의 성인인 공자는 당연히 천디의 마음을 가졌고 그가 내세운 도리는 천지의
도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욕심의 지배를 받는 보통사람으로서의 대다수 왕들은 정성을 다
해야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정치의 도리를 따라 행할 수 있지만 공자에게는 그렇게 하고
자 하는 의도적인 노력도 필요가 없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음 자체가 완벽하게 천지
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으니까말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무엇을 가지고 3 년이면 완벽하게 목
표한 바를 성취할 수 있겠다고 했는지에 대한 조광조의 설명은 이미 끝이 난 셈이다. 또 그
로 인한 효과가 과연 볼 만한 것이었겠느냐 하는 책제의 질문이나 그에 대한 조광조의 장황
한 설명도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나 책제에서 마지막으로 묻고 있는 것, 그러니까 조광조가 살던 16세기 초의 당시 현
실에서 훌륭한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함에 있어서는 공자가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이러
한 마음은 중요하게 논의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임금인 중종이 결코 공자와
같은 성인의 마음을 가진 지도자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조광조는 당시의 형실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질문에 부응하는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을까? 이제까지의 설명에서 그 답변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셈이지만, 조광조는
여기서 성리학의 본말론을 들어 더욱 구체적으로 말으 하고 있다.
천하의 일이 일찍이 근본이 없지 않고 또한 말단도 없지 않습니다. 그 근본을 바르게 하
면 비록 느리고 더디더라도 실제로 일은 쉽게 되고, 그 말단에 힘쓰면 비록 금방 되더라도
공을 이루기는 힘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치를 잘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근본과 말단의
있는 바를 밝혀서 먼저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근본아 바르면 말단은 다시리지 않
아도 우려할 바가 아닙니다.(위와 같음)
여기서는 근본과 말단으로 단순화시켜서 말하고 있지만 요컨대 가장 중요한 핵심의 것에
중점을 두고 일을 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질구레한 일에 매달이면 당장 눈에 보이
는 개선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일의 근원적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조광조가 언급하는 본말론은 성리학적 세계관의 한 특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러한
인식은 대학에서 벌써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제10장에 보면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덕이 중요하며 재물은 가치면에서 볼 때 상대적으
로 덜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2분법적 사고는 마침내 세계 사물을 보는 기본 관점이
되어 인격면에서 군자와 소인, 후자는 말단으로 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정치에 있어 근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이다. 그야말로 "마음은 정
치를 나오게 하는 근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광조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
다.
정치를 함에 문자, 도구의 말단으로써 기강과 법도를 삼지 마시고 한 마음의 묘한 것으로
써 기강과 법도의 근본을 삼으셔서 이 마음의 본체로 하여금 광명정대하게 두루 사방에 흐
르고 통달케 하며 천지와 그 본체를 같게 하여 그것을 크게 쓴다면 일상생활과 정치를 하는
사이에 모두가 도리를 활용하는 것이 되어 기강과 법도가 세우지 않으려 해도 섭니다. 비록
그러하나 그 정성스러움이 있은 후에야 그 마음의 도리가 굳게 세워져서 결국 그 성취를 보
게 됩니다.(위와 같음)
여기서 정치의 근본이 되는 왕의 마음, 그것이 정성스러움을 가지고 바르게 될 때 기강과
법도가 서며 정치가 그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분
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왕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를 보좌하
는 신하들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조광조는 다음과 비유해서 말한다.
임금은 하늘과 같고 신하는 4시와 같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행한다고 해도 4시가 움직여
돌아가지 않는다면 만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임금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하더
라도 대신들의 보좌가 없다면 만 가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위와 같음)
이에 따라 옛날의 훌륭한 임금과 현명한 대신들은 정성을 다해 서로를 믿고 각자가 할 바
를 다하였던 것이니 오늘날 왕께서도 대신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정치의 할 바를 맡기소서
하는 것이 조광조의 주장이다.
그는 책문에서 명도(도리를 밝히는 것)와 근독(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전자는 공자의 나라 다스림, 그리고 후자는 그의 학문에 있어 각기 요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양자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명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착한 본성을 잘 밝혀 음악, 형벌, 제도 등 모든 것에 각기 마땅한 이치
를 찾아 이끌어 가는 것인데, 정치에 있어서는 이 모든 것이 왕의 마음을 떠나 있지 않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에는 신중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소홀하기 쉬운 것이 사람이
다. 특히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온갖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등 아주 소홀해지기
쉽다. 왕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오래 쌓이면 얼굴에 드러나고 행
적에까지 미쳐 마침내는 정치를 그르치게 된다는 것이 조광조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야말로 왕이 근독 즉 마음을 삼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는 책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짓는다.
정성으로써 도리를 밝히고 혼자 계실 때를 삼가는 조정 위에 그 도리가 세워져 기강을 세
우기가 어렵지 않고, 법도를 정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즉 부자께서 3개월이면 일을
이룰 만하며 3년이면 목표한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한 것 역시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습니
다.(위와 같음)
결국 조광조의 주장대로라면 왕은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수양을 하여 거의 완
전에 가까운 인격자가 되고, 이를 기초로 도리를 깨달아 정치에 구현하는 우수한 두뇌의 송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당히 기대 요구가 높은 주문이 아닐 수 없다. 평범한 인물의
왕이라면 하다마다 지쳐서 오히려 이 요구를 관철코자 하는 신하를 마침내 꺼리며 싫어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아무려나 제한된 시간 안에 작성된 글임을 생각하면 조광조의 이 책문은 대단한 역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평소 정치에 대하여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면 도저히 시험장에서 이만
한 수준의 글이 술술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에 특별한 독창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주자의 상소문을 보더라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글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예컨데 기유의상봉사(기유년에
논해서 올리는 봉사. 봉사란 남이 보지 못하도록 봉해서 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말함)에 보
면 "인주의 마음이 하나로 바르면 천하의 일에 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조
광조가 말한 정치에 있어 근본이 바로 왕의 마음이라고 한 것과 그대로 일치한다. 또, 경자
응조봉사(경자년에 조칙에 응해서 올린 봉사)에서 "인근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기강을
세운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신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도 앞에 나온
주자의 기유의상봉사에서 표현만 재상이라는 용어로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게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책문의 후반부에 나오는 명도며 근독이라는 것도 성리학에 조금만 이해
를 가진 사람이면 그다지 낯선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의 독창성 여부보다 그것을 추진해 가는 실천력이 아닐
까? 조광조에 대한 평가도 궁긍적으로 이 실천력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어떻든 그의 나이 34세가 되는 을해년은 조광조에게 뜻깊은 해가 아닐 수 없다.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데다가 그토록 얻고 싶던 아들까지 이해에 태어났으니까. 장남이 되는
아이의 이름은 정. 아버지의 출세하는 때에 맞추어 세상에 나온 아이라 사람들마다. 복동이
라고 불렀음직하다.
10. 정치 지도자로의 부상
가) 강성의 신임 관료
알성시의 합격 이후 조광조에게는 새로운 보직이 주어졌다. 성균관의 진적(정6품관직), 이
게 첫 보직이었다.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있을 때 이름을 떨치던 그였으므로 천장에서 후배
들을 지도하고 작은 기쁨을 느낄 수도 있었겠으나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홍문관의 감
찰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과거 그의 부친도 거쳐간 바 있으니 부자 2대에
걸쳐 감찰을 지내게 된 셈이다. 그의 품성으로 보아 이들 보직은 그런대로 적성에 맞는 자
리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시기의 잦은 인사 관행 때문에 11월 들어 그는 사간원의 좌정언(정6품관직)으
로 다시 옮겨앉는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더불어 조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옳고 그름을
따져 왕을 보좌하는 기관이다. 말하자면 담당하는 관청인 것이다 사간원의 간부 직원은 총
5명으로 기관장인 대사간(정3품관직) 아래에 사간(종3품관직) 1명, 헌납(정5품관직) 1명, 그
리고 좌, 우정언이 각기 명씩 있다. 그러니까 조광조는 사간원의 최말단 간부 직원이 된 것
이다.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부 직원들은 각자가 독립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각 기관별로는 물론 두 관청간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사전에 의견을 조정하여 일치
된 견해로 왕에게 간언을 드리는 것이 대체로 실제의 관례이다시피하였다. 그런데 이 관례
는 조광조에 의해서 깨치고 만다. 하나의 상소문이 계기를 만들었는데 일의 전말을 보면 dlj
하다.
왕에게는 원래 즉위하기 전부터 함께 살던 왕비 신씨가 있었다. 그런데 신씨는 누구냐 하
면 연산군의 충직한 신하였다가 혁명 후 왕비로서의 신씨 지위는 당연히 무제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박원종, 성희안 등 혁명을 일으킨 주도 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후환을 없앤다
는 점에서도 신씨는 왕비의 자라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래서 혁명이 성공한 며칠 후 자신
들의 등에 업혀 즉위한 왕을 강박하다시피 기어이 신씨를 몰아내 버렸다. 같이 살던 아내를
어찌 버린단 말이오. 눈물까지 보이며 하소연하는 왕의 반대에도 신하들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이
렇게 해서 신씨는 마침내 왕비가 된 지 8일 만에 궁궐 밖으로 쫓겨나 세조 임금의 사위가
되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억지로 갈라진 부부이고 보니 서로를 그리워하는 두 사람의 장은 쉽사리 식을 수
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다감성에다가 외로운 신세가 된 신씨의 마음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어서 그녀는 매일 집 뒤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 대궐을 바라보며 왕을 그
리워하였다. 전하, 보고 싶사옵니다. 눈물 글썽이며 애타게 그리움에 떨던 그녀는 어느 때부
터인가 마침내 자기의 간절한 뜻을 전하는 방식을 찾아내었다. 궁궐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큰 바위에다가 자신의 치마를 벗어 놓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왕 역시 신씨를 잊지 못하여
그녀가 있는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보며 지내던 터라 바위 위에 놓인 치마는 곧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잘 모르다가 결국 내막을 알게 된 왕의 마음 또한 그리움에
젖어들 수밖에. 이후 왕과 신씨는 매일 이른바 이 '치마바위'를 통해서 애틋한 사랑의 언어
를 주고받으며 지내는 상태를 지속한다.
그러던 차에 왕의 즉위 10년째 되는 해에 계비로 맞아들인 장경왕후 윤씨(인종 임금의 생
모)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하루라도 국모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당
시의 일반적 인식에 비추어 볼 때 곧 후임 왕비를 맞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 이렇
게 되자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순서. 이렇게 되자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
는 논의가 일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왕에게 신씨를 버리도록 강박한 박원종이며
성희안 등 혁명을 주도한 공신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라 이러한 논의는 다름대로 힘
을 얻을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도 없지 않았다. 우선 남아 있는 공신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
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일 그녀가 복위된다면 왕을 움직여서 어떤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더구나 한번 죄인의 딸이라는 이유로 내쫓은 사람을 다시 맞아들인다는 것은
국가 체통상으로도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신씨가 이직 젊은 나이인 만큼 복
위 후 왕자를 낳는다고 해보자. 현재의 세자는 그 지위가 매우 불안정해질 것이 분명하고
이는 나라의 후계자 문제로서 결코 간단한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지 않은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지지
하는 쪽에서는 은근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나설 이를 기대하던 참이었는데, 마침내 그
당사자들이 나타났다. 담양 부사 박상과 순찬 군수 김정이 바로 그들. 정의감이 유난히 강했
던 이들은 함께 상의한 끝에 공동명의로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김정이 작성하고 박상이
다듬은 이 글의 제목은 청복고비신씨소(옛 왕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글)인데 여기에 보면
참으로 거리낌 없이 할 말을 다하고 있다.
도대체 신씨는 왜 쫓겨났는가? 신씨 본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오직 신씨의 아버
지를 죽인 공신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도모한 결과일 뿐인 것이다. 전하께서는 즉위 초 강
한 신하들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신씨를 버리시게 된 것이니 이를 꾸민 박원종 등
은 그 죄가 죽어 마땅하므로 추탈관작도 해야 한다. 더구나 신씨의 부친 신수근으로 말하면
(전왕에 양심적으로 충성을 바치며 관직에 종사한 것일 뿐) 국가에 관련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므로 지금에는 용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죄가 있는 것으로 하여 딸
인 신씨에게까지 그 누가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자신들의 몸만 생각하고 임금은 생각지 않
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신씨를 복위시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하다는 것이다.
반대파에서는 당연히 펄펄 뛸 내용이나 마침 왕의 구언(정치의 잘잘못에 대하여 왕이 간
하는 말을 구하는 것)에 따라 나온 것이므로 쉽사리 문제를 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용
된 언론에 대하여는 어떠한 내용이건 원칙적으로 죄를 줄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엇
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들도 박, 김의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아 불문에 부쳐 버리고 말았었다.
그런데 언론을 맡고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오히려 이를 문제삼고 나섰다. 내용이
지나쳐서 아무리 언로가 중하더라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더구나 이번 일을
그대로 두면 계속 문제의 불씨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으니 초장부터 혼을 내놔야 뒤탈이 없
다. 이런 생각이었으므로 상소문을 올린 두 사람을 굳이 귀양 보내도록 조처하고 말았다. 이
러한 조처를 취할 당시의 대사간은 이행이었고, 그와 의논하여 행동을 같이 한 대사헌은 권
민수였다.
이 두 사람 중에도 박, 김의 처벌을 주도하고 나선 사람은 이행이었는데, 거기에는 오늘날
일부 학자들이 거론하는 바와 같이 그의 사적인 동기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연산군 치세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세 정권이 들어선 후 박원종의 적극적인 배려로 빛을
보게 된 사람이다. 박원종이 죽었을 때 그가 박을 국민의 뜻에 따라 새 임금을 세운 중국의
이윤과 곽광에 비유하며 찬양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행은 박원종의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박상과 김정이 신비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에서 박원종의 죄를 물어
추탈관작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행의 반응은 이미 장해진 것일 수밖에 없다. 감정상으로
도 그렇겠거니와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될 경우의 자신이 처하게 될 정치적 입지를 생각할
때 그는 강경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겨우 말석의 간부로 사간원에 적을 두게 된 조광조지만 이러한 처사는 도저히 묵과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박, 심에 대하여 이미 내려진 조처를 변경시키도록 사간원
및 사헌부의 간부들과 논의를 하여 보았으나 의견의 합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심사숙
고한 끝에 그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무릎쓰고 이 관청의 인사개편을 요구하기로 결심하였
다.
그의 직속 상관에 해당되는 대사간 이행으로 말하면 관력에 있어 그의 선배인 것은 물론
숙부인 조원기와도 친교가 있는 사람이었다. 조광조가 사간원에 적을 두게 된 이해 가을에
그의 숙부는 성절사(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절)로 중국을 다녀오는데 이행
은 떠나는 조원기에게 시를 세 수나 지어 송별하고 있다. 또, 이보다 앞서 조원기가 함경도
의 도사로 떠날 때도 시를 지어 송별한 바를 정도로 이행은 조광조의 숙부와 친교가 있는
사이였다.(아세아문화사, 1976, 권3 참조)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신씨의 복위를 청한 박, 김을 좋지 않게 보는 잔
존의 공신들에게 조광조의 의도는 결코 환영받을 일이 못 되었다. 이러한 점은 관청내의 상
하간 화합을 위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행이나 권민수의 처사를 그대로 따르던
두 관청의 여타 동료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가 무슨 인물이나 된 듯이 저토
록 나선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그들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번 일
이 언론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라고 보았으므로 이런저런 사정은 모두 무시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동짓달(음력 11월)의 차가운 날씨가 한창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22일
의 낮, 마침내 조광조는 왕 앞으로 나아갔다.
전하,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가장 나라에 관련이 깊은 것이어서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나 막히면 분란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임금 되는 이는 언로
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 공경과 여러 관료들로부터 아래로 일반 시정의 백성들에 이르기까
지 모두 그 언로를 얻도록 합니다. 그러나 책임지는 언로가 없으면 스스로 뜻을 다할 수 없
는 고로 간관을 설치하여 이를 주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니 그 말하는 바가 좀 지나치더라도
모두 마음을 비워 놓고 우대하여 용납하는 것은 언로가 혹 막힐까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근
래에 박상과 김정 등이 구언하심을 당해 진언을 드렸는데, 그 말이 만약 지나친 바가 있으
면 쓰지 않을 뿐이지 어찌 다시 죄를 주겠습니까? 대간이 이를 잘못으로 여겨 죄주기를 청
하여 금부의 낭관을 풀어 잡아오기에까지 이르렀는데, 대간을 한다는 것은 언로를 넓힌 후
에야 능히 그 직책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정 등이 한 일에 대하여 재상이 혹
죄를 청하더라도 간관은 마땅히 이를 구해서 풀어 주어 언로를 넓혀야 할 것이건만 도리어
언로를 스스로 헤쳐 그 직분을 잃었습니다. 신이 이번에 정언이 되어 어찌 감히 그 직분을
잃은 대간과 같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용납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를 파한 후 언로를 열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부 직원 모두를 갈아야 한다는 주장은 왕으로서도 뜻밖이었다. 그래
서 조광조에게 이렇게 이른다.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데 대한 말은 옳다. 그러나 김정과 박상은 아랫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을 논하였으므로 대간이 죄주기를 청한 것이다. 이것으로 해서간관을 모두 교체한다
는 것은 지나친 듯하며 또 어찌 서로 용납 못 하게까지 되겠는가?"
그러니까 왕의 뜻인즉 기왕지사 지나간 일, 이대로 잠자코 있을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물
러설 조광조가 아니다.
김정과 박상 등이 말한 일이 비록 부당하더라도 그 상소문을 버려 두어 불문에 부쳐야 그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전하의 덕이 밝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재상도 상께서 그 말을 쓰
시지 않을 것을 역시 알고 시비를 논하지 않았는데, 간관이 강경하게 청하여 죄를 주어 임
금님을 불의에 빠뜨리고 간언을 거절하는 일이 점차 이루어지도록 함으러써 만세에 걸쳐 성
덕에 누를 끼쳤습니다. 이후 국가에 비록 큰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구언을 할 수 있겠으
며 구언을 하더라도 누가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지방의 초야에 있는 사람으로서 일에 대하
여 말하려는 자가 길에서 김정, 박상 등의 일을 듣고는 곧 그만둘 것이니 치세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 당시의 대간들이 아직 모두 그 직에 있으니 신이 어찌 서로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조광조에게 강경 자세를 누구러뜨릴 것을 권유한다. 김정과 박상의 일이 한
창 논의되고 있던 때에 뒤늦게 대간에 보직 명을 받은 사람들, 말하자면 지방관을 지내다가
올라온 장령유옥과 사간원 정언 박명손도 별 이의 없이 지내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경
만 서로 함께 용납하여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느냐.
그러자 조광조는 한마디 더 하기를 잊지 않았다.
신의 말은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당시 외방에 있다가 온 대간들은 비록 혹 용납하더라도
사람의 소견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니 신은 서로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여쭙는 바는
언로를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찌 구차스럽게 더불어 같이 일을 하겠습니까?
항우 같은 고집앞에는 왕도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의정부 대신들에게 이 일을 의논해
보도록 지시를 내리고 만다. 결과는 약간의 이의가 있었으나 조광조의 견해가 옳다는 쪽으
로 판정이 났고, 그래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부 직원 모두가 교체되기에 이른다. 단지 한
사람 조광조만을 남겨 둔 채.
물러간 간원의 간부 직원들 마음은 모두가 편치 못했을 것이다. 그중에도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앞장서 주도했던 이행의 울분은 누구보다 컸다.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연
산군 때는 유배를 가고, 사형의 명을 받았다 살아나기도 했으며, 노비까지 되는등 갖은 고생
을 겪어 온 그다. 거기다 이제는 하루아침에 자신이 기관장으로 있는 관청의 신임 간부에게
탄핵을 받고 물러가게 되었으니... 이튿날로 그는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한마디를 남긴채 말
을 타고 훌쩍 연고지인 면천으로 내려가 버렸다. 물론 곧 다시 관직에 복귀하게 되지만 당
시 그의 심정은 이처럼 암담한 것이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그를 성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이행이다. 그의 선배격인 남곤
과 심정도 문학적 재능을 인연으로 이행과 왕래하며 지내는 사이이기도 했다. 때문에 조정
에는 이행의 편을 들며 조광조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이행이 박, 김
을 처벌코자 한 것을 두고 그에 못지 않게 문학적 재능이 있고 명망도 높은 김정을 시기했
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이행을 지지하는 사람드로서는 이성적인 면에서
그의처사를 어떻게 평가하든 조광조로 인한 일의 전말을 두고는 이행에 대한 동정을 버리기
아려웠을 것이다. 조광조가 너무하는군. 그들의 감정은 이런 말을 그들 내부에서 각자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행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심정의 경우는 더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 지치를 제기함
물론 조광조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는데 그들은 주로 사림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비롯하여 일마다 유교의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이를 반대하고 할 수 있
는한 시정하려는 자세를 보여 온 그들이다. 이번 박상, 김정의 일만하더라도 언론을 중시해
야 한다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형벌을 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언론을
맡고 있는 간원(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칭)에서 오히려 그들을 죄주도록 하였으니 사림들 입
장에서는 참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식으로 이를 문
제화하는 용기와 결단력은 누구와 쉽사리 보여 주지 못하고 있던 차에 과감히 이를 해 낸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관직에 나서기 전부터 칭송이 있던 터이고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언행이 뛰어나 사림의 주목을 받고 있던 그이다. 나이는 젊어도 은근히 그에게 기대하는 사
람들이 늘어가던 상태에서 이 일은 조광조에게 더욱 커다란 신임을 모으게 하는 계기가 되
었다. 젊지만 참으로 의리를 아는 인물이야, 대단한 사람일세.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라
면 어디서나 이러한 말드이 죽돌았을 것이다.
무오,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훈구파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사람들. 그런데 혁명
이후 그들은 개혁의 기운을 타고 의리 정신에 입각하여 과감한 논의를 제기해 왔다. 연산군
을 몰아내는데 참여한 정국공신의 개정, 내수사 장리와 기신재(원래는 해와 달, 별 등에 제
사지내는 도교의 의식이나 이 당시는 왕실의 죽은 사람을 위한 불공으로 드러졌음)의 폐지,
소격서 혁파, 소릉(문종왕비의 능)의 복위 등 여러 가지를 거론해 온 것이다. 이중에는 조광
조가 정계에 나오는 것을 전후하여 해결을 본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소릉의 복귀와
내수사 장리 및 기신재의 폐지가 그것. 소릉의 복위와 내수사 장리 및 기신재의 폐지가 그
것. 소릉의 복위는 왕(중종) 8년, 그리고 내수사 장리와 기신재의 폐지는 왕 11년의 6월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처들은 외형상 사림파(사림들은 하나의 파벌로 지칭해서 부르는 말)의 승리를
알려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역대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공신으로 책정되어 단단한
기득권의 혜택을 누리고 있던 이른바 훈구 계열의 보수 세력에게는 달갑지 않은 면도 있었
다. 내수사 장리의 폐지만 하더라도 이자놀이로 부를 늘리고 있던 그들에게는 은연중 압력
으로 작용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들의 이자놀이라는 것이 대부분 장리로 이루어지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큰 일은 개혁 그 자체가 힘을 얻어 갈 수 있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
게 소릉 복위에서 나타난 과거사의 정리는 결코 예사로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소릉의 폐지
는 원래 세조가 자신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는 의미에게 단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복위시켰다는 것은 암암리에 세조의 즉위를 불법으로 판정하는 의미가 있게 된다. 이처럼
과거사의 정리를 요구하는 개혁의 소리가 앞으로 더욱 높아 갈 것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예
상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요구에는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포함될 수 있겠거니와 이
번에 제기된 신비 복위 문제만 하더라도 그와 무관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아직 정국공
신들이 적지않게 살아 있는데도 그들에게 민감한 이 문제가 과거사의 정리 차원에서 거론된
것은 앞으로 더 큰 문제의 제기를 예고하는 거이 아닐 수 없으리라. 적어도 보수 세력에게
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립은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법.
과연 이러한 대립상은 조광조에 의한 간원의 개편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대사헌
이장곤, 대사간은 김안국으로 하여 개편이 이루어졌지만 이들 진용은 일주일은 채 못 넘기
고 다시 개편되고 만다. 이행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과 조광조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으로 갈
려서 간원 자체의 의견 통일을 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의 여론대로 이장곤과
김안국이 조광조를 지지하는 그들의 입장을 계속 밀고나갔다면
왕도 그 말을 받아들여 언로가 중한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 거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광
조만한 투지와결단력이 부족하였다. 자신의 잘못된 조처로 돌리는 등 갈팡질팡하는 면모도
보여 일은 이후로 유사한 형태의 쟁론을 계속 유발시키게 된다.
후의 얘기지만, 이행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근무할 때는 조광조, 김정 등도 같은 관청 소속
이었는데, 서로가 내내 한마디 말도 없이 지내는 형편이 되고 만다. 주위의 여러 여건도 복
합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 대신을 비롯하여 이들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에 서는 그런대로 화목한 분
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일례를 들어, 왕11년 4월에 대제학(정2품관직)을 새로 뽑는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우의정(정1품관직) 신용개가 겸직하고 있던 직임인데, 문장력이 뒤어난 사람
만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이므로 그 후보는 어렵지 않게 압축될 수 있었다. 김전과 남곤, 이
두 사람이 그 후보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를 문형(대제학의 별칭)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의외로 쉽게 끝나고 만다.
"남곤은 지금도 학문에 힘쓰고 있습니다."
우의정 신용개의 추천과 함께 영의정 정광필이 아뢴 이 한마디로 왕은 곧 남곤을 대제학
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에 앞서 좌의정(정1품관직) 김응기도 남곤을 적극 지지하였으니 의정
부의 3정승이 나란히 같은 인물을 천거한 셈이다.
어떻든 이러한 판국에서 조광조는 자신의 제자격인 기준과 힘을 합쳐 경연에서 계속 왕을
치세의 지도자로 만들어 보고자 노력을 한다. 마침 35세가 되던 봄에 그는 호조, 예조, 공조
좌랑(좌랑은 정6품관직)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부수찬(정6품관직) 겸 경연의 검토관
(경연의 정6품관직으로 홍문관의 6품관 직원이 겸직함), 그리고 춘추관(정치에 관한 일의 기
록을 맡아보는 관청)의 기사관(정6품관직)까지 겸직하게 된다. 검토관의 직을 가지게 되었다
는 것은 경연이 있을 때마다 왕을 뵙고 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니 그로서는 때
를 만난 셈이었다.
조광조는 고려사절요 등 역사서를 좋아하는 왕에게 중용, 대학, 성리대전이며 근사록을 더
욱 열심히 읽도록 권유한다. 마음을 닦는 데는 역사서보다 이들 책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요컨대 그 취지는 성리학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여주십사 하는 내용이 되겠는데 왕도 여
기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성리학을 숭상하며 배우고 싶다."
그러나 성리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배우는 쪽도 그렇거니와 이를 가르
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공부하는 학문으로 깊은 사색과 연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관계가 왕과 신하의 사이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중국 송나라 때에 주자는 당시의 임금 광종에게 강의를 베푸는 것을 계기로 오히려 위학(진
실되지 않은 가짜의 학문이라는 뜻)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광조가 주장한 내용들을 보면 알성시책에서 제시된 견해에서 기본적으로 달
라진 것이 없다. 왕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이 모든 것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연산군 때의 혼란기를 거친 뒤여서 참으로 크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
였다. 그래서 왕 11년 12월 12일의 조강에서 그는 지금이야말로 힘을 더 쏟아야 할 기회임
을 강조하면서 조용한 가운데도 열변을 토하듯이 말을 이어 간다.
성상께서 마땅히 존양성찰(착한 마음을 함양하여 보존하고 깊이 자신을 반성하며 살피는
것)하는 공부와 함께, 나도 역시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있어 요, 순, 탕, 무(고대 중국의 요
와 순 임금, 그리고 은나라의 탕 임금과 주나라의 무왕을 말함)가 임금인 것과 다름이 없는
데, 어찌 요, 순, 탕, 무처럼 다스리지 못할 것인가 하여 이를 뜻으로 세우신다면 끝내는 (그
들이 이룬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아랫사람들을 진작시키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에
게 달렸으니, 성상께서 먼저 덕을 닦아 사람들을 감동시키게 되면 아래에서도 감동되지 않
는 사람이 없어 지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이야말로 다스릴 수 있
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의 힘을 다하신다면 나라의 큰 복이 되겠
습니다. 덕을 쌓는 것이 근본이므로 이를 힘쓰면 나머지는 애쓰지 않아도 절로 다스려지겠
거니와 (반대로) 근본에 힘쓰지 않으시고 말단의 일에 힘을 기울이면 수고스럽지만 하고 도
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어서 그는 왕이 너무나 자질구레한 국사에 관여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정하도록 아뢰기도 한다. 왕으로서는 대체에 속하는 큰 일만 관장하고 남는 시간은 학문
에 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무적인 말단의 일에 빼앗기는 시간에 학문을 해서 마음
을 닦으면 근본이 공고해져 그만큼 정치에 효과가 더욱 커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치라는 언급이 나왔거니와 이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난 듯 열중하게 되
는 것이 이즈음의 조광조 버릇이었다. 그래서 12월의 바깥 추위를 금방 녹이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로 왕에서 간언을 드린 것인데, 지치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지치라는 말은 서경의 주서 군진편에 나오는 구절, 즉 "지치는 형향하여 감우신명(지치는
그윽한 향기를 발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뜻)한다"는 구절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전해온다. 주공의 말로 알려져 있는데, 지극히 훌륭한 정치의 효과를 향기에 비유하여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자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공맹(공자와 맹자의 합칭)의 철학과 정치관
을 요약한 왕도정치, 그러니까 모든 국민을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만들면서 도덕적으로 인의
가 실현되는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왕도정치가 공맹을 받드는 정치권에서는 어디서나
이상정치로 추구되었던 만큼 지치가 유교정치의 궁극적 지향점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중국 송나라 때에 성리학이 크게 일어나면서 지치의 실현 방법도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지닌 본성의 이치, 즉 성리를 깊이 연구하고 이를 올바로 세워 정치에
구현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성리에 의거해서 자기 수양에 힘쓰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현실정치에 구현
코자 할 때 학자들은 흔히 이를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학은 성리학에 뿌리를 둔 것이로되
실천성이 강한 학문이요, 정치, 경제적 요소가 강한 특징을 가진다. 다시 말하자면, 내면적으
로 성인의 인격을 갖추기에 힘쓰면서 만백성을 위한 왕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것을 내
성외왕이라고 부른다)이 도학이요, 도학의 정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학정
치에서는 정치의 근본이 되는 주체, 즉 왕의 마음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에게 내성외왕의 도
가 갖추여져야만 도학의 정치인 지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이지면 말단에 해당되는 나머지의 실무적인 일을 그대로 잘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도학은 가지고 있다.
조광조의 주장이 여기에 속하는 것임은 누가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과 그 내용으
로는 엄연히 존재하여 왔음에도 그동안 비교적 잘 쓰이지 않던 지치라는 용어! 그것이 이제
조광조를 만나 그의 전매특허 용어인 양 조정에서 자루 쓰이게된다.
지치가 이루어지려면 상의 마음이 달라져야 하고, 그러자면 나 자신 비상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조광조였으므로 경연에 임하는 태도부터 아주 진지했다.
왕에 대한 강의가 있기 전날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목욕을 하고 밤이 늦도록 강의할 책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으며 그 뜻을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는 하였다. 새벽이 되면 옷을 새
로 갈아입고 왕 앞에 나가기를 잊지 않았으며, 경연에 들어가서는 엄숙한 태도로 준비해온
내용을 남김없이 아뢰어 왕을 감동시키고자 하였다.
이즈음 그가 하는 말은 대체로 보아 크게 세 가지였다. 하늘과 인간의 본성 및 7정에 관
한 철학적 논의, 왕도와 패도를 구별하는데 대한 정치적 견해, 그리고 수신과 지치에 관한
논의가 그것이었다. 그는 이와 함께 사기(선비들의 기풍)를 중요시하였다. 왕 이하 유생들이
며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선비라고 보았으며, 그 때문에 왕을 사기의 으뜸이라고 주체라고
보았다. 왕의 결심과 태도 여하에 따 라 사기가 달라지고 나라의 앞날이 변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왕도 진지한 태도로 강론에 임하는 조광조에게 깊은 신뢰감과 함께 호감을 보내고 있었
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때로 밤을 지나 새벽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도
왕이나 조광조 모두 피곤한 줄 몰랐고 무언가 지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
풀어 있었다. 두 사람의 밀월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옛 성인을 연상케 하는 침착하고도 당당한 걸음걸이, 공맹이며 정자와 주자가 아니면 입
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성리학에 열성적인 태도, 오로지 나랏일만을 생각하는 우국의 자세,
그리고 사람을 끄는 천부의 자질까지 겹쳐 조광조는 왕의 신임과 함께 조정의 선후배들로부
터 인망도 적지 않게 얻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세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중앙에 해당되는 경기도만 하더라도 조
세를 피하여 한성의 성안으로 도피해 들어온 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나라의 근본
산업이라고 하는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작황에다
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세 부담을 견디다 못하여 도시로 숨어들어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
래도 좌판이라도 놓고 있으면 그럭저럭 가족들의 생계는 해결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이
그들의 이농을 부추키고 있었던 것이다.(중종실록. 권25, 11년 5월 12일의 내용참조)
생계의 어려움은 지방에서 더하였다. 그래서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간 권민수는 생각다 못
하여 도내에 시장(기록에는 장문으로 나와 있음)의 설치를 왕께 아뢰었다. 그리고 호조는 이
건의가 일리있다고 보아 시장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할 것을 건의 드렸다. 백성들이 시장
에서 상호 필요한 것을 교환하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보게 되면 생계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왕은 시장이 이익에 쏠리는 폐단만을 조장할 것이요, 또 영악스러운 상인
들에 의해서 농가 물건이 모조리 독점되는 폐단도 있으리라고 보아 충청도에만 이를 허락하
였다.
원래 조정에서는 시장의 개설이 농업을 장려하는 국가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
래서 한성을 비롯한 일부 지방도시에 시전의 설치를 허용하는 외에는 시장의 개설을 억압하
는 정책을 취하여 왔다. 그러나 교환을 원하는 사람들의 자연적인 요구는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시전 외에 한성의 성안 여러 곳에 시장이 생긴 것은 그것을 입증한다. 이와 같은
자연적 요구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흉년이라도 들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매
매의 필요에 따라 절로 시장을 형성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만
나면 일종의 빈곤 대책으로 시장의 형성을 당국에서도 묵인하고는 하였다. 충청도에서도 마
침 흉년이 심한 때였으모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시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도록 중앙정
부에 요청한 것이고 왕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이를 허락한 것이다.
어디로 보나 뚜렷하게 달라지는 기미가 발견되지 않는 세태. 그러나 중앙정계에서는 어떻
든 조광조 등의 열성적인 계도에 힘입어 왕의 자세가 달라지고 있었다.
"내 항시 마음을 경계하며 지내고 싶으니 홍문관에서는 합당한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
라."
왕의 이러한 분부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소속 관원들이 모두 머리를 짜내어 글을 올렸고
왕은 문장에 능하기로 소문난 집전과 남곤에게 그중 가장 좋은 것을 뽑아 올리도록 지시하
엿다. 그 결과 채택된 것은 조광조의 글이었는데 사람들 중에는 다소 의외로 생각하는 경우
도 있었다. 평소 문장을 짓는 데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별로 탐탁
하게 보지 않던 조광조가 아니던가.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의 정성스런 마음이 이 같은 글을
지어 낼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왕으로부터 상으로 털요 하나까지 선물로 받게 만든 글,
그러니까 오늘날 계심잠(마음을 조심하도록 이르는 말)으로 알려진 글에는 과연 지치를 열
망하는 조광조의 꿈과 기원이 서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얼마전 겸직은 그대로인 채 수찬으
로 다시 승진한 그로서는 정말로 열과 성을 쏟아 쓴 글이다.
다) 계심잠
계심잠에는 서문이 먼저 나와 있다. 여기에서도 보면, 역시 그는 왕의 한 마음이 매우 중
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마음의 신령스럽고 묘함은 통하지 않는 데가 없거니와 항차 임금의 한 마음은 천지의 튼
것을 몸으로 삼아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를 내 마음이 운용하는 가운데 포함해 가지고
있으니 하루의 날씨와 한 물의 본성도 그 나의 법도에 따르지 않아 어긋나게 해서야 되겠습
니까?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는 욕심이 있어서 이른바 (마음의) 신령스럽고 묘한 것이 닫혀
서 사사로운 정에 같히면 능히 유통되지 않아 천리(하늘의 이치)가 어두워지고 기 역시 막
혀 윤리가 퇴폐하며 만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임금은 아첨하는 말과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향기로운 음식 맛에 유혹이 날마다 많이 있는데다가 세력은 지극히 높으니 아
울러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여기서 임금이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를 내 마음이 운용하는 가운데 포함해 가지고"
있다거나 "사사로운 정에 갇히면 능히 유통되지 않아 천리가 어두워지고 기 역시 막힌다"는
말은 유교. 특히 성리학에서 말하는 '천인상감설'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얼른 납득하기 어려
운 내용일 것이다. 이 설에서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느낌이 통한다고 본다. 그래서 왕이 정
치를 잘못하거나 백성들 중에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경우, 혹은 간사한 사람들
이 득세하는 경우 등 여러 상황에 따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석한다. 가뭄, 홍수, 지진
등의 재해는 공연히 일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일이 잘못되거나 그 억울한 기운이
하늘에 사무쳤을 때 경고의 의미로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천인상감설'의 기원은 중국 한 나라 시대의 유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
이
다. 그러나 그 근거는 논어에 나타나 있는 공자의 행적에서 이미 싹이 보이고 있다. 이 책의
향당편에 보면 뇌성벽력을 치고 바람이 세게 불 때 공자는 얼굴색을 변하였다고 한다. 그리
하여 밤일지라도 반드시 일어나 옷을 입고 관을 바로 썼던 것으로 전해온다. 뇌성벽력이나
세찬 바람을 단순한 자연재해로만 보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교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불교국가인 태국의 19세기 역사를 보
면 이와 마찬가지의 사유 가 거기서도 나타나 있다. 예컨대 1849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
람들이 죽자 당시의 태국 왕인 라마 3세는 정성껏 계율을 지키고, 동물들을 방생하였으며,
백성들에게도 가두어 놓은 짐승들을 놓아주는 공덕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왕을 비롯한 백
성들의 공덕이 부족할 때 천재지변이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상식화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일
들은 그저 우습게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인상감설'이 보편화되어 있던 시절의
천재지변은 당연히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만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왕의 근신(처신을
삼가는 것)과 정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면이 있는 가하면 정치관에서는 천재지변의 원
인을 정적의 탓으로 돌리는 일도 없지 않았다. 전자는 정치가 잘 되도록 하는 효과가 잇을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 정치인들 사이의 파쟁과 분쟁을 유발시킬 수 있음을 쉽게 짐작이
된다. 서로가 천재지변은 네 탓이라고 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정치판에서는 소인과 군자라는 이분화된 인격
개념을 가지고 서로 싸우기가 십상으로 되어 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냐의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이 둘 중의 하나로 판정하는 너무 단순화된 구분이어서 거기에는 무리가 없을 수 없
다. 사람이란 누구라도 잘못이 있을 수 있는데, 어쩌다가 한번 언행에 흠이 있는 것으로 판
정되면 그는 곧 소인으로 규정되고 만다. 군자라고 항상 군자일 수만은 없고 소인 역시 그
러한데 여느 때 한번 실수라도 있게 되면 그는 소인으로 낙인 찍히고 마는 것이다. 도덕적
으로 명명백백하게 비난받을 짓을 했다면 모르거니와 누구라도 자신을 소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도덕적 행위란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판정할 수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런데도 굳이 어느 한때의 행위를 문제 삼아 너
는 소인이야, 이렇게 판정을 내리고 배척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당하는 사람의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사실 이건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소인으로 몰려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은 이본
의 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이지메'의 성인판일 정도여서 그 괴로움은 이만저
만
이 아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선조 때에 김개(선조 초기 경연에서 특진관으로 활동하였
음)라는 사람은 당시 사간원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던 신진들로부터 '소인'으로 몰려 공
격
을 받고는 상심 끝에 죽은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소인과 군자의 구분은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해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대체 누가 소인이고 군자란 말인가? 그것을 칼로 쪼개서 보듯 환히 알 수 있다
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서 왕도 조광조가 35세이던 해의 4월에 한탄 비슷하게 이런 말
을 한 적이 있었다.
"옛날부터 어떤 임금이든 군자를 등용해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싶지 않으며, 소인을 임명
해서 나라를 망치고 싶었겠느냐? 그러나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군자를
소인, 소인을 군자라고 하여 난세가 따르게 된 것이다."
왕이 이런 말을 한 것은 한낮의 경연(주강)에서였는데, 주위의 신하들 역시 이에 관해서
뾰족한 기준을 제사할 수는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왕이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태도가 투철하지 못하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리학에서는 왕이 학문을 열심히 해서 식견이 높아지면 뛰어난 인식
과 판단능력을 갖출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도 잘 알아볼 수 있어 소인을 물리칠 수 있
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의 인식이나 판단능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꼭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결단력이나 실행력에도 문제점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예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은 없다. 한창 잘 다스려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야흐로 학문에 열심
인 이즈음의 왕을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째 되던 해 11월 16일의 조강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강관으로 경연에
참석중이던 한충이 경연에서 고쳤으면 하는 점을 아뢰었다. 왕이 격식을 차리지 말고 편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강론의 효과를 더욱 높일 수 있겠다는 것과 서안(책상)을 만들어 사람
들이 책을 밟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 너무 격식을 차린 자세
로 앉아 있으면 분위기가 딱딱해져서 군신간에 좀더 자유로운 대화가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
이다. 또, 책상을 만들자고 한 것은 경연에서 공부하는 책이 모두 옛 성현들의 훌륭한 언행
을 담은 것이므로 그것이 밟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존경하는 도리에 맞지 않겠느냐
는 이유에서였다. 누가 보나 타당성이 있는 얘기였으므로 왕도 '아주 좋은 말'이라고 하였
다. 그래서 그것의 실행을 대신들에게 의논시켰는데, 그들의 답변은 반대로 나왔다.
"조종조(윗대의 조정)에서 하던 일이 아니므로 갑자기 바꾸기는 어렵사옵니다."
이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왕은 대신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어찌 되었든 왕은 정치를 잘 해보겠다는 성의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계심잠(문집, 권
2)까지 지어 올리라고 한 것은 그 뚜렷한 증거일 것이다. 인간을 누구나 학문을 열심히 하
면 인격과 능력 모두가 향상될 수 있다고 보는 조광조의 입장에서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
을 것이다. 그래서 계심잠의 서문 말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상께서 (마음이 잘못된 것을) 염려하시고 두려워하셔서 신에게 명하여 경계하는 글을
지어 바치라 하시니, 오호! 지극하십니다. 신은 감히 뜨거운 정성을 쏟아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하나이다.
그리고는 정말로 정성이 가득 담긴 내용의 계심잠을 지어 올렸다.
천지의 기운 성하매 큰 변화 오직 순수하구나/ 기는 통하여 형체가 되고 이는 그 정수를
잇도다/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 남김없이 모아져 만상이 두루 휩싸이고/ 혼연하여 밝게 비
치니 신묘한 작용이 어긋나지 않는구나/ 은미한 데에 충만하고 널리 알려진 곳에도 이것은
드러나 사람에게 지극한 법이 세워지도다/ 확충하여 온 세상에 법도로 하면 공은 만물의 자
리를 바로 해 기르는 데 오르리/ 위대하도다, 영묘함은 조화되어 하늘에 통하누나/ 크고큰
요 임금의 대업 또한 여기에 있도다/
그러나 마움의 본체는 움직이되 허하여 물에 감응해도 종적이 없구나/ 정이 크게 일어나
분란하고 번거로우면 그 뜻을 몰래 바꾸나니/ 용렬하여 어두운 데 빠지면 방탕하여 날뛰는
말이어서/ 아주 폐하지면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나니/ 살려는 의지가 따라서 막혀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스스로 끊어 화가 속히 오니 건강도 잃게 될진저/
군자는 이를 두려워하여 동정간에 함양하노니/ 공경함을 안으로 지니고 의로써 행동한다
네/ 깨우쳐 단단하면 보고 듣는 것에 떳떳함이 있으리/ 조용한 방에서도 공경하기를 상제가
환하게 임한 듯이 하고/ 몸에 사무치도록 공경하기를 상제가 환하게 임한 듯이 하고/ 몸에
사무치도록 자기를 지켜 심처럼 엄숙하리/ 이렇게 함유(적시어 윤택하게 함)하여 바꾸지 말
며 계속 좇아서 닦으리라/ 그 맑은 물이 조금씩 흐르면 미침내 그 흐름이 아주 커지리/ 이
것이 만 가지 변화에 발휘되면 탁연(뛰어나게 의젖한 모양)히 밝은 해라/ 의는 일에 나타나
고 인은 만물에 두루 미쳐서/ 깊이 융화되어 순수하면 이 둘 사이에서 마음이 크게 밝아지
리/ 오호! 이것을 잡고 넣음에 따라 선과 악이 구별되다니/ 그런고로 성인이 주고받는 것은
오직 전하는 심법뿐일세/ 밝히기 어려운 것은 이이고 넘쳐흐르기 쉬운 것은 욕심인저/ 오로
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면 그 덕을 보존하리라.
물론 전체가 모두 마음에 관한 내용이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세가지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이 가지는 신묘하고도 커다란 힘. 그러나 그것을 잘못 쓰고 굳게 지키지 못할 때
오는 어려움,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내용들로 되
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간절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조광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듯하다. 끝에서 이렇게 다시 왕에게 부탁을 드리고 있다.
원하옵나니 성상께서는 몸에 체득하시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공경하고 또 공경하셔서 나
쁜 것을 이기기는 적을 대하듯 하고 4단을 일으키는 것은 풀싹이 돋아나듯이 하시며, 오직
살피고 지킴을 세밀하게 하사 바른 것을 잡아 한결같이 하시면 마음의 태극을 보존하심으로
써 영구히 지녀 폐함이 없으실 것이옵니다.
마음의 태극이란 인, 의, 예, 지를 갖춘 인간의 착한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것을 지
키기 위해 항상 자기 내부를 살피고 잘못된 것을 고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이
계심잠으 조석으로 보면서 깨우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경연에서 자주 만나는 조광조에게
더욱 호감이 갔고 그를 중용해야겠다는 생가고 점점 커져 간다.
라) 아직도 부족한 왕의 노력
왕의 마음은, 이제 조광조의 말대로 노력하면 지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왕의 의중을 잘 살펴서 아뢰기를 좋아하는 남곤이 이즈음 정치와 관련하여
심감(마음의 거울)에 관해서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왕의 마음이 공
명정대하면 사사로움과 바른 것을 명확히 구별하게 되어 정치가 잘 될 수 있다고 왕께 아뢰
었다. 그는 이조판서로서 유용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
다.
정치를 잘 해보고자 하는 왕의 뜻이 있고, 신하들 중에 누구 하나 뚜렷하게 문제가 되는
인물이 있지도 않은 시기. 그러나 이상하게도 백성들의 형편은 눈에 띄게 나아지는 것이 없
었다. 조광조가 경연의 검토관으로 활동하던 1517년의 1월만 해도 차마 그대로 보기 어려운
참산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먹고 살시 힘든 나머지 자식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거나
길에 버리기도 하며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살던 집을 불사르고 일가족 모두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중종실록, 권 27, 12년 1월 25일의내용 참조)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집을 떠났을까? 조광조가 펼치는 지치의 노력은 분명 이들
의 생활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이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사
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명명백백한 사실이 개혁의 이름으로 추진됨에
있어서는 어찌해서 어려운 과정과 이념의 가공이 필요한 것인지... 거기에는 또 싸움이 있고
이해가 복잡하게 얽히기도 한다. 사감이 끼어드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개혁은
그 자체 어려운 것이고 사회 다수인의 행복을 위한다는 그 궁극의 목표와도 동떨어지게 되
는 사례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요컨데 개혁은 인간의 불안전성을 극복해 가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과업이다.
그 노력이 크면 클수록 개혁은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할 수 있다.
조광조도 나름대로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나아지는 것
이 없는 민생의 현실은 그에게 고민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지금 지치가 제대
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연산군 때의 혹독한 사화를 신하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옳은
말 하기를 꺼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하들의 눈에,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화를 일
으키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전하께서 보여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신들과 나라
의 큰일을 확연하게 결정해서 추진해 가시면 기강도 서고 일에 효과도 있게 됩니다 하는 내
용으로 진언을 드렸다.
자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불안과 기대도 담고 잇는 말도 볼 수 있겠는데, 이어서 그는 매
사에 신속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도 왕에게 역설한다. 사실 왕은 신하들이 제기하는 어떠
안 사안도 즉석에서 금방 받아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든 몇 날 몇 달을 끌기가
예사였고 그중에는 몇 년이 걸려도 마이동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이즈음
조정에서 계속된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는 소격서의 혁파 문제는 아마 그 대표적인 사안일
것이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신하들이 요구해 왔지만 왕의 태도는 마치 그런 것 같았다.
너희들 얼마든지 떠들어 보아라. 그러다가 시일이 가면 잠잠해질 수밖에 더 있겠느냐.
왕은 또 기존의 불필요한 제도적 틀에 얽매이는 점이 없지 않았다. 신하들을 만나는 것도
정해진 자리와 시간이 있어서 그 외에는 좀처럼 면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공식적
인 규칙을 따라 면대를 하는 셈인데, 그러다 보니 신하들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누구라도 적당히 자기를 꾸미기가 쉬우므로 소인이라도 얼
마든지 언행을 잘 만들어서 군자인 듯이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는 왕에게
아무때나 자주 신하들을 면대하도록 진언을 드렸다. 격식에 얽매이지 말고 수시로 접함으로
써 신하들의 됨됨이를 좀더 자세히 알고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나라 실상을 한층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 문제는 역시 소인들과 군자를 잘 구분하여 쓰는 일이다. 조광조에 의하면 소인
과 군자는 음과 양, 낮과 밤처럼 어느 때고 항상 같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정치에 있어
서는 전자로 인한 위기와 후자로 인한 잘 다스려짐의 기회가 늘 공존한다는 얘기도 되겠는
데, 이 때문에 소인을 물리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는 서로 배척하기 마련이
므로 힘써 군자를 발탁해서 쓰면 소인은 자연 물러가거나 군자로 변해 가게 된다. 군자가
주도하는 세계에서 군자 아니면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조
광조의 입장에서 보자면 환경에 따라서는 소인도 군자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셈이다. 하기야 군자와 소인이 불변의 절대적 존재로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왕
에게 아뢴 조광조의 이 말이 특별하게 생각될 이유는 없다. (같은 책, 권 27, 12년 1월 11일
-1월 23일의 내용 참조) 조광조의 이러한 말이 있기 4 년 전 당시 동지사로 경연에 참여하
고 있던 남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남이 그때 왕을 향하여 아뢴말은 대략 이
렇다.
"임금이 정치를 하는 방도는 사사로움과 바른 것을 구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일을 바
르게 구분해 하기란 어려운데 그 근본은 본심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사람의 말이라고 하여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과 같아서 한번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군자도 소인이 되고 (그 반
대의 경우는) 소인도 군자가 됩니다."
조광조가 한 말보다 소인과 군자를 설명하는 데 있어 더욱 명확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이
는 내용을 진술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소인과 군자는 결국 감정적으로 대치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남곤이나 조광조 모두가 미처 모르고 있었겠지만.
조광조는 그의 나이 36세가 된 2월에 홍문관의 부교리(종5품직)로 임명된다.(문집에는 교
리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여기서는 실록의 내용을 존중하여 부교리에 임명된 것으
로 적는다.) 소속이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홍문관인 점도 그렇거니와 시족관(정5품관직으
로 홍문관의 고리와 부교리가 겸직)으로 올라 계속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조광조
러서는 뜻을 펴기에 아주 좋은 여건이었다. 아울러 춘추관에서도 기주관(정5품관직)으로서의
직책을 맏아 겸직을 계속하게 된다.
조정 전체로 볼 때 그는 차츰 힘을 얻어 가는 형세에 있었다. 기준은 경연에서 함께 활동
을 하고 있었으며, 마음으로 가깝게 지내는 안처순은 같은 홍문관 소속으로 있어 자주 의논
상대가 되었다. 문학에 조예가 있으면서도 그와 도학 뜻을 같이하는 김정, 그리고 3월 들어
경명행수(경전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다는 의미 내지 그에 해당하는 당사자)로 관흥창 주부
(관흥창은 관리들의 봉급을 주관하던 관청으로, 주부는 이곳의 종6품관직)가 된 생원 김식도
그와 뜻이 맞는 동료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들 대부분을 높게 평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기준은 말이 너무 과격하고 입
빠른 말을 잘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는 대신들이 없지 않았다. 김정은 우직한 편이었으나.
사람들의 단점을 들어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단점이 발
견되면 곧 상대를 배척하는 편협성이 있었다. 또 김식은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지나치게 바
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다. 첫 번째로 보직을 받은 광흥창에서는 물론 후에 전보된
형조에서도 세속에 물든 동료들과 그가 잘 어울리지도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떻든 조광조는 경연에서 왕에게 부지런히 진언을 드리는 데 쉴 틈이 없었다. 기준과 함
께 그는 왕에게 도학을 열심히 권하면서 정몽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몽주는 우리나라
이학(성리학을 말함)의 종주(근원이 되는 정통의 인물이라는 뜻)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대사성으로 지도를 맡았던 유승조에 대하여는 의외로 낮은 평가를 내
리고 있다. 유를 사람들이 학식이 있다고 말들 하지만 사람 됨됨이가 거칠고 경박해서 유학
을 공부한 사람으로서의 볼 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다. 학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비중
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은 언행과 인격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
듯이 여기에는 그가 26세 때 관련되었던 박경의 쿠테타 미수사건에서 유승조가 고발자였다
는 사실도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고 도덕을 생활해 가는 마을과 사
회가 되도록 하는 것은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조광조의 기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왕
의 재위 12년째이던 3월 25일자 조강에서도 조정에서 실천으로 예의와 겸양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가 조정에 들어오기 전부터 하나의 숙제로서 제기
되어 온 정국공신이며 정난공신의 문제를 이 시기에 거론하고 있는 것도 이유는 여기에 있
었다. 조정에서 정국공신의 책정이 이익에 따라 마구 이루어지니 결국 공신이 되고픈 이과
등의 책동으로 역모도 논의되는 등 도덕을 가볍게 보는 선비들의 악습이 유행처럼 되었다고
본 것이다.
결국 어디로 보나 왕의 한 마음과 조정에서의 모범이 마을이며 온 사회를 순화시키는 데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지금 당장 백성들이 굶주리며 헤매는 현실에 그것은 과연 얼
마나 의미 있는 처방일까? 흉년이 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는 양반집의 부녀자들까지 먹고
살기가 어려워 구걸하는 일이 없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중후한 인품의 정광필이 같은
자리에서 조광조의 말에 이어 뒤질세라 왕에게 한마디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광조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이 기아와 추위로 떠는 마을에 예의와 겸양
을 실행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을 논하고 왕도며 지치를 열심히 말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당장 굶주리는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당장 그들을 구제하는 조처를 먼저 강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정광필의
생각은 그런것이었다. 조광조라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순서에서 정
광필과 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 신, 구 세대의 간격
조정에는 은연중 신, 구 세대간의 견해 차이가 자꾸 노정되고 있었다. 지난해에 있었던 조
광조의 이행에 대한 공격도 따지고 보면 그중의 하나로 여겨질 수 있는 일이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세대들은 당시 이행을 소인시하는 형편이었지만, 영의정 정광필을 위시한 구세대
에서는 그렇게까지 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행을 반드시 좋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보는데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고 있었다.
신세대에서는 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으므로 매사에 소극적인 듯한 구세대의
대신들 태도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광조가 예의와 겸양의 필요성을 논한 이
날의 석강(저녁에 열리는 경연의 강론)에서 은근히 대신들을 비판하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정승 중에 만을 한두 사람만 현명한 이가 있어도 궁녀에게 빠져 나랏일을 그르치는
옛 중국에서의 고사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대신들이 어질더라도 착한 일을 하려는 사
람들에게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중용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애써 중립
을 취하는 대신들도 있지만 그들도 결국 나라에 해를 주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조광조가
말한 요지는 이런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은연중 궁중이며 조정에서의 문제점을 두고 대
신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셈이다.
궁녀 운운한 얘기만 해도 사실은 왕이 한창 사랑을 쏟고 있던 희빈 홍씨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생각된다. 홍씨는 홍경주의 딸로 대궐밖의 간사한 무리들과 연계되어 황에게 참소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또, 조광조를 위시한 자기네들은 왕을
모시고 지치를 실현코자 하는데 왜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느냐 하는 뜻이 나머
지의 말 속에는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립을 지키는 대신들, 그 대표적인 예가
정광필이겠는데 왜 그들이 결국은 나라에 해를 준다고 본 것일까? 조광조는 이때 자신들의
개혁을 저지하려는 반대파를 의식하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네들과 반대파, 이
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대신들은 결국 반대파의 편에 서거나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악한 음모를 막지 못하고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는 뜻을 말 한 것으로 해석된다. 조광조
는 영의정 정광필이나 우의정 신용개등의 중립적인 태도에 불만과 불안을 함께 느끼고 있었
던 것이다.
사실 그는 조정의 돌아가는 양상에서 갈등의 조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잇는
중이다. 자주 발생하는 천재지변의 원인을 두고 군신들간에 여라 가지로 해석을 내리고 있
던 같은해 4월 4일의 조강에서 그는 마침내 조정의 동향에 대한 자신의 전해를 밝힌다. 처
음부터 그가 이 문제에 관해서 말을 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을 꺼내기에 앞서 여
러 관원들, 이를테면 대사헌 김당이며 동지사로 참여하고 있는 남곤, 그리고 영사인 신용개
등이 예의 소인 군자론을 펼친바 있었다. 왕도 이들의 발언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
가 한마디를 하였는데, 자신을 경계하듯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지금 조정에 소인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위(왕 자신을 말함)에서 한번이
라도 도리를 잃게 되면 소인은 반드시 기회를 노리고 나타날 것이다."
신용개가 이 말을 받아 왕에게 소인을 경계해야 할 데 대하여 특별히 당부하는 말을 드리
고 났을 때 나직하나 힘있는 목소리로 조광조는 비로소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히고 나
섰다.
"어떤 일의 옳고그름을 의논하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반목하고
서로 헐뜯어 상하가 멀어지게 되니, 소신은 근래 재변이 자주 생기는 원인을 조정의 불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성조(성스러운 임금이 이끌어가는 조정)에 태어났으므로 이 시
대에 큰 일을 하고 싶은데,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이 비록 보필하여 지치를 성취하고 싶어도
소인배들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면 반드시 비방하며 헐뜯어 군자를 해치게 마련이니,
조정의 화합치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의 말을 한 후 그는 무슨 예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 대신들은 모두가 유자(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 앞날에 어찌 참혹한 사화가 있
겠습니까만은 불행하게도 간사한 무리가 식견이 없는 재상들과 결탁하여, 간사스럽게 전학
에게 아첨해서 술책을 부리면 한 명의 소인이라도 수많은 군자들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소신이 두려워 하는 것은 항상 여기에 있사옵니다.
그는 이미 조정에서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의 지치에 대한 노력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또, 그들을 전래의 소인, 군자에 대한 구별에 입각하여 어느 편으로 규
정하고 있는가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바이다. 너희들은 소인이야, 이렇게 규정했을 것인데,
그것이 태도에 나타나서 상대에게 감촉되면 하지 않던 반대도 하게 되지 않을까?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이 문장을 즐기고 그것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
는 점도 문제 였다. 문장에 능한 사람들은 부화(겉은 화려하나 실이 없음을 이르는 말)하고
경박하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순박하고 덕행이 있으며 도학에 뜻이 있는 사람, 이러한
인물들이라야 정치를 하는 인재로서 적합하다고 조광조는 보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왕도 동
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여기에 편벽됨은 없는 것일까? 영의정 정광필은 대신으로서 누구보다도 이점을 지
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소 비둔한 몸집을 신중하게 가누며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사장(문장)하는 사람이라고 꼭 어찌 부박하겠습니까? 사람을 쓰고 물리침에 있어서는 신
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말이 있었던 때는 그러니까 왕의 재위 12년째이던 4월 24일의 조강에서였는데, 논
의는 과거를 포함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에까지 미친다. 재야에 숨은 선비들을 널리 찾
아서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과거를 기본으로 하는 바탕에서 인격이 뛰어난 소
수의 인물을 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등 갑론을박이 있자 왕도 한마디 하였다.
"과거로 사람을 뽑으면 그 재능은 알 수 있지만, 행실은 알기가 어렵다. 초야(궁벽한 시
골)에 있으면서 고도에 뜻을 두고 과거에 힘쓰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없겠는가, 대신들이
마땅히 힘써 찾아내어 천거해야 할 것이요."
이에 맞추어 시강관으로 경연에 참여하고 있는 김정이 한 말도 그러했지만, 왕의 뜻도 덕
행을 앞세워 인재를 뽑자는 데로 기울고 있었다. 문장을 가지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은 글
재주로 요행 합격하는 폐단을 막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만일 문장이 좀 부족해서 과거에
떨어지는 사람이라도 그 중에는 덕행이 뛰어난 선비도 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참으로 아깝
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합격 여부를 불문하고 학행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주저
하지 말고 천거하라는 것이 왕의 뜻이었다.
이러한 논의가 있게 된 것은 물론 과거에 의존하는 인사 정책의 개혁을 시도하는 조광조
등 신세대들의 주장 탓도 있지만 인재가 부족한 데서 오는 점도 있었다. 이해의 3월에 이조
찬서 남곤은 정언의 자리에 결원이 생겨서 충원을 하고자 하였는데 아무래도 마땅한 인물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왕에게 후보자 3명을 추천해서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도무지 쉽지 않았
던 것이다. 그래서 이조참의로 있는 김안로와 협의 끝에 가까스로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인물을 채워 넣어 왕에게 올릴 수 있었다. 크게 보면 이러한 현상은 연산군의 폭정과도 무
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인재들이 사화의 희생물이 된 결과 인적 자원이 고갈되어 적재
적소에 마땅한 인물을 찾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여러 명목의 과거(식년시, 별시, 알성시)가
실시되어 인력 충원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배출되는 인물들이 과연 유용하냐고 보
면 그렇지도 못한 게 또한 현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처럼 인재를 좀더 널리 찾아서 쓰고
자 하는 논의가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을 사는 우리가 이 시대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느끼지 않을 수
가 없다. 양과 질에서 이미 부족한 인재의 가뭄 현상 속에서 그나마 소인과 군자라는 기준
을 가지고 따지는 등 너무나 엄격한 잣대로 비판을 일삼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인사가 있
게되면 간원은 직책상 그 가부를 논하게 마련인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때가 없다. 아무개
는 성품이 잔약하다. 아무개는 청렴하지 못하다. 또 아무개는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등 갖
가지 이유를 들어 성토하고 비판하니 당사자들로서는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생길 리 없다. 정
당한 비판도 그 중에는 물론 없지 않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기들의 이해관계와 당사자의
과거만을 문제삼음으로써 쓸만한 그의 능력마저 사장시키는 예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의
과거가 어떻고 그가 지닌 일부의 단점이 어떻든 당해 직책에 쓸 만한 반가 있으면 비록 70
퍼센트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100퍼센트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풍토가 아쉽
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단지 그 당시만의 문제일 것 같지는 않다.)
부제학 이자가 이 시기에 한 말은 그래서 적절한 내용으로 들린다. 재능 있는 사람이 부
족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데 있고, 인물을 얻는 데는 그에 맞는
길이 있고 쓰는 데도 요령이 있는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홍문관 소속의 조광조 상관
이자 그와 뜻이 맞아 함께 자주 어울리는 이자이다. 둘은 선산도 같은 용인이어서 그곳에
조광보(조광조의 친척형으로 박경의 쿠테타 미수 사건에 관련되었던 인물)와 그의 아우 조
광좌 등과 네 명이 사은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낚시도 하는 등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
는 사이었다. 그러므로 이자의 말 속에는 인재를 두고 조광조와 교환하던 내용도 있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어느 때나 정치에서 인재를 충원하는 문제는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아직은 과거가
기본이지만 근간의 인재에 관한 논의를 보면 조광조 등의 주장이 점점 힘을 얻어 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왕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확실한 증거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즈음 왕은 홍문관이며 사헌부, 사간원의 신하들을 불시로 불러 면대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것도 조광조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즉위 이래 좀처럼 없던 이 일은 홍문관에서 오랫동
안 건의를 해왔지만 끝내 실현을 못 본 일이었다. 그런데 조광조가 청하자 왕은 의외로 쉽
게 승낙한 것이다.
"이 시대의 큰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뜻은 경연에서 조광조가 왕에게 드린 말이지만 변함없는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자신의 말이 자츰 왕에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은 이러한 목표를 지닌 그에게 더욱 자심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은 것이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다음의 시조
는 그래서 음미해 볼 만하지 않은가?
길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낚시터)로다. (주)문왕은 어디 가고 빈 대만 남았는고 석
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 하더라.
비어 있는 것은 강태공의 조대인데, 찾기는 문왕을 찾고 있으니 웬일일까? 자신을 강태공
으로 생각하고 문왕만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섬기는 현재의 왕,
즉 중종임금이 문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강태공 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문왕
을 만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왕은 강태공을 만나지 않았어도 문왕
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강태공은 문왕을 만나지 못했다면 강태공일 수 없었을 것이다. 주
인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능력 있는 선비라도 제 뜻을 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옛
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서 죽는 선비는 이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가?
어떻든 1517년(중종12년)의 봄을 지나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를 맞아서도 여전히 조광조
는 왕을 모시고 나랏일에 열심이었다.
바) 굳어 가는 신세대의 입지
지치를 목표로 개혁을 해 가려면 조정에서 단단한 입지를 마련해야 한다. 7월에 접어들면
서 조광조와 그이 동료들은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광
조를 중심으로한 김정, 김식, 김구, 기준, 이자, 윤자임, 박훈, 박세희, 한충, 최산두, 양팽손,
안처순 등의 젊은 관료들. 이들은 지위의 고하를 떠나 기회가 있는 대로 술잔을 나누며 이
즈음 자주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 있었다.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의논했고 그러자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도 하였다. 여기서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단연 정계 개편 문제였다. 우선 개혁에 미온적인 삼정승을 교체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
다.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김응기, 우의정 신용개 3인 모두가 자신들에게 적극적인 후원 세
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들 중 누구 한사람이라도 우리들 편에 서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은 한결 같은 그들 모두의 심정이었다. 물론 이들 원로 세 사람이 조광조 등
을 무조건 반대하는 세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전례를 존중하는 그들의 보수적인 태
도가 시원시원하게 일을 추진해 가고 싶은 자신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할까?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 세 사람을 한꺼번에 갈아치울 명분이나 힘이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에게 있을 리도 없는 일. 따라서 내려진 결론은 이들 중 우선 한 사람
이라도 자기들을 적극 밀어 줄 수 있는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의논이 모아
졌다.
누구를 바꾸는 방향으로 해본다? 이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론에 비추어볼
때 결론은 오래갈 이유가 없었다. 좌의정 김응기가 교체 대상으로 점찍힌 것이다. 정광필과
신용개는 각기 중후한 인품과 영특한 자질로 해서 도저히 교체를 요구할 형편이 되지 못했
던 데 비해 김응기는 아무래도 처지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김도 원래 정승이 되기 전에는
모범이 될 만한 인격과 학식을 평가받아 상당한 인망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의정부의 대신이 된 이후로는 특별히 건의하는 일도 없이 무사 안일한 태도만을 지
키고 있어 주위의 불만을 사고 있던 터였다.
조광조 등이 미는 후임은 호조판서 안당.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조광조를 조정에 적극 천
거하고, 박상, 김정의 신비 복위 상소문이 문제되었을 때는 대사헌으로서 그들을 변호했던
인물이다. 이후 안은 자연 조광조 등 신진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었으므로 이제
그를 적극 밀기로 합의가 된 것이다. 발의는 사간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사간원의 성격으
로 보아 발언할 만한 사안이었으므로, 이곳에 근무하는 자신들의 인맥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좌의정 김응기는 조심만 하고 나라를 위하여 건의하며 베푸는 바가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니 차라리 그 자리를 비워 둘망정 계속 그를 직임에 있게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주장에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을
퇴진시키고 안을 후임으로 삼으려는 조광조 등의 주장은 이후 한참 계속된다.
이와 함께 그들은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들과 뜻이 맞는 사람을 애써 왕의 곁에
두고자 하였다. 이때는 아직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수준이 낮은 시절이라 경연에서 경서를
강독하는 데도 미진한 점이 없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 한충도 사가독서(임금이 신진 관료들
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던 제도)를 하면서 성래대전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제대로
해석하지를 못해서 애를 먹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들 사이에서는 성리
학에 밝은 김식을 경연에 참석케 하여 왕에게 깊이 있는 강론을 드리고자 생각하였다. 당시
호조좌랑으로 있던 김식 이상으로 이 방면에 해박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김은 신진드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고 함께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그들로서는 이래저래 그를 경연
에 참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한충이 그를 천거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정도 이를 지원하
고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경연에 참석하는 데 법제상 제한이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를 통하
여 관직에 나온 사람이 아니면 경연에서 강론할 수 없다는 게 이제까지 대체로 지켜져 온
예였다. 그러나 거기에 구애되어 유능한 사람을 쓰지 못한다면 너무 고루한 처사가 아닐까?
당연히 한충과 김정은 이러한 생각이었으므로 왕에게 전례에 얽매이지 말고 김식에게 경연
의 강론을 맡기도록 진언을 드렸다. 그러나 대신으로서 보수적 입장을 줄곧 지키고 있는 정
광필은 이번에도 제동을 걸고 나섰다.
"말은 좋습니다. 훌륭한 인물이 있다면 반드시 법제에 구애되지 말고 경연에 참여토록 해
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지난날부터 지켜 내려온 법제를 그렇게 쉽사리 고쳐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느릿하면서도 확고한 의지가 담긴 음성으로 이렇게 아뢰는 그의 의중에는 너무 드세게 나
오는 신진들의 개혁 자세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다. 옆에 있던 기준까지 합세
하여 김식의 경연 참석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왕도 이들의 뜻을 받아들일 것 같은 눈치였으
나 정광필의 태도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한창 조광조 등의 신진들에게 기울고 있는 왕이었
으나 영의정의 견해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만다.
이보다 전에는 이러한 일도 있었다. 이해의 7월에 왕은 사망한 장경왕후의 뒤를 잇는 새
왕비(문정왕후)를 맞아들였는데, 이해는 지독한 흉년이었고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가 그중에
서도 아주 심한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왕의 재혼 사실을 관례상 중국 명나라에 알려야 하
는데, 이것이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명나라에서는 재혼의 승
인과 그것을 축하하는 외교사절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 이럴 경우 그들은 황해, 평안의 두
도를 지나는데, 이때 도로 보수와 접대의 지원에 따른 백성들의 노고는 적지 않게 된다. 흉
년의 고통으로 한숨만 쉬고 있는 도민들에게 이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왕의 재혼 사실을 명나라에 당장 알릴 것이냐, 아니면 미루었다가 다음 기회에 할
것이냐 하는 방향에서 조정 논의는 시끄럽게 되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들이나 남
곤 등의 일부 대신들은 전자를 주장하는 반면, 정광필과 신용개 등 원로급의 대신들은 백성
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후자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떳떳한 도리로 하자면 물론 전자의 입장
을 취해야 하리라. 만일 명나라에 재혼을 알리는 주청사를 내년으로 미루었다가 그때 가서
도 흉년이 든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내년이라고 흉년이 안 든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해서 부제학 이자, 전한 김정, 정자 안처순 등 신진들은 조광조 등과 합의된 바에 따라
정, 신 등 원로 대신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천영(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최종 의식, 여기서는 왕의 최종적인 결혼 예식 말함)의
예를 거행한 것은 금년인데, 주청은 내녀에 한다면 그때 가서는 무어라고 주청을 해야 하겠
습니까?"
모든 일은 어럽더라도 떳떳한 도리를 따라 해야 한다는 뜻에서 김정이 이러한 말을 하자
두 대신은 불쾌한 낯빛으로 말을 받았다.
"일의 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부득이해서 나온 계책이야. 일의 사리를 젊은이들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원 참."
결론은 조광조등의 주장을 왕이 채택함으로써 끝이 났지만, 대신들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사) 갈등의 사연들
직제학(정3품관직)의 지위에 있는 홍언필이 모친상 때문에 관직을 내놓아 후임자를 고르
게 되었다. 이조판서 남곤은 검토 끝에 성세창, 문근, 이성동의 세 사람을 후보로 하여 왕에
게 재가를 올렸다. 현재 전한의 지위에 있는 김정도 여론이나 능력으로 볼 때 자격은 충분
히 있었으나 아직 승진할 자격(연한 등 규정상의 요건)이 구비되지 않았으므로 그를 뺀 채
이들 세 사람만으로 올린 것이다. 이조좌랑 박세희가 인물을 우선으로 해야 하므로 김정도
올리자고 주장하였나 남곤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세희 등 다른 사람들이 자꾸 강
경하게 주장하자 그는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말을 하지만 내 뜻대로 하겠소, 내 뜻에 맞으면 마땅히 하고 안
그러면 따를 수 없는 것이야. 내 뜻과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앞으로 큰 죄를 받게 될 수도
있고, 비록 그렇게 되지는 않더라도 나랏일이 그릇될 수도 있소."
자신은 공명정대하게 어디까지나 소신대로 하는 것이니 기관장인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
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결재권자인 왕은 전후 사정을 들은 뒤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후보로
올라 있지도 않던 김정을 부제학으로 임명한 것이다. 직제학과 급은 같더라도 서열이 위인
부제학으로 발령을 냈으니 왕의 뜻은 명확해진 셈이다. 규정상의 조건보다 능력을 중요시하
겠다는 뜻이고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 신진들을 전폭적으로 신임한다는 표시가 아니
고 무언가.
눈치 빠른 남곤이 왕의 이러한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튿날 조광조의 승진과 관련해서
는 완전한 백팔십도 다른 태도로 나오고 있다.
"조광조는 과거 유생으로 천거를 받을 만큼 뛰어난 학행이 있고 많은 신진들의 추종을 받
고 있으니 자격을 따질 것 없이 마땅한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곤의 말이 이렇게 나오자 왕도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고 나왔다.
"조광조의 인물 됨은 과연 아뢴 바와 같다. 자격에 구애되지 말고 임용하는 것이 좋겠지."
이 결과 조광조에게 새로이 주어진 관직은 응교(정4품관직). 조광조의 현직인 부교리에서
응교의 사이에는 교리(정5품관직)와 부응교(종4품관직)가 있으므로 무려 2품을 건너 뛴 것
이 된다. 여기에다 경연의 시강관(정4품관직으로 홍문관의 직제학, 전한, 응교, 부응교가 겸
직함)과 춘추관의 편수관(종4품관직), 그리고 승문원의 교감(종4품관직)도 겸직하게 된 상태
이다. 이 당시 왕은 정치를 잘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인재로 생각되면 파격적인 승진을 드물
지 않게 단행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이것이 예외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특
별한 우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조광조는 황송하여 여러 번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한사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남곤의 이러한 처사를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김정에게는
그토록 규정을 들먹이며 까다롭게 굴던 남곤이 조광조에게는 정반대로 일을 하였으니 누가
보더라도 공평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남곤과 김정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하여 온다. 김정이 아직 관직
을 가지기 전의 일이다. 어느 아는 사람의 집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한 상태에서 마
침 그곳에 들른 남곤과 마주치게 되었다. 술에 취한 김정이 재대로 예의를 차리지 않자 오
히려 15년이나 연장인 남곤 쪽에서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였다.
"커다란 이름을 듣고 마치 책 속에 있는 인물로만 생각했는데, 다행히 오늘 이렇게 만나
뵐 수 있게 되었군요. 곤(남곤 자신을 말함)이 이번에 망천도 장자(망천은 당나라 시인)를
새로 얻었기에 아름다운 글을 얻었으면 합니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보 환경의 변화와 사서직의 역할 (0) | 2023.04.17 |
|---|---|
| 정암 조광조 01 (0) | 2023.04.17 |
| 정암 조광조 03 (0) | 2023.04.17 |
| 정암 조광조 04 (0) | 2023.04.17 |
| 정체성의 미시정치학을 위하여 (0) | 2023.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