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아트의 미학
(브로스 노만)
1. 서론
흔히 '영상시대'로 이야기되는 오늘날, 캔버스와 물감 대신 모니터와 카메라, 스크린으로 구성되는 소위 '비디오아트'는 더 이상 주변적인 장르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주요한 표현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비디오아트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늘어나는 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가 깊어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구에서도 비디오아트는 "미술사적 승인에 요구되는 특질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독립된 비평체계를 갖지 못한"(주1) 미술로 평가된다. 미술사에 편입시키기거나 이론의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의 평가기준을 적용시키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비디오아트가 생겨난지 불과 30여년, 미술세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역사가 더 짧다. 그러나 그 미학을 기술하기가 어려운 것은 단지 역사가 짧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비디오아트가 그 전신격인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보다 현대의 기술문화에 더욱 가까이 밀착되어 있고 따라서 그 어느 장르보다도 '물질적' 기반에 의해 그 성격이 결정된다는 점 역시 그 어려움에 일조를 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가 낳은 컴퓨터 프로세싱 기법, 레이저 디스크의 보급, 인터엑티브적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전자공학적 기술 등 날로 세련되어가는 오늘날의 기술환경은 비디오아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테크놀로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 쉽게 만든다. 실제로 초창기 비디오아트의 감상자들은 작품이 '못보던 신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우선 흥미를 느꼈다. 이런 점은 창작자들이나 비평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시대,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오고 있다'하는 것이 비디오아트의 상투적인 소개방식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비디오아트를 기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단순한 시각은 많이 극복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비디오아트가 독자적인 미학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차원에서 그러한가, 또한 비디오아트에서 우리가 무엇을 감상하고 분석하고 비평할 것인가 하는 점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 비디오아트에서 테크놀로지가 문제시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새로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현대의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현대의 인간과 기술의 상호관계는 무엇이며 비디오아트에서 그것은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이며, 그러한 부분은 단지 기술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차원을 떠난다고 했을 때에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비디오아트는 단지 내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했을 때는 무의미한 작품이 많을 뿐 아니라, 테크닉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비디오아트는 영화처럼 어떤 고유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내러티브를 뚜렷하게 갖는 것도 아니다. 또 조형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비디오아트의 양태는 갤러리라는 울타리에 묶이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의 기록매체로서의 비디오, 모니터를 조형적 요소의 일부로 도입한 비디오 조각, 환경적이고 건축적인 요소를 도입한 비디오 환경-설치, 텔레비전이나 케이블에 방영될 목적으로 만든 대안매체로서의 정치적인 비디오테이프 등등...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비디오'라는 공통점을 가지며 비디오아트라는 이름 하에 묶인다. "'비디오아트'라는 용어는 비디오그라피적인 작품에만 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나왔지만, 실제에 있어서 이 말은 더 복잡한 영역을 포함한다. 오늘날 이 용어는 예술적 생산의 맥락에서 비디오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경우를 망라한다."
요컨대 비디오아트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잡종의 예술이며 통일된 기법적, 장르적 특성을 갖지 않은 예술이다. 따라서 비디오아트의 '단일한' 미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예술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미학적 원리를 정립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또 필수적인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비디오아트를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나 내러티브적인 차원 혹은 조형적인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차원을 한꺼번에 고려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 이 글은 혼합적인 접근방법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비디오아트에 차용된 다양한 기법들은 하나 하나가 독립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전혀 다른 효과를 내기 위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일된 미학을 정립하거나 절충적인 접근방식을 대입하는 것이 어렵다면, 다양한 비디오아트 작품들의 공통점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 이 글은 내적 원리를 종합하는 데서 눈을 돌려 비디오아트가 탄생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이 글은, 비디오아트는 어떤 전환이 일어난 시점에서 생겨났으며 그 전환을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비디오아트는 0세기 후반, 캠코더라는 저가의 촬영장비의 탄생과 새로운 텔레비전 문화의 영향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 기술적, 문화적 변화의 근저에는 깔린 더 중요한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일종의 존재론적 변화이다. 비디오아트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다. 비디오아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기술적 세련이나 조형적 혁신이 아니라 철학성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철학성이며 이 근거역사적 배경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또한 비디오아트가 철학성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다고 할 때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매체'라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다시말해 물질성과 철학성을 매개하는 요소가 '매체'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매체는 수동적인 도구로 이해되는 전통적인 매체 개념이 아니라 마샬 맥루한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매체 개념이다.
이 글은 첫부분에서 주로 맥루한의 매체 개념을 통해서 현대의 철학적 예술로서의 비디오아트가 어떤 존재론적 전환을 가져왔는가, 그 내용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음, 구체적인 작품을 몇 가지 예로 들면서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특성과 그 함의를 좀더 자세히 논의해보겠다.
빌 비올라(Bill Viola), 교차(the Crossing), 1996
2. 본론
2-1 '매체'의 새로운 개념과 탈주체성의 경험
오늘날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양식이나 장르라는 말보다 '매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런데 이때 매체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매체라는 말은 보통 작품을 구성하는 물질적이고 객관적인요소, 다시말해 하드웨어적인 요소를 지칭한다. 그러나 맥루한과 같은 이론가는 이러한 객관주의적 해석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말은 객관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 말은 모더니즘 미학의 전형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매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미학과 맥루한의 시각은 다르다. 맥루한의 이 말은 현대문화의 일반적 성격을 이론화하는 명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것은 오늘날에야, 맥루한의 용어로는 '전자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밖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즉 맥루한은 이 말로써 과거와 오늘날 사이에 일어난 어떤 단절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말의 우선적인 의미는,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그 매체의 성격과 분리될수 없다는 것이다. 보통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쓰이는 매체라는 개념은 메시지를 담는 중립적인 도구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메시지는 정보를 전달하는 주체에 속한 것으로, 매체는 정보를 담는 그릇으로서 객체에 속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맥루한은 매체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그 매체에 담기는 메시지를 결정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매체가 능동적인 힘이라는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맥루한에 따르면 매체라는 말은 인간의 감각기관의 확장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예컨대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고,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며, 전자정보망은 신경기관의 확장이다. "이것(매체는 메시지다라는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것은 모든 매체가 우리 자신의 확장이며, 이 매체의 개인적 및 사회적 영향은 우리 하나하나의 확장, 바꾸어 말한다면 새로운 테크놀로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도입되는 새로운 척도로서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주3)
매체가 우리 감각기관의 확장이라는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매체는 더 이상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결과물로 간주될 수 없다. 매체의 변화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변화를 야기하게 되고, 변화된 감각은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매체는 결국 인간의 개념 그 자체를 새롭게 정의내리는 능동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매체는 주체 대 객체라는 이분법의 한 극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융합'되는 심리적-물리적 과정 내지 일종의 '장'(field)에 가까운 개념이 된다. 비디오아트의 초기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비디오아트의 특징은 인간의 심리가 하나의 매체로 사용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도 맥루한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확대된 매체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맥루한이나 크라우스에게 있어서 매체는 인간 앞에 놓인 객관적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과 결합되어 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맥루한은 매체의 발달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다.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로 대표되는 '기계시대'는 추상적 사고와 언어의 시대이며 개인주의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직선적,중앙집중적, 객관적, 전문적, 분석적, 문화를 갖는다. 반면 오늘날의 사회를 지칭하는 '전자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통신망과 텔레비전이다.
전자시대는 순환적, 분산적, 총체적, 비전문적, 종합적, 다중감각적 문화를 갖는다. '매체는 메시지이다"라
는 말은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맥루한에 따르면 전자시대 이전에 이런 사실은 은폐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확장'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았을 때 테크놀로지는 고립적으로 발전했고 그 방향은 중심에서 방사상으로 뻗어가는 것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자시대 이전의 시대, 즉 기계시대는 '외부폭발(explosion)'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폭발이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 이것이 '내부폭발(implosion)'의 시대인 전자시대이다. 전자시대에 이르러 테크놀로지는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상호연관성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내부폭발의 시대는 반대방향의 힘이 역작용하는 시대이므로 상호간섭이 주요한 힘이 된다. 예를 들어 개개인을 더욱 더 고립시키는 것으로 보였던 컴퓨터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오히려 전세계를 동시에 하나로 묶어주게 되었다. 전자시대에는 전체적 영향을 한 분야의 발전보다 더 중요시하는 시대이므로 내용보다는 전체적 효과를 더 보게 된다. 따라서 매체와 매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시대가 시각을 특권화하고 정신을 육체와 분리시켰다면, 매체와 매체의 관계 혹은 전체적 상호작용이 중요시되는
전자시대는 감각의 다중적 사용과 신체의 재등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의 감각이나 신체는 더 이상
기계시대의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물질의 발달에 의해 시대의 단절 내지 변화가 일어났다는 맥루한의 관점은 유물론적인 색채를 띠고
있고 기술결정론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외에도 맥루한의 이론은 검증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의 미학을 철학적 전환 내지 단절이라는 관점을 통해 정립 하는 데 있어서 그의 이론은 일정 부분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예술이 문제가 될 경우 철학 적 전환에 대한 논의라는 것은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물질화되어 있는가를 말하지 않고 서는 공허해지기 쉽다. 맥루한은 '매체' 개념을 통해서 철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물질화의 동인 내지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 한다.
비디오아트의 시대에 살지 않았던 맥루한은 전자시대의 전형적인 매체로 텔레비전을 들고 있지만, 총체적, 종합적, 분산적, 참여적이라는 특성에 있어서 비디오아트는 텔레비전보다 더욱 전자시대의 정의 에 더 잘 들어맞는 매체이다. 비디오아트를 비롯한 전자시대의 문화적 산물들이 관객에게 주는 경험은 분명 모더니즘적 작품의 경험과는 다르다. 그러나 매체에 대한 객관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한 이 새로 운 경험의 성격은 규정내리기 힘들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비디오아트는 "주체와 객체를 똑같이 지배하고 탈인격화시키면서 전자를 후자에 대한, 그리고 비디오 이미지 혹은 '총체적 흐름'에 대한 기계 적 시간을 기록하는 의사물질적 기구로 변화"(주4)시킨다. 통일된 주체성과 단일한 자아의 감각을 더 이 상 유지할 수 없는 비디오아트의 감상경험은 이미 매체가 주체에 대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주체의 신체와 의식 속으로 침투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말은 이미 오늘날 주체성이나 인간성 혹은 신체라는 개념 자체가 매체에 의해 변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비디오아트와 같은 전자시대의 장르 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는 융합되는 경향을 띤다. 전자시대의 매체는 "인간을 기계화하고 기 계를 인간화"한다. 우리는 기계 앞에 주체로서 선 인간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가 융합된 심리-물질적 장 안에 서 있는 유사-기계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맥루한 이론이 궁극적으로 내포하는 결론이자 우리가 의미있게 받아들여야 할 주장이다.
비디오가 주는 탈주체성의 경험은 "모든 매체는 인간의 확장"이자 동시에 "축소"라는 역설적인 맥루 한의 말 속에서도 이해해볼 수 있다. 맥루한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인간의 감각이 점차 확장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감각을 축소시켜온 과정이기도 했다. 맥루한은 발전이 어떤 한계 점에 달하면 그 반대방향으로의 변화가 역사를 통해 항상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전자시대가 바로 그 러한 역전의 시대라고 말한다. 속도와 거리, 양 등 모든 것을 밖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기 계시대의 문화(예를 들어 교통수단의 발명과 발달에 따른 이동속도의 증가, 지식의 양적인 축적을 교육 의 일차 목표로 삼았던 것 등)는 인간의 감각을 점점 더 외부로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에 따른 자극과 긴장도 역시 높여놓았다. 이 긴장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인간은 일종의 감각마비를 일으켜 긴 장을 없애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인간 의 두뇌는 일정 정도의 기억용량만을 갖고 있다. 만약 망각이라는 작용이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 다면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심한 충격을 받으면 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원리이다. 맥루한은 매체에 관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이런 현상을 '감각의 마비' '사지 절단' 또는 '지각의 폐쇄'라고 부른다. 전자시대는 테크놀로지의 자극에 의해 인간의 감각이 극도로 '축 소'된 시대이다. 전자시대의 매체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감각을 축소하고 그 감각에 대한 통제력 을 스스로 "기계"(인간의 분신인)에 넘겨줌으로써 더욱 더 테크놀로지와 융합되며 기계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당한다. 전자시대의 전형적 매체인 비디오아트 앞에서 서는 인간은 기계 앞에 선 관조자 로서의 선험적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험, 즉 단일한 자아의 감각을 해체시키는 탈주체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맥루한에 따르면,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확장"이라거나 "매체는 메시지"라는 사실은 어느 시대에나 적 용될 수 있지만, 물질문화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선 전자시대 이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이 은폐되어 있 었다. 전자시대의 매체가 달성한 중요한 일은 이러한 인식을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런 관점을 받 아들인다면, 비디오아트가 철학성을 그 근거로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앞에서도 주장했듯이, 비디오아트는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다준 예술이며, 그 전환을 기록하는 것을 임 그렇다면 비디오아트에서 새로운 개념의 '매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러한 탈주체성의 경험을 발생 시키는가 ?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특성은 전자시대의 다른 매체들과 어떻게 구별되며 어떤 방식으로 작 동하는가 ? 다음 장에서는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요소들을 몇 가지 추출하여 이를 논의해보겠다.
2-2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요소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장에서는 탈주체성의 경험을 발생시키는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요소들을 신체, 시 간, 공간, 언어/음향으로 세분화시켜서 논해보겠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요소들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비디오아트의 공통적 원리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효과들은 비디오아트의 다양한 매체 적 가능성 중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2-2-1 신체
퍼포먼스에 한 기원을 두고 있는 비디오아트는 신체의 문제를 처음부터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로 다루 어왔다. 초기의 많은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스스로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으며 이점은 최근의 비디 오 아티스트들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비디오아트에서 신체는 작가의 신체로, 때로는 관객의 신체로, 또 한 작가의 신체와 관객의 신체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체화된다.
비디오아트는 시각만을 특권화하고 다른 감각과 분리시키는 모더니즘적 미술과는 달리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요구한다. 서구에서 오랫동안 '눈'은 인식에 연결되는 우월한 감각으로, 그밖의 감각은 저급 한 '육체적' 감각으로 간주되어왔다. 모든 감각이 다시 합쳐지는 전자시대에 신체가 다시 주요한 매체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때의 신체는 인간의 주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자율 적인 신체가 아니다.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을 무의식과 기표의 개념으로 전복시키고자 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거울 단계' 이론을 통해서 선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자아의 단일성이 사실 항상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구축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주5)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비디오아트의 탈모더니즘적 성격을 이 거울단계 이론으로 설명하면서 비디오를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적 매체라고 정의내린다. 크라우스가 이야기한 나 르시시즘의 특성은 주체와 객체의 융합이라는 측면이지만 사실 거울단계 이론은 이 융합의 행복감이 일 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라캉은 '나(자아)'는 항상 '나 외부에 있는 나 아닌 것(거울상, 타자)'을 통 해서만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소외를 각인시킨다고 말한다.
이 융합과 소외의 경험은 항상 신체라는 매개(체)에 의해 중개되는데, 비디오아트, 특히 비토 아콘치 나 댄 그래험, 피터 캠퍼스 등으로 대표되는 초기 비디오아트 시대에 관객 혹은 작가 자신의 신체는 종 종 이 거울단계 속의 신체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비디오아트 특유의 직접성(immediacy), 즉 폐쇄회 로 설치나 생방송용 카메라의 피드백 구조 등이 만들어내는, '지금 여기, 현재'의 성격은 공간 속에 현존 하는 신체를 작품의 주요 구성요소로 삼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비디오아트 속에서 신체는 하나의 거울 앞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종 멀티채널 모니터나 거울과 모니터의 무한한 반영작용 속에서 분산되 어 라캉적인 분열된 자아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자아의 분열을 발생시키는 매체로서의 신체는, 일종의 텅 빈 신체, 일종의 '장소'로서의 신체가 된다. 신체는 비디오아트의 물질성을 규정하는 한 요소로 환원 된다.
비토 아콘치는 신체를 물리적, 심리적인 자아 탐구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초기 비디오아트의 대표 적 작가이다. 70년대 작품들에서 그는 종종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실시간(real time)으로 촬영된 자신의 신체를 모니터로 보여주며 그 모니터 앞에서 거울 앞에 선 라캉의 어린아이처럼 자기에게로 되튕겨져오 는 독백을 중얼거린다. 예를 들어 그의 <방송시간(Airtime)>(1973)은 더 큰 퍼포먼스적 장치의 일부분 으로 제작된 비디오테이프인데, 모니터에는 아콘치가 거울을 보고 40분 동안이나 혼자 퍼포먼스를 벌이 는 장면이 방영된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에 대고 중얼중얼 독백을 늘어놓고, 마이크를 대고 말하 기도 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나'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울 속의 신체와 마주한 작가의 신체 그리고 인칭대명사의 혼란스러운 전환은 나르시 시즘적 융합과 소외의 이중적 경험을 글자 그대로 보여준다.
댄 그래험의 <시차를 두고 작동하는 마주보는 거울과 비디오 모니터(Opposing Mirrors and Video Monitors on Time Delay)>(1974)는 관객의 신체를 이러한 이중적 경험을 위한 매체로 사용한 작품이 다. 이 작품에서 거울상의 경험은 카메라, 거울, 모니터라는 3중의 장치를 통해 극대화된다. <시차를 두 고...>는 장방형의 방 양쪽 벽에 설치된 전면거울과 두 대의 카메라, 두 대의 비디오 모니터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이 거울과 카메라 사이에 서서 카메라를 향하면 그는 모니터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거울에 비친 모습, 그 거울상을 다시한번 촬영하는 카메라에 의해 보여지는 반대편 모니터 속의 모습 등 겹쳐 지는 영상의 현란한 중첩을 경험하게 된다. 거울의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는 듯 펼쳐지고 그 소실점을 향해 무수히 중첩되는 반사상의 유희 속에서 관객의 지각경험은 분열되며 관객의 신체는 단일한 감각으 로 인식되기를 그친다.
2-2-2 시간
시간은 과거의 미술과 비디오아트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요소는 사 실 미술과 늘 함께 했었다. 예를 들어 중세예술이나 원시예술에서 설명적인 시간의 요소는 종종 등장한 다. 단지 망막에 작품이 포착될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현존성'이 강조되는 모더니즘 시대, 즉 기계시 대의 미학이 미술에 있어서 시간의 경험을 부인했을 뿐이다. 맥루한의 용어로 말하면 '재부족화'가 일어 나는 전자시대에, 시간의 경험은 다시 중요시된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의 시간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 는 시간경험과는 다르다. 비디오아트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고 순 환적인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 개념을 가능하게 한 것은 현대의 물질문화이다. 비디오아트의 시간은 피 드백이나 반복시청 등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항상 현제시제의 특성을 획득하며, 이 즉시성(instantaneity) 은 시간의 경험과 공간의 경험을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라는 비디오아트 의 시간은 항상 공간 속의 현존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디오아트의 시간은 동시성(simultaneity)이 라는 특성을 갖는다. 한 카메라가 촬영한 이미지를 여러 개의 모니터로, 혹은 여러 대의 카메라가 촬영 한 이미지를 한 모니터에 전송할 수 있는 비디오의 기술적 특성은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이라는 사고방 식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주관에 특권을 부여했던 기계시대의 철학자 칸트는 시간이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지 각의 형식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형식은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고 일종의 선험적 조건과 같은 것 이다. 따라서 시간 그 자체는 중요하게 부각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와 같은 전자시대의 매체 에서 시간은 더 이상 중립적이거나 균일한 형식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다. 감상경험을 결정하는 능동적 인 요소로 작용하는 시간은 이제 그 속에 담기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비디오아트에서 시간에 대한 통제력 내지 주도권은 더 이상 인간의 편에 있지 않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대로 비디오 아트의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시간'이다. 즉 비디오아트의 시간이 갖는 기계적 속성은 관객에게 탈주체성의 경험과 유사-기계적 존재로의 변형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빌 비올라는 이 시간이라는 요소를 세련된 하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뒷받침되는 작품 속에 시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가 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연작 <매장된 비밀(Burried Secret)> 중의 하나인 <만남(the Greeting)>(1995)을 보자. 비디오 프로젝션을 이용한 이 작품은 미술사 의 고전적 도상에서 인용해 온 것으로, 세 여자의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중년의 여자와 좀 더 나이 든 다른 여자가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젊은 여자 한 명이 다가온다. 임신한 듯한 이 오렌지 색 옷의 여자는 중년여자를 무시하고 나이든 여자에게 다가가 뺨에 키스를 한 뒤 귀에다 대고 "저를 도 와주실 수 있어요? 지금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라고 속삭인다. 이 만남의 장면에 소요되는 실제 시간은 총 45초이지만 비올라는 이를 10분간에 걸쳐 극도로 느린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준다. 이 여자들 의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는 해석을 일체 부여해주지 않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 만남의 수수 께끼같은 성격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름아닌 '시간'이다. 30배로 확대된 이 극도로 느린 속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현미경적인 미시적 시간의 세계를 체험케한다. 여기서 시간은 우리가 통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관객의 인식능력을 방해하고 관객을 이 '기계적 시간'에 통합된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2-2-3 공간
비디오아트는 원래 전시장 안의 오브제라는 미술 개념에서 탈피해 미술을 공공의 공간으로 확장시키 고자 했던 대지미술이나 설치작업과 유사한 맥락에서 미술계에 도입되었다. 이미지가 인간의 신체를 둘 러싸는 하나의 '장소' 내지 '환경'이 되는 비디오 설치작업에서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작 품을 지배하고 관객의 신체와 정신에 작용하는 적극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에서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고정되고 단일한 실체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게 변
화하는, 가변적이고 불연속적인 '과정'으로 경험된다. 또한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디오아트에서 시간과 공
간은 서로 분리된 요소들이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일종의 다중감각적인 체험의 장을 형성한다.
70년대 초창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주로 작은 모니터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퍼포먼스와 종종
결합된 모니터 작업들은 공간 속에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비디오 이미지 그 자체의 힘에 의해 공간의 경험을 창조하는 방법은 비디오 프로젝션의 일반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모니터는 크기가 작고 텔레비전과 외관이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초기 작가들은 종종 모니터를 여러 대 겹쳐놓거나 해 서 멀티모니터의 '더미'를 만들었다. 그러나 레이저디스크가 보급되면서 프로젝터로 확대해도 선명한 영 상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이미지 자체의 크기를 통해 이미지를 공간화하는 작업은 80, 90년대에 와서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멀티모니터가 건축적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조각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비 디오 프로젝션은 확실히 거대한 공간의 느낌을 줄 수 있다. 프로젝터를 통한 공간의 극대화는 인간을 압도하는 신체를 그 공간 속의 한 장소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관객의 관조적 거리 를 소멸시키고 단일한 자아의 감각을 해체한다. 또한 비디오아트는 하나 이상의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공간을 분열시키거나 같은 장소에 여러 이미지들을 동시에 투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분열되고 파편화된 공간은 시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시간'에 대한 경험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어 부르스 노먼의 <인류학/사회학(Anthropo/Socio)>(1991)은 벽을 둘러쌀 정도로 거대한 영상 들을 통해 이미지의 공간화라는 비디오아트의 특성을 극대화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노먼은 3대의 프로 젝터와 6개의 모니터를 이용해 삭발한 남자의 얼굴모습을 방의 이곳저곳에 클로즈업으로 투사시킨다. 이 단순하면서도 공격적인 포즈의 영상들은 "밥 좀 주세요, 잡아먹어주세요, 인류학...살려주세요, 때려주 세요, 사회학..."이라는 외침을 위협적으로 반복하면서 이미지를 '본다'라고 하는 전통적인 경험을 붕괴시 킨다.
메리 루시에는 <기울어진 집(Oblique House)>(1993)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시간적 예술과 설치라는 공 간적 요소를 결합시킨다. 이 작품은 네 대의 모니터와 두 대의 프로젝터, 다섯 개의 레이저디스크 비디 오 채널, 그리고 오디오로 구성되어 있다. 루시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그 중 네 명을 택하고 이 '방' 모양의 조형적 구성물의 네 귀퉁이에 설치한 모니터를 통해 이들이 지진의 충격 과 그 치유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방영한다. 기억, 생존, 소멸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유 사-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은 모니터 위에 위압적으로 투사되는 거대한 바위더미의 영상과 이 '집'의 구 조가 갖는 깔끔한 조형적 성격으로 인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형된다. 이 상반되는 요소의 충돌과 돌연 한 변형 앞에서 관객은 또한번 의식의 분열을 체험하게 된다.
2-2-4 언어/음향
비디오아트에서 언어 혹은 음향, 넓게 말해서 청각적 요소는 시각적 요소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청각 적 요소는 독백일 수도 있고 해설풍의 나레이션일 수도 있고 소음에 가까운 단순한 음향일 수도 있으며 동물의 소리나 시 낭송 등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다. 화면을 해설해주거나 화면 속의 시공간 속에 서 나오는 영화의 음성과는 달리 비디오아트에 등장하는 음성은 영상과 합치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이 때 이미지와 음향의 불일치는 비디오아트의 경험에 또 다른 차원을 도입해준다.
예를 들어 비토 아콘치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독백을 즐겨 도입하는데, 그가 내뱉는 말은 기계적인 반복, 목쉰 속삭임, 날카롭게 끊어지는 소리 등 다양한 형태로 언어를 파편화시킨다. 이 목소리들은 내 용을 전달하거나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발화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오히려 주체 가 아니라 언어의 파편성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동적인 통로가 되며 과거에는 객체 혹은 수단에 불과했 던(그렇다고 믿었던) 언어는 인간의 정신을 규정하는 능동적 힘을 갖는다.
보통 문자로 표현된 '언어'가 신체를 갖지 않은 정신적 요소로 이해되는 반면, 비디오아트에서 언어적 요소는 신체에 각인된 것이 된다. 즉 비디오아트에서 언어는 투명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불투명한 물질성을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목소리들은 신체와 분 리된 건조한 목소리가 아니라 롤랑 바르트적 의미에서의 '목소리의 결(grain)' 혹은 라캉적 의미에서의 '실재계의 언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이 목소리의 결 혹은 실재계의 언어는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것 은 다만 언어의 물질성이 느껴질 때, 언어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이 느껴질 때 들리는 '마찰'로 나타날 뿐이다...그것은 의미에 대한 저항 혹은 의미의 실패를 기록한다."(주6)
게리 힐은 발화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게리 힐 의 <영화와 힘겨운 장소 사이에서(Between Cinema and Hard Place)>(1991)는 다양한 크기의 모니터 23개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다. 세 군데에서 나오는 이미지와 음향들이 컴퓨터의 도움으로 32개의 출 력장치에 하나의 영상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언어의 본질>에서 발췌한 구절을 낭독하는 음성이 들린다. 이 작품에서 발화행위와 이미지 전송과정은 일종의 유비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언어라 는 매체는 이 작품 속에서 비디오의 기계적 송신과정을 인간의 사고를 전달하는 일종의 정신적 통로로 변형시킨다. "힐의 비디오작품은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에 관한 것이자 새로운 글쓰기 그 자체이다." 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새로운 글쓰기'는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에 각인되는 언어, '물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글쓰기이다.
<다이얼 히스토리(Dial H-I-S-T-O-R-Y)>(1995-97)에서 조안 그리몬프레즈는 전세계 하이재킹의 연 대기를 유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다. 르포르타주 장면과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이미지들을 뒤섞 는 이 작품은 돈 드릴로의 두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허구적 내러티브를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다시한번 파편화시키고 현실성이라는 낱말을 허구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전복시킨다.
3. 결론
이상과 같이 정리해본 것처럼, 현대문화의 물질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새로운 예술인 비디오아트는 그 혼성적인 기원과 잡종적인 방법론으로 인해 하나의 단일한 미학적 원리를 정립하기 어려운 장르이다.
비디오아트라는 장르는 조형적, 기술적 공통성과 같은 내적 원리를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주체 성과 매체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철학적 전환을 기록하는 것을 그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다, 마 샬 맥루한의 이론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비디오아트는 '전자시대'의 전형적인 매체로서 과거와는 다 른 기능을 한다. 그것은 바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객관주의적 사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전복 시키고 그 전복을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기능이다. 매체는 수동적인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 재를 규정하고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힘을 갖는다. 인간의 감각의 비율을 조절하고 감각의 방향을 지시 하는 비디오 매체 앞에 선 인간은 더 이상 관조하는 자아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유사-기계적 존재이다.
오늘날 비디오아트는 유사-기계적 존재로서의 이러한 인간의 존재상황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는 철학 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이 철학성은 과거의 미술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우선 철 학성은 이 예술장르의 여러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공통 근거이다. 또한 이 철학성은 모더니 즘 미술에서와 같이 '시각의 우위'에 의해 유지되는 인식의 철학성이 아니며 예술을 개념으로 환원시키 고자 하는 시도에 의해 규정되는 철학성도 아니다. 비디오아트의 철학성은 항상 물질적 기반을 가지며 그 기반은 신체, 시간, 공간, 그리고 언어(음향)이라는 매체적 요소들로 구체화해볼 수 있다. 비디오아트 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 중의 일부인 이러한 매체적 요소들은 현대 테크놀로지의 힘에 의해 작품 속에 고전적인 미학적 원리를 붕괴시키는 차원을 도입한다. 비디오아트에서 신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주 체적 신체가 아니라 일종의 텅 빈 '장소' 역할을 하며 파편적, 분열적으로 경험되는 시간과 공간은 단일 한 자아의 감각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 언어는 사고의 전달체가 아니라 신체에 각인된 불투명한 '장 애물'로 기능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 것도 없이, 오늘날은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 요건에 의해 결정 되는 시대이며 비디오아트는 그런 문화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비디오아트를 감상하 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물질적 성격은 단순한 비판이나 옹호의 대상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철학 적 예술로서의 비디오아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물질적/정신적, 주체/객체라는 대립구도 자체가 이미 무너져버렸으며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휴머니즘 역시 예술과 문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인간성이라는 말 자체가 오늘날에는 이미 물질에 의해 규정받는 것으로 변 했기 때문이다. 비디오아트의 감상과 해석 혹은 비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매체에 대한 객관주의적 사 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전자시대의 문화가 과거의 인간관을 어떤 식으로 붕괴시켰는가, 그 붕괴와 새 로운 전환의 인식이 어떻게 작품 속에 '물질적으로' 각인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새로운 테크놀 로지를 단지 기계적으로 반복하기만 하는 작품과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작품 의 구별은 오늘날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전반적인 인식없이는 행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맥루한의 말대 로, 새로운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전 시대의 기준으로 예술과 문화를 판단 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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