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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무의식

by Casey,Riley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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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무의식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

현대 인문학이 인간에 대해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알려주는 중요한 진실 중의 하나는 바로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행위를 하게 되는 방식이, 외부의 어떤 다른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그 힘에 의해 근본적으로 주조(鑄繰)되고 형성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구성된다는 인식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듯이 보편적이고,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다른 외적 조건에 의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진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 밖의 다른 가능성들도 항상 열어 놓아야된다는 인식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가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동시에 최종적 준거점으로서의 “나”라는 주체를 해체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하나의 인간 개체가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존과 쾌락의 맹목적 충동만을 지닌 인간이라는 생물적 개체는 성장과 발달의 어느 단계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가진 주체로 만들어진다. 즉,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이 되고 싶으며, 내가 들어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나를 이미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외부세계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나는 그것들과 어떠한 방식으로 안정되고 익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의식과 느낌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에 의거해서, 남을 “정당하게”  죽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고, “기꺼이” 충성하기도 하고, 그것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경험은 우리가 의식하건 하지 않건 간에  이러한 “역사적으로 특정한” 주체의 구성과정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다.  알튀세에 의하면, 빈 공간, 혹은 알 수 없는 충동과 에너지의 덩어리--인간이라는 원초적 개체--를 어떤 가치와 규범에 따라 움직이고, 무언가 되고 싶어하고, 때로는 무엇을 보고 분개하고, 그것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삶의 모습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주체 구성의 근본적 조건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은 현대 인문학의 이론적 작업의 결과이며 그 뿌리를 우리는 맑스의 유물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소쉬르의 구조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될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현대 인문학의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 세가지 지적 전통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머리 속에 형성되는 생각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서의 이데올로기 (idea+ ology) 이론은 맑스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는 조건에 대한 질문은 맑스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인간의 다른 활동 영역 (즉 노동과 생산의 영역)에 의해 영향받고, 더 나아가서 “결정”된다는 생각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역사철학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이론은 유물론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물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의 개념은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도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맑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노동을 통해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을 영위하게 되는데 이 때 노동의 근본적 성격은 이미 형성되어 있으면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원시시대의 노동, 봉건제 노동, 자본주의제 노동 등으로.) 그것은 바로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발달의 특정한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이며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합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구조를 토대로 하여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생기게 되고, 거기에 상응하는 특정한 사회적 의식이 생기게 된다. 즉 물질적 삶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지적 삶의 과정을 조건 짓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맑스의 유물론의 명제이다.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다른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인간 의식과 행위의 고정된 확고 부동한 중심이자 원천으로서의 주체를 해체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서구의 경우에 의식의 주체로서의 “나”라는 실체를 철학적으로 정초한 사람은  데까르트이다. 모든 사고와 행위의 근거이자, 근원이며, 책임의 소재로서의 “나”는 하나의 안정되고 불변하고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한다. 철학자 데까르트는 가장 명석판명한-- 즉,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 행위, 지각 행위, 판단 행위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즉,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틀릴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진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이다. 즉,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 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실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나오게된다. 이 후 서구 형이상학에서 모든 사고와 행위의 중심으로서의, 고정된 “나”의 개념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고 그리고 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자아됨”의 근본적 핵심으로 근대 서구의 합리주의적 인간관과 인간중심주의적 인식론을 이끌어 가게 된다.
19세기 후반 정신분석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자아의 개념에 대한 급진적 도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하게된다. 행위의 원천으로서의 생각하는 “나”는 실제 나의 일부분일 뿐이며, 때로는 실제 나의 왜곡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알고 있는 “행위의 원천으로서의  생각하는 나”는 본래의 내가 밖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며, 오히려 본래의 나는 무의식이란 이름으로 숨어 있다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의 설명틀에 따르면, 원래 알 수 없는 원초적인 충동과 에너지의 덩어리인 “나”는 외부 세계와 조우하면서 특정한 과정을 거쳐, 일정한 모양을 갖추게 되는데, 이 때 형성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성적 자아이며, 이 과정은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형성적인, 역동적 분열과정으로 설명된다. 이 충동과 에너지의 덩어리가 외부 세계와 조우할 때 프로이트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찾아내게 된 몇 가지 심리적 방어기제에 의해 “행위의 원천으로서의 생각하는 나”가 형성되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는 나는 본래적 자아로부터 소외되고, “타자”에게 점령된 이질적 구성물일 뿐이다.
이 때 드러난 “나”, 즉 주체를 지배하고 구성하게되는 것은 일련의 친화적인 가치체계들이 서로 얽혀있는 의미의 망이다. 프로이트를 포스트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이론화한 라캉은 이 의미의 망을 상징 질서라고 부른다. 라캉의 상징 질서의 개념은 자아형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이해와 소쉬르에서 시작된 구조주의 전통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표현할 때 사용하게 되는 도구인 언어 기호에 관한 이론이다. 좀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소쉬르 이전에는, 우리가 외부의 사물이나 상태나 사건을 언어로서 표현할 때, 언어는 이미 그렇게 (즉, 언어에서 표현 혹은 지시된 대로) 존재하는 사물, 상태, 사건과, 고정된 주체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각 능력을 이어주는 매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소쉬르가 발견한 진실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대상이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체계가 대상을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서 제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상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매개를 거친 후에, 즉, 언어 체계가 그 대상에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언어 체계가 작용하기 이전의 대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며, 언어의 옷을 입었을 경우에만 비로소 인식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상 세계는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소쉬르는 대상 세계가 우리에게 인지 가능한 것으로 구성되는 것은 언어의 본질적 속성인 차이의 작용에 의해서라고 주장한다. 언어가 기능할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은 그것이 같은 언어 체계 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과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구별될 수 있는 관계의 총합, 즉 차이(difference)의 망상 조직이 구조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재떨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모양과 질량의 대상 사물이 있다. 이것을 우리에게 재떨이라는 의미를 가진 물건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손에 잡히는 묵직한 이 물건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재떨이를 재떨이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 즉, 우리에게 재떨이라는 대상으로 구성해 주는 것은 재떨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언어 요소들-- 담배, 재, 볼록하지 않고 우묵한 것, 재를 털어야 하는 필요, 불에 타지 않는 속성, 등등--, 즉 의미의 관계망이다. 19세기 말엽의 언어학자로서의 소쉬르에게 이것은 그 동안 언어학 내부에서 간과되어 왔던 언어의 한 중요한 속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쉬르의 언어 구조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그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후 인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구조주의라고 부르게 된다. 즉, 이 세상이 존재하는 모습에 대한 한 중요한 이해 방식으로서 “구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지하는 근본 조건을 구성하는 이 언어체계는 단지 사전적 어휘의 총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사전적 어휘의 총합이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어느 정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한 언어 공동체가 축적해 온 의미와 가치의 체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언어 체계가 대상을 구성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또한 반응하고,  행위하는 것의 한계가 언어체계(곧 의미와 가치의 체계)에 의해 설정되고, 그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주체가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은 맑스주의, 정신분석, 구조주의라는 별개의 지적 전통을 통해 전개되어온 인간 이해가 만나는 지점이며, 바로 이 세 전통의 교차점에 알튀세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무엇보다도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공동체적 삶에서의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설명틀로서의 맑스주의와 인간 개체의 가장 내밀한 욕망과 충동에 대한 설명틀로서의 정신분석이 서로 피할 수 없이 얽혀있는 이론적 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 글은 이데올로기의 작동과정에 대한 알튀세의 이론화가 가장 포괄적으로 시도된 논문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맑시즘과 정신분석의 이론적 통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 통합은 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알튀세의 맑스: 생산 조건의 재생산은 어떻게 가능한가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우선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기존의 지배관계가 (그것이 억압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지되고, 존속되고 강화되는가의 문제이다. 즉 지배관계의 재생산의 문제이다.  어떠한 사회 구성체도 기존의 사회관계를 재생산하고 그 체제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력과 기존의 생산관계를 재생산해야 한다. 부르조아 사회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르조아적 생산력과 부르조아적 생산관계가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는 특히 여기에서 생산력의 재생산에 주목하고 있다. 생산력에는 노동력이 포함되는데 이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한 답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물질적 수단을 계속 유지함으로서 가능하다. 곧, 임금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력의 재생산의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노동하는 인간의 재생산이다. 알튀세의 재생산 명제가 강조하는 점은 바로, 노동이 생물적, 기술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르조아적 사회관계가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공장제 생산이라는 생산 양식이 재생산되어야 하며, 공장제 생산에 맞는 설비와 투자가 계속 유지되어야하고, 그것에 필요한 숙련 노동과 지식이 계속 전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계속 공장에 나가 일하려는 생각, 의지, 의무감, 자발적 마음, 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 등이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자본주의적) “주체”가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아침 갑자기 노동자가 부르조아적 사회 질서가 착취에 근거한 부당한 것이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부르조아 사회 체제의 재생산은 효과적으로 진행되지 못할 것이며, 머지 않아 붕괴될 것이다. 즉, 도덕적 정치적으로 순응할 의지를 재생산할 수 있는 노동의 재생산, 지배체제에 계속 종속될 수 있는 노동의 재생산이 필요한 것이다. 알튀세의 설명에 따르면, 노동력의 재생산은 지배적 질서에 대한 복종을 재생산하는 것이며, 이것은 노동자에게는 지배 이데올로기에의 복종을 재생산하는 것이며, 사용자 측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능력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지배 계급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계급 이해에 따라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지배자나 피지배자니 똑 같이 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배 관계를 유지시키고 재생산하는 가장 중심적인 기제는 무엇인가? 알튀세에게 그것은 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였다.  맑스에게 국가의 기능의 무엇보다도 억압적인 지배 질서를 다양한 제도와 기구들을 통해 재생산하는 것인데 알튀세는 이것을 억압적 국가 기구 (Repressive State Apparatuses)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로 나눈다. 억압적 국가 기구에는 정부, 군대, 경찰, 법원, 감옥 같은 것이 있으며, 이것들은 물리적 힘, 즉, “폭력을 통해 기능”한다. 지배 질서에 저항하는 세력이나 생각을 물리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에게 보다 효과적인 재생산 기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이다. 이데올로기를 통해, 즉 사람의 생각, 신념, 가치관, 더 나아가서 감성까지를 근본적으로 지배함으로서, 그것들이 생산되는 방식을 독점적으로 통제함으로서, 지배적 사회 관계를 유지해 간다는 것이다.
알튀세에 의하면 종교, 교육, 법, 대중매체, 문학, 스포츠 등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의 가장 중요한 제도와 기구들이다. 이러한 ISA들은 한 공동체에서 의미 생산이 일어나는 의사소통 체계 (communication system)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우선 종교적  ISA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그리고 거의 독점적인 의미 생산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가던 자기 교구의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나 하는 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중세 유럽의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인식, 그 안에서의 농노와 일반 자영농과 귀족 계급과 군주와의 “정당한” 관계, 그에 따르는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특정한 정의 등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었다. 
교육제도는 알튀세가 특히 주목하는 ISA로서, 산업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당시의 임금 노동자를 구성하고 있던 일반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새로운 생산 체계, 새로운 사회관계 속으로 편입시키기 위하여 대중교육 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알튀세의 이러한 주장에는 물론 이의의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19세기 초반의 영국에 대중 교육 제도가 들어선 것은 한 편으로는 부르조아 계급의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노동자의 삶과 권익을 확장시키려는 진보주의자들의 노력 --즉, 인간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생각 같은 것--에 의해서도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9세기의 전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던 공교육의 제도화가 영국 사회를 보다 확고한 부르조아 사회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가족도 역시 ISA의 기능을 하게 된다. 우리의 상식이나 도덕율 (알튀세에게는 이러한 것들도 근본적으로 지배 질서의 재생산과 관계된 것인데) 은 대개 가족을 통해서 형성된다. 법적 ISA는 한편으로는 법원과 경찰 혹은 군대, 감옥 등을 통해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집행된다는 의미에서 억압적 국가기구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물리적 집행의 정당성의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으로는 ISA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이나 그에 따른 하위법들은 단지 그것이 구성원의 합의와 계약를 통해 이루어 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가치와 규범과 당위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집행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  문화적 ISA이다. 대중 매체를 통한 문화적 재현은 이러한 지배적 의미, 가치 실천의 체계가 재생산되는 가장 효과적이며 핵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보는 TV는 드라마나 뉴스나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삶의 형태에 대한 특정한 재현을 보여주면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 생각 등을 계속 재생산해주고 있다. 

알튀세의 라캉: 이데올로기는 인간 개체를 주체로서 호명한다

억압적 국가 기구가 근본적으로 폭력을 기반으로 행사되는 반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튀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구성함”으로서 작동한다. 앞에 설명된 재생산 명제가 맑스를 문화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그람시의 상부구조 논의를 발전시킨 것이라면, 이데올로기의 작동 기제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결정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알튀세는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네가지 명제로 설명한다. (1)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  (2)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그들의 실제 존재 조건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의 재현이다. (3)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가진다. (4)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는 명제는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실체가 없는 환영이며 따라서 그 자체의 독자적인 역사를 갖지 못한다고 할 때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 명제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은 영원하다”고 했을 때 의미한 것과 같이 이데올로기의 초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의식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우리가 언젠가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고 그것이 혁명의 핵심 단계라는 의미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혁명적인 맑스주의 이론가로서의 알튀세의 이론적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역사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역사를 초월해서 항상 이미 (always already)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명제는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 조건 (즉 생산관계와 사회 관계)은 한 개인의 의식이 직접 파악할 수 없으며, 이미 특정한 해석의 틀의 매개를 통해서만 재현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존재를 가진다는 명제는 이데올로기는 관념의 형태로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체라는 구체적 개체를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에게 작용하는 방식은 특정한 의식(儀式)을 통해서, 행동과 실천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를 통해서 진행된다.
이 세가지 명제는 사실 네 번째의 이데올로기적 호명 기제를 설명하기 위한 예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됨으로서, 즉 그 이름이 부여되고 불리어 짐으로서 비로소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것에 의거해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나를 그렇게 불러 줌으로서, 혹은 이데올로기가 나를 그렇게 인식해 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하나의 주체로서 구성해 주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나를 그런 방식으로 정의하고 규정해 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고 그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서 내가 종속되게 되는 이 이데올로기는 신, 국가, 민주주의, 도덕률, 자유, 평등, 혹은 여자다움과 같은 매우 강력한 가치 개념으로 충전되어 있는 신념 체계이다. 이러한 신념 체계에 한 개체가 종속되고 그 가치들을 내화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정체성을 획득하게되는 과정 (즉, 기독교적 세계 창조와 구원을 믿는 나, 대한민국 국민인 나, 여자다운 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나, 왕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 등의 정체성)을 알튀세는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예로 설명한다. 이 예는 단순한 예시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이데올로기는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통해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원리와 신의 의지를 믿고 따르는 길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가치 체계이다. 그것을 통해 한 개체는 삶의 의미와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한 개체에 이름을 부여해주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가 응답해 줄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신은 그에게 너는 영생을 위해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너의 존재의 근원이며, 이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의 너의 자리라고 말해 준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것이며, 네가 신의 사랑의 법칙을 깨닫는다면 너는 구원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알려준다. 알튀세가 이 알레고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이것이 한 개체가 외부의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종속됨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일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알레고리는 우리가 강력한 가치 체계를 내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되고 종속됨으로서 하나의 “주체”로 구성되는 과정을 이루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보여 주고 있다. 우선 그것은 정체성을 부여해준다. 여기서 이름을 불러주는 것(호명)은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것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존재의 근원과 이 세상에서의 나의 자리를 지정해 준다. 그리고 정체성을 부여받은 뒤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행동의 규범이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사랑과 구원의 약속이 뒤따른다. 
주체는 호명되는 순간 “예, 바로 접니다”라고 자발적으로 기쁨에 차서 응답한다.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부여해준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인지된다. 이 때 호명 기제는 인지 기제를 의미한다. 이데올로기가 불러준다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알아봐 준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서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의 십계명에 복종할 때 이데올로기의 법칙은 곧 사랑의 법칙이 된다. 호명되고 인지되어 내가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이름에 걸 맞는 축복의 과정인 것이며, 그것은 그만큼 역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바로 이 때 주체가 완벽하게 복종하고 종속하게 되는 (왜냐하면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알튀세는 대주체 (Subject) 혹은 대타자 (Other)라고 부른다. 한 개체를 주체로서 호명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고유하고 중심적인 대타자적 대주체 (Other Subject)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대타자가 모세에게 모세야라고 부르자 모세는 “네 바로 접니다. 당신의 종, 모세, 말씀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과정, 호명과 인지와 정체성의 부여/획득의 역동적 과정에 대한 알튀세의 이론은 라캉의 주체 구성의 정신분석학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자신을 파편화된 조각으로만 인지하던 신생아는 생후 6개월에서 18 개월 사이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아라는 것에 대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즉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총체적인 통일감을 가지게 되고 환호한다. 거울에 비친 통일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총체성에 대한 범주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거울상 단계라고 부르며, 이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통일된 실체를 가진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때 거울에 비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 즉 타자 (other)이지만 이 타자를 통하여, 자신의 통일된 정체성의 느낌을 갖게되는 것이다.
자아 형성 단계에서 이 거울 단계가 의미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안정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 어떤 타자 (통합된 실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라는 것이다. 라캉은 이 단계를 심상계 (imaginary order)라고 부른다. 이렇게 통합된 자아라는 범주가 형성되고 난 후, 어린아이는 점점 성장하여,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의식있는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언어 체계에 진입하면서 가능하게 된다. 즉 주위에 있는 사물들에 기존하는 이름을 습득하면서, 구체적인 주체로 형성된다. 라캉의 용어로는 상징계(symbolic order)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상징계에서 주체는 강력한 가치 체계를 내장하고 있는 대타자 (Other)들을--신, 국가, 자유민주주의, 특정한 도덕률, 대한민국 혹은 한민족, 미국, 여자다움 등-- 만나고, 그것에 호명되고, 종속되고 그 가치들을 내화시키면서, 또한 그 대타자들로부터 인지되면서, 정체성을 갖게되고, 하나의 주체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통해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을 주고, 그에 따라 더 완벽하게 종속되게 된다.
예를 들면, 생물적인 욕구와 충동만을 가지고 있던 어린아이가 상징 질서 속에 편입되면서,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든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든가하는  특정한 도덕률을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도덕률이 그 체계 안으로 자신을 종속시키고 “도덕을 잘 지키는 나”라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인데, 이 때 이 과정은 이데올로기와 한 주체 사이에 애정관계를 형성함으로서 완성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특정한 여성에게 성공적으로 작용할 경우 그 여성은 여성다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갖게된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적 주체 형성이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되는 경우, 더욱 더 여성다운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궁극적으로 주체를 구성해 줌으로서, 그것은 내 자신이 되고, 그 속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고, 정체성을 가지게 됨으로서, 나라는 존재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체는 그 스스로에 대한 안정된 느낌,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와의 익숙한 느낌을 유지할 수가 있고, 주체에 본질적인 시간적 연속성과 일관성을 부여해준다. 알튀세는 이러한 호명과 인지의 과정, 정체성의 형성의 과정을, 개체가 주체(subject)로서 구성되는 것은 보다 큰 대주체(Subject)에 종속(subject)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의 통합: 알튀세 이론의 한계와 가능성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논의의 중요한 문제점 중의 하나는 억압적 지배 체제의 재생산 구조에 대한 강조와 주체 구성의 조건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이론화 사이에 서로 상충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재생산 명제가 현재의 지배 질서는 문제적인 것이고, 우리의 삶에 억압적인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있는 반면,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이데올로기의 초역사성-- 즉 이데올로기가 우리 인식의 근본조건이라는 것,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확인해준다. 따라서, 한 사회가 다른 저항적이고 대항적인 사고 방식과 행위 체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대안적인 사회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가하는 중요한 질문을 포기하고 있으며, 사회 변혁과 혁명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론으로서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알튀세가 계급 혁명의 중요성을 다시금 역설하면서 이데올로기를 과학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해결이라기 보다는 그의 이론의 난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한계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을 통합하려는 이론적 시도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라캉 이론의 사회적 함의는 물론 충분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의식의 형성을 주로 소외와 분열로 접근하고 있고, 의식 형성 이전의 요소들에 과도한 주목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의 주체 구성 이론은 근본적으로 정신 분석 이론이며  맑스주의와의 결합은 처음부터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와 정신 분석을 통합하려는 알튀세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알튀세의 맑스에 대한 정교한 이론적 재해석을 높이 평가하는 많은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의도적으로 알튀세와 라캉 사이의 이론적 관계를 축소시키거나 분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통합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의 이론의 현재적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튀세의 세례를 받은 맑스주의가 그 이전의 맑스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알튀세가 시도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의 접목은 인간의 개체적 삶과 공동체적 삶이 상호구성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것, 실제로는 한가지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현재 작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공할 만한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새로운 실천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알튀세 이론의 실천적 유효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알튀세가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통해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정체와 작동 과정이다. 즉, 지배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하게 기존의 사회적 질서와 의미 체계를 재생산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구성해주는 것이라면, 그것 밖으로 우리가 나갈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그것이 이미 지정해 주기 때문이다. 혹은 그 지배 체계에 도전적이거나 위협적인 의미와 가치들을 주체 구성의 과정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배제하고,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 이론의 현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구성의 조건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인정하면서,--즉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화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보다 진전된 자본주의 양식 --즉 자본주의적 본성, 자본주의적 인간 관계가 더욱 심화되어 있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 “순수” 자본주의시대-- 하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은폐된 힘들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외부 세계를 변화하고 확장시켜가는  인간의 창조적 문화적 실천의 가능성도 모색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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