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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대자유인

by Casey,Riley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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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말할 때 삼매를 유지하는 것    비파사나 수행법   화두법(話頭法)   마조스님의 휘하에서도 80여명의 선지식이 있었지만 정작 돈오한 사람은 두셋에 불과했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공부가 끊이지 않는다면 저를 찾아오시어 저의 스승님께 점검을 받으십시오   태식호흡   깊은 잠을 잘 때에도 어느 때고 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묵동정일여  
  꼭 봐야 할 참선 지침서   취암 강정진 著 <영원한 대자유인>  영원한 대자유인-구도기   1934년 나는 경남 진주에서 출생   상이나 뜻도 생각할 수 없는 '옴마니반메훔'이란 염(念)으로만 계속 이어지게   어묵동정일여라는 고비를 넘고 나니, 잠이 들면 깨어  있을 때의 공부가 저절로 이어져   숙면일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육계 부분에서 항문까지 철사나 막대기 같은 것으로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가까워질 때에는 명멸함으로 감지되던 아뢰야식이 이때부터는 그 감지됨이 정착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귀의 뒤로 가게 하고 손바닥은 귀의 구멍을 덮지 않도록 하면 반듯이  누워서    [영원한 대자유인]7.해산 스님과의 만남   의심하는 방법은 다음의 4가지 방법으로 회광반조   1978년 2월 초 새벽 2시 선정(禪 定중)    아무리 생각해도 막히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표현 방법이 미숙함을 알았다    나에게 오는 처사  한 분이 견성(見性)을 했는데 대소변을 못 가린다     어느 때부터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뜻밖의 해괴망측한 행동을 보여 주시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하셨다   이것 역시 이해하지 못하다가 10년쯤 지났을 무렵에야  오늘부터 화두를 버려라   [영원한 대자유인]은  크게 3부분   
  수행 방법에 대한 고찰 1    [영원한 대자유인]제2장1.중생과 부처   
수행방편을 마음 속에서 관하게 되면 그 수행방편의 관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삼매(觀三昧)가 길어지게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염(念=생각)으로 바뀌어 염념상속하는 삼매에 들게 된다. 이와 같은 삼매인 한 생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그 한 생각이 나오는 곳을 찾게  되는 의심(疑心)으로 바뀌면, 드디어는 의심의  특성 때문에 수행자는  그 한 생각을 일으키는 의식(意識)의 주체인 자성(自性)을 돈오(頓悟)하게 된다.
의심법(疑心法)은, 부처님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 이후 사대의문(四大疑問)으로 수행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셨다는 것과, 금강경(金剛經)의 여시아문(如是我聞) 다음에 「一時 佛在 舍衛國…………收衣鉢 洗足巳 敷座而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무기가 계속되는 상태를 선정(禪定)인 것으로 잘못 알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되고 무기를 자성(自性)으로 착각(錯覺)하는 경우  
첫째와 둘째의 경우는 선지식이 아닌 스승이라도 수행자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 수행방편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 수행방편의 몽중일여(夢中一如)  → 수행방편의 숙면일여(熟眠一如) →  내외명철(內外明徹) →  돈오(頓悟)라는 수행과정(修行過程)   
돈오(頓悟)할 때 알게 된 그 자성(自性)을 이제는 어느 때에도 잘 간직하는 방법을 깨쳤다     
  육계가 생기는 곳에 어딘가에 받힌 것 같은 아픔  수행방편을 24시간 망각(忘却)하지 않도록 이어지게 하는 삼매(三昧)의 신호    행주좌와일여하고 어묵동정일여하고 몽중일여함에 이르기까지 수행의 힘으로 생기게 된 삼매관성(三昧慣性)을 무기관성만 미치는 영역 속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고려(高麗)의 태고(太古) 스님이 화두를 들 때의 오매일여(寤寐一如)   다만 그때에는 화두가 빠져버린 한결같음만, 즉 분명한 삼매관성(三昧慣性)만 있다   
  세번뇌는 추번뇌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는 달리 일과성(一過性)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특성(特性)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추번뇌를 평정할 수 있었던 염념상속(念念相續)하는 정도의 삼매(三昧)로는 평정이 불가능하다.
무기와 번뇌의 경계로 나타나던 안[內]과 밖[外]이 밝음으로 꿰뚫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내외명철(內外明徹)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만 충족되는 깨침은 세 가지로 한정(限定)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가까워지면 수행자 자신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감지   삼세망념(三細妄念)의 평정에 따른 차등(差等)에 따라 세 가지의 깨침   불조(佛祖)께서는 방편(方便)의 말씀으로서도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씀을 절대로 하시지 않았으며  하실 수도 없는 것    
  수행자의 공부가 어묵동정일여하다는 것은 수행자의 의식(意識)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행방편을 염념상속(念念相續)하던 의식(意識)은 다른 곳에 집중하지만 수행방편을 생각하는 삼매의 관성(慣性)만은 지속(持續)되는 것을 말한다. 
  대분발심(大奮發心)을 일으키는 방법은 생명이 있는 동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호흡에 리듬에 맞추어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염념상속(念念相續)시키는 것이다. 즉, 수행을 호흡에다 항상 동반(同伴)시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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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DONNOH   95/09/15   20   71  [청정회] 중생은 왜 중생인가.
   39 DONNOH   95/09/11   31   76  [청정회] 수행의 종류
   38 DONNOH   95/09/11   20   97  [청정회] 청정회란

번호:38/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09/11 11:00  길이:20줄
제 목 : [청정회] 청정회란


  청정회는 불교수행동아리인 서울대학교  선우회가 그 전신으로 
주로 학부를 졸업한  석,박사과정생들과 타대학교 학생, 직장인, 
그리고 일반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수행을 위해 
만든 모임입니다.

  현재 서울, 부산, 인천, 구미   등에 수행을 하는 많은 회원이 
있지만 장소의 문제가  확보되지 못한 관계로 서울대학교 학생회
관 2층 선우회 방에서 주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내용은 기본적으로 수행을  전제로 하며 또한 구성원 개개
인이 수행하여 성불함이 그 최종목표입니다. 
  그 기반적 지식습득을  위해서는 육조단경등의 수행을 위한 기
초 교재를 정기적으로 세미나하고 있고 수행과 관련된 다양한 주
제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수행 위에 모든 활동이 일어나며 수행을 위
한 도움을 주는 것을 떠나지 않습니다.

  바른 스승과 도반이 있다면 부처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
다.


번호:39/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09/11 11:03  길이:31줄
제 목 : [청정회] 수행의 종류


  외도의 수행법과 다른  종교의 수행법같은 것들은 모두 제외하
고 순수하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세가지로 나뉩니다. 이것들
은 모두 경전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경전에 근거한 것은 이것들
입니다.
  첫째 관법으로는 일출관, 월출관, 백골관, 자비관, 수식관, 비
파사나 등등 이 있습니다.
  둘째 념념상속법으로는 염불,  주력, 범위를 넓히면 독경(차라
리 관법이나  더 낮은 수행법에 가깝지만  잘 하면 념념상속법의 
효과를 조금은 볼 수 있습니다.) 정도가 잇습니다. 
  셋째 의심법으로는 격외도리인 화두를 가지고 의심하는 화두법
과 능엄경 25원통법문의  화두법에 해당하는 수행법(소리가 어디
에서 들리는지를 찾는것 같은)이 있습니다.

  이 방법들은 각기 그 쓰임이 있습니다. 
  관법은 무지몽매한 중생이  집착과 탐욕에 잠겨 있어 빠져나오
는 방법을 모르고 헤매일 때  정신을 차리게  해 줍니다. 
  념념상속법은 일단 정신을 차린  수행자가 그 깨어 있는  삼매
의 영역을 확보  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의심법은 영역은 확보되어 큰 번뇌는 없으나 깊은 삼매에 들지 
않아 미세번뇌가 빠져나오는  수행자가  깊은 삼매에 들기  위해
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쓰임은 각각의  수행법의 고유한 특성에 기초한 것이므
로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특성과 자세한 의미는 다음 글
에 밝히겠습니다.

  이러한 수행법의  의미를 모른다면  자신의 수행법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어느 수행단계에서 어떻게 이용하는 것
인지도 모르는 것이므로 수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번호:4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09/15 13:25  길이:20줄
제 목 : [청정회] 중생은 왜 중생인가.

  중생이 왜 중생입니까?

   번뇌  와  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번뇌 와  무기 로부터 자유로와져 자신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자유로와집니까?

   하나의 번뇌인  방편 으로  잡다한 번뇌를 평정하고 무기에 빠지지 
않게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자유로와지는 과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의심스럽습니까? 당신 자신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당신의 의심이 풀릴때까지.


번호:4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09/15 13:28  길이:64줄
제 목 : [청정회] 수행의 단계
< 수행의 단계 >

수행의 단계가 중요한 까닭은 
첫째 단계를 이르지 못하고도 자신의 수행이 나아간 것으로 착각을 하
거나 혹은 견성을 했다고 하므로 그것을 밝혀야 하며
둘째 각 단계에 따라 그에 맞는 수행과 선지식의 지도등 모든 것이 이
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단계가 없지만 중생의 마음은 두꺼운 번뇌와 무기의 구름에 가
려 있어 그것을 물리쳐 없애는데 정도에 따라 단계가 생긴 것입니다.

1.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걸어다닐 때나 머무를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할 때나 말
을 들을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항상 삼매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깨어 있을  때는 항상 삼매에 들어 있다는 말과 같
습니다. 이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말할 때 삼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인이 수행과정에서 만나는  세가지 고비즉 상기, 말할 때 삼매 유지, 내외명철  중 두번째에 해당하는 아주 어려운 경지입니다. 이 단계를 통과하는 데는 묵언수행이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이 단계만 통과하면 조금  후에 설명할 오매일여까지는 무난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2. 몽중일여(夢中一如)

  삼매가 깨어 있을  때 완벽하게 유지가 되면  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삼매가 유지가 됩니다. 이것을 몽중일
여라 합니다. 

3. 숙면일여(熟眠一如)

  공부가 몽중일여가 되고 나면  의식이 끊어진 깊은 잠에서도 삼매가 
유지되는 숙면일여의 경지까지  가게 됩니다. 이 경지를 오매일여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매일여가 되면 추번뇌는 모두 없어지게 되어 일반 중
생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단계를 불퇴전의 경지라고 합니다. 즉 
다시는 중생의 삶으로 퇴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지에 도
달하면 보통 성인이라고 이름합니다. 또한 이 단계는 선지식이 수행을 
점검하는 중요한 점검법이 되어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한 가짜 부처를 
가려내는 수단의 하나입니다. 

4. 내외명철(內外明徹)

  공부가 오매일여가 되면 6추의 번뇌는 모두 없어지게 되고 3세의 번
뇌만 남습니다. 이 때 더욱  수행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 3세의 번뇌도 
서서히 소멸되고 수행이 극치에  이르면 무기와 번뇌가 밝음으로 꿰뚫
어지는 내외명철이 되게 됩니다. 수행의 가장 중요한 단계로 수행인이 
최후에 넘어야 할 어려운 관문입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장좌
불와가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이 때는 스승의 도움이 거의 절대
적입니다.

5. 돈오(頓悟) 

  방편을 들고 수행하다가 내외명철이  되면 다른 번뇌와 무기는 밝음
으로 꿰뚫어지고 오직 방편  하나만 남게됩니다. 이와 동시에 그 방편
이 돈제(頓除)되면서 바로 방편  하나가 나오던 곳, 즉 의식의 주체인 
불성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돈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통 돈오는  내외명철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돈오를 견성이라고도 
합니다. 견성즉 성불이므로 이것으로  곧 부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
로 내외명철의 단계가  없거나, 통과했다고 착각하더라도 다시 번뇌와 
무기가 있어 그것을  없애 나가는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돈오가 아니라 착각입니다. 



번호:4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09/16 00:19  길이:57줄
제 목 : [청정회] 무기와 번뇌

  < 무기와 번뇌 >

  육조단경에  안으로  미혹하면 무기공에  떨어지고 밖으로 미혹하면 
상에 집착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선가에서는 참선수행시  무기공을 경계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또한 경전에도 망상과 혼침으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과연 무기란 무엇
이며 중생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나머지 하나인 번뇌는 무엇입니까? 

  1. 무기
   
  흔히 불교에서 수많은 번뇌만을  다루고 무기는 수행중의 경계할 상
태로 주의만  시킬정도로 많이 이야기되어지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가 
무기는 자신이 무기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기인줄을 잘 모른
다는 점 때문입니다. 
  물론 번뇌도 수행을 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번뇌에 빠져 
있는지 모르지만 무기는  바로  생각이 없는 상태   이기 때문에 더욱 
자각을 하기 힘든 것이지요.

  무기는 생각이  없는 깊은 잠이라든가,  기절한 상태라든가, 때때로 
생각이 끊어져 멍한 상태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에 보이는 상태  뿐만 아니라 무기는 모든 곳에 있
습니다. 생각과 생각사이에는 반드시 짧지만 무기를 거쳐 다음 생각으
로 나아갑니다. 아침의 몽롱한 상태에서는 수시로 꿈과 무기를 오락가
락합니다. 또한 평상시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거나 잡다한 생각만
을 일으키는 사람은 항상 무기에 덮여 있는 생활을 합니다.  

  무기는 편안하고 밝습니다.
  무기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우선 편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게으름을 부리며 무기를 조장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수행중의 무기공은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무기는 생각에 힘이 없는 중생뿐만 아니라 수행자에게 더욱 깊은 본
질적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수행자는 삼매의 힘이 있으므로 하나의 방
편에 몰두하게 되지만 그 방편을 놓치거나 혹은 처음부터 방편이 없는 
수행을 한다면 대번 무기공으로 빠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무기의 밝고 편안한 상태와 또한 순식간에 시간
이 건너 뛴다는 속성때문에 무기를 삼매로 착각하게 됩니다. 
  주의한다면 무기에 빠지기 전에  자신의 수행에 방편이 사라지는 것
과 수행을 망각하고 편안함에 마음을  맡기는 순간을 알 수 있을 것입
니다. 한번 빠졌더라도 두번다시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무기조장의 과보는 천제입니다.
  무기를 조장하면 지혜가 사라지므로 축생으로 태어나고 사람이 되더
라도 바른 법을 구분할 줄  몰라 방탕한 삶을 살거나 사마외도의 법에 
빠집니다. 또한  그것이 지나치면 선근의 종자가  끊어져 영영 성불을 
하기 힘든 천제(이찬티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보가 아니더라도 생각에  힘이 없어져 쾌락에 쉽게 무너지는 
약한 인간이 되므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덧없는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번호:4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09/21 13:59  길이:43줄
제 목 : [청정회] 무기와 번뇌 2

  2. 번뇌

  번뇌란 당신의 모든 생각을 말합니다.
  화를 내며 욕심을 내고  어리석어도 번뇌이며 기쁘고 즐겁고 평화로
와도 번뇌입니다.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지내도 번뇌이며 화두를 들며 
열심히 수행을 해도 번뇌입니다.

  당신이 무기에  빠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번뇌입니다. 수행의 방편 
역시 번뇌란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번뇌를 없앨 것입니까? 당연히 없앨 것입니다. 번뇌와 무
기의 두꺼운 구름을 하루빨리 불어제껴 참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길바닥의  돌과 같은 무정지물에 다를 바 없
습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함이지 굴러다니는 돌맹이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멍청히  아무생각 없이 편안히 앉아 무기만 기
르는 것을 절대 경계하십시오.

  번뇌를 없앤다  함은 번뇌의 속성을 없앤다  함입니다. 생각 생각에 
집착하여 얽매이는 중생의 속성을  모든 생각에 자유로운 부처의 속성
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여 이 법을 비방하지 말고 수행을 하
여 직접 보십시오.
  
  그 방법은 한 번뇌를 일으켜  수많은 잡다한 번뇌를 막고 큰 번뇌로
부터 시작하여 미세번뇌까지 모두  평정하여 마지막 들고 있던 방편마
저 사라질 때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생각이 나쁜  것이 아니라 번뇌가 나쁜 것입니다. 부
처도 생각을 하니 생각을 없애 부처가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또한 수
행은 바로 이 번뇌를 가지고 해 나가는 것입니다. 화두의 의심이 바로 
번뇌이며 염불의  부처님이름이 바로 번뇌이며  진언의 소리들이 바로 
번뇌입니다.
  생각은 이용할 것이지 없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잡다한 생각을 일
으켜 정신을 혼미하게 하며 집착에 그대로 붙잡혀 있으며 수행을 한다 
하면 그 사람의  근기가 낮은 탓이니 노력하여  나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뇌인 방편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번호:5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0 04:41  길이:36줄
제 목 : [청정회] 수행의 방편

 < 수행의 방편 >

  수행의 방편이란 직접 수행을 해 나가기 위하여 일으키는 그 번뇌를 
말합니다.

  화두의심법에는 화두요, 관법에는  관할 대상의 상이요, 염불법에는 
부처님의 이름이요, 진언에는 그 진언입니다.  

  방편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바로 한 번뇌를 일으켜 다른 번뇌를 일
어날 틈을 안 주고 무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중생의 속성인 무기와 
번뇌를 평정하여 성불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방편이 없는 수행법으로는 수행이 미천한 단계에서는 수많은 번뇌에 
끄달릴 것이며,  수행이 나아간 단계에서는 무기에  빠져 접신을 하는 
등 순간적으로  마음이 평안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지 모르지만 영영 
마구니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가지 방편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하여 편안한 길을 택한다 함은 자
신의 업장이 얼마나 두껍게 쌓여  있는지는 모르고 그것에 더 큰 짐을 
쌓는 것입니다.

  방편은 뗏목에 비유할 수 있는데 강을 건너기 위해선 뗏목이 필요하
고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립니다. 성불을 하면 방편을 버리며 그때 퇴
전이 된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수행중 어떠한 경게에서도, 방편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놓친다 하더
라도 곧 다시 잡아야 합니다.

  방편으로 쓰이는  번뇌의 종류에 따라  수행방법이 달라지며 그것은 
그 단계와 쓰임에 따라 적절히 쓰여야 합니다.  반드시 바른 선지식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크게 관법, 념념상속법,  의심법의 세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봅시다.


번호:57/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2 09:06  길이:57줄
제 목 : [청정회] 관법

  < 관법 >

  관법은 어떤 한가지 대상을  생각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 공부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행이 전혀 되지 않은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일깨워 정신을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상은 복잡한 번뇌를 파생시키
기 쉽고 깊은 삼매로 들기에는  미약하여 정신을 차리게 한 후에는 더
욱 수준높은 수행이 필요합니다.

  또한 관법의 단계도 거치지  못한 사람이 다음의 수행방법으로 들어
간다면 수시로 방편을 망각하며  잡다한 번뇌와 집착에 휩싸일 것이며 
그것을 일깨울 아무 제한이 없으므로 수행이 매우 더딜 것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관법 3가지를 알아 봅시다.

  첫째 백골관(白骨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시키는 공부방법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살이 검어지고 고름이 생기며 살이 썩어 들어가 벌레가 꼬이며 
나중에는 백골만 남는 것을 차례로 관(觀)하게 합니다. 
  욕심이 일어 집착을 일으킬 때 무상함을 일깨워 그것을 깨뜨리니 세
속에 집착하는 사람을 위한  낮은 차원이지만 좋은 수행이라 하겠습니
다. 

  둘째 자비관(慈悲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성내는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시키는 공부방법입니다. 
지장경에 나오는 지옥의 참담한 모습을 떠올려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내는 마음으로 마음이 평정을 잃었을 때 주의를 돌이켜 성냄에 집
착하지 않도록 합니다. 

  셋째 수식관(數息觀)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중생에게 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름대로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숫자를 세며 관찰하는 공부
방법입니다. 방법으로 호흡에  맞추어 1부터 시작하여 100까지를 세게 
하고 다음에는 거꾸로 100부터 1까지 다음에는 홀수만 세게 하고 다음
에는 짝수만 세게 하기도 합니다.
  호흡에 주의를 떼지 않으니  다른 관법보다는 훨씬 집중되며 번뇌가 
분화되지 않으며 주기적으로 숫자를 셈으로써 다른 번뇌를 일으키거나 
무기에 빠지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려우니 그나마 근기가 조금은 되는 중생을 위한 것
입니다.

  또한 비파사나 수행법을 굳이 분류하면 관법으로 넣을 수가 있는데 그 순간순간 행하는 행동과 마음에 집중하여 그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주로 기후가 무더워 한가지 방편을 들고 수행하기가 너무 힘든 지방에서 행하는데  번뇌의 분화가 크기는 하지만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방편의 의미가 약해 무기에 빠지기 쉬워 권할만한 방법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든 약간씩  섞어 하거나 가끔씩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중 어느때이든  끊임없이 한가지 방편을  꾸준히 일으키는 것입니
다.


번호:58/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2 09:08  길이:48줄
제 목 : [청정회] 념념상속법

  < 념념상속법 >

  이 방법은 공부가 관법의  수준을 넘어서 '정신을 차린' 수행인에게 '
수행의 영역을 확보' 하기 위해 시킵니다. 

  념념상속법(念念相續法)은 어떤 한가지 번뇌를 생각 생각 이어지게 함
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공부방법
입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전육식에서 일어나는  추번뇌를 없앨 수가 
있습니다.

  이 방법의 단계는 초발심 단계에서  어느 정도 흐린 마음을 맑게 하여 
집중력이 생긴 수행자가  어묵동정일여와 몽중일여 숙면일여까지에 해당
하는 단계입니다. 숙면일여  이후에는 전육식의 모든 추번뇌를 평정했으
므로 공부의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심법에서 알아봅시다. 

  이 방법을 분류하면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염불법(念佛法)입니다.
  부처님의 명호들, 예를 들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등 중
의 하나만을 생각 생각 이어지게  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
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방법입니다. 

  둘째 주력법(呪力法)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언들, 예를 들면 옴마니 반메훔,옴 치림,  옴 살
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신묘장구 대다라니 등등 중의 하나만을 선
택하여 그것만을 생각 생각 이어지게 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방법입니다. 

  이 두가지 방법중 염불법(念佛法)은  수행중에 순수한 삼매가 아닌 부
처님의 형상같은 파생된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염
불하는 부처님께  도와달라는 마음이 생기어  의지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단점이 있습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무엇엔가 의지하거나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접신하거나 마구니가 되기 쉬우므로 주의하십시오.

  주력법에서도 여러 주력이 있으나 너무 길어 한 삼매에 들기에는 부적
합하거나, 너무 짧아 생각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좋은 방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약 6자 정도의 '옴마니반메훔'이  적당하며, 가능한 빠르게 하여 번뇌
의 틈을 없앱니다.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염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소리를 내는 것은 그것
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합니다. 
  
  
번호:6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4 10:29  길이:44줄
제 목 : [청정회] 의심법 1 - 화두법
 
  < 의심법(疑心法) 1 - 화두법(話頭法) >

  이 방법은 공부가 숙면일여의  경지에 이르러 하루중 어느때라도 공부에 망각이 없고, 따라서 전육식에서 일어나는 추번뇌들은 이미 평정했을 때, 스승이 제자의  공부의 수준을 알아, 기연에 의하여, 의심을 돈발시켜 줌으로써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보아 제자가 공부가 거의 끝나갈 경지에 이르르면, 이제까지 
해 오던  방법으로는 제팔 아뢰야식의 3세망념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더욱 '깊은 삼매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방법을 바꾸어 줍니다.
  그것은 의심으로써 공부해 나가는  것인데 그 깊이는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든채 그대로 삼매에 빠질 정도의 깊은 삼매에 들게 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장좌불와가 필요하며  또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
입니다.
     
  의심은 스승이 제자와의 기연에 의해서 돈발시켜줍니다.
  예를 들어 제자가 스승에게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마
른 똥막대기니라' 하고 대답하면, 스승에 대한 신심이 없다면 그냥 넘
어가겠지만, 스승의 말씀이 거짓일 리가 없으므로 그 이유를 의심하게 
됩니다.
  ' 마른 똥막대기라고?  어째서 마른 똥막대기일까? 무었때문에 그랬
을까? 불법이 왜 마른 똥막대기일까? ' 
  하며 깊은 의심 속으로 들어갑니다. 

  깨치면 알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깨칠 때까지 계속해서 의심이 일
어나 수행자를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팔 아뢰야식의 모
든 번뇌 무기까지 평정되고 나면, 어떠한 경계에 닥쳐, 한순간에 돈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둘째, 의심이 돈발되어야  합니다. 즉 옛날 썼던  화두를 떡 주듯이 
그냥 던져 주어서는 의심이  돈발되지 않습니다. 만약 옛날 화두를 주
려면 그와 비슷한 기연을 만들어 의심을 돈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셋째, 돈발된  의심을 이어갈 삼매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삼매의 힘은 화두법으로 수행하기 전에 벌써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위의 세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두의심법으로 수
행하게 되면 수행의 진전이 없어 공부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번호:6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4 10:37  길이:42줄
제 목 : [청정회] 의심법 2 - 화두법
 
  < 의심법(疑心法) 2 - 화두법(話頭法) >

  수행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 즉 추번뇌도 제거하지  못한 
수행자가 화두의심법으로 공부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첫째, 공부의 영역확보가 힘듭니다.
  한두시간 좌선할 때나,  열심히 하면 사나흘도 의심이 지속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의심을  조금이라도 지속한다는 것은 
공부가 안된 수행자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어설픈 의심이라도 
의심의 특성상 그것에만  몰두해야 하므로 다른 모든 일을 못  하게 
되어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공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무리하게 장좌불와를  한다든가 하면 몸만 지칠 뿐,  추
번뇌는 잘  제거되지 않습니다. 의심법은  제팔 아뢰야 미세망념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상기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앞의 두 방법은 상기에  닥쳐 그것을 극복할 수 있고, 그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생이든  금생이든 상기의 단계(행주좌와어묵동
정일여 이전)도 못 벗어난 사람이 화두의심법으로 수행하면 상기를 
극복할 수가 없어 공부를 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착각도인을 양산합니다.
  앞의 두방법은 다른 경지에 다다른다 하더라도 그저 다른  것이려
니 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의심법은 특성상 무언가 해답을 찾아
내려 하므로, 어떠한  다른 경지에 다다르면 그것을 성품으로 착각
하여 견성했다고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또렷또렷한  순수한 의식이라든가, 공부가 많이 된  사
람이라면 제팔 아뢰야식을 성품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영원히 깨달은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하지  않
으면 차츰 매해져서 어느 틈에 숨어 버립니다. 따라서 나중에 늙어 
노망하거나, 노망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공부수준을 깨달아 처음부
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태까지 일어납니다.
  또한 이렇게 깨달은 사람이 견성했다고 하며 제자들을 또한  견성
인가를 하게 되면, 이러한 수준은 그다지 높은 것이 아니므로 수많
은 사람을  인가하게 되어, 착각도인을  양산하여 불법을 쇠퇴하게 
합니다. 


번호:6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6 02:17  길이:72줄
제 목 : [청정회] 단계와 수행법 - 연장의 비유

   < 단계와 수행법 - 연장의 비유 >
  
  이제까지 세가지 수행의 방법과 그 방법의 의미를 살펴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은 단계에 따라 정확한 지도 아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행을 하여 견성을 하는 것을 불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유해 봅시다.
  
  불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큰 나무를 커다란 도끼를 가지고 불상의 
대강의 형태에 맞추어 깍아냅니다. 
  그리고는 중간정도의 자귀를 가지고 어느정도 불상의 모양을 이루도록 
다듬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조각칼과 같은  세밀한 연장으로 아주 미세한 곳까지 조
각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에서 큰 나무를  도끼로 대강 다듬는 것은 관법이라 할 수 있습니
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여 아직 중생의 때를 하나도 벗지 못하고 번뇌에 휘
말리며 무기에 빠져 멍청히 시간을 보내는 때가 대부분인 사람이 우선 수
행의 틀을 세워 수행자로서의 변신을 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주변에 휘말리려는 마음을 관법으로 일깨워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정도의 자귀로 불상의 모양을 만드는 것은 념념상속법에 해당
합니다.  
  어느정도 정신은 차려 수행은 해 나가지만 아직 추번뇌가 그대로 있어 하
루중 어느 때도 망각함이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수행자가 그 수행의 
영역을 확보하여 삼매가 이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할 때조차 빈틈이 없다면, 깊은 잠속에서도 밝게 깨어 있다면 이 연장
은 그역할을 충분히 다한 것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밀한 조각을 하는 조각칼은 의심법에 해당합니다.
  수행이 하루종일 이어지지만 아직 미세망념을 제거하지 못하여 성품을 보
지 못하고 중생으로 살아가는 수행자가 깊은 삼매를 추구하여 미세망념을 
모두 제거하고 수행이 극에 달아 돈오함으로 이끌어주는 돈교법의 결정적인
방법입니다.
  조사가 유전돈법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수행법은 체계적이며  필연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
경전에서도 이러한 수행법이 나올때 각 경전이 불법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정
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면 수천년을 이어온 불법의 수많은 가지가 단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무지하게 수행을 한다
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불상을 조각하는데 미세한 조각도로 처음부터 집채만한 나무를 깍아간다면 
그것이 될 것입니까. 조각도는 망가질 것이며 또한 불상은 대강의 형태도 갖
추기 전에 공인은 일생을 다할 것입니다.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이 도구의 선택
잘못으로 헛되이 되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수행이 안된 사람이 처음부터 화두를 든다거나 한다면 순간의 
삼매는 추구할 것이나 그것이 얼마나 갈 것이며 그런 식으로 언제나 추번뇌
를 다 제거할 수가 있습니까. 
  추번뇌를 그러한 고급한 수행으로 제거하는 것은 마치 험악한 돌산에 길을
내지도 않고 아스팔트만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요철을 다 평평하게 하지
도 않고 아스팔트만 들이 붓는다면 언제나 그 산에 길을 낼 것입니까. 아스
팔트는 평평하게 다듬은 길에 마지막으로 마찰이 없는 최상의 도로를 만들기
위해 바르는 것입니다. 
   
  또한 커다란 도끼로 세밀한 조각을 마칠 수 없다는 것또한 당연한 일입니
다.
  관법과 같은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충격을 주며 수행을 이어나가도록 하지
만 세밀하지 못한 수행으로 미세망념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찌 그 단의 수행자가 택할 수행이겠습니까.   

  바른길을 놔두고 힘들여 돌아돌아 일생을 허비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닌 것입니다. 
  
  
번호:6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8 10:58  길이:55줄
제 목 : [청정회] 수행의 세가지 고비
 
  < 수행의 세가지 고비 >

  수행자기 수행을 하게 되면 반드시 지나게 되는 세가지 고비가 있습
니다. 
  그 고비들은 스승의 도움과 그에 따라 고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체
계적인 수행법의 제시를 통해 지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도움이 없다면, 수행자는 오랜시간을 들여 헛되이 헤매
거나, 설사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한두 고비를 지난다 하더라도 금
생에 수행을 마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한가지 에외가 있다면 전생에 스승 밑에서 수행을 했을 경우인
데 한번 한 수행은 몸을  달리 받더라도 다시 회복하기는 쉬우므로 이
런 경우에는 스승이 없다 하더라도 전생의 경지까지는 다다를 수 있습
니다.

  앞에서 나눈 수행의 단계는  사실은 이러한 고비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가지 고비를 지나게 되면  다른 단계로의 도약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계가 그
대로 고비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아무 고비 없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
가기도 합니다.
  
  세가지 고비를 단계와 같이 알아봅시다.
  첫번째, 상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통과하더라도 아직 행주좌와어묵
동정일여에도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수행을 시작하여 강도 있게 나아
가다 보면 반드시 만나거나  이에 해당하는 단계를 지나게 됩니다. 이
것은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므로  수많은 수행자가 이 단계에서 좌절
하게 됩니다.
  
  두번째, 말할 때의 통과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과하면 그대로 행주
좌와어묵동정일여의 단계를 뜻하며  이후의 단계인 몽중일여와 숙면일
여는 특별한 고비 없이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24시간이 꿰
뚫어져 한순간도 아닌 때가 없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말할 때를 통과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상당히 힘든 단계입니다.

  세번째, 내외명철에 이르는  고비입니다. 이것을 통과하면 돈오하여 
견성하므로 마지막  고비인 것입니다. 물론 두번째  고비를 통과한 후   
숙면일여에 이르르면  그때부터 수행은 저절로  되어지므로 힘든 것은 
없지만 스승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매우 어려우므로 이때가 스승
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게 되는 때입니다. 

  말할 때의 통과 이후의 설명은  되도록 그 의미를 감추기 위해 명쾌
히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유보할 것입니다. 수행의 전체적인 체계를 
명확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자신의 단계에서 거리가 먼 단계
의 수행을 자세히 들어 그에  대한 상을 세우게 되면, 없는 것을 만들
어 엉뚱한 방향으로 수행을 이끌고 나아가므로 듣지 않는 것이 낫습니
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 다다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말한 표현 이외
의 표현으로 직접 자신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으로 수행을 점
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전,  어록이나 다른 수행자의 말을 들어 자
신이 되든 안되든 그것을 말할  수도 있으므로 직접 보아야 할 것입니
다. 
  참고로 저는 이러한 단계를 다  통과한 것이 아니며 제가 감당할 수 
없으신 분은 저의 스승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번호:65/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18 10:59  길이:84줄
제 목 : [청정회] 첫번재 고비 - 상기
 
  < 첫번째 고비 - 상기 >

  상기는 수행자가 맞이하는 첫번째 고비입니다. 

  물론 중생의 삶을 살다가 수행의 길로 처음 들어서는 초발심의 과정
도 힘들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직  수행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지 
않은 것이므로 수행 중의 고비라고는 말할 수가 없으며 여기에서 말하
는 고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 그러한 과정도  쾌락에 젖어서 사는 삶의  큰 물줄기를 청정한 
수행의 길로 돌리는 일이므로  수행보다는 애욕에 대한 갈등같은 유치
한 주제가 길을 가로막긴 하지만 나름대로 힘들 것입니다.
  참고로 수행자가 애욕으로 걷잡을  수 없이 갈등한다거나 하면 그것
은 애처롭게 볼  것만이 아니라 정말 수행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여기면 됩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중생이 이 길을 알면서도 들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
면 이 과정도 어렵긴 어려운 일이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상기를 이야기하면 이는 수행의 첫번째 고비
이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수행을  해야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상기
가 일어났다고 하면 그래도 열심히 한 것만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상기는 수행이 한참 진전되어  웬만큼 수행에 감을 잡고 본격적으로 
수행을 해 나가다 점점 진전되는 것에 몰두하여 과도히 수행을 이끌어
갈 무렵 나타나게 됩니다. 수행을 시작한지 최소한 7-8개월 정도 후에 
하루 10시간 이상을 수행에 쏟아 부으며 매진할 무렵이며, 수행방법은 
느슨한 관법같은  것에서는 거의 이에  다다르기 힘들고 념념상속법과 
같은 강도높은 수행에서 나타납니다.

  상기의 현상은 우선 가장 첫째로 수행에 반하여 나타난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할 수록 더욱  더 현상이 악화되며 수행을 
쉬면 나아집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 때문에 수많은 수행자가 상기의 벽을 뚫고 나아가
지 못하고 경학자가 되어버리거나 아예 길을 바꾸어 버립니다.
  상기를 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도 상기에 타협하여 돌파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는 것을 돌파한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기의 증상이 사라진 것은 타협하여 수행을 쉰 것이며 돌파하여 상
기를 뚫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돌파하였을 때는 다른 표현이 있습니
다.   
  
  육체적인 증상으로는 처음에는 호흡이 안되고 몸이 차가와지고 머리
로는 열이 올라가며 어딘가 막힌듯한 증상이 있다가 이를 무시하고 수
행을 계속해 나가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며 침이 마르고 몸이 마비되
며 목이 붓고 죽을것 같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돌파할 수 있습니까?
   
  상기의 원인은 분발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분발심이 신심과 
조화를 이루게 되면 상기라는  부조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어느정도 수
행이 되면 분발심의 정도가 매우 높아져 그저 경전을 읽고 아 정말 불
법은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정도의 신심으로는 이것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순수한 신심을 불러일으
켜야 하는데 이것은 깊은 산속의 절에서 새벽예불을 드릴 때의 경건함
과 순수한 마음 같은 신심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신심을 수행을  하면서 일으킬 수 있을까요? 또한 이
러한 신심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상기의 고비를 완전히 돌파하기까지는 
몇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그 기간 내내 이것을 유지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소리듣기 공부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수행을 원
래는 마음속으로만 하지만 그것을  소리를 내어 경청하여 들으면서 하
게 되면, 또한 이것을 염불과 같은 음에 맞추어 하게 되면, 자신의 마
음 속으로부터 모골이 송연한 신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
다. 바로 이것으로 분발심과  신심을 조화를 시켜 나가면서 계속 앞으
로 나아가 상기를 돌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아갈 수 있는 방
법을 제시한 것일뿐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
법이 있다는 것은 상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것이며 
상기를 지날 수 있는 제가 아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소리듣기 공부는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며  그 방법은 실제로 
하게 되면 익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글만 가지고 하려고 하면 그
것은 제가  말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녹음테이프와  같은 것으로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듣고 또한 직접 지도를 받아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
다. 하지만 사실 직접  상기에 달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
에 금방 익힐 것입니다.

  소리듣기 공부도 상기를 완전히  지나면 필요가 없으며 다른 해결책
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번호:68/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21 12:12  길이:61줄
제 목 : [청정회] 두번째 고비 - 말할때의 통과

 < 두번째 고비 - 말할 때의 통과 >

  상기라는 고비를 넘긴다면 수행은 이제 나아갈 준비를 어느 정도 갖
추었다고 할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헤메면서 
고생을 했지만 이제는 조금은 수행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열심히 
정진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진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수행이  하루종일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시
때때로 자신이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번뇌에 끌
려다니며 욕망에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또다시 수행으로 돌아오
고는 합니다. 

  바로 이때  깨어 있는동안 단 1초도 수행을 망각하지 않는 대분발심
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한 상기의 고비를  넘기는 데에는 대신심이 
필요하였지만 이 고비는 바로 대분발심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깨어있는 동안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엄청난 체력과 정
신력의 소모가 일어나며 정신력은 수행으로 자연스럽게 솟아난다고 하
지만 체력은 어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마모됩니다. 체중이 몇키로씩 
빠지며 먹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훨씬 많아 몸을 위해 먹는 것이 고역
스럽기까지 합니다. 

  또한 이제까지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수행에 많은 지장을 주지 않았
지만 이제는 다른 시간에는 놓치는 시간이 없지만 잠잘 때와, 깨어 있
을 때는 바로 이 말할  때에 망각을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큰 방해
로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말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수행자는 묵언을 하거나 묵
언의 효과가 있는 토굴 등에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한가지 밝혀둘 것은 이러한 시기도 되지 않았는데 묵언을 하거나 토
굴에 들어가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며 나아가 해를 끼친다는 것
입니다. 단계가 안된 수행자가  토굴에 들어가 수행을 하면 잘해야 잠
만 늘거나  못되면 무기에 절어 접신하기  안성맞춤인 것입니다. 또한 
일상생활의 번뇌는 그대로 놔두고 말만 안한다고 얼마나 수행이 될 것
입니까. 도리어 속으로 망상만 늘릴 뿐입니다. 

  대신심은 소리듣기 공부를 통해서  일으킬 수 있지만 대분발심은 어
떻게 적용할 것입니까. 
  단계에 이른 사람이 대분발심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
이 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
다.

  이렇게 깨어있는 동안 끊임이 없는 공부를 계속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게 됩니다. 바로 이 변화를 알게 되면 수
행자는 깨어 있는  동안에는 잠시도 놓침이 없이  이어지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것이 이어져 잠잘 때도  공부를 하게 됩니다.  잠잘 때 꿈속
에서의 공부를 아는 것은 바로  말할 때의 공부가 어찌 되는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꿈속에서 공부가 한두번 되는 것을 느꼈다고 그
것이 몽중일여는 아니며 그것은 아직 잠꼬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
습니다.  

  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말할  때 이후의 수행은 수행자를 위해서 
자세한 것을 밝히지 않으나 바른  법을 밝히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하였
습니다. 자신의 수행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구체적
인 내용은 수행의 정도에 따라 필요한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번호:69/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0/27 10:57  길이:55줄
제 목 : [청정회] 세번째 고비 - 내외명철

  < 세번째 고비 - 내외명철 >

  수행이 말할 때의  고비를 통과하여 24시간 어느  한 순간도 번뇌에 
휩쓸리는 순간이 없다 하더라도  아직 돈오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
니다. 

  추번뇌는 제거하였더라도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은 아직 송곳처
럼 수행을 뚫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항상하는 아뢰야식을 성품으로 착각하여 돈오를 했다 하면서 
수행을 그만두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행을 자신이  되돌이켜 본다면 아직 제거하지 못한 
미세망념과 미세무기가 있고 또한 오랬동안 수행을 그만두면 퇴전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정직한 수행자라면 다시 수행을 시
작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착각을 하면 생각을 고치기가 
쉬운 것이 아니기에 많은 수행자가 죽음에 이르러 자신의 잘못을 발견
하곤 해  왔던 것입니다. 설사 불퇴전의  경지인 숙면일여를 넘어섰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남은 마지막 고비를 넘지 않을 것입니까.

  그러나 이 마지막 고비는 스승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앞의 두 고비가 대신심과 대분발심을 각각 이용하여 넘어설 수 있다
면 이 고비는 바로  대의심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대의심은 
스승이 기연에 의해  돈발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 줄탁치기에 
해당하는 거의 돈오에 이른 수행자를 단번에 내외명철하여 돈오함으로 
이끄는 것도 바로 스승의 역할인 것입니다. 

  화두는 이 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써온 념념상속법과 같은 
수행법은 추번뇌정도를 제거할 수는  있지만 더욱 깊은 삼매로 들어가
기에 적합치 않아 미세망념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추번뇌조차 
제거 못한 수행자라면 화두는 의미가 없지만 이 때는 대의심으로 깊은 
삼매를 추구해야 할 때이기 때문에 화두의심법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장좌불와 또한 이때 필요한  것입니다. 화두는 그 성격상 다른 일과 
병행할 수 없으며, 이 때의 삼매는 밥을 먹다가도 밥숫가락을 든채 삼
매에 들  만큼 깊은 삼매이므로 좌선수행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또한 
그 수행 또한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일을 하거나 놀거나 어느 때에
도 한 순간도 망각함이 없으나 내외명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24
시간의 좌선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장좌불와는 저절로 되는 것이므로 결코 어려운 것이 아
닙니다. 어느 때나 삼매에  들어 있으므로 몸만 좌선이라는 편한 자세
를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에 이르지 않은  장좌불와는 오히려 정체함만을 만들 뿐입
니다. 많은 경전에 이를 경계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기왓장을 갈아 거
울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이 가지 않는 몸만 다그쳐 장좌불와를 한다
고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체함이 무기를 부추켜 많은 
경우 접신하거나 무기에 절은 중생을 만들 뿐입니다. 
  사실 스승이 있다 하더라도 스승과의 인연이 맞지 않거나 하다면 숙
면일여까지는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내외명철하여 돈오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조스님의 휘하에서도 80여명의 선지식이 있었지만 정작 돈오한 사람은 두셋에 불과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숙면일여에 이른 수행자라면  다음 생에서도 그 수행을 쉽게 회복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견성 성불할 것입니다. 


번호:7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1/01 12:43  길이:39줄
제 목 : [청정회] 수행의 시작 

  < 수행의 시작 >

  이제 수행을 시작합시다. 
  수행은 글로써 배우기는 힘듭니다. 수행자를 직접 만나야만 모든 것
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수많은 오류를 범할 가능
성이 있으며 사소한  실수는 스스로 알아 바로잡을  수 있겠지만 어떤 
것은 스스로 알지 못하여 큰 잘못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을 글로 모두 경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경계한다 하여도 무
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면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암을 수술
하는데 책만 읽어 혼자서 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듯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훌륭한 의사와,  낫겠다는 의지, 같이 고생하는 친구
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글로써 모든 것을 전달해야 하니 오직 
이 글을 읽고 수행을 하시려는 분들이 저희를 찾으시거나 옳은 선지식
을 찾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떻게 옳은  선지식을 구별해 낼 것입니까?  중생의 눈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번뇌와 무기에 절어  있는 마음이 청정한 
마음을 본다 하여도 그것이  청정한지를 어찌 알 것입니까. 마치 청정
한 척 하는 수많은 외도들의  현란한 말과 글에 마음을 빼앗겨 판단을 
그르치기가 일쑤인 것입니다.
  참 선지식을 만나기는 어렵고도 어려우며 많은 경전에 수백 생을 통
하여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갖기가 힘들다 하였으니, 당신이 마음의 
스승과의 인연이 닿아 바른 법에 눈을 뜰 기회가 있기를 염원하겠습니
다.
  
  수행의 시작은 스승과 스승으로부터의 옳은법 그리고 도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당분간은 글 속의  제가 당신의 스승과 도반의 역할을 하여 
제가 들은 법을 전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하여도 끝이 
없는 것은 참스승과 도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호:7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1/01 12:45  길이:75줄
제 목 : [청정회] 수행하기

  < 수행하기 >

  당신이 지금까지의 글을 읽어  왔다면 왜 처음의 단계에서는 관법과 
념념상속법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 것입니다.  모르겠다면 다시 앞의 
글을 읽어보거나, 자료실의 '참선수행의 기초'를 읽어보십시오.

  당신의 수행의 경지가 높아 모든 추번뇌를 제거하여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공부가 끊이지 않는다면 저를 찾아오시어 저의 스승님께 점검을 받으십시오. 만약 맞다면  저와 같이 깨치지 못한 수행자는 도반
일 뿐이지 당신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스승님이 당신의 의심을 돈발
시키시어 직접 화두의심법으로 공부를 시키실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관법의 단계를 벗어나지도 못하였습니다. 수행을 해 보
았다면 수시로 다른 생각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다시 수행으로 돌아오
곤 하는 것을 느끼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나 미혹하면 자신의 마음
이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막기 위해 관법의 요소가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관법은 하기가 쉽고 편한  대신 한 번뇌를 힘있게 밀고 나아가
는 것이 부족하여, 본 수행으로는 념념상속법이 효과적입니다. 
  이 두가지를 절충한 형태가  바로 념념상속법을 숫자를 세면서 하는 
것입니다. 숫자를 세는 것이 바로 수식관의 요소입니다. 

  보통 절에서 염불을 할  때는 염주를 가지고 숫자를 세어 나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식관에서와 같이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는 것보다 당
신의 마음이 번뇌에 끌려가는  것을 막는 효과가 적습니다. 딴 생각을 
하면서 염주만 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항상 염주를 들고 다
녀야 하니 불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만개, 이만개, 삼만개를 센다는 것은 기억하기도 
힘들 뿐더러 한 번뇌를 일으키는데 꽤 큰 방해가 됩니다. 사실 숫자를 
세는 것부터가 다른 번뇌이지만  처음에는 도리어 수도없이 많은 번뇌
를 막아 주므로 세는 것입니다. 따라서 숫자를 손으로 세어 천개 단위
로 다른 곳에 표시를 해둔다면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념념상속법은 염불을 할 수도  있겠지만 주력이 좋은 점이 많으므로 
주력중의 '옴마니반메훔' 을  택합니다. 저의 스승님도 어렸을 적에는 
염불을 하셨지만 염불은 그것이  부처님의 이름을 염한다는 뜻을 알게 
되면 그것에 의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당장 몸만 아프더라도 관세음
보살님 저좀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의지하니  이것이 수행자에게 될 
말입니까. 
  주력을 할 때에는 가능한 빠르게  1초에 1번 이상의  빠르기로 합니
다. 딴 생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는 것은 소리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십시오. 한 번뇌
를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므로 마음속에서  하기가 힘들고 잘 안 될 때 
소리를 내어 합니다. 또한  어떠한 장단이나 음을 넣어 하지도 마십시
오.
  장단이나 음을 넣어 천천히  한다면 타성에 빠지기 쉬우며 한생각으
로 힘있게 나아가기 힘듭니다.
  호흡은 들이킬 때는 염하지 않고 내쉴 때만 한 호흡에 열번 이상 스
무번 정도 염합니다.  
  주력에 대한  어떤 의미도 모르고 하십시오.  알더라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한 생각을 위한  방편일 뿐 다른 어떤 의미도 두지 마
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주력은 신통을 얻는데  쓴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주력이 그런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이니 
어떠한 왜곡된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의 수행을 이야기할 때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쉽다 어렵다의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쉽기로야 념념상속법보다야 관법이 쉽고 
뜻도 모르는 주력보다야 말이 잘나오는 염불이 쉬울 것입니다.  
  사실 수행이 너무 힘든 사람은 안하는 것보다야 쉬운 수행이라도 하
는 것이 나으므로, 또  그렇게 근기가 향상되어 나아가므로 쉬운 수행
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금생에서 성불할 수 있을 것을 목표로 한 수행정도
를 기준으로 그것을 위한 최선의 적합한 난이도와 방법을 택한 것입니
다. 그리고 해 보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참고할 것은 수행의 수준이 높아지면 하는 방법 또한 달라지므로 수
행정도에 따른 적절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자세한 것은 자료실의 [수행하기] 와 [ 참선수행의 기초]를 참고 하
십시오.

   
번호:7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1/04 12:33  길이:69줄
제 목 : [청정회] 수행하기 2 - 호흡

  < 수행하기 2 - 호흡 >

  호흡은 수행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호흡
에 붙어 있으니 수행을 호흡에  붙여 한다면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수행을 하게 되므로 이 얼마나 큰 이로움입니까. 
  이러한 중요한 요소를 제대로 활용치 못한다면 걷는 법을 배우지 못
하여 기어다니는 꼴이니 목적지까지 다다르기가 힘든 것은 물론이려니
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호흡이 수행은 아닙니다.  수행은 우리가 들고 있는 한가지 번
뇌인 방편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여 몸이 건강해지고, 아
픈 곳을 없애며, 활력있게  되는 것은 수행과는 상관 없이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수행자가 원하는 목표가 아닙니다.
  하물며 호흡으로 기를 모아 기를 운행한다든지 하는 것은 수행에 반
하는 행위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한생각으로 나아갈 것이지 
기라든가 몸이라든가  하는 다른 대상으로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수행자들이 많이 쓰는 호흡은 가슴이나 어깨부분으로 하는 흉식호흡
이 아니라 복식호흡입니다. 호흡이  깊지 못한 죽기 전의 병자들은 호
흡이 더욱 위로 올라가 거의  어깨나 목에만 이르니 복식 호흡이 좋은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복식호흡으로써  많이 유행하는 것으로  단전 호흡이 있는데 
이는 건강증진이나  기의 수련에는 좋을지  모르나 수행에는 부작용이 
많아 쓰지 않습니다.
  우선 단전 호흡의 방법에 기의 운용이라는 면이 있어 수행자가 방편
이 아닌 다른 곳에 끌려다니게 합니다. 
  둘째 많은 사람이 경험하듯이  호흡의 특성상 성욕을 자극하는 효과
가 있어 수행자에게 크나큰  번뇌의 마장을 안겨 줍니다. 성욕은 중생
의 가장 근본적 번뇌의 하나인  고로 수행이 깊어지기 전에 이러한 번
뇌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면 수행하기가 열배 어렵습니다.
  셋째 기공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운기를 하는 도중의 상태가 
편안한 상태로 무기에 빠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경계해야할 무
기를 찾아서 빠진다는 것은 수행자에게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넷째 단전으로 호흡을  내리다 보니 밥을 먹을  때라든가 운동을 할 
때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단 일초라도 놓치는 순간이 없어야 하는데 
호흡 자체를 못하는 때가 있다는 것은 큰 단점입니다.

  그리하여 이 수행에는 불가에서 내려오는 복식호흡인 태식호흡을 씁니다. 이 방법은 위의 모든 단점에 대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행을 위하여 만든 호흡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태식호흡은 갓 태어난 아이가 하듯이 배꼽위에서 명치 사이의 부분을 숨을 들이킬 때에는 내밀고  숨을 내쉴 때는 당기며 하는 호흡입니다. 
  주의할 것은 숨을 들이킬 때는 방편을 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행에 리듬을 주어야 하고 또 들이킬 때가지 수행을 하면 지나친 무리를 하여 부작용이 일어나므로 들이킬 때는 빨리 들이키며 그 순간에는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내쉴  때는 길게 내 쉬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방편을 염합니다. 

  참고로 그밖의  좋은 점을 열거하자면  복식호흡은 횡경막이 움직여 
하는 호흡이라 호흡이 깊고 길어져 안정이 되고 폐활량이 커집니다.
  또한 태식호흡의 특성상 위와 장을 계속 자극하여 소화가 잘 되도록 
하고 식사 중에도 호흡에 지장이 없습니다. 

  태식호흡도 상황과  번뇌의 정도에 따라  태식호흡, 지식호흡, 반씩 
섞어서 하는 호흡, 받치는 호흡, 돌리는 호흡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야 
하나 이것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한가지, 매우 끈질긴  번뇌에 시달린다면 지식호흡으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숨을 멈추어 방편을  염해 보십시오. 목숨이 끊어질 판에 끝까
지 남아 있을 번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호흡 또한 매우 섬세한 지도를  받아야 하므로 직접 찾아 오시어 지
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호흡이 제대로 익혀지는데는 1년여가 걸리며 
같이 수행하는 법우들 역시 수많은 잘못된 점을 서로 발견하곤 하므로 
점검을 받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번호:7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1/06 06:43  길이:45줄
제 목 : [청정회] 수행하기 3 - 결인, 혀말기

  < 수행하기 3 - 결인, 혀말기 >

  당신이 방편을 들고 나아가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순
간 순간 경계에 끌려 어느  틈엔가 망각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허다합
니다. 
  수행 중에서 바로 이 최소한 어느 순간에도 완전히 수행을 망각하지
는 않도록 하는 요소가  관법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방편 하나 
하나를 세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이것만으로  지금까지 수천 수억생에 걸쳐 쌓
아온 습기를 없앤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어
느 틈엔가 못된 버릇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러한 번뇌와  무기를 완전히 차단하여 어떠한 망
상과 혼침도 한  방편 사이로 뚫고 들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호
흡, 결인, 혀말기의 삼중벽을 쳐야 합니다.  

  호흡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목숨에 걸어 번뇌와 무기를 막습니다. 
그러나 호흡을 어느 때고 망각하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수행이 되기 
전에는 힘든 일입니다.

  결인은 좌선시에는 한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려 놓고 엄지손가락 끝
을 맞물려 타원형의 꼴을 만들고, 평상시에는 그리 할 수 없으므로 한 
손으로라도 엄지와 검지 끝을 맞물려 원형을 만듭니다. 
  여기에서 모양이 이그러지거나 손가락 끝이 떨어지거나 하면 수행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어느 때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좋은 자극
제입니다. 

  혀말기는 혀끝이 목구멍 쪽으로 향하게  혀를 말아 입천장으로 붙이
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혀가  떨어져 바닥에 닿거나 쫙  펴지거나 하다면 번뇌와 
무기가 뚫고 들어와 당신이 수행을 놓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그 즉시 
수행을 다그쳐 정신을 차리고 혀를 말아 붙여야 합니다.
  처음 혀를 말 때에는 이삼일  혀뿌리가 조금 뻐근할 수도 있지만 익
숙해지면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침이 잘 나와 소화를 돕고 이 
사이가 약간 떨어지도록 하여 충격을 줄여 줍니다. 
  깊은 잠을 잘 때에도 어느 때고 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묵동정일여의 검증법이 되기도 합니다. 
  호흡, 결인, 혀말기의 삼중벽을  잘 활용하여 번뇌와 무기를 철저히 
막아 낸다면 제아무리 중생이 찌들어  있는 수천 생의 습기가 크다 하
여도 머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 수행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번호:9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1/28 23:30  길이:100줄
제 목 : [청정회] 수행과 생활 1 - 의미, 영역

  < 수행과 생활 1 - 의미, 영역의 확보 >

  수행자도 역시 생활을 합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생각을 하며 놀
고 자고 배설합니다. 때론 아프기도 하며 어쩔 수 없이 번뇌에 시달리
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인데 그러면 수행은 무엇입니까? 
수행을 한다면 바람과 같이 모든 것을 떠나 세속의 어떠한 고통으로부
터도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까? -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출가하여 깊은 산중  동굴 속에 틀어 박혀 세속의 모
든 것을 끊었다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자유로운가요? - 아닙니다.
  아, 그렇다면 수행이란 말짱  작위의 소치이군요. 중생은 그저 고통
스러운, 때론 기쁘기도  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거늘 어찌 
마음을 일으켜 자유롭다고 합니까? - 그래서 당신이 자유롭습니까?
  평상심이 도라고 하지들  않습니까. 한마음 돌이켜 보통때의 마음을 
편안히 한다면 그게 깨달음이 아닙니까? - 그래서 당신은 진정으로 자
유롭습니까? 
   
  무지한 자들과 욕망에 끌리는  자들은 수많은 편안한 합리화를 합니
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깨닫는다면 일상의 어느 순간에
도 자유롭습니다. 밥을 먹거나 일을 하거나 이야기하거나 웃거나 어느 
곳에도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지금 당장 근심걱정  다버리고 편안히 산다고 해서 자유롭습니
까? 당장에 단 일초라도  자유롭지 못하여 끊임없는 번뇌와 무기에 시
달리는데 그것도 몰라 한가한 도인 흉내를 냅니까?

  평상심이 도라 하여 마조 스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글자만 줏어대며 
자신의 상태도 모르며 수행을 하지 않으며 지낸다면 정말 무지를 한탄
할 따름입니다. 깨달으면  어느 순간이고 평상심이지만 깨닫지 못했다
면 평상심은 커녕 꿈속을 헤메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마음 편하고 등따습고  배부르며 즐거우신 분일지라도 이 말을 
이해하시어 자신의 처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생활이 수행과 다르다면, 수행이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
라 당신의 생활이 방일한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
을 뜯어 고치는 일인데 그저 하루 몇시간 수행한답시고 열을 내다가는 
밥먹고 놀때는 이생각 저생각  끄달리는 것은 당신을 기만하고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모든 순간의 당신을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24시간의 
단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번뇌와 무기의 구렁텅이로 끌려가는 당신
을 곧추 세우는 것입니다. 다리를 틀고 앉아 삼매에 든다면 그것은 수
행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지 수행의 전부가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영역의 확보입니다.
  처음에는 좌선이나 해야 수행이 되고, 시간을 내어 안간힘을 써야만 
수행을 하지만, 차츰 차츰  당신의 모든 생활 속으로 수행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걸어다닐 때도 되고, 차를 탈 때도 되고, 세수할 때도 되고 
밥을 먹을 때도 되다가는 잡담할  때도 되고 놀때도 되고 읽을 거리를 
읽을 때도 되며 나아가 잠을 잘 때까지 그 영역을 확보해 나아가는 것
입니다.

  영역의 확보는 무엇으로 해 냅니까?  그저 열심히 어느 때고 정진하
기만 하면 됩니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중생은 그것이 너무
나도 힘듭니다. 중생의  마음은 그리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
다. 조금 하다 힘들거나  지루하면 분명히 다른 곳으로 주의가 옮겨지
고 정말로 집중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행에 목표량을 정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양을 정하여 최소한 그 양은  해 내야만 하루를 마치도록 하는 것입니
다. 
  그리 하면 질은 어떨지 몰라도 양적으로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수행
을 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수행을 하는가 하지 않고 있는
가를 객관적인 숫자로 알  수있습니다. 목표가 있으므로 그날 그날 목
표를 달성함으로써 수행을 하도록  합니다. 또한 목표를 계속 늘려 나
감으로써 나아가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행의 질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좌선도 하고 조금 더 집중해
서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
로 최소한의 절대적 수행량의  확보입니다. 하루 서너 시간 깊이 있게 
수행하는 것보다 24시간 내내 정도는 약하더라도 최소한 건너 뛰는 시
간은 없도록 수행하는 것이  백배 낫습니다. 바로 그것이 또한 질적인 
향상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서너 시간 좌선하여 깊이 수행을  한다 해도 그것이 다음 날까지 이
어지지 않으면 수행력은 맹탕으로  돌아가 다음날 또다시 바닥부터 수
행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십사시간 내내 계획된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
을 한다면 어느 틈엔가 비어 있는 시간들이 수행으로 채워지며 목표량
이 늘어날 수록 틈새는  메꾸어져 결국에는 수행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단계에 이른다면 그 때부터는 질적인 향상이 진정으로  문
제가 되는 때입니다. 이미  커다란 공백은 모두 메꾸었으니 수행의 절
대량으로는 이제 얻을  것이 없고 수행의 질적  향상이 바로 나아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여 이
상의 단계, 절대량으로 친다면 주력수행이라면 하루에 삼만 번 이상을 
최소한 수개월 이상 해야 그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양적인 확보를 우선할 것이
며 변화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점검을 받은 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번호:95/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5/12/07 23:01  길이:58줄
제 목 : [청정회](공고) 불교수행학교 - 언제, 어디서

Title : 불교 수행학교, 언제,어디서!

불법을 만나기가 눈먼 거북이  바다에서 고목잡기처럼 어렵다고 합니다. 요즘은 
불법을 접하기 어렵다기보다는 바른 수행법을 얻어 바른  수행의 문에 들어가기 
어려운 시절입니다. 

불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두번쯤  수행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의 삶을 관통하면서 힘있게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분은 드물것입니다.  선지식
을 찾아서 여러곳을    돌아도 다녀보았을 것입니다.   시원한   감로수와 같은 
자신에게  갖는 수행법을 찾고 계신분들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립니다. 

천리길을 가려면 첫 한걸음을 잘 골라서 떼어놓아야 합니다. 
불교수행의 첫걸음을 배울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수행 
방법을    배울수 있고 직접 수행의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불교수행모임 청정회에서 "불교수행학교, 4박5일  출가생활"을  아래
왁 같이 개최할 예정입니다.
  
        일    시 : 1996. 1. 10. ∼ 1996. 1. 14.
        장    소 : 경북 선산 도리사
        접수마감 : 95. 12. 31.
        접수방법 : 전화나 방문으로 접수. (Tel : 880-8627)
        회    비 : 40,000원 (차비포함)
                   서울대에서 대절 버스로 출발
         문의전화 : 880-8627 (청정회)


번호:32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7/14 09:24  길이:44줄
제 목 : 꼭 봐야 할 참선 지침서

  불법을 만나신 분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할 것입니다. 모든  경전의 진의를 꿰뚫어, 요
약경이라고도  불리울 만큼  불법의 요체를  명료하게 밝힌  저서를 
우리의 시대에  우리의 언어로 접하였습니다. 3000년을  이어내려온 
부처님의 말씀이  흩어지고 변화되고  수만권의 분량으로 방대해져 
지금 그에  대해 감조차 잡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선지식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오직  스승을 따를 뿐이지만 경전으로 
들어선다면 그  의미를 아는  데만 평생을 쓰고도  서로 다른  말로 
싸울 것이니 여기 이러한 책을 접한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취암 강정진 저 <영원한 대자유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 1 부 )  
불교에 접하여  수행을 시작하고 살아가며 일상  속에서 수행이 나
아가고 수많은  인연과 스승의 도움 속에  매진하여 깨달음에 이르
기까지를 경험으로부터 쓴 구도기.

 ( 제 2 부 )
불교란 무엇이고  수행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여 부처가 되는가.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명확하고 간결한 어조로  정의를 내려 불교
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뜨이게 하는 장들과 수행의 단계, 수행
중 닥치는 난관,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 그리고 수많은 수행법들의 
의미와 그 위치를 밝힌 장들.

 ( 제 3 부 ) 
남북방 불교에 대하여. 현재 불교의 위기상황을 밝혀 그 원인이 된 
가짜 선지식들의  출현을 말하고 그들을 구별하여  스승을 찾는 방
법을 밝힘. 돈오점수의 허구성.

( 본문 중에서 ) 
 중생이란, 무기와 번뇌라는  속성이 주체인 자성을 망각하게  하고 
어둡게 하여, 속성이 삶을  주재하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중생은 
그 속성이 주재한  것은 인이 되어 연을  만나면 과로 받는 피동의 
육도윤회만 계속하는 업생인 것이다. 
  부처란, 중생이  수행에 의하여  무기와 번뇌를  망각하지 않음인 
불망과 어둡지 않음인 불매로 그 속성을 바꾸어, 주체인 자성이 삶
을 주재하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부처는 그 속서이 자성을 영겁
토록 망각하지 않게 하고 영원토록  어둡지 않게 하여 능동의 삶만 
영위하는 원생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중생과  부처는 속성의  차이에서 업생과  원생으로 
나누어지므로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속성을 부처의 
로 바꾸는 수행을 해야 한다....


번호:38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07 01:34  길이:2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 서문

- <영원한 대자유인> 서문 -
 
   중생들에게 궁극적인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고 답할 것이다. 중생들의 이러한 소망은 수행을 통하여 성불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불은  중생들이 이루어야 할 절박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려면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반드시 알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첫째, 수행자는 중생과 부처의   차이와 수행의 정의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즉, 
수행자는 중생과 부처의 속성은 무엇이며 그 속성으로  인하여 어떠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과 수행의 정의를 모르고 수행에 임하면  차라리 불법을 만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결과가 생기는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수행자는 수행단계에 따라 수행방법을 달리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즉, 수행자는 수행수준에 따라 수행방법으로서 관법,  염법, 의심법이라는 일관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수행자는  깨침의 종류를 알아야 한다.  즉 수행자는 깨침의 종류에,  견성이며 성불이며 구겅각인 돈오와 돈오에 이르는  필요조건만 갖춘 깨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수행자는 반드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쉽게 돈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선지식은  수행자에게 수행수준에 따라 지름길을  제시하여  주며, 수행자가 수행 중 고비를 맞게 되면 그것을 돌파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는 등 수행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여 쉽게 돈오하도록 하므로 선지식의 가르침이 수행자에게는 절대적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원한 대자유인>은 이상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여 놓고 있으므로 수행자는 누구나 이 글에 의지하여 열심히 수행하면 반드시  돈오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96년 3월 
취암 강정진 합장


번호:38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07 01:35  길이:33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은 요약경

  <영원한 대자유인>은 우선,  구경(究竟)의  깨침에 이른 선지식이 불교  전체에 관해 직접 쓰신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년이 넘는  선종사에서 수많은 선지식이 출현하셨지만 불교 전반에 대해 체계적으로 책을 쓰신 분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생과 부처를 성품은 같으나   속성이 다름으로, 즉 중생의 속성은 무기(無記)와 번뇌(燔惱)로, 부처의 속성은  영겁불망(永劫不忘)과  영원불매(永遠不昧)로 대칭시켜 밝히신 것은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귀한   법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속성을 바꾸는 것으로  성불을 정의하여 수행의 시작과 목표점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이 글은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인 수행과 깨침에 관한 골자들을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거사님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의 법문을 비교 대조하면서 수행의 길을 밝혀  놓아  불조의 정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오매일여(寤寐一如), 내외명철(內外明徹),  돈오(頓悟)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를  설명하실 때 필요조건,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수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깨침의 질을 분명히 구분해 주심으로써 돈오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어묵동정시와 숙면시의 공부를  물리학의  관성 법칙을 도입하여 설명하신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부각시켜 주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현재  불교계에 만연하고 있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마설을 완전히  추방하고 어묵동정시와 숙면시의  공부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는 수행방법에 관한 부분인데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 제도를 위해 법안으로 관, 염,  의심의 일관된 순서에 입각해서 수행방법을 절묘하게 구성하여 놓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몰라 남방  불교권에서는 관법을 위주로  하고 북방 불교권에서는 의심법 일색이 되어있기 때문에 돈오에 이르는  수행자가 나오기 어렵다는 지적은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같은 통찰력은 선지식의 밝은 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4가지 부분 이외에도 아뢰야식에 관하여 자세히 밝히신  것, 돈오(頓悟)와 무념(無念)을 새로운 시각에서 설명한  것, 여래선과 조사선에서 여래선  게송이  1000년이 넘도록 잘못 전해지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신 것, [덕이본 단경]이 등장한 이후 800여년 동안 구경각에 이른 선지식의 출현이 없었다는 것, 오조 법연  선사의 '무(無)!'를 설명하신 것 등은 이 책의 진가를  느끼게 해주는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내용들로 볼  때 이 책은 49년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장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요약경"이라  이름 붙임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불교 수행 모임 淸淨會  김 형석 합장  
    

번호:38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07 01:40  길이:18줄
제 목 : 불교의 종주국이 되다2

  돈오하여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중생과 부처의 정의를 속성이 
삶을 주재하느냐 자성이 삶을 주재하느냐라는  점에서  말씀하셨고 수행의 정의를 속성바꾸기 라는 면에서 명확히 하셨습니다.  또한   관법→염법→의심법으로 이어지는  수행방법은 수행단계에  따라 달리하는 것임을 밝혀 성불에  이르는 과정의 실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수행방법에 따라 깨침의 종류가 달라짐을 밝혀 깨침의 실상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특히 수행단계에 맞지 않는 수행법으로 공부하게 되면 깨침에 이를 수 없거나, 명멸하는 아뢰야식, 또렷한 의식, 무기 등을 성품으로 착각할 수 있음을 밝혀 깨침의 종류에서 착각을 배제하고 있음은 정법을 지키시려는 거사님의  깊은 뜻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깨침에는 자나깨나 한결같은 경지에서의 깨침, 즉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을 갖춘 깨침과 그 필요충분조건인 내외명철한 돈오 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묵동정과 그 이후의 몽중, 숙면시의 공부를 삼매 관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어 의식이 다른 곳에 집증하고 있을 때나 무기관성만 미치는 때의 공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불조의 정전임을 말씀하시면서 불교사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두 
가지 큰 대립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하여  이들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먼저 점교법(漸敎法)과  돈교법(頓敎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점교법은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 수행이 오랜  세월을 거쳐 관(觀)→염(念)→의심(疑心)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바뀌어 돈오하게 되는 것이며, 돈교법은 선지식이 출현하여 수행자의 수행 수준에  맞게 단계별로 수행방법을 달리 제시하여 돈오에 이르게 하는 것
자연발생적으로 바뀌어 돈오하게 되는 것이며, 돈교법은 선지식이 출현하여 수행자의 
수행수준에 맞게  단계별로 수행방법을 달리 제시하여  돈오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원리를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번호:385/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07 01:41  길이:18줄
제 목 : 불교의 종주국이 되다1

  취암 거사님께서는 어린 시절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33세에 수행이 자나깨나 한결같이 되시고[오매일여], 그 후 12년간을  그러한 경지에 머무르시면서  처음에는 하루에 18시간, 나중에는 20시간 이상 좌선하시는 대수행력을 보여주셨고  구경에는 선정 중 법진경계의 자극에 의하여 화두를 타파하고 돈오(頓悟)하셨습니다. 
  거사님께서는 이와 같은  대수행력을 토대로 선수행에서 팔만장경을 꿰뚫는 요지만을 체계를 세워 영원한 대자유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영원한 대자유인은 돈오(頓悟)하여   출현합니다. 돈오란 미망(迷妄)을 평정한  후 
육진경계(육진境界)의 자극을 감지하는 식(識)의  주체와 수행방편을 생각하는 식(識)의 주체가 꼭 같이 바로 자신의 성품임을 문득[頓] 깨닫는[悟]   것이라고 정의하시어 돈오가 곧 견성이며 성불이며 구경각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돈오하여 알게된 무념(無念)은  永劫不忘하고 永遠不寐한 부처의  속성임을 밝히시고 不生不滅과 常住不滅, 寂寂과 惺惺, 無量壽와 無量光,  空寂과  靈智, 眞空과 妙有, 寂과 照, 如와 來 등의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음을 적시하셨습니다.  여기서 돈오가 성불임이 더욱 명확해 진다 하겠습니다. 
  돈오 후 뒤따라야 할 깨침으로  인가의 말씀이자 수동자세의 터득인 수행불행의 깨침과 눙동자세의 터득이자 열반락을 즐김인 오조법연  선사의 '무(無)!'의 깨침까지 알아야 영원한 대자유인이 됨을 밝히고, 오조 법연  선사의 '무(無)!'까지 깨침으로써 오늘날 불교의 좌표를 삼아야  한다고 역다.


번호:38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07 01:43  길이:23줄
제 목 : 불교의 종주국이 되다3

  다음으로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의 문제점과 보완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전자는 관(觀)에만 치중하고 의심법을 알지  못하므로  구경각에 이르지 못하고, 후자는 처음부터  의심법만을 고집함으로써 돈교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후자의 이러한 점은 ①선지식의 대(代)가 끊어지거나 ②오도(悟道)  후에 보아야 할 조사어록을  수행의 초보자가 보고 그것대로  수행하고 있는 점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①<덕이본  단경>에서 돈오(頓悟)와 수행불행(修行佛行)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②앙산 선사의 여래선 게송이  1000년 이상 잘못 전해져  오고 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③더우기  불조의  말씀에는  없는 돈오점수라는  주장이 부처님의 정법을  가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오하면 미망이 모두 평정되었으므로 더 닦을 미망이  없어 돈수일 수밖에 없고 돈오점수는 불조의 정전이 아닐 뿐더러  말 자체가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것입니다. ④마침내는 수행불교 자체를 말살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불조의 가르침의 어떠한 것인가를 종잡기  어려워 혼란스러운 이때에 이 책은 구경각을 성취한 선지식이 직접 저술하시어 수행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밝힘으로써, 또한 중생, 부처, 수행, 돈오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함으로써  체계적으로 일관된 수행의 바른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경학의 발전에 있어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영원한 대자유인>은  남·북방 불교를 비판 종합하고  돈법과 점법의 핵심을 밝혀 
본래의 부처님의 정법(正法)  그 자체를  드러내어  이 땅을 불법의  종주국임을 자부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땅에 살게 된 인연으로 불조의 진수를 담은 <영원한 대자유인>을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이 글대로 수행하면 모두  이고득락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會 
                                                         조만래 합장

번호:39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15 15:59  길이:5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구도기

               제 1 장 구도의 길
     
           1. 지산 스님과의 만남과
                              수행의 시작

  1934년 나는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그 해 부모님을 따라 사천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가 금생에서 처 음으로 수행을 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학생으로 13살 나던 1946년 11월 중순 조부님께서 별세하셔서 일보는  사람들이 산성사라는 절로 장례에 쓸 조화를 찾으러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산성사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절을 구경 하던 중 법당 문을 열고 등상불을 바라보는 순간 무엇인가 예삿일 같지 않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이 조화를 가지고  돌아간 후, 그 절  주지인 지산스님께서 나를  친절하게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물어보면서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관세음보살을 불러보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참 좋단다."
  지산 스님의 그 한 마디 말씀을 듣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되었다. 부르는  횟수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날짜의 수만큼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그 날짜 수를 계산해 보니  4천 몇 백번이 되는지라  5천번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 횟수가 매일 한번씩 더  늘어나 성취감이 생기면서 재미있는 일과가 되었다.
  횟수는 다음과 같이  세었다. 우선 왼쪽 손가락으로  열번을 세고, 열번 단위는 오른쪽  손가락으로 백번까지 세었다. 백번이 되면 머리의 중앙, 그 다음 백번부터는 왼쪽  눈썹, 오른쪽 눈썹, 왼쪽 눈, 오른쪽  눈, 왼쪽 귀, 오른쪽  귀, 코, 입, 성대의 튀어나온 부분의 순서로  기억하여 천번을  세었다. 천번 단위는  성냥개비  한 개로 하루에  다섯 개, 즉 오천번을  세었다. 도중에 잊어버린 것은 숫자에 넣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생활과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과는  서로 지장을 주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공부하는 것,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이러한 모든  것이  나의 생활 속에서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을  아무에게서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비밀로 하였다. 
  지산 스님을 만난  후로 두번의 방학을 산성사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 해인사, 통도사  같은 절에서 온 많은 수행승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창호지로 발려져 있는 방문에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을  통하여 황소가 들어올 것이라고 하면서 보고 있는  스님도 있었고, 흰  종이에 원상을 그려 놓고  하루종일 보고 있는 스님도 있었으며,  염불을 하는 스님, 무자화두를 들고 있는 스님도 있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산성사에서 수행방법을 달리하고 있는 다양한 수행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번호:40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09/23 21:53  길이:29줄
제 목 : 불교바로보기4 강좌 소개-청정회-

   안녕하십니까? 
저희 청정회에서 이번에 불교 바로보기 4번째 강좌를 준비하였습
니다. 
불교에 대해 관심있으신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불교바로보기4>
  
 -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

<<대상 :
   당신의 마음이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잠에서 깨어나시오.

<< 1. 중생의 정신세계      (10. 12)  
    2. 수행의 방법, 삼매     (10. 19) 
    3. 수행의 단계, 부처     (10. 26)
    4. 수행하기Ⅰ           (11. 2)  
    5. 수행하기Ⅱ           (11. 9) 
    6. 오늘의 불교          (11. 16)

<< 일시 : 96. 10. 12 - 11. 16,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장소 : 청정 선원 (지하철2호선 서울대입구 관악구청 맞은편)
          Tel. 878 - 1843 / 880 - 8627 (서울대학교 선우회)  
 
<< 주최 : 불교수행모임 청정회
<< 참가비 : 만원(자료 포함)


번호:45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06 13:24  길이: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 구도기를 연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불자 여러분.
 쌀쌀하긴 하지만 수행하기에 좋은 가을 날씨입니다. 
 저희 참선 수행 모임 청정회에서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는 강정진 선생님의 저서 [영원한 대자유인]의 구도기 편을 앞으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수행 정진에 많은 도움 되길 바랍니다. 


번호:45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06 13:35  길이:51줄
제 목 : 구도기 1. -참선 수행 모임 청정회-

   1. 지산(芝山) 스님과의 만남과 수행의 시작

  1934년 나는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그 해 부모님
을 따라 사천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시
적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가 금생에서 처음으로 수행을 
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학생으로 13살  나던 1946년 11월 중순 조
부님께서 별세하셔서 일보는  사람들이 산성사라는 절
로 장례에 쓸  조화를 찾으러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산성사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절을  구경하던 중 법당 
문을 열고  등상불을 바라보는  순간 무엇인가 예삿일 
같지 않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이 조화를  가지고 돌아간  후, 그 절  주지인 
지산 스님께서  나를 친절하게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물어보면서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관세음보살을 불러보렴.  관세음보살을 부
르면 참 좋단다."
  지산 스님의 그  한마디 말씀을 듣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되었다.  부르
는 횟수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날짜의 수만큼이 좋
겠다고 생각되어 그 날짜 수를 계산해 보니 4천 몇 백
번이 되는지라  5천번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
여 그 횟수가 매일 한번씩 더 늘어나 성취감이 생기면
서 재미있는 일과가 되었다. 
  횟수는 다음과  같이 세었다. 우선 왼쪽  손가락으로 
열번을 세고,  열번 단위는 오른쪽 손가락으로  백번까
지 세었다. 백번이 되면  머리의 중앙, 그 다음 백번부
터는 왼쪽 눈썹, 오른쪽  눈썹, 왼쪽 눈, 오른쪽 눈, 왼
쪽 귀, 오른쪽 귀,  코, 입, 성대의 튀어나온 부분의 순
서로 기억하여  천번을 세었다. 천번 단위는  성냥개비 
한 개로 하루에 다섯  개, 즉 오천번을 세었다. 도중에 
잊어버리는 것은 숫자에 넣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기도  하였지만 이런한  생활과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과는  서로 지장을  주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공부하는 것,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는 이러한 모든 것이  나의 생활 
속에서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을 아무에
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비밀로 하였다. 
  지산 스님을  만난 후로  두번의 방학을 산성사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보내고 있었는데  그 때 해인
사, 통도사  같은 절에서  온 많은 수행승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창호지로 발려져 있는  방문에도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을 통하여 황소
가 들어올 것이라고 하면서 보고  있는 스님도 있었고, 
흰 종이에 원상을 그려 놓고 하루종일 보고 있는 스님
도 있었으며, 염불을 하는 스님, 무자 화두를 들고 있는 스님
도 있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산성사에서 수행방법을 달리하
고 있는 다양한 수행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번호:45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08 15:28  길이:39줄
제 목 : 구도기 2. -불교 수행 모임 청정회-

   2. 구하 스님과의 만남과 수행방편을 바꿈

  스무살 나던  해 가을,  평소 불교에 관하여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셨던  진근수 외숙부님과 함께 양산 통도사 보광전에 가서 구하 노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어약우연(魚躍于淵)'과 함께 '옴마니반메훔'이란 글씨를  써 주시면서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부터 수행방편을  '관세음보살'에서 '옴마니반메훔'으로 바꾸어  불렀고 그 부르는 방법은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와 똑같이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뒤 그 일을 회상해 보았을 때 나는 구하 스님과의 만남이 참으로 좋은 인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는 어려서 관세음보살에 대한 아무 의미도 모르고  불렀지만, 차차 철이 들고 식견이 깊어감에 따라 논리적인 사고가 발달하면서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하는  부처님인지를 반드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관세음보살의 모양과 관세음보살이  어떠한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에 그 상을 마음 속에 떠올렸을  것이고 또한 소원을 비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두 가지 생각은  번뇌가 되어  오직 '관세음보살'이라는  한 생각만  염(念)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마침 구하 스님과 만날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으므로 당시에는 깊은 산중에나 있었던 절에 갈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법당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의 '상(像)'을 보지도 못했고  관세음보살의 '원(願)'도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구하 스님과의 만남은 나의 공부가 아무런 상이나 뜻도 생각할 수 없는 '옴마니반메훔'이란 염(念)으로만 계속 이어지게 하여, 수행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처음 불문(佛門)에  들어와 기도나  염불을 하여  원(願)을 성취하는 것은  신심(信心)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수행자가 되면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 중 상(像)이 떠오르거나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 수행방편 외 다른 번뇌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이 점에 유의하여 수행방편의 선택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번호:455/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12 07:15  길이:47줄
제 목 : 구도기3. -청정회-

   3. 공부의 나아감과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20대 후반부터는 살아온 날짜 수가 많아짐에 따라 염(念)하는 횟수도 자연히 많아지게 되어 세는 것만 해도 매일 만번 이상이 되었다. 그때부터 가속이 붙기 시작하여 30대 초반에는 만 몇 천번을 가지고는 횟수가 적어서 3만번으로 횟수를 올리게 되니,  얼마 안 가 거의 하루종일 염하게 되면서 '옴마니반메훔'이 걸어다닐때(行)나, 섰을  때(住)나, 앉아 있을 때(坐)나, 누워 있을 때(臥)에도 또렷또렷하여 거의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3만번이라는 횟수는 양(量)적 확보에 중점을 두는 수행에서 질(質)적인 추구에 중점을 두는 수행으로 가는 전환점이 되는 횟수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즉, 3만번에 이르기까지는 횟수를 늘리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했지만 그 이후에는 3만번 이상은 세지 않고 더욱 또렷또렷하게 하는 데에 중점을 둠으로써 삼매(三昧)의 질을  높여 행주좌와일여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관세음보살을 세면서 부르고 옴마니반메훔 역시 같은 방법으로 불렀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수행하는 나에게 관법(觀法)과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을 함께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횟수를 세는 것은 망각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여 무기(無記)에 빠지지 않게 하였고,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을 염했던 것은 염념상속하는 삼매에 들게 하여, 이상과 같은 행주좌와에 일여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렇게 됨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염을 할 때에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 속으로 불렀으나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에는 소리를 내어 그 소리를 경청하여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소리를 내어 그 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대신심(大信心)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여 상기(上氣)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피곤함도 극복할 수 있게 하여 수행을 한 차원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면 노력과 긴장 때문에 목덜미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며 심한 경우에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럽게 되는 상기(上氣)가 오는데, 나의 경우는 이상과 같이 염(念)할 때에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를 듣는 방법을 곁들였기 때문에 상기는 경험하지도 못하고 피곤함도 모르고 수행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번호:457/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15 10:08  길이:40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 구도기

   4.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와 
   몽중일여(夢中一如)·숙면일여(熟眠一如)

  30대 초반이 되자 만 몇 천 번을 가지고는 횟수가 적어 3만번으로 횟수를 올리게 되니 얼마 안가 하루종일 염(念)하게  되어 공부가 행주좌와일여함에는  이르게 되었지만, 아직은 말을 할 때(語)나, 말을  들을 때와 같이 침묵을 지킬  때(默)나, 일을 할 때와 같이 몸을 움직일 때(動)나, 사색할 때와 같이 고요히 있을 때(靜) 등 의식(意識)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는 공부가 한결같지 않았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나 들을 때에도  한결같이 공부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고비여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염(念)하는 것을  호흡(呼吸)에다 언제나 동반(同伴)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부터 호흡에 맞추고 있었는데 그것은 태식호흡(胎息呼吸) 방식이었다. 숨을 들이쉰 후 길게 토하면서 내쉴 때만 '관세음보살'을 불렀는데, 보통 한  호흡에 열번 이상 불렀으며, 폐에 공기가 다 빠져나가 배에 아픔을 느끼게 될 때까지 숨을 들이쉬지 않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처음부터 염하는 것을 호흡에 그 리듬을 맞추어 왔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여 어느때고 수행을 호흡에 동반시키기로 하였다. 이렇게  수행을 어느 때고 호흡에 동반시키게 되니 '옴마니반메훔'을 염하는 삼매는 관성(慣性)이 생겨 그 삼매관성(三昧慣性)의 영역이 어묵동정간(語默動靜間)을 꿰뚫어 수행이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수행방편을 언제나  호흡에 동반시키게 되니 체력소모가 컸고 체중도 감소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비에 차차 적응하게  됨으로써 체력소모도 적어졌고 수행을 이끌어 나가는데 큰 어려움도 없게 되었다. 
  어묵동정일여에  이르는 단계에서는  대화를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삼매관성의 길이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하거나 일을 하는 시간이 길면 삼매관성이 그 시간 동안을 감당하지 못하여 수행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이 어묵동정일여에 이르는 것을 앞당기려면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하거나, 혼자 살면서 수행을 하거나, 토굴생활(土窟生活)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번호:459/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19 10:38  길이:35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4.어묵동정일여 계속

  나의 경우에는 이때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어 혼자 사는 효과가 있었고, 또한  입안이 헐어터진 상태가 6개월 이상 계속되어 말하는 것을 십분의 일 정도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묵언수행하는 효과가 생겨 이 고비를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수행이 20년째에 이르는 33살이 되어 어묵동정일여라는 고비를 넘고 나니, 잠이 들면 깨어 있을 때의 공부가 저절로 이어져 꿈을 꿀 때에도 한결같게 되었고[몽중일여(夢中一如)], 깊은 잠에 들어서도 한결같게 되었다[숙면일여(熟眠一如)].
  나는 항상 대신심과 대분발심으로 공부해 왔고 잠을 적게 잤기 때문에 꿈도 거의 없었고 잠을 자고 난 다음에도 깨어 있을 때의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러므로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와 같이 공부가 한결같아야 함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렀어도 이것이 특별한 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행을 해 오면서 항상 나의 수행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행주좌와일여에 이르렀을 때나 어묵동정일여, 몽중일여 그리고 숙면일여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러한 과정에 이르는 묘리를 스스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번호:46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22 09:45  길이:60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 구도기 편 계속

  숙면일여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추번뇌가 없어지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체적인 현상으로는 부처님의 육계(살상투)에 해당하는 부분이 솟아오르면서  그곳에서 예전에는 간헐적으로 있던 신호가 항상 끊이지 않게 되었다. 만약 순간이라도 염(念)하는 것을 잊게 되면 강한 반응이 와서 그것을 잊을 수가 없게 하였다. 나는 이러한 반응이 삼매(三昧)의 신호임을 알았다. 
  그 당시 몸살을 앓거나 몸이 아플 때에는 그 신호가 심한 아픔으로 다가왔는데 마치 육계 부분에서 항문까지 철사나 막대기 같은 것으로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몸이 아플 때에는  염하는 것을 더욱 망각할 수 없었다. 수행자는 누구나 삼매의 신호가 올 때까지 간절히 수행하지 않으면  어묵동정일여, 몽중일여 그리고 숙면일여의 경지에 이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부처님의 육계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조사들의 경우에도 조사당에 그려져  있는 상을 보면 육계가 솟아올라 있는 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신체적 현상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신적인  현상들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몽중(夢中)에 내가 산꼭대기에 서 있는데 해가 중천에 떠올라 하늘과 땅이 너무나 밝게 보인다거나 밤에 달이 떠오르면서 천지가 밝아지는 것을 본다거나, 밤중에 잠이 깨어 눈을 떠보면 천정과 지붕을 뚫고 하늘의 별들이 보인다거나, 몇 백미터  밖에 오고 있는 아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거나 사람의 얼굴을 한번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읽어버린다거나,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거나 말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거나, 모든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뛰어나게 된다거나 하는 것 등이었다. 또한 뒷날 돈오(頓悟) 이후에 이때의 수행행적을 되돌아볼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가까워질 때에는 명멸함으로 감지되던 아뢰야식이 이때부터는 그 감지됨이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불교에  관한 서적들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 극히 드물었던  때였는데, 마침 그 시기에 탄허 스님의 세속 제자인 윤태정 처사를 만나 내가 처음 접한 불교서적인 우리말로 번역된 <선문촬요(禪門撮要)>를 얻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가를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무엇을 하시러 이 세상에  나오신 분인가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읽어보는 불교 서적이 불교의 최상승법문을 발췌해  놓은 책이었다는 데 대하여 몹시 기뻐했고 석가모니 부처님과의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았다. 더우기 이 <선문촬요>는 나의 인생의 방향을 확정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을 읽고 난 후부터는 여러가지 일어나던 현상들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고 담담한 자세로 돌아오니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저절로 없어지는 일과성(一過性)의 현상들이었다.
  절에서 공부하는 수행승이었더라면 스승이나 도반들로부터 가르침이나 하다못해 귀동냥이라도 있었겠지만 세속에 살면서는 그런 일들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절한 시기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수행에 도움이 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번호:47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26 19:04  길이:53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구도기 5.잠자는 자세


   5. 잠자는 자세 

  '옴마니반메훔'을 염할 때  호흡으로 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한 가지 더 부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수행자는 잠을 잘 때에도 수행의 방편을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잠자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말하기를, 사람이 잠을 잘 때 오른쪽 방향으로 머리를 두면 형이상학적 사고(形而上學的 思考) 즉 정신적(精神的)인 사고를 하게 되고, 머리를 왼쪽 방향으로 두면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사고 즉 물질적(物質的)인 사고를 하게 된다고 하였다.
  공자(孔子)는 <논어>에서 다만 시체처럼 하여 잠을 자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머리의 방향에 대해서는 말이 없지만 반듯이 누워 하늘을 쳐다보는 자세로 자지 말라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아함경(阿含經)>에서 반드시 오른쪽으로 누워 자라고 강조하셨다. 또한 열반도(涅槃圖)를 보면 부처님께서 오른쪽 손을 불에 붙이고 오른쪽 방향으로 누워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귀의 뒤로 가게 하고 손바닥은 귀의 구멍을 덮지 않도록 하면 반듯이 누워서 잠을 잘 때와 똑같이 소리를 잘 들을 수가 있다.
  수행자는 위의 두 분 성인의 말씀과 부처님의 열반도를 아무 의미없이 보아넘겨서는 안된다. 수행자가 깨어 있을 때에는 공부가 잘 되더라도 잠이 들면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시체처럼 반듯이 누워 자게 되면 깊은 잠에 빠지게 되고 잠자는 시간이 길어져 무기(無記)의 시긴아 길어지므로 수행자는 열반도에서의 부처님의 자세를 본받아 잠자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집념을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수행자 중에는 몇 십년씩 장좌불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수행자들이 잠을 자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집념이 흐트러지지 않는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살아서는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앉지 못한다."는  그런 어리석은 자세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좌불와하는 사람이  앉아서 졸거나 뒤에 있는 벽에 머리를 바로 기대고 잔다면 누워서 잘 때에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자는 것과 닮은 자세가 되므로 장좌불와가 공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은 피곤하고 등만 굽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좌불와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장좌불와는 시작해야 할 때가 있고 그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선지식(善知識)만이 적절한 시기를 알려줄 수 있다.
  수행자가 잠잘 때 부처님의 자세대로만 따르면 몸은 쉴 수 있게 되고 잠은 어깨가  아파서도 오랜 시간을 잘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열심히 공부하는 수행자가 잠잘 때는 부처님의 자세를 따른다면 언젠가는 잠이라는 무기(無記)의 공간을 삼매관성으로 채울 날이 올 것이다.



번호:48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1/30 00:44  길이:40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6.스승을 찾아 나서다

   6. 스승을 찾아 나서다.

  30대 중반에 이르러 수행이  깊어감에 따라 <선문촬요>와 같은  데서도 누누히  강조한 스승의  필요성이 마음 속에  간절히 다가왔다. 그리하여 스승을  만나기 위해 여러 절의 스님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1) 고암(古庵) 스님
  처음으로 만난 스님은 그 당시  종정(宗正)으로 계시던 윤고암(尹古庵) 스님이었다.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찾아가 그 절의 큰스님을 뵙고 싶다고 하였더니 한 젊은 스님이 마침  고암 스님에 서울에서 내려와 게신다고 하며 안내하여 주었다. 나는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의 공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강정진(姜丁鎭)입니다."
  "바로 강정진(强精進)이구나."
  "주력을 할 때 혀뿌리가 움직이느나?"
  나는 이전에 이러한  질문을 받은 적도 없었고 생갹해 본 적도 없었기에  대답을 하기 전에 그때 나의 수행하는 상태를 잠시 돌이켜보고 난 뒤 말씀드렸다. 
  "혀뿌리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돼."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염할 때 처음에는 소리를 내어 해야 하지만, 공부가 향상되면서 소리는  내지 않고 혀만 움직여야 하고, 드디어는 마음 속으로만 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할 때 수행자가 반드시 주의할 것은 수행방편을 소리를 내어  할 때와 똑같이 또렷또렷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때에 '옴마니반메훔'의 음절이 또렷또렷하지 않고  뭉개어지게 한다면 정신차리게 하는 효과가 적어지게 된다. 
  고암 스님과의 대화 도중에 스님을 지켜보니 스님은 쉬지 않고  염주(念珠)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스님도 수행방편을 염(念)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것을 알고 돌아오는 길에  단주(短珠) 하나를 사서 한동안  굴려 보았다. 그러나  염주를 굴리는 것은 안  굴리는 것 보다야 훨씬  낫지만 손가락으로  세는 곳보다는 굴릴 수 있는 시간도 적고 정신차리게 하는 효과도 적다는 것을 알았다. 



번호:50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03 14:47  길이:76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6.스승을 찾아..계속


   (2) 경봉(鏡峰) 스님

  다음으로 만난 스님은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 극락암(極樂庵)에 계시던 경봉 스님이었다. 그 당시 주위의 아는  사람이나 신도들에게 선지식(善知識)이  누구인지를 물어보았더니 남쪽에서는  통도사 극락암의 김경봉 스님이고 북쪽에서는  정전강(鄭田剛) 스님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가까운  곳에 있는 극락암의 경봉 스님을 찾기로 하였다. 
  35세 되던 1968년  10월 어느 가을날 극락암을 찾았더니, 절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는 감이 붉게  익었고 법당 앞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쓸어져  있었다. 스님을 찾아 삼소굴(三笑窟) 앞 요사채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인사도 미처 드리기  전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전생(前生)의 중이 들어오는구나."
  "너는  전생에는 스님이었다.  그것을 증명해  줄까? 너는 음식은 식물성을 좋아하고 색깔은 푸른색을 좋아하지? 너 지금 앉아 있는 그 자세는 전생부터 참선(參禪)하던 자세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스님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다가 나에게도 입을 열 기회를 주셨다. 
  나는 열 세살  어린 시절부터 '관세음보살'을 부르던 이야기며 스무살 때  구하 스님을 만나 '옴마니반메훔'을 불러 오늘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스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 이렇게 해라."
  그리고는 바로, 
  "아이구 안됐구나. 너와 나는 법연이 없어. 그렇더라도 속가상좌가 되어라. 그리고 자주 찾아 오너라."고 하셨다.
  나는 경봉  스님을 친견한 그날부터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게 되었다. 그리고 매월 한번씩은 스님을 뵈오러 갔다.  그러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그런지 그 후에는 다만, 
  "요즘 공부를 잘 하느나?"
하고 물으시어, 
  "한 주일에 몇 번씩 철야정진을 하였더니 그런가 봅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몸을 너무 그렇게 다루지 말고 남해 보리암에 가서 기도를 한번 해  보지. 옛 조사 스님들도  기도를 했단다."
하는 당부의 말씀도 하셨다. 그  당시 나느느 화두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경봉 스님의 부탁은 들을 수 없었다. 
  혼자서 극락암을 다닌 지 1년 가까이 지나자 신도회가 결성되어 매월  셋째 일요일에 법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혼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법회  날 참석하여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이  법회를 통하여 나는 공부를 하는 데  있어 참으로 좋은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첫째는 화두를 들 때 항상 입천정에 혀를 붙이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 법문을  듣는 순간 '이렇게 좋은 법이 있는 걸 여태 몰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먹을 때나 말을 할 때가 아니면 입천정에 말아붙인 혀를 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잠이 들어 혹시 꿈을  꾸더라도 꿈 속에서 말을 할 때에는 혀를 움직이지만  말이 끝나면 즉시 다시 입천정에 혀를 말아붙이게 되었으며 잠이 깰 때 혀가 입천정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진언을 염하면서 익힌 오매항일(寤寐恒一)에다  입천정에 혀를 말아붙이니 이 둘이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어 화두가 비는 공간을 더욱 밀착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혀를 말아붙이는 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육신에 수행방편을 결부시켜 어느  때고 망각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렇게 수행방편을 육신에 결부시켜  수행하면 수행자가 잠시라도  수행방편을 망각하게 되면 혀가 떨어지게 되므로 즉시 감지하여 수행방편을 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수행에 크게 도움이 된다.

*12월 6일(금)에 [경봉스님편]을 연이어 올리겠습니다. 


번호:51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06 06:47  길이:6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6.스승을 찾아...계속

  둘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대의문(四大疑問)에 관한 법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태다  때 사문유관(四門遊觀)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시고 인생에 대하여 사대의문에 생겨 그것 때문에 출가하여 6년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수도하시다가  견성성불하셨다는 법문이었다. 이 말씀은 후에 내가  화두를 드는 방법을 찾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법문 외에도  경봉 스님과는 좋은 인연이 있었다. 1977년  6월 7일  경북 선산 도리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친견법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경봉 스님과  천명 이상되는  신도들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경봉 스님이 사리를  친견하신 후 나는 신도들의 대열에 들어가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순간 사리 안에서 부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움직이는 부처님이었다. 웃으시는데  입이 커지면서 입가의 보조개가  들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거 형상은  등상불과 꼭 닮았다. 
  즉시 법당으로  뛰어가 문을  열고 등상불과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니, 등상불에는 육계의  꼭대기가 마치 공처럼 둥글었는데 사리에서 본 부처님에는 육계의 꼭대기가 마치 계란처럼 타원형이었다.  그리고 사리에서 본 부처님의 피부는 미세한 다이아몬드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이 각(角)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매우 감격했으며  이것을 나의 공부에 대한 부처님의 격려로 받아들여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꼭  견성하겠다고 원(願)을 세웠다. 
  경봉 스님을 만난 뒤  6년 동안을 하루에 보통 18시간 좌선을 하며  젊음을 다 바쳤지만 화두는 타파되지 않았다. 오랜 후 회상해  본 것이지만, 그 당시에 나는 경전이나 조사어록  같은 것이  번역되어 있지도 않아 <선문촬요(禪門撮要)>외에는  책을  읽어보지 못했고, 선지식의 법문도 들어보지 못했으며,  경봉 스님으로부터 나의 수행에 대해 깊이 있는 점검과 세밀한 가르침도 전혀 받아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의심의 주제가 뚜렷이 부각되지도  않았고 의심하는  방법 또한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결국  화두가 타파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의심의 주제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지  않아 수많은  시간을 답보상태로만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옴마니반메훔'을  염하면서 익혀놓은 24시간 끊어지지 않는 오매항일(寤寐恒一)한 삼매(三昧) 덕분으로 의심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화두가  염(念)으로 이어져  오매일여(寤寐一如)를 더욱  다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활로를 찾기  위하여 나는 다른 여러 스님들을 만나 뵙기로 하였다.

   (3) 향곡(香谷) 스님

  1974년 8월 어느 날 경남 월래(慶南  月來) 묘관음사(妙觀音寺)의 향곡  스님을 찾아갔다. 시자(侍者)  스님의 안내로 향곡  스님이 계시는 토굴로 스님을 찾아갔더니 향곡 스님은 나를 데리고 간 시자 스님에게 버럭 화를 내셨다. 
  "오늘은 사람을  안 만난다고 했는데  왜 데리고 왔어!"
  우리들은 그만  무안하여 되돌아 나오게 되었다.  시자는 오늘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며 왜 그러실까를 연발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향곡 스님의 그러한 말이 법거량(法擧揚)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초의 법거량이었다. 



번호:53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10 23:47  길이:87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6.스승을 찾아..(성철스님편)

   (4) 성철(性撤) 스님

  해인사(海印寺) 백련암(白蓮庵)으로  성철 스님을 찾아간 것은 1974년 12월 27일이었다.  시자 스님에게 성철 스님을 친견하겠다고  하였더니 큰스님을 친견하려면 3천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많은 절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하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시자 스님은 오후 5시가 되면 저녁 공양을 하고, 절을  할 법당 청소도 하고,  저녁 6시부터 절을 시작하라고 하였다. 내가  그 당시 3천배를 한  법당은 천태전이라는 건물이었는데,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창문에는 창호지 대신  여름에 발라 놓았던 모기장이 그대로 발려 있어서 밖에서 보면 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법당에 들어가자 시자 스님은  염주를 주며 그것으로 절하는  숫자를 세고 물이 가득  찬 큰 주전자를 건네주면서 물을 마셔가며 절을 하라고 했다. 
  절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하기로는 약 2시간 정도 하면 끝마치고 저녁 8시쯤  되면 성철 스님을 친견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저녁  6시에 절을 시작하여 백팔배를 하여  보니 17분이 걸렸다. 나는  그날 밤에 큰스님 만나기는 불가능하겠다고 체념하고 절을 계속하는데 천번 가까이 되니 몸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으며 천오백번을 넘으니 그것은 울고 싶을 만큼 고된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이 정도의 고통을  못 참겠나 싶어 계속하다가 마지막 백팔배가 남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하기 위해 잠깐 쉬었다. 
  모기장 밖을 내다보니  성철 스님은 잠을 자지도 않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내가 절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젊은  스님을 시켜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 왔다. 그  스님에게 마지막 백팔배가 남았는데  정성을 다하야 하기 위해  잠시 쉬는 중이라고 대답하고 절을 끝마치고 나니  새벽 3시  10분 전이었다. 꼬박  8시간 50분 걸려서 3,024배를  끝낸 것이다. 천태전에서 방으로 30분 이상이나 걸려 겨우 걸어갔다. 
  아침 8시 30분이 되어 성철 스님으로부터 시자를 시켜 자기 방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갔더니,  성철 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조사 스님들과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출가인연(出家因緣)에 대하여 2시간 동안 말씀을 하시고는 결론으로, 
  "마누라는 칼을 가지고  푹 찔러 죽였다고 생각하고 오늘 집에 돌아가지 말고 출가해라."
  "내가 중이  되고 난 뒤에  처음 하는  말이다. 너는 출가하면 몇 만 명의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 텐데, 집에 있는 서너명 그것들 제도나 되나."
하시는 것이었다. 
  성철 스님을 친견하러 간 것은 오직 법문을 듣기 위해서였지, 출가  문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나는 그 당시 속가에 살면서도 하루 18시간 좌선을 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6시간도  화두를 놓치는 순간이 없었으므로 장소 문제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출가하게 되면 절생활에 적응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스님의 갑작스런 출가 권유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집안  일을 떠올려 생각해 보았다.  집에 있는 처(妻)는 나의  공부 뒷바라지도 그렇게 잘  해주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이나   철야정진(徹夜精進)으로 몸이 약해지면  약도 달여 주고 집안  일이나 하고 학교  교사로서의  생활도 너무나 충실한 사람인데,  처에게 모든 것을   다 떠맡기고 나 혼자  부처 되겠다고 절로 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한 배신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철 스님의 출가  권유는 당장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50살이 넘어 집안일을 어느 정도 정리해 놓고 출가하겠습니다."
  "그래? 그때 가면 마음이 변하는데 되나."
  "저는 이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하직 인사를 드린  후 백련암을 뒤로 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할 일을 다 마치고 가정일도 어느 정도 정리했을 무렵, 지난 날  성철 스님과의 출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1986년부터 매년 한번씩 백련암을 6년에 걸쳐 방문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1992년 7월 17일에  방문하였을 때에는 참으로 안타까웠지만 시자인 원택(圓澤) 스님을 통하여  성철 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서만 남기고 돌아왔다.  

① 화두 들 때의 몽중일여(夢中一如)는 어떠합니까?
② 화두 들  때의 몽중일여와 잠꼬대는 어떻게 다릅니까?
③ 화두 들 때의 숙면일여(熟眠一如)는 어떠합니까?
④ 화두타파 후의 몽중일여는 어떠합니까?
⑤ 화두타파 후의 숙면일여는 어떠합니까?
⑥ 오조 법연 선사는 조사 스님이  되고 난 뒤에도 '무(無)!''무(無)!''무(無)!'...하셨다는 데 왜 그랬습니까?



번호:53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10 23:51  길이:17줄
제 목 : 불교수행학교 제3차 소개글 -불교수행모임 청정회-

  불교수행모임 청정회(서울대 불교 수행 동아리 선우
회)에서는 지난 겨울의 1,2차에 이어 이번 겨울 제3차 
불교수행학교를 엽니다. 
  중생과 부처,  수행의 정의,  방법과 단계, 수행하기, 
고비와 극복, 깨달음,  선지식에 관한 전반적인 강의와 
실제가 있을  예정입니다. 불교와 수행을 꿰뚫는  앎과  
실제를 얻을 수 있는 장이 될 것입니다.
  불교수행학교 일정은 97년  1월 8일부터 12일까지의 
5일간이며, 장소는 해인사 백련암입니다. 
  신청은 96년 12월 9일부터 12월 28일까지 받을 예정
이며, 참가 인원은 제한하고 있습니다(총 80명 정도).

전화번호: 서울 (02) 880-8627, 878-1843
          대구 (053) 257-6647
          대전 (042) 636-5179



번호:54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13 15:34  길이:225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7.해산 스님과의 만남
   7. 해산(海山) 스님과의 만남
  1975년 12월 초, 뒤에 나의 스승이 되신 해산 스님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부산  데파트에서 경봉 스님의 선서화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전부터 안면이 있던 처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처사는 이야기 중에 12월 둘째 일요일 아침 8시에 부산역에서  만나 자기를 따라 가자고 제안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묻지 말고 무조건 따라만 가자는 것이었다. 그 처사의 인품을 보아서는 나를 잘못 끌고 갈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한 날에 부산역에서 만나 기차를 탔는데 밀양역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시내버스로 갈아 타고 시외버스 주차장까지 가서 표충사(表忠寺)행 버스를 타기에 표충사에 가는구나 생각했다. 표충사에서 버스를 내려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 내원암(內院庵)이라는 곳에 이르러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해산(海山)  스님께서는 상당법문(上堂法門)을  하고 계시던 중, "오늘 이 절에 아주  귀한 분이 한 사람 왔구나" 하셨다.
  법문이 끝난  후 옆 사람들에게 이  절에 오늘 어떤 사람이 왔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새로 온 사람은 나밖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니  나는 법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수께끼에 부닥친 셈이 되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처사들과 같이 해산 스님 방으로 가서 인사드리고 앉아 법문을 듣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하직  인사를 드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법당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나의 왼쪽 귀에다 입을 대고 말했다. 
  "부산 초량에서 왔다지?"
  뒤를 돌아다보니 해산 스님이었다. 그  절에 온 사람 중에 내가 부산 초량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같이  온 처사조차도 모르는 사실인데 나는  '스님께서 어떻게 아실까?'하는 두번째의 수수께끼에 부닥쳤다.
  절 앞에서 스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버스 정류소까지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법회날이어서 복잡하여 스님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으니 다음 또 다시 와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씀이구나. 다음에  한번 더 와야겠구나!' 버스  안에서 그 처사에게 언제 또 오느냐고 물었더니 1976년  1월 1일 새해 아침을 내원암에서 맞이하기  위하여 뜻이  있는 신도님들은 12월 31일 다시 모여 철야정진을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도 그날 스님을 뵈오러 오기로 작정했다. 
  철야정진하여 1976년 1월 1일 새해 아침을 내원암에서 맞고 곧장 혼자  스님 방으로 가서 새해 인사를 드렸다. 스님께서는 시자를 부르더니  지묵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해산  스님께서는 너 공부  어떻게 했니, 무슨 화두를 들고 있니  이런 말씀을 전혀 없으시고 아래와 같이 써 주셨다. 
  阿難尊者問 迦葉尊者(아난존자문 가섭존자)
  經云 金란袈裟白玉鉢盂外(경운 금란가사백옥발우외)
  有別傳之法何也(유별전지법하야)
  迦葉尊者答  道覺門前刹竿斥(가섭존자답 도각문전찰간척) 
  나는 이 글을 보고, 
  "저는 한문세대가 아니어서  무슨 글인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해 주셨다. 
  "아난 존자께서 가섭 존자에게 물으시기를,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에게 입으시던 금란가사와 밥을 담아 잡수시던 백옥으로 만든 발우를 전하신 외에 따로이 법을 전하셨다는데 그것이 무엇입
니까?'
  가섭 존자께서 답하시기를, 
  '법당 문 앞에 있는 찰간을 물리쳐라.'"
  이것을 일컬어  '교외별전화두(敎外別傳話頭)'라고 한다.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고도 오랜 후에 조사어록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원문에서 '유별전지법하야(有別傳之法何也)' 다음에  가섭 존자께서 "아난아!"하고  부르니, 아난  존자께서 "예!"하고  대답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  부분이 있으면, 첫째 화두로  들 때 말이 너무  많아 산만하여 집중력을 떨어뜨릴  염려가 있었으며, 둘째 의심의  방향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구경각(究竟覺)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도  원문에는 '도각문전찰간착(道覺門前刹竿着)'이었다.  그러나 해산 스님께서는 道覺門前刹竿着이라는 원문의 중국식 어법을 道覺門前刹竿斥으로 바꾸어, 그 글을  읽을 때의 한자의 음과 뜻을 원문과 크게 다르지 않도록 하면서 글자를 바꾸어 우리말  식으로 이해가 쉽도록 하셨던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발상을 하실 수가 있었을까!'하고 감탄했으며 스승님의 제자를 가르치시는 솜씨와  자비에 머리 숙여 감사하였다.  스님의 그 은혜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요, 또 지금은 출가한 그 처사에게도 감사한다.
  그 당시 해산 스님께서 써 주신 글을 읽어보니 외우기야 어렵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어색하고 글을 읽는 듯이 의심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3일 동안을  들어보고는 여태껏 들어오던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렇게 해산 스님께서 써 주신 화두는 비록 얼마  들지는 않았지만 해산 스님을 만난 이후로는 좌선 시간을 18시간에서 20시간으로 올렸다. 
  그러나 의단(疑團)은 독로(獨露)되지 않아 별다른 진전 없이 그해는 저물고 1977년 1월 1일의 아침을 또다시 표충사  내원암에서 맞이했다.  6월에 선산  도리사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을  하고, 7월 하순이 되니  해산 스님께서 날짜를 잡아 주시면서 분부하셨다. 
  "내원암 위  재약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진불암(眞佛庵)에 올라가서 7일간 용맹정진을 하고 오라." 
  "진불암에 가서 주지에게  물으면 옛날 내가 참선하던 장소를 안내해 줄 것이다."
  그날이 와서 쌀 한 말을 등에 지고 내원암에서 출발하려고 하니 스님께서는, 
  "낮에는 볕이 뜨거우니  나무그늘 아래에 앉고 밤이 되면 그 자리를 절대 떠나지 말라."하고  당부하셨다. 진불암에  도착하여 주지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니 스님은, 
  "용맹 정진하는 동안 밥은 절에서 드십시오."
라고 하면서 공부할 장소로 안내해  주었다. 공부할 장소로 가 보니  바위 낭떠러지였는데 만약 앉아서 졸다가 몸의 중심을  잃어면 아래로 떨어져서 크게 다치거나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평범한 사람처럼 별 의미 없이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는 수행자로서 목숨 바쳐 공부하겠다는 원을 세웠으므로  그러한 장소가 문제되지는 않았고 두려움 또한 없었다.  그리고 해산 스님께서도 말씀은 없으셨지만  내가 이러한 어려움 정도는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이미 파악하고 이곳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맹정진하는 10일  동안을 졸음도  없이 무사히 잘 보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려운  시간들을 잘 참아 보았고, 1976년 여름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해 본 경험도 있고,  집에서 수행하면서도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항상 철야정진을 해 왔던 것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화두는 타파되지 않았다.
  10일 동안의 진불암 생활을 끝내고 하산하면서 내원암이 가까워지니 저 멀리 해산  스님이 보였다. 스님께서는 절  뒤에서 내가 돌아오는 것을  마중 나와 계셨다. 나는 스님께 인사 올리고 말씀드렸다.
  "베푸신 은헤에 보답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미소지으며 나의  눈빛만 보고 계시더니 절 안으로 들어가자고 입을 떼셨다.  절에 들어가서 스님께 10일간의 모든  것을 말씀드린 후 하직인사를 드리고 부산으로 올라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3일간을 더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는데 4일째 되는 날 통도사 극락암에 다니는  처사 두 분이 집으로  찾아 왔다. 그들은 나를 술집으로, 담배연기 가득  찬 다방으로 계속 끌고 다녀,  결국 나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용맹정진은 그날로 끝을 맺었다.
  그 당시 몸만  약간 피곤한 정도였으므로 잠을 전혀 자지 않는 것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를 보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보통 때에도 정진하는 것은 잠이 들어 꿈을 꾸거나 깊은 잠이 드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몸을 전혀 쉬지 않고 얼마나 지탱할 수 있는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해 10월이  되니 코피가 터지는데 그 흘러나옴이 보통 피곤하면  터지는 경우나  코를 얻어맞아 터지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고 수돗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상기가 되어서  코피가 터졌다면 머리가 몹시 아팠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른 수행자들은 상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계속 공부하여 온 탓도 있겠지만 수행방편을 소리내면서 그 소리를  들으면, 한편으로는 올라갔던 상기는  끌어내려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심은 대신심으로 끌어올려지는 수행의  묘리를 내  스스로 이미 터득하였기에 상기에서 저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드는데 코피가 터지는 일이 세번이나 일어났다. 여기에서 일단 멈춰서 생각해 보니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를 계속 들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해산 스님으로부터 받은 '교외별전화두'를 들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의심하는 방법을 찾던 중 경봉 스님의 법문 중에서 들은  '부처님의 사대의문'을 원용하기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좌선 중에는 항상  옆에 종이와 볼펜을 두고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종이에다 적어 두어 그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로 했다.
  네 가지 이상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방법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해  가면서 의심을 해 보기도 하고, 네 가지 이하 세 가지나 두 가지 또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의심해 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제 경험을 통해 검증한 후 내가 찾아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항상 전제로서 다음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난 존자가 가섭 존자에게  부처님께서 금란가사 백옥발우 외에 따로이 전하신 법이 있다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를 물으니, 즉 아난 존자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가섭  존자는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하라고 대답했다는데.'
2. 의심하는 방법은 다음의 4가지 방법으로 회광반조해야 한다. 
 ①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하라고?
 ② 어째서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이라  그랬을까?
 ③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④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왜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일까?
  그 경험에서 나는 '부처님은 참으로 위대하신 스승님이시구나'하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했다. 지난 날 9년 동안을 그렇게 애써 왔지만 성과가 없었던 이유를 알아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순서대로 11월 초부터 화두를 회광반조해가며 들기 시작했는데 며칠 안 가서 벽시계 치는 소리부터 잘  안들리기 시작하더니,  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초량동 길가에  있는 집이라서 항상 자동차가 다니는데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한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시간 흘러감을 느끼지 못했다. 
  한번에 몇 시간을 앉아 있으면 많은 시간 동안 다리를 쉬어 주어야 했으므로 50분 앉고 10분 쉬고 하였으며, 10분 쉴 때에는 물도  마시고, 화장실에도 가고, 반드시 물구나무 서기를 3번 하며 리듬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나는 괜찮은데 온  가족들이 나를 보고 귀를 먹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런 말에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화두만 들었는데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하는 화두를 들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잠도 거의 없어졌다. 
  마음 속에는 네  가지 방법으로 의심하는 외의 다른 것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망(迷妄)의 경계가 거의 물러가니 또렷또렷한 심광(心光) 속에서 의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초조함이라든가 피곤함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번호:54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17 09:56  길이:7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8.화두의 타파

   8. 화두(話頭)의 타파(打破)

  이렇게 되기를 석달이 지났을  때 1978년 2월 초 새벽 2시 선정(禪 定중)에서  법진경계(法 塵 境界)의 자극에 의하여 나는, 
  "바로 이 놈이구나. 여기에서 바로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이 나왔구나."
  이렇게 확인했다. 
  옛 선사들은 이때 즐거워 춤을 추고 오도송(悟道頌) 을 읊었다던데 나의 생각에는,
  '별 것도 아니구나! 내가 어느 때고 항상 쓰던 건데 어찌 그다지도 고생만 했던가. 옆에 스승이 있어 한 마디만 일어주었더라면 빨리 주인공(主人公)을 찾았을 텐데' 하였다.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려서 아침 첫기차를 타고 표충사 내원암 해산 스님께 갔다. 인사드리고 앉자마자,
  "스님!"
  스님께서 얼굴을 들고 쳐다보시기에,
  "이것 알았습니다."
하면서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딱'하고  때렸다. 그때 마침 풍경이 울리니 스님께서는, 
  "저 풍경소리를 내놓겠는가?"
하셨다. 나는 즉시 손뼉을 '딱' 치면서 말했다. 
  "이 소리는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스님의 두번째 질문은 무엇이었던가를 기억할 수 없는데 그 답도 잘했고, 스님의  세번째 질문은 한문게송으로 무엇인가를 묻는데  나는 그 말씀 자체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네번째 질문은, 
  "서강수를 마셔 보았느냐?"
  "이미 몇 만년 전에 마셨습니다."
  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 어디서 들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 당시 나도 이 대답을  잘못한  것을 즉시 알고 '스님께서는 귀신같이 잘도 아시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나의 대답이 분명히   있는데 남의 말을 한  것이다. 나는 해산 스님 만나기 몇   년 전에 부산 남천동 보림  선원에서 백봉 거사라는  분이 바로 
이와 같이 자문자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생각이 나서 그렇게 
대답했을까?'하는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변명하고 정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스님의 처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취암!"
  "예."
  "다음 큰스님한테 찾아가  너 공부 어찌하느냐고 묻거든 그 답은 하지 말고, '이름도 형상도 없되 말도 하고 걸음도 걷고 때로는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하는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되물어라."
  이로써 대화를 끝맺으려고 하시기에, 
  "스님!  제가 화두를  타파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못했습니까?"
하고 두번이나 물어 보았지만 이렇다저렇다 하는 답은 해  주시지 않으셨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오늘 급제(及第)도 아니고 낙제(落第)도  아닌 시험을 쳤구나' 했다.
  화두 타파할 당시, <육조단경(六組壇經)>에서의 '바람이 부니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나 <금강경(金剛經)>에서의 '여시아문(如是我聞)……부좌이좌)(敷座而座)'나, 어떠한 격외(格外)의 화두라도 오늘 새벽 2시에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과 함께 어느 것이 먼저 어느 것이 뭐랄 것도 없이 한 순간에 모조리 함께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분명했다. 
  '이름도 형상도 없되 말도 하고  걸음도 걷고 때로는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 하는 그것'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막히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표현 방법이 미숙함을 알았다. 
  화두를 타파하여 의심은 다 풀렸으나 어떻게 앞길을 헤쳐 가야 할 지를 전혀 알 길이 없어 오히려  더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때껏  30년  이상을 정진해 오면서 스승없이 속가(俗家)에서 수행하여 돈오(頓悟)에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이때만은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선지식(善知識)이 꼭 필요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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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8.화두의 타파 계속

   이렇게 스승님의 다음 공부에 대한 제시 없이 날이 가고 달이 가서 그 해 6월 6일이  되었다. 아침에 범조(梵潮) 처사라는 분과 전화로 대화 중  범조 처사 자신과 하청담(河淸談) 처사라는 분이 어느날 해산 스님 앞에서 서로 삿대질을 해가며 큰 소리를 하고 나서 스님께 참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지금까지 싸움할  때 성이  어디서 나오더냐?"
고 물으시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후  전화를 끊고 즉시 스님께 달려 가면서 '이번에는 나도 스님의 입을 한번 꼭  막아봐야지! 지난 번 스님께 찾아갔을 때 너 공부 어찌 하느냐 묻거든 그 답은 하지 말고 '이름도  형상도 없되 말도 하고 걸음도 걷고 때로는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 하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라고 했던 그 말씀이 바로 2차 법거량(法擧揚)인 줄  몰랐구나'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님이 계시는  절에 도착하여 급히 스님의 방문을 활짝 여니 스님께서는 방문을 향하여 반가부좌를 하여 앉아 계시다가  나를 보는 순간 옆으로 90도 돌아 앉으며 하시는 말씀이, 
  "대오(大悟)를 해야지."
  나는 스님의 그 말씀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스님께서는 웃으시며 방석을 펴 주시면서 앉으라고 하셨다. 앉으니 스님께서는 공양주를 부르셨다. 
  "공양주(供養主)야!"
  "오늘 저녁은 겸상을 차려  오너라. 취암하고 나하고 같이 먹는다."
  나는 지금껏 절에 다니면서 스님과 신도 사이는 물론 조실(祖室) 스님과 다른 스님과도 겸상하여 공양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격식(格式)을 벗어난 해산 스님의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에 감사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또 내가 당했음을 알았다. 나는 아직까지는 스님을 당해낼 만큼 재간이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이것은 깨침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 여하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는 여태껏 속가에 살면서 경전이나 어록을 거의 보지 못했고 귀동냥도 없었으므로 스님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力不足)임을 알았다.
  스님께서 아직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니 나의 심정은 마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저쪽 강가에 도착은 했는데  어떻게  하여야 땅에  올라서는가를 앙띵 길이 없는 
것과 꼭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스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를 기다리는 길 밖에 없었다.
  그해  7월 15일쯤  되어서 백야학(白野鶴)  처사라는 분이 나의 집으로  찾아와 해산 스님께서 상당법문 중 '나에게 오는 처사  한 분이 견성(見性)을 했는데 대소변을 못 가린다'고 하시더란  말을 전해  주었다. 그 처사도 그  이상의 말은 없었고 나도  
그 말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해 6월 6일  이후로는 스님을 찾아가소 뵙지도 않았고  7월 법회날에도 가지 않았으나 스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으로 알고 다음날 새벽차로 뵈러 갔다. 
  이젠 스님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싶어 스님 방으로는 못가고 법당에서  좌선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스님께서 법당문을 여셨다. 
  "취암!"
  "예."
  "내 방으로 와."
  조실방으로 따라 가서 인사드리고 앉으니,
  "취암!"
  "예!"
  "오늘부터 화두를 버려라."
  "스님! 화두를 버리면 무기(無記)가 아닙니까?"
  "무기(無記)라고? 너 선정(禪定)도 번뇌 아니더냐?"
  "스님! 예! 그렇습니다."
  "그것을 무념(無念)이라고 해. 부처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래.  그 무념(無念)을 영원히 잊지 말고 어느 때고 잘 간직하라."
  스님의 그  말씀 아래에 수행불행(修行佛行)을  즉시 깨닫고는, 
  "예! 스님! 잘 알겠습니다."
하고 일어나서 삼배(三拜)드리고, 
  '아!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나에게도 어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부처님이시여! 고맙습니다.  스승님이시여! 고맙습니다.'
  '그 은혜는 중생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 
  "스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취암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스님! 고맙습니다."
하고 스승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해산 스님께서는 '이 무념을 영원히  잊지 말고 어느 때고 잘 간직해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 뒤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때부터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뜻밖의 해괴망측한 행동을 보여 주시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하셨다. 
  그때 나는 아직 긴장에서 덜 풀린 때인 고로 그것을 수용하여 '불리자성(不離自性)하니 망념이 반야로 바뀌어 반야상재(般若常在)하도다'로 보지 못하고 '아직 중생심(衆生心)이 남이 있어서 저런 짓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하여 그렇게도 자상하게 잘 지도하여 주시던 스승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스님께서도 그 후 곧장 세연(世緣)이 다하여 열반(涅槃)에 드시었다. 상당히 오랜 시일이 경과한  뒤에야 해괴망측한 행동이 중생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또 나를 다루는 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금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스승이 되어 버렸다.



번호:56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20 21:54  길이: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책은...

종로에 있는 커다란 서점이나 조계사 옆 '경서원'이란 서점에 가면 있습니다. 
아니면 청정선원(지하철2호선 서울대입구역 관악구청 건너편 880-8627)으로 
연락주셔도 책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로 문의하시거나 메일 주십시오. 



번호:579/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23 01:46  길이:79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9.오조법연선사의 '무!'

   9.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의 '무(無)!'

  스님께서 열반하신 후 일년쯤 되었을 때 동래(東萊)에 사는 하상욱(河尙郁) 처사로부터 <한글  대장경> 181, 182권의 <전등록(傳登錄)>을 빌려 보았는데 거기에서 전혀 알  수 없는 한 대목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한글 대장경>  181권 415페이지의  '복주(福州) 영운 지근(靈雲 志勤) 선사'편의 다음 대목이다. 
  
  영운 지근 선사가  위산에서 복사꽃을 보고 도를 깨닫고 게송을 지었다. 

  30년 동안 검을 찾던 손이 
  몇 차례 잎이 지고 순이 돋았나
  복사꽃을 한차례 보고 난 뒤엔 
  아직껏 다시는 의심치 않는다. 

  위산 영우(위山 靈祐)  스님이 이 게송을 보고  영운 지근에게 따져 깨달은 바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인연 따라 깨달은 것 영원히 잊지 말로 간직하라."
  현사 사비(玄沙 師備)  선사가 이와 같은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지당하고  심히 지당하나  노형(영운 지근)이  아직 끝까지 알지는 못했다 하겠노라."
  옆에 있던 어느 스님이 이 말을 의심하기에 현사(玄沙)가 제자인 지장 계침(地藏 桂琛)에게 묻기를,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장 계침이 말하기를, 
  "계침(桂琛)이 아니었더라면 천하 사람을  끝없이 달리게 할 뻔 하였소."

  여기에서 내가 몰랐던 것은, 위산 영우 스님의 제자인 영운 지근 스님이 위산 스님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끝까지는 알지 못했다"고 한 현사 스님의  말씀과 지장 계침 스님의 "천하 사람을 끝없이 달리게 할 뻔 하였소"이다. 
  이 대화는 격외도리(格外道理)의 거량이 아니고, 인가를 받을 때 스승의 다음 공부를 제시하는 말씀인 "잊지 말고 간직하라"는 외에 또 나머지 마지막 공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그 공부는 지장 계침 스님의 말씀대로 '천하 사람을 끝없이  달리지 않게 하는 공부'란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하(河) 처사가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께서는 조사가 되고 난 뒤에도 "가만히 '무(無)!'하면서 문득 쉰다"고  하는 말을 경학자인  일우(一愚) 스님으로부터 들었다고 나에게 몇 번 말해 주었다. 
  나는 이것 역시 이해하지 못하다가 10년쯤 지났을 무렵에야 하 처사로부터 한글로 번역된 <법화경(法華經)>을 빌려 와서 보는 도중에 문득 현사(玄沙) 스님과 지장(志藏)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렇게 쉬는 것이구나', '이렇게 끝없이 달리지 않는 방법이 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영원(永遠)한 대자유(大自由)를  누리는 한가(閑暇)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의 말은 그 자리에서 없어질 수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기면 그 기록은 몇 천년도 갈 수 있으니 다음 사람에게는 이 기록이 선지식(善知識)의 역할을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알게 되었겠지만 현사 스님과 지장 스님과 오조 법연 스님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고서야 이것을 알게 되었을 것인가! 스승이 있어 가르쳐 주었더라면 단박에 알았을 것을 10년이나 걸려 알게 되었으니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을 보고 아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걸렸는데,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더구나 선지식도 없이 수행자가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으며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리겠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현사 스님, 지장 스님, 오조 법연 스님 세 분 스님이시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번호:58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6/12/23 01:46  길이:148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연재를 마치며...

  [영원한 대자유인] '제1장 구도의  길' 연재를 오늘로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내용에 관한 지적, 책에 대한 문의 등을 해 주셨습니다.  선지식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에서 취암 강정진 스승님의 [영원한 대자유인]은 참선  수행을 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보아야 할 책입니다. 대부분의  책이 여러 경전이나 조사어록의 짜집기에  불과한 것과는 달리 이 책에는 독창성과  탁월함이 살아 있습니다. 물론  내용의 독창성과 탁월함의 토대는 바로 직접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이 책을 지으셨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연재해 온  '구도의 길'은 스승님꼐서 국민학교 6학년 때인 13세의 나이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45의 나이에  돈오에 이르고  나아가 오조  법연 선사의 '무'로써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신 기록이었습니다. [영원한 대자유인]은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구도의 길'은 첫번째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어 '제2장 수행방법(修行方法)과 수행단계(修行段階)', '제3장  바른 수행(正修)과 바른  깨침(正 覺)'이 나오는데,  그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 중생과 부처
2. 속성을 바꾸는 수행
3. 수행방법
4. 수행의 시작과 공부의 행주좌와일여
5. 공부의 어묵동정일여 ⑴ 삼매관성 ⑵ 육계신호
6. 공부의 몽중일여 
7. 공부의 숙면일여
8. 세번뇌의 평정
9. 내외명철(안팎이 밝음으로 꿰뚫어짐) 
  ⑴ 내외명철의 의의
  ⑵ 구경각에 이르는 원리와 내외명철
  ⑶ 조건충족에 따른 깨침
10. <단경>에서의 내외명철
11. 돈오
12. <단경>에서의 돈오
  ⑴ 돈황본과 덕이본의 차이 ① 돈황본 ② 덕이본 ③ 돈황본과 덕이본의 차이
  ⑵ 돈오와 수행불행의 깨침 ① 돈오하는 계기 ② 돈오라는 깨침 ③ 돈오 후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깨침
  ⑶ <덕이본 단경>의 오류 
13. 수행불행의 깨침
14. <단경>에서의 수행불행의 깨침
15. 무념 
16. <단경>에서의 무념
17. 돈수와 점수 
18. <단경>에서의 돈수와 점수
19. 수행 중 세번의 큰 고비와 그 극복 방법 
  ⑴ 상기의 고비
  ⑵ 어묵동정일여에 이르는 고비
  ⑶ 세번뇌를 평정하는 고비
20. 대혜 스님과 그 스승들 
  ⑴ 담당 문준 선사와 대혜 스님
  ⑵ 원오 극근 선사와 대혜 스님
  ⑶ 오조 법연 선사와 원오 극근 스님
21. 대선지식 오조 법연 
  ⑴ 법연 선사의 '무!'
  ⑵ 법연 선사의 '무!'의 의미
  ⑶ '무!' 속에 들어 있는 구경각
22, 영원한 대자유인
 
제3장 바른 수행과 바른 깨침
1.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 
  ⑴ 부처님의 가르침
  ⑵ 남방 불교권과 북방 불교권
  ⑶ 남방 불교과 북방 불교에서 보완해야 할 점
2. 경전과 조사어록에 대한 올바른 이해 
  ⑴ 경전과 조사어록
  ⑵ 조사어록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필요성
  ⑶ 수행불교의 위기를 초래하는 조사어록
  ⑷ <능엄경>의 25원통법문
3. 돈교법의 위기를 초래하는 격외
  ⑴ 돈교법의 서래
  ⑵ 조사의 가르침 
  ⑶ 격외로써 수행할 수 있는 요건
  ⑷ 돈교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격외
  ⑸ 돈교법의 위기에 대한 대처방안 
4. 착각도인의 출현 
  ⑴ 착각도인이 출현하는 원인 
  ⑵ 착각도인의 유형
  ⑶ 착각의 문제점
  ⑷ 선지식의 필요성
  ⑸ 선지식을 알아내는 방법
5. 돈오점수의 허구성
  ⑴ 불조의 정전
  ⑵ 돈오점수와 외도
  ⑶ 돈오점수와 돈오
  ⑷ 돈오점수와 아뢰야식
  ⑸ 돈오점수와 무기
  ⑹ 점수라는 용어의 올바른 사용
6. 여래선과 조사선
  ⑴ 여래선과 조사선의 의미
  ⑵ 잘못 전해져 온 여래선 게송
  ⑶ 앙산 선사의 여래선
  ⑷ 조사선
  ⑸ 잘못 전해져 온 여래선 게송에 대한 의문   
 
  이상은 수행에 꼭 필요한 지식이 망라되어 있으면서도 핵심을 간파한  팔만사천경의 요약경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글을  마치기에 앞서  여러분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을 덧붙입니다.  구도기 편을 보시고 하시는  비판들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청정회와 [영원한 대자유인]에 관한 근거없는 감정적 거부, 내용과 사실 여부에 대한 의혹(약간 부정하는 입장에 치우치는), 일단 긍정. 
  언젠가 이경호(pyock) 님께 드린 답변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영원한 대자유인]에 대해 의심하고 철저히 사실  여부를 따져보려는  태도는 올바른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여러가지 내용과  수행방법과 체계  등에 대해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고찰하고 실제로 청정회와 직접 대면하여  이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지 어떤 진전을 이루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일단  충분한 정보 수집 후 내리려는  조심스러운 태도는 자칫 외도에 빠지거나 잘못된 수행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해 줄 것입니다. 
  [영원한 대자유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시는  분들은 저희 청정회가 PC통신을  통해 정법을 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구체적인 내용의 밝힘 없이 [영원한 대자유인]을 권유해 드린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어 이후 저희가 올린 글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신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올바른 비판이 되려면 스스로 판단하여 비판하되 그냥 툭 던지는 듯한 엉성하고 비논리적인 주관적 비판이 아니라 치밀하고 사실(자신의 수행정도에 비추어 나타나는)에 입각한 간주관적 혹은 객관적인 비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말만  요란하고 감정적 대응만 난무하는 무의미한 논의가 될 테니. 
  참된 비판적 논의는 서로를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영원한 대자유인]  연재는 일단 '구도의  길'에 한정지으려 하기에  앞으로는 주요  이슈를 몇가지 정해서 이를 중심으로  정법 선양을  계속 하겠습니다. 단  올 1996년은 오늘로 마감하도록 하고 내년 1997년 1월 중순 이후부터  뵙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논문 준비와  해야 할  여러 일들로 인해 그간  소홀한 점이 있었음에 대해 사과드리며  올해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청정회  강신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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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68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1/17 10:57  길이:39줄
제 목 : 수행 방법에 대한 고찰 1

  이 글은 [영원한 대자유인]의  저자 강정진 님이 [대중불교]에서의  원고청탁으로 최근에  작성되었습니다. 
수행정진에 많은 도움 되는 글  되길 바라겠습니다. 짧
은 글이긴 하나 편의상 6차례로 나누어 실을 예정입니
다. 한꺼번에  읽고 싶은  분은 [대중불교]를 찾으십시
오. 성불하십시오...
                               -청정회 강신영-   

   <수행 방법(修行 方法)에 대한 고찰(考察)>

1. 중생(衆生)과 부처(佛)
  중생의 속성은 무기(無記)와 번뇌(煩惱)이다. 
중생은 속성인 무기가 주체(主體)인 성품(性品)을 망각하게 하고 번뇌는 성품을 어둡게(昧) 하여, 속성이 각각으로 교대(交代)하면서 그 속성이 삶을 이끌어가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중생은 이상과  같은 무기와 번뇌로 인하여 끝없이 윤회고(輪廻苦)를 받는 업생(業生)으로만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부처는 중생이 수행(修行)에 의하여 무기는 성품을 망각하지 않게 하는 불망(不忘)으로, 번뇌는 성품을 어둡게 하지 않는 불매(不昧)로 바꾸어, 불망과 불매가 공존(共存)하는 무념(無念)상태에서 경계를 만나면 불망은 그대로 유지시키고 불매만  작용시키는 반야(般若)로 바꾸면서 주체인 성품이 삶을 이끌어 가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부처는 무념(無念)과  반야(般若)로 인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어 중생제도(衆生濟度)를 위한 원생(願生)의 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상과 같은  업생과 원생의 차이점에서는 수행의 시작과 목표점을 알 수 있게 되고,  중생의 속성과 부처의 속성의 차이에서는 수행단계에 따른 수행방법을 알 수 있게 되므로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알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번호:687/836  등록자:CHYOO  등록일시:97/01/17 13:12  길이:30줄
제 목 : 수행 방법에 대한 고찰 1 - 1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이 얼마나 웃긴 말인가?

중생의 성품도 알고 부처의 성품을 알고 수행을 하자네..
중생의 성품도 알고 부처의 성품도 아는데 무슨 수행을 하리..

인생을 사는데 모두 다 알고 인생을 살자고 하네...
내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모레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인생을 살자고 하네...

혹에다 혹을 하나 더 붙이는 꼴임을 모르는
공부하다가 퇴전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네...

공부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옛날의 수행자가
마구니 짓을 하네....

차라리 능엄경을 말하는 것이 좋겠네....
능엄신주를 지니면 마구니가 접근 못하네....
마구니가 접근 못하는 이를 부처님이라고 하네...
중생의 성품도 모르고 부처의 성품도 모르는데
어찌 능엄신주를 지닌다고 마구니가 접근 못하나...
능엄신주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를 않네...

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능엄신주를 지니면 마구니가 접근못하네....
하기 힘든 말이네...
밥벌이가 떨어지기에 하기 힘든 말이네...
불법을 뒤집어쓰고 밥 먹고 살려는 사람은 마음이 급하네...



번호:688/836  등록자:CHYOO  등록일시:97/01/17 13:13  길이:29줄
제 목 : 대중불교는 전법지?

대중불교라는 잡지를 간혹 보게됩니다.
일반 대중에게 불교를 알리기 위한 훌륭한 마음들이
모여서 만드는 좋은 잡지입니다.

그러나 "전법"하는 것과
불교 쎄일은 다른 것입니다.

전법은 인생의 근본과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고
불교 쎄일은 근본과 관계없는 모양새, 이름, 여러가지 문화현상,
불교라는 이름이 붙은 
이야기 꺼리들을 아무 생각없이 편집하는 것입니다.

전법은 부처님을 전하는 것이고
불교 쎄일은 부처님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상품이 됩니다.

대중불교는
전법하는 잡지일까요?
쎄일하는 잡지일까요?
혹은 불교동호인 회보일까요?

그 좋은 마음들이 모여서 훌륭한 잡지를 만들지만
좋은 마음으로 말하면
앙굴리마라의 마음이 참으로 좋은 마음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을 99명 죽이고 맙니다.

대중불교가 전법하는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중불교를 만드는 분들이 법을 아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번호:689/836  등록자:CHYOO  등록일시:97/01/17 16:25  길이:31줄
제 목 : 수행 방법에 대한 고찰 1 - 2

중생의 성품에는 팔만사천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이 팔만사천가지 성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고 각각의 중생성품 마다 부처성품과의 거리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중생성품에 속하는 지를 알아서
그 급에 맞는 수행들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부터 팔만사천가지 중생성품 마다를
일일이 다 설명하고 그 중생성품 마다 맞는
수행법들을 팔만사천개 제시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각자들 자신의 중생성품이 어디에 속하는 지를
찾아서 맞는 방법들을 골라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팔만사천 수행방법을 완전히 구비한
최대의 수행방법 회사입니다.

예전에 석가모니 회사는 중생성품을 아홉개 밖에
고찰하지 못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저희는 드디어 팔만사천 중생성품을 모두
따져서 거기에 맞는 팔만사천가지 수행방법을 획기적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아마도 1500년 전에 중국에서 나온 광고같습니다.

그리고 삼조 승찬스님은 울부짓었습니다.

지극한 도가 어렵지 아니하네
오직 헤아려 골라잡지 말을지니
중생성품은 싫어하고 부처성품은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않으면
스스로 도가 명백하리라.



번호:72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1/27 09:26  길이:31줄
제 목 :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2
2. 수행의 필요성
  중생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로 변신할 수 있음은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바뀌어 지는 것을 보면 수행은 중생이 아니면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생이 성불(成佛)의  염원을 이루려면 수행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즉, 중생이 성불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하려면 자신의 속성인 무기는 성품을 망각하게 하지 않는 불망(不忘)으로 번뇌는 성품을 어둡게  하지 않는 불매(不昧)로 바꾸는 행위인 수행(修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한가지의  대상(對象)을 수행의 방편으로 선정하여 그것을 망각하지 않고 그것만을 생각함이 무기에 빠질 틈이나 추번뇌와 세번뇌의 일어남도 모두 멈추게 되는 수행단계에  이르면 육진(六塵)  경계 중 어느 한 가지의 자극에 의하여 돈오(頓悟)하게 된다.

  돈오는 수행자 자신이 수행방편을 생각하던 의식(意識)의 주체인 자신의 성품(性品)을  문득 깨닫는 것이므로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견성하는 순간 중생 때의 속성이었던 무기와 번뇌는 성품을 불망(不忘)케 하고 불매(不昧)케 하는 부처의 속성으로 바뀌므로 성불(成佛)이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견성 성불(見性 成佛)의 원동력은 수행이었으므로 중생에게 성불을 위한 수행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번호:72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1/27 09:27  길이:56줄
제 목 :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3

3. 수행 방법(修行 方法)
  중생이 성불하기까지는, 마치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장 단계와 교육 수준에 알맞도록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과정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진출하는 것처럼, 수행단계와  수행 수준에 알맞는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을 순서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觀) : 관법(觀法)
  둘째, 염(念) : 염법(念法 = 念念相續法)
  셋째, 의심(疑心) : 의심법(疑心法)

⑴ 관(觀)
  관법(觀法)은 수행자가 수행의 방편을 마음 속에 대두시켜 심안(心眼)으로 계속 보고 있는 수행방법이다. 관(觀)에는 백골관(白骨觀), 자비관(慈悲觀), 수식관(數息觀),  일출관(日出觀),  일몰관(日沒觀),  월출관(月出觀), 월몰관(月沒觀).....등이 있다. 이  수행법은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에게 적합한  수행방법이다. 즉 수행자가 수행 방편을 마음 속에 대두시켜 심안(心眼)으로 게속 보고 있게 되면,  다른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무기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수행법은 무기(無記)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즉 항상  정신차리게 하는 데 그 주안점(主眼點)을 두고 있다. 

⑵ 염(念)
  염법(念法) 즉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은 부처님이나 보살의 명호(名號)나 진언(眞言)을 염(念)하는 수행 방법이다. 이 수행법은 부처님이나  보살의 명호나 진언을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일으킴으로서 다른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 수행  방편을 염념상속하게 하는 삼매(三昧)가 육신(肉身)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추번뇌를 평정(平定)하도록 함에 있다. 

⑶ 의심(疑心)
  의심법(疑心法)은 수행자가 수행의  방편을 의심(疑心)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방법은 수행방편에  대한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의심의 특성(特性)을 수행에 원용(援用)하는 방법이다.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화두선(話頭禪)도 이에 속한다. 
  의심은 외ㄱ으로  일어나면, 첫째는  심각(深刻)하게 되고, 둘째는 해결의 돌파구(突破口)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의심의 특성을 수행에 원용하면, 첫째 심각하게 되는 특성은 수행을 고밀도화(高密度化)시켜 염념상속하는 삼매(三昧)로는 평정이 불가능한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나오는 세(細)번뇌를 평정하게 하고, 둘째 해결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특성은 수행의 마무리인 돈오(頓悟)를 이끌어내게 한다. 



번호:73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1/29 15:16  길이:41줄
제 목 :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4.

  이상 세 가지 수행방법의 공통점(共通點)과 특성(特性)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공통점(共通點)
1. 수행방편인 한가지 번뇌만 일으킨다.
2. 수행방편으로써 무기에  빠질 틈이나  수행방편 외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② 특성(特性)
1. 관법(觀法)은 중생의 습성에 따라  치우치던 탐(貪), 진(嗔), 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을 평정하고 무기에 빠지지 않게, 즉 정신차리게 한다.
2.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은 생각 생각으로  이어지는 삼매(三昧)가 마치 점점(點點)에서  선(線)으로 이어짐과 같아지면서 추번뇌를 모두 평정할 수 있게 한다.
3. 의심법(疑心法)은 의심의 특성이 삼매(三昧)를 고밀도화(高密度化)시켜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나오는 세번뇌를 평정하게 하고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표인 돈오(頓悟)를 이끌어 내게 한다. 
  ③ 결론(結論)
  이상과 같은 공통점과 특성에서 결론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세 가지 수행방법들은 각각  다르지만 수행자로 하여금 관삼매(觀三昧), 염삼매(念三昧), 의심삼매(疑心三昧)라는 삼매에 들게 함에 그 공통된 목적이 있다. 
2. 삼매의 밀도(密度)를 높이는데 있어서 세 가지 수행방법들은 각각 한계(限界)를  갖고 있으며  그 한계는 서로의 영역(領域)을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 
3. 그러므로 세 가지 수행방법들은  미망(迷妄)을 평정(平定)할 수 있는 영역 별로 순서를 맞춰보면 관법, 염법, 의심법으로 이어지는 일관(一貫)된 수행을  위하여 수행 수준에 알맞게 부처님께서 고안하신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번호:781/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2/11 23:02  길이:67줄
제 목 :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5.

  이상 세 가지의 수행방법들은 부처님께서나 옛 선지식들께서 이미 그러한 수행방법으로 수행하셨던  흔적을 남기시고 있다고 하겠다. 
  첫째, 관법(觀法0은 부처님께서 초기(初期)에 말씀하신 아함경(阿含經)에서 많이 나옴을 볼 수  있다. 특히 부처님께서는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능엄경에서는 25 대사(大士)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들의 수행방편을 관(觀)함에서 시작하여 수행하다가 마지막에는 원통(圓通)을 얻었던 것을 사실 그대로 그분들의 입을 통하여 법문을 하도록 함을 볼 수 있다. 
  관법(觀法) 수행은 수행방편을 마음 속에서 보는(觀) 것을 말한다. 수행방편을 마음 속에서 관하게 되면 그 수행방편의 관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삼매(觀三昧)가 길어지게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염(念=생각)으로 바뀌어 염념상속하는 삼매에 들게 된다. 이와 같은 삼매인 한 생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그 한 생각이 나오는 곳을 찾게  되는 의심(疑心)으로 바뀌면, 드디어는 의심의  특성 때문에 수행자는  그 한 생각을 일으키는 의식(意識)의 주체인 자성(自性)을 돈오(頓悟)하게 된다.
  둘째, 염법(念法) 즉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은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라고 하신 것이나, 지장경(地藏經)에서 지장보살을 염하라고 하신 것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라고 하신 것이나, 경전(經典)에 나오는 각종 진언(眞言)들이 이에 속한다. 
  염법(念法) 수행은 수행방편을 마음 속에서 생각 생각으로 이어지게 하는 수행방법이다. 이 수행법은 관법수행을 거친 수행자는 처음부터 쉽게  염삼매(念三昧)가 점진적으로 길어 지지만, 관법 수행을 거치지 않은 수행자는 염하는 수행방편이 관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염삼매(念三昧)에 들게 된다. 염삼매는 처음에는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한  수행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한 수행단계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서  수행이 더욱 나아가면 몽중일여(夢中一如)한  수행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숙면일여(熟眠一如)한 수행단게에 이르게 된다. 
  염(念)하는 수행방편이 숙면일여에 이르면 육신에서 일어나는 추번뇌는 모두 평정된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감지(感知)됨이 정착(定着)되면서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추번뇌와는 특성이 다른 세번뇌가 감지되는데, 이 세번뇌는  숙면 때에도 한결같음에 이르는 염삼매(念三昧)의 힘으로는 도저히 평정되지 않음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염념상속하는 수행법의 한계(限界)는 추번뇌의 평정(平定)까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의심법(疑心法)은, 부처님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 이후 사대의문(四大疑問)으로 수행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셨다는 것과, 금강경(金剛經)의 여시아문(如是我聞) 다음에 「一時 佛在 舍衛國…………收衣鉢 洗足巳 敷座而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국(中國)의 선지식들이  고안하신 격외(格外)의 화두(話頭)들이 이에 속한다.
  의심법(疑心法)은 의심의 특성을 원용하여 세번뇌를 평정하고 내외명철(內外明徹)하여 성불에 이르도록 부처님께서 고안(考案)하신 것이다. 


번호:78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2/13 10:00  길이:33줄
제 목 : 수행방법에 대한 고찰 6. 

4. 끝맺는 말
  관법(觀法)의 수행은  수행자가 자신의 무기(無記)를 평정(平定)하여 항상 정신차리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의 수행은 수행자가 자신의 육신  때문에 일어나는 추번뇌를 평정하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의심법(疑心法)의 수행은 수행자가 의심의 특성을 원용하여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일어나는 세번뇌를  평정하고 성불(成佛)에 이르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수행자는 관→염→의심이라는  수행단계에 따른 수행방법의 골격(骨格)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선지식(善知識)이 수행자의 수행 기간을 단축시키려고 수행자로 하여금 관(觀)과 염(念)을 함께 하도록 함은 좋은 발상(發想)일 것이다.  그러나 관(觀)과 의심법(疑心法)을 함께  하게 한다거나 염(念)과 의심법(疑心法)을 함께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순서를 바꾸어 하도록 해서도 안된다. 
  오늘날은 착각도인(錯覺道人)들이 중국(中國)의 옛 선지식인들을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수행자들에게 처음부터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를  주거나 마구 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선사(禪師)들은 구제 불능한 착각도인(錯覺道人)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번호:78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2/19 08:53  길이:46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제2장1.중생과 부처 
  작년 후반부에 정기적으로 연재하던 취암 강정진 선
사님의 저서 <영원한  대자유인>의 '제  1 장 구도의 
길'에 이어 '제  2 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를 올리려 
합니다. 수행에 많은 도움 되시길 빕니다.
                     
                           불교수행모임 청정회  
                                      강신영 합장.
                                         
  취암 강정진 著 <영원한 대자유인> 중에서 
제 2 장 수행방법(修行方法)과 수행단계(修行段階)

1. 중생과 부처
 
  중생(衆生)이란,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라는  속성(屬性)이 주체(主體)인 자성(自性)을 망각(忘却)하게 하고 어둡게(昧) 하여, 속성이 삶을 주재(主宰)하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중생은 그  속성이 주재한 것은 인(因)이 되어 연(緣)을 만나면 과(果)로 받는 피동(被動)의 육도윤회(六道輪廻)만 계속하는 업생(業生)인 것이다. 
  부처(佛)란, 중생이 수행(修行)에 의하여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망각(忘却)하지 않음인  불망(不忘)과 어둡지 않음인 불매(不昧)로 그 속성을 바꾸어, 주체인 자성(自性)이 삶을 주재(主宰)하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부처는 그 속성이 자성을 영겁토록  망각하지 않게(永劫不忘)하고 영원토록 어둡지 않게(永遠不昧)  하여 능동(能動)의 삶만 영위(營爲)하는 원생(願生)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중생과  부처는 속성의 차이에서 업생(業生)과 원생(願生)으로 나누어지므로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는 수행을 해야 한다. 

※ 주(註)
* 무기(無記):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때의 멍한 상태, 무기(無記)에는 두터운 무기와 엷은 무기가 있다. 
* 번뇌(煩惱): 중생이  일으키는 모든  생각. 번뇌(煩惱)에는 추번뇌와 세번뇌가 있다.
*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는 미(迷)와  망(妄),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미혹(迷惑)과 망념(妄念) 등으로도 표현한다. 
* 영겁(永劫)이란 말과 영원(永遠)이란 말은 같은 뜻을 지닌 말인데, 한문(漢文)에서는 같은 말도 글자를 달리하여 쓰는 경향이 있다. 


번호:788/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2/21 09:28  길이:82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2.속성을 바꾸는 수행
<영원한 대자유인>
제 2 장 수행방법과 수행 단계 

2. 속성(屬性)을 바꾸는 수행(修行)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衆生)이 시작없는 과거부터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라는 속성(屬性)을  갖고 있어 그 속성이 주체인  자성(自性)을 망각(忘却)하게  하고 어둡게(昧) 하여, 윤회고(輪廻苦)를  받고 있음을 보시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 중생들이 그들의 자성(自性)을 깨닫고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법문(法門)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법문을 부처님의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것을 팔만장경(八萬藏經)이라고 부른다. 
  중생은 주체(主體)인 자성(自性)이 무기와 번뇌라는 속성으로 인하여 망각되고  어두워져 속성이 주재(主宰)하는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있게 된다. 중생이 윤회고(輪廻苦)를 벗어나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에 의거하여 자신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속성을 바꾸는 노력은 중생의 속성인 무기와 번뇌를 평정(平定)하는 행위인데 이것을 수행(修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의 정의(定義)는 중생의  속성인 미망(迷妄)의 평정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수행은 무기와 번뇌를 평정하는 행위인데도 즉 수행은 미(迷)와 망(妄)을 평정하는 행위인데도 <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이 출현한 이후 이러한 것을 제대로 몰랐던 과거의 선사(禪師)들은 미망(迷妄)을 망념(妄念)만인 줄 알고 수행은 망념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볼 수 있고 현재에도 많은 선사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수행자가 수행을 망념(妄念)만 제거(除去)하는 것으로 알게 되면, 번뇌만 일어나지 않게 하는 무기(無記)에 빠지는 수행을 하여, 무기가 계속되는 상태를 선정(禪定)인 것으로 잘못 알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되고 무기를 자성(自性)으로 착각(錯覺)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修行)의 정의(定義)를 확실히 알고 수행에 임(臨)해야 한다. 
  수행자가 수행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수행의 방편(方便)으로 택하여 끊임없는 무기와 번뇌 속에서 의도적(意圖的)으로 어느 때에나  그 수행방편만을 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수행방편의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 수행방편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 수행방편의 몽중일여(夢中一如)  → 수행방편의 숙면일여(熟眠一如) →  내외명철(內外明徹) →  돈오(頓悟)라는 수행과정(修行過程)을 거치게 된다. 
  수행자가 돈오(頓悟)하면  수행방편이  나오던 곳인 자성(自性)을 보게 되므로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돈오(頓悟)하면 중생의 속성은  부처의 속성으로 바뀌므로 성불(成佛)이라고  하며,  돈오(頓悟)하면 구경지극(究竟至極)의 깨침이므로  구경각(究竟覺)…  등등으로 부르게 된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에게는 10가지 명호(名號)가 붙게 된다. 
  이상의 돈오(頓悟),  견성(見性), 성불(成佛), 구경각(究竟覺)… 등은 순서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동시(同時)에 이루어지므로 말은 각각 다르게 부르지만 그 뜻은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다만 시각(視覺)에 따라 말을 다르게 할 뿐이다. 
  성불(成佛)하면서 바꾸어진 속성은  다시 중생의 속성으로 바꾸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망각(忘却)하지 않게 된 것을 망각하도록 하거나 어둡지 않게 된 것을 어두워지도록 하는 수행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다시 중생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성불(成佛)하면, 자성(自性)의 망각되지 않음(不忘)은 영겁(永劫)으로 지속되므로 영겁불망(永劫不忘)이라 하고 자성(自性)의 어두워지지 않음(不昧)은 영원(永遠)히 지속되므로 영원불매(永遠不昧)라고 한다.  부처의 속성이 영겁불망(永劫不忘)과 영원불매(永遠不昧)라면, 즉 영겁(永劫)으로 망각(忘却)하지 않는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할 수 밖에 없고, 영원(永遠)히 어둡지 않는다(不昧)면 상주불멸(常住不滅)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부처의 속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상주불멸(常住不滅), 무량수(無量壽)와 무량광(無量光), 적적(寂寂)과 성성(惺惺), 공적(空寂)과  영지(靈知), 무(無)와 념(念)=무념(無念), 여(如)와 래(來)=여래(如來), 적(寂)과 조(照), 진공(眞空)과 묘유(妙有)…  등 여러 가지 말로써 표현하게 된다. 


번호:789/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2/25 10:04  길이:155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3.수행방법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3. 수행방법(修行方法)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성품(性品)을 깨닫는 것은 마치 조각가(彫刻家)가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조각가가 나무로 큰 불상(佛像) 하나를 만들려고 한다면, 처음에 사용하는 연장으로는 대개 윤곽을 잡기  위하여 두 손으로 잡는  큰 자귀를 사용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좀 더 자세한 윤곽을 잡기 위하여 한 손으로 잡는 작은 자귀를 사용할 것이며, 마지막에는  구체적으로 모든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마무리 연장인 조각칼을 사용하여  그 불상을 완성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연장을 작업의 진척도에 따라 알맞게 사용하면 일의 능률과 효율을 높여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도 수행의 연장 역할을 하는 수행방법을 수행의 수준에 잘 맞추면 중생의 속성이면서 윤회(輪廻)의 원인 요소(原因 要素)인 무기와  번뇌를 효과적으로 평정할 수 있게 있다.
  물질 세계의 작품 완성을 위한 연장  사용의 잘잘못은 본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쉽게 발견되어 잘못되었을 때 개선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성품(性品)을 깨닫기 위한 수행에서 수행방법의 선택에 대한 잘잘못은 선지식(善知識)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이치(理致)를  모르는  수행자가 수행방법을 잘못 선택하였을 경우에는 수행의 진전이 없이 한평생을 무의미하게  보내거나,  외도(外道)나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반드시 선지식으로부터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수행방법을 지도받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경전(經典)의  곳곳에  수행자의 공부 수준에 따라 수행방법들을 제시해 놓았는데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단계(段階)에 따라 3가지 수행방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관(觀): 관법(觀法)
  둘째, 염(念): 염법(念法=念念相續法)
  셋째, 의심(疑心): 의심법(疑心法)

  ① 관(觀): 관법(觀法)은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마음 속에 대두시켜 심안(心眼)으로 계속 보고 있는 수행법이다. 관(觀)에는 백골관(白骨觀), 자비관(慈悲觀), 수식관(數息觀), 일출관(日出觀), 일몰관(日沒觀)… 등이 있다. 이 수행법은 초보자에게 적합한 수행방법이다. 즉,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마음 속에 대두시켜 심안(心眼)으로 계속 보고 있게 되면, 다른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무기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수행법은 무기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 즉 항상 정신차리게 하는 데 주안점(主眼點)을 두고 있다. 
  ② 염(念): 염법(念法)은 부처님의 명호(名號)나 진언(眞言)을 염하는 수행방법이다. 이 수행법은  부처님의 명호나 진언을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으켜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없게 함으로써  수행방편의 삼매(三昧)에 들게 한다. 
  ③ 의심(疑心):  의심법(疑心法)은 수행자가 수행의 방편을 의심(疑心)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방법은 수행방편에 대한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의심의 특성(特性)을 원용(援用)하는 방법이다.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화두선(話頭禪)도 이에 속한다. 
  의심은 외곬으로  일어나면, 첫째는 심각(深刻)하게 되고, 둘째는 해결의 돌파구(突破口)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의심의 특성을 수행에 원용하면, 첫째 심각하게 되는 특성은  수행을 고밀도화(高密度化)시켜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나오는 세 번뇌(細煩惱)를  평정(平定)하게 하고, 둘째 해결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특성은 수행의 마무리인 돈오(頓悟)를 이끌어내게 한다. 

  ※ 주(註)
  * 추번뇌(序煩惱):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과 제칠식(第七識)에서 일어나는 번뇌.
  * 세 번뇌(細煩惱):  제팔식(第八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일어나는 번뇌.


  이상 세 가지 수행방법의  공통점(共通點)과 특성(特性)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공통점(共通點)
① 수행방편(修行方便)인 한 가지 번뇌만 일으킨다.
② 수행방편으로써 무기에 빠질 틈이나 방편 외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2. 특성(特性)
① 관법(觀法)은 중생의  습성에 따라 치우치던 탐(貪), 진(嗔), 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을 평정하고 무기에 빠지지 않게, 즉 정신차리게 한다. 
②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은 생각생각 이어지는 삼매가 마치 점점(點點)에서 선(線)으로 이어짐과 같아지면서 추번뇌(序煩惱)를 모두 평정할 수 있게 한다.
③ 의심법(疑心法)은 의심의 특성이  삼매(三昧)를 고밀도화(高 密度化)시켜 아뢰야식에서 나오는 세 번뇌(細煩惱)를 평정하게 하고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표인 돈오(頓悟)를 이끌어내게 한다. 

  3. 결론(結論)
  이상과 같은 공통점과 특성에서 결론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세 가지  수행방법들은 각각 다르지만 수행자로 하여금 삼매에 들게 함에 그 공통된 목적이 있다. 
② 그러나 삼매의 밀도(密度)를 높이는 데에 있어서 세 가지 수행방법들은 각각 한계(限界)를 갖고 있으며 그 한계는 서로의 영역(領域)을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 
③ 그러므로 세 가지 수행법들은 미망(迷妄)을 평정(平定)할 수 있는 영역별로 순서를 맞춰보면, 관법,  염법, 의심법으로 이어지는 일관(一貫)된 수행을 위하여 수행수준(修行水準)에 알맞게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상 세 가지의 수행방법들은 선지식(善知識)이나  스승이 수행자를 가르칠 때 필요로 하는 방법들이다. 
  첫째, 스승이 수행자에게 수행방편을  관(觀)하게 하는 경우이다.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관하여 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관하는 대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염(念)으로 바뀌어 염념(念念)이 상속(相續)하는 삼매(三昧)에 들게 된다. 이와 같은 삼매인 한 생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그 한 생각이 나오는  곳을 찾게 되는  의심(疑心)으로 바뀌면, 드디어는 의심의 특성 때문에 수행자는  그 한 생각을 일으키는 의식(意識)의 주체(主體)인  자성을 돈오(頓悟)하게  된다.
  둘째, 스승이 수행자에게 염(念)하는  수행방편을 주는 경우이다. 이때에는 첫째와 같은  과정을 거쳐 돈오(頓悟)하게 된다. 
  셋째, 선지식이 수행자의 공부를 3단계로 나누어 수행방편을 달리하여 가르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하면 수행자의 공부는 빠른 속도로 나아가 쉽게 돈오(頓悟)하게 된다. 
  넷째, 선지식이 수행자에게 수행자의 공부를 2단계로 나누어 가르치는 경우이다. 이때에는 먼저 관(觀)과  염(念)을 함께 하도록 하여 육신(肉身)에서 일어나는 번뇌가  평정된 다음 의심을 돈발(頓發)시키는 수행방편을 주게 된다. 
  다섯째, 선지식이 수행자에게 처음부터 의심을 돈발(頓發)시키는 수행방편을 주는 경우이다. 이러한 수행자는 극히 드문 경우지만, 의심(疑心)의 특성 때문에 쉽게 돈오(頓悟)하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법문(法門)은 경전(經典)과 여러 곳에 각각 산재(散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것은  수행자를 가르칠 수 있는 선지식만이 파악하게 되어  있다. 특히 첫째의  경우는 <능엄경(楞嚴經>의 25원통법문(圓通法門)에 집약(集約)되어 
있다.
  첫째와 둘째의 경우는 선지식이 아닌 스승이라도 수행자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인데 이것은 점법(漸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에 스승이 수행자에게 수행방편을 주는 경우이다. 
  셋째, 넷째 그리고 다섯째의  경우는 오직 선지식(善知識)이 출현하여 수행자를 가르치는 방법인데 이것은 돈법(頓法)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은 3단계의 수행법들은 절묘(絶妙)하게 구성하여 놓고 중생제도(衆生濟度)에 나섰던 부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부처님의  법안(法眼)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며, 또한 부처님의 그러한 뜻을 오늘날까지 계승시켜 주신 선지식들에게도 합장(合掌)하고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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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4.수행의 시작과...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4. 수행(修行)의 시작과 공부의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수행은 젊은 사람의 경우는 번뇌가 조금이라도 더 분화(分化)되기 전에, 나이 많은 사람의 경우는 체력(體力)이나 뇌(腦)의 기능이 조금이라도 더 퇴화(退化)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다. 
  중생이 수행(修行)에 임(臨)하게  되는 것은 기도나 참회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전생(前生)부터 수행하던 사람은 수행습관이 남아 있어 어떤 계기에 불법(佛法)에 접하게 되면 바로 수행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수행에 임하게 되면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진여(眞如)와  삼보(三寶: 佛·法·僧)를  믿는 확고한 신심(信心)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신심은 공덕(功德)의 어머니다"라고 하셨듯이  수행자가 수행함에 있어서 진여와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기초(基礎)를 단단히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둘째, 수행자는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속성을 꿰뚫어 보시고 49년 동안 중생제도를 위하여 중생에게 수행단계에 따른 수행방법과 수행자세를 자세히 제시하여 놓으셨지만 경전(經典)은 방대(尨大)하여 수행자가 이해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불법(佛法)에 통달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선지식(善知識)은 부처님을 대신하여 수행자에게 가장 알맞는  수행방법이나 수행자세를  제시하여 주며, 때로는 수행자의 공부를 점검하여  주며, 수행자의 공부가 어려운 고비에 이르렀을 때에는 쉽게 넘게 해 주며, 수행방법이나 수행자세에 변화가  있어야 할 단계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바꾸어 주는 등 수행자에게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셋째, 수행자는 항상 수행을 위하여  노력(努力)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수행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열심히  노력하여야만 한다. 수행이라는 것은 중생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는 작업이므로 수행자의 노력 없이는 결코 성불(成佛)할 수 없다. 
  수행자는 앞의 세 가지 요건을 갖추고 수행에 임하게 되면, 수행의 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이어짐이 마치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실개천들이 모여 작은 강을 이루고, 작은 강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들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것처럼, 걸어다닐 때에도, 섰을 때에도, 앉아 있을 때에도, 누워 있을 때에도 한결같아지는데, 이때를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에 이르렀다는 것은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하여 처음 이르게 되는 수행의 단계이지만, 이것은 수행자의 대신심(大信心)과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 없이는 이르기 어려운 단계인 것이다.


번호:793/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04 07:40  길이:90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4.공부의 어묵동정일여 
[영원한 대자유인]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5. 공부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수행자가 수행방편(修行方便)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이어감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에서  더욱 나아
가면, 말을 할 때[語]에도, 남의  말을 들을 때와 같이 
침묵할 때에도[默]에도, 일을 할 때와 같이  몸을 움직
일 때[動]에도, 사고(思考)할  때와 같이  고요히 있을 
때[靜]에도 수행이 한결같아지는데, 이것을 어묵동정일
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
르렀다는 것은 수행자가 깨어 있는  시간의 전(全) 영
역을 수행으로써 꿰뚫어버렸다는 말이 되므로, 공부가 
오시일여(午時一如)에 이르렀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수행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이러한 수행이 
불가능하다면 부처님의 49년  동안의 법문(法門)은 그 
뿌리부터 거짓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생들이 
생각하기에는 인간(人間)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공부할 
수 있는가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수행단계에 알
맞는 수행방법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수행자에게는  그
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징후(徵
候)가 나타나게 된다. 

  (1) 삼매관성(三昧慣性) 

  수행자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  마치 물리학(物
理學)에서의 관성(慣性)의 법칙(法則)과 마찬가지로 수
행에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됨을  알게 된다. 물리학적
인 관성에 운동관성(運動慣性)과 정지관성(停止慣性)이 
있는 것처럼,  수행의 관성에도  삼매관성(三昧慣性)과 
무기관성(無記慣性)이 있다. 
  삼매관성(三昧慣性)은 수행자가 수행 중  삼매(三昧)
로 인하여 생기는 관성(慣性)이다. 삼매관성은 마치 운
동고나성이 운동의 힘에  비례(比例)하는 것처럼 수행
의 힘에 비례한다. 
  수행자가 수행력(修行力)을 높이면, 삼매관성(三昧慣
性)은 수행자가 수행 중  수행의 방편을 잊어버릴  때, 
수행의 방편 외 다른 번뇌를 일으켜야 할 때, 다른 사
람과 대화를 할 때, 깊은 잠에 빠졌을 때와 같이 수행
에 공간(空間)이 생길 때 그  공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여 수행의 단절(斷切)이 생기지 않게 하므로, 수행자
의 공부를 쉽게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도
록 한다. 
  삼매관성(三昧慣性)은 수행자의  공부를 어묵동정일
여에 이르게 한 다음에도 멈추지 않고 잠잘 때인 매시
(寐時)까지 그 영역을 넓혀 공부의 몽중일여(夢中一如)
와 숙면일여(熟眠一如)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삼매관
성은 추번뇌 모두를 평정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기관성(無記慣性)은 수행자가 수행  중 무기에 빠
지게 되면 그 무기에 관성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무
기관성(無記慣性)은 마치 정지관성(停止慣性)이 무게에 
비례하는 것처럼 무기의 깊이에 비례한다. 
  무기관성(無記慣性)은 수행자로 하여금 고요하고 편
안하고 기분좋게 하여 지혜(智慧)를 없게 한다. 그리하
여 무기관성은 수행자로  하여금 미물(微物)이나 축생
(畜生)의 과보(果報)를 받게  하므로 수행자는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2) 육계신호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갖고 공부할 때, 손으로는 결인(結印)을 하고, 호흡으로 공부의 리듬을 맞추고, 입천정에는 혀를 말아붙이는 등 수행방편에 대한 간절한 생각을 수행자 자신의 육신(肉身)에 삼중(三重)으로 연결시키면, 처음에는 머리의 육계가 생기는 곳에 어딘가에 받힌 것 같은 아픔이 있다가, 그 시기가 지나면 그곳에 수행자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신호가 감지(感知)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그 신호가 계속과  단절이 거듭되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신호가 작은 파장(波長)으로 이어지고, 드디어는 그 신호가 마치 선(線)과  같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때 수행자 자신은 그것이 수행방편을 24시간 망각(忘却)하지 않도록 이어지게 하는 삼매(三昧)의 신호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삼매관성이 길어지고 육계에서 삼매의 신호도 감지하게 되면, 수행자는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의 어려운 고비를 넘게 되고, 쉽게 공부의 몽중일여와 숙면일여에도 이르게 되면서 모든 추번뇌를 완전히 평정하게 된다. 
  수행자의 공부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삼매(三昧)의 신호가 나오는 육계가 구의 형태로 솟아오름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부처님의 육계가 수행의 결정체(結晶體)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수행방편에 대한 간절한 생각을 육신(肉身)에 삼중(三重)으로 연결시키도록 가르치셨던 불조(佛祖)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하게 된다.


번호:797/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07 07:58  길이:59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6.공부의 몽중일여

[영원한 대자유인]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6. 공부의 몽중일여(夢中一如)

  중생은 잠을 잘 때에도 꿈을 꾸지 않으면 깊은 잠에 빠진다. 이것은 중생에게 번뇌와 무기의 현상이 잠을 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와 꼭 같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잠을 잘 때[寐時]에도 깨어있을 때[寤時]와 마찬가지로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수행자가 수행방편(修行方便)에 대한 간절한 생각으로 인하여 삼매관성(三昧慣性)이  생겨 그 삼매관성이 어묵동정간(語默動靜間)에 완벽하게 이어지게 되고 육계에서도 선(線)으로 이어지는 삼매(三昧)의 신호를 감지하게 되면, 잠잘 때 꿈 속에까지도  깨어있을 때와 똑같이 수행하는 상태가계속 연장되는데 이것을 공부의 몽중일여(夢中一如)라고 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는 것은 공부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가  완벽하게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깨어 있는 때의 공부가 한결같지 못하면서도 꿈 속에서 공부하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공부의 몽중일여가  아니고 일종의 잠꼬대  현상인 것이다. 
  공부의 몽중일여에 이르게 되면 오시(午時)의 공부가 몽시(夢時)의 공부와 같고 몽시(夢時)의 공부가  오
시(寤時)의 공부와 같음을 수행자 자신이 확인하게 된
다. 그러나 이때에는 잠자는 시간도 적고, 잠잘  때 꿈
꾸는 경우도 드물며, 잠에서 깬 뒤에도 수행에 몰두하
여 꿈 속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으므로, 처음에는 자신의 공부가  몽중일여(夢中一如)함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수행자가 자신의 공부가 몽중일여함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수행자의 공부가 오시일여(寤時一如)함이 연장되어 잠잘 때 꿈 속에까지 이어져 꿈 속에서도 공부가 깨어있을 때와 꼭 같이  한결같다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 속에서도 지금 깨어있는  이때와 꼭 같았지!'하면서 수행자 자신이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깨어있으면서 어떤 경계에  갑자기 부닥쳐 꿈 속의 일을 연상하게 될 때, '지금 내가  ㄲ어 있으면서 공부하는 이것이 꿈 속에서도 이와 꼭 같았지!'하며 수행자 자신이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이상의 두 경우를 비교해 보면 수행자의  공부 수준은 첫째와 둘째의 경우가 꼭 같지만  자신이 확인하는 시점(時點)은 다르다고 하겠다. 
  첫째의 경우는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여 온 수행자가 긴 시간 동안의 수행의 연속으로 인하여 삼매가 필연적(必然的)으로 몽중(夢中)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었기 때문에, 몽중일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알게되는 경우이다. 
  둘째의 경우는 첫째와는  달리 짧은 기간에  공부의 강도(强度)를 높여온 수행자가  자신의 삼매가 몽중일여(夢中一如)에 이르렀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깨어있을 때의 수행 중 어떤 경계에 부닥치면서 꿈 속의  일이 연상되면서  몽중(夢中)에도 공부가 이러했음을 갑자기 확인하면서 감탄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공부의 몽중일여(夢中一如)함을 어떻게 확인하는가를 보면 수행자가 지난 날의 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가도 알 수 있다. 


번호:80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12 10:40  길이:143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7.공부의 숙면일여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7.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일으킴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
靜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면 다음에는 
깊은 잠 속에까지 한결같게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한다. 이와 같이  깨어
있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의 전(全)영역을 공부로써 채
워버리게 되면 수행자의 공부는 오매일여(寤寐一如)하
다고 한다.
  중생의 일과(日課)는  무기(無記)에 빠짐과  번뇌(煩
惱)가 일어남의 반복이다. 그러한 가운데 오시(寤時)에
는 무기보다는 번뇌가 많고, 매시(寐時)에는  번뇌보다
는 무기가 많다. 매시(寐時)에도 얕은 잠에서는 번뇌가 
일어나고 즉 꿈을  꾸게 되고, 깊은  잠에서는 무기에 
빠지게 된다. 
  수행자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수행방편(修行方便)을 
의식(意識)으로 굴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깊은 잠
에 빠지게 되면 기절(氣絶)했을 때와 꼭 같이 의식(意
識)의 작용이 멈추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깊은 무기(無記) 속에 있을 때인
데, 이때에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시(行住坐臥時)에서 어묵동정시(語默動靜時), 몽시(夢時)까지는 거의 의식(意識)으로 공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숙면시(熟眠時)는 무기관성(無記慣性)만 미치는 영역이어서 의식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에는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일여하고 어묵동정일여하고 몽중일여함에 이르기까지 수행의 힘으로 생기게 된 삼매관성(三昧慣性)을 무기관성만 미치는 영역 속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숙면시(熟眠時)를 삼매관성(三昧慣性)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이다. 
  수행자가 무기관성(無記慣性)만 마치는 시간의 영역
을 삼매관성(三昧慣性)이  이어지게 하려면,  추번뇌를 
모두 평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부가 숙면일여(熟
眠一如)에 이르려면 추번뇌를 모두 평정해야만 가능하
다. 추번뇌를 모두 평정한 수행자라면 중생(衆生)이 아
닌 성인지(聖人地)인 보살지(菩薩地)이며  불퇴전지(不
退轉地)이므로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는 벗어나게 된
다.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
은, 수행 중 거쳐야 했던  어려운 단계마다 그것을 극
복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나 수행자세를 불조(佛祖)께
서 이미 제시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나 조사(祖師)들께서는  수행자의 공부가 오매항일(寤寐恒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특히 고려(高麗)의 태고(太古) 스님이 화두를 들 때의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한 귀중한  말씀을 남긴 것이  있다. 태고(太古) 스님은 "점점 자나깨나  한결같은 때에 이르거든 단지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고 하셨는데  이 글은 공부가 오매일여함에  이르렀을 때에 자신이  직접 터득했던 것을 간결한  글로써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스님은  '점도오매일여시 지요화두심불
리(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라는 이 글을 다음
과 같이 잘못 번역하거나  잘못 해설을 붙인 것을  볼 
수 있었다. 

① 漸漸하여 工夫가 寤寐一如한 時에 到達하거든 다못 
心中에 話頭를 離却 忘失하여서는 안된다. 
② '오매일여한 때에 점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漸到寤寐一如時에도 
只要話頭心不離)'고 한 태고(太古)  선사의 유훈(遺訓)
과 같이 극히 어려운 오매일여의 깊은  경계에서도 화
두를 힘써 참구하여야 한다. 
  
  한문은 언문일치(言文一致)가 되어  있지 않아서 문
자(文字)에 대단히 밝은 사람이라도 돈오(頓悟)하지 못
하면 글을 쓴 사람의 뜻을  잘못 전달받게 된다. 그리
고 이상과 같은 중요한 글을 잘못 번역하고 잘못 해설
하여 이 세상에 내어놓으면 수행자들에게 크게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말과 글은 언문일치(言
文一致)가 되어 있고, 그 구조가 '…하다, …한다, …하
겠다, …이다, …있다,  …것이다' 등의 명확한  직설형
(直說形)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의
사전달에 대한 잘못은 거의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수행자가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의식(意識)으로 의심
을 굴리는 것이므로, 의식의 작용이 멈춘 숙면시(熟眠
時)에는 화두를 들 수 없다. 깊은 잠에서 화두를 든다
고 하면 깊은 잠이 아니고 꿈 속에서 화두를  드는 것
이지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는 아닌 것이다. 
  중생이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은  깊은 무기관성(無記
慣性) 속에 있음을 말한다. 중생에게 그 무기관성이 영
원히 이어진다면 유정(有情: 동물의 총칭)이 아니고 무
정(無情: 동물이 아닌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생에게는 무기관성의 정도가 육도(六道) 중 갈 곳을 
결정지워 주는 두 가지 인자(因子) 중 한 가지가 되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운명(運命)의 반쪽을 차지하게 
된다. 
  태고(太古) 스님의 '점도오매일여시  지요화두심불리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라는 말씀은  공부가 
오매일여함에 이르기 시작하는 수행자에게 주의와  부
탁을 겸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중생의  의식(意識)으로
는 그 내용을 감지(感知)할 수  없으므로 공부가 숙면
일여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을 따져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두(話頭) 들 때의 숙면일여함을 말로써 접근시켜 보면, "다만 그때에는 화두가 빠져버린 한결같음만, 즉 분명한 삼매관성(三昧慣性)만 있다"고 하겠다. 더욱 실감나는 아주 간결한 표현도 있지만 이러한  것은 수행자가 직접 수행을  통하여 터득하도록 아껴둘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
른다는 것이 육신(肉身)을 잠재우지 않고 공부하는 것
으로 잘못 알고 전혀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하는 수행자
를 볼 수 있고, 자신은  육신을 잠재우지 않고 공부하
므로 자신의 공부는 숙면일여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수
행자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는 공
부가 깊은 잠에서도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앞  과정의 
공부를 반드시 거쳐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앞 과정
의 공부를 거치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면 숙면
일여에 이를 것으로 생각하거나, 잠을 자지 않고 수행
하는 것을 숙면일여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러
한 수행자는 자신이 멍청이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러한  수행자는 외도(外道)가 되거나 
멍청이로서 일생을 마치거나 착각도인(錯覺道人)이 될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하다고 
생각되면 그 확실성을 여러 각도(角度)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면 그것
은 환상(幻想)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 확
인하는 방법인 *숙면일여의 검증법(檢證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숙면일여의 검증법은  자신의 공부의 확인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다음에 자신이 선지식이 되어 후학(後學)을 지도할 때에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만 선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외도(外道) 중에는 공부의 수준이 대단히 높은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도 선지식은 반드시 숙면일여의 검증법을 갖추고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깨쳤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선지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숙면일여의 검증법을 갖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외도(外道)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하다는 것은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件)을  갖추게 되는 수행단계이다. 그 이유(理由)에 대해서는 9. '내외
명철(內外明徹)'에서 설명하겠다. 


번호:808/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14 07:37  길이:60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8.세번뇌의 평정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8. 세번뇌(細煩惱)의 평정(平定)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에 이르면 안식(眼識),  이
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
識) 등의 육식(六識)과  제칠식(第七識)인 말나식(末那
識)에서 일어나던 번뇌,  즉 육신(肉身)에서  일어나는 
번뇌인 추번뇌는 모두 평정된다고 공부의  숙면일여의 
단계에서 이미 자세히 밝혔다. 
  추번뇌가 평정되었다면 세 번뇌도 평정되어야만  돈
오(頓悟)하여 성불(成佛)할 수  있게 된다.  세 번뇌는 
제팔식(第八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일어나는 번
뇌를 말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세 번뇌를 평정하기 위한 수행을 하기  전에 자신에게 존재하는  아뢰야식을 먼저 감지(感知)할 수 있어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중생의 육신이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식(識)이므로 무몰식(無沒識)이라고도 하고, 또한 중생의 무기(無記)와 번뇌(煩惱)가 인(因)으로 함장(含藏)되어 중생에게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원인  요소(原因 要素)를 제공하여 주는 역할을 하므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수행자의  공부가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가까워지면 수행자에게 명멸(明滅)하면서 그 존재가 감지(感知)되다가,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게 되면  그 존재가 감지됨이 정착(定着)되는 식(識)이다. 즉, 추번뇌가  평정되어야만 그 존재가 감지됨이 정착된다. 
  수행자가 추번뇌를 평정할 수 있는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육신(肉身)에 있는 일곱 가지 식(識)에서 추번뇌의 일어남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세 번뇌를 평정하기 위한 수행을 할 수 있으려면 수행자 자신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번뇌를 평정하기 위한 수행은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 
  세번뇌는 추번뇌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는 달리 일과성(一過性)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특성(特性)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추번뇌를 평정할 수 있었던 염념상속(念念相續)하는 정도의 삼매(三昧)로는 평정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번뇌는  염념상속하는 정도의 삼매는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번뇌의  평정에는 염념상속하는  삼매보다 더욱 삼매를 고밀도화(高密度化)시킬  수 있는 수행방법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세  번뇌의 이러한 특성을 무력화(無力化)시켜서 그 세 번뇌를 평정하고 수행자의 궁극 목표인 돈오(頓悟)를 이끌어내도록 의심(疑心)의 특성을 활용하는  수행방법인 의심법(疑心法)을 등장시키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의심법(疑心法)을 등장시키시어 세  번뇌를 평정하기 위하여는 심각성(深刻性)을, 돈오(頓悟)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는 해결의 돌파구(突破口)를  찾으려는 의심의 특성을 원용(援用)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中國)의 조사(祖師)들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이나 자신들이  수행의 방편을  의심(疑心)함을 통해  돈오(頓悟)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수행자들에게 수행의 방편으로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번호:814/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18 19:21  길이:38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9.내외명철 (1)의의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9.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밝음으로 꿰뚫어짐)
   
   (1) 내외명철(內外明徹)의 의의(意義)
 
  부처의 속성(屬性)은 영겁불망(永劫不忘)과 영원불매
(永遠不昧)인데  반하여, 중생의  속성은  무기(無記)와 
번뇌(煩惱)이다. 중생은 무기와  번뇌 때문에 사생육도
(四生六道)의  윤회(輪廻)라는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중생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중생이 자신의  속성(屬性)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
려면 반드시 수행과정(修行過程)을 거쳐야만  한다. 즉, 
수행자에게는 수행방편을 갖고 무기에 빠질 틈이나 그 
방편 외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이 없도록 노력하는 과
정이 필요하다.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생각함이 행주
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
如)함에 가까워지면  때때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명
멸(明滅)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공부가 몽중일여(夢
中一如)하고  숙면일여(熟眠一如)하게  되면, 수행자의 
추번뇌는 모두 평정되면서  아뢰야식이 수행자에게 감
지(感知)됨이 정착(定着)하여  드디어는 수행자의 공부
가 이 아뢰야식에서 나오는 세번뇌까지 모두 평정하게 
되는 수행의 극(極)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무기와 번뇌의 경계로 나타나던 안[內]과 밖[外]이 밝음으로 꿰뚫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
외명철은 한번  오면 그것은 영원(永遠)히  어두워지지 
않는다. 수행자가  내외명철하면 돈오(頓悟)하게  되고, 
돈오하면 내외명철은  주체(主體)인 자성(自性)의 나툼
임을 깨닫게  된다. 즉,  자성(自性)과 내외명철(內外明
徹)은 체(體)와 용(用)의 관계이다. 


번호:81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21 07:51  길이:39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9-2.구경각에 이르는...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9. 내외명철

   (2)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원리와 
      내외명철(內外明徹)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件)을 추번
뇌가 모두  평정된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한
다면, 그 필요충분노건(必要充分條件)은 세번뇌까지 모
두 평정된 내외명철(內外明徹)이다.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원리(原理)를  수학(數學)에
서 도형의  합동원리(合同原理)를 통해 유추하여  보고
자 한다. 
  구경각(究竟覺)을 A라는 기본도형이라 하고,  숙면일
여(熟眠一如)의 단계를  B라는 도형이라 하고,  내외명
철(內外明徹)의 단계를 C라는 도형이라 하자. 
  ① 구경각인 기본도형 A에 이르름에  있어서 숙면일
여(熟眠一如)의 단계인 도형  B의 조건충족은, 마치 B
와 A가 서로 각의 크기만 같아 B가  A와 합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必要條件)을 충족하여 닮은꼴[相似形]이 
되는 경우와 같다. 
  ② 구경각인 기본도형 A에 이르름에  있어서 내외명
철(內外明徹)의 단계인 도형  C의 조건충족은, 마치 C
와 A가 서로 각과 변의 길이까지 같아  C가 A와 합동
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을 충족하여 
합동(合同)이 되는 경우와 같다. 
  ③ 그러나 도형 B가  기본도형 A에 합동이 되기 위
한 필요조건도 충족하지 못하면 도형 B는 기본도형 A
와는 닮을 수도  없는 것처럼, 구경각이 되기  위한 필
요조건인 숙면일여에도 미치지  못한 수행단계에서 깨
침이 일어나면, 그 깨침은 구경각과는  닮을 수도 없는 
깨침이다. 그러므로 구경각(究竟覺)과  닮지도 않은 깨
침이라면 착각(錯覺)이거나  부처님의 법(法)에는 없는 
외도(外道)의 깨침일 수밖에 없다.   


번호:817/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26 09:49  길이:50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9.(3)조건충족에 따른 깨침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9. 내외명철
 
   (3) 조건충족(條件充足)에 따른 깨침[悟]

  ① 도형들이 서로 합동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면 합동인 것처럼,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충분조
건인 내외명철하면 돈오(頓悟)하게  된다. 이때의 돈오
는 불지(佛地)인 구경각(究竟覺)일 수밖에 없다. 
  ② 도형들이  서로 합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만이 
충족되면 닮은꼴[相似形]의  도형이 되는 것처럼, 구경
각에 이르는 필요조건인  숙면일여에서 깨침이 일어나
면, 이때의 깨침은 구경각과는 '닮은꼴[相似形]의 깨침'
인 것이다.
  기본도형 A에 합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만 충족된 도형들의 수는 A보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무한(無限)히 많다. 그러나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만 충족되는 깨침은 세 가지로 한정(限定)된다. 그 이유는 숙면일여에서 내외명철에 이르기까지는 세 가지의 미세망념(微細妄念)의 평정(平定)이라는 한정적인 과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만 충족된 깨침은 삼세망념(三世妄念)을 평정한 차등(差等)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그 깨침들은 구경각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만 충족하고 있으므로 포괄적(包括的)으로 말할  때에는 닮은꼴[相似形]의 깨침들이라고 하면 된다. 
  닮은꼴의 깨침들은 세번뇌가  모두 평정되어 내외명철하여 돈오할 때까지  점수(漸修)하여야 한다. 그리고 닮은꼴의 깨침들은  구경각이 아니므로 무여열반(無餘涅槃)이 될 수 없어 유여열반(有餘涅槃)인 보살지(菩薩地)이고 구경각에  이르기까지  변역생사(變易生死)가 있게 된다. 이러한 깨침의 수행자는 자기를 지도하는 스승인 선지식의 능력과 본인의 수행방편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이 조화를 이루어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수행해야만  불지(佛地)인 구경각(究竟覺)에 이르게 된다. 
  ③ 도형들은 서로  합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서로 닮지도 않은 도형이 되는 것처럼,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수행단계
에서 깨침[悟]가 일어나면 그  깨침은 구경각과는 닮지도 않은 전혀 다른 형태의 깨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필요조건도 충족되지 않은 깨침은 부처님의 법에는 없는  외도(外道)의 깨침이나 착각(錯覺)일 수밖에 없다. 


번호:819/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3/31 08:25  길이:55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0.단경에서의 내외명철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0. <단경(壇經)>에서의 내외명철(內外明徹)
   
  〈 육조단경(六祖壇經)〉은 모든 선지식들이 훌륭한 수행의 지침
서라고 극찬(極讚)하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이므로,〈단경〉에서  돈
오(頓悟)에 이르는 필요충분조건인 내외명철(內外明徹)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찾아 보고자 한다.
  
  ①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
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
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
에 모두 나타난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아 지혜는 항상 밝
지만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면 망념의 뜬구름이 자성을 덮어 밝
을 수가 없다. 그러나 참 법문을 열어 주시는 선지식을 만나 미
망을 불어서 물리쳐버리면 안팎이 밝음으로 꿰뚫어져[內外明徹]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난다. 모든 법에  자재한 성
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한다.
  
  日月常明 只爲雲覆蓋 上明下暗 不能了見日月星辰 忽遇慧風 吹
散 卷盡雲霧 萬像森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 智如
月 智惠常明 於外著境 妄念浮雲 蓋覆自性 不能明  故遇善知識 開
眞法 吹却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皆見 一切法  自在性 名爲
淸淨法身
  
  ② 자성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밝음으로 
꿰뚫어지면[內外明徹] 자기의 본심을 알게 된다. 만약 본심을 알
게 되면 곧 이것이 해탈(解脫)이며 이미 해탈을 얻었으면 곧 이
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곧  이것이 무
념(無念)이다.
  
  自性心地 以智惠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③ 자기의 마음의 땅 위에 깨달은 성품인  여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되고 여섯 욕계
의 모든 하늘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고 안팎이 밝음으로 꿰뚫어지면[內外明徹] 
서쪽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않고 어떻게 
피안(彼岸)에 이르겠는가.
  
  自心地上 覺性如來 放大知惠 光明照耀 六門淸淨 照破六欲諸天 
下照三毒若除 地獄一時消滅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

  
  이상과 같이〈단경(壇經)〉의 세 곳에서 내외명철(內外明徹)이
란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단경에서 혜능 스님
이 돈오(頓悟)하는 구절을 보면, "혜능은 나무를 팔고  나오다가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보고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쳤다[一聞心明便悟]."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心明', 이것이 내외명철인  것이다. 내외명철은 수
행이 극(極)에 이르러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나오는  미세망념
(微細妄念)까지 모두 평정하여야만 있게 되는  현상이므로 내외
명철하면 돈오(頓悟)할 수밖에 없다.


번호:820/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4/01 09:30  길이:132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1.돈오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1. 돈 오(頓 悟)

  수행자가 수행의 방편(方便)을 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노력
을 계속하게 되면, 처음에는 선정(禪定)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
臥一如)한 수행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어묵동정일여
(語默動靜一如)한 수행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수행자의 공부는 깨어 있는 시간의 전(全) 영역
을 선정(禪定)으로 가득 채우기에 이른다.  그 다음의 수행자의 
공부는 선정이 잠자는 시간 속으로 연장되는데,  처음에는 몽중
일여(夢中一如)한 단계에 이르게 되고,  드디어는 숙면일여(熟眠
一如)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수행자의 공부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추번뇌와 그  번뇌에 상응(相應)하는 무기(無記)도 
함께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의 공부가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가까워지면 수행자 자신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감지하게 되는데, 이것은 수행자의 공부에 큰  전환점(轉換點)이 된다. 눈밝은 선지식(善知識)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행자로 하여금 이 아뢰야식에서 나오는 세번뇌(細煩惱)를 평정하도록 수행방법을 새롭게 바꾸어 준다. 즉, 선지식은  이때부터는 수행자로 하여금 의심법(疑心法)으로 공부하도록  의심을 돈발(頓發)시킬  수 있는 과제(課題)를 주어 수행의 방편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수행자의 공부가 의심(疑心)의 특성 때문에  드디어 
세번뇌(細煩惱)의 일어남이나 순간적인 무기(無記)에 빠짐도  없
는 선정(禪定)이 계속되는 시기에 이르면  다음과 같이 돈오(頓
悟)하게 된다. 
  ① 수행자가 육진경계(六塵境界),  즉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어느 한 가지에  자극받는 순간 그것을 
감지(感知)하는 식(識)의 주체(主體)와 수행방편을  생각하는 식
(識)의 주체(主體)가 꼭 같이 자신의  주체인 성품임을 문득[頓] 
깨닫게[悟] 된다.
  ② 수행자를 지도하는  스승인 선지식(善知識)이 의도적으로 
기회를 포착하여 수행자에게 직지인심(直指人心)하는 언동(言動) 
또는 문답(問答)이나 격외(格外)의 언동  또는 문답으로 자극을 
주게 되면, 수행자는 그러한 자극을 받는 순간 그것을 감지하는 
식(識)의 주체와 수행방편을 생각하는 식(識)의 주체가 꼭 같이 
자신의 주체임을 문득[頓] 깨닫게[悟] 된다.
  이상에서 ①의 경우는 수행자의 공부가 돈오(頓悟)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 수행자가 스스로 돈오(頓悟)하는 경
우이고, ②의 경우는 수행자가 선지식의 자극에 의하여 돈오(頓
悟)를 앞당기게 되는 경우이다. 이것은 마치  ①은 어미닭이 품
고 있는 계란이 병아리가 되었을 때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
는 것과 같고, ②는 품고 있는 계란이 병아리가 된 것을 감지한 
어미닭이 부리로 껍질을 깨어  주어 껍질 밖으로  빨리 나오게 
하는 것[졸탁( 啄)]과 꼭 같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란,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
를 거친 다음 수행의 방편 외에는 세번뇌의 일어남이나 순간적
인 무기(無記)에 빠짐도 없는 선정(禪定)에 이르렀을 때에 육진
경계(六塵境界) 중 어느  한 가지에 자극받게  되면, 그 자극을 
감지하는 식(識)의 주체(主體)와 수행방편을  생각하는 식(識)의 
주체가 바로 수행자 자신의 주체인 성품(性品)임을 문득[頓] 깨
닫는[悟] 것을 말한다.
  수행자가 이상과 같이 돈오(頓悟)하면,  수행방편(修行方便)을 
생각하던 식(識)의 주체(主體)인 자성(自性)을 보게 되므로 견성
(見性)이라고 하며, 수행자 자신의 속성(屬性)은  부처의 속성으
로 바뀌게 되므로 성불(成佛)이라고 하며,  수행자의 이와 같은 
깨침은 구경지극(究竟至極)의 깨침이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행자가 돈오(頓悟)하게  되면 과거의  중생 때와는 
달리 자신의 주체인 성품(性品)은  망각되지 않고[不忘] 어둡지 
않으며[不昧], 자성(自性)이 주재(主宰)하는 능동의 삶을  영위하
게 된다.
  돈오(頓悟)한 다음 자신의  주체인 성품을 망각하지  않고[不
忘] 어둡지 않음[不昧]은〈금강경(金剛經)〉의 요지(要旨)인 "〈  금
강경(金剛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것"이며,  돈오(頓悟)한 
다음 자신의 주체인 성품(性品)이 주재하는 능동의 삶을 영위함
은〈법화경(法華經)〉의 요지인  "부처님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
緣)으로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하시는 것[佛世尊  唯以一大事因
緣故 出現於世]"이다.
  지난 날 선사(禪師)들  중에서 마조 도일(馬祖  道一) 선사의 
제자 대주 혜해(大珠 慧海) 선사가〈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
門論)〉에서 돈오(頓悟)에 대한 풀이를 간명(簡明)하게 해놓은 것
이 있는데, 이것은 그분  공부의 전체를 내어 보이는  것이므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문: 어떠한 것을 돈오(頓悟)라 합니까[云何爲 頓悟] ?
  답:   돈(頓)이라는  것은   문득  망념을   제거함이요[頓者頓除妄念],
      오(悟)라는 것은 얻을 바  없음[無所得]을 깨닫는것이다[悟者 悟無所得].
  
  "돈(頓)이라는 것은 문득 망념(妄念)을 제거함이요." 
  이 말은 중생의 속성인 미망(迷妄), 즉  미(迷)와 망(妄)을 돈
오하기 이전의 여러  수행단계를 거쳐오면서  동시에 차츰차츰 
평정하여 오다가 드디어는 모든 미망을  평정하기에 이르면 수
행이 극(極)에 이르러, 지금까지 수행을 이끌어 오던 방편인 그 
망념마저 문득 순간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주 
혜해(大珠 慧海) 선사는 돈(頓)이라는 것은  돈제미망(頓除迷妄)
이라 하지 않고 돈제망념(頓除妄念)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悟)라는 것은 얻을 바 없음[無所得]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은 수행자 자신의 내면세계(內面世界)에 존재하고  있지
만 미망(迷妄)에 가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수행이 극(極)에 이
르러 마지막으로 남은 망념인 수행의  방편마저 문득 제거하면
서 수행자 자신의 주체(主體)인  성품(性品)을 확인하는 깨침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깨침은 수행자의  외부에 존재하
는 사물(事物)이나 이치(理致)에서 무엇을 깨달아 얻는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얻을 바 없음[無所得]'을 깨닫는다고 한 것이다.
  
  돈오(頓悟)할 때 돈(頓)과 오(悟)는 시차(時差)없이 같은 순간
에 이루어져야 구경각(究竟覺)이다.  그런데 숙면일여에서 내외
명철(內外明徹)이 되기 전 삼세망념(三細妄念)의 평정에 따른 차등(差等)에 따라 세 가지의 깨침이 있는데, 이것을 보살지(菩薩地)로 말을 하면 팔지보살(八地菩薩),  구지보살(九地菩薩), 십지보살(十地菩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보살은 돈(頓), 즉  돈제망념(頓除妄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세망념(三細妄念)이 모두 평정되어 돈제망념하여 구경각(究竟覺)인 불지(佛地)에  이를 때까지 수행방편(修行方便)을 갖고  계속 수행해야 한다. 운문 선사(雲門 禪師)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십지보살이 설법을 구름이 일어나고 비가 쏟아지듯 하여도 성품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十地菩薩 說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 ]."고 하셨다.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도 이르지 못한 중생이 
깨쳤다고 말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러한 깨침에는 구경
각(究竟覺)에 이르는 조건충족(條件充足)도 전혀 없고 앞에서 말
한 돈(頓)과 오(悟)에 해당하는 것도 전혀 없어, 그 깨침은 미망
(迷妄)의 경계에서 착각(錯覺)을 한 것이거나 외도(外道)의 깨침
이므로, 빨리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만약 이러한 중생이 인
연 있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착각을 바로잡지 못하면 착각외
도(錯覺外道)가 되어 불조(佛祖)가 전하지 않은 돈오점수(頓悟漸
修)를 주장하게 된다.
  돈오(頓悟)와 착각(錯覺)의 차이는 법왕(法王)과 마왕(魔王)의 
분기점(分岐點)이 되므로 수행자 자신이 돈오(頓悟)했다고  생각
되면, 자기의 깨침을 앞에서 말한 돈(頓)과 오(悟)에 대입(代入)
시켜 보고 자신의 깨침이 틀림없으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확
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선지식에게서 수행불행(修行佛行)에 
대한 당부의 말씀을 듣고 수행방편을 놓아야 된다.


번호:822/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4/07 11:06  길이:181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2.<단경>에서의 돈오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2.〈단경(壇經)〉에서의 돈오(頓悟)
돈오(頓悟)에 관한 것은 경전이나 조사(祖師)들의 어록 등에서도 볼 수 있고 앞에서 내가 경험하였던 것도 밝힌 바 있지만, 여기서는 모든 선지식들이 돈교법(頓敎法)의 지침서(指針書)라고 일컫는〈단경(壇經)〉에서 혜능 스님의 돈오(頓悟)하는  장면을 대두시켜 수행자에게 돈오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단경은 오종(五種)의 이본(異本)이 있다.  그 중에서 천여 년 동안 돈황(敦煌)의 석굴에 묻혀  있다가 근세(近世)에 출토되어 원본(原本)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돈황본 단경(敦煌本 壇經)〉과, 중국(中國)에서는 원(元)나라  시대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高麗)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800년 가까이  대표적인 단경으로 유통되고 있는〈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에서, 혜능 스님의 돈오(頓悟)하는  장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단경〉의 핵심이 잘못 기록된 덕이본의 구절을  지적하여 후학(後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고자 한다.
  
   (1) 돈황본(敦煌本)과 덕이본(德異本)의 차이
   
   ① 돈황본(敦煌本)
   
  혜능은 어려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난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더니라.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사고는 혜능을 데리고 관점에 이르러 손님은 나무를 가져갔고 혜능은 돈을 받고 문 앞을  나서는데 홀연히 한 손님이〈금강경〉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은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쳤다.
  
  惠能幼小 父小早亡 老母孤遺 移來南海  艱辛貧乏 於市賣紫 忽有一客 買紫 遂領惠能 至於官店 客將紫去 惠能得錢  却向門前 忽見一客 讀金剛經 惠能一聞 心明便悟
  
   ② 덕이본(德異本)
   
  혜능은 돈을 받고 문 밖을 나서는데 한 손님이 경을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은 경에서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라고 이르는 것을 한번 듣고 마음이 즉시 열리어 깨쳤다
  
  能 得錢 却出門外 見一客誦經 能 一聞經 云  '應無所住 而生其心' 心卽開悟
  
   ③ 돈황본과 덕이본의 차이
  
  이상과 같이〈돈황본 단경〉과〈덕이본 단경〉에서 혜능이  돈오(頓悟)하는데 자극받는 계기를 제공하여 준  것은 모두〈금강경〉이지만, 그 내용은 큰 차이점을 갖고 있다.  
  돈황본에서는 "한 손님이〈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은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쳤다."고만 하였다.〈금강경(金剛經)〉에는 수행이 극(極)에 이른 수행자에게는 "如是我聞 一時佛在 舍衛國‥‥‥洗足已 敷座而坐"의 구절을  비롯하여 내외명철(內外明徹)되면서 돈오(頓悟)할 수 있는 구절이  많다. 그러므로 본인이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반드시 그 구절을 밝혀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덕이본에서는 "한 손님이 경을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은 경에서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라고 이르는 것을 한번 듣고  마음이 즉시 열리어 깨쳤다."고 하여 혜능 스님께서 들은〈금강경(金剛經)〉의 구절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덕이본에서 밝히고 있는 그 구절은 수행자의 공부가 아무리 극(極)에 이르렀을 지라도 한번  듣고 마음이 즉시 열리어 깨칠 수 있는  구절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즉, 이 구절에 담긴 뜻으로는 절대로 돈오(頓悟)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수행자가 돈오하는 계기와  돈오라는 깨침과 돈오 후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깨침 등에 대하여 자세히 이해해야 하므로, 지금부터 그러한 것들을 밝히고자 한다. 
  
   (2) 돈오(頓悟)와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
  
   ① 돈오하는 계기(契機)
  
  수행자는 모든 미(迷)와 망(妄)을  평정하여 수행이 극(極)에 이르렀을 때에, 자신 앞에서 펼쳐지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라는 육진경계(六塵境界) 중의 어느 한  가지에 자극받는 계기(契機)가 반드시  와야만 돈오(頓悟)하게 된다. 
  이때 수행자가 받는 자극은  대부분 육진(六塵) 중에서도 어떤 모양[色塵]이나 소리[聲塵] 그 자체이거나 또는 어떤  모양이나 소리에 담긴 뜻[法塵]의 경계이다. 이와 같이 돈오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육진경계 중의 한 가지는 수행자에게 마치 폭발물의 기폭제(起爆劑)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돈오(頓悟)라는 깨침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갖고  공부하여 세번뇌까지 모두  평정(平定)하기에 이르렀을 때에 육진경계 중 어느 한  가지에 자극받는 계기가 오면, 자신에게서 시작없는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으면서 주인공(主人公) 역할을 하고  있는 성품을 문득  깨닫게 되는데, 이를 돈오(頓悟)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와  같은 돈오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선지식의 지도가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돈오는 어디까지나 수행자 자신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수행자는 선지식인 스승의 언하(言下)에  돈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수행자의 공부가 돈오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 스승이 육진경계 중의 한 가지를 자극하여 줌으로써 돈오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③ 돈오(頓悟) 후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깨침
  
  돈오(頓悟) 이후에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깨침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이고,  다른 한 가지는 한도인(閑道人)이 되는 깨침이다. 여기서는 수행불행의 깨침에 대해서만 밝히기로 하고 한도인에  관한 것은 21. '대선지
식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수행자가 돈오하게 되면  선지식(善知識)은 수행자의 돈오를 확인한 다음 수행자에게 앞으로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가  들어 있는〈금강경(金剛經)〉의 사구게(四句偈)를 일러주게 된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자성을 여의지 말라[不離自性]."라는  당부의 말씀을 일러주게  되는데, 수행자는 이때에 선지식의 그 당부 말씀에서 즉시 수행불행(修行佛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수행불행의 깨침은  반드시 선지식인 스승의 당부 말씀을 들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스승의 당부 말씀은 또한 수행자의  돈오(頓悟)를 인가(印可)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수행자가 돈오 후에 선지식에 의한 수행불행을 깨닫지 못하면 수행자는 앞으로의 진로(進路)를 알 수  없어 선지식인 스승을 찾아야 한다.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고 돈오한 혜능(惠能)이 홍인 대사(弘忍 大師)를 찾아  황매(黃梅)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理由)에서였던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은 과거 생(生)에 모든 수행을 끝마치시고 오로지 중생제도(衆生濟度)를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인가(印可)받을 스승이 필요없다.
  그런데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진귀 조사(眞歸  祖師)에게서 인가(印可)를 받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설화(說話)가 생기게 된 것은 돈오(頓悟) 이후 선지식(善知識)의 필요성을 절감(切感)했던 어느 수행자가  이때에는 '부처님이라도 스승없이는 수행불행(修行佛行)을 깨칠  수 없었을 것이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말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수행자는  반드시 돈오(頓悟)하는  계기(契機)와 돈오라는 깨침과 그리고 돈오 후에 뒤따라야 할 깨침이 있어야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3)〈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의 오류(誤謬)
   
  지금부터〈돈황본 단경(敦煌本 壇經)〉과〈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에서의 돈오(頓悟)에 대한  구체적인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돈황본(敦煌本)에서는 혜능(惠能) 대사께서 돈오의 계기가 된〈금강경(金剛經)〉의 구절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수행이 극(極)에 이른 수행자라면 어느 한 구절에 담긴 내용을 듣고 돈오할 수 있는  곳이〈금강경〉에는 많이 있다. 따라서 비록 구체적인 구절이 없다고 할지라도 돈오한 선지식이라면〈금강경〉에서 돈오할 수 있는 구절들을 상상해 볼 수 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덕이본(德異本)에서는 혜능(惠能) 대사께서 돈오(頓悟)한 계기가 된 경(經)의 구절이〈금강경〉에 있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이었다고 한다.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란 말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선지식이 수행자의  돈오를 확인한 다음 수행자에게 앞으로 살아가는 지침(指針)을 일러주게 되는데, 그때에 이 말을 하여줌으로써 돈오한  수행자로 하여금 수행불행(修行佛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덕이본(德異本)은 혜능 대사의 돈오(頓悟)하는 계기부터 잘못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쓴 덕이  비구(德異 比丘)는 돈오(頓悟)라는 깨침과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에 대하여 그 실상(實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원대(元代)에 출현한 덕이본(德異本)이  지금까지〈단경(壇經)〉을 대표하여 유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의 핵심(核心)이 틀렸음을 지적한 선지식이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불법(佛法)의 진수(眞髓)가 계승되었던 전성기(全盛期)는 달마(達磨)  대사 이래 당대(唐代)의 혜능(惠能) 대사부터 시작하여 송말(宋末)의 오조 법연(五祖 法演) → 원오 극근( 悟 克勤) → 대혜 종고(大慧 宗 )에서 끝나고, 그 이후에는 쇠퇴기(衰退期)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의 '무(無) !'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쇠퇴기에 들어가면  돈오(頓悟)라는 깨침과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件)을 충족한 깨침만 전승(傳承)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필요조건도 충족하지 못한  착각(錯覺)을 전승하고 있음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이 크게 훼손되는 현상이며 수행불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가 올 것을 대비하여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던 옛 선인(先人)은〈단경(壇經)〉을 돈황(敦煌)의 석굴에서 천년의 세월을 잠들게 하여 오늘날 그 잠을 깨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기에서 불조(佛祖)의  정전(正傳)을 바로 알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수행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법의 진수(眞髓)가 잘  계승(繼承)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번호:827/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4/11 15:02  길이:65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3.수행불행의 깨침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3.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
  
  여기서는 내가 경험했던 수행불행의 깨침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수행불행의 깨침은 돈오(頓悟)를  전제(前提)하므로 내가 경험했던 돈오(頓悟)와 단경에서의  혜능 대사(惠能 大師)의 돈오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수행자가 돈오하기까지는 선지식의 지도 여하에 따라 수행기간이 짧게 걸리거나 길게 걸릴 수도 있겠지만, 돈오의 원동력은 오로지 수행자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돈오한 다음에는 그 이전과는 달리 수행자 자신의 지혜나 노력만으로는 전혀 나아갈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여기에서 진로(進路)를 찾으려면 선지식의 도움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절감(切感)하게 된다.
  이때 옆에 선지식이 있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선지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마침내 선지식을 만나게 되면, 선지식은 우선 돈오한  수행자를 이런저런 점검(點檢)만 해 보시고는 시인(是認)도 부인(否認)도 없이 몇 달 동안 답
답하게 기다리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인연이 무르익게  되면 마침내 선지식은  수행자를 불러서 다시 확인하시고는,
  "너는 오늘부터 수행방편을 버려라." 
하시고,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하여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할 것이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할 것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라는〈금강경(金剛經)〉에 있는 사구게(四句偈)를  일러주신 다음, 앞으로  그 사구게의 내용대로 수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수행자는 선지식의 그 말씀 아래[言下]에 수행불행(修行佛行)을 즉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제1장 '구도(求道)의 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난  날 나는 화두타파(話頭打破) 이후 표충사(表忠寺) 해산(海山)  스님을 찾아갔었다. 스님께서는 몇 번의 이런저런 점검만 해 보시고는 시인도 부인도 하시지 않고 몇 달  동안을 뒷짐만 지고 돌봐주시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가슴  답답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섯 달이 지나간  어느 날 해산(海山)스님께서 부르
셨다.
  "취암 !"
  "예 !"
  "오늘부터 화두를 버려라."
  "스님 ! 화두를 버리면 무기(無記)가 아닙니까 ?"
  "무기(無記)라고 ? 너 선정(禪定)도 번뇌 아니더냐 ?"
  "스님 ! 예 ! 그렇습니다."
  "그것을 무념(無念)이라고 해. 부처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래. 그 무념(無念)을 영원히 잊지 말고 어느 때고 잘 간직하라."
  스님의 그 말씀 아래에 수행불행(修行佛行)을 즉시 깨닫고는, 
  "예 ! 스님 ! 잘 알겠습니다."
하고 일어나서 삼배(三拜)드리고
  '아 !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나에게도 어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
  '부처님이시여 ! 고맙습니다. 스승님이시여 ! 고맙습니다.'
  '그 은혜는 중생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
  "스님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취암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스님 ! 고맙습니다."
하고 스승님의 은혜(恩惠)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후 지금까지 그  무념을 순간도 망각하는 때가 없게 되었다. 즉, 순간도 망각하지 않고  '〈 금강경(金剛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게 되었으며, 어떠한 때에도  '불세존 유이일대사인연고 출현어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해산(海山) 스님의 그 은혜(恩惠)는 분골쇄신(粉骨碎身)토록 갚아도 다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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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4.단경에서의수행불행의깨침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4.〈단경(壇經)〉에서의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 
  
  앞에서는 나의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에 관하여 설명하였
다. 여기서는 혜능 대사(惠能  大師)의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
침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혜능 대사는 스승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돈오(頓悟)는 
하였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닥쳐 스
승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어
머니를 하직하고  황매(黃梅)의 빙무산(憑茂山)으로  가서 오조 
홍인(五祖 弘忍) 대사를 예배하였다. 
  
    홍인 대사가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지금 나에게서 또 구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 
    혜능이 답하기를,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멀리 와서 
  화상(和尙)을 예배함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
  처가 되는 법을 구하고자 합니다." 
    홍인 대사가 혜능에게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사람이고 또한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습니
  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불성은 어찌 차별
  이 있겠습니까 ?"
    홍인 대사는 함께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
  이 둘러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더 말씀하지는 않았다. 그
  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을 하게 하니, 그때 혜
  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8개월 남짓 방
  아를 찧었다.
  
  이상과 같은 홍인 대사와 혜능과의 대화는 몇 마디 안되지만 
그 내용을 보면 홍인 대사는 혜능의 공부를  이미 감지(感知)하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개월 남짓 방아를 찧게  하였음도 
다음의 일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빙무산에 온 지 8개월 정도 지나 혜능이 방아를 찧고 있었을 
때 신수 상좌(神秀 上座)의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을 수 있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莫使有塵埃]
  
혜능은 이상과 같은 게송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기를,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明鏡亦無臺]
    불성은 항상 맑고 깨끗하거니             [佛性常淸淨]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何處有塵埃]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心是菩提樹]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身爲明鏡臺]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明鏡本淸淨]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何處染塵埃]
  
  홍인 대사는 신수의 게송을 보시고는,
  "소견은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
으로 들어오지는 못 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에 의지하여 수행
하면 곧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는 위없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는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 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의 본성(本性)을  보느니라. 너는  우선 돌아가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한 게송을 지어 와서 나에게 보여
라. 만약 문 안에 들어와서 자성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
을 너에게 부촉하리라."
하셨다. 신수 상좌(神秀 上座)는  돌아가 며칠이 지났으나 게송
을 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조 홍인(五祖 弘忍) 대사는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는 
즉시 큰 뜻을 잘 알고, 밤중  삼경(三更)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
로 불러〈금강경(金剛經)〉을 설하여 주었다.  혜능은 한번 듣고 
그 말 아래[言下]에 문득 깨쳐서 그날 밤에 법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혜능 대사가 또 다시 깨쳤다는 것은 그분이 나무장사 시절에 나무를 팔고 돈을 받고 나오면서〈금강경(金剛經)〉을 읽는 것을 듣고 돈오(頓悟)할 때 알게 된 그 자성(自性)을 이제는 어느 때에도 잘 간직하는 방법을 깨쳤다는 것이다. 즉, 혜능은 홍인 대사가〈금강경〉을 설하여  주시는것을 듣고 수행불행(修行佛行)을 문득 깨친 것이다.
  돈황본(敦煌本)에는〈금강경〉의 어느 구절인가는  언급이 없지만〈금강경〉에서 찾아보면 수행불행을 가르쳐 주시는 부처님의 말씀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하여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할 것이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할   것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라는   사구게(四句偈)의 말씀인 것이다.
  이 사구게에서 청정심(淸淨心)이 바로  돈오할 때에 알게 된 
자성(自性)인데 이 자성을 육진경계(六塵境界)의 어느  곳에서도 
빼앗기지 말고 잘 보존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때에도 
그 자성을 잘 간직하라는 말을 아주 구체적으로 육진경계를 들
어가며 청정심을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을 
또 다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거 중생 때와는 달리  어떠한 
때에도 자성을 여의지 말라[不離自性]."는 것이다.
  혜능은 홍인 대사의 그와 같은 말씀을 듣고 수행불행을 문득 
깨친 다음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던  의발(衣鉢)을 홍인(弘忍) 
대사로부터 전하여 받고 육조(六祖) 대사가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수행불행(修行佛行)에 대하여 자세히 밝힘은, 첫
째는 현재나 미래의 수행자로 하여금 불법(佛法)을 바로 알도록 
함에 있고, 둘째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혜능 대사와 같은 분도 
돈오(頓悟) 이후 스승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수행불행을 깨달
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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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5.무념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5. 무 념(無 念)
  
  수행자가 수행방편으로써 추번뇌와 세번뇌를  모두 평정하고 
수행방편인 한 가지 망념(妄念)만 남는 수행경지(修行境地)에 이
르렀을 때에 자신 앞에서 펼쳐지는 육진경계(六塵境界) 중 어느 
한 가지에 자극받으면 돈오(頓悟)하면서 자신의 주체인 성품(性
品)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성품(性品)은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돈오(頓悟)하
면서 터득하는 것이지 감각(感覺)이나 의식(意識)으로 이해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하여 성품을 터득한 선지
식(善知識)이라도 수행을 하지 않은 중생이나  수행이 모자라는 
중생에게 언어(言語)로써 성품을 이해하도록 할  수는 없다. 이
러한 이유로 불조(佛祖)께서는 성품을 말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불과할 뿐 그 실상을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언어도
단(言語道斷)이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불조(佛祖)께서는  성품(性品)을 시각(視角)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 수행자에게 그 존재함을 인식시키고 수
행을 통하여 터득하도록 하셨음을 볼  수 있다. 불조(佛祖)께서 
붙인 이름들을 예를 들어보면, 부처[佛], 불성(佛性), 법신(法身), 
성품(性品), 진여(眞如), 자성(自性), 자아(自我), 진아(眞我), 주인
공(主人公), 본성(本性), 본체(本體),  주체(主體), 평상심(平常心), 
본래면목(本來面目), 일물(一物), 일기(一機),  청정심(淸淨心), 금
강불괴신(金剛不壞身)… 등이 있다.
  그러나 성품(性品)의 나툼인  작용(作用)은 언어로써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불조(佛祖)께서는 성품의  나툼에 대한 
확실한 표현을 하여 수행자에게 성품의 터득을 위한 올바른 수
행이 가능하도록 하셨고, 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터득한 성품
이 불조께서 터득한 것과 일치(一致)하는가를 점검해 보도록 하
셨다.
  성품(性品)의 나툼은, 무(無)와 념(念) 즉 무념(無念), 진공(眞
空)과 묘유(妙有), 영겁불망(永劫不忘)과 영원불매(永遠不昧),  불
생불멸(不生不滅)과 상주불멸(常住不滅), 무량수(無量壽)와  무량
광(無量光), 적적(寂寂)과  성성(惺惺), 공적(空寂)과  영지(靈知), 
적(寂)과 조(照)… 등이다.
  이상과 같이 성품(性品)의 나툼은 성품의  속성(屬性)을 말한
다. 즉, 각소현발(覺所顯發)인 것이다. 선지식들은 성품의 나툼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도 무념(無念)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터득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가 간단하고 
중생들에게는 성품의 존재를 이해시키기 쉬운 말이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념(無念)을 터득함에 있다. 무념
은 이해하여 아는 것이 아니므로 중생은 감지할 수  없다. 오직 
시차(時差)없는 돈(頓)과 오(悟)가 되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중생을  위하여 많은 설법(說法)
을 하신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돈오(頓悟)하여 무념(無念)을 터
득하도록 하신 것이지  말씀으로써 무념(無念)을  이해시키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무념(無念)은 망각하지 않음[不忘]과 어둡지 않음[不昧]이기에 
깊이 잠들거나 기절(氣絶)을 하여도 망각하거나  어두워지지 않
는다. 무념(無念)은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의  나툼이기 때문에 
한번 터득하면 비록 목숨이 끊어지고  육신(肉身)이 없어지더라
도 항상하며 변하지 않는다.
  무념(無念)의 '무(無)'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이고   '념
(念)'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이므로 무념을 깨침은 무상정
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룸이요, 무상정등정각을 이룸은  무념
(無念)을 깨치는 것이다.
  수행자가 무념(無念)을 터득했다는 것은 순간도 끊임없는  노
력의 연속성이 만든 무형(無形)의 작품인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무념을 터득하는 일보다 
노력의 연속성(連續性)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돈오(頓悟)하여 무념(無念)을 터득했다는  것은 그  수행자가 
금생(今生)에 처음 수행자로 출발하여 그러한 결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그 이상의  전생(前生)부터 수행이 계속되어
온 결과인 것이다.
  돈오(頓悟)하여 무념(無念)을 터득하면  선지식으로부터 확인
점검을 받고 수행불행(修行佛行)하는 방법을 제시받아야만 수행
불행을 하게 된다. 수행불행(修行佛行)하는  일은 숨을 쉬는 일 
보다 더 쉬우니 아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이 보다도 
더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부과되는 일은 
가장 어려운 것과 가장 쉬운 것이라는 극 대 극(極 對 極)의 양
면성(兩面性)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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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6.<단경>에서의 무념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6.〈단경(壇經)〉에서의 무념(無念)
  
  육조 대사(六祖 大師)께서는 무념(無念)을 어떻게 말씀하셨나
를〈단경(壇經)〉에서 찾아 보고자 한다.
  
  나의 자성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으
로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뭄이  없음[無住]
으로 본(本)을 삼는다.
  
  我自法門 從上已來 皆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무념이라는 것은 생각인데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無念者 於念而不念
  
  모든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이름한다.
  於一切境上 不染 名爲無念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는다.
  
  是以 立無念爲宗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는다.
  
  此敎門 立無念爲宗
  
  세상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만약 생각
함이 없다면 무념도 또한 서지 않는다. 없다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며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 없다함은 두 모
양의 모든 진로(塵勞)를 여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인  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며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인 
것이다.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도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한다.  유마경에서 말씀하
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는 
제일의(第一義: 眞如)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世人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無者 無何事 念者 念
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是念之體 念是眞
如之用 自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 而常自在 維摩經云 外能
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
  
  이 법을 깨친 사람은 곧 무념이다. 생각이 없고 집착이 없는
지라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 아니함을 일으키지 마라. 곧 이것이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비추어 보고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
고 버리지도 않음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며 부처님의 도를 이
루는 것이다.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 莫起x妄 卽自是眞如性 用智惠觀
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어떠한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
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
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아나게 하고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
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며 무념행이라고 이름한다.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
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온갖 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무념돈법을 깨친 사람은 부
처님의 지위에 이른다.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
佛位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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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7.돈수와 점수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7.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돈수(頓修)와 점수(漸修)는 상반(相反)된 용어이다.  그런데 수
행자가 그 용어의 사용처를 구별하지 못하면 정법(正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못하게 됨으로써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될 수 있
으므로, 점수돈오(漸修頓悟),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사용처를 명
확히 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불조(佛祖)의  말씀이 아니라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말임을 확실히 밝혀 두고자 한다.
  
  첫째, 수행자는 점수돈오(漸修頓悟)하는 것이다. 
  ① 중생은 수행자로 출발하여 수행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
로 수행수준에 따라 기다리고 있는  고비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 돈오(頓悟)에 이른다. 즉, 중생은 점수(漸修)하는 수
행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돈오(頓悟)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
이 성불(成佛)하려면 점수돈오(漸修頓悟)해야  한다.  
  ②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러 추번뇌(鹿
煩惱)는 모두 평정하였지만 미세번뇌(微細煩惱)는 평정하지 못한 
깨침, 즉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건만 갖춘 깨침들이 있
다. 이러한 깨침들은 돈오(頓悟)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
침에 이른 수행자는 계속 점수(漸修)하여야만  미세번뇌를 평정
하고 돈오(頓悟)에 이르게 되므로 점수돈오(漸修頓悟)하게 된다. 
  
  둘째, 수행자가 돈오(頓悟)하면 돈수(頓修)일 수밖에 없다.
  수행자가 수행방편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고, 숙면일여(熟眠一如)하게 되는 수행과정을 거친  다음 미세망념(微細妄念)까지 모두 평정하게 되면 수행이  극(極)에 이르러 내외명철(內外明徹)되면서 돈오(頓悟)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과정을 거친 수행자에게 앞으로 더 닦아야 할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수행자는 돈오(頓悟)하는 그 순간에 지금까지 해오던 수행을 끝맺는 것이므로 돈오(頓悟)하면 돈수(頓修)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셋째, 그러므로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불조(佛祖)가 전한 법(法)이 절대로 아니다. 옛날부터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한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중생은 다음과 같은 착각점수(錯覺漸修)나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① 공부가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나 몽중일여(夢中一如)나 숙면일여(熟眠一如)에도 이르기 전에 성품을  해오(解悟)한 수행자. 
② 또렷또렷한 의식(意識)을 성품인 줄 아는 수행자.
③ 좌선(坐禪) 중에  수행방편을 놓아버려 무기(無記)에  빠지게 되면서 그 무기를 성품(性品)인 줄 아는 수행자.
④ 공부가 추번뇌(鹿煩惱)의 평정(平定)에  가까워지면 수행자는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감지(感知)하게 되는데, 이 명멸하는 아뢰야식을 성품인 줄 착각하는 수행자. 
  이들은 자신들이 돈오(頓悟)한 것으로 착각하고 남아 있는 망념(妄念)은 점수(漸修)하면서 제거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게 된다. 돈오(頓悟)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돈오라면 구경각(究竟覺)이고 견성(見性)이고 성불(成佛)이므로 더 닦을 망념은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앞의 ①, ②, ③, ④의  경우의 수행자들이 말하는 돈오(頓悟)는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도 갖추지 못한 상태인데 어찌 감히 돈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돈오점수는 착각점수(錯覺漸修)이거나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수행인 것이다.
  수행자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같은 용어의 잘못됨을 모르면 근본진리(根本眞理)에 접근하기 이전에 쉽게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된다. 사마외도가 되면 자신이 사마외도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사마외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불조(佛祖)께서는 방편(方便)의 말씀으로서도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씀을 절대로 하시지 않았으며 하실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수행자가 돈오(頓悟)한 다음에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돈오에 대한 인가(印可)를 받게 되면, 그때부터 그는 수행불행(修行佛行)하게 된다. 수행불행은 중생이 무기와 번뇌를  평정하기 위한 점수행(漸修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수행불행은  다만 부처님의 일상사(日常事)일 뿐이다. 그러므로 착오없기 바란다.


번호:835/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4/30 07:59  길이:57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8.단경에서의돈수와점수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8.〈단경(壇經)〉에서의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여기에서는 중생들이 잘못 생각할 수 있는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와 돈오(頓悟) 이후의 수행불행(修行佛行)에 관한  혜능 대사(惠能 大師)의 말씀을〈단경〉에서 찾아 보고자 한다. 
  
   선지식들아 법에는 문득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는 것이다.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돈수한다.
  
  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卽漸契 悟人頓修
  
  여기서 혜능 대사(惠能 大師)가 오인돈수(悟人頓修)라고 한 것은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를 설명하기 전에 하신 말씀인데 '오인(悟人)'이라는 것은 '돈오(頓悟)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돈오는 모든 미망(迷妄)의 평정을 전제(前提)로  하므로 수행자는 돈오하면 더 닦을  미망(迷妄)이 남아 있지  않다. 즉, 오인돈수(悟人頓修)인 것이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는 것이다. 생각 생각은 반야의 관조여서 항상 법의 모양을 떠 났는데 무엇이 있어 세우겠는가? 자성은 돈수하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는다.
    
    自性 無非無亂無痴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
修 立有漸 此所以不立
  
  이 글은 혜능 스님이 지성(志誠)  스님과의 계(戒), 정(定), 혜(慧)에 관한 대화 중에서 나오는 말씀인데, 돈오(頓悟)는 자성(自性)의 깨침을 말한다. 즉, 자성(自性)은  모든 미망(迷妄)을 평정한 다음 돈오하는 것이다. 돈오(頓悟)하면 더 닦을 미망(迷妄)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돈오(頓悟)와 동시에 미망은 돈수(頓修)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오(頓悟)는 자성(自性)의 깨침을 말하며 자성(自性)은 깨침과 동시에 미망(迷妄)이 돈수(頓修)되므로 자성돈수(自性頓修)라고 하신 것이다. 
  오인돈수(悟人頓修), 자성돈수(自性頓修),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똑같은 말인데 필요에 따라 달리 쓸 뿐이다.  그러나 오인점수(悟人漸修), 자성점수(自性漸修),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면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혜능 대사와〈법화경(法華經)〉을 7년 동안 항상 외웠다는  제자 법달(法達) 스님과의 대화에서, 혜능 스님은  법달에게 "일불승만을 의지하라[但依一佛乘]."는 말씀과〈법화경〉에 굴림을  당하지 말고〈법화경〉을 굴리는 방법의 말씀을 했다.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法達一聞 言下大悟]. 그리하여 법달 스님은 "지금부터는〈법화경〉을  굴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닦겠습니다[已後 轉法華 念念修行佛行]."라고 했다. 혜능 대사는 "즉, 부처님의 행이 바로  부처님이다[卽佛行是佛]."고 했다. 
  
  여기서 수행불행(修行佛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돈수(頓修)나 점수(漸修)하고는 상관없는 말이지만, 여기에서 수행(修行)이라는 말이 붙어있어 중생들이 점수(漸修)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또 다른 외도(外道)가 나올 염려가 있어 대두시킨 것이다.



번호:836/83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5/02 13:11  길이:198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19.수행중세번의큰고비와그극복방법
[영원한 대자유인] 제2장 수행방법과 수행단계

        19. 수행 중 세번의 큰 고비와 그 극복 방법
  
  
  인간(人間)이 어떤 중요한 일을 완수하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고비를 만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고비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스승이나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선배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면  쉽게 그 고비를 극복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수행의 시작에서 돈오(頓悟)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세번의 큰 고비가 있다. 
  
  첫번째 고비: 상기(上氣)의 고비.
  두번째 고비: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는 고비.
  세번째 고비: 세번뇌(細煩惱)를 평정(平定)하는 고비.
  
  수행자는 수행 중 이상과 같은 세번의 큰 고비를 만나기 마련인데, 이때에는 수행자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극복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러한 고비들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불조(佛祖)의 수행행적(修行行跡)에서 지혜를 찾거나 스승인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수행자가 위에 말한 세번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고 돈오(頓悟)에 이르도록 불조(佛祖)께서는 각 고비마다 수행자(修行者)에게 필요한 수행자세(修行姿勢)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시고 있다.
  
   (1) 상기(上氣)의 고비
  
  <상기(上氣)를 극복하려면 대신심(大信心)을 일으켜야 한다.〉
  
  상기(上氣)는 수행의 초보단계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고비이다. 수행자는 이 고비를 극복해야만 공부가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한 수행단계에 이르게 된다. 상기(上氣)는 수행으로 인한 긴장감 때문에 혈압(血壓)이 상승(上昇)하여 가슴이 답답하거나, 목덜미가 아프거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거나, 머리가 터질듯이 아픈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상기증세가 있을 때에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수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수행자가 상기(上氣)에서 쉽게 벗어나려면 수행을 중단하면 되겠지만 중단한 후 다시 수행을 시작하면 또 다시 상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육신(肉身)은 유한(有限)한데 중생(衆生)으로부터 벗어날 가망은 점점 없어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지 상기(上氣)라는 문제에만 착안하지 말고 수행을 이끌어가는 요소(要素)가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계속 이끌어 갈 수 있는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신심(信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노력(努力)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항상 균형(均衡)을 이루어야 한다.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① 신심(信心)만 있고 수행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신심은 맹신(盲信)으로서 미신(迷信)이 되어 수행자가 되지는 못한다. 
  ② 반대로 수행에 대한 노력(努力)의 강도(强度)만 높이고 신심은 답보상태(踏步狀態)에 있으면, 긴장으로 인하여 상기(上氣)가 일어나서 수행을 계속할 수 없는 고비를 맞게 된다. 
  상기(上氣)가 일어나면  수행자는 신심(信心)을  일으켜 이를 예방하거나 해소(解消)시켜야 수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상기(上氣)는 불자(佛子)로서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를 믿는 정도의 신심(信心)으로써는 예방되거나 해소되지는 않으므로 이때에는 이보다 더 강도(强度)를 높인  대신심(大信心)을 일으켜야 한다.
  대신심(大信心)을 일으키는 방법은 수행자가 자신의 수행방편(修行方便)을 소리내면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방편을 소리내면서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올라갔던 상기(上氣)는 순식간에 끌어내려주고, 낮은 신심(信心)은 끌어올려주게  된다. 수행자의 신심(信心)과 노력(努力)은 이와 같이 잘 어울리게 되면 서로 상승작용(上昇作用)을 일으켜 수행의 질(質)을  한 차원(次元) 높여 주게 됨으로써 수행자는 상기(上氣)의  고비를 넘게 된다. 
  상기(上氣)는 세 가지 수행방법(修行方法) 중에서 수행자가 관법(觀法)으로 공부할  단계나 관법과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을 절충하여 공부할 단계에서 예방(豫防)하거나 해소(解消)시켜야 한다. 만약 의심법(疑心法)으로 공부하는 수행자에게 상기(上氣)가 온다면 그러한 수행자는 의심법으로 공부할 수준에 이르지도 못한 수행자이므로 수행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이치(理致)를 모르고 계속하여 의심법으로 공부하게 되면 착각도인(錯覺道人)이 되거나 공부의 진전(進展)이 없어 방향을 바꾸거나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오고야 만다. 상기(上氣)는 젊은 수행자에게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되며, 나이 많은 수행자에게는 혈압상승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상기(上氣)는 수행자 모두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전생(前生)에 이미 상기를 극복한 수행자나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하는 수행자는 상기(上氣)가 오기 전(前) 이를 예방할 수 있다.  
  
  
   (2)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는 고비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려면 대분발심(大奮發心)
을 일으켜야 한다.〉
  
  수행자가 대신심(大信心)으로써 상기(上氣)라는 고비를 극복하면 공부의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공부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라는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어묵동정일여라면 수행자의 수행수준이 말을 하거나[語], 자신은 말을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거나[默], 일을 할 때와 같이 몸을 움직이거나[動], 사고(思考)할 때와 같이 고요히 있거나[靜] 하여도 공부가 한결같게 되는 고도(高度)의 수행단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행단계에 이른다는 것은 큰 고비라 할 수밖에 없다. 
  수행자의 공부가 어묵동정일여하다는 것은 수행자의 의식(意識)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행방편을 염념상속(念念相續)하던 의식(意識)은 다른 곳에 집중하지만 수행방편을 생각하는 삼매의 관성(慣性)만은 지속(持續)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삼매관성(三昧慣性)이 어묵동정시(語默動靜時)를 꿰뚫으려면 수행자는 대분발심(大奮發心)을 일으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대분발심이란 수행의 초보단계에서 상기(上氣)의 원인이 되었던 노력보다는 차원(次元)을 높인  매우 노력하는 자세를 말한다.
  대분발심(大奮發心)을 일으키는 방법은 생명이 있는 동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호흡에 리듬에 맞추어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염념상속(念念相續)시키는 것이다. 즉, 수행을 호흡에다 항상 동반(同伴)시키라는 것이다.
  이때의 호흡은 건강을 위한 단전호흡(丹田呼吸)보다는 태식호흡(胎息呼吸)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단전호흡은 무기(無記)에 빠지는 때가 많지만, 태식호흡은 무기에 빠지지 않게 하고 자세의 전환(轉換)이 쉽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대분발심(大奮發心)으로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이르는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묵언(默言)이나 토굴생활(土窟生活)을 곁들이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이다. 묵언이나 토굴생활은 불조(佛祖)의 행적(行跡)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묵언이나 토굴생활도 필요한 시기가 아닌  때에 하게 되면, 묵언 수행자는 수행의 어려움과 지루함에 놀라 수행을 중도(中途)에서 포기하거나 방향을 바꾸게 되며, 토굴생활을 하는 수행자는 초능력(超能力)이나 신통(神通)을 추구하는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러한  것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해야 한다.
  
   (3) 세번뇌(細煩惱)를 평정(平定)하는 고비
  
  〈세번뇌(細煩惱)를 평정(平定)하기  위해서는 대의심(大疑心)
을 일으켜야 한다.〉
  
  수행자가 대분발심(奮發心)을 일으켜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의 고비를 극복하고 나면, 공부는 쉽게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고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게 된다.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에 이르면 수행방편은 망각되지 않고 이어져 추번뇌(鹿煩惱)는 모두 평정되지만, 세번뇌(細煩惱)는 염념상속(念念相續)하는 정도의 삼매(三昧)는 뚫고 나오기 때문에 공부가 숙면일여에 이르러도 세번뇌는 평정되지 않는다. 대분발심은 추번뇌를 평정하기 위한 도구(道具)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여기에서 수행방법을 바꾸지 않고는 세번뇌를 평정할 수 없다. 수행자가 여기에서 미세번뇌(微細煩惱)까지 모두 평정하고 돈오(頓悟)하려면 대의심(大疑心)을 일으켜 의심의 특성(特性)을 원용(援用)하는 수행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대의심(大疑心)을 일으키는 방법(方法)은 다음과 같다. 
  ① 수행자 스스로가 대의심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관(觀)하게 되면, 수행이 나아가면서 그 관(觀)이 염(念)으로 바뀌어 삼매(三昧)로 이어지게  되고, 그 삼매가 수행자의 추번뇌를 모두 평정(平定)하게 되면, 드디어 수행자는 삼매인 한 생각이 나오는 근원(根源)을  알고자 하는 대의심(大疑心)이 문득 일어나게[頓發] 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수행자가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의 출현(出現)이 없어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을 때에 많은 생(生)을 거쳐 수행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이 저절로 나아가는 것은 수행의 묘리(妙理)라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최초(最初)의 부처님이 출현(出現)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수행하여 성불(成佛)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므로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점법(漸法=漸敎法)이라고 한다.
  ② 선지식(善知識)이 수행자에게 대의심(大疑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경우.
  스승인 선지식(善知識)은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의심(疑心)으로 수행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음을 감지하면, 수행자에게 대의심(大疑心)이 문득 일어날[頓發] 수 있는 수행방편을 등장시켜 준다. 중국(中國)의 선지식들은 이러한 때에 상식이나 이치(理致)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를 등장시켰다.
  선지식은 수행자를 이상과 같이 지도하여 수행기간을 단축시켜 주므로 이와 같은  수행법을 돈법(頓法=頓敎法)이라고 한다. 조사(祖師)인 선지식은 오로지 돈교법만  전하므로 조사(祖師)는 유전돈법(唯傳頓法)한다고 한다.
  이상 ①, ②의 경우와 같은 수행자에게 대의심(大疑心)이 일어나면 의심의 특성 중 심각성(深刻性)은 세번뇌를 평정하게 하고, 해결(解決)의 돌파구(突破口)를 찾으려는 특성은 돈오(頓悟)를 이끌어내어 미망(迷妄)을 평정하기 위한 수행을 마무리한다.
  수행자가 대의심(大疑心)으로 수행할 때에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던 불조(佛祖)들의 행적(行跡)에서 수행의 지혜를 찾을 수 있다면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의 공부가 대의심(大疑心)으로 이끌어 가야 할 때가 아닌데도 장좌불와하면, 결국에는 수행의 어려움과 지루함에 지쳐서 수행을 포기하거나 무기(無記)로 인하여 접신(接神)하거나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므로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수행중 세번의 큰 고비와 그 극복 방법을 보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수행방법(修行方法)과 꼭 일치(一致)함을 알았을 것이다. 수행자는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수행방법에 의한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돈오(頓悟)하여 성불(成佛)할 수 없음을 알고 수행에 임하기 바라며, 또한 이러한 수행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함은 과거의 부처님도 그러하셨고, 현재의 수행자도 그러하고, 미래의 수행자도 그러할 수밖에 없는 진리임을 확실히 알기 바란다.


번호:847/847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5/28 08:50  길이:403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20.대혜스님과그스승들

          20. 대혜(大慧) 스님과 그 스승들
  
  돈교법(頓敎法)이 달마 조사(達磨  祖師)에 의하여  중
국(中國)에 전래(傳來)된  이래 당대(唐代)에   혜능(惠能) 
대사께서 육조(六祖)가   되시면서 그분의  문하(門下)에 
많은 선지식(善知識)이 배출되었다. 그 맥(脈)은 송대(宋
代)로 이어져 송말(宋末)의  대혜 종고(大慧  宗 ) 선사 
때까지는 구경각(究竟覺)의 원형(原形)이 그대로 이어졌
다고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원(元)나라  초기에 〈덕이본  단경(德異本 壇
經)〉이 출현할 때쯤부터는  깨침의 질(質)이 떨어져  구
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을 
갖춘 깨침은 없어져 버리고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
(必要條件)만 갖춘 깨침, 즉  구경각과는 닮은꼴[相似形]
의 깨침만 전하여졌다.
  여기서는 원(元)나라 이전, 즉〈덕이본  단경(德異本壇
經)〉이 출현하기 이전인 송(宋)나라 때의 대혜(大慧)  스
님과 그분의 스승들을 통하여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시
던 방법과 스승의  지도로 제자가 돈오(頓悟)하고  돈오
한 제자를  스승이 인가(印可)하시던   내용들을 간단히 
조명(照明)하여 구경각(究竟覺), 즉 돈오(頓悟)의 실상(實
狀)을 보여 주고자 한다.
  
   (1) 담당 문준(湛堂 文準) 선사와 대혜(大慧) 스님
  
    대혜 종고(大慧 宗 ) 스님이 처음  행각(行脚)할 때 
  명적 소정(明寂 紹程) 선사를 찾아가 설두(雪竇)  선사
  의 염고(拈古), 송고(頌古)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
  다.
    소정 선사는 대혜 스님에게 화두를 들게 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보고 말하도록  하였을 뿐, 자신의  말은 
  조금도 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옛 성인들의 미묘한 종지(宗旨)를  깨치자, 소정 선사
  는 대중 앞에서 대혜 스님은 부처님이  다시 온 사람
  이라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혜 스님은 그 후 다시  영주( 州) 대양사(大陽寺)
  에 가서 원(元) 수좌,  동산 도미(洞山 道微) 스님,  견
  (堅) 수좌 등 세  분 아래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조
  동(曹洞)의 종지를 모두 깨쳤다.  그곳에서는 법을 주
  고받을 때 모두가  팔뚝에 향을 피워  함부로 법통을 
  전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하였다. 대혜 스님이 곰곰
  이 생각해 보니  선(禪)에 전수할  법이 따로  있다면 
  불조(佛祖)가 스스로 깨치셨다는 법은 무엇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 담당 문준(湛堂 文準) 선사에게 
  귀의하였다.
    어느 날 담당 스님이 대혜 스님에게 물었다. 
    "너의 코는 어째서 오늘은 반쪽이 없느냐 ?"
    "보봉(寶峰) 문하에 있습니다."
    "엉터리 참선꾼이군 !"
    또 어느 날 시왕전(十王殿)을 단장하는 곳에서 물었
  다.
    "이 관리의 성씨는 무엇이냐 ?"
    "양씨(梁氏)입니다."
    이 말에 담당  선사는 손으로  자기 머리를 만지면
  서, 
    "양씨인데 복두(僕頭)가 적은 것을 어찌 할꼬 ?"
    "비록 복두는 없지만 코는 비슷합니다."
    "엉터리 참선꾼이군 !"
    한번은 경(經)을 보고 있는데 물었다
    "무슨 경을 보느냐 ?"
    "〈 금강경(金剛經)〉입니다."
    "〈 금강경〉에서는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
  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운거산은 높고  보봉산은 낮
  은가 ?"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는 좌주(座主=講師)의 심부름꾼이나 되겠구나."
    또 어느 날 담당 스님이 물었다.
    "고( ) 상좌야 ! 나의 이 선(禪)을  너는 한번에 이
  해하였다. 그래서  너에게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할 
  수 있고 염고(拈古)  송고(頌古)와 소참(小參)  보설(普
  設) 법문을 하라면 그것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
  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너는 알겠느냐 ?"
    "무슨 일입니까 ?"
    "네가 한 가지  알지 못하는 게  있지. 네가  이 한 
  가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방장실에서 너와 이야기할 
  때는 선(禪)이  있다가도 나서자마자  없어져 버리며, 
  정신이 맑아서 사량(思量)할  때는 선(禪)이  있다가도 
  잠이 들자마자 없어져 버린다. 만일 이렇다면 어떻게 
  생사(生死)와 대적할 수 있겠느냐 ?" 
    "바로 그것이 제가 의심하는 점입니다."
    그 후 담당  선사의 병세가  위독하자 대혜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 만일 이 병환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저
  를 누구에게 부탁하여 그 큰 일을 끝마치게 하시렵니
  까 ?"
    "극근(克勤)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 네가 만일 그를 만나면 반드시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면 수행을 계속
  하다가 후세에 다시 태어나 참선을 하도록 하라."
                                               〈宗門武庫〉
  
  이상의 담당(湛堂) 선사와  대혜(大慧) 스님과의  대화 
내용에서 담당(湛堂) 선사가  대혜(大慧) 스님에게 질문
을 하게 된 이유는, 
  첫째 대혜 스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수행이 아직 보잘 
것 없음을 파악하도록 함에 있었고, 
  둘째 담당 선사는 자신의 질문 중  어느 한 가지에서 
대혜 스님으로 하여금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하게 하
여 수행의 방편이 되도록 함에 있었고,
  셋째 수행자가 수행 중에는 자신을 이끌어 주는 선지
식(善知識)이 없으면 돈오(頓悟)에  이르기는 거의 불가
능하다는 것을 파악하도록 함에 있었다고 하겠다.
  대혜 스님도 담당 선사의 이상과 같은  뜻을 모두 파
악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의 수행이 담당 선사의 생
전(生前)에는 끝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물었다. 
  "스님께서 만일  이 병환에서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저를 누구에게 부탁하여  그 큰 일을  끝마치게 하시렵
니까 ?"
  담당 선사는 극근(克勤) 선사에게 가라고 답했다.
  이상 두 분의 대화를 보면 담당(湛堂) 선사와 대혜(大
慧) 스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끼리  만났음을 실감케 
한다. 그리고 훌륭한 인물(人物)  앞에는 반드시 훌륭한 
스승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하겠다.
  
  대혜(大慧) 스님을   돈오(頓悟)에 이끌려고  애쓰셨던 
담당(湛堂) 선사가 수좌(首座) 시절에 귀신(鬼神)을 천도
한 법문(法門) 한 편이 전해지는 것이  있다. 이 법문이 
그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담당(湛堂) 스님이   수좌 시절에  오시자(悟侍者)란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이 우연히 지객실에 있다가 
  불을 지피는 스님이 불 때는 것을  보고 갑자기 깨친 
  바 있었다. 곧장 방장실로  올라가 깨친 바를  알렸더
  니 방장 스님은 그를 내쫓아 버렸다. 그 후로 정신을 
  잃고 연수당 동편 변소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후 
  밤이 되면 항상  장경전이나 지객실이나 변소  등 세 
  곳에 출몰하여 짚신을 옮겨 놓거나  물병을 건네주거
  나 하여 온 대중을 괴롭혔다.
    어느 날 담당 스님이  지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돌아
  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깊은 밤 중에 일부러 연수
  당 동쪽 변소에 들어갔다. 그때 벽 위에 걸린 등불이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꺼져버렸다.  옷을 벗으려  하자 
  오시자가 물병을 가지고 왔다. 이때 담당 스님은,
    "아직은 필요 없으니 옷을 벗을 때까지 기다려라."
  하고 옷을 벗은 후 물병을 받아 놓았다. 그리고 당시 
  오시자가 목매 죽은 곳에서 용변을 보니 잠시 후에는 
  또 다시 똥 닦는 막대를 가져왔다. 그가 변소를 나가
  려 할 때 담당 스님이 물병을 가지고 가라고 불러 세
  웠다. 오시자가 물병을 받는 순간,  그를 붙잡아 손을 
  더듬어보니 흐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한 것 같
  기도 하였다. 담당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오시자냐 ?  네가 그  당시 지객실에  있다가 
  불을 지피는 스님이  불 때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는 
  바로 그 사람이냐 ?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일이란 오
  로지 생명의 본원이 가는 곳이 어딘가를 알기 위함이
  다. 그러니 네가 장경전에서 단(端) 수좌의 짚신을 옮
  겨놓은 일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
  니겠느냐 ? 또한 네가 지객실에서  목침을 옮겨 놓은 
  일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 무슨 까닭에 갈 곳을 모르고 어쩌자고 여기서 대중
  을 괴롭히기만 하느냐, 내가 내일 대중들에게 권유하
  여 너를 위해 경전을 읽도록 하고 돈을 모아 죽을 마
  련하여 천도할  터이니  너는 특별히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를 구하고 이곳에 머물지 말라."
    이 말을 마치자마자 힘껏  밀쳐버렸더니 마치 기왓
  장과 돌탑이  무너지듯 와르르하는  소리가 났다.  그 
  후로 그의 자취가 끊어졌다고 한다.〈宗門武庫〉 
  
  담당 문준(湛堂 文準) 선사는 젊은 수좌  시절인 데도 
죽은 오시자(悟侍者)를   위하여 설법(說法)하시는  것을 
보면 선지식(善知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일이란 오로지  생명의 본원
(本源)이 가는 곳이 어딘가를 알기 위함이다. 그러니 네
가 장경전에서 단(端)  수좌의 짚신을  옮겨 놓은  일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 또한 
네가 지객실에서 목침을 옮겨 놓은 일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
  선지식이 아니라면 어찌 죽은 오시자에게  이런 설법
(說法)을 할 수 있었겠는가 ?
  
   (2) 원오 극근( 悟 克勤) 선사와 대혜(大慧) 스님
  
  대혜(大慧) 스님은 담당(湛堂)  스님의 유언(遺言)대로 
원오 극근( 悟 克勤) 선사를 찾아갔었다. 
  
    어느 날 원오 스님은 법좌(法座)에  올라 법문을 하
  고 있었다. 
    "한 스님이 운문 문언(雲門 文偃) 스님께 묻기를, 
    '무엇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까 ?'
  라고 하니 운문 스님께서,
    '동산(東山)이 물위로 간다[東山水上行].'
  라고 하셨는데,  만약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熏風自南來殿閣生微凉].'
  라고 했을 것이다."
    대혜 스님은 이 법문을 듣고  홀연히 마음 속에 걸
  려 있던 것을 놓고서  바야흐로 오시(寤時)가 몽시(夢
  時)와 같고 몽시가 오시와  같음을 알게 되어 오매항
  일(寤寐恒一)이라 하신 부처님 말씀을 알았다.
                                               〈人天寶鑑〉
  
  여기에서 한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물은  것이
나, 운문  스님의 답이나,  원오( 悟) 스님이  대신하신 
답이나 모두가  격외(格外) 문답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수행자는 이러한  대화를 듣
는 순간 즉시 깨닫게 되고, 또한 이러한 법문에 의심이 
걸린 수행자로 하여금 대의심(大疑心)을 돈발(頓發)시켜 
돈오(頓悟)하도록 유도하는 법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혜 스님은 원오 스님 법문의 내용
과는 관계없이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내면공부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이 오시(寤時)가 그 몽시(夢
時)와 꼭 같았고 그 몽시가 이  오시와 꼭 같았음을 알
게 된 것이다. 대혜  스님의 공부는 몽중일여(夢中一如)
한 경지에 들어 있었음을 의미하며, 다만 대혜 스님 자
신은 이 사실을  여태껏 몰랐는데 원오  스님의 법문을 
듣던 그때에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수행자(修行者)가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알게 되는  경
우에는 대혜 스님과 같이 알게 되는 경우와, 공부가 행
주좌와(行住坐臥)에 한결같이  되고  어묵동정(語默動靜)
에도 한결같이  되면서 꿈  속으로 들어가서  한결같이 
될 때에 잠에서  깨면서 알게  되는 경우의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경우에 우열(優劣)의 차이는  전혀 없으며 
똑같은 수준이다.
  그런데 '훈풍자남래  전각생미량(熏風自南來 殿閣生微
凉)'란 이 대목에서  공부가 몽중일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조사어록(祖師語錄)에만 통달함으로써  대
혜 스님이 깨친 것으로  오해(誤解)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오해의 이유는  지금까지 조사어록에서 본  이와 같
은 문답에서는 즉시  깨닫는 사람과 전혀  모르는 사람
이라는 두 가지  부류(部類)밖에는 없었기 때문인  것이
다. 실제로 공부가 몽중일여에 미치지 못하고 조사어록
에만 통달한 사람은  이때의 대혜 스님을  파악하지 못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혜 스님에게는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통
하지 않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조사어록에만 통달한 사람은 대혜 스님이 
깨친 것으로 오해하게 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러한 사람은 여태껏 숨겨왔던  자신의 수행을 
드러내게 된다.
  
    대혜 스님이 방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원오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이런 경계에 도달한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깝구나 ! 죽기만 했지  다시 살아나
  지 못하니 화두(話頭)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로다. 듣지 못했는가  ? 깎아지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스스로 긍정해야 맨 끝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 이렇게 되면  그대를 속일 수  없으니 이런 도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번은 방장실에서 원오 스님이 묻기를,
    "있다는 말[有句]과 없다는 말[無句]이  등넝쿨이 나
  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으니 입을 열고 말을 했다 하
  면 틀린다[有句無句如藤倚樹 開口便道不是]."
  라고 한 일이 있었다. 
  
  대혜어록에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
어 있다. 
  
    매일 방장실에 들어가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있는 것과 같다."함을  거량하고
  서 대혜가 대답하려고  입만 열면  원오스님은 "틀렸
  다."고 하셨다.
  
  원오 스님이 대혜가 방에 들어 올 때마다 거량하고서 
틀렸다고 했던 것은  대혜로 하여금 의심(疑心)이  돈발
(頓發)되도록 방편을 쓴 것이다.
  
    대혜 스님이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손에 잡고도  먹는 것을 잊고  있으니 원오 
  스님이 웃으시면서 손님에게 말했다.
    "저 놈은 황양목선(黃楊木禪: 꼭  막혀 융통성 없이 
  선공부하는 것을 잘 자라지 않고 딱딱한 황양목에 비
  유한 말)을 참구해 터득했다오." 
    대혜 스님이 분개하여 물었다. 
    "스님께서는 지난 번 오조 스님(五祖 法演)께 '등넝
  쿨이 나무에 기대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는데 오조 
  스님께서는 무어라 대답하셨습니까 ?"
    "묘사하려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描也描不成 畵也畵不就]."
    "나무도 자빠지고 넝쿨도 말라버리면 있다 없다 하
  는 그 말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又問, 樹倒藤枯句歸
  何處]"
    "오조 스님은 '서로  따라 오느니라[相隨來也].'하셨
  다."
    대혜 선사는 여기서 
    "나는 알았다 ![我會也]"
  하고 외쳤다. 이때부터 마음이 확트여 응어리지고 막 
  히는 곳이 없었다.〈人天寶鑑〉
  
  대혜 스님이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
가락을 손에 잡고도 먹는 것을 잊고 있으니  원오 스님
이 웃으시면서 말씀하기를 "저 사람은 황양목선(黃楊木
禪)을 터득했다오."했는데, 이것은  스승인 원오 스님이 
대혜 스님의 공부가 이미 몽중일여(夢中一如)함을  지나 
그의 행동에서 숙면일여(熟眠一如)나 그 이상에  이르렀
음을 확인하고  기쁜 마음에서  황양목선(黃楊木禪)이란 
말을 해서 대혜 스님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혜 스님은, 원오 스님과 오조 스님의  "있
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등넝쿨이 나무에  기대있는 것
과 같다[有句無句如藤倚樹]."란 법거량  중 오조  스님의 
"서로 따라오느니라[相隨來也]."하는 대목에서 "나는 알
았다 ![我會也]"하고 외침에  이른 것이다. 대혜  스님은 
여기에서 돈오(頓悟)하여 무념(無念)을 안 것이다.
  원오 선사는 제자가 확실히 알았나를  점검하여 보니 
대혜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답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오 극근( 悟 克勤)  선사는, 홍인  대사(弘忍 大師)가 
혜능 대사(惠能 大師)에게  하셨듯이 대혜 스님으로  하
여금 두번째의 깨침이 있게  하고, 자기의 스승인 오조 
법연 선사의 '무(無) !'도 깨닫게 하였음에 틀림없을 것
으로 생각된다.
  대혜 스님이 "나는 알았다  !"고 외치면서 조사(祖師) 
스님으로 탄생된 것은 담당 문준(湛堂 文準) 선사의  올
바른 가르침이 밑받침이 되었고 결정적으로는  원오 극
근( 悟 克勤) 선사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 
결과라고 할 것이다.
  
   (3)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와 원오  극근( 悟 克勤)   
      스님
  
  대혜 스님을 거목(巨木)으로 키운  원오 극근( 悟 克
勤) 선사는 어떤  스님이었던가 알아보자. 원오  스님이 
처음 강원(講院)에서 공부할  때 그  당시 승상(丞相)인 
범백재(范佰才)가 스님의 그릇이 비범함을 보고  장편의 
글을 지어 그에게  남방으로 행각의 길을  떠나도록 격
려해 주었는데 그  글도 참으로 훌륭하지만  승상(丞相)
이 직접 그렇게  했음은 그도 보통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 원오는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대위철(大 喆) 
스님과 황룡심(黃龍心) 스님을 만나 뵈니 다 법기(法器)
라 했고, 회당(晦堂)  스님은 후일에  임제(臨劑)의 일맥
(一脈)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했지만,  최후에 오조 법연
(五祖 法演)  선사를 친견하여  원오가 그  기용(機用)을 
다하였으나 오조 법연 선사는 인정하지  않으니 불손한 
말을 하고 떠났다.
  오조 법연 선사가 원오에게 말했다. 
  "너가 심한 열병을 앓게 되면  그때서야 나를 생각하
리라."
  원오가 금산(金山)에 이르러  과연 상한(傷寒)으로  극
히 위독하여 평일(平日)에  과시(誇示)하던 공부로써 시
험해 보니 아무 힘도 없는지라 오조 법연  선사의 말을 
골똘히 생각해 보니  옳은 것  같아서 나의  병이 조금 
나아지면 즉시 오조 법연 선사에게  돌아가겠다고 맹세
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완쾌하여 오조  법연 선사에게 
돌아오니, 오조는 한번  보고 크게  기뻐하며 원오에게 
참선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오는 오조 법연 선사의 지도를 받아 병이 
나서 아플 때에는  도망쳐버리는, 착각으로  알고 있던 
그 주인공(主人公)은 버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바른  주
인공을 찾고서 오조 법연 선사의 법을 이었다고  할 것
이다.
  평생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말을 건네 본 적도 없었
건만 밝은 눈을 가진 담당 문준(湛堂 文準)  선사에게는 
그 법향기(法香氣)가 전파되어 그 당시 중국의 그  많은 
스님들 중에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원오 극근
( 悟 克勤) 선사만을 천거하면서,
  "극근(克勤)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나는 그를  알지 못
한다. 그러나 네가 만일 그를 만나면 반드시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면  수행을 계
속하다가 후세에 다시 태어나 참선을 하도록 하라."
  이런 일로 미루어  볼 때  최상승법(最上乘法)이 꽃을 
피웠을 때에도  명안종사(明眼宗師)는 드물었거늘  하물
며 오늘날에야 이루 말해 무엇하랴 !
  원오 극근을 보고 대위철과 황룡심은 그를 법기(法器)
라 했고 회당(晦堂)은 후일에 임제(臨濟)의 일맥(一脈)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했다. 대위철,  황룡심, 회당은 그래
도 그 당시  큰스님으로 한  종문(宗門)을 이끌고  가던 
스님들이었는데 왜 원오 극근을 잘못 점검했을까 ?
  그것은 원오가 강원에서  공부할 때 승상(丞相)의  눈
에도 뜨일 만큼 총명하였으며 말을  잘하고 불교이론에 
밝고 약간의 참선공부도  한 탓도 있었겠지만,  대위철, 
황룡심, 회당 같은 분들이 '엉터리  참선꾼'이었기 때문
이라고 할 것이다. 눈밝은 사람들이었다면 그런 원오를 
절대로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가 원오 극근을  왜 인정하
지 않았던가는  그들이 주고받은  말을 남기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뒷날 원오 극근이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평소에 하던 공부로 시험해 보니 아무런  힘이 없
더라는 말에서 법연(法演)  선사가 인정하지 않은  이유
가 드러났다고 하겠다.
  머리가 명석하고 영리한 사람이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몇 권 읽고  참선도 조금  한 사람이라면  대혜(大慧)가 
대오(大悟)하기 전과 같이  어떤 법문이라도 잘하고  모
르는 게 없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화두(話頭)
도 모르는 게 없이 다 타파(打破)한  것으로 말한다. 그
렇게 되면 본인도  오도(悟道)한 것으로 착각(錯覺)하여 
보통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알아낼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일러 해오(解悟)한 사람 또는  엉터
리 참선꾼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몸이 건강할 때에는 자신도 착각하고 있
고 남들도 오도(悟道)한 것으로 알지만, 일단 몸에 병이 
난다거나, 심지어 충치나 치주염으로 심하게 아플 정도
만 되어도 평소 공부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이것은 공
부의 경지가  숙면일여(熟眠一如)한 상태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원오 극근이  법연 선사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 것이며 대위철, 황룡심,  회당 같
은 스님들의 공부수준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부가 미진한 사람이 입을 열면 다음 사람을  크게 그
르치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로써 원오 극근은 또한 자기를  되돌아 볼 줄 
알았고, 스승과의 인연을 지어놓아, 병이 낫게  되자 법
연(法演) 선사에게 되돌아와 선사의 지도를 받아 큰  일
을 끝마쳤다. 그리하여 원오 극근( 悟 克勤) 선사는 오
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의  법을 받은 조사(祖師)가  된 
것이다.


번호:845/84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6/10 19:00  길이:194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21.대선지식 오조법연

    21. 대선지식(大善知識) 오조 법연(五祖 法演)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는 송(宋)나라 때의  스님으
로 임제 문하(臨濟 門下)인  백운 수단(白雲 守端)  선사
의 제자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분은 원오 극근
( 悟 克勤) 선사를 선지식으로  길러내었고, 원오( 悟) 
선사는 대혜 종고(大慧  宗 )를 훌륭한 선지식으로  길
러내신 분이다. 또한 법연(法演)  선사께서는 달마 조사
(達磨 祖師) 이래 마지막으로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흔
적을 남겼는데 그것을 밝히고자 한다.
  
   (1) 법연(法演) 선사의 '무(無) !'
  
  나는 1979년 한글로  번역된〈대장경〉중에서〈전등록
(傳燈錄)〉을 읽을 때  아래와 같이 알  수 없는  부분을 
발견했다.
  
    위산 영우( 山 靈祐)  선사가 제자 영운  지근(靈雲 
  志勤) 선사의 공부를 인가(印可)할 때에,
    "인연 따라 깨달은 것 영원히 잊지 말고 간직하라."
  고 했는데, 현사  사비(玄沙 師備)  선사가 이와  같은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지당하고 심히  지당하나  노형(老兄=靈雲)은 아직 
  끝까지 알지는 못했다 하노라."
  하니, 어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의심하였다. 현사(玄
  沙) 선사가 지장 계침(地藏 桂琛)에게 묻기를,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지장 계침이 말하기를, 
    "계침(桂琛)이 아니었더라면 천하 사람을 끝없이 달
  리게 할 뻔 하였소."〈한글 대장경〉181권, p.415, p.436
  
  나는 그 당시 위의 현사(玄沙) 스님과 제자인 지장(地
藏) 스님과의 대화 내용을 알 수 없어 나름대로 분석하
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보았다. 
  첫째, "영운(靈雲)  스님은 아직  끝까지 알지는  못했
다."고 하니 돈오(頓悟)한 후에 무념(無念)을 간직하면서 
함께 하는 공부가 있다. 
  둘째, "천하(天下) 사람을 끝없이  달리게 할 뻔 하였
소."하니, 끝없이 달리게  하지 않고 쉬게  하는 공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사(玄沙) 스님과  지장(地藏) 스님의  말씀
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보니 항상 무념(無念)을  간직
하면서 쉬는 공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결
론에 이르고 보니, 이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어
서 이러한 공부를  알고 있는  선지식이나 경학자(經學
者)에게 물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선지
식은 찾을 수 없었으며,  또한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밝
은 사람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랜 후에  우연히 어느 처사(處士)로부터  경
학자(經學者)인 어느 스님이  "〈 오조  법연록(五祖 法演
錄)〉을 보니  법연(法演) 선사는  조사(祖師)가 되고  난 
뒤에도 '가만히 '무(無)  !'하면서 문득 쉰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나에게 몇  번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나
는 법연 선사는 "가만히 '무(無) !'하면서 문득 쉰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전등록〉에서 현사(玄沙) 선사와 지장(地
藏) 선사의 말씀을 접한 지  10년쯤 지난 무렵〈법화경
(法華經)〉을 읽을 때 갑자기 "현사(玄沙) 선사와 지장(地
藏) 선사와의 대화가 바로 법연(法演) 선사의 '무(無)  !'
로구나, 이렇게 쉬는 방법이 있구나."하며  스스로 깨닫
게 되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연관지워 깨닫고 보니 밖으로 누구
에게 물어서 그 답을 구하려고 하였던 지난  10년이 너
무 길었으며 현사(玄沙) 선사와 지장(地藏) 선사의 말씀
이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실감하였다.
 〈전등록(傳燈錄)〉에서 현사(玄沙)   선사와 지장(地藏) 
선사의 대화를 읽을 그때에 만약 밖에서 찾지  않고 안
으로 비추어 보았더라면 즉시 깨달았을 것이며, 이것을 
아는 선지식으로부터 "안으로 비추어 보라."는 한 마디
의 말씀이라도 들었더라면  그 소리가 허공  속으로 사
라지기도 전에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선지식의 지도 없이는  공부의 진
전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선지식의  한마
디만 있었더라면 한 순간에 깨쳤을  것'을 10년이 늦어
진 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기회 있을 때마
다 강조하는 말이지만, 수행자는 자신의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스승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것과 스승의 
지도 없는 수행은  외도(外道)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 법연(法演) 선사 '무(無) !'의 의미(意味) 
  
  위산( 山) 선사가 영운(靈雲) 스님에게  하신 인가(印
可)의 말씀이 돈오(頓悟)한 수행자에게 이제는 없어져버
린 육진경계이지만 그 경계를 받아들이는  수행자의 수
동자세(受動姿勢)에 대한 당부라면, 법연 선사의 '무(無) 
!'는 돈오한 뒤의 능동자세(能動姿勢)의 말인 동시에 없
어져버린 육진경계에서  열반락(涅槃樂)을 즐기는  말인 
것이다.
  만약 수행인이 돈오(頓悟)하여 선지식의 인증(印證)을 
받고도 법연(法演) 선사의 '무(無)  !'를 누릴 줄 모른다
면, 현사(玄沙) 선사의 말씀 같이 수행자로서 아직 알아
야 할 것이 남아 있으며, 지장(地藏)  선사의 말씀 같이 
한가(閑暇)한 때가 없게 되는 것이다.
  법연(法演) 선사의 '무(無) !'가  이렇게 큰 의미를  지
니고 있는 것인  데도 그것을 대두시켜  놓은 곳은〈오조
록(五祖錄)〉과〈전등록(傳燈錄)〉에서 각각  한  곳, 염송
(拈頌)에서〈전등록〉의 것을 인용한  곳 이외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전등록〉이나 조사어록(祖師語錄)에는  수백 명이  돈
오(頓悟)하는 장면이나 스승에게서 인가(印可)받는 장면
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수행자들이  과연 현사(玄沙) 
선사의 말씀 같이 끝까지 알았고, 지장(地藏) 선사의 말
씀 같이 끝없이 달리지는 않게 되었고, 법연(法演) 선사
와 같이 '무(無) !'하면서 문득 쉬는 선지식(善知識)으로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법연(法演) 선사의 '무(無) !'는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선지식만이 알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피하고, 
이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만을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① 조주(趙州) 선사의  무자화두(無字話頭)와는 차원(次
元)이 다른 것이다.
 ② 현사(玄沙) 선사와 지장(地藏)  선사의 말씀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③ 위산( 山) 선사가 영운(靈雲)  선사에게 한 말씀이 
돈오(頓悟)한 뒤의 수동자세의 말이라면,  법연(法演) 선
사의 '무(無) !'는  돈오(頓悟)한 뒤의  능동자세의 말인 
것이다. 여기에서 쉰다는 말과 능동자세라는 말은 서로 
이율배반(二律背反)되지 않는다.
 ④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앵무새의 무(無)는  절대로 
아니다.
 ⑤ 무자(無字)라고만 고집한다면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중생이다. 
 ⑥ 이것은 부처님들께서도 하시는 '무(無) !'다.
 
   (3) '무(無) !' 속에 들어 있는 구경각(究竟覺)
  
  수행자의 깨침[覺]에는  돈오에 이르는  필요충분조건
(必要充分條件)을 갖춘 깨침과 필요조건(必要條件)만  갖
춘 깨침이 있다고  숙면일여(熟眠一如)와 내외명철(內外
明徹)을 설명하면서 이미 자세히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법연(法演) 선사의 어록과〈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
을 보면 송(宋)나라에서  원(元)나라로 바뀌면서 깨침의 
질(質)에 획(劃)이 그어지는 현상이 나타나 있다.
  법연(法演) 선사의 '무(無) !'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무(無) !' 속에는 내외명철이  들어 
있다. 즉, 내외명철하여 돈오(頓悟)하여야만 '무(無) !'라
고 할 수 있다. 법연(法演) 선사께서  원오( 悟) 선사를 
가르쳤던 것을 보거나, 원오( 悟)  선사께서 대혜(大慧) 
선사를 가르쳤던 것을 볼 때에, '무(無)  !'는 법연(法演) 
→ 원오( 悟)  → 대혜(大慧)  선사의 삼대(三代)까지는 
이어져 달마 조사(達磨  祖師) 이래 구경각에  이르렀던 
조사(祖師)들의 맥(脈)이 면면(綿綿)이 이어져 왔다고 하
겠다.
  대혜(大慧) 선사 이후 송(宋)나라가 망하고 원(元)나라 
초기에〈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이  나왔는데,〈덕이본 
단경〉에서는 혜능(惠能) 스님의  돈오(頓悟)와 수행불행
(修行佛行)의 깨침의 계기가 된 것이 다음과 같이 '응무
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법진경계(法
塵境界)에서였다고 되어 있다.
  
    혜능(惠能) 대사께서 나무장사를 할 때에 혜능은 돈
  을 받고 문  밖으로 나서는데, 한  손님이 경을  읽는 
  것을 보고 혜능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
  其心)'이라고 이르는 것을 한번 듣고 마음이  즉시 열
  리어 깨쳤다.
    
    혜능 대사께서 밤 삼경에 오조  홍인(五祖 弘忍) 대
  사의 방에 들어 갔을 때, 조사께서 가사로 둘레를 막
  아 가리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시고〈금강경(金
  剛經)〉을 설하시는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
  生其心)'이라 하는 데에  이르러 혜능은  그 말  아래 
  크게 깨쳤다.
  
  즉,〈덕이본 단경〉에서는 육조  혜능(六祖 惠能) 대사
의 돈오(頓悟)와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한족(漢族)의 송(宋)나라에서  몽고
족(蒙古族)의 원(元)나라로 바뀌는  동안에 중국에는 수
십년간의 전란(戰亂)과  한족 문화의   말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선지식의 맥(脈)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덕이본 단
경〉이 나온 이후에는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
건만 갖춘 깨침이 이어져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혜능 대사의 두번의 깨침을  두고, 지금까지 우
리 나라의 선사들이나 중국의 선사들  중에〈덕이본 단
경〉이 돈오(頓悟)와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을 구별
하지 못함을 지적한 선지식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둘째,〈덕이본 단경〉이 나온 이후 선사들의 어록에서
는 오매일여(寤寐一如)에  이르러  깨쳤다는 기록은  볼 
수 있어도 내외명철(內外明徹)하여 돈오(頓悟)한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덕이본 단경〉이 지금까지도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얻어 대선지식인 오조 법연(五
祖 法演) 선사의 가르침에  회귀(回歸)하는 자세로 오늘
날 불교의 좌표(座標)를 잡아야 할 것이다.



번호:846/846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6/10 19:01  길이:57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2-22.영원한 대자유인

           22. 영원한 대자유인(大自由人)
  
  
  
  
  돈오(頓悟)하기 전 중생(衆生) 시절에는 생로병사(生老
病死), 희노애락(喜怒哀樂),  호오(好惡)… 등  모든 경계
(境界)가 실존(實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수행
하여 돈오(頓悟)에 이르고 보면  중생 때의 미(迷)와 망
(妄)은 불망(不忘)과 불매(不昧)로 바뀌어, 경계는 식(識)
에서 나오고, 식은 돈오(頓悟)할  때 알게 되는  성품(性
品)에서 나오고, 성품은 나오는  곳이 없는 불생불멸(不
生不滅)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돈오(頓悟)한 다음  선지식으로부터 "앞으로는 
육진경계(六塵境界)에서도 돈오(頓悟)할 때  알게 된  그 
성품(性品)을 망각하지 말고  잘 간직하라."는 가르침을 
받게 되면 수행자는 '지금까지의 수행으로 인하여 어떠
한 때에도 망각(忘却)되지 않고 어둡지 않게 된 이것[性
品]을 이제부터는 어떠한 경계에서도 망각하지 말고 쓰
라는 말씀이구나.'하고 또 다시 깨달아, 육신(肉身)은 과
거와 같이 그대로이지만 사량세계(思量世界)는 다시  바
뀌어질 수 없는  공간(空間)으로 와버린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량세계(思量世界)의 공간개념(空間槪念)이  바뀌어진 
다음부터는 과거에는 실존(實存)하던 색(色),  성(聲), 향
(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진경계가,  이제부터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여의지 않음 때문에 망념(妄念)이 
아닌 반야(般若)로 바뀌어 흔적(因)을 남기지 않게 된다.
  돈오(頓悟)하기 전(前)에는 경계가  벌어지면 그  경계
에서 일어나는 망념(妄念)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
을 거쳐 장식(藏識)에 인(因)으로  남아 연(緣)을 만나면 
과(果)로 받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윤회(輪廻)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돈오(頓悟)한 뒤에는  망념(妄念)은 반야(般若)
로, 무기(無記)는 불망(不忘)으로 바뀌어,  짓는 인(因)이 
없게 되니 받을  과(果)도 없어져 분단생사(分段生死)나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없어지므로  업생(業生)에서  벗어
나 영원(永遠)한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될 수밖에 없다.
  
  중생(衆生)이 이상과 같은 대자유인(大自由人)으로  바
뀌려면, 
  첫째 수행자가  돈오(頓悟)할 때에  돈(頓)과 오(悟)가 
시차(差差) 없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고, 
  둘째 돈오(頓悟)한 다음  선지식(善知識)의 당부로  중
생 때의 육진경계를  반야(般若)로 바꾸는 수동(受動)자
세를 터득하여야 하고, 
  셋째 중생 때의 육진경계가 반야(般若)로  바뀐다고는 
하지만 한가(閑暇)할 수 없기 때문에 오조 법연(五祖 法
演) 선사의 '무(無)  !'를 깨달아 능동(能動)자세까지  터
득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어서야 비로소 현사 사비(玄沙 師備) 선사와 
지장 계침(地藏 桂琛) 선사로부터 "아직  끝까지 알지는 
못했군 !", "끝없이 달리고  있군 !"이라는 말씀은 듣지 
않게 되는 것이다.


번호:836/845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7/13 19:27  길이:146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3-1.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
  
      1. 수행(修行)에 대한 올바른 이해(理解)
  
  
  
  
   (1)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올바른 수행[正修]과  올바른 
깨침[正覺]으로 이끌기 위하여  방편(方便)의 말씀을 하
시고[方便說法], 자신의 설법에 대한 이해를 극대화시키
기 위하여 비유(比喩)의 말씀을  하시고[比喩說法], 수행
자의 근기(根器)와 수행수준에  따라 알맞은 말씀을  하
시고[對人說法], 설법을 해야 할  때나 수행방편을 주어
야 할 때와  같이 어떤  기회가 필요하실  때는 기회를 
포착하여 말씀하시어[對機說法], 중생들이 쉽게  성불(成
佛)하여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벗어나도록 하셨다.
  여기에서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중생제도(衆生濟度)
를 위하여  설법(說法)하셨던 내용을   요약하여 수행에 
대한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중생(衆生)에게는 왜 윤회고(輪廻苦)가 있는가 ?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라는 속
성(屬性)이 자신의 주체(主體)를 망각(忘却)하게 하고 어
둡게[昧] 하여 그 속성이 주재(主宰)하는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윤회고를 받는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께
서는 중생을 윤회고에서 벗어나도록 49년  동안 중생에
게 자신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는  수행을 지
도하셨던 것이다. 
  
  둘째, 중생의  속성(屬性)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게 
하는 수행(修行)이란 무엇인가 ? 
  수행은 수행자가 한 가지 생각만  계속함으로써 무기
(無記)에 빠질 틈이나  다른 번뇌(煩惱)가  일어날 틈을 
없게 하여 드디어는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를 평정하
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한 가지  생각을 수행방편(修行
方便)이라고 한다.
  
  셋째, 그러한 수행은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 것인가 ?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심안(心眼)으로 계속  보게[觀] 
되면, 수행이 나아가면서 심안(心眼)으로  보던[觀] 수행
방편은 생각[念]으로 바뀌게  되고, 그 생각[念]은  삼매
(三昧)가 되어 드디어  '삼매인 이 한  생각은 어디에서 
나올까 ?'하는 의심(疑心)으로 바뀌게 되면, 결국 그 의
심은 자체의 특성(特性)  때문에 돈오(頓悟)를 이끌어낸
다. 즉, 수행은 수행방편의 관(觀) → 염(念) →  의심(疑
心) → 돈오(頓悟)라는 순서를 밟게 된다. 
  
  넷째, 수행자가 돈오(頓悟)하기까지는  어떠한 수행단
계(修行段階)를 거쳐야 하는가 ?
  수행자가 돈오하기까지는   수행방편의 행주좌와일여
(行住坐臥一如) →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  몽중
일여(夢中一如) →  숙면일여(熟眠一如) →   세번뇌(細煩
惱)의 평정(平定) →  돈오(頓悟)라는 수행의 단계를  반
드시 거쳐야 한다.
  
   (2) 남방 불교권(南方  佛敎圈)과 북방 불교권(北方  佛敎   
       圈)
  
  ① 타이, 미얀마, 스리랑카 등  남방 불교권에서는 위
빠싸나(Vipassan )라는 관법(觀法)으로 수행한다고 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관(觀)하면 관
(觀) → 염(念) → 의심(疑心) → 돈오(頓悟)하여 해탈(解
脫)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관법(觀法)인 위빠싸나 수
행법은 수행의 시작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것
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남방 불교권에서는  북방 불교의 화두법(話頭
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
심법(疑心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수행자가  마지막에는  수행방편(修行方便)을  의심하여 
돈오(頓悟)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된다. 그러
므로 남방  불교권에서는 초보단계(初步段階)의  수행범
주(修行範疇)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② 중국(中國), 우리나라,  일본(日本) 등 북방  불교권
에서는 돈교법(頓敎法)이라고 하여 격외(格外)인 화두(話
頭)를 수행방편으로 삼고 수행하고 있다. 화두수행(話頭
修行)은 수행방편을 의심(疑心)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수행법은 경전(經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북방 불교권에서는 위빠싸나 수행법을 하근기
(下根器) 중생의 점법(漸法)이라고  하여 무시(無視)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말한다면 북방 불교권의 화두법
(話頭法)은 의심법(疑心法)으로 수행하기  이전의 관(觀)
과 염(念)의 수행단계를  무시(無視)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두법은 그 존립근거(存立根據)가 없어지는 것이다.
  
   (3)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에서 보완(補完)해야 할 점
  
  수행자의 수행이 관(觀)하는  단계 이상 나아가지  못
하면 수행자는 어떠한 깨침에도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수행자가 수행의 방편을  관(觀)하는 단계에서 염(念)하
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면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
요조건(必要條件)을 갖춘 깨침에는 이를  수 있다. 그리
고 수행자가 그 수행의 방편을 염(念)하는 단계에서 의
심(疑心)의 단계로 나아가면 구경각(究竟覺)에까지 이르
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초보의 수행법인  수행방편을 관
(觀)하는 수행방법밖에 모르면 수행자는 어떠한 깨침에
도 이를 수 없고,  수행자가 추번뇌(鹿煩惱)도 평정하지 
못한 수행수준에서 세번뇌(細煩惱)를  평정하고 돈오(頓
悟)에 이르는 수행방법인  의심법(疑心法)만으로 수행한
다면 역시 어떠한  깨침에도 이를 수  없거나 착각도인
(錯覺道人)밖에 될 수 없다.
  남·북방 두 불교권의 수행방법을 살펴보면, 남방 불
교권(南方 佛敎圈)에는 의심으로 하는 수행방법에  대해
서는 전혀 모르는  것으로 보아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
조건을 갖춘 깨침  이상의 선지식(善知識)의 출현이  없
었음을 알 수 있고, 북방 불교권(北方 佛敎圈)에서는 과
거 많은 선지식(善知識)이 출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북방 불교권에서 많은 선지식(善知識)이 배출되었던  것
은 불법(佛法)은 난법(煖法)이기  때문에 사계절(四季節)
이 뚜렷한 북방의 기후 특성(氣候 特性)과도 관련이  있
을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이 없는 곳에서는 수행자는  반드시 수
행방편을 관(觀)하여 그 관(觀)이 염(念)으로  바뀌어 삼
매(三昧)가 되면, 드디어는 그 삼매(三昧)가 나오는 곳을 
의심(疑心)하여 돈오(頓悟)하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수
행자가 이와 같이  선지식의 지도 없이  수행하여 성불
(成佛)하려면 기나긴 세월에  걸쳐 점수(漸修)하여 돈오
(頓悟)해야 하므로 점법(漸法=漸敎法)인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의 출현이 있는 곳에서는  선지식은 수
행자가 아무리  하근기(下根器) 중생이라도   잘 이끌어 
수행의 단계마다 수행방편을 달리하여 수행이  빨리 나
아가도록 개별지도한다. 그리하여  수행자의 공부가 의
심법(疑心法)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면  수행
자에게 의심을 돈발(頓發)시킬 수 있는 과제(課題)를 등
장시켜 쉽게 돈오(頓悟)하도록 유도한다.  이와 같이 선
지식(善知識)은 수행자를 짧은  기간 내에 성불(成佛)하
도록 하므로  돈법(頓法)이라고 한다.  따라서 선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돈법(頓法=頓敎法)은 존재할 수 없다.
  즉, 수행자가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
느냐 없느냐에 따라  돈법(頓法)과 점법(漸法)으로 나누
어지는 것이지, 불법(佛法) 자체에는  돈법(頓法)이나 점
법(漸法)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남방 불교(南方 佛敎)
와 북방 불교(北方 佛敎)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북방  불교권에서는 과거  선지식(善知識)들이 
수행자를 개별지도할  때에 의심법(疑心法)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행수준에 이른   수행자들에게 의심(疑心)을 
돈발(頓發)시켜 주었던 화두(話頭)들이 대부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본 중생들은 조사(祖師)는 유
전돈법(唯傳頓法)한다고 하니까  수행의 시작부터  조사
(祖師)들이 남긴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로써 수행하는 
것을 돈교법(頓敎法)인 줄 잘못 알고 있는데 이와  같이 
잘못된 생각은 바로 잡혀야 한다.
  


번호:838/845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7/16 03:45  길이:14줄
제 목 : [영원한대자유인]의저자 강정진 선사님 법회안내
다음 법회 안내는 서울 청정선원에서의 법회일정이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내용입니다. 
지난 5월까지는 매달 넷째 주 오후 3시 서울대입구 전철역 근처의
청정선원에서 선사님 법회를 가졌습니다만
6월부터는 매달 넷째 주(마지막 주가 아닙니다) 저녁 7시에 법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장소는 변경없이 관악구청 맞은편의 청정선원입
니다. 보다 자세한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서울대학교 참선수행모임 
선우회 동아리방(전화: 880-8627)으로 연락 주시거나 수요일 저녁
혹은 일요일 청정선원(전화: 878-1843)으로 직접 연락 주시면 되겠
습니다. 
더운 여름날 변함없는 수행정진으로 금생에 성불하시길 빕니다. 
                      
                                 서울 청정회 강신영 합장-



번호:851/853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8/11 10:35  길이:183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3-2.경전과조사어록에대한올바른이해
    2. 경전(經典)과 조사어록(祖師語錄)에 대한 
                      올바른 이해
  
  
  
  
   (1) 경전(經典)과 조사어록(祖師語錄)
  
  경전(經典)은 부처님께서 남긴  말씀이고 조사어록(祖
師語錄)은 선지식(善知識)들이 남긴  말씀을 말한다.  수
행자가 부처님이나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수행
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수행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므
로 부처님이나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에는 수행자는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스승으로 삼고 수행해야 한다.
  경전(經典)에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많은  제자들에
게 단계별로 수행방편을 달리하시고 다양한  비유를 구
사하시면서 지도하셨던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사어록(祖師語錄)에는 수행에  관한 초보적인  것과 
경전(經典)에 있는 법문(法門)은  생략되어 있고 선지식
들의 마지막 수행단계의 공부나, 그분들의 돈오(頓悟)에 
임박했을 때의 공부나, 그분들이 돈오(頓悟)할 때나,  돈
오(頓悟) 이후에 스승으로부터 인가받는 장면이나, 돈오 
이후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들만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전(經典)에는 수행자를 위한  법문이 모두 있기  때
문에 수행자가 경전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잘못되는 수
행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전(經典)은 방대(尨
大)하여 불법(佛法)에 통달한 선지식이 아니면  그 순서
와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 단점(短點)이다.
  조사어록(祖師語錄)에는 초보적이고 경전에 있는 내용
들은 대부분 생략되었기 때문에 수행자가  이러한 사실
을 모르고 처음부터 조사어록에 의지하여  수행하게 되
면 잘못되는 수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조사어록에 의
지하여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수행자는 조사어
록을 통해 조사(祖師)의  유전돈법(唯傳頓法)에 접(接)할 
수 있음이 장점(長點)이다.
  
   (2) 조사어록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필요성
  
  오늘날 수행자들의  대부분은 그  방대함으로 인하여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경전(經典)보다는 
간략함으로 인하여 그 파악이 쉬운  조사어록에 의지하
여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의 폐단(弊端)이 많으므로 
조사어록의 실상(實狀)을  더욱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조사어록은 수행자에게 수행의 지침(指針)이 되게  하
는 말이나,  수행자에게 격외(格外)를  등장시켜 수행의 
방편이 되게 하였던 것이나, 선지식께서 돈오(頓悟)하였
던 내용이나, 수행자의  공부를 지도(指導),  점검(點檢), 
인증(印證)하였던 것이나, 선지식들끼리  서로의 공부를 
겨루어 보았던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어록들을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두 가지 유형
(類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바른 수행의 지침서(指針書) 역할을 하는 것.
  이러한 것은〈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돈오입도요
문론(頓悟入道要門論)〉과 같이 수행자에게 바른  수행과 
바른 깨침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초보의  수행자에게 필
요한 수행의 지침서가 된다. 
  둘째, 수행자의 공부 수준이 의심법(疑心法)으로 수행
해야 할 수준에 이르렀을 때나 돈오(頓悟) 이후에  보아
야 하는 것.
  이러한 것은〈벽암록(碧巖錄)〉과 같은 것인데  대부분
의 조사어록이 여기에 속한다.  그 내용에는 주로 수행
자가 돈오(頓悟)한 다음  자신의 깨침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방법과,  선지식이 수행자에게  격외(格外)를 돌출
(突出)시켜 수행의 방편이 되게 했던 것들을 담고  있어 
초보의 수행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3) 수행불교(修行佛敎)의 위기(危機)를 초래하게 된 조사  
      어록(祖師語錄)
  
  이상과 같이 조사어록은 종류에 따라 읽어야 할 사람
이 구분(區分)지워지지만, 그것이 일단 책으로 출판되어 
나오면 구분지워 읽혀지지는 않는다. 돈오(頓悟)한 수행
자가 보아야 하는 조사어록을 초보자(初步者)가 보거나, 
선지식(善知識)이 아니면서  초보자에게 스승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초보자에게  조사어록에서 나오는 격외(格
外)를 수행의 방편(方便)으로 주게  되면, 수행불교(修行
佛敎)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앞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경전(經典)에는  격외(格外)
가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부처님의 말씀에 격외가 등
장했더라면 불법(佛法)은   500년을 지속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격외를 등장시키는 스승이나 그것을 
수행방편으로 하여 공부하는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조
건(條件)이 따르는데 그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수행자
나 선지식의 대(代)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극명(克明)하게 보여 주는  예로서〈벽
암록(碧巖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원오  극근( 悟 
克勤) 선사가〈벽암록〉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
면 그 책의 목적은 의심법(疑心法)으로 공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수행자에게는  수행방편을 선택하도록  하
고, 돈오(頓悟)에 이른 수행자에게는  자신의 깨침을 점
검해 볼 수 있도록  하고, 후배 선지식에게는 수행자를 
가르칠 때에 참고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원오( 悟) 선사의 제자인  대혜 종고(大慧 宗
 ) 선사는 그〈벽암록〉을 읽어  보시고는 즉시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벽암록〉을  쓴 스승의 뜻은 
잘 알았지만 중생이  그것을 읽을 것을  염려(念慮)했기 
때문이었다.〈벽암록〉은 대혜(大慧) 선사가  불태워버리
기 전에 이미 어떤 신도(信徒)의 손으로 필사(筆寫)되어 
대혜 선사의 의도와는  달리 그것을 읽어서는  안될 중
생들에게까지 공개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해석
서(解釋書)까지 나왔다고  하니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늘날은  옛날과는 달리  출판문화(出版文化)의 
발달로 도서출판이  쉬워 오역(誤譯)  투성이인 경전(經
典)과 조사어록(祖師語錄)들이 번역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역(誤譯)된 것은 수행자가  돈오(頓悟)하게 되면 
쉽게 가려낼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
나 앞에서 말한 조사어록의 종류 중 돈오(頓悟)  이후에 
보아야 할 조사어록들이 대부분 번역되어 나와 경전(經
典)보다는 이와 같은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의지하여 수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큰 문제가 된다.
  문제가 되는 이유(理由)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 중생(衆生)이 이러한  어록들을 몇  권 읽게 되면, 
수행(修行)에 의하여 돈오(頓悟)하면서  화두(話頭)를 타
파(打破)하지 않았더라도 화두(話頭)에 대한 감(感)을 잡
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이 화두에 대하여 
감을 잡은 사람은  자신이 실토(實吐)하지 않는다면  중
생들이 자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마치 돈오(頓悟)하여  선지식이 된 것처럼  행세
하면서 수행자를 지도하게 된다. 
  ② 초보의 수행자가 보아서는 안될  조사어록을 보고 
처음부터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로써 공부하게  되면 
추번뇌(鹿煩惱)도 평정(平定)되기 전에  착각(錯覺)이 일
어나는데, 이러한  착각을 돈오(頓悟)로  아는 수행자가 
있다. 이러한 착각도인이 자신이  선지식인 줄 알고 수
행자를 지도하고 있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①은 자신이 선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고의성(故
意性)이 있는 경우이고, ②는 자신이 착각(錯覺)한 사실
을 전혀 모르고  선지식 노릇을 하는  사람으로 고의성
(故意性)이 없는 경우이다.
  
   (4)〈능엄경(楞嚴經)〉의 25원통법문(圓通法門)
  
  수행자가 선지식(善知識)의 출현이 없는  시기에 조사
어록에만 의지하여 수행하게  되면 수행불교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조사어록에서는 의심법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행자에게  격외(格外)를 등장시켜  쉽게 돈오(頓
悟)에 이르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러한 방법을 모르셨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격외는 선
지식의 출현이 있을 때에는 돈교법(頓敎法)으로서의  장
점도 갖고 있지만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에는 부처
님의 가르침 자체를 말살시킬 수 있는 큰  단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격외를 등장시
키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능엄경(楞嚴經)〉에서 25대
사(大士)들로 하여금 그분들이  얻었던 원통(圓通)을 자
신들의 입을 통하여 설명하도록 하셨다. 
  25원통법문(圓通法門)의 내용은   "모두가 수행방편을 
관(觀)하여 삼매(三昧)를 얻어 드디어는 원통(圓通)을 얻
었노라."고 되어 있다.  수행의 묘리(妙理)를 모르는  사
람은 그것을   관법(觀法)으로 단정하여  주목(注目)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에는 반
드시 이에 의지하여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통법문 속에는 25가지 중 한  가지를 수행방편으로 
택하여 관(觀)하면 수행이 나아감에 따라 염(念)으로 바
뀌어 삼매(三昧)를 얻게 되고, 거기에서 수행이 더욱 나
아가 삼매(三昧)인 한 생각이 나오는 곳을 찾고자  하는 
의심(疑心)으로 바뀌게 되면, 드디어는  원통(圓通)을 얻
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必然的)인 이치(理致)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통(圓通)을 얻는 과정에는 제2장 '수행방
법과 수행단계'에서 말한  관(觀) → 염(念)  → 의심(疑
心)으로 이어지는 수행방법이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
다. 그리고 수행단계도  역시 수행방편의 행주좌와일여
(行住坐臥一如) →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  몽중
일여(夢中一如) → 숙면일여(熟眠一如) → 미세번뇌(微細
煩惱)의 평정(平定)  →  돈오(頓悟)로 이어지는  단계를 
거칠 수 밖에 없다.
  수행자는 이상과 같은 수행방법과 수행단계를 반드시 
거쳐 돈오(頓悟)에 이르게 되어  있다. 수행자가 혼자의 
힘으로 이러한 수행과정을 거쳐 돈오(頓悟)에  이르려면 
수많은 세월이 걸리기 마련이므로 점법(漸法)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선지식(善知識)은  수행자를 지름길문[경
절문(徑截門)]으로 가도록 지도하여 빠른 시일  안에 수
행을 끝내게 하므로 선지식은 돈법(頓法)으로  가르친다
고 하며 선지식인 조사(祖師)는 오직[唯] 돈법(頓法)만을 
전(傳)한다고 한다. 즉, 조사(祖師)는 유전돈법(唯傳頓法)
한다고 말한다.
  

번호:844/845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7/25 18:26  길이:185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3-3.돈교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격외
   3. 돈교법(頓敎法)의 위기(危機)를
               초래하게 된 격외(格外)
  
  
  
  
   (1) 돈교법(頓敎法)의 서래(西來)
  
  부처님께서는  인도(印度)에서  출생하시고  그곳에서 
일생을 끝마치셨지만, 부처님의 중생들을 위한 그 숭고
한 염원(念願)이 담긴 돈교법(頓敎法)은  달마 조사(達磨 
祖師)에 의하여 중국(中國)에 전(傳)하여지게 되었다.
  달마 조사에 의하여 전해진  돈교법(頓敎法)은 중국의 
기후 풍토와 그곳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맞아, 육조 혜
능(六祖 慧能) 스님  대에 이르러  그 뿌리가  내리면서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출현하여 선종(禪宗)이라는 이
름으로 크게 발전하여  그 위치를 구축(構築)하게  되었
다. 그리하여 돈교법은 우리  땅에 전하여지고 다시 일
본(日本)에 전하여져 중국(中國), 우리나라, 일본(日本)은 
북방 불교권(北方 佛敎圈)을 이루게 되었다.
  
   (2) 조사(祖師)의 가르침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선지식(善知識)인 조사
(祖師)는 수행자에게 수행방편의 관(觀) → 염(念) → 의
심(疑心)으로의 전환을  집중지도하여 단기간(短期間)에 
돈오(頓悟)하게 하므로 이를 돈교법(頓敎法)이라고 한다. 
  수행자의 공부가  추번뇌(鹿煩惱)를 평정하고  아뢰야
식(阿賴耶識)이 감지되는 시기에 이르면, 선지식인 조사
는 마지막 관문(關門)인  돈오(頓悟)로 유도하기 위하여 
수행자에게 의심(疑心)을 돈발(頓發)시킬  수 있는 과제
를 수행의 방편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사(祖師)들은  수행자에 따라 다양한  방
법으로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의심의 과제가  수행방편
이 되도록 하였는데, 조사들이  그렇게 하는 이치(理致)
와 그 예(例)를 들어 볼까 한다.
  선지식은 수행자에게 돈오(頓悟)라는  도약의 전기(轉
機)를 맞도록 하기  위하여 수행자의  생각으로는 이치
(理致)에 맞지 않는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를 등장시키
거나, 불자(拂者)를 세워 보이거나,  주먹[拳]을 들어 보
이거나, 방(棒)으로 수행자를 때리거나, 할(喝)을 하거나, 
코를 비틀거나[把鼻], 혀를 내밀거나[吐舌], 손뼉을 치거
나[拍手], 춤을 추거나[作舞], 손가락을 튀기거나[彈指]… 
등의 어느 한 가지 행동을 보여 주어, 선지식의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하여 그러한 의
심의 과제가 새로운 수행방편이 되어  세번뇌(細煩惱)를 
평정하고 돈오(頓悟)하게 한다.
  선지식의 이상과  같은  격외(格外)의 말이나  행동은 
망각(忘却)되지 않고 어둡지 않은[不昧] 성품(性品)의 나
툼인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격외(格
外)는 전혀  이치(理致)에 맞지  않는 말이고,  선지식의 
행동은 전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으므로 수행자
에게는 선지식의 그러한 말이나 행동에 대하여 의심(疑
心)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이 선지식이 수행자에게 격외(格外)인  화두
(話頭)나 불(拂), 권(拳), 방(棒), 할(喝)… 등과 같은 행동
을 보여 수행자로  하여금 의심을 일으켜  세번뇌를 평
정하고 돈오(頓悟)하게 했던 것은,  경전이나 남방 불교
권(南方 佛敎圈)에는 없고 오직  북방 불교권(北方 佛敎
圈)에만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이것은  중국(中國)
의 선지식들이 창안(創案)한 것임에 틀림없다.
  중국(中國)의 선지식들이  수행자에게 화두나  괴상한 
행동을 등장시켜 수행의  방편이 되도록 했던  것은 부
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이나 선지식  자신들까지도 
모두가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돈오(頓悟)에  임박하여서
는 수행의 방편을 의심(疑心)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중국(中國)의 선지식들이 1,700가지 이상되는  화두(話
頭)와 선문답(禪問答)을 창출(創出)하였던  것은 격외(格
外)와 괴상한 행동의  다양성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의 
선지식들은 자신들의 성격과  수행자를 지도하는  방법
에 따라  오가칠종가풍(五家七宗家風)이 생겨나게  하였
고, 당(唐)·송대(宋代)에는 많은 선지식을  배출시켜 선
종(禪宗)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펼쳐지게 하였다.
  
   (3) 격외(格外)로써 수행할 수 있는 요건(要件)
  
  격외(格外)는 수행자의 공부가 의심법(疑心法)으로  수
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  선지식이 수행자
로 하여금 핵심(核心) 수행에 바로 접근시켜 돈오(頓悟)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격외로써 공부
하려면 다음과 같은 요건(要件)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전생(前生)의 공부가 돈오(頓悟)에는  이르지 못
했지만 숙면일여(熟眠一如)나 그 이상의 수준에  이르렀
던 수행자로서 금생(今生)에  다시 수행자가 된  사람에
게는 격외를 등장시켜 주어도 된다.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이러한 수행자가 있다. 이러한 
수행자는 전생에 돈오(頓悟)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
件)은 갖추었던 수행자이므로  관법(觀法)이나 염념상속
법(念念相續法)의 수행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의
심법(疑心法)인 격외(格外)의 수행방편을 등장시켜 주어
도 된다.
  둘째, 수행자가 다른  수행방법으로 공부하여  추번뇌
(鹿煩惱)를 모두  평정할 때가   가까워졌거나 추번뇌를 
모두 평정한 수행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선지식이 수행자에게 격외를 등장시키는 목적은 수행
자가 의심(疑心)의   특성을 원용하여  세번뇌(細煩惱)를 
평정하고 수행의  마무리인 돈오(頓悟)를  이끌어내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선지식은 반드시 추번뇌가 거의 
평정되었거나 추번뇌가   평정된 수행자에게만  격외를 
돌출(突出)시켜 수행방편이 되게 하여 주어야 한다.
  셋째, 격외(格外)는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에 의하여 
등장시켜져야 한다. 
  선지식은 수행자의 공부를 파악한 다음  그 수행자에
게 알맞은 격외를 등장시켜 수행의 방편이 되게 한다.
  넷째, 수행자는 선지식으로부터  점검과 지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수행자는 선지식에게  자신의 공부를  항상 노출시켜 
때때로 점검과 지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요건(要件)을 구비하면 수행자는 쉽게 돈오(頓
悟)하게 된다.
  
   (4) 돈교법(頓敎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격외(格外)
  
  수행자가 격외(格外)인 화두(話頭)로써 공부하려면 앞
에서와 같은 요건(要件)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데, 이
러한 요건(要件)을 갖추지  못한 수행자가 격외로써  공
부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경우로 말미암아  공부를 중
단해야 하거나 돈교법(頓敎法)의 위기(危機)를 초래하게 
된다.
  첫째, 수행자가 격외로써 수행하여 상기(上氣)가 일어
나면 수행을  그대로 계속하면서는  그 상기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공부를 중단해야 된다. 
  둘째, 관법(觀法)이나  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의 수행
으로 상기(上氣)를 이미  극복한 수행자나 희유(稀有)하
게 전생의 수행으로  인하여 상기가 일어나지  않는 수
행자라도  수행이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가   되기 
전에 격외로써 공부하게 되면,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
(阿賴耶識)이 감지될 때 그것을 성품(性品)인 것으로 착
각(錯覺)하게 된다.
  셋째, 국가(國家)에 오랜 동안 전란(戰亂)이나 정변(政
變)으로 인하여 선지식의 맥(脈)이 끊어진 뒤에, 수행자
들이 선지식의 지도  없이 임의로 구전(口傳)되어  오는 
격외(格外)나 조사어록에서  격외를 택하여  수행방편으
로 삼고 공부하게 되면, 수행자들이 구경각(究竟覺)에서 
멀어지는데 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처음에는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수행자가              
       없어지게 된다. 
       이때에는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을 갖춘 깨   
       침만 나오게 된다.
2단계: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件)만을 갖춘     
       깨침도 나오지 않는다. 
       이때에는 명멸하는  아뢰야식을 성품(性品)인 것   
       으로 착각(錯覺)한 수행자만 나오게 된다.
3단계: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성품인 것  
       으로 착각하는 수행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때에는 수행자가  또렷또렷한 의식(意識)을 성   
       품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4단계: 또렷또렷한   의식(意識)을 성품(性品)인   것으로     
       착각하는 수행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때에는 무기(無記)를  성품인 줄  착각하는 수    
        행자가 나오게 된다. 이  때부터 선지식의 출현   
       이 없으면 수행불법(修行佛法)은 막을 내리게 된  
       다.
5단계:  불법(佛法)의  진수(眞髓)는  공리공론(空理空論)       
       으로만 남는다. 
       이때부터는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고 탑(塔)  
       을 쌓고 기도하는 외형 불법만 남게 된다.
6단계: 외형  불법(外形 佛法)에는  실상(實相)이 없으므        
        로 이것조차 막을 내리고 마는 때가 오고야  만  
       다.
  
   (5) 돈교법(頓敎法)의 위기에 대한 대처방안(對處方案)
  
  돈교법(頓敎法)의 위기란 것은 돈교법만의  위기가 아
니고 북방 불교(北方 佛敎)의 위기인 것이다. 이러한 위
기가 오는 원인(原因)은  선지식(善知識)의 출현이 없는 
때에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격외인 화두(話頭)로써  공부
하기 때문이다.
  선지식(善知識)과 격외(格外)는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다. 즉,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에는 수행자
는 수행방편을 격외로써 공부해서는 안되며  격외는 반
드시 선지식에 의하여  수행자에게 등장시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을 때에는 돈교법(頓敎法)은  존재
하지 않는다.
  격외(格外)는 선지식의 출현이  있을 때에는 많은  수
행자로 하여금 돈오(頓悟)에 이르게 하는 큰 장점(長點)
을 갖고 있는 반면,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에는 수행
자의 공부에 진전이  없게 하거나 돈오(頓悟)에  이르기 
전에 거의 모두가  착각(錯覺)하게 하고 수행불교  자체
를 말살시키는 큰 단점(短點)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선
지식의 출현이 없는  시기에는 수행자들은  수행방편을 
격외(格外)로써 공부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시기에는 돈
교법(頓敎法)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부처님의 
경전(經典)에 의지하여 수행하여야 한다.


번호:124/124  수신자:DONNOH  송신일시:97/07/26 00:07  형태:TEXT  크기:10줄
제  목 : 답장:[영원한 대자유인]3-3.돈교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격외

  음.. 신영이니?
  계속 수고하는 구나..
  몸은 좀 회복 되었니?^^
  낼은 볼 수 있겠지?
  오늘은 강희병님, 윤종국님, 나, 하영숙, 원순영이 모여서 식사했다^^
  뭐.. 큰 이야기는 없었고.. 이제 일반인들도 잘 올 수 있게 잘해보자는 얘기
였지요..
  그럼 피로 회복하고 낼은 초롱초롱하게 보기를..
                    김대환



번호:852/853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8/11 10:36  길이:248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3-4.착각도인의 출현
  
         4. 착각도인(錯覺道人)의 출현(出現)
  
  
  
  
   (1) 착각도인(錯覺道人)이 출현하는 원인(原因)
  
  수행자가 돈오(頓悟)하기  위한 필요조건도  충족하지 
못한 수행단계에서 어떤  식(識)이나 무기(無記)를 자신
의 성품(性品)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사
람을 착각도인(錯覺道人)이라고 한다. 
  수행자는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에게  귀의(歸依)
하여 수행에 필요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다면 큰 어려움 없이 돈오(頓悟)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수행자가 지도받을 선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수행의 정
의(定義)와 수행방법과 수행단계에 대한 예비지식도  없
이 조사어록(祖師語錄)에만 의지하여 수행하게 되면, 잘
못된 수행으로 인하여 착각도인(錯覺道人)이 되어  불법
(佛法)을 만난 보람도 없이  한 생(生)을 헛되이 보내게 
되거나 혹은 악도(惡道)로도 갈 수 있다. 
  
   (2) 착각도인(錯覺道人)의 유형(類型)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올바른 수행과 올바른 깨침으
로 이끌기 위하여 방편(方便)의  말씀을 하시고[方便說], 
자신의 설법에 대한 이해를 극대화(極大化)시키기  위하
여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比喩說],  수행자의 근기와 수
행수준에 알맞은 말씀을 하시고[對人說], 설법을 하시거
나 수행방편을 주어야  할 때에는 적절한  기회를 포착
하여 말씀하시었다[對機說]. 그리고 조사(祖師)들도 부처
님의 그러한 뜻을 받들었던 것이다.
  불조(佛祖)의 뜻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수행자들 중에는  수행을 잘못하여  착각도인
(錯覺道人)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착각도인(錯
覺道人)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깨친 것으로 생각하
며 무엇을 보았기에 깨쳤다고 하는 것인가 ? 그들의 착
각(錯覺)에 대하여 자세히 분류해 보기로 한다.
  ① 실참실구(實參實究)가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이 조
사어록(祖師語錄)에서 격외(格外)의   문답(問答)을 보고 
착각하거나, 화두(話頭)를 풀이 해 놓은 것을 보고 착각
하거나, 그러한 법문을 많이  듣고는 그 이치를 알아차
리고 몇 가지 격외문답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되
자 자기가 돈오(頓悟)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
  ② 수행자가 조사어록(祖師語錄)이나 착각선사들의 법
문에서 "성품(性品)이라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의 이전(以前)이다."라고 가르쳐 주
는 것에서 자기의  또렷또렷한 의식(意識)을 성품인  것
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
  ③ 수행자가 수행의  정의(定義)를 모르고 수행에  임
하거나, 수행자가 좌선(坐禪) 중에 수행방편을 잊어버리
게 되면 고요하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무기(無記)의  경
계가 나타나는 데, 이것을 성품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경
우.
  ④ 수행방편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수행자가 공부
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의  경지에   가까와지면 
자신에게서 지금까지 감지(感知)되지  않던 제팔식(第八
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명멸(明滅)하기 시작하는데, 
수행자가 이와 같이 명멸하는 아뢰야식을  성품(性品)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경우.
 
   (3) 착각(錯覺)의 문제점(問題點)
  
  앞의 네 가지 중 ①, ②, ③의  경우는 수행자의 공부
가 보잘 것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행자
나 경(經)과 어록(語錄)에 밝은 중생이라면 쉽게 가려낼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겠다. 
  그러나 ④의 경우는 선지식(善知識)이  아니면 가려낼 
수 없어, 수행자  자신뿐만 아니라  후학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
을 성품으로 잘못  알게 되는 과정과  문제점에 대하여
는 설명이 필요하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보통 중생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식(識)이다. 아뢰야식은  공부가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
一如)의 경지에  가까워졌을  때에야 감지가  가능하다. 
그리고 수행의 단계에  알맞은 수행방법으로  공부하게 
되면, 그 식(識)을 감지(感知)할  뿐이지 그것을 성품(性
品)으로 착각(錯覺)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돈오(頓
悟) 이후 지난  날의 공부를 정리하여  볼 때, 지난  날 
어느 때부터  명멸(明滅)함으로 감지되던   것이 그리고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른 다음부터는 그 감지됨이  정
착(定着)되던 그것이 바로 아뢰야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가  명멸하는 아뢰야식이  감지되기 전
(前)부터 의심법으로 수행하게 되면, 어느  날 명멸하는 
아뢰야식이 감지되기에 이를  때에 수행자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것이  자기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므로 이
것을 성품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공부를  경전(經典)이나 조사어록(祖
師語錄)에 대입(代入)시켜 보면 맞는  것 같고 대부분의 
화두들이 속하는 한  부류(部類)의 화두들은 모두  타파
(打破)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部類)의 화두(話頭)들은 타파(打破)되지 않는다.  결
국 이러한 사실은  두 부류  중 어떤  부류의 화두들도 
타파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수행자들은 선지식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그 
착각(錯覺)을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나 선지식 
대신 자기와 같은 수준의 스승으로부터 자기가 타파(打
破)한 부류의 격외(格外)들만 질문을 받고 그 스승의 수
준에 알맞은 답을  하여 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게 되면, 이러한 수행자는  불법(佛法)을 잘못 이해할 
뿐만 아니라 중생들에게도 불법을 잘못  전달하여 깨침
의 질(質)을 격하(格下)시키게  되고, 자신의  수행은 향
상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때부터 퇴전(退轉)하기  시작한
다. 
  수행자가 이상과 같이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阿賴
耶識)을 성품(性品)인 것으로 착각(錯覺)하게  되는 것은 
아뢰야식의 특성(特性) 때문이다.  즉, 아뢰야식은  추번
뇌가 평정되어야만  감지(感知)되는  식(識)이라는 특성
(特性)과 밝은  식(識)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수행자는 
아뢰야식이 등장할 때에는  그것이 아뢰야식임을  확실
히 알고 수행에 더욱 힘쓰면 머지 않아  돈오(頓悟)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선지식(善知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수행자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도 강조하셨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성품(性品)
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면 이러한 수행자는  자기가 알
고 있는 것이  성품이라는 확신 때문에  자기를 인가해 
준 스승 외에는  어떠한 선지식도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수행의 
방편을 놓아버리고 보림(保任)한다고 그것을 챙기는  방
법으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공부하면 명멸(明
滅)하는 아뢰야식은 오락가락하다가 숨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수행자의 공부는 하루가 다르게 자꾸만 원점
(原點)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지난 날 챙
기던 것이 무엇이었던가조차도  모르게 되며, 늙어서는 
보통 중생 같이 노망(老妄)드는  큰스님도 있다. 그때에
야 비로소 중생들은  그 큰스님의 공부와  그 큰스님을 
인가한 스승의 공부까지도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을 성품인 줄 알았던  수행자
들 중에는 공부가  퇴전(退轉)되어도 노망들지 않는  사
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은  공부가 퇴전하여 원점(原點)
까지 되돌아가는 때를  당하면, 그  대부분이 부처님을 
원망하겠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육자염불(六字念佛)이
라도 하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 생(生)
을 마감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자들의 실상(實狀)은 오
로지 선지식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불조(佛祖)의  말씀들은 
모두가 똑같다[異口同聲]. 그러나 명멸(明滅)하는 아뢰야
식을 성품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중생들의  말은 서
로 비슷한 것도  있겠지만, 그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의 말이 달라[異口異聲]  항
상 시시비비(是是非非)로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상의 사항들을  수행자들은 확실히  파악하고 명멸
(明滅)하는 아뢰야식을 성품인  줄 착각하여 자신은  값
진 일생을 허송세월하지 말 것이며, 후학들에게는 돈오
(頓悟)를 격하(格下)시켜 지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
다.
  
   (4) 선지식(善知識)의 필요성(必要性)
  
  옛 선사(禪師)들의 어록을  보면 명멸(明滅)하는  아뢰
야식을 성품으로 착각했던 선사가 중국(中國)이나  우리
나라에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엉터리
를 가려내기 위해 선지식들의  애쓰신 흔적도 있고, 그
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그물을 쳐놓은 선지식도 있다. 
  그러나 선지식의 출현이 없는 시기에는  이러한 엉터
리 선사로 인하여  부처님의 숭고한 염원(念願)이  공리
공론(空理空論)에 떨어져  중생제도(衆生濟度)와는  거리
가 멀어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수행자는 자신의 노
력도 중요하지만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선결과제(先決
課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곳곳에 함정(陷穽)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
다.
  그리고 선지식에 대한 확신이 생겨 믿고 따를 때에는 
목숨이라도 내놓는 결의(決意)가  필요하다. 수행자에게 
그러한 결의가 있다면 선지식의 지도와  수행자 자신의 
노력이 조화(調和)를 이루게  되면서 수행자는 큰  어려
움 없이 목적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5) 선지식(善知識)을 알아내는 방법
  
  수행자가 선지식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이지만, 만난다 해도 선지식임을 알아낸다는 것은 더더
욱 어려운 일이다.  수행자는 선지식을  만나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만  수행에 진전이  있고 공부를  성취할 
수 있으므로 선지식을 알아내는 방법을  반드시 명심하
고 있어야 한다.
  수행자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자신의  행동(行動)이나 
법문(法門)으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주의깊게만 관찰하면 가려낼  수 있게 된다. 스승
의 행동이나 법문이  다음의 지적 사항에  한 가지라도 
해당하는 것이 있거나  지적한 것을 모르는  것이 있으
면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할 수 없다.
  
1. 수행(修行)의 정의(定義)를 모르는 선사(禪師).
2. 일관(一貫)된 수행방법을 모르는 선사.
3. 수행단계를 모르는 선사.
4. 수행에 있어서 관(觀), 염(念), 의심(疑心)의 역할을
   모르는 선지식.
5. 좌선(坐禪) 상태에서 항상 졸고 있는 선사.
6. 좌선(坐禪) 상태에서 항상 눈을 감고 있는 선사.
7. 화두는 타파하였지만  말할 때나  잠잘 때에는 성품
   (性品)을 잊어버린다는 스승.
8. 공부가 숙면일여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돈오(頓悟)했
   다고 말하는 선지식.
9. 오도(悟道)하여 수행자를 지도하다가 늙어 노망(老妄)
   드는 선지식.
10. "화두(話頭)는 타파(打破)하였지만 구경(究境)에는 이
    르지 못하여 지금은 염불(念佛)을 하고 있다."고  하
    는 선지식.
11. 초보자에게 처음부터 좌선(坐禪)하라고 가르치는 스
    승.
12. 초보자에게 처음부터  수행방편으로 격외인  화두를 
    주는 선지식.
13. 수행자의 공부수준도 파악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항
    상 손바닥으로 방바닥이나  땅바닥을 치면서 "이것
    을 아느냐 ?" 또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
    는 선지식.
14. 수행자의 공부수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항상 불
    (拂), 권(拳), 방(棒), 할(喝)로써 지도하는 선지식.
15.  수행자의  공부가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묵언(默言)을 하라고  하거나 토굴
    생활을 권유하는 스승.
16.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자
    신이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거나 또는 숙면일여에
    도 이르지  않은 수행자에게  장좌불와를 권유하는 
    스승.
17. 번뇌가 일어나면 주인공(主人公)에게 맡기라고 가르
    치는 스승.
18.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는 선지식.
19. 수행을 호흡에 동반(同伴)시키는  방법을 모르는 스
    승.
20. 수행자에게 수행 중  세번의 큰 고비가  있는데, 그
    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르는 스승.
21. 아뢰야식(阿賴耶識)을 확실히 모르는 선지식.
22.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검증법(檢證法)을 모르는 선지
    식.
23. 향엄(香嚴)   선사의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에서 
    '유유탁추지지(猶有卓錐之地)'가 고의로 '무탁추지지
    (無卓錐之地)'로 바뀐 것을 모르는 선지식.
24. 향엄 스님의 조사선(祖師禪) 게송을 바르게 번역 못
    하는 선지식.
25. 경전(經典)에는 격외(格外)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선지식.
26.〈능엄경(楞嚴經)〉에 25원통법문(圓通法門)이  나오는 
    이유를 모르는 선지식. 
  
  이상 지적한 것에  잘못됨이 없고 모르는  것이 전혀 
없다면 선지식(善知識)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것
이고, 아래에 지적하는 관문(關門)까지 통과했다면 영원
(永遠)한 대자유인(大自由人)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
을 것이다.
①〈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혜능(慧能)  대사와  같은 
두번의 깨침.
② 오조 법연(五祖 法演) 선사의 '무(無) !'.



번호:852/853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8/22 09:05  길이:222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3-5.돈오점수의 허구성
  
      5.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허구성(虛構性)
  
  
  
  
 〈덕이본 단경(德異本  壇經)〉이 출현한  이후 선문(禪
門)에서는 불법(佛法)의   진수(眞髓)인 돈오돈수(頓悟頓
修)는 가려지고 불조(佛祖)의 정전(正傳)이 아닌  돈오점
수(頓悟漸修)라는 용어가 정착되고  있으므로, 돈오점수
의 허구성(虛構性)을 자세히 밝힘으로써 이것을  바로잡
고 나아가  선문에서 돈오점수라는   용어(用語) 자체를 
추방하고자 한다.
  
   (1) 불조(佛祖)의 정전(正傳)
  
  불조의 정전(正傳)은  수행자가 수행의  시작에서부터 
성불(成佛)에 이르기까지 다음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공부의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   → 몽중일여(夢中一如) 
→ 숙면일여(熟眠一如) → 세번뇌(細煩惱)의 평정 → 돈
오(頓悟) →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깨침 → 오조 법연(五
祖 法演) 선사의 '무(無) !'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거쳐
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수행자는 부처님의 정전
(正傳)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된
다.
① 돈교법(頓敎法)은 불조(佛祖)가 전하는 최상승인(最上
乘人)을 위한 경절문(徑截門)이다.
② 돈오(頓悟)에서 '돈(頓)'은  수행자의 공부가 미망(迷
妄)을 모두 평정한 다음 수행방편을  문득 제거함을 말
하고, '오(悟)'는 수행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
는 의식(意識)의 주체인  자기의 주인공(主人公)을 깨닫
는 것이다. 이러한 돈(頓)과 오(悟)는 시차(時差)없이 동
시에 이루어진다. 
③ 수행자의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도 미치지  못
한 수행단계에서 일어난 깨침은 모두 착각(錯覺)이다.
④ 돈오(頓悟)와 착각(錯覺)의 차이는 법왕(法王)과 마왕
(魔王)의 차이와 같다.
  
   (2)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외도(外道)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 중생제도를 위한  법문(法門)
을 하셨는데, 그 법문의 내용은 중생의 근기(根器)와 수
행수준에 따라 주(主)된 말씀과 그 주된 말씀에 종속(從
屬)되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속되는 말씀은  중
생들이 주된 말씀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방편(方便)과 비유(比喩)로써 하신 말씀을  말한다. 부처
님의 주된 법문 속에는 진리상(眞理上)으로 돈오점수(頓
悟漸修)라는 말씀은 없을  뿐만 아니라, 종속되는  말씀 
속에도 그러한 말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돈오(頓悟)한 조사(祖師)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최상근기(最上根器)인 수행의  천재들을 위하여  자신들
이 터득한 바를 펴셨는데,  그분들이 남긴 어록을 대표
하는 육조 혜능(六祖 惠能)  대사의〈단경(壇經)〉 속에서
도 돈오점수(頓悟漸修)한다는 말씀은 없다.
 〈 단경〉에서 혜능(惠能) 스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부처
님의 말씀을 그 요점만을  간추렸다고 하겠다. 이와 같
은〈단경〉의 내용에는, 혜능 스님의 두번의 깨침 중 두
번째의 깨침은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에  의하여 깨치게 
된다는 것,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시각(視角)을 달리하여 
말씀할 때에도  반드시 내외명철(內外明徹)은  빠뜨리지 
않는 것,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나툼인  무념(無
念)의 설명, 오인돈수(悟人頓修)와 자성돈수(自性頓修)라
는 말씀, 제자 법달(法達) 스님의 "생각생각마다 부처님
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念念修行佛行]."는 말씀에 혜능 
대사께서 "부처님의  행이 바로  부처님이니라[卽佛行是
佛]."고 하신 것 등의 중요한 말씀이 있지만, 어느 곳에
서도 혜능 조사(祖師)는 돈오점수(頓悟漸修)한다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는  말은 외도(外道)의 
말인 것이다.
  
   (3)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頓悟)
  
  수행자가 돈오(頓悟)하면 더  닦을 무기(無記)와  번뇌
(煩惱)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돈오와 동시에 돈수(頓
修)이다. 이와 같이 돈오라는 말 다음에는 점수(漸修)라
는 말이 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돈오점수(頓悟漸修)
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아 성립될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수행자의 공부가 돈오(頓悟)에 이르는  필요조
건(必要條件)만 갖춘 깨침,  즉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
如)에는 이르렀지만 삼세망념(三細妄念)이  평정되지 않
은 깨침[覺]들이 있다. 이러한 깨침들은 망념이 모두 평
정되지 않아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므로 돈오(頓悟)는 
아니다. 그러므로 돈오에  이를 때까지 점수해야  한다. 
이와 같은 깨침들을  돈오인 줄  알고 돈오점수(頓悟漸
修)한다고 말하면 돈오의  정의(定義)를 모르는  것이다. 
후수(後修)가 필요한 깨침은 돈오가 아니므로  점수하여
야만 돈오하는 것이다.  즉, 점수돈오(漸修頓悟)인  것이
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는  말은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 생겨나는데, 돈오점수라는  말이 정착되면 선지식이 
출현하더라도 이와 같이 잘못된 용어를  바로잡기는 대
단히 어렵다.  우리 선종사(禪宗史)에는  이러한 현상이 
오래 전부터 나타나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수행자의 공부가  돈오(頓悟)에 
이르는 필요조건조차 갖추지 못한 수행단계, 즉 행주좌
와일여(行住坐臥一如)나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도 이르기 전이나 또는 몽중일여(夢中一如)나  숙면일여
(熟眠 一如)에도  이르기 전에  어떤 식(識)이나  어떠한 
경계를 성품(性品)으로 착각(錯覺)하고  있는 경우를 쉽
게 볼 수 있다.
  우리 불자(佛子) 모두는 깨침의 질(質)이 단계별로 전
락(轉落)되어 가는 현실에서  돈오(頓悟)의 정의(定義)를 
바로 알고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염원(念願)이  이루어
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4)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아뢰야식(阿賴耶識)  
  
  수행자의 공부가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에 가까
워지면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하여 선지식의 가르침
이 없으면 이 식(識)을  성품(性品)인 것으로 착각(錯覺)
하여 그것을 각찰(覺察)하는 방법으로 점수하게 된다.
  명멸(明滅)하는 야뢰야식은 성품(性品)이 아니다. 그리
고 수행자는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 이르러  추번
뇌가 평정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깨침도 있을  수 없으
며, 숙면일여  이후에 감지됨이  정착(定着)된 아뢰야식
(阿賴耶識)의 깨침은   착각(錯覺)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필요조건(必要條件)을 갖춘 깨
침인데 이와 같은  깨침은 후수(後修)가 필요한  깨침이
다. 그리고 숙면일여 이후에 의심법(疑心法)으로 수행하
여 깨친 깨침은 돈오(頓悟)밖에는 없다.
  그런데 공부가  숙면일여(熟眠一如)에도 미치지  못한 
수행단계에서 명멸하는  아뢰야식을 성품(性品)인  것으
로 착각(錯覺)한 후  수행방편을 놓아버리면 공부가  퇴
전하기 시작하며 명멸함으로  감지되던 아뢰야식은  숨
어버리게 된다. 이때 명멸(明滅)하던 아뢰야식을 성품으
로 착각하였던 수행자는  자신이 각찰(覺察)하던 그  대
상이 없어져버렸음을 알게 된다.
  지난 날 선사(禪師)들  중에 화두타파(話頭打破)  이후 
공부가 퇴전된 것으로 전해지는 선사나  화두타파 이후 
노년(老年)에 노망(老妄)들었던   것으로 알려진  선사는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가 선지식의 지도 없이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수행
자는 공부를   게을리하더라도 수행방편을  놓아버리지 
않으면 늙어서 노망만은  들지 않는 것이  수행의 공덕
(功德)이다.
  명멸(明滅)하는 아뢰야식을  성품으로 착각하였던  수
행자는 비록 공부가  성인(聖人)의 경지(境地)에는 이르
지 못하였지만, 공부의  수준은 높았던 사람들이었으므
로 악도(惡道)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돈오
점수(頓悟漸修)라는 착각을 바로잡지 못하여 이상과  같
은 결과가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행자는 내
생(來生)에는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 돈오(頓悟)하겠다는 
원(願)을 세워야 할 것이다.
  
   (5)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무기(無記)
  
  수행자가 수행의 정의(定義)를 모르는 스승의  지도를 
받고 번뇌(煩惱)만 없애는  공부를 하면서 처음부터  주
로 앉아서 공부하게 되면, 수행 중 잠들지도 않고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수행방편이  빠져버리면
서 편안하고 기분 좋고 고요한 경계인 무기(無記)에  몰
입(沒入)하게 된다.
  이러한 경계를 모르는 수행자가 그 경계에 대하여 가
르쳐 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것을 선정(禪定)이
나 무념(無念)으로 생각하여  그와 같은 경계를  연장시
키는 것을 수행(修行)인 것으로 잘못 알게 되고, 드디어
는 그와 같은 무기(無記)를 성품(性品)으로 착각(錯覺)하
여 견성(見性)하였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무기(無記)를  성품으로 착각하고  무기의 
경계를 연장시키는  행위를 돈오(頓悟)  이후에 점수(漸
修)하는, 즉   돈오점수(頓悟漸修)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이 있다.  이러한 무리들은 
한편으로는 접신(接神)하여  신비적(神秘的)이고 초능력
적(超能力的)인 것을 보여 주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한편
으로는 먹이를 먹거나 생식활동(生殖活動)이 아니면  항
상 잠자는, 즉 무기(無記)의 상태에 있는 축생(畜生)이나 
미물(微物)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뒤 중생제도를  머뭇거리
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법문(法
門)을 잘못 듣고 수행하다가 이와 같이 악도(惡道)로 갈 
중생들이 나올 것을 염려하셨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
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잘못되는 중생이  나오지 않도록 
하고 자신의 법문을  잘 이해시키기 위하여  49년 동안 
법문하실 때마다 항상  방편(方便)의 말씀과 비유(比喩)
의 말씀으로써 대인(對人)과  대기(對機)에 따른 법문을 
하신 것이다.
   (6) 점수(漸修)라는 용어의 올바른 사용
  
  인간 사회의 언어(言語)에는  단어(單語)와 단어(單語)
가 합하여져 합성어(合成語)가 만들어지는데, 이때 중요
한 점은 그 합성어의 뜻이 이치(理致)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합성어가 이치에  맞으면 각각의 단어가 가
지는 의미가  더욱 부각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지만, 만약 그 합성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그 말
은 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진리(眞理)의 말씀을 전하는  불교 용어도 이러한  점
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잘 만들어진 합성어는 부처님
의 말씀을 보다 명확하고  쉽게 전하지만, 잘못된 합성
어는 불교의 근본진리를 격하(格下)시키는 말이  되거나 
외도(外道)의 말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단어는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이다. 이 두 단어가 다른 단어와 합성어를 이
루는 경우 이들 합성어가 이치(理致)와 진리(眞理)에 맞
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돈수(頓修)라는 말이 제대로  된 합성어를 이루어  이
치(理致)와 진리(眞理)에   맞으려면 돈오돈수(頓悟頓修), 
오인돈수(悟人頓修), 자성돈수(自性頓修)라야 하고,  점수
(漸修)라는 말이 제대로 된 합성어를 이루어 이치와  진
리에 맞으려면  점수돈오(漸修頓悟), 점수개오(漸修開悟)
라야 한다.
  그러나 점수(漸修)라는   말이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합성어로 만들어지면, 이  말은 수행자로  하여금 착각
(錯覺)을 하게 하고  불교의 근본진리를 왜곡(歪曲)하고 
훼손(毁損)한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은 돈오(頓悟)
의 실상(實相)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선지식(善知識)
의 출현이 없는  시기나 선지식이 없는  곳에서 만들어 
낸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불법(佛法)을  가장 욕되게 
하는 말이므로 빨리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① 돈오(頓悟)한  수행자가 후수(後修)할  미망
(迷妄)이 남아 있다면 일단 자기가 외도(外道)라는 의심
을 갖고 선지식을 만나 점검(點檢)을 받아야 할 것이다. 
  ② 돈오한 뒤 스승의 인증(印證)을 받지  못했다면 선
지식을 찾아 점검을 받아야 한다. 
  ③ 돈오한 뒤 스승의 인증을 받았는 데도 순간이라도 
망각하거나 번뇌가 일어나면 다시 선지식의  점검을 받
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은  수행자가 선지식을 만날  수 없다면 
놓아버렸던 수행방편을 다시 들고 선지식을  만날 때까
지 기다려야 한다.



번호:852/852  등록자:DONNOH  등록일시:97/09/03 16:35  길이:443줄
제 목 : [영원한 대자유인]마지막회3-6.여래선과조사선
  
         6.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
  
  
  
  
  앙산 혜적(仰山 慧寂) 선사께서 향엄(香嚴) 스님의  깨
침을 점검할 때에 앙산(仰山) 스님은 향엄(香嚴) 스님으
로부터 두 게송(偈頌)을 이끌어내었는데, 하나는 여래선
(如來禪)이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조사선(祖師禪)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때의 향엄 스님의 게송이나 앙산 스님이 붙인 이름
은 참으로 묘(妙)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오도(悟道)한 수행자의  경우는 그 깨침의  깊이
를 마치 자[尺]로 재듯이  재어 볼 수  있게 하고, 수행 
중 착각(錯覺)한 수행자의  경우는 착각의 종류까지  쉽
게 가려낼 수 있게 하는 등, 선지식(善知識)이 수행자의 
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도구(道具)가 되기 때문이다. 이 
도구는 지금까지 천년의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낡지도 
않았고 앞으로 영원히  변할 수도 없으므로  이것을 새
롭게 조명(照明)해 보고자 한다.
  
   (1)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의 의미(意味)
  
  여래선(如來禪)은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고도  하
는데 〈 능가경(楞伽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  뜻은 부처
의 무념(無念)을 말한다. 조사선(祖師禪)은  경전(經典)에
는 없는 말인데 앙산(仰山) 선사께서 향엄(香嚴) 스님의 
깨침을 점검할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여래선이 부처의  무념(無念)을 의미한다면  조사선은 
조사(祖師)의 무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둘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앙산(仰
山) 선사께서  향엄(香嚴) 스님의  깨침을  점검할 때에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한 말씀은  앞에
서 말한 본래의  그 뜻과는  전혀 다른  뜻을 함축하고 
있으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잘못 전해져 온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
  
 〈전등록(傳燈錄)〉이나 여러  선사들의 어록(語錄)에서 
향엄(香嚴) 스님의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의  내용이 
잘못 기록된 것을  모르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향곡(香谷) 선사의 법어집(法語集) 중  '여래선과 조사
선'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去年貧 未是貧           거년빈 미시빈
    今年貧 始是貧           금년빈 시시빈
    去年貧 無卓錐之地       거년빈 무탁추지지
    今年貧 錐也無           금년빈 추야무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은 비로소 가난일세.
       작년 가난은 송곳 꼿을 땅이 없더니
       금년 가난은 송곳이 없다네.
  
  전강(田剛) 선사의 어록에는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
이 전강 선사와 해봉(海峰) 스님과의 대화 중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해봉 스님께서,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去年貧 未是貧           거년빈 미시빈
    今年貧 始是貧           금년빈 시시빈
    去年貧 無卓錐之地       거년빈 무탁추지지
    今年貧 錐也無           금년빈 추야무로다.
    
    라고 했는데, 이 게송은 여래선(如來禪)밖에 안되니 
    조사선(祖師禪)을 한번 일러보게."
    하니, 전강스님이 답하기를, 
      "능각이 첨첨 첨사추(菱角  尖尖 尖似錐)로다. (말
    밤가시가 뾰족뾰족한 것이 마치 송곳 같도다.)"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의    번역서인〈선
(禪)에서 본 반야심경(般若心經)〉  중 '深'자를  풀이하면
서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이 책의 번역서에는 蘇九山 선사께서 撰을 썼다.) 
  
    古云                    고운
    去年窮 未是窮           거년궁 미시궁
    今年窮 始是窮           금년궁 시시궁
    去年窮 無卓錐之地       거년궁 무탁추지지
    今年窮 錐也無           금년궁 추야무
  
〈경덕 전등록(景德 傳燈錄)〉에는 다음과 같다.
  
    去年貧 未是貧           거년빈 미시빈
    今年貧 始是貧           금년빈 시시빈
    去年貧 無卓錐之地       거년빈 무탁추지지
    今年貧 錐也無           금년빈 추야무
  
    대사(大師)가 말했다. (앙산 스님이 향엄스님에게)
    "그대는 여래선(如來禪)만을 얻었을 뿐  조사선(祖師
  禪)은 얻지 못했다."
    
  여래선(如來禪)이라는 말은,  앙산(仰山)  선사가 향엄
(香嚴) 스님을 찾아가서  "듣자하니 스님은  깨쳤다는데 
그 깨침을 나에게 한번 보여 주시오."하니, 항엄 스님이 
자신의 깨침 대신  자신이 수행으로 인하여  번뇌가 없
어졌음을 가난[貧]에 비유(比喩)하여 게송으로 보여드렸
는데, 앙산선사는 그것을 듣고 여래선(如來禪)이라고 이
름 붙인 데서 유래(由來)한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던〈전등록〉이나 여러  스님들의 
어록 중에 있는 여래선 게송은 앙산(仰山) 선사께서  그
것을 여래선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게송이다.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문법(文法)이나 비유(比喩)에서 하등
의 잘못이 없어 보일  것이지만, 미망(迷妄)과의 산전수
전(山戰水戰)을 다 치러본  수행의 경험자가 볼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의 게송들은 앙산(仰山)  선사가 
"그대는 여래선(如來禪)을  얻었노라."고 말할  수  없는 
게송이다.
  첫째, 선수행(禪修行)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수행수준을 언어(言語)로써 표현할 때에는 확실한 수행단계의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게송들에서는 작년의 가난함[貧]과 금년의 가난함이 어떤 단계에서 어떠한 단계로 발전하였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단계가 수행자가 거치게 되는 수행단계 중 어느 단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수행자는 수행 중 수행방편의 이어짐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고, 숙면일여(熟眠一如)해야 하며, 마지막에는 세번뇌(細煩惱)도 평정되는 수행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돈오(頓悟)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수행단계들을 꼭 이상과 같은 말로써 표현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자신의 추번뇌(鹿煩惱)와 세번뇌(細煩惱)가 평정된 것만은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게송들에서는 번뇌(煩惱)의 평정(平定)을 가난함[貧]의 정도(程度)로써 표현하고 있다.  즉 "지난 해의 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는데[去年貧 無卓錐之地] 금년 가난은 송곳이 없다네[今年貧 錐也無]."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 구절의 땅[地]과 네 번째 구절의 송곳[錐]은 무엇에다 비유했는지 알 길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위의 게송들은 문법(文法)과는 상관없이 그 내용이 이치(理致)에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둘째, 만약 위의 게송들이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가난함의 극한(極限)에 비유하기에는 아직  더 여유가 있다. 예를 들면 송곳보다  더 작은 바늘,  바늘보다 더 작은 무엇… 이렇게 나열하자면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의  이유에서 향엄(香嚴) 스님의  게송은 
이치(理致)에 맞지 않으므로 여래선(如來禪)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러한데도  천년이 지난 오늘날의 스님
들에게까지 잘못  전해지고 있는  향엄 스님의  게송이 
여래선이란 이름으로 회자(膾炙)되고 있다는 것은  도저
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3) 앙산(仰山) 선사의 여래선(如來禪)
  
  앙산(仰山) 선사는 육조 혜능(六祖 惠能) 대사의  제자 
남악 회양(南嶽 懷讓) 선사의 법손(法孫)인 위산 영우( 
山 靈祐) 선사의 제자이시다. 그리고 스승이신  위산 선
사와 함께 위앙종( 仰宗)을 창시(創始)한 대선지식(大善
知識)이시다. 
  전해지는 설화(說話)에  의하면 한산(寒山)과   습득(拾
得)이 앙산  선사를 "부처님  당시에는 아난  존자(阿難 
尊者)였는데, 그 후 두번을 임금의 몸을 받고 세속락(世
俗樂)을 누리다가 매(昧)해져서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구
나."라고 했다고 한다. 아난 존자라면 부처님의 사촌 동
생으로서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시던 날 밤에  태어나 
25살에 출가하셨으며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이시다. 또한 아난 존자는 운문(雲門) 
선사로 다시 나오셔서 운문종(雲門宗)을 창시하여  독특
한 가풍(家風)을 드날리셨다고도 한다.
  이러한 대선지식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게송에 여래선
(如來禪)이란 이름을 붙였다면  그 게송에는 어떠한  오
류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을  규명(糾明)
해 보기로 하였다. 마침  한학자인 조영조(曺寧助) 교수
의 도움으로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 게송이〈
위앙록( 仰錄)〉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았고, 해인사(海
印寺) 백련암(白蓮庵)에서  펴낸〈사가어록(四家語錄)〉에 
수록되어 있는〈위앙록〉에서 올바르게 기록된 것을  찾
을 수가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산( 山) 스님께서   하루는 향엄(香嚴)  스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백장(白丈) 스님의 처소에 살 때 하나를 물
  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고 하
  던데, 이는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해력이 뛰어
  났기 때문인 줄로 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生
  死)의 근본(根本)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 그대의  본
  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 한 마디 말해 보아라."
    향엄 스님은 이 질문을 받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으로 되돌아와 평소에 보았던 모든  책을 뒤져가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끝내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탄식하며 말하였
  다. 
    "그림 속의 떡은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
    이 일이 있은 뒤로 향엄 스님은 여러 번에 걸쳐 위
  산 스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으나, 그럴 때마
  다 위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대에게 말해 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
  할 것이네. 무엇이든 내가  설명하는 것은 나의  일일 
  뿐 결코 그대의 수행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향엄 스님은 이윽고 평소에  보았던 책들을 태워버
  리면서 말하였다. 
    "금생에는 더 이상 불법을 배우지 않고 이제부터는 
  그저 멀리 떠돌아 다니면서 얻어 먹는 밥중 노릇이나 
  하면서 이 몸뚱이나 좀 편하게 지내리라."
    이리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위산  스님을 하직하였
  다. 곧 바로  남양(南陽) 지방을  지나다가 혜충 국사
  (慧忠 國師)의 탑을 참배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쉬
  게 되었다.
  하루는 잡초와 나무를 베다가 우연히 기왓장 한 조각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향엄 스님은  급히 거처로 돌아와  목욕 분향하고 멀리  계시는 위산 스님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스님의 큰 자비여 ! 부모의 은혜보다 더 크십니다. 만일 그때 저에게 말로써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이에 게송을 읊었다.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持     일격망소지 경불가수지
      動容揚古路 不墮 然機     동용양고로 불타초연기
      處處無 跡 聲色外威儀     처처무종적 성색외위의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제방달도자 함언상상기
      
        딱소리에 알던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얼굴을 움직이면 옛 길이 드러나고 
        초췌한 소승근기에 떨어질 리 없어라. 
        
        어디를 가나 자취를 남기지 않고 
        소리와 모양 밖의 몸짓이니
        
        제방의 선지식들이 
        상상근기라 하더라.
        
  위산 스님께서 이 게송을  들으시고는 앙산 스님에게 
  "향엄이 확철대오했구나."
하시자, 앙산 스님은 
  "이 게송은 알음알이로  따져서 쓴 것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볼 터이니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앙산 스님은 그 후 향엄 스님을 찾아와 말하였다. 
  "위산 스님께서는 사제(師弟)가 깨달은 일을 칭찬하셨는데, 그 일을 한번 말해보게." 
  향엄 스님이 일전에 읊었던 게송을 다시  들먹이자, 앙산 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지난 번 일을 기억으로 말하는  것이네. 정말로 깨쳤다면 달리 설명해 보게."
  향엄 스님이 또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去年貧 未是貧             거년빈 미시빈
      今年貧 始是貧             금년빈 시시빈
      去年貧 猶有卓錐之地       거년빈 유유탁추지지
      今年貧 錐也無             금년빈 추야무
      
         지난 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지난 해 가난은 송곳 꼿을 땅이라도 있더니
         금년 가난은 송곳이 없다오.
  
  앙산 스님은 말하였다. 
  "여래선(如來禪)은 사제가  알았다고  인정하겠다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보지 못하고 있군."
  향엄 스님은 다시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我有一機                아유일기
      瞬目視伊                순목시이
      若人不會                약인불회
      別喚沙彌                별환사미
      
         나에게 한 기틀이 있사오니
         눈을 깜짝이여 그것을 보여드립니다.
         그렇게 하여도 알지 못하신다면
         따로이 "사미야 !"하고 사미승을 부르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앙산  스님은 위산 스님께 다음과 같이 보고드렸다. 
  "반갑게도 지한(香嚴 智閑) 사제가 조사선(祖師禪)을 알았습니다."    
  
  나는〈사가어록〉 안에 있는〈위앙록〉에  이상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야   여래선(如來禪)에 대한 
아쉬움이 풀릴 수 있었다.
  여래선의 게송 중 '무탁추지지(無卓錐之地)'의  구절이〈사가어록〉 안에 있는〈위앙록〉에서와 같이 '유유탁추지지(猶有卓錐之地)'로 되면 게송 전체가 새롭게 바뀌어 '여래선(如來禪)'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글이 된다. 왜냐하면 비유하는 글자 하나하나의 대상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즉 가난[貧]은  번뇌의 없어짐, 송곳[錐]은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세번뇌(細煩惱), 땅[地]은 심지(心地), 즉 성품(性品)에 비유했음이 확실해진다.
  중생에게는 끊임없는 번뇌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번
뇌는 추번뇌(鹿煩惱)와 세번뇌(細煩惱)로 크게 나누어진
다. 중생은 이러한 번뇌들을  수행을 통하여 평정(平定)
하게 된다. 그런데 향엄(香嚴) 스님은 네  구절로 된 간
단한 게송으로써  이러한 번뇌들을  모두 평정한  것을 
앙산(仰山) 스님께 보여드리니  앙산 스님께서는 이  게
송은 여래선(如來禪)밖에  안된다고 하셨다.  이 게송을 
번역하고 풀이해 보면,
   
    去年貧 未是貧 
       지난 해 가난은 아직 가난함이 아니더니.
       즉, 지난 해에는 아직 번뇌를 모두 평정하지 못하였
    더니
     
    今年貧 始是貧 
       금년의 가난은 비로소 가난이로다.
       즉, 금년에는 비로소 번뇌가 없어졌도다.
    
    去年貧 猶有卓錐之地
       지난 해 가난은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더니.
       즉, 지난 해에는 번뇌(煩惱)가 송곳처럼 불쑥불쑥 튀
       어나 오더니. 이  말은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일어
       나는 세번뇌는 추번뇌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
       을 거치는 것과는 달리 마치  송곳을 보자기나 주머
       니 속에 넣어 두면 튀어  나오듯이 일과성(一過性)으
       로 지나가 버리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今年貧 錐也無 
       금년 가난은 송곳이 없다오. 
       즉, 금년에는 마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번뇌가  없
       어졌다오. 이 말은 금년에는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세번뇌까지 없어졌다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번뇌는 추번뇌(鹿煩惱)를  먼저 평정해야만  아뢰야식
(阿賴耶識)이 감지되면서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세번
뇌(細煩惱)를 평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향엄(香嚴) 
스님은 이 게송에서  금년에는 세번뇌까지  없어졌다고 
말씀드리니, 앙산(仰山) 선사께서는  "사제(師弟)가 여래
선(如來禪)은 알았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군."하셨다. 앙산 선사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면 
추(鹿)·세(細)의 모든 번뇌가 없어진 것은  여래선(如來
禪)을 알았다는 말로 비유한 것이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향엄 스님이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조사선(祖師禪)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
  
   (4) 조사선(祖師禪)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근본목적
(根本目的)은 돈오(頓悟)에 있고, 돈오는  부처님의 중생
에 대한 염원(念願)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인 것이다.
  앙산(仰山) 선사께서 향엄(香嚴)  스님의 게송을  들어
보니 향엄 스님은  금년부터 모든 번뇌가  없어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수행자가 모든 번뇌를 평정(平定)했다고 하여 바로 돈오(頓悟)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앙산 선사께서는 향엄 스님이 세번뇌까지 평정했다고 하니 돈오까지 했나를 알기 위하여 "그렇다면 사제(師弟)의 깨침도 한번 보여 주게."란 말을 대신하여 "조사선(祖師禪)은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군."하신 것이다. 향엄 스님은 앙산 선사의 그 말씀에 다시 게송으로 답했다.
  
    我有一機
       나에게 한 기틀이 있사오니
    瞬目視伊
       눈을 깜짝이어 그것을 보여 드립니다.
    若人不會
       그렇게 하여도 당신이 알지 못하신다면
    別喚沙彌
       따로이 "사미야 !"하고 사미승을 부르겠습니다.
  
  향엄 스님은 이상과 같은 게송을 통하여 자신의 깨침
을 모양[色]과 소리[聲]로써  앙산 선사에게 보여드리고 
있다. 즉, 향엄 스님은 조사선(祖師禪)을 잘  보여드렸다
고 하겠다. 이와 같은  조사선(祖師禪)의 게송은 격외도
리(格外道里)이기 때문에 후학을 생각하여 많은  설명을 
붙이는 것을 삼가한다.
  다만 여기서 말해둘 것은, 앙산 선사께서는 경(經)에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닌 여래선(如來禪)이란 말과 경(經)에는 없는 조사선(祖師禪)이란 말을 만들어 썼는데, 이것은  오로지 향엄 스님의 공부와 깨침에 대한 점검용(點檢用)이었다는 것이다.
  
   (5) 잘못 전해져 온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에 대한 
      의문(疑問)
  
  향엄 스님의 여래선 게송 중에서  '유유탁추지지(猶有
卓錐之地)'가 '무탁추지지(無卓錐之地)'로   바뀌게 되면, 
이것은 여래선 게송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송대
(宋代)에 출간된〈전등록(傳燈錄)〉에조차 왜  그렇게 잘
못 기록되어 있을까 ?
  나는 '猶有'가 '無'로 기록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하여 보았다.
  첫째, 혹시 베껴 쓰는  과정에서 착오(錯誤)가 생겼을
까 ?
  둘째, 누군가가  고의(故意)로 그렇게  바꾸어 놓았을
까?
  이와 같이 바뀐 이유가 첫째 경우에  해당할 수는 없
다. 왜냐하면 '猶有'와  '無'는 글자의  모양이나 발음이 
전혀 다르고, 두 가지 글의 뜻도 서로 정반대이므로 베
껴 쓰는 과정에서 일어날 착오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째에 해당한다고 해야 하는데, 누가 고의
로 그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 이것은 어떤 선지식(善知
識)이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
다. 왜냐하면 선지식이  아니라면 그렇게  바꿀 능력도 
없고 그렇게 바뀐 것을 찾아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고서(中國 古書)들을 보면 중국 사람들은 다음에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나와서 가려내어 보라고 고의로 문장에서 글자를 바꿔 놓던가, 빠뜨려 놓은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는데, '猶有'를 '無'로 바꾸어 놓은 것도 어느 선지식이 후배 선지식으로 하여금 한번 가려내어 보도록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엉터리 참선꾼이나 착각도인(錯覺道人)이 이 게송의 진의(眞意)도 모르고 함부로 인용하여 쓰다가 그들의 공부와 그들의 실체가 밝혀져 생전(生前)이나 사후(死後)에라도 한번 창피를 당해 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도 보면 된다.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이  생긴 이후〈전등록(傳燈
錄)〉에 나오는 선사(禪師)조차 여래선 게송에서 '무탁추
지지(無卓錐之地)'로 인용하여 쓰는 엉터리가 있음을 볼 
때,〈전등록〉에 나오는 선사 중에도  남의 눈을 속이고 
법맥(法脈)만 이으려고  했던 무리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나  현재에도   여래선(如來禪)의 
진의(眞意)를 전혀   모르고 '무탁추지지(無卓錐之地)'로 
인용해 쓰는 선사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조리 엉터리를 
가려내는 그물[網]에 걸려든 것이다.
  옛 선지식들은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 외에도 엉터리들을 잡아내는 그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쳐놓고 있으니, 수행 중 조그마한 꾀가 생긴 사람이나 착각도인들은 법문(法門)을 하거나 글을 발표할 때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문중(門中)까지 이름을 더럽힐 것이다.
  〈전등록〉이 나온 뒤에도 많은  선지식들이 출현하였
는데 그분들은   왜 '무탁추지지(無卓錐之地)'에  대하여 
함구(緘口)하셨을까 ? 그것은  선지식이면 누구라도  쉽
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공부의 척도
(尺度)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그냥 두었다고 보면  가
장 타당한 답이 될 것이다.
  나 역시 여래선 게송(如來禪 偈頌)을  밝힘에 앞서 조
금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 중의 중요한 것은, 
여래선 게송이 오도(悟道)한 수행자에게는 깨침의  깊이
를, 착각(錯覺)한  수행자에게는 착각의  종류를 가려낼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편리한 도구의 기능을  갖고 있
는데, 이러한 기능을 상실하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것을 자세히 밝혔는가? 그것은 오늘날은 많은  선지식이 출현하였던  옛날과는 달리 수행불교(修行佛敎)는 그 정통성(正統性)마저 없어져가고 있는지라, 이러한 사례를 그냥 보고 넘기면  '무탁추지지(無卓錐之地)'가 정착(定着)되어  깨침의  질(質)이 착각(錯覺)도 수용(受用)함에  이르게 되므로 이러한 것을 막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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