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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동어서화 [산방야화(山房夜話) 대답 자]

by Casey,Riley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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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語西話 上


 내가 고질병을 치료하던 여가에 질문을 던지는 객승이 있어, 그 질문에 응답한 것이 모여 한 책이 되었으니 그 제목을 「산방야화(山房夜話)」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일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가져갈만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산방야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그때 그때 일어났던 느낌들을 말하다 보니 모두 20여 편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 제목을 「동어서화(東語西話;이런 말 저런 말)」라고 했는데, 책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는 조리있게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히 깨달으신 선배에게는 들려줄 것이 못 되고, 후학들에게나 겨우 보여줄만 하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얼굴이고, 아주 친한 듯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심성(心性)이다. 얼굴은 직접 볼 수 없다 해도 거울에 비추면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성은 그냥 알 수는 없지만, 투철하게 깨달으면 알 수 있다.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하고 심성의 심오한 이치를 알려는 것은, 마치 거울을 버리고 자기의 얼굴을 보려는 것과 같다.
 옛날에 대매산(大梅山)에 머물던 법상(法常;752∼839)스님이 마조(馬祖;709∼788)스님에게 묻기를, "부처님이란 무엇입니까?"하자, "마음이 부처님이다〔卽心是佛〕"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상스님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열 개의 태양이 일시에 비추듯 모든 미망과 번뇌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바로 대매산(大梅山)으로 가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곳에 자신을 한결같이 맡겨버렸다. 이것이야말로 투철하게 깨달은 좋은 본보기이다.
 이로부터 `마음이 부처이다'고 한 말이 온 세상에 퍼졌으니, 이것은 현묘함을 참학하는 상근기 인재뿐만 아니라 일개 장사치·부엌데기·아녀자까지도 말할 때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질문하면 망연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런 무리들은 그만 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더러는 평소에 참선공부 한다고 자처하는 수행자들이 그 심체(心體)를 노래하고 읊조려 지적하기를, 마치 얼굴이 거울 속에 선명하게 비추듯이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법상스님이 도달한 경지에는 좀처럼 미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까? 법상스님은 투철하게 깨달은 것이고, 그밖의 사람들은 다만 알음알이로 이해한〔情解〕 것이다. 그저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은 말은 오히려 교묘할지 몰라도, 그 종지(宗旨)에는 도리어 어두우며, 말이 기묘하면 기묘할수록 이치는 더더욱 혼미해진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비출 거울은 구할 수 있지만 심성을 밝히는 말씀에 관한 요점을 들어보질 못했읍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다만 불성〔性〕은 마음에 있는 것이니 깨달음은 어려울 것이 없읍니다. 혹 이것을 믿지 않는 이라면 깨달음의 원인〔因地〕이 없으므로 스스로 깨달는 것〔果覺〕도 없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의 <믿음>은 누가 믿음을 내라고 꾸짖고 지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며, 또 <믿음>을 내라고 권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이 마음에서 우러나왔으니, 마치 굶주린 자가 음식 찾듯이 생각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알음알이와 사량분별을 싹 쓸어내어 철벽같은 믿음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눈 밝은 종사(宗師)의 기연(機緣)을 만나 깨달음의 문이 툭 터지면 마치 오랫 동안 잊었던 것을 홀연히 기억한 것과도 같았다. 이것이 바로 법상스님이 마조스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대답한 소식이니 어찌 우연히 그랬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을 지껄이며, 알음알이의 허망한 분별로 이리저리 때도 없이 지껄인다. 이래서야 그저 말만 많아질 뿐 <마음>과 <부처>에 계합할 이치가 있겠는가!
 
 생사대사가 왜 중요한가 ?
 
 참선하는 사람치고 생사(生死)의 일이 크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생사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망연하여 의례 대답을 못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읍니다"고 해서 내가 넌즈시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대는 생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심한다 하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생사의 일은 인간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실로 생사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농사일을 버리고 생식〔 穀〕하는 사람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억지로 시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벽곡으로 이미 배고픔을 잊은 그는 벼나 기장을 심을 필요가 없으므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게으름만 피웁니다. 이와 같이 참학을 하는 자가 생사의 단서부터 미혹되면 참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어떤 사람은 `태어나도 오는 곳을 모르며, 죽어도 가는 것을 모른다. 이것을 생사라고 말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지 미친 소리입니다. 가령 오고 가는 곳을 안다 해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생사인데 생사 자체에 빠져서 생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는 원래 체성(體性)이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미혹시켰기 때문에, 허망하게 윤회를  아서 한 생(生)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이 추우면 응결하여 얼음이 되지만, 그 추위가 사라지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혹이 마음에 축적되면 생사가 허망하게 응결되지만, 미혹했던 것을 깨닫고 나면 마음의 작용은 고요할 뿐입니다. 생사를 찾으려 하나, 마치 졸다가 깨어난 사람이 꿈 속에서 있었던 일을 찾는 것과 같읍니다. 어떻게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 이치가 있겠읍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란 본래 공(空)한 것이지만 그것을 알려면 깨달아야만 하고, 본래 열반(涅槃)이 있지만 미혹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혹 자기의 마음을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는데도 생사문제를 환히 깨달으려 한다면,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계속 때면서 가마솥의 물이 끓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읍니다. 그런 이치가 어디 있겠읍니까? 생사를 환히 깨닫는 데에는 마음을 깨닫는 것보다 가까운 길이 없고, 마음을 깨닫는데도 발심(發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읍니다. 그러려면, 추위와 더위를 모두 잊고 침식(寢食)을 그만두며, 알음알이〔情〕와 허망한 생각〔妄〕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 일념(一念)을 어떤 곳에서든 꾸준히 하여, 마치 견고한 무기나 침범되지 않는 엄중한 성곽처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옛 사람들이 말했던 확고한 발심을 두루 살펴 그와 같이 하기를 조심해서 노력한다면 확철대오하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미 깨닫고 나면 생사만 공적(空寂)한 것이 아니라, 열반도 그러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생사와 미망(迷忘)이 교대로 결합하여 멀리는 광겁(曠劫)으로부터 미래제(未來際)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한 사이도 없이 유전(流轉)하겠읍니까? `생사는 큰 일이다'고 말하는 것이 왜 헛된 말이며, 어찌 빈 말이겠읍니까?'
 
 환법의 정체란 무엇인가 ? 
 
 독사와 호랑이에게는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높은 산허리를 의지하고 평평한 땅바닥에 누워 있다. 그런데 길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을 무서워하여 서로 주의를 주며 멀리 한다. 이는 그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또 독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보살이 환법(幻法)을 대하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이 <환법>인가 하면, 실제는 없는데 있는 듯한 것이다. 이미 실체가 없다고 말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허공에는 본래 미세한 먼지도 없는데, 눈병에 걸린 사람은 허공에서 어지러운 헛꽃〔空華〕을 보는 것과 같다. 허깨비인 줄 아는 사람은 자기의 눈병을 탓하겠지만, 허깨비인 줄 모르는 사람은 도리어 헛꽃만을 탓한다. 그밖에 물에 어린 달그림자와 거울 속에 비친 형상도 실제로는 모두가 헛된 존재이다. 그런데도 미혹한 사람은 그것을 <있다>고 집착하면서 그저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 더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무언가 <있는> 듯 해진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허깨비인 줄 알고 없애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일부러 없애려 하지 않아도 그것은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서 `허깨비인 줄 알면 그대로 없어지니 따로 방편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허깨비인 줄 아는 그 <앎>은 알음알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담박에 깨치는 마음 바로 그 자체이다. 그 <앎>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허깨비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므로 일부러 방편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깨비를 없애려는 마음이나 없애려는 대상이 모두 방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자리를 통철하게 깨달아서 모두가 허깨비인 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확실히 알기만 하면 허깨비는 저절로 없어지므로, 없애고 말고 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뱀과 호랑이를 보기만 해도 피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자연히 그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어찌 따로 방편을 써야만 환법(幻法)이 사라지겠는가?
 참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4대5온(四大五┃)은 허깨비'라고 모두들 말한다. 그러나 잠시라도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딪치면, 갑자기 알음알이가 발동하여 갖가지 허깨비가 생겼다가는 없어지곤 한다. 갖가지 고통을 모두 맛보고 마음에 싫증이 나서 그것들을 없애려고 하지만, 허깨비같은 견해〔幻見〕만 더욱 증가할 뿐이다. 더구나 허깨비가 생기게 된 모든 인연을 올바르게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없앨 수가 있겠는가?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허깨비를 없애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오직 자기의 공부만 부지런히 할 뿐이다. 자기의 마음자리만 깨달으면 백 천이나 되는 허깨비의 허망이 녹아져 진실하고 고요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 때는 <떠난다>고 한 그 말마저도 오히려 부질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말로써 성품을 깨칠수 있는가 ? 
 
 묘희 대혜(大慧;1088∼1163)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의례히 말로써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 너희들이 알아듣도록 잘 가르칠 것이니, 삼십 년 후에 내가 말했던 것을 검토해 보라"하였다. 이런 지극한 말씀이 없다고 해도 교화는 날로 쇠퇴하고 인심은 날로 쇠락해 갔다. 
 무엇이 견성(見性)인가 하면, 다름이 아니라 수행하여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성품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수행은 하지 않고서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듯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사는 서울에 천하의 빼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것과 같다. 다른 지방·다른 나라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어린애나 더벅머리 총각도 서울이 있는 방향은 가리킬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직접 가보지 못했을 뿐이다. 아직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에 대한 말이 많을수록 설명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 말에 의지해서 서울 사정을 알려고 할 것이며, 더구나 실없는 말이나 연구하여 헛된 것을 찾으려는 선승이 되려 하겠는가? 발심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양식을 준비하여 튼튼한 신발을 신고 천 리나 먼 길이라 해도 서울을 향해 고생을 무릅쓰고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몸소 서울에 도착하면 화려한 대궐과 많은 인파, 번화한 문물과 엄청난 부귀를 직접 보게 된다. 이래야만 비로소 직접 서울을 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직접 본 사람이라야 고향에 되돌아 가서 서울의 사정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훌륭한 것을 억지로 천한 것이라 하며, 종일토록 자기 멋대로 말하더라도 결코 그가 몸소 보았던 진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나는 `법왕(法王)은 법에 자재(自在)한 분이다'고 한다. 몸소 도달해서 본 사람과 도달하지 못하고 말로만 설명한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설명하려 했던 경우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뽐내려는 마음이다. 대체로 말로만 하는 자는 천부적인 자질이 준수하고 민첩하여 많이 듣고 널리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버릇이 알음알이를 움직여서 알음알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알음알이는 그의 뽐내는 행위를 더더욱 부추기고, 뽐내는 마음은 알음알이를 더더욱 빛나게 하여 말을 하면 할수록 사생(死生)의 결박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그러나 몸소 본 사람은 종일토록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실한 음성은 우주에 가득 찬다. 그래서 영가(永圈;647∼713)스님은, "말없을 때 말을 하고, 말을 할 때 묵묵하라.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놓으니 막힘이 없다"고 하셨다. 그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삼십 년 뒤에 이 말을 검토해 보라"고 한 그 말씀이 없었던가? 대혜스님의 이 말씀을 칭찬해야 할는지 깎아내려야 할는지.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비오듯 할 것이다.
 
병고가 양약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 
 
 부처님께서는 "중생에게 병고는 훌륭한 약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중생은 오랫동안 미망(迷妄)을 쌓아왔기 때문에 안으로는 아상(我相)이 생기고, 밖으로는 대상에 집착한다. 단지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한 것만을 뽐낸다. 그 결과 알음알이가 어지럽게 뒤섞여서 허깨비같은 육신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만다. 섭생해서 건강을 유지하다가 방법이 잘못 되어 어느날 갑자기 자리에 누워 신음하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고 때도 없이 고통이 찾아와 머지 않아 죽게 된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도(道)도 깨닫지 못하고 의지할만한 법력도 없어서 아득한 3계(三界)에 끝없이 들락거리게 된다. 혹 그러다가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되면 이를 악물고 뼈를 깎는 고행으로 도를 탐구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출가(出家)했던 본 뜻을 살리고, 불조(佛祖)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맹세한다. 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병고가 진실한 양약'이라는 본 뜻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도리어 병을 앓으면서도 자기에게 좋거나 싫은 상황을 사량분별(思量¿別)하여 애증만 더 두터워진다.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면서도 자기가 지어온 업(業)을 되돌아 보지 않는다. 이렇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깨달음을 구하는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불조의 진실한 말씀을 허물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고는 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좋은 약이 되는 것일뿐만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도 훌륭한 약이 된다. 왜냐하면 피차 몸은 4대(四大)에 구속되어 있고, 형체는 외연(外緣)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남들의 병이 저와 같은데 나인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은 요행히도 병이 없어 몸이 쾌적하고 편안하지만, 순환하는 8고(八苦) 속에서 건강을 자신할 수 있겠는가? 건강할 때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지런히 도를 닦아 번뇌의 울타리를 부수고, 무명(無明)의 소굴을 분쇄하며, 열반까지의 험난한 함정을 텅 비우고 생사의 빠르게 돌아가는 흐름을 끊어야만 한다. 마음 밖에서는 도를 구하지 못하는데, 깨달음〔佛〕을 어떻게 다른 것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위와 같이 생각하다면 좋은 약의 효과가 어찌 병든 사람에게만 있다고 하겠는가? 무릇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모두 이 말씀에서 신비한 효험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들은 삭발출가해 선문총림(禪門叢林)에 살면서 걸핏하면 생사의 일로 평생의 업을 삼는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병고가 바로 양약이다'는 밝은 가르침을 듣고서도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끝없이 윤회전생(輪回轉生) 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사찰을 잘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 
 
  한 손님이 말하기를, "속인이 교묘한 방법으로 이웃 사찰의 살림을 빼앗은 자가 있었읍니다. 절의 스님들은 백방으로 힘을 써보았으나 절을 찾지 못했읍니다. 그래서 관청에서 이 문제를 다스려 주길 바랬으나 절도 찾지 못하고 수고로움만 겪었읍니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세간 밖에 노니는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몸뚱아리를 잊고 물욕을 비워 이치로써 자신을 관조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속인들의 취사(取捨)에 집착하는 꼴을 본받읍니까?"하였다.
 옆의 객승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읍니다. 예로부터 `천 년간이나 상주(常住)하는 사찰이요, 하루 아침 살다 가는 스님이다'는 훈계가 있읍니다. 그러나 하루 살다 가는 승려가 아니라면 누구라서 천 년을 상주하는 사찰을 보호하겠읍니까?"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이와 다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상(常)이라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주(住)라 합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고요한 법신(法身)의 본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참된 것은 변하지 않으며, 고요한 것은 요동하지 않읍니다. 참되고 고요한 상주물은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모두 포섭하여 어느 것도 본체를 벗어난 것이 없읍니다. 그러므로 옛날 가르침에도 `이 법은 진여〔法位〕에 안주하여 세간의 모습이 상주한다'고 하였읍니다. 우리들이 속세에서 분주히 돌아다녀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걸핏하면 알음알이를 쓸데없이 일으키니, 이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대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입니다. 상주물은 참되고 고요한 법신의 본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를 행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읍니까? 옛날의 보살은 6바라밀을 수행하고 4무량심(四無量心)을 베풀어 행동을 삼가하고, 착한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사찰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읍니다. 그대는 하루 아침 살다 가는 승려로서 사찰을 보호하려 하니 착하다고는 하겠읍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정념(正念)을 버리고 취사(取捨)의 알음알이에 빠져 싸움질하고, 혈기만 믿고 빼앗긴 땅과 살림살이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실하고 고요한 법신을 미혹하고 사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큰 잘못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뉘우쳐 고치지 않고 다만 미친 감정으로 세속의 풍습을 본받아 천년 토록 계속될 사찰을 보호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제방을 터놓고 물이 새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읍니까? 세간에 나는 듯한 누각이며, 용솟음치는 듯한 전각을. 모든 장엄구(藏嚴具)가 대천세계에 충만했는데, 만약 그것이 부처님께서 원해서 그렇게 되었다면 외도(外道)라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는 자신의 머리·눈·골수·뇌 등을 보시해도 아까와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읍니다. 보살은 3륜(三輪)*이 모두 공적하여 한 생각도 집착이 없읍니다. 인간과 천상이 봉헌한다 해도 오히려 `내가 보시를 받는다'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보살에게 베풀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겠읍니까?
 참되고 고요하다는 것은 법신의 본체를 말한 것이고, 항상하여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신의 모습을 밝게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만 진정으로 상주물인 사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정을 멋대로 하여 관청에게 다스려주기를 바라겠읍니까?"
 그러자 객승이 말했다.
 "분명 이와 같다면 당신에게는 가능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사건이 공적인 문제에 걸려 있을 경우, 어찌 그런 일을 앉아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겠읍니까?"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대는 한갖 구제라는 말만 알았을 뿐, 정작 구제해야 하는 까닭은 알지 못했읍니다. 아녹다라 삼막삼보리인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깨달아 거기에 의지해서 사찰이 건립되는 것이고, 사찰은 6도(六度)·4무량심(四無量心)·만행(萬行)·중선(衆善)을 바탕으로 해서 잘 운영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서 구제하는 이유를 따로 찾으려고 하면, 다만 업륜(業輪)만 도울 뿐입니다. 비록 구제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해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았더니 진실한 법신의 상주는 사찰과 표리의 관계가 되어 하나가 되어 억만 겁이 지나도록 변동이 없는데, 어찌 천 년만 가겠읍니까?" 얘기가 이쯤 되자 듣던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신광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의 당체(當體)는 매우 밝아서 우주의 어디에나 가득찼으며, 너무도 눈부시게 색(色)과 공(空) 모두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볼 수가 없으며 자취도 찾을 수 없다.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길거나 짧지도 않다. 그것은 근기에 따라 감응한다. 그리하여 설산(雪山) 한 밤중의 샛별이 되기도 했으며, 용담(龍潭;1423∼1500)스님의 꺼버린 촛불이 되어 비추는 본체는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기도 했으며, 동평(東平;    )스님의 깨버린 거울이 되기도 했고, 비아리성(毘耶離城)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오랜 동안 본체에 접촉하여 그 본체와 떨어지지 않아 아침 내내 눈에 가득하여 눈이 멀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신광(神光)이라는 것이다. 고덕스님은 "신광이 홀로 빛나니 만고의 아름다운 법이다.이 문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간직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홀로 빛난다'고 한 뜻은 한몸〔一體〕으로서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싱그럽고 광채로운 깨달음의 당체여! 하늘에 있으면 하늘과 동일하고, 땅에 있으면 땅과 동일하도다. 그것은 텅 비어 만상을 머금었고 훤출하게 10허(十虛)를 관통하였다. 붉은 비단 장막 속에 옥구슬을 뿌리고, 무쇠 눈 구리 눈동자로도 그 비슷한 것조차 엿볼 수 없다. 고목(奇木)이 서 있는 바위 앞에서 길을 묻지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빨리 지나가니 누구라서 그 시작과 끝을 분간하겠는가? 
 `신광은 가리거나 감출 수 없다'고 하니, 산호(珊瑚)는 가지마다 달을 지탱하였다. 또한 `신광은 혼람(混濫)하지 못한다'고도 말하니, 부상(扶桑)에서는 밤마다 일륜(日輪)이 붉었구나. 그러나 이 신광은 하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용솟음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외부에서 온 것도 아니다. 이 신광에 의지하여 조화(造化)가 부려지고, 이를 말미암아 만물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성취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성취될 수 없는 것이 이 신광이며, 일체를 덮을 수 있으나 어느 것에 의해서도 덮여지지 않는 것이 이 신광이다. 반야(般若)는 중생심(衆生心)으로써 깨달을 수 없지만, 신광으로는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진여는 다른 것에 섞여지지 않지만 신광은 다른 것과 섞여진다. 서쪽 조사가 칼을 잡으면 부처가 와도 목을 베고, 마구니가 와도 목을 벤다. 그러나 목을 벨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신광이다.
 도인이 가는 처소에는 불이 얼음을 녹이는 듯하고, 납승(納僧)의 앞길은 험난하여 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대가 이렇다 하면 나는 이렇다 하지 않으며, 그대가 이렇지 않다 하면 나는 이렇다고 하리라.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는데도 과녁에 적중하였고, 여의주가 독 안에 있는데도 허공을 비춘다. 이는 모두 신광이 붙은 것으로서, 다른 방법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천하의 참선하는 사람이 말 밖에서 확연히 깨닫지 않고 알음알이〔知解〕로써 나의 빛나는 신광의 요지(要旨)에 계합하려 한다면, 마음은 날로 수고로와지고 공부는 매일같이 후퇴하리라. 이것을 조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복과 재앙의 근원은 무엇인가 ? 
 
 산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며, 방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업(業)은 피할 수가 없다. 보연(報緣)의 업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선과 악이다. 선하면 복으로 보답하고, 악하면 화로 보답한다. 복과 재앙이 동일하진 않지만, 모두 보연에 속하므로 모두 업이라고 이름한다. 업으로 정해진 이치〔¿〕는 길가는 사람이 만나는 경계와 같다. 30 리에 다리〔橋〕 하나, 50 리에 점포 하나를 기준으로 하고 다다른 이수(里數)에 의해서 다리와 점포를 설치한다. 이것은 성현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악의 생각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으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다. 한결같이 미망(迷妄)의  정(情) 때문에 제 스스로 결박을 했을 뿐이다. 3세(三世)와 오랜 세월을 통해 인연 때문에 만나는 복과 화는 마치 30리를 가서 다리를 만나고 50 리를 가서 점포를 만나는 것처럼 털끝만큼 착오가 있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요절하고, 포악한 사람은 도리어 장수하고, 거역하는 자는 길하고, 의로운 자는 흉한 것만을 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지었던 것을 지금에 받고, 지금에 지은 것은 후세에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업을 짓지 않을지언정, 오는 과보를 받지 않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았던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다.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가령 그것을 알았다면 복이라 해서 기뻐할 것이 없으며, 재앙이라 해도 슬퍼할 것이 없다. 기쁨을 잊었는데 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한 생각이라도 내어 그 복에 반연하려 하겠는가? 또 슬픔도 잊었기 때문에 억지로 속임수나 계책을 늘어놓아 재앙을 피하려고 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피하지 않는다. 더러는 구차하게 구하여 얻기도 하고, 구차하게 피하여 면한 자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도 한 번 정해진 업으로서 당연한 것이지 우연히 구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구차하게 하는 짓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복을 좇고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은 저절로 없어진다. 사념〔念〕의 자체가 공(空)해지면 간직한 마음자리도 공해져서 도에 회합한다. 불조성현의 해탈한 방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없다면 이(理)는 저절로 빼어나게 되고, 사(事)는 자연히 수승해진다. 이(理)가 빼어나고 사(事)가 수승해지면 온 법계(法界)안의 한 띠끌이라도 나의 장엄한 세계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증오가 그의 알음알이를 결박하고, 좋은 것은 갖고 싫은 것은 버리려는 망상이 어지럽혀진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인연과 함께 미래로 들어가 혹독한 고초를 받는다. 그러나 정해진 분수의 업이 한결같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이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지가 비옥하면 심어진 곡식이 반드시 풍성해지고, 샘이 깊으면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저축한 것이 많으면 살림살이가 풍족해지고, 인(因)이 원만하면 그에 따르는 과(果)도 반드시 원만해진다. 이는 천하 고금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성인은 오랜 세월동안 공덕을 쌓고 온갖 수행을 닦아 한량없는 신명(身命)을 다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법재(法財)를 모았다. 모든 복이 빈틈없이 구족하였고, 만 가지 덕은 원만하여 세간이나 출세간에서 훤출하여 빠지거나 부족한 것이 없다. 그 베푸는 것이 마치 봄이 돌아온 것 같고, 달이 천이나 되는 강에 나타나듯이 자취없이 온다. 대체로 축적된 인(因)이 원만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과(果)도 원만해진다.
 나는 일찌기 가람(伽藍)을 건립하고 탑묘(塔廟)를 세우는 자를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다. 혹시라도 4방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거나 그 형세가 미약할 경우는 많은 재물로써 사람을 모으고, 방편으로써 구하며, 교묘한 계책을 꾸몄다. 심지어는 세력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가 보리(菩提)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가람을 건립해도 깨달음과 상응하지 못할 경우는 불법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선행(善行)도 없다. 이것은 허망한 업을 따라서 수순한다는 견해에 바탕이 될 뿐, 보살행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보살이 원만한 깨달음을 수행을 할 때, 가람이나 탑묘를 건립하는데 잘 구비가 안되거나 부족한 경우를 만나면, 근본인(因)이 부족한 것을 반성하고 정근(精勤)을 가다듬어 고행을 닦는다. 이렇게 해서 반드시 깨달음이 수승한 행이 만족하기를 기다린다. 시주단월들이 지녔던 재물을 헌납하면서도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면 시주하는 사람 쪽으로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이 이뤄지고, 스님에게는 원만한 깨달음이 이뤄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가람과 탑묘를 건립하는 방법이 빈틈이 없고 완벽하지 못할 경우, 지혜로운 재주를 동원할지언정 세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원래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재물로써 취하는 경우야 어찌 이치에 어긋나겠읍니까?"
 내가 이에 대답하였다.
 "도인(道人)이 가람과 탑묘를 건립할 경우는 자신이 도를 먼저 수행한 뒤에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합니다.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의 원만한 깨달음의 위치에서 균등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탐심이 쌓여서 모든 괴로움을 다 받읍니다.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탐심은 더욱 심해서 중생들을 더더욱 괴롭게 만듭니다.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면서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과 그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든 곳에 도가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 .
 
 동산연조(東山演祖; ? ∼1104)스님께서는 "모든 곳에 도가 존재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곳이란 바로 만사(萬事)이며, 만법(萬法)입니다. 또 세간의 사법(事法)과 출세간의 지극한 도(道)는 서로 표리 관계를 이루는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읍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그대는 무슨 말을 그리도 쉽게 하십니까? 동산연조께서 존재한다고 말씀한 이유는 서로 섞어서 간격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허망한 차별은 바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로 말한다면, <모든 곳>이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옷을 입을 때 몸 전체가 도라고는 생각할지언정, 실오라기가 옷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읍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은 밥을 먹을 때 입에 가득한 것이 도라고는 생각할지언정 곡식의 알맹이가 밥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읍니다. 그밖의 갖가지 경우에도 어느 것도 도와 일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읍니다. 도와 일체가 된다는 참 뜻이 분명하면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그것이 도인 줄을 알지 못할뿐 아니라, 옷에 대해 알음알이를 일으켜 허망한 짓을 하여 갖가지 분별을 짓읍니다. 분별에 빠지게 되면 생사에 끝없이 묶여버리고 맙니다. 
 `모든 곳에 도가 존재한다'할 때에 이 존재의 뜻에는 두 종류가 있읍니다. 즉 세상물정에 섞여서 존재한다는 뜻도 있으며, 그저 자기의 수행만 굳건히 존재한다는 뜻도 있읍니다. 깨달아 통달한 사람들은 혼합되어 하나라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 혼합되어 하나인 줄은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수행만 굳건히 지킴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행만을 굳건히 지킨다'는 뜻은 순수한 정념(正念)으로써 배워야 할 도를 생각하여 범부와 성인을 떠나고, 증오와 사랑을 끊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잠시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중한 보배를 손에 잡은 듯, 봄날에 살얼음을 밟은 듯이 더욱 굳게 조심하고, 신중히 발걸음을 떼놓는 것입니다. 홀연히 깨달아 내가 능히 도를 닦노라 하는 생각과 또 닦아야 할 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돌이켜 관찰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 일정한 본체가 없읍니다. 종일토록 분명하게 작용한다 해도, 억지로 하려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
 
 옛날 가르침에 `사람에 인연이 있으면 쉽게 믿고, 법과 인연이 있으면 쉽게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여기서 인연이란 무엇인가 하면, 오랜 겁 동안 심었던 인(因)이 금일에 감응하는 것이다. 연의 회합은 불조성현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지 못했다. 더구나 나머지 중생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산연조 스님께서는 `한결같이 목전의 연을 따른다〔信〕'는 훌륭한 훈계가 있었다. 이것은 바로 순종을 뜻하는 것으로서, 바르게 순종하여 흘러 넘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신으로부터 감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업(業)이라 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감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연(緣)이라 한다. 깨달은 사람은 한 과보(果報)의 연이 성숙됐다는 것을 알고 멀리하려거나 얻으려 하지 않고, 기쁨·슬픔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좋으면 구차하게 얼른 가지려 하고, 싫으면 구차하게 얼른 버리려고 한다. 그러다가 얼른 가지려는 욕심이 이루어지면 금새 뽐내고 과시하다가, 구차하게 얼른 버리려는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탄식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다. 
 보연(報緣)이 한 번 정해지면 구차히 피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면, 종신토록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도 더 기뻐하지도 않고, 죽도록 싫어하는 것을 만난다 해도 더 노여워하지도 않는다. 경전에 `미운 사람을 만나는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에 대한 말씀이 있다. 여기서 말한 괴로움이란 목전의 연(緣)을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받는 것이다. 가령 목전의 연(緣)이 당연히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바르게 순종했다면, 괴로움이 침투할 틈이 없다. 이것은 세상의 변치 않는 연(緣)이다. 도인은 출세간의 종지를 탐구하는 사람이므로 본래 보연으로 의론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추리해 보면 보연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옛날에 하나를 듣고 열을 깨달아 대총지(大總持)를 갖춘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보리도(菩提道)의 연(緣)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겨자와 바늘이 서로 투합〔鍼遭相投〕하듯 오랫 동안 잊었던 것이 갑자기 기억나 알음알이를 굴리지 않고 즉시에 통달한 것이다. 또는 스승과 제자의 보연이 성숙되어 그 음성을 듣거나 용모만 바라보아도, 방편을 자세히 베풀지 않더라도 그 즉시 종지를 깨닫기도 한다. 더러는 종신토록 배워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숙세의 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이 성숙되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깨닫기를 바란다면, 어린아이들에게 어른의 일을 대신하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이것을 바른 이치라 하겠는가? 보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힘써 노력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도록 물러나지 않는다면, 하루 아침에 힘 센 장사가 남의 도움 없이 팔을 굽히듯이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 어찌 보연이 아니겠는가! 왜 보연이 아니라 하겠는가!
 
근본적인 수행의 태도는 무엇인가 ?
 
 살림살이를 하는 목적은 재물을 모으는 것이고, 몸을 수양하는 목적은 원기(元氣)를 기르는 데에 있다. 세상에는 근본을 튼튼하게 하지 않고 겉모양만 꾸미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을 해도 보통 잘못이 아니다. 이웃집에 두 명의 아들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건강하여 천 근을 들어도 무거운 줄 모르고 하루종일 일을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른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초췌하고 연약하여 일년내내 병석에 누워 있었다. 우연히도 의사가 두 사람의 맥을 짚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맥(屍脈)을 범하면서 일을 하였으니, 몸은 비록 건장하나 맥이 병들어 머지 않아 죽을 것입니다"하였고, 초췌하고 연약한 사람에게는, "6맥(六脈)이 화평해서 비록 몸은 병들었어도 맥이 건강하므로 곧 원래대로 회복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오래지 않아 과연 의사의 말처럼 되었다. 몸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은 맥에 달려 있고, 맥의 상태는 원기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근본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관찰해 보건대, 교종(敎宗)·선종(禪宗)·율종(律宗)의 세 종파가 도량을 세우고 전원(田園)을 모은 것은 마치 강한 나의 신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정·혜(戒定慧)의 세 무루학(無庄學)이 바로 나의 맥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혼자 가만히 채찍질하고, 은밀하게 단련하여 굳게 지키고 힘써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맥은 머지 않아 병들 것이다. 옛날 우리 불교가 3무1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 사건을 만났던 것은 내 몸이 병들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다가 이윽고 계·정·혜의 근본 맥이 뛰게 되자 살아날 가망이 생겼다. 그 뒤 오래지 않아서 병은 사라지고 몸은 더욱 건강해졌다. 이것은 근본이 견고했던 것을 증험한 사실이다. 아아! 그 근본을 견고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자는 외호(外護)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거기에 문채를 더하여 수식까지 하지만, 이것은 맥과 원기가 깎이고 상하면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짓이다. 또한 이것은 재앙이 어느날 갑자기 발생하는 것을 모르는 짓이다. 이것이야말로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한 사나이가 100묘의 전답을 경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협조를 구했다. 속담에서는 이것을 반공(伴工)이라 부른다. 상대방이 내 농사일을 돕는 것은 쉽지만, 내가 보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훗날 보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먼저 쉽게 도움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급히 길러낸 인물은 반드시 요절하고, 급히 쌓은 공로는 반드시 쉽게 무너진다"고 하였다. 천하의 일이 처음이 쉽지 않으면 뒤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듯이, 처음에 어려움이 없으면 나중에는 오히려 처음처럼 쉽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하늘이 이 사람에게 중대한 책임을 내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심지(心圍)를 괴롭히고,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한다"고 하였다. 어려움과 쉬움을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과 쉬움의 이치는 저절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이치에 어두운 사람은 쉬운 쪽을 추구할 뿐, 일에 임할 때 경중(輕重)의 분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쉽고 간단한 것만 약삭빠르게 하려 한다. 그리고는 성공을 하게 되면 마음에는 승리감이 넘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쉬운 일은 없어지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의롭지 못한 행동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이치에 통달한 인재는 보통 사람의 행동과는 다르다.
 비록 어렵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쉬운 일도 조심해서 처리한다. 쉬운 일을 조심해서 할 수 있다면 구차하게 얻겠다는 얼굴을 할 필요도 없으며, 어려움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피하려 괴로운 몸짓을 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의 천진한 성품이 희로득실(喜怒得失)에 혼란이 되지 않으면, 도는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쉬움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쉬운 것만 숭상하고 어려운 것은 등지는 경우가 많다. 혹 거들떠 볼만한이치가 없다면 성인의 말씀도 모두 헛소리가 될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불법에 깊고 얕음이 있는가 ?
 
 고창(高昌)땅에서 살던 한 장자(長者)는 평소에 도를 닦을 뜻이 있었다. 귀한 벼슬에 올라서도 성내거나 노한 얼굴을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하루는 그 장자가 내게 말하였다.
 "불법(佛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곧 얕음과 깊음이 있읍니다. 그 심오한 것에 대해서는 속인(俗人)이 본래 알 수 없겠으나, 얕은 것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박식하게 듣고 익숙하게 이해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듣고 보았던 것과는 서로 달라서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물었다.
 "불법은 광대하여 온 세계에 두루 들어 있어서 부처와 조사라 해도 이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도의 깊고 얕음에 대해 말하십니까?"
 그러자 그 장로가 말했다. 
 "심식(心識)의 참 뜻과, 경관(境觀)의 차별과, 깨달은 이치의 잘잘못과, 계를 잘 지키고 못 지키고 등이 모두 불법의 심오함입니다. 가령 세간의 재물은 독사보다 해로워 선근(善根)을 손상시키고 괴로움의 근본을 자라게 한다고 말한 것은 불법의 얕은 것입니다. 최초에 입도(入道)하면서부터 여러 스님들의 문전을 편력하였읍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이처럼 가르치지 않는 분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평소에 세간의 재물을 생각하면 하찮게 보아왔읍니다.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자가 문앞에 와서 재물을 달라고 할 때, 인색하게 아끼고 지나치게 아끼고 탐내는 감정이 눈 앞에 엇갈렸읍니다. 이것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자기에게 금지되었다고 해서 남도 재물을 갖지 못하게 하는 심보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대에게 재물을 보시하는 것은 번뇌를 보시하는 것이므로, 재물을 주지 않는 것이 그대를 독사의 구덩이에서 구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모로 생각해 봐도 끝내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이로 인해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평일에 듣고 이해했던 것은 거짓 마음이었으며, 인색하게 아꼈던 것이 그의 솔직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진솔한 감정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마음의 밑바닥에 들어 있어 통철히 깨달아  그 밑바닥을 털끝만큼의 찌꺼기도 없이 뒤집어버리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다시 눈 앞에 나타난다. 비록 갖가지로 오묘하게 이해했다고 해도, 이것은 신을 신고 그 위를 긁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덧없는 생사(生死)를 생각하는 것은 참된 마음이며, 들뜬 알음알이로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것은 잘못된 알음알이이다. 이것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시비를 따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
 
 아무리 작은 털끝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의 눈이 깜짝거리는 것은 스스로 보지 못하며, 천 근의 무게를 드는 사람도 자기 몸은 들지 못한다. 옛 사람의 이 비유는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쉽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는 어두운 폐단을 잘 말해주는 말이다. 친구들과 이 문제를 의론했는데, 손님 중에 그때의 그 문제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탄식을 하며 상을 찌푸리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인심은 옛과 같지 않고 세상의 도덕은 날로 문란해져 갑니다. 그런데도 삼백이나 오백씩 대중을 모아 큰 건물을 짓고 예의를 극진히 하는 곳이 많읍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장대로 일이 되지 않거나, 제가 주장하는 말에 대꾸하지 않으면 매우 분노해서 원수보다 더 심하게 굽니다. 그 많은 손님을 대하는 주지는 쩔쩔매며 뒷바라지를 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봄날 살얼음을 밟듯, 호랑이 꼬리를 밟듯 조심합니다. 이렇게 해서야 어디 해탈을 기대할 수 있겠읍니까? 옛날 총림에서는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서로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런 여풍(餘風)은 지금에 와서는 다시 보지 못하겠군요"
 내가 대답했다.
 "그대의 말은 지나치십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지 못했읍니까? 옛 가르침에 `제가 사는 지역에 인연이 있으면 믿기 쉽고, 법에 인연이 있으면 들어가기 쉽다'고 하였읍니다. 어떻게 고금(古今)과 정법(正法)·상법(像法)의 구분이 있겠읍니까? 가령 나에게 인연과 복이 없으면 수백 년전 수행하던 대중과 함께 살더라도 옛 사람이 또한 지금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인심은 좋고 나쁜 것이 없읍니다. 좋고 나쁨은 단지 내 인연에 있을 뿐입니다. 나에게 인연과 복이 있으면 천마외도(天魔外道)라 해도 도리어 나를 보호하는 무리가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순종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읍니까? 이것을 두고 이른바 `인연을 만나면 과보를 스스로가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인심이 좋은 것도 과보이며, 그렇지 못한 것도 또한 과보로서 모두가 자업(自業)이 빚어낸 것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만들 수 있겠읍니까?"
 이 말을 듣고는 수긍하면서 물러갔다.
 
공(空)·가(假)·중(中) 3제의 뜻은 무엇인가 ?
 
 진제(眞諦)·속제(俗諦)·제일의제(第一義諦)는 셋이면서도 하나이다. 이것은 물·파도·얼음이 셋이면서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금화·소반·비녀는 모두 금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쓰임새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본체는 다를 바가 없다. 본체의 측면에서 사물의 작용을 관찰하기는 쉽지만, 각각의 작용을 모두 합쳐 본체로 귀납하기는 어렵다.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은 본체는 작용하는 속에 있고 작용하는 속에서 본체를 찾을 수 있다. 만일 오묘하게 깨닫지 않고 알음알이로만 이해한다면 서로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셋>은 무슨 뜻이겠는가? 진제(眞諦)·속제(俗諦)·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그렇다면 <하나>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사람의 본래의 마음이다. "<하나>에 상즉(相卽)한 <셋>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 마음이 곧 진제이기도 하고, 속제이기도 하고, 중도제일의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제·속제·중도제일의제가 모두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형계(荊溪:711∼782)스님께서는, "진제는 모든 법을 부정하고, 속제는 모든 법을 긍정하고, 중도제일의제는 모든 법을 통일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 가르침에도 "진리〔諦〕라는 측면에서는 본래 진제와 속제 둘이지만, 깨닫고 보면 본래는 항상 하나이다"고 했던 것이다.
 현수(賢首;643∼712)스님이 말한 4구(四句)의 게송에도, "진제를 의지하여 속제로 들어감이 1구이고, 속제를 따라 진제에 회합하는 것이 1구이며, 진제이니 속제이니 하는 구별을 버리고 중도제일의제에 들어가는 것이 1구이고, 중도제일의제에 상즉하여 진제·속제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1구이다"라고 한 것이다. 천태(天台;538∼597)스님도 말하기를, "진제는 독립적으로 진제가 아니라, 속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써 진제이다. 속제 또한 독립적으로 속제가 아니라, 진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서 속제인 것이다. 중도제일의제 역시 독립적으로 중도제일의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진·속 2제(二諦)는 하나이면서 독립단독자가 아니고, 둘이면서도 독립개별적인 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여, 상즉상융(相卽相融)하여 중도제일의제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공(空)이 절대독립적인 공〔斷空〕이라면 색(色)과 융합하지 못하고, 색이 절대독립적인 색〔實色)이라면 공과 혼합하지 못한다. 절대독립적이면 공이 아니고, 절대독립적이면 색이 아니다. 서로 두 극단에 서 있으나 완전한 중도이다. 이러한 심체(心體)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제를 마주하면 단견(斷見)에 집착하고, 속제로 들어가면 상견(常見)에 미혹된다. 두 견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 중도에서 어긋난다"하였다.
 이 말은 경학(脛學)을 강론하는 자들이 일찍부터 주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장은 했으면서도 실제 이치는 깨닫지 못했다. 그 까닭은 알음알이로 문자에 의지해 이해했을 뿐 오묘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묘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자취가 뚜렸해졌고, 알음알이가 많아질수록 미혹의 정은 더욱 무거워진다. 이른바 <깨달음>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는가? 그것은 이 한마음의 지극한 본체를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 <알음알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3제(三諦)의 헛된 자취만을 마냥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알음알이와 다르고, 알음알이는 깨달음과 다르다. 깨달음은 지취와 마음으로는 통하지만, 말로 의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실하게 참구한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학문으로 이해한 것이 설사 현묘하고 현묘하다 할지라도 확철대오한 것에는 견줄 수가 없다.
 
애증심으로도 도를 깨칠수 있는가 ?
 
 정(情)은 애(肯)와 증(憎) 때문에 생기고, 자취는 진(進)과 퇴(退) 때문에 생긴다. 바로 이 애증과 진퇴 때문에 인간이 생사에 유랑하며, 3계(三界)에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세간을 초월하고 멀리 성도(聖道)에 계합하여 보리를 신속하게 증오(證悟)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유랑>과 <초월>은 무슨 뜻이겠는가? 성인께서 언교(言敎)를 통하여 알려주려 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를 깨닫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업에 얽매이는 이유를 밝히려 한 것이다. 아끼는 마음〔肯〕 때문에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은 공적인 재물을 아끼고 여러 사람을 아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상주물(常住物)을 마치 자기의 안목(眼目)을 보호하듯이 아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공적인 재물을 아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 가르침에도, "내가 많은 생을 통하여 깨닫기를 바랬던 까닭은 일체 중생을 구호하여 괴로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을 아끼는 것이다. 이렇게 아끼는 마음을 품게 되면 깨달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깨닫게 된다. 
 아끼는 마음에 업에 결박된다는 것은 자신을 아끼는 것이고, 자기의 가까운 권속을 아낀다는 뜻이다. 자신을 아끼기 때문에 아첨·질투·반연·치축(馳逐)·광망(狂妄)·전도(倒)가 마구 일어난다. 자기의 권속을 아끼려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마구 날뛴다. 이렇게 몰지각하게 권속을 아끼다 보면 생각마다 생사의 업습(業習)과 뒤얽혀버리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증오가 있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책망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까운 권속 중에 올바른 수행을 안하는 자를 또한 책망한다. 자기를 책망하기 때문에 게을러서 그저 편함만 바라는 잘못이 있게 되면, 스스로를 경책하고 이 점을 뼈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반성하여 고치고 후회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따로 깨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반면 자기의 잘못을 증오하는 태도를 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들춰내게 되고 급기야는 분노가 가슴 속에 쌓이고 불만이 얼굴에 가득해진다. 이것이 바로 업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도는 이와 같고, 진퇴의 이치 또한 이와 같다. 유가(儒家)에서 말하기를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충성을 극진히 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자기의 허물을 보완한다"는 훈계가 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인들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나아간다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은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꾸준히 용맹스럽게 수행을 하고 계행을 낱낱이 지켜서, 아침에는 저녁이 빨리 올까 걱정하고, 저녁에는 아침이 밝을까 걱정하듯 열심이 해야 한다. 또한 생각생각이 머리에 불을 끄듯 하여 잠시라도 잊어버리려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공무(公務)를 관장하고 교화의 방편을 행하는 것이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부지런히, 추위와 더위도 잊으며 털끝만치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반드시 실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감히 자기의 이익 때문에 공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 이 경우를 두고 공직을 맡는 것이 도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훌륭한 공직살이라고도 한다. 혹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명리를 구하는 마음을 허망하게 일으켜 얼굴이 꺼멓게 되고 발에 못이 박히도록 숨돌릴 겨를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그 결과 생각할 수도 없이 업보만 계속 쌓여 공직에 나가 있을수록 더더욱 업에 얽히고 만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숨어서 운둔하는 생활을 고상하게 여겨 도념(道念)을 지키기만 하는 부류가 있고, 조용하고 한가한 것을 숭상하여 세상을 업신여기는 부류가 있다. 이 두 부류를 모두 공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 물러나는 것과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 정말로 타인을 위해 일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고 세상을 교화할만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 공직에서 물러나 은거해 열심히 도를 닦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수행을 마치지 못해 감히 세상 일에 망령되이 간섭하지 않고 깊은 산 속에 은거하여 인적이 끊어진 곳에서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린 경우가 있다. 이런 물러남이야말로 비로소 도에 합치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개중에 어떤 사람은 교제를 끊게 되면 구애를 받지않아 먹고 사는 것에 부족함이 없어 따로 세상에서 더 구할 것이 없다고 믿기도 한다. 따뜻한 옷에 배불리 먹으면서 제멋대로 지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속세를 끊었다"고 말한다. 높은 누각에 누워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늘어 놓으면서 도리어 대중들을 나무라고, 공적인 소임을 맡은 사람을 비웃기도 한다. 게으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자기가 여태껏 입은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른다. 이럴 경우 어찌 공직에서 물러나 도를 닦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어느날 문득 보연(報緣)이 다한다면, 앞으로 닥칠 업(業)을 어찌 피하겠는가? 생사의 굴에 빠져들어 자기의 배꼽을 스스로는 깨물지 못하는 것처럼 피하지 못한다.
 애증과 진퇴의 이치는 흑백처럼 분명해서 깨닫는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번뇌의 업을 쌓는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번뇌의 업을 쌓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한 생각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받는 과보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능엄경」에서도, "그대를 윤회전생하게 하는 생사의 결근(結根)은 너의 6근(六根)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가 신속히 깨달아야 할 해탈과 묘상(妙常)도 너의 6근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니라"라고 한다. 이것은 애증과 진퇴가 도에 합치될 수도, 업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말이겠는가?
 눈밝은 납자들이여! 업의 결박이 깊지 않고 도가 멀리 떠나지 않았을 때 부지런히 용맹수행하여 기연을 굴리고 일찌감치 깨치기를 노력하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걸핏하면 업의 결박을 만나게 되리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東語西話 下卷


 불법의 비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
 
 한유(韓愈:768∼824)는 당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이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많은 글을 발표하여 불교를 비난했다. 태전(太  )스님이 그의 잘못을 강력하게 지적했는데도, 한유는 여러 서적에서 헐뜯고 비난하는 얘기를 계속했다. 유종원(柳宗元:773∼819)도 한유와 동시대 사람인데, 문장으로써 당대를 울렸고 많은 조사들의 비갈(碑碣)을 지어 불교를 세상에 드날렸다. 불교의 극치를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애초부터 한유가 불교를 헐뜯고 훼방했던 것을 본받지는 않았다.
 한편 송나라 때에 구양수(歐陽修:1007∼1072)가 출현하여 문장을 한유를 본받고 한유의 「원도론(元道論)」을 근본으로 해서 불교를 비난했다. 날이 갈수록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비난은 더욱 심해져서 불교는 더더욱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는 그네들은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부질없고 흉흉한 말만 많아졌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판하지도, 그렇다고 도와주지도 못했다. 이때에 명교(明敎:1007∼1072)스님이 「명교론(明敎論)」을 써서 한유의 배불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한유를 비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양수의 잘못을 타일러 주기 위해서였다. 후세에도 한유와 구양수를 본받아 불교를 비방하는 유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자 우리 불교의 스님들이 그들의 비난에 대해 가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점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네들이 불교를 질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로 불교를 제대로 몰라서 그랬다는 것이다. 가령 저들이 불교를 제대로 알았다면 불교를 외호하려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되지도 않게 억지로 헐뜯고 비방했으니 어찌 그들인들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었겠는가? 인과응보의 이론으로 따져보더라도 그 정도의 비방은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제바달다가 나쁜 계략을 세워 당신을 죽이려는 위험을 여러번 만났으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미 제바달다가 당신에게 숙세의 원한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만나더라도, 과보가 다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조용히 관조하시며, 마치 감로수를 마시듯이 그 고통을 달게 받으셨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혼들렸겠는가. 저 한유와 구양수가 불교를 비방한 것도 제바달다의 원한이 씌워서 그런 것인 줄을 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정념(正念)을 굳건히 지니고 그저 제바달다의 원한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도 저절로 사라지리라.
 영가(永圈)스님은 말하기를, "저네들이 비방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허공에 불을 붙이려는 것처럼 쓸데없이 자기 자신만을 피로하게 할 뿐이다"라고 했다. 영가스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옳기는 옳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씀은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하다. 영지원조(靈芝元照:1048∼1116)스님이 하루는 왕통(王通:584∼618)의 저서인 「중설(中說)」을 가지고 와서 묻기를, "어떻게 불교를 비방하는 소리를 틀어막을까요?"하자. 영가스님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영지스님이 "그 말씀대로 하겠읍니다"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대꾸하지 말라'는 말과, `비방하더라도 내버려 둬라'는 것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잘못이라고 여겨진다. 「원각경」에서는, "내〔我〕가 공(空)하다는 것을 알면 나를 훼방할 것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저들이 비방하더라도 그냥 두라는 말과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결국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아! 슬프도다! 국가의 공론(公論)을 담당하는 자들은 근본은 따져보지도 않고 유생들이 불교를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것만을 보고 그저 불교를 외도라 비난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시골 아낙네들이 싸리문을 붙들고 서로 욕지거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되어서야 어찌 무생자인(無生慈忍)의 힘과 인과응보의 원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어떤 임금님이 500마리의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아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다. 그 때에 부처님은 다섯 손가락으로 코끼리를 살짝 들었다 땅에 내려 놓았다. 그랬더니 다른 코끼리들도 길이 잘 든 듯이 엎드렸었다. 바로 이 때에 아나율(阿那律)은 부처님의 다섯 손가락 끝에 각각 금빛사자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 때에 어떤 제자가 부처님께 질문했다. "일찌기 듣자오니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몸은 헛된 것이므로 아끼고 보호할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읍니다. 그런데 지금 사자의 위엄을 나타내어 술 취한 코끼리의 위험을 막으시니, 그것은 헛된 몸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어찌 코끼리를 막겠다는 마음이 있었겠느냐. 나는 다만 오랜 세월 동안 자인삼매(慈忍三昧)를 닦았을 뿐이다. 지금도 손가락을 세우고 이 자인삼매에 들어가 코끼리가 짓밟고 해치는 대로 두었으나, 나의 삼매의 힘이 성숙했기 때문에 사자의 위엄이 저절로 나타난 것이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을 가만히 새겨보니, 이것이야말로 재난을 극복하고 남의 비방을 막는 최상의 방법이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 부처님이 말을 사용했나? 아니면 기지(機智)를 사용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또 속담에도 이른바, "훌륭한 도덕군자를 눈앞에 만나면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어드덧 사라지고, 다만 그 사람의 훌륭한 덕에 심취된다"라는 말이 있다. 어찌 그 도덕군자가 일부러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덕에 심취되겠는가! 바로 이것도 코끼리의 위험을 막는 한 방법이다. 혹시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는 모두가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상대의 비방을 말로 이러구 저러구 따져서 물리치려 하면, 더더욱 그들의 비방만 늘어나게 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는 뜻이 무엇인가 ? 청정법신과 만상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군생 앞에 두루 나타나시고.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나
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시네.

佛身充滿練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綠卦惑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천하의 총림에서 부처님을 찬양하는 데에 이 게송을 많이 사용한다. 이 게송은 「화엄경」 제 6권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백호상(白毫相)의 과광명 속에 일체법승음보살(一切法勝踵菩薩)의 소리를 나투어 보이셨다"했다. 이 말이야말로 「화엄경」 전체의 핵심이고, 또한 모든 조사들이 외길에서 서로 만났던 골수이기도 하다.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다'는 소리를 어는 곳에서라도 부처님을 모셔 앉히려고 헤아리겠는가라고 설명하고, `일체의 군생 앞에 두루나타나시고'를 눈과 귀 속에 딱 붙어 있어 볼래야 볼 수가 없다고 설명하고,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나'라는 귀절을 허공에 허공을더하고 바닷물에 바닷물을 집어넣는다는 뜻이라고 풀이하며, 끝으로 `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시네'를 언제나 변치않는 처소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풀이한다면 일반적인 해석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본 뜻을 모르고서 잘못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란 더딘 해가 강산에 걸린 것이며, `일체 군생 앞에 두루 나타나시며'란 봄바람에 화초가 향기로운 소식이며,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네'란 지저귀며 서로 어울려 나는 제비이며, `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시네'는 따뜻한 모래에서 졸고 있는 원앙새의 소식이다. 이렇게 알아들어야 일체법 수승한 음성을 들은 것이다. 마치 물을 한움큼 움켜쥐니 손에 달빛이 그득하다는 소식이다.
 두보(杜甫:712∼770)의 시(詩)에 "꽃 속을 노니니 그 향기 옷에 가득하네〔弄華香滿衣〕"라는 귀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야광주를 굴리고 구슬을 희롱하네〔珠轉玉回〕"라고 한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몸>이란 유리궁전에 있는 흰 옥호보(玉毫¿)이며, 연화대 위에 있는 황금상(黃金相)이라 말해도 일부만을 파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32상 80종호까지도 눈 속의 금가루일뿐이니 모두 쓸데없는 소리이다. <부처님의 몸>은 작위가 없어 모든 것에 속하지도 않는다. 언어문자를 가지고 알음알이를 낸다면 수만리의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법계에 충만한 부처님 몸>에 대해 말해본다면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그렇다고 마음으로도 알 수 없으며, 지혜로도 안되고 나아가 알음알이로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운문(雲門:?∼949)의 "똥 묻은 막대기가 부처이다"는 화두와, 동산(洞山;910∼990)스님의 "부처란 삼〔麻〕세 근이다"라는 화두만이 그것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기가 막힌 담론도 모두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 비방하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그럴듯한 이론을 광대하게 인용하여 말하기를, "부처님 몸은 태허(太虛)를 싸고 만상(萬象)을 머금는다. 그리하여 물질〔色〕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모든 물질〔色〕에 두루하며, 공(空)으로도 알 수 없으나 공(空)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것을 앞장서서 안내한다 해도 불신(佛身)을 앞선 것이 아니며, 그것 뒤에 따른다 해도 불신(佛身)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쉿! 쉿! 허튼 소리 하지 말아라. 그 따위 소리는 밥 짓는 아낙네도 젖 빠는 어린애도 모두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아라. 설사 <부처님 몸〔佛身〕>이라고 말하더라도 잘못이다. 그러니 `군생 앞에 두루 나타나신다'느니 또는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한다'느니 하는 귀절에 대해서도 이러고 저러고 논하지 말자.
 다음은 무엇을 <보리좌>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 몸이 충만하면 보리좌도 충만하다. 그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눌 수도 없으며, 구별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나눌 수도 없다"고 한다. 만일 <보리좌> 위에 따로 <부처님 몸>이 있다고 한다면 `항상 떠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 몸>이 충만했다면 덧없는 생사의 유루세간(有庄世間)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영가스님이 말한 "꿈 속에서는 분명히 6취가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텅 비어 대천세계도 모두 없더라"한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깨어나면 부처님 몸이니 보리좌니 하는 말도 다 필요없다. 그러니 그 어떤 말인들 잠꼬대가 아니겠는가!"라고 한다. 참선하는 사람이 진정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부처님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시방세계의 모든 것이 청정한 법신(法身) 그대로이다.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비추는 것처럼 털끝만한 장애나 가리움도 없는데, 까닭없이 한 점의 무명(無明)이 근본자리를 덮어버렸다. 그래서 우러러보고는 하늘이라 말하고, 굽어 살피고는 땅이라고 하며, 광대하게 엿보고는 법계(法界)라고 말한다. 산은 높고 물은 깊으며, 낮은 밝고 밤은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어나고, 구름이 일면 새도 나는 등등의 모든 삼라만상의 빈 껍질을 벗기고 티없는 밝음〔精明〕을 드러내어 이른바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텅 비어 법신이라 할 것도 없다.  이처럼 분별망상을 일으켜 허망한 알음알이에 집착되면, 공을 색이라 하지도 못하고, 밝음을 어둠이라 하지 못하고, 친한 것을 소원한 것이라고 하지도 못하고, 증오를 바꾸어 사랑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것이 마음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고서는 무명의 진면목을 식별할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억지로 도(道)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고서 그들은 "나는 공(空)을 그저 볼 뿐이지 그것이 공(空)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색(色)을 볼 뿐 색(色)이라고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청정한 법신으로 관찰할 뿐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옳기는 옳으나 공(空)이니 색(色)이니 하고 구별하는 견해가 모두 없어진 것만은 못하다. 그것은 내가 능히 청정법신을 본다는 생각과 또 대상으로써 보여질 청정법신이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잊지도 못하고 끊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근본무명이다. 마르지 않은 무명의 물방울을 담박에 짜버리고 청정하지 못한 것은 세척해버려야 한다. 만약 세상의 갖가지 현상을 모두 밝혀서 무명을 없애려 한다면, 그것은 신발을 신고 신발 속의 가려운 곳을 긁는 정도도 못된다. 「원각경」에서 말한, "이 무명이란 실로 본체가 없다. 꿈 속에서 사람이 꿈을 꿀 때는 분명히 무엇이 있는 듯 하지만, 깨고 나면 결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니 무명이 무슨 실체가 있어서 정해진 성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모든 본체가 그대로 청정법신일 뿐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경에서 말한대로, "깨고 나면 끝내 남는 것이 없다" 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깨어난 것인가! 아니다. 깨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모름지기 <깬다〔醒〕>는 뜻은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무엇보다 색·공(色·空)등의 법이 모두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으로서 청정한 법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말무명을 끊어버릴 수 있다. 그 다음에는 견문(見聞)의 알음알이가 없어지고 주관·객관〔能·所〕의 식(識)이 소멸하여, 한 법도 법신이라 여기지 말고 한 법도 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시시비비가 모두 사라지고 생각생각이 모두 여여(如如)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근본무명을 끊을 수 있다. 그러나 지말무명과 근본무명을 모두 담박에 끊어야 하다. 이 두 무명을 밑바닥까지 꿰뚫지 못하고 3∼5회쯤 나누어서 끊으려 한다면 안된다. 어찌 마음으로 사량분별하고 언어문자로 따지는 것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법신의 참 뜻은 무엇인가 ? 
 
 옛날에 동파(東坡:1036∼1101)거사가 여산(廬山)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시냇물 소리 그대로가 부처님 말씀인데
산의 자태인들 어찌 청정법신 아니랴
밤 사이의 팔만사천 게송
뒷 날 어찌 다른 사람에게 전할꼬.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昭人.
 
 이 시에 대해 어떤 선사는 말하기를, "동파는 매 귀절에 <변시<便是)>와 <기비(豈非)>를 쓸데없이 덧붙였다. 왜 곧바로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 말씀이고〔溪聲廣長舌〕, 산의 자태는 청정법신이다〔山色淸淨身〕'라고 하지 못했는가?"라고 힐난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시냇물 소리는 혀를 사용하지 않아도 낼 수 있고, 산의 자태는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드러난다"는 등등의 여러 가지 평을 했다. 이것에 대해 종합해서 말해 보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하여 소동파의 치우친 견해를 초월한 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이 싯귀의 뒷전에서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당시에 동파거사는 시냇물 소리와 산의 자태만이 장광설인 줄 알았을 뿐, 나귀소리·말소리·거위울음소리·까치 우는 소리·나아가 근심으로 탄식하는 소리·통곡하는 소리·지옥 속의 창칼이 사람을 찌르는 등의 갖가지 악독한 신음소리가 모두 부처님 말씀인 줄은 몰랐다. 또 어찌 산의 자태 뿐이랴! 크게는 허공, 작게는 겨자씨에 이르기까지 법계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모습 있는 것으로서, 특이한 모양과 곱고·추하며 기이한 것과, 청·황(靑·黃)과, 장·단(長·短) 내지는 빙하·숯불·누린내·더러운 것과, 눈으로는 살피지 못할 정도의 갖가지 악한 물질 모두가 청정법신이다.
 어찌 몸과 혀뿐이겠는가. 코로 들어가는 것도 다 부처님의 향기이며 입으로 씹는 것이 모두 법미(法味)이다. 6입(六入)과 12처(十二處)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법성이 혼융하여, 털끝만큼의 간격도 다른 것이 용납될 수 없다. 이를 두고 "한 모습으로 평등하여 진정(眞淨)한 무루(無庄)를 원만히 구족한 삼매문(三昧門)이다"라고 한다. 위로부터는 불조가 이 삼매에 의지하여 묽은 우유를 정제하여 수락( 酪)을 만들었고, 흙을 변화시켜 금덩어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타났다 숨었다, 오므렸다 폈다 등등의 끝없는 묘한 작용이 한결같이 모두 이 삼매문(三昧門)에서 흘러나왔다. 「법화경」에서 말하기를, "오직 이 일승만이 진실일 뿐 나머지 2승(二乘)은 진실이 아니니라"고 했다. 바로 지금 하늘은 높고 땅은 낮고,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낮은 밝고 밤은 어두우며, 산은 위로 솟아 있고 바다는 옆으로 드리워져 있다. 이런 것들 모두 털끝만큼도 삼매문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이처럼 명백히 드러난 듯 하지만 구태의연하게 시냇물 소리와 산의 자태 가운데만 앉아 있는 줄을 어찌 알겠는가! 새우가 제아무리 뛰어본들 어찌 북두칠성 밖을 벗어나는가. 
 부상좌(孚上座)가 「열반경」을 강의하기를, "법신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네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다. 머무는 모습〔住相〕도 아니고 그렇다고 머물지 않는 모습〔不住相〕도 아니다. 원만하게 10허〔十虛〕를 싸고 3제(三際)를 혼융하였다"라고 했다. 이 때에 어떤 한 선사스님이 좌중에 있다가 헛소리라고 판단하여 코를 가리고 물러났다. 그러자 부상좌가 쫓아가서 묻기를, "나는 법신을 설명하면서 아직 문의(文義)에 어긋난 적이 없었는데 그대의 비웃음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자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상좌가 배웠던 것을 모두 털어놓는다 해도 법신의 그림자 정도를 겨우 말할 뿐입니다. 만일 진실한 법에서 볼 때 상좌의 말은 법신과는 거리가 맙니다. 그대는 법신과 상응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강학했던 것을 화두로 들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앉아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부상좌는 그 가르침대로 꾸준히 했더니 갑자기 호각소리를 듣고 활연히 깨달았다.
 그대는 말해 보라! 과연 늙은 소동파가 이와 같이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 도는 언설로써 얻을 수도 없고 알음알이로도 불가능하다. 빈틈없이 참구하여 깨닫기를 기약하면서, 경험적 지식〔見聞〕을 벗어나고 알음알이를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허망하게 시냇물 소리·산의 자태 따위의 알음알이를 끌어들인다면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천하가 모두 깨달음의 문이다. 삼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19) 달마의 직지법문(直指法門)
 
\ 달마스님은 곧바로 가리키어 문자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6조 혜능스님은 말하기를, "곧바로 가리켰다고 말하더라도 벌써 옆길로 샌 것이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화두를 들고 의심덩어리를 일으켜 공부를 하며 마음 깨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선덕(先德)을 비방하고 고인을 욕되게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6조 스님으로부터 3대(代)를 지나서 백장(百丈;720∼814)스님이 출현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대지선사(大智禪師)라 불렀다. 스님께서는 선림청규(禪林淸規)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멀리는 율장(律藏)에 바탕을 두고 승려생활의 예법을 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넓은 강당과 넓은 평상을 배치하여 삼백 내지 오백 명의 대중들이 늠름히 모여 앉아서, 육체는 고목처럼 꼼짝 않고 마음은 불꺼진 재처럼 고요히 흔적 없게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을 두고 앉아서 참구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대는 `곧바로 지적한 것도 잘못이다'고 비방하였는데, 이 말은 정말 잘못된 중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선림청규(禪林淸規)에 의하면 처음 출가하면 시자료(侍者寮)에 있으면서, 아침에는 예불하고 저녁에는 교육을 받아 견문(見聞)을 넓히고 깊이 연구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는 장경각의 열쇠를 관장하게 하여 갖가지 교리를 섭렵케 하였다. 또한 유서(儒書)를 박식하게 연구하고, 다른 학문도 통달할만큼 공부하여, 나란히 좌석을 잡아 설법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시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스승이 되게 하였다. 스승들은 의발(衣鉢)을 부촉하여 믿음을 표시했고, 제자들은 향을 준비하여 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5종(五宗)으로 파가 나누어진 다음부터는 도를 전수하고 받을 때 세밀한 지도와 여러 견해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곧바로 지적한 도라면 과연 이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들이 문자를 수립하지 않고 그대로 가리키는 도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시기가 성인이 태어났던 때와 벌써 한없이 멀어졌고 인심 역시 날로 퇴보하여 사람들이 도를 체득하겠다는 바른 생각이 견고하지 못했고, 또한 경계를 구분하는 알음알이만 날로 더해가는 것을 보고는 마지못해 펴신 방편이다. 백장스님이 총림을 건립하지 않았을 때에는 스님들은 모두 때묻은 초의(草衣)를 입고 깊은 산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도(道)로 향하였다. 백장스님 대에 이르자 그 때의 스님들은 벌써 늙고 병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총림을 건립하여 늙고 병드는 것을 위안하고, 조사의 도를 보완하게 하였다. 가령 이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지적한다'는 그 말마저도 없어져 지금 들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 공리공론만 일삼는 무리들은 사람들이 바로 지적하지 않고 우회한다고 따진다. 이것은 우회하는 것이 바로 가리키는 달마의 선법을 선양하는 방편임을 제대로 보지 못한 때문이다. 또 그러한 책망이 옳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따지는 그 마음을 반성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자신이 벌써 우회하여 굽은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 때문일까? 달마의 경우 곧바로 가리킨 도를 전하느라 묵묵히 9년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곧바로 가리키는 도를 믿지 않는다고 책망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바로 가리키는 직지(直指)의 도가 일월처럼 빛나지만, 앞에서 말한 우회하고 굽은 것 때문에 그 가르침이 털끝만큼도 잘못된 점은 없다. 마음이 진실하면 이치는 자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림의 달마와 같이 곧바로 가리키는 도(道)에 의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직지(直指)의 요체를 저버리고, 또한 말로는 달마스님이 얘기한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의 조급함 없이 장벽처럼 수행을 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하신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반연을 물리쳐 끊어버려 거기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안으로 마음을 억제해서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어찌 곧바로 가리킨 종지(宗指)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오랫 동안을 수행하여 직지의 세계로 깨달아 들어가려고 한다. 지금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는 목적은 정(情)을 소멸하고 식(識)을 뒤바꿔서, 공(功)·용(用)을 둘 다 잊고 직지의 세계로 그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는 것에 더 무슨 의혹이 있을까?





자심의 현량(現量)이란 무엇인가 ?
 
 자기 마음에서 화복의 싹도 트는데, 증오와 사랑인들 어찌 다른 곳에서 오겠는가? 한 때에 발생한 번뇌는 3세(三世)를 통하여 나타나면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멸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빗나가지 않는다. 일대장교(一大藏敎)에서는 과(果)를 들어 인(因)을 밝혔는데, 모두가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으로서 한 법도 마음 외에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없다. 도인은 생각마다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하여 그것의 형상은 물론 자취로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옛날보다 밝고, 미래세가 다하도록 뚜렷하여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능엄경」에는, "새어나감이 없는 진정(眞淨)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가운데서 다른 무엇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옛 스님들은 이것을 금강보검(金剛寶劍)이라고도 했고, 청정태허(淸淨太虛)라고도 했다. 칼〔劍〕은 베지 못하는 물건이 없고, 허공은 모든 장소를 포섭한다. 한량없는 광명을 지닌 여래의 몸〔大光明藏〕은 본체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밖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조는 이것을 깨달아 잘못된 생각을 담박에 비웠고, 중생들은 이것을 몰라 허망하게 알음알이를  는다. 그래서 3계(三界)가 생기고 만법(萬法)이 이루어지며, 생멸거래(生滅去來)의 모습이 복잡하게 생기며, 복과 재앙을 받는 이치가 분명해진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복을  고 화를 피하려는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려는 감정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허망한 견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업(業)은 더더욱 많아진다. 세속의 사람으로서 세상의 그물에 아교를 붙인 것처럼 딱 붙은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용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욕의 그물을 찢어버리고 출가한 자면서도 알음알이를 쫓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출가자는 책망해야 할 것이다. 
 「능엄경」에서도, "미친 마음이 쉬지 않았으나, 일단 쉬었다 하면 보리(菩提)이다"고 하였다. 이는 교종에서 하는 질책이다. 언어·문자의 가르침으로 책망한 것이다.
 반면에 달마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외부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헐덕이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고덕스님도, "불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 쉬기를 힘쓸 뿐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선종의 질책이다. 4무량심(四無量心)·6도(六度)·만행군선(萬行群善)·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등은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으로, 우수한 것이 못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모두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써서 책망한 것이다.
 바로 마음의 본체를 말해 보자. 쉼〔歇休〕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벌써 황금가루가 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열경중을 더 의론할 것인가?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중생들이 제 마음의 현량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드디어 화성(化城)의 방편을 써서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심(自心)이란 무엇이고, 또 현량(現量)이란 무엇인가? 자심(自心)이란 불조가 증오한 본래부터 있던 원만한 보리의 본체이다. 그리고 현량(現量)이란 중생이 식(識)의 변화에 따라 집착하여 도저히 바꾸어 줄 수 없는 견해이다. 
 어떤 사람이 물어왔다.
 "어떻게 이를 버려야 합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버리려 해서는 안됩니다. 일부러 버리려 하면, 버리려는 자취와 함께 현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장자(莊子)는, `죽은 뒤 점치는데 쓰이는 신성스런 거북이가 되어 호강하느니,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자유롭게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것이 낫겠다'고 비유하였읍니다. 믿는 마음이 확고하고 참구를 그치지 않아 확연하게 개오(開悟)하면, 자심(自心)의 현량이 모조리 사라져 도리어 자각한 성지(聖智)로 됩니다. 이것은 마치 미혹했을 때는 황금을 구리로 잘못 알다가, 깨닫고 나서는 그것이 황금이지 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담박에 아는 것과도 같읍니다. 처음에는 구리라고 잘못 알았지만, 그것은 본래부터 황금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자각한 성지이며, 본래 황금인 것을 구리라 생각하는 것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입니다. 달마스님은 「능엄가경」 한 권의 요의(要義)를 지니고 직지(直指)의 마음에 그대로 계합하여 현량을 버렸읍니다. 그리하여 재앙을 재앙으로 여기고 복을 복으로 여기는 자취를 모두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알음알이〔情〕란 대체 어떠한 것인가? 알음알이란 집착해서 바꾸기 어려운 허망한 견해이다. 알음알이가 있는데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고, 집착이 있는데도 알음알이가 없을 수 없다. 알음알이에 집착하는 까닭은 바로 미망(迷妄) 때문이다. 이러한 미혹의 대상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자성(自性)이다. 이 자성을 미혹하여 알음알이가 된다. 중생이 알음알이로 집착하는 것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증오와 사랑이 그런 것이고 다르다는 것 또한 증오와 사랑이 그런 것이다. 생각하는 견해의 차별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 한결같을 수는 없다. 예컨대,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동쪽을 집착하여 옳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향하는 대상이 모두 동쪽일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서쪽을 집착하여 옳다고 한다면 향하는 대상이 모두 서쪽일 것이다. 동쪽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는 자는 매양 서쪽을 비난하고, 서쪽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비난받는 것을 모른다. 또한 동쪽을 고집하는 자는 서쪽으로 향해 있는 사람이 자기의 동쪽을 가리키며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모른다. 그는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스스로 옳다고 더 믿어 상대방을 더욱 비난한다. 서쪽을 고집하는 자도 이와 같다. 두사람의 고집은 서로 부수지 못하는 창과 방패같다. 이것을 서로 부수지 못한다면 천하의 시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세상에 나와 이를 구제하려 하였다. 말씀과 가르침을 베풀어 시비를 가리는 마음을 해결하고, 알음알이를 따르는 중생들을 교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성인의 가르침도 그 자취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시비가 더욱 성해졌던 것을 어찌하겠는가?
 옛부터 유·불·도(儒佛道) 3교(三敎)가 정립해서 서로 헐뜯었던 것도 각각 자기 파만을 옳다고 주장하여 시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베푸신 교화는 만법이 모두 한 마음일 뿐이며, 한 마음이 바로 만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만법의 측면에서 교(敎)라 하였고, 한 마음의 측면에서 선(禪)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명칭은 항상 서로 달랐지만, 그 본체는 항상 같았다. 교(敎)는 문자를 매개로 하였지만, 선(禪)은 문자를 매개로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선(禪)은 알음알이의 미망(迷妄)을 타파하여 신령한 근원자리인 일심(一心)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문자를 매개로 하느니, 문자를 떠났느니 하는 집착을 떠나지 못해서 결국 교와 선이 얼음과 재처럼 겉돌았다. 문자를 떠났느니, 문자를 매개로 하느니 하는 두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가 교가 아니고, 선이 선이 아닌 경지에 이르러서는 성인이라 해도 옷깃을 여미고 그 앞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또 불성(佛性)의 이치〔性理〕를 매일 직접 수행하면서도 시비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 평소부터 교리(敎理)에 어두운 사람에게 그가 집착했던 것을 끊어버리고 시비를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마치 배고픈 사람 앞에 밥을 갖다놓고는 그 밥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고덕스님의 훈계에, "다른 사람의 잘못과 나의 옳음을 들추지 않으면, 자연히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을 공경하고 윗 사람도 아랫 사람을 공경하며 서로 존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불법은 시시때때로 드러나고, 번뇌는 그때그때마다 사라지리라"고 한 말씀이 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다. 그런데도 그 교훈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알음알이가 있어 상대방의 시비를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집착을 끊는데는 알음알이를 없애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고, 알음알이를 없애는 데는 본성을 깨닫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본성을 깨닫고 나면 알음알이는 굳이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며, 알음알이가 없어지고 나면 시비에 대한 집착은 봄날 서리가 밝은 햇빛에 녹아내리듯 하리니, 교화가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항주(杭州)의 신성(新城) 땅에서 살았으며, 성은 손씨(孫氏)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대에 전당(錢塘) 땅으로 이주하여 부모가 그 곳에서 일곱 자녀를 낳았는데, 나는 그중 제일 막내였다. 나는 겨우 포대기를 떠나던 시절부터 범패(梵唄)를 읊조리며 불사(佛事)를 흉내내며 소꿉장난을 했다. 이웃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상히 여겼다. 일곱 살이 되자 나는 외전(外傳)인 「논어(論語)」·「맹자(孟子)」를 읽었고, 아홉 살이 채 못되어 어머니를 잃어서 그만 학문을 중지하였다. 어려서부터 출가할 뜻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일에 얽매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24세가 되자 그 속박이 자연히 풀렸다. 이 때가 바로 지원(至元) 연간의 병술(丙戌;1286)년이었다. 이 해 5월 혼자 산에 올라 선사(先師)의 제자로 들어갔다. 이윽고 「금강경」을 지송하던 중, "여래를 걸머진다〔邊擔如來〕"는 문구에서 분명하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로부터 경서(經書)와 어록(語錄)의 맛에 상당히 심취했는데, 깨닫지는 못했었다. 그 이듬해인 정해(丁亥;1287)년 2월에 우바새 양씨(楊氏)가 생활용품을 주어 산해옹(山海翁)을 따라 산에 올랐는데, 그때야 비로소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었다. 기축(¿丑;1289)년에 당사(堂司)의 소임을 맡았는데, 경인(庚寅;1290)년에 몰래 이곳을 떠나려 하다가 그만 송공(松公)에게 들켰다. 그래서 다시 기름진 전답 3묘(三)를 도와주며 참선을 하였다. 그런지 얼마 안되어 코피가 나는 병에 걸려 그것을 그만두고 선사(先師)의 시봉을 했다.
 신묘(辛卯:1291)년 봄에 구공( 公)이 전장(田莊)을 시주하였으나, 편지를 해서 되돌려주게 하였다. 임진(壬辰;1292)년에는 고무(庫務)의 소임을 맡았다.
 계사(癸巳;1293)년과 갑오(甲午;1294)년에는 시주의 문전이 분주했을 뿐이다. 원정(元貞) 연간 을미(乙未;1295)년에는 선사께서 병으로 누우셨는데,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 장례를 마친 나는 즉시 산을 떠나 오랜 뜻을 이루게 되었다.
 병신(丙申;1296)년에는 오문(五門) 땅을 왕래하였다. 대덕(大德) 연간 정유(丁酉;1297)년 봄에는 봇짐을 짊어지고 천주산(天柱山)으로 갔다가, 가을이 되자 여산(廬山)으로 갔다. 겨울에는 건강(建康)땅으로 가서 초가집에 자취를 감추고 10개 월간을 지냈다.
 무술(戊戌;1298)년 겨울에는 변산(弁山) 땅에 환주암(幻住庵)을 지었고, 이듬해 겨울에는 오문땅에 환주암을 지었다. 경자(庚子;1300)·신축(辛丑;1301) 연간에는 두 곳에서 다 거처하였다. 
 임인(壬寅;1302)년에는 대각사(大覺寺)에서 주지를 맡아달라고 청하여 남서(南徐) 땅으로 피해갔다. 이듬해 계묘(癸卯;1303)년에는 대각사로 목면가사를 되돌려 보냈다.
 갑진(甲辰;1304)년에는 산으로 되돌아가 선사의 탑을 지켰다. 을사(乙巳;1305)년 겨울에 사자원(師子院) 일을 맡았고 병오(丙午;1306)·정미(丁未;1307)에서 무신(戊申;1308)년 겨울에 이르기까지는 오송(吳松)땅을 번갈아 왕래하느라고 산으로 되돌아 오질 못했었다. 
 기유(¿酉;1309)년에는 의진(儀眞) 땅에서 배를 사서 여름에 삽성( 城) 땅에 닻줄을 매었다. 경술(庚戌;1310)년에 천목산(天目山)으로 되돌아가 산과 배에서 거처하였다. 신해(辛亥;1311)년에 다시 배를 만들어 타고 변수( 水)로 갔다.
 황경(皇慶) 연간 임자(壬子;1312)년 봄에는 육안산(六安山)에 암자를 지었고, 가을에는 배를 타고 동해주(東海州)로 갔다. 이듬해 계축(癸丑)년에는 개사(開沙)에 배를 정박시키고, 정수(定¿)스님을 대각사(大覺寺)로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환산(環山)에 가 머물렀다.
 연우(延祐) 연간 갑인(甲寅;1314)년 봄에는 다시 사자원(師子院)의 일을 맡았다. 이듬해 을묘(乙卯)년에는 대와(大窩) 땅에 암자를 지었고, 병진(丙辰;1316)년 봄에는 당뇨병이 생겨 고생하였다. 그 해 여름에는 남심(南¡)에 배를 정박시켰다.
 정사(丁巳;1317)년에는 단양(丹陽) 땅의 대동암(大同庵)에서 거처하였다. 그 이듬해 무오(戊午)년에 다시 천목산으로 되돌아 왔다. 기미(¿未;1319)·경신(庚申;1320)에서 지치(至治) 연간의 신유(辛酉;1321)·임술(壬戌;1322)에 내 나이 60 세가 되었다. 이 해 여름 중최산(中崔山)에 암자를 지었다. 출가했던 병술(丙戌;1286)년에서 60 세가 되던 임술(壬戌;1322)년까지 37 년간의 생활을 모두 고백하고, 허깨비같은 자취를 멀리 이끌고 가서 인연을 피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처음 발심하여 출가했던 뜻은 초의(草衣)에 때묻은 얼굴로 두타행(頭陀行)을 익히며 농사꾼의 옷을 입으려 했는데, 결국 종신토록 부끄러움을 안게 되었다. 또 문자를 주물렀지만 학문을 완성하지도 못했고, 참구했지만 깨달아 밝히지는 못했다. 평소에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칭찬했던 것은 보연(報緣)의 우연일 뿐이었다. 항상 은퇴하여 쉬는 것을 흠모했을 뿐이고, 세상을 바로잡거나 세속의 일을 끊지도 못하고 앉아서 신자들의 시주만 받아먹었으니 위태롭고 불안할 뿐이다. 
 옛 사람은 나이 50이 되어서 지난 49 년간의 잘못을 알았다고 했다. 지금 나는 60이 되어 지난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대개 헛된 알음알이에 가리웠던 세월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치에 합당한 것인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浮光〕와 환영(幻影)은 잠깐 사이에 변한다. 이러한 나의 회포를 글로 써서 스스로를 경책하려 한다.

東語西話 續集 上


별전인 선은 교와 다른가 ?
 
 1년이라는 세월의 단위가 없었더라면 긴 시간의 변화를 측정할 수 없고, 마음이 아니면 갖가지의 현상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1년은 춘·하·추·동의 4계절로 분명히 구별되지만, 1년이라는 세월과 별개로 4계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돈(頓)·점(漸)·편(偏)·원(圓)이 이치상으로 보면 분명히 구별되지만 한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 한 해〔歲〕는 제 스스로가 춘·하·추·동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나 4계절의 질서는 한 해를 이룬다. 이처럼 마음은 돈·점·편·원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 4교(四敎)는 그 마음을 드러내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차별을 떠나서 달리 동일함이 있지 않으며, 동일함을 떠나서 달리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별에 상즉(相卽)한 동일함이므으로 넷이 하나를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고, 동일함에 상즉한 차별이므로 하나가 넷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에 동일한 측면만 있다면 교화의 방편을 철저하게 하지 못할 것이고, 다만 차별적인 측면만 있다면 그 근본자리에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함과 차별은 개별적으로 볼 때는 서로 양립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근본자리와 그 방편을 나누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달마의 선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여래가 본래부터 품고 있었던 내용을 그대로 모두 드러낸 것이다. 선사들이 비록 교외별전이라고 하지만, 어찌 교(敎) 밖에 과연 다 전하지 못한 법이 따로 있어서 달리 전했을리가 있겠는가? 만일 따로 전할 그 무엇이 있었다면 외도(外道)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따로 전할 것이 없었다면 허망한 소리를 지껄이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한마음과 4교(四敎)의 관계로써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달마의 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몇마디 하겠다.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시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일곱 걸음을 걸으셨읍니다. 이 행위는 어떤 교의(敎義)에 속하는가? 바로 이것이 별전(別傳)을 처음으로 분명히 보이신 것입니다. 어찌 최후에 꽃 한 송이를 가섭에게 보이시고 난 뒤 비로소 별전을 전했겠읍니까? 중간 49년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그대로 방편을 버리게 한 일 등은 모두가 별전의 종지(宗旨)입니다. 그러니 어찌 사바에 출현하시자마자 일곱 걸음 걸으신 것과, 입멸하실 때 꽃 한 송이 든 것만이 별전이겠읍니까? 이른바 별전이란 교(敎)에 따로 존재하는 선(禪)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 밖에 따로 있는 법도 아니고, 언어와 문자를 떠난 밖에 따로 언어로써 허용하지 못할 비밀스런 삼매(三昧)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치 밖에 따로 이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괜히 할 일 없이 고의로 이 말을 지어낸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음만을 보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을 의지하여 가르친 것은 한 법일 뿐입니다. 어떻게 이른바 따로〔別〕라는 것이 있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의 본체는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경험적인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내지는 일체의 모든 형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읍니다. 그렇다고 비록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언어가 아니면 가르침 자체를 세울 수가 없으며, 경험적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경험적 지식이 아니면 그 가르침을 전할 수 없으며, 논리적 사유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사유가 아니면 그 가르침에 도달할 수 없으며, 문자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문자가 아니면 그 가르침을 체계화시킬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언어와 문자 등이 바로 가르침〔敎〕이며, 그것을 떠난 것이 교외별전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교(敎)는 마음을 언어와 문자로 밝힌 것이며, 교외별전은 언어와 문자를 뛰어넘어 마음 그 자체에 오묘하게 계합하는 것입니다. 가령 언어와 문자 밖에 따로 다른 뜻이 있다면 경전에서 `모든 법이 고요히 멸한 모습은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 이 법은 사량분별로써는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나 문자 등으로는 정말 여래의 마음에 계합할 수 없읍니까?"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읍니다. 왜 이런 말을 듣지 못했읍니까?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설법을 시작하여 입멸하신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러니 일대장교(一大藏敎)를 어찌 언어나 문자 등으로 말할 수 있겠읍니까? 실로 여래의 본 뜻을 통철하게 깨닫지 못하고 그저 언어나 문자에 집착한다면 진정한 교(敎)가 아니며, 그렇다고 문자가 쓸모없다고 고집한다면 그것도 참된 선(禪)이 아닙니다. 걸핏하면 유(有)·무(無)의 사이에서 집착하는 것은 교(敎)와 선(禪)에서도 모두 배척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교외별전이라는 것은 바로 선(禪)을 두고 하는 말인데, 선이란 한 마음의 다른 명칭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人)·천(天)의 2승(二乘)들이 수행하는 4선 8정(四禪八定)의 선에서는 반드시 육신을 마른 고목처럼 하고 마음을 죽여 알음알이를 없애고 식(識)을 끊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달마스님의 곧바로 가리킨 선〔直指之禪〕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선의 본체는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과도 같읍니다. 상근기로서 숙세의 업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어 방편을 쓰기 전에 미리 알며, 말 밖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경험과 사유 등을 가지고 털끝만큼이라도 알음알이로 알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배 위에서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서 그 위치를 뱃전에 표시하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칼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에 무슨 도움이 되겠읍니까?
 멀리 달마스님으로부터 계속 전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문자나 형상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지극한 이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별전이라는 말은 실로 의미있다고 믿을 수 있읍니다. 종합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선(禪)은 문자를 떠난 교(敎)이며, 교는 문자가 있는 선입니다. 선과 교에 한 털끝만큼이라도 공통점을 찾으려 해도 결코 찾지 못하는데, 더구나 무슨 구별이 있을 수조차 있겠읍니까? 다만 구별되는 점은 교화의 방편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단단한 얼음과 한 여름날의 뙤약볕이 하루한날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읍니다.
 
방편은 깨달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가 ?
 
 약을 먹었다고 해서 모든 병이 반드시 치료되는 것도 아니고, 병이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약을 쓰느냐 마느냐 혹은 목숨을 구하는가 못 구하는가는 의사의 잘잘못에 달려있을 뿐이다. 실로 건강의 요체를 체득하여 추위로써 추위를 물리치고 더위로써 더위를 물리친다면, 건강을 더욱 실하게 해서 그 허(虛)한 것을 더더욱 허하게 하는 오류는 없을 것이다. 그 요체를 체득하지 못하여 혹 털끝만큼이라도 약을 잘못 투여한다면,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도리어 약 때문에 죽게 된다.
 이 세상에 노의(盧¿)와 편작(扁 )처럼 훌륭한 의사가 없었더라면 수만금의 가치가 있는 신약(神藥)이라 해도 오히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약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이로움과 해로움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부처님을 3단계의 대의왕(大¿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오로지 최고의 신령한 약으로써 법신(法身)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증세에 따라 방편을 쓸 경우에 순(順)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역(逆)으로 시술하기도 하면서 자유자재하게 치료해주신다. 세간에서 말하는 어떠한 신성공교(神聖工巧)라도 부처님에게는 비교될 수 없다.
 나는 그 뒤로 「원각경」을 열람했었다. 문수보살이 처음 부처님께서 수행했던 인지(因地)에 대하여 질문하자, "영원히 무명을 끊어야만 불도(拂道)를 이룰 수 있으리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보현보살이 몸과 마음이 모두 허깨비인데 어떻게 이 허깨비인 몸으로써 허깨비인 무명을 없앨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하자, "응당히 허망한 경계를 모두 없애야 하나니, 아주 없애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간직했기 때문에 마음이 허깨비같다는 생각조차도 없어져야 되며, `허깨비를 아주 없애버린다'는 생각마저도 또한 멀리 여의었다는 그 생각까지도 또한 없애서 더 이상 없앨 것이 없게 되면, 허깨비도 없어지게 되리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보안보살이 수행의 차례를 질문하자, 부처님께서는 "먼저 여래의 사마타행(奢摩他行)에 의지하여 계율을 잘 지키고, 여러 대중과 함께 수행하며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서 4대(四大)와 6근(六根)·6진(六塵)이 허망하게 화합하여 이 몸이 되었다고 두루 관찰하여야 한다. 마음·육근·육진과 허깨비가 함께 소멸하면 모든 곳이 다 청정하리라" 하셨다. 그러자 또 미륵보살이 불보리(佛菩提)를 닦는 차별이 몇 종류나 되는가에 대해 묻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생사를 해탈하여 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탐욕을 끊고 애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 청정혜보살이 범부와 성인이 증오하고 체득하는데에 어떤 순서〔漸次〕와 차별이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자, "모든 장애가 바로 구경각(究境覺)이며, 바른 생각을 얻거나, 잃거나 해탈 아님이 없다"고 하시며, "또한 항상 어느 때에라도 허망한 생각을 하지 않고, 허망을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아야 하느니라"고 답변하셨다. 또 위덕자재보살이 모든 방편과 수행하는 사람의 종류를 질문하자, "세 종류의 청정한 관(觀)을 닦아야 한다. 말하자면 적정사마타(寂靜奢摩他)와 여환삼마발제(如幻三摩鉢提)와 적멸선나(寂滅禪那) 등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또 변음보살이 원각법문(圓覺法門)을 몇 가지로 수행해서 닦아야 하는가에 대해 묻자, "25종 청정묘륜(二十五種淸淨妙輪)으로써 앞에서 말한 3관(三觀)을 홑으로 또는 겹으로 닦아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정제업장보살이 본성은 청정한데 어찌하여 더러움에 중생들이 물들었는가에 대하여 질문하자, "4상(四相)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고 대답하시고 또 "오로지 정근하여 번뇌를 항복받고, 대용맹을 일으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끊지 못한 것은 끊게 해야 한다"고 답변하셨다. 원각보살이 어떻게 안거하며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수행해야 되는가에 대해 질문하자, "세 기간을 세워서 간절하게 참회를 하고, 다시 3종정관(三種淨觀)으로 낱낱의 일을 모두 배워야 한다"고 답변하셨다.
 이상은 모두가 대비(大悲)하신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들에게 널리 고하신 것으로 깨달음의 본체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선견(善見)이며 묘약이다.
 무엇 때문에 유독 보각보살의 질문에 답변한 보각장(普覺章)에서 네 가지 병통〔四病〕을 지적하였겠는가? 즉 작(作)·지(缺)·임(任)·멸(滅)을 병통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바 선견신약(善見神藥)도 결국은 모두 이 네 가지 병통〔四病〕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허깨비를 멀리 떠나버려야 한다'는 데서부터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3기(三期)를 건립해야 한다'는 등까지의 부처님 말씀이 어찌 작(作)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선적으로 탐욕을 끊고 애욕을 제거해야 한다'는 부분부터 `고요한 방에 단정히 앉아 사마타행을 닦아야 한다'는 등까지는 어찌 지(缺)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런가 하면 `일체의 장애가 바로 구경각(究竟覺)이다'에서부터 `모든 허망한 마음도 쉬거나 소멸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등의 말씀이 어찌 임(任)이 아니겠는가? 또 `무명(無明)을 영원히 단절하고'에서부터 `4대(四大)·6근(六根)이 허망하게 화합했다가 허깨비와 함께 소멸한다'는 등까지가 어찌 멸(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법신(法身)이 5도(五道)에 유전하여 중생이 된 까닭은 안으로 3독(三毒)에 훈습되고, 밖으로는 4전도(四倒)에 미혹했기 때문에 끝없는 생사의 바다 속으로 굴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래께서는 3독·4전도를 지적하여 병통이라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작·지·임·멸(作·缺·任·滅)을 병통으로 한 까닭은 무엇인가? 또 작·지·임·멸이 원래 원각(圓覺)의 문턱에 나아가는데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역시 성도(聖道)를 깨닫는 순서이기는 하다. 3독과 4전도에 비교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치가 비록 성인의 말씀이지만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이 의심을 여기에서 풀어보여 주겠다.
 이런 소리 듣지 못했는가? `한 때에 부처님께서 신통대광명장(神通大光明藏)에 들어가사 삼매(三昧)를 그대로 받고 있으셨으며, 그 때에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동일하였고 아래로는 중생과 10법계(十法界) 가운데 유정(有情)·무정(無情)들과 동시에 함께 들어갔나니라'하는 얘기를.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앉은 자리에서 잠시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바로 거기에는 주인〔主〕도 짝도〔伴〕없고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구별도 없고, 몸과 마음이 혼융하여 하나가 되며 성(性)과 상(相)이 평등하다. 그러나 스무 명의 대사(大君)는 경(境)과 지(智)를 모두 없애버리지 못하고 질문을 하여 시시비비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대원각(大圓覺)에 의거하여 그들의 질문에 따라서 어떻게 수행하고 깨달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말씀하시니 곧, 작·지·임·멸을 두루두루 가르쳐서 약으로 삼았다. 그러나 보각장(普覺章)에 와서는 앞에서 말한 내용을 수습하고 현묘하게 창도하려고 작·지·임·멸을 모두배척하여 `병통'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병통'이란 한 말로 취사(取捨)를 모두 부정해버렸다. 
 긍정할 줄만 알고 부정할 줄은 모른다면 문답을 서로 주고받느라고 원각을 혼동할 것이고, 부정만 알지 긍정할 줄을 모른다면 그저 부정만 하느라고 원각을 잃어버릴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긍정 또한 약이며, 부정 또한 약이라는 사실이다. 긍정해주는 것이 약이 된다 함은 3독·4전도의 정병(正病)을 치료한 것이고, 부정(不定)하는 것이 약이 된다 함은 작·지·임·멸의 조병(助病)을 다스린 것이다.
 세상에서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였느냐? 일반적으로 처음 정병(正病)에 감염된 때에는 처방을 내려 치료하다가, 급기야는 투여했던 약을 지나치게 고집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이로 인해 처음 감염된 정병(正病)은 병으로 여기지 않게 되고 도리어 약 자체가 병통이 되어, 끝내 어떻게 치료해 볼 도리가 없게 된다. 약이 도리어 병이 된 것은 어지간한 의원은 치료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을 분명히 알야야 한다. 작·지·임·멸이란 약 때문에 생긴 병의 근원을 여래께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셨다면, 그 누구라서 그 병통을 지적해낼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알아라. 각(覺)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허망을 깨닫는 각(覺)은 일체의 구염(垢染)과 세간·출세간의 갖가지 견문진습(見聞塵習)을 치료하는 것이며, 각(覺)의 본체는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구별을 떠났고, 자취로는 자(自)·타(他)가 없어져 색(色)과 공(空)을 모두 녹여 없애고 능(能)과 소(所)를 둘 다 잊었다. 고금에 이르기까지 두루 밝고 고요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그 사이에 한 티끌도 없으며 마주 보는 자체는 원만 청정하다. 보리·열반·진여·반야라 해도 이 경계에 오게 되면 모두 병통이 되고 만다. 그러니 어찌 작·지·임·멸이 병통이 아닐 수 있겠는가.
 
교화의 성쇠는 무엇에 달렸는가 ?
 
 선한 행동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행동을 하면 재앙을 입으며, 올바르게 행동하면 도에 합치하고 삿된 행동을 하면 업(業)을 짓는다. 이 이치는 너무도 분명하여 마치 흑색과 백색을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진여의 청정한 경계에는 애초에 선·악·사·정(善惡邪正)이 없었는데, 모두가 한 생각이 홀연히 일어날 때에 관조(觀照)를 잃었기 때문에 부득불 있게 된 것이다. 선·악·사·정이 있기 때문에 3계(三界)의 번뇌가 생각생각에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성(成)·주(住)·괴(壞)·공(空)이 순환하여 그치질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비심을 내어 교화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 하다가 끝내는 선도 잊어버리고 도에 합치되게 했으며, 또한 삿됨을 버리고 올바름에 돌아가게 하다가 끝내는 그 올바름마저도 잊어버리고 마음에 회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고 3계가 텅 비며, 한 티끌도 요동하지 않고 번뇌가 다 없어져 다시 본제(本際)로 되돌아가 근원을 투철하게 깨우치면, 교화의 방편마저도 저절로 없어져 버린다.
 악을 버리면 육친의 은혜와 사랑을 끊고 이익과 명예를 멀리하여 번뇌를 벗어나 탐욕이 사라진다. 삿됨을 버리면 물(物)·아(我)가 평등해지고 시비가 끊어져 경험적 지식이 사라지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어지며, 선을 따르면 계율을 지키고 선나(禪那)를 닦아서 공적한 깨달음에 나아간다. 올바름으로 돌아가면 법의 근원을 분명히 깨달아 진제(眞諦)를 통철하게 밝혀 불심(佛心)에 계합하여 성도(聖道)를 이룬다. 나아가 사(邪)·정(正)·선(善·악(惡)이 모여 일념(一念)으로 되돌아 가면, 항상 상대의 근기를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어서 뭇 중생을 두루 제도한다. 그러면 그저 손 가는대로 하더라도 하는 일마다 오묘한 작용 아닌 것이 없다. 중생의 서원을 따르고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며, 손과 눈 등의 몸 전체에 이르기까지 한 기연도 드러내지 않고 왕성하게 작용하나 조금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며, 손끝하나 까닭하지 않고 오가는 모든 행동에 구속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교화하시는 근본 뜻이다. 뭇 종파와 각기 다른 가르침이 각각 다른 가풍을 세웠다 하더라도 모두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부처님께서 건립하시고 그 뒤로 조사들께서 서로 불법을 계승하면서부터 크고 작은 가람들이 곳곳에 분포하게 되었다. 한 지방의 어른노릇 하는 자로써 혹 선악이 뒤바뀔 경우 화·복의 기미는 생각을 따라 메아리처럼 호응한다. 안으로 자기의 덕을 갈무리하고 밖으로 널리 교화를 펴려면 이 점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된다.
 알음알이는 뛰는 말처럼 쉽게 일어나고 정(情)은 원숭이처럼 움직이길 좋아하여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현이 예법을 제정하고 법도를 만들어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매우 미세한 번뇌를 미리 방지하여 그것이 점차적으로 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가령 작은 번뇌를 막을 줄 모른다면 그 많은 집착을 어떻게 구제하겠으며, 점차적으로 커지는 번뇌를 막을 줄 모른다면 담박에 생기는 번뇌를 수습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것은 마치 물과 불이 미세하고 점차로 커지려고 하는 시초에 방지한다면, 결코 물이나 불 때문에 산이 무너지고 들판이 모두 불타버리는 지경에까지는 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승(萬乘)의 권세를 버리고 필부가 주는 갖은 욕을 달게 받았으며, 속세의 엄청난 부귀를 모두 버리고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서 옷과 음식을 구걸하였다. 궁실의 화려함을 잊어버리고 한 몸뚱이를 그저 초목 아래에서 굴렸으며, 부모와 처자와의 관계가 매우 귀중하지만 그것을 모두 끊고 갖은 고생을 몸소 겪으셨다. 이렇게 행동하신 이유는 가없는 중생들이 한량없는 욕심덩어리가 알음알이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 단번에 제압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애통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고쳐주려고 세간에 화현(化現)하신 것이다. 실로 작은 상태일적에 방지하고 점차로 커지려는 길목을 막는 대지(大旨)라 하겠다.
 교화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는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과 욕심의 사이에서 결정된다. 가령 도덕을 잘 지키면 교화가 잘 되기를 억지로 바라지 않아도 잘 되고, 반대로 욕심을 부리면 교화가 안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잘 안된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불조(佛祖)께서 성대하게 교화를 펴신 뒤로부터 세월이 차츰 흘러 점점 중생들의 근기가 쇠퇴하게 되자 마침내는 도덕마저도 점점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흘러 세상사가 변화하는 동안에 탐욕과 망령된 행위들은 나날이 더해가 욕심은 더더욱 많아졌다.
 도덕과 욕심과의 관계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즉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고, 물과 불이 같은 그릇에 담길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수도하는 도량에서 단정하게 거처하면서도 작은 욕심들을 막을 줄 모르는 것은 참으로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서로서로 욕심을 부리고 이익으로써 서로서로를 유혹해서야 되겠는가?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게 여긴다면, 바싹 마른 불쏘시개에 횃불을 던진 것과 다름없다. 경계(境界)의 바람이 매일매일 부채질하여 재앙이 갑자기 일어나는데도 도리어 근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교화가 저절로 되기를 기다리는 자는 마치 그물 속에 바람을 채우려는 것처럼 어리석을 뿐이다. 참으로 불쌍하구나!

선가에서는 왜 의미 없는 말들을 사용하는가 ? 
 
 세간에서 쓰이고 있는 말과 언어는 그것이 마음 속에서 발동하여 입으로 나오면 말한 사람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서 의미 없는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부드럽고 좋으면 그 말도 화기롭고 온화하며, 반대로 증오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말 또한 거칠다. 또 노하면 그 말은 절박하면서도 원망스러우며, 마음이 순조롭고 너그러우면 그 말 또한 자재하면서도 이치에 알맞게 되고, 마음 속에 무언가 뽐내고 꾸미려 하면 그 말은 직접적이지를 못하고 번지르하고, 속되고 촌스러우면 그 말은 소박하지만 졸렬하다. 이것은 모두 언어이 겉모습이다. 그러므로 말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면 먼저 그 겉모습을 관찰해야 하다. 또 겉모습을 통달하고 나면 결국 그 마음의 감정을 알게 되고 나아가 그 말의 의미를 따져볼 수 있다.
 이른바 의미〔義〕는 감정에 맞는 것을 의식이 주재하여 언어로써 선포한 것이다. 대체로 언어란 감정이 반연한 의미를 모사하여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실로 감정이 미치지 못하고 알음알이가 적용되지 못하면 종일토록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한다 해도, 한마디조차 어떻게 해낸 것이 없다. 이런 것이 어찌 사람의 말에만 해당하는가? 거위가 울고 까치가 울고 개가 짖고 닭이 우는 등등의 일까지도, 감정을 가진 존재들이 한 번 소리를 내었다 하면 그 속에는 반드시 주장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다만 인간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겉으로 나타난 음성이 있는데 그것의 의미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불조의 도(道)는 이와는 다르다. 부처님이 탄생하시자마자 손으로는 하늘과 땅을 각각 가리키고 앞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부터 영취산에 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실 때까지, 그 사이에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백만억의 대중들이 모두가 신통스런 성인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또 사고했어도 끝내는 부처님의 뜻을 겉껍질조차도 헤아리질 못했다. 그러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꽃을 보고 미소지었을 뿐이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중국으로 건너와서는 양종5파(兩宗五派)가 하늘의 별과, 바둑판처럼 온 세상에 분포되었다. 그리하여 선(禪)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수미산(須邇山)이다", "이 무엇인고?" "동해 바다 속의 잉어를 한 몽둥이로 때려잡아라" "신부는 노새를 타고 시어머니가 이끌고 간다" "나에게 선판(禪板)을 가져오너라", "이 밥통아 강서(江西)의 호남(湖南)으로 꺼져라"는 등등의 대답이 흉흉하게 끊임이 없었다. 이는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이를 맛보려 하면 마치 나무로 만든 국과 무쇠 못으로 만든 밥과 같았다. 그리고 가까이 하려 하면 취모검(吹毛劍)이나 불무더기와 같아서 가까이 할 수도 없으며, 눈으로 보려 하면 번득이는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았으며, 귀로 들으려 하면 독을 바른 북이나 가문 땅 위에 내려치는 우뢰소리와도 같았으며,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가시덤불과도 같으며, 뚫으려 하면 마치 무쇠로 된 장벽과 같았다. 그렇다고 말로는 물론 말없음으로도 알 수 없으며, 지식으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뭇 귀신들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의미없는 말〔無義語〕이라 한다.
 의미가 없는 말은 희노애락의 범주를 초월하였고, 알음알이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러니 어떻게 경전의 문자와 나아가 성인이니 범부이니 하는 단계 따위로 깨달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애석하다. 참선하는 납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되는 대로 이 소리 저 소리 하고 자기 멋대로 착각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놓아주었다", "이는 파정(把定)이다" "이는 곁에서 두들겼다" "이는 가만히 쳤다", "이는 상대를 더듬어 보았다", "이는 긍정하고 허락했다", "이는 향상향하(向上向下)이다", "이는 전제반제(全提半提)다", "이는 빈가주가(賓家主家)다", "이는 사구활구(死句活句)다", "이는 상량평전(商量平展)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이 말은 최초와 최후이다", "이는 칼끝을 숨기고 관문을 꿰뚫었다", "이는 살인하는 칼, 혹은 사람을 살리는 칼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심한 사람들은 경교(脛敎)에서 억지로 이끌어다 말하기를, "이것은 색(色)에 나아가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의탁하여 이치를 나타냈다. 또 이는 말을 하여 말없음〔無言〕을 나타냈고, 무언으로 말있음〔有言〕을 나타냈다. 이것의 눈은 동남쪽을 관찰하지만 뜻은 서북쪽에 있다. 이는 위음왕불(威踵王佛) 저쪽 공겁(空劫) 이전으로서 티끌만큼 차이도 없이 완전히 자기에게로 되돌아간다"라고들 한다. 이와 같은 이단(異端)의 잘못된 말들은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 알음알이에 한 번 빠졌다 하면 모두가 의미 있는 말〔有義語〕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하겠다.
 가령 불조의 도가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말〔有義語〕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생사망정(生死妄情)의 뿌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른바 반딧불을 모아서 수미산을 불태우고 조개껍질을 가지고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이라 하겠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선가의 의미 없는 말〔無義語〕을 나는 압니다. 불조께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전한 교외별전(敎外別傳)에 어찌 의미 있는 말〔有義語〕이 있겠읍니까! 다만 그때 그때의 기연에 감응하여 중생을 제접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때에 따라 높이 휘두르고 크게 문지르기도 하면서 서로 문답한 것이 굉장히 많아서 그에 따르는 말씀이야말로 티끌처럼 많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잘못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가 제일가는 뜻〔第一義諦〕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말 속에 있지 않읍니다. 그러니 어찌 향상(向上)이니 향하(向下)이니 분분히 말할 수 있겠읍니까? 의미있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것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말은 50(五十步)보로써 100보(百步)를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그대가 향상(向上)·향하의 귀절에 떨어지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대가 말한 제일가는 뜻〔第一義諦〕은 의미 있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가 듣기로서는 달라붙은 것을 분해시키고 결박을 제거하며〔解粘去縛〕, 못을 뽑고 문설주를 뽑아버려라〔抽釘拔楔〕한 말들도 결국은 언어 문자를 의지하여서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령 불조의 말이나 언어에 그 의미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들이 나왔겠읍니까?"
 나는 대답했다.
 "그대의 이 말은 진실에 약간은 가깝다고 하겠읍니다. 그대는 이 의심을 가슴 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여 오래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희론만 더할 뿐 도(道)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마음이 있으며 마음에는 감응하는 작용이 있읍니다. 선이란 마음이며 기(機;방편)란 마음이 감응할 대상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여러 대중에게 보여주시고 소림사에서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팔뚝을 잘라 바친 이후, 역대의 조사들께서 이 마음만을 오로지 전하여 그 메아리가 천고에 울렸읍니다. `선이란 이런 것이다' 혹은 `방편〔機〕이란 저런 것이다라'는 등등의 말은 어느 한 때도 없었던 적이 없었읍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들이 억지로 꾸며내느라고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구나 종문(宗門)이 건립된 이래로 이른바 목상좌(木上座)·금강권(金剛志)·암호자(暗號子)·파사분(破沙盆)·청주삼(靑州杉)·낭생고(娘生袴)·삼각려(三脚驪)·별비사( 鼻蛇)·무미반(無味飯)·불습갱(不濕羹)과 5군신(五君臣)·4빈주(四賓主)·3현9대(三玄九帶)·10지중관(十地重關)·방하착(放下着)·시십마(是什 )·막관타(莫管他) 등에 이르기까지 4방 8면에서 우뢰가 진동하듯 호호탕탕하게 전후로 나타나 서로 응하니, 일일이 그것을 다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빠르기는 날으는 화살촉을 물어뜯는 것보다 신속하고, 예리함으로 말하자면 취모검(吹毛劍)도 둔하며, 독하기는 먹으면 죽는 짐주( 酒)술과도 견줄 수 없읍니다. 그 훌륭한 맛은 고깃국과도 비교할 수가 없어 화려한 비단 위에 꽃을 수놓은 격이며 최고로 맛난 음료인 우유와도 같읍니다. 근엄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임하였고 큰 평상에 걸터앉았으니, 바람이 불면 귀신 소리가 우주에 퍼집니다. 기침하고, 침뱉고, 팔을 휘젓고, 노하여 꾸짖고, 희롱하여 웃는 일 등을 가리켜 모두 선기(禪機)라 한 것에는 까닭이 있읍니다. 유가(儒家) 경전에서 말한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면 드디어 마음에 통한다(寂然不動 惑而遂通)'는 말은 불가의 선기와 비슷한 듯도 합니다.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중지시킬 그 무엇이 있어서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태가 본래 밝고 고요하여 태허공(太虛空)같은 것으로서, 이는 천리(天理)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응하여 만사에 통한다'는 것은 한 털끝만큼이라도 의식적으로 바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응하여 마음에 통할 때, 마치 큰 종을 두들기면 빈 골짜기에 소리가 울리듯이 인위적인 작위도 조작도 없이 이치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맑은 거울에 온갖 물체가 비치고, 밝은 구슬에 5색이 나타나는 것과도 같읍니다. 선(禪)은 이러한 거울이나 구슬이며, 기(機)는 비춤이거나 나타남입니다. 온갖 물체의 곱고 추함과 5색의 여ㅌ고 진함이 너무도 분명하여 자신을 감추지 못한다고는 하나, 거울과 구슬이 무엇을 인위적으로 비추려 하였겠읍니까? 한 것이 있다면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맑은 그 자체의 효과일 뿐입니다. 여기에 계합하는 것을 선기(禪機)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대의 알 바가 아닙니다"
 어떤 이가 물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읍니다. 그렇다면 유정계(有情界) 안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산업(産業)과 세상을 다스리는 말〔言語〕이 모래알처럼 많읍니다. 그 원인은 마음 때문이지, 선기(禪機)라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읍니다. 그런데 유독 소림문하에서 묻고 참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만이 자기 멋대로 명칭을 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해 말했다.
 "마음에는 진(眞)·망(妄) 두 종류가 있읍니다. 진심(眞心이란  영지(靈知)의 본체로서, 오묘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추측이 불가능합니다. 망심(妄心)이란 알음알이 허깨비가 작용한 것으로서, 외물(外物)을 쫓는 자는 이 망심대로 움직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저 모두 마음이라고 부르지만, 진심과 망심이 하늘과 땅 차이인 줄을 모릅니다.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산업은 망심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진심은 부처님과 조사만이 정인(正因)을 단련하여 지혜로 사무치고 신령하게 깨달았읍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갖가지의 차별세계와 시비 속에서도 오묘하게 부합하고 은밀하게 계합하셨읍니다. 수증(修證)을 완전히 초월하여 공훈(功勳)에 구애되지 않으며, 경험적으로 얻은 지식에도 포섭되지 않읍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행의 단계가 있겠읍니까? 이른바 `대도(大道)에 통달함이여! 알음알이를 뚝 끊어 초연하구나!'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에 간 사람을 조사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알음알이에 의존하여 속세의 번뇌에 얽매여 있는 자들과 같이 취급할 수 있겠읍니까?
 아직 그 진심을 통달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수행하는 것도 괜찮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령 사유(思惟)를 조작하여 참선하는 집 안에 살면서 허공을 바라보고 짖고 흙덩이를 좇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이런 사람은 오히려 세속에 내려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산업에 종사하여 돈을 버느니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저 자신도 이익이 없을뿐 아니라, 앉아서 법을 비방하는 허물도 짓게 됩니다. 선기(禪機)가 왜 사람에게 누를 끼치겠읍니까? 사람이 진심을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도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꼭 살펴야 합니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뜻은 무엇인가 ? 
 
 조주(趙州;778∼897)스님이 남전(南泉;748∼834)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도입니까?"하자, 남전스님이 "평소의 마음이 도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대화의 내용이 종림에 널리 퍼졌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 말 때문에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은 자가 드물다. 모두들 말하기를 "옷 입고 밥 먹는 동정어묵(動靜語默)이 한결같이 본래의 참모습이다. 이 본래의 참모습을 떠난 밖에서 사량분별로 헤아리면, 벌써 평상(平常)이 아니다"라고 말들 한다. 옛 사람이 `평상심이 도이다'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분부할 때는 일체가 평상한 것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불법(佛法)과 세간법(世間法)은 모두 그 자체에는 힘이 없는 것이니,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장졸수재(張拙秀才)가 말한 `세상의 인연을 그대로 좇아서 걸림이 없으니 열반과 생사가 모두 헛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이것이 평상심이라고도 한다. 혹은 방거사( 居君)가 말한 `매일 일어나는 일이 별다를 것이 없고, 내 스스로 우연히 함께 할 뿐이다'라고 한 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하고, 3조(三祖)가 말한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는 것을 미워할 뿐이다'라고 한 말들을 인용하여 그것이 평상심이라고 한다. 또한 마조스님이 말한 `색(色)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보며, 색이 없으면 마음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하고, 고덕스님이 말한 `푸른 대나무는 진여(眞如)이고, 누런 국화는 반야(般若)이다'고 한 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 본래 갖추어져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떠나지 않은 내용이기만 하면 모두 평상심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알음알이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남전스님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위로부터 고인들도 이 속에서 머뭇거린 것이 아니었다. 조주스님이 아직 묻지도 않았고, 남전스님이 채 대답하기 전에 직접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 생각이라도 내어 어묵동정(語默動靜)을 따라 알음알이를 일으키려고 머뭇거린다면 결코 평상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옛 사람들이 중생을 교화했던 방편으로 한 말들을 이끌어다가 평상심의 증거로 삼는다면 더더욱 절벽이 만 리나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바로 지금 사물을 마주하고 경계를 만나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평상심이다'고 하며, 혹은 `생각을 내어 알음알이를 움직여도 모양다리에 매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평상심이다'라고 하며, 혹은 `유와 무의 간격이 없어 보고 들음이 혼융하면, 이것이 평상심이다'라고 하며, `추우면 옷 입고 더우면 부채질하는 것이 평상심'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번거롭게 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그대로 완전한 본체로써 진실하며, 미세한 말·거친 말이 모두 제일가는 뜻〔第一義〕이니, 이것이 평상심이다'라고도 한다. 혹은 `옛 사람이 통렬하게 방망이질 하고, 목이 터져라고 꾸짖고, 기연(機緣)에 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을 말하신 것이 평상심이다'라고 한다. 그밖에도 갖가지 작위(作爲)와 갖가지 사상과 갖가지 자잘한 일들도 평상심과 흡사하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 귀를 막아 방울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어 스스로 속임수만 더할 뿐이다. 아무리 현묘한 성인의 말씀이라 해도, 또 오묘한 이치의 참된 말씀이라 해도 모두 평상심과는 상응(相應)하지 못한다. 그런데 더구나 미혹된 탐망(貪妄)과 전도된 알음알이로써 조금이라도 평상심에 계합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평상심은 알음알이에도 속하지 않고, 이해해서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화해영락(和解領略)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해(知解)에 걸려서야 어떻게 평상의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 설산(雪山)에서 부처님께서 밝은 별을 보았던 것도 이 평상심을 깨달은 것이며, 가섭이 파안미소하고, 2조(二祖)가 세 번 절하며 예를 올렸던 것도 모두 이 평상심을 깨달은 것이다. 태원(太原:?∼1370)스님이 호각소리를 듣고, 영운(靈雲:  )스님이 복사꽃을 보았던 일기일경(一機一境)의 계합과 증오도 모두 이 평상심에 계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오늘 이 평상심과 조금도 간격이 없기를 바란다면, 직접 저 불조께서 홀연히 한 번 돌이켰던 것과 같이 해야 하리라. 그렇게 한다면 손 가는대로 집어들어도 조금도 평상심과 상응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간(眉間)에서 만팔천토(萬八千土)를 비추는 광채와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는 광장설상(廣長舌相)을 드러내며, 개자(遭子)에 수미산을 받아들이고, 털끝에서도 보왕의 나라를 건립하여, 심지어는 불무더기에 몸을 눕히고 도산(刀山)지옥을 활보하는 것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평상심과 상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아가 가없는 중생들이 끝없는 괴로움 속에서 자꾸 미혹되며 여러 가지 장애를 받으며, 무수한 세월을 지내면서도 그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역시 이것도 일찌기 털끝만큼도 이 평상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미혹된 사람은 스스로 차별상을 보지만, 그 차별 가운데에도 이 평상심으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다. 나아가 가없는 중생들은 끝없는 괴로움 속에서 자꾸 미혹되고 여러 가지에 구애되며, 무수한 세월을 지나면서도 그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역시 이것도 평상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스스로 미혹되어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
 남전(南泉)스님은 말하기를, "도는 아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면 허망한 깨달음이며, 모른다면 무기(無記)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이 말씀을 온갖 힘을 다해 잡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에 잘못된 허물이 많은 줄은 알지 못한다. 영가(永圈)스님이 말한 "배움을 끊고 인위적인 조작을 끊은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라고 한 것은 평상심과 조금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배움을 끊었으며, 누가 인위적인 조작을 끊었겠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다.
 멀리서 온 길손이 문앞을 지나다가 나의 몸뚱아리를 가리키며 4법계(四法界)에 대해 물었다.
 "이 몸은 4법계에서 어느 법계에 해당합니까?"
 나는 그에게 조용히 대답하였다.
 "4종법계(四種法界)는 한 마음의 체(體)와 용(用)을 나타내었을 뿐입니다. 소승은 경교(經敎)를 잘 모르므로 내 나름대로 설명해 보겠읍니다. 그러니 이 손의 주장자( 杖子)로 비유해 말하겠읍니다. 겉모양을 보아 주장자( 杖子)라고 하는 것이 사법계(事法界)로 비유해 말하겠읍니다. 겉모양을 보아 주장자라고 하는 것이 사법계(事法界)이며, 모양을 떠나서 성품뿐이면 주장자라고 부를 수가 없으니 이것은 이법계(理法界)이며, 성품과 모양이 둘이 아니면〔性相不二〕 주장자라 부를 때 문득 주장자가 아니며, 주장자가 아닌 상태에서는 본체에 걸림이 없는 주장자이니 이를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라 합니다. 끝으로 한 주장자가 일체법에 들어가 법에 따라 명칭을 붙이지만 끝내 일정한 본체가 없고, 일체법이 나의 주장자로 들어와 똑같이 주장자라고 부르지만 또한 일정한 본체가 없는 것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제망주(帝網珠)와 같읍니다. 나의 한 구슬이 일체의 구슬에 투영되서 들어간다지만 그 본체는 일찌기 분리되지 않았으며, 일체의 구슬이 나의 한 구슬에 비쳐 들어와도 그 본체는 일찌기 합치하지 않았읍니다. 서로 들어가고 서로 포섭하여 이지러짐이 없고, 서로 부정하고 서로 융합하면서 간격이 없읍니다. 이것은 마치 영가스님께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본성에 들어오니 나의 본성이 다시 여래와 함께 합한다. 달 하나가 모든 강물에 두루 나타나니, 물 속의 모든 달이 달 하나에 포섭된다'고 하신 것과 같읍니다.
 법계의 명칭을 드넓게 말하면 만 가지로 다르나 대략 말해보면 넷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실제는 넷도 아닙니다. 확연하게 자기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 경지가 법계의 모양과 원융하여 하여 하나를 고집하지 않고 일체를 말하며, 일체를 떠나지 않고 하나를 지킵니다. 이것은 이치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으로서, 신통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프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허망하게 색신(色身)을 고집하여 나〔我〕라 하고 갖가지 탐욕을 일으켜 사(事)에 장애되어 3계(三界)에 결박되니 해탈에 기약이 없읍니다. 성문들은(色)에 나〔我〕가 없다는 것을 관하기는 했지만, 다만 공(空) 그 자체에 막혀 세간을 멀리 떠나 홀로 해탈을 구하느라고 이(理)에 장애가 되어 부처님의 꾸중을 받읍니다. 그런가 하면 보살승들은 색(色)이 곧 공(空)이며 공(空)이 곧 색(色)임을 분명히 깨닫고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중도(中道)에 안주하여, 이사(理事)를 서로 머금고 홀로 해탈하여 걸림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견해의 집착이 존재하여 오히려 법진에 막혀 있읍니다. 유독 여래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계만은 거울로 거울을 비추듯, 허공으로 허공에 합치듯 합니다. 훌륭한 마니구슬은 모든 색을 갖추었으니 거두면 한꺼번에 거두고, 나타나면 일제히 나타나는 것과도 같아 조작을 용납하지 않읍니다. 그러니 어찌 인위적으로 배치할 수 있겠읍니까? 이것을 두고 공용(功用)이 없는 법문(法門)이라고 합니다. 만 가지나 되는 법계의 모습을 총괄하여 넷으로 귀결하고, 넷을 회합하여 하나로 귀결시키는데, 공용이 없는 가운데서 그 하나마저도 남겨둘 수 없읍니다.
 나의 몸이 4법계(四法界)에 있어서 이치의 자체가 이와 같읍니다. 빼어난 상근기는 기연보다 앞서서 알아차리지만 중·하의 부류들은 부질없이 수고하며 오랫동안 생각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객승은 "아 그렇군요" 하고 물러났다.
 
반야의 정체는 무엇인가 ? 
 
 태말충(太末蟲)이란 벌레는 어느 곳에나 달라붙지만 불꽃 위에는 달라붙지 못하며, 중생의 마음은 곳곳에 반연할 수 있지만, 반야 위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불길에야 원래 붙지 못하겠지만 반야는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유독 반연하지 못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가령 반야에 반연이 불가능하다면 중생이 성불(成佛)한다는 이치도 옳지 않으리라.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중생은 허망에 미혹하여 생사에 타락하여 세간에 오염되어 떠돌고 있다. 알음알이가 불길처럼 솟아오르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 모두가 *변계소집성( 計所執性)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비록 좀 아는게 있다 해도 희론을 이룰 뿐이다. 멀리는 많은 겁을 보냈고 가까이는 금생에 이르기까지 계속 미혹하여 한 번도 쉬어보질 못했다.
 반야는 언어로도 알 수 없으며, 문자로도 알 수 없으며, 심식(心識)으로도 알 수 없으며, 사유로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견문각지의 변계소집성으로 분별하는 갖가지 분별지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그것마저도 모두 멀리 버려야 한다. 바로 이렇게 되어야지만 반야의 자체를 마주보며 성취할 수 있다.
 이른바 반연할 수 없다는 것은 진(眞)과 망(妄)이 각각 성립되어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명(明)과 암(暗)의 두 자체가 서로 합치하여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신통변화가 있다 해도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법에는 다른 모양이 없어서 사념을 요동했다 하면 그릇되며, 이치는 모든 길이 끊겨서 마음을 움직였다 하면 벌써 막힌다는 것은 자못 알지 못했다고 하겠다.
 시방세계에 두루한 것이 반야 그 자체이며, 온 대지가 광명의 깃발이다. 한 티끌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원만청정하지만, 가느다란 티끌 정도라도 알음알이가 남아 있으면 억만 세월이 지나도 밝히기 어렵다.
 분명하게 깨치려면 반드시 지혜의 작용에 의지하여야 한다. 모름지기 한 생각이 싹트기 이전에 주관·객관의 대립을 뽑아버리고, 마음이 요동하지 않을 때 인(人)·아(我)의 견해를 비워버리고, 생각생각에 무명을 타파하고, 망상을 떠나며 반연을 끊고 견문각지를 없애버려야 한다. 이 뜻을 분연히 일으켜 마치 금강왕보검을 높은 누각에서 허리에 비껴차고 있다가 물건을 만나는대로 바로 베어버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 종일토록 치연하게 끊임없이 하여 그렇게 하길 오래오래 하면 마음과 바깥 경계가 공적하고, 인(人)·법(法)이 뵈고, 의식이 소멸하고 기량이 다하여 손 안의 칼자루까지도 일시에 놓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는 반야도 없는데 지혜는 어디에 의지할 것이며 반야를 떠나서는 중생의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반연을 하겠는가. 즉 중생심은 반야가 아니나, 푸른 색이 쪽빛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며, 반야는 중생심이 아니나 얼음이 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바로 중생심이고 바로 반야이어서 확연하게 원명(圓明)하며, 한편 반야도 아니고 중생심도 아니어서 전혀 의탁할 곳도 없다. 그런 뒤에는 한 티끌만 움직여도 만법이 나타나며 한 사념을 움직여도 만법이 나타나며 한 사념을 거두면 십허(十虛)가 무너져 권서(卷舒)와 여탈(與尊)을 마음대로 종횡으로 하며, 생사거래의 법에서도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비록 일이 이와 같더라도 조사의 문하와 본분납승의 면전에서는 어떠한 말도 남겨둘 수 없으리라, 기이하다. 이 도는 왜 옛 사람만 홀로 소유하고 나에게만 유독 없겠는가? 총림이 날로 쇠잔해지고 세월은 자꾸 흐르니 노력하여 부지런히 참구하라. 결코 서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지관(止觀)의 참 뜻은 무엇인가 ?
 
 지(止)는 본체로서 백천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안주하는 바며, 관(觀)은 작용으로서 갖가지 수행이 일제히 나타나는 것이다. 본체는 작용 밖에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지(缺)는 관(觀) 속에 있으며, 작용은 본체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관(觀)은 지(缺)가 있는 곳으로 귀결된다. 본체는 요동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수미산이 허공 속에 서 있는 것과 같고, 작용은 어둡지 않기 때문에 솟아오르는 해가 양곡( 谷)에 걸려있는 것과도 같다.
 지(止)에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파도가 근원자리에서 사라지고, 관(觀)에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광채가 고경(古鏡)에서 소멸한다. 수미산이 허공 속에 있어도 지(止)의 본체는 본래 스스로가 이지러짐이 없으며, 양곡( 谷)이 솟아오르는 햇빛을 간직한다. 해도 관(觀)의 작용은 원래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근원이 공적해지면 파도도 없어지는데 지(止)가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또 거울이 깨지면 광채도 없어지는데 관(觀)을 어디에다 의탁하겠는가? 그렇다면 거울과 근원이 본래 허깨비이고 본체와 작용이 원래 공(空)하여 주관·객관이 함께 없어지면 지(止)·관(觀)도 또한 고요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중생은 혼침과 산란 때문에 생사의 바다에 빠지고 모든 부처님들은 지(止)·관(觀) 때문에 열반의 언덕에 안주한다'고 하였읍니다. 이른바 지(止)로써 산란을 고요히 중지시키고 항상 관조하며, 관(觀)으로써 혼침을 관조하여 항상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고요와 관조가 쌍으로 나타나고, 정(定)과 혜(慧)가 융합하여 지(止)가 극치에 이르면 관(觀)이 원만합니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무엇에 의지하겠읍니까?
 분명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지·관의 명칭이 혼합되었다면 정·혜의 본체를 어떻게 나눌 수 있겠읍니까? 명분과 실제가 잘못됐으므로 당신의 말씀은 옳은 것 같지가 않읍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슬프다. 왜 듣지도 못했더냐. 「법화경」에서 말하기를, `일승만 진실이고 나머지 이승은 진실이 아니니라'하지 않았느냐? 지관·정혜·적조·체용 등은 이치가 본래 다름이 없는데 명칭만을 달리 붙였을 뿐이다. 그러나 진실로써 방편에 나아간다면 이변(二邊)이 각각 성립되지만, 방편을 돌이켜 진실로 귀결한다면 하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방편과 진실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명칭과 모습은 저절로 오류가 된다.
 신령스런 비춤은 상대가 끊겼고 진실한 깨달음은 의지함이 없는데, 실로 일념(一念)이 홀연히 일어난 것을 연유하여 만법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자못 알지 못했다고 하겠다. 또 미혹과 깨달음을 구별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잘못이 어찌 두사람에게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베푼 가르침이 백천 가지로 모두 다르지만 근기에 알맞게 하고 사람 됨됨이에 허망을 버리고 집착을 제거하게 할 뿐이다. 이는 모두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삼매(方便三昧)의 지력(智力)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일찌기 그 사이에 정해진 의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일찌기 정해진 의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요컨대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또 지(止)로써 산란을 그친다 하나 산란하는 까닭을 모르겠으며, 관(觀)으로써 혼침을 관찰한다고 하나 혼침하는 원인을 모르겠다. 가령 산란을 중지할만한 것이 있다면 마음 밖에 법이 있게 되며, 혼침을 관할만한 것이 있다면 법 밖에 마음이 있게 되리라. 이른바 산란이란 공적한 영원(靈源)을 말미암지 않고는 스스로 발생하지 못하며, 혼침도 원담(圓湛)한 진체(眞體)가 아니라면 무엇을 말미암아 스스로 일어나겠는가?
 또 공적하고도 신령스런 근원자리는 동·정이 다르지 않는데 원망하고 담적한 진체인들 명·암이 어찌 다르겠는가? 가령 지(缺)가 동·정이 끊어진 근원에 나타난다 해도 한 줌의 흙을 수미산에 보태는 것과 같으며, 관(觀)을 명·암을 떠난 본체에 더한다 해도 작은 등불로 양곡( 谷)을 비추는 것과 같으리라.
 또 한결같고 진실한 지극한 본체를 확연히 밝힌다면 만법의 허깨비 명칭은 자연히 풀린다. 지금의 이 생각을 떠나지 못했는데 계단이나 사다리가 어찌 필요하겠는가? 지·관을 혼침·산란한 장소에서 융합하며, 정·혜를 생멸이 일어나는 때에도 완전하게 한다. 그리하여 모든 파도 속에서 맑은 물을 관찰한다면 청·탁을 누구라서 구분하겠으며, 5색(五色) 속에서 둥근 구슬을 본다면 염·정이 미혹할 수가 없다. 지극하도다 이 뜻이여. 세상에서는 혹 들어본 사람이 드물구나! 증득해야만 알게 되고, 깨닫지 못하면 헤아릴 수 없다. 말 이전에 알아차린다 해도 이미 옆길로 샌 것이다. 의식으로 헤아리고 구하려 한다면 각주구검(刻舟求劍) 격이니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東語西話 續集下

견해의 병통〔見病〕은 무엇인가 ? 

 객승이 질문하였다.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금의 산과 대지·4대5음(四大五陰)·명암색공(明暗色空) 등은 중생의 시작없이 흘러온 견해의 병통〔見病〕 때문에 생겼다'고 했읍니다. 저는 여기서 말하는 견해의 병통이 무엇인지 모르겠읍니다. 풀이를 바랍니다."
 나는 손에 쥐었던 부채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 겉모습을 가리켜 부채라고 하겠읍니까, 아니라고 하겠읍니까?
 두 가지 모두가 바로 견해의 병통입니다." 그리고는 거위가 우는 양을 보고는 다시 말했다. 
 "그대는 이 소리를 귀로 듣고 거위의 울음소리라고 말하겠는가, 거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고 하겠는가?"이 두 가지가 견해의 병통임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의 코·혀·몸·의식으로 마주하는 6진(六塵)의 경계까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모두 견해의 병통입니다. 왜냐하면 옳다고 긍정할 경우 그것은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고, 아니라 부정하면 단견(斷見)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상견에 떨어지면 세상 산하와 대지가 실제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단견에 빠지면 세상 산하와 대지가 본래부터 없는 것이 됩니다. 유(有)·무(無)·단(斷)·상(常)·3세(三世)·5음(五陰)을 종합하면 모두 62 종류가 되는데, 이 62가지가 모두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른바 견(見)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는 것도 견해라 합니다. 「수능엄경」에 말하기를, `6진(六塵)으로 말미암아 지(知)가 발현하고, 6근(六根)으로 인해서 상(相)이 있게 된다. 모양〔相〕과 견해〔見〕는 본성이 없어 마치 교로(交蘆)와 같다'고 하였읍니다. 「능엄경」에서는 견(見)이라는 말 대신 지(知)라고 하였읍니다. 말하자면 6근과 6진에 상대되는 것이 견해입니다. 이것을 병통이라고 하는 것은 왜이겠읍니까? 그것은 이 두 견해가 신령한 근원을 옹색하게 하고, 법성(法性)을 가로막아 허망을 일으키고, 생사에 결박되어 결국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한 범부와 2승(二乘)의 견병(見病)은 모두 이와 같읍니다. 그러나 조사의 문하에서는 산하·대지 등이 자기 묘명진심(妙明眞心) 속의 물건이라고 깨달았던 것조차도 떨쳐버리고, 유(有)·무(無)의 2변(二邊)에도 머무르지 않읍니다. 심지어는 4구(四句)를 떠나고 100비(百非)를 끊어 법진(法塵)마저 청정하게 다스리고, 성인의 말씀마저도 남겨두지 않읍니다. 혹 얻은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잊지 못하고 있다면 이 또한 견해의 병통이라 하겠읍니다.
 이 자리에서는 어찌 산하·대지 등만이겠읍니까? 가령 백천 화장해(華藏海)의 해탈보리장(解脫菩提場)과, 법계·허공·성문·보살·부처의 오묘한 의미와, 신기(神機)의 삼매와, 어묵동정 등도 한마디로 말해 모두 견해의 병통입니다."
 객승이 말하였다.
 "세속에 이 병통을 치료할 자가 있읍니까?"
 나는 말했다.
 "없다고 하면 불법이 영험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의 병통만 더하겠읍니다."
 객승이 망연해 하므로, 몇 가지 적어 본다.
 
이치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참뜻은 무엇인가 ?

 천하의 이치를 가만히 엿보았더니, 참된 이치는 모두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그럴듯한 말만이 참된 이치를 둘로 보고 동일하게 보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는 본래 모든 알음알이가 쉬어서 한가한 자도 있고 게을러서 한가한 자도 있다. 두 사람은 한가하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알음알이를 쉰 것과 게으른 면에서는 하나라고 할 수 없다. 바쁜 것도 똑같다. 도의(道義)를 극진히 하느라고 바쁜 사람도 있고, 이욕(利欲)을 쫓느라고 바쁜 자도 있다. 바쁜 것은 똑같지만, 도와 이욕을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럴듯한 잘못에 깊이 빠져 되돌아올 줄 모르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이 미(迷)·오(悟) 두 갈래에 빠져 스스로 미혹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 자기와 닮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 몹시 미워하기까지도 한다. 마치 게으른 사람이 죄악의 더러운 수렁에 자기 자신이 빠져 있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도의를 극진히 하느라고 바쁜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자신의 사리사욕을 쫓느라 바쁜 자가 자신이 미치고 전도된 세계에 빠져 있다는 것은 모르고, 도리어 마음과 뜻을 쉬어 한가한 사람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성인의 마음만이 도의(道義)에 공정하여 백천의 방편으로써 허망하고 잘못된 정(情)을 바로잡고, 한가한 사람·바쁜 자들을 그 이치에 계합시켰다.
 아아! 사람들의 정(情)이 미망(迷妄)에 빠지고 말았구나. 성인이 `옳다'고 한 것은 사람들도 `옳다'고 한다. 그러나 말뿐이고 정작 생각은 고치지 않는다. 또한 성인이 `잘못이다'고 한 것은 사람들도 또한 `잘못이다'고 한다. 비록 입으로는 `잘못이다'고 하지만, 정작 그 정(情)은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시시비비(是是非非)는 겉으로 보아서는 그럴듯 하지만, 진실과 견주어 보면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난다. 이 세상의,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잘못에 관해서는 우선은 덮어두고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가령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한 말은 깨달은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알음알이로만 이해한 사람도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겉보기에는 비슷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마음이 곧 부처이다'고 하는 말을 두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말은 밝은 거울이 물건을 비추면서도 흠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의 말은 마치 다섯 가지 색깔로 어떤 물건을 그리는데, 붓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하면 군더더기가 많아지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런데도 배우는 사람들은 어찌 겉보기만 그럴듯한 이치를 구분하질 않는가?
 세상의 모든 그릇은 제각기 용량이 있기 마련이다. 술잔은 술잔으로서의 크기가 있고, 항아리는 항아리로서의 크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릇의 종류를 굳이 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릇은 용량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바로 몸의 그릇이다. 그러므로 어찌 그것에 크기가 없겠는가? 성인과 범부의 마음은 서로 같고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그 마음이 서로 달라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술잔도 그릇이고 항아리도 그릇이다. 그릇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둘 다 다를 것이 없지만, 크기는 소견의 밝음과 어둠을 따라서 대소가 구별된다. 이것은 마치 개미는 눈을 부릅떠도 아주 조금밖에 보지 못하고, 사람 역시 아무리 애써도 몇 리 이상은 볼 수 없지만, 신통을 갖춘 성인은 대천세계를 손바닥 안의 아마륵 열매를 보듯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께서는 4대해(四大海)같은 눈으로 미진찰토(微塵刹土)를 뚜렷하게 관찰하여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부처님 마음의 크기는 항사세계(恒沙世界)에 두루한다'는 찬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옛날 장무거사(張無居君)는 `사람이 경솔하게 노하고, 쉽게 기뻐하는 것은 도량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량이 크지 못하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는 말이 온화하지 못하고, 말이 온화하지 못하면 분노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난다. 심지어는 이를 갈고 팔을 걷어부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저와 같은 잘못이 불같이 일어나면 화환(禍患)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소견의 밝음과 어두움은 학문이 제대로 되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학문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소견이 어두워 도량이 좁아지고, 학문이 차츰 이루어지는 사람은 소견도 깊어지고 확연해진다. 나아가 학문이 순일(純一)해지면 소견도 넓어져 굉활하게 되며,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면 견해는 분명하고 원만해진다. 성인(聖人)은 학문이 크게 이루어진 자이며, 지인(至人)은 학문이 순일하게 이루어진 자이며, 현인(賢人)은 학문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사람이며, 일반 사람들은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자들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도량은 자연 작아질 뿐이다.
 도량이 한번 좁은 데에 빠지면, 넓어지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터럭만큼이라도 이해(利害)를 쫓지 않게 늘 함양(涵養)해야 된다. 그러나 마음의 소견은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함양의 도는 힘써 실천하고 정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양이란, 첫째 믿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믿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성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소견도 자연 어둡다. 마음의 견문이 소멸되지 못하면 걸핏하면 성인의 말씀을 믿지 않고 천리(天理)를 어기는 짓을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3계에는 별다른 법이 없다. 한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다"고 하신 것이다. 3계는 본래 일삼을 것이 없는데,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흔들렸을 뿐이다. 실로 이 사실을 믿는다면 대상세계에 시비증애(是非憎肯)를 두지 말아야 한다. 혹 이런 견해를 간직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자기 마음으로 분별한 것이라 한다. 자기의 마음으로 분별했다면 내 마음의 도량도 비좁고 옹색할 뿐이다. 시비를 분별할수록 마음 그릇의 도량은 더욱 좁아진다. 티끌 수처럼 두루한 법계를 우러러 관찰해 보았더니, 하루와 영겁의 세월의 차이가 고작 배가 되는데 그쳤겠는가? 그러나 믿은 후에야 배울 수 있고, 이른 후에야 밝힐 수 있고, 밝힌 후에야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뚜렷하게 밝히고 영원하게 살필 수 있다면, 마음의 도량은 머지않아 허공과 같이 너그러워질 것이다. 비록 삼라만상이라 해도 이것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이같은 도량을 갖추었건만,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학문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시비증애를 달게 여기고 번뇌습기의 세계에 갇혀 있게 되었다. 도인이 어찌 이렇게 마음을 쓸 것인가?
 
재량을 키운다는 것은 무승 뜻인가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담지 못하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긷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모든 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나의 주머니가 다섯 자이면 석 자의 물건을 넣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두레박줄이 두 길밖에 안되면 세 길 깊이의 물은 길을 수 없다. 모든 일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알맞게 한다면 여유롭고 자유자재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안되는 일에 부딪치면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면서 궁핍해진다. 이렇게 작은 데 큰 것을 담고, 짧은 두레박으로 깊은 물을 긷는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재능과 도량은 억지로 키울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도인은 재량을 관대하게 하고 일은 간략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신의 재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리라.
 
마음의 도량과 복은  어떤 관계인가 ?

 세상에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더라도 어긋나지 않으며, 생각나는대로 하더라도 일이 항상 잘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도량이 크고 재량이 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도량이 그렇게 되는 것이 어찌 온갖 지식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지혜를 두루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리요! 이것은 다만 복이 많아서 그렇게 될 뿐이다. 복이란 형상이 없는데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나는 일찌기 형상없는 복으로써 의지할 것 없는 도량을 찾아보았더니 거기에는 실날같이 작은 차이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신령스런 견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현상대로 관찰해 보았던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있다 하자. 밖으로는 먹고 살기에도 부족하고, 안으로는 질병에 걸렸으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면, 이 사람은 복이 제 몸뚱이 하나 보살피기에도 부족한 것이다. 혹간은 배고픔과 추위도 면하지 못했는데 재앙이 함께 모여들어 닭이나 개만큼도 편안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복이란 한 집안을 보살피기에도 부족하다. 또 자기 한 개인에게 복이 있으면 제 한몸이 편안하고, 여러 사람에게 복이 있으면 온 집안이 편안해지고 나아가 나라가 편안해지고 온 천하가 편안해지니 이 모두가 복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복이 두루하지 못한 점은 책망하지 않고 남들이 나를 순종해 주지 않는다고만 원망한다. 이것은 마치 귀먹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탓하는 것과 같다. 어찌 어리석은 짓이 아니리요. 지혜로운 사람만이 세상과 함께 어울려서 탄식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복의 많고 적음은 인위적으로 더하거나 덜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즈음은 불법이 왜 옛날 처럼 흥성하지 않는가 ?

 도의 본체는 본래 모두 갖추고 있지만 지혜와 복은 수행해서 완성된다. 지혜가 이루어지면 본래 타고난 도가 더더욱 밝아지고, 복이 모이면 본래 타고난 도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지혜와 복을 둘다 모두 잃으면 본래 타고난 도라도 숨겨져 버린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옛 사람은 천진하고 순수해서 교화하기가 쉬웠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회가 곳곳에서 성대하게 이루어졌읍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얄팍하기 때문에 교화하기 어렵읍니다. 그래서 곳곳마다 법회가 적어지게 되었읍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읍니다. 중생이 알음알이가 한 번 뚫렸다 하면 자꾸 깊어져서 시시비비가 나타납니다. 2천여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증애가 없었던 적이 없었읍니다. 요즈음 사람이 그대로 옛 사람이니 옛 사람의 증애가 그대로 요새 사람들의 증애입니다. 끝내 털끝만큼 줄지도 늘지도 않았읍니다.
 옛날에 법석(法席)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어도 실패한 일이 없었던 까닭은 법을 주재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인연이 맞았기 때문이며, 게다가 여기에 감응한 대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당시의 대중들이 천진하고도 순수하여서 교화가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걸핏하면 마구니의 재앙을 만나 쇠미한 채 힘을 떨치지 못한 까닭은 법을 주재하는 자가 복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중생의 성품이 교화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슨 증거로 그런 줄을 알겠읍니까? 금일과 같은 쇠잔은 옛날에도 있었고 옛날과 같은 번성은 지금에도 역시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인정이 변하고 바뀌어서 그렇게 됐겠읍니까! 실로 복과 인연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내 나름대로 생각했던 바를 말해보겠읍니다. 교화가 잘 되는 까닭은 총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교화가 잘 안되는 것은 우매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총명은 스스로 총명한 것이 아니고 복이 많아서 그 총명을 북돋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음은 스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복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총명함 때문에 교화가 잘 되는 줄만 알 뿐 총명의 바탕이 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어리석음 때문에 혼란해진다는 것만 알 뿐, 그 혼란하게 하는 바탕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복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교화가 잘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합니다. 복이야말로 한결같이 전생의 업에 따라 정해져 있으니, 금일에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읍니다.
 달마스님의 도가 동쪽으로 온 이후에 도가 높고 덕이 많았던 인재들이 여러 책 속에 모두 실려 있어 여기저기에서 읽어볼 수 있읍니다. 그 중에는 몸에 기이한 질병에 걸린 자도 있었고, 쓸쓸한 산 속으로 은퇴한 자도 있었으며, 세상에 전혀 종적을 감춘 자도 있었으며, 세상에 나와 교화를 펴려다가 그만 여러 일에 휘말려 그 도를 펴지 못한 자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존엄하게 방장실(方丈室)에 거처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에워싸기를 마치 우담화(優曇華)가 출현하듯 하여, 빛나는 광명이 고금을 두루 비추었던 인재는 천만 사람 가운데 한 두 사람 정도일 뿐이었읍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체득한 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고, 다만 복에 차등이 있어서 성쇠의 자취가 동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이라 불렀던 까닭은 모두 이유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복은 과거의 업(業)에 얽매여 그 과보가 다하면 다시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인이라면 이 복 많은 것을 뽐내지 않읍니다.
 옛날에 전오(冶午)가 행책(行策)스님은 복이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고 걱정을 했읍니다. 그러자 행책스님은 말하기를, `참선하는 자는 그저 자기 자신의 안목이 밝지 못할까만을 걱정해야 합니다. 안목만 밝아진다면(따르는 대중이 없어서) 성승(聖僧)을 홀로 마주하고 밥을 먹은들 무엇을 걱정하겠읍니까?'라고 했읍니다. 그러자 전오(冶午)가 그 뜻을 알아듣고는 턱을 끄덕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애석하도다! 보연(報緣)을 오묘하게 살피고 도의 안목이 홀로 빼어났던 분은 행책스님 그 어른 뿐이었읍니다. 성쇠의 자취가 어찌 도의 안목을 더럽힐 수 있겠읍니까?"
 
총림의 말뜻은 무엇인가 ?

 참선하는 집안에서 말하는 총림(叢林)이란 초목을 비유해서 한 것이다. 총림이란 거기에 법과 도가 의탁하게 되며, 큰 인물들이 그곳에서 나온다. 초목은 북 돋아주고 김매주면 풍성해지고 알맞게 비가 내리면 싱싱해진다. 그러나 서리와 눈이 내리면 시들어지고, 도끼에 찍히거나 하면 모두 죽어버린다. 총림은 위없는 큰 도를 북돋고 김매주며, 자비희사(慈悲喜捨)로 적셔준다. 그러니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눈이나 서리에 해당하며, 탐욕과 진에는 도끼에 해당한다. 총림을 주관하는 자가 도(道)를 북돋고 김매고 적셔줄 줄을 모른다면 초목은 병들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하물며 편함과 잇속만을 기르는 도끼, 즉 초목으로 말하자면 눈발이나 서리에 해당하고 인간으로 말하자면 탐심이나 진에에 해당하는 도끼로써 쩍어내어 죽여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초목들이 새싹을 티울 겨를도 없는데,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어 총림이 성대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예법과 도는 어떤 관계인가 ?

 우리 총림에서 읍하고 사양하며 올리고 내리는 것을 예(禮)라 하고, 매질하고 물리치며 욕을 보이는 것을 법(法)이라 한다. 옛 사람들이 체득한 도를 실천하고자 하면 반드시 예와 법으로써 보완해야만 도가 시행되었다. 예(禮)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며, 법(法)이란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상태에서 그 잘잘못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혹 도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다면, 어찌 반드시 예를 의지해야만 올바르게 되고 법으로 다스린 뒤에야 따르겠는가? 절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총림에서 예와 법을 사용하는 까닭은 마치 국가에서 전쟁을 하는 이유처럼 부득이해서 그러는 것이다. 다만 예와 법을 통해서, 올바로 참선하려는 남자의 마음씀씀이와 행동거지를 바로 잡으려는 뜻이다.
 혹시라도 지극한 도에 근본을 두지 않고 예와 법에 융통성이 없다면, 이런 예는 헛된 속임수에서 나왔으며 법은 오히려 원수인 적과 가깝게 된다. 헛된 속임수는 예를 잊기 쉽고, 원수같은 적은 법을 뒤바꿔 놓는다. 그렇다고 예가 사라지고 법이 변하면 그 마음씀씀이 또한 크게 파괴된다. 그러니 그밖의 잘잘한 예의범절은 말해 무엇하랴!
 
도를 닦으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다섯 가지 올바른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마음 속에서 희·노·애·락 하는 주인옹(主人翁)의 본 모습은 3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비교해보더라도 한 털끝만큼도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둘째는 오랜 세월 이전부터 바깥 세계와 애증에 물들여져서 이루어진 생사(生死)는 덧없어서, 4대(四大) 속에서 생각생각 떠돌아 다니느라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세째는 고인들께서 자비를 베풀어 남겨주신 작은 한 말씀이라도 그것은 하늘을 떠받칠만한 긴 칼과 같아서 사무치게 새겨두고 분명하게 이해하기만 하면 윤회의 근본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네째는 참선하는데 있어서 다만 그것을 계속하지 못할까만을 근심하고, 생각생각마다 정교롭고도 한결같이 참선을 하면 언젠가 투철하게 생사에서 벗어날 날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다섯째는 생사는 덧없고 작은 일이 아니므로 분연하게 꼭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써, 오직 해탈하기만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3악도(三惡途)의 윤회를 절대로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한편 또 도에 나아가는 첩경이 될만한 세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지혜의 안목이 밝아야 하며, 둘째는 이치의 본성을 통달해야 하며, 세째는 뜻이 견고해야 한다. 지혜의 안목이 밝으면 세간의 신심(身心)과, 나타나는 모든 경계 및 일체의 시비·증애·취사·득실·빈부·수요(困夭)·고락 등이 모두 헛된 것이므로 결코 실다운 의미가 없다고 꿰뚫어 보아 사량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치의 본성을 통달하면 위로부터는 불조께서 말씀하신 어언(語言)·명상(名相)에서부터 3교(三敎)의 성현 및 제자백가의 별의별 주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근원으로 모여 돌아오는 줄을 알아서,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다. 또 뜻이 견고하면 지금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끝내 그만두지 않는다. 이 세 법 중에서 첫째만 갖추고 둘째와 세째를 빠뜨리면 하릴없는 놈이 되며, 앞의 두 가지만 갖추고 세째를 빠뜨리면 그저 머리만 영리한 놈이 될 것이며, 세번째 법만 갖추고 첫째와 둘째 법을 빠뜨리면 선판(禪板)만 지고 다니는 놈이 된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도는 1,000리나 되는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첫번째 두번째만 갖추고 세번째를 빠뜨린다면 900리 정도 가다가 중지하는 자이며, 첫번째와 세번째만 갖추고 두번째를 빠뜨린다면 갈림길에서 어찌할 줄 몰라 우는 신세를 끝내 면하지 못하며, 두번째와 세번째는 갖추었으나 첫번째 법을 빠뜨린다면 그는 가는 길마다 반드시 막히리라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세가지의 법을 모두 갖추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이미 깨달음의 집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 없으리라는 사실을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어찌 미혹을 벗어나는 나루터가 어디인가를 거듭 묻고, 말채찍의 그림자를 다시 흔들 필요가 있겠는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도반 여러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윤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모두 참마음〔眞心〕을 일으키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
 참마음은 바깥 경계와 부딪치는 바로 그자리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량분별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치 남이 나를 악하게 헐뜯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그자리에서 화가 나서, 몸과 마음의 경계는 물론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모두 성내는 것과 같다. 나아가 밥먹는 것도 잠자는 일도 모두 잊고 꿈 속에서도 그것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원망을 품고 종신토록 잠시도 잊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화내는 것〔 〕은 수많은 8만 번뇌 중의 겨우 한 번뇌에 해당할 뿐이다. 번뇌 하나가 그럴진대 나머지 모든 번뇌도 다 그렇다. 번뇌끼리 서로서로 섭입해서 자물쇠 고리처럼 연결연결되어 생사를 이루어 끊임없이 거기에 흘러들어간다.
 참선하여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 즉 남들이 생사(生死)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언어나 문자로 사량분별하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곧바로, 나를 악하게 헐뜯는 소리로 여겨서 분한 마음을 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경교(脛敎)에서 한 말을 끌어들여 알음알이를 조작하여 사량하려 하지 말라. 오직 분하고도 분한 마음이 마음 속에서 떨쳐버리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해야만 한다. 만일 담박에 깨치지〔頓悟〕 못하면 죽더라도 그만 두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마음 먹는다면 생사의 대사를 깨닫지 못하겠으리오!
 
생사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수 있는가 ? 

 이른바 선(禪)이란 현학(玄學)도 아니며, 해괴한 이론도 아니며, 은밀하게 주는 것도 아니며, 비밀스럽게 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생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성품인 동시에, 원래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으신 삼매(三昧)이다. 이 성품을 깨치려면 반드시 간절하고도 절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사는 덧없다〔生死無常〕는 이 한 귀절은 만겁을 지내오도록 해결하지 못한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이기 때문이다. 만일 금생(今生)에 이것을 몽땅 뒤집어 엎어버리지 못하면 미래제가 다하도록 깨칠 기약이 없으리라.
 이와 같이 발심하여 결코 다른 견해를 내지 말고 오래오래 하다 보면 알음알이가 다 없어지고 요리조리 따지는 기량이 끊어져, 담박에 한바탕 깨치고 나면 덧없는 생사 바로 그대로가 선(禪)의 골수이며, 선 바로 그대로가 덧없는 생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안다. 그런 다음에 참선과 생사·골수와 핵심도 모두 삭제해버려서 기침하고·침 뱉고·팔 흔드는 것 등이 모두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소식인 줄을 알게 되리라. 스스로 그러하여서 두두물물(頭頭物物)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과연 참선이란 현묘하지도 비밀스럽지도 아닌 줄을 알게 된다. 그대가 만약 실로 생사가 덧없다고 여기지 않고서 참선을 하는 자라면, 인도의 96종 외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중생들은 왜 범부짓을 하는가 ?

 부처님과 조사의 도(道)는 범부의 분상에 있어서도 끝내는 털끝만큼이라도 더하거나 덜어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거울이 거울을 비추고, 물〔水〕이 물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범부가 끝내 스스로 어두워져서 밝게 비출 수 없는 까닭은 그 잘못이 미혹 때문이다. 무엇을 미혹했다는 말인가? 구원겁으로부터 한 줄기의 심광(心光)이 걸핏하면 망습(妄習)에 가리워 스스로 깨치지 못했다.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 미혹은 4대6정(四大六情) 등에만 미혹했을뿐 아니라, 나아가 책을 읽으면 책에 미혹하고, 가르침을 들으면 가르침에 미혹하고, 좌선하면 선에 미혹하고, 계율을 지니면 계율에 미혹하고, 선정을 익히면 선정에 미혹하고, 더 나아가서는 깨달으면 깨달음에 미혹하고, 증득하면 증득함에 미혹하고, 성불하면 성불에 미혹한다. 통틀어서 말해 보면 인위적인 조작이 있으면 모두 심광(心光)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실로 이 마음을 알음알이 밖으로 내버리고, 인위적인 조작을 마음에 앞서 비우지 않으면, 그대가 비록 불조의 깊은 이치를 두루 찾아 골수에 사무쳤다 해도 결코 이 미혹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자기의 귀를 틀어막고 고함을 지르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이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선배 중에서 진실하게 이 도에 뜻을 두는 자가 있어서, 그는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침식도 잊은 채 시비(是非)를 뚝 끊어버리고 증애마저도 끊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기약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그런데 가슴속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는 사람은 미망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활연히 밝게 드러나 온 몸이 마치 하늘을 떠받칠만한 긴 칼처럼 되어서 사방팔방에서 적군이 모여들어도 모두 쳐부순다.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공용없는 삼매는 무엇인가 ?
 
 도는 방향이 없으므로 가더라도 도달할 수 없고 형체가 없으므로 보려 해도 볼 수 없으며, 도는 인위적인 조작〔作爲〕이 없으므로 이룰 수 없고 기미〔機〕가 없으므로 지혜로운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3교(三敎)·9류(九流)*·제자백가〔百氏諸子〕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도에 대해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도가 과연 이와 같다면 누구라서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총명하고 지혜로운 인재는 곧 근원으로 향해서 기이하고 특별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옛날 훌륭하게 도를 닦은 분으로서 임제(臨濟;?∼867)스님의 경우는 황벽(黃 ; ∼  )스님께 불법의 대의를 묻기만 하면 방망이를 맞았다. 방망이로 때리는 것 외에는 끝내 말씀이 없었다. 또 자명(慈明;987∼1040)스님이 분양(汾陽;947∼1024)스님에게 물으면 꾸짖고 비웃었을 뿐, 이른바 향상기(向上機)니 말후구(末後句)니 하는 말은 애초에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그런 뒤 의로(義路)가 끊어진 상태에서 오랫동안 가슴 속에 깊이 새겨 결단하려 하나 결단하지 못했던 의심을 하루 아침에 활연히 벗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붕새가 회오리 바람을 치듯,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듯, 번개가 치듯, 우뢰가 진동하듯 말과 글을 토해내는데 독(毒)이 있는 벌레를 입술에 대지 못하듯 하며, 철벽처럼 조금도 기어오를 수 없는 듯하며, 허공에 흘러가는 달이 곳곳에 빛나는 듯하며, 나무가지에 부는 바람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취가 끊긴 듯하다. 한편 네모난 걸상에서 한결같이 평상(平常)하기도 하며, 기침하고 침 뱉고 팔 흔드는 것까지도 이 도와 입술이 합하듯 섞여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윽고 그 집안의 깊숙한 도를 깨닫고 문전을 나선 인재들은 낱낱이 6진을 뽑고 세속을 단절하여 일반 무리보다 뛰어나 대방(大方)에 활보하면서 눈으로는 은하수를 보는 듯하였다. 불조성현이라 해도 함께 할 의도가 없는데 더구나 명예·이익·5욕(五欲)·은애(恩肯)의 진로의 경계에 머리 숙이고 구속을 받으려 하겠는가? 선배로서 이와 같은 체재를 자부한다 해도 다른 사람보다 특이한 견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상을 뒤덮을만한 기이한 수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결같이 도를 위하는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서리와 얼음이 불 그림자만 바라보아도 녹아버리는 것과 같고, 티끌이 작은 바람에도 날려버리는 것과 같았다. 도를 체득하려는 생각이 1푼 견고하고 촘촘해지면 그에 따라 업도 자연히 1푼 소멸할 뿐이다. 내가 도를 향하는 마음이 투철하면 이른바 알음알이 허상으로 전도된 애증의 사념은 마치 바람을 만난 티끌이나 불 가까이에 있는 눈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게 된다. 어찌 알음알이의 허망만 그렇게 되겠으리오? 나아가 성인의 도조차도 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질 못한다. 이를 이름하여 공용(功用)없는 삼매(三昧)라 한다. 삼매 가운데는 생사와 열반이 모두 붙어 있을 틈이 없다.
 요즈음 사람들도 이 삼매 속에 있지만, 도를 향하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여 걸핏하면 알음알이 허상을 만난다. 그 결과 주관과 객관이라는 2원론에 결박되어서 불법을 알면 알수록 업식(業識)이 더 늘어나며, 도에 밝을수록 무명(無明)이 자라난다. 그리하여 지견(知見)의 바람이 부채질 해 생사윤회의 바닷 속으로 들어가서 유전을 달게 받아들인다. 어찌 뜻이 있는 인재로서 이와 같이 하겠는가? 이는 마치 눈 먼 사람이 보배가 있는 곳에 빠져서 오히려 보배에 걸려 몸을 다쳐 못숨마저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왜 정진력을 길러야 하는가 ? 

 도를 배우려면 무엇보다도 신근(信根)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정진력(精進力)으로 보고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성취하지 못한 자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신근(信根)은 경쾌한 배에 견준다면 정진력(精進力)은 채찍과 같다. 돛대를 경쾌한 배에 더한다면 물의 역순(逆順)은 상관할 바가 못되고, 준마에 채찍질을 한다면 길이 평탄하고 험난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신근을 갖춘 자가 없지는 않으나, 정진력으로써 시작과 끝을 일관되게 하는 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진을 하루라도 안하게 되면 게으름이 불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들뜨고 천박한 신근으로 한없는 게으름이 보태지면, 성인의 도가 손바닥을 펴듯 쉽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반드시 도를 깨닫지 못하리라. 더구나 오랜 겁 동안 윤회의 종자가 심식(心識)과 더불어 생각생각에 천류하여 끝내 조금도 쉼이 없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설사 순일하게 정근한다 해도 도에 사무치지 못할까 염려해야 할텐데, 지금 이 생에서도 마음대로 방일하면서 정진하지 않으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되지 않겠는가?
 
도 닦는 것과 외부의 조건은 어떤 관계인가?

 옛 사람은 도를 믿는 것이 독실하여 이치를 보는 것도 분명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견고하여 입지(立圍)도 원대하였다. 도를 닦다가 백 번 좌절한다 해도 그 뜻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좌절했다 하더라도 그자리에서 뜻과 능력을 연마하고 견고하게 하는 방법을 도모했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들이 깨달음을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본다면 외부의 조건에 어찌 좋고 나쁨이 있겠는가! 오직 도에 나아가겠다는 나의 마음이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도에 나아가겠다는 마음이 진실하고 간절하기만 하면 속세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외부 조건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모두 도 닦는데에 도움이 된다.
 선배들 중에 깨달음의 처소에 깊숙이 들어간 자들은 가난과 고생으로써 성취하지 않은 분이 없다. 그러니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 보자.
 
도에 쉽고 어려움이 있는가 ? 

 불조의 도는 쉽게 알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쉽다고 여기면 게으름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렵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도를 깨치기가 어렵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혹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쉽고 어려운 것은 도 닦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결코 도에 달려 있지 않다. 비유하면 천리 길과 같아서, 가령 가볍고 좋은 마차에 천리마를 앞세우고 탄다면 해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파리하고 좀먹은 소의 고리나 절름발이 자라의 발에 의탁한다면 날이 가고 한해가 다한다 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가야할 길이 좋은 마차와 말 때문에 가까와지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느린 소나 자라 때문에 멀어진 것도 아니다. 실로 빨리 가느냐 느릿하게 가느냐에 달려서 그렇게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만일 제 자신의 더디고 신속함이 깨치는 일을 어렵게도 만들고 때로는 쉽게도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앞에서 말한 게으름과 의혹의 폐단 가운데에 이쪽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 저쪽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신근(信根)으로 살펴보면 영리한 사람은 게으름이 많고 둔한 사람은 의혹이 많다. 영리한 사람이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둔한 사람이 의혹에 병들지 않는다면 모두가 함께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이미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나면, 어찌 어렵고 쉬움과, 게으름과 의혹과, 더디고 빠름과, 영리함과 둔함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으리오!
 
도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  
 
 이 도는 아주 간결하고도 가깝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마음을 일으키고 사념을 움직여 이 간결하고도 가까운 도를 찾으려 하면 벌써 도와는 멀어지고, 간결하지도 가깝지도 않게 된다. 게다가 언어·문자로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리며 알음알이로 취사(取舍)하면 도는 간결하지도 가깝지도 않을 뿐더러, 도리어 도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밥 먹고 옷 입는 외에 자질구레한 일이 없이 사느니만 못하다.
 다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불조께서는 모두 참되고 바른 체재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천생 백겁토록 이 도를 철저히 증오하고 온축하여, 한 생각이 쉬는 곳에서 모든 경계가 평등하게 잠길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간결하고도 가까운 깨달음이란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어찌 구차하게 하여 그렇게 되었겠는가. 그래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옛 집 한가닥 전답이라고는 하나 한 번에 싸가지고 와야 비로소 쉬게 되리라" 하였다.
 
예Pt 사람의 말에 따라도 되는가 ? 

 큰 불무더기에도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고 칼 끝도 오히려 밟을 수 있지만, 이 한소식〔一著子〕에는 사념(思念)을 내는 순간 벌써 십만팔천리 멀어져버린다. 더구나 알음알이를 홀연히 일으키고 사량불별을 가만히 흥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불가사의한 말솜씨를 갖추었다 해도 말을 하기만 하면 할수록 더더욱 시끄러울 뿐이다. 이는 생사의 숲에 가시나무를 재배하고 윤회의 바다에 똥물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다. 본색상사(本色上君)*라면 어찌 이같이 전도착란하겠는가. 마땅히 알아라. 옛 사람은 부득이하여 하나의 털이라도 들어 일으키기라도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은 그것을 민첩하게 끊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인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지리한 언어·문자만 짓게 되었다. 이를 어떻게 그만두겠으며 어찌 그만두었겠는가!
 
시절인연 때문에 깨닫기 어려운가 ? 

 소림사의 달마스님은 "마음이 철벽 같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고, 6조 혜능스님은 "그대가 선과 악을 모두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의 본체에 들어가리라"고 했고, 덕산(德山;782∼863)스님은 "그대는 마음에 아무것도 일삼지 말라. 마음에 일삼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하고, 고요하면서도 요묘하리라"고 했고, 사심(死心;1043∼1114)스님은 "절검(節儉)하고 놓아버리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제일 빠른 첩경이다"라고 하였다.
 선배들이 저마다 각각 후배들을 위해 하신 말씀들이 어찌하여 노파심이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이겠는가? 요즈음에는 이런 도리에 놓인 사람을 찾으려 해도 드물게 되었으니, 하물며 이 도리 밖에서 대수용〔大受用〕을 구비한 인재를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대장부라면 난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대가 `나는 한 가지 뜻을 간직하였지만 시절인연이 옛과 같지 않아 깨달음으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다면 스스로 자기능력의 한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사의 화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마삼근(麻三斤)·간시궐(幹  )·수미산(須邇山)·백수자(栢樹子) 등등의 화두는 마치 태아(太阿)지방에서 생산되는 보검과 같아, 슬쩍 스치기만 해도 만 겁의 생사가 그 자리에서 끊어져버린다. 그러나 그 작용하는 처소를 찾으려 하면 시방세계가 다하도록 바람은 쉬고 구름이 고요하여 끝내 종적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일러 법왕의 법인(法王法印)이라 한다.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이 도리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자는 도리(道理) 위에 쭈그리고 앉아, 유(有)·무(無)를 따지고 지(知)·해(解)를 세우지만, 이것은 마치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움켜잡으려는 것처럼 소용이 없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로울 것이다. 진정으로 생사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20. 
 도인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경계는 모두 지난 날의 업(業)이고 허깨비의 변화로써 끊임 없지만, 그렇다고 순진일여(純眞一如)와도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자라면 영욕을 떨쳐버리고, 갖가지 인연이 얽혀서 시끄러운 곳에서도 모든 시비를 끊어버린다. 그렇지 않다면 덧없는 생사가 미래제가 다하도록 계속되어 끝내 쉴 날이 없으리라. 참선하는 납자들은 종일토록 바쁘게 무엇을 하느라고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다시 한 생각을 홀연히 일으켜 세속과 더불어 분별을 일으킨다면, 이른바 도 닦는 사람은 못된다.
 과거의 업(業)으로 목전을 관찰해 본다면 한 털끝도 그대가 회피할 수 없으며, 부질없는 허깨비로 목전을 관찰하면 한 털끝만큼도 그대가 취하거나 찾을 것이 없으며, 끊임없는 것으로 목전을 관찰하면 한 털끝만큼도 그대가 버리거나 떠날 것이 없으며, 순진일여(純眞一如)한 것으로써 목전을 관찰하면 한 털끝만큼도 그대가 간택할 것이 없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관(觀)과 조(照)가 모두 사라지고, 능(能)과 소(所)를 모두 다 잊어서, 도인이 시시비비를 끊고 영욕을 비워 생사를 초월하고 허깨비꿈을 뛰어넘는 시절이 오리라.
 


어떻게 시비를 벗어날 수 있는가 ? 

 3조 승찬스님은 말하기를, "시비가 분연히 일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마음을 잃어버린다."고 했고, 또 "생사가 범부이고 열반이 바로 성인이다."고 했다. 그러자 세상에는 범부는 부정하고 성인을 긍정하는 견해가 온 세상에 꽉 퍼져서 피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눈먼 것을 쳐버리고 열반이니 생사니 하는 명자(名字)가 생기기 이전의 자리에 한 번에 뚝 끊어버려야 한다. 그런 뒤에 한 가닥 단절된 실을 가지고 생사와 열반의 정영(頂 )을 하나로 관통해야 한다. 요컨대 시비의 견해를 벗어버리기만 한다면 정주(鄭州)에서 조문(曹門)을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실로 신령하게 깨닫고 오묘하고도 원만하게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견(情見)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마음대로 이리저리 구멍을 뚫어 놓고 물이 새지 않기를 바라는 격이다. 이는 모두 시비로써 시비를 없애려는 것이니 결국 본심(本心)만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찌 또 제 2념(第二念)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겠는가?
 
방편에는 해로움이 없는가 ? 

 한 가지 일이 앞서 적중하면 한 법이 뒤따라 풀리는 것이 천하고금의 수행법이다. 이는 마치 앉거나 누우면 피로가 풀리고, 음식을 먹으면 배고픔이 사라지는 이치와 같다. 즉 앞서 적중했던 것은 피곤과 배고픔이며, 뒤따라 풀리는 것은 앉고 눕는 것과 음식이다. 그러나 피곤과 배고픔은 때로는 없어지지만 앉고 눕는 것과 음식은 사념을 떠날 때가 없다. 그것들이 사념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점점 습관이 되어 게으름과 욕심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덕을 없애고 뜻을 잃으며, 도를 없애고 몸을 망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사람들은 적중하는 것이 해롭다는 것만 알 뿐, 그 적중한 것을 푸는 일도 해롭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세하게 미루어 보면 적중했을 때도 모두 해롭다는 사실을 안다면 거기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일부러 생각하면서 풀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푸는 일도 해롭다는 사실을 모르고 가까이 하여 익숙하게 하면 그와 함께 동화해버린다. 그것이 몸 속에 깊숙이 들어가고 그럴수록 그 해로움은 더하여, 끝내는 이런 자신을 자각하기에는 아주 힘들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유하면 무더운 더위에 불티가 얼굴로 날아드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비오는 듯한 땀을 씻으면서, 바람과 찬 이슬로 이 더위를 해소하려고 생각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 때에 바람을 쐬이고 찬 이슬을 맞게 되면 너무도 상쾌하고 시원해서 떠날 줄을 모르게 된다. 그리하여 이렇게 하기를 오래하다 보면 음산한 바람·습한 이슬이 그 사람의 피부와 뼛속까지 침입하여 그 증세가 가벼우면 몸이 뒤틀리고 심하면 온 몸이 마비되는 중풍에 걸리고 만다.
 구구하게 한때의 번거로움을 풀려다가 고황(膏¡)의 깊은 병을 얻으면서도, 끝내는 해로움이 많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부터 성현들께서 이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교화가 생기게 된 까닭이다. 사람들이 이 이치를 통달하면 도를 깨치게 되리라.
 
구도의 자세는 무엇인가 ?

 세상의 풍속을 보면 고용된 노비는 주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전신이 피로하고 죽겠어도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잘못하거나 꾀를 부리면 주인은 노하여 욕지거리를 하며 채찍질을 한다. 그래도 노비는 조금도 이것을 싫어하지 않고, 주인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어찌 성냄과 원망을 이처럼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먹여 살려 주는 이양(利養)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성내고 원망했다가는 주인에게 쫓겨나 끝내는 먹고 살 수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이양(利養)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는 일을 모두 잊은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바깥 경계에 부딪치면 갑자기 퇴타심(退惰心)을 낸다. 그러나 그저 먹고 사는 이양을 도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먹고사는 이양을 구하는 것은 간절하게 하면서도 도를 구하는 것은 소홀하게 하는가? 이것을 깨닫고 스스로 힘써야 되리라.
 
출가자도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가?

 유가(儒家)의 경전에서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책임을 맡기고자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의 심지(心圍)를 먼저 괴롭히고, 그 육신을 고통스럽게 하며, 그 몸뚱이를 주리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위없는 큰 깨달음에 대해서는 말로 표현해서 무엇 하겠는가! 어찌 큰 책임만이 있겠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오랜 겁 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셨다. 이렇게 하느라고 오랜 겁이 지나 그동안 쌓인 뼈는 수미산처럼 높았고, 마신 우유만도 바다와 같았으니, 결국 몇번이나 몸뚱이와 생명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이리하여 "나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없는 대도(大道)를 아낄 뿐이다."라는 말이 남게 되었다.
 슬프다! 요즈음 도를 닦겠다는 자들은 그저 도를 닦는다는 그 자체로써 명분을 삼기는 한다. 그러나 그 하는 행동을 살펴보면 배고프지 않아도 밥 먹고, 피곤하지 않아도 침소로 향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제멋대로 시주물을 쓴다. 그러다가 더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망과 탄식이 마구 일어나며, 남이 부지런히 정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막고 물러나 움추려버린다. 천하에 어찌 노력하지 않고 거두며 심지 않고 수확하는 것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선배들은 대근기를 갖추었으면서도 깨치지 못하거나 사무치지 못한 날에는 밥 짓고 절구질 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를 숨기고 아무리 천한 일일지라도 감히 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감히 방종하면서 스스로를 돌보려 하지 않는가!
 옛날 관자(管子)는 제(齊)나라 임금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임금의 몸으로서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짐독( 毒)을 가까이 하는 격입니다. 그것을 절대로 그리워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다. 나라의 임금이 되면 부귀와 편안함을 가까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수행하는 우리들은 생사대사를 뼈아프게 여겨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그러니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처럼 화급히 하더라도 오히려 시간이 없을텐데, 편안함에 안주해서야 되겠는가! 게다가 관자가 말한 짐독은 그 피해가 한 생의 몸뚱이를 해치는데 지나지 않지만, 우리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짐독은 만겁의 혜명(慧命)을 해친다. 그러니 그 해로움은 서로 비교도 할 수 없다.
 
25. 
 염송(念誦)에 이르기를, "대중들은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일종의 비유로써 이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다. 머리에 붙은 불을 그대로 둔 채로는, 매우 굶주린 상태에서 음식을 만나더라도 그 불을 끄지 않고는 먹을 겨를이 없다. 또 너무나 피곤해도 그 불을 끄지 않고는 누구라서 편안히 잠잘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이 아무리 배고프고 쉬고 싶더라도 그 불을 끄지 않고는 결코 쉬거나 먹을 수 없다. 혹 머리의 불을 끄지 못한 채로 빈들빈들 논다면, 비록 불조(佛祖)와 같은 성현이라도 그래서는 안되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 가령 머리의 불을 끄려는 듯이 정진하는 생각이 한결같이 사무쳐, 바로 그 자리에서 몸과 마음을 마치 견고한 병기와 삼엄한 성곽처럼 늠름하게 하여 조금도 범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생사의 업식과 알음알이로 전도된 것을 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
 지금도 총림의 강유(綱維)가 있는 곳 치고는 매월 8일이면 대중들을 엄연하게 모아놓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거량(擧揚)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마치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의 비대하고 수척한 모습을 보듯 무관심하기만 하다. 또는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배우가 북을 치고 피리부는 소리를 듣더라도 전혀 감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정진을 게을리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진하는 모습을 듣고 보는 것조차도 싫어한다. 이는 일 없는 것이 상쾌한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슬프다. 인심이 거칠어져 모두가 이토록 게을러졌구나! 설사 백장(百丈)스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시더라도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구나! 어찌 해볼 수가 없구나!
 
東語西話續集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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