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미학 강의
①미메시스(Mimesis)
희랍어로 모방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전형적으로 회화적
재현(pictorial represen-ation)의 동의어로 쓰인다. 모방이란 일종
의 관계 개념으로서, 한 그림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대상의 그
림인 한에서 그 대상에 대해 모방의 관계를 갖는다. 모방의 개념
을 철학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했던 플라톤은 국가 10권에서 화
가를 모방술이라는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사람으로
설명하였다. 화가는 원형의 가시적인 외양을 베껴냄으로써 그
원형과 닮은 일종의 거울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림이 보여주
는 상은 원형인 실물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존재론적으로 볼
때 원형보다 열등하다. 본디 미메시스는 없는 것을 현존하게 만
드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과의 그림이 실제의 사과처럼 달콤한
맛을 가질 수는 없듯이, 그림은 원형이 갖는 어떤 속성들을 결여
하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모방을 닮은 이미
지를 만드는 것으로 보는 입장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모방 개
념으로서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삼차원적인 대상의 외양을 평면에다 베껴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한 작업에 포함되는 것이 정확히 무
엇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
이 다른 어떤 것을 닮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
엇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검토를 거쳐 반론을 제기하
는 사람들은 대체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그룹은, 고전
적인 모방 개념에서 닮음의 결과를 낳게 하는 필요조건, 즉 모
방물은 원형이 갖는 색깔이나 형태같은 속성들과 대응되는 속성
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조건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곰브리치
와 굿먼은 실제 대상을 평면에 묘사할 때, 원형의 속성들을 모방
물에 나눠 갖게 하는 자연적인 모사의 방식이 개입되는 것이 아
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습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회화에 원근법이 도입된 것은 자연주
의적인 모사방식이라기 보다는 재현의 방식으로 제시되었고 학
습을 거쳐 소위 사실주의의 한 관례로서 확립되었던 것이다. 실
제로 세잔느는 기하학적인 재현방식을 의심하면서, 대상들은 실
제로 윤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색깔들과의 관계를
통해 시각적 현상으로서 보여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반론은 과연 우리가 어떤 대상의 외관을 베껴내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정확한 모사가 가
능하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닮은꼴을 만드는 것은 의의가 없다.
존재론적으로 잉여의 사물을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림이나 조각의 가치는 닮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있지 않고, 주어진 대상의 참모습 또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있다고 보는 이상화(idealization)로서의 재현개념이 제시
된다. 이 입장은 주로 신플라톤주의 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는
데, 사실상 현상보다는 실재, 즉 사물의 참된 상태를 우위에 놓
는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모방론자들과 크게 다름이 없다. 그리
고 숭고미의 예찬자들에게서 보여지듯이 추한 대상이라도 적절
하게 묘사되었을 때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며 감동을 줄 수 있다
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상화로서의 모방개념은 모방에 대한 하
나의 규범일 뿐 모방의 총체적인 설명으로서는 부적합하게 보인
다.
듀이, 하이데거, 가다머 등의 현대 사상가들은 대상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해부하면서, 고전적 모방론에서 주체와 객체를 이분
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모
방한다고 할 때 모방의 대상이 과연 주체 앞에 선재하는 것인지
를 의심한다. 세계는 수동적으로 우리 앞에 있으면서 우리가 그
것을 모사하거나 이상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
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우리가 재현하는 행위에 의해 비로소
모습을 갖게되고 심지어는 창조되기도 한다. 대상이 우리에게 인
지될 때 그 대상은 무언의 미완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목소리
와 얼굴을 가진 존재이다. 대상이 가진 뚜렷한 모습은 우리의 의
식적 행위, 그림의 경우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행위에 의해 생성
된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의식된 대상은 유의미한 대상으로서,
우리의 의식에 의해 이미 해석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존재론
적인 전화를 동반한다. 즉, 그림이 대상을 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그림을 닮는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을 단순히
모사할 수 없고, 그림을 통해 대상이 비로소 모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적인 모방개념은 삶이 예술을 모방한
다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모방개념은 형이상학적인 입장에 따
라 상이하게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재현적인 예
술작품을 경험할 때 원형과 모사물 사이에 지각적인 유사성을 느
끼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각적 현상
을 랭 는 형태학적 또는 인상학적으로 설명한다. 마음에 어떤
도식이 형성되면 도식의 틀을 통해 우리는 이질적인 영역에 속한
두 대상 간에서도 유사성을 지각할 수 있다. 이 설명에서는 두
대상이 속성들을 정확히 공유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또 마음의
도식은 재현의 관례들을 배움으로써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실
제의 상징체계들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의 도식이 형성되
는 과정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은 인지과학적인 연구가 동반되어
야 할 것이다.
서구미학강의 - ② 형식
인식론에서 나온 미의 필수개념
사회변화에 민감한 예술적 속성 반영
주지하듯이 형식은 미학의 독특한 개념이 아니다. 18세기 중엽
독일에서 바움가르텐의 『미학』(1750)이 출간된 이후 비로소 철
학의 한 교과로서 확립되기 시작한 미학은 이 개념을 특히 인식
론과 형이상학으로부터 이양받았다. 그러나 이 개념은 미학을
통해 각별한 비중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미학의 가장 주된 대
상인 미의 이념은 작품 속에 현상함으로써 비로소 구체화되는 속
성을 지니며, 또한 이미 이 점에서 형식은 미의 불가결한 요소
로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미학에서 논의되는 형식은
오늘날 각양각색이라 할 만큼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실정이다. 이
것은 형식이 내용, 질료, 요소, 소재 등의 다양한 개념들의 반대
말로 쓰이고 있는 사정만 보더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형식의 출발, 객관적 기준의 모방
우리는 형식을 미학적 견지에서 외적 형식과 내적 형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 외적 형식이란 소리, 색, 굳기 등의 형태로 감
각기관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나 혹은 이러한 감각적 소여
들을 외적으로 설명함에 따르는 비례, 균제, 조화, 질서 등과 같
은 규정들을 일컫는다. 이중 후자는 고대 그리이스의 미적 형식
에 관한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조
각가들은 얼굴과 신체의 1:8의 비율이나 이마와 얼굴의 1:3의 비
율을 이상적인 것으로 준수한다. 이 관점은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발전되어 “미는 질서와 비례”라든가 “비례가 없이는 어
떠한 예술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천명되었고,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의 규정
을 위한 유력한 척도로서 남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못생긴 얼
굴을 희화적으로 무질서한 얼굴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 경우에
도 비슷한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생각에 충실하자면 예술은 외
적, 객관적 규정으로서 형식의 모방(미메시스)으로 간주된다.
객관화된 이념으로서의 형식
그러나 현대적 안목에서 볼 때 이것은 혹 미를 규정하는 한 필
요조건은 될지언정 결코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은 되지 못한다.
이러한 반성은 이미 근대의 시작과 함께 뚜렷이 부각되었다. 무
엇보다 인간의 주관적 능력이 강조되던 근대에 예술도 역시 주
관성의 표출을 목표로 삼았다. 이와 함께 근대 예술은 인간의 정
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미의 내적 형식에 관한 문제로 눈길을 돌
린다. 외적 형식으로서 미의 비중은 점차 낮아져, 급기야 근대
예술의 대표적 사조인 낭만예술은 고전적 관점에서는 비미(非美)
라고 부를 만한 것을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즉, 예술의 목적은 아
름다운 작품의 산출에서 깊이 있는 작품의 산출로 바뀌었다. 여
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예술의 내용규정과 그에 따르는 현상방식
이다. 이 점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헤겔의 소위 내용미학
이다. 그에 의하면 형식은 객관화된 이념이며, 따라서 참된 예술
은 자신의 개별적 형태 속에 이념을 품어야만 한다. 이제 이념
이 자기현상적 정신의 최고 결과라고 한다면, 각각의 역사적 단
계에서 성취된 정신의 수준에 따라 예술적 형식도 함께 규정된
다. 이를 통해 예술의 의미는 단순한 흉내나 모방을 넘어서 형이
상학적 의미를 현시하는 유력한 정신적 형식으로 고양된다.
극단적 주관주의 시대로
그러나 벌써 쇼펜하우어나 니체에 이르면 이념은 과거와 같은
비중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비친 현
실은 자유실현의 희망이 물결치던 헤겔의 시대와는 달리 도저히
이념의 현존을 인정할 수 없으리만큼 참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며, 또한 다만 이기적이며 권력지향
적일 뿐인 의지가 세계를 움직이는 기본 바탕으로 되었다. 보편
성이 상실된 시대에는 니체가 말하듯 각자마다의 입장에 따라
사물을 해석하는 시각주의(Perspektivismus)가 득세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은 그들 나름의 독특한, 보다 정확히 말해 기이한 형
식의 고안에 열중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경향의 맹아
를 사물 자체 보다는 사물을 보는 방식을 더욱 중요시하는 세
잔느에게서 발견한다. 그리하여 현대는 무수한 형식이 범람하는
다원주의적 분열의 시대로 되었으며, 더불어 예술은 뤽 페리가
말하듯 예술가 자신의 명함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형식의 이러한 변천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현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발견한다. 다만
예술은 그 현상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또한 그것을 가장
일찍부터 표현해 왔을 따름이다. 우리가 예술의 탁월한 예민성에
계속 신뢰를 보낸다면, 우리는 새로운 보편성의 정립을 통해 분
열의 시대극복을 약속하는
최초의 형식도 역시 예술로부터 기대
해도 좋을 것이다.
서구미학강의 ③창조성
창조성, 미적 대상 제작/ 관례적 사고로부터 탈피
창조성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창조란 이제까지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피터 대
제가 러시아를 세웠다거나 유대 - 기독교적 신이 무로부터 우주
를 만들었다고 말할 때 창조자는 제작자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를 제작자로 이해할 때 예술가의 창조성
은 그가 우리의 미적 감상을 위해 어떤 종류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 이 개념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서 세익스
피어가 쓴 『템페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대상의 제
작물들을 포함한다.
한편 엘리어트의 구분을 따라, 첫째 의미와는 다른 ‘새로운
’ 관념 또는 개념의 창조에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유의미한 창
조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제작자로서의
창조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물리적 소재인 대리석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천연 대리석의 상태를 변화시킨 것일 뿐이다. 세익
스피어가 16세기 영어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둘째
의미의 창조성에서 ‘새로움’이란 단순한 ‘다름’이라기보다
는, 관례적 사고를 벗어나는 혁신성과 적절함에 초점을 둔다. 아
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창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창조적 예술, 혁신성의 직접 체현
이상의 두 창조성의 개념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세계 안에 들
여온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지만 예술에서의 창조의 개념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하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만들어 낸다. 미
적인 가치를 갖는 대상이란 특별한 어떤 성질이나 특징을 가짐
으로써 감상자의 미적 관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피카소의 그림들이 미적으로 가치있다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혁
신적인 이념을 단순히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물감들의 구성을
통해 그러한 혁신성을 직접 체현(embodiment)하고 있기 때문이
다.
한편, 창조적인 예술이 물리적으로 현시하는 그러한 미적 가
치들은 작품에 내재된 고유한 성질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러나 대상이 갖는 미적으로 가치있는 성질들은 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주목하게 되는 성질들로서 사
람들이 귀속시킨 성질들이다. 즉, 어떤 대상의 어떤 측면이 미적
으로 가치있다는 것은 그 대상을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성질들처
럼 통사회적으로 인지되는 객관적 성질이 아니다. 특정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적 성질은 공
지성을 갖지만, 그러한 공지성이 모든 사회들에서 발견되는 것
은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제도적으로 귀속된 이차적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차적 성질로서의 미적 성질들은 사람들
의 관심의 변화에 따라 취소될 수도 첨가될 수도 있다.
한편, 창조적인 예술가가 미적으로 흥미롭고 가치있는 성질
을 가진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창조성의 개념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 우리가 걸작들의 복
제품을 감상할 때 복제기술의 정도에 따라 원작 못지 않게 훌륭
한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복제품은 미적으로는
가치 있을지라도 예술적인 가치를 갖지는 못한다. 예술의 가치
는 역사적 개념으로서 유의미하게 새로운 대상에만 귀속된다. 미
적으로 가치있는 대상이라도 그것이 동일한 미적 성질들을 가진
다른 대상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예술적으로
가치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복제품은 미적
인 가치를 소유하더라도 예술적 가치는 결여된다. 이 점에서 예
술의 창조성은 하는 예술의 창조성은 예술사적으로 유의미하게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에게 주는 찬사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현대의 예술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창조성보다는 찬사의
의미에서의 독창성에 비중을 둔다고 말할 수 있다. 독창성이 예
술사에 나타났던 다른 예술 작품들을 준거의 틀로 삼는다고 볼
때 독창성은 역사적촵상대적촵평가적 개념이 된다.
반복 예술에서 동일성의 문제
창조성과 연관된 해묵은, 그러나 중요한 한 측면이 있다. 회화
나 조각의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반복적인 예
술, 즉 음악이나 건축, 문학 등의 예술들에 있어서 과연 진정한
작품 자체는 무엇인가 하는 동일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한
음악 작품의 연주 사례들을 그 작품 자체라고 볼 수는 없으므로
악보라는 순수한 형식구조를 작품 자체라고 보는 플라톤주의자들
이 있다. 그들에 의하면 형식구조로서의 음악이 역사의 어떤 시
점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악보를 쓴 사람
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 악보가 표상하는 형식구조 자체는 물
리법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의미있
는 발견을 우리는 창조적인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미학강의 ④ 미적 경험
미적 경험, 원초적 감성으로 인간의 존재에 타당성 부여
이창환 <서울대 교수·미학>
미학에서 미적 경험의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은 그
것이 원리적으로 다른 종류의 경험들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적 경험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경험일까? 이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일단 우리는 ‘미적’
과 ‘예술적’이란 용어가 의미상 반드시 합치하지 않음에 유념
해야 한다. 즉, 때로는 예술적이기는 할 지언정 미적이지는 않은
상태가 있고, 또한 그 역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과 미의 관계를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양자가 긴밀히 관계하고 있음이 사실이긴 하지만, 미는 예
술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또한 예술 역시 전적으로 아름다움
만을 추구하는 노력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 볼 때, 이것은 ‘미적’이란 용어가 ‘
예술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감성적’으로 해석되어야 마
땅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미적 경험을 일차적으로 감
성적 경험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감성적 경험은 무엇보다
우리의 지각능력에 의해 촉발되며, 그런 한도에서 그것은 예컨
대 예술작품과 같은 개별적 대상에서 비롯되는 경험일 수밖에 없
다. 다시 말해 미적 경험은 선과 같은 보편적 개념에 따르는
도덕적 판단과는 이미 그 출발점에서부터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지각이 곧 미적 경험으로 인도되는 것은
아니다. 지각은 우리 안에 여러가지의 감정을 야기시킨다. 그
중 미적 경험과 관계하는 지각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이제 미적 경험의 최우선적 특징이 즐거
움이라면, 그것은 미적 경험이 바로 우리의 취미판단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취미판단은 인식이 아니며, 따라서 논리적이 아니라
감성적이다. 이것은 취미판단의 토대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는 칸트의 언급은 이를 잘 대변한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의 감정이 곧 미적 경험인 것은 아니다. 즐
거움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먹음으
로써 느긋함을 느끼며, 의지적 목표를 세운 사람은 그 목표를 달
성함으로써 환희를 느낀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들은 욕망이나
의지의 충족일 뿐, 한 사태의 순수한 미적 본질의 경험으로 간
주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순수한 미적 경험이란 일상적
즐거움과 비교될 수 없는 즐거움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순수한 태도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순수한 미적 태도란 과연 무엇일까? 미적 태도란 우
리가 세계와 대면하는 한 독특한 방식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방
식들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과학적 태도, 종교적 태도,
도덕적촵형이상학적 태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태도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우리 자신 속에 편입시키거나 또는 우리를 세계
속에 편입시켜 세계 속에서 우리 존재의 타당성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와의 관계정립에 기초하여 우리는 문화와 제
도와 교육 등의 실제적 분야들을 위한 원리를 마련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점차 중시되어 온 미적
태도와 그 산물로서의 미적 경험이 그들의 분화와 인간성의 고양
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미적 태도를 인간 정신의 한 불가결한 요소인 것으로 체계화
한 사람은 칸트이다. 그에 따르면 미적 태도는 윤리적 태도와
학문적 태도의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미적 태도를 소유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모든 종류의 사적인 욕망들을 제거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지성과 의지의 개입마저도 차단해야 한다.
즉,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순수한 마음의 상태로 되돌아 가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의 여러가지 인습과 제약에 물들은 우
리가 참된 의미의 미적인 태도를 지니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
를 위해 우리에게는 본성을 되찾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극기가 요
구된다. 하지만 일단 순수한 마음이 준비된 상태에서 우리가 세
계를 대면하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가 세계와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임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즐거움을 주는 세계를 - 그것은 자연일 수도 있고
자연 속에 숨겨진 가장 깊은 비밀을 가시화한 예술작품일 수도
있다 - 우리는 아름답게 느낀다.
세계의 원리와 인간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또한 이 동
일성은 미적 경험을 통해 구체화됨을 설파하는 칸트의 사상은
물론 그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변형을 겪었지만, 세계
의 본질이 미적 태도를 통해 경험 가능하다는 근본적인 면에서
는 흔들림이 없었다. 인간은 미적 경험 속에서 도덕적이거나 학
문적이지 않고서도 자신에게 본래적인 감성을 통해서 세계의 본
질로 - 또한 이와 더불어 삶의 본질로 - 접근할 수 있는 통로
를 찾은 것이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정신 속에서 삶
을 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를 간파한 니체나 그
의 예술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더니즘 계열의 미학사상들
은 모두 세계의 총체성이 미적 경험 속에서 비로소 알려질 수 있
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적 경험이란 단순히 감관
에 유쾌한 자극을 주는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학문적 노력
이나 의지적 노력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즐거움과도 구분된다.
미적 경험은 감성에 기초하여 세계 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타당
성을 보장해 주는 경험이며, 이로 인해 삶의 근본적인 즐거움을
확인시켜 주는 경험인 것이다.
서구미학강의 ⑤해체
파괴·구성 넘나듦 통한 끝없는 '역설'의 유희
김혜숙<이화여대 교수·철학>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은 이제는 진부하게조차 들린다. 그
러나 과연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답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일단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촵사회
촵경제촵예술의 맥락을 포괄하는 전체 문화적 상황과 특징을 표
현하는 개념이라고 해 두자. 그리고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주의
가 한 시대를 풍미한 이후에 구조주의와 다양한 사상적 전통을
결합하여 탈구조주의적 성격을 띠고 등장한 일련의 사상적 움직
임이라고 해 두자. 라깡, 알뛰세,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들뢰
즈 등이 여기에 속하고 있다. 이제 그러면 해체주의는 무엇인
가?
해체주의는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해 제시된 새로
운 철학적 프로그램, 혹은 전략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포스트 구
조주의, 또는 후기 구조주의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언어의 임의성’에 관한 소쉬르의 동참에 바탕을 두
면서 소쉬르의 혁명적 생각을 보다 극단화하여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의 이분법마저도 전통적 철학적 이분법(감성/이성, 현상/본질,
물질/정신 등의)에 속하는 것으로서 비판한다. 데리다는 의미화의
원리로서 소쉬르의 ‘차이의 원리’에 시간 개념을 도입한 ‘차
연(differance)의 원리’를 설정함으로써 끊임없는 의미의 생성과
변화의 차원, 그에 따른 의미구조의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강조함
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서려 한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생각은 문화 안에서의 인간의 모든 행위,
나아가 문화 자체가 기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의미구조로서의
언어라는 생각에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의미의
그물망으로서 하나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초
월적,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절대적이고 객관적 방식으로 확정지
워지는 것이 아니라 섬과 같이 떠 있는 의미의 그물망 안에서
자기들끼리의 통시적, 공시적 관계지움 속에서, 차연의 놀이를 통
해 생겨난다. 텍스트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은 서양 철학의 역사를 견인해 온 근본적 이분법들(언어/실재세
계, 사유/존재, 현상/물자체, 감성/이성적 직관 등)을 거부하는
것이며 전통 형이상학의 역사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거부, 이전의 철학
에 대한 거부는 단순한 파괴나 부정, 전도의 의미가 아니다.
데리다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하고 있는 이 부정의 방법은
형식논리적 부정도 아니고 변증법적 부정도 아니다. 현전, 근원,
본질, 주체, 자기의식 등을 중심에 놓고 있는 전통 형이상학을
해체한다는 것은 그것을 바깥의 비형이상학의 지점(예컨대 과학
의 관점)에서 파괴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의 내부
로부터 그 안에 있어 왔던 개념과 도구틀을 이용하여 그 자신의
역설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형이상학의 역사를 파
괴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또 다른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것은 자
기모순적이다. 하이데거나 니체는 모두 이러한 역설에 빠졌다
고 데리다는 본다. 해체는 대안적 관점에서의 부정이 아니라 대
안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역설을 포괄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부
정하고 있는 전통 안에서 그 전통의 것으로 자신의 무기를 삼는
방식은 역설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체의 전략은 따라서 단선적이고 단절적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파괴하면서 구성하는
(destruction + construction = deconstruction) 이중성을 내포하
며, 안과 바깥을 넘나들면서, 경계에서 유희하면서 금지의 체계
를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반하고 (위반하기 위해서도 금지
의 체계는 존재해야 한다) 가로지르면서 작동한다. 해체는 중요
한 철학적 방법이면서도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실천하
고 있는 바의 것이기도 한 역설의 논리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
도 폐쇄적으로 완결적인 자기동일성을 가질 수 없고 끊임없는 타
자에 대한 지시 속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철학은 철학의
타자인 것들과의 넘나듦 안에 있는 것이다.
해체의 전략은 여러 부문에서 이용될 수 있다. 해체주의 예술
이라는 이름을 걸고 들어오는 것들 중에 해체주의 건축의 시도는
흥미롭다. ‘차연’의 개념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하는 파리의
라 빌레뜨 공원(Parcde La Villette)은 전통적 공간과 건축 개
념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여
기서는 기능과 형태의 관계가 대폭 수정되고 있으며 하나의 기
능은 다른 기능과 넘나듦의 관계에 있다. 점, 선, 면들의 세가
지 자치 시스템을 상호 교차시키거나, 직선적 공간 가름 대신에
파동적 형태의 선을 이용하기도 하고 용도없는 공간을 만들거나
무질서, 불안정한 공간구조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전통적 공
간과 건축 개념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 동경 국립극장도
건축과 그것의 타자인 음악을 접목시킴으로써 건축 개념에 대한
해체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해체주의 예
술은 역설적인 요소를 드러내 보이는 전위나 변위의 방법을 사
용하며 의미의 다종성, 불확정성을 보이기 위한 은유나 환유의
기법을 사용한다. 또한 인식론적 단절의 불가능성을 강한 역사
성을 도입시킴으로써 보여주기도 하고 이러한 역사성은 토속성의
도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진 변증법은 헤겔에 의해 집
대성되어 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전 그 안의 한가지 함정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펴나갈 제 이론(?)은 지양(SUBLATEION)에 있어서 지양인(SUB
-LATER)에 주목을 했다는 것입니다.저로서는 이를 통해 기존의 미완
의 개념들에 명쾌한 답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대단히 두서없고 체계적이지 못한 글이 될것 같습니다만 모쪼록 인
식의 기초인 변증법의 가치를 아는분들이라면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
다.저 나름대로 밟아온 철학학습의 길이 여러분과 다를수도 있고 기
초적인 전제들이 상당부분 공유되지 못함에 기인하는 이해의 어려움
도 많이 있을것입니다.
철학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날카로운 비평을 기다립니다.
생소한 소개념들은 제가 만든것입니다.그에 대한 각론은 중간 중간
나갈것입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1--
지양인의 발생,분열의 의의, 목적
지양인은 세계속에서 "관념의 무작위적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 무의식은 어떤 지양인이 발생했을때 재빨리 기존 체계에 검색을
한다.그러나 종종 이 지양인은 다른것들에 저지당한다.반지양인의 저
지를 극복키 위해선 그 하위단계의 지양에서 생성된 에너지(공자가
말한 인의 상태,헤겔이 말한 사랑)가 필요하다.-이는 그 개체에서 충
족되지 못할 경우 다른 개체에서 흡수될 수도 있다.(의도적인 흡수도
있다)
위 작용을 위해 "전체의 개체로의 분열"과 "그 개체들 각자의 발전"
이 필요하다.(분열의 의의가 명쾌하게 밝혀진다고 본다)
이것은 인간세계에서 사회의 존재의의,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해답도 된다.
끝으로.. "관념의 무작위적 결합"이라는 현상에 대한 통계학적 고찰이
요청된다.
--2--
새로운 변증법-지양의 본질,특성,완전함의 정의
지양은 근본적으로 현상이고 action이다.과정일뿐이며 따라서 완전히
정적 상태나 물을 가지지 않은 순수한 동적현상이다.
우리는 중요한 명제 하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둘이상의 존재
가 있으면 그것들이 융합해(상호작용을 시작해) 동적 상태인 지양으
로 이끌리기 위해선 "이끄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이는
지양인 이론의 핵심이자 출발점이 되는 명제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자
들은 무의식중에, 생명은 "저절로" 생긴다는 믿음(파스퇴르에 의해 입
증된 그 오류)과 같은 오류에 빠져 있었다.이는,존재들 그리고 상호작
용에만 촛점을 맞추는 무의식적(컴퓨터 용어를 빌리자면 "디폴트된")
사고방식에 철학자들 자신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작용
"이 있다면 "작용자" "원인"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한것이다
.이는 분명히 그 존재들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모든 존재는 모두 그
밖의 더 큰 시스템의 부분임을 상기하자-
우리는 이제 "완전"을 정의할 수 있다.이는 그간 가치판단의 용어로 부
당하게 사용되어 온 "완전"이란 용어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지양인(sublater)은 지양을 일으킬때 그 체계안에서 유일하게
완전하다."사실 "유일하게"란 부사가 붙을 필요도 없다.그러나 "그 체
계안이란 말은 중요하다.또 중요한 사실은 지양인의 완전성은 그 지양
의 가치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하다는것이다.
be continued..
니이체에서의 虛無主義
1.들어가며
니이체의 중심사상은 허무주의 니이체는 허무주의를 정신의 나약함의
징후로 나타나는 수동적 허무주의,정신의 강함의 징후로서의 능동적 허
무주의의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이 글에서는 수동적 허무주의는 허무
주의로 간략하게 표기하며 능동적 허무주의는 그대로 쓰기로 한다. 허
무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니이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그의
철학에서 허무주의를 간과한다면 니이체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를 잃게
된다.니이체 자신이 "내가 가장 전념한 것은 사실 데카당스의 문제다"
라 고백한바 있다.
니이체에 의하면 서구의 모든 도덕 철학 종교는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
된다. 그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파헤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면서 새로
운 미래의 철학을 제시하려 한다. 종래의 도덕이나 철학및 기독교에 대
한 니이체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에 집중된다. 그러면 허무주의란 무엇
을 뜻하는가. 허무주의로 번역되는 독일어 Nihilismus의 라틴어 어원
nihil은 無를 의미한다. 허무주의는 형식적으로는 어떤 것도 승인하지
않고 부정하려고 하는 입장이지만, 그 중점이 어디에 놓여지는가에 따
라서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것이 있을 수 있다. 허무주의의 제 형태는
상호 연결되어 나타나는 수가 많으며 허무주의의 일반적 특징은 懷疑主
義的인 사고방식이 과격화하여 급기야는 절대 부정의 입장을 취하는 데
있다.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의지처가 될 수 있는 일체의 것, 즉 實在
信仰 道德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낸다. 온갖 理想, 秩序가 부
정되지만, 그러나 이것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것은 생기지 않은, 말하
자면 사상의 無政府狀態이며 혼돈인 것이다.
그러면, 니이체는 허무주의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가 몰가치화되고, 목표가 없으며, 무엇 때문에라는 물음
에 해답이 없다" 는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실의 세계와 인간 생존
의 의미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러한
生 否定에 이르게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니이체에 의하면 여기에는 상
반되는 것들이 있다.
첫째로는 초월적 원리와 피안의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결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원론적 세계관 때
문에 나타나게 된 것으로 유신론적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도리어 어떠한 초월적 존재도, 가치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필경에는 허무주의에 귀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은 무신론적
허무주의이다. 니이체는 이것을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 표현하였
다.
그러면, 현실세계와 초월세계의 관계가 어떤 것이기에 피안의 세계
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허무주의로 귀결케 되는 것인가? 니이체의
사유를 예의 추적하여 보면, 이 두 세계를 聯關性 내지 同一性의 관계
또는 對立 내지 矛盾의 관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세계는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섭리되고 있다고 할
때, 특히 인간
이 신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현실세계의 생성의 의미와
가치의 근거는 바로 초월세계에 있게 된다. 이것은 이 두 세계가 밀접
한 연관관계 또는 동일성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
이다. 니이체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뒷받침하고 있는 철학자라고 보는
플라톤에 의하면, 참 實在인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만
현세적 사물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가 긍정되면, 후
자도 긍정된다. 인간이 초월적 신의 존재를 믿을 때, 큰 위로를 얻게
된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신의 긍정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가 긍정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변하여 신의 세계의 긍정이 인간의 세계의 부
정을 초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세계의 관계는 실체적 존재와
현상적 존재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
면, 이 양자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만일 같다면, 이렇게 둘로 갈라서
생각하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초월적 절대신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참 실재로서 영원불변적 존재인 데 반
하여 현실세계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자신을 있게 할 수 없으며, 그
자체만으로서는 어떠한 의미와 가치도 갖지 못하는 생성 변화해 가는
덧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초월세계와 현실세계는 대립 모순의 관
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만이 초월신을
긍정
하는 기독교가 현실세계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있게
된다. "당신들은 숭배하는 일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버
려라!"라고 하는 니이체의 말은 이 대립 모순되는 두 세계 중에서의 양
자택일의 필요성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니이체적 사유의 기본틀을 파악하는 일이 그의 철학에 있
어서의 허무주의를 논의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중요하다. 여기서는 니
이체가 진단한 허무주의적 양상, 이러한 허무주의가 도달하게 한 근본
요인들,그리고 허무주의의 극복등을 알아봄으로써 니이체에서의 허무주
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해명해 보고자 한다.
[60] 제목 : 니체의 허무주의 - 본질 연구
2. 虛無主義의 본질 究明
2.1.1. 有神論的 虛無主義
인간이 의식하면서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부단히 생성하고 소멸해
가는 변화의 세계이다. 인간에게 경험되는 한에서 이러한 일들은 통하
여 도달되는 어떤 궁극적인 목표나 목적이 없는 것 같고, 잡다하기 이
를 데 없는 세계의 현상들을 묶는 궁극적인 통일도 없어 보인다. 이것
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그의 表象能力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단순한 우연적 존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무의미한 삶, 더구나 고통스러운 삶을 언제 끝난다는 기약도 없
이 영위해 나가는 일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제한된 존재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믿을 수 있고,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기
위하여 궁극적인 어떤 목적과 유기적인 통일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세계를 가상의 세계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이 세상
아닌 어딘가에 참된 세계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상상적인 날조를 하기
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자연적인 추세이기도 하며, 현
실로부터의 탈출의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념상의 탈출에 불과한
것이나 자유로운 인간의 자기결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 자신의 요
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절대자의 세계는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인간은 그 속에서 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불완전하고 언젠가는 덧없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감당해내기 위하여서도 영
원한 절대자에 자신을 연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현실적 삶을 지탱
해내기 위한 위로는 초월세계와 이 세계의 연관성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彼岸의 세계가 존재하므로 此岸의 세계도 있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이에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定礎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신적 존재를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단순치 않다.
대자연의 운행과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원리를 신적 원인에 귀
속시킬 수도 있으며 또한 한계상황과 같은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인간
이상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인간은 구원을 얻으려고 할 수도 있다. 그
리고 사물을 이해관계에서 보는 목적론적 사고방식에 의하여서도 신이
만들어질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사고에 의하면, 신의 창조 없
이는 세계가 허무에 불과하다. 허무로부터 만들어진 세계는 오직 신의
절대적인 의지와 힘에만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본래 이원론적 세계관
속에는 이 현실세계는 참 세계인 피안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라고 하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이 작용하고 있다. 이 두 세계는 결국에
는 대립 내지 모순 관계로 빠지게 된다. 즉 신의 긍정은 현생의 부정
을 귀결케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옳은 뜻에서 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초월세계뿐이다. 초월신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
을 수 있겠으나 어쨌든 만들어지면, 이 현실세계를 부정하게 되는 결
과는 같다.
이 현실세계에 어떠한 의미나 가치도 인정할 수 없게 하는
모든 형이상학 내지 철학도 허무주의적이라고 니이체는 말한다. 초월
적 신과 종래의 지고의 가치에 대한 신앙 자체가 허무주의를 초래하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도덕도 생을 부
정하려고 하는 의지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도덕은 금욕주의로
나타나 생을 부정한다. 사람은 이러한 도덕의 타당성을 믿고 있는 한
생존 자체를 단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니이체에 의하면 "도덕적 가치판단은 단죄이며 부인이다. 그리고 도
덕은 생존 의지로부터의 배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도덕은
생에 대하여 극형을 받고도 남을 죄를 범하고 있다" 는 것이다. 생에
의 의지의 부정이 종교가 된 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은 신 피안 참 세
계 등의 개념을 가지고 현세적 생의 가치를 부인하고, 이 유일하게 존
재하는 세계의 가치를 滅却시켜 버리려 하는 것으로서 현실에 대한 극
단적 적대형식이라고 니이체는 말한다. 그것은 생의 죽음을 염원하
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생을 배반하게
함으로써 생을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그것은 염세주의를
촉진하고 드디어 허무주의가 나타나게 한다.
인간들이 처음에는 신을 만들어 그것에 의하여 이 현실세계와 인간
존재에 가치를 주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 일을 통하여 도리어 이 세계
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을 가치와 實在性조차 부
정하게 되고, 단순한
가상의 세계로 전락토록 하였다. 니이체는 이 사실을 "이상의 세계를
虛構하는 정도에 따라서 사람은 이 실재로부터 그 가치, 의미, 진실성
을 뺏는다" 라고 나타내고 있다.
2. 無神論的 虛無主義
현실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초월세계를 믿는 것이 허무주의이지만,
유신론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무신론이 허무주의가 된다. 왜냐하면 참
세계인 초월세계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니이체는 자신의 철학을 무신
론적 허무주의로 분명히 자각하였다. "신은 죽었다"고 하는 말 속에
그가 자신의 입장을 허무주의로 인정한 것이 격렬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의 시대 진단으로서 현대의 허무주의도 잘 표현되어 있다. 신은 인
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인간 이상의 것이라
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했던 것인데,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것
이다. 아마도 니이체는 자신이 느낀 바에 기초하여 깊은 사색을 거듭
한 끝에 가지게 된 통찰에 의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을 것이
다.
한편 합리적 실증적 정신의 발달은 신에 대한 절대적 신앙의 상실을
촉진하였고 극단적인 합리주의는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게 된다.
근대 인간이 그처럼 믿고, 절대성을 부여하였던 이성도 실은 인간
의지의 소산 내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니이체는 신뿐
만 아니라 이성도 부정한다. 신과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한,
우상 숭배적 삶이 계속되어 진정한 생의 영위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
다. 그러나 인간들이 신과 이성을 부정하게 되면, 자신의 판단을 의존
시킬 어떠한 초인간적인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생의 궁극
적인 목
적과 통일이 없어져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그리고 필경에는
존재 자체까지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근세 이래의 사회문화가 표면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 심층에서
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있다고 하는 생각은 19세기 중기 이후부터
분명해 졌다. 신과 이성이 부정된 다음 남겨진 자연적 생의 실상은 아
무런 가치도 없는 니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니이체는 허무주의를 서구의 철학적 전통 하에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귀결로서, 또는 지금까지의 최고 가치에 대한 해석이 끝까지 심
사숙고된 논리의 결과로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것은 시대의 필연이
며 역사적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부터 2
세기의 역사이다. 그것은 오려고 하고 있는 것, 오는 일이 피해질 수
없는 것, 즉 허무주의의 도래에 대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 허무
주의가 벌써 1백 가지의 징표로 자신을 고시하고 있으며, 유럽의 모든
문화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형세로 파국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초월적 세계의 비실재성에 대한 통찰에
서 기원한다. 니이체는 심리상태로서의 허무주의의 세 경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 현실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생기현상은 어떠한 궁극적인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사랑과 조화를
더해감으로써 사회 전체의 행복을 이룩할 수 있다든가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최고의 도덕 규범 또는 세계 질서의 실현과 같은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왔는데, 이와 같은 목적의 가설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자 환멸을 느끼며 실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헛된 노력을 기울였다는 徒勞의 의식이 생겨나며, 이제 인간은 세계
생성의 중심도 협력자도 될 수 없다.
둘째, 현실세계의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는 생성 현상들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일원적 통일도 없다고 하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이 통일이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깊은 귀속감 속에서 결함과 의존의 감정으로
숭배하고 찬미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그것의 한 나타남이라
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신을 통해 무한한 가치를 가진 전체자가 역
사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가치지울 수도 있
다. 인간은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믿을 수 있기 위하여 어떤 유기적
통일을 생각해 냈던 것이었다. 개인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적 통일이
최고 가치로서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에 빠지게 된다.
세째, 초월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이다. 세계의 생성 속에는 궁
극적인 어떤 목적도 통일도 없다면, 이제 하나의 해결책은 이 현실세
계를 미망에 불과한 것이라 하고 참된 세계인 피안으로 도피하는 일이
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편한대로 생각하여 사물의 본질로 투영시키
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세계
로 불리는 초월적 존재에는 어떠한 실재성
도 대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왜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
가? 니이체에 의하면,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있다고 믿는 것, 참
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생의 목적을 위한 단순화를 이루려 하기 때문
이다. 또한 그것은 그 지배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유용한 특정
의 원근법의 결과이다. 물론 이 지배에는 자기 지배, 자연지배, 사회
지배 등의 여러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내부적 필요로부
터 유래하는 초월세계는 그 假象性, 非實在性을 면할 수 없으며, 다
만 있다면 하나의 생의 현상으로서, 인간의 심리적 현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목적 통일 초월적 존재라고 하는 세 카테고리는
가치와 이상의 원리로서 현실세계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하여서는 필
수 불가결의 근거였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에 의하여 대표되는 제 가
치가 생 자체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생에 의
한 존재 해석의 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는 현존재의
전체성격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의 죽음의 내용은 무
엇인가? 그것은 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통일은 없으며 초월적 존재
도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며,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어온 지고의 가치
로서 신을 상정할 아무런 근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참된
세계의 존재를 믿을 수 없
다고 하는 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에
는 어떤 형이상학적 세계도 믿기를 거부하는 강력한 의지가 나타나 있
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어떤 심리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없
는 것을 있다고 할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역사 해석은
적용성을 상실하여 버렸다. 막대한 힘이 바쳐졌던 세계 해석이 수행
불가능한 것으로 배척된 후, 이밖에 다른 어떤 존재 해석도 허위가 아
니겠는가 하는 불신이 생겨나게 되며 여기에 허무주의의 최후의 형식
이 나타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이 이상 더 이 생성 변화해 가
는 세계를 유일한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승인하
게 되지만, 이 현실세계에 있어서의 무의미한 고통의 삶을 영위해 나
가는 일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어떠한 절대가치도 없는 한, 아무런 가치도 있을 수 없다는
초기의 니이체적 입장은 극단의 허무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는 있지도
않는 저 세상을 날조하여 이 세상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린 유신론자들
만을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超越者에 대한 숭배를 버리고,
서양의 전통적인 신앙과 도덕을 부정하는 무신론의 관점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철저한 허무주의적인 귀결에 도달하게 되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짧은 명제로 표현되는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신
에 의하여 대표되는 모든 가치와 이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에
대하여 초월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
을 버리는 것이다. 형이
상학적 사유를 용납치 않으며 현상 뒤의 物自體, 眞實在를 인정치 않
고 인식은 허구라고 본다. 니이체가 자기 속에서 끝까지 살아냈다고
하는 허무주의는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이 말하는 참 세계와 기독교적인
신 그리고 기독교적 도덕 즉 종래의 지고의 가치에 대한 불신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초월적 원리의 부정에 의하여 현실세계와 인간
존재에 부여되어 왔던 의미와 가치가 부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안
의 세계에 대한 신앙을 잃음으로써 그것을 전제로 하여 의미와 가치가
주어져온 현존재가 무의미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신론적 허무
주의는 인간이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최고 가치가 없어져 모
든 하는 일과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고 헛수고라는 의식이 생겨나는 현
상이다. 이 현실세계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으므로 그 존립의
가치가 없다. 인간의 현존재도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다. 인간들
이 생각하며 느끼고, 의욕하고, 행위하고, 고뇌하는 모든 삶의 내용들
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보며 여기에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徒勞의 감정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세상을
이렇게 보는 것은 아직도 은연중에 초월적 원리를 모든 가치의 표준으
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신만이 진리이며",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은
허위라고 하는 믿음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아직도 유신론적 세계관을 완
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 중간적 상태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마
땅히 없어져야 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허무주의자의 생
각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신적 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판단이 작용
하고 있다. 신만이 가치인데 그것이 무가치화 하였으니, 이제는 어떠
한 가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을 부정하려고 하면서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모순적인 정신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
지고 있던 모든 절대적 근거들을 잃었으나 아직 새로운 것은 찾지 못
했다. 그러나 단념할 수도 없어 계속 세계의 의미를 묻고 있지만 종
래의 해석들의 무용성 때문에 실망하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의식은 더욱 피곤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否定으로 얼룩진
세계 속에서 단언적인 언표의 최후의 형태는 모든 존재 인식 가치 뒤
에는 無가 있다는 허무주의적 전제뿐인 것 같이 보인다. 이 생각의 근
저에는 초월세계와 현실세계로 갈라서 보는 도식이 남아 있을 뿐만 아
니라 이 양자는 연관 내지 동일성의 관계에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작
용하고 있다. 즉 전자의 가치가 인정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는데,
후자의 가치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논리이다.
종래의 가치와 이상을 믿는 일이 없었다면 그것이 이 현실세계에 적
용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혹은 초월적 세계에 실재성을 부여
하는 일이 없었던들 그것이 없어졌다고 해서 현실세계가 이처럼
무가
치 무의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자승자박
적 사유의 결과이다. 서양사회를 지배해온 가치 평가가 스스로 끌어내
게 되는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니이체가 관찰하는 바에 따르면, 서양문화 속에 허다한 허무주의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서양의 정신은 줄곧 파국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서양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경향이며 역사적 사건인 것
이다.
이리하여 허무주의는 이제 엄연한 사실로서 서양 문화권에 등장하기
에 이른다.
[61] 제목 : 니체의 허무주의 - 도래 원인
3. 虛無主義의 到來 原因
1. 信仰至上主義
먼저 허무주의의 출현의 이유를 자세히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인
간은 복잡다단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
하여 무엇보다도 일정한 정신적 자세를 갖고 적절한 의지 결단을 내리
는 일이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확고한 신념을 갖는 일이다. 이 두 가지는 인간에게 삶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현대에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인식적 태
도보다 신앙적 태도가 우세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세계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있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인간은 세계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자신
이 전체의 일부로서 개체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미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전체 존재를
믿고 자신을 그것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안스러워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신앙심은 자연발생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 기독교가 출현함으로써 이 순수한 신앙이 오염
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결국에는 초월적 지주가 무너지기 시작하
여 허무주의적 前提가 마련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기독교적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인식적 대상까지도 신앙적 대
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 초월세계에 인식과 증명이 가능한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신앙적 대상을 인식적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리하
여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것을 혼동하였다. 그러나 이 양자는 엄연
히 구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인식을 신앙 내용이 되도록 하거나
반대로 신앙을 인식 내용이 되도록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과 인식의 혼동은 왜 일어나는가? 그 근본 원인은
기독교 교회의 지배욕과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월권에 있다고 니이체
는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기독교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관
할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기독교적 창조신의 섭리에 의탁하고, 자신에
게 편리하도록 세계를 定礎하였다. 오로지 신앙의 대상이 될 수만 있는
초월신이 관리 운영한다고 주장되는 현실세계를 인식 대상으로 하였다.
즉, 신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세계에 관한 인식으로 비합리적 이행을 감
행하였다. 이것은 초월자의 오용이며, 남용이다. 교회의 부당한 지배욕
은 진정한 기독교의 의미를 변질되게 하였다. 교회는 지배권을 강화하
기 위하여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는 것은 신적 의지와 동일시하며, 신앙
의 증거로 채택하였으나, 거역되는 것은 배척할 뿐만 아니라 정죄하였
다. 이 세상의 단념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삼았다. 원시기독교에 의
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거나 거의 제외되었던 것들이 존
중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싫어하
고 부정하였던 것이 교회에 의
하여 긍정되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그는 어떤 이유로든 인간
들이 서로를 가르는 일, 멸시하는 일, 미워하는 일, 그리고 성내는 일,
송사하는 일, 복수하고 벌을 주는 일을 싫어하였다. 한마디로 자기중심
주의를 배척하고,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삶을 개별의 원리보다는
전체의 원리에 따라 영위하기를 요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
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는 따르지 않았다. 교회에 복
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못박았다. 교회는 점점 지배욕과 복수심의 化身이 되어갔다. 기
독교는 그리스도가 바로 투쟁의 대상으로 하였던 그런 삶의 태도를 용
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리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기독교는 진정
한 기독교적 정신을 파괴함으로써 비기독교가 되어 갔다.
니이체는 기독교의 근거 문서인 성서의 신적 원천성을 흔들어 놓고 있
다. 성서는 일관성 있는 저작물이라 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모순
점들을 가지고 있다. 아직 인간들의 인식 능력이 성숙되지 못하고 있을
때, 교회는 현시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부당한 결합을 감행하였다고 한
다. 인간들의 이해의 한계를 넘는 수수께끼같은 현상이 일어나면, 그
속에 신적 의지의 작용이 있다고 설명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에 대
한 경건한 신앙이 지켜지게 하고, 자신을 그 관리에 필수불가결한 존재
로 만들어 남아 있게 하기 위하여 초인간적인 신성을 인
간적인 기록물
인 성서에 결부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한 문자적 내용을 신앙의 조건,
더 나아가 바로 신앙 자체와 동일화 하였다.
서양사회를 규제해온 기독교적 도덕가치는 어떠한가? 이것 역시 절대
적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무리한 시도를 한다. 수천년래 세계 전
체의 파악과 설명을 위해서는 초월적 신에 대한 신앙이라고 하는 한 형
식만으로 충분하였던 것처럼 그 선악이라는 가치체계의 유일성만으로
충분하다고 버티며 내려왔던 것이다. 경직된 이 도덕적 법칙을 현실세
계에서 발견하거나 적용시켜 보려고 오래동안 애써왔으나 결국은 실패
하게 되자, 생을 비방하게 된 것이다. 도덕과 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생이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며 이리하여 건강, 아름다움,
본능, 정열, 즐거움 및 자기발전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생은 부도
덕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자연적인 것은 부정되고 반자연적인 것이 긍
정되었으며, 현실적인 것은 나쁜 것이 되고 당위적인 것이 좋은 것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도덕은 그 지배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의 생
을 박해하여 왔다. 즉 "우리는 도덕을 믿는 한 현존재를 단죄한다" 는
것이다.
그러나 현생을 믿는 근대적인 인간은 전통적 도덕률에 정면으로 도
전하였다. 도덕적 현상은 없는 것이고, 생의 현상에 관한 도덕적 해석
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니이체에 의하면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리적 내지 심리상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가령, 사랑은
성적 충동, 겸손은 약자의 영리성, 공정은 책임에 대한 공포, 정의는
복수 본능과 같은 도덕외적 유래를 갖는 것이다. 항상 도덕적인 인
간은 언제나 좋은 날씨처럼 권태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더 나아
가 도덕은 단순성과 우직성의 한 존경할만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도덕은 지상의 다른 사물들과 같이 비도덕적이다. 도덕성 자체가 부
도덕의 한 형식이다" 라고 하며 도덕은 그 자신의 근본 법칙의 부정
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한 것이라고 니이체는 말한다. "한 도덕적 이념
의 승리는 다른 종류의 승리처럼 폭력, 거짓말, 비방, 부정의와 같은
부도덕적인 방법으로 쟁취되었다." 요컨대 반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가차없이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근세 이후 계몽정신이 일어나 점점 발달하여 기독교적 신앙
과 도덕지상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번개와
뇌성, 산과 바다의 형성, 질병의 발생과 건강의 회복 그리고 역사의
진행과 같은 모든 것이 그 원인을 사물 자체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을 때, 그리고 그 법칙을 발견하고 이것을 이용할 수 있
게 되었을 때, 초지상적인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와 작용, 이와 더불
어 성서의 신적인 원천성과 그 문자적 신앙이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고대 그리이스적인 자유로운 세속인간이 교회가 영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삼았던 인간의 육체와 자연에 대한 멸시와 학
대를 과감
히 물리치기 시작하였을 때, 그리고 이 인간성의 본질적 구성요소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였을 때, 기독교적 도덕은 그 토대를 파괴당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신앙과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에 의
하여 만들어진 가변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
신앙과 도덕의 해체를 통하여 허무주의를 초래한 그 근본 원인은 어디
에 있는가? 신앙 지상주의가 지배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을 지킬 줄 모
르고 월권한 데 있는 것이다.
2. 知性至上主義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자유 독립정신에 불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
아갈 길을 찾으려 하며, 더 나아가 현실세계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였
다. 인간은 자기 속에 이성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투시하려 하였다. 스스로의 발로 선 사려
깊은 인식의 능력은 감각의 세련화와 사고의 날카로움을 통하여 사물
에 접근한다. 이 때 사물의 이해 가능성, 상호 관련성, 전체 槪觀性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니이체에 따르면, 세계의 궁극적 목적과 통일, 그리고 신적 존재와
같은 것은 아직 유치하였던 인간 정신의 동경과 상상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근세적 인간인 계몽
주의자들은 초지상적인 것에 대한 신앙 대신 이성적인 자연, 뜻있는
역사, 문화의 발전과 같은 것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의 원천은 인간 의지에 있었고, 이것은 인간 지성으로 하여금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월권을 하게 하였다. 구시대에 반기를 들고 혁
신적 사상운동을 전개한 계몽주의 역시 결국 중세적 기독교와 같은 과
오를 범하고 말았다. 즉 신앙과 인식의 혼동이다. 다만 이번에는 방향
이 바뀌었을 뿐이다. 인식에서 신앙에로의 방향이다. 계몽주의자는 자
신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자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이 속
에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목적론적 섭리에 대한 신앙을 도출해 내려
고 하였다. 그는 신의 섭리 대신 자연의 섭리를 믿고 있었다. 이 때
실은 그가 도저히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성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복잡한 사건들
과 변화들을 통하여 자기완성을 기하려는 세계 정신이 역사하고 있다
고 생각하며, 그리고 진리와 사랑과 정의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세계에 있어서 사물의 生起 자체로부터 보상과 징벌을
통한 교육에 의하여 보다 나은 것에로 인도하는 질서와 원리가 나타난
다는 것이다. 이러한 낙관적 계몽주의적 인간의 이성적 법칙에 대한
믿음는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기 쉽다. 인식은 旣知의 사실로부터 출발
하여 未知의 세계로 나아가 기지의 세계를 자꾸 확장하여 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일이 진행될수록 미지의 세계는 더 커지고 궁극적인 진
리는 일층 더 먼곳에 놓여지는 것이다. 완성의 개념의 수준은 점점 높
아지기 때문에,전보다 더 성과를 냈다 하더라도 不足意識은 더해간다.
의식과 완전성은 상극적인 관계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대단
한 자랑과 미약자의 겸손" 을 함께 마음에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상대적 진리는 몰라도 절대적 진리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적 인식의 본질속에 숨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절대적 진리에 언제인가는 도달하게 되리라고 예측하였던 것은 인
간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교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이 부당한
월권도 하게 한다. 지성 지상주의자는 인식이라고 하는 이 한 형식만이
세계 전체를 파악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습관은 어찌할 수 없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모든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반드시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면 안된
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과 같이 제한된 존재인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어
떠한 해답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니이체는
과연 하나의 최고 진리만이 있으며, 더욱이 그것이 인식 가능하다고 단
언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설사 있다고 하여도 왜 비진리는 없어
야 하는가? 인식한다고 하는데, 잘못 생각하거나 속고 있는 것은 아
닌가? 그리고 이성을 전폭적으로 신임하여도 좋은가? 왜 불신임은
안되는가? 어떤 잘못된 판단은 허위라고 무조건 배척하여 버려도 좋
은 것인가? 이렇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을 죽
이는 진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살리는 비진실이 있을 수 있다. 거짓
된 판단을 버리는 것은 삶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도리어 삶을 위하여 없지 못할 것이 된
다. 따라서 사람은 함부로 진리에 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하는 단안을
내리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감히 절대적 진리에 도
달하려는 요구를 가져서는 안될 것 같다. 또한 세계는 인식하고 비판하
고 있는 인간보다 언제나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다. 따라서 가장 현명하
다고 자처할 수 있는 자가 있다 해도 그 역시 자신의 제한성, 당혹성,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어, 이 끝도 없는 無成果에 우
울하게 되고 비관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지성 지상주의
는 인간들을 보다 더 불확실하게, 보다 더 의지박약하게, 보다 더 의존
적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쓸데없이…"라는 좌절감이 의심
하고 있는 자들, 절망하고 있는 자들을 허무주의로 몰고다. "엄청난
노력이 바쳐진 한 세계 해석의 불타당성은 모든 세계 해석들이 거짓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특정 해답에 대한 이
의심은 다른 모든 해답들에 대한 의혹을 가져오게 한다. 그 결과 지금
까지의 해석들의 허위성이 인지되고, 사물의 생기 현상의 무의미성에
대한 신앙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계몽사조는 초기의 계몽주의자
들이 기대했던 것만큼은 인간들을 더 힘있게도 확고하게도 하지 못하
였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해방 이후 궁극적인 진리를 믿으려 하고 인
식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믿지 못해지고 인식할 수 없게
되어갔으며, 결국에는 어떤 것도 믿을 가치와 인정할 가치가 없는 것으
로 보여지게 된 것이다. 막스 쉘러가 인간 역사의 발전의 기본방향은
점점 자기를 명확히 의식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에 앞서 헤겔에 있어
서 자유롭고 자의식적인 인간 정신이 잘 표현되고 있으나 지난 수세기
에 걸친 인간의 자의식적인 발전은 결국 허무주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즉 인간의 자의식의 강화는 허무주의적 경향을 촉진하고 있었다. 학문
은 인간 의식을 보다 밝고 주의깊게 만들어 정신의 예민성과 정밀도를
극도로 높혔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각성하게 하고 자
기반성과 자기성실을 촉구하였을 뿐이다.
헤겔과 같은 철학자는 범이성주의를 감히 주장하면서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세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담한
모험을 벌써 그 동시대인들 중에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
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철학에 정면 도전하여 비합리주의 철학을
제시하였고,키에르케고르의 경고도 나왔으며,니이체에 이르러 더욱 분
명한 반이성주의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철학을 통하여 인간 정
신은 가차없이 자유롭게 끝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놀라지 않을 수 없
다. 왜냐하면 이 종점에서 발견된 것은 기대에 너무나 어긋나는 것이었
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자주적이요 자유로왔던 인간 정신은 이제 그 희
망을 묻어버리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러 깊은 좌절감에 빠져 불안
에 떨게 되었다. 궁극적인 해답에 대한 강한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는
데, 이 해답을 줄 자는 없으며, 초지상적 지주와 지상적 지주의 흔들림
은 신앙적 가치도 이성적 가치도 모두 파괴하여 버렸다. 세상에는 믿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 이외에는 남을 것이 없어
졌다. 지성지상주의의 말로가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그것 없
이는 인간이 자신을 세계 전체와 도저히
연관지울 수 없는 신앙을 파
괴한 인식이 가져온 大終局인 것이다. 인간 정신은 의지할 수 있는 어
떤 지주도 잃어버리고, 이제 거기에 전혀 근거도 없이 無 속에 던져져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니체의 허무주의의 극복에 대해서....
- 개강하기전 무엇인가 남기고픈 철학도 -
[62] 제목 : 니체의 허무주의 - 극복
4. 虛無主義의 克服
이 無에 대한 실망에서 다시 어떤 초월적 존재에의 신앙에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허무주의적이었
다. 왜냐하면, 그는 신을 잃은 고독한 인간 존재의 공허감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신앙에의 비약에 의하여 이 절망을 극복
하여 인간 존재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야스퍼스도 세계 내의 무에서 반
전하여 초월자에의 새로운 신앙을 획득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고 한다. 그러나 니이체의 극복 시도는 다르다.
그 자신은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많으나, 무신론적 허
무주의에는 여러 종류와 단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크게는 불철저하고
불완전한 것과 철저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니이체의 안
목으로 보면, 자신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극단의 허무주의, 완전한 허무
주의이다. 이것만이 허무주의 자체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니이체는
강한 정신력에 기인하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앞으로 올 유럽적 허무주의라
고 하면서 수동적 허무주의와 구별하고 있다. 이 수동적인 것은 약자들에
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서 허무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피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쇠퇴현상으로서, 정신력이 저하하여 그 약함의 표시로 나
타나는 피로한 허무주의이다. 피로한 허무주의자에게는 종래의 목표, 신조
등의 가치가 적합성을 잃게 되며 그 총합이 무너져 개개의 가치가 서로 싸
우게 된다. 그들 중에서 진정시켜 주거나 마비시켜 주거나 혹은 강장제의
역할을 하는 일체의 것들이 종교, 도덕 등의 가장 하에 통용된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지금까지 타당하였으나,이미 그 초월적 근거를 잃어버린 가
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다만 삶의 안온을 위하여 이용할 뿐이다.
또한,허무주의에는 수동적인 것 외에 또한 수동도 능동도 아닌 중간 상태
가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목표나 가치의 상실이 이상적으로 일반화되어,
도대체 의미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병적이라고 보여지는데, 이 상태는 생산력이 충분히 강
하게 되지 않았거나 쇠퇴해가는 생명력이 아직 잔존해 있지만 마땅한 요
법을 발견치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잠재적인 허무주의를 예감하는 사
람이 절대적 가치의 상실로 일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
각에 불안정하게 머물면서 감상에 젖어 있는 상태도 역시 병적 중간 상태
이다. 허무주의적인 것을 주의나 사상적 입장으로서보다 오히려 근원적인
생의 감정으로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겠다.
반면, 니이체는 삶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그 내적 필연성에
의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한다. 이 때 니이체는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의 입장을 내세우려 한다. 그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의지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유신론적 허무주의 속에 숨어 있
는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간파하고 실망에 빠져 있는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성실하게 대결하여 참된 새 가치의 표준을
확립하려고 하며 선악의 피안
에 서서 일체 가치의 전도를 감행하여 생을 절대 긍정하는 길을 열려고
한다. 니이체가 {힘에의 의지} <서언>에서 "그 자체를 벌써 자기 자신 속
에서 끝까지 살아낸 바의 그 허무주의를 이제 자신의 뒤로 하고,밑으로 하
고, 밖으로 한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라고 자신을 부른 말은 허
무주의를 스스로 체험하여 살고 철저화함에 의하여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
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자기 극복의 논리인 것이다. 이 점에 니이체의 철
학적 특색이 있다. 그는 이처럼 허무주의의 자기극복을 목표로 하여 오히
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진행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자기 속에서 체험한 바
의 유럽적 허무주의가 가야 할 운명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니이체가 가
치의 전도라고 하는 것은 초월주의에 의하여 부정되었던 생의 복권을 의
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다름아닌 허무주의의 자기극복의 길인 것이다.
지금 까지의 논의를 진행시켜 오면서, 하나의 질문이 필연적으로 도출된
다. 그것은 '과연 인간은 아무 것도 믿지않고 살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
다. 여기에 대한 니이체의 대답은 긍정적이다. 그렇다, 살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신앙의 부재를 하나의 방법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만약 사람들이
허무주의를 귀결케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를 위한 사투를 벌인
다면 말이다. 이 때 이 허무의 현실에 압도되어서도,이 생의 허망함에 실
망하여서도 안될 것은 물론이며 허무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대결함으로써
이것을 극복하려고 하여야 한다. 이것이 니이체의 능동적인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사람이 거기에 안주할 곳은 못되지만,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하
여서는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될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모든 참
된 존재와 가치가 거치지 않으면 안될 過渡態인 것이다. 이처럼 허무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고
존재의 정당화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니이체는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 이 새로운 가치는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초인 이다.
1.힘에의 意志
힘에의 의지란 무엇인가. 니이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생명체를
발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힘에의 의지를 발견하였다." 니이체는 세
계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보았으며, 인간의 의식과 행위를 포함하여
자연에서의 갖가지 변화와 우주의 움직임이 모두 '힘'을 더 얻고자하는
부단한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하여 "힘에의 의지"의 보편성
을 인정하고 있다. 모든 존재자의 존재내용이요, 모든 자연 현상을 가능케
하는 기본원리이며 상승해가고 있는 삶의 내적본질인 힘에의 의지는 본질
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란 모든 생명적 존재를 유
지 발전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니이체에서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가치설정의 필연성의 근거이
며, 가치를 평가
할 수 있는 근원이다. 그가 말한 능동적 허무주의의 기본
원리는 이 힘에의 의지이다. 이 힘의 의지야말로 그에게서는 새로운 가치
의 기준이며, 삶의 근본특성이다. 일반적으로 힘에의 의지는 生成이며, 동
시에 그것은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힘에의 의지가 현실성으로 현존할때
비로소 가치가 무엇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가치평가가 무엇에 근거하고 있
는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가치설정의 원리로써 인
식된다. 다시말하면 일절의 가치평가는 힘에의 의지라는 새로운 원리에 의
하여 행하여지고 일절의 가치설정도 바로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힘에의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힘에의 의지에서
의지는 생명적 존재의 내부에서 부단히 솟아오르는 힘이다. 이 의지는 마
치 강물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흘러가듯이 모든 생명체의 내면을
상승의 형식으로 솟구치면서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때 의지란 아
무 것도 志向하지 않고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의지는 아니며, 무엇에의
의지이며 이 무엇에의 의지는 무엇을 意慾하는 것이다. 니이체는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욕함이란 더욱 강하게 되고자함, 生
長하고자함과 같은 뜻이다." 의지는 결코 根源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며
단지 休止없는 흐름에 불과하다. 흐름으로서의 의지는 원인도 결과도 아니
고 作用, 즉 의지 자신이 자기에대하여 가지는 작용이다. 의지가 흐름이면
서 의지인 限 이 때 의지는 자기가 아닌 다른 것에로 지향하는 것
이 아니
고 오히려 自己深化요 自己克服인 동시에 自己强化및 自己生長에로 向上
發展하는 것이다.
그러면 힘에의 의지에서 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지가 自己志向을
말하는 것이므로 자기자신을 의지하는 그 樣式의 본질을 의미한다. 힘에의
의지에서 힘과 의지란 결코 相互分離되고 獨立되고 孤立된, 즉 고정불변적
이면서 卽自的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속에서 상호연결되며
의지의 의지로서 힘에의 강화라는 의미에서 힘에의 의지이다. 이 힘은 의
지 가운데 현존하는 의지로서 이 의지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에 그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힘과 의지가 相互連鎖 相互作用을 하면서 自己展開
自己表出의 力化 上昇 向上인 흐름을 힘에의 의지라 할 수 있겠다. 이렇
게 볼때 힘에의 의지는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공격성이나 다윈이즘 혹은
그와 유사한 기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존재자의 자기극복의 논리이자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개인의 자기실현이며 자신의 힘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그 실존과 가능성에 대한 긍정이다.
허무주의는 이 힘에의 의지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外化될 경우에 나타나며
이 때 인간은 자기자신부터 疎外되고 상상의 대상에 불과한 신의 신앙을
통하여 자신의 eroism을 충족시킬 것을 바란다.
2. 永遠回歸
영원회귀론은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경멸하는 모든 종교에 대한 강한
부정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
한 파괴를 가르킨다. 그러나 이것
은 단순히 부정과 파괴의 논리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긍정의 형식
으로서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지향한다.
영원회귀론은 간단히 말해서 늘 제자리로 되돌아 오는 回歸뿐이라는 내용
이다. 영원회귀의 세계란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이체의 세계관속에서 생성
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는 결코 있을 수 없고, 있는 것은 부단히 生成發展
하는 디오니소스적 세계, 즉 만물이 무한히 되풀이 되어 離散綜合하는 세
계로서 그에게서는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고대의 헤라클레이토스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
로 보이는 영원회귀론은 세계에 있어서 힘의 양은 固定되어 있지만 그것의
본질이 流動的이기에 無限하고 영원한 시간속에 有限한 物質의 모든 綜合
은 이미 무한히 반복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무한하고 영원한 시간의
경과에 있어서 각 순간은 하나의 同一한 生成의 반복에 불과하며 이 순간
순간의 전개에서 동일한 생성의 반복,바로 이것이 그의 영원회귀론이다.모
든 것은 영원한 변화인 동시에 이러한 변화는 영원히 되돌아 오는 圓形의
운동으로 모든 것은 이전에 있었던 그러한 것으로 다시되돌아 온다는 니이
체의 영원회귀론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의 進步란 하나의 幻想에 불과한 것
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발전은 그것이 指向하는 목적이나 의도가 있을 수
없다. 모든 움직임은 목표도 의도도 없기 때문에 진보적인 운동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오는 圓形의 운동일 뿐이다.
그러면 니이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론은 어떤 의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인
가? 그는 영원히 되풀이 될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되
어 무가치함을 치유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상은 超越的 神의 죽음뒤에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롭게 나타나는 세
계관이며 이 자연적 생을 초월적인 궁극의 목적에 의한 의미부여로부터 해
방시켜, 세계의 모든 순간과 상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라진 순간은 되돌아 온다. 삶의 목적은 그것은 어떠한 초월적인 것도 아
닌 이 現生에서 다시 한번 살고 싶을 정도로 사는 것이다. 영원의 모상을
우리의 삶에 각인하자.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을 무수히 또 행하려 하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내세에 대한 어떠한 암시보다도 더 위력이 있다. 이 사상은 인간
의 삶을 일시적인 것으로 비웃고 정해지지 않은 다른 삶을 지향하며 가르
치는, 허무주의를 촉진하는 모든 종교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원회귀론은 삶의 최고 긍정형식으로서 허무주의의 극복
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2.超人( bermenshe)
니이체는 평생 동안 신의 죽음을 대신할 새로운 인간상을 찾았으며 인간
위치의 새로운 정립과 그에게 부여된 과업을 확인하기 위한 인간상으로 우
리에게 초인( bermenshe)를 제시한다.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초인이란 옛가치의 허구를 통찰하고 새로운 가치로
의 전환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인간이지 그 자체가 가치의 출처와 근거는
아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치질서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니이체의 대답은 멀지않은 곳에 있다.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 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
다. 너희는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너희들에게 초
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다. 너희의 의지는 말해야만 한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어야>만 한다고!
나의 형제들아 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너
희에게 天上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믿지말라. 그들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간에 毒을 썩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의 경멸자들이고, 쇠잔해 가는 자들이며, 스스로 독을 먹는 자들
이다. 그런 자들에게 대지는 지쳐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없어져 버려도
좋다!
예전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가장 큰 모독이었으되, 그러나 신은 죽었고
그와 더불어 신의 모독자들도 또한 죽었다.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가공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혀로 너희를 핥아줄 번개는 어디 있는가? 너희에게 접목되어야
할 광기는 어디 있는가?
보라,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그가 바로 그 번개이며, 그가 바
로 그 광기이다."
신의 죽음 뒤 이제 대지가 모든 가치의 출처이며, 유일한 현실로서 삶의
바탕이다. 여기서 모든 가치의 출처라 함은 대지가 선과 악,아름다움과 추
함, 그리고 참됨과 거짓됨 등의 판단 기준이 됨을 뜻한다.
즉, 어떤 것이 선하며 어떤 것이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그것이 이 대
지의 뜻에 부합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하는 물음과 같다. 이 때 대지
란 자연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되는 현실세계를 가르킨다.
초인은 이 대지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러면 초인은 어떠
한 인간인가. 그는 어떤 종류의 神性도 갖지 않은, 지상에서 성취가능한
이상적 인간이다. 초인은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자이며, 彼岸의 世界
를 위하여 地上의 삶을 저버리지 않는 자이자 나아가 지금까지 이 대지에
등을 돌리고 저편의 세계를 동경한 形而上學의 迷妄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
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假飾이나 속임수없이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는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앞날을 새롭게 구상하는 인간이며 그 구상을
실현하는 創造者이며 自由人이다. 그는 또 어린아이와 같이 無罪하고 스스
로의 힘에 의하여 돌아가는 바퀴와 같은 존재이며, 새로운 出發이자 앞날
에 대한 肯定이다.
이 초인에 의하여 삶의 뜻은 회복된다.
니이체는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세 변화에
대하여>에서 초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니이체는 인간 정신
의 세 발전 단계를 神에 대한 맹목적 복종, 神의 죽음에 대한 자각, 새로
운 가치의 정립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낙타에
서 사자로, 그리고 그것이 다시 어린아이로 변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그것
이다.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낙타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커다란 짐을 지고 넓고 메마른 사막을 질주하고 있다. 그 낙타는 짐의 소
유주가 아닐 뿐더러, 누구를 위하여 어느 곳으로 그 거운 짐을 날라야
하는지에 대해 묻지도 않고 다만 언젠가 있을 보상을 생각할 뿐이다. 여기
에서 짐이란 종래의 형이 상학이며 종교적 가르침을, 사막은 아무것도 제
힘으로만은 살 수 없는, 생명력이 없는 세계를 가르킨다. 낙타는 저항을
모르는, 무던히 참고 견디는 짐승이다. 이 낙타처럼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순종과 겸손, 두려움과 인내로 그가 결코 만나보지 못한, 실재에서는 존재
하지도 않는 주인을 섬기고 있다. 이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낙타에게 명령
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은 기독교에서의 신으로, 니이체는 그것을 천년
의 나이를 먹은 龍으로 표현한다.
종래의 형이상학의 가르침에 맞서는 니이체의 철학에 따르면, 세계는 오
직 하나이며 그 움직임은 특정한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것
은 끊임없
이 되돌아오며, 따라서 이 세계의 움직임은 처음과 끝을 잇는 직
선상의 것이 아니다. 같은 것의 늘 되돌아옴만이 현실이며, 來世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거짓의 옛가치와 결별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위해
먼저 이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 이제 옛가치의 거짓됨을 깨달은, 즉 자
신을 지금까지 괴롭혔던 무거운 짐의 내용이 속임수와 기만이외의 아무것
도 아니라는 것을 터득한 낙타의 정신을 지닌 인간은 이제 사자로 변하여
포효한다. 그는 자신에게 도덕의 채칙을 가하던 용과 과감히 맞서 싸워 이
기고 자신의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신은 죽었다. 이제 인간은 인내
와 굴종으로 남을 섬기고 그 보상을 애타게 기다리는 하인이 아니며, 스스
로 명령할 수 있는 자신의 주인이자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서 행동하는 自
由人이다.
이와같은 신의 죽음은 몇세대, 몇세기를 거친 가치의 전도를 통하여 완성
되고, 지금까지의 최고 가치를 잃은 인간은 얼마간 정신적 지주를 상실하
고 허무주의에 빠진다. 사자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 즉 소극적 자유는
얻어 냈으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적극적 자유는 아직 쟁취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의 정립을 통하여 비로서 가능해지는 이 허무주의의 극
복은 사자에서 어린 아이로 변한 인간의 정신이 감당해야할 과제이다.
어린이는 니이체에 의하면 무죄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
이며,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굴러가는 바퀴이며, 첫 움직임이요, 미래를
향한 거룩한 긍정이다. 어
린이는 있는 것을 거짓없이 그대로 받아 들이며,
모든 것은 쉼없이 늘 되돌아 온다는 자연의 질서를 긍정한다.
이것은 개별자로서의 허무주의의 극복이자, 자기극복에의 길이며 나아가
초인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이 과정의 최종점인 어린아이는 바로 초인
의 수준인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새 역사는 시작된다.
이렇듯이 초인은 종래의 최고 가치의 전도를 담당하고, 힘에의 의지를 그
의 삶을 통하여 구현할 뿐아니라 생성 소멸하는 우주의 운동 어느 곳에도
기독교적 의미의 최종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즉 목적론적 세계관의 허구
를 통찰한 인간이며 플라톤 이래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근거없음을 터득한
계몽적 인간이다. 그는 또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한 형태인 영원회귀, 즉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것이 어떤 유의 고정된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채 늘 되돌아 오고 있다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끝으로 니이체는 초인을 어떻게 집약하여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 사람을 보라}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초인이라는 말은 최고로 완성된 유형의 인간을 가르키는 것으로
<현대인>, <선한 인간>, <기독교인>, 그리고 다른 허무주의자와는 반
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기성 도덕의 파괴자인 짜라투스트라의 입에 오
르면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 된다."
이 사람을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5.나가면서
니이체는 현실의 세계를 초월한 피안의 무한자, 절대자는 환영에 불
과한 허구라고 하면서 모든 형이상학적 단언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엄
격하게 말한다면,그의 철학에도 세계의 본질은 '힘에의 의지'이다 하는
따위의 형이상학적 단언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가 종래의 잘못된 가치
의식을 파괴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고, 새로운 가치 수립을 위하여
적극적 탐색하여 마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얼마든지 서로 다른 세계 해석들과 평가들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대상은 이 현실세계일 수밖에 없다. 이것만이 문
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 근거이며 모든 사변의 출발인 것이다. 말은 얼
마든지 변환시킬 수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로서 남아 있게 된다. 자연적
으로 생성 변화해 마지 않으며 無常하며 虛荒되어 보이는 이 현실의
세계를 니이체는 唯一無二의 실재로 승인 하였다.
비록 이 세계를 하나로 묶는 어떤 통일의 줄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또한 어떤 자들도 동일시하는 듯한 맹목적인 운명이 지배하고 있을지
라도, 세계는 이것밖에 있을 수 없다. 또한 광명과 암흑, 선과 악과 같
은 재의 이중성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니이체의 굳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게 있어서는 이 생
의 절대 긍정만이 허무주의의 자기 극복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의 글을 읽어주신 철포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개강전에 무엇인가 남기고픈 철학도.-
[63] 제목 : 헤겔에 대한 소고(헤겔에 대한 맑스의 응답)
헤겔
1. 생 애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튀빙겐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790년에
이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여러 가정에서 가정 교사일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베른에서, 그리고 다음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하였다.
그는 종교에 흥미를 가져 기독교의 기원을 연구하게 되었고,예수의 생애에
관한 저술을 내었는데, 여기에서 기적과 정통적 그리스도관을 부인하였다.
처음에 그는 자연에 관한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해석을 채택한다고 공언했는
데, 해석은 셸링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또 그는 셸링을 통하여 예나 대학에
서 가르치는 자리도 얻었다. 그와 셸링은 [비판적 철학잡지]를 함께 발산하
여 1802-1803년 2년간 함께 편집을 맡아보았다. 1803년에 셸링이 예나를 떠
나자 그는 셸링의 여러 견해와 결별했고, 그 후 10년 동안 차츰 자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예나를 떠난 후로 뉘른베르크 대학/하이델베르크 대학,
그리고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철학계의 지도자로 여겨지게 되었고
또 많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931년에 베를
린에서 퍼지기 시작한 전염병 콜레라로 죽었다.
2. 학 술
헤겔의 철학은 일종의 칸트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칸트 후계자들처럼 그
도 칸트의 불안정한 입장의 여러 국면을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다. 그는 칸트
의 몇 가지 논점을 열렬히 받아들였고, 다른 몇몇 논점은 전적으로 배척하였
다. 그리하여 칸트의 비판 철학을 소위 절대적 관념론(觀念論)의 체계로 변
모시켰다.
헤겔은 경험의 이성(理性)적 성격에 대한 칸트의 주장에 의하여 깊은 감명
을 받았다. 경험은 아무런 합리적 구조도 없이 그저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소재(素材)가 아니다. 헤겔은 로크와 흄이 경험을 이와 같은 소재(素材)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 이성(理性)은 개인 속에 머물러 있는, 그
리고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러 가지 직관을 가지고 작용하는 추상적 능
력이어서는 이성(理性)과 경험은 둘이아니요 하나이다. 이성(理性)은 경험의
객관적 구조이다. 그리고 우리들 인간은 우리의 심리학적인 여러 변덕스러운
경향을 따르기를 그치고 우리의 사고로 하여금 경험이 일어나는 방식 그대로
를 따라가게 할 때 가장 참되게 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헤겔은 '사물들 자체'에 대한 칸트의 상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성이 오
직 현상 세계에만 적용되고 모든 실재에 대하여서는 구성적인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칸트가 가르쳤을 때 칸트도 결국 이성을 너무나 신통치않은 우연적
인 것이 되게 하였다고 그는 논란하였다. 물론 실재는 개인의 정신들로부터
독립해 있으나 정신과 전혀 관계없이 존재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사물들 자체'는 만일 이성의 한계를 넘는 것이라면 도대체 아무것도 아니
다. 현상들은 실재와 대조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상
들과 대조를 이루는 실재는 경험의 배후에, 그리고 사고와는 영 떨어져서 존
재하는 가상적(假想的)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편적인, 따라서 아
직 어느 정도 합리성이 부족한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 경험이 인간 이상의 정
신의 객관적 질서로서 지향하는 완성된 경험이다. 현상들은 실재에 대하여,
마치 부분이 전체에 대한 것처럼 관계되고 있다. 경험은 단순히 혹은 원래
인간적 사건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광대한 우주적과정으로서, 거기
대한 우리의 유한한 참여를 넘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무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혹은 전체로부터 인위적으로 추상하는 우주적
경험의 어느 토막에서나 우리는 여러 가지 혼란/모순/애매성을 발견한다. 우
리의 유한한 경험이 더욱 더 넓어지거나 혹은 우리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전
망을 더욱더 구체적인 것이 되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경험이 더욱더 많은 합
리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경험의 전부가 완전
히 이성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경험의 여러 가지 못마땅한 점, 혹
은 못마땅한 것으로 우리에게 여겨지는 것은 시간을 통한 우주의 점진적인
운동에서 모두 극복되는 것이다.
3. 절 대 적 관 념 론.
이리하여 헤겔은 나중에 하나의 유명한 철학적 명문구가 된 말로, 현실적인
것은 이성(理性)적이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
다. 그는 이 원리를 역사의 연속체로부터 떼어낸 각 순간의 인간 경험에 적
용하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당연한 기대가 사건들의 경과에
의해서 가끔 좌절된다는 사실을 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속에
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혼합에 부딪친다. 그러나 헤겔은 절대적인 경험,즉
시간을 따라 발전하는 우주 전체의 충만한 구체성안에 온전한 합리성이 깃들
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말한 바와 같이, 헤겔은 19
세기의 문학에서 그 모든 국면의 특징을 이루면서 중대한 역사의식을 철학에
끌어들였다. 혹은 적어도 이 역사 의식을 그 자신의 철학에서 강조하였다.그
러나 헤겔이 다룬 역사는 그저 과거의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시간적 구조를 전체로서, 즉 과거/현재/미래에 있어서 이해하는 것이
다. 하나하나의 경험은 그 어느 것이나 아무리 향상의 도중에 있는 것일지라
도 결국 현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경험이 우리
의 단편적 경험의 여러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모든
부조화, 모든 의미의 결여, 모든 허망은 인간 정신에 있어서는 사라지지 않
지만 절대 정신(絶對精神)에 있어서는 사라지지 않지만 절대 정신에 있어서
는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다. 절대적 경험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그
필연
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또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실재의 여러 가지 정도와 인식의 여러 가지 정도를 논하
였다. 환상이 우리의 경험에서 사실 일어나지만, 그것은 현상일 따름이요,
따라서 낮은 정도의 실재만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상의 존재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유한한 견지에서는 옳은 것이 될 수 있다. 그
러나 그것은 결국 낮은 정도의 지식밖에 낳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
터 헤겔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실재가 이미 완성된 것이요,
실재를 목적 삼는 우리의 인식은 온전하고 최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가정
함으로써 과오를 범했다고 헤겔은 생각하였다. 실재도 인식도 결코 완성될
수는 없다. 실재는 끝없는 과정이요, 그것에 대한 전적으로 올바른 인식은
오직 절대 정신에게만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의 어느 순간에서 발견
하는 세계는, 그것이 우리의 작업의 터전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과학들의 재
료로서 우리에게 추상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학문은 비록 고귀한 것이기
는 하나 지적 발달의 여러 단계요, 개별적 학자들의 정신적 경각심의 정도
와 지역 사회의 문화적 전진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현실적인
유일한 세계는 우주 전체요, 전적으로 올바른 유일한 인식은 이 우주의 인식
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견해에 있어서는 우주가 곧 절대 정신(絶對精神)이다. 인
간 존재들 속의 정신은 하나의 주관적 과정이지만, 우주 속의 정신은 하나의
포괄적인 역사적 과정으로서 이에 의하여 우주는 그 자신의 완전한 성취를
향하여 서서히 전진하는 것이다. 절대 정신을 헤겔은 신이라 부르고자 하였
다. 이 견해는 역사상의 유태교나 기독교의 교리들과 아주 일치한다고는 도
저히 말할 수가 없다. 헤겔의 신은 제일 원인도 아니오 궁극적인 목적도 아
니다. 그것은 세계와 대립하는 것으로 세워진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것을 '가이스트(Geist)'란 말로 표현하는 데, 이 말은 보통 '정신'이라고
번역되지만 헤겔의 경우에는 '문화'라고 번역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절대적
인 것은, 모든 물건과 모든 사건 속에 깃들어 있는 문화적 발전의 선이다.
그것은 우주가 더욱더 잘 이해되는 데로 진전하는 하나의 광대한 역사적 과
정이다. 역사는 그저 그것에 의하여 우리들 인간 존재들이 신을 의식하게 되
고 혹은 세계의 포괄적인 문화에 이르는 과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또한 그것에 의하여 신, 즉 가이스트가 그 자신의 발전과 그 양양한 미래에
대한 원대한 경륜을 더 충분하게 의식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4. 헤 겔 의 변 증 법
헤겔은 실재와 인식에 관한 그의 이론이 하나의 새로운 논리학을 필요로 함
을 깨달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이 논리학을 조직적으로 꾸미기에 주력하였
다. 그는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배척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
텔레스의 논리학이, 영구적인 실체들과 또 모든 실체가 주기적으로 되돌아오
는 고정된 전형들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의 논리학은 명제들이 참이 아니면 거짓이요, 또 참인 때에는 궁극적으로 참
이라고 가르친다. 헤겔은 발전하는 사물들과 변화하는 사건들의 모습을 드러
내어 주는 논리학을 원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사건들의 논리에 관하여 이야
기한다. 이와 같이할 때 우리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헤
겔은 생각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형식 논리학(形式論理學)은 이 논리학,
즉 사건들의 논리학이 아니다. 형식 논리는 오히려 이 논리로부터의 추상이
다. 형식 논리학은 세계의 동적 과정들로부터 멋대로 끄집어낸 고정된 사항
과 생명 없는 존재물을 다루기는 하나 이 동적 과정들의 본성을 살펴보지는
않는다. 헤겔이 제창한 논리학은 절대 정신(絶對精神)의 점진적 개현에 있어
서의 사상의 율동적 운동을 인정한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우리의 사고의 모
형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리고 우리들의 유한한
정신들을 떠나서 우리가 벌써부터 알려고 추구하고 있는 절대적 경험의 모형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리학을 사고의 법칙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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