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명작 다이제스트
권응호
차례
머리말
영국
햄릿(Hamlet:1600-1601)-셰익스피어
맥베스(Macbeth:1605-1606)-셰익스피어
실낙원(Paradise Lost:1655-1667)-밀턴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하디
율리시스(Ulysses:1922)-조이스
러시아
죄와 벌 (Prestuplenie i nakazanie:1866)-도스토예프스키
부활(Voskesenie ;1899)-톨스토이
벚꽃 동산(Vishnyovy Sad:1904)-체호프
프랑스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1857)-프로베르
여자의 일생(Une Vie:1883)-모파상
이방인(L'Etranger:1942)-카뮈
미국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1843)-포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1905)-오 헨리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1952)-헤밍웨이
그리스
일리아드(Iliad:900 B.C)-호머
이탈리아
신곡(La Divina Commedia:1308-1321)-단테
독일
파우스트(Faust:1831)-괴테
스페인
돈 키호테(Don Quixote:1605-1615)-세르반테스
폴란드
쿠오 바디스(Quo Vadis:1896)-솅키에비치
노르웨이
인형의 집(Et dukkhjem:1879)-입센
아라비아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작가 미상
머리말
대학 입시 제도가 단편적인 지식 암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종합적, 창의적 지식을 측정하는
대학 수학 능력 시험과 본고사를 실시하도록 되었다
이런 현실로 인해 일선의 국어과 교사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점은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
문학 작품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교사가 짧은 수업 시간에 작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실정도 아니며, 학생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책들을 구입하여 하나하나 독파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만족스러운 학습 지도가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종합하여 세계 명작 21편을 엄선하였다. 각각은 나라별로 수록하였고 작품의
연도를 밝혀 역사적인 지식도 함께 터득하여 교양 축적에 충분한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세계 문학의 조류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문학을 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것과 아울러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발판으로 하여 세계인으로서의 성장에, 새
문화 창조에 이바지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중, 고교 학교 학생들 뿐만 아니라 대학생, 일반 성인들에게까지도
교양 축적을 위한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고 본다
이 책을 엮는데 특히 유의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중, 고등 학교 교과서 수록 작품 중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작품 가운데 21편을 엄선하여
수록하였다
2. 각 작품에 대하여 (해설), (작가약전)을 삽입하여 그 문학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평가를 도왔으며, (줄거리)를 되도록 자세히 실어 문학적 향기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3. 각종 시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나라별로 수록하였으며 작품 연도와 더불어 작가와 작품의
시대적 배경, 그 시대의 사조, 대표적 작가들을 함께 수록하였다
햄릿(Hamlet:1600-1601)
해설
셰익스피어는 37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애독되고 있는 "햄릿"은 대중적 흥미가
높기 때문에 자주 상연되지만 셰익스피어 연구가들에게는 가장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복수극으로 끝나기 쉽고 신중히 처리한다 해도 일종의 윤리극이 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는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인생의 비밀을 파헤쳐 그 진상을
제시하려 했는데 그 비밀을 해명하는 열쇠로 햄릿의 성격을 창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햄릿을 통하여 인생의 영원한 비밀인 삶, 사랑, 번뇌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햄릿이 지니는 성격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인긴 행위의 근저에 깔려 있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느끼는 기쁨을 알 수 있다. 햄릿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신병설 의지 박약설 우울증설 등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그것은 햄릿의 복잡한
성격의 일면을 설명하지만 그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실로 "햄릿"은 인류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인간의 감정에 감동을 주며 생각을 새롭고 깊게 해 줄 것이다.
괴테는 햄릿을 통하여 "훌륭하고 숭고한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지만 영웅적인 기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짊어지지도 못하고 던져 버리지도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진 채 거꾸러지고
만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반성적이고 외향적이며 환경에 순응하는 유형의
성격자는 햄릿의 생활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가 인간의 성격을 햄릿 형 돈 키호테 형으로 비유하여 나눌
정도로 셰익스피어는 "햄릿"으로 성격의 전형을 창조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에는 "햄릿"외에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가 있다
작가 약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중부 잉글랜드의 스트래트포드 안 에이번에서 태어나 1616년
4월 52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빈곤으로 겨우 국민학교 정도의 교육을 마치고 20세 때에 런던으로 나왔다.
일정한 직업 없이 전전하다가 어느 극장에서 배우 겸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26세 경에는
완전한 극작가가 되었다. 그 후로 약 23년 간 문필 생활을 하였다. 장시 2편 소네트 154편
희비극 37편을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나서야 진가를 인정받아 그 위대함이 연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의 시인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그의
관찰력은 넓고 파악력은 강하다. 음악과 색채의 아름다움 재미있는 말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의 전개 성격이 뚜렷한 인간의 동작 싱싱한 서정시의 맛 터져나오는 웃음 가슴이
뜨거워지는 슬픔 등 예술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춘 것이 그의 극이다
줄거리
-제1막-
자정이 지난 시각 덴마크 엘시노어 궁성 앞의 말루에서 버나드는 마셀러스 호레이쇼와
괴이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정이 지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이틀을 계속 두 달
전 죽은 선왕의 혼령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누군들 보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으랴. 버나드의 보고를 들은 호레이쇼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망루에
나타났다. 앞은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이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성벽의 모퉁이에 정말
혼령이 나타났다. 선왕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혼령은 생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찌푸린 표정엔 위엄과 고통이 서려 있다. 아무리 보아도 선왕 그대로의 모습이다.
놀란 호레이쇼는 공포에 와들와들 떨면서도 멀어져 가는 혼령에게 소리친다
"너는 누구냐? 누구이기에 한밤중에 덴마크의 선왕께서 행차하시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냐? 어서 말해라!"
호레이쇼는 질려 있었다. 이것은 덴마크에 괴변이 일어날 징조가 아닌가? 평소 불평이 많은
마셀러스는 이 징조를 두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듯 엄중한 말을 세워 백성들을 매일처럼 못살게 대포를 만든다 외국에서
무기를 사들인다 배를 만든다 하며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자네들 가운데 아는 바가 있으면
속시원하게 말 좀 해 주게!"
호레이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왕께서 그의 생전에 노르웨이 국왕과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국왕의 소유지를 바로 선왕이 빼앗았다는 것이다. 최근
선왕이 돌아가시자 노르웨이 국왕의 아들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잡병을 모아 덴마크 국경을
노리고 있으니 선왕의 혼령은 이와 관계있는 징조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다시 혼령이 나타났다. 호레이쇼는 조금 전보다 침착해져 혼령을 향해 말을 걸었다
"섰거라! 나에게 말을 해라 만일 네게 원한이 있다면 내가 너의 원을 풀어 주어 내게도
복이 될 일을 할 것이니 말해 다오. 무엇이건 말해다오. 이 나라의 화근의 비밀을 알거든
말해 다오. 생전에 남에게 빼앗은 재물을 땅속에 묻어 둔 채 죽은 탓으로 그것을 못잊어
나타났느냐? 어서 말을 하라"
그러나 첫닭 우는 소리와 함께 혼령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동녘 하늘엔 붉은 햇살이
뻗치고 있었다. 호레이쇼는 이 사실을 햄릿에게 보고함이 신하로서의 의무이며 친구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왕은 두 달 전 술을 마시고 잔디밭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독사에 물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선왕의 죽음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의 아들인 햄릿이었다. 부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자라난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져
괴로워했다. 선왕의 후임으로 햄릿의 숙부가 왕좌에 앉았으며 더욱 햄릿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선왕이 죽은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 그의 어머니가 숙부와 재혼한 데 있었다.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선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덴마크 영지에서 이제 햄릿
외엔 없는 것이다
오늘도 왕비를 옆에 거느리고 그 옛날 형이 자리잡았던 옥좌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앉은
클로디어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집정 소감을 연설하고 있었다
"햄릿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가 두 달 전이라 만백성이 수심과 슬픔의 도가니 속에서
선왕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인정과 도리이되 언제까지나 비탄의 눈물을 흘린다고 죽은
넋이 되돌아올 리 없고 험악해진 국경 지대의 형세는 일각의 지체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기쁨과 슬픔을 저울질하면서 나는 지난 날의 형수를 정궁으로 모셨노라 또한 이 문제에 대
해서는 경들이 협조하였기에 짐도 그 월등한 지혜를 굳이 막지 않았노라"
클로디어스의 언변은 유창하고도 의젓하여 모든 신하들을 위압했다. 침통한 표정의 햄릿을
바라본 왕비는 아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사랑하는 왕자 그 어두운 얼굴빛을 던져 버리고 좀더 다정스러운 눈으로 왕을 우러러
보오. 항상 그렇게 눈을 내려 덮고 떠나신 아버님을 땅 속에서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소?
죽음이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현세에서 영원의 생명으로 지나가는 것을"
클로디어스 왕도 햄릿의 마음을 달래느라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햄릿의 마음
속에는 슬픔과 의아심과 분노가 타오를 뿐이었다. 그는 숙부인 클로디어스보다 어머니로부터
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 추하고 더러운 몸뚱어리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겨우 한 달! 거친 바람이 어머니의
뺨을 스쳐가는 것도 못 마땅히 여기시던 끔직한 사랑이었건만 그런 사랑을 주던 왕의 시체가
썩기도 전에 이 지경이 되고 말다니... 생각을 말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
염치도 체면도 없는 조급한 마음 어쩌면 그렇게도 재빠르게 음탕의 자리로 달려간단
말인가? 저리도 곱고 우아한 왕비의 속이 매춘부의 그것과 무엇아 다르랴 그러나 가슴이
터져도 입을 다물어야 해!'
이 때 호레이쇼 마셀러스 버나드가 햄릿을 찾아와 간밤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듣는
햄릿은 긴장하여 심상치 않게 생각한다
"설령 지옥이 입을 벌려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해도 나는 기어코 그 혼령에게 말을 걸
어 보겠다. 그리고 자네들은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는
말게 나는 혼령이 선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기어코 말을 걸어 보겠다. 오늘 밤엔 나도
말루에 가 보겠네 비밀을 지키게"
세 사람은 햄릿에게 맹세를 하였다
'아버지의 혼령이 무장을 하고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데! 무슨 흉계가 있나보다. 어서
밤이 됐으면! 그 때까지만 참자 서두르지 말고 온 세상이 덮어 둔다 해도 나쁜 일이란
머리를 쳐들고 사람들 눈앞에 나타나지 말지니'
클로디어스 왕의 심복인 폴로니어스에게는 레아티즈와 오필리아 남매가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 레아티즈는 장부답고 오필리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더구나 오필리아의 끝없이
청초한 미모는 일찍부터 햄릿의 가슴 속에 사랑의 불꽃을 심었다. 레아티즈는 프랑스 유학 도
중 클로디어스 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다시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에게 햄릿과의 교제는 삼가하라는 충고를 한다
"햄릿이 너에게 호의를 표시한다지만 그건 다 한때의 기분이니 조심하여라 방춘 가절의 한
떨기 꽃이라 오래가지 못하면 향기가 달콤하나 계속되지 못한다. 왕자의 지위니 만큼
지금은 너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가 누구를 배필로 정하느냐는 덴마크 국민이 정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그의 고백을 너무 귀담아 듣거나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 오필리아
사랑하는 동생 내 말을 명심하겠지?"
"오라버니 말씀은 제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잠갔으니 열쇠는 오라버니께서 맡으세요"
아들을 떠나보낸 폴로니어스도 역시 오필리아에게 햄릿을 조심하라고 훈계했다. 순종과
정숙의 미덕을 간직한 오필리아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려 하면서도
햄릿의 사랑이 결코 허위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성 위의 망루는 바람이 세고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들었다. 햄릿과 호레이쇼
그리고 마셀러스는 혼령이 나타나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궁성 안에서는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주연이 한창이라 밤새 가무의 환성이 그치질 않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 혼령이 나타났다. 햄릿은 무서움도 잊고 혼령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가 천당에서 내려왔건 지옥에서 솟았건 나는 그대를 나의 왕 나의 아버님이라
부르리라 당신을 격식에 따라 땅 속에 묻은 것을 이 눈으로 보았건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수의를 찢고 나타났습니까? 어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죽어 시체가 된 당신이 또다시 무장을
하고 그믐달도 어스름한 이 밤을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서 말씀하십시오!"
"따라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전하에게 따로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눈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따라가야지!"
"안됩니다. 만일 저것이 전하를 바닷가로 꾀어내든가 무서운 낭떠러지 위로 이끌면
어쩌겠습니까? 안됩니다"
호레이쇼는 혼령을 따르려는 햄릿을 잡고 말렸다
"나의 운명이 나를 부른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전신의 힘줄이 사자처럼 솟아오르는구나!
나를 막는 자는 목을 베어 혼귀로 만들 테다. 썩 물러나라!"
햄릿은 날쌔게 혼령이 손짓하는 대로 따라갔다
혼령은 성벽 아래까지 갔다
"어디까지 가실 작정입니까? 말씀을 하십시오"
"이제는 내 시간이 거의 다됐다. 다시 지옥의 유황 고열의 업화 속에 시달릴 때가
왔다..."
"가엾기도 해라..."
"너는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이제부터 하려는 얘기를 명심하여 반드시 내 원수를
갚아야 하리라. 나는 너의 애비의 혼령이다.만일 네가 죽은 애비를 공경한다면, 인륜을
짓밟은 암살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잊지 말아라"
"암살?"
"그렇다.사람들은 내가 정원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독사에게 물려 죽은 줄로 믿고 있는 모
양이니 그것은 거짓말이다.네 애비의 목숨을 빼앗아 간 독사는 지금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
는 바로 그 자니라!"
"아! 아버님, 저의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았군요"
"그렇다. 그뿐이랴? 그 놈은 왕비의 지조까지 정욕의 노예로 삼았다. 새벽 냄새가 풍겨 오
는 것 같으니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나는 그 날도 예전과 같이 정원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 때 네 숙부는 무서운 힘을 가진 독약을 나의 귀에 부었다. 그 독약은 삽시간에
내 육체를 수은이 돌 듯 돌았지 그것은 마치 젖에 초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맑고
고요한 나의 피를 두부처럼 굳게 하니 나의 육체는 문둥이처럼 전신에 종기가 솟았고
보기에도 흉측스런 시체로 변하였다. 이리하여 생명도 왕관도 왕비도 친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구나 네가 나의 아들이라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아들아 네가 어떠한
수단으로 어머니는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가슴 속에 양심의 가책을 받게끔 내버려 두라
날이 새니 나는 가야 한다. 잘 있거라 부디 이 아비를 잊지 말기를..."
-제2막-
며칠이 지난 후 폴로니어스의 저택이다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햄릿 왕자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풍문이 성안에 쫙
퍼졌다
오필리아는 황망히 아버지의 방문을 밀치며 뛰어들었다
"아버지! 큰일났어요. 무서워요..."
아직도 불안에 사로잡혀 초조히 서 있는 오필리아는 방금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방금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노라니까 햄릿 왕자님께서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모자는
벗은 채 백지장 같은 얼굴로 제 방으로 들어오시잖겠어요? 그러더니 제 손목을 덥석 잡으시고
는 언제까지나 제 얼굴을 바라보시는 거에요. 왕자님은 긴 한숨을 내쉬었지요..."
"음... 그거야말로 틀림없는 사랑병이다. 그래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아니오.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한참을 그 자세로 있으시다. 저의 팔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거리시더니 밖으로 나가셨어요.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뒷걸음으로 나가셨읍니다"
"알았다. 그래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이건 지체 말고 왕께 아뢰어야지. 그것은 바로
상사병이라는 것이다. 오필리아 너 요즘 왕자에게 박정하게 한 적은 없었느냐?"
"아뇨 다만 아버님 분부대로 왕자님이 보내 오신 편지를 돌려 보내고 만나자는 것을
거절 했을 뿐이에요"
"내가 좀더 주의해서 살펴 볼 것을 ...이 아비는 네 몸을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서 왕자에 대해 지나친 의심을 했구나. 어서 가자.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꾸나"
폴로니어스의 보고를 들은 왕과 왕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햄릿의 병의 원인이
선왕의 죽음과 자기들의 결혼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필리아에 대한 사랑의 열병에서라니 일단 안심은 되면서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왕자께서는 이 복도를 몇 시간이고
거니는 습관이 있으십니다. 그 때에 소신의 딸을 왕자와 만나게 하고 폐하께서는 소신과
함께 휘장 뒤에서 두 사람의 언행을 엿보면 사실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햄릿은 헝클어진 차림새로 책을 읽으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햄릿의 발광은 사실이 아니었다. 혼령을 만난 후부터 가슴 속에 자기 대로의
계획과 각오가 자리잡게 되었다. 햄릿은 그것을 남들이 알게 되면 숙부가 그의 복수를
눈치챌 것이 우려돼 일부러 정신병자의 행동으로 가장하였던 것이다.
햄릿은 학식이 풍부하며 문예도 능하여 귀족 자제들과 백성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명민한
머리로 복수를 계획하고 적절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복수의 계획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비록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번민은 끊이지 않았다
햄릿을 위로하기 위해 극단의 연극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햄릿은 상연작품을 햄릿
자신이 윤색한 "곤자고의 살해"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햄릿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배우 외에는 그 작품 내용을 미리 눈치채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을 돌려 보낸 다음 햄릿은 복수의 일념에 몸부림쳤다.
'아 복수다. 내가 얼이 빠졌어 사랑하는 아버지가 참살 당한 아들이 천지가 원수를
갚으라고 재촉하는데 나는 뭐지? 복수하라는 엄명을 받고도 창부처럼 가슴 속에 말만
늘어놓고 막상 원수를 만나면 입 속에서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매춘부처럼 가랭이를
벌리는 꼴이 참으로 장하다. 아 이게 무슨 꼴인가? 분기하라 살인의 죄는 입이 없어도
스스로 실토하기 마련이라거늘 이제 저 배우들에게 숙부의 앞에서 아버지 살해의 장면과
비슷한 연극을 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숙부의 안색을 살펴 그 급소를 찔러 보리라 그래서
깜짝 놀라면 앞으로 할 일은 뻔하다!'
햄릿은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제3막-
궁중의 어떤 방이다
간악한 클로디어스 왕은 갖은 수단을 써서 햄릿의 광증의 원인을 캐내려고 했으나 뜻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햄릿이 잘 드나드는 방에서 오필리아와 만나게 하고 그
현장을 엿보기로 하였다. 왕과 폴로니어스는 오필리아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휘장 뒤로 숨어
버렸다
오필리아는 마음이 아프도록 괴로웠다. 왕자가 자기 때문에 그렇게 변했다면 자기에게도
왕자를 소생시킬 책임이 있으며 의무가 있다는 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진심을 속이면서까지
왕자를 대해야 하는 자신이 부질없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햄릿 왕자는 역시 헝클어진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고 참는
것이 장한 정신인가? 아니면 조수처럼 밀려드는 환난을 두 손으로 막아 그를 없애는 것이
올바른 정신인가? 죽음이란 잠자는 것 그뿐이다. 한 자루의 단도만 있다면 그 자신을 깨끗이
청산할 수 있거늘 압박자의 억울한 짓과 권세가의 무례 멸시받은 사랑의 쓰라림 법률의 태만
관리들의 오만과 덕있는 사람이 가치없는 자에게서 참고 받아야만 하는 발길질 그 모든 것을
누가 참겠느냐?"
햄릿은 경건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오필리아를 보자 미친 사람처럼 다가갔다
복수를 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도 버려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오필리아! 그대는 정절한가?"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여 아름다움은 당신이 타락할 수 있는 표시.
조심하시오, 여인이라면. 나는 한때 그대를 사랑했지"
"저도 그렇게 믿었죠"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았어야 했소. 무엇 때문에 나와 같은 사람과 함께 죄인들을 더
만들어 내려는 게요. 나는 꽤 복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나 차라리 어머니가
나를 낳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할 만큼 가지가지의 죄를 생각하고 있소. 나는 오만하고
복수심이 강하고 야심이 많은 인간이라 나의 머릿속에 사상의 옷을 입히고 형체를 입히고
숱한 죄악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소. 나같이 못된 인간이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모두 모두 다 극악하기만 한 존재들이오. 사람이란 그렇소. 수녀원으로
가시오. 왜 사내와 사귀어 죄 많은 인간을 낳겠다는 거요! 아무도 믿지 말고 어서
수녀원으로 가시오. 아버지는 어디 있지?"
"집에요"
"그럼 문 밖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그만두라고 하시오. 집 안에 박혀 있으라고 하란 말이야
잘 있어요"
"하느님 이분을 보호해 주옵소서!"
"만약 결혼하려거든 바보와 하시오! 영리한 사람들이 당신과 결혼하면 머리에서 뿔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자 어서 수도원으로 가요. 잘 있어요"
햄릿은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오필리아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아아 그토록 고귀하던 분이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 궁중의 안목이요, 학자의
달변이요, 군인의 검이요, 국민의 기대요, 나라의 꽃이시던 높으신 정신이 마침내
땅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기약의 꿀만 빨아먹고 살아 온 나는 지금 모든 여성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었어. 아름답게 울리는 종소리처럼 거룩하고
장하신 이상의 조화는 간 곳 없구나 아아 몹쓸 내 팔자 옛날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아련한데 지금 이 꼴을 보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오필리아는 비통을 참지 못하여 흐느껴 울었다
햄릿과 오필리아의 만남을 몰래 엿듣고 있던 클로디어스 왕은 햄릿이 사랑으로 인해
미쳤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미친 행동 속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진실이
느껴지자 왕은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에 조공을 바쳐 오던
잉글랜드로 햄릿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색다른 환경에서 기분
전환 겸 여행을 떠나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햄릿을 추방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 날 밤, 궁성 안에서는 연극 공연의 준비에 분주하였다. 햄릿은 직접 배우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연극을 지도할 때 햄릿은 생기가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햄릿의 절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호레이쇼에게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숙부의 표정의 변화를 살피라고 하며 햄릿은
복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왕과 왕비를 위시한 문무 백관이 장내에 모여들었다. 햄릿은 오필리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희롱한다.
"무릎 사이에 들어가도 될까?"
"아이 참 왕자님도..."
"아니 무릎을 좀 베자는 거야"
"그건 괜찮아요 "
"내가 무슨 상스러운 짓이라도 할 줄 알았어?"
"오늘 밤은 퍽 쾌활하시네요"
"천만에 저기 앉으신 우리 어머니의 희색 만면한 모습을 보시오.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두 시간도 못 되는데!"
"아니에요. 두 달의 갑절은 되어요"
"벌써 그렇게? 그렇다면 이제 나는 상복을 악마에게 물려 주고 수달의 털가죽옷이라도
입어야겠군!"
"드디어 연극의 막이 오른다
연극은 무언극으로 시작한다. 햄릿은 왕과 왕비의 표정을 훔쳐 본다. 다음, 극중의 왕과
왕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왕 왕과 왕비에게 자신에 대한 변심을
우려하자 왕비가 말한다.
"당치도 않을 말씀을... 이 몸이 재가할 바엔 차라리 지옥으로 가지요. 전 남편을
죽인 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두 번 째 남편을 맞이할 수 있으리오? 두 번째 남편이
침실에서 저에게 입을 맞출 때는 저는 전 남편을 두 번씩이나 죽인 셈인 됩니다"
이 대사는 햄릿이 삽입한 것이었다. 극이 진전됨에 따라 왕비의 얼굴엔 동요의 빛이
지나갔음을 햄릿은 놓치지 않았다. 극은 바야흐로 절정에 달하여 조카가 왕의귀에
독얀을 부어 넣었다. 이 때 햄릿이 말하였다.
"저 놈은 왕위를 빼앗으려고 정원에서 왕을 독살하는 거야. 저자는 머지않아 곤자고의
왕비를 농락할 것이다!"
이 말이 장내에 울려 퍼지자 클로디어스 왕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폴로니어스는
연극을 중지하라고 고함을 친다. 왕은 몸이 좋지 않다는 구실로 왕비와 궁성 안으로
들어가자 장내는 수라장이 되었다
햄릿은 혼령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확인했다. 햄릿은 앞으로의 복수에 대해 한층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폴로니어스가 황급히 나타났다
"전하 왕비께서 드옵시라는 분부입니다"
한편 자기 방에 돌아온 클로니어스 왕은 분노와 공포를 억제하지 못하여 햄릿을
잉글랜드로 추방하라고 신하들에게 호령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신하에겐 잉글랜드
왕에게 보낼 서신을 주고 내일이라도 즉시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고 혼자 남게 된 왕은 참회와 침울한 심정으로 괴로워했다
"아, 나의 몹쓸 죄상! 그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
심정을 어디에 쏟을 것인가? 죄의 결과를 지니고 있으면서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아! 처참한 신세로고... 나의 가슴은 죽음처럼 시꺼멓구나 천사들이여 나를 도와
주소서! 힘을 주소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듯 왕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려던 햄릿은 왕의 뒷모습을 발견하자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단도를 손에 쥐어
한 발 두 발 가까이 갔다.
'기회는 바로 이때다. 지금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어 하지만 저렇게 기도하는 순간에
죽는다면 숙부는 천당으로 갈 것이니 그것은 복수가 될 수 없다. 칼이여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자'
들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서 햄릿은 어머니의 거실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햄릿을 본 왕비는 엄격한 어조로 아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햄릿 그대는 아버님께 매우 불손했다"
"어머니는 저의 아버님께 매우 불손하셨소"
"너는 제 어미도 몰라보는구나?"
"천만에요. 당신은 왕비이며 당신 남편 동생의 아내이십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의
어머니이시죠?"
"대체 이 어미가 어떻게 했기에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냐? 정 그렇다면 누구를
부를 테다"
공포와 분노를 떨며 왕비가 일어나려 하자 햄릿은 재빠르게 왕비의 손을 끌어
당겨 자리에 앉혔다.
"꼼짝 말고 계세요. 그 마음 속을 거울에 환히 비춰 보일 테니. 그 때까지 못
나가십니다"
"나를 어쩌자는 거냐? 나를 죽이려는 게로구나? 사람 살려라! 사람 살려!"
왕비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자 휘장이 흔들리며 인기척이 들려 왔다.
"이건 또 뭐냐? 쥐새끼냐? 죽어라 죽어!"
햄릿은 칼을 빼들고 휘장 안을 찔렀다. 그 때까지 햄릿은 휘장 뒤에 숨은 자는 왕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진 것은 오필리아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였다
"햄릿! 이 무슨 잔인한 짓이냐!"
"잔인한 짓? 그렇죠 어머니 왕을 죽이고 그 왕의 아우와 사는 것은 참혹하고 잔인한
짓이 아니겠지요"
왕비는 부들부들 떨며 잠시 동안 굳어 있었다. 햄릿은 어머니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로 화살을 쏘았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듯 왕비는 자책과 참회의 눈물로 하염없이 흘렸다
바로 그 때 선왕의 혼령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오! 하늘의 수호신이시여! 이 몸을 지켜 주소서 이 곳까지 이렇게 나타나심은 무슨
이유이십니까? 혹시 불초 자식이 때를 놓치어 복수를 소홀히 할까보아 꾸짖으러
오셨습니까?"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네 결심의 칼날이 무디어질까 두려워
재촉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보아라. 네 어머니는 정신이 산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구나 네 어머니를 도와 주어라 심약한 처지에는 같은 말도 크게 울리는 것이니 자 말을
주어라"
그러나 왕비는 이 혼령과의 대화를 듣지 못한다. 왕비는 햄릿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도대체 그렇게 허공을 응시하고 누구에게 말하는 거냐?"
"안 보이세요? 저기..."
"아무 것도 무엇이 있단 말이냐?"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까?"
"우리들의 말소리 밖에는"
"앗! 저기를 보십시오. 아버님이 사라져 갑니다. 살아 계셨을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이제
문을 열고... 아!"
왕비는 햄릿이 이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으로 슬퍼하였다.
-제4막-
클로디어스 왕은 햄릿을 한시 바삐 잉글랜드로 추방하는 것이 안전한 길이라고 믿어
이튿날 아침 배에 태워 출발시켰다. 폴로니어스의 시체는 아무도 모르게 매장해 버렸다
그러나 가엾은 희생자가 나타났다. 오필리아가 미치고 만 것이었다. 오필리아에게는
하늘같이 자비로운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죽었으니 그것이 오필리아를 미치게 하였던 것이다
솜털처럼 보드랍고 샛별처럼 맑은 처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크고 처참한 충격에 미쳐 버렸다.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했던 오필리아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궁성 안을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애절한 노래를
불렀다. 드디어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아티즈가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급보를 받고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성격이 곧고 정의감이 강한 레아티즈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둘 까닭이 없으리라
젊은 레아티즈가 폭도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부수며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내 레아티즈는 클로디어스 앞에 나섰다. 혈기에만 맡긴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만큼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왕비는 조용하기는 하나 위엄 있게 말하였다
"레아티즈 좀 진정하라"
"진정할 수 있는 피가 제 몸에 있다면 그것은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오. 저의 아버지는 어디 있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게 된 연유가 무엇이냐 말이오? 저를 속일 수는 없소.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확실한 사정을 알고 싶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친구와 원수를 분간하지 못하면서 정작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때 오필리아가 노래를 부르며 나타나자 레아티즈의 심장은 찢어질 듯하였다
"아, 이 가슴의 불꽃이여! 나의 뇌수를 태워 없애다오. 눈물이 피가 되어 앞도 못 보게
해다오. 나는 기어코 너를 미치게 한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다. 오 아름다운 오필리아!
5월의 장미 귀여운 내 동생! 인간이란 사랑의 극치에 달할 때 사랑하는 어버이를 쫓아 그
귀중한 정성을 사랑의 표적으로 떠나보낸단 말인가!"
그러나 오필리아는 오빠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다시는 오시지 못할 것인가?
어찌 돌아오리오, 한 번 가신 몸
차라리 이내 몸을 버릴까 보다
백설 같은 흰 수염, 삼베 머리에
이제는 영영 가고 못 오실 사람
탄식이 무슨 소용, 도리 없구나
저승에서 부디부디 잘 계시옵소서"
오필리아는 노래를 부르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레아티즈는 그것을 보자 한층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왕은 레아티즈에게 그 복수를 위해 조력을 하겠으니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며
레아티즈를 데리고 갔다
잉글랜드로 떠난 햄릿은 클로디어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보내는 서신을 몰래 뜯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끔직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햄릿 왕자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즉시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햄릿은 편지의 사연을 자기를 따라간 두 사람의 부하를
처형하라는 내용으로 고쳤다
이리하여 죽음을 면한 햄릿 앞에 또 하나의 장애가 나타났다. 햄릿은 해적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된 것이다. 해적들은 햄릿이 덴마크의 왕자임을 알게 되자 그를 인질로 많은 보상금을
타먹기 위해 극진히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덴마크 왕 앞으로 햄릿의 사연을
편지로 보냈다. 햄릿이 무사히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자 간악한 클로디어스 왕은 모든 책임을
햄릿에게 돌려 버리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햄릿과 레아티즈는 검술에 탁월한 무사들이었다. 왕은 햄릿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두
사람이 결투를 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레아티즈가 차지할 칼끝에는 독약을 칠하여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삽시간에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햄릿을 없애 버리기
위해 레아티즈의 힘을 빌리되 국민들의 의아심을 잠재우기 위한 간계였던 것이다.
"좀 더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의 계획이 서툴러 탄로 나면 안 되니까 만일의
경우를 위해 다음 방법을 준비해야지"
"어떻게요?"
"두 사람은 정식으로 내기를 하고... 옳지! 좋은 수가 있지. 두 사람이 결투를 하면
목이 마르게 될 거야. 그럴 때 그 자는 물을 청할 테니까 그 때 미리 준비해 둔 독을 탄
술잔을 내 주면 된단 말이야. 결투에서 칼을 모면했다 할지라도 그 술 한 모금만 마시면
만사는 뜻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이렇게 두 사람이 모의를 하고 있을 때 왕비가 뛰어들어 왔다
"재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군요. 레아티즈! 그대의 동생이 물에 빠져
죽었어요!"
"오필리아가? 어디서요?"
"개울가에 비스듬히 누운 버드나뭇가에서 오필리아는 그 가지에다 미나리아재비와
딸기풀과 실국화를 꺾어서 꽃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꽃 목걸이를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나뭇가지가 꺾이면서 그만 시냇물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꽃송이처럼 활짝 핀 치맛자락은 물 위에 수를 놓은 듯 오필리아를 싣고서 흘러
가더니 마침내 거센 물결이 삼켜 버렸다는군요"
여동생의 최후를 듣고 난 레아티즈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불쌍한 누이여!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그러나 하염없이 솟구치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구나. 비웃을 놈은 비웃어라. 실컷 울고 나면 여자같이 약한 마음도 가실테지...
전하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이 마음 어리석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복받쳐 오르는 눈물에 말끝을 맺지 못하는 레아티즈는 쏟살같이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5막-
냉기와 이상한 기운이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묘지였다. 두 사람의 어릿광대가 또
하나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무덤을 파고 있었다.
덴마크에 돌아온 햄릿은 이 묘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땅 속에서 파낸 해골이
햄릿의 발 앞에 떨어지자 햄릿은 무심코 해골을 주워 바라보았다
"이 해골도 한때는 혀가 박혀 있어 노래를 불렀을 테지. 살인의 원조인 카인은 형을
죽이는 데 말의 턱뼈를 썼다지만 이건 그 턱뼈나 되는 것처럼 마구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군
지금 저 바보가 삽으로 파 올리는 해골도 그 옛날엔 어떤 지도자의 지혜를 돕는 사람의
해골이었는지도 모를 텐데!"
옆에 서 있던 호레이쇼는 햄릿의 넋두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더기 마나님 신세를 지게 되고 참으로 기가 막힌 변화로구나.
우리가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더 재미있는 것을... 기를 때에는 많은 공을
들였건만 이제는 노리개가 되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구나!"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며 무덤을 파고 있는 광대에게 햄릿은 물었다
"어느 사내의 무덤이냐?"
"사내 것이 아니오"
"그럼 여자 것이냐?"
"여자도 아닙죠 살아서는 여자였지만 가엾게도 지금은 죽은 사람입죠"
"그놈 참 까다롭기도 하지... 그래 너는 언제부터 무덤을 파서 살아 왔느냐?"
"햄릿 왕자님이 세상에 나시던 날부터죠 그분도 지금은 미쳐서 잉글랜드
땅으로 쫓겨 갔지만..."
햄릿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가 쑥스러워서 시치미를 떼고 말을 계속하였다
"왕자는 왜 미치게 됐나?"
"풍문에 들은 즉 그게 이상하다는 뎁죠"
"어떻게?"
"글쎄 정신이 돌았으니까 그렇습죠"
"사람은 무덤 속에서 몇 해면 썩지?"
"글쎄올시다. 가죽을 다루는 갖바치는 9년 갑니다만..."
"그건 또 왜?"
"그야 장사가 장사니 만큼 살가죽이 무두질이 되어서 오래 갑죠"
이 때 저만치 숲 사이로 장례식에 오르는 행렬이 보였다. 햄릿은 호레이쇼를 재촉하여
나무 그늘에 숨어 엿보았다
그 행렬 속에는 왕 왕비 그리고 레아티즈도 함께 있었다. 그것은 오필리아의
장례식이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레아티즈는 사제에게 보다 정중한 장례식을 요구하여
관은 땅 속에 묻히게 되었다
레아티즈는 슬픈 소리로 곡하였다. 나무 그늘에서 듣고 있던 햄릿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왕비도 꽃을 관 위에 뿌리면서 마지막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처녀에게는 아름다운 꽃을... 잘 가거라. 햄릿과 백년 해로하기를
바랐건만... 이 꽃을 너의 성스러운 결혼식 자리에 뿌려 줄 날을 기다렸건만
이렇게 너의 무덤에 뿌릴 줄이야..."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끓여 오는 격정을 억제하던 레아티즈는 사랑하는
여동생과 함께 묻어 달라고 외치며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넋을 잃고 서 있던 햄릿은 이 광경을 보자 다음 순간 미칠 듯이 오필리아의
무덤 속으로 뛰어갔다. 햄릿을 발견한 레아티즈는 햄릿에게 욕을 퍼부어대며 덤벼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왕자님 진정하십시오!"
호레이쇼는 햄릿을 뜯어말렸다
"나는 오필리아를 사랑해 왔다. 수 만명의 오라버니의 사랑을 다 끌어 모아
보아라! 감히 따라올 것 같으냐! 오필리아를 위해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레아티즈가 다시 덤벼들려 하자, 이 때 왕은 정신 이상이 생긴 햄릿을 상대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리고 어제 이야기한 것을 명심하고 잠시 참으라고 타일렀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잉글랜드에서 다시 살아나올 때까지의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사건의 전모를 듣고 있던 호레이쇼도 새삼스럽게 왕의 흉계를 알았다는 듯이
분함과 의기에 몸을 떨었다
이 때 클로디어스 왕의 종인 오스릭이 햄릿을 찾아와 왕의 분부를 전했다
"왕자님, 마침 레아티즈께서 귀국하셨는데, 검술이 뛰어나다고 하시고 인품이
온유하시어 문자 그대로 완전한 신사이시어 만인이 경모할 분이라 하옵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이냐?"
"전하께서 왕자님과 레아티즈가 12회에 걸친 시합을 하라시는 명이십니다. 그래서
석 점은 놔주고 나머지 아홉 점으로 결승하는 데 전하께서는 왕자님이 다섯 점 득점으로
결국 이길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응답해 주신다면 곧 시합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싫다고 한다면?"
"아닙니다. 시합장에서 직접 응답하시랍니다"
"처분대로 하시오. 전하와 레아티즈가 모두 원한다면 칼을 가져오게 하라. 되도록이면
폐하를 위해 이기고 싶지만 시합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 소득은 망신과 놓아 주는
석 점 뿐이겠지!"
"그럼 전하께 바로 그대로 아뢰겠습니다"
검술 시합은 궁성 안 넓은 마루에서 시작되었다. 장내에는 문무 백관이 꽉 들어찼고 왕과
왕비도 나와 있었다.
호레이쇼는 끝까지 햄릿에게 이 시합을 만류하였다
"왕자님 조금이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소인이 가서..."
"나는 예감 같은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겠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늘의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 이제 오면 장래에는 아니 올 터이고, 장래에 아니 오면 이제
올 터이고, 평소의 각오가 제일이야. 어차피 우리가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하는
이상 젊어서 죽는다고 슬퍼할 거야 있나? 만사는 될대로 되는 거지!"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왕은 햄릿을 가까이 오게 하여 레아티즈와 서로 손을 쥐어 주었다
햄릿은 레아티즈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하였다
"레아티즈 용서하게. 요전에는 실례가 많았었네. 그러나 레아티즈에게 폭언한 것은 결코
햄릿이 한 짓은 아니었네. 그럼 누가 했을까? 그것은 나의 광증이 했네. 내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었음을 이 대중 가운데서 맹세하네. 그리고 내가 한 짓은 마치 내 집 지붕을 향해
쏜 화살이 내 형제를 맞춘 격이라고 너그럽게 생각하게"
"그 말씀을 듣자니 저의 마음도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명예에 한해서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우정은 우정으로 간직할 뿐 절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좋아. 그럼 형제 사이처럼 이 시합을 깨끗이 겨루어 보자. 칼을 다오"
네댓 자루의 칼이 나왔다
햄릿은 별 생각없이 한 자루의 칼을 집어 들었다. 레아티즈는 이것저것 고르던 끝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칼을 재빠르게 들었다
우렁찬 나팔 소리가 성안과 성밖에 울려 퍼지며 시합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합은 햄릿이 이겼다. 왕은 독을 탄 포도주를 햄릿에게 권하였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햄릿의 칼 솜씨를 칭찬하며 어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자 햄릿은 술잔을 그대로
탁자 위에 놓고는 시합을 계속하였다.
시합은 차츰 절정으로 접어들었고 햄릿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하였다. 손에 땀을 쥐며
보고 있던 왕비는 손수건을 햄릿에게 주며 땀을 씻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갈증이 심해지자
햄릿이 마시려다 놓은 술잔을 무심코 들었다
이 광경을 본 클로디어스 왕은 깜짝 놀라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이미 술은 왕비의
입 안에서 목구멍으로 흘러내릴 때였다
왕은 극도로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시합은 세 번째로 접어들었다. 햄릿이 피로를
풀기 위해 잠깐 쉬는 순간 레아티즈는 그 틈에 햄릿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다. 상대방의
비겁한 처사에 격분한 햄릿은 레아티즈와 맞잡고 엎치락거리다가 두 사람은 칼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주은 칼은 바뀌어진 채로 두 사람의 손에 쥐어졌다
바로 이 때 왕비는 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듯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것은 햄릿의
칼끝이 레아티즈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햄릿도 상처를 입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왕비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아. 이 술에는 독약이 들어 있어! 독약이!"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햄릿이었다
"음모다! 문을 잠가라! 역적이다! 범인을 찾아내라!"
신하들은 사방 문을 지켜 섰다. 그러자 레아티즈는 가빠지는 숨결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 역적은 이 안에 있소이다. 왕자도 이제 죽을 것입니다. 어떠한 약을 써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반 시간 안에... 칼끝에 칠한 독약이 전신에 돌고
있으니까... 저는 제 함정에 빠졌습니다. 모두가 저 왕이 꾸민 짓이오. 왕비 전하께서도
독을..."
"천하에 둘도 없는 살인 강간자! 너도 독맛을 보아라!"
햄릿은 불타오르는 분노로 독 묻은 칼로 왕의 가슴을 찔렀다
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햄릿은 술잔에 남아 있는 독주를 왕의 입에
부어 넣었다
숨이 꺼져가는 레아티즈는 햄릿에게 말했다
"왕자님 서로의 죄를 용서합시다. 저와 저의 아버지의 죽음도 당신 탓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당신의 죽음도 이 놈의 탓이 아니기를 바라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레아티즈는 숨을 거두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햄릿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30분 후면 죽어야 할 운명이다
"레아티즈 그대를 하늘도 용서할 걸세. 호레이쇼, 이제는 나도 다 살았다. 가엾은 어머니
잘 가시오! 하고 싶은 말은 적지 않지만 죽음이 나를 재촉하니 도리가 없군. 호레이쇼
자네만은 살아야 하네. 살아서 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일의 시비를 잘 가려
주게나"
"왕자님 몸은 비록 덴마크서 태어났지만 정신은 옛 로마 사람과 다를 바 없구나.
내가 지금 살아 무엇하리. 마침 독주가 남아 있군"
"장부답지 못한 노릇! 그 잔을 이리 주게. 자손을 두어 내게 어떤 누명이 남을지도
모를 일. 그러니 자네가 나를 아껴 준다면 잠시 하늘의 은혜를 멀리하더라도 이 욕된 세상에
남아 괴로움을 참고 햄릿의 이야기를 전해 주게"
마침내 햄릿은 숨을 거두었다.
맥베스( Macbeth:1605-1606)
해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제일 마지막 작품이며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1606년 여름에 덴마크 왕이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궁정에서 상연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한다.
맥베스는 야심의 비극이며, 양심의 움직임과 그 무리한 달성, 달성한 후에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세밀한 연구이며 해부인 것이다
맥베스는 바로 주인공 자신이 저지른 악에 의하여 자기 자신도 칼에 맞아 죽게 된다는
인과 응보적인 내용이다
맥베스의 무술에 대한 자신과 이기적 야심 이상한 마녀의 숙명적 암시가 이
작품 구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과의 성격을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해리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맥베스의 성격에는 선과 악이 혼합되어 있다. 그의 용감하고 고상한 성격은 그의 양심과
비등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압도적인 상상력으로 어떤 행동의 결과를 예견할 뿐 아니라 그
진의를 투시한다. 제1막 제3장은 예언이 실현되리라는 비극적 예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듣는 순간 그것을 수행할 방법을 예견하고 그 광경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그의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균형을 유지한다. 맥베스 부인은 자기
남편보다 다 낫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다. 이 부인은 맥베스와는 달리 대담한 편이지만
예민함과 지각이 결여되어 있다. 던컨 왕을 살해하고 나서 맥베스는 자신의 행위가 악일 뿐만
아니라 그 응보를 받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왕이 살해된 후 남편과 아내의 성격의 차이는
더 뚜렷해진다. 맥베스는 그의 부정 행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에 압도된다.
그러나 그 부인은 다음에 해야 할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맥베스 부인에게는
상상력이 없다. 시역이 감행되고 나서 던컨 왕의 피가 맥베스의 뒤를 따라 계단에 떨어지고
그것이 전 우주를 둘러싸서 그는 피바다에 홀로 서게 된다. 그러나 맥베스 부인은 물이
조금만 있으면 악행을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두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맥베스 비극은 처참하고 비장한 여러 장면을 통해
전개된다
맥베스가 고대의 운명극과 다른 점은 그의 성격과 야심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작가 약전은 햄릿 참조)
줄거리
-제1막-
스코틀랜드의 명장 맥베스 장군은 적국인 노르웨이를 멸망시키고 대승리를 거둔 후
뱅크오 장군과 함께 당당히 돌아오는 길이었다.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마녀 셋이 나타나서
말했다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영주께 축복을 드리오!"
"맥베스 만세! 코더 영주께 축복드리오!"
"장차 왕이 되실 맥베스 만세!"
이 말을 들은 뱅크오는 자기에게도 예언을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마녀들은 뱅크오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맥베스만은 못하나 더 훌륭하신 분!"
"맥베스보다는 운이 좋지 못하나 운이 더 좋으신 분"
"왕이 되지는 못하나 왕을 낳으실 분 그러니까 만세! 맥베스와 뱅크오 만세!"
이 말을 남기고 마녀들은 사라졌다
두 장군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아왔을 때 왕은 승전을 치하하며 맥베스를 코더 영주로 임
명했다. 마녀들의 말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뱅크오가 축하의 말을 하자
"글래미스, 그리고 코더의 영주! 그러면 장군은 자손들이 왕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지는
않으시오? 나에게 코더 영주를 예언한 그것들이 그러한 약속을 하였으니"
맥베스는 뱅크오 장군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예언을 믿는다면 장군은 코더 영주뿐 아니라 왕관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게 되리라"
뱅크오도 이렇게 말하였다
승전 축하의 연회석상이다. 왕은 모든 문무 백관 앞에서 왕자 맬컴을 세자로 뽕하고
캄버랜드 공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인버네스의 맥베스 성으로 가서 하룻밤의
폐를 끼치고 다음 날 떠나겠다고 말하였다
"폐하를 위하는 것이 아니면 휴식도 고통이 됩니다. 신이 선발자가 되어 폐하의 행차를
알려 소신의 처를 기쁘게 하겠사옵니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맥베스는 왕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왕과 그 일족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맥베스의 성으로 간 왕은 기쁜 얼굴로 맥베스 부인을 칭찬하며
축복하였다
"폐하의 종복인 저희들은 항상 저희들 가족 저희들 자신 그리고 저희의 모든 것이 다
폐하로부터 빌린 것이며 언제든지 분부가 계시면 그대로 돌려 드릴 것입니다"
맥베스 부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말했다. 왕은 맥베스 부인에게 진심으로 치하하며
값진 보석과 많은 금화를 선물로 주었다
밤이 이슥하여 맥베스는 막상 왕을 죽이려니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다
"우리가 만일 실패를 한다면?"
맥베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맥베스 부인은 남편을 격려하며 죄를 범하게 하였다.
왕후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패라니요. 용기를 내세요.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던컨 왕이 잠이 들면 그 시종 두
사람에게 마취제가 든 술을 먹여서 그들이 술에 골아 떨어진 후에는 왕에게나 그들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옳지, 그자들의 단도를 사용하면 그자들의 소행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오 "
"그럼요. 왕의 시해 소식을 듣고 우리는 슬픔에 잠겨서 울고불고 야단을 하는거죠"
"결심을 했소. 이 무서운 모험을 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소. 자 갑시다. 그리고 좋은
얼굴로 세상 사람들을 속입시다. 마음의 거짓은 거짓 얼굴로 감추어야 하는 법이오"
-제2막-
다음 날 아침 일찍 귀족인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와 레녹스가 맥베스에게 찾아 와서 왕이
일찍 오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말하였다. 맥베스는 문지기를 시켜서 그들을 왕의 침소로
안내했다
"아, 무서운 일이다. 무서운 일 입과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왕의 침소로 들어갔던 맥더프는 혼비백산하여 뛰쳐 나오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맥베스와 레녹스는 놀라서 물었다. 두 사람은 곧 왕의 침소로 뛰어들어갔다. 비상종이
울리자 맨 먼저 맥베스 부인이 나타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페하께서는 사살을 당하셨습니다 "
"저것을 어쩌나! 아니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을 생기다니!"
맥베스 부인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부왕께서 누구에게?"
왕자 맬컴은 몸을 떨었다
"침소에서 시중을 들었던 그 두 사람의 소행 같습니다. 그자들의 손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자들의 단검 역시 피가 묻은 채 베개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마치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맡길 만한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레녹스가 왕자에게 이렇게 말을 하자 맥베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분노에 사로잡혀 단칼에 그자들을 베어 버린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모든 장군들은 반역을 기도한 악도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회의실에 모이게 되었다
맬컴은 잉글랜드로 도날베인은 아이랜드로 두 왕자는 몸을 감추었다. 이렇게 되어 왕위는
자연스럽게 맥베스에게 돌아갔다
-제3막-
맥베스는 바라던 대로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으나 이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뱅크오 장군이었다. 맥베스는 결심을 하였다
"마녀들이 처음에 나를 왕이라고 불렀으나 뱅크오에게는 역대 왕의 조상이라고
축복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 뱅크오의 자손들이 왕이 되게 하기 위하여 내 마음의
술잔을 쓰게 만들었단 말인가? 운명아 오너라! 최후까지 사생 결단을 내자! 그것이 누구냐?"
맥베스는 두 자객을 시켜 뱅크오를 죽일 간계를 세웠다
"그 자와 그의 아들 폴리언스가 동행할 것이니-일을 깨끗이 처리하기 위하여-그의
아들까지 함께 없애버리는 것이 그 애비를 없애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폐하 소인들은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두 자객들은 맥베스 왕에게 맹세하였다
밤이 되자 왕이 초대하는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뱅크오는 아들 풀리언스를 데리고
횃불을 들고 등청하는데 숨어 있던 자객들이 뱅크오에게 달려들었다
"아, 살인이다! 풀리언스야, 달아나라, 달아나라! 이 원수를 갚아다오. 아 사악한 놈!"
뱅크오는 그 자리에서 죽고 풀리언스는 간신히 도망을 쳤다
한편 궁전에서는 맥베스 왕과 왕비가 참석한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
자객이 가만히 들어와 뱅크오만 죽이고 그 아들은 놓쳤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러면 또 불안증이 일어나겠다. 둘을 다 없앴더라면 자유롭고 유쾌한 기분이 될 수
있었을 것을... 큰 뱀이 죽었다. 달아난 새끼 뱀은 독사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독이
없다"
맥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좀 꺼림칙하였다
"폐하께서는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맥베스가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신하들이 이렇게 말을 했으나 맥베스의 눈에는 뱅크오의
유령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맥베스는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놀라면서 유령을 꾸짖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왕이 비틀거리며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러분 이것은 간혹 있는 병이오. 별것이 아닙니다"
맥베스 부인은 잔치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께서 속히 쾌유하시기를 빕니다" 하며 신하들은
물러갔다
맥베스에게 왕위를 빼앗긴 던컨 왕의 왕자 맬컴이 잉글랜드 애드워드 왕에게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맥베스는 이 보고를 듣고 크게 노하여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제4막-
맥베스는 마녀들을 찾아가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맥베스는 마녀에게 물었다.
"어두운 밤에 은밀히 다니며 흉악한 일을 꾀하는 마녀들아! 그들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느냐? 나에게 말을 해다오"
"맥베스! 맥베스! 맥더프를 경계하라 파이프의 영주를 경계하라..."
마녀는 맥베스가 가장 무서워하고 있는 것을 알려 주었다. 맥베스는 맥더프를 죽일
결심을 하였다. 마녀들은 말했다
"잔인하게 대담하게 결단성 있게 하라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라 여자가
낳은 자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하리라"
"버남 숲이 단시네인의 높은 언덕까지 공격해 오지 않는 한 맥베스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마녀들은 그림자처럼 여덟 사람의 왕이 나타나고 최후의 왕은 손에 거울을
들고 있으며 뱅크오의 망령이 그 뒤에 따르는 환상을 보여 주었다. 뱅크오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자기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아! 그것이 사실이냐?"
맥베스가 미친 듯이 소리치자 모든 장면이 사라지고 레녹스가 들어왔다. 레녹스의
보고에 의하면 맥더프가 잉글랜드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계획이 잘 실행되도록 곧 움직이게 하자. 맥더프의 성을
습격하자. 파이프를 탈취하여 그 자와 핏줄을 나눈 불운한 놈들은 모두 다 칼날에
죽으리라.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한편 맥더프 부인은 위험이 임박해 오는 줄도 모르고 집안에 있다가 자객들에게
아들과 같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잉글랜드로 망명한 맥더프는 왕자 맬컴을 만나 맥베스를 없애고 다시 나라를
찾을 것을 협의했다. 그 때에 역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던 스코틀랜드 귀족인
로스가 등장했다. 맥더프가 자기 가족의 안부를 묻자 로스는 말했다
"당신의 성은 불의의 습격을 당하고 부인과 자식들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부인 자녀
시종 눈에 보이는 대로 모조리..."
이 말을 들은 맥더프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복수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제5막-
단시네인 성안의 별실에서 맥베스 부인의 시녀와 시의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맥베스 부인이 몽유병이 걸렸다는 것이다
"시의님께도, 누구에게도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직접 보지 않고는 제 말씀을 믿지
않으실 테니까요"
시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맥베스 부인이 촛불을 들고 나타났다
"저것을 보십시오. 지금 나오십니다. 저 모양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깊은 잠에
빠져 계십니다. 주의하여 보세요. 여기 숨으세요"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보시오. 손을 비비고 계십니다"
"늘 저렇게 손을 씻는 시늉을 하고 계십니다"
시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맥베스 부인은 손을 씻는 시늉을 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망할 피야 없어져라 아니 폐하 무엇을 하십니까? 군인이 겁을 내세요? 누가
안다고 두려워하십니까? 우리의 권력을 재판할 자가 어디에 있어요? 하지만 그 노인이
그렇게도 피가 많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왕후의 권위를 다 가진다 하여도, 가슴에 저런 고통은 지니고 싶지
않습니다"
시녀가 시의에게 말하자 시의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입 밖에
낼 수 없다며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얼마 후 잉글랜드 군은 맬컴과 그의 숙부 시이워드 그리고 충성스러운 맥더프의 지휘로 피
비린내 나는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맥베스는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반란에 격분하여 단시네인 성의 방위에 전념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왕의 칭호가 난쟁이 도둑놈이 거인의 옷을 훔쳐 입은 것같이 몸에 맞지 않는다고
수군대고 있었다
맥베스는 성 안에 홀로 앉아서 "여자가 낳은 자는 너를 해칠 수 없다"라는 마녀들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에 종복이 뛰어들어와서 일만 명의 군대가 공격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맥베스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뼈에서 살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싸우겠다. 나의 갑옷을 가져 오너라 기병을 더 보
내서 국경을 순찰하게 하라. 공포심을 퍼뜨리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
맥베스는 정신이 이상해져 갔고 맥베스 부인의 병세도 더욱 악화되어 갔다. 맬컴이
인솔한 군대는 버남 숲 부근의 마을에 도착하였다
"여러분 우리가 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는 날이 가까이 온 것 같소"
맬컴은 많은 동지와 군인들에게 외쳤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맥베스의 부하들은 다들 기회가 있으면 그를 배반하고 이쪽으로 합세하려고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확실한 결과는 공격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진군합시다"
그들은 성난 파도처럼 단시네인 성을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위장을 했다
한편 단시네인 성 안에서 방위를 하고 있던 맥베스는 부하들에게 장담했다
"우리의 성은 견고하다. 포위가 무엇이냐. 놈들이 머물게 내버려 두어라. 기아와
열병으로 그 놈들은 한 놈도 남지 않을 것이다"
"폐하 왕후 폐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여자들의 울음 소리가 들릴 때 종복이 들어와 보고를 하였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몸이었다. 한 번은 들어야 할 소식이었다"
이 때에 사자가 들어와서 맥베스에게 보고를 하였다.
"제가 언덕 위에서 파수를 보고 있다가 문득 버남 쪽을 바라보는데 그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에 그 말이 거짓이라면 네 놈을 나무에 산 채로 매달아 굶어 죽게 할 것이다.
그 마녀들은 버남 숲이 단시네인까지 오지 않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숲이 단시네인으로 오고 있다. 달아날 수도 없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경종을 울려라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 갑옷이라도 몸에 걸치고 죽겠다"
맥베스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맥더프는 혼자 맥베스가 있는 곳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맥베스에게 소리쳤다
"돌아서라. 지옥의 사냥개야 돌아서라"
"너만은 피하려고 했다. 돌아가라. 나의 영혼은 네 집안의 피만으로도 너무 짐이 무겁다"
"너 같은 놈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칼이 나의 말을 대신하리라"
"너와는 싸우지 않겠다"
"그러면 항복을 해라 비겁한 놈 너의 초상을 막대기 끝에 걸어 놓고 그 아래에
'찬탈자를 보라'라고 써 붙일 것이다"
"항복은 안 한다. 최후까지 싸우겠다. 자 덤벼라. 여자가 낳은 자에게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그 미신은 단념해라 나는 달이 차기 전에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왔다"
칼과 칼은 불꽃이 튀었다. 마침내 맥베스는 맥더프의 칼에 쓰러졌다
싸움은 맬컴의 승리로 끝났으며 백성들은 스코틀랜드 국왕 만세를 외쳤다. 왕위에
오른 맬컴은 축하를 받으며 백성들을 위해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실낙원(Paradise Lost:1655-1667)
해설
밀턴이 59세에 발표한 서사시 "실낙원"은 영국 문학 사상 최대의 대작일 뿐 아니라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기독교 문학의 두 기둥을 이루는 중요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열 권이었으나 후에 열 두 권으로 개편되어 1667년에 출판되었다. 밀턴은 일찍부터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와 같은 대작을 쓰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밀턴은 이 "실낙원"에서
구약의 창세기에 기술된 인류 창조를 바탕으로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중심
사건으로 서술하면서 신과 인간과의 기본 관계를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통찰하였다. 장님이
된 밀턴이 구술로써 이 서사시를 완성한 것은 1655-1665년 경이라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 학문에 대하여 "조용한 시절에 너를 다시 만나겠다. 이 시끄러운 때가
아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낙원"은 배경이 지상의 어느 한 지점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는 광대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취급하였다
실낙원 의 주제는 높은 시상과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제재의 하나이며
오늘날까지 영원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빛과 어둠과의 싸움'과 '선과 악의 투쟁'이다.
그러나 곤란한 점은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흥미를 일으킬 두 인물이 순진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햄릿" 등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극적인 정열과 갈등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천진 난만함을 파괴시킨 사탄의 타락은 이 시에서 일관되고 있는 작품의 취지의 하나이다
밀턴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자비롭고 전능한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무질서의 씨가
어떻게 하여 침투해 들어왔는가 하는 것이다
"실낙원"은 그 광대한 구상과 높고도 먼 이상에 경탄할 정도이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그것을 예술적으로 처리한 그의 기교이다.
일찍이 아놀드(M. Arnold)는 그의 저서에서 "밀턴의 완전한 문체는 셰익스피어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밀턴은 그 사조와 운율에 있어서 영국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이다"라고
격찬하였다
작가 약전
밀턴은 1608년 런던에서 출생했으며 6형제 중 3남이었다. 르네상스 최후를 장식한
휴머니스트인 밀턴의 문학적 생애는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수려한 용모와 섬세하고 고상한 취미 단정한 생활로 '학급의 귀부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재학 시절부터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629년 22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최초의 걸작 "그리스도의 탄생의 아침"을 썼다.
1632년에 허튼에 이주하여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정독하고 수학과 음악을 즐기면서
6년을 보냈다. 시작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쾌활한 사람", "사색에 잠긴 사람"과
"아케이즈"는 1633년에 집필되고 초기의 최고 걸작인 가면극 "코모스"가 1634년에
상연되는 등 계속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638년에는 파리를 거쳐 이탈리아에 가게
되어 과학자 갈릴레이와 사귀었다. 나폴리에서 조국의 내란의 비보를 듣고 귀국을
결심했다. 그 때 그는 "동포가 고국에서 자유를 위하여 싸우고 있을 때 마음 편히
유람을 다니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밀턴은 1652년(46세)에 실명하였으나 1655년부터 "실락원"을 쓰기 시작하여
1665년 말에 완성했으며 1667년에 출판했다
줄거리
태고 시대 해와 달이 아직 형성되기 이전의 일이다. 신의 나라와 악마의 나라 두
세계가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무수한 혼돈이 있을 뿐 지구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때였다. 우주의 대법칙에 따라 만물을 다스리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성자(예수)를 후계자로 정하여 모든 신의 위에 있도록 하셨다
천사들의 환희가 넘치는 하늘에서 재주와 용맹이 빛나는 사탄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왔으며 천사장으로서 하느님의 다음가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보좌와 주권에 대한 반역을 일으켜 다른 재앙을 가져오는 신들을 모아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교만과 불경을 벌하여 바닥 없는 지옥으로
내던지셨다. 그 때부터 천국에서는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옥은 어두운
곳이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타락한 사탄은 휴식도
평화도 없는 불꽃의 바다에서 아홉 날 동안 고통을 받으며 혼수 속에 빠져 있다가 겨우
뜨고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일찍이 천국에서 하늘의 영광을 받으며 무상의 광휘에 싸여 찬란한 별들을 무색케
했던 내가 이렇게 파멸과 비참 속에 던져지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비록 그
무시무시한 힘에 패하였지만 굳은 결심과 자존심 모멸감은 변치 않았다. 저주와
복수심으로 우리의 대적에게 영원한 싸움을 걸 작정이다"
그리고 바알세불에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불구대천의 성부 앞에 굴복하여 자비를 비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무슨 일에나 선을 쫓아내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악을 행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선이라는 탈을 쓰고 악의 수단을 부리는 것이 우리들의 비운을 만회하는
길이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합해야 한다"고 말하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거대한
체구를 일으켜 두 손으로 불길을 헤치며 큰 날개를 펴서 육지에 올랐다.
"이게 나의 영토인가? 천국의 광명에 비하면 어둡기만 하구나!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자유다. 천국에서 봉사하는 것보다 지옥에서 지배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 동료들을 망각의 불바다에서 헤매게 해서야 될 말인가?"
악마의 대왕 사탄은 악의 천사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 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다
"전에는 천국의 아름다운 천사였던 너희들의 지금의 그 추태는 무엇인가? 깨어
일어나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한다"
이 부르짖음에 수많은 악의 천사들은 궐기하였다. 마치 애급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나올 때에 메뚜기 떼가 일어나 나일 강 유역을 어둡게 한 것처럼 악의
천사들은 화염을 어둡게 하며 지옥의 허공을 날고 있었다. 사탄은 그들을 총지휘하였다.
그들은 후세의 여러 민족에 의하여 숭배를 받은 악마들로 '몰록', '그모스',
'아스타롯토', '아스토레드', '림몬' 등이었다. 타락한 천사들이 모두 모였다. 천만의
기치를 휘날리며 무수한 갑옷과 방패 숲과 같은 칼 종소리 북소리에 섞인 마군의 함성은
지옥의 밑바닥을 잡아 찢는 듯하였다. 사탄은 정연한 군대를 검열한 후 오만에 차
있다가 자신 때문에 자신을 따르던 수백만의 추종자들도 곤경을 겪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만군 앞에서 세 번의 울음 소리를 내며 탄식하였다
"너희들 천국의 영체를 이런 지옥에 떨어뜨렸으니 이제 평화는 없다. 누가 굴욕을
당하고 있겠느냐? 앞으로 전쟁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수도에 모여 대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전부터 건축의 신 맘몬이 인솔하는
군대가 지옥의 언덕에서 금속을 파내어 건축에 착수하니 금빛 찬란한 악마들의 전당이
대지 가운데에 교향악과 함께 솟았다. 운집한 악마들은 대회의의 개회를 선언하였다.
그들이 하늘의 천사로 있었던 시절의 권리와 영광을 공공연한 전쟁으로 얻을 것인지
비밀의 간계로써 얻을 것인지를 의논하는 것이었다
홀을 쥔 왕 몰록은 거센소리로 단연 전쟁을 주장하였다. 여신과 같은 벨리알은
승산이 없으니 이 지옥을 천국과 같이 금은 보화로 꾸며 행복이 깃든 보금자리로
개척하자고 황금 만능설을 내세웠다. 모두가 당당한 웅변이었다. 모든 악마들을
꾸짖으며 사탄의 계획을 지지하였다. 위험한 원정으로 하늘을 침범해도 전능자를 이길
수 없으므로 보다 쉬운 계책을 찾자는 것이다. 그 계책을 세울 한 곳이 있는데
하늘에서의 오랜 예언대로라면 지금쯤 인간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존재들이 창조되었을
것이니 신의 은총을 받은 그들을 악의 자식들로 만들어 창조주 스스로가 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사탄은 자기가 최고라고 자처하면서 악마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몸소 탐험자가
될 것을 자청하였다.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사탄의 희생적인 정신을
찬양하는 소리는 뇌성이 울리는 것 같았다
사탄의 지옥의 큰 문으로 향하였다. 문은 3중의 철 문 3중의 금강석 문 등 아홉
겹으로 굳게 닫혀 있었으며 불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문 앞에는 두 마리의 괴물이
앉아 있었다. 하나는 허리까지는 아름다운 여인인데 하반신은 뱀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체를 구별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시커먼 것이 지옥처럼 무섭게 서서 사탄이 가는
길을 막았으므로 사탄과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지옥이 흔들리 만큼 요란하였다
뱀의 모습을 한 여인은
"여보 당신이..."
하고 부르며 둘의 사이를 뚫고 들어가 싸움을 말리며 부자지간에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즉 이 마녀는 일찍이 사탄이 말리며 음모를 꾀할 때 등장했던 '죄'라고
부르는 미인이었으며 사탄과 불미스러운 사랑을 맺은 후 임신을 했는데 사탄이 하늘의
대전쟁에 패배하자 사탄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죄'의 배에서 나온
것이 무서운 창을 휘두르며 사탄과 싸우고 있는 '죽음'이며 모자는 함께 지옥의
문지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옥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던 '죄'는 남편인 사탄의 모험적 계획을 듣고 나서 그
계획이 성공하면 자기도 축복의 신세계에 들어가 죄의 환락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인류에게는 모든 비극의 씨가 된 그 열쇠로 다시는 닫을 길이 없는 지옥의 큰 문을
당겨 열었다. 지옥은 이 때 열려진 이래로 영원히 인간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외부에 전개된 암담한 혼돈의 심연은 밑도 끝도 없었고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으며 암흑과 혼돈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냉, 열, 습, 건의 4용사가 혼돈의
심판에 의하여 서로 권위를 다투고 있었다
모든 것은 우연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다도 육지도 불도 아닌 일체를 포함한
대자연의 묘지로서 심연이며 지옥이었다. 사탄은 지옥의 가장자리에서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았다. 광막한 진공에 부딪혀 떨어지면서 방향도 모르고 헤매 다녔다.
사탄은 겨우 혼돈의 왕 카오스와 암흑의 왕 나이트의 원조를 얻어 희망의 피안에
이르는 지름길을 알게 되었다. 사탄이 개척한 그 발자취는 인간이 타락하기 쉬운 길이
되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이 지옥과 인간계와의 사이에 하나의 큰 다리를 놓은
것이다(이것은 하느님의 계획이었다)지옥의 마귀들은 낮이나 밤이나 다리 위를
방황하며 인간계의 선한 사람을 유혹하고 악을 조장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구원을
받은 선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의 죄를 지은 인간이 가게 되는 지옥의 길이 이 때에
열린 것이다.
사탄은 하늘의 문 가까이 갔다. 문에는 황금의 쇠사슬이 달려 있었으며 별처럼
빛나는 신세계의 공이 아래로 내려져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지구에게 인간의 시조 아담과 이브의 두
사람이 행복에 넘쳐서 환락과 사랑을 마음껏 누리며 불노 불사의 열매만을 먹고 지내는
것을 보고 계셨다. 다른 한 편에는 이제 갓 창조된 세계를 향하여 사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느님은 그의 아들에게 사탄이 인류를 죄에 빠뜨리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유혹에 대항할 수 있도록 창조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사탄처럼 자기의 악의에서가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정의가 충족된다면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하셨다. 인간은 신의
자격을 얻으려는 교만이므로 하느님의 존엄을 더럽혔으므로 그 죄를 회개하고 그의
벌을 대신 받을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의 자손과 더불어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자진하여 자신과 인간의 대속 제물이 되겠다고 하자 하느님은 이를
수락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이름을 초월하는 우월한 존재인 그에게 모든 천사들이 그를
예찬할 것을 명하셨다.
천사들은 노래로 성자의 덕을 찬양하였다. 이 때 사탄은 우주의 끝을 산책하다가
지구의 최상부에 다달았다. 이곳은 당시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광막한 들판이었으며
앞으로 땅 위의 모든 자들이 고통스런 미신과 맹목적인 열정의 결과에 대해 대가를
치를 곳이었다. 여기서 방황하던 사탄은 맞은편에서 흘러오는 한 줄기 빛 속에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한 건축물을 발견하였다.
문은 황금과 금강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탄은 놀라움과 비애에 사로잡혔다.
사탄은 젊고 우아한 천사로 변장하고 대천사 우리엘을 만났다. 새로 창조된 세계와
신의 위대함을 찬미하겠다는 구실로 인간 세계의 주소를 물었다. 우리엘은 천지 창조를
보기 위해 홀로 나온 것을 칭찬하며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사탄은 아시리아의
우아테스 산상에 도달하였다. 사탄은 악의 천사가 되어 하느님께 복수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탄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 속임을 당한 우리엘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탄의 본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탄은 에덴은 경계에 이르렀다. 많은 꽃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었고 높은 산비탈이 낙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에덴을
바라보며 신과 사람에 대한 음모를 시험할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는 중천의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 태양이여! 나는 옛날에 너보다 빛나는 권위자였는데 오만과 야심 때문에
타락하였다. 아, 이 무슨 일인가!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복종을 멸시하고 스스로 반역하였다. 이것은 내 몸에서 생긴 독이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무한한 노여움 무한한 절망 어디로 가나 그것은 지옥이다. 내 자신이
지옥인 것이다. 그렇다면 단념하겠다. 회계할 여자는 없는가? 그것은 복종하는 것
그러나 내가 가장 멸시하는 것 복종을 맹세한다 해도 마음 편할 리 없다. 결국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희망이여 공포여 후회여 그럼 안녕! 일체의 선을 나는 잃었다. 악이여
너야말로 나의 신이다. 너에 의하여 나는 적어도 하늘의 반 이상을 지배할 것이다"
사탄은 향기로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울창한 숲속에
문이 하나 있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사탄은 일부러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가볍게 날려서 절벽을 한 발로 뛰어넘어 광명의 낙원에 숨어
들었다. 마치 늑대가 목자의 눈을 피하여 양 떼 가까이 가는 것처럼 도둑이 밤중에
숨어 들어가는 것처럼 최초의 큰 도둑 사탄의 침입으로 신의 전당에 음란한 사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사탄은 낙원의 중앙에 가장 높이 솟은 생명의 나무 아래에
탐욕의 새 고루모란도와 같이 악마의 날개를 쉬며 새로운 낙원을 의심의 눈을 반짝이며
돌아보았다.
에덴의 낙원 중앙에 과실 나무와 신비로운 나무 향기 좋고 맛 좋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뛰어난 것은 생명의 나무였다. 보석과 같은 이
나무의 과실은 너무도 향기로워 잠을 모르는 신들이 한없는 환락의 춤을 추고 있었다.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는 낙원은 환락과 행복의 선경이었다. 사탄은 뜻하지 않은
광경에 마음이 타는 듯한 분노와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늠름한 아담의 모습과
청초한 이브의 질투심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권리와 지혜와 참다운 자유의 성결함이
빛나고 있었다. 싱싱한 과실 나무들의 생명을 부르는 그 아름다운 맛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생명의 나무 옆에는 우리의 죽음인 지혜의 나무가 서 있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고 자주색의 열매가 달린 포도 넝쿨 새들은 아름답게 합창했다. 자연의 신 춤의 신은
즐겁게 춤을 추었다. 아담과 이브는 서로 손을 잡고 벌거벗은 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악을 몰랐으며 사랑으로 맺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녹음에서 또는 분수 옆에서 쉬었다. 유쾌한 동산에서의 상쾌한 서풍을
받으며 산책하다가 과실을 저녁으로 먹었고 먹은 과실 껍질로 맑은 물을 떠 마셨다.
앞에는 지상의 여러 동물들이 와서 장난을 하였다. 태양은 점점 기울어지고 돌아오는
별들은 저녁 하늘의 선구자처럼 반짝였다.
사탄은 점점 가까이 가서 두 사람의 즐거운 대화에 부러운 듯이 귀를 기울였다.
아담과 이브는 최초의 남자와 최초의 여자였다
"이브여, 너는 나의 모든 기쁨이다. 신은 우리들을 흙으로 빚어 이 낙원에 살게
하셨다. 신은 자비롭고 영광된 분이시다. 우리들은 이 낙원의 모든 나무 가운데 생명의
나무 곁에 있는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된다. 삶의 옆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무서운 것이리라 너도 저 나무의 과실을 맛볼 때 죽음이
우리들에게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 외에 모든 것에 대해서는 무한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또 어떠한 환락도 무한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은
항상 신을 찬미하고 초목과 꽃을 기르는 일이다"
이브는 아담의 존귀함을 찬미하였다.
악마는 이것을 듣고
"그들에게 금지된 나무가 하나 있군. 선악의 지혜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죄가 되는가? 그것이 죽음인가? 그것은 불합리하다. 그것이 그들의 신에 대한
신앙과 복종의 증거인가? 나는 이제부터 그들의 마음을 유혹해야겠다. 그리하여 금단의
과실을 먹고 죽게 하리라"라고 중얼거렸다.
사탄은 그들을 파멸에 빠트릴 방법을 찾아낸 것을 기뻐하였다.
조용한 낙원의 저녁 동물들은 숲 속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나무에서 꿈을 꾸며
나이팅게일만이 밤의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달이 구름의 베일을 걷고 나타났다.
아담과 이브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의 잠자리는 자연 그대로의 과일 나무들과
향기로운 꽃과 아름다운 나무로 덮여 있는 조용한 장소였다. 사탄은 마술로써 환각과
꿈과 공상을 갖게 하였다. 그녀의 순결한 머릿속에 불평 불만의 생각을 갖게 하고
방종한 욕망과 교만이 생기는 환상을 갖게 하였다.
아침이었다.
동쪽 하늘의 태양이 붉은 진주를 땅 위에 뿌릴 때 아담이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깼으나 이브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담이 손을 잡고 흔들자 이브는 눈을 뜨고
어젯밤의 악몽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타락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하여 늙은 천사 라파엘을 불러 두
사람을 보호하도록 명하셨다.
라파엘은 아담과 이브에게 사탄의 이야기를 들려 주며 경계하도록 하였다. 아담이
천지 창조에 대하여 묻자 라파엘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가 사탄과 싸워 이긴 것을 칭찬하여 새로운 세계를 하나 창조하고
거기에 인류를 살게 하고 기쁨과 사랑의 왕국으로 만드셨다. 그 창조는 6일 간에
이루어졌는데 제1일에는 낮과 밤을 구분하셨다. 제2일에는 하늘과 물을 구분하셨다.
지구에 땅과 바다를 만들고 대지 위에 풀과 나무와 꽃이 나게 하신 것이 제3일이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든 것이 제4일이었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게 하고 육지에는
하늘 높이 새들을 날게 하시어 제5일은 조류와 어류를 만드셨다. 창조의 제6일은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흙으로 만들어 생명의 입김으로 불어넣으시고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다. 신은 그것을 남성이라 하고 다시 여성을 만들어서 지상에 자손을 퍼트리게
하셨다. 제7일에는 창조된 세계를 흡족해하며 모든 일을 쉬셨다
이러한 말을 하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서 천사와 헤어지게 되었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자고 있는 뱀을 만나 그 몸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다시 아침이 되었다. 에덴 동산에는 아침 기도를 끝낸 두 사람이 그날의
밭갈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브는 나무와 꽃들이 무성하므로 일거리가
많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서로 웃고 이야기하고 쳐다보느라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니까 따로 떨어져서 일을 하자고 말했다. 아담은 라파엘의 경고를
떠올리며 유혹이 위험하다면서 따로 일을 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브의 자신감 있는
얘기를 듣고 양보를 하여 이브의 말대로 하였다. 악령에게 끌린 뱀은 이브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장미꽃 그늘에서 일하고 있는 이브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브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니, 동물이 인간의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여왕님, 어느 날 내가 들을 배회할 때에 금색의 과실을 가진 한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향기로운 냄새가 식욕을 돋구어 맛을 보았더니 나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이렇게 이성과 언어의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브는 뱀의 말을 듣고 그 나무의 있는 곳까지 안내를 받았다.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금지된 지혜의 나무(선악과)였으므로 깜짝 놀라 물러서려 하였다
뱀은 대담하게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금하고 당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셨습니까? 여왕님 믿지
마십시오. 죽지는 않습니다. 그 과실은 지혜를 주는 것으로 나를 보십시오. 그것을
먹었어도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높고 완전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동물인 나는
인간이 되었으니 인간인 당신은 틀림없이 신이 될 것입니다. 선악의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어찌 죄악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잠시 선악과를 바라보고 있던 이브는
"저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운 과실, 뱀이 말한 것처럼 영험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금지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인간에게 허락치 않은 것을 동물에게
허용하실 리가 없을 텐데 금지한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라고 말하며 이브는
과실을 따서 입에 넣었다. 죄를 범한 뱀은 풀 속으로 미끄러져
도망하고 이브는 과실의 아름다운 맛에 취하여 홀로 중얼거렸다
"아, 지혜의 길을 열어 준 과실 나의 이 변화를 그에게 알려서 같이 행복을
즐겨야지"
이브는 과실이 많이 달린 가지를 꺾었다. 이브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아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생긴 일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겠느냐?"고 말하면서
그녀와 같이 벌을 받고 죽을 결심을 하였다. 아담도 그 과실을 먹었다.
효과가 나타나서 두 사람은 독한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음욕에 불탔다. 두 사람이 눈을
떴을 때 마음을 덮고 있던 흥분은 사라지고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놀라서 앉아 버렸다
신앙도, 청정도, 결백도 모두 사라지고 악을 아는 마음이 되었다. 그들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여 무화과의 잎을 엮어 허리에 감았다
하느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그들의 유혹자가 지옥을 빠져 나올 때 알고 있던 것이 마침내 왔다. 인류는
타락하였다. 그들에게 줄 것은 이제 죽음의 선고이다. 그 심판으로 가리라"라고
성자께 말씀하셨다. 아담과 이브는 바람에 들려오는 신의 음성을 듣고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숲 속으로 숨었다. 성자는 불순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고하였다
"뱀, 너는 배로 기어다닐 것이며 평생 진흙만을 먹으라! 너와 여자는 영원히 원수가
되어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며 너는 사람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브 너는 비애에 젖어 살게 될 것이며 해산할 때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남편의 의지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너를 거느릴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담을 향하여 선고를 내렸다
"아담이여 이제부터는 흙을 갈고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갖게 되리라"
이브는 아담에게 용서를 빌며 자손에게 미치는 저주를 피하기 위하여 자살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아담은
"너의 자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리리라고 하신 신의 말씀을 잊었는가? 자손들에게
희망을 가지라 너는 이제부터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당하고 나는 일을 하여 빵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죄악은 슬픈 일이지만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며 기뻐하자"
하고 위로하며 두 사람은 쓸쓸히 낙원을 떠났다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
해설
하디는 영국 소설계에서 조지 메러디스(George Meredith, 1828-1909)와 더불어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 8권의
시집(918편의 시 수록)과 2편의 서사극시를 남겼으며 하디 문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테스"로 이름을 떨쳤다. "테스"가 많은 애독자를 가지게 된 까닭은 인생의 비극적인
실상을 직시하는 하디의 페시미즘 사상이 불안과 동요의 도가니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의 시류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영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기장 즐겨 읽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테스"가 발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를 잠깐 살펴보자 이 때는 치기와
위선의 시대였다. 민주적 경향과 과학 정신으로 조성된 물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속물주의와 체면주의가 판을 치던 속된 분위기였다. 이런 시대는 윤리관이나 도덕관이
지극히 편협해지기 마련이어서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하디는 편협한 윤리 도덕관에 반기를 들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 윤리
도덕 정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디는 "테스"에서 두 개의 순결성을 보여 준다. 나아가 육체의 순결성보다 정신의
순결성을 위에 두고 있다. 테스가 알렉에게 빼앗긴 육체의 정조는 한낱 외형의
순결성을 상실했기 따름이지 본연의 순결성은 여전히 테스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기본 골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결국은 알렉 살해의 책임은 테스를
둘러싼 환경의 편협함의 결과로 돌리는 것이다. 테스가 놓여 있는 환경이란 야수적인
알렉과 이기적이고 결벽증인 에인젤의 횡포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테스의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테스의 불행은 스스로의 성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의 희생자인 것이다. 하디는 인생을 하나의 비극으로 인식한다.
우주에는 인간사에 무심한 맹목적 대의지가 있고, 지상의 인격들 제각기의 소의지가
있다. 인간의 소의지는 우주의 대의지에 휩쓸려 결국 자멸이란 비극을 치르게
마련이라는 것이 하디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테스"가 발표되었을 때 타임즈는 "테스"에 대하여 인습적 관념을 다루는 데
대담하고 애틋한 비애감을 서리게 하여 지극히 감동적인 비극감을 자아냈다고 평했다.
시인 윌리엄 윗슨 경(Sir William Wastson)은 테스는 인간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의 폭을 항상 넓혀 준다고 했으며 웨스트민스터의 평론가는 조지엘리가 별세한
뒤의 최고 역량의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테스"는 출판된 지 3년 만에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전문적인 연구 서적과
논문도 많이 발표되었다. 또한 영화와 연극으로 상연되었다
작가 약전
하디는 1840년 6월2일 영국 남부 지방 웨섹스의 중심지 도셋의 하디북햄프턴이란
삼림 지대와 황무지 사이의 두메 초가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산된 순간
사산인 줄 알고 한구석에 내버렸던 것을 이웃의 거들던 아낙네가 의사에게 "죽다니요!
가만 계세요 꼭 숨을 쉴 테니!"하고 외치는 바람에 다행히 소생했다.
7, 8세 때에 친구들은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될까 하며 신나게 이야기했지만 하디는
어른이 되고 싶지도, 무엇을 갖고 싶지도 않았으며, 지금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야심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디를 목사로 만들고자 했으나 하디가 원하지 않으므로 건축가로
출세시키려 했다. 18세 때에는 도체스터의 교회 건축가 조힉스의 제자가 되어 5년 동안
건축에 관한 경험을 쌓는 한편 친구의 지도를 받아 고전 중에서도 특히 희랍 비극과
영문학을 탐독하여 차츰 글을 쓰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일리아드를
읽고 낮에는 건축 일에 시달리고 일이 끝나면 바이올린을 들고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바빴다.
21세 때는 당대 굴지의 건축가인 부룸 후일드의 조수로 런던으로 오게 되어 10년간
과학적 사회적 문학적 사조를 접하였다
1865년에 시를 쓰기 시작 이듬해 잡지상에 투고했으나 반환되는 바람에 시작의 붓을
꺾고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865년에 "내가 집을 지은 이야기"라는 단편을 발표했으며 1871년 "궁여지책",
1872년 "푸른 숲 그늘에서", 1873년 "푸른 눈동자"를 각각 발표했고 1874년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874년 엠마 라비니아 깁후드 양과 결혼했다. 1878년 하디의 4대 걸작의 하나인
"귀향"을 발표 그 후 "케스터브리지 시장", "웨섹스 이야기", "귀부인들", "테스",
"아내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였다. "테스"가 간행되자 에인젤과 같은 과거가 있는
아내를 가진 남편들로부터 그리고 테스와 같은 과거를 지닌 아내들로부터 하디에게
많은 서신이 쇄도하였다
1928년 1월11일 88세로 세상을 떠날 떄까지 1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과
8권의 시집과 2편의 서사극시를 냈다
생전에 이미 그의 문학적 공헌이 인정되어 애버딘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70세에는 국왕으로부터 유공 훈장을
받았다
줄거리
5월 어느 날, 저녁 세스톤에서 블랙모어의 말로트 마을로 한 중년의 사나이가 길을
가고 있다. 사나이는 두 다리를 비척거리며 똑바로 걷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로 지금은 무식하고 가난하여 그 자신이 더버빌 가의 피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술에 취해 집으로 향했다. 그는 옆구리에 빈 달걀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귀족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나 집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목사로부터 그가 몰락한 귀족의 자제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말로트 마을은
아름다운 분지의 동북쪽에 파도처럼 굽이친 산줄기 한복판에 자리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고장이다. 런던은 네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나
아직도 유람객들이나 풍경화가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고장이었다.
이 지방은 지형상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매우 흥미 깊은 곳이었다. 헨리 3세
시기의 기묘한 전설 때문에 이곳 분지는 일찌기 '휜 사슴의 숲'이라 불리웠다.
지금도 얼마간 옛 풍습이 남아 있는데 5월의 무도회 같은 것이 그 한 예였다.
이 무도회는 여자들의 친목 모임으로서 수백 년 전부터 해마다 같은 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5월은 기쁨의 계절이라고 하여 회원들은 하나같이 흰 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저마다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한아름 흰 꽃을 들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행진을 했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면 곧 춤놀이가 시작되는데 회원은 여자들 뿐이므로 여자들끼리
춤을 추었다. 그러나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이 되면 마을 사나이들이며 도보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춤을 추는 향연이 벌어졌다. 그 날도 역시 이 마을에서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어깨에 작은 바랑을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든 상류 계층의 젊은이 셋이 여인들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지간이었다. 맏이는 흰 넥타이에다 목까지 닿는
조끼와 좁다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쓴 부목사의 정복 차림이었고 둘째,는 보통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셋째는 얼른 보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 삼
형제는 성령 강림절 휴가를 이용하여 도보 여행 중으로 동북쪽에 있는 세스톤 마을을
떠나 서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 형은 오래 지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나 셋째는
남자 상대자 없이 여자들끼리 춤을 추고 있는 광경에 흥미가 끌렸다. 그는 이윽고
바랑과 지팡이를 생울타리 위에다 걸어 놓고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두 형은 에인젤에게
곧 뒤따라오도록 당부를 하고는 먼저 떠났다
여자들은 에인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하였고 에인젤에 뒤이어 마을 청년들도 일을
끝마치고 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과 함께 춤추는 아가씨와 아낙네들은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가 춤 한 곡을 끝내고 나올 때 수줍은 표정의 어여쁜 처녀가 눈에 띄었다.
테스 더버빌이었다. 처녀의 큼직한 눈동자는 자기를 택해 주지 않은 에인젤에게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이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형들의
뒤를 따라야 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테스는 언덕 위로 사라져 가는 젊은이가 저녁 햇살 속에 모습을 감출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테스는 감정이 드러나기 쉬운 작약과 같이 어여쁜
입술과 순진한 매력이 넘쳐 흐르는 커다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머리에는 리본을
달고 단 한 벌의 외출복인 린네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골 학교를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초한 처녀였다
향연은 끝나고 다시 살기 힘든 생활이 반복되었다.
뒤늦게 밝혀진 몰락한 귀족 신분이 가난하기만 한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테스의 부모는 허황한 공상을 하였다. 테스는 많은 동생과
어머니가 좀더 편히 살 수 있도록 이것저것 돈 되는 일을 찾아 나섰다. 테스는 귀족의
혈통이므로 신사에게 시집을 가서 편히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공상을
무시하고 어려워져 가는 집안 사정 때문에 얼마 후 집을 떠나 양계장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테스는 그 집의 관리인이요, 사료 조달인이요, 간호인이요, 외과 의사요, 친구가
되어야 했다. 아직 육십이 안 된 여주인인 알렉의 어머니와 하녀의 틈에서 테스는 모든
일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닭을 기르는 데는 휘파람도 잘 불어야 했다. 도착한
이튿날은 오랫동안 안 불었던 휘파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안뜰의 담장의
가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꼭대기에서 한량꾼인 알렉 더버빌이
테스를 엿보다가 담장에서 뛰어 내렸다. 알렉은 그 전날 테스가 살고 있는 오두막의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자연 속에도 예술 속에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어 내 사촌 누이 테스!"
그리고 그는 휘파람 연습을 시켜 주겠다고 하며 계속 추근거렸다. 테스는 웬지
이 사람이 싫었다
"싫어요"
"바보. 누가 저를 만지기라도 한데나?"
알렉은 이 집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자기에게 얘기하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이 트란트리지 일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지루하며 단조로운 마을에서 힘겨운 일을 하는 그들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여자들도
여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으레 2,3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볼품없는
장터 체이조바라로 나가서 술을 마시고 놀다 이튿날 새벽 한두 시 경에야 돌아왔다.
테스는 처음 매주마다. 한 번씩 있는 이 행차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의 휴식을 위해 자기와 별로 나이 차이가 없는 동네 부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일 주일 내내 갑갑한 양계장 일에서 나와 보니 자기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 후로도
테스는 종종 동행하게 되었고 원래 미인이고 매력이 있는 데다 나이 열 일곱의 한창인
아가씨였기 때문에 사나이들의 능글맞은 시선을 끌었다
한두 달이 지나고 명절과 장날이 겹친 9월 어느 토요일 트란트리지에서 놀러 나온
패들은 다른 때보다 더 신이 났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트란트리지와 이곳은
워낙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밤 늦은 시간에 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테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이미 취기가 오른 알렉이 테스에게 손짓을 했다.
"테스, 난 오늘 말을 타고 왔으니 주막으로 와요. 마차를 불러 데려다 줄 테니"
테스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가겠노라면서 이를 거절했다. 열한 시가 훨씬 넘은
후에야 몇 사람씩 떼를 지어 돌아가게 되고 테스도 그 안에 끼었다. 그날 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밤길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녀들은 비틀거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댔다. 테스는 이런 경우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테스는 여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 때 동행자 중에 카아라는 여자가 물건이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꿀이
쏟아져 머리카락에 붙어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다. 모두가 이 모양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을 때 테스도 아무 생각없이 같이 웃고 말았다. 카아는 화를 내면서 테스에게
달려들었다.
"왜 날 비웃는 거야. 요 악마 같은 것"
카아는 알렉의 정부였다. 알렉이 요즘 테스에게 눈이 팔려 쫓아다닌다는 것을
시기한 카아는 공연히 테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가슴에 쌓였던 연적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듯이 갖은 욕을 퍼부어가며 대들었다.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말리려고
했으나 술에 취한 카아는 좀체로 진정하지 않고 점점 더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때 말을 타고 달려오던 멋쟁이 알렉이 이 광경을 보고 테스 곁으로 가서 몸을
굽히며 말을 했다.
"그런 것 하고 싸울 필요 없어. 자, 내 말에 같이 타요"
테스는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카아의 욕설을 듣자 그녀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가벼운 심술이 발동했던 것이다. 평상시 알렉을 경계했던 테스는 보란 듯이 알렉의
말 위에 올라탔다
테스는 말을 타고 밤길을 알렉과 함께 간다는 사실에 은근히 불안해졌다. 알렉은
유쾌하게 말을 몰면서 테스에게 말을 걸었다.
"왜 테스는 내가 키스하려고 하면 싫어하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키스한다는 건 싫은 일이지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말 내가 싫어?"
테스는 아무 말 없이 알렉의 등을 꼭 붙들고 있었다.
테스는 이 젊은 주인이 추근거리는 것이 몹시 싫었다. 지금도 말 위에서 알렉은
말을 걸었다. 골짜기에서 자욱이 드리웠던 안개는 차츰 사방으로 퍼져 두 사람을 감싸
버렸다
안개는 달빛을 가로막아 활짝 갰을 때보다도 한결 더 골고루 빛을 퍼지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몽롱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졸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길에서 트란트리지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 지가 꽤 오래 되었는 데도 사나이가
트란트리지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테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스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한 주일 동안 아침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온종일 서서 지냈고 더구나 이 날 저녁에는 체이조바라까지 3마일이나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느라고 1마일의 길을 걸으면서 그 야단법석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기진 맥진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가까웠다. 피곤한 나머지 정신없이 잠든 순간
테스는 사내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알렉은 말을 세우고 등자에서 발을 빼어 안장
위에 옆으로 돌아앉아 테스를 부축할 양으로 허리에다 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테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불현 듯 치미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알렉을 떠밀었다.
하마터면 사나이는 떨어질 뻔했다
"이런 욕을 당하다니 내 꼴이 뭐야? 근 석 달 동안이나 남의 감정을 희롱하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골탕 먹이기가 일쑤니 이젠 참을 수가 없어!"
"전 내일 떠나겠어요"
"안 되지, 그러지 말고 내 팔에 안겨 줘. 자 어서. 당신과 나와 단 두 사람 뿐
아무도 없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테스는 안장 위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렉은 소원대로 테스를 두 팔로 껴안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체이조 숲의 한 귀퉁이야. 잉글랜드에서도 제일 오래된 숲이지. 밤도 아름답고
하니 좀더 오래 말을 타요"
"내려 주세요. 전 집까지 걸어가겠어요"
"내가 당신을 이런 외딴 곳으로 데리고 왔으니 당신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당신을 집까지 무사히 보내 줄 책임이 있어 아무튼 여기가 어디쯤인가를 내가 보고
올 테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 곁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한다면 여기다 내려 주지"
그는 말고삐를 나무에 매놓고 낙엽을 모아 자리를 만들었다.
"자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그런데 이렇게 옷이 얇아서 춥겠군 그래"
알렉은 자기 코트를 벗어 테스의 어깨를 감싸고 단추를 끼워 준 다음 비탈로
올라갔다 달도 져서 푸른 빛마저 사라져 혼자 남아 낙엽 위에서 꿈길을 더듬는
테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테스는 힘없이 앉아서 쉬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알렉은 일부러 엉뚱한 길로 말을 몬 나머지 지금 그들이 접어든 곳이 체이조 숲의
어디쯤 되는지 분간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듬더듬 산마루를 넘어 낯익은 신작로를
발견하고 위치를 짐작했다 그리고는 겨우 테스와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알렉은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테스를 살펴보았다.
여자의 입김이 느껴졌다. 테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눈썹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엷은 비단결처럼 감촉이 부드럽고 티없는 눈과도 같이 새하얀 테스의 살은
알렉에게 더 없는 유혹이었다. 알렉은 테스를 이렇게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색색거리는 나른한 숨소리와 어렴풋한 테스의 얼굴 살내음은 알렉의 자제력을 몽땅
앗아갔다.
시월 그믐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테스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체이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무서운 경험을 겪은 지
몇 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직 이른 아침 테스는 무거운 짐을 들고 더버빌의 양계장을
나왔다. 등 뒤의 지평선을 노랗게 물들인 빛은 테스의 눈 앞에 보이는 산마루를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테스는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부인은
"그래, 그러고도 넌 그 사람더러 결혼하자구 말을 안했단 말이냐? 그대로 바보처럼
집으로 돌아오다니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넌 버젓하게
그 사람에게 결혼 신청을 할 수 있지 뭐냐?"
"어머니도 참, 결혼이라니요. 전 그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하지 않는다구..."
어머니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속 책망을 했다.
"여자란 건 그렇게 되고 나면, 어떠한 남자한테라도 따라가게 마련이란다. 더구나
알렉 같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남자 치고 그만하면 훌륭하고 게다가
부자가 아니냔 말이다"
알렉 같은 남자의 성질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테스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테스는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에겐 그 남자를 사랑할 마음이 도무지 없었어요. 저쪽에선 여러 가지로
말해 왔지만"
"아내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좀더 정신을 차렸어야 할 게 아니냐?"
테스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남자라는 건 정말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라고 왜 진작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테스의 아름다운 큰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러나 이미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이제 처녀가 아니다. 비록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정조를 빼앗긴 여자였다
테스에게 심신이 모두 괴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그리고 불행을 안은 채 숙명의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테스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을 중오했으나 일단 태어난
생명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껴 아이를 안고 기도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이시여! 이 가련한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에게는
어떠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부디 많은 복을
주시옵소서"
아이는 사생아였으므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아이는 튼튼하지 못했다.
테스는 어느 날 밤 동생들을 불러 자신이 신부를 대신하여 아이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말했다. 테스의 얼굴은 맑고도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테스는 이 가련한 아이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확고히 생각했다. 자신이 세례를 주어도 이 아이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었다
테스는 어린아이를 안고 물이 담긴 그릇 곁에 서고 동생은 교회에서 하듯이 기도서를
펴들고 언니 앞에 섰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테야?" 하고 동생이 물었다.
테스는 구약 성경의 소로우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을 위한
신성한 생각으로 선언했다.
"소로우, 아버지이신 주님과 주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을
받들어 나는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
테스는 아이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우리들은 이 아이를 받아 십자가의 표시를 너에게 하노라"
테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 소로우라고 이름지은 갓난아이는 곧 죽고 말았다. 함부로 이 세상에
뛰어든 자 사회의 법도 모르는 염치 없는 자연이 준 사생아는 불과 며칠이라는 시간을
영원한 때로 알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테스는 변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성숙해진 그녀의 눈은 깊었으며 차분해진 표정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트란트리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남짓한 5월 어느 날 아침 테스는 어느 목장에
취직하여 집을 떠났다. 모든 기억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의 딸로서만 살아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전세 마차에 몸을 싣고 스타워카슬이란 조그만 읍내를 향했다. 이번 길은 첫번째
집을 떠나던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스타워카슬에서 마차를 갈아 타고 웨터베리를 거쳐 아름다운 탈보나이조의 낙농장에
이르렀다. 한없이 뻗은 녹색의 초원 희고 검고 붉은 무늬가 아롱진 소의 무리가
장미빛처럼 빛나는 낙조 속에서 노닐고 있는 곳 젖 짜는 곳에서는 여러 남녀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테스는 2년 동안 고민에 찬 세월을 고향에서 보낸 뒤 꿈을 꾸며 맑고 즐거운 생활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젖 짜는 여인으로서 테스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
건강한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슬픈 추억으로 고통에 잠겼던 침울한 눈은 다시 이
맑은 태양 속에서 빛났으며 창백한 볼에도 처녀 시절의 아리따운 장미빛이 감돌았다
이 목장에는 다른 일꾼들과 달리 기품이 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청년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민스터의 유명한 목사의 막내 아들인
에인젤로 학교를 나온 후 목장의 견습생으로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존재였으므로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었으나 그는
여자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목장 주인도 이 청년에게는 젊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테스는 이 청년을 보았을 때 전에 본 일이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테스가 아직 철모르는 소녀였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동네 처녀들과 같이 부인회의 무도회에 갔을 때 끝내 자기와는 춤을 춘 일이 없이
총총히 떠나가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얀 능금꽃이 떨어지는 초여름의 황혼 아래 테스는 공기가 맑고 고요한 정원에
나와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모든 생각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보다
차라리 이렇게 홀로 조용히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때 뒷집 지붕 밑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구슬픈 음조는
테스의 마음을 꿈 같은 세계로 끌어들였다. 잠시 후에 바이올린 소리는 그쳤으나
테스는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황혼에 비치는 흰 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에인젤이었다. 그는 악기를 치우고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왔다. 담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테스를 만났다.
사실 에인젤은 테스에게 끌렸으므로 간단한 음악을 연주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테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에인젤은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도망가다시피 하세요? 제가 두려우신가요?"
"아녜요"
테스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무서운 건 없어요. 별이 이렇게도 아름답게 비치는 걸요"
"그럼 뭐가 두렵습니까? 아니 당신 눈에 눈물이 고였군요"
에인젤은 유심히 테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테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별을 보고 있노라니까 인간의 행동이 흙탕물같이 더럽게 여겨져서 갑자기
쓸쓸해졌어요"
"슬퍼한다는 것은 때로는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어 주니까요"
에인젤은 테스가 이 목장에 왔을 때부터 용모가 아름다운 그녀에게 끌렸다. 또한
지금은 그녀가 영리한 여인임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목장 한 모퉁이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에인젤의
마음에서는 테스의 얘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들은 아침 일찍 젖 짜는 곳에서 자주 만났다. 젖을 짜기
위해서는 다들 이른 아침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에인젤과 테스가
제일 빨랐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얘기하며 명랑하게 웃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목장을 같이 산책하기도 했다. 아침 해의 장미빛에 비치는 테스의 모습은 에인젤에게는
자연의 여왕과도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무더운 여름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 날 테스는 오랜만에 이 마을에서
2, 3마일 떨어진 교회로 세 명의 처녀들과 함께 예배를 보러 갔다. 길은 질퍽했다. 한참
가다 보니 언제나 뛰어 넘을 수 있었던 작은 냇물이 불어서 신을 벗고 건너가도 물이
무릎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네 명의 처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면 훨씬 먼 곳에 있는 큰 길로 돌아가야 했다
에인젤은 일꾼들이 교회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들판을
거니는 습관이 있었다. 멀리 네 처녀가 소나기에 넘친 개울가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본 에인젤은 그들을 못본 척하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중에 테스도 끼어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인젤은 네 처녀가 몰래
사모하는 대상이었으므로 그가 점점 가까이 오자 아가씨들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청년은 가까이 와서 친절히 한 사람씩 안아서 냇물을 건네 주었다. 물 깊이는 그의
장화를 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테스를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다.
세 처녀는 마음을 조이며 에인젤이 테스를 데리러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에 에인젤과 같은 훌륭한 남자는 없으며 에인젤이라면 언제라도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에인젤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다고 하며 풀이 죽어 있었다. 테스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자신도 에인젤을 사랑하고 있으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용없이 그분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는걸"
테스는 에인젤에게 안겨 건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동요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인젤이 가까이 왔을 때 테스는 말했다.
"전 저쪽 국도로 돌아가겠어요. 세 사람이나 건네 줘서 퍽 피곤하시잖아요
에인젤 씨"
"아니 조금도 사실 당신을 건네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겁니다"
테스의 부드러운 몸은 에인젤의 가슴에 끌리듯 안겼다. 에인젤은 아름다운
꽃다발이라도 안은 듯이 여인을 안고 내를 건넜다
"무겁죠?"
"무겁다뇨. 당신이 입고 있는 모슬린처럼 가볍습니다"
테스를 건네다 주자 에인젤은 물에 젖은 길을 저벅거리며 혼자 돌아갔다. 네
처녀들이 다시 교회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한 처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틀렸어, 우린 이제 기권이야"
"그게 무슨 말이니?"
테스가 물었다.
"그분은 널 제일 좋아해 그분이 널 안고 건널 때 우린 확실히 알았어 만일 네가
조금이라도 유혹만 했다면 그분은 네게 키스를 했을 거야"
"얘가, 별말을 다 하네"
테스는 이렇게 부정하면서도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 후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테스는 목장에 남아서 젖을 짜고 있었다. 석양빛을
받으며 하얀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고 젖을 짜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 테스를 찾아 목장에 나온 에인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테스를 보자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그는 테스에 대한 애정이 날이 갈수록 타오르는 곳을
느꼈다. 에인젤은 테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형을 본 것이다. 진흙 속에 박혀 있는
보물처럼 테스도 자신에게서 교육을 받는다면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인이 되리라
에인젤은 지독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연으로 끌리는 두 사람의 애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어쩌면 테스의 거부보다도 에인젤에게 있는 이성 때문이 아닐까?
이성적이고 사리 분별이 뛰어난 에인젤은 어느덧 테스를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에인젤은 들의 여신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테스를
보자 테스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말았다
"용서하십시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참, 소가 다 놀라서 젖통을 차고 말았어요"
"테스, 나와 결혼해 주오"
"아아 에인젤 씨,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자가
아녜요"
"그건 왜요? 테스 당신은 날 사랑할 수 없다는 건가요?"
에인젤은 더욱 세게 테스를 감쌌다
테스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고 있어요. 진정으로 사랑해요. 그렇지만 당신하고 결혼을 할 수는 없어요"
"무엇 때문에? 다른 남자와 약혼이라도..."
"아녜요"
테스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당신하곤 신분도 다르고 또 저는..."
테스는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무거운 화석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깊은 밤에 일어난 그 숲의 사건 자기는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 사실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사랑하지만 절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토록 에인젤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에인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인젤은 또 다시 테스를 포옹하며
"그럼 내 말을 듣고서 대답해 줘요. 난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당신의 훌륭한 성품을
이해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도 날 사랑해 주겠지?"
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승낙하겠소?"
에인젤의 말을 들으면서 테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 진실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질 수는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테스, 분명히 대답해 주오"
"만일 내가 당신의 아내로서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그리고 나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테스! 결국 승낙해 주었구려"
테스는 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인젤의 손등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테스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돌아간 에인젤은 저녁에 가족 예배를
마친 후에 아버지께 말을 했다. 학벌이 없고 집안도 가난하지만 순결하고 정숙하며
독실한 종교 신자이고 농장 생활에 있어서는 월등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규수는 네가 결혼할 만한 훌륭한 가문이니? 정말 정숙한 숙녀이구?"
어머니가 불쑥 말을 했다
"그 규수는 농부의 딸이지만 보통 숙녀 정도가 아니에요. 감정이나 성품이나
몸가짐이나... 가문만 좋으면 뭘 합니까. 장래 제가 하는 일에 협조자가 되어야죠"
"마시는 정말 가문 좋고 예쁘고 교양 있고 남 주기는 아깝지"
어머니는 안경 너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외면상으로 좋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테스의 생활과 행동은 시
그것입니다"
얼마 후 테스는 어머니에게 이 목장에서 신분이 좋고 교육을 받은 에인젤과
결혼하게 됐다는 편지를 냈다. 어머니로부터는 곧 테스의 결혼을 기뻐하는 회답이 왔다
'사랑하는 테스, 네가 훌륭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전에 있었던 그 일을 결코 남편될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말을 하고 나면
불행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네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구차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란다
네가 50번을 물어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하겠다. 너는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털어놓고 무슨 일이건 말해 버리는 정직한 성품이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다. 너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내 말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네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네 아버지는 술김에
주책없이 네 결혼을 사방에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한 줏대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단다
사랑하는 테스야, 생기에 넘치는 마음으로 결혼해 다오. 결혼 선물로는 사이다를
한 독 보내겠다. 에인젤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에인젤에게 아직 말을 하지 못한 괴로운 비밀을 어머니는 이렇듯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표리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 생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만일 에인젤과의 애정이 무너지게 된다면
테스는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12월 31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테스가 즐겨
다니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목장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젖 짜는 아가씨들은 부러운 마음으로 신혼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가 된 테스도 명랑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축복에 대답했다. 에인젤이 선사한
아름다운 신부 옷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웰브리지라는 시골에 가서 조용히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몰락하기 전의 더버빌 저택이었는데 에인젤은 테스의 혈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징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에인젤이 기존의 사상과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보적이라 해도 그 역시 인습을 어느 사이엔가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생활로 돌아갈 때에는 인습이 우선인 것이었다
신혼 초야의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을 때 테스는 난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시시각각으로 테스의 양심에 육박해
오는 것이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순결한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바라보자 테스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마음은 점점
더 긴장해졌다
모든 일을 말해 버리려고 에인젤을 바라보았을 때 에인젤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스, 내 말 좀 들어 줘 난 당신한테 고백할 일이 있어"
테스는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에인젤도 나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도...
"여보, 당신의 천사와도 같은 순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숨길 수가 없소"
에인젤은 이어 대학 시절에 방탕하고 창녀와 함께 몇 밤이나 지냈던 일을 고백했다
"테스, 이 더러운 내 과거를 용서해 주겠어?"
에인젤은 부들부들 떨면서 테스의 고운 손을 꼭 쥐었다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에 싸였던 테스는 남편의
말을 이어 자신의 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깨끗이 과거를 먼저 얘기해 주셨어요. 내게는 그보다 더 무서운
과거가..."
"쓸데없이 무슨 말을...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니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에인젤은 자기의 가슴에 뭉쳐 있던 고백을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테스는 더욱 괴롭기만 했다. 칼을 들고 가슴을 에이는 듯한 생각으로 분명히
말했다
"이대로 나를 기만할 수 없어요. 내 얘기를 다 들어 줘요"
테스는 창백한 얼굴에 단호한 결심의 빛을 띄우며 그 검은 숲 속에서 알렉
더버빌에게 당했던 무서운 일과 어린애까지 낳았다가 죽고 만 얘기를 다 털어 놓았다
아내의 고백을 듣고 난 에인젤은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앞에서 벌겋게 타오르던 난로 불마저 꺼져 가고 있었다.
"테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나는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막상 말을
하려니 당신이 나를 버릴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에인젤은 머리를 움켜 쥐고 미칠 듯이 쥐어 뜯으며 소리쳤다
"무서워, 정말 무서운 일이야. 여보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오. 당신한테 그런
끔직한 일이 있다니. 테스, 부디 거짓말로 그래 본 거라고 말해 주오"
테스는 오히려 담담히 대답했다
"모두가 사실이에요. 지금에 와서 당신을 추호라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주님 앞에 나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게 없어요. 여보 에인젤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내 이 과거를 용서해 줘요"
"아아, 무서워. 용서고 뭐고 그럴 수가 없어. 당신이 이렇게 고운 당신이 딴
남자한테 몸을 맡기고 아이까지 낳다니. 아아 무서운 일이야. 내 꿈은 깨졌어.
저주받은 결혼..."
테스는 엎드려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들어 한사코 호소했다
"여보 에인젤, 용서해 줘요. 난 당신 이외의 사람을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일이 있을 땐 난 아직 어린애였어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어린애였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아냐. 피해를 당했을 뿐이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동기야 어쨌든, 난 괴로워. 이런 일을 알고 나서 당신과 같이 있을 순 없어. 당신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난 더욱 괴로워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
이처럼 엄격해 남편의 마음이 아주 풀리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테스는
이미 이혼을 각오했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간 지 사흘째 되는 날 테스가 먼저 제안을
했다.
"난 불평은 안하겠어. 어쨌든 내일이라도 곧 친정으로 돌아가겠어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역시 헤어지는 게 상책일 것 같소. 적어도 얼마간은,
지금까지의 사유를 좀더 뚜렷이 알게 되고 내가 당신한테 편지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당신은 법률상으로 나의 아내요"
에인젤은 테스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의 속마음은 그녀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해진 에인젤은 에인젤 자신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인습의 안에서 성장했던 가짜 에인젤인 것이다. 그는 그가 얼마나 테스를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날로 두 사람은 각각 짐을 꾸렸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마차에 몸을 싣고 우선
낙농장으로 돌아갔다. 농장주 클리크 씨 부처와 만나서 일처리를 마친 다음 그들은
다시 마차를 몰아 나즐베리에 이르러 헤어지게 됐다
"난 참을 수 없는 것도 되도록이면 참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자리를 잡으면 곧
당신한테 그 주소를 전하지. 그리고 그 일을 참을 수 있는 심경에 이르면 그 땐 당신
곁으로 돌아가려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 준엄한 선고를 테스는 순순히 받아들인 채 고향으로 향하는 다른 마차를 탔다.
마차가 언덕을 기어오르고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에인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은
시의 한 귀절을 읊조렸다
'주님은 천국에 계시지 않고
세상은 온통 잘못 투성이'
테스가 언덕 마루를 넘어간 뒤에야 에인젤은 자기 갈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를
가도 마음의 고통을 풀 도리가 없었다. 그는 십자가와 같은 번뇌를 등에 지고 마침내
고국을 떠나 멀리 브라질로 가버렸다. 고국이라도 아득히 떠나 있으면 마음의 고통이
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블랙모어 분지로 마차가 접어들자 어릴 적 눈익은 풍경이 사방에 전개되어 테스는
혼미한 상태에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부모님의
얼굴을 대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손에 든 보따리는 가벼워도 마음 속에는 무거운 짐을 진 테스는 지금 온 세상에
갈 곳이란 여기 만한 데도 없다는 듯 친정집 문간을 찾아들고 있었다. 시집 간 딸이
소식도 없이 찾아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어머니는 테스를 보자 깜짝 놀라 말을 했다
"아니, 테스 아니냐. 그래 네 신랑은 어디 있니?"
어머니는 놀라움과 불안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테스는 흐느껴 울면서 대강을
얘기했다.
"그렇게까지 주의를 했는데도 넌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바보지 뭐냐"
더버빌 부인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테스에게도 자기 몸에도 물을 마구 뿌리면서
고함쳤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려 부러워하던 테스의 결혼이
도리어 동네 사람들의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테스는 괴로웠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도 테스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진심으로 사랑하던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자기를 떠나 멀리 브라질까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스의 앞길은 암담했다. 게다가 집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찌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내 바보라고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눈물을 감추고
되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집안 식구들에게 에인젤이
다시 자기를 찾는다고 말하고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났다. 테스는 맡은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동생 리자루의 기별이 와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게 되고
아버지 역시 중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회복되었으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편 알렉은 그 동안 개심을 하고 캠프나 기타 종교 회합에서 설교를 하며 시골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회합에서 그는 우연히 테스를 보았다. 그리고 또 뒤를 따라
다녔다. 테스에 대한 연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의 징조를 유린하고 그로 인해서 평생을 파멸시키고 있는
알렉의 손길이 다시 테스에게 뻗쳐 왔다. 그는 종교 순회를 집어치우고
플린트콤애쉬로 테스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알렉은 자기가 테스의 진짜 남편이며
에인젤 클레어는 결코 테스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결혼을 요구했다
테스는 에인젤에게 호소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는 회답이 오지 않고 알렉의 구혼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게다가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가에 대한 알렉의 친절과 클레어의 이해할 수 없는
무소식이 겹쳐 차츰 테스를 궁지에 빠뜨렸다. 테스의 어머니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렉의 집안은 너도 알다시피 이 근처에서 제일 가는 부자다. 사실 또 네게
처음으로 남자란 걸 알게 해 준 인연도 있지 않니 그러니 이런 얘기가 나온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테스는 이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걸음 더 파고 들며
얘기했다
"생각해 보렴. 네가 그만큼 솔직하게 과거를 말했는데 그렇다고 널 버리고 타국에
간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매정한 사람이지 뭐냐. 그런 박정한 남자한테 의리를
지키다니 넌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니?"
"그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에요"
"참 딱하기도 하지. 글쎄 돌아올 리가 있겠니. 첫날 밤에 신부를 안아보지도 않은
남자가 어떻게 돌아온단 말이냐. 거기 비하면 알렉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네게 대한 책임을 느끼고 청혼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알렉과 결혼을 하면 우리는 이
집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동생을 학교에 보내게 되며 남부럽지 않게 살게 아니냐. 내
말만 들으면 틀림이 없다"
테스는 무척 괴로웠다. 브라질에 있는 에인젤에게 또 편지를 썼다
'그리운 남편에게 당신을 이렇게 부르게 해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정녕 당신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에인젤! 저는 지금 무서운 유혹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상대가 누구라는 것도 너무도 지겨워 차마 말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다시 한 번 지난 날의 목장 시절과 같이 저를 사랑해 주실 수 있다면
곧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안 되면 저를 당신 곁으로 데려가 주세요. 저를 당신의
아내로 하실 수 없다면 하녀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오든지 아니면 제가 당신 곁으로
가지 않으면 저는 죽을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 당신을 위해서는
깨끗이 죽을 것이며 또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살겠어요. 입 밖에 내고 싶지도 않은
알렉과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고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와
결혼을 한다면 우리 집은 가난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무정하고 모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코 당신은 저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구하러 돌아와
주세요. 곧 돌아오실 형편이 못된다면 얼마 후에 돌아온다는 편지를 보내 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올가미에 걸려서 영원한 함정 속에 빠지고 말 것 같습니다. 빨리 저를
만나 주세요. 당신의 테스는 주님께 맹세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께만 순정을 바치는
애타는 테스 올림'
이러한 편지를 발송한 테스는 에인젤의 회답을 받은 뒤에 자기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다. 테스는 편지가 가고 올 날짜를 계산하며 남편의 답장을 고대했다.
그러나 답장이 올 날짜가 훨씬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알렉도 어머니도 그것 보라는 듯이 테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알렉은 때로는
에인젤이 영국에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친구에게 써 보내온 편지를 보고 왔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테스는 이제부터 석 달만 더 기다려 보아 회답이 없을 경우에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어느덧 3개월도 흘러갔건만 에인젤로부터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매일 문간에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소식이 온 것이 아닌가 그이가 돌아온
것이나 아닌가 하고 가슴을 죄며 기다리던 보람도 없이 공허한 날만 지나갔다. 테스는
절망과 자포 자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빈곤한 살림이 테스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알렉의 청혼을 수락하여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에인젤에게는 마지막 원망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테스의 애통함을 보다 못하여 옛 목장 시절의 두 처녀는 에인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부인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선생님도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디
부인을 돌보아 주세요. 그 이유는 부인은 지금 친구의 탈을 쓴 원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멀리 쫓아 버려야 할 사람이 도리어 부인 곁을 추근추근
따라다니고 있어요. 여자에게 자기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을 주어서는 안 될
거에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아니 그 이상의 다이아몬드라도 뚫어
없애고야 말 거에요. 테스의 행복을 비는 두 친구로부터'
테스는 알렉으로부터 선사받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렉은 테스를 데리고 샌드번으로 가 신혼 가정을 이루었다
에인젤 클레어는 브라질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더구나 처음부터 몹시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귀국 길에 그는 어떤 영국 사람을 만나 그에게
자기 결혼에 대한 얘기를 고백했다. 그 사람은 클레어에게 부인과 화해하라고 권고했다.
클레어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는 테스를 찾기 시작했다. 에인젤은 테스가 샌드번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기차를 타고 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테스의 주소를 물었다
알렉과 테스가 결혼한 지 며칠이 안되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어떤 남자가
알렉 더버빌 부인을 만나러 왔다는 집 주인의 전갈을 듣고 테스가 아무런 생각없이
현관에 나갔을 때 안색이 나쁜 한 남자를 보았다
"테스!"
"에인젤..."
에인젤은 두 팔을 내밀었으나 팔은 다시 양 옆으로 힘없이 내려갔다. 테스가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한낱 황색 해골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 에인젤은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느끼고 자기의 외양이 테스에게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도망간 나를 용서해 주겠소? 테스!"
"이제는 너무도 늦었어요"
테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왜 당신은 좀더 빨리 돌아와 주시지 않았어요? 그처럼 저를 기다리게 해 놓고"
"테스, 난 거기서 열병으로 누워 지냈고, 당신 편지는 5개월이나 늦게야 내 손에
들어왔던 거요"
"정말 퍽 마르셨어요. 에인젤 지금은 저 알렉의 아내예요. 그인 지금 윗층에 있어요.
이 옷도 그이가 입혀 준 거에요. 에인젤 제발 곧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시지
말아 주세요"
"물론 내가 나빴어. 테스 용서하오. 내 딴에는 편지를 받아보자 곧 병석에서 일어나
돌아오느라고 왔는데도, 결국 이미 늦었구려"
에인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인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알렉의 동네에서 빠져 나왔다. 간밤에 묵은 여관에
들렀다가 곧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마치 테스가 신혼 여행 때의 여관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와 같은 고민이 에인젤을 사로잡았다. 그는 차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심정이 아니어서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신작로는 얼마 안 가서 내리막길이 되고 움푹한 골짜기가 뻗어 있었다.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서 서쪽의 오르막길을 가다가 숨을 돌리려고 발을 멈춰 무심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걸어온 길 저쪽에 자기를 향해서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테스일까 싶어 기다려 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헐떡거리며 뛰어온 사람은 분명히 테스였다. 테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와 이리로 오는 걸 봤어요"
에인젤은 여자의 손을 쥐어 겨드랑이 밑에 끼고 전나무 아래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에인젤! 왜 제가 당신 뒤를 쫓아왔는지 아시겠어요? 전 그 사람을 죽이고 왔어요.
전 기어이 해치우고 말았어요. 제가 당신을 생각하고 울고 있을 때에 그는 당신을 마구
욕하지 않겠어요. 전 벌써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망쳐 놓은 거에요. 전 그 사람에게 짓밟히며 거짓 속에서 일생을
보낼 순 없어요. 에인젤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절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말해 주세요. 네 어서 절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에인젤 클레어는 파르스름한 입술로 테스에게 키스하고 여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과거에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말이야"
두 사람은 아래로 한없이 걸어갔다. 그리하여 산 속에 있는 어느 나무꾼의 빈
움막에 들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안주할 곳을 발견한 듯 흐뭇한 마음으로 포옹했다.
그들은 이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생애를 건 지극한 사랑을 다만 이 자리와 이 한
순간에 기울여 테스는 에인젤에게 매달렸다. 에인젤도 테스를 사랑했다
그들은 낮에는 숲 속에서 쉬다가, 밤이면 어둠을 타고 도망을 쳤다. 북쪽으로 가서
항구로 빠져나가 도망하려는 것이 에인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비장한
사랑도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여보, 제가 죽더라도 제 동생 리자루를 돌봐 주세요. 만약 그 애가 당신 것이
된다면 제가 죽은 후에도 우리 사이가 멀어지지도 않을 거에요. 여보 에인젤, 우리는
저승에 가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테스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산에 들어온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수색대는 이들을 포위했다. 먼저 눈을 뜬 에인젤은 그들에게 낮은
소리를 냈다
"테스가 잠이 깰 때까지 좀 참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없이 석상처럼 서서 테스의 잠자는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테스는 에인젤에게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 리 없어요. 지금까지도 저에겐 과분했어요. 저는 마음껏
행복을 누린 셈이에요. 이젠 더 살면서 당신에게 멸시 당한 일도 없게
되었어요" 하고 일어서서 수색대원 앞으로 나가며
"포승줄로 묶으세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일찌기 웨섹스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옛 도시 윈톤세스터 시에는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테스가 갇혀 있는 감옥이었다. 이 건물에는 팔각형의
높은 탑이 솟아 있고 그 탑 꼭대기에는 길다란 깃대가 서 있었다.
극도로 쇠약한 에인젤 클레어와 키가 후리후리하고 한창 피어나는 그의 처제
리자루는 언덕 위에 서서 이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가 여덟 시를 친 지 몇 분 후에 검정 깃발이 느릿느릿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7월의 아침 바람에 펄럭거렸다. 검은 깃발은 사형을 집행했다는
표시였다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여러 신들의 말을 빌리면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끝마친 것이다. 그러나 더버빌 가의 옛 조상인 기사들이며 귀부인들은 무심히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고 섰던 에인젤과 리자루는 마치 기도를
올리듯 땅 위에 쓰러져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검정 깃발은 말없이 바람결에
나부끼고만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일어서더니 다시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율리시스(Ulysses:1922)
해설
율리시스는 그리스 원어로 오디세이라고 하며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의
주인공이다
그리스 서해안의 작은 섬 이타카의 왕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와 갓 낳은 아들
텔레마코스를 남겨 두고 그의 벗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렌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유혹되어 간 것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리스로 간다. 그는 여러 왕과 함께 트로이 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10년이 걸려 트로이를 함락시킨다. 다른 왕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오디세이는 북풍에 표류되어 그리스 남쪽의 섬에서 섬으로 10년 동안 떠돌다가 고향인
이타카에 도착한다. 조이스는 호머의 작품의 주인공인 오디세이(율리시스)의 이름을
따서 작품의 제목으로 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이 더블린
거리를 하루 거니는 것은 율리시스가 10년 간 해상을 방랑한 것과 같은 구조로 본
것이다. 그리고 36세의 블룸의 방황을 율리시스의 방황으로 비유하고 남편이 아닌 정부
보일란과 밀회를 하는 블룸의 부인을 페넬로페 역으로 하고 아들 텔레마코스에
해당되는 사람으로서 블룸의 친구의 아들 스티븐 디덜러스로 비유한 것이다. 그 밖에
더블린 시의 상인 여급 무직자 친구들은 각기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마녀와 신들과
친구들로 비유한 것이다
조이스는 현대의 한 평범한 사람의 생활에서 고전의 작중 인물과 같은 생존 양식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진실을 파악하여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 점에서
조이스는 고전주의자라 할 수 있다.
조이스는 기존의 소설 양식을 파괴하고 독특한 문장을 통해서 의식상에 나타나는
기억 인상 의지 등을 되도록 발현 형태 그대로 표현하는 수법을 시도했다
조이스의 문체와 구성은 20세기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작품 속에 열거적인 거대 묘사법 희곡체나 시나리오를 이용한 부분 신문의
제목이나 문체를 그대로 모사해 낸 부분 종교 문답식의 문체 등 거의 한 장마다 색다른
맛을 나타내는 구성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일관된 줄거리를 추려 낸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요약된 내용을 통해서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이해하기 위한
개괄로서는 그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작품은 3부로 되어 있으며 제1부에 해당되는
1, 2, 3장은 제2부에 나오는 블룸의 이야기에 대한 프롤로그(서곡)로서 디덜러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시간적인 배경은 오전 여덟 시부터 정오까지이다
제1부 1장 모독적인 언사를 노상 지껄이는 의학도 벅 멀리건과 문학 청년 헤이즈가
동거하고 있는 마텔로 탑을 배경으로 스티븐의 일상 생활의 단면이 그려져 있다
2장 디지 씨의 학교 교실에 나타난 스티븐이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있는 학생들과
난해한 역사에 대해 교리 문답을 하고 있다.
3장 주인공의 행동이라곤 거의 없다. 따라서 아무런 사건도 없다. 다만 스티븐의
더블린 시의 교외 샌디코브 해변을 거닐 때 그의 뇌리에 오락가락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내면 독백이 있을 뿐이다.
제2부에서는 블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역시 오전 여덟 시에서부터 시작된다
4장 오전 여덟 시 광고업자인 블룸은 아침 식사를 위해서 곱창을 사온다. 소프라노
가수인 아내 마리언은 남편이 전해 주는 정부 보일란의 편지를 읽고 있다. 둘이서
자리를 같이했을 때 마리언이 윤회의 뜻을 물었고 블룸이 그것을 열심히 설명해 준다
5장 블룸은 우체국 가는 길에 세이론 산 홍차 상표를 보고 동방에 대한 동경을
하는데 연상의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목욕탕에서 자기의 성기를 꽃으로 보는 것도
역시 일종의 연상이다. 현실 속에 새로운 공간을 그리고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고 있다
6장 이것은 "오디세이"의 지옥에 해당되는 장면으로 묘지와 죽음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냉혹하게 그리고 있다. 묘지에서의
블룸의 독백은 이 작품에서 전용되는 대표적인 수법.
7장 군데군데 커다란 신문 타이틀을 삽입하여 시간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리하여 어수선한 신문사의 분위기를 재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조형적 문체이다
8장 식당에 앉아 있는 블룸은 자유 분방한 백일몽에 잠긴다. 과거가 현실 이상의
현실성을 지닌 채 나타난다. 시간과 공간은 마침내 도착되어 버린다.
9장 "율리시스" 전체를 통해서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인 부자 관계가 중심 문제로 취급되었다
10장 모두 열 아홉 개의 짧은 문장으로 나누어진 이 장면은 영화적인 수법을 실험한
것이다. 즉 더블린 시내의 여러 장면을 카메라를 이동시켜 촬영하듯 단편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건 A와 사건 B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A 장면 속에 B 장면
속에 나오는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오버랩(Overlap)의 효과를 노렸다
11장 음악적인 수법을 도입하고 있다. 사건 전체가 음악적인 리듬 속에 아름답게
통제되어 있으며 사건 전체도 음악과 관련된 것이다. 음악과 문학이 혼연일체된
작품으로 이 장면처럼 성공한 예가 일찌기 없었다고 한다
12장 희극적 과장을 볼 수 있다. 아일랜드 사람에 대한 묘사와 마지막 대목에 가서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13장 의식의 밑바닥에 흐르는 성을 취급하고 있다
14장 놀랄 만큼 대담하고 정교한 언어의 구사를 볼 수 있다. 태아의 발육을 영국
문제의 다양한 변화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15장 홍동가에서 전개되는 환상적인 드라마(몽환극)이다. 여기서는 블룸이 온갖
유령들과 대화를 하고 심지어는 무생물인 부채와도 얘기를 한다. 현실이 환상의
세계로 뒤바뀌어 펼쳐지는 것이다. 즉 제2의 현실 창조인 것이다.
이상이 제2부에 해당되는 것이고 제3부는 밤 열두 시부터 새벽 세 시경까지의
이야기로서 16장에서는 블룸이 스티븐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17장에서는 문답체로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스티븐을 보내고 난 블룸은 오랜 명상에 잠긴다.
18장에서는 침대에 누운 블룸 부인의 내면 독백으로 채워진다. 약 40페이지가
구두점 하나 없이 완전히 연속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작가 약전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출생했다. 제수이트 파(카톨릭의 일파)의
신자이며 그 계통의 학교를 대학까지 졸업했다
학생 때부터 자의식이 강한 수재였다. 카톨릭교에 열렬한 어머니와 담임 교사는
그가 교역자로 살기를 바랬으나 그는 19세기 말의 근대 문학을 탐독하고 예술가로서
살아갈 결심을 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입센의 작품을 좋아했으며 영문학에서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대학을 마치고 파리에 유학했다. 유학 기간은 1년 정도였으나 의학을 배웠고 성악을
지망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고 귀향하였다. 이 때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는 운명하기 바로 직전에 조이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이스는 어머니를 개처럼 죽게 했다는 가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도 간혹 나타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로 가세가
급작스럽게 기울어져 누이 동생들은 가구들을 팔아 연명하고 있었다. 조이스는 국민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신문에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1914년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을 썼다. 1907년에는 이미 시집 "실내악"이
간행되었고 그 후 10년에 걸쳐 자전적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7년)으로
비로소 당시의 소설가 베넷의 칭찬을 받아 주목을 끌고 새로운 세대의 작가로 등장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조이스는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살면서 "율리시스"를 계속
쓰고 있었다. 7년에 걸쳐 쓰여졌다는 이 작품은 전작에서 시도한 수법을 더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미국과 유럽의 20세기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파리에서 신흥 문학가 클럽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피네건즈 웨이크"(1939년)을
내놓았으며 만년에는 안질이 악화하여 거의 실명하다시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를 떠나서 스위스에서 지냈으나 1941년 1월 13일
십이지장 궤양으로 사망했다
줄거리
1장 마텔로의 폐탑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해변에 있는 마텔로 폐탑에는 세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집에서 뛰쳐 나온 스티븐 디덜러스와 언제나 익살맞게 빈정거리기를 좋아하는 의학생
벅 멀리건과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문학 청년 헤인즈 등이다.
1904년 6월 16일
벅 멀리건은 면도를 하면서 헤인즈를 노상 몹쓸 녀석이라고 빈정거린다. 그러나
스티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난간에 기대 서서 바다의 물결과 항구를
떠나려는 우편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수염을 다 민 멀리건도 스티븐 곁으로
다가가면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위대한 어머니!"
멀리건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스티븐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는 별안간
스티븐에게 핀잔을 주었다.
"여보게 숙모는 자네가 어머닐 죽였다고 생각한다네. 그래서 숙모는 내가 자네와
사귀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지... 자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실 때 말이야. 숨넘어가는
소리로 자네한테 기도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그래 까딱도 않았단 말인가.
이 답답한 친구야!"
스티븐은 찔끔했다. 더구나 언젠가 꿈 속에 찾아와 나무라는 듯하던 어머니의
환상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다
스티븐과 멀리건 그리고 헤인즈는 식탁에 모여 앉았다. 이 때 우유를 배달하는
노파가 찾아왔다. 노파는 그들에게 가지고 온 우유를 돌려 가며 부어 주었다.
스티븐은 그 순간 그 노파의 노쇠한 모습에서 지금 아일랜드의 모습을 대하는 듯
싶었다. 스티븐은 아일랜드의 문예 부흥 운동을 경멸해 주고 싶었다
식사가 끝난 후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 셋은 다같이 바닷가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멀리건은 스티븐에게
"오오, 아버지 노아를 찾아 헤매는 아벨이여!"라고 느닷없이 빈정거렸다.
그러나 스티븐은 디지 씨의 학교에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과 작별하였다. 이
때 멀리건이 외쳤다
"배의 집에서 만나세. 열두 시 반에, 응?"
"그래"
스티븐이 대답하였다.
2장 디지 씨가 운영하는 학교
오전 열 시경
스티븐은 디지 씨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로마 역사를 강의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하는 수업이었다
스티븐은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을 앞에 놓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교리 문답을 하며 가끔 혼자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피러스(이집트의 왕)가 아고스에서 노파의 손에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또 줄리어스
시저가 단검에 찔려 죽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가 하는 역사의
가능성에 관한 것들이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갑자기 밖에서
"하키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키라는 말에 학생들은 일제히 '와'하고 뛰쳐 나갔다
스티븐은 디지 교장에게 불리워 그의 서재로 갔다. 스티븐에게 봉급을 주기 위하여
부른 것이다.
디지 씨는 스티븐에게 돈을 주면서 또 버릇처럼 충고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자넨 저축을 않는다니까 아직 돈의 가치를 모를 걸세 돈은 힘이야. 그건 내
나이쯤 돼야 알 테지만 그러나 알아야지 자네 영국 사람의 자랑이 무언지 아는가?
그건 바로 '나는 돈을 빌리지 않고 살았다'라는 걸세 어떤가? 한 푼도 빌리지 않는다.
배울만 한가?"
디지 씨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렵군요"
스티븐은 딱 잘라 말하였다. 그러자 디지는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아일랜드의
역사며 영국과 유태인의 관계에 대해서 자기 견해를 열심히 이야기했다.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도록 하기 위해서 관청에다 그 대책에 대한 공개장을 쓸 테니 어디
신문지상에라도 발표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스티븐은 텔레그라프신문에
가져가겠노라고 대답했다
스티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디지 씨가 뒤따라 나오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참,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걸 잊었군요. 아일랜드는 영광스럽게도 유태인을
박해한 적이 없는 단 하나의 나라라고 하는데 자네 그 까닭을 알고 있는가?"
디지 씨는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글쎄, 왜 그런가요? 저는 아직..."
스티븐은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건 아일랜드가 일찍이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기 때문일세"
디지 씨는 자못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껄껄대며 웃었다.
제3장 샌디마운트 해변
스티븐은 더블린 교외의 샌디마운트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을 좇아 침묵의 독백을 되씹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의 어쩔 수 없는 양식 내 눈을 통하여 생각하기엔 그 이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의 특징을 읽는다. 생선알과 해조
밀려오는 조수 저 낡아빠진 신발 청록색, 청은색, 흑갈색... 색채로 나타나는 상징
다음 순간 스티븐은 눈을 감아본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의 양식을 몰아 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발 밑에서 조개 껍질과 해초가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딛는 스티븐은 다시 귀에 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양식을 지님을 느꼈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의 과거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 양심의 가책 학교에서 교장이
부탁하던 공개장의 원고 열두 시에 만나기로 한 멀리건과의 약속 배의 집 주머니 속에
든 소지품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네 가지 낱말로 된 물결에 관한 말...
바닷뱀 뒷발로 곤두서는 말 암초 그 틈에서 급하게 호흡하는 물결 그것은 바다의
숱한 잔 속에서 뛰논다.
통 속에 처박혀진 것처럼... 그것은 맴돌아 넓게 흐른다. 거품이 떠오르는 늪.
꽃이 피어 펼쳐지는 모습.
저녁은 되돌아오고 있다
그는 지팡이를 잡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렇다. 저녁이 내 속에 기어이 찾아오는구나 모든 하루는 끝이 있기 마련이지.
그런데 내일 화요일은 제일 한가한 날.
제4장 블룸의 집
프리먼 신문사의 광고 외관원 리오폴드 블룸은 에클스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헝가리 인의 피가 섞인 아일랜드 계의 유태인으로 나이는 서른 여섯 살이었다
1904년 6월 16일 멀리건이 마텔로 폐탑에서 수염을 깎고 있을 시각 그러니까 아침
여덟 시경에 블룸은 고양이를 희롱하면서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 마리먼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버터 빵을 굽고 커피를 끓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양의
곱창을 사러 나갔다
헝가리 계의 유태인이 경영하는 푸줏간에 찾아갔을 때는 곱창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블룸은 자기보다 앞서 온 이웃집 하녀가 그것을 사지 않을까 하고 마음을
졸였다. 눈은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에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곱창을 안
사고 갔다. 그녀가 돌아간 뒤 블룸은 테이블에 쌓아 놓은 포장용 신문지를 한장 집어
들고 광고문을 읽었다
티베리아스 호반의 키네레스 모범 농장
-이상적인 겨울 요양소로 가장 알맞는 곳-
그는 그것을 유심히 읽고 나서 푸줏간 주인이 꾸려 주는 곱창을 받아들고 걸음을
옮겼다
집에 들어선 블룸은 현관 마루에 떨어져 있는 두 통의 편지와 한 장의 엽서를
집어 들었다. 블룸 앞으로 온 편지와 엽서는 딸 밀리한테서 온 것이었다. 올해
열 여덟 살이 되는 밀리는 멀린가 시의 사진관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그 동안의
소식을 정해 온 것이다. 나머지 한 통의 편지는 아내 앞으로 온 것이다. 소프라노
가수인 아내와 함께 동행할 연주 여행의 매니저인 보일란에서 온 것이었다. 보일란은
그녀의 정부이기도 하였다
블룸은 그 편지를 이층 침실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곱창을 불에 올려 아내의 아침상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온 편지가
누구한테서 온 거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거요? 보일란한테 온 거죠 프로그램을 알려 준 거에요"
"당신은 무슨 노래를 부르지?"
"제이 시 도일과 함께, '그대의 손을 나에게' 그 다음엔 '사랑의 그 옛날 달콤한
노래'를 부르죠"
그녀는 풍만한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책을 빌려 주는 가게에서
빌려다보던 저속한 책에 나오는 'Met himpike hoses'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책을
들여다 본 블룸은 그게 바로 'Metempsychosis'를 잘못 읽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즉 윤회란 거야"
그는 몇 마디 더 설명을 덧붙였다
아내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갑자기 곱창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블룸은
말을 그치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곱창은 조금밖에 타지 않았다. 그는 아주 타버린 쪽만 잘라 고양이에게 던져 주고
곱창을 질겅질겅 씹어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 딸에게서 온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멋진 생일 선물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주 잘 어울려요. 제가 새 모자를 쓰자
멋쟁이가 됐다고들 해요. 엄마한테는 크림 과자가 든 예쁜 상자를 받았어요.
두 가지 다 마음에 들었어요
이제는 사진 찍는 일에 아주 능숙해졌어요. 코린 씨가 사진을 찍어 주었어요.
현상이 되는대로 그의 부인이 보내 주시겠대요. 이번 일요일엔 친구들과 함께 호수로
피크닉을 갈까 해요. 엄마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럼 가장 다정한 사랑으로 이만
그치겠어요
밀리 올림
편지를 읽고 난 블룸은 그 동안 못 본 밀리의 성장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하늘 높이 삐걱대는 소리와 음울하게 울리는 소리 성 조지 교회의 종소리 높고
음울한 쇳소리 그제야 그는 자기가 참례해야 할 장례식이 이제 십오 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쌍한 디그남!
5장 로터스 이터즈. 목욕탕
프리먼 신문사의 광고 업무를 맡아 보는 블룸은 오전 열 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웨스트랜드 거리의 우체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그는
벨파스트앤드오리엔탈 상점의 진열장에서 최상품 세이론 산 홍차의 상표를 보았다.
순간 동양에 대한 동경심이 새삼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정말 더운 여름 아침이야"
그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품위 있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동양 그곳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곳일 테지 지상의 낙원 사방에 떠 있는 크고 처진
잎사귀 선인장 온갖 꽃이 어울려 핀 들판 뱀처럼 얽힌 칡넝쿨 햇빛 아래를 천천히 걷는
사람들...?'
우체국에 들어선 블룸은 헨리 플라워라는 이름으로 보내온 편지를 찾았다. 몰래
사귀고 있는 마사 클리포드라는 타이피스트에게서 온 것이다
우체국에서 나온 블룸은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봉투를 찢고 편지지를
끄집어 내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데 마코이를 만났다. 이럴 때 만나기에는
달갑지 않은 친구였다. 블룸은 그를 피해 달아나려는 데 이미 그의 눈에 띄고 말았다
"여보게, 블룸 어디 가는 길인가?"
"이런! 마코이 아닌가?"
마코이의 시선이 블룸의 검정 넥타이와 검정 옷에 머물렀다
"불쌍한 디그남 말일세. 오늘이 장례식이야"
"아, 그렇군 불쌍한 친구. 몇 시지?"
"열한 시"
마코이와 헤어진 블룸은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어 들고 있던 신문 속에 말아
넣었다. 녀석이 내 뒤를 밟진 않겠지. 혹시 이런 데서 아내라도 만나면...
골목길이 안전해
그는 역마차의 오두막을 지나쳤다. 미드의 목재소 근처에 이르렀다. 그는
신문사이의 편지를 폈다. 꽃이 꽂혀 있었다. 잎이 납짝해진 노란 꽃 화를 내진 않은
모양이군 뭐라고 썼나?
친애하는 헨리
당신께서 지난 번 주신 편지 받았습니다. 고마워요. 제 편지가 마음에 안
드셨다고요? 용서하세요. 그런데 우표는 왜 동봉하셨죠? 전 정말 화가 났어요.
정말이지 벌을 주고 싶었어요. 전 당신을 장난꾸러기라고 부를 거에요... 당신은
댁에서 행복하지 않으세요? 가엾은 장난꾸러기. 전 당신에게 무엇이든 해 드리고
싶어요.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죠. 말씀해 주세요. 전 당신의 이름을 자주
불러보곤 합니다. 사랑하는 헨리 우리 언제 만나죠? 제가 당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세요? 아마 모르실 거에요. 당신처럼 제 마음을 끄는 남자는 지금까지 없었어요
얼마나 당신이 그리운지 모르겠어요. 제발 저에게 긴 편지를 주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안 그러면 벌을 줄 거에요. 그래도 좋죠? 장난꾸러기 정말
만나고 싶어요. 사랑하는 헨리 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정말 화낼 거에요.
만나면 모든 것을 얘기해 드릴께요. 그럼 안녕 사랑하는 장난꾸러기 꼭 회답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마사
블룸은 다 읽고 나서 핀에 꽂힌 꽃을 호주머니 속에 꽂았다. 그리고 철교 아래에서
구겨진 봉투를 꺼내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헨리 플라워라 이런 식으로 백 파운드
짜리 우표라도 찢으라면 찢을 수 있지. 하찮은 종이 조각
그는 어느새 올할로즈 교회의 열려진 뒷문에 와 있었다. 문에는 게시가 붙어 있었다.
'성 피터클레버와 아프리카 전도에 관한 예수회 존콘미 신부의 설교 중국의 수백만
민중을 구한다'
'흥 어떻게 중국인을 설득시키지? 설교보다는 차라리 1온스의 아편을 더
좋아할 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6장 하데스. 더블린 거리와 공동묘지
오전 한 시 블룸 사이먼 디덜러스 칸닝험 잭파우어 네 사람이 디그남의 장례 마차를
타고 묘지를 향해 출발한다. 이들은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라든지 그 밖에 여러가지
일들에 대하여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것은
블룸은 언제나 모두에게서 경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지날 때 통행인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곧
묘지의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 때 블룸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의 뒤에 선
채 소년의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칼과 새하얀 칼라 속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목덜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불쌍한 소년! 아버지가 죽었을 때 곁에 있었을까? 둘 다 아무런
의식도 없었을 테지
드디어 인부들이 관을 교회 안으로 옮겨 왔다. 뒤이어 하얀 옷을 걸친 신부가
나타났다. 그는 책을 펴 들고 봉독하고 나서 라틴어로 기도를 했다
간단한 절차가 끝나자 인부들이 들어와 관을 손수레에 실었다. 그리고 묘지로
향하였다. 얼마 뒤 관 위에는 흙더미가 덮이기 시작하였다. 블룸은 얼굴을 외면했다
'아직 녀석이 살았다면 어떡하지? 흥 천만에! 그런 일이 있다면 큰일 날 노릇이지.
녀석은 죽은 걸. 암 그렇고말고. 월요일에 죽었으니까. 심장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든가,
아니면 전기 벨이나 전화를 장치하든가 하는 법이 있음직도 하지 않는가. 조난 신호
시체는 사흘 동안 그대로 놓아 두라. 여름에는 기간이 좀 오랜 셈이지 하긴 죽은 것만
분명히 판명되면 곧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흙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7장 아이올로스. 신문사
블룸은 프리먼 신문사에 나타났다. 키즈의 광고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신문사는 한창 시끄럽고 떠들썩하다
그는 먼저 교정 부장에게 가서 광고의 게재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다음에
편집장에게 가서 프리먼 신문사의 관리를 받고 있는 텔레그라프 신문의 토요일 붉은색
판에 키즈의 광고를 크게 내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신문사에는 사이먼 디덜러스 램버트 논설 위원 맥휴 교수 그리고 클라우포드도 함께
참석하고 있다. 모두들 신문에 보도된 단 도우슨의 아름답게 꾸민 말로 쓰여진 연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때 사이몬과 램버트가 한잔하러 밖으로 나간다
뒤이어 스티븐이 디지 교장에게 부탁받은 원고를 가지고 신문사를 방문하였다
원고를 받아 본 편집장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구창이라? 허어 자넨 언제 직업은 바꿨나?"
"아닙니다. 그건 제 원고가 아니라 디지 씨에게 부탁을 받아 쓴 겁니다"
스티븐이 대답하자 편집장은 더블린의 생활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권했다
"무언가 강하게 어필해 오는 것을 써 주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말이야"
8장 레스트리고니언즈. 더블린 시 한복판
오후 한 시. 블룸은 신문사에서 나왔다. 그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이제 그는 국립 도서관에 가서 킬케니피플을 조사하는 것이다. 걷고 있는 그에게
미국의 전도사가 포교하기 위한 전단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엘리야가 왔다!'
시몬의 교회 부흥 운동을 벌리고 있는 '존 알렉산더 다위'가 왔다는 선전이었다
'흥, 한몫 볼 셈이군'
구름이 햇빛을 가렸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도 어두운 그늘이 덮였다. 디그넘이
죽었다. 출산의 고통 일 초마다 어디선가 한 사람씩 태어난다. 또한 일 초마다 한
사람씩 죽어간다. 내가 오분 전에 물오리에게 먹이를 던져 주고 난 뒤에도 벌써
삼백 명이 죽었을 것이다
브라스트 사무소의 시간표가 그로 하여금 시차에 대한 의문을 종일 품게 했다.
힐리점의 샌드위치 맨 광고를 보자 그는 자신이 그곳에 근무하던 때를 상기했다.
거리를 오락가락하는 순경들의 무리가 재학 당시 보어 전쟁에 대한 반대 데모를
떠오르게 했다
블룸은 데비번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보일란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블룸은 아내의 부정한 소행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는 되도록 화제를 돌려가며 치즈 샌드위치 등으로 주렸던 창자를
채웠다. 포도주도 마셨다. 그는 다소 거나한 기분으로 자유 분방한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서른 가지의 식사라. 호사스런 타후크 연회, 상류 계급의 야회복 반나체의
귀부인, 아내 마리언과 함께 즐기던 지난 날의 바닷가, 아름다운 여신들 신들의 회식
광경, 그 요리와 우리들이 6펜스짜리 점심.
식당의 유리창에는 파리가 윙윙거리고 있었다
블룸은 식당에서 나왔다. 그는 여신의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박물관으로
향하였다
블룸이 박물관 근처에 이르렀을 때 보일란이 눈에 띄어 박물관으로 황급히
뛰어들어갔다
9장 스킬라와 카립디스. 국립 도서관
오후 두 시 더블린 국립 도서관에는 스티븐과 당대의 젊은 문학가들이 모여
셰익스피어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의 역사적 진실성의 연관 및 햄릿의 성격 예를 들면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고향에 두고 온 그의 아내와 그의 동생과의 부정한 관계를 소재를
했다는 것,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기질에는 이아고나 샤일록과 같은 기질이 있어
"오셀로"나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 자신을 드러낸 작품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회고주의를 추구하는 아일랜드 문예 부흥 운동의 참가자들과
모더니즘을 추구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 스티븐과의 의견 대립을 다루고 있다.
스티븐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털어 놓는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인생이 그의 인식의 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내면에서
더 나갈 수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통일과 형태를 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타난
예술은 깊어 가는 그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술은 예술이다. 인생은 인생이다'라는
식으로 고집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노릇이죠"
그는 또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아버지란 존재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악입니다. 자연 속에서 부자를
결합시키는 것은 한 순간의 맹목적인 욕정의 발로인 것입니다. 부권이란 법률상의
가정인 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거나 또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엉뚱한 의문을 끄집어내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관념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10장 배회하는 바위들. 거리
거리의 풍경. 세 시와 네 시 사이의 더블린 거리의 장면이다
스티븐이 재학했던 클론고즈 우드 칼리지의 교장 콘미 신부가 거리를 걷는다.
디덜러스의 집에서는 스티븐의 여동생들이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는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장난조로 마구 지껄이고 있다.
블룸은 자기 아내가 즐겨 읽는 묘한 책을 사기 위해 책방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때
"죄의 감미로움"이 눈에 띄었다. 이게 아내에게 맞겠군! 그는 책을 펼쳐 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받은 돌비라를 잘라 멋드러진 가운과 비싼 옷깃에 모두 써
버렸다. 그이를 위해서였다. 라울을 위하여!
'라울을 위하여...'
블룸에게는 보일란이 바로 그 라울처럼 느껴졌다.
같은 시각에 스티븐은 책방 앞에서 "여자에게 매혹되는 비결"이라는 책을 펼쳐 읽고
있었다. 그것을 여동생 딜리에게 들키자 당황한다. 다음 순간 그는 딜리가 갖고 있는
프랑스 어 기초 독본을 보면서 요즈음 집안 형편을 들었다. 그가 집에 남기고 온
책들이 전당포에 가 있다는 얘기며 살림이 몹시 옹색하다는 얘기를 듣고 심한 가책을
느꼈다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였다.
11장 세이렌. 주점
오후 네 시 오먼드 바의 음악 감상실
오먼드 바의 웨이트리스인 흑갈색 머리의 도즈와 금발의 케네디는 그 앞을 지나는
마차 행렬을 창 밖으로 내다보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스티븐의 아버지가 들어섰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면서 도즈에게 은근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뒤에 보일란이 마차를 몰고 왔다
그는 블룸 부인과 만날 시간을 조금 앞두고 오먼드 바에 들른 것이다. 보일란이
들어서자 도즈와 케네디는 그를 둘러싸고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보일란은 오먼드 바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덜컹덜컹...'
한편 블룸은 애인 마사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편지 쓸 종이와 봉투를 사들고
"죄의 쾌락"을 옆에 낀 채 오먼드 바로 향하였다. 걸어가는 블룸의 머리에는 아내가
보일란과 밀회하기로 되어 있는 시간이 떠올랐다. 오후 네 시경이었다.
블룸은 오먼드 바 근처에서 우연히 친구 슬딩을 만나 함께 오먼드바로 들어가
식사를 하였다
블룸은 마침 마사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라 마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 앞에 그려
보았다. 동시에 젊은 날의 마리언 모습도 떠올랐다
블룸은 마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벤 달라스가 굵은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딱딱. 맹인의 지팡이 더듬는 소리. 딱딱딱. 맹인이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딱딱딱딱딱. 이 소리는 마리언과 보일란의 밀회가 다가옴에 따라 블룸의 심장 박동
소리와 혼동이 되었다
12장 키클롭스. 바니커넌 주점
오후 다섯 시. 바니커넌 주점 정체 모를 한 사람의 술꾼이 화자로 등장한다.
주점에 들어선 블룸은 시민과 한데 어울려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 그는 사형 제도며,
아구창에 대한 대책 문제며, 위생 운동 등 여러가지 문제에 걸쳐 자기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블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오히려
유태인계 블룸을 앞에 놓고 유태인들을 마구 헐뜯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그 말에
상대하지 않고 있었던 블룸도 차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드디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면서 그들을 향하여 크게
소리질렀다.
"이봐 멘델스존도 마르크스도 스피노자도 너희들의 하느님 예수도 다
유태인이었어..."
이 때 별안간 큰 지진이 일어났다
13장 나우시카. 샌디마운트의 해변
오후 여섯 시 블룸은 오늘 아침 스티븐이 명상에 잠겨 거닐던 샌디마운트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가까운 바윗돌 위에 세 처녀가 나와 바닷바람을 쏘이며 불꽃 구경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시쉬 카프리, 에디보드맨, 가티 맥도웰이었다. 가티는
첫눈에 마음이 끌리는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들 중에 하나가 뿔을 찼다.
이 때 블룸은 바위 틈으로 굴러가는 그 뿔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티의 스커트
밑으로 굴러가도록 겨냥해 던졌다. 그 때문에 뿔을 주으려던 가티의 스커트가
젖혀지면서 속이 들여다 보였다
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소녀는 블룸의 눈에 고요히 감돌고 있는 정열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블룸은 가티가 불꽃을 보려고 되돌아서거나 그네를 타거나 얕은 개울을 건널 때
스커트 밑으로 드러나곤 하는 하얀 허벅다리를 훔쳐보며 자위 행위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을 뉘우치면서 생각했다. 그녀의 눈망울 속에는 면죄시킬 수 있는 말이
담겨져 있다고
블룸은 혼자 남아서 아내와 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든 여성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내에게 사 주기로 한 화장수도 생각하였다
아홉 시가 가까워왔다
블룸의 뇌리에 오늘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분수처럼 흘러가는 것이었다
14장 태양신의 황소들 산부인과
산부인과 장면 입원 중인 퓨포이 부인에게 문병을 갔다. 밤 열 시경이었다
거기엔 이미 블룸이 아는 의학생과 스티븐 등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블룸도 그들 틈에 끼었다. 그들과 함께 산부인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산인 경우에 산모를 살려야 하는가, 아이를 살려야 하는가 등
모두들 술에 취해 음담을 섞어가며 외설스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층 병실에서
퓨포이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다는 기별이 왔다. 바로 그 때 번개가 번쩍이며 폭우가
쏟아진다
온 좌석이 신바람이 나서 농담을 지껄이고 있는 사이에도 블룸은 마냥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자 바크의 술집으로 가세!"
갑자기 스티븐이 소리칠 때에야 블룸은 비로소 공상에서 깨어났다. 퓨포이 씨를
위해서 축배를 들자는 것이었다. 모두 환성을 지르며 몰려나갔다. 블룸도 따라 나섰다
그들은 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밤거리로 향했다
15장 키르케. 밤거리
블룸은 술이 취한 채 마보트 가를 헤매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린 뒤라 짙은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블룸은 술 취한 스티븐을 보살피기 위해 스티븐을 뒤따라 가다 짙은
안개 속에서 그를 놓친다. 밤의 마보트 거리는 난폭한 군인들 술꾼들 비틀거리는
노동자들이 우글댄다. 블룸은 안개 속을 헤매다 베라 코헨의 집에서 스티븐을 만났다.
스티븐은 그곳에서 피아노 곡을 연구하며 매음녀와 즐기고 있다. 스티븐의 환희가
절정에 달한다. 거기서 블룸은 베라와 마주 앉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부채와 더불어
얘기를 주고받았다.
부채(펄럭펄럭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잠잠해진다)
"마누라가 있는가 보군요"
블룸
"글쎄 중도에 망친 셈이지 딴은 내 잘못이기도하지만..."
부채(반쯤 폈다가 다시 접히면서)
"그러니 마누라가 판치겠군"
블룸(무안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숙인다)
"하기야 그런 셈이지"
부채(아주 접힌 채 귀고리 곁에 머물렀다)
"당신 날 잊었수?"
블룸
"원 천만에 그럴 리가..."
부채(접힌 채 그녀의 옆구리에 가로놓였다)
"제가 당신이 최초로 꿈꾸던 여잘까요? 아니면 우리가 사귀고 나서부터 당신이 늘상
꿈꾸던 여잘까요? 지금도 우린 옛날 그대로일까요?"
블룸은 이렇게 베라의 부채와 더불어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스티븐과 함께
매춘부와 어울려 자동 피아노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 때 블룸에게는 부모님의 유령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그가 신앙을 저버린 것을
꾸짖었다. 이어서 아내의 얼굴도 나타났다. 또 다른 얼굴들도 연달아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이런 데 있게 된 것을 애써 변명하곤 하였다
환상은 잇달아 일어났다
매춘부와 춤을 추던 스티븐이 그만 졸도해 버렸다
블룸이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장의사인 코니와 함께
그를 간호해 주었다. 이 때 반쯤 의식을 잃은 스티븐은 에이츠의 시를 입 속으로 읊고
있었다. 이러한 스티븐을 지켜보는 블룸에게는 스티븐이 마치 열한 살에 죽은 루디의
귀여운 모습으로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스티븐이 자기 아들이었으며 하고 은근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하여 블룸과 스티븐은 정신적인 부자로 서로 가까이 마주서게 되었다
오후 열두 시경이었다
16장 시우마이오스. 역마차의 오두막
블룸은 스티븐의 옷매무새를 고쳐 주고 곁에서 부축해 가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마차를 찾았으니 보이지 않았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자칭 귀족이라고 떠벌이는 코리를
만났다
그들은 코리와 헤어지고 나서 어느 주막에 들렀다. 거기엔 낯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블룸과 스티븐도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그리고 어느 뱃사공과 같이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았다. 매춘부의 얘기며, 여행에 대한 얘기며, 그 밖에도 더블린의
장래 도시에 관한 노동자 아일랜드의 천연 자원 마리언 그녀의 공적 유태인
아일랜드의 자치 운동 죽은 파넬과 그의 귀국 디그넘의 주점 등 닥치는 대로 화제를
벌여 놓았다.
주막에서 나온 블룸은 스티븐이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자기 집에
데려가려고 하였다. 코코아를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은 오두막을 나와 서로 팔짱을 끼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클레즈 가 7번지로 향한다
새벽 한 시경이었다
17장 이타카. 이클레스 가 7번지. 블룸의 집
새벽 두 시 블룸의 집
블룸과 스티븐은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걸으면서 그들은 교리 문답식으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고대 히브리 어와 아일랜드 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화제는 마냥
번져 갔다.
세 시경 블룸이 스티븐에게 묵고 가라고 권했으나 스티븐은 굳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블룸과 악수를 나누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스티븐을 배웅하던 블룸은 문턱에 머리를 부딪쳤다. 실내의 구조가 잘못된 탓이다
그는 옷을 벗으면서 하루의 출납표를 자세히 작성하였다. 뒤이어 상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18장 페넬로페. 침실. 마리언의 독백
침실에서의 마리언의 독백으로 구두점도 전혀 없고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비몽사몽
간에 흘러가는 그녀의 의식의 흐름이 42페이지나 전개되어 간다. 그녀가 젊었을 때부터
관계해 온 많은 연인들의 그림자가 오간다. 성적 갈망이 일관되어 가는 여기에는
수치심도 도덕심도 없다. 자연으로서의 여체 도리어 건강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감에 가득한 잠재 의식의 세계가 폭로되어 있다.
죄와 벌(Prestuplenie i nakazanie:1866)
해설
"죄와 벌"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로 작가가 45세에 발표한
작품이다. 살인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지식인 청년의 심리를 섬세하게 해부하여 그 당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합리주의 공리주의 허무주의에 날카로운 비판을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불후의 명작이며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소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는 1865년으로 언제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쪼들리는
생활을 했으며 이 때가 경제적으로 가장 고통을 받던 시기였다
바로 전 해에 아내와 형이 죽었고 그 때까지 형과 함께 경영하던 잡지사가 형의
죽음으로 실패하자 사업을 하면서 지게 된 모든 빚을 그가 짊어지게 되었다. 또한 형의
유가족의 생활까지 도맡게 되었다.
막대한 빚을 갚지 못하자 빚쟁이들은 그를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위협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고심 끝에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발표된 당시 진보적 청년들에게 조국의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조소하고 앞에 나선
젊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모독하고 헐뜯은 작품이라고 하여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작품의 인물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유형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을 풍자했으며 라즈미힌이란 인물의 입을 빌어 사회주의의 기계주의적인
합리주의를 정면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추상적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인간성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허무주의 또는 초인간주의와 하느님의 진리와의 투쟁에 대한
해답으로 "죄와 벌"을 내놓은 것이다
대학생인 라스콜리니코프는 학자금이 떨어지고 거의 기아 지경에 빠졌다. 그는 작은
하숙 집의 지저분한 구석 방에 처박혀 있었으나 감수성이 예민한 그의 두뇌는 공상적인
이론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다가 마침내 인간을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은 기존의 도덕 및 법률에 복종할 의무를 가졌으나
선택된 비범한 사람은 법률을 무시해도 되는 권리를 가졌고 창조를 위해서는 낡은 것을
파괴해도 좋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없이 새로운 인류의 도덕은 수립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한 이론으로
자기 자신을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는 무가치한 전당포 노파의 돈을 훔쳐
가치 있는 자신이 쓰는 것이 인류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고리 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노파를 살해한 순간부터 그의 내부에서는 양심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선과
정의라는 양심이 의지와 대항하여 그의 내면 세계에서 싸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한 갈등은 그를 정신 착란 상태에 던지고 그의 마음을 고독하게 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불안과 공포에 찬 악몽 같은 나날을 보냈으나 끈질기게 의심하는 경찰에게는
대담하고 교만한 태도로 대하는 등 극단적인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순결한 영혼을 가진 매춘부 소냐의 영향으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을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기의 범행을 고백하여 자신을 법의 손에 넘기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이 가장 깊은 곳까지 정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형지의
죄수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덕이 어떠한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살인범의 심리와 인간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헤치는 치밀한 심리 분석과 연극의
대사를 읽는 듯한 대화의 맛은 물론 싱싱하게 살아 있는 등장 인물의 완성된 성격 묘사
그러한 것을 에워싼 작가의 위대한 정서는 천재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치밀한 심리 분석과 묘사의 긴장감은 이 작품의 생명이다. 이 작품이
심리학계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던 것도 당연하다
작가 약전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호의 한 사람이며 깊은 사상성과
문학의 현대화의 의미에서 으뜸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 병원의 관사에서 태어났다
원래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성은 나라에 공을 세운 것에 의해 '도스토예프스키'영지와
더불어 성을 수여 받은 러시아의 귀족의 성이었다. 그런데 18세기의 말경부터 가세가
기울어져 도스토예프스키가 출생하였을 당시에는 형편없이 몰락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귀족이라기보다 오히려 잡계급의 처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때문에 출생부터 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몸소 겪어 잘 알고 있었다.
1848년(27세)에 무미 건조한 군대 생활에 진력이 나 사표를 제출하고 극도의 빈곤과
싸우면서 처녀작 발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듬해 봄에 동창 그레고로비치의
소개로 시인 네클라소프가 편찬하는 문집에 첫 작품을 게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비평계의 권위자인 벨린스키를 경탄시킨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작품의 발표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누추한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 소설을 편집자인
시인이 읽어 줄지는 몹시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깊이 잠들고 있는 새벽
네 시경, 네클라소프와 그리고로비치가 찾아와서 방문을 두들겼다. 두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목을 얼싸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은 진리를 계시하였소. 당신은 예술가로서 그 진리를 부여받은 것이오. 그
재능을 소중히 다루어 언제까지나 진리에 대해서 충실히 한다면 반드시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오"
두 사람은 그 날 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게 되어 밤을
새워가며 다 읽었다. 그들은 서로 울고 있었다. 흥분을 참지 못한 이 유명한 시인
네클라소프는 작가를 만나서 그 감상을 전하기 위해서 밤인데도 불구하고 무명의
천재를 방문했던 것이다
네클라소프는 '새로운 고골리가 나타났다'라고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추천한 대
비평가 벨린스키는 처음에는 '요즘에는 우후죽순 같이 새로운 고골리들이
튀어나온다니까' 하고 말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작품을 읽은 다음 격찬하며 "그
사람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외쳤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널리 소개하였다. 그의
처녀작은 압도적인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다투어 그를 자신들의 모임에
끌어갔다
무명의 청년은 일약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서 첫 발을 내디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급속한 성공은 얼마 못가 그에게 압도적인 찬사를 뿌린 사람의
배반으로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벨린스키 일파와 그는 전혀 융합할 수 없는 타입의
인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벨린스키는 그에게 실망을 표시하였다
그 후 그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1848년 당시 파리에 일어난 1월 혁명
이래 공상적 사회주의가 유럽 전체에 풍미할 때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연구 단체가 여러 개 조직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페트라셰프스키 학회'였다.
이것은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저서를
연구하고 러시아의 사회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푸리에주의의 정치 사상 연구
단체였는데 도스토예프스키도 가입하고 있었다. 당시의 니콜라이 1세의 전제 정치는
이것을 사상적인 음모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로 간주하고 벨린스키 주위에 가까이
있던 30여 명 의 젊은 자유 사상가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도 그의 형제와 함께 붙들려
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귀족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8개월 간 감옥에 갇혀 있다. 공개
심문을 받은 후 수 명의 청년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49년 12월 공공 광장의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공포와 싸우면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눈에
문득 멀리 바라보이는 교회당의 금빛 십자가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어쩐지 거룩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군중이 떠들썩하더니
황제의 특사에 의하여 사형을 사면한다는 사면장을 휴대한 전언자가 달려왔다. 사형은
취소되고 대신 4년 간의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 받게 되었다. 사형 집행의 경험은 후에
"백치"의 주인공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 후 3일 후 쇠사슬에 묶여 시베리아로 이송되어 로글리스크의 노역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4년이라는 긴 세월을 흉폭한 살인수의 넋과 사귀며 괴로운
노역에 종사하며 무서운 고독감과 절망 육체적 고통과 싸우면서 겨우 허용된 한 권의
성경을 벗삼아 지냈다. 그 후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고관의 도움을 받아 군인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출옥하게 되었다
1866년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지 7년만에 "죄와 벌"을 발표하였고 명성을 다시
되찾았으며 이듬해에는 안나 그리고예브나와 재혼하여 다시 외국으로 나가 살게 되었다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떤 교활한 출판업자와 계약하여 기한까지 신작 소설을
제공하지 못하면 그의 저작권 전부를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되었는데 이 기간 안으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고용한 속기사였다. 그는 4년의 세월을 독일 이탈리아 등의
객지에서 이 성실한 위안자의 따뜻한 사랑 속에 행복한 생활을 보내면서 불후의 명작
"백치" 및 "악령"과 "영원한 반려"를 발표하였다
그는 1875년에 "미성년"을 그리고 1879-80년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발표하였다.
"미성년"은 영혼과 육체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파멸한 벨시로프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원한 여성인 소피아를 대립시켜 인간성의 근원적인 문제 즉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과의 대립 상극을 원숙기에 도달한 그의 예술적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며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예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이
천재의 최후를 장식하기에 알맞는 인류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해답을 준
걸작이었는데 제2부를 구상만으로 그치고 인류의 고뇌를 예술화한 그는 사망하였다.
1880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열린 푸슈킨의 동상 제막식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설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이 축전은 오히려 그 자신의 천재 찬미를 위하여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명한 연설은 그가 행한 최후의 연설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따뜻한 인간애와 신에 대한 반항과 문제 제기였으며
인간성의 해부와 서술은 고금을 통하여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슬라브주의에 속하는데 그의 작품은 주로 대도시의 뒷
골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같은 시대의 문호 투르게네프가 서구의 문명을 존중한 작가인데 반하여 그는 러시아
사람의 민족성을 깊이 사랑했으며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이나 슬라브의 혼 그대로를 보여
준 작가였다. 그는 종교의 힘이 엄격하였던 중세기를 거쳐 근대 문명의 영향을 받아
한없이 복잡해진 러시아의 혼을 그대로 새겨 놓은 슬라브를 그려 냈다. 끝없이 깊은
넋으로 끝없이 깊은 민족 전체의 마음을 그려낸 작가였던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호 톨스토이와 아주 대비되는 작가이다. 톨스토이가 외적
현실이나 생활의 객관적인 묘사를 통하여 존재의 진실을 확증한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생활과 현실의 추악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암흑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형상화했다
크로포토킨, 로맹 롤랑 등이 톨스토이를 옹호하는 데 반하여 니체, 앙드레지드 등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연 톨스토이를 능가하는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신을 잃은 인류의 실존적 혼돈의 문제에
절실한 빛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인 작가라는 것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줄거리
7월 초의 무섭게 더운 어느 날 해질 무렵 한 젊은 사나이가 C골목의 어느 셋방에서
나와 방향없이 K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운좋게 계단에서 하숙집 주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을 모면했다. 그의 방은 높은
5층의 다락방인데 그 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벽장 같았다. 주인 여자는
그의 아래층에 살고 있었으므로 거리에 나갈 때는 항상 계단 쪽으로 열려 있는 주인집의
부엌 곁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젊은 사나이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으레
병적인 불안을 느꼈으며 그런 기분에 휘말리는 것이 스스로 창피하게 생각되어 상을
찌푸리곤 하였다. 하숙비가 상당히 밀려 있었으므로 주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겁이 많고 배짱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인데 얼마 전부터 그는
우울증에 잠겨 불안스러운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자신 안에 틀어박혀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었으므로 주인 여자뿐 아니라 어느 누구하고 만나는 것을
피해 왔던 것이다. 그는 가난해서 꼼짝 못할 지경에 처해 있었으나 그것도 요즘에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꼭 해야만 할 일감도 그는 내던져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하숙집주인 여자 따위가 자기에 대하여 어떠한 일을 생각해 낼지라도 겁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계단 위에서 붙잡혀 그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저분한
헛소리나 귀찮은 독촉이나 넋두리를 대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고양이처럼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와 몰래 슬쩍 달아나는 편이 나왔던 것이다
거리에 나와 보니 자신이 빚이 있는 한 여자를 만나는 일을 두려워하였다는 데
어이가 없었다. 그는 묘한 미소를 띄우면서 생각했다.
'어떠한 일이든 실행하려고 생각하면서 이런 하찮은 일에 겁을 먹다니! 흥
그렇다... 무엇이든지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는데도 그저 겁 많은 탓으로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이건 확실한 논리이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새로운 독자적인 말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좀 말이 많다. 말만 떠벌리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거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
이건 내가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저 방 속을 뒹굴면서...꿈같은 것을 생각하는 동안에
떠버리 노릇을 배워 버린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지금 무얼하려고 걷고 있는 걸까?
정말 내가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그게 진심에서 나온 생각일까? 천만에 천만에
진심에서라니! 그저 공상으로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것뿐이다. 장난이다! 진짜 장난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 이라스콜리니코프는 무엇하러 어디를 가는 것일까? 그리고
아까 그가 중얼거리던 '그 짓'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달 전쯤에 그는 고리 대금업과 전당포를 하는 한 노파를 알게 되었다. 노파
아료나 이바노브나는 어떤 대학 교수의 미망인으로 백치인 누이 동생 리자베타를
부리면서 심술 사나운 욕심으로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 짓을 공상하게 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 공상은
몸서리치도록 잔인한 것이었으나 퍽 유혹적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그 짓을 해도
괜찮다는 충분한 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결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무기력을 오히려 조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실행함에 있어서 전혀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 그
계획의 장소인 노파의 집을 탐색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는 죽은 아버지가 남긴 시계를
가지고 나왔다
"무엇하러 왔지?"
"저당잡힐 걸 가져 왔어요"
"하지만 지난 번 것이 벌써 기한을 넘겼어 어제로 꼭 한 달이야"
"그럼 한 달 동안 이자를 드리지요.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하지만 기다리건 팔아치우건 내 마음대로야"
"아무튼 이 은시계로 좀 많이 쳐 주십시오"
"어디서 이런 지저분한 것만 들고 온담 요전에도 당신에게 반지에 두 장이나
내줬지 그것도 보석상에 가면 새 것을 한 장 반이면 살 수 있단 말이야"
"한 4루블쯤 빌려 주세요. 꼭 찾아가겠어요. 아버지의 유품이거든요. 곧 집에서
돈을 부칠 것이라니까요"
"1루블 반이야. 이자는 미리 제하고"
"1루블 반이라구요! 어림도 없어요"
"좋을 대로 하시지"
노파는 시계를 도로 내밀었다. 그는 약이 올라서 그대로 돌아서려 하였으나 다른
데라곤 갈 데도 없고 여기 온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마음을
돌렸다. 무뚝뚝하게 그는 말했다.
"좋습니다"
노파는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으며 커튼 쪽으로 가서 장롱을 열고 돈을 꺼냈다.
그는 온 신경을 귀로 집중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노파가 돌아왔다. 지난 달의
이자와 요번의 이자를 미리 제하여 그가 받은 돈을 겨우 1루블 15카레치카에 불과했다.
그는 돈을 받은 후 돌아갈 생각을 않고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주저하였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아료나 이바노브나, 곧 다른 물건을 가져 오려는데... 은으로 만든...
훌륭한... 담배갑인데요..."
"그건 그 때 얘기하지"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 참 그런데 할머니는 언제든지 혼자 계시는 것
같군요. 누이 동생은 어디 나갔나요?"
"내 동생에게 볼 일이 있나?"
"아니오. 별로... 그저 한 번 물어 본 것 뿐입니다. 그걸 할머닌 그렇게
말씀하시긴...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료나 이바노브나!"
라스콜리니코프는 계단을 뛰어내려와서 이렇게 외쳤다
"아아 참! 더러운 생각이다! 정말 나는... 그것은 터무니없이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내 마음은
어쩌면 그렇게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할까! 무엇보다도... 이 추잡하고 더러운
생각이 아아 싫다! 정말 싫다! 나는 온통 한 달 동안이나..."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어느 선술집에 들어갔다. 맥주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하였다
이 술집은 지저분했고 손님들도 후즐근하게 보였다. 그들 속에서 50세쯤 보이는
늙고 초라한 관리인 듯한 사나이가 미친 듯이 그러나 빛나는 눈초리로 머리칼을 쥐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나이는 라스콜리니프를 보자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는 마르메라도프라는 사람으로 이전에는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던 관리였으나 술 때문에 몇 차례나 지위를 잃었음에 또 다시 술에 빠져 버리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는 좀 우습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한 태도로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라스콜리니프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침대에 꼬꾸라져 있었습죠. 지독하게 곤드레가 되어서 말이지요...
그 때 문득 딸의 목소리가 들렸지요... 소냐는 순진하고 얌전한 애에요. 목소리도
퍽이나 부드럽죠... 머리는 금발이고 얼굴은 좀 파리하지만 품위가 있지요...
그 애가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겠소. '어머니 내가 꼭 그런 일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라고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다알리아 프란츠오브나라는 악독한 포주
노파가 내 처를 통해 벌써 서너 번이나 유혹해 왔기 때문이죠. 그러자 '그게 어떻단
말이냐' 하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코웃음 치며 대답하지 않겠소. '무엇이 그리 소중히
모셔 둘 물건이냐? 무슨 큰 보배도 아니겠고'라고요. 하지만 아내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네 비난하지 마십시오. 네 비난하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 제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병은 나빠지고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울고불고하니 가슴을 쥐어
뜯고 싶은 기분이 되어 마구 쏘아붙인 말이지요. 화풀이로 그런 소리가 나온
것이지요... 원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성질이 그래서 아이들이 비록 배가 고파서
울어도 곧 때려 주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 날 다섯 시가 넘자 소네치카(소냐의
애정)는 일어나서 목도리를 감고 모자가 달린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가더니 여덟 시
넘어서 돌아왔어요. 돌아오자 그대로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곁으로 가서 그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아무말 없이 1루블 짜리 은화를 서른 개 올려 놓지 않겠소? 그리고
말 한 마디 않고 집 안의 커다란 초록빛 목도리를 들고 그것은 식구들이 공동으로 쓰고
있는 목도리지요. 그것으로 머리를 푹 뒤집어 쓰고 벽쪽을 향해 몸을 돌려 침대에
쓰러져 버리지 않겠소. 가냘픈 어깨하고 조그마한 몸이 언제까지나 떨고 있을 뿐...
그런데 나는 그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누워 있었지요... 술에 취해 있어도
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젊은 선생님 얼마 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마찬가지로 말 한 마디 없이 소냐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밤새 그 아이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그 애의 발에 입을 맞추고 좀처럼 일어서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러다 두 사람은 그대로 같이 잠이 들어버렸지요. 껴안은 채
말이지요... 둘이서... 둘이서... 그래요... 그런데도 나는 곤드레가 되어 누워
있었다오"
그의 부인인 카테리나는 귀족의 자녀가 다니는 여학교를 나왔으며 지체 있는 집
출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폐병으로 병약해져 언제나 기침을 콜록이며 신경질적이며
남편을 증오하고 자신의 삶을 증오하는 여인이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마르메라도프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미칠 듯한 마음으로 한 푼이라도
가져오기를 기대하며 마르메라도프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르메라도프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양말을 팔다 못해 딸이 매춘을 해서 번 돈으로
값싼 술을 마시면서 그날그날을 술 없이는 못 사는 것이었다. 소냐는 전처가 낳은
딸인데 순진하고 온순한 처녀였다. 그러나 이제는 황색 감찰을 가진 매춘부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마르메라도프는 괴로워하면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묵묵히 그의 비참한 이야기를 듣고 이 가엾은 주정뱅이를 위로하며
친히 부축하여 그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마르메라도프가 사는 집은 페테르부르크 지저분한 뒷골목에 있었다. 커다란 건물의
내부는 어둠침침했고 4층 구석에 통로로 되어 있는 형편 없는 방이었다. 카테리나는
문턱에 무릎을 꿇은 남편의 모양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아아! 돌아왔군! 짐승! 짐승! 돈은 어디 있어요! 호주머니를 뒤집어 봐요. 어머나
옷도 달라졌어! 그 옷은 어떻게 했어요? 돈은 어디 있어요? 어서 말해요! 돈은 어디다
두었을까? 아아 또 들이마셨나 봐! 상자 속에 은화가 열둘이나 남아 있었는데!"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분에 못 이겨 남편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아 방 안으로 끌어
넣었다. 마르메라도프는 온순하게 아내가 끄는 대로 제 무릎 걸음을 걸어 아내의 힘을
덜 들이게 했다
"내게는 이게 쾌락입죠! 고통은 아닙니다. 쾌락입니다. 서... 선생님"
그는 머리채를 끌리면서 땅바닥에다 이마를 박으며 외쳤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무말 없이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살그머니 창가에
놔두고 나왔다. 그 돈은 그의 굷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전당포의 노파에게 꾸어온
돈 중에서 술값을 치른 나머지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마르메라도프의 비참한 가족의
실상을 보고 가난이 가져 오는 타락의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신의 타락이 놓여
있어서 순진하고 티없는 사람들의 성질을 파괴하고 부식시킨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이튿날 아침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깨었다. 하숙집
주인은 그가 몇 달 치의 하숙비를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밥을 안 준 지 벌써 보름이
되었고 이제는 그를 경찰에다 고소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그가
나가고 없는 동안 편지가 와 있었다. 하녀가 갖다 주는 편지를 보자 그의 안색은
갑자기 달라졌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고향의 그리운 어머니에게서 온 긴 편지였다
편지 속에 녹아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애정은 읽는 동안 사뭇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러나 누이동생 두냐의 결혼에 대한 소식은 그의 마음을 몹시 어둡게 하였다.
상대자는 나이가 45세나 되고 사업도 하는 돈 많은 변호사인 루딘인데 이 사나이는
외모는 점잖게 보이나 전형적인 속물이었다. 누이동생이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소식은 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결혼하는 것을 무슨 큰 은혜나 베풀어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기적인
놈의 아내가 되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그 동안 두냐는 어려운 일을 겪었다. 오빠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지방 귀족의
집에서 가정 교사를 했다. 그 집의 소유자인 마르파는 두냐를 신뢰하고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마르파의 남편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인데 그는 선악의 경계도 모르고
오로지 악마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어떠한 장애도 짓밟고 넘어가는 사나이였다.
이러한 그에게도 뜻밖에 한줄기 선량한 일면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두냐에게 반해서
여러 번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유혹한 방탕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갖은 간계를 다하여 두냐를 밀실에 유인하여 처녀를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었으나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 문 열쇠를 두냐에게 내어 주어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돌려 보낸 일도 있었다
오빠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서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서 빌린 돈이 있어서 그
기간 동안 일을 해 주기 위해서 마지못해 그러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두냐는
한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을 안주인 마르파에게 들켜
마르파의 오해로 말미암아 갖은 욕을 다 보고 그 집에서 쫓겨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두냐의 결백을 알게 된 마르파는 그녀에게 사과를 했고 또한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두냐의 깨끗함과 자기 남편의 잘못을 알리고 다녔으므로 두냐는 마을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루딘과의 혼담이 나왔던 것인데 두냐는 오빠와 집안 살림을 위하여 루딘의
구혼을 승락한 것이다. 이러한 결혼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누이동생은 몸을 팔아서 불필요한 사치품을 얻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필요에 몰려 자기의 몸을 판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근본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나는 그 애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이번에 그 결혼 때문에 어머니와 누이가 이곳에 올라온다고 하는데
그 여비를 마련하는 데도 아버지의 몇 푼 안 되는 연금을 또 저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지위를 얻는다면 나는 어머니나 누이를 위하여 내 일생을
바쳐도 좋다. 그러나 대학 졸업이란 꿈 같은 일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입술을 비틀며 떨었다.
"그렇다. 그 일을 실행하자 만사는 돈이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놈의 주둥아리는
내가 찢어 놓을 테다!"
그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전당포의 그 노파를 죽이는 일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렇다! 그 노파를 죽여 돈을 빼앗자 그 돈을 전인류 공동의 복리를 위하여
공헌케 하자. 하나의 값없는 벌레의 죽음과 백의 귀중한 사람의 목숨과 바꾸자.
그 단 하나의 조그마한 범죄는 훌륭한 공공 사업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역사상 입법자나 개혁자라고 하는 라이칼가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 비범한
사람도 사실은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도살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처사를 세상 사람들은 죄인으로 취급하여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영웅이니
위인이니 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선악을 초월한 어떤 특수 지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비범한 사람은 파괴하고 살인을 하더라도 그 천재성과 권력 때문에 기존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행동이 인류 전체의 행동을 목적으로 삼는
경우에는 일부분의 희생은 필요악이며 이러한 범죄는 마땅히 시인되어야 한다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생각했다
이러한 판단에서 자신도 선택된 비범한 사람에 속한다고 믿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유용하게 살아가는가를 기준으로 사고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 해독만을 끼치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인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할 결심을 굳힌 것이다. 초인이란 선악의 개념을 초월하여 행동하는
비범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와 같이 신에 대한 신앙을 잃고 초인의 사상을 전개해 버린 라스콜리니코프는
누이 두냐와 마르메라도프 가의 불쌍한 가족과 순진한 처녀 소냐를 도와 주기 위해서
이를 실행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비범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지만
이러한 벌레 같은 추잡한 노파를 죽인다는 것이 너무 저열한 일이 아닐까? 위인은 과연
이런 지저분한 일을 했을 것인가... 마음 한 구석에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숙명적으로 이 계획에 유혹되어 갔다
여섯 시에 노파가 혼자 집에 있다는 것은 그의 누이 리자베타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느덧 가까운 교회당의 시계가 여섯 시를
알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행위가 옳고 그른 것보다 시간이 늦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는 노파를 죽이는 데 사용할 흉기를 훔쳐 내는 데 성공했다. 미리 보아 두었던
도끼를 몰래 훔쳐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을 웃옷 안에 숨겼을 때 이제 자신의
계획이 시작됐다는 안심을 했다. 갈 곳은 건물의 4층에 있는 노파의 방이다. 초인종을
누르니 심술궂게 생긴 그 노파가 눈을 번뜩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반쯤 열더니 반갑지
않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몸으로 밀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왔지?"
"전당 잡히러 왔지요. 저번에 말하던 은으로 만든 담배갑을 가져 왔어요"
"아무래도 이건 은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노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밝은 창 쪽으로 몸을 돌려 라스콜리니코프가
일부러 단단히 묶어 두었던 끈을 풀려 하였다. 그 때 그는 도끼를 힘있게 쥐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원 참 이렇게 단단히 묶은 걸 가지고 오다니..."
노파는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쪽으로 돌아섰다.
그 때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노파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쳤다. 피투성이가 된 노파는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그는 곧 노파의 호주머니에서 돈주머니와 열쇠걸이
귀고리 등 일일이 살필 사이도 없이 닥치는 대로 호주머니에 긁어 넣었다. 이 때
노파가 쓰러져 있는 방으로부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죽은 듯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가 그쪽으로 뛰어갔다. 방 한 가운데에 리자베타가 언니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를 쳐들어 소리도 못지르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리자베타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그녀는 애걸하는 시늉으로 손을
주저주저 내밀었으나 머리가 두 조각으로 깨져 거꾸러졌다.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자 라스콜리니프는 자신의 행동에 격심한 공포와 혐오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
그는 자신을 꾸짖으면서 피묻은 손과 도끼를 씻은 다음 방을 나왔다. 뒤이어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와 이 집을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 문이 안 열린다고 떠들어 대는
틈에 들키지 않고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하숙집에 돌아온 라스콜리니프는 불안과 공포 때문에 완전히 실신 상태에 빠져 열에
뜬 하룻밤을 지냈다. 모든 것이 이미 경찰에 알려져 버린 것 같은 무서운 망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완전히 착란 상태에 빠져 나흘 동안이나 혼수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의 친구 라즈미힌이 찾아와서 그를 충실히 간호하여 주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직하고 다정한 이 친구도 멀리하고 홀로 무섭게 번민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이상할 만큼 비겁했다. 하숙집 주인이 하숙비를 안 낸다고
고소를 했는데 경찰에 불려가서 자신의 범행이 발각된 것으로 착각하여 기절하기도
하였다. 무슨 소리만 들려도 모두 자기를 탐색하려는 것으로 망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 나가 거리를
무작정 헤맸다. 훔쳐온 물건은 어떤 공사장의 토굴 속에 내던져 둔 채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심정으로 불안하고 의아한 행동을 했다. 그를 의심하고 있는 경찰
서기장인 포르피리를 만나 보기도 하고 밤늦게 무의식적으로 죽은 노파의 집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마르메라도프를 만났다. 마르메라도프는 술에 취하여
마차에 깔려서 기절해 있었다. 그는 몹시 흥분했다. 마치 친아들처럼 또는 경관처럼
마르메라도프를 그의 집까지 데리고 가서 곧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하였으나 이미
절망적이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그의 집안은 비참한 기도 소리로 가득하였다. 가련한
매춘부 소냐도 달려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호주머니를 더듬어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식비를 내라고 보내 준 돈 전부를 내놓고 그대로 마르메라도프의 집을 나왔다. 그런데
소냐가 보낸 어린 계집 아이가 그의 뒤를 몰래 따라와서 그의 주소를 알고 돌아갔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불안과 공포에 빠져서 병자가 다되어 있을 때 어머니와 누이동생
두냐가 약속대로 그를 찾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앞에 두고 그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어머니는 편하게 느껴졌지만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딘지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어머니와
두냐에게 달라진 모습으로 보였다. 다정하고 침착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므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는 가슴이 아팠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견딜 수
없는 고뇌 속에서 어느 날 자살을 결심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살하기 전에 소냐를 찾아왔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냐는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소냐는 비록
매춘부였으나 마음은 천사와 같이 맑고 슬기로운 처녀였으며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불타는 종교심을 지니고 있었다. 소냐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 주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휘어진 촛대의 불빛은 처량하게 살인자와
매춘부를 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소냐에게 다가갔다. 소냐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눈동자를 날카롭게 번뜩거리며 말하였다
"지금 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이별하고 왔소. 마지막으로 이곳을
들러야겠기에... 나는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왔을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리자베타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소?"
소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맑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분은 무엇
때문인지 괴로워하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고귀한 분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우연히 리자베타를 죽였던 거요. 그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소?"
"네" 하고 소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를 보시오"
얼마 후에 소냐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지고 눈은 놀라움에 더욱 커보였다. 소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무엇을 하셨단 말씀이에요?"
소냐는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아 힘 있게 자기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당신은 지금 네 거리로 나가서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절을 하고 나서
'나는 사람을 죽였소' 하고 큰 소리로 외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선 반드시 당신을
구원하여 주실 거에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의 구원과 은혜를 믿지 않는 젊은 사상가였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행한 일을 고백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냐의
순결함 앞에서 그냥 말해 버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자수하라고? 내가 왜?'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직접 노파를 살해하고 또한 순진무구한
리자베타까지 죽이고 나서 끝없이 갈등하고 번뇌하였다. 그는 그의 번뇌로 인해
어머니와 두냐도 제대로 보살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두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의로운
친구 라주미힌이 성심껏 돕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유일한 친구로서
예전에도 그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등 퍽 호의를 보여 주던 사람이였다. 라주미힌은
두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라주미힌에게 그의 누이와 어머니를 부탁했다. 두냐도 그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달라진 라스콜리니코프를 보면서 두냐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자매를 살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수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 세게 반박했다
"모든 사람이 피를 흘렸다. 피는 강물처럼 땅 위를 흐르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흐른다. 술처럼 흐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피를 흘려서
영예의 관을 쓰고 인류의 선각자라고 불리는 거야. 나는 다만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는 대신에 더 많은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거야.
아니야. 잘못도 아니지. 단 한 번의 더러운 짓에 불과한 거야"
그의 무의지는 단 한 사람의 순결한 영혼을 지닌 소냐에 의해 이끌렸다. 소냐의
뜻에 따라 그는 자수를 결심했다. 그는 만사를 라주미힌에게 맡겼다. 여러 가지로
걱정한 나머지 병이 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이별을 하러 찾아갔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맞았다. 아들의 신변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너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너는
이제 곧 떠나야 하니?"
"네. 곧 출발하겠습니다"
"또다시 돌아오겠느냐?"
"네... 돌아오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꼭 한 마디만 내게 들려다오. 네가 가는 곳은 퍽 먼 곳이냐?"
"네. 대단히 먼 곳입니다"
"그렇게 먼 곳에 가는 것이 너의 임무니? 아니면 무슨 출세할 길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것이냐?"
"어머니 그런 일은 저 자신도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기도를 올려
주시겠지요"
나가려는 아들을 꽉 붙들고 그의 눈을 뚫어지게 살펴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설마... 이제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는 일은 없겠지 넌 내일이라도 나를 만나러
오겠지, 응?"
"네. 오겠어요.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라스콜리니코프는 하숙으로 돌아왔다. 두냐는 혼자서 수심에 잠겨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가 고민에 견디지 못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지나 않았나 염려하여 간밤을
소냐와 울면서 지새웠다는 것이다. 두 남매는 여러 말은 안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말없는 이해와 슬픔과 동정이 교류하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가서 자수하겠다. 그러나 왜 자수하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구나"
두냐의 뺨에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두냐, 너는 울고 있구나 너는 변함없이 나를 대해 주겠지 내 손목을 쥐어
주겠니?"
"오빤 무슨 그런 말씀을"
두냐는 오빠를 힘껏 안았다
"이만큼 괴로워하셨으면 오빠의 죄는 벌써 반은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죄라고? 무슨 죄란 말이냐? 저 욕심꾸러기..."
하고 항변하려 했으나 자기 때문에 누이동생을 비롯하여 불행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니 풀이 꺾이었다
"두냐, 용서해다오. 그럼 이제 이별이다. 내가 가 버리면 어머님은 돌아가시거나
미치거나 하실거다. 아무튼 너는 어머님의 곁에 있어라 라주미힌이 반드시 뒤를 보아
줄 것이다"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소냐의 사랑에 용기를 얻은 그는 대지에 입을 맞추고
경찰서를 향하여 걸어갔다. 소냐는 그의 뒤를 눈에 띄지 않게 따라 갔다. 거리를 두고
몸을 숨기며 그의 뒤를 따랐다
...시베리아로 가는 죄수들 속에 라스콜리니코프도 섞여 있었다. 법률상으로 그의
죄는 중벌을 받아야 할 것이었으나 솔직한 자백과 그의 갸륵한 인격에 우러난 과거의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행동과 그리고 병적 상태에서 한 것이라는 많은 친구들의 증언
등을 참작하여 8년 징역이라는 가벼운 형이 언도되었다
두냐는 라주미힌과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이 두 사람의 극진한 간호의 보람도 없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두냐와 라주미힌은 몇 년 내에 라스콜리니코프가 갇혀
있는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라스콜리니코프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가게를 개업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죄수가 호송되어 갈 때 라스콜리니코프의 뒤를 멀리서 따라가는 한 여인이 있었다.
소냐였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면회하면서 그곳 죄수들의 편리를 함께
돌보아 주었다. 그 곳 죄수들 사이에서 그녀는 천사로 통했다. 순결하고 투명한 그녀의
사랑은 죄수들의 마음에 빛으로 스며들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처음 얼마간은 소냐가
찾아오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막상 소냐가 몸이 아파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때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한 외로움을 느끼며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내부에 그녀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얼음 같은 마음에
부드러운 빛이 피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소냐는 행복했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여러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감옥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신앙 깊은 소냐의 따뜻한
사랑에 싸여 그는 자신의 허무주의적인 초인 사상을 버리고 신의 품에 안기는 새로운
기쁨과 평안을 맛보았다.
부활(Voskesenie:1899)
해설
"부활"은 톨스토이가 70세에 쓴 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로 인류 문학사에 영원한
기념비라고 할 만한 걸작이다
특히 "부활"은 톨스톨이가 열중하였던 인도주의적인 사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발표되자 국내외에 비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제정 러시아의 사회 생활 특히 그 어두운 면을
기탄없이 폭로하여 불완전한 사회 제도에서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의 이상을
향한 몸부림과 양심의 뉘우침 자유 해방에 대한 열렬한 부르짖음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폭풍이 다가오기 전의 어둡고 광포한 분위기를 묘사하여
러시아 혁명을 암시한 듯하다. 작품 속의 많은 인물은 실재 인물을 모델로 취했는데
검열에서 형편없이 손상 당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부활"의 완본은 혁명 직후인 1918년 러시아의 '보드나르스키'의 원작
부흥판으로 간행되었다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더불어 톨스토이의 3대 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내용의 함축성에서 두 작품을 능가한다고 평가된다. "부활"은 예술성으로
우수할 뿐더러 톨스토이의 생애에 걸친 사상이 이 작품 안에 구현 응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예술적 성서이다. "전쟁과 평화"가 그의 성숙기를
장식하였다면 "부활"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다"
로맹롤랑이 "부활"을 두고 이렇게 찬사한 것은 유명하다
크로포트킨도 그의 저서 "러시아 문학사"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약 톨스토이가 "부활"이외에 아무것도 안 썼다. 해도 대작가로서 인정받을 만큼
이 작품의 예술성은 높다"
그의 소설은 예술 소설의 정도를 걷는 주제와 소재로 일관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이야기의 흥미진진한 진행에 있지 않다. "부활"을 읽는 재미는 각 부분의 생활
심리 인물 사건 묘사에 있다. 그 중에도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생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죄수 면회소의 광경에 대한 묘사는 정부와 교회를 전율시켜 검열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감옥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의 무의미를 그려 냈기 때문에 작가는
"부활" 출판 후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했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구상 과정에서 몇
차례나 감옥을 견학하기 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아 감옥의 관리와 사귀어 감옥 내부의
사정을 들었다고 한다.
작품에서 진실하고 생생한 인물은 카츄사인데 네흐류도프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기
위해 그의 구혼을 물리치고 심손과 결혼하는 결단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열차의 창을 두드리는 젊은 날의 카츄사와 대비되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적인 인물형인 것이다. 네흐류도프는 작가의 분신으로 '올바른
인간이 유일하게 살 곳은 감옥', '내가 미쳤는가 사회가 미쳤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 투사된 인물이다. 작가는 네흐류도프가 농민 생활을 시작하는 2부를
구상하고 있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작가가 '세계의 양심'으로 이목을 끌고 있던
시기의 작품이었던 만큼 "부활"은 읽는 이에게 공감을 일으켜 사상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약전
톨스토이는 1828년 8월28일 중부 러시아의 루라 시 근교 야스나야폴라나에서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세 명의 형과 누이동생이 있었다. 부친의 사망 이후 그들의 교육은 숙모인 오스텐 사켄
백작 부인이 맡았으나 숙모도 4년 후에 사망하였으므로 또 다른 숙모인 유시코프
부인에게로 옮겼다
톨스토이의 용모는 몹시 추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비관하였다고 하며 그의 기이한
행동은 소년 시절부터 나타났다. 하늘을 날아보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린 일까지
있었다. 숙모의 집에서 프랑스 사람과 독일인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고 15세에
형들과 함께 카잔 대학에 입학하여 동방어학과를 선택하였으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법률학과로 옮겼는데 관료주의적인 학과 규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1847년에 중도
퇴학을 하고 말았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톨스토이는 사교적인 숙모의 영향을 받아 쾌락에 잠겨
방종한 생활을 보내다 우연히 루소의 "참회록"과 "에밀"을 읽고 감동을 받았고 루소의
저서라면 "음악 사전"까지 읽었으며 루소의 초상을 휘장처럼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20세에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학사 칭호를 얻자 자기의
영지로 돌아가 지주로서 농노 해방의 이상을 품고 농사 개량에 착수하였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청년 시절에 쓴 대학 논문 "토지 사유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여 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농촌 생활에 염증이 난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나왔는데 그에게는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다. 도박과 주색에 빠져 타락한 러시아 귀족의 생활을 하여 몇 번이나 자살을
결심한 일도 있었다.
이 때 아우를 염려한 형 니콜라이의 권유에 따라 카프카스 지방의 수비대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함으로써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프카스의 자연과 그 지방의 생활 양식은 그에게 처음으로 예술적 재능을 깨닫게
하여 예술 창작을 시도하였다. 24세에 "유년 시대" 등 기타 수 편의 작품을 내었다
1853년 10월(25세)에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포병 사관으로 종군하여 이 전쟁의
양상을 선명하게 묘사한 수 편의 단편을 세바스로풀 지에 내어 일반 독서계에 필명을
알리기 시작했다
1862년 9월(34세) 소년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소피아와 결혼을 하여 가정 생활을
시작했다. 소피아의 나이는 18세였다. 결혼 이후 그는 창작에 비상한 감흥을 가지고
몰두하였다
1869년(41세) "전쟁과 평화" 완성. 48세에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
1908년 8월 28일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차원의 80주년 생일 축하식을
거행했다
1910년 10월 18일 집을 떠나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 날 새벽녘 친구인 의사
도산과 함께 수도원에 있는 누이동생을 만나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그의 일기와
마코비츠키의 말에 의하면 집을 나와서 처음으로 시원스런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기차에서 감기에 걸려 아스타포바 역에서 하차했는데 그 해 11월 7일 역장의
집에서 숨졌다
그의 뜻에 따라 장례 절차는 극히 소박하였으나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농민 학생
공장 노동자들이 각 지역에서 작은 역에 몰려들어 '러시아의 대작가'의 유해를 어깨에
메고 그의 출생지 야스나야폴라나로 행진하였다. 관을 묻은 후 수십일 동안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영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였다고 한다. 그 후 묘지는 모든 나라
사람들의 순례의 땅이 되었다.
로맹 롤랑으로 하여금 '세계의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예술의 신'이라 경탄케 하였고 성자 간디로 하여금 '나의 생애를 이끌어 준 훌륭한
교사'라 숭배하게 하고 레닌마저 '만국 근로 대중의 친구'라고 말한 톨스토이는
독자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은 수십 개 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서만 해도 무려 2만 3천 권을 넘으며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다
줄거리
4월 28일 오전 여덟 시 간수장은 어두컴컴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감방 앞에 섰다.
열쇠로 문을 열어 덜커덕 문을 잡아당기고는 소리 높이 외쳤다.
"야 미스로바 출정이다"
그러자 감방 안에서 키가 작고 날씬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이 여자의 경력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고아였는데 어머니가 일하던
집주인의 온정으로 딸처럼 하녀처럼 길러졌다. 이 집에서 그 여자는 카츄사라고
불리었다. 애칭으로 카첸카라고 불려지지도 않았으며 카치카라고 낮추어 불려지지도
않았다
16세 되던 해에 그는 주인의 조카인 청년 귀족의 사나이다운 모습에 애모의 정을
품었다. 그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놀던 소꼽동무였는데 벌써 큼직하게 자라난 그들은
비록 신분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달콤하고 순진한 첫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젊은
귀족의 이름은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흐류도프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부활절 전날 밤 젊은 네흐류도프 공작은 크림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소속의 연대에 부임하는 도중 카츄사가 살고 있는 백모의 집을 찾아왔다. 실은
이 집에 올 생각을 했을 때부터 카츄사를 손에 넣으려는 마음이 솟았으며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 온갖 방탕한 짓을 다해 본 그는 이미 상당한 오입쟁이가 되어 있었다.
순진하고 아름다운 처녀 카츄사는 다정하게 대해 주는 젊은 공작의 유혹에
끌려들어갔다. 부활절의 밤, 물 위에 얼음이 바삭바삭 깨지는 안개 낀 밤이었다.
네흐류도프는 남몰래 카츄사의 침실에 숨어 들어가 카츄사를 안고 자기 방으로 왔다.
카츄사는 목숨을 바쳐 마음 깊이 네흐류도프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나 그는 하룻밤의
들뜬 마음으로 신앙 깊고 깨끗한 처녀를 정욕의 희생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후 두 번 다시 네흐류도프는 카츄사를 찾아 주지 않았다. 카츄사는 버림받았던
것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카츄사는 이미 임신한 몸이었으며 주인집에도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주인집을 나온 그녀는 윤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갔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리저리 주인을 옮겨 다녔다. 어디를 가나 사나이들은 호색한 눈으로
그녀의 몸을 노렸다. 마침내 여자 포주의 손에 걸려 도회지의 사창가에서 매춘부가
되어 뭇사내에게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7년 동안의 윤락녀 생활에서 두 번 거주지를 옮겼고 병원에 들어가기도 해서 그녀의
심신은 거칠대로 거칠어졌으나 여전히 정직하고 고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카츄사는
결코 도둑질이나 살인을 할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28세 되는 해에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여 살인 및 절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면제라고 생각하고 그녀가 먹인 약으로 그녀의 손님인
스멜리코프라는 돈 많은 상인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체포되어 석 달 이상이나 숨
막힐 듯한 감옥에 감금된 다음 겨우 재판을 받기 위하여 법정에 불려가게 된 것이었다
재판장은 카츄사 마스로바를 향하여 판에 박은 심문을 시작하였다. 성명 신분 직업
종교 등을 묻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취조에 들어갔다
"그대는 상인 스멜리코프의 가방 열쇠를 가지고 그 가방 안에 든 현금 2천
6백루블과 반지를 절취한 다음 여관에서 독주를 마시게 하여 그를 살해한 것이
틀림없는가?"
"아니오! 아니오!"
카츄사는 숨을 할딱거리며 대답하였다. 이상한 일었다.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앗! 저것은 카츄사다!'
법정 배심원 석에서 배심원의 한 사람이 카츄사를 보다가 갑자기 낯빛이 어두워지며
중얼거렸다. 그는 네흐류도프였다. 그는 카츄사를 눈앞에 대하자 이제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10년 전의 자기의 추행이 머리에 떠올랐다.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감에 따라 그의 마음에는 자기의 죄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흰 앞치마를 걸친 어여쁜 소녀 카츄사, 가슴 울렁이던 첫키스로부터 2년 후에 그녀를
만났을 때의 일, 그녀의 처녀를 빼앗고 다음 날 백 루블의 지폐를 그녀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고 부임지로 떠나던 일,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네흐류도프 공작의 눈앞에
독살범이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서 있는 창녀 카츄사, 이 여자는 먼 옛날 자기의
일시적인 육욕의 만족을 위하여 짓밟고 버렸던 가련한 소녀가 아닌가... 신성하고
의젓한 배심원인 네흐류도프 공작의 마음은 몹시 어수선해졌다. 그 때의 가련한 소녀가
창부가 되다니 이 여자의 신세를 이렇게 만들어 놓는 자는? 내가 아니냐! 젊은 시절의
우연한 내 쾌락의 원인이 되어 마침내 이러한... 자기의 과오가 너무나 컸다는 것
그리고 그 커다란 죄에 대하여 자기가 너무나 태연스럽게 아니 오히려 잊어버린 채
오늘날까지 지내 왔다니 등뼈가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네흐류도프는 강력히 카츄사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법정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카츄사 자신도 울면서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소연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재판의 결과는 답변서에 '독살할 의사가 없었다'는 일항이 빠져 있기 때문에
카츄사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
네흐류도프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할수록 그의 마음은 가책 받았다.
이튿날 그는 감방으로 카츄사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만날 수 없었다. 낙심하고 돌아온
그는 2년 동안이나 열어 보지 못했던 일기장을 꺼내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4월 28일 나는 배심원으로 법정에 참석하여 뜻하지 않은 일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카츄사가 죄수가 있는 붉은 옷을 입고 피고석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녀를 석방하기 위하여 감옥으로 면회를 갔었으나 시간이 늦어
면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 나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받기 위해 그녀와
결혼할 작정이다. 오 신이여 도와 주소서..."
다음 날도 카츄사를 만나기 위해 감옥을 찾아갔다. 면회 장소로 간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카츄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방긋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다
"당신이세요? 저를 만나고 싶다는 분이?"
"오오, 나요. 당신을 만나러 왔소.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왔소..."
네흐류도프는 숨가삐 말하였다. 이야기하는 동안 카츄사는 네흐류도프와의 일이
뚜렷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카츄사의 얼굴은 점점 흐려지는 것이다.
헤어지려 할 때 그녀는 네흐류도프의 손목을 잡고 말하였다
"용서를 구할 만한 죄는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혹시 있다고 해도 그건 벌써 지나간
일이에요"
네흐류도프는 배반당한 마음으로 면회소를 나왔다. 그가 그녀를 구원하려 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녀는 기뻐하고 감동할 것이며 옛날의 카츄사로 돌아오리라고 기대했던
그의 교만함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네흐류도프는 속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는 귀족의 딸과의 약혼도 파기하고 말았다. 카츄사를 구하기 위해 카츄사를 바른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도 올바른 사람이 되리라 결심하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카츄사를 위하여 변호사로 청하고 진정서도 썼으며 모든 힘을 아낌없이 바쳐
그녀의 억울한 죄를 씻으려 하였다. 그는 변호사로부터 공소장을 받자 다시 카츄사를
면회하러 갔다. 그 공소장에 카츄사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서명이 끝나자
네흐류도프는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결심을 토로했다. 카츄사는 안색이 달라졌다
"그건 또 뭣 때문에요?"
"그렇게 하는 게 신에 대한 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신이라구요! 무슨 신 말씀이세요! 당신은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게
진실이라면 10년 전의 그 때에 신을 알고 계셨을 거에요(카츄사는 극도로 흥분하였다)
나가 주세요! 저는 죄인이고 당신은 공작님이세요. 이 곳에서 당신이 하실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네흐류도프는 이렇게 외치는 카츄사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점점 거칠게 퍼부어 대었다
"멋대로 사람을 노리개감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저를 제물로
내세워서 자기의 죄를 벗으려고... 아아 당신의 그 부글부글한 얼굴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려요. 나가세요. 나가세요. 당신과 결혼할 바엔 목을 매어 죽어 버리겠어요...
왜 내가 그 때에 죽어 버리지 않았을까?"
카츄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네흐류도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틀 후 면회하러 갔을 때에는 카츄사의 눈에는 번뇌와 초조한 빛이 있었다.
네흐류도프는 이 날도 결혼에 대해 말을 꺼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또 한 번 말하겠소. 꼭 나와 결혼해 주오. 당신이 납득할 때까지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을 따라가겠소"
그는 불쌍한 이 여자를 구하기 위해 시베리아까지도 따라갈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로원에 공소하기 위하여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드디어 카츄사의 공소
사건은 심의에 오르게 되었다. 변호사 파나린은 자신과 열의를 가지고 원판결의
부당함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검사는 공소의 이유의 부적합함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공소는 기각되고 말았다. 네흐류도프는 몹시 낙심하여 모스크바에 되돌아왔다
짧은 기간 동안에 카츄사의 마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격심한 고뇌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네흐류도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끝까지 그를
미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그녀를 움직였다. 카츄사는 점점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 경건하고 순진한 여자가 되었다. 이제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네흐류도프가
자기에게 해 주는 것이 과분하고 황송스럽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동시에
카츄사는 아직도 네흐류도프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단호히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도 그 결혼이 네흐류도프에게 불행한 것이라고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옛날의 자신을 되찾은 카츄사를 느끼지 못하고 다만 수치심도
없는 여자로 자기를 대하는 네흐류도프의 태도가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츄사가 호송대에 들어가기로 확정되자 어디까지나 카츄사의 사면을 얻으려는
마음을 관철하려고 마음먹은 네흐류도프는 그녀와 함께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영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집과 가재 도구를 누님에게
양도하는 등 명예와 부귀를 내던져 버렸다. 모든 것을 내던진 네흐류도프는 이제 다만
카츄사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눈 쌓인 시베리아 벌판까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였다. 호송되는 죄수들은 남자가 623명, 여자가 64명이었다.
죄수들이 모두 광장에 모였다. 드디어 출발 소리가 울렸다.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옥문이 열렸다. 동시에 쇠사슬 소리가 높이 울리기 시작했다. 호송병의 총소리
전송하러 온 사람들의 작별하는 소리와 그에 대답하는 죄수들의 목소리! 대열은 움직여
나갔다
네흐류도프는 여죄수들의 대열 중에 카츄사를 본 듯했으나 그 모습은 많은 군중
속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기시켜 두었던 마차에 올라 대열의 뒤를 쫓았다.
한눈도 팔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카츄사의 얼굴에는 각오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더위는 점점 심해졌다. 죄수 몇 사람은 일사병으로 죽어 넘어졌다. 네흐류도프는
도중에 사경에 이른 죄수 한 사람을 발견하자 곧 그를 위해 자기가 탄 마차를 제공했다.
그가 정거장에 닿았을 때에는 죄수들은 모두 열차에 오른 뒤였다. 그는 잠시 동안
카츄사와 말을 할 수 있었다. 기적 소리가 나자 쇠창살이 있는 죄수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카츄사가 있는 죄수 분대는 거의 3천 마일을 기차로 달렸다. 카츄사는 보통 형
사범과 함께 베름 시까지 기선을 탔으나 그 곳에서 네흐류도프의 노력으로 정치범들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카츄사는 정치범들 사이에 들어가서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또한
정치범들에게서 대단히 유익한 감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심손이라는 혁명주의자는
카퓨사의 좋은 스승이 되었다. 심손은 은근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감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카츄사는 그의 마음을 눈치챘었으며 그만큼 고귀한
사나이에게 사랑을 받은 것이 그녀의 기쁨이 되었다. 네흐류도프의 사랑과 청혼은 그가
자기의 과거의 죄를 씻으려는 도의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심손의 사랑은
달랐다. 그는 카츄사를 한사람의 여자로서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녀에게 사랑을 바치고
있었다. 카츄사와 심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으나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9월이
되자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때때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죄수
일행이 베름 시를 떠날 때까지 네흐류도프는 두 번 카츄사를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마저 자세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흐류도프는 시베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명랑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자기의 과거를 그리고 자기가 지금까지
그 속에 안주하고 있던 사회의 모습을 뚜렷이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모순에 찬 사회의
허위 방종에 물들기만 한 귀족들의 생활 그러한 생활과 사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학대받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그들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카츄사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일어선 그는 한 걸음 나아가서 모순에 찬
더럽혀진 사회의 구제를 위하여 일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다
네흐류도프가 시베리아의 죄수 숙박소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그 곳의 날로 앞에서
나무를 가지고 쪼그려 앉아 있는 심손을 보았다. 그와 함께 자루가 빠진 비로 방을
쓸고 있는 카츄사를 보았다. 카츄사는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잠깐 조용히 말씀 드릴 일이 있는데..."
심손이 네흐류도프에게 말하였다. 카츄사는 깜짝 놀라 두 사나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네흐류도프의 얼굴을 보자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루에 나가자
심손은 침착한 말씨와 진지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실은 다름이 아니라 저는 당신과 카츄사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말씀 드릴 의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카츄사와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에게 고백하였다
"...그러나 저 여자의 색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녀를 세상의 갖은 고초를
다 겪은 훌륭한 부인으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를 구원하여 그녀의 앞길을 밝게 해 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심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네흐류도프는 감격하여 말했다
"저는 다만 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카츄사의 짐을 가볍게 해 주려고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카츄사가 당신과
같이 훌륭한 배우자를 얻은 것이 저로서도 대단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츄사의 복역 중 그 곁에서 보호해 주고 석방된 후에는 그녀와 결혼해야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네흐류도프는 포기하고 마침내 깨끗한 영혼을 도로 찾은 그녀를
심손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는 이제 다른 많은 괴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홀로 남게 되자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카츄사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몇 달이 지났다. 여행지에서 네흐류도프는 변호사로부터 등기 우편을 받았다.
가슴이 설레였다. 그것은 바라고 바라던 카츄사의 감형 통지서였다. 감형 통지서
등본에는 도형을 유형으로 감형한다는 뜻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가지고
음침한 감옥으로 카츄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카츄사는 감형의 통지를 들고 흥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제발 염려 말아 주세요. 전 심손이 가는 곳을 따라갈 결심으로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
"나는 영영 헤어지고 싶진 않소"
네흐류도프는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카츄사는 그의 손을 쥐더니 곧 몸을 돌려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죄송합니다'라고 카츄사는 말했다. 이 말 속에서 네흐류도프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카츄사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자기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고 심손과 운명을 같이하여 영원히 파묻혀 버릴 각오를 했던 것임을 명백히
깨달았다
감옥에서 돌아오자 네흐류도프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한참 방 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카츄사와의 관계는 드디어 끊어졌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제 또
한 가지 일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목격하여 온 죄수들이 받고
있는 너무나도 비인도적인 처지 그리고 냉담한 처사 및 감옥의 비리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욱 올바른 길을 인류는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시정하는 일이
남았다
오락가락하며 생각하는 데 지쳐 그는 램프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의 성경을 들어 읽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읽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경의 한 귀절을 되풀이하여 읽었다
"하느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얻으리라"
그리고 그는 외쳤다.
"그렇다. 하나의 일은 우선 끝맺었다. 이제 또 다른 일이 시작된다"
그날 밤은 네흐류도프에게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의 새로운 생활이
어떻게 끝맺을는지 그것은 다만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벚꽃 동산(Vishnydvy Sad:1904)
해설
러시아의 문호 체호프가 사망하기 1년 전에 탈고한 4막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극작가 체호프로서는 마지막 작품인 만큼 심오한 인생 관조의 눈 날카로운 현실
분석과 천재적인 두뇌로 특징 되는 극작 수법 마디마디의 배역을 표현하는 묘사의
기도 등 그의 예술을 구성하는 온갖 요소가 원숙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만년에 이르러 모스크바 예술좌의 여배우 크닛벨과 결혼함으로써 관계가
깊어지게 된 모스크바 예술좌 배우들의 간청에 의하여 병 중에도 2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초연은 1905년 1월 17일 작가의 명명일을 택하여 모스크바 예술좌에서
열었다. 주연은 그의 아내이며 예술좌인 배우인 올가 크닛벨이었다. 그 무대에서 작가는
축사를 받았다. 이날은 막간에 화려한 축제를 열어 병을 앓는 체호프는 권고에 못 이겨
자리에 참석했는데 그대로 비장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성대한 식장 여러 축사와 연설
그 사이에 할쑥한 체호프가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앉으시오. 앉으시오...
안톤 파블로비치를 앉게 하시오!" 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 모든 사람의 머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것이었다. 과연 체호프는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7월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 성대한 축제는 사실상 체호프의 세상에 대한 고별식이 되었다.
"벚꽃 동산"은 그 집필에서 완성까지 전례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것을
상연하는 데도 무대 감독 및 배우들과의 사이에 맹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 병든
몸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던 작가는 이러한 충돌을 견디어 낼 수가 없어서 희곡을
극장에 내 줄 때에는 3천 루블에 사가서 맘대로 해 달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규에도 상연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후 10년 동안 처음 작가가
요구한 3천 루블의 10배인 3만 루블 이상을 작가 측에 가져 왔다고 한다
작품은 어떤 고장 제일의 명소라고 하는 벚꽃 동산을 배경으로 19세기 말엽 농노
해방에 따르는 귀족 계급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대의 움직임을 평범한 일상 생활을 매개로
뚜렷이 부각해 놓은 것이다. 벚나무로 유명한 주택지는 소유자인 미망인 라네프스카야
의 인정 많고 돈을 아낄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몇 겹으로 저당 잡혀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귀족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하여 땅은 이전의
농노였던 자본가 로파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벚나무는 도끼에 찍혀 넘어진다.
극의 형식은 이른바 정극 또는 기분극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독창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세상 이야기 단편적인 철학적 추상론 내용 없는 익살 거의
무의미해 보이는 감탄사만으로 극이 진행되어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효과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해 모호한 분위기에서 생활의 실상이 상징적으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주의의 예술이며 훌륭한 음악의 기능을 지니는 상징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약전
체호프는 1860년 1월 17일 흑해에 면한 남러시아의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는 돈으로 자유를 산 농노였고 아버지는 이미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항구에서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네 아들에게는 힘닿는 대로 교육을 받게 하였다.
소년 시절에는 가정이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체호프는 이 곳의 하층 사회
소상인 농부 뱃사람들 틈에서 지냈다. 교육은 그 지방의 중학교에서 받고 그 후
온 집안이 모스크바로 나와 그는 1879년에 의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1881년의
대기근과 그에 이은 1892년의 콜레라가 만연할 때에는 자진하여 이들의 구제
운동에 힘썼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에게 세상의 실상을 파악하고 많은 사람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갈 때 왜 의과를 선택하였던가는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 선택이 나중에 그의 문학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그의 문학 활동은
대학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19세기부터 익명으로 단편적인 소품을 신문
잡지에 발표하여 그 고료로 가계를 도우면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과로와 영양 부족으로 건강을 헤쳐 그의 죽음을 빠르게 하였다고 한다. 졸업하자
의학사의 칭호를 얻었으나 개업하지 않고 1년 동안 어느 병원에 의사로서
근무하고 문학에 정진하기 위해 다시 의사 노릇을 하지 않았다. 후에 시골에
칩거할 무렵 병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을 보기가 딱해서 봐 준 일은 있다.
1885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고 수도의 문학자들과 사귀게 되어 많은 자극을
받았으며 특히 노작가 그리고로비치로부터 재능의 낭비를 충고한 격려의 편지를
받고 겨우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자각하게 되었다. 1888년에 단편집 "황혼에"로
푸슈킨 상을 탔다. 1892년에 그는 그의 건강을 몹시 상하게 한 사할린 여행을
하였다. 그 당시는 횡단 철도 개통 전이라 마차와 썰매 외에는 교통편이 없는
시베리아를 거쳐 황량한 지방을 2개월 간 여행하면서 그 곳의 감옥 제도와
죄수들의 생활을 조사하였다. 그 후 배로 인도양을 거쳐 귀국하였는데 "사할린
기행", "유형지에서", "구세유프" 등이 이 여행 체험에서 얻은 것이다.
1892년에는 모스크바 부근의 세르푸호프군에 조그마한 영지를 얻어 창작
생활에 들어갔으며 농민들과의 사이에도 따듯한 관계가 맺어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체호프는 그 당시 불치의 병이었던 폐결핵이 발병하여 남쪽 크리미아의
얄타 해변가로 옮겼다. 건강이 좋을 때 한해서 그의 희곡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모스크바 예술좌를 방문하였다.
1898년의 '드레퓌스'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의 재능의 최초의 발견자였던 스볼린과의 우의를 끊었다.
1900년 학사원의 명예 회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으나 친구 고리키가 회원
명부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자 즉시 사절장을 보내어 탈퇴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1904년 병세가 악화되어 독일의 요양지 바덴베르로 옮겼는데 한 달
후인 7월 2일 마흔네 살의 장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모스크바에서
거행되었다.
체호프의 작품은 무려 300편이 넘는다. 장편 소설이 특징인 러시아 문학계에서
체호프는 거의 유일한 단편 작가이며 단편의 형식과 취재에서 이룬 그의 공적은
그에게 '러시아의 모파상'이라는 칭호를 받게 했다. 극작에서 새로운 수법인
기분극의 창출은 세계 문학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체호프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톨스토이는
'보옥같이 순수한 러시아인의 작가'로서 사랑하였고 "이 진주 같은 작품을 보라.
나는 마침내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절찬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작가들
사이에도 찾기 힘든 아름답고 정다운 것이었다.
체호프의 초기 작품은 순수한 웃음을 노린 경쾌한 소품과 사회 풍자적인
색채가 짙은 우울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작품의 대부분이 소품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었는데 체호프는 당시의 유명 작품의 관습에 따라 하급 관리 상인
교사 배우 화가 등 도시의 소시민충에 속하는 인물을 경쾌한 필치로
희화함으로써 작가의 천재적인 재능을 여지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
계열에 속하는 것은 독특한 유머에다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른바 '체호프의
우수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그들 작품 대부분의 비굴한 소시민적
근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권력층에 대한 신랄한 항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특히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같이 안일한 예수와
유머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19세기 말엽 농노 해방의 뒤를 이어 계속된
정쟁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지식 계급은 염세주의로 흐르고 사회 전체는 태만과
암흑 속에 허덕이게 되었을 때 그의 칼날같이 예민한 직감력은 사회의 온갖 부정
부패 허의 모독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약 천 편의 소설 1막 물 6편 극작 5편이 있으나 주요한
것으로는 "맛없는 이야기", "아내", "결투", "이바노프", "귀여운 여인", "세 자매",
"6호 병실", "바냐 아저씨", "갈매기", "기념제", "곰", "벚꽃 동산" 등이다
줄거리
-제1막-
'아이들의 방'이라고 불리는 방에서 두나샤와 로파힌이 5년만에 파리에서
돌아오는 여지주 라네프스카야 부인을 기다리고 있다. 먼동이 틀 무렵이다.
5월이라 아직 공기는 차가우나 벚꽃 동산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다.
멀리 기차가 닿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후 집에 마차가 두 대 닿는다.
라네프스카야와 딸 아냐 그리고 이들을 마중 나갔던 부인의 친오빠인 가예프
부인의 양녀로 이 집의 가정을 맡고 있는 빌랴 그리고 이 집에 70년 동안이나
일하고 있는 머슴 필즈 등이 들어온다. 부인은 울고 있다.
"내 아이들의 방, 귀엽고 예쁜 아이들의 방... 나는 조그마할 때 이 방에서
잤지...(울면서) 지금도 꼭 난 어린아이 같아..."
라네프스카야는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족도 아닌 어느 변호사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빚을 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재간도 없는 주정뱅이었다.
남편이 죽자 부인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그 사람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치 천벌처럼 그녀가 사랑하던 갓난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
부인은 이 강물을 보고 싶지 않아 외국으로 멀리 떠났다. 그녀의 애인도 뒤를
따랐다. 애인이 병을 앓게 되었다. 부인은 멜트나의 부근에 별장을 장만하여 그를
간호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빚에 쪼들려 별장을 팔아 파리로 갔다. 애인은 딴
여자와 눈이 맞아 그녀를 버렸다. 부인은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불현듯
고향과 딸 아냐가 그리워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고향은 지금은 황폐하여 이미 옛날과 같은 목가적 생활은
찾을 수 없었다. 유서 깊은 벚꽃 동산은 저당 잡혀 있었으며 여름에 경매를
당하게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그의 오빠인 가예프는 이러한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어린아이나 다름 없었고 어떻게 할 바를 몰랐으며 그 동안 무슨 수가
생겨서 파산에서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로파힌은 이 부근의 상인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사람이었다. 그는
라네프스카야 부인 영지에서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자주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이 저택에 찾아와서 부인에게 귀여움 받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외국에서 5년 동안이나 살다 오셨으니 이제 어떻게 변했을까? 참
좋은 분이었지 언젠가 아버지한테 뺨을 얻어 맞고 코피를 흘리고 있었지 그 때
부인은 나를 이 '아이들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얼굴을 닦아 주었어 '울지
말아요. 작은 농부님 장가 갈 때까진 나을 테니까'하고 말했지...작은 농부... 사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였어 나는 지금 하얀 조끼를 입고 노란 구두를 신고 있지만
돼지코를 치켜 들고 신사들 속에 한몫 낀 것뿐이고 ... 돈이야 가지고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역시 농사꾼은 농사꾼이야... 책을 읽어보았지만 무슨 소린지도 알
수 없어 잠이 들어 버렸지..."
로파힌은 파산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부인과 가예프에게 그들의
경제 상태를 설명하고 대책을 일러 준다.
"아시다시피 댁의 벚꽃 동산은 저당 잡혀 팔리게 되었습니다. 8월 22일이
경매할 날이지요.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안심하고 편히 쉬세요. 빠져 나갈 길은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댁의 영지는 도시에서 25리밖에 안 떨어졌고
변두리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지요. 만약 이 벚꽃 동산과 강가의 토지를
별장용으로 쪼개서 세를 내게 되면 그 임대료는 문제 없이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낡아빠진 이 집이나 케케묵은 벚꽃 숲은 헐고 베어 내야 합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재산을 모은 로파힌의 계산으로는 벚꽃 동산에서
2년에 한 번밖에 안 열리는 벚꽃 열매는 사갈 사람도 없고 돈벌이도 안 되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인과 가예프에게는 로파힌의 제안이 바보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도내에서 으뜸가는 자랑거리요. 백과 사전에까지 이름이
실려 있는 이 벚꽃 동산을 없애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들은 벚꽃 동산
없는 자기들의 생활을 생각할 수도 없어요.
로파힌은 그 후로도 기회만 있으면 여러 가지로 납득시키려고 했으나 자기들의
집을 헐어 별장지로 내 주고 벚꽃나무를 자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믿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라네프스카야는 재산이 없어
로파힌에게 용돈을 빌려 쓰는 형편인 지금도 길 가는 거지에게 금화를 던져
주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가진 돈을 빌려 주는 버릇을 어쩌지 못했다.
가예프는 얼음 사탕을 빠는 것과 당구치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항상 쓸데없는 농담만 하고 잇는 호인에 불과했다.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는
바랴는 항상 허리춤에 쇠뭉치를 차고 말없이 싸다니며 집안을 보살피고 있었다.
가정 교사로 와 있는 프랑스 여자는 재미있는 복화술로 사람들을 웃겼다.
파리에서 제법 멋쟁이가 된 머슴 아샤는 두나샤와 희롱하고 있다. 이렇게 무기력
하고 침체한 공기 속에 명랑하고 활발한 소녀 아냐는 예전에 부인이 잃은
어린아이의 가정 교사로 이 집에 기식하고 있는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그들은 모든 과거를 깨끗이 버리고 빛나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씩씩한 꿈을 꾸고 있었다. 로파힌이 되풀이 주장하는 제안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라네프스카야 가예프는 여전히 무슨 좋은 수가 생겨서 빠져 나갈
구멍이 있으려니 믿고 있다. 늙은 백모가 죽으면 유산이라도 받을지 모른다는 등
꿈 같은 일만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무위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제2막-
마침내 경매의 날은 왔다. 이 날 집에서는 무도회가 열린다.
"예전에 이 댁의 무도회에서는 대장이나 남작이나 해군의 사령관들이 와서
춤추었건만 이제는 우체국원이니, 역장이니 하는 사람이나 모시러 가야한다. 그런
사람들도 선 뜻 나와 주지 않으려 하니... 원 제기랄"
하인 필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예프는 경매장에 가 있다. 라네프스카야는
경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절망적인 불안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가예프와 로파힌이 들어온다. 가예프는 경매의 결과를 이야기할 기운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벚꽃 동산은 팔렸어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로파힌 누가 샀나요?"
"제가 샀습니다. ...여러분 좀 참아 주시오. 저는 머리가 멍멍해서 말을
못하겠군요... 경매장에 가 보니 벌써 데리가노프 녀석이 버티고 있지 않아요?
가예프는 1만 5천 루블밖엔 안 가지고 계셨는데 데리가노프는 처음부터 3만을
걸었지요. 이건 안 되겠다 생각해서 저는 4만을 걸었지요. 그랬더니 저쪽에서 4만
5천으로 올리기에 저는 5만 5천으로 올렸지요. 저쪽이 5천씩 올려가고 저는
1만씩 올려가서 결국 9만 루블로 낙찰 됐지요. 벚꽃 동산은 내 것이오! 내
것이오! 꿈이 아닐까? 벚꽃 동산이 내 것이 되다니! 여러분께서는 저를 술이
취하거나 돌았다고 웃으시는 모양인데 웃지 마시오. 항상 얻어 맞기만 하고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봉사놈이 세계에서 다시 없는 아름다운 영지를 샀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종살이를 하면서 감히 부엌에도 못들어 가던 이 농노가
영지를 산 것이오. 여보게! 악대를 불러 실컷 떠들어 주게 로파힌이 벚꽃 동산에
도끼를 대면 나무들이 땅바닥에 텅텅 쓰러진단 말이야! 얼마 안 가서 여기에
별장이 죽 들어서고 우리 손자들과 증손자들은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겠지... 자 악대들 어서 불고 치게!"
부인은 의자에 몸을 떨어트리고 울고 있다. 로파힌은 나무라듯이 말한다.
"마님 왜 저의 말씀을 듣지 않았어요. 이젠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눈물을
흘리며) 아아 이런 일들이 빨리 끝나 버렸으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불행한
생활이 어서 끝나 버렸으면!"
아냐가 와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위로한다.
"엄마 엄마 듣고 계세요? 소중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엄마 난 괜찮아요. 벚꽃
동산은 팔렸어요. 이젠 없어졌어요. 하지만 엄마 울지 말아요. 엄마의 생활은
아직 남아 있지 않아요? 엄마의 고운 마음씨도 남아 있지 않아요. 자 가요. 나와
함께 가요. 여기서 나가요.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뜰을 만들어요. 엄마도 그걸
보면 알게 될 거에요. 깊은 기쁨이 마치 서산에 기우는 해처럼 엄마의 마음에
스며들 거에요. 그러면 엄마도 웃을 거에요! 자 가요. 엄마!"
-제3막-
제1막과 같은 무대다. 그러나 이제 커튼도 없고 가구들은 쓰레기처럼 구석에
쌓여 있다. 사람들은 쓸쓸히 정든 집을 떠나간다. 벌써 가을이다. 부인은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지난 날의 애인을 찾아 파리로 가게
되었다. 아냐는 페테르부르크의 여학교로 트로피모프는 대학으로 떠난다. 바랴는
딴 집의 가정부로 옮긴다. 가예프는 월급쟁이로 은행에 취직하여 읍으로 나간다.
농부들이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울지는 않고 있으나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말도 못하는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지갑에 들었던 돈을 모두 털어 그들에게 나눠
준다. 가예프가 나무라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뿔뿔이 이 집을 나가자
부인과 가예프만 남는다.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운다.
"아아, 내 아름답고 정다운 벚꽃 동산!... 내 생활, 내 청춘, 내 행복
안녕!(아냐가 밖에서 즐거운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또 한 번 마지막으로 이
벽과 유리창을 봐야지! 이 방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즐겨 거닐던 곳이야..."
아냐의 재촉하는 소리가 또 들린다.
그들이 나가자 무대는 공허해진다. 사방의 문짝에 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는 고요해진다. 이 고요 가운데
벚꽃나무를 베어 내는 도끼 소리가 적막하게 들려온다.
발자국 소리가 난다. 병이 나서 병원에 보냈던 늙은 머슴 필즈가 나타난다.
그는 비틀 걸음으로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려 본다.
"쇠가 잠겼구나 다 가버렸나 보다...(의자에 걸터앉는다) 나를 잊어버렸나
보지... 아무래도 괜찮아 여기 이렇게 앉아 있지 뭐...(무엇인지 알아 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중얼거린다) 아아 한 평생이 다 갔구나 살아 있는지 모르게
끝났구나...(눕는다) 잠깐 눕기로 하자... 필즈야 너는 이젠 다됐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제기랄 못난 녀석아!"(누운 채로 꼼짝 않는다)
멀리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가야금 줄이 끊어지는 듯한 슬픈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꺼져간다. 고요 다만 멀리 벚꽃 동산에서 나무를 찍는 도끼
소리만이 울려 온다.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1857)
해설
"보바리 부인"은 플로베르가 1852년부터 1856년 사이에 쓴 작품으로
"시골 풍속"이라는 부제로 출판되었었다.
"보바리 부인"이 출판된 이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플로베르와 출판사의
편집자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사실 이 작품의 초판은 원본 그대로가 아니었다.
출판사는 "보바리 부인" 출판 후에 반드시 물의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어떤 부분은 간단히 요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도덕 관념은 이 소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 문학사상 획기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법정 투쟁은 플로베르의 승리로
마감했고 그 이듬해인 1857년에 원본이 햇빛을 보았으며 플로베르는 일약
일류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보바리 부인"은 평범한 시골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 생활과 환경을
정밀하게 표현한 것으로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최초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사실주의 운동의 기치가 된 작품이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의 로맨틱한
영혼에 대한 동경과 그녀를 둘러싼 지극히 평범하고 무의미한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파멸을 묘사함으로써 꿈과 현실의 차이가 빚어 내는 환멸
그리고 그 환멸 속에서 출구를 찾아 몸부림치는 비극적인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현실이 꿈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꿈이 현실과 너무 먼 곳에 있을 때 인간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플로베스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이 자신의
꿈에 충실했을 때 맞게 되는 현실적인 파멸을 경고하려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파멸을 맞게 되더라고 꿈을 꾸게 되는 인간의 속성을 그려 낸 것인가?
진실은 현실 세계에서는 초라하며 비극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에 대해 의미 심장하게 언급한 말을
기억해보자.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작가 약전
플로베르는 1820년 루앙 시립 병원 외과 부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같은
해에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도 탄생했으며, 또한 그도 의사의 아들이라는 점은
일치된다) 병원에서의 견문이 작가 수업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며 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의사 샤를의 이야기도 병원 생활에서 얻은 것이 아닌가 추축된다.
그는 예술에 몸을 바쳐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플로베르의
문학상의 위치는 사실주의의 완성자라는 점에 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비톨 위고를 숭배했으며 열 살 전후에 이미 몇 편의
희곡을 써서 친구들을 모아 놓고 연극을 했다. 문학 방면에는 조숙했으나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수학을 못하여 저능아가 아닌가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일생 동안 위고를 숭배하면서도 위고의 낭만주의와는 반대되는
사실주의의 주창자가 된 것이다.
"우리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는 단 하나의 정확한 표현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에 맞는 표현에는 하나의 형용사밖에 없다"라고 한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플로베르에게는 문학이란 곧 문장이고 표현이었던 것이다.
"가두 마차의 말이 그에 잇따른 또 그에 앞선 그 외의 오십 필의 말과 어느
점이 다른가를 단 한 마디로 말해 주게"
그의 제자 모파상에게 한 말이다. 어디까지나 현실을 정확하며 적합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는 의미이다.
작품으로 "성 앙투안의 유혹", "살람보", "감정 교육", "브봘과 페규세" 등이
있다.
줄거리
프랑스의 북부 토스트란 시골에서 사는 샤를 보바리는 병원 개업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샤를은 사랑하는 여성이 없었으므로
마흔 다섯 살이나 된데다 얼굴도 밉기까지 했지만 상당한 지참금 때문에 구혼
경쟁이 많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샤를은 결혼을 하게 되면 행복한 생활을 기대했다. 좀더 자유롭고 윤택하게
지내게 되기를... 그러나 그의 첫째 부인인 엘로이즈 뒤뷔크 부인은 주장이
심하고 사사건건 샤를의 생활을 간섭했다. 그의 부인은 몹시 질투가 심했다.
샤를에게 오는 편지를 먼저 뜯어 보고 그의 뒤를 살피고 여자 환자가 있을 때면
문 뒤에서 진찰실을 엿듣곤 했다. 그런데다 무척 신경질적이어서 샤를은 아내의
기분을 맞춰 주느라고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밤중에 베르토라는 시골 농가의 골절 환자가 왕진을 청해 왔다.
토스트에서 베르토까지는 육십 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환자인 루올 씨는 이
고을의 꽤 부유한 지주였다. 홀로 된 루올 씨에게는 엠마라는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치료를 시작한 지 사십여 일 후에는 거의 완치가
되다시피해서 환자 자신은 물론이요. 이웃 사람들끼리 샤를을 훌륭한 의사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샤를은 사람들의 호평을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이 집 처녀에
대한 면목이 서는 점에서는 다행으로 여겼다.
치료 기간 중에 그는 매주 한 번씩 규칙적으로 환자를 찾아보았으며 그 외에도
마치 우연히 들른 듯이 자주 그 집을 들락거렸다. 그것은 물론 엠마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어느덧 이 베르토로 말을 모는 일이 다시 없는 즐거움이 되어 있었다.
엠마는 유르싀를린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와 집안 일을 돕고 있었다. 여러
가지 교양을 쌓은 꿈이 많은 엠마는 생기가 넘치고 투명하리 만큼 살결이 뽀얀
아가씨였다. 반가이 맞아 주고 상냥한 말씨로 환송해 주는 엠마에게서 샤를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샤를은 루올 노인이 완치된 후에도 이 집에 자주 들렀다. 그러나 샤를은
부인의 심한 잔소리가 귀찮아서 엠마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을 끊고 말았다.
그럴수록 만정은 가슴 속에서 불타올랐다.
샤를의 부모는 가끔 아들과 며느리를 보러 왔다. 그러나 번번히 며느리와
싸우고 돌아갔다. 재산이 많다고 하여 구혼 경쟁들을 했지만 실은 엘로이즈의
재산이란 것도 소문과는 달랐다.
결혼 전에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난 일로이즈는 점점 더 밉게만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또 시부모와 충돌이 생긴 지 얼마 후에 엘로이즈는 별안간
각혈을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샤를이 상처를 한데 대한
동정에서인지 환자의 수가 늘어갔다. 샤를은 베르토에도 마음대로 다니기
시작했다. 막연하면서도 새로운 행복을 꿈꾸면서 그의 얼굴에는 즐거운 빛이
떠올랐다. 더욱더 젊어지는 것만 같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희망을
다짐하면서...
엠마는 실상 샤를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어쨌든 이 남자가 자기를
찾아 주는 유인한 이성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랑이라든가 정열이라든가 하는
말들이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올 때 엠마는 무언지 모를 감미로운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 샤를은 대단히 결심을 하고서 베르토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엠마를
대하자 또 청혼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엠마가 없는 틈을 타서 루올
씨에게 말을 꺼냈다.
"루올 씨 저..."
과거를 가진 남자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 루올 노인은 곧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챘다.
"알았소 나로선 이 이상 바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애의 생각을 물어
보기로 하지요"
엠마는 얼떨떨했다. 그야말로 무언지도 몰랐다. 결국 구혼은 수락되었다. 다만
샤를의 상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아주 성대했다. 그 지방 풍속에
따라 갖출 것을 다 갖추었고 별다른 불만이 없이 신혼 여행도 했다. 그리고
토스트에 정착했다.
엠마는 샤를의 후처로서 보바리 부인이 된 것이다
시골 병원의 생활은 한결같이 단조롭기만 했다. 엠마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불안에 뒤이어 이내 환멸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두 사람의 생활이
친밀해질수록 구 내면은 점점 남편에게서 멀어져 갔다.
샤를이 하는 얘기는 결혼 전처럼 감격을 주지도 않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화제들 뿐이었다. 그는 헤엄을 칠 줄도 물랐고 검술도 총술도 모르며 승마에도
연극에도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내라는 것은 무엇이나 다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무슨 일이나 다 뛰어나야 하며 여자를 불 속으로 끌어들일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엠마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샤를은 이런 점을 구비하지 못한
남편이었다. 샤를은 엠마가 샤를에게 염증을 내는 줄도 모르고 그는 아내가
행복해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은 이 움직임이 없는 평온함
둔한 단조로움 그리고 자기가 사내에게 준 행복을 생각하면서 샤를을
원망하였다.
엠마는 가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황혼이 깃든 창가에 기대 서서
한없는 꿈을 쫓으며 공상에 잠길 때가 많아졌다. 수녀원 시절이 새삼스럽게
그립기도 했다. 무능하고 평범한 시골 의사의 아내로서 일생을 따분한 시골
구석에서 보내야 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우울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후작댁에 초대되어 화려한 무도회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 밤은 보바리 부인에게 추억을 남겨 주었다.
많은 신사 숙녀들 틈에 끼어도 엠마는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용모의
아름다움에서나 화술에서나 몸매며 춤에 있어서도 의젓한 숙녀였다. 무엇보다도
엠마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 삶들은 지금쯤 호화 찬란한 파리에서
사교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텐데 자기는 이렇듯 보잘것없는 시골에서 세월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청춘도 아름다움도 이대로 시골 구석에서
한낱 풀잎처럼 시들고 말리라고 생각할 때 엠마는 한없이 초조해졌다. 무미
건조한 생활과 초라한 자기 모습에 점점 더 싫증이 났다.
엠마는 토스트가 싫어서 환경을 바꿔 보려고 남편에게 졸라 반년 전에
용빌르라베이라는 시골로 이사를 했다.
이 곳은 루앙 시에서 8마일 떨어져 있고 조그만 강이 마을을 둘러싸고 흐르며
왼편은 초원 오른편에는 밭이 쭉 뻗어 있었다. 풀밭 가장자리를 흐르는 물은
목장의 빛깔과 밭의 색깔을 하나의 흰 줄로 구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정원과 정적에 익숙해 온 엠마는 좀더
인간적인 자극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 것만 같았다.
어려서부터 시와 소설을 많이 읽고 음악과 그림을 좋아한 엠마에게 샤를과의
결혼 생활은 다만 우울한 마음을 길러 줄 따름이었다. 밤낮으로 환자나 대하고
의학 서적이나 뒤적거리는 무능하고 평범한 시골 의사의 아내로서 일생을 이
마을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 만큼 울적해졌다.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의 마음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엠마 앞에 나타난
사내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레옹이었다.
이 마을에서 엠마에게 자극을 주는 유일한 존재는 공증인의 서기로 있는
레옹 뿐이었다. 레옹은 그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문학이나 음악에
이해가 있었다. 서로 통하는 이야기 상대가 되었다.
보바리 부인은 이 청년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레옹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면서도 수줍어서 말을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여자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은 이런 일을 자기가
먼저 얘기하리 만큼 경솔하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면서 마음 속에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말만 하는 것이었다. 매력이 넘치는 레옹의 얼굴을 볼 때 부인은 항상
불안한 초조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레옹 역시 엠마의 재능과 미모에 끌렸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옹은 사랑의 비밀을 끝내 털어놓지 않고 파리로 유학의 길을
떠나버렸다.
레옹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부인의 가슴은 마치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그이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내가 좀더 대담하게 모든 것을 고백하지 못했던가' 보바리 부인은
창문을 열고 서서 마차로 떠나간 레옹의 뒤를 쫓기나 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먹장 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강한 바람이 포플러 나무를 뒤흔들고
지나가더니 이어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빗발이 나뭇잎을 때리고 지나간
후 금방 해가 다시 났다. 모래 위의 물웅덩이에는 아카시아 꽃이 떠 있었다.
'이제는 가고 없는 레옹!'
부인은 물끄러미 아카시아 꽃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날 저녁 우연히 약제사 오메가 와서 레옹에 대한 얘기를 했다
"이런 촌에 있을 때와는 달리 레옹도 아마 금방 파리가 좋아질 것입니다.
술집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가장 무도회에서 샴페인과 파리 여인에게 정신을
잃고 말겠지요"
이 말을 들으니 보바리 부인은 마치 손 안의 구슬을 놓친 듯 후회했다. 나는
하나의 행복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샤를의 평범하고 권태로운 얼굴을 보니 한결 더
우울해졌다
결혼 전 일을 돌이켜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샤를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변덕으로 싫어지게 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이외에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결혼 당시는 엠마도 신부답게 가구를 여러 가지로 꾸며서 기분을 전환시켜
보기도 하고 커튼의 무늬를 궁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반 년쯤 지나서부터는
왜 이처럼 무능하고 둔하고 따분한 사내와 결혼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일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어떠한 남편을 만나게 됐을까 하고 여러
가지 타입의 남자를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당장 샤를의 품에서
빠져 나갈 결심도 생기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불만을 참고 억제하는 것이 지나쳤든지 히스테리 증상이 생겼다.
샤를은 그래도 의사로서 꽤 성공한 편이었고 생활에 어떤 곤란도 받지 않을 만큼
무척 바빴다. 그리고 여전히 아내가 아무런 불만이 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은 한없이 외로웠다.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매력을 느낀 레옹도 멀리 파리로 가버리지 않았는가! 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닳아빠진 구두처럼 점점 주름이 늘어갈 뿐이다. 부인은 이러한
허전함을 걷잡을 수 없었다.
계집애를 낳았으나 어머니로서의 애정을 느끼지도 못한 채 곧 남에게 맡겨
버렸다. 결혼은 사랑의 형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엠마의 경우는 결혼이 무덤과도
같이 쓸쓸한 것이었다. 남편은 아내의 빗이나 반지 목도리 따위를 어루만지기도
하며 하얗게 드러난 팔과 어깨에 사랑스러운 키스를 하곤 했으나 일단 남편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 엠마에게는 그런 애무조차도 도리어 불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랑이라든가 정열 감동 등 소설 따위에서 즐겨 읽은 아름다운 말들이 현실에
있어서는 이다지도 비참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자기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슬픔을 가져오는 원인일까 생각하면서 보바리 부인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고요한 저녁이면 이런 생각이 더욱 새삼스러웠다. 창에 비치는 어스름한 빛이
물결치듯 조용히 가라앉는 저녁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들은 자기의
생활 자체와도 같이 꼼짝도 않고 캄캄한 바다에 빠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시계는 째깍째깍 그저 반복일 뿐인 시간을 새기고 있다. 자기 마음은
헝클어졌는데 주위의 만물은 어쩌면 이렇게도 조용한가 하고 놀라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 때 요즘 집에 돌아와 있는 두 살 난 딸 베르트가 아장아장 걸어와서
'마마' 하고 앞치마에 매달렸다. 보바리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매정스럽게
밀어냈다. 자기의 귀중한 공상을 무너뜨린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어린애는 더욱 어머니 무릎에 매달렸다.
"귀찮다는 데도!"
부인은 재차 팔꿈치로 아이를 떠밀었다. 저만치 옷장에 머리를 부딪히며
아이가 쓰러졌다. 자지러질 듯한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부인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이 어린 것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보바리 부인은 베르트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가다간 내 생활이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구의 탓인지 알 수도 없는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몸서리칠 만큼 단조로운 생활에도 더러는 뜻하지 않은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즉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공진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지사가 몸소 참석하고
표창 받을 농부들이 가족을 데리고 모여들었다.
보바리 부인은 최근에 알게 된 로돌프라는 지주와 함께 이 모임에 참석했다.
로돌프는 유세트 장의 주인으로 아직 독신이었다. 1년 수입이 일만오천
프랑이나 된다는 소문이 도는 사람인데 그의 머슴이 진찰을 받으러 온 일이 있어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부인과도 서로 알고 지내게 됐다.
호색가인 로돌프는 보바리 부인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미 욕심이 생겼다.
마음 속 깊이 찌르고드는 그 여자의 눈매 하얀 살결과 표정이 풍부한 얼굴
첫눈에 반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로돌프는 오늘의 공진회가 절호의 찬스라
생각하고 보바리 부인을 청해서 같이 온 것이다.
엠마는 이 날 따라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였다. 엷은 색깔의 리본이 달린
보닛 밑으로 햇빛을 받아 새하얀 얼굴이 또렷하게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길다란
눈썹에 가리운 크고 푸른 눈동자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드러낸 살결은 구슬이
굴러 떨어질 듯 매끈했다.
보바리 부인은 이 곳에 오는 도중 들국화를 꺾으면서 로돌프에게 말했다.
"참 둘국화가 곱네요. 마을 처녀들은 이걸로 사랑을 점칠 수 있대요"
균형이 잡힌 몸매에 장부답게 생긴 로둘프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여자를
상대해 온 만큼 보바리 부인의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부인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 가를 곧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부인을 위해서 점을 쳐볼까요?"
"아녀요. 그런데 로돌프 씨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계시죠?"
"글쎄요. 그러나 만일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면 정말 온 정열을
기울여서 사랑하고 싶은 것만은 사실이죠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사막을 걷는
거나 마찬가질 겝니다"
한 자리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 틈에 끼었을 때 로돌프의 차림새는 한결 더
멋이 있었다. 그는 지금 서른 네 살의 한창 나이에 굵직한 줄무늬의 바지를 입어
더욱 젊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구두에는 풀잎이 비치리 만큼 반들반들하게
니스 칠이 되어 있었다. 조끼는 회색 무늬가 들어 있고 저고리 소매에는 주름
장식이 잡혀 있어 농부들 틈에 끼어 있는 그의 모습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참사관이 일어서서 군중에게 극히 형식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로돌프는
부인 곁에 다가가서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판에 박은 듯하고 생명이 없는 저따위 맥빠진 말은 진저리가 나잖아요?
진실하고 위대한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진정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정열만이 인생의 보람이요. 인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영웅적인 행위와 그 감격스러움 시와 음악과 예술 그러한 것의 바탕이 되는
사랑과 정열!"
보바리 부인은 귀밑까지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얼마쯤은 세상의 이목과 도덕에 따라서 살아가야죠"
"아닙니다. 부인 도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저 바보 같은 친구들이
떠들어대는 체면상의 도덕 또 하나는 사랑 속에 꽃 피는 영원한 도덕입니다.
이 세상에서 매력을 지닌 도덕은 참다운 용기를 지닌 특출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높은 의미의 도덕입니다"
말쑥하게 가다듬은 로돌프의 머리에서 풍기는 포마드 냄새가 그의 야릇한
체취와 함께 보바리 부인을 자극하고 황홀한 유혹을 느끼게까지 했다.
그 후 여섯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로돌프가 보바리 부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자기 경험을 통해서 사랑을 이루려면 여자에게 적당한 자극을 준 후에 얼마 동안
간격을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저녁 무렵이어서 유리창에는 차츰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보바리 부인은
홀로 있었다.
로돌프가 객실에 들어서자 보바리 부인의 안색은 본인이 느낄 만큼 달라졌다.
이러한 얼굴빛과 태도를 보고 로돌프는 자기의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첫인사를 받고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일이 있었고 몸이 불편하고 해서 이렇게..."
"몹시 편찮으셨어요?"
그녀는 놀란 듯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몸살이 좀... 찾아 뵙기가 두려워서"
"왜요?"
"모르시겠습니까?"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차근히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로돌프는 말을 이어서
"엠마"
"어머나 그렇게 부르시다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그를 바라보며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찾아 뵙기가 두려웠던 것도 모두가 이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가슴에 넘쳐
흘러 불쑥 한 마디 튀어나온 당신의 이름 그 이름을 왜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까?
보바리 부인... 이것이라면 누구든지 당신을 부르는 것이죠... 더욱이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딴 사람의 성입니다. 딴 사람의..."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에 대해서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저는 오직 절망뿐입니다. 아니 실례했군요! 작별하겠습니다...안녕히...
저는 멀리 떠나가겠습니다. 당신이 두 번 다시 저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먼 곳으로...그런데도...오늘이란 이 날이 ...어떤 힘으로 하여금 저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줄달음치게 했을까요? 사람이 하늘과 싸울 수 없는 것처럼
천사의 미소에는 대항할 수 없는 것처럼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녀는 황홀해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로돌프의 속삭임의 열기에 의해서 달아올랐다.
"그러나 비록 오늘 방문을 안했어도 비록 만나뵙지 못했다 해도 저는 항상
당신 곁에서 당신을 감싸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저는 잠자리를
걷어 차고 이 곳까지 왔었죠. 당신의 집을 달빛에 비친 지붕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창가에서 흔들거리는 정원수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비치는 램프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아, 당신은 짐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곳에 그렇게 가까이
또 그렇게 멀리 불쌍한 사나이가 있었던 것을..."
"오, 당신은 참으로 좋은 분 그런 생각까지 하실 줄은..."
부인은 숨을 내쉬며 간신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것뿐입니다. 의심은 안하시겠죠?
말씀해 주세요! 단 한 마디라도 사랑을 의심 않는다고"
이렇게 말하면서 로돌프는 의자에서 차츰차츰 밑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때 부엌 쪽에서 신발 소리가 나며 하녀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로돌프는 시치미를 떼고 일어났다.
다음 날 말에 탄 보바리 부인과 로돌프의 모습이 마을 밖 숲에 나타났다.
어젯밤 샤를이 부인의 몸이 약하다고 걱정스럽게 이야기했을 때 로돌프는
승마를 하는 것이 건강에 가장 적당하니 생각이 있으면 집에 있는 말을 빌려
주겠다고 말하였다 남편 샤를은 좋아하면서 아내를 대신하여 감사해 하고
부탁했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이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꽃이 만발한 들을 지나니 빽빽이 우거진 울창한
나무 숲이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렸다. 로돌프는 말을
잡아맸다.
그녀는 오솔길 사이의 이끼 낀 곳을 걸어갔다. 스커트 자락을 치켜 잡기는
했으나 너무 긴 탓으로 걷기가 불편했다. 로돌프는 그 뒤를 따라가며 양말 신은
그녀의 흰 다리의 윤곽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어디를 가는 거에요? 이젠 그만 가요. 지쳤어요"
돌아다보며 물었다. 로돌프는 아무 대답도 없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곳에는 노목을 잘라 눕힌 것이 많았다. 두 사람은 자빠져 있는 나무 기둥에
걸터 앉았다. 로돌프는 자기의 사랑을 그녀가 놀라지 않게 조용조용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흩어진 톱밥들을 발 끝으로 걷어차며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은 이제 하나로 되지 않았습니까?"
로돌프는 단정적으로 물었다
"아녜요. 잘 아시면서 그건 안 될 말씀이에요"
그녀는 일어서서 돌아가려 했다. 로돌프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잠시 황홀한 눈매로 사나이를 바라보던 부인은 갑자기
"아아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말은 어디 있어요? 돌아가요"
로돌프는 화난 듯이 당황한 몸짓을 하였다. 그리고 이상한 미소를 띄우며
양팔을 활짝 벌리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더듬거렸다.
"어머 무서워요. 그러지 마세요. 자 이제 돌아가요"
"하는 수 없죠"
그는 야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평상시와 같은 은근하고 부드럽고 서먹서먹한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그에게 팔을 걸치며 돌아가려 했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저의 사랑을 믿지 않으십니까? 제발 제 말을"
그는 팔을 벌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두 사람의 말은 나뭇잎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연못가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연못 수면에는 풀들이
파랗게 떠 있었다. 시들은 수련이 동심초 사이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풀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에 개구리가 뛰어서 숨어버렸다.
"제가 나빴어요.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다니 아무래도 제가 좀 돈 것이 아닌지
몰라요"
"왜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아 로돌프 씨 저는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말하였다. 스커트 자락이 로돌프의 옷에
감겼다. 그녀는 풀밭에 반드시 누워 하얀 턱을 뒤로 젖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정신없이 흐느끼면서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었다.
초저녁 어둠이 사방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심장이 또다시 뛰고 뜨거운 피가 온
몸을 감도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들은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말을 탄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날씬한 상반신을 똑바로 하고 한쪽 다리는 갈기 위에 얹었다. 저녁 노을에 비친
얼굴은 발그레하게 상기해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기증이 이는 것 같은 정오의 기억이 아직도 온 몸에 감도는 것을 느끼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머리맡에 거울을 집어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놀랐다.
'어마, 내 눈이 어쩜 이렇게 클까? 그리고 이렇게 깊을까? 정말 나도 파리의
어디에 갔다 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거야'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의 얼굴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아아, 나에게도 애인은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단 말야'
그 말을 되풀이하며 처녀 시절부터 꿈꾸던 일이 지금에야 실현된 것처럼
생각했다. 오랜 시일을 억눌려 막혀 오던 사랑의 둑이 기쁨에 넘쳐 한꺼번에
홍수를 이룬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흥분 속에서 후회도 두려움도 그리고 고민도
느끼지 않는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 다음 날도 승마를 핑계로 그녀는 새로운 기쁨의 밀회를 했다. 뜨겁고 긴
포옹이 끝나자 그들은 맹세를 했다. 영원히 변치 말 것을.
"로돌프, 당신은 나의 슬픔을 모르실 거에요. 숨이 막힐 것 같은 울타리에 갇혀
있는 한 마리의..."
"엠마, 아무 말도 말아요. 아무 말도"
그녀의 이야기를 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엠마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로돌프, 다시 한 번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상한다고 해 주세요"
"엠마, 사랑해요. 사랑해요. 엠마!"
밀회는 행복의 불꽃처럼 즐거웠다.
그 날부터 두 사람은 매일 저녁 편지를 교환하기로 했다. 그녀는 뜰
가장자리의 개울 옆 울타리 사이에 편지를 끼워 두고 로돌프는 그것을 가져
가면서 편지를 두고 간다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남편 샤를이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가자 그녀는 갑자기 로돌프가
만나고 싶어져 유세트 장으로 달려갔다.
풀밭과 농장의 뜰을 지나면 로돌프의 집 현관이 있고 그 곳에서 큰 계단이
이층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커다란 침대에 로돌프가
잠들어 있었다.
"로돌프, 제가 왔어요"
난데없이 로돌프를 부르는 소리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아아, 엠마, 어떻게 왔소? 잘 왔소"
하고 그는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남자는 새벽에 피어난 한 떨기 꽃과도 같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이처럼 대담한 행동에 성공하자 그녀는 남편이 아침 일찍 외출할 때마다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는 개울로 통한 돌층계를 밟아 내려갔다. 로돌프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소를 무서워했다. 도중에 소가 있으면 숨을 죽이고 뛰어갔다.
이슬 길에 옷자락을 적시는 일이 마치 행복에 젖는 것처럼 즐거웠다. 언제나
그녀가 이렇게 헐떡이고 찾아가면 로돌프는 항상 자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면
로돌프는 새벽 이슬에 젖은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며
"엠마, 오늘 아침은 더 예뻐 보이는군. 엠마가 오면 이 방 안이 봄을 맞는
것처럼 훈훈해지거든. 자아, 나의 귀여운 엠마!"
하며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여자의 머리에 맺힌 이슬 방울이 보석처럼 빛나고 생기에 넘치는 미인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그리고 난 후 그녀는 방안을 자세히 살폈다. 가구의 서랍도 열어 보고
로돌프의 빗으로 머리를 빗어 보고 면도용 거울에도 모습을 비춰 보기도 했다.
헤어져 돌아오려면 십오 분이면 충분했다.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언제나
눈물에 잠겼다. 일생 동안을 그의 곁에서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서운 힘이 자기의 등을 로돌프에게 밀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 동안 일 주일에 서너 번씩 로돌프는 해가 저문 뒤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그녀에게 신호로 모래를 창문에 끼얹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때로는 잠시 기다려야만 할 때도 있었다. 남편인 샤를이 왕진도 안 가고 난로
옆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이 달아
안달을 하면서도 천연스레 화장을 하고 책을 들고 침착하게 재미있는 듯 읽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샤를은 잠시 후 자리에 들어가 벽을 바라보고
잠이 든다. 남편이 잠이 들기를 기다려 그녀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살짝 빠져
나갔다. 로돌프는 그녀가 나오면 큰 망또로 그녀를 푹 싸서 허리를 껴안고 마당
구석으로 간다.
사랑에 도취된 그녀는 무척 센티멘탈해졌다. 조그만 초상화를 교환하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주기도 했다. 후세를 약속하는 뜻에서 진짜 결혼반지를 갖고
싶어했다
그녀는 몰라보리 만큼 아름다워졌다. 많은 여자를 경험한 로돌프도 이렇게
아름답고 순진한 여자를 겪어 본 적은 없었다. 그녀의 진실한 연애는 그에게
있어서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밀회는 로돌프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소문이 나는 일 없이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남편에 대한 그녀의 경멸과
냉대는 날이 갈 수록 더해졌다. 샤를이 어떤 환자의 수술에 실패했을 때 풀이
죽어서 수염이 꺼칠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불만은 절정에
이르렀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무능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을까 지금까지 쉴 새 없이
희생을 하고 꽃다운 젊음을 썩히다니 나는 이렇게 참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이제 출구를 원하고 있었다. 로돌프를 만나자 그녀는 마음먹은 것을
얘기했다.
"딴 곳으로 가서 살아요. 이젠 정말 이렇게 밀회하기에 정말 싫증이 나서 견딜
수 없어요. 먼곳으로 가요"
그녀는 정말 샤를의 곁을 떠나고 싶었다. 로돌프와의 밀회가 있은 다음은
더욱더 그랬다. 뾰족하고 긴 손, 텁수룩한 수염, 멍한 눈. 그와 반대로 로돌프의
남자답게 헌칠한 이마, 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얼굴, 건장하고 멋있는 몸집.
그리고 잠자는 듯한 남편의 정욕과 달리 사자처럼 맹렬하고 불꽃처럼 튀는
로돌프의 정열 그녀는 초조하고 겁이 났다. 그를 놓친다면 그녀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로돌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시겠어요? 이렇게 당신을 만나고 돌아서면 또 금방 당신이
보고 싶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요"
그녀는 로돌프에게 매달려 졸랐다. 로돌프는 보바리 부인의 정열에 끌려 함께
달아나기로 했다. 로돌프 같은 호색한도 이처럼 아름답게 다듬어진 보석과 같은
여인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로돌프는 마차의 좌석을 미리 사두고 여권도 내어 마르세이유로 같이 갈
계획을 세웠다.
로돌프는 출발을 이틀 앞둔 토요일에 찾아왔다. 그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2주일을 더 연기했다. 그 다음에는 몸이 불편하다고 2주일을 연기했다. 또 다시
세번째는 급한 일로 어디를 갔다 와야겠다고 2주일을 연기했다.
로돌프는 이제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성격으로 한
여자에게 얽매어 마음에 없는 객지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연기할 도리도 없고 해서 드디어 다음 월요일에는
무조건 출발하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밤 그들은 만났다.
"준비는 다 됐어요?"
"으음"
"잊으신 건 없어요?"
"으음"
"정말이죠?"
"물론"
둘은 화단을 한 바퀴 돌고는 축대 옆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우울한 것 같은
로돌프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그러나 조용히 물었다.
"로돌프 당신은 슬프세요?"
"그럴 리가 있소? 왜? 내가 그렇게 보이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다른 때와 달리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사랑하던 온갖 것 당신의 생활을 버리고 갈 생각 때문에 그러시죠?
알 수 있어요. 그 심정 그러나 저는 이젠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제게는
당신만이 있을 뿐이에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실거에요"
"오, 귀여운 나의 엠마"
로돌프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요염한 몸짓으로 살포시 안기며 다짐했다.
"저를 영원히 이 행복 속에 가둬 주세요. 네? 그렇다고 맹세해 주세요"
"사랑하다 뿐이오. 마음과 몸을 다 바쳤는데. 엠마. 당신이 더 잘 알면서"
열두 시에 종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월요일 아침 마차를 타고 이 마을을
떠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용기를 내요, 엠마. 용기를 나는 당신의 생활을 파괴하고 당신을 불행으로
이끌고 싶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후회를 한다면 고통 속에서 우린 얼마나
괴로워해야 될 것인지? 아마 당신이 사회에 흔해 빠진 천하고 경박한
여성이었다면 나는 내 편리한 대로 도피 행위를 실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엠마.
그 동안 우리는 진실했습니다. 긴 날이 지나면 같이 앉아 지난 날을 얘기하며
다정한 친구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엠마. 우리의 지난 날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우리는 같이 떠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으실 즈음 저는
먼 곳으로 떠난 다음일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호수처럼 담담해질 때 돌아오겠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을 위한 행복이 아닐까요? 안녕'
다음 날 오후 그녀는 부엌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로돌프는 머슴
아이를 시켜 과일 바구니와 함께 이런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녀는 미친 듯이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그 곳에는 공교롭게도 남편이 있었다.
그녀는 후다닥 뛰어나와 3층으로 해서 헛간에 들어갔다.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으며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편지를 읽었다. 분노와
증오가 가슴을 에워싸고 불길을 이루었다. 로돌프의 배신 그러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손에 든 편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읽으려고 했으나 머릿속이 어지러워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죽고
싶었다. 창으로 뛰어내리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아래층에서 하녀가 부르는 소리에 위기를 모면했다.
억지로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집 옆으로 파란 마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마차 속에 여행 준비를 한 로돌프를 발견하는 순간 보바리 부인은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한 달쯤 지나서 그녀는 겨우 침대 위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점점 회복되어
낮에도 몇 시간 일어나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하루는 다른 때보다 기분이
좋다고 해서 샤를은 그녀를 부축하여 뜰을 거닐었다.
정원 깊숙이 의자 옆까지 왔다. 그녀는 조용히 머리를 들고 멀리 바라보았다.
지평선에는 여기저기에 낙엽을 태우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여보 여기 좀 앉읍시다"
"싫어요 거긴"
그녀는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통나무 의자는 로돌프와
몇 번이나 뜨거운 키스와 몸과 마음이 녹을 듯한 포옹을 하던 자리였다. 그
날부터 그녀는 병이 더 커졌다. 병세는 심해 그녀도 주위의 모든 사람도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성체를 받고 싶어했다. 신부가 불려오고 형식적인 식이
거행되었다.
성체를 받은 후 그녀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다.
그 다음 해 이른 봄 그녀는 완쾌했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반대로 신앙심이
깊은 여자가 되었다. 그녀는 마을에 가난한 가정을 위해 옷도 만들어 보내고
난산으로 고생하는 집에는 장작을 보내 주기도 했다.
남편 샤를에게는 착한 아내가 되고 딸 베르트에게는 좋은 엄마가 되었다.
건강하고 명랑해졌으며 얼굴에는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여자에게 근본적인 안정과 만족을 갖다 주지도 못했다.
어느 날 그녀는 샤를과 함께 유명한 라가르디의 오페라단이 루앙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을 갔다. 그 곳 극장에서 그녀는 파리에 간 그 옛날의 레옹을
만났다. 레옹은 파리에서 공부한 후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바리 부인은 맵시 있게 차려입은 레옹을 보았을 때 지난 날의 연모가 다시
살아옴을 느꼈다. 레옹도 자기의 심정을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헤어지고만
여인을 우연히 다시 만날 것을 기뻐했다.
"아니, 어떻게 해서 당신이 여기에... 그럼 루앙에 와 계신가요?"
"네"
"언제부터?"
"조용히"
하고 옆 사람이 말했다. 오페라의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그 여자는 벌써 무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레옹을 처음 만나던 때 딸의 유모의 집으로 가다가 만나서 산책하던 일, 날로
옆에서 마주 앉아 얘기하던 일, 정자 밑에서 책을 읽던 일, 레옹과 관계는 모든
것이 조용하게 조심스러웠고, 귀여웠던 그 가련한 연정이 가슴을 울렁대고
살아나는 것이다.
샤를은 일이 바쁘기 때문에 오페라를 더 구경하겠다는 그녀를 루앙에 맡겨
두고 먼저 가버렸다.
다음 날 레옹은 그녀의 호텔로 찾아왔다. 삼 년만의 해후에서 레옹은 파리에서
익힌 기교로 그리고 그녀는 로돌프와의 경험에서 얻은 용기로 그들의 사랑은
거침없이 불꽃을 튀겼다.
"저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으나 여인숙에서 만나던 그 때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레옹의 고백을 듣자 보바리 부인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도 눈치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저는 이제 할머니가 다된 걸요. 레옹 당신은 아직 젊어요. 저 같은 것
잊어버려야 해요. 젊고 싱싱한 새로운 여자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천만에요. 저는 파리에서도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마, 당신은 정말 철부지로군요. 우리가 서로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눈은 레옹을 더듬고 있었다. 레옹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그녀를 포옹하며 애무하려 했다. 그러나 레옹의
애무는 장년의 로돌프처럼 대담하지 않고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젊은이답게
약간 겁을 먹은 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애무했다.
레옹의 내향적인 성격이 그녀에게 커다란 유혹이었다. 남자가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그의 손길에서 그녀를 차지하려는 정욕으로 붉게 물든
레옹의 뺨을 내려다보며 엠마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정말 사랑스러운 젊은이야. 이 건장한 육체'
그러나 거기에서 레옹을 그냥 돌려 보냈다. 그것은 그녀가 안간힘을 쓰면서
견뎌낸 이성 때문이었다.
다음 날 그녀는 레옹과 함께 이 마을의 오래되고 유명한 사원을 보러 갔다.
그 사원을 나오자 두 사람은 마차를 탔다. 이 마차는 상자형이었는데 타자마자
레옹은 커튼을 내려 버렸다.
"어디로 갈깝쇼?"
"어디든지 좋은 곳으로 갑시다"
마차는 그랑 퐁 거리를 지나 데자르 광장 나폴레옹 강둑 그리고 뇌프 다리를
지나 피에르 코르네이유의 상 앞에서 멈췄다.
"좀더 달려"
안으로부터 열에 들뜬 소리가 났다.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라파예트 광장 네
거리를 지나자 길을 똑바로 달려 옆으로 들어갔다.
"더 앞으로 가"
안에서는 여전히 고함을 질렀다.
마차는 철둑을 지나 가로수 길을 천천히 달렸다. 마부는 이마에 땀을 씻으며
가죽 모자를 무릎 사이에 끼고 물가 잔디밭 가까이 갔다. 식물원 앞에서 세
번째로 섰을 때
"더 가!"
전보다 더 강하게 마차 안에서 소리쳤다. 마차는 그대로 달렸다. 왔던 곳을 또
오고 또 달리고 그래도 안에서는 다 왔다는 말이 없다. 마부는 하는 수 없이
달린 곳을 또 달리고 쉴 새 없이 채찍질을 했다.
마부와 말은 똑같이 피로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젠장 병들이 났나?"
혹시 병이나 난 것이 아닌가 해서 마차를 세우면
"더 가 앞으로 더 가"
안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마부는 앞으로 달리면서 울상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도 커튼을 내린 마차가 몇 번이나 같은 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이상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황혼이 깃든 여섯 시쯤 되어서야 겨우 마차는 보브와진느의 어두운 뒷골목에
멈추어 서고 그 속에서 한 여자가 내리더니 베일을 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마른 나무에 한 번 불을 지피면 아주 잘 타오르기 마련이다.
보바리 부인은 다음 날 루앙에서 돌아왔으나 마음은 루앙에 있는 레옹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앙에 갈 핑계만 찾고 있을 때 남편이 수표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것을 알자 법률적인 지식이 있는 레옹에게 의논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고 루앙으로 나왔다. 그 곳에서 삼 일 간 두 사람은 밀월과 같은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배를 저었다. 달이 뜨자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고요한 밤에 달빛 아래를
나는 노를 저어 그대 곁에서
웃음 지으며 뱃놀이를 했지...
레옹은 부인이 돌아가자 부인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백만
장자가 고향을 찾아가듯 도도한 기분으로 용빌르 라베이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샤를은 레옹의 방문을 무척 반가워했다.
그 날 밤이 깊어서야 앞 마당의 좁은 길에서 보바리 부인과 레옹은 처음으로
단둘이 만났다. 로돌프와 만나던 그 자리에서 마침 폭풍우가 쏟아져 둘은
번갯불에 비치면서 우산 속에서 속삭였다.
그녀는 헤어진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 죽어버렸으면 이대로 죽는 대도 후회는 않겠어"
그녀는 남자의 팔 속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안녕히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테죠"
둘은 되돌아와서 포옹을 했다.
"레옹.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께"
그녀는 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행히도 그 기회는 쉽사리 왔다. 그녀는
피아노를 조금 칠 수가 있었다. 샤를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녀가 피아노 치는 것을 즐겨 들었다.
그녀가 좀더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서 일 주일에 한 번 루앙에 가서 음악
교사에게 레슨을 받고 싶다고 하자 샤를은 두말없이 찬성하였다.
그로부터 그녀는 매주 목요일마다 루앙으로 나가 레옹과 밀회를 했다.
목요일만 되면 소풍을 서두르는 어린애처럼 남편이 아직 잠들고 있을 때
준비를 끝마치고 루앙으로 마차를 달리는 것이었다.
루앙에 도착하면 멀리서 마차를 내려 뒷골목으로 뛰어갔다. 어떤 모퉁이를
돌아서면 레옹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 밑으로 나온 머리카락으로
레옹임을 곧 알 수가 있었다. 레옹은 앞서서 들어간다. 방에 들어가면 빨간 터키
산의 비단 커튼이 천장에서부터 내려와 두르고 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가린다.
아름다운 팔로 가리울 때는 이 커튼의 주홍색과 대비되어 까만 머리와 횐
살결처럼 아름다웠다. 일 주일 동안 그리웠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을 때에는 그녀는 달콤한 우수에 잠기면서 말했다.
"아아, 당신은 멀잖아 나를 버릴거야. 그리고 결혼을 하겠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라니?"
레옹은 물었다.
"즉 세상 남자들 말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그리고 서글프게 레옹을 밀쳤다.
"남자란 모조리 염치없는 물건이라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그에게 숨이 막혀버릴 듯이 속삭이는 것이었다.
"아아 움직이지 말아요. 입을 열지 말아요. 나만 바라보세요. 아이 한눈을 팔면
싫다니까"
그녀는 베이비라고 불렀다.
"베이비 내가 좋아?"
그녀가 레옹의 정부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레옹이 보바리 부인의 정부의 위치에
놓인 것이다. 그녀는 상냥한 말씨와 혼을 뺏는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옹은 말 할 수 없이 미묘한 여성미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집에만 있을 때보다. 한결 잘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낙화생
크림을 만든다든가 식사 후에는 루앙에게 배웠다고 새로운 왈츠곡을 치곤 했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를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환락을 즐기려면 돈이 필요했다. 레옹의 박봉으로 모라자는 돈은 전부
그녀가 지불해야만 했다. 그 외에 집안 생활도 화려해져서 커튼과 양탄자
드레스 몇 벌 화장품 값 등 2천 프랑 이상의 계산서가 밀렸다. 남편이 알면
기절할 금액의 빚이었다. 남편 모르게 비밀로 한 것이 모르는 사이에 이자가
늘고 또 어음으로 바꾸어 쓰고 한 것이 눈이 쌓이듯 늘어만 갔다.
그녀는 신경질이 났다. 이젠 어음의 금액이 8천 프랑 가까이 되었다. 이럴 때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레옹과의 밀회뿐이었다.
레옹은 약간 겁이 났다. 향락으로만 줄달음치려는 그녀. 그리고 식욕과 향락이
거의 병적으로 늘어만 가는 그녀에게서 빠져 나오려 하면서도 그녀만 만나면
그녀의 세계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열렬한 사랑에도 고비는 있는 것이다. 그 고비를 넘기면 그 곳에는 암담하고
뛰어넘기 어려운 절벽이 있는 것이다.
레옹의 어머니는 레옹이 유부녀와 불의의 쾌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자
레옹의 직장 주인에게 사정 편지를 냈다. 그 주인이 레옹의 장래를 염려하여
경고를 했다.
그 경고를 받은 레옹은 자기들의 애욕이 오래 지속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고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한 곳에서 장난을 하다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보바리 부인도 이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레옹과 이별을 하자
그녀는 부채에 대한 기한이 임박하여 가산이 차압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 돈을 만들기에 바빴다.
처음엔 레옹을 찾아갔다. 가서 돈 이야기를 해 보자고
"뭐요. 8천 프랑이요? 어떻게 내가 그렇게 큰 돈을...미안합니다만 나는
실례하겠습니다. 안녕히"
레옹은 이렇게 꽁무니를 빼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런 거액의 돈을 융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최후
수단으로 로돌프를 찾아가 애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돌프는 그녀를 보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배를 문 채 그녀를 맞았다.
"부인 오래간만이군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는 지난 날의 정욕이 솟아오르자 그녀를 포옹하고 말았다.
"아아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좋아한 건 역시 당신이었소 나는 바보요. 나쁜
놈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보바리 부인의 뺨에는 차가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제는 매춘을 하러
왔구나'하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 자기의 운명이었다.
"아녜요. 아녜요"
그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기는 지금 파산의 운명에 몰렸으며 그것을 구해
줄 사람은 당신 외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찾아왔다고 이야기하자 로돌프는 갑자기
떨어져 서며 냉정해졌다.
"미안합니다만, 당신에게 융통할 만한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금전의 요구라는 것이 사랑 위에 떨어지는 모든 회오리 바람 가운데 가장
차가운 그리고 가장 환멸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엠마는 한참 동안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비굴한 말을 하지 말 걸 당신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군요.
당신도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군요"
그녀는 진심을 토로했다.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보바리 부인이 돌아갈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녀는 죽음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아니 선택이 아니라 하나의 운명이 그녀에게 준 마지막 유일한
출구였던 것이다.
힘없이 집을 향하던 엠마는 남편의 병원에 들러서 마침 약제실에서 홀로
일하고 있는 약제사로부터 다락방 열쇠를 빼앗았다. 그리고 전에 눈에 익혀 둔
다락방 약장에서 독이라 쓴 흰 약을 한 주먹 집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시체처럼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눈을 멍하니 뜨고 입을 벌리고 일어나려고
했다. 숨소리가 점점 그녀의 입에서 거칠어졌다. 마지막 자리를 마련하려고 온
신부가 라틴어로 속삭이는 기도도 빨라졌다. 기도 소리는 샤를의 참으려는 울음
소리와 섞여 때로는 애도의 종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아아 상쾌한 날이야"
"낫으로 베어 버린다"
"장님이다. 장님이야"
엠마는 뜻 모를 소리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잔인하게
미친 것처럼 절망적으로 웃었다.
"그 날은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래서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갔어!"
경련이 그녀를 쓰러지게 했다.
모두들 가까이 갔다. 그녀는 이제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결국 죽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갈구하던 꿈과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꿈과는 거리가 먼 돈 때문에 죽은 것이다.
엠마가 죽은 며칠 후에 샤를은 로돌프와 레옹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하고 그의
아내가 자기를 속이고 있었음을 알았다. 샤를은 아내의 부정에 문을 걸어 닫고
사람의 눈을 피했다. 그에게는 배반당한 분노 때문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그는 도무지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햇빛이 쪼이는 뜰의 벤취에 앉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견디고 있었으나
언제까지나 그대로 둔다면 그는 영원히 그렇게 앉아 있을 것처럼 언제까지나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어 그의 딸이 아버지를 찾아 뜰로 나왔다.
딸은 아버지가 장난하기 위해 그렇게 앉아 있는 줄만 알고 뒤로 가서 그의
아버지를 가만히 밀었다.
샤를 보바리는 그대로 엎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다.
일체의 물건을 팔아 넘겼을 때 남은 돈이란 겨우 보바리 양이 할머니댁에 갈
여비뿐이었다. 그 할머니댁도 가난하여 보바리 양은 할 수 없이 방직 공장에
다녀야 했다.
여자의 일생(Une Vie:1883)
해설
이 작품은 주제와 묘사법에 있어서 모파상의 대표적인 장편이다. 꿈과 희망에
부풀던 한 소녀의 학대와 절망에 얽힌 삶이 작가가 자라난 노르망디의 절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절묘한 필치로 묘사된 것이다.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허무
염세와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심연에서 느끼는 슬픔과 체념을 깨닫게 한다.
"여자의 일생"은 출판되자마자 단번에 2만 5천 부가 매진되었으며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비평가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 까닭은 모파상이 자연주의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잔의 암담한 회색으로 물든 인생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꿈 많은 처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 여인이 걸은 길은
결국 근대 생활에 대한 가혹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증오하고 조소할
만한 사실 이외에 깊이 공감할 만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문단의 자연주의 경향은 심하게 부정되었던 인간애를 가치
있는 인간성으로 취급하였다.
여러 가지 예술적 경향에 대하여 비평을 가하는 톨스토이도 이 작품만은 높이
평가했다
"이 작품은 모파상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후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일 것이다"
독일의 세계적인 철학자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저서에서 독일의
문학자들을 악평한 후 프랑스의 문학자를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 모파상을 그 중
뛰어난 천재로 손꼽히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꿈과 낭만적인 희망에 들뜬 순진한 귀족 아가씨가 있다. 그녀는
냉혹 무정한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자식에게도 배신당한다. 꿈결 같이 짧은
한때의 신혼 여행을 마지막으로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녀의 희망을 빼앗고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다. 왜 그럴까? 이 의문을 내놓은 작가는 스스로
아무런 해답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 주인공에 대한 동정과 주인공의 생애를
더럽힌 남자에 대한 비난은 소설 전편을 통하여 충분한 해답을 하고 있다고
본다. 결론은 염세주의에 대한 하나의 항의로 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작가 약전
모파상은 프랑스 노르망디 리엡 근처의 투르빌 쉬르 아르크, 밀로메니르의
성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구스타브는 네덜란드 귀족이었고 예술적인 기질은
어머니 로르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양친이 별거하는 동안 모파상은 어머니
밑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루앙코르네이유 중학교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 중학교 졸업 후 파리에 나가서 약 10년 간 해군성 문부성에 근무했는데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어머니는 모파상의 재능을 믿고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플로베르에게 문학 지도를 부탁했다. 그는 플로베르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모든 문학 수업을 쌓았다. 그가 처음 소설을 발표하기까지 20편이나 플로베르의
엄격한 수중에 보류되었다고 한다.
1880년 그가 30세 때 에밀 졸라가 주재하던 '메당의 저녁'에 "비계덩어리"가
발표되자 큰 호응을 얻고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 그 해에 처녀 시집을 내고
이어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다. 1880년부터 1891년에 걸쳐서 쓴 단편 소설의
수는 약 300편에 달한다. 이 밖에 6권의 장편 소설 3권의 기행문 1권의 희곡이
있다. 생전에 출판된 단편집의 수는 15권이었는데 현재는 18권이고 그 중의
2권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의 단편집은 미국, 독일, 일본 등의 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다. 세계3대 단편 작가로 미국의 포, 러시아의 체호프,
그리고 프랑스의 모파상이다.
1892년 1월 2일 밤 모파상은 돌연 목을 끊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파시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듬해 7월 6일에 정상적인 정신으로 돌아서지
못한 채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몽파르나스의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줄거리
잔은 짐을 꾸리고 창가로 가 보았으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제 수도원을 갓 나온 잔은 영원한 자유의 몸이 되어 그처럼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인생의 온갖 행복을 막 손에 넣으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만약 날씨가 개지 않으면 부친이 출발을 망설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워 아침부터 여러 번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잔은 열두 살까지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딸에 대한 미래 설계에 의해 모친의 눈물도 돌아보지
않고 수녀원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을 속세와 격리시켜서 남의 눈에 뛰지 않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모르게 해 놓았다. 열 일곱 살이 되면 순결한 채로 자기에게 돌려보내 줄 것을
모친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소 일종의 올바른 시의 목욕통
속에 딸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들을 걸어 다니고 기름진 대지의 한복판에 소박한 사랑의 모습과
동물의 단순한 애정 생의 청량한 법칙을 보여 주고 딸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넋을 열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잔은 수도원을 떠나려는 것이다. 환하게 낯을 반짝이고 생기와 행복에
차서 한가한 낮 긴 밤 가지가지의 희망만이 떠오르는 고독 속에서 그 여자의
마음이 이미 떠돌아다니던 온갖 기쁨과 즐거운 가지가지의 우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한여름을 이포르 근처의 절벽 위에 세워 놓은 선조 대대의 옛 성관인
레페플의 저택에서 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 해변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에서 무한한 환희를 기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저택은 그 여자의 것으로 되어 있었고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그
곳에서 영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출발하려는 순간 전날
밤부터 쉴새 없이 내리고 있는 비는 그 여자의 생애에서 최초의 큰 슬픔이었다.
남작 부인은 몇 해 전부터 심장 비대증으로 부쩍 뚱뚱해져서 늘 심장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숨을 몹시 헐떡거리면서 낡은 호텔의 정면 층계까지 오자 빗물이
내처럼 넘쳐흐르는 앞뜰을 바라보고
"정말이지 제 정신은 아니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남편은 늘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임자가 그러자고 한 거요. 아델라이드 부인"
부인이 아델라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다소
놀려대는 듯한 경의를 표해서 언제나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발 속에서 두 필의 말 엉덩이에서는 온통 젖어 김이 나고 있었다.
잔은 아름다웠다.
장미빛을 띤 살결에는 우단 같은 솜털이 나고 금발 머리는 광채를 내며
물결치고 있었다. 눈은 도자기처럼 푸르고 날씬한 키에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명랑한 웃음 소리는 환희의 물결이
되어 사방에 퍼졌다.
줄리앙 라마르 자작은 레페플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남성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느낌을 주었으나 모든 여성에게는 이상적인
완전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가 건강한 이마를 덮고 두터운 눈썹은 거무스레한 눈을
그윽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짙고 긴 속눈썹은 그 시선에 여자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은 정열적인 빛을 드리우게 했다.
아베 피코 사제의 소개로 알게 된 자작은 바로 이틀 후에 레페플로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남작댁의 만찬에 초대받게 된 것이다.
심장 비대증 때문에 언제나 잔심부름꾼 로잘리의 팔에 매달려 걷는 아델라이드
부인은 자작을 보면 항상 그 팔을 끼고 부인의 산책길을 걸었다.
자작은 잔을 향해서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과
눈은 무엇엔가에 끌리듯이 마주치곤 했다.
라마르 자작과 함께 남작과 잔이 에트르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배가 둑에 가까워지자 남작이 맨 먼저 뛰어내려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자작은
잔이 발을 적시지 않도록 두 팔로 안아서 내려 주었다. 그 짧은 포옹에 흥분한
가운데 두 사람이 해안의 자갈길을 올라가노라니 뜻밖에도 고기잡이 라스티크
아저씨가 남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두 사람 귀에 들려왔다.
"바로 이 사람이 점찍은 대로야 잘 맞는 귀여운 부부고 말고"
그 날 밤 잔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낸 주신 사람 내 생애를 바칠 사람일까?
그와 나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되고 떨어질 수 없이 한데 어울려져 그러다
사랑을 낳을 사이일까?
잔은 사랑하고 싶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날마다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작
옆에 있으면 가슴이 뛰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데보 남작이 외딸인 잔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침대 발치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르 자작이 우리에게 청혼을 해 왔다"
잔은 담요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아무튼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해 뒀지 네가 저쪽보다도 훨씬 부자지만
한평생의 행복이란 돈 문제가 아니거든 자작 형편으로서는 네가 결혼한 후에도
이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나 나나 그 남자가 맘에 든단다. 그렇지만
네가 어떨른지?"
잔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귀밑까지 새빨개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푸른 눈 속을 들여다 보며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
데보 남작은 워낙 귀족 태생이어서 혁명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의지가 약한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결점이기도 했다.
남작이 잔을 위해서 새로 만들게 한 배의 기도식이 있던 날이었다. 자작은
몰라볼 만큼 훌륭한 복장을 차리고 왔다. 몸에 착 붙은 프록 코트에 가슴에는
레이스 장식이 보이고 에나멜 장화를 신은 그 모습은 참으로 당당한 귀족이었다.
로잘리까지도 황홀한 듯 그 자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 부부와 젊은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해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꽃다발로 장식한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돛과 줄에 매달아 놓은 기다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윽고 성가를 부른 뒤 사제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았다.
잔은 자작이 자기 손에 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리고 차츰 세게
잔의 손을 죄어 왔다. 자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속삭였다.
"잔은 당신만 좋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약혼식이 되는 겁니다"
잔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 '네'하고 말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배에
성수를 뿌리고 있던 사제는 두 사람의 손가락 위에도 성수를 몇 방울 떨어뜨려
주었다.
짧은 약혼 기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하고 코르시카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결혼 첫날 밤 무참히도 무너져 버린 환멸 속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망한
잔의 푸념은 그 후로도 내내 몸에 붙어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이것이, 그래, 그이가 말하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구나? 이것이! 아니
이것이!"
남편 줄리앙은 호텔 주인이나 하인 마차꾼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상인들을
상대로 항상 다투었다. 그리고 다만 얼마라도 값을 깎게 되면 손을 비비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난, 도둑맞는 게 싫단 말이야"
계산서가 올 때마다 잔은 몸서리나는 것을 느꼈다. 일일이 말썽을 부리면서
에누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하인들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귀밑까지 화끈해졌다.
호텔에 들어서서 점심을 마치고 나면 줄리앙은 잔을 껴안고 귓전에 속삭였다.
"어때, 잠깐 쉬지 않겠어?"
"난, 지금 별로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 거야 알겠어?"
잔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잔은 경멸하다시피 남편을 쳐다보았다. 잔은 줄리앙을 외면하였다.
"호텔 것들이 뭐라던 그까짓 것 문제삼지 않아"
줄리앙에게는 수치심이라는 섬세한 신경이 전혀 없었다. 잔은 두 인간이 진정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융합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잔은 또한 남편의 그 부단한 욕망에서 무언지 야수적인 심한 오욕 이외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잔의 여성으로서의 감각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것이다.
그런데 코르시카 깊숙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따가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샘터로 나섰다. 융단을 빽빽하게 깔아
놓은 것 같은 이끼 위에 무릎을 꿇은 잔이 물의 싸늘한 맛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이 허리를 끌어안고 나무통 끝으로 흐르는 물을 가로채려 했다. 잔은 한사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며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실낱 같은 물줄기가 꺼졌다가 맞히곤 하면서 얼굴과 목과 옷,
손에 물이 튀고 두 사람의 머리에서 진주처럼 빛났다. 그러다가 뜨거운 키스
시간이 물줄기와 함께 흘렀다.
잔은 갑자기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사랑의 영감을 느꼈다. 심장은 뛰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 눈이 눈물에 젖은 잔은 나직이 남편에게 속삭였다.
"줄리앙!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소리를 내어 즐겁게 웃으면서 빨갛게 물든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이후의 여행은 참으로 꿈과 같았다. 그칠 줄 모르는 환희의 연속이었다.
잔의 눈에는 오직 줄리앙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찬란한 남국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노르망디는 벌써 가을이었다. 노르망디의
가을은 하염없이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은 몹시 지쳤다. 즐거운 추억에 넘치는 이 시골의 풍물이 자취도 없이
퇴색해 보였다. 춥고 습기 찬 나날이 어제와 똑같은 단조로움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줄리앙은 어느새 아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기 역을 끝마친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 일에 마음을 쓰는 기색도 없고 모든 사랑의 흔적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방을 찾아드는 밤도 드물어지고 그는 재산의
관리와 살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일꾼처럼 차리고 있어 약혼 시절의 고상한
태도를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겨울이 닥쳐 왔다. 잔의 양친은 정초에 루앙으로 옮겨 갔다. 줄리앙은 극도로
인색한 본성을 나타내어 하인들의 식량에 이르기까지 엄밀히 제한을 했다. 잔이
매일 아침 빵집에 주문하던 가레트를 금하고 보통 빵으로 바꿨다.
잔은 말다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바늘 끝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줄리앙은
하인들 급료나 그 밖의 어떠한 지출에서 얼마씩 돈을 뗄 때마다 그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싱글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거든 "
쾌활하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던 로잘리도 달라졌다. 새빨갛던 두 볼이
혈색을 잃고 거북한 듯이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고서
"너, 어디 아프니?" 하고 잔이 물으면 으레,
"아녜요. 부인"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로잘리는 노르망디 태생으로 잔의 젖동생이기 때문에 다른 하인들과는 좀달리
대우받고 있었다.
정월도 다 갈 무렵에 눈이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들 전체가 눈에 덮이고 모든
나무는 다 얼어 붙었다.
어느 날, 점점 더 변화가 심해진 로잘리가 몹시 대견스럽게 잠자리를 보고
있는 동안 잔은 난로 옆에서 발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무척 괴로운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니?"
잔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아녜요. 부인"
로잘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심한
신음 소리로 변했다. 잔은 겁이 났다.
창백한 얼굴, 핏기 어린 흐릿한 눈, 로잘리는 두 다리를 뻗고서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러니, 로잘리 웬일야?"
로잘리는 말 한 마디 없이 미칠 것 같은 눈으로 잔을 쳐다보며 무서운 고통에
찢기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을 주고는 이를 깨물고 비명을
죽이면서 뒤로 미끄러져 굴렀다.
그러자 아래 옷으로 무엇인지 움직여 보였다. 곧 거기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물결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목을 눌러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제 아기 울음 소리로 변했다. 가냘프고 고뇌에 찬
호소의 소리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 얼굴을 내놓은 인간의 최초의 호소였다.
줄리앙은 몹시 격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저 계집애를 어떻게 할 셈이야? 애비 없는 자식 따위를 집에
둘 순 없어"
"그렇지만 여보, 어디, 맡기기라도 하면..."
"돈은 누가 치르고? 당신이 ?"
"그야 애 아버지가 내겠지요. 그 사람이 로잘리와 결혼하면 되잖아요?"
"애비라고? 당신은 그게 누군지 알고 있나? 알 까닭이 없지"
"하지만 저 애를 저대로 내버려둘 순 없어요. 그건 비겁하잖아요? 이름을 물어
봐서 내가 그 남자를 만나겠어요"
"흥 남자 이름을 대줄 게 뭐야 그리고 만일 사내가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애비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있는 저런 여자를 그냥 여기 두어서는 안 돼.
얼마쯤 돈을 줘서 내쫓아야 해"
잔은 단호히 반대했다.
"안 돼요. 그것만은 안 돼요. 저 애는 내 젖동생이에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걸요. 우리집에서 쫓아 내다니, 안 될 말이에요. 정 그렇다면 내가 애를 키우지"
줄리앙은 빨끈해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쳤나?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는 노발대발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날 오후 잔은 산파 집을 찾아 나갔다.
로잘리는 잔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담요 밑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잔이 키스하려 할 때 절망적으로 온 몸을 떨며 로잘리는 얼굴을
피하며 거절했다. 잔은 어린애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한편 줄리앙은 아내에게 거의 말 한 마디 없이 지냈다. 이 주일 후에 로잘리는
일어나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잔은 어느 날 아침 로잘리의 두 손을 꼭 쥐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 로잘리, 바른 대로 얘기해 줘. 저 앤 누구 애지?"
로잘리는 또 다시 무서운 절망에 사로잡혀 주인의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기어이 손은 뿌리치고 미친
사람처럼 달아나 버렸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이 추운 밤이었다. 잔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이불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고 심장은 쿵쿵 울리다가 가끔
멈추는 것 같기도 했다.
별안간 두려움에 잔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로잘리를 부르는 종을 눌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잘리는 오지 않았다. 잔은 정신 없이 맨발로 계단 쪽으로
뛰어가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갔다. 겨우 문을 찾아서 열었다.
"로잘리!"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부딪쳤다.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보니 잠자리는 비어 있었다. 싸늘한 채였다.
당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잔은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면서 계단을 내려와
줄리앙을 깨우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꺼져가는 난로 불빛에 잔의 눈에 비친 것은 남편의 머리와 나란히 베개 위에
얹힌 로잘리의 머리였다.
잔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잔은
우뚝 멈췄다. 그러나 금새 돌아서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뒤에서 다급하게 잔을 부르는 줄리앙의 소리가 울렸다.
잔은 방에서 나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남편의 거짓말을
듣기가 죽기보다도 무서웠다.
잔은 도망쳐 버리고 싶은 격한 생각에 사로잡혀 속옷 바람으로 집을 나섰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 속을 절망적으로 달려 갔다.
오랜 실신 상태에서 깨어나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자신으로 돌아간 잔은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데 따라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루앙에서 달려온 남작 부부에게 잔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노기에 불타는 남작은 당장 줄리앙에게로 뛰어가서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줄리앙은 신에게 맹세하면서 부인했다.
"대관절 무슨 증거가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잔은 열병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겁니다"
줄리앙은 오히려 격렬하게 화를 내며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남작은
어리둥절했다.
잔은 남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잔은
로잘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으나 남작이 그것을 거절했다. 마음이 산란할 때에
의사가 들어왔다. 잔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로잘리를 만나겠다고 계속 반복했다.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시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 임신
중이니까요"
잔의 손을 잡고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멍한 표정으로 잔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뱃속에 애가 살고
있다. 그것이 줄리앙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잔은 마침내 사제를 오게 하고 그 자리에 로잘리도 나오게 했다. 남작에게
떼밀려 로잘리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잔은 홑이불처럼 창백해져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내가 느닷없이 방에 들어갔을 때 줄리앙의 잠자리에 있었던 건 너지?
로잘리!"
"네, 부인"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처음 여기서 식사를 하시던 날 제 방으로
오셨습니다. 다락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럼 네 아인... 그 사람 거야?"
"네, 부인"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언제부터 또 시작했니?"
"오시던 그 날 밤부터..."
말 한마디한마디가 잔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맥이 풀리고 무한한 절망감이
전신을 감돌았다.
그 이상 듣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나가, 어서 나가!"
잔은 소리쳤다.
남작이 다시 로잘리의 어깨를 붙들고 문에서 끌고 나가 짐짝처럼 마루에
떼밀어 버렸다. 남작이 얼굴이 파래져서 자리로 돌아오자 사제가 말했다.
"참 야단입니다. 이 고장의 여자들이 다 저 모양이거든요"
"아니, 용서 못할 인간은 줄리앙이죠. 더러운 녀석! 제 딸을 데리고 가겠어요"
"좀 참으십시오, 남작님. 그도 그저 예사로운 일을 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남작님 자신만 하더라도 생각해 보시면 아실 텐데요. 하하하..."
남작은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울고 있던 잔의 얼굴에는
미소의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사제는 좋은 기회라는 듯이 말했다.
"부인 항상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부인에게는 크나큰 불행이 닥쳐
왔습니다. 그러나 신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큰 행복으로 이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부인은 장차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애가 부인의 위안이
될 것입니다. 잔 부인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봐서도 줄리앙 씨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어린애는 두 분 사이를 맺은 인연의 실마리니까요"
잔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작은 2만 프랑에 상당하는 농장을 붙여서 사제의 주선으로 다른 남자와
로잘리를 결혼시켰다. 줄리앙은 펄펄 뛰며 아내가 상속받아야 할 재산이라고
주장했으나 남작도 잔도 들어주지 않았다.
잔은 모든 것을 체념한 가운데 임신 기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빨리 7월 말에 사내 아이를 낳았다.
무서운 고통 끝에 인생의 목표를 잃고 있던 잔은 갓난아이의 가냘픈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환희의 섬광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는 잔의 열광적인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남작 부부도 좋아서
야단이었으나 이기적인 줄리앙은 자신의 지배적인 권위를 침범하는 어린애의
존재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줄리앙은 얼마 전부터 근처에 사는 푸르빌 백작 집에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얼굴이 희고 깊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백작은 벌건 턱수염을
기다랗게 기르고 거선처럼 거대한 남자로 사냥에 미친 사람이었다.
잔은 남편을 따라 이 부부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루이 13세 양식인 굉장한
저택은 계곡의 경사진 곳에 있었고 한쪽 돌담이 전부 커다란 연못 속에 들어
있었다. 돌층계 아래에는 배가 네 척 매달려 있었다. 백작은 그 못에서 오리를
잡기도 하고 고기를 낚기도 했다.
잔은, 거칠기는 하지만 호인인 이 곰 같은 거인에게 호감을 가졌다. 백작은
레페플에 오면 잔의 손에서 폴을 받아 안고, 털이 난 큼직한 손으로 어린애를 잘
다루었다. 수염 끝으로 어린애 코를 간지럽히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항상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편 줄리앙은 햑혼 시절처럼 말쑥하고 단정하며 매혹적인 미남이 되었다. 그
눈에는 다시 애무하는 듯한 빛이 돌았다.
3월이 되자 질베르트 백작 부인의 제안으로 넷이서 가끔 먼 곳까지 승마를
했다. 백작 부인과 줄리앙이 앞서고 잔은 백작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속삭이다가 별안간 큰 소리로 웃어대기도
하고 의미 심장한 눈초리로 은근히 서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채찍질을 하고 달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이상하게 흥분한 백작 부인은 줄리앙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연상 박차를 가해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갑자기 말이 우뚝 서서 땅을 차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었다.
"조심하지 않고 뭐야, 질베르트!"
걱정이 된 백작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부인은 백작의 말에 도전하는 듯이
오히려 사납게 채찍으로 양쪽 귀 사이를 쳤다. 훌쩍 뛰어오른 말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을 달렸다.
백작은 나직히 신음 소리를 내더니 자기 말의 목을 안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전력을 다해서 말을 앞으로 내몰았다.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모양은 마치
거인이 말을 다리 사이에 끼고 날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두 마리 말은 쏜살 같이 달려 잠시 동안에 목장 저쪽에 조그맣게 되고 마침내
지평선 넘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잔과 줄리앙이 그 뒤를 쫓았다. 15분쯤 달리더니 되돌아오는 백작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네 사람이 만났다. 백작은 새빨개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부인은 새파랗게 굳어진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잔은 백작이 그의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백작 부인은 그 후 한 달 동안 일찍이 본 적이 없을 만큼 쾌활했다. 항상
소리내어 웃으며 충동적인 애정을 가지고 잔을 포옹했다.
무언지 신비스럽고 황홀한 상태가 백작 부인에게 찾아든 것 같았다. 백작 역시
무척 행복한 듯이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아내의 손과 옷자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줄리앙도 또한 아주 딴사람처럼 쾌활하고 상냥해졌다. 마치 두 집의 친밀이 곧
각자의 평화와 기쁨의 원천인 듯했다.
그 해 봄은 유난히 더 일찍 왔다.
어느 날 아침 잔은 조그만 흰 말을 타고 들로 나갔다. 줄리앙은 아침 일찍부터
어딘가 가고 없었다. 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옛날 줄리앙과 사랑을
속삭이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막 좁은 길을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잔은 그 길 막다른 데 있는 나무에
매어둔 두 마리의 말을 보았다.
분명히 줄리앙과 백작 부인의 말이었다. 여자 장갑 한짝과 채찍 두 개가 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잔은 말에서 뛰어내려 나무줄기에 기대섰다. 바로 옆 풀 속에서 두 마리
산새가 날아 앉았다. 한 마리가 열심히 쭉지를 펴고 몸을 떨면서 상대방 둘레를
훌훌 날다가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울고 있더니 별안간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렸다.
"참 그래 봄이니까"
중얼거리는 동안에 문득 어떠한 의혹이 잔의 머리에서 번쩍였다. 잔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정신 없이 말을 몰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은 어린애에게 뛰어가서 몇 번이나 키스를 했다. 잔의 그
가슴 속에는 이미 질투도 증오도 없었다. 다만 살을 찌르는 듯한 고독감과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에 괴로워할 따름이었다.
또 다시 봄은 돌아왔다.
지난 1년 동안 잔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어머니
아델라이드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남작 부부는 딸과 함께 따뜻한 계절을 보내기 위해 5월 20일 루앙에서
레페플에 왔었다. 어머니 모습을 대하는 순간 잔은 깜짝 놀랐다 지난 6개월 동안
남작 부인은 10년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토실토실하던 볼이 자주빛이 되고
눈은 빛이 사라졌으며 숨을 쉬기도 괴로워했다. 줄리앙까지도 그 변화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 날은 도리어 보통 때보다도 몸이 좋은 편이었다. 점심 때에는 수프와
달걀을 두개나 먹고 평상시처럼 플라타너스 우거진 오솔길을 산책했다. 그런데
별안간 길에 쓰러져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밤 잔은 싸늘한 어머니 손을 쥔 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잔의 희망에
따라 어머니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잔은 어머니가 운명하기 전에 예전 편지를 다 꺼내서 읽으며 울고 있던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소녀 시절 이래 할머니나 친구들한테서 받은 것이었다. 잔은 아직
그대로 있는 어머니 편지 상자 쪽으로 눈을 돌린 다음 일어나서 그것을
끌어내렸다. 갑자기 읽고 싶어진 것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편지는 다 쓸데없는 그러나 열렬한 사랑의 편지였다.
사소한 집안 일들이 세밀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다른 뭉치를 풀어서 읽기 시작한 잔은 넋을 잃었다.
'소생은 이제는 그대의 애무 없이는 지낼 수 없습니다. 미칠 듯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그가 나가는 대로 곧 와 주십시오. 한 시간은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생은 그대를 열애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게 그대를 요구하면서 괴로운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있는
당신을 생각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격정을 느꼈습니다...'
폴덴느마르 그 이름은 아버지가 지금도 폴 그놈이라고 부르면서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제일 친한 사란이었다.
잔은 별안간 그 편지들을 집어 던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을 느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잔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실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잔은 더럽게 느껴지기만 하는 편지들을 난로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남작은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후에 루앙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 폴이 병이 났다. 잔은 열 이틀 동안 한잠도 못자고 거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냈다. 폴은 나았으나 잔은 앞으로도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딸을 이 생각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잘리의 사건이 있은 후로 잔은 줄리앙과 별거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남편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잔은 남편의 애무를 받기가 몸서리나도록 싫었다.
어느 날 잔은 아베 피코 신부를 찾아갔다. 수줍은 낯으로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신부는 싱글싱글 웃었다.
"잘 알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몸도 건강하시지요. 잘 알겠어요.
줄리앙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신부가 자상하게 마음을 써 주었지만 잔은 부끄러운 나머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불안한 1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줄리앙이 이상한 주름을
입가에 띄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산책을 하는 동안 줄리앙은
아내의 귓전에 속삭였다.
"이제 아마 우리는 화해를 한 것 같군. 나로선 마침 잘 되었어"
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모든 인간으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슬픔의 가슴을 억눌렀다. 오열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잔은 남편의 가슴에 쓰러지면서 울었다. 놀란 줄리앙은 아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잔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옛날 관계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 일을 의무처럼
해치웠으나 잔은 가슴이 느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참고 견디었다.
이번에 임신한다면 그것을 최후로 영원히 줄리앙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잔은 남편의 애무가 그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서지"
"어머나 왜 애가 싫어요?"
"체! 하나면 그만이야 귀찮기도 하고 돈도 들고..."
다시 잔은 신부한테 갔다. 신부는 마치 단식한 사나이의 식욕과도 같은
호기심으로 꼬치꼬치 캐묻더니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
"수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인이 임신했다고 믿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엔 정말 임신하실 걸요"
잔은 눈 속까지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만일 제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웃에 소문을 내십시오. 결국은 주인께서도 믿을 테니까"
사제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는 사제의 예상대로 되었다. 잔은 임신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미칠 것
같은 환희에 넘쳐 어머니를 여윈 슬픔을 겨우 잊을 수가 있었다.
9월 하순에 아베 피코 사제가 새삼스러운 태도로 찾아왔다. 고르데빌의
수도원장으로 영전하게 되어 후임의 젊은 사제를 소개했다. 아베톨비악은 마르고
키가 작은데다 눈이 침울해 보여서 대단히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신임 사제는 준엄하고 매서운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경멸 인간 만사에 대한 혐오 무경험에서 오는 옹졸함 이러한 모든 것이
그를 순교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사제는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다. 절교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격해서 성욕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서로 아니꼬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차츰 밀렵자를 쫓아다니는 산지기처럼 정부들끼리 밀회하는 것을
감시하고 방해를 놓고 해서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미사에 나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줄리앙은 거의 매일 푸르빌 백작 집에 출입했다. 이제는 줄리앙 없이 지낼 수
없게 된 백작과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하고 백작 부인과 승마를 하기도 했다.
남작은 11월 중순경에 다시 잔의 집으로 돌아왔다. 골수에 사무친 슬픔 때문에
더 늙고 수척했다.
겨울도 다갈 무렵의 어느 날, 아베 톨비악 사제가 찾아왔다. 그는 줄리앙과
질베르트와의 정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 부인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사제님께선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세요?"
"한사코 이 죄를 막아야 합니다"
잔은 눈믈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제 남편은 제 말 같은 건 들어 주지 않아요. 심부름하는 계집애를
상대해서 저를 배신할 일도 있답니다. 전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부인께선 그러고도 한 사람의 아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신앙이 있는
여성이신가요? 눈앞에선 죄를 저지르는 걸 보고서 모른척 하시다니 비겁한
마음이 부인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부인은 천주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분인
못되는 줄 압니다"
"아, 사제님!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푸르빌 씨의 눈을 뜨게 하십시오. 이 관계를 끊는 것이 그분의 할 일이거든요"
잔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녜요. 그러다간 그가 두 사람 다 죽이고 말아요!"
"그렇다면 부인은 언제까지라도 치욕과 죄악 속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군요.
저는 이 이상 이런 데 있을 수가 없소"
사제는 잔을 저주하는 듯 들고 있던 우산을 쳐들고 잔뜩 화를 낸 채 돌아갔다.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말을 타고 다니는 산책 도중에 늘상 사제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때는 들녘 끝이나 낭떠러지 위에 검은 점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두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는 계곡에서 기도책을 탐독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윽고 봄이 왔다. 나뭇잎들이 아직 투명해 보일 정도고 들은 축축했기 때문에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대개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에 숨곤 했다. 막사는 작년
가을 이래 보코트의 언덕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고 계곡의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온종일 맹렬한 바람이 불어대는 어느 날이었다.
잔이 날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푸르빌 백작이 허둥지둥 찾아왔다.
안색이 몹시 창백해서 빨간 수염이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핏기 어린 눈은
사고력을 잃은 듯이 자꾸 움직였다.
백작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질베르트가 여기 와 있겠죠"
잔은 놀라서 대답했다.
"아아뇨! 오늘은 통 안 보이셨는 걸요"
그러자 백작은 두 다리가 잘리기라도 한 듯이 털썩 주저 앉아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씻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내밀며 입을 딱
벌리고 무언가 무서운 괴로움을 호소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고서 상대방을 우두커니 보고 있더니 혼자 입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뛰어나갔다.
잔은 그 뒤를 쫓았다. 공포에 싸여 쥐어짜는 듯한 가슴을 안고 그러나 거인의
발걸음을 따를 수가 없었다.
백작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다라 한사코 달렸다.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고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초목과 곡식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보코트 언덕이 보였다. 양이 없는 우리 한쪽에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가
있고 말뚝에 말 두 마리가 매어 있었다.
백작은 당에 엎드려 그 막사 옆으로 접근해 갔다.
두 마리의 말은 백작의 모습을 보자 몸부림쳤다. 백작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로 고삐를 끊었다. 말은 바람과 함께 뛰어갔다.
백작은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켜 문 틈에 눈을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작은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일어났다. 이어 밖에서
대문 빗장을 힘껏 밀어 넣자 두 손에 막대기를 쥐고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그는
상체를 구부리고 죽을 힘을 다해서 황소처럼 끌기 시작했다.
오두막 안에서는 주먹으로 판자를 두들기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비탈의 절벽까지 오자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놓아버렸다. 오두막은
비탈을 구르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제 무게 대문에 더 속력이 가해지며 살아 있는 것처럼 뛰고
부딪치고 하면서 굴러갔다. 안에서는 무서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움푹 팬 곳에서 한바탕 곡선을 그리며 훌쩍 뛰어오른 그 다음 순간
깊숙한 땅에 여지없이 떨어져 마치 달걀처럼 부서져 버렸다.
끔직한 두 시체가 그 속에 깔려 있었다. 남자의 이마에는 구멍이 뚫리고
얼굴은 형편 없이 깨져서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여자는 턱이 빠져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부러진 손발이 뼈가 없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참사를 폭풍우를 피하려고 뛰어들어 간 오두막이 거센
바람에 뒤집혀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날 밤 잔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계집애였다.
잔은 석 달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몹시 몸이 쇠약하고
조그마한 소리만 들어도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잔에게는 오직 폴이 전부였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되어 아브르의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집 안에는 그래도
평화와 사랑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남작도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 늙은 독신인 리존도 리페플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폴은 세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났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된 시월 어느 날 아침 그는 세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아브르로 출발했다. 그는 생후 처음 가족의 손을 떠나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날 밤 레페플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러나 폴은 이윽고 이틀만에 한 번씩 만나러 오는 어머니가 그다지 반갑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보다도 처음 사귄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측에서도 면회를 금했다. 잔은 하는 수 없이 폴이 돌아올 휴일을 고대하며
살아야 했다.
폴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금발의 아주 훌륭한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낙제를 두 번씩이나 하고 겨우 수사과에 올라 갔을 때는 벌써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휴일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는 습관을 차츰 게을리 하게
되고 어떻게든지 구실을 붙여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아침에는 초라한 옷을 입은 유태인 노인 하나가 잔에게 면회를
청했다.
"마님께 보여 드릴 쪽지를 가져 왔습죠"
노인은 대 묻은 쌈지 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어 잔에게 주었다. 그것은
폴의 사인이 들어 있는 차용 증서였다.
잔은 전신이 떨렸다.
폴은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불량 소년들과 함께 도박장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즉시 아브르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이미 한 달이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교장이 잔의 사인이 있는 편지 네 통과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다만 놀랄
따름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읍내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경찰의 손을 빌려 시중에 숨어
있는 여자한테서 폴을 찾아 냈다. 그들은 이 젊은이를 데리고 레페플로 돌아왔다.
잔은 도중 내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으나 폴은 실로 태연한
낯으로 창밖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폴은 시골에서 번들번들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배를 타고 아브르로 도망쳐
버렸다. 경찰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시는 폴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전 여자 역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잔은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무 걱정 말아 주십시오. 저는 지금 런던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옹색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날도 있습니다. 저와 같이 있는
여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유산에서 1만 5천 프랑만 미리 쓰게 해 주십시오. 얼마 후에 저도 성년이
되니까요...'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던 잔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아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돈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있는 여자에 대한 증오는 악착스러우리 만큼 큰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섯 달 동안 또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년에
달한 아들의 대리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청구했다. 12만
프랑을 받은 폴은 그 후 여섯 달 동안에 간단한 편지 네 통을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날아든 절망적인 편지가 세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머님 저는 지금 막다른 데까지 왔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폴의 편지는 또 8만 5천 프랑을 청구해 온 것이다.
토지를 저당해서 돈을 보내 주었더니 1년쯤 있다 "폴드라마르 주식회사"라는
기선 회사가 파산했다는 통지가 왔다. 결손은 23만 5천 프랑이었다.
남작은 저택과 두 농장을 저당에 넣고 최후의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졸도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겨울이 다간 어느 날 리종 이모가 기관지염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잔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괴로워할 것 없이 자기도
죽어버리고 싶다고 빌면서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건장한 농촌 여자 하나가 잔을 번쩍 안아 들고 집으로 데려왔다.
"당신은 누구지...?"
밤중에 눈을 뜬 잔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면이 있는 그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어
보았다.
"가엾은 잔 부인! 저를 몰라보시는가요?"
"앗, 로잘리!"
잔은 정신없이 로잘리를 얼싸안고 키스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언제까지나 흐느껴 울고 있었다.
로잘리도 이미 남편이 죽고 줄리앙의 아들은 장가를 들여서 훌륭한 일꾼이
되어 있었다.
로잘리는 집을 아들 내외에 넘기고 외로운 잔을 돌보아 주기 위해서 24년만에
레페플에 돌아온 것이다.
잔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정든 저택을 팔아서 조그마한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로잘리는 여러 가지로 잔을 위로하고 시중해 주었다. 사실
잔은 이제 아주 늙어 버렸고 슬픔에 지쳐 소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왜 나는 남처럼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왜 나는 조용한 행복마저도 은혜받지
못했을까?"
잔은 자신의 불행한 일생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힘없는 한숨을 내쉬는 날이
계속되었다
돈을 보내 주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귀여운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들고 일년 내내 하녀 하나밖에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 좀 해다오. 나는 지금 큰 길가의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단다. 참 슬픈
일이다. 그러나 너만 있어 준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는 없으면서도 칠 년 동안이나 너를 못 만나 보고 있으니...네 어미는
얼마나 불행했었는지 얼마나 내 마음을 네게 의지해 왔었는지 너는 도저히 모를
것이다. 너는 나의 생명이었다. 나의 꿈, 오직 내 하나의 희망, 내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배반했고 또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아아!
돌아와다오. 나의 귀여운 폴아 돌아와서 네 어미에게 키스해다오. 절망의 팔을
내밀고 있는 네 늙은 어미의 곁으로 돌아와 다오. 잔'
'그리운 어머님, 진작 편지를 드리지 않은 것은 파리에 소용없는 여행을 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자신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찾아뵈어야만
했기 때문에 저는 현재 몹시 불행한 처지에 빠져서 대단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 처는 사흘 전에 계집애를 낳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전 한푼도
없습니다. 애는 문지기가 간신히 키우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어린애를 길러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죽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가 됩니다. 어머님이 맡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정말이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모에게 맡기자니 돈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대로 곧 회신을 바랍니다. 어머님을 사랑하고 있는 아들 폴'
잔은 의자에 맥없이 앉아서 로잘리를 불렀다.
"제가 아이를 맡지요. 부인 아무래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로잘리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 줘, 로잘리"
"그리고 공증인한테 갑시다. 아드님 결혼 수속을 해야 해요. 만약에 그 여자가
죽는다면 어린애의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로잘리는 그 날 밤 곧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사흘만에 돌아왔다.
"그래 어땠어?"
잔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죽었어요. 결혼식은 올렸답니다. 아드님은 장례식을 마치고 오실
거에요. 이게 손녀입니다"
이불에 싸여 보이지 않는 갓난애를 내밀었다.
잔은 '폴'하고 중얼거릴 뿐 입을 다물었다.
잔은 허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포근한 온기가 생명의
체온이 잔의 옷을 통해서 다리로 전해 오고 살 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그것은
무릎 위에서 잠들고 있는 어린 것의 체온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감동이 잔의 온 몸에 파고들었다. 잔은 왈칵 아직 보지 못했던
어린 것의 얼굴을 덮은 헝겊을 벗겨 버렸다. 자식의 딸 그러자 이 연약한 것이
불안에 싸인 채 심한 광선을 받고 입을 움직거리면서 파란 눈을 떴을 때 잔은 품
안에 들어올리고는 꼭 껴안고 빗발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로잘리는
무뚝뚝하면서도 즐거운 낯으로 그것을 말렸다.
"자, 자. 부인, 그만 좀 두세요, 그러시다가는 울려요"
로잘리는 아마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답하려 하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구나"
이방인(L'Etranger:1942)
해설
카뮈의 작품은 놀랍고도 야릇한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데 그 속에는 심오한
사상이 들어 있다. 카뮈 문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이다. 부조리 반항이란 무엇인가? 카뮈는 인간 존재를 모순으로 보고 있다.
인생은 모순된 두 가지 기본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절망과 삶의
환희', '고독과 사랑', '악과 선'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상징적인 면으로 본다면 '암흑과 광명', '질병과 건강', '겨울과 여름', '얼음과
불' 그런 것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있는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 그리고 깨어나는 의식이 불가피하게 허망한
모순에 부딪쳐 부조리를 깨닫게 되는 귀결을 보여 주는 것이 "이방인"이다.
모순에 봉착할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의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모순으로 보고 있다. 그는 부조리 해소의 희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생이 그토록 허망하고
반복적인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혹은 인생의 뜻이고
뭐고 다 귀찮고 괴로우니 인생에 대한 물음은 덮어 두고 그저 편히 살면 그만
아닌가?(사르트르는 그것을 '물질화'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허망에 직면한
의식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유혹이다. 카뮈의 대답은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카뮈 문학의 열쇠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는 비약이 있어 보인다. 거기에서 우리는 생명의 약동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자세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먼저 부정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소설
분야에서는 "이방인" 희곡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의
신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체험이 없었다면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작가 약전
카뮈는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라는 작은 읍에서 수공업 노동자들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음 해에 아버지는 전사했으며 어머니는 스페인계의 여자였다. 카뮈는
고학을 해가며 알제리 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그는 자동차 부속품상 알제리
총독부 직원 기상대 요원 해운 중개인 등 직업을 번갈아 가며 공부를 계속했다.
철학 전공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학원 졸업 논문으로는 '성오귀스탱과
플로맹'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그 후 결핵으로 인하여 교수 자격 시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학생 시절부터 연극에 열중하여 '동지좌'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몸소 배우 겸
극단 대표로 활약했다. 여러 희곡을 각색했으며 그 자신이 쓴 "아스튀리아의
반란"과 그 밖에 몇 편은 당국의 상연 정지 처분을 받은 것도 있다. 이 무렵에
"결혼"이란 수필집을 냈다.
처음에는 알제리 시에서 파리로 건너가 기자 생활을 하던 중 2차 대전에는
독일 점령하에서 레지스탕스로 일했다. 프랑스가 해방될 무렵에는 "콩바"지
주필로 활약하고 1945년에 사임할 때까지 세인의 이목을 끌던 그 탁월한 사설은
"악튜엘"이라는 논설집에 수록되었다. 이미 그의 문학적 명성이 확립되어 있었다.
특히 앙드레 말로의 주선으로 "이방인"(1942)을 유명한 출판사 '칼리마르사'에서
간행하고 이어 "시지프의 신화"(1943)가 출판되었다. 종전 후 희곡 "오해",
"칼리굴라"를 각각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전후에 쓴 것으로는
"계엄령"(1948), "정의의 사람들"(1950)이 상연되었다.
1951년에는 "반항적 인간"이 발표되었다. 카뮈는 자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알제리 대학 교수 장 그로니에를 내세우고 있다. 그는 또한 앙드레
지드에게 고전주의를 배웠으나 지드의 영향은 그것으로 그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 앙드레 말로와 카프카를 찬양하고 있으며 특히 "백경"의 작가이며
부조리의 스승인 멜빌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줄거리
-제1부-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마랑고에 있는 양로원으로부터 이러한 전보를 받고 내가 양로원을 찾아간 것은
매우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양로원의 원장은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찬 키가 작은 늙은이었다. 그는 서류를
뒤적이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
"뫼르소 부인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에 이 곳에 들어 왔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당신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가 나를 나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변명을 하려 했으나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어머니를 보게 해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는 안뜰을 지나
조그만 빈소 앞에 이르렀다. 나는 원장에게 사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는 뚜껑이 덮인 관이 가로놓여 있고 기름을 칠한 판장 위에 대충 박아둔
나사못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때 문지기가 들어와서 입관을 하였으나 볼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 주겠다고 하면서 관으로 가까이 갔다. 나는 그를 멈추었다.
"안 보시렵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라고
느껴서 매우 어색해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의자를 권하고 내 뒤에 앉았다.
문지기는 그가 양로원에 들어 오게 된 경위와 또 다른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는 동안 날이 어두워졌다. 그는 저녁을 먹으러 가라고 했으나 나는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카페 오 레를 가져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카페 오 레를 매우
좋아했으므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어머니 시신 앞이라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조금도 꺼릴 이유가 없어서
문지기에게도 한 대 권하며 함께 피웠다.
이튿날 아침 원장의 부름을 받고 내가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말했다.
"장의사쪽 사람들이 조금 전에 왔는데 관을 닫아야 하겠습니다. 그 전에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전화에다 뭐라고 명령을 했다.
원장은 일어서서 사무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마랑고 신부님이 벌써 오시네, 꽤 이르시군"
빈소가 있는 건물 앞에 신부와 복사가 둘이 있었다.
나는 곧 관에 나사못이 박히고 방 안에는 일꾼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영구차가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고인의 나이가 많았습니까?"
영구차를 따라가는 인부가 내게 물었다.
"꽤 많았습니다"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신이 좀 흐리멍텅했으나 모두가 급속하고 순조로이 또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므로 나의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하루 일로 피로하였기 때문에 일어나기 괴로웠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 끝에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우연히 우리 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있었던 마리 코르도나를 만났다.
나는 그녀가 부표 위로 오르내릴 때 거들어 주었으며 팔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
함께 헤엄을 쳤다.
나는 저녁에 영화 구경을 가고 싶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페르낭델이 주연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관을 나와 그는 내 집으로
왔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마리는 가버리고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도 다 끝나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녁에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다가 옆방에 사는 자칭
창고 감독인 레이몽 생테스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자기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술 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하자 그는 나에게 자기를 도와 달라면서 얘기를
꺼냈다. 머뭇거리면서 털어놓은 그의 얘기로는 며칠 전에 자기의 정부로부터
이용을 당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가 그녀의 살림을 대어 주고 있는데
그녀의 핸드백 속에는 전당표며 노름표가 들어 있고 자기가 애써 사다. 준
팔찌도 두 개씩이나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단단히 벌을 주려고
하니 나에게 편지를 한 장 써 달라는 것이었다. 여자가 그리워할 만한 사연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그녀가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음껏 짓밟아 주고
아침에 얼굴에다 침을 뱉아 내쫓아 버리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만족할 만한
편지를 써 주었다.
일요일 아침 마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몽이 때리는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복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가 법정에 설 때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약속했다.
다음 일요일 마리와 함께 레이몽과 함께 해수욕을 갔다. 그런데 레이몽의
정부의 오빠가 그 일로 해서 레이몽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그의 친구 아랍
사람들이 레이몽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우리들은 곧 버스를 타고
레이몽의 친구 마송을 찾아가 재미있게 놀게 되었다. 마송은 해변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 사람들은 거기까지 뒤쫓아 왔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레이몽은 팔이 찔리고 입이 찢어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와 레이몽은
해변을 거닐다가 큰 바위 뒤에 있는 조그만 샘가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시 아랍 사람들을 만났다.
레이몽은 주머니에서 피스톨을 꺼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빼앗았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뒷걸음질을 하며 바위 뒤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레이몽을 별장까지
바래다 주고 다시 해변가로 나와 바위 뒤에 있는 서늘한 샘을 찾아갔다. 나는
당황했다. 서늘한 그곳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아랍인 한
사람이 그 곳에 번듯이 누워 있지 않은가 나는 안주머니에 있는 레이몽의
피스톨을 쥐었다. 아랍 사람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뜨거운
햇빛에 뺨마저 달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혔다.
그 햇빛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아랍인은 단도를 뽑아 나에게 겨누었다. 햇빛이 강철 위에 반사되어 기다란
칼날이 이마에 와서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 뜨거운
햇빛은 나의 속눈썹을 쓸고 어지러운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모든 것이 동요한 것은 나의 온 몸이 긴장하여 피스톨을 힘껏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놀라고 짤깍하고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굳어진 몸뚱이에서 다시 네 방을 쏘았다. 그것이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린 짧은 네 토막의 소리인 듯 싶었다.
-제2부-
체포되어 나는 여러 번 심문을 받았다. 판사는 그 날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재촉했다.
"당신의 행동에 나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점들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그 날의 사건을 요약하여 레이몽, 바닷가, 해수욕, 싸움, 다시 바닷가,
조그만 샘, 태양, 다섯 방의 권총, 쓰러진 시체까지 이야기를 마쳤다
"좋습니다"
다음 그는 다짜고짜로 어머니를 사랑했느냐고 물었다.
"네,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사랑했습니다"
"첫 번째 방아쇠를 쏠 때와 두 번째와의 사이에는 왜 간격이 있었습니까?"
그가 말하였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붉은 바닷가를 눈 앞에 보고 뜨거운 햇볕이
나의 이마 위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당신은 땅에 쓰러져 이미 죽은 사람 위에 다시 총을 쏘았습니까?"
그 물음에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판사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왜 그랬어요?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예심은 십개 월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마리는 여러 번 찾아와서 석방되면
곧 결혼하자고 했고 해수욕도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결국 여름이 지나가고 또 다시 여름이 되었다.
아침 일곱 시 반. 나는 호송차를 타고 재판소에 닿았다.
재판장은 서류를 뒤적이고 나서 처음으로 왜 어머니를 양로원에 넣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를 부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마음이 괴로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은 서로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었으므로 곧 그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다음으로
증인 심문이 있었다. 먼저 양로원 원장이 진술했다. 그는 어머니가 나에게 불평을
했다고 말하고 또 장례식 날 나의 냉정한 태도에 놀랐다고 말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무덤 앞에서
묵도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로 문지기의 진술로 그는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까페 오 레를
마셨다는 것을 말하였다. 다음에 마리 마송 레이몽 등의 공술도 끝났다.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은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검사는 어머니가 죽은 뒤의 사실을
요약하였다. 내가 냉정했다는 것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 이튿날
여자와 함께 해수욕을 갔었다는 것 영화 구경을 가고 마리와 함께 집으로 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레이몽과 합의하여 그의 정부를 꾀어다가 성품이 불측한 사나이의
흉악한 행위에 맡기려고 편지를 썼으며 바닷가에서는 레이몽의 적에게
대들었다는 것이다. 레이몽이 다친 뒤 레이몽에게 권총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사용할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계획대로 아랍 사람을 쏘아 죽인 것이다.
잔인하게도 일이 잘 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네 방의 탄환을 태연하게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쏘았다고 검사는 말하였다. 끝으로 검사는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사형을 요구합니다"
재판장이 나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는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하자 장내는 웃음으로 소란해졌다. 변호사의 긴
변론이 끝난 다음 나는 옆방으로 끌려갔다. 변호사는
"배심원의 답신을 재판장이 읽습니다. 당신은 판결을 언도할 때에야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변호사는 나를 두고 가 버렸다. 나는 마리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재판장은
내가 프랑스 인민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속 신부의 면회를 여러 번 거절하고 새벽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풀벌레의 울음 소리가 축축한
대기에 울려 퍼지고 검은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는 밤을 보내며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형제애를 느꼈다. 나는 그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1843)
해설
'최고의 작품은 최대의 상상에서 생긴다'이것이 작가로서 포의 생애의
표어였다. 보들레는 "고통과 싸우며 칼날 같은 날카로움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그의 작품의 남성도 포 자신이요. 병들었으나 빛이 있고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울리는 작품의 여성 또한 포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포는 철두 철미한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시대에 무관심했다. 외적 상황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의 내적 요구에 충실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포는 시인으로서 아름다움의 창조를 시의 생명이라고 하였으며 "갈가마귀",
"헬렌에게" 등 죽음 및 우수를 테마로 하는 극히 음악적인 서정시를 지었다. 단편
작가로서는 철저하게 단일적 효과를 노려 '그로테스크 하고 아라베스크 한
이야기'에서와 같은 불유쾌 공포 우울 등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비평가로서는 "호손론", "시의 원리" 등에서 단편 소설의 이론을 수립하였고 시를
사회적인 효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순수시론을 주장했다.
시대 및 환경에서 이탈되어 사상성이 빈곤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포와 같은
날카로운 분석적 두뇌로 오직 미의 세계만을 추구한 문학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그가 근대의 과학적 탐정 소설의 시조라는 점이다. 그의
치밀한 추리나 해석은 보통 두뇌의 작가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작가 약전
포는 1809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는 가난한 순회 연극단의 배우였으며 3형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부유한 상인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소년 시절에는 양부를 따라
영국에 가서 살기도 하였다. 후에 미국에 귀국하여 버지니아 대학에 다녔다.
젊어서 배운 술과 도박 때문에 양부와 이별하고 자립해야 할 형편에서
저널리즘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1836년에는 버지니아 클렘이라는 13세의 어린
소녀와 결혼했으나 절망과 방탕으로 인한 빈곤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다. 직업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꾸준하게 시집과 단편집을 내어
인정을 받았으나 1849년 10월에 술집에서 폭음으로 인사 불성이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짧고 불행한 생애였지만 그의 작가적 활동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미국의 포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체호프를 꼽을 수 있다.
전문
내가 이제 여기에 쓰려고 하는 광포한 그러나 지극히 솔직한 이야기에 대하여
믿어 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거니와 애원하지도 않는다. 바로 나 자신도 믿지
않을 만한 사건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믿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정말 미치광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일이면 나는 죽을 몸이다. 나는 내일 영혼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생각이다.
나의 목적은 솔직하고 간결하게 아무 주해도 달지 않고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내 놓으려는 것이다. 사건의 결과는 나를
공포에 떨게 하였고 들볶아 왔으며 마침내 파멸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이들
사건에 해설을 붙이려고 하지는 않는다-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이들 사건이
무섭다기보다는 기괴하게 보이겠지 앞으로 어떤 지성인이 나타나서 내 환상을
흔해 빠진 것이라고 설명하게 될는지도 모른다-나보다 더 냉정하고 더
논리적이고 도무지 흥분하기가 어려운 지성인이 있다면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있는 이 전후 상황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 관계의 단순한 사실밖에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나는 성질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유약한 마음씨가
얼마나 유난했던지 친구들의 조롱감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특히 동물을
좋아해서 양친이 가지 각색의 동물을 사 주셨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것들과
함께 보냈다. 그들에게 먹이를 주며 쓰다듬어 주는 순간처럼 즐거운 시간은
없었다. 내가 자라면서 이런 특성도 같이 자라게 되어 어른이 되면서는 더욱
중요한 쾌락을 얻게 되었다. 충실하고 영리한 개에게 사랑을 가져 본
사람들에게는 이런 데서 맛보는 만족감이 어떤 성질의 것이며 또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하찮은 우정과 경박한 성질에
시달려 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그 무엇이
짐승의 비이기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에는 있는 것이다.
나는 일찍 결혼했는데 아내에게도 나와 비슷한 성미가 있음을 알게 되어
행복했었다. 내가 집에서 기르는 귀여운 동물들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아내는 마음에 드는 동물을 사들였다. 우리는 새 금붕어 개 토끼 작은 원숭이와
고양이들을 길렀다.
이 고양이는 퍽 크고 예쁜 동물로 몸 전체가 검은 것이 놀랄 만큼 영리하였다.
아내는 내심으로 상당히 미신을 믿고 있는 터라 이 고양이가 영리하다고
말하면서 검은 고양이는 모두 마녀의 화신으로 간주하는 옛 사람들의 말을 자주
들춰 냈다. 아내가 이 점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문득
생각이 났기 때문에 말하는 것뿐이다.
플루토(저승의 왕)-이것이 고양이의 이름이었다-는 내가 귀여워하는 애완
동물이며 같이 뛰어놀던 친구였다. 내가 도맡아 길렀더니 집 안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외출할 때에는 고양이가 거리까지 따라나오는
것을 떼어 놓느라 애를 먹곤 했었다.
나와 고양이와의 우정은 이렇게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내 기질과
성격은-음주라는 악마 때문에(고백하기 부끄러운 노릇이지만)-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나는 나날이 더 침울해지고 성급해져서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게 되었다. 아내에게는 욕설을 퍼부었고 드디어는 폭력을
가하게까지 되었다. 내가 귀여워하던 동물들도 물론 내 기질의 변화를 맛보게
되었다. 그들을 돌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학대까지 하였다. 토끼나
원숭이라든가 개까지도 무심코 또는 좋다고 내 곁으로 오기만 하면 학대를
하였지만 플루토에 대해서는 그래도 학대를 삼갈 만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병은 점점 악화되어-알콜 중독과 같은 병이 또 어디 있으랴!-마침내
이제는 차츰 늙어 좀 억지로 어리광을 부리는 플루토에게까지도 손을 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거리의 술집에서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오니 고양이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놈을 움켜 잡았다. 그러자 그 놈은 나의 난폭한 짓에 놀라서
이빨로 할퀴어 내 손에 가벼운 상처를 입혔다. 순간적으로 악마와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성을 잃었다.
악마보다 더한 악의가 전신의 모든 근육을 타고 흘렀다. 나는 조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날을 편 다음 고양이의 목을 붙잡고 눈알 하나를 날렵하게 도려
내었다. 이 저주받을 만한 폭행을 써 내려가는 동안에도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거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이튿날 아침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간밤의 취기에서 깨어나서-나는 내가
저질러 놓은 죄악에 대해서 공포와 회한이 반반 섞인 감정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미약하고 모호한 느낌 뿐이었지, 내 마음은 그래도 바뀔 줄 몰랐다. 나는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고,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모든 기억을 술 속에 파묻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고양이의 상처는 차츰 회복되었다. 도려낸 눈 구멍은 사실 끔찍한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 놈은 평상시대로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 가면 당연히 그럴 테지만 그만 질겁을 하고 달아났다. 전에는 나를
그렇게도 따르던 동물이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며 처음에는 슬픔을 느낄 만큼 옛날
심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그러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자초하려는 것 같은 정신의 변태가 생겨 났다. 이 정신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변태성이 인간의 심정의 원시적 충동의
하나라는 것-인간의 성격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불가사의한 원시적 본능 혹은
감정임을 확신하며 내 영혼 속에 있다는 것도 확신한다.
고약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경우를 때때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가장
건전한 판단력을 무시하고 오직 법률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만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범하려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뒤틀려 버린
정신이 내 최후의 파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죄없는 짐승에게 가했었던
위해를 그대로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죽이게까지 나를 충동한 것은 자기의
본성에다 폭력을 가하고 악을 위해서 악을 범하려는 자학에 대한 영혼의 무한한
욕망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평정한 마음으로 고양이 목에 올가미를 씌워
나뭇가지에 매달았던 것이다. 눈물이 흘렀고 쓰디쓴 회한으로 가슴이 메었다. 그
놈이 나를 꽤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그 놈이 분노를 일으킬
아무 구실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내
불멸의 영혼이 위험한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심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경지에까지 떨어지게 하는 끔찍한 죄를-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놈을 매달았던 것이다.
이 잔인하기 그지 없었던 짓을 저질렀던 그날 밤 나는 "불이야!" 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내 침실 커튼에 불이 붙고 있었고 집은 온통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내와 하인과 나는 간신히 화염 속을 피해 나왔다. 모조리 파괴되었다. 전재산을
완전히 날려버리자 나는 절망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이 재난과 폭행과의 사이에 인과 관계를 찾아보려고 할만큼 마음이
약하지는 않다. 오직 사건의 연쇄를 자세히 설명하여 사슬의 고리 하나라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불이 난 그 다음 날 나는 불탄 자리에 가 보았다.
벽은 한쪽만 남고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 한쪽이라는 것은 집 한가운데에 있는
그리 두껍지 않은 간막이 방의 벽으로 내가 침대머리를 붙여 두던 벽이었다.
이 벽의 벽토가 불에 견뎌낸 것은 바른 지가 얼마 안 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벽 근처에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떤 부분을 여러 사람이
세밀히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데!" "기묘하군!"하는 말들이 내
호기심을 끌었다. 가까이 가 보니 커다란 고양이 모양을 한 것이 얇게 조각이나
한 것처럼 나타나 있었다. 나타나 있는 모양은 신기하리만치 선명했다. 동물의
목에는 올가미가 걸려 있었다.
나는 처음 이 망령-딴은 망령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으니까-을 보았을
때 내 놀라움과 공포는 극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나니 마음이 덜컹 가라앉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양이는 집에 딸려 있는
정원에 매달아 놓았었던 것이다.
"불이야" 하는 소리에 정원에는 사람들로 꽉 차 버렸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나무에 매여 있는 끈을 끊고 그 동물을 열려 있던 창문으로 내 침실에 던졌던
것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아마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려는 뜻에서 였을 것이다.
다른쪽 벽이 무너지면서 내 잔인성에 희생된 제물을 새로 바른 회벽에다
압착시켰을 것이다. 벽의 석회분이 불꽃과 짐승 시체에서 나온 암모니아와
섞여서 내가 보고 있는 화상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자세히 말한
놀라운 사실을 내 이성으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내 공상에 심각한 인상을
뿌리박아 놓고 말았다.
여러 달 동안 나는 그 고양이의 환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동안에
회한 비슷한 실은 그것도 아니지만 모호한 감정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것이 애석하여 그 당시 자주 가던 하류 주점 같은
데서라도 혹시 그와 같은 고양이나 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는 고양이가 없을까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술집에 정신없이 앉아 있으려니까 방
안의 주요한 가구를 이루고있는 진과 럼을 담은 커다란 통들 중 어느 하나 위에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웅크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것을 좀더 일찍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손으로 건드려 보았다. 그것은 검은 고양이로서-썩 큰
놈이었는데-플루토만큼 큰 데다가 하나만 빼고 모든 점에서 그 놈과 흡사하였다.
플루토는 몸에 흰 털이라고는 없었는데 이 고양이는 선명치 못한 윤곽이긴 하나
가슴이 거의 큼직한 흰 점으로 덮여 있었다.
내가 건드리자 그 놈은 곧 일어나서 골골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내 손에다
몸을 비벼대며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고양이었다. 나는 당장 주인에게 그 놈을 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고양이를 알지도 못하고 전에 본 일도 없으니 자기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니 고양이도 나를
따라올 눈치를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걸으면서도 이따금씩
허리를 굽혀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집에 오자마자 그 놈은 곧장 길들여져
아내에게도 당장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얼마 안 되어 그 고양이에 대해 싫증이 났다. 그것은 내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도대체 웬일인지 그 놈이 확실히 나를 따른다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불쾌하고 귀찮아졌다.
이러한 염증에 대한 불쾌감은 극도의 증오로 변해 갔다. 어떤 수치심과 이전의
내 잔인한 행위 기억이 나로 하여금 그 놈을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삼가게
했다. 여러 주일 동안 그 놈을 때리지도 않았거니와 횡포하게 다루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로-나도 모르는 사이에-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감으로
그놈을 바라보게 되었고 악취를 피하듯 고양이를 슬슬 피하게 되었다.
이 고양이에 대한 내 증오심을 부채질한 것은 그 놈을 집에 데리고 온 다음 날
아침 플루토와 같이 그 놈도 눈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인정이 많은 아내는 이러한 사실로 더욱 고양이를 측은히 여길 따름이었다.
인정이 많다는 것이 전에는 나의 유별난 특징이었으며 나의 소박하고 순수하기
이를데 없는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내가 고양이를 미워하면 할수록 그놈은 더욱 성가시게 내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내가 앉아 있으려면 으레 의자 밑에 쪼그리고 앉거나 무릎에 뛰어
올라와 지겹게 핥거나 제 몸을 내 몸에 비벼대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걸어가려고
하면 가랑이 새로 기어들어 나를 넘어뜨릴 뻔하거나 뾰족하고 긴 발톱으로 옷을
할퀴면서 가슴까지 기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저 한 방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참을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전에 저지른 죄가
생각나서이지만 그 주된 이유를 솔직히 고백하면 그 짐승이 끔찍하게 두렵기
때문이었다.
이 공포감은 육체적 위해의 공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곤란했다. 좀 부끄러울 정도지만-그렇다. 이중죄수의
감방에서까지도 고백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이 고양이가 내게 불어넣은
공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어떤 망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이
고양이와 내가 죽인 고양이 사이의 유일한 차이가 흰 털 반점이라는 것은 전에도
말한 바 있거니와 아내는 가끔 그 흰 점에 나의 주의를 끌게 했다. 이 반점이
크기는 했지만 원래는 그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그리고 오랫동안 내 이성은
그것을 공상이라고 부정하려고 싸워 왔던-그것은 마침내 아주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그것이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었다-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나는 그놈을 미워하고 두려워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괴물을 없애 버렸을 것이다-그것은 저 소름끼치는 무시무시한 교수대의
형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보통 인간으로서의 불행한 범위를 넘어선 불행에 빠져
버렸다. 한 마리의 짐승이-제 친구를 내가 하찮게 죽여 버렸지만-나를
위하여-지고하신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인간인 나를 위하여
이렇듯 견딜 수 없는 고민을 안겨 주다니! 낮이나 밤이나 내게는 안식의
기쁨이라고는 조금도 없구나! 낮이면 고양이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이면 밤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몽에서 소스라쳐 깨어나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고양이의 뜨거운 입김이며 영원히 내 가슴을 억누르는 그 육중한
무게가-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몽마의 화신을 느끼게 했다.
이같은 고통의 압박을 받아 마음 속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착한 성질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흉악한 생각이-흉측하고 악독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내
유일한 벗이 되었다. 평소의 내 침울한 기질은 점점 변해서 모든 인간에 대한
증오가 되었다. 별안간 주체할 수 없는 광란의 발작이 가끔씩 일어나 지각 없이
날뛰는 동안 아내는 언제나 불평 한 마디 없이 화를 도맡아 받는 희생자였다.
우리는 가난해서 할 수 없이 지은 지 오래 된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안일로 아내는 나를 따라 지하실로 들어갔다. 고양이도 험한 계단을
따라 내려와 하마터면 내가 곤두박질할 뻔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격분하여 어린애 같은 공포심도 잊어버리고 나는 도끼를
번쩍 들어 고양이를 내리찍으려고 겨냥을 하였다. 마음먹은 대로 내려쳤다면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손으로 막는 바람에
내리치지는 못했다. 방해가 자극이 되어 악마도 못 당할 정도의 심한 격노에
싸여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아내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쳤다. 아내는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이 끔찍한 살인을 치르고 나자 나는 아주 신중하게 시체를 감추는 일에
착수했다. 낮이나 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집에서 시체를 내갈
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한 번은
시체를 토막으로 각을 떠서 불에 태워 버리려고도 생각하였다. 다음에는 지하실
바닥에 구멍을 파고 그 밑에 묻어 버릴까도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뜰 안에 있는 우물 속에 던져 버릴까-상품처럼 상자에 챙겨
넣은 다음 포장을 하고서 짐꾼을 불러 집에서 내갈까-하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끝내는 이제까지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낫다고 여겨지는 계획
하나를 짜냈다. 중세기 승려들이 그들이 죽인 사람을 벽 속에 넣고는 발라
버렸다는 기록처럼 나도 시체를 지하실 벽 속에 넣고 발라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이같은 목적에 지하실은 적당했다. 벽은 부실하게 쌓은 데다가 전면에 굵은
벽돌로 바른 것이 공기가 습해서 아직 굳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 벽에는 툭
두드러진 데가 있어 가짜 굴뚝으로 벽난로를 가리게 된 것 같으나 이미 메워져서
다른 벽과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이 부분의 벽돌을 떼고 시체를 넣은 다음
이전처럼 벽을 발라 버리면 누가 보더라도 의심나는 데를 찾아 볼 수 없게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계획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쇠지레로 거뜬히 벽돌을 떼고서 송장을
안쪽 벽에 기대어 감쪽같이 그 자리에 버티어 놓은 다음 별로 힘들이지 않고
먼저 있던 대로 벽 전체를 다시 쌓았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전과 다름없는
벽토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벽돌 개수 공사를 끝마쳤다. 공사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벽에 손을 댄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는 남김없이 치워 버렸다. 득의 양양하게 주위를 돌아보니 저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적어도 이번은 헛수고가 아니었군"
다음으로 할 일은 이런 여러 가지 불행의 원인이 되어 온 그 고양이를 찾는
일이었다. 기어코 그 놈을 죽이기로 굳게 결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 놈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그 놈의 운명이란 두 말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활한 고양이는 내가 무섭게 화를 내는 바람에 놀랄 일이 있어서 그
때의 그런 기분으로 있는 동안에는 나타나기를 꺼리는 것 같았다. 보기 싫던
고양이가 없어진 그 가슴이 후련하던 안도감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놈은 밤에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놈이 집에 온 후에
처음으로 나는 아무 생각없이 잠을 잤다. 살인죄의 무거운 부담을 느끼면서도
편안히 잠을 잤던 것이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변함없이 지나갔건만 나를 괴롭히던 고양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숨을 쉬었다. 그 괴물은
공포에 질려 영원히 내 집에서 도망치고 말았구나! 그놈을 다시는 보지 않겠지!
그야말로 내 행복의 절정이었다. 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죄의식도 별로 내
마음을 괴롭히지 않았다. 서너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거뜬히 대답해 냈다.
수색까지 당했으나 물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 앞날의 행복은 굳게
보장된 것으로 보였다.
나흘째 되는 날 뜻밖에도 경관들이 집에 몰려와서 재차 엄중한 가택 수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체를 감춘 장소는 절대로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경관들은 나에게 수색 중에 자기들을 따라다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구석구석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지하실로 내려왔다. 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심장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평온하게 뛰었다.
나는 지하실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다녔다. 가슴에 팔짱을 낀 채 버젓이 왔다갔다
했다. 경관들은 의심이 풀려서 떠나갈 준비를 했다. 가슴에 북받친 기쁨을
참는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벅찬 일이었다. 버티고 서서 단 한 마디 말이라도
해서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재인식시키고 싶어 몸이 달았다.
"여러분!" 하고 마침내 경관들이 층계를 올라갈 때 내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의심을 풀어 드려서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건강을 빌며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 집은 이 집은 썩 잘 지은
집입니다(무엇이든지 태연 자약하게 말하고 싶은 미치광이 같은 욕심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지껄이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 참 잘 지은 집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벽돌은 썩 튼튼하거든요"
그리고 허세를 부리고 싶은 미친 놈의 심사에서 쥐고 있던 지팡이로 그 뒤에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가 있는 바로 그 부분의 벽돌을 쾅쾅 두드렸다.
그런데 하느님이시여 악마의 손에서 저를 구하옵소서! 지팡이 소리의 반향이
가라앉자마자 무덤 속에서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짤막짤막한 것이
마치 어린애가 우는 것 같은 소리였는데 갑자기 길고 높이 연속적인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변하면서 사람 소리 같지 않은 아주 불규칙적인 고함 소리로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공포와 승리가 반씩 뒤섞인 통곡 소리로
변하였다.
내 마음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졸도하여 맞은편 벽으로
비틀비틀 쓰러졌다. 순간 경관들도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싸여 층계에 꼼짝
못하고 붙어 있었다. 다음 순간에 열 둘이나 되는 억센 팔들이 벽을 허물어
부수고 있었다. 벽이 무너졌다. 벌써 상당히 썩어 핏덩어리가 엉겨 붙은 시체가
사람들 눈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머리 위에는 시뻘건 입을 벌리고 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저 끔찍한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나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하고
내가 잡히도록 소리를 내어 교수형 집행자에게 인도한 그 괴물의 술책에 빠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 괴물을 시체와 함께 벽 속에 넣고 그냥 발라 버렸던 것이다.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1905)
해설
오 헨리가 남긴 270여 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과학을 초월한 정신력과 숭고한 사랑을 나타낸 단편 소설로서 짜임새 있는
구성과 간결하고 탄력성 있는 문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작품이다.
어휘가 풍부하고 적절하며 사건의 종말에 가서는 급전법, 반전법을 사용하여
독창적인 문학적 기법을 개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 약전
오 헨리의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이다.
은행원으로 있을 때 공금 횡령의 혐의로 3년 간의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가 그는 사교적인 성격은 못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될 수 있으며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썼지만 음성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이 역력하였다. 또한
수줍고 변덕스러웠다. 누구에게도 자기의 마음을 터놓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고집스럽고 완고해 보이리만큼 철저하게 자기 세계를 지켰으며 그
내부로는 누구도 발을 들여 놓을 수 없게 하였다.
'뉴욕 월드'의 편집장인 윌리엄 존스턴은 오 헨리와는 작가의 관계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견고한 벽만은 끝내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술회하였으며 오 헨리의 친구였노라고 자칭하는 인물들의 회고문이
발표되어질 때마다 "나는 그의 영혼이 천국에서 하이볼 잔을 기울이며 차갑게
비웃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오 헨리에게 진정한 친구는 없었다고 쓰고
있다. 이 자기 폐쇄적인 성격의 경향을 그의 공금 횡령 사건과 결부시켜 혹 그가
전과가 알려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제를 꺼리는 것이 아닐까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마도 그것은 타고날 때부터 그가 형성해 온 성격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는 1909년 극작에도 손을 댔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폴 암스트롱이 그의 단편 "개심 뒤에 오는 것"을 각색하여 상연하였더니 그것이
전국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건강을 해치게 된 오 헨리는 1909년 일단 아내와 딸이 있는 내시빌로
돌아가 약 1년쯤 요양을 했다. 이듬해 9월에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그로부터
죽기까지의 마지막 석 달 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전화 수화기조차 내려놓은 채
굳게 닫혀진 아파트 안에 들어박혀 병과 싸우며 집필을 계속했다. 특히 그가
병원으로 옮겨지기까지의 며칠 동안을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그의 침대 밑에 빈 위스키 병이 9개나 뒹굴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임종 때에는 의사 한 사람만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숨을 거둔지
하루만인 1910년 6월 6일자 '뉴욕 트리뷴'지는 오 헨리의 죽음을 알리면서
사인은 간경화증이라고 밝히고 다음과 같은 의사의 말을 첨부하고 있었다.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소화기관은 못 쓰게 되고 신경도 도저히 손 댈
수 없는 상태였다. 심장 역시 작은 충격에도 견뎌 내지 못할 만큼 약화되어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매디슨 스퀘어에서 가까운
"순경과 찬송가", "정신 없는 브로커의 로맨스" 등에 나오는 '모퉁이를 돌아 가서
있는 조그만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 장례식에 대해서는 그의 작품과 거의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유머와 위트와 페이소스, 바로 이것이 오 헨리의 작품의 훌륭함이라 할 수
있지만 더욱 경탄할 것은 그 착상의 기발함과 플롯의 교묘함에 있다. 풍부한
상상력과 앞뒤를 재는 구상력을 지닌 그의 단편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항상 뜻밖의 결말'이 있으며 작품마다.
예외없이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따뜻한 미소와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 작가가 인간의 심리와 인정의 흐름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또한
오 헨리 자신이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입증한다.
작품에는 "20년 후", "순경과 찬송가",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캬베스와 왕", "400만 달러", "도시의 목소리", "서부의 혼"
등 13권으로 270여 편에 달한다.
전문
워싱턴 광장 서쪽 한 구역은 큰 길들이 제멋대로 뻗어서 플레이시스라 부르는
조그만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플레이시스는 이상한 각도와 커브로 되어 있다.
하나의 골목길이 그 길 자체와 두세 번이나 교차된다. 어떤 화가가 일찍이 이
거리의 귀중한 가치를 발견하였다. 가령 어떤 수금원이 그림 물감과 종이와
캔버스 값을 받으려고 청구서를 가지고 이 거리를 돌다가는 대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안 되어 낡은 그리니치 마을에는 화가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북쪽을 행한 창과 18세기식 박공 지붕과 네덜란드 식 다락방과 값싼 집세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백납제 손잡이가 달린 잔과 한두 개의 식탁용 화로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화가촌'이 형성된 것이다.
이 마을의 납작한 3층 벽돌집 꼭대기에 수우와 존시는 그들의 공동 화실을
차렸다. 존시란 조안나의 애칭이었다. 수우는 메인에서 왔고, 존시는 캘리포니아
출신이었다. 두 여자는 8번가에 있는 델 모니코 식당에서 만나 예술과 꽃상치
샐러드와 작업복의 긴 소매에 대한 두 사람의 취향이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침내 공동 화실을 차리게 되었다.
그것이 5월의 일이었다. 11월이 되자 의사들이 폐렴이라고 부르는 차갑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한 모르는 신사가 이 화가촌을 배회하면서 얼음 같이 찬 손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만졌다. 이 파괴자는 우선 동부 일대를 대담하게
활보하면서 수십 명씩 희생자를 내더니 끝내 그의 발길은 이 좁고 이끼 긴
플레이시스의 미로에까지 들어왔다.
폐렴 씨는 이른바 기사도 정신을 가진 노신사는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온화한 미풍에 핏기를 잃은 한 조그만 여자는 원래 저 붉은 주먹을 가진
신경질적인 말썽꾸러기의 적수가 아니었지만 그는 존시를 기어코 때리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처녀는 꼼짝도 못한 채 페인트 칠을 한 쇠침대 위에 누워
조그마한 네덜란드식 유리창을 통하여 건너편 벽돌집의 흰 벽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숱 많은 회색 눈썹을 가진 한 의사가 수우를 복도로 불러냈다.
"저 아가씨가 회복될 가능성은...열에 하나밖에 안 됩니다"
그는 체온계의 수은을 털어 내면서 말하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장의사만 기다리고 있으면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친구는 자기 병이 낫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이 특별히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그 애는 그 애는 언제나 나폴리 만을 한 번 그려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림이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 마음에 무슨 깊이 생각할 만한 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이를테면 남자라든가..."
"남자요?"
수우는 유태인의 하프 소리 같은 울음이 담긴 소리로 말하였다.
"남자를 무슨 생각할 만한... 하지만 없어요. 선생님 도무지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것이 오히려 약점입니다"
의사는 말하였다.
"좌우간 의학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지요. 그러나 환자가 자기
장례식에 따라올 만치 수를 세기 시작하면 내 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은
반으로 줄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그녀에게 이번 겨울에 입을 외투 소매의
스타일에 대해 의욕을 갖게 한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5분의 1로 높아질 수 있다고
보장합니다"
의사가 돌아간 뒤 수우는 화실로 들어가 일본제 냅킨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화판을 들고 휘파람을 불면서 존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존시는 침대 시트에 작은 주름 하나도 만들지 않고 가만히 누운 채 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수우는 그녀가 자는 줄 알고 휘파람을 그쳤다.
수우는 화판을 세워 놓고 어느 잡지에 실릴 소설의 삽화를 그리기 위해 펜화를
시작하였다. 신인 화가의 길은 무명 작가들이 등단하는 문학지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수우가 주인공의 모습에 얌전한 승마복 바지와 외알 안경, 그리고 아이다호
지방의 목동을 스케치하고 있을 때 나직한 소리가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창을 내다보며 무엇인가를 세고 있었다.
'열 둘' 하더니 조금 있다가 '열 하나' 그리고 나서 '열', '아홉' 그리고
'여덟'과 '일곱'을 거의 한꺼번에 세었다.
수우는 걱정스럽게 창문을 건너다 보았다. 대체 거기에서 무엇을 세고 있는가?
거기에 보이는 것은 다만 텅 빈 마당과 20피트쯤 떨어져 있는 벽돌집의
흰담벽 뿐이고, 한 줄기의 늙고 늙은 뿌리마저 썩어 버린 담쟁이덩굴이 그
벽돌담으로 뻗어 있을 뿐이었다. 차디찬 가을 바람이 담쟁이 잎새를 때려 덩굴의
앙상한 가지만이 무너져 가는 담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어?"
수우가 물었다.
"여섯"
존시는 거의 속삭임으로 말하였다.
"지금은 더 빠르게 떨어지는군! 사흘 전에는 거의 백 개나 있었는데 그걸 다
세려면 머리가 아프더니 하지만 지금은 아주 쉽거든 또 하나 떨어지는군! 지금은
다섯 개밖에 안 남았어"
"글쎄, 무엇이 다섯이야? 좀 가르쳐 주렴"
"잎새 말이야 담쟁이 덩굴에 있는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나도 가는 거야.
사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의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
"아이 어쩌면 난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들은 적도 없어"
수우는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글쎄, 늙은 담쟁이 잎새랑 네 병이 무슨 상관이야? 넌 저 늙은 덩굴을
사랑하는 모양이구나? 글쎄 바보 소리는 그만두어. 의사 선생님이 오늘 아침
나에게 말하기를 네 병이 나을 가능성은... 가만 있어.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병이
나을 가능성은 십중 팔구라고 하던데! 그야 뭐 우리가 뉴욕 시내에서 전차를 탈
때나 새로 지은 빌딩 아래를 지날 때에도 그만한 위험률은 있지 않아? 그러니
어서 맘 놓고 수프를 좀 마셔 봐. 그래야 나도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편집자에게 그것을 갖다 팔아서 아픈 너에게는 포도주를 사다 주고 먹성 좋은
나는 돼지고기를 좀 사다 먹지"
"포도주는 사서 무얼하게?"
존시는 물끄러미 창문 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또 한 잎이 떨어지고 있어. 나는 수프는 안 먹겠어 남아 있는 잎새가 꼭 네
잎뿐이로군 어둡기 전에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그 후엔 나도
죽게 되겠지"
"존시!"
수우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제발 좀 눈 좀 감고 창문을 내다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지 않겠어? 내일까지는 이 그림을 갖다 주어야 하는데 밝아야 그림을 그리지!
그렇지 않으면 그만 커튼을 내리겠어"
"다른 방에 가서 그릴 수는 없겠어?"
존시는 차갑게 말하였다.
"나는 네 옆에 있고 싶어"
수우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 쓸데없는 담쟁이 덩굴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일을 끝내거든 알려 줘"
존시는 눈을 감고 마치 석고상처럼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이젠 기다리기도 지쳤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털어 버리고 저 지친 잎새처럼 밑으로 가라앉고 싶어"
"좀 자도록 해 봐"
수우는 말하였다.
"나는 베어먼 씨를 불러서 그 늙은 시골 광부의 모델을 부탁해야 하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줘"
베어먼 씨는 그들의 아래층에 사는 화가이다. 그는 예순 살이 넘었고 마치
산양신의 머리로부터 요정의 몸으로 굽실거리는 미켈란젤로의 '세상'에 나오는
모세의 수염을 하고 있었다. 베어먼 시는 예술가로서 실패한 사람이었다. 40년
동안이나 그림을 그렸으나 끝내 미의 여신의 치맛자락도 만져 보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걸작을 그려보이겠다고 말하였으나 아직 한 번도 그런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몇 해 동안 그는 어쩌다가 그리게 되는 상업용이나 광고용의
싸구려 그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 화가촌에서
비싼 모델을 고용할 수 없는 젊은 화가들에게 모델을 서 주는 것으로 근근히
살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면 여전히 미래의 걸작에 대해 아야기 했다.
그는 성미가 거칠고 왜소한 노인으로 누구든 상냥스럽고 다정한 것을 보면
심하게 조롱했으며 자기는 위층 화실에 있는 두 젊은 화가를 보호하는
사냥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우는 아래층 희미한 등불이 켜 있는 굴 속 같은 방에서 심하게 술냄새를
풍기며 앉아 있는 베어먼을 발견하였다. 한쪽 구석에는 화가에 흰 캔버스가
덮여져 있었다. 그것은 25년 동안이나 걸작의 맨처음 선을 기다리며 있었던
것이다. 수우는 노인에게 존시의 망상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회미한 집착마저 사라져 정말 잎새와 같이 떨어져 버릴까봐 걱정이라고
말하였다.
베어먼 노인은 시뻘건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존시의 어리석은 상상에
대해 경멸과 조롱을 퍼부었다.
"세상에 아무리 어리석기로 그래 그 빌어먹을 담쟁이 잎새가 떨어진다고 해서
사람이 죽는다는 법이 어디 있담? 난 그 따위 소리는 난생 처음 듣겠군 듣기
싫어! 당신 같은 멍청이의 모델 노릇은 그만 두겠소 아 글쎄 어떻게 해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존시의 머릿속에 들어가게 했느냐 말이오. 가엾은 존시..."
"그 애는 병 때문에 약해진 거에요"
수우가 말했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까지 병들어 이상한 공상만 머리에 가득 차게 된 거지요.
하지만 베어먼 씨, 그런 줄 몰랐는데 당신은 정말 무서운... 변덕쟁이
노인이로군요"
"참 여자란 할 수 없군"
베어먼이 외쳤다.
"누가 모델 노릇을 안 하겠다고 했나? 가십시다. 함께 가지요. 반 시간 전부터
모델 노릇을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맙소사, 이런 곳에 존시 같은 착한
아가씨가 병이 나서 누워 있다니. 나도 언젠가는 걸작을 그릴 테니, 그 때는 우리
모두 여길 떠납시다. 암 그래야지"
그들이 2층으로 올라왔을 때 존시는 자고 있었다. 수우는 커튼을 밑으로 잡아
내리고 베어먼에게 눈짓을 하여 다른 방으로 옮겼다. 거기서 두 사람은 두려운
마음으로 창밖의 담쟁이 덩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말이 없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발 섞인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베어먼은 낡은
곤색 셔츠를 입은 시골 광부가 되어 뒤집어 놓은 남비를 바위 삼아 걸터 앉았다.
다음 날 아침 수우가 한 시간쯤 자고 눈을 떠 보니 존시가 기운 없는 커다란
눈으로 늘어진 녹색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좀 올려 줘. 밖을 보고 싶어"
그녀는 가느다란 소리로 부탁했다.
그러나 보라! 밤새도록 비가 내리치고 사나운 바람이 불었는데 벽돌담 벽에는
담쟁이 잎새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실로 담쟁이의 마지막
잎새였다. 줄기 가까이는 짙은 녹색을 띠었으나 잎새 가장자리는 약간 누런 빛을
띤 채 당당하게 지상 20피트 높이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
"마지막 잎새야"
존시가 말하였다.
"난 저 잎새가 간밤에 틀림없이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바람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아마 오늘은 떨어지겠지 그러면 나도 이 세상을 떠날 거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수우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존시에게로 돌리면서
"네 자신을 생각지 않겠다면 나를 좀 생각해 주렴 난 어떻게 하란 말이니?"
그러나 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장차 신비한
곳으로 먼 길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의 영혼일 죽음에 대한 환상이 점점 더
그녀를 사로잡아 그녀로부터 친구와 현실을 멀리 떼어 놓은 것 같았다.
하루가 지났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그 외로운 담쟁이 잎새가 담벽 위에
꼭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더니 밤이 되자 북풍이 다시 휘몰아치고
세찬 비가 창문을 들이쳐 나직한 네덜란드식 처마를 두드렸다.
날이 밝자 존시는 커튼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담쟁이 잎새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존시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그녀는 가스 난로에서 닭고기
수프를 젓고 있는 수우를 불렀다.
"내가 잘못했어, 수우"
존시는 말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누군가가 저 마지막 잎새를
그대로 있게 한 거야. 죽기를 원하는 건 죄악이야. 수프를 좀 갖다 줘. 그리고 내
옆에 베개를 많이 쌓아 줘. 이렇게 앉아서 네가 요리하는 걸 구경하고 싶어"
한 시간 뒤에 그녀는 다시 말하였다.
"수우, 난 나폴리 만을 꼭 한 번 그리고 싶어"
오후에 의사가 왔다. 그는 갈 때 수우를 복도로 불러 내었다.
"회복할 가능성은 이제 80퍼센트입니다"
의사는 수우의 수척한 손을 잡고 말하였다.
"간호만 잘하면 문제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또 다른 환자를 보아야 하겠군.
무슨 베어먼인가 하는 사람인데 아마 화가인 모양입니다. 역시 폐렴이요. 그는
쇠약한 노인인데다가 급성입니다. 그는 살 희망이 없어요. 안정이나 할 수 있도록
입원을 시켜야겠습니다"
다음 날 의사는 수우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고비를 넘겼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이젠 영양과 간호만 잘하면
됩니다"
그 날 오후 수우는 존시가 누워 있는 대로 침대로 다가갔다. 존시는 짙은
푸른색 털실로 별 쓸모도 없이 보이는 어깨걸이를 느긋한 자세로 뜨고 있었다.
"글쎻, 내 말 좀 들어 봐"
수우는 존시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베어먼 씨가 오늘 병원에서 돌아가셨어. 병이 난 첫 날 아침에 그 노인이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문지기가 발견했대. 그의 신발과 옷이 온통
젖어서 몸이 얼음장같이 차더래. 그렇게 춥고 무서운 밤에 그가 어디에 갔었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아직 불이 켜진 램프와 늘 놓아 두던
장소에서 꺼낸 사다리 흩어진 붓 몇 자루와 함께 녹색과 노란 색 물감이 섞인
팔레트가 발견되었대. 잠깐 저 밖을 좀 내다 봐. 저 벽에 남은 마지막 잎새를
보란 말야. 바람이 그렇게 몹시 불었는데 저 잎새가 어떻게 흔들리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았는지 이상하지 않았니? 글쎄, 그게 베어먼 씨의 걸작품이었거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날 밤에 그 잎새를 그려 놓았던 거야"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1952)
해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50세에 미국 최고의 문학상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영미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절찬을 받았고 2년 후인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인과 바다"는 장편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아 중편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형식이라든가 언어의 구사 문체에 있어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서 원숙기에 이른 작가의 역량이 남김없이 발휘되어 있다.
푸르고 맑고 광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고기잡이 노인의 치열하고 고독한 싸움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치밀한 묘사와 참신한 내용이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걸작이다.
작가 약전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 시카고 교외의 오크 파크(Oak Park)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낚시와 사냥을 좋아하였다. 헤밍웨이도
어릴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낚시와 사냥을 좋아하였다.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
환경의 탓이었는지 나이가 들면서 생명을 거는 위험한 모험을 즐기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격과는 반대로 온화하였으며 교회의 독창 가수였다.
아버지는 어린 헤밍웨이에게 낚시대와 엽총을 주었고 어머니는 첼로를 주어
아들을 음악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헤밍웨이가 아프리카로 사냥을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8세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켄자스 주 '스타'지의 기자가 되었는데
다음 해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의용군에 지원하였으며 후에 이탈리아
북부 전선에 출전하여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무공 훈장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1923년 24세 되던 해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해
'포이트리'지 1월호에 최초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는 첫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한 성공적인
작품은 1926년 파리에서 발표된 첫 장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였다.
헤밍웨이가 이 작품으로 작가적 명성을 떨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신념의 상실과 절망 환멸 속에서 인생의 가치를 잃은 그 당시 청년들의
심리 상태와 현실을 여실히 묘사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강인한 체력에서 생기는
생명력과 일상성이 파괴된 데서 오는 허무감이 동시에 흐르고 있는 그의 독특한
문장이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헤밍웨이의 명성을 확고 부동하게 한 것은 두 번째 장편 소설인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였다.
1940년에는 헤밍웨이 자신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적인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가 나왔다. 이 작품은 그 누구도 완전히 고립된 존재일 수 없고 모든
사람은 전체의 일원이며 한 사람의 죽음은 전인류의 손실이라는 내용으로서
인생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보여 준 문학의 새로운 가치를
실현한 작품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하고 난 후 그는 10년 간 침묵을 지키다가
1950년에 "강 건너 숲 속으로"를 발표하였고 1952년에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세상에 내 놓았다 헤밍웨이는 62세가 되던 1961년에
의문의 엽총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줄거리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서 낚시질을 하면서 살고 있는
고독한 노인이었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허송한 날이 벌써 84일째였다.
이런 운수 나쁜 날이 계속되던 처음 40일 동안은 한 소년이 그를 도와 주어서 덜
외로웠다. 그러나 40일이 지나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것을 보자 소년의
부모는 소년을 다른 배로 옮겨가서 일하게 했다. 소년은 날마다 허탕만 치고 빈
배로 돌아오는 노인을 보기가 딱해서 노인의 배가 뭍에 닿으면 여러 가지 일을
도와 주곤 하였다.
"산타이고 할아버지, 다시 할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싶어요"
소년은 조각배를 올려 놓고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이 소년에게 낚시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소년은 무척 이 노인을
사랑하며 따르고 있었다.
"아니다. 네가 일을 하고 있는 그 배는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느냐 너는 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단다"
노인은 말했다.
"'테라스'에 가서 제가 한 잔 사드릴께요. 그리고 나서 어구를 집으로 가져
가지요"
"그래 좋다. 우리 어부끼리 한 잔 마시자"
노인과 소년은 '테라스'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가 처음 저를 바다로 데리고 나가셨을 때 제가 몇 살이었지요?"
"다섯 살이었지 그 때 내가 어마어마하게 큰 고기를 낚아 올려 그 놈이 배를
산산조각으로 부술 것처럼 푸드득거리는 바람에 네가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단다.
기억하고 있니?"
"기억하고 있다 뿐이겠어요. 그 모든 것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게에요"
노인은 햇볕에 그을린 인자한 눈으로 다정하게 소년을 바라보았다.
"네가 만일 내 아들이라면 너를 한 번 더 데리고 나가 어떤 모험이라도 해
보고 싶다마는 네게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또 너는 지금 고기가 잘 잡히는
좋은 배에서 일하고 있으니..."
"내일은 어느 바다로 나갈 계획이세요?"
소년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먼 바다로 나가서 바람이 바뀌면 돌아오겠어 그래서 내일은 날이 밝기 전에
바다로 나갈 작정이야"
"이젠 어구를 가지고 돌아가지요"
소년은 웃었다. 노인과 소년은 배에서 어구를 집어 들었다. 노인은 돛대를
어깨에 메고 소년은 사려 감은 작살을 손에 들었다. 그들은 나란히 도로를
따라서 노인이 사는 오막살이까지 도착했다. 노인이 집이라고 거처하고 있는
오막살이는 이 지방 사람들이 구아노라고 부르는 종려나무로 지은 것이었다.
좁은 방 안에는 침대 하나 의자 하나 식탁 하나가 있을 뿐이었고 숯으로 불을
피워서 실내는 형편 없이 더러웠다.
"85는 행운의 수란다" 하고 노인은 의자에 앉으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
"두고 봐라 내일은 천 파운드도 넘는 큰 놈을 낚아 올 테니"
"나는 투망을 얻어서 정어리나 잡아 오겠어요. 문턱에서 햇볕이라도 쬐고 앉아
계셔요"
이렇게 말하고 소년은 밖으로 나갔다.
소년이 돌아왔을 때 노인은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 소년은 낡아
빠진 군대용 담요를 침대에서 벗겨다가 의자 뒤로 둘러 싸 노인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노인의 어깨는 확실히 나이에 비해서는 남달리 튼튼하였고 아직 힘이
넘쳐 있었으며 목덜미도 아직 힘 차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자는 것을 보니
주름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만은 나이를 속일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일어나셔요"
소년은 손을 노인의 한쪽 무릎에 가만히 놓았다.
"뭘 가져왔니?"
노인은 눈을 뜨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저녁밥을 가져왔어요"
"난 아직 배고프지 않은데"
"어서 드세요. 먹지 않고 어떻게 고기를 잡겠어요"
소년이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런데 누가 이 밥을 주던?"
"'테라스' 식당 주인 마틴 씨가 주었어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구나 큰 고기를 낚으면 배때기의 좋은 살을
선사해야지 벌써 이렇게 얻어먹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
"예"
그들은 친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다정하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노인은 소년에게 훌륭한 야구 선수 디마지오를 고기 낚는데
데리고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젠 주무세요. 푹 쉬셔야 내일 아침에 힘이 나지 않겠어요. 나는 이 그릇을
'테라스'에 갖다 주고 가겠어요"
"그럼 가서 자거라 내일 아침 깨우러 가마"
소년은 돌아갔다. 노인은 어둠 속에서 바지를 벗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먼 바다로 나가기로 작정한 노인은 흙냄새를 뒤로 하고 이른
새벽의 신선한 바다 냄새가 풍겨오는 먼 바다를 향하여 노를 저었다. 힘이
자라는 한도 내에서 노를 젓는 데는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해면은 유리같이
잔잔했다. 게다가 노젓는 삼분의 일의 노력은 파도가 덜어 주어서 동녘이 환하게
밝았을 때 노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먼 바다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날이 더 밝기 전에 미끼를 물에 띄워 보았다. 그리고 배를 파도의 흐름에
맡겨 두고 있었다.
해가 뜬 지 이제 두 시간이 지났다. 육지에는 구름이 산처럼 솟아올랐고
해안은 한 줄의 푸른 선으로 보였다.
노인은 우연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갈매기가 공중에서 원을 그리면서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기가 있구나" 하고 노인은 소리쳤다. 그 때 노인이 발로 밟고 있는 배
뒤쪽의 낚시줄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부지런히 낚시대를 놓았다.
낚시줄을 통하여 조그만 방어가 몸부림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노인은 낚시줄을
힘껏 당겼다. 몸부림치던 방어는 배 안으로 끌러 들어왔다.
"좋은 미끼가 되겠다. 무게가 십 파운드는 되겠군" 하고 소리쳤다
이젠 해안선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을 덮어 쓰고 있는 듯 희게 보이는 푸른
산봉우리와 또 그 위에 산봉우리 같은 구름이 솟아 있을 뿐이었다.
햇볕은 벌써 따가웠다. 그의 등은 따가운 햇볕을 받아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배는 파도에 맡기고 한잠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노인은 85일이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마음을 고쳤다.
바로 그 때 낚시줄을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던 노인은 녹색으로 칠한 그 막대기
하나가 쑥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 그래 알았어"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노인은 노를 조용히 놓고 낚시대를 가볍게 쥐어 보았다.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이 낚시대를 그대로 쥐고 조금 있으려니까
무엇이 낚시줄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퍽 세게 끌어당겼다. 그제서야 노인은
모든 것을 확실히 파악했다. 수백 피트가 되는 물 속에서 거대한 물고기가
낚시에 걸린 정어리를 물어 뜯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먼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상당히 큰 놈일 거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물어라 이 놈아 어서 미끼를 먹어라 육백 피트나 되는 어두운 물 속에서 뭘
그렇게 꾸물대고 있니'
노인은 손가락으로 낚시대를 쥔 채 조용히 기다렸다. 가벼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고기가 낚시줄을 불끈 잡아 끌고 갔다. 노인은 재빨리
낚시줄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준비해 둔 예비 낚시줄에 이었다. 이제 준비는
모두 되었다.
노인은 양손에 힘을 주어 낚시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고기는 유유히 먼 데로 달아나고 있었다. 한 피트도 더 잡아당길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배는 북서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 애가 여기 있었다면... 나는 지금 고기에 못 이겨 끌려가고 있다. 이렇게
줄을 풀어 주고 있다가는 줄이 모자라겠어" 하고 노인이 중얼거렸다.
저 놈이 맥이 풀릴 때도 왰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고기가 낚시에
걸린지 네 시간이나 되었는데 고기는 여전히 조각배를 끌고 먼 바다로 헤엄쳐
가고 있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별들을 보고 고기가 그 날
밤의 진로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잡아둔 방어를 보면서
날이 새면 방어가 상하기 전에 먹고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지나고 주위가 조금씩 환해졌다. 배는 쉬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해가 좀 더 높이 솟은 뒤에야 노인은 고기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너는 참 멋진 놈이다. 그러나 나는 해가 지기 전에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 고기가 줄을 잡아당기면서 물 속으로
미친듯이 내려가는 바람에 노인은 그만 뱃머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재빨리 줄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노인은 물 속으로 끌려들어갈 뻔하였다. 노인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낚싯대를 잡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노인은 물에 담갔던 손을
햇볕에 비춰 보았다. 상처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곳이어서
노인에게는 타격이 컸다.
"자, 이젠 방어를 먹어야지"
손이 마르자 노인은 말했다. 노인은 한쪽 무릎으로 고기를 누르고 한쪽
손으로 가죽을 벗겼다. 바로 그 때 왼손에 갑자기 경련이 일어났다. 오른손으로
무거운 낚싯대를 죽을 힘을 다해서 꽉 잡았다.
"손이 왜 저러지, 경련이 날 테면 나 보라지 상관없다" 하고 노인은
중얼거렸다.
"자! 이젠 먹자" 하고 노인은 방어 한 점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먹었다. 제법
맛이 좋았다. 노인이 방어 한 마리를 다 먹고 오른손에 느껴지는 고기의 위력을
알아 차린 바로 그 때 낚싯대의 경사가 커지더니 줄이 물 위로 올라 오기
시작했다.
"저 놈이 이제 올라오는구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왼쪽을 향하여 외쳤다. 고기의 양쪽 지느러미에서 물이 양편으로 갈라졌다.
햇볕에 고기 비늘이 반짝거렸다. 주둥이가 야구 방망이 길이 만하고 끝은 칼같이
생겼다. 고기는 거대한 몸집을 물 위에 드러내더니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배 길이보다 두 피트나 큰 놈이다"
노인은 놀라서 중얼거렸다.
정오가 가까왔을 무렵에야 왼손의 경련이 겨우 풀렸다.
"네 놈에겐 좋지 못한 소식이다"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배 꽁무니에 짧은 낚싯줄에 다시 미끼를 끼워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이제 지칠대로 지치고 말았다. 밤이 벌써
찾아왔다. 노인은 우연히 어떤 일을 회상하고 힘을 얻었다.
젊었을 때 노인은 어떤 선술집에서 한 흑인과 팔씨름을 하였다. 그 흑인은
몸이 무지하게 크고 힘도 그 부두에서는 제일 센 녀석이었다. 팔씨름 한판이
하루 낮과 밤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날이 밝아질 무렵 모두들 씨름을 무승부로
결정하자고 주장하고 심판도 그 주장을 받아 들이려고 했을 때 노인은 온 몸의
힘을 다하여 흑인의 팔을 눕히고 말았다. 결국 씨름은 일요일 아침에 시작하여
월요일 아침에 끝난 셈이었다. 얼마 동안은 노인을 보면 모두들 '선수'라고
불렀다. 그 후로도 노인은 몇 번 팔씨름을 했으나 그와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오른손은 낚시를 위하여 아껴야만 했던 것이다.
어두워지려고 할 무렵 낚시에 돌고래가 걸렸다. 노인은 돌고래를 막대기로
마구 후려갈겨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배 위로 끌어올려 놓은 뒤 먹을 것을
마련한 것에 흡족해 했다.
해가 지자 9월의 바다는 금방 어두워지고 말았다. 사방은 캄캄했다.
"저 놈같이 억세고 큰 놈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 어떻든 나는 저 놈을 꼭
죽여야 한다"
노인은 별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동쪽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별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바람은 고요히
잠들고 말았다.
"사나흘 후에는 일기가 나빠지겠구나"
노인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노인은 그 놈이 잠잠할 때 한숨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인이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낚시줄이 마구 풀리고 있었다. 양손으로
낚싯대를 잡아 풀리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낚시줄은 계속해서 풀려나갔다.
왼쪽 손바닥은 상처가 났고 오른쪽 손바닥은 타는 듯이 아팠다. 고기는 몇
번이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노인은 이제 감각마저 잃은 손바닥이 마구 터지는
대로 맡겨 두었다. 노인은 다만 손가락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제 낚싯줄도
속도가 차츰 느려져 천천히 풀려갔다. 노인은 오른손을 물에 담근 채로 훤히
밝아지는 동녘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바다로 나오고 세번 째 해가 떴을 때야 고기가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줄을 잡아당기면 원은 차츰 작아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놈에게 맛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자 노인의 피로는 골수에까지 파고 들었다. 그리고 고기가 그리는
원도 퍽 작아졌다. 고기가 일곱 바퀴를 천천히 돌고 난 다음에야 노인의 작살이
닿을 만한 거리에 와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머리가 희미해지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고기의 허연 배때기가 보이는
순간이면 현기증이 나곤 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그 옛날의 자랑스러웠던 힘을 되돌려 보려고 하였다. 고기는 천천히 다가왔다.
주둥이가 뱃전에 거의 닿을 만한 거리에 왔을 때 노인은 낚싯줄을 발로 밟고
남아 있는 온 몸의 힘을 모아 작살을 높이 쳐들고 고기 배때기를 푹 내려
찔렀다. 고기는 치명상을 입고 갑자기 물위로 튀어오르며 그 아름다움과 넘치는
힘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노인은 현기증이 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져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노인은 작살에 매인 줄을 터질 대로 터진
손으로 풀어 주었다. 고기는 해면에 은빛의 배를 보이면서 자빠져 있었다. 해면은
고기 심장으로터 흘러나오는 피로 온통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노인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려서 낚싯줄을 당겨 보았다. 그러나 고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할 수 없이 고기에게로 배를 저어 가 준비한 밧줄로 고기
대가리는 뱃머리에 매달고 꼬리는 배 꽁무니에 달았다. 고기가 너무 커서 노인이
타고 있는 조각배를 큰 바위에 올려다 붙인 것 같았다. 모든 일을 끝낸 노인은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았다. 배는 미끄러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과
고기는 순조롭게 나아갔다. 노인은 손을 물에 담그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상어의 첫 습격을 받은 것은 약 한 시간 후의 일이었다. 노인은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는 고기를 보고 그것이 상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인은 작살에다
줄을 매었다. 상어가 배 꽁무니에 임박해 왔을 때 노인은 상어 대가리를 향하여
힘껏 작살 끝으로 내려 찔렀다. 상어의 가죽과 살이 우지직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투지 만만한 상어는 여전히 달라 붙었다. 노인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마구 작살을 내려 찍었다. 상어는 드디어 온 몸을 떨면서
단말마의 신음을 내었다. 그러다 꼬리로 물을 때리고 턱을 움직이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몸의 사분의 삼은 물 위로 나와 있었다. 그 순간 그것이 작살에 매어진
줄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노인은 그만 쥐고 있던 줄을 놓치고 말았다.
노인은 부상을 입고 뱃전에 매달려 있는 고기를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이라면 큰 고기도 필요없고 침대에 누워서 신문이나
보는 것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 순풍이 불고 있었다. 약 두 시간쯤 지났을까 노인은 뒤따라오던 상어 두
마리가 배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칼을 노 끝에 붙들어 매고 일어섰다.
두 손의 상처가 너무 아파 노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노인은 노를 꽉 쥐었다. 몹시 아팠다. 상어는 가까이 다가왔다. 다음 순간
상어는 입을 짝 벌리고 큰 고기를 습격해 왔다. 노인은 번개 같은 솜씨로 상어
대가리와 눈을 내려 찔렀다. 큰 고기에 매달려 살을 뜯던 상어는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배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배 밑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상어가 큰
고기를 물어뜯고 있었다. 노인은 재빨리 매어진 밧줄을 풀었다. 배가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하자 배 밑에서 상어가 나타났다. 노인은 칼로 재빠르게 내려 찔렀다.
그러나 칼은 머리에 맞지 않고 잔등에 맞았다. 손도 어깨도 말할 수 없이 아팠다.
상어가 큰 고기에 덤벼들자 노인은 대가리를 향해 칼을 다시 내려 찔렀다. 또 한
번 그러나 상어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찔렀다. 그래도 상어는
꼼짝하지 않았다. 노인은 노를 거꾸로 들고 노 끝으로 상어의 입을 찔렀다.
그제서야 상어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노인은 상어에게 욕을 퍼부었다.
"죽일 놈 같으니 잘 가거라! 바다 밑까지 가자면 일 마일은 가야 할 게다. 아까
그 놈에게 안부나 전해라"
배는 순풍을 받아 해안으로 해안으로 달렸다. 고기의 사분의 일은 빼앗기고
말았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다음에 습격해 온 상어도 아까와 똑같은 종류였다. 노인은 상어가 고기에
달겨드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상어가 고기를 물어뜯는 순간 노
끝에 붙은 칼로 놈의 대가리를 내려 찔렀다. 상어는 몸을 뺐으나 칼이 대가리에
박혀 칼까지 잃고 말았다.
다시 상어가 습격해 온 것은 해지기 직전이었다. 노인은 뱃머리로 가서
막대기를 손에 들었다. 상어 두 마리가 나란히 고기를 향하여 돌진해 왔다.
그 중 한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고기에게 덤벼든 순간 노인은 막대기를
번쩍 들어 죽을 힘을 다해서 그 놈의 대가리를 내려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콧잔등이를 내려쳤다. 상어는 고기에서 떨어져 나갔고 또 한 마리가 입을 짝
벌리고 달려들었다. 노인은 막대기로 대가리를 힘껏 후려갈겼다. 상어는 고기살을
뜯어서 입에 문 채 뒤로 몸을 뺐다. 상어는 다시 달려들었다. 노인은 막대기를
높이 쳐들었다가 힘껏 내려쳤다. 그러기를 서너 번 한 뒤에야 전투가 끝이 났다.
상어는 물 위에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었다. 노인은 고기를 보는 것조차
싫었다.
고기의 반 이상이 상어란 놈들에게 물어 뜯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아바나 항구의 등불들이 보일 거다. 이 배가 동쪽으로 너무 멀리
나와 있다면 다른 해안의 등불이라도 보일 테지"
이젠 해안도 멀지 않았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밤중에 놈들이 달려들면
어떻게 하지? 무슨 수가 없을까?'
"싸워야지" 하고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노인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밤 열한 시쯤 되었을 때 노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항구의 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싸움은 자정에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이번에는 놈들이 떼를 지어서
습격해 왔다. 노인은 무턱대고 막대기를 내려쳤다. 그러나 막대기도 무엇에 걸려
빼앗기고 말았다. 노인은 다시 노를 들어서 내려치기 시작했다. 상어들은 차례로
고기의 살을 뜯고는 물러났다.
노인은 숨쉬는 것도 괴로웠다. 노인은 바다 위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처 먹어라! 더러운 상어놈들 같으니! 그리고 사람을 죽인 꿈이나 꿔라"
이제서야 노인은 자기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지쳐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런 상념도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다만 조각배를 잘 조종해
항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자정이 지난 후에도 상어는 뼈만 남은 고기에게
여러 차례 달려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눈도 깜짝이지 않았다.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노인이 항구에 당도했을 때는 '테라스'의 등불도 이미 꺼져 있었다. 노인은
바위 아래의 모래밭에 배를 붙이고 돛대를 맨 채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을 다
올라간 노인은 엎드린 채로 한참 동안이나 누워 있었다. 노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오막살이까지 당도하는데 다섯 번이나 쉬어야
했다. 오막살이로 들어간 노인은 물병을 찾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넘어지듯
침대에 쓰러져 곧 깊이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소년은 매일 아침 하던 대로 오막살이로 갔다. 노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노인의 거치른 숨결과 상처가 심한 두 손을 보고 소년은 울음이
북받쳐 나왔다. 소년은 커피를 가져 오려고 조용히 오막살이를 나왔다.
어부들이 노인의 배를 둘러싸고 고기의 잔해를 구경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리로 가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소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년이
커피를 갖다 놓고 다시 장작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을 때야 노인은 무거운 눈을
떴다.
"일어나지 마시고 이 걸 드세요"
소년이 말했다. 그리고 노인을 찾기 위해 해안 경비대와 비행기도 나갔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함께 일하자고 했다.
"어구는 내가 모두 준비하겠어요. 할아버지는 빨리 몸이 낫도록 하세요"
그리고 소년은 먹을 것을 가지러 밖으로 나왔다.
정오가 지나자 관광객 일행이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부인이 파도를
타고 막 흘러 나가고 있는 커다란 꼬리가 붙은 고기의 뼈를 발견했다.
"저게 뭘까요?"
급사에게 물었다.
"티브론입니다. 일종의 상어죠" 하고 웨이터는 서투른 영어로 설명하느라
애썼다.
"상어라니요. 상어에겐 저렇게 잘 생기고 아름다운 꼬리가 달려 있지 않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함께 온 사나이가 말했다.
길 저편에서는 노인이 담요를 덮어 쓰고 자고 있었다. 소년은 그 옆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일리아드(Iliad:900 B.C)
해설
고대 그리스의 시성 호머의 2대 서사시의 하나로서 총 24권으로 되어 있다.
"일리아드"란 소아시아의 서북부에 있는 한 도시 일리온(트로이)의 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는 트로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트로이와 그리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이다.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오디세이"와 함께 서양 문학 역사상 가장 오래 된 작품이며 고금을 통하여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이 두 서사시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호머는 음유 시인으로서 그리스의 구비
문학을 집대성하며 양대 서사시를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장님이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증은 찾을 수 없다.
소아시아 지방의 발굴에 의한 고고학의 연구 결과 "일리아드"는 작가가 그
지방의 지리적 사정에 정통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일리아드"는 무사들을 배경으로 '트로이'전쟁을 노래 부른 시이기는 하나 그
내용으로 보면 그 전쟁의 일부분을 서술한 것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트로이
성 공략 10년이 되어가는 종결 전 51일 간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 시는 전체가 24권 15,693행 가량의 서사시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음송
사시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알렉산드리아 시대(323-146 B.C)의 문헌학자
세노드토스(335-269 B.C)가 처음으로 이것을 각 권 약 500행 내지 600행의
24권의 음송 사시로 나누어 각 권을 표시하는데 그리스 대문자 25문자를
사용하였다. 각 권의 서두에 있는 제목도 역시 이 시대에 생긴 것이며 이것이
"일리아드"로서 문자화하여 서적으로 나온 최초의 것이었다.
"일리아드"의 가치는 가장 오래된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
교묘히 흐르는 인간성을 경쾌하고 활발하게 묘사한 점에 있다. 이 작품은 세계
문학 역사상 문학성 면에서도 그 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양서이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인물도 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일리아드"를 배우고 항상 애송하였으며 '황금의 함'속에
넣어 전쟁터에도 가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이 작품에는 왕의 의무가 써
있다고 하여 알렉산더 대왕은 이 시를 '왕자의 서'라고 불렀다고 한다.
작가 약전
고대 그리스 인은 물론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호머라는 위대한 시인이
있어서 최대의 작품 "일리아드""오디세이"를 썼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모두 다 전설이며 사실적 가치는 없는데 그의 이름은 처음으로
철학자 크세노파네스(510 B.C)의 저서에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는 호머를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기원 전 천 년경에 그리스 세계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직업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오르페우스와 같은
전설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연구의 결과 그는 실재의
인물이며 그 대서사시의 작가라고 보는 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음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호머가 맹인 음유 시인이라는 설은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인해서 후에 호머의 흉상을 비롯하여 그의 대리석상은 맹인의 노인으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의 나폴리 국민 박물관에 있는
것이다.
고금을 통하여 서양 문학에 호머의 시만큼 인류에게 널리 영향을 준 것은
"성서"를 제외하고는 비할 것이 없으며 그 중에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현대 문학의 원천이 되었고 세계 문학의 무진장한 보고로서 수많은 시인들이
문학적 영감과 암시를 받은 원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가장 훌륭한 작품을
꼽힌다. 호머는 2800여 년이 경과한 오늘에 있어서도 서양 문학의 시조로서 고대
근대를 통하여 이탈리아의 단테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괴테와 함께 세계 4대 시성으로 꼽힌다.
줄거리
이 이야기는 아득한 옛날부터 그리스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사들의 이야기이다.
기원전 1200년경 이 나라에는 프리아모스라는 왕이 있었다. 파리스라는 사내
아이를 낳을 때 왕비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 이번에 태어난 아들은 후에
트로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꿈이었다. 그래서 왕은 파리스를 낳자마자
트로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다'라는 산 속에 버렸다. 버림받은 파리스는
다행히 양치는 사람이 주워다 길렀다. 파리스는 양치기를 하면서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신들의 세계에서는 10년 동안이나 싸움을 끌게 될 사건이었다.
아킬레스의 아버지인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데티스가 결혼할 때에 모든 신들이
초대받았으나 전쟁과 파멸의 신인 아레스는 제외되었다. 아레스는 대단히 노하여
신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기 위한 계략을 꾸민다.
"이 곳에 와 있는 여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이것을 받으시오"
아레스는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새긴 순금의 사과를 던졌다. 여신들은 이
순금의 사과를 갖고 싶었으나 누구보다는 용모가 아름다워야 했다. 그 곳에는
미모에 자신 있는 여신이 있었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의 처이며 가정의
여신인 헤라, 승리와 수예의 여신 아테네, 그리고 아름다움과 사라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이었다.
제우스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헤라는 제우스의 처이며 아테네는 제우스가 특히
사랑하는 딸이며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의 표현이며 그것을 주관하는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미인 경쟁의 심판관으로서 이다 산의 파리스를 임명하였다.
세 명의 여신들은 자기가 제일 예쁘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파리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질투심이 강한 헤라는
"만약 나를 선택한다면 권력과 부를 주고 아시아의 왕으로 삼겠다"
아테네는
"그대를 연전 연승의 영웅으로 하겠다"
아프로디테는
"그대에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리라"
세 명의 여신들은 파리스에게 이러한 조건들을 내걸었다.
파리스는 아시아의 왕보다도 영웅보다도 세계 제일의 미인을 얻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가 제일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심판을
내려 그 진기한 황금 사과는 이 여신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프로디테는 자기의 약속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계의 여인은 헬렌이었으나 그녀는 이미 메넬라오스의 부인이었다.
여신은 호의를 보이며 먼저 파리스에게 그가 트로이의 왕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그를 트로이로 보내었다.
마침 트로이에서는 신들을 섬기는 치성을 올리기 위하여 큰 경기가 열리고
있었으므로 파리스는 자기 재주를 실험해 보려고 여러 가지 경기에 참가하였다.
그의 재주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승리의 영광은 왕의 손에서
파리스에게 수여되었다. 그 때 그의 신분과 경력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난 청년이 이다 산 속에 버린 자기의 아들이었음을 알았을 때 왕과
왕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였으며 50명이나 되는 그들 왕자들 중에서도
파리스는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제 그는 목동이 아니라 훌륭한 트로이의 왕자였다. 파리스는 왕자로서 다른
그리스 도시의 왕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도시마다 돌아다니게 되었다.
-발단-
파리스는 그리스의 각지를 순회한 후 스파르타에 왔다. 이 곳에는 당시
메넬라오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왕비가 헬렌이었다. 파리스는 정중한 대우를
받았는데 그 동안 그는 아름다운 왕비 헬렌을 사랑하게 되었다. 참으로 헬렌은
세계 제일의 미인이었으나 그녀에게는 헬미온이라는 귀여운 딸까지 있었다.
파리스는 헬렌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처음에는 응하지 아니하였으나 아프로디테가
그녀의 가슴에 마귀의 힘을 넣어 그 뒤부터 파리스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어
남편과 딸을 버린 후 그와 함께 트로이로 도망쳐 버렸다.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기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왕의 분노는 말할 수가
없었다. 메넬라오스는 그에게서 헬렌을 뺏아가는 자가 있다면 목숨을 내걸고
싸우겠다는 맹세까지 한 바 있었다. 그는 즉시 그리스의 맹주인 그의 형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찾아가서 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국민의 자랑인 헬렌을 되찾기 위해 총궐기할 것을 설복하여 트로이와 전쟁을
시작하려고 동맹군을 조직하였다. 출정군의 총대장은 만군의 용사 아트레우스의
아들이며 메넬라오스의 형인 태양의 영웅이라고까지 불리우고 있는
아가멤논이었다. 그리스 동맹군은 최고의 무장인 아킬레스 모사의 천재 오디세이
등 많은 영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의 세계에서도 이 유명한 전쟁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 아프로디테는 물론 트로이 편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헤라와
아테네 여신은 파리스에게서 그들의 아름다움이 무시되었기 때문에 파리스의
고향인 트로이와 그의 족속들을 미워하였다. 그러나 대신 제우스는 파리스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예지의 신 아폴론과 함께 공정의
지위를 밝히기 위하여 중립을 지키고 때로는 그리스 편이 되고 또한 트로이 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들은 그리스 군이 잘 참고 그들 편에서 전쟁을 중지하지 않는 한
결국은 트로이가 패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0년 동안의
전세는 그렇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군세는 도처에서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10만의 정병을 실은
1186척의 군함은 트로이를 향하여 용의 행렬과도 같이 출발하였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에 도착하자 메넬라오스와 오디세이가 사자가 되어 트로이 성에 가서
헬렌의 반환을 교섭 하였으나 파리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양군은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스의 대군은 트로이의 성벽 가까이 진을 치고 밤 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였다. 트로이 군도 이에 대비하여 부근의 각국들과
동맹을 맺고 성벽을 단단히 방비하였다. 그러나 트로이 군은 그리스 용사
아킬레스의 불패의 무용에 공포를 느끼고 거의 성 밖으로 나오려고도 안했다.
전쟁은 일승 일패로 결정을 못하고 9년의 세월을 끌고 있었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의 9년째에 전리품 분배에 대하여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와 일어난 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트로이의 용사 헥토르의 전사와
매장까지 51일 간에 발생된 사건의 기록이다. 위의 내용은 "일리아드"에는 있지
않으나 일리아드의 배경이고 "일리아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 동안 그리스 군은 이웃 나라에 동맹을 구하고 많은 도시를 점령하여 백성을
살해하고 부녀들은 노예로 잡아 왔으며 많은 양식을 약탈하였으나 트로이 성은
함락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때 그리스 군에 무서운 유행병에 죽어 넘어지는
병사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것은 예지의 신 아폴론의 분노였다. 어느
날 그리스 군은 크라시를 약탈하고 여러 부녀자들을 각각 나누어 갖게 되었다.
총대장 아가멤논은 아폴론을 모시는 사제의 딸 크라시스라는 미소녀를 자기의
노예로 하고 살고 있었다.
사제는 사랑하는 딸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법복을 입고 막대한 몸 대금을
가지고 와서 아가멤논에게 딸의 해방을 애원하였다. 그러나 크라시스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긴 아가멤논은 사제가 무릎을 꿇고 탄원함도 들은 체 만
체 그에게 도리어 모욕을 주어 쫓아 보내었다. 사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아폴론 신에게 복수를 빌었다. 어두운 밤의 장막은 지상에 내렸다. 아폴론이
노사제의 탄원을 듣고 그리스 군 위로 은으로 된 활로 화살을 무수히 당기어
쏘았다. 이 죽음의 화살은 무서운 역병으로 변하여 많은 사람과 말의 목숨을
앗아갔다. 9일 간이나 그리스 군은 아폴론의 뜻대로 죽어 갔으며 시체를 태우는
검은 연기는 바다 위를 덮었다.
이 재화의 대책을 강구하려고 전군의 참모 회의를 열자 그 석상에서 예언자
칼카스에게 역병의 원인을 밝히기를 재촉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아폴론 신의 분노이다"
그리스 군 제일의 영웅인 아킬레스는 아가멤논에게 단호히 말했다.
"대장! 그리스 군을 아폴론 신의 노여움에서 구하기 위하여 크라시스를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시오. 우리들은 그 배상으로 다음 약탈에서 최상의 전리품
을
대장께 올리겠습니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스의 말이 몹시 볼쾌했다.
"아킬레스 그대는 프리세우스라는 아름다운 포로를 단단히 간직하게 이
아가멤논이 그대의 왕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지 그리고 크라시스를 그 늙은
사제에게 돌려 보내 주리라"
프리세우스를 빼앗겠다는 아가멤논의 말에 아킬레스는 열화와 같이 분노하여
칼자루를 잡고 아가멤논에게 덤벼들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이 때 여신 아테네가
돌연 그에게만 보이게 나타나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여신에게 만류를 당하여 빼려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었으나 그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아가멤논을 향해 퍼부었다.
"철면피 너는 개의 얼굴을 가진 비겁한 사슴이다. 한 번도 전리품을 위해서
무사답게 싸운 일도 없이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얻은 물품을 빼앗으려고 위협을
하려고 하지 여기 모인 무인들도 너를 따라 비겁한 자가 될까 두렵다. 그리고
나는 단언한다. 이 아킬레스가 돌아간 뒤에는 그리스의 병사들은 저 무서운
헥토르의 칼날 아래 시체의 산을 쌓을 것이다. 그 때 너는 제일의 영웅을
업신여긴 것을 후회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으리라"
그는 장군의 표시인 황금의 지팡이를 땅에 내동댕이 치고 자기의 진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크라시스는 아폴론에게 바치기 위한 백
마리의 짐승과 함께 한 척의 전함에 태워서 돌려 보내 주었다. 이윽고
아가멤논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아킬레스의 진으로 프리세우스를 탈취하러
보냈다. 아킬레스는
"여러 사자들 매우 수고하였다. 그대들에게는 하등의 죄가 없으나 다만
아름다운 프리세우스를 빼앗으려고 그대들을 보낸 아가멤논 한 사람에게만 죄가
있는 것이다. 그녀를 데려가게. 그러나 아가멤논이 파멸에 빠져 자기를 구원하려
나의 도움을 바랄지라도 나는 앞으로 어떠한 원조도 않겠다고 아가멤논에게
말하여 주게" 하고 그는 사자들에게 말하였다. 사자들은 아킬레스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프리세우스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는 홀로 남아 회색빛 바닷가에 서서
소리 높여 울었다. 바다의 왕의 딸이며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은빛을 가진 바다의
신인 데티스는 아들의 울음 소리를 듣고 안개와 같이 바닷속으로 떠올라왔다.
"이렇게도 슬픔을 당하게 할 줄 알았으면 나는 차라리 너를 낳지 않았으리라"
바다의 여신 데티스는 그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듣는다. 데티스 여신은
단명을 운명으로 태어난 아킬레스를 낳자 불사의 강에 적시어 창이 그의 몸을
뚫지 못하게 했으나 단 한 군데 여신의 손에 잡혔던 곳만은 강물에 젖지
않았으므로 발뒤꿈치에 급소를 갖게 되었다. 여신은 이미 아킬레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면 전사할 것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다른 나라 임금에게 숨겨
두었다. 그러나 지혜가 많은 오디세이에게 발견되어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한 데티스 여신은 올림포스 산정의 제우스에게 가서
아들을 위한 복수를 탄원하였다.
"짧은 목숨을 타고 땅 위에 태어난 인간이 된 나의 아들에게 명예를 돌리고
아가멤논을 징계하기 위하여 아킬레스가 칼을 잡고 일어설 때까지는 트로이에게
승리를 주시오"
제우스는 여신의 탄원을 듣고 그의 청을 들어 주리라 약속한다. 그 때서야
바다의 여신 데티스는 푸른 바다를 헤치고 그녀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이 있는
궁정으로 돌아갔다.
제우스 신은 어떻게 하면 이 전쟁이 아킬레스에 의해 승리하여 아킬레스에게
영광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아가멤논에게 꿈을 꾸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무기를 들고 일어서라 반드시 승리는 너의 것이리라'
꿈의 전갈을 받은 아가멤논은 대단히 기뻐하고 전군의 장사를 소집하여 간밤에
제우스 신의 꿈 이야기를 한 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오디세이는 의심스러운
생각을 품었으나 여신 아테네의 보호를 받아 용기를 얻어 동요하고 있는
장졸들을 진정시키면서 엄연히 한 자리의 연설을 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긴 전쟁에 피로하여 그저 귀국할 것만을 원하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가 오랫동안 싸우고 이제 빈 손으로 귀향한다면 이 이상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여러 군사들아 용감히 싸워라! 이제 트로이는
우리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여러 용사들도 잊지 아니하였으리라! 우리들이
고향을 떠나서 배로 출발하려 할 때의 그 무섭고도 믿음직한 전조를
잊어버렸는가? 맑은 샘물이 솟아오르는 나무 아래에서 여러 신들에게 재물을
올리고 있을 때에 피에 아롱진 한 마리의 뱀이 사당 밑에서 기어나와 나무 위로
올라갔었다. 나무 꼭대기에 둥우리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여덟 마리의 어여뿐
새끼가 어미 새의 따뜻한 날개 밑에 안기어 있었으나 한 마리 한 마리 애처러운
소리를 지르면서 뱀에게 먹히고 말았다. 어미 새는 새끼 위에 날개를 치면서
슬피 울며 부르고 있었는데 뱀은 그것마저 날쌔게 잡아 긴 몸으로 휘감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신은 이 전조의 진실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 뱀을 돌로 변하게
하였다. 이 전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의 예언자 칼카스는 이 전조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아홉 마리의 참새는 9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트로이와 싸우려면 10년째 되어야 비로소 승리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야 그 10년째가 된 것이다. 우리들은 끝까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지 않겠는가!"
그리스 장사들은 오디세이의 이 말에 힘을 얻어 환호성을 울렸다. 그 소리는
바다에 떠 있는 군선에 부딪쳐 멀리 울려 나갔다. 이리하여 그리스 군대는
기다란 열을 짓고 백조와도 같이 또한 학과도 같이 떼를 지어서 전진하였다.
그러나 대신의 고함은 거짓이었다. 실은 제우스는 그리스 군을 징벌하기 위하여
거짓의 꿈을 보내어 그리스 군을 급작스레 유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군의
내습을 보자 트로이 군도 진군하여 양군은 서로 대치하였다. 트로이 쪽에서는
메넬라오스에게서 헬렌을 빼앗은 파리스가 걸어나왔다. 신과 같이 아름다웠고
또한 엄숙한 그는 어깨로부터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구불어진 활과 칼을
차고 두 개의 날이 붙은 청동의 창을 휘두르며 나와서 그리스군의 장군들을
향하여 용감한 대장과의 대전으로써 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 짓자고 제의하였다.
그가 교만스럽게 나타난 것을 본 메넬라오스는 마치 먹이가 되려고 나오는
커다란 사슴을 보고 기뻐 날뛰는 사자와도 같았다. 이 때 파리스는 메넬라오스가
나오자 겁을 집어먹어 그를 피하려 하였으나 헥토르의 꾸지람을 듣고 단념하고
머물게 되었으며 두 사람의 일대 일의 결투로 승리한 자가 헬렌을 아내로 할
것과 진 사람은 승리자에게 평화를 맹세할 것을 약속하였다.
트로이의 성벽 위에는 노왕 프리아모스를 위시한 원로들 그리고 헬렌도
지켜보고 있었다. 헬렌은 왕궁에서 커다란 베틀에 앉아 보라빛 실로 트로이와
그리스의 전쟁화를 짠 후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여신 헤라는 그녀의 꿈에
사자를 보내어 고향과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와 딸이 그리워 못 견디게
하였으므로 두 군사의 진에까지 나온 것이었다. 늙은 무사들은 아름답게 단장한
헬렌을 보고 비웃으며
"그리스와 트로이의 두 나라 사람들의 수많은 생명을 바쳐가며 싸우고 있는
것은 저 한 사람의 계집 때문이다. 그녀가 이 곳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들뿐
아니라 우리의 자손에까지 화근을 물려 주게 될 것이니 하루 빨리 그리스로
돌아가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일까"
이 때 두 용사는 두 개의 돌을 청동의 투구에 넣어 흔들었다. 파리스라고 정한
돌이 먼저 나왔으므로 그는 먼저 메넬라오스를 향하여 던졌다. 그의 창은
메넬라오스의 방패를 때렸으나 방패가 두터워서 뚫지 못하고 그만 튕겨 나왔다.
다음 메넬라오스는 무서운 창을 던졌다. 그 창은 파리스의 빛나는 방패를 통하고
눈부신 갑옷을 뚫고 속에 입은 옷을 찢고 그의 무릎에 박히었다. 그러나 그가
교묘하게 몸을 피하였기 때문에 생명만은 무사하였다. 메넬라오스는 힘에 넘쳐
칼을 빼들고 그를 받아쳤다. 파리스의 투구는 산산히 깨어졌으나 동시에 상대의
칼도 네 도막으로 부러졌다.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덤벼들어 파리스의 관모를 잡고 그리스 진영으로 끌고 갔다.
파리스가 위태롭게 된 이 때 이 모양을 보고 있던 그의 수호신 아프로디테는
그가 기절할 뻔한 투구의 가죽끈을 끊었으므로 투구만이 메넬라오스의 손에 남게
되었다. 그 틈에 여신은 짙은 안개를 퍼뜨려 파리스를 덥석 안아 성내로 데려가
버렸다. 전쟁은 트로이의 한 용사가 일으킨 사고로 인하여 협정은 파기되고 더욱
싸움은 격심하게 계속 되었다.
양군은 잠시 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사이를 이용하여 전사자의
시체를 높이 쌓아 놓고 불살라 장사 지내었다. 이 때에 트로이 성내에서는
회의를 열었다. 그리스 군이 다시 공격하여 오면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아름다운
헬렌을 재물과 함께 희랍군에 돌려보내자는 의론이 점점 높아 갔다. 그러나
파리스는 듣지 아니하였다. 다음 날이 되어 지상에 황금색의 햇빛이 비칠 때
제우스는 여러 신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제신이여, 여신이여, 모두 들으라. 내가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트로이고 그리스고 돕고자 하는 신이 있다면 매우 불행하게 죽으리니, 나
제우스가 선언하노라. 신이건, 인간이건, 나보다 강한자는 없으니"
이렇게 여러 신들을 위협하고 황금의 갑옷에 몸을 꾸민 후 전차에 올랐다.
전차에는 청동의 말굽을 박은 나르는 준마가 황금색 꼬리를 툭툭 치면서 매어
있었다. 대신은 황금의 채찍을 들어 때렸다. 말은 번개와 같이 빛나면서 땅과
별의 사이를 이다 산 꼭대기까지 높이높이 말을 몰아 오른 후 야수들의 어머니의
품인 이다 산의 샘이 흐르는 곳에 다다랐다. 여기 성스러운 곳에 그의 신전이
있다. 제우스는 산정에 홀로 앉아 그 아래의 평원에서 마치 장난감과도 같이
싸우고 있는 양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날 양군은 아침 일찍부터 싸우고 있었는데 창검이 서리 같이 빛나며 화살
소리는 쉴 새 없이 요란하였다. 이리하여 아침의 공기는 고통과 노여움 패배와
승리의 고함 소리로 떨리었다. 아름다운 대지에는 죽은 사람 이제 죽으려는
사람들의 붉은 피가 강물을 이루어 흘렀다. 정오가 되자 제우스 신은 산장의
옥좌로부터 황금의 저울을 끄집어 내어 그 위에 두 개의 죽음의 추를 놓았다.
하나는 그리스 인의 것이고 하나는 트로이 인의 것이었다. 그리스 인의 죽음의
추가 점점 내려갔다. 이 때 제우스는 눈부신 번개를 놓았다. 그 빛에 의하여
양군의 사람들은 제우스와 저울을 보았다. 그리스 인들은 자기의 추가 내려간
것을 보고 대경 실색하였다. 드디어 그리스 군은 패하게 되었다. 도망하는 그들을
향하여 트로이 군은 소낙비처럼 많은 창을 던졌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는
득의양양하여 부르짖었다.
-경과-
이리하여 전세는 트로이가 유리하였으나 밤이 되었으므로 트로이 군은 함성을
울리며 성내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스 군은 오늘의 패전을 염려한 나머지 군의
평정 회의를 열었다. 아가멤논은 먼저 무엇을 말하려고 일어섰으나 눈물이 먼저
그의 뺨에 흘렀다. 마치 푸른 강물이 햇빛을 한번도 보지 못한 암흑의 골짜기
속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눈물이었다.
"우리들은 제우스의 미움을 받고 있다. 이제는 배를 돌려 귀국할 길밖에 없다"
이 때 무사 네스토르는 용사 중의 용사 아킬레스를 불러 내어 다시 한 번
그리스 군을 위하여 싸우게 하면 트로이는 반드시 함락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감정에 치우쳐 아킬레스에게 모욕을 주고 그로부터 아름다운
프리세우스를 빼앗고 아킬레스를 떠나도록 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처사였다.
나는 이제 아킬레스에게 막대한 황금과 훌륭한 말과 바느질 잘하는 일곱 명의
아름다운 노예를 보내고 프리세우스도 돌려 보내 주겠다. 맹세하건대 나는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희롱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킬레스가 트로이
성을 함락하면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은 물론 나의 딸도 그에게 주겠다"
이렇게 말하고 아킬레스에게 사자를 보내게 되었다. 참전하여 사죄사로서는
제우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피닉스와 거인 아이아스 그리고 지혜로운
오디세이였다. 세 사람이 아킬레스 영지에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거문고를 타면서
무용담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찾아온 것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나
그들이 온 사명을 말하고 그리스의 운명을 위하여 참전할 것을 바라고 원하자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아가멤논을 원망하고 있소. 그는 사리 사욕을 채우는 욕심에 가득한
사람이니 왕으로서 권위와 자비가 부족한 사람이오. 도대체 나는 이 싸움이
무의미하게만 생각되오. 나는 명예도 필요없고 더 큰 부도 필요없으니 그저
평범히 살아가고 싶소. 그러니 아가멤논에게 전해 주시오. 트로이 군이 나의
진영으로까지 쳐들어 와서 불을 질러 배를 사르려 하기까지는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트로이의 세력을 나의
힘으로 억누르고 트로이 성을 함락시켜 보이겠다고"
그의 말에 사자들은 실망하고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였다
밤은 지나갔다. 붉은 해가 동편 바다 위에서 떠올랐을 때에는 격심한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여 승하고 패하고 양군의 용사들은
이날 용감한 무훈을 많이 세웠다. 아가멤논도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제우스
신이 그를 도와 주지 않으니 그리스 군의 용사들은 연속하여 상처를 입고
거꾸러졌으며 낮에는 벌써 패군하게 되었다. 트로이 군은 그리스 인들이 쌓은
성벽을 향하여 올라갔다. 위에서는 우박과 같은 큰 돌을 던져서 수없이 쓰러지는
데도 창을 든 채 흉벽 사이까지 올라갔다. 성문 앞에는 두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이지 어려운 바위가 있는 것을 헥토르는 한 손으로 쳐들어 이중으로 된
성문을 쳤다. 이 거대하고 완고한 문이 부러져 뒤로 넘어졌다.
눈에 불을 뿜으며 헥토르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돌진을 보고는 신이
아닌 이상 어떤 사람도 감히 대적할 수 없어 보였다. 트로이 군은 그의 뒤를
따라 무서운 홍수와 같이 돌입하였다. 그리스 군은 방비할 수가 없어서 바다까지
쫓겨가 배안으로 도망쳤다. 단지 거인 아이아스만이 해변가에서 발을 버티고
싸웠으며 뒤따라 전사를 각오한 사람들만이 그 주위에 남아 조국과 명예를
위하여 용감히 싸웠다. 헥토르는 미친 사자와도 같이 무섭게 싸워 승리를
거듭하였다. 그가 지나간 길에는 전사한 그리스 인의 시체가 산과 같이 쌓여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싸우는 자의 소리와 합하여 처참하였다.
수많은 명장들의 눈도 죽음의 밤처럼 어둡게 잠겨 있었다. 그리스 군의 총대장
아가멤논은 퇴각을 명령하였다. 오디세이와 디오메데스는 그의 비겁함을
지적하며 물러설 수 없다고 강경히 버텼다. 그러나 아가멤논도 자기의 비겁함을
부끄럽게 느끼고 그들과 함께 다시 전쟁터로 돌아왔다. 그리스의 연속되는
패배를 본 헤라는 제우스 몰래 포세이돈과 계략을 세웠다. 헤라가 제우스를
유혹하여 그리스 군을 도와 주도록 이를 본 제우스는 자신이 헤라의 계략에
말려든 것을 깨달았다. 헥토르는 그리스의 영웅 아이아스가 던진 커다란 돌에
맞아 시커먼 피를 토하고 벼락에 맞은 나무처럼 쓰러졌다. 여기서 형세는
역전하여 그리스 군은 군세를 회복하였다. 쓰러진 헥토르는 제우스가 보낸
부하들의 구원을 받아 전선으로부터 불려갔으나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 제우스의
명을 받은 아폴론 신이 황급히 내려와서 사라지려는 그의 몸과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었다. 헥토르는 분연히 일어서며 이전의 십 배되는 힘을 갖게 되어
전선에 다시 나왔다. 그가 향하는 곳이면 그리스 군들은 놀랄 사이도 없이
쓰러져 넘어갔다.
이것을 본 아킬레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킬레스를 내세울 때가 왔다. 나는 곧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겠다"
아킬레스에게로 가서 그리스 군의 위기를 구해 줄 것을 청하였다.
아킬레스는 그리스 군의 패색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곧
자기가 전쟁이 나갈 수도 없어서 파트로클로스에게
"나는 적장 헥토르가 침입하여 들어와서 나의 군함을 불사를 때까지는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그러나 자네는 나의 갑옷을 입고 나의 부하를 거느리고
아킬레스로 가장하여 싸워 주게" 하고 대답하였다. 그가 이렇게 여유 있게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 그리스 군이 기대하고 있던 아이아스의 힘도 점점
쇠약해져서 트로이 군은 벌써 그리스의 군선에 뛰어 올라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불을 놓기 시작하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갑옷을 입고
은으로 만든 커다란 칼을 차고 두 개의 억센 창을 들고 아킬레스의 두 바퀴
전차에 뛰어 올랐다. 이 때에 마치 길가에 벌집을 지었던 말벌의 데가 돌에 맞아
일시에 날아와 돌 던진 아이를 쏘려는 듯이 이제 그리스의 군사들은 배 안에서
뛰어내려 전쟁터로 돌진하였다. 아킬레스는 홀로 남아서 제우스에게 재물을
올리고 전승을 빌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칼에 적의 용사가 찔려 넘어졌다.
"아킬레스가 진두에 섰다"
그리스 군은 갑자기 용기 백배하여 트로이 군에게 대적하였다. 아킬레스의
빛나는 갑옷과 전차를 보았을 때 트로이 군사들은 모두 전율하여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적은 배 안에서 쫓겨나고 불은 꺼졌으며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동안에 군세를
회복시키어 용감한 헥토르까지도 성벽까지 밀어부쳤다. 파트로클로스는 수많은
적을 학살하고 아킬레스의 충고도 듣지 않고 너무 깊이 적중으로 뚫고 들어갔을
때 제우스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용사인 살페돈이 용감하게 저항하여 왔다. 그가
던진 창은 파트로클로스의 명마 페다솟스에 박히었다. 살페돈이 다시 던진 창은
파트로클로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에 파트로클로스가 던진 창은
살페돈의 가슴을 뚫었다. 살페돈은 도끼에 맞아 넘어지는 나무와도 같이 땅 위로
넘어졌다. 그는 자기의 시체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리스 군은 그의 갑옷을 벗겨 버렸으니 제우스는 아폴론을 시켜 그의
시체를 탈취하여 쌍둥이 형제인 죽음의 신과 수면의 신에게 뒤처리를
부탁하였다. 죽음과 수면의 신은 이 시체를 살페돈의 고향인 리기아로 옮겨 그
곳에서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많은 용사를 죽인 파트로클로스는 점점 대담해졌다. 그는 용감하게 세 번이나
돌격을 감행하여 드디어 트로이의 성벽 위로 넘어가려고 했다. 이것을 본 아폴론
신은 세 번이나 그를 밀어 떨어트렸다. 이 때에 헥토르는 전차를 타고 그에게로
왔다. 파트로클로스도 전차에서 뛰어내려 모진 큰 돌을 내던졌다. 돌은 헥토르
전차의 마부에게 맞아 힘없이 지상에 거꾸러졌다. 헥토르도 전차에서 내려와
싸웠다. 해가 저물 무렵에 그리스 군의 승리로 돌아갈 것 같았다. 네 번째의
돌격에서는 아폴론 신은 노기를 띠고 파트로클로스에게 말했다.
"너는 신을 향하여 싸우려느냐?"
아폴론은 짙은 안개를 사방에 뿌려 몸을 감춘 후 그에게 가까이 와서 어깨를
몹시 쳤다.
파트로클로스가 쓰러진 것을 보자 헥토르는 달려와 그의 옆구리를 청동 창으로
찔렀다. 전투는 파트로클로스가 죽기 전부터 격심했으나 그가 전사한 후에도
더욱 치열한 양상을 더해갔다.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에서 아킬레스의
갑옷을 벗겨 갔다. 트로이 군사들은 시체를 끌고 돌아가려 했으나 이 때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애워싸고 쟁탈전이 처참히 벌어졌다. 이것을 본 제우스
신은 온 하늘에 검은 구름을 덮고 번개를 내리치며 천둥 소리로 천지를 진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체만은 트로이 군의 추격을 받아가면서 겨우 그리스 군이
탈환하였다. 파트로클로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아킬레스는 그만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그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친구가 살해당했다는 것뿐이
아니었다. 자기의 갑옷도 빼앗긴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는 갑옷을
빼앗겼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아킬레스는 아가멤논과의 불화도
흘려 버리고 헥토르를 죽이고 이 전쟁을 그리스의 승리로 이끌고 트로이 성을
점령하고자 마음먹었다. 무거운 그의 한숨 소리는 푸른 바다밑 궁전 속에
앉아 있는 어머니인 데티스 여신의 귀에까지 전달되었다 데티스 신은 곧 푸른
파도를 헤치고 아킬레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아들이 전사한 친구의 모양을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헥토르는 너의 갑옷을 가지고 오랫동안 자랑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의 신은 그에게로 가고 있다. 내가 이제 새로운 갑옷을 가지고 올 때까지
너는 싸움터에 나가지 말아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의 궁정에서는 밤새도록 불을 이루어 청동과 금은을
녹여 훌륭한 갑옷을 만들고 있었다. 솜씨를 다한 훌륭한 방패와 불길보다도 더
빛나는 갑옷과 금테를 단 투구도 완성되었다. 아킬레스는 투구와 갑옷의
훌륭함에 경탄하여 충직한 친구를 잃은 슬픈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경과-
훌륭한 갑옷을 입은 아킬레스가 소리쳤다
"전쟁터로! 전쟁터로!"
그의 우렁찬 소리를 듣고 중병자들까지도 용기를 받고 일어섰다. 이제
아킬레스가 총대장이 되어 그리스 군은 싸움에 굶주린 것처럼 넓은 들판에 나가
트로이 군과 싸웠다. 맹렬한 불길이 강풍의 힘에 의해 숲을 태우듯이 아킬레스는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트로이의 진중을 휩쓸었다.
아킬레스가 참전하여 양군이 전열을 정비할 때 제우스 신은 신들을 소집했다.
"신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부른 까닭을 아는지 나는 이처럼 살육으로 들끓는
전쟁이 걱정스럽소 나는 이제 올림포스 산정에서 저들의 싸움을 관망할 터요.
이제 그대들은 그대들이 참여하고 싶은 진지로 가서 그들과 합세하도록 하시오"
제우스의 선언은 필사의 격전을 불러 일으키기에 족했다. 신들이 양편으로
갈려 전선으로 달렸다.
그리스 진영에는 헤라와 아테네, 대지의 신 포세이돈, 헬메스, 헤파이스토스가
가고 트로이 군에는 전쟁과 파멸의 신 아레스, 예지의 신 아폴론, 활의 여신
아르테미스, 레토와 크산도스,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가 참가했다.
아킬레스는 미친 듯이 트로이 진영을 피로 물들였다. 그가 노리는 것은
헥토르였다. 이 때 트로이 성벽 위에서는 노왕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스의 무서운
싸움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트로이 성문 앞까지 오자 모든 병사는
성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 때 헥토르는 그 곳에 버티어 서서 그를 맞아 싸우려
하였으나 노왕은 용기에만 정신을 빼앗긴 그의 아들을 제지하면서
"그는 너보다 강하다. 혼자서 대항하는 것은 삼가하여라" 하고 만류하였다.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전사가 뻔한 이 결투에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헥토르는 분연히 외쳤다.
"나의 명령으로 오늘의 전쟁에 나가 많은 무사가 죽어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사람의 적에게 쫓겨 가다니 그럴 수 없다"
그는 성벽을 뒤로하고 빛나는 방패에 의지하여 아킬레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용사는 드디어 얼굴과 얼굴 창과 창을 맞대고 섰다. 여러 신들도
이곳에 와서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킬레스가 던진 창은 어두운 밤에 빛나는 유성처럼 날라가
헥토르의 목을 찔렀다. 운명은 이미 그를 버렸다. 드디어 트로이 제일의 용사는
홀로 성벽 아래에서 넘어졌다. 아킬레스는 기쁨의 환호성을 올렸다. 죽어가는
헥토르는 가늘게 말했다.
"나의 시체는 나의 부모들에게 상금과 바꾸게 하여 트로이 자녀들의 손으로
장례를 지내게 해 주게"
그러나 아킬레스는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갑옷을 벗기고 시체의 발꿈치에 구멍을 꿰어 전차에
달았다. 그리고 말을 몰아 트로이성 앞을 끌고 다녔다. 트로이의 자랑이요.
희망인 헥토르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헥토르의 부모인 왕과 왕비의
비탄은 형용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뛰어나가려는 노왕을 겨우 막았으나 그는
몸을 땅 위에 내던지며 죽여 달라고 외쳤다. 백성들은 이 두 사람의 주위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슬픈 소리는 헥토르의 아내의 귀까지 들려 왔다.
그녀는 성벽 위로 달려가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성벽 위에서
기절했다.
아킬레스와 그리스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이루었으므로 그의 장례
준비를 하였다. 그리스의 영웅들은 긴 머리털을 잘라 친구의 머리 위에 뿌리고
아킬레스도 황금빛 나는 머리털을 잘라 고인의 두 손에 쥐어 주었다. 그들은
소와 말의 재물과 함께 트로이 용사 17명의 시체를 불 위에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파트로클레스의 시체를 태웠다. 아킬레스는 그의 뼈를 금병 속에 넣고 자기가
죽은 후에 그와 함께 매장해 달라고 명령했다. 이어서 이륜차 경주 씨름 궁술
등의 경기가 그의 묘 앞에서 거행되었다. 대장들은 모두 장례 후의 향연에
참석하고 각자 휴식에 들어갔으나 아킬레스만은 향연에도 참석하지 않고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쟁터와 무서운 큰 바다에서 함께 고생을 하고
위험을 거듭한 죽은 벗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했다.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헥토르의 시체를 달았다.
그는 파트로클레스의 무덤 주위를 두 번이나 끌고 돌아다닌 후 시체를 그의
묘지 가운데 던져 능욕함으로써 파트로클레스의 영을 위로하였다. 아킬레스가
이렇게 분노에 가득차 용감한 헥토르를 모욕하는 모양을 본 제우스는 헥토르를
불쌍히 생각하여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데티스 여신을 아킬레스에게 보내어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 보내 주도록 하였다. 동시에 무지개의 신을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내어 아킬레스에게로 아들의 시체를 찾을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노왕은 곧 보물 창고를 열어 귀중한 보화를 가지고 단 한 사람의 시종을
데리고 성문을 나섰다. 노왕은 비록 적에 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아들의
몸을 자기 팔로 안아보고 싶었다. 제우스 신은 이 존경할만한 노왕을 가련히
생각하고 자기의 아들 헬메스를 길 안내로 보내어 그를 보호하게 하였다.
헬메스는 젊은 무사가 되어 두 노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곧 노왕의 손목을
잡고 차에 태워 아킬레스의 진영으로 데리고 왔다. 도중 헬메스가 가지고 있던
두 마리의 뱀이 감겨 있는 지팡이의 힘으로 파수병들을 모두 잠들게 하였다.
이 때 아킬레스는 두 사람의 무사에게 호위되어 앉아 있었다. 노왕은 그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자기 아들을 몇 명이나 죽인 그 무서운 손에 키스를 하였다.
"오오! 아킬레스. 그대의 아버지가 나처럼 나이를 먹고 죽음에 임박해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어떤 이웃 나라의 대장이 위험한 곳에 빠뜨렸다 할지라도 그
재난에서 그를 구해 줄 사람이 곁에 없을 테지요. 그러나 그분은 아들인
아킬레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시므로 다시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아버지는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힘을 돋아
주고 위로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트로이의 꽃이라고 하던 용감한
아들들은 전부 그대의 손에 의해 쓰러졌습니다. 어느 자식보다도 더욱 늙은 몸을
의지했던 아들마저 그대가 죽여 버렸지 청컨데 아킬레스여, 나는 귀한 보물을
가지고 그 시체를 찾으러 왔소 아킬레스! 신을 소홀히 말게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해서 나를 가련히 여겨 주게"
이 말은 아킬레스를 감동시켰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와 친구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리고 노왕의 백설과 같은 흰 머리와 수염을 보고 가련하게
생각했다. 아킬레스는 그를 땅바닥에서 일으켰다
"프리아모스 왕, 당신은 어느 신의 인도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신의 도움이
없으면 젊어도 인간의 힘으로 이곳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한데 제우스의 부탁도
있으니 당신의 소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날 밤 아킬레스는 내 놓은 음식과 술을 헥토르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입에
술대고 그의 옆 방에서 역시 처음으로 깊이 잤다. 이튿날 아침 아킬레스는
버렸던 헥토르의 시체를 깨끗이 씻어 두 장의 웃옷을 덮어 노왕에게 인도하고
자진하여 헥토르의 장례 기간인 12일 간 휴전을 허락하였다.
"일리아드"는 헥토르의 장엄하고 비애에 가득찬 장례의 장면에서 끝난다.
신곡(La Divina Commedia:1308-1321)
해설
"신곡"은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가 20년 간 모국으로부터 추방되어 방랑하면서
완성한 신학적 서사시이다. 전곡 14,233행이 100가로 나뉘고 다시 지옥편 34가
연옥편 33가 천국편 33가로 구성된 3부작이다. 그런데 33이라는 수는 그리스도가
속죄에 오른 연령을 의미하는 수이며 또한 100은 완전수 10의 제곱수로서
'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0이라는 숫자는 당시의 3을 기초로 한 완전수를
상징하는 동시에 삼위일체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신곡"은 전편이 일시에 발표된 것이 아니다. 지옥편은 1300년-1308년에
연옥편은 1313년에 완성되고 천국편은 그의 사후 유고로서 세상에 나왔다.
"신곡"의 제목은 단테가 Commedia.라고 일컬었고 16세기 중엽 이후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Divina.를 첨가하여 초인적인 우월성으로 신성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뜻을 덧붙였다.
작자가 제목을 Commedia.라고 붙인 것은 시의 내용이 고뇌와 증오로 시작하여
미와 희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내용의 주조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죄악의 생활로부터 참회와 정화를 거쳐 천국에 도달하는 인생의
여로를 그린 아름답고 숭고한 환상의 시이다.
"신곡" 속에는 예술가로서의 단테의 의식과 의지와 감정의 결정체가 나타나
있다.
"신곡"은 단테다.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쓴 "신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유명한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은 이 위대한 작품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테로
하여금 위대한 시인이 되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것은 9세 때이며 이 소녀가 8세 되던 어느
따뜻한 봄날 꽃의 도시 플로렌스에서였다. 그 후 단테는 만나보지 못한 채 9년
동안 이름조차 모르는 이 소녀를 간절하게 사모하였다. 그 후 만9년이 지나서야
같은 봄날에 같은 장소인 아루노 강의 베티오 다리에서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우연히 만났다. 이 재회의 장면은 영국 화가 포리테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그 때 이 소녀는 단테에게 정답게 인사를 했다. 이 일이야말로 단테에게
천상의 세계를 계시하고 서정적 회고록인 "신생"을 쓰게 했던 시적 해후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테는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 남몰래 청순한 사랑을 품은 채
조용히 집에 올라와 타오르는 연모의 마음으로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그 소녀의
꿈을 꾸었다. 단테는 꿈에서 깨어나 소네트를 지었는데 이것이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의 스타일인 신미체의 시였으므로
보수적인 사람들에게서는 악평을 받았으나 선배 시인인 구아도 카발칸티는
대단히 감동하여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친교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다시 재회하였을 때 베아트리체는 벌써 어떤
은행가의 부인이 되어 있었으며 1290년 6월 9일 단테가 25세가 되던 해에
베아트리체는 죽고 말았다. 단테는 그녀가 은행가인 귀족과 결혼한 것을 알고
몹시 슬퍼하기는 했지만 질투와 같은 비천한 감정은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속 깊이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되었으며 그녀가 죽은 후 그의 사랑은
승화되어 천상적인 사랑이 되었고 그녀의 자태는 단테의 가슴 속 깊이 남아
영원한 연인으로서 천상적인 이상이 되었다.
"그녀는 자연이 낳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그를 보는 사람은 마음이
온화해져서 모든 원한이 녹아 버리고 오만과 분노도 사라지게 된다"고 단테는
그 여인을 칭송하였다. 그 후 단테는 다른 여인에게로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베아트리체의 환영을 보고 참회하여 영의 순례자로서 천계의 그녀를 찬양하게
되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절망과 빈곤과 암흑에 끊임없는 위안의 원천이
되었으며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찬양되어 단테로 하여금 예술의 문을 통해 종교의
본질에 이르게 하였다.
"신곡"은 세계 문학에서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 문학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 작품은 당시 경시되던
투스카니 어로 쓰여졌고 당시의 사회적 사건에 대한 비평이 들어 있으며 중세적
우주관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단테는 이 투스카니 어를 사용하여 문학적인
언어를 창조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고전 이탈리아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자료가 된 것은 성서와 그리스 로마 신화 및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며 신 플라톤 파의 우주론 토레미의 천문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등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곡"은 인간의 예술품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전해진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줄 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의
비극적 시에 원천이 되었다.
"신곡"은 인간의 상상력이 낳은 최고의 창작품의 하나이며 세계문학사나 인류
문학사의 불후의 금자탑이다. 러스킨은 "신곡"의 어떤 부분의 시에 대해 사람의
힘으로 미치지 못할 기적이라고 말했고 괴테도 이 시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인간이 쓴 시 가운데 최고의 것"이라고 감탄하였다. 이와 같이 "신곡"에 의하여
이탈리아 국민 문학은 불후의 명성을 확립했고 단테 자신도 국민 문학의 스승이
되었다. 칼라일은
"유럽은 많은 것을 만들었다. 거대한 도시 위대한 제국 수많은 백과 사전 많은
신조 다양한 의견 각종의 실천 등을 그러나 단테의 사상에 비견될 만한 것은
극히 적을 것이다"고 단언했으며 헤겔 쇼펜하우어 쉴링 등의 철학자들은 일생
동안 이 시의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곡"이 단테의 환상이라고 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작자 자신의 고뇌와 사랑과
열망의 표현으로서 그의 인생관 종교관 우주관 사회 비평의 집대성이며 역사와
문학상으로는 물론 철학상으로도 의미가 큰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중세 사상의 총괄이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교 신학 스콜라
철학의 심오함 신비주의자의 정신적 비약을 볼 수 있어 문예 부흥의 선구로서
숭고한 예술의 전당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 담겨진 지식의 방대함과 깊이는
중세 백과 사전과 같은 느낌도 준다. 여러 세계 문학 작품 중에서도 그 사상의
심원함이나 구상의 웅대함 종교적 열정과 예술적 장엄함에 있어서 이 서사시와
비교될 만한 것은 밀턴의 "실낙원" 외에는 없다고 한다. "신곡"은 인쇄술이 아직
발달되기 이전에 이미 600권의 사본이 있었으며 그 후 판본이 300권 외국어
번역이 300종 이상이 된다고 한다.
작가 약전
단테는 1265년 5월 30일 르네상스의 요람이며 중세 유럽 문학의 중심지였던
플로렌스 시의 가난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단테는 일찍 생모를 잃고 계모의 손에서 양육되었으나 18세 때에는 아버지마저
별세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은 9세 때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테를 알게 된 일이었다. 그에 대한 순결한 사랑은 평생 동안 그의
영혼에서 사라지지 않고 시정을 움직여 세계적인 명작 "신생"과 "신곡"을 쓰게
하였다. 그는 1290년에 그 소녀가 죽자 한때 방종한 생활에 빠졌으나 그 소녀가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되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도 그만큼
고결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26세 때에는 플로렌스 시의 명문 출신인 겜마 도나티와 결혼하여 1302년(37세)
그 시에서 추방당할 때까지 함께 살면서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학문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고 애국적 열의도 높아 정치에도 참여했으며 전쟁에
나가기도 했었다.
그는 격렬한 당파 싸움에 휩쓸려 1302년 4월에 반역 등의 죄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귀국하거나 체포되는 경우에는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되어 단테의 고독한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단테는 항상 고국에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었으며 1301년 플로렌스 정부가
모든 정책을 완화하여 벌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귀국을 허가하였으나
단테는 자기의 무죄를 명확히 하지 않는 한 귀국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정부는
그에게 다시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리하여 단테는 유럽의 망명 시인의 시조가
되었다. 아니 정치적인 망명에 관례적인 위엄을 부여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볼로냐 파류아 라벤나의 프란체스코 사원 안에 있는데 그 비문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플로렌스 땅은 무정한 어머니같이 그를 낳았을 뿐 단테는 어머니인
조국으로부터 쫓겨 나서 이곳에 잠들다"
단테가 죽고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플로렌스 정부는 국보와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가혹했음을 후회하고 그의 작품을 모든 사원과 일반인들에게 강독케
하고 연구 주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맨 먼저 나타난 "신곡"의 주해자는 단테를
이탈리아 민족의 독특한 광휘라고 평가하고 단테와 더불어 현재 이탈리아 어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였다.
교황 레오 11세 때의 단테의 유골을 플로렌스로 옮기려 하였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단테가 죽은지 600여 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세계의 존경과 애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이탈리아의 시골에서는 가난한 농부들이 단테의
시를 애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줄거리
-지옥편-
단테가 인생의 반 고개인 35세(1300)가 되던 봄4월8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성 금요일 새벽녘에 그는 길을 잃고 어떤 어두컴컴한 숲 속을 방황하고
있었다. 이 숲은 인간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상징하는 곳으로 드디어 그는 숲의
끝에 있는 험한 산비탈까지 왔다. 때마침 솟아오르는 햇빛은 이 '기쁨의 산'을
아름답게 비추었다.
그는 밤새도록 무서운 숲 속을 헤매었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였으나 산에
올라가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막 올라가려고 했을 때 세속을 상징하는 무서운
호랑이와 사자와 이리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그가 단념하려는 순간 앞에 나타난 것은 단테가 진정한 철학과 시의
스승이라고 숭배하고 있던 로마의 위대한 시성 베르길리우스였다.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은 단테에게 인간 이성의 상징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죄로부터 단테를 인도하는 사명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이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숲 속을 빠져 나가려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변경해야 될 것입니다. 그 길은 나와 함께 지옥과 연옥을 통과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천국이 나오는데 그 곳에는 인간의 이성은 갈 수
없으므로 당신을 인도할 여인 베아트리체 신의 사랑의 상징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며 동행을 권하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여기서 세 마리의
맹수는 중세 사람들이 믿고 있던 죄의 3대 근원으로 호랑이는 악의와 사기
사자는 폭력과 야욕 이리는 무절제를 상징한 것이었다.
첫날 저녁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가다 기진하며 절망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자기에게는 베르길리우스가 말한 환상을 볼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베르길리우스는 자기가 이 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이나 천당에도 가지 못하고 연옥에 있을 때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신의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녀가 단테를 과오에서 인도하고자 베르길리우스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단테는 도움을 받지 않고는 신의 사랑에게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베아트리체는 성모 마리아와 성 루시아의 기도로서 보내졌다는 것이다 단테는
이와같이 천국의 세력들이 자기를 구해 주려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우주 여행의 길을 나섰다.
그 날 해질 무렵 두 사람은 지옥의 문턱에 도착했는데 문 위 돌에 이상한 말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슬픔의 나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영겁의 고통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영원의 파멸로 가는 길이다"
이 문을 지나 가니 아케론 강가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지옥을 바라보고
섰다. 별도 없는 암흑 속에서 이상한 외국어와 방언으로 아우성치는 소리와
몸부림치는 소리 차마 들을 수 없는 비명 소리가 참혹하게 들려왔다. 지옥의
주위를 흐르고 있는 이 아케론 강을 건너 망령들을 저승에 이르도록 해주는 배를
젓는 것이었다.
그는 떼지어 오는 망령들을 잔인한 말로 조롱하며 이 강을 건너기만 하면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여기서 보이는 태양빛도 다시 보려는 생각조차 말라고
하자 망령들은 일제히 통곡하였다. 카론은 지상에 있을 때와 같은 옷차림을 한
단테를 보고 화를 내며 이 괴상한 방문객의 승선을 거부하였다. 그의 임무는 죄
지은 망령들만을 건네 주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천국의 뜻에 의해 이 곳에 왔다는 것을 듣고는 이내 납득하였다.
이 강의 탁류를 건너는 도중 신의 노염을 받은 망령들이 사방에서 떼를 지어
모여 와서 단테를 붙잡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배가 전복될 뻔하였다. 이 때에
'눈물의 나라'로부터 큰 바람이 불어오고 번개가 치는 바람에 단테는 공포
때문에 그만 졸도하고 말았다. 이 위험을 겨우 벗어나 건너간 곳이 바로
지옥이다. 단테가 생각하는 지옥의 위치는 지구 중심의 밑바닥이 되는 북반구
밑에 놓여 있는 큰 묘지 모양의 동굴이었는데 이 큰 분지의 주위로 봉우리들이
있고 여기에는 죄에 대한 형벌이 지정된 곳이었다.
지옥의 끝이 되는 곳 즉 지심의 밑바닥인 대마왕의 형벌을 받는 곳에서부터 한
줄기의 험한 길이 지구의 표면을 통하여 반대 방향으로 열려 남해의 파도 위에
우뚝 솟은 정죄산의 비탈로 나오게 되어 있다. 이 지옥은 또 '상부 지옥'과 '하부
지옥'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상부 지옥'은 이성을 잃은 사람이 욕망을 제멋대로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곳이며 '하부 지옥'은 이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짐승과
같은 행위 또는 악랄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벌을 받는 곳이다.
단테는 인도자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인도되어 먼저 상부 지옥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여러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지옥 전체는 아홉 가지의 지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부로 내려갈수록 죄가 무거운 사람들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제1권
이 곳은 지옥의 변두리가 되는 특수한 장소인 변옥이라는 곳인데 죄는 없으나
그리스도를 모르고 세례를 받지 않은 자 즉 무신자 혹은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내려오기
전의 사람들이나 혹은 그리스도를 몰랐던 사람들로 덕이 있어서 형벌을 받지
않지만 애써 신을 찾으려 해도 구원과 희망을 얻을 수 없는 절망의 고통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이 곳에 있던 사람들로서 승리의 왕관을 쓰고 온 그리스도에게 최초로 구원된
사람은 아담 이브 아벨 노아 모세 아브라함 다윗 왕이었으며 많은 그리스 로마의
성현 중의 한 사람인 베르길리우스는 거기에 남아 있다가 특별한 사명을 띠고
단테를 지상 낙원까지 인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네 사람의 망령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위대한 시인에게 경의를 표하라 떠나간 영광 그 영혼이 돌아온다. 그이가
왔다. 그이가 왔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스승은 단테에게 그를 맞아준 사람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이름 높은 시성 호머 호레이스 루칸
등이었다. 이 여섯 사람은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교환함으로써 단테가 지옥
여행에 대해서 품은 공포심도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일행은 강물을 육지와
같이 걸어서 어느 지점까지 왔다. 그 곳에 위치하고 있는 거룩한 철학성은 일곱
겹의 벽으로 둘러싸여 현자의 7덕을 나타내고 벽마다 열려져 있는 일곱 개의
문은 일곱 학문의 상징이며 그 성벽의 주위에는 웅변을 상징하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을 들어가니 그 곳에는 진기한 화초가 우거지고 푸른 숲이
있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 곳에는 수많은 세계의 시성 성현 위인들이 있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
로마의 건국자 아에네아스 줄리어스 시저 터키 왕 사라센이 있었다. 단테는
사라센을 보고 그가 임종시에 자신의 장례를 성대히 거행하지 말라고 유언으로써
엄명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장례식은 그의 속옷을 창끝에 걸어 왕의 깃발로
사용하여 열 앞에 들게 하고 소복을 입은 중이 깃발 앞에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동방의 정복자이고 생전에는 부귀와 위대함이 정복자였던 사라센은 이제 한
벌의 속옷만을 들고 간다" 하고 외치도록 되었던 것이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지상에서 즐기지 못한 세
사람의 만남을 기뻐하는 것같이 보였으며 그 외에 데모크리토스, 디오게네스,
탈레스가 있었고,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 수학자 유크리트, 천문학자
프로메테우스, 의성 히포크라테스 등이 있었다. 단테는 중세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위인들을 지옥에 있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죄인에 대한 일관된 정서는 복수적 징벌이 아니고 측은한 마음이었다.
제2권
지옥 고유의 형벌이 길을 가로막고 시작된다. 지옥에 온 죄수를 심판하고 그
업보를 판정하여 이들을 각각 적당한 지옥에 보내고 있는 자는 옛날 크레타성의
왕이었다는 미노스였다. 그는 반인 반수의 무서운 얼굴과 한 개의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죄수가 앞으로 나와 참회를 하면 그 꼬리를 자기 몸에 감아
그들이 추락할 옥을 숫자로 표시하고 또한 매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미노스는 두 시인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뱃사공 카론에게와 같은 태도를 취하여 그를 침묵케
하였다.
이 옥에는 육욕의 죄를 범한 자 즉 이성을 배반하고 욕정에 빠진 자들이 있는
곳이다. 망령들은 그칠 새 없이 불어오는 무서운 태풍과 모래와 먼지의 고통을
받으며 암흑 속에서 떨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쾌락에 젖어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살면서 이성을 망각한 응보였다.
그들 속에는 수많은 미남 미녀들이 있었는데 로마의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농락한 클레오파트라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미녀 헬렌과 그의 정부 파리스가
있었다. 그리고 여러 민족을 다스리면서 육욕에 빠져 부패를 일삼은 여왕
세미라미스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자 모든 음란한 행위를
법으로 합리화했었다.
그 다음은 디도인데 그녀는 남편 시카에우스가 죽은 뒤 정절을 깨고 사랑에
빠져 자살을 한 여왕이었다.
그들 중에 서로 얼싸안고 떨어지지 않으며 가련하게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와 파울로였다. 이 두
사람은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단테와는 한 고향이었다. 파울로는 묵묵히 울고
있었으나 프란체스카는 전생에서의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사랑의 이야기는 너무도 비극적이어서 후세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275년 리미니의 조반니 말라테스타는 약간의 불구자였기 때문에 절름발이
조반니라 일컬었지만 용감하고 힘센 무사였으므로 라벤나의 구이도 다폴렌타의
딸 프란체스카와 정략 결혼을 하였다. 프란체스카가 리미니에 왔을 때 조반니의
동생 파울로와 사랑에 빠졌다. 파울로는 1269년 결혼한 두 딸의 아버지였는데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카와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조반니가 프란체스카의 침실을
기습하여 둘을 죽인 것은 1283년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즉 조반니는 파울로를 자기 결혼의 대리인을 보냈는데 프란체스카는
진짜 자기 남편으로 알고 첫눈에 마음을 주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단테는 비통함에 젖어 끝내는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가 의식을 회복하였을
때는 제3권 앞에 서 있었다.
제3권
이 곳은 대식가와 음식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자들을 벌하는
지옥이다. 상을 에이는 듯한 눈과 큼직큼직한 우박이 미친 듯이 쏟아져서 암담한
지경을 이루고 있다. 욕심껏 먹어도 만족을 모르는 머리가 셋 달린 짐승
첼베루스가 새로 들어온 망령에게 덤벼들어 잠깐 동안에 피부를 찢고 살을
물어뜯어 망령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괴물은 두 시인을 발견하자 큰 입을
벌리고 단숨에 삼킬 듯이 가까이 왔다. 이 때 베르길리우스가 흙덩어리를 집어
던지자 괴물은 그 흙덩어리를 먹느라고 수선을 떨었으므로 그 틈을 이용하여
겨우 그 곳을 통과하였다. 이 때에 길 옆의 더러운 물이 고인 구덩이 속에서
단테에게 소리치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플로렌스 사람으로서 생전에
욕심껏 많이 먹기로 유명하여 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인데 그는 단테의
물음에 고국의 혼란과 흑백 양당의 싸움을 논하고 백당이 승리한 3년 후에 또
다시 패배한다고 미래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플로렌스의 여러 명사들이 지옥
깊이 떨어져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제4권
이곳은 축재할 줄만 아는 인색함과 낭비로 일생을 보낸 방탕아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곳이다.
이 권에서는 수많은 망령들이 흡사 사람의 물결과도 같이 서로 아우성을 치며
싸우고 있었다. 이들은 두 패의 노한 폭도로 각각 거대한 바위를 힘을 다하여
굴리고 충돌시키고는 그것을 굴리고 되돌아 갔다가 또다시 충돌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이 바위는 부의 상징이었다. 이 거대한 바위를 굴리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부만 추구하고 또한 낭비하는 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바위가 도로 굴러떨어지면 한 쪽에서
"너희들은 왜 돈만 모으려고 하느냐?" 하고 외치면 한 쪽에 있는 자들은
"너희들은 왜 낭비만 하고 있느냐?" 하고 외쳤다. 그것은 권의 양끝에서
욕망끼리 부딪칠 때 일어나는 과도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중에는
성직자들과 교황, 추기경들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덧없는 허영과 부귀 영화,
야욕으로 본성끼리 더럽힌 죄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제5권
이 곳은 분노에 몸을 맡긴 자들이 잇는 지옥이다. 여기는 스틱스라는 무서운
늪이 있고 늪 가운데에는 디테라고 하는 증오의 성이 높이 솟아 있었다. 이
늪에는 검은 탁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물 속에는 진흙투성이의 망령들이
하반신을 진창 속에 담그고 서 있는데 그 분노의 형상이 참으로 처참하였다.
그들은 서로 손과 발을 들어 머리나 가슴이나 발을 닥치는 대로 치고 박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빨로 서로 물어뜯었다. 그뿐만 아니라 늪의 수면에는 검은
물이 부글부글 거품을 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가라앉은 망령들이 가슴 속에 뭉쳐
있는 검은 연기와 같은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테와 스승은 죽음의 늪을 건너 중죄를 범한 자들이 있다는 디테 성의 문
앞에 섰다. 탑의 꼭대기에는 신을 배신하고 타락하여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의
망령들이 운집하여 내려다보면 성난 소리로 외쳤다.
"지상 사람의 모습으로 망령들의 영역을 대담하게 침입하려는 너는 누구냐?
당장 지상으로 없어져라" 하고 단테의 입성을 거절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조심스럽게 밀어 제치며 그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단테에게 그 망령들이 전생에 지은 분노와 교만의 죄에 대해 설명해
주며 위로했다.
"이 메두사야 빨리 나타나라. 너희들이 쏘아 보아도 우리는 돌이 되지
않는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들이 말하는 메두사는 무서운 힘을 가진
여자인데 누구든지 그의 무서운 얼굴을 한 번만 쳐다보면 그만 돌로 변해
버렸다.
스승은 악령들이 메두사를 불러 단테에게 위험을 가하려는 것을 알고 놀라
있는 단테를 뒤로 돌려 세우고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려 주었다.
이 때 늪의 양쪽이 흔들리며 돌연 온 몸에서 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천사가
물위로 육지와 같이 걸어 오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절하게 하니
그때까지 날뛰고 있던 악령의 무리들이 이리저리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천사가
성문 앞에 와서 성장을 문에 대자 굳게 닫힌 큰 문이 활짝 열렸다. 천사는
성으로 들어가 망령들을 꾸짖고 두 시인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온 길로 돌아가
버렸다.
제6권
이 곳부터가 가장 무서운 '하부 지옥'이다. 이 곳은 넓은 들판으로 신을 모독한
죄, 즉 이교도의 교주들과 그 제자들이 있는 지옥이다. 그리스도교에 반항한
이교도와 쾌락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 파의 철학자들이
있었다. 바라보이는 곳마다 무덤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 뚜껑이 옆에 있거나
없어서 망령들의 아비 규환과 고통에 시달리는 소리가 그 속에서 들려 왔다.
더구나 그 위에 맹렬한 불길이 타고 있는데 여기는 각종 종파의 이교도들이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영생을 부인함으로써 영혼이 육체와 더불어
죽는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의 처벌은 신의 분노로 화형을 받는 영원한 무덤에
사는 것이다. 이 곳에는 기배린 당의 용장 파리나타를 비롯하여 단테의 친구이자
시인인 구이도의 부친인 카바르칸티와 피데리코 2세 교황 옥타비아누스 등 천여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원한과 복수의 상징인 메두사가 두 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7권
여기에는 깨진 암석들이 둥글게 쌓여 원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바닥이 있었다.
험한 암석이 톱니처럼 우뚝 솟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좁은 바윗길을 겨우
뚫고 나가니 바위틈 사이에 옛날 크레타 섬에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반인
반수의 미노타우로스가 누워 지키고 있었다. 이 괴물은 누워 있다가 그들을 보자
분노에 떨면서 자신의 몸을 물어뜯기 사작하였다.
이 기형아는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바다의 신이 보내 준
숫소를 사랑하게 되어 나무로 만든 암소의 몸 속으로 기어들어가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다. 미노스 왕은 그를 달아날 수 없는 미궁 안에 유폐하여 나오지
못하게 한 후 매일 아테네의 소년 소녀 일곱 명씩을 잡아먹고 살게 하였다.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는 이것에 분개하여 크레타 섬에 가서 그를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의 혼은 피에 굶주린 포악과 잔학의 상징이 되어 이 권에 갇혀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가 분노하는 모양을 보고 큰 소리로
"이 괴물아, 나는 너를 죽인 아테네의 왕이 아니다. 우리들은 단지 너의 형벌을
보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다" 하고 소리쳤다.
두 시인은 허물어진 암석을 겨우 지나서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걸어가는데
발에 걸리는 돌이 이상하게 발 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세계가 갑자기 암흑이 되고 온 골짜기가 진동하면서 이 곳에
있는 바위도 추락하여 이와 같이 움직이는 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세 개로 구분된 원 하나에 백성들에게 흉포한
행동을 가한 폭군과 살인자들이 열탕처럼 끓고 있는 빨간 피의 연못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눈과 이마가 뜨거운 핏물에 잠긴 자도 있고 겨우 목만 내놓고
신음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침몰의 깊이에 차이가 있었으며
대안에는 흉포의 표상인 반인 반마의 센타우르스가 수천 마리의 떼를 지어 핏물
속에서 올라오려는 망령을 활로 쏘려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압제자였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인간의 영혼을 더럽힌 시칠리아의
데오니오스 등 자기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많은 살생을 한 호전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제2원은 신의 율법을 배반하고 자살을 한 자들이 사는 숲으로 이 곳에 있는
작고 앙상한 나무들은 전부 죄수가 변한 것이었다. 열매는 하나도 맺지 못한 채
독가시만이 무성했다. 불평과 절망의 상징으로서 이 곳에서 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새와 같은 날개와 긴 손톱을 가진 괴물은 얼굴은 굶주림으로
창백하였다.
이 곳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는데 슬픈 울음 소리가 사방으로부터
들려 왔다. 그것은 이 괴상한 새가 새싹을 주둥이로 쪼았기 때문에 나무들이
아픔을 견디지 못해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단테가 스승이 시키는 대로 그
나뭇 가지 하나를 꺾었더니 마디 속에서 피가 흘러 나왔으며
"왜 남의 몸에 상처를 입히느냐?" 하면서 고통에 겨워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나무는 시칠리아 왕 페데리코 2세의 고관이었던 피에르 텔레뷔니에의
화신이었다.
그는 평민으로서 웅변과 학식이 뛰어난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으며 공도 많았던
사람이었으나 만년에는 정적들의 모략으로 국왕의 총애를 잃고 눈알까지 빼앗긴
채 유폐 당하자 절망 끝에 자살하였다. 이 때 벌거벗은 두 개의 그림자가
가시덤불에 상처를 입은 채 악마들에게 쫓겨 숲을 헤치고 오더니 죽어 버렸다.
그들은 시에나 사람인 라노와 파도아의 자코보인데 가산을 탕진하고 횡사하여
이러한 벌을 받고 있었다.
제3원에 이르니 풀 하나 남지 않고 타버린 열사의 들판이었다. 이 곳에는 신을
모독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그들은 뜨거운 모래 위에 엎드려 고민하고 있었으며
자연에 반역하여 인륜을 더럽힌 자와 땀을 흘리며 얻어야 할 노동의 대가를
부당하게 착취한 불로 소득자들이 죄의 무게에 따라 속도를 달리하여 떼를 지어
달리며 헤매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불줄기와 이 나체의 죄수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불꽃이 점점 모래땅 위에 쌓여 불바다를 이루자 망령들은 손을
휘젓고 발을 구르면서 계속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열사를 지나가니 한 줄기의 빨간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물은
부리가메에서 흐르던 물과 같았다. 부리가메라는 것은 비델보 부근의 유황
온천인데 중세 때는 창부나 죄 지은 여인들이 일반 부인들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금지 당하였으므로 이 온천의 물을 다른 장소로 끌어내어 따로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지옥의 늪과 강물은 인간 태고의 황금 시대는
제외하더라도 그 후의 죄와 고통으로 가득 찬 각 시대에 흘려진 눈물이 지하를
뚫고 흘러서 지옥의 내를 이루었으며 여기에 지옥의 죄수들의 눈물과 폭군
자객의 피와 여러 지옥의 모든 더러운 것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형벌의 좋은 도구가 된다고 말했다. 이 강은 아케론과 스트제 강인데 열사의 한
복판을 흐르며 질병을 퍼트리고 물위나 냇가의 불꽃을 끈 후 대마왕이 사는 최저
지옥의 얼음지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 곳을 지나는 강가에서 단테는 여러 죄수들 가운데서 얼굴이 그을려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그의 은사 부르네토 라티노를 간신히 발견하였다.
그는 단테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단테는 누구보다 가장
큰 존경을 보였다. 부르네토는 단테가 플로렌스 사람의 손에 고역을 겪으리라는
예언과 함께 자신의 보전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신의 강제에 의해 들판을
달려 건넜다. 강물이 그치는 곳까지 이르러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허리에
매고 있는 띠를 물 속 깊이 던지게 하니 한 마리의 기괴하고 큰 짐승이 짙은
안개 속에서 떠올랐다. 얼굴은 유순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나머지 전신은 털이
돋은 뱀 형체를 한 보기에도 끔찍한 괴물이었다. 이것은 사람을 유혹하여
자연이나 문명을 파괴하는 상징인 게류온이었다.
이 때 한 쪽에서는 비싼 이자를 받아 사람들을 괴롭힌 고리 대금업자가 목에
영원히 걸고 있어야 하는 가방을 매고 고열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돈가방에는 문장과 상표가 선명하게 수놓여 있었는데 대개가 플로렌스의 명문
귀족들이었다. 두 시인은 게류온을 타고 빨간 피의 폭포수를 좌우로 바라보면서
공중을 번개 같이 빠르게 비행을 하여 사기꾼들이 벌받고 있는 무쇳빛 암석의
나라로 내려갔다.
제8권
이 곳은 악의 구덩이라고 하는데 사기꾼과 악한들이 있는 지옥 상반부이다.
암석은 점차 제9권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고 다시 열 개의 골짜기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는 죄의 정도가 다른 자들이 각각 들어 있었다. 타락한 천사도
이 곳에 있는데 이 권은 인륜을 파괴한 기만의 죄를 범한 자들이 떨어져 있었다.
제1의 골짜기에는 지상에 있을 때 부녀자들을 유괴 혹은 매매한 자들로서
그들은 뿔이 돋힌 악귀의 긴 매에 무참하게 맞으려 도망쳐 다녔다. 노무노스
섬의 젊은 왕녀 피퓨시프레에게 아이를 배게 한 뒤 버리고 아내로 맞은
고루키스의 왕녀 메데아까지 버린 셋사리아 왕 야송 알렉산드리아의 난폭한 국왕
타이스가 이 곳에서 자기 몸을 학대하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제2의 골짜기에는 아첨한 자들이 똥통 속에 빠져 허덕이는 것이 보였다.
제3의 골짜기에는 성직 매매의 죄를 범한 자가 있는 곳인데 이 곳은 납빛을 한
절벽 속에 많은 구덩이가 뚫려 있었는데 그 속에는 죄수가 한 사람씩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빨간 불꽃이 그 구덩이 속에서 타고 있는데 밖으로 나온
두 발목은 뜨거움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불꽃이 강한 것이 니콜라스 3세의 것이었다. 그는 교황의 몸으로 성직을 돈을
받고 팔아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제4의 골짜기에는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했던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신의
신비를 폭로한 죄로 앞을 보지 못하게 머리를 뒤로 돌려 붙었기 때문에 발은
앞으로 걸어가나 눈은 뒤를 향하고 있었다.
단테는 비참한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제5의 골짜기에는 관직을 더럽힌 자들이 있었다.
뇌물을 받은 탐관 오리들은 송진과 기름이 끓고 있는 연못에 파묻혀 얼굴만
겨우 내놓고 개구리 같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들을 감시하고 있는 포악스럽게
생긴 악귀들은 손에 갈고리를 들고 끓고 있는 송진과 기름 속으로 죄인들을 밀어
넣었다. 그들은 감시를 피하여 떠올랐다가 악귀들이 가까이 오면 못 속 깊이
숨어 버리곤 하였다.
제6의 골짜기에는 위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무거운 납으로 만든 의복을 입고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으나 그 의복의 표면은 찬란한 도금으로 덮여 있었다.
그 중에는 브로니아의 수도사 카타라노와 로데링고 등이 있었으며 땅바닥에 세
개의 말뚝에 못박혀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빌라도에게 넘겨
준 제사장 카이아파스였다. 그는 벌거벗고 좁은 길바닥에 누워 그 위를 짓밟고
다니는 사람들의 무게를 낱낱이 몸에 느껴야만 했다.
제7의 골짜기에는 수많은 도둑들이 가장 천한 벌을 받고 있었다.
이 곳은 어두컴컴한 밑바닥은 보이지 않았으나 온 골짜기에는 끔찍한 뱀의
무리가 보였다. 리비아의 사막이나 에디오피아와 아라비아의 뱀을 모두 모아도
이처럼 처참하고 지독한 뱀들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죄인들이 뱀 사이를 피해
다니는데 뱀은 손과 목 허리를 칭칭 감아 조이고 있었다.
지금도 뱀 한 마리가 두 시인 옆에 있는 한 사람의 목을 찔러 쑤시니 금새
타서 재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베르길리우스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으니 단테의 고향에서 가까운 피스토이아
사람이며 신전의 성스러운 보물을 훔쳐 이 속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단테에게 피스토이아와 플로렌스의 정치 싸움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말을 마친 그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신을 욕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곧 떼를 지은 뱀이 목을 감아 입을 막고 팔을 감아 움직이지 못하여
도둑을 끌고 갔다. 이 때 떼를 지어 덤비는 뱀이 등에 붙은 젠타우로(예전에
가축을 훔친 죄로 이 옥에 떨어진 사람)가 그를 뒤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에 본 광경은 더욱 처참하고 기괴하였다. 세 망령이 두 시인이 바라보는
아래로 왔을 때 여섯 개의 발을 가진 도마뱀 한 마리가 그중 한 망령에게
달라붙었다. 망령은 도마뱀에게 칭칭 얽혀지더니 뜨거운 납처럼 녹아 보기 흉한
모양이 되어 떠나갔다.
그 때 또 삼복의 더운 햇볕 아래 번개같이 길을 지나던 작은 뱀 한 마리가 한
망령의 배로 뛰어들어 그 배꼽을 찌르고 그의 앞에 넘어진다. 찔린 사람은
열병에 걸린 듯 하품을 하면서 뱀과 서로 쳐다보면서 연기를 토하고 그 연기는
서로 섞이었다. 이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그 사람의 사지는 비틀어지고 얽혀서
얼굴이 변하면서 뱀의 몸이 되고 뱀의 몸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뱀으로
변한 망령은 소리를 내며 바위 틈으로 도망 다니고 있었다.
이와 같이 뱀과 한 덩어리가 되어 뱀이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하는 이 기괴한
변화와 비참한 고통을 눈앞에 보여 준 자들은 모두가 플로렌스의 도둑들이었다.
제8의 골짜기에는 권모 술수의 죄를 범한 자들이 있었다.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남용하여 권모 술수로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다. 그
죄인들 중에는 트로이 전쟁 때 목마의 간사한 꾀로써 트로이 성을 함락시킨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이와 디오메데스도 있었다. 그들은 간계의 대가로 화염에
싸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제9의 골짜기에는 이간 중상자와 책동자가 있는 곳으로 그 참혹한 광경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기독교를 변질시킨 마호메트는 뺨으로부터
아래까지 갈라져 있는데 종아리 사리로 창자가 늘어져 있으며 오장육부가 환히
다 보였다. 이는 그의 종교적 불화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단테
눈앞에 자기 가슴의 상처를 헤쳐 보이며
"보라, 이 모습을! 나는 마호메트이다. 나보다 앞서 가고 있는 이마로부터
얼굴까지 갈라져 있는 사람은 이슬람교 안에서 최초의 분파를 만든 나의 사위인
알라이다. 여기에 있는 악귀들은 우리들이 고뇌의 길을 한 바퀴 돌아오면 다시
칼로 무참하게 갈라 놓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상처가 다시 아물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이슬람교 주인 마호메트는 단테의 지상의 옷차림을 보고 현세에 돌아가면 헛된
교파 싸움만 하고 있는 돌치노에게 충고해 달라고 하였다. 돌치노는 바루마의
세가렐리의 제자였는데 공산적 경향이 있었으며 재산과 여성의 공유를
주장하였다.
목을 베이고 코를 눈 아래까지 깎이고 귀가 한쪽만 있는 사나이가 목구멍을
열어 말하는데 그는 루마니아의 각 도시에 분쟁의 씨를 뿌린 피에르 다
메디치였다. 그 옆에 혀를 잘리어 묵묵이 있는 것은 시저로 하여금 로마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한 호민관 쿠리오였고 두 손을 잘리고 남은 팔만을
어두운 공중으로 올리고 있는 것은 결혼을 위해 플로렌스를 두 파로 분열시켜
전쟁의 원인이 된 폰델몬테 가문의 모스카였다.
프랑스의 귀족이며 연애 시인 벨트란드 데 보른은 머리가 없는 몸뚱이로
자기의 머리를 손에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달려 있는 머리는 그의
몸뚱이를 바라보며
"아아!" 하고 슬프게 한숨 지었다. 그는 영국의 왕자 헨리를 사주하여 부왕인
헨리 2세를 반역하게 한 자였다. 결합되어 있는 두 사람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머리와 몸뚱이가 잘리운 것이었다.
제10의 골짜기에는 연금술사와 화폐 위조자들이 벌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기만자들은 엎드려 배로 기어다니거나 타인의 어깨 위에 매달려
있거나 혹은 네 발로 바애의 길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썩어 문드러진
몸에서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머리부터 발목까지 부스럼으로
덮인 채 서로 얼싸안고 견딜 수 없는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손톱으로 긁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몸을 공중으로 띄워 나를 수 있다고 사람을 속이고
또 한 사람은 화폐를 위조한 연금술사인데 이들은 이미 시에나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 때 고삐 풀린 산돼지처럼 광포하게 달리는 두 개의 망령이 달려 와서 그
하나는 연금술사 한 사람에게 덤벼들어 목덜미를 물으며 배를 땅바닥에
문질렀다. 이것을 보고 떨고 있는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폭행자는 위조의
유언장을 가지고 유산횡령에 가담한 플로렌스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지풀로의
왕 지니라의 딸로서 어둠을 타서 아버지와 근친 상간을 한 미류라의 넋이라고
했다.
그리스의 시논은 간계를 써서 트로이의 포로가 되어 그리스 군대가 남겨 두고
간 목마를 성내로 끌어들이게 하여 성을 함락시킨 간첩이었는데 그는 옴이
손등에 번지고 열병에 걸려 전신에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으나 한 방울의 물도
얻지 못한 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이 지옥은 마왕의 지옥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사방이 어두웠다. 이 때 천둥
소리보다도 더욱 무서운 소리가 들려와서 바라보니 높은 탑이 늘어선 것 같은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시에나 성의 북쪽에 있는 성 몬테레치오네의
12층 탑과 흡사했으나 베르길리우스는 그들이 거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신에게 반역을 꾀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 팔을
철쇠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넓은 얼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길이 7피트 반이나 되는 거대한 종만 하였으며
골격도 역시 거대하였다.
제9권
이 곳은 지옥의 최말단으로 반역의 죄를 범한 자들이 철쇠에 묶여 원의 얼음
속에 잠겨 있는 얼음 지옥이다. 국가를 반역한 매국노 군주를 죽인 역적
그리스도를 판 유다 등이 이 얼음 지옥에서 가장 가혹한 중벌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머리까지 얼음 속에 잠겨 있었는데 단테가 잘못하여 그 중 한 사람의
머리를 발로 건드리니 그가 성을 내면서
"몬다페르디 전쟁에서의 복수를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는 것을 달래어 그의
이름과 사적을 물어 보았다. 현세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죄수들이 이 곳에서는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테는 무자비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한 줌 뽑았다. 그래도 그는 고함만
지르며 고개를 숙인 채 이름을 감추었으므로 그의 옆에 있는 다른 죄수의 입을
통해 그가 동지를 배반한 복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루프 당과 기베린 당의
양당이 1260년 몬테페르디에서 대결전을 하였을 때 적과 내통하여 기수의 손을
잘라 군기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게루프 당의 사기가 떨어져 대패를 하게 했던
간악한 배반자였다.
가족과 손님을 연회에 초대하여 살해한 죄인은 핏줄까지 얼어붙을 듯한 곳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친 아우를 살해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혹한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붙들고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전신이 얼음 속에 잠겼는데 얼음이
눈알까지 덮여 있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가 고통이 더욱
심하였으며 양쪽 귀는 없었다. 단테는 그의 눈에 있는 얼음을 씻어 주는 대신
그의 신상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알베루티 형제로서 백작인
아버지가 죽은 뒤 잠시 협력하여 압정을 하였으나 분쟁을 일으켜 두 당으로 갈려
서로 살육을 범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단테는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자들은 아귀였으므로 단테의 사랑에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암굴 속에서 머리가 또 하나의 머리 위에 붙어 동료의 머리를 뜯어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무슨 죄로 그렇게 처참한 짓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입을 머리에서 떼고 입술의 더러운 피를 씻으며 이야기했다. 이들은 유명한
우골리노 백작과 대승정 루지에르였다. 우골리노 백작은 피사의 귀족으로서
게루프 당의 지도자였다. 권세를 좋아하며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에 자기의 당을
배반하고 루지에르와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루지에르의 배반으로 우골리노
백작은 두 아들과 세 명의 손자와 함께 피사의 탑 속에 감금되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약 8개월 간 유폐되었던 감옥은 짐승도 살지 못할 만큼
어둡고 습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듬해 3월에는 옥이 폐쇄되어 식사를 받지
못하게 되고 굳게 닫힌 옥문의 열쇠는 알노 강물 깊이 던져졌다. 그 때부터 한
방울의 물도 한 조각의 빵도 없이 노백작은 희미한 빛 아래서 가련한 아이들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게 되었다. 곧 벌어진 참극을 짐작한 늙은 백작의 고민과
비탄은 참으로 처참하였다. 일 주일이 지난 후 다섯 명의 어린애들은 비참한
몰골이 되었다. 원통함과 슬픔 때문에 백작이 자기의 두 손을 물어뜯자 옆에서
보고 있던 아들이 배가 고파 그러는 줄 알고
"우리들의 살을 잡수시지요. 그러면 우리들의 슬픔과 고통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불행한 살을 주신 아버지께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흘이 되는
날 아침에 그의 둘째 아들 갓도는 아비의 무릎 아래서 죽어갔다.
"왜 구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아버지!"
이것이 그가 죽어가며 외친 절규였다.
이리하여 남은 애들도 모두 죽어 버렸다. 비애와 고통의 극단을 맛본 백작은
아이들이 죽은 3일 후에 아사하고 말았다.
이 우골리노 백작의 이야기는 프란체스카의 비련과 함께 고금의 애절한 노래로
후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어떤 나라에서는 교과서에까지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피사의 고탑은 이 사건 떄문에 아사탑이라는 끔찍스런 이름을 얻게
되고 잔인함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남게 되었다.
지옥의 밑바닥 즉 광열의 근원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은 대마왕
르치페로이다. 그는 악의 상징이고 우주를 반역한 거대한 괴물이다. 이전에는
아름다운 천사였으나 악마가 되면서부터 얼굴이 흉악해 지고 모든 비애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천당에서 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 한반신이 영원히 얼음
지옥 속에 파묻혀 추악한 세 면의 얼굴과 여섯 개의 눈을 가졌다.
그런데 그 얼굴의 하나는 붉었고, 하나는 검었으며, 나머지는 노랑색이었다. 이
세 면의 얼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이것은 신의 삼위 일체인 지혜와
힘 사랑에 대하여 지옥에 있어서도 삼위 일쳬라고 할 만한 무지 무력 증오의
상징이라고 한다. 무지는 자체의 암흑 때문에 검고, 무력은 분노 때문에
붉었으며, 증오는 질투에 의하여 노란 것이다. 얼굴 아래에는 날개가 둘씩 나와
있는데 그것은 박쥐의 날개 같았으며 쉴 새 없이 날개를 치면서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일어나는 바람으로 얼음이 점점 두터워져 이 얼음 지옥의 얼음
강을 얼어붙게 할 뿐이었다.
반역의 왕인 그의 여섯 개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고 세 개의 입으로
세 사람의 죄인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판 가롯의
유다였는데 머리는 벌써 입 속에 들어가고 양쪽 발만 내저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부르터스와 카시우스는 로마의 영웅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죄로 다른
두 입에 물려 있었다.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은 이것으로 다 보았으니 밤이 되기 전에 돌아가자" 하고 말하였다. 두
시인은 이틀 동안의 지옥 구경을 끝마치고 다시 지구의 표면으로 험악한 길을
올라갔다. 하루가 지나서 멀리 보이는 둥근 구멍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마왕이
회개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때 생긴 그 구멍으로 빠져 나왔다. 두 시인이 지옥을
나왔을 때 인간 세상은 부활제의 전야인 월요일의 새벽녘이었는데 별은 아직도
찬란하게 연옥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연옥으로
올라갔다.
-연옥편-
넓고 푸른 바다로 된 남반구의 중앙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산으로 된
섬이 있다. 그 형태는 원추형이고 바로 예루살렘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꼭대기는 화천에 이르게 되어 있는데 이 높은 산이 연옥이다. 연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간이 죄를 회개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의
상징일 것이다. 이 곳에서는 망령들이 지옥에서와 같은 비참한 형벌을 받지는
않으나 고난과 싸워 가톨릭의 신조를 지키고 자기의 잘못을 속죄하면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영혼의 구원을 받을 희망이 있는 망령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곳에서의 시련과 수양만으로는 불충분하여 다시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연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산의 중턱을 도는 일대를 연옥의 하부라 하고 그
위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를 연옥의 상부라 하는데 그 봉우리에는 에덴의
동산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낙원이 있었다.
연옥의 하부
컴컴한 지옥의 둥근 구멍을 나온 두 시인은 연옥에 서 있었다. 밤은 아직 밝지
않아서 별빛은 사람의 마음에 사랑을 깨닫게 하고 정의와 신중 강의와 절제의
네 가지 도덕을 표상하는 네 개의 별이 남쪽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그 곳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자유의 이상을 지키며 평생
흔들림이 없었던 로마의 애국자이며 스토아 학파의 도덕가인 와치카의 카토였다.
그는 여기서 연옥을 지키는 문지기의 임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빛과 같이 빛나고 어깨에는 흰 머리가 늘어져 있었으며 가슴에는 흰 수염이
길게 내려져 있었다.
두 시인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연옥 견학의 허락을 구하자 그는 몸을 깨끗이
씻도록 한 뒤 연옥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 때 바다 저편에서
아름다운 빛에 싸인 한 척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 왔다. 이 배는 노도 돛대도
없이 배 앞에 선 천사의 날갯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배 안에는 연옥에서
정죄를 씻는 수행을 해야 하는 많은 망령들이 타고 있었다. 배가 강가에 닿자
그들은 찬송가 114절 출애굽의 노래를 부르고 십자가를 그리며 배에서
뛰어내렸다. 밤은 점차 밝아지고 부활절의 아침 해가 떠올라 찬란한 빛이 이
망령들을 축복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테의 그림자는 땅에 검게
비쳤으나 스승인 베르길리우스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만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시인은 산에 오르는 도중에 떼를 지은
여러 망령들을 보았다. 그들은 참회하여 죄를 용서받거나 또는 임종의 순간에
신에게 귀의한 사람들의 영혼이었다. 그들 중에서 용모가 수려한 장부 한 사람이
"내 얼굴을 모르겠는가?" 하고 말을 걸어 단테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시시리아
여왕 고스단사(1258년 즉위)의 손자인 만후렛티로 교회를 배반하여 교황에게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생전의 연령의 30배를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를 위하여 명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기간이 단축되므로
단테에게 인간 세계로 돌아가면 자가의 딸에게 그의 명복을 빌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와 작별하고 걸어가는데 생전에 안일하고 태만하여 마지막 임종할 때 비로소
참회를 했던 단테의 친구이며 악기 제작의 명인이었던 배랏구아가 게으름의 죄로
이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임종 때까지 참회를 미루었던 죄로 생전에 보낸
시간을 이 곳에서 지내야 하며 또한 지상의 착한 사람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두 시인은 험악한 산길을 올라가 넓은 평지로 나왔다. 이 곳에서는 한 떼의
망령들이 시편 501장을 부르고 있었다.
"하느님이여, 주의 자비를 좇아 저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제 죄를 도맡아 주소서. 저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저의 죄를 깨끗이 하소서.
저는 제 죄를 아오니 제 죄가 항상 제 앞에 있나이다"
이 사람들은 암살했거나 혹은 전사 익사 모살 교살된 자들로 억울한 최후를
마친 사람들이었으나 단말마의 순간에 회개를 한 사람들로서 눈을 감는 순간에
하늘로부터 광명이 내려와 평화롭게 영혼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시인 소로데루로를 만나 왕후의 골짜기로 안내되어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시인들은 연옥에서 밤길을 가지 않았다. 이 곳에서는 밤에 걷게
되면 반드시 길을 잃는다. 밤의 어둠은 의지를 잠재우고 무력하게 만들게
때문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연옥에서는 금물이었다. 이 곳에서는 화초와
진귀한 나무가 울창하여 찬란한 금은 보석의 장식을 펼쳐 놓은 것과 같았으며
대기에는 향기가 가득하여 에덴과 흡사한 작은 낙원과 같아서 단테의 심신이
황홀해졌다. 여기는 고금의 이름난 장군과 어진 왕의 거처인데 그들은 백성들을
가련하게 여겨 훌륭한 정치는 하였으나 정사에만 몰두하고 사치를 일삼으며 정작
중요한 신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황제를 비롯하여
룩셈부르크의 앙리 3세 등이 옛날에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이제는 친구가 되어
조용히 과거의 죄를 씻고 있었다. 밤이 되어 기도 소리가 밤 하늘에 들리는데
높은 하늘에서 푸른(푸른 빛은 희망의 상징) 옷을 입고 푸른 날개를 치며 두
천사가 자비의 상징인 불꽃에 싸인 이 검을 들고 내려와 낙원을 경호하고
있었다. 옛날 에덴에서 죄악의 과실을 먹도록 이브를 유혹하였던 뱀도 이 화원에
숨어 있었는데 또다시 왕후들을 유혹하려고 기어다니고 있는 것을 천사들이 큰
칼을 휘두르며 쫓아 버렸다. 연옥에서 이틀째 되는 날이 밝을 때 잠자던 두
시인은 천사들에게 운반되어 연옥의 상부에 가 있었다. 그 문턱에 있는
다이아몬드 문이 큰 층대 위에 있었는데 천사가 신의 심판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강한 빛을 내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두
시인은 두려워하며 회개를 상징한 세 개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 계단의 제1단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마음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고 제2단은 녹색의 소석인데 죄의 참회를 상징하고 제3단은 피처럼 붉은
반암으로 신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며 입구의 다이아몬드 문은 교회의 근본을
상징한다고 한다. 천사는 그들에게 권위를 표상하는 금과 지식을 표상하는
은으로 된 열쇠를 주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천사는 자기가 들고
있는 무딘 칼로 단테의 이마 위에 일곱 개의 P자를 써 주었다.
이것은 이 죄를 씻는 곳(연옥)에서 속죄하여야 할 죄인 오만, 질투, 분노, 태만,
탐욕, 폭식, 사음의 일곱 가지 악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 때에 새로 연옥의 문을
들어가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찬미의 소리가 들려왔다. 두 시인은 암석이 톱니와
같이 늘어선 속죄의 험한 길을 겨우 올라갔는데 거기에는 여덟 개의 고리 모양의
길이 나 있었다. 연옥의 산마루를 도는 이 둥근 길(환도)의 넓이는 좁지만
평평하였다. 한 쪽은 지하수의 천길 계곡이며 다른 한 쪽은 하늘을 찌를 듯한
절벽이었다. 스승은 단테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테의 오른편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제1환도
이 곳의 암벽에는 겸양의 미덕을 나타내는 옛이야기 몇 가지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 암석은 흰 대리석으로 한 쪽 면에는 성모 마리아의 수태 고지와
시편의 작자인 다윗 왕이 모세의 십계명이 새겨진 궤 앞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춤을 추는 모양과 로마 황제가 가난한 과부의 호소를 듣고 있는 모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때 이상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오만의 죄를 저지른
자들로 어깨 위에 거대한 돌을 메고 허리를 굽히고 고민하며 걷고 있는 괴상한
형상이었다. 그 중에는 단테와 친한 화가 오데릿지도 있었는데 그는 인간 사회에
있을 때 혈통의 존귀함을 자만하고 예술의 가치만을 높이 여기며 동료를 존경할
줄을 몰랐으나 이 곳에 와서는 과거의 행동을 참회하고 명예의 공허함을 깨달은
자신의 심중을 고백하고 있었다. 산길을 올라가니 길에 깔려진 돌 위에 오만의
벌을 받고 있는 열세 가지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마왕 르치페로의
지옥 추락과 올림포스 신들에 반역한 거인 괴물 부리야우스와 뇌사의 바벨 탑을
건축한 냄부롯트 대왕 등의 그림이 상상의 석재에 새겨져 있었다. 이 때 겸양의
천사가 샛별과 같이 나타나서 전진할 것을 재촉하였다. 어디서인지 천상의
은악과 아울러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자 단테의 이마 위에 새겨진 P자의 상처
하나가 사라졌다. 두 시인은 험한 계단을 올라 제2의 환도로 나왔다.
제2환도
이 곳은 질투의 죄를 씻는 곳으로 첩첩한 암벽이나 길이 마음의 어둠에서
생기는 질투의 색깔에 따라 변하였다. 정죄를 하고 있는 망령들도 같은 색깔의
허름한 옷을 입고 병풍과 같은 암벽에 매달려 마리아 미카엘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있는 모양이 마치 눈먼 걸인들이
성전의 복도에 앉아 보이지 않는 눈을 쳐들고 무엇을 달라고 애걸하는 모양과
같았다. 그들은 현세에 있을 때 타인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시기한 보복으로
이제는 눈이 철사로 꿰매어져 바다에서도 하늘에서도 도무지 맛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빛의 혜택도 받을 수 없었으나 이젠 지상의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슬퍼하며 가련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광경이
너무 가련해서 단테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곳을 나오자 제2의
P자가 또 사라졌다.
제3환도
이 곳은 분노의 죄를 지은 자들이 죄를 씻는 곳이다. 이 곳에 가까이 오자
세 가지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아들
그리스도를 찾으러 다니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의 궁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성모
마리아였으며 두 번째는 자기 딸이 어떤 젊은 청년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도 그 죄를 추궁하려 하지 않았던 아테네의 왕
피시스트라였다. 세 번째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의 속죄를 빌며 죽어간 기독교의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였는데 모두가 온화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이 환상이
사라지자 어둠이 닥쳐왔다. 단테는 스승의 뒤를 따라 악취가 풍기는 짙은 안개
속을 걸어 나갔다. 이 독기는 이 곳에 있는 망령들의 분노의 상징이었다. 이 세
개의 환영은 이러한 분노를 씻어 버리고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망령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2일째의 밤이 되어 그들은 제4환도의 태만의 연옥에 들어섰다.
제4환도
이 곳에 들어오자 광명의 세계가 펼쳐졌다. 지금까지 본 제1의 환도는 타인의
기업을 험담하려는 오만 제2의 환도에서는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질투 제3의
환도에서는 타인을 괴롭히고 만족하는 분노의 죄를 닦는 것을 보았으나 이
곳에서는 신의 덕을 본받으려 해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 속세의 쾌락이 정도를
넘고 육체의 욕망에 굴복한 사람들이 정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세의 속죄를
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시련을 받고 있었다.
이 때 뒤에서 많은 망령들이 태만의 벌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단테가
잠시 잠들었을 때 머리맡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벙어리에다 손과
발이 꼬부라진 불구로 단테가 바라보니 여자의 발이 노근하게 펴지고 혀가
늘어지면서 야윈 얼굴이 사랑을 구하는 듯한 빛을 띠기 시작하여 단테의 마음이
온통 그에게 쏠렸다. 그 여인은 아름다운 노래로 배를 타고 가는 선원들을
유혹하고 교태를 부리는 사이렌이었다. 이 때 성스러운 얼굴을 한 천사가
나타나서
"베르길리우스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꾸짖자 그 요부가 본색을
나타내었는데 얼굴이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만큼 추악해졌다. 단테가 견딜 수
없는 악취에 잠을 깨어 보니 스승은 세 번이나 그를 깨웠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제5환도
이 곳은 세상에 있을 때 재물을 탐낸 죄인이 있는 곳이다.
"나의 영혼은 먼지에 불과하다"라는 시편의 구절 그대로 망령들이 좁은 길바닥
위에 엎드려 땅 위에 얼굴을 대고 이젠 아름다운 것을 볼 수가 없어 죄를
회개하는 슬픈 소리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들은 물거품과 같은
속세의 환락을 좇으며 신을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금지 당한 채 신의 뜻에 받아드려질 때까지 있어야 했다.
그들 중에 39일 동안 세 개의 관을 법왕 아도리아노 5세가 있었는데 그의
참회가 늦었던 것에 대해 현세에 생존 중인 단 하나의 손녀 아라지야의 기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단테가 허리를 굽히고
대법왕의 존위를 빌자 그는 황급히 이를 말리고 일으키며 죽은 다음에는 귀함과
친함의 구별이 없으며 베드로의 가르침에는 하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여
주었다.
프랑스에서 푸줏간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프랑스 왕조 유구 카페
재물을 탐내어 의형을 죽인 풋다마리온 황금을 탐하던 나머지 손에 닿는 것
전부를 금으로 변화시키는 마력을 원하며 먹을 것까지도 황금으로 만들어 금은
속에 파묻혀 굶어 죽은 미다스 왕 등이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서 산이 곧
허물어질 것 같아 단테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런데 망령들이
"보다 높은 곳에는 신에게 영광 있으라" 하는 축복의 노래를 부르자 곧 지진이
그쳤다. 두 시인이 겨우 일어나서 땅 위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망령들을 넘어
걸어나가니 옛날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소생하여 지나 가던 두 제자에게 말하던
것과 같이
"형제여! 그대들에게 신의 평화가 있으라" 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돌아다보니 그는 기원 전70년경의 이름 높은 로마의 시인 스타츄였다. 두 시인이
그에게 지진에 대해 물으니 연옥의 둥근 길(환도)에서 죄를 씻는 수행을 끝마친
망령이 신에게 용서를 받아 영원의 행복을 받을 때가 되며 천지가 기뻐하여 모든
산이 흔들리고 망령들은 신의 영광을 노래 부르며 구원받은 망령을 환송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제 스타츄는 500년의 긴 세월을 이곳에서 시련을 받고 산마루에 있는 낙원에
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상 자기가 숭배하고 동경하고 있던
베르길리우스를 반가워하며 세 시인은 함께 제6환도로 들어갔다.
제6환도
이 곳은 폭식의 죄를 씻는 곳이다. 이 곳을 들어서니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절제의 미덕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길의 중앙에 있는 능금나무는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아래 부분의 줄기가 가늘었는데 보석과 같은 과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리고 바위 틈에서는 감로와 같은 샘물이 흘러내리고 언덕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는 흡사 백옥을 뿌리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현세에서 폭식을 하던
사람들이 눈앞에 산해 진미를 차려 놓고도 단식의 고행 때문에 눈은 움푹
들어가서 구슬이 빠진 반지 같았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오직
"주여! 나의 입술을 열게 해 주소서"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7환도
이 곳은 정욕에 빠져 타락한 사람들 즉 음욕의 죄를 저지른 죄를 씻는
곳으로서 연옥의 끝이다. 깎은 듯한 암벽에서는 빨간 화염이 분출되어 폭포 같이
솟아 오르고 땅 위에도 퍼져 화염의 막으로 덮여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자비로우신 신이여!" 하고 음탕함에 젖어 있었던 망령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를 다니며 자기가 범한 죄를 깨끗이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동정녀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정결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찬양하고
있었다. 이 곳을 지나니 해질 무렵이 되었는데 어디선가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행복이 있도다" 하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 오고
화염의 반대편에서 정숙한 천사의 자태가 나타났다. 천사는 단테에게 이 화염
속을 뚫고 가지 않으면 천국으로 갈 수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단테는 잠시 그
화염 속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 하는가? 범한 죄가 없는 자는 불에 타지 않는다.
용감하게 뛰어들어 보는 것이다" 하고 말하는 베르길리우스의 격려와 그의 애인
베아트리체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그 죄를 씻어 주는 화염
속으로 몸을 던져 돌진하였다. 그의 몸은 타는 듯이 뜨거웠다. 이리하여 단테와
베아트리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최후의 죄가 사라져 버리고 단테는 이제
청정 무구한 시인이 되었다. 이 때 그의 이마에 남아 있던 마지막 P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테가 천사의 말을 생각하며 앞을 바라보니 멀리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지상 낙원에 이르는 길을 지키고 있는 천사의 소리였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인도자였던 베르길리우스는
"나는 나의 힘이 미치는 예술과 지혜로써 그대를 이 곳까지 인도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의 임무는 끝났다. 앞으로의 길은 험하기는 하지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교도였기 때문에 이 곳에서 더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단테는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해는 벌써
저물었다. 두 시인은 스타츄에게 안내되어 빠른 걸음으로 제7환도를 나와 새로운
층계를 올라가서 지상 낙원에 닿았다.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직접 그를 마중 나올
때까지 혼자서 그 근처를 산책할 것을 허락 받았다.
지상 낙원
여기에서는 살아 있는 단테도 그림자가 없어졌고 맑고 부드러운 신비로운
기운은 시달림 받은 그의 영혼과 육체를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다. 행복을
암시하는 별들을 쳐다보며 돌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동안 환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단테는 꿈 속에서 이제는 천사가 된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도 보았다.
이 곳은 천지 창조 때 아담과 이브가 있었던 에덴의 동산이었다. 세 시인은
떠오르는 아침 해의 영광을 받으면서 이 낙원으로 들어갔다. 알 수 없는 향기와
기운으로 가득 찬 수풀 속을 꿈 같은 기분으로 걸어가니 고통과 걱정 있는
자들이 마시면 모든 고난을 잊어버린다는 '레테(망각)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건넌편 강가에는 백화가 만발해 있는 곳에 아름다운 사람이 시편 32편의 "그
죄가 가리워진 자는 복이 있도다"를 부르며 강변을 따라 올라가며 꽃을 꺾고
있었다. 이 때 돌연 먼 숲 속에서 엄숙한 교회의 행렬이 나타났다. 신비롭고
장엄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는 황금 촛대
7개는 신의 일곱 영혼(혹은 교회의 7가지 비밀)을 상징하고 무지개의 아름다운
광채와 같은 일곱 개의 기는 신의 일곱 가지 전능인 지혜 총명 모략 굳센 기상
지식 경건 외경을 상징하여 행렬의 선두에 세웠다. 그 뒤에 따르는 34인의
장로는 구약 전서(혹은 '유다'의 족장 및 예언자)를 상징하면서 두 줄로 나란히
섰는데 머리에는 흰 백합 화관(신앙의 상)을 쓰고 흰 옷을 입고 혼례식에
걸어가는 신부보다 느리고 공손하게 걸으며 베아트리체를 축복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한 한 대의 쌍륜(두 바퀴는 신구약을 상징함)의 전송차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흰 옷을 입고 늙은 장로의 뒤에 푸른 관을 쓰고 눈이 달린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네 마리의 영수는 제전의 꽃창대에 둘러싸인 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머리는 독수리이고 몸이 홍백색인 사자인 구리호네는 그리스도의
신성함과 인간성을 상징한 것으로서 거대한 날개를 하늘에 펴고 네 가의 빛나는
금색발로 화원을 거닐며 전송차를 목으로 끌고 있었다. 구리호네의 뒤를 따라
오른편에는 사랑, 소망, 믿음의 3덕을 상징하는 백색 녹색 붉은색의 옷을 입은
여신이 따르고 왼편 바퀴에는 자주빛 옷을 입고 정의, 주밀, 강직, 절제의 4덕을
상징하는 네 명의 여신이 뒤따랐다.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세 개의 눈을
가진 천사의 지휘에 따라 이들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뒤에는 이 행렬을 돌봐 주는 얼굴이 비슷한 두 노인과 천한 네 사람의 노인이
따르고 맨 끝에 한 노인이 졸면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노인들은 신약
전서의 7서를 상징한 것으로 머리에 진홍색의 장미꽃 관을 쓴 두 사람의 노인은
'사도행전'과 '로마'서를 의미하고 그 뒤의 4인은 '베드로'서, '야고보'서,
'요한'서, '유다'서이고 끝에서 졸고 있는 노인은 '요한 묵시록'이었다.
세 시인들이 넋을 잃고 이 신비로운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을 치더니 수많은 천사가 나타나 성가를 부르며 백합꽃을 뿌렸다. 그러자
신비로운 향기가 주위에 퍼져 순식간에 오색 찬란한 구름이 되었다. 그 속에서
천사가 된 베아트리체의 존귀한 자태가 나타났다. 단테는 아홉 살 때부터 한 살
아래인 그녀에게 순결한 사랑을 느꼈고 그 때부터 그녀는 단테의 사랑과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10년 전 어느 날 세상을 떠나 이제는 신에게 봉사하는 천사가
되어 단테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예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구원하려는 자기의 소망을 위하여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의 고통과 쓸쓸한 연옥을 순례하고 이 지상 낙원까지
도달한 단테를 환영하기 위하여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단테는
신의 계시의 상징이 된 존귀한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단테는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다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단테가 당황하여
그의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를 찾았으나 벌써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기의 무덤으로 돌아간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지혜와 철학의 상징으로
사람은 철학의 힘으로 연옥에서 죄를 닦을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행복에는
도달할 수가 없으므로 천당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오직 사랑과 종교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사랑과 종교 즉 구원의 애인이었다. 푸른 숲을 지나갈 때 사람들이
'아담'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은 그 곳에 서 있는 선악을 아는 '지혜의 나무' 즉
법제와 복종의 상징인 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를 말하는 것이었다.
구리호네가 전송차를 이 나무의 줄기에 매니 고목이었던 그 나무에 푸른 잎이
돋고 꽃이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풍겼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의 합치를 표시하는
깊은 의미의 계시이다. 이 때 천상의 음악이 더욱 심오해져서 여러 악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률이 시인의 마음을 황홀케 하였다.
벌써 구리호네와 그 행렬은 가버리고 바람에 꺼지지 않는 등불을 손에 들고
있는 일곱 명의 여신과 함께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그 큰 나무 밑에
베아트리체가 앉자 돌연 큰 독수리가 전송차 안으로 들어와 그 날개를 남겨 두고
날아가니 굶주린 여우 한 마리가 차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또한 날개 달린 용이
바위 틈에서 기어 나와 차의 일부를 탈취해 가니 전송차 안에서 무서운 혼란이
일어났다.
한 더러운 요부가 옥좌를 침범하자 뿔이 한 개 혹은 두 개 달린 괴물의 일곱
개의 머리가 기어 나왔다. 이 때 거인이 나타나서 그 차를 해방하고 요부를 안고
처음에는 그를 애무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질투를 하는 듯 그를 매질하고
또한 구타하는 소리가 심해지더니 그만 그를 태운 채 산림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로마 황제 콘스타티누스의 박해를 날개는 이권을 여우는
교회 최대의 이단을 용은 악마를 지목한 것이며 일곱 머리는 7대 죄악을 요부는
타락한 교황 보니화치오 8세를 거인은 프랑스의 휘이릿푸 4세를 매질하는 태형은
교황의 오욕을 산림 속으로 향했다는 것은 1305년 교황청이 로마로부터
아비논으로의 이전을 말한다고 한다. 이것을 본 베아트리체는 탄식하면서
일어서서 일곱 천사를 앞세우고 단테를 데리고 갔다. 그는 단테에게 다정스럽게
위로하면서 이제가지 단테를 최고의 선을 사랑하는 길로 인도하려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한 후 궁금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 보라고 말하였다.
베아트리체는 이탈리아 통일과 교회의 조화를 성취시킬 왕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단테에게 신목인 '지혜의 나무'의 일을 후세에 잘 전할 것을
당부했다. 낮이 되어 레테와 예우네의 두 은혜의 강가에 도달하였다. 이 강은
영원의 샘에서 흘러내리는 것으로서 레테(망각)은 사람들이 범한 죄의 기억을
씻어 잊어버리게 하는 힘을 가졌으며 예우네는 모든 선행의 기억을 회복시키는
힘을 가졌다.
이상하게도 단테의 흐려졌던 정신과 몸을 강물에 적시고 나니 갑자기 육신이
투명해진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되었다. 정죄의 몸이 된 단테는 이제부터는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되어 천당이 있는 성스러운 별의 세계로 승천하게 되었다.
-천국편-
천국은 열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일곱 개에는 살아 있을 때 하느님을
알고 선한 생활을 한 영혼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열 번째의 광명이 하늘이
중앙을 차지하고 그 외의 아홉 천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대지 주위를 돌고 있다.
그리고 천사에게는 애, 지, 위, 치, 용, 위, 자, 대천인의 9계급이 있어서 각자의
천계에 살고 있었다. 지구와 달 사이는 불의 하늘로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이 "신곡"의 우주관은 중세의 천동설에 의한 것이고 이것은 가톨릭교의
요구에 응한 것으로 결코 단테 개인의 상상만은 아니라고 한다)
제1천
이 하늘은 월광천인데 타인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신에 대한 맹세를
어겼던 사람들의 영혼이 살고 있다. 단테가 천국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은 젊었을
때 성 글라라 교단에 들어갔다가 어떤 사람의 유혹 때문에 수도원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결혼을 강요당한 플로렌스 명문의 딸 핏칼타였다.
제2천
이 수성천은 공명심 때문에 선행을 하였으나 그 목적이 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적인 명예를 구했던 영혼들이었다. 단테는 여기에서 로마법을 편찬한
유스티노의 영혼을 만나 그가 생전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야기와 그의 업적에
대해 들었고, 베아트리체에게서 십자가의 속죄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타락하여 죄를 지은 후 영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속죄의 대업이 완성되는 마지막 심판의 시기가 오면 속죄의 육체는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 본래의 존엄을 다시 회복할 수 있어서 불멸의 존재가
된다고 하였다.
제3천
이 금성천은 속세에서 사랑에 도달한 사람의 영혼들이었다. 여기서 나폴리 왕
샤를 2세의 아들이며 잠시 헝가리의 임금이었던 카루로말테로를 만났다. 그는
자기 가문의 문란함과 악정을 한탄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단테의 의문 하나를 풀어 주었다. 그것은 왜 고상한 부모로부터 야비한
자식이 출생하느냐는 물음이었는데 이에 대해 "사람의 성격은 천성을 타고난
것이며 단지 유전만은 아니다. 그 떄문에 한 사람의 가치를 정하기 위해서는
물려받은 신분이나 지위 등 환경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고 주로 사람의 재능과
덕과 지식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 세 가지의 천까지를 하천이라고
한다.
제4천
이 곳은 태양계라고 하는데 우주의 창조와 미묘한 만물의 질서 신의 섭리를
깨닫기 위하여 노력한 덕망 있는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영혼이 살고 있는 곳이다.
달무리와 같이 두 시인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세 바퀴를 돌다가
멈추는 빛나는 한 뗴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 영혼들의 가운데 있는 중세 최대의
스콜라 학파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은 자기의 교파 도미니크스에
속하는 11명의 영혼들을 찬사를 다하여 소개하였다. 그들은 케룬의 백학의
스승이라고 하는 아루벨트 대사, 사원법의 대가인 구라데이아노, 교법 선생이라는
별명이 있는 페트로롬바루도, 이스라엘의 성왕 솔로몬 대왕, "천국관할론"의 저자
아레오산의 재판인인 디오누시오, "참회록"과 "신의 마을"의 저자로 유명한 라틴
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스페인의 고승 파우로오로시오, 유골은 파비아의
성당 제엘다우로에 묻혀 있지만 순교를 하고 이 곳에 와 있는 브에티우스,
세비리아의 승정 이시도로, 영국의 교회 역사가인 베어다. 성 빅토르의 마리칼도,
파리 대학의 철학 교수로 법와 마루티노 4세의 집에서 암살당한 부라반트의
시세에리 등 11명이었다.
그리고 토마스는 단테를 위하여 성스러운 교회의 두 성인 프란시스코와
도미니크스의 업적에 대해 상세히 들려 주었다. 이 때 장미 화환을 쓴 천사들이
단테를 에워싸고 신묘한 하늘의 음악과 무용이 찬란하게 펼쳐져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러자 한 줄기의 새로운 빛의 화환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보나벤투라가 나타나서 자기도 상대에 대한 찬사를 한 마디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먼저 토마스가 상대방의 종파에 대해 찬양할 것과 마찬가지로 프란시스코에
속하는 그도 성 도미니크스의 기적을 논하며 그가 교회의 수호자라고
찬양하였다. 그는 자기의 종파에 불만을 품은 두 파로 분열되어 그 논쟁이
결국은 일반의 분쟁을 초래하였다고 말하고 동렬에 있는 영혼을 지명하였다.
그들은 성 프란시스코를 따라 애굽에 건너갔다는 이루미나도,
테라테이라보로에 있어서 이 파의 관구장으로 첫 제자인 아고스티노, 파리 성
빅토르 교회의 목사이며 신비파 신학자인 위고, "성경의 해석"을 저술한 페토르
만자도레, 12권의 "논리학 개요"를 쓰고 기억법을 고안해 낸 스페인 출신의 교황
페토로이스파노, 로마 대승정으로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이 있는 유명한 설교사
구리소스톰, 캔터베리 대승정 안제롬, 4세기 중엽의 유명한 라틴 문법가
도나아토, 마인스의 대승정이며 "우주론" 22권의 저술가 라반마우르스, 20세기의
사람으로서 여러 권의 미래 이야기를 쓴 후 로라 원장 조아키노 등이었다.
두 빛의 화환은 다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삼위일체의 찬양하였다.
제5천
이곳 화성계는 순교자와 기독교를 위하여 싸운 사람들의 영혼의 거처로 되어
있다. 그들은 모여서 십자가의 모양을 만들며 신을 찬미하고 있었다. 모세의
다음가는 유다, 민족을 이끌었던 여호수아, 유다의 용장 마카메오,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사라센 인과 싸운 칼류 대왕과 그의 조카인 올란도, 십자성군의 지도자
부리네오의 고프레도, 나폴리의 노르만 왕조의 구이스칼도 등의 용사들이었다.
제6천
이 복성계에는 정의로써 나라를 다스린 현왕과 지혜롭고 덕망 있는 법관들의
영혼이 거센 불꽃과 같이 빛나고 빛에 따라 여러 가지 생긴 모양이 그려진다.
그들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땅을 지배하는 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라"는
문자를 그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곳에는 한 마리의 영취(이 영취는 로마제국의 상징으로 지상의 정의확립을
나타내는 것이다)가 있었는데 그는
"바르고 경건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곳에 오게 되었고 지상의 영광을 받고
있다 우리들은 지상에 정의를 기념으로 남겨 두었으나 사람들은 말뿐이고 지킬
줄을 모른다"고 말하였다 성도들 중에는 성경의 시인 다윗 왕과 과부의 슬픔을
위로해 준 도라야누스 황제 등이 있었다.
제7천
이 하늘은 토성계인데 햇빛에 비쳐 황금빛으로 빛나고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은
금 사다리로부터 쏟아지는 빛처럼 내려오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승, 명상자 또는 신비주의의 사람들의 영혼들이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 죄인
페트로라고 부르고 이제는 부패해 버린 혼테아베리나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는
페트로 다미아노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박학하고 겸허한
스승으로서 이름이 높았으나 이젠 고승들의 부패와 허식을 개탄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엄격한 교육으로써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한 덩어리의 불꽃이 그
주위에 떨어지면서 무서운 천둥 소리가 났다.
단테가 놀라고 있을 때 한 천사가 가까이 와서 그것은 천벌의 기운이라면서
그를 위로하여 주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베네딕트 파의 건설자이며, 캇시노
산상의 아폴톤 궁을 파괴하고 유명한 수도원을 세운 성 베네딕트도 있었다. 이
3천을 상천이라고 불렀다.
이 천국에는 지옥과 연옥과 같이 극적인 사건은 적고 단지 철학과 신학의
이론이 아름다운 시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그것은 죄인들이 성인보다 극적인
생애를 보내기 때문이다 제8천과 제9천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는
하늘인데 이것을 움직이는 것은 천사이다.
제8천
이 하늘은 항성천으로 지혜의 천인의 영지이다.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덕을 완성한 성인들이 있는 곳이다.
이 때 온 천국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단테는 장엄한 음률에 황홀해졌다.
여기에서 단테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았는데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구원받은
수많은 성도의 무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춤을 추고 환희의 고운 빛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단테는 그들 성인들 중에서 기독교를 대표해서 나온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앞에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신앙과 희망 인내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 곳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을 만났다. 그는 단테가 알고 싶은 여러 가지를
미리 짐작하고 이야기하여 주었다. 그가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된 원인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경계를 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낙원에 있던 기간은 4302년이고 지상에 살아 있던 것은 930년 동안이었다. 그가
사용한 말은 저 님로데의 백성들이 바벨의 탑을 짓기 훨씬 이전에 없어졌다고
하면서 말이라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생겨서 하늘의 감화로 추이하는 인간의
뜻대로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지상의 낙원에 있었던 것은 해가 뜰
무렵에서 낮에 이르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베아트리체는 여러
성인들에게 부탁하여 단테에게 천당의 식사를 하게 해 주었다.
제9천
사랑의 천인이 사는 이 수정천은 직접적으로는 다른 8천이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운행하는 것을 주관하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고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 이 곳에 있는 것이다. 이 하늘이 다른 여러
하늘을 싸고 있는 것과 같이 이 하늘은 다른 하늘보다도 더욱 신의 사랑과 빛에
넘쳐 있었으며 또한 여러 가지 운행을 측정하는 시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제10천
이 광명천은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가장 빛나고 밝은 곳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추상적인 하늘에다. 여기에는 만물의 원망인 신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구원받은 모든 영혼이 사는 성스러운 곳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되어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 하늘은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 하늘은 자연법의 원인이 되고 모든 물체의 근원이 되어서 단테는 이
곳에 들어와서 무의미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것은 생멸로 옮겨 가는
과도 즉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더없이 깨끗한 광명천! 성스러운 사랑의 둥근 광채 속에 많은 천사와 성도들이
보인다. 무한히 빛나는 바다 광명의 바다이다. 이제는 단테가 인간계를 떠나서
신의 경지에 들어오고 시간을 벗어나 영원에 들어오고 플로렌스를 떠나 성자의
무리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얀 성의를 입은 명상과 직관의 대표자인 성 베로나도스는 베아트리체의 청을
받아 단테를 인도하여 신비로운 비밀을 알려 주려고 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를
향하여
"인간의 미혹을 이 사람으로부터 씻어 주시고 최고의 희열을 베풀어
주소서" 하고 단테를 위하여 기도를 올려 주었다. 이 때 단테는 인간 지복의
영광을 받아 시력이 밝아졌다. 그는 이 곳에서 영원의 빛을 우러러 보고 신의
거룩한 자태를 눈으로 보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성복을 받아 눈을 떠보니 천국이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낙원이었다. 축복 받은 성도들은 백장미의 원형 극장과 같은 좌석에 흰 장미꽃
모양으로 자리잡고 앉아 극락의 빛에 움직이고 있었으며 중앙의 밑바닥은 빛의
바다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것을 '천국의 장미'라고 부르는데 수천의 천사들이
떼를 지어 그 위에 있는 지극히 높고 더없이 성스러운 대보좌와의 사이를 비처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곳까지 인도한 베아트리체는 성모 옆에 있는 자기 자리에 들어갔는데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제일 높은 곳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하늘의 불변의 영광 속에서 삼위 일체의 신비와 화신의 신비가 단테에게
보였다. 그가 이 신비스러운 뜻을 해독하려고 하는 순간 한 줄기의 광채가 비쳐
와서 그의 마음을 때렸다.
이 때 단테의 눈과 상상은 여기에 이르러 그 힘을 잃어버려 그의 마음의 힘은
마침내 그 영묘함을 포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 의지는 신성의
환상과 별들을 움직이는 '영원의 사랑'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단테는 처음으로 우주의 본원 즉 신의 의지에 완전히 일치 융합되는 무상의
환희를 느낄 수가 있게 되어 이 신성 희곡의 대환영은 이 곳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파우스트(Faust:1831)
해설
"파우스트"는 종교 개혁 시대의 산물인 독일의 파우스트 설화를 소재로 하여
괴테가 그 풍부한 삶에 대한 사색과 감정을 결정화한 2부작의 극시이다.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그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한테서 파우스트의
인형극 장난감을 선물로 받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인형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그 조종술을 배워 그 재주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여 주는 것에 대한
대단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극의 소재는 인형극 공연을 보게 된
뒤 그에게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파우스트의 전설을 소재로 한 편의 희곡을
써 보겠다고 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770년 그가 20세 청년이었던
시절이었다. 1774년에 쓰기 시작하여 제2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기 8개월 전인
1831년 7월로 82세 되던 해였다.
"파우스트"는 근 60년 간에 걸쳐서 청년기의 정열과 예술성 노년기의 지혜가
담긴 그의 인생과 더불어 성장한 사람의 기록이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 이 극이
발표된 형식을 보면 "단편 파우스트"(1790), "파우스트 제1부"(1803), "파우스트
중간곡"(1827) 등이었다. 그런데 "파우스트 제2부"를 쓰고 난 후 괴테는 그것을
함 속에 봉인하여 두었다. 그 작품이 그 시대에 갈채를 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계적인 걸작은 그가 죽은 다음 발표되었던 것이다.
2부에는 그 시대의 자연관과 철학 사상이 상징과 비유로 곳곳에 삽입되어
있으므로 이해가 어렵다.
그가 이 작품의 소재로 오랫동안 깊이 간직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에서
치밀한 구상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원고에는 정정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파우스트"가 독문학에 있어 고전 중의 고전으로서 성서와 같이 중요시 되고
주인공 파우스트가 독일인의 전형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파우스트 전설
"파우스트"의 소재가 된 것은 15세기에서 16세기에 실제로 살아 있었다는 요한
파우스트라는 마술사의 방랑 행각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고 아마도 실존 인물인 요한 파우스트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흥미 있는
마술 이야기를 덧붙여 만들어 낸 전설의 집대성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 된 1587년에 괴테의 출생지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출판된 책에 의하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파우스트는 바이마르 근방인 로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뷔텐베르크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그 곳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 박사가 되었다. 그는
원래 머리가 예민하고 노력과 향상력이 강하여 만족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의학을 연구하여 의학 박사가 되었으며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고 마술에까지 손을 대어 천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려 했으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깨닫고 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불러내는 데 성공하여 계약을 하게 된다. 파우스트는 한밤중에
숲 속에 가서 마술로 악마를 불러내는 데 성공하여 계약을 제안하지만 마왕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악마가 마왕의 허가를 얻어서 파우스트는 24년 간
악마의 힘을 빌려 자기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며 그 동안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의 시종이 되어 봉사를 하는 대신에 파우스트는 신을 배반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되어 두 번 다시 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며 24년 후에는 그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는 조건으로 혈약을 맺는다. 혈약을 맺을 때 피가 흘러
"Ohome fuge!"(인간이여 피하거라)란 글자가 나타난다.
계약 후 8년 간은 여러 가지 기괴한 일이 일어나 뷔텐베르크에 있는
파우스트의 집에서 보낸다. 그러는 동안에 파우스트는 향락 생활에 욕심이 생겨
여자와 결혼할 것을 원하나 메피스트펠레스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단념시키고
만다. 향락과 타락은 악마의 본령이지만 결혼이 루터 주의적 관념에서는 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해 주고 드디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고 로마
교황의 궁전을 방문하고 콘스탄티노플에도 갔으며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기기묘묘한 마술을 연출한다. 8년 간의 여행을 끝마치고 고향인 뷔텐베르크에
돌아온다. 이와 같은 공중 여행에 사용한 것은 날개가 돋친 말과 악마의 외투인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와 이웃에 살고 있는 경건한 의사로부터 마음을 돌릴 것을 충고
받고 과거를 후회하며 악마와의 계약을 파기할 것을 결심하나 악마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고 또다시 관능과 육욕의 향락 생활에 빠져서 절망적인 마음의
상태를 잊어버리려 한다. 파우스트는 지난 날 뷔텐베르크 집에서 학생들의
연회가 있었을 때 어느 학생이 세계 최고의 미인인 그리스의 헬렌이 보고
싶다하여 마술로써 헬렌을 나타나게 해 보인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이제
다시 헬렌에 대한 열망이 솟아올라 메피스트는 어쩔 수 없이 이 열망을 풀어
준다. 파우스트와 헬렌 사이에 열렬한 사랑이 맺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까지 태어나게 된다. 이 아들은 조숙하고 예언력을 가지고 있는 신동이어서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으나 이미 24년이란 계약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선고 받은 사형수처럼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후회하며
통탄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날 저녁을 그는 친구들 학생들과
근방의 림릿히에서 보내고 그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고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서 사멸하고 그의 영혼은 영원히 악마의
소유가 되어 버린다. 그가 죽은 후 헬렌과 그의 아들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설화가 있으나 보편적인 전설을 여기에 소개했다. 이
이야기의 근본 사상은 결국 15세기를 전후해서 민간에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던
마술 신앙이 기독교 그 중에서도 특히 루터교에 위배된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특히 루터교에 위배된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루터교의 승리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약전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라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법학사의 학위를 가졌으면서도 재봉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리로 채용되지
못했으나 부유했기 때문에 명문가였던 시장의 딸과 결혼하여 나중에는 독일 황제
카를 7세로부터 궁중 고문관의 칭호를 얻어 당시의 최고 인사들과 같은 지위에
몸을 두게 되었다. 어머니는 겨우 18세에 괴테를 낳았다. 어머니는 나이 차이가
심하고 까다롭고 엄격한 성격을 가진 남편 때문에 괴로움을 받았으나 보기
드물게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부인이었으며 언제나 낙천적이며 희망과
기쁨과 신에 대한 신앙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는 기질과 인생에 대한 진지함을 그리고 어머니에게서는 쾌활한
성격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문학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다"
이렇게 괴테는 그의 훌륭한 모친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작품에 담았으며
모친은 아들이 성장한 뒤에도 창작의 의논 상대가 되어 아들의 모든 작품을 읽고
비평을 해주었다고 한다. 특히 "루레의 왕"이라는 시를 여러 사람들에게
합창으로 들려달라고 한 후에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이 시인을 낳은 사람은 나야!" 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괴테는 대학 재학 중에 우연히 식당에서 알게 된 케트헨이라는 처녀와 깊이
사랑을 하게 되었다. 대체로 괴테의 인간으로서의 성숙과 도전에는 여성이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와 교제한 여성을 논하지 않고 그의 시와 생애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병이 들고 나서는 신비주의와 연금술을 가까이 하였으며 어머니의 친구인
노처녀 그레텐베르히 양으로부터 신에 대한 관념 등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에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의 중심 인물인 헤르데르와 친교를 맺게
되고 마을의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1771년에는 법률가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나 헤르데르에게서
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목가적인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으로 터져 나온
왕성한 창작열은 불과 6주일만에 "괴츠 폰 베르리힌겐"을 쓰게 하였다.
1772년에 베츨러의 제국 고등 법원에 사법 사무 견습을 가서 친구
케스트네프의 약혼자인 샤 롯테 붓프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때 유럽 여러 나라에
소위 베르테르 열풍을 일으킨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 때 체험한
사랑을 고백한 서간체 소설이다.
샤 롯테는 15세의 쾌활하고 총명한 처녀로서 미래의 남편인 외교관보다 16세나
나이가 어렸다. 케스트네프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결코 미인은 아니었으나
괴테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케스트네프가 부재 중에 괴테는
자제할 수 없는 연정에 그만 새 롯테에게 키스를 하고 말았다. 이 때 샤 롯테는
괴테에게 자기에게 우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며 거절을 했고 괴테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샤 롯테는 약혼자가
돌아왔을 때 이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것은 케스트네프 자신이 샤 롯테의
말을 들은 대로 담담하게 자신의 일기 속에 써 놓았던 사실이다.
다행히도 케스트네프가 침착하고 고결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하여 세 사람이 다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고 위험한 삼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세 사람은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괴테는 이 사랑을 단념하지 못하고 자살까지도 생각한 일이
있었으나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두 사람에게는 내색하지 않은 채 혼자서
감당하였다.
샤 롯테에 대한 사랑을 끝내 잊을 수 없어 글로 표현한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데 전작 "괴츠"와 더불어 이 두 작품은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동시에 독일 문학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나폴레옹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되풀이
애독하였다고 하며 그 후 모방작까지 나오고 멀리 중국에서도 그릇과 부채에
베르테르와 롯테를 그렸으며 베르테르가 자살할 때에 입었던 푸른 상의와 노란
조기와 바지를 당시의 청년들도 입고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1781년에 그는 총리 대신이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 안의 정치 외교의 중심
인물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이른바 시트름 운트 드랑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국의 내정과 외교가 안정되자 예술적 열정이 다시 되살아나 관직을
떠나 여행을 했다고 한다. 이 여행은 그에게 정치가가 아닌 시인으로 설 결심을
하게 했다. 여행 중에 괴테는 공직 생활에서 해방된 자유의 생활을 즐긴 동시에
바르고 아름다워 품위가 있는 고전 예술의 극치와 남방 풍경의 아름다움에
접하여 고전주의 예술 원리를 확립하였으며 평생 동안 그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1788년 귀국한 그는 예술과 과학의 연구를 일생의 과업으로 정하고 정무에서는
물러나 다만 궁정 극장의 감독과 예나 대학의 지도에만 종사하였다.
1794년에 실러와의 친교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슈레겔의 형제
철학자 피히테 쉘링과도 교류하여 영향을 받았다. 실러와의 깊은 우정은 독일
문학 사상에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으며 두 시인의 협력은 독일 문학 운동의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지녔으면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두 시인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우정은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괴테는 1797년 제3차 스위스 여행에서 '빌헤름 텔'의 사적에
흥미를 느껴 자료를 수집한 후 희곡을 쓰려고 하였으나 이것을 실러에게
양보하여 그로 하여금 유명한 희곡을 창작케 하였다. 그리고 공동으로 시평
"구세니엔"의 시를 짓기도 하고 경작도 하여 많은 담시도 지었다.
이 두 시인의 제휴는 또한 독일 연극사상에도 신기원을 이루었는데 실러는
희곡을 쓰거나 다른 사람이 쓴 희곡을 각색하였으며 괴테는 주로 연출의 지도에
종사하였다.
1805년 실러가 병사했다는 비보는 괴테를 절망 속에 빠트렸으며 "나의 반신을
잃었다"고 탄식케 하였다. 현재 독일 공화국의 신헌법 제정 의사당으로 선정된
바이마르 국립 극장의 전면에는 두 시인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조각한 유명한 입상이 있다.
실러가 죽은 뒤 나폴레옹 전쟁은 그를 더욱 암담케 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동요되었다. 1808년 10월 나폴레옹이
에르누르트에서 4명의 국왕과 34명의 대공과 함께 회의할 때 괴테는 아우그스트
공을 시종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곧 이 유명한 시인을
초대하였다. 그가 일대의 영웅인 황제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나폴레옹은
고관들에게 둘러싸여 조찬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괴테를 가까이 불러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보라! 이 사람을!" 하고 부르짖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사람이다'라는
뜻이었으며 괴테에 대하여 이 이상 적확한 비평이 없다는 것이 모든 비평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몇 살이 되십니까?" 하고 물었고 괴테가
"60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참으로 건강하십니다. 귀하는 독일 제국의 극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괴테와 한 시간 이상을 그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청년 시대의
애독서로서 그는 그것을 모방하여 소설을 쓴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수 년 후 나폴레옹은 바이마르 대공에게 궁정 배우를 인솔하게 하여 볼테르의
"시저의 죽음"을 상연시켰다. 연극이 끝나고 무도회가 개최되었을 때에 그는
괴테를 가까이 불러
"진실한 희곡은 황제에게나 백성에게나 좋은 교육이 됩니다. 귀하께서
베르테르보다 더욱 위대한 시저의 죽음도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하며
파리로 오면 우대하겠노라고 권하였으나 괴테는 파리로 가지 않고 바이마르에
머물러 있었으며 시저의 죽음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파우스트"를 완성한 지 얼마 안 되는 1832년 3월 22일 오전 11시 30분에
84세의 고령으로 안락 의자에 기대 앉은 채 이 시성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까지도 이야기를 하였으며 중도에 말이 끊어지면 문자로라도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공중에 손을 내저어 쓰는 시늉을 하였으며 그것도 여의치 못하자
자기의 무릎 위에다 글씨를 썼다. 그의 노년에 그가 항상 귀여워했고 자기를
진심으로 섬겨 주었던 며느리에게
"악수를 하자"고 말한 것과 청지기에게
"방 안에 더 많은 빛이 들어 오도록 창을 열어라"한 것이 이 위대한 인물의
최후의 말이었다
그는 혈육이 다 죽고 없었으므로 며느리 옷타리에의 이름으로 사망 통지서를
내게 되었고 26일 오후 5시에 장엄한 의식으로써 바이마르 대공가 역대의 영묘
안에 있는 실러의 무덤 곁에 묻였다.
1932년은 괴테의 사후 백 년 되는 해였는데 3월 22일부터 4월 5일에 걸쳐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는 다양하게 괴테 백년제 강연과 연극
전람회 등을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괴테가 세계의 문화 문학 연극
과학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괴테에 대한 전기 연구의
왕성한 열기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살아 있을 때부터 열렬한 찬미자들에
의하여 성인으로까지 높이 받들어졌던 괴테가 몇천 년 후에는 그리스의 신과
같은 존재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독일어와 독일 문학을 창조하였으며 독일 사상을 집대성하여 후일 독일의
정치적 통일의 터전을 닦은 위인일 뿐만 아니라 시적 상상과 풍부한 창작력
건전하고 심오한 사상 형식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 등 모든 것을
구비한 점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일 것이다.
줄거리
하늘의 서곡
이 극시의 줄거리는 천상의 서곡으로부터 시작된다. 첫머리에 중세기 사람들의
기독교적 사상에 의거한 천국의 광경이 전개된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높이 옥좌에 앉아서 천사의 무리를 알현하고 있다.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도 천사와 똑같은 하느님의 부하이므로 이 알현에
참가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악마는 창조의 하느님과는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
같이 부하로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악마라는
파괴적인 방해자를 부하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안식을 염원하면서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정신에 자극을 줌으로써 인간을 더욱 성숙시키기
위함이다. 악마는 인생의 역사는 모두 실패이며 무의미한 것이고 인간은 천지
창조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참담한 것이라고 말하고는 천사가 부르는 찬미의
노래를 비웃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실패 속에서도 하느님이 부여한 고상한 본성
즉 진리를 향하여 매진하는 본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성서의 야고보서에서 야곱의 인격에 대하여 하느님과 악마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이 곳에서도 파우스트의 인격에 대하여 하느님과 악마 사이에 대립이
있다. 악마는 파우스트를 악한 길로 유인하여 영혼을 타락시킴으로써 속세의
온갖 쾌락에 빠지게 할 자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이에 대하여 악마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항상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파우스트를 본성의 뿌리까지
타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선량한 인간은 비록 내부의 충동에 의하여 여러 가지 미로에 빠져드는 일이
있어도 그리하여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바른 길을 망각해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마는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파우스트를
통하여 증명하고 싶으니 파우스트의 인생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청하여
하느님의 허락을 받는다.
악마가 제안한 이 내기를 하느님이 승낙한 것은 이미 승패의 판결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파우스트 역시 대다수의 인간들처럼 인간 고유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약점으로 말미암아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파우스트의 일생의 경로를
서술한 희곡 "파우스트"의 내용이 보여 주고 있다.
-제1부-
파우스트는 오랜 세월 속세를 떠나 곰팡내 나는 고딕 식의 서재에 파묻혀
철학, 의학, 신학 심지어는 마술 연구에까지 몰두하여 학식에 있어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대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오하고 폭넓은 지식으로도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대우주의 법칙을 파악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한계와 무능을 한탄했다. 그는 이미 인생에 지친 노인이었다. 자기의
생명이 이미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한계에 도달한 학문을 위해서 인생의
모든 것을 희생해 버렸음을 생각하며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더욱 괴로운 것은 지식의 한계보다도 학자로서의 삶이 부질없다는데
대한 불만인 것이다. 어떠한 지식이나 기계도 자연의 신비를 여는 열쇠가 못
된다는 걸 깨닫고 학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것을 후회하면서 그는 이제 지상의
향락을 누리려고 한다. 즉 학문의 부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의 미신 즉 마술에 몸을 맡기고 주문을 읽어
인간과 교섭을 하며 인간과 유사한 영인 지령을 불러내어 우주의 진리를
간파하고 집요한 지식욕과 향락에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파우스트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지상에서의 만족을 구하였기 때문에 지령의 힘을 빌리려 한
것인데 대지의 아들인 그로서는 너무나 위대한 지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지령
또한 그를 외면하였다.
파우스트가 지령의 음성을 듣고 당황하고 있을 때 이상도 없이 지식만을
탐하고 있는 현학적인 그의 조수 와그너가 잠옷을 입은 채 들어와 학문에 대한
이야기로 파우스트가 영혼에 대하여 사색하고 있는 것을 방해한다. 그는
와그너를 보자 다시 불쾌해져서 소리를 질렀다.
"학자 그 중에서도 역사가는 쓰레기이다!" 하고 호되게 꾸짖어 돌려 보냈다.
홀로 남은 파우스트는 고독과 회의 인생에 대한 갈증으로 절망한 나머지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육체로부터 빠져 나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혼이 되어 우주의 진상을 보기 위하여 자살을 결심한다. 그는 독약을
마시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독약을 입에 대려는 순간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하는 부활절의 합창 소리와 함께 교회의 종소리가
멀리서 은은히 들려왔다. 이 소리는 신을 믿지 않는 파우스트에게 신의 은혜를
믿고 찬미가를 부르면서 숲이나 들을 헤매어 다니던 어린 시절의 옛 추억을
환기시켜 주었다. 더구나 그 노래의 고운 음률은 파우스트의 늙은 가슴 속에
순진하던 소년 시절의 동경을 소생시켜 마침내 자살을 단념하게 되고 만다.
그는 와그너와 함께 밖으로 나가 고운 옷차림을 하고 봄날을 즐기는 시민 학생
군인 직공 노인 소녀 거지들의 무리에 섞여 교외를 돌아다니며 향락의 모습을
바라본다. 즐겁게 춤추는 농부들 가운데서 그에게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노인
한 사람이 파우스트를 발견하고 인사를 하며 술을 권하여 그도 그 순간에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을 떠날 때에는 다시
와그너를 향하여 인간의 지식이 무용함을 한탄한다. 석양을 바라보며 지상에
대한 집착과 높은 하늘에 오르고 싶은 마음의 갈등으로 더욱 새롭고 풍부한
내용의 생활을 구하려 한다.
이는 그가 유혹 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때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검은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파우스트의 뒤를 따라왔으므로 그는 이
개를 서재로 데리고 온다. 파우스트의 가슴에 또다시 이성과 희망이 솟아나 그는
성서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요한 복음을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한다. 그러자
서재 안으로 들어온 검은 개는 짖어 대면서 방 안을 돌아다니더니 이상스럽고
불안한 태도를 보이므로 파우스트는 이 짐승이 어떤 영혼이 둔갑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혼을 불러내는 주문을 읽어 보았으나 하등의 효험이 없다. 그래서
악마가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 주자 개는 점점 변해서 금실로
수놓은 빨간 저고리에 새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긴 칼을 찬 귀공자가 되어
나타났다. 검은 개는 악마 메피스트펠레스의 변신이었던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라 함은 '빛을 싫어하는 자' 즉 악마라는 뜻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와 악마의 본체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그를 달콤한 말로 유혹하려고 한다.
그는 파우스트에게 그가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원하는 모든 희망과
향락을 성취시켜 주는 대가로 그가 죽은 뒤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에리고 가는
계약을 하자고 제안한다. 파우스트는 그의 유혹과 지식에 대한 혐오의 마음에
자포자기가 되어 고민을 잊어버리는 향락에 도취하여 보려고 쾌히 이를 승낙하고
영원히 영혼을 파는 증서에 혈관을 찍어 주었다.
그는 악마를 종복으로 하여 자유로이 부리고 그 마법을 이용하여 인간의 기쁨
및 슬픔을 맛보고 또한 자신의 자아를 인류의 자아에까지 확장하여 세계의
근원을 규명하려는 초인적인 욕구를 관철하려는 것이었다.
계약이 성립되자 둘은 악마의 외투를 타고 세계 여행 길을 떠났다.
악마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파멸의 구덩이에 떨어트리기 위하여 먼저 그를
공상의 세계로부터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현실의 추악한 진상을 보여
주면 그도 향상적인 노력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 쾌락의 세계를
보이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온 곳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아우에르바하의 지하실
주막에서 활기에 찬 대학생들이 주연을 베풀고 있는 곳이었다. 악마는 마술로
만들어 온 술을 타락한 그 대학생들에게 먹여 만취해 있는 광경을 보여 주었으나
냉철한 학자인 파우스트의 도덕성은 마비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에게 젊어지는 약을 먹이려고 산중에 사는 마귀 할멈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요술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마귀로부터 이상한 액체를
받아 마시고 일정한 의식을 마치자 마약의 효능이 현저히 나타나 노쇠하여
구부러진 그의 몸은 한 서른 살쯤으로 젊어져서 이제까지 몸 한 구석에 잠자고
있었던 정욕이 발동하여 악마의 마법에 의하여 거울에 비친 절세의 미인을 보자
마음이 황홀해지며 추잡한 감정이 일어났다. 악마는 기뻐하며 그레첸이라는
16세밖에 안되는 순결한 처녀를 그에게 접근시켜 육욕으로써 그를 타락시키려고
하였다.
파우스트는 교회에서 돌아오는 그레첸을 길거리에서 본 뒤로는 꿈 속에서도
그의 미모를 잊을 수가 없어 악마에게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켜 달라고 졸라댔다.
어느 날 밤 그 처녀가 이웃집에 놀러 나간 틈을 타서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안내되어 처녀의 방에 침입하였다. 아담한 처녀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들뜬 사랑의 꿈에 잠겨 있다가 악마에게 들고 오게 한 보석이 든 조그마한
상자를 쇠로 잠겨진 옷장 속에 몰래 넣어 놓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집에 돌아온 그레첸은 파우스트가 두고 간 보석과 장신구를 발견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머니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레첸은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원래 정직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상의한 끝에 누가 준 것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선물을
가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교회에 다 바치고 말았다.
이것을 안 파우스트는 다시 새로운 장신구를 보내고 그 옆집에 사는
마르테라는 여자를 매수하여 처녀에게 접근하려고 하였다. 처녀는 새로운 보석이
옷장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마르테를 찾아가서 어머니에게 보석을
보이면 또 교회에 바칠 것이니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낯선 사나이가
찾아왔다. 그는 메피스토인데 마르테를 아름답다고 칭찬하여 비위를 맞추고
마르테의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매독으로 죽은 것을 알리러 왔다고 하며
마르테에게 추파를 던진다. 본래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르테 부인은
처음에는 눈물까지 흘렸지만 악마의 유혹에 점점 끌려 들어가서 남편의 사망증을
손에 넣어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악마는 계획대로 그의 남편의
죽음을 목격하였다는 자기의 친구를 증인으로 세우고 증서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 날 밤 파우스트를 증인으로 세울 자기의 친구로 가장 시키고 마르테의 집을
찾아가서 소개한다. 이리하여 두 쌍의 애인이 맺어졌다
메피스토와 마르테의 사랑은 순간의 물거품과 같은 사랑에 불과하였으나
파우스트와 그레첸(마가레테의 애칭인데 본서에서는 이렇게 부른다)과의 사랑은
희열에 넘치고 순수한 사랑이었다. 순결한 소녀의 감화에 의하여 파우스트의
난폭한 정욕이 순결한 사랑으로 변화된 것이다. 둘의 사랑은 마음과 몸의 모든
기능을 정화시키는 것 같은 순수한 것으로 파우스트는 그레첸의 순진하고 고상한
감정을 사랑했으며 그레첸은 파우스트의 높고 심원한 지성을 존경하였다.
이와 같이 두 사람 사이에는 순결 무구한 사랑이 이루어졌으나 대망을 품고
있는 파우스트는 이 처녀와 결혼하여 가정이라는 굴레를 만들기를 원치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이 처녀를 일시적 쾌락의 대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더욱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처녀를 잊어버리기 위하여 심산 유곡으로 몸을 피하여
대자연을 즐기게 되었는데 집요한 악마는 그 곳까지 쫓아 와서 그레첸이 그에
대한 연모로 비탄에 잠겨 있다고 유혹한다. 마음 속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던
파우스트는 그의 유혹에 못 이겨 다시 산에서 내려와 열정에 몸을 맡기고 만다.
그레첸의 파우스트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상한 세계가 그녀에게
펼쳐졌다. 격렬한 연모의 마음이 얼음이 녹은 후의 냇물과 같이 충만해져서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을 멀어지게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어머니도 형제도 없었다. 자기 자신마저도 잃었다. 매일
마르테의 집 뜰에서 밀회를 하며 육욕과 쾌락에 도취하였다.
"내가 만일 새라면!" 하고 노래만 종일토록 부르면서 그의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그레첸은
파우스트가 그렇게도 순결한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신앙을 권유하였다.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피와 살도 아끼지 않습니다" 하고 파우스트가 대답했지만
그레첸에게는 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것이 하나의 커다란 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그레첸은 물을 길러 샘터에 가서 여인들이 하는 얘기 속에서 근처에
사는 여자가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일인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 안에 있는 돌담으로 만든 감실의 마리아
상에 꽃을 꽂고 자기의 타락한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구원을 빌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랑에
맹목적인 그레첸은 밀회의 방해가 되는 어머니를 잠들게 하기 위하여 수면제를
파우스트에게서 받아 어머니에게 먹인 후파우스트를 자기의 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레첸의 오빠인 발렌틴은 누이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끼고 있었으나
뜻밖에 그레첸에 대한 추문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성급한 군인 기질이 발동해서
누이를 찾아 다니는 그놈을 붙들어 욕을 보이고 혼을 내려고 가만히 숨어서 망을
보고 있었다. 이 때에 파우스트가 악마와 함께 몰래 침입해 들어와 창 밑에서
기타를 치며 그레첸을 유인하려는 것을 보자 그는 어둠 속에서 뛰어나와 칼을
빼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발렌틴은 불의의 습격을 피하려고 빼어든
파우스트의 칼에 그만 무참히 피살되고 말았다.
기쁨은 순간이었다. 청춘의 환락은 한순간의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쾌락은 그레첸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새겨 놓았다.
그녀가 파우스트에게서 받아 온 수면제는 애인을 만나고 싶은 생각만으로
어머니에게 먹인 것인데 너무 분량이 많아서 어머니는 그만 죽고 말았다.
교회에서는 죽은 두 사람의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레첸은 오르간의 음률과 합창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를 책망하는 악령에게 갖은 고초를 당한 끝에 여러 사람의
면전에서 졸도한다.
파우스트는 자기의 죄를 자각하고 한시도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악마에게 이끌려 하르츠 산중의 부록켄 산으로 도망하였다.
그 때는 마침 매년 봄 전세계의 마녀들과 악마들이 집합하여 대연회를
개최하는 발푸르기스 축제인 5월 초하루 밤이었다. 그는 마녀들의 소란스런
축연 속에서 기분을 돌려 그레첸을 잊어버리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으며 시간이
경과될수록 그에 대한 연모의 마음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한편 어머니와 오빠를 사랑 때문에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애인마저 산 속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와의 불의의 씨는 그레첸의 뱃속에 잉태되어 햇볕으로 나왔다.
그레첸은 기막히는 죄의 가책에 드디어 발광하여 제 손으로 아기를 물 속에 던져
죽게 하고 정처없이 방황하다가 결국 붙잡혀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지혜를 빌려 밤을 이용하여
마법의 검은 말을 타고 감옥으로 달려갔다. 악마의 힘으로 문지기의 정신을 잃게
한 후 파우스트는 열쇠를 가지고 감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쓰러져
있는 그레첸을 구출하려 하였다. 회한과 공포 때문에 미쳐 버린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애인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파우스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이 돌아온 그레첸은
"오오, 당신이었습니까. 키스를 해 주세요. 숨이 막힐 듯한 키스를... 도망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아 빨리 당신의 어린애를 구해 주세요. 저편 냇가의 숲
속에 있는 연못 가운데 있어요. 아! 어린애가 떠오르려고 손발을 움직이고
있어요. 어서 빨리 구해 주세요"
이렇게 헛소리를 하고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린다.
파우스트는 그녀를 억지로라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하였으나 그녀는 다시
깨어나 머리를 흔들면서
"안 돼요. 저는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 신의 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하고 거절하며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저를 구해 주소서. 천사님 저를 둘러싸고 지켜 주소서.
오, 하인리히 나는 당신이 무서워요!" 하고 파우스트의 이름을 부르면서 가련한
그레첸은 그만 쓰러져 아침 이슬과 같이 숨을 거둔다.
"그녀는 심판을 받았소!" 하고 메피스토가 말하자 천상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소리가 들려 온다
"구원을 받았도다"
메피스트는 억지로 파우스트를 끌고 밖으로 도망쳐 나가는데 뒤에서 애처럽게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리히! 하인리히!"
이 소리는 파우스트를 타락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소리였다.
-제2부-
화초가 가득한 알프스 고원의 우아한 풍경 속에 누워 있는 파우스트는
아리엘이 거느리는 요정들의 합창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자연의 품에 안겨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받을 수 있는 안식을 다시 찾은 것이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새로운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물질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활동의 생활 즉 위대한 세계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래서 메피스토가 연애 이외의 넓은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중세기 독일의 라르츠 제령의 궁중이었다.
황제는 아직 나이가 젊고 사려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므로 정치는 문란하고
향락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심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마침 어전 회의가 열려 각 대신으로부터 어려운 문제가 속출되고 의견이
구구하였을 때 메피스토가 나타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유혹하며 황제는
메피스토에게 의지하며 그의 의견을 묻는다. 악마는 이 나라에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국토의 지하에 막대한 금과 재물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이 황제의 소유이니 꺼내어 쓰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설득한다. 대신들 중에는 메피스토의 의견을 반대하는 자도 있었다. 악마는
황제로부터 보물을 파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천문 박사의 입을 통해서 황제에게
가장 무도회를 열 것을 권하여 잠시 그의 기분을 돌리게 하고 금의 발굴을
연기시켰다.
파우스트는 부의 신 플루투스로 가장하고 악마는 가난한 사람으로 분장하여
소동을 벌인다. 이 가장 무도회에서는 신분이 천한 사람으로부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까지 여러 계층의 남녀가 참석하였다.
다음 날 한 재상은 황제를 알현하고 한 장의 지폐를 보인다. 그것은 지하의
보물을 담보로 발행된 지폐인데 그 종이엔 황제의 서명이 찍혀져 있는 것이었다.
황제가 놀라 그것을 조사해 보니 전날 밤 무도회의 혼란 속에서 메피스토의
계략으로 황제에게 정신없이 서명시켜 하룻밤 사이에 수천 매를 인쇄시켰던
것이다. 악마는 지하의 보물은 영원히 황제의 재산이며 그것을 파내는 대신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속여 그를 납득시키니 대신들도 새 지폐를
보고 기뻐하였으며 황제는 그의 지혜에 감탄했다. 지폐의 발행은 경제 사정의
일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에 새로운 자본주의가 탄생하려는 것이다. 이
위험 천만한 위조 지폐의 남발로 황제는 일시적이나마 부를 얻게 되고 국내의
재정난도 수습되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는 재정의 여유가 생기자 또 다른
욕망이 일어났다.
그는 파우스트에게 세계 제일의 미남 미녀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그리스의 헬렌과 트로이의 파리스를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 일은 파우스트가
담당하게 되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를 믿고 승낙하지만 그들이 북구의
메피스토에게는 영향력이 없는 그리스 사람이므로 곤궁에 빠진다. 그리고 파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악마에게 이러한 부활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천상의 신을 불러 올 능력도 없었으므로 파우스트에게 단지 그 환영을 불러 올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쳐 준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서 마법의 열쇠를 받아 우주의 끝까지 가서 헬렌이 있는
'어머니의 나라'로 내려간다. 이 곳은 만물의 원상을 제조하는 불가사의한 곳인데
이 세계는 일체의 창조되는 것이 그대로 환영으로 존재하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히 공허한 곳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가 가르쳐 준 대로 타버린 향을
가지고 나온다.
파우스트가 '영원의 나라'로부터 돌아오자 무대가 장치되어 있는 '기사의 방'에
황제 이하 궁전 안의 사람들이 다 모였다. 파우스트가 향을 피우고 아름다운
음향을 울리며 마법의 열쇠로 그 향로를 두들기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인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파리스의 자태가 나타나더니 잠이
들었다. 계속해서 절세의 미인이라는 헬렌도 나타났다. 그의 요술에 황제를
비롯한 궁전의 모든 사람들은 꿈같은 마음으로 다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신비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때 헬렌이 잠들어 있는 파리스에게 키스를 헬렌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절제를 잃은 파우스트가 질투를 억제할 길이 없어 손에 쥐었던 마법의 열쇠를
파리스에게 내던지자 폭발이 일어나 아름다운 두 남녀의 자취는 다시 연기로
사라지고 파우스트는 땅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기절해 버린다.
메피스토는 연기에 취해 기절해 있는 파우스트를 업고 그의 옛날의 서재로
돌아왔다. 파우스트의 돌연한 실종은 대학과 학계를 놀라게 하였으나 그의
제자였던 와그너가 그의 뒤를 이어 저명한 학자가 되어 유기 화학 실험으로 인조
인간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마침 악마가 그 방에 들어 왔을 때 이것이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인조 인간은 피와 살이 없는 소인(호문쿨루스)이며 아직 시험관 속의
존재였다. 소인은 악마에게 말을 걸어 옆방에서 헬렌에게 정신을 잃어 실신해
있는 파우스트의 꿈을 읽은 것을 보고한다. 파우스트가 고대 그리스를
그리워하며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호문쿨루스는 혼수 상태인
파우스트를 고대 그리스로 데리고 간다.
이 소인은 문예 부흥기의 학술을 상징하고 있는데 박학 다식하고 그리스의
사정에 정통하고 있으므로 파우스트를 그리스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데 가장
적합하였다.
와그너와 작별한 악마는 이번에는 파우스트를 자기 외투에 태우고
호문클루스와 함께 팔자루스의 들판에서 마침 열리고 있는 '발푸르기스의
밤'으로 데리고 간다. 팔자루스의 들판까지 따라온 파우스트는 그의 몸이 그리스
땅에 닿자 잠에서 깨어나 헬렌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파우스트 메피스토
호문클루스 등의 세 사람은 각자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 곳에 모인 고대
그리스의 영혼들 중에서 헬렌을 찾으려고 돌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파우스트는 다시 그리스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그 곳을 흐르는 페네이오스
강변을 거닐며 스핑크스 등에게 헬렌의 소식을 묻자 의술에 능한 인수마신의
히론에게 물으면 알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강의 하류로 내려가 파우스트가
히론의 등에 올라 타자 히론은 그리스 제일의 미인 헬렌을 자신의 등에 태워 준
일이 있다고 자랑한다. 이 말을 들은 파우스트는 미칠 듯이 좋아하였다. 히론은
그를 등에 태우고 예언을 하는 무녀 만토가 살고 있는 세계로 안내한다. 만토는
파우스트를 맡아 그를 올림포스의 산 속에 있는 하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에게
가서 헬렌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보자고 암흑의 통로로 내려간다.
한편 사상의 덩어리인 인조인간 호문쿨루스는 육체를 얻기 위하여 철학자인
탈레스를 따라 바다의 신 프로토이스를 찾아갔다. 바다의 신은 예언하는 것과
형태를 바꾸는 것을 좋아했는데 호문클루스를 보자 마음에 들어 그의 생장을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프로이토스는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점점 커지면서 큰 일을 하려면
넓은 바다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탈레스도 인조 인간의 생장을 보고 기뻐하며
모든 것이 물에서 생장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며 대양의 위대함을 찬미한다.
그래서 셋은 에게 해로 나가 그 곳 바다의 제전을 보기로 한다. 이윽고 달빛이
비치는 해상을 바다의 여러 신들과 요괴들이 헤엄치며 지나간다. 프로포이스는
해돈으로 변신하여 호문클루스를 등에 태우고 바다의 여신 가라테아의 조개
껍질의 수레 가까이 간다. 그러자 호문클루스는 기쁨의 빛을 내뿜었으나 수레
바퀴에 닿자마자 그의 몸은 순식간에 부서지고 생명의 불은 바다 속에 흘러가고
만다. 이것은 인조 인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만토를 따라 하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에게 가서 헬렌을 한 번만 더
데리고 갈 것을 간청하니 쾌히 승락한다.
헬렌은 시녀를 거느리고 세상에 다시 돌아와 옛날 그의 아버지인
틴다레오스왕이 지은 궁전 앞에 서 있다. 미인인 헬렌은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운명에 휩쓸렸는데 아버지인 항해자 메넬라오스를 그의 남편으로 정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동안 파리스에게 유혹되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10년
간의 트로이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잃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된 그녀는 한 걸음 먼저 스파르타의 성으로 돌아와 뒤따라 들어온
남편 메넬라오스 왕을 기다린다
이 때 메피스토는 추녀 포르기아스로 변신하여 메넬라오스의 궁전에 침입한 후
종들의 총감독이 되어 궁전 일을 제멋대로 처리한다. 헬렌은 남편으로부터
부탁 받은 제단의 준비를 그에게 의논하니 포르기아스는 그 준비가 이미 다
되었음을 알리며 제단에 올릴 희생의 제물이 헬렌이라고 위협하면서 헬렌의
결심에 따라서 살아날 길도 있다고 유혹한다.
이 때 왕이 돌아온다는 신호의 나팔 소리가 들린다. 헬렌은 자신의 과거와
10년 전쟁의 원인이 된 일을 생각하면서 포르기아스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는
계획한 대로 부근 산골짜기에 파우스트가 지어 놓은 성 이야기를 하며 그 곳에
가면 구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헬렌은 그의 안내로 그 훌륭한
성안으로 들어가니 독일의 황제(중세 문화의 대표자)가 된 파우스트가 마중 나와
그녀를 환영해 주었다.
그리스에서 온 헬렌은 중세기식 건물의 진기함에 놀라고 또한 독일어로 된
아름다운 음악에 감탄한다. 헬렌의 아름다움은 햇빛이 빛나듯 궁전 안을 빛나게
했으며 금고에 있는 갖가지 보석도 그 빛을 받아서 빛나는 것 같았으며 복도에
깐 융단도 그녀의 발에 밟혀 부드러워지는 듯 했다. 파우스트는 소망대로 헬렌을
여왕으로 정하고 자기는 그의 남편이 되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전기파
예술과 고전파 예술 즉 중세기와 고대의 융합의 상징이며 또한 여기에서
중세기의 여성 숭배 풍조를 보여 준다)
이 때 헬렌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파우스트의 궁성을 공격해
온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부하들이 용감하게 싸웠으므로 적군은 퇴각하여 두
사람은 더욱더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사랑의 황홀감에 빠진다.
그들은 아카디아의 깊은 숲 속에 거처를 정하고 둘 사이에 오이포리온(근대
예술의 상징)이라는 조숙한 아들을 낳게 되었고 파우스트는 단란한 가운데
진실한 하느님의 희열을 느낀다. 오이포리온은 점점 성장하여 산과 들을 마음껏
뛰어다니고 속박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자유 분방한 생활을 하며 전쟁을 즐겼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려고 바위 위에서 날려고 하다가 그만 계곡으로 추락하여
참사한다. (이것은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전하였던 영국 시인 바이런의 생애를
가리킨다고 한다)이 변사가 있은 후 파우스트와 헬렌의 사랑에 틈이 생겨 헬렌은
"미와 행복은 함께 있을 수가 없나 봐요. 지옥의 여신이여 아들과 함께 나의
몸을 받아 주소서" 하면서 다시 하계로 돌아가려고 한다. 파우스트가 애석하여
그녀를 부둥켜안았으나 여자의 옷과 면사포만 손에 남고 헬렌은 사라지고 만다.
그의 손에 남아 있던 옷과 면사포는 곧 구름이 되어 파우스트를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간다. 그는 구름을 타고 헬렌의 뒤를 쫓았으나 그의 자취는 보이지 않고
넓은 육지와 바다만 내려다 보일 뿐이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인간의 지혜로 바다를 정복하고 싶다는 욕망을
피력한다.
"사랑과 환락이 아닌 위대한 사업이 나에게 남겨져 있다"
"그러면 제왕이 되어 권세를 누리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명예를 얻자는
것인가?" 하고 메피스토가 묻는다.
"아니다. 사업이다. 명예와 권세는 공허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곧 넓은 해안을 개발하는 간척 사업을 계획한다. 이 때에
그들이 발행한 위조 지폐의 남발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자 황제를 원망하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이 일어났는데 황제가 이를 물리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침 의욕에 불타고 있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마력을 이용하여 이 반역자를
물리치고 그 상으로 해안 일대의 토지를 얻게 된다. 그는 이 불모의 토지를
개척하여 이곳에 새로운 이상국을 건설하려고 한다. 미와 예술은 그에게 있어
최고의 이상이 아니고 고상한 존재에 도달한 힘을 주는데 불과하였다.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타인을 위한 희생적 활동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갔다. 파우스트에게도 회색의 노년이 찾아와 벌써 백 살의
노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새로운 영토의 완성에 여념이 없다. 바다는 번화한
도시가 되고 그도 이제 궁정에서 살게 된다. 궁정은 아름다운 화원에 둘러싸이고
그 앞의 운하에는 외국 무역선의 왕래가 빈번하다. 그런데 이 신천지와의 왕래에
필레몬과 바우치스 노부부가 살고 있는 보라빛 오막살이가 장해물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 메운 토지에 아름다운 집을 지어 놓고 옮기도록 하였으나 노부부는
오래 살아온 그 땅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땅이 자기가 건설한 국토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였기 떄문에 파우스트는 궁전을
옮기려고 메피스토에게 상의하니 메피스토는 그 노부부를 철거시킬 것을
약속한다. 악마는 경찰관리를 데리고 가서 너무나 난폭한 행동을 취했기 떄문에
이 집이 파괴되는 것을 본 노부부는 놀라서 그만 죽게 된다. 그리고 불이 나서
오막살이와 함께 교회까지 타서 없어진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포악한 행동에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이 때 연기
안에서 불만 죄악 우수 가난이라는 네 가지 화를 주는 잿빛의 악령들이
나타났다. 다른 악령들은 그의 재산과 권력으로 쫓아 버렸으나 우수의 악령만은
파우스트의 굳게 닫은 집안으로 들어와 독기를 풍겼으므로 그는 마침내 눈이
멀게 된다.
파우스트는 사업의 완성에는 열정이 남아 있지만 심리적 고통은 그들 노부부의
죽음에 의하여 점점 깊어 간다. 아끼던 토지를 빼앗기고 죽은 자들에 대한
가책으로 그는 만인을 위한 자유로운 왕국의 건설까지 무가치한 일로 여겨진다.
학문에 의혹을 품고 연애와 예술에 공허감을 느끼고 낙원의 건설에 인생의
가치를 발견한 후 큰 제국을 건설한 파우스트는 이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눈먼 파우스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원대한 계획을 하루
속히 실현시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동시에 그는 마술에서 헤어지고 악마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자각과 자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것은 메피스토의
계획과는 정반대 되는 일이었다. 한편 파우스트가 박애적인 개척 사업을
추진시키고 있는 동안에 악마는 파우스트에게 죽을 때가 가까워진 것을 알고
넓은 뜰 안에서 악령들을 지휘하여 무덤을 파게 하고 있었다.
"훌륭한 궁전을 나와 이렇게 좁은 곳으로 들어간다니 파우스트는 천하에
바보 같은 놈이다" 하고 악마는 조소한다. 이 때 장님인 파우스트가 다가온다.
그는 삽을 든 인부들이 개척 사업을 하고 있는 줄 안다.
"여러분! 저 산 밑의 늪을 메우고 거기서 솟는 독기를 막아내면 몇백만의
백성들에게 토지를 줄 수가 있다. 땅은 기름지고 초목은 무성하여 거센 파도가
밀려오더라도 이 곳에는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생활이나 자유도 나날이
싸워 얻어야 비로소 이를 향유할 권리가 생긴다. 여기에서는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 자유로운 백성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토지 위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찰나를 향해서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하고 외치고 싶다. 내가 세상에 남기는 흔적은 억겁을 지나도 멸망하지
않으리라. 그 크나큰 행복을 기대하며 나는 지금 최고의 찰나를 맛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최고의 목적을 간파하고 감격에 넘친 소리를 외치며 파우스트는
그만 쓰러져 절명한다
메피스토는 이 모양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 사람은 어떠한 즐거움에도 어떠한 행복에도 만족하지 않았으며 변화하는
아름다움만을 쫓아 다녔다. 그리하여 이 불쌍한 녀석은 최후의 텅 빈 찰나를
잡아 놓으려고 했지" 하고 조소한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아름답다고 외친 찰나는 감각적인 속세의 순간은 아니었다.
새로운 자유의 세계를 창조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행복한 생활을 영위케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상하고 초감각적인 순간이었다. 악마가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고 하느님이 바라는 마음이었다. 드디어 그의 영혼이 하느님에게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영혼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악마는 파우스트의 죽음을 파우스트의 패배이며
자기의 승리로 생각하고 지난 날 받은 증서에 따라 그의 영혼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악마는 파우스트의 죽은 육체에서 영혼이 튀어나오는 순간
잡으려고 부하인 악령들을 모아 지키게 한다. 이 때에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천사들은 발갛고 향기로운 장미꽃을 비같이 뿌리며 지상의 더러움을
씻으려고 내려온다. 악마는 악령들을 지휘하여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사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누르고 있었으나 하늘에서 떨어진 장미꽃의 향기는 불꽃처럼
강력하게 그들의 몸을 태울 뿐 아니라 메피스토는 본래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를 보고 황홀해져서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에
천사들은 파우스트의 무덤을 둘러싸고 그의 영혼을 안은 채 하늘 높이 올라가
버린다.
여기는 세 사람의 신성한 학자가 숨어사는 산꼭대기이다. 그 높은 대기 속에서
파우스트의 영혼을 나르는 한 무리의 천사가 나타난다. 하느님에게 구원받은
사내아이들도 날아와 파우스트의 육체를 따라다니는 지상의 솜털을 떼어 준다.
광명의 신인 성모 마리아가 내려온다. 그 주위에는 죄를 닦는 여인들이 나타난다.
그들 중에는 옛날에 그의 애인이던 그레첸이 나타나 성모에게 사모하던 애인의
용서를 빈다. 파우스트의 영혼도 드디어 그레첸의 영혼에게 인도되어 더욱 높이
하늘로 올라간다. 이리하여 인간의 그칠 줄 모르고 노력하는 마음이 마침내
하늘의 하느님과 합치하는 것이다.
이 때에 그를 환영하는 천사들의 신비로운 합창 소리가 들려 온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도달할 수 없는 것 여기에 실현되고
말할 수 없는 것 여기에 이룩되었네
영원한 여성은 우리를 인도한다"
돈 키호테(Don Quixote:1605-1615)
해설
"돈 키호테"는 근대 소설의 시조라 불리우는 세르반테스의 작품으로 스페인
고전 문학을 대표하는 희극으로 원제는 "기상 천외의 기사 돈 키호테 델 라
만차"이다.
"돈 키호테"는 스페인에 있어서는 국보와 같이 취급되고 있으며 성서 이외에
이만큼 널리 읽히는 책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전편은 1605년 후편은
1615년에 나왔다.
처음 전편이 나오자 작자도 놀랄 만큼 대호평을 얻어 얼마 안 되어 9판을
거듭하였으며 후편 "돈 키호테"라는 가짜 책까지 나오게 되었다. 작자는 계속해서
후편을 내놓으려고 신중을 기하고 있었으나 이 때문에 자극을 받아 계획보다
빨리 집필하게 되어 그 출판이 그의 생전에 가능할 수 있었다.
"돈 키호테"는 원작이 출판된지 불과 7년도 못 되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각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로 보급되었으며 20세기의
초기의 계산으로 700종의 번역이 나왔다. 그 중에는 전집 여섯 권 중 주석만 두
권이 되는 것도 있으며 현재는 각종 형태의 의역까지 합하면 2천 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고래로 문학에 묘사된 인물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 주인공만큼 우습고
익살스러운 인물은 찾아볼 수가 없다.
투르게네프는 100여년 전의 러시아 농민이 무지한 점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농민 이상이지만 그들 사이에서조차 '돈 키호테'라는 이름은 우스꽝스럽고
공상적인 인물로서 통용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유명한 햄릿과 돈 키호테라는 강연에서 두 주인공의 성격을 비교하였는데
"인생이 그 위에 타고 빙빙 도는 축의 두 모습"이라면서 근본적으로 상이한
인간의 두 유형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하였다(영국편 "햄릿" 참조)그리고 그가
햄릿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햄릿보다는 돈 키호테에 대한 동정을
명백히 하고 있다.
투르게네프가 말하는 유머는 말 속에는 이미 그의 결함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돈 키호테의 순량함은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하이네는 소년 시절 "돈 키호테"를 읽으며 주인공의 고난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서 이 작품이 그의 후년의 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바이런의 장시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중에도 돈 키호테에 대하여 그를 단지
어리석은 인물로만 보는 일반의 견해에 대한 항의가 쓰여 있다.
루나찰스키는 왜 "돈 키호테"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때로는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시종인 산초 판사가 돈 키호테에 대하여 그다지도 충실한지
또한 각 시대의 독자가 단지 웃음거리로만 여기면서도 되풀이 읽는 것을 무엇
때문인가를 물으면서 돈 키호테의 언행 일치와 자기가 믿는 진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으면서도 회의하지 않는 끝없는 순량함을 높게 평가했다. 범속한
현실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순진함과 이상주의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희극이면서도 순량함이 사람의 마음을 울려서
읽을수록 단순히 웃어 버릴 수만은 없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진의를 이해하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며 그 때까지는
단지 흔히 보는 하나의 우스운 이야기로서 취급되어 왔었다.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서문에 쓰여진 것과 같이 그 당시 스페인의 사회가
너무나 황당 무계한 기사도 소설에 열중해 있으므로 이 유행에 대한 풍자의
의미로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 스페인은 군국의 기풍이 성행하여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봉건적인
기사도적 정신이 뿌리 깊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특히 청년들도 공상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기사도 소설을 탐독하고 있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것을
개탄하고 정부가 어떠한 방지책을 강구하여 줄 것을 청원한 일까지 있었다.
1556년에 카루로 5세의 명령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스페인 영토 내에서는
일체의 기사도 소설의 수입을 엄금한 일이 있었으나 스페인 본국에 있어서는
카루로 5세 자신이 그 애독자의 한 사람이었던 까닭에 도저히 금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1605년 "돈 키호테" 전편이 나와 그 신랄한 풍자가 효과를 거두어 근
100년 간이나 스페인 반도를 휩쓸고 있던 기사도 소설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고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중판되는 것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이 시대는 상업 자본주의의 발흥에 따르는 경제 구조의 조직의 변혁에 따라
중세 봉건 시대에 사회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귀족 계급 중에서도 소지주
귀족 즉 기사 계급이 붕괴와 몰락의 운명에 빠져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 새로운 사회 현실에 적응해 가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그러한 능력도
없으면서 단지 옛날의 꿈을 그리워하고 과거가 되어 버린 사회 사상과 도덕의
기반을 회복하여 보려고 공상하는 자들은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돈 키호테도 이러한 유의 인물이라는 해석이 성립된다. 작자 세르반테스도
본래는 이 몰락해 가는 소지주 귀족의 가문이었으며 그 계급의 몰락이 필연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다소의 미련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작자가 풍자하고 희화시킨 것이 붕괴해 가는 기사도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 소설은 전편 53장 후편 74장으로 된 대작인데 기사 이야기의 황당 무계
함을 야유하기 위하여 주인공의 모험을 항상 실패로 돌아가게 함으로서 줄거리가
산만한 편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라 만차' 주의 지방색과 민중의 생활의
풍부한 모습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시각으로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근대 사실주의의 시조라는 플로베르도
"나는 글씨를 깨우치지 못했을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던 책 "돈 키호테"에서
인생의 근원을 찾아냈다"고 말하면서 스페인의 도로를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에 찬탄하였다.
작가 약전
세르반테스는 1547년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근처의 알카라 테 레니레스에서
났다. 그의 출생일은 확실치 않으나 그의 이름이 Miguel인 것으로 보아 미카엘
축일인 9월 29일일 것이라고 한다. 그의 집은 본래 가난한 귀족의 가문이었으며
아버지는 청각을 잃은 외과 의사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상세히 전해진 것이 없고 단지 그의 저서 특히 "돈
키호테" 등에 대하여 추측되는 것이 많다. 그가 마드리드 대학이나 사라만카
대학에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그의 환경으로 보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으로 전기 작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1568년(21세)에 로마
교황의 사절 아쿠부이바가 귀국할 때에 시종직으로 아라비아에 동행하였으나
본래 그의 야심이 다른 데 있었으므로 1570년 고로나 장군의 보병 연대의 한
병졸로서 자원 입대하였다.
그 때 마침 스페인과 로마 베니스와의 사이에 체결된 신성 연합은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기독교도의 공동의 적인 터키 군과
싸우게 되어 그도 십자군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해군이 터키 해군을
전멸시키고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 유명한 렌판트 해전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는 고열로 누워 있었으나 적함이 보인다는 소식을 듣자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일어나 격전 끝에 3개의 손가락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이
중상으로 7개월 간 병원 생활을 하였으나 왼손은 영구히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노년에는 그 불구의 왼손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자랑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연합군에 귀대하였을 때에는 그의 아우 로데라도 그 곳에 와 있었다.
3년 간 각 처를 전전한 후 1575년 9월 휴전을 이용하여 휴가를 얻어 나폴리에서
본국으로 향하였는데 그의 아우도 동행하였다. 그 때 세르반테스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부터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갔었다. 그 안에는
레판트 해전의 용사인 그의 공훈을 칭찬하고 그를 중대장에게 임명할 것을 청한
뜻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추천장이 도리어 그에게 불행을 초래하게
되었다.
본국을 향하여 항해하는 도중 불행히도 9월 26일 적함을 만나 격전 끝에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납치되었는데 이 곳에서 5년 간의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포로들이 분배되어 그는 어떤 선장의 소유가 되고 아우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형제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포로는 상당한
보상금을 지불하면 석방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본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우선
아우를 석방하게 하였으나 세르반테스만은 그가 휴대한 국왕의 추천장 등으로
미루어 고귀한 신분으로 믿고 쉽게 석방해 주지 않았다.
때때로 포로들이 도망하려고 반란을 기도하여 실패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자진하여 그 무서운 죄를 한 몸에 도맡았다. 그는 드디어 알제리 총독의 손으로
한층 더 엄중히 금고 당하게 되었다. 이 총독은 잔인한 사람이어서 코나 귀를
잘리운 포로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는 이 곳에서도 도망을 꾀하였다. 그러나
잔인한 총독도 그의 대담하고 솔직한 기품을 아깝게 여기고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의 집에서는 그를 자유의 몸으로 하기 위하여 누이동생의 결혼 비용까지
긁어 모은 거액의 돈을 보내왔다. 그러나 총독은 다시 그 갑절의 금액을
요구하였으며 그의 임기가 다 차서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게 되자 세르반테스도
같이 가게 되어 벌써 승선하고 있었다. 그러자 총독은 생각을 바꾸어 그
보상금을 감해 주었으므로 그제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것은 1580년
9월 19일 포로가 된 지 만 5년으로 그가 33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가 포로 생활 중에 쓴 작품은 상당히 많은 수에 달하였으나 거의 분실되어
버리고 그 때에는 수 편의 시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국에는 돌아왔으나 실업 군인의 범람으로 그의 생활은 빈궁하였다. 그 때
마침 그가 전에 있던 연대가 포르투갈로 출정하므로 그 뒤를 따라 다시 2년 간
아조오아 군도로 원정을 나갔다. 그는 1583년의 가을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소설 "라 가라테아"의 원고와 한 어린 계집아이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
어린아이는 출정 중 리스본 태생의 어떤 귀부인과의 사이에 낳았다고 하는데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605년 "돈 키호테"가 나왔을 때에 그녀는
20세에 달하였으며 호적에는 세르반테스의 사생아로 되어 있었으며 1614년에
수녀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없는 패잔병 세르반테스와의 관계를 끊고 일찍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버렸는데 이 사건이 가난한 시인에게 자극을 주어 그
후부터 영리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584년 12월에 18세나 차이가 나고
다소 지참금도 있고 신분도 있는 어떤 부인과 정식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처녀작이라고 추측되는 작품이 그 이듬해에 출판되자 원고료도 들어오게 되어
생활이 다소 편해졌으며 문단에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포기하였던
펜을 다시 들어 약 3년 간에 30여 종의 희비극을 썼으나 그 중 2종만이 200년
후의 연구가들에 의하여 발견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 후 지방 순회를 목적으로 극단에 가입하여 희극 배우로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1598년에 유명한 무적 함대가 영국의 해군과 싸우게 되어
출발준비로 식량 징발의 명을 받아 식량 공급 계장으로 임관되어 밀과
올리브유의 수집에 분주하였으나 월권 행위가 있어서 1592년 투옥되었다. 2년
후에는 다시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가 되었으나 1597년에는 또 다시 투옥되었다.
공금을 예금하여 둔 은행이 파산하여 우두머리인 포르투갈 인이 행방을 감췄기
때문에 그는 옳지 못한 행위로 관리의 이름을 더럽힌 죄로 3개월 간 옥중 생활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관리 생활도 끝이 났다.
그 후 6,7년 간은 세빌리아에서 비참한 빈민굴 생활을 했으며 문단에서도
잊혀지고 있었으나 때때로 소네트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수감 중에 복안을 얻었던 세계 문학사상 위대한 희극 소설인 "돈
키호테"를 마드리드에서 1805년에 출판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이
작품은 당시 대호평을 받아 약 1년 간에 3만 부가 팔렸으므로 출판사는 거액의
이익을 얻었으나 계약 조건을 잘못 정하였기 때문에 작자의 소득은 몹시
적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어떤 변사 사건의 살인 혐의자로 갇히게 되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여전히 가난하였으며 문학적 성과를 새로이 쌓으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돈 키호테"가 인연이 되어 레모스 백작과 친밀하게
되어 그의 비호를 받았다고는 하나 그의 아내와 딸은 비리야부랑카 후작의
집에서 바느질 일을 하여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1611년 그는 시루바
한림원에 들어가 겨우 생활의 기초를 얻게 되었으며 이 곳에서 창작욕을 태우며
많은 작품을 내었다.
1614년에는 아베리아네드라는 익명으로 "돈 키호테"의 후편을 죽기 전에
완성하려고 전심 노력하여 1615년 그 완결을 보았다. 그는 1616년 4월 23일
수종병으로 영면하였는데 영국의 "햄릿"의 저자 셰익스피어가 죽은 날 같은
시간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딸이 있는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소재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의 생애에 대하여 그의 소설보다도 위대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의 빈곤하고 불행한 60년의 생애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용기와 유머와
정의감과 동포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 그리고 고상한 인품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세르반테스는 시도 지었고 극도 썼으나 특히 소설가로서 위대했던 것이다.
이론이 아닌 실제의 예술가요 천성적인 소설가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는
단편적 글에 있어서도 누구와도 견줄 구 없는 명문장가였으며 재치 있는 구상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유머 감각과 생동감 등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이 지상에
남겼다.
줄거리
옛날 스페인의 라 만차라는 마을에 긴 창과 낡은 방패에 케케묵은 갑옷과 투구
피부병에 걸린 말 사냥 도구 등을 갖춘 한 신사가 있었다. 그 신사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식탁 위에는 양고기보다는 쇠고기가 많이 올랐으며
대개 저녁에는 고기 샐러드로 마치고 목요일에는 고기 부스러기 금요일에는 콩
요리가 많은 일요일에는 작은 산비둘기 한 접시였는데 이것만으로도 소득의
4분의3은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4분의 1은 안식일에 입는 맞지 않는 비단
덧저고리와 벨벳 바지 구두 등의 호화스런 차림에 사용되었다.
집에는 마흔이 넘은 가정부와 스물이 아직 못 되는 조카딸 농사 일을 하는
젊은 하인이 있었다. 노인인 신사는 오십이 가까웠으나 아직 독신이며 얼굴은
야위어 보이고 몸집은 말랐지만 극히 강건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사냥 가는 것을
몹시 좋아하는 사나이였는데 이름은 아논소 키하아노라고 불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여가를 이용하여 중세 기사 소설을 탐독하여 가산을
관리하는 일도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서적을 구입하기 위하여
선조의 토지까지도 팔아 없앴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기사나
마술사나 전쟁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무술 수업을 위하여 세계
각국을 누비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여 약한 자를 도와 주고 강한 자를
다스려 그 무용을 천하에 떨치겠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정신이 이상해진 그는 곧 출발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헛간 구석에서
우선 선조가 사용했던 케케묵은 갑옷과 투구를 끄집어 내었으나 투구가 부서져
있었으므로 두터운 종이로 다시 만들었는데 아주 기묘한 모양이 되었다.
다음에는 말을 점검하였다. 가죽만 남은 말라빠진 둔마였지만 그의 눈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에 못지 않는 수려한 준마로 보였다.
그는 4일 간이나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그 말에 로시란테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기 자신은 8일 간 생각한 끝에 제멋대로 라 만차의 돈 키호테라고 정했다.
갑옷도 투구도 말의 이름 짓기도 다 끝나고 자기도 훌륭한 기사가 되었으나
기사의 관습으로서 자기의 사랑을 바칠 절세의 미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애인을 위하여 천신만고를 격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며칠을 생각한
끝에 이웃 마을에 사는 이름도 있고 용모가 아름다운 시골 처녀가 생각이 나서
그를 고귀한 귀부인으로 여기고 토보소 마을의 애인이라는 의미로 둘씨네아 델
토보소라는 훌륭한 이름을 붙였다.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7월의 어느 날 집안 사람들 몰래 준비한 것으로
무장을 하고 그 늙은 몸을 실은 후 창을 높이 들고 용감하게 기사 수업의 길에
올랐다. 그에게는 한 가지 불안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 기사의 칭호를 받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잠시 걸어가는 도중에는 기사를 만나게 될 것이니 그 때
직접 칭호 수여 의식을 올리겠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로시란테의 옆구리를 힘껏
찼다. 그의 괴상 망측한 모양을 본 마을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수근댔으나 그는
도리어 그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비웃으며 떳떳이 길을 떠났던 것이다.
정해둔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로시란테의 머리가 향하는 대로 달렸는데
해가 저물 무렵 어떤 허름한 주막집 앞에 다다랐다. 자세히 보니 하녀인 듯한 두
여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기사의 눈에는 이 주막집이야말로 당당한 성주의
거대한 성으로 보였으며 그 하녀는 공주와 같이 보였으므로 곧 위엄을 갖추고
가까이 갔다. 그러자 그 여인들은 이 기괴한 풍채를 보고 무서웠든지 집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가 이것을 보고
"안심하십시오. 부인들이여 저는 기사입니다. 고귀하신 부인들에게 어찌 무례한
짓을 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하녀들은 일제히 웃어 버렸다. 이 때 주인이
앞으로 나와 이 진귀한 가장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아! 기사님이십니까. 마침 침구가 갖추어져 있는 방은 손님이 차 있습니다만
다른 것은 무엇이나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고 요령 있게 그를 거절할
눈치였으나
"아니 성주님. 저는 무엇이든 족합니다. 무구는 나의 보배요 싸움만을 준비하는
나그네가 어찌 부족을 말하겠소" 하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러시다면 딱딱한 돌방이에서 나마 하룻밤이라도 쉬어 가십시오" 하고 그의
갑옷에 손을 대자 아침부터의 허기에 쓸어질 듯이 말 위에서 내리며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명마이니 잘 부탁하오" 하고 로시란테를 주인에게
맡겼다. 돈 키호테는 하녀들의 손을 빌려 갑옷을 벗었으나 종이로 만든 투구는
파란 줄로 몇 번이나 묶였기 때문에 벗겨지지 않았다. 끈을 칼로 끊어 버리자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속옷 바람에 투구는 그대로 쓰고 있었다. 식사도 그 투구
때문에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마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주인에게서 술을 대접받게 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침 주인이
기지를 짜내어 갈대의 심을 뺀 것을 그의 입에 물리고 다른 한쪽 끝에서 그 술을
넣어 겨우 술을 먹여 주었다. 그런데 돈 키호테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예의 기사
칭호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 주인을 외양간으로 데리고 가서 문을 닫고
돌연 그의 발 밑에 엎드리며
"성주님. 대단히 당돌한 청이라 황송하게 생각하오나 기사 칭호를 내려
주신다면 일생 동안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돈
키호테에게는 주인이 훌륭한 성주로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도 그가 이상한 자라고 짐작했지만 이제 그 정체를 확실히 판단하게 되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으나 그도 본래 익살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쯤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 쾌히 승낙을 한 후 자기도 젊었을 때에는
각국으로 기사 수업을 다니면서 대단히 고생을 겪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그런데 귀하는 돈을 가진 것이 있으신가요?" 하고 주인은 약삭빠르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돈 키호테는 태연스럽게 지금까지 기사 수업에 있어서 금전을
휴대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으므로 한푼도 소지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주인은 그 부주의함을 말하고 여행에는 반드시 여비가 필요하고
갈아입을 속옷도 가지고 다녀야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기사는 착실히 그의 충고를 듣고 들에서 무구를 든 채 적이 오는 것을
감시하게 되었다. 돈 키호테는 자기의 무구를 우물가의 물통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고 방패와 긴 창을 들고 그 앞을 왔다갔다 하며 밤새도록 지켰다. 때마침
그 주막에 숙박하고 있었던 마부가 돌연히 나타나서 이러한 사정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자기의 말에 물을 먹이려고 그 물통 위에 모셔 놓은 귀중한 무구에
손을 대었다. 수상한 자가 접근하자 돈키호테는 놀라서 고함을 치며
"무슨 일로 나의 무구에 손을 대느냐?" 하고 애인 둘씨네아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부르며 마부의 머리를 향하여 일격을 가하자 그는 불의의 습격에
당황하며 그만 땅 위에 나동그라져 버렸다.
얼마 안 되어 또 한 사람의 마부가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져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 우물 가까이 왔다. 그러자 돈 키호테는 이번에는 창을
휘두르며 그 마부의 머리를 서너 번이나 몹시 때렸다. 이러한 불상사가 연달아
일어나므로 주인은 그를 빨리 구슬러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곧 기사의 칭호를 수여하기로 하였다.
식은 반드시 예배당이 아니고 들판이어도 좋다고 하면서 그는 부피가 두터운
통장을 중대한 것인 양 들고 예의 귀부인 즉 하녀와 촛대를 든 사내아이를
데리고 서서히 돈 키호테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걸어 갔다. 먼저 돈 키호테에게
꿇어 앉도록 명령하고 그럴 듯하게 통장을 읽은 다음 칼을 들어 기사의 어깨에
힘껏 일격을 가하여 이 자리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사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만족한 돈 키호테는 로시란테에 뛰어 올라 성주와 귀부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의기 충천하여 원정 길을 떠났다. 뒤에 숨어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구경꾼들의 폭소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순진한 돈 키호테는 성주의 충고에 따라 여행에 필요한 용돈과 갈아 입을
속옷을 준비하고 또한 종복도 한 사람 데리고 정식으로 다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았을 때 오른쪽 숲속에서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어젯밤
기사의 칭호를 받았는데 오늘 아침부터 임무를 수행할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의 다행이라고 숲 속 깊이 들어갔다.
이 곳에서 안드레스라는 17, 8세 되어 보이는 게으름뱅이 목동이 염소를
잃었다고 주인에게 쫓기는 것을 본 돈 키호테는 주인을 용감히 칼로 위협을 하여
우선 그 소년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더욱 의기 양양하여 다시 약2마일 쯤 갔을
때 한 무리의 행상들을 만났다.
일행은 상인이 여섯 사람에 종이 네 사람인데 모두 다 말을 타고 그 뒤를
마부가 세 사람이나 따르고 있었다. 돈 키호테는 좋은 적수를 만났다는 듯이 길
한복판을 가로 막으며 말 위에서 당당한 위풍과 기세를 보이면서
"야 거기 가는 기사들 이 세상에서 라만차의 여왕 둘씨네아보다 아름다운
미인이 없다고 맹세를 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는 이 길이 저승길이 되고 말
것이다" 하고 외치자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상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것은 무엇일까? 기묘한 풍채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미친 모양이지" 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였으나 그 중에 짖궂은 한 사나이가
"그 부인을 보여 주신다면 기꺼이 맹세하지요. 초상이라도 보여 주신다면 애꾸
눈이라도 동의하지요..." 하고 놀리자 돈 키호테는 불같이 노하여 분연히 긴 창을
겨누고 공격해 왔으나 로시란테가 힘을 다하고 있는 주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발이 걸려 넘어지자 그렇지 않아도 갑옷과 투구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돈
키호테는 마음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고약한 한 마부가 그의 창을
빼앗아 들고 닥치는 대로 쑤셔 놓고 가 버렸다.
늙은 기사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사 수업에는
반드시 재난이 따르는 것이라고 단념하고 하는 수 없이 누운 채로 있었다. 마침
그 때 그 마을 농사꾼이 지나가다가 그 곳에 사람이 뻗어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와서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씻어 주고 보니 돈 키호테였다. 땅에서 겨우 그를
일으켜 자기의 나귀 위에 태우고 무구를 긁어 모아 가지고 마을로 돌아오니 돈
키호테의 집에서는 대소동 중이었다. 돈 키호테의 친구인 부목사와 그 마을에
사는 이발사가 와 있었다. 하인은 큰 소리로
"이틀 전부터 그분의 말도 창도 갑옷도 보이지 않았어요. 주인님은 저 기사도
책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지신 모양이에요" 하고 호소하였다. 그의 조카도
"아저씨는 2,3일 동안이나 기사 수행의 책을 읽고는 칼을 빼들고 벽을
찌르고는 이제 거인 4명을 무찔렀다고 자랑하시며 마술사에게 얻은 물이라고
하시며 병 속에 든 냉수를 마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 때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돈 키호테가 나귀에 태워져 돌아왔으므로 모두
달려가 조심스럽게 안아 내리려고 하였다. 돈 키호테는
"물러 가거라! 나는 말의 부주의로 실수를 한 것이다. 현명한 프리스톤 거인을
불러 상처를 낫게 하여라" 하고 외치자 모두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돈 키호테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냥 조용히 잠들게 하였다.
돈 키호테가 잠들고 있는 사이에 부목사와 이발사가 그의 서고를 뒤졌는데
수백 군의 서적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든 게 책 때문이라고 결론 짓고 모닥불을
피워 전부 재로 만들어 버렸다.
돈 키호테가 잠이 깨어 자기의 자기의 사랑하고 아끼는 서고를 마술사가 와서
전부 태워버렸다고 얘기를 듣고 그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납득하였다.
돈 키호테는 그 후 15일 간 집에 있었는데 친구들의 충고도 듣지 않고 망상은
더 심해져 정직하고 어리석은 농사꾼 산초 판사를 꾀어 종복으로 삼기로
약속하였다. 이 불쌍한 농부는 처자식을 가난한 집에 남겨 둔 채 돈 키호테와
함께 출정하기로 결심하였다. 돈 키호테는 산초에게 당장에 섬나라에 손에 넣어
그 섬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터무니 없는 약속을 하였지만 그는 그 말을
믿고 기뻐하며 그의 종복이 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젠 여비도 조달되고 속옷도 준비되었으므로 산초에게는 헝겊으로 만든
자루와 가죽 포대를 휴대케 하고 출발할 날짜와 시각을 정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집안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느 날 밤을 틈타 몰래 마을을 빠져
나가기로 하였다.
산초는 키가 크고 말라 빠진 돈 키호테에 비하여 몸집이 뚱뚱하고 키가 작은
땅딸보였으며 성격도 아주 단순하고 융통성이 없는 둔한 사람이어서 이 두
사람은 우스꽝스러운 대조를 이루었다.
노기사는 말라빠진 말 위에 올라 애인 토보소의 둘씨네아의 모습을 가슴 속에
그리면서 종복은 야윈 나귀 등에 올라 모험을 위해 출발하였다.
"나리 어제 약속하신 섬나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큰 섬나라도
훌륭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고 종복이 다짐을 하니
"그것에 관해서는 염려 말아라. 섬이든 나라든 손에 넣게 되면 부하를 그 곳의
총독으로 임명하는 것이 옛날부터 기사 수행도의 관습이다. 수일 후에는 속국이
서넛 있는 나라를 점령하게 될 것이니 너는 그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왕이 되면 좋지 않겠느냐" 하고 대답하자 산초는 눈동자를 빛내며
"내가 왕이 되면 마누라와 자식들은 여왕과 왕자님인가!" 하고 두 사람은
희열에 들떴다. 그들은 정처없이 들판을 헤매다가 열 개의 풍차가 눈에 띄었다.
이것을 발견한 돈 키호테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참으로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행운이다. 적어도 30명은 더 되는 괴물
프리스톤이로구나 이것은 좋은 적수이니 나가서 정의롭게 싸우겠다" 하고 항상
애인에게 자기의 무용담을 들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마음 속으로 애인
둘씨네아의 이름을 외치면서 창을 휘두르며 로시란테가 거꾸러지지 않을까
염려될 만큼 힘차게 풍차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나리 잘 보십시오. 저것은 풍차입니다" 하고 산초가 말렸으나 이 말에 흔들릴
돈 키호테가 아니었다.
그 때 마침 바람이 일어나 풍차가 세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놓칠 줄 아느냐. 비겁한 무리들아" 하고 그는 방패를 힘 있게 쥐고 창을
겨누어 풍차의 날개를 찔러댔다.
그러나 창은 부숴지고 기사는 보기 좋게 말과 함께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더니
그의 몸이 밭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놀란 산초는 곧 달려가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인을 동정하며 일으켜 세운 뒤 겨우 말 위에 앉혔다.
"하지 말라는 일을 하시더니만 큰일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염려하자
"허! 그렇게 낙심할 것 없다. 전쟁의 승패는 병가의 상사이지 못된 마술사가
거인 정복의 영예를 내게서 빼앗으려고 프리스톤을 풍차로 변화시킨 것이로구나.
그러나 내게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라고 말하고 산초에게
이 정도로 낙심하는 것을 기사의 수치라고 하며 득의 만면하여 다시 전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건너편에서 베네지구트 파 승려 두 사람과 그 뒤로
귀부인이 탄 사륜 마차 한 대가 비스케이인 종들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돈
키호테는 이것을 보고 기뻐 날뛰며 그들 승려야말로 여인을 유혹하고 다니는
극악 무도한 무리들이라고 판단하고
"이 나쁜 놈들아. 너희들이 유혹해서 데리고 온 고귀한 공주를 즉시
인도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고 외치자 놀란 것은
산초와 승려들이었다.
"기사님, 우리들은 여행 중이며 이 마차의 부인은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 하자
돈 키호테는 그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제일 앞에 선 중을
창으로 찔렀다.
그 중은 놀란 나머지 나귀 위에서 떨어지고 다른 중 한 명은 나귀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산초가
"이젠 되었다" 하고 떨어진 중 옆으로 가서 입은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종복
두 사람이 달려들어
"이게 무슨 짓이요. 남의 옷을 벗기다니!" 하고 항의를 했다. 산초는
"무엇이라고? 너희들은 기사도 책을 읽은 일도 없느냐 이것은 나리께서 싸움에
이기신 전리품이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종복들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은 모르나 산초를 넘어뜨리고 발로
차고 수염을 잡아당겼다. 그 사이에 남아 있던 중도 나귀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돈 키호테는 마차 옆으로 가까이 가서 그 여인을 향하여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을 알고 보시는 바와 같이 악인들을 퇴치하였습니다.
나는 토보소의 둘씨네아와 사랑으로 맺어진 기사 돈 키호테입니다. 사례 같은
것은 전혀 필요없으나 이제부터 토보소로 둘씨네아 공주를 찾아 가셔서 이
사건의 전말을 들려 주신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하자 종복들은 처음부터 길을 가로막힌 분노에 토보소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자 격분하여 돈 키호테에게 덤벼들었다. 서로 옥신각신한 끝에 종복들이 몹시
당하였으나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려는 판에 주인인 귀부인이 마차에서 내려와
반드시 종복들을 토보소의 둘씨네아 공주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여 겨우 일이
수습되었다.
산초는 중의 종복에게 몹시 얻어맞았으나 즉시 일어나서 공손히 주인의 손을
잡으며
"잘되었습니다. 좀 빠르긴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손에 넣으신 섬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좀더 기다려라. 산초야! 이것은 아직 섬의 전쟁이 아니다. 단지 좁은 길에서의
작은 다툼이다. 이제 반드시 대전쟁이 시작된다. 그 때는 반드시 너를 국왕이든
황제든 시켜 주겠다" 하고 달래자 산초는 감사의 뜻으로 주인의 손과 갑옷에 몇
번이고 키스를 하였다.
다음 날 그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자 보기에도 부드러운 초원이 있었으므로 그
곳에서 쉬면서 말과 나귀에게 풀을 뜯게 하였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작은
말들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이 때에 돌연 로시란테가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곤봉으로 때려 로시란테를 쓰러트렸다. 이것을 보고 분개한 돈
키호테와 산초는 칼을 빼들고 돌진했으나 20명에 가까운 마부들이 모두 곤봉을
들고 두 사람을 에워싸고 닥치는 대로 때렸기 때문에 돈 키호테는 여지없이
땅바닥에 뻗어 버렸다.
산초가 먼저 정신을 차려 돈 키호테를 나귀에 올려 붙잡게 하고 로시란테를
일으켜 세워 고삐를 나귀 뒤에다 묶은 후 자기는 모든 아픔을 참아가며 큰 길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얼마 안 가서 주막집이 보였으므로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주막집에서는
돈 키호테를 간호하기 위하여 천정 아래 방에다. 허름한 침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눕게 했다.
그 집 여자와 딸은 돈 키호테의 머리부터 손톱 끝까지 고약을 붙여 주었으며
'산초'도 나머지의 고약을 얻어서 자기의 몸에 붙였다. 그런데 이 방에서 마부
한 사람과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이 날 밤 이 집 하녀와 밀회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돈 키호테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여러 가지 환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하녀가 들어왔다. 그가 속옷 바람에 맨발로 남몰래 더듬거리며 마부를 찾자
이것을 보고 있던 노기사는 늑골의 아픔도 참아가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미의
여신으로 생각되는 그 젊은 여자를 꽉 껴안고 나직하고 정다운 말소리로
"사랑스럽고 고귀하신 여인이시여!" 하고 속삭이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그녀의 정부인 마부가 흥분하여 돈 키호테의 옆으로 가까이 와서 야윈
턱을 힘껏 갈겼다. 돈 키호테의 입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가슴에 올라 앉아서 힘껏 누르는 바람에 침대가 그만 부서져
버렸다.
이 소리에 놀라 잠을 깬 주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달려왔다.
하녀는 놀라서 그 옆에서 자고 있던 산초의 잠자리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산초도 이 소동에 잠을 깨어보니 머리 위에 이상한 것이 있어 주먹으로 마구
쳤다. 하녀는 너무나 아프고 화가 나서 같이 때렸다.
이것을 본 마부가 사랑하는 하녀의 편을 들어 산초에게 덤벼들었으므로 이
네 사람 사이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그 때 마침 그 곳에 순찰 와서 숙박하고
있던 경찰이 이 괴상한 소리를 듣고 방 앞에 와서 호령을 하자 모든 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이 때까지 기절해 있던 돈 키호테는 겨우 정신을 차려 상처를 치료할 향유를
만들기 위해 기름 포도주 소금 향료를 얻어 올 것을 산초에게 명령하였다. 돈
키호테는 이것을 한꺼번에 끓여 여섯 컵 반이나 되는 것을 한꺼번에 마셨다.
그러나 약효를 기대했던 이 향유는 위를 통과하자마자 곧 심한 구토와 경련을
일으켰다.
두 시간 이상이나 의식을 잃고 잠들었던 돈 키호테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는
이상하게도 상처의 아픔도 가시고 상쾌하게 나은 듯하였다. 기적과 같은 주인의
회복을 본 산초는 아직 남아 있는 향유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산초는 성심 성의를 다하여 주인에 못지 않게 많이 마셨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산초의 위는 주인의 것보다는 못하였던지 떠나기 전에 격렬한 복통을 일으켰다.
식은 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이것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라도
각오할 정도였다.
돈 키호테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이 음료는 기사가 아닌 사람에겐 약효가 전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산초는
"그것을 아시면서 왜 마시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고 괴로운 숨을 내쉬며
원망하였다. 드디어 가련한 충복 산초는 위 아래로 배설을 시작하여 깔고 있던
것이나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더럽히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그럭저럭 두 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받았으므로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고 말았다.
돈 키호테는 자기는 완전히 회복하였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또 다른 모험을
위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손으로 로시란테의 등 위에 안장을 깔고
산초를 부축하여 옷을 갈아 입힌 후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주막집을 막 나서려고 할 때 주인이 그를 불러 세우고 숙박료를
청구하였다. 그런데 돈 키호테가 태연 자약하게 대답하는 것이 걸작이었다.
"주막집이라 하니까 돈을 전부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기사
수업하는 자가 단 한 푼이라도 음식값이나 숙박료를 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고 거부하였다.
주인이 기사의 아야기 따위는 상관없으나 돈만 내라고 재촉하자 돈 키호테는
몹시 화를 내며 용감하게 말을 몰아 창을 공중으로 휘두르면서 주막집을 빠져
나가 버렸다.
돈 키호테가 지불도 하지 않고 도망쳐 버리자 주인은 산초를 붙잡았다. 산초도
주인이 지불하지 않은 것을 자기가 지불할 의무가 없는 거라며 버티자 그 곳에
숙박하고 있던 8, 9인의 여행객들이 산초를 이불에 싸서 팔매질을 시작하였다. 그
가련한 사나이의 울음 소리가 주인의 귀에까지 들려와 돈 키호테가 그쪽을
돌아다 보았다. 이불에 싸인 산초의 몸이 담 위로부터 우스꽝스럽게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보였으므로 돈 키호테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그 고초를 겪은 산초는 나귀에 올라탈 수도 없을 만큼 기진맥진하였다. 이
가련한 충복은 견디다 못해서 기사 수업이 이렇게 고생스럽고 시끄럽고 말썽만
일어난다면 자기는 차라리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돈 키호테는
"그게 무슨 말이냐? 아직도 기사도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 탓이니 그저 가만히
참고 있어라" 하고 나무라며 기사의 명예와 희망을 자세히 타일렀다. 돈
키호테는 다시 그를 데리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났다.
어느 날 그들은 몰려가는 양 떼를 발견했는데 희뿌연 먼지가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퍼져 오고 있었다. 돈 키호테는 이것을 보고
"산초! 저것은 북쪽으로 진군하는 연합군의 군대이다. 군마의 울음소리와
북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라고 말하였다. 돈 키호테는 이와 같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가 읽은 기사도 소설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기상
천외한 그의 언행도 그로서는 정연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약한자를 도와 주는 것은 나의 힘으로 충분할 것이다. 나의 용맹과 무기의
위력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로시란테에게 채찍질을 하며 창을 들고
번개처럼 언덕을 내려갔다.
"나리님! 당신의 상대는 바로 염소 떼입니다" 하고 산초가 외치는 소리도 듣지
않고 몰려드는 양 떼의 한복판으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양치는 사람들은 불의의 침입자에 놀라서
돌멩이를 집어 들고 돈 키호테를 향하여 일제히 돌팔매질을 했다. 불행히도 큰
돌이 그에게 명중하여 마침내 천하의 용사가 거꾸러 넘어지고 말았다. 돈 키호테
자신도 자기가 확실히 죽었던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목동들도
그가 확실히 죽은 줄 알고 양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산초는 언덕 위에서 주인이 싸우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그가 쓰러지고
목동들이 사라져 버린 후에야 그의 옆으로 달려가서 슬픈 듯이 말하였다.
"주인님, 그만 돌아오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들은 양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않았어요" 하자 돈 키호테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의 적인 저 마술사의 도적놈들이 양으로 변했다
없어졌다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상처는 염려할 것이 없다"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다시 전진하였으나 그 날은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저물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딱한 것은 그들은 배가 고파서 곧 스러질 정도였는데
가까스로 어느 조용하고 넓은 계곡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바위의
꼭대기에서 사람을 경악스럽게 할 정도의 괴상한 소리가 마치 폭포수처럼
요란하고 무섭게 들려 왔다. 더구나 그 날 저녁은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었으며 쉬쉬하는 나뭇잎 소리가 공포감을 더해 주었다.
산초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몸이 떨리며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돈 키호테는 창과 방패를 들고
"산초야, 이 위대한 모험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3, 4일만
여기서 기다리다가 만약 돌아오지 않거든 고향으로 돌아가서 둘씨네아 공주에게
그녀의 기사는 명예를 위해 괴물과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전하여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산초는 아무래도 그 날 밤의 모험에 주인을 보내는게
불안하여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어 몰래 말의 다리를 끈으로 묶은 뒤에 돈
키호테에게 밤이 새는 것을 기다려 보자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돈 키호테는
기여이 출발하려고 말 위에 올랐는데 말이 뛰기만 하고 걷지를 못하자 단념하게
되어 그 날 밤은 공포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돈 키호테는 괴물과
싸우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 곳에는 대여섯 채의 움막이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는 그 안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하룻밤 동안 그들을 괴롭힌 공포의 원인을 알아 보려고
로시란테까지도 온몸을 긴장하였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놀랍게도 표백 기계의 망치 소리였다. 즉 옷감을 튼튼히 하고 표백하는데
쓰는 수차였다. 돈 키호테는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창으로 그에게 일격을
가하면서
"나는 진실로 대모험을 각오하고 온 것이다. 첫째로 표백 기계라는 것을
몰랐었다. 그러나 이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말하지 말아라.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현인은 별로 많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맞은편에서 12명 가량의 죄수가 쇠고리에
채워져 강제 노역에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돈 키호테는 그 모양이 가련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그중 한 사람에게 연유를 물어 보았다. 얘기를 들은 이
순진한 이상가의 분노는 또다시 폭발하였다.
"도대체 이렇게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있는 권리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하며
불쌍한 죄수들이야말로 자기가 나서서 구출해야 한다고 결심하며 칼을 빼들고
호위병들 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사이에 산초는 죄수들의 포승을 풀어 주고
그들과 합류하여 호위병들을 완전히 쫓아버렸다. 돈 키호테는 곧 죄수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을 곧 토보소의 둘씨네아 공주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말하고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으나 죄수들은 도저히 도시로는 나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명령을 거절했다.
그러자 돈 키호테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분노하며
"너희들이 싫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너희를 보내고야 말겠다" 하면서
죄수 한 사람을 후려쳤다. 이 때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죄수들은 일제히 자갈과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 불의의 공격으로 돈 키호테가 말에서 떨어지자
죄수들은 재빨리 은인인 두 사람의 소지품과 옷을 벗겨 가지고 숲 속으로 제각기
숨어 버렸다. 몹시 불쾌해진 기사는
"산초야, 천한 놈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일이로구나" 하고
한탄하자
"오, 주인님. 제발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는 주의하여 주십시오" 하고
산초도 분노하며 대답하였다.
두 사람은 아픔을 참아가며 겨우 말 위에 올라 불쾌한 이 장소에서 조용히
말을 돌렸다. 잠시 걸어가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 한 사나이가 나귀를
타고 황금같이 빛나는 것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돈 키호테는 이 모습을
보고는 잘 생긴 준마를 타고 황금 투구를 쓴 기사라고 생각하였다.
"저것이 바로 마부리노의 투구이다. 저 황금의 투구를 얼마나 빨리 내 손에
넣는가를 보여 주겠다" 하고 돈 키호테는 자신 만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돈 키호테가 기사라고 본 사나이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의
이발사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수염과 머리를 깍았으므로 놋쇠로
만든 대야를 휴대하고 다녔다. 이 사나이는 시골의 이발사였는데 마침 비가 와서
자기의 새 모자를 버리지 않기 위하여 머리 위에 그 놋대야를 뒤집어 쓴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돈 키호테는 창을 겨누고 그 사나이에게로 달려갔다. 혼비
백산한 이발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나귀 위에서 굴러 떨어진 채 위기
일발로 창끝을 피하여 놋대야도 내던진 채 어디로인지 달아나 버렸다. 돈
키호테는 손쉽게 그 황금 투구를 수중에 넣었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그것을
자기의 머리에 쓰고 의기 양양하여
"이 훌륭한 투구를 만들게 한 기사는 확실히 큰 머리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반쪽이 없어졌구나!"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앞서 일어난 죄수의 일로 인하여 두 사람은 관청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은 몸을 숨기려고 얼마 동안 험한 산 속을 깊이 헤매다녔다.
옛날부터 많은 성인들이 도를 닦는다는 모래나 산 속에서 돈 키호테는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수호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마을에 내려가서 한
여인을 강제로 데려와 명예스러운 기사의 수호신으로 정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사자와의 격투, 마선에 의한 봉변 등 많은 모험을 겪었고
전리품도 상당히 많이 얻었다.
이 전리품들이 모두 산초의 것이 되었으므로 일단 산초는 토보소의 둘씨네아
공주에게 돈 키호테의 무용담을 들려 주기 위해 귀향하게 되었는데 돈 키호테가
쓴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거룩하고 고귀하신 공주님, 나의 충실한 종 산초는 당신을 위해 나의 고난을
상세히 알려 드릴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당신의
종인... 우수에 젖은 얼굴의 기사로부터"
'우수에 젖은 얼굴의 기사'란 이름은 돈 키호테가 주막집에서 마부들에게 얻어
맞았을 때 이가 빠져서 종일 굶는 바람에 핼쑥해진 얼굴을 보고 산초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리고 조카딸에게는
"내가 없는 동안 너에게 맡겨 둔 나귀새끼 다섯 필 중 세 필을 나의 시종
산초를 통해 보내 달라"고 썼다. 이것은 산초가 산중에서 노숙할 때 나귀를
도둑맞았기 때문이었다. 산초는 기뻐하며 로시란테에 뛰어올라 고향으로
향하였다.
그 이튿날 이전에 이불 찜질을 당했던 주막집 앞에 도착하였을 때 우연히도 두
사나이가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정신 이상이 된 돈 키호테를
고향으로부터 사방으로 찾아 헤매고 다니던 부목사와 이발사였다. 산초는
그들에게 토보소의 둘씨네아 공주와 돈 키호테의 조카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중요한 문제의 편지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귀에 대한 지시도 있었기
때문에 얼굴빛이 창백해진 산초가 당황하여 온 몸을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산초는 너무 놀라서 자기 수염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기도 하여
피투성이가 되는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서 둘씨네아 공주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잠시 생각한
끝에
"거룩하고 귀하신 공주님. 상처를 입고 수면 부족으로 창에 찔린 자가 당신의
손에 키스합니다. 인정도 없고 차마 쳐다볼 수도 없는 추한 어여쁘신 공주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그 외에 건강인지 병인지를 그 여인에게 보낸다는 것과 맨 끝에는
죽을 때까지 당신의 것인 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로부터라고 씌어 있었지요" 하며
총명한 기억력을 자랑하듯이 말하였다. 그리고 만약 둘씨네아 공주로부터 좋은
회답을 가지고 가면 주인은 적어도 황제나 왕이 되고 자기는 예쁜 시녀를 신부로
맞이하기로 둘 사이에 굳은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부목사와 이발사는 돈 키호테의 광기로 인해 이처럼 가련한 사나이까지도 변해
버린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에 젖어 꿈을 꾸고 있는 산초의 몽상을 깨뜨리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었지만 돈 키호테를 무모한 고행에서 구출하는 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여러 가지로 머리를 짜내어 묘안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그 묘안이란 이발사를 어느 나라의 공주로 변장시키고 부목사는 그 시종으로
분장하여 공주가 어떤 공작의 아들인 몹쓸 기사에게 대단한 괴로움과 모욕을
받은 것 같이 꾸미고 돈 키호테가 복수를 해 주면 그 공주를 아내로 삼고 거인이
침범하는 이웃 나라의 어려움을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돈 키호테도
공주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도와 주겠다며 반드시 공주를 따라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새로운 대책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 주막집의 안주인의 손을 빌려 공주의 차림과 시종의 분장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다행한 일은 산중에서 남장한 아름다운 도로데아라는 소녀와 그의
애인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한 끝에 그 소녀가 스스로 비탄에 잠긴 공주의
역할을 맡겠다고 하였다. 세 사람은 대단히 기뻐하며 곧 준비해 온 물품을
꺼내었다. 신분이 높은 귀부인 차림의 어여쁜 공주와 긴 수염을 기른 이발사인
시종이 즉석에서 꾸며졌다.
산에서 많은 고초를 겪은 뒤에야 겨우 공주와 시종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돈 키호테를 발견하였다. 여인은 곧 말 위에서 내려 돈 키호테 앞에 무릎을
꿇으며
"오! 용맹하신 기사님, 당신의 명성을 듣고 산과 바다로 수천 리 떨어진
이국땅에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이 곳까지 찾아 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옆에
있던 산초도
"주인님, 꼭 이분의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이분이야말로 이디오피아의
미코미콘 왕국의 미코미코나 공주이십니다" 하고 말했다. 돈 키호테는 엄숙한
태도로
"소인이 지키는 기사도에 맹세하고 구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공주는 기쁜 얼굴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제부터 제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왕국을 가로챈 반역가들을 물리쳐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돈 키호테는 최상의 예의를 갖추며 정중하게 공주를 일으켜 세우고
포옹하였다
돈 키호테는 공주의 간청이야말로 기사 수업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즉시 행동할 것을 승낙했던 것이다.
돈 키호테는 곧 로시란테에 올라타며
"공주를 구해 드리기 위하여 신의 이름을 걸고 출발하자"라고 말하였다.
이젠 공주가 된 도로데아는 도중에 흥미있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 주면서
돈 키호테를 인도하였다. 돈 키호테가 그 동안 획득하였던 전리품도 전부 잃고
고향 근처의 어느 마을에 왔을 때 또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는 가뭄이 심하여 비가 조금도 내리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기도하는 무리 고행하는 무리 같은 것을 조직하여 신의 자비에 의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날도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신성한 도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돈 키호테는 이것을 보고 이 괴상한 무리들을 무찌르는 것이 기사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로시란테를 채찍질하였다. 주위에서 그를 말릴 틈도 없었다. 산초만
"기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무슨 마귀에 홀렸기에 신에게 반역한단 말입니까?"
하고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돈 키호테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 중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녀를 유괴 당한 귀부인으로 생각하고 칼을 빼들고
돌진하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를 폭행자로 여기고 곤봉을 휘둘러 돈 키호테의 양
어깨를 심하게 구타하였으므로 불쌍하게도 그는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았다. 산초가 눈물을 흘리며
"오오 기사도의 꽃! 이렇게 쉽게 생애를 마치다니 무정하고 야속합니다" 하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울음 소리가 돈 키호테의 정신을 들게
하였다.
"산초야, 나를 부축해서 마술의 수레에 태워다오. 나는 로시란테를 탈 수 없을
것 같다" 하고 돈 키호테가 힘없이 말하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일행은 돈
키호테를 재빨리 붙들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창살로 만든 우리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 우리를 마차에 싣고 두 남녀와 작별한 다음 부목사와 이발사 산초는
돈 키호테를 데리고 6일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완전히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었는데 하인들과 조카딸은 돈
키호테가 아주 야위고 창백한 얼굴로 짐승같이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기사도 책을 저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초의 부인은 돈 키호테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이렇게 고마울데가 돈을 많이 벌어 오셨지요? 내게 줄 옷감은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 것은?" 하고 반겼으나 산초는
"다음에 또 한 번만 여행을 떠나면 나는 틀림없이 백작이나 총독이 되어서
돌아올 텐데!" 하고 큰소리만 치고 있었다.
돈 키호테의 기사 수업은 그가 우리 속에 갇히는 것으로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동안의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기사 수업의 길을
떠났다.
돈 키호테는 세 번째 집을 나서서 사라고사로 갔는데 그 읍내의 유명한 경연
대회에 참가하여 그의 용기와 지략에 걸맞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전혀 없으며 단지 한 의사가 전해 준
납으로 된 상자가 있었다. 그것은 낡은 성당을 개축할 때 깨어진 바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스페인어로 된 시가 고딕체로
쓰여진 양피지였고 거기에는 돈 키호테의 기상 천외한 모험과 둘씨네아의 미모
로시란테의 생김새 산초의 충직함과 돈 키호테의 무덤에 대한 내용이 찬양시와
함께 들어 있었다. 납 상자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의 첫 부분에는
라 만차의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용감한 돈 키호테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동정과
애도가 들어 있었다.
쿠오 바디스(Quo Vadis:1896)
해설
폴란드의 문호 솅키에비치의 역사 소설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며
이 작품으로 그는 1905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 작품의 부제는 "네로 시대의 이야기"이며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 치하에
유포될 당시 네로 황제의 크리스트교에 대한 박해를 배경으로 쓴 것이다.
퇴조기의 로마 사회의 퇴폐와 부패한 화려함을 묘사했다. 통치와 행정 기구의
절대 권력과 하나의 정신력 즉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대비시켜
크리스트교의 신앙이 로마의 신을 정복하여 가는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어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에필로그에서 사도 베드로가 폭군 네로의 박해에 견디지
못하여 로마를 벗어나 도피의 길을 떠날 때 압피아 국도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하고 묻자 그리스도가
대답하기를 '네가 로마를 버리었으니 나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 네가 나의 어린 양들을 버리었으니...'라고 대답하였다는 전설에서
연유한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은 역사상 실제의 인물이나 전형적인 로마 호민관 비니키우스와
그의 애인 리기아만은 작가가 상상해 낸 인물이다.
작가 약전
솅키에비치는 1846년 5월 5일 러시아령 폴란드의 비슬라강 델타 도시보다
가까운 볼라오크세이스카에서 대저택을 가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전통적이고
애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귀공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866년 그의 나이
20세에 바르샤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했다가 곧 문학과로 옮겨 철학 역사학
문헌학 문학 등을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1872년에는 처녀작 유머 소설 "내 고장의 예언자"를 발표하였다. 초기의
작품들은 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1876년 30세에는 바르샤바의
신문 가제타 폴스카의 해외 특파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조국의 신문에 통신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에게 미국은 환멸의 나라이었다.
귀국 후 "미국 여행에서의 편지"를 써서 '가제타 폴스카'지에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1905년은 작가 솅키에비치에게는 기쁨과 분노가 뒤얽힌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그는 59세의 나이로 '산문적 서사시의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는
칭송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러한 작가로서의 영광과는 달리 그가
사랑하는 조국의 마지막 독립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조국을 염려하는 열렬한 애국자였으며 폴란드의 민족 사상을 고무시킨
공적이 인정되어 '폴란드의 영웅'이라는 또 하나의 관사가 늘어났다.
줄거리
페트로니우스가 잠을 깬 것은 한낮이 다되어서였다. 그는 문무에 탁월한
풍류를 아는 사람이었다. 어젯밤 네로 황제가 주최한 향연에서 네로와 루칸
세네카를 상대로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토론을 하는데 함께
끼어 밤을 세웠다. 늦게 일어나 피로를 풀기 위해 황제 욕실보다 한층 풍취가
있는 정원의 욕실에 들어 갔었다.
욕탕 당번인 노예 두 명이 측백나무의 탁자에 기대고 있는 그를 감람 향유에
손을 담그게 하고 주물러 주고 있었다.
이 때 비니키우스가 소아시아에서 돌아와 주인을 만나겠다는 말을 전한다.
비니키우스는 페트로니우스 누나의 아들인데 코르블로 장군의 휘하에서
파르티아군과 싸우는 원정에 종군하다가 로마에 개선한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조카가 아름다운 용모와 씩씩한 기개를 지닌 우아한 성품을
가진 전형적인 로마 무관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누구보다도 비니키우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비니키우스가 이 곳을 찾아온 것은 귀국의 인사만이 아니었으며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출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로마와 리지아 족과의
전쟁에서 불모가 되어 지금은 로마의 정신 플라우티우스의 집에서 양녀로 있는
리지아 족의 공주에게 반했기 때문에 이 사랑을 이루고 싶어 외숙부의 힘을
빌리고 싶었던 까닭이다.
"저는 파르티아 군의 화살 끝에는 가벼운 상처도 입지 않고 돌아왔으나 사랑의
여신이 쏜 화살에 맞아 견딜 수 없어 외숙의 힘을 빌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
두 사람은 욕실에 속해 있는 기름 바르는 방에 들어가 부인 노예들의 손에서
시베리아 향유를 발랐다. 여신과 같이 아름다운 고스 출신의 여자 노예는 가운의
주름을 가지런히 하고 있었다.
"이건 참으로 잘 고르신 미녀들입니다"
비니키우스는 감탄하며 아름다운 노예를 바라보았다
"나는 양보다도 질을 취한다. 나의 집에 수용된 노예는 400이 넘지만 빨강
수염도 이 이상의 미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
페트로니우스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빨강 수염은 포악한 네로 황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형과 아내를 죽이고 어머니까지 죽인 폭군이다. 궁중에서 무엇이고 그에게
충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페트로니우스 한 사람뿐이다.
비니키우스는 전선에서 돌아오다 낙마하여 팔을 다쳤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플라우티우스 장군에게 발견되어 그의 집에서 친절한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정원의 샘터에서 비너스가 솟아 오른 듯한 처녀가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몸이 투명하게 비치는 듯이 아름답게 보였으므로
환영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 여자가 노예라면 사면 되지 않느냐?"
"노예는 아닙니다. 볼모로 잡혀 온 리지아 족장의 딸인데 플라우티우스의
아내가 된 폼포니아가 양녀로 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여자가 노예가 아니라고 해도 양친이 없고 플라우티우스의 가족이 되어
있으면 플라우티우스가 너에게 그녀를 줄 마음이 있으면 되겠지 내가 힘써 보자.
너는 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해 보았느냐?"
비니키우스는 자신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출발하던 전날 밤 송별 만찬에서 리기아를 만났으나 그 때는 말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만난 것이 그 샘터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숨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그 곳을 떠나야겠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도무지 나오질 않았고 그
곳에서의 고통이 다른 곳에서의 환락보다도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갈대로 모래 위에 무엇인가를 그려
놓고 가버렸습니다"
"무엇을 그렸지?"
"물고기였습니다. 자기의 혈관에는 물고기와 같은 찬 피가 흐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이튿날 오후 두 사람은 플라우티우스의 집으로 방문하였다.
페트로니우스는 플라우티우스를 고지식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모르는 무관일
것이라고 내심 경멸하고 있었으나 그의 집은 소박하고 취미가 고상한 구조로
장식되어 있었으므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
페트로니우스는 극히 정중하고 품위 있게 비니키우스가 이 집에서 받은 후대에
대한 답례를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네로 황제의 신임 받는 말벗이고 또한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는 별칭을 지닌 귀인의 방문에 당황하고 있던 노장군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 여러 가지 한담을 나눈 후 그들을 정원으로
안내하였다.
정원에서는 그의 아들 아울루스와 리기아가 유쾌하게 공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비니키우스도 한축 끼어 공을 던지자 리기아가 손을 높이 들어 받았다. 그
사이에 페트로니우스는 리기아를 자세히 관찰하였는데 그녀의 완벽한 미모에
그도 탄복하였다.
투명하고 맑은 장미빛을 띤 얼굴 깊은 바다와 같이 푸른 눈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호박 빛깔의 머리 탐스럽고 품위 있는 어깨며 부드러운 선을 이루고
있는 몸매 페트로니우스는 예술가의 안목으로 리기아의 아름다움을 경탄했다.
이 처녀의 상을 세우고 그것을 봄이라고 적어도 어색하지 않겠다고 느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비니키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에게 좋은 수가 있다. 며칠 후에 아름다운 리기아가 너의 집에서 곡물의
신이 주는 음식을 먹고 있게 될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교묘한 말솜씨로 네로를 설복하여 3일 후 플라우티우스의
양녀로 있는 리기아를 네로의 휘하에 있게 하며 그녀를 비니키우스에게
양도하도록 손을 써놓았다. 플라우티우스와 그의 아내 폼포니아는 리기아를
폭군이며 위험한 네로에게 보낸다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리기아는 폼포니아의 가슴에 안겨서 슬피 울었다. 자기를 데려가는 이유를
몰랐으나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충성이 지국하고 힘이 엄청난 거인 우르수스는 리기아 공주가 볼모로 잡혀
왔을 때 따라온 노예였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이며 리기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있었다.
리기아는 페트로니우스의 계획으로 네로의 해방 노예인 악테에게 보내졌다.
악테는 전에 네로 황제의 애첩이었다. 한때 그녀의 앞에서는 로마에 있는
원로원들도 머리를 숙였는데 선량한 그녀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았다.
네로의 총애가 사라진 후에도 궁중에 머물러 있으며 네로의 충실한 시녀로서
때때로 주연에도 나가게 되어 있었다.
오늘은 향연의 날이며 리기아도 참석하게 되었다. 향연의 자리는 타락한
향락이 난무하는 것을 리기아는 알고 있었다.
리기아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오욕의 구덩이에서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리기아는
향연의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악테는 네로가 화를 내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만일 수치를 당하거나 죽음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 때에는 당신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해요. 처음부터 위험을 당할 필요는 없지요. 무자비한
네로를 성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악테는 자기만이 쓰는 화장실로 리기아를 데리고 들어가서 기름을 발라 주고
옷을 입혀 주었다. 머리에는 금가루를 뿌려 주었다.
"리기아 당신은 폼피아 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요"
악테는 리기아를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연회는 말할 수 없이 화려했다. 채색한 가운을 입고 덧신에 반달 수를 붙인
원로 의관을 위시하여 유명한 귀족 예술가와 분장을 한 귀부인들이 별과 같이
앉아 있었다.
악테는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의 성질과 몸가짐까지도
설명하며 편안히 마음먹으라고 했다. 리기아는 겁이 나서 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초청객들은 그칠 사이 없이 들어왔다. 황제의 노예들과 근위병도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리기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아름다운 두 볼이 붉어졌다. 원주
사이로 비니키우스와 페트로니우스가 나타났다. 흰 옷을 입은 신관과 같이
아름답고 고상한 두 사람은 사람이 없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 중에서
비니키우스를 발견하자 리기아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비니키우스를 만나
이야기해 보고 싶은 마음이 그녀의 공포를 몰아냈다.
"안녕하셨소. 아름다운 분이시여!"
리기아가 돌아보니 비니키우스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덧옷을 벗은 그는
용감한 전사답게 근육이 늠름하였으며 반달을 그린 듯한 눈썹과 서늘한 눈
단정한 얼굴이 수려했다.
"안녕하셨어요. 비니키우스 님"
리기아는 자기를 왜 이런 곳에 데리고 왔는지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궁성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무섭다면 이 곳을 벗어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리기아는 비니키우스의 친절이 고마웠다.
이 때 네로는 그의 시를 읊으라는 간청을 듣고 폼피아를 나오게 하였다.
그녀는 자수정 빛 옷을 입은 눈부신 여인이었는데 리기아는 지금까지 폼피아와
같은 미인을 본 일이 없었다.
흥분되어 있던 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폼피아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녀와 비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무대 위에는 광대 한 패가 음탕한 장난을 하여 보인다. 연회의 밖으로 나온
비니키우스는 리기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리기아 키스해 주시오. 나는 기다릴 수 없소. 내일 밤에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겠으나 나는 내일 밤까지 참을 수가 없소. 어서 당신의 입술을
나에게 주시오"
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리기아는 그리스도의 열렬한 신앙자였기 때문에 그의 추한 모습을 보고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리기아는 힘껏 저항하며 용서를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다시 리기아를 끌어안아 키스를 하려 했다. 그때 우르수스가
나타났다. 그는 무서운 힘으로 비니키우스를 나뭇잎 다루듯이 옆으로 밀쳐
버렸다.
우르수스를 따라 나오게 된 리기아는 플라우티스의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악테에게 호소했다. 악테는 만약 리기아가 궁전을 탈출하면 플라우티스와
폼포니아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되고 리기아는 궁성으로 다시 붙잡혀 오게 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비니키우스의 집으로 따라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하였다.
"궁성은 당신에게 비니키우스의 집보다 위험합니다"
악테는 리기아에게 비니키우스의 아내가 되기를 암시했다.
"아닙니다. 나는 이 곳에 머물러 있지 않겠습니다. 물론 비니키우스의 집에도
가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비니키우스가 싫습니까?"
"나는 그가 싫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신자입니다"
리기아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우르수스도 그녀를 따라 아침 햇살이
창에 비칠 때까지 기도하였다. 리기아는 퇴폐한 궁중의 공기 속에 한시라도
머물러 있기 싫었다. 그녀는 플라우티우스 집에 화를 끼치지 않도록
비니키우스가 데리러 올 때를 이용하여 우르수스를 따라 로마 밖으로 도망하려
결심하였다. 어디를 가나 우르수스만은 자기를 구할 수 있으며 우르수스
이외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밤이 점점 가까워졌다. 리기아는 악테와 이별하는 것을 슬퍼하였다. 어둠
속에는 우르수스가 대기하고 있다. 그녀는 마음이 안정되었다. 악테는 자기가
지니고 있던 보석을 아낌없이 꺼내어 리기아의 옷섶에 꿰매 넣어 주고 도망할
때에 팔아 쓰라고 하였다.
비니키우스로부터 리기아를 호송할 사람이 도착했다.
"갑시다"
리기아는 조용히 말하고 악테를 껴안았다.
비니키우스가 보낸 가마는 수십 명의 노예가 호위하고 있었다. 리기아를
도중에서 빼앗겼다는 말을 들은 비니키우스의 안색은 노여움으로 뒤덮였다.
분노는 머리끝까지 타올라 그녀를 찾기 위해 노예를 팔방으로 풀어 놓고 자신도
말을 달려 찾아보았다. 아무 소득이 없었다.
비탄에 빠진 비니키우스를 본 페트로니우스는 조카의 연정을 동정하여 로마에
물샐 틈 없는 비밀 수사망을 쳤다. 어느 날 여자 노예인 에우니케가
페트로니우스에게 말했다.
"킬로 키로니데스라는 지혜자를 찾아보면 알 것입니다"
그는 사이비 철학자인데 리기아가 비니키우스 앞에 물고기를 그렸다면 반드시
그는 새로운 신을 믿는 신자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리스 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이 다섯 단어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맞춰 보면
물고기라는 단어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 사이에 쓰는 비밀 암호였다.
네로 황제의 어거스트 왕녀가 병으로 죽었다. 제사나 의사의 치료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병이 난 시기는 리기아를 궁성에서 만나 때였다. 그녀의 앞에서
왕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었다. 알려지지도 않은 이상한 신을 믿는다는 말과
함께 리기아가 왕녀에게 마법을 걸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왕녀의 병은 리기아가
마법을 걸었다는 말이 퍼졌다.
페트로니우스는 리기아의 실종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일 먼저 플라우티우스의 집이 화를 입게 될 것이고 자기들도 궁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혜가 많은 페트로니우스는 사랑하는 왕녀를 잃은 비탄을
잊도록 황제에게 안티움으로 여행할 것을 권하였다. 네로도 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낯선 땅에서 죽은 딸을 위한 송가를 짓고 작곡도 하자"
페트로니우스는 네로가 로마 밖으로 나가 있는 사이에 리기아를 찾아내어
안전한 장소로 옮기기로 계획을 세웠다.
"너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같이 사랑에서도 승리자가 되어라"
그는 사랑하는 조카 비니키우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어느 날 킬로가 기독교 신자들이 모이는 설교회에 리기아가 우르수스를 데리고
출석한다는 정보를 전하자 비니키우스는 이 킬로에게 많은 사례금을 주고 안내를
받기로 했다. 오늘 저녁만은 반드시 리기아를 만나고 그녀를 자기 곁에 둘 것을
생각하며 비니키우스의 마음은 기쁨에 차 있었다.
밤이 되자 그들은 로마에서도 제일 가는 투기사 크로톤을 데리고 갔다.
살라리아 가도의 묘지를 향해서 가는 검은 그림자들이 어둠 속에서 행렬을
이루며 가고 있었다. 군중은 시가로부터 떨어진 공동 묘지에서 성가를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예배를 보는 것이었다. 비니키우스는 이 엄숙한
분위기에 감동되어 서 있었다.
"베드로, 베드로"
군중은 중얼거리며 모두 꿇어 앉았다. 베드로는 어진 어버이와도 같이
부드럽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호사스런 생활을 버리시오. 청빈과 순결과 진리를 사랑하시오. 불신과 사기와
비방을 삼가하시오. 그대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베드로는 현세에 있어서의 평화가 아니고 사후에 그리스도와 영구히 삶을 같이
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을 듣고 있는 사이에 비니키우스는 그녀를 붙잡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잡기는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요한과 나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이틀 밤을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에 주는 소생하여 우리들에게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비니키우스는 꿈결같은 마음으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킬로가
옷소매를 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와 같은 분이 계십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리기아가 서 있었다. 그러나 비니키우스는 이 곳에서
리기아를 붙들게 되면 일대 소동이 일어날 것만 같아 리기아를 그의 집 앞에서
납치하려고 크로톤을 데리고 뒤를 밟았다.
리기아의 집 문 앞에는 우르수스가 지키고 서 있어서 덤벼드는 크로톤을
강철과 같은 양팔로 꽉 눌러 버리고 말았다. 비니키우스는 날쌔게 안으로 들어가
리기아를 안고 뜰로 나왔다. 우르수스는 맥이 풀어진 인형과 같은 크로톤을 손에
들고 있었으나 즉시 비니키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죽이지 말아요"
비니키우스는 리기아가 외치는 소리를 꿈같이 들었을 뿐 온 빛깔이 두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니키우스는 심한 통증으로 눈을 떴다. 우르수스는 리기아를 지키기 위해
비니키우스를 죽일 수 있었으나 리기아의 만류로 부상만 입히고 말았다.
비니키우스는 기독교 신자인 의사 글라우코스의 치료와 리기아의 정성 어린
산호로 건강을 회복했으며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기독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말씀은 특히 그의 마음을 감화시켰으며 또한 달소의 바울의 웅변은
한마디 한마디가 몸 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리기아도 점차 비니키우스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집의 주인은
완고한 기독교도로서 리기아가 그리스도 아닌 지상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몹시
노하며 그녀를 심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리기아의 사랑을 축복해 주었다.
"당신의 사랑에 죄는 없습니다"
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통해서 기독교에 접함으로 내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향락으로 지내오던 생활은 덧없고 추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숭배해 마지않던 외삼촌 페트로니우스의 생활을
연민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즈음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대향연이 아그리파 호수에서 벌어졌다. 이 날 밤
비니키우스는 복면을 한 여인에게 유혹당했으니 복면을 한 여인은 네로의 황후
폼피아였다. 오직 페트로니우스의 기지로 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안티움에 체재한 네로는 아침부터 밤까지 시가를 음송하고 운율을 감상했다.
깊은 교양과 섬세한 취미와 감정을 지닌 페트로니우스는 네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네로의 변덕은 예측할 수 없으니 페트로니우스에 대한 총애도 언제
거두어질지 모른다. 그는 조카 비니키우스의 안전을 네로의 환심을 계속 사 둘
필요가 있었다.
네로는 예술적 기질이 있으나 성격 파탄자로서 망상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네로는 안티움에서 시를 짓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시가의 예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가 있다. 도리어 그것은
필요하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대도시의 불타오르는 장면을 본 일이 없다"
교활하고 간계에 능한 근위 총독 티겔리누스는 페트로니우스를 시기하고
어떻게 하든 네로의 신임을 독차지하려고 꾀하고 있다.
"황제님이 한 마디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안티움을 불바다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안티움은 아무일 없이 향연을 벌이며 나날을 보냈다.
"황제님 로마에 불이 났습니다. 시가의 대부분이 불 속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복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로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오 신이여! 불에 싸인 도시를 보고 나의 트로이의 노래를 짓자. 곧
출발하자. 불이 꺼지기 전에..."
로마의 대화재 멸망을 향해 치닫는 로마는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으니
그에 박차를 가하듯 과대 망상가이자 폭군인 네로는 파멸을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지 않은가?
로마의 참상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로마의 시민들 질서도 없고 폭력이 들끓었다. 타인의 집을 빼앗는 사람 젊은
부인을 납치해 가는 사나이 쌓이고 쌓인 압박과 학정에 대한 원한은 광란으로
변하여 시가는 절망과 공포 신음 광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로마의 화재는 황제가
시상을 얻기 위하여 방화한 것이라는 유언 비어가 어느덧 군중 사이를 떠돌기
시작했고 군중은 네로와 폼피아를 죽이라고 아우성쳤다.
네로는 밤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는 7일 동안 불탄 후 잿더미가 되었으나
티벨 강 건너편의 가난한 부락은 재화를 면하였다.
네로 황제에 대한 로마 시민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네로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비겁한 황제는 이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군중의 원성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누구를 원성의 제물로 할
것인가? 티겔리누스는 기독교도를 생각해 냈다. 로마의 신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무리들 당시 기독교는 로마의 천민들과 양심적인 귀족층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로마인의 가치관으로 볼 때 기독교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무리들이었다.
네로와 티겔리누스는 군중들에게 향락을 제공하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피의
향연을 계획했다. 굶주린 사자 들소와 씨름을 할 장사로 우르수스를 지목했다.
미녀와 야수 미녀를 지키기 위한 노예의 목숨을 건 싸움 향연에 굶주린 로마
시민에게는 최고의 오락이 될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비니키우스와 리기아를 살리기 위해 황제에게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나 도리어 네로를 불쾌하게 할 뿐이었다. 위험은 페트로니우스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비니키우스는 사랑하는 리기아가 체포된 뒤로는 밤낮을 번민하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워 베드로의 발 밑에 꿇어 앉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 고통을 전하며 지금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말하니 그 말에 위안을
얻어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현세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원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원형 경기장 리기아와
우르수스의 사형 집행자는 들소였다. 비니키우스는 애인의 최후를 보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이윽고 우르수스가 경기장에 나타났다. 그는 거상과도 같이 보였다. 넓은
로마에서도 그처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었으므로
관중은 환호성을 올렸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창살문이 열리자 거대하고 억센
들소가 질풍처럼 뛰어들어왔다. 그런데 그 두 뿔 사이에는 옷을 벗은 여자가
매어 있었다. 그 여자는 기절해 있었다.
'리기아다! 주여 기적을'
비니키우스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고 넋이 나간 듯 '믿습니다 믿습니다'만을
반복했다. 페트로니우스가 토가로 그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신자답게 유순하고
평화롭게 죽으려고 결심하였던 우르수스는 이 광경을 보자 눈에 불을 켠
사람처럼 뛰어들어 날뛰는 야수를 향해 덤벼들어 양손으로 힘껏 황소의 뿔을
잡아 눌렀다. 경기장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사람과 소의 필사의 투쟁!
이와 같이 장엄하고 치열한 광경은 로마가 생긴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우르수스의 양쪽 발은 발목까지 모래 속으로 들어갔고 그의 등은 활처럼
휘어지고 머리는 우뚝 솟은 양쪽 어깨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온 몸의 근육은
터질 듯이 불거졌다. 사람과 황소는 꼼짝도 않는다. 그러나 양쪽은 죽을 힘을
다하여 대결하고 있었다. 극단의 긴장이었다.
돌연 괴상스러운 신음 소리가 장내를 진동했다. 관중은 우르수스가 거대한
들소의 머리를 껴안은 것을 보았다. 야수의 신음 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들소의 머리는 점점 틀어져서 우둑우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머리가 꺾어져서 땅 위에 쿵 하고 넘어졌다. 그 순간 거인은 들소의 뿔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자기의 주인인 리기아를 두 팔로 안아 내렸다. 우르수스는
처절한 몸짓으로 관중을 향해 그녀를 들어 보였다. '나의 아가씨를 살려 주시오'
우르수스의 몸짓은 그것이었다.
이것을 본 관중은 우르수스의 행위에 감격하여 그를 용서하고 희생자인 가련한
공주를 구하라고 외치며 미칠 듯이 소리질렀다. 장내의 건물은 들끓는 소리로
진동하였다. 소리는 그대로 황제의 포학과 잔인에 대한 저주로 변해 갔다.
비니키우스도 경기장에 뛰어내리며
"불쌍한 희생자를 보호하라!"고 호소하였다. 수천의 군중들은 일제히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군중들은 분노하여
"빨강 수염! 어미 죽인 놈! 아내 죽인 놈! 방화범을 투기장으로 끌어
내려라!" 하고 외쳤다. 투기장에서는 군중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네로는 드디어 관중의 뜻에 따라 그들을 살려 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로마의 영웅 비니키우스와 아름다운 리기아를 축복하자. 괴력 우르수스 만세!"
외치는 소리와 함께 뇌성과도 같은 칭찬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와 같이
영웅을 숭배하는 로마 시민들의 열광적인 찬탄으로 기독교인 리기아와
우르수스는 목숨을 구했다.
리기아가 구원된 것은 체포를 면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주의 영광의 뚜렷함을
믿게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하여 살아 남은 신도들을 또다시 투옥한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베드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은 비니키우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
로마를 떠날 것을 권유하였다. 베드로는 듣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신의 가르침을
위하여 로마에 남아 있으려 하였다. 그러나 비니키우스의 권유를 물리친
베드로도 폭군 네로의 절대 권력 아래에 짓밟힌 그리스도의 비참한 자취를
돌아보고 이 위험으로부터 살아 남아 그리스도의 뜻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자들의 권유에 못 이겨 일단 로마로부터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동이 틀 무렵 칸파니아를 향하여 남몰래 걸어가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베드로 또 한 사람은 그를 따르는 보조 소년 나자렛이었다. 그들은
박해받은 형제들을 남겨 두고 로마를 떠나는 것이다. 길가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다. 적막한 거리에는 두 사람이 신은 나막신의 딸그락거리는
소리만 낮게 울릴 뿐이었다.
이 때에 금빛의 황홀한 광채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베드로는 발을 멈추고
나자렛에게 물었다.
"저 빛이 무엇일까?"
"저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말하였다.
"누군가 빛 가운데로 걸어온다"
베드로는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앞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놀라움과 기쁨과 황홀의 빛이 나타났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펴며 부르짖었다.
"오오 그리스도! 오오 주여!" 하고 땅에 얼굴을 댔다. 늙은 사도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계속하였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나자렛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베드로의
귀에는 슬프고 맑은 소리가 들렸다.
"네가 나의 양 떼를 버리고 가니 나는 로마로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겠다"
베드로는 말없이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주의 말씀에 힘을 얻은 베드로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쥐어 들고 걸음을 돌렸다.
"로마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와 전도를 계속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불어났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전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해 오더라도 살아 있는
전리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진리의 승리가 시작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의 최후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두
사도는 체포되어 바티칸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삶의 최후에
직면하자 수많은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이 세상의 축복을 빌면서 기쁘게 형을
받았다.
"나는 마침내 성스러운 싸움에서 이겼고 신앙의 길을 지키었으니 정의의 관은
나의 머리 위에 놓일 것이다"
베드로는 만족한 듯이 숨을 거두었다.
비니키우스와 리기아는 주의 은총을 찬양하며 더욱 신앙을 깊이 하고 고요한
시실리아의 영지에 양부모인 플라우티우스 장군과 폼포니아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스 이래의 미적 생활과 고전적 정신의 최후의 풍류가였던 페트로니우스는
네로로부터 죽음을 당하기 전에 친구들을 불러서 성대한 향연을 벌이고 그들에게
이별을 고한 다음 네로를 비판하는 시를 읊고 팔의 동맥을 끊어 그를 사랑하는
여자 노예 에우니케와 함께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쾌락주의자다운 최후를 마쳤다.
네로의 변덕은 더욱 심해져 아무런 까닭도 없이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자기의
아내 폼피아까지도 죽였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빈덱스와 갈리아 군단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네로는 코웃음만 치면서 여행길에서도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네로는 여전히 극장과 음악에 파묻혀 살았고 광기는 극에 달했다.
네로의 측근자들은 그가 반란군을 진압할 생각을 않고 마치 역사에 없었던
예술가로 자처하는 모습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황제가 사실은
몹시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시구를 생각하는 듯 태연한 척하며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그의 행동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혼란해졌다. 수만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가는 또 허물어지곤 하였다. 때때로 그는 눈앞에 다가오는
위험을 도피할 결심으로 파리와 수금을 수레에 싣게 하고 젊은 여자 노예들을
동원하여 낭자군을 만드는 한편 동양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게 다시 로마로
회군하라는 명령을 내릴까도 생각했다. 또 어떤 때는 반란군을 전쟁으로써가
아니라 노래로써 정복해 보리라는 생각도 했다. 반란군이 노래를 듣고 항복하는
광경을 상상하고서 그는 혼자서 마음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되면 그 놈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앞에 모여들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들 앞에서 개선 송가를
부르리라. 이것은 아마 후세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 자빠질 획기적인
일일 것이라고 그는 공상했다. 또 다시 피비린내가 그리워지는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나는 이집트만으로도 만족하겠다'하고 갑자기 겸손해지기도 했다.
이럴 때면 그에게 예루살렘 정복까지도 약속해 준 점쟁이가 생각났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한낱 유랑 시인이 되어 하루의 끼니를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생각하고 전세계의 군주로서가 아니라 대시인으로서
온 겨레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을 상상하고 혼자 도취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는 고민하고 노심 초사하고 악기를 타고 계획을 바꾸고 시구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날을 보냈다. 온 세상이 어리석고 텅 빈 무서운 꿈처럼 보였다.
그의 삶은 과대한 표현, 애처러운 시구, 신음과 눈물, 그리고 피의 뭉치나 다름
없었다.
로마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혼란해졌다. 현실은 이제 그를 위협하기에
충분할만큼 변화되어 있었다.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오래 전부터
있어 온 터였고 네로의 비현실적인 광기는 반란군의 계획에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로마 시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디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 아내, 형제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
네로는 죽음을 절감했으나 광기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아, 위대한 예술가의 종말이란 이런 것인가?"
이제 누구도 네로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해방된 종들은 이제는 황제가 죽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듣고 네로는 자기를 묻을 무덤을 파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기의
몸에 꼭 알맞게 무덤을 파라고 자기 자신이 흙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곡괭이질을 할 적마다 흙이 튀는 것을 보고 네로는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살찐 그 뚱뚱한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이 흘렀다. 그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비극 배우 같은 음조를 띠면서 그가 죽어야
할 때는 아직도 멀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시귀를 중얼거리더니 마침내는
자기를 불태워 달라고 소리 질렀다.
그 때 밖에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백인 대장이 부하를 거느리고 네로의
목을 가지러 왔다.
"자아 빨리! 빨리 하시죠!" 하고 해방 노예는 서둘렀다. 네로는 단도를 꺼내어
떨리는 손으로 자기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 손으로 자기의 목을 찔릴 만한 용기가 없었다. 옆에
있던 에파프로디테가 네로를 부축하여 자기 손으로 그 단도를 눌렀다. 단도는
깊숙히 그 자루까지 목으로 들어갔다. 네로의 두 눈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커다랗고 원망스럽고 그리고 공포로 가득 찬 눈알이었다.
"사형이 집행 유예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하고 백인
대장은 안으로 들어오자 헐레벌떡거리면서 소리쳤다.
"이젠 다 늦었다! 아아 너의 그 충성!" 하고 네로는 숨가쁜 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뚱뚱한 목에서 피가 솟아 정원에 떨어졌다. 그는 두 다리를 비비꼬다니
드디어 최후의 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 끝까지 남편에게 충실한 악테는 네로의 시체를 값진 보자기에 싸서
향유에 적신 장작으로 화장을 했다.
이리하여 네로는 폭풍처럼 화재처럼 전쟁처럼 그리고 무서운 전염병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 바티칸 언덕 위에 있는 베드로의 예배당인 로마를 지배했다.
옛 카페나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도 조그마한 예배당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거의 다 지워져 보이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인형의 집(Et dukkehjem:1879)
해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의 걸작으로 사회극 3막물인 "인형의 집"은
1879년 5월 2일에서 8월 3일에 걸쳐 완성되어 같은 해 코펜하겐의 길덴달과
레클람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1879년 12월 21일 코펜하겐의
왕립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입센을 일양 세계적 작가가 되게 한 문제작으로 발표 당시 이 작품의 예술적
평가를 압도할 만큼 찬부 양론으로 나누어져서 사회에 여러 가지 사건을
야기시켰다. 작품에 대한 비난 모작 개작 노라에 대한 모의 재판 등
사교계에서는 금지된 화제로까지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어떤 파티의 초대장에는
'노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말 것'이라는 말이 써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의
문에는 '"인형의 집"에 대해서는 논쟁을 금함'이라고 씌어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 작품에서 취급된 테마 여성 해방 문제는 오늘날은 상식화된 것이지만
당시는 작가 자신도 예기하지 못했던 논란을 일으켰으며 사실적 대화와 치밀한
무대 기교와 아울러 19세기 이래 근대 극의 운동에 선명한 선을 그은 역사적
명작이 되었다.
여주인공 노라는 우연한 사건에서 '수천 년 옛날부터 여성은 자식을 낳아서
기르듯이 본능적이며 맹목적으로 육체와 영혼을 모조리 남서에게 바쳐 왔지만
남자는 평생 여성이 바치는 순결한 애정을 충분히 향락하면서도 법률이나 체면의
앞에서는 어제의 향락주의자가 돌변하여 군자처럼 행동하는 비겁하고도 교활한
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사회에서 여성이란 결국 남성을 위한 한낱 인형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깨닫는다. 노라는 이러한 불합리한 사실을 각성하고 참된
인간 의무를 다하고 진실한 생활을 찾기 위하여 남편과 세 자식들을 버리고
결연히 10년 가까이 살아 온 가정을 떠나게 된다.
"인형의 집"은 입센의 생존시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던 여성 해방 문제에 가장
중요한 문학적 기여를 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형의 집"이 코펜하겐
오슬로 뮌헨 베를린 빈 등 유럽 각지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 이
드라마는 세인들의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작가 약전
1828년 3월 20일 입센은 노르웨이의 스키인에서 출생하였다. 양친은 크누트
입센과 마리헨 입센으로 중류 이상의 가정이었으며 가족 중 많은 사람이 정치에
영향력이 있었다.
8세 되던 해에 크누트 입센이 파산하면서 갑작스럽게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6세에 가족이 흩어져 그림스타드의 약제사의 견습 직원이 되었다. 매우
불행한 시기였다. 적은 봉급과 형편 없는 작업 조건으로 고독한 생활을 했으며
이 때부터 어둡고 반항적인 기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1848년 유럽을 휩쓸고 간 2월 혁명의 분위기에 젖어서 분노와 정열에
휩싸인다. 이 때 그는 대학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 보조 목사와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는데 라틴어의 명문집 중에 키케로의 '카틸리네'를 읽은 것이 동기가 되어
처녀작으로 운문극 "카틸리네(비열한 반역자)"를 발표하였다.
"카틸리네"는 오늘날 문예 호사가들의 수집 진본의 하나이나 발표 당시에는
극장과 출판업자가 원고를 인수하지 않아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자기의 이름을
숨기고 자비로 출판해 준 작품이다.
21세에 시 대학 입학의 지망과 다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여비를
만들어 수도 키리스차니아로 갔다. 이 곳에서 일생 동안의 경쟁자였던 뵈른손과
빈예 등 노르웨이 문단의 명성들로서 빛난 사람들과 동창생이 되었던 것은
기연이었다.
의학 시험에는 실패하고 친구인 쉬레류토의 하숙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사극 "용사의 무덤"이 우연히 크리스차이나 극장의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일과 전후하여 젊은 친구들과 정치 문예의 주간 잡지를
발행한 일이 인연이 되어 1851년 24세에는 베르겐 시에 신설된 노르웨이 극장의
전속 작가 겸 무대 감독으로 초빙 받았다.
이 극장은 덴마크의 사상과 문예적 영향에서 독립하여 노르웨이의 신문학
운동의 기초를 닦으려는 시도로 설립된 것이다. 그는 이듬해 4월에 파견되어
덴마크 독일 등의 극장을 견학하고 새로운 영향을 받고 귀국하였다.
1858년 6월 18일 수산나 토레센과 결혼했다. 수산나 부인은 시인의 좋은
내조자였으며 여성 해방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영향을 미쳤다.
1864년 4월 고국을 떠났다. 65세에 귀국할 때까지 28년의 긴 외국 유랑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남부 유럽 로마의 교외에 기거하면서 "브란드"를 썼다. 이
작품은 입센이 자기 나라의 문화를 비평한 것이다. 안이한 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노르웨이 국민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으며 탄핵이었다. 이 작품이 본국에 전해져
이 천재에 대한 경탄의 소리는 북유럽의 사회를 휩쓸었다.
노르웨이의 국회는 시인 수당으로 연금을 그에게 지급할 것을 의결하였으므로
그의 생활은 겨우 여유를 찾게 되었다. 1868년에는 로마를 떠나 독일로
이주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번갈아 거주하며 1879년 "인형의 집"을 출판하였다. "인형의
집" 발표 이후 입센은 세계적 존재가 되고 발표되는 작품들은 모두 가치 있는
걸작이었다. 1891년 63세가 되던 해에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으나 근대극의 선구이며 유럽 연극계의 왕자로서의 영예로 빛났다.
그 후 입센은 크리스차니아에 영주하면서 약 10년 간 4편의 희곡을 내 놓고
병상에 눕게 되었다.
1898년에 국민적으로 70세 생일을 축하받았으며 다음 해 그의 동상이 국립
극장 앞에 건립되었다.
1906년 5월 23일 입센은 79세의 고령으로 동맥 경화증을 일으켜 생애의 막을
내렸다.
줄거리
노라가 변호사인 헬머와 결혼한 것은 8년 전의 일이었다. 노라는 세 아이의
어머니였으나 명랑하고 아름다워서 헬머로부터 귀염을 받아 왔으며 노라 역시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다.
남편이 중한 병을 앓게 되자 남편이 질색할 것을 알면서도 전지 요양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크로그스타트라는 고리 대금업자에게서 1200프랑의 돈을 빌렸다.
그 당시 헬머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변호사였기 때문에 살림이
대단히 곤란하였다. 노라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는 비밀로 했다. 남편은 돈에
대해서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었으며 남에게 돈을 빌리는 따위의 일은 아주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헬머는 노라의 배려로 남쪽 지방으로 요양해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다.
불과 56년의 눈부신 활약 끝에 헬머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실업계에 뛰어들어
어느 은행의 중역으로 있게 되었다. 헬머의 가정은 어느 때나 봄날같이
행복했으며 노라는 언제나 자식들과 함께 종달새처럼 즐겁게 노래 부르며
뛰어다녔다.
노라의 불안은 순조로이 가라앉았다. 남편으로부터 넉넉한 용돈을 받아 절약해
모은 돈으로 빚을 청산할 작정이었다. 빚을 다 갚는 날 이 사실을 헬머에게
말해서 헬머가 자신에게 고마워하며 칭찬할 것이라는 즐거움을 상상하며
불편함을 참아갔다.
-제1막-
크리스마스 전날 노라는 기분이 좋은 듯 흥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아주 많은 물건 꾸러미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왔다. 돈에 인색한 헬머는
노라의 낭비벽을 꾸짖으면서도 변함없이 인형을 귀여워하듯 노라에게 애정을
보낸다. 잔소리를 하면서도 노라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까닭은
그가 새 해부터 은행장으로 추천되어 수입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노라는 남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자신들의 나아진 형편을 헬머에게 말하며
헬머의 잔소리를 묵살한다. 그러한 노라의 모습에는 단지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고 있다는 자랑의 빛이 엿보인다.
옛 친구인 린데 부인이 찾아왔다. 린데 부인은 늙은 어머니와 나이 어린
동생을 위하여 사랑하는 애인과 이별하고 부유한 사람과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였으나 3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늙은 어머니와 동생을 먹여 살리는 책임감이
강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도 죽고 아우도 다른 곳에 가 있게 되어 홀몸이
되자 쓸쓸하고 재미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린데 부인은 노라 남편의 은행에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다.
노라는 린데가 자기만 고생을 한 것같이 말하는 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취직의 일만은 쾌히 승낙하였다.
그러나 무심코 한 약속을 이면에 뜻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린데 부인의 방문에 이어 크로그스타트가 찾아왔다. 노라는 곧 환멸을 느꼈다.
그는 남편 은행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이며 노라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인데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았으나 지금은 헬머의 은행에 고용되어 사회에서
행세하고 있었다. 헬머는 크로그스타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그를
퇴직시키려 하고 있던 판이었다.
크로그스타트는 희망을 잃고 노라의 비밀을 먹이로 면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라의 문서 위조가 형법상의 범죄가 된다고 하면서 노라를 협박하고 노라에게
헬머의 마음을 돌리도록 압력을 주었다.
법률에 무지한 노라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문서 위조의 죄를 범했던 것이며
노라를 협박하기에는 충분한 무기였다.
노라는 외쳤다. 딸이 사경에 빠진 아버지께 염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 또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와 남편을 위하여 한 희생적 행위를
처벌하려는 법률 그것은 인륜을 벗어난 법률이라고 당시의 법률은 여성의 권리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노라는 만일 자신이 죄를 졌다면 그것은 남편의 생명을 위하여 한 일이나
남편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내를 용서하여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노라는 헬머에게 크로그스타트의 복직을
간청하였으나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크로그스타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오. 죄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남을 속이고 자신을 가장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구료. 자기의 이웃 사람
심지어는 마누라와 아이들에 대해서도 가면을 써야 하다니 이건 정말 끔찍스러운
일이오 노라. 일찍부터 타락해 버린 사람들 중 거의 모두가 거짓에 찬 좋지 못한
어머니를 갖고 있었소. 노라는 그런 자를 위해 어떤 일을 주선하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해 줘야겠소. 자, 노라"
헬머의 말은 도덕가의 설교에 지나지 않으나 그 말은 노라의 양심을 칼로
찌르는 듯이 들려 왔다.
제2막
같은 방 크리스마스 저녁
하루 사이에 노라의 심경은 눈에 띄일 만큼 변화했다. 그녀는 회의와 희망의
어둠 속에 시달리게 되었다.
남편이 무심코 한 말이지만 그녀가 받은 충격은 컸다. 그날부터 노라는
자식들을 딴 방에 옮겨 두고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의 도덕적 부패가
자녀들의 죄를 빚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위해서는 남편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기가 범한 과실의 책임은 자기 자신이
져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러기 위해서 어떠한 치욕이나 고통이라도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실이 폭로되어 노라의 위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될 때 남편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아마 헬머는 노라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노라는
생각한다.
'대개는 어떻게 될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을지라도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아직 흥미가 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보여 줄 것인가?
중대한 위기에 처하는 아내의 생애에서 보잘것없는 욕망을 떠나 진실과 자유의
정신에서 보여 주는 남편의 희생적 행동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기적일 것이다. 그
기적을 나는 보고 싶다'
'그리하여 깨끗이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의 길로 들어서 진실되게
살아가야 한다'
크로그스타트는 드디어 면직되었다. 오늘도 그는 찾아와서 사정 없이 노라를
협박하고 돌아갔다. 그가 불쌍하기도 하였다. 그는 은행에 취직한 것을 기회로
지금까지의 부정을 뉘우치고 사회적으로 갱생의 길로 나가려 하는데 버림을 받게
된다면 다시는 재생의 길이 없을 터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 은행에
복직할 수 있도록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음을 안 크로그스타트는
노라의 비밀을 폭로한 편지를 우편함 속에 넣고 가 버린다.
우편함의 열쇠는 헬머가 가지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노라는
크로그스타트의 협박에 대한 공포감은 사라졌다. 다만 사랑의 기적이 시작되기
전에는 비밀이 폭로되어서는 안 되었다.
노라로부터 사실을 알게 된 린데 부인은 크로그스타트를 설득하여 그 편지를
철회시키려고 한다. 그녀와 크로그스타트는 어떤 관계가 있는 듯 하였다. 편지는
헬머의 우편함에 이미 들어 있다. 헬머가 우편함을 열려 하자 노라는 타란테라의
춤 연습을 핑계로 그것을 중단시킨다.
"노라! 당신은 목숨을 걸고 춤추는 것 같아"
-제3막-
이튿날 밤 2층에서 가장 무도회가 열렸다. 린데 부인은 이 곳에서
크로그스타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크로그스타트와 린데 부인은 똑같은
생활의 파선자이다. 묵은 사랑의 잿더미 속에서 그들의 애정은 다시 타올랐다.
크로그스타트는 노라의 비밀을 폭로한 편지를 찾아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린데 부인은 이를 말리면서 언제까지나 부부 사이에 그러한 비밀을 감춰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니 이 기회에 알게 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생활의 기쁨을 얻은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밖으로 나간다.
"아무리 사는 것이 비참할지라도 살아가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노라의 옆 아파트에서 의사를 개업하고 있는 랑크가 곧잘하는 말이다.
랑크는 헬머의 옛 친구이다. 노라는 이 옆방 의사와 친히 지내는 터였다. 그는
아버지의 방탕한 사관 생활의 화를 입어 심한 음독 병으로 척추를 상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생활의 즐거움과는 등을 지고 무덤 속을 향하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행복이라곤 있을 수 없는 그에게 젊고 아름다운 노라는 비참한
생활에 비치는 따뜻하고 귀중한 빛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오늘 밤 노라의 발작적인 타란테라 광무를 보고 죽음의 직전에서도 취할
수 있었다. 랑크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약속대로 명함에다 검은
십자가를 그려 놓은 후 떠났다.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의 행로를 발견하여 손을
맞잡는 크로그스타트와 린데 숙명적인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감각의
향락을 추구했던 랑크. 이러한 남녀의 무리가 떠난 후 헬머와 노라는 마주
앉았다. 사랑의 기적이 나타나야 할 순서이다.
헬머는 크로그스타트의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노라가 기대하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라! 그대의 몸에 어떠한 위험한 일이 쏟아져 나의 생명과 재산을 내던져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으며 좋겠어"
헬머는 자주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은 헬머는 노라에게 거짓말쟁이니 위선자니 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노라에겐 집안 일이나 자식들도 맡겨 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체면도 있고 하니 표면상의 부부 관계는 이대로 두고
좋지 못한 이 비밀만은 언제까지나 두 사람 사이에 감춰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적을 믿어오던 노라는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크로그스타트로부터 두 번째 편지가 왔다. 그 편지에는 자기는 다행히 안정된
생활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으며 차용 증서까지도 들어 있었다.
그가 오래 전부터 사모하고 있었던 린데 부인이 그의 구혼을 승락함으로써
크로그스타트의 마음을 돌려 놓았던 것이다.
자신의 명예에만 급급했던 헬머는 금시에 태도가 달라졌다.
"아아 노라! 이젠 살았어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의 과실도 다 용서해 주지"
남편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노라의 마음은 무거웠다.
비겁하고 경박하며 이기적인 남편의 정체는 완전히 폭로된 셈이다. 8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그녀에게는 무의미한 장난이었으며 거짓이었다. 노라는 용서한다는
남편의 말에 대해 쌀쌀하게 응답했다.
"용서해 줘서 고맙군요"
노라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는다. 헬머가 뒤따라와 노라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인형의 옷을 벗습니다"
노라는 간소한 여행복으로 갈아 입은 후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온다. 노라는
남편을 조용히 앉게 한 후 자기의 결의를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까지 8년 동안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즐거웠을 뿐입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형을 사랑한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어릴 때는
아버지의 집에서 인형과 같은 딸로 자라 온 것과 같이 당신의 집에 와서는 인형
아내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식들도 또한 우리들의 인형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들은 인형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부부관계이었으며 나는 이제 내가
아내이고 어머니인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당신도 나와 같이 한
인간이라는 것을 믿는 것 뿐입니다. 나는 이제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진정한 인간으로 생활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노라는 진실한 생활을 찾기 위하여 정든 가정을 버리려는 것이다.
자기의 의사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으로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그녀의 가슴
속에 처음으로 격렬한 자기 혁명의 폭풍이 불었던 것이다. 이 폭풍 앞에서는
가정이라는 껍질도 남편이나 자식이라는 정을 이어 주는 사슬도 더 이상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
헬머는 노라가 미치지나 않았냐고 물으며 타일렀으나 노라는 단호히 말한다.
"나는 오늘 밤처럼 홀가분한 기분에 젖어든 적이 없습니다"
노라는 10년 간이나 살아온 정든 집을 버리고 천천히 나간다.
"노라! 노라! 없구나. 그녀는 이제 여기 없어..."
헬머는 그의 마음 속에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는 듯 외친다.
"가장 경이로운 기적이..."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
해설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라비안 야화", "아라비안 설화", "천일야화"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운다. 세계문학사상 둘도 없는 기서로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엮어진 대설화집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왔는데 이처럼 종교와 인종 연령이나 시대
국가를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꿈으로 아름답게 가꿔 주고 이처럼
다양한 세계를 여러 가지 수법으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원본이 아라비아 인에 인하여 아라비아 어로 씌어진 것은 틀림없으나 어느
시대에 누구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책은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친 페르시아의 사사니아 왕조 시대에 이 책의
일부분으로 추측되는 것이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페르시아가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복된 후 문학도 아라비아 인의 서고로 넘어가게 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 바그다드의 수도가 함락될 때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의 손에서
확고히 보존되고 그들의 소유물로서 한 편의 책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무대는 고대 이집트를 중심으로 대서양과
소아시아 그리스 인도 중국까지 걸쳐 있으나 내용은 아라비아 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과 비유담 우화 교훈 등이 대부분이며 정통파 회교도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회교도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와 마호메트에 있지만 또한 신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서 공기에서 나온 천사 대지가 낳은 인간 외에 불에서 나온 징이라는
일종의 마성을 지닌 존재를 믿고 있었다.
징은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때로는 인간과 결혼하는 일도 있으며
이 마성의 활약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징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교조 마호메트 외에는 옛날의
현자 솔로몬 왕이 있을 뿐이며 교황이라 할지라도 마호메트의 유물이나 솔로몬
왕이 남겨 놓은 반지의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지배할 수가 없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그 후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수정되었으나
17세기경까지는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 최초의 소개자는 프랑스의 동방학의
권위자 앙트와느 가랑이었다. 그가 대사 노완델 후작을 따라서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게 되었는데 그 후 소아시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마호메트교도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1704년부터
번역에 착수하여 17년 동안 12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처음 이 이국적 정서가 짙은 동방 이야기를 들은 프랑스 인들은 완전히
매혹되었다. 이렇게 현란한 설화가 세계의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선녀 같은 미녀 램프 속에서 나오는 거인
불가사의한 마술사 거대한 루크 새의 알 보석의 계곡 선박에 박힌 못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섬 금과 은으로 만든 이슬람 궁정 동양풍의 호화로운 향연 등
모두가 경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당시 화제의 중심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가랑이 쓰는 책의
출판을 기다리다 못해 애독자들이 심야에 그의 집 창문 앞에 모여서 신기한
아야기를 듣기 위해 일대 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각개 국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자 단시일 내에 널리 애독되었으나
아라비아의 풍속과 습관 등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이 와전되어 있었으므로 그
뒤로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복원에 힘쓰게 되어 유사한 책들이 속출하였다.
유럽은 한때 "아라비안 나이트"의 시대가 된 듯하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문자화한 최초의 무명의 저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우연히 수집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발단에서 출발한 일맥 상통한 이야기로 만들기에 힘썼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인자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페르시아 왕 사리아르는 어느 날
사냥을 하러 나가고 없는 틈에 왕비가 흑인 노예와 음탕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격분하여 역시 부정한 아내를 가진 아우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징이 그의 아내를 두 겹의 철궤 속에 집어 넣고 일곱 개의 자물쇠로 잠가 놓아도
여자는 그것을 깨뜨리고까지 정부와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눈앞에서
보여 주었다. 왕은 모든 여자를 저주하게 되었다. 왕비와 노예를 죽인 뒤 세상의
부정한 여자를 근절시키기 위해 새로운 법령을 내렸다. 전국의 미인을 저녁마다
한 사람씩 수청을 들게 한 다음 날이 밝으면 사형에 처하였다. 피를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잔악한 생활이 3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바그다드는 물론 국내의 구석구석까지 딸을 가진 부모는 극도의
공포에 떨게 되었으며 이 잔인한 국왕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 처형을 피하려고
국외로 도망하는 처녀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국내의 미녀가 전부 사라지게 되자
재상의 딸로 재색을 겸비한 미녀 세라자드는 자기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왕의
폭행을 중지시킬 목적으로 자진하여 수청을 들 것을 결심하였다.
세라자드는 자기의 동생 테니아사아르를 후궁으로 궁전에 동반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이튿날 사형 집행 한 시간 전에 국왕에게 청을 해서 이 세상과의
고별을 위해 데리고 온 자기 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게 되었다. 세라자드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있는 것이었는데 제일 재미있는 곳에서
중지하였으므로 왕은 그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때마다 사형 집행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가 천일 밤을 계속하자 왕은 세라자드의 지혜를 믿게 되어 관대하고
자혜로운 마음으로 변하여 세라자드를 왕비로 삼고 더욱 어진 정치를 베풀어
페르시아 왕국은 오래도록 번영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아라비안 나이트"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세라자드가 국왕과 동생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천일야화"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최초의
번역서인 가랑의 번역서가 수정되고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발견된 이집트
고초본에서 알려지지 않은 새 자료가 발견되어 첨가되었으며 아라비자의
원본이라는 신역도 나오는 사이에 유명한 동양학자이며 반생을 이집트에서 보낸
원레인과 바튼의 역서가 영국에서 간행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레인은 문자화하기에 거북할 만큼 심각한 성 묘사의
장면을 생략하거나 애매하게 처리했으나 바튼의 한정판 16권 본은 이 점을
보완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정본으로 통용되고 있다.
줄거리
알라딘의 램프
아득한 옛날 중국 어느 도시의 한 재봉사의 집에는 알라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린애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도무지 일을 할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걱정한 나머지
병에 걸려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라고 하는 낯선 사나이가 찾아와 알라딘에게 좋은 장사를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사실은 삼촌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었고 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마술사로서
보물이 중국의 어느 위험한 지대에 있다는 것을 마법으로 알아 내고 이것을 얻기
위하여 알라딘을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훌륭한
사업을 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으며 알라딘도 그 말에 속아
마술사의 목적지인 어는 높은 산봉우리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그 사나이가 근처에 흩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잎에 불을 지르고 향을 던져
넣고는 몇 마디 주문을 외우자 연기가 사라지며 땅이 갈라지더니 그 속에 반지
한 개가 들어 있는 네모난 돌이 나타났는데 그 돌을 들어 보니 그 밑에 큰
구멍이 나타났다.
알라딘은 마술사가 시키는 대로 그 구멍 안으로 내려가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램프의 불을 끈 다음 기름을 쏟아 버리고 가지고 나오려고 하였으나 마술사는
그가 구멍에서 나오기 전에 그 램프만을 올려 달라고 하였다. 알라딘이 그
사나이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나가서 주겠다고 고집하였더니 그는 화를 내며
구멍을 무거운 돌로 막아 버렸다.
알라딘은 하는 수 없이 구멍 속 깊이 내려가 보았다. 그 밑바닥에는 뜰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보석의 열매가 달린 과실나무로 가득했다. 그는 많은 보석
열매를 호주머니에 따 넣었다.
그러나 다시는 밝은 세상에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슬픔에 빠졌다.
모든 화를 면하게 해 준다고 마술사가 구멍 밑으로 내려올 때 끼어 준 반지를
우연히 문지르게 되었다. 그 순간 이 신비스러운 반지의 종이 나타나 알라딘을
구출하여 주었으므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돌아온 램프를 헝겊으로 닦다가 램프 속에서 거인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 거인을 불러 내어 무엇이든지 명령만 하며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알라딘은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알라딘은 국왕의 딸 아루바슬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와는 너무도 큰 신분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도저히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떤 대신의 아들도 역시 왕녀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딘이 용기를 내어 청혼했더니 왕은 흑인 노예 40명과 백인 노예 40명을
시켜서 보석을 담은 그릇 마흔 개를 선물로 보내면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알라딘은 램프의 거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왕의 요구 이상으로
아름다운 선물과 찬란한 의복을 선물했고 알라딘이 성으로부터 나올 때 멋진
행렬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전부 램프의 덕택이었다. 결국 알라딘의 소원이
이루어져 왕녀와 결혼하였고 램프의 거인이 만들어 준 훌륭한 궁궐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의 마술사가 점을 쳐 보았더니 죽은 줄 알았던 알라딘이 아직도
살아 있으며 더구나 램프를 사용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단히 화가 나서 복수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불행하게도 알라딘이 사냥을 간 틈에 마술사에게 램프를 빼앗기게 되어 램프의
거인은 이제 마술사의 명령에 따라 왕녀와 궁궐을 고스란히 아프리카로 옮겨
가버렸다.
알라딘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궁궐과 왕녀가 없어졌으므로 반지의 종의 힘을
빌려 그것이 그를 속인 원수 같은 마술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알라딘은 아프리카로 달려가 비밀리에 왕녀와 힘을 합하여 마술사를 독살해
버렸으며 램프도 다시 찾게 되었다.
마술사의 아우도 또한 마술사였는데 알라딘에게 해를 입히려다가 램프의
거인에게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알라딘과 왕녀는 궁전도 예전과 같은 자리에 옮기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래도록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옛날 페르시아의 어느 도시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형은 카심이었고
아우는 알리바바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얼마되지 않은 유산을 두 형제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형은 재산을 독차지한 뒤 부잣집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으나 알리바바는 자기와 처지가 같은 가난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가난하게 살면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 그것을 말라빠진 세 마리의
노새의 등에 싣고 매일 도시에 나가 팔아 겨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알리바바는 늘 하던 대로 산 밑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말을 탄
도둑들이 벌판을 건너 왔다. 그는 무서워서 높은 바위 옆에 있는 나무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그들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40명이나 되었는데 그 곳에 도착하자 두목이 선두에 서고 각자
무슨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는 듯한 자루를 한 개씩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목이 큰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 하고 외치자 큰 돌문이 활짝 열리고
도둑들이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가고 돌문은 다시 닫혀 버렸다.
도둑들이 다 가버린 후 알리바바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돌문 앞에 서서
도둑들이 그 문을 열 때 쓰던 말을 시험하려 보려고 "열려라 참깨!" 하고 외쳐
보았다.
과연 문은 활짝 열렸다. 그가 어두컴컴한 동굴일 줄로만 알았던 그 안에는
밝고 넓은 방이 있었다. 천정 구멍에서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갖가지
음식과 값진 옷감과 금은 보석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돈이 든 자루도 헤아릴
수 없이 쌓여 있었다.
알리바바는 어떤 왕도 가지지 못한 많은 보물을 보고 이 동굴이 도둑들이 훔친
것을 오랫동안 쌓아 놓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리바바는 이 도둑들이
훔친 보화를 자기가 좋은 목적에만 쓴다면 약간 가져가도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노새가 운반할 수 있는 만큼의 자루를 싣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올려 놓아 흔적이 나지 않게 감추었다. 그리고는
"닫혀라 참깨!" 하고 소리치니 문은 그전과 같이 닫혀 버렸다. 그는 집에 와서
놀라는 아내에게 신기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준 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아내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금화를 모두 세어 보겠다고 했지만 알리바바는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이 구덩이를 파는 사이에 보석이 몇 되나 되는지
보려고 근처에 사는 카심의 집으로 되를 빌리러 갔다.
그러나 카심의 처는 알리바바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되로 달 만한 것이 있는지 호기심이 나서 되의 밑바닥에 쇠기름을 조금 발라
두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돌려받은 되의 밑바닥에 금화가 한 개 붙어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알리바바의 형수는 '그들에게 되로 달 만한 금화가 있단
말인가?' 하고 질투가 일어났다. 그는 자기의 남편 카심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이제까지는 자기들이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리바바는 돈을
계산하는데 되를 사용할 정도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카심은 깜짝 놀라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설명해 달라고
재촉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말하고 그 증거로 한 개의
금화를 보여 주었다. 카심은 부자 과부로 결혼한 후로는 알리바바를 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멀리하며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한 달에 은화
한 푼도 가지기 어려운 동생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불같은
질투심이 일어나 그 날 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카심은 그 이튿날 먼동이 트기도 전에 알리바바의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서
들은 금화의 이야기를 하며 금화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면 고소하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알리바바는 비밀로 감추고 있던 것을 들키고 말았으므로 하는 수 없이 형에게
전날의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 형제가 일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금화가
있으니 그것을 나누어 갖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욕심 많은 카심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열 마리의 노새 등에
큰 상자를 올려 놓고 알리바바가 가르쳐 준 길을 떠나서 그 동굴 앞에 닿았다.
그리고 "열려라 참깨!" 하고 주문을 외치니 역시 문이 열렸다. 그는 재빨리 그
안에 들어가서 욕심껏 많은 양의 금화 자루를 꺼내어 싣고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깜박 그 암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깨라고 하지 않고 "열려라 보리!" 하고
외쳤다. 그러나 무거운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위험을 느끼고 초조해져서
생각나는 곡식의 이름을 아는 대로 불러 보았으나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모든 보물을 내던지고 그 동굴 속에서 안절부절 하였다.
낮이 되어 도둑들이 이 동굴로 돌아와 그는 꼼짝없이 살해당하고 말았다.
도둑들은 그의 보물 창고가 외부에 발견된 사실에 화가 나고 분해서 공범자에게
겁을 주기 위해 카심의 시체를 넷으로 찢어서 동굴 안의 좌우에 나누어 걸어
놓았다.
알리바바는 날이 지나도 형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세
마리의 노새를 몰고 산에 가서 돌문을 열고 보니 과연 짐작했던 대로였다. 그는
곧 넷으로 찢겨진 형의 시체를 노새 위에 싣고 보이지 않게 그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다른 노새의 등에는 금화 자루를 가득히 싣고 어둠을 이용하여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카심의 집에 하녀로 있는 모르자나는 영리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는 주인이 병으로 누워 있는 것같이 꾸미느라고 약방으로 약을 사러 다니며
이웃 사람들을 속였다. 그리고 가죽을 깁는 노인을 금화를 주어 매수한 후 눈을
가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주인의 시체를 꿰매게 하였다. 그녀는 주인이 병으로
죽었다고 큰 소리로 통곡하여 감쪽같이 주인의 변사를 감추고 장사를 지냈다.
알리바바는 얼마 후 형수의 집으로 살림을 옮기고 밤을 이용하여 금화도 전부
옮겼으며 형의 가게는 자기의 장남에게 관리하게 했다.
한편 도둑들은 동굴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시체를 훔쳐간
사람을 찾을 목적으로 자기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을 나그네로 가장시켜
시내로 들여보냈다. 약 중대한 그 범인을 찾지 못할 때에는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무서운 조건도 붙였다. 변장한 도둑은 마을에 들어와서 우연히도 신
깁는 노인의 가게까지 오게 되었다. 노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큰 바늘을 들고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도둑이 무심코
"당신은 참 부지런하군요. 더구나 그런 나이에 눈이 참 밝으십니다" 하고
감탄하며 말을 건네자
"나리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만 내가 이런 나이에 여기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죽은 시체를 꿰맸다는 것을 아신다면 더욱 놀라시겠지요" 하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이것을 들은 도둑이 깜짝 놀라며 그에게 말을 추궁하였다. 노인은
그제서야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버무리려 하였으나 도둑이 주는
금화에 매수되어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눈을 가리운
채 찢어진 시체가 있는 집으로 갔던 까닭에 카심의 집 위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둑이 시키는 대로 처음에 하녀에게서 눈을 가리운 곳까지 가서 눈을
가린 채 도둑의 부축으로 하녀와 같이 걸었던 대로 걸었다.
그래서 카심의 집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도둑은 눈 가리개를 벗기기
전에 카심의 집 문에 분필로 표시를 해 두고는 기뻐하며 소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모르자나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에 그려진 이상한 표시를
보았다.
'대체 이것은 무슨 표시일까?' 하고 궁금해 하다가 누군가 자기 주인을
해칠려고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근처의 모든 집에 꼭 같은 표시를
해두었다.
그날 밤 산에서 내려온 도둑들은 알리바바의 집을 발견한지 못한 채 그만
돌아가 버렸고 임무를 다하지 못한 도둑은 두목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도둑들은 자신들의 안전 때문에 동굴의 침입자를 찾아내야 했으므로
도둑 한 명을 다시 시내로 들여 보냈다. 이번 도둑도 동료가 하던 방법으로
알리바바의 집을 찾아서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빨간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모르자나 때문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두목은 용감한
부하를 두 사람이나 죽게 하고도 침입자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그 약탈자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도 역시 우연하게 그
신 깁는 노인을 이용하여 알리바바의 집을 찾아내고는 표식을 하는 대신 그
주위의 지리를 상세히 관찰하여 두었다.
동굴로 돌아온 그는 19필의 노새와 큰 가죽으로 만든 38개의 독을 모아서 그
중 한 개에는 기름을 가득히 담게 하였다. 그는 알리바바의 집을 무난히 찾은 후
자기는 기름 장수인데 내일 시장에서 팔 기름을 노새에 싣고 왔으니 하룻밤 자고
갈 숙소를 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람 좋은 알리바바는 도둑의 두목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의 처지를 생각하고 쾌히 승락하였다. 그리고
알리바바는 손님을 위하여 성대한 만찬까지 베풀어 주었다.
밤이 깊어져서 불이 꺼졌으므로 모르자나는 기름 장사의 기름을 얻으려고 뜰로
나왔는데 기름독 안에서
"두목님 시간이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모르자나는 그 순간 음모를 알아차리고 알리바바의 일가와 자기 몸의 위험을
생각하여 떠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마음먹고
"아니 아직 때가 아니다. 좀더 기다려라" 하고 침착하고 낮은 소리로 독마다
돌아다니며 똑같은 말을 해 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기름이 든 독에서 기름을
따라서 주전자에 가득히 담아 끓인 후 도둑들이 들어 있는 독의 뚜껑을 열고
하나씩 차례로 그 기름을 부었다. 독 속에 들어있던 도둑들은 소리도 못 지르고
전부 죽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는 두목은 밤이 깊어 집안이 조용해졌을 때 몰래
뜰로 나와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부하들이 들어 있는 독의 뚜껑을 열고
"나오너라. 때가 되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서야 놀라서 독 뚜껑을 모두 열어 보니 어느 놈이고 다같이 무서운 죽음을
당해 있었다. 두목은 자기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한시도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37명의 생명을 빼앗은 무서운 손이 언제 자기의 생명을
빼앗을지 몰라서 겁이 난 그는 곧 담을 넘어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두목은 부하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알리바바는 모르자나로부터 전날 밤에 일어났던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사를 표하였으며 그 보답으로 모르자나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알리바바의 집은 뒷마당이 넓었으므로 그 곳에 구덩이를 파고 도둑들의 시체와
독과 무기를 묻었다. 그리고 많은 노새는 모르자나를 시켜 몇 차례에 나누어
시장에 나가 팔았다. 그 후 몇 해 동안 알리바바의 집은 아무 근심없이
평화스럽게 지냈다.
그간 도둑의 두목은 음침한 동굴 속에서 혼자 있으면서 부하들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시내로 들어와 동굴에서 가져온 옷감으로
포목점을 시작하였다. 그 상점은 알리바바의 아들이 보고 있는 상점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둑의 두목이 가게를 시작한 며칠 후에 알리바바와 자기 아들의 상점에 찾아
갔는데 그 때 두목이 그를 보고 말았다. 그 날부터 두목은 그의 아들에게
접근하여 특별한 친절을 보이며 때때로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같이하게
하였다. 알리바바의 아들은 두목의 호의에 답례하려고 자기의 아버지와 상의하여
그를 초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목은 소금을 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괴상한 주문을
하였다.
모르자나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로부터 복수하려는 사람은
소금을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고 수상하게 생각하며 그 소금기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손님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 음식 접시를 나르는
체하고 객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손님은 교묘하게 변장한
도둑의 두목이었이며 주의해서 살펴보니 옷 속에 단도를 품고 있었다.
모르자나는 주인에게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고향의 의복으로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페르시아로 잡혀와서 이 곳에서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객실로 들어가
주인에게 이 댁의 경사를 위하여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운 춤으로 귀한 손님을
환대하고 싶다고 청하였더니 모두들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춤을 아름답게 추고 나서 단검을 빼어 들고 한 손으로는 북을
들고 구경꾼들에게 희사를 바라는 시늉을 하였다. 알리바바가 금화 한 개를 그
북위에 놓아 주니 그의 아들도 그렇게 했다. 이번에는 도둑이 품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려 하였다. 순간 모르자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와 힘을
다하여 손님의 가슴에 단검을 푹 찔렀다. 이 광경을 본 알리바바는 부자는
놀라며 큰 소리로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는 이제 파멸이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아닙니다. 주인님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을 잘 보십시오" 하고
죽은 손님의 옷을 헤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단도를 보이고 모든 음모를
밝혔다.
알리바바는 뛰어난 기지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 준 모르자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녀를 얼싸안으며
"나는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우리집 며느리로
삼겠다"고 말하며 아들에게도 그녀와 부부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아들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전부터 그는 모르자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둑의 두목을 뒷뜰에 그의 부하들과 똑같이 묻고 며칠 뒤에는
알리바바의 아들과 모르자나의 결혼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웃 사람들은 그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모르자나의
아름다운 성품을 귀하게 여기는 주인의 도량과 인품을 칭찬하며 이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알리바바는 1년 동안은 도둑의 동굴을 찾지 못했었다. 아직도 어디엔가 도둑이
살아 남아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바바는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몹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말을 달려 그 동굴로 가 보았더니 두목이 상점으로 옷감을 운반한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온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이 보물 창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단지 자기 한 사람뿐이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많은 재보를 전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기뻐하며 말로 운반할 수 있는 양의 금화 자루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년 후 그는 자기 아들로 동굴로 데리고 가서 모든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아들은 그것을 자손에게 전해 주었다. 자손들도 이 재산을 유익하게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알리바바의 자손들은 몇백 년 후대까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신드바드의 모험
바그다드의 하룬 알 라시트 왕 시대에 히드바드라는 가난한 짐꾼이 살고
있었다. 몹시 더운 어느 날 무거운 짐을 지고 시내로 들어 가다가 어느 훌륭한
저택 옆에서 쉬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정원에 우거진 화초의 향기와 함께 아름다운 음악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들려왔다. 거기에 맛있는 음식 냄새까지 섞여와 성대한
주연이 벌어져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집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겨 문 앞에 훌륭한 복장을
하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물어 보았다. 문지기는 그에게 바그다드에 살면서도
세계의 어느 곳이고 안 가본 데가 없는 유명한 항해자 신드바드의 집을
모르느냐고 도리어 반문하였다. 그러자 히드바드는 하늘을 쳐다보며 누구에게나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전능하신 천지 만물의 조물주시여 신드바드와 나와는 어찌 이다지도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까? 나는 매일매일 허덕이며 괴롭게 일을 해도 처자식에게
보리빵도 충분히 먹이지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그에게는 저렇게도 막대한 재물을
써 가면서도 항상 즐거운 날을 보내게 하시는지요.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십니까?" 하고 신세 타령을 하며 비관에 잠겨 있는데 하녀가 나오더니
주인이 부른다며 따라 오라고 하였다. 히드바드가 들어간 곳에는 산해 진미를
차려 놓은 식탁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앉아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불안에 몸을 떨면서 겨우 여러 사람에게 인사하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인 훌륭한 노신사인 신드바드는 그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술을 부어 주며 환대하였다. 그가 식사를 다 끝마치자 이름과 직업을 묻고 방금
밖에서 한 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히드바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했다며 무분별했음을
사과했다.
신드바드는 자기는 그렇게 사리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며 그러한 불평이
불쾌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오해가 있으니 그것을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진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의 노고를 몇 년 동안이나 견디어
왔기 때문이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히드바드의 생각이 바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물을 얻게 된 일곱 번의 항해 중에 겪은 여러 가지의
모험담을 들려 주겠다고 하였다.
제1항해
신드바드는 원래 막대한 유산을 받았으나 방탕한 생활로 전부 탕진해 버리고
워낙 모험을 좋아했기 때문에 외국에 가서 장사나 해 볼 생각으로 항해를
결심하였다. 그들 일행은 페르시아 만을 지나 동인도를 향하여 항해를 시작했다.
하루는 배가 작은 섬의 기슭에 닿게 되었다. 그것은 섬이라고는 하나 해면에서
겨우 노출되어 있을 뿐인 푸른 풀밭과 같은 곳이었다. 선장이 그 섬에 내리고
싶은 사람은 상륙하여도 좋다고 하였으므로 신드바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륙하여 여행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 섬이 기우뚱하고
흔들리더니 그만 침몰하고 말았다.
그들이 섬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실은 커다란 고래의 등이었다. 그는 미쳐
타고 온 작은 배에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그 섬에서 불을 때기 위해 가지고 내린
나뭇가지에 의지하여 표류하다가 간신히 어떤 섬나라의 어진 왕에게 구조되었다.
그는 섬나라를 떠날 때 왕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으며 귀국하는 도중에 그가
타고 온 배와도 만나게 되어 항해의 상품도 손에 들어오게 되어 막대한 재산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돈이 많이 든 주머니를 히드바드에게 주면서
내일도 자기의 모험담을 들으러 꼭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다음 날 히드바드는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관대한 이 여행가를
찾아갔다. 신드바드는 반가이 맞아 주었고 손님들이 다 도착하자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의 제2항해의 모험담을 시작했다.
제2항해
항해 중 그는 과실나무가 무성한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여 술을 마시고
기분좋게 낮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배가 떠나고 말았다.
그는 절망 끝에 순간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섬의 형태를 살펴보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득한 푸른 바다뿐인데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먼 곳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타원형의 흰 물체였다. 그가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높이가
상당하고 둥근 지붕처럼 생겼으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문 같은 것은 없고
미끄러워서 위로 올라 갈 수도 없는데 그 주위를 걸어보니 약 50 걸음이나
되었다.
이 때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에 덮인 듯이 캄캄해졌다. 이상해서 하늘을
쳐다보니 그것은 이 섬을 향하여 날아오는 무섭게도 큰 한 마리의 날짐승 때문인
것을 알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뱃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루크라는 큰 새가 틀림없으며 정체를 알 수 없던 원으로 생긴 물체도 그
새의 알이었던 것이다.
이 루크의 몸의 길이는 약 80 미터나 되는데 날개를 펴면 그 넓이가 100
미터나 되고 코끼리나 소를 마음대로 채가는 무서운 것이었다. 이 새는 내리더니
그 알 위에 앉았다.
신드바드는 새가 앉기 전에 몸을 그 알 옆에 숨겼으므로 바로 그의 눈 앞에
새의 한쪽 발이 놓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큰 나무통만 하였다. 그는 새의 발에
자기의 몸을 끈으로 매고 루크 새가 자기를 이 무인도에서 옮겨 줄 것이라
기대하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 이튿날 예측했던 대로 큰 새가 날아 갔는데 어찌나 빠른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새가 땅으로 내려가는 것 같아 재빨리 묵었던 끈을 풀자마자 루크
새는 무섭게 긴 뱀을 입으로 채 가지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새가 그를 내려 놓고 간 곳을 사방이 병풍과 같이 깍아지른 듯한 높은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험해 도저히 그 골짜기에서
빠져 나갈 길이 없을 듯하였다. 골짜기를 걸어보니 다이아몬드가 흩어져 있는데
놀랄 만큼 큰 것도 있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바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무섭게 긴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이
코끼리를 한숨에 삼킬 만큼 큰 것이었다.
이것을 본 그는 그 섬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였다.
이 뱀들은 낮에는 구덩이 속에 들어가 루크 새의 눈을 피하고 밤에만 활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뱀을 피하기 위하여 밤이면 작은 동굴 속에 들어가 그
입구를 큰 돌로 가리고 지냈다. 그러나 뱀은 밤이 되면 그 주위를
'쉬-쉬-' 하고 소리를 내며 기어다녔기 때문에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는 너무나 피곤해서 밖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돌연 큰 날고기 덩어리가
공중으로부터 떨어졌다. 보석 상인들이 독수리가 새끼를 가질 때쯤 되면 이
골짜기 근처에 와서 다이아몬드를 채집할 때 쓰는 방법으로 큰 고기 덩어리를 이
다이아몬드 골짜기 속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다이아몬드가 고기
덩어리에 박히게 되면 크고 강한 이 곳의 독수리가 이 고기 덩어리를 채어서
그들의 둥우리로 돌아와 새끼 독수리에게 먹이려고 날아오게 된다. 그러면
상인들은 이것을 감시하고 있다가 곧 달려와서 그 어미 독수리를 쫓고 그 고기
덩어리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떼어 가는 것이었다.
신드바드는 이 방법을 이용하면 이곳에서 구출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 근처에 있는 수많은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골라서 그중
가장 큰 고기 덩어리에 자기 몸을 단단히 묶은 후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시
후 한 마리의 큰 독수리가 그의 몸이 묶인 고기 덩어리를 물고 산봉우리에 있는
둥지로 날아갔다. 그러자 마침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보석 상인들에게 그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신드바드는 놀라는 상인들에게 가지고 온 다이아몬드를 나누어 주고 자기의
모험담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상인들과 같이 무사히 귀국한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항해에서 얻은
막대한 재물의 일부를 나누어 주고 자기도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이 제2항해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인은 히드바드에게 또 많은 돈을 주며 다음 날도 와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초청하였다.
제3항해
신드바드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항로에서 벗어나 어느 섬 근처를 표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장은 그 섬에 상륙할 것을 꺼려하였다. 선장은 이 섬과 부근의
섬에는 전신에 털이 돋은 보기 흉한 야만인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습격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난쟁이이지만 대항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메뚜기보다도 수가 많기 때문이며 만일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죽인다면 일행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릴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선장의 말이 끝나자 키가 2피트 가량 되는 빨간 털이 난 무서운 난장이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헤엄쳐 와 배 주위를 둘러싸고 놀랄 만큼 민첩한 행동으로
그 배를 빼앗아 다른 섬으로 가 버렸다.
신드바드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이 섬에 내렸다. 일행은 이 곳에서 거대한
건물을 발견하고 가까이 갔다. 훌륭한 건축 양식으로 된 궁전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넓은 실내에 인기척은 없고 눈에 띄는 것은
산더미같이 쌓인 해골과 수없이 놓여 있는 쇠꼬챙이였다.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있을 때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키가
종려나무만큼 큰 검둥이 거인이 나타났다. 그는 이마 한가운데에 눈이 하나
있었으며 앞니는 길고 날카롭게 뾰죽이 나와 있었다. 윗입술은 가슴까지 쳐져
있었으며 귀는 코끼리 귀와 흡사한데 양 어깨를 길게 덮고 있었다. 손톱은
사나운 짐승과 같이 길고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었다.
이 무서운 괴물을 본 일행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에 괴물은 현관에 앉아서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괴물은 그 중에서 가장 통통한 선장을 참새를 잡듯이 한 손에 쥐고
꼬챙이에 꿰었다. 괴물은 선장을 불에 구워 먹고 난 후 우뢰와 같이 코를 골면서
잠들어 버렸다. 신드바드 일행은 처참한 공포 속에서 그 날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거인은 그들을 궁전 안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일행은 이 괴물을 죽이기로 협의하였다. 그 날 저녁 거인은 살이 많은
뱃사람을 잡아먹고 잠이 들어 버렸다. 괴물이 골아 떨어졌을 때 일행 중 용감한
10명의 뱃사람이 쇠꼬챙이를 불에 달궈 일제히 그 거인의 눈속 깊이 틀어박아
장님을 만들어 버렸다. 거인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무서운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양손을 벌려 그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모두 재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뱃사람들은 곧 해안에 나와 흩어져 있는 배의 파편을 모아 세 사람씩 탈 수 있는
뗏목을 몇 개 만들었다.
거인은 동이 트기도 전에 그와 똑같은 거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으며 그
뒤에도 여럿이 계속 몰려 오는 것 같았다. 일행은 그 거인이 죽어 버리면 이
섬에 머무를 희망을 가졌으나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자 뗏목에 올라 바다로 저어 나갔다. 이것을 본 거인들은 큰 바위
덩어리를 끼고 허리까지 닿는 바다까지 쫓아와 바위덩어리를 뗏목을 향해
던졌다. 뗏목은 산산이 부서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신드바드의 뗏목만 모면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행은 표류하다 겨우 섬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좋은 열매를 따
먹고 원기를 회복하였다. 그 날 저녁은 해변가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놀랄 만큼 커다란 뱀의 습격으로 잠을 깨었다.
뱀은 한 사람을 통채로 삼켜 버리더니 그를 다시 토해내어 땅 위에 두드려
부셔서 먹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불쌍한 사나이의 뼈가 바스라지는 무서운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 없이 도망쳤다.
그 이튿날도 무서운 뱀을 보았다. 섬 가운데를 헤매다가 높은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 날 저녁은 나무 위에서 뱀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뱀은 그들의
뒤를 쫓아와 신드바드보다 아래 앉아 있던 한 사람을 발견하여 통채로 삼켜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드바드는 자기도 동료들과 같은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닫자 두려움에 떨며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으나 끝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신에게 그의 몸을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신드바드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나뭇가지나 덩굴을 이용하여 몸을 은신할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고 그를 위협하는 잔인한 운명을 모면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 노력하고 그 날 밤 덩굴 속에 숨어 있었다. 뱀은 전날과 똑같은 시각에
나타나 그 나무의 주위를 돌아다녔으나 신드바드를 발견하지 못했다. 뱀은 밤이
새도록 숨은 쥐를 망보고 있는 모양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날이 밝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신드바드는 그 날도 절망하여 몸을 바다 속으로 던지려고 했다. 순간 멀리서
한 척의 배를 발견하였다.
그 배는 이전에 그를 떨쳐 놓고 간 바로 그 배였다. 그는 그의 성품과 그
이익을 되찾고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다.
이 날도 신드바드는 히드바드에게 많은 돈을 주고 다음 이야기를 들으러
오라고 하였다.
제4항해
이번 항해도 태풍을 만나 파선하여 몇 사람만이 겨우 어느 섬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섬에는 사람 사는 곳이 있었다. 일행은 마을 가까이 갔다가 많은
흑인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흑인은 일행을 붙들어 각자 분배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신드바드는 일행 다섯 사람과 함께 어느 집으로 붙들려 갔었는데 흑인은
그들에게 이상한 풀을 먹으라고 손짓하였다. 일행은 몹시 시장한 터여서 그것을
받아 먹었으나 신드바드는 무슨 흉계가 있을 것만 같아서 먹는 시늉만 하고
삼키지는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일행은 정신을 잃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다음 흑인들은
야자씨 기름으로 조리된 쌀밥을 주었다. 흑인들이 그 풀을 먹인 것은
뱃사람들에게 이성을 잃게 하여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함이었고 쌀밥을 준 것은 그들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흑인들은 식인종이었으므로 뱃사람들의 살이 오르면 잡아먹으려는 의도였다.
여러 주일이 지났다. 흑인들은 가장 살찐 사람부터 잡아먹기 시작하였으나
신드바드만은 정신이 온전하여 죽음의 공포로 나날이 여위어 갈 뿐이었다.
이렇게 신드바드가 쇠약해지는 병에 걸렸으므로 흑인은 그를 잡아먹는 것을
연기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나중에는 거의 감시조차 받지 않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기회를 보아 그 곳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8일 간의 여행 끝에 겨우 백인들이 산호초를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백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섬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왕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섬나라는 인구도 대단히 많고 상업도 번창한 곳이었다.
이 곳은 고생만 연속하던 그에게 참으로 좋은 위안처였다. 도량이 넓은 왕은
그를 후대하였다. 왕은 그가 고향 생각을 잊고 오랫동안 자기의 영토에 머물도록
아름답고 부유한 궁녀와 결혼시켜 주었으므로 신드바드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드바드는 고향이 그리워 기회만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 나라에는 야만적인 습관이 있었는데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나라의
법에 의하여 남편도 같이 매장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드바드는 그 곳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의 시체와
함께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 장례식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이 화려했다. 고운 옷을 입고 많은 보석으로
몸을 꾸민 시체를 뚜껑이 없는 관대 위에 실은 후 그 뒤에 남편을 선두로 많은
친척과 친구가 따랐다. 매장할 장소에 이르자 깊은 구덩이를 덮은 거대한 돌을
일으키고 시체를 눕힌 관대를 그대로 컴컴한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다.
그의 남편은 친척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고 또 하나의 관대에 한 병의 물과
일곱 개의 작은 빵을 차려 놓은 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누웠다. 그리고
이것도 시체와 같이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고 그 위를 무거운 돌로 덮자
의식은 끝났다.
그런데 신드바드의 아내가 병으로 죽었다. 불행하게도 2주일 후에 그도 아내와
함께 매장되야 할 운명에 놓여졌다. 국왕은 모든 신하들과 국내의 명사들을
참가시켜 그 장의를 빛나게 하여 신드바드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노력하였다.
성대한 식이 끝나자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는 도중 위로부터 비치는
광선으로 그 구덩이 속의 윤곽을 대충 알게 되었는데 끝이 없는 동굴의 깊이는
약 50 길이나 되어 보였다. 신드바드는 가지고 온 빵과 물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무슨 발소리를 들었다.
그가 소리를 따라가니 짐승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신드바드가 그 뒤를 쫓아가노라니 멀리 마치 별과 같은 빛이 보였다. 이 빛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더욱 앞으로 가보니 좁은 바위 틈에서 비쳐 오는 빛이었다.
신드바드가 그 틈을 겨우 뚫고 나오니 바로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다.
신드바드는 이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시 동굴로 되돌아 가서 관대 위에 놓인
다이아몬드와 루비 금팔찌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모아 가지고 해변 가까이
나왔다. 다행히도 신의 가호를 받아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신드바드는 묘지에서 가지고 온 보물로 더욱 부자가 되었다. 그는 사원의
유지와 빈민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기부하였다.
제5항해
신드바드는 다시 배를 한 척 준비하여 각 국의 상인들과 상품을 가득 싣고
출항하였다.
긴 항해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무인도에 상륙하였는데 두 번째 항해에서 본
것과 같은 큰 루크 새의 알을 발견하였다. 그 알은 어미새가 부리로 깨기
시작하여 새가 곧 나올 것 같았다.
신드바드는 상인들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일러 두었으나 그들은 호기심에 차서
망치로 알을 깨뜨리고 새를 꺼내어 태워 버렸다.
식사를 마치기 전 하늘 높이 두 뭉치의 큰 구름 덩어리가 나타났다. 선장은
경험에서 그 구름이 루크 새의 수컷과 암컷인 것을 알고 일행을 배에 오르도록
재촉하였다. 두 마리의 루크 새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가까이 오다가 알이 깨져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고 더욱 억세게 날개를 쳤다. 루크 새는 그들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사라졌으나 뱃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 올 것 같은 재난을 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배를 저었다.
얼마 안 되어 루크 새는 발톱 사이에 큰 바위 덩어리를 끼고 와서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배 위에 던졌다. 배는 이 돌에 맞아 산산이 박살나고 말았다.
신드바드는 배의 조각에 매달려 겨우 어느 섬까지 다달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이 섬은 맛있는 열매가 많이 있고 나무도 무성하여 흡사 낙원 같았다.
신드바드가 좀더 걸어 들어가니 깨끗한 개울이 있었다. 시냇가에는 몹시 야위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드바드는 가까이 가 인사를 하고 왜 그렇게 앉아만 있느냐고 물어 보자 그는
겨우 머리만 흔들고 자기를 업어서 건너편으로 옮겨 달라고 손짓을 하였다.
신드바드는 노인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믿고 그를 업고 시내를
건넜다. 보기에는 아주 힘없이 보이던 늙은이는 날쌔게 신드바드의 어깨 위에
올라타더니 발로 목을 감고 힘껏 졸랐다.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이 고약한 노인은 그가 기절해도 목 위에 올라
타고 있었으며 그가 겨우 숨을 내쉬자 노인은 한 쪽 발로 그의 옆 배를 누르고
한 쪽 발로는 그를 걷어 차 억지로 일어나도록 했다. 그가 일어나자 노인은 나무
밑으로 가자며 열매를 따서 먹기 위하여 때때로 멈춰 있으라고 하였다. 노인은
종일 신드바드의 목을 감은 다리를 풀지 않았으며 잘 때에는 마찬가지였다.
신드바드는 어느 날 나무에서 떨어진 표주박을 발견하여 그 곳에 포도를 짜서
술을 만들었다. 그 술은 아주 훌륭해서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었다.
신드바드는 기분이 좋아서 노인을 업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겁게 놀았다.
노인은 그가 이전보다 가볍게 자기를 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자기에게도 좀 달라고 손짓하였다.
노인은 그 술을 상당히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드바드의
어깨 위의 다리 힘이 풀렸다. 신드바드는 노인을 땅 위에 내던져 버렸다. 노인은
그대로 잠이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신드바드는 얼른 큰 돌을 들어 노인을 때려
죽였다.
신드바드는 노인에게서 해방된 기쁨을 안고 해변가로 걸어나왔다. 마침 물을
얻으려고 멈췄던 배에 구조되었다.
이 배의 선원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괴물이 교살하려는 것에서 모면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모두 놀라했다.
이 노인은 한 번 붙잡아 자기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는다고 하며 이 섬은 그 괴물의 손아귀에 죽은 사람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뱃사람들은 대단히 그를 후대하여 주었으며 배에 탄 상인들과도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항해하다 배는 항구에 닿았다. 그와 친밀한 상인이 큰 자루
하나를 소개하여 주었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을 취하고 만일 그들로부터 떨어지는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신드바드는 항구 사람들을 따라 야자수 밀림까지 왔는데 그 나무들은 대단히
높고 미끄러워서 도저히 올라가 열매를 따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 많은 원숭이 떼가 그들 일행을 보자 재빨리 나무의 맨꼭대기로
올라갔다. 같이 갔던 사람들의 나무 위에 있는 원숭이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신드바드도 사람들을 따라 돌을 던졌다. 원숭이들은 대단히 성이 나 야자 열매를
일행을 향하여 던졌다.
그들은 원숭이가 던진 구하기 어려운 야자 열매를 얻을 수가 있었다.
신드바드는 귀국 후 장사를 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이익의 1할을 자선 사업에 사용하고 피로한 심신을 쉬었다.
제6항해
신드바드는 다섯 번이나 조난을 당해 위험을 거듭하였으므로 친척과 친지들이
만류를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이번 항해는 선장과 도선사가 침로를 잘못 잡았다. 선장은 미친 사람처럼
탄식하며 스스로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신드바드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이 대양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에 왔는데 빠른 조류가 배를 이끌고 있어 15분 후에는 그들이 바다 속으로
빠져 죽을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단념하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고 하였다.
배는 조류로 인해 평시에는 도저히 가까이 댈 수도 없는 산의 절벽까지 올라가
그 곳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행은 생명과 식량 가장 중요한 물품은 구할 수 있었다. 산 중턱에는
난파선의 파편과 해골과 믿을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보물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곳에서는 많은 물이 바다로부터 컴컴한 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 동굴의 입구는 대단히 높고 넓었다. 또한 이 산의 돌은 수정과 루비와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곳에는 역청이 샘물과 같이 바다로
흐르는데 물고기가 그것을 먹으면 용연향이 되어 곧 토해 내었다. 물결이 이
용연향을 해변가로 밀어 붙여 수목이 그 곳에 자라나게 되어 있었고 자라는
나무는 대개가 가라목이었다.
이 곳은 배가 일정한 거리 이내로 들어오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여 산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바다로 피할 수도 없어 이 지역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신드바드의 일행은 이 산중턱의 해변가에서 나날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하였을 때에 그들은 있는 식량을 공평하게 분배하였기 때문에 각자 식량의
취급 여하에 따라 길게도 혹은 짧게도 살 수가 있었다.
신드바드는 식량을 조절하여 가장 오래 살아남아 있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료를 매장한 후 자기 손으로 자기의 무덤을
파 두었다.
신드바드는 동굴로 흘러 들어가는 강가로 가보았다. 그는 이 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을 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 강은 땅 밑으로 흐르지만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흘러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익사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죽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는 곧 큰 배 조각과 닻줄로 튼튼한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루비 에메랄드
용연향 수정 등이 가득한 상자와 값이 나갈 물품을 담은 자루를 싣고 신에게
그의 운명을 맡겼다.
동굴 안은 컴컴하였으며 천정은 머리가 닿을 만큼 낮은 곳도 있었다. 가지고
온 식량도 도중에 전부 떨어져 정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
신드바드가 정신을 회복하였을 때 그는 넓은 들판 위에서 많은 흑인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다. 그들 중에 아라비아 어를 해독하는 흑인이 있었으므로 다행히
그로부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주민인데 가까운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물을 논에 담고
있을 때 신드바드의 뗏목을 발견하고 그 뗏목을 끌고 와 그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드바드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왕에게 안내하여 주었다. 이
나라의 인도였다. 왕은 그에게서 진기한 모험담을 만족하게 듣고 그를
후대하였다.
신드바드는 인도 왕으로부터 회교도의 지배자인 아라비아 왕에게 보내는
친선의 서한과 많은 보물을 전달할 것을 부탁하고서 귀국하였다.
대교주인 국왕은 이 선물을 받고 그 나라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은 후
신드바드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사람을 시켜 그의 집까지 보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드바드는 전날과 같이 히드바드에게 많은 돈을 주며
다음 날 그의 최후의 항해를 꼭 들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제7항해
그는 귀국하자 다시는 항해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신드바드는 이제
나이도 많이 들었고 이제까지 겪어 온 위험한 일에 다시는 몸을 내던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생을 편하게 보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대교주로부터 사절이 왔다. 인도 왕에게 답례로써 답서와 예물을
가지고 사절로 가 달라는 명이었다.
그는 대주교인 국왕에게 자기는 이후 일체 항해를 단념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국왕이 부탁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어 승낙하고 말았다.
신드바드는 인도에서 되도록 속히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려 하였다. 인도 왕은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으므로 곧 귀로에 올랐으나 불행히도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선원 중에는 저항을 하여 생명을 잃는 자도 있었고 남을 사람들은 먼
섬으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 갔다.
신드바드를 산 주인은 부자였으며 그를 후대하여 노예로서는 분에 넘치는
몸차림을 하여 주었다. 주인은 그에게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신드바드가
상인이라고 하였더니 활을 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활 쏘는 것은 젊었을
때의 운동이었다고 말하였더니 주인은 만족한 듯 커다란 코끼리에 그를 태우고
활과 많은 화살을 싣고 밀림 속 깊이 그를 데리고 갔다. 큰 나무 밑에 가자
주인은 그에게 나무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주인은 코끼리의 무리가 이 앞을
지나갈 때는 활로 쏘아 넘어지는 놈이 있으면 자기에게 곧 알려 달라 하고
음식물을 남겨둔 후 시내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튿날 새벽녘에 수많은 코끼리 떼가 몰려 왔다. 신드바드는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넘어트렸는데 다른 놈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하니 대단히 기뻐하며 그를 칭찬하여 주었다. 그들은 코끼리를
땅에 묻었는데 이것이 썩어버릴 때에 코끼리의 큰 상아를 뽑아 팔 계획이었다.
신드바드는 이 일을 약 2개월 간 계속하였는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신드바드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망을 보고 있을 때 코끼리들은 그 나무 앞을
지나가려 하지 않고 멈춰 서서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신드바드가 은신하고 있는
나무 주위를 둘러쌌다. 코끼리의 수는 실로 헤아릴 수 없었다. 코끼리 무리는 긴
코를 공중으로 쳐들어 일제히 신드바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정신이 아찔했다.
제일 커다란 코끼리가 나서서 코로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 땅 위에
넘어트렸다. 신드바드가 땅 위에 떨어지자 코끼리가 그의 몸을 코로 감아 자기의
등에 앉혔다. 신드바드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 코끼리가 선두에 서서
걸어가자 많은 수의 코끼리가 질서 있게 열을 지어 뒤를 따랐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코끼리는 신드바드를 땅 위에 내려 놓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는 얼마 동안 누워 있다 이상히 생각하여 주위를 살펴 보니 그 곳은 길고
넓은 언덕 위였는데 코끼리의 뼈와 상아로 덮여 있었다. 코끼리의 무덤이었다.
코끼리는 자기들을 죽이지 말라는 뜻을 알리기 위하여 신드바드를 이 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제 코끼리를 죽이지 않고도 상아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신드바드는 하루를 꼬박 걸어 주인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은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그는 주인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코끼리를 타고 그 언덕까지 가서 많은
상아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은 그에게 코끼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지금까지 그
밀림 속의 코끼리들은 많은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매년 수없이
죽여 왔다. 그러나 신은 신드바드만은 사랑했음인지 코끼리들의 분노에 거슬리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했다. 이것은 아마도 신이 그를 이 세상에서 더욱
유익하게 일을 시키려는 증거일 것이라고 하며 그 날부터 신드바드를 자유의
몸으로 하고 재산도 나누어 주며 친형제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위험한 바닷길을 피하고 낙타 대상에 합류하여 육로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사절의 임무를 완수하여 국왕이 많은 보물을 주었으며 그 후로
바그다드를 떠나는 일이 없이 가족들과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다.
신드바드는 그의 항해담을 다 마치고 히드바드를 향하여
"저의 친구여! 당신은 내가 겪은 만큼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의 소문을
들었는지요. 내가 이러한 고생을 다하였으니 평화롭게 유쾌한 생활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하고 말하였다.
히드바드는 그의 손에 키스를 하고
"저의 고생은 당신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당신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재산도 이렇게 훌륭하게 사용하니 그 자격도 충분하고 남습니다. 영원히
행복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신드바드는 다시 그에게 많은 돈을 주며 짐을 운반하는 일은 그만두고
앞으로는 자기의 식탁에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히드바드가 뱃사공이던 신드바드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 것을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기쁘고 당연한 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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