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잡학사전
차례
가장 강한 자의 주장이 항상 옳다
거인 아틀라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갯세마네의 동산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
결혼이란 권리를 반으로 하고
의무를 두배로 하는 일이다
고다이바 부인
고르디우스의 매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
고드 러시
고리앗과 다윗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
금단의 열매
기사도
길로틴
길 잃은 양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
나르시시즘
나 죽은 다음에는 홍수야 지든 말든
너 자신을 알라
넥타이
노스탈자(nostalgia)
노아의 반주
노트르담(notre Dame)
루벨바그
눈에는 눈을
뉴턴의 사과
늙은이의 여자는 있지 않다
대부, 대모
대장장이 발칸
데마
데카메론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
독한 약이지만 호혐은 확실하다
돈 쥬안
돼지에게 지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드라마(drame)
들의 꽃, 공중의 새
디스크(disk)
디오게네스(diogenes)
라 마르세예즈(La Mrseillaise)
라 볼레의 15분
로마의 세계를 세 번 통일했다
로마의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로봇
로비콘 강을 건너다
마녀 재판
마돈나
마라톤
만나(Manna)
만능의 사람
만물은 유전한다
만우절
맘모스(mammoth)
먼저 쏘십시오, 영국군 여러분!
메두사(mevusa)의 목
메시아(Messiah)
메이 데이(May day)
메이 플라워의 맹세
면죄부
모나리자의 미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목마의 계교
목축의 신 판
문화투쟁
물고기
뮤즈(Muse)
미궁
미녀와 야수
미사(missi)
미사일(missile)
미완성 교향악
미인 컨테스트
미카일(Michel)
밀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바벨의 탑
바빌론의 공중 정원
바카스(Bathos)
반역이 아니고 혁명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밤의 대통령
백일몽
백일천하
뱃속의 벌레를 죽인다
베니스의 상인
베들레헴의 별
베로니카의 수건
베아트리체
보다 더 빛을!
보이콧(boycott)
부자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낙타가 바늘 뒤로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분화산 위에서 춤을 춘다
불속의 밤줍기
브나로드 운동
브루터스 너 까지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순절
사이렌
사자의 몫
사탄(Satan)
산상의 설교
산타 클로스
삼손과 데릴라
3퍼센트의 진실
술은 새 부대에
샌드위치(Sandwith)
샌들
생명의 나무
서부전선 이상 없다
소돔과 고모라
소크라테스의 아내
솔로몬의 영화
솔로몬의 지혜
스파르타 교육
스핑크스
시간은 돈이다
시시포스의 바위
신데렐라
13일의 금요일
아담과 이브
아담이 밭갈이 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아론의 지팡이
아마존의 여군
아킬레스의 힘줄
아폴로와 월계관
악어의 눈물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알파와 오메가
약한자여 너의 이름은 여자니라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에덴 동산
에로스
에루레카(나는 발견했다)
엘레기
여자를 찾아라
여자의 마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올드 렝 사인(Auid Lang Syne)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용사만이 미인을 차지한다
원죄
원탁회의
윌리엄 텔의 사과
유토피아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 너의 이름아래 얼마나 많는 죄가 저질러 지고 있는가
제왕절개
존 불
좁은 문
조세핀과 처질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필 박사와 하이드씨
짐은 국가이다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프로의 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철혈재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카노타의 굴욕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로
카인의 저주
코페르티쿠스적 전회
콜롬부스의 달걀
쿼 바디스
클레오파트라의 코
탄타로스의 갈증
통곡의 벽
판도라의 상자
패각추방
폼페이 최후의 날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
플라토닉 러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한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햄릿과 돈키호테
현명한 우인
황금시대
황금의 사과
중국편
건곤일척
결해골
경국지미
경원
계륵
고희
곡학아세
관포지교
교언영색
구우일모
국척
국파 산하재
군계일학
권토중래
근화 일일지영
금성탕지
금슬상화
금의야행
기우
기호지세
낙양지가
남가지몽
남상
누란
대기만성
도원경
도청도설
도탄
동병상련
두주불사
등용문
마이동풍
만가
망국지음
명경지수
명철보신
모순
무항산 무항심
문인상경
문전성시
미망인
미봉
방약무인
배수지진
백년하청
백문불여일견
백미
백발 삼천장
백약지장
부마
분서갱유
불구대천
봉정만리
비육지탄
빙탄 불상용
사면초가
사이비
사족
사지
살신성인
삼십육계
삼천지교
삼촌설
상가지구
새옹마
세군
소이부답
송양지인
수서양단
수어지교
식지
안서
양두구육
양산박
양상군자
어부지리
역린
연목구어
오리무중
오십보 백보
오월동주
오합지중
옥상가옥
옥석혼효
와신상담
완벽
원교근공
월단
월하빙인
읍참마속
이하 부정관
일자천금
전전긍긍
전철
조강지처
조삼모사
조장
조지육림
채미가
천리안
천의무봉
철면피
청담
촉견폐일
출람
태산북두
퇴고, 추고
파죽지세
포류
한단지몽
해로동혈
형설지공
호접지몽
홍일점
화룡점정
후생가외
한국편
가명인
강강수월래
건지두풍
계란유골
고려 공사 삼일
공당문답
꽃중에 좋은 꽃
구렁이 제 몸 추듯 한다
구천십장 남사고
군자는 가기이방
그 말을 왜 했던고
기습작전
나는 언제나 급제를 하노?
나 먹을 것은 없군
노다지
노목궤
녹두장군
담바귀타령
동상전엘 갔나
뜨고도 못 보는 해태 눈
말뚝이 모양 대답만 해.
먼저 영감의 제사
모주
문래
박태보가 살았을라구
보은단
보호색 군복
봉이 김선달
불강불욕
불수산 지으러 갔다가 금강산 구경
비오는 날의 나막신
사명당의 사처방
사부집 자식이 망하면 세 번 변해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선 부처의 형
삼 서근 찾았군
삼청냉돌
서생은 부족 여모라
서해어룡동 맹산 초목지
소대성이 항상 잠만 자나?
손돌이 추위
송도 말년의 불가살이
송도의 삼절
쇄골표퐁
술 잔 깨뜨린 건 파맹
습지자도 불가무
신이화가 많이 폈군!
신정성 구정승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어
악망위에 턱 걸었나?
안성 맞춤
양주 밥 먹고 고양 구실 한다
어우동
언문 진서 섞어작
여언이 시야로다
여황제 부럽지 않다
오비가 삼척이라
용병하는 술모라
을축 갑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
전 조림
제호탕
존염은 표장부
지화난독
청기와쟁이 심사
체할라 버들 잎 띄워 물좀 먹고
춘몽을 하가진신고?
충주의 자린고비
칠십에 능참봉을 하나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 아홉번이라
태종우
평양의 황고집
한 다리가 짧은게 아니라 길어
할 말이 없다
함흥차사
행주치마
화랑의 오계
서양편
가장 강한 자의 주장이 항상 옳다
18세기 프랑스의 우화시인 '라 퐁떼느'(1621--1695)의 '우화집' 제1권에 실려 있는 '늑대와 새끼양'의 이야기는 봉건시대 지배자의 압정을 통렬히 풍자한 이야기이다.
새끼양이 골짜기의 개울물을 마시고 있는데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새끼양을 잡아 먹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고 억지를 쓰지만 새끼양은 하나하나 조리있게 대답하여 마침내 늑대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러자 늑대는 이유를 대주지도 않고 새끼양을 잡아 먹어 버린다. 즉 약자는 강자의 억지를 당해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강자와 약자는 있게 마련이며 손해는 항상 약자가 보게 마련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것은 뒷골목 똘마니들의 세계지만, 국사를 다루는 국회를 주장하고 다수의 횡포를 규탄해도 국정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다수당인 여당이며 야당은 소수의 비애만을 되씹을 뿐이다.
거인 아틀라스
'제우스'신이 거인신 '타이탄'족을 멸하고 전세계의 통치권을 장악했을 때 거인신의 하나인 '아틀라스'로 하여금 하늘을 버티고 있게 했다. 하늘은 무게가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물리학에서도 배우듯이 대기의 압력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어서 '아틀라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다. 때로는 하늘 대신 지구 전체를 버틴다고 생각하여 지구를 '아틀라스'라고 하게 되었다.
한편 '아틀라스'가 있는 곳은 이 세상 서쪽 끝의 바닷가라고 했는데, 차츰 서쪽의 지리가 밝혀짐에 따라 '아프리카' 서북단에 솟아 있는 '아틀라스'산맥을 그 거인의 상징으로 보고 그렇게 이름짓기도 했다. 다시 그 산 바깥 쪽의 바다 즉 대서양은 '아틀라스'의 바다라하여 '아틀란틱 오션'이라 부르게 되었다.
'타이탄'신은 이 세상이 처음 시작될 때 하늘 '우라노스'와 땅 '가이나' 사이에서 태어난 원시신인데, 그들의 우두머리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하지만 후에 그의 아들 '제우스'에게 쫓겨나고 만다.
'아틀라스', '타이탄'은 미국의 대륙간 탄도탄의 이름으로도 쓰이고 있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운동회나 약광고 따위의 캐치 프레이즈로 곧잘 쓰이는 이 글귀는 희랍의 시인 '유베나리스'의 글귀에서 유래된 것. '유베나리스'는 그의 '풍자시'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것의 허무함을 읊고 있다. 권세를 자랑하던 '티베리우스'의 충신 '세이야누스', 웅변가 '키케로', 명장 '한니발' 등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지적하고 또 용모의 아름다움은 도움을 받기 보다 해를 가져오는 수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것. 또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를 아울러 갖추도록 노력하기를 '유베나리스'는 권하고 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사상 유례없는 3.15 부정선거는 마침내 마산의 유혈데모를 몰고 왔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자유당 정권에게는 아직 사태수습의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자유당의 모 고위층은 서슴없이 말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
총칼을 휘두른 결과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 결국 그들은 총칼에 의하여 망하고 만 것이다.
'예수'가 '유다'의 배신으로 제사장들에 잡혀가려 할 때 함께 있던 사나이 하나가 칼을 뽑아들어 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리쳤다. 그러자 '예수'는 칼을 든 사나이를 보고 말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아라. 검을 쓰는 사람은 모두 검으로 망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에 열 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이제 내가 당하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리고는 조용히 제사장들에게 끌려 갔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걸핏하면 힘으로 국민을 억압하려 들기 쉬운 위정자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겟세마네의 동산
예루살렘의 동쪽, 올레베트산 기슭에 있는 올리브의 동산.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수난에 앞서 최후의 만찬을 가진 다음 제자들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그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하여, 자기가 갚으려 하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추악한가를 보고 또한 다가오는 수난을 슬퍼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로 돌아온 '예수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잠들어 있음을 보고,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하고 깨우쳤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
현실이 어둡고 괴로울수록 밝은 내일을 기약하며 일기장에다가 혹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글귀를 한두번 써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국의 시인 '쉘리'(1792--1822) 평의 시 '서풍부' 마지막 구절.
'바이런', '키츠'와 더불어 영국 낭만주의시대의 3대 시인의 하나로 꼽히는 '쉘리'는 불과 서른 하나의 나이로 타고 있는 요트가 전복하여 횡사했지만 주옥같은 시를 남겨 놓아 오늘날까지도 애송되고 있다.
결혼이란 권리를 반으로 하고 의무를 두 배로 하는 일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 하우어'(1788--1860)의 말.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제2권에 있다.
'니체'는 '쇼펜 하우어'를 가리켜 '참다움 인생의 교육자'라고 했는데, 그의 저서에서 받는 진지한 인상과는 달리 꽤 재미나는 점도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한 번은 남녀가 모여 즐기기로 있는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몇 명의 여자가 남자와 여자는 원칙적으로 누가 더 현명하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야 물론 여자지요. 왜냐면 여자는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허지만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하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즉 여자는 현명하니까 남자와 결혼하지만, 남자는 어리석기 때문에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이름난 철학자가 거의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악처 '크산티폐'로 골치를 앓은 '소크라테스'를 제외한다면 '플라톤', '제논',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흄', '라이프니츠', '칸트', 등이 모두 독신으로 지내지 않았느냐는 것.
중세 영국의 봉건영주 '레오프릭'백작은 11세기 경 코멘트리 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번번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마음씨 고운 그의 아내 '고다이바'부인(1040--1080)은 세금을 가볍게 하도록 남편에게 부탁했다. 냉혹한 백작은 듣지 않다가 하도 여러차례 부탁하자 농담 삼아 "당신이 대낮에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오면 세금을 면제해 주지"하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부인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남편의 말대로 알몸으로 시내를 일주했다. 시민들은 부인의 정에 감격하여 집집마다 창문을 굳게 닫고 부인의 나체를 보지 않기로 했는데, '톰'이란 사나이가 약속을 어기고 문틈으로 기웃거렸다가 그만 벌을 받아 장님이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코벤트리 연대기'에도 실려 있는 에피소드로 지금도 그곳에서는 부인의 유덕을 기리는 축제를 지낸다고 한다.
또한 필요 이상 남의 일을 캐기 좋아하는 사람을 '엿보기 좋아하는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더'대왕은 페르시아를 짓밟고 동진해 가다가 기원전 343년 소아시아 서해안 프리지아의 고도 고르디움을 함락시켰다.
'알렉산더'대왕이 그곳의 신전을 찾아갔더니 신전 앞에 수레가 하나 있는데 수레의 손잡이는 신전 기둥에 단단히 매어져 있었고 매듭은 어찌나 복잡하게 얽혔는지 아무도 풀지를 못했다. 그 매듭은 옛날 현자로 이름 높던 '고르디우스'왕이 맨 것으로 "이 매듭을 푼 자는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 하는 신탁이 전해지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유럽과 아시아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
고양이가 어찌나 쥐를 잡아먹는지 견디다 못한 쥐들이 자기 방어의 수단을 강구하고자 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갖가지 해괴한 방법이 논의된 끝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고 만장일치 합의를 보았다.
자, 그러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가느냐-쥐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모두다 꽁무니를 빼고 만다.
이것은 어린이들까지도 알고 있는 '이솝이야기'의 한 토막이지만, 확실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즉 '위험하고 성공의 가망이 적은 일'을 앞장 서 하려면 여간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 하물며 오늘날과 같이 갖가지 사회악이 만연하고 폭력이 활개치는 시대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로버트 케네디'나 '킹'목사 처럼 죽음의 희생마저 각오해야 할 것이니까.
골드 러시
1848년 1월, 미국 켈리포니아 사클라멘트의 한 노동자가 세라 네바다에서 사금을 발견했다. 그 뉴스가 전해지자 미국 내에서는 물론 세계 각지로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미국 서부로 쇄도했다.
더욱이 금광은 켈리포니아뿐만 아니라 콜로라도, 아이다호, 몬타나, 사우스 다고타 등 각지에서 잇달아 발견되어 골드 러시로 들끓었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십만을 돌파했고, 일개 한촌에 불과하던 샌프란시스코도 일약 인구 2만의 도시가 되었다. 금에 눈 먼 인간의 욕망은 갖가지 희비극을 연출했으며 오늘날까지 서부극에서 곧잘 다루는 주제가 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또 다른 뜻의 골드러시가 세계를 휩쓸었다. 즉 국제통화인 파운드화가 동요를 거듭하다가 67년에 평가절하를 단행하자 금값이 급등, 세계 도처의 금시장이 문을 닫고 금의 이중가격제를 채택하는 등 소동을 겪었다.
골리앗과 다윗
구약 성경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거인.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사람과 싸움을 벌여 '유다'의 소고라는 곳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블레셋 사람의 진영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거인이 나타나더니 이스라엘의 진지로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골리앗' (골라이아스), 키는 6큐빗(3.8m), 머리에는 청동의 투구를 쓰고 몸에는 5천세겔(약 75킬로)의 비늘 모양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진지를 향해 무시무시한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나하고 결투하자. 내가 지면 우리 군사는 모두 너희들의 노예가 되마. 그러나 내가 이기면 너희들은 우리에게 항복을 하라."
이렇게 4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그의 생김새에 겁을 집어먹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서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때마침 종군하고 있는 형을 찾아 이스라엘의 진지에 왔던 '다윗' 소년 (후에 이스라엘 왕)이 '골리앗'을 보더니 분연히 나가서 상대하겠다고 했다.
'사울'왕은 '다윗'에게 갑옷을 주었으나 '다윗'은 그것을 입지 않고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에는 돌 다섯 개를 넣은 자루를 들고 거인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다. '골리앗'은 비웃으며 단숨에 죽이겠다고 덤볐으나, '다윗'소년이 자루에서 돌을 꺼내어 힘껏 던지자 보기좋게 거인 이마에 명중, 거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블레셋 사람들은 총퇴각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골리앗'은 거인의 대명사로 쓰인다.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리레오 갈리레이' (1564--1642)가 한 말. 르네상스시대 이후 유럽에는 자연과학의 연구가 싹텄으며, 그 발달과 함께 중세 이후 기독교 교회에서 제창해 온 갖가지 학설이 번복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가르쳐온 것도 실험해본 결과 올바르지 못함이 판명되자 사람들은 차츰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 반면 교회의 사상 통제는 한층 엄해져서, 아무리 과학적으로 올바른 것이 입증되어도 교회의 규율과 어긋나는 학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사정없이 체포 처형했다.
특히 지구에 대해서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이나 별들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고집해 왔다. 이에 대해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 (1473--1542)가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갈리레이'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여 '코레르니쿠스'의 설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그러자 로마교황청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우격다짐으로 학설을 변경시키려 했다.
칠십 노령의 '갈리레이'는 강압에 못이겨 자기설을 번복하기로 맹세했지만 판결이 내린 다음에도 "그래도 역시 지구는 움직이고 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는 것.
금단의 열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살도록 한 다음, 다른 나무의 열매는 따 먹어도 좋으나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생명의 나무' 만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 죽어 버릴 터이니 먹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원래 사람이란 보지 말라면 보고 싶고 먹지 말라면 더욱 먹고 싶어지는 법.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마침 악마가 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저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선악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고 유혹하자 '이브'는 곧 그 꾀임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에게도 권했다. 그 결과 그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알몸임을 깨닫고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무화과나무로 앞을 가렸다. 또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죄로 낙원에서 쫓겨났으며 괴로움과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고 다시 그 죄는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흔히 신문의 삼면 등에서 "한번 금단의 열매를 맛본 젊은 남녀는 걷잡을 수 없는 향락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운운하는데 금단의 열매란 허용되지 못한 환락을 뜻한다.
기사도
여권이 신장하여 '여성상위시대' 운운하는 요즘에 와서는 다분히 퇴색하고 말았지만 기사도를 말할 때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특징은 '여성을 위하고 아껴 주는 일' 즉 '여성에 대한 갤런트리(정중함)'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서양의 봉건사회는 기도드리는 사람(승려), 수호하는 사람(귀족), 경작하는 사람(농부)의 세가지 신분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수호하는 사람이 바로 기사이다. 기사들의 윤리가 곧 '기사도'였으며 충성과 무용을 첫째로 꼽았다. 또한 중세 유럽의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였으니만치 기사도에도 그 정신이 반영되어 기독교를 수호하고 이교도를 멸망시키는 것도 기사들의 의무라 생각했다. 그리고 기사로 서임될 때는 약한 자인 여성을 보호할 것도 맹세했다. 이는 '마리아 숭배'와도 관계가 있으나 기사도의 전성기였던 십자군 시대에 고국에 남아 집을 지키는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했다는 것, 또 원정하는 동안 기사들의 성생활이 부자유스러웠던 데서 여성에 대한 동경심이 높아지고 나아가서 '여성에 대한 캘런트리'를 낳게 했다는 풀이도 있다.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은 신분이 높은 귀족의 부인이었으며, 정신적으로 여성을 존경하고 봉사하는 것이 이상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육체적 관계에까지 발전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서 월터 롤리' (1552--1618)가 마차에서 내리는 '엘리자베드'여왕 앞에 자기 망토를 펴서 흙탕길을 밟지 않게 한 것도 모두 기사도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길로틴
단두대, 정확하게는 기요띠느, 프랑스 혁명시대에 사용됨으로써 유명해졌다.
'기요땅' (1738--1814)이라는 의사가 발명했다고 한, 실제로는 프랑스 남부지방과 이탈리아에서 그전부터 사용되어 왔었다.
또한 길로틴을 발명한 '기요땅' 자신이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일화도 근거없는 이야기.
길로틴은 두꺼운 널빤지 위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위에 밧줄로 세모꼴의 칼을 매달았는데, 사형수가 널빤지 위에 엎드려 기둥 사이로 목을 내밀면 칼이 떨어져 목을 자르게 되어 있다.
힘 안들고 목을 자를 수 있는 것이 이점이어서 공포정치하의 프랑스에서 대량 살인에 이용되었으며, '루이' 16세, '마리 앙뜨와네뜨', '로베스삐에르' 등, 길로틴에서 처형된 사람으로 역사상 이름을 남긴 사람이 많다.
길 잃은 양
기독교에서는 죄 지은 사람들을 곧잘 길 잃은 양에 비유한다. 누가복음 14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말.
양 백 마리를 가진 자가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잃었던 양을 찾게 되면 잃지 않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할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적혀 있은 말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낸 것으로서 여기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길 잃은 양은 죄인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바라심은 죄인의 회개함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1596--1650)는 중세기 이후의 전통적인 철학인 스콜라 철학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 눈뜬 주아적의식 즉 근대적 자아에 입각한 철학의 체계를 세우려 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명저 '방법론서설' 제4부에 나오는 위의 명언으로 집약된다.
그는 온갖 기존의 관념과 자기자신의 감각까지도 의심하고 '방법적 회의'를 추진시켜 나간 결과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확고하고 확실한' 것으로서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였다. 일체를 부정하더라도 그 부정의 작용을 하는 자아만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아가 모든 철학의 모든 철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진리에서 출발하여 물질에 대해 정신의 우월을 주장하는 이원론을 확립함으로써 근대적 관념론의 선구자가 되는 동시에 그의 수학적 유물적 방법론은 근대 과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
영국은 여왕재세시에 발전했다고 한다. 현재의 여왕 '엘리자베드' 2세 치하에는 이렇다 할 발전은커녕 오히려 축소일로에 있지만, '엘리자베드' 1세는 즉위하자 곧 통일령을 발표하여 영국교회를 확립하는 한편 외교면에 있어서도 발전적 정책을 취하여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 영국이 일류 해군국이 될 토대를 닦았다.
이 시대는 문화면에 있어서도 '엘리자베드 시대'라 불리는 획기적 융성기로 '세익스피어', '스펜서', '벤 죤슨', '프랑시스 베이컨' 등이 활약했다.
당시의 관습으로 유럽 각국의 왕가는 서로 전략적 결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여왕에게도 구혼자가 많았지만 여왕은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하여 끝내 독신으로 지냈다. 그래서 '처녀왕'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나르시시즘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가씨, 자기의 알몸을 거울에 비춰 보고 황홀감을 느끼는 사춘기의 소녀, 이러한 자기도취의 현상, 즉 '나르시시즘'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람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남이야 뭐라든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사람이니까.
정신분석학자의 창시자 '프로이드'는 인간에 있어서 리비도(애욕)의 발전단계를 자연애, 자기애, 동성애, 이성애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리비도가 자기애에서 머무르는 것을 '나르시시즘'이라 불렀다.
'나르시소스'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에코'라는 님프가 그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강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애착을 느낀다. 그러다가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며 그가 죽은 자리에는 수선화가 피어났다. 한편 사랑을 못이룬 '에코'는 목소리만이 남아서 골짜기를 헤매며 '나르시소스'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래서 영어로 '수선화'를 '너시서스', 메아리를 '에코'라고 한다.
나 죽은 다음에는 홍수야 지든 말든
나중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신나는 대로 놀고나 보자-이런 생각은 누구나 갖게 마련인 것이지만, 명색이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이미 대혁명의 기운이 차츰 짙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봉건제 말기의 왕답게 철저히 무능했으며 정치를 싫어하여 규방에 틀어박힌 체 '샤톨루'부인, '퐁파두르'부인, '뒤 바리'부인 등의 정부와 놀아났다. 게다가 이들 정부의 말을 따라 공연한 전쟁에 개입하여 패배 당하는가 하면 식민지를 잃기도 했다.
정치하는 꼴이 너무나 엉망이어서 국민들 사이에는 '이대로 가다가는 대혁명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러한 소문이 귀에 들어와도 왕은 예사로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이런 상태가 계속될 거다. 다음에는 태자가 어떻게든 잘 해 주겠지. 나 죽은 다음에는 홍수야 지든 말든 알 바 아니지"라고 뇌까렸다 한다.
그의 뒤를 이은 '루이' 16세 또한 암군이어서 결국은 대혁명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며 '루이' 16세는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너 자신을 알라
희랍의 중앙부 코린토만을 깊숙히 들어간 곳에 미루라 항구가 있다. 그 항구의 북쪽 언덕을 올라가면 높이 솟은 파루나소스 산기슭에 아폴론의 신역으로 이름난 델포이가 있다. 옛날에는 희랍 전역으로부터 이곳을 찾아오는 공물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으며 신전에 이르는 길 양옆에는 뭇나라에서 바쳐온 공물을 간수하는 보고가 즐비했다. '희랍 주유기'에 의하면 그 신전 입구에는 인생에 대한 금언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너 자신을 알라'와 '매사에 도를 지나치지 말라'의 두 글귀였다고 한다.
고대 철학자의 전기를 쓴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타레스전'에 의하면, 별을 쫓다가 시궁창에 빠졌다는 이 철인은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나 자신을 아는 일'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매사에 도를 지나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테네의 입법자 '솔로'의 말이라 전해지고 있다.
넥타이
넥타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신사의 옷차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그러나 본래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으로 불어로는 크라바트(cravat)라고 한다. 이는 크로아티아인이 와전된 것이라는데 다음과 같은 삽화가 전해지고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일인데, 왕은 베르사이유로 도읍을 옮긴 다음 밤마다 호화로운 사교 파티를 개최하여 국내의 귀족 귀부인 상류계급은 물론 외국의 사신들도 초대했다. 하루는 몇몇 크로아티아인이 목에 가느다란 천을 감고 파티에 참석하게 됐는데, 왕은 그것을 보고 옆에 있는 신하에게 "저건 뭐냐"하고 물었다. 신하는 사람을 두고 묻는 말인줄 알고 "크로아티아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아무튼 왕은 그 가느다란 천이 마음에 들어 다음날부터 자기도 그와 같은 천을 목에 감고 사교계에 나타났다는 것.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흉내를 내어서 목에 천을 둘렀으며 그 후로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노스탈쟈(nostalgia)
흠식(home sick) 혹은 회향병, 면학을 위해, 또는 입신을 위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전전한 사람이면 누구나 노스탈쟈에 젖어 눈물로 밤을 새운 경험을 가질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박해에 못이겨 북간도로 중국 땅으로 혹은 멀리 중남미로 떠난 이민들의 경우 망향의 설움은 뼈아픈 것이었다.
본래 노스탈쟈는 희랍어로 nostos(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와 alg(고통)의 합성어. 즉 고향이나 집으로 돌아가고자하여 마음을 태운다는 뜻.
노아의 방주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해 주셨다.
하나님은 20세기 후반기에 가서는 폭발적인 인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줄 미처 몰랐던 모양. 그러나 세월이 가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차츰 타락하여 지상에는 악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하나님도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다만 의인 '노아'만은 악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되 간을 막고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라. 방주의 길이는 3백큐빗(약 150m), 폭은 50큐빗(약 25m), 높이는 30큐빗(약 15m)으로 하되 상중하 3층을 만들고 위에서 1큐빗되는 곳에 창문을 내어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있는 육체를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라고 일렀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 타며 모든 생물 한 쌍씩과 먹을 양식을 준비하도록 했다. '노아'는 하나님 명령대로 오랜 세월을 두고 방주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노아'는 가족 및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탔는데, 방주에 탄지 이레 째 되는 날부터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밤 낮 40일 동안을 잠시도 쉬는 일 없이 내리 퍼부었다. 그 결과 온 세상은 흙으로 덮이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고 말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2월 17일, 그친 다음에도 1백 50일이 지나서야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7월 17일 방주는 아라랏 마루에 닿았다. 물은 계속 줄어들어 10월이 되자 여기저기 산봉우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40일이 지나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창 밖으로 내보내자 앉을 곳이 없어 하늘을 날아다니기만 했다. 그 후 7일이 지나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저녁에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다. 다시 7일이 지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해 1월 1일, 물이 완전히 비었으므로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한 번 혼이 나고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에게 또 '성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을 내리셨는데 그 결과는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되었다.
'노아'는 홍수 때 나이 6백살이었는데 3백 50년을 더 살아 9백 50에 죽었다고 한다.
노트르담(Notre Dame)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귀부인'이란 뜻.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빠리, 아미앙, 샤르뜨르, 루앙 등 프랑스에는 이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대성당이 많다. 그 중에서도 '노트르담 드빠리(Notre Dame de Paris) 는 '빅토르 유고'작인 동명의 소설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누벨 바그(nouvelle vague)
프랑스어로 '새로운 물결'의 뜻. 1958년 경부터 프랑스에서 일기 시작한 영화 운동을 말한다. 처음으로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은 여류 평론가 '프랑소와 지루'라고 한다.
'사촌들' (클로드 샤브롤작). '멋대로 해라' (J·L·고다르), '어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프랑소와 트뤄포) 등이 이 파의 대표적 영화 감독.
기성 감독의 작품이 아니고 영화 평론지 '카이에드 시네마'에 기고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의 감독 작품이 많다. 배우도 대부분이 신인들. 세트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배경에는 실지 경치를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많다. 대기업적 영화 제작에 반기를 들며 아마추어적 정신이 넘쳐나고 즉흥적 연출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테마로서는 현대에 반항하며 살아가는 청년의 현실적 모습을 즐겨 다루고 있다.
눈에는 눈을
'모세'는 만약 남의 생명을 빼앗았을 때는 목숨으로써 보상케 하고 눈을 다쳤을 때는 눈을, 이를 다쳤을 때는 이로써 보상케 한다는 율법을 정했다.
이는 원시적인 형벌법으로서 동해복수법 혹은 동태복수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법적으로 이러한 복수를 인정했음은 3천 6백여 년 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이 발표한 법전 제196조와 200조에 명기되어 있다.
이러한 법 원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 사이에도 행해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복수를 인정하지 않고 자비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유명한 '산상의 설교'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 편 빰을 치거든 왼 편 뺨을 돌려대기에 앞서 오른 쪽 주먹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뉴턴의 사과
영국이 낳은 근대 이론 과학의 선구자 '뉴턴' (1643--1727)은 3대 발견 즉 빛의 분석,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으로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그중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전한다.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었는데 때마침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번지기 시작, 이로 말미암아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인 '울스소프'로 돌아갔다. 그 후 고향에서 1년 반 가까이 지내는 동안 앞의 3대 발견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갈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안다'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 한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에게까지 미치는 지구의 중력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상상력의 비약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뉴턴'의 조카딸로부터 들어서 먼저 유럽 대륙에 퍼졌고 후에 영국으로 역수출되었다고 한다.
늙은 여자는 있지 않다
여성을 찬미하고 존경하는 프랑스에서 '여자에게는 나이가 없다', '여자는 언제나 젊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 여자가 듣기에 더 없이 반가운 이 말은 16세기의 프랑스 문학자 '몽떼뉴' (1533--1592)가 한 것으로 전한다.
19세기 후반의 철학자 '미슈레' (1797--1874)도 그의 '연애론' 제5부 제4장에서 '늙은 여자는 있지 않다'라는 표제 아래 '만약 여자가 남을 사랑하고 선량한 마음을 가진다면 어떠한 연령에 있어서도 남자에게 무한한 한 순간을 준다'고 하고 있다.
'연애론'이 출판된 것은 1856년인데, 그보다 15년 가량 앞서 시인 '알폰스 칼'은 '여인'이란 글에서 '여자는 노령으로 말미암아 혹은 그 밖의 어떠한 이유로 해서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늙은 여자란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여자는 항상 젊다. 여자는 언제나 동일한 취미와 동일한 쾌락 그리고 동일한 사랑을 지닌다'고 했다.
다모클레스의 칼
희랍 전설에 나오는 말. 시칠리섬의 도시국가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1세 (BC430--367)의 신하에 '다모클레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항상 왕의 행복함을 부러워했는데, 하루는 왕이 그를 보고 '네가 못내 부러워하는 왕좌에 하루 동안 앉아 보아라' 하며 자기 옷을 입히고 훌륭한 음식을 먹여 주었다.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다모클레스'가 무심코 천장을 쳐다보니 바로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칼이 한 가닥 머리칼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본 '다모클레스'는 혼비백산하여 물러 나오고 말았다.
이는 곧 권력의 자리가 겉보기와 같이 편안하지 못하며 항상 위험과 직면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전 미국대통령 '케네디'가 그의 연설에서 핵무기를 가리켜 '인류에 있어서 다모클레스의 검'이라 한 것은 유명하다.
대부, 대모
천주교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의 보증인으로서 남자일 경우에는 대부를, 여자일 경우에는 대모를 세운다. 그리고 대부 혹은 대모는 세례를 받은 자 즉 대자 혹은 대녀가 세례 때 한 약속을 지키게 할 의무를 가진다.
또 세례를 베푸는 자와 받는 자 및 그의 대부, 대모 사이에는 세례에 의하여 영적 친척관계가 성립되며 이상 3자간의 결혼은 무료로 한다는 규정이 교회법에 의하여 정해지고 있다.
대장장이 발칸
로마신화에 나오는 불과 대장간의 신. 절름발이인 데다가 별로 잘 생기지도 못했지만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제철공업의 원조이다. '발칸' (Vulcan)은 영어명이고 로마어로는 불카누스 (Vulcanus) 희랍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 (Hephaistos)이다. 영어의 화산(volcano)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
이 신은 화산 밑바닥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있으며 화산의 분화구에서 솟아난 연기는 바로 그의 일터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참고로 이태리는 '폼페이 최후의 날'의 베수비우스 화산을 비롯해서 세계 제일의 화산국이다.
데마
희랍어 데마고기(demagogie. 민중 선동)의 약자. 데모스 (demos 민중, 일반국민)에서 유래된 말로 '선동적인 언론', '엉터리 선전' 등의 뜻.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민중들을 사실무근한 선전으로 선동하며 자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고 선동하는 아지테이션(agitation)과 대조되는 말. 우리 나라의 정치 풍토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데마'로서도 모자라 '마타도어작전'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얘, 너 요즘 미스터 김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지?"
"얘두, 그건 순 데마야"
하듯 가벼운 뜻으로 쓰인다.
데카메론
수녀원의 원장님께서 정부의 팬츠를 두건으로 착각하여 쓰고 나와서는 설교하여 가라사대 "고기의 자극은 막을래야 막을 길이 없다."
음담패설이 아니라 이태리의 유명한 작가 '보카치오' (1313--1375)의 작품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
데카메론이란 '10일 이야기'의 뜻으로, 페스트를 피하여 피렌체 교외의 별장에 간 일곱 사람의 남자와 세 사람의 여자가 각자 하루에 한 가지씩 열흘 동안 이야기한 백 편의 이야기를 수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용은 귀족과 승려에 대한 반항 등 당시의 세태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대담한 남녀간의 성관계를 다루고 있다. 근대 소설의 기원이자 르네상스기를 통한 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
서울에서는 공기의 오염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서울에 올라오면 곧 살 길이 마련되기라도 하는 듯 공기 맑은 시골에서 혼탁한 서울로 뛰어든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 있어서는 도시가 농노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자기의 땅이었다. 유럽에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경의 일이었는데 처음 봉건 영주들은 도시의 성립이 그들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여 이를 보호했다. 그러나 점차 도시 상인의 길드(조합)와 영주 사이의 이해가 대립되자 도시는 영주에게 돈을 주고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장원의 영주 아래 있던 농노들은 이동의 자유가 없었지만 도시로 도망쳐서 일정기간(보통 1년하고 1일) 영주에게 들키지 않으면 자유로운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해서 '도시의 공기는 (사람들) 자유롭게 만든다'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독한 약이지만 효험은 확실하다
'엘리자베드' 여왕시대의 군인이자 문필가였던 '월터 롤리'는 수려한 용모와 우아한 태도로 해서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새로 맞춘 자기 망토를 흙탕물 위에 깔아서 여왕이 그 위를 밟고 가도록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 그가 이복 형제 '험프리 길버트'와 함께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식민지를 건설하여 '버지니아'라 이름지은 것도 다 여왕의 마음을 사기 위한 일이었다. 이때 감자와 담배를 가져온 것은 문화적으로 특기할 일. 그가 처음으로 자기 서재에서 담배를 피웠을 때 하인이 놀라서 머리 위로 물을 뒤집어 씌웠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에 가서는 여왕의 신임을 잃었고 더욱이 여왕 사후 '제임스'왕으로 부터는 반역죄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20년 동안 갇혀 있기도 했다. 후에 출옥하여 왕의 명령으로 남미 오리노코 강변에 전설적인 황금의 나라(엘 도라도)를 찾으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처형은 '올드 팰리스' 형장에서 집행되었는데, 여러모로 구명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마침내 형장에 서자 사형 집행인이 든 도끼를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독한 약이지만 효험은 확실하다"
돈쥬안
다소 퇴색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방탕한 자, 호색한의 뜻으로 널리 쓰이는 말.
본래는 14세기 스페인의 전설적인 귀족 이름으로 방탕을 일삼았으며 남의 집 딸을 유괴하고 다시 그의 부친을 죽인 끝에 살인죄로 목이 달아났다는 사나이.
후세에 와서 갖가지 형태로 문학화되었는데 그를 영원한 인간 전형의 하나로 확립한 것은 '몰리에르'의 희곡 '돈 쥬안' (1865)이다. 그밖에 '바이론'의 서사시 '돈 쥬안' (1823)도 유명하며 '모짜르트'의 가극 '돈 죠반니' (1787)는 가극을 대표하는 것이 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여대생 등 수십 명의 여자를 농락한 끝에 법정에 서서 '법은 보호할 가치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명(?)판결을 낳게 한 박인수 (1955)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돈 판'이었다.
돼지에게 진주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진가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고귀한 것을 주어도 무의미하다는 뜻.
돼지는 구약시대부터 부정한 동물이라 하여 식용으로 하는 것 조차 금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잠언11장 장22절) 혹은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베드로 후 2장 22절)하는 등 돼지에 대한 모멸감이 강하고 최하급의 동물로 다루고 있다.
우리 나라의 속담 '개에게 편자'도 같은 뜻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곤란한 일과 마주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을 보면 흔히 말로써 힘를 북돋아 준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7장 7절 이하에 나오는 말로 '산상수훈'의 일부.
"구하라 주어질 것이요, 찾아라 찾아질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드라마(drama)
고대 희랍에서는 주신 '바카스'의 제례 때 행사의 하나로 희극 또는 비극을 경연했었다.
그로 말미암아 트래지디(비극), 코메디(희극) 등 갖가지 연극 용어가 전해지고 있으며 드라마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연출되는 것'이란 뜻이다.
지금은 연극 전반을 가리키지만, 본래는 종교적 사회적 리크리에이션으로 부족의 기분을 일신하고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들의 꽃, 공중의 생
'예수 그리스도'의 유명한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 즉 마태복음 6장 26절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들의 꽃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 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요컨대 사람은 먹는 것, 입는 것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진리를 쫓아 영원한 삶에 눈뜨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인데 공기만 마시고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현실적으로는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디스크(disk)
지금은 흔히 레코드의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본래는 원반의 뜻으로 고대 희랍의 운동기구였으며 디스코스(diskos)라 했다.
그 후 라틴어로는 디스카스(discus), 유명한 희랍의 조각작품에 '원반 던지기 선수' (diskobolos)라는 대리석상이 있다.
디오게네스(Diogenes)
고대 희랍의 철학자.
금욕파인 큐니코스파의 대표적 인물인데 큐니코스파라는 이름도 원시적 반문명적 생활을 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이 큐논(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그의 기행에 대한 갖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알렉산더' 대왕과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평생토록 홑옷을 입고 통 속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가서,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더니 때 마침 햇볕을 쬐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조금만 비켜 서 주시오.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알렉산더' 대왕은 그 말을 듣자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
하고 술회했다 한다.
라 마르세예즈(La Mrseillaise)
프랑스의 국가, 그 뜻은 '마르세이유의 노래'인데 그것이 프랑스 국가가 된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제국이 프랑스 왕실을 옹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유럽의회는 '루이' 16세에 강요하여 오스트리아에 선전을 포고했다. 그 무렵 프랑스 북부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 대위 '루제 드 릴'이 의용군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작사, 작곡한 것이 바로 이 노래로 처음에는 '라이군의 군가'라 했다.
'라이군의 군가'는 급속히 각 부대에 번져갔는데 8월 10일 '루이' 16세가 퇴위하던 날 빠리로 올라온 마르세이유의 의용군이 이 노래를 소리높이 외치며 샹 제리제 거리를 활보하자 빠리 시내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빠리 시민은 이 노래를 '마리세이유의 군가'라 불렀으며 그 후 일반 국민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국가가 된 것이다.
라블레의 15분
A군은 오래간만에 애인 B양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생겨서 매양 즐겁기만 했다. 푸짐하게 먹고 나서 돈을 치르려고 카운터 앞에 선 A군,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 넣더니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옷을 갈아 입고 나오느라 지갑을 잊고 온 것이다.
이런 순간을 프랑스에서는 '라블레의 15분'이라고 한다. '라블레'는 '가르간튜어', '판타그튀엘' 등으로 유명한 16세가 프랑스의 작가.
그는 당시의 왕 '프랑소아' 1세의 명을 받들어 로마를 갔었는데 오는 길에 리용에 이르니 여비가 한 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신분을 밝히면 되었지만 그러기를 싫어한 '라블레'는 심사숙고 15분, 마침내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의사로 변장한 다음 그곳의 의사들을 모아놓고 의학강의를 한바탕 늘어놓았다. 시골 의사들이 탄복하여 듣고 있는데 난데없이 '라블레'는 약 한 봉지를 꺼내들더니 이태리에서 구해온 독약인데 이 약으로 국왕을 독살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놀란 의사들이 경찰에 알렸기 때문에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것도 중대범인이라하여 소중히 다루었으며 빠리까지 편안히 호송되어 갔을 뿐 아니라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
'프랑소와' 1세는 중대 범인을 체포해 왔다는 말에 직접 대면을 했으나 변장을 지워버리고 제 모습으로 돌아온 '라블레'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크게 웃으며 그의 기지를 칭찬했다.
로마는 세 번 세계를 통일했다
로마는 처음에 무력으로 다음에는 기독교로 그리고 세 번째는 로마법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했다고 한다.
로마인은 문화적으로 볼 때 희랍인의 아류라고 하나 실용적인 면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도로, 수도 등의 대 토목 공사를 남겼고 또 로마법을 만들었다.
이 로마법은 유럽제국이 법을 제정할 때 그 본이 되었으며 현대의 법률은 모두 영향을 받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의 현행법도 예의는 아니다.
이 말은 독일의 법학자 '예링' (1818--1892)이 그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 첫 머리에 쓴 데서 유명해졌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사업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곧잘 쓰이는 유명한 말은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에 나온다.
로마는 티베리스 강변의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이태리 반도를 정복, 마침내 지중해 주변을 모두 지배하기에 이르러 지중해를 '우리들의 바다'라 부를 정도의 대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역사와 수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로봇
인조인간을 가리키는 말, 한 때 우리 나라 텔레비젼에서도 방영되었던 미국의 TV영화 '우주가족'에 보면 정교한 로봇이 등장하여 충실한 하인 구실을 하고 있다. 본래는 체코의 극작가 '차벡' (1890--1938)이 희곡 'R·U·R' (Rosssum's Universal Rovots, '로섬이 만든 만능 로봇'의 뜻, 1923)에 나오는 인조 인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뜻을 좇아 움직이는 주체성 없는 인간을 가리켜 '로봇'라고도 한다. 국가나 대기구가 일부 인간의 이익에 이용될 경우 곧 잘 그 표면에는 로봇적 인물이 자리를 장식한다. '로봇 시장' 로봇 장관' 등 모두 다 그런 무리의 인간들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기원 전 50년, 로마의 원로원은 그 당시 갈리아 지사였던 '시저'를 해임하고 군대 해산을 명령했으나 '시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폼페이우스' 일당을 몰아내고 전 이태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로해서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말은 어떤 일의 용단을 내릴 때 쓰인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와 흡사한 예를 찾자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은 이씨 조선 건국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까운 예로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을 건너 온 혁명 주체들의 심경 또한 루비콘강을 건너는 '시저'의 심경과도 같았을 것이다.
마녀 재판
중세 유럽은 신앙의 시대인 동시에 미신의 시대이기도 했다. 일체의 사상은 교회의 엄중한 통제를 받았지만 무지한 민중들은 곧잘 점장이나 요술쟁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특히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으니만치 약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나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존경하기도 하고 두려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성경에 가르침을 인간의 정신면에 국한시키지 않고 자연계와 인간 세계의 온갖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자는 악마에게 흘린 자라하여 모조리 처형했다. 그 결과 오랜 세월에 걸쳐 수백만의 사람이 처형되었으며, 그 재판을 마녀재판이라고 했다.
마녀재판이라 해도 대상은 여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교회의 교리를 어긴 자는 남녀 불문하고 마녀라 불리었다. 프랑스의 애국소녀 '잔 다크'가 처형된 것도 마녀라는 이유에서였다. 마녀재판에는 잔인한 고문이 따르기 마련이었고, 고문에 못이겨 자백을 하면 곧장 화형대에 끌어올려 불살라 죽였다.
오늘날 공산세계의 소위 인민재판은 현대판 마녀재판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마돈나
이태리어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 성모의 성화, 성상도 '마돈나'라고 한다.
성모상은 보통 어린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잘 그려지는데 '라파엘로' (1483--1520)의 성모화는 특히 유명하다.
그밖에 귀부인, 애인의 뜻도 있으며 이상화의 유명한 시 '마돈나 나의 침실로'의 '마돈나'는 그 후자의 경우이다.
마라톤
기원전 490년 페르샤군은 '알타페르네스'와 '다티스'를 지휘관으로하여 희랍을 침공,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 시 북방 412Km인 마라톤평야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 당하여 10배가 넘는 페르샤의 대군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밀티아테스'의 교묘한 지휘로 아테네군은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마라톤 전쟁의 승리를 아테네 시민에게 알리고자, 한 용사가 40Km의 거리를 단숨에 달린 끝에 승리를 알림과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마라톤 경주'의 시작이라 하며 현재 올림픽에서 거행되는 마라톤의 거리도 아테네-마라톤간의 거리와 같은 40Km(정확히 42.195Km)이다.
다만 그때의 용감한 병사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만나(manna)
이집트를 출발한 이스라엘인은 2개월 25일만에 새로운 땅에 이르렀다. 가지고 온 양식도 떨어지고 배고픔을 느낀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을 말하자 '여호아'는 '모세'에게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라"라고 일렀다. 과연 그날 저녁 수 많는 메추라기가 내려와서 야영지를 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이슬이 자욱히 내렸는데, 이슬이 사라지고 나니 서리같이 희고 동그란 것이 가득히 흩어져 있었다.
'모세'는 백성에게 "이는 여호아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니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두어라"하고 일렀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만나'라고 했다. 그 맛은 꿀 과자 같았으며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그것을 모았다. 또 하루가 지나면 부패해 버리는 성질이 있어 그날 필요한 몫, 즉 한 사람이 1호멜(4리터)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인은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을 날마다 만나에 의하여 목숨을 이어갔다. (출애굽기 16장 13절 이하, 민수가 16장 6--9절)
만능의 사람
이태리에서 비롯된 문예부흥은 인간과 자연의 발견을 모토로 했으며, 부자유스러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려는 기운이 팽배했다. 이와 같은 이상을 충분히 나타낸 사람이 바로 '만능의 인간'이라 일컬어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였다. 그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등 화가로서도 불후의 이름을 남겼거니와 조각, 건축, 토목, 군사에도 밝았고 해부학, 생물학, 수학, 물리학 등을 연구했으며 철학자로서도 뛰어났었다. 또한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를 평생토록 연구하여 비행기에 관한 이론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만물은 유전한다
기원전 5세기경의 희랍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 그는 '소트라테스' 이전의 초기 희랍 철학자 가운데서 가장 난해하며 깊은 통찰력을 지닌 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 '만물은 유전한다(반타 레이)'는 당시의 유행어였던 모양으로 같은 시대의 희극작가 '에피칼모스'의 희극 가운데 그 말이 나온다.
한 사나이가 돈을 빌리고는 그 사람이 받으러 오자 "돈을 빌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람이 달라졌다. 반타 레이"하며 돈의 반환을 거절했다. 화가 난 빚쟁이는 그 사나이를 두들겨 패서 마침내 법정에 서게 되었는 데 그때의 빚쟁이 왈 "때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람이 달라졌다. 반타 레이"
만우절
'에이프릴 풀즈 데이'를 가리키는 4월 1일날, 악의없는 장난이나 거짓말로 사는 장난이나 거짓말로 사람을 속여 넘기는 습관이 옛부터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습이 세계 도처에 널리 퍼졌으며 이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사월 바보'라고 한다.
이 풍습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 현행 달력의 3월 25일을 새해로 정하고 4월 1일까지 춘분의 축제를 지냈으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친한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샤르르' 9세 때인 1564년, 새로운 달력을 채용하여 신년을 1월 1일로 정했다.
그러나 새 달력은 골고루 보급되지 못했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옛대로 4월 1일에 선물을 교환하는 예가 많았다.
개중에는 새 달력을 싫어하는 자도 있어 옛설달을 잊지 못하고 4월 1일이 되면 엉터리 선물을 주거나 잔치를 벌여 장난치며 즐겼는데, 이런 풍습이 차츰 각국으로 번져 나갔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음력 설날을 못 잊는 것과 흡사하다.
또 영국에서는 옛부터 4월 1일에 축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17세기경 프랑스의 풍습이 건너와서 오늘날과 같은 만우절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동양에서 발생했다는 설로 있다. 즉 인도에서는 춘분날 불교의 설교가 시작되어 3월 31일에 끝난다.
설교를 듣는 동안 제법 믿음이 두터워졌던 사람도 이 날만 넘기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기 때문에 3월 31일을 야유절이라하여 사람을 놀려주곤 했다는 것.
우리 나라에서 6.25동란 이후 미군의 참전과 함께 차츰 이 풍습이 퍼졌고 한동안 제법 유행하는 듯하다가 시들해졌다. 다만 112, 119등 비상용 전하가 짖궃은 장난꾼들의 허위신고로 골탕을 먹고 있다.
맘모스(mammoth)
'맘모스'는 보통 '거대한'의 뜻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맘모스 빌딩', '맘모스 대학', '맘모스 서울' 등.
빙하기에 살았던 거대한 코끼리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코끼리는 이빨이 23m나 되고 길다란 털가죽으로 온몸이 덮여 있다.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대에서는 얼어붙어서 거의 살았을 때의 생김새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한 적이 있다. 아시아, 유럽에서 북 아메리카에서 이르기까지 북반구 거의 전역에서 그 뼈가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빙하기 말기에 전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쏘십시오. 영국군 여러분!
겸양은 일종의 미덕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융통성 없는 사교적 예의로 말미암아 오해를 받거나 터무니없는 손해를 보는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745년 5월 11일, '루이' 15세 휘하의 프랑스군은 벨기에의 '톤트노와'에서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에는 네델란드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참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군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영국군 참모 '켐버란드' 공은 병력을 삼각형의 밀집부대로 편성하여 프랑스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군의 근위군진지 앞까지 쇄도해 들어갔다.
양쪽 군대의 거리가 50보 정도로 좁혀지자 쌍방의 장교가 부대 전면에 나와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때 영국군의 장교 '로드헤이'가 모자를 벗어들고 '프랑스 근위군 여러분, 먼저 쏘십시오'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진영에서 '단테로쉬' 백작이 나와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쏘십시오. 영국군 여러분! 우리들 프랑스 사람은 절대로 먼저 쏘지 않습니다!"
영국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사격을 가했으며 프랑스군은 뚱딴지 같은 사양으로 말미암아 대담한 타격을 받았다. 중국의 고사 송양지인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이다.
메두사(medusa)의 목
희랍신화에 나오는 괴물. 세계의 서쪽 끝에 '고르곤' (Gorgon) 이라는 괴물 세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머리는 뱀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으며 사람을 한 번 노려보기만 하면 돌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었다.
세 자매 가운데 막내인 '메두사'만이 죽어야 할 사람의 운명을 타고 났으며 나머지 둘은 불사신이었다.
영웅 '펠리우스'는 그 목을 잘라 오라는 명령을 받자 사자의 신 '헤르메스'로부터 날개 달린 구두와 몸을 숨기는 모자를 빌려가지고 갔다. 그리고 세 자매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거울에 그 모습을 비춰 보고 뒷걸음질로 다가가서는 재빨리 '메두사'의 목을 잘라서 싸들고 돌아왔다.
'아테네' 신은 그 목을 방패에 붙여 놓았으며 그 방패를 '고르곤'의 방패라고 한다.
메시아 (Messiah)
구세주를 가리키는 말.
히브리어로는 '기름 부음을 받는 자'의 뜻인데 희랍어에서는 '크리스토스'라고 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 사제, 왕 등에게 성유를 붓는 습관이 있었다.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강탄한 그리스도는 예언자, 대사제, 왕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구세주라하여 '메시아'라고 부른다.
메이 데이(May Day)
일반적으로 국제 노동자의 날로 알고 있으나 옛부터 서양에서는 봄을 맞이하는 5월 1일, 봄의 축제를 베푸는 습관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날 남녀가 교외 숲으로 가서 꽃과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는 길 모퉁이에 세워진 검정과 노랑 얼룩무늬의 '메이 폴' (5월의 기둥)을 장식한다. 그밖에 이 기둥에는 리본이며 흰 바탕에 적십자를 그린 '세인트 죠지'의 깃발을 장식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메이폴을 둘러싸고 하루종일 춤과 노래로 즐기는 것이다. 또 이날 마을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를 '메이 퀸' (5월의 여왕)으로 뽑는다.
우리 나라에서 맨 먼저 이러한 풍습을 받아들인 것은 이화여대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메이 퀸'을 뽑고 화려하게 대관식을 올리는 행사는 전통적인 것이 되어 있으며 근래에는 각 대학에서도 이를 본받고 있다.
이 메이 데이가 노동절로 된 것은 1886년 5월 1일 미국 각지에서 노동자가 시위 행진을 한 데서 비롯된다. 이 시위 운동은 미국은 여러 노동 단체가 '해마다 이 날을 기하여 8시간 노동제 획득을 위해 총파업을 단행한다'고 결의한 데 의거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메이 데이' 이후 각지에서 8시간 노동제의 실시를 보았다.
미국에서 노동자의 시위가 성공한 것을 본 '제2 인터내셔널'에서는 '메이 데이'를 국제적인 노동자의 날로 정했으며 1890년 구미 각 도시에서 최초의 국제적 '메이 데이'의 행사가 거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방 이후 좌익 계열의 난동으로 '메이 데이'도 실질적인 노동자의 날이 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어 오다가 1959년부터는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갖가지 행사를 벌여오고 있다.
메이플라워의 맹세
메이플라워는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대륙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배의 이름. 당시 영국에서는 청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일부 청교도들은 '네델란드'로 피신, 그곳에서 '스피드웰'호를 타고 미대륙으로 향했다.
'스피드웰'호는 영국을 출발한 '메이플라워'호와 만나서 함께 대서양을 항해해갔는데 도중에서 '스피드웰'호는 난파하여 침몰, 승객들은 모두 '메이플라워'호에 수용되었다. 이때 두 배의 승객들은 한 자리에 모여 상륙 후 신천지를 개척함에 있어 일치 협력하기로 맹세했다. 이것이 곧 '메이플라워의 맹세'이다. 배는 그해 12월 21일 당초의 목적지인 '버지니아'보다 훨씬 북쪽인 '프리마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 상륙한 일단의 신교도들을 '필그림 파더즈'라고 한다. 그들의 용감한 정신은 미국의 개척사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면죄부
본시 로마 교회에는 일정한 선행을 쌓은 신도에게 교황의 권한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는 면죄의 제도가 있었다.
선행 가운데는 단식, 순례 등 실제 행동면 뿐만 아니라 교회에 재물을 기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교회의 타락이 심해지자 단순히 돈을 긁어 모으는 수단으로서 면죄부라는 증서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상 빼에뜨로' 사원 건립의 자금을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면죄부를 발행했으며 그 판매인을 각지에 파견했다.
전부터 교회의 타락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당시의 저명한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분연히 일어서서 면죄부의 판매를 반대하고 나섰으며 마침내 종교 개혁으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모나리자의 미소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29)의 작품인 '모나리자'는 르네상스가 남긴 최고의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모나리자'란 '나의 엘리자베드'의 뜻. 이 그림은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죠꼰드'의 의뢰로 그의 아내 '엘리자베드'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03년에서부터 4년 동안 그녀의 나이 24세에서 27세까지의 사이라고 한다. 널빤지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의 크기는 77㎝*55㎝. 이 정도의 소품을 그리는데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 수수께끼 같은 미소에 대해서는 '엘리자베드'가 그 당시 아기를 잃었기 때문에 비탄의 빛이 절로 어렸다는 등 갖가지 설이 있지만, 화가 자신의 깊은 인간 관찰이 그처럼 복잡한 표정을 그려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 빈치'는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의 초청을 받고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갔는데 왕은 이 그림을 사서 폰텐브로의 성에 보관했다. 그 후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지금은 파리 루불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으나 '모나리자'의 입가에는 여전히 신비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프랑스의 시인 '라 뽕떼느' (1621--1695)의 '우화'에 나오는 말. 14세기의 영국 시인 '쵸서'도 이 말을 썼다고 한다.
이 말이 생긴 것은 로마 제국의 도로가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큼 발달된 것과도 관계가 있는 뜻. 로마인은 토목건설의 능력이 탁월했으며 광대한 영토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군용 도로를 닦았는데, 지금도 유럽 곳곳에는 그때의 길이 남아 있어 '로마가도'라 불리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글자 그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고대 문화는 일단 로마에 집약되었다가 다시 서구로 번져갔다. 그러므로 유럽 문화의 거의 모든 원류는 로마에서 발상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목마의 계교
트로야의 왕자 '파리스'가 희랍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하여 도망친데서 비롯된 트로야 전쟁은 10년의 세월이 흘러도 끝장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희랍의 대장들이 이마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트로야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교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목마의 계'였다.
즉 나무로 큰 말을 만들고 그 속에 골라 뽑은 용사들(9명이라고도 하고 그 이상이라고도 한다)을 숨겨 둔 다음 밤 사이에 진지를 철수하여 배를 타고 멀리 바다 가운데로 떠나가 버렸다. 트로야 시민들은 이를 보자 마침내 적이 퇴각한 걸로 잘못 생각하고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때 신관 '라오콘'이 제지를 했으나 듣지 않았다. 밤이 되자 목마 속에 숨었던 용사들이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어제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희랍군을 끌어들였으며 마음놓고 잠들어 있는 트로야 시민을 닥치는대로 살육했다. 이로써 트로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계교를 목마의 계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들킬 듯 하면서도 들키지 않는데 묘미가 있다.
이 목마의 계를 생각해낸 것은 희랍의 대장들 중에서도 지모가 뛰어나는 '오뒤세우스' 로마에서는 '울리크크레스' 또는 '울리세스', 영어의 '율리시즈'는 여기서 나온 말. 또 트로야인을 제지하려 했던 신관 '라오콘'은 두 아들과 함께 바다 속에서 나온 구렁이에 감겨 죽었는데 이를 주제로 한 희랍의 조각이 유명하다.
목축의 신 판
잘못 발음했다간 먹는 빵과 혼동하기 쉬운 이 희랍신화 중의 신은 발레 '목신의 오후'로 유명하다.
'판'은 숲과 사냥, 목축의 신으로 몸뚱이는 사람과 같으나 염소의 다리를 가졌고 머리에 뿔이 났으며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곧잘 '님프'와 춤을 추기도 한다.
발레 '목신의 오후'는 '말라르메'의 시에 의하여 '드뷔시'가 작곡할 것으로 1912년 '러시아 발레단'이 처음으로 공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문화투쟁
1871년 '비스마르크' 영도하의 독일 정부와 카톨릭교회 사이에 일어난 투쟁을 말한다. '비스마르크'는 사제의 정치 비판을 체형으로 억압하고 교회법에 의하지 않는 결혼을 인정하는 등 카톨릭 억압 정책을 썼다.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소위 오월법에 의하여 사제의 임명권을 국가가 장악하며 수도사의 학교 경영까지 금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카톨릭교도들이 결성한 중앙당이 강력한 반대 투쟁을 벌인 끝에 '비스마르크'가 양보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독일 이외에서도 교회와 정부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질 때는 이를 문화투쟁이라 부르는 수가 있다.
한편 계급 투쟁에 있어서도 쓰인다.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65년 문화인에 대한 비판으로 막을 올린 중공의 문화 투쟁으로 급기야는 홍위병을 앞세운 탈권 투쟁에까지 발전, 유소기 일파를 축출하고 모 택동, 임 표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1969년 일단락되었다.
물고기
희랍어로 Ichthus (이크투스)라고 하며 이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크리스트' (Iesous christos. theonhyos, soter) 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물고기는 종종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런 어부'는 로마 교황을, '어부의 반지'라고 하면 교황이 끼는 반지를 가리킨다.
뮤즈 (Muse)
'뮤즈'가 시와 음악의 여신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수가 아홉이나 되며 시와 노래 뿐만 아니라 문예, 학문 전반에서 천문, 수학 등 이과 계통의 학문까지 관장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희랍의 원명은 '모우사' (Mousa, 복수는 '모우사이' Mousai), 라틴어에서는 '무사' (Musa, 복수 Musae 영, 불, 독 Muse)
'호머'나 '헤시오도스'이 서사시 맨 첫머리에 인용되고 있는데 아마도 시신이니 만치 그 도움을 청한 것인 듯. 그런데 '호머'에서는 한 사람이었으나 '헤시오도스'의 '신통보'에는 아홉으로 늘어났으며 이름도 하나하나 밝혀 놓고 있다. 그러나 각자가 맡은 직분은 분명치 않다.
그녀들이 맡은 일은 학문 전반이었으니 만치 '뮤직' (mousic)도 본래는 널리 '학문, 문화 전반에 관한'의 뜻이었으나 차츰 협의인 '시가, 특히 음악의, 음악에 관한 것'의 뜻으로 쓰여 결국 '음악'이 되고 말았다.
학문 전반에 관한 말로 쓰이는 것은 '뮤점' (Museum 미술관, 박물관)으로서 본래는 '무사에 관한 집, 학예의 집' (Misaoem)의 라틴어 (Musaiem)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궁
어떤 사건이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마는 것을 흔히 '미궁에 빠졌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미궁에 빠진 사건은 허다하며 특히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한 '언론인 테러', '국회의원 테러' 등 정치성을 띤 사건은 의례히 미궁에 빠지기 마련이다.
범인이 '오리무중'을 헤매다가 '미궁'에 빠지면 일건 서류는 '영구미제'의 딱지가 붙어 창고에 처막히는 신세가 된다.
미궁을 영어로는 '래버린스' (lsbyrinth)라고 하는데 희랍어 라비린토스(labyinthos)에서 나온 것.
'라비린토스'는 옛날 지중해 '크레테' 섬에 있던 왕궁으로 '미노스' 왕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다에달로스'를 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라비린토스'는 그 내부가 어찌나 복잡하든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노타우로스'는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소인 괴물인데 '미노스' 왕은 그의 지배하에 있던 희랍에서 해마다 소년과 소녀 한 사람씩을 공물로 바치게하여 이 괴물의 먹이로 삼았다. 그러다가 영웅 '테세우스'가 나타나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도네'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해 버리고 만다.
미궁이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즉 미궁 자체가 미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우리 나라에도 들어온 적이 있지만 서양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옛이야기, 그 중에서도 18세기 중엽 프랑스어로 엮어진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어느 상인이 딸의 부탁으로 괴물의 집 뜰에 들어가서 장미꽃을 꺾는다. 그러자 괴물이 나타나서 딸을 바치지 않으면 상인을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다. 딸은 자기 몸을 희생하기로 하고 괴물을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괴물은 아름다운 왕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소녀의 헌신으로 악마의 저주가 풀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이야기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변신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지극히 건전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즉 사람의 가치는 그 외모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
괴물처럼 생긴 사람에게 왕자와 같이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생김새는 고귀하지만 본성은 야수와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미사(missa)
천주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어받는 것으로 빵과 포도주로 구현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사제가 받드는 의식, 이 미사를 통하여 천주를 찬미하고 속죄를 원하며 다시 은총을 기도한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 때 이를 제정했는데 이 세상이 다 하도록 사제를 통하여 자기를 희생하려는 것으로 십자가의 희생과 미사는 실질에 있어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사제는 미사에 있어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희생의 봉헌을 행하는 임무를 가진다.
신자가 일요일과 축일에 미사를 올리고 노동을 쉬는 것은 철칙으로 되어 있다.
미사일(missile)
'미사일'이 대륙간 탄도탄임은 세 살 먹은 어린이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꽤 오래된 말로서 돌 던지기, 투창 등 집어 던지는 무기 나아가서 화살, 총알 등 비살무기를 통틀어 '미사일'이라 한다. 2차대전 후 유도탄의 비약적 발전을 보아 중거리 탄도탄(IRBM), 대륙간 탄도탄(ICBM) 핵무기의 운반 수단으로서 미, 소 양국이 유도탄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벌임에 따라 '미사일'이란 말도 일반화되었다.
미완성 교향악
음악에 별로 소양이 없는 살마도 '슈베르트' (1797--1828) 작곡의 '미완성 교향악'을 모른 사람은 거의 없다. 원 이름은 '교향곡 제8번 b단조', 제2악장까지만 작곡을 해 놓고 끝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통칭 '미완성 교향곡'이라 부르게 된 것. 31세로 숨진 이 천재가 남겨 놓은 대량의 악보 가운데서 발견되어 1865년에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미완성 교향곡'에 대해서는 '슈베르트'가 두 번에 걸쳐 음악의 가정교사로 있었던 헝가리의 '엘스텔하지' 백작의 딸 '카로리네'에게 실연하여 작곡 도중에 집어치웠고, 그 악보에 '내 사랑에 끝이 없음과 같이 이 곡에도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없는 속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인 컨테스트
우리 나라에서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그나마 요즈음 '미스 000'도 흔해 빠져서 '미스 관청, 회사'에서부터 화장품과 약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자못 다양하다. 그러나 그 역사를 살펴보면 아득한 희랍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랍신화에서 '헤라', '아데나', '아프로디데'의 3여신이 트로야의 왕자 '파리스'를 심판관으로하여 미를 다툰 끝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트로야 전쟁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아마 '미인 컨테스트'의 효시라하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화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대희랍에는 오늘날 유행인 '미인 컨테스트'가 행해지고 있었다. '레스보스'섬, '테네도스'섬, '알카디아'의 '바실리스' 등에서 거행 되었는데 요즘은 수영복 차림이지만 그 당시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기 않는 완전한 누드였다. 남성들로서는 군침이 돌만한 얘기지만 오늘날처럼 화장품 회사가 스폰서로 나서는게 아니고 종교적 행사여서 지극히 엄숙한 것이었다.
또 '에리스'와 '아테네'에서는 '남성미 콩쿠르'도 거행되었는데 이 역시 완전 나체로서 종교적 행사의 하나였다.
미카엘(Michael)
천사 가운데는 '루시펠'처럼 그만 불손하게도 하나님 같이 되고자하여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천사가 있었다. 그때 반역한 천사와 싸운 천사군의 총사령관이 대천사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과 같이 행동하는 자는 누구냐"의 뜻. 반역한 천사를 소탕할 때 '미, 카, 엘'이라 소리치며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놓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해서 '미카엘'은 이교도와 싸우는 기독교도의 조력자, 악마로부터 개개의 신도를 보호하는 자로 여겨지고 있다. 9월 29일은 '미카엘마스'로서 교회에서는 미카엘의 축제를 지낸다.
밀월
영어 '허니문'에서 온 말. '사무엘 존슨' (1709--1780)의 정의를 따를 것 같으면 '오직 정다움과 열락으로 충만한 신혼의 1개월'을 가리킨다.
인생이 온통 장미빛으로 보이고 행복에 겨운 순간이지만 그 기간은 통틀어 1개월을 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 차츰 각성과 오해가 싹트기 시작하여 밀월의 단 꿈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요컨대 밀월은 '꿀처럼 달콤한 달'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어원을 따져 볼 때 '스칸디아비아'에서는 신혼의 남녀가 한 달 동안 벌꿀로 빚은 술을 마시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문'은 달을 가리키며 부부의 애정이 차츰 식어가는 것을 이지러지는 달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물론 달은 다시 차는 것이니 부부 사이의 애정도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는 동안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글자 그대로 부부 일신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의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957년의 일. 그 후로 '00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유행어가 한동안 사회를 휩쓸다시피 했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마가레트 미첼' (1900--1959)의 유일한 작품인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6)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외국 작품의 하나가 되고 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미첼'은 미국 여성의 한 전형인 '스카렛 오하라'를 창조해 냈다.
바벨의 탑
우리 속담에 '공든 탑이 무너지랴'하는 것이 있지만 공을 들인 끝에 무너져 버린 것이 바로 이 '바벨'의 탑이다.
이 세상에 악이 만연하자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만을 남겨 놓고 전 인류를 대홍수로 멸했거니와 ('노아'의 홍수) '노아'의 자손들도 그 수가 불어나자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동쪽에 있는 '시날'평야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빛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렇게 의논을 하여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리석고 무모한 계획을 본 하나님은 한심한 생각이 들어 그들의 오만함을 꺽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서로 다르게 만들어 버렸다.
말이 달라져서 의사소통이 안되니 혼란만 빚어질 뿐 일이 될 리 없어 마침내 그들은 탑의 축조를 포기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언어가 통하는 무리들끼리 모여 살게 되었다. 그리고 쌓다 만 탑을 '바벨', 즉 히브리어로 '혼란'이라 불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나 일 따위를 두고 '바벨의 탑'이라 부른다. 구약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이야기.
바빌론의 공중정원
신 '바빌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BC562)가 그의 비 '세미라수미'를 위해 만들었다는 정원. 고대 희랍인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들고 있다. 물론 글자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정원이 아니며 높다란 곳에 마련되어 있어 공중정원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건물 맨 꼭대기의 발코니에 만든 일종의 옥상정원이었다.
나무 숲이 드문 지방인데 높다란 건물 위에 울창한 수목의 정원을 만들었으니 당시의 사람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 공중정원의 수목에 물을 주기 위해서 특별히 우물을 파기도 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격파하고 '유다'왕국을 멸하여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강력한 왕조를 이룩했었다.
바카스(Bachos)
술을 '바카스의 선물' 또는 그냥 '바카스'라고도 한다. 단 '바카스'는 희랍의 신이니까 이때의 술은 포도주를 가리킨다.
'바카스'의 정식 이름은 '디오니소스' (Dionsos)로 주신 '제우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설에서 티바이의 공주 '세메레'라고 하나 소 아시아의 대지의 여신 '제메라'가 옳은 것 같다. '바카스' ('로마'에서는 Bacchus, '바카스'는 그 영어 발은)는 별명 혹은 통칭이며 '로마'에서는 '리베르'(Liber)라고도 한다. '리베르'는 '자유'의 뜻인데 술을 마시면 온갖 근심 걱정을 잊고 몸과 마음이 하나같이 자유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본래는 곡물과 식물의 신이었는데 8세기경 희랍으로 건너오면서 포도 및 포도주와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희랍에는 포도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연극은 희랍의 비극이나 희극이 모두 '아데나이'시에서 개최된 '디오니소스'는 형 '아폴로'와 함께 문예계를 다스리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서양의 문예 사조를 '아폴론적인 적' 즉 명석한 이지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비합리적이며 격정적인 동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모 제약회사에서 '드링크' 제의 이름에 '바카스'를 차용, 이것이 히트하여 요즘음 '바카스'가 '드링크'제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바카스'의 선물(술)에 곯아 떨어진 주객의 구미에는 '드링크'제 역시 '바카스'가 맞는 모양이다.
반역이 아니고 혁명이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정치범 수용소로 이름높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프랑스 대혁명이 번져 나갔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민중의 움직임에는 불온한 빛이 감돌고 있었으나 궁중의 우아하고 단조로운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날도 '루이' 16세의 일기에는 오직 '무'라고만 쓰여 있다. '무돈' 숲에 사냥을 갔으나 사냥감이 없었다는 뜻이다.
밤 늦게 왕의 측근 '리양쿠르'공이 '바스티유' 습격에 대해서 보고를 하자 왕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구, 그건 반역이 아니냐!"
'리양쿠르'는 똑똑히 대답했다.
"폐하, 이것은 반역(Revolte)이 아닙니다. 혁명(Revolution)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왕이 얼마나 국사에 무관심하고 무지했던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 밖에서 군중들이 빵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자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텐데"라고 한 것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안트와네트'였다.
'부르본' 왕조 최후의 왕과 왕비다운 소리다.
벌거벗은 임금님
'덴마크'의 유명한 동화작가 '크리스천 한스 안데르센' (1805--1875)의 대표적 동화 가운데 하나.
옛날 '아라비아'에 몹시 사치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어서 수없이 아름다운 옷을 만들게 했다. 하루는 사기꾼 두 사람이 옷을 만드는 명수라고 속여서 많은 돈을 받고 임금님의 옷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옷을 만드는 시늉을 하면서 임금님에게는 투명한 천으로 만들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은 그 천을 볼 수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속인다. 어리석으면서도 자만심이 강한 임금님은 사기꾼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 알몸뚱이로 시가를 행진하다가 창피를 당한다.
속은 비어 있는 주제에 겉치레에만 급급하는 사람을 비꼬는 이야기. 하긴 스커트의 자락이 끝없이 올라가고 여름의 해변에는 '비키니 스타일'이 판을 치며 발가벗기를 좋아하는 세대이고 보면 멀잖아 발가벗은 아가씨 거리를 활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밤의 대통령'하면 '알카포네'를 연상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가 비명에 가지 않고 유유자적의 생활을 즐기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하와이의 별장에서 폐염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엄격한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의 미국은 법망을 뚫고 주류의 밀매로 한 몫 보려는 갱들이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무법의 거리 시카고에서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하여 악명을 떨친 갱의 두목이 바로 이태리 이민의 아들 '알카포네'였다.
그는 잔인 무도하기로도 이름이 났으며 29년의 '성 발렌타인제의 학살'을 비롯, 직접 간접으로 그의 손에 죽은 자는 2백 50명이나 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법망에 걸려든 일이 거의 없었고 다만 탈세 사건으로 말미암아 8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을 뿐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다소 색다르지만 '정신적인 대통령'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백일몽
우리는 흔히 터무니없는 계획이나 공상을 가리켜 백일몽이라고 한다. 한낮에 꾸는 꿈은 그만큼 더 허망하다는 뜻.
백일몽에 대해서 처음으로 학문적인 정의를 내린 것은 정신분석학의 원조 '프로이드' (1895--1939)였다. 그는 '작가와 공상' (1908)이라는 작은 논문 속에서 백일몽과 공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과 문학자 및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탁견을 피력하고 있다.
공상이나 백일몽이나 밤에 꾸는 꿈이나 다 같이 충족되지 못한 소망의 대용 충족이다. 그러므로 작가를 '백중의 몽상가', 작품을 '백일몽'에 비유함으로써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비밀의 일부가 밝혀질 것이다. (프로이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20세기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백일천하
'삼일천하'와 함께 단명의 정권을 가리켜 흔히들 '백일천하'라고도 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 급격히 두각을 나타내어 한 때 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1769--1822)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큰 소리 쳤으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 60만 대군 가운데 40만을 상실하는 타격을 입고부터는 그의 운세도 급격히 쇠퇴해 갔다.
1814년 여러 외국군의 공격을 받자 프랑스는 마침내 항복하고 '나폴레옹'은 지중해상의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년이 채 못되어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황제폐하 만세'의 소리를 들으며 '파리'에 입성, 1815년 3월 15일 재차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6월 '워털루'의 결전에 패하자 이번에는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 헤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동안 황제의 자리에 앉은 것이 백일에 불과 했으므로 이를 가리켜 '백일천하'라 하게 되었다.
뱃 속의 벌레를 죽인다
슬프거나 화난 데는 술이 약이요 기뻐도 한 잔 안할 수 없다. 으시시할 때는 따근한 정종이, 오뉴월 무더위에는 시원한 맥주가 좋다. 그래서 1년 열 두달,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모주군이 술마시는 핑계를 찾는 데는 군색하지가 않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대포집에 들러서 해장 한 잔 들이키는 습관이 있는데 그 핑계라는 게 '뱃 속의 벌레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그 유례를 찾아보면 "프랑소와 1세 시대의 한 파리 시민의 일기'라는 책에, '1519년 왕의 청원 심사위원의 한 사람인 '라 베르나드'경의 아내가 급사했다. 그 시체를 해부해 본 즉 심장에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가 심장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시험삼아 포도주를 적신 빵 위에 그 벌레를 올려 놓았다. 그 일로 해서 날씨가 고르지 못한 계절에는 벌레가 생기기를 두려워하여 아침마다 빵과 포도주를 먹는 습관이 생겼다."
결국 이것도 술꾼이 생각해낸 한 가지 핑계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베니스의 상인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긁어모으는 고리대금 업자를 보고 흔히 '저 녀석은 샤일록 같은 놈이다'하고 빈정댄다.
이처럼 악독한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가 된 '샤일록'은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1597)에 나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이다.
베들레헴의 별
동방에서 별의 인도를 받고 '베들레헴'에 찾아온 세 사람의 박사는 갓난 예수가 있는 집 위에서 별이 멈추었으므로 그 집 안에 들어가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났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한 다음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받쳤다. (마태복음 2장 1절)
이리하여 예수는 동방의 3박사로 대표되는 유대민족 이외의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 날을 '공현제'라하여 해마다 1월 6일 축제를 지낸다.
베로니카의 수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의 언덕을 향해 가는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달려나와 그리스도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그리스도는 그 수건을 받아 피로 물든 얼굴을 닦은 다음 그 수건에 자기 모습을 옮겨서 되돌려 주었다고 전한다.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는 '단테' (1265--1321)가 첫사랑을 바친 여인. 그의 작품 '신생'과 '신곡'에 등장한다.
'단테'가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여덟살 때였으며 10년 후 '피렌체'의 거리에서 다시 만나 '단테'는 말 못할 감회를 느낀다. '베아트리체'의 모델로 보이는 여성은 '시모네 디 발디'와 결혼한 후 129년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단테'는 절망적인 슬픔을 맛보는 동시에 마음 속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더욱 더 다듬어 영원하고 이상적인 여성으로서 작품을 통하여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다.
'단테'의 작품 '신생'과 '신곡'은 난해하기로 이름이 있지만 '단테'의 작품을 한 구절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베아트리체'만은 곧잘 알고 있어서 첫사랑의 여인을 가리켜 '나의 베아트리체' 운운하는 감상적인 말을 뇌까리기도 한다.
보다 더 빛을!
이것은 '괴테' (1749--1832)가 임종 때 한 말이라하여 널리 알려지고 있다. 또한 '괴테'의 인생관과 생애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족히 '괴테'로서 함직한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의 출처는 1833년 '베를린'에서 발행한 '괴테'의 주치의 '칼포켈'의 병상보고 별쇄이다.
"내가 잠시 임종의 방을 비운 사이에 '보다 더 빛을!'이라고 한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싫어하였다."
한편 1832년 6월의 '일반문학신문'에는 '괴테'가 하인 '프리드리히'에게 "서재의 두번째 창 덧문을 열어서 빛이 들어오도록 해다오"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다.
'임머만'의 '회상록' (함부르크. 1840--1843)에 보면 '괴테'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괴테'의 마지막 말은 그의 며느리에게 한 것으로 "아가,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다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서울의 명문 '도둑촌'의 주인공이 숨을 거둘 때 과연 뭐라고 할까. "보다 큰 집을!" 아니면 "보다 큼직한 이권을!" 글쎄...
보이콧(boycott)
사전에 보면 '노동자가 단결하면 고용주와 관계를 끊는 것, 소비자가 단결하여 상품을 사지 않는 것, 불매동맹' 등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미스 김은 미스터 리의 '프로포즈'를 '보이콧'해 버렸다" "A상사는 B사의 합작 제의를 '보이콧'했다" 하는 등으로 흔히 쓰인다. '거절한다' '배척한다'의 뜻.
이 말은 '아일랜드'의 지주 '캡틴 보이콧' (1832--1897)에서 유래되고 있다. 육군대위이기도 한 이 지주는 어떻게나 지독하게 굴었던지 농민들이 일제히 반발했음은 물론 지주사회에서도 따돌림을 받고 말았다. 그것이 1880년의 일이었는데 그 소문은 순식간에 독일, 프랑스 등지에까지 퍼져 '보이콧'이란 낱말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 쳐놓고 돈에 인색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자수성가한 사람일수록 더 무섭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재벌이라는 사람들도 해방 후 혹은 6.25후 적수공권으로 오늘의 부를 이룩한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돈이 생기는 일이면 눈이 뒤집혀서 덤비지만 보람있는 사회사업이나 자전사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못해 의식적으로 피하기까지 한다.
수억 원의 돈을 들여서 조상의 무덤을 만드느니 보다 그 십분의 일의 돈이라도 무의무탁한 노인이나 고아를 위해 쓰는 것이 더 조상을 위해 덕을 쌓는 일일 것 같은 데도 막상 돈이 생기면 그런 마음은 안 생기는 모양이다.
예수님도 이러한 부자의 생리를 훤히 아셔서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셨다.
하루는 돈 많은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청년은 물론 지키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서글픈 표정으로 말없이 돌아갔다. 어쩌면 속으로는 예수님을 공산당보다 더한 양반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자들을 훈계한 것이 바로 첫 머리에 든 말이었다.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
분화산 위에서 춤을 춘다
'프랑스'의 7월혁명 직전인 1830년 5월 '팔레 로와이얄' 궁전에서는 '루이 필립'이 '나폴리'왕을 위해 베푸는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당시의 이름난 작가 '사르반디'가 '루이 필립'을 보고 말했다.
"과연 나폴리다운 연회올시다 전하! 우리는 분화산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1824년 '샤를르' 10세가 즉위한 후 프랑스에서는 시대에 역행하는 전제 정치를 단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그런 끝에 1830년 의회와 충돌,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지만 자유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왕은 선거를 무효로 하고 선거법을 멋대로 개정,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했다.
이로 말미암아 긴장 상태가 계속되던 끝에 그해 7월에 파리에서 폭동이 발발, 3일 동안 정부군과 시민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었으나 정부군의 패배로 왕은 영국에 망명했으며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 연유로 해서 눈 앞에 박두한 전쟁의 위험을 모르고 놀아나는 국가의 지도자를 곧잘 분화산 위에서 춤추는 것에 비유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북괴 남침의 정보가 꼬리를 무는 데도 "북진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하고 잠꼬대 같은 호언을 한 당시의 국방장관이나 바로 6.25 전날 밤 파티를 열어 취한 몽롱하여 남침의 보고를 받은 육군의 수뇌 등 모두가 분화산 위에서 춤을 춘 위인들이었다.
불 속의 밤 줍기
'라 퐁떼느'의 '우화집' 제9권에 '원숭이와 고양이' 이야기가 있다.
어느 집에서 원숭이와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두 놈이다 못된 장난만을 일삼는다. 하루는 난로불에 밤을 굽는데 꾀 많는 원숭이가 고양이를 꾀어서 그 밤을 줍게 한다. 추켜 올리는 말에 넘어간 고양이가 얘를 써가며 재를 헤치고 밤을 꺼내자 기다리고 있던 원숭이는 꺼내는 족족 까먹어 버린다. 고양이는 화를 내지만 그때 식모가 돌아오는 바람에 둘 다 달아나 버린다.
즉 남이 추켜세우는 데 우쭐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 그 이익을 송두리째 남에게 빼앗기는 얼간이를 비꼬는 말.
우리는 흔히 이와 비슷한 뜻으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놈이 차지한다'는 말을 쓰는데 프랑스의 경우 고양이가 곰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다만 '라 퐁떼느'는 한 나라의 왕이 추켜 올리는데 넘어가서 자기 나라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나라를 도왔다가 번번이 골탕먹는 것을 비꼬는 것이다.
브나로드 운동
아직도 80대 이상의 사람들 가운데는 일제치하인 1931년 동아일보사가 주동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시 민족의 대변자로 자처하던 동아일보사에서는 하기 방학을 이용, 중학생과 전문학생으로 계몽대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문맹퇴치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민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총 1,320개소에 걸쳐 참가 인원은 98,598명이었다.
그러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이 운동을 총독부가 그대로 버려 둘 리 없어 1934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 광수의 '흙'은 '브나로드' 운동에 종사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이 운동은 제정말기인 18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러시아'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으로 그들은 "브나로드(인민속으로)!"을 외치며 농촌으로 파고들어 농민들의 계몽운동에 종사했다. 농민을 선전, 계몽함으로써 혁명을 준비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년들은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혁명진영은 과격한 직접 행동파와 니힐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등으로 분열되어 갔다.
브루터스 너까지도!
'폼페이우스'를 쓰러뜨리고 아시아를 정복한 '시저'의 권세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기회가 엿보이자 그때까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민중들 사이에는 순식간에 반감과 증오의 불길이 일었다. 그 결과 '카시우스'는 사원에서, '브루터스'는 공화제를 수호해야겠다는 애국심에서 '시저'를 습격했다.
'시저'는 처음에는 도망치려 했으나 습격자들 가운데 평소에 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터스'가 끼어 있음을 보자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브루터스, 너까지도!" 하고 소리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바로 그의 정적 '폼페이우스'의 동상 아래였다.
믿어온 자가 자기를 배신했을 때, 즉 "믿는 도끼에 발 찍힌다"고 할 때 쓰이는 말. 이 말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로 해서 유명해졌지만 이 문구는 본시 '로마'의 문학자 '스에토니우스' (69--140)의 '12 황제전'에서 나온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의 대표적 비극 '햄릿'의 제1장 - '햄릿'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외친다.
"살아야 할 것이냐, 죽어야 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웬만하면 다 알고 있는 구절이다.
어머니에게서 인간이 지닌 음탕한 애욕의 본보기를 발견하여 절망한 '햄릿'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벅찬 일에 짓눌려 살아 있기가 고통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귀만치 자기나름대로 적당히 변형하여 쓰이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녀와 결혼을 하느냐 않느냐, 그것이 문제다" 퇴근 길에 "대포를 한 잔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등...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TV, or not TV;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발음까지도 비슷한 걸작이 있다. "텔레비젼을 보느냐, 안 보고 공부를 하느냐" 이것은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정에서도 날마다 한 번 쯤 되풀이해 보는 문제일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선각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는 성령을 따라 광야로 갔다. 그곳에는 악마가 그를 시험하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광야에 이른 '예수'는 40일 동안을 꼬박 단식을 한 끝에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사탄이 '예수' 앞에 나타났다.
"당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사탄이 놀리자 '예수'는 단호히 말했다.
"사람이 빵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4장 4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 않게 마음의 양식도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굶고는 살 수 없는 것이어서 "목구멍이 포도청" 혹은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는 사람 없다"는 우리 나라 속담이 어쩌면 보다 인간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순절
부활절을 앞둔 40여일 (일요일을 빼고 40일) 동안을 교회력에서는 속죄와 정진의 계절로 정하고 있다. 즉 신자는 '예수'가 광야에서 겪은 40일간의 수난을 상기하고 자신도 단식하며 속죄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부활절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이 기간 동안이 곧 사순절이며 의식용의 복장에는 슬픔을 나타내는 보라색을 사용한다.
사이렌
10년에 걸친 '트로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오뒤세우스'는 희랍으로 돌아오는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본대와 떨어져서 외톨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지중해 연안가지 이르렀는데 당시 그곳에는 갖가지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인 괴물 '사이렌' (희랍어로는 '세이레네스, Serienes)' 3자매의 가까이로 배가 지나가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의 마음을 흘린다.
일단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게 되면 저도 모르게 정신이 빼앗겨 바닷가 암초로 배를 몰고 가며 끝내는 난파하여 '사이렌'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 '오뒤세우스'는 마녀 '사이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가 '사이렌'의 소굴 가까이 이르자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간단히 틀어막고 자신은 배의 중앙 돛대에 비끌어 매게 했다.
그런 다음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거나 아우성을 쳐도 절대로 나를 풀어 놓아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힘껏 노를 젓기만 해라"하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이윽고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오뒤세우스'는 그 소리를 듣자 미친 듯 몸부림치며 배를 그곳으로 몰고 가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귀를 틀어막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선원들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리하여 배는 무사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약이 오른 '사이렌'은 자살해 버렸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쇨,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때로는 한가롭고 때로는 다급하게 느껴지는 사이렌 소리도 그 근원을 살피면 아득한 옛희랍 신화속의 마녀에서 유래되고 있는 것이다.
사자의 몫
하루는 사자와 당나귀와 여우가 사이좋게 사냥을 하러 갔다. 뜻밖의 많은 사냥감이 있어 다들 기분이 좋았다.
사자는 먼저 당나귀를 시켜서 잡은 것을 나누게 했다. 당나귀가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 사자를 보고 먼저 가지라고 하자 사자는 화를 내어 당장 당나귀를 잡아먹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여우에게 분배하라고 일렀다.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의 몫으로 주고 자기는 조금만 차지했다. 그러자 사자는 지극히 흐뭇해하며 어째서 그렇게 나누었느냐 하고 물었다. 여우가 말했다.
"당나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힘을 가진 자는 힘을 앞세워 더 많이 차지하고 부를 가진 자는 부를 이용하여 더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힘도 없고 부도 갖지 못한 백성들에게는 쥐꼬리만한 몫이 돌아오게 마련.
고충 건물이 들어서는 서울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지만 이지러진 지붕의 시골 풍경은 십 년이 하루 같고 보면 위의 '이솝' 이야기를 한갓 우화로만 들리지 말고 위정자들은 한 번 되씹어 볼만하지 않을까.
사탄(Satan)
성경에서는 물론 동화, 시, 연극 등에서 악역의 대표, 악마의 총수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탄'이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것을 비롯,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저지르게 하고 끝내는 지옥에 빠뜨리는 등 갖은 못된 짓을 다한다.
그 모양도 뱀이나 용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박쥐 모양으로 날개를 가진 흉칙한 괴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성경에 의하면 본래는 천사였으며 타락하여 이승으로 떨어진 후 암흑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상의 설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로 시작되는 이 산상의 설교는 기독교 윤리의 근본이자 진리와 교양의 요강이기도 하다.
예수는 진복팔단을 기본으로 하여 일상생활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알기 쉽게 해설하고 있으며 특히 구약시대의 율법과 이 원리의 차이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다시 참다운 하늘나라와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밝혔으며 사랑이야말로 모든 덕의 결론이라 말하고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하여 실행에 옮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다시 참다운 하늘 나라와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밝혔으며 사랑이야말로 모든 덕의 결론이라 말하고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하여 실행에 옮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예수가 산상의 설교를 한 곳은 현재의 '아인 다부가'에서 북쪽으로 2마일 가량 되는 '갈릴레아' 호반의 언덕으로 추측되고 있다.(마태복음 5~7장)
산타 클로스
끝에 술이 달린 고깔 모자에 흰 수염, 빨간 옷을 입고 가죽 장화를 신은 '산타 클로스'는 우리 나라 어린이에게도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산타 클로스'는 17세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의 이민이 어린이의 수호 성인 '신트 클라에스(Sint Xlaes)를 부른데서 연유한다고 전한다. 이는 또한 사교 성 '니콜라스'의 영국에 있어서의 애칭이기도 하다.
성 '니콜라스'의 축제일, 즉 12월 6일 전날 밤 선물을 주는 기왕의 풍습과 한데 얼려 오늘날처럼 선물 꾸러미를 짊어진 '산타 클로스'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해방후 미군의 진주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축하행사가 일반화되자 이에 따라 '산타 클로스'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세군이 흔드는 자선 남비의 종소리도 빼어놓을 수 없는 세모풍정의 하나이기도 하다.
삼손과 데릴라
이스라엘 사람의 사사인 '삼손'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기로 이름나 있었다.
'삼손'이 열여덟살 때 '블리셋'사람의 딸을 사랑하여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화가 난 '삼손'은 삼백 마리의 여우를 잡아 그 꼬리에 횃불을 매달아 '블리셋' 사람의 보리밭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보리밭은 몽땅 재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블리셋'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놀라서 '삼손'을 묶어 갈라진 바위 틈에 내버려두었다. 때마침 '블리셋' 사람이 복수하려고 쳐들어오는 것을 보자 '삼손'은 자신을 묶은 밧줄을 잘라 버리고 '블리셋' 사람을 1천 명이나 때려죽이고 말았다. 그 후로 '블리셋' 사람은 틈만 있으면 '삼손'을 죽이려고 노렸다.
그 후 '삼손'은 '데릴라'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자 '블리셋' 사람은 "'삼손'을 잘 구슬러서 그의 힘이 어디서 나는지 알아 내어라, 우리들에게 그를 사로잡을 방법만 가르쳐 주면 은전 천 개를 주마" 하고 '데릴라'를 꼬였다. '데릴라'가 날마다 '삼손'에게 아양을 떨며 그의 힘의 출처를 묻자 마침내 '삼손'은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한 번도 머리를 깍아 본 적이 없다. 만약 이 머리를 잘라 버리면 나는 힘을 잃고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게 되고 만다" 하고 비밀을 털어 놓았다. '데릴라'는 '삼손'이 잠든 틈을 타서 그 머리칼을 잘라 '블리셋' 사람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 '블리셋' 사람은 힘 잃은 '삼손'을 비끌어 매고 두 눈을 도려내어 장님으로 만든 다음 '가자'로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어 넣었다. '삼손'은 감옥 속에서 날마다 맷돌을 돌리고 있었는데 차츰 머리칼이 자라남에 따라 기운도 되찾아갔다.
그런 줄 모르는 '블리셋' 사람들은 그들이 받드는 '다곤' 신의 축제 때 '삼손'을 끌어내어 갖가지 놀이를 시키는 장난거리로 삼았다. 그때 '삼손'은 "오오, 주여, 저에게 다시 한 번 힘을 주셔서 복수를 하게 해주소서"하고 기도드리며 궁전을 버티고 있는 기둥을 잡고 힘껏 뒤흔들었다.
궁전 안에는 물론 그 지붕 위에서도 삼천여 명의 남녀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손'이 흔들자 기둥이 부러지면서 집이 무너져 버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 깔려 죽었고 '삼손'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이상은 구약성서 사사기 13장에 있는 이야기.
'가자'는 '블리셋'의 도읍이었고 남부 '팔레스타인' 해안에 가까우며 구약시대의 우상 '다곤'신의 신전이 있다. 특히 '삼손'이 최후를 마친 곳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시인 '밀튼'은 '투기자 삼손'에서 '가자'에 끌려가 맷돌을 젓는 '삼손'을 노래했으며, '헉슬러'의 소설에도 '가자에 눈멀어'라는 것이 있다.
3퍼센트의 진실
경구의 대가로 꼽히는 '리히텐베르크' (1742--1799)가 한 번은 1년치의 신문을 한데 엮어 한 권의 책처럼 처음부터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의 인상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신문의 축쇄판을 맨 먼저 필요로 한 사람이 그였던 모양이다.
그는 신문을 끝까지 훑어본 다음에 말했다.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수고한 보람을 찾지 못했다. 내가 얻은 것은 50퍼센트의 그릇된 희망과 47퍼센트의 그릇된 예언, 그리고 3퍼센트의 진실뿐이었다."
오늘날의 신문에 있어서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 가지 예로 지난 67년 대통령 선거 때, 여야 후보의 강연회에서 동원된 청중 수에 신경을 쓴 나머지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된 숫자가 중구난방이어서 웃음거리가 된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일.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신문보도의 진실성이 문제될수록 음미해 봄직한 명구이기도 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신약성서 마태복음 9장 1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은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쏟아지고 부대는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된다"고 했다. 여기에서 ' 새 포도주'란 기독교의 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교리는 낡은 율법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며 '파리사이' 사람처럼 정신이 퇴폐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즉 성령에 의하여 일신된 신도의 정신에게만 합당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상이나 그밖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게 된다. 5.16이후 한 때 구정치인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참신한' 정치를 표방하여 '새 술은 새 부대'의 기풍이 조성되었으나 그와 함께 '신악'이 몽강하여 모처럼의 이미지가 흐려지기도 했다.
샌드위치(Sandwich)
영국 켄트주의 ' 샌드위치'백작 (1718--1792)은 밥보다도 노름을 더 좋아했다. 한 번 트럼프를 손에 들면 자리에서 떠날 줄 모른다. 물론 식사시간 따위는 아랑 곳 없다.
"백작님,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한 판만 더 하고..."
그러는 동안에 애써 만든 요리는 다 식어서 엉망이 되고 만다.
궁여지책으로 하인이 빵조각 사이에 고기며 채소를 끼워 먹기 좋게끔 만들어 주었더니 그것으로 요기를 하며 스물 네 시간 꼬박 노름으로 지새우기까지 했다. 같이 노름을 하던 친구들도 덩달아 먹어 보았다. 그런데 맛이 과히 나쁘지 않다. 그리하여 이 간편한 요리는 순식간에 일반 가정에도 널리 퍼졌으며 백작의 이름을 따서 '샌드위치'라 부르게 되었다.
앞뒤로 광고판을 메고 거리를 다니는 광고장이를 '샌드위치 맨'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
샌들
지금은 아무리 후미진 산골에 가도 짚신 구경을 하기가 힘들지만 개화기 이전까지 가장 보편적인 서민의 신발은 짚신이었다. 그러다가 일제치하로 접어들자 짚신을 본 딴 고무신이 널리 보급되었고 본의 아니게 게다를 신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게다는 일본인들과 함께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샌들이 등장했다.
샌들은 희랍어 '샌달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느다란 가죽과 끈으로 엮어만든 서양판 짚신이다.
희랍인의 신발은 보통 발 전체를 감싸는 모양의 것이 아니라 바닥에 가죽을 깔고 그 위에 끈을 달아 발을 꿰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신발이었고 여행자나 군인용의 가죽 구두는 따로 있었다.
생명의 나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갖가지 나무를 나게 했으며 에덴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의 나무와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분간하게 되는 나무를 심었다. 그 열매가 곧 '금단의 열매'이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에게 이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그러나 뱀이 나타나서 "이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하고 유혹했다. 마음이 약한 '이브'는 그 유혹에 넘어가서 열매를 따 먹었을뿐더러 '아담'에게도 권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서부전선 이상 없다
독일의 작가 '에리히 레마르크'의 작품 '서부 전선 이상 없다' (1929)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데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서부전선이란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선이 말하며 치열한 공방전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숨져갔다. 그러나 전선은 이상 없이 건재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 않으나 그래도 제목만은 곧잘 인용되어 '취직 전선에 이상 있다' '결혼 전선 이상 없다' 등 애용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팔레스타인'의 '시딤'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던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열 명의 의인조차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사악과 음란으로 가득 차 있어, 마침내 하나님이 내린 불과 유화의 세계를 받아 모두 불타고 말았다. 이들 도시는 현재 사해 남쪽 바다 속에 잠겨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벌을 받은 본보기로 성서에 곧 잘 등장한다.
훗날 '소돔'의 죄, 즉 '소도미'는 자연에 반하는 사음 즉 계간, 수간, 남색, 동성연애자 등 성적 도착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심술이 사납고 항상 바가지를 긁어서 위대한 철인의 속을 썩혔다고 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남편이란 자가 철학을 한답시고 집안 일은 통 돌보지 않으니 화가 날만 했는지도 모를 일.
하루는 어떤 사람이
"어째서 저런 부인을 맞이하셨습니까"하고 물었다.
"마술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은 사나운 말을 골라서 탄다. 사나운 말을 다룰 줄 알게 되면 다른 말을 다루기는 쉬운 일이다. 내가 이 여자를 견디어 낼 수만 있다면 천하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란 없어질 것이다"하고 대답했다.
또 "쉴 새 없는 부인의 투정을 용케 참으시군요"하자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고 나면 듣기 싫은 줄 모른다"
한 번은 그의 아내가 욕설을 퍼부은 끝에 '소크라테스' 머리 위에 물을 뒤집어 씌우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 비가 쏟아지게 마련이지"라고 했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솔로몬의 영화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탁월한 지혜와 교묘한 정치 수완을 발휘. 민심을 얻는 한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은 유례없는 국력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솔로몬'은 즉위 4년만에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대사업을 착수했는데 곧 신전의 건조였다. 건축에 동원된 인원이 3만, 자재 운반에 7만, 석공 8만, 공사 감독의 관리 3천3백이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건축은 7년 걸려 완성했으며 내부는 순금으로 장식했다. 신전의 준공에 이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하나님에게 바친 소가 2만2천 두, 양 20만 마리, 다시 14일 동안의 잔치를 베풀었다.
신전에 이어 이번에는 자신의 궁전을 건조했는데 이 역시 호화를 극한 것으로 옥좌는 전부 상아로 만들었으며 계단은 여섯 개로 나누어 각 계단마다 한 쌍의 황금사자를 비치하고 황금의 방패 5백 개로 궁전을 장식했다. 심지어 식기에 이르기까지 은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만든 것만 썼다.
차츰 오만해진 '솔로몬'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이방인의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는데 그의 비는 총 7백 명, 첩은 3백 명이었다. 이방인의 여인이 왕을 에워싸고 궁전을 차지하자 이로 말미암아 국론이 분열되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은 제위 40년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영화를 누렸던 만큼 그의 지혜도 탁월한 것이어서 구약성서의 열왕기 상에 보면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 사람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더 크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는 동식물학에 밝았다고 문필적 재능도 뛰어나서 시가 1천5백 수, 잠언 3천을 지었다고 전한다.
'솔로몬'의 지혜를 말해 주는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 집에 창녀 두 명이 살았는데 어쩌다 거의 동시에 임신을 한 끝에 사흘 간격을 두고 똑같이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아이를 낳은 창녀는 몹시 잠버릇이 나쁜 여자였는데 어느 날 밤 아이를 짓눌러 질식시키고 말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여자는 옆에 자던 또 하나의 창녀 아이와 죽은 아이를 바꾸어 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둘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살아 있는 아이가 제 아이라고 우겨댔던 것이다. 마침내 해결을 못보고 '솔로몬' 왕에게 제소를 했다.
'솔로몬'왕 앞에 나와서도 두 여인은 여전히 다툰다. 한참동안 바라보던 있던 왕은 신하를 시켜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 칼로 살아 있는 아이를 두 동강 내어서 저들 두 여인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특히 그 아이의 생모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임금님, 제발 그 아이를 베지 말고 그냥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그러나 또 하나의 여인은 "아닙니다. 둘로 갈라서 나누어 주십시오"하고 태연히 말한다. 그 말을 듣자 '솔로몬'왕은 "그 아이는 베지 말아달라고 한 여인에게 주어라"고 했다.
백성들은 이 재판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다들 칭송했다고 한다.
스파르타 교육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낭떠러지 아래로 집어던져 제 힘으로 기어오르는 새끼만을 키운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는 아이가 나면 먼저 튼튼하게 자랄 아이인지 아닌지를 살펴 본 다음 장래성이 없는 아이는 산에 갖다 버렸다고 한다.
사내 아이는 일곱 살만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공동생활을 하게 되며 엄중한 교육을 받는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옷이라고는 망도 하나 뿐 잠자리는 갈대잎으로 엮어서 만들었고 음식은 언제나 모자라게 주어서 배고프면 역량껏 훔쳐먹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눈에서 불꽃이 튀길 정도로 체육과 무술을 연마했다. 성인이 되어서 가정을 가진 다음에도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간소한 음식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늘 날 '스파르타 교육'이 엄격한 교육의 대명사처럼 된 것은 여기에서 연유하고 있다.
이처럼 엄격한 제도는 '뤼쿠르고스'라는 반 전설적인 인물이 제정했다고 하는데 소수의 정복자가 수십 배되는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로 삼고 그 위에 군림하던 처지의 '스파르타'로서는 불가피한 제도였을 것이다.
스핑크스
고대 희랍의 '테베' 근교에는 인두사신의 괴물 '스핑크스'가 나타나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로, 낮에는 두 개, 밤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수수께끼를 내고는 이것을 풀지 못하면 잡아먹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풀 수 없어서 수많은 사람이 잡아먹혔고 마침내 소문이 퍼져서 그 근처는 얼씬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때마침 영웅 '오이디푸스'는 당장에서 "그야 사람이지"하고 대답했다.
즉 인생의 아침인 어린이 시절에는 기어다니다가 낮인 성장기에는 두 다리로 걸으며 황혼기로 접어들면 지팡이를 집어서 세 개의 다리로 걸어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 대답을 듣자 '스핑크스'는 그만 골짜기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테베' 시민은 열광적으로 '오이디푸스'를 맞이하여 그를 왕으로 삼았다.
'이집트'에는 피라밋과 함께 피라밋을 지키는 거대한 '스핑크스'의 상이 지금도 나그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A군은 지각을 다반사로 알고 있다. 오늘도 사장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A군의 빈 자리를 노려 보고 있는데 A군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자네는 날마다 지각이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네 실은, 저..."
"다 알고 있네. 앞으로 주의해. '시간은 돈'이란 걸 모르는가"
이 말은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란 말과 함께 젊은이를 훈계할 때 어른이 즐겨 입에 담는 글귀이다. 이 말은 '프랭클린' (1706--1790)이 '청년에게 주는 충고'에서 인용한 후로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프랭클린'은 근대자본주의 정신을 처음으로 합리화한 사람이니 만큼 다분히 공리적인 냄새를 풍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말의 기원은 오래된 것으로 고대 희랍의 '디오게네스'도 '시간은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귀중하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시시포스의 바위
여성 상위시대라고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나라의 주부들은 고달프기만 하다. 아침마다 첫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한바탕 수선을 떤 끝에 남편은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면 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소제다 빨래다 하여 일을 해도 끝이 없다. 이러한 주부의 노력은 곧잘 '시시포스의 바위'에 비유되기도 한다.
'시시포스'는 희랍신화의 무한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죄인 가운데서도 '탄타로스'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존재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가파른 비탈길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올리는 것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바위를 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시시포스'는 본시 '코린토'의 왕이었는데 무척 꾀가 많고 교활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였다고 한다. 그가 이러한 벌을 받게 된 데 대해서도 사신을 속여서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제우스'의 정사를 폭로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의 영원한 고역은 옛부터 여러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아 왔으며 근자에는 '프랑스'의 '까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를 부조리의 영웅이며 운명에 도전하는 거인이라 찬양하고 있다.
신데렐라
계모의 학대로 말못할 고생을 겪어야만 했던 불쌍한 소녀 '신데렐라'는 요술쟁이 할머니 덕분에 왕자님이 신부감을 고르기 위해 베푼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다. 왕자님은 첫눈에 '신데렐라'가 마음에 들어 마침내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옛이야기 '콩쥐팥쥐'와 흡사한 이이야기는 프랑스의 동화작가 '베로' (1628--1720)의 작품으로 그 이후 뜻밖의 행운을 차지한 소녀를 곧잘 '신데렐라'에 비유한다. 타고난 미모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무명의 소녀 등 이따금 현대판 '신데렐라'가 매스콤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나코'왕비가 된 '헐리웃'의 여배우 '그레이스케리'는 대표적인 현대판 '신데렐라'일 것이다.
13일의 금요일
달을 향해 가던 '아폴로' 13호 우주선이 도중에서 고장을 일으켜 달 착륙을 포기하고 돌아온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때 전세계 사람들은 우주선이 남태평양에 무사히 착수하기까지 손에 담을 쥐며 경과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아폴로' 13호의 발사일시가 4월 11일 13시 13분이었고 비행 중 13일에 첫 사고가 발생한 데서 13이란 숫자가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인간이 달에 갈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도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는 미신은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 우리 나라에서 4자를 싫어하여 병원엔 4층이 없고 군대에 4사단 혹은 4연대 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싫어하게 된 까닭으로서는 흔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을 때 거기 참석한 사람의 수가 13명인데서 비롯되었다. 또 그리스도가 죽은 날(서기 13년 4월 7일)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13일의 금요일을 가장 불길한 날로 치는 습관이 있다.
아담과 이브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양을 본따서 인간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놓으니 산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를 '아담' 즉 흙에서 난 자라고 불렀다. 다시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를 도울 베필을 만들어 주자"하여 각가지 동물을 만들어 아담 앞에 끌어다 보였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그것으로 여자를 만들었다. '아담'은 여자를 보더니 "이것이야말로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하여 반기며 '이브'라고 이름지었다. 그 후 그들은 부부가 되어 에덴동산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으나 인간의 행복을 시기한 악마의 꾀임에 빠져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끝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아담이 밭갈이 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14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페스트의 유행으로 인구가 격감했다. 그 결과 일손이 줄어들자 영주는 한층 더 농민에 대한 부역을 강화했으며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영국에서는 '에섹스'의 벽돌 직공이던 '와트 타일러'가 두목이 되어 1381년 '켄트'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는 런던에 침입하여 '리처드' 2세에게 농노제의 폐지 등을 요구, 이를 수락시켰으나 런던시장 '윌워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 폭동에서 정신적 지도자였던 '죤 폴'은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때는 대체 누가 영주였단 말인가"하며 농민을 격려하고 영주의 착취를 비난했다.
아론의 지팡이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려했으나 '이집트'의 왕은 그들의 '이집트'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세'가 고민 끝에 하나님에게 탈출의 방법을 물으니 하나님은 '이집트'의 왕 '바로'를 혼내 주어서 출국을 허락하게 만들 양으로 '아론'의 지팡이를 사용하게 했다.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그때 나이 83세였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론'이 지팡이로 강을 치니 물이 온통 피로 변하여 물고기가 죽고 사람들은 먹을 물이 없어졌다. 그러나 '바로'는 항복하지 않았다. 다시 그 지팡이의 힘을 빌어 모든 가축이 병들게 하고 우박이 쏟아져 나라 안을 쑥밭으로 만들었으며 메뚜기 떼가 새까맣게 몰려와 곡식을 갉아먹었다. 그래도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3일 동안 '이집트' 전역을 암흑 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제사 고집 센 '바로'도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는 수 없으니 '이집트'를 떠나도 좋다고 '모세'에게 허락해 주었다. 이리하여 총사령관 '모세' 부사령관 '아론'에 이끌려 60만 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 이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급기)
아마존의 여군
희랍신화에 의하면 '코카서스'에서 '스키타이'지방에 걸쳐 '아마존'이라 부르는 용맹한 여인족이 살고 있었다 한다.
그녀들은 남자 뺨칠 정도로 무술에 능하고 말를 잘 탔으며 때로는 희랍에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 또 '트로야' 전쟁 때는 여왕 '펜테실리아'에 이끌려 '트로야'군을 편들기도 했다.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종족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에 다른 나라의 남자를 끌어와서 자식을 받았다. 아들이 나면 죽여 버렸고 딸만 기르는데 어려서 왼쪽 유방을 도려내어 활쏘기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남미 '브라질'에 있는 세계 최대의 강 '아마존'도 이 전설에서 이름을 딴 것인데 16세기 초에 처음으로 이 강을 탐험한 '스페인'탐험대가 도중에서 여자들로 이루어진 토인들로부터 습격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아킬레스 힘줄
복사뼈 뒷 쪽 발뒤꿈치 바로 위에서 장딴지로 이어지는 힘살이 '아킬레스 힘줄'로 보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갑자기 뛰거나 하면 끊어지는 수가 있다.
이 아킬레스 힘줄은 희랍신화의 영웅 '아킬레스'에 유래되어 있다.
'아킬레스'는 보통 사람과 달라서 그의 아버지 '페레우스'는 인간이지만 어머니 '테티스'는 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이었다.
'테티스'는 '아킬레스'가 태어나자 저승과의 경계를 흐르는 '스튀쿠스'강에 담그어 창칼이나 화살을 맞아도 몸에 상처를 입지 않게 했다. 이때 발뒤꿈치의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물 속에 담갔기 때문에 그 부분만은 물이 묻지 않아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살로 남게 되었다. 즉 그 부분이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트로야 전쟁에 참가한 '아킬레스'는 희랍군에서 첫 손 꼽히는 장수로 용맹을 떨쳤으나 그의 약점을 알고 있는 트로야의 왕자 '파리스'가 독묻은 화살로 '아킬레스 힘줄'을 쏘았기 때문에 마침내 죽고 만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나라나 개인이 지닌 약점을 곧잘 '아킬레스 힘줄'이라고 한다. 미국의 흑인폭동, 소련의 농업부진 따위는 제각기 그 나라의 '아킬레스 힘줄'이라 할 수 있다.
아폴로와 월계관
'아폴로' 우주선으로 널리 알려진 '아폴로'는 희랍신화에서 태양과 동일시되는 광명의 신으로 여러 남자의 신 중에서도 으뜸가는 존재다. 그밖에 그는 문학과 예술을 다스리며 의료 시설도 그이 관할 안에 들어간다.
의사의 신 '아수크레피오스'는 '아폴로'의 아들이고 서양의학의 시조인 의성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폴로'에 관한 설화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월계수로 변한 소녀 '다프네' (희랍어로 월계수의 뜻)의 이야기이다.
'다프네'는 '테싸리아'의 강의 신 '베네이오스'의 딸인데 몹시 사랑스런 소녀였다. 우연히 그녀의 모습을 본 '아폴로'는 한 눈에 반해서 뒤쫓았으나 '다프네'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어느덧 그녀의 아버지가 있는 강가에 이르자 그녀는 아버지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베네이오스'는 '다프네'를 한 그루의 월계수로 만들어 버렸다. 그후로 '아폴로'는 '다프네'를 불쌍히 여겨 항상 월계수의 가지로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희랍중부에 있는 '아폴로'의 '델포이'신전에서는 그 곳에서 거행되는 시가와 문예대회 및 운동경기 대회의 우승자에게 상품으로 월계수의 가지를 엮어만든 관을 주었다. 그것이 곧 월계관의 시초이다. 이 제전은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4년마다 거행되었으며 희랍전역에 걸친 대 제전이었으나 고대말기에 가서 쇠퇴하고 말았다.
악어의 눈물
다같이 물 속에서 활동하는 동물이라도 하마는 그 둔한 생김새가 일종의 애교를 느끼게 하지만 악어는 잔인하고 징그러운 인상을 준다.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악어를 위선의 상징처럼 여기고 마음에도 없이 흘리는 위선적인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한다.
'세익스피어'도 '헨리 6세', '오델로',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등의 작품에서 곧잘 그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문헌에 "악어가 물가에서 사람을 발견하면 이를 죽인 다음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먹을 것이다"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또 '악어의 논법'이란 말도 있다. 이집트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인데 나일 강가에서 악어에게 아이를 빼앗긴 여인이 악어를 보고 돌려 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악어 왈 "내가 아이를 돌려 주겠는가 안돌려 주겠는가 맞혀 보아라. 맞으면 돌려주마"하고 말하더라는 것. 어떻게 대답하든 잡아 먹기는 매일반이라 '악어논법'은 이래도 저래도 해석되는 궤변법을 말한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16세기 영국의 무역상 '토마스 그레샴' (1519--1579)은 재정에 밝았을 뿐 아니라 런던거래소의 설립자로 유명하며 '엘리자베드' 1세의 재정고문관을 지내기까지 했다. 그는 1558년 '엘리자베드'여왕에게 재정상의 충고를 담은 서한을 바쳤는데 그 첫머리의 글귀가 바로 위에 든 명언이며 그로 말미암아 이를 '그레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18세기경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지폐가 없었고 화폐는 모두 동화 아니면 은화였다.
그런데 왕은 재정상의 궁핍을 덜기 위하여 종종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곤 했다. 즉 백 원짜리 은화에는 백 원 값어치의 은이 함유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함유랑을 떨어뜨리고 명목만 백 원이라하여 유통시키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백 원어치의 은을 함유한 은화 즉 악화로 지불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양화는 자취를 감추고 악화만이 유통하게 된다. 즉 악화는 양화를 추방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우리 나라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가짜 등쌀에 진짜가 맥을 못추고 베스트 셀러가 나타나면 해적판이 홍수처럼 그 뒤를 따른다. 부정부패가 활개치니 청렴한 공무원은 무능의 딱지가 붙어 출세의 길이 막힌다. '그레샴의 법칙'은 20세기 후반의 한국에도 건재하고 있다.
알파와 오메가
입에서 술 냄새 그칠 날 없는 모주군이 절주를 권하는 친구에게 소리친다.
"여보게, 술은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 말씀이야.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살겠나!"
이쯤되면 곤란하지만 아무튼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끝' 혹은 '전부'의 뜻으로 흔히 쓰인다.
수학의 부호로서도 눈에 익은 희랍어의 알파벳은 전부 24자. 그 첫째가 '알파'이고 끝자가 '오메가'인 데서 온 말이다. 희랍인은 이 알파벳을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신약성서의 '요한'이 받은 계시(묵시룩) 23장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여자니라
'세익스피어' (1564--1616)의 희곡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것은 '햄릿'일 것이다. 그러니만치 이 희곡의 대사 가운데는 오늘날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많다. 위에 든 것도 역시 그 대사 가운데 하나.
이상주의자인 '햄릿'은 부왕이 죽은 지 한 달도 채 못되어 모친 '가틀루드'가 부친을 독살한 그의 숙부 '클로디아스'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절망하여 외친다.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여자로구나!"
거리를 활보하는 미니 아가씨를 붙잡고 이 말을 한다면 "웃기지마" 할지 모른다. 그만큼 요즘의 여자들은 강해졌다. '여성상위 시대'니 하는 해괴한 이웃 나라 유행어가 그대로 판을 쳐도 어색하지 않게끔 되었다. 그러나 '햄릿'의 대사에서 '약하다'는 뜻의 원어 '프레일티'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도덕관이나 절개가 허약함을 뜻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과연 '여자는 약하지 않다'고 큰소리 칠 수가 있을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 (1788--1824) 이 한 말이라하여 널리 알려진 것.
타고난 미모에 절름발이인 이 청년귀족은 일찍이 분방한 생활에 탐닉했으며 친구들과 더불어 해골바가지에 술을 담아 통음 난무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스무살 때 새로운 바람을 쐬려고 스페인, 희랍, 중근동 일대에 여행을 떠났다. 퇴폐적인 서양문명에 싫증을 느낀 그에게 동방은 확실히 이국적인 몽상의 나라였다.
'바이런'은 동방여행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인상을 바탕으로하여 쓴 것이 장시 '챠일드 해롤드의 여행'이었다. 그 시가 세상에 발표되자 그 분방하고 자유로운 시상은 독서계에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당시의 감상이라하여 그의 벗 '토마스 모어'가 전하는 말이다.
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된 '바이런'은 수많은 여인과 관계를 가졌으며 끝내 무궤도한 생활로 해서 영영 고국을 등지게 되었다.
"영국아, 수 많는 결점이 내게 있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노래한 것은 그 무렵의 일.
불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바이런'의 생애는 그의 작품이 낭만적이었듯이 파란만장의 한갓 로망이었다.
에덴 동산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처음에 살던 낙원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갖가지 아름다운 나무가 무성하고 동산 한가운데 생명의 나무와 선악의 나무가 있었으며 수정과 같이 밝은 네 개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 동산으로 가서 밭 갈고 곡식을 가꾸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너는 이 동산의 온갖 나무열매를 따먹어도 좋다. 그러나 선악의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 열매를 먹으면 죽고 말 것이다." (창세기 2장 15절)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악마의 꾀임에 빠져서 그 열매를 따먹은 끝에 낙원에서 쫓겨나고 만다.
또 '아담'의 아들 '카인'이 옮겨 산 곳은 '에덴의 동쪽 노도의 땅'이었다. (창세기 4장 16절)
엘로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로'니 '에로틱'이니하면 점잖은 어른들이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요즘에 와서는 '섹시하다'느니 '섹시 무드'등 숫제 '섹스'란 어휘를 사용해야만 직성이 풀리게끔 되었다. 성개방의 풍조가 우리 나라에도 밀어닥치고 있기 때문일까.
'에로'라는 말의 어원은 희랍신화의 사랑의 신 '에로스'에서 비롯되고 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어깨에 조그만 날개가 있고 손에 활과 화살을 든 어린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 화살을 심장에 맞으면 사람이나 신이나 할 것 없이 사랑에 빠져 가슴을 태우게 된다.
로마시대에 와서는 '쿠피도'라 불리웠다. 즉 '큐피드'가 바로 그것이며 '큐피'인형은 그 변형이다.
에우레카(나는 발견했다)
고대 희랍 '시라쿠사'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 (BC287--212)는 왕 '히에로' 2세로부터 최근에 만든 왕관이 순금제인지 아니면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조사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문제를 놓고 무척 고민을 했다. 하루는 공중 목욕탕엘 갔는데 그 욕조에 가득하던 물은 그가 들어가자 밖으로 넘쳐났다. 그 순간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물 속에 물체를 넣으면 같은 부피의 물이 넘친다. 금은 은보다 무겁기 때문에 같은 무게의 은덩어리는 금덩이보다 더 많은 물을 내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이다.
'아르키메데스'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쁜 나머지 "에우레카 에우레카!"하고 소리치며 벌거숭이 몸으로 집에 뛰어왔다. 그리고 즉시 실험을 해본 결과 왕관에 불순물이 섞어 있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상은 널리 알려진 고사이지만 오로지 진리의 발견을 위해 불태우는 인간의 열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엘레지
뽕짝조의 노래가 판을 치는 우리 나라 가요계에서도 '엘레지'의 꼬투리를 달고 나와 히트 한 것이 드물지 않다. '명동 엘레지' '황혼의 엘레지' 그밖에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것도 있었다. 유행가의 가사는 그것만을 놓고 읽어볼 때 정신병자의 잠꼬대같은 것이 하나 둘 아닌 터이라 과연 '엘레지'의 뜻이나 알고 작사를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
'엘레지'란 말은 옛 희랍시대의 시형 '엘레게이아'에서 비롯된 것인데 본래는 교훈이나 훈계, 술회 따위를 노래하는 시형이었다. 그것이 후에 가서는 비명이라든가 연애시, 애가 등에 많이 쓰이게 되었으며 '로마'시대에 접어들면서는 '프로펠티우스', '비오디우스' 등의 시인이 슬픈 사랑의 추억 따위를 노래함으로써 일약 '엘레지'의 이름이 높아졌다.
근세에 와서는 독일의 시성 '괴테'의 '로마 엘레지' 등이 있다.
이광수와의 사랑을 노래했다는 모윤숙의 '렌의 애가'는 아직도 여학생들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
여자를 찾아라
강변 3로의 '정 여인 살해사건'은 여자가 사건 정면 뒤에 튀어나오고 그 뒤에 무수한 사나이들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이색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사건 이면에 여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여자를 찾아라'라는 말도 나오게 된 것.
이 말은 16세기의 파리 경찰총감 '아르티느'가 했다고 하는데 1864년 파리에서 '알렉산드르 듀마'의 극 '파리의 모하칸족'이 상연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이 극의 제3막에서 유괴사건을 수사중인 경관 '쟈켈'이 하숙집 안주인을 심문한다
쟈켈-어떤 사건에도 여자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건의 보고를 받으면 "여자를 찾아라"하지요. 그래서 그래서 여자가 발견되면...
안주인-여자가 발견되면?
쟈켈-남자는 곧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말은 그 이전에도 있었으며 로마의 '유베나리스' (65--128)도 '풍자시'에서 "여자가 주요역할을 하지 않는 사건은 거의 없다"고 간파하고 있다.
아무튼 옛부터 여자의 간교한 힘은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랑스의 속담에 "여자의 뇌는 원숭이의 크림과 치즈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있다.
여자의 마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이것은 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이태리의 작곡가 '베르디' (1813--1901)작 '리골레토'중의 아리아 '여심의 노래'. '리골레토'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가를 높인 걸작이거니와 '베르디'는 특히 이 노래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 리허설 때에도 가수에게 악보를 주지 않다가 공연 바로 전날 밤에서야 주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과연 이 노래는 일세를 풍미했고 그에 따라 '베르디'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각설하고 여자가 변덕스럽기는 양의 동서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는 사흘 동안만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하여 간사하고 변덕스런 여자는 매로 다스리라했고 공자님도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고 한탄했다.
또 프랑스의 옛날 속담에 "여자는 종종 변한다. 그러므로 여자를 믿는 자는 바보다" 혹은 "달이 변하듯 여자의 마음도 변한다"라는 것도 있다.
특히 16세기 프랑스의 명군 '프랑소와'1세는 창가에 큰 글씨로 위의 속담을 적어 두고 평소의 경구로 삼았다고 하는데 아마 궁녀를 사랑하다가 단단히 혼이 난 모양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옛부터 노래나 시에 수없이 등장한 이 글귀는 희랍의 의성 '히포크라테스' (BC460생)의 말로써 그의 '잠언집' 첫머리에 나온다.
흔히 "예술가의 인생은 짧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오랜 생명을 지닌다"는 뜻으로 사용되나 '히포크라테스'의 경우 '기술' 특히 '의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의 일생은 극히 짧은데 의술을 닦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이에 종사하려는 자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의 가르침이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살았던 다도해 중의 작은 섬 '코스'는 옛날부터 의료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히포크라테스'는 뛰어난 의술로 일세에 명성을 떨렸다.
그가 제자들을 위해 지은 소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정을 품는 아들의 심정, 특히 성적 요소를 가진 것. 이로 말미암은 복잡한 심정을 통틀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고 한다.
이 말의 근원인 '오이디푸스'는 희랍신화 시대의 '테바이'왕이었다. 그는 '라이오스'왕과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 태어났는데 그 아이를 두고 '아폴로' 신전에서는 "장차 이 아이가 크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놀란 '라이오스' 왕은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몰래 산중에 버리고 만다. 산중에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요행히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왕에게 발견되어 그의 아들로 자라나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의 험담을 듣고 그것에 자극을 받아 '아폴로'의 신탁을 들으러 간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듣자 놀라서 집에 돌아갈 생각도 없이 근처의 산중을 헤맸다. 그러다가 노인 일행을 만나 싸움을 벌인 끝에 그 노인을 죽이고 말았다. 그 노인이 바로 그의 아버지인 '테바이'의 왕이었다.
때마침 ' 테바이'의 근교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길 가는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왕마저 행방불명이 되자 인심은 극도로 흉흉해졌으며 '스핑크스'를 퇴치하는 사람은 왕을 삼기로 했다. '오이디푸스'는 그런 영문을 모르고 '테바이'의 왕이 되고 그의 어머니인 왕비와 결혼했다. 결국 '아폴로'의 신탁은 모두 들어맞은 셈이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10년 가까이 왕비와 사는 동안 슬하에 네 아이를 두었으나 나라 안에 전염병이 유해하자 신탁을 받은 결과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저지른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 유명한 '소포클레스' (BC496--406)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다.
올드 랭 사인(Auid Lang Syne)
무도회의 밤이 깊어 이별의 시간이 왔다. 하나 둘 꺼지는 촛불과 함께 흘러나오는 멜로디 '올드 랭 사인'. '로보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 주연의 '애수' (원명 '워털루 브릿지')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이별의 노래'로 불리어지고 있는 이 스코틀랜드의 민요는 우리 나라에서도 잊지 못할 멜로디가 되고 있다. 일제의 총칼에 쫓겨 이역만리에서 망국의 설움을 달래던 겨레들은 이 곡을 빌어다 애국가로 삼았다. 한편 일제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졸업식의 노래 ('호다루노 히까리') 로서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노래가 이처럼 유명해진 데에는 스코틀랜드의 대표적 민중시인 '로버트 번즈' (1759--1796)에 힘입은 바 크다. 그의 시에는 구구절절이 스코틀랜드의 자연과 민중에 대한 애정이 어려 있어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올드 행 사인'도 그 가운데 한가지. 제목의 뜻은 '즐거웠던 옛날'로 가사의 내용은 벗들과 산으로 뛰놀던 옛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시저'는 뛰어난 전략가인 동시에 간결하고 박력있는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있다.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한 '시저'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갔다. '폼페이우스'는 그 곳에서 죽고 '시저'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랑을 속삭인다.
그후 기원전 47년 '시저'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제라'에서 '폰토스'의 왕 '파투나케스'의 대군과 대치했다. 그리고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자 '시저'는 곧 그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승의 기쁨을 전했다. 그 편지가 곧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붸에니 뷔디 뷔키)의 세 마디였다. 동시에 이는 가장 군인답게 간결하고 요령있는 보고로써 유명하다.
용사만이 미인을 차지한다
기원 전 331년, 페르샤를 정복한 '알렉산더'대왕은 페르샤의 왕궁으로 들어가서 승전의 축연을 베풀었다. 넓은 홀에 가득히 웅장하고 감미로운 음악의 선율이 흘러 넘친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죤 드라이덴' (1631--1700)은 그의 명시 '알렉산더의 향연' 제1절에서 이 화려한 장면을 취주악과 같은 한 편의 시로 읊고 있다.
높다란 옥좌에는 용장 '알렉산더' 대왕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시중드는 것은 아테네 제일의 미인 '타이스'이다.
'드라이덴'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용사만이 미인을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섣불리 단념하는 것도 금물이다.
"마음이 약한 자는 미인을 얻은 적이 없다"는 영국의 속담도 있으니까.
다만 요즈음과 같은 황금만능의 시대에는 '용사' 대신 "부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원죄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저지른 죄는 그의 자손에게로 물려졌다. 즉 '아담'은 인류의 우두머리이며 그 자격으로 범한 죄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 죄과를 짊어지고 나오는 것이다. 이 죄를 기독교에서는 원죄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에서 베푼 혜택을 상실하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원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속죄를 한 결과 사람은 신앙, 수세에 의하여 원죄를 그 본질에 있어 용서받기로 되어 있다.
원탁회의
국제적인 대회에서는 곧잘 원탁회의란 말이 쓰여진다. 글자 그대로 원형의 큰 테이블을 둘러싸고 토론하는 것인데 회의 운영의 공평과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하여 환영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 어원은 중세 영국의 '아더'왕의 전설에 비롯되고 있다.
'아더'왕은 기사도의 전성 시대인 6세기 경에 영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스칸디나비아와의 프랑스를 정복하고 로마군을 격퇴했다는 전설까지 남겼다.
'아더'왕 주위에는 이름난 기사들이 벌처럼 모여들었는데 왕은 그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회의 때에도 대리석의 원형 테이블을 만들어 그 주위에 앉게 했다. 원탁에 앉는다는 것은 최고의 명예였으며 그 석상에서 갖가지 문제가 토의되었다. '아더왕의 죽음' (1485)은 후세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편 근대에 와서는 1887년 1월 당시의 영국 수상이던 '글래스톤'이 반대당인 '챔벌린'과 당시의 최대 문제이던 아일랜드의 자치에 대해 논의한 것이 원탁회의 효시라고 한다.
윌리엄 텔의 사과
"네 개의 사과가 유럽문명을 낳았다"는 말이 있다. 첫째는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낙원을 쫓겨나게 만든 '금단의 사과', 둘째는 '트로야' 전쟁의 원인이 된 '파리스의 사과', 셋째는 '뉴턴'이 만류인력의 암시를 받은 사과, 그리고 마지막이 곧 '윌리엄 텔'의 사과이다.
다소 억지이기는 하나 첫째의 사과는 헤브라이즘(기독교), 둘째는 헬레니즘(르네상스), 셋째는 근대과학, 넷째는 근대 정치사상을 의미한다고 보면 그런대로 수긍이 간다.
14세기 초엽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인 총독 '게슬러'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길가에 말뚝을 박아 그 위에 오스트리아 왕을 상징하는 모자를 걸어놓고 지나가는 백성들에게 경례를 강요한다. 때마침 '윌리엄 텔'이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그 앞을 지나가면서 경례를 않자 '게슬러'는 그 벌로써 아이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텔'로 하여금 쏘게 한다. '텔'은 보기좋게 사과를 맞추어 '게슬러'를 실망시켰으나 '텔'이 또 한 개의 화살을 갖고 있는데 대해 '게슬러가 이유를 묻자 '텔'은 감연히 대답한다.
"만약 실패를 할 경우 두 번째 화살로 당신을 쏘려했소!"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폭동이 발발, '스위스'는 독립을 획득한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종종 예술화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쉴러'의 희곡 '윌리엄 텔' (1804)과 '로시니' 가극 (1829)이 유명하다.
유토피아
"하루 세 시간씩, 일주일에 사흘 동안만 일하고 나머지는 놀고 지내는 회사는 없을까. 대신 월급은 지금의 열배 쯤 주고 말이야."
"얘, 그런 유토피아 같은 소리말아."
유토피아 즉 이상향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도 없는 나라의 뜻.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자 '서 토마스 모아' (1478--1533) 라틴어로 쓴 책 이름에서 비롯된다.
이 유토피아란 나라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로 가난을 모르며 돈도 없다. 하루 여섯 시간씩 일하며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음악 따위로 즐긴다. 육체의 건강을 중시하고 병을 죄로 여기며 남녀 평등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 '서 토마스 모아'는 그 당시 전 유럽에 이름을 떨친 인문학자로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대했기 때문에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마침내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프로타고라스'는 희랍문화의 전성기인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에서 명성을 떨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출생지는 '트라키아'의 '아부델라'였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아테나이'에서 보냈으며 웅변과 처세술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보다 열 살 가량 나이가 많았으며 그의 선배인 동시에 적수이기도 했다. 당시의 '아테나이'는 민주정치의 전성기로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 웅변술은 절대적이었으니만치 그의 인기도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서 오늘날까지 곧잘 인용되는 것이 바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지만 요컨데 인간 중심주의, 혹은 판단의 상대성을 나타내는 것. 즉 만물의 척도는 '자연'이라는 도그마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미국 '펜실바니아'주 남부에 있는 '게티스버그'는 남북전쟁 때의 격전지였다. 1867년 7월 1일에서 3일까지 이곳에서 남북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니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대세는 판가름 났었다. 그 후 이곳에는 전사자를 위한 국민묘지가 만들어졌으며 11월 19일 그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링컨' (1809--1865)이 한 연설이 소위 '케티스버그 연설'로 미국사상 불후의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링컨'은 용사들의 공헌을 찬양한 다음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결의를 새로이 해야 할 것이다. 이들 사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나라의 국민은 하나님 아래서 새로운 자유를 창조해 낸다는 것을,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이 지상에서 절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그 후로 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란 말은 민주정치의 이상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역시 '링컨'이 남긴 말로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일 수는 있다. 국민의 전부를 한 때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의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일 수는 없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말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775년 자치독립을 원하는 북미의 영국식민지와 영국 본국 사이의 대립은 마침내 미국 독립전쟁으로 발전할 기세를 보였다. 남부 '버지니아' 식민지도 태도를 결정해야만 했다. 이때 '페트릭 헨리' (1736--1799)는 대의원회의 연설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도리 밖에 없다고 절규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원합니까? 생명은 존귀하고 평화는 감미로운 사슬에 묶인 노예의 신세가 되더라도 이것을 얻고자 합니까? 당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길을 택할지 모르나 나는 외칩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 후 이 말은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이 즐겨 부르는 구호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2월 혁명 때도 쓰여졌다.
1945년 겨울, 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벼락같은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히 일어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구호를 외치며 반탁시위를 벌인 것은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에 새롭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러지고 있는가
프랑스 혁명을 추진한 지도적 세력으로서 온건한 '지롱드' 당과 급진적 '쟈코뱅' 당이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혁명 초기에는 '지롱드' 당이 우세하여 1792년 '지롱드' 당 내각이 구성되었는데 내무부장관이 된 '로랑'의 아내는 재식이 겸비할뿐더러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그녀의 집 살롱은 '지롱드' 당의 사령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혁명의 진전과 함께 차츰 급진적 경향으로 흐르더니 마침내 1793년 6월 '쟈코뱅' 당은 '지롱드' 당을 의회에서 추출하고 정권을 장악, 정적을 사정없이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로랑' 부인도 '지롱드' 당의 간부들과 함께 체포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윽고 형장에 끌려 온 '로랑' 부인은 형리에게 펜과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내뱉듯이 말했다.
"오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오늘날의 정치가들도 한 번 되새겨 봄직한 말이기도 하다.
제왕절개
골반이 작거나 또는 정상적인 분만이 불가능할 경우에서 자궁벽을 절개하여 그 속에 든 태아를 꺼낸다. 이러한 방법, 즉 제왕절개술은 요즘 일반화하여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고 위험도 거의 없어 여러 차례 이 방법으로 아기를 낳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있어서는 이 방법은 곧 산모의 죽음을 뜻했고 의술이 발달한 20세기에 들어와서도 ' 페니실린'이라는 획기적 화농방지제가 발명되기 전에는 상당히 위험한 수술에 속했으며 사망률도 높았다.
제왕절개 수술이란 라틴어의 '섹티오 카에사레아'를 번역한 것인데 '카에사르' (시저)가 이러한 방법에 의해 출생했기 때문에 이 말이 생겼다는 통설이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카에스라' 벤다 라는 말에서 나온 술어인데 발음이 비슷하여 '시저'를 잘못 인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이 분만법이 고대에도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존 불
'포프', '스위프트', '아버스드노트', '게이' 등 16세기 영국의 보수파 문인들은 '스크리브리러스 클럽'이라는 문학클럽을 만들어 저마다 풍자적인 작품을 쓰기로 했다. 그 결과 '포프'는 '우물열전'을 썼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를, '게이'는 '걸인의 가극' (삼문 오페라)를 썼다.
그리고 '아보드노스트' (1667--1735)는 본업이 의사였는데 클럽의 약속에 따라 '존 불의 역사'라는 것을 썼다. 이것은 그 무렵에 있은 스페인의 계승전쟁을 일상생활에서 빚어진 개인 사이의 싸움처럼 쓴 것인데 여기 나오는 영국인의 이름이 '존 불' 이었다. 그 후로 '존 불'은 영국인의 별명이 되었다. '불'은 '거세하지 않은 황소'의 뜻
'존 불'은 다소 생소하지만 우리는 흔히 미국사람을 '양키', 일본사람을 '쪽발이'라 부른다. '양키'는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본국 사람이 낮춰 부른데서 비롯되었고 남북전쟁 때는 남부인이 북부인을 '양키'라 불러서 그 후 미국사람의 별명이 되었지만 일본사람을 '쪽발이'라고 하는 것은 36년 동안 일제에 시달려 온 우리 나라에서 일본인의 '게다' 신은 발을 비꼬아 부르게 된 것.
좁은 문
해마다 이른 봄의 졸업시즌이 되면 신문의 삼면에 오르내리는 것이 '좁은 문'이란 낱말.
까만 가운데 사각모를 쓰고 친지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수많은 학사들이 교문을 나서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직도 좁기만 한 취직의 문. 그래서 훤한 것은 고생문뿐이다.
또한 숱한 말썽을 몰고 오던 중학 진학의 좁은 문은 무시험 진학으로 활짝 열려서 전국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지만 대신 고등학교의 문은 더욱 좁아질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좁은 문'은 성서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게 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좁아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데서 비롯된 것.
즉 신앙에 의하여 참 생명을 찾는 길을 말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안락한 길보다 노력을 요하는 고난의 길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뜻에서 널리 쓰인다.
'앙드레 지드'의 아름다운 작품 '좁은 문'도 유명하다.
조세핀과 치즈
"조세핀, 오늘밤에는 안돼"
이 말은 '나폴레옹'이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한 말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다음의 일인데 한 번은 외국 사신들을 모아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한창 흥이 무르익는데 주인공인 나폴레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시종들이 조심스레 그의 사실로 가 봤더니 '나폴레옹'은 소파에 파묻혀 곤히 자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깨워야 하나, 흔들어 깨울 수도 없는 노릇, 시종들은 의논 끝에 황제는 치즈를 좋아하시니까 그 냄새를 맡으면 깰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큼직한 은쟁반에 치즈를 수북히 담아 앞에 갖다댔더니 '잠결에 손을 저으며 하는 말이 "조세핀, 오늘 밤에는 안돼." 일설에 의하면 '짐은 피곤하오'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치즈의 냄새를 잠결에 '조세핀'의 체취, 즉 바로 그 부분의 냄새로 알았다는 것.
그래서인지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후로 이 연상의 아내를 차츰 멀리한 끝에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60년, '시저'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 1회 삼두정치 체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시저'가 '갈리안' (현재의 프랑스)를 평정하여 명성을 얻자 이를 시기한 '폼페이우스'는 53년 '크라수스'가 죽어서 삼두정치의 일각이 허물어진 것을 기회삼아 원로원과 결탁, 49년 1월 1일 '시저'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시저'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로마'의 경계를 흐르는 '루비콘' 강까지 왔다. 그곳에서 '시저'는 잠시 망설였으나 마침내 결단을 내려 "주사위는 던져졌다!" 하고 외치며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 '폼페이우스'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요즘도 어떤 모험적인 일을 시작할 때 곧잘 쓰이고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 (1850--1894)의 작품으로 내용은 덕망이 높은 학자 '지킬'박사가 약을 먹으면 추악하고 극악무도한 '하이드'씨로 변한다는 이야기. 거기서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이중인격자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언젠가는 국회위원이 간첩으로 판명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밖에도 억대의 회사공금을 카지노에 탕진한 모범사원, 강도로 둔갑한 경관, 엽색행각 끝에 칼부림까지 한 목사, 국제금괴 밀수단의 한국 책임자 노릇을 한 무역회사 사장 등 우리들 주변에도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무수히 있다. 정말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사람이다.
짐은 국가이다
백년전쟁 (1339--1453) 이후 프랑스에 있어서는 중앙집권화의 경향이 급격히 강해졌으며 16세기 말에 '부르봉' 왕조가 성립하고 18세기 중엽 '루이' 14세가 즉위함에 따라 국왕의 절대적 전제적 권력은 그 절정에 달했다. 즉, 제상 '마자랑'은 왕권에 반항하는 귀족들의 '프론드'의 난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했고 재무상 '크르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에 의하여 부를 축적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었으며 '루이' 14세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도의 전횡를 자행했다. 국무의 처리에 관해서 왕의 전단을 국가의 이름으로 간하는 자가 있자 그는 말했다.
"국가라고? 그건 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왕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무기로써 왕권신수설이라는 것이 안출되기도 했다. 이와같이 신성한 후광에 감싸인 '루이' 14세의 오만과 전횡은 그칠 줄 몰라 무익한 전쟁을 도발하여 국비를 낭비하는 등 훗날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모순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집시
프랑스 작가 '프리스퍼 메리메'의 대표작 '카르멘'의 주인공은 분방하고 정열적인 '집시' 여자.
살결이 거무스레하고 새까만 눈동자, 검은 머리, 웃으면 이가 유난히 희고 아름답다.
이들은 본시 인도에 있었으나 차츰 서쪽으로 나아가서 소아시아와 발칸반도를 거쳐 지금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다.
그들이 처음 유럽에 나타난 것은 14세기 경의 일.
처음에는 별 말썽이 없었으나 차츰 이교도라하여 배척했고 17세기 경부터는 곳곳에서 추방령이 내리기까지 했다. 포장마차에 몸을 담고 떠돌아 다니는 그들은 도벽이 심하고 책임감이 없다하여 도처에서 괄시를 당했지만 음악과 무용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녀 인류 문화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즉 '집시 음악', '집시 무용'은 민족 예술의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을뿐더러 전통적인 예술분야에까지 파고 들었다. 바이얼린의 명곡 '지고이 넬바이젠'은 집시계의 명연주가 '사라사테'가 작곡했고, '리스트'의 '헝가리 광상곡', '브람즈'의 '헝가리 무곡' 등에는 '지시' 음악이 풍부히 담겨져 있다.
'메리메'의 소설을 바탕 삼은 '비제'의 가곡 '카르멘'은 '집시'의 음악과 무도가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집시'란 명칭은 그들을 처음 본 영국인이 이집트인과 혼동한데서 생긴 것이며 그들 자신은 '로마니'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보엠' (보헤미아인), '보헤미앙 라이프'도 실은 '집시와 같은 분방한 생활'의 뜻으로 '보헤미아'와는 관계가 없다.
'집시'의 장기 가운데 하나는 손금 보는 것과 트럼프의 점이 있으며 트럼프도 그들에 의하여 유럽에 전해졌다고 한다.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을 두고 하는 말이다
'토마스 에디슨' (1847--1931)은 금세기 최대의 발명왕이지만 초등학교에서는 저능아이라하여 퇴학을 당했다. 2 더하기 2는 어째서 4가 되는지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한 살 때 지하실에 실험실을 차려놓고 실험에 몰두했으며 1869년 최초의 발명인 투표기록기를 완성, 그 후 눈부신 연구활동이 계속됐다.
그가 발명가로서 명성을 떨치자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천재적 영감을 찬양해 마지 않았으나 '에디슨'의 대답은 한결같이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된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한다. 하루 네 시간밖에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그의 일상생활을 아는 사람이면 수긍이 갈만한 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표적 미국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도 진리를 탐구하는 학구적 인간이 아니었고 그의 연구는 모두가 실용성과 직결되는 것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미국의 거대한 물질문명의 큰 기둥이기도 했다.
철혈재상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 (1815--1898)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뷜헬름' 1세 밑에서 수상을 지냈다. 그 당시 독일은 아직 민족적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뷜헬름' 1세는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통일하려 했으나 의회는 국왕의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적잖은 지장을 받았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나가 "독일이 당면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철과 피로써만이 해결될 수 있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의회를 정지시킨 채 소신껏 일을 밀고 나가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한 다음 독일의 통일을 완수했다.
앞의 연설로해서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의 별명을 듣게 되었지만, 철혈은 곧 독일이 그 공업력을 기반으로하여 강력한 군비를 갖춤으로써 세계에 도전하려는 권력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차례의 패전을 겪은 독일의 비극은 권력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제레미 벤덤' (1748--1831)은 그의 저서 '도덕입법 원리서설'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야말로 도덕 및 입법의 기초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공리주의를 요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벤덤'은 공리주의적인 철학자로서 이름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법률학, 윤리학, 경제학에도 밝았다. 그는 쾌락을 유일한 선, 고통을 유일한 악으로 보았으며 그 어느 것을 낳게 하는 힘의 계량에 의하여 각각 행위의 윤리적 가치를 정하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도덕 및 입법의 최고목적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얻는데 두었던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볼 때 이 말은 크게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카놋사의 굴욕
유럽에서는 중세 봉건사회의 확립과 함께 기독교가 서구일대를 교화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권위는 정신적인 것에서부터 세속적인 것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교회는 차츰 부패하고 속되게 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위협하게 되었다. 특히 962년 독일황제 '오토' 1세가 이탈리아을 병합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후로는 교회의 임명권까지 갖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교회내부에서도 개혁운동이 차츰 적극성을 띠게 되었는데 1073 년 '그레고리' 7세가 교황의 위에 오르자 속인, 즉 황제에 의한 사교임명을 금한다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로 말미암아 당시의 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을 하게 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자기의 힘만 믿고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자 교황은 이에 맞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해 버리고 말았다. 이 파문 조치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어서 교회는 물론 제후와 신하들까지도 황제를 등지고 교황에게 섰다. 당황한 '하인리히'는 굴복을 자인하고 '카놋사' 에 있는 교황을 찾아갔다. 때마침 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교황의 성 앞에 몇 시간 동안이나 서서 용서를 빈 끝에 간신히 뜻을 이루었다. 이 사건이 사상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으로 교회의 권위가 세속의 최고 권위까지 굴복시켰음을 보여주는 특정적인 보고가 되었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로
예루살렘의 사제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체포하고 싶었지만 예수는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있어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제자를 그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하고 묻게 했다.
당시 유태인들은 로마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고발할 것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면 독립을 원하는 유태인들과 예수의 사이를 이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음흉한 꾀를 알아차리고 간접적으로 교묘히 대답했다.
"화폐에 새겨져 있는 초상은 누구의 것이냐"
"카이저(로마황제)의 상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카이저의 것이니 카이저에게로 돌려 주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쳐라" (마태복음 22장)
카인의 저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죄로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아야만 했는데 먼저 '카인'을 낳고 이어 '아벨'을 낳았다.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쳤다.
한 번은 두 형제가 제각기 수확한 것을 하나님에게 바쳤는데 하나님은 '아벨'이 바친 것을 보고 좋아한 반면 '카인'의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화가 치민 '카인'은 '아벨'과 둘이서 들에 일하러 나갔을 때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그 결과 '아벨'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게 되었다. '카인'도 자기가 저지른 죄의 엄청난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말했다. "저의 죄는 너무나 무거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뿐더러 오늘 이 땅을 쫓겨나서 방랑자가 되면 도중에서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럴 염려는 없다. 카인을 죽인 자는 7배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하며 만나는 사람이 그를 죽이지 않도록 그에게 표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카인'은 '에덴'의 동쪽 노도의 땅에 가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장가를 들어 '이녹'을 낳았다.
결국 '카인의 저주'란 인류 최초의 살인자, 형제를 죽인 자가 받는 저주인 것이다.
이상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만들고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으며 '아담'과 '이브'가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 그런데 '아벨'이 죽었으니 이 지상에는 '아담' '이브' '카인'의 세 사람밖에 없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방랑자가 된 '카인'을 누가 죽인단 말인가. 또 '카인'이 아내로 맞이한 여자는 어디서 생겨났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어떤 사태나 국면이 크게 그리고 극적으로 변동하는 것을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한다.
16세기 폴란드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를 충실히 관측한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이 지구도 천체의 하나로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소위 지동설이었다.
원래 지동설은 희랍의 철학자나 과학자에 의해서도 추정되어왔지만 기독교의 세력이 확고해짐에 따라 교회는 이를 이단시하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권위적으로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공표하지 않고 있다가 죽기 직전인 1543년 '천체의 운행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당시의 교황 '바우로' 3세에게 자기 병명을 담은 헌사를 바쳤다. 그 헌사 덕분에 '코페르니쿠스'는 아무런 탄압도 받지 않고 평온한 인생을 마칠 수가 있었다.
교황은 이 논문의 발표와 동시에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인 효과로써 세계관의 180도 전회가 이루어졌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콜럼부스의 달걀
미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콜럼부스'는 국민들로부터 거족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그의 인기를 시샘하여 '신대륙의 발견이라 해서 야단스럽게 떠들 것 없다.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냐"하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연회석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콜럼부스'는 잠자코 테이블 위에 놓인 달걀을 집어들더니 그것을 세워 보라고 했다.
좌중의 사람들은 저마다 달걀을 세우려 애썼으나 아무도 세우지 못했다.
그것을 본 '콜롬부스'가 달걀의 한 쪽 끝을 테이블에 대고 가볍게 쳐서 평평하게 만드니 쉽사리 섰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콜럼부스'는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무도 이런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나 혼자만이 생각해 냈소, 신대륙의 발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먼저 생각해 내느냐가 문제지요."
그 후로는 아무도 '콜롬부스'를 비웃지 않았다고 한다.
쿼 바디스
영화 '쿼 바디스'는 우리 나라에서도 개봉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 후 한동안 길가에서 친구를 만나면 "어딜 가는 길이냐?"하는 대신 "쿼 바디스"하고 묻는 것이 유행되었다.
본래는 '그리스도'와 사도 '베드로'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인데 19세기의 폴란드 작가 '셍키비츠'가 이 제목의 소설을 쓴데서 유명해졌다.
'그리스도'의 사후 기독교의 세력이 점차 로마제국의 하층민 사이에 번져나가자 황제 '네로'는 가혹하고도 잔인하게 이를 탄압했으며 그 결과 견디다 못한 기독교인들은 잇따라 로마를 떠났다. 그들 가운데는 12사도의 하나인 '베드로'도 끼어 있었다.
밤중에 로마를 빠져 나온 '베드로'는 '아피앙'가도에서 일출을 맞았다. 그때 '베드로'는 눈부신 햇빛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끓으며 말했다.
"쿼 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의 귀에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역력히 들렸다.
"네가 나의 백성을 버린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
잠시 후 일어선 '베드로'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베드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흔히들 '클레오파트라'하면 동양의 양귀비와 쌍벽을 이루는 서양사상 대표적 미녀를 연상한다. 더욱이 이집트제국의 마지막 여왕으로서 원정 온 '시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시저' 사후에는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로마로부터 독립, 대 제국을 형성하려 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가 '시저'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자살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까지도 유혹하려다가 실패, 독사에 팔을 물려 자살하는 등 역사에 남긴 자취도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겨난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납작했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
미인치고 코가 납작한 미인이란 상상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실제에 있어 '클레오파트라'는 용모가 아름답기는 하나 절세의 미인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고, 용모만으로써 뭇사나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미모에 곁들여 풍부한 교양과 재치있고 뛰어난 화술이 한층 그녀의 매력을 더했던 것이다. 특히 그녀의 음성은 더없이 감미롭고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수 개 국어를 마음대로 구사했다고 한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강국 로마로부터 자기 왕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자로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최대로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탄타로스의 갈증
희랍신화의 지옥 '타루타로스'에서 '시지푸스'와 더불어 이름난 것이 '탄타로스'이다. 그는 무릎까지 잠기는 물 속에 서 있는데 먹음직스런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탄타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은 금새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또 과실을 따 먹으려고 손을 뻗치면 나뭇가지는 바람에 날려서 높이 올라가고 만다. 그리하여 '탄타로스'는 과실과 물을 눈 앞에 보면서도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한다.
'탄타로스'는 본래 '제우스'의 아들로 '프류기아'의 왕이었는데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차츰 오만해서 하루는 신을 자기 집에 초대한 다음 자기 아들 '페로푸스'를 죽여 그 고기로 신들을 대접하여 시험하려 했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받아 그와같이 됐다고 한다.
통곡의 벽
68년의 중동전쟁으로 '통곡의 벽'이 일약 유명해졌다. 본래는 예루살렘의 신전이었는데 지금은 높이 약 40야드의 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신전은 역대 유대인 예배의 중심지였는데 기원 전 천 년경 '솔로몬'왕이 처음으로 건립했다. 기원전 586년에는 '바빌로니아'인이 이를 파괴, 기원전 516년 '조로바벨'이 재흥, 그후 BC. 20년 '헤롯'대왕이 신전 건축에 착공하여 기원 64년에 준공했으나 70년에는 다시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벽은 유대인이 기도드리며 지난날의 영화를 회상하여 우는 곳이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힘들다"는 것은 공자님의 말씀이지만 기독교에서도 여자의 조상 '이브'가 '아담'을 꾀어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걸로 돼 있다.
이 모두 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나온 일방적인 악선전일테지만 희랍신화에서도 역시 여자가 남성 지배하에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희랍신화에서도 맨 먼저 만들어진 것은 남자였는데 한 번 만들어진 인간은 죽지 않고 차츰 불어났으며 (어떻게 불어났는지 모르지만) 나쁜 짓만 골라하게 되었다. 이를 본 주신 '제우스'는 화를 내고 인간을 혼내 주려 불을 빼앗아 버렸다.
그러자 인간의 동정적이던 거인의 신 '프로메티우스'가 몰래 인간에게 불씨를 갖다 주었다. 덕분에 인간은 더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곧 '제우스'에게 들키고 말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엄벌에 처하는 한편 인간에게도 벌을 주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판도라'였다.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흙으로 여신의 모양을 본딴 인형을 만들게 했다. 다음에 미의 신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생김새를, '아테나'여신은 손재주를, '헤르메스'는 간사한 마음씨와 말재주를 각각 불어넣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최초의 여자 '판도라'를 데리고 '프로메티우스'의 아우 '에피메티우스'에게로 갔다.
형 '프로메테우스'는 전부터 아우에게 '제우스'가 선물을 줄 때는 조심을 하라고 일러 두었는데 좀 모자라는 '에피메티우스'는 반가이 '판도라'를 맞이하여 함께 살았다. 그런데 '판도라'는 '제우스'로부터 선물로 받아온 상자 하나를 선물로 갖고 있었다. 여러 신들이 무엇인가 잔뜩 집어넣은 다음 단단히 봉한 것으로 절대로 열어 보아서는 안되다는 상자였다.
'판도라'는 남편이 일하러 나간 사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노라니 그 상자를 열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참다 못하여 뚜껑을 여니 괴상한 연기와 함께 오만 가지 괴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모두 인간 세상에 재앙을 끼칠 것들 뿐이었다. '판도라'는 기겁을 하며 뚜껑을 닫았으나 이미 나올 것은 다 나오고 동작이 느린 '희망'만이 꾸물거리다가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인간은 오만 가지 재앙을 겪으면서도 한 가닥 미지의 '희망'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이야기.
패각추방
초등학교 반장에서부터 국정을 다루는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선출방법은 투표에 의한다. 즉 투표권의 행사없이 올바른 민주정치란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어느 나라처럼 선거때마다 '피아노 표'니 '쌍가락지 표'니하여 해괴한 표의 뉴페이스가 나타난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다.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에서도 민주정치를 유지하고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위해 이 투표제도를 활용했다. 즉 세력이 비대하여 독재가가 될 염려가 있으면 국민은 그 사람의 이름을 사금파리에 적어서 투표한다. 그것이 일정한 수에 달하면 지명된 정치가는 10년간 국외추방을 당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 '패각추방'(오스트라키모스) 제도 덕분에 그들은 민주정치를 수호할 수 있었으나 후에는 남용되어 도리어 해가 많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말았다. 투표에 종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당시만해도 '이집트'에서 수입하여 쓰는 형편으로 무척 귀중했기 때문. 기원 전 850년 경 '아테네'의 정치가 '크레이스테네스'가 '오스트라콘'에서 비롯된 것이니만치 '도편추방'이라고 해야 옳다.
폼페이 최후의 날
기원 79년 8월말 이태리의 '나폴리'만 부근에 있는 '베스비우스'화산이 대 분화를 일으켜 그 기슭에 있던 로마인의 별장지 '폼페이', '헬라클레네움', '스타비아에' 등의 도시가 화산재에 뒤덮인 채 멸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으나 1748년 봄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이 도시의 유적을 파냄으로써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 거리의 대부분이 드러나서 이태리 유수의 관광지로 되어 있다.
'폼페이'가 멸망한 것은 '로마'의 전성시기였으므로 발굴의 결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상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특히 주민의 일부분까지도 화석화하여 남아 있어 '폼페이'의 폐허가 지니는 의의는 크다.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
옛 희랍 '아티카'라는 곳에 '프로크라스테스'라는 괴상한 도둑이 있었다. 이 도둑은 나그네를 붙잡으면 그의 소굴로 끌고 가서 특별히 마련한 침대에 눕힌다. 나그네의 길이가 침대 길이보다 작으면 잡아 늘리고 크면 밖으로 나온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그러다가 침대의 길이와 키가 꼭 같은 영웅 '테세우스'가 나타나서 '프로크라스테스'를 꼭 같은 방법으로 퇴치하고 만다.
이처럼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정해놓고 모든 현상을 획일적으로 갖다 맞추는 것을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라고 한다.
자기의 조상이 지주였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출세의 길이 막히는 사회, 일정한 작업량을 정해 놓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달성해야만 하는 악명높은 천리마 운동, 백성을 못살게 들볶는 북한 공산주의의 수법은 현대판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토닉 러브
'단테'에게 있어서 '베아트리체'는 이상의 여인이었다. 그는 평생을 두고 그녀를 사모했으며 그의 작품 '신곡'에서는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당으로 인도해 간다. 요즈음과 같은 섹스만능의 풍조에서는 눈을 닦고봐도 없겠지만 아무튼 이와같은 육체를 떠난 사랑. 정신적인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한다.
이는 '플라톤' (BC 429--347)이 그의 저서 '향연'에서 육체적인 사랑보다도 정신적인 사랑을 찬양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사랑이란 당시 희랍사회의 습관이던 소년 사이의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었는데 어느 새 남녀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절되고 말았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
대학의 학생회장을 선출하는데 돈이 든다고 한다. 술을 받아주고 돈을 집어주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고,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대모를 벌인 학생들이 이 모양이니 한심한 노릇이다.
아낙네들까지도 술에 곤드레가 되어 길가에 쓰러지고 마타도아다 사꾸라다하여 흑색 선전이 난무하고 그래도 피아노 표니하는 것은 사라질 줄 모르고. 이런 판국에 아무리 한 표의 권리를 호소하고 공명선거를 외쳐도 그야말로 말짱 헛것이다. 피리를 불고 징을 쳐도 귀 기울일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우매한 백성들이 예언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려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여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 (마태복음 11장 16절)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옳은 소리를 받아들이기에 인색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하여 그후에 전답을 측량하고 경계를 정할 필요에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것을 학문적 체계로 정리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유클리드'였다. 그의 업적은 13권으로 된 '기하학 원본'에 담겨져 있는데 이는 당시의 권위있는 교과서였다.
'유클리드'는 당시의 이집트 왕 '프토레마이오스' 1세에 초빙되어 기하학을 강의했는데 왕은 그 방대한 내용에 질려서 "좀 더 손쉽게 배울 방법은 없겠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권위를 말해주는 에피소드로 여기서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 오늘날 완벽한 교육시설 속에서 유능한 교사로부터 받은 교육과 불충분한 시설 속에서 무능한 교사로부터 받는 교육은 그 효과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그런 뜻에서는 '학문에는 왕도가 있다'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예수가 기적을 베풀어 죽음에서 소생시킨 '나사로'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어 예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하고 말했다.
이 비유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싹 트기 전에 죽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사람도 열매 즉, 선과를 맺고자 한다면 자기가 죽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생명을 유지할 망정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며 신앙을 위하여 이 세상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햄릿과 동 키호테
이 두 작품 즉 세계 최고의 비극과 풍자소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 주인공을 위식적으로 비교한 것은 근대 러시아 작가 '뚜르게네프'가 처음이었다. 그는 '햄릿과 동 키호테'라는 강연에서 두 주인공의 성격을 비교한 다음 "햄릿을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돈 키호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햄릿'은 '세익스피어'작인 희곡의 주인공. 아버지를 죽인 자가 숙부임을 밝혀내고 원수를 갚지만 자기도 뒤따라 죽는다. '동 키호테'는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1547--1616)가 지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황당무계한 기사소설에 정신이 팔려 종자 '산쵸 판사'와 함께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수꽝스런 모험과 실패를 되풀이한다.
그로 인해서 '햄릿'하면 과잉의식에 사로잡혀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 즉 근대 지식인의 원형이라고도 할 내향적 성격의 사람을 말하고 반대로 '동 키호테'는 과대 망상적이지만 자기가 정의라고 믿으면 물 불 안가리고 덤비는 행동적 성격의 사람을 뜻한다.
주의해서 보노라면 우리들 주변에도 현대판 '햄릿'과 '동 키호테'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현명한 우인
영국왕 '제임스' 1세 (1566--1625)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상당한 박식이었으나 그의 행동에는 전통적인 제도와 습관을 무시하고 독재적으로 나가는 점이 많았다.
그는 몇몇 논문에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고 국민 가운데서 자유로운 것은 오직 왕 한 사람 뿐이며 국민은 왕이 신으로부터 물려받는 절대적 권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로 말미암아 의회파와의 충돌이 잦았으며 어떤 의원은 왕을 가리켜 '기독교 세계에서 으뜸가는 현명한 우인'이라고 평했다. 즉 이론이나 서적에서 얻은 지식은 경험을 쌓아서 얻은 지식에 비하여 쓸모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왕은 '식자우환'의 적절한 본보기가 된 셈이다.
황금시대
서울 한 모퉁이에 '도둑'촌 이란게 있어서 한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월급 기 만원의 공무원이 수천 내지 억대의 집을 장만한데서 생긴 말인데 과연 때는 부정 공무원의 황금시대인 모양이다.
황금은 옛부터 귀중한 금속이니 황금시대의 뜻은 굳이 따질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어엿한 내력이 있다. 즉 기원 전 7백여 년의 옛 희랍 시인 '헤시오도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일과 나날'라는 서사시에서 인간 세계가 차츰 타락했다고 노래하고 하나님이 처음 만든 것은 황금의 인간이었다고 했다. 황금의 인간이 사멸하자 백은의 종족이, 그 다음에는 청동의 종족, 그리고 영웅의 시대를 거쳐 철의 종족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황금의 인간들이 영화를 누리던 시대가 소위 황금시대인데 현대의 인간은 어쩌면 철의 종족보다 한 계단 더 낮아져서 원자의 인간인지도 모른다.
황금의 사과
흥겨운 잔치 마당에 던져진 한 개의 사과가 10년에 걸친 '트로야' 전쟁을 몰고 왔다.
즉 영웅 '아킬레스'의 아버지 '페레우스'는 주신 '제우스'의 중매로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결혼 축하의 자리에는 수 많은 신들이 초대를 받았는데 다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예외였다. 경사스런 잔치에 싸움의 신을 부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당사자로서는 약이 오를 수 밖에. 그래서 '애리스'는 황금의 사과 한 개를 잔치상의 위에 던져 넣었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제 잘난 맛에 살기란 신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인 듯 서로 사과를 갖겠다고 아우성을 친 끝에 '제우스'의 아내인 '헬라'와 군신 '아데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이 끝까지 경합을 했다. '제우스'신도 골치가 아파서 그 심판을 '이다'산에서 양을 치는 소년 '파리스'에게 떠맡기고 말았다.
'파리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세 여신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까닭을 듣자 권력과 재산을 주겠다는 '헬라'나 '아테나'의 유혹을 물리치고 세계 제일의 미인을 아내로 삼아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고 말았다. 그 결과 '파리스'는 세계 제일의 미녀인 희랍의 왕비 '헬렌'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함께 자기 나라인 '트로야'로 도망쳤으며 이에 분격하여 쳐들어온 희랍군과 10년에 걸쳐 혈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중국편
건곤일척
한 유의 싯귀로서, 천하를 잡느냐 놓치느냐 하는 커다란 모험을 말한다.
진 나라가 망하고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던 무렵 초 나라의 항 우와 한 나라의 유 방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휴전이 성립되어 항 우는 군병을 이끌고 귀국하니 유 방도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장 량과 진 평이 유 방을 충동거린다.
"우리 한 나라는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러 군주를 거느리고 있거니와 초 나라는 군사도 지쳤고 식량도 없습니다. 이야말로 하늘로 초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징조요, 이 판에 치지 않는다면 범을 길러두어 후환을 남기는 거나 같습니다."
유방은 뜻을 정하여 초 나라 군병을 추격하니 한 신 팽월의 군사와 합세하여 항 우를 포위하였다.
유 방의 이 추적이야말로 천하를 집어 삼키는 모험이었던 바 그가 훗날 한 나라의 고조이다.
걸해골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는 자기의 뼈를 임금에게 바치는 셈이니 벼슬 아치가 벼슬자리에서 하직하려 함을 말한다.
유 방이 항 우와의 싸움에 지쳐 강화를 청할 무렵이다.
항 우로서도 휴정할 생각이 있어 범 증 장군에게 의논하였다. 그러나 범 증은 이때야말로 한 나라를 무찔러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매 항 우는 다시 포위하고 나섰다.
유 방은 당황하여 진 평에게 의논하자 진 평은 항 우의 단순한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항 우와 범 증 사이를 갈라놓기로 제의하였다.
자기네 부하를 시켜 초 나라 군병들 사이에다 뜬 소문을 퍼뜨리자는 것이니 범 증이 항 우에게 불만을 품고 한 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허튼 소문이었다.
항 우는 이내 동요하여 범 증에게는 은밀히 해둔 채 유 방에게 강화의 사신을 보낸다.
한편 지장 진 평은 그 사신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다 말고 능청을 부렸다.
"범 증 장군께서는 평안하시오?"
사신은 이 느닷없는 질문에 "소인은 범 증의 사자가 아니오라 항 우의 사신이올시다"
"그래? 나는 존경하는 범 증 장군의 사자이거니 여기고 후대했구먼. 하, 거 참..."
진 평은 이렇게 흉물을 떨고는 내 놓은 주안상을 거두고 대접을 마구 하였다. 그 사신들이 돌아가 항 우에게 고하자 항 우는 범 증이 한 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확실하다 여기고 범 증의 온갖 권력을 박탈해 버렸다. 범 증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진 거나 같사오니 앞 일은 몸소 조처하소서. 소인은 해골을 빌어 내어 가지고 초야에 묻히렵니다"
이리하여 범 증은 낙향하던 도중 울화로 말미암아 등창이 생겨 사망하니 그의 나이 75세. 항 우는 어리석게도 진 평의 책략에 넘어가 유일한 지장을 잃은 셈이었다.
경국지미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만큼 뛰어난 미인을 말한다.
한 무제를 섬기는 가희에 이연년이라는 미녀가 있었다. 노래와 춤이 능할뿐더러 작곡과 편곡에도 뛰어났는데 하루는 무제 앞에서 춤추며 노래하였다.
'북녁에 가인이 있어 세상에 견줄 바 없이 으뜸이라네. 그의 눈짓 하나에 성이 기울고 두 번째 눈길에는 나라도 기운다네. 어찌 성과 나라를 저버리랴만, 가인은 다시금 얻지 못하리'
무제는 한숨을 쉬며 "아,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을까?" 하자 무제의 누이는 소근거렸다.
"바로 쟤네 여동생이 있다오."
무제는 연년이네 여동생을 비로 맞으니 그녀가 곧 이부인이었다. 무제의 총애를 누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추모의 정을 걷잡지 못하였다.
경원
겉으로는 존경하는 척하면서도 내심은 꺼려서 멀리 한다는 오늘날의 뜻과는 달리 본래는 신령을 섬기면서도 그를 멀리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공자는 불륜의 죄업으로 태어난 사람이었기에 정상적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완전하고자 했다. 그런데 자기 부모의 행실을 부정하면 불효가 될 것이요, 부모의 행실을 용인하면 배덕을 승인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공자는 도덕은 도덕으로서 받들고 부모는 부모로서 섬기며 도덕과 부모와의 관계에는 관여치 않는다는 자기 중심주의를 견지하게 되었다.
하늘과 조상 그리고 하늘에서 주어진 도덕률 등 사람의 의지를 초월한 모든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를 초월했으면서도 어째서 권위인가 하는 비밀을 추구하지는 않고, 그런 권위에게 복종하기 위한 실천론 만을 가르친 셈이었다.
공자의 제자인 번 지가 영지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대답하기를 백성으로서의 의무에만 힘쓰고 영혼이나 신령은 섬기면서도 멀리 하는 것이 곧 영지라고 하였다.
계륵
닭의 갈비뼈는 먹으려고 하면 고기가 적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는 데서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할 사물을 말한다.
후한의 유 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위의 조 조를 맞아 역사적인 한중 쟁탈전을 벌였을 때다. 전쟁이 수개월에 이르러 조 조는 군비 군량이 어지럽혀지고 도망병이 속출, 나아갈 수도 지켜낼 수도 없어졌다. 그래서 조 조는 '계륵' 즉 닭의 갈비뼈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뜻을 아는 부하가 없었다.
그런데 조 조의 군병 가운데 양 수라는 재사가 있어 일찍이 어느 비문의 은어를 풀어내는데 조 조보다도 빨랐던 자다. 그는 조 조의 '계륵'이라는 명령에 접하자 곧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하며 동료들에게 일러 주었다.
"한중 땅이란 마치 닭의 갈비뼈와 같아서 먹자니 먹을건 없고 버리자니 또한 아깝다는 뜻이므로, 나랏님께선 돌아가기로 작정하신 거라네"
아니나 다를까, 조 조는 군병을 이끌고 한중에서 철수하였다.
고희
70세. 당의 서울 장안, 그 동남쪽에 곡강이라는 못이 있다. 경치가 아름다운 못으로서 봄이면 서울의 상춘객이 들끓었다. 그 곡강 가에서 두 보는 몇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나이 47세 때 일이다.
'날마다 조정에서 돌아오면 봄옷을 전당 잡히고 곡강 가에서 만취해 돌아간다. 술빚이야 예사로운 것, 가는 데마다 있거니와 인생이란 예로부터 일흔까지 산 이가 드물구나'
두 보는 당시 1년 미만을 숙종 밑에서 조그마한 벼슬을 살았거니와 숙종을 에워싼 정치의 소용돌이가 두 보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그 무렵에 곡강 가에서 꽃과 술을 벗삼아 노래한 시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인생도 59세로 끝났는데 유랑과 가난으로 일관된 고달픈 일생이었다.
곡학아세
스스로 믿는 학설을 굽혀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부한다는 말이다.
한의 무제는 왕위에 오르자 곧 천하의 인재를 찾았거니와 먼저 아흔살 난 시인 원 고생을 불러 들였다. 그는 강직한 선비였기에 무제 측근의 어용학자들이 그를 중상하였다.
"폐하, 그따위 늙어빠진 촌뜨기 선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저 촌구석에서 증손주나 돌보는 것이 제격일까 하옵니다"
하나 무제는 단호히 그를 등용하였다. 그와 동시에 공 손흥이라는 젊은 선비도 기용했는데 그 자 역시 원 노인을 마땅치않게 여겼다. 그러나 원 노인은 개의치 않고 젊은 선비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지금 학문의 길은 어지럽혀지고 속석이 유행하고 있오. 이대로 놓아두면 유서있는 학문의 전통은 마침내 사설 때문에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요. 그대는 요행히 젊으신데다 학문을 즐기는 선비라고 들었고. 아무쪼록 올바른 학문을 착실히 닦아 널리 세상에 퍼뜨려 주오. 결코 자기가 믿는 학설을 굽혀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부하지는 마시오"
공 손흥은 원 노인의 굳은 절개와 풍부한 학설에 감복하여 불손했던 일들을 사죄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관포지교
형세의 빈부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교우를 말한다. 관중은 춘추시대 초기의 제나라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포 숙아는 관중의 비범한 재주에 심취되어 언제나 좋은 이해자요, 또한 동정자였다.
훗날 관중은 제나라의 공자 규를 섬기고 포 숙아는 규의 아우인 소백 공자를 섬겼다. 그런데 그 공자의 아비인 양공이 사촌네 공손 무지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자 관중은 규를 모시고 노나라로 망명했으며 포 숙아는 소백을 모시고 거나라로 망명하였다.
이윽고 공손 무지가 죽음을 당하니 규와 소백 두 공자가 제왕의 자리를 다투게 됨에 따라 관중과 포 숙아는 서로 적수가 된 형국이었다. 관중은 규를 왕위에 올리기위해 소백의 목숨을 노렸으나 실패. 소백이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이름 높은 제나라의 환공이다.
규는 환공의 지시로 망명처인 노나라에서 죽고 그를 추종하던 관중은 제나라로 붙들려 오게 되었다. 환궁으로서 보면 관공은 지난 날 자기의 목숨을 노린 자이니 목을 칠 생각이었으나 관중의 옛 친구인 포 숙아가 환공에게 아뢰었다.
"나랏님께서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려면 모르되, 천하를 잡으시려거든 모름지기 관중의 정치적인 재능을 활용토록 하소서"
환공은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던 만큼 신뢰하는 포 숙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관중에게 대부라는 벼슬자리까지 주었다. 관중은 국민경제의 안전에 입각한 덕본주의로써 어진 정치를 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 중의 일인이 되게 하였다. 훗날 관중은 포 숙아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젊은 시절에 가난하여 포군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그 이득은 언제나 내가 더 많이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또한 내가 그를 위해서 한 노력이 실패하여 그가 도리어 궁지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그는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일에는 실패가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나는 또 몇 번이나 벼슬을 하다가도 파면되었으나 그는 나를 무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직 내 운수가 트이지 않았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싸움터에서도 몇 번이나 패배하여 도주했건만 그는 나를 비겁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또한 내가 사로잡혀 왔을 때도 그는 나를 몰염치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줄을 아는 까닭이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로되 나를 알아준 이는 포군이다"
교언영색
교묘한 말과 표정으로 겉치레할 뿐 좋은 내용은 없음을 말한다. 공자는 말하기를 말솜씨가 교묘하고 모가 없는 표정을 짓는 이 중에는 성실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무뚝뚝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은 완성된 것을 갖춘 셈이나, 진배없다고 하였다. 하나 그런 사람이라도 완성된 덕을 갖추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형식과 실질이 조화를 이루어야지만 비로소 순자라고 공자는 말했다. 여러 방면의 학문을 배우고 그것을 형식으로써 정히 통제하라고 가르쳤다. 결코 무뚝뚝하고 우직한 태도를 권장한 것은 아니다. 공자는 무엇보다도 말과 표정으로 사람을 속이는 교활을 미워했다.
구우일모
많은 것 중의 극히 적은 것을 말한다. 천한2년, 무제의 장수 이 능은 불과 5천년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무찌르러 나섰는데 기마조차 주어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십 배의 적군과 싸우기를 10여일, 그 동안에 유리한 전황을 알리는 사자가 올적마다 천자를 비롯하여 대신들은 축배를 들어 경하했다. 그러나 필경은 참패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죽은 줄 알았던 이 능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 능의 일적을 몰살하려 하였고 그에 대해서 신하들도 감히 만류를 못하는 터에 유독 사마 천이 사학자로서의 안목으로 대담하게 변호하고 나섰다.
"이 능은 목숨을 걸고 국난 극복에 나선 명장이었으나 인간의 능력으로서의 극한점에 다다른 셈이올시다. 그가 흉노에게 항복한 것도 미상불 훗날 한나라에 보답코자 하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런 즉 차라리 이 능의 공헌을 천하에 표창하심이 타당할 줄로 아뢰오"
무제는 이 당돌한 사학자를 옥에 가두고 마침내는 궁형에 처하고 말았는데 궁형이란 남성으로서의 기능를 박탈하는 형벌이었다. 수염은 절로 빠지고 얼굴이 매끄러워질뿐더러 성격조차 변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마 천은 치욕을 참고 견디며 선친인 사마 담의 유언대로 사기 130권을 완성하였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궁형을 당하는 노릇쯤은,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가 빠진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을테지"
국척
국천 척지의 준 말이니, 머리가 하늘에 닿지 않도록 굽히고 땅이 꺼질까봐 조심스럽게 걷는다... 다시 말하자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용이다.
육조시대 송 나라의 범 엽 (398--445)이 지은 '후한서'의 전팽전에 보면
-공정한 진팽을 맞이하니 부도덕한 관리들은 국척하여 잔꾀를 부릴 여지가 없어졌다.
또한 육조의 양 나라 무제의 장자인 소명태자가 엮은 문선에 보면 장 형의 동경부에
-어찌 국천 척지함에 그치랴. 더욱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국파 산하제
나라는 망했건만 신하는 남아 있다는 것이니 당 나라때 시인 두 보의 '춘망'이라는 시의 첫 귀다.
두 보는 벼슬이 하고 싶은 욕망이 45세에야 이루어져 조그만 벼슬자리에 앉았다. 이제부터 안정된 생활이 이루어지나보다 했더니 난데없이 안 록산의 반란이 일어났다. 안 록산은 68만의 병력으로 남하하여 낙양을 함락, 스스로 대연황제라고 일컬었다. 장안도 위태로왔으니 현종황제를 비롯하여 관리며 귀족들이 시골로 피난하였다.
두 보도 처자를 촌락으로 피난시키고 당시 현종의 태자로 시골에서 왕위에 오른 숙종을 섬기고자 떠났던 바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두 보는 조로한데다가 벼슬도 낮았기에 목숨도 건지고 감시도 덜 받는 가운데 전화로 망가진 서울의 모습을 체험하게 되었다.
안 록산은 본래 호인이었기에 호병들이 거드럭거리며 말을 몰고 다녀 부녀자는 공포에 떨고 왕손 공자들도 거지의 몰골을 하고 어정거렸다.
이 안 록산의 반란은 그 후로 사 사명 부자의 반란으로 번져 9년 동안이나 끌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당나라는 어지러울대로 어지럽혀지고 무사들은 멋대로 할거하였다.
두 보는 남의 눈을 꺼리며 장안을 헤매는 동안 그 서글픈 풍정을 수많은 시로써 읊었는데 '춘망' 또한 그 중의 한 편이다.
'나라는 망했건만 산하는 남아 있고 성은 봄이라서 초목이 짙었구나.
세월의 변천을 느껴 꽃에는 눈물 뿌리고 이별을 원망하며 새를 보고서도 도적인가 싶어 놀란다.
전쟁의 횃불은 석 달이나 이어져 가족의 편지는 그지없이 소중하다.
센 머리를 긁으니 더욱 성글어져 있어 갓끈을 멜 비녀를 꽂기에도 어슬프구나'
군계일학
수많은 범인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써, '진서'의 소계천에서 나온 말이다.
계 소 (?--304년)는 죽림칠현 중의 일인으로 열 살 때 아버지가 무고한 죄로 사형을 당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쓸쓸히 지내던 중 선친의 친구인 칠현 중의 한 사람인 산도가 무제에게
" 서경에 이르기를 부자간에는 죄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계 소는 계 강의 자식이오나, 슬기롭기가 춘추 진나라의 대부 극결보다 나을 망정 못하진 않습니다. 아무쪼록 비서랑으로 기용토록 하소서"
하고 아뢰니 무제는
"경이 그토록 천거한다면 굳이 낭으로 쓸 것이 아니라 승으로 삼아도 좋겠소"
이리하여 계 소는 비서랑보다 한층 위인 비서승으로 등용되었다.
계 소가 처음으로 낙양에 올 무렵 어떤 사람이 칠현 중의 한 사람인 왕 융에게 '어제 인파 속에서 계 소를 처음 봤는데, 의기양양한 폼이 마치 무리진 닭 중의 학 같습디다 그려"
하자, 왕 융은 대답하기를
"자네는 아직 그 사람의 선친을 못봐서 그래"
그리하여 '군계일학'이란 말이 나왔거니와 그리고 보면 계 소의 어버지 계 강은 더욱 잘났던가보다. 아무튼 계 소는 벼슬이 차츰 높아져 갔다.
권토중래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듭 다그쳐 온다는 것이니 한 번 실패한 자가 다시금 세력을 일으킨다는 뜻. 만당의 시인 두목 (803--852)이 항 우를 읊은 싯귀에서 비롯된다.
두 목은 두 보와 견주어서 소두로 일컬어진 시인이었던 바, 항 우가 31세로 세상을 떠난지(BC202) 천 년이 지난 시기에 항 우가
"싸움에 진 몸이 부형을 뵐 낯이 없다"고 자결했던 오강땅에 이르러, 그가 강동으로 돌아가서 재기를 기약하지 않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을 애석해 한 것이다.
'승패는 병가로서도 기약할 수 없으니
수치를 감싸고 견디는 것이 사내인 것을.
강동의 자제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왔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항 우는 단순하고 격한 성품이었으며 그의 애인 우 희와의 이별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다.
그러나 당송팔가의 한 사람인 왕 안석은 두 목의 시에 대해 반대 의견이었으니 '강동의 자제가 지금 있다 할지라도 구태여 군주를 위해 권토중래 할까 보냐'고 노래하였다.
사마 천도 사기에서 '항 우는 힘을 과신했다.'고 하였고 역시 당송팔가의 한 사람인 증 공도 같은 견해였다.
근화 일일지영
무궁화는 아침에 피어났다 저녁에 지는 꽃으로써 덧없는 상징이다. 세상 만사는 허무한 짓이어늘 어찌 환상 같은 애환에 얽매이랴 하는 뜻이다. 백 간천의 시 '방언' 중의 싯귀.
'소나무는 천 년을 살지만 마침내 썩어지고 무궁화는 하루를 살지만 스스로 영화롭다. 어찌 세상에 연연하여 죽음을 근심하랴. 육신을 탓하여 속절없이 삶을 꺼리지도 말라.'
백 낙천은 중당의 대표적 시인이요, 당의 대시인 이 백이 간지 10년만에 태어났다. 또한 그는 두 보가 간지 2년만에 태어난 셈이다.
그의 시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였고 정치의 난맥과 사회의 혼란을 풍자했으며 백성들의 고통에 동정산 것이 많았다. 동시에 감상적인 시도 많았으니 '장한가'며 '비파행' 등이 그것이다.
금성탕지
끓는 물에 에워싸인 강철 성이라는 것이니 침공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전국의 난제를 통일하고 대제국이 된 진나라도 시황제가 죽고 2세 황제가 등극하자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하여 여러 곳에 잠복되어 있던 전국시대 6강국의 종식과 유식들이 진나라를 타도하려고 일어섰다.
그 무렵 무신이라는 자가 조나라의 옛 영토를 휩쓸고 봉기하여 스스로 무신군이라 일컬었다.
그것을 본 괴통이라는 논객이 현령인 서공에게 아뢰었다.
"나으리께선 매우 위험한 처지에 계십니다. 그러나 소인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올시다"
서공은 놀라 물었다.
"어째서 위험하단 말이오?"
"나으리께선 현령이 되신 지 10여 년이 되셨습니다만, 그 동안에 진나라의 형벌이 가혹한 탓으로 백성들이 진나라를 아니 직접적으로는 나으리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위엄이 오늘날처럼 몰락하고 보니 백성들이 이제야 말로 나으리를 죽여서 원한을 풀고 공명을 떨치려고 벼르는 참이올시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겠소?"
이에 괴통은 서공에게 다가앉으며 대답하였다.
"소인이 나으리를 대신하여 무신군을 만나 투항해 노는 현령을 우대하도록 설득시키겠소이다."
"무슨 수로 그렇게?"
"여러 군현들을 일일이 무력으로써 침공하려면 희생이 막대할 것이므로 투항해 오는 현령을 깍듯이 대접하도록 하는 게 상책이라고 설득시키렵니다."
"흐흠... 과연 설득이 될까?"
"되고 말구요. 가령 현령을 소홀히 다룬다거나 혹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한다면 여러 군현마다 죽기 한정하고 성곽을 굳건히 지킬 것이니. 그야말로 끓는 못물에 에워싸인 강철성이나 같을 거라고 타이르면 될 것이올시다."
서공은 기꺼이 괴통을 무신군에게 보냈던 바 무신군은 과연 괴통의 말을 합당하게 여겨 범양 현령 서공을 맞아 우대하는 한편 여러 군현에 투항을 종용하는 사신을 보내니 화복에서만도 투항해 온 군현이 30이상이었다.
금슬상화
금은 거문고요, 슬은 큰 거문고니 그 두 가지 현악기를 함께 탐으로써 이루어지는 즐거운 분위기를 단란한 부부 사이에다 비유한 말이다.
시경의 소아 상체편과 주남 관휴편에 나오는 싯귀인 바 상체편의 경우에는 야릇한 곡절이 있다.
주 나라 무왕의 아우 주공단은 형인 관숙손과 아우인 체숙도가 주 나라에 반역하다 죽은 것을 애석해하며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하며 즐기는 양을 노래하였다 한다. 혹은 주나라의 여왕 때 종족이 불화했기 때문에 소목공이 일동을 모아 놓고 지었다고도 하며 혹은 그 자리에서 주공이 지었다고도 한다.
소마란 주나라의 조정에서 잔치할 때 쓰이던 노래인 바 거기에는 상체편 따위처럼 순진한 궁정가가 있는 한편 연애나 군역의 애환을 노래한 민가도 수록되어 있다.
금의야행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간들 누가 알아주랴 한 항 우의 말로써. 입신출세하여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서는 옛 친구에게 알릴 수 없다는 인간 심리의 약점을 나타내는 말이다. 금의 귀향이니 금의 주행이란 말이 '삼국지'에 보인다.
진 나라의 서울 함양을 향하여 유 방과 항 우가 앞을 다투어서 침공했을 때였다. 두 호걸의 대조적인 성격이 여실히 나타났다. 먼저 항 우는 진왕의 자식인 영을 죽이고 진 나라 궁전을 불태웠다. 사흘 동안이나 타올랐다는 그 불길을 술안주 삼아 여자를 껴안고 승전을 축하했다. 또한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쳤으며 재보와 미녀를 차지하였다.
제왕이 될 첫걸음을 스스로 무너뜨리는거나 같은 이같은 행실을 지장이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약탈한 재보와 미녀를 모조리 거두어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려하자, 한 생이란 자가 그를 만류했다. "관중은 4면이 산하에 에워싸여 있어 지세가 견고할뿐더러 토질도 비옥하오니 이곳에다 도읍을 정하시어 촌사를 제패하소서."
한편 항 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불타버린 궁전과 황폐한 전적 뿐이었다.
하루 속히 고향에 돌아가 자개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은 터였기에 한 생에게 '금의 야행 얘기를 했던 것이다.
한 생은 항 우에게서 물러나와
"초나라 사람이란 마치 원숭이가 관대를 갖추어봐도 오래 못 견디는거나 같거든."
이렇게 이루어진 말이 항 우의 귀에 들어가 한 생은 당장 쪄죽임을 당했다. 결국 항 우는 한때의 성공에 취한 나머지 천하를 유방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기우
부질없는 근심.
주 나라 때 기국이라는 나라에 천지가 무너지면 어쩌나 싶어 침식을 제대로 못하는 사내가 있었다.
한편 그 부질없는 근심을 염려하는 사내가 있어 그에게 말하였다.
"하늘의 공기니까 무너질 염려가 없다네"
"하늘이 정녕 공기라면 일월 성신이 떨어지지 않겠나?"
"천만에! 땅은 또 흙이 쌓여서 된 것이만큼 무너질 염려가 없느니"
이리하여 두 사람이 함께 근심을 덜었다는 이야기이다.
열자는 그 얘기를 듣고 웃었다.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 사람도 잘못이야. 무너지느니 무너지지 않느니는 우리로서 알 수 없는 바거든. 천지가 무너지느냐 무너지지 않느냐 하는 건 우리가 염려할 바가 아닐세."
이 백이 노래하기를
"기 나라에는 일도 없이 하늘이 기울까봐 염려하더라"
옛사람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심사를 그냥 따뜻하게 바라보는 이 태백의 인간성이 느껴진다.
기호지세
범을 타고 몰아친다는 것이니, 이미 큰 일을 착수한 이상 도중에 그만두면 오히려 위험함을 말한다. 잡다한 이민족이 한 민족과 대항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망했다 하던 남북조 시대.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의 의제가 죽자 외척인 한인 양 견이 궁중에 들어갔다.
견은 재상으로서 정치를 총괄하고 있었는데 한인의 천하를 이룩하고자 염원하고 있던 터에 죽은 의제의 자식이 어린데다가 슬기롭지도 못하여 스스로 제위에 올라 수 나라를 세웠다.
서기 581년의 일로서 견은 그로부터 8년 후에는 남조의 진 나라를 무찔러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가 수 나라의 고조 문제인 것이다. 문제의 황후가 독고 황후였다. 일찍이 남편의 대망을 알고 있었기에 남편이 북주 천하를 장악하고자 궁중에 들어갔을 때 사람을 보내어 남편을 격려하였다.
"하루에 천리를 내닫는 범을 탄 이상 도중에 내려오신다면 범에게 잡아 먹히십니다. 범을 몰아 끝까지 가셔야 합니다. 이미 큰 일을 일으키려고 일어서셨으니 도중에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기필코 목적을 이룩하도록 힘써 주셔요."
남편이 아내의 이 말에 용기를 얻은 건 물론이겠다.
낙양지가
아직 인쇄물이 생겨나기 전에는 사본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종이도 귀중품이었기에 베스트셀러를 서로 베끼는 바람에 서울의 종이값이 올랐다는 것이다.
진 나라 때 제 나라에 좌사라는 이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추하고 말씨도 더듬거렸으나 붓을 들면 문장의 장려함이 비길 데 없었다.
그는 사람과의 관계도 끊고 창작에 몰두하여 1년 걸려서 제도부를 써냈다. 그러나 그는 삼도부를 지어낼 소망이었는데 삼도란 촉의 서울 성도와 오의 서울 건업과 위의 서울 업이다.
처음에는 인정해 부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윽고 유명한 시인 장 화가 그 구상의 웅대함과 또한 그 환상의 화려함을 탄복하면서부터 삼도부는 대번에 유명해졌다. 그리하여 고관이며 귀족들이 서로 다투어서 사본하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비싸졌다는 것이다.
남가지몽
꿈 혹은 꿈같은 세상, 당의 덕종때 광릉이란 곳에 순우분이란 사내가 있었다. 집의 남쪽에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이 있었는데 어느 날 취해서 그 나무 밑에서 자고 있노라니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 둘이 나타났다.
"괴안국 임금님의 분부로 모시러 왔습니다.
분이 그들을 따라 느티나무의 구멍 속으로 들어갔더니 커다란 성문 앞에 이르렀다. 대괴안국이라고 황금으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왕은 분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사위로 삼았다. 하루는 왕이 분에게
"남가군의 정치가 어지러우니 그곳의 태수가 돼 주겠나"
분은 친구인 주변과 전자화를 부하로 삼아 남가군으로 부임하였다. 그로부터 20년간 분은 두 친구의 도움으로 어진 정치를 펴니 왕은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단라국이 남가군을 침노하니 분은 주변을 장수로하여 방어케 했으나 변이 적을 넘본 탓으로 패배하였다.
적은 분양품을 가지고 물러갔으나 변은 이윽고 동창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분의 아내도 병으로 숨졌다.
분은 태수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오니 그의 명성은 대단하고 권세는 날로 불어나 왕도 내심 불안해졌다. 마침 그 무렵 서울을 옮겨야 할 이상한 징후가 있다고 상주문을 올린 자가 있어 항간에서는 그것이 분의 세력이 강해진 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왕은 그를 사저에다 연금했으나 그 억울함을 인정하고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깨닫고 보니, 분은 예전대로 느티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느티나무 뿌리를 살폈더니 그 구멍이 있어 구멍을 파본즉 침대 하나가 들어갈만한 공간에 개미떼가 무리져 있는 것이다.
그곳이 괴안국의 서울이요, 한 쌍의 큰 개미가 곧 국왕 내외였다. 남쪽 가지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개미떼가 있는 편편한 곳이 있는데 거기가 남가군이었다.
분은 예전대로 구멍를 메워 두었는데 그 날 밤에 큰 비가 와서 개미떼가 온데간데 없어졌다. 나라에 변고가 있어 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나라 이 공좌의 '남가기'에 있는 얘기
남상
사물의 시초를 말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성장을 하고 공자를 뵈러왔다. 공자는 그의 보라는 듯 싶은 기색을 알아채고 그냥 보아 넘겨선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자로군, 그 성장은 웬 일인가?"
하고 물은 다음 비유해서 말하였다.
"예로부터 양자강은 그 근원인즉 술잔을 띄울 정도의 물에 불과했다네, 그런데 내려울수록 물이 깊어지고 흐름이 빨라져 배를 타고서도 바람이 없는 날을 택해야지만 건널 수 있게 되거든"
공자는 이처럼 비근한 사례를 들어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능란하였다. 그는 또한 상냥하게
"자로군, 지금 자네는 성장을 하고 득의 양양하네만 자네를 충고하는 데에는 나 이외에 없겠구먼"
어떤 사람이든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언짢으면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이다.
누란
달걀을 쌓아 올린다 함이니 매우 위태로움을 말한다.
전국시대에 장기가 있는 자는 누구나 실력으로 출세하려고 애썼다. 개중에서도 종횡가라고 일컬어지는 변설사는 여러 군주를 찾아다니며 유세하는 것이니 그 지위가 매우 높았다.
위 나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범 휴도 종횡가가 될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무리 실력주의 세상이라해도 느닷없이 출세의 실마리를 찾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고향의 중대부인 수가를 섬겼는데 그를 따라 제 나라로 사신이 되어 갔을 때 부하인 범 휴가 도리어 수가보다 평판이 좋았다. 그래서 귀국 후 수가가 위나라의 재상 위제에게 모함을 하였다.
"네놈이 제나라와의 내통을 했으렸다?" 하고 범 휴는 붙들려가서 호된 매질을 당하였다.
갈대발로 말아다가 변소에 처넣는 욕을 당했다.
그러나 범 휴는 가까스로 정 안평이라는 동정자에게 문지기를 보내어 그에게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이름도 장 록이라 고치고 진 나라로 갈 기회를 노리던 중 진나라 소왕의 사신 왕계가 나타났다. 왕계는 장 록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위나라의 장 록 선생으로 말하면 천하의 외교관 이온바 우리 진나라의 정치를 비평하여 '달걀을 쌓아 올리느니보다도 더욱 위태롭다'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자기를 등용하던 정치가 탄탄하리라 하옵기에 소신이 선생을 모시고 왔습니다."
진나라의 왕은 이 불손한 나그네를 구태여 처벌하려고는 않고 뜨내기 나그네로서 놓아두었다. 범 휴가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기만성
큰 인물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랜 세월과 꾸준한 노력 끝에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삼국 정립시대 위 나라에 최 염이라는 이름 높은 무장이 있었다. 그는 풍채며 음성이 대인풍으로 수염이 넉자요, 무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데 최 염의 종제에 임이라는 자가 있어 외양도 초라하고 명성도 나지 않아 문중에서도 홀대를 받는 터였으나 최 염만은 그의 사람됨을 인정하고 있었다.
"큰 종이나 큰 솥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재능은 만만히 이루어지지 않소이다. 임도 그렇듯 '대기만성' 유일테니 두고 보시오. 기필코 대단한 인물이 될테니..."
그의 말대로 임은 훗날 삼공이 되어 천자를 보좌하는 소임을 맡을만큼 큰 인물이 되었다.
도원경
선경 혹은 이상향을 말한다. 진 나라 태원 시절 무릉에 한 어부가 있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종선을 타고 물고기를 찾아 골짜기의 냇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난생 처음 보는 곳에 이르렀다. 잡목 한 그루도 없는 복숭아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감미로운 향기가 자욱한 가운데 예쁜 꽃잎이 화려하게 춤추고 있는 것이다.
어부는 그 황홀한 경치에 홀려 더욱 더 노 저어 올라갔더니 산이 가로막혔다. 그 산에는 조그마한 굴이 있고 그 안이 아련히 밝기에 배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굴 속은 눈부시게 밝아지면서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들은 정녕 저마다 어부를 청해다가 술과 닭고기를 대접하면서 어부네 세상 얘기들을 물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네 조상도 진나라 적 전란을 피하여 이 절경에 온 이래로 한 번도 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오. 그래, 대체 어떤 세상이 되어 있나요?"
그들은 한 나라를 모르고 있을뿐더러 위나 진나라도 몰랐다. 어부는 4,5일 후에야 집에 돌아와 그 희한한 체험담을 마을의 태수에게 들려주었다.
태수는 어부의 안내로 그 선경을 찾아 갔으나 웬일인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선경이 곧 '도원경' 혹은 '무릉도원'이다.
도청도설
오다 가다 들은 말을 또한 오다 가다 지껄임을 말한다.
'논어'의 양화편에 이르기를
"앞길에서 들은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수양거리로 삼는 게 아니라 뒷길에서 곧 남에게 지껄임은 스스로 그 덕망을 버림이니라, 착한 말은 온통 그 마음에 간직하여 제 것으로 삼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
또한 후한의 반고에 의하면
"무릇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군주가 서민의 풍속을 알기 위하여 낮은 벼슬아치에게 일러 지껄이게 한데서 비롯된다. 즉 세상 얘기며 항간의 소문은 '도청 도설'하는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애초에는 패관소설이라 했으니 패관이란 낮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도탄
도는 흙탕물이요, 탄은 숯불이니 마치 흙탕물이나 숯불에 빠진 것 같은 백성들의 고난을 말한다.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주지육림에 홀려 백성들의 고통을 등진 왕으로서 알려져 온다.
그 걸왕의 학정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켜 걸왕의 대군을 무찌르고 스스로 처자가 된 이가 은나라의 탕왕이다.
탕왕이 군사를 일으킴에 있어 군중들 앞에서 출진의 서약을 한 말이 서경에 남아 있다.
"오라, 그대들 백성들이여 다들 내 말을 들으라, 나는 구태여 난리를 일으킴이 아니요 하나라의 죄가 많기에 천명이 이를 무찌름이니라,"
탕왕은 또한 개선한 연후에도 여러 군주들에게 걸왕의 무도함을 열렬히 공격했다. 또한 탕왕의 신하인 중훼는 말하기를
" 하나라의 덕망이 혼미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지도다."
이로부터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는 말이 오늘날까지 상용되어 온다.
동병상린
같은 비운에 처한 사람은 서로 애처롭게 여긴다는 말이다.
춘추시대 오나라 왕 합려의 신하 오 자서와 백비 얘기다. 오 자서와 백비는 본래 초나라 사람이었는데 자서의 아버지와 형이 초왕에게 죽고 백비는 또한 할아버지가 초왕의 손에 죽었으므로 두 사람이 한 가지로 초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초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는 오나라에 기탁한 터려니와 하루는 오나라의 대부인 피리가 자서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찌하여 백비를 사용하는고?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은 신용할 수 없어 뵈던데"
"그건 나으리의 자나친 생각이십니다. 그 사람의 초나라에 대한 원한은 저와 마찬가지로 심합니다. 나으리께선 하상가를 못들어 보셨나요?"
'병환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애처로와하고 근심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돕는다. 놀라서 날아가는 새는 서로 모여들고 여울 밑의 물도 그렇듯이 흐른다...' 고 했습니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만 그 사람은 거동이 거칠고 음험하니 과히 친숙하게 지내지 않는게 좋을텐데..."
"아니올시다. 나으리! 저는 근심을 같이 하는 그를 믿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합려를 도와 노력하기를 9년, 마침내 초나라의 소왕의 군병을 무찔러 오랜 원한을 풀었다.
그런데 훗날 피리가 염려하던 일이 생겼다. 오나라가 월나라와 싸우게 되자, 두 사람은 합려의 아들인 부차를 섬겼는데 월나라의 뇌물을 먹은 백비가 부차에게 자서를 모함하여 죽이게 했던 것이다.
두주불사
말술도 사양하지 않고 마신다는 말이다.
진나라의 말엽, 유 방이 진나라의 서울 함양을 이미 함락했다는 말을 듣자 항 우는 크게 노하여 유 방을 무찌를 작정이었다. 그 낌새를 안 유 방은 두려워하여 몸소 항 우의 진중을 찾아가 해명하였다. 이로써 항 우의 의혹은 풀렸으나 항 우의 모신 번 증이 이 기회에 유 방을 죽일 생각으로 칼춤을 베풀며 유 방의 목숨을 노리는 참이었다.
한편 유 방의 부하인 번증이 유 방의 위급함을 들고 달려와 왼손에 든 방패로 위병을 쓰러뜨리고 오른손의 칼로 막을 걷어 올리며 뛰어들어 항 우를 노려보았다. 항 우는 이 난데 없는 일에 놀라
"웬 사람이고?"
"유 방의 부하 번증이란 자올시다"
하고 겉에서 장 량이 일러 주었다.
"오 장사로구나, 술을 대접하렸다"
내다 준 말들이 술잔을, 번증은 선채로 단숨에 들이켰다.
"안주가 있어야지. 돼지고기 어깨살을 주렴!"
번증은 커다란 날고기를 방패로 받아 칼로 썰어가며 먹었다. 항 우도 다소 질리는 기미였다.
"대단한 장사로군, 한 잔 더 주랴?"
"죽음조차 사양치 않는 놈이거늘 어찌 말술을 사양하겠나이까? 다만 한마디 여쭙고자 하는 저의 나으리께선 함양에 입성은 하셨으나 차지한 물건을 없으며, 오로지 장군이 오시기를 기다리셨던 것이올시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소인배의 말을 믿으시어 큰 공이 있는 나으리를 해치려 하시다니 망한 진나라의 흉내를 내는 짓으로서 결코 장군에게 이롭지는 않습니다."
유 방은 변소에 가는 척하고 자리를 떠 번증과 함께 황급히 사라졌다. 이리하여 '두주불사'란 말이 생겨났다.
등용문
용문은 황하의 상류에 있는 좁은 골짜기의 이름인바 매우 가파른 까닭에 큰 물고기도 거슬러 올라 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일단 거슬러 올라 가기만 하면 물고기가 대번에 용이 된다고 전하며 등용문-즉 용문을 오른다 함은 난관을 돌파하여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 함이다.
후한도 이미 종말에 가까운 환제때 일이다.
발호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포악한 외척 양기가 살해되고 이른바 오사로 일컬어진 환관들이 날뛰기 시작했을 때 일부 정의파 각료들은 그에 대해서 과감한 항쟁을 벌여 대규모의 탄압을 받던 무렵이었다.
그 항쟁의 중심 인물이요, 정의파 각료중의 영수로서 알려진 이가 이 응이었다. 감찰관으로 관계에 나서서 치안국장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특히 청년 학도들 간에 평판이 높았으며 신진 각료들은 그의 천거를 받는 것을 '등용문'이라 하였다.
마이동풍
남의 의견이나 비평이나 충고를 전혀 개의치 않음을 말한다.
이 태백의 친구에 왕십이라는 이가 있어 '차가운 밤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느껴움이 있노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이 태백은 그에 답하는 장시를 지어 보냈거니와, 자네처럼 고결하고 뛰어난 인물이 지금 세상에 용납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위로하며 세대를 개탄해마지 않았다.
"시속을 보아하니 닭싸움 솜씨가 뛰어나야지만 천자의 총애를 받아 대로를 활보하며 오랑캐의 침공을 막는데 사소한 공이라도 세워야지만 최고의 충신 행세를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자네나 나나 그런 짓은 못하며 북창에 기대어서 시를 읊을 뿐이니 제 아무리 걸작을 서본들 한 잔의 물만도 못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듣고 모두 머리를 저으며
"마치 동풍이 말의 귀에 불어치는 격이네 그려"
만가
영구차를 이끌며 부르는 노래. 한의 유 방이 항 우를 무찌르고 고조로서 등극했을 때였다. 일찍이 한신의 급습을 받고 화목사를 쪄 죽였던 제나라 왕 전 횡은 고조가 등극하자 보복이 두려워서 부하 5백여 명을 이끌고 섬으로 도망쳤다. 고조는 전 횡의 후한이 두려워 죄를 용서할테니 오라고 청하였다. 전 횡은 낙양까지 3백리를 앞두고 포로가 되어 고조를 섬길 것이 수치스러워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 목을 고조에게 바친 두 나그네도 전 횡의 무덤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섬에 남아 있던 5백여 명 역시 전 횡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모조리 자결하였다. 이윽고 무제의 시대로 옮겨지자 무제는 악부라고 하는 음악원을 만드니 그곳의 총수인 이 연년이 지난 날 전 횡의 제자가 지은 상가에다 곡조를 붙어 영구를 이끌며 부르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만가'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만가의 시초는 그보다도 예전이라 한다.
주나라 경왕 36년 노나라의 애공과 오나라의 부차가 합세하여 제 나라를 쳤다. 그때 제나라의 공손 하가 부하를 격려하여 장송가를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필경 제나라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니 장송가는 결국 불길한 전조가 된 셈이다.
망국지음
망한 나라의 음악, 혹은 나라를 멸망시킬만큼 음탕한 음악.
위나라의 영공이 진나라에 가는 도중 복수근방에서 참으로 심묘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영공은 그에 심취하여 거느리고 있던 음악사에게 그 가락을 베끼도록 분부하였다.
이윽고 진나라에 당도하니 영공은 그 음악사에게 일러 진나라 평공 앞에서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런데 진나라에는 사 광이라고 하는 탁월한 음악사가 있어 음악으로써 학을 춤추게 하고 구름을 부른다는 명인, 그래 평공은 곧 사 광을 불러다가 같이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 광은 음악이 연주되자
"잠깐 기다려줍쇼! 그건 망국지음이올시다."
하고 음악사의 연주를 만류하였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하는 영공과 평공에게 그 내력을 들려 주었다.
"옛날에 은나라 주 왕을 섬기는 사 연이라고 하는 유명한 음악사가 있었습니다. 사 연은 주왕을 위해 음탕한 악곡들을 지어 올렸거니와 주 왕은 밤낮으로 그 악곡들에 홀려서 지내셨읍죠. 주왕은 그렇듯이 악독한 정치를 하다가 멸망하자, 사 연은 악기를 안고 동쪽의 복수로 가서 투신자살 했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언저리에선 그 곡조가 들려오고 있다더니만..."
영공도 평공도 소름이 끼쳐 다시는 그 음악을 들을 리 없었다. '한비자'의 십과편에 있는 이야기.
명경지수
맑고 티없는 거울과 움직임이 없는 잔잔한 물은 예로부터 맑고 고요한 심경의 비유이다.
노나라의 왕 태라는 인물은 형벌로 다리가 잘리웠는데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기로 평판이 높았으며 그의 제자는 공자만큼이나 많았다.
공자의 제자인 상계는 그 불구자의 평판을 이상하게 여겨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왕 태가 이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그이는 천지 자연의 실상을 알아차리고 외물에 이끌려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네. 만물의 변화를 자연 그대로 받아들여, 도의 근원을 지키고있는 분이야. 눈과 귀에 비치는 미추 따위는 개의치 않으며 만물을 한결같이 보는 까닭에 득실은 문제가 안되며 다리 하나쯤은 마치 흙덩이를 버린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거든"
또한 상계는 왕 태에게 제자가 많은 곡절을 물었다.
공자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이의 어느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심경 때문이야. 무릇 사람이 제 모습을 물에 비쳐 보고자 할 적에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 잔잔하게 머물러 있는 물을 거울로 삼을 것 아닌가.
그와 마찬가지로 항시 변함이 없는 심사를 지닌 사람만이 남에도 마음의 평정을 주기 때문일세."
공자는 이렇게 평전된 마음을 잔잔한 물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현자의 명징을 밝은 거울에 비유한 예를 들어보면, 신도가라고 하는 역시 형벌로 다리가 잘리운 선비가 자기의 스승 백혼무인의 덕을 찬양하여 가로되
"거울이 흐리지 않으면 먼지가 앉지 않거니와 먼지가 있으면 흐려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오랫동안 어진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맑아져서 과실이 없어진다"
명철보신
널리 사리에 통달하고 또한 높은 덕망과 영지에 의해 몸가짐에 실수가 없는 현인을 칭송하는 말이다. 은나라 무정은 왕위에 오르자 부왕의 상을 입기를 3년, 연후에도 정치에 관해서는 말을 않고 조용히 산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중에 설이라는 현자를 초야에서 찾아내어 그의 도움으로 선정을 펴서 만백성의 경모를 받았다.
여러 신하가 무정을 찬양하기를
"천하의 사리에 통달하여 민중보다 먼저 아는 이를 명철이라 하옵니다. 명철한 이는, 정치와 도덕의 율법을 정하는 분이올시다." (서경)
또한 시경에 보면 주나라의 어진 재상 중산보를 찬양하여 '명철보신'이라 하였다.
모순
말의 앞 뒤 이치가 서로 어긋남을 말한다.
전국시대 군웅이 난립하여 피비린 살육전이 중국 천지를 감쌌을 때의 일이다. 무기의 소모는 급격히 불어나 거리마다 창과 방패를 늘어놓고 파는 게 풍속이었다. 전쟁이 뜸해진 한나절 거리에 인파를 바라보며 무기를 팔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 방패로 말하자면 천하에 없는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소이다. 자, 이 창은 또 어떠한가?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어떤 방패라도 뚫는 창이올시다. 그런즉 이 창과 바로 이 방패만 지니고 보면..."
이때 한 늙은이가 물었다.
"그런데 말씀이야... 바로 그 창으로, 바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누?"
무기 장수는 불그락 푸르락하며 사라졌다는 얘기가 '한비자'에 나온다. '한비자'는 전국시대의 강국인 한나라의 왕족이자 선비였던 한 비(BC233) 의 저서이다.
무항산 무항심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변함없는 지조가 있을 수 없다는 맹자의 가르침이다.
등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나라의 군주 문공이 맹자를 정치고문으로 초빙해다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맹자의 진술이 유명한 정전설인 바 그 요체는 다음과 같다.
"국정은 먼저 백성의 경제 생활의 안정에서 비롯되옵니다. 항산이 있는 자는 항심이 있으며,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이 없는 법이올시다. 항심이 없으면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하지요. 백성이 죄를 저지른 다음에 벌을 준대서야 법의 그물을 씌우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문인상경
문필가는 제각기 자기가 제일이라고 뽐내며 다른 문필가를 얕보는 기질이 있다는 말이다.
명제가 반고와 부의 두 선비에게 분부하여 여러 서적을 비교 검토 수정토록 하였는데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문선(6세기)에 전해진 바를 보면
"문인은 서로 상대방을 얕본다 하거니와 그런 풍조는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반고와 부의의 사이가 그러하다. 두 사람의 실력은 서로 백중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는 의를 대단치 않다고 하였다."
문전성시
문 앞이 장터처럼 붐빈다는 것이니 방문객이 많음을 말한다.
후한의 젊은 황제 애제는 실권을 조모네 가문인 부씨와 외가인 정씨네 일족에게 떠맡긴 채 미남인 동현과 동성연애에 빠져 있었다. 정 승 등의 중신들이 암만 충고해도 듣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힐책하였다.
정 승은 명문 출신으로 아우가 부씨네 실권자와 동학이었던 연고로 대신이 된 터였는데 조 창이라는 상서령이 애제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애제는 곧 정 승을 불러다가
"그대의 문은 장터와 같다면서?"하고 아첨객이 많음을 지적하였다. 정 승은 그에 대답하기를
"신의 문은 장터와 같사오나 신의 마음은 물과 같사옵니다."
하고 자기의 청렴함을 말하였다. 하나 애제는 그를 옥에 가두었다.
사예인 손 보가 정 승을 변호하고 조 창의 무고를 공격하는 글을 애제에 올렸으나 애제는 손 보를 서민으로 떨어뜨리는 한편 정 승은 옥사하고 말았다.
문전성시는 본래 문여시로서 정 승이 애제를 충고하는데 먼저 쓰인 말이었다.
미망인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마땅히 덩달아 죽을 도리이건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니 과부가 자신을 업신여겨서 일컫는 말이다.
춘추시대 노 나라 성공의 사촌 누이가 송공에게로 출가하게 되어 계문자라는 이가 신부를 모시고 송나라에 갔다 돌아왔다. 그리하여 위로의 술자리가 베풀어 졌는데, 계문자는 그 자리에서 송나라는 좋은 곳이니 신부는 미상불 행복하게 살 거라고 노래하였다.
신부의 어머니 목강은 매우 기뻐하며
"그대는 선왕 때부터 충직하더니 이 미망인에게도 극진하구려."
하고 자신을 미망인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약 5년이 지나 위나라는 정공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정공이 몸져 눕자 서자인 간이 태자가 되었다. 그런데 정공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태자는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공의 아내 강씨는 이미 사흘 동안이나 음식을 끊은 터였는데 태자의 기색에 분개하여 말하였다.
"저 사람은 필시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요 먼저 이 미망인을 못살게 학대할테지. 아, 하늘은 어찌하여 위 나라를 져 버리고 나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지 못하였을꾜!"
미봉
보완, 보충과 같은 말이다.
주나라의 환왕이 정 나라의 장공을 무찌르러 나설 때 환왕은 몸소 중앙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왕군의 배치를 본 정나라의 공자 원은 장공에게 진언하였다.
"왕군의 좌익을 진나라의 군사가 맡고 있는데, 진나라는 국내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전쟁을 할 기력이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먼저 좌익을 쳐서 물리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그러노라면 중앙군은 어지럽혀지고 우익군도 지탱할 수 없어서 달아날 것이올시다."
장공은 이 의견을 쫓아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고서도 버티었는데 장공은 왕을 추격하려는 부하를 만류했다.
"우리는 천자를 능가할 수 없느니라. 본시 자위를 위해 한 노릇이니 나라의 안전이 유지되면 족하다."
그날 밤 장공은 부하를 왕의 진지로 보내어 왕의 노고를 위로했다 한다.
이 전투로써 장공은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 당시의 포진을 '좌전'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원형을 지어 전차를 앞세우고 보병을 뒤로하여 전차의 사이 사이를 메웠다.
'좌전'에서는 이 밖에도 다시 두 군데서 미봉이란 말을 썼다.
방약무인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행동함을 말한다.
어떤 일에 열중해서 그러는 경우와 성품이 당돌해서 그러는 경우가 있겠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시킨 무렵 위나라에 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독서와 검술을 즐기고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나라에 용납이 안되자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니며 현인 호걸들과 사귀었다.
그런데 그가 연나라에 갔을 때 그곳에서 한 개백정과축(대조각으로 타는 거문고의 일종)의 명수인 고 점리 두 사람과 사귀었는데 형가는 그들과 함께 시중에 나가 술을 마시고는 취하면 축에 맞추어 노래하였고 감상에 겨워 함께 울기도 했는데 그것이 마치 아무도 없는데서 하는 짓 같더라-사기의 자객정에 나오는 이야기.
배수지진
강을 뒤로 하고 진을 치면 적은 정면으로 공격해 오고 뒤에는 강물이니 물러서면 빠져 죽을 판이라서 나아가 사력을 다해 적을 무찌른다는 전법.
한 고조가 제위에 오르기 2년 전(BC204)일이다. 한 신은 위나라를 무찌른 여세를 빌어 조나라로 진격하였다. 그래 조나라 군사 20만이 정경땅의 좁은 길목에 집결하고 굳건한 성을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한 신은 정경 땅 어귀에 이르자 경기병 2천만에게 한 자루씩 깃발을 주고
"그대들은 저 성 근방의 산에 잠복해 있으라. 우리 순사가 도주하는 척하고 물러나면 적은 전력을 다해 추격해 올테니 그대들은 그 사이에 성으로 들어가서 적의 깃발을 거두고 우리 군사의 기를 꽂으라."
한 신은 또한 만여 명의 군사를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한 다음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좁은 길목으로 진격케 하였다. 강물을 뒤로하고 포진한 한군을 보고 조나라 군사들은 자못 비웃었다. 드디어 몇 차례의 각축전 끝에 한군은 예정대로 후퇴하여 '배수의 진'에 합류하니 조나라 군병은 한 신의 목을 베겠다고 온통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성새가 빈 사이에 잠복해 있던 한 신의 경기병 2천 명이 들어가 성벽의 깃발들을 온통 갈아 꽂았다.
한편 강물을 뒤로 하고 포진한 한군 만여 명은 물러날 여지가 없는 까닭에 필사적으로 싸웠으니 조군은 다시 성채 안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기네 성채에는 어느새 한군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거기서도 한군이 공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앞뒤로 한군의 공격을 받아 조나라 군병 20만은 참패하고 말았다.
싸움이 끝난 축하연에서 부하 장수들이 한 신에게 물었다.
"병법에는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며 싸우라고 했습니다. 한데 이번에 강물을 등지고 싸우신 까닭은?"
"어느 병서에 보면 자신을 사경에 빠뜨림으로써 비로서 살아날 수 있느니라 하였고. 그 병법을 이번에 활용한 셈인데 왜냐면, 우리 군사는 워낙 원정을 거듭해왔던 만큼 온통 보충병으로써 이루어진 군병이오 그러니 생지에 놓아두면 결속이 안될 것이 뻔하지 않소?"
백년하청
황하의 탁류가 맑아지기를 암만 기다려도 허사라는데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주나라의 영왕 7년(BC585년)때 얘기다. 정나라가 채나라를 침공하여 그곳의 공자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채는 초의 속국이었던만큼 채나라 군병이 정나라를 공격해왔다. 그 무렵 약소국인 정나라는 북쪽의 나라와 남쪽의 초나라에게서 항상 압력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 정나라의 지도자들은 긴급히 구수회의를 가졌는데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초나라에게 항복하자는 의견과 진나라의 구원을 청하자는 의견이 그것이었다. 먼저 항복론을 펴는 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시에 노래하기를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려도 끝이 없으며 사람의 수명에는 한정이 있느니라 하였고. 지금 우리 백성들은 위급한 상태인만큼 초나라에게 항복하여 백성들의 고난을 덜어 줍시다. 진나라 군사가 오면 또한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이 약소국의 도리인 것이오."
한편 진나라의 구원을 청하자는 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약소국일수록 신용이 없으면 당장 망하오. 우리는 진나라와 다섯 번이나 동맹을 맺었던 만큼 이제와서 그 신의를 저린다면, 설령 초나라가 구원해주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겠소? 진나라는 우리를 멀리하고 속국으로 삼을 것이오."
결국 정과 초는 화평을 맺었다.
백문 불여 일견
귀로 백 번이나 설명을 듣느니보다 눈으로 한 번 보는 편이 이해하기에 낫다는 말이다.
한나라의 선제때 서북방의 유목민인 강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장군이 강의 무리 천여 명을 죽인 데 대한 앙갚음이었는데 한나라 군사는 그들에게 참패를 하고 물러났다.
그래 선조는 후장군 조충국에게 사람을 보내어 누구를 토벌군의 장수로 삼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조 충국은 그때 70세가 지나 있었는데 자기에게 맡겨 달라는 대답이었다. 그는 일찍이 흉조와의 싸움에 나섰다가 포위를 당하여 몸에 20여 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 포위망을 돌파, 전군을 건진 유공자였던 것이다.
"장군이 토벌에 나선다면 어떤 계략을 쓸테요? 그리고 군사는 얼마나 필요하겠고?" 하는 선조의 물음에 노장군은 대답하였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올시다. 현지에 가서 방책을 세우도록 하소서."
이리하여 그는 현지에 가서 정세를 살펴 둔전법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기마병을 버리고 보병 만여 명이 각지에 나뉘어서 농사를 지으면서 두고두고 반란을 진압한다는 방책이었다.
그는 1년 걸려서 진압에 성공한다는 방책이었다.
그는 1년 걸려서 진압에 성공하였거니와 이 한서 조충국전에 '백문이 불여 일견'이란 문자가 최초로 나와있다.
백미
우수한 것들 중에서 더욱 뛰어난 것을 말한다.
삼국시대 위, 촉, 오 세나라가 정립하여 싸우던 무렵이다.
촉나라에 마 량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는데 유 비가 촉한을 세우고 제위에 오르자 마 량은 시중의 소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남방 오랑캐들을 찾아가 그들을 설득시켜서 부하로 삼을 정도의 인재였다.
마 량은 본시 5형제였는데 모두 자에 상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 5형제를 마씨네 5상이라고도 일컬었다. 그들은 모두 영리하고 학문에도 능하며 고향에서 평판도 좋았다. 그중에서도 마 량이 한결 뛰어났던 것이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마씨네 5상 모두 잘났지만 그 중에서도 흰눈썹이 제일이거든."
마 량은 어려서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어 있어 그의 별명이 흰 눈썹이었던 것이다.
백발 삼천장
이 태백의 싯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절로서 늙음에 대한 놀라움과 서글픔이 동심과 노심이 한데 엉긴 가운데 뛰쳐 나온 해학이다.
백발 삼천장.
근심으로 해서 이리도 길었구나.
모를 일이야, 거울 속에는
어디서 저리 서리가 내렸을꼬.
중국식 과정법으로서 곧잘 인용되는 싯귀거니와 이는 조작적인 과장이라기 보다는 순간적인 감동의 반영이라고 보는 편이 옳겠다. 거울을 들여다 본 순간의 노인의 놀라움은 그것이 익살맞은 까닭에 허탈하게 서글프다.
그는 만년에 현령을 지내고 있는 친척을 찾아가서 기탁해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화려한 천재의 만년도 외롭고 처량하였다. 향년은 62세로 추측되고 있다.
백약지장
술은 어떤 약보다는 이롭다는 말이다. 전한과 후한 사이의 14년간 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단명했던 나라의 황제 왕 망은 경제정책을 철저히 하고자 해서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렸거니와 그 허두에 이런 구절이 나와 있다.
"소금은 식효의 장이요. 술은 백약의 장이자 연회의 기호품이며 쇠는 농사의 근본이니라."
그는 소금과 술과 쇠를 정부 사업으로 삼았기에 그 물건들의 요긴함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는 어찌하여 그렇게 단명하였던가?
애제가 죽자 그의 외척들에 의해 조정을 쫓겨났던 왕 망이 다금 대사마의 자리에 앉았으니 군사와 정사의 대권을 쥔 최고관으로서 어린 평제를 제위에 올렸다. 당시 백성들은 모든 것을 잃고 얻는 것이 없으며 죽는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다고 일컬어질만큼 궁핍한 사회였다.
왕 망은 이윽고 제 딸을 평제의 아내가 되게 했으나 불로장생하는 약주라는 초주를 12세 난 평제에게 올려 독살하고 보다 조종하기 쉬운 두 살 난 아기를 내세우고 스스로가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유교의 성인인 주공을 이상으로 하여 신성한 정치를 피력했으나 관리들은 큰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제도를 악용해서 돈을 벌려고 날뛰었으니 백성들은 더욱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앞서 인용한 조서를 내려 백성들의 소득을 늘리려고 했건만 백성의 생활은 악화되기만 하여 난리가 꼬리를 물더니 기어이 실각하고야 말았다. 그는 술만 마시면 공자의 말씀을 입에 올렸고 그러면서도 재앙을 가셔주는 기적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다가 필경 온몸을 난도질 당하여 죽었던 것이다.
천하의 애주가들이 곧잘 내세우는 '백양지상'설에는 이상과 같은 피비린 고사가 깃들여 있다.
부마
부마란 본래 부마, 즉 주마에게 딸린 말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천자의 사위라는 뜻으로 바뀐 데에는 까닭이 있다. 한나라 무제 때 부마도위라는 벼슬을 두어 부마를 관장하게 했는데 공주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 벼슬을 맡게 하였던 까닭이다.
옛날 농서에 신 도도라는 사내가 있었다. 지방으로 유학을 갔다가 돈이 궁하여 굶주리며 옹주 서쪽 50리까지 왔을 때 웬 커다란 저택이 있고 그 문전에 하녀인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신도도는 사정 얘기를 하고 밥을 청했더니 하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서는 안주인의 방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안주인이 말하였다.
"나는 진 나라 민왕의 공주였는데, 조나라로 출가했다가 남편을 여의고 그로부터 22년 동안을 홀로 지낸다오. 손님께서 모처럼 와주셨으니 제발 부부가 돼주어요."
신 도도는 그렇듯 고귀한 여인이라서 사양했으나 간청에 못 이겨 인연을 맺기를 사흘 밤, 여인은 처량하게 신 도도에게 말하였다.
"당신하고 더 지내고 싶지만 사흘 밤 밖에 안된다오. 더 지내다가는 화를 입을테니 헤어져야겠는데 헤어지고나면 나의 정성을 드릴 수 없겠구려, 다만 정표로서 이걸 받아줘요."
여인은 신 도도에게 금베개를 주고 하녀더러 대문까지 배웅케 하였다. 그런데 대문을 나와서 돌아보니 저택은 온데간데없고 잡초가 우거진 벌판에 무덤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하나 금베개는 어김없이 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베개를 팔아 음식을 사먹었다.
훗날 진나라의 황비가 장터에서 그 베개를 발견하고 조사해보니 신 도도라는 사내가 나타났다. 황비는 이상히 여겨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봤더니 장례 때 넣어준 물건들은 다 있건만은 오직 베개가 없었다. 딸의 몸을 살펴 보니 정사를 치른 흔적이 완연했다. 황비는 비로소 신 도도의 말을 곧이 여기고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사위라고 '부마도위' 벼슬을 주어 금마차를 베풀어서 본국으로 보내 주었다는 데서 부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분서갱유
진시황이 금서 육경을 불태워 버리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것을 말한다.
진나라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봉건제도를 없애고 군현을 두어 비로서 중앙집권의 대제국을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제위를 만세에 물리려 하였다. 그러자 34년(BC 213) 여러 중신들을 거느리고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풀었을 때 군현제의 입안자였던 재상 이 사가 말하였다. 순현제의 부당론을 편 선비에게 대한 반론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태평천하가 이룩되었는데도 나라의 법률과 문교정책을 헐뜯고, 조정에서는 입을 다물었다가도 항간에 나가서는 나라를 비난하며, 더구나 제자들을 거느리고 도당을 결속하는 선비가 있습니다. 그런 무리야말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후환이 있을 것인즉 백성들에게 없어선 안 될 의학, 점술, 농사 그리고 우리 진나라의 기록 이외의 서적을 모조리 불태우도록 하소서. 시경이며 서경을 얘기하는 자에게는 기시(사형하여 시체를 노천에 공개 하는 것)의 형벌을 내리시고 옛날과 견주어서 오늘날을 비난하는 자는 멸족을 시키시고 또한 이와 같은 금법을 어기는 자를 검거하지 않는 관리도 같은 형벌로 다스립시다."
시황제는 이 말을 받아들여 천하의 소중한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태워 버리게 하였다. 그는 또한 항간에다 정보원을 풀어 놓아 나라를 비방하는 선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잡혀 온 선비들은 모두 죄를 면해 보려고 다른 선비를 찍어대니 연루된 자 460명에 달하여 모조리 생매장함으로써 천하에 본을 보였다. 그 희생자가 거의 유학자였기에 이 포학을 갱유라 하는 것이다.
불구대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엄격하게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말한다.
'예기'는 예법에 관한 고서인데 거기엔 곡례라고 하여 자질구레한 예법도 설명되어 있다. 심지어 복수에 관한 예법조차 기술되어 있으니
"아버지의 원수와 함께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는 집에 가서 무기를 가져올 겨를도 없이 항상 무기를 지니고 있다가 당장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나라에 살아서는 안되니 역시 죽여야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이 예로서 집약되어 있었다. 미분화상태다. 도덕도 법률도 시대에 따라 변천함을 볼 수 있다.
붕정만리
붕정이란 붕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먼 거리-나아가서는 범인이 생각지도 못 할만큼 원대한 계획을 말한다.
붕새는 고대 중국인의 소박한 공상이 빚은 으리으리하게 큰 새인바 '장자' 첫머리의 소요유편을 보면
"붕새의 크기는 몇 천리인지 모른다. 새가 한 번 힘껏 날면 날개는 하늘을 뒤덮은 구름인가 싶으며 바다가 웅얼거릴만큼 큰 바람이 일면서 북해의 끝에서 남해 끝까지 날아갈 지경이다."
비육지탄
비육이란 넓적다리의 살인데 무사가 말을 타고 싸움터를 쏘다니면 넓적다리의 살이 내린다. 그런데 넓적다리의 살이 쪘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무사가 공명을 세울 기회가 없음을 한탄한다는 것이다.
건안 원년(196) 조 조 스스로 대장군이라 칭하며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 무렵 유비는 차츰 혹성으로서 주목을 이끌었으나 조 조의 충동거림으로 인하여 협공을 당한 나머지 조 조에게 기탁해 있는 처지였다. 유 비는 한실의 후예로 자처하며 한실의 부흥을 뜻하고 있었기에 차기장군과 결탁하여 조 조를 죽이려는 음모가 드러나 가까스로 도망쳐서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유 비가 정착한 곳은 형주의 유 표의 휘하였던 바 유표는 천하를 넘어다 볼만한 그릇이 아니었기에 유 비는 한낱 그의 객장으로서 작은 성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이는 이미 50이 가까웠으니 어느 세월에 천하를 제패하고 한실의 부흥을 이룰 것인가.
그날도 유 비는 유 표와 술을 마시다 말고 변소에 갔다가 제 넓적다리에 살이 쪘음을 알고 놀랐다. 키가 7척 5촌, 서면 손이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거인이건만 자리에 돌아와서 눈물을 흘렸다.
"대체 웬일이시오?"
유 표가 묻는 말에 유 비은 대답하였다.
"내 넓적다리에 살이 찐 것을 한탄하는 것이오. 헛되이 세월만 보내어 어느덧 늙어가려 하는데..."
유 비의 비육지탄은 몇 해 더 계속되다가 적벽의 싸움에서 용명을 날리고 이태 후에야 양자강 중류의 요충인 강릉으로 진출, 드디어 촉한제국을 세우니 조 조의 위나라와 손 권의 오나라와 함께 삼국이 정립-형주에서 비육지탄을 말한 지 10여 년 후였다.
빙탄 불상용
얼음과 숯은 서로 성질이 다르므로 용납되지 않듯이 결코 어우러질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한 나라 무제를 섬긴 신하에 동방삭이라는 별난 명신이 있었다. 매우 박식하여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하는 법이 없어 무제는 늘 그를 말벗으로 삼았다. 어전에서 식사를 하면 남는 고기는 아내를 위해 가지고 돌아가고 옷이 베풀어지면 어깨에 들러메고 돌아가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으나 본인은 흔연하게
"난 궁중에서 숨어사는 사람이라네 심산초야에서만 숨어사나?"
이렇게 이죽거리면서도 정확한 관찰력으로 풍자적인 시문을 썼다.
"심사가 끓어올라 뜨겁기가 탕물 같으니 얼음과 숯은 서로 용납되지 않는 법"이라 한 그의 글귀는 충신과 아첨배가 공존할 수 없다는 비유였다.
사면초가
주위가 온통 적이요, 자기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말한다.
항 우는 유 방과 천하의 패권을 다투기를 5년, 마침내 천하를 갈라주고 유 방과 강화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돌아가는 도중 한신이 지휘하는 한군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항 우의 군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군량도 동이 나 있었다. 밤이 되자 어디선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혹은 가까이서 동에서도 서에서도 북에서도 남에서도 노래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히 귀를 기울이니 그것은 초나라의 노래 소리였다. 장 량의 계략이었는데 과연 항 우의 군사인 초나라의 농군들은 그리운 고향의 노래 소리에 향수에 젖어 전의를 잃고 도망쳐갔다. 이미 한에 투항한 초나라 군사들의 노래 소리였던 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초나라를 가로챘단 말인가. 저리도 많은 초나라의 군사가 투항하다니!"
항 우는 이제 마지막임을 깨닫고 휘장 속으로 들어가서 작별의 술자리를 베풀었다. 항 우의 군중에는 우 미인이라는 미녀가 있어 항시 항 우의 곁을 떠나지 않는 터였다. 또한 추라고 하는 준마가 있어 항 우는 언제나 추를 타고 싸웠었다. 항 우는 이제 우 미인이 애처로왔다. 비분강개하여 손수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힘은 산을 뽑고 얼은 세상을 덮치건만
때가 불리하니 추 안가는구나.
추 안가는구나, 어이할거나
우여, 우여, 그대를 어이할꺼나
항 우는 몇 번이나 노래하였다. 우 미인도 이별이 애틋하여 자지러질 듯이 노래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우리를 메워
사방에 들리나니 초나라 노래 소리
나랏님도 의기가 다 하셨으니
이 몸이 어찌 살아 남을까 보냐.
귀신도 섬짓해 할 항 우의 얼굴에 몇 줄기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진중의 신하들도 모두 울고 아무도 얼굴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항 우에게 매달려 있던 우 미인은 항 우에게서 보검을 빌어 그 연약한 살결에다 꽂고 자결하였다. 그날 밤 불과 8백여 기마병을 이끌고 탈출한 항 우는 이튿날 적군에게 쳐들어가 스스로 목을 베였다. 그의 나이 31세 였다.
사이비
닮았으면서도 그것이 아닌 것.
공자는 말하였다.
"사이비한 것을 언짢아 하노라. 가리지풀은 잡초이면서도 모를 닮았으니 한결 번거롭다. 말주변이 좋은 사람을 미워하는 까닭은 정의를 혼란케 하는 까닭이다. 정나라의 음악을 미워하는 까닭은 섣불리 그것이 아악을 닮았을 만큼 올바른 음악을 혼란케 하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근엄한 척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덕을 어지럽히는 까닭이다."
사족
뱀에는 본래 발이 없는데 뱀을 그리면서 발을 그렸다는 것이니 부질없는 물건을 곁들임을 말한다.
초나라의 재상 소양이 위나라를 쳐서 이기더니 제 나라를 또한 침공하려고 들었다. 제나라의 민왕은 이것을 염려하여 마침 진나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는 진 진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의논하였다.
"염려 마십시오, 폐하... 소인이 곧 초군의 진지를 찾아가 침공을 않도록 하겠습니다."
진 진은 황급히 초군을 찾아가 진중에서 소양과 회견하였다.
"초나라의 법을 여쭤보겠습니다. 적군을 무찌르고 적장을 죽인 자에게는 어떤 포상이 베풀어지나요?"
"상주국이라는 벼슬이 주어지며 규라고 하는 작위가 베풀어지오."
"그러시면 그보다 웃질가는 벼슬자리는 없나요?"
"그야, 재상자리가 있을 뿐이요."
"대감께서는 임 재상이시고 보면 인제 제나라를 침공하신들 생색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며 진 진은 얘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어떤 사람이 여러 하인들에게 커다란 술잔 하나에다 가득히 술을 베풀었다. 그런데 하인들은 그걸 나누어 마시자니 감질이 나겠기에 땅바닥에다 맨 먼저 뱀을 그려 내는 사람이 혼자 마시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맨 먼저 그려 낸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뱀에다 발을 그렸던 까닭에 실격하고 두 번째로 그린 사람이 술잔을 마셨다는 얘기였다.
"어떻습니까, 대감? 위나라를 쳐서 적장을 죽이셨는데 이제 또 제나라를 침공하신다면 승리하신들 무슨 보람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지시는 경우라면 그야말로 뱀에다 발을 그리는 격이올시다."
소 양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돌아갔다.
사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
그러므로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후한시대의 관료는 부패해 있었는데 어쩌다 고결한 관료도 없는 건 아니었다. 제 6대 아제 때 사람인 양 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양 진은 박학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으며 관서 출신이기에 '관서의 공자'라는 찬양을 받았다. 그가 동래군의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의 숙소에 묵었을 때다.
밤늦게 그 고장의 현령이 찾아왔다.
"태수 나으리, 소인을 모르시겠습니까? 은혜를 입자왔던 왕 밀이올시다."
양 진은 그리고 보니 생각났다. 자기가 감찰관으로 있던 시절에 과거에 급제를 시켜주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정담을 나누었는데 왕 밀은 금 열 근이라는 거액을 양 진에게 주려 하였다. 지난 날 과거에 급제 시켜준데 대한 보은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대의 학식과 인품을 기억하는데 그대는 나의 사람됨을 잊었단 말이오?" 하고 양 진은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아니올시다. 태수 나으리. 이것은 결코 뇌물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서의 도리일 뿐이올시다."
"그대가 나의 예상대로 현령 자리에 올라 주었으니 나에게 대한 보은은 그것으로 족하오."
"더구나 이 밤중에, 알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이 방에는 태수님과 소인 밖에 없으니..."
"무슨 말이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알잖소?"
왕 밀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돌아갔다. 양 진은 그 후로도 고결하게 처신하여 드디어 태위 벼슬에 올랐다.
살신성인
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함을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충과의 서에 그친다고 한다.
'충'이란 하늘에 의해서 규정된 질서와 법률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복종하는 정신이다.
'서'는 남에게 대해서 허심 탄회하게 대하는 정신이다.
이 '충'과 '서'를 공자는 인이라고 일컬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참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진 사람은 목숨을 아낌으로써 인을 저버리는 일이 없으며 목숨을 버림으로써 인을 이룩하는 법이니라 하셨다."
진리라고 믿는 것 앞에서는 죽기로 맹세한 공자의 중대한 결의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삼십육계
비겁한 자를 비웃는 말로써 전법에는 여러 가지 방책이 있긴 하지만 냉큼 도망쳐서 자기 한 몸의 안전을 꾀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이다.
이른바 남북조시대 북녘에는 위가 세력을 펴고 남쪽은 제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나라건 내분이 얽혀 있던 시절이다.
제나라의 장수 왕 경측은 반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황제와 오랜 분란이 계속되어 자식들도 황제에게 피살된 터였다.
그런데 황실에서는 엉뚱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으니 왕 경측이 도망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측은 진격 도중에 그 뜬 소문을 듣고 분연히 뇌까렸다.
"송 나라의 단 도제 장군이야말로, 갖은 계략 중에서도 도주를 으뜸으로 삼았다더군. 제기랄, 저희들이나 도망치지!"
당 장군이 위나라 군병을 피했던 사실을 경측은 이 판국에 생각해낸 것이었다. 경측은 마침내 제나라 군병에게 포위되어 도망도 못 쳐보고 목이 잘렸는데 그가 뇌까린 말은 오늘날가지도 전해진다.
그런데 애꿎게 경측의 구설에 오른 단 도제란 어떤 인물이었던가? 송 나라 명장으로서 북방의 대적인 위나라 군사와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용병에 능하여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토도 과히 빼앗기지 않았는데 모함으로 인해서 처형되었다.
전국시대의 왕들은 자기 장군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명장 단 도제가 죽자 위나라 군사 백만이 쳐들어와 송나라 천지는 쑥밭이 되었다. 위병들은 창끝에다 갓난애를 꽂아 가지고 날뛰었다 한다. 황제는 그제서야 명장을 잃은 것을 애통해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삼천지교
아이들의 교육에 환경의 영향이 큰 까닭에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이나 집을 옮겼다는데서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의 집념이란 뜻으로 쓰인다.
맹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무덤을 파는 인부들의 흉내만 내며 놀았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집을 옮겼는데 그곳은 장터 근방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장사꾼의 흉내만 내는 게 아닌가. 맹자의 어머니는 곰곰 생각한 끝에 글방 옆으로 이사하였다. 과연 글방에서 조상을 섬기는 걸 흉내내며 노는 자식을 보고 맹자의 어머니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래 그런지 맹자는 훗날 공자에 버금할만한 현철이 되었다.
이 밖에도 맹모 단기지교라는 말이 있다. 유학을 간 맹자가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하고 있었다. 공부를 채 마치기도 전에 돌아온 아들을 보자 맹자의 어머니는 짜다 만 베를 곁의 장도로 끊어버렸다. 공부를 중도에서 포기한다면 마치 이렇게 길쌈하던 베를 잘라버리는 거나 같다고 타일렀다.
삼촌설
말로써 능히 난국을 타개함을 말한다.
전국시대 얘기다. 서쪽의 강대국 진나라의 침략 앞에서 동방의 여러 나라들은 명맥을 유지하려고 갖은 지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에 조나라는 진나라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수도 한단성의 운명도 멀지 않는 듯 싶었다. 쥐 한 마리도 전도 30장에 거래될 지경으로 식량사정은 핍박하여 다른 나라의 원병이 와 주냐 마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운명이 좌우될 판이었다. 물론 여러 나라에 원을 청했건만 아무데서도 반응이 없을 터였다. 양육 강식하는 시대에 스스로 강대국 진의 창 끝에다 몸을 내던질만한 나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나라 왕족에 평원군이라는 재주군이 있어 초나라 왕에게 몸소 구원을 청하러 나서기로 하였다. 평원군은 당시 3천 명으로 소문이 난 식객 중에서 스무 명을 추려내어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열 아홉 명까지는 인선이 되었건만 나머지 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모 수라고 하는 이가 자청했던 바 그는 존재가 알려질 만한 재사가 아니었기에 평원군은 망설였다.
"송곳이 주머니에 들어있다면 그 날카로운 끝이 나타나게 마련이건만 그대는 3년 동안이나 식객으로 있었다면서 전혀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주머니에 넣어 주질 않았던 탓이겠습죠."
가까스로 축에 든 그는 평원군을 따라 초나라 왕과의 동맹을 교섭하러 나섰다. 하나 조조 동맹의 교섭이 그리 만만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래 마침내 모 수가 초왕을 설득해볼 차례가 되었는데 초왕 앞으로 층계를 뛰어 올라가는 그의 손에는 칼집이 든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초왕은 꾸짖었으나 모 수는 까딱도 않고 아뢰었다.
"폐하께서 소인을 꾸짖으시는 건 배후에 초나라의 대 병력이 있는 덕분이올시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폐하와 소인과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이올시다. 폐하의 수명은 소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초나라만한 대국이 어찌 진나라를 피하시려는겁니까. 초나라의 대군과 폐하 사이에 소인이 뛰어든 것처럼 진나라 군사가 또한 뛰어들기 전에 우리 조나라와 동맹을 맺어 주십시오."
모 수의 설득은 마침내 성과를 거두어 그의 요청대로 닭과 개와 말의 피가 갖추어졌다. 맹약의 결의를 표하기 위하여 초왕과 평원군과 모 수 이런 차례로 그 피를 마셨다. 이에 총명을 자랑하던 평원군이 탄복하였다.
"이런 인재를 내가 여지껏 몰라보다니... 모 생원이 일단 초나라에 나서자. 우리 조나라의 국위를 구정대려보다도 무겁게 하였다. 모 생원은 세 치의 혀로써 백만의 스승보다도 강한 셈이었다."
상가지구
초상이 난 집에선 주인이 개의 끼니를 돌볼 경황이 없을 것 아닌가. 그래서 돌봐 주는 이가 없어서 초췌한 사람을 곧잘 초상집 개에다 비긴다.
공자는 자기네 노 나라에서 왕족들과 비꼬여 십여 년 동안을 위. 조. 송.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쏘다녔으니 자기의 포부를 용납해 줄만한 곳을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서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제자들이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정나라 사람이 스승을 찾아 헤매는 제자 자공을 만나 동문 옆에서 본 공자의 인상을 얘기하였다.
"그의 이마는 효를 닮았고 그의 뒷덜미는 고도같았으며 그의 어깨는 자산과 흡사하니 모두가 예전에 성현이라고 불리운 사람들과 꼭 닮았네. 그러나 허리 밑으로는 우와 견주어서 세 치가 모자라고 그 고달파서 풀이 죽은 꼴이란 마치 초상집의 개와 같더군"
자공은 공자를 만나 이 말을 전했더니 공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용자에 관한 비평은 반드시 합당하다고는 못하겠으나 초상집 개 같다는 말은 합당하이. 암, 합당하고 말고!"
필경 공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자기네 노나라로 되돌아 갔다.
새옹마
세상의 모든 일은 화복의 변화가 무상하므로 행운을 만났다고 해서 즐거워만 할 것이 아니요, 비운을 만났다고 해서 낙심만 할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에 중국 북방에 사는 이민족을 호라고 총칭했는데 한민족은 호를 매우 두려워 하였다. 그런데 그 국경에 있는 성새 근방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노인네 말이 호인네 땅으로 도망쳐 버렸으니 남선 북마라고 일컬어지는 북녘인 만큼 여간 큰 낭패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위안들을 왔는데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이었다.
"이 노릇이 행운으로 바뀔지도 모르잖소."
아니나 다를까 몇 달 후에는 그 말이 호인네 훌륭한 말들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요행을 축하하러 왔으나 이번에도 노인은 심상한 기색이었다.
"이 노릇 또 화근이 될지도 모르겠는걸."
어떻든 노인네는 훌륭한 말 부자가 되었는데 이윽고 그의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딱하게 여겨 위안들을 왔는데 노인은 또
"천만에! 이 노릇이 행운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거든"
그로부터 1년 후였다. 호인들이 밀물처럼 성새에 쳐들어 왔으나 마을의 젊은이들은 온통 활을 메고 싸움터로 나가야 했다. 그리하여 열에 아홉은 전사하고 말았건만 노인네 아들은 절름발이인 까닭에 싸움터에 안 나가 노인네 부자는 무사하였다. 그래서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군
자기의 아내 혹은 남의 아내. 본래 제후의 부인을 일컫는 소군에서 온 말.
전한 무제 때의 익살맞은 신하 동방 삭의 말에 유래하므로 1700년의 역사를 헤아린다. 무제는 등극하자 널리 천하에서 유능한 인재를 구했거니와 그 때 제나라 사람 동방 삭이 자신을 추천하는 글을 올렸다.
종이가 없던 시대였기에 댓조각으로 무려 3천 장-무제는 한 장 한 장 읽어나가기를 두 달, 당당한 문장이었다. 무제는 그를 불러 낭에 임명하였다.
동방 삭은 박식하고 재치가 있어 곧잘 무제의 말 벗이 되었다. 그런데 무제 앞에서 식사를 하고나면 고기를 주머니에 넣어 아내에게 갖다 주곤 하였다.
삼복에는 황제가 정신들에게 고기를 베푸는 풍습이었는데 고기는 준비되었는데 정작 분배할 관리가 나타나지 않는 중에 삭은 제 칼을 뽑아서 베어 가지고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무제가 알게 되어 그를 힐책하자
"네, 칼을 뽑아 고기를 벤다는 건 무척이나 장렬한 노릇이던 뎁쇼. 베긴 베도 조금만 베었으니 이 또한 청렴하지 않습니까요. 그것도, 고기를 갖다가 아내를 주었으니 거 오죽이나 정다운 마음씨냐 말씀이야요, 네..."
무제는 너털 웃음을 웃고 술 한 섬과 고기 백 근을 베풀며 말하였다.
"가지고 가서 부인을 섬기게나"
소군이란 본래 제후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므로 동방 삭은 자기 아내를 그렇게 일컬음으로써 자신을 제후에다 비긴 익살이라고도 한다.
소이부답
남이 묻는 말에 대해서 그저 웃어 보일 뿐 대답이 없다는 말이다.
이 태백의 시 '산중문답'에 있는 문자인 바,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곧잘 체험케 되는 문답의 묘법이다. 그 시를 새겨 보면
어떤 생각으로 산 속에서 사느냐고 남들은 묻지만,
나는 구태여 대답을 않고 웃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의 심정은 사뭇 온화하다.
복사꽃 이파리는 냇물에 떠서 어디론지 사라진다.
여기는 사람이 사는 마을을 떠난 별천지거든.
송양지인
송나라 양공의 인정이라 함이니 쓸데없는 인정이란 말이다. 송 나라 환공이 죽기 전에 태자는 서형인 목이가 인덕이 많은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태자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목이는
" 나라를 양보할 수 있는 이야말로 최대의 인자올시다."
하고 굳이 사양하였다. 그래서 그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양공이다. 양공은 목이를 재상으로 삼았으므로 송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양공이 강대국인 초나라의 군사를 홍수에서 맞았을 때 얘기다. 초군은 속속 강을 건너오고 있었으나 아직 진용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때 목이는 주장하였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므로, 지금 무찔러야 합니다."
"천만에! 군자는 적의 약점을 찌르는 법이 아니오. 적진이 정돈되기 전에 공격하는 건 비겁한 짓이오."
적군이 모두 강을 건너고서도 아직 정비되지 않았을 때 목이는 또 성화였다.
"초나라는 강적이니까 지금 공격해도 이길지 말지 합니다. 전쟁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적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올시다."
하나 양공은 적군의 정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였다. 결국 송군으로 참패를 하고 양공 자신도 넓적다리에 부상 당하여 그로 인해서 이듬해에 죽었다.
그는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데 일설에서는 꼽지 않기도 하며, 제나라의 환공이나 진나라의 문공만큼 큰 인물은 아니었던가 보다.
수서양단
쥐는 의심이 많으므로 구멍에서 목만 내놓고 나올까 말까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태도 결정이 확실하지 못함을 말한다.
전한 제4대 경제에서 제5대 무제 연간에 위기후와 무안후 두 사람은 좋은 적수였다. 무안후가 아직 어렸을 때 위기후는 대장군이었는데 경제 만년에는 무안후도 상당한 자리에 있었고 경제가 죽은 후로는 거꾸로 무안후가 재상이요 위기후는 차츰 몰락해 가는 과정이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견원지간이 된 것은 위기후의 친구인 강직한 장군 관부가 사소한 사고를 일으킨 것이 동기였는데 그 사고를 가지고 두 사람이 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대방을 헐뜯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키가 난감해져서 관리의 죄를 규명하는 구실인 어사대부 한 안국에게 물었더니
"양쪽의 주장에 각기 일리가 있어서 판단키 어려우니 폐하께서 몸소 가름하소서."
하였다. 그래 이번에는 내사에게 물었다.
그는 본시 위기후 쪽 사람이었으나 형세가 무안후에게 유리할 듯 싶어서 뚜렷한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한편 무안후는 어사대부를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쥐가 구멍에서 목만 내놓고 나올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흑백을 뚜렷이 가리지 못하고 어물거리는거요."
어사는 이윽히 궁리하던 끝에
"명안이 있습니다. 먼저 대감께서 재상자리를 하직하시겠다면서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린데 대해서 사과하십시오. 황제께서는 그것을 대감의 겸양지덕으로 여기고 결코 대감을 물러 앉히시지는 않을 것이올시다. 지금처럼 두 분이 서로 비난해 대는 건 참으로 위신 문제이올시다."
무안후는 그 말대로 했더니 과연 황제의 신임이 도리어 두터워졌다.
위기후는 지금까지의 일들이 철저히 조사되어, 먼저 문제의 중심이었던 관부 장군네에 일족이 처형되었고 위기후도 이윽고 처형되고 말았다.
그런데 무안후도 미구에 병석에 눕게 되어 꿈결에 외쳐대는 것이었다.
"용서해다오! 내가 잘못이었다"
무당에게 보였더니 이 병환은 위기후와 관부 장군의 원혼이 무안후를 죽이려는 것이라 했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두 사람의 원혼은 떠나지를 않다가 무안후는 한 주일쯤 후에 죽고 말았다.
수어지교
군주와 신하와의 사이 혹은 남편과 아내와의 친밀함을 말한다. 이른바 삼국정립의 시대, 곧 조조 손권 유비-그 중에서도 유비의 득세는 가장 늦었다. 그에게는 관우 장비 조운 등의 용장이 있었으나 더불어 책략을 세울만한 인재가 없었다. 그것을 통감한 유비가 착안한 인물이 제갈공명이었던 것이다.
공명은 전난을 피하여 산중에서 초가를 짓고 은둔해 있었는데 유비는 두 차례나 그를 찾아갔으나 부재중이라서 만나지 못했다. 유비는 만류하는 관우와 장비를 뿌리치고 세 번째 찾아가서 공명을 만났다.
"이미 한실은 기울고 간신이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나는 외람되게도 천하에 대의를 펼 뜻을 지녔으면서도 지혜롭지 못해서 하는 일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나 아직 뜻은 버리지 않고 있지요. 아무쪼록 도와주십시오."
세 차례나 예방했다하여 삼고지례라 일컫는바 공명도 그에 감동하여 유비를 위해 일하기로 작심하였다. 비록 난세를 피하여 산중에 묻혀 지냈다고는 하나 세상을 보는 눈은 유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만큼 날카로왔다. 유비가 묻는데 대답하여 공명은 한실 부흥의 대계를 이야기하였다.
"형주와 익주를 장악하여 근거지로 삼고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위해서 후환을 덜고, 안으로는 부국 강병에 힘쓰면서 밖으로는 손권과 동맹하여 조조를 고립시켰다가 때를 보아 조조를 치는 것-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한실 부흥책이올시다."
유비의 신하가 된 공명은 이 기본 정책에 따라 일을 추진하다가 미처 성공을 못보고 전사하였다. 그 동안에 유비는 공명을 스승으로 모시고 침식을 같이 하였다. 공명 또한 온갖 힘을 기울여서 유비를 도왔다. 애초에 관우와 장비는 27세밖에 안되는 공명에게 대한 유비의 심취를 시기하여 공명을 지나치게 존경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때 유비는 말하였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이나 같다. 바라건데 다시는 그런 말 말아다오."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 또한 관자에 보면 친밀한 부부 사이를 그렇게 비유하였다.
식지
둘째 손가락-식사 할 때만 쓰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식지가 동한다'고 하면 식욕이나 혹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는 말이다. (다섯 손가락의 이름은 거지, 식지, 장지, 무명지, 소지)
정나라 영공에게 초나라 사람이 커다란 거북을 진상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공 자가 두 공자가 입궐하려 하는데 자공의 둘째 손가락이 움직거렸다. 자공은 자가에게 그 손가락을 보이면서
"항상 이렇게 내 식지가 동하면 맛있는 걸 먹게 되거든."
아니나 다를까 입궐해 보니 거북 요리를 먹을 판이었다. 그런데 두 공자가 식탁을 대했을 때 자공은 불려 나가게 되었다. 아까 식지가 동한 노릇을 무효가 되게 해 보려는 조롱이었는데 자공은 제가 선수를 써서 영공을 죽이기로 마음 먹고 자가에게 의논하였다. 자가는 불응했으나 자공의 위협에 못 이겨서 수긍하였다. 그래 영공은 마침내 죽었다는 얘기가 '춘추'에 나오는데 식사에 관한 원한이란 심각하다나?
안서
편지, 소식, 방문, 안찰, 안백이라고도 한다.
소무는 한나라의 중랑장이었다. 무제 천한 원년(BC 100) 그는 사신으로서 북녘의 흉노국에 갔다. 포로 교환을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흉노의 내분에 휘말려버려 사신들은 모두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버렸다. 항복을 하겠느냐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느냐 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소무만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산중의 굴속에 갇혀 굶어 죽을 참이었다. 그는 털가죽을 씹고 눈으로 갈증을 달래며 견디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죽지 않자 흉노는 그를 귀신인가 싶어 북해 언저리의 민가도 없는 고장으로 보내어 양을 치게 하였다. 온통 수컷으로만 주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너희 한나라에 보내주지"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숲과 바다와 같은 호수, 그리고 매운 추위와 굶주림뿐이었다. 양들도 모두 도적들이 앗아가 버렸다. 그는 다람쥐를 잡아 굶주림을 견디면서도 흉노에게 항복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실상 그런 희망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 황폐한 북녘에서 이미 몇몇 번을 세월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기차고 단조로운 나날이 수없이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어쩌다 끝없는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만이 소무로 하여금 속절없이 고향 생각에 잠기게 할뿐이었다.
고국에서는 무제가 죽고 소제 6년이 되어 있었다. 한나라의 사신이 흉노를 찾아왔다. 훨씬 예전에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가 실종되어 버린 소무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미 죽은지 오래라고 흉노는 잡아떼었다. 사신으로서는 그 진부를 가려낼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 소무와 함께 흉노에 왔다가 항복하였던 상혜라는 자가 사신을 찾아와 무엇인지 귓속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래 사신은 다음 회견때 말하였다.
"우리 한나라의 천자께서 사냥을 가셨을 때 기러기 한 마리를 쏘아뜨린적이 있었는데, 그 기러기의 발목에 헝겊이 잠겨져 있었소, 그리고 그 헝겊에는 '소무는 대택에 있소'라고 적혀져 있었으니 소무가 살아 있는 것이 명백하오"
흉노의 추장은 놀라는 기색으로 신사와 소근거리더니
"실인즉, 그 사람이 살아 있다 하는구려"
사신이 상혜의 귀띔으로 꾸며낸 거짓말이 적중한 셈이다. 흉노는 부리나케 북해로 달려가 소무를 데려왔다. 머리도 수염도 이제 셀대로 세고, 넝마보다도 추한 가죽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으로서의 부적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꿈에도 차마 바라지를 못했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어느덧 19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다.
양두구육
양의 머리를 점두에다 걸어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함이니 표방하는 바와 실지 판이함을 말한다.
이 말의 원형은 양두를 걸어놓고 마박-즉 말의 건육을 판다고 돼 있다. 후한의 광무제가 내린 조서에 있는 말이요 또한 제나라의 명신 안자의 말에는 쇠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말고기를 판다고 돼 있다. 그 유래인 즉-
제나라의 영공은 남장여인을 좋아하여 궁녀들에게 온통 남장을 시켰다. 그랬더니 여염집에서도 여인들이 남장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자 영공은 엄한 금령을 내렸으나 효력이 없었다.
"금령의 효력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고?"
영공이 안자에게 물으니
"궁중에서는 남장을 시키면서 밖에서는 금하시니 그것은 마치 쇠머리를 문에 걸어 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짓이나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올시다"
쇠머리를 쇠뼈로 표현한 글도 보인다. 후한 광무제때 선비인 유 향의 저서에 의하면 쇠뼈를 문에 걸어놓고 말고기를 파는 짓이나 같다고 돼있다. 어느 것이나 뜻은 같거니와 소가 되었다 양이 되었다 하는가 하면 말고기가 되었다 개고기가 되었다 하는 점이 재미있다.
제나라의 선왕이 희생으로 바쳐질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얼떨거리는 양이 측은하여 소 대신에 양을 희생으로 바치도록 분부하였다. 맹자는 이 얘기를 전해듣고 측은하기는 소나 양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였다.
양산박
집권자의 횡포에 반항한 농민봉기의 본거지.
북송의 휘종 황제는 궁전과 만수산을 꾸미기 위하여 그 정원의 장식용 꽃과 돌을 강남 땅에서 날라 오는데 있어서 백성들의 고역을 강요하였다. 그 꽃과 돌의 행렬을 화석강이라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거니와 마침내 방 납이라는 요술사가 반란을 일으켜서 부호와 관리를 죽이고 다녔다. 그 무렵에 산동의 양산박이라는 곳에 송강을 두목으로하는 36명의 의적이 모여 제나라와 위나라를 횡행하면서 수만이 관군과 대항하였다. 송강이 경동을 범했을 때 조정에서는 송강을 용서하여 방납을 무찌르려 했는데 송강은 해주에서 관군에게 바닷가로 몰려 부장을 사로 잡히고 항복하여 처형을 당했다. 한때는 관군이 덤비지를 못했던 농민 봉기였기에 그들은 호한으로서 압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뇌리에 아로새겨졌다. 그들의 무용담이 과정되게 기술된 것이 수호전이다.
양상군자
도적, 쥐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후한의 끝무렵 진식이라는 이가 태구현의 현령이었다. 어진 정치를 폈는데 어느 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다. 진식이 독서를 하고 있노라니 웬 사내가 대들보 위로 숨어 들어왔다. 도적이다. 진식은 아들과 손자를 불러들여 엄숙히 타일렀다.
"사람이란 본성이 나쁜 것이 아니다. 습관이 어느 새 성질이 되어 불량한 짓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저 대들보 위의 군자처럼 말이다."
그러자 대들보 위에 숨어 있던 도적이 뛰어내려 진식에게 엎드려 사죄하였다. 진식은
"보아하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구나. 아마도 가난해 그랬을테지."
이리하여 명주 두 필을 주어 보냈는바 그 고을에는 도적이 없어졌다. 도적을 군자라고 일컬은 말이 익살스러워 후세에도 곧잘 쓰인다.
어부지리
양편이 싸우고 있을 때 제3자가 이익을 차지함을 말한다.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중국 북동 쪽에 있었는데 서쪽은 조나라, 남쪽은 제나라와 대붙어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로부터 꾸준히 압력을 받고 있었다. 어느 해 연나라에 흉년이 든데다가 많은 병력이 제나라에 나가 있는 사이에 조나라가 연나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그래 연나라에선 소대를 조나라 왕에게 보내어서 설득시키기로 하였다.
"저는 오늘 귀국에 오는 도중에 역수를 지났는데요, 문득 강가를 보니 조개가 입을 벌이고 볕을 쬐고 있습디다. 그런데 마침 비취새가 지나다가 조개의 살을 먹으려고 부리를 집어넣지 않았겠어요? 조개는 냉큼 껍질을 다물어 버리고는 열어 주려 하지 안습디다. 그러자 비취새가 말하기를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안오면 너는 죽었지 별 수 없어"
하나 조개는 지지 않고 뇌까립디다.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죽었지 별 수 없어
이렇게 서로 고집을 피우고 있는데 어부가 지나다가 한꺼번에 잡아버립디다 그려,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우리 연나라를 치려하시거니와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비취새올시다. 두 나라가 싸워 백성들이 지치면 저 강대국인 제나라가 어부가 돼서 횡재를 거둘 것이올시다."
조나라 혜문왕은 현명한 왕이었기에 소대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자기네 조나라와 대붙어 있는 제나라의 위력을 생각하면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겨 침공을 종지하였다.
전국책에 나오는 얘기인데 "홀방지쟁은 어부지리"라하여 '홀방지쟁' 혹은 '어부지리'라 한다.
역린
군주의 노여움, 한 비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현실주의적 법가의 대표였다. 어디와 어디가 맺어지고 어디와 어디가 싸우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된 전국시대인 만큼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의심하여 거꾸로 뜨리기가 예사였다. 한 비는 그러한 정세 가운데 나라의 대계를 세우고자 했는데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에 제자인 이 사에 의해 독살되었으나 세상에
'한 비자'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에 이르기를
"용이란 온순한 짐승이다. 익숙해지면 탈 수도 있거니와 목 밑에 1척쯤 되는 거꾸로 난 비늘이 하나 있다. 만일 이것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찔러 죽인다. 군주에게는 이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 법이다."
용이란 야릇한 힘을 지녔다고 알려진 상상상의 동물로서 봉새, 기린, 거북과 함께 4령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비늘이 있는 생물 중의 왕이요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부른다고 한다. 한데 중국에선 곧잘 군주를 용에다 비유한다.
연목구어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것이니 어떤 일이거나 그 길에 따르지 않으면 헛수고에 그친다는 말이다.
나이 50이 지난 맹자가 양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동방의 나라 제는 서쪽의 진나라 남쪽의 초나라와 함께 강대국이었다. 선왕은 멋쟁이 임금이었는데 맹자는 그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러나 시대는 맹자가 주장하는 인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시대가 아니라 부국강병과 외교상의 책모의 시대였다. 선왕은 중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기에
"나랏님의 대망을 듣잡고자 합니다."
하고 맹자는 설득하려고 애썼다.
"나랏님의 소망을 영토를 확장하여 진나라, 초나라와 같은 대국을 굴복시키고,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사방의 오랑캐들을 복종케 하시려는 거겠죠. 하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무력만으로 그것을 이루시려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시려는 거나 같습니다."
"그다지 무리한 노릇이란 말이오?"
"아니 그보다도 더욱 무리한 노릇이올시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려고 하신다면 다만 물고기를 잡지 못하시는 데에 그치겠습니다만, 무력만 가지고 영토확장의 대망을 이루시려 하신다면 백성들이 곯고 나라가 망가지는 재난이 왔으면 왔지 결코 좋은 결과가 오지 않으니까요."
오리무중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다는 것이니 사물의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 환관과 외척이 실권을 쥐고 횡포를 부리던 후한 무렵 장패라는 선비가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권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사귀려 하였으나 장 패는 끝내 피하다가 70세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의 아들이 장계로서 항시 백 명의 제자를 거느린 선비였는데 환관이나 황제의 친척들도 그와 사귀려고 애썼으나 끝내 피하였다. 그런데 장 계는 학문 뿐 아니라 도술에도 능하여 5리 사이를 안개로 뒤덮게 하였기에 '오리무중'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무중'이었던 게 아니라 '오리무'에다 가운데 중을 곁들여서 쓰는데 불과하다.
오십보 백보
조그마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큰 차는 없음을 말한다.
맹자는 철저한 이상주의자로서 남에게 자기의 사상을 설득할 때는 기백이 넘친다. 당시의 사상가나 책략가들은 여러 나라의 왕을 찾아 다니며 유세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맹자가 위나라의 혜왕에게 초대되었을 때 얘기다. 당시 위나라는 서쪽에선 진나라의 압력을 받고 동쪽의 제나라와의 싸움에선 여러 번 크게 져서 심한 역경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 혜왕은 이름높은 현사 일재를 청해다가 의견을 들어 국운을 만회하려고 꾀하는 터였다. 그는 맹자더러
"짐은 흉년에도 백성을 위하여 극진히 돌봤건만 이웃나라에 비해서 백성이 불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대왕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관한 비유를 한 마디 여쭙겠습니다. 싸움터에서 진격의 북소리가 들려오자 병사 하나가 겁을 집어먹고 투구를 벗어던지고 칼을 이끌며 백 걸음쯤 도망쳐 왔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런데 위에서 50걸음을 도망치던 병사가 그를 비웃으며 비겁쟁이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치도 않소. 50보나 100보나 도망치는 것은 매일반이오."
"네, 바로 그점이올시다. 비단 흉년에만 백성을 돌보실게 아니라 평소부터 백성들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 예의와 교육이 존재하는 문화국가를 지향하실 일이요, 그밖의 아무 것도 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월동주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행동을 같이 한다든지 자리를 같이함을 말한다.
'손자'라고 하는 유명한 병서가 있다. 용병법에는 아홉 가지 경우가 있는데 마지막의 경우를 사지-즉 죽을 고비라고 일컫는바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그런 경우에는 병사들은 한 마음으로 싸워서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말하기를-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랜 적국이요 국민끼리 미워하는 사이다. 그러나 두 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다면 그들은 서로 왼 손과 오른 손처럼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바랄 것은 필사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병사들의 마음이다."
이리하여 '오월동주'라는 말이 생겨났다.
'손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사람인 손무가 지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서쪽으로는 초나라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라를 무찌른 명장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인 손 빈의 저서라는 설도 있다. 그는 다리가 잘리우는 등 기구한 운명을 더듬으면서도 마침내 대장군이 된 병법가였다.
오합지중
통제되지 않는 군중.
전한 말에 외척인 왕 망이 스스로 황제라 일컬으며 국호를 신이라 한 것은 서력 9년이었다. 그러나 정치에 실패하여 각지에 반란이 횡행하고 개중에서도 녹림과 적미의 무리는 크게 천하를 어지럽혔다. 이때 일어선 것은 나중에 후한의 광무제가 된 유 수의 군사로서, 여러 곳에서 왕 망의 군사를 무찌르고 유현을 황제로 삼으니 왕 망은 멸망하고 다시금 한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천하가 금방 평온해진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한탄을 근거지로하여 반란을 일으킨 왕 랑은 스스로 천자라 일컬으니 유 수는 그를 무찌르러 나섰다. 이때 하북성의 태수의 아들 경감은 21세 난 준재였던 아버지 경황의 분부로 기꺼이 유 수의 휘하로 달려갔다. 그러자 도중에 손 창과 이 표 두 부하가 왕 랑이 사칭하는 바 성제의 아들이라는 말을 곧이 여기고 그의 휘하로 가려고 나섰다. 경감은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왕 랑은 이름도 없는 도적이니. 내가 장안에 갔다 와서는 군사를 무찌를 것인바 그 따위 오합지중을 짓밟기는 시들은 나무를 꺾는 짓이나 같은 것이요. 왕 랑을 사로잡을 것은 뻔하다. 너희 둘이 사리를 분간치 못하고 도적과 어울린다면 단번에 패망하여 멸족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두 부하는 기어이 왕 랑에게로 도망치니 경 감은 굳이 만류하지 않고 유 수에게로 갔다. 그리하여 유 수를 도와 수 많은 무훈을 세우고 훗날 건의 대장군이 되었다.
옥상가옥
지붕 위에다 다시 지붕을 씌운다는 것이니 부질없는 중복을 말한다. 원전에는 어디나 옥하 가옥으로 돼 있는데 우리는 으레 '옥상가옥'으로 통용되고 있다.
후한 말 삼국시대에 위는 촉, 오 두 나라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 국호를 진이라 하고 서울을 낙양으로 삼았다. 하나 지난 달 오나라의 서울이었던 건업은 양자강가에 자리하고 산을 등지고 있어 비록 멸망한 나라의 서울이었다고는 하나 풍광명미한 강남의 중심지였다.
그 무렵에 낙양에 유중이라는 시인이 있어 현란한 건업의 모습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그 중에 '삼이경, 사삼도'라는 글귀가 있어 특히 표현이 신기하다고 평판이 났다. 서울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이 시를 베껴서 걸어놓고 감상하여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비싸졌다고 한다.
그때, 사 태부라는 고관이 이 시를 보고 비웃었다.
"이 싯귀는 마치 지붕 밑에다 지붕을 만든 것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 한데 불과하군 그래. 이따위를 가지고 떠들어대다니 모를 일이야"
이 밖에도 북제의 안지추라는 선비가 엮은 '안가 가훈'의 머릿글에도 역시 옥하 가옥으로 나와 있다.
옥석혼효
구슬과 돌이 섞여 있다는 것이니 좋은 것과 나쁜 것,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섞여 있음을 말한다.
진나라의 갈 홍이 지은 '포박자'라는 저서에 옥석혼효라는 말이 나오는데 대충 이러하다.
"시경이나 서경이 도의의 바다라면, 제자 백가(전국시대의 유학자 이외의 사상가)의 저서는 그것(바다)을 깊게 해주는 강이요, 방법은 다를지언정 덕을 족진하는데는 다름이 없다. 옛사람은 곤산의 구슬이 아니라고 해서 야광주를 버리거나 성인의 글이 아니라고 해서 수양을 돕는 말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은 여러 가지 빛깔을 모여서 눈부신 아름다움을 빛어낸다는 것을 모른다. 천박한 시문을 찬양하는가 하면 뜻깊은 제자의 글은 업신여기고 공허한 말재주에 탄복한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뒤집히고 구슬과 돌이 어우러진 격이니 참으로 한탄할 노릇이다"
와신상담
복수를 이룩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감내함을 말한다.
주나라의 경왕 24년 (BC 496),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 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패하였다. 합려는 적의 화살에 손가락을 상했는데 그로 인해서 죽었다. 그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태자 부차에게 유언하기를 기필코 월나라에 복수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왕위에 오른 부차는 밤낮으로 아버지의 유언과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리려는 굳은 결의에서 밤마다 섶에서 자며, 아버지의 유한을 되새겼다. 뿐만 아니라 자기 방에 드나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아버지의 유언을 외치게 하였다.
"부차여, 그대는 아비의 원수가 월나라 왕 구천임을 잊어서는 안돼!"
"네, 결코 잊지 않으렵니다. 3년 안으로 기필코 원수를 갚지요."
부차는 이렇게 아버지의 임종 때 대답한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를 훈련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낌새에 선수를 칠 생각으로 월나라 왕 구천은 먼저 싸움을 걸었으나 복수의 일념으로 단련된 오나라 군사에게 크게 패하여 구천은 회계산에서 포위를 당하였다. 구천은 마침내 나라를 버리고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될 조건으로 항복했으니 치욕을 참고 다시 일어설 날을 기약하려는 속셈이었다.
오왕의 도량으로 고국에 돌아온 구천은 앉으나 누우나 또한 식사할 때마다 쓰디쓴 쓸개를 핥으며 오왕 부차에게 복수할 결의를 가다듬곤 하였다.
스스로 농사를 짓고 부인은 길쌈을 하며 회계산에서 겪은 치욕을 되새겼다.
그리하여 항복의 치욕을 '회계지욕'이라 한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항복한지 12년, 오왕 부차는 기나라 황지에서 여러 군주들과 만나 천하의 패권을 잡았다. 그 부재중에 구천은 오나라를 쳤으나 결정적인 타격은 못되었다. 4년 후에 또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다시 2년 후에는 서울 고소를 침공, 오나라 왕 부차를 고소성에서 포위하였다. 드디어 회계산의 치욕을 씻은 구천은 부차를 귀양 보내어서 여생을 마치게 할 생각이었으나 부차는 그 호의를 뿌리치고 스스로 목을 베었다.
구천은 더욱 북진하여 제나라, 진나라의 군주들과 서주에서 만나 오나라 대신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완벽
둥근 옥 벽자이니 둥근 옥처럼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한 상태를 말한다. '완벽을 기한다'고 하면 훌륭한 물건을 감쪽같이 원상으로 돌이킨다는 뜻.
전국시대, 조나라 혜문왕은 아주 희한하고 값진 반지 모양의 구슬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나라 서쪽에는 강대국 진나라가 있어 그곳의 소양왕이 그 구슬을 욕심 내었다.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나라 영토 안의 15 성을 줄테니 그 구슬과 바꾸자고 하였다. 조나라로서는 난처한 노릇이었다. 거절하면 전쟁을 걸어 올지도 모르며, 설사 구슬을 건네어준들 약속대로 15 성을 내놓을지 몰라서였다. 혜문왕은 중신들과 숙의한 끝에 인상여라는 지모와 용기를 겸한 사내를 교환의 사신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진왕은 구슬을 받고 대견해 하면서도 성을 내놓을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는 "폐하, 그 구슬에는 한군데 조그만한 흠이 있으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리하여 도로 구슬을 받아 쥔 순간 기둥 옆으로 물러나며 진왕을 노려 보았다.
"우리 조나라는 귀국과의 정분을 중하게 여겼기에 이렇듯 구슬을 가져온 것이올시다. 그렇건만 폐하께서는 약속하신 바 15성을 내놓을 기미가 없으시니 소인의 머리통과 함께 이 구슬을 기둥에다 깨뜨려 버리겠습니다"
진왕은 허둥지둥 약속을 이행하겠노라 했으나, 성의가 안보이자 인상여는 핑계를 대어 구슬을 가지고 숙소로 돌아와 하인을 변장 시켜서 고국으로 돌려 보냈다.
진왕은 애초부터 15성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으나 인상여에게 속은 것이 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도 위신문제요 뿐만 아니라 이자의 담대한 소행이 장쾌하기도하여 신하들의 분노를 억제하고 정중하게 보내 주었다. 인상여는 훗날 조나라의 기둥이 된 인물이다.
원교근공
먼 나라와는 교분을 맺고 가까운 나라는 침공한다는 진나라의 국시이자 천하를 통일한 지도 원리.
위나라의 책사 범 휴는 남의 나라와 내통했다는 무고로 말미암아 생명이 위태로왔으나 용케 진나라의 사신 왕 계를 따라 진나라의 서울 함양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진나라의 운명은 달걀을 쌓아올린 것보다도 위태롭다"는 등의 솔직한 말이 환영을 받지 못하다가, 진나라의 재상이 먼 강대국인 제나라를 치려고 꾀하자, 왕 계를 통해서 왕에게 올린 글이 계기가 되어 소양왕은 예의를 갖추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범 휴는 왕에게 아뢰기를 "한, 위 두 나라를 건너서 강대국 제나라를 치시려는 건 이롭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의 군사를 절약하고, 한나라와 위나라 군사를 전면적으로 동원하시려나 본데 동맹국인 두 나라가 믿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그 나라들을 건너서 공격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나랏님께서 취하실 방법으로서는 먼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나랏님의 촌토요 한 자의 땅을 얻으면 나랏님의 척토가 아니겠습니까?"
범 휴는 진나라의 객경이 되고 더욱이 재상이 되어 군사를 온통 장악하게 되었다.
월단
매월 초하룻날 인물을 비평한 고사로 말미암아 인물평을 월단평이라 하거니와 줄여서 '월단'이라고도 한다.
후한 (25--220)도 전한과 마찬가지로 외척과 환관(형벌로서 거세되어 궁중에서 봉사하던 남자)의 횡포가 심하였다. 환관이 결속하여 절개있는 선비 2백 여명을 죽인 전당고의 화에 이어 7백 여명을 죽인 후 당고의 화등... 정치가 이처럼 어지럽고 보니 태평도라는 사교가 유행하였다. 그러자 그 교주인 장 각이 수십만의 신도를 이끌고 천하를 잡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표지가 노란 수건이었기에 그들을 황건적, 그 난리를 황건란이라 한다. 그 황건적을 무찌른 데 공이 큰 조 조는 젊어서부터 명인 기질로서 가사를 돌보지 않고 호걸들과의 교제에 신명을 내는 터였다.
그 무렵 하남성의 여남이라는 곳에 허 소라는 이와 종형인 청이라는 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매월 초하룻날 인물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이 매우 적절하여 '여남의 월단평'이라면 유명했다. 그 소문을 듣고 조 조도 허 소를 찾아갔다.
"나는 어떤 인물인지 비평해주시오"
난폭한 조 조인지라 허 소는 선뜻 말을 못하다가 재촉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료에 불과하거니와 난세에 있어서는 능히 간웅이 되실 인물이올시다"
이 말을 듣고 조 조는 기뻐하여 비로소 황건족을 칠 결심을 하였다. 그때 조 조가 허 소를 찾아가지 않았거나 허 소가 그런 인물평을 내리지 않았던들 '삼국지'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다.
월하빙인
결혼 중매인
당 나라에 위 고라는 총각이 있었는데 송성이라는 곳에 갔을 때, 달밤에 땅바닥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는 노인이 있고 그의 곁에는 큰 자루가 놓여 있었다.
"무엇을 하시나요?"
"이 세상의 혼인에 관해서 살펴보는 중이라네"
"자루에는 무엇이 들었나요?"
"빨간 끄나풀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부부를 맺어주는 끄나풀이야. 일단 이것으로 이어지면 두 사람이 아무리 멀리 있다든지 또 어떠한 원수지간이라도 부부가 되게 마련이지"
"그렇다면 제 처가 될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요?"
"이 송성에 있다네. 저 북쪽에서 채소 장사를 하고 있는 진씨 성받이 노파가 있는데 그 노파가 안고 있는 것이 장차 자네 배필이거든"
위 고는 정나미가 떨어져 냉큼 돌아서 버렸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 위 고는 상주에서 관리가 되어 군 태수의 딸과 결혼하였다. 신부는 16, 7세로서 아름다웠으니 노인의 예언이 어긋난 셈이었다. 어느 날 밤 위 고는 아내에게 신상 얘기를 물었다.
"나, 실은 태수님의 양녀라오. 아버지는 송성에서 관리를 지내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모가 채소 장수를 하면서 나를 길렀어요. 송성 아셔요, 그 북쪽에 있는 가게였는데..."
또 이런 얘기가 있다.
진나라 때 색 탐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하루는 고 책이라는 이가 해몽하러 왔다.
"나는 얼음판 위에 서 있었는데 얼음판 밑에 사람이 있어서 그와 얘기를 나누는 꿈이었답니다"
색 탐은 이렇게 해몽하였다.
"얼음판 위는 양이요 밑은 음인데 양과 음이 얘기를 했다니 당신이 혼인 중매를 해서 성사 시킬 징조로구려. 성사가 될 시기는 얼음이 풀릴 무렵이 될 것이오"
이윽고 고 책에게는 태수에게서 부탁이 왔다. 자기의 아들과 장씨네 딸과의 중매를 서 달라는 청이었는데 과연 봄철에 혼인이 이루어졌다.
앞 얘기의 월하로와 뒷 얘기의 빙상인이 한 낱말을 이루어 '월하 빙인'이 된 셈이다.
읍참마속
대의를 위하여 애통함을 무릅쓰고 사정을 버림을 말한다.
촉나라의 제갈 공명은 각지에서 위나라의 대군을 무찔러 천하를 석권하고 있었다. 그때 위나라의 장수 사마 중달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산벌에서 촉군을 맞으려고 부채 모양으로 진을 쳤다. 공명은 그것을 물리칠 작전이 돼 있었으나 꼭 한군데 불안한 곳이 있었으니 그것은 촉군의 군량 수송로인 가정 땅이었다. 만일 이곳을 위군에게 빼앗긴다면 전선의 촉군은 꼼짝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가정 땅을 누구에게 수비케 하느냐 하는 점이 공명의 고민 거리였다. 이때 스스로 그 소임을 자원하고 나선 사람은 공명의 친우인 마 량의 젊은 아우 마 속이었다. 재기 환발하여 공명은 그의 대성을 내다보며 아우처럼 사랑하는 부하였다. 하나 상대방의 장수 중달과 대항 시키기에는 아직 젊었기에 공명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다년간 병법을 배운 터에 가정 땅 하나를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패하는 날이면 저는 물론이요 저의 가문을 모조리 군벌에 처하십시오"
"그래, 진중에서는 허튼 수작이 없느니라"
마 속은 기꺼이 공명의 명령을 받들었다. 공명은 특히 왕 평을 부장으로 택하여 마 속을 보좌토록 하였다. 가정산은 3면이 절벽인 바 그 산기슭을 사수하여 위군의 접근을 막으라는 것이 공명의 명령이었다. 하나 마 속은 적군을 끌어들여서 역습하기에 알맞는 지세라고 판단 왕 평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 결과 위군이 산기슭을 포위하니 물이 끊기어 마 속은 궁한 나머지 전군을 이끌고 쳐내려 왔으나 위군에게 에워싸여서 참패를 보고 말았다. 공명은 마 속을 기용한 것을 뉘우치며 전군을 한중 땅으로 후퇴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철수가 끝나자 공명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마 속의 목을 베기로 하였다. 마 속은 유능한 인재인 만큼 그를 잃는 건 나라의 손실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명은 단호히 말하였다.
"마 속은 아까운 사내다. 하나 사정은 그가 범한 죄보다도 더욱 큰 죄악이다. 마 속을 잃는 건 나라의 손실인지도 모른다. 하나 그를 용서한다면 더욱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아까운 사람이면 일수록 그를 처단하여 대의를 바로 잡아야 한다"
마 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공명은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 자리에 엎드려서 울었다. 이윽고 마 속의 목이 진중에 내 걸리자 전군의 장병은 공명의 심정을 헤아리고 모두 울었다.
이하 부정관
남에게 의심받을 짓을 안 한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나라의 위왕은 왕위에서 오른 지 9년이 되었으나 나라는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국정을 간신 주파호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호는 유능한 즉묵 대부를 비방하고 무능한 아대부를 치켜 세웠다. 그래 위왕의 후궁인 우희가 파호의 소행을 위왕에게 고했던 바 그 말이 파호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우희는 원죄를 쓰게 되었다. 위왕은 그 처사가 미심하여 몸소 우희를 신문하니 우희는 아뢰었다.
"저의 결백함은 명백하오나 혹시 저에게 죄가 있다면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않으며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매만지지 않는다는 말마따나 남에게 의심을 살 짓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이겠죠. 저는 비록 죽음을 당하여도 앙탈하지 않겠사오니 꼭 한 가지 여쭙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우희는 파호의 횡포를 아뢰니 위왕은 불현 듯 깨닫는 바 되어 즉묵대부에게 마호 벼슬을 주고 아대부와 주 파호를 쪄 죽이고 내정을 정돈하자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오이밭에 들어 갔다가 신이 벗겨져 다시 신느라고 구부리면 오이를 따는 양으로 의심받게 될 것이요. 오얏 나무 밑에서 갓을 매만지면 오얏을 따는 양으로 의심 받을 것이니 그런 짓을 삼갔다는 말.
일자천금
글자 하나를 첨삭하는데 대해서 천금의 상을 베풀겠노라 한 고사.
전국시대 말엽 여러 나라의 군주들은 식객을 유치하기에 바빴다. 식객이란 일예일능에 뛰어난 자들인 바 이를테면 제나라의 맹산군의 식객이 수천 명이요, 초나라 춘신군의 식객은 3천여 명, 조나라 평원군은 수천 명, 위나라 신릉군은 3천 명-이렇게 저마다 식객의 수효를 자랑하였다.
그 무렵 여러 군주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으니 일개 장사치로서 몸을 일으켜 이제는 강대국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어린 왕정(훗날 시황제)을 조종하며 위세를 떨치던 여 불위이다.
그는 사재를 기울여서 식객을 모으니 어느덧 3천 명에 달하였다.
마침 각국에서 저서를 펴 내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여 불위도 질세라 여러 식객으로 하여금 20여만 마디의 대책을 펴니 그것이 곧 여씨 춘추이다.
"천지 만물, 고금에 관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느니라. 이렇게 큰 사업을 해낼 사람은 나 이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여 불위는 그 방대한 책을 수도 함양의 성문 앞에다 늘어 놓고 그 위에다 천금을 매달아 크게 방을 내세웠다.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더하거나 깍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천금을 주겠노라"
시체 문자로 웃기는 짓이거니와 식객 유치를 꾀하는 그의 상흔이 엿보인다.
전전긍긍
두려워서 몸을 떤다는 말.
시경에서 나온 말인 바, 모신이 황제의 측근에서 옛법을 무시한 정치를 펴니 나라의 앞날이 두렵다고 개탄한 시다.
-범을 맨손으로 잡지 못하고 강을 맨발로 건너지 못하련만 군신은 하나만 알고 그 밖은 모르나니, 식자는 전전긍긍하여 깊은 늪을 대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 하더라.
왕권을 늘려 여러 군주의 권력을 억제하려고 드니 필연적으로 천자와 군주들 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와져서 시국의 위기감이 심각해졌던 서주 말엽의 힘의 정치에 대한 회의이다.
전철
앞서 간 수레의 뒤집힌 바퀴 자국은 뒤로 가는 수레에게 경계가 된다는 말이다.
전한의 제3대 황제인 문제 (BC 197--157)는 고조 유 방의 서자요, 제2대 혜제의 아우로서 제후였던 바 한실의 내분 때문에 뭇 신하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오른 인물. 그 무렵의 이름난 신하에 가 의라는 인재가 있었는데 그는 20여 세에 문제에게 초빙되어 박사가 되었다. 문제는 제후 출신인 만큼, 강대한 제후 사이에는 그의 명령이 업신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 가 의 등의 명신을 중용하여 제후 대책을 비롯하여 국정 쇄신에 힘썼다. 가 의는 황제를 도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가장 오랜 나라인 하 이래로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의 흥망의 길을 거울 삼아서 제후의 힘을 덜고 백성의 힘을 기르며 정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여러 가지 대책을 진언하였다.
"항간에 이르기를, 앞서 간 수레의 뒤집힌 바퀴자국은 뒤로 가는 수레에게 경계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범으로 삼는 바 옛날의 좋은 시대인 하, 은, 주 3대는, 비록 오랜 옛날일망정 잘 다스려진 까닭은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진나라가 일찍 멸망한 것을 우리는 몸소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앞날이 암담해질 것은 빤합니다. 나라의 운명과 난리를 다스릴 열쇠는 오직 여기에 있는 것이올시다"
문제는 이 말을 받아들여 제후의 영토를 덜고 대국을 소국으로 나눈 이외에도 농업을 장려하여 세를 면하고 극형을 폐지하는 등 어진 정치를 폈다. 더욱이 질소 검약의 기풍을 장려하여 궁녀들도 구슬을 장식하거나 옷자락을 끌지 못하게 하니 미풍양속을 이루어 천하가 태평해졌다.
조강지처
조는 재강이요, 강은 겨이니 가난하여 조잡한 음식을 먹으며 살던 아내.
후한의 세조가 된 광무제는 홀로 된 누나 호양공주가 진작부터 대사공 자리에 있는 송 홍에게 뜻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송 홍에게 직접 의향을 떠볼 수 없었다. 그래 미리 호양공주를 옆방에다 불러다놓고 송 홍을 청해다가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부유해지면 친구를 바꾸고 존귀해지면 아내를 바꾼다는 말이 있는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송 홍은 분명히 말하였다.
"아니올시다. 폐하! 빈천할 적 친구는 잊지 않으며 조강지처는 당하로 내려놓지 않는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남편을 가로채려던 공주도 단념을 안 할 수 없었다.
조삼모사
사람을 농락하여 술책에 빠뜨림을 말한다.
송나라에 저공이란 사람이 있었다.
저란 손이 긴 원숭이인데, 저공은 원숭이를 무척 좋아하여 가족의 음식을 줄이면서까지 수많은 원숭이를 길렀다. 저공은 원숭이의 마음을 알고 원숭이는 저공의 마음을 알았다. 저공은 마침내 원숭이의 사료를 제한하는 수 밖에 없어졌는데 그렇다고 원숭이의 기분을 상해서도 안되겠기에 원숭이들에게 물어 보았다.
"너희들에게 주는 밤을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랴?"
그러자 원숭이들은 성내었다.
아침에 세 개만 먹어서는 시장하다는 원숭이들의 생각을 저공은 알아차렸다. 그래 저공은 잔꾀를 부려 말하였다.
"그럼 아침에 네 개씩 주고 저녁에 세 개씩 주면 되겠구나"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조장
성장을 돕는다는 뜻인 바 급히 성장시키려고 무리하게 힘썼다가 도리어 해친다는 어감이 깃들였다.
제나라의 공손 축은 제나라를 찾아온 맹자의 제자가 되어 제나라 왕년의 명재상이었던 관중과 안자의 패업에 관해서 물었다. 왕도정치를 주장하는 맹자는 패업을 부정하고 어진 정치를 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 그래 축은 물었다.
"선생께서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에도 선생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실까요?"
"나는 40세가 지나서부터는 마음이 동하지 않소이다 - 유혹에 지지 않소이다"
선생의 마음은 어찌하여 동하지 않게 되셨을까요?"
"말을 가려들을 줄 아는 점과 호연지기를 기른 까닭이오"
이리하여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법을 설명하였다.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그 행동이 모두 도의에 합당해야 하거니와 도의심은 서서히 길러나가야 하오"
맹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춘추시대 송나라 농부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송나라의 어느 농부가 모를 심었는데 모가 여간해서 자라나지 않는 까닭에 하나 하나 뽑아내서 늘어뜨렸다. 그래 온통 시들어 버렸다는 얘기.
"세상에는 이렇게 모를 늘어뜨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숫제 잡초도 솎아주지 않는 자도 있소이다. 모는 서서히 자라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요 호연지기도 꾸준히 자라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오"
내버려 둬서도 안되고 조장해서도 안 된다고 맹자는 주장하였다.
주지육림
물 대신에 술에 담긴 못과 나무 대신에 마른 고기가 우거진 숲.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고대 중국에 있어서의 폭군 음주의 전형. 두 제황은 한 가지로 재지와 무용을 지녔으면서도 매희라는 요녀, 달기라는 독부에게 홀려 주색의 향락으로 자신과 함께 나라를 망쳤다. 두 제왕은 총애하는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제왕으로서의 온갖 권력과 부력을 탕진했던 것이니 대충 아래와 같다.
하나라의 걸왕은 자신이 무찌른 유시씨의 나라에서 공물로 보내어진 매희에게 홀려 보석과 상아로 가꾸어진 호탕한 궁전을 짓고 그녀의 소원대로 국내에서 3천여 명의 미소녀를 모아 5색으로 수놓인 옷으로 단장케하고 눈부신 춤과 음악으로 날을 보내었다. 또한 매희의 제안에 따라 궁원의 일각에다 커다란 못을 팠다. 그 밑 바닥에는 새하얀 자갈돌을 깔고 물 대신 향기로운 술을 충만케 했으며 못 둘레에는 고기로 언덕을 만들고 나무 대신에 마른 고기의 숲을 꾸몄다. 왕은 매희와 함께 술의 못에 배를 띄우고 못 둘레에서는 3천 명의 미소녀가 가락에 맞추어서 춤을 추다가 북소리가 울리면 못으로 뛰어와서 술을 마시고 또한 우거진 마른 고기를 먹는 양을 바라보며 즐겼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니 국고는 탕진되고 민심은 이탈하여 멸망의 날이 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은나라의 주왕 역시 유소씨의 나라에서 바쳐진 달기에게 흘렸거니와 그녀는 희대의 미모에다 음분함을 겸한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기 위하여 호탕한 궁전을 짓고 주지 육림을 마련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 미주의 못가에서는 실오라기 한 안 걸친 남녀들이 좇으니 쫓기우느니 하며 춤추면 황홀한 심사로 그것을 바라보는 달기의 볼에 음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러한 광연이 백 스무날 동안이나 주야로 계속되니 그 광태를 조심스레 충고하는 신하도 이었으나 그들은 도리어 황제를 비방하다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다.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에서 불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죽는 희생자의 모습까지가 잔인한 달기의 음욕을 부채질해 주는 것이었다.
주왕은 마침내 주나라 무왕의 혁명으로 망했다.
채미가
백이 숙제 두 형제가 의를 지켜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먹다 죽은 수절.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의 아들이었는데 고죽군은 아우 숙제에게 대를 물러 주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제가 대를 잇는 건 예의가 아니라 하여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하나 백이는 그것이 아버지의 유지에 어긋난다하여 사양하다 못해 고국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뒤를 이어 고국을 떠났다.
두 형제는 진작부터 주나라 문왕의 인덕을 존경했던 까닭에 서쪽인 주나라로 갔다. 하나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문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정세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문왕의 대를 이는 무왕이 군사를 모아 중국의 북녘을 제압하면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 하였다.
무왕은 군중의 수레에다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데 백이와 숙제는 진군하려는 무왕의 말을 양 옆에서 만류하며 아뢰었다.
"부왕의 제사도 치르시지 않고 싸움터로 나서면 어찌 효자의 길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주왕으로 말하면 당신의 임금이시니 신하의 몸으로서 임금을 죽인다면 어찌 어질다 하겠습니까" 하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은나라를 무찔러 천하를 제압하였다.
여러 곳의 군주는 주나라를 종주로 섬기는 세상이 되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무왕에게서 아무런 덕망도 찾을 길 없어 그를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신의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말자고 맹세한 두 사람은 멀리 민가를 떠난 수양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고사리로써 목숨을 이었다.
그들이 지은 '채미가'에는 세상을 근심하고 원망하는 회포가 보이는 바 그들은 옛날의 성왕이었던 신농, 순, 우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마침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천리안
멀리 꿰뚫어 보는 눈.
북위 말엽, 양일이라는 청년이 광주(하남성 한용현)의 장관으로 부임되어 왔다.
명문 출신으로서 나이는 29세. 고을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낮에는 음식을 잊고 밤에는 잠도 안 자며 일한다고 하였다. 난리에다 흉년이 겹쳐서 굶어 죽는 백성이 많자 그는 창고를 열어 나누어주었다. 담당자가 군주의 노여움을 염려하자 그는 말하였다.
"나라의 근본은 사람이요 사람의 목숨을 잇는 건 식량이다. 창고를 열어 헤친 것이 죄라면 달게 받자꾸나"
그가 부임되어 온 이래로 이 고장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긴 현상이 생겼다. 예전에는 중앙에서 관료나 병사가 오면 반드시 주연이 베풀어지고 노자도 요구 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스스로 음식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생색을 내어 깊숙한 술자리를 차려 놓아도 그들은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자 그들은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양 장관은 '천리안'을 지녔어. 눈가림이 안되거든"
그는 고을 안에다 샅샅이 염탐꾼을 두어 관료나 병사들의 동태를 살피게 했던 것이다. 군벌의 싸움에 말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 33세, 시민과 농민이 관리보다도 더욱 슬퍼했다 한다.
천의무봉
선녀의 옷에는 기운 자국이 없었다는 데서 시문이나 서화에 조작이 없고 자연스런 품위가 있음을 말한다.
곽 한이라는 사내가 한여름에 하도 더워서 마당에 나가 바람을 쏘이면서 누워 있노라니까 하늘에서 무엇인지 하늘하늘 날아 내려왔다. 가까이 가보니 예쁜 여인이기에 그는 황홀하게 바라보다 말고 물었다.
"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선녀의 옷은 너무도 가볍고 부드럽고 또한 너무도 아름다웠거니와 그 아무데도 기운 자국이라곤 안 보였다.
자른 자국도 기운 자국도 없는 옷이 하도 신기하기에 주저주저 물었다. 선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투로 "우리가 입는 천의는 본래 바늘이나 실이 안돕답니다"
철면피
창피한 줄을 모르는 마음씨 혹은 그 사람을 말한다.
왕 광원이라는 자가 있었다. 학문도 재능도 상당하여 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는 대단한 출세주의자로서 웃사람이나 권세가를 찾아다니며 아첨하기에 바빴다. 누가 보건 말건 낮 간지러운 칭찬을 늘어놓기가 일쑤요, 상대방이 취중이라서 무례한 짓을 해도 노여워 하기는커녕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한 번은 취한 상대자가 매를 휘두르며
"어때? 그대를 때려 볼까?"
"네, 각하의 매질이라면 오히려 영광이올시다"하고 등을 내밀자 상대방은 실지로 매질을 했다.
한 자리에 있던 친구가 나중에 "자네는 창피한 줄도 모르나? 여러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그런 망신을 당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거 모르는 소릴세. 그이한테 잘 보이면 얼마나 이로운지 알기나 아나?"
이렇게 대답하는 바람에 친구도 어안이 벙벙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그 사람의 낯가죽이 두껍기란 마치 열 겁으로 된 철갑 같거든"
청담
세속의 명리나 희비를 넘어선 고매한 정신세계를 주제로 하는 청신한 얘기.
위진(3세기 후반)시대에 이른바 죽림의 칠현이라 하여 그 기교 방달한 언행으로 세상에 알려진 일곱 선비가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권력자와 또한 그에 추종하는 무리의 비루한 생활태도에 반발하고 기만적인 유교 등의 속박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짐짓 야릇한 언행을 농하면서 술을 도취하고 초속적인 노자 장자 사상에의 심취하였다. 그 대숲이 당시의 수도 낙양 근방이라지만 석연치는 않다. 다만 그들의 이름을 높여준 것은 술에의 도취요, 그럼으로써 혼탁한 정치사회에서 몸을 지킨 점이며 기성도덕에 대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칠현 중의 일인이었던 완적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는 속물이 찾아오는 것을 백안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완함이란 이는 돼지와 함께 큰 독의 술을 마셨고 유령이란 이는 취하면 집안에서 발가벗고 딩굴며 찾아오는 이에게 이죽거렸다.
"내게 있어서는 천지가 집이요, 이 오두막집 따위는 고의에 불과한데 자네는 어째서 남의 고의 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촉견폐일
견식이 좁은 사람이 탁월한 언행을 보면 알지 못하는 지라 의아스러워서 비난 공격함을 말한다.
촉나라 땅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에워싸이고 구름과 안개가 많은 까닭에 1년 중 대낮에도 해를 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어쩌다 해가 나타나면 개들이 수상쩍어서 짖어댄다는 것이 '촉견 폐일'이다.
월나라는 남쪽이므로 눈이 드문 까닭에 월나라의 개는 눈을 보고 짖는다는 말도 있다. 또한 오나라는 남쪽의 더운 고장이기에 소가 달을 보고서도 열을 내뿜는 태양인 줄 여기고 헐떡거린다는 말도 있다.
출람
제자가 스승보다 우수해 짐을 말한다.
중국의 유학자 순자(BC 300--240)는 말하였다.
"학문은 쉬어서는 안 된다.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으나 남색보다 푸르며 얼음은 물로써 이루어졌으나 물보다 차다"
스승을 능가할만큼 학문이 깊어지는 제자도 있다는 말이니 '북사'에 보면 그 실례가 나와 있다. 이 밀은 공 번의 제자였으나 몇 해 후에는 이 밀의 학문이 공 번보다 앞질렀기에 공 번은 자진하여 이 밀의 제자가 되었다.
하나 무엇이 청이요, 무엇이 남인지 현실적으로는 대중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바로 그 말을 한 순자만 보더라도 멀리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가지고 제자인 이 사와 한 비에게 물려준 중한 역할이었다. 애초에 공자의 주장은 예락의 나라와 선왕의 길이었건만 전국의 준엄한 현실은 순자로 하여금 성악설 논자가 되게 했으니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므로 인위에 의하여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비나 이 사는 더욱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나타나 법률과 정치, 경제야말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자는 평생을 두고 이상의 정치를 행하기가 소원이었건만 어느 나라에서도 위험시 당하여 용납되지 않았다. 하나 한 비나 이 사의 사상은 전국의 정치를 움직이는 커다란 힘이었으며 이 사는 실지로 진나라 시황제 밑에서 재상을 지냈었다. 청과 남의 개념도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셈일까?
태산북두
각기 자기 분야에서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을 말한다. 현재는 '태두'로 약칭.
태산이란 산동성에 있는 중국 오악의 하나로 예로부터 명산으로 숭상되어 왔다. 또한 북두는 북극성이니 다른 별들이 존경하는 별로서 일컬어진다. 주로 학문 분야에서 존경받는 사람을 '태산 북두' 혹은 약하여 '태두'라고 일컬는 바 당서의 한 유전에서 비롯되었다.
한 유는 이 백, 두 보, 백 거이와 함께 당대의 4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바 당대 3백 년을 통틀어 문장의 제 1인자임은 물론이요 중국 고금을 통한 굴지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인물. 그런데 앞서 얘기한 당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가 시작된 이래로 한 유는 육경으로써 여러 선비의 스승이 되었다. 한 유가 죽은 후에는 그의 학문도 더욱 흥성하니 그 까닭에 선비는 한 유를 '태산북두'를 우러르듯 존경하였다"
퇴고·추고
시문의 자귀를 단련함을 말한다.
중당의 시인 가도는 당나귀 등에서 흔들리며 무엇인지 중얼중얼, 혼자서 묘한 손짓에 팔려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은 흘깃흘깃 그를 돌아보건만 그는 방심한 양으로 당나귀가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지금 당나귀 위에서 '이 응의 유거에 제하여'라는 시가 생각난 참이었다.
한 거에 이웃이 드물고 풀섶길이 황원으로 들러가라
새는 못 가의 나무에 깃들이고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그런데 끝 구절에서 문을 민다고 해야 할지 두드린다고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래서 그는 손짓으로 미는 시늉도 해보고 두드리는 시늉도 해 보는 참이었다. 그러다가 고관의 행차에 부딪쳐 경윤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용케도 그 고관이 대시인 한 퇴지였기에 사정 얘기를 듣고 웃었다.
"그거야 두드린다는 편이 낫겠는 걸"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다시 없는 시우가 되었다.
'퇴 자는 밀 퇴자이자 가릴 추자이므로 퇴고,추고 아울러 무방하지 않겠는가?'
파죽지세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듯 세력이 맹렬함을 말한다.
삼국 중의 촉한은 이미 망하고 천하는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나라와 남쪽의 오나라와의 대립이었다. 그래 진나라는 오나라에게 마지막 결전을 걸어 그의 대군이 오나라를 향하여 남하해 왔다. 중앙군은 진남 대 장군 두 여가 이끌고 내려왔으며 서쪽에서는 왕 준의 수군이 양자강을 타고 내려오고, 동쪽에서는 왕 혼의 군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태강 원년(280) 2월, 두 여는 왕 준의 군사와 합세하여 무창을 함락, 그곳에서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작전을 세웠다. 한 장수가 말하기를 "이제는 봄인지라 강물이 이내 충만해질 것인즉 이곳 무창에서 오래 주둔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일단 철수를 했다가 오는 겨울에 한꺼번에 쳐내려오는 것이 좋을리라 생각하오"
이때 두 여는 잘라 말하였다.
"아니, 그렇지 않소이다. 지금 우리 군사는 기세가 하늘을 찌른 지경이오. 이를테면 대나무를 쪼갤 때 둘째 마디 셋째 마디를 쪼개고 나면 다음부터는 칼날이 가기만 하면 자연히 쪼개져 힘을 줄 필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기세이오. 이때를 놓쳐서는 안되오"
이리하여 그는 곧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그의 군사는 곧장 오나라의 서울 건업으로 쇄도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
오왕 손 호는 손을 뒤로 묶어 얼굴만 내놓고, 수레에다 관을 얹어 사죄의 뜻을 나타내며 항복하였다.
포류
포류란 강변의 수양나무이니 잎이 일찍 떨어지므로 체질이 약한 데다 비기는 말.
동진의 고 열지는 신기라고 일컬어진 대화가 고 개지의 아버지.
아들인 개지는 분방한 평생을 살았으나 열지는 선비풍의 성실한 사람이었다. 열지는 간문 황제와 같은 나이였는데 간문의 머리털은 아직 검건만, 열지는 이미 백발이었다. 그래 어느 날 간문이 열지에게 물었다.
"경은 어찌하여 먼저 백발이 되셨오?"
그러자 열지는 대답하였다.
"수양나무는 가을이 오면 잎이 지거니와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리를 맞음으로써 한결 무성하는 것이올시다"
자신의 약한 체질을 수양나무에 비기는 한편 상대방의 강한 체질을 소나무,잣나무에다 비긴 셈이다.
한단지몽
인생의 영고 성쇠는 한 마당의 꿈과 같음을 말한다.
여옹이라는 도사가 한단의 객주집에서 쉬고 있노라니까 남루한 옷을 입은 젊은이가 오더니 여몽에게 말을 걸어 고생스럽게 사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젊은이의 이름은 노생인바 그는 여옹에게서 도자기 베개를 빌어 가지고 낮잠을 잤다. 그 베개 양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자는 사이에 구멍이 차츰 커져 노생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훌륭한 집이 있어 노생은 그 집에서 명문가인 최씨네 규수를 아내로 삼고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자 오래잖아서 경조윤이 되고 또한 오랑캐를 무찔러 더욱 영전하였다. 그러자 재상이 시기하는 바 되어 자사로 좌천, 3년 후에는 다시 중용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니 그로부터 10년 간 어진 정치를 펴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역적모의를 한다는 모함으로 포박을 지니 처형당할 것이 뻔했다. 그는 아내더러 "나의 산동집에는 적으나마 좋은 녹이 있었오. 농사나 짓고 있었던들 그것으로 추위와 굶주림은 면했으련만 어쩌자고 벼슬을 살았기에 이 지경이 됐구려. 남루를 걸치고 한단의 길을 가던 생각이 나오. 그 시절이 그립건만 이젠 어째볼 수도 없이..."
노생은 칼을 뽑아 자살하려 했으나 아내의 제지를 받았고 다른 이들은 처형을 당했으나 그는 환관의 진력으로 귀양을 가는데 그쳤다. 몇 해 후에는 천자가 그의 원죄를 깨닫고 다시 불러 영국의 군주로 삼았다. 아들 다섯이 저마다 고관이 되어 천하의 명문가와 통혼하여 10여 명의 손주를 얻어 매우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품을 하고 눈을 떠보니 한단의 객주집에서 그냥 누워 있었다. 곁에는 여옹이 앉아 있다. 그가 잠들기 전에 객주집 주인은 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여태 조밥이 익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 꿈이었구나!"
"세상 만사가 그런 거라네"하며 여옹은 빙그레 웃었다. 노생은 어리둥절하고 앉아 있다 사정을 깨닫고 여옹에게 감사하였다.
"영욕도 빈부도 죽음도 다 겪었습니다. 필시 도사께서 나의 욕망을 막아 주신 것일테죠. 잘 알겠습니다"
여옹에게 공손히 절하고 노생은 한단의 길로 사라졌다.
해로동혈
부부의 금술이 좋아서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히고자 함을 말한다.
시경에서 나온 말인바 세 편의 시에 '해로'라는 말이 있으며 또 한편에 '동혈'이란 말이 보여 합쳐서 '해로동혈'이란 말이 생겼거니와 그 네 편의 시는 한결같이 해로동혈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한탄하고 있어 숙명적으로 서글픈 말인지도 모른다.
가령 '격고'라는 시는 싸움터에 나간 병사가 고향에 돌아갈 날도 모르고, 사랑하는 말도 죽고, 싸움터를 헤매며 고향의 아내를 생각하는 노래다.
-죽음도 삶도 같이 하자고 그대와 함께 맹세했었다. 그대의 손을 잡고 함께 늙어 가자고 맹세했었다. 그대의 손을 잡고 함께 늙어 가자고 맹세했었지.
그 맹세도 허사가 되었다고 병사는 처량하게 노래를 끝맺고 있다.
또한 '대차'라는 시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춘추시대에 초나라가 식나라를 쳤을 때 식나라의 군주는 포로가 되고 부인은 초왕이 아내로 삼고자 궁궐로 데려갔다. 부인은 용케 사로잡혀 있는 남편을 만나 "나는 잠시도 당신을 잊을 수 없으며 결코 이 몸을 다른 이에게 바칠 순 없어요. 살아서 당신을 그리워하며 넋이 땅 위를 떠나 사느니보다는 죽어서 땅에 묻히는 편이 얼마나 나을지 모르겠어요"
이리하여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살해 버리자 남편도 뒤를 이어 자살하였다. 그 시를 이르기를,-비록 살아서는 거처를 달리 할지라도 죽어서는 무덤을 같이 하리라. 나를 믿지 않는다면 해를 믿지 않는 것과 같아옵니다.
형설지공
반딧불과 눈빛을 등잔 대신 써서 공부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고학한 보람이 있음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천5백년 전 옛날 차 윤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부지런하여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등잔을 밝힐 기름이 없어 여름철에는 얇은 명주로 만든 자루에다 수십 마리의 개똥벌레를 넣어 그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 그는 마침내 상서랑이라 하여 천자를 가까이 모시고 칙서 따위를 맡아보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또 같은 무렵에 손 강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음씨가 착한 친구하고만 사귀었다. 그런데 집이 가난하여 등잔을 밝힐 기름이 없어 겨울에는 눈이 쌓여있는 창가에다 책상을 놓고 눈빛에 비쳐가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어 그는 훗날 어사대부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호접지몽
장자가 자기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한 바 나비가 된 꿈을 일컬음이니 꿈과 현실에 대한 구분은 한낱 인간의 잔재주나 어리석음에 불과함에 말한다.
장자는 고금 독보의 철인이었다. 그의 고매하고 오묘한 철학을 그는 여러 가지 우화를 빌어 표현했거니와 그 중의 하나에 나비가 된 꿈 얘기가 있다.
-언제였던가, 나는 깜박깜박 조는 사이에 나비가 되었다. 하늘하늘 날개짓하며 대기에 떠오르는 즐거움, 나는 내가 나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즐거움에 팔려 있었다. 이윽고 문득 눈을 떴다. 나는 역시 나였다.
그러나 - 현존하는 내가 꿈 속에서 그 나비가 된 셈일까? 그 하늘하늘 즐겁게 날아다니던 나비가 꿈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됭 셈일까?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였는지?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우리의 인간적인 분별에 의하면 장자와 나비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현실과 꿈은 판이하다. 나비가 곧 장자일 수는 없으며 현실은 역시 현실일 뿐 꿈이 현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구별이란 사람의 잔재주나 혹은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재의 세계에 있어서는 장자도 또한 나비요, 나비도 또한 장자라는 것이다. 현실도 또한 꿈이며 꿈도 또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절대자유의 정신세계 - 다시 말하자면 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가치관념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몸은 혼탁한 세속에 있을망정 그 정신에 있어서 생사, 시비, 선악, 진위, 미추, 빈부, 귀천, 물아 등... 대립과 차별을 온통 벗어나야지만 비로소 영롱한 도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깨어나면 장자로서 살며 꿈꾸면 나비로서 날고 주어진 현재의 모습 그대로 현재를 즐기는 것, 그것이 참된 자유라고 장자는 생각하였다.
홍일점
많은 남성 중의 한 사람의 여성.
송나라 사람 왕 안석은 탁월한 문장가로 당송팔가문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지경이라 한다. 그가 지은 '석류의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만록 총중에 홍일점이 있나니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은 모름지기 많아서는 안되느니라.
온통 초록빛이 우거진 가운데 석류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양을 그는 봄빛의 으뜸이라 하였다. 그 아름다움과 가랑스러움을 일컫는 것이리라.
다른 이의 시문에도 '홍일점'이란 표현이 나오거니와 거기서는 '만록 총중' 대신 만록 진두, 혹은 농록 만지로 표현되어 있다.
화룡점정
사물의 요점 혹은 마지막 손질을 말한다.
남북조 시대, 남조인 양나라에 장승요라는 이가 있었다. 관료로서는 상당한 지위에 올랐으나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화필이었다. 그는 온갖 것을 살아 있는 양으로 그려냈다는 중국의 전설적인 대화가이다.
그가 금릉 안락사에다 한 쌍의 용을 그렸을 때 뭉게치는 먹구름을 박차고 금시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 한 두 마리의 용... 그 비늘 하나 하나에도 날카롭게 펼친 발톱에도 강한 생명력이 충만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동자는 하나도 그려 넣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집요하게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다.
"눈동자를 그려 넣는 날이면 용이 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눈동자를 그려 넣어 보라고 졸라댔다. 장승요는 마침내 눈동자를 그릴 양으로 먹물이 흥건한 붓을 눈에다 내려 놓았다. 순간 벽 속에서 번개가 번뜩이며 벽을 박차고 날아가는 용... 무서운 순간이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벽을 보았다. 아직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용만이 그냥 벽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화룡 점정'이란 말이 생겼거니와 반대로 '화룡 점정을 결했다'고 하면 전체적으로 잘 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요긴한 점을 빠뜨렸다는 말이다.
한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입안이라 한다.
후생가외
자기보다 젊은이는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 헤아릴 수 없으므로 그 형세가 두렵다는 말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벼 싹인 채 빼어나지 않고 시드는 것도 있다. 또한 빼어 날지라도 영글지 않고 시들어 버리는 것도 있다.
자기보다 연소한 자의 뻗어나는 기세는 참으로 두려운 바가 있다. 그 소년이 언제까지나 지금 우리에게 못 미치는대로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사람의 진보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40, 50이 되어도 아직 세상에 알려질 만큼 되지 않으면 그때 비로소 두려워 할 바 아님을 알게 될 뿐이다. 학문을 그쳐서는 안된다"
'논어'에 있는 말이다. 공자는 춘추난세에 자기의 이상을 펴려고 여러 곳을 방랑했으나 끝내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학문이 이어지고 언젠가는 활용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 말에도 그의 한탄이 엿보인다.
한국편
가명인
일본이 3,1운동후 문단 정치를 지양하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전국의 유림에서 만동묘의 제향을 다시 받들자는 공론이 돌았다.
만동묘란 것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만주족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한이 되어 명나라야말로 우리 종주국이라는 명분 아래 임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모신 사당으로 흥성대원군 때 일시 철폐되었다가 재건은 하였으나 혼란 통에 제향을 못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꼴을 보자 새로 나온 동아일보 1920년 5월 9일양일자 지상에 '환민 한별'이란 필명으로 이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야유하는 내용의 '가명인 두상에 일봉'이라는 글을 실었다.
제목부터가 그러하듯 매우 감정적인 어투로 그들 모화 사상에 젖은 인사를 여지없이 몰아쳤다. 나라의 주권까지 빼앗긴 오늘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는 강개한 마음에 쓴 글이겠으나 유림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궁벽한 역사 사실인 야마사기의 일화까지 들추어 그가 자주성을 주장한 나머지 '만약에 공구가 원수가 되어 70 제자를 거느리고 일본을 침공한다면'하는 가제 아래 마땅히 '먼저 공구를 버히어 그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더욱 큰 노여움을 사 동아일보의 불매동맹으로까지 번졌던 문제의 글이다.
강강수월래
이순신 장군에 결부되어 이런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중의 어느 전투에서 왜적을 짓두들겨 쫓았는데 장병은 모두가 여러 날 전투에 시달려 맥이 풀리도록 피로해 있었다. 이 장군은 배마다 몇 통씩의 술을 배급해 주었다.
"오늘 저녁에는 실컷들 마시고 즐겨라. 내가 노래를 지어서 가르쳐 줄 것이니 밤새 칼을 빼어 뱃전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부르고 놀면 재미날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이기고 난 뒷일수록 긴장을 못풀게 하던 그였는데 뜻밖에 너그러운 처분에 모두들 기뻐 어쩔줄을 몰라 했다. -이때 지어준 노래가 오늘날 전라도 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강강수월래'라는 것이다 -번갈아 멕이며 후렴을 되풀이 하는 이 노래는 흥겹게 밤을 새우기에 족하였다.
낮 전투에 참패를 본 왜적들은 무슨 수로라도 보복을 하려는데 때 마침 달은 밝고 안개는 자욱한지라 하늘이 도우셨다고 야습을 하기로 하였다. 알몸에 칼만을 지니고 헤엄쳐 들어가 곤히 잠든 배를 습격하자는 것이다.
일당 백의 용사들만으로 된 이 결사대는 헤엄쳐 들어오며 싱긋이들 웃었을 것이다.
"저렇게 술들을 쳐먹고 난장을 부리니 수라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놈들은 하나도 배 위에 올라와 보지 못하였다. 새벽녘에야 놀이를 끝내고 해가 높이 뜨도록 자고 일어난 배 안의 군사들은 뱃전에 잘려진 손가락이며 손목들과 주위에 떠 다니는 많은 왜적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강강수월래란 '강한 오랑캐가 물을 넘어서 온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물론 이 노래도 '캉캉'은 악기를 두드리는 소리의 의성으로, '수월래'란 '술래'를 길게 한 것으로도 해석이 된다. 그러나 국가 수호의 영웅을 두고 이런 유의 전설로 엮어졌다는 것은 여간 대견한 일이 아니다.
건지두풍
이씨 왕조를 이룬 전주 이씨의 처음 발상지는 그의 본관대로 전주요 그 주산이 건지산이다.
그런데 그 후손 가운데서 이 태조 같은 이가 나서 왕조를 열고보니 얘기는 달라진다. 본시 북망산 모양 많은 무덤이 있던 산인데 풍수설을 믿는다면 반드시 어떤 명당 산소의 정기를 타서 이런 후손이 났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역사가 오래되어 과연 이씨 선조의 산소일지 징험할 도리가 없는지라 일등 지관을 동원하여 이것을 감정하는 도리 밖에 없다. 그래서 뽑힌 것이 두씨라는 풍수였다는 것이다.
그래 그 많던 산소를 일제히 이장시켜 다른 산으로 보내고 오직 한 분의 산소 정혈에 든 산소만을 남겼는데, 이것을 능으로 봉하거나 또는 선조 산소라고 확정짓기에는 그래도 자신이 없었든지 그런데로 봉분만 크게 하여 놓고 조경단을 모아 제향은 거기서 받들게 하였다는 것이 현지 사람의 전하는 얘기다.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되지 않게 아는 체 하든지 할 경우 '건지두풍이지'하는 식으로 놀리는 어투로 많이 사용들 하고 있다.
계란유골
"재수가 없으려면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식으로 "모처럼 호의로 생긴 것이 그나마도 마가 들어 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흔히들 황 희 정승을 쳐들지만 그가 청백하고 어렵게 지냈다는 얘기가 하도 많으니까 실재 인물에 덧붙여서 그럴싸하게 얘기한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겠고, 실지로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여간 어떤 재상이 몹시 곤궁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임금이 특명으로 어느 날 하루 서울 사대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을 몽땅 사서 그 대신에게 주라고 분부하였더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인적이 딱 그쳐 버렸다. 꼭 하나 서대문인가로 계란 세 꾸러미를 가지고 들어오는 이가 있어 그것이 그 재상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사고다.
계란마다 뼈가 들어 있어서 그나마도 하나 먹어 보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몇몇 기록에도 나오는데 주인공을 물론 밝힌 곳은 없다.
고려 공사 삼일
자빠져서 침뱉기로 제가 벼슬하고 있는 조정을 드러내 놓고 욕할 수는 없다. 조령모개로 변덕 많은 정사를 비꼬되 민심이 이탈되어 망했다고 전 왕조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어느 때고 왕조가 바뀌면 전대에는 형편없었다고 과장하여 표현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관원이 공문을 기안하여 하인을 시켜 보내 놓고 이튿날 보니 변경하여야겠으므로 고쳐 써서 뒤미처 보내며 앞의 놈의 것을 회수하고 이것을 전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또 고쳐야 할 일이 생겨 사람을 보내되 이번엔 아예 쫓아가 둘 다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직 출발하지도 않은 두 하인을 저희들 집에서 데리고 왔다.
"왜 아직 안 떠났느냐"고 힐책하니까 대답이 걸작이다.
"언제든지 그러는데 무엇하러 애써 가다가 되돌아 옵니까?"
이조 중엽에 소재라는 호의 노수신이라는 문장 대가가 있었다.
판서들 중에서 발탁되어 우의정이 되었으니 정승이다.
그런데 하루 온 종일 있어도 한 가지도 헌책이라곤 하는 일이 없다. 재상 한 분이 독설을 부렸다.
"노정승의 침은 종기의 선약이라"
속담에 아침에 일어나 말 안한 침을 바르면 종기가 낫는대서 한 소리다.
그를 천거하였다는 율곡선생에게 어떻게 그렇게 무능한 분을 추천하였느냐고 따진 사람이 있었다.
그랬더니 대답이 또 묘하다.
"공연히 쓸 데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보다는 나아"
그래 민요에도 있다.
"옛법 고치지 말고, 새법 내지 말라고"고
공당문답
이조 초에 호를 고불이라고 하는 맹사성이란 정승이 있었다. 청렴하고 수탈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한 번은 고향인 온양에 다녀오는 길에 용인의 원 집에 들었는데 (원이란 관에서 경영하던 숙박소) 호화로운 차림을 한 영남 선비와 같이 쉬게 되었다.
녹사라고 정부의 최하급 관리에 취직하려고 취재차 가는 길이라 한다. 같이 수작하던 끝에 '공'자 '당'자로 운을 달아 문답하기로 하였다.
"어째서 서울 가는공?"
"녹사 취재하러 올라간당"
맹 정승이 웃으며
"내가 당신 위해 시켜 줄공?" 하였더니
"놀리는 건 안된당"
물론 상대가 정승인 줄은 모르고 한 대꾸다.
며칠 뒤 정부에 있으려니 과연 취지가 들어오므로
"요새 어떠한공?"
선비가 알아보고 엎드리며
"죽여지이당"
그래 한 자리의 관원들이 모두 놀라 들었더니 그런 연유라. 자리에 붙여 주고 돌보아 주어서 여러 고을 원을 거쳤는데 매우 근실하고 업적이 있어 나중까지 얘깃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꽃중에 좋은 꽃
이조 21대 영조가 늙어서 상배를 하고 환갑이 넘은 분이 다시 장가 가겠다고하여 처녀 간택을 하였다.
처녀들은 예에 의하여 아버지의 벼슬과 이름을 써 붙인 방석 위에 앉게 돼 있는데 한 처녀만이 옆 방바닥에 앉아 있다. 까닭을 물으니까 "아무리 종이일지라도 아비 이름 쓴 것을 어떻게 깔고 앉겠습니까?"
왕은 그 처녀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 다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꽃중에 좋은 꽃은 무엇이더냐?"
모두 모란이니 함박이니 월계니 하고 대답하는데 그 처녀는
"목화꽃이 올시다"한다. 다시 까닭을 물으니 "그 꽃이 아니면 만 백성이 헐벗습니다." "반찬 중에 제일 좋은 반찬은 무엇이냐?" "소금이올시다. 모든 반찬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이 전각의 기와골이 몇이겠느냐?" 하였더니 처녀들은 모두 고개를 쳐들어 빗줄기를 세는데 그 처녀만은 다소곳하니 세는 기색이 없기로 물었더니 꼭 알아 맞힌다. 그 사이 빗줄기가 떨어져 패인 자리를 살폈던 것이다.
이리하여 왕비로 뽑힌 분이 김한구의 따님인 정순왕후로 숙덕을 높이 찬양 받는 분이다.
영조의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가 '화부화(꽃 뒤에 다시 꽃 피는 것)'로 제목을 내어 조관들을 시험하였더니 채제공만이 그것을 맞춰 냈다고 하는데 그는 뒤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구렁이 제 몸 추듯 한다
사람이 제 자랑을 늘어놓든지 할 때 하는 소린데 구렁이가 어쨌다는 얘기는 없다. 중국 고대 초 나라의 굴원이 자기의 회포를 읊은 어부사에 '거세개탁이어늘 아독청하고 중인이 개취어늘 아독성이라 - 온 세상이 모두 썩었건만 나 혼자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건만 나 홀로 깨어 있다"
한 대목이 있어 본시 '굴원이 제 몸 추듯 한다' 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굴원이 특별히 심청이 사나웠을 리도 없건만 어느 결에 음이 비슷한 구렁이로 화해 버린 것이다.
그 굴원이 자기 주장이 통과 안되자 양자강 중류 멱라수에 투신자살을 한 때문에 고사 좋아하는 사람은 이 방면의 대표 인물로 친다.
표연수라는 사람이 있어 연산군때 벼슬을 했는데, 한강에 놀이 나간 자리에서 왕이 배로 내려가자는 것을 노를 끌어안고 간하여 말리다가 그것을 뺏는 바람에 물에 떨어졌다.
모두가 건져서 나왔을 때 물었다.
"물엔 왜 들어갔더냐?"
"들어가 굴원일 만나고 왔습니다"
"그래 굴원이가 뭐라고 하더냐?"
"나는 어두운 임금을 만나 물에 던져 죽었거니와 너는 밝은 임금을 모셨는데 무슨 일로 왔느냐고 시로 대답합디다"
이렇게 풍자를 잘 하였는데 결국 귀양가서 죽었다.
구천십장 남사고
남사고란 이조 명종 때의 유명한 지관이다. 술수를 잘하여 서울의 산 이름을 보고 당파싸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인왕산 밑에 왕기가 있어 중흥지주가 날 것이라고 하더니 선조가 임금으로 들어서더라는 둥 일화가 많는 분이다.
자신이 용한 지관인 때문에 자기 욕심으로 좋은 자리를 골라 아버님 산소를 옮겨 모시고 보면 결함이 눈에 띄어 이렇게 옮겨 쓰기 여러 차례만에 마지막으로 비용상천형의 명당을 얻어 다시 장사지내는데 한 역군이 노래로 부른다.
"구천십장 남사고야 비룡상천만 여기지 마라 고사괘수 아닌가?"
깜짝 놀라 다시 산세를 살펴 보니 사룡이라 그 역군을 만나려 하였으나 자취를 감추어 찾을 길 없었다.
그래 지각유주라 땅에도 임자가 있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 하고 간신히 흠이나 없을 자리를 구하여 썼다고 한다. '사욕이 동하면 술수가 도리어 어두워진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또 '방관자명'이라는 말이 있듯 '곁의 사람이 밝게 본다'는 말은 실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에 바로 본다는 얘기.
군자는 가기이방
군자란 마음이 곧고 사악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방편을 가지고 속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조 후기 정조 때 조태채라는 당파 싸움에 희생된 정승이 있었다. 마침 부인 심씨를 잃고 얼마 안 있어서의 일인데 담당한 서리(하급 사무 담당 보조원)가 예정된 시간을 지나 기다리고 애타던 끝에 나타났으므로 벌로 볼기를 때리렸더니 울면서 호소를 한다.
"소인의 죄를 소인이 모르는 배 아니옵고 죽을 때 죽더라도 비통한 말씀이나 드리고 벌을 받아도 받겠습니다. 소인은 상처를하여 어린 것을 셋을 데리고 있사온데 큰 놈이 다섯 살 다음이 세 살 끝이 딸년이온데 난지 여섯 달 밖에 아니 됩니다. 그래 아비겸 어미겸 키우고 있사온데 오늘 아침도 어린 년이 울고 보채어 이웃집 아주머니께 젖 먹여 줍사고 부탁하고 이어 두 놈이 일어나 또 배고프다 울기에 나아가 죽을 지어서 먹여 주곤 부랴부랴 들어온 것이 이쯤 되었사오니 그저 죽여줍소사"
듣다가 그만 눈물을 지으며
"네 정경이 정히 나와 같고나"하고 물자를 후히 주어 내보냈는데 물론 거짓말이요 매맞는 것을 모피하기 위한 깜찍한 계교였던 것이다.
그 말을 왜했던고
이씨조 효종 때 유 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라 때 불국사와 석굴암을 이룩한 김대성과 흡사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평양에 한 부부가 사는데 세상에도 똑똑한 아들을 두어 그 놈이 열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평안 감사의 근감한 행차를 구경하고는 "나도 공부 잘해서 평안감사가 될 터야요"
부모는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메어지는 듯 하였다. 그래 우리같은 쌍놈은 공부가 제 아무리 용하여도 그렇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한 번 못될 바에는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며 그날로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죽어 버렸다.
그래 달리 다른 자식이라고는 없는 이 부부는 그날이면 잃은 자식의 제사를 지내 주며 "그 말을 왜 했던고?" 하고 무던히도 울었다.
그런데 이 유 념이란 분이 어려서부터 이상한 일이 있는데 자기 생일이면 꼭 꿈에 어딘가 가서 잘 먹는데 반드시 늙은 부부가 "그 말을 왜 했던고?" 하고 운다. 철이 든 뒤에도 항상 그러했는데 평안감사가 되어 부임하여 처음 겪는 생일 날 여전히 거기를 갔다. 이번엔 늙은 할머니만이 운다. 그리고 거기는 동헌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였다.
신기하여 밤중이건만 사람을 앞세우고 찾아가보니 꼭 꿈에 보던 그 할머니가 같은 소리를 되뇌이며 울고 있다. 그에게서 연유를 알았고 꿈에 보던 대로 영감은 연전에 죽어서 지금은 없는 것이다.
유 념은 그 뒤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못 이룬 소원을 성취하고 그의 영혼은 곱게 돌아간 모양이다.
기습작전
안 중근 열사가 만주 할빈 역두에서 침략의 원흉 이또오를 쏴 죽인 일은 세계적으로도 한국 남아의 의기를 떨친 일이다. 그가 여순에서 일본 정부의 재판을 받을 당시의 일이다.
"그대는 어째서 이또오 후작을 암살했는가?"
"아는 이등이를 암살한 사실이 없다."
재판관은 당황했다. 현행범으로 잡힌 것이니 달리 진범이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등이를 죽인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는 대한 독립군의 육군중장으로서 침략의 괴수를 상대로 기습작전을 폈던 것이요. 그 작전이 주효하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의 이번 행위는 전투행위지 범죄로 구성되는 암살행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실로 당당한 진술이었다. 그러기에 역사 기록에도 그의 뜻을 받들어 암살이라는 용어를 피하여 달리 표현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급제를 하노?
예법에 고관 대작에 있던 사람이 반대당의 탄핵을 받든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더라도 과거에 급제한 것만은 말하자면 학위라 대외적으로 급제로 호칭하는 법이었다.
임란 때의 공신이요 또 유머리스트로서 많은 일화를 남긴 백사 이항복은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 때 중신의 위치에 있었으나 날로 심해 가는 조정 처사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옛 동료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상소를 올렸다가는 차례로 관직을 삭탈당하는 판국인데 그런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나는 머지 않아 그대들의 뒤를 따라 도로 급제로 돌아갈 것이다"
벼슬하려는 선비의 등용문인 급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것이라 산전수전 다 겪은 재상으로서 이런 심각한 한 마디를 던졌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상소를 올려 벼슬을 사하고 다시 반대당에 몰려 함경도 북청에 귀양갔다가 거기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준들 어떻리"하는 그의 단가는 도성 내에 모르는 이가 없게 유행하였고 광해군도 연회 석상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기분이 울적하여 잔치를 파하였다고 한다.
나 먹을 것은 없군
지금도 정초면 온 백성들이 지극한 관심을 갖고 대하는 토정비결을 만든 이지함은 한산 이씨로 임란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 삼촌이다.
그는 항해술에 남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어 바다 다니기를 육지처럼 하였다 하며 또 전도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어 세상에서 이인 소리를 듣는 분이다.
그가 남다른 재주와 포부를 갖고도 뒤늦게 경기도의 포천 현감이라는 미관 말직에 취임했을 때의 일이다.
모두들 대신의 숙부시라고 특별히 마음을 써서 산촌 읍 치고는 최고로 차려다 놓고 잡숫기를 권했더니 상을 휘둘러 보고 나서 "먹을 게 없군!" 한다. 모두 황송해서 상을 물려 전 보다 더 호화롭게 차려다 올렸더니 젓가락을 집지도 않고 또 "나 먹을 건 없군!" 한다. 모두 도리가 없어 마당에 거적을 깔고 죄 주기를 청했더니(석고대죄) "너희 고을에서는 산채가 많이 날 것이 아니냐? 그 산채로 된장국을 끓이고 밥은 오곡잡곡밥으로 지어서 한 그릇 수북히 담아 오너라. 나는 그것이라야 먹느니라"
그리하여 재임기간 계속 이런 식사로 일관하였다 한다. 또 여행을 즐기어 '새옹'이라고 조금만 솟을 갓삼아 쓰고 다니다 경치 좋은 곳이면 벗어서 닦아 밥을 지어 먹고 다녔다고도 한다.
노다지
광산에서 금이 생으로 쏟아지는 것을 노다지라고 하는데 흔히 이런 말로 설명하고 있다.
평안도의 운산은 유명한 금 산지인데 구 한국 말엽 미국인이 특별히 왕명으로 인수받아 막대한 이익을 올렸던 곳이다. 한 번은 광부들이 착굴해 들어가는데 육안으로도 누런 금맥이 보이므로 떠들고 있으려니 미국인 광주가 들어오며 "노 텃취(No touch. 손대지 말라)!"고 소리쳤기 때문에, 영어를 모르는 그들은 그것이 생금줄이란 말이거니 하여 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국의 금광에서 공통된 상식이 하나 있다. 천안 직산하면 사금 산지로 손꼽았었고 광산에서 함지로 금을 이는 사람치고 그곳 출신 아닌 사람이 없다 할 정도다. 그들은 그 지방 말투로 '노다지'라는 말을 잘 쓴다. "낮이고 밤이고 노다지 노름만 한다"하는 식이다. 그래 거기서 온 말이라고 설명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보다도 그럴싸한 설명이 있다. 아까의 운산에서 난 원광을 궤짝에 넣어 기차로 수송할 때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노 텃취'라는 글씨를 궤짝마다 크게 적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배주고 뱃속 빌어먹는다는 격으로 보물을 송두리째 내어 주었던 쓰라린 추억의 단어라 할 것이다.
노목궤
이조 말엽 홍만종은 그의 저서 '순오지'에 상당히 많은 민속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데 거기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촌 영감이 딸을 사랑하는 나머지 사위를 고르는데 노목으로 궤를 만들어 쌀 쉰 닷말을 넣고 누구든 그 안에 든 것을 알아 맞혀야 사위를 삼겠다고 하였다.
물론 여러 사람이 뒤통수를 치고 들어간 뒤의 일이다. 그렇게도 시집가고 싶었든지 딸년이 몰래 장삿꾼 총각에게 이 내용을 귀띔해 주고 취재 보도록 권했다.
그래 얻었다는 사위가 천치라 장인이 이 자를 쫓을 양으로 다시 장에 가 소를 고르랬더니 "노목궤 쉰 닷말은 들겠군!"하여 웃음거리가 되고 세상에서 변통성없는 사람을 노목궤라 한다고 실려 있다.
못난 사위와 깜찍한 며느리 얘기는 전국적으로 무수히 많다. 그것은 밖의 사회에서 들어온 자에 대해 자기네 풍습에 익숙지 못한 것을 웃음거리로 삼았던 한 예라 보겠다. 그리고 이 얘기의 구조는 하나 들은 얘기로 다른 데도 적용시키려는 우직함을 과장하려는데서 온 한 유형이라 하겠다.
녹두 장군
이조 말 민중이 봉기하여 일으킨 동학란의 전주 전투의 지휘자였던 전봉준의 책수가 조그맣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동학란을 평정하다는 구실로 일,일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많은 일화가 생겨나곤 하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사 울고 간다.
이것은 당시 유행한 동요였는데 녹두는 물론 녹두 장군을 말한 것이고 청포는 녹두로 쑤는 것이지만 청나라를 말한 것으로 싸움의 결과를 예언한 것이라고들 한다.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어지나"하는 것은 청일 두 나라의 최초의 대 접전을 말한 것이다.
또 갑오년(1894)에 청나라의 세력이 물러날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무렵의 사회적 불안을 틈타 정감록 신봉자가 갑자기 늘고 십승지지 피난처를 찾아 일신일가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소극적인 움직임이 매우 성하였었다.
담바귀 타령
잔치 자리 같은 데서 이 노래를 꺼낼 때면 "시작일세 시작이세 담바귀타령이 시작일세" 하는 법이라 시작이라는 말의 결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이 노래가 일정시대 때 불온하다 하여 금지를 당하였던 이유는 잠깐 밝혀 볼만한 일이다.
"귀야귀야 담바라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너의 국이 어떻길래 대한제국을 왜 나왔나? 우리 국도 좋건마는 대한의 국을 유람왔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어 "은을 주려 나왔느냐? 금을 주려 나왔느냐?" 묻는 말의 대답이 "은도 없고 금도 없다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로 되어 있다. 다음부터는 전승하는 이에 따라 가사 내용을 달리하여 일정한 것을 찾을 길 없다.
그러나 애초 '담바라'를 '단발귀' 곧 ' 머리 깍는 귀신' 또는 '머리 깍은 귀신'이란 뜻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일본 세력의 상륙을 은근히 비꼰 것이라고 보겠으니 먼저 가사의 '은도 없고 금도 없이'라는 말의 뜻이 짐작이 간다.
노래하는 이에 따라서는 '처녀 쌈지는 한 쌈지요 총각의 쌈지는 빈 털털이라' 어찌 보면 익살도 같으나 처녀로 실속 차린 일본 세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동상전엘 갔나
혹은 "안동상전엘 갔나?" 하는 말은 싱겁게 웃는 사람을 보고 함축성 있게 놀리는 소리다.
옛날 궁중의 나인이라는 여관들의 생활이란 확실히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래 이 나인들을 다소나마 고적감에서 구해 주려는 심사일 것이다. 동성끼리 결혼을 시켜 완전히 일반 가정과 같이 영감 마누라를 분명히 하여 무수리라는 하인을 부리며 가정을 이루고 살게 하였다.
그때에는 상감이 살림제구 일체를 차려 주는데 자개장은 그들의 외 쪽 생활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 생활을 위하여 암소뿔을 깍아 ' 각신'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두께 한 푼 정도로 얇게 후벼낸 속을 풀솜으로 채우고 더운 물에 담가서 쓰면 탄력이 있어 제법 쓸만하다는 것이 고로들의 얘기다.
이것을 구하는 길은 친정을 통하여 종로의 상전이라는 일용 잡화상에서 손에 넣는 도리 밖에 없다.
그래 장옷을 쓴 여인이 들어와 말 않고 쌩긋이 웃으며 돈뭉치를 내 놓으면 주인은 알아차리고 종이에 싼 그것을 내어 주었더라는 것이다.
이조 후기는 일반으로 왕의 생존기간이 짧아 교체 퇴역(?)한 나인들이 다량으로 나오게 되어 현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희궁에 수용하였었다.
나중 그 궁을 철거할 때 진귀한 물건이 수십 개나 나타나 외국인 수집가에게 고가로 팔렸다는 얘기 조차 있다.
뜨고도 못 보는 해태 눈
지금은 과자 상표로 널리 쓰이는 이 해태를 흔히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 경복궁 자리에서는 관악산이 규봉이 되어 남산 너머로 보이는데 이 산의 봉우리가 불숙불쑥 마치 불꽃 타오르는 것 같아 보이므로 이 화기를 누르기 위해 바다 짐승인 해태를 만들어 앉혀 그것을 향해 노려보고 있게 한 것이라고.
확실히 그럴싸한 얘기다. 그러나 해태는 그렇게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 시험삼아 불교의 절엘 가보라. 그 저승을 그린 그림에서 염라대왕은 특이한 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이것이 해태관이라는 관이다. 해태란 사람의 마음의 곧고 굽음을 감별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짐승이므로 이것을 상징화하여 법관의 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까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그 정문인 광화문 양 곁에 해태를 해 앉힌 뜻은 아까 얘기와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뱃속 검고 마음 굽은 고약한 놈은 들어오지 말라고. 그러나 탐관오리는 날로 늘어만 가고... 그래 그 연유를 아는 백성들은 이런 말을 만들어냈다.
"뜨고도 못 보는 해태 눈깔"
지금도 해태는 그 큰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다. 드나드는 인사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들여다 보는듯이.
말뚝이 모양 대답만 해
개화기까지 우리 나라에는 똑똑한 연극이 없었다고들 말하고 있는데 물론 지금 안목으로 보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탈춤이라는 무용을 주로 한 가면극이 있는데 황해도의 봉산, 경기도 양주 것이 널리 알려져 왔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이미 소멸된 기악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서 중국 남방으로부터 수입되어 온 것임을 문헌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또 사자도 일반 서민 사이에 널리 애호되어 수원성을 쌓았을 때의 실황을 그린 것을 보면 역군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쌍 사자를 놀리는 광경이 나타나 있다.
이 사자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던 것인데 전기 봉산의 경우는 탈춤과 어울려서 연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 탈춤은 모두 열 두 마당으로 구분되어 거의 전승한대로를 연기하는데 그 중에 말뚝이 과장이라는 것이 있다. 취발이가 "말뚝아 말뚝아" 수없이 불러도 딴전을 부면서 퉁명스럽게 "네 네" 대답만 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생겼을 때는 과거에 탈춤이 얼마나 민중에게 친근한 존재였던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멀쓱하니 키 큰 여자더러 "왜장녀 같다" "취발이 상투 짜나 마라" 하는 유의 말도 이 역시 탈춤에서 나온 말들이다.
먼저 영감의 제사
이조 후기 영조 때 청나라에서 조선이 명 나라를 잊지 못해 대보단을 세우고 제향을 받드는 일을 힐책한 사건이 있었다.
유척기가 사신의 어려운 임무를 띠고 가는 도중 이종성 속칭 장단 대신이라 하는 분의 향제에 들르니 의미심장한 얘기를 들려 준다.
늙은이가 밤에 남의 제사밥을 좋아하는데 이웃에 재가한 여인이 있어 먼저 남편의 제사를 받들므로 영감이 탓했더니
"당신이 만약에 불행하고 내가 살기 어려워 개가했다면 당신 제사를 뉘 있어 받들겠오?"
하여 영감이 그리 여기고 제사를 차리게 하여 내 그런 음식을 다 얻어먹었오.
유 척기가 청나라 정부의 문책을 받을 제 이 비유로써 대답하여 외교관계를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다 한다.
물론 사대주의의 얘기라 하겠으나 선견의 안목을 높일만하다.
그는 백사 이항복의 5세손이었는데 역시 백사 현손에 이 광좌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찌나 무섭고 점잖든지 어린애들이 학질을 앓을 때 그이 이름 석자만 써 붙이면 떨어졌다고까지 한다.
또 전라도 출신의 명필 이 삼만은 자기 아버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철천의 한이 되어 뱀만 보면 반드시 잡아서 먹었으므로 뱀 들어 올만한 데 그의 이름을 써 붙이면 얼씬도 못한다는 것이 그 지방에 전하는 얘기다.
모주
술에 중독되었달까 술 없이는 못사는 사람을 이렇게 별명지어 부른다. 그런데 진짜 모주는 그것이 아니다. 약을 넣지 않고 순곡식과 누룩으로 술을 담가서 먹던 시절. 서울에는 곧잘 모주집이 있었다.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뜨끈뜨끈하게 끓여낸 것이다. 입김이 허옇게 서리는 추운 새벽 "모주 끓었오!"하고 외치면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해장 겸 아침 겸 모여들 든다. 물론 값도 어지간히 싸다.
그런데 모주를 어미 모자를 넣어서 쓰는데 대해 이렇게들 설명하고 있다. 이조 15대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비록 계모일지라도 어머니는 어머니겠는데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궐에 유폐하는 폭거를 하였다. 그리고 대비의 어머니 노씨도 제주서 귀양살이를 십 년이나 하였는데 생계를 이을 도리가 없어 재강(술 지게미)를 사다 끓여 팔아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역시 생계를 이을 길로 술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서울 대가집 솜씨로 약주를 만들어 파니 섬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 들었더란다. 약주가 떨어지면 그 나머지라도 맛보자고 졸라 하는 수 없어 '막 걸러 팔아서' 막걸리가 되고, 그 지게미를 다시 끓여서까지 팔아서 이런 얘기다 나왔다는 것이다.
문래
고려조 말엽에 문익점이란 분이 있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벌을 받아 멀리 교지까지 귀양을 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밭에 허옇게 핀 이상한 꽃을 여인들이 줄로 서서 수확하는 것이 아닌가?
물으니까 그것으로 실을 짜아 옷을 짜 입는다는 것이다. 씨를 받았더니
"이것은 국금이라 외국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도로 뺏는다.
그때 살짝 씨앗 세 개를 손새에 감춰서 갖기는 하였는데 가져올 도리가 없다 글씨 쓰던 붓대 속에 넣어 귀양이 풀린 뒤 무사히 가지고 돌아오긴 했으나 처음 일이라 작물의 성질도 재배법도 모른다.
그래 봄에 그 세 개의 씨앗을 열흘 간격으로 하나씩 심었더니 둘은 죽고 곡우 때 심은 하나만이 겨우 싹을 내어 컸다. 이것이 개화되도록까지의 우리 나라 목화의 시조가 된 것이다.
목화를 수확하게 되자 씨 뽑는 기계를 생각해내고 여러 모로 민생에 도움을 주었는데 그 손자 문래라는 분은 처음으로 실 짜는 기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명칭이 없어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박태보가 살았을라구
뜨거운 것을 못 만지는 사람보고 흔히 하는 소리다. 박태보는 이조 19대 숙종 때 사람으로 왕이 장희빈을 불러들여 왕비를 삼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할 때 정면으로 간하다가 잡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은 분이다.
전하는 말에는, 종묘 제향에 향로를 반드는 봉로관이 되었을 때 으레 물수건으로 싸서 드는 법이건만 나랏일에 약간 뜨겁다고 싸서 들다니 말이 되느냐고 맨 손으로 들었다고 한다. 누릿한 냄새가 나기에 왕이 돌아다 보니 박태보의 향로든 손 끝이 타서 노란 연기가 오르는데 눈썹 하나 까딱 않더라는 그런 분이다.
그래 중전을 폐위하는 것을 간했을 때도 친국하는 자리에서 "너는 요놈 뜨거운 것 잘 참더구나"하고 인두를 달궈 단근질을 해서 역사상에 드문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어 금천(지금의 시흥)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간신히 노량진까지 이르자 형벌 여독으로 운명하였는데 그때의 나이 서름 여섯이었다고 한다.
보은단
홍 순언은 이조 중엽의 역관으로 공에 의해 당룡군까지 봉한 분이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 남자의 호기로 기관엘 들렸는데 대파의 말이 신기하다.
"귀한 댁 출신의 처녀가 있는데 하루 저녁 해우채가 자그마치 천냥이요 하루 저녁 모신 뒤로는 일생을 받들겠다 합니다"
일종의 객기랄까 남자다운 성격의 그는 성큼 천금을 던지고 그 여성을 만났다. 그러나 너무나 성숙하고 나긋나긋하여 손 한 번 안 만지고 내력을 물으니 아버지를 고향으로 반장해 모실 비용이 없어 몸을 팔아 감당하겠노라는 끔찍한 얘기다. 효심에 감동되어 그냥 돌쳐서려니 여인은 울며 아버지로 모시겠노라고 하여 부녀로서의 인연을 맺고 헤어져왔다.
그 뒤 홍 수언은 공금 포탈로 옥에 갇혔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다시 사신을 따라 중국엘 들어갔는데 그의 딸이 병부상서 석성의 후취부인으로 들어앉아 있지 않은가? 석성도 그를 장인으로 대하고 극진히 굴었다. 그리고 구원병 파견에 대하여도 남달리 주선하여 이 여송의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성 부인은 재생의 은혜를 잊지 못해 보은 두자를 무늬로 넣어 손수 비단을 짜서 선물로 하였으며 이것은 이조 오백 년에 가장 인정미있는 얘깃거리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홍 순언이 서울 복판의 다방골에 살았고 그의 동네를 '보은단 미담'의 고장이라 하여 '보은단골' 또는 담을 곱게 꾸미고 살았다고 하여 '고운담골'이라고 하였다. 한 때 정객들의 사교장이던 비장그릴은 이 '고운담골'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보호색 군복
우리 나라 사람의 아이디어로는 기발한 것이 많다. 이것을 조금만 발전시키면 훌륭한 발명으로 많은 사람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조 초기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모반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으로 도총사를 삼고 허 종,강 순 등으로 이를 도와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홍원 북청 싸움을 거쳐 만령 싸움에서의 일이다. 적은 높고 험한 영을 의지하여 완강히 항전한다. 대장 어 유소가 한 꾀를 내었다. 군사들에게 모두 풀빛 옷을 해 입혀 적의 눈을 속이고 접근, 높은 곳에 올라 소리치고 협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육군의 군복 색깔을 카키색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국이 해외 영토를 확장하노라 광분하던 당시 남아프리카의 토민과의 싸움에서 우연히 생긴 이름이다. 처음 해군을 상륙시켜 사울 때 상당한 희생자를 냈었는데, 때마침 범람한 카키강을 헤엄쳐 건너 뒤로 사상자 수가 부쩍 줄기에 그제사 보니 해군의 흰 군복이 흙빛으로 물이 들어 주위의 풀이나 흙과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인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착상은 그것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 된다.
또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접는 부채는 처음 고려에서 착상하고 제조하여 중국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를 고려선이라 하였고, 황실에서는 이 신기한 물건을 모본으로 하여 그곳 직공들에게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전하고 있다.
봉이 김선달
대동강 물을 팔아 먹었다는 것을 필두로 여러 가지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유쾌한 사나이다. 한 40년 전 만해도 '봉익이 김선달'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결에 이렇게 변했다. 충신주의 자린고비나 그런 이처럼 실지로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문으로 재담을 한 것은 모조리 김삿갓이 그랬다고 그러듯이 남 속여 먹은 얘기는 모조리 그에게로 붙여서 얘기하니 당자로서는 기막힐 일일 것이다.
앞서 든 대동강 물 팔아먹은 얘기만 해도 두 종류가 있다. 서울서 돈 많고 허욕 많은 영감을 하나 앞세우고 와 자기 집에 재우고 밤사이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돈을 나누어 주고 말하기를 "내일 아침 물 길어갈 제 이 중에서 한 푼씩을 내 앞에 던져 주고 가게. 나머진 술이나 사먹고"
이튿날 잠이 깨인 손님은 주인을 찾았다.
"강에 나가서시오, 그것이 생업이니께요" 슬슬 나와 보니 줄로 늘어서서 무진강한 강물을 길어 가는 사람마다 돈을 던지고 가는데 잠깐잠깐 불어간다. 그래 상당한 대가를 주고 그 권한을 샀다. 그러나 결과는 빤하다.
또 하나는 이렇다. 짚을 사다 여물을 썰어 어는 추운 날 대동강이 얼어 붙으려는 저녁, 배를 타고 들어가 상류에서 뿌렸다. 눈보라 치는 날 땅 사려고 온 사람을 데리고 간색을 갔는데, 눈을 쓸고 보면 볏짚이 턱 어울려 얼어 붙은 게 땅은 보나마나 기름진 좋은 논이다. 그래 헐값으로 팔았지만 손해는 갈 리 없고 이듬해 농사를 붙이려와 보니 물은 청청히 흐르고,
소화란 이렇게 평하니 어수룩한 구석이 뚫려 있어야 얘기가 제대로 성립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불강불욕
담원 정인보는 동래 정씨 명문의 후예로 고종 30년(1893년)에 낳아 6,25사변 중 납북 당한 채 소식이 끊긴 분이다. 그가 왜정아래 처신의 굴호로 삼은 것이 위의 글귀이다. 불강기지 불욕기신(그 뜻을 낮추지 말며, 몸을 욕되이 하지 않는다)은 굳은 신념의 표시이다.
조상의 이룩한 가풍과 타고난 천품으로 일찍이 학문의 기반을 이루었고 스물 하나라는 젊은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 동지들과 광복 운동을 하다가 가정 형편으로 중도에 귀국, 1923년 이래 연희 전문학교를 위하여 각 전문학교에서 국학과 동양사를 강의하며 시대일보,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도 진력하였다.
일제 말엽 어두운 시절을 용하게 겪고 해방을 맞아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는 서글픈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허어 책이 있어야지"
지조를 지키러 그 뜻을 낮추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생명같이 여기는 서책을 모조리 손놓았던 것이다. 왜놈 아래 본의 아니나마 협조하면서 13만 권이라는 장서를 지킨 최남선과는 그렇게 성격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불수산 지으러 갔다 금강산 구경
이조 말엽의 기인 정수동의 일화에서 나온 얘기다.
뛰어난 글재주로 추사 김정희의 지우를 입었으며, 또 두호해 주는 권세가도 있었으나 언제나 뜬 구름같은 행적으로 자유로이 돌아다녔다.
불수산이란 여자가 얘기를 낳을 때 고생않고 쉽게 낳으라고 먹이는 약이다. 부인이 얘기를 낳으려고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약을 지으러 나섰다가 길에서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온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조두순이란 대관 앞에서 수동의 그런 행적을 탄하였더니 "당대에 자네 있는 줄은 몰라도 정수동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를 감싸더라고 한다.
어떤 연회 자리에서 화제가 마침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으로 미쳤을 때, 모두가 '호랑이'니 양반이니 '도둑놈'이니 하니까 불쑥 한다는 소리가 "호랑이 탄 양반 도둑놈이 제일 무섭지 뭐..."
호피 깔고 앉아 갈퀴질하는 양반들을 면전에서 비양한 것이다. 그의 날카로운 풍자가 대충 이와 같았다. 철종 9년(1858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유고를 모은 하원시초 한 권이 전한다.
비오는 날의 나막신
이조 말의 비운의 정치가 김홍집(1842--1896)을 두고 세간에서 하던 소리다.
25세에 과거하여 벼슬 길에 나아가 39세에는 수신사로 일본 국내의 정세 파악과 병자 수호조규의 뒷처리 문제로 활약하였다.
그러자니 자연 당초 대신 중 가장 식견이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화를 반대하는 척사운동이 전개되어 대관들의 태도가 달라져도 그의 태도는 의연한 바 있었다. 미,영,독 여러 나라와의 수교에도 힘이 컸으며 개국 이래로 청,일의 세력 다툼 가운데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하였건만 그때마다 그들은 김홍집의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계속 요직에 앉게 되고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별명도 그래서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혁신파에게도 수구파에게도 쓰이었던 때문에 대가 약한 인물 같아도 보이나 중도의 인물인 때문에 또 식견과 외교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중용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희미해져가는 세력을 만회하려고 낭인들을 시켜 경복궁에 들어가 왕후 민씨를 시해하는 을미의 변을 일으키고 친일 내각을 세웠을 때 그 수반으로 뽑히었다가 아관파천으로 친로파가 정권을 잡자 거리에서 폭력배화한 보부상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 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애석한 일이다.
사명당의 사처방
사명당은 임진왜란 당시도 승병대장으로 활약하였고 전란 후 일본으로 왕래하며 피납되어 간 민간인을 대량 데리고 돌아오는 등 공로가 큰 유정, 자는 소운이라는 중의 호다.
임진란은 민족적으로 얼마나 크게 적개심을 자극하였든지 이를 소재로 한 임진록-또는 흑룡록은 민간에 널리 읽히어 일반적으로 민요가 한 작가의 작이 아니듯 한 작자에 의한 창작 이상의 것으로 전 민족의 몸부림, 염원의 표출이며 생의 영위인 민족설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민족의 기억에 새로운 여러 사람의 행적을 열거한 끝에 사명당이 일본에 들어갔을 때의 행적을 쓴 것에 이런 것이 있다. 그가 신승이라 하니 어디 견디어 보라고 구리 방석을 만들어 물에 띄우고 거기 앉혀도 가라앉지 않고, 또 구리로 한 칸 집을 짓고 거기 들여보낸 뒤 사면으로 숯을 쌓고 불을 지피어 대풀무로 부니 구리가 녹아 흐를 지경이라 나중 문을 열고 보니 눈썹엔 서리가 앉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으며 "왜 이리 추우냐?"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 방이 춥든지 하면 "사명당의 사처방의 사처방인가 왜 이리 추워?"하는 말이 상식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사부집 자식이 망하면 세 번 변해
사부란 양반이다. 잘 살던 양반 집이 망하게 되면 자식이 똑똑히 나지를 못하여 자연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세 번 변한다는 것이다. 첫 번 송충이가 되는 법이니 이는 조상 산소 주위의 소나무를 베어서 먹는다는 뜻이다. 둘째로 좀버러지가 되는데 이것은 조상이 읽던 책을 팔아 먹는다는 얘기요, 끝으로는 호랑이가 되는데 이것은 집에서 부리던 종을 팔아서 먹기 때문에 사람을 먹는 호랑이가 됐다는 얘기다. 이 밖에도 망하는 것으로는 종가집이 망해도 신주 보하고 주독은 남는다는 말이 있다.
또 이 이외에도 더 나아가 이런 얘기도 있다. 양반 집이 망해도 신주 주독은 남고 놀던 계집이 망해도 엉덩이 짓은 남고 남산골 샌님이 망해도 거름 걷는 봇수는 남는다. 또는 왈자가 망하여도 왼다리길 하나는 남는다 등등으로 그들의 처하던 사회상을 잘 나타낸다.
대개 여러 개를 열거하여 말할 때는 맨 나중의 것을 강조해 말하기 위하여 위윗 것들은 들러리로 덧붙이는 수가 많다. 모두 다 못마땅해 하는데서 나온 말이니 불평의 방향을 미루어 짐작할만한 일이다.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씨 조선 초기에는 신흥의 왕운을 띠었다고 할까 자손들도 잘 나더니 후기에 가서는 어찌 그리 손이 귀하고 단명을 한지 이 역시 가운이지 모를 일이다.
태종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맏이가 양녕대군이요 둘째가 효령, 셋째가 충녕 곧 세종대왕이요 넷째가 성녕대군이다.
양녕이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되는 태종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때문에 임금 자리를 모피하고자 일부러 광패하게 굴어 여러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여론을 일으켜 폐세자를 당하게 되었다.
둘째 효령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일까 얌전하게 독서를 하고 있으려니 형이 들어와 발길로 "이 놈 죽고 싶으냐"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과연 그런 일이라 그 길로 불교에 귀의하여 어찌나 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웠든지 쿠렁쿠렁하면서도 질긴 것을 '효령대군의 북가죽 같다'고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파주 두 형을 청하여 동기의 정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술 먹고 고기를 씹으며 효령 염불하는 자리에 나갔더니 충고 비슷한 소리를 하는지라 활개를 벌이고 춤을 추며 이렇게 외웠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이 아니 즐거운가?"
그의 묘와 사당은 서울 영등포구에 있고 사당의 간판은 지덕이라 하였다.
삼 서근 찾았군
이씨 조선 선조 때의 일이다. 난리다 나리라는 등 소문이 뒤숭숭하던 판국이라 임금은 지인 지김이 있는 어떤 명사에게 사람 하나 천거 하라고 부탁하였단다. 그랬더니 얼마만에 들어와 복명하기를 "어명대로 하나 구하긴 했습니다만은 워낙 쇠약해 있으니 삼 서근만 하사해 주시면 소복도 되려니와 특히 역량을 발휘하여 봉사할 것입니다"
그래 어련하랴 하고 삼을 내보내 주었는데 그 뒤 데리고 들어온 것을 보니 자 세치 관복이 끌린다고 하는 작은 체수에 얼굴은 흐르고 도무지 볼품이 없다. 임금은 어이가 없어 내뱉듯이 말했다.
"삼 서근 버렸군!"
다른 이 아닌 오리 이원익이다.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 선조는 팔자에 없는 피난 길에 오르게 됐는데 아무리 초조한 몽진길이라도 수라가 번번히 늦어 시장해 배길길이 없다. 그래 담당자를 불러 나무라니까 "다름아니라 이원익이 와서 먼저 한 가지씩 줏어 먹고는 뙤약볕에 한참씩 드러누웠다가 들여보내기 때문에 늘 이렇게 늦습니다" 하는 대답이라 그를 불러 탄했더니 "이 분란 중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 신이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본 것이고 만약에 독이 들었더라고 볕에 누웠으면 빨리 퍼질 것이라, 그래서 신의 소견껏 하였을 뿐이옵니다"
임금은 그제사 고개를 끄덕이며
"삼 서근 찾았군!"
그는 뒤에 수 팔십을 넘기고 원로대신으로 광은연중 고문 구실을 하여 세상이 바로잡히는 것을 보고야 세상을 떠났다. 삼 서근이 문제가 아니다.
서생은 부족 여모라
단종을 복위하려다 참혹한 죽음을 당한 늙은 장군 유응부가 한 말이다. 애당초 단종의 복위를 논의했을 때 육신 외에 김 질이라는 사람까지 끼어 있었고 김 질의 장인 정창손은 사업이 성공하는 날 영의정 재목으로 지목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사의 기회로 노렸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날, 전각이 비좁다고 한명희 등의 꾀로 운검을 폐하라는 명이 났을 때, 군사는 신속을 존중하니 그냥 들이치자고 했던 것이 유응부의 주장이었다.
본래 임금 계신 전각에는 아무도 칼을 차고 오르질 못하고 운검이라는 직책을 맡은 분이 운검이라는 긴 칼을 메고 전각 네 귀에서 호위해 섰게 마련이라 그냥 들이친 대도 상당한 가능성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성삼문 등이 주장하는 바람에 일은 연기가 되고 시일을 천연하다 보면 성공할 가망이 적다고 본 김 질이 자기 장인에게 얘기하고 장인 정창손은 다시 이것을 고변해서 참극은 벌어졌던 것이다.
참혹한 형벌이야 이루 적지 않겠거니와 유응부는 이러한 말로 문관 출신 동지들을 꾸짖고 단근질하는 쇠꼬치를 집어던지며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고 외쳐 꿋꿋한 기상을 보여 더욱 유명하다.
서해어룡동 맹산 초목지
이순신장군이 자신의 칼에 새겨 지녔던 문구이다. 바다를 두고 맹세하면 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을 향해 맹세할 때 풀과 나무도 알 것이다. 이 충무공에 관하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일본이 노서아를 상대로 노일전쟁을 벌였을 때 일이다. 연합함대로 이끌고 나가 노서아의 발틱함대를 전사에 없을 만큼 전멸시키고 이름을 떨친 도오고 대장이 개선했을 때 도꼬 제국 호텔에서 조야를 망라하여 성대한 환영연이 벌어진 자리에서 유명한 외교관 고또가 일장 연설을 하였다.
"이번의 도오고대장의 전승이야말로 멀리는 영국의 넬슨에 해당되고 가까이는 조선의 이순신장군에 비길만한 대공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다음 본인의 답변 차례가 되자 본시 말이 적은 그였지만 엉뚱하게 실마리를 꺼낸다.
"이번 이 사람의 한 일을 넬슨에 비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럴만하다. 다만 조선의 이순신에 비한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소리다. 영국은 거국일치가 되어 싸우는 해군의 한 정점으로 누구나가 한 사람 총책임자로 앉아야 할 그런 태세였고 일본 역시 군신상하가 일치가 되어 나라는 사람을 내세웠을 뿐이니 이것은 국가 전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운 것이요. 두 나라의 형편은 매우 비슷한 바가 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은 그의 임금이 그를 밀었던가? 오직 하나만의 힘으로 정성으로 나라를 버티어 싸웠던 것이니 그는 신이요 사람은 아니다. 이 사람은 도저히 그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관점이 뚜렷한 겸손한 발언에 오히려 그의 명성을 더 높이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소대성이 항상 잠만 자나?
소대성이란 소설의 주인공인 가공의 인물이다. 이조 후기에 발표됐을거라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계모의 참소질로 자기 신변을 해명할 길이 없어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그렇다고 친구들을 만나면 더욱 의심을 받겠고 달리 소일할 거리가 없다.
그래 날마다 잠만 자는 것으로 작품에 나와 있다.
물론 그 뒤 주인공은 누명을 벗고 임금과 주위 사람들의 신임을 회복하여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우고 하는 정해진 코스로 얘기는 진전된다.
이 소설은 상당히 널리 읽혔던 듯하여 이러한 표현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설에서 연유된 용어로는
"유현덕이 모양 울기만 하느냐?"
"장 비 군령인가?"
"조자룡이 헌 창 쓰듯 한다"
"조 조는 웃다 망한다"하는 유의 삼국지연의에서 나온 것이 가장 많고 "야단 장 도감을 친다" 같은 '수호지'에서 온 것도, 본래의 의미는 잊어 버린 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손돌이 추위
음력으로 시월 스무날은 예외 없이 춥다. 이것을 손돌이 추위라고 하는데 걷잡을 수 없는 한 가지 전설이 널리 통하고 있다.
강화도는 본토와의 사이가 염하라는 강 너비만 밖에 안되는 수로로 가로막혀 있어 섬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고 이 조그만 물줄기가 오랜동안 몽고병의 침공을 저지하였었다.
그런데 고려의 어느 왕 때 본시 변란 잦은 고려조의 일이라 왕도 초조하게 이 수로를 배로 통과하게 되는데 손돌이라는 일등 사공을 길잡이로 세웠건만 점점 첩첩 산중으로만 이끌고 가는 것 같아 가뜩이나 불안하던 끝이라 그만 그 사공을 죽여버렸다. 그 죽인 곳이 지금의 손돌목이요 뱃길의 가장 험소라고 한다.
그런데 왕은 그의 유언대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 흘러가는 대로 따라 행성하여 비교적 수월하게 인천 앞 바다에 나올 수 있었고, 그제사 그의 충성심을 알아 죽인 것을 뉘우치고, 후하게 제 지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은 날에는 천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춥다는 것이 거기 얽힌 전설이다.
어떤 사람이 하필이면 시월 스무날이 제 아비 제삿날이라 무심코 "고놈 죽은 날은 만날 이렇게 춥다'고 하여 망발하였다는 얘기도 민간에서 흔히 하는 소리다.
송도 말년의 불가살이
이조가 서기 전 고려조에서는 나라가 망하려고 그랬든지 말년에 여러 가지 변고가 생겼었다고 정한다.
그 하나가 편조(민간의 이름으로 신돈) 왕의 신임을 독차지하여 회포를 부린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 우왕,창왕도 사실은 신돈의 소생이라는 것이 왕위에서 내어 쫓는 구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신돈이 권력을 잡은 뒤로 많은 대관의 부인을 더렵혔는데 그의 소생에게는 돌때를 둘러 표시하게 한 것이 오늘날 전설이나 이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 양도에 좋다고 지렁이를 회쳐 먹는 등 하였는데 매양 누런 개나 푸른 매를 보면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늙은 여우의 정이라고들 하였다 한다.
이처럼 타락 혼란한 중에 불가살이라는 괴물이 나타났는데 쇠라는 쇠는 닥치는대로 집어 삼켰다고하는 것이다. 왜정 말엽 군기 만든다고 일본인이 고철이며 금속류를 강제로 징발해 갔을 때 송도 말년의 불가살이가 다시 나타났다고들 하였다.
혹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부 혁명 세력이 무기를 만드느라 은근히 쇠붙이를 모은 데서 파생된 얘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송도의 삼절
삼절이라면 흔히 시서화를 말한다.
즉 선비의 점잖은 그림인 문인화에서 그림과 찬으로 쓴 글과 그것을 화면에 써 넣는 글씨 세 가지가 다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런 말로 호칭한다. 우리 나라로는 정조 때 자하 신위 같은 이가 그럴 정도다.
그런데 여기 얘기하는 삼절은 다르다. 이조 중엽에 송도(지금의 개성)에 황진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인물도 뛰어났으려니와 글도 짓고 속류에 휘말리지 않아 스스로 높이 처하였다.
그래 그 기생이 송도에 다시 없이 뛰어난 것으로 산수 경치에 박연폭포, 남자로는 화담 서경덕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을 꼽았던 때문에 얘깃거리가 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또 많은 소설가에 의해 윤색된 일이지만 당시에 도학 높다는 사람의 여색에 대한 태도를 시험해 봤더란다.
첫째 유학자인 퇴계 선생은 담담하려고는 하나 무척 고민하는 눈치였고, 둘째 화담선생은 자신의 요구대로 쓸어안아 주기까지 하는데 마치 물건이나 다루듯 전혀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면벽 9년의 생불 스님이라는 지족선사를 시험해 봤더니 전혀 접근도 못하게 하다가, 그만 유혹을 배기지 못하고 파계하고 놀아난다. 세상에서 이것을 망석 중이라 하고, 이것을 제재로 한 야단스런 춤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진이는 자신을 가지고 이렇게 삼절을 꼽았다는 것이다.
쇄골표풍
옛날 형벌은 참혹한 것이 많은 중 역적이 났을 때는 남자는 가족의 씨를 말리고 여자는 종을 박으며 그의 살던 집터는 다시 남이 살지 못하게 헐어 버리고 그 자리는 연못을 파는데 이것을 파가저택이라고 하였다.
또 사형에도 가장 점잖게 약을 내려 자살을 명하는 사약에서부터 참수(목베기), 효수(잘린 목을 내어 걸어 광고하는 것), 능지처참이라고 팔 다리 목으로 토막쳐 죽이는 형벌이며 시체를 다시 목 베는 육시 등 끔찍하고 다채롭다.
그런 중에도 형벌 주어야 할 사람이 이미 죽어 장사 지냈을 때는 시체를 파 내어 목 베는데 이것을 '부관참시'라 하고, 전기에 '화가 천양에 미쳤다'라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연산군 당시의 간신 임사홍의 아들 희재가 시국을 풍기하는 시를 지어 임금이 이를 죽이려 하자
"이놈의 성행이 불순하건만 진작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처분대로 하십시사"하여 참 당하던 날 잔치를 베풀어 질탕히 놀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다.
이들 몇은 공주를 장가들여 부마를 삼고 갖은 농권을 다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쇄골표풍할 놈이라고 들 하였다.
살아서는 영화를 누릴지 모르나 죽은 뒤에라도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 없애 버릴 놈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런 형벌을 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술 잔 깨뜨린 건 파맹의 뜻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나 금산에서 수장 이하 전원이 고스란히 순국한 7백의사총의 주인공 중봉 조 헌에 관해 이런 얘기가 있다.
오랜 전란 끝에 일본을 평정한 평수길이가 국교를 청해 오자 우선 그 본 뜻이나 알아보자 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그 사신을 대하는 태도가 수수께끼에 차있다.
50일 만에서야 우리 사신을 대했는데 술잔으로 술을 권하고는 문득 깨뜨리고 새 잔을 썼으며, 어린 것을 안고 나와 서서 다니며 응대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들은 조정 안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는데 중봉은 이렇게 해석하였다.
"술잔을 깨쳤다는 건 애태까지의 맹약을 깨뜨린다는 것이요, 어린 것을 안고 나온 것은 우리는 너희를 어린애 같이 본다 하는 뜻이다"
일본 사신을 참할 것을 상소하니 조정에서는 일부 찬동도 있으나 실성한 사람으로들 돌린다.
그러나 그는 집안 식구와 제자들을 총독하여 전란에 대비하였다. 본시 두드러진 벼슬도 한 적이 없는 분이건만 의병을 일으켜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뒤에 예조판서를 증직하고 문묘에 배향이 되었으나 그의 뜻을 생전에 펴 주지 못한 이상 모두가 헛된 일일 것이다.
습지자도 불가무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농성 중의 일이다. 끝까지 버티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뜻은 장하나 그만한 실력은 없고 그렇다고 화의를 받아 들이자니 전고에 없던 일이라 결정을 못 내리는 중에 시일만 천연하여 이젠 무릎 끓고 항복할 수 밖에 없는 극단의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 항서를 써 놓고 장차 청진에 가려 하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이것을 찢어 던지며 통곡하였다.
본시 화의를 이끌어 오던 이조판서 최명길은 "이미 적을 당할 순 없고 척화하는 것을 청의라 하겠지만 나는 혼자 더러운 이름을 받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하고 이것을 차근차근 줏어 맞추었다. 그래 그때의 사람들이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겠고 줍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겠다"고 하였다 한다.
화의가 성립되자 김상헌은 목을 베어 자결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후에 삼학사와 함께 심양까지 끌려가 여러 해 고초를 겪은 뒤에서야 놓여 나왔다.
함께 잡혀 갔었는데 진중에서의 꿋꿋한 태도를 보고 김상헌도 오해를 풀어 서로 화목하였다고 한다.
신이화가 많이 폈군!
신이화란 본시 목련을 가리킨 말이지만 흔히는 봄에 일찍 피는 개나리를 이렇게 부른다.
개화기의 선각자요 왜정 때 기독교청년 회장으로 민족의 지도자였던 월남 이상재는 날카로운 풍자로 사람의 폐부를 궤뚫는 많은 교훈을 남겼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머에 차 있었다.
그가 어느 자리에 이완용을 면대하여 말하였다.
"대감 일본으로 가십시오. 대감이 계셔서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이 망해야 우리가 독립이 될 것이다. 그러니 대감이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 번은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 총독부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 들어서면서 마치 준비나 하였던 것 같이 "이크 신이화가 많이 폈군!"
둘레의 사람들은 한참만에야들 깨닫고 어이없어 속으로들 웃었다. 신이화란 개나리요, 왜놈 밑에서 벼슬을 하니 개 나으리라는 뜻이다. 그가 또 어느 자리에서 "65세의 청년 이상재는..." 하였다. 모두들 웃으니까 "내가 청년회장인데 회장이 청년이 아니면 어떤 놈이 청년이란 말이냐?"하여 한국 사람의 조로증을 빈정거리기도 하였다. 한 번은 형무소에 갇혔다가 풀려 나왔는데 길에서 만난 제자가 인사를 하였다.
"선생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대답은 않고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 "자넨 지금 호강을 하고 있는 셈인가?"
그의 날카로운 구변이 대충 이와 같았다.
신 정승 구 정승
이조 초기에 살인여마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단종의 비극을 연출하여 대망의 왕위에 오른 세조가 득의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 남다른 공로가 있는 신숙주와 구치관을 두고 이런 얘기가 있다. 신숙주는 영의정이요 구치관은 새로 우의정이 되어 정승 줄에 서게 됐는데 하루는 왕이 두 정승을 불러 놓고 좌석을 마련하여 한 잔하는 것이다.
"내 이제 부를 것이니 대답을 하라. 구 정승"
그래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그게 아니라 먼저부터 있던 정승인 신숙주를 부른 것이라고 벌주로 한 잔, 다음 "신 정승"하고 부르기에 둘 다 대답을 않았더니 어른이 부르는데 어째 대답을 않느냐고 둘 다 한 잔씩. 이것이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 종일 취토록 먹여서 내보냈다고 한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변란을 겪은 뒤지만 군신간 화기 어린 정경이라 할만한 일이다.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어
가만 두더라도 임자는 따로 있다는 식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안동 김씨 외척 세력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 그럴싸하다.
이조 말엽 순조의 국구 김조순이 영의정이 되어 정권을 잡은 이래로, 김씨 일문이 어찌나 드세게 굴었든지 이씨의 왕조가 아무 때고 김가의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데서 이런 말이 유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김조순에게 전라도 나주 출신의 불여우 같은 첩이 있어, 뒷손으로 회뢰와 청탁이 성행하고 수령 방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오다시피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나합이라고 불렀었다. 나중 흥선 대원군이 실권을 쥐게 되자 이 여자를 불러 들여 물었더니 합이라는건 조개 합자라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고 했다는 여자다.
이 사람들이 정권을 오래 쥐려는 욕심에서 종친 가운데 왕통을 이을만한 똑똑한 사람은 차례로 몰아 죽이고 보니 이런 말이 나옴직도 하였다. 그래 흥선군의 남연군도 또 흥선군 자신도, 자기네 가문을 보전하기 위하여 상갓집 개라는 별명을 들으면서까지 행적을 감추어 똑똑지 않게 보이기 위하여 무진한 애를 태웠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악망위에 턱 걸었나?
이조 초 태종의 부마에 평양군 조대림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둘째 따님 경정공주의 남편이다.
장인되는 임금의 배경을 믿고 어찌나 횡포한 일이 많았든지 세상에서 악망위라 별명지어 불렀다. 그래 무서운데 없이 굴든지 하면 "저놈이 악망위에 턱을 걸었나?" 하는 것이 일상용어에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법으로, 사헌부 관원이 하인에게 먹통을 들려 가지고 다니다가 백성의 원성이 높은 집은 대문에다 먹칠을 하여 외부와 왕래를 못하게 하고 법으로 다스리는 제도가 있었다.
유명한 맹사성이 헌관으로 있을 때 이 집에 먹칠을 하고 조대림을 잡아다 단단히 신문을 하였다. 태종이 노하여 "어느 놈이 내 말도 안 듣고 내 사위에게다 손을 대느냐?"고 잡아 죽이려고 하다, 주위의 만류로 그만 둔 적도 있었다.
조대림의 부인되는 이가 작은 공주요, 그의 살던 동네를 소공주동이라 하였는데, 오늘의 소공동의 이름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 뒤에 그의 집은 남별궁이 되어 외국 사신의 숙박소로 쓰이더니, 그 자리에 눌러 '조선호텔'이 들어 앉아 지금도 외국 귀빈의 숙소로 쓰이니 신기한 일이다.
안성 맞춤
안성은 유기 그릇의 산지다. 거기 유기쟁이에게 특별히 마춘 방짜 유기를 흔히 안성마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미리 예정이나 하였던 것처럼 꽉 들어맞는 것을 안성마춤이라고 그런다. 그렇다면 유기가 이 말의 근원되기에는 알맞지 못하다. 물론 맞춤이라는 말은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고로의 얘기를 들면 안성에서는 갓바치들이 가죽신을 기성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 가정으로 들여 주문을 받아 맞추어서 지어 팔았더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을 찾았을 때 꼭 발에 맞을 것이 분명하니 이 말도 상당히 근사하게 들린다.
그런데 고려조 공민왕 때 벼슬길에 오른 안 성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한 쪽 눈이 작아서 아명을 소목이라 했는데 그 이름 그대로 과거하여 벼슬을 했더니, 왕의 말이 그 이름이 속스러워 쓰겠는가고 두 글자를 합쳐 한 글자로 만들어 쓰게 하였다. 그래 그의 이름이 '안성'이 됐는데 이것이 '안성'마춤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 이름을 맞췄다는 얘기는 서적에 많이 나와 있으나 이것이 안성마춤의 어원이 된다는 것은 요 몇 해 사이에 나도는 얘기다.
양주 밥 먹고 고양 구실 한다
경기도 고양군은 서울시로 점점 편입이 되어 줄어 들었지만 그 읍이 벽제관 안말이다.
본시 '벽제관'이라는 것은 그곳 객사의 이름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여기서 승리를 거둔 때문에 왜정하에 그냥 지명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읍의 길을 가운데 두고 맞은 편이 양주군이다.
그러니까 관청에 구실 사는 사람 가운데는 고양 땅에 주소를 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그래 이런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좋지 않게, 즉 이 회사에 적을 둔 사원이면서 이해가 상반되는 상대방 회사의 편의를 봐 준다든지 하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니까 최근 정계에서 흔히 쓰는 사꾸라라는 말과 매우 비슷한 내용이다. 사꾸라란 일본말로 말고기를 말하는 것으로 쇠고기보다 빛이 더 붉대서 하는 소리다.
질 좋지 않은 고기, 장사들이 쇠고기 가운데 슬쩍 슬쩍 섞어 팔았기 때문에 본색을 숨기고 상대편 진영에 끼어 들어가 자기 편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당하는 측에서 보면 양주밥 먹고 고양 구실하는 놈 때문에 피해를 입는 셈인 것이다.
어우동
이조 초기 양가집 출신의 음탕한 여자의 이름.
그는 지승문 원사 박 모의 딸로 자색이 있고 집도 부자였다.
종실 태강수의 아내가 되었는데, 음탕한 본성을 드러 내었다.
한 번은 장색을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장인이 의젓하고 준수하게 생겼었다. 그래 종의 옷을 입고 곁에가 붙어 앉아 그 솜씨를 칭찬하고 하더니 결국 내실로 끌어들여 수욕을 채우고 남편이 돌아오면 숨고 하였는데, 끝내 남편에게 들켜 쫓겨 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더욱 방자해져서 계집종을 놓아 미남자가 지나면 불러 들이고 또 계집종도 제 몫을 잡아 들이며, 때론 거리에 나아가 돌아다니다가 끄는 이가 있으면 자고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또 종실 방산수와도 사통하고 아주 집에 맞아 들여 부부같이 지내기도 하였다. 제법 서로 시로 회답하였다고도 전한다.
그밖에 무수한 조관과 선비가 관련되어 모진 형벌을 받고 귀양간 사람이 수십인이요 드러나지 않은 사람은 헤일 수 없었다.
사헌부에서 죄를 논할제 죽이기까지는 않을 뜻이었으나 위의 명령으로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해 거리에서 그 종년과 함께 목 베이었다.
수원의 한 기생이 손님을 안 받는다고 볼기를 맞고는 "어우동은 음란했다는 죄로 벌을 받더니 나는 음란하지 않다는 죄로 또 매를 맞으니 조정의 법이 이처럼 공번되지 못한가?"고하여 한때 얘깃거리가 되었다.
언문 진서 섞어작
이조 후기 정조 때 무식한 판서로 유명한 이문원이란 분이 있었다. 그 양아버지 이천보가 사도세자(속칭 뒤주대왕)를 위해 애쓰다가 자결한 때문에 정조는 서로의 아버지 생각을 하고 공부가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중요하였다. 이문원 역시 무식한대로 기지와 배짱으로 진심껏 봉사하여 가지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한 번은 간소배들이 그를 과거에 도시관으로 천거했는데 "내야 무어 알겠오? 대감들 요량껏들 하시오" 해 놓고, 얼마만에 "집의 애들도 커 가는데 거 글씨 잘 쓰고 글 잘된 거 있거든 몇 장 골라 봐 주시구료" 하였다. 멋모르는 시관들이 골라 주었더니 그것으로 발표를 해 버려, 이조 오백 년에 전무후무하게 공평한 과거가 되었더라고 한다.
그가 한 번은 남산에서 놀이가 있어 나갔더니 시들을 짓는다고 야단들이다.
그래 선수를 쳤다.
알각달각 등남산 하니 승지 참판 영감내라 언문진서를 섞어 작하니 시비자는 황견자라.
따지는 놈은 우렁개 아들이라 하였으니, 좋으니 그르니 말도 못하게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또 한 번은 모화관에서 중국 들어가는 사신을 송별하는데
동지사 모화관
상부사 서장관
연경로 삼천리
거평안 내평안
이라고 읊어 이 역시 극진한 우정을 표시한 평명한 글이라 하여 널리 알려진 것이다.
여언이, 시야로다
이조 초의 명재상으로 널리 알려진 황 희 정승의 일화에 이런 것이 있다. 그는 청백하여 살림이 군색하였으나 마음이 너그럽고 통이 커서,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 못할 일을 곧잘 하였다.
하루는 집에서 부리는 두 종년이 서로 싸우고 와서 호소한다.
"아무개 년이 이리이리 하여서 쇤네가 이리이리 하였사온대 제 말이 옳습죠?"
"오냐 네 말이 맞다"
상대방 여자가 달려와서 제 입장을 발명하며 떠드니까
"오냐 네 말이 맞다"
서로 주장하고 싸웠는데 둘 다 맞을 리는 있을 수 없다. 부인이 옆에서 보다가
"아이 참 대감 딱도 하시오. 아무개 년은 이렇고 요년은 이러니 이 말이 옳지 그래 다 옳다는 말이 어딨어요?"
"그래 그래 당신 말이 옳소"
이렇게 대답하였더라고 한다. 하기야 주장하는 한편 말만 들으면 제각기 다 옳지 않은 바도 아니지만, 이렇게 무능한 분이 어떻게 조정에 섰나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하루는 대궐에 사진하려고 관복을 정제하고 의자에 앉아 떠날 차비 되기를 기다리는데, 부인은 그 방에 들어서다 말고 무리청 하였다. 전신에서 뚝뚝 넘쳐 흐르는 위엄, 찬 바람이 훵 돌 지경이다. 황 정승은 빙그레 웃으며 "우리 마누라가 이제야 정승을 알아 보는군!" 하였더라니 조정에서의 그의 태도를 미루어 알만하다.
예황제 부럽지 않다
몸 편하고 우대 받고 호강하는 폼을 설명하는데 일본 임금의 생활을 인용한 것이다.
'용재총화'에 보면 "일본국에 황제가 있고 국왕이 있으니, 황제는 궁중에 깊이 파묻혀 하는 일이 없고 다만 아침 저녁으로 하늘에 절하고 해에 절할 따름이어서 세상에서 권력이 없으면서 존귀한 자를 왜황제(일부 발음은 예황제)라 이른다" 하였으며 그의 정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다.
국왕이 오로지 국가의 정치를 주관하고 쟁송을 처단하였다. 저들의 말하는 장군을 국왕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대신이 있어서 각각 병사를 가지고 지면을 나누어 웅거하여 때로 반란을 꾀하여 명령에 거역하나 왕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전의 우리 나라 지식인이 가진 일본에 대한 이해도를 짐작할만하다.
또 "전혀 노루, 사슴, 소, 돼지를 먹지 아니하며 다만 개 먹기를 좋아하고 또 잉어를 즐겨 먹어 이것을 '제일 아름다운 맛'이라고 하였다"고 설명하였으니 당시의 풍습을 짐작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오비가 삼척이라
'내 코가 석자라' 라고도 하는데 '지금 내 처지가 급하게 되어 남을 동정할 때가 아니라' 하는 뜻으로 쓰인다.
신라시대 김방이라는 사람이 있어 형제가 살았는데 동생은 부자나 - 여기서는 흥부전과 정 반대다 - 형 방이는 가난하여 빌어먹다가, 누가 땅 한 귀퉁이를 주어 농사를 지으려고 아우에게 씨앗을 얻으러 갔더니 심술궂은 아우는 씨앗을 모두 쪄서 주었다.
방이는 그것도 모르고 심었는데 오직 한 그루만이 나서 커 한 자 길이나 넘는 이삭이 달렸다. 진기하여 주야로 지키는데 하루는 새가 와서 잘라 물고 달아난다. 쫓아가다가 날이 저물어 새가 들어간 돌 틈서리에 밤을 나게 되었다.
그런데 붉은 옷을 입은 여러 아이들이 나와 노는데 금 방망이로 두들겨 술과 음식을 내어 먹고 즐거이 논다.
새벽녘이 되자 그 방망이를 바위 틈에 꽂고 헤어지므로 방이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큰 부자가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동생이 저도 그렇게 되려고 그곳에 갔다가 도깨비들에게 붙잡혀 코를 석자나 잡아 뽑혀 코끼리처럼 되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상이 흩어진 신라시대 기록에 남아 있는 얘기인데 위의 말은 이러한 설화에서 나온 것일지 분명하다.
용병하는 술모라
고려 말의 최 영 장군은 호를 철성이라 하였다. 젊었을 때 그 아버지가 매양 경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흙과 같이 하라" 하였으므로 이 네 글자를 큰 띠에 서서 종신토록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았다.
어느 때나 그렇지만 당시의 재상들이 서로 맞이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고 다투어 맛난 음식을 장만하여 호사를 다투었는데 그만은 그렇지 않았다.
한낮이 지나도록 두었다가 다 저녁때서야 기장을 섞어 밥을 짓고, 여러 가지 나물로 찬수를 삼았다. 손들이 주렸던 판이라 다들 먹고 나서는 "철성댁 식사가 유난히 맛있다"고들 하면 그는 웃으며 "이것도 용병하는 술모니라"고 하였다 한다.
이 태조의 위화도 회군 뒤 형벌을 받아 죽을 제 "평생에 악한 일을 한 일이라고는 없건만 오직 임 령을 죽인 것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탐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성 현이 '용재총화'에 이것을 쓸 때까지도 무덤에 풀이 없어 홍분이라고 하였다는데 지금도 고양군 벽제면에 있는 그의 묘는 역시 홍분 그대로이다.
을축 잡자
언제나 민중은 자신들의 억울한 심정을 민요에 붙여 곧잘 토로하게 마련이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 산천이 밝아온다.(후렴) 에에 에헤이에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을축 사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일제 - (후렴) 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 한다 - (후렴)"
이상은 경복궁타령의 첫머리 부분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동원된 팔도 기술자 일군들 사이에서 퍼진 노동가요다.
그런데 여기 '을축 사월 갑자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실지로 경복궁 역사를 시작한 것이 1865년(고종 2년) 4월의 일이다. 사실대로 노래 불렀다면 그만이겠지만 여기 갑자 을축이 뒤집혀 놓인게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은연 중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고 비방하는 소리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되나?" 하는 속담은 이조말 민중전의 지나친 발호를 노골적으로 욕한 것이요 "나이나 적은가 갑술생, 키나 작은가 왱이래..."하는 것은 폐인에 가까운 순종 황제의 무능을 개탄하여 퍼졌던 객담의 일부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
인왕산 하면 지금도 서울 복판의 나무 하나 없는 바위산이지만, 옛날에는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강감찬은 민족적 영웅으로 숭앙할만한 장군이거니와 그에 관하여는 초인적인 전설이 많이 있다.
당시 남경이라던 서울엔 어찌나 호랑이가 많은지, 그가 판관으로 있을 때 군정을 시켜 뒷산 양지에서 졸고 있는 늙은 중을 불러오라 하였다.
"너희들이 들끊어서 도무지 백성들이 잘 수가 없어. 그러니 족속을 다 데리고 곧 떠나라" 곁에서 보던 사람이 이상해서 물으니 '네 본색을 드러내 보아라" 그랬더니 그 중이 두 발 길이나 되는 큰 범으로 화하여 붉은 입을 벌리고 '아응' 하는데 참으로 무시무시하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호랑이가 한 줄로 늘어서 힘없이 후퇴하는데 밤낮 사흘이 걸리더라는 것이다. 모두 강감찬의 한 마디 호령으로 두만강을 건너 갔는데, 마침 새끼 배어 만삭이 된 호랑이가 하나 있어서 남겨 두게 하였더니 그것이 번져서 한국의 호랑이가 되었다는 얘기다.
강감찬은 그밖에도 서울 안의 맹꽁이를 울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옥천에서는 모기를 물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등 일화가 많다.
원효, 퇴계, 충무공과 함께 조선의 4대 명인으로 치는 분인데, 다른 분은 서울의 거리 이름을 하나씩 얻었건만 강감찬을 빼 놓았다는 것은 여간한 실책이 아니다. 그의 낳은 터는 관악산 밑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라는 석탑이 서 있다.
전조림
이조말의 정치가로 어윤중이라는 분이 있다. 개화기에 처해 국고를 정비하고 경제를 바로 잡으려 무던히도 애쓰던 성실한 행정가였건만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허물어졌을 때, 각원의 한 사람으로 군중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그가 탁지부 대신으로 어찌나 예산을 깍고 깍아 긴축 정책을 쓰든지 당시의 사람들이 그의 성자를 거두절미하여 밭 전자를 만들어 이러한 별명을 지어 불렀던 것이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이런 분이 몇 분만 조정에 있었던들 그 꼴은 안되었을 것이다.
당시 별명 지어 부르기로는, 유길준이 국한문 혼용을 시작하여 모든 공문에 '이리이리흠'이라는 문투를 쓰기 시작하였다하여 '유흠'이라고들 불렀었다.
시대는 아주 떨어지지만 최남선이 줄곧 메투리를 신고 동분서주하였다 하여 '최 미투리', 주시경은 매일 교재를 프린트하여 모퉁이로 들고 다니며 가르쳤다하여 '주 보퉁이', 원영의는 짚고 다니는 단장을 그대로 교실로 가지고 들어와 교련으로 쓰는데 국운을 생각하여 감개하든지 하면 그것으로 교탁을 치며 호령하였기 때문에 '원 몽둥이', 모두들 나라의 역군으로서 길이 남을 분들이다.
제호탕
이것은 여러 가지 향기로운 재료를 넣어서 다려 식히고, 거기에 꿀을 타 얼음에 채웠다 먹는 극히 고급에 속하는 청량음료요 약이다.
임진왜란 때 외교수완으로 공헌이 컸던 한음 이덕형은 이항복과의 해학으로 유명하거니와 장난은 '오성'의 짓이 많지 그는 좋은 상대였을 뿐인 것 같다.
그가 임금을 모시고 피난길에서 돌아와 영의정으로서 창덕궁 중수의 도제조를 겸해 주야로 분주했을 때 일이다. 때마침 복중이요, 집에서 들여오는 공고상으로는 식사가 도무지 마땅하질 않아 대궐 가까이다 조그만 집을 마련하고 소실을 하나 두었다. 여색을 탐내서가 아니라 잠깐잠깐 들려 쉬기도하고 때를 놓쳤을 때 식사도 하기 위하여서다.
하루는 한여름 더위에 허덕이며 제호탕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소실 집에 들어서는 즉시로 손을 내밀었는데 선뜻 갖다 바치는데 어느새 마련해 두었는지 자기가 찾는 제호탕이다. 그는 한참 여인의 얼굴을 쳐다 보다가 그 길로 돌아서 나와 그 길로 발을 끊었다. 여인을 영영 버린 것이다.
얼마 뒤 오성이 찾아갔다가 그 사실을 알고 한음을 붙잡고 물었다. 그 계집을 버렸다니 어쩐 일이냐고.
"그 날 목이 무척 타서 제호탕을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더니 선뜻 내어주는게 어떻게나 영리하고 귀여운지... 그러기로 지금 이 시국에 명색이 대신으로서 한 계집에 혹해 있게 됐습니까? 그래서 딱 그만 끊어버린 것이죠"
이 말에는 오성도 그만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존염은 표장부
이조초 이태조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도와 공이 컸던 이지란 - 본 여진명으로는 퉁두란 - 이태조의 등국 후 벼슬을 물러나며 한 말이다.
한 나라 창업 때 공신의 한 사람인 장 량이 사업의 성취와 함께 신선도를 좇아 신명을 보전한 것이 좋은 얘깃거리로 전한다. 한 신이 모양 끝내 붙어 있다가 죽음을 당한 것에 비하여 확실히 현명한 처신이었다는 얘기다.
이지란은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오자 머리 깍고 중이 되어가며 상소 가운데 상투를 잘라 넣어서 뜻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보였다.
이와 같은 말을 한 분이 또 있으니 하나는 세종의 지우를 끝내 잊지 못해 단종 손위 후 중이 되어 방랑한 매월당 김시습이 그다.
또 한 분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사신 갔던 사명당 유정이 그다.
그가 대장 가등청정을 만났을 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있기는 있으되 너희 나라에 있다" "무엇이냐?" 하니까 "너의 머리가 그것이다"하여 일본에 갔을 때도 '보물 얘기한 스님'이라 하여 숭앙을 받았다. 중이면서 수염을 기를만큼 그는 역시 호기남아였던 것이다.
지화난독
삼국유사에 이런 얘기가 전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려 고구려를 쳤을 때, 나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성 밖에 주둔하고 통지하기를 급히 군량을 날라 오라 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적진을 통과하여 양곡을 보내기가 장히 어려운데 어떻게 할 것인가고. 김유신, 김인문 등이 양곡 이만섬을 전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이제 양군이 힘만 합치면 되게 되었다.
먼저 연기 병천 두 사람을 파견하여 서로 합세할 작전을 물었더니 종이에 난조(봉황과 비슷하다는 전설상의 새)와 송아지를 그려서 돌려보냈다. 수수께끼로 이 나라에 사람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수작이다.
그래 원효대사에게 묻게 했더니 속환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내렸다. 종이 지자의 첫소리(그 당시 음으로는 ㅅ)를 따고 송아지 독자의 아래 음절을 따붙이면 반절식으로 맞춰 '속'이란 음이 된다. 또 그림 화가 위에 난조새 난자의 받침을 따 붙이면 '환', 그러니까 속환 빨리 되짚어 오라는 뜻이 된다.
그래 김유신이 군대를 독려하여 대동강을 건너고 이튿날 갑자기 돌이켜 고구려 병을 좇아서 수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기와쟁이 심사
우리는 고려 청자의 훌륭한 기술을 열었으면서도 그것을 이어서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었건만 그 기술을 오늘날 아는 이가 없다. 이처럼 좋은 기술이 있어도 그 비법을 일러 주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다가 죽어가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여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또 청개구리 심사라는 것이 있다. 청개구리 이야기는 이웃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나라 독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밭일을 하다가도 청개구리가 울면 "이크 저녁 상식 올리는군!" 하는 유의 말은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이밖에 모과나무 심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나무 밑둥이 뒤틀렸대서 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워낙 늦게서야 열매가 여는 때문에 "모과나무는 심은 사람이 죽어야만 열매가 달린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심사는 변강쇠 타령에 나오는 그것과 방사한 것이니, 일반으로 심사 사나운 것을 줏어 모아 작품 가운데 쓰자니 그리 된 것이다.
체할라 버들 잎 띄워 물 좀 먹고
이조의 대표적 폭군인 연산군 때에 이장곤이라는 교리 벼슬하는 이가 있었다. 임금에게 미움을 사서 거제도로 귀양을 가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세상이 어수선하여 이제 더욱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 몰래 탈출하여 지향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함흥 지경에 이르러 어느 우물가 물 긷는 처녀 아이를 보고 물 한 모금 먹게 해 달라고 청했더니,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들고는 손님 얼굴을 흘낏 쳐다 보더니 옆의 버드나무 잎을 주루루 훑어 띄워서 준다.
목 말랐던 끝에 물을 청해 시원하게 마시려고 하였는데 버들잎이 섞여 있어 후후 불며 한참만에야 마실만큼 마셨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래 버들잎을 띄운 내력을 물으니까 하는 말이다.
"냉수에 체하면 약도 없답니다. 보아하니 손님께서는 너무나 기갈에 지쳐 계신데, 갑자기 찬물을 자시고 병나실까 겁나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을 뿐입니다"
그래 그 아이의 집을 물으니 사회에서 천시받는 고리 백정의 집이었다. 잘 말하여 그 색시에게 장가들고 그 집 사위가 되었으나 한 가지도 일을 도울 줄은 몰라 무진한 천대를 받다가 중종의 반정을 만나 서울로 돌아오고 천한 출신이지만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여 해로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의 사마광이 독을 깨뜨려 친구를 구했다는 얘기만큼이나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들려줄만한 슬기로운 얘기라 하겠다.
춘몽을 하가진신고?
이조 중종 때 사류를 많이 모함하여 죽임으로써 소인의 대표처럼 된 인물에 남곤, 심정의 두 사람이 있다. '곤쟁이 젓'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심정이 그래도 그 아우 심의와는 우정이 각별하였다. 하루는 둘이 한 방에서 자다가 아우가 갑자기 일어나 방성통곡을 한다.
"꿈에 아버지를 뵈었는데, 재산도 넉넉히 나눠 주지 못해 아무데 논과 종 아무개는 널 주려던 것인데 이루지 못하고 죽어 한이 된다고 하시기에 서로 붙잡고 울다가 깨었는데 말씀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하는 것이다.
형도 서글퍼져서 그 얘기대로 베어 주고 나서 생각하니 확실히 속았다.
나쁜 짓을 해서라도 그만치 사니, 좀 주었기로 어떠랴만 그러기에 소인이다. 그래 하루는 또 같이 자다 형이 일어나 운다.
"꿈에 아버지가 오셔서 너는 큰 집으로서 봉제사 접빈객에 씀씀이도 센데, 아무데 논을 아우를 줬다니 그게 웬 말이냐고 하시더라"
아우는 빙그레 웃으면서 "형님, 봄 꿈을 어찌 다 믿겠오?"
그래 그만 서로 쳐다 보고 웃어버렸다.
충주의 자린고비
전국적으로 역사상으로 인색하기 첫째가는 인물이다. 성명을 고비라 하는 실재의 인물이었다고도 하는데 상고할 도리는 없다. 지방에 따라 '자리곱재기'라고도 하여 많은 소화가 그를 주인공 삼아 얘기되고 있다.
반찬 사는 돈이 아까워 자반을 하나 사다 천장에 걸어 놓고 쳐다 보며 밥을 먹는데 아이놈이 연거푸 두 번 쳐다 보니까 철썩 하고 때리며 "이 자식 짜게 쳐먹고 물 찾을라" 했다든가. 또 밥상에 김치 한 통을 포기채 내놓고 손님접대를 하는데 모두 젓가락으로 건드려만 보고 만다. 그래 그냥 놓아두면 겨울을 나겠는데, 뱃심 좋은 사람이 있어서 장도칼을 뽑더니 썩썩 썰어 놓고 마구 줏어 먹는다. 그걸 보는 그 길로 병이 들어 여러 날만에야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고도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며 잘 살 수 있느냐고 비결을 물었더니 내 가르쳐 주마고 산으로 끌고 올라간다. 높은 바위 벼랑에 선 소나무로 올라가란다. 그리고 두 손으로 매달려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손을 놓으라고 한다.
다음엔 나머지 손을 놓으라고 하기에 "누굴 죽으라는 얘기냐?"고 했더니 "그럼 내려오라"고 하여 놓고 "돈이 생기거든 말야. 아까 그 마지막 손 쥐었듯이 손아귀에 꼭 쥐고 놓지 말란 말야. 알았나?"
칠십에 능참봉을 하나 했더니 한 달에 거동이 스물 아홉번이라
'늙게 된 서방 만났다'는 격으로 명목 없는 구실에 일만 드세다는 뜻으로 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런 일화도 관련되어 있다.
이조 후기의 정조가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수원으로 능침을 옮기고 수원성을 쌓고 행궁을 새우며,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고 뻔질낳게 거동을 해서 능을 봉심한 때문에 나온 소리다.
그는 자기 아버지 능 주위에 송충이 끓어 소나무들이 다 죽는단 얘길 듣고, 그 중 큰 놈으로 잡아올리라 해서 그 징그러운 놈을 깨물었더니 하늘이 감동했는지 큰 비가 내려 송충이가 전멸하였다고도 전하여 온다.
또 일설에는 어떤 능참봉이 신수를 보았더니 아무 날 능상 앞에 가 엎드려 있으면 죽을 고비를 면하리라고 한다. 마침 그 날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임금은 생각하였다.
"이렇게 비오는 밤이면 능상이 어찌 되려나. 지키라고 둔 관원 놈은 뜻뜻한 방에서 편하게 자렸다"
그래 군사에게 칼을 주어 달려 보냈더니 집에 안 있고 그 비를 맞으며 능상 앞에 엎드려 있더라는 보고라,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상까지 후하게 탔다고 하는 것이다.
태종우
음력으로 5월 10일에는 꼭 비가 오게 마련이요 그것을 태종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초의 일을 모조리 나쁘게만 얘기하고 있지만 권도로 뺏은 정권일지라도 잘한 것은 잘했다고 추어 줄만한 아량도 있어야 할 것이다.
실질상 이조를 창업하다시피 한 태종이 병석에 있으면서도 날이 가무는 것을 끔찍이도 걱정하더니, 결국 임종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자 유언처럼 말하였다.
"내 죽거든 상제에게 가 이 백성을 위하여 비를 내려 주십사 하겠노라"
운명하자 구름이 모여 들며 표연히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며칠을 계속하니 백성들은 모두 그의 은덕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로 매년 틀림없이 왔는데 몇 해를 계속해 안 오더니 임진왜란이 일어났더라고 선왕의 영험을 말하는 이도 있다.
그래 농삿군들은 가무는 중에 헌릉 국기 날만 기다리는 풍습이 최근까지 있었다.
한시의 마지막 대가인 최영년은 이렇게 읊었다.
왕언거작인간우 - 왕의 말씀 인간의 비를 주마시더니
백일천봉인송뇌 - 밝은 메뿌리 우뢰소리 울려온다
만민함희선왕사 - 백성들은 모두다 선왕의 주심을 기뻐하고
오백년중년년래 - 5백년 뒤 지금까지 해마다 오네
평양의 황고집
평양 외성에 황순승이라는 진사가 한 분 있었다. 연대도 과히 오래지 않은 분이다. 성정이 고지식하고 곧아 남이 고집이라고 별명 지으니, 또 그리 싫어하지 않고 집암이라고 스스로 호하였다.
한 번은 나귀를 타고 지나는데 도둑의 떼가 나타나 물건을 뺏는다. 선선하게 내려서서 고삐를 내어 주고 채찍마저 내어주며 하는 말이 "하 쇠약해서 때리질 않으면 가질 않습니다" 도둑놈 대장이 한참 보더니 "댁이 외성 황고집 황진사 아니요?"하고 도로 주고 갔다 한다. 도둑들도 그런 분의 물건 뺏기에는 마음이 꺼렸던 모양이다.
한 번은 서울을 왔다가 평양에 벼슬 살러 왔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행들이 같이 조상 가자고 하니까 "그 사람하고 나 사이에 볼 일 보러 왔던 끝에 조상 한 대서야 말이 되느냐?" 고 그 길로 평양 5백 5십리 길을 부지런히 내려가 다시 되짚어 올라와서 조문을 하였다 한다.
어떻게 와전되었는지 '황꼽재기'라고 인색한 사람의대명사처럼 전하는 이가 있으나 근엄하고 규모가 있었을 뿐 그에게는 가당치 않은 얘기다.
한 다리가 짧은 게 아니라 길어
이조 중기에 상진이라는 정승이 있었다.
밭 가운데 소 두 마리를 걸려서 밭 가는 사람이 있기에, 어느 소가 잘 가느냐고 물었더니 일을 멈추고 나와 귀에다 대고 일러준다. 왜 그냥 말하지 그랬느냐니까
"아무리 짐승이라도 칭찬 받는 소는 좋겠지만 못하다는 소릴 들으면 마음이 좋겠느냐"
고 하는 말을 들은 뒤로 평생에 남의 단점을 얘기 하지 않았다는 분이다.
한 번은 절름발이가 지나는 것을 보고 한 다리가 짧다고들 한다. 그는 "왜 하필 짧다고 하여야 맛인가? 한 다리가 긴 것이지" 하였다고도 하는데 이건 좀 지나친 얘기 같다.
오 상이란 이가
희황낙속금여소 - 희황적 좋은 풍속이 깡그리 없어져
지재춘풍배주간 - 오직 훈훈한 자리에 있을 뿐이라고 읊었더니 왜 그리 박하게 말하느냐 면서
희황낙속금유재 - 희황적 좋은 풍속이 아직도 있어
간취춘풍배주간 - 춘풍 이는 술자리에서 볼 수 있도다 하고 글자 넉자를 고쳐 이렇게 부드러운 글을 만드는솜씨였다.
당시의 명복인 홍계관에게 물어, 자기 죽을 날짜를 짚어서 종신할 준비를 하였는데 끄떡도 없다. 홍계관 말이 무언가 남 모르게 적적하신 일이 있기에 그러리라고 하더니 십오년을 더 살아 영의정까지 지내고 세상을 떠났다.
할 말이 없다.
이조 때 재상으로 초기에 황 희요, 말기에 김재찬이라하여 황금 마구리라는 말까지 생기게 한 김재찬에 관해 이런 얘기가 있다.
그가 처음 문과 급제하자 무신 이창운의 눈여긴 바 되어 그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있어 불러도 잘 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창운이 대노하여 군령으로 베이겠다고 곧 잡아 들이란다.
그제사 크게 놀라 아버지 욱(역시 대신을 지낸 분)께 들어가 살려 달라고 비니 "네가 방자하여 체례를 업신여겨 저지른 일이니 낸들 어찌하랴"하고 꾸짖고는 편지 한 장을 돌려 보냈다.
이창운이 잡아 들여 끓여 놓고 노대감의 편지가 있다기에 받아 뜯어 보니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백지가 들어 있을 뿐이다. 할 말이 없노라는 뜻.
"내 너를 죽일 것이로되 대감 낯을 보아 살려 준다" 하고는 한 곳에 가두고 평안도 지리와 군비에 대하여 상세히 가르쳐 주고는 강을 받는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일 만에 타이른다.
"일후에 반드시 쓸 기회가 있으리라. 내 그대를 그릇으로 보고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 잊지 말라"
나중 대신의 반열에 오른 뒤 홍경래의 난이 터졌는데 온 조정이 오직 황황할 뿐이라, 공이 일부러 행차를 천천히 하여 대로를 지나 민심을 가라앉히고 손에서 바람이 일도록 지휘하여 이를 평정하니 모두 이십여년 전 이창운의 교시한 바를 활용한 것이었다.
함흥차사
고려 말엽 왜구를 물리치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신망을 함빡 한 몸에 받게 된 이성계는 드디어 고려 사직을 들러 엎고 이씨 조선을 세워 그 시조가 되었는데, 외부로 그처럼 화려한 반면에 가정사에 들어서는 매우 순탄하지 못하였다.
젊은 왕비 강씨의 책동으로 막내아들 방석으로 세자를 책봉하고 개국공신 정도전이 뒷배를 보게 되자, 실지 이조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다섯째 방원은 비상수단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과 배다른 동생 방번과 세자마저도 죽여 버리어 자신의 지반을 굳히었다.
태조는 세상에 뜻이 없어 임금자리를 둘째 방과에게 물려 주고 상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떨어지는 새 서울 한양을 떠나 송도 옛 서울로 가 있었는데, 이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게되매 단연 소매를 떨치고 자신의 발신한 곳인 함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새 임금 태종은 체통으로 보나 또하나 정치적인 불안감도 있어, 자주 돌아오십사고 사신을 보냈는데, 그 보내진 사신들을 그때마다 극도로 노여움에 차 있는 태조에 의하여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물론 늙마에 고적감에 젖은 태조는 여러 사람의 권고로 오랜만에 한양 서울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 사이 계속 보냈던 사신들은 가기만 하였을 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고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흔히 함흥차사라고 하게까지 된 것이다.
행주치마
여자들이 일할 때 막 입는 튼튼한 베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하는데 여기엔 이런 연유가 있다.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로서 전공을 세운 권 율 장군은 이어 전라감사로 임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왔는데 때마침 왜군은 명나라 대군에게 밀려 후퇴하여 서울로 집결하던 때였다.
권장군이 서울의 서쪽 강가 행주산성에 웅거하여 놈들의 돌아오는 목을 노리니 그들에게는 여간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래 대군을 휘동하여 여러 날 이를 포위 공격하였는데 성 안에서는 적은 수의 군대로 잘 지켜 싸워 왜군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임란 중의 유명한 행주대첩인데 이때 성 중에서는 적을 막아내는데 돌팔매까지를 동원했고 그 돌을 나르기 위해서는 부녀자들까지도 모두 합심하여 앞치마에다 돌을 담아 날아서 이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행주의 지명을 따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임란 전에 이미 부엌을 '행주'라 기록한 것이 있으니 '부엌치마'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난을 치른 뒤에는 공있는 영웅을 만들고 적개심이 발로하여 이런 유의 설화는 생겨나게 마련이요, 이런 것을 영웅설화라고 한다. 또 어원을 밝히려는 점을 강조하여 '민간어원론'이라고도 한다.
화랑의 오계
삼국유사의 이런 기록이 근원이 된다.
귀산과 취항은 한 동리에서 친하게 사는 사이였는데 매우 수양에 힘쓰는 사람이었다.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공부하고 돌아온 것을 듣고 둘이 찾아갔다.
"저희들은 어리석어 아는 바 없으니 바라건대 한 마디로 종신의 교훈이 될만한 것을 일러 주십시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그 종류가 열 가지나 되지만 그대들은 남의 신하가 되어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군이친 - 임금을 섬기매 충심으로써 하며
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기매 효도로써 하며
교우이친 - 벗과 사귀매 신으로써 하며
임전무퇴 - 싸움에 임하여는 물러남이 없으며
살생유택 - 생물을 죽이더라도 가려서 하며 이 다섯 가지를 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다른 것은 알겠으나, 죽이되 가려 하라는 말씀은 잘 모르겠습니다"
"육재 날과 봄 여름에는 죽이지 말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요, 부리는 짐승을 죽이지 말지니 이는 말, 소, 닭 개를 말함이라, 또 갸날픈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꼬치도 안되는 것을 말함이라. 이것을 물건을 가리는 것인데 이 역시도 그 소용되는 데에 그칠 것이요 많이 죽여서는 안된다. 이것이 세속의 좋은 가르침인 것이다"
그 뒤 귀산 등은 힘써 수양을 쌓아 군사로 나아가서는 나라에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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