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수염난 여자 (1) - 엘러리 퀸
수염난 여자
엘러리 퀸
파크 로우 40번지의, 번창해서 거의 싫어질 정도로 격식을 차리는 다우링
메이슨 앤 쿨리지 법률사무소에 속한 피니어스 메이슨 변호사는 지극히
피니어스(트라키아의 왕)답지 않은 신사였다. 코는 주먹코이며,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국의 성가신 법정논쟁을 줄곧 보아 온 눈꺼풀은 축 늘어져서
마치 100년쯤 법정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속 운전기사가딸린
리무진 좌석에 딱딱한 자세로 앉아 입속으로 무언가 묘한 소리를 내고있었다.
" 그래서, 실제로 살인이 벌어진 걸세. 정말 어떻게 될지 상상도 못 할 세상
이야. " 메이슨은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러리 퀸은 롱아일랜드의 햇빛 속에 눈이 팽팽 돌 만큼 바삐 움직이는 세계
를 바라보면서 인생이란 스페인 여자 같은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뜻밖의 일뿐이다. 그 어디에도 부드러운 점이라고는 없고 모두가 자극적이다.
엘러리는 파란만장한 정신 생활을 보내고 있는 수도승 같은 인물이라 이런
생활을 좋아했다. 또 탐정-그는 이 호칭을 굉장히 싫어했지만-이기 때문에
생활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퀸은 그러한 속마음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피니어스 메이슨은 이런 속세적인 은유를 이해할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 있지요.
어떻습니까? 그 괴상한 쇼 일가에 대해 선생님께서 가능한 데까지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롱아일랜드의 지방 경찰서에서는 그다지
환영을 못 받을테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모로 어려움이 예상되므로 미리
무장을 해 둘까 해서요. "
메이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 하지만 맥이 나한테 책임지고.... "
" 오 맙소사. J.J.맥 말입니까? 그 친구는 주제넘게 남을 대신해서 과대망상
을 품고 있는 겁니다. 메이슨 씨, 당신에게 경고해 둡니다만, 전 엉뚱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전 요술쟁이처럼 모자 속에서 살인범을 꺼내는
그런 재주는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코사크 병사들이 증거를
어지럽혀 놓고 있다면..... "
" 난 그들에게 경고해 두었네. 오늘 아침에 사건을 전화로 알려왔을 때 직접
머치 경위에게 일러두었지. "
메이슨은 좀 화난 듯이 말하더니 다시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 시체를 움직이지도 않았다더군. 난, 뭐랄까...지방에서는 영향력이 좀
있으니 말일세. " " 옳은 말씀이십니다. "
엘러리는 코안경을 고쳐쓰면서 한숨을 쉬었다.
" 아주 잘하셨습니다. 메이슨 선생님. 그럼, 그 끔찍한 사건의 경위를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
변호사는 못마땅한 듯한 묵소리로 말했다.
" 나와 함께 일하는 쿨리지가 쇼 집안의 사건을 취급하고 있었지. 존 쇼는
백만장자인데 자네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야. 쇼의 첫 부인은 1895년에 난산
으로 죽었지. 그 아이는 애거서라고 하는데 그 딸은 지금 이혼을 하고 여덟
살 난 아들과 함게 살고 있다네. 물론 그녀는 어머니가 사망할 때 죽지 않고
살아 남았던 거지. 그 전에 또 한 아이가 있었어.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이
어받아 존이라고 하는데 지금 마흔다섯 살이네...아무튼 아버지인 존 쇼는
첫 부인이 사망하자 이내 재혼을 했는데 재혼하고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자기가 죽고 만거야. 이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페인 쇼는 남편이 죽은 뒤
30년 이상이나 살다가 바로 한 달 전에 죽었지. "
" 사망률이 너무 높군요. " 엘러리는 중얼거리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메이슨 선생님, 지금까지는 별다른 점이 없는 이야기로군요. 그것과 쇼
집안이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 글쎄 가만 들어 보게. " 메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 존 쇼 노인은 전 재산을 두 번째 아내 마리아에게 남겼어. 두 자녀, 존과
애거서는 아무 유산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탁조차 넘겨받지 못했지.
쇼 노인은 마리아가 두 자녀를 돌봐 줄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야. "
" 세상에 흔히 있는 이야기 같군요. " 엘러리는 하품을 했다.
" 마리아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계모와 전처 자식을 중재할 사람도 없었나요? "
변호사는 이마를 문질렀다.
" 무서운 일이야. 그들은 3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싸워 나왔네. 마치 야만인
들처럼 말이야. 내가 볼 때 쇼 부인의 태도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네.
말하자면 정당방위였던 걸세. 존은 항상 벌이도 하지 않고 한심한 거지나
다름없었지. 예의도 모르는 방탕아로 그야말로 건달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
고 쇼 부인은 금전 면에서는 쇼를 알뜰히 돌봐 주고 있었지. 아까 말했듯이
존은 지금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나 되는데도 평생 벌이다운 벌이를 한 적이
없어. 게다가 술주정꾼이고. "
" 퍽 재미있겠는데요. 이혼한 누이동생 애거서는요? "
" 오빠의 여성판이지. 본인과 비슷하게 재산을 목적으로 한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애거서가 빈털터리라는 것을 알고 그가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쇼 부인이 몰래 이혼 수속을 밟아 주었어. 부인은 애거서와 아들 피터를
맡아 그 뒤로 같이 지내 왔는데, 마치 칼을 서로 맞대고 사는 거나 다름없었
지 뭔가. 인품에 대한 설명이 좀....뭐랄까....거칠었던 점은 이해하게.
그들의 실태를 그대로 알려 주고 싶었던 걸세. "
엘러리는 껄껄 웃었다.
" 존과 애거서는. "
메이슨은 지팡이의 손잡이 끝을 입으로 깨물면서 말을 이었다.
" 단 한가지, 즉 계모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던 거네. 물론 그 경우 유
산을 상속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몇 달 전에 어떤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
도 쇼 부인의 유언장에는 그들에 대해 대단히 인심 좋게 책정이 되어 있었지. 그
러나 그 사건이 일어나자 그만..... "
엘러리 퀸은 회색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렇다면.... "
변호사는 한 숨을 쉬었다. " 석 달 전에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노부인을
독살하려고 했네. "
" 아! "
"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났네. 테렌스 알렌 의사가 그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여러 해
전부터 걱정이 되어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시안화물(청산가리)은 부인의
입에는 들어가지 않고 대신 키우던 고양이가 죽고 말았네. 물론 누가 독을 넣었는
지는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쇼 부인은 유언장을 고쳐 쓰고
말았던 걸세. "
"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저도 귀가 솔깃해지는데요. 알렌이라고 하셨지요?
이야기가 뒤얽혀서 재미있어지는군요. 그 알렌에 대해 말씀 해 주시죠. "
엘러리는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는 수수께끼 같은 노인인데. 두 가지 일에 대해 정열을 쏟고 있지. 즉
쇼 부인에 대한 헌신과 그림에 대한 취미일세. 나는 그 방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림도 상당한 솜씨라고들 하더군. 벌써 20년이나 쇼의 집에서
살고 있지. 쇼 부인이 어디선가 데려온 의사인데 부인 이외에는 아무도 그의
경력을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그리고 알렌도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
기는 전혀 하지 않아. 부인이 많은 월급을 주며 그 집에서 살게 하여 집안의
주치의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지. 내 생각에는 그녀가 전처 자식들이 못된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 것 같아. 그리고 알렌이 이례적
인 대우를 순순히 승낙한 것은 뭐랄까, 세상의 이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
다고 보고 있네. "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운전기사는 차를 돌려 큰 길에서 좁은
자갈길로 접어들었다. 메이슨은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엘러리가 동그랗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 한 달 전에 쇼 부인이 자연사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선생님은 전혀 의심
을 하고 계시지 않다는 말씀이시지요? "
" 물론이지. " 메이슨이 말했다.
" 알렌 의사는 자기의 진단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도
그 점은 충분히 주의를 했네.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도 여러 명의 전문의
를 불러서 진단을 받았거든. 그러나 부인은 몇 차례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결
국 사망한 거네. 워낙 나이가 많았으니 말이야. 의학 용어로는 혈전증인지
하는 병이라더군. "
메이슨은 우울한 것 같았다.
" 자네도 쇼 부인이 독살 계획 사건에 대해 당연히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이해가 갈 걸세. 사건 직후 부인은 이런 말을 하더군. '그 애들이 내 목숨을
노릴 만큼 타락했다며야 내가 구태여 그 애들을 돌봐 줄 필요가 없지요.'라고
말일세. 그리고 새 유언장을 나에게 쓰게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한푼도 안 주기로 해버린 걸세. "
" 그것은 더 좋은 데 쓸 용도가 있다는 경구(警句)로군요. "
엘러리는 싱긋 웃었다.
메이슨이 차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 버로즈, 더 속력을 내게. "
차는 급히 내달렸다.
" 쇼 부인은 누구 유산 상속자가 없을까 하고 찾다가 마침내 쇼 집안의 재산
을 헛되이 뿌리지 않고 남겨 줄만한 인물을 생각해 냈지. 존 쇼에게는 모튼
이라는 형님이 있었는데 다 자란 두아이를 거느리고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
었네. 쇼 형제는 몹시 사이가 나빠 서로 싸우고 헤어졌는데 그 뒤 모튼은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거기서 재산을 거의 모두 탕진해 버렸다네. 두 아이는
에디스와 퍼시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자살해 버린 뒤 자기들 힘으로 밥벌이를
해야 되었어. "
" 쇼 집안 사람들은 아마 싸움을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
" 아마 그런 혈통인가 봐. 그런데 에디스와 퍼시말인데 그 두 남매에게는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야. 런던에서 무대 생활을 했는데 뮤직홀에 나가 1막
짜리 남매 공연을 맡아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 그래서 쇼 부인은
그 조카딸인 에디스에게 재산을 남겨 줄 결심을 했던 걸세. 내가 조사해
보니 에디스는 결혼하여 로이스 부인이 되었으며 아이도 없이 벌써 오랫동안
과부 생활을 하고 있더군. 쇼 부인이 사망하였을때 전보로 그 사실을 알렸
더니 곧 다음 배편으로 그녀는 이곳에 왔어.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남동생
퍼시는 몇 달 전 유럽 대륙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어 지금 자신은 의지할 데
없는 신세라고 하더군. "
" 그래서 유언에는.... 무슨 특별한 거라도.... "
" 그래 이상하단 말이야. " 메이슨이 한숨을 쉬었다.
" 쇼 집안의 재산이 전에는 막대했는데, 불경기로 인해 약 30만 달러로 줄어
버렸더군. 쇼 부인은 그 중에서 20만 달러를 조카딸에게 남겼지. 그리고
나머지는 당사자도 깜짝 놀라고 있었지만 알렌 의사를 위해 신탁 예금을
해 놓았더구만. "
메이슨은 말을 중단하고 키가 큰 젊은 친구에게 호기심 어린 눈을 고정시켰다.
" 알렌에게요? "
" 알렌은 원금에 손댈 수는 없지만 죽을 때까지 이자를 받을 권리가 있지. 재
미있지 않나? "
" 재미있는 정도가 아닌데요. 그런데 메이슨 선생님, 전 무척 의심이 많은
편이라서 말입니다만, 틀림없이 로이스 부인이 쇼 집안 사람이라고 선생님
께서는 믿고 계십니까? "
메이슨은 흠칫했다. 그리고나서 고개를 저었다.
" 아닐세, 그건 자네의 예상이 빗나갔어.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네. 첫째, 용모에 쇼 집안의 독특한 특징이 있거든. 자네도 만나
보면 알게 될 걸세. 그건 그렇고 내가 볼 때 그 여자는 상당한...그렇지!
상당한 괴짜야! 아버지 모튼 쇼의 개인적인 소지품을 가지고 왔더구먼.
그녀가 도착했을 때 내가 직접 쿨리지와 함께 여러가지 질문을 해 보았지.
아버지의 생애며 미국에서의 그녀 자신의 어렸을 때 생활에 대해 세세한
것을 모두 알고 있더군. 그런 건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에디스 쇼가 틀림없다고 우린 확신했어. 우리는 세심하고 신중하게 조사했다
고 생각하네. 그건 보증하지. 아무튼 존도 애거서도 어렸을 때밖에 애거서를
만나지 않았으니 말이야. "
" 그냥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 엘러리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 그리고 알렌이 죽었을 대는 10만 달러의 신탁은 어떻게 처리되는 겁니까? "
메이슨은, 리무진이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손질이 잘 된 자동차
길 양쪽에 정연하게 서 있는 포플러 가로수를 침통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 그때는 존과 애거서가 반씩 나누어 갖기로 되어 있지. "
메이슨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차는 한적한 주차장에 조용히 멎었다.
" 그렇군요. " 엘러리가 말했다.
살해된 것은 테렌스 알렌 의사였던 것이다.
군(郡)경찰의 경관이 천장이 높은 식민지풍의 홀을 지나 오래 된 저택의
깊숙하고 조용한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거기서 계단을 올라사 어둠침침
하고 썰렁한 복도로 나가니 목이 짧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사내가 서서
지키고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메이슨 선생님. "
그 사내는 앞으로 나오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퀸 씨인가요? "
부드럽고 원만하던 말투가 가시 돋친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 그래, 그렇다네. 퀸. 이 사람은 군 경찰의 머치 형사일세. 모두 그대로
놓아 두었겠지, 머치? "
머치는 무슨 소린지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한쪽으로 길을 비켰다. 엘러리
는 두 방이 이어진 듯한 서재로 들어갔다. 활짝 열려 있는 문 저쪽에 새눈
무늬의, 단풍나무로 만든 네 기둥 달린 침대가 있고 누비질을 한 흰 침대보
가 보였다.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기에 유리를 끼워 태양광선이 들
어오게 되어 있었다. 방 안에는 잡다한 그림 도구가 어질러져 있었는데, 얼
마 안 되는 의료 기구보다 더 많았다. 이젤이며 물감 상자며 작은 대(臺)며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가운 등이 있고, 벽에는 유화 물감과 수채화 물감의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몸집이 자그마한한 사내가 묘하게 윤이 나는
은발에 키가 크고 가느다란 몸을 하고 죽음으로 얼어붙어 누워 있는 죽은 의
사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상처는 한눈에 보아도 깊었다. 심장 언저리에
미세한 조각이 된 단검자루가 튀어나와 있었다.
피는 거의 흐르지 않았다.
" 어떻습니까 선생님. 그 밖에는? "
머치가 불쑥 말했다. 몸집이 작은 사내는 일어나서 기구를 치웠다.
" 칼에 찔려 즉사했군요. 보시다시피 정면에서 찌른겁니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에 몸을 피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만, 그때는 이미 늦었던 거지요. "
사내는 턱짓을 해 보이고는 모자를 집어들고 조용히 돌아갔다. 엘러리는 조금
섬뜩했다. 화실은 죽은듯이 고요했다. 복도도 조용했다. 그 한 모퉁이 전체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집 전체가 거의 기분 나쁠만큼 무서운 정적의 무게에 짓
눌려 있었다.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불길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엘러리는
참을 수 없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 단검 말씀입니다만 머치 경위님, 흉기의 출처는 알아 내셨습니까? "
" 알렌의 것입니다. 언제나 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지요. "
" 자살의 가능성은 없겠지요? " " 절대로 없다고 의사가 말했소. "
피니어스 메이슨 씨는 구토증이 나는 듯한 소리를 냈다.
" 나한테 일이 있거든 퀸.... "
그는 기분 나쁜 메아리를 일으키면서 방에서 비틀거리듯이 나갔다. 시체는 파자
마 위에 그림물감으로 더럽혀진 가운을 입고 있었다. 굳어진 오른손은 붓끝이
새까맣게 된 붓을 아직도 꼭 쥐고 있었다. 그림물감이 담긴 팔레트가 뒤집어진
채 시체곁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엘러리는 단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 피렌체 제(製) 같군요. 그런데 지금까지 알아 낸 것들을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경위님. 즉 범죄 자체에 대해서 말입니다. "
엘러리는 건성으로 말했다.
" 조금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경위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 의사 말로는 새벽 2시쯤 그러니까 약 8시간 전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시체는 오늘 아침 7시쯤 이 집에서 벌써 2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크뤼치
라는 여자가 발견했습니다. 아주 성실한 여자지요. 살인이 벌어진 시간에
알리바이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그 시간
에는 다들 자고 있었고 게다가 각각 딴 방에서 자고 있었거든요.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 정도 입니다. "
" 그야말로 조금이군요. " 엘러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그런데 경위님. 알렌 의사는 그렇게 이른 새벽에 붓을 드는 습관이 있었습니까? "
" 그런 모양입니다. 그 점은 나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좀
괴짜 영감이라 무슨 일에 열중하면 24시간 계속해서 한다더군요. "
" 다른 사람들도 이 건물에서 잡니까? "
" 아니오. 이 건물에는 하인들밖에 자지 않아요. 알렌은 이 방에 사람들
출입이 적어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게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할머
니도, 한 달 전에 돌아가신 쇼 부인 말입니다만...좋을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늘 말하고 있었나 봅니다. "
머치는 문 앞으로 가서 " 크뤼치 양. "
하고 불렀다. 간호사가 알렌 의사의 침실에서 천천히 나왔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생긴 젊은 여자로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간호사 제복을 입고 있었
는데 그 모습과 이름(크뤼치는 목발이라는 뜻)사이에는 공통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엘러리가 감탄하여 관찰한바에 의하면 태도도 용모 못지
않게 단정하며 아주 매력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눈물에 젖어 있기는 하였
지만 크뤼치는 이 오래 된 큰 집에서 엘러리가 본 최초의 태양이었다.
" 퀸 씨에게 나에게 말한 얘기를 해 드리시오. " 머치는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 하지만 말씀드릴 것이 없어요. " 크뤼치는 겁을 먹고 있었다.
" 저는 여느때처럼 7시 전에 일어났습니다. 제 방은 본채에 있습니다만, 이
쪽에 시트와 타월 같은 것을 넣어 두는 방이 있어요. 그래서 이 앞을 지나가
는데 알렌 선생님이 칼에 찔려 바닥에 쓰러져 계신 것이 보이지 않겠어요.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만, 아무에게도 안 들렸던 모양이에요. 워낙 떨어져
있어서.... 하지만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까 쇼 씨가 뛰어오셨어요.
그리고 애거서 쇼도요. 그것뿐이에요. "
" 여러분 중에서 누구, 시체에 손댄 사람이 있습니까, 크뤼치양? "
" 아니에요. 당치도 않아요. " 크뤼치는 몸을 떨었다. " 그렇군요. "
엘러리는 시체에서 얼굴을 들어 별생각 없이 화가를 보더니 다시 밖으로 눈
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또 신경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원래
자리로 돌렸다. 머치는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엘러리를 보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퀸 씨, 마음에 드셨습니까? " 머치는 비웃는것처럼 말했다.
엘러리는 앞으로 뛰어갔다. 큰 이젤과 나란히 있는 작은 이젤에 그림이
한 장 있었다. 그것은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룹 자화상으로 <화가와 그의아내>
라고 제목을 단 유화의 값싼 복사품이었다 렘브란트가 앞쪽에 앉고 부인이
뒤에 서 있었다. 화가의 커다란 캔버스에는 그 그림의 모사가 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화가와 그의 아내의 모습은 알렌 의사에 의해 정성껏 스케치되어
막 물감을 칠하는 일이 시작된 참이었다. 화려한 깃털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화가는 밝은 미소를 머금고 왼팔을 네덜란드 식 차림을 아내의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인의 턱에는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엘러리는 맥빠진 사람처럼 복제 유화와 알렌 의사의 모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한쪽은 여성의 매끈한 턱을 나타내고 있고 또 한쪽-모사한 그림-은
아마추어를 넘어선 필법으로 네모난 검은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알렌이 시간에 쫓기어 그린 것처럼 급히 색이 칠해져 있었다.
" 이런! 이건 미친 짓이야. " 엘러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쳤다.
"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짚이는 것이 있어요. "
머치가 부드럽게 말했다. 경위는 크뤼치 양에게 꾸짖듯이 말했다. " 가봐요. "
간호사는 긴 다리를 한들거리면서 달아나듯이 화실에서 나갔다.
엘러리는 멍하니 머리를 흔들며 의자에 앉자 담배를 꺼냈다.
" 이건 새로운 취미 같은데요, 경위님. 살인 사건에서 턱수염 콧수염파의
예술 견본을 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광고 간판의 남자나 여자 얼굴에
연필로 수염이 그려진 것은 흔히 보았습니다만. "
그 때 뭔가 눈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이 엘러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쑥 물었다.
" 애거서의 아이, 피터는 집에 있습니까? "
머치는 무슨 엉뚱한 농담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복도
문 앞으로 가서 뭐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 엘러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가
로질러 가운을 하나 들고 와서 시체를 덮었다. 겁을 먹고 있으면서도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을 한 조그만 남자아이가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인물은 엘러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 중에서도 가장 놀랄 만한 사람
이었다. 나타난 인물은 예순 살이 될까말까 한, 몸집이 크고 튼튼하게 생긴 부
인인데 주름투성이의 거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광주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은 주름이 수두룩하게 나 있었다. 게다가 놀라운 화장 기술을 발휘하
여 온 얼굴에 덕지덕지 칠을 한데다가 그 위에 또 칠을 하고 또 덧발라져 있었
다. 두꺼운 입술에는 큐피드의 활 모양으로 천덕스럽게 진한 색깔의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다. 눈썹은 한껏 가늘게 그렸고 늘어진 뺨에는 장미색 볼연지가 두
드러져 있었으며, 거칠고 두꺼운 피부 가득히 흰 분가루가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의 화장보다도 옷차림이 더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빅토리아 왕조 스타일의 차림새였기 때문이다. 허리를 잘록하게 조른
옷을 입었는데, 허리받이라도 댄 것처럼 엉덩이가 불룩 튀어나왔으며 폭이
넓고 발꿈치까지 끌리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도 불룩 튀어나
왔으며 유난히 번들거리는데다가 목을 죄는 것처럼 심이 든 빳빳한 레이스
칼라가 달린 옷이었다. 그래서 엘러리는 이부인이 에디스 쇼 로이스가 틀림
없으며, 그러고보면 이 괴상한 옷차림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
되었다. 이 여자는 노인이고 영국에서 왔으며, 이제는 사라져 버린 처녀시절
무대에 섰을 때의 화려한 영광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 로이스 부인입니다. " 머치가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 그리고 이쪽은 피터. " " 처음 뵙겠습니다. "
엘러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하고 눈을 돌렸다. " 피터라고 했지? "
소년은 뾰족한 생김새에 앙상하게 마른 조그만 몸집을 하고 있었는데 더러운
집게손가락을 입에 물고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 피터! " 로이스 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외모와 잘 어울리고 있었다. 굵고도 쉰 목소리였다. 엘러리는 머
리칼까지 과거를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주춤했다. 진한 갈색의 머리
도 염색한게 분명했다.
적어도 여기 과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는
한 여성이 있다고 엘러리는 생각했다.
" 이 아이는 겁을 먹고 있어요. 피터! "
" 아주머니. " 피터는 계속 쳐자보며 우물우물 말했다.
" 피터, 저 그림을 봐라. "
엘러리가 말했다. 소년은 조심조심 시키는 대로 했다.
" 네가 저 그림의 얼굴에다 수염을 그렸니? "
피터는 로이스 부인의 부푼 스커트 뒤로 몸을 숨겼다.
" 아, 아니오. " " 이상하지요? " 로이스 부인이 유쾌한 듯이 말했다.
" 오늘 아침에 그 이야기를 머치 경위님에게 했어요. 피터가 저기다 수염을
그리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어요. 전에 야단을 맞은 일이 있으니 말이에요.
그렇지 피터? "
엘러리는 이 괴상한 부인이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것처럼 오른쪽 눈썹을
비벼 올렸다가는 다시 비벼 내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놀랐다.
" 아아, 전에 야단맞은 일이 있다고요? " 엘러리가 말했다.
" 그게 말이에요. "
로이스 부인은 열심히 무의식적으로 묘한 눈 운동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 바로 어저께 일입니다만, 피터가 자기 침실에 있는 알렌 선생님의 그림에
목탄으로 수염을 그리다가 제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았겠어요. 아마 알렌
선생님이 피터를 한대 쥐어박고서 손수 목탄을 지우셨나 봅니다. 그래서
이애 어미 애거서는 선생님에 대해 무척 화를 내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피터
네가 그런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 안 그랬어요. " 피터는 말했으나, 가운을 덮어 놓은 바닥의 물체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 알렌 의사가 말씀이지요? "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대단히 고맙습니다. " 이렇게 덧붙이고는 방 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로이스 부인은 피터의 팔을 잡고 얼른 화실에서 데리고 나갔다. 방이 흔들
릴 만큼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로이스 부인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엘러리는
'굉장한 여자로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인이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가죽이 보기 흉하게 불룩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발바닥에
어지간히 큰 물집이 생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저리로 갑시다. " 머치가 문 쪽으로 가면서 불쑥 말했다.
" 어디로? "
" 아래층에 말입니다. " 머치는 한 경관에게 화실을 감시하도록 일러 놓고
앞장서서 갔다. 그리고 본채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 그림 속의 여자 턱에 수염이 있는 이유를 보여 드릴까 해서...... "
" 정말입니까? " 엘러리는 나직하게 중얼거렸을 뿐 그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머치는 고색 창연한 식민지풍의 거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방안
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엘러리도 안을 보았다. 품이 커서 헐렁한 트위드
양복을 입은 가슴이 얄팔하여 송장같은 사내가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떨리
는 손에 든 빈 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렇게 흐린 눈엔 핏발이 서있고
늘어진 피부에는 거미줄처럼 빨간 힘줄이 드러나 있었다.
" 저분이, 존 쇼 씨입니다. " 머치는 경멸하듯, 조금 우월감을 담고 말했다.
엘러리는 쇼가 저 육중한 사촌 누이 로이스 부인과 똑같이 튼튼한 뼈대와
두터운 입술과 바위를 깎아 놓은 듯한 코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저 벽난로 위에 있는 초상화의 얼굴을 잔뜩 찌푸린 꽤 까다로워 보이는
늙은 해적은 보나마나 아버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러리는 또 존 쇼 씨의 덜덜 떨리는 턱에 보기 흉하게 늘어진 뾰족
한 수염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PRE>번 호 : 67 / 76 등록일 : 2000년 10월 04일 15:52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24 건
제 목 : 수염난 여자 완결 - 엘러리 퀸 [귀니]
</PRE>
메이슨은 턱 언저리를 좀 파리하게 해 가지고 어두컴컴한 응접실에서 두 사람
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떻게 되었나? " 그는 큐메의 시빌(고대 로마의 유명한 여자 예언자)앞에서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 머치 경위님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모양입니다. "
엘러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경위는 언짢은 얼굴을 했다.
" 이것은 해를 보는 것처럼 명확한 일입니다. 존 쇼가 한 짓이에요. 제 판단
으로는 그 수염은 알렌 의사가 범인의 단서로서 그린 것입니다. 이 집에서
수염을 기른 사람은 쇼뿐입니다. 물론 정확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단서
는 됩니다. 아무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
경위는 갈색으로 변한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말했다.
" 저는 이 선을 더듬어 볼 작정입니다. "
" 존이라... " 메이슨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확실히 그는 동기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
변호사는 날카로운 눈을 깜박거렸다. " 수염이라니, 어느 수염 말인가? "
" 2층에 있는 그림의 여자 턱에 수염이 그려져 있더군요. "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 알렌은 살해되기 전에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었는데
그 그림 속의 여자 얼굴에 수염이 그려져 있는 겁니다. 알렌이 직접 그 수염
을 그린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건 보통 사람의 솜씨가 아니었고, 검은 유화
물감이 사용되었는데, 시체의 손은 아직도 검은 유화 물감을 찍은 붓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 집에서 그 밖에 그림 그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
" 없는데. " 메이슨은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말했다. " 그렇습니까? "
" 하지만 비록 알렌이 그런 미친 사람 같은 짓을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
이 살해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 " 메이슨이 반대하자 머치는 신음
하듯이 말했다. " 오오! 그렇다면 대관절 언제라는 겁니까? "
" 가만 계십시오. 경위님. " 엘러리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좀더 과학적으로 생각합시다. 메이슨 선생님. 당신의 의문에 대해서는 완
전한 해답이 있습니다. 첫째, 알렌 의시가 범인에게 습격당한 뒤엔 그릴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 같은 의견일 것입니다. 즉사였으니까요. 따라서
습격 당하기 전에 그린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얼마 전이냐는 것
이 됩니다. 그리고 또 어째서 수염 따위를 그렸나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
" 머치 경위는 범인에 대한 단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 메이슨이 중얼거리듯
이 말했다. " 하지만 그런 건 경찰 나름대로의 공상이야. 터무니없는 소리지. "
" 어디가 터무니없다는 겁니까? "
" 기가 막혀 말을 못 하겠군. " 메이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만일 알렌이 단서를 남기고 싶었다면 어째서 캔버스에다가 범인의 이름을
쓰지 않았지? 손에 붓을 쥐고 있지 않았나... "
" 옳은 말씀 입니다. " 엘러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연한 의문입니다. 메이슨 선생님. 그렇고 말고요.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만일 알렌이 혼자 있었다면, 즉 살해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자기가 하고 있는 걱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쓴 기록을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범인이 나타
나기까지 알렌을 자기가 살해될 것을 예기치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
니다. 따라서 알렌은 범인이 방에 있을 때 수염을 그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서로서 왜 수염을 그렸는가가 설명이 되는 셈입니다. 범인이 보는 앞에서는
그 이름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썼다고 하더라도 범인은 이내 그것을
알아차리고 찢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알렌은 부득이 교묘한 방법을 취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범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단서를 남기는
방법입니다. 알렌은 바로 그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어서 화가로서의 방법
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 경우 비록 범인이 알았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알렌이
신경 과민이 되어 그런 짓을 한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깨닫지 못한 채
끝날 확률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
" 그러나 여자 얼굴에다 수염이란, 내가 볼 때.... " 메이슨은 신음했다.
" 아무튼 들어보십시오... " 머치가 큰소리로 말했다.
" 오오! 알렌은 전례(前例)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 엘러리는 꿈꾸는 것처럼
말했다. "
" 전례를? "
" 그렇습니다. 머치 경위님과 제가 발견했습니다만,어린 피터가 천진난만하게
자기 침실에 걸려 있던 알렌 의사의 서투른 그림에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백묵
으로 그려 넣은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제의 일이지요. 알렌은 예술에 대한
이 굉장한 모독에 노발대발 화를 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피터 소
년의 수염 장난이 알렌의 마음 한 구석에 달라붙어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범인이 말을 걸고 있었든지 위협하고 있을 적에 알렌의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던 그 수염에 대한 일이 문득 고개를 쳐들었겠지요. 알렌은 그 방법을
쓰면, 분명히 수염이 효과를 나타내줄 것이라고 믿었던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풍자가 있었던 셈입니다."
" 하지만 난 아무래도 그런 일은 터무니 없는 짓이라고 생각되는데. "
메이슨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엘러리가 말했다. " 터무니없는 짓이 아닙
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알렌은 렘브란트의 부인 턱에 수염을 그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렘크란트의 부인을 택했을까요. 200년이나 전에 죽은 여자를.
더구나 쇼 집안의 가족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여자를... "
"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 머치가 내뱉듯이 말했다.
엘러리는 말했다. " 말 같지도 않다는 것이 이런 경우 꼭 알맞는 말일겁니다,
경위님. 아니면 괴상한 장난이라든가, 결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만일 그것이 알렌 의사의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대체 무엇일까요?
의사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요? "
변호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라면 난 이렇
게 말하고 싶네. 알렌이 가리키려 한 것은 피터였다고 말이야. "
그러자 머치가 말했다. " 말도 안 돼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메이슨 씨, 말이 지나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린 피터야말로 완전한 알리
바이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애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늘 그 애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있거든요. 제가 직접
오늘 아침에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창문으로 빠져 나올 수도 없습
니다. "
메이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알았네, 알았어. 나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
군. 존이..... 퀸, 자네 생각은 어떤가? "
" 전 말다툼하는 걸 싫어합니다만.... " 엘러리가 말을 이었다.
" 그러나 머치 씨의 의견에는 찬성할 수가 없는데요. "
그러자 머치는 비웃듯이 말했다. " 허허, 그래요! 물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
" 그렇습니다. 우선 진짜 수염과 그린 수염이 전혀 모양이 다르다는 점도 유
의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
" 그럼, 알렌 의사가 존 쇼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누구를 가리
키고 있는겁니까? " 머치는 언짢은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 그것을 안다면야 경위님, 만사가 다 해결되겠지요. " 엘러리는 어깨를 움찔
하며 말했다.
머치는 짖어 대듯이 말했다. " 좋소. 나는 여기에 어떤 계략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어쨌든 존 쇼 씨를 군 경찰로 끌고 가서 그 나쁜 인간을 다그쳐 그
계략을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
엘러리가 재빨리 말했다. " 나 같으면 그렇게는 하지 않겠는데요, 머치 씨.
단지 그것 때문에 그런다면... "
" 나는 나의 직무를 잘 알고 있습니다. "
머치는 화난 표정으로 말하더니 응접실에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존 쇼는 술을 꽤 많이 마시고 있었으나 별로 저항을 하지 않았으므로 머치는
쉽게 그를 경찰 차에다 밀어 넣었다. 머치는 알렌 의사의 유해를 실은 군의
시체 운반용 트럭을 몰고, 존 쇼를 태워가지고 사라졌다.
엘러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방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메이슨 변호사는
웅크리듯이 앉아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방도 집도 공기까지도
정적에, 무시무시한 정적에 휩싸이고 말았다.
" 선생님. " 엘러리가 불쑥 말했다.
" 선생님께서는 이 사건에서 뭔가 아직 저한테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것이 있지
요? "
변호사는 흠칫하였으나, 다시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이분은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을 쓰시는 아주 자상한 분이라오. " 기운찬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로이스 부인
이 두 사람을 향해 생글생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부인은 가슴을 흔들며
근위병 같은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그리고 메이슨의 옆자리에 앉아 품위있게
두 손으로 폭 넓은 스커트를 살찐 무릎 언저리까지 들어올렸다.
" 무엇 때문에 골치를 앓고 계신지 알고 있어요, 메이슨 씨. "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고 부리나케 말했다. " 별로 아무것도...... "
" 그러셔도 전 다 알고 있어요, 메이슨 씨. 아직 소개를 못 받았습니다만,
이 젊은 양반은 누구시죠? "
메이슨은 입 속으로 어물어물 얼버무리는 것처럼 말했다.
" 퀸 씨라고요? 반가워요, 퀸 씨. 난 여기 와서 당신같이 훌륭하고 매력있는
미국 사람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도 잘생긴 남자분을 보는 안목
은 있답니다. 오랫동안 런던에서 무대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
그녀는 근사한 저음으로 주위에 울려 퍼질 만큼 큰 소리를 냈다.
" 나도 그다지 못생긴 편은 아니었지요. "
" 그러셨겠지요. 그건 그렇고, 어째서.... " 엘러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로이스 부인은 처녀처럼 지어 만든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 메이슨 선생님은 나를 무척 걱정해 주고 계세요. 정말 양심적인 변호사님
이랍니다. 선생님은 가엾은 알렌을 죽인 범인이 나를 다음 희생자로 택할
거라고 두려워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아까 당신이 그 무서운 머치 씨와 함께
2층에 계실 때도 말했듯이, 난 그렇게 쉽사리 살해되지는 않을 거예요. "
엘러리는 틀림없이 그 말대로일 거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또 한가지, 메이슨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알렌 선생님이 살해된일
로 존과 애거서를 의심하고 계시죠? 숨기셔도 소용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렇
게 생각지 않아요. "
" 나는 결코... " 변호사는 연약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 그렇다면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로이스 부인? " 엘러리가 말했다.
부인은 구두점이라도 찍는 것처럼 턱짓을 하며 보라는 듯이 말했다.
" 누군가 알렌 의사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사람일 거에요. 그분은 20년 전에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상황 아래 이리로 왔다는 말을 들었어요. 누군가를
죽였다든지 어떻게 해서, 그 피해자의 형제나 누군가가 이번에 복수한 건지
도 몰라요. "
" 훌륭한 의견이십니다. " 엘러리는 싱글벙글 웃었다.
" 머치 경위님의 설과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군요, 메이슨 선생님. "
로이스 부인은 흐흥 하고 코방귀를 뀌면서 " 사촌 동생 존은 곧 석방될 거에
요. " 하고 만족스럽게 말했다. " 존은 보시다시피 평소에도 등신 같지만
술에 취하면......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퀸 씨, 담배 한 대 주시겠
어요? " 그는 얼른 담배 케이스를 내밀었다. 로이스 부인은 굵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한 개비 뽑자 성냥을 내민 엘러리에게 장난꾸러기처럼 웃어보이고는
러시아 식이라고 할까, 두 개의 손가락으로 담배를 집는 대신 손을 담배
둘레에 컵처럼 둘러씌우듯이 하여 피우고 있었다. 색다른 여자이다.
" 메이슨 선생님, 어째서 그렇게 로이스 부인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물었다.
" 그게 말일세... " 메이슨은 망설이며 이야기를 할까말까 주저하고 있었다.
" 알렌 의사를 죽인 것은 이중의 동기가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데.... "
그리고 얼른 덧붙였다.
" 말하자면 만일 애거서나 존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
" 이중의 동기라고요? "
" 물론 내가 자네한테 말했듯이 하나는 쇼의 전처 자식들 손에 10만 달러가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지. 또 하나는, 알렌 의사에의 유증(遺贈)에 대해서
는 단서가 붙어 있다네. 그에게 집과 여생을 보낼만한 수입을 주는 대신 가
족들의 의료를 돌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었던거야. 특별히 로이스 부인
에게 주의를 기울여서. "
로이스 부인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마리아 숙모님도 가엾지. 무척 좋은 분이었던 게 틀림없어요. "
" 메이슨 선생님, 유감스럽지만 전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뜻을 잘 못 알아듣
겠는데요. "
" 주머니 속에 유언장 사본이 있는데.... " 변호사는 구깃구깃한 서류를
꺼냈다. " 이걸세. '그리고 특별히 조카딸 에디스 쇼의 건강 진단을 매달
한 번-알렌 의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는 한 번 이상-행할 것이며
그녀의 건강 보전에 유의할 것. 이 규정은..... 이 대목을 주의해서 듣게.
이 규정은 전처 자식들이 감사하리라고 믿는다.' "
" 얄궂은 단서로군요. " 엘러리는 눈을 한번 깜박거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 쇼 부인은 사랑하는 전처 자식들이 혹시 로이스 부인의 목숨을 노리는
고약한 짓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부인의 건강 보전에 대한 책임을
신뢰하는 의사에게 맡겼다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어째서 전처 자식들이 그런
짓을......? "
그 때 비로소 공포 같은 것이 로이스 부인의 큼직한 얼굴에 나타났다. 부인
은 턱을 잔뜩 긴장시키고 가늘게 떨면서 말했다.
" 나, 난센스에요.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 생각으로는 그 애들이 이미
그런 짓을 하려 한 적이 있다고.... "
" 기분이라도 언짢으십니까, 로이스 부인? " 메이슨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짙은 화장 밑에서 부인의 거친 피부가 볼썽사납게 창백해졌다.
" 아니에요. 알렌 선생님은 내일 처음으로 나를 진찰하실 예정이었어요.
오오, 만일 그것이.....음식에라도...... "
변호사는 몸서리치듯이 몸을 떨며 말했다. " 음식에 독을 넣은 사건이 석 달
전에 있었지. 쇼 부인에게 말이야. 아까 자네한테 말했듯이. 아무튼 로이스
부인, 부인도 조심하셔야 겠습니다. "
" 저어, 메이슨 선생님.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요점이 뭡니까? 대체
무엇때문에 쇼의 가족들은 로이스 부인에게 독을 먹여야 하는거지요, 메이슨
선생님? " 엘러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 그건 말일세. " 메이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로이스 부인이 사망할 경우 그 재산은 본디 상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
문일세.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존과 애거서의 것이 되는 걸세. "
메이슨은 이마를 닦았다.
엘러리는 의자에서 일어서자 또다시 침침한 방 안을 분주히 왔다갔다했다.
로이스 부인의 오른쪽 눈썹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시작했다.
" 이건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 엘러리가 불쑥 말했다.
그 눈에는 무언지 야릇한 것이 있어, 두 사람은 불안스럽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 로이스 부인만 괜찮으시다면 전 오늘 밤 여기서 묵겠습니다. 메이슨 선생님. "
" 좋습니다. " 로이스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겁을, 정말로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다가오는 불길한일의 먼 징조
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일고 있었다.
" 퀸 씨의 생각으로는 그 애들이 정말로 손을 써서.... "
"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엘러리는 서슴없이 말했다.
그 날은 별일 없이 멍청하니 지나가 버렸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아무도 찾
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다. 머치에게서도 아무 소식이 없어
존 쇼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메이슨은 현관포치에 처량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입에 문 잎 담배는 불이 꺼졌고 촌스러운 옛 인형
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로이스 부인은 얌전하게 자기 방에 들어앉아 있었
다. 피터는 뜰에 나가 개를 쫓고 있었다. 가끔 크뤼치양이 조심스럽게 피터
를 타이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러리 퀸에게는 고통스럽고 곤혹스러운 답답할
정도로 싫은 시간이었다. 이 질서 없는 저택 안을 혼이 나갈 정도로 맛없는
담배를 피워 대며 생각에 잠겨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 집 위에 위협의
덮개가 뒤덮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에 덤벼들려고 설
치며 몸을 억제하는 데에 모든 의지력을 쏟아야 했다. 그리고 정신이 산란해
서 무엇을 똑똑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살인자가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게 가능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엘러리는 몸을 떨고 어깨 너머로 힐끗 돌아보며 어깨를 움찔하고는 또다시
당면한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열 시간쯤 지나는 동안 생각
이 차분해지자 줄거리가 서기 시작하여 거기에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음이
명백해졌다. 마음이 차츰 누그러졌다. 엘러리는 미소를 머금고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을 불러 세워 애거서 쇼의 방이 어디 있는가를 물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통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극(劇)이 고조되어 감을 깨달은 엘러리는 가느다란 흥분을 느꼈다....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엘러리의 노크에 대답했다. 문을 여니까 남성판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애교가 없는 여성판 쇼가 소파 위에 몸을 굳히고 앉아
슬픈 듯한 눈으로 창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내복에는 깃털 장식이 달려
있고 불룩하게 드러난 종아리에는 정맥이 부풀어올라 있었다.
" 그래 무슨 볼일이시지요? "
애거서 쇼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 엘러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 퀸이라고 하며 메이슨 선생님의 의뢰를 받고 이 댁에서 일어난 번거로운
문제의 해결을 도우러 온 사람입니다. "
애거서 쇼는 가느다랗게 뼈가 드러난 목을 천천히 구부렸다.
" 퀸 씨에 대한 것은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저더러 뭘 하라시는 거지요?
키스라도 하라는 건가요? 존을 체포하도록 공작을 꾸민 건 당신이지요?
당신들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바보들뿐이에요! "
" 그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부인의 오빠를 구속한 것은, 여러분께서 신뢰하
고 계시는 머치 경위 한 사람의 생각입니다, 부인. 아시다시피 존 씨는 정식
으로 체포된 게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나는 완강하게 반대를 했었지요. "
애거서 쇼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으나, 갑자기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의식
했는지 포갠 다리를 내리고 볼썽 사나운 다리를 실내복 밑에 감추었다.
" 아무튼 앉으세요, 퀸 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돕겠어요. "
엘러리는 미소를 머금고 앉아 겉으로는 프랑스 적인 잔인성을 발휘하며 말했
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치 경위를 너무 책망할 수만도 없을 겁니다,부인.
부인의 오빠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자료가 있으니까요. "
" 그리고 나한테도요? "
" 그렇습니다. 부인에게도. " 엘러리는 안됐다는듯이 말했다.
애거서 쇼는 앙상하게 마른 팔을 들고 소리쳤다.
" 오오, 나는 이 저주스러운, 저주스러운 집과 그 저주스러운 여자가 미워요!
그 여자가 모든 사건의 원인이에요. 그 여자는 언젠가 틀림없이...... "
" 부인께서는 로이스 부인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하지만 그건
좀 공평치 못한 처사가 아닐까요? 메이슨 씨 말씀을 들어보면, 부인의 계모
님께서 아버님 재산을 로이스 부인에게 넘겨 주겠다고 유언하신 것은 누가
강요해서 그런 게 절대로 아니던데요.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일도 없고,
편지 왕래도 없었지요. 그리고 부인의 사촌 언니께서는 4천8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바다 건너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물론 불만은 있으시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로이스 부인의 잘못은 아니잖겠습니까? "
"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요? 누가 공평하지 못하단 말이에요? 그 여자는
우리 집 재산을 가로챘어요. 이제 우리는 이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그
여자에게 얻어먹어야 할 신세란 말이에요.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어요.
그 여자는 적어도 2년은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거예요. 그건 틀림없어요.
분을 덕지덕지 처바른 그 천박스러운 여자는.....그러니까 그 동안 죽.... "
" 난 도무지 말뜻을 못 알아듣겠군요. 2년 동안이라니요? "
" 유언장에는. " 애거서 쇼는 물어뜯을 듯이 말했다.
" 그 대단한 우리 사촌 언니가 이 집에 살면서 최소한 2년 동안 여주인으로서
살림을 맡게끔 결정이 되어 있어요. 그것이 우리에 대한 복수였던 거예요.
그 비열하고 악독한 할망구! 아버지가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든...
그 여자는 유언장에 '존과 애거서가 자기들 문제의 영구적인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주거를 제공할 것'이라고 써 놓았어요. 퀸 씨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이 말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요. '자기들
문제'라니, 난 생각할때마다.... "
여자는 입술을 깨물고 갑자기 경계하는 것처럼 엘러리를 곁눈으로 보았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고 문 쪽으로 갔다.
" 그래요. 그렇다면 정해진 기한이 차기 전에 이 집에서 로이스 부인을.....
뭐랄까....쫓아내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 물론 우리들 손에 돈이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
애거서 쇼는 미워 죽겠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기색을 띠었다. 야위고 가무잡잡
한 피부는 푸른 기를띠고 있었다.
"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
"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
엘러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문을 닫은 뒤 그는 잠시 동안 손
가락을 깨물며 서있다가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고 아래층의 전화 있는 데로 내
려갔다.존 쇼는 그 날 밤 10시에 경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 가슴은 더
움푹 꺼지고, 손가락은 더 떨리며, 눈은 더 핏발이 서 있었다. 술기운은 전혀
없었다. 머치는 꼭 소나기 구름 같았다.송장 같은 사내는 거실로 들어가자
하나 가득 찬 술병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혼자서 단호하게 결의를 품은
듯이 마셨다.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군요. "
머치 경위는 엘러리와 메이슨에게 불평하듯이 말했다.
자정 무렵, 집 안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최초의 경보는 크뤼치 양에 의하여 알려졌다. 간호사가 있는 대로 목청을
쥐어짜 외치면서 2층 복도를 뛰어내려왔을 때는 거의 1시쯤 이었다.
"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났어요! "
뭉게뭉게 이는 연기가 크뤼치 양의 가느다란 발목에 달라붙듯 감돌며, 복도
의 뒤쪽 창문으로 비쳐 드는 달빛에 얇은 잠옷을 통해 날씬하고 긴 토실토실
하 정강이의 떨리는 선이 드러나 있었다. 복도는 순식간에 북새판이 되었다.
문짝이 두들겨 부서지고 여기저기서 머리를 산발한 고개가 내밀어지고 저마다
질러 대는 고함소리가 오가고 메마른 목들이 연기 때문에 캑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치가 빠져 백 살도 더 먹어 보이는 피니어스 메이슨 씨는 잠옷
바람으로 층계 어귀 쪽으로 달아났다. 머치는 몽롱하게 술에 취해 쩔쩔매고
있는 존 쇼를 데리고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실크 잠옷을 입은 앙상한 애거서
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피터를 안고 비틀거리며 홀로 나왔다.
두 하인이 쫓기는 쥐처럼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엘러리 퀸은
자기 방 바깥에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주위를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 머치 씨. " 엘러리는 침착하게 스며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위가 달려왔다.
" 불이 났어요. "
머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 불난 곳이 어디지요? "
" 로이스 부인을 못 보셨소? "
" 로이스 부인? 아니, 못 보았는데요. "
경위는 홀을 뛰어서 돌아갔다. 엘러리는 뭔가 곰곰 생각하며 그뒤를 따라갔다.
머치는 문의 손잡이를 움직여 보았다. 잠겨 있었다.
" 어떻게 된 걸까? 자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연기에 질식되어..... "
" 가만 계십시오. " 엘러리는 한 발 물러서서 날카롭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 소리는 대강 지르시고, 문을 두들겨 부술 테니 거들어 주시오. 그녀가
자기 기름으로 프라이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
어둠과 지독한 연기 속에서 두 사람은 힘껏 문에 몸을 부딪쳐 갔다.
네 번째로 부딪치자 돌쩌귀가 부서졌다. 엘러리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손에 든 손전등의 강렬한 빛이 방 안에 비쳐 들며 흔들거렸다.
갑자기 누군가가 엘러리의 손에 든 손전등을 쳐서 손전등은 방바닥에 퉁겨
떨어졌다. 다음 순간 엘러리는 필사적으로 격투를 했다.
상대는 튼튼한 악마같은 녀석이었다. 숨을 씨근덕거리면서 억센 손으로
엘러리의 목을 죄려 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냉정하게 상대의 팔을 잡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뒤에서 머치가 소리를 질렀다.
" 로이스 부인, 우리입니다! "
무언지 따끔하고 차가운 것이 엘러리의 등을 스치더니 곧 타는 듯한 아픔이
남았다. 엘러리는 맨팔을 발견했다. 힘껏 비틀어 올렸다. 쨍그랑 하고 쇳조각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겨우 머치가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군 경찰의 순경 하나가 손전등을 휘두르면서 뛰어들어
왔다. 엘러리의 주먹이 상대방의 투실투실한 복부에 힘껏 한 대 쳐들어갔다.
목을 죄고 있던 손가락이 늦추어졌다. 순경이 전등 스위치를 찾아냈다.
로이스 부인은 심하게 버둥대면서 두 명의 남자에게 짓눌려 바닥에 누워있었
다. 옆에 있는 의자 위에 쌓아 놓은 빅토리아 왕조 의상 더미 속에 고무로
된 브래지어 같은 괴상하게 딱딱해 보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로이스 부인의
머리털도 어쩐지 이상하고 군데군데 쥐어뜯긴 것같이 보였다. 엘러리는 작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며 힘을 주며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머리 가죽이 훌렁
벗겨지며 백발로 테두리가 된 불그레한 머리 밑 살이 드러났다.
" 이 여자는 남자다! " 머치가 소리쳤다.
" 이렇게. " 엘러리는 한 손으로 로이스 부인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피투성이의 뺨을 가볍게 누르면서 말했다.
" 사변(思辨)의 힘이 실증되었습니다! "
이튿날 아침,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가며 메이슨이 중얼
거리듯이 말했다.
" 나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짐작을 했지, 퀸? "
엘러리는 눈을 들었다.
" 짐작이라니요? 메이슨 선생님, 그 말씀은 퀸 가문에 대한 모욕인데요.
이건 억측 따위와는 조금도 관계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산출해 낸 것이니까요.
그리고 일이 썩 잘 되었어요. "
뺨에 난 가느다란 상처를 만지면서 엘러리는 감개무량한 듯이 덧붙였다.
" 이봐, 퀸. " 변호사는 웃으며 말했다.
" 나는 자네에게는 2 더하기 2의 비범한 능력이 있다고 맥이 항상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실은 여태까지한 번도 믿지 않았네. 이래봬도 난 무지하지도
않을 뿐더러 법률적 훈련으로 일반 사람들보다는 두뇌적으로도 뛰어나다고 믿
고 있는데, 이번만은 자네의 그 능력의 실증에 완전히 어리벙벙해져 버렸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일세. "
" 선생님은 회의론자이십니까? " 엘러리는 뺨에 통증을 느끼면서 말했다.
" 그렇다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말씀드리지요. 알렌 의사가 살해되기
직전 렘브란트 부인의 얼굴에 그린 수염에 대한 것부터요. 알렌 의사가 범인
에 대한 단서로서 일부러 수염을 그려 놓았다는 점엔 이론이 없겠지요?
알렌은 그 수염을 가지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함에 있어서, 특정한 사람
을 지적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속의 여자는 렘브란트
의 부인이며 역사적인 인물입니다만, 우리들 인물 쪽은 전혀 미지의 인물이
니까요. 알렌은 또 문자 그대로 수염 난 여자를 지적할 속셈이었을 리가 없
습니다. 수염 난 여자란 병신이 아니면 기형인인데, 이번의 경우 관계자들
중에는 병신이나 기형인이 없었습니다. 또 수염 난 남자를 지적하려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림 속의 남자 얼굴에 전혀 손대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죽인 범인으로서 수염 난 남자를 지적하려 하였다면-즉
그것은 존 쇼라는 것이 됩니다만-알렌은 렘브란트의 수염 없는 얼굴에다
그것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존 쇼의 수염은 반 다이크 형이라 끝이 뾰족
합니다만, 알렌이 그린 것은 네모진 수염이었어요..어떻습니까, 꽤 까다로운
문제라는 것을 아셨지요? "
" 계속하게. " 변호사는 긴장해서 말했다.
" 그래서 다른 가능성이 모두 배제된 이상, 남은 유일한 결론은 알렌 의사가
수염을 그림으로써 지적하려 한 것은 남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굴
의 수염은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성에 대하여 우리들의 성을 위해 얼마
안 되는 전유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니까요. 바꿔 말하자면 여자 얼굴에-어떤
여자의 얼굴이라도 좋습니다. 그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수염을 그림으로써
알렌 의사가 말하고자 한 것은, '나를 죽인 범인은 여자같이 보이지만 실제
로는 남성인 인물이다'라는 것입니다. "
"아무튼 어처구니가 없군. " 메이슨은 숨을 삼켰다.
엘러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렇지요. 그런데 '여자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성인 인물'이 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변장입니다. 이 집에서 유일한 남이라고 하면
로이스 부인밖에 없습니다. 존도 애거서도 알렌 의사나 선생님이 너무 잘아시
기 때문에 변장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알렌은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집안의 주치의로서 그 두사람을 정기적으로 진찰해 왔기 때문이지요. 크뤼치
양은 의심할 여지없는 여성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여자는 정말 아름다운 젊은
여성입니다. 그 여자에게는 변장을 해야 할 만한 동기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스 부인이 변장할 가능성이 가장 클 것 같아 보여, 저는 그 인물에
관련하여 제가 관찰해 온 여러 가지 세세한 사실, 즉 겉모습이라든가 동작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증거를 발
견하고서 놀라고 말았지요. "
" 증거라고? " 메이슨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 정말이지, 메이슨 선생님. 이래서 회의론자는 곤란하다니까요. 대번에
어리둥절해 버리니 말씀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입술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로이스 부인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큐피드의 활 모
양과 똑같이 입술 연지를 바르고 있었습니다. 나이 든 부인치고는 이상했어요.
전체적으로 짙은 화장이었습니다만, 특히 분을 너무 많이 발랐더군요. 분을
많이 바른다는 것은 점잖은 노부인에게는 별로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피부는
아무리 자주 꼼꼼하게 면도질을 한다 해도 그 거친 살결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옷차림을 말씀 드리자면 이것이 아주 유력한 증거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유행이 지난 빅토리아 왕조식 옷을 입을 필요가 있었는가? 그 여자는
전에 무대에 섰었다니까 사교계 여자로서 닳고 닳았다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그는 지난 세기의 괴상 야릇한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보나마나 뻣뻣한 몸을 싸서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의 얄팍한
알몸이나 다름없이 몸에 착 달라붙는 부인복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칼라입니다. 정말이지 그 칼라는 기막힌 착상이었어요. 기억하고 계시
지요? 초커라고 하는 목 전체가 가려지는 칼라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툭
튀어나온 결후는 감출 수 없는 남성의 세습적인 재산이니까 초커 칼라는
여자로 변장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바리톤의 목소리, 거친
동작, 남자 같은 걸음걸이, 뒤축이 납작한 구두....구두가 특히 의미심장
하였지요. 굽이 납작했을 뿐만 아니라 엄지발가락 안쪽에 큼직한 염증이 보
이더군요. 아무리 편한 여자 구두라도 남자가 신으면 으레 군살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
메이슨이 이설을 끄집어냈다.
" 자네의 설명이 하나하나 당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작해야 개괄설이니까
자네가 결론을 먼저 내놓고 거기서 산출해 낸 것에 우연히 일치했을 뿐인지도
모르지, 자네가 로이스 부인을 남자라고 단정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인가? "
변호사는 실망한 것 같았다.
" 천만에요. " 엘러리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
이상은 선생님 말씀대로 개괄적입니다. 하지만 그밖에도 그 빈틈없는 로이스
부인은 토론할 여지없는 남성 특유의 세 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
선 첫째로 제가 두 번째 만났을 적에 그 여자는 두 손으로 무릎 있는 데까지
스커트를 쳐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양 무릎에다가 손을 하나씩 놓고서 말입니
다. 이것은 명백히 남자들이 앉을 때 하는 동작입니다. 바지를 슬쩍 쳐들지
않습니까? 생각건대 바지의 무릎 있는 데가 툭 불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겠지만요. "
" 그러나... "
" 잠깐만요, 그리고 그 여자가 계속 오른쪽 눈썹을 씰룩이며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을 눈치채셨습니까? 이것은 오랫동인 외눈 안경을 썼던 결과에서 온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입니다. 외눈 안경은 남성 특유의 것입니다. 끝
으로, 그 여자가 담배를 입에서 뗄 때의 색다른 습관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
람은 대개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으로 집게마련인데, 그 여자는 손을 컵처
럼 둘러싸듯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을 컵처럼 씌우는 것은 분명히 파이
프를 피울 때의 시늉입니다. 파이프를 피우는 사람은 손을 컵 모양으로 해 가
지고 파이프 끝을 쥐고 입에서 뗍니다. 이것도 또 남자의 특징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특수한 요소를 방금 말씀드린 개괄설에다가 덧붙여서, 로이스 부인은
틀림없이 남자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남자인가? 이것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우선 첫째로 선생님과 선생님의 협력자이신 쿨리지 변호사께서
그녀에게 여러 가지로 질문하셨을 때 쇼 집안의 역사, 특히 에디스 쇼의 경력에
대하여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렇게 여자로 변장
해서 행동하려면 일종의 연기력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외눈 안경을 쓰고 있었다
는 추정이 있었습니다.그야말로 영국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집안 사람들이
갖는 외모적 특징이 크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이스 부인'은 틀림없이
쇼 집안의 한 사람이며, 더구나 영국인인 쇼 집안의 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집
안의 또 한 사람인 모튼 측의 쇼, 즉 에디스 쇼의 남동생 퍼시라는 것을 저는
알았던 것입니다. "
그 때 메이슨이 소리쳤다.
" 하지만 그 여자...아니, 그 사내말인데, 그 사내, 퍼시는 자동차 사고로 유럽
어딘가에서 몇 달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
엘러리는 슬픈 듯이 말했다.
" 제가 존경하는...특히 변호사쯤 되시는 분이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 여자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아니, 그 사내지요. 자꾸 혼동이 되는군
요. 에디스 쇼 앞으로 보낸 선생님의 법률적인 편지를 퍼시가 받은겁니다. 그들
두사람은 아마 같이 살고 있었을 테니까요. 퍼시가 받았다고 한다면, 얼마 전에
죽은 건 퍼시가 아니라 에디스 쇼였음이 틀림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안 그렇습니
까? 그래서 퍼시가 그 기회를 잡고 유산을 물려받을 목적으로 여자로 변장했던 것
입니다. "
메이슨은 의아한 듯이 반문했다.
" 하지만 어째서 또 그는 알렌 의사를 죽였을까? 아무것도 이득될 것이 없는데.
알렌의 돈은 쇼의 사촌 남매들한테 돌아가기로 되어 있으니까, 퍼시 쇼의 손에는
안 들어간단 말야. 과거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을까. "
" 아니,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눈 앞에 있는 동기가 더 없이 일목요연한데, 과거의 원한 따위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로이스 부인이 남자였다고 한다면 동기는 금방 드러납니다. 쇼
부인의 유언장의 조건에 의하면 알렌은 정기적으로 가족을 진단해야 했고, 로이스
부인에 대해서는 특별히 유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어제 애거서 쇼가 저한테
말한 바에 의하면 로이스 부인은 유언장에 의하여 2년 동안 그 집에서 살게 되어
있더군요. 그렇다면 퍼시 쇼로서는 알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자기의 속임수가
드러날 파국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물론 알렌이 진찰을 하는 날에는 곧 진상이
드러날 테니까요-의사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간단 명료합니다. 안 그
렇습니까? "
" 그렇다면 알렌이 수염을 그린 것은..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
" 거기에는 무슨 계기가 있었겠지요.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던가를 상상해
보건데, 아마 그 사기꾼 사내가 최초의 건강 진단을 받을 날이 임박한 것을
알자 흉행이 있었던 날 밤 의사를 찾아가, 자기가 남자임을 털어놓고 통사정
을 하며 거래를 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군요. 알렌은 워낙 정직한 사람이라
딱 잘라 매수를 거절했던 겁니다. 그때 알렌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으며, 집안 사람을 부르지도 못하고 순간적인 착상으로 수염을 그렸던
거겠지요. 다른 사람들은 방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범인의 이름을
쓰면 '로이스 부인'이 보고 찢어 버릴 게 뻔하니까 그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때 뇌리를 스친 것이 피터가 수염을 낙서한 일이어서, 그는 '로이스 부인'
이 지껄이고 있는 동안 조용히 수염을 그린 거지요. 그러다가 찔려 죽은 게
틀림없습니다. "
" 그렇다면 그 전의 쇼 부인 독살 미수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건가? "
" 틀림없이 존과 애거서가 짜고 한 짓이었겠지요. "
메이슨은 입을 다물었고 잠시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차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변호사가 몸을 움직여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글쎄, 여러 모로 생각해 볼 때 자네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해야 할 것
같네.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물론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추리에는
법적 증거의 뒷받침은 아무것도 없네-로이스 부인을 남자로 짐작했다는
것만으로 고발한다는 것은 도저히 못 할 일이거든. 그렇잖은가? 만일 자네의
추리가 잘못된 날에는, 그 여자는 자네를 훌륭하게 고소할 수가 있거든.
어젯밤의 화재는 하느님이 보살핀거야. "
엘러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메이슨 선생님,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하느님의
보살핌이 나타나면 물론 그것을 감사해야지요. 그러나 헛되이 속수무책으로
앉아 기다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
" 그렇다면......."
메이슨은 숨을 삼키고 입을 딱 벌렸다.
엘러리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 전화를 걸어 벨리 경사가 현장에 달려와 연막탄을 터뜨렸기 때문에 밤중에
로이스 부인의 방에 침입할 구실이 만들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크뤼치 양의 주소를 모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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