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서 충 렬
선운산이 지척으로 보이는 `인내보'에서 버스를 내려 길가 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내가 태어난 곳을
찾기 위해 나는 지금 길을 걷고 있다.
반 세기 전에는 젊으신 어머님이 이 길을 걸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길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그리고 풀잎
한 포기에도 정감이 어려온다.
어머님의 추억이 서려 있고, 나의 탄생을 신비로움으로 간직하고 계시는 어머님의 오랜 부탁을 백발이 성성한
몸이 되어 나는 겨우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사신원'이라는 마을을 지나 `깨진 바위' 쪽으로 한참을 가다가 선운사 방향으로 얼마를 오르니 아름드리
소나무숲 사이로 바구니 모양의 밭이 나타난다. 이곳이 내가 태어난 집터다.
57년 전 부모님께서 어렵사리 지으셨다던 초가집은 간데 없고, 어느 농부의 정성으로 심어논 보리 이삭이
봄바람에 파릇 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보리밭을 가로질러 가파른 능선을 조금 오르니 무뚝뚝하게 생긴 제법 큰 바위가 나타났다. 이 바위에서
어머님께서는 나를 얻기 위해 100일 동안을 산신령께 치성 드렸다는 것이다.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
바위에 기대어 소주병을 기울이며 어머님의 일생을 생각해 본다.
어머님은 퇴락(頹落)한 시골 선비의 장녀로 태어나 16세에 부자집 막내아들인 아버님과 혼인 하셨다. 시집올
때 춘향전 등 이야기 책들을 필사하여 한 궤짝 가져오신 어머님께서는 이야기 책을 많이 읽으셨고, 붓글씨도
매우 잘 쓰셨다. 기품있는 외모에 음식솜씨가 좋으셔서 할아버지께서는 많은 가족 중에서 가장 총애를 하셨고,
부자이신 할아버지께서는 막내이지만 많은 재산을 물려 주시기도 했다.
1940년 日帝가 태평양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모든 물자를 수탈하였고 人力을 동원할 때 아버지께서는
징용에 해당되어 日警의 눈을 피해 다니셔야만 했었다. 어느날, `닛본도'를 허리에 찬 일경의 급습으로
붙잡히게 되어 끌려가던 중 그 일경을 뚝 아래 물웅덩이로 밀쳐 버리고 도망치셨다. 그후 아버지 께서는
도망자 신세가 되셨고, 그래서 도저히 고향땅에서 살 수가 없게 되어 이곳 깊은 산골을 은신처로 택하신
것이었다.
산짐승들이 떼지어 다니고 호랑이도 보였다는 이곳에서 어린 딸들과 초근목피로 연명하시면서도, 혼인한지
15년이 넘도록 아들 하나 없는 것을 한탄하셨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되는 이 문젤 어떤 초월적인 신비로운
힘의 존재인 산신령께 의탁하고자 어머님께서는 이 바위를 제단으로 정하여 100일 동안이나 치성드렸던
것이다. 그 결과 나를 잉태하게 된 것으로 믿으시는 어머님께서는 산신령께 그리고 부처님께 재물을 바치시는
일생을 살으셨다.
16년만에 얻은 자식이니 특별하셨겠지만 어느 날 잔치집에서 우연히 만난 신들린 무당으로 부터 `충렬'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후로는 이 무당의 말을 신의 계시쯤으로 여기시게 되었다. 더욱이 내가 3살 되던 해에 일제가
실시한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상을 타게 되자 어머님의 나에 대한 애정은 거의 신앙에 가까웁게 되어버렸다.
부상으로 받은 쌀과 광목도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었지만 "만 5세가 되면 일본으로 데려가 훌륭하게
키워준다."는 일본 관리의 말을 듣고 어머님께서는 그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그러나 내가 4살되던 해 일제는 망했고,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일제가 망한것을 오래토록 아쉬워 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어 우리가족이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땐, 땅 한 평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날 때 맡겨둔
집과 논밭을 아편 중독자가 되신 큰아버지께서 모두 탕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어머님이
장사를 해서 형편이 풀릴 때까지 오랜 세월을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한량으로만 살으시며 가정 경제에는 보탬이 되어 주지 못하였으므로 어머님께서는 오직
우리들의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궂은 일을 감내하시며 살으시다가 내가 취학아동이 되어 있을 때쯤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비단 장사를 시작하셨다. 옷감을 한 보따리 머리에 이시고 해뜰 때 집을 나가시어 오지 마을을
다니시며 곡식으로 물물교환을 해가지고 해가 지면 돌아오셨다. 올 때의 보따리는 목이 휘도록 무거웠다. 나는
이 보따리를 받아오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마중을 다녀야만 했다. 마중 나갈 때의 우리의 약속은
매우 융통성이 있었다. "구시봉과 태봉 사이의 갈림길에서 어두울 때 만나자." 항상 이런 식이어서 약속 장소
근방에서 두어 시간쯤 기다리는 것은 비일비재였다.
어둠이 깔린 외딴 길가에서의 기다림은 무섭고 추운 기억이 전부이지만, 때로는 달빛을 가리는 흰구름도
있었고, 은하수 선명한 밤하늘도 있었다.
어두운 논두렁 빠져가며 걸었던 `목골'가는 길을 단벌 교복안으로 파고드는 겨울바람이 매서웠고, 별이 빛나던
`구시봉'갈림길에서의 숱한 나날들……
그 시절 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은 무수했고, 소쩍새는 밤마다 서럽도록 울기만 했다. 북풍 몰아치는 추운
겨울밤, 새끼줄로 동여맨 고무신이 눈에 빠져 발 동동 거리며 기다리는 시간은 하, 길기만 했었다.
어머님과의 기다림으로 점철된 오랜 세월은 봄바람에 실려오는 들꽃 향기로는 떠오르지 않고 춥고 삭막한
겨울로만 떠오르는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추운 겨울로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나의 꿈은 시린 발을 감쌀 신발 한 켤레와 따뜻한 외투 한 벌을 갖는 것이었다. 한 번은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봉산들'에서 길을 잃고 자정까지 헤맨 일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스라히 인가로부터
새어나온 불빛만 희미하게 보이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어림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한참을 걷고 나면 다시 출발
지점에 도착되어 있기를 거듭하며, 어머님과 나는 무서움에 떨며 오랜 시간을 헤매었다. 지금 생각하니 비
오기 전 저기압의 날씨가 빚어낸 燐火를 본 것이겠지만 그때 우리는 도깨비 불로 생각했고 어머님께서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계신다. 이런 저런 사연들이 쌓여가며 어머님의 보따리 인생은 내가 성장하여 서울에서 방
한 칸 장만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만년필, 손전등 그리고 칼을 좋아했다던 내가 그것들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분해조립을 거듭하면서
망가뜨리고 다시 구입하는 버릇을 계속하고 있을 때에도, 어머님께서는 꾸지람은 아니하시며 뒷돈을 대
주셨고, 학과 공부는 안하고 밤새워 소설책만 읽고 있는 나를 어머님께서는 대견해 하시며 군말없이 책값을
대주셨다. 어머님에 대한 나의 영상은 가난, 어두움, 추위, 그리고 일방적인 사랑이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온다는데, 나는 평생을 곁에 모시면서 고운 정이 모두
희석되어 버렸는지 눈물이 아니 나온다. 다만 이렇게 잠시 떨어져 홀로 어머님을 생각하려니 마음 속으로부터
눈물이 흐를 뿐이다.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웠더니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보인다. 지금 내 발 아래로는 예쁘게 생긴 다람쥐 한 마리가
촐랑거리며 주변을 맴돌다 소나무 가지에 오르고, 두견화는 산골 처녀의 수줍음처럼 앙증스런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다. 골짜기로부터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에 멀어져 가는 뻐꾸기 소리 들으며 나는 산에서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의 아픈 과거가 어려 푸릇푸릇 보리싹으로 돋아난, 옛 집터를 뒤로 하며. 이젠 어느덧
세월이 흘러 소슬바람앞에 매달린 가랑잎처럼 자의대로 거동조차 못하시는 나의 어머니. 평생을 자식
하나만을 믿고 사셨는데, 생각해 새삼 나의 쓸쓸한 어깨 탓인지 아니 흐른다던 눈물이 다 앞길을 막는다.
바닷가의 두 소녀
펌
바람이 별로 없는 바다의 아침은 평화로웠습니다. 갈매기도 연처럼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어젯밤에
그렇게 불던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쳤기에 파도도 노래를 부르는 듯했습니다. 하늘도 어제의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쪽빛 하늘은 마치 고요한 호수 같았습니다.
그 바다 백사장을 두 소녀가 걷고 있었습니다. 두 소녀는 바다가 마냥 좋아서 걷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해변을 걷는 겁니다. 두 소녀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아침마다 조개를 줍습니다. 그 조개를
팔아 살림에 보탤려고 아침마다 길고 긴 해변을 걷는 것입니다.
"어, 큰 조개네?"
한 소녀의 맑은 눈망울에 큼직한 조개가 반짝이며 들어왔습니다. 소녀가 마악 주우려는 순간 뒤따라오던
다른 소녀가 그녀를 거칠게 뿌리치며 그 조개를 먼저 주워 담았습니다.
맑은 눈동자의 소녀는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바닷가에 조개는
틈틈이 있지만 아무나 크고 아름다운 조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조개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 후 소녀는 또 크고 아름다운 조개를 보았습니다. 다시 그 조개를 주우려 할 때였습니다.
"이것도 내꺼야."
다른 소녀가 또 그것을 집어들었습니다. 소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입을 꼬옥 다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녀는 크게
낙심했습니다. 소녀의 바구니에 담긴 조개는 조그만 것뿐이었습니다. 거친 소년,ㄴ 바다가 모두 자기
것인양 어깨에 힘을 주며 앞장서서 나아갔습니다.
조금후 뒤따라가던 소녀의 맑은 눈망울에 크진 않지만 신빈한 빛을 띠고 있는 조개가 들어왔습니다.
소녀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진주 조개였습니다. 소녀는 진주 조개를 얼른 주워
바구니 안쪽에 밀어 놓고 조개를 조금 벌려 보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거기에는 영롱한 빛을 띠고 있는
큼직한 진주가 들어있었습니다.
거친 소녀는 여기저기 뛰다시피하며 큰 조개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뒤 따라오는 소녀를 향해 흔들어보였습니다.
"네 까짓게 이런 조개를 주울수 있어?" 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큰 조개가 듬뿍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입을 삐쭉 내밀고 했습니다.
그러나 맑은 눈동자의 소녀는 더이상 가슴 아프지도, 실망하지도, 원망하지도 읺습니다. 그녀에게는 진주 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녀는 오늘따라 하늘이 더욱 파랗고 다정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소녀의 고운 입술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갈매기의 흰 날개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보고 싶구나.
퍼옴
저는 9살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별하시고 저는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형편은 어려울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직장을 나가게 되었지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저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되었고, 어머니는 점차 병이 들어가시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 호되게 혼이 난 다음 집을나오고 말았어요. 물론 학교도 가지 않았구요.
집을 나와 친구네서 신세를 졌지만 신세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는 못 있겠더라구요. 배도 고프고 집생각도 났지만 집에 들어가긴 싫었어요. 그러다가 주유소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일은 너무나 힘들었고,냉정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기심에 술도 마시게 되었고, 담배도 피우게 되었어요. 그러기를한두 달, 벌써 5개월이란 시간이 지나게 되었지요.
저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집에 전화를 했지요. 아무도 받지 않더라구요. 몇번 더 전화를 더 걸었지만 마찬가지였어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더군요.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이모에게 전화를 받는 순간 전 너무 당황했고 나의 몸에 싸늘히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북받쳐 올라오는 눈물로 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답니다.
일주일전 어머니가 악성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강례도 이미 치러졌구요.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사진과 일기장, 그리고 제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시고 가셨어요. 어머니의 일기장을 보며 장마비같은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보고싶구나..."
저는 속으로 말했죠.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시간이 뒤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생각이 들었어요.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매해마다 어머니의 산소를 돌보며 지난 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답니다.
한순간의 방황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저버리시 않으시길 바랍니다.
못생긴 나의 도장
Best 8. 91년 9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도장이 있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입학원서에 찍을 도장이 필요하다며 선생님께서 도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교육자 가정에서 7남매를 연이어 대학교육까지 시켜야 했던 나의 아버지로서는 도장 하나 남들처럼 제대로 새겨 주기도 경제적 형편이 어려웠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께서 쓰시던 헌 도장을 깎아 버리고 손수 서툰 솜씨로 밤새워 도장을 파 주지 않으면 안 되셨다.
친구들은 모두 도장 전문가가 새긴 번듯한 도장으로 세련되게 도장을 찍는데, 나는 손때 타서 거무죽죽한 나무 도장을, 그것도 잘 쓴 글씨가 아닌 비뚤어진 글씨의 보잘것 없는 도장을 꺼내 누가 볼세라 어디서 훔쳐 온 도장마냥 살짝 찍어야만 했다. 남이 가진 것보다 내 것은 항상 못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도 부끄럽고 서러웠던지….
차차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새겨 주신 그 도장은 어느 유능한 예술가가 새긴 조각품보다도 더 훌륭하고 귀중한 것이 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나의 못생긴 도장은 각종 진단서나 서류에 유용하게 쓰여지면서 사용하면 할수록 섬세하신 아버지의 한없이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도장을 찍을 때마다 못생긴 도장을 부끄러워하며 서러워했던 철없던 시절의 나의 행동에서 아버지의 성실하시고 검소하신 삶을 부끄러워했던 불효를 느끼고 마음이 참 아팠다.
사연을 모르는 주위의 많은 이들이 내 도장을 보며, “과장님! 돈 벌어 어디 쓰십니까? 신분에 맞게 좋은 걸로 다시 파세요.” 하는 충고도 하고, 또 실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게 아주 값비싼 고급 도장을 선물로 사 온 분도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이 못생긴 도장만을 사용한다. 쓰지 않으면 배은망덕하기라도 한 것 같아서.
최근 우연히도 30년 만에 그 도장을 아버지께서 보실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밤을 새시며 손수 파 주셨던 이야기며, 딴 애들과 비교해 너무 보잘것없는 도장이라 느끼며 부끄럽고 서러워 울었던 지난 날의 이야기를 해 드렸다.
그 후, 아버지로부터 영문 모를 소포가 하나 왔다. 궁금해하며 열어 보았더니 아버지께서 수십 년을 쓰시던 상아 도장을 깎아 내 이름을 예쁘게 새긴 도장이 들어 있었다.
그 도장과 함께 곱게 접어 넣어 두신 짧은 글.
“사랑하는 순옥아! 아버지가 새겨 준 것이라며 30년이나 간직해 온 너의 못생긴 도장을 보니, 키울 때 잘해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켰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마음이 많이 아프더구나. 그 도장은 네가 계속 쓰기에는 이제 너무 보잘것 없는 것이 되었지. 이것은 아버지가 평생을 써 왔던 도장인데 이제 정년 퇴임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쓸 일이 없어서 다시 깎아 네 이름을 새겨 보았다.
아버지 생각하며 평생을 유익하게 써 다오.”
나는 그 소포와 편지를 받고 그만 울어 버렸다. 그 도장 속에 새겨진, 내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든 고생과 설움을 읽으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 때에 비하면 너무나 경제적으로 부요해지고 풍족한 요즘의 나의 삶을 보며 나는 내 사랑하는 딸들에게 평생을 두고 간직할 만한 정성어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날이면 날마다 공부, 공부 하며 살아야 하는 그 아이들에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이 삭막한 엄마가 동심어린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반성해 본다.
불에 타 버린 천사
Best 8. 95년 11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나에게는 고모가 한 분 계셨다. 세상 사람들은 고모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은 다 못 가도 저분만은 천당에 가실 거야.”라고 말했다.
그만큼 고모는 유별난 크리스천이었다.
고모가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된 이유는 그의 구제 생활에 있었다.
시골에 홀로 사시는 노인들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웃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길거리의 거지들을 한데 모아 먹이는 일이었다.
농촌이 바쁜 철이 되면 거지들을 대여섯 명씩 데리고 와서 우리 집 일을 도와 주시기도 했다.
그 중에 잊혀지지 않는 거지가 한 명 있다.
아마 가장 오랫동안 고모를 따라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추운 겨울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을 자다가 옷에 불이 붙어서 심한 화상 입은 것을 고모가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치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다리 하나를 잘라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듬 해 겨울, 나는 초라한 초가집 단칸방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 가고 거리는 조용했다. 가끔 바람에 나뭇잎 날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열한 시쯤 되었을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왠지 무서운 생각이 엄습해 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마당 가운데 흉칙스런 옷차림에 목발을 짚은 그 애가 서 있는 것이었다. 무서운 생각은 사라졌지만 갑자기 나의 머리 속은 깊은 갈등으로 가득찼다. 들어오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가라고 해야 할까.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침묵이 계속 흘렀다. 나의 눈을 바라보는 그 애의 모습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제발 나한테 가라고 하지 마세요. 날씨는 너무 춥고 전 갈 곳이 없어요. 그냥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만 있을 게요. 제발 들어오라고만 해 주세요.”
하며 간절히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성 프란체스코의 이야기에 나오는 문둥이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고모네 집에 가지 왜 여기에 왔니? 어서 고모네 집에 가 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서서히 목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모가 오셨다. 고모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봉기야, 어젯밤에 그 애가 죽었단다. 모닥불 옆에서 자다가 옷에 불이 붙어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외치니까 이웃집에서 뛰쳐나와 물을 부었는데 그때는 이미….”
고모는 어젯밤에 철야기도 가느라 집을 비웠었고, 마침 대문이 꼭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내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성 프란체스코는 문둥이의 손발을 씻겨 주고 목욕까지 시켜 주었는데, 난 그를 불에 타서 죽게 하다니….
그날 밤, 마당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좀 들어가도 될까요?"
"안돼"
"구석에 쪼그리고 있을께요"
"안된대도"
"제발 들어오라고만..."
죽어버렸다던 거지애는 쉬지않고 내 가슴에 속삭이고 있다.
뭐하러 기다렸어?
여보, 나도 뭔가 일을 하고 싶어요.”9주년 결혼기념일이던 지난 여름밤, 설거지를 끝낸 아내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아침에 당신 출근하고, 애들까지 학교 보내고 나면 얼마나 힘이 쭉 빠지는지…. 주부우울증이란 게 이해가 가더라니까. 아무 일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그래. 하지만 요즘 일자리 구하기가 뭐 그리 쉽나….”
그냥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는데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일거리를 구했다며 직장으로 전화를 했다.
동네 작은 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오후 2시부터 8시까지 수업을 하는 거라며 아내는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아이를 낳았을 때만큼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당장 그 다음 날부터 회사에선 날 ‘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퇴근시간이 되면 1분도 놓치지 않고 칼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9시가 넘어서야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간신히 애들과 내 얼굴만 확인하고 곯아 떨어졌기 때문에 아이들 저녁밥이나 집안청소 등은 전부 내 차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하느라 평소보다 늦어지는 날이면 아내는 꼭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일을 시켰다. 하다못해 애들 준비물 사오는 일이나 내일 아침 쌀 씻어 두는 일까지….
하지만 그만 두라 말할 입장도 아니고,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활기찬 모습에 기쁜 마음으로 일을 거들었다.
그날도 ‘칼’처럼 집에 돌아와, 장 봐와서 애들 먹이고, 청소하고, 숙제시키고, 아이들 싹 씻긴 다음 잠까지 재워 놓고, 아내가 올 시간이 되어서는 피곤하고 배고플 아내를 생각하며 저녁상을 정성껏 차렸다.
‘어? 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왜 안 오지?’
직장에서의 피로가 쌓인데다 집안일까지 해치우고 나니 몹시 피곤하고 배가 고팠지만 늦는 아내를 마중하기 위해 집 앞 큰길 버스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어나갔다.
‘보충수업 땜에 늦어지나? 그럼 왜 전화도 한통 없담….’
연락없이 늦는 아내를 원망하려다가 갑자기 지난 날의 내 모습들이 떠올라 가슴이 저몄다.
"뭐 하러 기다렸어? 아무렴 내가 집에도 못 찾아올까 봐?”
“저녁은 먹었어요? 당신, 왜 전화도 없었어요?”
밤늦게 버스에서 내린 나를 반기는 아내에게 난 매정하게 몰아붙였었다.
“그런 걸 당신한테 일일이 다 보고해야 돼? 그럼 내가 어떻게 맘놓고 바깥일을 보니?”
너무나 정색을 하고 말하는 바람에 머쓱해하던 그녀.
“아니 뭐 그냥…. 피곤하시죠? 빨리 들어가요.” 지난 9년 동안 내가 얼마나 아내를 속상하 했던가. 이 정도는 싸지, 싸.
권오섭/서울 종로구 안국동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몇 년 전 몹시 무덥던 날 전철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 안이라 응급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주위 사람들고 괜찮으냐고 걱정을 해 주는 것이 고작일 따름이었다.
아주머니가 약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마실 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철은 역에 도착했다.
바로 그 순간 20세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꽁지에 불붙은 토끼처럼 튀어나가더니 전철이 출발하는 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캔 주스를 하나 들고 전철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주머니, 이것으로 약을 드세요."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역이 내려야 할 역인 듯 그 아가씨는 다시 잽싸게 내렸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승객 모두는 어안이벙벙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아가씨가 내리고 나자 잠시 후 아주머니도 고통에서 벗어났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고 하지만 그런 기특한 아가씨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내 딸도 그 아가씨처럼 성장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빌었다.
그 광경은 언제까지고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 중에서
사막으로 간 택시
"어디로 모실까요."
"기독병원 갑시다"
1200이라는 숫자가 미터기에서 붉은 빛을 발했고, 운전기사는 핸드브레이 크를 풀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동시에 관성에 의해 몸이 좌석에 바짝 들러붙 었다. 살갗이 떨리는 바깥공기와는 달리 실내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차 있었 다. 히터로 달구어진 공기에 살갗의 올 하나하나가 풀어져나가는 것을 느꼈 다. 졸음이 스멀스멀 눈꺼풀사이를 음습해 들어왔다. K씨는
움츠렸던 어깨를 이완시켜 달겨드는 졸음을 쫓아보았다. 여전히 냉기가 가득한 손등을 두어번 비비고 나서 K씨는 운전기사의 얼굴 을 힐끗거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운전기사 얼굴이나 확인해 보자, 는 습관적인 동기였다.
푸웃. 그순간 K씨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소리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언뜻 보이는 이마의 주름살이 쉰살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 었지만,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엔 붉은염색이 알록달록하게
앉아 있었고, 귓볼 에는 둥그런 고리가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영화에서 보는 할렘가의 흑인들이나, 요즈음 일부 철부지 청소년들에게서나 볼 수 있을 장신구가 연상 되었다.
헤어스타일은 또 어떤가. 저 아메리카의 메이저리그에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엘에이 다저스의 투수 박찬호의 인기가도에 무임승차해 유행하는 하늘색 야구모자와, 그밑으로 빼꼼히 꼬리를 내린채 투명한 겨울햇살에 반사 되어 빛을
발하고 있는 갈색 귀밑머리하며, 까아만 양복에 까아만 와이셔츠 그리고 까아만 선글래스, 카오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힙합풍의 저 흑인음악.
"날씨가 많이 춥죠?"
"네에."
K씨는 명료하게 대답을 했다. 그가 날씨따위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 을 K씨는 잘 알고 있었다. 지리에 눈이 어두운까닭으로 생활반경을 벗어난 출장은 늘 택시를 타는 K씨다. 새로 승차한 손님과 목적지까의 무료한 시간을 때울 잡담을
위해 그는 사전포석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K씨는 심드렁한 표정 을 지어보였다.
"어디가 편챦으시나 보죠? 병원을 가시게"
"그게 아니구요 먹고 살려다 보니"
"어이쿠. 그럼, 의사선생님이세요?"
남이야 병원에 아파서 가든 문병을 가든, 자동차를 팔아 해치우러 가든 무 슨 상관이란 말인가. 운전기사의 예상외의 반응에 섬짓 놀란 K씨는 애초에 쌀 쌀하게 끊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던 것을 후회했다. K씨는 더이상 그의 호기심이
쓸데없이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조금은 귀챦다는 투로 그렇습니다만, 하고 짧게 끊어 대답했다. 아니라고 하면 뭐하시는 분이냐, 고 물어올테고 그렇게 되면 대화가 피곤하게 질질 이어질 것 같다는 계산이 들었던 것이다.
천성적으로 K씨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과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 었다. 그저 스치듯 지나는 사람은 그렇게
스치듯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K씨의 신조라면 신조랄 수 있었다. 서른해의 삶 동안 K씨가 비교적 단촐한 인간관계 를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덕분이었다. 그덕에 조금은 차갑다느니, 인정이 없다느니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그런말에 신경 써가 면서도 자신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인연의 끈을 묶어둘 필 요가 무어있겠는가, 라고 그는 생각한다. 복잡한 것은 싫다. 꼭 필요한 관계 가 아니라면 가급적 맺지 않는 것, 그것은 K씨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원 칙이었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는 자신이 자동차외판원이면 어떻고 의사면 또 어떻다고 저토록 놀란단 말인가. K씨는 그가 못마땅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긴 또 신문한켠의 조각기사로 난 의료사고따위를 놓고, 자신에게 시비걸자 고
하는 것일지도 모를 터였다. 우리나라 운전기사치고 말발이 약한 사람 없 고, 시사평론가 아닌 사람이 있겠는가만 특히 광주의 택시운전기사들의 입심 은 전국적으로도 수위를 지킬만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치밀한 분석과 거창한 대안을 내놓는 이들이 광주의 택시기사들이 아 니던가. 단지 그 대안이란게 좀 감정적이고 현실성이 없어서 탈이라면 탈이라 고 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그는 의사가 아니다, 대한민국 어딜가나 가장 흔해빠지고 서민들에게 는 가장 경계의 대상이랄수 있는 세일즈맨일 뿐이다, K씨는 그렇게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K씨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 원해 있는
아내의 간병을 위해 병원에 붙어 있는 대학동창에게 자동차를 한대 팔아 치우기 위해 찾아가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었다. 평생에 자동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던 고지식한 친구가, 비록 경승용차이긴 했지만 자동차를 하 나 계약하자고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가뜩이나 불황인지라 자동차 판매실적 이 여의치
않던 차에 K씨는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전화를 수화기에 내려 놓자마자 경승용차 카렌다를 챙겨들고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길이었다.
"그러세요?"
그런데 웬일인지 운전기사는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을 섞은 얼굴로 K씨를 돌아다 보는 것이었다. 마치 경이롭다는 듯이 혹은
오래된 친구를 화장실에서 만났을때처럼. 점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음을 K 씨는 직감했다.
K씨는 창 밖을 내다보며 그의 시선이 거두어지기만을 기다렸 다.
창밖으로 조선대학교 정문풍경이 흘러가고 있었다. 머얼리 백악관이라고도 불리는 조선대 본관이 의젓한 자세로 산중턱에
서 있었고, 가까이는 이십층짜 리 공과대학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서 있었다. 하지만 K씨는 알고 있었다. 본관의
약학대학이 들어서 있는 쪽은 현재 붕괴위험이 있어 폐쇄되어 있고, 멀대처럼 하늘만 찌르고 있는 저 이십층짜리
공과대학건물의 엘리베이 터는 보름이 멀다하고 고장이 나곤하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라는 것을. 겉만 거창하지
말하자면 속은 텅 빈 대나무라고나 할까. 세상엔 겉만 화려했 지 속은 실속이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하고 K씨는
생각한다. 겉만 화려 했던 것들은 모두 무너졌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칼기, 그리고 우산동 해양 가스, 어디 그런 것
뿐인가. 세상은 다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속내는 매 양 한가지로 부식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라는
강력한 산화력 앞에서 맥없이 스러지는 것들. 택시도, 가로수도, 비둘기호 완행열차도, 심지 어는 자신도 서서히
산화작용으로 부서지고 있는지도.
정문에서 빠져 나온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서 종종거리며 걷고 있었다. 두툼한 외투를 둘러쓴 그들은 입에다가 뽀얀 안개를 하나씩 달고 있 었다.
"무슨 전공이십니까?"
"네?"
"외과신지 내과신지 그런거 말입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는게 귀챦아 그렇노라 고 했을 뿐인데 오히려 운전기사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만 모양이었다다. K씨는 이번에는 그냥 소아괍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외과나 내과라고 하면 누구나 다 그와
관련된 질병의 경험은 갖고 있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되면 또 이야기가 길어질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어린아이가 있을 법한 나이는 이미 지나 보였으므로, 그것이 가장 그럴듯하고 무난한 탈출구같아 보였다. 그러나 산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더욱 놀랍다는 듯이 아 그래요,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기시작했다.
"그럼 혹시 조로증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네. 그야"
K씨는 엉거주춤 대답을 했다. 분명히 대화는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대화에 억지로 이끌리며 시간을 때우고있는 것도 짜증이 날 지경인데, 이건 도무지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대화를 메꾸어야 한다는
억울함이 K씨를 몸둘바 모르게 만들었다. K씨는 꼼짝없이, 여지없이 소아과의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냥 버스를 찾아 탈걸, 하는 후회 가 찾아들기 시작했고 더불어 에라이 모르겠다, 하며 갈데까지 가보자,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하루하루가 막막한 자동차 외판원 신세보다야 돈 잘벌고 인기좋은 의사가 한 번쯤 되어 보는것도 나쁠 것 없쟎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 다. 비록 말 뿐이기는 하지만, 해 볼만한 모험이었고 스릴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조로증이 소아과 진료과목이
맞는 걸까. 하긴 일찍 늙는 병이니 소 아과일 것 같기도 했다. 어짜피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문제될 것은 없 었다. K씨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제가 몇 살쯤으로 보입니까?"
"……?"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K씨는 시선을 거두어 운전기사에게 던졌다. 그는 정 면을 쳐다보며 운전대를 쥐고 있었지만, 표정은 마치 최종형량을 선고받는 죄 인처럼 자못 진지해 괴기스러움마저 느껴졌다. 마치 K씨의 말 한마디가 대단 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듯이. 덕분에 K씨는 알 수 없는 책임감마저 느껴 야 했다.
"글쎄요. 사십대 중반쯤이요?"
그렇게 말해놓고 K씨는 속으로 앗차, 했다. 질문의 의도를 그제서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 뒤 질문의 정황을 살펴
보건대, 조로증환자는 다름아닌 운전기사인 듯 했다. K씨는 미안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해 곁눈질로 그를 훔 쳐 보았다.
운전기사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다시 애초의 태연 스런 표정으로 돌아왔다
. "의사시라면서 뭐 그리 눈썰미가 없으십니까?"
운전기사의 말에는 자조적인 뉘앙스마저 섞여 있었다. 학동 고가도로 앞에 이른 택시가 갑작스레 정지했다. 빨간불이었다.
그 바람에 약간 몸이 앞으로 쏠렸던 K씨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택시 옆으로 택시보다 열배는 커 보 이는 레미콘이
트르렁, 하며 트림을 하더니 멈추어 섰다. 그 바람에 택시의 실내공간이 턱없이 좁게 느껴졌다. K씨는 이유없이 위축감을 느꼈다.
"그럼?"
K씨는 좀체 짐작을 할 수 없었다. 헤어스타일하며 듣는 음악의 취향이 분명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것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열여섯 정 도요? 라고도 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열여섯이면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 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나이일테니 말이다.
"저 두사람 보이죠?"
불현듯 운전기사는 턱을 들어 택시 앞을 지나치고 있는 남녀 한쌍을 가리켰 다. 이제 막 이십대초반이 되었을 법했다. 옷차림새하며 들고 있는 책을 보아 조선대생이거나 인근 전남대 의대생임이 분명했다.
"저하고 같은 또래일겁니다. 이제 짐작이 가세요?"
그제서야 K씨는 나즈막이 아, 하며 탄성을 흘렸다. 그럼 고작해야 스물한두 살쯤 되었단 이야기가 아닌가. K씨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짧고 깊은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파란불이 들어 오면서 택시는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세상이지요. 남들은 오래 살려고 보신관광에 별의별 보약에 온 갖 노력을 다하는데 나는 고스란히 앉아서 몇십년의 시간들을 날려 보냈죠. 제몸은 생리적으로 이미 쉰살이 넘었답니다. 말하자면 단숨에 나의 청춘을 도 둑 맞은 셈이지요."
"……!"
그의 눈시울에서 무엇인가가 반짝거렸던가. K씨는 운전기사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 정면에다가 시선을 박았다.
계속해서 그의 말이 환청처럼 귓 바퀴로 흘러들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늙기 시작하더니 지금엔 여기에 멈추 어 있습니다. 덕분에 남들이 말하는 학교생활도, 연애도, 결혼도 다 꿈같은 이 야기로 들려요. 내 삶의 수십년이 생략된거죠. 손님들은 저를 두고 하나같이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뭐 거기까지는 좋아요. 저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 런데 할아버지는 또 뭡니까. 나원 참. 그럴 때마다 도대체 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회의를 느낍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남들이 알고 있는 모습 의 엄청난 괴리감이
가져다주는 상실감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왜 택시를 모는 지 아세요?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말예요. 그나마 택시를 몰지 않으면 제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저 를 슬금슬금 피해요. 하긴
또래들과 어울리기엔 너무 늙어버렸고 그렇다고 쉰 이 넘은 사람들과 어울릴수도 없는 노릇아닙니까? 하지만 택시를 몰다보면 모 두들 제게 행선지를 알려주고 그곳에 도착할때까지 모든 시간의 연출권을 제 게 넘기죠. 제게 전적으로 몸을 맡긴다 이겁니다"
운전기사는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수 없는 말을 혼잣말을 하듯 연신 중얼거 리고 있었다. K씨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 다는 나름대로의 성의를 표했다. 택시는 병무청 앞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고 있었다.
K씨는 아무말도 하지 않 은채 침묵을 지켰다. K씨는 엉뚱한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의 삶에 있어 보람은 무엇이었던지. 아직 무엇하나 뾰족히 이루 어놓은 것이 없는, 자신의 나이 서른. 아니 사회로 내쳐진 이후 단 한 번이라 도
미친 듯이 내 일에 열정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일에도 과감하지 못 하고 미지근하게 살아온 삶. 여지껏 그 흔하디 흔한 운전면허증조차 갖고 있 지 않은 인생을 우격다짐으로 끌고 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자신이 자동차 세일즈를 하고 있다니.
이번 자동차계약건만 해도 그랬다. 자동차계약을 제의해 온 것은 오히려 고 객쪽이었다. 고객이라고 해봐야 대학시절에 문학회에서 알게 된, 밥이 되는 소설을 쓰고야 말겠노라고 문학에 목을 매달던 친구 M인데, 이번에 꿈에도 그리던 어느
문예지의 장편공모에 소설이 당선되어 상금을 받게 되고 또 책으 로도 출간되는 바람에 벌어 들인 인세가 쏠쏠한 모양이었다. 해서 이참에 아 내의 소원이던 작은 경승용차라도 한대 사주고 싶다, 는 거였다. 지금껏 잡지 사에서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마누라와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가까스로 먹 여 살리더니, 쥐구멍에 드디어 볕이 들려는 모양이었다.
그 친구도 처음에 K씨가 자동차세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렇게 말했었다. "야, 세상이 살기 힘들기는 하는가 보구나. 네가 자동차를 다 팔고 말이야." 지난 가을, 동창회에서 만난 M은 소줏잔을 채우며 연신 등을 토닥거렸다.
사실 그 친구와는 인연은 그다지 즐겁게 엮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이 운전 기사와의 관계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꼬여왔듯이 말이다. 사람과의 만남이 늘 생각처럼 되는 법은 없었다.
K씨에게는 죽도록 흠모했던 여자가 있었다. 철학과 일학년에 함께 입학한 Y. 그녀를 본 첫날 그만 K씨는 그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어 버렸다. 특별히 얼굴이 아름다웠다거나 가슴이 예뻤다거나 혹은 다리가 미끈했던 것은 아니었 다. 차라리 키는
조금은 작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윤기가 흐르는 쌔까만 단발머리는 어깨에 닿을락 말락해 여고생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커다란 눈으로 세상을 모두 담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세상의 모든 정 물을 응시하던 그 눈, 그
눈이 문제였다.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려면 작고 도 톰한 입술이 아닌, 그 눈망울에 입울 맞추고 싶을정도로 깊고 음울해보이는 눈이었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내성적이라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다지 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은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깊은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인지도. 그녀가 교내 문학써클인 용봉문학회에서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 은
한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그것을 알고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K씨 는 오로지 그녀의 가시권 내에 머물기 위한 단 하나의 이유로 손톱만큼도 관 심없었던 문학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라이벌을 만났으니, 그가 M이었다. 물론 M이 K씨처럼 애초에 은희를 사로잡기 위한 계획으로 문학회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인 연이란 것이
어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가, 말이다. 제법 재능도 있어 보 이고 열정도 있는데다가 항상 해독할 수 없는 그늘을 뒤집어 쓰고 다니는 M 은 또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비쩍 마른 체구에 코에 간신히
걸릴들 말듯한 안경을 걸고는 늘 턱을 괸채로 책속에다 얼굴을 쳐박고 있기 일쑤인 그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 이유를 K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듬해 교내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닫힘과 갇힘} 이라는 언뜻 보아서는 무슨 뜻인지조차
알 수 없는 난해한 소설이 당선되자, 그는 후배팬들까지 거느리며 더욱 상종가를 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그에게 관심이 없었던 여자가 있었으니, 그가 Y였다. K씨는 그 사실이 못내 다행스러웠지만 결코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K씨에게 있어서 M은 최대의 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말수가 적은 쑥맥이었던
K씨로서는 직접 은희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용기 는 없었고, 결국 언제라도 맞수로 부상할 수 있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필요 했다. M을 견제하기 위해선 M이 갖고 있는 문학적 재능을 상쇄할 만한 어떤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다. 결국 K씨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잠재된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M은 소설을 쓰 고 있었으므로, K씨는 시로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Y도 시를 쓰고 있 었기에 얼마간 동지의식을 유도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M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동시에 Y의 관심을 확실히 붙잡아 두는 두 마리 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서는, 처음의 습작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았다.K씨는 사흘 낮밤을 강의실과 도서실, 그리고 화
장실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구상애 매달렸다. 식 사는 물론 강의시간까지 걸러가며 골몰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마침내 K씨는 다음의 구절로 시작하는 시를 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서쪽 변방에서 짧은 여름을 보낸다//격포에 어디나 검고 어두워 개펄도 바위 도 은밀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예사롭지 않은 세상에서 날마다 새로운 상처를 내던 욕망도 여기서는 휴지조각처럼 보잘 것 없었다.
그 시는 어느 여류시인이 이십년 전에 썼던 [격포에서]라는 시를 산문시로 적당히 고친 거였다. 어짜피 K씨의 목적은 다른데에 있었으므로, 표절이 문학 적으로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지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시적재능을 과시하기 위해선
판에 박힌 행갈음시보다는 산문시가 효과적일 것 같은 생각에 이래저 래 폼만 갖춰 고쳐 썼다. 과연 재기 넘치는 시인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서의 시를 앞두고, 품 평회는 술렁거렸다. 선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재능으로
가득 찬 후배를 애정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 보았고, 후배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 한채 그저 멍하니 경이로움의 시선을 보내왔다. K씨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시선을 즐기며 의기양양하게 M을 건너다보았다
. K씨의 천부적인 시적재능의 신호탄은 그해, 그러니까 M이 대학신문사에 소 설이 당선된 해의 가을에 인근대학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까지 빛을 발했다. 시부문 당선작으로 결정이 된 것이었다. 모두가 K씨를 축하해 주었고 심지어 는 M과
Y까지도 K씨의 당선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만하면 그녀 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지고 말았다. 후배녀석 하나가 어떻게 알아냈 는지 당선작이 표절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강하게 제기해왔던 것이다. 폐간 된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그것도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방문예 지에서 따온
신인추천작품이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아냈는지 모를 일이었 다. 덕분에 당선이 확정된지 보름도 되지 않아 K씨의 순조로운 항해는 암초에 부딪치고 말았다. 후배녀석은 원작의 복사본을 들이밀며 이의를 제기했고, 결 국은 그 소문이
이웃대학에까지 퍼져 당선이 취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K씨의 천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쏟아 부었던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순간 이었다.
허무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K씨는 Y를 바로 쳐다볼 낯이 없었다. 마침 기말고사가 끝난때라 그 길로 K씨는 고향으로 잠적을 했고, 한달간의 잠수함을 탄 끝에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M이 Y에게 프로포즈를 성공시 킨 후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M은 시화전을 앞둔 품평회를 마치고 참 석한 뒤풀이에서 만취한 상태로 Y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거였다.
그러나 Y 는 역시 숙녀답게 정숙하게 M을 거부했고, M은 술김을 빙자해서 프로포즈를 계속해서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주일동안의 집요함으로 결국 Y의 입술을 가 질 수 있게 되었고, 둘은 급속하게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K씨는 단
한번의 고백다운 고백을 해 볼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채 첫사랑을 빼앗기고 말 았던 것이다.
"손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뇨, 뭘하면서 청춘을 보냈나 모르겠군요."
"아저씨는 젊음을 다 지나버렸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죠?"
아저씨, 하는 말이 어색한 파장을 일으키며 K씨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하 긴 고작 스물두셋 정도 되었다니 자신을 두고 아저씨라고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택시는 좌회전을 해 광주천변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얼마 안되는 곳에 사 직도서관이 시야에 잡혔고 그 옆 산등성이에는 기독병원건물이 보였다.
"저는 비록 몸은 겉늙었지만 제가 스물셋이라는 사실만큼은 잊지 않고 살 아갑니다. 스물셋이라는 나이는 제게 늘 용기를 줍니다. 아직은 젊다고 늘 내 자신에게 타이르곤 하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비록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젊쟎습니까. 속사람과 겉사람이 하나라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 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의사 라는 직업을 가졌음에야."
전 의사가 아닙니다, 라는 말이 삐져 나오려는 것을 K씨는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여기까지 와서 굳이 자동차세일즈맨임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늘, 너무 먼 곳을 달려왔다고 생각했다고 K씨는 생각한다. 가능성의 시대 는 막을 내렸고, 누구의 시집처럼 서른, 잔치는 끝나버린 심정으로 삼십대 고 개를 건너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자신. 그저 자동차를 팔면 운좋은 날이었고 팔지 못하면
그것이 고민이었던 말하자면 K씨의 삶에는 철학이 없었고 신바 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눈을 감으면 정말 세상이 가려지는
시절을 참 편리 한 살아왔다. 도전이 없었고, 고여있음 혹은 정체속에 몸을 묻어왔다.
M이 그 랬던가. 자신만 바라보다 꽃다운 이십대를 흘려보낸 아내, Y를 위해 그렇게 소원하던 자동차를 산다고. 비록 자신은
여지껏 운전조차 할 줄 모르지만(그 점은 K씨와 통하는 점이기도 하다. 다만 녀석은 운동신경이 둔해서 번번이 면
허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자신에게 가정과 따뜻한 아이를 선물해 준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자동차를 선물하노라고.
'사막으로 가고 싶어요. 살갗을 다 태워버릴 것같이 뜨겁게 폭사하는 그 강 렬한 땡볕. 그곳을 한없이 한없이 질주하고
싶어요. 타이어가 닳고 엔진이 폭발하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내 존재가 산산이 부서져 모래바람이 된다고 해도. 그 사막의
낮과 밤을 가로지르고 싶어요.
' 언젠가 Y의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고작 이런 경승용차를 가지고 사막에서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니, 정말 그녀는 이
자동차를 타고서 지금이라도 훌쩍 사막으로 떠날 수 있을까. 사막으로 가고 싶다, 고 수십편에 달하는 연작시를 쓰며
사막으로 가기를 기원했던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빨갛고 작은 자동차를 산다는 친구 가 K씨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부탁해 볼까. 혹여 사막으로 가는 그 자동차에 자신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겠느냐고.
택시는 기독병원앞 일차선 도로로 꺾어들고 있었다. K씨는 오랜만에 기쁜 마음으로 자동차를 팔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가 멈추자마자 K 씨는 요금을 지불하고는 문을 박차고 일어섰다. 안녕히 가십시오. 운전기사가 등뒤에서
아득하게 들리는 인사를 했다. 희뜩 운전기사의 얼굴을 돌아본 K씨 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방금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택시기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에는 모래무덤만이 잔뜩 쌓인채 흘러넘 치고 있을 뿐이었다. 택시는
동시에 부르릉 소리를 내며 언덕을 넘어가버렸다. K씨는 한참을 그 자리에 붙박인채 택시의 사라지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고 중 詩는 임희숙의 <격포에 비내리다>를 인용했음. 현대시학95년 6월호 p.186.
<하이텔 사이버문예대학 문집 제1호 수록작품>
한 알의 콩 이야기
알 몇 개를 낡은 편지에 싸 가지고 소중하게 품고 다니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인 맏이와 1학년인 막내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남편은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요. 더군다나 죽은
후에 남편이 오히려 가해자로 몰려 어머니와 아들 형제가 그대로 길거리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호의로 헛간 일부를 빌려서 가마니를 깔고, 백열등 한 개, 식탁과 아들 책상을 겸한 사과 궤짝 한 개, 변변찮은 이부자리와
옷가지 약간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이것이 전 재산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생활을 잇기 위하여 아침 여섯 시에 집을 나서서 가까운 빌딩의 청소를 하고 낮에는 학교 급식을 돕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고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집안 일은 자연히 맏이가 맡게 되었지요. 그런 생활이 반 년.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잠
잘 겨를도 없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구차스러웠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냄비에 콩을 잔뜩 안쳐 놓고
집을 나서면서 맏이에게 메모를 써 놓았습니다.
“아가, 냄비에 콩을 안쳐 놓았으니 이것을 조려서 오늘 저녁 반찬으로 하거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단다.
엄마가.”
그날도 하루종일 일에 시달려 지쳐 버린 어머니는 오늘은 꼭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몰래 수면제를 사들고 돌아왔습니다. 두 아이는
가마니 위에서 낡은 이부자리를 덮고 나란히 잠들어 있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어머님께!’라고 쓰인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적어 놓으신 대로 열심히 콩을 삶았어요. 그리고 콩이 물렁해졌을 때 간장을 부었지요. 그래서 저녁식사 때
반찬으로 내 놓았는데 동생이 ‘형! 짜서 못 먹겠어’하며 찬밥을 물에 말아서 맨밥만 먹고 잠들어 버렸어요. 어머니, 정말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 열심히 콩을 삶았어요. 어머니 부탁합니다. 제가 삶은 콩 한 알만 드셔 보세요. 그리고 내일 저에게 콩 삶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내일 아침 아무리 일러도 좋으니 나가시기 전에 저를 깨워 주시구요. 꼭이요. 어머니 지금 몹시 피곤하시지요?
저는 알아요. 저희들 때문에 고생하신다는 것을…. 정말 고맙습니다. 제발 몸조심 하세요. 저 먼저 잡니다. 어머니도 편히 주무세요.”
‘아아, 저 어린 것이 이토록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었구나.’
어머니는 아이들 머리 맡에서 맏이가 너무 졸여 짜디짠 콩자반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눈물범벅이 된 채 한 알 또 한 알 먹고 있었습니다.
Best 8. 91년 10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동네 목욕탕에서
일요일 아침이면 80세가 훨씬 넘어보이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동네 목욕탕을 찾는 40대 중년의 아들이 있다. 아들은 낡은
체육복 차림이지만 아버지는 새로 산 듯한 깨끗한 점퍼에 푸른색의 유명브랜드 티셔츠 등 산뜻한 외출복 차림이었다. 모처럼의
외출이라 아들이 정성껏 치장해드린 것 같았다.
아들은 천천히 아버지의 옷을 벗겨 옷장에 잘 정돈해 넣고 아버지를 안고 욕탕으로들어갔다. 아버지가 혹시나 미끄러져 다칠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샤워기의 물온도를 손으로 확인한 후 아버지를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노인이 아프지않게 능숙한 솜씨로 때를 밀고 비누칠까지 깨끗하게 마친후 다시 아버지를 안고 밖으로 나와 옷을 차례차례 정성껏
입혔다.
마지막으로 얼굴과 머리의 물기까지 재차 닦아드린 그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고는 탕으로 재빨리 들어가 10여분만에 목욕을 마친후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자신은 제대로 목욕 한번 못하면서 아버지를 감기에 들지 않게 하려는 아들의 마음 씀씀이를 보고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몹시도 그리웠고 효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고마움을 잊고사는 이시대에 일요일 아침에 만나는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델이다.
<한국일보 97년 10월 3일자 독자에세이 중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할아버지는 매우 노쇠해져서 다리를 움직을 수도 없었고 제대로 보거나 듣지도 못했다.
이빨도 없어 식사할 때는 입에서 음식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참다못한 아들과 며느리는 할아버지의 음식을 더이상 식탁에
올려놓지 않았다. 난로 뒤에서 할아버지 혼자 먹게 했다.
처음에는 컵에 음식을 담아서 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컵을 들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컵은 산산조각이 났다. 며느리는
늙은이가 집안 세간을 더럽히고 컵을 깬다고 투덜거리면서, 다음부터는 개수통에 밥을 담아 주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어느 날 남편과 아내는 집에서 아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나뭇조각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미샤, 뭘하고 있니?"
그러자 아들아이가 대답했다.
"아빠, 개수통을 만들고 있어요. 아빠와 엄마가 늙으면 밥 담아 드리려고요."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쳐다 보았다.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늙은 아버지를 무례하게 대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밀려 들었다.
그후로 아들과 며느리는 할아버지를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어 드렸다. (*)
감사라는 선물
오늘도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섬에서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로 부두까지 나와서는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해서 다시 차를 운전하고 한참을 가야 직장인 우체국에 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겨우겨우 출근을 해서 일과를 시작할 때쯤이면 벌써 온몸의 힘이 절반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는 집배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모녀가 모두 지체부자유자이기 때문에 집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가 없는 가정이 있었는데,
내가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몇 번 심부름을 해주었더니 이제는 아예 아침마다 전화해서
필요한 물품을 불러주곤 하는 것이었다.
심부름의 종류도 다양했다.
볼펜, 빗자루, 빗에서부터 홍시, 귤, 생선…. 심지어는 요강까지 사다준 적도 있었다.
일이 바쁘지 않고 여유로울 때에는 불쌍하다는 생각에 기꺼이 도와주었지만
업무량이 많은 날이면 그 부탁들이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집에서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많은 업무량에 투덜거리며 배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김없이 그 전화가
걸려왔다.
혼자서는 추스리기조차 힘든 많은 우편물에 쩔쩔매고 있던 터라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참으며 전화를
받았더니, 돈은 나중에 주겠다며 양말을 사오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었지만 마지 못해 양말을 사서 오토바이에 싣고는 그 집으로 향했다.
축 늘어진 어깨로 그 집에 도착하니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고 계셨다.
“아이고… 왔구먼. 저런 고맙기도 해라.”
나는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불쑥 양말 봉지를 내밀었다.
“그랴 그랴. 이게 얼마고?”
“2천 원이요.”
퉁명스러운 나의 대답에 아주머니는 지갑을 열어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그런데 양말 값을 지불하신 후 아주머니가 양말이 들어 있는 봉지를 나에게 다시 내미는 게 아닌가.
“그 동안 부탁만 혀서 미안하구먼.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몸이 원체 이 모양이니….”
쑥스러운 듯 미소짓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감사’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형편없는 와중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품고 있다니.
얻어먹기는 커녕 밥을 지어먹을 힘까지 있는데도 지금껏 그 기본을 몰랐던 나.
김대양/전남 고흥군에 사는 스물다섯 살의 집배원
행 복
어느날 한 왕이 있었는데 하루는 신하를 전국에 보내어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금을 주더라도 그 사람의 속옷을 얻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 옷을 입으면 자신도 행복해 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지시를 받은 신하는 오랜 세월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권력 있다는 자, 돈이 많다는 자, 지식이 있다는 자…. 그러나 진정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한 청년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그의 얼굴은 너무도행복한 표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그 청년에게 달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던히 행복해 보이는군요.”
“그럼요. 단 하루도 불행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 신하는 자기가 다니는 목적과 사정을 말하고 “그러니 당신의 속옷을 꼭 팔라”고 하며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주겠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먼지 투성이의 옷을 활짝 젖혀 가슴을 열며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전 속옷이 없습니다. 사실 속옷뿐 아니라 구두도 한 켤레 없어서 불만이었는데 마침 이리 오다가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난 후로는 구두가 없다는 게 무슨 불만인가 싶어 감사의 마음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Best. 94년 6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어느 간호사의 짧은 이야기
펌
대학교 4학년 때 암병동으로 간호사 실습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있었던 곳은 그 중에도 소아 병동이었지요. 무서운 암과 싸우는 환자 중에 유난히 눈이 동그랗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여섯 살 된 꼬마 아이가 있었습니다.
“지혜야, 언니가 동화책 읽어줄까?”
“… ….”
“그럼 지혜가 언니한테 노래 하나 불러줄래?”
“… ….”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별 반응이 없는 아이었습니다. 주사를 놓을 때도 아픔을 애써 참고 있는 듯 했습니다.
부모가 이혼을 해서 할머니만 가끔 병문안을 와 줄 뿐인 지혜. 엄마는 새로 시집을 갔고, 아빠는 중동으로 떠나는 바람에 꼬마의 병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오직 나이드신 할머니 한 분뿐이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할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대주던 병원비는 할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끊기게 되었고, 병원장이 지원하던 보조금조차 원장이 바뀌는 바람에 더이상 지급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퇴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몇 몇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퇴원을 앞둔 지혜를 위해 병실에서 조그만 송별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애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선물다운 선물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지혜야, 여기 백 원짜리,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중에 네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걸 하나 줄테니 뽑아봐….”
그 방에 있던 우리 모두는 지혜가 만 원짜리 지폐를 집을 줄 알았는데, 주저하지 않고 백 원짜리 동전을 집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혜야, 아직 어떤 게 큰 지 모르는가보구나. 이중에는 만 원짜리가 제일 좋은거야, 동전 대신에 이걸로 가지려무나.”
라고 제안하자 아이는, “저는 이 동그란 백 원짜리가 제일 좋아요, 백 원짜리는 멀리 있는 우리 엄마와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자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있는대로 털어서 아이에게 주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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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보내는 신호 하나
여기서 좀 내려 주세요.”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택시를 세웠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려던 택시가 멈췄다. 단지는 무척 넓어서 눈 가는 데까지 아득히 수많은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건물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창문마다 밝은 빛을 내뿜고 있어서 마치 밤하늘에 뿌려진 별무리같았다.
“몇 동이신지 집 앞까지 가시죠.”
아까 종로에서 택시를 잡아 날 태우며 친구가 실제 요금의 두 배 이상되는 액수의 차비를 대신 준 탓인지 운전사는 친절하려고 애썼다.
오는 도중에도 내가 “운전면허 따서 이렇게 택시를 운전할 수 있게 되려면 한참 걸리겠죠?”하고 묻는 말에, “그러믄요” 한 마디로 대답해 버려도 그만일 텐데 운전사는 운전 교습기간 동안의 요령, 면허시험 볼 때의 요령, 주행 수련기간의 필요성과 그에 드는 비용 등을 친절하고 세세히 대답해 주었다.
운전을 배워 택시운전사가 되는 게 지금 처지로서는 가장 확실한 취업의 방법일 것 같다고 난 생각했었다.
“됐어요. 여기서 걸어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우리 식구가 전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은 단지의 정문에서 15분 쯤 걸어야 하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택시로 그 건물의 현관 앞까지 갔어야만 옳았다. 하지만, 아무리 친구가 태워 준 택시라지만 택시로 집 앞에 도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우리 집안 형편을 뻔히 알고 있는 수위나 다른 누군가가 오해를 할 것 같아 일부러 멀리 정문에서 내린 것이다.
작년 이맘 때 쯤 나는 대학 졸업 후 15년 청춘을 다 바쳐 일한 신문사에서 해고되었다. 적잖은 액수의 퇴직금을 받긴 했지만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의 위 수술 비용을 대고, 나머지로 몇 달 생활하고 나니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다.
출판사를 차린 친구들이 도와 주는 뜻으로 번역 일거리를 주었지만 그것도 항상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가는 정신없이 뛰어오르고수입은 없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사이에 이웃 집과 아파트 단지 앞 식품 가게에까지 한푼 두푼 빚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매달 내야 하는 아파트의 관리비가 석 달째 밀리게 되자 관리실에서 직원이 나와 전기를 끊어 버렸다. 바로 어저께의 일이었다. 앞으로 일 주일 내에 관리비를 완불하지 않으면 수도마저 끊겠다는 것이었다.
전기가 끊기고 보니 죽음같은 침울한 어둠 밑바닥으로 우리 집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젠 가동되지 않는 냉장고 속의 음식물이 당장 시큼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고, 오후 다섯 시면 시작하는 텔레비전의 어린이 프로를 기다리는 재미로만 살고 있는 듯한 아이들은 시간이 되어도 켜지지 않는 텔레비전 앞에서 “아참, 전기가 끊어졌지.” 하고 억지로 참는 표정이 처참했다. 밤이 되어 어둠에 싸이게 되자 양초를 몇 개 찾아내 불을 밝혀 놓고, 그 작고 답답한 불빛 밑에서 아이들은 숙제를 했고, 아내는 설거지를 했고, 난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새로 맡은 일거리를 위해 영한사전을 뒤적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캄캄하고 답답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전기불이 있어 집안이 밝은 동안엔 비록 당장 버스값이 없을지라도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내일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착각이라도 하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캄캄한 어둠과 맞닥뜨리고 보니 난 도대체 여태껏 뭘 하고 살아 왔던가 하는 인생 전체에 대한 회의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나만을 믿고 살아가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수돗물을 소리나게 틀어 놓고 울기도 했었다.
우리 식구를 굶겨 죽이려는구나 하고 회사를 원망하다가 그러다가 지금 내 능력이 우리나라 경제형편에선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전등불도 사용해선 안 되고 촛불을 간신히 허용하는 그 정도의 중요성밖에 없는가 보다 라고 하는 깨우침 비슷한 생각에 잠겨들곤 했다.
하지만, 난 수돗물 틀어 놓은 캄캄한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울면서 이내 ‘참자. 참고 우선 가진 것을 탈탈 털어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을 가려 쓸 수 없는 것은 버리고 쓸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새출발해야 한다’ 그런 결론에 이르렀었다. 그러자 마음이 평안해지고 두려움도 절망도 사라졌다.
난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앞에 다다라 9층을 올려다 보았다. 모든 창문들이 밝은 불빛을 쏟아내고 있는 중에 우리 집 창문들만 캄캄하게 숨죽이고 있었다. 아니, 눈물로 흐려지는 눈에도 유리창을 간신히 통과하고 있는 불그레한 촛불의 작은 빛은 있었다. 가족들이 보내는 생명의 신호같아서 난 반가왔다. 살아 있다는 것을 이토록 기뻐해 본 적이 전에는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일 초라도 어서 가족들이 보고 싶어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하여 걸어갔다. 문을 열어 주는 아내가, 그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지켜 주고 남편을 기다려 준 아내가 그토록 든든해 보인 적도 이전엔 없었던 것 같다.
“늦어서 미안해. 친구녀석이 어찌나 잡아끄는지 말이야. 애들은?”
촛불 하나만 동그마니 켜져 있는 어두운 거실엔 “아빠!” 하고 외치며 달려나와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요.”
“벌써 자?”
“이제부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대요. 애들이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어요. 햇빛이 있을 때 숙제해 버리겠다구 학교에서 오자마자 숙제를 해치우고요, 아까 해질 녘에는 창가에 앉아서 아, 햇빛이 이렇게 고마운 줄 처음 알았다면서 해지는 걸 그렇게 안타까와 할 수 없었어요. 앞으론 해 지면 자고 새벽에 동틀 때 일어나겠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이제 겨우 큰애가 열한 살, 작은애가 여덟 살이었다.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중에서도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전기불이 없어졌는데도 우린… 더 행복해진 것 같아.”
김승옥/소설가
두명의 수도승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
엄가르트 쉴괴글 <선승들의 지혜>에서
도둑의 성경
어느날 선교사를 남편으로 둔 부인이 남편의 책상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손바닥 크기만한 작은 성경책을 집어드는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성경은 7년전 그녀가 학교 기숙사에서 잃어버린 것이었다. 성경책을 얼마나 열심히 보았던지 다 헤어져 있었으나 분명 그부인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부인은 성경책을 품에 안고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후 선교사가 들어왔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아내를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은 아무말없이 성경책을 탁자위에 꺼내
놓으며 지긋한 눈길로 쳐다 보았다. 그순간 그의 얼굴엔 일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성경은 오래전에 제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당신의 손에 들려
있는지요."
" 미안하오. 당신에게 숨긴 것이 있오. 10년전만해도 나는 도둑이었소. 7년전 어느날 밤 한 기숙사에 들어간 나는 물건을 훔치는 중
책상위에 있던 성경까지도 모조리 쓸어 담았다오. 집에 돌아와 물건을 정리하던중 성경책을 보게 되었다오. 줄을 그어볼 정도로
성경책은 그주인에게 귀한 것임을 난 알 수있었오. 그런데 무심코 펼쳐본 책에 이런 귀절이 눈에 들어왔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손으로 베푼 선한 일을 헤아려 보라고.
그때처럼 내가 부끄럽게 느낀 적이 없소.그 뒤로 나는 날마다 이 성경책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에 이르렀소. 늘 그
성경책의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바로 당신이었다니......" 솔직하게 지난 일을 털어놓는 남편모습에 부인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어머니와 나물
나는 시장에서 푸성귀를 살 때면 덤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집 떠나 10년 동안 자취생활을 하느 동안 시골의 집에서 쌀이며, 양념, 고구마,감자등등 농산물을 갖다 먹었다. 그렇게 했던 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 어머니의극성스러운 사랑 때문이었다.
동생과 나는 탁상시계 벨 소리가 울리면 버튼을 누르고는 '5분만 더'를 찾다가 출근시간이 임박해서야 허둥지둥 집을 나서곤 했다.
그러다보니 아침 식사를 챙겨먹기는 커녕 출근해서 자동판매기의 커피나 율뮤차로 고픈 배를 채우고는 했다. 그리고 저녁시간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야근이 많았다. 야근을 하다 보면 식사는 해결되기 마련이고 설사 일찍 퇴근한다 해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거나
동료들과 시간을 같이 보낼 때가 많았다.
일요일에도 오전에는 늦게까지 잠자다가 오후에 약속이 있어 나가면 늦은 밤에 들어와음악을 크에 틀어놓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결국
집에서 밥을 하는 날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밥 좀 해 먹어야지.' 하고 큰 마음먹고 냉장고 문을 열면 집에서 가지고 올라온 미나리며 쑥이며 갖가지 푸성귀와 농산물들이
상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버리면서도 아까웠고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웠다.가끔 집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께서 농산물을 싸 주시면 안
가져가겠다고 사양했지만 가져가기 귀찮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번번히 새겨 들어야만 했다.
"얘야, 시장에서 사먹는 채소는 농약을 많이 살포한 거라는 말이 많더구나. 또 싱싱하지 않아서 몸에도 별로 좋지 않아."
거기다가 언젠가 한번 '밥도 안 해 먹는데...' 하고 말했다가 어머니께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던 터라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하지만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와 농사일을 도우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채소는, 거름을 내고 경운기나 소로 밭을 갈아 둑을
만들어 씨를 뿌리고 김을 매주는 등등 뜨거운 햇볕을 온 몸으로 받으며 허리 평 살이도 없이 바쁘게 일을 해서 얻은 소중한
농산물이었다. 그냥 혼자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에 내다 판다고 할지라도 값이 너무 헐해 비료나 농약값을 제하면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힘들여 수확한 채소인지라 너무나
소중했지만 어머니는 무공해 채소라고 이웃이나 친척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그럴 때마다 속좁은 마음으로는 아깝게만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마도 풍성한 인심을 같이 나우고 싶으셨던 것 같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셨다.
오늘 어머니께 서울의 동생에게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동생은 아직도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혼자 자취를 하고
있으므로 가끔 동생을 돌봐주기 위해 서울을 올라가곤 한다.
어머니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신 후 바쁜 걸음으로 동생에게 보내줄 미나리를 뜯으러 개울과 논으로 가셨다. 나도 가끔 시간이
있으면 쑥이나 냉이, 미나리를 캐러 다니지만 생각같이 나물 캐는 일이 쉽지가 않다. 개울주변은 내다 버린 쓰레기로 지저분한데다가
여기저기 떨어진 유리 조각 때문에 발을 다칠 염려까지 있다. 또 물이 풀숲까지 올라 잘못 발을 디디면 발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나물
뜯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농사일로 바쁘셨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보내기 위해 바쁜 시간을 내어 미나리를 뜯고 쑥과 취나물도 캐어 여행 가방을 가득
채우셨다.나는 어머니가 건네 주시는 가방을 받으며 씁쓰레한 기분을 느꼈다. 어머니의 사랑을, 그 가슴을 자식이 얼마나 알아줄까
싶어서 였다.
오늘 동생의 자취방에 가서 이 미나리를 깨끗이 씻어 삶아 무치고 쑥국을 끓이면서 동생을 기다려야겠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일까,
채소의 덤이 가당치 않게 느껴지며,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서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는다. 또 아까운 농산물을 상하게 내버려 두는 일도
없다.
사람은 너무 쉽게 얻은 것은 그 고마움을 모르게 되는 것 같다.
- ----------동양그룹 사보 '별과꿈' 1995년 5.6월호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던 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느 가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댁의 가장은 의과대학 교수이면서 유명한 병원
원장이었고, 하나뿐인 아들도 의과대학생이었습니다.
사모님과 딸도 인정 많고 덕있는 분들이어서 저는 남의집살이 하는 것 같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 가족 모두가 너무도 고마워 저는 정성을
다해 그분들을 섬겼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제가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저는 뜻밖에도 그댁 아들로부터 정식으로 청혼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과 심한 충격으로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그 집을 떠날 궁리만 했습니다. 주인댁 부모님도 당연히 반대를 했고 집안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는 아들에게 부모님의 승락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의를 다하여 꾸준하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납득시켜 주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아들의 뜻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에게 알려 주셨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두렵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는 저에게 아버님이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아내로 택하고 너를 며느리로 맞이한 우리에게 갚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네가 의사인 남편의 아내답게 되는 것이고, 병원장의
며느리답게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면서 이 가문의 당당한 일원이 되거라.”
저는 그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가정부 처지에서 그 댁의 며느리로 처지가 바뀐 것입니다. 저를 선택한 남편과 받아 준
시부모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은 이전에 제가 가정부로 일하던 때의 의식이나 태도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님의 며느리답게 그
남편의 아내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뿐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시부모님과 남편이 원하는 대로 공부를 시작,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대학의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가문이 원하는 며느리와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아픔이 함께하는
과정이었으나, 오직 저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모든 가족이 저를 인정해 주고 그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
감사와 감격이 오늘도 저를 기쁨과 보람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힘이요, 저의 재산입니다.
Best 8. 93년 1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뿌린대로 거두기
내가 중학교 다닐 때 2학년 깡패가 내 배에 주먹을 날렸다. 나는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났을 뿐
아니라 당혹감과 수치심을 참을 수 없었다. 난 복수 심에 불탔다. 그래서 다음날 갑자기 기습을 해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어떡하다가 내 계획을 할머니에게 말하게 되었다.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한 시간이 넘게 설교를 늘어놓으셨다. 설교는 끝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는데,
그중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내가 그 녀석에 대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좋은 행동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행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돼
있다."
나는 할머니에게 애써 공손한 말투로,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지금까지 좋은 일만
해 왔는데 그 보상으로 내가 받은 것은 '개똥!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개똥'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진 않았지만.)
할머니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모든 좋은 행위는 어느날인가 네게 돌아올 것이고, 네가 하는 모든 나쁜 행위도 어느날인가
돌아올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에 담긴 지혜를 이해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할머니는 캘 리포니아 라구나 힐즈에
있는 시설 좋은 양로원에서 생활하셨다. 매주 화요일이면 난 할머니를 모시고 저녁을 사드렸다.
할머니는 언제나 단정히 옷을 입으시고서 현관 앞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셨다.
나는 할머니가 노인 요양소로 옮겨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저녁을 먹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가족이 운영하는 근처 작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쇠고기 요리를 시키고, 나 자 신은 햄버거를 주문했다. 음식이 도착해 내가 먹기 시작했는데도
할머니는 드시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계셨다. 접시에 놓인 음식을 물끄러미 쳐다보 기만 하실
뿐이었다.
내 접시를 치우고 나는 할머니의 접시를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드렸다. 그런 다음 접시를 할머니 앞으로 가 져다 놓았다. 할머니는 이제 많이 노쇠하셔서 고기 자를
힘이 없으셨던 것이다. 내가 잘라 드린 고기를 할머니는 천천히 입으로 가져 가셨다. 그것을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40년 전, 한 어린 소년이 식탁에 앉을 때면 할머니는
언제나 내 접시를 끌어당겨 내가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작게 잘라 주셨었다.
이제 40년이 흘렀는데 그 좋은 행동이 보상을 받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우리는 뿌린대로 정확히 거두게 되어 있다.
"네가 하는 좋은 행동은 언젠가는 너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 중학교 2학년 깡패는 어떻게 됐는가?
일년 뒤 그는 3학년 깡패가 되었다.
- 마이크 부에텔 -
되돌아온 만년필
필 박사는 몇명의 외국인과 함께 독일을 여행하던 중 공원에서 한무리의
소년들을 만나 사인을 해주었다. 그런데 사인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오는 바람에 그는 급히 자동차를 타려다가 그만 만년필을 떨어
뜨리고 말았다. 잠시 뒤에 창밖을 보던 필 박사는 자신의 만년필을 든 채
달려오는 소년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만년필 하나쯤이야’하는 생각
에 차를 멈추지 않고 창 밖으로 소년에게 만년필을 가지라는 뜻으로 팔을
흔들어 보였다. 곧 자동차를 필사적으로 뒤쫓아오던 소년의 모습도 희미하
게 작아졌다.
그 뒤 육 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필 박사는 다 찌그러진 그의 만년필과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는 소포를 받았다.
필 박사님께
그날 선생님의 만년필을 우연히 가지게 된 소년은 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만년필을 들고 온 다음날부터 선생님의 주소를 알아내려 애썼지요.
그것은 겨우 열세살 어린아이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들은 꼭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주어야 한다며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그러기를 오개월, 어느 날
아들은 우연히 선생님의 글이 실린 신문을 보고는 그 신문사를 직접 찾아가서
주소를 알아왔습니다. 그때 기뻐하던 아들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한달전 "어머니 우체국에 가서 그 박사님께 만년필을 부쳐 드리고
오겠습니다." 는 말을 남긴 채 훌쩍 집을 나선 아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너무 기뻐서 무작정 우체국으로 뛰어가다가 달려오는 자동차를
미처 못 본 것입니다. 다만 그 애가 끝까지 가슴에 꼭 안고 있었던 만년필
만이 제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찌그러졌지만 이 만년필을 박사님께 돌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애도 그걸 원할 테니까요.
한 독일 소년의 정직한 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
상고를 졸업하고 전자회사 영업 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김우준 씨는 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여 모은 돈과 주변 사람들의 돈을 빌려 조그만 가전 제품 대리점의 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사업이 안정되고 빌린 돈도 거의 다 갚아 갈 즈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빌린 빚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빚을 갚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가전제품 외판원으로 나섰는데, 날마다 방문 판매를 하면서 버는 돈중에서 하루에 오천 원씩
빚을 갚아 가기로 했다.
매일 저녁 그는 오천원을 주머니에 넣고 한강다리를 건너 용산까지 돈을 빌려 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돈을 갚은 뒤, 온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대교 위를
걸어다니면서 그는 언제가는 반드시 사업을 다시 일으키리라는 희망의 싹을 가슴속에 키워갔다.
몇 년이 지나 드디어 빚을 다 갚은 그는 재기할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전자회사 판매이사가 그의 신용을 믿고 물건을 대줄테니 다시 유통업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돈이 좀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즈음 우연히
예전에 오천 원씩 돈을 갚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엇는데, 얘기 끝에
김우준 씨의 처지를 알게 된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당신이 오천원씩 빚을 갚기 시작했을 때, 나는 며칠 지나면 그만둘 거라 생각했소,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해냈고, 그 사이 당신에 대한 내 믿음도 쌓여갔소. 나는 언젠가 당신이 꼭 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오. 새로 출발한다니, 내게도 출자할 기회를 주겠소?" 그 동안 그는 돈을 갚은 게
아니라 신용을 쌓은 것이었다.
혼수이불
20년 가까이 쓰지 않은 솜이불 3채를 이사다닐 때마다 끌고 다닌다. 결혼한지 한 10년 간은 요긴하게
잘 덮었는데 중앙난방이 되는 아파트로 이사하고, 침대를 사용하면서 전혀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요즘은 가전제품이 가장 중요한 혼수라지만 옛날에는 혼수하면 제일 먼저 꼽는 것이 이불이었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덜했지만, 어머니가 결혼할 때는 더했던 모양이다. 다른 것은 살면서 장만해도
되지만 이불은 쉽지 않다고 하시며, 내가 아무리 말려도, 어머니는 누비이불이나 차렵이불 말고도
솜이불만 5채를 해주셨다. 그런데 시집와서 보니 시어머니께서도 선물로 한 채를 해놓으셨었다.
내 혼수 이불을 만들기 위해 어머니는 3년 동안 손수 목화를 가꾸어 솜을 모으셨다. 그것도 맏물솜만
골라서 쓰셨다. 이 다음에 솜이 눌려서 솜틀집에 가게 되면 꼭 지켜보라고 내게 일러 주셨다. 혹시
나쁜 솜과 바뀌게 되면 너무 아깝다고.
우리집 목화 농사는 내 혼수로 끝이 났을 뿐더러 시골 어느 집도 이제는 목화를 심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때는 내가 마침 일반 주택에 살더 때였고, 그 솜이불을 애용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무척 흡족해 하시며 기쁨으로 그 일을 대행해 주셨다.
늘어나는 살림살이와 좁은 생활공간에서 쓰지 않는 이불을 보관하는 일이 때로는 힘겨워지곤 한다.
내가 미련을 떠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이불들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집안 정리를 하던 중 불현듯 이불보를 보게 되었다. 빨간 깃이 달린 초록 이불과 초록 깃이
달린 빨간 이불, 그 중 어느 것이 신랑 이불이고, 어느 것이 새댁 이불인지, 시집올 때 분명히 어머니가
일러 주셨던 그것마저 기억할 수가 없다.
그 무렵에 유행이었던 금실로 수놓은 반짝이 무늬를 나는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무늬를 쓸어보는
내 손바닥에 비단결과 다른 감촉이 닿았다. 새까만 작은 알갱이 몇 개가 이
불천에 붙어 있었다. 그러자 언젠가 아버지께서 은밀히 내게 해주시던 얘기가 떠올랐다.
내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을 불러 내 혼수 이불을 함께 꾸며 주며, 먼지가 안
앉도록 비닐로 잘 싸서, 방학 때면 내가 내려가 쓰곤 하던 문간방에 쌓아 놓았다고 했다.
막내 동생이 그 방을 공부방으로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모기장 안에서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하다
잠이 들어, 그만 모기장에 불이 붙었고, 바로 발견하여 동생을 끌어 내고 불을 껐는데 모기장의 불이
혼수 이불을 싸놓은 비닐에 옮겨 붙었다고 했다.
"네 엄마가 정신없이 덤벼 손으로 불을 껐다. 내가 잡아끌어도 막무가내였어. 불붙은 비닐이
손바닥에 붙어 온통 데었지. 한동안 손을 싸매고 다녔어. 동네 사람들이 왜 그랬냐고 물으면, 그냥
잘못하여 뜨거운 물에 데었다고만 하더라."
우리가 금년에 결혼 30주년을 맞으니, 그게 꼭 30년 전 일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 눈물 방울이
비단 위에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얼룩질까봐 나는 얼른 눈물 방울을 찍어 냈다.
두 분 다 오래 전에, 내가 이 이불들을 뭉쳐 고전으로 보관하기 이전에 돌아가셨다. 사용하지 않고
싸두기만 했는데도 그 동안 이불 호청이 누렇게 변색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늘 광목을 필로 사서
방망이로 척척 두들겨 빨아 방죽둑에 펼쳐 널어 하얗게 바래서, 풀 먹여 다듬이질로 반들반들 곱게
두들겨 호청을 만들어 주셨었다.
나는 후둑후둑 이불 호청을 뜯기 시작했다. 깨끗이 삶아 빨아 다시 예쁘게 꿰매고 손질하여
결혼기념일에 덮고 자고 싶었다.
왜 이런 생각을 20년 동안 한 번도 못했던 것일까.
이제 앞으로 사는 동안 결혼기념일마다 혼수 이불을 꼭 덮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남편도 기뻐할
것이다.
---------
권오욱/시인. 최근 시집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파도가 바람을 일으켜?'를 펴냈다.
낮은울타리 '97년 11월호에서
접시깨고 칭찬듣다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다. 할머니는 가족의 생일이나 기념일같은 중요한 날이면 당신이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들로 식탁을 장식하셨다. 그것은 대부분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도자기 접시였다. 그 접시들이 유명한 것이었는지 이름모를 도공의 간단한 소품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집에선 대단히 소중한 물건으로 취급되어, 가족 모두 우리집 재산목록 1호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섯살이 되기 전부터 식탁청소와 설거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할머니 치마에 매달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래서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일이 일찍 끝나도록 식탁위의 접시를 치우기도 했는데, 그릇이 어찌나 번쩍거리는지 손에서 놓칠 뻔한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염려하던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채소를 담아두었던 접시를 옮기려는데 그만 접시가 내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 것이다. 접시는 산산조각나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접시에 담겨있던 콩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순간 내마음은 무척 아팠다. 손가락을 다쳤을 때보다 무릎이 깨졌을 때보다 더 아팠다. 그때까지 모범생으로 귀여움만 받던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의 성난 얼굴과 마주쳐야 하는 순간이었다. 잘못했다는 죄의식이 온몸을 감쌌다. 참으로 그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부엌에는 조용히 침묵만 흘렀다. 나는 이미 목안에서 울음이 터져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나를 쳐다보시던 할머니가 나를 번쩍 들어 창가의 요람에 태우시고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접시 잘 깨뜨렸다. 다행이야. 나도 그 접시에 싫증이 나 있었거든"
캐럴린 S.매티어
유리병 속의 병균
벌써 오래전의 이야기,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미국 선교사 한분이 중국에 와서 전도를 하는데, 때마침 이름모를 전염병이 유행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급히 그 전염병의 병균을 유리병속에 담아 면역체를 만들기 위해 의학이 발달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샌프란시스크에 상륙하려고 할 때, 검역소 직원들이 철저하게 승객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각되면 면역체고 뭐고 헛일이라고 생각한 선교사는 고민끝에 병균을 자신의 입에 털어넣고 유리병은 바닥에 버렸습니다.
조금뒤 그의 온몸에 병균이 퍼지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몸은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이 병균을 뽑아 면역체를 만들어 주세요. 그것을 중국에 보내 많은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후 선교사는 숨을 거두었고, 그 희생의 대가로 전염병의 면역체가 만들어져 중국내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낮은 울타리 '99.4.
사람을 찾습니다.
이솝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이솝의 주인은 훌륭한 학자였다. 어느 날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은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 안에 들어가 사람 수를 헤아려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이솝우화]에서
어머니의 손가락
내가 결혼전 간호사로 일할때의 일이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에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25살 남짓 되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문앞에 서있었다. 아마도 모녀인듯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 아주머니..아직 진료 시작 될려면 좀 있어야 하는데요..
선생님도 아직 안오셨구요.. "
" ..... "
" ..... "
내 말에 두 모녀가 기다리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마주 보았다.
업무 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 받기도 했고..엄마가 딸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긴장된..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원장선생님이 오시고..
나는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얘..얘가...제 딸아이예요...
예..옛날에..
그니까..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
다행이 네손가락은 접합수술에 성공했지만...
근데..
..네...네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네요..
.....
다음달에 우리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위될 녀석...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
..보잘것 없고 어린 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게..이 못난 에미 바램이예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한지..
...... "
그 순간 딸도 나도 그리고 원장선생님도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원장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채..
" 그럼요..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 할수 있습니다. "
라고 했고..
그말을 들은 두 모녀와 나도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꿈속의 전화벨
가끔 잠든 사이에 전화벨이 울릴 때가 있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엔 짜증도 나지만 겁도 난다.
밤늦게 걸려온 전화 중엔 안 좋은 소식도 있으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대개는 잘못 걸려온 전화이거나 그리 급하지 않은 안부 전화, 또는 장난 전화인 경우가 많다.
장난 전화인 경우에도 나는 여간해선 짜증을 내지 않는다. 친절하게 응대하다가 적당히 끊어버리곤 한다.
내가 성인 군자에 버금가는 인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추억 한 토막이 아직까지도 나의 꿈 속에서 가끔 전화벨을 울려대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기다리고 있던 1983년 가을 무렵이었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하루는 잔뜩 술에 취해 들어와 막 잠이 들려는 순간 그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친구는 잠에 빠져드는 내게 아무런 설명 없이 당장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처럼 술에 취했던지 전화기 건너편의 친구 음성은 약간 혀가 꼬부라진 채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몹시 술에 취했던 나는 귀찮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해 만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거절하곤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이번엔 다른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 00인데, 지금 빨리 XX네 집으로 와. 간밤에 XX가 자살했대….”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간밤 그 친구는 자살을 하기에 앞서, 그래도 뭔가 미련이 남아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르는 나는 잠시의 귀찮음 때문에 친구의 요청을 매몰차게 뿌리쳐버렸다.
나는 친구를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친구의 죽음을 방치한 것은 분명했다. 친구가 간 뒤,
나는 전화벨이 어느 때 울리건, 그게 잠결이건 꿈 속이건 가리지 않고 수화기를 든다.
행여 죽음을 앞두고 울먹이던 친구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하여….
한수빈/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쌍용사외보 '여의주' 98년 8월호)
무서운 선생님과 만화책
고 등 학교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돌려보다가 선생님께 걸리면 대부분의 선생님은 만화책을 빼앗아 캐비닛에 보관하거나 훈계를 하시곤 했다.
어느 날, 과학 시간에 만화책을 읽다가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다.
엄하기로 소문난 과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다.
혼자서 밤을 새워가며 예습, 복습하는 것보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는 것이 공부 잘하는 비결이라고 말하곤 하셨다.
그런 선생님한테 걸렸으니 만화책이 찢기는 것은 물론,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쩜 그 학기 내내 선생님의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만화책을 빼앗아 가셨고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교탁 안에서 만화책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만화책을 본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학생들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과학 선생님한테 걸리면 큰일이라며 안 빌려주려 했던 만화책 주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너무 미안해서 새것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과학 시간을 마치고, 갈가리 찢겨졌을 만화책을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교탁 밑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만화책은 찢어진 곳이 한 곳도 없이 말끔했다.
선생님께서는 만화책 대신 다른 종이를 찢어 소리만 크게 내고 만화책은 교탁 속에 고스란히 놓아두셨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난 학업 태도가 무척 좋아졌다.
선생님은 반성문을 쓰라고 하지도 않았고 별다른 벌을 주지도 않으셨다.
나는 그 선생님 덕에 졸업할 때는 모범생에게 주는 ‘학업상’을 받고 졸업했다.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된 나는 가끔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만 때론 잘못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모른 척 해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큰 감화를 준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은 강요하면 잘 듣지 않지만 스스로 깨닫게 해주면 신기하게도 잘 따른다.
나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과학 선생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정택섭/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근내리 (쌍용사외보 '여의주' 98년 8월호)
저절로 울리는 피아노
어떤 피아노를 만드는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 청년은 삼년동안 자신의 온 정열과 혼을 바쳐 '저절로 울리는 피아노'를 만들었습니다.
"됐어, 이제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두사람이 함께 결혼식을 올리면 이 피아노가 저절로 울릴거야"
청년은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마음씨 착하다고 인정받는 아가씨에게 청혼하였고, 둘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청년은 피아노를 교회에 가져다 놓았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결혼을 축하할 때 피아노에서 저절로 울려퍼지는 음악에 놀랄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드디어 결혼식날, 많은 하객속에서 신부를 기다리던 청년은 신부의 행진이 끝나도록 울리지 않는 피아노를 보고 크게 좌절했습니다.
'이럴수가, 그렇게 착하고 예쁘게만 보이는 마음이 사실 그렇지 않다니'
청년은 그길로 교회를 뛰쳐나와 사라졌습니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거리 저거리를 떠돌며 살던 청년이 우연히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을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놀랐습니다.
"아니, 누가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따르지요?"
"예, 이 마을에서 가장 착한 마님이지요, 마을의 과부와 고아를 위해 온 생애를 다 바치셨던 고귀한 분이랍니다.
결혼식때 자신을 버리고 간 나쁜 놈을 기다리며, 평생을 처녀로 지내다 결국 병을 얻어 돌아가셨답니다.
생각할 수록 이런 분을 이유도 없이 버리고 간 놈을 생각하면..."
"......"
청년은(이제는 더이상 청년이 아닌) 행렬을 따라 교회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앞쪽에 자리잡은 그녀의 관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도 뿌리친채 뛰어들어갔습니다.
관위에 엎드려 알 수 없는 절규를 터뜨리는 그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눈물을 흘리다 흘리다 오랜 방황에 지쳐 관위에 그가 쓰러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0여년을 울리지 않던 피아노에서 일찌기 듣지 못한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이 저절로 연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절대 그런게 아닙니다...
퇴근시간 즈음에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쏟아졌다.
도로 위의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나도 이 갑작스러운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건물의 좁은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그 곳에는 이미 나와 같은 처지의 청년이 서 있었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시작하자 할아버지 한분이 가세하셨다.
그런 다음 중년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아주머니 한분이 비좁은 틈으로 끼어들었다.
출근시간의 만원버스처럼 작은 처마 밑은 사람들로 금세 꽉 찼다.
사람들은 이 비좁은 틈에 서서 멀뚱멀뚱 빗줄기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비는 금방 그칠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뚱뚱한 아줌마 한 분이 이쪽으로 뛰어 오더니 이 가련하기 짝이 없는 대열로 덥석 뛰어들었다.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했던가?
아주머니가 그 큼직한 엉덩이를 들이대면서 우리의 대열에 끼어들자 그 바람에 맨 먼저 와 있던 청년이 얼떨결에 튕겨
나갔다.
그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쭉 훑어 보았다.
모두들 딴 곳을 바라보며 모른척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젊은이, 세상이란게 다 그런거라네."
그 청년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길 저쪽으로 뛰어갔다.
한 사오분쯤 지났을까? 아까 그 청년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비닐우산 5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다.
"세상은 절대 그런게 아닙니다."
청년은 다시 비를 맞으며 저쪽으로 사라졌고,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청년이 쥐어준 우산을 쓰고 총총히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세상은 다 그런거나네라고 말한 할아버지만이 한참동안을 고개를 숙이고 계시더니 우산을 바닥에 내려 놓고는 장대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좋은 생각 1996년 9월
. 철부지 시절이 담긴 봉투
방과후 꼬마들 몇 명을 데리고 교실 청소를 하고있던 어느날이었다.
말그대로 늠름한 청년 하나가 교실문을 열고는 불쑥 들어서더니
의아해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거 얼마만입니까? 저 백규인입니다. 세상에 선생님께서 이렇게 변해 버리시다니"
그러나 내가 반가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를 알아 본 것은 한참 후였다.
"그래맞아. 이십여 년 전 그렇게도 무우말랭이처럼 빼빼 말라 항상 시들했던 규인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그가 일학년이던 어느 날인가 한참 음악수업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선생님 냄새가 나서 노래를 못 부르게겠어요" 하면서 모두들 코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좋지 않은 냄새가 아까부터 온 교실을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당시에는 배곯는 우리어린이들을 위해국제 아동기금에서 옥분과 분유를 보내주었고 학교에서는 그것으로 죽이나 빵을 만들어 주었는데, 끼니조차 해결 못하는 가난 할때 허기가 진 규인이는 옥분죽을 너무 많이 먹고 그만 설사를 해버린 것이었다.
핼쑥한 얼굴을 하고 고통과 무안함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를 엉겁결에 데리고 가 씻기기는 했는데 갈아 입힐 옷이 있을 리없었다.
발가벗은그를 데리고 관사에 가서 맞든 안 맞든 바지를 얻어입혀서 집으로 돌려보냈였다.
이런저런 그와의 지난 시절을 이야기 하며 그의 아내가 온갖 정성을 다해서 마련한 저녁을 마친후 과일을 들고 있는데, "여보, 장롱 밑에 있는 봉투와 가위를 가져와요, 선생님 계신데서 개봉합시다." 하고 그가 얘기했다.
무엇인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실로 고색이 창연한 비료 푸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겉면에는 당사의 연도와 '나의 일학년 시절'이라는 제목, 그리고 '결혼한 후에 개봉할것'이라는 글이 씌여져 있었다.
문득 나는 옛날 우리 반 모두에게 만들어 준 기념 봉투 생각이났다.
"선생님, 그동안 수없이 많은고생을 겪으면서도 이것 만은 꼭 간수했습니다.
6년 전 결혼했을 때 개봉할까 하다가 선생님을 모시고 개봉하고자 꾹 참아왔습니다. 선생님, 뜯어주시지요"
봉투에서 나온 누렇게 변색돤 낡은 공책,그림 그린 도화지, 시험지. 통지표등을 들춰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내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감회는 실로 형언할수 없었다.
"이것은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저의 가보입니다.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4반세기 동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무력감이 투명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낮은 울타리 2월호> 에서 서울의 어느 한 초등학교교사의 이야기로 부터.......
이웃사랑과 바꾼 결혼 십주년 여행약속
1998년 11월 14일 오전11시 경기도 파주시 재해대책본부, 주부 10여명이 막 도착한 매일유업 트럭에서 내려진 분유통을 한두개씩 받아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평생 이렇게 반가운 선물은 없었어요.물난리통에 분유 사러갈 틈도 없고...할 수 없이 밥을 먹였더니 애가 밤새 설사를 하는 거예요.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趙애리(29.파주시금촌2동)씨는 10개월된 딸아이가 분유통을 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비치기까지 했다. 이날 주부들을 감동시킨 '특별 구호품'은 중앙정부나 자치단체가 보낸 것도 아니고 매일 유업의 호의도 아니었다.
한 30대 서민 부부가 10년동안 간직해온 정성이 밴 것이었다.
88년 봄 결혼한 이 부부는 신혼여행조차 변변히 다녀오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결혼 10주년때 해외여행을 가기로 한 뒤 매달 7만원씩 적금을 부어왔다. 회사원인 남편의 월급으론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고 집장만이 급해 아파트 중도금으로 쓰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올해초 1천만원을 모으게 됐다.
하지만 집중호우가 이들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수해지역 어린이들이 분유와 기저귀가 없어 고통받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뒤 이들을 돕기로 한 것.
이들은 수재의연금을 기탁하는 대신 직접 물품을 전달하기로 하고 매일유업에 전화를 걸어 분유 6백만원어치 5백30통을 구입하고 나머지 4백만원으로 기저귀를 샀다. 그리고는 매일유업에 부탁해 14일 경기도 파주와 의정부,서울 노원구 등 수해지역에 분유를 전달했다. 15일엔 남편이 친구의 트럭을 빌려 직접 기저귀 2천개를 파주시 조리면,광탄면 등 오지마을을 돌며 나눠줬다.
이들의 선물이 전달된 뒤 지역 대책본부와 동사무소 등에는 "분유도 나이단계별로 준비하고,기저귀도 남녀용을 구분하는 등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전화로 인사라도 해야겠다. 도대체 그분들이 누구냐"는 문의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이웃을 위해 좋은 일 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기자에게조차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1998년 8월 17일.중앙일보.
삐삐 비밀번호
안녕하세요.저는 이동통신회사에서 민원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있는 이 혜영이라고 합니다..
2년이 훨씬 넘게 많은 고객들과 통화를 하면서 아직까지도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날은 비가 많이 오는 날 이였어요. 그 날 따라 불만고객들이 유난히 많아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지요.
하지만 업무의 특성 상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고객이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해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죄송합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서.... 다시 조치하겠습니다" 이런 말 외에 같이 흥분하거나 소리를 지를 수는 없거든요...
그날도 비까지 오는데다가 컨디션도 많이 안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사정이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에 제 기분은 뒤로 숨긴 채 인사멘트를했죠.. 목소리로 보아 어린꼬마여자 이였어요..
이혜영: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텔레콤 이혜영 입니다
고객: 비밀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목소리가 무척 맹랑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혜영:고객 분 사용하시는 번호 좀 불러주시겠어요
고객:1234-5678 이요...
이혜영:명의자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고객:난 데요.. 빨리 불러주세요..
(어린 꼬마애가 엄청 건방지군...)
이혜영:가입자가 남자 분으로 되어 있으신 데요?
본인 아니시죠??
고객: 제동생이예요.제가 누나니까 빨리 말씀해주세요.
이혜영:죄송한데 고객 분 비밀번호는 명의자 본인이 단말기
소지 후에만 가능하십니다. 저희 밤 열시까지 근무하니
다시 전화 주시겠어요??
고객: 제 동생 죽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전화를 해요??
***가끔 타인이 다른 사람의 비밀번호를 알려고 이런 거짓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전 최대한 차가운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혜영:그럼 명의변경을 하셔야 하니까요 사망진단서와
전화주신 분 신분증 또 미성년자이시니까 부모님
동의서 팩스로 좀 넣어 주십시요.
고객: 뭐가 그렇게 불편해요. 그냥 알려줘요.
***너무 막무가네였기때문에 전 전화한 그 꼬마 애의 부모님을
좀 바꿔달라고했죠*******
고객: 아빠 이 여자가 아빠 바꿔 달래..
그 꼬마 애의 뒤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가입자의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비밀번호 알려 달라고 그래... 빨리
아빠: 여보세요...
이혜영:안녕하세요. **텔레콤인데요. 비밀번호 열람 때문에 그런데요 명의자와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아빠:제 아들이요?? 6개월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콰당??? 그럼 사실이란말야???--그 때부터 미안해 지더군요...
아무 말도 못하고 잠시 정적이 흐르는데 아빠가 딸에게 묻더군요.
아빠:얘야 비밀번호는 왜 알려고 전화했니??
딸이 화난 목소리로
고객: 엄마가 자꾸 혁이(그 가입자 이름이 김혁이였거든요)호출번호로 인사말 들으면서 계속울기만하잖아.
그거 비밀번호 알아야만 지운단 말야..
전 그때 가슴이 꽉 막혀왔습니다.
아빠: 비밀번호 알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혜영:아??? 예... 비밀번호는 명의자만 가능하기 때문에 명의변경하셔야 합니다. 의료보험증과 보호자 신분증 넣어 주셔도 가는 하시요..
아빠: 알겠습니다..
(전 감사합니다로 멘트 종료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이혜영: 죄송합니다..... 확인후전화주십시요...
아빠:고맙습니다.
이혜영:아...예....
그렇게 전화는 끊겼지만 왠지 모를 미안함과 가슴아픔에 어쩔 줄 몰랐죠..
전 통화종료 후 조심스레 호출번호를 눌러봤죠.. 역시나..
"안녕하세요. 저 혁인 데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멘트가 녹음되어있더군요.
전 조심스레 그 사람의 사서함을 확인해 봤죠.
좀 전에 통화한
혁이라는 꼬마 애의 아빠 였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혁아.... 아빠다.. 이렇게 음성을 남겨도 니가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오늘은 니가 보고 싶어 어쩔 수가 없구나..미안하다 혁아 아빠가 오늘 니 생각이 나서 술을마셨다 니가 아빠 술마시는거 그렇게 싫어했는데.. 안춥니?혁아...... 아빠 안보고싶어???“
가슴이 메어 지는 거 같았습니다... 그날 하루을 어떻게 보낸 건지..
아마도 그 혁이의 엄마는 사용하지도 않는 호출기 임에도 불가하고 앞에 녹음되어 있는 자식의 목소리를 들으며 매일 밤을 울었나 봅니다. 그럴 보다 못한 딸이 인사말을 지우려 전화를 한거구요.. 가슴이 많이 아프더군요.
일 년이 훨씬 지난지금이지만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는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족들을위해 부족한 저지만 다시 한번 기도 드립니다. 이젠 혁이의엄마 더는 울지않으시길 절대로 잊을 순 없는 거지만 이젠 덮어두시고 편히 사시길... 그리고 제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이혜영님이 제 홈 게시판에 남겨주신 글입니다.
첫사랑의 원죄
간 절히 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청춘의 꽃이라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첫사랑의 실패 원인을 꼽자면 경험 부족과 참을성 부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한테는 애초부터 첫사랑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나는 재수생 시절에 친구와 함께 학원을 다녔다.
친구한테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C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려 다니곤 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나는 친구의 애인을 짝사랑해 열병을 앓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너무 좋아해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써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폭풍처럼 가슴 속에 휘몰아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 속에는 악마가 자리잡게 되었다
녀석만 없으면… 녀석이 이 세상에 없으면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어서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나는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친구가 애인과 헤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통 사고라도 나서 친구가 죽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곤 했다.
그런데 한창 복더위일 때, 친구는 애인과 심한 말다툼을 하고 냉전 중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친구에겐, 남자인 네가 먼저 화해를 청하라고 충고까지 해주었다.
더할 수 없는 위선이었다. 다음날 오후,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친구가 학원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고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친구의 사망 소식을 학원 친구가 전화로 알려왔을 때,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실현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장례식 날, 나는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용서를 빌었다.
그 후 나는 C와 모든 관계를 끊고 학원도 옮겼다.
그리고 매년 친구의 기일이면 한강에 나가서 장미 한 송이를 강물에 던진다. 내년에도 친구를 찾아갈 것이다.
이제는 그만 오라는 친구의 말을 들을 때까지….
이정국/서울시 광진구 구의2동 (쌍용 사외부 '여의주' 10월호)
20년 만의 진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낯선 사람이 와서 따라 가자고 해도 절대로 따라 가서는 안 된다고 늘 신신당부를 했었다.
일곱 살이었던 어느 날, 나는 동네 한 모퉁이에서 오뎅 국물을 떠 먹는 다른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팔기 시작한 바지와 모자 달린 새 돕바를 입고 있던 나는 모자만 연방 썼다 벗었다 하며 빈 주머니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얘, 변전소가 어디 있지?” 하고 묻는 중년 신사의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안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곳을 묻기에 나는 “저를 따라 오세요” 했다. 나와 제일 친한 윤이도 동행해 주었다.
언덕 위로 올라서자 서늘한 9월답지 않게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밑에 몸을 잠시 피했다.
“얘들아, 니들 옷 벗어라. 비에 젖겠다. 옷 버리면 엄마 아빠가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그 말은 나를 위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얼른 새 옷을 벗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신사는 내 옷을 착착 접어 가방 속에 넣더니 변전소 근방에 가서 돌려 주겠다고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목적지를 불과 2백 미터 앞두고 있었다.
그가 급하게 내 손에 10원을 쥐어 주며, “얘, 저기 가서 빵을 좀 사 오련?” 했다.
나는 친구와 같이 빵가게에 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애석한 마음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신사는 골목 어귀를 돌고 있었다. 쏜살같이 내빼는 뒷모습만 보이고….
내 손에 쥐인 10원짜리 동전 하나. 그게 전부였다. 다 떨어진 내의 차림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날, 윤이와 난 그 10원으로 오뎅 국물만 실컷 마셨다.
20년이 흘렀다.
나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 조그마한 섬유공장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날도 비가 약간 내리고 있었다. 거래 관계에 있던 한 동창이 내게 할 말이 있다며 다방으로 가자고 했다.
“어이, 자네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나? 우리 아버지가 실직한 지 2개월 되던 날, 나와 했던 약속으로 새 옷을 한 벌 가지고 오셨더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지. 난 기분좋게 새 옷을 입었었어. 그런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네 이름이 새겨진 조그마한 뿔명찰이 쥐여지는 게 아니겠어?”
“….”
“미안하게 됐네. 사실 난 그 날 이후 한 번도 그 옷을 입지 않았어. 언젠가 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었지. 어젯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네. 네게 그 얘기를 하라고 하셨어. 그 때 미안했다고.”
Best 8. 91년 5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아주 특별한 결혼식
토요일 오후 두 살된 아이를 들쳐 업고 가는 남편의 거래처 사람 결혼 식장은 '짜증' 그 자체였다.
남편은 급한 일로 못 간다 하며 전화를걸어왔다.
"대신 가줘. 나 말고 딴 사람 것도 있으니까 돈 찾아서 봉투에 두 개 넣어 줘. 미안해!"
아시다시피 토요일 오후의 예식장 가는 길은 얼마나 복잡한가.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축의금을 들고 결혼식장에 들어선 나는 너무 힘들어서 축의금을 전해주고는 곧장 나오려 했다.
그런데 다른 예식장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가 나를 끌어 당겼다.
신랑측은 여느 분위기와 다를 바 없이 웅성거렸지만, 오른쪽에 있던 신부 하객들은 대부분 침묵한 채 부지런히 손만 놀리고 있었다. 아,그러고 보니 신부가 벙어린가 보다. 그냥 집으로 가려던 나는 발길을 멈추고 예식을 끝까지 지켜 보았다.
모든 순서가 진행될 때마다 우축 맨 앞에 나온 수화 통역자가 계속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특이한 결혼식이었다. 대충 감을 잡은 신랑측에서는 수근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신부 엄마쪽이 온통 장애래."
"신부 친정 식구들이 듣지를 못한 대."
"그럼, 양가가 서로 말도 못하겠네."
"쯧쯧, 그래서 그렇게 결혼 반대가 심했구만."
옆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애를 업은 내 등에서 식은 땀이 배어 나오고, 심장은 마구 도리질치기 시작했다.
내 결혼식 때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양쪽 어른이 함께 인사하던날, 사돈되실 분 손 한번 잡아 보시고 가족들의 대화하는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우리 아버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수화로 말씀하셨다.
'네 결혼식 때 나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니 큰 삼촌이랑 고모하고 혼주석에 앉고 나는 멀찌감치 뒤에 있으마.
못 듣기 때문에 네 손을 잡고 못 들어가겠다.'
물론 그때 식구들은 무슨 말씀이냐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신부입장 때 소리를 못 듣는 아버지가 실수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침내 결혼식 당일, 내가 염려한 대로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조심조심 입장하던 아버지는 주례사의,
"신부 아버지는 이제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로 인계해 주세요." 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신 것이다.
순간 나는 당황하여 더 가지 마시라는 신호로 아버지의 팔을 꽉 붙잡았는데 눈치를 못 채신 아버지는 그만 단상 위까지 올라가실 뻔
했고, 신랑은 어정쩡하게 그 옆에 서 있게 되었다.
1분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하객쪽에서는 "하하하" 하는 폭소가 터져 나왔고,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하객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섰다.
결혼식 내내 아버지는 땀을 닦으시며 안절부절이셨고, 옆에 앉아계신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대충 일어나고, 앉고, 사진 찌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결혼식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수화 통역자가 아예 사회자 옆으로 나와 서 있었고 식장까지 들어와 잘 살라며 축복해 주는 하객들.
그것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는 신랑. 박수로 축복하는 하객들.
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 나는 결혼식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친정집을 향해 달렸다.
결혼식 내내 골이 나 있었던 나의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 못하던 아버지의 눈길을 묵살하고 말았던 철없는 나의 행동을 용서받고 싶었다.
'아버지, 그동안 저희 두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오신 30년의 세월,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저의 등 뒤에서 등대가 되어 주세요. 그리고 아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조희주 (군산시 명산동)
노점상 할아버지의 도시락
우리 회사 앞 양쪽 보도 블록에 죽 늘어선 노점상에는 항상 사람들이 제각기 분주하게 일하
고 있다. 구두 수선집, 튀김 가게, 신문 가게 등 온종일 조그만 네모 상자 안에서 일하는 그
분들을 지나칠 때 마다 나는 삶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곤 한다. 그중 일흔이 훨
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돗 자리를 펼쳐 놓고 손톱깍기, 가위, 도장집, 돋보기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잡동사니들을 팔고 있다.
할아버지는 손님을 기다리면서 깜빡깜빡 조릭도 하고, 이따금씩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곤 하셨다. 그리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실 때가 많았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살 때도 많았다.
그런데 그날 일찍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할아버지 앞을 지나치다 보니 할아버지
가 다른 때와 달리 도시락을 드시고 있었다.
웬일일까 궁금했지만 우선은 라면보다 밥을 드신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이 되었다.
나는 곧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침 그 안에는 아가씨 둘이 타고 있었는
데 한 아가씨가 친구에게 무엇인가 캐묻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오는데 말하기 그렇게 어려운거야?
"응. 그냥 저기..."
"말을 안하니까 더 궁금하다 어디 다녀오는데? 말 좀 해봐."
"요 앞에 장사하는 할아버지한테. 며칠째 계속 라면만 드시기에 아침에 내 도시락 싸면서
하나 더 싸가지고 왔거든. 그걸 갖다 드리고 오는 길이야."
부드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가씨의 말에는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임옥례님/서울 중구 서소문동
애니의 바이올린..
애니는 바이올린을 몹시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몇 해째 계속되는 흉작으로 바이올린을 사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애니는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소원을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애니는 아버지 방에서 흘러 나오는 두런거리는 소리에 일어나 몰래 아버지 방을
엿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애니가 바이올린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애니는 곧 자신의 철없음에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는 기도가 끝난 후 오하이오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띄었습니다.
평범한 안부를 묻는 그 편지에는 막내 애니의 바이올린을 사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 배
어 있었습니다.
몇 주가 지난후 애니의 집에 한통의 편지가 날아 들었습니다.
그 편지는 오하이오의 친구가 애니와 애니의 아버지를 집으로 초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하이오의 아저씨는 친구와 애니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애니로 하여금 자신이 소중히 하는 바이올린을 켜게 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벼룩시장에서 7달러를 주고 샀지. 이 바이올린은 애니에게 더 잘 어울리는
군."
그 바이올린으로 애니는 행복한 소녀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애니도 중년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신문을 뒤적이던 그녀는 " 딸 아이를 위한 싼 바이올린 구함" 이라는 광고를 보고 지난날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존심을 위해 비싼 바이올린을 7
달러라는 싼 가격으로 판 생각 깊은 오하이오 아저씨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곧 옷장 깊숙히 숨겨 논 바이올린을 꺼내 광고를 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역시 가난으로 딸의 바이올린을 사주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악기 값은 얼마를 드려야... ."
"7달러요."
애니는 어느 새 오하이오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펀글......
행복수첩
할아버지의 유품..
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하
얀 봉투를 발견하곤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
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뽑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생활이 어려
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학교에 입학하여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
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시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
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천 원짜리 육십 장을 천천히 세어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이셨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에서 한 달 용돈
을 기다리던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애가 고생하면서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쓰라고 하
셨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고 달랑 천 원짜리 세 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 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넣는 할아버지가 너무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 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 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 장의 월급
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었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
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한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
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 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
이나 울었다.
<행복수첩>, 김용택 엮음, 좋은생각
편지로 맺어진 사랑
글쓴이 : 하늘사랑(1999년 3월 17일 수요일)
이 글은 내가 예전에 읽었던 어느 소설내용이다.
이 글을 읽노라면 사랑이 무언지 알 것도
같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때는 미국의 남북전쟁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한 군인이 있었는데 그는 책읽는 걸 무척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알수없는 전쟁터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군인은 항상책읽기를중단하지 않았고 군인의 가슴속은 언제나 따뜻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하루는 군인이 도서관에서 책을 한권 빌려왔는데 그 책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책 내용에대한 주석이 줄 사이에 씌어져 있었다.
너무도 깨끗하고 완벽하게 붙여진 주석에 대하여 청년은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주석을 붙인 이가 누군지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마참내주석을 붙인 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주석을 붙인 이는 여인이었고 그녀 역시 군인에게 답장을 보냈다.
편지가 오가길 여러번.....
그러는 사이 군인과 여인은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 어느덧 군인은 제대를 해야 할 시기가 왔다.
군인은 제대를 하고 나면 그녀와 편지를 보내기가 어려워 질 것이라
생각하고는그녀를 만나기로 작정하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자신에 대하여 인상 착의며 나이등을 군인에게
가르쳐 주지 않고 단지 자신은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나이도 또한 많다고
전할 뿐이었다.
하지만 군인의 간절하고 끈질긴 부탁에 그녀도 마지못해 군인과의 만남을
허락했다.
어느 철도 역의 중앙광장에서 12:00정각에 그녀는 가슴에 붉은 장미를
달고 나가기로 했으며군인은 정복을 입고 나가기로 했다.
드디어 약속의 날.........
군인은 30분쯤 일찍 도착해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군인은 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과 상상으로 들떠
있었다.
기쁜 생각으로.........
하지만 30분은 마치 3년처럼이나 길고도 긴 시간처럼 군인에게는
느껴졌다.
광장의 시계탑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의 앞으로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걸어 왔다.군인의 가슴은 두근
거렸다.
드디어 그녀가 오는구나 하며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스쳐 지나며 따라오라는듯 윙크를 보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뒤로 40대중반의 한 중년부인이 나타났다
짜리몽당한 키에 뚱뚱하게 생긴 중년의 부인....
군인은 제발 가슴에 붉은 장미가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붉은 장미가 달려 있었다.
순간 군인은 망설였다.
앞에 스쳐지나간 아가씨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자신앞에 나타난 상상속의
그녀는 너무나...
둘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군인에게 40대중반의 여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의 아가씨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 정신적 공감대를 형성했던 누군지 모를 주석의 주인공인
40대여인에게 다가갈
것인가!!!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한손에 쥐고는 40대 중반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순간.....
40대 중반의 여인은 군인에게 말을 건넸다.
자신은 편지의 주인공이 아니며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여인은 바로 전 당신앞을 스쳐서 지나갔던
여인이라고.....
앞에 가던 저 여인이 나에게 이 꽃을 건네주며 당신이 내게 말을 건네오면
이꽃을 주면서 자신이 저 길건너 찻집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일러주라고
했다며 꽃을 건네주었다.
그래서.....
군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마침내 이루어 진 것이다.
=============================================
사랑이란 형식이 아니랍니다.
사랑이란 내용이지요!!
지금 이순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사랑에 대한 형식만을 쫓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의 큐피트
오늘은 저와 그녀에게 무척 중요한 날입니다.
그녀와 저는 최근 들어 무척 힘들었습니다. 평범하게 오래된 남녀의 연애라는 것이 다
그렇겠지만요...
어제 그녀가 전화를 했습니다.
" 동원아. 우리 내일 5시에 만나자. 우리가 다시 시작할지. 아니면 헤어져야 할지 결론을
내리자. "
" 그...그래... "
당황해서 승낙을 하긴했지만 지금 걸어가고 있는 저의 마음은 무척이나 무겁습니다.
이제 약속장소는 300m만 걸어가면 나오지만 솔직히 아직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이 헛 시간이 아니었기에 저는 당당히 다시 시작해보자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잠깐 쇼윈도우에 모습을 비춰보기 위하여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 지극히 평범한 내 모습. 그녀는 이런 내 모습이 싫은걸까? '
그런데 갑자기 바지자락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 으아아앙...엄마아아아..... "
저는 깜짝 놀라서 아래를 쳐다 보았습니다.
한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제 바지 자락을 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소극적인 성격의 사람이 다 그렇듯이 전 아이들을 참 싫어했습니다.
아무리 이쁘게 생겨도 관심조차 갖지 않았죠.
저는 어느 부모인지는 몰라도 애를 빨리 데려가 주길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1분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대려가지 않았습니다.
" 꼬마야... 왜 울고 있니? "
" 엄마...엄마...가 없어졌어... "
전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이 큰 건물안에서 애를 잃어버리다니. 무책임한 부모라고
마음속으로 욕을 했습니다.
" 응..그래 내가 찾아줄께... "
저는 그 아이를 데리고 건물 경비실로 갔습니다.
" 아저씨. 얘가 엄마를 잃어버렸데요... 방송좀 해주시겠어요? "
" 그러죠. 꼬마야...이름이 뭐니? 몇 살이야? "
" 나... 서민아...5살... "
아저씨는 바로 방송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냥가기가 좀 그래서 잠시부모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약속 시간이 아직 5분이 남아있기 때문에 바로 뛰어가면 될 것입니다.
5분이 흘렀습니다.
전 마음이 급했지만 차마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5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평범한 다른 날 같았으면 기다려 줄 수도 있지만 오늘은 너무나도 중요한
날 이었습니다.
" 민아야... 오빠...가야하거든? 엄마 오실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라.."
" 싫어. 오빠랑 같이 있을꺼야... "
" 미안해. 오빠가 급한 일이 있어서... "
난 평소처럼 냉정하게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 으아아앙....엉엉엉... "
민아가 막 울면서 따라와서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어리광이라면 화가 났겠지만 엄마를 잃어버리고 당황해서 그러는 것임을
알았기에 저는 다시 달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민아야... 엄마 꼭 오실꺼야... 응?? "
" 싫어..싫어.. 오빠도 여기 있어... "
" ..... "
저는 무척 급했지만 그녀가 30분은 기다려 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우뚝서서 시계만 보며 꼬마의 부모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시간은 천천이 흘렀지만 그만큼 제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약속했던. 함께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30분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민아에게 정말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 민아야... 정말 미안해... 응?? 오빠 가야해.... "
민아는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경비 아저씨의 인상이 좋은편이 아니어서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민아는 절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전 순간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여자 친구냐... 이 꼬마냐...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희랑 오늘 일 때문에 잘 안풀리더라도 오늘 상황을 잘 설명하면 이해해 주리라
생각뻍고 또 만약 잘 안풀리더라도 여자 친구는 또 사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녀같은 여자는 드물었지만요...
하지만 만약 민아를 내버려두고 갔는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 민아야...알았어... 오빠가 엄마 오실때까지 기다려줄께... "
민아는 엄마를 잃어버린 것도 잊은듯 기뻐했습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민아의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벌써 6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상가는 7시면 문을 닫는데...
민아는 땀이 흥건이 적셔진 조그만 손으로 제가 언제라도 손을 놓고 사라질까봐
걱정스러워서인지 제 손을 무척이나 꼭 쥐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자꾸만 흘렀습니다.
주희나 제게 삐삐가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연락이라도 하면
좋을텐데...
민아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꼬마의 어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웃음만이 어울릴 그 얼굴에...
" 민아야. 너 어디살아? "
" 나 대전 "
" 그래? 그럼 서울로 여행온거야? "
" 응 "
" 대전 어디살아? "
" 집에 " -_-;
참 곤란했습니다. 이 지역 사람이라면 대충 주소를 알면 찾아 줄 수 있으련만
대전이라니...게다가 주소도
모르고...
" 그런데 엄마 어디서 잃어버렸어? "
" 몰라. 걸어오는데 엄마가 없어졌어 "
" 얼마나 걸어왔는데? "
" 몰라. 많이... " -_-;
민아에게 시간적인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기다리다보니 벌써 7시가 되었습니다.
경비 아저씨가 다가와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 학생. 그 아이 부모가 이 앞으로 올지도 모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혹시 나타나지
않으면 미아 보호소에 데려다 주시고요. "
" 예. 알겠습니다. "
나와 민아는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 오빠. 나 쉬 마려워. "
" 에구... 건물 안에 있을 때 이야기하지... "
할 수 없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지저분한 곳에 민아를 데려가는 것은 왠지 꺼림직해서 앞쪽에
보이는 KFC로 데려갔습니다.
" 어서 오십시오. "
" 예... "
사 먹을 것도 아닌데 인사를 받으니 왠지 쑥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쑥스러운 마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물어보았습니다.
" 화장실 어디 있나요? "
" 저쪽으로 가셔서 왼쪽으로 돌면 있습니다. "
화장실은 역시 참 깨끗했습니다.
" 민아야. 혼자 쉬할 수 있지? 여자 화장실에 난 못들어가... "
" 싫어. 같이 들어가... "
민아는 쉬가 마려워 얼굴이 노랗게 되었으면서도 참고 말했습니다. 전 할 수 없이 민아를
데리고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민아는 제가 사라질까봐 두려워서인지 문을 활짝 열고 쉬를 했습니다.
그리고 소변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 오빠... 배고파... "
" 응?? "
" 닭 먹고 싶어 "
" 응..그래...얼른 쉬하고 나와... "
민아가 나온뒤 저는 주희에게 장미를 선물하려고 가지고 나왔던 돈으로 닭을 샀습니다.
" 오빤 안먹어? "
" 응? 난 배 안고파... 너 많이 먹어.. "
사실 배는 많이 고팠습니다.
민아 부모를 찾을 때 혹시 필요한 경우가 생길까봐 돈을 아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민아는 행복한 표정으로 얼굴에 기름을 묻혀가며 먹었습니다.
나랑 주희도 이렇게 순수할 수 있으면 머리 복잡하고 마음 아픈일은 없을텐데.
민아가 먹는 동안에도 저는 계속 밖에 신경을 썼습니다.
혹시 민아의 엄마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건물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실망한 모습으로 다시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어갔습니다.
" 민아야..잠깐만... "
그 여자는 걸음이 빠르지 않았습니다.
" 혹시 민아 찾으러 오셨나요? "
" 예? 아니요... 남자 기다리는 중인데요... "
" 아..죄송합니다. "
저는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민아가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들어가서 민아를 본 순간 무척 놀랬습니다.
민아는 먹던 닭다리를 들고 있는체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도 저런 슬픈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 민아야 미안해. 너희 엄마가 온 줄 알았어. "
" ..... "
민아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민아는 나오면서 제 손을 잡았는데 아까보다도 훨씬 꼭 잡았습니다.
대답하지
않았어도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민아야. 오빠는 절대로 널 버리고 도망가지 않아... "
" 응 "
그녀가 다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드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런 민아를 꼭 안아주고는 벤치로 데리고 갔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9시가 깊은 밤이나 된 것 처럼 무척 어두웠습니다.
" 민아야. 안졸려? "
" 응. 근데 엄마 왜 안오지? "
민아도 어두워지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민아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꼭 오실꺼야. 참 민아야 미술 좋아해? "
" 미술? "
" 그림 그리는거... 이게 몬줄알아? "
저는 들고 있던 조그마한 화판을 들어 올렸습니다.
오늘 그녀와 대화후 공원에서 그림이나 그려볼까하고 가져나왔던 것이었습니다.
" 몰라 "
저는 화판을 펼치고 파스텔을 하나 민아에게 쥐어 주었습니다.
" 그림 그려봐... "
" 뭘 그려? "
" 네가 그리고 싶은 거 아무거나... "
민아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뭘 그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열심히 그렸습니다.
" 민아야 뭐 그리는거야? "
" 오빠 "
민아의 얼굴은 진지했습니다. 괴물을 그리고 있었지만요...
" 아. 차거 "
" 응? "
" 오빠 비 와 "
저는 서둘러서 화판을 접고 민아를 데리고 비를 피할수 있는 장소로 달려 갔습니다.
빗방울은 그렇게 굵지 않았지만 꼬마가 맞으면 감기에 걸릴것 같았습니다.
민아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 민아야 추워? "
" 응 "
저는 가만히 무릅 꿇고 앉아서 민아를 다시 꼭 안아 주었습니다. 민아는 참 따뜻했습니다.
" 오빠. 오빠 결혼 해? "
" 응? "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니'란 대답 대신 '응?'하고 되 물었습니다.
" 오빠. 이 다음에 나랑 결혼해.. 응?? "
" 글쎄... 어떻게하지? 이미 약속한 애가 있는데... "
물론 주희하고 나하고는 전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 나 싫어? "
그녀는 곧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 아니. 너무 이뻐 "
" 그럼 나랑 해 "
" 음...글쎄... 생각해보고... "
" 약속 "
민아와 저는 새끼 손가락을 걸었습니다. 지켜지기 힘든 약속이었지만요.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10시 30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비 때문인지 별로 보이지 않았고 차들만 물을 튀기며 지나가곤 했습니다.
" 오빠... 나 졸려... "
" 응? 그래. 그럼 오빠한테 기대서 자... "
저는 민아를 안고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불은 하나 둘씩 꺼져가고 있었고 날씨는 더욱 선선해졌습니다.
그렇게 민아를 안고 있던 저도 슬슬 졸리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선선하니 더 졸음이 왔습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눈을 떴고 민아도 눈을 떴습니다.
" 민아야! "
" 어? 엄마다. 엄마!! "
" 너희 엄마야? "
민아는 제 손을 뿌리치고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민아의 기쁨을 알면서도 제 손을 뿌리친 민아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에게 안겨서 기뻐하는 민아의 모습을 보니 저도 기뻤습니다.
민아 엄마가 민아를 안고 다가왔습니다.
" 학생. 고마워요. 정말 어찌나 걱정했는지. 오늘 민아를 찾느라고 이 동네를 다 뒤집고
다녔다우... "
" 엄마. 오빠가 닭고기도 사주고 그림도 그려줬다. "
" 어머나!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까요? "
민아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 밝았습니다. 저는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복한 얼굴이 저를 기쁘게 했으니까요.
" 괜찮아요. 민아 졸리다고 했었는데 어서 가서 쉬세요.
저는 일이있어서... "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계속 보고 있으면 저의 마음만 아플 것 같았습니다.
민아 엄마는 연락처를 하나 주고 민아의 손을 잡고 걸어갔습니다.
저는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민아야 행복해'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아가 엄마 손을 놓더니 저에게 뛰어 왔습니다.
" 오빠... 안녕! "
민아는 저에게 한 번 안기고는 볼에 뽀뽀를 쪽 해주고 다시 달려갔습니다.
저는 한동한 볼을 만지며 민아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아..안녕...민아야.. "
저도 일어났습니다.
한 편으로는 무척 기쁘지만 주희와의 약속이 깨져 또 한편으로는 무척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근처의 공원의 그네에 앉았습니다.
그네에 앉아 왔다갔다 하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네가 멈췄습니다.
" 계동원! "
" 어? 주희야... "
" 나...오늘 6시간 기다린거 알아? "
" 미..미안해...사정이.... "
" 너 여자랑 데이트 했지? "
" 아니야. 정말 아니야... "
" 나 봤어. 키스까지 받던걸? "
그러더니 그녀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녀는 다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 너 본거야? 언제부터? "
" 그..꼬마애랑 그림 그릴 때 부터.. 그런데 그 꼬마... 나도 못한 키스를 먼저
해버렸드라...그리고 너.. 걔랑 결혼 약속하면 나랑은 어떻게 할껀데? "
나는 그네에서 일어나서 그네 줄을 잡고 있던 그녀를 안아버렸습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나의 태도에 깜짝 놀라는 것 같더니 살며시 제 어깨를 붙잡고
제 가슴에 얼굴을 파 묻었습니다.
" 주희야. 나 정말 많이 생각했는데...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
" 글쎄... 그 꼬마에게 해 줬던 것 처럼 하게 해주면 가능하지... "
그러더니 그녀는 제 볼에 키스를 쪽 해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 밝았습니다. 아까 엄마를 만나 기뻐하던 민아처럼요...
" 그런데 동원아. 그 꼬마애...민아라고 했던가? 사랑의 큐피트였나보다.
너랑 나를 다시 이어준... "
점점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멈추었습니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 잘잤어? 얼른 우리 아파트쪽으로 와봐...오래간만에 무지개가... "
저는 바로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주희가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 아... 정말 무지개가... '
" 무지개 노란색 빛도 참 아름다운 것 같다. 그치? "
" 그럼! 우리 사랑을 이어준 민아의 색인걸... "
" 그럼 난? "
" 너? 무지개에 검정색도 있냐?-_-; "
나와 주희는 서로 좋아합니다. 아직 말은 못했지만요...
그리고 민아에게 이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 민아. 우린 너를 사랑한다....
혼자만의 사랑
손이 떨려왔다.
조금 소심하기도 한 그였지만 이렇게 떨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인장을 찍듯이, 그는 조심스럽게 공중전화의 번호판를 눌렀다.
" 따르르릉~ 따르르릉~ "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냥 수화기를 내려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이 번호를 알기위해 그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 딸깍. "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렸고,
" 여보세요? "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로 그녀가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잠시 전화기에 머리를 기대고 있더니, 결심한 듯 이를 꽉 물고
전화박스지나서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타고 싶지 않은 듯 그는 계단을 밟아 8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몇호인지 확인하는 듯 복도를 따라 죽 걷더니, 807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 앞에서 10분 가량을 서 있었다.
갑자기 대문 열리는 소리가 원래 그 자리에 박혀있던 것 처럼 서 있던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6살 정도 되어보이는 꼬마 아이가 장난감 포크레인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놀이터로 가는 듯 했다.
그는 지레 겁을 먹은 자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드디어 손을 들어 벨을 눌렀다.
" 찌르르르릉~ "
그에겐 몇 분처럼 느껴졌을 몇 초간의 침묵이 지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세요? "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누구세요? "
하지만 대답을 해야만 했다.
" 나야.. "
도대체 나가 누구냐고 되묻는 듯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어색한 얼굴의 그를 보았다.
사람은 너무 놀라면 할 말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바로 그녀가 그랬다.
" 너... 너... "
그렇게 힘들었는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열고 3년전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을 만남의 인사로 사용했다.
" 안녕. "
" 세상에.. 너 여기 어떻게 왔어? "
" 잠깐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 "
" 얘~ 누구니? "
" 아니에요, 엄마. 저 잠깐만 나갔다 올께요. "
덜컹~
그리고 아파트 앞 벤치에서 아까 질문들의 대답이 진행되었다.
" 너 여기 어떻게 알았어? 누구한테 물어본거야? "
" 그냥 어떻게 알게 됐어. 근데 너.. 나 의무경찰 지원한 건 알았었니? "
" 아니. 너 의경 갔어? 군대 안간다면서? "
" 그렇게 됐어. "
의경을 지원한 단 한가지 이유는, 경찰이 되면 그녀가 이사한 주소를 컴퓨터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 그래.. 아무튼 반갑다. 얼마만이지? "
" 3년만이야.... "
"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
그가 기억하기로는 1098일 3시간째였다.
" 그런데.. 왜 여기까지? "
" 아, 저기.. 이거 돌려줄려구. "
" 어! 이거 내 가방이잖아! "
" 응. 순찰 돌다가 우연히 쓰레기통 옆에 버려져 있어서.... "
" 누가 가져갔다가 돈 될게 없으니까 그냥 버렸나 보구나. 실은 얼마 전에
지하철 타다가 그냥 놓고내렸거든.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
" 한번 열어봐. 속에 책 몇 권 있는 것 같던데. "
" 응.. 다이어리까지 다 있네. 고마워.. 근데 이게 내 가방인 어떻게 알았어? "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신고 있던 신발 색까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그가 그녀의 가방에 달린 그가 사준 열쇠고리를 잊을리 없었다.
" 그냥 네 가방 같아서.. 너 가방 뒤에 실로 이름 새겨놨잖아. 보니까 네꺼 맞더라구. "
" 그랬구나.. 고마워 정말. "
그리고 몇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그녀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할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 그럼 이제 가 볼께. "
" 벌써 가? 아직 말도 별로 못했는데. "
그녀의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길 바랬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인사치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 이제 가 봐야돼. 너무 오랫동안 나와 있었거든. "
" 그래.. 이거 돌려줘서 정말 고마워. 잘 가. 몸 건강하구. "
그녀는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 그래. 잘 있어. "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녀가 깜빡 잊었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 아 참, 그런데 조금 전에 전화했다 그냥 끊은 거 너니? "
" 아니. "
" 어.. 그럼 누구지.. "
" 다른 사람일꺼야. 난 아니야. "
" 그래... 그럼 잘 가. 나도 들어갈께. 안녕~"
" 안녕. "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찾아오지 않는 편이 나을 뻔 했다.
하지만 후회라는 것은 이미 저지르고 난 후에 할 수 있는 일.
그녀의 다이어리에서 다른 남자의 사진이 떨어졌을 때 그는 이미 찾아오면
후회할 것을 알고 있었다.
노을 너머로 길어진 그림자가 그를 따라 걸어갔다.
펀글.
가슴이 시리면 읽어봐. 그럼 따뜻해 질걸....
글쓴이 : 난나(1999년 2월 4일 목요일)
1
음..그러니까 그게 제 나이 6살때군요...
전 바닷가 근처 작은어촌 외딴곳에 살았답니다..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신 저는 언제나 바닷가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바닷물에 여러
꽃잎들을 띄웠었죠...
그 꽃잎을 보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절 보러 와주실꺼라 믿었꺼든요..
그러나 동네 아이들은 언제나 저를 비웃었답니다..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한다며 놀리곤
했었죠...
그러던 어느날 입니다..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전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부모님이 오시길
기다리며 빨간 꽃잎들을 바닷가 위에 뿌리고
있었죠...
그때 어떤 한 오빠가 저에게 다가왔었습니다.
"응??...너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니??"
그 사람의 질문을 들음에도 저는 하던일을 멈추지 않고 여전히 꽃길을 만들며 대답했죠..
"꽃길을 만들어요..."
"꽃길??? 꽃길이라니??..."
"네..저희 부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길을 따라 저를 만나러 오라고 만드는 거예요..."
그런 저의 대답을 한동안 아무말없이 물끄러미 절 바라보던 그 사람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을 하였죠..
"그래...꽃길이라..참 이쁘구나..부모님이 보시면 아주 좋아하시겠는걸?"
"정말이요??..그렇죠?? 좋아하시겠죠??.. 오빠는 제말을 믿어요??"
"후훗..그럼..하늘나라에 사시는 부모님이 분명히 아주 좋아하실꺼야..."
"그초? 것봐..내말이 맞았어...히힛..신난다.."
그 사람은 절 믿어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저는 그 후로 생각했죠..
2
그리구 세월은 흘러흘러 제가 고3학생이 되었을 때랍니다.
전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제가 3학년때 저희반에 새로오신 담임선생님이
계셨죠.
새로오신 담임선생님은 총각 선생님으로써 저희 학교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답니다.
그 선생님은 오시자마자 아이들을 각자개인 면담을 하였습니다.
"음..넌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구나??"
"네..부모님은 제가 어릴적에 돌아가셨어요.."
"저런...음...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자라주었는걸??"
"......"
"밝고 이쁜 네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들도 아주아주 기뻐하실꺼야.."
그렇습니다.. 그 선생님은 저를 믿어준 두 번재 남자였죠..그 뒤로도 무슨일이 있어도 그
선생님은 절 항상 믿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누구든지..그때 그 사람처럼만 절 믿어준다면..꼭 사랑하리라고.
언제부턴가 저역시 그 선생님을 사랑했구요...
다행히도 그 선생님 역시 저를 사랑했나 봅니다.. 저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죠...
"넌 소원이 뭐니??"
"저요??..ㅎ훗..전..아주 어릴적부터 꽃으로 만든 길을 갖고 싶어했죠...
꽃길을 만들면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절 보러 와줄꺼라 믿었거든요.."
"꽃길??..음...이쁘겠다..꽃길이라.."
그분역시 저의 꽃길을 아름답다고 인정해 주었어요...너무나도 고마우신분 제가
졸업하자마자 그 사람은 저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전..주저하지 않았죠...
그렇게 우린 결혼하였습니다..
3
당신자신보다 항상 절 먼저 생각해주는 사람.....
저의 결혼생활은 꿈만 같았습니다.
왕궁에 사는 왕비나 공주조차도 부럽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그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그꿈은 교수였죠..절 가르쳤듯이
그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걸 무척이나 행복해 하였죠..
그런 그가 어느날 저에게 이야기하였죠..
"1년만 외국에 갔다 올께..1년만..기다려줄수있니?
당신이 보내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꺼야..나에겐..당신이 전부니까.."
"기다리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걸요??..후훗..걱정하지 말아요..
1년이 아니라 평생이라도 당신을 기다리는거라면...기다릴수 잇어요.."
"고마워...1년도 채 안돼 돌아올꺼야..그리고 매일매일 전화도 할꺼구.."
"아이고..관둬요..공부는 언제 하구요? 편지나 자주하세요.."
"그..그렇게 되나?? 후훗..그래그래!! 그럼 편지는 꼭 자주하지.."
그렇게 그는 외국으로 유학을 갔죠....
그가 떠난지 얼마지나지 않아..저에게 아기가 생겼답니다..전 너무너무 기뼜죠..
제가 사랑하는 그와의 결실이니까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멀리 외국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날라왔습니다.
외국에 그가 사는 곳에 폭동이있었고 그 와중에 위험에 처한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그만 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통보였습니다..
저..전...죽고싶었죠....
그토록 맑은 마음씨를 지닌 그가..때묻지 않도록 순수한 그가..무슨죄가 있길래 저보다
먼저..아니..이토록 일찍 신께서 데리고 가셨는지..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4
그가 죽었다는 연락이 있고 한달뒤에 그가 살던 집에 있던 유품들이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의 옷과...제 사진들..그리고 그가 차마 부치지 못했던 편지들..
그 유품들 가운데 아주커다란것이 하나 있었죠..
빨간 캠퍼스지들이 여러장 이어져 붙어있었고 그 위에는 빨간 꽃잎들이 수천장이나 위에
뿌려져 놓아있었답니다..
그 꽃잎들은 캠퍼스지를 전부 덮어버릴정도였으며 그 꽃잎들은 마르지 않도록 위에 무슨
스프레이 같은것들로 뿌려진채로 수놓아 있었죠..
꽃잎위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 한통이 놓여져 있었죠..
TO.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그대에게..
아주 오래전 내가 고등학교때 대학에 떨어지고 비관하여 자살을 하려고 어느 시골 바닷가를
찾은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어느 작고 예쁘장한 아이가 아름다운 빨간 꽃잎으로 꽃길을 만들고 있었죠..그
아이는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그토록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고 있었답니다.
그때 전 그렇게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아이를 바라보며 자살을 하려했던 제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깨닫게 되었죠....
그뒤로 서울로 올라온 저는 그 순수한 아이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제가 꿈꾸는
인생에 한발한발 내딛을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저를 이처럼 도와준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절 너무나 원망하며 세상을
살아갔죠...
그러던 어느날 그 어린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 소녀는 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라주었고...
여전히 어릴적 순수했던 마음을 지닌채로 제앞에 나타나 주었죠...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이제야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그녀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꽃길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비록 하늘나라에 닫을만큼 커다랗지는 않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커다란 꽃길은 아니어도..
이 꽃길을 보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당신을...
-당신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알게된 당신의 영원한 반쪽이..
"그..그렇다면..다..당신이..그..그 사람??..다...당신은 모든걸 알고 있었군요
당신역시 저에게 있어 너무나 고마운사람..."
5
"엄마?? 정말 이렇게 꽃잎을 띄우면 아빠가 이걸 보고 나에게 오셔??"
"그럼..물론이지..네가 그렇게 이쁘게 꽃길을 만들면..아빠는 꼭 좋아하실꺼야"
"정말??..이야~ 신난다..아빠가 내가 만든 꽃길을 보고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그래..네가 이토록 이쁘고 정성스럽게 만드는데..아빠는 하늘나라에서 아주아주 행복해
하실꺼야..."
"응..나도 아빠가 좋아하시면 더욱더 이쁘게 만들꺼야.."
당신은 가고..저역시 이렇게 어른이 되었지만..
여기 이곳에는 당신과 저말고 또다른 맑고 순수한 아이가 이렇게 꽃길을 만든답니다..
어디선가 이걸 지켜보며 행복해하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그대여...
"엄마 왜울어?? 엄마도 아빠가 보고싶어서 그래??"
"으..응..그래..엄마도 아빠가 너무나도 보고싶구나 너무나도 말야..."
(끝)
없어진 아이들
'안성군 교육장이 명하는 학교의 근무를 명함'이라는 극히 사무적이고 짤막한 문구에 몹시도 기뻐하며 초임근무를 위해 허위허위 찾아간 학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은 산골학교였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더니,첫날부터 버스의 결행으로 한 시간반 이상 걷고 걸어 마을 어귀에 도착하고 보니,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까까머리의 사내애와 상고머리의 여자애들이 까만 고무신에 책보를 등에 메고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애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부임인사를 하고 첫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갔더니, 올망졸망한 눈동자들이 내 모든 것을 단번에 알아내려는 듯이 여간 바쁘지 않다. 나 또한 그 애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리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기껏 생각해 낸 것이 그 애들의 용의검사였다.
"점심먹고 오교시엔 용의검사를 하겠어요."
한 마디 던져놓고 별생각없이 네 시간 수업을 마쳤다.점심을 먹고 잡무를 약간 처리하고 종소리와 함께 교실에 들어와보니, 참 별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분명히 거기 있어야 할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운동장을 돌아봐도 아이들의 모습은 영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을 어쩐담.' 낭패한 마음으로 교실에 돌아와보니, 그때까지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텅 빈 교실에 어지러이 책과 공책만 대충 놓여 있었다.
'이럴 때 교장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부푼 기대를 안고 부임한 근무 첫날부터 사고를 치는 교사라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도무지 초조해서 그대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창을 열고 내다보니, 멀리 냇가에 점점이 움직인는 무리들이 보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다시 쳐다보니, 그것은 분명히 우리 반 이이들이었다.
"애들아!"
다른 반 수업 방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큰 소리를 질렀더니 빠른 동작으로 둑길을 뛰어오르는 아이들....
아아, 헉헉 소리가 들리도록 내쪽을 향해 달려오는 그 모습들이라니. 얼마 후,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흠뻑 젖어 스물 여덟 마리의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선생님께 더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나의 발령 날짜가 유월 초하루였으니 아직 물에 들어가기는 이른 철이었건만, 순진한 그애들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선생님께 치부를 보이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더 급했던 것이다.
점심도 굶고, 부끄러움도 없이 여자 남자 섞여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주어 닦았을 그들의 몸을 나는 검사할 수가 없었다. 그 애들은 이미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가장 깨끗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월간 낮은 울타리 1996. 8
공원에서 있었던 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하나님이 살고 있는 곳까지 가려면 먼 여행이 필요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소년은 초콜릿과 음료수 여섯 병을 배낭에 챙겨 들고 여행길에 나섰다.
네 거리를 세 개쯤 지났을 때 소년은 길에서 한 늙은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우두커니 비둘기들을 바라보며 공원벤치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그 할머니 옆에 앉아서 가방을 열었다. 음료수를 꺼내 마시려다 말고 소년은 할머니가 배고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 그 할머니에게 주었다.
할머니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들고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의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소년은 그 미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할머니에게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할머니는 또다시 소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매우 기뻤다.
그들은 그날 오후를 그렇게 먹고 마시고 미소 지으면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것밖에는 다른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려고 배낭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소년은 뒤돌아 서서 그 부인에게로 다려와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할머니는 소년에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후 소년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의 얼굴에 나타난 행복한 표정을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소년에게 물었다.
"오늘 무엇을 했길래 넌 이렇게 행복해 보이니?"
소년이 대답했다.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 전에 소년이 덧붙였다.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내가 여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다구요."
그러는 동안 그 할머니 역시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의 아들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행복한 표정이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었단다."
아들이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는 덧붙였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더구나."
줄리 A. 만한
거리의 스승들을 만나라
오두막 둘레에는 5월 하순인 요즘에야 철쭉이 한창이다. 창호에 우련히 비쳐 드는 분홍빛이 마치 밖에 꽃등이라도 밝혀 놓은 것 같다. 철쭉이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검은등 뻐꾸기가 찾아온다.
4박자로 우는 그 새소리를 듣고 고랭지의 모란도 살며시 문을 연다. 야지에서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모란이 6월의 문턱에서 피기 시작한다. 그 빛깔이 어찌나 투명하고 여린지 가까이 다가서기가 조심스럽다.
어제는 산넘어 장에서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고추와 가지와 오이와 케일, 방울토마토도 세 그루 심었다. 그리고 호박 모종을 여덟 구덩이 심고 남은 이랑에 고소씨도 뿌렸다. 며칠동안 개울물을 길어다 목을 축여 주면 모종들은 꼿꼿이 일어설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제는 머리 무겁게 여겨져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된다. 나도 늙어가는 모양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장에 가면 한번 들렀던 가게를 다시 찾는다. 모종은 몇 해째 같은 집에서 사온다. 가게 주인의 말에 신뢰감이 가기 때문이다. 한번은 꽃시장 한쪽에서 맵지 않은 고추라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사다 심었는데 열린 고추가 너무 매워서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케일도 말만 믿고 사다 심었다가 두 번 다 실패했다. 케일은 줄기가 초록이어야 잎이 연하고 생육상태도 좋다. 자색을 띠면 잎이 거세고 맛이 없다.
결과적으로 허드레 가게에서 파는 모종은 신용할 수 없지만, 간판을 내건 종묘상의 모종은 비교적 믿을 수 있다. 자기집 물건을 팔면서 그 물건에 대한 긍지도 함께 지녔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경우 팔고 보자로 끝을 낸다. 그렇게 되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 끝이 좋을 수 없다.
채소의 모종만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모종도 함께 판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나같은 사람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데,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배우게 된다. 한두 가지 현상을 통해서 그 배후의 세계까지도 넘어다 볼 수 있다. 사실 종교적인 이론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일상에서 만나고 부딪히는 인간관계에서 경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다 진솔한 삶의 뜰을 거닐 수 있다.
얼마 전 길상사 「문화강좌」에 참여했던 한 회원의 편지를 받아보고 흐뭇한 감동을 받았다. 3개월 동안 (한주일에 두 번) 전철을 타고 문화강좌를 듣기 위해 먼길을 오고 가면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생동하는 또 다른 문화강좌이기도 했다. 전철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에게는 이름 모를 스승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 3월에 만난 스승은 시각장애자 걸인이었어요. 복잡한 전철 안인데 멀리서 갸냘픈 여인의 노래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웬 꾀꼬리 소리지? 카세트가 아닌 생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며 다가온 그녀는 시각장애자였습니다."
성가를 틀고 다니는 다른 장애인의 상업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에는 신선함이담겨 있었다고 했다. 그 회원은 천 원 짜리 한 장을 바구니에 넣어 주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아줌마!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봄기운보다 아줌마 목소리에 더 아름다운 봄기운이 담겨 있네요. 비록 볼 수는 없지만 개나리, 진달래 만발한 동산에 지금 계시다고 생각하세요. 아줌마가 바로 봄처녀일거예요.'
이런 사연을 전해 듣는 내 마음도 봄기운에 쪼이듯 화사해진다. 우리는 눈을 가지고 뭘 보는가? 우리 둘레의 이웃이 나와는 무연한 타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어째서 그가 그때 그 자리에서 나와 마주치게 되었을까?
중생은 부처를 제도하고 부처는 다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 있다. 모든 부처와 보살은 오로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불도를 성취한다. 따라서 중생이 없다면 부처와 보살은 할 일이 없어져 끝내 불도를 이룰 수 없다.
마주치는 이웃을 통해 내 마음이 활짝 열려야 한다. 그때 마주친 대상은 나를 일깨우기 위한 스승이요, 선지식이라고 생각하라.
'5월에 만난 스승은 평촌 범계 전철역 앞의 노점상 아저씨입니다.' 그의 편지는 이어진다.
참외를 사고 있는데 그 옆에는 상품 가치도 없는 앵두만한 방울토마토를 한 바구니에 천원에 팔고 있는 노점상 아저씨가 있었다. 팔아 주었으면 하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한 바구니를 산다.
어려운 노점상 처지를 생각해서 비닐 봉지라도 아끼라고 '참외 봉지에 그냥 쏟으세요' 했더니 노점상 아저씨는 '아니예요. 볼품없는 거라도 제가 파는 물건인데 으깨지면 안돼죠. 맛있게 잡수셔야죠'
이렇게 말하면서 새 봉지에 조심조심 넣어 주더라는 것이다.
비록 영세한 노점상이지만 자기 상품에 대한 사랑과 고객에 대한 마음 씀씀이에 숙연해지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먼 길을 오가면서 많은 공부를 했노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자신의 행위를 안으로 살피면서 보다 성숙한 삶으로 한층한층 쌓아 올리는 일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승은 아무때나 마주치는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찾을 때 그를 만난다. 그리고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 스승은 나타난다.
법 정 스님
비밀 약속
그날 나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급히 어디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늦은 데다가 도중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되도록이면 주유소가 눈에 띄길 바랬다. 방향 감각을 잃고 낯선 도시를 헤매다 보니 어느새 기름이 바닥나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때마침 나는 저만치 앞에서 노란색으로 회전하고 있는 소방서 건물의 형광등 불빛을 발견했다. 다행이었다. 길을 묻기에 소방서만큼 좋은 곳이 또 있겠는가?
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길 건너편의 소방서로 갔다. 세 개의 문이 위로 활짝 젖혀져 있고 그 안에 주차에 있는 빨간색 소방차 여러 대가 보였다.
크롬으로 도금된 잘 닦인 소방차들은 차체를 반짝이며 문이 약간씩 열린 채로 비상벨이 울릴 경우에 대비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소방서 특유의 냄새가 났다. 선반에서 물리고 있는 긴 소방 호스와 커다란 크기의 고무 장화, 그리고 소방대원들이 입는 재킷과 헬멧 등에서 나는 냄새였다. 거기에 깨끗이 물청소된 바닥과 광택 처리된 소방차들에서 나는 냄새까지 합쳐져 소방서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시 나의 어린시절로 돌아갔다. 나의 아버지는 소방서에서 화재 진압 반장으로 35년 동안을 일하셨다.
나는 소방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쪽에는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높다란 화재 진압봉이 세워져 있었다. 하루는 내가 제이 형과 함께 소방서에 놀러 갔을 때 아버지는 나와 형에게 두 차례나 그 장대를 타고 내려오게 하셨다.
소방서 구석에는 소방차를 수리할 때 차 밑바닥에 눕기 위해 사용하는 도르레 달린 깔판이 있었다. 아빠는 그 깔판 위에 나를 올려놓고선 소리치셨다.
"꽉 잡아야 한다!"
그리고는 내가 술 취한 선원처럼 비틀거릴 때까지 깔판을 빙빙 돌리셨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타 본 어떤 놀이기구보다 더 스릴 넘치는 일이었다.
깔판 옆에는 고전적인 코카콜라 상표가 부착된 오래된 음료수 자판기가 한 대 있었다. 그 자판기는 아직도 코카콜라 초기 제품인 280cc 초록색 병에 든 코카콜라를 판매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35센트이지만 내가 어렸을 당시는 10센트였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척했지만 사실은 그 자판기에서 코카콜라 한 병을 뽑아 먹는 것이 나로서는 소방서에 놀러가는 가장 큰 즐거움이자 중요한 이유였다.
내가 열살때의 일이다. 하루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친구 두 명을 데리고 소방서로 갔다. 소방서도 구경시켜 줄 겸, 또 아버지에게 콜라를 사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에게 소방서 내부를 구경시켜 준 뒤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콜라를 한 병씩 사 마시면 안 될까요?"
그날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약간 주저하는 내색을 느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승낙을 하셨다.
"그렇게 하렴."
아버지는 우리들 각자에게 10센트씩을 나눠주셨다. 우리는 자판기로 달려가 콜라를 한 병씩 꺼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뚜껑을 열고 뚜껑 안쪽에 영화 배우 사진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얼마나 행운이 겹치는 날이었던가! 운 좋게도 내 뚜껑에 영화 배우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제 두 개만 더 모으면 야구모자를 경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여름 오후의 수영을 즐기러 갔다.
그날 나는 호수에서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돌아왔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우연히 부모님께서 대화를 나누시는 걸 엿듣게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약간 화가 나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콜라 사 줄 돈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죠. 브라이언도 알아들을 나이가 됐어요. 그 돈은 당신이 점심 사 드실 돈이었잖아요. 우리가 돈이 여유가 없다는 걸 아이들에게도 일깨워 줘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자꾸만 점심을 굶으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늘 하시던 대로 그냥 어깨만 으쓱해 보이실 뿐이었다.
내가 엿듣고 있다는 걸 엄마가 알아채시기 전에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내 방으로 갔다. 그 방은 우리 네 명의 형제들이 함께 쓰는 방이었다.
호주머니를 비우자 많은 문제를 일으킨 콜라 병뚜껑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그때까지 모은 여섯 개의 병뚜껑들이 있는 곳에다 놓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 병뚜껑들을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큰 희생을 해오셨는지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그 희생에 보답하기로 혼자서 약속했다. 아버지가 그날뿐 아니라 전에도 수없이 나를 위해 희생하셨음을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신 일들을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
아버지는 아직 젊으셨던 47세에 첫 번째 심장마비를 일으키셨다. 우리들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느라고 밤낮으로 직장을 세 군대나 다니면서 힘들게 일하신 것이 끝내 아버지를 망가뜨렸던 것이다. 부모님의 결혼 25주년 기념일 저녁에 우리들 중 가장 체구가 크고 가장 강하고 가장 목소리 굵던 아버지는 식구들에 둘러싸인 채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셨다. 어린 우리들이 절대로 뚫을 수 없다고 여겼던 그 단단한 갑옷이 처음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8년에 걸쳐 아버지는 세 차례나 더 심장마비의 고통을 겪으시면서 힘겹게 생활고와 싸우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슴에 심장 박동 조절장치를 메단 사람이 되시고 말았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의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 4륜 구동의 파란색 차였는데 너무 낡아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나더러 태워다 달라고 전화를 거셨다. 한 시간 뒤 나는 차를 몰고 소방서로 갔다. 아버지가 다른 소방대원들과 함께 소방서 앞에 나와서 누군가 새로 산 파업 트럭을 구경하고 계셨다. 짙은 바다색의 포드 회사 제품이었다. 얼른 보기에도 아주 잘 뽑아져 나온 차였다. 내가 아주 멋진 차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당신도 언젠가 그런 트럭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둘 다 웃었다. 그것이 항상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이루기 힘든 꿈처럼 보였다.
이 무렵 나는 개인적으로 사업이 잘 되어 나가고 있었고,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트럭을 한 대 사드리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돈으로 그걸 사지 않으면 도무지 내 차라는 기분이 들지않거든."
병원 진료실에서 걸어나오는 아버지를 보니 얼굴이 창백하셨다. 주사 바늘로 수없이 찔리고 검사받고 진찰받느라 몹시 지치신 것이다.
"그만 가자."
그것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전부였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문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우리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말씀하시겠지 하고 나는 기다렸다.
나는 소방서까지 먼 길을 차를 몰았다.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 운동장, 호수, 모퉁이의 구멍가게를 지나가는 동안 아버지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과 그 각각의 장소들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음을 나는 이때 알았다.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더니,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난 이해했다.
우리는 도중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내려 15년만에 처음으로 단 둘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날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우리가 나눈 진정한 대화였다.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이 무척 자랑스러우며,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것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어머니와 결별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버지처럼 한 여자와 그토록 깊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날 아버지는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을 나에게 부탁하셨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힘든 비밀임을 알았다.
이 무렵 아내와 나는 승용차든 소형 트럭이든 새 차를 한 대 구입할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마침 근처에 있는 자동차 대리점의 판매사원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차가 좋을지 함께 보러 가자고 부탁했다.
자동차 전시장으로 가서 판매사원과 얘길 나누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초콜릿 빛깔의 갈색 픽업 트럭을 유심히 바라보고 계신 걸 눈치챘다. 모든 선택 사양이 완전히 장착된 대단히 멋진 차였다. 아버지는 마치 조각가가 자신의 작품을 점검하듯이 손으로 트럭을 쓰다듬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 생각엔 아무래도 승용차보다는 트럭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름 소모가 적은 소형 트럭을 사야겠어요.
" 판매사원이 제품 설명서를 가지러 사무실로 들어간 사이에 나는 아버지에게 그 갈색 트럭을 한 번 시운전해 보자고 제안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흔드셨다.
"이 차는 너무 비싸서 네 형편으론 살 수 없다."
내가 말했다.
"저도 그건 알아요. 아버지도 아시구요. 하지만 판매사원은 제 형편이 어떤지 모르잖아요."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으셨다. 우리는 곧장 27번 도로로 달려나갔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처럼 우리는 신이 났다. 10분 정도 운전을 하면서 아버지는 정말 승차감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옆에 앉아서 모든 버튼과 경음기를 눌러대며 장난을 쳤다.
전시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다시 파란색의 소형 선다우너 트럭을 골라 시운전을 했다. 아버지는 이 트럭이 내가 운전하게 될 거리로 보나 기름 소모로 보나 가장 적합하다고 조언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고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판매사원과 거래를 끝냈다.
며칠 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산 트럭을 가지러 가자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얼른 동의하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얼른 동의하신 것은 지난 번의 그 갈색 트럭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시기 위한 것임을 난 알았다.
아버지는 그 트럭을 '나의 갈색 트럭'이라고까지 하셨다.
우리가 전시장 마당으로 갔을 때 내가 산 파란색 소형 선다우너 트럭이 판매 딱지를 붙이고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광택이 나도록 잘 닦인 그 갈색 픽업 트럭이 역시 유리창에 커다랗게 <팔렸음>이란 딱지를 붙인 채 서 있었다.
나는 슬쩍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누군가 멋진 트럭을 샀구나."
난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버지,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직원에게 제가 왔다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차를 주차하는 대로 곧 뒤따라 갈게요."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그 갈색 트럭 앞을 지나가셨다. 그러면서 손으로 그 차를 쓰다듬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 다시금 실망감이 스치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건물 안쪽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바깥에 선 채로 유리창을 통해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판매사원은 의자를 권한 뒤 트럭 열쇠 하나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바로 그 갈색 트럭의 열쇠였다. 판매사원은 이어서 아버지에게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위해 드리는 선물이며 이것은 둘만의 비밀이라는 걸 설명했다.
아버지가 유리창 밖을 쳐다보셨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날 밤 아버지가 차를 몰고 오셨을 때 난 집 밖에서 기다렸다. 아버지가 트럭에서 내리자 난 아버지를 힘껏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씀드렸다. 또 나는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의 비밀임을 아버지께 상기시켰다.
그날 저녁 우리는 드라이브를 나섰다. 아버지는 그 트럭의 다른 것들은 다 이해가 가는데, 핸들 중앙에 코카콜라 병뚜껑이 막혀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브라이언 키페
어머니와 딸기 위스키
어머니는 딸기 위스키를 무척 좋아하셨다. 나는 언제나 예고 없이 들러 어머니가 좋아하
시는 위스키를 선물해 어머니를 놀래켜 드리곤 했다.
말년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분 다 노인을 위한 라이프 케어(종신 의료 서비스가 있는 맨
션) 센터에서 생활하셨다. 부분적으로는 어머니의 알츠하이머 병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역시 병을 얻어 더 이상 어머니를 돌볼 수가 없으셨다. 두 분은 떨어진 방에서 따로 생활했지만 여전히 가능한 한 늘 함께 하셨다. 두 분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셨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두 연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른 노인 분들의 방을 방문하면서 복도를 거닐곤 하셨다. 두 분은 라이프 케어 센터의 소문난 '연인' 이셨다.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음을 알고 나서 나는 어머니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가 자랄 때 매사에 너무 고집을 부려 걱정을 끼쳐 드린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말 훌륭한 어머니셨으며 어머니의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고집센 나머지 말하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들을 전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나는 문득 어머니가 이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만한 정신적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편지에다 사랑에 대해, 그리고 인생의 완성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설명을 했다. 그후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부턴가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셨다. 나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내가 찾아가면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종종 이렇게 묻곤 하셨다.
"그런데 댁의 이름이 뭐유?"
나는 이름이 래리이며 어머니의 자랑스런 아들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으셨다. 아, 그 특별한 감촉의 손길을 다시 한번 만질 수만 있다면!
한번은 근처의 위스키 가게에 들러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각각 위스키 한 병씩을 샀다.
나는 먼저 어머니 방에 들러 다시 한번 나를 소개한 뒤 위스키를 선물하고 몇 분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병을 들고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쯤 어머니는 이미 그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우신 뒤였다.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쉬고 계셨다. 잠드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나
를 쳐다보셨다. 우리는 둘 다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은 사랑의 빛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친구들에 대한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다시 10분이 흘렀다. 우리 두 사람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내
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나즈막히 말씀하셨다.
"누군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란다."
내 눈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어
머니를 껴안았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말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하신 그 말씀은
황금과도 같은 소중한 말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리라.
래리 레임스
짝사랑? 아니...맞사랑!
여러분들은 짝사랑이란 것을 해 보신적이 있으세요? 물론 거의 다 한번쯤은 해봤을 테지만, 저의 경우는 좀 다르답니다. 저는 말이죠? 이 나이가 되도록 그 흔하디 흔한 짝사랑이건 홀사랑이건 ...아무튼 사랑이란 사랑은 단 한번도 해 본적이 없으니..후후..심각한 건가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드디어 짝사랑에 빠졌지 뭐예요? 저의 짝사랑의 주인공은 바루바루...저희 집 맞은 편에 있는 게임방 주인 오빠인데요? 볼 때마다 가슴에서 두 방망이질 치구,
얼굴은 술취한 사람보다 더 새빨게지구 ...밤에 이렇게 벽 보고 앉아 있거나 잘려구 드러누워 있으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기만 하니....여러분들이 진단 하기에두 제가 그 게임방 주인 오빠를 짝사랑 하는 게 맞긴 맞는 거 같죠?
아차차..!! 제 소개를 빼먹었네요..저는 올해 스물 다섯 살이나 먹은
깜찍한(?) 백조, 조아영이랍니다. 사실 저는 한달전까지만 해도 명동에 있는 '샤넬'이라는 커피숍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다가 커피잔외 몇 개의 유리그릇을 깨먹었다는 혐의로 부득이하게 정리해고 당한 갈 곳 잃은 천사인데요? 요즘에는 뭐... 날도 덥고 집에 그냥 멀뚱멀뚱 있자니 빨리 시집이나 가라는 엄마의 바가지 잔소리 듣는 것도 지겹구 해서 이렇게 집에서 탈출하여 시원하고 저렴한(시간당 1000원이라는데 저렴하다고 해두 맞는 말인가요? 히힛^^) 게임방에서 시간을 보내구 있는 신세지요. 제가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거의 한 달 동안 동네에 있는 게임방이란 게임방들은 모조리 찾아 들어가 이런 살인적인 무더위와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게임방일지 라도 제가 모르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을 정도랍니다.
아무튼 저는 다이어리에다가 동네에 있는 모든 게임방의 이름을 적어 놓구 일명 '게임방 순회'를 하면서 지난 한달을 거뜬하게 지냈죠. 그런데 말이죠..?
며칠 전에 저의 집 바로 앞에 있던 비디오 대여점이 이사를 가구 그 곳에 새로운 게임방이 들어서더라구요. 물론 제 다이어리의 '동네 게임방 리스트'에 그 게임방의 이름도 올랐죠.
그러니깐 저저번주 수요일이네요. 게임방 개업이 있은 바로 그 다음날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먼저 그 게임방부터 들렀죠. 도배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서자마자 새벽지 냄새가 코끝을 찌르더군요. 그래두 뭐...처음에야 쪼~~끔 괴로웠지..몇 시간 지나니깐 그 냄새에 중독이 되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게..뭐..견딜만은 하더라구요. 아무튼 뒤늦게야 스타크래프트 베틀넷에 맛을 들인 저는 그 속에 폭 빠져서 적의 동태를 살피며 열심히 기지국을 만들고 있었죠. 솔직히 말하면 요즘에 저는 스타크래프트의 실력이 부쩍 늘어서 저와 대전해서 저를 이기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랍니다. 적의 기지국을 찾아서 죄다 부수어 버릴 때 느껴지는 그 쾌감! 한마디로 저는 요즘 그 쾌감의 짜릿한 맛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베틀넷에 점점 중독되어 가고 있는 셈이죠.
그 날도 개업했다던 그 게임방에서 스타에 폭 파묻힌 채, 몇 시간을 정신없이 보냈죠. 얼마나 지났을까? 적의 갑작스런 공격에 정신이 번쩍들어 막 싸우고 있는데 누군가 내 자리로 오더니 컵라면을 슬그머니 놓더라구요. 게임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자세히는 못 보구 얼핏 보았는데 컵라면을 놓구 나무젓가락까지 올려 놓는 그 손이 참 예쁘대요? 맑고 투명할 정도루 흰데다가 길고 가는, 마치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손이었지요. 아침에 게임방에 들어올 때만해도 카운터에는 어떤 복스럽게 생긴 아주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그냥 여자 아르바이 트생쯤으로 생각하고 계속 게임에 열중하려는 찰나였지요.
"어제 개업을 해서 오늘 오신 첫손님들께는 특별 서비스를 드리는 거예요"
굵고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 엥..? 그렇다면 그 뽀얗고 예쁜 손의 주인공이 남자? 몇 시간만에 처음으로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뒤돌아 본 순간, 핫~~! 이럴수가.... 내가 중학교때부터 그리고 그리던 이상형의 왕자님이 나를 보고 방글방글 웃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저를 보구 웃고 있었다는 것은 저의 착각일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잠깐 보았던 그 미소는 완전히 제 눈꺼풀을 뒤집어 놓기에 아주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죠. 망연자실 그의 뒷모습만 바라 보던 저는 혼란스런 머리를 추스리며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죠. 그 잠깐 사이에 제 기지국은 완전히 쑥밭이 되어 있더라구요. 평소 같았으면
기분이 더러웠을 텐데... 그 날만은 평소와는 좀 다르더라구요. 결국 저는 과감히 스타크레프트를 빠져나와 레인보우씩스로 옮겼죠. 제 옆에서는 라면이 팅팅 불고 있었지만 그 당시 제 목구멍에 라면이 들어 갔다간 구박만 먹기 안성마춤의 상황이었기때문에....후후...
컴퓨터 화면은 레인보우씩스에 ?上沮?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아까 그 테리우스 같은 제 맘속의 왕자님으로 가득차 있었죠. 카운터는 제 등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왕자님의 모습을 몰래 훔쳐 볼 수도 없었구요..할 수 없이 저는 유치 한(?) 작전을 썼죠. 그것은 한시간에도 몇 번씩 화장실에를 갔다 오면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죠. 거기는 출입문 바깥에 화장실이 있었거든요. 몸은 출입문을 향하고 있지만 눈은 카운터에 고정되어 있었고, 오고 가는 중에 저만의 왕자님과 마주치게 되면 일부러 그의 발을 사알짝 밟고서는 마치 실수인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척 하며 걱정스런 목소리루 "어머..죄송해요. 이를 어째?" 라고 한다던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와 마주치면 발에 걸리는 것도 없는데 일부러 발을 헛디딘 척...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어쩔수 없이 그에게 안기듯 넘어지는 상황을 연출하며 겉으로는 매우 쑥스러운 척 고개 푹 수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듯한 연약한 목소리로 "어머..이거 정말 죄송해서...발을 헛디뎠나 봐요."라고 한다던가 아무튼 그에게 조금이라도 튀게 보일려고 머릿 속에서는 오만가지 상황을 쥐어 짜내기에 바빴답니다. 그 후로 제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동네 게밍방 리스트'는 다 사라지고, 저는 오직 저희 집 맞은편의 그 게임방에만 출입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매일 옷도 바뀌었고, 화장도 하고, 머리도 요렇게 묶었다..조렇게 묶었다가 하면서 말이죠. 홍홍홍...*^^*
그렇게 게임방에서 하루에도 화장실만 수십번을 들락날락하며 갖은 상황을 연출한지 얼마쯤 지나자 그도 약간 저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제가 단골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는 제게 조금의 관심을 보이더라구요. 가끔 음료수를 가져다 준다던가..슬며시 제 곁으로 다가와서는 제가 하는 것을 들여다 보며.."게임하는 것을 좋아하시나봐요? 주로 어떤 게임을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 본다던지...게다가 인제는 마주앉아 점심까지 같이 먹게 되었으니..
그간의 저의 수고가 헛수고는 아닌 셈이죠...뭘...헤헤~~ 그리고 인제는 서로 농담도 주고 받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들두 하구요.. 그는 알고 보니, 저보다 두 살 위인 '오빠'더라구요. 그래서 그와 좀 더 친해지기 위해, 저는 그를 보구 '오빠'라고 부르곤 하는데 여동생이 없다던 그도 저의 '오빠,오빠' 라고 하는 소리가 듣기 좋다나요?
그렇게 그 오빠랑 친한척 하며 지내던 어느날이었어요. 그날도 아침일찍 눈뜨자마자 게임방을 찾아갔죠. 명목이야 새로 나온 게임을 독파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그 오빠를 만나기 위함이었죠. 히힛~~ _ 그런데 점심먹을 때쯤되자, 같은 여자의 눈으로 봐도 정말 예쁘게 생긴 여자가 들어오더니 그 오빠랑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오랫동안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두사람이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어찌나 정다워 보이던지 제 손에는 힘이 쫘악 빠지대요..?
'후~~ 무든 게 다 허사로 돌아가는구나..'
이런 상황에서 게임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죠. 그냥 넋놓고 그 두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참후에 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오빠의 어깨를 두어번 톡톡 치더니 웃으며 인사하구 나가대요..? 그 여자가 나가자 오빠는 제쪽으로 오더니 음식 시켜 놨으니깐 점심이나 먹자더군요,
냉면을 먹는데 무슨 맛인지 하나두 모른 채, 젓가락으로 죄없는 면발만 휘젓다가 힘없이 수저를 내려 놓았죠.
"왜? 냉면...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아니...그냥 입맛이 별로 없어서...아마 날이 더워서 그런가봐.."
지지배...그래도 자존심은 있어가지구....
오빠는 이상하다는 듯이...고개를 갸우뚱하더라구요. 그도 그럴것이. 이 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어서 추울 정도구 저는 잠자는 시간 빼구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생활했으니까요.
"너...어디 아픈 거 아니야? 목소리에 기운두 없구...평소의 아영이 같지가 않은데? 냉방병인가?"
"아,아니야..목소리에 기운이 없다니..난생 처음 듣어 본 말인걸? 하,하,하..."
일부러 크게 웃을려고는 했지만, 그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분위기만 더더욱 어색하게 만들어 놨지 뭐예요? 내 참...
"아..근데 오빠! 아까 왔던 사람은 누구야?"
일부러 밝은 목소리루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 보았져..다 먹은 냉면그릇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던 오빠는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더군요.
"아..아까 여기 온 여자? 너두 봤니?"
"어..보니깐 예쁘던데? 오빠 여자친구야?"
오빠는 대답대신 피식 하고 한 번 웃어 보이더군요. 뭐..이 오빠가 스마일 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긴 하지만 지금의 스마일은 제게 그렇게 환영받을 수 없었죠.
"엣... 오빠 여자친구구나? 맞지맞지? 오빤 예쁜 여자 친구 있어서 참 좋겠다."
저는 저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해댔구....저의 발언을 들은 오빠는 큰 소리로 웃기만 하더군요.
"하하..아까 그 여자..그렇게 젊어 보였니? 그 사람이 들으면 기뻐
하겠네? 하하하..."
이게 무슨 말이래요? 저는 깜짝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오빠만을
주시하고 있었죠.
"임마~~ 아까 그 사람은 오빠의 누난데...오빠랑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거든?
이거..누나가 들으면 대단히 기뻐하겠는걸? 아니..오빠가 슬퍼해야
하는 건가? 하하..."
순간, 약간 챙피한 면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일단은 안도의 한숨부터
나오더라구요. 히히~~ 오빠의 누나라는 그 여자는 지금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친구의 결혼식으로 잠깐 한국에 나왔다가 동생의 개업 소식을 듣고, 한 번 찾아와 본 거라나...뭐..그렇다더군요..우하하하..
"그럼 오빤 진짜루 여자친구 있어?"
뭐..여자친구가 있고도 남을 법한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밑져야 본전이라..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 보았죠. 오빠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미소부터 짓더라구요. 에구..있는 모양이구나라구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제발 없다고만 해라..없다고만...'이라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오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엇죠.
"하하...녀석. 그건 왜?"
"아니...그냥 궁금해서...."
예상치 못했던 오빠의 반문에 어쩔 줄 몰라 어리벙벙해 하고 있던 저에게 제가 차마 감당치 못할 미소를 보내고 있던 오빠는 나중에는 그냥 허허하고 웃기만 하대요? 먼저 말꺼낸 자로서 약간 챙피해진 저는 오빠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투정 반 애교 반 섞인 목소리루 나이에 맞지 않는 떼(?)를 썼죠.
"에잉~~~ 오빠..뭐야, 뭐야? 대답두 안 해주구... 얼~~ 그러구 보니..오빤
여자친구 없구나?"
일부러 오빠를 깔아 보앗죠..어떻게 나오나 볼라구요...제가 너무 심술궂었나요?
"하하..왜? 오빠 여자친구 없으면 아영이가 오빠 여자친구 해 줄려구?"
어머니나...이건 완전히 역습이지 뭐예요?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설
조아영이가 아니죠.
"왜? 그럼 내가 오빠 여자친구 해두 되는 거야?"
농담인것처럼 위장한 저의 물음에 오빠는 의외루 진지하더군요.
"음..그럼 아영이는 오빠 여자 친구 해 줄 수 있어?"
맘 같아서는 "내가 실은 말이지? 오빨 얼마나 좋아하구 있었는데.. 암,,암..
두말하면 잔소리지.뭘...오빤 내 이상형 중에서도 상이상형이거덩...오호호호."라구
말해 버리구 말았겠지만 저같은 천방지축 말괄량이에게도 '존심'이란 것이 있긴
있거든요.
"으으음.. 그거야 뭐 별루 어려운 일두 아닌데.. 뭘.."
"정말이지? 그러면..이제부터 아영이가 오빠 여자친구 되어 주는 거다..!"
아쟈?~! 이게 왠 떡이래? 스물 다섯해...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보람이.....
후후..전 그저 기쁘기만 했죠. 그래서 그냥 쿡쿡 웃기만 했답니다.
"오빠가 말이야...? 사실은... 사실은 오빠 혼자서 아영이 많이 좋아하구
있었거든..."
…………… 오빠 혼자서 아영이 많이 좋아하구 있었거든...……………
…………… 아영이 많이 좋아하구 있었거든...………………
…………… 좋아하구 있었거든...………………
앗! 이럴수가...후후... 나만 오빠를 좋아하구 잇었던 게 아니었던 거죠.
짝사랑이요? 도리도리... 이건 맞사랑이었답니다. 낄낄낄~~~~~~~~~
펀글..
문제아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교사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의 일이다. 그 해에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하지만 나름대로 열의가 대단해 힘든 줄 모르고 지냈는데 졸업식 때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참으로 서운하고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끝내고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가는 순간 ‘와장창’ 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교사 몇 명이 급히 교실로 달려갔고 문제아로 널리 알려진 학생이 교무실로 붙들려 왔다.
교실 유리창은 거의 모두 부서졌고, 당시 녀석의 담임을 맡고 있던 여선생님은 임신 중이었는데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다. 모두들 씁쓸한 마음에 표정이 어두웠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서운한 마음은 싸늘하게 변했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에 대해 잠시나마 후회했다. 졸업생들은 담임과 기념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씁쓸한 추억만을 간직한 채 교정을 떠나야 했다. 녀석을 다시 만난 것은 일 년 남짓 지난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 길거리에서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은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녀석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녀석은 밝은 표정으로 “저희 선생님 잘 계세요? 한 번 찾아가 뵙고 싶은데 너무 죄송해서요. 저… 안부 좀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힘들기는 하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학교 교실에서 보았던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녀석과 헤어지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입시 위주의 잘못된 교육과 문제아라는 교사들의 선입관이 어린 녀석의 가슴에 견디기 힘든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졸업식 날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그 후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제아로 찍힌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밝은 웃음으로 인사하던 녀석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내 자신에게 다짐한다. 문제아는 없다. 문제 가정, 문제 어른이 있을 뿐이라고.
쌍용사외보 여의주(김홍각/충남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
어머니를 기억하며....
(원제 : 수리취와 홋잎의 ... )
오랜만에 시장엘 들렀다. 작은 그릇에 산나물을 놓고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수리취, 고사리, 홋잎들을 담아 놓고, 봄나물을 식탁에 올리려는 나를 기다리는 둣하다. 그 할머니는 올해로 일흔여덟이 되는 내 어머니의 모습과 똑같다.
봄이 오면 어머니는 옆집 아주머니와 함께 새벽밥을 드시곤 먼 산을 향해 떠나신다. 어머니가 가는 곳이 어딘지 알지 못해 그 바쁜 걸음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곤 했다.
온종일 어머니는 봄산을 헤매셨다. 앞치마에는 훗잎과 대나물을 , 왼손에 든 자루에는 고사리와 취를 뜯어 넣으셨다. 어머니는 어둑어둑해져서야 돌아오신다. 어머니의 나물 보따리에는 따뜻한 봄의 향기가 넘쳤다. 펼쳐 놓을수록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산나물이다. 내게 주는 선물이라며 '수영'이라는 식물을 꺾어다 주셨다. 몹시 신맛 외에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나는 매우 기뻐하곤 했다.
다음날이면 어머니는 나물을 데쳐서 시장에 이고 가신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간다. 어머니 머리 위의 그릇 속에는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들어 있다. 이것저것 팔아 한 푼 두푼 모은 돈은 오빠와 나의 학비로 쓰였다.
농촌에서 특별한 수입 없이 대학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물려줄 재산이 없으니 학교 교육만큼은 시켜야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비장한 결심이었다. 한글 해독조차 못하신 어머니의 교육열은 실로 엄청났다.
아버지는 5년 동안이나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내가 고3이 되자 돌아가셨다.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 해는 가뭄이 심했다. 철길 건너 천수답에 물을 대러 삽을 들고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하늘은 별만 총총 비가 올 기색이 없다. 삽자루를 깔고 앉아 하늘을 보며 엄마와 약속했다. 돈이 덜 들고 취직이 보장되는 사범 대학에 가서 고생하신 어머니를 잘 모시겠노라고.
내가 대학에 합격하던 날 어머니는 나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기뻐하신 기억은 없다. 쌀 한 가마니 빚내어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가난한 집에 시집와 홀시어머니와 다섯 시누이를 열 여섯 살부터 모시고 산 어머니다.
어머니는 돌이 지나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계모 밑에서 고생하며 공부 못한 것을 늘 한스러워 하셨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아버지와 가마니를 치셨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어머니가 바늘로 짚을 먹이면 아버지는 바대를 내리치셨다. 나는 가마니 치는 소리에 새벽 잠을 깨곤 했다.
채소며 도토리묵, 참외와 수박등, 어머니의 머리 위에는 항상 무거운 보따리가 올려져 있었다. 그 속엔 다섯 남매가 함께 들어 있어서 더욱 무거웠을 것이다. 가지고 간 물건이 다 팔리지 않으면 돌아오시지 않고, 이 집 저 접 다니며 싼값에 주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과 바꿔 오시던 어머니. 그렇게 늦는 날이면 십리나 되는 신작로를 따라 어머니를 마중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뼛속 깊이 간직하면서.
대학 입학금을 가까스로 마련한 어머니는 돼지 두 마리를 사 오셨다. 음식점에서 구정물을 얻어다 먹여 키운 돼지는 학기마다 내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려 갔다. 객지로 자식 다 보내고 혼자 집을 지키며 농사를 짖고 짐승을 키우셨다. 그러느라 관광은 커녕 친척집 나들이도 한 번 못 하셨다. 대학 3학년 때 어머니는 경운기를 타고 시장에 다녀오시다 사고를 당했다.
60을 넘긴 어머니에겐 심한 충격이었다. 돌봐주는 이 없이 혼자 고생하신 어머니는 그후 큰 병을 얻으셨다. 관절염에 위암까지 겹쳤다.
그토록 고대하던 나의 졸업식장에도 못 오셨다. 선생이 되어 발령장을 받던 날, 어머니는 국립 의료원에 입원하셨다. 어머니의 병은 날로 악화되었다. 내게 마지막 말조차 할 수 없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토록 바라던 딸의 선생됨을 보시긴 했으되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다. 찔레꽃 하얗게 핀 고향의 봄산에 아버지와 나란히 누우셨다. 어버이날을 단 하루 남긴 채.
나는 한동안 몹시 괴로워했다. 무리한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던들, 어머니 곁에 있었던들, 그토록 외롭고 처절하게 가시진 않았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를 다 빼고 틀니도 해 넣지 못하셨던 어머니다. 첫 월급을 타면 먼저 틀니를 해 들이려 했었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제대로 씹어 잡숫지 못하신 어머니의 마음. 왜 산나물을 좋아하셨는지, 왜 국물만을 잡수셨는지, 나는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음식의 맛조차 느끼지 못하고 사셨던 나의 어머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는 어머니의 사랑, 더욱 보고픈 어머니의 모습. 외할머니와 외갓집을 모르는 내 아이들이다.
산나물이 시장에 나오고 온 산이 더욱 푸르러 가는 어머니의 계절이 왔는데 어머니는 다시 오시지 않으신다. 긴 겨울 동안 희망처럼 간직해 온 산나물 뜯으러 가려던 봄나들이 계획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나신 어머니. 그토록 좋아하시는 수리취와 홋잎의 맛이 그리워 그렇게 산으로 가셨나? 이번 5월 7일 어머님 1주기 제사엔, 두 애들과 함께 어머니 묘소를 찾아 잔을 올리리라.
이윤희 저, (장미 세송이와 야한속옷), 삶과 꿈, 1994.
딸아이의 선생님께
선생님께
저는 올해 딸아이를 선생님의 지도하에 맡기에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로서의 노파심과 걱정이 앞섭니다.
제 딸아이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아비로서 그 영혼을 키우고 보호해 왔고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선생님께서 제 딸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두 사람이 앞으로 함께 할 여정 속에서 딸아이가 필요로 하는 지도를 베풀어주시길 원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겁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 딸의 영혼을 소중히 보살피고 잘 보호해 주십사고 부탁드립니다.
제 딸이 반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마 그 아이의 기를 살펴주신다면 다른 아이들에 못지 않게 재기를 발할 겁니다.
그러니 야단을 치거나 창피를 주는 대신에 칭찬하고 부추겨 주십시오.
딸의 영혼은 그 아이를 목적 지향적이고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이끌거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미래로 이끌겠지요 저는 제 딸이 도전을 앞두고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기를 바랍니다. 제 딸이 인생의 거친 파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고 내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모든 역경을 극복하기 바랍니다. 선생님, 제 딸의 영혼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제 딸의 자아가 서서히 눈을 뜨는 시기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자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움터 오르기 시작한 아이의 자아는 너무 약한데다 그 단계가 시험적이므로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니 딸이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앞장을 서야 할 때 능동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제 아이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표준 규범이 모순되기 일쑤랍니다.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능력을 적극 후원하고 아이의 성취에 박수를 치는 한편, 그 한계 또한 스스로 터득하게 해주십시오 그 다음에 아이가 성장하고 앞을 가로막는 장애나 방해를 뛰어넘도록 옆에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선생님보다 그것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다정한 조력자가 되어 주세요
내 아이는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서 선생님께 갈 겁니다. 간곡하게 부탁 드리오니 그 아이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공부를 하나의 자극이자 즐거운 놀이처럼 받아들이게 해주세요
지금까지는 그래 왔답니다. 아이의 초기 교육 경험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해주세요 제 딸이 배우는 과정을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우위에 놓고, 그 아이와 다른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하도록 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딸이 자기 인식의 놀라움과 흥분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셔서 연말에 그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없는지를 더 많이 알게 해주십시오. 저는 딸아이가 한 사람의 학생이자 인간으로 더 성공적으로 유능 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선생님의 품을 떠나 험난한 교육의 사다리를 한 계단 더 오를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다 아시겠지만 올해 선생님께서는 제 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실 겁니다. 딸아이는 당신의 가치 기준을 따를 것이냐, 외면할 것 이냐를 결정할 겁니다.
남은 평생 당신을 존경의 대상으로 기억하거나 실망을 주었던 대상으로 기억하게 될 겁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딸아이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으로 남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그 선택은 선생님께 달려 있습니다.
참, 이 부탁을 빠뜨렸군요. 두 사람이 함께 했던 해를 마칠 때, 제 딸을 꼭 안고 그 아이가 선생님 삶의 일부가 되어 준 점에 대해서 감사하게 여겨 주세요
저 역시 딸의 삶에서 일부분을 차지하셨던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희망과 사랑을 담아 딸을 학교에 보내는 한 아버지가.
잡지 "즐거운 아이"에 실린 편지
듣지 못한 대답
오래 전 신경외과 병동에서 간호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에 앞서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했다. 비록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호감 가는 얼굴에 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의 동갑내기 아내도 성격이 참 밝았다. 사람들은 늘 신혼 같은 애정이 흐르는 그 부부를 부러워했다.
내가 낮 근무를 하던 날 그는 조직검사 수술을 받고 병실로 돌아왔다. 난 조심스럽게 수술 부위를 살피며 환자의 의식을 알아 보기 위한 의례적인 질문 몇 가지를 했다.
“오늘이 몇 일이에요? 여기가 어디죠? 이 분이 누구예요?”
환자는 겨우 실눈을 뜨고 웃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난 환자들이 흔히 의식이 명료하지 않을 때 하는 엉뚱한 소리인 줄 알고 그의 아내를 가리키며 “이 분이 누군지 아세요?” 하고 다시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럼요, 알지요. 내가 지옥에서도 알아볼 유일한 사람, 내 사랑하는 아내!”
잠깐 동안 긴장했던 나는 가슴이 턱 놓이면서 웃음이 번져 나왔다. 그의 아내도 여왕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뒤 검사 결과가 나왔고, 그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아름다운 부부였지만 말수가 줄어 있었고, 환자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그날 저녁, 그 환자 병실에 들어갔더니 하루 종일이라 할 만큼 긴 시간 동안 수술을 받은 그가 힘없이 누워 있었고 곁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환자의 상태를 알아 보기 위해 질문을 시작했다. 첫 물음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지난번처럼 큰소리로 또다시 물었는데, 거듭된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커다란 두 눈 가득 눈물을 글썽이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가리키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자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는 말을 하지도 못했고, 의식도 혼미한 상태였다. “내가 지옥에서도 알아볼 유일한 사람, 내 사랑하는 아내!” 그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나보다 더더욱 강한 열망으로 그 대답을 기다렸던 그의 아내를 등뒤에 남겨둔 채 깊은 죄책감을 안고 돌아나오고 말았다.
‘환자의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질문을 하지 말 걸, 질문을 하지 말 걸….’
그날밤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그 뒤 나는 그 부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지금 그 부부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그 뒤로 다른 환자에게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내 가슴속에서 울려 오는 그 대답을 듣곤 한다.
이금희 님 / 부산시 사하구 괴정1동 (좋은생각)
내게 아름다운 그녀
◈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왔던 그녀가 처음보는 나에게
" 너, 운 좋은줄 알아라. 내같이 이뿐애가 옆집으로
이사오는거 흔치 않어! "라는 말에 첨으로 인연이란
단어를 알게되었다.
◈ 내 생일날...
갈비집에서 이따만한 상추쌈을 싸서 입에다 넣어주고는
" 많이 먹어, 난 점심을 늦게 먹어서 별 생각이 없어! "란
말을 하는 순간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었다.
◈ 그녀의 생일날...
면종류를 싫어하는 그녀가 왠지 자장면이 먹고싶다며
" 난 어릴때 자장면 먹는게 소원이었어! "라고 말하며
입주위에 온통 짜장 범벅이 된 양파 조각을 묻힌채로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었다.
◈ 어머니 생신날...
오늘 엄마 생일이라 일찍 들어 가야봐야한다고 말했더니
" 넌 엄마가 좋냐? 내가 좋냐? "란 억지 질문을 하고는
자기도 쑥쓰러운듯 나중에는 자기를 더 좋아해달라는
말로 얼버무렸었다.
◈ 졸업식 날...
그 흔한 사진기 하나, 꽃다발 하나 없이 뻔뻔하게 나타나서는
축하한다는 말대신 두꺼운 다이어리 하나를 선물했다.
" 사진보며 추억속에 잠기지말고 미래를 여기에다 적어봐! "란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말로 대신했었다.
◈ 병원에 입원했던 날...
밤새 뜬눈으로 옆에서 지켜보기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 너 코고는 소리때문에 힘들어...^^ 근데, 난 이빨도 간다~!
담에 너도 고생좀 해바! 차라리 내가 아픈게 낫지!" 라며
핏기 선 충혈된 눈으로 말했었다.
◈ 입대 하던 날...
훈련소에 도착후 사실 좀 불안하고 두려운나머지 축 처져있는 날보며
" 남들 다가는데 왜그냐? 남자는 군대 갔다와야 인간이 돼!"라고
어깨를 툭툭치며 잘 갔다오라고 말하면서 내가 쓰고간 모자를 벗기고
뒤돌아서서는 그 모자로 눈물을 몰래 쓸어내렸었다.
◈ 서로 다툰 다음날...
맘이 아파 그녀의 집앞에서 그녀가 오기만을 밤새도록 기다리다
아침이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 기다리다 먼저 간다. 근데 넌 이제 외박까지 하냐? "란 쪽지가
내 책상에 놓여져 있었다.
◈ 그녀와 헤어지던 날...
시집간다는 그녀의 말에 친구라기엔 너무 함께한 시간이 많았고
연인이라기엔 질투란 감정이 부족해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내게
" 넌 이뿐 마누라 얻어야 2세 걱정이 없을거야... "라며
사돈 남걱정(사돈 남말인가..?) 하는 소리를 했었다.
◈ 결혼식 날...
유난히 아름다웠던 그녀에게 행복해 보인다고 말했더니
" 여태까지도 행복했는걸... 너도 행복해라! "란 짧은 말과
어색한 악수를 청했었다.
지금도 가끔 시장에서 아줌마들과 삼백원때문에 실갱이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아름답고 행복해 보입니다...
펀글....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
평범하고 소박한 조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록 가진 재산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조니는 이러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어느날 우연히 어떤 쓰레기통 옆을 지나가던 조니는 쓰레기통 속에 500루피짜리 지폐가 한다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조심스럽게 그 지폐다발을 집어 들었다. 언뜻 이 돈을 그냥 가지고 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니는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음 지금 자기가 들고 있는 지폐들을 향해 말했다.
정말로 나의 행복을 위해 너희들이 꼭 필요한 걸까?
오늘날까지 나는 한번도 너희들을 이렇게 많이 손에 넣어 본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무척 행복하게 살아왔단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너희들 때문에 고민하고 불행해 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나는 나 자신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는 차라리 너희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것보다는 너희들없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어.그래 나에게는 너희들이 필요 없단다.
조니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지폐다발을 도로 쓰레기통 속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지폐들은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은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이처럼 기분 나쁜 대접을 받아 본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지폐들은 몹시 화가 나서 조니를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아저씨는 멍청한 얼간이에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 틀림없어요.지금까지 우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손에 넣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데 아저씨는 우리에게 이런 모욕을 주고 있어요 . 창피한 줄 알아야 돼요 아저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이 될 거여요 .돈만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세요? 돈만 있으면 모든 쾌락과 권력과 성공의 문을 열수 있단 말이에요 만일 아저씨가 우리를 가지신다면 아저씨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에요.
돈은 곧 행복을 가져다 주니까요. 어서 우리를 주머니에 접어 넣으세요 조니가 대답했다.
그래 어쩌면 너희들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돈이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있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너희들 없이도 지금까지 너무나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왔어.
지폐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조니를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는 너무나 세상을 몰라요. 정 그렇다면 우리를 가지고 살 수 없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어서 말해 보세요 어서요!
조니는 확신에 찬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어디 예를 들어 볼까? 돈이 있으면 황금침대는 살수 있겠지만 지금내가 즐기고 있는 달콤한 단잠은 살수 없지. 돈이있으면 가장 훌륭한 음식들을 살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즐기고 있는 왕성한 식욕은 살 수 없단다. 돈이 있으면 값비싼 화장품을 살 수 있겠지만 지금 나의 이 아름다운 용모는 살 수가 없어 돈이 있으면 호화롭고 멋진 집은 살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지 . 돈이 있으면 감각적인 쾌락을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마음 속 깊은 곳의 기쁨은 살 수 없어 . 돈이 있으면 섹스와 여자를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 나의 착하고 다정한 아내는 살 수 없지. 돈이 있으면 사람을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진실된 친구는 살 수가 없단다. 돈이 있으면 책을 살 수는 있겠지만 지식과 지혜는 결코 살 수없어 . 돈이 있으면 예쁘고 화려한 옷을 살수 있겠지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근엄함은 살수 없어 . 돈있으면 내가 죽었을 때 최고급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것과 같은 행복한 죽음은 살 수가 없단다. 간단히 말하면 너희들 돈만 가지고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롭고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살 수가 없는 법이야 너희들 은 똑똑한 사람들에게 너희만 가지면 뭐든지 다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줄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사기꾼과 다를 바가 없어 .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은 지금있는 곳 바로 쓰레기통 속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구나!
말을 마친 조니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가 버렸다.
피터 라이브스의 소금인형 중에서
보온병과 보온도시락
5개월째 실업자로 있던 동생이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누나, 나 점심 좀 싸줘.”
“그래, 알았어.”
선뜻 대답을 했지만 점심을 싸줄 그릇이 없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먹을 점심이라 따뜻해야 하지만, 보온도시락을 사려니 빠듯한 가정 형편이 부담이 되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아기 우유 탈 때 쓰던 긴 보온병이 두 개 보였다.
동생은 보온병에 점심을 싸가도 좋다고 흔쾌히 말했고, 난 열흘 동안이나 긴 보온병에 밥과 국의 나눠 싸주었다. 원래 물을 담는 보온병인지라 밥을 쌀 땐 아침마다 작은 숟가락으로 밥을 넣느라 씨름을 해야 했고, 국을 싸면서 건더기를 조그만 입구에 안으로 넣기 위해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동생은 재주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긴 병에 담긴 밥과 국을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비울 수 있는지. 문득 학과 여우의 「이솝우화」 가 생각났다. 그래도 동생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괜찮다며 한사코 보온도시락 사는 것을 말렸다.
그릇 가게와 할인점을 여러 번 드나들면서 보온도시락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서곤 했다. 동생은 소주병에 보리차를 싸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 날 물을 조금 남겨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물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아마도 물이 얼어서 먹지 못한 것 같았다.
다음날, 난 퇴근길에 주저없이 보온도시락을 샀다. 더 이상 동생에게 길쭉한 보온병에 밥을 싸주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동생이 따뜻한 도시락을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보온도시락만큼 따뜻해졌다.
최경애/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쌍용 사외보 여의주)
딸애의 작은손
막내딸이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그날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어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이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었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레었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씨가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펀글.....
전근가기를 바라던 선생님
30년 전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학기 초엔 정든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로 떠나고 새로운 선생님들이 오시곤 했다.
당시 우리 학교 학생들 사이에선 신학기만 되면 다른 학교로 전근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다행스럽게도 그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학교를 떠나지 않으셨다.
그 선생님은 영어를 담당하셨던 양인모 선생님이신데 당시 무척 엄하시고 숙제를 많이 내주셨다. 거기다 숙제를 안 해 오거나 공부를 게을리하는 학생들에게 무척 엄격하셔서 우리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하곤 했다.
잊혀지지 않는 숙제 중의 하나가 방학 동안 재활용지나 신문에 하루에 영어 단어 50개를 100번 씩 써오는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방학 내내 혹은 개학을 며칠 앞두고는 선생님의 숙제에 시달려야 했다.
영어를 단순히 미국말이라고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앞으로 영어를 꼭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만약 전쟁터에서 지뢰(Mine)와 피난처(Shelter)란 표시의 갈림길에서 영어를 몰라 지뢰가 깔린 길로 갈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학년이 위로 올라갈수록 영어만은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실력이 좋아 각종 경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도 사회 생활을 하면서 영어 실력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고마우신 선생님은 제자들을 키우는 데 너무 많은 열정을 쓰셔서인지 일찍 세상을 뜨셨다. 살아 계실 때 한 번 찾아뵙지 못한 것이 큰 후회로 남는다. 이제 선생님은 안 계시지만 선생님의 큰 가르침은 항상 가슴에 남아 있고, 내 딸아이도 선생님같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광환/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복포리
스승의 길을 가려는 제자들에게
퇴근 후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저 인선이예요.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저 기억하실 수 있어요?”
“뭐! 인선이라고?”
“네, 선생님 저예요. 이제야 연락 드려서 죄송해요. 저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올해 교대에 입학했어요.”
인선이는 13년 전 처음 내가 유치원 교사 생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우리 반 아이였다. 잘 해보겠다는 신념과 열의는 많았지만 아직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쩔쩔 매던 시절이었다. 그때 인선이는 만 다섯 살로 야무지고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항상 내 주위를 맴돌며 입고 온 옷과 머리에 꽂은 핀이 예쁘다고 하는 등 애교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집이 멀어서 항상 데리러 오시던 인선이의 어머님이 수업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나는 집에 가는 길목까지라도 데려다주려고 아이의 손을 잡고 교문을 나섰다.
인선이의 집으로 가는 지름길에는 돌이 서너 개 놓여 있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선이가 “엄마, 업어줘.”라고 크게 말했다. 나는 인선이 어머님이 오신 줄 알고 주위를 살펴봤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선아, 어머니가 어디 오셨니?”
“아니오. 선생님이 전에 그러셨잖아요.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 엄마니까, 말 잘 듣고 재미있게 공부하자고요.”
아이의 순진한 말에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 그리고 무심코 던진 말을 아이들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알았다. 그 후 인선이는 서울로 이사를 가서 연락이 끊겼다.
갑작스런 인선이의 전화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기쁨을 내게 주었다. 숙녀가 되어 있을 인선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무척 즐거웠다. 인선이는 누구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선생님이 되리라 기대한다.
김미영/충북 제천시 신백동
토마토
나는 잔뜩 겁에 질렸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플리샌턴 연방 교도소에서 렉
싱턴의 연방 여성 교도소로 이감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은 죄수들로 만원
이고 폭력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8개월 전에 나는 아버지가 하는 사업에 연루되어 사기죄로 유죄 선고를 받
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나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성적으
로 학대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 집안 사업 중에서 어머니가 맡
던 자리를 나더러 맡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나는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까지나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
는 다섯 살 짜리 어린 소녀에게 불과했다. 그리니 "싫어요." 라고 말할 용기
가 내게는 없었다.
몇 달 뒤 FBI가 찾아와 내가 서류에 서명을 한 장본인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어려서부터 해오던 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했다.
"네, 내가 했어요. 아버지가 한 게 아녜요."
나는 유죄 판결을 받고 중죄인을 수감하는 감옥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에 나는 성인 갱생 프로그램에 참여했
다. 그곳에서 어렸을 때 입은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에 걸
친 정신적 육체적 학대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 왔는가를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기억들과 정신적인 상처들은 충분히 치료될 수 있음
을 배웠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혼란과 극도의 불면증이 사실은 내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혼란이 외부로 드
러난 결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진리와 지혜가 담긴 책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진정
한 모습을 일깨우는 긍정적인 문장들을 써 내려갔다.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에게 "넌 아무 존재도 아니야. " 라고 소리칠 때마다 나는 그 목
소리를 "넌 나의 사랑하는 자녀다." 라고 말하는 신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날마다 한 생각씩 나는 내 인생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렉싱턴의 연방 여성 교도소에 도착한 것은 실로 충격이었다. 나
는 잔뜩 겁에 질렸다. 하지만 신이 아직도 나를 보호하고 있음을 깨닫는 뜻
밖의 소중한 순간들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 배당된 감방의 이름은 대부분의
다른 감방들처럼 <블루그래스(미국 남부의 컨트리 뮤직의 하나)>와 같은
켄터키 풍의 이름 대신에 <르네상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이름은
'거듭남'이라는 의미였다. 그 이름만으로도 나는 신을 신뢰하고 내 자신이
안전한 거처에 와 있음을 느꼈다. 나는 다만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 더 많
은 걸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나는 건축 과정을 배우는 작업실에 배치되었다. 우리가 맡은 일은
연한 가죽으로 바닥을 닦고 건축재를 붙이는 일이었다. 그것은 재소자들이
사회로 돌아갔을 때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지키는 간수 리어 씨(그의 본명이 아님)는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
다. 리어 씨는 재미있고 친절하다는 점에서 남다른 사람이었다.
통상적으로 재소자와 간수 사이에는 두 가지 규칙만이 존재한다. 재소자는
간수를 믿지 않으며, 간수 역시 재소자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믿지 않는다
는 것이다. 하지만 리어 씨는 달랐다.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즐겁게 이끌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는 결코 규율을
무시하진 않았지만 우리를 괴롭히거나 학대해서 우리의 작업실을 더 불행한
곳으로 만드는 따위의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나는 여러 날을 두고 리어 씨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흥미 있는 표정
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종종 그런 시선을 받곤 했다. 나
는 감옥에 들어와서도 전처럼 캔자스 시티 근교의 가정주부 같은 모습을 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봐도 나는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리어 씨와 나는 작업실에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마침내 그가 내
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왜 감옥에 갇힌 거요?"
나는 그에게 사실을 설명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더니 나의
아버지도 감옥에 갇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아버
지를 고발할 어떤 육체적인 범죄의 증거도 없을 뿐 아니라 나의 여자 형제
와 남자 형제들 모두가 아버지가 범죄에 개입되었다는 내 주장이 새빨간 거
짓이라고 아버지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리어 씨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듯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처럼 행복해 보이는 거죠?"
나는 행복과 평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배워 나가고 있는 단순한 진리들을 그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자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그리고 믿음의 결과를 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자신이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 등에 대해 말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리어 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배우는 일에 관심
조차 없는 재소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열의를 갖고 가르칠 수 있는
가? 또 공포 분위기와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한 감옥이라는 체제 안에서 어
떻게 그토록 행복한 마음과 친절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리어 씨는 그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그가
가장 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은 직업군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꿈을 실현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 안정된 직업과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
는 자신의 가슴속에 없는 열망은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도 대체할 수 없음을 설명했다. 나는 리어 씨에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
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의 대화는 그 이후에도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리어 씨에 대한 나의
신뢰의 감정은 더 커져갔다.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간수라고
여겼다. 다른 간수들은 갑자기 나에게 불복종죄나 반항죄를 뒤집어 씌어 작
업 시간을 연장시키거나 나를 독방에 처넣곤 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개
인적인 좌절감이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감옥에선 이런 일이 잦다.
특히 여성 교도소에선 더욱 심하다.
따라서 리어 씨가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아무 이유도 없이 화를 냈
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는 내게 소리
쳤다.
"로고프, 넌 당장 내 사무실로 가서 선반에 있는 것들을 모두 치워라. 알겠
나? 선반 위에 하나도 남기지 않을 때까지 깨끗이 치우란 말야."
나의 어떤 점이 리어 씨를 화나게 했는지 아무리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
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알았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의 사무실로 갔다. 내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
어졌다. 내 감정은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
했었다. 우리가 그 동안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해 왔다고 자부했었다. 하
지만 사실은 나는 그에게 있어서 다른 재소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리어 씨는 내 뒤에서 문을 꽝 닫고는 복도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선반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선반은 텅 비어있었다. 단지 잘 익은 붉은색 토마토
하나와 소금통이 얹혀져 있을 뿐이었다.
리어 씨는 내가 거의 일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싱싱한 토마토를 한 번도 먹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텃밭에
서 그 토마토를 몰래 들여왔을 뿐 아니라 다른 간수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를 위해 복도에서 망을 봐주기까지 했다. 그날 내가 먹은 그 토마토는 내
생애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었다.
그 단순한 친절의 행위, 나를 하나의 수감번호가 아니라 인간존재로 여겨
준 그 단순한 친절의 행위가 내 치료 여행에 큰 힘이 되어 주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깊은 곳에 있는 내 학대받은 상처를 치료할 소중한 기회였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훗날 나는 다른 상처들까지 치료할 수 있었다.
리어 씨는 나의 간수이자 나의 친구였다. 나는 감옥에서 석방 된 이후 그
를 만날 수도 없었고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집 텃밭에
서 토마토를 딸 때마다 매번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어 씨가
오늘날의 나처럼 자유로워져 있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바바라 로고프
만일 당신이 당신의 가슴속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발견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성공한 것이다.
마야 앤젤루
생각할 만한 이야기
언제 였던가....고2때 가을쯤 이였던가...?
그 날 이였다....내가 처음으로....장애인의 슬픔을 본게....
피곤하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게 짜증이 나서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 보고 있을 때였다.
난 가끔 굉장히 예쁜 여자 애와 잘생긴 남자 애를 자주 보곤 했었다.
볼 때마다 둘은 같이 다녔었고 나이는 내 나이 또래 정도 되어 보였는데
특히 여자애가 정말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이 지금까지도 기억이 날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난 아직까지도 이 여자애보다 예쁜여자를 본적이 없다....>
그날 그애들은 어김없이 같이 있었고 중간정도에 여자애를 앉히고 남자애는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주 보던 얼굴들이여서 잠시 눈이 마주치자 눈 웃음은 나눌 정도는 되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탄뒤에 다음 정거장에서 교복을 입은 몇명의 남학생들이 올라탔었다.
남학생들은 여자아이의 자리쪽으로 왔고, 한 남학생이 그 여자애를 보곤 자기들끼리 예쁘네 어쩌네 하면서 낄낄대고 있었다.
한 남자애가 "어 피곤하네 누가 가방 안들어 주나~" 하면서 의도적으로 여자애의 주위를 기웃대기 시작했다. 여자애의 얼굴은 달아 올라 있었고, 그 남학생의 친구들까지 덩달아 농을 걸면서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야 좀 들어주라 무겁 대자너~" "얼굴 이쁜 값 하나 이 기집애가~"
계속되는 농짓거리...
여자애의 얼굴은 거의 울듯한 표정이였고 난감해 하면서 일어나려 했었다.
"쌍~ 이 년도 우리가 공고생이라고 무시하냐? 걸레 같이 생긴년이"
<그 당시에 한참 상업계와 인문계생의 싸움으로 시끌시끌하던 때였다.
상고다니던 한 여학생이 버스안에서 버스가 흔들려서 옆에 남학생의 팔을
순간 잡았는데, 그 남학생이 `더러운 공순이 손 치워!`라고 했고
그 여 상고 여학생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말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버스는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많이 타는데
그 여학생 옆에서 같이 있었던 공고 남학생들이 인문계 남학생의 말을 들어
버린것이였다.
"야 씹XX야! 너 오늘 공돌이 손에 죽어봐 개XX!"
흥분한 공고생들이 전부 달려들었고,버스안에선 일대 싸움이 났었다.
혼자였던 인문계 남학생은 주위에 자신의 학교생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자기네 학교에서도 그 당시에 싸이코라는 별명을 가진 애였다고 한다.
그 남학생의 친구들은 자기네 학교 학생이 맞고 있어도 남자애가 여자애한테 했던 말에 질려서 맞아도 싸다는 듯 가만 지켜보기만 했었다고 한다...
그 뒤론 한동안 상업계와 인문계가 같이 있는 학교들 마다 싸움이 끊이질 않았었다.>
그런 일이 있던 때라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었다.
그 남학생들은 심할 정도로 여자애앞에서 욕을 해대면서 여자애를 둘러싸고는 괴롭히고 있었는데..
여자애와 항상 같이 다니던 남자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남학생들을 밀쳐대며 여자애를 일으켜 세웠다.
"어쭈? 니가 이 계집애 서방이냐? 뭐야 넌?"
남자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감싸안고 문쪽으로 가려 했었다.
그러나 시비를 걸던 남학생들은 남자애를 가로 막았고, 심한 욕을 내뱉으며 발로 남자애를 걷어 차버렸다.
남학생들중에 한명이 여자애의 손목을 잡고는 놓지 않자, 여학생은 바둥거리면서 싫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남자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남자애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면서 남학생들에게 말을 했던 순간이.......
"어....어우어....어어....."
남자애는 농아였었다............
잠시 버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뭐야? 이거 병신 새끼잔아? 야 징그러 너 말하지마! 병신 새끼....."
"우..재수없어!"
아직도 잊을수가 없다.....
그 남자애의 표정을... 억울함과...분노....슬픔이 뒤섞인 그 표정을...
그의 얼굴엔..자신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분함이 서려 있었었다....
남학생들은 '병신 새끼' '더러운 놈'이라는 말을 지껄이며 '이런 놈이랑 뭐하러 같이 다니냐?' 면서 여자애를 붙잡고는 비웃고 있었다.
농아인 남자애는 남학생들에게 맞으면서도 그녀를 보호하려고 애를 썼었다.
그녀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남학생을 뿌리치면서 침을 뱉고는 눈물이 그렁 그렁한 표정으로 남자애를 감싸안았다.
그리고...그녀 또한 농아였었다.....
..........
그녀는 수화로 남자애에게 뭐라고 손짓을 하며 일으켜 세우며 벨을 누르곤 입술을 꽉 깨문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버스안의 그 누구도....아무도....말을 하지 않았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했을꺼다.... 정상인도 감당하기 힘든 욕설을 들으면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의 농짓거리 상대가 되버린 것도 억울할진데...
그녀는 말 못하는 농아...
항상 같이 다니면 그 남자애가 연인이든 아니든..그 또한 서러웠을꺼다..
말 한마디 못해주고... 지켜주지 못하는 억울함에...
버스가 정거장에 정차하자 여자애는 남자애를 부축해서 내려갔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그녀가 쓰러지듯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것도 모른다는 듯....
남자애의 눈은 안쓰러움과 서러움을 가득담고 그녀를 감싸안고..
멍한 시선으로 차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내리고 나자 시비를 걸었던 남학생들은 멀쓱했는지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려고 하고 있었다. `재수가 없었다`느니 여전히 험한 말투로..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 둘에게 눈물을 쏟게 하는건지...
남학생들이 내리자 마자 난 창문을 열고는 마시고 있던 음료수 캔을..
그 중 한명에게 던져 버렸다.......
정면으로 맞은 남학생은 놀라서 날 쳐다보았고 버스에 다시 타려고 뛰어왔지만
버스 운전기사는 빠른 속도로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남학생들마져 내리자 그때서야 여기저기서 수근거리는 말들이 들려오고....
내가 던진 캔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남학생이 길길이 날뛰는게 보였었다...
그들이 농아인줄은 몰랐다....가끔 보던 그들이였기에...말 한마디 하지
않고 웃기만 하던 그들이였기에....
농아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너무나 예쁜 여자애.... 여자아이 못지 않게 잘생겼던 남자애...
그저 이쁜 커플이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슬프디 슬퍼보였던 그들....
아마도 그들은 마음속으로 더더욱 많이 울었으리라...
처음으로 장애인의 슬픔을 보던 날...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듯....눈물이 비로 채워지던..그런 오후....
그 뒤로 딱 한번 그들을.. 본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지 1년이 지난 후였던가....?
서울에 일이 있어서 터미날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때였다..
그는 여행이라도 가는지 커다란 배낭 가방을 들쳐매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날 기억할리는 없었겠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약간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한참을 쳐다보는데 그녀가 나타났었다....
여전히......함께였다 그들은...
어딜가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얼굴은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웃는 낯이였다.
그녀만큼 예쁜이를 본적이 없다 나는...
펀글..
어머니와 닭도리탕
모두 팔남매인 한식구가 살구 있었다...
그날은 홀로 팔남매를 키으신 어머니에 환갑 잔치가 있었다.
모두 사회에서 제법 성공한 자식들은....
어머니에 환갑잔치 선물로 많은 것들을 가져 왔고...
많은 돈을 선물 대신 주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비싼 금반지를 선물하는 자식도 있었고..
모두 값비싸고 좋은 선물들이었다..
근데 팔 남매 중 가장 가난하게 살고 있는 막내는....
선물대신에 닭도리탕을 한 그릇 손수 만들어 왔던 것이다..
다들 이상하게 쳐다 보았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닭 알레르기가 있어서 닭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어머니는 값비싼 선물들을 제쳐두고....
닭도리탕을 아주 맛있게 드셨다...
평소 어머니는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식들에게 좀더 많이 먹이기위해..
무척이나 좋아했던 닭도리탕을 안드셨던 것이었다...
펀글..
덧붙임 : 닭도리탕은 일본어말이고 우리말로는 닭볶음탕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간
한청년이 사랑에 빠졌다.
그 상대가 된 여자는 아름답긴 했지만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를 가졌다.
그 여자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사랑에 눈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다.
그는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런데,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다.
"얘야, 어디 다치치는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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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멕시코의 어느 한적한 해변가였습니다.
붉게 황혼이 물들어가는 한적한 해변을 어떤 사람이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떤 멕시코 원주민 노인이 계속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무엇인가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노인은 파도에 떠내려온 불가사리들을 한마리씩 주워서
바다를 향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지금 무엇을 하는 거예요?"
" 지금은 썰물이라서 파도에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에 보내지 않으면 뜨거운 햇볕에 곧 말라죽고 만다오"
" 그건 저도 압니다만, 이 해변에 수천마리가 넘는 불가사리가 널려 있습니다. 그것을 다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매일같이 이 해변에는 수천마리의 불가사리가 떠내려와 죽고 또, 멕시코전체를 보면 매일같이 수만마리가 죽지요.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한다고 무슨 차이가 있지요? "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용하게 몸을 굽혀 불가사리 한 마리를 집어 올리며 바다로 멀리 던졌다. 그러며 이렇게 말해다.
" 지금 저 한마리에게는 아주 큰 차이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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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경륜
군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상황실에 있는 커다란 작전지도를 본 사단장이 작전지도가 훌륭하게 제작되었다고 칭찬을 한후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어 다른 부대의 상황실에다 설치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부대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 지도를 만드는 데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걸렸는 데, 그 사단장이 다른 부대에 가서 보고를 받는 일정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작전지도를 만든 장본인은 이미 그 부대를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 부대장은 부대의 모든 장교와 장병을 뒤져서 제도와 설계를 전공하였던 사람을 찾았습니다. 마침 유명한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하고 지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병사를 찾아내었습니다. 그 병사는 도구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커다란 건축설계용 T자형 자와 줄자, 기타 컴파스 및 설계도구들.... 그 부대는 없는 돈을 들여서 이 모든 것들을 사다 주었습니다.
그 병사는 지도를 30등분으로 나누어 한 칸씩 정밀측정한 후에 다른 설계판에 옮겨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른 지도를 30등분한 한 칸의 모든 구조물표시를 좌표화 시켜서 말입니다. 밤새도록 이 작업을 했지만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때쯤 그 부대에서 제대를 기다리던 어떤 병장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왔습니다. 이 사람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고 농사일만 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병장이 갑자기 그 상황실에 들어오자 마자 그 건축설계를 전공했던 병사의 뒤통수를 쳤습니다.
"니 모하노?"
"......"
"애고 이런 놈이 무슨 집을 짓는다고 쯧쯧.... 퍼뜩 가서 전지한장 가져온나 "
사람들이 커다른 전지(커다란 종이)한장을 가지고 오자 이 병장은 작전지도위 에 탁 포개 놓고 불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밑에서 비춰지는 지도의 선을 연필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30분도 안되어서 완전 똑같은 작전지도가 그려졌습니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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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어느날 한사람이 산에서 열심히 톱으로 나무를 베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땀이 온몸에 흐르며 열심히 나무를 썰고 있지만 그 나무가 잘 베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톱이 녹이 슬고 무듸어져 있는 것 같아서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보면모르오? 나무를 자르고 있지않소"
"잘 되십니까?"
"글쎄, 빌어먹을 잘 안되고 있오"
"제생각에는 잠깐 일을 멈추고 톱을 갈아서 다시 하시는 게 어떻겠소?"
"제정신이요? 하루종일 나무를 자르는데도 아직 반도 못 잘랐는 데, 톱을 갈 시간이 어디에 있겠소?"
그리고는 그 나무꾼은 계속 나무를 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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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형님의 사랑
오래 전에 강원도에서 군대 생활을 하던 형님이 어느 날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어 병후 회복을 위해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동료 군인 편에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러자 당시 산후 조리중인데다 형편이 좋지 않던 누이는 몹시 괴로워 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형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수술을 하쎴다니 걱정이 되는 군요. 하지만 형님께서 부탁하신 돈은 이곳 형편이 어려워 부칠수 없을것 같습니다. 몇 푼 안되는 매형 봉급에 저까지 함께 있다 보니 저도 늘 미안합니다. 이웃에 사는 분이 돈을 빌리려는 누이에게 그러더군요. 군에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달 용돈도 주니 절약하면 견딜수 있다고요. 그리고 형님도 웬만하면 그냥 참으십시오. 죄송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편지를 쓰는 동생을 용서하십시요."
그 뒤 형님이 제대하기까지 우리 가족들은 한번도 면회를 가지 못했고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 내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제대할 때까지 가족들의 면회가 한번도 없었던 김 병장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형님이 딱 한 분 계시는데 먹고 살기 바빠서 면회를 올수가 없대요. 형님 형편이 얼른 나아져서 제대 전에 면회 한 번 오쎴으면 좋겠으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형님이 생각났다. 가족들의 면회 한번 없는 쓸쓸한 병상에서 동생이 보내 매정한 편지를 보면서 형님은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데도 원망은 커녕 내가 군에 있을 때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제쳐두고 면회 와서는 돌아가기전에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말없이 쥐어 주시는 형님을 생각하며 나는 눈물을 왈탁 쏟고 말았다.
'건강한 웃음 소중한 이야기',송수현
버들잎은 떨어지고
그녀는 으스스 몸이 떨렸다. 이른 봄의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힘껏 땅을 밟아 보았다. 발 밑엔 축축히 젖어 미끄러운 버들 잎이 켜켜로 쌓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방을 둘러보고 버드나무 뒤도 살펴보았다. 그래, 분명히 가장 줄기가 굵고 나무껍질이 제일 꺼칠 꺼칠한 이 버드나무 아래서 만자자고 했는데 왜 그는 여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연못에선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엔 수풀과 포도덩굴 울타리와 학원빌딩이 있는데, 이 모두가 아른아른 안개 속에 떠 있는 듯이 보였다.
" 나 또한 안개 속에 떠 있는 거야." 하고, 그녀는 넋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 사건은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녀가 편지를 받은 건 어제 정오 무렵이었다. 굵게 거침없이 써 내려간 글씨체를 보고 누가 썼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같은 학교의 같은 반이었다. 그런데 편지라니. '무슨 속셈일까' 하고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뭔가 심각한 것을 느낀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하얀 종이에 쓰여 있는 건 단 두 줄이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항해길에 나서지 않겠는지? 답장 주기를..."
처음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는데 얼굴이 온통 빨개졌다. 당치도 않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론 화가 나면서도 또 한편으론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었다. 아, 얘가 이런 대단한 말을 한 첫 번째 남자애라니! 어쩔까? 좋다고 할까? 싫다고 할까?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무턱대고 숲속을 거닐면서 그녀는 나뭇잎을 하나 따서 두 손으로 비볐다.
그는 본받을 만한 아이지만 사귀기 쉬운 애는 아니다. -- 이것이 모든 우리 반 아이들의 그에 대한 평가였다. 선이 뚜렷한 외모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더욱 품위 있고 강해 보였다. 그는 어떤 과목이나 다 잘했으며, 시골에 나가 함께 일할 때는 우리 반의 어느 누구보다도 일을 잘했다. 그렇지만 그는 말이 없는 편이었고 괴짜였다.
그들은 일 년 반 동안이나 한 반이었지만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대화라 해 봤자 다섯 문장을 넘은 적이 없었다. 이번 학기에 그의 자리가 그녀 뒤로 바뀌면서 좀더 많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요전 날, 그녀가 풀 줄기를 한 묶음 따다가 엮어서 고양이와 개를 만들어 책상 위에 놔 두었던 적이 있다. 그때, 그가 들어오다가 그녀 책상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는 "야! 그거 재미있구나!"하면서, 따뜻하게 빛나는 눈으로 슬쩍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금 뒤 제자리로 돌아간 그는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고양이를 좀 달라고 해서, 그녀는 고양이를 주었다. 이것이 그들의 첫 접촉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로 그들은 더 자주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책을 읽을 거냐고 묻기도 하고, 빌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빌려 주기도 했다. 수학 문제를 푸느라고 혼자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으면 힌트를 적은 종이 쪽지를 던져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 자신이 인정하든 않든간에, 그녀의 마음 속에 그를 보고 싶어하는 어렴풋한 욕망이 생겨났다.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거나, 칠판에 나가 수학 계산을 하거나, 철봉대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거나 고개 숙이고 산책하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가 무얼 하든지, 뒤에 않은 그의 희미한 모습을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마음이 든든하고 편안해졌다. 그가 물리경시대회에 참가하러 가고 없던 날 저녁은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하여, 자습 시간 2 시간 동안에 한게 모두 틀려 버렸다. 공부는 전보다 더 열심히 했다. 공부를 걷어치우려고 할 때마다 마음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목소리가 울려 나오곤 했다.
"그는 항상 점수가 좋다. 그는 의지가 강하지만 난 너무 약하다. 안돼, 그를 따라잡아야 해!" 하고.
그가 편지를, 그것도 그렇게 대담하고 솔직하게 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녀는 마음이 산란하여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오후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교실로 들어가면서, 그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그녀의 얼굴을 불안하게 살피고 있다는 걸 직관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없이 끝나고, 그가 옆을 지나갈 때 그녀는 우연히 머리를 쳐들었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사로잡힌 듯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말했다. 다음날 아침 다섯 시에 연못간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기다리겠노라고, 그때 대답을 하겠다고.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 빛은 그 빛을 잃어 가고 별빛도 가물거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려고 동쪽 하늘 아래쪽이 희부예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실 몹시 지쳐서, 귀에 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를 고대하면서 '올 때가 됐는데.' 하고 생각했다. 감정과 이성의 싸움으로 시달린 그녀는 거의 한잠도 잘 수 없었다.
한편으로 그녀는 그 위에 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왜냐하면, 지난밤 내내 고민하면서 그를 거절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마음대로 한다면 좋다고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이성의 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그녀는 그가 괴로워한다면......?
그녀는 천천히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파릇한 잎사귀들을 쓰다듬었다.
사실, 그는 오래전에 와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무 뒤에 숨어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모습으로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그런 편지를 쓴걸 뉘우치기까지 했다. 그녀가 화를 내고 영원히 자기 꼴을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떡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와 같은 바보스러운 편지를 보내기 보다 전처럼 그냥 친구로서 있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어쩌다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걸 취소하기엔 너무나 늦어 버렸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를 풀거나 하는게 생활의 전부인 멍텅구리 공부벌레였다. 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녀의 출현으로 그에게 좀더 다채로운 세계로 가는 창문이 열릴 것같이 보였다.
어떤 추운 날이었다. 교실에는 학생들이 몇 없었다. 그는 열심히 올림픽 경시 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워서 동동거리고 손을 녹이려고 호호 불기도 하면서, 그대 그녀가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예쁜 유리컵을 들고 조용히 들어왔다. 덜렁이 파티가 급히 그녀에게로 나가 뜨거운 유리컵을 받아드는데 갑자기 '펑'하고 큰 소리를 내며 유리컵이 깨졌다. "어이쿠" 하고 파티가 놀라서 소리쳤다.
"고거 샘통이다."
그는 그녀가 파티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을 잡고,
"다쳤니? 다쳤어? 상처는 나지 않았니?"
하고 물어대는 것을 보고 좀 흥분이 됐다.
그녀는 예쁜 유리컵이 깨진 데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파티는 입술을 오므리고 "여길 다쳤어!" 하고 말했다.
"흥, 그놈은 쇼를 부리는 거야"
하고, 그는 경멸하듯 코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전혀 그렇게 생각치 않는 듯 파티의 손을 살폈다.
"어머 상처가 났어. 피가 나잖니!"
하고 그녀는 말했다.
"움직이지 마. 내가 피를 지혈해 볼께"
그리고는, 그녀는 파티를 양호실로 데려갔다. 교실 문이 소리없이 닫히자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그의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날씨가 정말 춥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의 마음이 날씨보다 더 추웠던 게 아닐까?
그는 그녀를 점점 더 잘 알게 되면서 자신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비온 뒤의 키큰 나무들, 햇빛에 반짝이는 풀밭, 산들바람 속의 흙 냄새, 넓게 흩어져 있는 구름, 장엄한 해넘이--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에 깊게 닿아왔고 그것들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은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 가면 어머니 눈가에 주름이 많아지고 관자놀이 위에는 흰 머리카락이 더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자기 손으로 어머니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 드리고, 작고 여읜 어머니를 껴안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반 친구가 병이 나면, 그는 곧 시내까지 나가 맛있는 음식을 사다 먹이곤 했다. 학교가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시내 중심가까지 내내 자전거를 타고 갔다 왔다. 아픈 친구와 함께 있어주고 이야기도 하면서 돌볼 줄도 알게 되었다. 그의 마음에 온정이 넘쳐흐르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녀는 태양이며 공기였다. 그는 그녀와 평생을 함께 보내며 진짜 남자처럼 그녀를 돌보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저 따뜻한 저녁이었다. 그가 교실의 창문턱에 기대어 멀리 해가 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지평선에 그녀의 모습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격한 감정에 사로 잡혀 펜을 들어 편지를 썼던 것이다.
이제 그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일찍이 그런 마음의 갈등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거절할 경우에 대해 생각했다. 받아들일 경우도 생각해 보았다. 어느 쪽이든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거절한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불행을 극복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급한 행동으로 그녀의 가슴에 그림자를 남길 경우 스스로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받아들이겠다면...... 그녀를 보살피고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녀가 추워서 발을 동동거리고 어깨를 움츠리는게 보였다. 그 자신도 추위을 느꼈다. 이애에게도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가 그만 기다리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가서 만나보자. 아무 생각말고.
그녀는 기다리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났는지도 몰라, 그녀는 연못에서 눈을 거두고 머리를 수그렸다. 그때, 푸르른 버드나무 잎이 담요처럼 쌏인 위로 진흙 투성이의 젖은 운동화를 신은 발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가 벌써 와 있었음을 알았다. 도대체 이 고얀 녀석은 언제 온 걸까?
"왔니?" 하고, 그녀는 말을 건넸지만, 그에게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응!" 하고, 그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리고는 둘 다 침묵. 그녀는 너무 당황해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두 개의 작은 종이배를 끄집어냈다.
"우리, 이 작은 배를 뛰워 보자"
그는 한 배에는 풀잎을 놓고 다른 배에는 꽃을 놓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어리둥절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못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다른 긴 풀줄기를 뜯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불쑥 말했다.
"이 두 보트를 나란히 떠가게 하고 싶니?"
그녀는 처음 순간엔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곧 의미를 깨닫고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거절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이 딱 붙어 열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고, 그의 빛나는 두 눈 속에서 진지한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꼼짝 않고 자기 앞 연못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연못엔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점점 엷어져 가고 있었다. 버들 잎은 그녀 앞에서 바람에 춤추고 있었다.
"싫다고 말하지 마........"
그는 더듬거리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싫어"
어떻게 이 말을 꺼냈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왜?"
왜? 왜?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땅에서 주운 버드나무 줄기를 쓰다듬었다. 버들 잎이 붙은 잔가지가 그녀의 머리에 떨어졌다.
"지금 한 말 정말이야?"
"응"
하면서,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꽃이 든 작은 보트를 그녀의 손바닥에 살짝 놓아주고 조용히 돌아서서 걸어나갔다. 그녀의 손에 있던 버드나무 가지가 때깍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들어 봐, 싫다는 게 아냐!"
그녀는 뜻밖의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획 돌아섰다. 그의 눈은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서 작은 배를 집었다. 그녀는 배를 그에게 내주고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섰다.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겠다는 것도 아냐. 이 두 보트는 너무나 작잖니? 아직 한번도 항해해 본 적이 없어. 그것들이 자기들의 목적지를 결정할 수 있겠어? 그것들이 각장의 갈 곳을 알고 같은 길로 붙어 가겠니?'
그의 손이 아래로 처졌다. 종이 배는 땅에 떨어졌다.
"그래, 그들은 지금은 서로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론 안 돼."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일 이 다음에 둘 중 하나가 동반자를 잘못 택했음을 알게 된다면 그땐 어떡하니?"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못 위로 퍼져 나갔고 그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레 침묵을 깨고 그녀가 말했다.
"오 년만 기다려 줘. 아마 오 년쯤 지나면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야."
"아냐, 다시 생각해 보니까," 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배들이 자유롭게 물위를 떠가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네 물음은 없던 걸로 하자. 아마도 그들은 오 년 안에 다시 만나 같은 길로 항해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어쩌면 오 년이 되기 전에 헤어져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항해하며, 완전히 서로를 잊어 버리게 될지도 몰라."
"아냐, 그렇지 않아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그는 마치 기하학 정리라도 선포하듯이 진지하게 말했다.
"기다려 보자!"
하고, 그녀는 귀엽게 미소지었다.
"보트를 띄워 보낼 때가 됐어!"
하고, 그는 그녀에게 일깨웠다.
그들은 웅크리고 앉아 엄숙하게 두 배를 물에 띄웠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재빨리 돌아서 버렸다. 그 배들이 어떻게 떠내려가는지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작은 손을 내밀었다.
큰 손도 내밀었다.
작은 손과 큰 손이 서로 굳게 잡았다.
파릇한 버들 잎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중국 순정 단편 소설 - 롱 쉰화
한 소녀가 와서 묻거든
멋모르고 커피숖을 찾던 그 시절. 모양없이 찢어놓은 메모지에 음악을 신청하고
쓴 커피를 마시며 웃던 그시절..
지금은 나의 싸늘한 그리움으로 여울지게 하는 추억들..
20여년을 살아오면서...
옛날 만나던 그애가 왠지 짙게 생각난다
더운 여름날 냉커피를 마시자고 졸라대면 나를 무시하고 조그만 간이 식당에서 펄펄 끊는 라면을 먹던 그애.
별로 크지 않은 발에 큰 농구화를 신고 찾아오던 그애.
더위을 식히기 위해 큰 해수욕장을 찾던 날 물속에 들어가서 놀던 나와는 달리 청바지를 입고 모래사장에 앉아 있던 그애.
어느 비오는 날 그애 엄마는 날 찾았고 내가 그애를 찾았을때
그애는 이미 소독냄새 풍기는 하얀 병원에서 말없이 떠난 뒤였다
그런 그애의 일기장을 본순간 시작하는 글귀와 끝나는 글귀가 똑같았고
진실이라는 단어와 함께 내이름만 열거했던 그애..
그 글귀를 읽고 나서 그제서야
큰소리로 아주 큰소리로 울고말았다
" 한 소녀가 와서 묻거든
먼저 떠났다고 말해주오
남긴말이 없냐고 묻거든
고개만을 흔들어 주오
한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거든
나도 울면서 떠났다고 말해주오 "
펀글..
잃어버린 한 조각
떨어져 나온 한 조각 홀로 외로이...
어디인가 데려다 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어요.
꼭 맞는 것이 있었으나...
하지만 굴러갈 수가 없었어요.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맞질 않았어요.
어떤 건 어떻게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어떤 건 뭐가 뭔지를 알 수 없는 것도 있었어요.
어느 것은 매우 연약하였어요.
퍽!
어떤 건 조각을 받침대 위에 올려 놓고...
그냥 가버리는 것도 있었어요.
어쩌다 너무 많은 조각을 잃은 것도 있었고,
너무 많은 조각들을 가진 것도 있어 그냥 끝나 버리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굶주려 허겁대는 것들을 피해 숨는 것도 배웠어요.
바싹 다가와.
뚫어질 듯 유심히 살펴보는 거도 있었고,
바로 코앞에 두고도 무심히 굴러 가버리는 것도 있었어요.
야아..?
좀 더 매혹적으로 보이려고 치장도 해보긴 하였으나...
별로 호과가 나지 않았어요.
번드르하고 야하게 꾸몄더니
소심한 친구는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가고 말더군요.
마침내 꼭 맞는 것을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
하지만 갑작스럽게도...
맞았다 싶은 조각이 자라나는 거예요!
자꾸 거지는 것이었어요?
" 네가 커질 줄이야 미쳐 몰랐구나."
" 나 역시 그걸 알 수 없었어"
떨어져 나온 조각의 말입니다.
" 이제 다시 자라지 않을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봐야겠어..."
그럼 안녕
제기랄...
그러던 어느 날
남 달라 보이는 어떤 것이 다가왔더랬죠.
" 내가 널 도울 일이 없겠니?"
조각이 물어 보았습니다.
" 아무것도 없어."
" 뭔가 필요한 게 있을 것 같은데? "
" 없다는데두."
" 그렇담 넌 누구지?"
조각이 물었습니다.
" 난 말이야 큰 동그라미지,"
큰 동그라미가 으쓱대며 말했어요.
" 내가 이제까지 기다려 왔던 게 어쩌면 바로 너라는 생각이 들어,"
조각이 말했습니다.
" 아마도 내가 너의 읽어버린 조각일 꺼야."
" 하지만 난 읽어버린 조각이 없는 걸 네가 끼일 자리는 아예 없구."
큰 동그라미는 대답했어요.
" 안됐군, 난 너와 함께 굴러갈 수 있길 바랬었는데..."
조각이 대답했습니다.
" 넌 말이야 나와 함께 굴러 갈 수는 없어, 하지만 너 혼자서도 구를 수있을 거야."
큰 동그라미가 충고했습니다.
" 나 혼자서 말이야? 어림 없지 떨어진 조각은 혼자서 구를 수 없어."
" 너 혼자 굴거가 보려고 애써 본 적 있니?"
큰동그라미가 물었더랬죠.
" 하지만 난 끝이 뾰죽해서 굴러 가지는 못한다구."
조각이 심드렁하니 말했어요.
" 뾰죽한 건 닳구 모습도 변할 거야 난 가봐야겠어. 어쩌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큰 동그라미는 떠나 갔습니다.
이제 다시금 홀로 된 떨어진 조각.
오랫동안 그저 앉아 있어야만 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천천히...
한 쪽 끝을 딛고 제 몸을 세워 보았지요..
... 그러다 풀썩 엎어지고.
맙소사 !
다시 안간힘을 다해... 일어섰다 넘어지고...
그러는 중에 차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얼마 안 가 뾰죽한 끝이 닳아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일어났다 뒤뚱거리고 넘어지기를 되풀이...
은연중에 점차 모습이 변해 갔어요...
이젠 넘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뒤뚱거리며 굴러갑니다...
기우뚱거리는 대신 폴짝폴짝 뛰어 보고...
마침내 통통거리며 굴러만 가는 거였죠...
어디인지는 알 수 없어도
관여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굴러 갈 뿐 !
쉘 실버스타인
은전(銀錢) 한 닢
내가 상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錢莊)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 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 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좋소'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 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 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거치른 손바닥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아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으로 몇 닢씩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 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 한 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가지고 싶었습니다."
전장(錢莊) : 돈을 바꾸는 집 .
각전(角錢) : 잔돈 .
대양(大洋) : 대륙을 둘러싼 큰 바다, 중국 화폐인 은전(銀錢)의 이름
피천득 님
깜빡 잊은 아내의 생일
아침 조간신문을 뒤적이고 있자니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났다. 아침 식탁 위의 미역무침과 시금치무침이 먹음직스러웠다. 아내는 미역국을 한 사발 가득 떠주고 흰 쌀밥 두 그릇을 담아낸다. 매일 검은 콩에 찹쌀 현미밥을 먹다가 멥쌀밥을 먹으니 몇 번 씹지 않아도 잘도 넘어간다.
“오늘 반찬이 많소.”
“시장에 갔더니 싱싱한 게 있어서 몇 가지 더 했어요.”
“오늘 무슨 계획이 있소?”
“오늘은 약속이 있어요. 저녁 때 늦게 들어올 테니 혼자 식사하세요.”
회사로 출근해 일을 하는데 군대에 있는 맏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오늘 미역국 많이 잡수셨어요?”
“아니, 네가 미역국 먹은 것을 어떻게 아냐?”
“오늘 어머님 생신이잖아요.”
맞다.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깜박 잊은 것이다.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하고 전화를 끊었다.
퇴근하는 길에 케이크를 사고 중국요릿집에 음식도 시켰다. 집에 들어가니 약속이 있다던 아내가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케이크를 내놓으니 아내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 사촌들, 하다못해 조카사위들 생일까지 챙기는 내가 아내의 생일을 챙겨준 것은 결혼한 지 25년 만에 처음이었다.
아내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그 동안 왜 못 챙겨줬는지 너무 미안했다. 내년엔 정말 근사하게 아내의 생일을 챙겨줘야겠다.
황장진/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쌍용 사외보 여의주에서)
민정이의 저녁 도시락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부모님이 요즘 들어 더욱 바빠지셨다.부쩍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저녁 늦게 피곤에 지쳐 돌아오시는 두 분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고3인 나는 나대로 섭섭할 떄가 많다.친구들은 집에서 귀하게 대우받으며 학교에 갖가지 간식들을 챙겨 오곤 하는데,나는 도시락조차 싸가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그럴 때면 엄마는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용돈을 넉넉히 주시며 말씀하신다."맛있는 거 사 먹어라."그러나 엄마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괜히 힘이 빠져 우울해지곤 했다.
며칠 전 일이다.그날도 도시락 없이 학교에 갔다.그런데 내 책상 위에 아직 식지 않아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도시락이 하나 놓여 있었다.자세히 살펴보니 옆 반 민정이의 도시락이었다.문득 전날 민정이를 만난 일이 생각났다.그때 이런저런 애기 끝에 내가 언뜻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했는데,민정이는 그 말을 가슴속에 새겨 두었나 보다.나는 내 도시락까지 챙겨 온 민정이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며 어느 점심보다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저녁 시간에 연습장을 사러 매점에 갔다가 민정이네 반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다."민정이가 저녁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데."친구의 얘기를 듣고 나는 얼른 민정이네 반으로 달려갔다.책상에 엎드려 있는 민정이 주위에는 도시락이 하나밖에 없었다.민정이는 내 도시락을 싸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녁 도시락을 내게 주고 저녁을 굶은 채 자고 있었던 것이다.순간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나는 얼른 민정이를 깨워 손을 잡아 끌었다."민정아, 나 매점 가는데 같이 가자!" 꼬옥 잡은 내 손끝으로 민정 이의 따뜻한 맘이 전해 왔다.
펀글..
여보게, 기꺼이 받겠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 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꼭 만나자고 하기에,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하고 소식도 궁금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나갔다.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깡마른 체구에 변한 게 없었다.단지 나이탓인지 좀 늙어 보였을 뿐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고 있는데,친구가 갑자기 작은 반지 상자를 내보였다.
"이거 변변치 못한 거지만 받아 주게나"
"아니.웬 반지를...내가 자네한테 반지 받을 만한 일이라도 했단 말인가."
깜짝 놀라 기절했더니 그가 정색을 하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집사람이 늘 자네 이야기를 하면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네. 지난날 우리 집사람이 중병으로 두 번 수술을 받았을 때 기억나나?"
친구의 밀을 듣자 오래 전 일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때마다 자네가 문병을 와서는 봉투를 침상 밑에 놓고 가곤 했다며.어려울 때 정말 요긴하게 사용했다더군.집사람이 그 일을 잊지 않고 늘 가슴속에 담고 있다가 이렇게 작게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마련한 거라네.집사람의 뜻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게나."
30여 년이 지난,내가 까맣게 잊고 있는 일이었다.그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해온 친구 부인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게,기꺼이 받을 테니 자네가 직접 내 손에 끼워 주게나."
친구에게서 소중한 마음의 반지를 받아 손에 끼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후덕하고 마음씨 고운 부인을 만난 친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펀글..
결혼식
오늘은 저의 결혼 1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금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내 남편과 살과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날이 벌써 365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밤 그이와 결혼식때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이는 한장도 입을 다물고 찍은 사진이 없었습니다. -_-;
그러나 한장도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빠였습니다...
결혼식 전날이었습니다. 전 너무나도 설레이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달이 보고 싶었습니다. 집 앞마당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밤하늘에 걸린 달을 보며 계속해서 줄담배를 태우고 계셨습니다.
아빠의 다른 한손에는 저의 백일사진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아빠는 저의 백일사진을 한참을 뚫어지게 보시더니 가만히 품으로 가져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순간 아버지의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을 보았습니다.
조용히 아빠등뒤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갈수 없었습니다.
아빠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습니다. 언제나 완고하고 강하게만 느껴지던 아빠가 오늘처럼 작고 왜소하게 보여진적이 없었습니다.
살며시 아빠등뒤를 안았습니다. 어느덧 아빠의 어깨와 저의 어깨가 같은 위치까지 왔습니다...
" 내 딸아... 내가 너의 아버지라는 것이 자랑스럽구나..."
아빠의 말이었습니다. 언제나 말썽피우고 문제만 일으키며 다녔던 내게 아버지는 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때였습니다. 저는 원래 가족계획에 없었는데 아버지의 왕성한 혈기에 우연찮게 태어난 핏줄이라고 했습니다. -_-;
그래서 아빠와 난 나이차가 많습니다. 다른 친구들 아빠는 다들 젊고 힘도 세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나이도 많고 머리도 많이 하얗습니다. 아빠랑 교문을 나올때였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 아빠 안 오셨니? " 라고. 그런데 더 못된건 제가 " 아빠가 많이 바쁘셔서....할아버지가 대신 오셨어.. " 라며 아빠를 친구에게 소개를 시켜 주었습니다.
그때는 다른 아빠보다 키도 작고 머리도 하얀 아빠가 부끄럽게만 생각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버지는 머리를 새까맣게 염색을 하셨고 좀더 세게 다리좀 땡겨보라며 엄마를 닥달하셨습니다....
중학교때의 일입니다. 아빠생각때문에 기말고사를 몽땅 말아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빠가 땅덕을 많이 보셔서 어깨를 펴고 사시지만 고등학교때까지만 하더라도 한번도 제대로 허리를 펴고 사신적이 없었습니다. 기말고사 마지막날이었습니다. 늦게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빠, 엄마가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게 살아오신 두분덕에 가훈이 '잘먹자'인 우리집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밥을 대충 먹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무슨일인가 싶어 안방문을 살며시 열어 엄마, 아빠를 보았습니다.
엄마가 아빠의 허벅지 사이에 30cm 이상 깊게 패인 상처에 고약을 발라주고 계셨습니다. 어제 막일을 하시다가 못뿌리에 긁힌 것이라고 아빠가 말했습니다.엄마는 계속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아빠는 괜찮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끝내 아빠가 내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조금 있으면 막내둥이 생일이야. 하루벌어 하루사는 우리가 병원가서 돈 다 쓰면 가뜩이나 해준것 없는 우리 막내둥이한테 내가 미안해. 난 조금 아프면 돼. 허나 막내둥이는 가슴 아프면 안돼. 이번엔 좋은걸 해주고 싶어."
그날 아침 절름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향하시는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겨울에 태어난 제가 너무 미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날이었습니다. 신부입장. 저 앞에 그이가 어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부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입장하라는 안내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내 손을 꼬옥 잡고는 입장을 하셨습니다.
아빠의 한군데도 성한곳이없는 손을보자 문득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아빠의 손을 더욱더 꼬옥 잡았습니다. 신랑앞에 서서 손을 건네 주어야 될순서에서도 아빠는 제 손을 놓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그이의 뺨을 때리고서는 '내 딸을 훔쳐가는 댓가야!'라는 말씀과 함께 깊게 그이를 안았습니다. 당황해 하고 있는 그이에게 못내 쉽게 내 손을 건네주고는 자리로 돌아가시는 아빠의 뒷모습에서 짙은 외로움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아빠의 일흔 네번째 생신입니다. 그때는... 그때는 정말 말하렵니다.가슴깊이 담아두었던 내 영혼의 말을...
아빠.... 당신을 진정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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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새벽부터 눈발이 날려 들뜬 기분으로 마당에 나갔는데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종종걸음 소리가 났다. 가만히 살펴보니 신문을 배달하는 어린 소녀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대문을 열고 나가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꿈나라에 가 있을 시간인데, 정말 부지런하구나.”
“저는 부모님이 안 계시고 병든 할머니와 둘이 살아요. 그래서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신문배달을 해요.”
그 소녀와 할머니는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생활하는데, 그것만 가지고 생활하기가 힘들어서 소녀가 신문을 배달하려고 신문보급소에 찾아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는 여자애라 꺼리더니, 사정을 알고는 신문 배달을 맡기더라고.
순간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내게는 가슴 설레고 기쁜 눈이었지만 그 아이에게는 미끄러운 길에 날씨도 추워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 보였다.
그 날 아이를 그냥 보내고는 하루 종일 고민했다. 아이에게 뭔가 힘이 될 만한 걸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다. 나는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기쁨을 소녀에게 나눠주고 싶어서 새벽에 본 소녀에게 정성을 들여 긴 편지를 썼다.
그 후로 일 주일에 한 번씩 아이에게 편지를 써서 작은 손에 쥐어 주었다. 정말 별 것 아닌 정성이었는데 아이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활발해졌다. 그리고 그 아이한테서 답장이 왔다. 요즘 그 아이의 답장은 내게 삶의 활력과 기쁨을 주고 있다.
김선옥/대구시 북구 산경3동(쌍용 사외보 여의주에서..)
수저 없는 도시락
중학교 1학년때 자꾸만 삐뚤어져 가는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부모님은 생각 끝에 고향을 떠나 부천으로 이사를 하셨다. 처음엔 나도 찬성했지만, 막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니 힘이 들었다. 새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잘 지내고 싶어도 좀처럼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나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 말도 잘 하지 않았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엄마는 도시락 가방에 수저를 넣지 않으셨다. 처음엔 함께 도시락을 먹던 친구들에게 수저의 여분을 물었지만 다들 없다고 하기에 나는 그냥 밥 먹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수저 하나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 엄마가 미울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새 학기만 시작되면 한동안 도시락 가방에 수저를 넣지 않아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는 아예 학기초엔 학교 앞 가게에서 나무젓가락을 사가지고 등교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무심함이 속상하고 섭섭했다. 그러던 중3 학기초 어느날, 그날도 아침에 나무젓가락을 사가지고 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런데 저녁에 설거지를 하려고 빈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던 엄마가 빙긋 웃으며 내게 물으셨다. "오늘 수저를 깜빡 잊었는데, 그래 친구한테 수저 빌려서 밥 먹었니?" 엄마의 물음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잔뜩 심통 맞은 얼굴로 "아니, 나무젓가락 사서 먹었어"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엄마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지더니 내 손을 꼭 붙잡고 그 동안 도시락에 수저를 넣지 않은 사연을 설명하셨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해 혼자서 끙끙대는 걸 아시고, 학기초마다 내게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수저를 넣지 않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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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대의 수통
전쟁이 한창이던 때 어느부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장교가 전투중에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보다 심한 상처를 입은 병사가 애타게 물을 찾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중이라 물이 귀했지만 장교는 자신의 수통에 얼마남지 않은 물을 내주었습니다. 목이 무척 말랐던 그는 무심코 마시려다가 동료 병사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모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이 귀한 상황이라 모든 병사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수통을 입에 대고 꿀꺽 꿀꺽 소리를 내면서 물을 마신 후 다른 병사에게 수통을 남겼습니다.
수통을 넘겨 받은 병사가 마시려고 보니 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깊은 눈빛으로 동료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꿀꺽 소리를 내며 맛있게 물을 마신 후 수통을 또 다른 병사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며 모든 병사들이 물을 마셨습니다.
마침내 수통이 장교에게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수통의 물은 처음 그대로 였습니다. 모든 병사들은 얼굴에 미소를 띄웠고, 더 이상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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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자존심
사소한 오해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락이 끊긴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전화를 하지 않고 있긴 했지만 친구와의 사이에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사나이는 다른 한 친구를 찾아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위를 가리키며 그 친구가 말을 꺼냈다.
“저기 빨간 지붕을 얹은 집 옆에는 헛간으로 쓰이는 꽤 큰 건물이 하나 있었다네. 매우 견고한 건물이었는데 건물 주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지고 말았지. 아무도 돌보지 않았으니까. 지붕을 고치지 않으니 빗물이 처마 밑으로 스며들어 기둥과 대들보 안쪽으로 흘러 들었다네. 그런던 어느날 폭풍우가 불어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나더니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네. 헛간은 졸지에 나무더미가 된거야. 나중에 그곳에 가보니 무너진 나무들이 제법 튼튼하고 좋은 것들이었지. 하지만 나무와 나무를 이어주는 나무못의 이음새에 빗물이 조금씩 스며들어 나무못이 썩어버리게 되어 결국 허물어지고 만 것이지”
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다 보았다. 거기엔 잡초만 무성할 뿐 휼륭한 헛간이 있었다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여보게 친구, 인간관계도 물이 새지않나 하고 돌봐야 하는 헛간 지붕처럼 자주 손 봐 주어야 하네. 편지를 쓰지 않거나, 전화를 하지 않거나, 고맙다는 인사를 저버리거나, 잘못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지낸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나무못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이음새를 약화시킨다는 말일세.”
‘그 헛간은 좋은 헛간이었지. 아주 조금만 노력했으면 지금도 저 언덕에 휼륭하게 서 있었을 것이네.’
사나이는 친구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새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옛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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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 같은 선생님
열여덟 살에 여중 1년생. 남들보다 늦은 나이였지만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는 야간학생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정규 중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배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러던 중에 돈벌이를 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처음 일 년은 공장에서 제일 밑바닥 일을 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일이 서투르다고 언니들한테 야단을 맞고 직장 상사로부터 인격적인 모욕도 받았지만 배워야 한다는 각오로 견뎌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학교에는 나이가 가장 많으시고 교무주임을 하시면서 물상을 가르치시는 이현태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항상 출석을 부르면서 결석한 친구가 있으면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나, 직장을 그만두었나 꼭 살피셨다. 그리고 방학 때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공장에 와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열심히 살라고 위로하셨다.
당시 나는 많이 지쳐 있었고 공부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 힘든 고비 때마다 선생님은 마치 아버지같이 나와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사랑을 주셨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이 더 안타까워하시고 가슴아파하셨다.
수업 시간에 피곤해서 조는 학생들을 깨우면서 힘들지만 참고 열심히 공부하면 훗날 반드시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여학생들을 걱정하시며 혼자 다니지 말고 여러 명이 모여 다니라고 하셨고, 이곳에서 일생 동안 잘 지낼 친구를 만나라고 하셨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에 힘입어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딸 하나를 둔 가정주부가 되었다.
친정아버지를 뵐 때마다 이미 정년 퇴직을 하신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 시절 선생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 학업을 포기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은 보람 있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장선자/대전시 서구 도마2동
세븐 일레븐에서 생긴 일
몹시 추운 콜로라도 주 덴버 시의 겨울날 아침이었다. 날씨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먼저 따뜻한 훈풍이 불어와 눈을 녹이고는 모퉁이를 돌아 뒷골목 과 낮은 지대를 지나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다음에는 앙갚음을 하듯 혹독한 추위가 되돌아와 또다시 길과 지붕전체를 하얗게 덮어 버렸다. 지난 번 돌풍에 휩쓸려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것들마저 꽁꽁 얼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얼음판 위에서 팔을 휘저으며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이런 날은 집 안에 있는 것이 제격이다. 코감기에 걸려 엄마가 끓여주는 따뜻한 수프를 기다리는 것이 어울린다. 그리고 뉴스로 가득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눈이 지붕 높이까지 내리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상을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덴버 컨벤션 센터에서 2백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들 역시 나처럼 코를 훌쩍이며 엄마가 끓여주는 수프를 기다릴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날씨에 대해선 우리가 어떻게도 할 수 없다. 날씨에 대해 떠드는 것 말고는.
벌써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나는 무선 마이크에 들어갈 건전지가 필요했다. 게으름 피울 시간이 없었다. 여분의 건전지를 챙겨 오는 걸 잊었던 것이다. 정말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건전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숙이고, 단단히 옷깃을 세운 뒤, 형편없이 얇은 신사화 구두를 끌면서 살을 에는 바람 속으로 걸어나갔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양본 바지가 뒤로 달라붙었다. 옷이 너무 얇아서 만일 이런 어리석은 옷차림으로 바깥에 나가는 걸 알았다면 엄마는 틀림없이 나를 집 밖에 내보내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퉁이를 돌자 24시간 영업하는 세븐 일레븐 편의점의 작은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폭을 크게 해서 좀더 빨리 걸으면 숨을 쉬지 않고서도 그곳까지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어찌나 맹렬하고 차가운지, 숨을 들이쉬면 기관지가 금방 타 버릴 것만 같았다. 덴버에 사는 사람들은 의지인들에게 덴버의 겨울은 참을 만한 괜찮은 경험이라고 농담을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묻는 친척들의 질문에 덴버의 시민들은 곧 잘 말한다.
"좀 건조한 편이지요."
좀 건조하다구! 맙소사! 이건 순전히 고추가 다 얼어붙을 것만 같은 날씨다. 습도가 부족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극을 능가하는 시속 60킬로의 강풍이 등짝을 냅다 후려칠 때는 말이다.
세븐 일레븐 안에는 두 영혼이 있었다. 계산대 뒤에 있는 여성은 로베르타라고 적힌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얼굴 표정으로 보아 로베르타는 얼른 집에 가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수프를 끓여주며 위로의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소망과는 다르게 그녀는 지금 사람의 발기조차 뜸한 시내 한복판에서 상업의 첨병 역할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이토록 추운 날에 바깥으로 나온 소수의 어리석은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리라.
추위로부터 피신해 온 또다른 영혼은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어떤 노신사였다. 그는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장소가 무척 편안해 보였다. 서둘러 편의점 문을 나가서 무자비한 바람과 싸우고 싶은 표정이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얼음이 뒤덮인 거리는 늙은 나이의 사람에게는 위험천만이었다.
나는 그 노신사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날에 밖으로 나와 다리를 질질 끌며 세븐 일레븐까지 물건을 사러 나온 걸 보면 올바른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어쨌든 나는 제정신이 아닌 노인에게 관심을 둘 시간이 없었다. 나는 건전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내가 컨벤션 센터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2백 명의 중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에겐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어쨌든 나보다 먼저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자기가 고른 물건들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로베르타는 그 빈약한 물건들을 하나씩 들어 각각의 가격을 계산기에 등록했다. 이 노인은 지금 싸구려 옥수수빵 하나와 바나나 하나를 사기 위해 이 추운 덴버의 겨울 아침을 뚫고 밖으로 나왔단 말인가. 이런 엄청난 실수가 다 있다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옥수수빵 한 개와 바나나 한 개 정도는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동장군이 물러나고 거리가 웬만큼 기운이 추스렸을 때 천천히 산책을 하며 나와서 사 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낡은 노구를 이끌고 이 추운 겨울 아침 속을 항해해 온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정말로 내일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매우 나이가 많아 보였다.
마침내 로베르타가 금액을 말하자 지치고 늙은 손이 낡은 바바리 코트의 주머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오, 제발! 하루 종일 꾸물거릴 거예요? 난 지금 무척 바쁘단 말예요!'
주머니를 뒤지던 손이 마침내 동전 지갑을 꺼냈다. 지갑은 노인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다. 동전 몇 개와 구겨진 1달러 지폐 한 장이 계산대 위로 떨어졌다. 로베르타는 마치 보물이라도 받은 듯이 그것들을 소중히 다뤘다.
그 열악한 물건들이 비닐봉지에 담기고 났을 때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어났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늙고 지친 손을 천천히 계산대 너머로 내밀었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방향이 확실했다.
로베르타는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빌려 노인의 손목에 부드럽게 걸어 주었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손가락들은 노인의 나이를 상징하듯 온통 주름투성이였다.
로베르타는 크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계산대 너머로 몸을 숙여 노인의 또다른 늙은 손을 들어올리더니 그 두 손을 맞잡아서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그렇게 노인의 손을 자기 얼굴에 대고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했다. 위아래, 그리고 양옆까지.
노인의 언 손이 얼마쯤 녹았을 때 로베르타는 손을 뻗어 노인의 굽은 어깨로 흘러내린 스카프를 집었다. 그녀는 그것을 노인의 목둘레에 꼭 동여매 주었다. 그때까지도 노인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 순간을 자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 두기라도 하려는 듯 정지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기억이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살아 있어야 하리라. 그가 다시금 추위 속을 뚫고 이곳까지 와야 하는 내일 아침까지는.
로베르타는 노인의 늙은 손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단추 하나를 단단히 채워 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노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들어 조롱하듯이 노인에게 말했다.
"자, 존슨 씨! 건강 조심하셔야 해요!"
그러더니 그녀는 강조하려는 듯 약간 말을 멈췄다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내일도 당신이 여기에 꼭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란다구요."
그 마지막을 말을 귀에 담은 채로 노인은 자기가 산 물건을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친 말 하나가 질질 끌리며 다른 발 앞으로 약간 나아갔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덴버의 겨울 아침 속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노인이 바나나 한 개와 옥수수빵 하나를 사기 위해 그곳에 온 게 아니라는걸. 그는 따뜻해지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의 가슴속까지.
나는 말했다.
"와우, 로베르타! 정말 대단한 고객 서비스군요. 저 노인이 당신의 삼촌이거나 이웃에 사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나요?"
로베르타는 내 말에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런 훌륭한 서비스를 한다는 내 생각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베르타에게는 모든 사람이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 스콧 그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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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무신을 신고 오신 선생님
졸업을 앞둔 중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다.
마당에 지게를 세워놓고 땔감을 준비하고 있는데 영어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흰 고무신을 신고 찾아오셨다.
당시 학생회 간부였던 나는, 부끄럽다거나 싫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추한 집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선생님의 방문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바위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께서는 누런 월급봉투를 통째로 내밀며 부모님과 상의해서 진학 준비를 서두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3년 간 학비 일체를 책임질 테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엉겁결에 봉투를 받아든 나는, 집에 들렀다가 가시라는 말도 못한 채 멀어져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못 이루며 갈등했다. 결국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나는 다음날 아침, 선생님께 월급봉투를 돌려드렸다.
졸업 후 1년 동안 서울에서 주경야독하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공부를 그만두고 가족을 돌보았다. 그 후 24개월 간의 군 생활을 마치기까지, 어머니와 동생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도 우리 가족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다행히도 지난날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모든 일이 잘 풀려 사십을 훌쩍 넘긴 지금은 그 시절에 쓴 빛바랜 일기장을 들춰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깊고 넓은 사랑과 관심을 선생님으로부터 받았고, 그 사랑은 내 삶을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몇 년 전, 선생님이 경상도 밀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로 인사를 드렸더니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선생님은 옛날의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셨다.
지금도 졸업과 입학의 때가 되면 흰 고무신을 신고 찾아오셨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혼자 눈물짓곤 한다.
강윤휘/충남 서산시 동문동
이 빠진 접시
내가 식탁을 차리고 있을 때면 엄마는 종종 가장 좋은 접시들을 꺼내 놓으라고 말했다. 자주 있는 일이라서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난 그것이 엄마의 일시적인 기분이라고 여기고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내가 식탁을 차리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옆집에 사는 마가렛 아줌마가 찾아왔다. 마가렛이 문을 두드리자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없던 엄마는 아줌마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주방으로 들어온 마가렛 아줌마는 식탁에 놓인 아름다운 접시 세트가 눈에 띄자 이렇게 말했다.
"아, 손님이 오실 예정인 줄 몰랐네요. 다음에 다시 올께요. 먼저 전화를 드리고 나서 왔어야 하는 건데."
엄마가 말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아무 손님도 오지 않아요."
그러자 마가렛 아줌마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왜 이렇게 귀한 그릇 세트를 꺼내 놓았죠? 난 이런 그릇은 일년에 한두 번밖에 쓰지 않는데."
엄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위해 언제나 가장 좋은 식사를 준비해 왔어요. 손님이나 외부인을 위해 특별한 식탁을 차려야만 한다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겠어요? 가족은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람들이니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해요. 하지만 그러다가 아름다운 그릇들이 깨지기라도 하면 어쩔려구요?"
마가렛 아줌마는 가족에 대해 엄마가 갖고 있는 특별한 가치 기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온 가족이 저녁 테이블에 앉아 이 아름다운 그릇들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접시에 이가 빠지는 것쯤은 그다지 큰 대가가 아니죠. 게다가..."
엄마는 소녀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덧붙였다.
"이 빠진 접시들은 제각기 그것과 관련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엄마는 찬장으로 가서 접시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손에 들고 엄마는 말했다.
"이 접시에 이가 빠진 게 보이죠? 내가 열 일 곱살 때의 일이었어요. 난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답니다."
마치 다른 시대를 기억하는 듯 엄마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느 가을 날, 오빠들은 그해의 마지막 건초를 저장하느라 일꾼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젊고 튼튼하고 잘 생긴 청년이 우리 집에 고용됐답니다. 엄마가 나더러 닭장에서 금방 난 달걀들을 꺼내 오게 했어요. 내가 그 청년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난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가 크고 무거운 건초 더미를 어깨에 들어올렸다가 능숙하게 헛간의 널 대 위로 집어던지는 걸 바라봤어요. 정말이지 매력적인 남자였어요. 가는 허리에다 팔뚝은 강인해 보이고 머리 결은 빛이 났답니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걸 눈치챘는지 어깨에 건초 더미를 들어올린 채로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어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미남이었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오빠들도 그 청년이 맘에 들었던 모양인지 저녁 식사에 그를 초대했답니다. 큰오빠가 그 사람더러 내 옆자리에 앉으라고 말했을 때 난 거의 숨조차 쉴 수 없었지요.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들킨 뒤였으니 내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그런데 이제 그 사람 바로 옆에 앉아 있게 된 거예요.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입을 꼭 다물고 식탁만 내려다봤지요. 문득 어린 딸과 이웃집 여자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엄마는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이야기의 결론으로 달려갔다.
"어쨌거나 그 사람이 나한테 음식을 덜어 달라며 접시를 내밀었는데 난 너무 긴장되고 떨리고 손바닥에는 땀까지 나서 그만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답니다. 접시는 찜냄비에 부딪치면서 그만 한쪽에 이가 빠져 버렸지요."
엄마의 이야기에 무감동한 채로 마가렛 아줌마가 말했다.
"나 같으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군요."
엄마가 말했다.
"오히려 정반대죠. 일년 뒤에 난 그 멋진 남자와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접시를 볼 때마다 난 그이를 처음 만난 그날이 생각나요."
엄마는 접시를 다른 접시들 뒤켠의 제자리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는 얼른 윙크를 하셨다. 방금 한 이야기에 마가렛 아줌마가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 걸 알고 엄마는 서둘러 다른 접시를 꺼냈다. 이번 것은 완전히 깨졌다가 접착제로 다시 조각들을 이어 붙인 접시였다.
"이 접시는 우리의 아들 마크가 막 태어나서 병원에서 집으로 온 날 깨진 거랍니다. 그날은 어찌나 춥고 바람이 세게 불던지! 여섯 살 짜리 딸아이가 날 거들겠다고 접시를 싱크대로 나르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렸지요. 처음에 난 당황했지만, 다음 순간 내 자신에게 말했어요. 저건 깨진 접시에 불과해. 깨진 접시 하나가 새로운 아기가 우리 가정에 가져다 준 행복을 망쳐 놓을 순 없어, 라고 말예요. 사실 그후 우린 접시의 깨진 조각들을 맞추느라고 몇 번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내가 보기에 엄마는 그것 말고도 다른 접시들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간직하고 계신 듯했다. 그 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는 엄마가 아빠를 처음 만난 날 깨셨다는 그 접시에 대한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것을 다른 접시들 뒤 켠에 고이 간직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 접시가 자꾸만 내 생각을 사로잡았다.
며칠 뒤 엄마가 야채를 사러 시내로 나가셨을 때였다. 엄마가 외출하시면 나머지 아이들을 돌보는 건 내 몫이었다. 엄마가 탄 차가 도로 아래쪽으로 사라지자마자 나는 다른 때처럼 얼른 부모님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것은 사실 금지된 일이었다. 나는 의자를 끌어와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서랍장의 맨 윗 서랍을 열었다. 그 다음에는 지금까지 수없이 한 것처럼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 안쪽, 어른들이 입는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는 옷 밑에는 나무로 만든 네모난 보석 상자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늘 같은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힐다 고모가 엄마에게 물려주신 붉은 색 루비 반지, 엄마의 엄마에게 결혼식날 외할아버지가 선물한 섬세한 진주 귀걸이, 엄마 자신의 특별한 결혼 반지 등이 있었다. 엄마는 아빠일을 돕기 위해 외출할 때면 종종 그 반지를 끼셨다.
소중한 보석들에 다시금 매혹되어 모든 계집애들이 하듯이 나는 그것들을 손가락에도 끼어 보고 귀에도 달아보았다. 나도 이 다음에 엄마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되면 이런 우아한 보석들을 가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서 빨리 나 자신의 서랍장을 가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그걸 열어 보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바랬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들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보석함 밑바닥에 깔아 놓은 작은 붉은 색 융단을 들췄다. 거기에는 보석과 분리된 곳에 접시에서 깨어져 나온 평범한 사금파리 하나가 보관되어 있었다. 전에는 그것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상자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빛에 비춰 보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부엌 찬장으로 달려가 의자를 받치고 그 접시를 꺼냈다. 내가 상상한 그대로 엄마가 세 개밖에 없는 소중한 보석들과 함께 보관하고 있는 그 사금파리 조각은 엄마가 처음 아빠와 눈이 마주친 날 깬 바로 그 접시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고, 엄마에 대해 더 많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 성스런 접시 조각을 보석 상자에 조심스럽게 도로 갖다 넣었다. 이제 나는 엄마의 그릇 세트가 가족에 대한 많은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그 접시들만큼 엄마에게 소중한 유산은 없었다. 깨어진 접시 조각과 함께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시작 됐으며, 그 이야기는 이제 33번째 장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결혼하신 지 올해로 33년이 된 것이다!
내 여동생들은 엄마에게 나중에 그 골동품 루비 반지를 자기들한테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여동생은 외할머니의 진주 귀걸이를 갖겠다고 말했다. 나는 여동생들이 이 아름다운 가정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기를 바란다. 나 자신은 매우 특별한 한 여성의 매우 특별한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 기념품을 갖고 싶다.
그 작은 접시 조각 말이다
베티 B, 영
두 가족
금세기 초에 일본에서 이민온 한 가족이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장미 농장을 일구어 일주일에 세 번씩 이른 아침마다 장미꽃을 트럭에 싣고 샌프란시스코로 배달하는 사업을 정착시켰다.
또다른 가족은 스위스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장미 재배 사업을 했다. 이들의 장미꽃은 샌프란시스코 꽃 시장에서 널리 알려져 두 가족은 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거의 40년이 넘도록 두 가족은 이웃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농장을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했다. 다른 식구들은 이미 미국인으로 귀화했지만 그 일본인 가정의 아버지만은 그때까지도 고집스럽게 일본 국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본인 가족은 곧 강제 수용소로 끌려갈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끌려가고 나면 장미 농장은 폐허가 되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반세기 가까이 열심히 일궈 놓은 사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이때 이웃에 사는 스위스인 가족이 찾아와서 말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시오. 우리가 당신들의 농장을 대신 돌봐 주겠소."
수없이 감사의 절을 하는 일본인 가족에게 스위스인 가정의 아버지는 말했다.
"당신들이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겁니다."
얼마 후에 일본인 가족은 콜로라도 주 그라나다에 있는 황폐한 장소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 강제 수용소는 아주 형편없었다. 기름종이로 지붕을 한 군대 사막에다, 철조망과 무장한 경비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꼬박 일 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두 해가 지나고 세 해가 지났다. 일본인 이웃이 수용소에 억류돼 있는 동안 그들의 친구인 스위스 가족은 두 군데의 장미 농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기 전까지 일을 했고, 아버지는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일했다.
어느날 유럽에서의 전쟁이 막을 내리자 일본인 가족은 다시 짐을 꾸려 열차에 실렸다. 오랜 기간의 유배가 끝나고 마침내 그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 가족이 열차에서 내리자 그들의 이웃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일본인 가족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미 농장이 햇빛을 받으며 건강하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인 가정의 아버지가 은행 예금통장을 일본인 아버지의 손에 건네주었다. 일본인 가족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 역시 장미 농장만큼 잘 관리되어 있었다.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이제 막 피어나기 직전의 붉은색 장미 송이 하나가 꽂혀 있었다. 한 이웃이 다른 이웃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 다이안 레이너, 캐롤 브로드벤트 제공-
펀글..
친절의 행위
미국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에이브라함 링컨은 종종 부상당한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한 번은 의사들이 심한 부상을 입고 거의 죽음 직전에 있는 한 젊은 병사들에게 링컨을 안내했다. 링컨은 병사의 침상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겠소?"
병사는 링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간신히 이렇게 속삭였다.
"저의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만 써 주시겠어요?"
펜과 종이가 준비되었다. 대통령은 정성스럽게 젊은이가 말하는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하던 중에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아무래도 회복되지 못할 것 같군요.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저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존과 메리에게도 저 대신 입 맞춰 주시구요. 신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기를 빌겠어요."
병사는 기력이 없어서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링컨은 젊은이 대신 편지 말미에 서명을 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 에이브라함 링컨이 이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젊은 병사는 그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마침내 편지를 대신 써 준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병사가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이신가요?"
링컨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대통령이오."
그런 다음 링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는가를 그에게 물었다. 병사가 말했다.
"제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편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실내에서, 키가 크고 수척한 링컨 대통령은 청년의 손을 잡고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에게 따뜻한 용기의 말들을 나지막이 들려주었다.
- <더 베스트 오브 비츠 앤 피이시즈>에서-
이런 아내 되겠습니다...
눈이 오는 한겨울,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당신의 퇴근 무렵에
따뜻한 붕어빵 한봉지 사들고, 당신이 내리는 지하철역에 서 있겠습니다.
아무말 하지 않고도 당신의 피로한 어깨를 느끼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오는 당신의 집에 향내나는 그런 집으로 만들겠습니다.
때로는 구수한 된장찌게 냄새로, 때로는 보리차 끓이는 냄새로
때로는 만개한 소국들의 향내로, 때로는 진한 Chanel의 향기로...
말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늦게까지 불켜놓은 당신의 방에서
담배연기 자욱해하며 책을 볼때 나는 슬며시 레몬 넣은 홍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미모와 외모로서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는 여자로서가 아니라
나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서, 있어도 없는듯 없으면 서운한
그런 맘편한 얘기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불꺼놓은 보금자리. 대화하다가 동이 트는 것을 보아도
서로의 대화로 인하여 풍성해진 우리 맘을 발견하겠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를 빌어 태어나는 아이가 장성해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당신으로 꼽는다면 나는 영광스럽게도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여도 행복하겠습니다
늘.. 사랑해서 미칠것같은 꼭 내것으로만 여겨지는 그런 아내가 아니라,
아주 필요한 사람으로..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공기같은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행여 내가 세상에 당신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일이 있어도
가슴 한구석에 많이 자리잡을 수 있는 그런 현명한 아내가 되겠습니다.
지혜로와 슬기로와 당신의 앞길에 아주 밝은 헤드라이트 같은 불빛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롱불처럼 아니 반딧불처럼 당신 가는 길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흰서리 내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당신은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였소. 당신을 만나 행복했었소."
라는 말을 듣는 그런 아내... 되겠습니다.
펀글..
맛없는 자장면
종로의 한 중국집은 맛이 없으면 돈을 안 받는다. 그 집에 어느 날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왔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간 뒤라 식당에서는 청년 하나가 신문을 뒤적이며 볶음밥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아이는 자장면 두 그릇을 시켰다. 할아버지의 손은 험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 그대로 북두갈고리였다.
아이는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그릇에 자신의 몫을 덜어 옮겼다. 몇 젓가락 안 되는 자장면을 다 드신 할아버지는 입가에 자장을 묻혀가며 부지런히 먹는 손자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이가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부모없이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모양이었다. 손자가 하도 자장면을 먹고 싶어해 모처럼 데리고 나온 길인 듯 했다. 아이가 자장면을 반쯤 먹었을 때, 주인이 주방쪽을 대고 말했다.
"오늘 자장면 맛을 못 봤네. 조금만 줘봐."
자장면 반 그릇이 금세 나왔다. 주인은 한 젓가락 입에 대더니 주방장을 불렀다.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거 같지 않나? 그리고 간도 잘 안 맞는 것 같애. 이래 가지고 손님들한테 돈을 받을 수 있겠나."
주방장을 들여보내고 주인은 아이가 막 식사를 끝낸 탁자로 갔다. 할아버지가 주인을 쳐다보자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자장면이 맛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맛있는 자장면을 드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가게는 맛이 없으면 돈을 받지 않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들러주십시오."
손자의 손을 잡고 문을 열며 나가던 할아버지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주인이 다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고, 고맙구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팔을 붙들려 나가면서 주인에게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주인은 말없이 환하게 웃었다.
펀글..
사랑의 정의
“사슴반 송선생님~~ 오늘도 데이트 가느라 바쁜가바? 히죽 ^^” 늘상 있는대화다.. 우리엄마는 작지 않은 유치원을 하고 계셨다. 송선생님은 정말로 이쁘고 착하고 어떤때는 터프하기까지한 아이들한테는 인기짱으로 통했고 난 그런 선생님을 언니라 따르면 조아했다. 송민정.. 이름까지도 이뻤다.. 우리엄마와 민정언니는 엄마와 딸처럼 친했고 언니와난 5살밖에차이나지 않아 날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 언니에게는 아주 옛날부터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김영훈이라고..장래가 뚜렷히 보이는 컴퓨터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7년되던가?
흠..
어쨌든 정말 오래된연인이었다. 정말 보기좋은 한쌍이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난 맛깔나게 낮잠을자고 저녁이 다되서야 일어났다. 근데 어디선가 여자가 흐느끼는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호기심에 말을 엿듣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민정언니였다.
왜 울지?? 흠.. 엄마는 절대 안댄다는말만 반복하셨고 언니는 어떻하냐는말만 되풀이했다.
한시간을 엿들었건만 진작 무슨말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난 영훈오빠랑 싸웠겠지..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어느날 엄마와 민정언니..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됐고 그 날 난 기가막히는사실을 알게되었다. 언니가 우리엄마에게 물었다.. “언니.. 진정한 사랑이랑게 몰까.. 내가지금 잘하고 있는걸까?” 이게 무신말이다냐.. 멀뚱거리고만 있는나에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절대 있을수없는일이 내 귓가로 속삭여져 들어왔다..
유전성마비.. 유전에 의한병인데 어느정도에 나이가 차면 몸이 손끝이나 발끝에서 부터 마비증상이다. 결국에는 심장도 마비되어 죽는다는 이 병..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영훈오빠가 손끝이 저려온다며 컴퓨터 일을 관두었었다. 설마.. 언니는 이얘기를 마치 남얘기인냥 웃으며 말하고 있었고.. 난 그런 민정언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영훈오빠가 이병에 걸렸다는걸 안지 벌써 3년이 되었다고 한다. 영훈 오빠는 어떻게 해서든지 너와 결혼할 수 없다고 버팅겼고 언니는 미친소리 하지말라며 오빠를 끝까지 붙잡았다고 한다..
어느 추운겨울날 영훈오빠가 빈정언니에게 다시는찾지말라며 조은사람 만나라는 말과 함께 편지 한장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로 언니는 폐인이 되기 시작했고 오빠를 찻아나섰다. 아마도 영훈오빠는 언니를 너무 사랑한나머지 언니에게 부담이 되기싫었나보다. 영훈오빠의 가장친한친구에게 수소문한결과 영훈오빠는 어느 자그마한섬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와 언니와 우리엄마는 그길로 섬으로 향했고 난 그토록 잘생긴 영훈오빠가 폐인이 되있음에 너무 놀라고 말았다. 몸에 삼분에 일이 마비되어 있었고.. 왼손은 감각조차 느끼지 못하 고 있었다.
“왜왔니!! 송민정.. 너 미쳤구나 나 이렇게 추한꼴 확인할려고 왔니? 나같은병신이랑 결혼해서 뭘어쩌겟다는건데.. 나 이제 얼마 살지못한다는거 잘알면서..”
이것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야!! 김영훈!! 내가 너한테 이것밖에 안되? 우리 고작 이런거였어? 삼년동안 아무렇지 않게 잘지내왔잖아.. 너가 이러면 나도 병신되고 말거야.. 우리가자.. 우리엄마한테는 영훈 씨 출장갔다고 말씀드렸어. 가자..응? 내인생이야.. 이건 내가 선택한거고.. 그러니까 영훈씨는 아무말도 하지말고 따라와.(언나 터프했다..)”
영훈오바는 마지못해 끌려가는듯했지만 얼굴에는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흘렀다.
결혼식이 한창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단하나. 영훈오빠에 건강상태를 모르시는분은 민정언니 어머니 단한분이셨다.. 알면 날리 나실게 뻔한데.. 주위사람들은 다알고 있었지 만 단 민정언니 어머니께는 비밀이었다..
민정언니와 영훈오빠 가정에는 양쪽다 아버지가 안계셨다. 영훈오빠는 삼대독자였고.. 민정 언니는 와동딸이었다. 양쪽 어머니는 옛날부터 친한사이였고 누구보다 둘의 결혼을 축하해 주셨다..
하지만 영훈오빠에 어머닌 무작정 결혼을 반대하셨다.. 나라도 그랬을것이다. 아휴..
3월.. 어느 교회에서 둘에 결혼식은 이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인제 영훈 오빠는 몸에 왼쪽 이 완전히 마비된상태.. 민정언니 어머니는 막상 교통사고라고 말씀드렸다.. 이날이 세상에 서 가장 슬프고 아름답고 안타까운 결혼식이었다.. 보통 결혼식에서 신부가 오른쪽에 서는 게 예의다. 그리고 이교회는 꽤나 큰 편이었기 때문에 깔아져있는 빨간천이 상당히 길었다.. 오신손님은 대략 200명..
언니와 오빠에 인기탓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이왔다. 사람들은 축복에 눈길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안타까운건 민정언니에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신채 웃고만 계셨다.
신랑입장!! 영훈오빠가 쩔뚝거리며 입장하기 시작했다.. “저기여!! 잠깐만여!! 같이 입장 할꺼에요”
언니는 드레스를입은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어리둥절 언니를 보고만있었다.
언니는 곱게깔린 빨간천을 돌돌말기 시작했다. 반정도를 말고난언니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기서 부터 입장할께요” 언니는 영훈 오빠를 휠체어에 태우고 천이 말려있는 곳까지 가서 영훈오빠를 세웠다. 언니는 오빠에 왼쪽에 서서 오빠를 부축하며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거리를 두사람이 입장하기가지 약 30분이 걸렸다. 영훈 오빠는 몇 번씩이나 넘어졌고 언니는 부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은 소리없이 울기시작했고.. 몇몇분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주례하시는 목사님 앞에 도착한 두명은 주례사를 마친후 양가에 인사를 하게 되었고 영훈오빠는 구부리지도 못하면서 인사하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차마 보지못할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민정언니 엄마에게 인사할차례.. 언니는 큰절을 올리며.. 울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미안하고.. 죄송해요.. 나 정말 잘살께요..” 영문도 모르는 언니의 어머니는 언니를 토닥거리며 잘살거라고 말씀해주셨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신부에 행진.. 언니와 오빠는 울면서 손을꼭잡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아름다운커플은 없었다..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다.. 오빠가 힘들거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런걸 운명이라 부르는건지 영훈오빠는 민정언니와 결혼한지 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모든걸 알아차린 민정언니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하셨다. 우리딸 불쌍해서 어떻하니.. 라는말과 함께.. 민정언니에게 괜찮냐고 뭍는 사람들을 향해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눈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은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있는지 모른다면.. 당황하고 그사람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을거야.. 하지만 난 안심이돼.. 영훈씨가 어디있는지 아니까.. “
며칠전이 영훈오빠가 세상을떠난지 일년이 되는날이었다.. 언니는 우리집에 비디올를하나들고 찾아왔다. “언니~ 나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랑 내기하나 하자.. 우리 이비디오 보고 먼저 우는사람이 저녁사기하까?키둑..” 비디오를틀자 언니와 오빠에 결혼식 장면이 나왔고.. 엄마는 엉엉 울고계셨다.. 그랬다.. 언니는 영훈오빠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다.. 인제 민정언니나이 25살이다.
언니는 지금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있다.
얼마전에 언니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때 곁에 있어주는 것 만큼에 축복은 없을거라고.. 그래고 언니는 영훈오빠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도 하늘에서 기달리고 있을텐데..
지치지는않을까.. 하면서..
아마도 이런게 사랑인가보다.. 악한조건을 사랑으로 승화 시키고 다른세상이지만 서로 기다리면서 행복해 하는 것..
y2kkdh님이 보내주신 글...
인간에게 있는 몇가지 규칙들
1. 신으로 부터 육체를 받은 것이다.
당신 그 육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이 생을 마칠 때까지 당신의 것이다.
2. 당신은 교훈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인생이라는 학교에 등록을 해서 하루종일 전과목을 배워 나갈 것이다.
이 학교에서 하루하루가 당신에게 교훈을 배우는 기회이다.
당신은 그 교훈을 좋아할 수 도 있고, 어리석은 것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3. 당신에게 실패란 없으며, 오직 교훈이 있을 뿐이다.
성장은 고난과 실수에서 찾아온다. 실험과 시도가 곧 성장을 가져다 준다.
실패한 시도는 성공한 시도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성장이라는 열매를 가져다 준다.
4. 교훈은 당신이 그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당신이 교훈을 얻을 때까지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당신에게 찾아온다.
당신이 그것을 배우면 당신은 그 다음 교훈으로 나아갈 수 있다.
5. 배움의 과정에는 끝이 없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 교훈을 담고 있지 않은 일이란 없다.
6.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7. 타인은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단지
그가 당신속에 있는 좋은 부분과 싫은 부분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8. 당신 자신의 삶을 어떤 것으로 만드는 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은 이미 필요한 모든 연장과 재료를 갖고 있다.
9. 당신이 찾는 해답은 이미 당신속에 있다.
10. 당신은 이 모든 사실들을 잊고 살아갈 것이다.
11.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당신은 이 사실들을 기억할 수 있다.
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중에서 / 잭 캔필드.마크빅터 한센 지음
어떤이의 다짐
오늘 하루만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친절해야지.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그들 덕분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대해야지.
오늘 하루만은 남을 헐뜯지 말아야지.
어떤 상황에서나 다른 사람의 좋은점을 보도록 애쓰고,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할 만한 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해야지.
오늘 하루만은 남을 나무랄 때 마치 내 잘못을 나무라는 것처럼 자재력과
유머를 가지고 기분좋게 대해야지.
오늘 하루만은 내가 하는 일에 모두 완벽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아야지.
무슨 일이든 빨리 해서 신기록을 수립하려는 생각을 버려야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억지로가 아니라 내 능력에 맞게 해나가려고 노력해야지.
오늘 하루만은 내가 적성에 꼭 맞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지.
내가 직책과 봉급에 걸맞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버려야지.
오늘 하루만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시대에 감사해야지.
그리고 나를 강제로 일시키는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오늘 하루만은 직장에서 건강하게 일하고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지.
병원의 수술대기실에 있지 않는 것이 참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야지.
펀글...
오늘을 알차게 보낸다면 내일도 밝은 태양이 ......
토끼와 거북이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더래요.
거북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토끼는 거북이를 사랑했답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토끼의 소중한 마음이었죠.
어느날... 토끼는 거북이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거북이는 느린 자신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거든요.
너무나 느리고 굼뜬 자신에 대해서요.
토끼는 거북이를 사랑했습니다.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어이~ 느림보 거북아! 나랑 경주해보지 않을래?
너따위는 내 상대가 절대 될 수 없지만 말야~ 어때?"
"토끼야, 내가 비록 느리지만... 경주를 하겠어.
빠른 것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어!"
토끼는 기뻤습니다. 바보같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저 높은 언덕 꼭대기까지의 경주였습니다. 물론...
거북이는 토끼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토끼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죠.
'거북이가 쫓아올까? 포기하지 않고 쫓아올까?'
앞서가는 토끼는 달리면서도 거북이만을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너무나 차이가 나버렸습니다.
토끼는 거북이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죠.
토끼는 길가에 누워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거북이가 다가와 자신을 깨워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함께 달리기를 원했습니다.
둘이서...
그러나...
여러분도 그 다음은 아시죠?
거북이는 길가에 잠든 토끼를 추월해서 경주에
이겼답니다.
그렇지만 모르시겠죠...
잠든 척 누워있던 토끼의 눈물을...
경주가 끝나고...
거북이는 근면과 성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반면, 토끼는 자만과 방심의 낙인이 찍혀버렸죠.
그렇지만 토끼는 그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거북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더래요.
거북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토끼는 거북이를 사랑했답니다.
그리고... 그건 토끼 혼자만의 아픔이었답니다.
그 거북이가 토끼를 이겨 일등을 받아서 기뻤지만..
진짜 마음 속에선 그다지 기쁘지 않았습니다..
뭔가 빠진 거 처럼 공허했고..
왜냐하면.. 거북이도 역시 그 토끼를 사랑했었습니다..
그 전에 토끼가 거북이한테 시합하자고 제의했을때..
거북이가.. 무지 기뻤습니다..
"나 같은 놈과 같이 뛰게 해주더니..'
경주가 시작하자마자..
토끼가 쏜살같이 재빠르게 달려가고 있는데..
거북이가 엉금 엉금 기어나가면서 생각 들었어..
"아.. 나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나..'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뛰고 있었습니다..
몇시간뒤에..그 토끼가 길가에서 낮잠 자고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낮잠자는 토끼를 보자 기뻤습니다..
토끼랑 같이 뛰고 싶기 때문입니다..
'음.. 깨워줘서 같이 나란히 뛰어나가자고 말할까?'
거북이가 한참 망설했는데...
'아니다..나란히 뛰어나가도 나랑 같이 있으면..
토끼가 부끄럽고 창피할게 같애..그럼 나랑 같이
있기는 싫어할텐데..'
그래서 깨워주면 자존심 상할까봐 일부러 안 깨워주고
그냥 모른척하며 지나갔었습니다..
거북이가 달리는 동안에..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래.. 토끼가 감히 나를 사랑할리가 없고..'
그 생각하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어느새 종착점을 골인했습니다..
거북이가 일등 했다고 모든 동물들이 환호했습니다..
거북이가 억지로 웃는 모습으로 내밀고 답례까지
했지만...
마음속은 마니 슬펐습니다..토끼를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요즘 거북이가.. 슬픈 표정으로 기어 다닌답니다..
펀글..
책,영화,리뷰,
서 충 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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