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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박준규

by Casey,Riley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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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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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름 가득한 밤에 뜬 별
어느 해인지는 몰라도 꽤 오래된 날의 일로 생각된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한 소년, 그 소년이 자라나던 마을. 그곳은 하늘처럼 푸른 바다와 작은 동산이 있던 어느 어촌이었으며, 그 소년의 마음도 넓은 바다를 닮아 가며 성장을 해 나갔다. 세월이 흐 르고 그 소년이 초등 학교에 입학 할 무렵, 소년은 혼자만이 알아 놓은 아늑한 숲을 자주 찾아 가곤 했었다. 그곳은 푸른 바다가 보이고 풀 벌레들의 울음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곳이었으며, 소년이 엄마 품 다음으로 좋아 하는 곳이었다. 그 소년에게는 공간 적 소유물이 아닌 또 하나의 소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강아지 였고,친 구들 보다 더 좋아하곤 하여 잠 잘 때만 빼고 언제나 같이 있을 정도 였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이 아끼던 강아지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소년은 태어나 가장 슬픔을 느꼈고, 그 후로 소년은 즐겨 찾던 숲에 가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하루 하루를 지냈 다. 그 강아지의 죽음은 한창 동심이 부풀어 오는 소년에게 커다란 절망으로 다가선 것이 확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은 흐리고 소년의 마음을 달래줄 비가 내릴 것 같은 밤이 찾아 왔을 때, 소년은 어김없이 그 숲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공상에 빠져 있었다. 지나 버린 시간들 강아지와 놀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숲에서 바다 를 바라 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소년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하늘을 보았 을 때, 짙은 어둠 사이로 너무나 맑은 빛 하나가 소년을 바라보며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도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의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빛은 무엇이었 을까? 별빛보다는 밝고 전등보다는 흐린 그 빛은... 하지만 그 빛은 오래 가지 못하 고 사라져 버리고, 하늘은 다시 어둠으로 뒤 덮였다. 소년의 슬픈 마음과 같이 흐린 하늘을 머리 위로 하고 소년은 집으로 향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 소년의 꿈속에 세상을 떠난 강아지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 강아지의 눈빛은 소년이 보았던 비구름 가득한 밤에 뜬 별 빛, 바로 그 빛이었다. 소년은 사랑 하던 강아지를 그리워하다 헛것을 보았던 것이다.그래도 소년의 가슴엔 그무엇보다 밝은 별 빛을 보았던 추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빛마저 맑게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자기 욕심에 못 이겨 사는 이 세상 사람들 속에 파묻혀 외롭게 반짝이는 별로 남아서 말이다. 현재 우리는 예전에 느끼던 아름다운 동심은 모두 현실밖에 내 놓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메말라 버린 마음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거기에서 오는 수많은 오해로 이 사회는 점점 더 삭막해지며 나가서 는 병들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순수한 동심을 간 직하거나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다. 하루빨리 동심을 되새김 하면서 사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새벽바람 속에 숨은 그리움 언제 부터인지 하루에 한번씩 바람을 맞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가슴 깊숙이 파고드 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습관도 분명 이름 모를 병(病)에 속할 것이 틀림없 다. 이름 모를 병이니 당연히 약도 없을 테고.... 병 앓이를 하지 않으려면 하루에 한번씩 바람을 맞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나는 그런 병을 앓기가 싫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정해지지 않은 퇴근길이면 난 집으로 향하기보다는 강으로 숲 속으로 발길을 돌리는 적이 많았고 그 덕에 내 마음은 항상 바람이 든 상태였다. 나를 잘 아 는 사람들을 내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 한다. 스쳐 지나는 바람처럼 내 주위 사 람들은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제 갈 길로 흩어져 버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아쉬움 가득한 자리를 메우려 또다시 밖으로 바람을 맞으러 나간다. 이런 것이 제대로 돌아 가는 내 삶의 방법이라면 굳이 피하려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갖는다. 그렇게 바람을 맞는 방법 중 제일 좋게 바람맞는 것은 이른 새벽 동네 작은 언덕 어귀에 서서 바람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는 나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럼 어떻게 바람을 맞아야 마음도 달랠 수 있을까... 이 쉽지 않은 문 제로 몇 날을 애태우다 어느 날 우연히 그 해답을 찾아내 기뻐하던 때가 있었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바람을 맞되 이른 새벽에 부는 바람 을 맞을 것. 두번째로는 바람을 맞되 그 안에 숨은 나의 그리움들을 찾아내는 것이 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구나 보이지 않은 그리움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루어질 그리움인지 가슴앓이용 그리움인지는 모르지만 싱그 러운 새벽바람 속에서 찾아 느낄 수만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아도 행복해 할 수 있으 리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제마다 다르므로 제각기 가진 생각 중 자 기만의 그리움을 찾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놓치지 말고 잡길 바란다. 힘들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그리움을 되새길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더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결코 행복한 삶이란 것은 경 제적인 부(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족해도 새벽바람 속에 숨 은 그리움 하나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따스한 일들로 얼마든지 참다운 행복한 삶을 느 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너무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자.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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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바람 속에 숨은 그리움
언제부터인지 하루에 한번씩 바람을 맞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가슴 깊숙이 파 고드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습관도 분명 이름 모를 병(病)에 속할 것이 틀림없다. 이름 모를 병이니 당연히 약도 없을 테고.... 병 앓이를 하지 않으려면 하 루에 한번씩 바람을 맞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나는 그런 병을 앓기가 싫지 않았 다. 그래서 일까. 정해지지 않은 퇴근길이면 난 집으로 향하기보다는 강으로 숲 속으 로 발길을 돌리는 적이 많았고 그 덕에 내 마음은 항상 바람이 든 상태였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을 내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 한다. 스쳐 지나는 바람처럼 내 주 위 사람들은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제 갈 길로 흩어져 버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아 쉬움 가득한 자리를 메우려 또다시 밖으로 바람을 맞으러 나간다. 이런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내 삶의 방법이라면 굳이 피하려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갖는다. 그렇게 바 람을 맞는 방법 중 제일 좋게 바람맞는 것은 이른 새벽 동네 작은 언덕 어귀에 서서 바람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는 나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 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럼 어떻게 바람을 맞아야 마음도 달랠 수 있을까... 이 쉽지 않은 문제로 몇 날을 애태우다 어느 날 우연히 그 해답을 찾아내 기뻐하던 때가 있 었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바람을 맞되 이른 새벽에 부는 바람을 맞을 것. 두번째로는 바람을 맞되 그 안에 숨은 나의 그리움들을 찾아내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커다 란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구나 보이지 않은 그리움이 마음 한켠에 자리 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루어질 그리움인지 가슴앓이용 그리움인지는 모르 지만 싱그러운 새벽바람 속에서 찾아 느낄 수만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아도 행복해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제마다 다르므로 제각기 가진 생 각 중 자기만의 그리움을 찾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놓치지 말고 잡길 바란다. 힘들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그리움을 되새길 수만 있다 면 누구보다 더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결코 행복한 삶이 란 것은 경제적인 부(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족해도 새벽 바람 속에 숨은 그리움 하나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따스한 일들로 얼마든지 참다운 행 복한 삶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너무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자. 진정 으로 행복한 삶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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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소리를 내면서 온다
겨우내 묵은 마음의 때를 벗기려 햇살이 화사한 날 머리를 감고 밖으로 나갔을 때, 먼 산과 들녘마다에는 이미 봄의 기운이 퍼져 있었다. 방송으로만 듣던 봄이 어느새 우리 마을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있을 줄이야... 20여 년을 살다 처음으로 겨울을 잃 어버리고 맞은 봄이라서 그런지 참으로 새롭게 느껴지고 빛나는 햇살마다에는 지난겨 울의 대한 아쉬움이 숨어서 온 대지를 비추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것은 왜일까. 나 어릴 적에는 봄이 올 무렵만 되면 싸아한 알 수 없는 향기가 온 대지에 퍼져 있어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으나 지금은 그 향기를 느낄 수 없고 단지 햇살의 밝기, 농도를 보고 봄이 온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 사라진 향기는 어 디로 간 것일까... 그래도 행복하다고 느껴야할 것이다. 무엇으로 느끼던 봄이 오고 있고 있음을 안다는 사실 하나에 행복을 느껴야할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작은 언덕에 서서 바라보는 들녘마다에 햇살은 그리 엷지도 짙지도 않게 퍼져 있으니, 분명 봄이 오고 있음이 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을 느끼며 이렇 게 바람을 맞고 서 있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먼 산너머로 지고 나면 이 언덕 아래로 흐르는 강물 위에 잠시 산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우아한 모습이 질 무렵에는 오색 의 별들이 강물 위에 사뿐히 떠, 다가온 봄을 즐기며 밤새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면 반짝이던 별들은 모두 사라지고 푸르스레 아침이 다가 서 온 대지를 깨울 것이다. 그런 날이 몇 번 반복되면 더러운 때로 찌든 우리는 봄나 들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밖으로 밖으로 나갈 것이고 그 사람들 속에는 내 초라한 모습도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봄은 소리를 내면서 온다. 수없이 많은 소리를 내면서 온다. 얼음이 녹는 소리, 꽃이 피는 소리, 언 땅이 녹는 소리, 아침의 새 울 음소리,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잎 돋는 소리, 아이들의 뛰어 노는 소리, 먼 산너머로 해지는 소리, 땅 속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소리 등 봄은 수없이 많은 소리를 내며 우리 곁을 찾아 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소리를 점점 잊어 가고 있다. 아니, 들 으려 하지도 않는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사람은 아 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 연습을 해야할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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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열기
수없이 맞이한 아침의 햇살을 오늘도 변함없이 맞아 또 하루를 시작한다. 언제나 그 랬듯이 지난밤의 그리움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투명하게 되살 아나 내 머리 위에서 맴돌며 떠나지 않고 그 그리움을 머리에 이고 하루의 문을 연 다. 하루종일 그리움을 이고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늘 해왔던 습관이라 참을 만도 하다. 아니 어찌 보면 그리움을 이고 산다는 것이 내 삶의 즐거움 일수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습관을 갖게 된 이유는 아주 오래된 일인 것으로 기억한다. 내 가족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생긴 습관... 그 러다 보니 의지할 그 무엇을 찾다 지난 그리움을 떠올리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그러 한 날들이 하루 이틀 늘다 보니 자연스레 내 몸에 배이게 된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위에 생각을 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예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누가 설명 을 안 해 주어도 가슴 깊숙한 곳까지 느낄 수 있다. 내 주위에서 모두가 떠난 뒤 깨 달은 터라 커다란 후회가 나를 슬프게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침마다 그리움부터 챙기는 내 모습이 때때로 한심하게 보이지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움을 챙기고 아침을 연다. 그러나 가끔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내가 아침마다 챙기는 그리움과 조금 다른 느낌의 그리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과 누군가 를 그리는 그리움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알 수 없는 명제가 또 내 머리를 어 지럽힌다. 언제나 그랬지만 한번도 마음을 비우고 산 적이 없는 터라 차분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고 매일 같이 반복하는 나는 빈 마음속을 자질구레한 그리움들 과 돌이킬 수 없는 추억들로 가득 채우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찌 보면 매우 한심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이 비추어질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습관을 과감히 버릴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 것일까. 정말 그러한 것들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이 험한 세상 을 회피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비겁한 행동은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습관을 갖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세상 사람들 모두 바쁘게 살며 자기만 생각하려는 이기주의(利 己主義)와 메말라 가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이렇게 나마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내 안에서만 헤매이는 내 자신이 어찌 보면 행복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침 햇 살과 함께 그리움을 여는 이러한 생활이 어느 날부터인지 행복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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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피하기
* 1 *


언젠가부터 나에겐 또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어릴 적에는 없었던 습관... 그것은 바로 아침마다 창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피하려 하는 조금 이상한 습관 이다. 처음에는 잠에서 깨어나기 싫어 일부러 햇살을 피하고 싶은 것이겠지 했는데 시 간이 흐르고 보니 그것은 나의 잘 못된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밤새 달콤한 꿈을 아침 햇살이 무참히 짓밟는다는 생각이 무의식(無意識) 중에 생겨서 그러한 행동이 나왔 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몸에 완전히 배인 습관으로 자리를 잡아서 고치고 싶어 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피해 온 햇살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만큼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던 사실 하나로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그 꿈이 달콤하지 않고 악몽이었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 2 *


좀 오래된 일인가. 들녘 가득 불어 대는 갈대 같은 바람이 내 방까지 스미던 날 누군 가를 그리워하던 기억...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기억은 내 가슴속에서 모두 사라진 듯 희미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간혹 불어 대는 마른 바람을 맞을 때 면 그때의 기억들이 모두 섞여 되살아나서 나를 휘감고 이리저리 휘두르다 먼지 쌓인 곳에 내다 꽂곤 한다. 그러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서면 내 온 주위는 텅 비어 버린 들 한복판, 거기 나 홀로 휘청거리며 서서 그 무엇을 찾다가 나를 찾아다니는 내 그 리움들을 만나는 순간, 난 또다시 정신을 잃는다. 수없이 정신을 잃고 깨고 하다가 끝내 현실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꿈도 꾸곤 한다. 그래서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너무 많이 햇살을 피해 온 탓에 찾아 드는 후유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본다.


* 3 *


두려워하지 말자. 내 지난 삶 속에서 잃은 햇살,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자. 앞 으로 다가올 아침 햇살, 얼마든지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 하나로 희망을 갖자. 때로 는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한다. '너는 너무 햇살을 피해 왔어...'라고 걱정스러운 목소 리로 나에게 말을 한다. 그러나 그 말에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피해 온 햇살만큼이나 꾸어 온 꿈이 내 안에 있어 그것으로 위로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햇살을 피해 살았다고 해서 결코 삶의 무엇을 잃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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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앞을 지나다
내 머릿결이 햇살에 유리알처럼 부서지는 날, 다리를 절며 어느 병원 영안실 앞을 지나다 잠시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띠는 사람들 얼굴마다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국화꽃이 커다랗게 장식된 화분 앞에서 기쁜 얼굴로 찾아가는 조 문객(弔問客)들을 맞는 사람과 영안실 입구 한 모퉁이에 원탁을 차려 놓고 동네 구 멍 가게에서 물건값을 계산하듯 분주하게 오가는 흰 봉투들... 그 풍경 속에 내 미래 의 모습이 드리워졌다. 이 작은 별에 태어나 뒤돌아 볼 시간도 없이 살다가 어느 날 훌쩍 다른 별로 떠나면 내 주위 사람들 나를 배웅할 생각은 접어 두고 내가 알아 온 사람들에게서 한 장 두 장 나오는 지폐에 관심이 더 많이 갈 것이라는 걸 생각하니 완 치 되어 가던 한쪽 다리가 왈칵 주저앉을 것만 같이 아파 왔다. 나와 상관없는 이의 죽음 앞에 서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어딘 가로 향하던 발길 이유 없이 멈추 어 서서 변해 버린 세상을 원망하는 것일까.......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풍경에 새로 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무지 (無知)속에서 헤매인 터라 그 풍경 속에서 전해져 오는 것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 후 세계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 까. 새로운 그 무엇을 느끼는 동시에 사후(死後) 세계의 대한 궁금한 점이 떠올라 발 길을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금만능(黃金萬能)주의 가득한 영안실 앞에 서서는 도저히 사후 세계를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씁쓸한 웃음이 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의 반이 지난 듯한 시간에 그곳을 뒤로하고 내 갈 길을 가려 하니, 갑 자기 갈 곳을 잃어 버렸다. 처음부터 갈 곳을 정해 놓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반나절 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 보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 고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맑게 웃던 조문객 맞는 사람과 정신없이 수금을 하 듯 흰 봉투를 챙기던 사람은 조금 지쳤는지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었다. 아 니, 조문객의 발길이 끊긴 것 같은데 그래서 얼굴이 굳어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흐릿하게 풍겨져 오는 향 내음 마냥 내 머리를 스쳤다. 이 별을 떠난 이는 영안실 어느 어두운 곳에 누워 있고, 그의 가족들은 영안실 밖에서 떠난 이의 명예를 거둬들이듯 하얀 봉투 챙기기에 바빴고 넋 나간 나처럼 그의 가족들은 하나 둘 짐을 챙기며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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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 1 *


내 나이 27세, 그리 오랜 세월을 산 나이도 아닌데 이렇게 갑작스레 와 닿는 보이지 않는 걸림돌들 때문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끔 한다. 평탄한 삶을 살 아가는 사람들은 하찮은 일에도 쉽게 좌절을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지만 그 말은 어 디까지나 부유층 혹은 마음 편한 계층들에게나 통하는 말일 뿐... 언제나 어렵게 사는 계층들에게는 하찮은 일에도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게 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매일 반복되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조금 더 어려운 일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대처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 나의 삶도 평탄치 만은 않 았단 말인가. 그 질문의 대한 답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내 삶에 자 신이 없어질 때면 지나온 내 삶의 길을 뒤돌아보게 된다. 


* 2 *


모두가 잠들어 있는 중환자 실에서 눈을 뜨고 누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지나온 내 삶이 영화 필름처럼 쉴 새 없이 머리 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이라 면 오만가지 생각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이미 정신을 차리 고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있는 터라 지난 일들의 잔해들이 병실 밖에서 불어 대는 바람처럼 이리 저리 휘몰아치고 있었으며 앞으로 헤치고 나가야 할 나의 일들도 혼미 해지는 내 정신처럼 병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진정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 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 실에 누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분이 참으 로 이상했다. 귓전을 맴도는 의료기기의 소리하며 내 코에 꽂힌 산소 줄에서 나오 는 차가운 공기하며 오묘하게 전해지는 느낌이 참으로 새로웠다. 아니 조금은 두려웠 다. 그리고 새벽마다 영안실로 실려 나가는 자들을 보며 또다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한다. 


* 3 *


오래 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서던 산책길에 오늘은 나 홀로 우두커니 서서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바람만이 내 옷깃을 파고들 뿐, 밀려드는 외로움은 사라 진 길과 상반되듯 또렷이 내 눈앞에 펼쳐져 발길을 멈추게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 이다. 옛 일을 돌이키고 싶어 애를 쓰면 그 일들은 모두 바람으로 변하여 내 곁을 떠 나고 마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또 여기서 산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 을 하게 된다. 문인(文人)을 꿈꾸며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장점이 있다면 미래를 향해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빼 놓을 수 없는 장점으로 꼽을 것이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본능에 의해서만 생(生)을 유지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본능을 제외하고 법과 규 칙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 론 인간들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 은 동일할 것이다. 그 중 나도 인간에 속하므로 한때 꿈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가 꿈꾸어 오던 것은 나의 생각과 나가서는 어떤 이야 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인이 되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지적(知的)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內面) 세계는 그 어떤 이들보다 썩을 대로 썩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 을 동경(憧憬)하며 나는 지금껏 살고 있다. 진정한 문인들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홀로 앉아 많은 세월을 고민해 왔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일인가. 일부 문인들의 생활 을 흉내내며 조금은 풀린 생활을 하면서 학창시절을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공부보다 는 삶의 현장에서 얻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많은 곳을 배회하고,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도 몇 년을 계속 정신을 못 차리다가 성격 잘 맞는 후배를 만나 또 얼마간의 방황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 많은 방황의 날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해 여름, 후배와 나는 새벽 잠 안자고 나와 동네 교회란 교회를 모두 찾아다니며 우 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찾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고생 끝에 우리가 찾던 교회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우리가 찾던 교회의 모습은 별게 아니고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도록 문을 개방해 놓은 곳과 십자가 밑에 밝혀 놓은 불이 제 몸 을 태우며 사라지는 촛불이 밝혀져 있는 곳을 찾던 것이었는데, 그 많던 교회는 단단 한 자물쇠로 문이 잠겨 있었고 한 곳은 문은 잠긴 채 십자가 밑에 밝혀 놓은 불이 초가 아닌 초 모양의 전구였다는 사실이 우리 둘을 실망에 빠뜨렸다. 그 후로 우리는 교회를 마음 편히 누구나 찾아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단, 하 느님을 믿는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음) 그런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해놓은 낙서를 서로 돌려보기도 하며, 이야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현실을 봐야 진정한 문인이 된다는 근거 없는 생각을 갖고, 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런 탓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방황을 하는 듯하다. 다행히 나 와 방황을 하던 후배는 모 대학 문예 창작과에 들어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 만 나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문인이 되는 것을 꿈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도 그 꿈이 내게 살아 숨쉬고 있기에 포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언제고 꼭 진정한 문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희망을 가 져 본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방황한 시절만큼 큰 기쁨을 내게 안겨 줄 것이라는 것을 어리석지만 믿어 본다. 무엇이던 꿈을 꾸는 것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질 때까지 밀고 나가자.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꿈은 꼭 이루어지 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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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을 꿈꾸며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장점이 있다면 미래를 향해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빼 놓을 수 없는 장점으로 꼽을 것이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본능에 의해서만 생(生) 을 유지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본능을 제외하고 법과 규칙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들의 능력은 저마다 다 르기는 하지만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동일할 것이다. 그 중 나도 인간에 속하므로 한때 꿈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가 꿈꾸어 오던 것은 나의 생각과 나가서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인이 되 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지적(知的)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內面) 세계는 그 어떤 이들보다 썩을 대로 썩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동경(憧憬)하며 나는 지금껏 살 고 있다. 진정한 문인들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홀로 앉아 많은 세월을 고민해 왔었 다. 내가 고등학교 때 일인가. 일부 문인들의 생활을 흉내내며 조금은 풀린 생활을 하면서 학창시절을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공부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얻는 것이 더 중 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많은 곳을 배회하고,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도 몇 년을 계속 정신을 못 차리다가 성격 잘 맞는 후배를 만나 또 얼마간의 방황을 하던 때가 있었 다. 그 많은 방황의 날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해 여름, 후배와 나는 새벽 잠 안자고 나와 동네 교회란 교회를 모두 찾아다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찾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고생 끝에 우리가 찾던 교회는 보이지 않 았다. 그 때 우리가 찾던 교회의 모습은 별게 아니고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도록 문을 개방해 놓은 곳과 십자가 밑에 밝혀 놓은 불이 제 몸을 태우며 사라지는 촛불이 밝 혀져 있는 곳을 찾던 것이었는데, 그 많던 교회는 단단한 자물쇠로 문이 잠겨 있었고 한 곳은 문은 잠긴 채 십자가 밑에 밝혀 놓은 불이 초가 아닌 초 모양의 전구였다는 사실이 우리 둘을 실망에 빠뜨렸다. 그 후로 우리는 교회를 마음 편히 누구나 찾아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단,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음) 그런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해놓은 낙서를 서로 돌려보기 도 하며, 이야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현실을 봐야 진정한 문인이 된다는 근 거 없는 생각을 갖고, 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 탓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방황을 하는 듯하다. 다행히 나와 방황을 하던 후배는 모 대학 문예 창작과에 들어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나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문인이 되는 것을 꿈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하 지만 지금도 그 꿈이 내게 살아 숨쉬고 있기에 포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언제고 꼭 진정한 문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희망을 가져 본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방황한 시절만큼 큰 기쁨을 내게 안겨 줄 것이라는 것을 어리석지만 믿어 본다. 무엇이던 꿈을 꾸는 것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질 때까지 밀고 나 가자.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꿈은 꼭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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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는 병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을 까맣게 잃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 다. 다행히도 잃었던 내 자신이 나도 모르게 되찾아 오니 안심은 되었지만, 내 자신 을 잃을 때면 불치(不治)의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혹은 내 자신을 학대(虐待)하며 세상을 외면(外面)하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지난 것 일까. 이젠 내 갈 길을 찾을 때도 된 것 같은데 그 길의 그림자조차 눈에 띠질 않아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중간에 서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황을 할 준비를 한다. 그 방황에서 얼마나 많이 헤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면서도 방황을 할 준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일는지... 그러나 조금 달리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다. 가야 할 길은 훤히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테니까. .. 많은 세월 동안 나를 잃는 병에 걸려 살아오다, 이제 내 앞길을 헤쳐 나가야 한 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 병의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지고 언제 그 병이 유발되어 그 로 인해 많은 세월을 방황할 생각이 하니 눈앞이 어두워진다. 만일 병이 완치가 되어 내 앞길을 헤쳐 나간다 하더라도 언제 그 후유증이 제발 되어 나를 잃게 될지 모른다 는 마음에 병이 완치되기도 전에 나를 잃을 것만 같다.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씩 마 음의 병을 앓으며 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를 잃는 병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마음의 병이야 세월이 흐르고 나면 점점 나아지지만 나를 잃는 병은 세월이 흘러도 치유가 되지 않으며 한번 앓고 나면 나를 되찾는 작업부터 다시 해야 하니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 그러나 나는 그 병을 치유해야 한다. 그 치유 방법이 어떤 것 이 되던, 나는 꼭 그 병에서 벗어나야 하고 내 앞에 열린 길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 다. 그럼 어떻게 그 병을 치유할 것인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았다. 우선 나를 잃게 되면 무작정 여행을 떠나 아무도 없는 바다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나를 완전히 잃는 것이다.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도록 아무런 미련 없이 나를 바다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를 괴 롭히던 병과 또다른 나는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병 을 고치고 나면 또 하나의 병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다. 그 또 하나의 병 은 다름이 잃어버린 나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고 그것에 아파하지는 않을까 하는 병이다. 이렇게 나는 나를 잃는 병과 그 병이 치유되고 찾아 올 또다른 병을 걱정하며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병들이 있지 만 나를 잃는다는 병만큼이나 잔인하고 후유증이 강한 병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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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떠난 사람은
하루가 끝이 나고 어둠이 밀려든 지금, 내 주위는 조용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 겐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언제나 내 곁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 를 둘러 싸 있곤 했었다. 그리고 난 그들 속에서 하루를 맞고 끝내며 평탄한 삶을 살 아 왔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 철 지난 호숫가에 처량하게 홀로 앉아 있는 철새의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내 모습이 어 느 날 문득 돌아보니, 무척이나 야윈 모습으로 변하여 있었다. 이렇게 변하게 된 이유 는 과연 무엇일 까. 아무도 없는 방안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해보지만 그 해답은 찾 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왜 넋 나 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지...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내 주위에서 머물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북적이는 공간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누구나 넋 나간 사람들의 표정을 지으며 야위어 갈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 곁을 하나 둘 떠났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을 하겠지만 난 그것 에 대한 명백한 답을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잘 못 했고 무 엇을 서운하게 했는지 솔직히 알 수가 없어서이다. 어떻게 들으면 참으로 건방진 말 이며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만큼 내 마음을 대신할 그 무엇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속 야위어 가는 내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 지만 그럴 수만은 없다. 근본적으로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내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 둘 멀어져 가는 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을 닦고 내 안을 들여다보는 눈도 더욱 깨끗이 닦고 나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게 해서 해결책을 찾는다면 이미 멀어진 사람들은 냉정히 잊기로 해 야 한다. 애써 그 사람들을 내 곁으로 끌어들인다 해서 예전과 같이 친근하게 지낼 수 없다면 그렇게 까지 그 사람들을 내 안으로 끌어들일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번 잊혀진 사람은 나에게서 이미 마음을 끊어 버린 사람이므로 굳이 그들을 못 잊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를 사귀는데 있어 장애 조건이 된다 하더라도 내 게서 멀어지기 전까지는 내 마음을 모두 주되, 한번 떠난 사람은 냉정히 잊기로 하 자. 이미 내게서 멀어졌던 사람은 아무리 내가 포용력 있게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 은 나만이 베푸는 헤픈 사랑에 불가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내가 냉정하리 만큼 이나 인색해 보이겠지만 하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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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봄이 오지 않는다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하는 우리 나라, 그 중 어느 시골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에 태 어난 나는 우리 나라의 어느 한구 석조차 잘 알지 못한다. 세계를 통틀어 우리 나라만큼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도 없다고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 들어 왔 으나, 나는 그 사실이 정말인지도 믿지 못하며 살아왔다. 다른 나라를 가 보기는커녕 우리 나라의 좁은 땅도 제대로 가 보질 못했으니,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 고향만큼은 사계절의 변화가 확실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봄이면 따스 하고 여름이면 덥고 가을이면 시원하며 겨울이면 눈물이 나도록 추운 것을 보면 사계절이 분명하게 바뀌는 내 고향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 나라의 다른 곳, 강릉이나 부산과 같은 곳의 사계절을 접해 보지 못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게 여겨지지만 그곳들도 분명 계절의 변화가 확실할 것이라고 믿 는다. 
내가 특별히 강릉이나 부산을 지명한 것에는 큰 의미가 없다. 단지 그곳의 바다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펼쳐질 풍경이 궁금할 따름이다. 끝없이 넓은 바다에 하얀 눈이 쏟아지는 것과 투명한 빗줄기가 쏟아지는 때의 느낌, 햇살이 바다 위에 떠다니는 풍경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고향의 7월 어느 저녁의 바람 느낌과 그곳에 서 느끼는 7월 어느 저녁에 바람의 차이가 어떤지 궁금해서이다. 물론 그곳에 사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 다면 '궁금한 것도 참 많다'라는 얘기를 하겠지만 나 에 겐 그것이 참으로 커다란 궁금증이다. 한 지역에서 27년간 계속 살다 보면 당연히 찾아 드 는 궁금증일 것이다. 그동안 살던 고향에는 내가 자주 찾던 강이 있는데 그곳엔 계절이 바뀔 때, 또는 하루해가 뜨고 질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 다. 그 느낌을 말과 글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한 곳 과 타 지역의 계절 변할 때와 하 루해가 뜨고 질 때의 느낌이 어떤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러나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곳 은 서울 어느 좁은 동네, 몇 달간 서울에 있는 병원 신세를 짓다가 지금은 친척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을 보내고 있지만 이곳의 봄은 내가 느끼기엔 진정한 봄이 아니다. 부는 바람도 예전에 내가 느끼던 바람이 아니고 햇살도, 그 무엇도 봄의 대 한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단지 해 묵은 겨울이 뿜는 탁한 공기처럼 느껴질 뿐... 하지만 요즘 밤 9시 뉴스에서는 봄이 온 들녘을 뒤덮었고 서울에도 찾아왔다고 야단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서울엔 봄이 오지 않는다. 봄이 지나다 떨구어 놓은 바람만 간간이 불어 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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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1
* 1 *


초봄이 온 거리와 들녘마다에 비구름으로 인해 잔뜩 흐린 오늘 같은 날, 나는 무엇을 기다 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오후 시간, 하지만 내 마음은 깊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여느 날과는 다른 분위기가 흐르는 오 늘 같은 날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아마도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온 이유에서 일 까, 아니면 너무 헛되게 살아온 이유에서 일까... 나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지금 의 한가로움이 행복할 뿐이다. 아 직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고 조금 가라앉은 내 마음을 더욱 차분하게 만들고 있다. 그 리고 시간이 흘러 소리 없이 비가 내려 준다면 나는 오늘을 내리는 비와 함께 조용히 마감하리라.

* 2 *


봄이 더욱 무르익는 비가 창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의 비가 온 산과 들녘을 적시며 내 가슴속까 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겨울을 잃고 지낸 지난 계절의 끝으로 봄비가 내린다. 하지만 나는 내리는 비를 보고 봄비라 말할 수 도 느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지금 내리는 비의 향기와 부는 바람의 촉감이 예전에 느꼈던 것들과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 기 때문이다. 검게 타 버린 듯 내리는 빗물과 무엇인가 썩어 들어가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 러 진정한 봄이 찾아와 비를 내린 다고는 볼 수가 없다. 몇 개월 동안 고향을 떠나서 새롭게 맞는 봄의 느낌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올해의 봄을 맞이하지 않으 리라는 생각도 같고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두 개의 계절을 잃게 되는 샘이 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계절이든 자기 마음으로부터 맞이하는 것이므로 이번 봄도 나는 맞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비록 각종 매체에서 봄이 왔다고 말들을 해대도 내겐 봄이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실망은 하지 않는다. 현실보다 조금 늦게 봄이 찾아 든다 하더라 도 뒤늦게 찾아 든 나의 봄은 어느 해 봄보다 화려할 것이라 믿기에 나는 마음을 편히 갖을 것이다. 모든 계절은 자기 마음 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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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1
* 1 *


97년 4월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는 날 밖으로 나섰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잃고 봄이 온 다고 하는 97년의 4월 초,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느낌들이 간간이 불어 대는 바람에 섞이여 이리 저리 휘날리며 거리 를 채우고 있었으며, 며칠 전부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흐리고 봄을 상징하는 따스한 햇살은 하늘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 다. 그동안 야윈 몸으로 겁 없이 나선 거리라 무척이나 낯이 설고 두려움마저 내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예전과 같이 밝게 보였으 며, 때론 세상 행복을 다 갖고 있는 듯한 사람도 내 눈에 띠었다. 그리고 잠시 들른 병원 로비에선 알코올 향보다는 오래된 목욕탕 냄새가 코를 자극 시켰다. 모든 것이 새롭다. 아니 낯설다. 어찌 보면 새롭게 다가서 는 것들을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 동안 잃어버린 생활 패턴을 나도 모르게 상실하고 거기에서 오는 후유증으로 두려움이 내 안에 배인 것인지도 모른다. 

* 2 *


어느 날인가, 깊지 않은 낮잠을 자다 요란히 우는 새 소리에 눈을 뜨고 그곳을 찾아가던 때 가 있었다. 그때는 태양이 시위하 는 여름이었으며, 장마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인 것으로 기억한다. 여느 해 같으면 그런 시기에는 매미의 울음과 마 른 바람 소리로 가득 차 있었을 테지만 그날 만큼은 주위가 조용하였으며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 소리 였다. 어슴푸레 잠에서 깨어난 후에서인가, 너무나 새들의 울음소리가 맑아서인가, 그곳으로 가고 싶어지는 충동이 일어 아무 도 모르게 집을 나섰던 때가 기억난다. 집을 나와 새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귀 기울이며 한참을 헤매이다보니, 동네 어귀 뒷산 작은 소나무가 떼지어 뻗어 있는 곳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뛰어 그곳으로 갔을 때, 새들은 모두 놀라 날아가 버리고 정적과 함께 남은 것은 죽은 토끼 한 쌍 뿐이었다. 마 치 잠을 자듯 곱게 누운 토끼 곁 에서 그토록 많은 새들이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풍경은 나에게 무엇을 안겨 주려 했던 것이었는가... 나의 이기적인 삶 앞에 서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려 잠을 자던 나를 그곳까지 불러낸 것이 었는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비록 잠결에 보았던 풍경이었지만 지금껏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을 보면 참으로 감사하다. 언제고 다시 그런 아름다운 풍경 이 내 앞에 펼쳐질지 걱정 또한 생기지만 이젠 그런 풍경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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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구상(構想)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지도 미련을 갖지도 않기로 했다. 많은 세월 동안 나는 지난 세월을 그리며 현실 세계를 도피하듯 살아 왔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시간들과 홀로 지내며 자유를 만끽하며 살던 젊은 날의 시절을 못 잊고 지금껏 되돌아 갈 수 없 는 날들을 그리며 살아 왔다. 이렇게 살던 나에게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 편히 산다고 조금 은 비아냥거리듯 말을 했고 난 그 말을 들으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내 방식대로 살아 왔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공부보다는 산이나 강을 찾아다니 는 게 좋았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 내 지난 세월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살던 시절 엔 돈과 명예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말로 내게 다가 왔었고 저마다 살아가려는 아니, 돈 한 푼에 제 양심과 정직 등을 접어 두 고 살아가는 사람들 볼 때마다 많은 안타까움과 때론 이해마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 서 내가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 왔 다거나 나를 밀어 주는 그 누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 주위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는 안 계시고, 형 한 분이 먼 타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 내 현실 속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내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보수적 (保守的)이며 꽉 막혔는지도 모른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 것만 같고 때로는 이기주의(利己主義)적 이념(理念) 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도 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가 바라보던 그 사람들 속에 나를 묻고 살 아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감옥 과 같은 직장과 사람의 탈을 쓴 그 누구의 지시(指示)를 받으며 종이에 불가한 돈이라는 것 을 벌려고 내 양심과 그동안 쌓아 온 모든 내 안의 것들을 모두 포기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나 밀려드는 두려움에 나는 잠 시 멈칫거린다. 세상 사람들과 어 울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내 잃은 정신적 자유에서 오는 후유증, 그 모든 것이 나를 두 렵게 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세 상에 적응하는 법부터 배워 둘 것을...
지금 나는 하얀 병실에 누워 있으며, 얼마 후면 퇴원을 하고 세상 속으로 나를 파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 도 미래 구상(構想)을 해야겠다. 내가 외면(外面)한 세상 속에 나를 묻고 살아 갈 수 있는 법을 구상해야겠다. 그러나 나에겐 시간이 많이 주어져 있지가 않다. 세상을 적응할 수 있는 법을 구상하기엔 너무나 시간이 짧다.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구상을 해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짧다 해도 세상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처음부터 차분히 내 미래 구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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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1
* 1 *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올해도 봄을 재촉하는 비가 거리와 높은 아파트 그 리고 많은 자동차를 적시며 온 종 일 내렸다. 그리고 나는 보온이 잘 되는 병실 안에 누워 창문 밖으로 흐르는 비를 바라보 다 잠이 들고, 때론 꿈속에서 빗속 을 거닐기도 하며 '97년의 봄을 맞이했다. 여느 해 같았으면 이맘때쯤이면 물안개 자욱히 드리워진 강변을 찾아가 갓자란 수 초의 향을 맡으며 봄을 맞이하고 있었겠지만 올해는 알콜 냄새 배인 병실에서 봄을 맞이했 다. 간간이 찾아 드는 통증과 더불 어 봄이 찾아온 것이다. 한참을 누워 있다 병실 밖으로 몸을 옮기면 가슴속까지 스미는 싱 그러운 바람의 느낌, 그것에 감사 를 한다. 비록 그 바람이 예전에 느끼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누워 꿈을 꾸던 방안의 무엇 보다는 훨씬 신선하기 때문이다. 

* 2 *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채 걷히지 않은 구름 사이로 한 마리 이름 모를 새가 지나가면서 희미한 나만의 추억을 그림자로 남겨 놓고, 나는 어느새 그 그림자 안에서 꿈을 꾼다. 무엇을 꿈꾸는 것인지조차 알 수는 없 지만 그동안 그리던 것들을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구름이 걷히고 그 추억의 그림자도 모두 사라지고 나면 나는 또 다시 복잡한 현실 안에 눈을 뜬다. 그리고 나는 기한 없이 오랜 세월 동안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어릴적 자 주 찾던 강변에서 또는 숲 속에서 맡던 향기를 마음껏 느끼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내 더러워진 정신으로 맡을 수 없는 향기를 느끼고 싶다. 

* 3 *


욕심 없이 뛰노는 아이들의 눈 속에는 너무나 투명한 향기가 있다. 그 향기를 말과 글로는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 그 아이들의 눈 속엔 투명한 향기가 있다. 그 향기는 나처럼 때묻은 사람들에게만 느껴지는 것 인지도 모르겠으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그 아이들 눈 속의 향기를 느끼며 내 어릴적을 돌아 볼 수 있 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 가. 만일 나 같은 사람들이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의 눈 속에서 투명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에 커다란 감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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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기
무엇인가에 빠져 한가지 일에만 정신을 쏟으며 행하는 것만큼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쉬운 일이든 어려 운 일이든 상관이 없고 그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만큼 보람 된 것 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아는 터에 나도 오랜 세월을 한가지 일에만 정신을 쏟아 왔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 결과가 분명 치 않게 되어 가고 있지만 지금껏 그 일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젠 그 일에 의욕을 잃어 가고 있는 듯 느껴진다. 아니 보다 진보된 일을 찾고 싶어진다. 다행 이 내가 찾는 일이 지금껏 해 온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되지만 처음부터 일을 다시 할 생각을 하니 걱정부터 앞선다. 그러나 누구든 그럴 것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이 들 면 분명히 걱정부터 앞설 것이다. 우리가 많이 들어온 '세상엔 쉬운 일이 없다' 라는 말을 떠올리면 앞으로 내게 펼쳐질 일 들에 대해서 조금은 안심을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안심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전에 하던 일이 실패해서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경우와 실패는 안 하고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경우, 또는 예전부터 하던 일과 관계가 있어 쉽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경우, 이렇게 세 가지 종류에 따라 안심을 얻는 정도가 매우 다르다. 나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므로 조금 다 행이기는 하나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거듭나기'라 말을 한 다. 누가 어떻게 거듭나기를 해야 하는가 !
거듭나기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자, 또는 새롭게 일어서려 하는 자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 를 위해서는 일단 목적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한 목적은 대략적인 것이 아닌 매우 구체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 일의 대한 미래마저 꿰뚫어 보고 계획을 세 워야 한다. 만일 뚜렷한 목적 없이 계획을 세우고 거듭나기를 하려 한다면 자칫 일어설 수 없는 위험한 상태까지 갈 수가 있 다. 뭐든지 그렇겠지만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왜 이 일 을 해야 하며 이 일이 내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까지 파악을 하고 난 다음 그 일을 추진해 나가는 정신이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는 지금 거듭나기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일들과 관련된 진보된 일을 하기 위해 마음 다 지기부터 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그 일을 해서 얻을 것들과 잃을 것들을 계산하며 마음 다지기를 하고 있다. 아직 거듭나기 를 하지 않은 상태라 내 정신이 산 만하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나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나는 지금 거듭나기를 하 기 위해 마음 다지기를 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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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배우는 법
나는 그리 오래 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파란 나이의 어린애도 아니다. 이제 삶의 대해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는 나이를 가진 사람이다. 지나온 나의 삶은 그리 평탄치 만은 않았으나 어떻게 보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오히려 그 평탄치 않은 세월 속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말을 해도 거짓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해 전 일인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선 장터 안에서 느꼈던 잊지 못할 느낌들이 기억이 난다. 그곳엔 없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다 펼쳐져 있었고 그 물건들 앞에는 주름진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오가는 이들을 붙들기에 바빴다. 마음 약하신 우리 어머닌 그 많은 상인들이 붙들면 그 자리에 서서 물건을 조금씩 구입하시며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어린 나는 그 모 습에 덩달아 기뻤고 한 손은 어머 니 손에 이끌리며 또 한 손에 있는 내 얼굴보다 큰 솜사탕을 보며 더욱 즐거워했다. 그래서 일까, 그때 바라본 세상은 어머니 마음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모든 욕심과 이기적인 삶의 모습은 찾기가 어려웠었음을 이제와 느낀다. 물론 그때 내 나이 가 어려서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것만이 아니라고 느껴진 다. 진정으로 세상을 정직하게 살 던 사람들을 대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세상을 정직하게 사는 것이 란 어떤 것인가. 그 답은 그리 어 렵지만은 않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만 이득 되는 것만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 더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 을 만큼 아름다워 질 것으로 보인 다. 그러나 삶의 대해서 배워야 하는 내 눈에 비친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만은 않다. 저 마다 제 이익만을 위해 눈을 크게 뜨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겉모습만이 내 눈에 비치 니 나는 진정 무엇으로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나는 두렵다. 앞으 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 씬 많이 남은 것도 같은데, 지금의 세상사는 법을 배우고 삶을 살아간다면 지금 이기주의적 병을 앓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 른 것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 홀로 살아가야 할 날 들이 걱정되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배워 온 것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법을 배운 것인데 이렇게 홀로 되 어 버린 내 주위엔 모두 나를 외 면하는 사람들뿐이니... 그러나 삶을 배우는 법을 세상에서 배우지 않기로 했다. 나의 꿈과 어머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내 스스로 터득하기로 했다. 이 세상에선 더 이상 배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삶을 사 는 법에 대해서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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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맞기
* 1 *


낮 동안 쉴새 없이 무엇을 찾아 헤매었다. 그 무엇이란 존재는 내 안에 숨은 그 무엇일 수 도 있고 현실에서 급급한 그 무엇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온종일 헤매었으나 그것은 찾지 못하고 이렇게 밤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어린 날 즐겨 하던 숨 바꼭질, 그러나 숨어 버린 친구를 끝내 찾지 못하고 홀로 집으로 향하는 마음, 지금 바로 그 러한 마음이다. 지금까지 살아오 면서 쌓아 왔던 것들을 한순간 잃어버린 기분... 그 때문인가, 이 밤이 더욱 길게만 느껴진 다. 멍하니 이렇게 책상 앞에 쭈그 리고 앉아 하얀 백지(白紙)장 속만 들여다보며 밤을 잊으려 애도 써 보고 그러다 안되면 나에게 띄우기 위한 편지도 써 본 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미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잃은 터라 나에게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생각 없이 밤이 지나 가기를 바랄 뿐이며 아침이 오는 동시에 잃었던 내 모든 것들이 돌아와 주길 기 대할 뿐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 늘밤은 너무나 긴 터널처럼 느껴진다. 

* 2 *


마음의 새벽을 맞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나처럼 오염된 마음으로는 진정한 새벽을 맞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現 代)의 발달된 문명(文明) 속에서 오염된 내 자신을 깨끗이 씻기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오염되는 나를 발견한 다음부터는 나를 포기하고 마음으로 맞는 새벽 또한 포기했다. 이러한 내 자신이 거울에 비추어질 때면 참으로 부끄럽지만 어찌할 수 없 다. 그것은 이미 내 자신이 나를 포기했기 때문이며 또한 마음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자신을 순수했던 그 옛날로 돌이킬 수 없단 말인가. 그 난제(難題)를 가지고 나는 또다시 머리를 굴린다. 날로 발달되어 가는 문명, 그리고 그 여 파로 생기는 오염된 자연, 그것을 바라보고 자라는 나를 비롯한 우리. 결론은 짧게 나온다. 이미 나를 순수에서 잃었다면 결 코 되돌릴 수 없다는 답이 나온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정화(精華)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예전과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돌 이키기엔 힘이 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 또한 마음에 달려 있다. 자기를 오염된 마음의 숲 속에서 구해 내겠다는 신념과 노력을 꾸준히 갖고 산다면 어느 정도 마음의 정화가 될 것이며, 싱그럽진 않아도 상쾌한 새벽을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아직 마음의 정화가 되지 않 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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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의 음악을 들으면...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는 우울증 또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며칠씩 앓다가 나를 잃어 버리고 헤매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리고 가을이 아니어도 로보의 음악을 들으면 그 병이 재발(再發)하여 나를 괴롭힌다. 아마도 어느 해 가을, 로보의 음악을 들을 때쯤 그 병에 걸린 듯싶다. 일단 그 병이 재발되면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지난날들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 에 모든 의욕을 잃게 된다. 이러한 병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나 의 경우는 좀 심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그 병을 치유하고 싶지만은 않다. 때때 로 찾아와 맥을 못 추게 하는 그 상상의 병을 치유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앓는 병의 증세를 가만히 보면 누군가를 그리는 데서 오는 미련 또는 아쉬움과 같은 조금 따스한 느낌을 가진 세균들의 반란(反亂)이다. 어찌 보면 마음 편한 사람들이나 걸리는 고급 병인지도 모르겠으나, 그 병을 앓고 난 후엔 내 마음은 더욱 성숙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 고급 병이든 아니든 간에 그 병에 걸린 것을 감사하게 생각을 한다. 만일 내가 그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이 험하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아마도 미쳐 버렸을 지도 모 른다. 거침없이 밀려드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고문 속에서 나를 완전히 잃어 버렸을지 도 모른다. 물론 내가 때때로 앓는 병도 나를 잃게는 하지만, 그 병으로 잃는 것과 세 상의 보이지 않는 고문으로 나를 잃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병을 앓다가 나를 찾은 뒤 깨어나면 보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묵은 기억은 모두 잃는 상쾌함이 있지만 세상의 고문으로 나를 잃는 것은 그동안 쌓아 온 아름다운 기억 모두를 잃는다는 커다 란 차이가 있다. 그런 것을 볼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인 듯싶다. 내 주위엔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볼 수없이 살다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현 실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들에게도 누군가를 그리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그리움과 아쉬움을 아무런 의미 없이 흘려 보낼 확률이 많다. 그리고 자신을 잃었다고 그들은 마음 아파하며 이 세상을 삐뚤어지게 바라보려는 적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자신이 간직한 그리움들이나 아쉬움 들을 모두 마음 한켠에 모으고 수시로 꺼내어 보며 느낄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보라고... 나를 잃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내 그리움 속에서 나를 잃는 방법을 택하여 수시로 나를 잃고 새로운 나를 찾는 기회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나를 잃고 깨어나면서 새로운 나를 찾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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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모진 세상을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을 우리는 만나고 그들과 더불어 살려는 노력 과 때로는 그들을 앞질러 가려 애를 쓰기도 하지만, 정작 내 마음에 들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 가진 것 모두 주고픈 마음이 드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누구를 알게 되고 그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을 흔히 인연이라 부르곤 한다. 옷깃이 스쳐도 인연이라는 우리 옛말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너무나 신기한 일이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살아간 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나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주었으며 지금도 가끔씩 마음 좋은 사람들과 알아 가며 살아간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간 혹 사람 같지 않은(내 막힌 마음의 눈으로 본 사람) 자들을 만나 답답할 때도 있지만 아 직 그런 자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기에 살아갈 만하다. 인연이란 어차피 좋건 나쁘건 한번 접하게 되면 내가 하늘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내 마음 한켠에 간직해야 하는 것이므로 누구 를 사귈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겉모습보다는 마음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솔직히 누군가의 마음을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게 사실이지만 조금만 노력을 한다면 가능하 리라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부터 돌아보고 나의 단점부터 고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럼 나는 내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나도 잘 알 지 못하는 문제이 다. 내 뒤를 돌아보고 나의 단점을 찾은 후에 누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겠는가. 그러나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비록 실천을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구를 알게 되고 그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 음을 가져야 한다. 만일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물론 다른 사람들도 존재를 한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면 서로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삭막해지는 세상에 적응하기도 어려운데 주위에 아무도 없고 나 홀로 우두커니 서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 인연이라는 것이 있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를 만나 그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루어지는 수없이 많은 인연을 나만의 추억 앨범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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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을 앞두고
'96년 가을의 시작을 끝으로 한 계절을 잃고 '97년을 맞이한다. 비록 병원에서 맞는 봄이기 는 하지만 가을에서 봄으로 건너뛰는 현상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발 을 딛고 살아야 하는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 온 듯하다. 아직 내 마음과 몸에는 병 이 남기고 간 후유증이 간간이 고개를 들어 나를 괴롭히지만, 이젠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며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지나 온 병원 생활을 돌이켜 보면 너무나 허탈한 시간을 보낸 듯하다. 내 가슴 한켠에 무엇 하나도 남겨 놓지 못한 점과 그동안 나를 잃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허탈하다. 이제와 후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다. 이 곳에 머무르면서 조금 더 밝게 생활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몇 명의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 그들의 따스한 정을 끊고 퇴원할 생 각을 하니 마음이 괴로워진다. 누구나 한번씩은 몸이 아파서인가 그들은 나의 마음을 꿰뚫 어 보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동정에서 우러나는 행동을 나에게 보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만 나는 지금껏 그들이 베풀어준 도움을 하나의 동정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만난 몇 명의 고마운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을 할 것이다. 간혹 자기만 알던 자들이 떠오르겠지만 얼마 후면은 아름다운 추억 속의 사람들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부 디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계속 그들의 이기적인 모습만 떠오른다면 얼 마나 괴롭겠는가... 어차피 한번의 만남으로 헤어지는 사람들이지만 그 만남 역시 인연이라 는 것에 속하는데... 그 인연을 악연(惡緣)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제 내일이면 그들과 헤어지고 또다른 곳으로 몸을 옮겨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길다면 참으로 긴 세월 동안 이 싸늘한 곳에서 숨을 쉬며 지낸 시간들을 뒤로하고 세상 속으로 뛰 어 들어야 한다. 그에 앞서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조금 슬퍼지니 마음이 착잡하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든 사람들인데, 그러나 새로운 마음을 가지 고 이곳을 떠나야 하리라. 그동안 못 했던 일들과 잃어버린 내 자신을 찾기 위해 마음을 다 져야 하겠다. 퇴원을 앞두고 바라보는 이 병실 안이 무척이나 따스하다. 1997년 04월 09일 밤 11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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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으론 세상을 모두 볼 수 없다
지금 내 눈 안에서는 여러 형태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저마다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과 그들의 발자국 소리, 먼 하늘 밑으로 거대한 몸체의 비행기 온힘을 다해 날아가는 모습과 그 소리... 이렇듯 세상 밖에서는 끊임없는 풍경과 거기 맞는 소리가 쉴새 없이 들리며 시간을 따라 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그 짜여진 틀 속에서 벗어날 엄두조 차 내지 않고 순한 양처럼 때론 멍청한 애완 짐승처럼 그 틀 안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며 살 아간다. 마치, 펼쳐진 풍경과 지금도 흐르는 시간이 이 세상의 전부인양 생각을 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진정 그런 것들이 세상 전부의 모습이며, 불변(不變)의 것인가! 솔직히 난 그것에 뭐라 답할 수 없다. 지금 이렇게 창 밖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조금 배부른 생각들을 하고 있 을 뿐,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과 이 세상의 광활한 그 무엇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 게 해야 진정한 세상의 모습을 모두 바라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 전에 나를 바라보는 법부터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나는 나를 알지도 못한 채 주위 사람들과 이 세상을 원망하며 독선(獨善)적으 로 살아온 듯싶다. 조금 달리 보면 이기적인 사람의 탈을 쓰고 남을 경계하며 살아온 것이 다. 그런 삶을 살아온 터라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어느 누구의 눈 못지 않게 썩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우두커니 서서 창밖에 펼쳐진 풍경만을 보며 세상 모두의 모 습을 바라보는 듯 온갖 잦은 생각을 하며 이 세상을 나름대로 논(論)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얼굴이 뜨겁다.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인양 느끼는 것 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젠 그 수치심을 벗기 위해 나를 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보다 많은 곳을 바라볼 줄 아는 눈도 깨끗이 닦아야 하고 그것을 통해 전해져 오는 많은 것 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도 수양해야 할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조금 성숙된 모습의 나를 바라 볼 수 있을는지, 그리고 세상이 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을는지 조금은 의문이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나만을 생각하 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지내 온 터라 다시 세상의 모두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걱 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지금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을 새롭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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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려 하기 전에
지난 몇 개월 동안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아무런 일도, 내가 즐겨 하는 공상 (空想)마저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려 버리고 말았다. 비록 그 시간들을 모두 병원이라는 곳 에서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앞으로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앞날이 막막하고 헤쳐 나가 야 할 일들이 조금은 두렵게 다가오곤 한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일까, 아니면 그 동안 내가 너무 약해진 탓일까. 솔직히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은 병원에서 나와 이렇게 내 둥지 아닌 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얼마 후 되돌아갈 나의 삶터와 엉망으로 변 해 있을 내 둥지를 생각하니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가슴이 울렁거린다. 병원에서 퇴원하 기 며칠 전부터 생각을 해 오던 나의 미래의 대한 꿈이 지금의 내게 비추어 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루기 힘든, 말 그대로의 꿈이 되어 있을 뿐이다. 그토록 자신 만만하게 설계하던 것들이 이제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변하여 나를 흔들리게 하다니 어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힘이 들었을 때 세운 계획이 조금 나아진 지금에 와서 무너질 수 있다니 이것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란 말인가. 그런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처해 있 을 때 많은 생각을 하며 희망을 같고 그것을 이루리라는 굳은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형편 이 조금 나아지고 나면 그 때 가졌던 희망을 조금씩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옛말에 '개 구 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봐도 우리네 인생이 다 그런가 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형편이 전보다 나아져서 배부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그 반대 일수도 있다. 이제 내 오래 전 둥지로 돌아가면 나는 예전과 같이 생활 을 하면서 얼마 전 병실에서 꾸었던 꿈과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지금의 몸으 로 그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조금은 자신이 없는 생각에 두려움부터 앞선다. 병 실 안에 누워 있을 때는 꿈만 꾸고 그것을 이루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되었으나, 세상 안으로 걸어나온 지금과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얼마 후부터는 현실에 적응하기 와 생계(生計)유지 하기에 급급할 것이므로 그동안 꾸었던 꿈은 뒷전으로 밀어 두어야 한다 는 생각에 두려움부터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로를 한다. 당장은 못 이루어도 이루어 야 한다는 꿈이라도 꾸어 놓았다는 것 하나에 위로를 한다. 그리고 세상에 적응하면서 조금 씩 노력을 할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내 꿈을 이루려는 노력을 쉬지 않 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본다. 꿈이란 것은 이루려는 것도 중요하 지만 우선 이룰 수 있는 꿈부터 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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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2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본 풍경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여러 풍경을 보러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어서이다. 고작 본 것이라고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의 강변, 봄비 오고 난 후에 안개가 드리워진 강과 야산(野山), 여름 햇살 아래 물 장구 치는 아이들, 가을 들녘의 풍성한 곡식들, 겨울의 흰눈이 가득 쌓인 소나무 숲 등이 전 부다. 그러나 나는 그 밖에 풍경들이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 외국의 유명한 강과 눈 쌓인 알프스 산 등 볼 것이 세상엔 많다고 하지만 나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 그동안 내가 보 고 온 것에서 느낀 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많은 행복의 느낌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다. 하지만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보면 서로들 여행을 못 가서 안달을 하는 사람들이 즐비하 게 늘어서 있다. 

그들은 무엇을 찾으려 여행을 하려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나처럼 많지는 않지만 여러 풍경을 보고자라지 못해서 그렇게 여행 가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내 스스로 상상은 하지만 비싼 돈까지 들여가며 해외로 여행을 떠나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해할 수가 없다. 물론 그들이 내 글을 읽으면 '내 돈 가지고 가는데 뭔 간섭이냐'라고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무엇을 보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다면 굳이 해외까지 여행을 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곳, 그렇지 않다면 가까 운 시골을 찾아 그곳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만 봐도 무엇인가 느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서이다. 바다가 보고 싶다면 동해로, 산이 보고 싶다면 설악(雪嶽)이나 지리산으로 훌 쩍 떠나도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나는 산은 아직 가 본적이 없다. 집 뒤에 있는 야산밖에는...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산의 대한 모든 것을 안 듯싶다. 그 크지 않던 야산에서... 이렇듯 어떻게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작은 풍경에서 얻는 감동은 말할 수없이 커진다. 비싼 돈주고 해외까지 나가서 바라 본 풍경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보다 얼마나 경제적이며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젠 가까운 곳에 눈을 돌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보도록 하자. 시골 어느 놀이터에서 들려 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도 행복이 섞여 있을 것이고, 해지는 산과 강변에는 계절의 흐름 이 느껴질 것이며, 그것을 느끼고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과 마음속에는 조용히 마음의 평화 와 안정이 찾아 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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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
오랜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여름, 친구들과 나섰던 여행이 지금껏 기억 속에 살아 있 다는 것에 새삼 즐거움을 느낀다. 유난히도 따가운 햇살을 머리 위에 얹고 버스 터미널로 가서 표를 끊고 에어컨인지 온풍기인지 모를 바람이 나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강릉으로 향 하던 때, 몸이 약한 나는 4시간 30동안 수시로 멀미를 하며 녹초가 되어 정착지에 도착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포대로 향하면서 둘러 본 그곳의 풍경이 왜 그리 낯설고 이국적 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한 것인지 더욱 기억에 남는다. 뜨겁게 불어 대는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 내음과 붉게 떨어지는 태양, 수없이 많던 관광객들의 웅성거림 모두가 처음 보고 맞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동행하던한 친구가 저 만치서 '야! 바다가 보인 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멀미에 지친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그곳을 향해 뛰었었 다. 생전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은 태양이 모두 사라진 뒤라서 그런지 온통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그 모습이 왜 그리 좋던지, 그리고 얼마 후 밤은 찾아 들고 친구들과 나는 밤바다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모두 마음속에 삭히고 말았다. 누구 한 명도 제 생각을 친구들 앞에 말하지 않고 싶었던 모 양이었다. 하기야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으니... 그렇게 여행의 첫날밤은 끝이 나고 다음 날 아침, 태양이 정말로 말로만 듣던 것과 같이 바다 끝 수평선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우리는 촌놈의 티를 못 벗은 서로를 보며 한바탕 웃어댔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 고 바다의 색도 하늘과 같이 변하여 같다. 여행의 세번째 날, 떠나올 때의 설레임은 다 어디 로 갔는지 친구들의 얼굴엔 그새 지루함과 나른함이 섞인 듯 한 표정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 다. 나는 친구들 사이를 빠져 나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밭에 앉아 깊은 생 각에 빠져 보려 애를 써 보았다. 푸른 바다의 깊이 만큼이나...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 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흔한 내 지나온 추억들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내려 쬐 는 태양의 강도와 나른해 지는 몸의 피곤함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집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강릉 시내로 나와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강릉 역에 도착하여 오전 10 시 청량리 행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에 오르고 10분 뒤 우리를 실은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 했고, 그렇게 7시간 반이 지났을 때, 청량리에 내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가평 행 기차 표를 끊고 차에 오른 뒤, 2시간쯤 후에 가평에 도착했다. 나름대로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어 딘지 모르게 남는 아쉬움이 떠나는 기차에 매달려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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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假想) 공간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
21세기의 새로운 휴식 공간으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가상 공간)가 새롭게 자리를 틀고 우리들의 정신 세계에 까지 그 공간의 새로운 호기심을 불어넣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우리가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는 맑은 공기가 가득한 숲 속이나 도심지에서는 분위기 좋 은 찻집 등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아니 아직까지도 많은 사 람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젠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듯하다. 이미 젊은 세대에서는 가상 공간이라는 것이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이 공간 에서는 누구나가 자유롭다.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기에 호기심 많 은 젊은 층들이 이 공간을 많이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방에 앉아서 서로의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고민도 말하고 때론 사랑까지 논하면서 자기들만의 표현 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가상 공간은 충분히 발전이 될 가능성이 보이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젊은 층에서는 이미 실생활화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한 편에서 는 이 공간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만은 않다. 말 그대로 가상 공간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몰지각한 자들을 두려워하는 층에서는 당연히 이 공간의 확산을 두려워하고 심한 사람은 부정적으로 이 공간을 철폐시키자는 사람들도 생겨나는 것 이다. 가만히 생각을 하면 이 반대론 자들의 마음도 헤아려 볼 필요는 있다. 비밀이 보장되 고 뜻 있는 사람들끼리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만날 수 있는 이 공간이 언젠가 가져올 수 있는 피해 요인이기 때문인 것이다. 벌써 가상 범죄가 생겨났다는 지상(紙上) 보도가 있었 다. 잘 못 들으면 '가상으로 일어난 범죄'라는 큰 오해로 받아 들일 수 있으나, 이 가상 범 죄 는 현실에서 일어난 범죄 보다 더 큰 악영향을 초래(招來)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가상 공간!

과연 이 공간 속에도 어떤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를 즐겁게 때론 슬프게 만드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 과반수 이상이 이 공간 속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말한다. 이 공 간 속을 채우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단지 생각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가상 공간에 불가 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가상 공간이라 할 지라도 그 안엔 어떠한 생명체가 존재한다. 물론 그 생명체를 나도 본적은 없으나 분명 존재한다고 본 다. 언젠가 그 생명체를 찾아 나서는 모임도 분명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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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세상을 살아오다가 내 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 는 어느 도심지 지하철 플렛홈 휴지통 옆에서, 버려진 인간 쓰레기가 되어 깊은 잠이 들었 다. 지금껏 지내 온 날들을 모두 이불 삼아 덥고 수많았던 기억들을 베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는 내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고 무엇도 부럽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 다. 그리고 나는 그 꿈속의 나로 들어가고 만다. 

은빛 호수 반짝이는 작은 벤치에 앉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봄의 햇살과 같은 소중한 사람을 기다린다. 부는 바람을 맞는 순간엔 너무나 행복해 홀로 앉아 웃어도 보고, 호수에 비친 하늘에 돌을 던져 구름도 깨보고... 그러다 멀리서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 보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색에 잠겨 있는 것처럼 앉아 있는다. 점점 다가서는 그 사람은 내 앞 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소를 건네주고 내 옆에 다소곳이 앉는다. 마치 동화 속의 주 인공이 된 기분이다. 너무나 행복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사람과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고, 모든 슬픔은 빛나는 햇살에 모두 녹은 듯하다. 호수 건너편에서 한 쌍의 노루가 뛰어 다니며 풀을 뜯고 나는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에게 풀꽃을 엮어 사랑관을 만들어 씌워 주 면 그 사람은 행복한 얼굴로 내게 안기어 잠이 든다. 그 사람의 얼굴은 잠든 공주처럼 곱다. 그리고 나는 이웃 나라 왕자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안고 호수 건너편을 바라본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곁에는 수십 종류의 나비들이 날아와 사뿐히 춤을 추며 우리를 축복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오후가 찾아 들면 먹이 찾아 나섰던 새들이 모두 우리가 있는 숲 속으로 돌아와 노래를 부르고 바람도 장단 맞추어 나뭇잎을 흔들어 댄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에 더욱 행복 을 느낀다. 그렇게 또 오후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들 때면 주위가 조용해지고 남은 것은 나 와 그 사람뿐이다. 그러나 우리 둘은 말이 없다. 그저 바라보고 때때로 나오는 미소와 눈빛 으로 서로를 느낄 뿐이다. 그리고 헤어지기 아쉬워 나누는 입맞춤 하나에 모든 것을 대신한 다. 그렇게 아름다운 하루가 끝이 날 때쯤, .....난데없이 요란하게 들리는 지하철 소리에 눈을 뜨니 수없이 많은 나비들이 어수룩한 사 람의 모습들로 변하여 지하철 안으로 밖으로 너풀대며 오르내리고 나는 휴지통 옆에 누워 그들을 바라보는 거지 왕자가 되어 풀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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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도 가끔은 뒤를 돌아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시간 매꾸기를 하며 지낸다.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때론 자기만의 명예나 이득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씩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는 것에는 매우 인색하다. 이런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것이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많은 책이나 유명 인사들의 말에서 잘 보고 들어 왔었지 만, 막상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에 너무나 인색해 왔다. 그리고 나는 남들 보고 '당신 자신을 돌아보라고' 주제넘은 말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어찌 보면 뒤를 돌아 봐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얼굴에 이중성을 띤 채 그들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나의 삶이 얼마나 헛되게 보이는 가... 내 자신조차 알지 못하며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습이..... 그러나 이렇 게 사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 이겠는가. 위에서 말했던 내가 읽은 많은 책을 쓴 작 가들과 삶의 조언(助言)을 하는 유명 인사들, 그들은 진정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본 후, 잘 못 된 점을 고치고 난 뒤에 남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중성 얼굴로 남들에게 그러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우리는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그들 자신이 세상에 오염되어 있는 상태라도 우리에게 는 올바로 살수 있는 법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법을 말한 자의 본래 보습이 아 무리 잘 못된 삶의 모습일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올바른 삶을 살아가라는 조언을 해주 고 있기에 그냥 그 조언 그대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 속고...하는 그런 것이 인생인 듯싶다. 언젠가 내가 읽었던 시집에 있던 시 중에서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 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이다' 라는 시 구절이 기억이 난다.

물론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앉은 새나 먹이를 찾 아다니는 새는 가끔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는 새는 무언가를 찾는 새이다. 이렇듯 우리도 이젠 앞만 보면 살아갈 것이 아니라 가끔은 뒤돌아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때 가 온 듯하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가져왔어야 했다.

...새도 가끔은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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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未來) 작가(作家)
텅 빈 방안에 앉아 버릇처럼 또 공상(空想)을 한다. 봄이 와서인지 창밖엔 눈부신 햇살 이 퍼져 나를 비롯한 수많은 방안에 갇힌 사람들을 유혹을 하고 있지만 오늘 나는 그 유 혹에 넘어가지 않고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공상을 하고 앉아 있다. 그 공상의 주제는 미 래 시인(詩人)에 대해서이다. 얼마 전까지 아니, 지금도 중견(中堅) 시인들은 매우 고지 식하고 어딘지 모르게 옛 것을 중요시하는 보수적(保守的)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보 통 시상(詩想)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을 찾거나, 홀로 지내기를 좋아하며, 주로 밤에 글을 쓴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은 줏대가 강한 면도 없지 않다. 자기만의 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넘보며 헐뜯는 자들을 매우 싫어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나라 중견 시인들의 대체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90년에 접어들어 각종 미디어 매체나 통신 매체들이 확산되면서 문학(文學)도 그에 영향을 받아 시뿐만이 아니라 여러 장르의 문학 작품들도 가상(Cyber-Space) 공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다. 그래서인가! 그 가상 공간에 떠다니는 작품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너무나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 이다.

물론 가상 공간을 떠다니는 작품이라고 해서 그 모든 작품이 가볍게 느껴진다는 말이 절 대 아니다. 일부 그곳에 작품을 올리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경솔해 있거나 우선 작품을 올리고 보자는 목적으로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닌데도 올리는 이유에서 오는 현상일 수도 있다. 앞으로는 가상 공간을 이용하는 많은 문인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 중 시를 비롯하여 수필, 소설 등 많은 작품들이 그 가상 공간 안에서 떠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품들을 쓰는 작가들의 작품 구상하는 법도 지금과는 많이 변할 것이다. 이젠 운치(韻致) 있는 곳보 다는 자기만이 앉아 있는 방에서 컴퓨터를 치며 작품 구상을 하는 작가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가지 우려되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구상을 한 작품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보고 느 낄 수 있는 작품이 나올까 하는 것이 나의 걱정이다.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우리 생활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지금껏 알아 왔는데, 순식간에 완성되어 버리는 작품이 미래의 작가들 머리에서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된다. 미래의 작가들은 지금 우리 가 알고 있는 작가들과는 전혀 다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제 한물 간 글쟁이로 낙인찍히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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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3
* 1 *


'97년 4월 어느 봄 날 일요일, 서울 어느 높은 동네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지내던 사촌 누나네 집에서 첫 번째로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언제나 홀로 맞은 일요 일과 병실 식구들과 한동안 맞던 일요일 아침을 조금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맞이했다. 평소 와 같이 집에 있을 때는 오늘같이 화창한 휴일엔 어디론가 떠날 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였을 테고, 병실에선 아침 먹고 생각 없이 침대에 앉아 있다가 또다시 잠 속으로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낯선 곳에서 맞은 일요일 아침은 나와는 관계없이 바삐 흘러가 버린다. 이모 님과 조카는 교회 간다 하며 서두르고, 사촌 누나는 일요일도 없는 직장에 나간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또다시 넋 나간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내 자 신을 바라본다. 이럴 때 나는 무엇을 한다 하며 움직여야 하는지... 모두들 제 갈 곳으로 나가고 나는 방안에 갇혀 그들을 기다리는 한 마리 말 잘 듣는 애완견이 되어 버렸다.

* 2 *


빼꼼이 열린 창으로 따스한 햇살과 바람이 스미는 것을 보고 밖을 내다보니 신기한 세상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 유혹에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 오가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내가 있던 고향에서는 상상도 못할 많고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정신없이 걸어다니고 그 뒤로 알 수 없는 그들이 흘리고 간 추억들이 주저리주저리 널려 있었다. 츄리닝 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서 있는 내 앞 이층집 옥상에서 는 절(寺) 표시가 된 깃발이 바람에 정신없이 날리고, 그 집 밑으로는 선경 책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 지나간다. 세상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다.

* 3 *


어느새 일요일도 끝이나 버리고 동네 곳곳마다에 가로등이 환하게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낮까지 아무일 없던 옆 집 건너 집 문 앞에는 가로등과 한 영혼을 보내는 등불까지 켜지고, 그 집 앞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지푸라기 끈으로 허리와 다리를 묶고 서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 농담을 하며 찾아오는 조문객(弔問客)을 기쁘게 맞이한다. 이곳은 참으로 희한 한 동네임에는 틀림없다. 서울 친척 집에서 처음 맞은 일요일을 신기한 풍경 속에서 나를 잃어 가며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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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찾기보다는
비오는 날만 되면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못난 모습 모두 다 알고 계신 사람, 나 보다 더 나를 잘 알아 나를 보는 것 보다 그 사람을 봄으로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너 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비오는 날만 되면은 그리워집니다. 그날이 언제였나요. 소낙비 정신 없이 내리던 날, 그 비 다 맞으며 좋아하시던 당신, 그리고 그 촉촉한 모습에 정신 못 차리 고 좋아했던 나...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네요. 단지 이렇게 나 홀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네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살아 간 다는 것이 이처럼 아픈 일인지 꿈에서도 몰랐습니다. 길을 걷다 수없이 많은 연인들을 봅니 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젊은 연인들을 보 면 부럽다 말들을 하지만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런 감정이 생기질 않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아마도 당신이 내게 전해 준 사랑이 너무나 고귀하고 진실 되어서 일런지도 모 르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연인들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들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무 진실된 사랑을 빨리 받았나 봅니다. 그리고 너무 빨리 그 사랑을 주는 당신을 잃었나 봅니다. 어찌 보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며, 어찌 보면 제일 행복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세상엔 진실된 사랑을 한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아가 는 사람이 많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스턴트 사랑만 수없이 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에 비한다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그 러나 이제 그 사랑을 잃은 상처에 또다른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이젠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새롭게 모든 것을 잊고 일어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 야 합니까. 아니면 그동안 베풀어주신 당신의 사랑만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합니까...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삶속에서 겪어야 하는 사랑 앓이가 나에겐 왜이리 크게 다가오는지요. 남들 은 쉽게 쉽게 이루어 나가는 듯한데 말입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사랑에 매달려 아파하는 것은 너무 못나서 일겁니다. 한번 받은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가슴에 묻어 두려는 의심 때문에 오는 벌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벌을 받는 동안 당신이 베풀어주신 사랑 을 오기로라도 간직하겠습니다. 다시 새로운 사랑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태양이 모두 타 버 리는 날까지 잊지 않고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새로운 사랑 찾기보다는 당신이 베풀어 준 사 랑을 떠올리며 아파하는 것이 행복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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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붙이고
길고도 지루한 시간 속에서 빠져 나와 서울 어느 거리를 걷다가 올려다 본 하늘은 참으로 푸르고 따스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봄이 온 이유에서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 니 정말 가로수 마다에는 파릇파릇한 잎들이 돋아 있었으며, 가끔씩 보이는 어느 높은 동네 담벼락엔 노란 개나리들이 벌써 한 풀 꺾인 모습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 안 무엇을 하며 지난겨울을 보냈을까! 그러나 나는 알 수 없었다. 약 5개월 동안 겨울잠을 자고 나온 어느 짐승과 같은 마음뿐이었다. 굳이 그 겨울잠에서 깨어나 남은 것이 있다면 그 겨울잠에서 꾸어 온 꿈들의 껍데기들 뿐이다. 실컷 꿈속을 헤매이며 남겨 둔 껍데기... 난 오늘 그 껍데기를 출판사에 붙이고 서울 어느 거리를 걷다 텅 비어 비틀거리는 내 모습 과 머리 위로 펼쳐진 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방황을 했다. 참으로 허탈한 날이다. 기나긴 지 난 시간들의 흔적을 모두 잃어버린 느낌... 그리고 나를 잃어 버려 허둥거리는 내 자신을 느 끼는 참으로 허탈한 날이다. 그러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말할 수없이 밝다. 어 찌 보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어두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누 구는 다가온 봄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하지만 그 생각은 나만의 쓸데없는 이기 적인 편견(偏見)일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헤매이다 집으로 돌아와 작은 방으로 몸을 감추니 또다시 몸이 나른해졌다. 그동안 모아 온 꿈의 껍데기들을 모두 잃어버린 데서 오는 후유증 때문인가. 처음부터 나를 잃었었지만 다시 나를 찾아야 하는 고행(苦行)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부터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마음을 달래려 거리를 헤매이다 집으로 들어와 휴식을 취하려 하였건만 또다른 알 수 없는 것들이 방 안 곳곳에 숨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동안 나를 잃고 꿈의 껍데기마저 모두 잃은 지금,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슬픔과 고독을 어떻게 맞이하고 그것들 속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을 새롭게 가져야 할 시간임을 알았다. 아무리 나 를 잃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펼쳐질 내 길을 힘껏 달려나가 활동을 하여야 한다는 다짐과 더 이상 나를 잃지 않겠다는 희망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번 잃은 내 자신을 너무 애타게 찾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써 온 원고를 붙이고 온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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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에서는 솔바람이 불지 않는다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내 나이 여섯 살 때부터 열 세 살 때 까지의 시절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바라보는 모든 것들에는 너무나 투명한 눈들이 달 려 있었고 그것들과 눈 맞추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나의 일과(日課)였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초등 학교가 파하고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나는 학교 뒷산으로 발을 옮겼던 기억이 난다. 그날 학교에서는 숙제를 안 해가 선생님께 회초리로 손바닥을 신나게 맞은 터라 어린 마음에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나지막한 학교 뒷산 큰 바위에 걸터앉아 내려다 본 교정엔 신나게 집으로 달음질치는 아이들과 학교 뒤편 화장 실 청소를 하는 심술궂은 아이들의 모습이 심각하게 내 눈에 비추어 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주변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교정을 비롯한 학교 뒤편 화장실에 있던 아이들도 하나 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배경을 뒤로하고 산 위로 올라갔 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조금 전까지 보이던 학교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라간 것이다. 주위엔 사람의 인기척은커녕 어둑해진 하늘과 차가워지는 공기만이 나를 둘러쌓고 있었다. 조금씩 두려워지는 마음에 다시 학교로 내려올 생각을 하고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산기슭 밑에서 무엇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두려워지는 마음을 달 래며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산기슭 밑에는 너무나 넓고 평탄한 솔숲이 어둠을 맞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평화로움과 자유가 있는 곳 같았다.

나는 왜 그때까지 그곳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그 리고 수없이 많은 솔 나무들은 푸른 눈을 뜨고 처음 보는 나를 경계하듯 바라보며 곧은 자 세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들은 너무나 친한 친구의 모습 마냥 나를 즐 겁게 했고 다가오는 어둠으로 인해 두려워진 마음도 오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금만 더 그 솔숲을 빨리 알았더라면 외로운 날을 행복하게 보냈을 텐데...나는 한참을 그곳에서 솔 나무들의 순진한 눈을 바라보다 학교 교정을 지나 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시다 애태우신 어머니께 또 한차례 회초리 질을 당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던 기억이 난 다. 내일 또다시 그곳을 찾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나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 본 솔숲에서는 솔바람이 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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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보다는 시골 시내가 났다
나에겐 서울에 대해서 아주 절대적인 생각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 해 오던 것, 서울이라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고 화려한 도시라는 거의 불변(不變)의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 왔다는 것이다. 어려서 한번 가보았던 서울 대공원의 수많던 놀 이 기구와 서울 어느 시장의 북적거림과 잘 되어 있는 교통편, 그리고 깔끔한 옷차림의 사 람들... 그 풍경은 나에게 서울의 이미지를 세상 제일의 곳이라고 심어 주기에 충분했었던 것 같다. 그 중 제일 내 눈길을 끈 서울의 모습은 밝은 미소를 짓는 어느 백화점 상인들이 었고 그들의 생활은 나의 생활 아니, 우리 가족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를 것만 같았다. 그들 의 생활은 백화점 천장에 매달려 반짝이는 화려한 조명처럼 밝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내게 전해져 오는 서울의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제 모두 자란 후에 서울이라는 곳을 바라봐서 그런 느낌을 받는 탓일까! 예전에 가졌던 서울의 대한 환상과 동경(憧憬)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잘 되어 있는 교통편은 여전 하였지만 수도 없이 늘어난 자동차들의 혼잡과 밝게만 미소짓던 백화점 상인들 얼굴엔 미소 대신 피곤에 지쳐 찡그린 표정만이 가득했다. 이러한 것들로 나는 서울이 싫어졌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도시, 하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빈 공간과 병들어 가는 강과 산들이 있 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서울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이다. 살기 바빠 서 그렇게들 변했겠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 사회속에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 익(利益)만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슬프다. 이러한 것들을 느끼는 지금은 서울을 좋 아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문화적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서울 중심지에 사는 사 람들이 가끔씩 부러울 때가 있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서울을 좋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너무나 복잡한 동네, 많은 자동차, 그리고 매연(煤煙)...이것들 속에서 굳이 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어설피 개발된 서울 변두리보다는 시골 시내가 났다. 위에 열거한 오염이 없는 시골, 비록 원하는 물건이나 문화 혜택을 조금 못 얻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얼마나 마음 편한 삶을 살수 있는 여건인가! 나만이 아닌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살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지만... 서울 변두리보다는 시골 시내가 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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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雨) 그친 날의 단상(斷想)
* 1 *


다시는 내게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짧지 않은 방황을 하던 나에게 또다시 봄이 오리 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들어선 것처럼 당황스럽고 두려웠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나는 수없이 내 자신을 잃는 꿈을 꾸며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꿈을 꾸 었던 것 같다. 어젯밤처럼 비가 내리던 날에 더욱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를 잃 는 꿈이 남기고 간 후유증 때문에 또다른 방황을 할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내 옆에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또다른 내가 나에게 말을 한다. '이젠 너를 찾아야 할 시간이라고..' 나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나를 찾아야 할 시간'이라...! 한동안 가라앉았던 내 가슴 에 알 수 없는 물결이 아니,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가슴에 쌓여 있던 먼지들을 순식간에 씻어 주는 파도 거침없이 일기 시작했다. 그 파도에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내다 보 니 온 주위가 봄이라는 계절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까지 내리던 비도 어느새 그치고 따스한 바람이 산들 불어 대며 그동안 잠든 모든 것들을 깨우고 있었 다. 이렇게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도와준 또다른 나의 모습은 누구인가 !

* 2 *


비가 내리는 날엔 그 비를 맞으며 두 손을 잡고 정처(定處)없이 떠나자 하던 사람이 생각난 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던 그 사람은 비를 좋아했고 언제나 비처럼 그리움으로 나를 흠뻑 젖게 하였으며, 때론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 되어 내 가슴 안에 사랑의 호수를 만들어 놓았 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사람을 볼 수가 없고 홀로 비를 맞는다. 어 느 날인가, 그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비와 관련된 음악만 120분 짜리 공(空) 테이프에 정성껏 녹음하여 또 하나의 복사 본을 만들어 미니 카세트에 넣고 들으며 비오는 저녁 그 사람 집 앞에서 서성이며 그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때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하지만 끝내 그 테이프를 전하지 못하고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오던 아픈 기억, 그러나 지금은 너무 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버렸다. 오늘처럼 비가 내렸던 날에는 변함없이 떠오르는 아름다 운 추억이 되어 버렸다. 비록 그 사람의 소식도 모르는 사람으로 이렇게 살아 숨을 쉬고 있 지만 그 사람이 남겨 준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가 끔씩 비가 내리는 날엔 그 비를 맞으며 두 손을 잡고 정처(定處)없이 떠나자 하던 사람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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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세대 시인(詩人)
『오래 전부터 시(詩)를 써 오던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다. 몇 줄 되지 않는 시를 쓰기 위해 온갖 궁상(窮狀)을 떠는 모습하며, 매일 방황을 하는 것하며,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빨 리 떠올리는 시상(詩想)과 아주 긴 문장, 모든 것을 속도 있게 해결해 버린다. 모든 일 뿐 만이 아니라 문학도 속도 있게 작업을 해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방황을 하며 시간만 죽이 는 허비는 하지 않아야 한다. 그동안 그렇게 문학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은 이 글을 마음 깊이 새 기며 읽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현실에 맞는 문학 활동을 해 나가야할 것이다. 이 젠 모든 문학 소제는 어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전과 같이 소제를 얻기 위해 방황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널려져 있는 소제는 다양하다. 내 감정이나 사랑 얘기, 요즘 일어 나는 사회문제 등 너무나 많다. 이렇게 다양한 소제를 놔두고 왜 방황을 하며 시간을 왜 죽 이는가. 나는 그런 문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방황할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작품이 사라지 는가.』

위 글을 쓴 자에게 띄우는 글
아직 문학을 모르는 자여! 그대는 이쯤에서 글쓰는 일을 그만 둬라. 진정한 문학을 알지 못 하는 불쌍한 자여... 그대가 말한 문학적 소제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 게 그대가 글을 쉽게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다. 나는 지금의 문인 (文 人)들 모습과 그들의 삶이 좋으며 나 또한 그들과 방황을 같이 하면서 문학 활동을 하고 싶 을 뿐이다. 그대처럼 빠르고 길게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비오는 저녁 느즈막히 편한 옷차림으 로 친한 사람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고 그들과 살아가는 얘기를 가벼운 술기운에 주고받으며 그 안에서 느낀 감정들을 몇 자 안되는 문장으로 열거(列擧)하는 습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르고 긴 내용의 글을 쓰면 무엇하겠는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한번 읽고 휴지 통에 버릴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글을 쓰고 싶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마음에서 무 엇인가 우러나와 쓴 글이 아니라 일단 작품(?) 끝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글을 맺은 것들은 진정한 문학 작품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글을 써 오는 문인들을 좋아하고 나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을 따라갈 것이다.

* 이 글은 내가 내 자신에게 쓴 주제 없는 글에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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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로 세운 자존심은 물거품에 불가하다
물질 만능(物質萬能)주의로 물들어 가는 현대, 그 안에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타인(他人)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와 남을 비교하는 습관을 자신도 모르게 가지게 되었다. 거기서 오 는 후유증으로 남보다는 조금 더 튀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을 느껴야 하는 고 통을 앓고 있다. 아주 옛날 일도 아닌 몇 십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젊은 우리들의 부 모님 세대에서는 나와 남을 비교하는 내가, 남보다 좀 못하다 하여 자존심이 상한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요즘 우리들의 모습은 어 떠한가. 남에게는 결코 뒤지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 욕심이 금전(金錢) 적인 것을 떠나서 자기 성찰을 하는데 목적이라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 젊은이 들이 내는 욕심은 금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리고 외형적인 것이 태반이다. 그리고 거기 서 오는 자존심 구겨지는 소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나보다 외형적으로 나아 보이는 사람들을 나를 비롯한 우리 젊은이들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거나, 그들에게서 자존심을 꺾이는 경우가 적지 않게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없어도 있는 척하는 매우 좋지 않은 버릇 또한 가 지고 있다. 내면(內面)을 가꾸기 위한 노력보다는 외면(外面)만을 가꾸려는 철없는 노력... 그 러므로 우리는 부모(父母)님들에게 힘겨운 짐과 걱정만을 안겨 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리 모습을 보고 '한 때, 그럴 수도 있다'라는 식의 말로 포용하려 하 고 있으나 이젠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온 듯싶다. 화려한 옷과 두툼한 지갑, 잘 생 긴 외모... 솔직히 부러운 일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게 살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화려함을 애써 꾸미고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그 뒤에 오는 허전함은 더욱 커지고 나를 잃게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 맞는 삶의 방법이 있다. 부유층(富裕層) 사람들은 거 기에 맞는 삶을, 중산층(中産層) 사람들도 거기에 맞는 삶을, 일반 시민과 하위층(下位層) 사 람 또한 거기에 맞는 삶이 있기 마련이다. 옛 말에도 '참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 어 진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이젠 우리도 우리의 참모습을 찾아야 할 때가 온 듯싶다. 

무스로 세운 자존심은 물거품에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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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가끔은
나에게 지나 버린 일들은 모두 버리지 말고 마음 한켠에 간직하라고 귀띔해 준 맑은 사람이 생각난다. 비오는 저녁이나 눈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분위기 있어 좋은 날이라며 철없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던 때묻지 않은 사람이 문득 불어 대는 바람처럼 내 머리를 스쳐지나 간다. 요즘같이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 사람같이 여유나 낭만 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며 내 스스로 깨우치지만 그것은 내가 바라는 마음일 뿐, 나 역시 차 가운 세상을 만드는 요소의 하나로 손색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어 때묻지 않은 풍경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데려가 줄 사람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젠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잊혀져 가는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 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예전과 같이 맑은 마음과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지 너무 그리워진다. 그러나 이젠 나 홀로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시간이다. 오래 전 가졌던 아름다운 삶 의 추억들을 모두 마음 한켠에 남겨 두고 그 추억을 들척이며 이 차가워진 세상 어느 한구 석에서 표정 없는 사람들과 호흡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삶이 너무 힘들어질 때면 시골 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때문은 나를 차창 밖으로 과감히 내던져 죽이고, 예전의 나 를 찾기 위해 노력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잊혀진 내 삶의 시간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한 이치(理致)는 한번 떠난 바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끔씩 지나 버린 삶의 시간들은 돌이켜 살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나는 이 렇게 비현실적인 일들을 상상(想像)하며, 이 세상을 잠시 등지는 꿈을 꾼다. 그 꿈 안에는 푸른 강과 하늘이 있고, 내가 잊지 못하고 있는 때묻지 않은 사람만이 그 작은 세상을 지키 고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선 나는 왕자가 되고 때론 거지가 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은 공주가 되고 때론 무서운 마녀(魔女)가 된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산들은 가끔씩 소리 내 우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지는 해를 머리에 이고 푸른 강물은 큰 나무에 얹힌 해가 떨군 눈물에 얼굴을 붉힌다. 이것이 내가 꾼 꿈 안에 있는 풍경이다. 너무나 유치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그 풍경을 좋아한다. 그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때로는 나처럼 모자라게 살아가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이 세상 속에서 잃은 여유 와 낭만을 꿈 안에서라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만 되면, 지나 버린 일들은 모두 버리지 말고 마음 한켠에 간직하라고 귀띔해 준 맑은 사람이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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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 대학을 다녀와서
나는 서울 어느 동네 언덕에 위치한 친척집에서 요양(療養)을 하며 지내다, 찾아온 봄만큼이 나 화창한 하늘 아래 산책을 나섰다. 그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끄적여 놓은 낙서장 디스켓을 주머니에 넣고 언덕에 위치한 집에서 시내 쪽으로 산책길을 정하고 발길을 옮겼다. 봄이 와 서인가. 노란 개나리가 담장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으며, 내려오는 햇살은 너무나 따스했 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목마다에는 겨울옷을 벗고 이리저리 오가는 표정 없는 사람들과 부 유층이 타고 다니는 듯한 커다란 외제 자동차와 돈벌이를 하기 위해 온갖 장식을 한 50cc 낡은 오토바이가 서로 마주 보고 길을 먼저 양보할 줄 모르는 시비(是非)가 엇갈린 풍경... 새삼 어지러운 동네라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어지러운 세상이 스케치한 풍경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풍경을 뒤로하고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작은 시장 골목이 나오고 그 밖으로 많은 차들이 오가는 시내가 보이는 듯했다. 수없이 많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 섞여 걷는다는 것에 조금은 신기한 마음마저 들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 다.

북적거리는 시장과 시내를 벗어나 이리저리 거닐다 숭실 대학교 주변에서 각종 '논문 입출 력, 프린팅...'등이라고 쓰여진 어느 문화사에 들어가 그동안 병원에서 끄적여 놓은 낙서를 A4용지에 출력을 하고 누런 서류 봉투 한 장을 얻어 그 안에 모두 집어넣어 밖으로 나와 서울에 처음 온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다 숭실 대학교 정문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얼마 만에 마주하는 신선한 느낌인가... 젊은 학생들의 힘찬 발걸음마다에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 그들을 뒤따르고 있는 듯했다. 교정 안 잔디밭에는 어느 동아리같이 보이는 몇몇 학생들이 모여 봄바람에, 봄 햇살에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를 토론을 하고, 조금 튀어 보이고 싶은지 한 학생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 밑에 누어 공상(空想)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떼지어 걸어가는 세 여학생, 그들은 너무 현실에 물든 사람들처럼 보였다. 무언가 배우러 온 학생 이 아닌 놀러 학교를 나온 학생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는 생각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역시 대학이 젊음과 자유를 발산(發散)하는 근원지(根源地)라는 것이 느껴졌다. 한쪽 팔엔 낙서 꾸러미와 또다른 팔엔 목발을 짚고 교정 안 풍경을 바라보다 정문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문을 나서는 순간 내 긴 머리를 날려 주던 바람이 왜 그리 따스했는지... 지나왔던 길을 따라 집으로 되돌아와 보니, 봉투에 담긴 내 낙서들이 모두 숨이 막혀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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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편집기
때때로 우리는 거리를 걷다가,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을 인상 깊게 바라보다 외톨이 사랑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장소를 찾게 되고 보고 파 하던 사람이 나타나면 뛰는 가 슴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고, 멀리서 아른대다 사라져 버리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애태 우는 경우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지만, 이러한 현상(?)도 이젠 서서히 희미해져 가고 있는 듯 하다. 그 대신 직설적이면서도 대담한 행동의 사랑을 해 버리고 끝내는 조금 위험한 사랑 법이 빠르게 나타났고,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속의 사랑이나 참사랑, 짝사랑, 외톨 이 사랑과 같은 투명한 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있는 듯하다. 언제부터 우리는 순간적으 로 일어나는 인스턴트 사랑에 물들어 버린 것일까. 그리고 그 사랑을 하기 위해 얼마나 헛 된 방황을 하고 있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스턴트 사랑 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반대로 풋풋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 을 당하거나 한심한 눈초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이러한 현상에 아직까지 적응 을 하지 못하고 바보가 되거나 한심한 눈초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나도 신 세대라고 칭하는 나이를 가진 한 사람인데 정신연령은 조선 시대 선인들이라니... 나는 사랑 이라 하면 첫째 순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가지고 있으며,사랑은 불변(不變)이 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참으로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내게 보낸다. 물론 여자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것에 나는 좌절(?) 하지 않는다. 조금 주춤할 뿐이지. 그러나 나는 한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즘 즐겨 하는 인스턴트 사랑의 장점인 이성(異性)과의 빠른 사귐성과 우리 옛사랑의 장점인 순수와 불변을 조합시킨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인 가가 필요하다. 요즘 일반화가 되어버린 컴퓨터처럼 무엇이고 편집할 수 있는 편집기, 즉 사 랑 편집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편집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만 있다면 서로의 마음으로 사랑 편집기를 만들어 둘만의 아름 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랑 편집기는 나뿐만 아닌 우리에게 모두 존 재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이 편집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조금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안심은 된다. 사랑 편집기는 마음이 나쁜 사람에게는 작동이 안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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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갇혀 #1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나를 잃어 가슴 아플 때나,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혹은 아무런 생각 없이 있고 싶어질 때,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사람들이 북적 거리는 거리를 걸어 보아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보아도 그것은 진정으로 나를 찾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가할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나도 나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 적이 있 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달리는 강릉 행 통일호 열차 안에 너무나 지쳐 버린 몸을 싣고 아홉 시간 반 동안 열차 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차 창 밖으로 수없 이 지나가는 낯선 풍경과 그 안에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나의 지나간 추억들... 그러나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라져 가는 추억들을 느끼고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의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찾기 위해 나는 그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솔직히 그 여행을 하고 있는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잃었 던 나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막상 여행길에 오르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니, 나는 그 현실에 빠져 허덕이는 단순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이유로 여행에서 남은 것은 몇 장의 사진들과 나를 찾지 못했다는 내 자신에게 내려진 죄책감뿐이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갖던 나였는데,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내 자신을 보고 너무나 큰 실망을 한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찾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거닐어도 보고 새벽 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에도 가보고. 많은 방황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방황은 나를 찾는 방법에 역부족한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종일 비가 내려 방에 갇힌 적이 있었다. 집에 있기 싫어하는 나에겐 최악의 조건이 조성된 날이다. 언 제나 그랬지만 그날도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나는 홀로 방안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 면서 내 자신을 찾기 위해 흰 종이를 펼쳐 놓고 무엇인가를 끄적여 보았다. 수없이 많이 쏟 아져 내리는 빗물만큼이나 흰 종이 위에도 무수한 글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단어가 되고 그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되어 갔다. 그리고 나는 그 단어들과 문장 안에서 내 자신을 찾는 법 을 배웠다. 비로소 나를 잃어 헤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에 갇힌다는 것이 어 찌 보면 모든 것과 차단된다는 폐쇄적인 느낌을 가져다주지만 그 폐쇄된 공간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주보다 넓은 상상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때로 우리는 방 에 갇혀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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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긴 남자
우리에게 자기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시대가 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았고, 그것에 대한 항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지내 온 적 이 있었다. 나도 그 시절 그러한 사회현상에 적응하며 살았었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을 바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자유로운 자기 개성 표현과 의사 표현을 하는 걸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시대가 벌써부터 열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조금씩 개방이 되고 있으 니 달리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무제한적인 개방으로 빚어 질 역효과 같은 것들이 이 사회에 미치게 될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개방이 된지도 몇 년... 서서히 개방된 사회가 우리 몸에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다. 이러한 사회 개방 중에서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 중 하나는 남녀의 옷차림과 머 리 모양일 것이다. 남자같이 머리를 깎은 여자, 여자같이 머리를 기른 남자... 이것만을 봐도 이 사회가 얼마나 변화(개방) 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장발족 단 속과 미니스커트 길이 제한 단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우리에게 지금 펼쳐져 있는 이 자유로운(?)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개 방에 요즘 나도 한몫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머리를 기르고 있다는 건데, 그 이유는 이 렇다. 어릴 때와 고등학교 졸업 후까지도 나는 머리를 아주 짧고 단정하게 하고 다녔었는데 (강압 반, 자유 반) 그것에서 나도 모르는 구속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변명일 수도 있 겠다. 이것 외에 내가 머리를 기르고 있는 이유는 너무 편해서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에는 '머리가 긴게 뭐가 편해?'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겐 편하다. 물론 머릴 한 번 감고 나면 손질하기가 좀 까다로워서 그렇지 나는 머리가 긴 것이 편하다. 그리고 또 하 나의 이유로는 어떤 사람의 말 때문이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사람. 나는 원래 몸 이 무척 마른 편인데, 그런 나에게 다가와 건넨 말. 「머리가 참 기네요?」나는 그 말에 퇴 원 후 자를 것이라고 표정 없이 대답을 했었다. 그 대답에 그는 나를 며칠 동안 지켜보았었 다는 표정으로 다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냥, 기르세요. 잘 어울려요.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인데 머리까지 짧으면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아요.」라고... 그 말에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굳혔다. 머리를 자르지 않기로 남이 보는 시선이 어떻든 내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괜히 머리를 잘 못 잘라 폐병 환자같이 보이는 것보다는 났지 않 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머리를 기르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개방된 사회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뒤늦게 누리는 자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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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강에 빠뜨리다
오랜 시간 동안 쉴 사이 없이 살았었다. 비록 지금은 쉬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쉴 사이 없이 모든 잡념과 공상을 잊고 살아왔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씻고 간단히 아침 식사 를 하는 듯 마는 듯 하고 내가 좋아서 일하는 곳으로 출근을 하면 그때부터 나의 바쁜 일과 (日課)는 시작된다. 매일 반복되듯 흐르는 생활속에서 너무나 많은 지루함 또한 느끼며 살아 왔었다. 그러나 이젠 그때가 점점 그리워지는 것은 왜인가!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 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현 위치를 못 마땅하게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 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변덕이 심한 동물'이라는 말이 나온 것인지도 모른 다. 내가 그 변덕이 심한 동물이 된다 해도 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 예전에 정신없이 일하며 지낸 날들이 그리워지는 게 사실이다. 지금 나는 먹고 노는 위치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요양(療養)'이라고 하는 수식어가 나를 위로하고 있는 듯 하 지 만 말이다. 그동안 나는 더욱 몸을 단련(鍛鍊) 시키고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하는 용기와 법(法)을 터득해야 한다. 예전과 같이 바쁘고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 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런 용기와 법을 터득할 마음마저 생겨나질 않는다. 그 이유는 무 엇 때문일까! 아마도 지금 가라앉아 있는 내 기분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을 해도 직성이 풀 리지 않는 고질적인 병이 또 도져서이다. 참으로 몹쓸 병... 지금의 내 위치가 한심하게 느껴 지는 몹쓸 병. 이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나는 알 수가 없다. 현실을 거부하는 내 마 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 나는 알지 못한다. 또다시 새로운 일이나 전에 하던 일들이 하 고 싶어진다. 완전히 치료되지 않은 몸이지만 무엇인가 해보고 싶은 욕심이 물밀 듯 밀려들 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어느 서점을 찾아가 수채화 같은 투명한 파스텔 톤의 수필집도 읽 고 싶어지고, 봄이 다 가기 전에 강가를 찾아가 수초(水草)의 비릿한 향기를 맡으며 지는 해 를 바라보고 싶다. 그렇지만 이러한 마음도 그때 가서는 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또다른 무 엇인가를 나는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미워할 수는 없다. 비록 이 세상에 도움 이 안되는 삶을 살고 있는 변덕이 심한 동물에 불가하지만 이런 내 자신을 미워할 수는 없 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이렇게 오늘도 나는 희미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라지는 내 마음을 달래며 흰 종이 안에 낙서를 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동안 그리워하던 모든 것 들을 내 마음속 강물에 모두 빠뜨리며 하루를 마감한다. 지금의 자리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 하고 따뿐해 하는 못난 내 자신도 함께 마음속 강물에 빠뜨리며 저물어 가는 하루를 마감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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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 사람들
어느 외진 산골엔 세상을 살아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사업을 크게 하다 실패한 사람, 돌봐 줄 자식이 없는 병든 노인, 고아, 장애인 등 다 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아주 단조로워 보였다. 자고 일어 나고 밥 먹고 쉬는 일, 얼핏 보기에는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눈.비오는 날엔 집안에 옹기종 기 모여 간식을 꺼내 놓고 둘러앉아 서로의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날이 좋을 때는 마당이 나 야산(野山)에 올라 계절의 흐름을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보통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그 들의 모습을 본다면 참으로 부러워할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을 부러워해 본적이 있으니까. 그 러나 그들에게는 우리가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일그러지도록 웃는 그들 의 얼굴 가득히 남아 있을 것이다. 세속(世俗)에 물들어 힘겨워 하는 우리와 자신의 마음에 난 상처로 아파하는 그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마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 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이 우리가 힘겨워 하는 것보다 더욱 클 것이다. 우리가 힘겨워 하는 것이야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로서 어디 가서 한번 흥겹게 즐기고 나면 그나마 고쳐지는 일상의 현대 병이지만 그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不 治)의 병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그들을 아직도 부러워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긍정적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산골 마을을 다녀온 지도 어느새 몇 해가 지났다. 그리고 현재의 나 는 현대 병에 더욱 심하게 걸린 듯, 모든 것에 의욕(意慾)을 잃어 버렸다. 간간이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려 보며 마음을 달래려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 또 한 번 나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토록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인가... 한번 다짐한 것을 이렇게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있는 것인가... 그 산골 마을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 런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나만이 힘든 처 지(處地)에 놓인 것만 같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인생(人生)이다. 그러나 이젠 마음을 다시 정리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아무리 지금의 처지가 힘겹고 모든 것에 의욕이 없다 하더라도 잠시나마 나를 돌아봐야 할 시간이 온 듯하다. 그 시간의 잘 활용하여 지금의 위기를 극복 해야 한다. 그래서 무너진 내 자신을 일으켜 새워야 한다. 그래야 나 아닌 타인(他人)에게도 떳떳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나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 다 음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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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바보
나는 길을 가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그 이유는 아까 보았던 구름이 어떤 모습으로 변 하여 나를 따라 왔는지, 아니면 앞장 서 가는지가 궁금해서이다.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구름 의 모습과 하늘색이 신기해서이다. 아마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조금 이상하게 생각을 할 것이다. 살기 바쁜 세상에 넋을 빼고 하늘만 쳐다보며 걸어다니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 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좋은 대로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생활 신조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며 길을 걷든, 강을 보며 길을 걷든,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자유이기 때문에 타인의 눈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런 나를 이기주의(利己主義)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 데 결코 그렇지는 않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하지만 친구나 좋은 사람들이 잠시라도 내 가까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그들에게 내 가진 것을 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기주 의로 치장한 사람은 아니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 안에 서 할뿐이다. 내 이러한 생활 태도는 어릴 적부터 가져온 꿈 때문 일수도 있다. 수많은 직업 을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서 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과 같이 틀에 박힌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머리 모양, 짜여진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기 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자유 직업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고 사물이든 자연이든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꿈 꿔 왔었다. 비 록 그 꿈이 이루어지든 말든 무작정 꿈부터 가지고 살아보자는 신념 아래 지금껏 숨을 쉬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 내 삶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인가! 간혹 내 자신에게 던지는 이 어려운 질문에 모든 기운(氣運)이 빠져 버리는 때가 있다. 바로 지금과 같은... 그 러나 나는 좌절(挫折)하지 않는다. 지금껏 꾸어 온 꿈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기 에 나는 내 꿈을 깨어 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며, 언제가 이루어질 그날을 또다시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꿈이 꿈으로만 끝나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하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내 꿈을 이루고 말 것이다. 자유로우면서도 생계 유지를 할 수 있는 직업을 반드시 얻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누 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내 곁에 끝까지 머무르며 나를 도와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 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아무런 일도 하고 있지 않은 일명 백수에 불가하다. 비현실적 으로만 보이는 자유의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나이 많은 어린애에 불가하다. 그리고 꿈을 꾸 며 살수 있다는 것 하나에 들떠 있는 바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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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나는, 지나 버린 시간을 모두 잊어버리려 하는 안 좋은 습관 을 가지고 있다. 그 지난 시간이 즐거웠던 것이든, 그렇지 않았던 것이든 나는 모두 잊으려 하고, 현재의 시간만 중요시 여기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현재의 시간을 중요시하며 살아가므로 써 보람을 얻는 것도 아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무수히 많 은 것들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도 많이 있다. 이럴 때,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나를 찾는 법을 배워,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갑작스레 머리를 스친다. 이렇듯 지난 시간도 결코 지나갔다고 잊어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들 마음 어느 한구석에 곱게 간직을 해 놓고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꺼내 보며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현재가 중요하다는 말에 바보와도 같이 그 한가지만 중요시 여기며 한번 지난 시간의 조각들은 모두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미 내 지난 모습을 모두 잃고 난 후에... 앞으로 그 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서 위로를 삼아야겠다. 그리고 아직도 현재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가 중요하지만 가끔씩 내 자신을 뒤돌아보고 찾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는 얘기다. 이러한 준비 없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나를 잃고 헤매게 된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엔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 니다. 그래서 지나 버린 시간을 간직해 놓고 살아가자는 얘기다. 그러나 이 말에 사람들은 얘기할 것이다.「마음 편한 소리하고 있네...」라고. 어떻게 들으면 그들의 말도 맞는다. 바쁜 현실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어찌 지난 시간까지 간직하고 살수 있겠는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누구보다 현실을 헤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뒤늦게 깨달은 것,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 지난 시간들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러니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삶속에서 나만이 돌아볼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살아가도록 하자. 지나 버린 시간의 간 직이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렇다. 꼭 필요한 것은 나중에 찾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곁에서 굴러다니면 우리는 귀찮다는 듯이 멀찌감치 밀 어 두기 마련이다. 그리고 꼭 필요할 때, 그것을 잃어버려 애태우는 일일 심심지 않게 생긴 다. 우리도 그러기 전에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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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뒤에 오는 것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 동안을 나는 기다림이라는 그림자를 항상 등에 지고 살아왔 다. 이제와 생각을 하면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데, 그때 왜 그리 기다림이라는 허무한 것에 이끌렸었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봐도 잘 알 수가 없다. 어릴 적에는 볼 일 보시러 서울 가신 어머니를 저녁 늦은 시간까지 기차역에서 기다렸고, 학교가 끝나고 난 뒤 에는 친구를 기다렸고, 이것 뿐만 아니라 나에겐 수없이 많은 기다림이 뒤를 따라 다니곤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기다림 뒤에 오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서울 다녀오시는 어머니의 지친 듯 보이는 얼굴에서 피어나는 미소와 어머니 손에 들려져 있는 많은 먹거리들, 학교가 끝나고 기다린 친구들에게서는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정 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기다림 뒤에 오는 것이 아주 많았지 않은가! 지금 내 문장력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렇지, 위에 말한 것을 제외 하고도 무척이나 많은 것들이 그 기다림 뒤에 따라와 나를 기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어쩌 면 나는 그 기다림 뒤에 오는 것들을 생각하며 더욱 기다림을 즐겨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러한 기다림이란 것은 이제 모두 먼 옛날 추억의 수채화처럼 내 가슴에 스케치돼 있을 뿐이다. 지금 내게 기다림이라 하면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즐거워 내가 먼저 기다림을 찾아 나선 때가 있 었는데 무엇으로 인해 기다림이라 하면 고개부터 젓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있 어 내게 기다림이라 하면 시간 낭비의 원인이라는 생각부터 갖게 된다. 무엇을 기다려 봐도 그 뒤에 오는 것은 허무함 뿐... 다시는 무엇을 기다리기가 두려워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 다림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 기다림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떠나서 그것을 기다리는 과정이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말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그렇고, 내 자신을 잃고 나서 나를 기다리는 것도 그렇고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기다림을 아름답게만 보지 않는 이유 는 그 기다림에서 얻은 가벼운(?) 상처 때문인데, 이를 제외시키고 본다면 기다림은 정말 아 름다운 일이다. 그 기다림 뒤에 오는 것이 날카로운 비수(悲愁)가 아니라면 기다림은 자처해 서 해볼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것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그무엇을 지니고 있다. 어차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다림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마 주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림을 기쁘게 생각해야 하며, 그 뒤에 오는 것을 아무런 가식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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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림마장조 야상곡 2번을 들으며
나처럼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양 있는 사람이 듣는 다는 클래식에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미친 듯이 떠들어대 는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지나간 팝송이나 가요, 때로는 유럽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다. 내가 이렇게 음악을 가까이 접하며 살게 된 시기는 중학교 시절부터 였을 것 이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바로 어머니가 병환(病患)안으로 병원 신세를 지시 게 되신 터라 집에서 홀로 지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음악 듣는 것이 습관화되어 버렸다. 나 에겐 친구도 많지 않은 관계로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자연스레 많아졌고 그로 인해 음 악은 나의 친구로 변하여 내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학교 음악 시간 엔 주로 교향곡이나 그 곡을 작곡한 자들 중심으로 하여 공부를 했는데도 불가하고, 난 팝 송과 가요를 듣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너무 되바라져 있던 것인가..... 잘 알 수는 없다. 그렇게 많은 세월은 흐르고 난 지금에도 나는 교향곡이나 클래식 같은 곡은 거 리를 두고 가끔씩 듣는다. 이러한 버릇은 음악을 처음 접할 때부터 너무 잘 못된 음악 선곡 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우리 속담도 있듯이 처음부터 가요. 팝을 먼저 듣기 시작했으니 그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요즘도 나는 옛날 팝송과 가요를 들 으며 마음을 비우곤(?)한다. 덕분에 남보다 차분한 마음을 갖게 되어 마음 편히 모든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만약 클래식이나 교향곡을 들어 왔었다면 지금쯤 내 모습은 어떻 게 변해져 있을까. 지금보다 더 차분해져 있을까, 아니면 모든 일을 너무 느긋하게 생각하고 처리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한 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라디오 올 드 팝송 프로에서 우연치 않게 '쇼팽의 내림마장조 야상곡 2번' 곡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 론 그 곡은 한 연주인(재즈)이 자기에 맞게 편곡하여 연주한 하나의 세미 클래식 같은 분위 기를 주는 클래식 곡이었다. 그 곡을 듣는 순간, 음악을 듣는 내 습관마저 바뀔 뻔했던 아주 신선한 느낌을 주는 곡이었다. 물론 그 곡은 아니지만 지루한 클래식도 편곡을 하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느낌을 주는 곡으로 탈바꿈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 나는 오 리지널 곡이 아닌 편곡된 클래식 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캐논도 원곡 보다는 조지윙스턴이 라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이 더 좋고, 그 밖에도 편곡된 클래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내게 이런 변화를 갖게 하여준 '쇼팽의 내림마장조 야상곡 2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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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앞에 서서
고향을 떠나온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서울 어느 동네 언덕에 위치한 친척 집 대문 앞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루종일 반복되는 변화 없는 시간들을 술렁거 리며 불어 대는 바람에 날리며 이렇게 넋을 잃고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내가 사는 고향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많은 자동차가 이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을 버스라 고 하는 차가 동네 사람들을 가득 싣고 저 밑에서 저 위로 쉴 사이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저 버스가 출발하는 곳과 종착지는 어디일까... 나는 이 동네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벌 게 아닌 점이 궁금해 졌다. 고향에 있을 때는 마을 버스라는 것 대신에 시내(市內) 버 스가 있어 오일장만 되면 시골 곳곳에서 나오시는 어르신네들을 태우고 시내까지 나오곤 하 는데, 나는 그 버스가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에 종착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물론 매일 보 는 풍경이었고 끊임없이 돌아 치는 내 성격을 보면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러나 이곳에서 의 나는 발묶인 동물 처지라서 그러한 사소한 것에서도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비록 내 발 은 묶은 줄이 교통사고가 남기고 간 후유증이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전의 나의 모습과 비 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착잡하다. 그리고 동네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서는 왜 그리 행복이 넘치는 것 같아 보이는지... 그들은 서울 생활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 러워 보였다. 하기야 이곳에서 태어나거나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생활했으니까 그러한 모습 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는 시내와 변두리라는 말이 있기는 하 지만 사람 많은 것은 시내나 변두리라고 해서 거의 차이나는 것 같지는 않는다. 이러한 곳 에서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것만 같이 보인다. 우선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모두가 소비자이기 때문에 머리만 잘 써서 무엇을 한다 해도 성공할 확률은 높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 만 하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방안에서 뒹굴다 책이나 좀 보 고, 점심 먹고 나면 식곤증(食困症)에 못 이겨 한 숨 낮잠을 자고 나서 저녁을 먹는다. 그리 고 새벽까지 잠 못 들고 공상(空想)의 나라를 헤매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또 아침을 맞으니 얼마나 한심한 삶인가... 그러나 나는 위로를 한다. 지금은 본이 아니게 몸이 아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다 밝은 미래를 설계해 나갈 얼마 후를 위해 체력 보충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위로를 한다. 

얼마 전 10톤 트럭에 치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에 감사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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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들르고 싶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둡던 시간이 흐르고 그 뒤로 조금 안정된 빛을 내포한 햇살이 비쳐 져 오는 날, 나는 집 앞에 있는 강둑으로 발길을 옮겼다. 얼마만에 두 다리로 이 둑 위에 서 보는 것인가! 나에게서 잊혀졌던 한 계절의 아쉬움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지나 갔다. 근 반년(半年)이라는 세월 동안 와 보지 못한 이 강변과 싱그럽다 못해 슬프게 와 닿는 이 바 람의 느낌,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병원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잃 고 얻느라고 오늘 맞는 이 느낌을 맛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이렇 게 자연을 대하며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다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병원에서는 밥 먹고 자고 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고, 간혹 바람이라도 쏘일라 치면 마땅히 갈 곳이 없이 1층 로비나 병원 건물 중간에 위치한 옥상(屋上), 그리고 별관이라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어린이 전용 병동밖에는 마땅히 바람을 쏘일 장소가 없었다. 그것도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아예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림에 떡 보듯 병실 창문밖에 펼쳐진 차들만이 가득 한 거리를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기야 병원이란 곳이 어디 휴양소 같은 곳이 겠는가 마는... 하여튼 그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자연의 이 신비함을 모두 상실(喪失)하는 줄 만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마주하고 보니 감개 무량(感慨無量)할 정도이다. 그리고 내 가 병원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오늘 할 예정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림처럼 예쁜 수 필집을 한 권 사러 서점에 가는 일이다. 병원에서 뒤적이던 전문 서적과 몇 번씩 읽은 시집, 잡지, 혹은 어느 교회에서 주고 간 읽지 않은 신문 등을 모두 접어 두고 이 봄날의 풍경처 럼 싱그럽게 쓰여져 나간 어느 수필가의 글이 담겨져 있는 책을 한 권 구입하러 서점을 찾 을 것이다. 내가 찾을 서점에는 그토록 신선한 수필집이 있을 것인가... 조금 마음이 뛴다. 아니 설레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찾는 수필집이 없다 해도 큰 실 망은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가짐도 해본다. 그 이유는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유이고, 앞으 로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내가 찾는 것들을 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이다. 아직 내겐 지난 병이 남기고 간 후유증이 몸 안 곳곳에 남아서 언제 고개를 들어 나를 괴롭힐지 모른 다고 걱정 어린 소리로 말을 해주던 주치의(主治醫)의 말이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걱정 이 되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자연과 희망찬 기대가 있기에 행복하다. 비록 지나 버린 시 간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소중했던 시간들은 내 마음 한켠에 곱게 자리하고 있으니 후회 는 없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자유와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할 뿐이다. 나는 오늘 그토록 그리던 수채화 같은 수필집을 사러 서점엘 가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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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우리 나라가 선진국 대열(隊列)에 진입했다며 각 방송사에서 자축(自祝)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년이 지난 듯싶다.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도 치른지 어느새 10년 넘짓 세 월이 지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우리 나라가 선진국으로서 이젠 자리를 잡을 시기가 충분히 된 듯 싶은데, 어딘지 모르게 허름하다는 느낌이 아직까지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지역들을 살펴보면 80년 초반까지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는 것은 이젠 누가 보아도 믿지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해 버렸다. 그러나 아쉽게 도 이 변화된 지역은 서울이건 수도권이건 그 지역의 중심권에 지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서울 변두리에는 아직 굶주림에 시달리고, 문화적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옹 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동네가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은 절 대 아니다. 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나라 미국에도 빈민층만이 사는 동네가 있다니까... 하지 만 내가 우리 나라 서울을 지목해서 말한 이유는 우리 나라가 국민들에게 빈부(貧富) 차이 를 크게 느끼도록 분위기 조성을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어느 누구는 자가용을 타고 외식(外食)을 하러 다니고, 어느 누구는 식구들의 한끼의 먹거리 값을 벌려고 시장에 새벽부터 나와 자리 싸움을 하는가 하면, 그의 자식들은 학교 점심시간에 예전 우리 부모 대(代)나 했을 법한 물로 배 채우기를 하고 있다. 어느 누가 이 글을 읽으면 아마도 믿 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냉정히 말해 부유층은 그들 나름대로 노력 을 해서 그만큼의 위치에 올랐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빈민층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 다. 그렇게 말을 하면 빈부의 차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지만, 인간이라면 그렇 게 냉정히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로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俗談) 을 우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가? 절 대 그렇지 않다. 빈부의 차이를 줄긋듯 그어 놓고 그에 맞는 사람들끼리 즐겁게 또는 괴롭 게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의 모습을 갖춘 나라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로... 자기 자신 또는 제 가족들뿐이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나라... 이젠 우리가 함 께 힘을 모아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跳躍)할 때가 온 것 같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면 서로 도와 가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음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같은 서 울에 살면서 받는 문화적 혜택을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는 이러한 어이없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겠다. 빈부의 차이가 큰 나라는 절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없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라의 빈민층 동네를 의미하는 산동네라는 숨겨진 상처부터를 하나 둘 찾아가며 치료부터 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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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인연 #1
나에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몇 명 있다. 그들을 한 명 한 명 나열해 가며 내 감정을 말하 기엔 너무 길고, 그들 중 한 사람을 떠올려 보기로 하겠다. 지금으로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사람은 나보다 세 네살 많은 나이를 가지고 있었 다. 그를 알게 된 계기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서이다. 매일 밤만 되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또다른 공간(空間)을 떠도는 자가 되곤 했는데, 어느 게시판에 내가 올려놓은 글을 그가 잃 고 내 아이디(ID) 앞으로 편지(Mail)를 띄우게 되어서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 주고받는 편지의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서로의 이름이며 나이며 취미 등...(어쩌면 이러한 내용이 더 중요할 수도 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의 것들을 주고받고 몇 번의 편지를 주고 받았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편안함을 느꼈는지,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많은 비밀(?)들을 내게 글로서 털어놓았다. 그러면 나는 그의 글에 답하는 글을 띄워 주고 하루 중 때때로 그 의 생각이 나서 다시한번 통신을 해 보기도 하는 가벼운 버릇도 생겼었다. 그 이유는 나를 믿고 자기 모든 비밀을 털어 놓아준 그의 대한 고마움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그의 글 을 잃으며 그를 상상했었다. 이제와 조심스레 털어놓는 얘기이지만 그의 비밀은 자기가 그 동안 겪어 온 세월 중에 만나 온 이성(異性)에 관해 서였다. 나 역시 그와는 성(性)이 달랐 음에도 불가하고 내게 그런 말들을 해주는 그가 참으로 대단해 보였던 것 같다. 그는 그동 안 여러 이성을 사귀어 오면서 많은 상처를 받은 듯 싶었다. 그리고 그 아픈 사연을 홀로 삭히며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나를 알게 된 그는 그의 속 깊은 곳까지 숨겨 놓았던 응어리를 터뜨려 버리기라도 하듯 내게 많은 글을 보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그 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을 뿐, 아무런 위로의 말조차 해주지 못 했었다. 그에게서는 그 당 시 컴퓨터 편지(Mail) 뿐만 아니라 직접 쓴 편지로도 많은 사연을 보내 주곤 했었는데..... 그 러던 어느 날인가, 그에게서 그동안 고마웠었다는 이별을 의미하는 편지 한 통이 우체부 아 저씨의 손에서 내게로 전해졌다. ...그럼 이젠 그의 답답한 마음은 누가 헤아려 줄 것인가가 궁금해 졌다. 비록 그동안 아무런 도움도 못돼 주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흘러내리 는 것 같았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모르지만 가끔씩 그가 그리워진다. 통신 이 접속할 때마다 와 있던 그의 편지가 사라진지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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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엔 나를 찾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느라 제대로 쉬어 보지도 못한 채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헤매이고 있다. 매주 찾아오는 주말이나 일년에 한 번 있는 휴가, 솔직히 그날도 마음 편히 모든 것을 잊고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동안 해 온 일들의 잔해(殘骸)가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이나 건강 전문 상담가들은 쉴 때는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라고 입버릇처럼 얘기를 한 다. 그 말에 우리는 수긍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아가지만 어디 그 일이 그렇게 쉽게 몸으로 옮겨질 수 있겠는가! 또다시 우리는 현실에 급급해 하며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 는 존재로 남고 만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쉴 시간을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21세기 로 치닫는 시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지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토요일엔 나를 찾아 떠나는 날로 정했다. 물론 내가 한가하거나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다. 이토록 급속히 변화하 는 세상 속에서 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뿌려 놓았던 내 이름 석자와 그 뒤에 따라 다니는 명예 건, 불명예 건 모두 내 기억속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서이 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얻어 새롭게 세상을 대하는 법을 깨닫기 위함이 다. 그러다 보면 잃었던 내 자신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토요일을 토요일답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아옹다옹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를 찾으며 살고 싶다면 별다른 준비는 필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일 게다. 아무 리 시간을 많이 비워 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에 잡념(雜念)이 있으면 결코 진정한 휴식 또는 나를 찾는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마음을 비웠다면 어디론가 떠나라. 만약 떠나 지 못할 여건이라면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지내 왔 던 시간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내 자신의 참모습에 대하여 생각을 해라. 그런 시간을 어느 정도 갖다 보면 마음이 한결 편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느낌을 가 지고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 든다면 스트레스 같은 것은 예전보다 줄어들 것이며, 일하는 것이 좀 더 보람되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나를 찾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여행이다, 오 락이다 하는 것들은 그것을 행하고 있는 순간에만 즐거움이 있지,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가 짐을 바꾸기에는 역부족하다. 아니, 여행을 하는 것은 나을 수도 있다. 홀로 하는 여행이라 면 더욱 좋을 수도 있다. 만일 이렇게 홀로 갖는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이 험한 세상에서 홀로 낙오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급속히 변 화하는 세상 속에서 적응할 수 있겠는가... 토요일엔 나를 찾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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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이 작은 별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동물, 그리고 식물들이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그중 우 리 사람이 제일 오염돼 있다. 처음부터 우리별에는 오염된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 (想像)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이 가져온 것이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우리 사람은 문명의 발달을 주도한 큰 주인공이지만 그 문명의 발달이 되는 동안 이 별의 자연은 헤아릴 수 없 을 만큼 파괴돼져 왔다. 그러니 우리 사람들이 제일 오염되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현 실에 있어서는 문명의 발달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사람을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에게 있어서는 그 발달이 해(害)가 될 수 있다. 조물주(造物主)가 만들어 놓은 이 별, 그리고 그에 맞게 태어난 것들은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그늘에 가려 시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들 수 있다. 예전엔 없던 현상, 바로 산성 (酸性) 비가 그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오염의 증거(證據)이다. 이 비는 예전에 우리가 맞고 놀던 그 깨끗한 비가 아니다. 이제 그 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오염돼 있다고 한다. 비록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비를 맞고 자라는 식물 또한 심각한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이 점점 병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우리들 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해결책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더 큰 문 제인 것이다. 내가 예전에 느꼈던 이 별의 자연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이 별이라 칭한 것은 나의 과장된 표현이고 우리 동네의 자연을 보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작은 풍경이라도 이 별의 축소된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고 보기에 우리 동네 풍 경을 보고 이 별의 전부를 보는 것처럼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즘 각 방송사의 뉴스, 신 문, 그 밖의 많은 언론 지(紙)를 통하여 나오고 있는 문제점은 지구 즉, 우리가 사는 이 별 이 병들어 간다는 걱정 어린 소리들로 가득하다. 그것만 봐도 아무리 작은 것에도 자연의 모든 것이, 이 별의 모든 진리가 있는 듯하다. 이렇게 병들어 가는 우리별을 지켜보고만 있 는 다면 머지 않은 우리가 사는 이 별은 빛을 잃어 갈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말을 하 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젠 예전에 맞던 맑은 비도 밤하늘에 뜬 수많은 별 들을 대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병들어 가는 이 별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지금 내가 서 있 는 이 검은 강변에서 바라보는 풍경에는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 이런 곳에서 문득 예전에 보았던 바람꽃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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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 드라마를 보며
친구들은 나를 문화적 혜택을 외면(外面)하는 미계인(迷界人)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현대인 이라면 누구나 TV를 보고 드라마나 쇼 프로에 대한 얘기를 화제(話題)화 하여 대화들을 나 누는데, 나는 그들의 무리에서 벗어나 늘 홀로 미계인처럼 지낸다는 이유에서 였다. 어찌 보 면 그 친구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나는 그동안 이 현실과 발달된 미디어(Media) 매체를 너무 외면하고 살아온 듯싶다. 솔직히 그런 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짜여진 연기 자체가 싫었 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 글을 읽는 다면 내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그 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다. 오히려 신세대(?) 층에 속하는 나이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왜 나는 내 나이 또래 친구들과 다른 사상(思想)을 가져 현 문화적 혜택(?)을 외면하고 옛것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이유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현란하게 흔들어 대는 몸 동작 에 무어라 하는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유행가(流行歌), 또는 별 다른 내용도 없는 드라마 등... 이러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짜증부터 난다. 차라리 조용한 음악이나 듣는 것이 행 복하니까. 그러나 요즘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친척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덕에 어쩔 수없이 TV드라마를 보지는 않아도 자연스레 귓속으로 그 드라마의 내용이 파고든다. 그러나 내 보수적(保守的)인 마음이 어디 가겠는가! 변함없이 요즘 방영 (放映)되고 있는 드라마에서는 산만함, 그에 사치(奢侈)성까지 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 다. 물론 제작사 측에서는 시청률이 우선 이니까, 젊은 층에 맞는 소재를 택하여 제작을 했 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 내용은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드물기는 하지만 괜찮은 내용을 전해 주는 드라마가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제작되는 드라마는 너무 비현실, 또는 사치성을 조성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히 나의 막힌 마음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지만, 그 드라마들을 보 며 정말 사치를 사치인 줄 모르고 받아 들여 잘 못 행동할 청소년들이 걱정이 되어 이런 주 제넘은 글을 쓰고 있고, 요즘 드라마를 잘 못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도 잘 못이지만 내가 그렇게 보도록 제작한 그 드라마 제작 팀에도 문제가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보다 깨끗한 내용을 극화(劇化)하여 방송할 의무가 제작 팀에게는 있는 것이니까... 뭐처럼 드라마를 보았 는데, 위 같은 감정이 생겼다는 것에 심심지 않은 유감(有感)이다. 앞으로 내가 다시 쇼 프 로나, 드라마 등을 볼 지 모르지만 그땐 정말 깨끗한 프로로 나에게 다가왔으면 한다. 아직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 시청률만 중요시하는 우리 방송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하루 빨 리 이러한 점들이 개선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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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AS 이브에 절 산에 오르다
푸르디푸른 가을이 가고 흰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그중 크리스마스 이브인 오늘, 동네 앞 산에 위치한 절 산에 올랐다. 각 방송 매체에서는 예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멘트와 음악 으로 난리(亂離)가 났고, 나처럼 무신론(無神論) 자들마저 무엇인가에 들떠 거리를 방황하며 하루를 즐긴다. 하지만 나는 그들 속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방탕(放蕩)한 생활 을 해 온 탓일까, 오늘처럼 모두가 들떠 있는 것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내 자신이 초라해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 하나로 나는 그들 속에 파묻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일 년(一年) 내내 일을 하였을 테고, 그 대가(對價)로 오늘 같은 휴식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참으로 즐거운 날이 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오늘 같은 날의 의미(意味) 는 아무것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매일 쉬다시피 하는 생활과 목적도 없이 사는 듯한 내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끌벅적한 곳을 떠나 이 절 산에 오른 것 이다. 만일 내가 오늘을 즐기려 마음을 가졌더라면 교회나 성당을 찾았을 테지만, 올해는 왠 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믿음도 없이 교회나 성당을 찾아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나 수치(羞恥) 스럽게 느껴졌고, 그런 내 자신에게 화가 날 것 같아서 였다. 그래서인 가! 이렇게 절 산에 오르고 보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나무들은 모두 옷을 벗고 앙상히 서 있지만 그들에게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함마저 느껴지고, 절 안 뜰에서 바라보는 시내(市內) 모습은 무색(無色)의 풍경화처럼 평화롭다. 나는 이곳에서 잃고 있던 내 자신을 찾을 것만 같다. 사방(四方)은 적막(寂寞)에 쌓이고 간혹 들려 오는 목탁(木鐸)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지금쯤이면 저 아래 세상에서는 축제 분위기에 점점 물들어 가고 있을 테지만, 이곳은 보이 는 것마다 자기를 찾는 모습을 하고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나는 이런 모습과 분위기 가 좋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불교를 예찬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차분한 분위기가 좋다 는 얘기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잃고 있던 내 자신을 찾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 말이다. 나는 아직 저 시내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 점점 해는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려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곳은 참으로 이상한 곳이다. 철없이 살아오던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드니 말이다. 그런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찾는 공 간(空間)이 따로 있는가 보다. 이 산 밑 동네에서는 그렇게 찾아도 내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없더니, 이곳에서는 내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잃었던 내 자신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왜 이러한 곳을 일찍이 몰랐었는지... 오늘 나는 예수님 생일 전 날, 부처님 을 모시고 있는 절 산에 올라, 마음으로 예수님 생일을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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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겠지만 나에게도 즐겨 찾던 산책길이 있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그동 안 마음 가득히 쌓여 있었던 답답함과 피로(疲勞) 등이 모두 사라져 버리곤 했다. 꼬불꼬불 길게 늘어져 있던 오솔길과 그 옆으로 흐르는 강(江), 지친 내 마음을 달래기엔 더없이 좋은 산책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곳을 찾을 수 있게 될지 의문(疑問)이다. 그동안 병원에 서 반년(半年) 가까이 지내면서 그곳을 찾지 못해서 그런 의문 반 걱정 반이 생겼는지도 모 른다. 지금은 병원을 퇴원을 하여 서울 어느 동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서울 중 변두리 에 속할 것 같은 이곳이지만 사람과 차는 골목골목을 가득 메운다. 그로 인해 나는 작은 방 안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며, 예전에 해 왔던 고향에서의 그 산책길을 다시 찾아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슬슬 한다. 그리고 그 산책길이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까 하 는 걱정도... 예전에 그곳을 찾을 때면 참으로 마음이 편했었다. 해가 산너머로 기울며 강물 위에 남긴 오색(五色)의 빛과 그 강물 위에 몸을 띄우고 헤엄쳐 다니는 물새들만 바라보고 있어도 정말 행복했었다. 그리고 가끔 나를 잃어 괴로울 때도 그곳은 나를 찾을 수 있는 분 위기를 자연을 통하여 내게 만들어 주곤 하였으며, 비나 눈이 올 때, 그리고 햇살이 좋을 때 나 날이 흐릴 때마다 그곳은 색다른 모습을 하여 나를 반겨 주곤 하였다. 이러한 곳은 이 세상 다른 곳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는 외국 (外國), 그리고 좁게는 우리 나라 어디에서도 내가 즐겨 찾던 산책길 같은 곳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아니, 이런 나의 생각은 나만의 고집에 불가(不可)할 것이다. 어디 아름다운 곳이 한 두 곳이겠는가. 그런 듯싶다. 이 세상 어디에 있는 아름다운 곳보다 나만이 알고 있는 조그 만 곳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듯싶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같다. 아 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직접 보지 못하고, 만약 보았다 하더라도 그곳을 자주 찾을 수 없게 된다면 아무래도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자주 찾 을 수 있고 그곳에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곳을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고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기만이 아는 곳, 산책길이던 다른 곳이던 분 명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 본다. 그중 나는 산책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겐 그 곳만큼이나 아름답고 편한 곳이 없다고 믿어 오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그곳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는 없지만 영원히 그곳을 잊을 수 없을 것이며, 매일 매일 그리워할 것이다. 요즘도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가고, 산책하며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내게도 그러한 산책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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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너머에는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 초등 학교에서는 자연의 변화(變化)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이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을 배우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한 적이 있었다. 이 자연을 배우는 시간은 요즘 어른들의 가식적(假飾的)인 눈으로 바라보면 분 명히 노는 시간으로 보일 것이 당연하지만, 그 당시 나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에게는 가장 재미있는 수업 과목 중 하나였으며, 그 시간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시냇물에 발을 담그 고 이리저리 무리 지어 오가는 송사리 때를 보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따가운 초여 름 태양 아래 목이 말라 고사리 같은 손바닥을 오므려 받아 마시던 야산(野山) 계곡 물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깨끗함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 고 갑작스레 맑았던 하늘이 검게 변하고 피할 시간도 주지 않고 퍼붓던 소나기, 그 비를 모 두 맞고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서로 바라보며 웃음 지었던 선생님과 우리 반 친구들... 그 래도 그때 우리는 너무나 즐거웠었다. 하루 수업 반(半)을 자연 학습이란 것에 빼앗겨 버렸 지만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던 친구는 아무도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바라본 하늘 저 멀리에서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길게 다리를 놓고 있는 모습에 길을 걷던 우리는 한참 동안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기억 또한 난다. 그때 무지개 를 보며 내가 가졌던 생각은 저 무지개 너머에는 어떤 나라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아마 그때의 내 생각은 같이 무지개를 바라보던 우리 반 친구들의 생각과 분명 같았을 것이 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그리고 그때 우리 선생님 또한 너 무나 뵙고 싶어진다. 그때 우리가 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선생님께서 그러한 배움의 터(攄)를 우리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이다. 물론 선생님의 그 말없는 가르침이 가장 중요했다는 것을 이제와 알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자라나는 아 이들의 배움의 환경은 어떠한가! 주입식(注入式)으로 배워야 하는 교과서나 참고서, 시험지 등을 뺀다면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초.중.고 학생의 구분이 없다. 그러므로 요즘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연이 가르쳐 주는 교훈(敎訓)을 잘 알지 못한 다. 그렇다고 좀 큰 학생이라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이젠 학생들에게서 예전의 순수했던 우리의 모습을 찾아본다는 것에는 큰 무리(無理)가 있다. 이젠 그들에게 누군가 자연의 대한 거룩한 가르침을 주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그저 말로만 걱정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수도 없는 일이고, 무지개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궁금해 하는 아이들이 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에 슬픔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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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얼마 전부터 나는 본(本)이 아니게 TV를 계속 보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겐 TV라는 것은 거의 무용지물(無用之物)에 지나지 않는 덩치 큰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것 이었다. 그 이유는 거의 똑같은 내용을 각 채널마다에서는 배우와 대사(代謝)만 바꿔 내보내 는 그런 식의 방송(放送) 자체가 싫었기 때문에 나는 TV 라는 것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으 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보고 있다. 그중 한 오락 프로에서 양심 있는 시민을 찾는 코너를 방영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 보니, 다 시 TV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완전 비양심적인 우리 사회가 그 조그만 브라운관 안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제 양심을 잃었는지 이젠 방송 프로 화(化)하여 양심 찾는 코너까지 마련했는지, 그것에 갑자기 화(火)가 치밀어 올랐다. 그 코너의 대체적인 소재(素材)를 보면, 아픈 사람을 길에 세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 응(反應)을 살펴본다거나, 장애자가 길거리에서 차를 잡는 극(劇)을 연출(演出)해 놓고 자동 차 기사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들이 대부분 이였다. 그러다 몇 시간이 흐르고서야 한 명이 어슬렁대며 나타나 길에 서 있던 자를 도와준다. 그러면 그 사람을 '양심 있는 사람'으로 정 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한 측에서 마련한 조그만 상품을 건네며 '아직까지 이런 분들이 있기 에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것 같습니다' 라는 대사를 가볍게 웃으면서 하고 그 코너는 막(幕) 을 내린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휠체어 탄 한 장애인을 태워 준 택시 기사가, 길가에 주저앉아 아파하는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가 준 사람 이 이 사회의 양심 있는 사람이라니... 그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들이 한 일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병들었단 말인가. 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의 힘겨움을 보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에 속한다 고 하니, 이 얼마나 통곡(慟哭)할 일이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보기 시작한 TV에서 퇴색(退 色)되어 버린 이 사회를 접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한숨 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가 되기까지는 어디서부터 잘 못 되어 온 것인가! 어쩌면 이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국 민 개개인에게서 발생한 문제이다. 그래서 오락 프로그램에서 양심을 가진 자(者)를 찾는 코 너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락 프로의 코너를 보고 절대 오락 그 자체(自體)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 코너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에 우리는 반성(反省)하고 자책(自 責)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만일 그 프로의 코너를 보고 웃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냉정히 말해 살 가치(價値)가 없는 생(生)에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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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위에 자란 풀
나는 요즘 도심지(都心지(地)에서 생활을 한다. 아니, 휴양(休養)을 하며 지낸다. 오랜 세월 을 시골에서 지낸 나는, 요즘 이렇게 도심지에서 지내는 것이 때때로 즐거울(?)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먹고 자고 하는 데서 오는 배부른 동물의 포만감 (飽滿感)인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뒹굴다 점심 먹고, 또다시 낮잠 한 숨 잔 다음 저녁을 먹는다. 이런 게 지금의 내 생활이다. 얼마나 편한 생활인가. 누가 보아 도 부러워할(?) 시간들을 나는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런 생 활속에 어제는 집 앞거리를 조금 거니는 연습을 했었다. 부러진 다리를 절뚝거리며 목발에 몸을 지탱(支撑)한 채 걷는 연습을 했었다. 그러나 그 연습은 내 마음과 같이 쉽지만은 않았 다. 그렇지 않아도 힘없는 또 한쪽의 다리가 왜 그리 떨리던지, 그리고 그 좁은 골목에 차는 왜 그리 많이 다니던지 걷는 연습하기에는 참으로 불편한 동네라는 것을 속으로 웅얼거리며 작은 언덕을 하나 넘었다. 그곳엔 교회를 뜻하는 십자 모양의 대하나가 지붕 위에 매달린 집 한 채와 어느 절(寺)에서 운영하는 유아원 자동차가 그 집 앞에 서 있었다. 힘없는 다리 로 간신히 찾아온 곳의 풍경이었지만 왠지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이라는 곳이 다 그렇 겠지만 그곳 역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였다. 아무리 변두리라도 골목골목 포장은 철저히 해 놓은 모양이다. 그 덕(德)에서인지 그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발달된 문화 속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흙을 밟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집도 많은 만큼 사람들도 많은 이 동네에 모두가 쉴 수 있는 자연 공 간(空間)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쩌면 내가 찾지 못해서 그렇게 느꼈는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후 다시 집으로 향해서 내려올 때, 골목 한 모퉁 이에서 고개를 들고 돋아나는 풀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풀을 보는 순간, 커다란 기쁨과 한편으로는 너무나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흙의 온기(溫氣)가 없을 것만 같은 아스팔 트 속에서 연초록의 풀이 돋아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놀라고 신기했다. 나는 그곳에 힘 없이 서서 그 풀을 한참 동안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본 사람 은 좀 이상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왠 정신 나간 놈이 서 있나...'하고... 그러나 나는 개의 (介意)치 않는다. 이 발달된 삭막한 도심지에도 가녀린 풀 한 포기가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하고 또 감동(感動)을 할뿐이다.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 선(視線)은 항상 보아 왔으므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 메마른 가 슴을, 그들의 초점(焦點)잃은 눈이 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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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머물다 간 자리에 서서
'97년의 시작은 나에겐 봄이 아닌 여름부터 될성싶다. 그 이유는 당연히 내가 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흘려 보낸 까닭이다. 해마다 봄이면 산과 들을 방황(彷徨)하듯이 헤집고 돌아 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올해는 거의 병실 안에서, 방안에서 지낸 탓이 봄을 잃어 버려서 이다. 그러나 봄은 저 창 밖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나 보다. 며칠 전까지 방송에 오르내리던 주된 내용이 봄이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올해도 봄은 오긴 왔었나 보다. 그러나 이제 나 는 봄을 맞으러 한 걸음 내딛어 보려 하지만 따스하고 싱그러워야 봄의 기운은 어디론가 떠 나 버린 듯싶다. 느껴지는 햇살과 바람이 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와 닿는 자 연 모든 것의 느낌은 봄도 여름도 아닌 참으로 오묘(奧妙)한 느낌이다. 벌써 봄은 어디론가 떠나 버린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허탈(虛脫)할 수가 없다. 봄이라는 계절이 나를 배반(背 反)해 버렸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97년을 시작하려니 의욕(意 慾)마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 처음 이 중요하다고 하는가 보다. 무슨 일이든 중간(中間)서부터 시작을 하면 왠지 어색하고, 그 일의 결과(結果)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해의 시작인 봄을 잃고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한 해를 시작하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의욕이 없을 거 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계속 힘없는 생각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한 계절은 잃었지만 그만큼 더 노력해서 다시 나의 생활 방식을 되찾아야 하므로 언제까지 넋을 잃고 살아갈 수 는 없다. 남들 두 배의 해당하는 일을 해야 하며 그들보다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을 하며 잃 어버린 계절에서의 시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나간 계절속에서 잃었던 모든 걸 찾 을 수는 없지만 내 능력(能力)이 되는데 까지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준 비를 하기 위해 나는 봄이 머물다 간 자리에 이렇게 서 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감추어 진 두려움과 세상의 대한 낯설움이 내 안에 내포(內包)되어 있는 듯하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 밑에 마을과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다른 별에서 찾아온 사람들처 럼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서 있는 내 자신은 그동안 이 별에서 잠시 떠나 있었던 사람처럼 왠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모든 느낌은 내가 너무 약해져서 오는 후유증(後遺症) 일 것이라 믿으며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 가져 본다. 이 변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그 동안 잃은 계절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법을 깨우쳐 보려는 마음의 준비를 남몰래 해본 다. 인간은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 처음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일 중간서부터 해 나 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봄이 머물다간 자리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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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기 시작 한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반(半)이상 지나 버리고 말았다. 지나 버린 세월만큼이나 이 세상도 몰라보게 변하였고, 주위엔 점점 새 로운 것들이 생겨나 우리를 즐겁게 또는 아프게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진리(眞 理)일 것인데, 우리 어른들은 이러한 변화에 반기(反旗)를 들고나서는 분들도 적지 않다. 무 슨 이유에서 그 분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반기를 들고나서는 것일까. 그러한 현상(現象)에 나 는 관심이 있다. 그래서 지금껏 변해 오던 우리 사회적인 현상(변화)을 가만히 되돌아보았 다. 그중 우리 개개인의 행동이나, 예절 등... 그런데 나는 여기서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것 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은이들의 예절(禮節) 문제였다. 예전부터 우리 나 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수식어(修飾語)를 항상 뒤에 붙이고 이어져 왔고, 우리 나라 사람 들의 예절은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예절은 점점 서구(西歐)화 되어져 가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점잖게 나타내느라 한 것이고 속되게 표현하자면 버릇이 없어져 간다는 얘기다. 어른들을 보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담배를 한 손 으로 들고 핀다던가, 아무 생각 없이 대중(大衆)들 속에서 욕설(辱說)을 내뱉는다던가... 이밖 에도 많은 것들이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이는 문명(文明)의 개방(開放)에서 스며든 좋 지 않은 병폐(病弊)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어른들이 사회적 변화에 과민 반응(過敏反應)을 보이며 반기를 들고나서는 것도 바로 우리 젊은이들의 예절이 더욱 나빠질까 하는 우려(憂 慮)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 나라를 보고 동방예의지국이라 고 불러 줄 나라도 점점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豫感)이 든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의 예절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것을 방지(防止)하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선뜻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 리 대부분이 이미 오염(汚染)된 현대 사회에 물들어 있어서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태도가 더욱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 실망(失望)을 느끼며, 옛 어른들의 사회적 변화에 반기를 드는 운동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다. 고로 나는 바람처럼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사회적 변화를 무척이나 반대(反 對)한다. 대신 우리의 묵은 사상(思想)을 자체적으로 개선해 가는 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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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수상 소감을 읽다가
내가 글을 쓰기 시작 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시간 동안 나를 잃고 방황을 하느라, 그 무슨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조차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황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백지(白紙)장 꺼내 놓고 내 마음속에 감춰진 그 무엇인가를 몇 장의 종이 위에 휘갈겨 쓰던 날이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글쓰는 것에서 잃어버린 내 자신을 찾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버릇은 아직도 내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를 찾을 수 있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진정 어떠한 것이 나를 찾는 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나는 알지 못한다. 마음 같아서는 진정한 글을 쓰면서 그 안에서 나를 찾는 작업을 하고 싶지만 아직 나에겐 그런 능력(能力)이 주어지지 않았는지 매번 그것은 바람으로밖에 끝나지 않았 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책들을 뒤적이다 우연히 어느 계간지(季刊誌)에 실린 한 시인의 당선 소감을 읽게 되었다. 그 글에서 그 시인은 '내가 쓰는 글은 유서일 것이고....., .....앞으 로도 틈나는 한은 유서 쓰기를 계속할 것이다'라는 글을 당선 소감 중에 밝혔다. 이 글을 읽 는 순간 나의 등에선 찌릿한 정도를 넘어선 강도의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그 글은 내가 표 현 못해 속앓이하고 있던 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준 시원한 문장이었다. 내가 조금만 글을 잘 썼더라면 내가 먼저 써 버렸을 표현법이었다. 그 글을 쓴 시인은 진정한 문인(文人) 이다. 나 같은 애송이 글쟁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문인이다. 그 글을 읽고 나니, 새록새록 용기가 솟았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진정한 그 무엇을 찾아 글을 써야겠다는 용기 가, 조금씩 강렬해지는 초여름 태양 마냥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렇듯 쉽게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을 그동안 나는 뭐하느라 내용 없는 글만 끄적이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가 보 다. 인간은 누구나가 제 멋에 사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 자기 생 각이고 남들이 보기엔 참으로 한심한 자로 보이기 마련인가 보다. 가만히 생각을 하니 지금 의 내 모습이 바로 그 제 멋에 사는 사람인 듯싶다. 그래서 내 기분에 도취(陶醉)되어 살아 가다 정신을 차리고, 남의 눈을 의식(意識)하여 마음 잡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버린 듯하 다. 그래도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언제까지나 내 안에 파묻혀 홀로 허덕 이며 살아갈 나에게 경종(警鐘)을 울려 주는 글을 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 이 아닌가. 오늘은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풀 수 있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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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
한동안 나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무감각(無感覺)해져 있었다.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또는 겨울이든 그 계절의 변화조차 큰 느낌을 받지 못하며 한동안 지내온 것 같은 느낌이 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내가 이렇게 무감각한 사람이 된 것이...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었 는데 말이다. 그때는 하루 중에서 수시로 변하는 자연의 변화(시간적, 공간적)에 대해서도 매우 신기해했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일 행복했었다. 그러다 계절이라도 바뀔 무렵에는 참으로 묘한 느낌의 것(풍경, 향기, 햇살의 농도 등)들이 나를 더욱 들뜨게 했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였을 것이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친구들과 강(江)으로 산으로 놀러 다니기에 바빴었다. 그렇게 이리 저리로 헤 매이다,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야산(野山)에 오르게 되었었다. 그곳은 해가 질 때는 무척이 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많은 나의 친구들이 찾는 곳 이기도 했다. 해가 넘어 가면서 남긴 빛이 휘어진 소나무 가지에 걸려 반짝이는 풍경하며, 어슴푸레 어둠이 밀려들 때면 별들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우리들만의 장소이었으므로 날마다 그곳을 찾아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자연이 좋았고 무엇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게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이 신기하게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 제는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으로 남아 버린 듯싶다. 그 이유는 더 이상 내가 어렸을 때 가졌 던 순수한 마음을, 자연의 변화를 느끼던 마음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나는 변하고 만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오염된 세상에 마음이 때묻어서일 것이다. 그 래서인지, 지금 내가 바라보는 자연의 변화와 풍경에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해지는 언덕에서도 새벽녘 강가에 물안개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봐도 예전에 느끼던 감정을 가질 수가 없으며,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좁아지는 내 동심(童心)이 사라져만 간다. 아 무런 느낌도 없이... 그런 우울한 나에게 오늘은 차가운 비가 내린다. 그동안 잃었던 내 자신 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주듯이, 내 가슴속까지 적셔 주는 비가 내린다. 예전 같았으면 나 는 이 비를 맞으며 좋아라 뛰었을 테지만 지금은 방안에 멍하니 앉아 아무런 느낌이 없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저렇게 고운 모습으로 내리는 비를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게나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 감각해지고, 주위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마음은 잃었지만, 남에게 피해 주 지 않고 지금껏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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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아우성
사람들은 누구나 제 명예(名譽)를 높이려 하는 욕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한 욕심은 나 또한 가지고 있으며, 내 명예가 널리 널리 퍼진 후에도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 고 우리 사람들은 '욕심이란 것이 끊임없는 것'이라 표현을 한다. 가만히 생각을 하지 않더 라도 누구나 그 말에 동감(同感)을 할 것이며, 동감을 하면서도 우리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 게 욕심을 버릴 생각은 거의 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물론 자기 발전을 위해 가지는 욕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그것은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욕심을 버리고 살자'라고 외치고 있다. 그럼 그들은 자기를 발전시켜 명예를 널리 퍼뜨리고 싶지 않아서인가! 아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 니 욕심이란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다들 알고 있겠지만) 그 중 첫 번째 의미 의 욕심은 자기 명예를 높이기 위해 내는 욕심이 아니라 자기 살아가는데 물질적으로 필요 한 것을 얻기 위해 가지는 욕심이고, 두번째로는 정말 자기 명예를 위해 습득해야 할 지식 을 얻기 위한 욕심이었다. 그중 어떤 이들이 '욕심을 버리고 살자'라고 외친 것의 욕심은 위 에서 말한 전자(前者)에 속할 것이다.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 세상은 정 말 살기 힘든 곳이 될 것이며, 이기주의(利己主義)가 난무(亂舞)하는 사회가 되어 버릴 것이 다. 저마다 자기 것을 챙기기에 바빠지면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남을 속여 자기 이익(利益) 을 부당(不當)적으로 얻으려 하는 최악(最惡)의 사회적 타락(墮落)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모여 욕심을 버리자는 소리나지 않는 아우성을 지르 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는 것을 느낀다. 또 그 소리나지 않는 아우성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때때로 이해가 안 가 는 때도 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 하는 그들의 노력이 너무나 안타까워서이다. 그래도 누 군가 나서서 타락하는 사회를 구하고자 희생(犧牲)하고 있다는 것에 적잖은 감동을 받는 바 이다. 지금껏 내가 떠들어온 것은 자기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요소를 얻으려는 욕심 에 관해서였다. 그렇다면 또다른 욕심은 아무런 문제를 갖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후자의 욕심이 커나가 전자의 욕심을 낳게 된 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의 명예에 필요한 욕심을 부려 나중에 명예를 얻게 되면, 그 명예를 앞세우며 자기 몫을 챙기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욕심을 버리고 살자'라는 말에 동감하며 살기로 했다. 좋은 의미의 욕심이건 그 렇지 않은 욕심이건 간에 모두 버리기로 살기로 남몰래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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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것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간혹 내가 아끼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 집만 나서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적응하며 살려는 몸부림에 남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이나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 들에 대해서 더욱 애착(愛着)이 가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간혹 그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소홀하게 또는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 일부 사람들을 제외(除外)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이 아끼는 것에 마음을 모두 내 주고 있다 해도 과언(過言)은 아니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외면 당했다는 생각이 가슴 깊이 박혀 있는 터라서 내가 아끼는 것들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이 있다. 내가 닦아주지 않으면 좁은 방안에서 먼지만 말없이 맞고 있을 말 못하는 것들... 누구 하나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렇게 내가 아끼고 있는 것들 중에는 먼저 낡은 오디오가 있다. 구입한지 몇 년이 지난 물 건이지만 그놈은 내게 언제나 마음을 달래 주는 음악만을 들려주어서 나를 위로하곤 한다. 만일 그놈이 없었다면 나는 우울증(憂鬱症)에 빠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머 리 좋지 않은(그놈에겐 미안하지만) 컴퓨터가 있다. 그놈이야말로 내 손과 발, 그리고 나의 눈과 입까지 대신하여 주는 없어서는 안될 친구다. 밤새 나의 넋두리를 받아 주고, 다음 날 이면 그 넋두리를 나에게 다시 들려주어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머리 나 쁜 컴퓨터, 그래도 때론 귀여울 때가 있다. 다음으론 아직 다 못 다 읽은 몇 권의 책이다. 그 놈들은 내게 생각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제공해 준다. 어떤 놈은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 려가 주고, 또 어떤 놈은 나를 수채화 속으로 초대를 하고, 간혹 짓궂은 놈은 나를 유혹하여 음밀한 수렁 속으로 데려 가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미워할 수 없다. 내가 아끼는 것들 에 속한 물건들이어서이다. 이 밖에 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것들에게는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며 지켜봐 주는 몇 명의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아끼는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 까 싶다. 이렇듯 내가 아끼는 것들은 많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나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는 그 많지 않은 것, 그 모든 것에 다시 하번 감사하는 나의 마음을 표한다. 소중한 것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여! 현실이 아무리 힘들 어도 당신들 주위에 있는 것에 관심과 사랑을 주며 살아가라. 그래서 그것들에게 위로를 받 으며 세상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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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무소유
많은 세월을 흘려 보내 오면서 나는 몇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 유하는 것과 소유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다. 쉽게 생각을 하면 소유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고,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로 쉽게 답이 나오는 문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소유하는 것과 소유하지 않는 것의 대한 근본(根本)적인 차이점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대강 이렇다. 소유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서 정신적(精神的)인 것과 물질적(物質的)인 것으로 나뉘 게 되며, 현대인(現代人)들이 흔히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 물질적인 것에는 금전(金錢)적인 것도 있을 것이고, 부동(不動)적인 재산(財産)일수도 있 고, 말 그대로 어떤 물질(건)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서 얻어지는 부(富)를 현대인들은 애타게 그리워하며, 이를 이루기 위한 몸부림, 때로는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動員)하여 온갖 추태(醜態)를 떤다. 간혹 그런 추태를 떨다 가지고 있던 것까지 잃어버 리는 낭패(狼狽)를 보기도 하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정신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어떤 지식(知 識)이나 깨달음 같은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소유한 것이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많은 양식(糧食)을 머리와 가슴 안에 소유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무소유(無所有) 역시, 위에처럼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물질적으로 무소유 하다는 것은 아 무것(금전(金錢), 부동(不動)적인 재산(財産), 물질(건)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언 뜻 생각을 하면 참으로 무능(無能)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다음으로 정신적으로 무소유 하다는 것(지식(知識)이나 깨달음) 또한 참으로 빈(貧)하게 여겨지는 안 좋은 뜻이다. 우스 게 소리로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다면 아는 것이라도 많아야 하지 않겠는가!' 쉽게 소유 와 무소유의 차이점을 살펴봐도 이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떠나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논(論)하게 된다면 얼마나 어려워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소유한다는 것과 소 유하지 않는다는 것의 진정한 차이에 대해서 알고 싶다. 예전에 읽었던 어느 책에서 '소유한 다는 것과 소유하지 않는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았는데, 확실치 는 않다. 그래서 더욱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혹 내 스스로 그 차 이점을 비교해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무지(無知)의 가까운 내 머리로는 고작 '갖고 있다는 것과, 갖고 있지 않다'라는 일반적인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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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길
요즘 같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에 눌려 있는 압박감(壓迫感)을 가끔 가다 받게 된다. 이렇게 압박감을 받는 사람들의 종류(種類)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 을 것이며, 이를 해소(解消)하기 위한 그들의 자가(自家) 치료법(療法) 또한 다양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압박감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해결 방법이 다르다는 얘기이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어떤 이들은 술(酒)로 압박감을 치료하고, 어떤 이들은 수다로, 잠으로, 음식으로, 또 는 싸움으로 치료하는 경우도 있다. 그중 맨 마지막 경우만 빼놓고는 괜찮은 치료법들이다. 그러나 나는 나그네 길을 걸으면서 압박감을 푼다. 또한 나와 같은 방법으로 자가 치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믿는다. 이 나그네 길을 걷는다는 것은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그 무엇이 그 길 안에 존재(存在)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 길은 혼자 거닐 때나 편한 사람 과 단 둘이 거닐 때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 길은 고독(孤獨)을 즐 기는 사람이나 사색(思索)을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걷는다. 간혹 철모르고 뛰어 들어 헤매이 는 사람들로 인해 어수선한 때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어쩌면 내가 아무도 걷지 않는 나그 네 길만 찾아 다닌 데서 느끼는 잘못된 인식(認識)인지도 모르나, 내가 걸어 본 나그네 길은 정말 한가롭고 아름다운 곳이였다. 나는 그 길을 걷다 맑은 호수도 보았고, 넓은 바다도 보 았으며, 우거진 숲을 지나다 산새들의 울음소리에 놀라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내게 눌려진 압박감을 해소해 버린다. 그리고 나는 이 해소법(解消法)을 다른 사람들에게 권 할 의사(議事)도 가지고 있다.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그리고 내가 이러한 길을 거닐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한다. 그 대상(對象)이 하느님이건 부처님이건 또는 내 가슴속에 있는 그 누구이건 간에 그들에게 모두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 이유는 별게 아니다. 내 가 이렇게 살아, 성치는 않지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 하나와 수많은 좋지 않은 것 들은 모두 빼고 가장 이상적(理想的)인 자가 치료법을 그들이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日常)에서 받은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안 좋은 길로 접어 들어 생(生)을 마치거나 압박감을 잊어 보겠다고 역시 안 좋은 해소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그들 안에 내가 속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앞으로도 나는 무엇인가에 압박을 당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그네 길을 떠날 것이다. 끝으 로 한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길을 혼자의 힘으로 걷는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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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나는 간혹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결코 나 하나 만은 아니겠지만 마치 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변하 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complex)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障碍)를 가지고 있었기에 성장(成長)해 가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눈길을 받았 고, 그것에서 오는 내 자신에 대한 나의 마음의 시선(視線)마저 어두워져 버렸던 것이다. 그 러한 나의 시선은 내 안에서 떠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욱 어둡게 어둡게 변해 가고 있었 다. 그러기에 나는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1년에 두번씩 가는 소풍...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소풍 갔던 기억은 세 네번에 불가(不可)하다. 그것도 모두 초등 학교 다닐 때에 일이다. 그나마 그 시절에는 나의 어머니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나의 손.발 역할을 거의 다 해주신 어머니의 희생(犧牲)이 있었기에 그나마 소풍을 갔었다는, 그 리고 소풍이 주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뿐이겠는가! 어머니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비록 그때는 몰랐지만 최근 들어 무서울 정도로 깨닫고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 후에 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 다. 지금 내 나이는 스룰 일곱이지만 정신 연령은 다섯 살서부터 쉰 살까지의 시간적 공백 을 넘나드는 돌연변이(突然變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어릴 때보다는 몸이 많 이 좋아져 이제 혼자 못하는 것 없이(?) 거의 모든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간간이 떠 오르는 옛 기억에 홀로 감정(感情)에 못 이겨 방황을 하는 때가 종종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나에겐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을 떠가는 구름에 실어 잠시 여행을 보내 놓고, 내가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가 가져왔던 모든 의식(意識)들을 과감(果敢)하게 뜯어 고쳐야겠 다. 소극(消極)적인 나의 성격과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던 일과 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의 초점(焦點)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겠다. 지금 내 곁에는 많지는 않지만 몇 명의 좋은 사 람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정든 것들이 있기에 이제 나의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살아 보려는 노력을 해보아야겠다. 그렇게 살다 힘에 겨워지면 구름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내 옛 기억을 흠뻑 맞아 가며 나를 위로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내 남은 삶속에서 모든 것을 외면하며 살던 예전의 내 모습을 모두 벗어 내던지고,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 야겠다. 수치스러웠던 예전의 나의 묵은 의식은 모두 초여름 태양에 태워 버린 채... 지금 이 대로의 내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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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거짓 그리고 양심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면 저마다 상반(相反)되는 그 무엇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 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아침이 있으면 어두운 밤이 있고, 남 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듯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그에 대응(對應) 하듯이 그 무엇인가가 존 재한다. 그 중에는 간혹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리(無理)를 일으키는 것들이 간간이 섞여 있어 세상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그런 것들 중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실과 거 짓'일 것이다. 이것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가 눈물을 흘렸다가, 또는 사이 가 좋았다가 다시 사이가 나빠지곤 한다. 어찌 보면 이 '사실과 거짓'의 차이도 크게 나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사람 양심(良心)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 실과 거짓 또한 사람 양심에 따라 한마디 내뱉은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붙여 놓았다가 떼어놓는 결과를 초래(招來)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창 주목(注目)이 되고 있는 한보사건 문 제 역시 바르지 못한 양심이 가져온 큰 사건의 예(豫)인 듯싶다. 그리고 그 사건의 진상(眞 相)을 밝혀 내려는 청문회, 이는 '사실과 거짓'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예로서 나무 랄 때가 없다. 그 이유는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나 측근(側近)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신 문(訊問)하는 의원(議員)들의 질문 내용이 '당신이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거짓 이냐?'라고 하나같이 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증인(證人)들은 사실 또는 거짓을 의 원들에게 증언(證言)을 한다. 비록 그 증언이 '양심적으로 나온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 는 나중에 밝혀질 문제이지만, 그 커다란 사건 역시 양심적으로 살지 못한 자들의 의해 저 질러진 것이며, 현재 우리는 그들의 양심에 사실과 거짓의 여부를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어 찌 보면 그 사건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들의 양심을 떠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 다. 이렇듯 우리들이 추구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 양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며, 훗날 누군가 나에게 진실 되게 살아온 것이 사실이 냐고 물어 보았을 때, 자신 있게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보사건의 마무리가 지고 나면 그 대가(對價)를 받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을 속이고 거짓을 증언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는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 일거라 믿는다. 훗날 진실 되게 살았었노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했을 때, 그 들 입에서 '진실'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9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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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속에 살고 싶다
언제부터인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는 급속히 변해 가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기 위하여 노력을 하다 보니, 자잘한 감동(感動)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인가, 신문이나 TV 등에서 는 우리에게 감동을 줄 기사(記事)나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우리는 그것들을 보면서 잃었던 감동을 받게 된다. 간혹 그러한 것을 대하고도 무뚝뚝하게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있기는 하 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다. 남보다는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잘 못된 의식(意 識)이 머리속에 박혀 있어 웬만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기는커녕, 그 장면(場面)을 외면하기 일수이다. 참으로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은 음악 듣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 말은 요즘 사람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감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는 작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음 악 듣는 것과 감동을 받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나?'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당 연히 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문학이건, 영화이건, 음악이건 간에 이들은 모두 예술(藝術)에 속하며, 예술이란 우리 인간이 가지고는 혼(魂)이 깃들어 있는 순수(純粹) 작품이다. 그러므 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의 혼을 느낀다는 것이고 혼을 느낀다는 것은 그 혼에게서 그 어떤 감동을 받는다는 의미(意味)가 된다. 그렇기에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감동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감동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도 끼어 있다. 언제나 음악을 들으 며 그 안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속에 살 정도로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 착각이 더욱 심해져 병적(病的)으로 까지 악화가 되어 버린 듯하다. 신나게 흘러나오는 음악 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어느새 모든 외로움과 슬픈 일들을 잊고 그 음악의 경쾌한 멜로디 속에 빠져들고, 조용한 음악이나 슬픈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히 자리 를 지키고 있는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이러한 증세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앓고 있다고 어느 분이 해주신 말에 나는 위로를 삼고 살아가고 있다. 솔직히 내가 음악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너무 큰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적잖은 걱정도 한편으로는 되지만, 아 직까지는 별 탈없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간혹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나 우리에 게 피해(被害)를 주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음악이 더욱 듣고 싶어지고 그 음악 속으로 뛰어들어 살고 싶어지는 충동에 어쩔 줄 모르다가 살짝 미치고 만다. 그래도 이러한 내 모 습이 좋다. 무언가 아름다움 속에 빠져들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행복 하다. 나는 때때로 음악속에서 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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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지 않는 것들의 반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껏 한시(漢詩)도 숨을 멎고 산적이 없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 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이라는 것은 숨을 쉬지 않는 그 무엇과 상통(相通)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숨을 쉬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대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숨쉬지 못하는 것들로부터 우리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것들이 우리를 외면해 버리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속속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인류(人類) 문명이 발달해 가면서부터이다. 그렇게 모 든 것들이 발달함에 따라서 자연히 우리 주변에 숨쉬지 않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대 표적인 것을 찾아본다면, 컴퓨터를 비롯하여 각종 전자 제품들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전 기를 제공받아야 제 성능을 발휘하며, 마치 생명이 있어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들을 편하게 해주지만 일단 전기가 차단(遮斷)되거나 고장이 나고 나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 처치(處置) 하기에 곤란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모여 사 회적으로까지 큰 피해를 주기도 하고, 컴퓨터 같은 경우 계속 발전이 있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인간을 지배(支配)(?)할 우려(憂慮)도 있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전자(前者)에 밝힌 것과 같이 가전제품을 비롯하여 수많은 폐품(廢品)들이 우리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줄게 분 명(分明)하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점차 오염되어 버린 숨쉬지 않는 강(江)이나 산, 그리고 오염된 모든 자연의 숨쉬지 않는 것들의 반란(叛亂)은 우리에게 어떤 피해를 가져다줄지 아 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숨쉬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새롭게 대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며, 어쩌면 더욱 신경을 써서 돌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 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후세(後世)들을 위해서이다. 지금 당장 편하기 위하여 외면해 버리는 숨쉬지 않는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思考方式), 이러한 것부 터 고치고 세상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 자신도 그렇게 올바 른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다. 내 방 주위를 둘러보면 숨쉬지 않는 것들로 가득 널려 져 있고,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치우거나 신경 써서 만져 주지 않는다. 이런 내가 위와 같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지금 나는 무척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에 괜스레 실망 (失望)이 간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에게 이래라저래라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 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위와 같은 글을 쓴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숨쉬지 않는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게 되면 숨쉬지 못하는 것들은 겉잡을 수 없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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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감추기
얼마 전, 나는 친구에게 바람이 불어오는 날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 러자 친구는 내게 '참, 슬픈 놈...'이라는 말을 힘없이 내던졌다. 그 친구의 말(語) 속엔 무엇 이 담겨져 있었을까, 나는 몇 날이 지난 오늘 그때 친구와 나누던 얘기를 떠올리며 생각에 빠진다. 언제나 나는 바람을 좋아했던 게 사실이었다. 산들바람이건, 실바람이건, 아침에 부 는 바람이건 저녁에 부는 바람이건 뭐든지 좋아했었다. 내가 그렇게 바람을 좋아한 이유는 그 당시엔 알 수가 없었고, 그저 바람을 맞으며 숲 속에 또는 강가에 앉아 있기를 좋아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동네 골목이나 벼를 거둬들인 논 밭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떼지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그들 중에는 나의 친구가 없었던 것 으로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하니, 정말 그때는 내 주위에 친구라 칭할 만한 사람 이 없었다는 것을 알겠다. 그래서 내가 바람을 더욱 좋아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람은 나 를 아주 편하게 해주었으므로 나는 친구라는 존재의 의미를 몰랐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바람 을 맞으면서 나는 그때 무엇을 그리도 많이 생각하였을까! 솔직히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거 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홀로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진 덕(德)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것 도 가진 것 없이 내 안에서만 끊임없이 방황하는 그런 모습의 사람? 아니면... 알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아직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야 하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때 나의 하나밖에 없던 친구는 내 게 '참, 불쌍한 놈...'이라며 미리 지금의 나를 예견(豫見)하고 힘없이 말을 했었나 보다. 참으 로 고마운 친구. 그때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지금의 내가 조금은 바보스럽다. 그런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집 위쪽에 있는 바람이 부는 작은 언덕에 앉아 있다. 물론 내 주위엔 아무도 없다. 부는 바람에 떨어진, 제 다 돋지도 못한 어린 나뭇잎이 땅 위에서 험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나뒹구는 모습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 는다. 그리고 보고 싶지도 않다. 지금 이대로가 행복할 뿐이다. 세상에 오염된 사람을 사귀 어 내 마음마저 병(病)들 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홀로 바람을 맞으며 보내는 것이 한결 났 다. 간혹 사람들이 그리워져 미칠 것 같은 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내 환경이 좋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어 봐야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듯이, 나도 지금 내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을 갖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겐 슬픔이 시시 때때로 찾아 든다. 그래서 나는 그 슬픔을 모두 바람에 감추고 살아간다. 나를 찾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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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1일
근(近) 사(四) 개월이라는 세월을 잃고, 두번째로 맞는 새로운 달이 시작하는 날이다. 한동 안 잊고 있던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조금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는 1997년 5월 1일의 아 침,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현실에 적응되지 않아서인가! 지붕 위로 펼 쳐진 푸른 하늘이 가벼운 현기증(眩氣症)을 동반하여 내 눈(目) 속으로 파고들었다. 모처럼 맞은 새로운 날의 시작을 나는 예상치 않은 현기증을 느끼며 맞이한 것이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들을 잃어 온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 금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견딜 만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얻은 자유를 마음 껏 느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포만감(飽滿感) 때문에 아침부터 찾아 든 현기증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아 무리 어려운 처지(處地)에 있어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 삶의 느낌들이 다른 각도(角度)로 비추어질 수 있다는 것을 5월이 시작한 날 아침에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나뿐만 아니라 많 은 사람들은 그동안 현재의 삶이 어려우면 모든 것을 어렵게만 바라보는 시선(視線)을 가지 고 살아왔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을 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현재의 시각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 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와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지만, 그때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삶이란 그렇게 쉬우면서도 때론 너무나 어려운 것인지도 모 르겠다. 그런 것을 알려면 일단 내 삶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지만 교통사고라는 것이 내 삶 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해서인가, 요즘은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다. 특히 자연의 모든 것들이 더욱 신비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항상 바라보던 강과 산을 지금은 내가 타지(他地)에 있는 터라서 볼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들은 꿋꿋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요즘은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 하 나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터라 세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세상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비록 지금의 내 마음이 세상에 뛰어들었을 때,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장담할 수 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너무나 삶이 어렵게 만 느껴진다면 삶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 만일 그런 계 기가 만들어진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새롭게 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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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살아가기 힘들다고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대견(對見)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어쩌면 내가 꿋꿋하게 살고 있 지 못한 데서 오는 하나의 질투심 섞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비록 나만 이런 질투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듯싶은데...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을 그들과 같이 힘있게 살아갈 용기 를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나도 잘은 모르지만, 혹 나에게 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보게 되었다.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인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급급해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내게도 직장이라고 하 기엔 뭐하지만 아침부터 나가서 일할 수 있었던 곳이 있었다. 그곳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은 지금과 같은 허(虛)한 생각들을 할 시간이 없었으며, 그날그날 처리해야 하는 일을 수습하기 에 바빴었다. 지금에 와서 반성(反省)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 좀 더 일을 열심히 하였을 걸 하는 후회(後悔)가 생긴다. 하지만 모두가 지나간 일이라 여기며 나는 지금의 처지를 한탄 (恨歎)하고 있다. 이 역시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선망(羨望)의 눈빛으로 바라본 사람들에 대해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 그리 힘차 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것을... 그러다 보니, 그 이유의 윤곽(輪廓)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였다. 물론 꿈을 갖고 산 다는 것이 말처럼 사소한 것은 아니다. 지금 내 자신을 바라만 봐도 알 수가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어떤 꿈을 갖기는 싶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려다 몇 번이나 실패의 쓰라린 경험 을 맛본 사람에게는 다시 꿈을 갖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 이어서이다. 그러므로 나 도 그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참으로 부러워할 때도 있고, 때로는 질투심마 저 갖게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번 실패를 맛본 나로서는 이것이 한계(限界)인 듯싶다. 그 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希望)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한 사람이 꿈을 갖고 살아간다 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두가 알고는 있겠지만 정작 자기에 맞는 꿈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고 있으며, 나처럼 꿈을 실패한 사람이나 아직 꿈을 갖지 못한 사람들도 이 작은 별 안에서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도 이 순간 (瞬間)을 고비로 새로운 꿈, 다시 실패하지 않는 소박한 꿈을 가져야겠다. 꿈을 갖고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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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5
* 1 *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방안에서 두리번두리번 천장만 바라보다가 대문 밖으로 몸을 옮겼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아 먼 산 위에 걸려 얼굴만 붉히고, 뉘엿뉘엿 물드는 저녁은 작은 동네 골목골목마다 자리를 틀고 어둠 맞을 준비를 하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다. 이 변해 가는 자연과 시시 때때로 바뀌는 모든 풍경들을 보고 있 노라면 살아서 숨을 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 감사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감사한다. 

* 2 *


어느덧 해는 먼 산 뒤로 얼굴을 감추고 어둠을 이 좁은 거리로 내보내고 있다. 저, 밑으론 잠시 정지하고 떠나는 마을 버스가 가방을 짊어진 중학생처럼 보이는 학생 둘을 골목 구석 진 자리에 떨구어 놓고 다른 목적지를 향해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그리고 버스에서 떨궈진 학생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서로가 갈 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그들 뒤로 는 마른 바람이 따라가다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린다. 잠시 후 우리 집, 윗 골목에서 나온 머리 긴 두 처녀, 내 쪽으로 웃으며 다가온다. 어느 이름 없는 삼류 술집 종업원일 것 같은 예쁘장한 얼굴에 옷은 달랑 한 장 입은 것 같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차림새로 나를 향에 너 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선다. 난 잠시 언 생선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그녀들은 '저, 밑에 슈퍼에는 술이 다 떨어졌데...'라는 말을 짜증난 목소리로 크게 떠들며 내 앞으로 차갑게 지나쳐 가 버린다. 침도 한번 뱉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들 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 무언가를 한마디한다. 그 후로 부는 바람이 매우 차게 느껴진다.

* 3 *


어두워진 골목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서니 또다른 어둠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갈 때는 분명히 없었던 어둠이 작은 방 가득 자리를 틀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어둠을 쫓아내려고 형광등(螢光燈) 스위치를 벽을 더듬어 찾아 올렸다. 순간 몇 번 깜빡거리는 빛의 요동과 함께 방안은 온통 환한 빛으로 채워지고, 어둠은 오간데 없이 사라 진 듯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싸이고 말았다. 무슨 이유일까!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생각을 해보니... 방안에 있던 어둠이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가슴속으로 숨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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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머피의법칙
언제나 생각하지 않고 있던 일이 뜻밖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우린 이런 것을 보고 우연(偶然)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연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그 것은 우리가 꼭 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일명 '머피의 법 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아주 간단하다. 우연이라는 것은 생각지 않고 있었던 일들이 좋은 결과로 변해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고,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은 꼭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 로 현실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이 둘의 차이점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 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내게 있었던 이 둘의 대한 일들을 얘기해 볼까 한 다.

* 우연 *


좀 오랜 된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후에 있었던 일인 듯싶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자주 찾던 강변을 느즈막히 찾아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은 정말 한가롭고 마음 달래기 또는 사색(思索)하기에 좋은 장소였었음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일 그곳을 가곤 했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즐겨 찾던 슈퍼에서 가끔씩 마주치던 사람, 나를 볼 때마다 수줍은 미소로 나를 더욱 설레게 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을 그 멋진 곳에서 만나 게 된 것이다. 그 사람 역시 그곳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우연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후로 그 사람과 나는.....

* 머피의 법칙 *


이 법칙은 노래로도 나와 있기에 별로 할 얘기가 없다. 그 이유는 그 노랫말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단히 얘기를 하자면 이렇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일이 다. 교통사고로 나는 다리가 골절되고 그로 인해 수술 후, 석고 붕대를 하고 근 세 달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다친 다리는 절대 땅에 딛지 말라는 주치의(主治醫)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갈 때나, 복도에서 목발을 짚고 걷는 운동을 할 때, 내내 딛지 않고 운동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바닥에 발을 살짝 딛고 서서(...견딜 만 했으니까) 잠시 휴식을 청할 때 쯤이면 어디선가 나의 주치의가 나타나 나의 모습을 보고 한마디한다. '... 한번만 더 걸리면 목발 압수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이것이 머피의 법칙이다. 꼭 일어날 것(안 좋은 쪽으로)같은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이렇듯 우연과 머피의 법칙은 비슷하면서 절대 다른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이상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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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일기
내가 서울에 머무르게 된지도 어느새 5개월이라는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와 서 이루어 놓은 것은 정작 아무것도 없다. 그저 흐르는 세월만 잡아먹고 있었을 뿐... 그렇게 지내다가 나는 오늘 많은 생각속에 빠졌다. 한동안 잊고 있던 나를 찾기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다. 진정, 나는 이곳에 무엇을 찾기 위해 온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시골 고향에 접어 두고 무작정 이곳으로 올라와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 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니,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고향 에 있을 때는 이곳에만 올라오게 되면 내가 할 일들이 널려져 있을 것만 같았고 모든 것들 이 잘 이루어질 것만 같았는데, 정작 올라오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모 든 것들은 매번 꼬이기 일수였다. 내가 운이 없는 것인지, 정말 이 서울이라는 곳이 만만치 않은 도시라 선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진즉 알았더라면 이렇게 먼 곳까지 올라와 고생을 하고 가진 것 모두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 또한 없었을 텐데 하는 뒤늦은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모두가 지난 시간 속으로 사라진 후(後)이고,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 로 되어 버렸다. 요즘은 이 서울이라는 곳이 사람을 차별하는 도시(都市)라는 것처럼 느껴진 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성공(?)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지금으로 서는 그러한 느낌마저 들고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면 이 험해 보이는 도시에서 너 무나 자신만만하게 살고, 일부 사람들은 내가 상상(想像)조차 하지 못하던 생활을 자연스럽 게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마음이 착잡해져 버린다. 이런 묘한 것들을 느끼면서 나는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마음을 남몰래 가져 본다. 막상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 간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여 성공(成功)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다. 단지 지금의 막막한 생활 에서 오는 지친 마음에 가져 보는 생각에 불가(不可) 한지도 모르겠으나, 이젠 내 갈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온 것 같다. 이젠 젊은 나이 갰기에서 나오는 서툰 행동 을 할 때가 지난 듯싶다. 진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향이든 서울이든 간에 빨리 찾 아 하는 것이 성공하기에 빠른 길이라는 것을 오늘 비로소 알았다. 내 능력의 한계도 알지 못한 채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만 찾아 나선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 이젠 내가 돌아갈 자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다. 이 화려한 도시에서는 더 이상 내가 할 것이 없는 듯 하다. 아니, 내게 어울리는 일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려 한다. 예전 의 나로 돌아가서 내게 맞는 일을 찾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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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들녘을 그리며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요즘과 같이 생각 없이 지낸 적은 거의 없었다. 말로만 듣던 도심 지(都心地)에 갇혀 수많은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 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생활해 본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지내고 있다. 방안에 갇히고, 이 도심지에 갇혀서 시간 죽이기에 급급해 하며 살고 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생활이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생활한다는 것이 아니, 내 자신을 잃고 생활한다는 것이 이토록 힘이든 일 인줄 전에는 몰 랐었다.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동네엔 탁 트인 곳이 없는 듯하다. 나는 지금처럼 생각이 없어질 때면 탁 트인 곳을 찾아가 마음을 열고, 잃어 가고 있는 나를 찾는다. 그러나 이곳에 는 탁 트인 곳은커녕 눈속에 비치는 것들은 모두 높은 건물과 희색 땅, 그리고 표정 없이 걷는 사람들뿐이다. 나는 이러한 곳에서는 잃은 내 자신을 찾을 수 없다. 아니, 마음의 정리 부터가 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곳이 시골이어서 인지, 내 나이에 비해 너무 보수적(保守 的)인지 모르지만 현대 문명이 우리 나라에서 최고로 발달돼 있다는 이곳 서울에서 살기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난 그저, 강과 산이 푸른 모습을 자랑하며 있는 고향 시골에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누가 이런 나를 본다면 '촌놈'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 만 하는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갑갑한 도시에 잘 적응되어 있는 듯하다. 그들은 탁 트인 곳이 없어도 답답한 표정을 짓지 않으며, 간혹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집마다 있는 창문은 모두 닫기에 바쁘다. 뿐만 아니라, 햇살이 너무나 밝게 내려 쬐일 때면 모자나 양산(陽傘)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을 걷는다. 때때로 비가 내릴 때는 그 비를 맞는 사람은 거 의 없다. 그 중에는 꿈을 키워 가는 어린애들도 적지 않게 끼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외선 (紫外線)이나 산성(酸性)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해는 하지만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을 오염(汚染) 되도록 방치(放置)해 둔 우리이기에 아무 런 불만도 표현할 처지가 못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 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이 현실속에서 벗어나서 내가 좋아하여 자주 찾 던 고향 어느 탁 트인 들녘에 나가 나를 찾고 싶다. 지금 이대로 지내다가는 나는 어쩌면 이 세상, 이 도시만큼이나 마음이 오염돼 버릴 것만 같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요즘과 같이 생각 없이 지낸 적은 거의 없었다. 말로만 듣던 도심지(都心地)에 갇혀 수많은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 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생활해 본적은 거의 없었다. 생각 없이 산다는 것 은 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를 잃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는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텅 빈 들녘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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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문학에 관하여 I
- 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사이버 문학에 관하여...

오랜 전부터 우리의 마음을 달래고 때로는 감동을 주어 왔던 문학, 이젠 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현대 멀티미 디어의 매체를 이용하고 있다. 그 가장 쉬운 예가 최근 확산되어 버린 컴퓨터 통신을 이용하는 작품 활동인데, 이 는 작품을 쓰는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젠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 마저 늘어나, 점차 아니, 그 사이버 문 학의 확산이 날로 커져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을 전후하여 확산된 또 하나의 이슈(Issue)인데 2000년을 바라보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빠른 변화도 그렇다고 좋지 않은 변화도 아니다. 다가오는 미래는 정보화 사회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컴퓨터 통신은 아주 흔한 정보 검색 도구로 쓰일 필수품이 되어 버릴 것이 다. 이렇게 컴퓨터 통신을 하다 보면, 정보만을 검색할 뿐만 아니라 가상(假想) 게임이라든가 남이 써 놓은 글을 접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커 가면서 사이버 문학은 점차 발전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이버 문학이 100%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부 문인들은 이 사이버 문학을 비평하거나 아예 읽어 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 한 현상은 등록되는(통신상에...) 작품들의 내용이 너무 가볍거나 간혹 어느 작가의 작품을 편집하여 등록하는 경우 가 있어서 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이버 문학이 자리 잡아 가는 중에 생기는 과도기(過渡期) 현상이라 볼 수 있는 데, 이 현상이 길어진다면 제대로 된 사이버 문학 자리 매김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진정한 사이버 문학을 발전시키려면 어떠한 일들을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무어라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들만 지켜 준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서 말한 상식이란 다름이 아니고 아래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마음으로 습작한 작품 등록하기.
*남의 작품 모방하거나 편집하지 않기.
*등록하기에 내용이 너무 선정적이거나 가벼운 글 등록하지 않기. 등...

*사이버 문학에 대한 의식 개선하기.
*사이버 문학 중 좋은 작품들은 활자로 출판하여 독자들을 늘리기.
*기존 작품들을 사이버 문학으로 재편집하여 등록하기 등.

이와 같은 점들만 신경을 쓴다면 머지 않아 사이버 문학의 정착이 이루어질 것이며, 올바른 통신 예절마저 정착이 될 것이다. 사이버 문학이라 해서 결코 가상 문학이 될 수는 없을 것이고, 오히려 활자화 된 작품들보다 진실된 작 품들이 나올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사이버 문학은 활성화되어야 우리의 문학 세계가 더욱 발전(?)이 될 것 이다. 재 반복하지만 이젠 사이버 문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사이버 문학과 현 활성화된 활자 문학의 차이가 나질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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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문학에 관하여 II
'사이버 문학에 관하여 Ⅰ'에 이어 몇 자 더 적어 보려 한다. 지난번 밝혔듯이 사이버 문학 이 성공적으로 자리 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예절이들이 있는데, 이 예절 을 지키고 난 뒤에 펼쳐질 사이버 문학의 미래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적어보기로 하겠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이버 문학의 매개체는 역시 컴퓨터 통신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컴퓨터 통신은 이미 문자 서비스 통신에서 동화상 서비스의 통신으로 전환되는 실정이고, 그동안 문자 서비스 통신 안의 수없이 많이 등록되어 오던 작품들은 이 젠 그 내용 그대로가 동화상으로 변하여 통신인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줄 것으로 보인 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문자로 서비스되는 통신을 이용하는 것보다 높은 지식을 요하는 일 이라서 이러한 동화상으로 서비스되는 통신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많지 않은 수준이 다.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에는 분명 문자 서비스보다 동화상을 중심으로 한 통신 서비스 이용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앞으로는 이러한 서비스 이용 방법이 더욱 쉬워질 것으로 보여, 사이버 문학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렇게 통신 서비 스가 동화상 또는 그림(Icon)화 되면 컴퓨터 지식을 쌓는데 조금의 방해 요소가 되지 않을 까 하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통신 서비스 구조도 컴퓨터의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인데, 이를 모르고 그림(Icon)만 보고 선택하면서 통신을 하다 보면 컴퓨터에 대한 지 식이 아무래도 남보다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가 우려하는 점이다. 냉정히 말해 '무엇 으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 라는 식의 말을 하면 이에 대해 할 말이 없지만 위에 지적한 바를 잘 생각하여 참고한다면 컴퓨터 통신을 하는데 조금의 도움은 될 것으로 보인다.

말이 잠시 딴 곳으로 빠진 것 같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말을 하자면 다가오는 사이버 문학의 열기와 확산률을 예상하면 매우 희망적이다. 기존의 작품들을 오히려 통신상으로 재 편집하여 올리는 현상마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추측(推測)이다. 이렇듯 사이버 문 학의 미래가 밝은 만큼 우리는 더욱 희망을 가지고 자신만의 작품을 열심히 습작(習作)하여 통신상으로 올려 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단, 앞에서 밝힌 주의 사항은 잊지 말아야 하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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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및 지방 방송 편성의 대한 문제점
아직 전국 방송화 되지 못하고 있는 중앙국의 편성 문제 때문에 지방국의 프로그램 편성이 어려움에 처해지고 있다. 해마다 두번씩 개편해야 하는 불편함과 그에 따른 애청자들의 혼 란이 개편 전후로 두 차례씩 찾아 든다. 이러한 편성은 한가지 프로그램의 지속적인 방송에 서 오는 지루함과 타 방송국의 경쟁에 대비하는 연중 행사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편성 은 중앙국뿐만 아니라 지방국까지 영향이 미친다. 지방국은 중앙국에서 이미 편성(시간대) 한 대로 따라야 하며, 그 편성 여분의 시간을 매꾸기 위한 프로그램을 새로이 편성해야 하는 시간 낭비(?)적인 고생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물론 지방화 시대를 선도한다는 큰 의 미를 내세우고 지방국은 계속 살아 숨을 쉬고 있지만 일부 청취자들은 매우 불만족한 생각 을 가지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대한 해결 방법은 몇 가지가 있을 것인데, 그 중 가장 큰 해결 방법은 지방 방송화 시대를 여는 것이다. 물론 중앙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이 지방 방송화 시대는 제 대로 열릴 것이지만, 전형적인 지방 방송! 이 특이성을 살린다면 지금보다 더욱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중앙국을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지금의 편성 비율을 뒤바꾼다 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어색하게 편성되어 운영되는 지방국의 시간 매꾸기 편성과 너무 젊은 층을 겨냥하여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중앙국의 편성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언제까지 중앙국에 이끌려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하 루 빨리 지방화 시대를 이루려면 위의 사항들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현실화시키 려면 보다 충실한 정보 수집과 지방의 특색을 살린 신선한 구성을 하고 이를 자신 있게 방 송해 나간다면 진정한 지방화 시대, 그리고 지방 방송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 다. 지방국의 프로그램 편성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흔히 지방국의 프로그램 편성의 경우 FM은 음악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편성을 해왔고 AM은 전문성이 부족한(?) 교 양 프로그램 또는 특성이 없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조금 안타까운 현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직 확실히 자리 잡지 못한 현재의 방송 편성 문제 때문일 것이다. 반복되는 얘기지 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방송 편성 법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하루 속히 진정한 지방화 방송 및 시대가 열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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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방송(Radio)의 편성 문제
중앙국에 영향을 받아 온 지방국의 편성을 살펴보면 안타까운 마음부터 앞선다. 그동안 중 앙국의 독재적인 편성에 뒤따라온 우리 지방국의 힘없는 처지에 이제까지 시간 매꾸기의 프 로그램을 제작하고 어쩔 수 없이 지금껏 운영을 해 오고 있는 듯하다. 지방화 시대가 열리 고 지방화 방송이 열린다는 이 시점에서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 구성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 문을 하겠지만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데, 이는 어디 까 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란 것을 염두 해 두고 읽어 주셨으면 한다. 우선 프로그램 주제를 선 별하는 과정에서는 지방국이니만큼 그 지역에 맞는 특성 등을 살린 것들을 선별하여 프로그 램을 구성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중앙국의 프로그램 구성을 모방해서는 안될 것 이다. 흉내내기 식으로 계속 구성을 해 간다면 얼마 못 가서 프로그램의 자원(?)이 떨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중앙국 의 음악 프로그램의 구성은 인기 연예인들을 초대하여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지방국에선 이러한 구성은 분명히 무리가 뒤따르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지방에서 인기 연 예 인들을 초청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앙국의 이러한 구성은 청취율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구성한 것인데, 이를 지방국에서 모방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 닐 수 없다. 그렇다고 지방국이라 해서 언제까지나 고리타분한 주제를 가지고 진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젠 지방화 시대가 열리니 만큼 더욱 특성 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운영해 간 다면 좋을 듯싶다. 혹 이러한 말이 너무 광범위하게 와 닿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 고, 각 프로를 제작하는 프로듀서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방국일 경우, 한 명이 두 세 가지의 역할을 하게 되므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의 틀이 잡히질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만 느낄 수밖에 없지만 해결책을 강구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 중 가장 큰 해결책은 전문 구성 작가를 양성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하면 보다 빠른 성과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지방국의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미래를 아니, 지방 화 방송 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결코 부담 가는 투자가 아닐 것이다. 필히 이러한 투자는 필요할 것이며 더 많은 투자를 하여 좋은 프로그램을 제작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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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Internet)을 통한 미래의 광고
컴퓨터 통신의 붐이 일면서 이젠 외국의 컴퓨터 통신 서비스까지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무섭 게 늘어났 다. 흔히, 국제적으로 이용하는 통신 서비스를 인터넷(Internet)이라 일컫는데, 이는 미국 에서 운영하는 호스트로서 전세계의 컴퓨터 통신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커다란 통신 서비스 이다. 우선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정식으로 가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일부 서비스는 무료로 이 용할 수 있 다. 인터넷의 최고 장점은 자료(Data)를 공유(公有) 한다는 것이고, 컴퓨터 하나로 전세계 의 소식 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인터넷의 전부가 아니다. 전 세계인이 이용하는 통 신 서비스이 니 만큼 이를 잘 이용하여 광고를 하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어 찌 보면 큰 낭비(?)가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큰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희 망이 있다. 이 두 가지 차이는 별 게 아니고, 어떤 사업을 하며 그에 맡는 광고를 인터넷 상(上)에 싣느냐가 그 차이다. 쉽게 예를 들면 컴퓨터와 무(無) 관련된 업종을 하시는 분들이나 인터넷 광고를 해 서 그 영향 권을 국제적으로까지 알릴 필요가 없는 분들은 인터넷 광고를 피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다 름이 아니 고 굳이 불필요한 광고까지 인터넷을 통해 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 관련 업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커다란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인터넷의 광 고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이 종류에는 홈페이지(Home Page)와 홈페이지에 일부분을 이용한 부분 광고가 있다. 큰 효과를 얻기 위해선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홈페이지엔 자사(自 社) 소개나 각종 정보들을 등록할 수 있고, 통신인들은 이를 검색하며 해당 업체의 정보를 얻어 갈 수 있다. 이러 한 방법으로 자연히 광고 효과를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가오는 미래의 광 고이다. 어 느 신문에서는 인터넷 상에서 서비스하는 어느 자사(自社) 홈페이지 광고를 검색하는 사람 에게 해당 광고 업체에서 상금을 준다는 조금 아이러니한 기사도 접할 수 있었던 것을 봐도, 분명 미 래의 광고는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국제 무역을 하는 곳에서는 더욱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밖에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는 상당히 많다고 보는데 위에 언급한 분(컴퓨터 비(非)활용 업체 등)들만 이 광고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좋을 것이다. 가볍게 알아본 것과 같이 인터넷 의 광고는 위와 같은 장단점(長短點)을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미래의 광고 통신 매체이다. 

하지만 너무 단시간 내에 확산되어 버린 경향도 있어 국내 통신인들의 작은 혼란도 있을 수가 있고, 제대로 알지 못하며 인터넷을 사용하는 국내 통신인들로부터 나오는 실수가 국제적인 망신 (亡身)마저 초래(招來)하지는 않을까 우려도 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인터넷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충분한 지식 습득과 기본적인 통신 예절만 갖추어 준다면 앞으로의 통신 문화는 밝을 것으로 전망이 된 다. 

이렇듯 아무리 가벼운 만남이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바보가 요즘 같은 이 세상에 절실히 필요하다. 한번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며,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 이 많아진 이 세상에, 잠시 스쳐간 아름다운 사람을 오래도록 못 잊고 행복해 할 줄 아는 그 바보가 이 세상에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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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엠브란스 인생(人生)
얼마 전,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가로 산책을 다녀오다가 어느 건널목에서 신호등 (信號燈)을 무시하고 달려오던 10톤 짜리 화물 트럭에 치어 한 달 동안 춘천 성심 병원 중 환자 실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사고로 다친 곳은 비장(脾臟)과 다리(足)로서, 비장은 파 열(破裂)되어 제거 수술을 받았고, 다리 역시 골절되어 고정(固定)시키는 수술을 받았었 다. 평소 몸이 좀 약했던 터라 장 제거 수술 후, 한 두 차례 고비(?)를 넘겨야 했고, 며칠 간 산 소 호수의 도움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고 보름이 지나고서야 골절된 다리를 수술 받을 수 있었는데, 의사의 말로는 내 간(肝) 수치(數値)가 낮아서 수술 날짜가 늦어진 것이라고 설 명 을 해주었다. 그렇게 두 차례 수술을 받고 중환자 실에서 약 보름하고도 이틀인가를 더 머 물다가, 보호자 관계(형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상 황 (狀況)을 맞이했다. 그렇게 해서 병원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까지 버스나 기차를 이용 할 수 없어 거금을 들여 엠브란스를 대절하여 서울까지 가게 되었다. 경춘 국도를 따라서 말이 다. 나를 태운 엠브란스는 춘천 병원을 출발할 때부터 응급 환자를 실었다고 울리는 경보음 을 틀기 시작했고, 거의 쉬지 않고 서울까지 내달렸었다. 역시 엠브란스 값을 하는 듯했 다. 책이나 영화에서나 봤듯이 나를 태운 엠브란스는 모든 거리의 차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듯 내달렸고, 나머지 차들은 양보를 해주는 듯했다. 역시 뭔가 다른 차란 것을 그때 느꼈다. 다 행히 나를 태운 엠브란스는 서울 대림동에 있는 병원까지 무사히 실어다 주었다. 

그러나 내가 오는 동안 많은 차들은 혼잡을 이뤘을 것이다. 만일 보통 자동차가 그렇게 달 려왔다면 수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닫혔거나 사망하고 사회적으로는 큰 이슈(Issue)가 되었 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참으로 위태위태한 느낌이 든다. 아무것도 볼 것 없 는 한 인간들이 저질러 온 사건들을 보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믿고 있던 대통령 아 들이 수십 억이 되는 금전을 챙겼고,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은행(銀行)의 장(長) 들 마저 금전 챙기기에 급급해 왔다고 하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가만 히 생각해 보면 그들은 모두 엠브란스 흉내를 내온 폐차(廢車)에 불가하다. 겉은 국민을 위 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속은 누구와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썩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아직 그들에 대한 법적(法的) 판결 (判 決)은 나지 않았으나, 모두 끝난 생(生)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지금껏 엠브란스 흉내를 내 오며 살아왔었지만 그들의 참 모습은 견적(見積)도 나오지 않는 폐차에 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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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Star Wars)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스타워즈'라는 영화가 요즘 최신 작으로 다시 만들어져, 영화관 마 나 성왕(盛旺)을 이룬다는 소식을 어느 신문(新聞)을 통해 알았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 던 그 영화는 미래에 일어날 전쟁의 관한 것에 초점(焦點)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영화 평론가 (評論家)들의 말이 있었으나, 이번에 개봉된 그 영화는 내용뿐만이 아닌, 소리에까지 신경 을 써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영화를 제대로 감상(感賞)하려면 무슨(?) 장치인가 하 는 것이 설치되어 있는 영화관에 가서 감상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그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영화관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 기사(記事)를 잃는 순간, 씁쓸한 웃 음이 났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첫 번째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어떠한 데 영화 속에서까지 전쟁의 느낌을 받아야 하냐는 것과, 선진국 대열(隊列)에 끼었다고 좋아하 던 이 나라에, 그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관이 하나 없다는 것에서 오는 한심한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가 영화나 보고 즐길 때인가! 물론 이 말에 반발(反撥)하고 나 서 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 지금 우리가 현(現) 위치까지 올 수 있었 던 것은 우리 부모님 대의 고생으로 얻어진 귀한 결과이다. 그 분들은 전쟁과 일제시대 때에 얻은 커다란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다. 지금이야 일제 탄압이 없어져 그나마 마음 편히 살 고들 계시지만, 전쟁은 시한(時限) 포탄(砲彈) 같이 어딘가에 감춰져 우리의 헛점을 노리 고 있다. 그러나 젊은 우리들은 이것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 에 만 빠져 허덕이고 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판국에 전쟁 영화를 보며 소리가 제 대로 나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런 것을 보면 미국(美國)은 참 좋은 나라인 듯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미 래 전쟁의 대한 SF 영화를 만들어 대는 여유(餘裕)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가(餘暇) 생활에 더 큰 의미를 두며 살아간다고 얘기한다.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우 리 나라 젊은이들처럼 나라에 대고 '뭐가 안돼요', '뭐 좀 해주세요'라는 투정(?)을 하지 않 아도 되니 말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젊은이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우리 현실 에 눈을 떠보자. 지금 우리가 웃고 즐기며 투정할 때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진국(先 進 國)에서 후진국(後進國)으로 전락(轉落)해 버릴지도 모르는 위기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 내 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내 자신조차 놀라고 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을 잡은(?) 것 은 결코 내가 잘라서가 아니다. 내 자신을 뒤돌아보는 순간, 너무나 한심했었고 우리 전체 가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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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필요한 바보
『이젠 내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비가 내리 던 숲 속에서 우연히 만난 당신과 나눈 아름다운 추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도 아직 기억 을 하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서서히 잊고 계시는지요. 그날, 비가 제법 많 이 내렸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기 전 찾아오는 장마 비처럼 쉬지 않고 내리던 비였었습니다. 다행히 숲들이 우거진 산 속이었던 터라 당신과 나는 서먹한 얼굴을 서로 붉히면서 큰 나무 아래 기대서서 비를 피했던 일, 부디 잊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비록 나는 지금 서서히 잊 어 가고 있지만, 가끔가다가 나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아 름답던 당신과 쌓은 추억을 잊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현실에만 얽매어 살아왔었나 봅니다. 그리하여 그때에 가졌었던 순수한 마음을 모두 잃어만 가고 있는 듯합 니다. 그러나 어찌 그 추억들을 모두 잊을 수 있겠는지요. 이젠 그 추억들은 잊으려 하면 할 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내리는 빗줄기만 서로 말없이 바라보다가 서로의 눈길이 마주칠라치면 더더욱 부끄러워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당신과 나, 그때 당신 모습은 정 말 아름답고 귀여웠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나이가 아마 이삼십 대 였을 거라 기억을 합 니 다. 그런데도 당신이 귀엽게 느껴졌던 것을 보면 내가 첫 눈에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었나 봅니다. 아마도 그때는 나의 그런 마음을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었겠지요. 실은 나도 그때 는 몰랐으니까요. 그땐 단지 부끄럽고 서먹한 기분이 전부였었으니까요. 비오는 산속에서 그 렇 게 서서 오랫동안 들뜬 마음으로 있었던 것은 처음 이었습니다. 어릴 때, 몇 번 혼자서 있 어 본 적은 있지만 말입니다. 그 아름답던 날, 당신과 나는 비가 그칠 무렵 짧은 몇 마디의 대 화만 서로의 가슴에 새겨 주고 헤어졌지요. 그 후로 나는 당신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못 하 고 이렇게 세월만 잡아먹고 있는 한 모자란 생(生)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아마도 바보중 에 바보인가 봅니다. 스쳐 지나간 시절인연에 빠져 허덕이는 바보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 게 나마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게 된 것 하나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듯 아무리 가벼운 만남이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바보가 요즘 같은 이 세상에 절실히 필요하다. 한번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며,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 이 많아진 이 세상에, 잠시 스쳐간 아름다운 사람을 오래도록 못 잊고 행복해 할 줄 아는 그 바보가 이 세상에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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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는 것과 잊는다는 것
실타래보다 더 긴 세월을 미우나 고우나 함께 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들로부 터 잊혀지거나 또는 그것들을 잊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나고 사귀 고, 또는 아옹다옹 다투던 사람들로부터 내 자신이 잊혀지거나, 그들을 내가 잊고 살아갈 수 있 는 가슴을 갖고 산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가슴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 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 보(情報)들만 기억하고 살기에는 우리들의 가슴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 람 중 어떤 이들은 이런 의문(疑問)을 가질 것이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머리가 아 닌 가슴으로 기억해? '라는... 이런 의문은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 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자연을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가슴이다 라는 것은 누가나가 공감(共感)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기억하는 곳이 가슴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내가 조금 모자라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 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머리가 아닌 바로 눈으로 볼 수 없는 가 슴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가슴에 진정으로 와 닿지 않으면 그것을 느끼지도, 기억하지도 못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가슴은 머리가 기억할 수 있는 그 무엇보 다 크기가 무척 작다. 때문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가슴으로부터 지워 나가는 것이 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보통 사람들은 머리속에서 지워졌다고 생각을 한다. 이렇듯 어떤 일 이 자기 머리속에서 지워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그 일을 잊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고로 그 일은 그 사람 가슴에 남아 있다는 얘기다. 이 정도로 가슴으로 한번 받아들인 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에서 한번 잊혀진 것은 거의 기억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나 쉽게 가슴에서 모든 것들을 지우며 사는 듯싶다. 그동 안 지켜 온 우정이나, 사랑, 양심들을 너무나 쉽게 지우며 새로운 것들만 가슴 안에 채워 놓 고 살아가는 듯싶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동안 간직해 온 좋은 것들은 모두 지워 버 리 고 현대 문명이 가져온 새로운 것들만 받으려 하고 있으니... 그러나 한가지만 유의(留意) 하 며 살아가자. 그동안 가슴으로부터 지워 버린 것은 어찌할 수 없으나, 우리 주위에 있는 사 람들과 쌓아 온 아름다운 그 무엇은 지우지 말고 살기로 하자. 이 삭막해진 세상 속에서 그 나마 있는 소중한 모습이 아닌가... 누군가로부터 잊혀진다는 것만큼 내 자신을 슬프게 하 는 일도 없으며, 누구를 잊는다는 것만큼 내 자신을 학대(虐待)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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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금지(通行禁止)
이젠 거의 추억 속의 일로 되어 있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 나라에는 통행금지라는 제도가 존재했었다. 이 제도는 밤 특정한 시간부터 새벽 특정한 시간까지 사람들의 외출을 금지시 키는 제도로써, 범죄를 최소화시키는데 목적을 둔 의미(意味)가 있는 제도였다. 이 제도 를 지키지 않고 새벽까지 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 가출한 사람들 등 을 모두 동네 파출소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이나 이 삼일간 잡아 두는 식으로 하여 몇 년간 계속 이어 오던 제도였다. 이 제도가 폐지된 이유는 아주 간단한 하다. 민주화 시대에 무 슨 통행금지 같은 것을 하느냐는 국민들의 반란(叛亂)과 국가 자체에서도 개화(開化)적인 정치 를 하겠다는 새로운 다짐 아래 이 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그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 나라는 몰라보게 바뀌어 버렸다. 수없이 많은 정치적(政治的) 변화속에서 우리 국민의 정신 까지 바뀌어 버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지금 우리에게는 과분(過分)하리 만큼의 자 유 (?)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 자유를 어떻게 이용할지 몰라 허덕거리고 있다. 그러나 뭐 든 지 양이 넘치면 탈이 나게 마련인지, 지금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매우 방탕(放 蕩)한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다. 이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겐 도덕적(道德的) 개념(槪 念) 이 사라진 듯하고, 자라나고 있는 우리 2세들 또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 의 폐국(弊國)에 가까운 사회로 발돋움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된 원인(原因)은 바로 우리 에 게 통제를 가하는 그 무엇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는 자유라는 것에만 눈이 어두워 그것을 이루려고만 해 왔었지, 정작 자유가 정착되었을 때, 우리를 통제시켜 줄 그 무엇은 만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젠 자유를 누리다 못해 인간성 맨 밑까지 타락(墮落)해 버린 우리는, 과연 이 시기를 어떻게 극복(克服)해 나갈 것인지... 이쯤에서 다시, 본래(本 來) 의 우리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통제를 가해 줄 그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동안 우 리는 자유가 시작되던 날부터 우리 자신 양심에만 모든 통제권(統制權)을 넘겨주어 왔었다. 그러나 우리 양심 하나만 믿고 이 자유를 누리기에는 이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사회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과 예절과 질서 등이 모두 사라 졌 다는 얘기다. 즉, 이를 통제하며 지시해 줄 양심이 우리들 가슴속에서 모두 섞어 버렸다 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예전에 있었던 '통행금지' 같은 강력한 그 어떤 제도가 절실히 필 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자유라 부르며 즐기고 있는 방탄한 생활들을 통제시켜 줄 그 무 엇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들 가슴속이든, 마음속이든 상관은 없으나 반드시 만들어져야 할 제도임에는 틀림없고, 그 모습이 빨리 드러날수록 이 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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