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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숭늉이 맛있는 집

by Casey,Riley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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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숭늉이 맛있는 집


작가 프로필:  정숙(鄭 淑)

 전남 여수 출생. 

 여수여성 백일장 대상.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필과 비평 6주년 창간 기념 중편 수필 현상 응모 당선. 

 해양 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여수 MBC-TV 구성작가(1997~8) 

            


 
               

                  비너스인가 임신부인가?

 

 

 느닷없이 남편이 ‘자급자족’을 선언했다.  포도주를 담을 커다란 항아리를  직접 흙으로 
구워내겠다는 것이다. 애주가란 역시 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가 보다.

 틈틈이 도자기를 만들던 창고에서 포도주 항아리를 위한 작업이 시작 되었다. 남편은 노후
에 가마를 만들어 흙을 구우며 살고 싶어한다. 노후의 취미생활은 젊을 때 조금씩 준비해야 
한다며 가끔씩 구봉산 한산사 아래에 있는 ‘토완 도요지’에서 소품을 만들어 오곤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흙을 반죽하던 남편이 기발한 착상을  했다. 둥그렇게 큰 항아리로만 만
들면 재미가 없으니 여자 나부상을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둔부와 가슴의 곡선
미를 잘 살리면, 그 나부상 속의 포도주 맛이 기가 막힐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여인의  나부상에서 달콤한  포도주를 따라  마신다
(?).........’

 상상만으로도 취기가 도는지 남편의 볼이 그새 발그스름 했다.

 엉덩이부터 목까지 올라오는 반 흉부상으로 정하고 남편은 모눈 종이에 줄자를 놓고 그렸
다. 바쁜 나를 불러 놓고는 앞으로 서 봐라 옆으로 돌아 봐라 수선을 피우기도 하고, 어디서 
구했는지 누드화 책을 연구랍시고 열심히 들여다 보기도 했다. 

 흙으로 손가락 굵기 정도의 코일을 만들어 돌려 올라 가기 시작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앗다. 흙이 질어서인지 몇 굽이만 올라가면 주저앉아 버리곤 하였다. 없는 실력으로  감히 
대작을 넘보는 탓인 것이다. 실패가 계속 되었지만 버팀목을  대고 간신히 엉덩이에서 잘룩
한 허리까지 올라왔다.

 남편은 날마다 퇴근만 하면 그 애첩에게로 달려갔다. 요사이  만취 된 남편의 모습은 찾을
래야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포도주며 포도주 통에는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일찍  퇴
근하는 남편 그 만이 좋았을 뿐이다.

 일요일 오후, 셋째 시아주버님께서 오셨다. 남편은 형에게 자신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받
고 싶었는지 미완성된 그의 애첩을 선뜻 보여 주었다.

 “웬 임신부를 만들고 있냐?”

 “........... ............... ”

 임신부라니? 툭 불거진 엉덩이 쪽이  만삭된 임신부의 배로 오인 될  줄이야.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질금거렸다.

 천신만고 끝에 흙이 가슴까지 올려지자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 했다. 부엌에서 밥공기를 가
져다 동그란 틀을 떠내어 양쪽 가슴에 붙이자 봉긋한  젖봉오리가 만들어졌다. 젖봉오리 위
에 점 하나씩을 더 붙이니 영락없이 수줍은 열일곱 소녀 같았다.

 그러나 큰 엉덩이에 비해 젖무덤은 너무도 작았다. 아쉬웠지만 이제 어찌하랴. 30대의 펑퍼
짐한 촌부의 엉덩이에 갓피어난 10대 소녀의 젖봉오리가 접목된 기형적인 나신상에  만족할 
밖에.

 곧이어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와! 아빠가 ‘위제트’를 만들었다! 우리 아빠 만세!”

 위제트란 눈알이 툭 불거진 로보트 이름이란다. 아니, 임신부는 웬말이며 위제트는 또 웬말
인가. 

 남편이 허탈한 모습으로 담배만 피우길래,

 “수고하셨어요. 비너스와 꼭 닮았네요.”

 예기치않은 나의 아부에 남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마주보며 또 한번 웃었
다. 


                      
             

                  꽁치와 양파

  

어릴 적 남편의 별명은 꽁치이고 나는 양파였다. 별명만 듣고도 대충 생김새를 어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꽁치는 좁고 늘씬한 선을,  양파는 펑퍼짐하고 질감나는 둥근 면을 연상케  한
다.  청녹색의 등에 배거죽이 은백색인 꽁치는 물 속을 헤엄쳐 다니니 활동적이고 자유롭다. 
그러나 얇은 갈색 껍질 사이로 푸른 잎줄기를  비죽이 밀고 나오는 양파는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사니 전원적이고 안정되어 보인다.

 꽁치와 양파는 사는 곳도 사는 방법도 어디 한 군데 닮은 곳이 없다.

 식탁에 올려질 때도 조리 방법도  음식 맛도 판이하다. 그렇지만  함께 어올려진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비위가 틀려지진 않는다.

 소금을 약간 뿌려 꽁치구이를 하면 구수해서 아이들 영양에 그만이다. 게다가 양파를 송당
송당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조림을 하면 꽁치의 또 다른 맛을 연출할 수가  있
다. 꽁치는 제 혼자서 식탁의 주인이 될 수 있으나 양파는 부침이나 하면 모를까 다른 요리
와 곁들여져야 더욱 맛이 난다. 된장 국에 넣으면 된장 맛이 우러나고 생선 국에 넣으면 생
선 맛이 살아나고 육고기와 구우면 고기 맛이 부드러워 진다. 적은 돈으로도 고단백질 저칼
로리를 얻을 수 있으니 꽁치와 양파야말로 서민적이라 하겠다.

 별명처럼 남편과 나도 모양새는 물론이고 성격 또한 닮은  데가 없다. 남편의 성격은 저돌
적이고 진취적이며 활동적이다. 그에 반해 나는 완충적이고 수비적이며 정적이다.  이를테면 
찌는듯한 더위를 쫓는 방법도 자기 성격대로 한다. 

남편은 이열치열이라고 줄줄 땀을 흘리며 흙을 반죽하고 물레를 돌린다. 난 행여 땀이 한번 
더 흐를까 봐 가만 앉아서 살랑살랑 책장을 넘긴다. 남편이 페달을 밟으면서 흙으로 호리병
이며 항아리를 만들 때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영화 장면이 떠 오른다. 남편 등 뒤로 돌
아가 영화장면처럼 포개고 앉아 함께 작품을 만든다면 우리  모습도 근사할 것이다. 그러나 
대견스럽게 바라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양파 같은 나를 보고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며 한사코 나를 
기억해 내려고 애를 쓰곤 한다.  시어머님과 함께 가면 딸이냐고 묻고  손윗 동서하고 함께 
가면 친정 동생이냐고 묻는다. 어느 수위 아저씨는 굉장히 낯이 익는데 어디서 장사하고 있
느냐고 하였다. 장사는 커녕 직장생활  한번 못해 본 쑥맥을 두고  하는 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그냥 웃음으로 답하고 말았다.

 지난 번엔 어느 암자의 노보살에게 사주풀이를 청하러 갔다.  그런데 옆에 앉은 중년 부인
이 나를 알 것 같다며 치근치근 묻는 바람에 민망해서 혼난 적도 있다. 장소에 따라선 친절
이 폐를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노보살은 우리 부부의 생일생시를  묻더니 아주 좋은 궁합이라  했다. 이렇게 만나기도 
어려우며 빈 몸으로 만나도 재산을 이루겠다고 했다. 게다가 이런  부부 아래서는 잘 못 된 
자식이 나올 수가 없고 시부모고 친정 부모고 못잊고 챙기며 살겠다 했다. 그러하니 부처님
께 갖다 바치려고 애쓰지 말고 부모님께 먼저 잘 하라고 하였다.

 궁합이란게 뭐 별것인가.

 둘이 모여 물과 기름같이 겉돌지 않고, 불이  물을 만나 꺼지지 않으면 좋은 것이고,  둘이 
합하여 형편이 나아지면 그게 천생연분일 것이다. 꽁치가 양파와 어우러져 더 나은 맛을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좋은 연분이라도 살다 보면 흐린  날도 있고 갠 날도 있기  마련이다. 천둥 번개도 
치고 장마나 가뭄도 있을 것이다. 그게  자연의 이치며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궁합이 좋은 사람은 그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궁합이 나쁜 사람은 
이런 경우 각자 힘 재기를 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우리 부부가 동반해서 어디를 가면  닮았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그 근본부터가 다른데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한 이불을 덮고 십 수년을  살아 오는 동안 생각도 닮아가고 
가치관도 같아간다는 얘기로 해석해 듣는다.

 어제 밤엔 먼 곳에 있는 남편 친구로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 안녕하세요?  재수씨”

 서로 형님이라고 아옹다옹 하는 것은 아직도 여전하다.

 “ 꽁치 옆에 있나요? 그 자식 요즈음도 술 많이 하는가요?

 그렇게 형님이 알아 듣게 일렀는데도 말이죠. 아참, 꽁치가 많이 컸으니 이젠 삼치가  되지 
않았나요 ?”

 별명이란 얼마나 편하고 부드러운가. 옛날 히포크라테스는 몸의  체형만 가지고도 그 사람 
성격을 분석해 놓았다는데 이 다음 어느 심리 학자는 별명만으로도 성격을 분석 해 놓을 지
도 모를 일이다. 

 

 

                   

    

                    숨쉬는 그릇

 

 “빵! 빵! 빠방 빵!”

 뭔가 굉음을 내고 폭발하는 소리가 나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 가 보았다. 선반 위의 술병들
이 선 채로 깨져 주저앉아 있고 그  파편 사이로 포도주가 낭자하게 흘러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천정에도 피가소의 작품을 방불케하는 담즙색 주채화(酒採畵)가 깜짝할 사이에 그려
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 꿰매 놓은 차림 이불에도 형편없는 염색을 해 놓았다. 실로 아
연실색할 일이었다. 하지만 우선 닦고 치웠다. 치울 때 깨진 유리 파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허망하게 들렸다.

 그 술은 석달 열흘 전에 남편이 정성스럽게 담근 포도주였다. 하루에 원액 포도주 한 잔씩
을 아내에게 마시게 했더니 얼굴에 기미가 벗겨졌다는 어느 애처가의 으시댐에 자존심이 상
했던지 당장 포도주를 담아 애처가임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었는데 일이 이만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씻은 포도송이를 알알이 떼서 닦고  으깨서 설탕으로 재운 일도  쉽지는 않았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재미난 놀이인 양 포도 한 알씩  떼고 으깨고 하더니 나중엔 노동인 줄 알았던지 
모두 도망가 버렸다. 저녁 먹고 시작해서  11시가 한참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그  밀봉했던 
원액을 백 일 후에 걸러  콧노래를 웅얼거리기조차 하면서 빈 병마다  채워 놓았었다. 맛이 
기가 막히다고 남편은 황홀해 하였지만 솔직히 난 설익은 과일처럼 떨떠름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포도주가 한 날 한 시에  예닐곱 병이 뻥뻥 터져버린 것이다.  시기적으로 너무 빨리 
병으로 옮긴 탓인 모양이다. 발효된 포도주의 압력은 마침내 마개를 박차고 하늘로 뛰쳐 올
랐고 가혹하게도 술병 옆구리를 차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불호청이 제일 골칫거리였다. 낮에 새로 호청을 기워 미처 이불장에 넣어 놓
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무려 두 채씩이나 되니 허탈하기조차 했다. 봉변을 당한 아내가  안
스러웠던지 남편이 함께 호청을 뜯어  주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악처가  아닌 다음에야 
악담을 퍼 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럭저럭 정리를 하고 아직 깨지지 않은 몇 병의 술
을 질그릇 항아리에 부어 놓고서 포도주 소동은 일단락 지어졌다.

 작년 여름, 남편의 대만 여행 중에도 우리의 포도주와 같은 소동이 벌어졌다고 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고추장을 폭발시킨 일이다. 카드로 호텔방의 전기를 쓰고 끄고 하는데 그것
이 익숙치 못한 사람이 에어컨 작동을 못시켰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밤새 실내 온도는 오를
대로 올랐고 가지고 간 고추장은 부글부글 발효가 되어 급기야 폭발해 버렸다.  

 남의 나라에서 그런 실수를 하다니 같은 방을 쓴 다른 한 사람까지 한잠 못자고 닦고 씻고
하여 팔에 알이 배었다고 했다. 볶은 고추장은 발효가 되지 않으나 그냥 고추장은 발효됨을 
염두에 두지 못한 탓이었을 게다.

 병마다 채우고 남은 포도주는 질그릇 항아리에 담아  놓았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편은 흙으로 구운 질그릇은 숨을 쉬고 있어서라고 했다. 외부 온도를 체감하여 스
스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그런 자생능력을 뜻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프랑스 영화에서
도 통나무 술통을 사용했던 것 같다. 통나무도 질그릇처럼 숨을 쉬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질그릇의 지혜가 돋보인다. 팔랑거리며 금방 열이 올랐다가 금방 식어 버리는 그런 속성이 
아닌 것이다. 투박하고 무디지만 은근한 맛을 우려낼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스스로 조절하여  늘 한결같은 질그릇과 같은  여인, 나이가 들수록 
그런 여인이 되고 싶어 진다.

 

                     

                         
 

                   햄릿호테  

 

 내 큰 아들은 대(大) 발이다.  운동화 크기가 무려 290이나 되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아빠 
엄마가 작은데 아들 녀석은 웬 덩치가 그렇게 크냐고들  묻는다. 그만하면 성공 작품이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아들 체격이 커 갈수록 내  어깨에는 힘이 들어간다. 볼수록 대견스러워
진다. 게다가 대가족 속에서 흙을 밟고 사는 놈이라 인성까지 제법이다. 인사성도 밝고 심부
름도 잘하고 인정스럽기가 그지 없다.

 다만 한가지, 행동이 생각보다 한 발 앞서 가는 것이 문제이다.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한 연
후에 움직여도 될 일을 우선 저질러 시작해 버린다. 그러니 실수가 잦았다. 나는 행여  돈키
호테 같은 인물이 될까 봐 “한번 더 생각해 보렴”하고 입버릇처럼 내 아이에게 주문을 했
다.

 그런데 어느날 ,

 “웬걸, 돈키호테가 얼마나 멋쟁이라구!”

하는 선배의 얘길 듣고 돈키호테에 대한 다른 시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돈
키호테에 대한 나의 지식은 고작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몇 페이지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
다.

 난 원작을 읽기 시작했다. 돈키호테를 제대로  알아야 내 아들 인성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가슴은 더 답답했다. 돈키호테가 하는 짓이란 
길길이 미친 짓이며 실패투성이 아닌가. 게다가 돈키호테의 눈은  이미 현실의 궤도를 벗어
나 최소한의 사회 적응력 마저도 상실한 상태였다. 그의 광기는  마치 어린애 손에 날이 선 
칼자루가 쥐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기사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세기의 편력 기사가 되어 세상을 의(義)로 
평정하고자 하는 의협심만큼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착각이란 얼마나 무모한가. 모든 것을 소설 속의 사건으로 파악하려고 들었다. 이발사의 놋
대야가 맘브리노 투구로 보였고,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결투를 
청했으며, 떠돌이 창녀를 귀부인으로 모셨고,  주막주인이 성주라고 착각했다. 돈키호테라는 
이름도 기사에게 걸맞게 자신이 명명한 것이었으나 그런 착각들은 최소한 남에게 폐를 끼치
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분별없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였다. 자유가 억압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죄
수들을 풀어주고, 가엾은 안드레아에게  월급을 찾아 주려고 주인을  때리는 바람에 오히려 
그에게 화가 미치게 만든 사건들은 사회에 누를 끼친 결과가 되었다.

 돈키호테에 대한 나의 편견은 바로 이런 분별없는 행동에  있다. 무분별한 행동은 나 자신
만의 손해로 끝나는게 아니라 남에게까지 폐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가련한 돈키호테는 비통한 패배자로서 귀향하였다. 나는  이 작품 어디에서고 문학의 
향기나 해후감은 맛 볼수 없었다. 다만 돈키호테라는 작품은  인물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키호테는 비록 분별은 잃었지만 의협심이 강했고 용기도 있었으며 희생 할 줄도 알았다. 
자신이 믿는 바를 쉽사리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상을 향해 매진할 줄 아는 투철한 사람이었
다. 이런 점에 촛점을 맞춘다면 분명 돈키호테는 멋쟁이라 할만도 했다.

 현대인들은 떼지어 몰려 다니길 좋아한다. 좋아한다기 보다는  떼지어 다니지 않으면 불안
해 한다. 뭐가 건강에 좋다면 우하고  몰리고, 남들이 떠나는 휴가도 덩달아 다녀야  직성이 
풀리고, 옷이며 구두며 심지어는 염색까지도 떼지어 해야 안심인 것 같다. 그런  현대인들의 
부초적인 삶에 비한다면 돈키호테는 분명 독보적인 존재일 것이다.   

 세익스피어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무대에 돈키호테를 올리면 연극은 5막까지 갈 필
요도 없을 것이다. 서막에서 선왕의 망령이 나타나 자신의 독살극을 알리면, 돈키호테는 2막
에서 당장 작은 아버지 클로디어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끝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죽음은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햄릿은 지식과 사색은 있었으나 우유부단 했다. 반면 돈키호테는 용기는 있었으나 사리 분
별력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때론 햄릿의 단역을 맡기도 하고 때론 돈키호테의 단역
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실천보다 잡념이 더 많은 햄릿역을 더 많이 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돈키호테 역에 더 가까울런지 모른
다. 물론 현실감있는 돈키호테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이제 나는 내 아들에게 무작정 돈키호테가 되어서는  안되다고 윽박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각있는 돈키호테, 이른바 햄릿호테가 되어주길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소망해 본다. 


             

             

                    비파의 연가

 

 누런 비파가 담장 밖으로 넘실거린다.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비파나무는 청록 물감으로 바
탕칠을 해놓고 붓끝에 노란색을 묻혀 가볍게 흩뿌려 놓은 수채화 같다. 아름다운 것은 바라
만 보아도 좋은 것이다. 지나가는 이들이 살구네 아니네 서로 입씨름을 한다. 차창 안의  사
람들도 전원의 향수를 잠시 느끼며 지날 것이다.  

 그럭저럭 우리 집을 지은 지가 40년이 넘었다 하니 늘 고락을 함께 하는 비파 나이도 이미 
불혹은 넘은 셈이다. 그 동안 새끼를 친 나무도 예닐곱 그루. 거침없이 뻗어가는 가지를  해
마다 쳐주고 다듬어도 나무의 생장력은 손질하는 이의 능력을 한 걸음 앞서 간다.

 비파가 저렇게 대풍작을 이루는 것은 남해안의 뜨뜻한 해풍과 포근한 대지의 체온 때문일 
게다.비파는 시월 달에 연한 갈색 털 밑에 하얀 꽃을 피웠다가 이듬해 유월이 되면 노란 열
매를 맺는다. 푸릇푸릇 새순이 나올  소년 시절에도, 기골이 건장한  청년 시절에도, 비파는 
지금처럼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었다.

 여자가 자식을 낳아야 비로소 완전한 여인이  되듯 유월이 되어야 비파는 제 몫의  사랑을 
제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비파의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새들이 있다. 주둥이가 뾰족한  그 보기 드문 새들
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껏 다니면서 잘 익어 맛난 열매만  톡톡 쪼아 먹는다. 새들에게 상
처 입은 열매는 틀림없이 단맛이 뛰어난 것이다. 살다 보면  때깔이 남보다 크고 좋아서 손
해보는 일도 있으니 굳이 남보다 뛰어나길 바랄 일은 아닌가 싶다.

 비파가 익어가면 아이들의 비파서리도 빼놓을 수 없는 연례  행사이다. 아직 채 맛이 들지
않아 신맛에 미간이 찌푸려지는데도 아이들은 옛날 수박서리의 묘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텃
세를 부리는 개들이 표독스럽게 짖어대면 아이들의 희롱은 막을 내린다. 미련없이 도망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일찌기 비파를 손에 넣을 계산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화려한 명성도 잠시. 바람 불고 비가 오면 비파알갱이는 맥없이 떨어진다. 그  잔해
들은 까맣게 모여든 개미떼들에게 더없이 성대한 만찬이다. 개미의  주린 배를 맘껏 채워주
고 집으로 돌려 보내고도 짓이겨진 껍질과 씨앗은 흙으로 돌아간다. 다음 생명을 위해 기름
진 거름이 되고자 하는 비파 영령의 갸륵한 뜻이리라.

 뜨거운 햇살을 많이 쏘인 탓일까. 유독 가지 꼭대기쪽 열매들이 잘 익었다. 더 물러 터지기 
전에 비파걷이를 서둘러야겠다. 비파걷이를 할 때는 가족이란 가족은 모두 동원된다. 시아버
님과 시어머님 남편과 아이들은 물론이고  셋째 시아주버님네 식구들 모두에게까지  크나큰 
일거리인 것이다. 추수를 하는 농촌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

 높이 메달린 비파는 사다리로도 부족하니  간들거리는 가지를 타고 오르는 재주를  부려야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위를 쳐다봐야 하는 뻐근한 고개를 참을 줄 아는 숙련자만이 윗쪽 
비파는 딸 수 있다. 

두레박에 철철 넘치는 우물물을 들어 올릴 때처럼 비파양동이를  받아 내려야 하고, 날라야 
하고, 좋은 것과 궂은 것을 골라야 하는 일을 쉴 새 없이 해야 한다. 나무등걸에 할퀴는 일, 
어린 가지 복병에 찔리는 일, 잘못 댄 전정가위 아래서 비파세례를 받는 일, 이런 땀과 먼지
로 범벅되는 고된 노동 다음에야 비파는 비로소 완성품이 되는 것이다.

 많이 열릴수록 우리의 일거리는 늘어나니 촌부자가 일부자라는  말이 실감된다. 그러나 아
무리 힘든 일이더라도 광주리 광주리마다 채워지는 기쁨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고목의 등걸처럼 거칠어진 손을 마다않고 농부들이 평생을 흙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런 채워지는 기쁨때문은 아닐지.

 손톱 밑은 새까맣고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이제 남은 일은 비파를  돌리는 일이다. 깨지고 
쪼아진 파치는 우리가 먹고 크고 잘 생긴 놈들은 선물로 간다.

 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비파를 보면 누구네 집에서 왔는지  금방 알아 차린다. 비파의 유
명세가 나를 훨씬 능가하고 있음이다. 미장원 언니, 양복집 아저씨, 슈퍼 아줌마, 옆집, 앞집, 
뒷집, 건너건너 노인당까지 온 동네 비파잔치를 벌린다. 목욕탕 둘째 형님과 내가 한참을 돌
아야 동네를 다 돌릴 수 있다.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비파를 받을 때, 내가 그들에게 기쁨을 
전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기쁨을 나누는 일에 내가 쓰이고 있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손가. 그들의 해맑은 미소에서 
온몸의 피로가 말끔히 걷힌다.

 농촌을 주로 그린 밀레가 생각난다.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진솔한 생활인이다. 농촌에 몸소 
살면서 농부들의 애환과 삶을 붓끝으로 승화시킨 그는 실제의 체험에서 묻어 나오는 그림이
기에 우리에게 더욱 친밀감을 준다.

 ‘만종’은 그의 대표작이다. 추수를 끝낸 들녘에 서서 지난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과 농부
들의 노고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림이다. 땀 흘린 후의 보람과  신의 섭리에 감사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비파를 나누면서 밀레를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어
렴풋하게 느낄 수 있어서 였다. 

 빈 그릇을 챙겨 들고 골목을 내려올  때, 고즈넉한 들녘에 울려 퍼지는  그 은은한 밀레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무식이 용감

 

 제법 철이 든 지금 가만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몇 번은 참으로 무식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의 무식은 내 결혼 조건에 얽힌 이야기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가 무섭게 결혼을 하였다. 맞선이라는 것  한 번 보지도 못한채 열렬
히 구애하는 젊은이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신부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 그 젊은이는 오빠의 선배  자격으로 우리집에 와 차  대접을 받았다. 졸업반이었던 
난 졸지에 그의 신부감으로 꽤나 높은 점수로 합격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 우리 집은 서
울로 잠깐 이사와 살던 시절이었고 그는 우리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16년 전 만해
도 비행기가 흔하지 않았기에 그는 단 몇 시간 나를 보려고 주말마다 야간 열차로 상경했고 
야간 열차로 하향했다. 거의 매일 밤 전화를 주었고 따박따박 쓴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난 결혼은 먼나라 꿈으로 밖엔 들리지 않았었다. 가능하다면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
다운 학문하기를 소원했었다. 부모님은 동생 둘이나 대학에 다니는데 무슨 대학원이냐고 사
대를 나왔으니 교사가 되어주길 바라셨다. 결국은 어느쪽도 이루지 못했지만.

 상대가 누구든 애초에 결혼의사가 없던 나를 함락시키느라 그는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오
늘까지 그 때보다 더 낮은  몸무게를 기록한 적이 없고, 결혼을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과는 
지금까지도 소원할 정도였다. 내 형제들을 일일이  설득시켰고 부모님께 진정으로 간구했으
며 내게는 자존심마저 꺾었다. 

 사실 내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 힘을 너무 고갈시키는 
것은 아닌가, 내가 무엇이라고 ....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불어갔다.

 그런데 그는 결혼 승낙도 하기 전에 결혼 조건을  먼저 내세웠다. 자신은 막내이지만 부모
님을 모셔야겠고, 서른이 넘었으나 대학 입시를 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운이 나빴든지 팔자였든지 그는 재수 삼수를 해도 원하는 대학이 되지 않자 홧김에 군대에 
자원해 버렸다고 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대학에 도전하였으나 몇 년 쉬어버린 공부가 제대
로 될 리 없었다. 그렇지만 결혼 후에라도 기필코 이루겠다고 했다.

 이처럼 나쁜 결혼 조건이 또 있었을까. 가정을 꾸린 가장이 대학공부를 시작하겠다는 것도 
모험일 뿐만 아니라 시부모님을 모시는 일도 부담스런 일이었다. 먹고 살만 하고 직장 튼튼
하니 구태여 대학이라는 곳 안가도  손색이 없고, 막내니 어른들 안  모신다고 해도 비난할 
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확고했다. 그런 자신을 제대로  보필해 줄 수 있는 상
대를 찾아 만혼의 고개까지 와 버린 것이었다. 무엇을 보고 내가 그 두 조건을 충실히 보필
해 주리라고 확신 하였던 걸까. 인생의 투전판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게 걸었던 그는 대단한 
도박을 했던 셈이었다.  

 그의 한판 승부에 순진한 스물 셋 처녀는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강한 의지력이 돋보였고, 
그 나이에도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이상이 비범했으며, 굳이 부모를 모시겠다는 효심이 대단
해 보였다. 그리고 때묻지 않은 이상과 순수함에 감동하였다.

 그런데 지금보니 그게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었는지 아찔하다. 서른 넘은 늙은 학생이며 시
어른 모시는 며느리를 어찌 그리 간단하게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룻 
강아지처럼 무식하였기에 용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의 순수함을 그대로 받아 드릴 수 
있는 나의 순수함도 한 몫을 거들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위를 얻어 목표를 초과 달성 하였다. 그의 공부바라지를 
나도 8년 동안 해냈다. 결혼 당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대학원보다 대학을 졸업했던 날이 더욱 기뻤다. 남편은 노란  술이 달린 사각모를 벗어 내 
머리에 얹어 주었다. 까아만 가운도 벗어 손수 입혀 주었다. 내 곁엔 한아름 꽃다발을 든 철
부지 두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두 개의 결혼 조건 중 첫 수확이었다.   

 남편은 요즈음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고 한다. 이리 재고  저리 재어 적당히 결혼해 버리
는 젊은이들이 눈에 거슬려서 하는 말이다.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는 법이야! ”

 고로, 난 그에게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그는 용감한 젊은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 


                         
                                                   

                    등산화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하지만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 소중하
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길가의 노오란 민들레 꽃이며 바닷가 하이얀 조개껍질에서 애틋한 정
감이 일 때이다.

 내겐 시간이 갈수록 살뜰해지는 애중품이 하나 있다. 빨간 등산화 한 켤레가 그것이다.

 육 칠년 전 남편이 끌고 가다시피해서 신겨 준 것이다. 그 때  나는 입이 반 자나 튀어 나
오고 양 볼에 심술이 붙어 있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신는다고  그 비싼 등산화를 사야 하
는가 하며 웅얼웅얼 불만이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맵시있게 선이  드러나는 유리구두라도 
한 켤레 사 주든지 현금으로 쥐어 준다면 조금 더 보태 아이들 옷이라도 한 벌씩 입힐 수가 
있는데 굳이 과용을 해 가면서 등산화를 고집하는 게 참으로  못 마땅했다. 날마다 시장 갈 
때 신는 신도 아니고 가뭄에 콩나듯 한 두번씩 신고마는 그런 신발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한 이 년이 지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산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매주 토요일 오후마
다 남편과 가까운 산에 오르는  일은 물론이고 새벽에도 곧잘 약수터엘  가곤 했다. 베낭에 
물통 하나 덜렁 넣고 항상 먼저 준비를  마친 남편은 현관에 내 등산화를 반듯하게 내놓았
다. 처음에는 끈을 늘여 몇번을 휘감아 매듭 짓는 일도  번거롭고 너무 투박한 나머지 발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서먹함은 잠시이고 이젠  등산화가 내 몸의 한부분이 
된 것처럼 편하고 가볍기만 했다.

 좁다란 흙길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을 옮길 때마다 빨간 등산화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리막길 돌뿌렁이에 걸릴 때에도 깨진 표주박에서 물줄기가 상당히 새어 나올 때에도 양말
을 망칠 염려는 없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는 남편처럼 투박한 등산화는 연약한 
내 발을 늘 감싸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함께 산에 오르는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낑낑대며 뒤따르는 나를 
아무도 없는 곳에선 끌고 밀어 주기도 했다. 한 치라도 더 붙고 싶은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걷기도 했다. 도란도란 얘기를 하면 대체로 남편은 듣는 편이었다. 자식 문제며 집안 대소사
며 내 자신의 일까지 허심없이 얘기할  수 있는 대화의 장으로 이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오고 가고 한 시간이 넘으니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바쁜 남편 붙들고 한시간 이상 대화 
하는 아내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겐 그 순간이 귀하기만 했다.

 약수물을 받아 놓고 우리는 한산사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딸랑  풍경 소리가 오가는 
사람을 맞을 뿐 법당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참선을 하고 앉은  남편의 뒷모습에서 무언가 
변화되고 점차 깨우쳐가고자 하는 겸허함이 느껴졌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가 가끔 이렇
게라도 자신을 돌아 볼 기회가 있다는 게 다행한 일이다. 남편은 누구를 위해 절을 하고 무
엇을 위해 곰곰 사색의 창을 열어가고 있을까. 나는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동안 내내 바쁜 
남편에게 이런 귀한 시간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하산하는 길은 연화사 쪽으로 택했다.

 한산사에서 구봉산 중봉을 거치는 샛길도 운치가 있고 거기서 한재로 내려 가는 길도 한적
해서 참 좋았다. 여수에서 가장 문명의 때가 덜 묻은 곳이 어쩜 연화사에서 한재 쪽으로 내
려가는 길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길이지 길이라고 할 수도 없을 돌밭이었다. 
그러나 그 길로 다니는 사람이 늘었는지 요즈음은 길이 다소  넓어져 보인다. 차가 들어 가
지 못하는 길을 닦기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그만인 것이다.

 방울 맨 소가 긴 꼬리로 파리를  쫓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시끌시끌한 개구리들의 합창도 
들을 수 있다. 쓰러져 가는 돌담 집이 한 채 있는데 언제  태웠을지 모를 낙엽 타는 냄새가 
가끔씩 풍겼다. 웅덩이엔 미나리가 푸르고 몇마리의 검은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다가 졸
기도 했다. 그런 풍경이 좋아 우리가 가급적 그 길을 택해서 내려 오곤 했다.

 문명의 혜택을 못 받은 길일수록 길은 험하다. 하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 내려올 수 있는 
돌밭의 내리막길은 내 등산화가 큰 몫을 해냈다. 그럴 땐 남편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는 것 
같아 꽤나 낡아진 등산화가 몹시 소중하기만 했다. 이제서야 철든 아내로 발돋음하는  걸까.  
  

     

                  
 

                                                 꾼   

 

   해태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TV 앞이 시끄럽다. 팔순에 앉은 노인이나 열살짜리 아이
나 응원하는 모습은 매일반이다. 큰소리로 악을 질렀다가 박장대소를  했다가 죽일 놈 살릴 
놈 상황에 따라선 욕지거리도 해댄다.

 오늘 해태 경기는 영 시원치가 않다. 정비가 덜 된 발동선에 시동 걸리는 것처럼 선수들의 
행동이 여간 굼뜨는게 아니다.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어이없이 한 점 내주고 말았다.  슬쩍 
밖으로 나간 남편은 담배 한 개피  태우고 들어 왔다. 승부를 거는 게임에는  분명 질 때도 
이길 때도 있으련만 우리집 남자들은 그것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투수가 바뀐다. 마운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스 선수가 물러났으니 남은 경
기가 더욱 불안하다. 해태의 공격 차례가  되어 간신히 한 점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안개에 
뒤덮힌 도로처럼 게임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갑갑하기만 했다. 

 다시 해태의 수비 차례이다. 투수와 강타자간의 신경전이 펼쳐진다. 감독의 싸인이  교묘하
게 떨어진 후 직구가 들어갔다. 딱! 하는 소리가 여간 매섭지 않다.  그 공은 투수의 글러브
에 들어가는 것 같더니 도로 튀겨 나와 안타가 된다. 이젠 영락없이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잽싸게 뛰쳐 나온 한 수비수가 그 공을 잡아 일루로 송구하여 거의 동시에 들어  오는 
선수를 아웃시켜 주었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미처 그 수비수의 이름도 확인되기 전에 다음 타자가 나와 첫번째 공
을 때렸다. 경쾌한 배트 음이 분명  크게 맞은 것 같다. 잠깐동안  침묵이 흘렀다. 천둥치기 
직전의 정적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극적인 묘기가 한 번 더 연출되었다. 안타가 될뻔한 그 공을 수비자가 간신히 글러
브 속으로 끌어 잡았다. 날다가 휘어지는 공이었는데 수비자가  공중으로 뛰다가 공이 휘어
지는 것을 보고 동시에 몸을 휘었던 것이다. 끝까지 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는 얘기다.

 관중들도 시청자들도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두 번의 위기를 구해준 수비자는 동일한 인물
이었다. 한동안 박수갈채와 찬사가  계속되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더욱  바빴다. 입에서 
침이 튀기는 줄도 모르고 “유격수, 이종범!”을 반복했다. 

 유격수, 그는 홈런 주자도 아니며 매회 카메라를 독점하는 투수나 캐쳐도 아니다. 다이아몬
드형 베이스 사이에서 묵묵히 공을  기다리는 수비수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언제 어떻게 
공이 날아들지 몰라 공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는 다른  선수들과 똑같다. 다르다면 자신에
게 오는 공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해 내겠다는 프로기질이 강하다는 것일 것이다.

 프로란 우리말로 ‘꾼’이라 한다. 자신의 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기어코 성취 해내
고야마는 질긴 근성이 있는 자에게 붙이는 단어이다. 

 한 유격수의 프로다운 수비는 게임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위기를 넘긴 아군 타봉에 불이 
붙어 결국 역전승으로 끝이 났다. 온 식구들의 얼굴이 상기 되었다. 게임에  승리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유격수의 역할이 더 맘에 들어서 였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프로 의식이 부족해 보인다. 대충 알고 적당히 일해서 쉽게 살려는 생
각 때문일 것이다.

 일전에 솔방울로 즙을 짜려고 동네 방앗간이란 방앗간은 다  돌아 다닌 적이 있다. 솔방울
로 즙을 짜내면 기계에 끈적끈적한 액이  묻어 청소하기가 성가스럽다고 가는 곳마다  거절 
당해서 였다.

 물론 귀찮은 주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친절한 방앗꾼을 만나  솔방울 즙을 짤 수는 있었
지만 쉽고 편하게만 살려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내게 주어지는 일이면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치루려는 사람만이 꾼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일에 철저하게 꾼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어떤  다른 일은 할 수 있을
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일 듯하다.

 

                   

                  
             

                    할미 꽃

 

 시어머니께서 털방석을 푸신다. 닳아빠진 털방석이 창 틈으로  새어드는 햇살에 분진을 일
으키며 힘없이 풀려 나간다. 작업에 열중이신 어머님의 숱없는  머리칼이 고개를 숙이니 더
욱 훤하게 드러났다. 염색한 지 한 달도 안되었는데 허연  머리칼은 누런 덤불 속에서 솟아
나는 새순처럼 불근불근 자라 있었다.

 어지간히 털실준비가 되었음인지 어머님은 삼층장  깊숙한 곳에서 대바늘 한 웅큼을  찾아 
오신다. 긴 것, 짧은 것, 가는 것, 손 때에 찌들어 팥 색이 된 것도 있고 투명한 오렌지 색도 
있다.

 “ 글쎄, 난 손이 놀고 있으면 꼬옥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 ”

 무언가 하고 있지 않으면 버려진 헌 신짝처럼 쓸모없는 노인네가 된 기분이신가 보다.

 아무리 실질적인 일을 하고 싶어도  팔순 노인에게 뜨개질은 어려운  일이다. 코수를 세어 
점점 늘이다가 줄이기도 해야 하고 무늬를 맞추느라 꼬기도 휘돌리기도 해야 하는 단순 노
동이 아닌 정신 노동이다. 아차하면 코를 빼놓기 일쑤고 세어  놓은 코를 잊어버려 몇 번이
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보송한 털옷을 입을 계절이 되면 늘  털실을 챙기곤 하신다. 언제나 먹어
도 질리지 않는 된장국처럼. 한 올씩 짜 올린 쉐터에는 순박함이 배어 있어서 좋다.  흙으로 
빚은 질그릇의 정서가 그런 것이 아닐까.

 쭈그리고 앉아서 신경을 쓰노라면 어깨도 등짝도 내려앉고 눈도 시려웁다. 젊은 사람도 성
가스러워 팽게치는 일을 어머님은 일삼아  열심이시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쉬운 작품을 
택하시는 것을 보면 세월에는 역시 어쩌는 수가 없는 것인가. 

어머님께 입으로는 이런 것 하지 마시라고 만류하지만 가슴으로는 나이가 들어서도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연약하지만 뚜렷한 어머님의  위세는 흐트러진 내 옷 
매무새를 여미게 했고 뒷덜미를 내리누르는 외경심에 숙연함마저 들게 했다.

 ‘정녕 삶이란 마지막 심지가 타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밝음을 토해 내는 촛불이구나. ’

 저 한 올 한 올을 엮으시는 순간들이 바로 생명력의 확신이며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꽉 붙
들 수

있는 동아줄일 것이다.

 어느 노인네의 푸념이 생각난다.

 버스에서 내려 벅수골에서 한산사로 오르는 길이었는데 누군가가 자꾸 자기를 따라오고 있
음이 느껴졌다. 굽은 등에 다리에 힘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날 따라 오는가 하여 뒤돌아 보
면 아무도 없고 다시 가면 또 따라 오고 그러길 수 차례 반복하다가 뒤따라 오는 자가 자신
의 그림자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 사실이 너무도 한탄스럽고  서럽기조차 해서 집에 내려와 
점심도 굶고 목놓아 울었더라는 것이다.

 그 할머니의 체험담은 우리들의 얘기일 수도 있다. 늙는다는 것은 몸도 마음도 의식마저도 
흐려지는 것이다. 피부에 검은 버섯이 송송이 서려 있고 일찍이 익혀둔 취미도 없이 자식을 
위해 헌신하였다면 그들은 누구에게서 젊은 날을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 세대에서는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는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자식은 자식대로 키
우면서 노후는 스스로 챙겨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하게  나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병은 
말없이 찾아 오고 늙음은 모든 의욕을 꺾어 놓는 법. 어느 누구도  노후를 장담 할 일은 아
니다.

 노부부는 젊은 우리의 거울이며, 우리들은 곧 내 아이들의 거울이다. 어머님을  바라보면서 
가만 내 자신을 들여다 본다. 내 나이 팔십에는 어머님처럼 저렇게 의연할 수 있을 것인가.

 한 올 한 올 짜 올라가는 뜨개질이 어머님의 삶이시다.

 어제도 그제도 성실하게 짜 오셨고 오늘도 내일도 겸허하게  짜 가실 것이다. 바쁘다고 한 
줄 뛰어 넘을 수도 없고 잘못 센 코수로는 무늬를 맞추지 못하는 뜨개질이야말로 참된 어머
님의 인생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탓인지 난 노인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어떻게 나이 들어야 아름
답게 늙는 것일까. 양지바른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졸음이나  쫒는 허망한 노인네가 되지 
않으려면 우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우선 건강을 잘 지켜 주위사람을 편케 해 주어야겠고 다음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메달리지 않을 자기생활을 꾸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 조건을 다 갖춘 이가 드물다는 사실도 나는 잘 안다.

 어쨋거나 늙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뉘엿뉘엿 석양에 지는 해에  괜스리 눈물이 배고 
꿈과 희망이 사그러드는 아픔까지도 감수해야 하기에.

 다소곳이 앉아계신 어머님의 옆모습이 할미꽃 같다. 도도하게  태양을 올려다 보지 못하고 
정열적인 빛도 없이 가녀린 꽃망울을 힘겹게 달고 있는 꽃.  그 보랏빛 정감있는 미소가 온
화한 얼굴에 은근히 피어 오르는 듯 하다.

 

                

 

       
 

                       풍요일(風曜日)  

 

 

   남으로 내려가자.

       철로가 끝나는곳엔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막연한 그리움을 좇아

          지친 영혼의 휴식처를 찾아

              기차가 멈추는 곳은

          해조음이 들리는

                 여수역(麗水驛)이다.

 

 내 고향 여수(麗水)는 물빛이 곱다. 그리고 그 물빛에 어리는 산빛도 아름답다.

 청정해역에서 갓 따온 해초는 텃밭에서 막 뽑은 배추처럼 싱그럽다.

 짭잘한 갯바람에는 삶의 의욕이 꿈틀거린다.

 어느 미국인은 여수가 샌프란시스코 같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라면 안개와 금문교와 비탈
길을 달리는 케이블카가 있는 곳이 아닌가.

 세계적인 낭만의 도시와 견주어 찬사를 받고 보니 여수인으로서 긍지가 앞선다.

 여수가 천혜의 고장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가시적인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충족한 생활 터전이라는 점이다.

 대도시는 잿빛 공기와 생기 잃은 물, 그리고 홍수  같은 교통문제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다. 깊은 산속은 오염은 덜 되었다고는  하나 백이,숙제처럼 나물밥 먹고 하늘만 쳐다  보고 
살아 갈 수 없고 보면 아무래도 우리와는 맞지 않다.

 가만 생각해 보면 대도시와 산골의 중용 속에 잉태된 곳이 바로 내 고향 여수가 아닌가 한
다.  낚시대 하나만 메면 사방이 낚시터요 베낭 하나만 메면 곳곳이 등산지다.

 서울에서는 관악산이나 북악산만 가려고 해도 시내 버스  안에서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가. 
길이 막혀 꼼짝없이 정지해 있는 차 속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오징어를 팔러 다니는 장사꾼
이 있는 곳이 바로 요즘 대도시이니. 객지 사람들은 남해의  푸른 물결을 보려고 일부러 이 
곳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이 바로  관광지요 생활의 터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 곳을 두고 멀리 등산이나 피서를 가는 사람도 많다. 

 사실 우리도 내장산 단풍구경을 갔다가 혼난 적이 있다. 왕복 6시간을 차 속에서만 있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은 몸부림을 쳤고 차량홍수 때문에 간신히 주차장까지 떠밀려 갔다가 일행
을 잃어버려 쫄쫄 굶고 구경도 못하고 돌아 온 일이다.   자연을 벗하려고 나갔다가 자연에
게 누만 끼치고 돌아온 셈이다.

 근래에 남편은 토요일 오후마다 근교의  산으로 등산을 한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흙길을 
밟는다.

챙길 것이 필요 없으니 경제적이며,   다음날에는 일요일이 턱 버티고 있어  하루를 충분히 
쉴 수 있다. 오고 가는 데 드는 시간도 없고 보니 토요일  오후가 다른 날 24시간 만큼이나 
길고 넉넉하였다.

 사람이 시간을 만들었으나 시간은 도리어 사람을  구속하고 있다.  1 주일을 8  일로 늘일 
수는 없는 것일까?  산도 가깝고 바다도 가까운 우리 여수에서는 하루쯤 늘일 수 있을런지 
모른다. 

토요일 오후를 하루로 만들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토요일 오후를 무슨 요일이라 하나,  월(月)요일은 달, 화(火)요일은 불, 수(水)
요일은 물, 목(木)요일은 나무, 금(金)요일은 쇠, 토(土)요일은 흙, 일(日)요일은 해다.’

 덤으로 얻은 하루는 이름을 어디에서 빌려 올까.

 문득 산에 오를 때 체감되던 바람이 떠 오른다.

 1주일의 이름 중에 왜 바람이 빠졌을까.

 바람 풍(風), 돛을 펄럭이는 해풍(海風), 풀숲 향을 실어 오는 뫼풍(山風).

 옛 선인들이 풍류를 즐겼다던 그 풍(風)자가 아닌가.

 풍요일(風曜日)!! 

 그래, 풍요일 (風曜日)이야!

 토요일 오후를 풍요일로 만들고나니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듯 하다.

     

                    

 

 
                     미인도

 

 미모는 모든 여인의 소망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본능이며 영원한 욕망이기도 하다. 내가 아
름답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거리 거리에 미인들이 넘실거린다.  초 미니를 입은 아가씨들의 쭉 뻗은 두 다리가 시원하
게 느껴진다. 엉덩이만 간신히 걸쳐진 그 짧은 스커트가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탄력있는 스타킹으로 살짝 조여 준 다리가 훨씬 유연하게 
보인다. 굽이 약간 있는 샌들이거나 아예 굽이 없는 단화가 짧은 스커트엔 잘 어울린다.  거
기에 윤기가 자르르한 생머리를 늘어 뜨릴 수 있다면 전체적인 균형이 맞아 떨어질 것이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이 예술의  시작이다. 범상한 우리야 느낌으로  끝나지만 환쟁이의 
끼란 그렇지가 않다. 그 미적 감흥을 기어코 화폭에 쏟아 붓고야 만다. 

 화가의 얼굴이 다 다르듯 그림의 대상 또한 다를  것이다. 명산지수를 그리면 산수화요 꽃
과 나비를 그리면 화충도이며 사람 사는 모습을 그리면  풍속화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
을 그리면 미인도가 된다.   

 18세기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를 보면 그  시대의 미인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인은 몸에 
착 달라 붙은 저고리와 배추 포기처럼 부푼 치마를 입고 요염하게 코 있는 보선 발을  살풋 
보이고 서 있다. 

둥그레한 얼굴에는 초생달 같이 가는 눈썹, 은행알 같은 두  눈, 작고 빨간 입술, 그리고 머
리는 구름처럼 말아 올렸다. 앞섶에 달린 노리개를 잡고 서  있는 그녀는 안방 마님은 아닐
테고 시(詩)나 예(藝)에 능한 기녀 정도일 듯하다. 

 신윤복은 그녀에게서 고혹적인 열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고서는 그림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여인에게서 노출  된 부분은 기껏해야 얼굴과 목
과 두 손이다. 

그러니 오목조목하게 예쁜 얼굴과 갸냘프게 드러난 목과 가는 손가락을 섬세한 선으로 표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은 노출이 아주 심하다. 하얀 피부가 눈이 부시고  톡톡 튀는 건강미가 그대로 드러
난다. 대담하게 노출을 하자니 몸매가 아름다워야 한다. 

19세기의 여인처럼 자그마하고 오목조목하게만 생겨서는 안된다.  키도 시원시원 커야 하고 
팔 다리와 허리는 가늘면서도 나긋나긋해야 보기도 좋다. 

군살이 붙었거나 비만인 여인에겐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기에 다이어트 식품이 성황을 이루
고 지나치게 군살을 빼려다가 부작용까지 일으키기도 한다.

 신이 만든 예술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여체(女體)라는 말이 있다.  원시림 같이 
신비스런 여인의 육체이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선이 막힘없이 죽죽 그어지고 나긋한 곡선
이 부드럽게 이어지며 강하고 약한 터치가 자연스럽게 교차된 것이다.    

 내가 아는 여류 화가 중에 주로 누드화 만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답다
고 느끼는 여체를 만나면 미친 듯 빨려 들어가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녀
의 그림은 유독 여인의 허벅지를 강조한다.  등과 허리와 엉덩이를  긴장되게 긋다가 배 부
분에서 부드럽게 휘어 감아주고 허벅지를 강조해 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편안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은 ‘목욕하는 군상들’이었다.  목욕하는  여러 여인들을 그렸으니 
소재 자체에서 우선 풍요로움을 느끼게 했다.  각자 각자의 포즈가 다르니 강조된 부분들이 
모두 달랐다. 돌출되는 가슴 부분이 강조된 여인, 비스듬히 앉아 한 쪽 허벅지와 둔부가  강
조된 여인, 가늘고 긴 허리가 강조 된 여인 등 그야말로 시선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쓴 작품
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은근한 선과 부드러운 질감으로 표현 되던 미인도가 지금은 대담한 선
과 깊이 있는 텃치로 변화한 셈이다. 미인을 보는 기준이 바뀌었으니 어쩜 당연한 결과인지
도 모른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예쁜 게 좋다.  집과 여인은  가꾸기 나름이라니 가꿀 수
만 있다면 가꿔야 할 것이다.  다만 요즘 미인이 되려면  얼굴보다는 전체적으로 흐르는 몸
의 선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한국화 예찬

 

    연말이 되어 서인지 미술 전람회가 여기저기 많이 열리고 있다.

 하느님 처음 만드신 게 빛이라 했다.  

천지를 창조하실 적에 먼저 필요로 했던 것이 암흑을 거둬낼, 그리하여 사물의 고유한 색을 
그대로 나타내 줄 빛이 절실했었을  것이다. 그 빛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전람회장마다 
크고 작은 화폭에 몽땅 옮겨져 있는 듯하다. 

오랫동안 공해에 찌들렸던 망막을 조금이나마 휑궈낼 수 있는  기회라 싶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식견이 없는지라 슬쩍 그 아름다움만 훔쳐 보고 태연히 돌아  오
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 전람회장에서 발길을 멈추게  하는 그림이 있었다.  수채화는  아니고 유화는 
더욱 아닌 것이 어찌 색감이  그리도 청아하고 수려하던지,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 그림에 
대해 물었다. 그 작가는 ‘한국화’라 답했다.

 한국화는 화선지를 두 겹으로 붙인 종이를 소재로 하여  동양화 물감을 사용하였다.  마치 
수채화와 수묵화를 합성해 놓은 인상이었고, 처음 보아도 전혀  낯설지 않고 무던히 익숙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림 속에는 솜털로 둘려진 강아지풀이  하늘거리고 새벽 이슬을 머금은 나팔꽃이  덩굴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연초록 들녘에 저절로 피어나는 키 작은 구절초, 허리를 넘긴 듯 유
연한 중나리꽃, 푸른 자줏빛의 애기 도라지 등 가녀린 풀잎  사이로 애틋한 꽃을 피워내 놓
았다.

 그 색감 또한 얼마나 고운지, 손끝이 정갈한 여인이 올 고운 모시를 쪽빛 물에 몇 번씩 담
궜다가 널어 놓은 듯 했고,  열두폭 치마를 널따랗게 펼쳐 놓고  한땀한땀 수를 놓은 것 같
기도 했다.

 문득 여류화가의 얼굴을 살펴 보고 싶어졌다. 어느 곳에 이런 기품이 숨겨져 있는 걸까. 순
결한 자연 속의 이 오묘한 빛의 조화는 화가 자신의 혼불 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과 고뇌의 상흔만이 역력했다. 짓물러 터질듯한 두 눈에는 촉
촉한 물기가 배어 나오고, 이 작품들을 출산하는 동안 다부지게 싸워냈었던 숱한 밤들이 녹
아 내리고 있었다.

 자연에 순응하고픈 그녀, 그녀는 어느 시골 미술교사 자리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한 줌 하늬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들꽃과 풀벌레며, 산골 웅덩이에 떠 있는 개구리 알들, 그리
고 지느러미를 흔들 때마다 반짝거리는 잉어들의 몸짓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풀
숲을 헤치고 다니면서 그늘 속에 핀 나도옥잠화도 찾아 낼  것이며, 길게 줄지어 달린 금강
초롱 꽃도 빈 화폭에다 옮겨 놓을 것이다.

 차 한 잔을 나누면서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가 여기저
기 전근을 다니신 덕에 그녀는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그러니  어린 그녀에겐 남달리 고독과 
그리움과 사색이 많을 밖에. 그것을 풀어 내릴 무엇이 그녀에겐 절실했고, 알 수 없는 그 냉
한을 물감에 풀어 스스로를 달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방학 때 시골로 아버지를 찾아 
가면 자상하신 어머니가 들판의 작고 힘없는  풀꽃들을 하나씩 일러 주시곤 하였는데  그게 
그림 그리는 자산이 되었다고 그녀는 회상에 젖어 얘기하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작품은 자칫 지나쳐 버리면 기억조차 없을 풀꽃들이 많았다.  그러나 
안개초나 들국화처럼 작은 꽃도 한 묶음이면 큰 꽃 뭉치가 되듯 작은 것을 늘 풍성하게  그
려 놓았다.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샘물에 머리를 감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지 사이로 배어드
는 은은한 빛의 조화와 풀꽃 향에 절은 한줄기 바람이, 선명하게 내 의식 속으로 파고 들었
다.

 

                   
                 엉덩이만 예쁘면 되는 이유

 

 여수(麗水) M라디오 ‘가요 초대석’에 우리 부부가 초대되었다.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생활에 관한 이야기 손님으로 불려진 것이다.  신사옥으로 방송국이 옮겨지고는 초행길
이라 여간 들뜨는 게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잘 하지 않은 화장을  정성껏 하고 옷에 맞는 
악세사리를 걸치는 등 온갖 겉치례를 다 하였다.

 “ 아니, 당신 얼굴이 나오는 텔레비전도 아닌 걸 ?”

 남편의 짖궂은 핀잔에 난 눈매를 약간 치켜 세워 잠시  눈을 흘겼을 뿐, 봄 나들이를 나가
는 노란 병아리의 기분 그대로였다.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로 시작되었다. 이 프로는 매일 오후  3시 5분부터 청취자의 전화 신
청을 받아 가요를 들려 주는데, 일요일에는 얘기 손님을  모시고 이야기와 음악을 곁들이고 
있다고 했다.  잘 다듬어진 고운 음성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소리는 옥구슬이 되어 연신 내 귓바퀴로 또그르르 굴러 들어왔
다.  밝은 표정, 알맞은 톤, 게다가 분위기에 잘 맞는 음색이라, 듣고 있는 우리를 무척 편안
케 해 주었다.  한데 세련된 음성에 비해 그녀의 화장 솜씨는 어쩐지 엉성해 보였다. 브라운 
계통의 색조 화장이 거무스름한 피부를 오히려  어둡게 조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 역시 그다지 세련되어 보이지가 않았다. 

 스튜디오 맞은 편 유리창 너머의 PD를 향해 싸인 하는 그녀의 손 동작은  작고 애뗘서 앙
증스럽기까지 했다. 두 귀에다 커다란  이어폰을 두르고 음악을 소개하면서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초청 손님과 정담을 나눴다가 다음 얘기할 내용을 준비도 시켰다. 

일렬로 엮어 놓은 굴비꾸러미처럼 그녀의  모든 진행은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묻고 우리가 
대답하는 게 아니라 우리 얘기 주머니를 숫제 풀러 놓게 하고 얘깃거리를 줄줄 훔쳐내고 있
었다. 어색해 하지도 힘들어 하지도 않았다. 스튜디오 안을 진솔한 웃음과 진지한 대화로 채
웠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경륜에서 터득한 그녀만의 기예같은 것이리라.

 신청한 음악이 흐르는 동안 문득 수필 한 편이 떠올랐다. 영국  수필가 가디너(Gardiner)가 
쓴 ‘모자 속의 철학’이라는 작품이다. 한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했을 때 터득되는 직업적 
시안을 풍자한 수필이다. 모자 기술공은 사람을 평가할 때  대체로 상대방의 머리 싸이즈와 
머리 형태 같은 것으로 한다. 이를테면 법률가나 선장처럼 생각을 많이 하거나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모자가 크더라는 것, 그러니까 모자의 싸이즈가 곧 그 사람의 인격
이나 사회적 지위와 동일하다는 편견을 갖게  된다. 가디너(Gadiner)는 그런 프리즘적 사고 
방식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직업적 시안도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경륜이나 이력 같은게 붙어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할 근거가 될  뿐이지 정확한 사실은 아니기 때
문에 보이지 않은 진실에 더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가정을 우선 본다. 얼마나 그 사람이 착하고 진실한 지
를 보는 게 아니라 그 가정이 얼마나 원만하고 화목한 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보석상 주
인은 누가 어떤 보석을 끼고 있는지 전도사는 누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는 지를  우
선 보는 것과 같은 것일 게다.

 그런 편견을 가져서는 아니 됨에도 불구하고 앞에 앉은 아나운서는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
었다.

 ‘ 혹 목소리로 상대를 평가 하지는 않을까 ?’

 목소리라 하면 그녀야 싱그러운 백합일테고 나야 털이 부시시한 엉겅퀴일 것이다.

 순간 묘하게 들떴던 감정이 허공으로 증발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구멍난 양말 사이로 발가
락이 나올까봐 안절부절 하는 그런 심정으로 방송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방송국 밖의 바람은 시원했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좁은 공간에서의 의구심과 자격지심
을 씻어냈다. 가정 주부가 아나운서 목소리에 가늠해 마음고생을 하다니 이게 바로 쓸데 없
는 기우(杞遇)일 것이다. 잠시나마 그런 하찮은 일로 기죽었던 일이 부끄러워졌다.

 어느 합창단 지휘자 눈에 다래끼가 났었다. 하필이면 공연날인데 어떻하냐고 하였더니,

 “웬걸, 난 말이지 얼굴이 얽어도 걱정이 없어. 이렇게 엉덩이만 예쁘면 되잖아 ?”

 엉덩이를 쑥 내미는 그 지휘자의 유머감각이 바로 세상 사는 지혜였음이 새삼스럽게 떠올
랐다.

 

                   

 

                        
 

               이별 인사

 

 뜰 안에 갑자기 벌들이 많이 보인다. 노란  호박꽃에 앉아 꿀을 빠는 그런 꿀벌이 아니다. 
너무 커서 나방만 하다. 어쩐지 푸르등등한 살기가 느껴진다. 지난번 물난리 때에도 그 벌떼
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벌을 쫓아내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었다.

 현관 앞 은목수 가지 위에 주먹만한 벌통이 발견 될 때만 해도 행여 벌통이 다칠까 봐 모
두들 염려했었다. 달포밖엔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벌통이 축구공만 해졌다. 나뭇가지 끝에 
교묘하게 지어 놓아서 현관 쪽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반대편에서 보아야 그 벌통이 
보인다. 살아 있는 생물은 이렇게 생명보호 본능이 있다.

 그 벌통의 형상이 참으로 괴이하다. 육각형을 맞대어 이은  듯한 보통 꿀벌들의 것과는 매
우 다르다. 고목등걸같은 딱딱한 표피로 둘러싸인 고추장 항아리 같다. 걸죽한 풀에다  나무
껍질을 짓이겨 영지버섯의 무늬를 만들어 놓은 조형 예술이랄까.  어쨌거나 그 집에서 풍기
는 분위기가 성깔있고 살벌해 보여 은근히 거북한 심사가 났다.

 그 집에 동전 만한 구멍이 하나 뚫여져 있다. 거기로 연신 말벌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집거죽을 기어가며 무엇인가 열심히 일하는  놈들도 보인다. 벌들은 자신의  배에서 나오는 
묽은 밀납을 입으로 반죽해서 집을 짓는다고 한다. 벌통 주위에서 분주하게 다니는 저 벌들
이 집을 늘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집이 커질 수가 
있겠는가.

 말벌이라는 게 나무에 붙은 해충을  잡아 먹는다고 한다. 곤충을  잡는 벌이라서인지 역시 
그 위풍이 전투적이다. 곤충이 없어지는 겨울에는 꿀벌들이 모아  놓은 꿀을 차지하기 위해 
꿀벌들과 전쟁을 치룬다고도 한다. 해충을 없애주는  이충임에는 분명하나 어쩐지 살벌해서 
안심이 되질 않는다.

 자꾸 벌의 숫자는 늘어가고 크기는 큰 나방 마냥 징그럽기까지 할 뿐 아니라 벌통도  축구
공만 해지니 이젠 걱정거리다. 혹시 아이들이 신기하다고 벌통을  건드릴까봐 몇 번이고 주
의를 주곤 했지만 위협감같은 게 사라지지 않았다. 없애기는 없애야 할 터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들을 어찌 할 것인가. 당분간 아이들을 그 근처에 접근을 못하도록 해놓고 좋은 방법을 
찾는 수 밖에 없었다.

 불을 피워 연기를 벌통 안으로 집어 넣고 벌떼들이 도망 간 틈을 이용해 벌집을 없애는 방
법이 그럴 듯 했다. 우리 손으로 살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 아래서  모
기향 같은 것을 몽땅 피운다면 그다지 어려울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시어머님께서는 옆집 송란이 엄마에게 묻고 오셨다.

 “그들도 생명인데, 어느 생명이라도 귀한  것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집에서  벌들이 늘어 
나는 일도 좋은 일이고... ...”

 송란이 엄마는 시골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오신 시골 부인이다. 농사도 짓고 짐승들도 키운 
경험이 있어서 그런 일에 일가견이 있으셨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자연 벌들이 없어지니까 그
때 벌집을 없애 버리면 된다고 송란이 엄마는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온 가족이 대 찬성이었다. 한두 달만  참으면 추워지니 그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그동안 
모두들 벌에 쏘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벌을 보호해 주자고  했다.  벌집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보니 이젠 한 가족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몇 년 전 우리 가족으로 남생이 새끼 한 마리가 있었다. 친척 한 분께서 우리 연못에서 키
워 보라고 가져다 준 것이었는데 손바닥만 해서 거북이와 얼른 구별이 안되었다.  

 남생이는 민물에서 산다. 모래 흙과 물을 반반씩 넣고 키우면 되는데 하루에 한 시간씩 일
광욕을 쪼여야 등딱지가 딱딱해진다. 그런데 우리집 남생이는 일부러 일광욕을 시키지 않아
도 되었다. 

부지런히 물 밖으로 나가는 통에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기  일쑤였다.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
럼 아이들은 신나서 찾아 다녔다. 때론 장독 뒤에서 때론 풀 숲 사이에서 찾아다 놓았다. 강
아지든 고양이든 새끼들은 아이들이 좋아하기 마련이다. 남생이가 집 안에 있으니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다. 빵부스러기도 가져다 주고 지렁이도 잡아다 주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소나 돼지처럼  집에서 사육하는 동물도 아니고 환
경도 마땅치 않았고 혼자라 가엾기도 했었다. 일찍 제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는 게 합당했다. 

 그래서 물색한 곳이 덕양에 대포 저수지였다. 그 곳이라면  남생이가 자연에서 자랄 수 있
는 환경이 될 것 같았다. 남생이를 물이 담긴 바케스에 담아 조심스럽게 차에 태웠다.  남편
이 운전했고 나와 어머님은 뒷자석에서 남생이를 보살폈다.

 대포 저수지에는 낚시꾼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둑 
아래로 내려가 남편은 남생이를 놓아 주었다.

 “낚시꾼들에게 잡히지 말고 잘 살거라. 남생아.”

 “잘 가. 안녕! ”

 아이들도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느릿느릿 기어 가던 남생이가 뒤를 한 번 돌아다 보고 갔다. 물가에 다다르자 남생이는 다
시 한번 더 돌아다 보고 물로 들어갔다.

 이제는 억지로 쫓아내지 않아도 훌쩍 떠나버릴 말벌과 이별할 차례다. 어쩌다 우리집 처마 
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어 온 가족에게  미움을 샀으나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면 
‘추위에 떨지 말고 잘 살아라’라는 인사조차도 못 할게 아닌가. 날이 밝으면 이별 인사를 
미리 해두어야겠다. 


                

 

사랑은 관심이다. 

 

 

햄(HAM)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홍콩에서 '미스 정'이라는 봉투가 날아 들었다. 상대가 나오면 서툰 언어에 이력도 짧아 우
선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했었는지를 잘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한  주
부라는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잊어 버리고 못 알려 준 게 아니라 일러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자신의 소개
를 할 때 어느 누구도 미스라든지 미세스라는 단어를 성 앞에 붙이지는 않는다. 나 역시 사
는 곳과 성을 알리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듣는 쪽에서 미스로 오인하였으니 누구
의 탓이라 하겠는가. 

내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나가 버리니 내가 들을 기회는  없다. 나이보다 더 젊게 들렸다니 
굳이 기분 나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남편이 내심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다. 다음부턴 성  앞
에 꼭 미세스를 넣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고 출근하였다. 그게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몇 년 전, 남편이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묻혀 왔다. 가슴에서 왼쪽 어깨 쪽으로 올라 가
는 부분이었다. 취중에 묻은 것임이 분명하니 그냥 둘까 하다가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따졌
다. 앙칼지고 야무지게 그러나 교양있게 추궁했다.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식하게 악다구
니를 하는 편이 더 인간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물론 남편을 의심하거나 공연한 상상력을 발
휘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었고, 중요한  내조였다. 최근들어 빈번해진 술좌
석에 제동을 좀 걸어야겠고 나사가 풀어진 상태라면 지금 조여 둘 일이었다. 

솔직이 남편은 자상한 부성을 지닌 부지런한 지아비이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라, 물증있
을 때 한번 환기를 시킬 속셈이었다. 요즈음은 유혹을 하고자  하는 여자들이 더 무서운 세
상이기에. 그 이후로는 와이셔츠에 김치 자국 아니고는 색깔을 묻혀 오는 일은 없다. 술좌석
에서 남편은 루즈 노이로제에 걸렸다고 농담까지 하였다 한다. 

해가 갈수록 부부싸움할 일이 줄어든다. 이미 서로의 성격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남편이 
성질을 내고 있으면 그러러니 하고 넘어간다. 그 성질  금방 시간가면 풀어지는 단순형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심 그 까짓 것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봐야 서로 손해날 짓이다. 

실수는 남편보다 내가 더 많다. 잊기도 잘 하고 빠뜨리기도 잘한다. 말하자면 엉성하니 성질
만 좋은 편이다. 처음엔 빈틈없는  남편이 철없는 내 행동에 성질도  많이 내더니 요즈음은 
아예 포기한 듯 하다. 

문화권이 다른 사람 둘 모여 하나를 만들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도 
들쑥날쑥 아귀가 맞질 않아 서로 상처를 받는다.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모난 돌이 파도에 씻겨 조약돌이 되듯 그렇게 된다. 서로에게 길들여 
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꽃도 내 손으로 물을 주고 가꾼 것이 더 소중하다. 한 가정을  이루어 쏟아 부은 정성이 얼
마인가. 혼자의 힘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부부가 힘을 모아야 하는 게 가정인데,  요즈음은 
이혼이나 특히 주부 탈선이 심심잖게 보도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결국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가 바람에 쓰러진다. 바위 틈  바구니에 어렵게 뿌리를 내린 소
나무는 결코 뿌리채 뽑히는 일은 없다. 온전한 가정을 만드는 일, 어쩌면 척박한 땅에  뿌리
를 내리는 일이 아닐까. 뿌리를 박고 자라는 나무도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벌레며 공해며 그리고 큰 물이나 바람에도 언제나 푸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중년 부부의 사랑이란 은근한 것이다. 잊고 있어도 늘 그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으며, 오
랜 벗들처럼 편안할 뿐 아니라 허물을 감싸줄 줄도 아는  너그러움도 있다. 지난 결혼 기념
일 날 남편이 내게 건네 준 시집 속에 이런 짤막한 시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백제인


화로에

남아 있는 불씨

잿 속에 박힌 별,

그 속에

내가 있다.

 

 

                     

 
              

                   우리네 현 주소

 

 

 미국 샌디애고 주에 사는 외사촌 오빠네 가족이 고국을  찾아 왔다. 무려 20여년만에 찾은 
고국이 너무도 좋아 이젠 자주 내왕하며 살겠다고 하였다.  오빠네는 수간호원인 올케 언니
와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인 딸, 네 식구였다. 세탁업을 경영하는 오빠네는 이국 땅에서 누
가 보아도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였다.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그 큰 장벽을 넘고 튼튼하게 
자리 매김을 한 것이다.

 미국인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의 경쟁을 뿌리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했다는 조카도  자랑스러
웠다. 그 조카녀석이 커 가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더라고 했다. 그래서 오빠네 부부보다  2주 
먼저 한국으로 보냈다. 과연 잘 견디어 줄까 걱정을 하며  후레이크 같은 늘상 먹던 음식까
지 챙겨 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놈들은 역시 한국인이었다. 먹고 생활하는 것에  너무 
쉽게 적응을 해 버렸고 2주만에 와 보니 한국말까지 아주 유창해져 놀랬다는 것이다.

  “뿌리를 찾길래.... ..”라는 얘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알렉스 헤일리가 따로이 있는게 아
닌 것이다.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자신의 근본을 찾게 되어 있는가 보다. 오빠가  의식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할 때에는 귀찮아 하더니 어느 틈에 그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열심
이더란다. 한국을 알고 싶어 하고 몸으로 부대껴 보고 싶어  하더니 이번에 그 소원을 이루
었다고 했다.

 일정이 바빠 여수에서는 하룻밤도 묵지 못한다고 해서  간단히 점심을 대접하였다. 남편은 
생선구이를 잘하는 식당으로 안내하여 모듬접시를 시켰다. 큰 접시 위에는 샛서방 고기라고 
이름이 붙여질만큼 맛이 있다는 금풍생이와, 누런 기름이 지글거리는 조기와, 가운데 토막만 
선보인 갈치와 삼치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나왔다.

 그들이 살고 있는 샌디애고 주에도 바다가 가까워 생선은 풍족하다고 했다. 가끔씩 낚시도 
즐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젓가락을 서툴게 든 그들은 얼굴을 찌뿌렸다. 생선머리 토막이  통
채 구워져 눈을 뜨고 있는 생선을 먹는 것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올케 언니가 아이들 마음
을 알고 얼른 머리부분은 떼어 주었다. 그것은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한참 먹다가 조카녀석이 급한 김에 불쑥 영어로 얘기하는데,  짧은 실력이나 대충 나도 그 
뜻을 알아 차렸다. 고기를 손가락 뼘으로 재면서 이렇게 작은  고기는 도로 집어 넣어야 하
지 않느냐고 올케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조기  새끼와 금풍생이가 그의 손가락 
길이 밖에 되질 않았다.

 요즈음 시장에 가도 고기들이 다 그 정도 크기이다. 저런 고기까지 다 잡아 먹으면 나중엔 
어떻하냐고 생각한 적이 나에게도 있었었다.  그런데 워낙 고기가 흉년인데다가  늘상 보는 
고기가 고런 정도라 지금은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도로 넣어 주어야 한다는 그 아이의 표정이  참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들 
사회가 개인주의라면 우린 이기주의가 아닌가.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하고 나 외의 다른 사람
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몰염치한 처사였던 것이다. 

 여수(麗水)에 바다를 없앤다면 곱추에게서 등을 떼는 일이리라. 굽은 등이 없는 곱추는 이
미 곱추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우리 여수가 여수답게 남기 위해서는 바다를 살려야만 하지 
않겠는가. 바다를 아끼고 어족을 보호하고 갯벌을 살리는 일이  바로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
게 남겨줄 수 있는 자산인 것을, 우린 어느새 작은 고기마저 잡아 먹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
다. 바다가 황폐되고 있음조차 느낄 수 없는 불감증에 걸려 버린 것이다. 

 주암댐 주위의 도로는 말끔한데 정작  댐물 위에는 쓰레기가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났다. 
저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부끄러워진다.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아닌가. 가까이 내 고향 바다가 적신호인데.... 

 생활 곳곳이 위험 수위이다.

 그러나 더 큰 위험은 그 사실을 입으로만 떠들고 있는 것일 게다.

 

                         

 


아빠 

아빠는 나를 어찌 시집 보냈을까. 세상에 둘도 없이 자랑스럽고 예쁜 딸을, 술만 한 잔 되면 
청와대에서 와도 그냥은 내 딸을 줄 수 없노라고 호언장담하던 그 딸을.

아빠는 졸업타기가 무섭게 나를 시집 보내셨다. 그리고는 밤마다 우셨다 한다.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보며 딸이 정말 시집간 것인가를 확인하며 우셨을까.  그토록 소중했던 아빠의 딸
이 설마, 어두워지면 문을 열고 들어오리라 하였을 게다. 

아빠는 나와 팔짱끼고 걷는 것을 좋아 하셨다. 조잘대는 내 얘기소리에 한마디 대꾸도 없이 
즐거워하셨다. 그래서 난 아빠를 위해 일부러 팔짱을 꼈다. 칭찬을 받았거나 성적이  올랐거
나 상을 탔다는 얘기를 주로 하곤 했다. 그런 얘기를 아빠는 제일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일평생을 권위로 살으셨다. 아빠의 권위를 한시도 느슨하게 푸신 적이 없었다.  사업
을 실패하고 앉을 자리가 없어졌을 때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입원을 하고 다니실 적에도 
자신의 권위만큼은 철저히 지키셨다. 

여전히 사장님이셨다. 흔적 뿐인 감투지만 언제까지고 회장님이셨다. 힘이 없어도 당당한 집
안 어른이셨고 자식들에게 애를 먹이셔도 지엄하신  아버지셨다. 누가 대접해줘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 모습을 지키셨다.

싫었다. 그런 아빠가 나는 싫었다. 어떤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사랑을 받았던 나였기에 속빈 
강정같은 아빠의 권위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수위 할아버지나 늙수레한 군고구
마 아저씨가 더 경건해 보였다. 하지만 아빠께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고비가 있었다. 출가외인으로 지켜 보아야했던 아빠의 모습은 안타까
움을 넘은 서러움이었다. 팔짱을 끼어  드리며 따뜻한 수다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저 
막막한 형벌이었다. 

친정에 잠깐 들린 짬 중에도 나는 아빠 다리를 주물러 드리곤 했다. 예쁜 옷을 사 달라거나 
용돈이 궁하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주셨던 아빠셨다. 살이 빠져 힘이 없는 아빠의 다리
에 눈물이 저리고 아파서 소리까지 죽여야 했다.

이제는 다시 윤택해지고 다복해지셨다. 지극히 효성스런 장남이 모시고 살면서 아빠가 아빠
로서의 온갖 권위를 다 누리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다. 아빠는 아빠의 권위가 제대로 
지켜질 때 가장 행복하셨다. 아버지로서, 어른으로서, 모자람 없는 위엄이 곧 권위였다. 철이 
더 들고부터는 아빠의 권위가 소중해졌다. 그 권위를 지켜드리는 일이야말로 효도의 첩경이
었다. 

"너희 아버지처럼 그런 복인이 어디 있댜냐? 서울가면 서울자식들이 공항이고  어디고 미리 
나와 발에 흙도 묻히지 않게 하고,  아프다면 금방 달려와 병원으로 한방으로 법썩을  떨고, 
며느리들이 철철이 구색 맞춰 옷이야 모자야 구두까지, 매달  궁하시랴 저들은 아껴도 아버
지께만은 후하니, 이 세상 천지에 그런 복이 또 어디 있다냐?"

엄마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빠가 스스로 얼마나 비관해 하셨는가를. 화려한 무대 뒤의  그 
음습한 패배감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아직은 그 비상한 머리로 한  세상을 앞질러 보고 싶으셨다. 사업도  사회활동도 곧 재기될 
듯 하여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셨다. 술이  아니면 잠을 못 이루셨다. 뒷전으로 물러앉을  수 
밖에 없는 신세가 억울했고 한 번은 더 떵떵거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주저
앉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싶으셨다. 

결국 세월이 아버지를 주저 앉혔다. 비참 다음의 체념이었다. 체념은 오히려 평안이었다. 주
위를 살펴보니 앞섰던 사람들도 모두 무대에서 내려 와 있었다. 아빠가 조금 일찍 내려왔을 
뿐이었다. 세상이 그런 것임을 아빠는 너무도 오랜 방황 후에야 인정하셨다.

그러나 아빠는 지금 남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자리에 계신다. 네 자식들이 모두 당당하게 제 
몫을 하는 큰 일꾼이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아빠의 권위를  지켜드리고자 애쓰고 있기 때문
이다.

아빠는 무엇인가를 자식들에게 남겨주지 못함을  애석해 하신다. 건물 한  채씩이나 거금의 
통장이라면 흡족하실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풍성했더라면 우리 자식들은 그 그늘에서 제대
로 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빠만 바라보고 아빠의 힘으로만 살아가려 했을 것이다. 

재물은 진정으로 믿을 게 못되고, 아빠는 우리에게 재물보다 더 귀한 재능을 주셨다. 어릴적
의 풍부한 자양으로 스스로 커 나갈 수 있도록 아빠는 옆으로 비켜 서 계셨다. 재물을 많이 
물리는 부모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을 앞에서 처리해 주는 그런 부모가 아니라, 혼자서도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그런 부모가 과연 나도 될 수 있을까.  아빠 나이
가 자꾸 되어감에 따라 점점 걱정스러워지는 아빠 노릇이다. 

아빠는 지금도 딸이 보고 싶다고 전화를 주신다. 

보고 싶으시댄다. 연인도 아닌데, 사랑할 나이도  지났는데,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아빠는 
지금도 내가 보고 싶으시댄다. 

                   

숭늉은 아직 식지 않았다

 

첫 수필집 `숭늉이 맛있는 집'을 출판한 후 제목이 숭늉인지 누룽지인지 나도 헷갈렸다. 사
람들은 편의대로 `숭늉 한 그릇' 이라고도 하고, 그 `누룽지가 맛있는 집'을 참 잘 읽었다고
도 했다. 

`숭늉'이란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까아만 가마솥의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밥을 다 푸고 남
은 군불로 노릇하게 누룽지를 눌렸다가 물을 붓고 주걱으로 잘 문질러가며 끓인 물이 바로 
숭늉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향수이다. 그래서 숭늉이란  따스한 인정이고 구수한 먹거리이
며 어머니의 애환이자 무던한 심성인 것이다. 

그 `숭늉이 맛있는 집'이라는 제목을 누구보다도 마음에 들어하시는 분은 시부모님이셨다.

"너희 시어머님은 항상 불어터진 누룽지로 배를 채우셨단다. 가나다 제과점을 하고 계실 당
시 직공들은 늘상 먼저 먹고 많이 먹었기에 맨 나중에 먹는 너희 어머님은 반찬 그릇에  남
은 찌꺼기 장 국물하고 퍼진 누룽지를 먹고 사셨느니라."

아까워서 먹게 된 누룽지가 먹지 않으면 그리워지고 이제는 어머니의 좋아하는 음식까지 되
어버렸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에미가 그런 얘기들을 소흘히 듣지 않고 이렇게 책 제목으로 붙였구나. 참, 잘했다!"

그래서 붙인 제목이 아니라고 정정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숭늉이 맛있는 집'을 만들기까지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 했다. 세상이 그저 밝고 맑고 깨끗
하기만 했다. 조금의 실수란 오히려 인간적이라 좋았고 상대는  곧 나의 얼굴이었기에 내가 
밝으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내 책을 읽고 어떤 이는 일부러 치부는 감추고 좋은 것만 골라
서 썼냐고 물어 올 정도였다. 그래서 나도 나를 의심 해 보았다. `정말 그랬을까?'

하지만 `숭늉이 맛있는 집'이야말로 진실이고 진솔이다. 거침없이 쓸 수 있는 소재이고 막힘
없이 쏟아 내는 생각이며 꾸밈없이 살아가는 흔적이다. 좋은 것을  고른 게 아니라 모든 것
이 좋은 것이다.

사실인즉 `숭늉이 맛있는 집'은 시아버님의 자서전이다. 아버님을 대신해서 내가 풀어 쓴 것 
뿐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 아버님 같은 분이 많이 계셔야 한다. 또 그런 삶을 차세대인 우리
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쓰는 동안이 희망차고 즐거웠다.

`숭늉이 맛있는 집'은 암울했던 우리  근대사의 80여년을 재조명하는 일이었다. 시아버님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새롭게 인식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17년을 하루같이 부대끼
며 함께 살아 온 며느리만이 제대로 아는 일이었으니 나만이  할 수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문필가나 문장가가 대필해도 그것은 흑백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시아버님이 왜 범민 선생인지, 연등천 위에 걸린 다리가 왜 범민교이며, 범민 장학금이 언제 
생겼는지, 그리고 그 분이 어떤 슬픔과 고통과 고생을 하였는지를 `숭늉이 맛있는 집'은 진
지하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기교나 미문은 없어도 살아서  생생하게 숨쉬는 진실들이 문장 
사이를 그득하게 채우고 있다. 

`숭늉이 맛있는 집'은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 분들에게 80여년의 긴 고
생에 대한 보람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 하나로 신들린 사람처럼 밤을 꼬박 새워
가며 글을 썼는데 독자들은 작가까지 알려고 했다. 작가의  자질과 수준까지도 평가하려 들
었다.

등 뒤로 땀이 흘렀고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시아버님만을  생각했던 그 당당함이 겸연쩍었
다. 긍정적이기만 했던 나의 사고도 차츰 조심스러워졌다. 주위의 시샘이나 눈치까지도 체감
할 수 있었다. 발가벗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정 모두가 책  속에 
알몸으로 벗겨져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수필이라는 게 그랬다. 삶의 흔적에 소롯이 난 사색로였다. 어떠한 형태든 속속들이  작가의 
삶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까지 고해성사를 하듯 진실해야 하는 
수필에 나는 온 몸에 개방구가 돋듯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게다가 숭늉 다음의 수필에 큰 벽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다. 또한 같은 소재는 식상감을 주기 때문에 소재면에서 노골적인 
경계심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나는 수필이 좋았다. 수필을 잘 쓰고 싶었다. 하지만 수필을 계속 쓰려면 무엇인가 
새로운 체험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가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방황
이었다. 새로운 체험은 늘 빈곤하고 인색했으니 나는 수필에  목이 마르고 허기지고 괴로워
졌다. 

현실 도피를 꿈꾸듯 나는 수필에서 도망쳤다. 그래서 시(詩)를 흉내 냈다. 나는 국문학과 출
신도 아니고 여지껏 문학강좌에 참석해 본 일도 없다.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끓어 오르는 열
정만으로 글을 써 온 것이다. 시를 자꾸 흉내내 보니 시의 맛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시는 
사실적 사건이 필요치 않았다. 새로운 체험이 없더라도 느낌과  언어적 재능만 있으면 가능
한 영역이었다. 구차하게 수필거리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이 났다.

 

초시(初詩)

 

반 세상 허송하고 늦게 만난 글월 문(文)

실개천 굽이굽이 흐를 때는 몰랐더니 이렇게 봇물 터지듯 차고 올라 넘치구나 

내 안에 언제 그리 반짝거리는 샛별들이 두루마리채 감겼던고

한 필 끊어 한 줄 쓰고 두 필 끊어 두 줄 쓰면

마름질은 원고지로 바느질은 펜대로 인두질로 주름펴서 조심조심 걸었다가 님 볼 날 보름달
을 고대 고대 하는구나

늦게 배운 계집질에 도끼자루 썪는구나

중 놈 맛 본 고기맛에 빈대 남질 않는구나

하, 늦게 배운 연애질이 애간장을 다 녹이네

매일 시를 썼다. 그게 시라고 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그냥 혼자서 
시를 흉내냈다. 누에가 실을 뽑듯 가슴에서 풀어지는 시어들을  원고지에 받아 적어 내려갔
다. 한없이 시가 좋았다. 풀어 쓴 내 시도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한계에 부딪쳤
다. 시의 세계는 너무도 벽이 높았고 나는 그 벽에 부딪쳐 허우적거렸다.

한동안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갈등과 고민에서 헤어나고 싶었다. 문학이라는  올가미에서 
풀려나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했다. 아무 것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내겐 형벌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만이 빛이고 희망이었다. 신앙이고 종교였고 
내가 가야할 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설을 써 보았다.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반신반의 하면서 구성에  들
어갔다. 며칠 끙끙거리니 주제가 잡히고 순서가 서고 글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중편  정도의 
소설이 기특하게 완성되었다. 지면에 발표는 하지  않았어도 소설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
로도 흡족했다. 하지만 몇 번을 후딱 읽고 나니 내 소설 읽기가 싫어졌다. 그것은  꾸며놓은 
허구였다. 거짓을 자꾸 읽는다 하여 감동이 오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시처럼 읽을수록 가슴
에 와 닿는 카타르시스도 수필처럼 겸허로운 사색도 없었다.

수필은 조용하다. 삶을 조용히 관조하면서 터득한 지혜이다. 살풋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띄울 
때도 있고 반짝 한 방울 눈물이 맺힐 때도 있으나, 읽고 또 읽어도 느끼해지거나 싫증이 나
지 않는 게 수필이다. 수필이란 그런 멋이고 맛인 것이다.

바람을 피우다 조강지처에게로 돌아온 기분이 이럴까. 밖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비로소 본처
의 깊은 정을 느끼게 된 철든 남편이 이러할까. 발가벗겨져도 이제는 수필이 소중하다. 새로
운 체험이 없다고 성화를 대서도 아니되고 급히 큰 것을 얻으려 해서도 아니되는 게 수필임
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많은 독자들이 내 수필은 따뜻하다고 귀뜸해 주었다. 숭늉처럼? !

늦게 배운 연애질이 애간장이 다 녹듯, 늦게 배운 글월 문(文)이 내게는 지금 그러하다!

      


수(水)? 수(水)자 맞나?

‘고울 려(麗)에, 물 수(水)라.........

물빛이, 물길이, 물에 어리는 풍광이, 얼마나 곱길래 여수(麗水)라 하였을까?’

상가집서 밤새워 울다가 대체 여기가 누구네 초상이냐고 물었다는 사오정같은 질문이다. 이 
곳에서 탯자리를 틀어 무려 40년을 살았으면서 이제서야 우리 고장이름이 왜  ‘여수’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여수(麗水)라야만 했을까?’ 

여수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이다. 육지이면서 섬같고 섬같으면서 육지인 항구이다. 긴 해안선
이 엿가락같이 늘여져 있고, 바닷물은 청정하고 수려한 쪽빛인데, 그 쪽빛에 담궈져  푸르른 
하늬바람이 아득한 갯벌까지 거침없이 불어오고, 갯벌 속엔 꽃게랑 대합이 야무지게 공생하
며 살고있는 곳이다.

그러니 응당 지명에 바다 해(海)자가 표기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여해(麗海)라든지 해려((海
麗)라든지 말이다. 동해시나 진해시처럼 바다를 끼고 물질을 하며 사는  도시가 바다 해(海)
자를 버젓이 쓰고 있음을 보면 분명 몰라서나 잊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기어코 수(水)자를 고집한 뜻은 어디에 있을까. 

싸리문처럼 바닷물을 열고 밀치는 해안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인근 산봉우리들이다. 
여수는 어디든 가까운 산에 올라가면 바다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미동도 없는 바다이다. 햇살이 비추면 은빛 빙판처럼 눈이 시리도록 부시다. 허연  물이빨을 
드러내놓고 가끔씩 배가 지난 흔적이 보이기는 하나 이내 부동한 자태로 돌아가서 바라보는 
이까지 숙연케 만든다. 흡사 고요한 호수인 것이다.

구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여수 앞바다는 돌산 대교를 한  축으로 좌측엔 종포와 장군도가, 
우측엔 신월동과 경도가 붕긋이 이웃을 이룬다. 살진 갈매기가 긴 다리 위까지 세차게 올랐
다가 낙하를 즐기는 모습이 우리의 마음까지 사뭇 들뜨게 한다.

화양면 봉화산의 봉화대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도 장관이다. 돌담쌓듯  한 켜씩 쌓아놓은 봉
화대의 연기가 멀리 광주로 통했다고 한다. 고흥 팔영산, 돌산의 대미 소미산들이 병풍을 두
르듯 능선을 드러내 놓으면 그 품안으로는 다도해라고 불리우는 크고 작은 섬들이 띄엄띄엄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곳 바다도 여수 앞바다처럼 평화롭다. 군데군데 섬들이 물결을 막아주고 걸러주어서인지 
끝자락에서나 파도가 일뿐 중심은 언제나  침묵의 바다이다. 화양면 바다도  여수 앞바다와 
같이 호수처럼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다가 호수같다는 점만으로 해(海)자가 아닌 수(水)자를 썼을까?’

수(水)자를 가만 들여다 본다. 물이 흐르는  형상이다. 흘러가는 내 천(川)자도 같은 형상이
다. 내 천(川)자까지 연상해서 여수(麗水)를 다시 생각해 본다. 

여수는 세 면은 바다이나 남은 한 면은 육지이다. 그  육지에서 흐르는 물이 아름답고 풍부
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간다. 이 곳 저 곳에 야트막한 산봉우리들이 예순 네 개나 된
다하니 그 산만큼 골짜기의 수도 많을 게 아닌가.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하며  순하고 흔하다. 산또랑에서 찢어지는  물가지 수를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하천이 많은 화양면 인근의 땅들이  걸고 기름진 까닭도 이제사 알 
것 같다.

시청이 학동(鶴洞)에 있다. 두루미를 이르는  학(鶴)이다. 이름처럼 오래전에는 학들이 많이 
살았을 것이다. 학이 서식하기에 적절한 들녘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웅천 고개를 넘어갈  때
면 푸른 들판에 목도 다리도 긴 하얀 새들이 삼삼오오 무리져 있는 모습이 눈에 쉽게  뜨인
다.

화양면에 연접해 있는 갯벌에서도 하얀 새들이 보이곤 한다. 크고 넓다란 날개를 유유히 퍼
득거리며 유순하게 날아 오른다. 그들  발가락 사이에는 좁은 물갈퀴가  웅승거리며 감춰져 
있다. 

논에 풀뿌리가 풍요롭기 때문이다. 오염되지  않은 물에서 개구리며 곤충들이  잘 번식되기 
때문이다. 인접한 바다에 어류와 패류가 널려 있어서 그런  귀한 새들이 풍요로운 먹이사슬
을 누릴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여수는 바다만 거름진게 아니었다. 골짜기 물에도 바다에 버금가는 생명력이 넘쳤다. 그러니 
청정한 남해와 비옥한 골짜기 물 사이에서 지명붙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선인들의 고심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안녘으론 냇물이,  가녘으론 바다가, 한결같이 곱
고 빼어나니 이곳에 해(海)를 쓸 것인지 천(川)를 쓸 것인지 얼마나 난감하였을 것인가.

그런 긴 산고 끝에 얻은 결론이 바로 이 수(水)자가 아닐까. 어느 한 쪽에 치우침도 없이 양
쪽을 모두 끌어 안을 글자로 수(水)만한 게 없을 터이니. 수(水)자 속에는 천(川), 해(海), 포
(浦), 만(灣)까지 물이란 물을 모조리 끌어안는 포용력이 있었으니까.

이 땅은 수(水)자를 선택하였다. 수(水)자는  이 땅에서 선택 받았다. 선택  받은 수(水)자는 
은혜를 알았다. 그래서 천혜의 쪽빛 고운 여(麗)자로 보답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땅이 여수(麗水)라나요?

그래요, 이 땅에서 여수(麗水)일래요! 

           


  요한 슈트라우스가 여수(麗水)에 오면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가 여수(麗水)에 오면 어떨까.

 ‘넘실대는 푸른 바다에 매료되어 가볍게 뒤꿈치를 들고  날 듯 스치며 걷게   되지 않을
까. 부드럽게 강약을 주어 ‘쿵 짜악 짝, 쿵쿵 짜아악 짝’, 그러다가   가끔씩 빙그르르 돌
고, 그러기를 계속 반복하면 저절로 왈츠가 되겠지. 세   박자 왈츠라면 그는 긴 768미터의 
오동도(梧桐島) 다리도 무도회처럼 유연   하게 건너 갈 수 있을꺼야.

  다리 위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가볍게 포옹을 하겠지. 맨처음 사랑을 고   백하고 난 후
의 후련함같은 휘파람을 자연스럽게 불게 될꺼야. 와인과 여인   과  노래가 잘 어우러지는 
관능적인 왈츠를 연주하고 싶어서, 속이  훤히 내   다보이는 동백열차에 뛰어올라  모자를 
벗어 던지고, 한려수도를 향해 가느   다란 지휘봉을 물결따라 휘두르게 될 지도 몰라.

  왜, 오동도(梧桐島)에 오동나무는 없고 핏빛 동백만 우거졌느냐고 물어오   면 어쩌지? 

  임금 왕(王)자 위에 사람 인(人), 그  전(全)자의 전라도인 이곳에, 오동나무   열매를  따 
먹으러 봉황이 날아드니 필시 새로운 왕조가 나올 것이라는 풍   수를 믿고, 오동나무를 모
조리 베어버렸다는 전설을 들으며, 그는 갸웃갸웃   이해를 구하려고는 할꺼야.

  또, 오동도에는 귀양 온 부부가 고기잡이로 연명을 하고 살었는데, 남편이   바다로 나간 
사이 도둑에게서 몸을 지키느라고 부인이 몸을 던져 낭떠러지   에 떨어져 죽었고, 그런 후 
부인의 무덤에 붉은 피와 푸른 절개를 뜻하는     동백꽃과 시누대(竹)가 솟아올라, 이렇게 
온 섬을 덮었다고 일러주면 그때   서야 어줍잖게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지......’      

 전설이야 어쨋든 오동도에서는 발랄하고 로맨틱하고 우아한 왈츠가 제격이다. 그림 그려진 
방파제에 올라 관현악단을 지휘하듯 그는 멋지게 손을 내저을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돌산 섬으로 드라이브를 하면 어떨까.

 알프스에서 흘러내려 오스트리아의 평원을 지나  멀리 동쪽 흑해로 유유히 흘러  들어가는 
긴 도나우강! 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연상해내지 않을까. 돌산대교를 건너 부드럽게 
쭉쭉 뻗어난 해안도로 풍경에서도 자연스럽게 도나우강이 떠오를 것 같다.

 돌산의 푸른 바다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허연 물살을 가르며 떠다닌다. 돌산 갓김치로 유명
한 푸르른 들녘이 펼쳐지는가 하면 어느새  멀리 가두리 양식장의 버거운 부표들이  시야에 
들어 온다. 굴전마을 갯벌에 도열된 양식용 굴껍질 풍경과  하얀 고니들의 서식지인 평사리 
갈대밭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고, 무술목의 몽돌과 향일암의 일출등이 서정적이고 정감스러
워서, 그는 분명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연상해 낼 것이다. 

낭만스런 왈츠를 고집하다가 갑자기 그가 폴카를 주문한다면 어디에서 일까.

 여름 태양이 이글거리는 만성리 해수욕장이나 돌산 방죽포에서가 아닐까. 파도가 쫒아오면 
달아났다가 다시 파도를 쫓아가는 동심, 벗은 몸매를 자랑하는 청춘들의 깔깔거림을, 슈트라
우스는 수다스러운 해학으로 표현할 게 뻔하므로.

 그의 아버지인 슈트라우스 1세를 추모할 수 있는  곳은 진남관이다. 슈트라우스 1세의 (라
데츠키 행진곡)은 비엔나 혁명시 혁혁한 공을 세운 라데츠키 장군을 위한 무곡이지만, 진남
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위한 개선곡으로 연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사 이충무공은 진남관을 객사로 사용했었고, 진남관은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
건물로서 보물 제324호 지정되어 있으며,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선소도, 우리 여수의 역
사이며 이순신의 역사이다.

 봉화대가 있었던 봉화산이나 군사들의 훈련장이었던 장군산 그리고 난리가 나면 산이 운다
는 종고산 등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그는 우선 난중일기의 영문 번역본을 꼼
꼼하게 읽어 볼 것이다. 

 고소동에 있는 좌수영 대첩비, 이순신의 타계를 슬퍼하면서  장군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타
루비, 큰 가뭄 때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보효대등을 둘러보면서, 가히 여수가 충무공  정신이 
살아있는 구국의 영지임을, 외국인인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청정한 한려수도 여수에는 왈츠곡만이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관광하러 온 사람들
이야 바다란 낭만이며 젊음이며 생동일 수 있지만, 어부들에게는 바다는 생활이며, 생활이기
에 고뇌일 수 있다.

 어부들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적조현상에 몸서리를 친다.  남편을 바다로 보낸 어
부들의 아내들은 태풍예보에 피를 말린다.  치솟는 인건비나 유가에 고통을  받고 양식장에 
번진 어병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다가 힘겨운 상대일 수 있다. 

 그런 어부들의 지친 마음을 슈트라우스는  침착하게 오페레타 (집시남작)의 (서곡)으로 다
둑여 줄 것이다. 집시, 유산, 사랑, 무공, 남작, 그리고  결혼, 그런 긴 여정의 유랑생활이 출
어하는 어부들의 삶과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나 바다는 생명이고 희망이며 약진이다. 눅진한 삶을 털어버리고 다시 닻을 올리는 어
부들의 팔뚝에는 푸르른 정맥이 불거진다. 그런 여수 바다를  슈트라우스도 사랑하게 될 것
이다. 그래서 마지막 곡은 여수를 위한 열정적인 리듬으로 채워주지 않을까.

 왈츠와 폴카를 많이 활용한, 집시남작 제3막 (입장행진곡)같은 빠른 템포로, 여수 사람들에
게 용기와 활력을 힘껏 불어 넣어주지 않을까.

           

 



     개펄은 바라만 보아도 좋다

 

 달천 선착장에는 도선배 하나가 밧줄에 까닥거리고 있었다.

 “몇 시에 배가 뜨나요?”

 더딘 시각만을 탓할 수 없어 옆사람에게 물었다.

 “아, 버스만 오면 그냥 가지!”

 애시당초 뱃시각을 모르고 섣불리  덤비는 초행자에게는 낭패에 가까운  답변이었다. 92번 
시내버스와 도선배가 공생하듯 뭍과 섬을 정확히 서로에게 옮겨주는 까닭이었다. 

마침내 버스가 선착장에 닿자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배는 곧 시동이  걸렸다. 나는 녹슨 
닻과 몇 바퀴를 돌려감은 밧줄이 놓인 배의 뒷전에 걸터 앉았다. 

 배는 반바퀴를 돌아 뱃머리를 여자도 쪽으로 돌리더니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물거품은 쫒기듯 헤쳐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탄산수같은 세찬 거품을 일으키는 배에서의 
뭍은, 월척을 비는 낚시꾼들이, 만선을 꿈꾸는  고깃배들이, 깃발을 단 양식팻말이, 그  부표 
위에 가뿐히 앉은 살진  물새들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휘날리는  바람결에 가만가만 멀어져 
갔다.

 투명하고 허연 물거품으로 융단을 깐듯한 널찍한  뱃길은 자유! 자유였다. 신호등 없이 간
이역도 없이 장애물은 물론 사람도 집도 나무도 없는 망망한 통쾌였다. 뭉실 피어오른 구름 
끝과 수평선은 맞닿아 있어도 그것은 이미 경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난간으로 튀어오른 물살에 잡념이 씻기어 갔다. 목적지를  향하는 거침없는 뱃소리에 잡음
이 잠식되었다. 구질한 처세나 구차한  삶에서의 해방, 해방이었다. 비울  수 있기에 후련할 
수 있고 잊을 수 있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격렬했던 배의 엔진이 서서히 멈추었다. 내가 정신없이 바다에 빠져있는 동안 배가 목적지
에 닿은 것이다. 돌을 층층이 켜개 놓은 섬의 가장자리에서 우리 일행도 짐을 챙겨 내렸다.

 여자도 섬마을은 반원으로 해안선을 긋고 있었다.  그 호의 안쪽에 몇 척의  작은 배가 뻘 
밭에서 삐뚜름하게 쳐박혀 있었다. 물이 들  때 정박했던 배일 것이다. 하얀 부표와  얼망한 
통발과 플라스틱 바구니가 실린 뗏목같은 ‘뻘스키’도 반쯤은 뻘에 잠겨 있었다.

 여릿여릿 빗살무늬결 바다가 밀려들었다. 하얀 포말도 없이 밀려드는 바다였다. 연신  촤르
르륵 밀려 들기만 할 뿐 나가는 길목은 없는데, 졸아든  바닷물은 어느틈에 널따란 검은 속
살을 드러내 놓았다.

 발빠른 아이들이 고동을 잡기 시작했다. 질좋은 뻘은 아이들의  신발을 더 이상 빠지지 않
게 받쳐 주었다. 물 속에서 놀던 고동은 어느새 뻘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검은 뻘을 긁어서 
바지락도 캐냈다. 미처 빠져 나가지 못했던 아기 새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린 고기도 잡
혔다.

 “우리, 먹을 수도 없는 어린 생명은 더 키웠다가 잡자, 그러자”

 아이들은 여린 생명의 종이컵을 들고 물가까지 나아가  가만히 부었다. 고동잡기에만 열중
했던 아이들의 목덜미는 이미 새빨갛게 햇볕에 익어 쓰렸다.

 섬 주변에는 소라 껍데기 무더기들이 군데둔데 쌓였다. 줄을 꿰어 단 소라껍질을 7월 백중 
쯤에 뻘 밭에 뿌려 두면 그 빈 껍질 속으로 쭈꾸미가 들어와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갯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뻘밭에서 삶을 꾸리고 있었다.

 17번 국도인 순천 해룡면에서 여수 도심으로 들어오는 샛길 해안도로에서보면 섬보다 너른 
개펄이 보인다. 순천만에 이어진 여자만의 개펄이다. 열 두 어촌 부락을 잇는 대단한 잿빛광
야는 시베리아에서 찾아오는 희귀한 도요새의 갈대습지와는 사뭇 다른 개펄이다. 바윗돌 하
나도 거칠게 없이 쭉쭉 뻗어난 뻘밭인 것이다.

 그 그림자같은 개펄에 겸허한 사색과 침착한 휴식이 있었다. 보는이로 하여금 느낌표와 말
줄임표를 동시에 찍게 했다. 타올랐던 햇살이 숨을 죽이고 45도 각도로만 역광으로  비칠때, 
유약을 칠하지 않은 오지그릇같은, 개펄은 그 자체만으로도 담백한 한 폭의 묵화였다.

 마치 숨이 멎은듯한 잿빛 광야는, 내 고향 여수의 잠재된 능력이며 참신한 미래이다.  품어 
넉넉한 게 개펄이고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숨어서 용트림 하는 곳이 개펄이기 때문이다. 

 어느쪽으로 튈지 모르는 짱뚱어의 점프력이 그렇고, 빼뚤빼뚤  옆으로 걷는 위협적인 집게
발 게가 그러하며, 빠끔빠끔 오줌싸듯 물줄기를 갈기는 새조개와 바지락, 그리고 뿔집을  인 
소라와 고동, 그 속으로 낙지나 쭈꾸미가 희롱하듯 드나드는, 개펄은 그 자체가 생명체인 것
이다.

 그러나 개펄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씨도 뿌리지도 가꾸
지도 않는다. 단지 줍기만 하는 곳이다.  물과 육지의 이중적 환경 적응능력이 필요로  하는 
개펄은 열악하면서도 비옥한 삶터인 것이다. 이 곳에서 고기들이 산란을 한다. 부화한  치어
들이 유년을 보낸다.      

 여자만(灣) 개펄이 없다면, 화양면과 소라면을 잇는 너른 들판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곧바로 
바다로 밀치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여자만의 개펄은 청정한 남해의 수문장이다.  걸르고 
가라안치고 토닥거려 맑히는, 과묵하고 어려운 일주문인 게다.

 인간에 의해 때묻지 않은, 자연이 아직  자연이기를 고집하는, 행여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매립시켜서는 아니되는, 마음을 비워야 더욱 잘 보이는, 여자만(灣)  개펄을 그저 바라만 보
아도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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