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타인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체험
이나 행동의 범주를 넘어서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설령 소설가라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내 소년 시절 얘
기를 쓰기로 하자.
되바라진 아이였다. 툭하면 어른들의 얘기에 끼어들었으며, 징글
맞도록 붙임성이 좋았고, 너스레도 잘 떨었다. 그런 주제에 성미가
급해 한 번 성질을 부렸다 하면 부모님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난동
을 피웠다. 또 노력하기는 싫어하면서 폼잡기는 좋아하였고, 무슨
일이든 끝마무리가 엉성했다. 그리고 주특기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
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공상벽이 있어 나 스스로도 넌덜머리를 내
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넌덜머리가 날 때면 현실이 똑바로 보이고, 가슴속으로 허
망한 바람이 휑하니 부는가 싶으면 금방 실망이란 회오리바람에 휘
말리기가 일쑤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근무처인
학교에서 할당해준 밭-식량난 때문에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을 갈고 있었다. 여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의 생활상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그날 그 순간의 일만은 기억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진짜 농부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잡초 더미에 뒹굴면서 그런 아버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눈앞
에는 파란 도깨비부채가 피어 있었다.
조건은 그것뿐이다. 아버지한테 신나게 혼이 난 다음도 아니고
감기에 걸렸던 것도 아니다. 하늘이 어둡게 구름져 있었던 것도 아
니다. 부정적인 기분이 들 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묵
묵히 괭이질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가슴에 돌연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 구멍으로 싸늘하고 허망한 바람이 휑하
니 불어와,혹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가-구체
적인 말을 아니었지만-하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어린 마음이
었지만,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현실 그 자체이며,나도 어른이 되
면 저런 식으로밖에 살아가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성장함에 따라 현실의 비참함을 볼 기회가 점차 많아졌
다. 인간이란 참으로 별볼일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굳어졌고 그럴
수록 내 가슴속의 구멍은 넓어졌다. 나는 점점 더 꿈속으로 도망가
게 되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들끓는 행
동적인 모험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정되고 일상적인
생활을 송두리째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애
인 나는 그런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
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산에 올라가 막대기를 휘두르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핑핑 뛰어다니거나 비탈진 낭떠러지를 날쌔게
기어올라갔다. 머릿속으로는 타잔이나 로빈 훗의 용감한 모습을 상
상하곤 했다. 밤이 되면 이불 속에 파고들어 가 영웅들의 터무니없
는 활약상을 꿈속으로 반입하는 정도였다.
내가 바란 것은 자유와 변화였을 것이다. 넘쳐흐를 정도의 자유
와 격렬한 변화. 이를테면 그림으로 그린 듯 반듯한 정의의 깃발
아래,마음에 들지 않는 치들을-그게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는 짐
작도 못 했지만-전부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증오
의 대상인 가상의 적이 필요했는데,행동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은
아이였던 나로서는 아무리 찾아도 그 대상을 설정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오로지 일본은 패전국이며, 더구나 그 모든
책임이 일본에 있고, 나쁜 것도 일본이라는 반복뿐이었다. 폭력적
인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쟁을 경험한 어른
들은 평화라는 두 글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평범하고 안정된 길
을 향하여 쉬지 않고 일했다. 혹시 그들이 전쟁중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 폭력적인 여운을 남긴 것은 아닐까. 일본이 미국에 내몰리
는 순간.천황이 패배를 인정한 순간,당시 어른들과 청년들.그리고
철이 든 어린이들은 돌변이란 말로 표현해도 좋을 만큼 재빠르게
사상 전환에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
는지 제대로 모르는, 아니 산 너머 세계에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세대는 의식의 저변에 아주 폭력적인 피를 남기게 된 것 아닐까.
그 세대는 학생운동만 해도 아주 거칠고 피비린내 나고 전투적인
방식을 취했다. 하기야 대학생활과는 인연이 없었던 나한테는 그들
이 일으킨 소동이 아주 사치스럽고 아주 흥미로운 혁명놀이에 불
과해 보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은 평화와 번영의 방향
으로 기세등등하게 흘러갔고, 끝내는 모든 사람들이 침묵과 무시
정도의 반항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그런 반항조차 깨
끗이 단념하고 세상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는 사
람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부모와 시대로부터 폭력적인 피
를 이어받지 못했다. 포식의 시대와 행복한 가정을 당연시하는 환
경에서 자란 탓에 애당초 거역을 모른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신
나게 놀고 안이한 상냥함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 나쁜 인종이 되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수중에 넣을 수 있
는, 현실적이라면 너무도 현실적인 꿈밖에 추구하지 않는 여자의
삶 그대로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가
없다는, 짐짓 도라도 닦은 듯한 말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진드기 같은 평론가는 아니므로, 최대공약수적인 의견은 토로하지
않는다. 거부를 당할지언정,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매도를 당할지언
정,나는 아무 상관 없이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은 딱 부러지게 한다.
한 시대나 국가가 붕괴할 때는 젊은이들부터 형편없어진다는 설
이 있다. 고대 로마가 그랬고 청나라도 그랬다. 먼저 젊은이들이 거
역을 모르게 된다. 무기력해지고, 호모나 정신적인 호모가 급증한
다. 자기 주변에 있는 일이 아니면 흥미를 잃게 된다. 그러는 사이
에 닳고 닳은 어른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세상은 혼란해지고,눈 깜
짝할 사이에 붕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얘기하자.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라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형과 동생이 있으며,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수입
이 있는 남들만한 가정이기는 하였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다
섯 식구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할 때면 나는 치가 떨렸다. 어디가 어
때서 그랬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아무튼 치를 떨었던 것
만은 확실하다. 누구 할 것 없이 저 잘났다고 쓰잘데없는 말다툼을
하고, 어딘가 궁상맞고,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았다. 더이상 견딜 수
없어진 나는 진지하게 가출을 생각했다.
내내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썩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쉴새없이 피가 들끓는 나날 속에 던져보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본들,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가.
중학생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브라질로 이주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흥분했던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때까지는 체력
이 따르지 못하여 집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즈음에는
아버지와 씨름을 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미 타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브라질이든 어디든 가야 했다.
그 브라질 이주의 꿈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계획한 현실적
인 꿈이 아니었을까.정글에 불을 피우고, 번들번들 땀을 흘리며 광
활한 토지를 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꿈은 가슴속에 뚫린 구멍
을 단번에 메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학교에서 받은 좁은 밭을 가는 행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
른 삶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진짜로 브라질로 이주할 꿈을 꾸었던 내 머릿속
에는 대학 진학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형을 중심으로 부모님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듯 대학 진학에 열심
이었다 중학생인 내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으
로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나는 겨우 세상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또 그 이
유에 대해 구체적인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틀림없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라고 믿고 있
었다.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 대학교를 졸업해 본들 그 앞에 어떤 나날
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심심하면 '학생 시절이 그나마 제일 좋았
어"란 말을 뱉어내는 샐러리맨 신세가 고작 아닌가. 샐러리맨 생활
이 어떤 것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아버지가 그랬으므로.여고에
서 교무 주임을 하던 아버지는 전근을 하자 평교사로 격하되었다.
월급도 형편없었다. 다른 샐러리맨보다 노는 날은 많지만 월급이
적은 탓에 -아마도-충실한 인생을 영위할 수가 없었다.
샐러리맨은 상부에서 떨어지는 명령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주 중
대한 일마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내가 초등학교 6
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전근 명령을 받았다. 새로 이사한 고장
은 실로 한심한 곳이었다. 어린 내가 화가 치밀 정도였다. 자기 마
음에 드는 장소에서 살 수도 없다니,이거야 너무 굴욕적인 입장이
지 않은가 싶었다. 세상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용
납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
충고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내 가슴속에 구멍이 뻥 뚫린 때가 어쩌면 자유로운 삶의 입구로
가는 문이 열린 순간이 아니었을까.그 가늠할 길 없는 허망함 속
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면 반짝이는 인생을 영위할 수 없지 않
았을까. 몇 번이고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인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시간도 공간도 전부 내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사회적 도덕적 제약 같은 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다른 인간들처럼,나 또한 진지하게 숙고한 다음 이 세상에 발을
내디딘 것은 아니다. 부모가 결정한 일이지만 그들 또한 그리 심각
한 의미로 나를 만든 것은 아니리라. 결혼을 했으니 아이가 태어나
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또 당시는 전
쟁중이었으니 영웅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이유라면 딱히 은혜를 느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너를 낳아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고 말하는 부모들을 많이 보는
데,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심사를 의심한다. 낳아 키웠다'는 말
다음에 올 말은, '그러니 우리가 늙으면 너희들이 우리를 돌보아야
한다'일 것이다. 이 무슨 염치없는 말인가.불순하고 타산적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어버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진다. 미래에 있을 보답을 내다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라니, 동물세계에서는 인간뿐이다. 동물은 자기 새
끼에게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는다. 낳아서 기를 뿐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이 말은 너를 생각
해서 하는 말이다'혹은 '너를 위해 하는 고생이다'라고.정말 그럴
까.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어떤 회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에 취직하는 길만이,진정 자식을 위한 인생길인가.물론 그렇지 않
다고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일지도 모른
다. 그런 코스를 밟아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으므로.
다만 거슬리는 것은 부모들의 속마음이다. 네가 안정된 생활을
하고 나아가 조금이라도 출세를 해준다면 우리들 인생도 함께 풍
요로워질 것'이란 꿍꿍이 속이 있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심각
한 문제다. 혹은 '우리가 다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이루어야만 한
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다.
자식의 인생에 편승하기 위하여 이러니저러니 잔소리를 하는 부
모는 추악하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인생이 있어 마땅하다. 자식이
눈을 돌리면 제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어서는 곤란
하다. 자식과 인생을 함께한다는 뻔뻔스러운 생각은 구역질나는 타
산 덩어리라 여기고 지금 당장 내동댕이쳐야만 한다. 그 반대도 마
찬가지다. 자식은 부모에게 밥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을 기대하면 자기만의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된다.
자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켜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역할은 끝
났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
기 때문이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이므로.
자식이 대학에 가고 싶어하고 부모 역시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 주
기를 바랄 경우,그것은 거래다. 자식이 어떻게든 대학에 가고 싶다
면서 울고 매달리며 학비를 원조해달라고 한다면 자식이 부모에게
빛을 지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가 제시하는 조건으로 빛을 변
상해야만 한다.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에 들어가야 한다고 요청한 경우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빛을 진 셈
이 된다. 따라서 학비는 물론이고 용돈까지 무조건 내놓고,그 다음
은혜를 베풀었다는 따위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브라질로 이주한다는 꿈이 부풀 대로 부풀었을 때 멜빌의 『백경』
과 조우하였다. 그 책은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책 가운데
유일한 외국 문학이었고. 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책이었다. 당시 나
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 문학은 내가 어
른들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저 시간
을 죽이기 위한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요컨대 인텔리의 아니꼽기
짝이 없는 나약한 고뇌가 주절주절 씌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도 사내자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다. 감동
을 느낄 만한 요소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백경』은 달랐다. 나는 정신없이 그 책을 읽었고. 그리고
감동했다. 문학의 위대함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말해도 좋다. 피가
들끓었다. 사내 자식이라면 에이헙 선장처럼 살아야 한다고 진심으
로 생각했다. 자신을 그런 삶에 근접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바
다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골짜기에서 자란 나는 바다와 바다에서의 생활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진짜 바다
를 보았고, 그것도 일본해를 힐끗 보았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수평선을 보고 상당히 겁을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드
넓은 공간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얼이 빠지고 말았다. 밀려오는 파
도에 압도되어 하염없이 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랬던 내가 바다로
나가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번 거부했던 세계로 자신
을 던져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문학의 힘은 위대하다.
나는 친구한테 선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러자 친구는 해양학교나 해양대학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성급한 나는 좀더 빠른 길은 없겠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러
면 통신사가 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자격만 있으면 당
장이라도 배를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통신사를 양성하는 국립 고
등학교-현재는 공업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고 한다-가 전국에
세 군데 있는데,나가노(長野) 현에 살고 있으니 센다이(仙臺)에 있
고 아직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새파란 젊은이가 한정된 조건
안에서 인생에 대하여 결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당최 경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 나이에 인생의 목적을 빈틈없이 터득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고자 하니 불안해지
는 것은 당연지사다. 괴롭다. 농담이 아니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자
신을 스스로 얽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물론 부모나 선생은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안정된 길을 걸어주기
를 바란다. 그러고는 입을 모아 '성실이 제일' 이라고 떠들어댄다. 절
대로 도산하지 않을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입사하여 아무튼 성실하
게 몇십 년 일하면 퇴직금도 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 삶만이 성실한 것일까.그것만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
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그렇게 바랐던 안정의 결과가 주위
의 눈치만 살피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되어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다시 한번 선생의 눈을 보라. 다시 한번 부모의 눈을 보라, 입으
로는 거창한 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그 표정이라니, 도대체 무언
가.왜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성실하게 하루하
루를 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라도
있다면,이번 인생은 이 정도로 해두고,두번째 세번째 인생을 마음
껏 누리자고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란 한사람에게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한 번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
든 것이다. 그리고 신들은 언젠가는 늙어 죽는다는 전제에다 하늘
도 마음대로 날 수 없는 육체를 주고서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자
이제 알아서 잘 살아보라'고 한다.
당시 나는 이런 말을 종종 했다.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학교에도 안 가고 일도 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집에는 남아 돌아가
는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한다. '
나는 취직 문제에 대해서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부모는 물
론 선생님과도 반 친구와도.어떤 상사(商社)에서 우리 학교로 텔렉
스 오퍼레이터를 구한다는 요청이 왔기에 입사 시험을 치러보기로
했다. 텔렉스 오퍼레이터란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도 알아
보지 않고.아니 그 상사가 어떤 회사인지조차 몰랐다. 마루베니라
는 회사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었다. 베니(紅)'란 글자가 붙어
있기에 화장품 회사인가 하고 생각해 봤을 따름이었다.
그런 어느 날,제법 성적이 좋은 친구가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상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양보해줄 수 없겠느냐고.
모집 인원이 딱 한 명이라,둘이 함께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회사가 유명한 대기업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한다면 양보를 하지.그 대신
내가 취직할 회사를 찾아줘"라고. 그는 신나서 그날로 당장 다른
상사의 팜플렛을 내게 들고 왔다. 그렇게 정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팔십 명 중에 팔십등이란 성적이지
만 학교측의 추천장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기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입사 시험이었다. 담임 선생이 나를
비웃었다. 시험을 보고 안 보고는 네 마음이지만 필기 시험에서 영
락없이 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나도 그 점은 인정했
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여기저기 회사를 쑤
시고 다녀보다가 정 안 되면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뭐 굳이 넥타이를 얌전히 매고 다니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
던 것은 아니다. 몸만 성하면 무슨 일을 해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쯤 익히 알고 있었고, 정 안 되면 마지막에는 뒷골목 세계에 발
을 들여놓으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자신도 있었다.
입사 시험 용지를 받기는 했는데. 역시 알쏭달쏭이었다. 작문도
거의 엉터리 문장으로 메웠다 사람들은 내게 곧잘 이렇게 말한다.
"소설가가 될 정도니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
겠군요"라고. 말도 안 되는 오해다. 나는 글쓰기를 지독하게 싫어
했다. 겨우 원고지 한 장을 메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방학 때면
일기도 '오늘은 잤습니다. 일어났습니다'란 말밖에 쓰지 못할 정도
로 한심했다.
필기 시험을 치르고 나서, 늘 자신만만해하던 나는 떨어졌다고 생
각했다.
그런데 인사과 담당자가 내게로 오더니 남아 있으라는 것 아닌
가. 일부러 먼 데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면접 시험까지 치르자는
것이었다. 수험자들이 전부 돌아간 뒤에. 나는 회의실로 안내되었
다. 의자에 앉아 중년 남자 세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질문 공세를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일어서더니 방 구석으
로 가서는 뭐라 쑥덕쑥덕거리다 다시 내게로 돌아와 "채용이 내정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놀랐다. 그렇게 쉽게 사람을 고용해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라며 가슴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그렇게 말한 것
이니 틀림은 없으리라.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입사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그 전보는 필기 시험에 낙방한 자
전원에게 보낸 전보였는데,중역들의 지시가 하달되지 않았기 때문
에 빚어진 혼선이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정정한다는 전보가 왔다.
가장 놀란 것은 학교측이 아니었을까. '저 농땡이가 어떻게?'라
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마루베니를 양보해달라고 했던
친구는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그가 떨어졌을 정도이니 내가 시험
을 쳤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참으로 재미있는 세상이다.
일단 취직만 결정되면 그 다음은 내 세상이다. 왜냐하면,그렇게
된 이상 학교는 나를 졸업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추천장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되므로.학교측이 졸업도 할 수
없는 학생을 추천한다면 학교는 신용을 잃게 될 것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어떤 선생이 나에게 이렇게 위협했다.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열
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따지 않으면 졸업 안 시켜줄 테니까 알아서
해.' 나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이곳은 재미있는 학교니까 몇
년이든 남아 있기로 하죠"라고 맞받아쳤다. 나는 어른에게 그런 건
방진 말을 툭툭 내뱉을 수 있는 아주 얄미운 농땡이꾼이었다
나는 그 희귀한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학교측은 꽤나 고심했
을 것이다 취직이 내정된 학생을 졸업시키지 않으면 학교의 체면
이 서지 않고,그렇다고 능청스럽게 백지 답안을 내는 학생을 졸업
시키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학교측은 대안으로 추가 시험을 생각해냈다. 문제의 질을
뚝 떨어뜨려서. 후의는 고마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학
교측은 약이 올라 한층 더 쉬운 문제를 만들어, 다시 추가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세번째 추가 시
험 때도 내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자, 기가 질린 선생은 칠판에
뭐라고 쓰기 시작했다. '마루야마,이게 힌트다'라고 말하며 써나갔
는데 그것은 힌트가 아니라 해답에 가까웠다. 나는 칠판에 씌어진
것을 베끼기만 하면 되었다.
졸업 증서는 교무실에서 받았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 교무
실로 들어갔더니 급사가 "여기 이거 받아요"라며 책상 너머로 내던
지듯 건네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수상 직후 센
다이 텔레비전 방송국의 출연 요청을 받아 방문했더니. 학교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전하고 싶은 물건이 있으니 꼭 들러 달라는 부탁
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학교를 찾아갔다. 그러자 응접실에서 교장
이 직접 나에게 표창장을 주는 것이 아닌가.모교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공적을 표창하는 것이라는데, 나는 그만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모교를 위해서 소설가가 된 것도 아닌데 그런 것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갸륵하고 노골적인 간청에 할말을 잃은 나는 일단 받아
들였다. '아아, 이런 건가. 세상이란 이런 것인가' 란 생각이 들었다.
상사란 대개 본사가 오사카에 있기 마련이다. 나의 근무처는 도
쿄의 지사였는데 입사식을 치르러 오사카까지 가야 했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나는 집을 나서 오사카행 열차를 탔다. 그날로 나는 자
유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내 손으로 번 돈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유원지 놀이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그렇다고 성실하게 일해서 저금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
고 정원이 딸린 내 집을 마련한다는 장밋빛 꿈은 꾸지 않았다. 또 상
사의 전신과에서 일하는 것이 이상도 아니었다. 텔렉스 오퍼레이터
라는 직업은 세상을 관찰하기 위한 일시적인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인생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
다. 자신의 적성에 어떤 직종이 맞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이 세상이 구석구석 통제되고 있는 듯하지만 어딘가 내
가 파고들 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훨씬 거칠고.
법이고 뭐고 태연하게 무시할 수 있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입사식장으로 향했다.
많은 젊은 남녀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들뜬 기분으로 재잘거리
고 있었다. 식의 내용은 틀에 박힌 것이었다. 한 명씩 자기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나가 중역으로부터 입사증을 엄숙하게 받아든다.
나는 뒷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입사증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보통 표창장 정도 크기겠지 하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얼굴을 들
자 웬걸 엽서보다 약간 큰 크기의 보잘것없는 종이 조각이었다. 이
런 시시한 종이 쪽지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을 필요가 뭐 있겠나
싶어 나는 빼앗듯 낚아채 내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 신입사원 전원을 대표하여 최고 성적으로 입사한 자가 중
역들을 향해 신입사원의 결의를 쓴 두루마리를 줄줄 읊었다. 이 회
사에서 일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한다. 온 힘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겠다, 모두 거창한 말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
게 '저 바보자식'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감사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우리는 월
급을 거저 받겠다는 것이 아니다. 일하고 받는 것이다. 돈을 산더미
처럼 꿈치고 있는 작자들에게 더욱 많은 돈을 벌게 하기 위하여 일
해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쪽이 감사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입사증을 꼼꼼히 살펴보니 첫 월급과 사원의 등급을 표시하는
숫자가 씌어 있었다. 나는 '1만 9천5백 엔'에 '9등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즉 고등학교 졸업자인 나는 9등급 사원이며,그 이하는 고
졸 여 사원으로 준사원에 해당한다. 대졸은 2만 얼마에 8등급이다.
'이런 쥐꼬리만한 돈으로 사람을 부려먹다니. 언젠가 벌을 받을
테니 두고 보라지'라며 나는 또 가슴속으로 중얼거렸다. 몸은 팔아
도 혼까지는 절대로 팔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는 중역이 한 명씩 연단으로 올라가 연설을 했다. 그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하는 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옛날에는 입사식에 부모들이 많이들 동참했는데 요즘엔 그 수가
줄어들어 유감이라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부모들이 경영자에게 반
드시 인사치레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무슨 시대착오란 말인가.상노()라도 고용한다고 여기는
것인가. 오사카다운 감각이기는 하지만 나는 화가 치밀었다. 사람의
약점을 잡아 싸구려 임금으로 부리는 주제에 부모한테까지 머리를
숙이라니 이 무슨 고약한 심보인가. 허세를 부리는 것도 유분수지.
언젠가 무릎을 꿇게 만들어줄 테니 두고 봐라.세상에 첫발을 디디
면서 느낀 최초의 분노였다.
식이 끝나자 팥밥 도시락이 하나씩 나뉘어졌다. 덜 세련된 회사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회사치고는 하는
짓이 깔끔하지 않았다. 도쿄로 돌아가는 열차 속에서 나는 치바(千
葉) 현에 있는 독신자 기숙사에서 생활할 동료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들은 모두 대졸이라 나와는 등급이 달랐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나보다 밑천을 많이 들였으므로.
그중 한 명이 이런 소리를 했다. "어째, 이 회사.좀 위태로운 모
양이야." 소문을 듣자 하니 도산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납득이 갔다. 그러니 나 같은 놈을 채용한 것이겠지‥‥‥‥
그런데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인 독신자 기숙사를 보는 순간 내
생각은 확 달라졌다. 멋진 건물이었다. 가구가 딸려 있고 냉난방 시
설을 갖춘 독방에 큼직한 공동 탕하며 넓은 정원까지‥‥‥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나는 그때껏 나 혼자만 쓸 수 있는 방에서 생활
한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갓난아이일 때부터 남의 집
에 세들어 살았는데 그것도 하나같이 규모가 작은 집이어서 독방
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그 회사를 신뢰하게 되었다.
단순했다. 도산이라니,헛소문이 틀림없을 것이다. 중역들이 허세를
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제멋대로 이해한 것이다
대졸 동료들은 며칠 동안 강습을 받고 각 과에 배치되었지만 나
는 당장에 전신과에 배속되었다. 그 때문에 고용된 것이었으니 당
연한 일이었다.
철저하게 방음이 된 사무실에 타자기와 텔렉스 같은 통신기기가
죽 늘어서 있고, 남녀 사원 몇 명이 앉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일
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
다. 해외의 각 지점에서 발송된 문장을 영업과에 전달하고, 영업과
에서 발송하는 문장을 해외의 각 지점에 텔렉스로 보내면 되는 일
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었는데 왜 여사원을 고용하지 않고 나
를 고용했을까.해외 시간에 맞추어 전문을 보내려면 야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전신과에 근무하는 남자 사원들 모두가 대졸에 영업과에서 탈락
한 자들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과장만 해도 그랬고, 모두
들 어딘가 멍청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 남자답다고 여겨지는 사
원은 정말 한줌도 안 되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원들은 회사라는 조직에 눌러붙어 어떻게든
그날그날을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딱 부러지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일
하고 있었다. 인생을 반쯤은 단념하고, 별볼일 없는 놀이에나 정신
을 팔고, 상사에게 아첨이나 떨고, 술을 마시고는 얼토당토않은 기
염을 토하기도 하는 등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는 인간들 같았다.
조금은 낫다 싶은 선배가 어느 날 나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자네도 그렇게 될 거야.그렇게 화를 내면서 몇 년이고 이
런 곳에 붙어 있을 수 있겠어."그러나 나는 나만은 그렇게 되지 않
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실제로 사회에 발을 내딛고 일개 샐러리맨의 입장에서 바
라본 세상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쩐지 시시하다'였다.
물론 직장에 속한 상태에서는 시야가 한정되므로 세상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침이나 저녁, 역을 들락날락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일 바라보고 있자니, 인간이란 얼마나 순
종스런 생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원 전철을 타고 가
는 남자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생기가 없었다.
그것이 산다는 것인가, 이것이 인생이란 것인가. 나는 의심스러웠다.
내 눈에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사가 하나쯤 빠진 듯 패기
없는 태도로 별볼일 없는 일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있는 듯
이 보였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어 우물쭈물할
인간들.지금껏 내가 게으름을 피운 것은 때가 오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리라는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지,평생 아무 일도 하지 않
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원 전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틀림없이 충실한 삶
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틈에 끼고 싶
다는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한 번 보고는 싶었다. 그러나 볼 기회는
전혀 없었다.
텔렉스 오퍼레이터가 하는 일이란 생각 이상으로 단순했다. 실패
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성공이란 없었다. 전문은 정확하게 해
외 지점으로 보내야 했다. 당연했다. 만약 실수를 하면 영업과로부
터 질책을 받는다. 전문은 알파벳을 사용하는데 알파벳 하나로 정
반대의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은 참기로 하였다. 하고 싶은 일이 발견될 때까지 주어
진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
다. 그리고 과의 행사에는 일체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직장에서 늘
보는 얼굴을 사생활에서도 봐야 하다니 딱 질색이었다. 그러자 과
장이 한마디했다. "자네,회사란 말이지, 일보다는 대인관계가 중요
하고 골치아픈 법이야.'
어느 날 그 과장이 나더러 아키하바라에 있는 전자 상가로 텔레
비전을 사러 가자고 했다. 어떤 텔레비전이 좋은지 결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과장은 칼부터 깎기 시작했다. 좀더 싸
게 팔라고 매달렸다. 점원도 끝내는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 대신
배달은 해주지 않을 테니,직접 가지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과장은 대금을 지불하더니 나를 보고는 '미안하지만, 집까지 좀
들어줄 수 있겠나. 부탁하네"라고 말했다. 과장 월급이래봐야 뻔한
것이고 가족도 있는데다 체력까지 튼튼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 건으로 나는 오해를 사고 말았다.
과장은 나를 아부꾼으로 착각하고는 그 어떤 무리한 무탁을 해도
얌전히 순종할 남자라 여긴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 힘으로 전신과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과장은
과장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는 일을 하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은 빈둥거리고 있었다.
과장은 험악한 얼굴로 나를 힐책하였다. 멋진 계산이었다.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과원들은 서둘러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과장 자리로 가서는 이렇게 소리를
쳤다. "너 이 자식, 날 뭘로 보는 거야!"
과장은 낙담하여 핏기가 가신 얼굴로 일어섰다. 설마 내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주저없이
말을 뱉었다. "따끔한 맛을 보여줄 테니 당장 밖으로 나오시지."
그것이 그 직장에서는 처음으로 내보인 나의 일면이었다.
나는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폭력적인 체험을
했고 그 때문에 체력을 단련하기도 했다. 한때는 타인을 쥐어 패는 일로
끼니를 이을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넌지시 지식을 자랑하는 것 이상으로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고 또 당시의 처절함을 돌이키다 보면 기분이 상한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직장 동료들은 나를 이중인격자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과장은 벌벌 떨고 동료들도 한동안은 나를 멀리했다.
어설프게 대항하면 한 수 더 뜨고, 강하게 나가면 쪽도 못 쓰는
여자 같은 남자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며칠이 지나자 과장이 "자네는 자존심이 너무 세"라며 빈정거렸
다. 나는 상대를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게서 자존심을 뺀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돈도 명예도 없
는 내가. 갓 스무 살이 된 내가 자존심마저 잃는다면 앞으로 무엇
에 의지하여 한 세상을 산단 말인가.쓰레기 같은 작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당하다니 말이나 될 법한가.
그러나 그런 나의 자존심은 보통 사람들의 자존심과는 다르다.
그것은 법률이라든가 유치한 도덕 관념 위에 성립하지 않는다. 필
요하면 무슨 일이든 하고 만다는 지극히 위험한 행동력이 뒷받침
되고 있는 그 자존심은, 다름아닌 범죄자 타입의 자존심이었다.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이며 그 어떤 집단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
국은 한 마리 외로운 늑대나 다름없는 인생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튼 샐러리맨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런 대사가 등장하는 삼류 갱 영화가 있다. "우선 보스를 찾아
라. 찾지 못하면 네가 보스가 되어라." 나는 이 대사가 딱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돈이 전부라는 낡아빠진 진리에 새삼 매달린
시대이기도 했다. 상사에는 그런 철학밖에 없다. 이 세상은 돈이 전
부가 아니라는 말은 부자가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 것이다. 돈
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뻔뻔스러운 짓이라
도 하는 것이 상사다. 매스컴에서는 상사에 속한 일부 인간이 몹쓸
짓을 한다는 인상을 조성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전 사원이
한통속이 되어 악랄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저 텔렉스 오퍼레이터에 불과했던 나조차도 실제로
는 들어오지도 않은 사기 전보를 몇 통이고 작성해야 했고, 막 입
사한 사원에게 부과되는 첫 임무가 어느 누구의 주머니에 현금을
쑤셔넣는 일이기도 했다. 바이어나 정치,관공서 사람들에게 여자와
돈을 제공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일
본이 오늘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그들의 그런 저질적인
분투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소 규모의 상사만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
는 것은 섣부른 오산이다. 대규모 회사는 또 그들 나름으로 발각될
가능성이 아주 적은 능란한 루트를 장악하고 있다. 상사뿐만 아니
라 일반 회사 역시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어느 선배가 귀띔해주었다. 세상 돌아가는 동태를 파악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직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진저리를 치지는 않았다. 구린 데가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가능하다면 영업과에서 일하고 싶
어했을 정도다. 그런 일이 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일단 통신사라는 명칭이 부여되고 나니 세상은 그
런 눈으로 밖에 나를 보려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똑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일하고. 일요일에
는 독신자 기숙사의 침대에서 늘어지게 자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개인적인 시간은 없었다. 스물네 시간 구속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인생이니 뭐니 할 틈도 없었다.
내가 아쿠타가와 상을 받자 신문 기자가 카메라맨을 데리고 독
신자 기숙사로 찾아와, 나의 사생활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렇
게 말했다. "일하고, 밥 먹고,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
그러자 기자가 말했다. '그것만 가지고는 기삿거리가 안 되겠는
데요, 볼링을 한다거나 고고장에 간다거나, 젊은이다운 놀이가 많
을 텐데요."
뭐가 젊은이다운 놀이란 말인가. 나는 학생이 아니다. 부모님의
돈으로 희희낙락하며 소설가가 된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청춘도 이
세상에는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급한 일로 땀범벅이 되어 뛰고 있는 내 앞
으로 한 청년이 탄 스포츠 카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
대낮부터 찻집에 죽치고 앉아 쑤근덕거리는 젊은 남녀를 본 기
억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 수많은 경찰관을 상대로 노상에서 흥미
로운 혁명놀이를 하고 있던 학생들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상사의 통신과에서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나는.오
로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확 차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떤 회사 조직이든 그 안에 속
해 있는 사람은,삶의 보람이 어쩌니저쩌니 해보아야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아무 다를 바 없
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동료들은 이렇게 항변했다. '그런 말 자네
가 안 해도 잘 알고 있어.새삼스레 유치한 소리 하지 말라구 이런
게 평균적인 인생이란 거야."
그들은 세상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정해져 있으므로 제아무
리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다고 뇌까렸다.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자
는 대학 졸업장을 받아들고 샐러리맨이 되어 전후좌우 눈치나 보
면서 출세할 궁리나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
다. 죽은 셈치고 어영부영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게 가장 안
전한 길이라고 했다. 그 증거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고 있지 않
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인생길에 한 걸음이라도 발을 내디뎌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것저것 해본 끝에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나마 수긍이 간다. 혹
은 그만한 나이를 먹고나 하는 소리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
들은 아직 한 가지 길밖에 걸어보지 못하지 않았는가.샐러리맨의
세계밖에 모르지 않는가.
이제 막 인생이 시작된 터에 밑도 끝도 없이 주식을 사들이고 그
것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재주밖에 없는 자들이 주식은 위험하
다느니 어떻다느니 과연 말할 자격이 있을까.
입사한 지 삼 년째에 드디어 회사가 수상해졌다. 도산을 할 거라는
등.무슨무슨 회사에 흡수될 거라는 등,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그해에는 도쿄 올림픽이 있었고 잇따른 호경기에 세상 전체가
들떠 있었으니 벼락부자가 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름이 어
지간히 알려진 회사 가운데 기울기 시작한 곳은 우리 회사가 거의
유일했다.
그러자 사원들은 모두 우왕좌왕이었다. 안정된 나날을 추구하여
들어온 세계가 흔들흔들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송수신 전문이
점차 줄어들고 암호를 사용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런 상황을 가
장 먼저 눈치챈 것은 영업과가 아니라 바로 전신과였다. 회사로 들
어오는 모든 정보가 통과하는 우리 과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회사 전체의 움직임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도 상당
히 정확하게.
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모두들 반신반의했다.
흡수합병이 되든가 부도가 나기 전에 상부에서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지 않겠느냐는 안이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어떤 선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느 거물 정치가가 우리 회사 지분을 왕
창 갖고 있으니까 부도 날 염려는 없을 거야." 또 이런 말도 나왔다.
"아무리 회사가 기울어도, 이 정도 회사에서 부도가 나면 사회적인
문제가 될 거고, 그 여파도 적지 않을 거야.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정치가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거물 정치가라는 사람이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사원들은 다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회사측에서 6백 명
에서 7백 명에 이르는 명예퇴직 신청자를 모집하였다. 역시 정치가
들의 배려는 꿈이었고 회사는 흡수합병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선
택된 상대 회사는 이류 상사였다. 한때 제철로 막대한 수익금을 거
두어들인 회사로, 동남 아시아의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 여자를 제
공하는 상술로 유명했다.
그런데 어느 날 쌍방의 간부들이 호텔에 모여 자료를 조사해보
니 서로 거의 맞먹는 부패를 짊어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합병은 무
산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손을 잡아봤자 쌍방이 모두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어쩌다가 우리 회사가 이 모양이 되
었느냐고. 대체 원인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선배는 이렇게 대답했
다.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한국전쟁이겠
지." 가까운 나라의 동족상잔을 이용하여, 다섯 군데 정도의 상사가
솜을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그런 상사 중에 우리 회사도 끼어 있었다. 정부의 한 고관이 '이
전쟁은 앞으로도 얼마간 계속될 터이니, 신나게 팔아먹으라'고 한
말을 믿고 그대로 움직였는데.그 전쟁이 짧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
이었다. 다른 원인으로는 어느 건축 회사로 지나치게 많은 자금이
흘러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우리 회사가 그 회사를 몇 년 동안이나
먹여 살린 셈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흔히 있다.
돈줄인 T은행에서 보낸 사나이가 사장으로 취임하였지만 그는
무능했다. 그전 사장도 바보 얼간이 였다. 사원들을 모아놓고 눈물을
질질 짜는 인물이었다.
눈물로 일이 해결된다면 나라도 열심히 울어주겠다.
우리 조합이 회사측에 요구한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퇴직금을
인상하라는 것. 함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연대투쟁을 하자는
타사의 요청을 물리치고, 우리는 오로지 돈을 요구했다.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만두는 대신 퇴직금이라도 많이 받아야
될 것 아닌가.
우리 회사를 합병하는 회사만 해도 좋아서 나선 것이 아니었다.
정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어부지리로 떠맡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지 자사의 사원들은 승진시키고 그 아래 자리에 우리 회사 사원
을 배치했다. 부장급도 직함만 줄 뿐 일거리를 주지 않거나 중요한
회의에서 제외시켰다. 실제로 전신과의 과장은 합병된 회사에서 편
지를 분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런 세계에서 삶의 보람이니 일의 성취도니 운운할 것이 뭐 있
겠는가. 젊은 사원들에게는 인생 공부가 되었다. 아무리 회사가 거대
하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만으로도.
연장자들은 처지가 달랐다. 그들을 고용해줄 회사가 없었다. 굴욕
감을 참아가면서 회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회사라는 미적
지근한 물에 잠겨서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그럭저
럭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고위층뿐이었다. 말단 사원의 목을 자르
는 대가로 그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나는 입사식을 떠올렸다. "자네
들의 평생을 보살필 테니,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하라"고 어느
중역이 말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입으로 "그만두라'고 말했
다. 애사정신 같은 것은 헌신짝이 되고 말았다. 나로서는 회사에 정
신까지 묻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넓은 곳이어서,아무렇지도 않게 정신마저 팔아치
우는 인간들이 굴러다녔다.
조합이 단기 쟁의에 돌입한다고 결정했을 때, 직장을 떠나지 않
으려는 사원들이 많았다. 젊은 사원들 중에도 있었다. 근본이 썩은
작자들로. 이런 치들이 모여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치들에 비하면 수입한 제품을 슬쩍하거나 회사 돈
을 훔쳐 달아나는 치들이 그나마 낫다.
그 동안에도 젊은 사원들은 하나들 새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회사나 부도 위기에 놓였지,일할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던 것
이다. 상사의 재산은 인간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한 사람의
당당한 비지니스맨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십 년은 걸린다. 자사
에서 십 년에 걸쳐 사원을 육성하는 것보다는 타사에서 십 년 길든
사원을 스카우트해오는 편이 낫다. 그런 터여서 이 회사 저 회사에
서 우리 회사로 마수를 뻗쳐왔고, 어떤 회사에서는 준비금이란 명
목의 돈을 들고 오기도 했다.
그러자 모두들 그때까지 몸담고 있었던 회사를 단념하고, 그때까
지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무렵 동료들의 얼굴은 아주 보기 좋았다. 긴장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사내다워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혼란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낱낱이 드
러난다는 점이다. "자네 뼈는 내가 책임지고 묻어주겠다"는 상투적
인 말로 부하의 신임을 얻고 있던 간부 직원은 회사가 위험에 처하
자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또는 "저 자식 바보 아니야'라는 등 내내 험담만 듣던 상사가,자
기 일은 제쳐두고 부하 직원의 재취업에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등‥‥‥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텔렉스 오퍼레이터를 고용하겠다는 회사가 있을 리 없으니. 나는
그저 멍하니 돌아가는 주변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고용하겠다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비즈니스맨이라면
몰라도 텔렉스 오퍼레이터는 어느 회사든 남아돌아간다.
양자택일을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대로 회사에 남아 있다가
흡수합병된 새 직장에서 일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퇴직금을 받고
이 직장을 떠나 다른 세계에서 살든지,둘 중의 하나였다.
샐러리맨은 이제 치가 떨렸다. 계속했다가는 인생 공부고 뭐고
다 헛고생이 될 것 같았다. 타인에 고용되어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도 싫었다. 타인을 고용하는 입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야? 텔
렉스 오퍼레이터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냐구. 있으면 말해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를 방망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선배는 말을 이었다. '제상이란 말이지,사람의 인격까지 봐
주지 않는다구. 세상은 바쁘다구. 뭘 할 수 있는가로 인간을 평가한
단 말이야."
선배의 말이 옳았다. 나는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뿐이지 실제로는 한 가지 일밖에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해보았
다. 회사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그러나 구체적인 방
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숨겨둔 재주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
며 잘난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그리고 어느 날 불
현듯 소설을 쓰자고 작정했다.
내 일이기는 한데,아무래도 이 부분이 명확하지가 않다. 왜 하필
이면 소설을 쓸 생각을 했는지.그때까지 소설에 흥미를 느낀 일도
없고 써본 일은 더더욱 없었다.
센다이 시에서 살 때 친구의 하숙방 옆방에 모인 T대학 문학 동
아리가 갑론을박 격론을 펼치는 것을 벽 너머로 들은 일이 있다.
욕지기가 올라올 듯한 말싸움이었다. 놈들을 한 명씩 세워놓고 뺨
따귀를 내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하필이면 소설을 쓰다니.
오만 엔의 상금이 탐났던 것일까. 아니면 유명해지고 싶었던 것
일까.아니면 또 나로 하여금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어떤 운명적인
힘이 작용한 것일까.
자본금 하나 없이 할 수 있는 일.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 일.
다행히 문장 쓰는 법은 약간 알고 있었다. 통신용 문체를 알고 있
었다. 무엇을 쓰면 좋은지도 알고 있었다. 나 자신에 관해서만은 쓰
고 싶지 않았다. 쓸 가치가 없다고 당시는 믿고 있었다. 또 어떤 식
으로 쓰면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도, 영화에서 배워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지독한 영화 팬이었지만 그저 보고 즐기는 팬은 아니었다.
좋은 영화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그런 방법적인 문제에 흥
미를 갖고 만드는 입장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런 버릇이 소설을 쓰
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쓰는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독신자 기숙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
해 녹초가 된 몸으로 책상에 앉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일요일
은 사방이 소란스러워 쓸 수가 없었다. 회사를 쉬고 쓰기로 하였다.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펜을 쥐었다
그러나 쓰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 쓰는 소설이었으니 그렇게
쉽사리 씌어질 리가 없었다.
첫 문장부터 완벽을 기하려 한 탓이다. 일단 쓰고, 그 다음 다른
종이에 수정하며 베껴 쓰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회사도 그렇게
자주 쉴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근무 시간을 이용하여 쓰기로 작정했다. 다른 회사에
흡수합병되기까지는 한 반 년 정도 여유가 있었고, 송수신 전문의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아 비교적 짬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뻔뻔스럽다 해도 동료들 사이에서 보란 듯이 소설을 쓰는 것은 마
음이 켕겼다. 부끄러웠다. 결국 몰래 써야 했다. 조그만 노트에 일을
하는 척하면서 써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한테 들키고 말았다. 모두들 "자네가 소
설을 쓴단 말이지" 하며 조롱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으므로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써나갔다. 시간이란 모름지기 훔치는 것이란
누군가의 말이 그때만큼 절실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목적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충실감에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안 것이다. 아니 생각만 하기보다는 실행하
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내가 쓰는 소설이 과연 소설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아마 대
답은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회사의 엉성함에 대
해서도. 세상의 모순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침묵하며 쓸 뿐이었다 이윽고 나의 인생이 시작됐다는 증거
임에 틀림없었다. 그때껏 어영부영 지낸 이십 년 세월을 마무리짓
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설을 다 완성하기는 했는데,그 백 매짜리 원고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기야 당시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조차 몰랐다.
문학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내게 17라는 순수문학
잡지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13사의 문학상을 노리고 출판사로 원고
를 우송했다. 자신만만했다.
중간 발표가 있었다. 오십 명 중에 내 작품도 들어 있었다. '여름
의 흐름'이란 제목과 내 이름이‥‥‥ 아니 이름은 달랐다. 마루야마
가 아니고 마루타니로 되어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1)사에 전
화를 걸어 따졌다. 그러자 젊은 여자가 나중에 반드시 정정을 하겠
노라고 답했다. 어떻게 정정할 것이냐고 다그치자 그녀는 말을 얼
버무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정정을 하려
면 최종 후보작으로 남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7로부터 기숙사로 전보가 날아왔다. 내 소설
이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그것 봐
라"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든 부딪치고 볼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재능 운운하면서 섣불리 단정짓는 일은 실
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7사로 갔다. 수상자는 당연히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수상자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에 적이 놀랐다. 오만 엔의
상금이 절반으로 주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스러웠다. 다른 수상
자는 나보다 훨씬 연장자인데다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고생을 많이 한 분위기였다.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
원에서 강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일편단심 문학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
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나 같은 타입의 남자가 발디딜 세계가 아니다 싶
었다. 직업을 바꾸기 위하여,혹은 상금에 눈이 어두워,혹은 주위
사람들이 낙담하는 꼴을 보기 위하여 이 세계에 들어가서는 안 된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불순한 동기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 같았다.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여기서 소설을 포기하자고 나는
결심하였다. 좋은 경험이었고. 좋은 추억이었다 여기고, 달리 먹고
살 길을 찾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B사에서 또 한 편을 쓰라는 것 아닌가.어떤 형태로 발을
들여놓든 무슨 상관이냐고,동기야 아무려면 어떠냐고, 편집자가 말
했다.
M신문의 기자가 카메라맨과 함께 회사로 찾아왔다. 그는 전신과
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B사의 신인상을 수
상한 것이 패 오랜만이니 취재를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플래쉬가 번쩍번쩍 터졌다. 상사와 동료들이 그런 나를 넋을 잃
고 쳐다보았다.
고졸 텔렉스 오퍼레이터란 나의 처절한 간판이 벗겨졌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불량 사원, 9등급 사원.그런 간판이 떨어져
나가자 주위 사람들은 단박에 당황스러워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들은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거지 뭐." 또는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지 뭐."
그들을 향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지 않으면 결코 당첨되지 않는다.
당첨될 턱이 있겠느냐고 생각하기 전에 자네들도 한번 사보는 것
이 어떨는지,'
순수문학 잡지 B사의 신인상을 수상한 나는 우선 시골의 부모님
에게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공부도 싫어하고 학교도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단념한 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학교 성적 따위로 인생이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
고 싶었다. 부모님은 내 앞날을 걱정하며 양돈 산업을 열심히 권했
을 정도였다. 양돈 사업은 머리만 적당히 굴리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어리석은 자들.
아버지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이런 터무니없
는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너 혹시 남의 작품을 베낀 건 아니겠지?'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자기 자식의 재능도 파
악하지 못한 주제에 그래도 아버지냐고, 그래도 교육 자냐고, 떠들
고 싶은 대로 마구 떠들어댔다. 봇물이 터졌다는 표현은 과연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흐름」은 다시 그 유명한 A상의 후보작이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농담이 아니다 싶었다. 그
러자 편집자는 이런 말을 했다. '신인상을 수상하면 대개는 A상의
후보작이 되니까,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 그 증거로
나와 함께 신인상을 수상한 M씨도 후보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진정 소설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오 년 정도의 습작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A상은 부담이 컸다. 소설을 쓰기 위하
여 습작 기간이 필요한가 아닌가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이런 상태
로 본격적인 소설가로 알려지면 곤란할 것 같았다.
신인상 심사위원들도 대부분 나의 재능을 의심했다. 그러나 가장
의심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부모님에게 자랑은 늘어놓았지만,수상의 변이랍시고 B지에 그럴
싸한 말을 쓰기는 하였지만,나는 나 자신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난생 처음 쓴 소설로 인정을 받다니,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학생의 입장도 아니었다.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먹고
살았으니,세상의 쓴맛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수상은 나에게 과분
한 것이었다.
9등급 사원에 첫 월급 1만7천 엔짜리 신세로 삼 년을 살아온 나
는 "자,상을 줄 테니까 매스컴 속에서 춤을 춰보라'고 부추긴다고
우쭐할 기분이 아니었다. A상에 적합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M씨였
다. 그는 오로지 그 한 길에 인생을 걸고, 많은 시간을 아낌없이 바
친 사람이었으므로.
편집자가 '당신은 들러리 같은 존재니까.그렇게 신경쓸 필요없
다'고 말했다. 이름도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까 행여라도 내가
수상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안심하고
단편을 써서 7사에 건네주었다.
그런데 A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결정이 되면 곧바로 연락을 할
테니 당일은 전화기 옆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또 만
약 수상할 경우에는 수상소감을 써달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었다.
그날이 되었다.
심사는 밤에 있었다. 그날 나는 여느 때처럼 출근해,내 책상 앞
에서 멍하니 일을 하였다. 그런데 동료가 다가와 신문을 보여주었
다. 그 한 귀퉁이에 A상의 후보작과 작가 이름이 조그맣게 실려 있
었다. 나는 그 기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네시경이 되자 나는 느닷없이 빨간 색연필을 쥐고는 후보작을
지워나갔다. 읽은 적도 없는 타인의 소설을,제목이 나쁘다는 등.필
명이 글러먹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이대며 차례차례 지웠다. 마지막
까지 남은 것은 나와 M씨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M씨도 지워버렸
다. A상을 받을 사람은 역시 나밖에 없다고 제멋대로 정한 것이다.
뻔뻔스럽게도 수상소감까지 썼다. 다 쓴 다음 옆자리에 앉아 있
는 여사원에게 건네주면서 만약 수상이 확정되거든 우편함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치바 현에서 보내기보다는 도쿄에서 보내는 편이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한테는 다른 일로도 신세를 많이 졌다. 그녀는 내가 근무중
에 소설을 쓸 때면 혹 과장이 전신실로 들어오지 않나 망을 봐주었
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소설가인 나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갱단
의 두목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다섯시 무렵. 나는 쓰다누마에 있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당신은 들러리'라던 편집자의 말과 '아니 나밖
에 받을 사람이 없어'란 나 자신의 목소리가 쉴새없이 들썩거렸다.
빨래를 하다가 7상의 신인상 수상 소식을 들었으니 이번에도 그래
야겠다는 얄팍한 생각에 팬티니 시트니 할 것 없이 한아름 세탁기
에 던져넣었다.
혼자 밥을 먹었다 목욕도 했다 관리실 아저씨가 스피커로 내 이
름을 불렀다.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수상할 리는 없었으므로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방이 말
했다. A상의 수상자로 당신이 결정되었으니 지금 바로 제일 호텔로
와주십사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머리
가 명하더니 격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제일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도 모르고 더구나 택시비도 없었다. 그날 밤 택시비는 누가 물었을
까.어디서 빌렸을까.기억이 안 난다
밤길을 뛰어나가 국도로 나가서는 택시를 잡고 행선지를 댔다.
그렇게 먼 거리를 택시로 달려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사치스런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찰칵찰칵 요금이 올라가는 미터기에만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운
명이 바뀌는 소리이기도 했다.
제일 호텔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좀체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안으
로 들어가려다 떠밀리곤 했다. 누구도 내가 수상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당신은 들러리'라던 편집자가 나타나 "이런 데서 우
물쭈물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자 질문이 쏟아졌다. 플래쉬가 홍수처럼 터졌다. 무슨
질문을 받고 어떤 식으로 대답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상금 십만 엔을 어디에 쓸 것인
가?'란 질문과 "아직 모르겠다"란 나의 대답뿐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면 쓸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인
가' 라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한 백만 엔 정도는 받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꿈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
이었다. 나는 우쭐해져 나의 모든 것을 긍정해도 좋을 듯한 기분에
젖었다. 나는 천생이 소설가다'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런 착각도 한순간. 기자들이 우르르 물러가고 소동이
가라앉자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금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편집자와 둘이서 작은 술집에 갔다. 편집자는 술을
마시고 나는 밥을 먹었다. 나는 말했다.
"장난도 이 정도로 해 둬야겠어요. 이제 소설을 그만두겠습니다. "
편집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그만두면 비겁해요."
전문 소설가가 되기 위한 상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만두는 것은 자유지만, 지금 그만두면 다음에 젊은 사람이 A상의
후보에 올랐을 때,심사위원들이 전례를 떠올리고 주저할지도 모르
는데 그래도 상관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중년의 사나이가 편집자에게 다가와 뭐라
속닥거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나를 걸고넘어졌다. 너 같은 젊은
녀석이 문학이 뭔지 아느냐는 등 염치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평론
가 나부랭이라고 하는데 문학을 알고 말고 하기 전에,문학이란 것
을 오래 하다 보면 모두들 저렇게 비굴하고 처참한 몰골을 하게 되
는가 싶어 놀랐다.
나중에 편집자가 "저런 치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듣자 나는 점점 더 소설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별볼일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관 같은 작자들의 집단으로 들어
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내가 바라는 세계는 남자답고 시원시원
한 곳이었다.
A상을 수상하였다는 것만으로, 단 한 편의 소설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 인생이 흔들흔들 소리를 내며 바뀌는 것을 나는 분명하
게 느꼈다. 바라던 바이기는 했지만 그 변화는 너무 거창했다. 분에
넘치는 변화였다.
막 스물세 살이 된 나에게 '사상 최연소 A상 수상'이란 간판은
솔직히 말해 상당한 부담이었다. 무지막지한 돌풍이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발밑을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혹여 발꿈치라도
들먹일라치면 당장에 날아가버릴 듯 강한 바람이었다. 나는 상체를
깊숙하게 구부리고 바람이 잦기를 기다렸다.
이런 변화는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은 정말
적당히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젊은 남자가A상을 수상했다는,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이렇게 허풍스런 바람이 불다니.물론 십여
년 전, 대학생이 이 상을 수상했을 때 세상이 한바탕 떠들썩했던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소동에 비하면 내 경우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시시한 것이었
다. 그의 소설은 많은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았고 풍속까지 좌우하
였다. 그가 내뿜는 의견은 동세대의 의식을 지배하였으며 마침내는
슈퍼스타적인, 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소설가들은 매스컴이 일으키는 돌풍을 거역하지 않았다. 아
니 여러 가지 상승기류를 이용하여-이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
으나-자신의 발판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빛나는 대기의
저편으로 날아올라,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화려한 언동을
일삼았다. 또 낮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꿈과 동경을 발견하고 때로는 삶의 목표로 삼
기도 하면서 갈채를 보냈다. 학생 신분이었던 그들에게 애당초 자
신의 발판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떠오르든 내려앉든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9등급 사원, 텔렉스 오퍼레이터라는 발판이 있
었다. 그 발판을 딛고 그들의 소설을 읽었을 때 너무 치졸하여 읽
어줄 수가 없었다. 끝이 훤히 내다보이는 스토리가 아니면 유치한
이미지를 허풍으로 엮은 문장이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심취할 수
없는 졸작들뿐이었다.
기세를 탄 그들은 점점 더 높이 날아오르게 되었고. 마침내는 일
본의 장래나 세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까지 언급을 하게 되었
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참여문학에 편승하여. 거시적이고 대략적
인. 예를 들면 권력과 반권력이라는 치졸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
라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발판이었다. 그 결과.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그들은 어린애 장난 같은 문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
는 사이에 당시 열광적 이던 독자들은 세상의 거친 파도에 휩쓸리
면서 점차 그들의 작품에 대한흥미를 잃게 되었다.
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은 바로 그 점에서 생겨났다. 문학 팬이란
실은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은 달콤함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여
자처럼 유치하고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패거리들의 소도구처
럼 보였던 것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를 밑바탕으로 하는 꿈이나 이상이라면 몰
라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소도구로 문학이 존재한다면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나는 문학 팬 대부분이 좋아하는 소설들이 형편없이 느껴져 견
딜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당신들 멋대로 몸부림 쳐봐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을 단련하지 않고 감수성에 휘말린 채.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이에 작가는 여장 남
자가 되고 말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들만의 남자다운 문학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
다. 나는 내 눈에 비친 세계를 아주 평범한 형태로 그리고 싶었다.
백이면 백, 흑이면 흑, 회색이면 회색.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순수하
게 그리고 싶었다. 나는 부자연스러움을 경계했다. 오만과 허세도
경계했다. 제아무리 문학 팬이 요구한다 해도 나는 그런 것만은 쓰
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나는 장밋빛 필터를 좋아하는 여자들.여자에 가까운 남자,그리
고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을 위해서는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당시 내 소설의 내용은 소박했다. 그런데 천박한 꿈에 정
신이 팔린 독자들의 눈에는 내 소설이 찬물을 끼얹는 듯한 소설로
비친 모양이었다.
당시 내가 가장 경계한 것은 주목받는 것이었다. 나는 겨우 한
편의 소설로 인정을 받았을 뿐,나의 전부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
다. 일본 젊은이들을 대표한다는 듯 떠들어대서도 안 되었다. 관심
도 없는 주제에 정치적인 코멘트를 남발해서도 안 되었다. 여배우
와의 대담 같은 일에 손을 대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어떤 평론가가 나의 태도를 젊은이답지 않다고 지적했다.
웃기는 소리다. 유치한 패거리들과 비교하면서. 젊은이답지 않다니
어디 말이나 될 법한가. 관계자들은 내가 매스컴이란 무대에서 바
보춤이라도 추기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나는 소설로 인정을 받았
으므로 오직 소설에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것이 도
리라는 것이다.
세상은 유명세를 요구했다. 유명한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
어했다. 매스컴이란 무대에서 춤을 추는 소설가의 책을 사고 싶어
했탁. 하지만 나는 매스컴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었다 사다리를 놓
고 올라가게 하는 것도 매스컴이지만,그 사다리를 걷어치우는 것
도 매스컴이었다. 일단 사다리에 올라서면 최소한 두 번의 기삿거
리는 나오는 것이다.
내게도 뻔뻔스런 기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돈이었
다. A상을 수상했으니 책이 엄청나게 팔리고, 인세를 듬뿍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다. 그 돈으로 편안한 생활을 즐기
면서, 한 해에 한두 편의 소설만 쓰고, 왜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그래서 나는 전직에 성공했다고 여겼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때에도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불안감은커녕
퇴직금을 받아들고 회사 문을 나설 때 기분은 최고였다.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퇴직금을 받고 회사 건물을
나설 때를 잊지 못한다. 밖으로 나선 순간.자유의 바람이 나를 감
쌌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시간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짜
릿한 기분.
그것은 다른 누구의 인생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인생이었다.
이십몇 년간을 고생하며 산 것은 지금 이 순간을 획득하기 위한 것
이었다. 회사 쪽을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나는 가슴속으로 중얼거
렸다. '그것 봐라.이제 나는 타인을 위하여 일하지 않아도 된다. 부
자들을 위하여 싸구려 월급을 받으며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
그런데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책은 팔리지 않았다. 세상은 나의
「여름의 흐름」을 꿈도 희망도 신선함도 없는 문학이라고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초판 팔천 부를 찍었는데 그 절반인 사천 부밖에 팔
리지 않았다. A상을 수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책이 몇만 부씩 팔린
것은 그 십 년 전이거나 그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때는 만 부가
고작이었다. 원고료도 한 매당 천 엔이나 천오백 엔.
그런 돈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 아내도 일하고 나 역시 다른
회사에 들어가 키 펀처 솜씨를 발휘해야 했다. 하기야 소설 이외에
도 써달라는 대로 써 갈겼다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돈도
들어오고 이름도 날리고 덩달아 책도 팔리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오라지 문학을 지향하고 있
는 사람들, 가령 B상을 함께 수상한 M씨 같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그보다는 기필코 내 나름의 삶을 관철하고 싶었다.
문단이란 것이 있고,그것이 지금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인간관계로 얽혀 있는지.그리고 그것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
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샐러리맨의 세계를 거기
에서 또다시 재연하다니 넌덜머리가 났다.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세계이기에 뛰어든 것이다. 등교
같은 것은 필요없었다. 동업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루는 동
지였다가,또 하루는 적이 되는 식의 교제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
았다. 문학론에 열증하는 것도 어리석어 보였다. 중요한 것은 조금
이라도 뛰어난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발판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고, 착실하게 전진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길이어서. 아무런 재미가 없었지만. 나에게
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결국 어느 것 하
나 명확하지 않다.
전직,돈의 필요성.자유에 대한 동경.어느 것 하나 틀리지는 않
지만,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그런 이유만으로 그만한 정열을
기울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이 들렸다든가.무슨 계시가 있었다든가 하는 말은 너무 거창
해서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당시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강렬한 힘
은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춘의 힘이란 그렇게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먼 훗날 생각해
도 믿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생
겼을 때, 거기에 끝없이 힘을 쏟아부을 수 있으며,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그것이 청춘의 힘이며 동시에 청춘의 위험한 일
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의 청춘에는 전자계산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아 불안스럽기 짝이 없다.
무모하게 소설이란 세계에 뛰어든 나는,내가 이 길에 뛰어든 동
기의 애매함 때문에 부담감을 느끼고 당황하곤 했다. 진짜 소설가의
얼굴이라고는 사진조차 본 일이 없고,그들에 대해 품고 있던 이미
지도 그저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저속한 세상에서 분리된 차원에
자리한 지극히 '순수'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순수'한 사람이란 이미지는 그림으로 그린 듯 투명하고, 예
술정신으로 돌돌 뭉친 하나의 덩어리라고나 할까,인간이면서 인간
이 아닌 만화적인 인물상으로 내 가슴 한구석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 나란 남자는 너무도 비열했다.
어느 출판사의 사장 취임 축하연에 나와달라는 초대를 받고 마지
못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처음으로 유명하다는 소설가들의 얼굴
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소설가는 한두 명에 불과
했다. 출판계에서 왜 알려진 소설가들 대부분이 내가 모르는 사람
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탄 없는 눈길로 그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나
는 주로 그들과 나의 차이점을 발견하려 했다. 같은 인간인데 과연
내가 생각하는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결정적인 차이가 발견된다면 나는 다시 속세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술자리에서 악수를 나눈 소설가끼리 악수가 원
인이 되어 싸움(?)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악수를 할 때 한 사람이
일부러 손을 꽉 쥐는 바람에 손가락이 이상해진 상대방이 한동안
펜을 쥘 수 없었다고 한 잡지에 기고한 것이었다. 그러자 손을 확
쥔 소설가가 화가 나서,오해라고 소란을 피우는 소동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꼴이 몇 번이나 잡지에 실렸다.
그 두 사람도 파티에 참석했는데 한 편집자가 그들 사이를 오가
며,선생님,이쯤에서 화해를 하는 게 어떨지요?"라며 중재에 나섰
다. 나는 솔직히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밖에도 소설가들의
다양한 소문이 내 귀에 흘러들어왔지만 역시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천진하다고 하면 천진하고, 여자 같다고 하면 여자 같았다.
하잘것없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말싸움들. 그와 같은 소문들은 내
가 생각하고 있었던 '순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순수는커녕 유치
할 뿐이었다. '순수'와 '유치'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많은 편집자들이 그런 소설가들의
어린애 같은 기행에 신기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을 마치
문학의 본질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결국 편집자에게 이끌리다시피
따라간 파티에서 내가 본 소설가들의 언행이란 벼락부자 아저씨들
이 벌이는 짓거리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나는 돈을 듬뿍 쥐어준 뒤 '선생님,선생님" 하고 부추기면 누구
든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편집자와 소설가들과의 관계 또한 실
로 기묘했다. 매우 끈적끈적하고 세련미가 없었다. 한쪽이 원고를
청탁하면 한쪽은 그것을 쓰는, 그야말로 심플한 관계여야 마땅할
텐데, 양자는 불필요할 정도로 긴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했다. 무슨
협의 사항이 있다면서 약속을 해놓고는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일에 관한 이야기라면 길어봐야 삼십 분이면
충분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내 관찰에 의하면 그들의 교제는 대등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교제와는 달리, 한쪽이 으스대면 다른 한쪽은 손을 비벼
대는 관계였다. 적어도 나는 그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신주쿠에 있는 어느 술집은 문단 사람들이 많이 꼬이기로 유명
하다. 그곳에서는 매일 밤 소설가나 평론가,편집자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소란을 피운다. 그 집은 문학론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맞붙어 싸우기도 하는 장소
였으며, 때로는 상담(商談)이 성립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
는 놀이 삼아 만나는 것인지 일 때문에 만나는 것인지 모를 교제는
질색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삼류
배우인지 배우 지망생인지는 모르겠으나 건방진 말을 뱉어대는 아
가씨들 아니면.가인(歌人)을 자처하며 신인 앞에서 충고를 하고 싶
어하는 아줌마들뿐이었다
내 뒤에 등장한 젊은 신인 작가들이 그런 술집에 기꺼이 얼굴을
내미는 일 또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실망시켰다. 신인들은 문단
같은 것은 엿이나 먹으라고 호언장담을 해대지만 노는 꼬락서니를
보면 선배 소설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선배들 앞에서 꼬리를 치
며 한 계보 밑에 들어가 똬리를 틀었다.
그러니 내가 소설을 계속 쓴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 쪽이 훨씬 순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는 소설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의문스러웠다. 나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인데, A상을 수상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해도 좋은 것인가. 내가 바라던 삶은 좀더 남자답고-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도 좋다-좀더 긴장되고 좀더 산뜻한 그 무
엇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도시의 목조 아파트에서 그렇게 주저하며 지내는 동안.
나는 완전히 바뀌었다. 정신은 물론이고 몸까지,온종일 방 안에 틀
어박혀 책상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글을 썼던 것은 아니지만 그
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운동 부족이 심각했다. 피하지방의 상자
속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몸이 그렇게 되자 정신도 이상해졌다. 생각은 점점 나약한 쪽으
로 흐르고, 자신을 부정하는 언어들만 잇달아 떠올라, 흔히 있는.
내가 경멸하는 소설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언어에 매달려 언어
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삶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소설가의 고뇌의 원천은 일상생활의 태
도에 있지 않을까.그렇게 무질서한 생활을 하다 보면,어떤 인간이
든 기존 소설가와 비슷한 타입이 되지 않을까.요컨대 그것은 일종
의 정신병이 아닐까.
내게는 물론 정신도 있지만 그에 앞서 육체가 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쓰느냐, 마느냐 하기 이전
에, 젊은 이 육체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금방 답이 나왔다. 대자연의 품에 안겨.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
산골에서 자란 나는 산에서의 생활이 정신과 육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피하지방이 연소하면 그 다음에 무엇이
남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재빠른 동작, 민감한 오감, 동물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되살아날 터였다.
그런 생활이 설령 일반적인 문학가들의 삶과 무연하다 해도 나
는 상관이 없었다. 당시 나는 아직 나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문학
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포착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강렬한
방향인 것만은 직감하고 있었다. 어떤 편집자가 "그런 생활에서 어
떻게 소설이 나오겠느냐"고 충고했다. "아니, 상관없다. 만약 산에
파묻혔다고 해서 소설을 쓰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멋진 대답
이 아니겠느냐'라고 나는 응수했다.
미국 소설가들은 거의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뉴욕이나 워싱턴 근처에 모여 지지
고 볶아대지 않는다. 막 소설가가 되었을 때 나는 도시 주변에 모
여 사는 일본 작가들의 심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도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도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이사를 준비하는 데 채 사흘도 걸리
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현금 십 몇만 엔이 전
부였다. 출판사에서 선금을 받을 재간도 없었다. 겨우 그 정도 돈을
가지고 도쿄에서 먼 곳으로 이사하기에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내가A상을 수상한 것은 행운이지 실력이 아니라는 견해가 문단
의 중론이었다. 그들은 나의 문학적 재능을 의심하고 있었다. 책이
라도 폭발적으로 팔렸다면 사정이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러나 경마
에서 내기 도박을 하는 사람들 같은 문학평론가들,그리고 무엇보
다 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쩨쩨한 인간들은 나의 소설을 인정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의 낙향'이 어쩌면 현명한 대응책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나 자신조차도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였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시간만 충분히 할애한다면 조금 더 좋은 소설을 쓸 자신
이 있었다. 비록 전망이 불투명한 자신감이었지만 그런 자신감에라
도 매달려 전력투구할 에너지도 갖고 있었다. 산속에서 생활하며
불필요한 살을 다 빼버리고 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정오이다』란 첫 장편소설을 발표한 직후. 나는 도쿄를 떠나 나
가노(長野) 현의 남쪽에 있는 A고장으로 이사했다. 같은 신슈이지
만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그 고장이 마음에 들어 선택한 것은 아
니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단지 한 달에 1천7백 엔이라는
집세 때문에 그곳을 택한 것이다. 무슨 조건을 내세울 입장이 아니
었다. 그래서 미리 한 번 가보지도 않고 곧장 이삿짐을 꾸렸다.
요즘도 가끔 그날 밤을 떠올리곤 한다. 아마다키 강변의 조그만
역에 내렸을 때는 이미 밤이었고, 여기저기 수풀 속에서 밤벌레가
울고 있었다. 그날 밤은 강가의 여관에서 묵었는데.좀체로 잠을 이
룰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편집자들의 충고가 하나둘 떠올랐다. 어
떤 편집자는 시골에는 자극이 없어 소설을 쓰기가 어려울 것이라
고 말했고. 어떤 편집자는 낙향이란 말까지 구사했다. 그런데 새벽
녘이 가까워지자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
차로 고작 일고여덟 시간 떨어진 곳으로 이사한 것을 가지고 이렇
게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 웃었다.
이튿날 아침, 아내와 나는 택시를 타고 산을 넘어 처음으로 그
소박한 집을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집이었다. 마당도
있었고, 옆집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틀에 걸쳐 짐을 정리하
고, 또 이틀에 걸쳐 마당에 가득 돋아난 잡초를 걷어내고 뱀을 쫓
아냈다. 물론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담배를 사러 가는데 왕복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고,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꼬박 하루를 투
자해야 했다. 그 무렵 우리에게는 자전거 한 대밖에 없었다.
A마을에서 지낸 처음 한동안은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한가한
전원 풍경 속에서 나는 어디서,무엇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무
위한 나날을 보냈다.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고, 펜을 쥐고 글을 쓰
는 것도 아니고, 하루 스물네 시간 조용한 공간 속에서 멍하니 시
간을 흘려보냈다.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혀놓고, 툇마루에 벌렁 누워 강과 숲을 흐르
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
리고 어두워지면 잤다. 한동안 이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일부터
글을 쓰자고 다짐하곤 했지만,막상 그 내일이 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글쓰기에 돌입하면 쓸 수 있을 만한 소재가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아직 쓸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의 삶은 나와 비교할 때 너무도 기본적이고 너무도 힘
찼으며,또 너무도 허망해 보였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흙을 일
구는 그들의 존재를 염두에 두면서 종이 위에 글자를 메우려면 여
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안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농사 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채소 한 포
기도 기르지 않았다. 감히 농사를 모독할 수가 없었다. 소설을 쓰면
서 지을 수 있는 농사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만약 양자를 병행하는 자가 있다면,그 사람은 거짓 삶을 사는 것
이다. 어느 한쪽은 장난 삼아 하는 소일거리일 것이다.
옛날에 나는 어떤 소설가가 쓴 책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그 책에는 한 손에 괭이를 든 작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단지 그
뿐이었는데도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나는 '이런 사기꾼이 있나'라
고 중얼거렸다. 도시에서 자란 인텔리들의 눈은 속일수 있을지 모
르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기르고 싶은 채
소만 기를 수 있는 농사꾼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농사
꾼을 흉내내며 농업을 다 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심심풀이로 삽을 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경작법은 잘 알고 있지만 절대로 채소를 기르지 않
는다. 그런데 점차 돈이 떨어지고,채소를 살 돈조차 떨어지고 말았
다. 나는 채소에 들어 있는 비타민이 필요했다. 그래도 채마밭을 가
꾸지 않았다. 대신 집에 있는 비타민제를 복용했다.
A고장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단편을 두세 편 발표했던 것
은 순전히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따금 아내에게
물었다. "앞으로 한 며칠 살 수 있지?' 그러면 아내는 "앞으로 이십
일을 넘기기 힘들어요"라고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섬뜩했다. 등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뭐라구, 정말
이야?'라고 소리치면서 저금통장을 꺼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곤
했다. 저금통장에 적힌 숫자를 보고서야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고,
그렇게 망설이던 소설을 술술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같은 이야기를 편집자에게 했더니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하
지만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돈이 들어오면 가능하면 빨리 써버리
도록 애썼다.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간혹 몇 달쯤 살 수 있는
돈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그 사이에 생각해두었던 전작 장편을 쓴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힘이라도 이용할 작정
이었다. 생활비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이라도 상관없었고. 오토바이
를 산다는 명목이라도 좋았다. 설령 물욕이 동기가 된다 해도, 결과
적으로 좋은 작품이 남으면 된다는 믿음이었다.
스스로 소설쓰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런 판단조차 구애
받지 않았다. 나는 그때 내게 몇 번이고 맹세했다. '좋아,소설을 써
서 내가 먹고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어.' 언제든 급하면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돌아가 밥은 굵지 않을 수 있다는 안이한 태도는 버
리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루야마 겐지를 격려하는 모임'이 결성되었으
니 참석해달라는 안내장이 날아왔다. 말로는 들었지만 정말 실행하
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모임을 계획한 것은 7사의 B지였는데,
후의는 고마웠지만 내 마음은 착잡했다. 나 자신이 누구로부터 격
려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기 때
문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절망할 만큼 비극적인 상황
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애써 마련해준 자리여서 외면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혼자 어슬렁어슬렁 상경했다.
모임이 열리는 장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친한 편집자에게 '격려받을 것까지는 없는데"라고 말
했다. 그러자 그 편집자는 히죽 웃으며 "뭐.이 모임은 연예계 사람
들의 피로연 같은 것이니까'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수긍을 하였지만 금세 비참한 기분
에 젖었다. '아하,그런가. 나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단 말인가.' 온몸
의 힘이 다 빠졌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연예인
이면 연예인답게 서비스를 해야지.' 모임이 끝나고 모두가 돌아갈
무렵 나는 머리를 주억거리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애 많이 쓰
셨습니다"를 연발했다. 결국 나는 바보 취급을 당하고야 말았다.
그 자리에서 한 중년 편집자로부터 당치 않은 칭찬을 들었다. 그
는 왜 부인을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내와는 관
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그는 ‥암, 그렇지,
그래야 마땅하지"라며 감탄을 했다.
그날 밤 나는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술집을 순례했다. 그 와중에
여러 소설가와 평론가.편집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언행은 내 성
격과는 물론 내가 추구하는 세계와도 맞지 않았다. 그들과 헤어진
뒤 나는 미련 없이 기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새
삼 각오를 다졌다. 나는 내 방식으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소설
을 쓰면 된다. 산으로 이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라고
신슈 남쪽 A마을에 살 때는,지금과 비교하면 그다지 동적인 생
활을 하지는 않았다. 가끔 친구가 오리 사냥이나 은어 낚시를 가자
고 할 때나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나머지 시간에는 늘 방 안에 틀
어박혀 있었다.
도쿄의 출판사와 연락을 할 일이 있으면 대부분 편지로 처리하
고,급할 경우에만 고등학교의 전화를 빌려 썼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달에 고작해야 한두 번 정도였다.
그 고장 사람들이 내 정체를 물라 수근덕거리는 일이 재미있었
다. 지질학자라고 넘겨짚는가 하면,도피중인 범죄자일지도 모른다
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소설가라는 것을 안 다음에도 사람들은
순순히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시골에서는 '소설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소설가입니다"라고 하면 "아아,그렇습니까" 하고 간
단히 인정을 받는 대신에 질문 공세가 쏟아진다. '어떤 소설을 씁
니까?'에서 시작하여 "돈은 어느 정도 법니까?''텔레비전 드라마가
될 정도의 소설을 쓰지 못하면 일류 소설가라고는 할 수 없죠"에서
끝난다.
아침부터 밤까지 논밭을 일구며 벼와 채소를 경작하는 기본적인
삶을 꾸리는 시골 사람들에게는 소설을 써서 먹고살 수 있다는 일
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어떤 편집자가 내게 이런 충고를 해준 일이 있다. "지방에 틀어
박혀 융숭한 대접을 받다 보면 주변이 눈에 안 들어오는 법입니다.
게다가 도시의 소리가 필요 이상 과장되게 들려, 휘둘리기가 십상
이죠."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소설가가 뭐냐"고 묻는 고장에
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도쿄에 살았을 때보
다 문예 잡지의 분량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누가 쓴 어떤 소설이
어떻다는 등의 평판은 시골에서는 그야말로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나는 A가 마음에 들었다. 사정만 허락되었다면 지금도 A에 살았
을 것이다. 그런데 한 반 년쯤 지나자 면사무소 직원이 찾아와 이
집에서 마을 중학교의 선생님이 살게 되었으니 비워달라고 했다.
내가 세들어 사는 집이 면에서 관리하는 집이었던 것이다. 나는 승
낙하였다. 나보다는 그 선생이 쓰는 편이 이 고장을 위하여 좋을 것
같아서였다. 시골이니 곧 새 집을 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막상 찾아나서니 좀체로 적당한 집이 없었다. 물론
셋집은 여기저기 많았지만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조건은, 집세가 쌀 것, 주변에 인가가 없을 것, 단 두 가지였다.
그때 나는 좀 이상했다. 소설가인 주제에(소설가이기에 그랬는지
도 모르지만) 사람을 싫어했다. 가능하면 타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고,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
다. 구태여 생생한 삶의 현장이나 인간들의 모습을 일일이 보지 않
아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도 없었다. 내게 소설가란 명칭이 부여되는 순간,무슨 까닭
인지 친구가 다들 멀어져버렸다. 그들이 나를 멀리했는지 아니면
내 쪽에서 멀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무튼 문득 사방을 돌
아보니 나는 외톨박이가 되어 있었다. 세상으로부터도 완전히 격리
되어 있었다. 샐러리맨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거짓말 같았다.
정상적인 판단 기준으로 보면, 나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고독 덩어
리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태연했다. 물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은 늘
존재했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동업자들과 술을 마시
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대지 않으면 못 견디는 그런 나약한 외
로움은 아니었다. 좀더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결의를 떠올릴 때마
다.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내 각오를 확인했다.
개가 친구였다. A마을에 살면서 난생 처음으로 개를 키웠다. 셰퍼
드 새끼였는데 그놈이 유일한 벗이었다. 그런데 개 기르는 법을 잘 모
르기도했거니와 그놈이 전염병에 걸려 있었던 탓에 얼마 안 있어 식
욕을 잃고 콧물을 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갑작스런 이사가 겹쳤다.
이사갈 집을 구하지도 못했는데 집을 비우기로 한 날짜가 다가
왔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N시에 있는 부모님 댁에 빌붙어 살게
되었다. 많지 않은 가재도구와 병에 걸린 개를 트럭으로 보내고,우
리는 전철을 타고 뒤쫓아갔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몸 하나
밖에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그 이상은 받고 싶지도 않았다. 내 몸 하
나로 세상에 나가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만큼의 자신감은 있었다.
부모님 신세는 지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 비용도 스스로 마련했
고,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린 적은 없었다.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부모님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내 인생 내 멋대로 살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이 간섭할 기회
를 주지 않으려거든 부모 신세를 지지 않으면 된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부모가 한마디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나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반격을 했다. 여자와 부모가 하는 소리에 일
일이 상대를 해봐야 득될 게 없다. 그들은 늘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 하고, 둘을 주면 셋을 바란다.
그런 내가 아버지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다. 살 집을 구할 때까지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비참했다. 굴욕적이었다. 그런데 아
버지는 내가 눌러붙을 작정은 아닌가 싶어 도리어 나를 의심했다.
대단한 아버지였다. 하기야 내가 A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던 아버지 아니었던가.나는 서둘러 집을 물색하고 곧바로 이
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또 이사를 했다.
그 무렵 나는 때아니게 달리기에 정열을 바쳤다. 파트너는 셰퍼
드였다. 그 녀석을 데리고 매일 산에 올라 뛰어다녔다. 점심을 먹으
면 곧바로 집을 나서 오후 늦게까지 산속을 뛰어다니다가 땀범벅
이 되어 돌아왔다.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다. 마치 달리기가 내 일인
것처럼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몸에 좋고 나쁘고는 다음 문제였다.
나는 달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설쓰기란 건장한 청년이 할 일이 아니었다.
글자를 내갈기는 것 정도로 청춘의 저 폭발적인 에너지를 제어
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런 타입의 사내였다. 그래서 나는 종
종 산속에서 냅다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고함을 마구 질러대며 분노를 해소했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는 안타까움만 간절했다. 그때마다 셰퍼드도 함에 짖었다.
온몸에 피가 들끓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세상을 대
하고, 문학 팬들이 좋아하는 포즈를 취하며 그럴싸한 소설을 쓰는
짓거리는 도무지 내게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설을 열심히 썼다.
한 작품 한 작품에 시간과 공을 들여.정성껏 완성했다. 그 점에서
는 어떤 작가보다 정열적이지 않았을까.
그 시절에는 소설가의 말이라면 제법 먹혀들었다. 대부분의 사람
들이 세상을 향해 자극적으로 내뿜는 소설가들의 코멘트를 신뢰했
다. 행동적인 뒷받침이 전혀 없어도 거기에 무슨 신이 내린 힌트라
도 들어 있는 것처럼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란 말을
거들먹거리면 모든 것이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행복하다면 행복한
시대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그들의 언동에 상당한 의심을 품고 있었
다. 그들은 스스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사상을 매스컴이란 파
도에 실어 먹고사는 작자들이었다. 안전 지대에 똬리를 틀고 앉아
싸구려 동정과 분노와 정의를 떠벌였다. 베트남 전쟁을 부정한다고
운운하며, 원고료와 인세를 짜냈다.
그렇지 않은 작자들은 문학적인 생활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쪽도 흉내낼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런 짓
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의 삶이 정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향하여 이런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안타까웠
다. '이건 단순히 일'이라고, '소설을 쓰는 것은 일일 뿐이다. 그 이
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반듯하게 일만 하면 된다'고
어느 지방 신문의 문학 좌담회에 반 강제로 참가했을 때 나는 처
음으로 동인지를 발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각 고
장에서 발간하는 동인지의 우두머리 격이었고,신슈 문단-실제로
그런 말이 있다-을 우습게 여기는 작자들이었다. 그때 나를 응시
하는 그들의 눈길은 실로 복잡했다.
무리가 아니었다. 자기들은 벌써 몇 년,몇십 년을 문학에 매달려
있는데. 한 방에 적시 안타를 터뜨린 내가 등장하였으니 틀림없이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들의 표정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원
고료도 받지 않고 소설을 쓰고 자비로 책을 출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절대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 이라는 생각만 했을 따
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이 아닌가.굳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함께 술이라도
한잔 안 하렵니까?' 나는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며 거절했
다. 그러자 "그럼 차는 어떻겠습니까?'라고 다그쳤다. 나는 차를 마
시며 뭘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문학 이야기나 신나
게 하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거듭 거절했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
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가 싫었다. 하
물며 문학 패거리들과 교제를 하다니 소름이 끼쳤다.
문학은 읽는 것이며 쓰는 것이지.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
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쓰기를 목표로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
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홀로 엄청
난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겠다는 사고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하는 이상은 무리가 되더라도 혼자
사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샐러리맨 같은 생활을 해서
는 절대로 안 된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
서 튕겨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카메라맨이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매스컴
이란 무대에서 바보춤을 추며 신나게 사는 소설가들이 있다는 등
의 이유로,소설이나 써 봐야겠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으로 달려든다
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단순히 문학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지망생들이 있는데,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만
두는 편이 낫다.
지금까지 소설가들 대부분은 그런 대로 홀로 열심히 글을 써왔
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고독감에 패배하여 나약한 방향으로 기
울었다. 끝내는 자살이란 해결책에 매 달리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삶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약한
방향으로 기울어 한순간 불꽃처럼 타오르고 사라지는 소설도 있지
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고독감 같은 것을 강인하게 극복하고.
주저와 나약함의 파도도 차례차례 극복하고, 그 너머에 있는 무엇
을 나의 펜으로 찔러보고 싶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몹시 우스
꽝스러운 삶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감히 몸을 확 펴고. 강인한 삶을 자처한다. 말뿐만 아
니라 행동으로 시도한다. 성격에 맞지 않는다. 내키지 않는다. 모양
새가 나쁘다,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따위의 수많은 구실과 핑계로
사방을 가로막고 그 안에 틀어박힌대서야 사는 보람이 없지 않은가.
인생의 최대의 감동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에 있
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컨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자신
을 만나는 일이다. 예전에는 결코 할 수 없다며 포기했던 일을 지
금은 할 수 있다니, 이만한 감동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과거의 내가 그랬으니 미래의 나도 그럴 것이라는 발상으로는
그런 감동을 절대로 자기화할 수 없다. 나는 미지의 존재이며,앞으
로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빛을 발
하고 충만해지는 것이며. 또한 영원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펼쳐나가는 강인함이 필요하다. 마음의 명령 따위에
일일이 따를 수가 없다.
동인지의 보스들이 이윽고 본심을 털어놓았다. "시골에 사는 인재
인 당신께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 말이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도쿄를 중앙이라
고 부르는 것부터가 싫었다. 그들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마추어는 원고료나 인세를 받지 않고 글을 쓰는 청렴함
과 순수성이 있지 않느냐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파이프라인의 의
미가 만약 편집자나 잡지를 소개하는 일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도쿄로 갈 때마다 그들의 원고를 날라야 한다면 그보
다 치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잡지든 신인상이란 등용문을 두고 있다. 아무라도 원고를
응모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집자들은 유망한 신인을 발굴하고자 말
그대로 혈안이 되어 투고된 원고를 읽는다. 문학 잡지사들은 프로
야구의 스카우트전 이상으로 신인을 찾기에 열심이다. 그러니까 어
설픈 재능으로 운좋게 걸려드는 일은 있어도 재능이 충분한데도
인정을 못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등한 것이다.
프로 소설가가 되고 싶으면 몇 번이든 응모하면 될 일이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며 다른 길은 없다고 믿어야 한다. 조금 이름이 알려
진 소설가에게,혹은 유명한 소설가에게 접근하여 인정받으려는 요
행은 바라지 않는 것이 좋다. 능숙한 대인관계만으로 파고들 수 있
는 세계가 아니다. 설령 그런 식으로 데뷔한 소설가가 몇 명 있었다
해도 본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 수단을 선택한 자는 자격이 없다.
내가 만약 동인지를 통해 문학 수업을 했고, 그 힘으로 프로가
되었다면 파이프라인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을지 도 모른
다. 그러나 나는 신인상에 응모하여 소설가가 되었다. 동지도 없거
니와 스승도 없었다.
도무지 제자를 키우는 소설가의 속셈을 모르겠다. 사사를 바라는
자들의 기분도 이해할 수 없다. 대체 무엇을 가르치고.무엇을 배우
는 것일까.소설이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설
사 스승 취향의, 혹은 스승과 꼭 닮은 소설을 썼다고 해서. 그게 어
떻다는 말인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스
승은 많은 제자를 거 느림으로 해서 세력권을 확대하고. 그 힘을 배
경으로 훈장이라도 받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 또 제자는 제자 나름
으로, 스승의 위광을 엎고 가까운 길로 질러갈 궁리를 하고 있는지
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상론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본과 상식을
거듭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이 유치하다고 하는 자
가 있다면 나는 그 자에게 샐러리맨이 되라고 권하겠다 샐러리맨
이 유치한 소설이나 쓰면서 쓰잘데 없는 상하관계에 얽매이는 것보
다는 훨씬 낫다.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이 세계는 화단(畵
壇) 등에 비하면, 언어를 사용하는 덕분인지, 그나마 양심은 남아
있다. 나 같은 놈도 데뷔할 수 있으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 산속에서 살면서 펜 클럽이나 문인 협회에
가입하지 않아도 어찌됐든 십수년을 계속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절대로 고리타분한 길만은 걷지 않도록 하라. 심사위원
의 집으로 쳐들어가 마당 청소를 하거나,소설가나 편집자들이 드
나드는 술집에 뻔질나게 출입하는 짓만큼은 절대로 하지 마라.문
학이 존재하고, 그것을 반듯하게 성취하려는 뜻이 있다면,다른 것
은 전혀 필요치 않다.
편집자의 눈은 날카롭다. 그들은 좋은 작품을 절대로 놓치지 않
는다. 또 그들은 부당한 압력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느 해 가을, 나는 바다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소설가가 된 지도 오 년이나 지났는데, 우리의 생활은 조금도 나
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근근이 먹고사는 일은 해결되었지만, 즉
안정의 희미한 조짐이 보이기는 했지만,나는 싫증이 나고 말았다.
소설은 쓰고자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펜을
쥐고, 한동안 벽을 응시하다 보면 써졌다. 그런데 쓰면 써진다는 바
로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그때까지 그럭저럭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당장 내일
먹을 것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매우 자극적인 배수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써서 세상에 내놓을 때까지 그 불
가사의한 스릴이 소름끼치도록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세끼 밥을 넉넉히 먹을 수 있고, 소설이 술술 써진다면 그런 생활
을 계속할 의미가 없었다. 내게는 계기의 유무가 중대한 관건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수
십 년 동안 이런 나날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치가 떨렸다. 넌더리가 났다. 그런 짜증스런 날들이 한동안 이
어진 다음,마침내 아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어찌됐든 바다로 나
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소설 자료를 취재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배는 대형 유조선이었다. 승선을 부탁한 선박 회사
는 S해운.유조선에는 무슨 까닭인지 매스컴 관계자를 태우지 않는
관례가 있었는데,다행히 내게는 통신사라는 직함이 있었다. 통신사
수습생이란 명목으로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스 타누라 항까지
장장 사십오 일에 이르는 바다 여행을 떠났다.
와카야마 현 게즈 항.거기에는 겨울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
다. 벌써부터 나의 감동이 시작되었다.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 있는
거대한 배 5호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갑판에 서는 순간 나는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여기야말로 남자들이
사는 세계라고 멋대로 단정지었다.
엄청나게 큰 배였다. 갑판원들이 자전거를 타고 갑판을 오락가락
했다. 꼭 소금쟁이들 같았다. 그리고 호화판이었다. 서른 명 남짓한
선원 모두가 냉난방이 완비된 독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끼 외에
도 밤참이 나오고, 오후 세시에도 간식을 먹는다. 웬만한 호텔급이
었다. 선체가 긴 탓에-대략 삼백 미터 정도이다-거의 파도가 느
껴지지 않았다. 이십몇 년 만에 만나는 폭풍우라며 선장이 바짝 긴
장했을 때도 나는 겨우 이 정도인가 싶을 정도였다.
승무원들은 모두 무료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은 거의
기계가 해치웠다. 예를 들면 항해중에 브리지에는 고작 두 명밖에
없다. 항해사와 조정수다. 이 두 사람도 거의 할 일이 없다. 자동 조
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간을 죽여야 할지 모르는 그들
은 윙에 나가 골프 연습을 하곤 했다. 긴 끈으로 묶은 공을 바다를
향해 치고는,끈을 잡아당겨 다시 친다. 교대를 할 때까지 수없이 반
복한다.
늙수그레한 승무원이 내게 말했다. "이제 그 옛날의 바다는 없어
지고 말았네." 바다는 옛날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런 괴물 같은 배
를 타고 가는 한 바다는 고여 있는 거대한 물음덩이에 지나지 않는
다고 덧붙였다. 좀더 나이를 먹은 승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배는 배가 아니야. 이 배에 탄 사람도 선원이라고 할 수 없지."
나도 수긍이 갔다. 저 엄청난 『백경』의 세계가 아니었다. 젊은 승
무원들은 육지의 샐러리맨이나 다를 바가 거의 없었다.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할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다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가득 싣고 가는 기름이 위험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나날
의 연속이 위험했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는 생활과
긴장감의 결여.싸움질을 하면 쌍방이 모두 해고된다는 규칙, 게다
가 불시에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승무원들은 점차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인간관계에도 차질이 생기고. 심지어 노이로
제에 걸려 자살을 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조선 같은 배는 아예 타지 말았어야 했다. 어선을 타는 편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유조선에 타지 않았던들 바다와 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평생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카드를 열어보았는데 아무짝에
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마지막
은신처를 잃고 말았다.
왜 오래 전 일이다.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일
이 있다. 강에서 사금을 채취하여-일본에도 사금이 있다-생활
하는 노인이. 입버릇처럼 홋카이도의 오지에 있는 강에 가면 사금
이 손으로 퍼낼 만큼 많이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말만 할 뿐 그
는 결코 그 강에 가지 않는다. 필시 그 강이 노인에게는 마지막 카
드였을 것이다. 그는 현명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었다. 얼마 살지
도 않았으면서 숨겨둔 카드들을 함부로 꺼내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카드에 기대를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
럴싸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열어본다. 흔해빠진 카
드라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방법이 훨씬 강하다.
선원들의 인생관은 흥미로웠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
진 끝에 알게 된 사실인데,그들은 한결같이 육지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선원이 되었기 때
문이고, 육지에서 살았더라면 지금쯤 좀더 나은 인생을 즐기고 있
을 것이라고 다들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뭍을 장밋빛 세계로 착각하고 있었다. 뭍에는 여자도 많
고.놀 데도 많지 않느냐고 말했다. 과연 그들이 휴가를 즐기는 육
지는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다. 육지생활에 대해 구태여 일일이 설
명은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육지가 마지막 카드이기 때문이다.
유조선에서 내린 다음부터 나는 다른 세계를 동경하지 않기로 작
정했다 배에서 내린 뒤 다시 소설의 세계로 돌아갔다. 오전중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개와 함께 이 산 저 산을 헤매다니고, 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생활로 돌아갔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담보 없는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 무렵,한 편집자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술이라도 마시고,
여자 꽁무니라도 따라다니면서 엉망진창 살아보면 어떻겠느냐. 소
설가에게는 그렇게 파멸의 길을 걷는 삶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뿌리쳤다. 농담도 유분수다. 고작 술이나 마시고 여자 꽁무니
나 따라다니며 그것을 두고 인생의 변화라고 여기라니.너무도 초
라하고 비참하지 않은가.그 정도의 일로 파멸 운운하는 것도 허풍
스럽다.
나 역시 남자니까,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여자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제2의 어머니에게
매달리듯 여자에게 구속당하기 싫다. 정신까지 모두 바칠 정도의
상대는 아니다.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만큼 가치가 있는 존
재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만큼 골치아픈 생물에게 빠져 혼신을
다해 쫓아다니다 휘둘림을 당하고는 급기야 너덜너덜한 신세가 되
는 남자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여자가 이러니저러니 잔
소리가 많을 때에는 한 방 주먹이라도 날려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편집자는 이렇게 반론했다. '남자가 진심으
로 정열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여자 정도가 아니겠느냐. 여자에게
농락당하고 인생이 추락할 때 스파크가 일어나는데 그 불꽃으로 인
생에 빛을 더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 말은 샐러리맨의 인생관과
다르지 않다. 하는 일이 재미없고 달리 할 일도 없는 남자가 흔히
입에 담는 말이 아닌가.
필요 이상으로 여자에게 빠지는 남자는 대개 마더 콤플렉스의
소유자인 동시에 매저키스트다. 정신적으로는 호모나 다름없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여자한테 그렇게까지 빠질 수 있다니,정상이
아니다. 그런 남자들은 야릇한 미학을 주장하면서 여자를 거울로
취급한다. 그런 남자들은 '사랑 운운하면서 여자 본래의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다. 결국 여자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눈치챈 여자는 이번에는 반대로 남자를 바보 취급하게 된다.
나는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내가 어떤 식으로 불타
오를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잠자코 기다리는 길밖에 없었다.
서른 살이 이제 얼마 남진 않았다. 소설가가 된 지 오륙 년밖에 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벌써 이십 년쯤 소설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또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전이었다. 일을 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창으로 내다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노파 둘이서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자기 집인 양 두런거리고 있
었다. 아무리 시골 사람이라도 해도 너무 한다. 뻔뻔스러워 보였다.
'당신들. 뭡니까?'라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한 노파가 태연한 표정으로 이 집이 자기 집이라는 것이
었다. 나는 놀란 나머지 마당으로 나갔다.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었
다. 막 집을 지어놓았는데 전근 발령이 나는 바람에 시골 마을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젊은 부부가 주인이었다.
노파의 설명인즉 그 부부가 자기의 양자와 양녀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한테 집을 빌렸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집입니다. 사전 양해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
시골에서는 이렇게 간단한 이치가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물건
을 사는 손님보다 파는 장사꾼이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조금도 이
상하지 않다.
그 노파는 뜨락 손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등. 연못의 잉
어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등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인간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나 시골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살 곳
이 없어진다.
결국 나는 또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이리저리 집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조건에 맞는 집이 좀체로 나서지 않았다. 직업이 소설가
라는 것을 알고는 돈이 많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인
간들투성이였다. 원래는 마사였던 건물을 보여주면서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부르지 않나. 폐옥을 가지고 도회지와 대등한 집세를 요구
하질 않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작자들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파렴치한 국민들이 뽑은 파렴치한 사나이가 이 나
라를 휘두르고 있었고, 지방 사람들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
일본 열도를 개조한다는 슬로건 탓에. 소나무숲조차 한 군데도 없
는 황폐한 땅이 엄청난 가격에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대였다. 물
가는 상승 일로였고 집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달씩이나 온천지 여관에 묵으면서 느긋하게 소설을 쓰던 시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쫓겨날 때마
다 머리를 숙이고 전셋집을 찾아 다니는 생활은 이제 넌더리가 났
다. 이사를 할 때마다 가난해졌다. 글 쓸 시간이 줄어들고. 피로해
졌다 한계인가 싶었다.
마지막 방법은 내 집을 갖는 길뿐이었다. 빛을 졌다. 돈의 힘은
위대했다. 정말 집을 지었다. 꿈같은 꿈이 현실이 되었다. 그 집으로
이사한 것은 여름이었다. 그때까지 몇 번이고 이삿짐을 꾸렸던 종
이 상자를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이것으로 지긋지긋한
이사는 끝이라고 외치면서.
그런데 정작 그 집이 내 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셋집에서만 살았고, 커서도 내내 이사만 했으니 무
리가 아니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집은 내 집이다,죽을 때까지 살아도
된다. 매달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남의
집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씻기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
주인이 찾아와 집을 비워 달라는 소리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
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내가 오오마치(大町)라는 북알프스 기슭의 땅에 집을 지은 연유
는 고향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조차 기억 못
하는 떠돌이 같은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소년 시절에 이곳 오오마치에서 약 십 년간 살았다. 그리고서 이
곳저곳 흘러다녔는데 늘 떠오르는 곳이 이 오오마치였다. 오오마치
의 사람이 아니라 오오마치의 자연과 추억이 어느 사이엔가 내 가
슴속에서 이상적인 공간으로 변했고 마음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그 이미지는 대도시나 중소도시,그리고 숲을 지나칠 때에도 나날
이 부풀어갔다. 그런 오오마치에 별 계획도 세우지 않고 집을 지어
고향으로 삼고자 했으니 내게는 축복이었다.
예전에 사과밭이었던 그 땅은 온통 억새풀로 뒤덮여 있었다 불
도저를 부르면 하루 만에 깨끗해질 텐데, 나는 곡괭이를 집어들었
다. 여기가 내 땅이라는 것을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까지 나는 글다운 글을 거의 쓰지 않고 오로
지 곡괭이를 벗하여 살았다. 그리하여 억새풀 뿌리를 모두 제거하
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땅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고릴라처럼 되었을 뿐이었다.
떠돌이 버릇이 몸에서 떨어져나갈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이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사가 버릇
이 되고 말았다. 끊임없이 이동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하는 남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그 고장의 풍경과 사람들을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하는 버릇은 어
떤 의미에서는 불행이었지만, 소설을 쓰는 데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오오마치의 자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내
기대 이하였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고 망상이었음이 금세 드러났
다. 나는 몹시 후회했다. 나는 평생 부초처럼 살아야 마땅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나는 인간에게도 지나치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이 어떤 인간인지를 잘 알고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이곳만은 특별하리라고 넘겨짚었던 것이 잘못이
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든다
고 짐을 싸들고 다른 고장으로 떠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집
과 땅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내게 이런 말
을 했다. "자네는 젊은 시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것 아닌가.그
러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작정인지."
많은'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모든 정열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일과 집,개 두
마리와 절대로 병치레를 하는 법이 없는 아내, 그리고 자전거가 있
다. 없는 것이 있다면 아이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불만스러웠다. 뭔가 부족했다. 그러나 무엇이 모자라
는 것인지 모른 채 열심히 소설을 썼다. 그즈음에는 내가 쓴 소설
도 조금씩 팔려나갔다. 일반 독자들은 여전히 재미있는 소설에만
달려들었지만.내 무거운 소설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그 사이에 얼
마간 늘어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개와 함께 산속을 미친 듯 헤맸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전에 펜을 쥐고 얼굴을 찡그리
고 있으면 있을수록 오후에는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셰퍼드도 열
심히 달려주었다. 인적 없는,눈부신 넓은 강변을 달릴 때면.내 가
슴속으로 그 어찌할 길이 없는 바람이 불어닥쳤다. 안타깝고 허망
한 바람이 내 안으로 휘몰아쳤다. 그 바람을 느낄 때마다. 혹여 내
가 문학에 부적합한 인간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과 내가 결국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눈앞을 가로지를 때마다. 나는 아연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
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와 같은 타입이 되지 않겠는가, 다시 말
해 생활 환경이 인간을 틀에 박히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스스
로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 타당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거역하며 살고 싶었다. 자연 그대로 살고 싶다든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희망은,늙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할
아버지가 되었을 때나 매달릴 법한 말이었다.
그래도 어디 몸 하나 숨길 데도 없이 탁 트인 강변 벌판에서 격
렬한 천등 번개를 만났을 때면 죽고 싶지는 않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런 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강한 쪽을 선택
하여, 그곳에서 터져나오는 불꽃을 씨앗으로 소설을 쓰고 또 나 자
신의 감동도 획득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 앞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
도 살아남으리라는 단단한 각오였다. 내가 가는 길 앞에 설령 한없
는 부끄러움이 놓여 있다해도,조소와 비난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나는 전력투구해 그것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 길이야말로 여자나
호모가 아닌, 진정한 남자가 걸어 마땅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휘황찬란한 이십대는 이
미 끝나려 하고 있었다. 이사와 소설쓰기만으로 내 청춘이 마감되
려 하고 있었다.
이 길이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또는
삶에 충실했는지,아니면 낭비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분명한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그 시간을 되돌이킬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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