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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25시 [게오르규]

by Casey,Riley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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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판타나 마을
1
"당신이 떠나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스잔나는 요한 모리츠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녀는 남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요한 모리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왜 안 믿는 거지? 모레 새벽이면 떠날 텐데." 하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런 줄은 알아요." 스잔나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울타리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밤 공기는 쌀쌀했고, 시간은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럼 잘 있어." 요한은 여자의 두 손을 끌어내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조금만 더 계세요." 여자가 애원하듯 그를 잡았다.
"더 있으면 뭘 해." 그의 어조에는 단호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너무 늦었어. 난 내일 할 일이 많아."
그녀는 남자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몸을 그에게 더욱 밀착시켰다. 그녀는 잠시 그의 가슴에 뺨을 묻고 비비다가 얼굴을 들었다.
"별들이 참 아름답군요."
그는 스잔나가 무슨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더 있다 가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고작 별 이야기를 할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떼어놓고 빨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 떠나면 적어도 3년 동안은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라도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생각에 같이 별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별을 갖고 있다던데 그게 정말일까요? 사람이 죽으면 그 별도 떨어진다는 게 사실일까요?"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요한은 그렇게 대답하며 이제는 정말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잘 있어!"
"우리별도 저 하늘에 떠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하늘 위가 아니면 우리 마음속에라도 있겠지."
요한은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았다가 가슴에서 떼어놓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채 길 있는 데까지 아무 말도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 스잔나는 그이 옆을 걸으며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저녁에 기다리겠어요."
"비가 안 오면."
스잔나는 좀더 따라가서 비가 오더라도 와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벌써 잰걸음으로 정원 뒷길을 돌아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스잔나는 한참 만에야 엉덩이에 달라붙은 잔 나뭇가지와 덤불을 털어 버리고 마당으로 돌아왔다. 느린 걸음으로 걷던 그녀는 호두나무 밑에 깔려 뭉개진 풀을 바라보았다. 곱게 뭉개진 잔디만이 두 사람의 사랑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요한의 체취가 아직 그녀의 후각에 남아 있었다. 짓눌려 뭉개진 풀 냄새, 담배 냄새, 그리고 버찌씨 냄새.......
요한 모리츠는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그는 검정 군복 바지와 목이 팬 하얀 셔츠 차림에 맨발이었다.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 그는 몇 번이나 휘파람을 멈추고 하품을 했다.
그는 지금 막 헤어진 여자를 생각했다. '스잔나!' 그는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별 이야기라니........., 여자들은 어린애와 같아. 쓸데없는 것만 묻거든.'
그는 또 이틀 후면 떠나게 될 미국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낯선 땅에 대한 동경심과 하찮은 걱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뭐가 뭔지도 모르게 생각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는 다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졸음이 왔다. 어서 집에 돌아가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 일을 끝내야 하는 날이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날이 밝으리라. 요한 모리츠는 걸음을 재촉했다.
2
동이 틀 무렵 요한 모리츠는 마을의 샘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셔츠를 걷어올리고 두 손으로 샘물을 움켜 떠서는 얼굴과 목을 문질러 깨끗이 씻었다.
그는 한길을 걸으면서 새벽의 냉기 어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는 셔츠의 깃을 세우고 한눈에 바라보이는 마을을 살펴보았다. 뽀얀 안개가 마을을 덮고 있었다.
이 마을은 루마니아의 판타나라는 곳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25년 전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금 조그마한 집들과 세 개의 교회―그리스정교와 카톨릭과 그리고 신교―와 세 개의 종루가 있는 이 마을을 바라보면서 어젯밤 스잔나가 마을을 떠나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고 묻던 말을 생각했다. 그 때는 그 질문이 재미있어 껄껄대고 웃으며 자기는 남자다, 그런 생각은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막연한 쓸쓸함이 그를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司祭)의 집은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멀지 않은 길가에 있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요한은 몸을 굽혀 문 밑에 숨겨 둔 열쇠를 꺼냈다. 그 열쇠는 매일 아침 그가 일하러 올 때 들어갈 수 있도록 거기에 감추어 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육중한 참나무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개들이 쫓아 나와 그를 맞아 주며 주위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요한 모리츠가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관에서 일한 지도 벌써 6년이었으므로 이 개들과는 친한 사이였다. 그 6년 동안 요한은 매일같이 사재 댁 일을 하며 사제 댁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오늘로서 그것도 마지막이다. 사과 따는 일로 하루를 보낼 참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임을 받고 사제에게 떠난다는 말을 해서 출발을 알려 드리리라. 사제는 그가 떠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헛간에 광주리들을 꺼내다 수레에 실었다. 사제는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하얀 무명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미루어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이었다. 모리츠는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그는 광주리를 놓고 두 손을 문질러 털고는 발코니에 올라가 노인이 들고 있던 물이 가득 든 물병을 받아 들었다.
"기다리세요. 제가 부어 드리죠."
요한 모리츠는 사제의 손에 물을 부어 주었다. 그는 길고도 가느다란 사제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하얀 것이 꼭 여자 손가락 같았다. 그는 노인이 수염이며 목이며 이마에다 비누질하는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보는 데 정신이 팔려 물을 붓는 것도 잊고 있었다. 사제는 비누거품 투성이가 된 채 두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츠는 무슨 죄나 지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알렉산드르 코르가는 이 마을의 사제였다. 50세밖에 안 되었지만 수염과 머리카락은 은빛처럼 희었다. 훤칠하게 크고 여위어 뼈만 앙상한 그의 신체는 그리스정교 교회의 성상에서 볼 수 있는 성인들의 모습과 같았다. 다시 말하면 틀림없는 노인의 몸매였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치거나 말하는 걸 들으면 누구나 사제가 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제는 세수를 끝내자 올이 굵은 거친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았다. 요한은 손에 물병을 든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사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하고 요한은 말했다.
"기다려 주게. 나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 사제는 요한 모리츠의 손에 물병을 받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다가 문턱에서 돌아보며 "나도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자네가 들으면 아주 기뻐할 얘기야. 아무튼 수레에 광주리를 싣고 말을 매어 놓게나."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한나절 내내 요한 모리츠와 코르가 사제는 광주리에 사과를 따 담았다. 둘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햇볕이 그들의 어깨에 와 닿자 사제는 일손을 멈추었다. 그는 피곤해서 두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좀 쉬었다 하지."
"그렇게 하죠."
그들은 사과가 가득 든 자루 쪽으로 가서 그 위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제는 늘 요한을 생각하여 가지고 오는 담뱃갑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그에게 권했다.
"할 얘기가 있다고?" 사제가 물었다.
"네. 저........"
요한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냥개비를 풀숲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불이 꺼져 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가 떠난다는 얘기를 사제에게 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요한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얘기하겠네." 사제가 말을 꺼냈다. 요한은 자기가 먼저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엌 옆에 있는 작은 방 말일세. 그 방이 비어 있으니 자네가 쓰도록 하게. 집사람이 칠도 다시 하고 창에 커튼도 달아 놓고 또 깨끗한 이부자리도 갖다 놓았네. 자네 집은 아무래도 너무 좁은 것 같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네가 단칸방 하나에서 모두 살고 있으니 말이야. 내일 아침에 올 때는 자네 물건들을 아주 챙겨 가지고 오게나."
"내일은 못 오는데요." 요한이 말했다.
"그렇다면 모레면 어떤가?" 그 방은 오늘부터 자네 방이야."
"앞으로 못 올 것 같습니다. 저는 내일 미국으로 떠나거든요......."
"내일 떠난다고?" 사제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네, 내일 새벽이에요."
요한의 음성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편지가 왔어요. 콘스탄차에 와 있는 미국행 배가 내일 떠난다고 합니다."
요한이 미국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사제도 잘 알고 있었다. 젊은 농부들이 수도 없이 미국으로 갔다가 2,3년 후에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와 마을에서 최고급 저택과 토지를 사곤했다.
사제는 요한이 떠난다는 사실에 불만은 없었다. 몇 년 후에는 그도 돈을 벌어 갖고 돌아와 좋은 땅을 갖게 될 테니까. 사제가 놀란 것은 그의 출발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둘이서 매일 함께 일을 했으면서도 요한은 그 일을 여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서야 편지를 받았어요." 요한은 변명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자네 혼자 가나?"
"아뇨, 이온 키챠와 같이 갑니다. 배에서 우리를 인부로 채용해 준대요. 화부 일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이 500레이만 내면 된다고 합니다. 키챠의 친구 하나가 콘스탄차 부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모든 일을 주선해 주었어요."
요한이 떠난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었으나 사제는 아끼는 마음으로 그이 행운을 빌었다. 요한은 젊고 건실하게 일을 해 왔다. 마음도 착하고 정직했으나 집안이 너무 가난했다. 단 1에이커의 땅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일을 계속했다. 노인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요한은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의 결심이 경솔했던 것 같기도 해서 후회 스럽기까지 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노임을 받아 든 요한은 두 눈을 내리깔고 사제 앞에 공손히 섰다. 한참 그렇게 서 있었다. 떠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곳에 도착하거든 잊지 말고 편지나 하게. 그리고 내일 아침엔 내가 약속한 꾸러미를 가지러 오게. 도중에서 먹을 것을 마련해 줄 테니." 사제는 100레이 지폐 다섯 장을 그에게 주며 말했다.
"새벽에 와서 가만히 창을 두드리게. 집사람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자들이란 가끔 노랑이가 되거든. 오늘 저녁에 모든 걸 준비해 두겠네. 언제 떠나지?"
"새벽에 이온 키챠를 동구 밖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겨우 우리 집에 들를 시간뿐이겠구먼. 정 시간이 없으면 오늘 저녁에 와도 되겠지만........."
"내일 들르겠습니다." 요한은 간략하게 대답했다.
오늘밤에는 스잔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요한 모리츠는 사제관을 나왔다.
3
코르가 사제는 준비된 식량이 든 보따리를 창 밑 벽에다 기대어 놓고 램프를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들기 전에 그는 요한 모리츠와 그가 할 미국 여행을 생각해 보았다. 음식 보따리를 챙기면서 그는 마치 자기가 떠나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30년 전에 자기도 짐을 꾸린 일이 있었다. 바로 신학교 졸업장을 받던 무렵이었다.
그는 미시간 주의 그리스정교 거류민단의 선교사로 부임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떠나기 1주일 전에 그는 그 부임을 취소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지금의 아내를 알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그는 이 마을의 사제로 일해왔다.
판타나 마을은 작고, 생활은 가난했다. 가끔 그는 미국으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에게 하나의 꿈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으로 가는 농부가 있을 때마다 그는 담배와 먹을 것과 얼마간의 돈을 주고 그 곳에 도착하는 대로 소식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아내 모르게 해 왔다. 아내가 알았다 해도 잔소리는 안 하겠지만, 노인은 미국을 생각할 때마다 아내에게 어떤 부정한 짓이라도 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가 미국행을 포기한 것은 바로 자기 아내를 위하는 마음에서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 갈등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가 미국으로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우와 판이하게 달랐다. 요한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한 모리츠와 함께 자기 자신의 일부가 신세계로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코르가 사제는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불을 켰다. 그는 3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서재로 가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그 책을 펴기 전에 사제는 책이 꽉 들어찬 책장을 죽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책 들이, 그리고 다른 벽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고전들이 꽂혀 있었다. 지난 30년 이 마을에 묻혀 있는 동안 그 책들은 모두 그이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가끔 왜 대학으로 가고 싶지 않았는지 자신에게 묻곤 했다. 이아시와 부쿠레슈티에 있는 친구들이 대학 교수로 가라고 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이나 교회사 강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판타나에서는 일요일과 제일(祭日)에 미사를 올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기의 땅과 꿀벌과 과수원을 가꾸는 데 열중했다.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에게 닥치는 운명에 순응했다. 단 한번 운명에 거역해 보려고 한 적이 있긴 했다.
미국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출발 준비가 다 되어 있었지만 뜻하지 않던 일이 생겨 그는 결국 떠나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 그는 미국으로 갈 생각을 단념해 버린 것이다.
'30년 전 떠나지 않은 걸 정말 후회하지 않는단 말인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요한 모리츠가 떠나는 오늘 나는 왜 이렇게도 흥분하는 걸까?' 사제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남아 있었던 걸 후회하는 건 아니야. 그것은 우리가 꿈속에서 사실이라고 믿었던 그 무엇,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실제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막연한 향수일 뿐이야. 그래서 만약 우리가 실제로 만져 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곧 꿈속에서 그리던 그 무엇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찾고 있던 것은 어쩌면 미국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내게 고민과 갈등만을 안겨다 주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미국을 모르는 것이 실제로 아는 것보다 실망을 덜 안겨 주겠지.'
그래도 코르가 사제는 잠이 오지 않았다. 분명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기 자신이 동구 밖에서 이온 키챠를 만나 콘스탄차로 가는 것처럼 동이 트는 것이 초조하게 기다려졌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캄캄했다. 그러나 닭 울음소리가 새벽임을 알려 주었다.
적막에 싸인 마을은 안개로 자욱했다. 사제는 보따리를 끄르고 탁자 위에 놓은 담뱃갑은 그 속에 넣었다.
'요한이 가 버리면 줄 사람도 없겠구나. 그에게 주려고 담배를 사곤 했는데.' 하고 사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침 햇살이 벌써 들창에 비쳤다.
'서둘러야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 텐데.'
한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집 앞을 지나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는 발코니에 나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물을 부어 주던 요한은 이제 영원히 떠나는 것이었다.
해가 떴는데도 요한은 오지 않았다. 사제는 아침 식사를 기다리면서 요한이 늦잠을 자서 보따리를 가지러 올 시간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거참 안됐군! 적어도 3주일은 먹을 수 있을 텐데......... 저 쪽에 가서도 며칠 동안 먹을 것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알렉산드르, 아침 드세요." 아내가 문 앞에 와서 말했다.
"곧 가지."
그는 가슴을 죄며 그 어떤 일을 포기하고 또 영원히 그 일은 단념해야 할 것 같은 슬픈 마음으로 그 보따리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비록 자기의 분신일망정 미국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린 셈이다. 그는 30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
'내가 꾸려 놓은 보따리를 요한 모리츠가 가지고 갔더라면 나도 떠나는 기분이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곧 나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가 오지 않아서 퍽 유감스럽군.'
4
사제관을 나온 요한은 길가에 있는 샘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맑은 물로 세수를 한 후 니콜라이 폴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 저편을 향해 걸었다. 니콜라이 폴피리는 산기슭에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팔려고 내놓고 있었다.
요한은 마당으로 들어갔다.
"내일 난 미국으로 갑니다." 요한은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는 이 땅을 사는데 충분한 돈을 지니게 될 겁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계약금을 걸어 놓고 싶어서 왔습니다."
"거기서 얼마 동안이나 있을 작정인가?"
"내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요. 2, 3년 정도 걸리겠죠."
"그래 3년이면 충분하겠지. 3년 이상 넘긴 사람은 없으니까 미국에 가면 돈을 벌기가 쉬운 모양이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요한이 물었다.
"난 지금은 돈이 필요하지 않아. 3년 후에 자네가 5만레이를 벌어 오면 그 밭은 자네 것이 될 걸세. 누구에게도 팔지 않고 자넬 기다리겠네."
그러나 요한은 바지 주머니에 지폐 한 뭉치를 꺼내어 마루 끝에 올려놓았다.
"자, 3천레이요, 계약금을 받아 두시는 게 좋겠어요."
요한 모리츠는 니콜라이 폴피리와 매매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뜻의 악수를 하고 그 집을 나왔다.
밖은 아직 어둡지 않았다. 그는 땅을 다시 돌아보고 싶었다. 이미 수십 번이나 가 본 땅이라 잘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은 여느때와는 의미가 다르다. 이제 그 밭은 자기의 것이 된 거나 다름없다. 남은 돈을 지불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5
요한 모리츠는 밭을 가로질러 달리다시피 걸었다. 셔츠가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다. 마음이 급해서 천천히 갈 수가 없었다.
요한은 참나무 숲에서 멈춰 섰다. 그의 토지는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산기슭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자기 어깨 높이까지 키가 자란 옥수수 밭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집 한 채와 마당에 과수원쯤은 들어앉을 수 있는 크기의 땅이었다. 눈어림으로 땅의 길이와 넓이를 재어 보았다. 그는 옥수수 너머로 지붕과 도르래가 달린 우물의 긴 기둥, 그리고 참나무로 된 큰 대문과 외양간이 솟아오르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러한 것들이 자주 솟아오르곤 했지만 지금처럼 이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그대로 정말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한 모리츠는 싱긋이 웃었다.
바람에 옥수수 밭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히죽이 웃었다. 몸을 굽혀서 흙 한줌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온기는 체온과 같았다. 마치 참새를 손에 쥘 대 느껴지는 온기와 같은 것이었다. 모리츠는 다시 몸을 굽혀 오른손으로 흙을 움켜쥐었다.
그는 옥수수 밭을 지나 숲 쪽으로 갔다. 그러나 밭 한가운데에 와서 다시 몸을 구부리고 흙을 움켜쥐었다.
'이것도 따뜻하군!' 요한은 그 흙을 뺨에다 문질렀다. 싱그러운 냄새가 풍겨왔다. '담배 냄새군. 흙 냄새가 참 좋구나.'
요한 모리츠는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향기로운 흙 냄새를 가슴 속 깊이 몇 번이나 들이마셨다.
'스잔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요한은 휘파람을 불며 걷기 시작했다.
6
스잔나의 아버지 요르그단의 집은 판타나 마을 끝에 있었다. 빨간 지붕의 커다란 집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정원을 지나 마당 쪽으로 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울타리 틈으로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요르그 요르단은 발코니에 나와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그는 덧문들을 닫고 빗장을 건 후 차례로 자물쇠를 채웠다. 요한은 그의 모든 거동을 살폈다. 덧문과 들창을 잠그고 나서도 요르그 요르단은 안심이 안 되는지 사방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나무 계단을 내려왔는데, 그러자 계단이 거인의 몸무게 밑에서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웃옷에 승마용 바지를 입고 짧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요르그 요르단은 집 앞의 정원을 지나 대문 쪽으로 갔다. 그는 난폭하게 빗장을 지르고 나서는 자물쇠를 두 번 돌리더니 육중한 몸을 흔들면서 되돌아갔다. 마치 어둠 속에서 누구를 찾기라도 하듯이 삽으로 두리번거리며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그는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요르그 요르단은 사냥에서 얻은 트로피와 박제한 사슴, 이리와 금의 머리로 벽을 뒤덮은 침실로 들어갔다. 벽의 한복판, 박제한 독수리와 사슴의 뿔들 사이에는 엽총과 권총, 그리고 탄약대가 걸려 있었다. 큼직한 침댓가에는 두 장의 검은 모피가 깔려 있었다. 그는 장화를 신은 채 곰 가죽을 밟고 엽총 한 자루를 가져다 침대에 기대 놓았다. 그러고는 서랍에서 권총과 초, 성냥갑을 끄집어내어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더니, 침대 끝에 걸터앉아 숨을 헐떡이면서 장화를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매일 밤 어둠 속에서도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도록 같은 장소에다 그것들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옷을 벗고 마치 눈 속에 빠진 곰처럼 하얀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요한 모리츠는 그의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불빛이 약해지면서 바들바들 떨더니 이내 꺼져 버렸다. 창문이 괴물의 아가리처럼 시꺼멓게 보였다.
요르그의 아내 요란다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으나, 그 불빛은 약하고 희미했다. 비단으로 된 갓을 등불에 씌워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요란다를 불행한 여자라고 말했다. 그녀는 25년 전에 요르그 요르단과 같이 이 마을에 왔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와서 여관에 머물렀는데,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아주 먼 곳에서 온 것만은 분명했다. 여자는 루마니아 인이었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헝가리에서 왔는걸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둘이 모두 긴 털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운 고기와 포도주로 식사를 하고 여관의 주인 방에서 잤다. 남자는 식충이처럼 잘 먹어 대는 편이었지만, 여자는 아주 적게 먹는 편이어서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3일이 지난 다음 두 사람이 이 마을에 영주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몇 주일 후에 그들이 그 여관을 샀다.
이 마을에 왔을 당시 요르그 요르단은 루마니아말을 한마디도 몰랐다. 지금은 능숙해졌지만 마을의 어느 누구와도 가까이 사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딸 수잔나가 다른 농민들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을의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스잔나는 도시에 가서 공부를 했다. 농민들이 요란다를 볼 수 있는 때라고는 그리스정교 교회에서와 자그마한 몸을 웅크린 모습으로 요르그 요르단의 옆에 앉아 마차로 시내에 갈 때뿐이었다. 거인 같은 남자는 그녀의 두 배나 컸다. 그녀는 잘 다듬은 비단결 같은 금발에 파란눈을 하고 있었다. 스잔나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어머니를 꼭 닮았다. 마을에서 요르그 요르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어느 해 겨울 그는 자기 집에 침입하려던 사람을 죽였다. 사냥총으로 양미간을 똑바로 꿰뚫어 죽였던 것이다. 헌병은 요르그 요르단의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밤중에 돈을 훔치려고 자기 집에 들어온 사람은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헌병의 견해에 동감하지 않았다.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이야기는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은 먼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요한 모리츠는 울타리 틈으로, 불빛이 가늘어지면서 잠시 떨다가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깔때기 모양으로 두 손을 입가에 대고 "부엉! 부엉!"하고 소리를 냈다. 요한의 부엉이 울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고 메아리져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깃들였다.
이윽고 덧문이 열리고 스잔나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스잔나는 발끝으로 걸어서 정원을 지나 울타리 사이로 빠져 나와 요한 모리츠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왔다.
7
"하필이면 왜 부엉이 소리를 신호로 택했어요?" 스잔나가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요한은 그녀가 울타리 저 쪽에서 나오자 키스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피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녀는 겁에 질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럼 어떻게 부르란 말야?"
"당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지만 부엉이 소리는 싫어요.
부엉이 소리는 불행을 뜻하는 거예요. 죽음을 알린대요."
"그런 말은 늙은이들이나 하는 소리야.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또 날씨가 어떠하든 계절에 상관없이 우는 새는 부엉이뿐이지. 다른 새가 있으면 말해 봐. 여름에만 우는 꾀꼬리 소리를 내면 다신 아버지는 대뜸 그게 남자라는 걸 알아차릴걸? 그 거인이 당신을 부르는 자가 나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요한이 말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부엉이 소리는 불행을 가져온다니까 왠지 싫어서 그래요."
"내 잘못은 아냐. 죽음과는 관계없이 사시사철 우는 새는 없을까? 어쨌든 다투지 말자고. 내가 당신을 불러내는 것도 오늘밤이 마지막이잖아. 내일 새벽에는 미국으로 떠나니까. 돌아오는 날엔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야 그 때엔  울타리 뒤에 숨어서 부엉이 흉내는 내지 않아도 되겠지."
요한은 스잔나를 껴안았다. 그녀도 두 팔로 요한의 목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넉 달 전 그들이 서로 알게 되면서부터 줄곧 만나 온 그 호두나무 아래에 와 있었다. 그는 스잔나를 풀밭에 누이고 자기도 곁에 누웠다. 두 남녀는 뱀처럼, 덩굴진 칡 나무처럼 얽혀들었다. 손과 손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입술을 뜨거운 자기 입술로 내리눌렀다. 둘은 눈을 감았다. 요르그 요르단의 정원 어디에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그들은 꼭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잔나의 푸른 옷이 풀밭 위에 놓여 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게 옷이 구겨지고 얼룩진 걸 보이지 않으려고 옷을 벗어 놓았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벗겨지자 여자의 벗은 어깨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요한은 자기의 셔츠를 벗어 깔아 주었다. 여자의 하얀 어깨에 비해 요한의 가슴은 마치 나무 껍질처럼 꺼멓고 단단했다.
"요한, 떠나지 말아요." 그녀는 애원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그는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미국에 가야만 땅을 살 돈이 생긴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내가 땅이 없으면 결혼할 수도 없고, 집도 땅도 없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3년 후에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오면 그 때 결혼을 하는 거야. 나와 결혼하기 싫단 말이야?"
"물론 결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는 것은 싫어요."
"그럼 무엇으로 땅을 사고?" 요한 모리츠는 쿡쿡 웃었다. "난 벌써 니콜라이 폴피리에게 토지 계약금을 치렀어. 돌아와서 잔금을 치르기로 하고."
요한 모리츠는 폴피리에게 돈을 치른 일과 땅을 보러 갔던 사실, 그리고 그 땅위에 어떤 모양의 집과 외양간과 그밖에 어떤 것들을 만들 것인가를 얘기했다.
"요한, 당신이 정말 간다면 저는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죽을 거예요."
그녀는 요한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한은 다소 화가 난 말투였다.
"그런 예감이 들어요. 제 말을 안 믿어도 좋지만 당신이 돌아왔을 땐 저는 이미 죽고 없을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 당신은 죽지 않아. 오늘처럼 당신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있을 텐데 뭘. 그러니까 당신 걱정을 안 해도 되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더욱이 남의 집에 고용살이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와 같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래?" 요한 모리츠는 스잔나에게 키스를 했다. 여자의 입술은 눈물에 젖어 찝찔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얘기해도 믿어 주지 않을 테니 더 말하지 않겠어요."
"믿을 테니까 얘기해 봐." 요한은 스잔나를 달랬다.
"아버지가 나를 죽일 것 같아요." 그녀는 숨죽여 흐느끼며 말했다.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 아버지가 어째서 스잔나를 죽인다는 거야?" 요한의 목소리는 격해졌다. 
"당신이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난 무서워서 못 견디겠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가 눈치를 챈 것 같아요. 그 때문에 나를 죽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아버지가 무얼 눈치챘다는 거야?"
"우리들의 관계 말예요."
요한 모리츠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스잔나의 몸은 풀밭 위에서 마치 대리석처럼 희게 빛났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그러진 않았어요."
"그럼 당신을 꾸짖기라도 했나?"
"꾸짖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눈치챘다는 걸 알았지?"
그녀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단순히 내 짐작만은 아니에요. 오늘 점심때 음식을 들고 식탁에 갔을 때 아버지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셨어요. 증오하는 눈초리였어요. 그러더니 '벽 쪽으로 돌아서 봐?' 하고 소리를 지르시지 않겠어요. 제가 돌아섰을 때 허리를 살펴보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 나서 '창문 쪽으로 돌아서 봐!' 하시잖아요. 또다시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이번엔 곁눈질로 배를 살펴보는 거예요. 또 허리 쪽도요. 마치 말을 검사하듯 자세히 관찰하시더니 화를 내시며 '저리 가, 이 화냥년!' 하고 소리를 치셨어요. 그리고 진지도 드시지 않았어요. 저는 밖으로 나오면서 아버지가 눈치를 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는 모든 걸 아세요. 나는 자라면서 야단도 많이 듣고 숱하게 얻어맞기도 했어요. 피가 날 때가지 때린 적도 있거든요. 그렇지만 '화냥년!' 하고 소리치셨단 말예요"
"어떻게 알았을까?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요한이 말했다.
"본 적은 없지만 느낄 수 있나 봐요."
"하지만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나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요."
요한 모리츠는 웃으면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망원경으로 봤으면 몰라도 알 게 뭐야. 여자가 연애를 한다고 밖으로 드러나나? 공연한 지레짐작이야!"
"보통 사람이면 몰라도 우리 아버지는 달라요. 말의 경우에도 알아보는 걸요. 쳐다보기만 해도 새끼를 뱄는지 알기 때문에 친구들이 의아스럽게 여겨요."
"그럼 당신 어린애를 가졌어?"
"그렇진 않아요."
"그렇다면 걱정할 거 없잖아. 2,3년 뒤에 내가 돈을 벌어 갖고 돌아오면 땅을 사고, 우린 코르가 사제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단 말이야. 그리고 예쁜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 거야. 그렇잖아, 스잔나?"
그녀는 무서운 듯이 몸을 떨며 힘껏 그에게 매달렸다.
"당신만 곁에 있다면 난 무서울 게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 버린다면 난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요. 아버지 총에 죽지 않는다 해도 난 당신이 올 때가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당신이 안 계시는 동안 겁에 질려 죽을 거예요. 매일 밤 방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자도 우리 아버지 발소리만 나면 베개에 머리를 묻어 버려요. 그만큼 무서워요."
요한 모리츠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그녀를 끌어당겨 자기 품속에 안았다. 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했다. 그는 그녀가 더 이상 울지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은 닭 울음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잔나는 밤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옷을 주워 입었다. 요한은 셔츠를 걸치고 스잔나의 손을 잡고 울타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는 울타리 사이로 빠져 들어가는 스잔나를 바라보았다. 울타리 사이로 들어간 스잔나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요한 모리츠는 무슨 일이 생겼나 보려고 몸을 굽혔으나, 그녀는 이미 마당 안에 있지 않고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새 그녀가 되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파르르 떨고 있었고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요한 모리츠는 울타리 틈으로 마당을 바라보았다.
스잔나의 방에 불이 켜진 채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잠옷을 입은 요르그 요르단이 손에 등불을 들고 마치 무엇을 찾는 듯이 왔다갔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한은 그녀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도록 그녀를 바싹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모든 광경을 본 것이다. 요한 모리츠에게 매달려 있는 그녀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울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요르그 요르단의 야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마구 욕설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거구인 그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림자 옆에 요란다의 가냘픈 그림자가 보였다. 요란다는 요르그 요르단 옆에 잠시 동안 서 있었다. 거인은 곧 창을 등지고 돌아섰다. 요한은 요란다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요란다의 비명이 들렸는데, 그 비명은 살을 찢는 듯이 소름이 끼치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불이 꺼졌다.
창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지만 어두웠다. 점점 더 절망적인 요란다의 비명이 어둠을 꿰뚫고 밤 공기를 진동시켰다. 비명은 차차 약해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순간 질식하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요한과 스잔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비명이 멎는가 싶더니 무엇이 방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으나 불이 꺼진 방에서 요르단이 쓰러진 요란다를 발로 짓밟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를 죽이나 봐요!"
스잔나는 요한의 품에서 빠져 나와 마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힘주어 여자를 껴안고 달래려고 애썼다. 그는 팔의 힘을 풀었다. 그도 맞아죽어 가는 여자를 구하러 달려가고 싶었다. 그대로 있으면 때를 놓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란다를 구하러 달려가지는 못했다. 그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요르그 요르단, 그 거인은 총을 갖고 있었고, 더욱이 황소 같았으므로 맨손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스잔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밭을 지나갔다. 그에게는 금방이라도 거인이 총을 들고 스잔나를 찾으러 나올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녀를 아주 멀리, 될 수 있는 한 이 빨간 벽돌집에서 멀리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달렸다. 자기가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이 여자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거인의 발소리가 위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8
요한 모리츠는 길을 피해 밭을 가로질러 달렸다. 몇 번이나 흙구덩이를 디뎌 넘어질 뻔했다. 기운이 빠졌다. 몸에 힘이 쭉 바지고 두 팔이 축 처지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을 달린 것 같았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옥수수 밭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스잔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스잔나를 축축한 땅 위에 누이고 그녀의 옷으로 무릎을 덮어 주고 두 팔을 뻗쳐 주었다. 그는 주위에 있는 큰 옥수숫잎을 따서 베개를 만들어 스잔나의 머리 밑에 받쳐 주고, 더 많은 옥수숫잎을 따서 푹신한 자리를 만들어 깔아 주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꽤 오래 달린 모양이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어느새 푸르스름했다. 주위를 돌아본 그는 그들이 참나무 숲에서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자 그는 사지가 떨렸다. 꿈이 아니었다. 스잔나와 자기는 니콜라이 폴피리의 밭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무작정 달린 도피는 무의식중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이다. 스잔나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그가 지금 막 뜯은 옥수숫잎은, 그가 지금 깔고 누워 있는 잎은 바로 그가 어제 계약금을 치른 그 땅의 옥수숫잎이었다.
눈물이 땀과 뒤범벅이 되어 뺨에 흘러내렸다. 이제는 결코 자기 것이 되지 못할 이 땅 위에서 요한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국으로 떠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9
요한 모리츠가 서 있는 곳에서는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집들이 보였다. 그는 그 집들을 마을의 이 쪽에서 저 쪽까지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발 밑 옥수숫잎 위에 누어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집들을 한 채 한 채 살피면서 그는 어디에 그녀를 숨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숨어 있을 곳을 찾아야 했다. 자신은 이미 미국으로 떠날 것을 단념하고 땅도 포기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며, 또한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숨어 있을 곳을 찾아야만 했다.
스잔나를 받아 줄 수 있는 집은 두 집뿐이었다. 자기 집과 코르가 사제관이었다. 그 밖의 집들은 받아 줄 가망이 없었다. 농민들은 요르그 요르단을 무서워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집도 방이 하나뿐이어서 스잔나가 차지할 잠자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식도 하지 않은 여자를 코르가 사제관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코르가 사제가 스잔나를 유숙시킨다면 틀림없이 요르그 요르단이 권총을 들고 와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요한은 그걸 잘 알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잔나를 이대로 들판에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요한 모리츠는 한참 생각을 하다가 스잔나를 품에 안고 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스잔나의 얼굴은 창백했다.
'겁을 먹어 병이 났나 보군.' 이런 생각이 들자 요한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잔나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동이 느릿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시바삐 마을로 들어가고 싶었다.
10
요한 모리츠가 자기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솟아올라 있었다. 그는 베란다의 벽에 스잔나를 기대어 앉혀 놓고 해가 뜨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동구 밖에선 이온 키챠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는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어 태양을 등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양친에게 스잔나를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양친은 아직 잠자리에 있었다.
요한 모리츠의 어머니인 아리스티샤는 성미가 급한 여자였다. 요한은 어머니를 피해 아버지한테 직접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턱을 넘어서자 아리스티샤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보따리를 가지러 왔니? 문간에 놓아두었다."
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간이처럼 왜 그러고 섰냐? 어서 나에게 키스하고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가거라. 거기서 돈을 다 써버리면 안 돼. 어떡하든 모아 가지고 돌아와야지."
"미국엔 가지 않겠어요." 요한이 대답했다.
"안 간다고?" 노파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가요."
"키챠도 안 가냐?"
"그는 갑니다."
아리스티샤는 잘은 모르지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옷을 걸쳤다.
"왜? 키챠하고 다투기라고 했냐?"
"아녜요."
"그럼 이유가 뭐냐?"
아리스티샤는 방 한가운데까지 왔다. 그녀는 치미는 화를 누를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들에게 다가왔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만 장가를 들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래서 미국 가는 걸 그만뒀어요."
요한의 목소리는 떨었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리스티샤는 아들의 어깨를 움켜잡고 그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어요. 어머니께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하고 요한은 말했다.
"아냐, 넌 나한테 얘길 해야 해! 넌 아버지 뱃속에서 나온 게 아니고 내 뱃속에서 나왔단 말이야."
"조용히 해!" 하고 이번에는 아버지가 이불 속에서 머리를 들며 말했다. 그는 아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리스티샤는 남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티샤는 자기 배를 두 손으로 두드리며 요한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요한, 똑똑히 알아 둬! 넌 이 어미 뱃속에서 나와서 내 젖을 빨아먹고 자랐어. 배은망덕한 녀석같은이라고! 그래, 이젠 나하곤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고?" 아리스티샤는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한테도 말씀드리겠어요. 하여간 진정하세요." 요한은 늙은 어머니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침댓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녀는 몹시 상심했으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장가를 든다는 거냐?" 그녀는 큰 소리로 물었다.
"곧 말씀드릴 테니 제발 좀 진정하세요."
"누구에게 장가들겠다는 건지 빨리 알고 싶다. 난 네 어머니니까 네가 누구와 결혼을 하려는 건지 알 권리가 있어."
"얘기해 봐라. 네가 그 말을 해야 조용해질 거야." 늙은 아버지가 거들었다.
아리스티샤를 다시 격해질 기미가 보였다. 요한 모리츠는 '스잔나'라는 이름이 어머니를 진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흥분시키게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요르그 요르단 씨의 딸인 스잔나예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리스티샤는 아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를 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껴안고 키스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네가 미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이유를 알겠다." 아리시티샤는 아들의 뺨에 한참 동안 키스를 퍼부었다. "하긴 말이지, 너는 미국까지 가서 소나 말처럼 일을 하고 몇 년 후에 지치고 병든 몸으로 주머니에 고작 몇천 레이쯤 넣어 가지고 돌아올 그런 바보는 아니지. 부잣집 딸에게 장가들라던 내 말을 명심했구나." 그녀는 기쁨에 들떠 눈을 반짝였다.
"나도 이젠 부자가 되겠지. 비로드 옷을 입고 마차도 탈 게고. 난 요르그 요르단의 집에서 살 테다. 그건 나, 아리스티샤의 당연한 권리야. 바로 내가 널 영리한 미남자로 낳아 주었기 때문에 네가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벽돌집에다 지하실이 있고 많은 토지와 마차, 그리고 말들을 가지고 있는 집의 처녀를 홀려 장가들 수 있게 된 거야."
"조용하라니까!"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도 감격했던 것이다. 요르그 요르단의 많은 재산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는 누운 채 담배 한 대를 말았다.
"난 네 장인인 요르그 요르단 씨 집에서 살겠어. 당신은 여기서 살구려." 아리스티샤가 남편에게 말했다. "난 내 아들 곁에서 살아야 해요. 며느리한테 이런 저런 얘기를 할수 있는 사람이 나 이외에 누가 또 있겠소?"
"어머니, 얘기가 또 있어요." 요한이 말했다.
"얘야, 얼마든지 말하거라. 이 어미가 다 들어 줄 테니."
"끝까지 조용히 들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모든 걸 약속하마." 아리스티샤는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머니, 전 요르그 요르단 씨의 승낙 없이 스잔나와 결혼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문제는 네가 그 애와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난 그 부자인 요르그 요르단의 딸의 시어머니가 되는 거니까, 요르단이 승낙하든 말든 그것은 별로 문제가 안 돼."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시어머니는 되시겠지만 절대로 부자가 되실 수는 없을 거예요."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그러면 누가 그 재산을 물려받는단 말이냐?" 아리스티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요르그 요르단에게는 딸 하나뿐인데, 설마 지참금도 없이 시집을 보내겠니? 그 집 지하실에는 금화가 가득 든 항아리가 묻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넌 지참금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그 일은 내가 맡을게. 넌 그런 일은 잘 모를 테니까 말이다."
"어머니, 전 스잔나와 결혼하는 거지 그녀의 돈과 결혼하는 게 아니에요."
"돈보다 계집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냐?"
"그래요."
"바보 같은 녀석! 하나 네 마음은 알겠다. 여하튼 내게 맡겨둬 난 남한테 이용당하진 않을 테니." 아리스티샤는 벌써 한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요르그 요르단과 흥정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가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해 주자 아리스티샤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뭐라고? 그 애가 아버지에게로 영영 못 돌아간다고?"
"그래요, 돌아갔다간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겁니다."
"그래, 그럴 거다. 그 애 아버진 능히 그럴 사람이야." 아버지가 말했다. "모리츠의 말이 옳아. 그 녀석은 정말 짐승 같아. 화가 나면 아무에게나 총질을 하는 놈이니까. 그러면서도 자기 두 눈보다 말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고 믿고 있으니 모를 일이야. 그러니 집에서 뛰쳐나온 딸이 되돌아간다면 자기 딸이라도 능히 죽일거야."
"아버지께서 이해를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요한이 말했다.
"일이 그쯤 됐으면 결과야 뻔하지. 난 그 자가 어떤 작자인지 잘 알고 있어."
"그래도 며칠 후에는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내가 그 애를 데리고 갈 테니 너무 걱정 말아라. 설마 자기 딸인데 죽이기야 하겠니?" 아리스티샤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듯 말했다.
"스잔나는 돌아가지 못해요. 제가 보내지 않겠어요."
"그 애가 돈이 없으면 넌 어떻게 할거냐? 함께 굶어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널려 있는 게 여자야. 어떤 남자가 지참금도 없는 여자를 색시로 얻든? 요한, 너 정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리스티샤는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
"지참금이 없어도 전 스잔나와 결혼하겠어요."
"완전히 미쳤구나! 계집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다 포기하다니. 더욱이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말괄량이 계집 때문에 모든 걸 팽개쳐?"
"네 어미 말이 옳다. 바보 같은 짓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거라. 갔다오면 얼마 안 되는 토지라고 갖게 될 거고, 그러면 거기다 집도 짓고 장가도 들 수 있을 테니. 여자는 수두룩하다. 얼른 가거라!" 아버지가 말했다.
"가지 않겠어요.!"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러니? 키챠는 아직 동구 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해가 뜬 지 얼마 안 돼. 빨리 가면 만날 수 있을 게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녀를 버려 두고 미국으로 가라는 겁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네, 아버지?"
"그 애가 어디에 있다는 거냐?" 아리스티샤가 물었다.
"문 밖에 있어요."
요한의 대답에 두 늙은이는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리스티샤가 스잔나를 보러 나가려 하자, 요한은 문을 막아서며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 제발 부탁이에요. 스잔나를 며칠 동안만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제가 다른 곳을 구할 때까지만요. 그녀는 이제 어머니의 며느리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산단 말이냐?" 어머니는 또다시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넌 요르그 요르단이 쳐들어와서 네 아비 어미를 죽여도 좋단 말이니?"
"너도 알다시피 여긴 우리 식구만 살기도 비좁다. 어디다 그녀를 재우겠단 말이냐? 애야, 그건 안 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거들었다.
"흥, 잘 한다! 이젠 그 년에게 먹을 것까지 뺏기게 생겼구나. 우리는 굶고?" 아리스티샤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머니로부터는 호통이 내릴 거라는 각오를 했었지만, 아버지까지 어머니편을 들리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것이다.
"그럼 스잔나를 오늘 저녁까지 만이라도 여기 있게 해 주세요. 당장 데리고 갈데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시내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 보겠습니다. 지금 그녀는 병이 나 있어요. 좀 쉬어야 시내까지 걸어갈 수 있잖겠어요? 어젯밤에 너무 겁을 먹어 병이 났나 봐요."
"집에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굶어 죽어도 좋다면 데려다 놓으렴." 어머니가 말했다.
"먹을건 제가 가져오겠어요 스잔나는 지금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니 우선 잠을 자게 해 주세요."
"네 아버지도 편찮아서 온종일 누워 계셔야 할 텐데, 어디다 그 애를 재우지? 아버지하고 한 침대에 재울까?"
"집안에 재울 수 없으면 저기 바깥 제가 자는 건촛더미 위에 재우겠어요."
"그렇다면 좋아, 그러나 먹을 것은 줄 수가 없구나. 먹을 게 있어야 말이지."
요한은 나가려고 하다가 문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잠깐 동안만 여기 있을 테니 스잔나를 잘 돌봐 주세요. 그녀는 불쌍한 여자니까요."
"이 몹쓸 녀석아! 감히 네가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설교까지 하는 거냐? 달걀이 암탉한테 알 낳는 법을 가르치든? 미국에 돈 벌러 갈 생각은 않고 오히려 군식구 하나를 갖다 맡기고 먹여 달라더니 이제는 설교까지 하는구나!" 아리스티샤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리스티샤는 몸을 굽혀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고 아들을 때리려 했다. 요한은 욕을 먹고 매맞는 일이 예사였다. 매질과 욕지거리를 빼놓으면 그의 어린 시절에 남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머니, 스잔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시죠?" 요한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곧 다녀올게요. 먹을 걸 마련하러 마을에 가 봐야겠어요."
스잔나는 요한이 내려놓은 그대로 꼼짝 않고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요한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깐 마을에 갔다 올게. 좀 자야겠지? 자고 나서 뭘 좀 먹고 둘이서 시내로 가자고."
"여기엔 있을 수 없나요?"
스잔나는 또 걸어야 한다는 것에 질려 물었다. 
"아니야, 이리 와요."
요한은 그녀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 집 뒤에 있는 헛간으로 데리고 가서 건초 위에 뉘었다. 
"한잠 푹 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내까지 걸어갈 수 없을 테니. 여기서 시내까진 20킬로미터는 될 거야."
스잔나는 고맙다는 듯이 그에게 웃어 보였다. 혼자 자게 해 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불덩이 같았고, 귓속이 윙윙거려서 요한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와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못 들은 체하고 대꾸하지 마. 지금 화가 잔뜩 나 계시니까."
이런 말을 남기고 요한 모리츠는 그녀의 곁을 떠났다. 한길로 나와 머리를 돌려 스잔나에게 미소를 보냈지만 그녀는 벌써 눈을 감고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아들이 나가자 곧 방에서 나와 뒤꼍으로 갔다. 그녀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건초 위에 누운 여자의 몸을 훑어보았다. 스잔나가 눈을 떴을 때 아리스티샤의 뾰족한 코와 올리브 빛깔의 쭈글쭈글한 뺨이 보였다. 그녀는 무서워 눈을 돌렸다. 
"내가 요한의 어미다." 하고 노파가 말했다. 
스잔나는 인사 겸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러고는 자기의 푸른 옷을 무릎 아래로 끌어내렸다. 노파가 마치 나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스잔나의 무릎과 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요한과 같이 살고 싶으냐?" 얼굴을 찌푸리면서 노파가 물었다. 
"네." 스잔나가 대답했다.
"그럴 게다. 암말처럼 새끼를 뱄으니."
스잔나는 건촛더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리스티샤가 바짝 다가와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흥, 지참금도 없는 네년을 마누라로 맞아 줄 어리석은 녀석을 찾았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직 일러! 결혼이라니, 당치도 않은 수작 마라. 내 아들하고 잔 것은 화냥년인 네가 좋아서 한 짓이니까."
스잔나는 팔꿈치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나가려고 했지만 아리스티샤가 자기 위에 몸을 굽히고 있었다. 
"야니(요한)는 어딜 갔어요?" 겁먹은 소리로 스잔나가 물었다. 실은 말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니라니? 야니란 사람은 이 집에 없어." 아리스티샤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스잔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노파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누구네 집 야니 말이냐?" 아리스티샤가 다시 물었다. "너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지금 어디에 와 있는 줄도 모르니?"
"이 집 아들 야니 말예요." 스잔나는 더듬거리며 들릴락 말락하게 말했다.
"내 아들 이름은 이온이야." 아리스티샤는 거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어미인 내가 이온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했어. 아무도 내 아들 이름을 고칠 권리는 없어. 알겠니?" 아리스티사는 한 대 후려갈길 듯이 주먹을 쳐들어 보였다. 
"알겠어요." 스잔나는 타협적으로 대하라는 요한 모리츠의 말이 생각나서 덧붙여 말했다. "이온과 야니는 같은 이름인 걸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그 변명이 노파를 더욱더 화나게 했다. 
"아니, 네년이 나한테 내 아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거냐? 대가리를 부숴 놓을까보다. 누구한테 감히 덤비는 게냐? 앙큼한 계집 같으니!"
"화나시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제발 용서하세요." 기가 질린 스잔나는 얼른 빌었다. 
그러나 노파의 두 손은 스잔나의 가냘픈 어깨를 움켜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스잔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요한의 아버지가 잠옷바람으로 달려나왔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그제야 스잔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던 손을 놓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이런 모욕을 받아 본 적 있소? 요 맹랑한 것이 글쎄 나보고 내 아들 이름도 모른다는 군요. 나 원 분해서." 아리스티샤는 몸을 굽혀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대가리를 까놓을까보다. 이 뻔뻔스러운 계집을 뱀 대가리처럼 눌러 박살을 내고 말 테야."
요한의 아버지가 마누라의 손을 붙들었다. "진정해!"
그는 아리스티샤를 문 쪽으로 떼밀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스잔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가엾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만 울어라,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어디 갔어요?" 스잔나가 물었다. 
"곧 돌아올 거다. 걱정 말고 조용히 기다려라."
스잔나는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인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얘야, 내가 꼭 한마디만 충고하겠는데,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는 것이 너를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이야." 하고 노인이 말했다. 스잔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있다간 아리스티샤에게 목이 졸려 죽든지 머리가 깨져 죽을 거야. 꼭 그렇게 되고 말 게다. 피를 본다는 것은 어쨌든 불행한 일이야. 요한이 그것을 본다면 제 어미를 죽이겠다고 날뛸 것이고, 그렇게 되면 큰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불행이 와서는 안 되지 않겠니? 내 말 알아듣겠니!"
"잘 알겠어요." 스잔나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내 생각엔 지금 곧 가는 것이 좋겠구나. 요한이 돌아오기 전에 말이야.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가면 빠르다. 부모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거라. 요한이 돌아오면 적당히 변명해 줄게. 그러면 예전 상태로 돌아가 서로 편안히 지낼 게 아니냐. 세월이 가면 지금의 괴로움은 서로 다 잊을 것이다. 앞날이 창창한데, 다시 한번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렴. 너희 나이 때는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다. 자, 용기를 내어 일어나 가거라!"
스잔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노인이 하는 이야기는 별로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너 정말 안 갈 테냐?" 노인이 다그쳤다. 마음 같아서는 스잔나를 자기가 직접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요한이 용서할 것 같지 않았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일어서며 말했다. 
"불상사가 생긴다면 다 네 잘못이야. 난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했어. 내가 그렇게 일러 줬는데도 그래!"
이 말을 남기고 노인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스잔나는 혼자 있게 되었다. 그 때 요한이 마을에서 우유 한 병을 들고 돌아와 데우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넌 이 늙은이들에게 우유 한 번 갖다 준 적이 있었니? 그러고도 그 갈보년에겐 갖다 주는 군! 이런 꼴을 볼 줄 알았다면 저 놈을 내 품속에 품어 젖을 먹이지 말고 핏덩이였을 때 목을 졸라 죽여 버렸는걸!" 아리스티샤가 소리를 질렀다. 
요한 모리츠는 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춤추는 불길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아리스티샤는 그에게로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저 더러운 년을 내 집에서 당장 데리고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테니. 저 년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목을 졸라 죽여 버릴 테다. 이 손가락으로 눌러서 말이다. 알겠지?"
"이 우유만 마시게 하고 곧 나가겠어요." 요한은 대답했다. 그는 '스잔나의 목을 졸라 죽이겠다.'는 어머니의 손가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우리가 시내로 가 버리면 앞으로는 우릴 보지 못할 거예요."
"귀부인께서 우유를 마시기 전에는 갈 수 없단 말이지?" 아리스티샤가 빈정거렸다. "네 어미는 아침마다 우유를 안 마셔도 되지만 그 더러운 년은 잡수셔야 된단 말이지?"
요한은 불에서 우유병을 집어들었다. 아직 끓지는 않았지만 냉기는 가셔졌다. 그는 두 노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스잔나는 발소리를 듣고 몸이 오싹했다.
"나야! 더운 우유를 가져왔어." 요한은 우유병을 내밀었다. 
"마시고 싶지 않아요." 힘없는 소리로 스잔나가 말했다. 
"그래도 좀 마셔."
스잔나는 요한의 손에서 우유를 받았다. 요한 모리츠는 보따리를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준비해 놓은 보따리, 만일 조금 전에 출발했다면 갖고 갔을 그 보따리였다.
"그 계집과 함께 가는 거냐?" 아리스티샤가 물었다. 
"네."
"잘한다!" 아리스티샤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요한이 침대 밑에 둔 헌 옷가지를 가지러 간사이 아리스티샤는 마당으로 나갔다. 스잔나는 그녀가 자기 쪽으로 오는 걸보고 우유병을 손에 든 채 무서워서 떨었다. 
"일어나!" 아리스티샤는 소리를 질렀다. "네년을 실컷 패 줘야겠다. 잠깐만 기다려. 맛을 좀 봐라!"
아리스티샤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스잔나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때리기 시작했다. 스잔나의 비명을 듣고 요한 모리츠가 재빨리 뛰어나왔다.
"어머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는 고함을 질렀다. 
노파는 증오심에 불타는 시선으로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또 한번 스잔나를 때리고 나서 옥수수 밭으로 달려가 버렸다. 
스잔나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입술과 두 눈은 부어 올랐다. 손에 든 우유 병이 깨져 팔목에 깊은 상처가 났다. 핏방울이 우유와 섞여 푸른 옷에는 큼직한 얼룩이 졌다.
요한 모리츠는 스잔나를 부축하고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보따리를 등에 진 다음 스잔나를 가슴에 안고 마당으로 나왔다.
두 개의 짐은 너무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들고 걸을 수가 없었다. 요한은 가슴에 턱을 붙이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요르그 요르단은 새벽에 일어나 말에게 먹이를 주고 목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게는 말이 여덟 마리 있었는데, 그중 네 필은 오직 승마용으로 마차를 끌지 못하게 했다. 마차를 끌기에는 너무 과분한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털에 가늘고 날쌘 다리를 가진 아라비아 순종이었다. 말은 요르그의 친구였다. 그는 스잔나에게 있었던 일을 말에게 이야기했다. 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괴로움을 전부 이야기했다. 인간들은 그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말들은 거울처럼 맑고 빛나는 커다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내 마누라는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으스러진 채 방바닥에 뻗어 있단다." 말들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말이 잠자코 있는 것이 자기를 나무라는 것만 같아서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곧 병원으로 옮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반시간쯤 지나, 그는 마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요란다는 외투로 둘둘 말려 짐짝처럼 의자 위에 뉘어져 있었다. 그녀는 쿠션에 누워서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병원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그들은 병원 문 앞에서 8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요르그 요르단은 마치 짐짝을 다루듯 그녀가 누워 있는 의자까지 한꺼번에 들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맨 먼저 진찰을 받게 되었다.  
간호사가 외투를 벗기자 의사는 요란다의 퉁퉁 부은 얼굴과 피투성이가 된 몸을 보게 되었다. 요란다는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잠옷밖에 입지 않았는데, 그것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피투성이 짐 꾸러미 같았다. 환자는 말이 없었다.
"누가 때렸나요?"
"그런 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소." 요르그 요르단이 대꾸했다. "다른 일엔 상관 말고 치료나 하시오. 치료해 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이고, 또 내가 병원에 데리고 온 것도 치료를 받기 위해서니까."
요르그 요르단은 그 밖의 다른 설명은 전혀 하려 들지 않았다. 의사는 요란다를 진찰하고 응급 처치를 하기 위해 수술실로 옮겼다. 
"난 바빠서 집에 돌아갈 테니 당신 할 일을 충실히 하시오." 요르그 요르단은 모자를 쓰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필요한 금액을 지불하겠소. 당신이 수술 하기 전에 계산해야 한다면 그래도 좋고, 아니면 넉넉히 놓고 가겠소."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직 돌아가지 말고 좀 기다리시오." 의사가 말했다. 
"왜 기다리라는 거요?" 그는 붙잡는 것이 싫었다. 약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그리고 요란다가 가여웠다. 아내를 때린 것이 후회 스러웠다.
'내가 발로 짓밟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저 의사들은 또 난도질을 하겠구나.'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겉으로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다만 그 곳을 빠져나가 가슴을 새로운 공기로 채우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15분쯤 지났을 때 검사 한 사람이 헌병을 데리고 들어왔다. 검사는 요르그 요르단을 병원의 사무실로 불러 신문을 했다. 이름이 요르그 요르단이 틀림없는가? 주소는 어딘가? 나이는? 그리고 아내를 때린 것이 확실히 자넨가? 검사의 상세한 질문에 요르그 요르단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눈은 흐려 있었다. 검사는 아내에 대한 폭력 행위로 체포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요르그 요르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행하려고 헌병이 어깨에 손을 대자 그는 파랗게 질리며 말했다. 
"나를 감옥으로 데려가는 겁니까?"
"그렇소. 감옥행이오."
"그러면 내 말들, 저기 마차에 매어 현관 앞에 세워 둔 내 말들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검사는 힐끔 헌병을 쳐다보았다. 
"돌봐 줄 사람이 없소?"
"아무도 없습니다." 요르그 요르단이 대답했다. 
"소방대에 맡기지. 소방대는 다른 말들도 있으니까 잘 돌봐 주겠지. 감옥에는 말까지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헌병이 말했다. 
검사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준 헌병에게 미소로 치하했다. 그는 그 말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검사는 4,5일 전에 취임한 다미앵이라는 사람으로, 이번 일은 그가 처음으로 담당한 사건이었다. 
점심때 그가 점심을 먹으려는데, 요르그 요르단이 감방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을 기도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간수장의 보고는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죄수는 병원에서 언명하기를 자기 소유의 아라비아 순종 말 네 필이 굶어 죽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참을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것임. 아마 그 죄수는 굉장한 애마가인 것으로 사료되며, 생명이 위독함.
그와 같은 순간에 도착한 또 하나의 보고는 요란다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조르주 다미앵 검사는 입 속에 재라도 털어 넣는 듯한 느낌이었다. 식당에 가서 식탁에 앉기 전에 그는 찬물에다 비누로 한참 동안 손을 씻었다.  
자기 아내를 때려죽인 죄로 법은 요르그 요르단을 처벌할 것이다. 아내를 때려죽인 사실, 그리고 사람보다도 말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로선 중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 상태에서 기인한 단순한 결과인 것이다. 
야만, 바로 그것이 요르그 요르단의 유일한 범죄다. 모든 야만인처럼 그는 인간을 과소 평가하여 무기력하게까지 만들었다. 이 타고난 야만성―즉 모든 다른 죄악을 생성시키는 이 죄악을 처벌할 법을 이 세상에 없다. 다만 그 야만성이 아주 확실한 행동으로 나타났을 경우 비합리적으로 기록될 따름이다. 
스잔나는 몇 킬로미터 걸어가다가 마침내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야니! 이젠 더 걸을 수가 없어요." 그러고는 풀밭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들은 판타나 마을과 시내의 중간쯤에 와 있었다. 
요한은 스잔나를 재우면서 그녀를 실어다 줄 마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길에는 걸어가는 사람 아니면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오후 5시쯤 되자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의 뺨을 때렸다.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이 비가 어제 밤에만 왔더라면 난 스잔나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텐데 그랬으면  스잔나는 집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고 난 콘스탄차에서 배를 탔으리라. 이 비가 어젯밤에만 내려 주었던 들......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지. 우리들의 운명은 이렇게 되라고 정해졌는걸!'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비는 여전히 내렸다. 요한은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을로 되돌아가 짐마차라도 빌려 와야겠어." 그는 스잔나를 측은한 듯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옷과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이를 덜덜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몹시 추운 모양이었다. 
"야니, 좋을대로 하세요."
"혼자서 무섭지 않겠어?"
"당신이 돌아와 주기만 하면 무섭지 않아요."
그는 그녀를 끌어안아 키스를 하고 곧 길을 떠났다. 판타나에 다다랐을 때는 벌써 앞을 분별하지 못할 만큼 캄캄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아무 집이고 닥치는 대로 대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아무도 요한을 도와주려 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 바로 요르그 요르단의 딸 스잔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대번에 거절해 보리고 마는 것이었다. 모두들 요르그 요르단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요한은 코르가 사제관 마당으로 들어갔다. 서재에 불이 켜져 있고, 현관 앞에서는 검은색 자동차 한 대가 비를 맞아 거울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집안에서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군. 방해를 해서는 안 되지.' 요한은 그대로 되돌아 나오려고 했다.
비는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며 지붕에서 줄기를 이루어 마당으로 쏟아졌다. 조용한 가운데 요한은 잠시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혼자 길가에서 떨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스잔나를 생각하고는 용기를 내어 가만히 유리창을 두드렸다.
14
"마침 잘 왔다. 보고 싶었는데." 코르가 사제가 아들 드라이얀에게 말했다. 그는 "그래, 자네 말대로일세."
코르가 사제가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가늘고 마른 손가락으로 석유 램프에 불을 켜서 조심스럽게 탁자 한가운데에 놓았다.
드라이얀은 가죽 트렁크를 열고 얌전히 포장된 꾸러미를 몇 개 끄집어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드라이얀은 포도주병 마개를 따고는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들어오자 드라이얀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금빛 책 커버에 가죽 표지로 장정된 책 두 권을 꺼냈다.
"최근에 나온 제 작품이에요. 여덟 번째 작품집이죠. 이 두 권은 제일 먼저 제본된 겁니다. 이번에도 이 두 권을 아버지 어머니께 드립니다. 그럼, 지난 일곱 작품이 출판되었을 때마다 축배를 들었던 이 포도주로 축배를 듭시다. 처녀작이 나왔을 때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기억나세요?" 하고 드라이얀은 말했다.
코르가 사제는 제단에서 성서를 잡을 때처럼 엄숙히 그 책을 아들의 손에서 받아들었다. 어머니는 손끝으로 만져 보고는 탁자 한쪽 끝에다 올려놓았다.
"손이 기름투성이라 네 책을 더럽힐까 두렵구나." 하고 말했다.
"다음은 조르주, 자네에게 기증하네."
코르가 사제는 드라이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검사는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뺨에 키스를 하고는 귓전에 대고, 그러나 다른 두 사람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했다.
"고백하지만 아직 다른 책들은 읽지 못했단다. 하지만 섭섭히 생각하지 말아라. 아버지께서 빼놓지 않고 다 얘기해 주셨으니까. 이번 책은 꼭 내가 읽으마. 아들이 자동차에서 가방을 꺼내 집안으로 옮기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 차는 담쟁이덩굴과 들장미 속에 절반쯤 차체를 감추고 발코니 앞에 서 있었다. 비는 여전히 억수로 퍼부었다.
"누구와 함께 온 모양이구나?" 코르가 사재가 물었다. 한 청년이 지금 막 차에서 내렸다.
"소개하겠어요, 아버지. 대학 동창인데 조르주 다미앵이라고 해요. 참 유능한 친구지요. 오늘 시내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이 지방 치안 재판소 신임 검사로 부임해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사제는 청년들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손님을 맞을 옷차림이 아닌 것을 알고 미안해했다. 사제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
검사는 뻐꾸기 소리를 내는 벽시계며 벽에 걸린 동양풍의 벽걸이며 융단과 책으로 꽉 들어찬 책장들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혀 볼까?" 드라이얀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는 지금 자기 작품 속에 자동차라든가 비행기, 바라든가 네온사인 등 현대적인 사물을 소재로 그걸 묘사하는 가장 근대적인 작가가 어떻게 이런 시간의 흐름이 중단된 것같이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무엇 하나 변하지 않고 발전 없이 지내 온 환경 속에서 태어나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드라이얀의 말에 검사의 얼굴이 빨개졌다.
"내 아들이 쓴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하고 죽긴 싫으니까."
드라이얀은 감격했다. 그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건배를 높이 들었다. 그것이 끝나자 어머니는 실례한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부엌에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좀더 계세요, 어머니." 드라이얀은 섭섭한 듯 말했다. "이번에 제가 온 건 또 다른 중대한 일이 있어서입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초판 인세입니다. 판타나에 땅을 사서 집을 한 채 지을 생각이에요. 되도록 이 근처에다 지어 일생을 여기서 보내고 싶습니다."
사제는 미소를 지으면서 봉투를 받아 탁자에 놓았다. 어머니는 앞치마 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가 우리를 기쁘게 해 주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걸 알고 있다. 여기서 네가 사흘 이상 있어 본 적이 있니? 매번 올 때마다 한 달을 있겠다고 약속하고는 2,3일만 지나면 곧 가 버렸잖니. 그러곤 몇 달 동안 얼굴조차 못 보게 되고........"
"지금까진 그랬지만 이제는 제 집을 지으렵니다." 드라이얀이 대꾸했다.
드라이얀은 아버지를 슬쩍 쳐다보고는 검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두 사람 역시 드라이얀의 계획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도 제가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시군요." 드라이얀은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2년 후 오늘, 내가 살아 있다면 판타나의 내 집에 자네를 초대하겠네. 그 때는 내 말을 믿게 되겠지. 그럼 오늘은 이만해 두세."
15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사제는 드라이얀에게 그의 새 작품에 대한 계획이 어떤 것이지 물어 보았다. 드라이얀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소재로 써 볼까 합니다. 기법만 문학적일 뿐 작중 인물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을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주소와 전화 번호까지 적어 넣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을 정도입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선전하는 인물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검사가 웃으면서 물었다.
"이 지구 표면 전체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드라이얀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호머도 수십 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모두 등장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몇 명 한 되는, 아마 열 명 가량의 인물들을 등장시키게 될 거야. 그 이상은 필요가 없지. 그러나 그 몇 명이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일들을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그 10여 명의 작중 인물들이 어떤 과학적 기준에 의해 선정되어 인류체험의 본질 자체를 대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검사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선택되는 거야. 문학에선 과학적인 기준을 사용할 필요는 전혀 없네.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세상 사람 누구나가 겪게 마련이니까. 물론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이지. 영웅적인 인물들은 필요 없어. 우연한 것에서 인물들을 잡는 거야. 20억의 인간들 중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거지. 한가족 전체 즉 우리 가족들, 아버지, 어머니, 나, 자네, 아버지의 고용인들, 몇몇 친구들과 이웃에 사는 사람들 말이야." 드라이얀이 대꾸했다.
코르가 사제는 웃으며 술잔들을 채웠다.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이 인물들에게 생기는 사건들을 모두 적어 둘 생각이야. 생각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해. 가까운 장래에 우리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만은 틀림없거든. 역사에서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는 일들 말이야."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앞으로 일이 지나치게 극적이라면 자네 소설 속에서 만으로 국한되기를 바라네." 하고 검사가 말했다.
"극적인 사건들은 먼저 현실 속에서 일어난 연후에야 내 소설에 나타나게 될 것일세."
"그렇다면 나도 극적인 순간을 살게 되는 건가?" 하고 검사가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어. 모험적인 인물과는 정 반대되는 사람이 바로 나야."
"이봐, 조르주.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대체로 파란만장한 모험가는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소설을 쓴 작가도 결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기복이 심한 생을 강요당하는 것일세."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사건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검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농담이 아니네, 조르주! 지금 막 중대한 사건이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느끼고 있네. 그것이 터져 언제 시작되고 또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느끼네. 우리는 폭풍우 속에 사로잡혀 있고, 그 폭풍우는 우리의 살을 찢고 뼈를 하나하나 부러뜨리고 말거야. 나는 오직 침몰하는 배에서 재빨리 도망치는 쥐만이 느낄 수 있는 예감으로 이 사건을 느끼고 있단 말이야. 그 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거지. 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우리를 위한 피난처는 없다네."
"자넨 대체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 건가?"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아.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규모의 혁명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전 인류가 그 희생자이고."
"한데 어제 그것이 폭발한다는 거야?" 검사는 여전히 드라이얀의 말을 우습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글세, 혁명은 이미 터졌다니까. 자네의 그 회의적인 태도와 아이러니도 아랑곳없이 혁명은 벌써 폭발하고 말았네. 아버지, 어머니, 자네,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차차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혹은 숨어 보려고 할걸세. 더러는 마치 폭풍우가 올 것을 예감한 야생 동물처럼 벌써 숨기 시작 했다네. 때문에 난 시골에 내려와 살려는 거야. 공산당원들은 그 위험의 책임이 파시스트들에게 있고, 그 위험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파시스트들을 처치해 버리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 나치 당원들은 유대인들을 죽임으로써 자기들 신변을 보호하려 든다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전 인류가 위험 앞에서 느끼는 공포의 징조인 거야. 그 위험은 어딜 가나 있는 것이고, 그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우리 모두를 위협한다는 그 큰 위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검사가 말했다.
"기계 노예라는 거지! 조르주, 자네도 알다시피 기계 노예란 그것 없이는 하루도 우리가 살아갈 수 없는 무수한 봉사를 해 주는 우리의 하인이야. 우리를 위해서 차를 태워 주고 광선을 마련해 주고, 마사지를 해 주고, 라디오 다이얼에 맞추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주고, 길을 만들어 주고, 산을 헐어 주고......... 이렇게 많은 일을 해 주고 있어."
"내 귀엔 시적 비유로만 들리네."
"시적 비유가 아냐, 조르주! 기계 노예는 현실적인 존재야. 그 존재를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거든."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냐. 하지만 왜 하필이면 '기계 노예'라고 부르느냔 말이야. 문제는 단순히 기계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검사가 즉시 대꾸했다.
"현대 사회의 기계 노예의 동지인 인간 노예도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맹목적인 힘, 생명이 없는 사물로 보일 거야. 그 노예들은 팔아도 좋고 사도 좋고 선물로 주어도 좋고 또 죽여도 좋으니까. 그들은 오로지 체력과 노동력에 따랄 평가되어 왔던 거야. 오늘날 기계 노예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차이는 매우 크지! 인간 노예를 기계 노예로 바꿔 놓을 수는 없잖나." 하고 검사가 반박했다.
"천만에! 바로 그렇게 바뀌어지고 있다네. 기계 노예는 인간 노예보다 확실히 능률적이고 값도 싸단 말이야. 그러므로 모든 인간 노예가 기계 노예로 바뀌어 지기 시작했단 말일세. 지금은 배가 인간 노예의 힘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노예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어. 저녁이 되면 기계 노예를 가질 수 있는 현대의 사치스런 부호는, 로마나 아테네의 자기 선조가 했듯이 손뼉을 쳐서 노예가 불을 들고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노예의 단추를 눌러 방을 밝히는 거야. 기계 노예는 아파트를 덥게 해 주고 목욕물을 데워 주고 창문을 열어 주고 시원한 공기를 만들어 주거든. 그것은 인간 노예에 비하면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데, 보다 잘 훈련되어 있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또 아무 것도 보지를 않거든. 기계 노예는 부를 때에만 나타나 잠시 동안에 연애 편지를 날라다 주고, 사랑하는 여인의 목소리마저 멀리서 듣게 해 주지. 기계 노예는 완전무결한 하인이야. 그들은 밭을 갈고 전쟁에 앞장서고 경찰을 조종하고 행정적인 일도 하지. 모든 인간 활동을 배워 가지고 훌륭히 그걸 실행해 나가거든. 사무실에서 계산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하늘을 날고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기도 하지. 기계 노예는 또한 사형 집행인까지 되어 죄수를 사형시키기도 하거든. 병원에서는 의사와 함께 환자를 치료하고 성당에서는 신부와 함께 미사를 올리게 된단 말이야."
드라이얀 코르가는 잠시 말을 끊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밖에는 여전히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하겠네. 내 경우를 말하자면 솔직히 말해서 겉으로는 내가 혼자 있다고 해도 언제나 어떤 단체에 속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주위에서는 늘 나를 거들어 주고 도와 줄 태세를 갖춘 기계 노예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보이거든. 담뱃불을 붙여 주고 세상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고 밤길을 밝게 비춰 주지. 나의 생활은 그들의 리듬을 따르고 있어.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 나와 상대하는 시간이 많지. 그래서 난 가끔 그들의 희생물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도 있어. 조금 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판타나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지. 내 기계 노예들이 부쿠레슈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네. 우리는 12명 가량의 노예밖에는 거느리지 못한 2천 년 전의 우리 동료들보다도 훨씬 부자란 말이야. 지금 우리는 수백 명, 수천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런데 한가지 물어 볼 게 있는데, 대답해 주게. 이 지구상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계 노예의 수는 얼마나 되겠나? 적어도 수백억은 될 거야. 그런데 인류의 수는 얼마나 될까?"
"20억이지." 검사가 대답했다.
"맞아. 그러니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기계 노예의 수적 우세는 단연 압도 적이야. 그 기계 노예들이 현대 사회 기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위험은 명백해지거든. 근대 용어를 빌리면 기계 노예가 우리 사회의 전략적 요소를 그 손에 쥐고 있단 말이야. 그중 제일 중요한 것만을 들어본다면 군대, 통신망, 식량 공급, 상업 등이야. 기계 노예들은 하나의 무산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말을 우리는 역사적인 어떤 사회 속에는 있는 한 단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단체는 이 사회 속에서 융합되어 있지 않아. 그들의 운명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거야. 난 공상 소설을 쓸 생각은 없어. 말하자면 이 기계 노예들이 하루아침에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모두 포로 수용소에다 가두고 그들을 단두대나 전기 의자로 없애 버린다는 그런 얘기를 쓰려는 것이 아니야. 그런 혁명은 인간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거든. 나는 현실적인 사실을 충실히 묘사할 작정이야. 그런데 사실상 이 기계 노예는 인간 노예처럼 바리케이드를 사용하는 혁명은 일으키지 않을 거야. 기계 노예가 현대 사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이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은 인간의 법률과는 다른 그들 고유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거니까. 이들 기계 노예가 가진 법칙을 세 개만 열거한다면 자동성과 획일성, 그리고 몰개성(沒個性)이지. 수백 억의 기술 노예와 겨우 20억의 인간이 사는 이 사회―비록 그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20억의 인간들이라 해도―는 절대 다수인 무산 계급의 성격을 갖게 되는 거야. 로마 시대에도 인간 노예는 그리스나 트라키아나 그 밖의 여러 피점령국에서 들어온 관습에 따라 말하고 기도를 드리고 생활했었지. 우리 사회의 기술 노예도 역시 그들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그들 나라의 법칙에 준해 생활하고 있지. 이 성격, 디시 말하면 이 현실이 우리 사회의 테두리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 영향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거든. 그들을 부려야 할 인간들은 부득이 그들의 관습과 법칙을 알아야 하고 때로는 모방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거지. 어떤 주인이건 자기 고용인에게 일을 시키려면 그들의 말과 습관을 조금은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점령자가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엔 그는 편의상 또는 실리상 피 점령 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거야. 전능한 점령자이며 주인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와 똑같은 과정이, 우리가 그걸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네. 우리는 노예들을 더 잘 부리기 위해서 그들의 법칙과 마을 습득하는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인간적인 특질과 우리 자신의 법률을 포기해 버리게 되는 거지.
드라이얀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있으며 기계 노예의 생활 방식을 따름으로써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네. 인간성 상실의 첫째 징조는 인간 멸시로 나타나지. 현대인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인간 한 사람을 기계 노예 30명으로 대치할 수 있는 현대사회는 기계의 법칙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네. 이 사회는 인간의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기계의 필요에 따라서 창조된 사회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또한 바로 거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단 말이야. 인간의 법규와는 관계가 없는 기계의 법규를 따라 생활하고 행동하게끔 되어 버렸네. 그래서 사회적 법률로까지 승격한 기계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는 인간을 벌을 받게 되고, 소수파로 살아가는 인간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소수 무산 계급으로 전락한다네. 인간은 몸에 굳어져 버린 인간 습관을 저버리지 않는 이상 그 사회에 융합될 수가 없게 되네. 그 결과 그에게는 열등 의식이 생기고 기계를 모방하려고 노력하고 사회 활동의 핵심에서 자기를 멀리 하며 인간 특유의 성품을 포기하게 되지. 그리고 이 느린 변질 작용은 인류를 변화시켜 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게 하고 마는데, 그 사회 관계는 판에 박은 듯 정확하고 자동적인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마치 기계의 부분품들을 잇는 것과 같은 관계가 되고 마는거야. 기계 노예의 리듬과 언어는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행정, 미술, 문학, 사교춤에 이르기까지 모방되고 있네. 인간은 점점 기계 노예의 앵무새가 되어 가고 있는거지. 그러나 이건 비극의 발단에 불과해. 이를테면, 아버지, 어머니, 조르주 자네, 나,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 나의 소설은 이러한 비극의 발단 단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네."
"자네 말은 우리가 '인간 노예'로 변해 가고 있다는 건가?" 여전히 조롱하는 말투로 검사가 물었다.
"바로 그 점이 비극을 몰고 오는 거야. 인간이 기계화될 수는 없으니까. 두 개의 현실―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이미 충돌하고 있어. 이 싸움에선 기계 노예가 승리할 걸세. 그들은 해방이 되어 우리 사회의 기계 시민이 되고 말 거야. 그리고 우리 인류는 시민의 다수 곧'기계 시민'의 필요와 문화를 토대로 조직된 사회의 무산 계급으로 전락될 걸세."
"그러면 실제로 그 충돌은 어떤 형태로 일어나는 것인가?" 검사가 반문했다.
"나 자신도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관찰하고 있네. 하지만 두려움이 앞서네. 나 자신이나 내 동료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죽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자넨 그걸 명확한 사실로 생각하나?"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사건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에 전개되는 모든 사건들은 이와 같은 기계 노예 혁명의 여러 국면을 보여 줄 것으로 예측되네. 인간은 결국 인간적인 본성을 지닌 채로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거야. 인간은 인간 본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동일하고도 획일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기계 노예에게 적용되는 똑같은 법칙에 준해 취급될 것이니까. 자동적 체포, 기계적인 선고, 기계적인 착복, 그리고 기계적인 집행, 이렇게 되면 개인은 이미 존재의 권리를 상실하고 마치 하나의 피스톤이나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서 끝내는 인간성을 무시하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 싸우게 된다네. 아마 지금이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볼 수 있을 걸세. 인간이 이처럼 멸시받은 적은 일찍이 없었지. 예를 들면, 원시 사회에서의 한 인간은 한 마리의 말보다도 못 한 취급을 받았었어. 아마 그런 현상은 오늘날의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개인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조금 전에 한 이야기, 어떤 농민이 자기 아내를 죽이고도 후회하지 않고 자기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말에게 먹을 것과 물을 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자살을 하려고 했다지. 이것이 바로 원시 사회적인 인간의 평가 절하라는 거야.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의 희생은 지적할 필요도 없이 흔한 일이고, 인간의 생명은 에너지의 원천으로밖엔 생각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과학적 기준이지. 이것이 현대 과학 기술의 무서운 야만성을 말해 주는 거야. 기계 노예가 전면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우리들이 도달할 점이 바로 여기야."
"그런데 자네가 예언하는 그 혁명은 언제 일어난단 말인가?" 검사가 물었다. 
"벌써 시작되었지! 우리는 이미 그 진행 과정에 말려 들어간 것이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 전쟁이 끝나기 전에 죽을 걸세. 지금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이 소설을 끝내지 못하고 죽지 않을까 하는 것이야."
"자네 비관론은 좀 지나친데." 검사가 말했다. 
"난 시인이야, 조르주. 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어. 시인은 곧 예언자니까. 나는 이런 슬픈 일을 예언해야 하는 최초의 시인이 된  것이 괴롭지만 시인이라는 직책상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비록 그것이 비관적 예언일망정 나는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외칠 수밖에 없네." 
"자넨 정말 그걸 믿고 있나?"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그걸 믿고 있네."
"난 자네가 그저 문학 얘기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건 문학 얘기가 아니냐. 나는 매일 밤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나?"
"인간이 오로지 기계 사회적 가치의 차원으로까지 추락된 이상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체포되어 노역장으로 갈 수도 있고 몰살당할 수도 있어. 5개년 계획을 위해서나 민족의 진보, 또는 기계사회에 필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 개인의 인간성은 고려되지 않은 채 어떤 노동을 강제로 해야만 할지도 모르네. 기계 사회는 오로지 기술의 법칙과 기술적인 계획에 의해서만 일하는 거지. 그 사회의 유일한 도덕은 생산이라는 거야."
"우리가 정말 체포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검사의 말투에는 이제 빈정거리는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약간 겁을 먹은 듯, 마치 이론상으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손금쟁이에게 미래를 예언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처럼 드라이얀에게 물었다. 
"이 세상 어디든 단 한 사람도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우린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서 죽는 단 말인가?" 검사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 인간은 오랫동안 기계사회에 예속되겠지만 속박 속에서도 생명을 잃지는 않아. 기계 사회는 안락한 시설을 만들어 내지만 영혼을 창조하지는 못하지. 그러니 영혼 없이는 천재가 있을 수 없고 천재 없는 사회는 언젠가 소멸될 운명에 처해지지. 서구적인 사회의 위치를 장악하고 지구의 전 표면을 정복하려 드는 기계 사회도 때가 되면 멸망하고 말 걸세. 그 유명한 알베르 아인슈타인도 다음과 같이 단언했었지. '현대 과학으로 건설한 모든 시설을 허물어뜨리려면 물리학에 특수한 재질을 타고난 천재를 단지 2대만 단절시켜 버리면 된다.'고 말일세. 이와 같이 기계 사회가 붕괴되면 인간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의 부흥이 곧 뒤따르겠지. 이 위대한 광명은 틀림없이 동쪽 아시아로부터 비쳐질 거야. 하지만 러시아는 아니야. 러시아 사람은 서양의 전깃불 앞에 엎드렸으니 그걸 넘어서지는 못해. 동양 사람은 기계사회를 극복하고 전깃불을 길이나 자기들의 집을 밝히기 위해 이용할 걸세.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서구의 기계 사회가 그 야만 상태 속에서 하듯 결코 전깃불의 노예가 된다든가 전깃불을 위한 제단을 세우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네온사인 빛으로 정신과 마음의 길을 비추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동양인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음악적인 조화의 재능으로 자기 악단을 지휘하듯이 이 정신으로 기계 사회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될 거야. 그러나 우리는 그 시대를 보지 못할 걸세. 우리들은 원시인처럼 전기라는 태양 앞에 굴복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거든."
"그럼 우리는 사슬에 묶인 채 죽는단 말인가?" 검사가 물었다. 
"우리 개개인은 기계 노예의 사슬에 얽매인 채 노예로 죽어갈 거야. 내 소설은 그러한 에필로그를 실은 작품이 될 거고."
"무슨 제목을 붙일 건가?"
"25시!" 하고 드라이얀이 말했다. "이것은 모든 구제(救濟)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야. 메시아의 왕림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시간이지. 이건 최후의 시간이 아니라 최후의 시간에서도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났으니까. 이 시간이 서구 사회의 현재의 시간이며, 정확한 시간을 뜻하고 있는 것이지."
사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신부님, 만약 드라이얀의 예언이 들어맞아 인간이 노예로 취급받아야 할 운명에 놓인다면 교회는 현대 사회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까? 교회가 그런 중대한 시기에 인류를 구제할 수 없다면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검사의 질문에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잠시 생각을 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사회를 구할 순 없네. 하지만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구원은 보증할 수 있지."
"신부님께서는 드라이얀의 예언이 들어맞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검사가 물었다. 
"나는 시인들의 말을 믿는 편이라네. 그리고 내 생각에 드라이얀은 위대한 시인이야." 사제의 대답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드라이얀은 어린애처럼 얼굴을 붉히며 칭찬을 긍정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가 지금 막 발코니를 지나간 것 같은데요." 드라이얀이 말했다. 
세 사람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에 대답하는 것은 빗소리뿐이었다. 
"누가 마당에 들어오면 개가 짖었을 텐데. 개가 짖지 않게 하고도 마당으로 들어올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신뢰하는 요한 모리츠뿐인데, 지금쯤 그는 미국행 배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거야."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는데요. 저는 소리에 민감하거든요."
"아마 기계 노예가 자네 자동차에서 도망쳐 나온 모양이군." 웃으면서 검사가 말했다. 
"벌써 그들의 혁명이 시작되어 바로 오늘밤에 우리들을 체포하러 온 모양이군 그래? 드라이얀, 몇 명이나 되는 노예가 자네 자동차의 일을 맡고 있나?"
"계산해 보면 알 수 있지. 55마력으로 치고, 1마력은 사람 일곱과 같으니까."
"수개 중대의 병력인데. 우리는 3명뿐이니 그들이 공격해 오면 우리는 무조건 항복하고 말 거야."
"누군가 사람이 가담하지 않으면 기계 노예는 인간을 공격할 수 없다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시민 하나가 가담해야 비로소 기계 노예는 묵시록에 나오는 짐승처럼 사나워지거든!"
"시민이란 어떤 의미인가,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나? 우리들도 모두 시민인데."검사가 물었다. 
"그 시민이란 인간의 사회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인간을 말하는 거야. 마치 기계의 피스톤처럼 그는 한 가지 동작만을 영원히 반복하는 거지. 하지만 피스톤과 다른 점은 시민은 자기의 활동을 모범으로 내세워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모방하게끔 하자는 속셈을 갖고 있지. 시민이란 인간이 기계 노예와 교섭을 맺은 후 지구상에 나타난 가장 위험한 동물이거든. 그는 인간과 짐승이 가지는 잔인성과 기계가 가진 냉철한 무관심을 겸비하고 있다네. 러시아 사람이 그 가장 완벽한 전형을 만들어 냈지. 그게 바로 '인민 위원'이야."
그 때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를 들었다고 했잖아요! 시인의 감각은 속일 수 없거든." 드라이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사제는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청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젊은이는 셔츠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는데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 청년이 요한 모리츠야."
사제가 소개했다. 그는 요한에게 포도주 한 잔을 따라 주며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요한은 이를 사양하며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양탄자와 의자를 적시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머리에서는 물이 빗물받이 홈통에서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빗속을 걸어온 것이 분명했다. 
"나한테만 할 말이 있나?" 사제가 물었다. 
"여기서 말씀드려도 괜찮습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자네가 보따리를 가지러 오지 않아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르네." 하고 사제가 말했다. 
"미국 가는 것은 포기했어요." 요한은 두 젊은이를 한 번 쳐다보고 사제 쪽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어......, 제가 부엌 옆방을 써도 좋다고 하셨지요?"
그제야 사제는 요한 모리츠가 한밤중에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그 방은 자네 거야. 언제든 필요하면 사용하게."
"오늘 밤 다른 사람이 자도 될까요?" 모리츠가 물었다. 
"물론이지. 혹 그 사람이 역경에 처해 있어 자네가 도와주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나. 그게 오히려 더 좋겠구먼."
"요르그 요르단의 딸 스잔나예요. 집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아버지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거든요."
요한은 그녀의 이름만 듣고도 사람들이 재워 주지 않으려 하던 것이 생각나서 사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방이 차거든 불을 때도록 하게. 장작 있는 곳은 잘 알지?" 하고 노인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문에 그냥 기대어 서 있었다. 그 자리를 나오기 전에 사제에게 모든 걸 고백했다. 그녀가 판타나에게 시내로 통하는 길 중간쯤에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드라이얀 코르가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그는 요한 모리츠와 함께 자동차로 떠났다. 그들이 돌아온 것은 반시간쯤 뒤였다.
자동차는 다시 조금 전과 같이 발코니 앞에 와서 멈추었다. 요한은 스잔나를 품에 안았다. 
검사는 발코니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제의 아내는 요한의 왼쪽에서 나란히 걸었고 사제는 그의 오른쪽에서 걸었다. 그녀는 잠이 든 어린애처럼 요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비에 젖은 푸른 옷이 허리에 달라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드라이얀이 방으로 들어오자 검사도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온통 젖었군!" 하고 말했다.  
드라이얀은 얼굴을 붉히며 진 흙투성이가 된 자기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물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자기 옷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연히 비를 맞았던 것이다. 요한 모리츠가 혼자서 여자를 안아다 자동차에 태웠기 때문에 그는 도울 필요도 없었지만 요한과 함께 행동했던 것이다. 
자기의 행동을 분석해 보며 드라이얀은 앞으로도 이와 같은 환경에 놓여지면 그 때도 지금과 같은 행동을 취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 도움이 실제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고 그것이 또 직접적인 도움은 못 된다 할지라도 이런 행동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데 필요할 것이다.'
사제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도 역시 젖어 있었다. 이마와 뺨, 수염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빗속에서 요한 모리츠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처럼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은 헛수고를 하셨으니........' 하고 드라이얀은 생각했다. '하느님은 실제적인 유용성이 없는 사물들을 창조하셨어. 하지만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야. 인간의 생명도 하나의 쓸데없는 창조다. 그것은 지금의 나의 행동과 아버지의 행동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짓이야. 하지만 그 성의는 훌륭해. 헛되긴 해도 견줄 데 없이 훌륭한 거야.'
"감기가 들면 안 될 텐데, 드라이얀." 하고 사제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한데 아픈 사람은 어때요?"
"열이 높구나. 네 어머니가 차를 끓이고 간호를 하고 있으니 기다려 봐야지 네가 자동차로 데리고 온 보람이 있을 거다. 드라이얀, 누구든 저 가엾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거야."
뻐꾸기 벽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18
요한 모리츠는 사제의 방문을 두드렸다. 내일까지 감사의 말을 미룰 수가 없던 것이다. 지난 24시간 동안에 겪었던 온갖 불행한 일들을 이미 깨끗이 잊고 지금은 오직 코르가 사제가 베풀어 준 친절에 대한 고마움만이 가슴속에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스잔나가 안식처를 구했다는 것이 기뻤다. 자칫 잘못되었더라면 불행한 일이 생겼을는지도 몰랐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모리츠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채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요 다음에 제가 다시 판타나에 오게 되면 아버님 댁에서 살겠어요. 그러니 제가 판타나에 집을 짓겠다고 맡겼던 돈은 요한에게 주어서 집을 짓게 해 주세요. 집이 필요한 사람은 저보다도 저 사람입니다."
사제는 봉투를 꺼내, 모든 위대한 행동이 그렇듯이 말없이 손짓으로 요한에게 내밀었다. 요한은 봉투를 열었다. 그는 마치 기적을 본 사람 같았다. 지폐뭉치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영문지지 알 수 없었다. 무어라고 입을 떼려고 했으나 한마디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요한은 봉투를 움켜쥔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한순간 침묵이 흐른 뒤 사제가 말문을 열었다.
"드라이얀에게 감사하게. 그리고 이젠 아무 걱정 말고 안심하게 자게나. 돈은 스잔나에게 주는 것이 좋을 거야. 돈은 역시 여자가 잘 간수하니까."
"요한도 아제 판타나의 지주가 되었으니 축배를 들기로 하세."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검사가 웃으며 말했다.
사제의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요한은 잔을 식탁 위에 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스잔나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사제를 방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귓속말을 했다. 사제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금세 빙그레 웃었다. 요한은 그의 일거일동을 빼놓지 않고 지켜  보았다.
"안심하게, 불길한 소식은 아니니까. 자네는 머지않아 아버지가 될 거라는 군. 그전에 결혼식부터 올려야지."
요한 모리츠는 드라이얀 코르가와 악수를 하고 검사와도 악수를 한 뒤 방에서 나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지 전에 요한은 돈이 젖지 않도록 셔츠 속에 집어넣었다. 봉투는 온기가 있었다.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요한은 그 봉투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눈앞에 벌써 집과 울타리와 우물과 정원이 만들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가 항상 꿈에 그리던 것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스잔나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는 돈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건촛더미 속에서 자려고 방을 나왔다. 그가 휘파람을 불며 서재의 창문 밑을 지날 때 사제가 드라이얀에게 말했다.
"결혼 얘기는 하지 말걸. 스잔나의 어머니는 병원 시체실에 있고 아버지는 감옥에 있으니 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할 시기가 아닌데."
"하지만 저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걸요. 저들은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그들은 이제 사랑과 꿈에 그리던 돈이 있으니 행복할 겁니다."
"행복이야 하지. 그러나 실제로는 슬퍼해야 할 때일 텐데."
"그렇습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기쁨은 신을 모독하는 일 같군요." 검사가 말했다.
"굳이 따지고 든다면 인간의 기쁨이란 것은 모두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뻐꾸기 벽시계가 1시를 알렸다.
19
요르그 요르단은 2년간의 징역살이를 한 후 석방되었다. 그는 27년 전에 떠나온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판타나에 들렀다. 집을 팔 생각이었다.
마을을 순찰하던 마을의 헌병 파견소 소장은 언제나 닫혀 있던 붉은 벽돌집 창문이 그날 따라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그 집으로 들어갔다. 요르그 요르단이 뒤꼍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요르단 씨, 당산은 과연 부자로군. 이렇게 빨리 석방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었을 텐데?" 소장이 말했다.
거구인 요르단은 눈을 들어 소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그의 음성은 무뚝뚝했다.
"석방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느냐고 물었소! 당신은 10년을 언도 받았다고 들었는데 말이오."
소장의 말에 요르그 요르단은 들고 있던 망치를 놓았다. 그는 푸른 웃옷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소장에게 던지고는 망치질을 계속하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그걸 보여 주는 거요. 며칠 후면 나는 SS(나치 친위대)의 하사관 군복을 입게 된단 말이오. 나는 독일 시민으로, 이제부터 내 조국을 위하여 의무를 다하러 가는 거요. 내가 어째서 빨리 석방되었는지 이제 알겠소?"
소장은 요르단이 집어던진 소집 영장을 손에 들고 읽어보았다. 복역중의 모든 독일 시민은 귀국과 입대한다는 조건 아래 특사를 받게 되었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띠고 영장을 집어 요르단에게 돌려주었다.
"이것도 읽어보시지." 요르그 요르단은 또 다음 종이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감사장이었다. 요르단은 자기의 전 재산을 독일군에 기증하여 장갑차 한 대를 사게 했었다. 그래서 부쿠레슈티 주재의 독일 대사가 감옥으로 감사장을 보내 온 것이었다. 소장은 그 종이도 돌려주었다. 독일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첫머리의 독수리와  표 문장(紋章)에는 감동되었다.
"집은 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둘 겁니까?"
요르그 요르단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내 돈으로 산 장갑차는 이미 전쟁터로 나갔소. 그러니 나도 곧 뒤를 떠나야하오. 젊은 몸은 아니 지만 위대한 독일은 나를 받아 줄 거요."
요그르 요르단은 서류들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망치를 집어들고 가지고 갈 궤짝에 계속 못질을 했다. 소장을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장이 작별인사를 해도 요르그 요르단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20
소장은 요르그 요르단의 집에서 나와 곧장 하숙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때는 5월이었다. 번쩍이는 구두에 먼지라도 앉을세라 그는 길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소장은 멋 부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여자와 술도 꽤 좋아했다. 술은 하숙집 주인인 유대인이 공짜로 대주고 있었다.
'가끔 새로운 법률이 나오지 않는다면 헌병은 말라죽고 말 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국가가 그런 걸 잘 알아서 해 주었다.
소장은 지난 1월 마을에 있는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판타나에는 유대인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가 바로 골덴 베르크라는 하숙집 주인이었다. 명령은 비밀이었는데, 그는 그 명령서를 유대인에게 보여 주고 나서 곧 후회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 한일 같았다. 그 뒤로 소장은 석 달에 한 번씩 골덴베르크가 병중이므로 강제 수용소에 보낼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서를 보내고, 그 대신 유대인으로부터 한 달에 자기 월급의 갑절이나 되는 3천 레이씩을 받아 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 덕분에 늘어진 생활을 하게 되었고, 게다가 제깐에는 무슨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늙은 골덴베르크는 수용소에 가서 고생을 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그대로 살면서 계속 장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랜디를 한잔 마시면서 소장은 커튼을 들치고 유리창 너머로 골덴베르크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골덴베르크의 딸인 로자에게 여느 때처럼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자의 살결은 희고 보드라웠다. 그녀의 팔을 꼬집어보면 비로드를 만지는 촉감이었다. 로자의 피부는 막일을 하는 시골 여자의 살결과는 달랐다. 그녀는 늘 창문가에 앉아서 소설을 읽었는데, 오늘은 그 여자 곁에 한 젊은 청년이 이야기를 하며 서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구요?" 소장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늙은 골덴베르크는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을 해도 좋을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 아들 마르크입니다. 파리에서 방금 돌아왔죠."
소장은 파리에서 돌아온 젊은이와 사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파리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얻어들을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무뚝뚝한 사나이였다. 이 쪽에서 말을 끄집어내야만 겨우 몇 마디 하는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하고 소장은 실망했다. 이 자는 본래 성격이 무뚝뚝했고, 소장이 권하는 브랜디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매우 비사교적인 청년이었다. 그래도 소장은 하숙집을 나서면서 마르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헌병 파견소로 나오게. 카드놀이나 한판 벌이자고."
하숙집을 나서면서 그는 골덴베르크 영감이 저런 아들을 파리까지 보내어 공부를 시키다니, 돈을 창문으로 내던져 버린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21
요한 모리츠의 집 앞을 지나던 소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스잔나가 안마당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2년 전에 이 집을 지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밤낮으로 일을 했다. 집은 아주 좋았다. 발코니도 있었다.
"벽돌을 왜 또 만드는 거요? 집은 다 됐는데."
그는 안마당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대문이 잠겨 있었다.
"외양간을 만들려고요." 여자가 대답했다.
그녀는 발로 계속 진흙을 이기고 있었다. 그녀의 허연 허벅지가 소장의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집에 없소?" 그가 물었다.
"야니는 물방앗간에 있어요." 웃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안마당 가운데서는 요한 모리츠의 어린 두 아이가 햇볕에 몸을 그을리고 있었다. 첫쨋놈은 드럼통 속에 누워 있고 둘쨋놈은 땅바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놀고 있었다. 스잔나는 그들을 가끔 쳐다보면서 진흙에 물을 붓고 발로 이겼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녀의 포동포동한 엉덩이가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소장은 또 한 번 문을 열어 보려고 했다.
"열어 주지 않겠소?"
"그대로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렇게 혼자 집에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남편도 없으니 문을 좀 열어 보구려."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어서 갈 데나 가 보세요. 남의 집 문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문 좀 열어요!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고."
"그이가 돌아올 때가 됐어요. 당신이 거기 서 있는 걸 보면 아마 도끼로 머리를 부숴 놓고 말걸요."
"녀석이 그리운 모양이지?" 소장이 물었다.
"더 점잖은 말은 없을까요? 어쨌든 이젠 그만 지껄이고 가보시지. 그이가 곧 돌아올 텐데."
"한 가지만 더 물어 보고 가겠소."
"물어 봐요."
스잔나는 진흙을 이기는 것을 멈추고 두 손을 양쪽 허리에 얹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만약 남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면 문을 열겠소?"
"별소릴 다 하시는군요!" 그녀는 다시 진흙을 이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때까지 만약 요한이 어디 멀리 떠나고 소장이 와서 자기를 보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젠 당신도 결혼한 여잔데 무엇이 두려워?"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라니까요!"
그녀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대답해 주면 간다니까."
"듣기 싫어요! 당치도 않은 소리를!" 그녀는 쏘아붙였다. 
"그런지 안 그런지 말해 봐. 대답 안 하면 언제까지고 여기에 서 있을 거야."
소장은 대문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기다렸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알고 싶어하죠? 야니는 집을 떠날 일이 없어요."
"그러나 만약 그가 떠난다면?"
"정 궁금하다면 한번 시험해 보구려, 어떻게 하나. 하지만 야니는 떠나지 않아요. 우린 외양간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 다음엔 우물을 파야 하고. 이렇게 할 일이 많은 때에 그가 어디로 떠난단 말이에요?"
소장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대문에서 멀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여자야."
스잔나는 그가 휘파람을 불면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일손을 멈추었다. 갑자기 소름이 쪽 끼쳐 그녀는 진흙 속에서 두 발을 빼고 아이들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큰 아이를 품속에 꼭 껴안고, 자기 자신이 아이들과 요한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게 될 어떤 일을 저지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나는 겁을 먹고 있는 거야.' 그녀는 껴안았던 팔을 풀고 아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다시 팔을 걷어올리고 진흙을 이겨 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파견대에서 나온 헌병 하나가 점심 식사 중인 요한 모리츠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요한은 창문 너머로 헌병의 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무슨 일일까?"
마당으로 나갔다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읽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 
"그 종이는 뭐예요?"
스잔나의 물음에 그는 입 속에 든 것을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징발 영장이야. 밥이나 먹고 나서 국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봐야지." 요한 모리츠는 아주 태연했다. 
농민들 모두가 말이나 수레 또는 가축을 징발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도 수레도 없었다. 그는 지금 그런 것들을 사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옥수수나 밀 한두 부대 정도 바치라고 하겠지.' 밀도 징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식사 후, 요한 모리츠는 헌병이 가져온 종이를 더럽힐까봐 우선 손을 닦고 펴서 읽어  보았다. 스잔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을 점점 붉어졌다가 파래지더니 결국 납빛으로 변했다.   
"뭐라고 씌어 있어요?" 스잔나가 묻자 아이들은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뭐라고 씌어 있는지 저에게 말하고 싶지 않으세요?"
여전히 말이 없는 요한을 보자 스잔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말해 줘도 당신은 무슨 소린지 모를 거요. 실은 나도 무슨 영문인지 오르겠는걸."
"무슨 불길한 소식이에요, 야니?"
"헌병 파견대 하사관 녀석이 아마 잘못 보냈을 거야. 하사관 놈들은 무엇을 기록하며 사무를 보면서도 언제나 딴 생각을 하니까 말이야!" 그는 종이 쪽지를 스잔나에게 내밀었다. 
"뭔지 알겠소? 징발 명령이야. 우린 이미 두 장이나 받았잖소. 한 번은 밀이고 또 한번은 폴피리에게 사 온 부대를 징발해 갔었지. 그런데 이번 명령은 밀도 부대도 아니야. 바로 나를 징발한대. 어떻게 사람을 징발한다는 거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겠소, 당신은?"
스잔나가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자 요한은 못 참겠다는 듯이 종이를 나꿔채어 큰 소리로 읽었다. 
"어떻게 나를 징발하느냔 말이야! 나를. 나는 사람이야. 말이나 집, 암소나 부대는 징발할 수 있어도 어떻게 산 사람을 징발하느냐고? 그런데 이걸 좀 봐. 내 이름이 적혀 있잖아! 하사관 녀석 정말 돌았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스잔나가 물었다. 
"내일 아침 7시에 헌병대로 가야지."
"당신 말대로 하사관 이 잘못했나 봐요."
"확실히 잘못된 거야."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그는 의심이 들었다. 
만일 하사관의 실수가 아니라면? 그는 입대할 때처럼 길 떠날 준비를 하기로 했다. 잘못된 명령이 아니라면 그 땐 아마 한두 달은 붙잡혀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그날 오후 내내 스잔나에게 짜증을 부렸다. 스잔나는 마주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징발 명령으로 화가 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때가 되자 요한은 징발 영장을 신문지에 싸서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신부님께 영장을 보이고 올게." 그는 밖으로 나왔다.
사제관 안마당에는 그의 부인만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시내에 나가 늦게야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요한은 사제 부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키스를 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한길에 나서자 개들이 짖었다. 밤은 조용히 다가왔다. 요한은 돌부리에 걸려 투덜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날 밤 요한은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초조했다. 자리에 누운 요한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스잔나가 다가와 목을 껴안았다. 남편의 근심은 곧 자신의 것이었다. 남편의 괴로움을 잊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아내의 팔을 풀어 떼어놓고는 돌아누웠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요한을 괴롭혔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집에는 할 일이 태산 같다. 밤낮으로 소나 말처럼 일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로 얼마 동안이나 집을 비우게 될지 알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어 이 모든 것을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괴로웠다. 요한은 마치 죽으러 가는 것 같은 암담한 심정이었다. 누구에게나 길 떠나기 전엔 정리해 둘 일이 많은 법이다. 요한 모리츠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며 고민에 싸였다. 
며칠 전에 재목을 20스텔이나 사 둔 것이 있다. 대금은 이미 지불되었고 그걸 잘라서 작은 더미로 숲 속에 그대로 쌓아 두었다. 이제 집으로 운반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내버려두어야 한다니. 그것은 참나무 재목이어서 값이 비싼 건축재였다. 요한은 자기 집 마당에 그것이 쌓여진 모양을 하루빨리 보고 싶었었다. 
쌓을 장소까지 다 정해 놓았었다. 나무통이 굵었기 때문에 울타리 곁에 쌓아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떠나게 된 것이다. 
요한은 스잔나 쪽으로 돌아누웠다. 재목을 숲 속에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스잔나는 그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재목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그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재목이 산림 구역 뒤쪽, 개울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는 걸 알려 줘야지. 그런데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재목도 있어서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아마 못 찾을 거야.'
스잔나는 요한의 손이 자기 어깨에 닿은 것을 느끼고는 잠결에 생긋 웃었다. 보름달이어서 방은 대낮처럼 환했다. 요한은 스잔나가 혼자선 절대로 재목을 운반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테미 영감이 같이 가 주면 곧 찾을 거다. 어쨌든 내가 산 재목이라는 걸 알려 줘야지. 그리고 가서 보라고 말해 줘야지.'
요한이 좀더 세게 아내의 어깨를 흔들자 그녀는 또 생긋이 웃었다. 그는 달빛을 받아 뚜렷이 드러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요한은 스잔나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감히 깨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재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안았던 팔을 오므리고 몸을 반듯이 폈다. 평소엔 이렇게 누우면 곧 잠이 들었지만 이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또 징발령 생각이 났다. 재목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잠시 잊었던 것이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요한 모리츠는 이미 국경 경비원으로 군복무를 마쳤었다. 그 동안에 그는 세르비아 말을 배웠다. 그는 군대의 규칙을 알고 있었다. 오늘을 내일로 바꿀 수는 없는 규칙을. 그러나 인간을 수레나 소, 쟁기나 트럭처럼 징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관자놀이를 비비면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내일이면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틀림없이 하사관들이 잘못 적은 것일 테니 그의 고민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헌병의 사무를 맡아보는 하사관 중의 한 녀석이 장난으로 동원장 대신에 징발 영장을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을 이루려 하는데 문득 발타에게 꾸어준 500레이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가 얼마 동안 집을 비우게 될지도 모르고 그 동안 스잔나도 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아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스잔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왼쪽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군.' 요한은 이런 생각을 하고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내일 말해 줘도 되겠지.'
요한은 또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물의 축대를 끝마치지 않으면 앞으로 장마철이 오면 허물어질 텐데. 그러나 장마철이 되기 전에 돌아오게 되겠지.'
요한은 우물에 대한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외양간을 만들 벽돌을 아직도 굽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800장을 만들어서 집 옆에 차근차근 포개어 놓고 말리는 중이었다. 
'구워 놓았어야 했는데...... 너무 말라 버리면 부스러져 여태까지 한 일이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데.' 이런 일들이 걱정되어 그는 엎치락뒤치락 했다. 
요한은 다시 스잔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다. 그녀는 이불을 차 버리고 얼굴을 베개 속에 묻고 자고 있었다. 요한은 아내가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워 보았자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닌가.
마을 사람들 중 마땅한 사람을 생각해 보았으나 벽돌을 구워 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자 자기 집이 있고 자기 일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낮이라면 또 누구에게 부탁이라도 해본다지만 한밤중이라 벽돌 얘기를 하려고 잠든 사람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짚과 옥수숫잎으로 벽돌을 잘 엎어 둬야지. 그러면 더디게 마를 게고 또 몇 주일은 견딜 거야. 그러다 보면 돌아오게 되겠지.'
요한은 침대에서 일어나 열려 있는 발코니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옷도 입지 않은 채였다. 몸이 오싹해서 셔츠와 바지를 입으러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내와 아이들을 깨울까봐 조심스러워 그만두었다. 
그는 벽돌 하나를 집어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아무래도 2,3일 후에는 가마솥에 들어가야 알맞을 것 같았다. 
요한은 우물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당을 돌아다니며 두루 살펴보았다.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집의 벽돌과 지붕까지 살폈다. 밤이 대낮같이 밝고 아름다워 그것들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달이 밝은 밤도 며칠 남지 않았으리라. 요한은 자기가 내일 떠나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외양간 지을 계획을 세우다 보니 수레와 말을 사야겠고 암소도 한 마리 사고 싶어졌다. 그는 마당 한구석에 짚단을 쌓아 둔 곳으로 가 짚단을 한아름 안아다 벽돌을 다 덮고 나자 몸에 땀이 났다. 너무 빨리 설쳤기 때문이다. 
첫닭 우는소리가 났다. 모든 걸 잊고 있던 요한은 갑자기 자기가 떠나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몸이 오싹했다. 이렇게 벌거벗고 마당에 나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부끄러워졌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방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내는 벌거벗은 채 침대를 가로질러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그 옆에 누웠다. 그가 옆에 온 줄도 모르고 그녀는 한쪽 다리를 뻗어 요한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요한은 금방 졸음이 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주위를 살폈다. 스잔나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달이 창문의 가장자리에 걸려서 헌병의 철모처럼 보였다. 요한 모리츠는 그걸 유심히 쳐다보며 뜬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그날 아침 요한 모리츠는 헌병 파견소로 떠났다. 도중에 물레방앗간이나 밭, 혹은 숲으로 가는 농부들과 마주쳤으나 요한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도 역시 물레방앗간에 가야 했고 숲에도 가야 했지만 그는 증오의 눈으로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야 하는 몸이었다. 그는 징발되었던 것이다. 
헌병대 문을 쳐다보았다.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순간 떠올랐다. 숲 속으로 숨어 버리면 헌병들은 도저히 그를 찾을 수가 없어 징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헌병대 문 앞에서 몸이 굳어 버려 요한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고 집도 있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는 헌병대 마당으로 들어섰다. 
헌병 파견소 소장은 사무실에서 수염을 다듬고 있었다. 요한은 그것이 끝나기를 기다려 영장에 잘못이 없는가를 물어 볼 생각이었다. 마당에서는 우유 끓이는 냄새가 났다.
그 때 누군가가 요한의 어깨에 손을 얹는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헌병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에게 영장을 가져다 준 헌병은 아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판타나의 유일한 유대인의 아들인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함께 서 있었다. 요한은 그들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험악스런 눈초리를 한 그 헌병은 마치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처럼 소리도 없이 옆으로 왔던 것이다.   
요한은 풀 위에 앉아 있었는데 헌병은 그의 셔츠를 움켜잡고는 마치 자루를 들어올리듯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하는 대로 따르던 요한은 마르크 골덴베르크의 손목이 뒤로 묶여져 있는 걸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란히 서!" 헌병이 명령했다. 
'마르크의 손이 묶인 걸 보니 장난이 아니구나!' 요한의 이런 생각도 잠깐뿐 헌병은 유대인 팔꿈치에 요한의 팔꿈치를 가까이 갖다 댔다. 요한은 두려웠다. 묶여 있는 사람을 보면 그는 언제나 겁이 났다. 
등위에서 보초가 총에 탄환을 재었다. 보지 않아도 요한은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군인 생활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총 끝에 칼을 꽂는 기척이 났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눈을 감았다. 안마당에서 나오면서 요한은 다시 한번 사무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소장은 유리창에서 거울을 기대어 놓고 여전히 수염을 깎고 있었다. 
농부들이 길을 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여자들이 물통을 내려놓고 그들을 보고 성호를 그었다. 
요한은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여자들은 언제나 손이 묶인 채 어깨에 총을 멘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는 성호를 긋는 것이다. 
뒤를 따르는 헌병의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 말이 없었다. 발을 맞추어 걷는 발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요한은 마르크 골덴베르크와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요한은 자기 몸의 살이 자기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몸 전체가 그랬다. 머릿속의 모든 생각도 그랬고 이젠 모든 것이 남의 것으로 여겨질 뿐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성들여 면도를 끝낸 소장은 휘파람을 불면서 안마당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부하가 물을 주어 세수를 했다. 부하는 그가 두 번이나 정성껏 수염을 깎는 것을 보았다.
"좋은 일이 생기신 모양이죠, 소장님?" 부하가 묻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소장이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은 대답 대신 윙크를 했다. 얼굴을 닦고 나서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책상에 앉았다. 그는 서류철에서 오늘 아침에 병사(兵舍)로 호송한 두 죄수에 관한 보고서의 사본을 꺼내어 읽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 법학 박사, 30세. 요한 모리츠, 농부, 28세. 이상 두 명을 호송함. 위의 두 사람은 유대 인 및 불온한 인물의 징발 또는 포로 수용소에 송치하라는 명령에 따라 법이 정한 규정에 해당함.
판타나 헌병 파견소 소장 니콜라이 도브레스코 준위
소장은 보고서를 서류철에 집어넣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요한 모리츠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스잔나 혼자다. 그는 이 시간을 2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신이 나서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소장은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왔다. 나갈 때는 하루종일 자리를 비우겠다고 했는데 금방 돌아온 것이다.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무슨 일에 손을 대야 마음이 가라앉을지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 소장은 눈에 띄는 서신 서류철을 바로 펼쳐 오늘 아침에 죄수 두 명을 병사로 보냈다는 보고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스잔나는 혼자 있었지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으나 그녀는 도끼를 들고 나와 들어오기만 하면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소장은 여자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강제로라도 마당으로 들어갔더라면 그의 머리는 당장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와 버렸다. 하지만 스잔나 못지 않게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요한 모리츠를 체포해 놓고 그의 아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던 책략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를 꾸미느라고 하룻밤을 꼬박 새웠는데 말이다.
'쓸데없는 일로 잉크와 종이만 버렸군!' 소장은 다시 스잔나 생각이 나서 욕설이란 욕설은 다 퍼붓기 시작했다.
28
병사 마당에서는 포로들이 줄을 지어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그들이 입은 값진 옷과 가죽 트렁크를 바라보았다. 피곤했다. 발이 아팠다. 골덴베르크는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아무 데라도 걸터앉고 싶었다. 그들 등뒤의 문은 아직 열려진 채로 있었다.
이윽고 포로의 행렬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마당에서 나가는 참이었다.
그 때 한 장교가 서류 묶음을 손에 들고 지나가다가 골덴베르크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요한 모리츠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헌병에게 물었다.
"둘 다 유대인인가?"
그는 헌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헌병의 손에서 노란 봉투를 낚아채고는 문을 나가고 있는 행렬을 가리키며 요한에게 명령했다. "저 대열 속에 따라 붙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요한 모리츠는 장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장교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리더니 장화를 신은 발로 차서 대열 속에 몰아넣었다. 요한 모리츠는 다른 포로들 틈에 끼여 문 밖으로 나갔다. 뒤를 돌아보나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바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29
그들은 저녁때까지 계속 걸었다. 잠시 쉬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을 대는 벌써 시내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요한 모리츠에게로 다가왔다.
"내 손 좀 풀어 주게." 그는 돌아서서 등을 들이댔다. 골덴베르크의 희고 가는 손목에 핏자국이 나 있었다.
요한이 손을 풀어 주가 골덴베르크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을 바라보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풀밭에 앉아서 유리같이 맑고 차디찬 시선으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한은 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말을 걸어 볼 생각으로 지금 막 풀어 준 끈을 내밀며 "이 끈 필요해요? 필요 없다면 내게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게." 골덴베르크가 대답했다. 그의 음성은 아까보다도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끈을 둘둘 말아서 비지 주머니 속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노끈 한 오라기라도 지니고 있으면 든든하거든요. 언제 긴요하게 써먹을지 누가 알아요?"
그제야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한 모리츠가 그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30
그날 밤 유대 인 포로 행렬은 목적지인 토플리차 강변에 이르렀다. 강물은 말라 있었고 강변엔 앙상한 버드나무와 왜소한 관목이 무성했다.
유대 인 포로들은 여기서 수로를 파야 했다. 멀리로는 인가가 보였으나 가까운 주위에는 마을이 없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빈 외양간 두 채만이 황량한 땅을 지키고 있었다. 그 외양간은 이 땅이 어느 수도원의 소유로 되어 있을 때 종말 사육장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삽과 곡괭이와 취사용 도구들을 실은 군용 트럭이 포로들 앞에 와서 멈추어 섰다. 달리 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포로들은 트럭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은 그 외양간에서 잤다. 요한은 바깥 풀밭에 누웠다. 잠자리가 부드러워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밤중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깨었다.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외투로 덮인 육체들, 자기 양쪽에 뻗어 있는 그 몸뚱이들만 보이지 않았다면 요한은 자기 집에 있는 걸로 착각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외투를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자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판타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튿날 아침 유대인들은 두 줄로 서서 점호를 받았다. 이 때도 요한 모리츠와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나란히 섰다. 요한 모리츠가 골덴베르크에게 아침 인사를 하자 그도 인사를 했다. 그가 약간 웃기까지 한 것 같았다.
준위 하나가 대열 앞에 서서 포로들에게 삽과 곡괭이를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차례대로 받았다. 몇 사람이 트럭으로 가서 큰솥을 내려 외양간 앞 호두나무 밑에 걸었다. 그러고 나자 금니를 해 박은 준위가 일장 훈시를 늘어놓았다.
준위의 훈시는 유대인은 조국의 번영과 수호를 위해 이 수로를 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준위 자신은 유대인의 신이며, 만일 자기가 어떤 것을 주장할 때에는 하늘에 있는 모세도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이름은 아포스톨 콘스탄틴이며, 아들이 둘인데 하나는 변호사이고 다른 하나는 장교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긴장한 채 듣고 있었다. 그 중에서 몇 사람은 히죽거리며 웃었지만 대부분 겁에 질려 있었다.
"아직 취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오늘은 식사가 없다. 내일부터는 빵 한조각에 차와 콩국을 두 번씩 주겠다."
그 말이 끝난 후 곧 작업이 시작되었다. 포로들에게 하루에 마쳐야 할 작업량이 할당되었다. 그것이 끝나면 밤까지는 자유였다. 그러나 자기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작업 태만이라는 규정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구속된다. 준위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포로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요한은 대열에서 빠져 나와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준위는 여기에 연락 사무소가 설치될 때까지는 어떤 이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요한은 마르크 골덴베르크 옆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와서 기다렸다. 군대에서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열흘 후에야 겨우 마련되었다. 판자로 지은 막사에는 탁자와 의자, 보초용 침대가 준비되었다.
요한 모리츠가 다시 사무실 문 앞에 얼굴을 내밀자 준위는 1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아직 그의 청원을 검토해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31
요한 모리츠는 땅을 파다가 괭이를 땅에 박아 놓은 채 오른쪽 사람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요한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뭔가 속에 앙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는 유대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가?" 옆 사람이 요한에게 물었다.
"유대 말을 모르거든요."
요한 모리츠가 대답하자 유대인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며 땅에 침을 뱉고는 돌아섰다. 요한은 억울해서 왼쪽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어서였다.
"할 말이 있으면 유대 말로 해!" 왼쪽 사나이가 말했다.
"바고 그 문제를 설명하려던 참이오. 난 유대 말을 모른다니까요." 요한은 맞받아 대꾸했다.
주위에서 일하던 유대인들이 증오에 찬 눈으로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요한은 일손을 멈추고 변명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모두 유대 말만 하기로 작정을 했나 보군. 그러라지! 저들은 유대인이니까 유대 말을 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왜 내가 유대 말을 해야 된단 말인가?'
"유대 말을 잊어버렸으면 히브리 말은 할 수 있겠지?" 하고 누군가가 적의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요한은 고개를 들고 뭐라고 대답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모두들 일손을 멈추고 요한을 주시하더니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요한 모리츠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빨개졌다. 자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국어가 문제가 된다면 웃을 사람은 나지 당신들이 아니야. 난 4개 국어를 능숙하게 수사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당신들은 몇 나라 말이나 할 수 있어?"
요한의 오른쪽 사나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난 말이야, 난 유대 말은 할 수 있다네!" 하고 대답했다.
요한은 삽으로 땅을 후려쳤다. 그들은 모두 루마니아말을 알고 있는데도 그 말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자 작업반장인 이삭 렌겔 노인이 요한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유대인들은 지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야.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유대 인 이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해. 무엇 때문에 남의 말을 쓰나?"
"하지만 난 유대인이 아닌 걸요!" 요한은 말했다.
"이 곳에까지 온 이상 숨겨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붙잡히기 전이라면 숨겨 둘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야. 우리들 사이에서 자네가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자넨 배교도(背敎徒)가 되네."
"하지만 렌겔 씨, 저는 유대인이 아니라니까요." 요한의 음성은 떨렸다.
"마음대로 하게나! 배교도가 되는 게 소원이라면!" 노인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도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걸 믿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며, 수용소를 빠져나가려고 술책을 꾸미고 있는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렌겔 노인이 가지고 있는 수용소 명부에 그는 모리츠 야곱이란 이름의 유대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요한이라는 이름은 없어! 유대 이름은 야곱이야. 그게 바로 자네 이름일세. 이론 역시 자네 이름이 아닐세. 그건 단지 야곱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아." 렌겔 노인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수용소 친구들은 그를 양켈이라고 불렀다. 그는 거기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익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곱이든 양켈이든 너희들 좋을 대로 불러라. 나는 다만 너희들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에 분통이 터질 뿐이야.'
요한 모리츠는 이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이 모두 자기처럼 징발 명령에 의해 끌려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가 말이나 수레, 밀가루 부대를 징발하듯이 사람을 징발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요한은 바로 그 사실을 준위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가 아니고는 누구 하나 붙잡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준위는 도무지 말붙일 겨를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틈을 타 그 말을 했더니 준위는 화를 벌컥 내면서 쏘아붙였다. 
"너는 넉 달 동안 여기 있으면서 계속 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구나. 넌 아무래도 혼란 분자 같아. 내가 사무실 문을 열 때마다 문간에 못박은 듯이 서 있단 말이야. 마냥 허튼 소리와 불평뿐이니. 왜 먹는 것이 부족하단 말이냐? 일을 하기 싫단 말이냐? 여편네하고 떨어져선 살 수 없단 말이냐?"
"간단히 해!"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라고?" 준위는 경멸하는 눈초리로 요한을 쏘아보며 책상 위에 놓인 포로 명부를 들고 M자가 있는 장을 펴서 읽었다. "모리츠 야곱, 28세, 기혼, 두 아이가 있음, 현주소는 판타나 마을, 아내의 이름 스잔나. 이게 확실히 너지?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유대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지?"
"기록은 확실하지만 제가 유대인이 아니란 것도 확실합니다."
"네가 지금 말하는 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너 그걸 아나?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하면 영창 신세야! 네 신상에 관한 이 기록은 적어도 군데 공문서인데도 계속 유대인이 아니라고 버티겠나?"
"전 유대인이 아닙니다." 요한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왔지?"
"그건 저를 끌고 온 사람들이 알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왜 지금 와서 말하는 거냐? 난 벌써 모든 공문서에 서명했어. 내 지휘 아래 운하 작업에 종사하는 250명은 모두 유대인이라고. 그런데 네가 아니라고 하면 난 허위 서명을 한 것이 돼. 그렇게 되면 나도 영창행이야!" 준위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말을 계속했다. 
"네가 하는 짓으로 봐선 양쪽 뺨따귀를 후려갈겨 한 닷새쯤 귀가 멍멍하도록 해 놓고 싶다만, 네 인생이 불쌍해서 청원을 명심해 두겠다. 그러나 매우 중대한 일이니 네 손으로 직접 이의 신청서를 쓰고 서명을 해야 돼. 만일 네가 유대인이 아니라면 너를 여기로 보낸 놈은 즉시 감옥행이야. 하지만 네가 유대인으로 판명되면 너는 그날로 수용소에서 동형수의 감옥으로 넘어가게 돼. 잘 알아들었나?"
요한 모리츠는 문 옆에 그냥 서 있었다. 준위는 이의 신청서를 써서 그에게 직접 서명케 했다. 요한 모리츠는 유대인이 아니므로 곧 석방시켜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제 가봐. 내일 아침 네가 서명한 서류를 보내겠다. 가서 좋은 회답이 나오길 기다려!"
요한 모리츠는 빙긋이 웃었다. 사무실에서 나올 때의 기분은 마치 자기 집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요한은 휘파람을 불었다. 바로 이 때, 사무실 보초인 스트룰이 쫓아와 그를 불렀다. 준위가 아직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봐, 야곱. 나는 군복무 한 지가 25년이나 돼. 그리고 난 한 가정의 가장이야. 네 이의 신청서 때문에 내 생애를 망치고 싶진 않아. 네 경우는 겉으로 보기 보단 복잡하단 말이야. 넌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졌어 네가 유대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졌지? 그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 너는 유대 말도 할 줄 알아. 유대 말 할 줄 아는 루마니아 사람을 봤나? 나만해도 루마니아 인인데 내가 유대 말을 하던가?"
"수용소에 와서 배웠습니다. 독일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 유대 말을 듣고 있으면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요한은 대답했다. 
"더 들어 봐! 첫째, 너는 유대인 이름을 가졌고, 둘째, 유대 말을 할 줄 안다. 셋째, 이 서류에 유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런데도 루마니아 인이라고 버틸 작정인가?" 준위는 요한이 서명한 이의 신청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그걸 당장 쓰레기통에라도 던져 버릴 듯이 책상 위에 놓았다. 
요한은 그대로 서 있었다. 억울한 생각에 목이 메었다. 
"준위님, 제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성인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테니 신청서는 일단 받아 두겠다. 그 대신 신청서에 내가 확인한 바를 덧붙여 기록해야겠다. 난 공평을 기하는 사람이야. 평생동안 그래 왔어. 네 이의 신청서에 너 자신도 근거를 잘 모르는 유대인 이름을 가졌고, 유대 말은 하지만 수용소에서 배웠으며, 그건 증인들이 증명해 줄 수 있다는 사실도 기록해 두겠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다른 문제로 넘어가 보자. 무슨 종교를 믿고 있지?" 하고 준위가 물었다. 
"그리스정교입니다."
준위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요한을 쳐다보았다. 
"유대인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을 아나?"
"압니다."
"그럼 그들과 같지 않다는 걸 증명할 수 있나?"
"할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정말입니다. 준위님."
"밝은 창가로 가서 네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라!" 하고 준위가 명령했다. 
요한 모리츠는 창가로 가서 바지 단추를 끌렀다. 그는 바지를 홀랑 벗은 채 준위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어.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밝은 곳으로 가서 잘 보이게 해. 정확한 보고서를 쓰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되니까!"
준위는 요한 앞에 무릎을 끓고 문제의 부분을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이전에 이미 목격한 경험과 사람들에게 들은 것과 비교하며 살폈다. 그러나 어떻게 판단해 야 할지 잘 몰랐다. 보고서는 어디까지나 정확이 생명이다. 그는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준위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모리츠, 너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을 시키고 있어. 너는 조국이나를 네 그것이나 보라고 이 곳에 보낸 줄 아나? 난 군인이다. 그런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란 말야. 내가 그런 짓을 한 건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야. 정말 네가 유대인이 아니라면 내가 너를 이 곳에 잡아 둘 필요가 없단 말이야." 
준위는 문을 열고 당번병 스트룰을 불렀다. 
"모리츠를 검사해라! 네 것과 같은 식으로 베어져 있는지를 조사해라."
스트룰은 모리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은행원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수학적 정밀성을 가지고 아주 꼼꼼히 처리하였다. 숫자를 다루듯 한 손을 그 위에 다 놓고 차분히 조사했다. 그러고 나서는 부동자세로 보고를 했다. 
"할례를 받았다 해도 아주 가볍게 받았습니다."
"가볍게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똑똑히 말해 봐.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약간 베인 자국은 확실히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랍비의 손으로 된 것인지 혹은 다른 원인에서 생긴 것인지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봐, 요한 모리츠, 네 경우는 매사가 이렇게 복잡하단 말이야. 여하튼 서류를 보낼 테니 이젠 가도 좋아. 스트룰, 너는 여기 남아서 내가 보고서 작성하는 것을 도와 다오!"
요한은 바지 단추를 채우고 묵묵히 사무실을 나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요한 모리츠가 징발되어 간 뒤에 시내에서 돌아온 코르가 사제는 곧장 헌병대로 갔다. 아침 9시경이었다. 소장이 마을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나는 징발 명령을 받고 실행한 것뿐이오! 그 밖의 것은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도 신부님과 마찬가지로 모르고 있으니까요. 시내 헌병대로 가서 알아보시지요." 골이 잔뜩 나 있던 소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요한 모리츠가 시내 헌병대에 있단 말이오?"사제가 물었다. 
"그것도 난 모릅니다. 만일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군의 기밀이니까요. 그 사람들은 방위시설 작업을 위해 징발되었기 때문에 그 작업 장소를 알려 드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제는 그날 오후에 시내 헌병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에 관한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입니까?" 한 젊은 장교가 물었다. 
"그리스정교 신자입니다. 내 교구에 속한 사람이지요." 코르가 사제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왔을 리가 없어요. 마을 헌병대로 가서 그 사람의 서류 번호를 알아 오세요. 어제오늘 이 곳에 온 사람들은 유대인뿐이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 다음날, 사제는 요한의 서류 번호를 알아 가지고 시내 헌병대로 갔다. 어제의 그 장교가 명부를 들춰보더니 말했다. 
"유감스럽습니다만 일체 알려 드릴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이건 기밀 서류이므로 육군 본부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요한 모리츠가 실제로 체포되었는지, 또 체포되었다면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알려는 겁니다. 그것도 기밀에 속하는 가요?" 
"그는 확실히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있는 장소를 가르쳐 드릴 순 없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걸요. 참모 본부의 관할로 옮긴 뒤에 우리가 보낸 사람들을 어디로 보냈는지, 또 어떻게 처리했는지 우리한테는 전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장교의 말투는 매우 무뚝뚝했다. 요한 모리츠라는 이름이 유대인 명부에 적혀 있는 것을 본 장교는 금세 태도가 달라져서 경멸의 눈초리로 사제를 쳐다보았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신부가 밖으로 나가자 젊은 장교는 그의 등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신부라는 작자가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다니. 문제의 녀석이 그리스정교 신자라고 주장하지만, 명부엔 분명히 유대인으로 기록되어 있잖아. 한번만 더 여기에 발을 들여놓아 봐라. 당장 내쫓아 버릴 테니!"   
코르가 사제는 편지로 요한 모리츠가 억류되었다는 사실을 드라이얀에게 알렸다. 그를 위해 육군 본부와 참모 본부에 힘을 써 보라고 부탁했다. 드라이얀에게서 곧 답장이 왔는데,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할 수 있는 데 까진 힘을 썼으니 요한은 머지 않아 석방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 2주일이 지나고 3주일, 4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왔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지사를 만나러 갔다. 시내로 나가는 도중에 마르크의 아버지 골덴베르크 노인을 만나 마차에 오르라고 권했다. 그 유대인은 몹시 수척해 보였다. 
"체포되어 간 뒤로 마르크에게서는 소식이 없습니다." 골덴베르크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놈을 부쿠레슈티와 파리에까지 보내 대학 공부를 시키느라고 재산을 몽땅 써 버렸지요. 그런데 박사 학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땅 파는 곳에 끌려갔습니다. 마치 땅을 파려고 박사 학위를 딴 셈이 되어 버렸어요."
사제는 손가방에서 따뜻한 빵을 꺼내 반으로 쪼개서 한쪽을 골덴베르크 노인에게 주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빵을 먹으며 마차를 천천히 몰았다. 오르막길에서 말은 속도를 늦추었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유대인이 말을 꺼냈다. 
"집까지 뺏기고 말았어요. 징발된 거지요. 며칠 내로 이사를 가야 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헌병들에게 쫓겨나고 말 거예요. 피땀 흘려 제가 지은 집인데 말입니다. 먼저 마르크가 징발되더니 이번엔 집이라니......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신부님?"
유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동안 묵묵히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유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다간 더 참을 수 없어서 자살하고 말 것입니다."
말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골덴베르크는 시내 입구에서 내렸다. 코르가 사제는 그가 유대인들만이 사는 좁고 어둠침침한 골목으로 재빨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35
골덴베르크와 헤어진 코르가 사제는 곧장 지사가 있는 도청으로 향했다. 사제는 말이 제멋대로 걸어가게 내버려둔 채 거리를 지나면서 집들을 바라보았다. 더 높이, 언제나 더 높이 솟아오르기를 그치지 않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층 건물들.
도청 앞에서 말이 걸음을 멈추었다. 코르가 사제는 요한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여기에 왔다. 시내로 향하기만 하면 사제가 어디로 가는지를 말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내로 들어오면 말은 으레 이 곳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다. 
지사는 좀처럼 사무실에 있을 때가 있었다. 또 설령 자리에 있다 해도 언제나 바빴으므로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한 번도 직접 그를 만나 보지 못했다. 비서와 수위들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올적마다 동정 어린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오늘의 미소는 여느 때와는 뜻이 달랐다.
"지사님께서 면회하시겠답니다. 앞으로 반시간만 기다리시면 신부님 차례가 될 것입니다."
한 시간이 넘어서야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겨우 지사를 만나게 되었다. 지사 앞에 앉은 사제는 말했다. 
"제 교구내의 한 젊은이가 6개월 전에 억류당했는데, 그가 있는 장소와 억류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유대 인 수용소에 있다는 말이 들리긴 합니다만, 그는 루마니아 사람이며 그리스 정교도입니다. 제 손으로 세례를 준 청년입니다. 그가 석방되도록 힘을 좀 써 주십사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원칙적으로 저는 그런 개인적인 일에는 일체 개입하지 않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고 지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말씀하신 그 사람이 지금 유대 인 수용소에 있다고 방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절대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똑같은 얘기죠. 현재 유대인 수용소에 있는 이상 그는 특별법에 저촉된 것이고 저의 권한 밖의 특별한 조치를 받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이고, 다음은 두 번째 문제인데 제 생각에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신부님과의 면회를 허가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저는 우리도내의 성직자 여러분들이 자기 교구의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런 저런 부탁을 들고 당국에 계속 간섭하러 오는 걸 좋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시에 처해 있으므로 각자가 자기 직책을 지켜야 합니다. 저의 이 말을 공적인 것으로 받아 주십시오. 제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신부님을 징계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셔야 겠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곧 교회와 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요한 모리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곧 교회와 신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부로서의 사명입니다. 요한 모리츠에게 내려진 처사는 부당한 것입니다."
"부당하다는 건 단지 신부님의 생각일 뿐이오. 우리는 전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조국과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적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 판국에 신부님은 어느 한 개인이 국방 시설 강화 작업에 참가하여 우리의 신성한 사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십니까?" 지사의 음성은 퉁명스러웠다. 
"그 개인도 한 인간입니다. 그 인간은 아무 죄도 없이 재판도 받지 않고 연행되어 강제 노동에 끌려간 것입니다." 사제가 대답했다. 
"그 모든 것이 쓸데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신부님, 만일 우리가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에 몰두한다면 볼셰비키의 큰 물결(러시아의 공산당 혁명)이 순식간에 우리를 집어삼켜 버려 머지않아 우리는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제일 먼저 그렇게 되겠죠. 우리는 십자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소."
"한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십자가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의 옹호자이면서 동시에 그 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볼셰비키가 국토를 침범하고, 우리들 교회에 불을 지르고, 우리의 부녀자들을 욕보이고, 우리를 감옥에다 집어넣어도 좋으니 그 요한 모리츠라는 사람을 석방시키라는 거요? 신부님이 교회를 위해 싸운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어떤 고귀한 이상, 국가적, 사회적 또는 종교적인 이상도 그것을 구실로 한 개인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착한 사람에게도 귀죄(歸罪)의 규정이 있는 것은 죄악이 지식을 보급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 몇 사람한테만 부정을 가할 이유는 없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을 노예화하는 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죄를 짓는 겁니다."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까?" 지사가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봉변을 당하고 있군요! 그 책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할겁니다. 징발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입니까?"
"그건 나도 모릅니다. 6개월 동안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누구 한 사람 말해 주는 이가 없더군요. 어디서나 하나같이 기밀이라고만 하더군요."
"그럴 겁니다. 이번 작전은 극비에 속하는 거니까요. 나도 그 일에 관해서는 신부님께 한마디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선 참모 본부에 가셔서 허가증을 받은 뒤에 다시 여기에 오시면 우리가 서류를 검토하여 누가 징발 영장에 서명을 했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혹시 직권 남용이라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죄를 저지른 자는 본보기로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이 문제에 관해 허가된 공식 문서를 가져오시기 전에는 우리로서는 일체의 정보를 제공할 수도 협조할 수도 없습니다."
지사는 일어섰다. 면회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코르가 사제는 앉은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사님, 사람이 그 정도로 무감각해져서 마치 기계처럼 자기 이웃 사람의 호소에 귀머거리가 되어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제가 요구하는 걸 지사님이 못 알아들으셨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감정과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요한 모리츠에게 가해진 부당성을 모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신부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신부님을 도와 드릴 수가 없는 걸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저 역시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저는 유대인이건 비밀 결사건 간에 그런 사건에 일체 관여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어서, 공연히 말려들어 관리로서의 내 경력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신부님의 깊은 이해를 바랄 뿐입니다."
사제는 일어났다. 그가 나가려 하자 지사는 사제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말씀하신 그 사람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름이 요한 모리츠라고 했나요? 그러나 다른 일로 저를 찾으신다면 그 때는 힘닿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36
시내를 벗어나는 길가에 교회가 있었다. 사제는 교회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그는 판타나의 헌병과 지사와 헌병대의 젊은 장교와 그리고 자기를 문간에서 기다리게 한 관리와 요한 모리츠의 죄수로 가두어 버린 모든 경찰들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들고 W.H 오든의 기도문을 입 속으로 외웠다.
'이제 보잘것없는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 드리자. 자신의 직권을 남용하여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죄 없는 사람을  강제 수용소로 보낸 자들, 사람을 신문하고 감독하는 자들, 허가를 해 주고 금지령을 내리는 자들, 이 모두를 위하여 기도 드리자. 문자(文字)와 숫자를 살과 피보다도 진실하고 생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 비나이다 주여, 우리들 이 지상의 소박한 시민들이 삶과 사람이 맡은 직책을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옵소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참고 견디어야 하는 국가라는 것이 우리의 조바심과 태만, 우리들 자신이 저지르는 부정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새기게 해 주옵소서.'
사제는 흰머리를 쓸어 올리고 모자를 썼다. 그리고 판타나를 향해 곧장 마차를 몰았다. 네거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덴베르크 노인을 또 만났다. 유대 인 앞에서 말이 저절로 걸음을 멈추었다. 말은 그 유대인 상인을 알고 있었다. 사제가 늘 그를 마차에 태워 주었으므로.
37
판타나의 헌병 파견소 소장은 상부로부터 마을의 유대 인 소유로 되어 있는 부동산 전체의 목록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골덴베르크 노인의 재산 목록은 만들었으나 요한 모리츠 때문에 그 목록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요한이 유대 인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당초 징발 명령을 내렸을 때 소장은 요한을 유대인으로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요한은 루마니아 인이었으므로 그 짓을 하면 후위 보고가 되기 때문이었다. 노무자 징발 규정에는 유대 인 및 불온한 인물들만 징발하라고 되어 있었다.
소장은 요한을 불온한 인물로 징발했다. 그것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뚜렷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병대 본부에서 유대 인 명부에 기재했던 것이다. 헌병대의 잘못이든가 아니면 요한의 실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은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요한이 몇 주일만 지나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벌써 6개월이 지났다. 그러던 차에 유대인의 재산을 징발하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당연히 요한의 집이 징발되어서는 안 되었지만, 헌병대의 명부에 판타나에서 유대인이 골덴베르크와 모리츠 두 사람이 있는 걸로 되어 있는 것이다. 소장은 어떤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만일 모리츠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집은 징발 대상권내에 들지 않는다는 걸 헌병대에 통고하면 요한 모리츠의 구류 원인을 확인키 위한 취조 명령이 내려질 것이 틀림없다. 소장은 취조를 당하고 싶지 않았고 될 수 있으면 그런 것을 모면하고 싶었다. 스잔나가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어떤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장은 골덴베르크 노인을 만나 의논해 보았다.
"스잔나가 루마니아 인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까, 그녀가 이혼을 하면 그 집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지요. 어쨌든 시내에선 크리스트교인과 결혼한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하던데요."
소장은 스잔나가 결코 이혼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일로 해서 어떤 소란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변호사와 의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라도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 취조 명령이 내려질 것이 뻔했다.
"이혼 은 간단히 돼요. 여자 편에서 '인종 문제'로 남편과 헤어지고 싶다는 걸 문서로 신청만 하면 되니까요. 신청서가 올려지면 그걸로 이혼이 허가됩니다. 재판을 할 것도 없이 관할 관청의 행정만으로 처리가 되니까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이혼에 관한 새로운 법률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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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은 스잔나가 직접 쓴 것처럼 자기 손으로 이혼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서명을 받으려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당신 남편은 유대 인 수용소에 가 있어. 그런데 이번엔 당신 집을 징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공문서에는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거든. 난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 이름이 문제야. 왜 하필 이면 유대식으로 이름을 지었을까?"
스잔나는 대문에 몸을 기대고 서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상대방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그녀의 큰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네놈이 내 남편을 끌어가더니 이번엔 내 집마저 빼앗으려 하는구나. 네놈이 제아무리 헌병일지라도 내가 널 죽였으면 죽였지 집은 못 뺏을 거야!"
스잔나는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문 밖으로 던졌다. 조장은 옆으로 몸을 피했다.
"왜 그래? 나도 당신 집을 빼앗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나는 당신이 이 집을 간직 할 수 있도록 이 서류에 서명을 받으러 온 것뿐이야."
이렇게 말하며 그는 이혼 신청서와 만년필을 스잔나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이건 무슨 서류야?"
"이혼 신청서야. 명령대로 이 집을 징발시키지 않기 위한 단순한 형식 서류야."
"그럼 이혼까지 시킬 작정이야?"
그녀는 악을 쓰며 한 마리의 암펌같이 그에게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소장은 당황하여 대문 너머로 그녀의 한쪽 손을 붙잡고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이건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니까. 정말 이혼하는 게 아니야. 만일 서명을 하지 않는다면 며칠 후엔 별수 없이 이 집에서 쫓겨나야 해. 그렇게 되면 곧 겨울이 닥쳐오는 이 때에 어린것들을 안고 어디로 갈 테야?"
스잔나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요한은 내 남편이야. 헤어지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소장은 한 시간 가까이 그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스잔나는 피로를 느꼈다. 너무 울었기 때문이다.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그녀는 돌멩이를 집어 소장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도끼를 들고 와서 그를 찍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런 집에서 쫓겨나는 것보다는 서류에 서명해 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이 돌아오면 자기를 이해해 주고 서명한 것을 용서해 주리라. 자기는 그에게 충실했으며 부지런히 일하고 집을 잘 지켰으며 아이들도 잘 키웠다는 걸 알아주리라. 자기가 오로지 그이만을 위해 그의 아내로 남아 있다는 것도 알아 주리라. 이런 생각을 하고  그녀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소장은 스잔나의 이혼 신청서를 웃옷 안주머니 속에 넣고는 재빨리 돌아섰다. 이제부터 그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조사를 할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만일 대장이 조사하러 왔더라면 적어도 2, 3일은 유치장 신세를 질 뻔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걱정은 없다. 그는 빙그레 웃고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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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함께 수용소에 갇혀 있는 포로들은 마음만 먹으면 모두 탈출할 수 있었다. 감시원으로 다섯 명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출해도 하루나 이틀 후엔 붙잡힌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 도망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만이 탈출을 한 번 시도했었다. 그러나 탈출하자마자 준위에게 붙잡혀 다시 수용소로 끌려왔다.
준위는 작업 시작 전에 포로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골덴베르크를 영창에다 집어넣어 군사 재판에 돌릴까, 아니면 여기에 둘까? 둔다면 이 작자가 다신 이 같은 바보짓을 하지 않게끔 너희들이 책임지고 감시하겠나?"
포로들은 마르크 골덴베르크를 감독하는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 때까지 그는 운하 파는 일을 하지 않았었다. 늘 아프다는 핑계로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아 왔었다. 그러나 탈출을 시도했으므로 이제는 땅을 파야만 했다.
렌겔 노인이 그에게 삽을 주고 파야 할 땅을 할당해 주었다. 그러자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즉시 이를 거절했다. 손목을 잘리는 한이 있어도 땅을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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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위 일을 하는 것은 내 정치적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란 말이오!" 하고 그는 말했다. 
포로들이 그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정치적 신념으로 운하를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의 말을 매우 흥미롭게 여겼다.
" 이 수로는 적군(赤軍)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 파고 있는 거요. 나는 공산주의자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내 동지들의 진로를 방해할 순 없소!"
포로들은 마르크의 용감한 태도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골덴베르크가 자기 몫의 땅을 파지 않을 경우엔 자기네들이 그 몫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감탄은 금방 사라졌다. 렌겔 노인은 마르크의 일을 잘 처리해 보겠다고 약속하고는 포로들에게 일을 시작하는 지시를 내렸다.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자, 렌겔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구덩이 밖에 서 있는 마르크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 유대인은 서구의 어떤 민족과도 견줄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타협할 줄 안다는 점이야. 우리 민족은 중재를 인정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경멸할 줄 아는 슬기를 지니고 있지. 이것은 자네도 잘 알겠지만 동양에서 받아들인 미덕이야. 염소와 양배추를 아낄 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야. 그런데 자네는 지금 현명한 점을 경멸하고 고집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어. 그런 태도는 야만적이고 호전적인 민족만이 지니는 특징이라는 걸 잊지 말게. 세련된 문화 민족은 여러 가지 태도를 동시에 취하고 있다가 그 속에서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가장 적합한 태도를 선택하는 여유를 갖는다네. 만일 자네가 그러한 현명한 태도를 중히 여길 의사가 없다면 마음대로 하게나. 우리는 자네가 운하는 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그 짓은 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이 곳에 있는 한 자네 몫의 땅을 누군가가 매일 대신 파 주어야 한다네. 지금까지는 자네가 사무실에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그것은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팔 수 없습니다!" 골덴베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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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하겠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자네는 호주머니에 두 손이나 찌르고 여기에 남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나!"
"제가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한 건 아닙니다. 그 일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일이 그리 즐겁거든요........."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우리가 자네의 태도를 준위에게 일러 바쳐서 자네 양손에 수갑을 채워 군사 재판에 회부시킬 수는 없잖나?"
"게으름뱅이라고 일러바치십시오! 왜 지금 당장에라도 가서 이르지 그러세요?"
"이봐, 마르크, 자넨 법학 박사야. 누구보다도 자네는 사태를 잘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우리는 자네가 체포되어 총칼 사이에 끼여 수용소 밖으로 끌려가는 걸 원치 않는단 말이야. 오늘날 전 유럽에서 파시스트들이 유대인을 잡아가고 있네.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이. 그러니까 파시스트들이 우리의 적이야. 마르크, 우리 유대인은 어느 한 사람도 자기 동포가 감옥에 갇히거나 군사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원치 않아.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우리가 자네 일을 대신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 각자가 자기 몫의 땅도 겨우 파니까 말이야."
"그런 논리적인 얘기로 동정을 얻어 나를 설득시킬 셈입니까? 내 생각을 돌리겠다는 건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마르크는 계속 빈정거렸다.
"나도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사람은 아니야. 내가 보기에 자넨 일종의 광신자야. 광신자란 원래 미친개와 같아서 접근하면 위험한 법이지. 자네에게도 부모님이 계시겠지? 물론 자네는 한 번도 부모를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자네의 부모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 부모님은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네가 유대인이라는 걸 알고 있네. 자넨 우리 형제야. 우리 혈관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자네가 그걸 잊고 있다 해도 그 피는 변함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네의 그 과격주의와 우리들 공동체의 이해 관계, 그리고 자네가 비웃는 우리들의 감상주의를 융화시키기 위한 타협책을 찾고 있는 거지."
다른 포로들은 다시 일손을 멈추고 두 사람을 에워싸고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네의 신념 때문에 공산군의 진로를 막는 작업을 거절하겠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그러나 정치적 의미나 군사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다른 일은 거절하지 않겠지? 예를 들면 변소 청소 같은 거 말일에. 우리는 차례로 순번을 정하여 변소 청소를 하는데 만일 자네가 매일 변소 청소를 해 준다면 그날 변소 당번이 자네 대신 땅을 파게 해보지. 그런데 미리 말해 두지만 그건 여간 힘들고 구역질나는 일이 아니야."
렌겔 노인은 골덴베르크가 어느 쪽이든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경우 반드시 운하 파는 일을 택하리라고 확신하였다. 변소 청소는 누구든 이틀 이상 계속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게. 오늘 저넉때까지 여유를 줄 테니까."
"저녁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결정했으니까요."
"그렇다면?"
"변소 청소를 택하겠습니다. 그 일은 건설적이니까요. 운하를 파는 일은 범죄적 일 뿐만 아니라 반동적이고 파시스트 적이지요. 적군 동지들의 장애물을 만드는데 혼신하기보다는 매일 변소 청소를 하는 편이 훨씬 더 낫겠습니다."
렌겐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결정하기 전에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보게나." 하고 노인이 말했다.
"내 마음은 결정되었습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골덴베르크는 돌아섰다.
포로 중에는 마르크에게 다가가 말을 붙일 용기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직 요한 모리츠만이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 당신 돌았구먼! 매일 변소 청소를 하는 편이 낫다니? 그건 감옥살이보다도 더 고약한데!"
"시끄러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어. 간섭하지 마!"
골덴베르크가 소리쳤다.
"간섭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요한이 대꾸했다.
그 순한 요한은 마르크의 눈빛이 요르그 요르단의 눈빛과 아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한 모리츠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의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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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인정 많은 노인은 곧 후회했다.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그는 마르크를 찾아가서 그의 결심을 돌려보려고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일을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다. 노인은 마치 자기가 마르크에게 그런 지독한 일을 강요한 것 같은 가책을 느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마르크는 그 때까지도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는 변소로 사용하는 구덩이에서 퍼낸 오물을 수용소 경계까지 운반해서는 그 오물로 들판을 메웠다.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구덩이는 퍼내도 퍼내도 물이 괴었다. 원래 몸이 약하고 폐가 나쁜 마르크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집어치우게! 자네 같은 사람에겐 맞지 않는 일이니." 렌겔이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자네라면 도저히 하루종일 이렇게 더러운 악취를 맡는 일을 못 하겠네."
여전히 마르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일어서는 것만도 힘에 겨워 보였다. 그래도 그는 일을 계속했다. 오물통을 두 개나 들고 노인 앞을 지나갔다. 그가 돌아보자 렌겔이 또 말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자네 옷과 자네 몸뚱이에는 이내 똥 냄새가 밸 거야. 밤에는 구린내 때문에 잠도 못 잘 걸세."
노인이 내일부터라도 당장 사무실에 다시 나가 하던 일을 하라는 말을 입 밖에 내려는 순간 마르크는 떠나지 않고 그의 곁에 서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렌겔 노인에게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마르크는 마침 잡고 있던 삽을 높이 쳐들었다가 눈을 감고 내리쳤다. 또다시 한번, 노인은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고, 마르크의 마지막 삽은 허공을 내리쳤다. 마르크는 삽 자루를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떠보니 렌겔 노인은 머리가 터져 발 밑에 뻗어 있었다. 죽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는 다만 절망 스런 몸짓으로 삽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후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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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넉 달이 지났다. 요한 모리츠는 눈에는 삽으로 두 쪽이 난 노인의 머리와 총칼을 멘 군인에게 끌려 수용소를 나가던 마르크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과거 속에 파묻혀 아주 오래 된 일같이 생각되었다. 그에겐 이 얘기가 몇 해가 지난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닌가 하는 느낌조차 들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혀지는 법이다. 마르크는 죽지 않았지만 감옥에 오래 갇혀 있으니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쉽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눈이 오는 날이었다. 준위는 포로들에게 장군이 사열을 하러 온다는 소식을 알렸다.
"국왕 폐하께서도 왕림하신다." 준위가 말했다. "폐하께서 우리가 파놓은 운하를 보시러 오신단 말야. 이 운하를 설계하신 분이 바로 국왕 폐하 자신이므로 보시려는 거야."
요한은 어느 소금 광산의 밑바닥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을 마르크를 생각했다. 그리고 직접 이 운하를 설계했다는 국왕을 생각해 보았다. 연필을 손에 들고 집무 책상 앞에 앉아서 설계를 하는 국왕의 모습이 영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운하는 매우 길었다. 사람들 말로는 100킬로미터 이상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나 포로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이 파는 작은 부분밖에 몰랐다. 보려 해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운하는 깊이가 3미터이며 양쪽이 가파른 벼랑처럼 되어 있었다. 여기에 물이 채워질 것이다.
요한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에 물이 흐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전쟁이 끝나면 이 운하로 기선이 지나가게 된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는 러시아의 진격을 막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 일은 국왕과 몇몇 장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준위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요한은 국왕과 장군들이 무어라고 귓속말로 주고받는 꿈을 자주 꾸었다. 요한은 자신과 유대인들이 일하고 있는 운하에 대한 토의였다. 그래서 이제 그는 포로들이 부모나 아내에게, 또는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러시아 공산군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준위는 말하기를, 러시아 사람들은 도처에 간첩을 보내어 지금 요한과 유대인들이 일하고 있는 이 운하의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매번 경찰이 그들을 붙잡았다고 말했다. 포로들을 석방시킬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귀가하게 되면 운하의 기밀이 샐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전쟁이 끝나면 언제고 아내 스잔나와 아들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서  그가 판 운하를 보여 주리라 생각했다. 그 때엔 물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잘 기억이 나도록 일한 장소를 눈여겨보아 두었다.
자식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감탄하리라. 그 놈들은 바로 이 장소가 옛날엔 가축들이 드나들던 들판이었다고 하면 곧이듣지 않으리라. 그리고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과거에 한 일을 자랑하겠지.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겠지. 이와 같은 공적을 세우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처음에는 집 생각이 간절해 고민했었다. 마당에 쌓아 둔 벽돌이 너무 마르지 않았을까, 스잔나가 숲 속에서 재목을 무사히 운반했을까, 옥수수는 다 거둬들였는지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뿐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틀림없이 스잔나가 모든 일을 다 처리했으리라. 그리고 여자의 연약한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자기가 돌아가서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준위가 바지를 벗기고 검사를 하고 나서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은 날부터 요한은 석방되기만을 계속 기다렸다. 그는 벌써 오래 전에 석방하라는 명령은 와 있으나 운하를 파는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 내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국왕과 장군들이 그가 파 놓은 운하가 마음에 드는지 와서 본다는 것이다. 그 다음엔 집으로 보내 주겠지.
요한은 자기를 이 곳까지 보낸 국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판타나에서 시내까지 자기를 끌고 간 헌병이 무척 미웠다. 그리고 소장도 미웠다. 자기를 징발한 자가 바로 그 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미움도 사라졌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 혹시 드브레스코 소장을 길에서 만난다면 옛날처럼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6개월 전에 석방이 되었더라면 외면을 하고 말았으리라. 어쩌면 욕설까지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징발 영장을 내려가기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적개심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시간과 함께 지나가 버리고 잊혀졌다.
그는 이제 얼마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가 살던 판타나 마을과 아내가 그리웠다. 아이들도 많이 자랐겠지. 페드로는 문가에서 자기 앞으로 달려오겠지.
요한의 마음은 마냥 부풀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페드로를 가슴에 안고 니콜라이를 꼭 껴안은 자기 모습을 그려보니 그것이 마치 벌써 실제로 일어난 일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스잔나에게는 어떻게 일을 했고 또 어디에 있었다는 걸 알려 주리라.
그러나 매를 맞았다는 말은 일체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배고파 죽을 뻔했다는 얘기도 빼놓아야지. 그녀를 가슴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가 유대 말을 배웠다는 것과 수용소 내에서는 아무도, 유대인들마저도 자기가 루마니아 인이라는 걸 믿어 주지 않더란 말을 해 줘야지. 준위가 요한의 그것을 조사하려고 바지를 벗으라고까지 했어도 그들은 자기를 루마니아 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 특히 준위가 하사관에게까지 명령하여 나를 검사시켰다는 걸 얘기하면 스잔나는 배를 잡고 웃겠지. 준위와 하사관 스트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너를 수용소에서 내보내야겠다. 넌 유대인이 아니니까 말이야. 국왕께서는 유대 인만 운하를 파라고 명령하셨어."라고 말했다는 것도 얘기해 주리라.
스잔나는 이런 일들이 이젠 다 끝이 나서 그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걸 기뻐하겠지. 그리고 자기 곁으로 와서 사랑스럽게 매달라며 이렇게 말하리라. '당신은 나의 소중한 남편이에요. 나에겐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보다 더 소중한 분예요.'
요한은 장군이 오는 날을 기다리며 이런 공상을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이 되자 장군의 시찰이 다음날로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군을 맞으려고 손에 괭이를 들고 세 줄로 늘어서 있던 포로들은 해산되었다.
요한은 사무실로 불려갔다.
"준위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다." 스트룰이 말했다.
요한은 가슴이 뛰었다. 석방 명령이 왔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준위가 자기를 사무실로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고 스트룰에게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기쁨을 감추기엔 힘이 들었다. 작업이 끝나면 곧 석방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희소식이 앞당겨 온 것이라고 믿었다.
준위는 새 군복을 입고 있었다. 마룻바닥도 장군의 시찰에 대비하여 깨끗이 닦여져 있었다. 사무실 책상은 얼룩 한 점 없는 푸른 조리로 덮여 있었고, 서류 뭉치는 잘 정돈되어 쌓여 있었다.
요한은 문 앞에 멈추어 서서 인사를 했다. 금방이라도 준위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으나 꾹 참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하는 모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준위의 옆에는 의사 사무엘 아브라모비치가 앉아 있었다. 이 사람 역시 포로였는데, 준위와 친하게 지내는 터여서 언제나 사무실에 틀어박혀 준위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스트룰은 한쪽 구석에 있는 푸른 종이로 덮인 작은 책상 앞에서 자리를 잡았다.
세 사람은 다같이 눈을 크게 뜨고 모리츠를 쳐다보았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준위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모리츠, 자네 아내가 이혼 신청서를 냈다! 그녀는 이제 네 아내가 아냐." 그러고는 짤막한 콧수염을 비비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이혼 신청서를 보내 왔으니, 네가 그걸 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거기에 사인을 해야 해."
준위는 착상 모서리에다 서류를 놓고는 요한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요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인종 문제라는 이유로 이혼이 요구되었어. 이젠 유대인의 아내가 되기 싫다는 거야." 준위는 힐책하는 말투로 덧붙였다. "넌 나에게 루마니아 인이며 크리스트 교도라고 엉터리 수작을 떨었지? 날 속이려고 했어. 그렇지? 나 같은 늙은 여우에게 걸렸다는 걸 몰랐겠지! 네 신청서를 보내지 않길 잘 했지. 네 여편네는 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신청했거든. 누구보다도 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네 아내 외에 더 있겠어? 안 그래?"
준위는 싱긋이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여자란 전부 그런 거야! 네가 떠나자마자 곧 다른 놈팡이를 물었을 거야. 여자라는 건 매춘부와 같아. 까짓것 너무 상심 말고........"
요한은 준위놈을 가리가리 찢어 놓고 싶었다. 자기 아내를 매춘부에게 비긴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갈았다. 울분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자신을 억제하려고 애썼지만 분노가 치솟았다. 목이 메었다. 닥치는 대로 쳐부술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요한은 준위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때려 누이고 싶었다.
"내 아내는 매춘부가 아닙니다."
"맞아. 너는 매춘부를 아내로 둔 사람이 아니니까. 너에겐 이제 마누라가 없으니 말이다. 네가 데리고 있었던 것은........" 준위는 책상 모서리에 놓은 서류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겨 날짜를 읽었다. "1월 30일까지야. 바로 그 날이 이혼을 선언한 날짜로 되어 있으니까 그날로부터 넌 다시 총각이 된 셈이야!"
준위는 다시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도 웃음을 띠었다.
"그녀가 이혼을 신청했을 리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녜요. 난 스잔나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네가 믿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혼을 인정하고 다시 독신이 된 것을 여기에 서명해야 해."
"난 독신이 아닙니다."
"좋아, 독신이 아니라고 해 둬라. 하지만 넌 문서를 봤다는 증거로 여기에 서명해야 돼!"
요한은 준위가 내미는 만년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절대로 서명할 수 없습니다!"
준위는 화가 나서 두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기는 군인이고 지금 요한의 대답은 엄연히 군기를 위반한 행동이라는 걸 상기했다.
"서명해!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 머리가 돌았어? 명령이다!" 하고 준위는 소리쳤다.
요한 모리츠는 만년필을 쥐고 서명을 했다. 명령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한은 준위가 손가락으로 지적한 종이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다 자기 이름을 쓴 다음 만년필을 책상 위에 놓고 그 방을 나오려고 했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넘쳐흘렀고 머리는 빙빙 돌았다.
"읽어 봐! 네가 무엇에 서명을 했는지 알아야 할 테니." 하고 준위가 말했다.
"읽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요한은 문을 열려고 했으나 앞이 캄캄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듯 더듬어도 그이 손엔 손잡이가 잡혀지지 않았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게나." 아브라모비치 의사가 이렇게 말하면서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요한은 되돌아섰다. 담배를 한 대 받아서 피우기 시작했으나, 그는 언제 누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어 줬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라이터의 불꽃뿐이었다. 노란 불꽃이 훨훨 춤을 추면서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다.
"아이들도 있나?"
의사가 물었다.
요한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대답은 했지만 자기가 아닌 다름 사람이 대신 해 준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사무실을 나와 있었다. 요한은 온종일 운하 언저리의 꽁꽁 얼어붙은 맨땅 위에 앉아 있었다. 추운 줄도 몰랐다.
천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때때로 지금 막 서명한 서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면 다시금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음날 아침 그는 사무실로 달려가 이혼 신청서를 읽어보았다. 그러기 전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서류를 읽어보니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스잔나까지도 자기를 유대인으로 믿고 다른 남자를 찾았기 때문에 그와 이혼을 한 것이다.
이제 와서 준위가 그를 보고 총각이라고 말해도 요한은 화를 낼 이유가 없어졌다. 가슴이 찢어질 듯하였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제 화가 나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44
그 다음날 준위는 멋진 새 군복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포로들은 수로를 따라 줄을 지어 늘어서서 점심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온다던 장군은 그날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준위는 항상 입은 군복으로 다시 바꿔 입고 나타났다. 준위는 장군이 화가 나서 운하를 보러 오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그로부터 1주일 동안 포들에게는 작업량이 할당되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이 소속된 수용소는 북쪽으로 이동되었다. 지금까지는 보드랍고 노란 찰흙을 파는 일이었지만 앞으로는 굵은 돌과 바위를 깨뜨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준위는 트럭을 타고 새로운 연장을 구하러 떠났다. 지금까지의 도구는 흙을 파는 데밖에는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준위는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우더니 돌덩어리를 깨뜨리고 가루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장들을 트럭 두 대에 잔뜩 싣고 돌아왔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진행되는 작업은 무척 힘겨운 것이었다. 포로들은 겨우내 고된 일을 했다. 급식 사정도 나빠 사람들은 파리처럼 쓰러져 갔다. 앓는 사람도 있었고 또 몇 명은 죽어갔다. 요한은 잘 견디어 나갔다. 1주일 정도 목 감기에 걸렸을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업은 진척되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4월이 되었으나 작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겨우 몇십 미터밖에 파지 못했다. 사람들 얘기로는 지난  겨울부터의 이 작업은 여름 내내 계속될 것이고 가을이나 되어야 물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5월 초순에 접어들자 갑자기 이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준위는 참모 본부가 이 운하 작업을 취소했다고 알려 주었다. 국왕 샤를 2세가 퇴위하고 망명하는 바람에 이 수로 계획에 관여했던 장군들도 모두 망명을 했거나 파면되었던 것이다. 이제 왕궁에는 다른 장군들이 들어와서 왕이 한 운하 설계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작업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차에 실려서 루마니아의 서부 국경으로 수송되었다. 거기에서 헝가리의 침공을 막을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작업장을 떠나면서 국왕의 설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다. 모든 작업이 헛수고였던 것이다.
45
새로운 수용소는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인접한 숲 속이었다. 그들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기차에 시달리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떠날 때 포로들은 수로를 파던 연장들을 가져갔고, 준위는 자기 사무실 전체를 다시 말하면 나무로 된 바라크 하나를 그대로 기차에 실었다. 스트룰은 명부를 운반했다. 포로들은 이가 득실거리는 옷을 그대로 입고 갔다. 포로 한 사람이 여남은 마리는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수용소에서는 수로를 팔 때에 쓰이던 연장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나무를 찍어 넘어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방어 요새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도 알지 못했다. 하여튼 그들은 숲 속의 나무를 전부 찍어서 국경으로 운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어서 나무를 찍어서 골짜기로 보내는 일을 했다.
요한 모리츠는 방어 요새를 어떻게 쌓는지 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그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 이렇게 잘라 낸 나무들로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에 거창한 벽을 쌓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계획도 보나마나 참모 본부가 세웠겠지만, 나무만 쓰러뜨리는 일을 하는 요한으로서는 더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두 나라사이에 굉장히 큰 벽이 서는 걸 하루 속이 보고 싶었다. 벽이 완성되면 그들이 일하고 있는 숲의 제일 높은 곳에 가서 볼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헝가리 사람들도 국경 저 쪽 자기들 땅에다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했다. 요한 모리츠는 어느 쪽이 더 높은지 보고 싶었다. 그는 준위에게서 헝가리 사람들이 만든 요새를 보잘것없이 허술한 것이어서 루마니아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사이에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퍽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루마니아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진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가끔 루마니아 군인이 헝가리로 진군해 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유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그 군인들을 보고 싶었다. 만일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이 곳에 있게 된다면 그 때는 산꼭대기에서 그 군인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준위의 말에 의하면 루마니아 방벽은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그 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요한 모리츠는 방벽이 상당히 높을 거라고 나름대로 상상했다.
새 중에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는 높이 나는 새도 있다. 그 새들까지 루마니아 방벽을 넘을 수 없다면―준위 자신이 보증한 얘긴데―아래에서 쳐다보면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아 구름 속까지 뚫고 들어갈 정도라는 말일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제 손으로 찍어 넘어뜨린 나무가 어느 부분쯤에 놓여질까 생각해 보았다. 무슨 표적이라도 남겨서 그 방벽이 완성되었을 때 어디쯤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으면 했다. 어쩌면 아주 높은 꼭대기에서 사용될지도 몰랐다. 숲 속에서 나무를 자르며, 요한 모리츠는 매일 이러한 생각을 했다. 어리석고 무가치한 짓일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좋았다. 집과 마을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만 하면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스트룰이 숲 속으로 요한을 찾아와서 사무실에서 그를 부른다고 했다.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한 이래 요한은 한 번도 사무실 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과 준위를 보기만 하면 그날 그 서류가 놓여 있던 책상 모서리와 팔꿈치를 대고 서명하던 자기 모습이 눈앞에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 번 다시 그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호출을 당했으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는 준위는 없고 아브라모비츠 의사와 스트룰과 수용소 요리사 후르틱 세 사람뿐이었다. 요한은 인사를 했다. 그들은 다정스럽게 인사를 받고는 의자 하나를 그에게 내주었다.
요한은 준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숲 속에서 사람을 보내어 자기를 불러온 걸 보면 준위가 무슨 중대한 일을 맡기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준위는 나가고 없네. 우리끼리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다네." 하고 말하면서 의사 아브라모비츠는 요한에게 담배를 권했다. 아브라모비츠 의사는 맛이 좋고 값비싼 담배를 늘 가지고 있었다.
"양켈, 자네는 이혼을 했지?" 하고 아브라모비츠 의사가 말했다. 요한의 얼굴빛이 파랗게 변했다.
"그래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건 내게 생긴 일이니까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네가 수용소를 나간다 해도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걸 말하는 것 뿐이야. 내 개인 생각으로는 전쟁이 끝나기 전엔 한 사람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전쟁은 앞으로도 10년을 더 끌는지 알 수 없어."
요한 모리츠는 한숨을 쉬었다 수용소에서 10년을 더 있다간 자기는 아주 백발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한, 자네 혹시 다른 나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아브라모비치 의사가 물었다.
요한은 자기가 이온 키챠와 함께 미국으로 가려고 했던 일을 회상했다. '그날 비만 왔더라도 난 지금 미국에 있을 거야. 그날 밤 스잔나와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하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그날 밤 스잔나를 만나지만 않았던들 지금 그는 멀고 먼 나라에 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수용소에 와 있지도 않을 것이다.
"떠나고 싶습니다. 전에도 미국으로 가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일이 잘 되지 않아서..........."하고 요한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번엔 실행될 거야. 자네가 떠날 결심만 한다면 자넨 몇 달 후에는 미국에 가 있을 걸세." 아브라모비치가 즉시 대꾸했다.
요한은 아브라모비치와 스트룰, 그리고 후르틱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자기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만일 그게 장난이 라면 숲 속에까지 와서 자기를 불러 낼 리는 없었다.
"꼭 가고 싶습니다." 요한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가세나. 우리 세 사람과 함께. 우리는 헝가리로 빠져나갈 거야. 탈출하는 게 무섭나?" 의사가 물었다.
"헝가리에는 유대인을 억압하는 법률이 없네. 내 누이동생이 부다페스트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후르틱 씨도 헝가리에 친척이 있지. 그런데 우리에겐 짐을 운반해 줄 사람이 필요해. 난 짐이 많아. 가방이 여섯 개야. 돈이 될 물건들을 갖고 있지. 국경을 넘어 헝가리 영토에 들어가서도 약 10킬로미터는 걸어야 하는데, 난 혼자서는 도저히 운반할 수가 없어. 그리고 우리들은 아무도 헝가리 말을 못 한단 말이야. 그래서 자네를 생각한 걸세."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갑니까?" 요한이 물었다.
"준위가 트럭으로 우리를 수용소에서 국경까지 데려다 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 곳을 탈출할 수 없을 거야. 어느 길을 가든 순찰대가 지키고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버젓이 군용 트럭을 타고 가는 거야." 하고 의사가 말했다.
"준위가 우리의 탈출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지! 그 사람은 가족이 많아. 돈이 필요해. 그 사람의 입장에 있다면 자네라도 그렇게 할걸세." 하고 후르틱이 말했다. 
요한은 잠자코 있었다. 
"자, 한 대 더 피우고 얼른 가서 짐을 꾸리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고." 의사 아브라모비치가 말했다. 
"당장 떠나는 겁니까?" 요한이 물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준위가 9시에 트럭을 가지고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어. 가서 자네 물건을 가지고 곧장 사무실로 오게. 우린 여기서 자넬 기다릴 테니까. 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오지 말게. 자넨 내 짐을 운반해야 하니까."
요한 모리츠는 사무실에서 나와 세수 수건 하나에다 셔츠 한 벌, 그리고 빵 한조각을 싸 가지고 곧 돌아왔다. 그들은 9시 정각에 수용소를 빠져나갔다. 정말 준위가 트럭을 몰고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위는 세 사람을 태우고는 곧장 국경을 향해 전속력으로 트럭을 몰았다. 
그로부터 6시간 후 요한 모리츠는 아브라보비치의 가방을 들고 헝가리 영토를 밟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 그들은 어느 역 앞에 도착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는 요한에게 돈을 주어 부다페스트로 가는 2등 열 차표 네 장을 사 오게 했다.  
부쿠레슈티에 있는 핀란드 공사관에서 베푼 만찬회에서 드라이얀 코르가는 루마니아의 국방부 장관인 투아르 장군을 알게 되었다. 
드라이얀은 며칠이 지난 후 장군을 만나러 가서 요한 모리츠의 일을 건의했다. 장군은 그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었다. 요한 모리츠의 이름과 직업, 생년월일과 억류된 날짜를 적어 놓고 이렇게 말했다. 
"늦어도 1주일 이내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즉시 조사를 시켜 석방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리지요. 오늘이.....," 장군은 달력을 쳐다보며 "8월 21일이군요. 28일에 다시 한번 들러 주시면 그의 석방장을 직접 내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요한 모리츠라는 이 사람은 당신 부친의 심부름꾼입니까?"
"아뇨, 아버님이 신임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심부름꾼과는 다릅니다."
"요즈음 시골에는 일손이 모자라 무척 곤란하더군요." 장군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그처럼 동분서주하는 이유도 이해가 갑니다. 한 사람이 더 있으면 그만큼 수확이 늘 테니까요. 특히 요즘은 농번기라 더할 테죠."
드라이얀은 자기가 요한 모리츠를 위해 힘쓰는 것은 아버지가 농삿일 때문에 그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가 부당하게 억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장군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제 방문은 순전히 인도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겁니다.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아, 그렇겠지요. 나도 때때로 그런 일을 하니까요. 가끔 농민들의 세례식과 결혼식 같은 것이 있어 시골에 가 보지만, 그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요즘은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야겠더군요. 그들이 이 쪽과 친구라는 생각을 갖도록 그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정도까지 돼야겠더군요. 당신의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당신의 아버님도 나와 똑같은 입장이실 것입니다."
장군은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고 드라이얀의 최근 소설을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새 책으로 아직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것이었다. 
"조금 전에 서점에 사람을 보내 사 왔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제 딸에게 증정한 다는 글을  한자 써 주시겠습니까? 엘리자베스라고 부르죠. 나이는 열 여덟 살인데, 소설을 아주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신의 책을 좋아한답니다. 점심때 당신이 나를 보러 왔었다는 말을 하면 아마 여러 가지를 물어 볼 거예요. 당신이 어떤 옷을 입었더냐, 어떤 넥타이를 맸더냐, 담배는 무엇을 피우더냐 등을 말입니다. 젊은애들이란 그런 거죠. 안 그렇습니까?"
드라이얀은 이번엔 틀림없이 요한 모리츠의 석방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국방부 계단을 내려 왔다. 그는 꽃가게에 들러 아침에 주문해 둔 백장미 다발을 받아들고 우체국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전보 한 장을 보냈다. 
"8월 29일, 요한의 석방장을 가지고 약혼자와 함께 귀향하겠습니다."
"8월 29일에 판타나의 아버지 댁에 간다고요? 빨리 가고 싶어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앞으로 1주일밖엔 안 남았군요."
그녀는 드라이얀 코르가의 손에서 백장미를 받아 꽃병에 꽂으며 말했다. 드라이얀은 그녀의 목과 까만 비단 드레스 위로 늘어진 곱슬곱슬한 다갈색 머리카락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가느다란 다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노라!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마주 보았다. 
"난 마음속으로 시인 튜도르 알게지와 같은 질문을 하게 돼. '그대의 어머니는 요정이었던가, 암사슴이었던가, 아니면 갈대였던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그것은 실로 정령 아니면 요정의 아기이리라. 왜냐하면, 그대는 실로 인간의 종자가 아닌 것 같기에.' 노라,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아무래도 당신의 몸에는 요정이나 암사슴의 피가 섞여 있는 것 같아. 당신의 두 눈은 놀란 다람쥐 눈 같고, 당신의 경쾌한 동작은 그 피를 물려받은 탓일 거야. 당신의 조상 가운데에 해조(海潮)도 들어 있었나 봐. 당신 몸에도 물풀과도 같은 조화가 깃들여 있어. 당신은 앙고라 고양이의 아양처럼 변덕도 많지."
엘리오노라 베스트는 드라이얀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백장미 다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내가 뭐 언짢게 한 거라도 있소?" 드라이얀이 물었다. 
"아녜요."
"그런데 기분이 나쁜 모양인걸. 눈을 보지 않아도 당신이 우울한 기분인 걸 난 알수 있어. 내가 한 말이 불쾌한가?"
"아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제 혈통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슴이라든가 요정이라든가 해조라든가 다람쥐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는 걸요......"노라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참나무로 된 낡은 가구들이 있는 커다란 식당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집은 부쿠레슈티에서도 손꼽히는 대저택이었다. 그녀 자신이 설계하여 건축한 집으로 가구, 양탄자 등 모든 것이 그녀의 취미에 맞게 꾸며져 있었다. 
29세인 엘레오노라는 루마니아에서 제일 가는 신문인 '웨스턴'의 사장이었다. 유럽에서도 유명한 대학을 몇 군데나 나온 그녀는 신문에 사설을 쓰는가 하면 직접 편집도 했다. 그밖에 출판사와 문예 잡지사도 경영했다. 그래서 정계와 문화계와 사교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드라이얀이 그녀를 안 지 벌써 6년째 접어들고 있었다. 그들의 애정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뜨거웠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 드라이얀이 그녀에게 청혼을 하면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매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결코 좋은 아내가 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제 직업을 너무 사랑하나 봐요. 만일 일을 그만둔다면 저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버린 것 같은, 이를테면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요한 모리츠가 석방될 것 같아! 국방부 장관이 오는 28일에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아버지한테 약혼녀인 당신과 함께 요한 모리츠의 석방장을 가지고 간다고 판타나로 전보를 쳤소. 기뻐하실 일이 두 가지인 셈이지." 하고 드라이얀이 말했다.
"당신은 저를 약혼자로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으세요?" 노라가 물었다.
"그래, 꼭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그만둘 수밖에. 아버님이 서운해하시겠지만 무슨 일이든 용서해 주시는 분이야."
"약혼녀가 아니라 아내로 소개할 수는 없으세요? 모레 아침에 결혼하면 판타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부부가 돼 있을 텐데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2년 동안이나 그녀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었지만 그녀는 누구의 아내도 되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갑자기 결혼을 제의해 오는 것이 아닌가.
"나와 결혼해 주겠소?"
드라이얀은 일어나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 있은 건 아녜요! 29일 판타나에 갈 때 우린 결혼한 사이가 되어 있는 거예요. 당신도 여러 차례 청혼 했었잖아요. 그 동안 마음이 변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셔야죠."
드라이얀 코르가는 분명히 그녀에게 무슨 중대한 사건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사건이 노라를 자기 아내가 되라고 밀어 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그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선 호적상의 수속만을 해 놓았다가 결혼식은 후에 판타나의 아버지 교회에서 올리기로 해요 당신은 언제나 당신 아버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면 했잖아요. 제가 흰 드레스를 입고 시골 처녀들에게 둘러싸여 제단을 향해 걸어가는 걸 상상하시곤 했죠......... 호적상의 결혼 증서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어요. 제가 전화로 검찰 총장에게 알아보지요."
"노라, 말해 봐요. 무슨 일이오? 무슨 중대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지?" 하고 드라이얀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 일도요. 일이 있다면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한 일뿐예요. 전 자연스럽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이 생겨 방해를 받기 전에 빨리 그 일을 실행시키고 싶어요. 저에게 닥친 이 행복이 저에게는 너무도 귀중한 것이어서 이젠 더 이상 지연시키고 싶지 않아요. 너무 기다리다 놓쳐 버릴까 두려워요. 이것이 전부예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세요?"
47
점심을 먹고 난 후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서재에 남아서 책과 그림을 보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엘레오노라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믿었지만, 어째서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변했는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둘은 벽에 걸린 피카소의 그림 앞에 나란히 섰다.
"피카소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야." 드라이얀은 루이스 멈포드의 피카소에 대한 평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되풀이했다. "그는 인간이 이룬 업적과 실패를 어떤 예술가보다도 잘 나타내고 있거든. 그의 전 작품 활동이 충격의 연속이며, 그 하나 하나의 충격이 우리 인간 문명의 구조와 붕괴를 상징하고 있거든. 그런데 원숙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빈곤과 비참을 그림의 소재로 삼기 시작하고 있어. 말하자면 우울한 시대에 있어서 휴머니티를 추구하는 것이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격심한 고뇌로 인해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흉한 얼굴을 한 여자를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찢긴 육체의 모습이며 고통으로 기계처럼 분해된 인간의 초상화였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눈과, 코, 입, 귀와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뿐이었다. 그 하나 하나가 고립되어 개개의 생명으로 살고 있었다. 고뇌로 말미암아 인간의 육체가 통일성을 포기한 상태였다.
드라이얀코르가는 노라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초상화와 닮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어떤 사진기도 그 순간의 그녀의 표정을 찍어 낼 수는 없었으리라. 너무도 깊은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얼굴은 피카소가 그린 여인의 얼굴과 똑같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전사(感電死)를 시키지 못하는 고주파 전류가 통과한 듯한 얼굴이었다.
"무얼 생각하오. 노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커피 드시지 않겠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러고 그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돌아섰다. 그가 조금 전에 그녀의 몸 속에 암사슴의 피가 섞여 있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호적상의 결혼식이 시청에서 거행되었다. 신랑 신부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드라이얀의 친구 두 사람이 증인으로 입회하였다.
결혼 절차를 끝낸 후 그들은 교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교회에서 식을 올릴 땐 좀 성대하게 베풉시다."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는 루마니아 시골의 결혼 풍속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결혼식을 할 떄는 먼저 말을 탄 청년들이 앞장서서 교회로 가지. 우리 고유의 옛날 옷차림을 한 청년 50명이 흰말을 타고 앞장서는 거야. 그 뒤로 소 네 마리가 끄는 수레가 따라가지. 수레에는 신부가 받은 선물과 또 신부가 시집으로 가져가는 물건들을 실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는 풍습이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수레에는 꽃만 가득 싣게 해야지. 입회인은 열두 사람이야.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신랑 신부와 입회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 교회의 높은 곳에선 사탕 과자를 비를 뿌리듯 쏟지. 그걸 주우러 신랑 신부 발 밑에까지 아이들이 몰려온단 말이야. 우리 결혼식 때엔 주머니 째로 던져주어 판타나 아이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록 해야지. 어렸을 땐 나도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그걸 주우러 갔지만 한 번도 흡족하게 주워 본 적이 없어. 네 개 이상 주워 본 적이 없어요. 우리 결혼식 때는 모든 마을 아이들의 호주머니가 가득 차도록 해 주고 싶어. 그리고 바이올린 과 기타를 갖춘 12인조의 집시 악단을 불러야지. 또 술은 통으로 갖다 놓고 온 마을 사람들이 취하게 할거야. 우리의 피로연을 숲 속의 빈 터 에서 열어 많은 사람들을 초대합시다. 그래서 한 1주일 동안 계속해서 잔치를 벌이도록 합시다."
노라는 시계를 보았다. 15분 후엔 변호사 레오폴드 스타인과의 약속이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 가 봐야겠는데 어쩌지요? 사무실에서 급한 용건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하는 수 없이 판타나에서의 결혼식 이야기를 중단하고 함께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노라를 신문사까지 바래다주었다. '웨스턴' 신문사의 웅장한 건물은 흰 대리석 현관을 갖춘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원래 인쇄소였는데 그것을 헐어 버리고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새로 지은 것이었다.
그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7층 건물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었다. 이 건물이야말로 노라의 정성이 깃들인 그녀의 자랑스런 작품인 것이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말했다.
그는 노라가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손수 운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결혼식을 올린 오늘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일이 끝나는 대로 혼자 들어갈게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드라이얀이 떠나는 것을 보고는 대리석 층계를 올라가 금테를 두른 제복을 입은 문지기가 활짝 열어 주는 육중한 문안으로 들어섰다.
49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당당한 태도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의 존재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핸드백과 장갑을 책상 위에 놓고 그 노인에게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그녀는 담배를 한 대 꺼내 손가락이 떨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안락의자에 앉으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스타인 씨?"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 위에 놓았던 손가방을 열고 서류 뭉치를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노라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모든 동작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일은 결말이 났습니다. 이것이 그 서류입니다." 그는 서류 뭉치에서 서류 두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프로에스티 등기소에 있는 서류는 이것뿐인가요?" 노라가 물었다.
"이것이 오늘 아침 등기소에 있던 유일한 서류들이죠. 지금은 그 서류가 당신 책상 위에 있지 않습니까. 등기소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고 노인이 대답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서류를 훑어보고는 접어서 책상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지금 곧 처분해 버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고 노인이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라는 그 노인의 금테 안경과 숨이 답답할 정도로 빳빳한 칼라와 구식 양복을 바라보았다.
"서류가 내 책상 속에 있는 이상 염려할 건 없어요, 스타인 씨."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만 베스트 양으로서는 당장 불살라 버리는 편이 좋을 텐데요."
"이 일에 돈이 얼마나 들었나요?" 노라가 물었다.
그녀는 화제를 딴데로 돌리고 싶었다. 노인이 겁을 먹고 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 서류는 물론 불살라 버릴 작정이었으나 그전에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꼭 10만 레이 들었습니다." 하고 레오폴드 스타인이 말했다.
"그러면 당신의 수수료는?"
"전부 포함해서입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책상 서랍에서 두 다발의 지폐 뭉치를 꺼내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잠자코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용건은 끝났죠?" 노라가 말했다.
그녀는 혼자 남아서 그 서류를 읽어보기 위해 노인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남은 게 있나요?"
"아니오. 이제 끝났습니다. 이번 일은 생각대로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이 대답했다.
"완전히 끝난 거죠?"
"물론, 그러나 서류를 없애 버렸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 부친과는 친구요, 또 함께 일해 온 사람이었고, 당신이 어렸을 때는 내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서류가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는 임시적으로밖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야 명백한 일 아닙니까, 베스트 양. 당신은 양친의 혈통이 유대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를 입수하기를 원했고, 이제 그 서류가 당신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걸 내가 등기소에서 꺼내 왔으니까요."
"그러니까 문제는 해결된 거잖아요?"
"서류를 없애 버릴 수는 있지만 사실 그 자체를 없애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온갖 방법을 연구해도 당신은 역시 유대인이니까요. 만일 누군가가 그걸 밝히려고 한다면........"
"무슨 증거로 그것을 밝힐 수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습니까?"
"그 서류는 갖출 수 있어요 돈만 들이면 내가 원하는 서류를 갖추는 것은 문제가 아니죠."
"그야 그렇죠. 하지만 그것은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법률을 농락하는 건 불장난을 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변호사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 프로에스티 등기소에서 서류를 훔쳐 낸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내게 그런 설교를 하시는 거죠?" 노라는 아픈 곳을 찌르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이건 설교가 아닙니다. 단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실을 뒤엎는다는 건 극히 위험한 일이며, 언제까지나 그런 당치도 않은 승부를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고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이것이 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고 노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달리 도리가 없어요. 이 사회가 내 나름대로의 생활을 금하고 집과 직업과 남편을 선택하는 것까지 금하는 이상,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싸울 거예요. 자기 보존의 본능으로 이 승부에 집착하겠어요."
"베스트 양, 문제는 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데 있습니다."
"그럼요! 나는 이기고 말 거예요." 그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유대계라는 걸 숨겨 왔는데 그야말로 젊은 혈기에 찬 대담한 행동이었어요. 그리고 운도 좋았고요. 당신이 무서워서인지 겁이 나서인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히 당신의 신분을 조사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인종법이 발효되고 나서 인쇄소와 신문사를 징발하라는 고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당신은 조사 담당자를 매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또 승부에서도 이겼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양친이 유대계라는 걸 증명하는 서류를 없애 버렸으니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종법의 적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엄해집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 법망을 피할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큰 고비에 이르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유대인이기 때문에 법률상으로는 단 한 줄의 글도 발표할 권리가 없는 당신이 아직도 이 큰 신문사의 사장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천만에요. 앞으로도 나는 '웨스턴'의 경영주이며 사장일 겁니다.' 노라는 반박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의 냉철한 지성을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대답은 맹목적인 신념이었다. 맹목적인 신념에는 이론이 서지 않는 법이다.
그는 그녀의 말에 반대하려 들지 않았다. 인간이 각성을 거부할 때는 반대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려고 애써 봤자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정오에 나는 한 기독교인과 결혼했어요. 앞으로 신문사는 남편의 명의로 운영할 것이니까, 만일 루마니아가 독일보다도 유대 인 압박이 더 심해진다 해도 '웨스턴'만은 징발하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정말 결혼했습니까?" 레오폴드 스타인에게는 노라의 말이 도무지 곧이 들리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은 엘레오노라 베스트 코르가입니다. 내 남편은 작가 드라이얀 코르가예요. 수일내로 그가 신문사 사장 겸 소유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것이 되는 거죠." 노라 베스트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레오플드 스타인은 엘레오노라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공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가 마음을 가라앉혀서 노라의 얘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믿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사를 넘겨주고 사장 직에서도 물러난다는 말이군요?" 그는 손수건을 입에다 대고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천만에요. 신문사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새 간부 체계를 만들어 조직을 재편성하는 거지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요."
"그건 비범한 착상인데요! 탁월한 착상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이러한 조건을 승낙하셨나요?"
"이해 못 할 말씀을 하시는군요." 노라는 냉정히 말했다.
"남편 되시는 드라이얀 코르가 씨도 동의하셨나 말씀입니다. 남자로서 이러한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건 어떤 정해진 계획 아래 한 여성에게 매수 당하는 게 되는 거니까요."
"매수라니요?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거예요." 노라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그녀에게 축하한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노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어 양친의 출생 증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두 눈에 눈물이 어려 번득였다.
"인간은 죽을 때가 아니면 축복 받을 권리가 없어요. 객관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신도 잘 알게 될 거예요. 그러나 일단 죽고 나면 인간은 축복 받을 수가 없어요. 유감스런 일이요. 정말 축복 받을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마는 데 안타까워요."
노인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기가 취한 태도를 후회했다.
"당신은 정말로 애정 때문에 결혼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내가 연애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당신같이 박식하신 분이 그런 말도 알아듣지 못하시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울고 계신 것 같은데."
"몹시 피로하신 모양이군요, 스타인 씨.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그것을 모르시다니. 당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군요. 유대인답지 않아요. 난 드라이얀 코르가를 사랑해요. 그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예요. 벌써 몇 해 전부터 그를 사랑해 왔어요.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에요. 인종 법 때문에 결혼했어요. 신문사를 살리기 위해서, 또 내 생활을 구하기 위해서.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레오폴드 스타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손에 키스를 하고 문을 향해 나갔다. 그녀는 그를 불러 세웠다.
"이번 주말에 나는 남편의 양친을 뵈러 시골 시댁에 가요. 드라이dis의 부친은 그리스 정교의 신부예요. 며칠간 거기서 묵을 예정이에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신문을 포함한 내 동산과 부동산 전부를 드라이얀 코르가의 명의로 바꾸는 증여증서를 만들어 주세요. 증여 증서를 꾸미는 데 사무상 곤란한 점이 있으면 아예 매도 증서를 만들어도 좋고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요."
"당신은 정말 총명하십니다." 노인이 말했다.
"총명한 게 아녜요. 나는 단지 나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자신의 본능과 그리고 자신의 투시력을 총동원시켜 싸우는 거랍니다. 나를 잘 이해하시고 수고해 주세요, 스타인 씨."
50
노인이 나간 후 엘레오노라는 책상 앞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우는 여자만이 울 수 있을 것 같은 울음이었다. 눈만이 우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후에 수화기를 들고 드라이얀을 불렀다.
"부탁이니 편집국까지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절 데리러 와 주세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빨리 와 주세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일어섰다. 그는 서재를 나오며 다시 한번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눈 하나가 절반은 웃고 다른 절반은 울고 있었다. 한 눈으로 동시에 심각하게 웃고 울 수 있도록 그 얼굴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51
드라이얀 코르가를 기다리면서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수화기를 들어 레오폴드 스타인을 불렀다. 그는 신문사 가까이에 살고 있어 방금 집에 들어온 길이었다.
"스타인 씨, 솔직히 말해 주세요. 내가 애정 때문에 결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안으면 이해 관계로 결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슴지 마시고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세요."
"당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타인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누가 내 머리를 자른다 해도 명확히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순수한 애정으로 움직인 것 같고, 어떤 때는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고 움직인 것도 같아요. 그러나 이런 설명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는 것과 아무래도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그 어느 쪽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느 여자들처럼 이해 관계만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군요!"
평소에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녀의 목소리도 이 때만은 애원하는 투였다.
"그렇지는 않아요, 코르가 부인. 당신은 전 재산과 신문사가 위험한 지경에 빠진다 해도 결코 이해 타산 때문에 결혼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자부심이 강하거든요."
"정말이에요?"
"그렇말고요."
"그렇다면 순전히 애정만으로 결혼한 건가요?"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하려면 미래를 믿어야 하고 행복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그 행복은 영원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코르가 부인, 당신은 그런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 총명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런 말은 실례가 되겠지만 애정만으로 결혼한 것도 아니라는 이유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녀는 초조하게 물었다.
"애정도 아니고 타산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포에서 나오는 행동은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놀랄 만한 신속성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애정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애정도 얼마만큼은 작용을 했겠죠.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인간이 아직 원시적인 상태로 숲 속에 살고 있었을 그 때, 밤낮으로 야수들에게 습격 받을 위험이 있었을 때의 여성들이 느낀 건 사랑과 같다고 봅니다. 그럴 때에 여성은 비로소 필사적으로 남성의 무릎에 매달려 보호와 사랑과 생명을 요구하며, 모든 걸 그만큼 열렬한 정열을 가지고 바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이와 같은 애정을 느끼는 때는 지진이나 홍수, 그밖에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경우뿐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때 말입니다."
"왜 아까 내 앞에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해 주셨어요?"
"당신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당신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공포심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도요. 당신이 가엾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어렸을 때 나는 늘 당신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귀여워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드라이얀 코르가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노라는 수화기를 놓고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며 웃어 보였다. 드라이얀은 그녀에게 키스를 해 주었다.
"당신의 기분이 다시 좋아진 것을 보니 기쁘군. 전화 목소리는 울고 있는 것 같았는데."
52
판타나로 떠나기 전날인 8월 28일, 드라이얀은 요한 모리츠의 석방장을 받으러 국방부를 찾아갔다. 그는 마치 주머니에 벌써 석방장이 들어 있기나 한 것처럼 즐거웠다.
그는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장관과 드라이얀 코르가가 친한 사이라는 걸 아는 부관이 곧 그를 장관실로 안내했다. 드라이얀은 장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삽화까지 들어 있는 자기의 호화판 처녀작을 한 권 들고 갔다. 책 속에는 정성이 깃들인 증정사까지 적혀 있었다.
장관은 그를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 맨 처음 면회하러 왔을 때처럼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방해를 해서 안됐습니다, 장관님."드라이얀이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앉으시오." 장관은 웬일인지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는 악수도 청하지 않았다. 드라이얀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뢰하신 용건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을 드리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지난 주일에 의뢰를 받았고, 또 오늘 그 일 때문에 오신 그 문제의 인물은 석방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엔 말입니다. 우리는 우선 그 인물의 인종적 혈통에 관한 당신의 증언이 옳은지 어떤지 그 여부를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장관이 말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당장 그 방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를 생각하고 그대로 참고 있었다.
"할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코르가 씨. 이젠 조사 위원회의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면회는 끝났다. 장관은 그에게 어서 사무실을 나가 달라는 눈치를 역력히 드러냈다. 드라이얀은 그걸 눈치챘지만 그대로 있었다. 내일 그는 판타나로 떠나야 한다. 아버지가 요한의 석방장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관님, 바로 1주일 전에 모리츠의 석방장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전번 말씀으로는 증언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되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틀림없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1주일 전에는 상황이 달랐지요."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 사람인데도 유대인 수용소에 감금당해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을 조사 위원회가 밝혀 줄 겁니다."
"그러나 위원회의 조사가 끝나려면 앞으로 몇 달이 걸릴는지 모릅니다. 그 가엾은 사람은 벌써 1년 반 전부터 무고하게 억류당해 있습니다."
"물론 조사가 끝나려면 1년이 걸릴 수도 2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전시라 워낙 바빠서 평화시처럼 조사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제 증언만 가지고 우선 요한 모리츠를 석방시키고 그 다음에 조사를 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관이 말했다.
"장관께서 1주일 사이에 그렇게 달라지시다니 매우 유감스럽군요." 드라이얀은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유감스럽소. 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 어떤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인가요, 장관님?"
"어떤 암시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실에 의거해서 말하는 겁니다."
장관의 차가운 대꾸에 드라이얀은 얼굴을 붉혔다. 
"그럼 제가 여쭈어 보겠는데요, 장관님. 구체적인 사실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코르가 씨, 말해 드리지요. 전세계의 유대인이 볼셰비키에 가담해서 우리 나라에 항거하고 우리 조국을 굴복시키려 드는 이 때에, 순수한 루마니아 사람이자 우리 나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인 당신이 사회의 지도자적인 입장을 망각하고 구태여 유대인을 아내로 맞는다는 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장관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듣고 있는 드라이얀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장관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군인으로서, 이 나라 국방 책임자로서 당신의 행동을 반역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조국에 대한 반역입니다. 당신의 이번 행동을 보고 내가 어떻게 당신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석방시키려고 애쓰는 걸로 보아 요한 모리츠라는 인물도 유대인이 틀림없다고 믿어집니다. 나중에 나의 이 추측이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겁니다. 이래도 내가 아직 당신 말을 믿어야 할까요?"
"물론 믿을 수가 없겠죠." 드라이얀은 이렇게 대답하고 묵묵히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는 손에 든 책이 생각났다. 드라이얀은 책을 펴서 서명한 페이지를 북 찢어 버렸다. 그러고 자동차에 올랐다. 
53
"노라가 유대인이라!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하고 드라이얀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어귀에서 그는 자동차를 세웠다. 그는 차 문을 열고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말을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런 말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지 뭐야. 어느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인종적 혈통을 물어 보겠는가!'
그는 몇 번이나 그녀의 혈통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암사슴과 해조와 다람쥐와 요정을 닮았다고 까지 했던 일을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어두운 얼굴을 했었다. 드라이얀은 이제야 겨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을 뉘우쳤다.  
'그때 그녀는 내 말이 자기의 유대 혈통을 암시하는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는 차 문을 닫고 다시 거리 쪽으로 향했다. 그는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의 여자를 생각했다. 
'좀더 빨리 알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구나. 좀더 일찍 알고 있었던 것들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주었을 텐데. 가엾은 노라!'
드라이얀은 맨 먼저 눈에 띄는 꽃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노라가 좋아하는 백장미 한 다발을 샀다. 꽃 파는 아가씨는 웃으면서 장미를 싸 주었다. 
54
"지금 쓰고 계시는 작품 얘기를 들려주세요."노라가 말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엘레오노라는 그가 새벽 4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방을 나가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이서 같이 하는 조반 시간에만 그는 서재에서 나왔다. 결혼한 지 두 달이 지났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에는 꽃이 꽂혀 있었다. 
"저에게 들려주시지 않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그녀는 몹시 듣고 싶었다. 드라이얀은 자기 작품에 대한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매번 회피해 왔으나 계속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전에 잠수함으로 항해를 한 적이 있는데, 1천 시간 동안을 물 속에서 보내야 했어. 잠수함 속에는 환기를 위한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는 특수 기계 장치가 있지. 그 기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그 대신 흰토끼를 싣고 다녔었지. 산소가 부족해 토끼가 죽어 버리면 수부들은 이제 대여섯 시간밖에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러면 함장은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하지.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 바다 표면으로 떠오르든가 아니면 그대로 바닷속에서 전원이 모두 죽어 버리든가 해야 한단 말이야.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죽어 가는 걸 보지 않으려고 서로 권총을 쏘아 쓰러뜨렸다고 해. 내가 탄 잠수함에는 기계 장치가 되어 있었어. 함장은 내가 산소량이 조금만 줄어들어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는 걸 눈여겨보았어. 그는 처음엔 나의 감수성을 흰토끼 같다고 비웃었지만 나중엔 그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만 쳐다보면 저절로 알 수 있으니 말이야. 나는 산소의 양이 부족한지 아닌지를 계량. 기계와 조금도 틀리지 않게 언제나 정확히 그에게 알려 주었지. 공기가 부족해 호흡 곤란을 일으키게 되는 시간을 다른 사람들보다 두 시간 앞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흰토끼와 나―타고난 재능이었어. 그런 데 얼마 전부터 나는 마치 잠수함에 탔을 때처럼 숨이 가빠서 견딜 수가 없구려."
"어디의 공기가 말예요?" 노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현대 사회가 갖고 있는 공기 말이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이젠 더 이상 견디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호흡 곤란증에 걸려 있소. 관리,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 등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인간을 질식시키고 있는 거야. 현 사회는 기계와 기술 노예한테 봉사하고 있거든. 그것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야. 인간은 모두 질식할 운명에 놓여 있지만, 그들은 아직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지. 인간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어. 그들은 마치 앞으로 여섯 시간밖에 살지 못할, 내가 탔던 잠수함의 승무원들과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거지. 그러나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 났다고 봐요." 
"그것이 당신 소설의 주제예요?"
"나는 작품 속에서 이 땅 위의 인간들이 탁한 공기에 질식되어 무서운 고통을 당하며 죽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 그런데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삼을 순 없기 때문에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여남은 사람만을 등장시키고 있소."
"어디까지 쓰셨나요?"
"아직 제1장이오. 그 등장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지금까지 그는 자기의 자유와 아내와 자식들과 집 등을 빼앗기고 말았어. 이젠 그의 이빨까지 뽑히기 시작했어. 좀더 있으면 눈과 아직 뼈에 붙어 있는 살도 발라내어질 거고 뼈는 분질러질 거요. 그의 마지막 고통은 아마 자동 기계나 전기 장치에 의해 가해질 거요."
"모두 실제로 있는 일인가요?"
"전부 사실이야. 나는 작품 속에 작중 인물이 사는 거리의 이름, 도시 이름, 나라 이름까지도 적어 넣었고, 심지어 전화 번호까지 밝혔지.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은 당신도 아는 사람이오. 그러니까 이 작품에 씌어진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당신도 알 수 있을거요." 드라이얀이 말했다. 
"누구예요, 그 첫 등장 인물이?"
"요한 모리츠."
노라의 이마가 찌푸렸다. 요한 모리츠에 관해서 드라이얀이 말한 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사람은 정말 가여워요! 그러면 제1장의 주인공은 그 사람이고 제2장의 주인공은 누가 되나요?" 노라가 물었다. 
"그것은 아직 나도 모르겠소. 우리 아버지가 될는지 우리 어머니가 될는지 혹은 나 자신이 될는지. 여하튼 우리들 가운데의 그 어느 사람이 되겠지."
"그러면 어느 장이나 모두 요한 모리츠의 얘기와 비슷한가요? 당신 소설 속에는 행운을 가진 운명, 다시 말하면 행복하게 끝나는 것은 하나도 없나요?" 하고 노라가 물었다. 
"하나도 없어. 흰토끼가 죽은 이상 행복이 있을 수 없지. 종말이 오기 전에 남은 시간이란 겨우 공포의 몇 시간뿐이니까." 하고 드라이얀은 대답했다.
55
요한 모리츠가 헝가리의 땅에 들어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세 사람의 유대인과 그는 역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 끊는 대합실로 들어 가는게 두려웠던 것이다. 잠시 후에 기차가 들어왔다. 
아브라모비치 의사와 스트룰, 후르틱은 2등칸에 올라탔다. 요한은 플랫폼에 남아서 차창 너머로 트렁크를 넣어 주고 기차가 막 떠나려는 순간 열차 발판에 뛰어 올랐다. 후르틱이 그의 팔을 붙잡아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기차를 타지 못할 뻔했다. 혼자 플fot폼에 남아 있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요한은 몸서리가 쳐졌다. 낮선 헝가리에서 일행과 헤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제때에 기차에 뛰어오를 수 있었던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와 후르틱은 곧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스트룰과 요한 모리츠는 객차 안을 모조리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객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고, 빈자리라곤 한군데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트렁크를 놓고 앉았다.
얼마 후에 한 여자가 내리는 바람에 스트룰이 재빠르게 그 자리를 잡았고, 요한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브라모비치가 객실의 문을 열고 말했다. "자지 말게. 트렁크를 도둑맞을지도 모르니까."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의사가 문을 닫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단했던지 그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요한은 목이 말랐지만 후르틱은 그가 역  구내 식당에 가서 레모네이드 한 잔 마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경찰관이 식당에서 그를 찾아내어 그가 루마니아에서 탈출해 온 것을 알면 네 사람이 다 붙잡힐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 누이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물은 얼마든지 마시게 해 주지." 하고 아브라모비치가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역 앞 광장으로 나가 자동차와 마차가 늘어서 있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차를 타는 것보다 걸어서 다니는 편이 더 현명할 거야. 마부가 우리를 밀고할는지도 모르니까.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붙잡힌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야."
일행은 걷기로 했다. 요한은 무거운 트렁크를 어깨에 매고 양손에는 하나씩 들었다. 트렁크는 아주 무거웠다. 그러나 어젯밤 국경을 넘어올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산길이 아니고 아스팔트길이라 힘이 덜 드는 군.'  이런 생각을 하며 요한은 맨발바닥에 힘을 주어 아스팔트를 밟았다. 
전차는 아직 다니지 않았다. 아직 이른 모양이었다. 날이 차츰 밝아지자 가로등이 저절로 꺼지는 걸보고 요한은 후르틱에게 누가 불을 끄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 멍청아! 입 닥치지 못해"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루마니아말을 쓰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누가 듣는 날이면 우린 끝장이야!" 후르틱은 얼굴을 붉히며 악을 썼다. 
"왜 루마니아말은 하면 안되죠?"  
"헝가리는 루마니아의 적국이야. 여기서는 루마니아인은 발각되는 대로 수용소행이야. 알아들었어?" 후르틱이 나직히 소리쳤다. 
"그러면 어느 나라 말을 해야 하죠?"
"유대 말을 해야지."
아브라모비치가 말했다. 
"헝가리에서는 아직 루마니아에서처럼 유대인을 억압하는 법률은 없으니까."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말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렇다고 그가 유대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다. 페트피 거리에 있는 아브라모비치의 누이 집에 도착할 무렵, 요한은 트렁크의 무게로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지쳐 있었다. 
그가 문 앞에 트렁크를 내려놓자 안에서 하녀가 나왔다. 요한은 하녀가 트렁크를 올리는 걸 도와주었다. 요한은 그녀와 같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요한은 이 옷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참만에 그는 스잔나가 지난날 그런 옷을 입었던 것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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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모비치의 누이는 상당히 뚱뚱한 여자였다. 요란스럽게 붉은 꽃무늬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생긴 대로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아브라모비치와 후르틱과 스트룰과 자기의 남편이 있는 방으로 요한 모리츠를 불러 모두에게 위스키를 대접했다. 요한은 앉을 의자가 없어 곁에 서 있었다. 의사의 누이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식탁 가운데에 놓으며 요한에게 말했다. 
"당신 자리가 없으니 부엌에 가서 차를 마시세요."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 우리끼리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녀의 남편인 나기가 헝가리 어로 말했다. 
요한은 이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식사하기를 꺼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별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녀 율리스카는 요한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반색을 하며 설탕과 레몬을 듬뿍 넣은 차를 석 잔이나 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햄과 버터를 넣은 커다란 빵을 세 조각이나 주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요한은 재빨리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난 뒤에 그는 세수를 하고 싶었으나 율리스카가 "그전에 나와 함께 시장에 가요! 갔다와서 씻어요." 하고 청했다. 
요한 모리츠는 바구니를 들고 율리스카의 뒤를 따라 장을 보러 갔다. 이리하여 그 다음부터 매일 아침 그는 그녀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나무를 패서 부엌으로 날라다 주고, 점심 식사 후에는 율리스카와 같이 설거지를 했다. 그녀는 성격이 명랑하고 상냥한 여자라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요한 모리츠는 이 집에 있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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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일과 율리스카의 농담에 휩쓸려 요한은 아브라모비치와 그 밖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무렵, 요한은 일행의 안부를 아브라모비치의 누이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들은 낮잠을 자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요한은 자기 일에 골몰하여 그들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눕자 비로소 오늘도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얘기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는 것은 부엌으로 나온 식기의 수로 보아 확실했다. 저녁 무렵에 모두 커피를 마셨다는 것도 분명했다. 다섯 개의 찻잔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 식사 때의 그릇 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율리스카가 접시를 겹쳐 쌓아 들고 왔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려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의 접시의 수가 적었던 것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후르틱도 자기 친척집으로 간 모양이지.' 하고 생각하니 요한은 후르틱이 자기를 만나 보지도 않고 가 버린 것이 섭섭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도 접시의 숫자가 적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고 요한은 스스로 자신의 불안을 달랬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요한은 자기의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르틱은 어제 저녁에 떠났기 때문에 이삭 나기의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와 스트룰은 아직 이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10시쯤 율리스카가 그 두 사람의 구두를 가지고 왔기에 그는 정성을 들여 닦았다. 그런 다음 그 구두를 집안으로 들고 가려 했더니 율리스카가 문간에서 말렸다. 그녀는 자기가 구두를 받아들고 들어갔다 돌아와서 말했다. 
"안주인이 당신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어요. 본래 성미가 그런 사람이에요. 누가 들어와 도둑질할까봐 겁이 난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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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에 의사 아브라모비치가 식당에 앉아 요한을 불렀다. 
"이 트렁크를 들고 나와 같이 가세."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요한은 고맙게 생각했다. 자기를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잊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넨 왜 맨발인가?" 함께 한길로 내려오자 의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한은 낯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구두가 없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 잠자코 길을 걸으며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단화가 아니면 장화를 신고 있었다. 요한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요한이 의사에게 사과하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요한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양쪽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혼자서 저만큼 앞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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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꽃이 만발한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어떤 낡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요한에게서 트렁크를 받아 들고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요한은 홀로 남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벽에 걸린 간판을 보니 영사관이라고 씌어있었다. 아브라모비치는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트렁크는 어떻게 했는지 혼자 빈손으로 내려오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벽에 기대서서 그를 기다리는 요한을 보자 웃음이 금세 입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의 앞에 다가오더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양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의사가 맨발의 사나이와 동행이라는 걸 사람들이 짐작하지 못하도록 그의 뒤에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아브라모비치에게 창피를 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이삭 나기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의사는 요한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서 이렇게 말했다.
"양켈, 자네 경우는 매우 복잡하더군. 유대인 단체는 우리 유대인들에겐 미국으로 갈 서류를 만들어 주지만 자네만은 곤란하다는 거야. 우리와 같이 왔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은 해 봤지만 영 듣지 않는단 말이야. 기독교도의 뒷일까지 봐 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대답이야. 유대인 위원회는 유대인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해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위원회'라고 부른다는군. 그런데 자네는 유대인이 아니거든. 사실이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의사 선생님."
"그러니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나로서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섭섭하네. 자넬 미국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난 자네를 그대로 죽으라고 내버려둘 사람은 아니야."
사무엘 아브라모비치는 지갑을 열고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요한 모리츠는 그가 세고 있는 헝가리 지폐가 너무 작은 데 놀랐다. 
"여기 20팽고가 있으니 받아 주게. 이건 내 짐을 운반해 준수고 값이야. 적지 않은 돈일세. 이 곳 헝가리에서 20팽고를 벌려면 적어도 1주일은 중노동을 해야 하네. 그런데 자네는 겨우 몇 시간 트렁크를 운반해 주고 그만한 돈을 번 거야."
요한은 그의 트렁크를 들고 국경을 넘어올 때부터 돈을 요구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삯을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으므로 요한은 할 수 없이 돈을 받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양켈,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자네를 수용소에서 구출해서 이 곳까지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니 잊지 말게." 하고 의사 아브라모비치는 말을 계속했다. "만일 우리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아직도 거기서 썩어 가고 있을 거야. 그렇다고 공치사를 하거나 내가 자네에게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야.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여하한 일에 대해 그 무엇을 요구하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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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모리츠가 아브라모비치의 누이동생 집에서 헝가리 공기를 마신 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다. 그는 날마다 처음 오던 날과 똑같은 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율리스카를 따라서 시장에 가고 장작을 패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설거지를 했다. 저녁에는 부엌을 청소하고 바닥과 계단을 닦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복도에서 마주친 이 집주인 이삭 나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일자리를 못 구했나? 여기 온 지도 벌써 1주일이나 됐는데. 아예 나한테 붙어 평생을 얻어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고 나서 이삭 나기는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요한 모리츠는 일자리를 구해 보지 않은 걸 뉘우쳤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자기는 이삭 나기 집의 하인으로 채용된 줄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바보처럼 여태 일자리를 구해 보지 않았을까? 그 사람 말이 옳아. 저들이 평생 날 먹여 살릴 순 없으니까.'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 저녁 요한이 율리스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곧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초콜릿 공장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만약 취직을 시켜 주면 내게 초콜릿을 갖다 주겠어요? 갖다 줄 딴 여자가 없다면......."하고 율리스카가 말했다. 
"다른 여자라니?" 요한은 율리스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섭섭했다. 
"초콜릿이 생기면 다 갖다 줄게요. 난 입에도 대지 않고."
그날 밤 요한 모리츠는 벌써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는 꿈을 꾸었다. 
그 다음날 아침, 아브라모비치 의사는 자기 누이와 매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다. 요한은 또 그의 트렁크를 들고 역까지 따라가 침대차에 그것을 올려 주었다. 
"멀리 가시는 겁니까?" 그는 물었다. 
"스위스로 가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기서 몇 주일 쉴 생각이야." 의사는 대답했다. 
기차가 떠나려고 기적을 울리자 아브라모비치는 요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요한은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플랫폼에 있던 신사들이 아브라모비치가 신발도 신지 않은 사나이와 악수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자 아브라모비치는 차창으로 목을 내밀고 외쳤다. 
"잘 있게, 양켈! 자넬 잊지 않겠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넬 도와 줄 테야!"
"안녕히 가십시오." 요한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기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요한 모리츠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후르틱과 스트룰은 그에게 작별 인사도 한마디 없이 떠나 버렸는데, 이제 아브라모비치마저 떠나 버렸다. 요한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한동안 플랫폼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초콜릿 공장 생각이 떠올랐다. 요한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페트피 거리를 올라가며 생각했다.
'일자리를 얻게 되면 율리스카에게 유리알로 된 예쁜 목걸이를 사다 줘야겠다.'
요한 모리츠와 율리스카는 여느 때 보다 약간 일찍 시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서둘러 장을 보고서 나지막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오른손에 시장 바구니를 든 요한은 왼손으로 율리스카의 팔을 부축했다. 두 사람은 재게 발을 옮겼다.
"초콜릿 공장은 이 거리 끝에 있어요 빨리 걸어야 해요." 율리스카가 요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두 사람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너무 시간이 걸리면 율리스카가 점심 준비할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는 고향 사람에게 요한의 일을 부탁했더니 공장장과 상의한 결과 일손이 모자라니 즉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정말 즉시 채용해 줄는지 몰라?" 요한은 길거리에 모여 있는 혼잡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며 말했다. "정말 즉시 나를 써 준다면 오는 월요일엔 첫 봉급을 타게 될 거야. 그러면 아마 당신은 초콜릿을 받게 될걸."
요한은 이날 따라 율리스카가 유난히 귀엽게 보여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그리고 방도 하나 얻어야지. 평생토록 당신 주인 신세를 질 수는 없거든? 공장 근처에다 방을 하나 구해 보아야지."
"그럼 내가 놀러 가도 될까요?" 율리스카가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사람들이 붐 비는 곳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율리스카도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사람들을 보려고 하려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길로 가요. 그렇지 않으면 점심 준비할 시간이 없어요." 하고 율리스카는 말했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허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더욱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런데 길 한쪽에는 헌병들이 비상선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율리스카는 곁눈질로 헌병을 슬금슬금 쳐다보면서 날쌔게 빠져나갔다.
"헌병과 군인들처럼 세상에서 변변찮은 인간들도 없어! 저런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시집 안 갈 테야."
율리스카는 요한이 그 말을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는지 알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보이지 않았다. 율리스카는 군중 속에서 그를 찾으려고 살펴보았다. 헌병 곁에 서 있는 요한이 손짓을 해 보이는 게 눈에 띄었다. 율리스카는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불심 검문에 걸린 것이다. 헌병들이 길을 막아 놓고 통행인들의 신분 증명서를 조사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율리스카는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율리스카는 요한이 아무런 증명서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자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다시 헌병이 쳐 놓은 비상선을 넘어갔다. 헌병 하나가 율리스카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뿌리치고 필사적으로 요한이 있는 데로 가까이 갔다. 요한은 어느 새 총검을 멘 한 헌병에게 떼 밀리며 트럭으로 끌려가는 무리 속에 끼여 있었다. 요한은 바구니를 높이 들어올려서 율리스카가 그것을 받아 갈 수 있도록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도 헌병들의 제지를 받아 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건이 든 바구니를 받으러 가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헌병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화를 내며 욕을 퍼부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요한 모리츠는 트럭에 실렸다. 그는 바구니를 바깥으로 내밀어 보이며 율리스카가 와서 받아 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런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채소 바구니를 무릎 사이에 놓았다. 
'율리스카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들어가지 않으면 나기 부인에게 매를 맞을 텐데.'하고 그는 생각했다. 트럭에서 뛰어내려 그 바구니를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칼을 꽂은 총을 둘러멘 헌병 둘이 긴 의자의 양쪽 구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험상궂은 그들을 바라보자 비로소 요한 모리츠는 율리스카와 시장 바구니 걱정을 잊고 자신이 또 붙잡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62
그로부터 4주일이 지났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방에 들어앉은 요한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체포된 날부터 요한은 햇빛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감방 들창은 안마당을 향해 있었으나 그 곳은 잿빛의 높은 벽돌이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4주일 동안 그는 한 모금의 신선한 공기도 마시지 못했다. 다른 포로들은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 마당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체조도 할 수 있었지만 요한에게는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웃 감방에선 죄수들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갔다. 돌아온다는 걸 발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복도가 조용했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요한은 눈을 떴다. 눈까풀이 간신히 떨어졌다. 눈까풀을 만져 보니 퉁퉁 붓고 피가 엉겨 있었다. 언제 감방에 데려다 놓았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업어다 놓았겠지.'
그는 매일 매를 맞았다. 때로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감방으로 돌아올 때에는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를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몇 시간이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때도 있었다. 근래에 와서 그는 늘 안겨서 감방으로 돌아왔는데, 언제 고문이 끝났는지 또 언제 간수가 부축해서 감방으로 데려와 침대 위에 뉘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너무 심하게 맞은 모양이야!" 그는 마치 낯선 사람에게 얘기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니 숱이 많은 수염은 뻣뻣했다. 콧수염과 머리털과 눈썹에는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바싹 마른 흙처럼 덩어리진 피가 손가락 밑에 말라붙어서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요한 모리츠는 혀로 입술을 더듬었다. 입술이 부풀어 터질 듯한 종기처럼 아팠다. 앞니 네 개가 빠져 달아났다. 그는 어느 날 턱을 주먹으로 얻어맞은 뒤 피와 함께 복숭아씨를 뱉어 내듯 이빨을 뱉어 냈다. 그날도 오늘만큼 턱이 아팠었다.
'이 이상 더 이가 빠져 버린다면 나는 빵도 먹지 못할 거야.'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아팠다. 요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는 보통 때 처럼 그것이 누구의 발소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아보려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몸 전체가 상처를 입어 그의 사고력마저 마비되어 있었다.
요한의 감방 앞에서 발소리가 멎더니 철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간수가 들어와 고문실로 데려가려고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렸을 때 요한은 비명을 질렀다. 발바닥이 방금 구워 놓은 빵처럼 부풀어올라 있었다. 언제 발바닥에 매를 맞았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간수가 마구 떠다밀었다. 요한은 감방 문턱을 넘어섰다. 간수가 떠다민 등이 눈물이 날 지경으로 아팠다. 그 아픔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발이 아프기 시작했다. 한 발짝씩 옮겨 놓을 때마다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취조관인 바르가의 방까지는 100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발바닥을 가지고 어떻게 100발짝을 옮길 수 있겠는가. 요한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간수가 달려와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질러 넣어 일으켜 세웠다. 요한 모리츠는 어린애같이 가벼웠다. 뼈와 가죽 외에는 무게가 나갈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과 지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체포되기 전까지의 요한의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63
구류되던 날 요한 모리츠는 사실대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 그가 헝가리로 오게 되었으며 어떤 경위로 왔는지를 자세히 얘기했다. 그러나 경찰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을 자백하라면서 마구 때리기만 할뿐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나서도 요한은 똑같은 식으로 자기 얘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면 또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헝가리 비밀 경찰의 감옥에 있었다. 그래서 매일 신문을 받고 한 차례씩 얻어맞았다.
"무슨 임무를 띠고 헝가리로 들어왔느냐 말이야?" 취조관이 물었다.
"무슨 임무를 띠고 온 것이 아닙니다."
"준위가 군용 트럭으로 국경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건 사실입니다. 중위의 이름은 아포스톨 콘스탄틴입니다. 그가 수용소 소장이었습니다. 아브라모비치 의사의 친구였는데, 보초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우리를 데려다 준겁니다."
"거짓말 마라. 루마니아 첩보 기관의 타나세 이온 사령관이겠지. 우린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그는 매달 우리 쪽으로 첩보원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너를 보낸 것도 그 자야. 그런데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무슨 목적으로 그가 너를 여기에 보냈는가 하는 것 뿐이야. 네 임무가 뭐야?"
"저는 모든 걸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요한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런 대답을 하면 몇 분 후엔 지하실로 고문을 받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런 연극은 소용이 없어.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너는 18개월 동안 유대 인 수용소에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또 거짓말을 하는군. 너는 거기 갔을 리가 없어. 네놈은 틀림없는 루마니아 놈이잖아."
"네, 저는 루마니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수용소에는 왜 들어가나? 헝가리에 와서 네놈은 유대인으로 행세할 작정이었지? 그래서 우리들을 믿게 하려고 루마니아에서 유대 인 수용소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더구나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넘어왔다고?"
"그것도 사실입니다."
"거짓말 마라. 넌 혼자 왔어. 넌 우리가 네 말만 믿고 조사를 더 이상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이 조서에는 나기 부부가 쓴 진술서가 들어 있어 그 부부는 네 이름조차 들어 본적이 없다는 거야. 로자 부인에게는 의사인 오빠가 없어."
"그분들이 저를 모른다고 했습니까? 요한 모리츠가 물었다." 그 부인이 그런 말씀을 했을 리가 없을 텐데요. 저는 그 집에서 일했습니다. 율리스카와 함께 시장도 보고 접시도 닦았는데요........."
요한 모리츠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취조관이 호통을 쳤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훌쩍거려! 로자 나기 부인 집에는 율리스카라는 하녀가 없어. 거짓말을 하려거든 이름이라도 똑똑히 알아둬야잖아!" 취조관은 한바탕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집 하녀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다 해 봤어. 그 집 하녀는 8년 전부터 그 집에서 일해 오고 있는데, 율리스카라는 이름은 네가 지어낸 이름이더구먼. 넌 우릴 속일 속셈이었지. 그렇지? 타나세 사령관이 네게 율리스카 얘기를 외우게 하면서 그렇게 반복하라고 하더냐?"
요한 모리츠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간수가 부르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지하실로 끌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기 부인이 자기를 모른다고 말했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를 지하실로 끌고 갈 간수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눈을 떠보니 이삭 나기가 앞에 서 있었다. 밤색의 새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요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놈을 아시오?" 취조관이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이삭 나기는 요한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루마니아에서 탈출한 유대 인 세 명이 당신 집에 머문 일이 있습니까?" 취조관이 물었다.
"수년 전부터 우리 집엔 내 처와 그리고 하녀뿐입니다. 내 집에 묵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맙소!" 취조관이 말했다.
이삭 나기가 취조실에서 나가자 곧 이어서 그의 아내가 들어왔다. 그녀 역시 요한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신 오빠되는 분이 루마니아에 의사로 있습니까?"
"저는 외동딸입니다." 로자 나기가 분명히 대답했다. 취조관은 요한 모리츠에게 험악한 시선을 던지고는 로자 나기에게 물었다. "당신 집에 율리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를 둔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부다페스트에 온 뒤 8년 동안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조세피나라는 하녀뿐입니다."
나기 부인이 냉랭한 표정으로 취조실을 나가자, 그 뒤로 한 노파가 들어와서 자기가 조세피나인데 8년간 줄곧 나기 씨 집에서 일해 왔다고 증언했다. 그녀가 나가 버리자 다시 취조관과 요한 모리츠만 남게 되었다.
"이쯤 되면 이젠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 실토하겠지! 자, 너는 무슨 목적으로 헝가리로 들어왔지?"
요한 모리츠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64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요한 모리츠는 취조관 바르가의 방에서 곧장 고문실로 끌려갔다. 요한은 오늘따라 고문 받는 것이 유난히 두려웠다. 지하실 방으로 들어서자 불빛이 얼굴을 들이비쳤다. 이방에는 언제나 백묵처럼 하얀 광선이 가득 차 있었다. 전등은 크고 촉수가 강했다.
요한은 눈을 감았지만 뜨거운 전등 불빛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또 왔구나. 옷을 벗어!" 고문 담당 간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명령했다. 그는 언제나 여기서 카드놀이를 하는 뚱뚱한 두 사나이 중의 한 사람으로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요한은 두려움에 떨면서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다가는 그 두 간수 중 하나가 밧줄로 얼굴을 갈긴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퉁퉁 부어 있어서 조그만 셔츠 단추를 빨리 풀 수가 없었다. 요한은 그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이렇게 매가 무서워 보긴 처음이었다.
요한은 계속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두 간수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들은 카드놀이에 열중해서 요한의 행동이 느린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요한은 겨우 셔츠를 벗었다. 그의 눈앞에 연장걸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군대에서 총을 청소할 때 사용하는 꽂을대 같은 가느다란 쇠 회초리가 죽 놓여 있었다. 엄지 손가락만한 굵기에서부터 지푸라기처럼 가는 것까지 모두 20종류의 등급인데, 한 등급에 각각 두 개씩이다. 요한은 쇠 회초리 한 개 한 개가 주는 아픔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둘 중의 한 간수가 일어서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카드가 흐트러진 채로 있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지어다."
요한은 그 사나이가 이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켜는 걸 보았다. 그는 몸에 찰싹 들러붙는 푸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졸음이 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간수도 뒤따라 일어서며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요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때? 오늘은 순순히 불 테냐?" 간수의 음성은 마치 담뱃불이라도 빌려 달라는 듯한 다정한 어조였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아까 사나이와 마찬가지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무도 나를 보낸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두 간수는 요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들은 벌겋게 달군 쇠붙이에 닿았을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가 난 눈들이 번쩍번쩍 빛났다. 요한 모리츠는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한 간수가 다가와 요한의 턱 밑을 냅다 갈겼다. 두 번을 연거푸 맞자 요한은 턱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두 번째 사나이는 그를 끌어다가 연장걸이 옆에 있는 긴 의자 위에 엎어놓고 말 타듯이 그 위에 걸터앉았다. 간수가 매일 이렇게 올라 탈때면 요한은 숨이 막혀 죽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가슴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의자 위에 납작하게 짓눌리고 간수의 몸무게로 해서 마치 연자방아에 깔린 것처럼 납작하게 된 허파는 더 이상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말하겠어?" 얼굴을 갈긴 간수가 물었다.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발바닥에 제 일격이 날아왔다. 그가 꿈틀 하고 다리를 구부리자 타고 앉은 간수가 다리를 꽉 붙잡아 긴 의자 위에 못박듯 올려놓았다. 두 번째 매질이 가해졌다. 굵은 회초리 같았다. 매질이 비 오듯 쏟아지자 두뇌에서는 아픔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가슴이 아팠고 그 다음에는 어깨가 아팠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의 육체는 빳빳해졌다. 그러나 계속 그런 상태로 두지는 않았다. 이젠 발바닥이 몹시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았고 불로 지지는 듯한 아픔이 몰아쳐 왔다. 그것은 틀림없이 가느다란 회초리였다.
회초리가 빗발치듯 내리쳐질 때마다 아픔이 무릎을 통해 허리로 퍼져 갔다.
방광과 배의 감각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매질은 빗발치듯 계속되었다. 요한모리츠는 구역질이 났다. 노란빛이 눈앞에서 아물거렸다. 그러자 아까 게걸스레 먹은 음식물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바지는 살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가 삼킨 물과 빵은 그의 위 속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요한은 사방에서 내리쬐고 있는 노란 광선이 자기를 삼켜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쓰고 푸르스름한 액체가 입 속에 가득 찼다. 그 액체는 코, 입 할 것 없이 몸뚱이의 모든 구멍을 통해서 흘러내렸다. 그것은 두꺼비의 입에서 나오는 정액처럼 푸른 거품과 뒤섞였다.
요한 모리츠는 몸 전체에서 생명이 빠져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직 정신만이 아직도 살아 남아 있었다.
회초리는 점점 가늘어졌으나 요한은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피마저도 그 매질을 견디지 못했는지 고문을 다해 찢어진 피부에서 벗어나려고 뚫어진 모든 구멍에서 뿜어져 나왔다. 코와 귀를 거쳐서 요한 모리츠의 몸밖으로 튀어나왔고 오줌에까지 섞여 나왔다.
피도 이젠 고통으로 가리가리 찢어진 육체 속에서 더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어디로든지 빠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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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돌아오자 요한 모리츠는 어젯밤 이삭 나기 부부를 취조실에서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들이 사실대로만 말해 주었다면 나는 석방되었을 것이고 어제 그런 고문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어제처럼 지독하게 맞아 본 적은 없었다.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였다.
'이삭 나기가 나를 모른다고 하다니........... , 그 부인까지도.' 아침마다 이삭 나기의 구두를 닦고 장작을―그의 분부로―패고 부엌 바닥을 닦던 자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율리스카라는 하녀는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요한 모리츠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심신의 모든 감각 기능이 마비되어 어제는 어떻게 매를 맞고 어떻게 감방으로 끌려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삭 나기 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집 하녀는 분명히 율리스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삭 나기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의 마누라도 '아니오.'라고 했다. 요한은 자기의 두 귀로 아니라고 한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어쩌면 그들의 비인간성은 그리도 잘 조화되어 있단 말인가?
요한 모리츠는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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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또 누가 그를 찾으러 왔다. 요한의 상처투성이인 몸은 다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는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간수가 문을 열어제치고 문간에 서 있었다. 간수의 웃는 얼굴이 희미하게 요한의 눈에 비쳤다.
"자아, 어서 일어나!" 간수가 말했다. 순간 요한 모리츠의 눈앞에 취조판 바르가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문실과 갖가지 크기의 쇠 회초리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등을 타고 앉은 간수의 무거운 몸무게마저 느껴졌다.
요한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오늘만은 제발 놓아주십시오. 내일 모레,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날마다 가겠습니다. 매일요. 취조든 고문이든 얼마든지 받겠습니다만 오늘만은 제발..........., "
"오늘 너는 석방이다!"
간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석방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루마니아 사람이었으므로 강제 노동 수용소로 실려갔다.
감옥을 나오기 직전에 요한 모리츠는 율리스카가 보낸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취조관 바르가의 부하가 그걸 가지고 왔다. 그는 요한이 감방을 나오려는 순간에 들어왔다. 서둘러 편지를 펼쳐 보니 율리스카의 귀여운 필적이 나타났다.
그리운 요한, 저는 나흘 전에 나기 씨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걸 알려 드리는 것이니, 석방되시더라도 저를 찾으러 페트피 거리로 가지 마세요. 저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 곁으로 갑니다. 티사 지방의 바라톤 마을이에요 거기서 언제까지든 사랑하는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감옥에서 나오시는 대로 찾아 주세요. 율리스카로부터
그리고 오른편 구석에 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제 나기 씨 집으로 제 짐을 가지러 갔었어요. 나기 씨와 그 부인이 취조관에게 당신을 모른다고 한 것을 아무쪼록 노여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여기서도 유대인들을 체포하는 중이기 때문에, 그 분들은 자기 집에 유대인들을 유숙시켰다는 걸 말하기가 두려웠던 거예요. 당신 칭찬도 하더군요. 그리고 나기 씨는 당신에게 주라고 새것과 다름없는 깨끗한 양복을 한 벌 주셨어요. 석방되어서 저의 집에 오시면 드리겠습니다. 나기 씨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로자 부인도요. 단지 붙잡혀 가는 게 무서워 당신을 모른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정말 험악한 세상입니다. 자신의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서는 자기 아버지, 어머니도 죽일 수 있나 봅니다. 당신께 키스를 보냅니다. 율리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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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정부의 각료들은 벌써 세 시간 전부터 레자스 궁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외무장관이 일어나서 말했다.
"5만 명의 노무자 동원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되지 않았소?" 수상이 안경 너머로 외무장관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만장일치로 가결된 거요."
장관들은 가방을 들고 자리를 뜰 참이었다. 그러나 외무장관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떤 것이든 독일에 제공할 걸 찾아내야 합니다. 독일과의 우호 관계 유지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와 독일과의 관계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와 독일의 동맹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속 관계에 있습니다. 굴욕적인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보다 더 불리한 입장, 즉 군사적 피점령국으로 전략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노무자 30만을 제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을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고 겨우 5만으로 줄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5만만은 제공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헝가리 인을 단 한 명이라도 독일에 노예로 넘길 수 없소. 이 문제는 그것으로 결론이 난 거요." 수상은 벌개진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독일은 이 문제를 굉장히 중대시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이 같은 요구는 우리 나라에 대한 최후 통첩과도 같은 것입니다. 독일은 지금 산업 부흥을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독일의 무력 침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거의 명백한 사실로 점령을 당하느냐 아니면 그들의 요구 사항의 받아들이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본인은 직책상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면 거절해도 좋습니다." 외무장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무슨 타협책이 없습니까?" 한 장관이 말했다.
"만일 단 한사람이라고 우리 국민을 독일의 노예로 보낸다면 사태는 더욱 중대한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는 이런 행위를 절대 용서하진 않을 겁니다. 따라서 그 요구에 대한 우리 나라 회담은 단호한 거절뿐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수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노무자 5만 명을 독일로 보내긴 하되, 그 5만 명을 헝가리 시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보내면 어떨까요? 우리 나라 적대국인(人) 수용소에는 30만이 넘는 외국인이 있습니다. 그들을 독일에 제공하면 어떻습니까?" 내무 장관의 제안이였다.
"본인으로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외무장관이 반박했다. "그런 방법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뿐입니다. 그것은 포로와 감금된 적대국에 관한 국제법 규정에 위반됩니다. 우리에게는 외국의 동정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방책을 취하면 테티엔 왕조의 명예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될 겁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됩니다."
치열한 논쟁이 30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협책이 마련되었다. 장관들의 결론은 국적이 분명치 않은 포로 중에서 헝가리 인이 아닌 5만 명을 골라 독일로 보내자는 것이었다. 내무장관은 그 안을 기초로 국적이 분명치 않은 외국인 5만 명을 추려 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제 겨우 국가의 체통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세의 역사가들도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진 상태에서 우리가 찾아낸 이 타결책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고 내무 장관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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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정부의 정보 부장 발트리 백작은 사무실에 들어서자 자기 비서를 불렀다. 각료 회의의 결정 사항을 발표하는 공문을 받아쓰게 할 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명예와 자존심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은 노예다!' 발트리 백작은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날 진정한 긍지를 가지고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존심과 명예, 다시 말하면 자유스런 인간의 생활을 탄압한다. 허용되는 것은 다만 노예 생활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인류가―장관에서 하인에 이르기까지―노예가 되어야 하는 사회는 반드시 멸망한다. 무너지려면 하루 속히 무너지는 것이 더 좋겠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비서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아니야,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공고(公告). 내각의 비공식 회합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음. 이 나라에 있는 포로들 중에서 각종 기술 산업 부문을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독일로 가기를 희망하는 자에 한하여 정부는 특별히 여행 조건의 편의와 비자를 제공하기로 함. 이 특혜를 받을 수 있는 노무자의 수는 5만 명으로 제한함. 이상. 이것을 곧 각 신문사에 전하고 제 1면에 내도록 말하게." 발트리 백작은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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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리 백작은 그날 저녁 자기 비서실장인 아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커피를 마시며 백작은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5만 명의 포로를 독일로 보내는 일에 어떻게 생각하니?"
"정치 무대에서 바로 KO를 한 대 먹인 셈이죠! 그 처리법이 참으로 훌륭했다고 봅니다. 헝가리 노무자를 보내는 대신에 감옥이나 강제 수용소에서 외국인들을 모아 독일로 보낸다는 건 독일의 거만한 태도에 당연히 주어져야 할 교훈입니다. 
법적으로는 적어도 아무 결점이 없으니까요. 참으로 천재적인 착안입니다." 루시안이 대답했다.
"그들과 교환 조건으로 우리가 독일에서는 얻는 이득이 어떤 것인지 넌 아느냐?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우리는 그 5만 명의 노무자를 넘겨주고 그 값을 받는단 말이다." 백작이 말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대가도 없이 독일에 노동력을 제공할 수는 없지 않아요?"
루시안이 말했다.
"그러면 너는 네 아비가 오늘 인신 매매에 가담했다는 걸 알고도 조금도 불쾌하지 않단 말이냐? 이런 거래야말로 인간의 도의적 타락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단계야."
"아버지도 참 이상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내내 그처럼 우울한 얼굴이시군요 ............. ."
"딴데로 말을 돌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내가 노예 매매에 관여했다고 보느냐, 그렇지 않다고 보느냐?"
"아버지께서 굳이 그런 식으로 보신다면 노예 매매에 관여하셨다고 볼 수도 있겠죠." 루시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넌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는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울적해진 원인이 다른 데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문제로 우울해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는 부득이 독일에 노무자를 보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만일 그런 방법이라도 생각해 내지 않았더라면 우린 꼼짝없이 헝가리 사람을 보내는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그건 그래. 헝가리 처지에서 보면 그 편이 훨씬 나은 문제지. 그러나 인류의 처지에서 보면 어느 편이나 다 마찬가지로 중대한 일이야. 요는 우리가 독일에 인간을 판 것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현재로선 부득이한 일입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사정이었지 않습니까."
"유럽은 이미 몇백 년 전에 노예 매매를 그만두었지. 맨 마지막으로 매매된 것이 미국의 흑인들이었어. 오늘날에는 이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노예 매매가 금지되어 있어. 노예 제도의 폐지는 인류 문명의 가장 으뜸가는 업적의 하나라고 생각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시대를 역행하여 다시 노예 매매를 시작하고 있거든. 20세기에서 르네상스와 중세기를 뛰어넘어 별안간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갔단 말이야. 이것은 역사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지."
"하지만 아버지, 무엇 때문에 만사를 그렇게 비관적인 각도에서만 보십니까? 독일로 보내는 노무자들은 어디까지나 노무자일 뿐 쇠사슬에 묶여 가는 노예는 아니잖습니까. 일을 하러 가는 거예요." 루시안이 말했다.
"그들이 도망갈 염려가 없기 때문에 사슬을 묶지 않는 것 뿐이야. 현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붙잡아 두는 독특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지 못했던 방법이야. 나는 단순히 기관총이라든가 전류가 통하고 있는 철조망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을 통제하는 관료 기술의 온갖 방법을 말하는 거야. 즉 식권을 지급 받는 데도 호텔에 잠자리를 얻는 데도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데도 길거리를 걷는 데도 또는 주소를 바꾸는 데도 경찰의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 거야. 만일 그리스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 현대 사회가 행사하는 이러한 통제법을 알았더라면 그들 역시 노예들을 쇠사슬에 묶진 않았을 거다. 그러나 노예임에는 틀림없어."
"이젠 그만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회를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독일에 노예를 판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가 다 그랬어요. 노예를 팔고 산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 정부가 독일에 대항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독일은 필연코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노무자를 충당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치 독일을 무너뜨린다 해도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독일인 대신 러시아인으로 바꾸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인은 세계 최대의 노예 매매업자입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모든 개인은 국가의 소유이니까요.......... "
"그래, 너는 이런 절망적인 상태를 보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느냐?"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야. 그것은 말하자면, 네가 인간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그런데 너 또한 한 인간이거든. 그렇다면 너는 이미 제 자신을 존중하지 않게 된 거지."
"그러나 아버지,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인 가치에 따라 존중합니다. 이런 저 자신의 평가 기준에 대해서 저를 나무라시지는 않으시겠죠?"
너는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즉 가격에 따라 상품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존중한다는 말이구나."
"그게 뭐가 나쁜가요?"
"그렇다면 너는 인간을 본질적인 가치, 즉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통해서도 존중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을 경우엔 반드시 상대방을 가엾게 생각하게 되고 후회를 하게 되거든요."
그건 상대가 짐승이라도 마찬가지일 게다. 채찍으로 때리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개를 보면 금방 때린 것을 후회하고 측은하게 여길 거다. 그러니까 너는 어떤 동물에 대해서든 품을 수 있는 동정을 인간에게도 품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단 말이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네가 인간을 인간 그대로, 비록 아무런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아도 그리고 동물처럼 연민이나 애정을 너에게 느끼게 하지 않아도 너는 과연 인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가치의 대상으로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까진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인간을 그 사회적 가치에 따라 하나의 살아 있는 동물로 존중할 따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루시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는 게 사실이냐?"
"그럼요. 이건 가장 타당하고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인간이란 사회적 가치를 지닌 개체입니다. 그 위의 모든 주장은 억설에 지나지 않아요."
"그건 실로 심각한 일이다."
"무엇이 그리 심각합니까?"
"내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현대 문명을 의미하는 거야. 루시안 우리유럽의 문화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지. 첫째, 미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거야. 그건 그리스 사람들이 터득한 습성이지. 둘째,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거다. 그것은 로마 사람들이 터득한 습성이지.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인간존중 사상이야. 이 마지막 특징이야말로 그 옛날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크리스트 교도들이 터득한 습성이지. 바로 이 세 가지 상징을 존중함으로써 우리 서양 문화는 비로소 오늘날을 이룩한 거야. 그런데 이제 우리는 유산 중에서 가장 귀중한 부분 즉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잃어버리고 만 거야.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의 원천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는 유럽 문화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아버지, 과거의 역사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비인간적인 
때도 있었죠. 인간이 대중 앞에서 불살라지기도 하고 제단 앞에서 재가되기도 하고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기도 하고 물건처럼 사고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현대의 그것에 대해 그처럼 가혹한 판단을 내리신다는 건 좀 지나 치다고 생각합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 암흑 시대에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치를 모르고 있었고,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행위도 실제로 있었지.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에야 겨우 그 야만성을 극복하고 인간을 인정하기 시작한 거야. 아직도 우리는 출발점에서 아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아. 그런데 기계 사회의 출현은 아직도 여러 세기를 거쳐서 획득하고 창조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았어. 기계 사회는 다시 인간 멸시의 관념을 끌어 들인거야. 이제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사회적인 가치라는 관점에서만 평가되고 있으며, 인간이란 본연의 가치는 전혀 쓸모 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어.
이제 그만 가 봐야 하지 않니? 밤도 늦었는데."
루시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제 시계가 섰군요. 몇 시입니까, 아버지?"
"25시다!"
"네?"
루시안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물론 모르겠지.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25시다. 유럽문명의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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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모리츠. 당신은 이제 독 안에 팔린 몸이야. 당신 몸값은 얼마였을까? 하지만 아주 비싼 값은 못 받았을 거야. 고작 탄약 한 상자 값일걸. 소문에 의하면 말이지 독일 놈들은 절대로 현금을 주지 않는다더군. 무기나 탄약 같은 걸로 대금을 치른대. 독일 놈들은 당신 몸값으로 탄약 한 상자 이상은 보내지 않았을걸!" 작업반장이 빈정거리며 요한에게 말했다. "그래도 꽤 준 편이야. 소련 놈들이었다면 그만큼도 주지 않았을 거야. 소련에서는 사람  값이 더 싸다니까."
요한 모리츠는 그런 농담이 못마땅했지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반장은 부쿠레슈티의 대학생이었는데, 그 역시 헝가리에 억류되어 8개월 전부터 요한과 함께 참호를 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그가 본래 실없는 소리를 즐겨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흥, 내 말을 안 믿는군." 학생이 말했다. 
"물론이지. 사람은 수용소에 처박히고 감옥에 들어가고 노동을 하고 때때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팔릴 수도 없거든." 하고 요한 모리츠는 대답했다. 
"어쨌든 당신은 팔렸단 말이야. 신에게 맹세해도 좋아. 당신과 나, 그리고 이곳 노동 수용소에 있는 루마니아 인, 세르비아 인, 그리고 루테니아 인 전부가 독일에 팔려 간단 말이야. 헝가리와 독일은 5만 명의 노무자를 사고 팔기로 매매 계약서까지 벌써 교환했어." 학생은 이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요한 모리츠는 반장이 한 말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나를 놀리려고 그런 말을 했겠지.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그러나 온종일 작업 반장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독일 사람들이 탄약한 상자를 지불하고 자기를 샀다는 그 말을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자기가 한심하게도 생각되었다. 
지금 요한이 있는 수용소는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참호를 파는 작업에 동원되고 있었는데, 안팀이라는 작업 반장의 말에 의하면 참호가 완성되려면 아직도 10개월은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헝가리 당국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포로들을 끌어 왔다. 벌건 낙인이 찍힌 도형수까지 투입하는 판국이었다. 일손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요한이 있는 수용소의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 인들은 모두 기차에 실렸다. 표면상의 이유는 루마니아 인과 세르비아 인의 작업 능률이 나빠서 보다 능률을 낼 수 있는 다른 패들과 교체시킨다는 것이었다. 
안팀은 자기들은 팔려서 독일로 끌려가는 거라고 주장하였다. 루마니아인들 중에는 간혹 안팀과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걸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기차가 멈췄을 때 요한은 용변을 보려고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 안에는 변소가 없었으므로 모두 기차가 설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차가 서면 여기 저기 흩어져서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볼일을 마쳤다. 기차는 들판 한가운데에 멎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요한은 여느 때와는 달리 빨리 기차에 오르지 않고 기차 주변을 서성대다가 기찻간마다 분필로 무엇인가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요한 모리츠는 바싹 다가가서 그 독일어를 읽어  보았다. 
'헝가리 노동자는 대 나치 독일의 동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음을 읽어보았다. '헝가리 노동자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개국 동맹의 편에 속했던 나라)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다.' 요한은 그제야 비로소 독일로 끌려가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요한 모리츠는 안팀을 불러 그 글을 함께 보았다. 
"흥! 이제 알겠지? 헝가리 놈들이 우릴 독일에 팔아 넘긴 거야!"
"아니야! 그래도 난 믿을 수 없어. 세상에 어떻게 사람을 팔고 사나?"
"좀 기다려 봐, 확실해질 테니까!"
 요한은 기차에 올라 기다렸다. 기차는 저녁때까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 총을 멘 경비병들이 여기 저기 들판에 흩어져서 꽃을 꺾었다. 요한은 무장한 군인들이 장교의 명령에 따라 꽃을 꺾는 광경을 난생 처음 보았다. 장교들도 꽃을 꺾고 있었다. 마침내 꽃묶음을 한 아름씩 안고 돌아와 잎과 가지를 곁들여서 열차 칸 하나 하나를 마치 결혼식 때처럼 장식했다. 포로들이 실린 기차는 금세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날이 저물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을 자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환한 대낮이었다. 찻간의 문이란 문은 모두 잠겨 있었는데, 바깥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까지는 황량한 들판이 아니면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거하던 기차가 이번에는 어느 역에 정거했던 것이다. 
들창 아래에서 사람 소리와 기관차 소리가 났다. 요한은 귀를 기울여 찻간 바로 옆을 큰 소리로 지껄이며 지나가는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분명 독일 말이었다. 그제야 요한은 안팀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독일에 팔려 온 것이다. 
"독일 놈들이 정말 내 몸값으로 헝가리에 탄약 한 상자를 준 모양이야. 내 뼈와 살과...... 결국 내 전부를 탄약 한 상자와."
"우리들은 모두 종신 노예로 팔려 온 거야." 안팀이 말했다. 그 자신도 이제 독일 영토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절감했다. 
안팀은 일어서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모두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요한은 듣지 않고 있었다. 요한의 정신은 안팀이 말한 '종신 노예'라는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껏 수용소 살이를 하면서 운하를 파고 참호를 파고 배를 곯고 매를 맞고 이에게 뜯기던 자기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에 갇힌 채로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포로들이 죽는 광경을 많이 보아 왔다. 그 자신이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판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포로가 일단 숨지면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던 누더기까지도 모조리 벗겼다. 마치 죽은 짐승을 묻기 전에 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죽은 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처럼 알몸으로 구덩이에 처넣는 것이다.    
'개는 파묻기 전에 장갑을 만들기 위해 가죽을 벗긴다. 포로는 옷을 벗긴다. 사람 가죽으로 장갑 만드는 법을 만드는 날에는 살감의 가죽까지 벗기게 될지도 모르지. 아마 내가 죽기까지는 그 방법을 알아 낼 것이다.' 요한은 수용소에서 죽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요한은 벌떡 일어섰다. 
'나를 한평생 수용소에 가둬 놓아도 좋다. 그러나 제발, 제발 죽을 때에는 나에게 자유를 다오. 죽기 전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나에게 자유를 주면 나는 자유인으로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갇혀서 죽는다는 건 자유에 대한 모독이요, 크나큰 죄악이다. 그러나 독일에 팔려 온 이상 평생 일만 하다 죽게 되리라. 죽기 전엔 석방시켜 주지 않을 테니까.'

72
"늦어도 열흘 안에는 여기서 떠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체포 영장이 이리로 날아올 거예요. 열흘, 이 기간이 내게 허락된 최대의 기한입니다. 실은 그것도 긴 시간인지 모르지만."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여느때 처럼 같은 의자에 앉아서 자기 앞에 있는 레오폴드 스타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았는가 싶어 다시 머릿속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유대인들이 자진하여 내무 당국에 신고하는 기간은 벌써 지나갔다. 이 수속을 밟지 않은 사람들은 새 법령에 의해 10년 징역을 받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진 신고를 하지 않았다. 검찰청에서는 밀고에 의해 이미 그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다. 
검사는 그녀가 모르고 있는 자료로써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 서류들을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전처럼 조사를 담당한 사람들을 매수하려던 계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번엔 우리가 졌어요, 스타인 씨. 이젠 싸움을 그만두고 도망칠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은 오직 그 길뿐입니다. 2년 반 동안 나는 최대한으로 버티었습니다. 모든 공격에 잘 견디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났어요. 이젠 운도 다 됐나 봐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말했다.
"용기를 내세요. 아직 완전히 졌다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하군요. 인쇄소와 신문사와 집을 팔되 좋은 값을 받아야 하니까요. 부동산과 마찬가지로 그림과 서적 등도 쉽게 팔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돈은 스위스 은행에 맡기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열흘 안으로 코르가 씨가 취임하는 일과 여권을 얻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말했다.
"이제 우리가 이 나라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무를 띠고 해외로 나가는 길뿐입니다. 그러니 스타인 씨, 남편이 라구세의 루마니아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되도록 무슨 방법이든지 써야겠어요. 그이가 외교관만 되면 나는 그의 아내로서 여권과 비자를 받게 될 거예요. 정말이지 한시가 급해요. 검사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이번 조사 기간을 열흘 더 연장시켜 주는 거라고 귀띔해 주더군요. 그 기간을 놓치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체포 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답니다."
"부군한테는 아직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알 일인데. 그건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한시라도 속히 아신다면 우리들의 이 곤란한 처지를 혹 도와 줄 수 있을는지 누가 알아요. 그 자신이 신청하지도 않은 임명장과 여권을 보신다면 부군께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로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요. 2주일 후에는 공공연한 사실이 될 것을 구태여 숨길 이유가 없는데 그래도 고백할 수가 없어요. 내가 유대인이라는 걸 그이도 알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이 이상 용기를 낼 수가 없어요. 2년 동안이나 숨겨 온 유일한 비밀을 그이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해요. 지금 나에겐 그 용기가 없어요. 너무나 오랫동안 긴장했기 때문에 지쳐 버렸어요. 정말 지쳤어요."
레오폴드 스타인은 정말 지쳐 보이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토록 활달하던 그녀가 지금은 애처롭기 그지없게 생각되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지금의 그로서는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는 기가 죽어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앉아 있는 그녀를 더 이상 보기가 민망하여 자기의 무릎 위에 놓인 손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집과 토지, 인쇄소, 신문사 그리고 그림 등의 매매증서, 그밖에 드라이얀 코르가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진 지갑이 들어 있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그것을 책상 위, 엘레오노라 앞에 갖다 놓았다.
"내일은 두 분께서 결혼하신 지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부인께서 여러 가지로 경황이 없어 부군께 드릴 선물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제가 대신 마련했습니다. 아마 그 분의 마음에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내일이 결혼2주년이라고요? 전 깜박 잊고 있었어요. 대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인 씨, 드라이얀이 퍽 좋아할 거예요."
그녀는 지갑을 바라보고 귀엽다는 듯이 어루만졌다.
"나 자신도 무엇 때문에 비밀을 간직하려는지 모르겠어요.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 인가봐요. 이번 일을 그가 안다면 내게 커다란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걸 굳게 믿어요. 그런데 말할 수가 없어요. 그이를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이에요. 이건 어리석은 공포심이라고, 꼭 말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번번이 용기를 잃고 말을 못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 지긋지긋한 비밀을 지키고 있답니다. 드라이얀만이 내 생명을 이끌어 주는 유일한 존재예요. 만일 그이를 잃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릴 거예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지갑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쑥 덧붙였다. "검찰 총장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글세, 우리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라는 거예요. 물론 일리는 있어요. 우리가 결혼한 것은 루마니아 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된 뒤였으니까요. 법령은 4월에 발표됐는데, 제가 드라이얀과 결혼한 건 8월이었으니까요. 법적으로 따지면 우리의 결혼은 무효지요. 그 이후의 결혼은 그 법률을 알았든 몰랐든 자동적으로 모두 무효가 된답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검찰 총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드라이얀 코르가 씨는 당신의 남편이 아닙니다. 법률에 의하면 그 분은 아직 미혼입니다. 당신들의 결혼은 그 자체가 무효니까 코르가 씨는 언제든 다른 여자와 결혼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중 결혼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생겨도 그 아이는 사생아가 되므로 코르가라는 성을 따르지 않고 베스트라는 성을 가져야 합니다. 부인, 당신 자신도 엘레오노라 코르가라고 서명하는 건 위법적 행위입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아요, 스타인 씨. 우리들은 아주 빠른 시일내에 어떤 값을 지불하더라도 여권과 비자를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돼요. 코르가 부부의 여권을........"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노인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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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후 레오폴드 스타인은 드라이얀 코르가를 라구세의 루마니아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과 푸른 가죽 표지의 여권을 가지고 엘레오노라 베스트 앞에 나타났다.
"부인, 이번에도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했다. "빈까지 가는 침대차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월요일에 떠나십시오. 당신들이 떠날 수 있게 돼서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레오폴드 스타인은 안경을 벗어 들고 닦기 시작했다. 줄곧 여권을 들여다보고 있던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그제야 노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노인의 얼굴이 며칠 사이에 퍽 수척해진 것 같았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그에게 같이 탈출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는데 레오폴드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밤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트란스트니스트리아로 이송되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이 곳을 떠나게 된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해도 부쿠레슈티엔 한 사람의 유대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수용소에서 견딘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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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얀 코르가는 서재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었다. 노라는 남편이 일하는 동안엔 결코 서재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나 오늘은 여권을 가지고 곧장 뛰어 들어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머리를 두 손으로 싸안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결혼2주년을 기념하는 근사한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당신을 라구세의 루마니아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이에요" 그녀는 임명장을 보여 주며 덧붙였다. "달마티아 해안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곳이에요. 당신은 그곳에서 작품을 조용히 구상 하실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을 혼자서 했소? 그리고 그런 비밀을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지키고 있었지?" 드라이얀은 아내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노라, 당신은 과연 천재야! 내가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요. 그렇잖아도 작품을 계속 쓰려면 환경을 좀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다음 장이 잘 되지 않아 고민이었소. 이젠 좀 풀릴 것 같구려. 아마 이 장이 이 소설 전편을 통해서 가장 두드러진 장이 될거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남편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다음 장의 내용을 듣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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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는 쉬운 일만 시키라는 주의를 받았어. 너는 아직 환자니까. 빌어먹을! 우리한텐 환자만 보내 주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공장 감독관이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그는 요한 모리츠를 얄밉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든 서류를 한번 훑어보더니 다시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독일에 온 지 2년 동안 모리츠는 항상 이 같은 눈총을 받아 왔다.
"헝가리 사람이야? 전에도 헝가리 사람들이 왔었는데 별로 신통치가 않았어. 자네야 설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감독은 싱긋이 웃더니 손에 든 종이를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야노스 모리츠, 헝가리 인, 32세, 미숙련공, 1941년 6월21일 독일에 왔음.

요한 모리츠는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므로 자기가 2년 전부터 헝가리 시민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요한 모리츠는 그가 지금까지 일해 온 나치 독일의 공장, 제작소, 수용소 등의 목록을 읽고 있는 감독의 눈길을 눈으로 따랐다. 리스트는 매우 길었다. 여러 가지 공장 이름도 들렸다. 요한은 자기가 이렇게 여러 장소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10여 군대의 수용소, 지금까지 일해 온 10여 군데의 강제 노동 수용소, 공장, 거리, 또 자기가 몸소 받아 온 고통들이 한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요한은 여기에 오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초를 참고 견디어 온 자기의 용기를 칭찬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감독은 요한이 쓰라린 고초를 당해 온 여러 장소의 이름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종잇장을 넘기더니 맨 끝에 와서 눈길을 멈췄다.
"1943년 3월 8일, 제 707 외국인 노무자 병원 퇴원."
요한은 한 인간이 자기의 눈물 어린 고난의 리스트를 아무 감정도 없이 읽어 내려가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독은 눈썹 하나 까닥 하지 않고 연필을 집어 서류 한구석 여백에다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다. '1943년 3월 10일 코노프 운트 존 단추 공장에 배속됨.' 그리고 이것과 똑같은 리스트들이 잔뜩 들어 있는 서랍 속에 집어넣고 나서 다시 요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규칙 엄수와 명령 복종, 그리고 근면과 질서! 이것이 외국인 노무자들이 우리 공장에서 일할 때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이다. 이 공장에서는 우리 독일의 부녀 노무자들도 있으니, 특히 이 점에 관해서 몇 가지 주의를 준다. 독일 여성에게는 절대로 눈독을 들이지 말 것. 독일 여성과 접촉하는 자는 최저 5년간의 형을 받게 된다. 우리 공장은 이 조항에 특히 엄격하다. 독일 여성은 모두 몸에 호신용 패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는 날에는 5년간 징역살이다. 그러니 독일 여자의 몸에는 최저5년형의 선고장이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 하는게 좋아. 만져서는 안 될 데를 만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말할 필요도 없을 줄 안다. 그리고 여자에게 다른 기대를 갖는다는 건 상상하지도 말아야 한다. 네가 오기 전에 여기 있던 헝가리 녀석은 지금 감옥에 있는데, 그 녀석이 왔을때도 나는 오늘 네게 말한 것과 똑같은 주의를 자세히 주었다. 그 녀석은 내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아마 컴컴하니까 여자와 함께 이불 속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모양이지. 하지만 우리 대 나치 독일에서는 너희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샅샅이 알수 있어. 이불 속에 숨어 있더라도 네 일거일동은 당장 우리에게 들키고 만다. 심지어 네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지도 알아맞힌다.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하루에 몇 번씩이나 사진을 찍어 둔단 말이다. 다음으로 명심할 것은, 지금 전시의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곳에서 네가 보는 것 듣는 것은 모두 군의 기밀이다. 외국인 노무자는 공장의 제품 종류, 제조 방법, 수량 등을 알아서는 안 돼. 만일 알려고 하다간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해야해. 지난 1월에는 이탈리아 녀석 하나가 사형 당했어. 현재도 체코슬로바키아 녀석 하나가 코노프 운트 존 공장의 비밀을 탐지하려다 발각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야."
감독은 일어서서 요한 모리츠를 데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까지 이 공장에서 일했던 헝가리 녀석들은 모두 신통치 않았어. 그 놈들은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 한 녀석은 태업을 하다가 20년의 강제 노동형을 받았어. 나는 예외라는 걸 믿지는 않지만 제발 너만은 그 예외이기를 바란다!"
감독은 큼직한 상자를 운반하는 콘베이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일 한쪽 끝에서 노동자 한 사람이 콘베이어에 실려서 밀려오는 상자를 들어 그의 곁에 있는 수레 옮겨 싣고 있었다. 감독이 그의 곁으로 갔을 때, 상자를 잔뜩 실은 손수레가 레일 위로 밀려가고 다른 빈 수레가 노동자 곁으로 굴러왔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상자를 들어 빈 수레에 싣고 있었다. 무척 무거운 상자라는 걸 눈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일부터 네가 할 작업이다. 간단한 일이지. 공장에서 나오는 상자를 받아서 창고로 가는 빈 자동 수레에다 옮겨 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규율을 엄수해야 돼. 이것은 가장 중요한 규칙이니까. 너는 전에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지?"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지 않고, 그렇다고 무슨 딴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계적으로 몸을 굽히고 기계적으로 팔을 벌려 단추 상자를 들어 자동 수레에 옮겨 놓는 노동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옆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기계는 규율의 문란을 용서하지 않는다. 기계는 무질서와 태만, 그리고 인간의 나태를 용서하지 않는단 말이야!"
요한 모리츠는 감독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일할 때는 절대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돼. 만일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면 기계가 당장에 너한테 벌을 내릴 거야. 모든 주의력을 네 동료인 콘베이어에 쏟아야해. 네게 상자를 가져다 주는 기계 노동자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넌 그저 허리를 굽혀 기계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자동 수레에 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감독은 요한에게 주의를 주면서 줄곧 웃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동료라는 콘베이어의 팔을 잡아 보려고 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감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감독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기계가 인간에게 적응하는 게 아냐. 언제나 네 자신이 그에게 적응해야 하고 네 동작을 기계의 동작에다 맞추지 않으면 안돼. 그것이 타당한 거야. 왜냐하면 저쪽은 완전무결한 노무자이지만 넌 그렇지 못하거든. 어떤 인간도 완전무결한 노무자가 될 수는 없어. 오직 기계만이 가능할 뿐이야. 그러니까 일을 배우려면 기계를 열심히 주시해야 하는 거야. 알겠나? 기계는 네게 규율과 질서와 안전을 가르쳐 줄 거야. 그걸 흉내내면 너는 1급 노무자가 될 수 있어. 그러나 너는 절대로 1급 노무자가 될 수 없을 거다. 너는 헝가리 인이니까. 헝가리 인은 공장에 들어오면 기계는 보지 않고 여자에게만 눈독을 들인단 말이야."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헝가리 인이 아니라 루마니아 인이라는 걸 밝히고 싶었다. 자기의 신상 얘기도 하고 자기가 있던 감옥의 이야기와 부다페스트에서 고문당한 얘기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독은 말없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상자를 날라 오는 기계만을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 좀처럼 말머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감독이 천천히 기계에서 눈을 돌려 요한을 쳐다보았다. 기계에 감탄하고 있던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경멸하는 눈초리로 변했다. 요한은 그 경멸이 자기의 온몸을 결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은 부다페스트의 감옥과 취조관 바르가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인간은 절대로 기계를 따라갈 수 없어. 특히 동방인은 더하지. 너희들 동방인은 기계에 뒤떨어진단 말이야. 너는 동유럽 사람 중에 헝가리 인이야. 게다가 병원에서 갓 나온 환자야! 그러니 네 실력은 뻔해."
요한 모리츠는 감독이 자기를 신통찮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이만한 일에 열이 오르거나 속이 뒤집힐 요한은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다는 것을 말해서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너 같은 놈은 도저히 기계와 비교할 수 없어! 너는 너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해."
감독은 머리끝에서 발끝에까지 요한을 훑어보았다. "너를 기계와 비교한다는 건 기계에 대한 모욕이야. 완벽한 기계에 비한다면 너 같은 건 기계의 노예로도 쓸수가 없는 인간이야. 나를 따라와. 작업복을 줄 테니. 공장 안에선 작업복 이외의 옷은 입을 수 없어. 노무자의 옷은 성직자의 제복과도 같은 거야. 너는 이 말을 못 알아들을 거다. 너희 헝가리 인들은 여자에게만 눈이 팔려 있거든. 야만인들 같으니라고!"

76
이튿날 새벽4시, 요한 모리츠는 혼자서 어젯밤에 감독에게 지시받은 콘베이어 곁으로 갔다. 작업 시작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아래위가 붙은 푸른 작업복을 입고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을 옮길 때마다 나무로 된 신바닥이 시멘트 바닥을 때려 마치 망치질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처음엔 발끝으로 걸으려고 했다. 혼자서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막신은 여전히 요란스러웠다.
방 한가운데까지 왔을 때 요한은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한테 말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두 번째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살베 스크라베!(안녕하셨습니까, 노예님!)" 검은머리에 커다란 눈과 검은 수염, 그리고 사기처럼 하얀 이를 가진 얼굴이 철창으로 된 작은 들창 너머로 보였다. 해골처럼 여윈 젊은이가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두 눈으로 요한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몸뚱이는 보이지 않았다.
요한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친구라도 본 듯이 말을 걸었다. "살베 스크라베!"
"내 이름은 야노스 모리츠." 요한은 그 젊은 사나이가 살베 스크라베라는 딴 사람과 자기를 혼동하는 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그 때 작업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난간 위 자기 자리로 가서 섰다. 검은머리의 사나이는 잠시 서서 머뭇거리더니 한번 더 요한을 바라보고 소리를 질렀다. "살베 스크라베!"
요한은 콘베이어를 타고 온 첫 상자를 들어 빈 자동 수레에 실었다. 상자가 그처럼 무겁지만 않았다면 일곱 살 먹은 아이들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었다.
요한은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이 단추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걸 한번보고 싶었으나 모두 봉해져 있었다. 혹시 열려 있다 해도 덮개를 열고 그 속의 단추를 들여다볼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지난번에 이탈리아 놈 하나가 사형을 받았다. 현재는 체코슬로바키아 녀석이 재판중에 있고......."
요한은 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 코노프 운트 존 공장의 기밀을 탐지하려다가 체포되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요한은 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지금쯤 판사들 앞에 서서 단추 공장의 비밀을 알려 한 것을 틀림없이 사죄하고 있으리라. 요한은 또 목이 떨어져 달아난 이탈리아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이탈리아 사람을 보아 왔다. 아주 명랑한 사람들이었다. 사형을 당한 그 사나이도 틀림없이 명랑한 성격을 가졌으리라 생각되었다. 검고 예쁘장한 콧수염을 기른 이탈리아 사람의 얼굴이 웃음을 머금은 채 단두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요한 모리츠는 우연히 덮개가 열린 상자가 오더라도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단추를 보았다는 것만으로 목이 달아난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그 단추들이 모두 군수품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상자를 가득 실은 자동 수레는 저절로 미끄러져 갔다.
요한은 계속 상자를 실으며 상자 속에 대체 어떤 단추들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해군용일지 육군용일지 아니면 공군용일지도 모른다. 검은 단추도 금단추도 감색 단추도 있겠지. 요한은 자기가 안고 있는 상자 속엔 금단추가 들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금화 같은, 해군들이 다는 그런 것 말이다.
'이 상자 속엔 틀림없이 해군용 단추가 들어 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요한 모리츠는 문득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너희들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전부 안다. 네 생각을 사진까지 찍어 놓을 수 있단 말이야.'
요한은 더 이상 상자 속에 든 단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기밀이고 공장의 기밀을 알려 하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요한은 문득 독일군이 이 많은 양의 단추를 만들어 도대체 무엇에 쓰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본 독일의 사병이나 장교들의 군복과 외투에는 이미 단추가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만들어 내고 있는 단추들은 모두 새 군복에 달 것임이 분명했다.
요한 모리츠는 꼬리를 물고 자기 앞으로 실려 오는 수없이 많은 상자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많은 단추라면 독일군 전원의 군복에 있는 단추를 바꾸고도 남겠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많은 단추를 다 어디에다 쓰겠는가? 전쟁이 끝나면 새 군복을 입혀 행진하는 데 쓰려는 것일까?' 요한 모리츠는 저도 모르게 싱긋이 웃었다.
그는 벌써 그 요한한 행군을 구경하는 군중 속에 끼여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장교와 사병들, 그리고 장군들이 달고 있는 단추까지도 자기 손을 거쳐 간 것임을 알고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상자 속의 단추는 어느 장군의 군복에 달아질 거야. 
그리고 장군들의 외투와 군복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 상자 속에 든 단추로 장식될는지도 몰라. 장군 한 사람에게 한 상자 모두가 필요할는지도 모르지.'
엉뚱한 생각에 잠기느라 요한은 잠시 자기 앞으로 밀려오는 상자를 드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러자 콘베이어 끝까지 밀려온 상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깜짝 놀란 요한이 급히 그걸 끌어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또 다른 상자가 요한의 등을 때리며 굴러 떨어졌다. 요한은 그것도 잡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떨어진 상자를 팔에 안았을 때 세 번째 상자가 또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팔에 안고 있던 두 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요한은 그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난생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공포가 그의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상자는 그대로 두고 밀려오는 상자들을 받아 자동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굴러 떨어진 상자들을 주워 수레에 실을 수 있도록 잠깐만이라도 기계가 멎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계를 쳐다보았지만, 기계는 규칙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상자들을 실어 올뿐이었다. 요한은 공포에 찬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벌을 받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나 야단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낮 12시가 되자 기계는 멎었다. 벌을 받을까봐 줄곧 불안에 떨고 있던 요한은 얼른 떨어뜨렸던 상자들을 주워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 누구도 자기가 범한 실수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멎어 버리자 상자 다섯 개를 실은 자동 수레도 레일 위에 오뚝 멈춰 버렸다. 요한은 수레를 밀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자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었다. 상자를 안아 저 쪽 창고에까지 나르고 싶었으나 겨우 수레가 드나들 만큼밖에 안 되는 창고의 문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요한은 가슴에다 상자 두 개를 안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 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요한은 깜짝 놀라 들었던 상자들을 자동 수레위에 올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들창 안에 아침에 자기를 불렀던 깡마른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 젊은이는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아침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살베 스크라베!" 이 말을 듣자 요한은 상자와 그가 저지른 실수를 잊어버리고 정답게 마주 웃어 보였다.
"내 이름은 그게 아니래도. 나는 야노스 모리츠라고 해. 자네는 아마 나를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나 봐."
그 젊은이는 입을 크게 벌려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 다시 한번 "살베 스크라베!" 하고 외치고 창문에서 사라졌다.
요한은 그 검은 눈의 사나이가 자기 이름을 가르쳐 줘도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그 살베 스크라베라는 사람은 자기와 퍽 닮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요한은 얼마 후에 그 젊은이가 이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 동료들을 모두 '살베 스크라베'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자기 자신을 보고도 살베 스크라베라고 불렀다. 훨씬 후에 알 일이지만 그의 이름은 조세프였다.

77
요한 모리츠가 단추 공장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5개월이 흘렀다. 요한은 이제 상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다. 상자가 자기 앞으로 오기가 무섭게 곧 자동 수레로 옮겨 놓았다. 일일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실수 없이 실을 수 있었다.
상자에 담겨 있는 단추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고 이 단추를 복장에 달 장군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상자 속의 빛나는 단추를 새 군복에 달고 광장을 행군할 군인들에 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상자를 옮겨 놓는 일에만 열중했다.
요한은 이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상도 하지 않았다. 벙글벙글 웃으면서 단두대 이래로 굴러 떨어졌을 이탈리아 사람의 얼굴도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는 그가 공자에 오던 바로 그날 재판을 받는다던 그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의 소식이 궁금했다. 유죄 선고를 받았는지 혹은 사면이 되었는지?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그가 기계실로 들어가면 언제나 그 프랑스 인이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살베 스크라베!' 하고 외쳤다.
요한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살베 스크라베!'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별 의미도 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장 자기 자리로 가서 콘베이어에 실려 오는 단추 상자를 기다렸다. 한번은 일을 좀 간단하게 해 볼 생각으로 상자 두 개를 한꺼번에 들어서 자동 수레에 옮겨 놓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기계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쇠사슬이 상자 끝에 닿는 순간 요란하게 물어뜯는 듯한 소리가 났던 것이다. 요한은 누가 자기 이빨이라도 뽑아 내는 듯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그는 상자를 한꺼번에 두 개씩 실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기계가 그걸 허용하지 않는 이상 기계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상자를 한꺼번에 다섯 개를 실을 수 있다 해도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은 일만을 되풀이하다 보니 마침내 그는 기계에 리듬을 맞추게 되어 버렸고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숙달되었다. 일은 쉽지도 않고 또한 어렵지도 않았다. 전에 힘든 노동을 할 때는 땀도 흘렸고 힘에 겨워 불평도 했었지만 이 일은 땀도 나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일을 하는 것같이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에는 힘든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별로 지루한 줄을 몰랐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상자를 들어서 자동 수레로 옮겨 싣는 동안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제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어서 아무런 영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과 공상이 그의 머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몸에 밴 일이긴 해도 그 일은 팔과 허리와 다리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기 심장과 뇌는 딴 곳에 가 있어야 할 텐데 항상 거기 상자 곁에, 기계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물기 빠진 식물처럼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밤에 자리에 누울 때는 상자를 들어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는 것 같았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상자를 옮겨 놓고 한순간 허리를 펴고 다음 상자가 올 때까지 빈손으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잠이 들면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에는 대지의 빛깔이 사라지고 거무스름한 기계의 빛깔이 서리기 시작했다. 요즈음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싣는 상자 속에 단추가 들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그것이 생각날 때는―자주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빙긋이 웃었는데, 그것은 마치 가뭄으로 메마른 땅처럼 윤기가 전혀 없는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은 병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수용소의 의무실로 옮겨졌다.

78
요한 모리츠는 천막으로 된 수용소 의무실의 막사에 누워 있었다. 창문에는 철망이 쳐져 있었다. 그가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는 폐를 앓고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그대로 녹아 버리는 느낌이었지만 요한은 하루속히 단추 공장으로 돌아갈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종일 병상에 누워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느 날 주위가 떠들썩했다. '의사들이 회진을 도는 것이겠지.' 하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끗이 씻은 몸에서만 나는 향긋한 살 냄새가 풍겨 왔다. 오랫동안 맡아 보지 못했지만 낯익은 냄새였다. 요한은 미소를 머금고 눈을 떴다. 군복을 입은 한 여자가 자기 침대 곁에 서 있었다. 금발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비누 냄새와 신선한 공기 냄새가 났다.
그녀는 험상궂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헌병 두 사람과 의무실 의사들이 서 있었다. 그 여자가 자기를 바라보는 동안에 의사 하나가 물었다.
"이 녀석입니까?"
그녀는 요한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병상 기록을 훑어보고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독일인들은 누구나 요한을 이와 같은 의심을 품은 눈초리로 보아 왔다.
"헝가리 사람?" 하고 그녀가 물었다. "헝가리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은 위험분자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이 덮고 있는 이불자락을 홱 들쳤다. 그리고 요한의 가슴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니에요,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놈은 가슴에 털이 잔뜩 났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요한의 침대 곁을 떠나 다른 모든 환자의 얼굴을 살피고, 몇 사람은 이불을 들쳐 보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찾던 사람을 찾지 못하고 방을 나갔다. 헌병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그 냄새, 단지 물과 비누와 향수 냄새만은 아닌 그 냄새는 그녀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방안에 감돌았다. 요한은 스잔나와 율리스카의 몸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중의 하나가 어젯밤 독일 여자를 건드렸어. 지금 여기 왔던 여자에게 그 현장을 들킨 거야. 여자는 붙잡혔으나 남자는 도망쳐 버렸어. 갈색 피부에 가슴엔 털이 많이 났다는데, 여자가 끝내 이름을 대지 않고 있어. 하지만 결국에는 체포되고 말걸. 그렇게 되면 5년간 영창 신세지. 불쌍한 녀석!"
그러고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소리쳤다. "저것 봐, 붙잡히고 말았지!" 하고 소리쳤다.
요한은 윗몸을 일으켜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두 손목이 묶인 세르비아 인 한사람이 창문 아래로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머리의 미 남자였다. 그는 두 헌병 사이에 끼여 걸어갔다. 요한은 그 사나이를 알고 있었다. 製絲(제사)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 쾌활한 청년이었다. 군복을 입은 그 여자가 그 뒤를 따라갔다. "꼭 찾아내고 말 거라고 하지 않았어!" 하고 의사는 말했다.
 
79
요한은 조세프가 곁에 있을 때만은 공포심을 잊을 수 있었다. 조세프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요즘의 요한은 모든 것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작업실에 있을 때는 상자를 떨어 뜨릴까봐 두려웠고 또 레일 위에 너무 늦게 옮겨 놓을까 싶어 두려웠다. 우연히라도 독일 여자를 보게 될 것 같아 무서웠고, 또 어쩌다가 단추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될까봐 겁이 났다. 결국 독일 사람 전부가 무서웠다. 독일 사람뿐만 아니라 독일의 땅과 독일의 말, 그리고 호흡하는 공기까지도 독일 것이기 때문에 두려웠다.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에서도 감금당하고 굶주리고 매를 맞았지만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심한 고문을 하던 헝가리 사람들도 그다지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대로 그들에게는 인간미가 느껴져 그렇게 무서워하지는 않았었다.
요한은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공포에 질려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착하면서도 동시에 심술궂은 면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더 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덜 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심술궂은 그 차이뿐이지, 모든 인간은 착한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루마니아 수용소에 있던 준위만 하더라도 주먹으로 때려 그의 이를 두 개나 부러뜨렸으면서도 나중엔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벌겋게 달군 쇠로 그의 발바닥을 지지던 헝가리 헌병들도 나중엔 물과 담배를 주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한 번도 두들겨 맞은 적이 없다. 여기서는 매일 더운 커피와 빵과 스프를 먹을 수 있다. 하는 일만 해도 루마니아에서의 운하 파는 일, 또는 헝가리의 참호 공사보다 훨씬 쉬웠다. 그래도 요한은 독일에는 배겨 낼 수가 없었다. 터무니없는 망상일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요한은 독일인들이 반드시 자기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이 아주 어리석은 줄은 알았지만, 언젠가는 자기도 아무런 죄 없이 두 손에 수갑을 차고 끌려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 사람들은 기계처럼 성질이 고약했다. 어쩌면 기계는 고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일 사람도 고약한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기계 곁에서는 살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모든 기계와 그리고 기계를 닮은 인간들이 무서웠다. 그는 독일인과 기계의 틈바구니에 끼여 진한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도 외로워서 갑자기 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요한이 프랑스 사람 조세프를 좋아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살베 스크라베!" 조세프가 요한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살베 스크라베!" 요한은 빙긋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조세프는 상대가 이런 식으로 대꾸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노예들이거든.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루에 수천 번이라도 서로 상기시키는 것이 좋아. 우리가 노예라는 의식을 잊는 순간 모든 것은 끝장이야. 우리는 항상 그걸 의식해야 해." 조세프는 자신의 논리를 이렇게 늘어놓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요한 모리츠와 조세프는 막사의 그늘진 잔디에 드러누워 있었다. 조세프는 요한에게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 얘기를 들려주었다. 요한은 그녀의 이름이 베아트리스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파리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검은 눈의 그녀는 조세프가 포로가 된 이후로 매일 밤 울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너무나 여러 번 그녀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요한은 나중에 군중들 틈에서 그녀를 만난다고 해도 그녀를 선뜻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때에는 그녀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음성은 샹송과도 흡사했다. 요한에게는 베아트리스가 자기와 조세프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같이 느껴졌다. 조세프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세 사람이 모여 함께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베아트리스가 그들 두 사람의 대화에 뛰어들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80
"전원 막사에 집합!" 수용소 소장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하여 흘러나왔다.
"또 몸수색을 할 모양이지?" 요한이 일어서며 말하자, 조세프도 뒤따라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왜 또 야단이야?"
조세프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이렇듯 좋은 일요일 오후까지 꼼짝 못 하고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외국인 노무자들은 여기저기서 몇 사람씩 떼를 지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햇볕이 따뜻했다.
요한과 조세프는 창문 쪽으로 가다가 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다보았다.
"그 말이 정말이었구나!" 요한이 말했다.
군용 트럭 세 대가 수용소 마당으로 들어와서 그들이 서 있는 창문 밑에서 멈췄다. 최근에 수용소에 여자들이 온다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다른 수용소에서는 이미 여자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노무자들은 그걸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위해 여자들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세 대의 군용 트럭에는 갈색 머리, 금발 머리, 빨간 머리의 여자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저것 봐, 헛소문이 아니었군!" 하고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그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은 틀림없이 와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얇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창가에 포로들이 겹겹이 몰려 있는 것을 쳐다보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여자들은 트럭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내릴 때마다 얇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여서 허여멀건 허벅지와 거기에 담뱃 종이처럼 얇게 달라붙은 가지각색의 슬립과 팬티가 보였다.
요한의 등뒤에서는 다른 외국인 노무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웃어댔지만 요한은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누가 내리랬어? 아직 트럭에서 내리면 안 돼!" 확성기를 통해 수용소 소장의 명령이 울려나왔다.
확성기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딱딱하고 위협적이었다. 소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장실에 앉아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돌아서서 내릴 때처럼 재빨리 다시 트럭에 올라붙어 섰다. 지시를 받기도 전에 내렸다고 벌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여자들이 트럭으로 다시 올라갈 때 포로들은 다시 한번 그녀들의 무릎과 슬립과 보드라운 자기각색의 팬티를 보았다. 그 여자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처음의 그것과는 달리 약간 겁을 먹은 듯했다.
" 한 방에 여자 10명씩 배당이다! 모두 배당 받은 막사에서 밤 9시까지 봉사할 것! 각 방 반장은 이 계획의 실시와 진행을 감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 질서 및 규율은 유지에 관한 책임은 모두 반장이 져야 한다!"
확성기는 잠잠해졌다. 트럭에 탄 여자들은 조용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망할 놈의 자식들!" 조세프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 요한은 그가 자기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러나 조세프는 요한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여자들은 막사별로 질서 있게 차에서 내려야 한다." 확성기에서 명령이 내려졌다. 여자들은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여자들은 다섯 개 반으로 나누어졌다. 그러자 각 막사에서 다섯명의 반장이 나와 여자들을 자기 막사로 데리고 갔다. 여자들은 앞서 걷고 있는 반장 뒤에서 낄낄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요한은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포로들과 자러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독일인들은 포로들에게 주기적으로 여자를 안겨 주지 않으면 일의 능률이 제대로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을 안겨 줌으로써 외국인 노무자들이 단추 공장에서, 제사 공장에서, 그리고 주조 공장에서 보다 능률적으로 일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남자가 왜 여자와 자야만 일을 더 잘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각 방에 배치된 10명의 여자들이 그 많은 남자들을 어떻게 모두 만족시켜 줄 것인지 궁금했다.
막사는 넓고 침대도 많았다. 그러나 남자 수는 많고 여자 수는 너무 적었다.
그래서 포로 한 사람이 여자 하나씩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여자들이 이 침대에서 저 침대로 옮겨다니겠지!' 요한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침대로 옮길 때마다 여자들은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런 막사 안에서 여자들을 보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지금 문 앞에 와 있는 것이다. 
반장이 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실행 방법에 대한 지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여자들은 아주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밖에 나가지 않겠어?" 하고 조세프가 물었다. 
요한은 조세프와 같이 방을 나왔다. 다른 막사에서도 더러 사람들이 나왔다. 두 사람은 문턱에서 여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싸구려 향수와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밖으로 나오려는 조세프와 요한 모리츠를 쳐다보고 그녀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비웃는 것이었다.  
한 여자가 요한과 스치면서 그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향내가 나는 축축한 손이었다. 요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살베 스크라베!" 조세프가 여자들 곁을 지나치며 말하자 여자들은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어댔다.
조세프 자신은 웃지 않았다. 그는 침울한 얼굴이었다. 마당으로 나온 그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요한도 나란히 누워 그 여자들을 생각했다. 조세프도 여자들을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그의 본심을 알 수는 없었다. 
"자네 들어가고 싶거든 들어가게." 조세프가 말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조세프가 요한 곁에 있으면서 베아트리스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것들은 강제 수용소의 폴란드 여자들이야. 수용소에 들어온 여자들은 반년 동안만 저 노릇을 하면 석방이 되지. 그러나 반 년 동안에 그녀들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서 나가게 돼. 수용소에서 곧장 병원이나 보호소로 실려 가거나 아니면 공동 묘지 행이란 말이지. 비참한 종말이지."
"난 그게 저 여자들의 직업인 줄 알았는데." 하고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그는 비로소 그 여자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들인 줄은 몰랐다. 
"직업적인 창녀들이 아냐, 장! (조세프는 요한을 늘 장이라고 불렀다.) 저 여자들은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온갖 수모와 고통을 감내하며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인간 노예들이야. 아무 연장도 없이 가냘픈 육체 하나로 자기들을 얽매어 놓은 사슬을 끊으려고 눈물겨운 치욕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참으로 용맹스런 일이지. 그런데 가엾게도 쇠사슬을 끊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몸만 스스로 깎을 따름이야. 노예를 묶는 쇠사슬은 항상 인간의 육체보다 더 강한 법이지. 
밤 9시가 되자 여자들은 수용소 막사에서 나왔다. 트럭에 올라타는 그 여자들은 올 때와는 달리 웃지 않았다. 웃는 대신 해쓱하게 지친 얼굴을 하고 담배만 피워댔다. 조세프는 떠나는 그 여자들에게 같은 노예의 신세로서 동정 어린 음성으로 "살베 스크라베!" 하고 외쳤다. 
그날 밤 조세프는 수용소를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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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님들이 발칸 語(어) 통역을 찾고 계신다. 그러니 그 분들 앞에서는 실례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해. 총사령부 장교님들이야." 요한 모리츠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면서 공장 감독관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문 앞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린 후에야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방안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 때문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둥근 탁자 위에는 술잔과 빈 병들이 뒹굴고 있었다.
요한이 들어가도 누구 하나 머리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요한은 묵묵히 문을 등지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공장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적어도 공장은 이 곳보다도 조용하고 숨이 막힐 지경의 담배 연기는 없는 것이다.
장교들의 바지 옆에 쳐진 붉은 띠가 참으로 근사하게 보였다. 장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고 한결같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장교가 갑자기 요한 곁으로 다가와서 손을 요한의 머리 위에 올려놓더니 마치 고무풍선을 가지고 놀 듯 이쪽 저쪽으로 돌렸다. 그는 오른쪽 옆얼굴을 살펴보고는 또 왼쪽 옆얼굴을 주시했다.
"돌아섯!" 하고 뒤로 세워 놓고는 뒤통수를 살핀 다음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턱 아래에 손을 넣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잇속까지 들여다보았다. 그 다음엔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요한 모리츠가 작업복을 벗어 벽 쪽의 바닥에 놓는 동안에 장교는 요한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얘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하나의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소." 요한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을 내렸던 친위대 대령이 다른 장교들에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멈추고 벌거벗은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요한 모리츠의 주위를 빙 둘러쌌다. 통역으로 호출 당해 여기까지 온 사람을 가지고 증명을 해 보이겠다니 요한으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요한은 문득 곡마단 같은 데서 하는 마술사들의 증명이 생각났다. 그 증명을 할 때는 객석에서 한 사람을 무대로 올라오게 하고, 마술사가 그 관객의 호주머니에서 산 고양이나 토끼 혹은 새들을 끄집어내 보이는 것이다. 요한이 알고 있는 증명이란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몰랐다. 그런데 지금 대령이 그를 세워 놓고 증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요한은 군대에 있을 때 곡마단에서 본 적이 있는 그런 증명이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퍽 재미있을 거라는 호기심이 생겨 요한은 싱긋이 웃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술사에게 불려나와 그가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깜짝 놀라는 것으로 그칠 뿐일 테니 자기도 대령이 겨드랑이나 주머니에서 토끼나 고양이나 새를 끄집어낼 때 깜짝 놀라는 척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은 줄곧 대령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마술사를 좋아했다.
'1천년을 연습해도 나는 그들같이 하지는 못할 거야.' 하고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대령이 요술을 부릴 줄 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가 요한 모리츠는 어머니가 '마술사는 악마의 종'이라고 하던 말을 생각했다. 그 말이 생각나자 약간 겁이 났다. 요한 모리츠는 이제 더 웃지 않았다 악마는 언제나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바로 10분전에 방에 들어왔을 때 처음 본 사람이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여기에 들어왔는지도 알지 못하오."
"대령님께서 부탁하신 발칸 어 통역을 하려고 온 자입니다." 공장 감독관이 설명했다.
"아, 내가 자네에게 통역 부탁한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군 난 저 사람이 들어오자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네."
대령은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 모리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는 벙글벙글 웃었다. 요한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령이 자기 겨드랑이에서 토끼를 끄집어 낼 때를 초조히 기다렸다. 대령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곡마단의 마술사들은 늘 이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허리를 꼬며 웃어도 마술사는 심각한 표정을 하니까. 요한은 폭소가 터져 나올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 자기도 웃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놓고 웃어 본 지도 정말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불과 10분전에 이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직 말 한마디 주고받은 일이 없지만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사람의 생애와 3세기에 걸친 가문의 역사를 아주 자세히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네."
전에 본 곡마단의 마술에도 이 같은 순서가 있었다. 마술사가 객석에서 누군가를 불러 내다가 그 사람의 나이와 이름, 또 결혼 여부 등등 개인적인 내력을 알아맞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그런 종류의 마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건 사람의 몸에서 고양이나 토끼 등을 꺼내는 마술이었다.
그는 대령이 그런 마술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자기 호주머니 속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오는 걸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마술사 앞에 바짝 다가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술사는 그 아닌 딴사람을 골라내곤 했었다.
"인종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사회주의 국가 체제하에서 굉장한 발전을 했네.
그 분야에 관한 한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적어도 100년은 더 앞섰을 것이네. 이 벌거벗은 사나이를 보고 나는 그의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고, 또 그 조상들이 어떠한 혼인을 했는지, 또 그 가족이 어떤 풍습을 가졌는지를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어.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면 여러분은 내 말을 확인할 수 있을 걸세." 뮐러란 이름의 그 대령이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데!" 장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 모리츠의 주위를 좁게 둘러쌌다.
"두개공의 구조와 앞이마, 코, 얼굴의 골격, 그리고 특히 흉곽의 구조와 쇄골의 위치로 미루어 보아, 이 사나이는 오늘날 라인 강 연안, 룩셈부르크,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소수로 잔재해 있는 게르만족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어. 또 중국과 미국에도 열 여덟 가족이 존속해 있다고 하나 그 사실은 전쟁발발 직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한 통계는 낼 수 없네. '영웅족'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들 게르만족에 관해서는 후에 특집으로 간행될 예정인 우리들의 통계에서 처음으로 정확하고도 완전한 자료를 우리가 제공할 걸세. 이 일족은 800명 정도가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의 조상은 16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독일 남서부에서 외국으로 집단적으로 이동해 갔어. 이 종족은 가장 순수한 게르만족으로서, 그 동안 외국에서 숱한 고난과 압박을 받고 살아오면서도 오늘날까지 자기들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 온 거야. 이 종족들은 개인 보존의 본능보다 훨씬 강한 종족 보존의 본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 소속된 영웅족은 우리 민족이 가진 종족본존의 본능이 얼마나 강인한가를 실증해 주는 유일한 표본이네. 이 청년의 조상들의 주위에는 훨씬 더 매력적인 다른 종족의 여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3,4백년동안 오직 자기 종족에 속하는 여성만을 아내로 맞아들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민족의 자체 보존 본능, 다시 말하면 자기 가족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타민족과의 혼혈이라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피의 절규가 있었기 때문이네. 이 가족의 계통을 들춰보면 다른 민족의 여성과 결혼한 예가 단 한번도 없었네. 그것은 4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 역시 그의 조상과 조금도 다름없이 닮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거든. 금은 명주 같은 이 머리칼을 보게 이것이 바로 영웅족의 머리카락이네. 4세기 전의 그 머리칼과 꼭 같은 것이네 이것은 다른 것과 혼동될 수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이 보면 금방 구별되는 것일세. 이것을 게르만 계통의 주요 민족의 머리칼과 비교하면 약간 더 부드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 모근은 같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네. 이 청년의 코, 이마, 눈, 턱은 4세기 전에 그려진 판화의 인물들과 조금도 다름없네. 그 동안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일세."
장교들은 요한의 머리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감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요한은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됨을 느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세히 선을 보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장교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일이 두려웠다. 그는 그들의 찬양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런 찬양은 보석과 떡갈나무 잎으로 장식된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은 사람에게나 보낸다는 걸 모리츠는 잘 알고 있었다.
뮐러 대령은 마치 트로아 이메라르트 교회의 성녀(聖女) 파라쉬바하 미라크르즈의 유물을 만지는 것과 같은 감탄과 존경이 담뿍 어린 표정으로 요한 모리츠의 어깨를 만졌다.
요한 모리츠는 발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서 싸운 적도 없고, 또 아무런 무훈도 세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두 눈을 내리 깔았다.
"우리가 영웅족이라고 부르는 이 종족은 가장 위대한 민족적 영웅주의의 전형적인 표본이네. 오늘은 내게 운이 참 좋은 날이야. 이런 전형적인 표본을 발견했으니 말이야. 이것은 여담이지만, 내 조상 가운데에도 이 영웅족의 처녀와 결혼 한 인물이 한 사람 있었네. 불행히도 신혼3개월만에 전사해 버려 후손을 남긴지 못하고 말았지만. 아무튼 나는 이 청년의 사진을 찍어 체위표와 역사적 참고 자료를 첨부해서 현재 내가 준비중에 있는 논문에 삽입할 생각이야. 로젠베르크 박사의 지도 아래 벌써 10년 전부터 연구해 왔는데 이제 이 사람을 발견함으로써 내 연구는 마무리를 짓게 되었어."
"축하드립니다." 장교들은 부동의 자세로 거수 경례를 하며 말했다. 감격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뮐러 대령은 오른팔을 들어 답례를 하고 일일이 장교들과 악수를 했다. 요한은 부동의 자세로 서서 대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 고향은 네덜란드인가, 룩셈부르크인가? 아니면 트란실바니아인가?" 대령이 물었다.
"트란실바니아입니다." 요한 모리츠가 대답했다.
장교들은 감탄하여 환성을 질렀다. 대령의 얼굴은 기쁨으로 희색이 만면했다.
"이 청년의 정확한 원적지를 맞혀 보겠네. 의기양양해진 뮐러 대령이 말했다. 
그는 요한에게 물었다.
"자네는 티미시와라 아니면 브라쇼브, 그렇지 않으면 제클러스 지방 출신이지?"
"제클러스 지방입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뮐러 대령은 두 손은 비비며 말을 계속했다. "틀릴 리가 없거든. 이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박물관의 영웅적 초상화의 인물이 우리들 속으로 내려오는 것 같았어. 영웅족의 모습은 내 인상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지. 여러분은 나중에 내 저서에서 보게 될 거네. 이 영웅족의 얼굴을 원색판으로 확대해서 출판할 작정이니까. 거듭 말하거니와 이 청년은 영웅족의 전형적인 인물이야. 내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이야."
대령은 감독에게 요한의 신상 카드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대령은 요한의 신상 카드를 읽어보더니 화를 벌컥 냈다. "영웅족에는 야노스라는 이따위 이름은 없어. 이 이름은 영웅족에 대한 모독이야!" 대령은 요한을 돌아다보았다. "자네 아버지가 야노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나?" 대령이 물었다.
"아닙니다, 대령님. 제 이름은 야노스가 아닙니다."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자기 이름은 이온이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물론 아니겠지. 영웅족의 가정에서 자기 자식들에게 독일 족보에도 없는 이름을 붙여 줄 리가 만무해. 이런 일은 과거 10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영웅족의 이름이 야노스라니 그따위 말이 어디 있어!" 대령은 다시 요한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요한의 이름이 야노스가 아니라는 말이 반가웠던 것이다.
"누가 야노스란 이름을 붙였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에 독일로 왔을 때 제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야노스가 아니야. 영웅족들은 이 따위의 수모를 얼마나 받아왔는지 몰라.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름을 따라 영웅족의 이름은 자주 바뀌어졌는데 결코 그들의 혈통만은 바꿀 수 없었어. 영웅족의 피가 그야말로 수정처럼 순수하게 보전되어 왔어."
대령은 공장 감독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 청년을 오늘부터 국립 민족 문제 연구소의 관할로 배치하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표본이니까."
"그럼 공장에서 일을 시키지 않습니까?"
"물론! 그에게 일을 시켜선 안 돼. 앞으로 이 청년에 대해서는 특별 지시를 내리겠다." 대령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대령은 요한 모리츠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학은 참으로 눈부신 진보를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완성은 아직 멀었다. 이 엄선된 표본, 극히 흥미 있는 한 인종의 대표적 인물은 귀중한 전형을 보호하는 인류원(人類原)에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류원은 아직 만들어져 있지 않다. 유럽에는 갖가지 종류의 조류와 짐승을 보존하는 동물원은 많이 있다. 그러나 아직 여러 가지 편견이 '인류원' 창설을 방해하고 있다. 이것은 막대한 과학의 손실이다. 이 분야에 있어선 미국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멸종되어 가는 인디언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어 일정한 장소(인디언 보호 구역)에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장차 유럽에도 그것이 창설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전쟁에 이겨야 한다. 다음 회합에서 나는 인류원 창설을 제의해 봐야겠다. 그렇게 해야만 희귀한 인종의 표본을 우리 과학자들이 자유로이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청년이야말로 그 인류원에 들어갈 표본 제 1호가되겠지. 나는 기꺼이 그 기증자가 될 것이니까.'
뮐러 대령은 요한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요한이 인류원, 즉 독일 민족관에서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오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대령은 다른 장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이 청년에게 그 혈통에 적합한 직책을 알선해 주지 않으면 안 되오.제일 알맞은 것은 군인이 되는 일일 게요. 나는 영웅족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족속은 게르만 족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인종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군인이 되도록 해 줘야겠소."
장교들 역시 찬성했다. 대령은 싱글벙글하며 당번병에게 자기 가방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정보국이라는 도장이 찍힌 종이 위에 요한 모리츠를 돌격대 사병으로 추천한다고 쓰고, 병적 등록을 위한 추천장을 썼다. 그리고 그 종이를 공장 감독관에게 내밀며 명령했다. "필요한 모든 수속 절차를 밟게. 지금 즉시 말이야."
뮐러 대령은 웃음을 머금고 요한 모리츠를 바라보았다.
"내달 중으로 자네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필요하네. 자네가 속해 있는 영웅족에 관한 내 연구에 매우 귀중한 것이야. 제벨 박사에게도 한 장 보내야겠어. 그렇게 되면 머지 않아 자네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자네 얼굴을 보게 될걸세."

82
"군복무에는 부적당해!" 징병계의 군의관 대위는 요한 모리츠의 신체 검사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오른쪽 폐에는 여러 개의 반점이 나타나 있었다. "군인들은 튼튼한 폐를 가져야 하거든."
요한 모리츠가 뮐러 대령과 만난 지가 벌써 3주일이 지났다. 요한 모리츠는 처음엔 군인이 되면 좋은 음식을 먹을수 있고, 물이 새지 않는 구두를 신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을뿐더러 담배도 피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수용소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군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고 보니 한편으로 잘 되었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총사령부와 국립 민족 문제 연구소에 계신 뮐러 대령이 추천했구먼!" 그러자 요한의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다른 군의관이 말했다. "그러면 떨어뜨릴 수 없지."
세 사람의 군의관이 요한 모리츠의 문제를 논의했다.
"자네, 그럼 사무 같은 건 볼 수 있겠나? 민간인으로서의 직업은 뭐였지?" 하고 군의관 대위가 물었다.
"농사꾼이었습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그들은 의논을 해서 결정지을 때까지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라고 말했다. 조금 후에 다시 불리어 들어가니, 군무에 적당하다고 인정하니 영장을 가지고 부대로 가 보라고 말했다.
"자네는 보초 임무를 맡게 될 걸세. 자넨 사무 계통을 볼 수 없으니 경비대에 배치될 거야." 군의관 대위가 말했다.

83
징계자 수용소 소장의 점심 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사병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지금 보초 근무중이라는 것도 깜박 잊고 밥그릇을 가지고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다 곧 깨닫고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빨개졌다.
'난 왜 이렇게도 바보일까!' 그는 총대를 양손에 꽉 거머쥐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제 포로가 아니라 그들을 감시하는 보초라는 걸 잊어먹었으니 말이야.' 이 경비대에 들어온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릴 때마다 이와 같은 착각을 되풀이했다. 자신이 군인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머리에 박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이라든가 포로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꼭 그 속에 섞여 있는 포로처럼 생각되었다. 하도 여러 해 동안을 수용소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는 종신 포로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포로 신분을 면했다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병이 교대하러 와도 요한은 그 사병이 자기를 잡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겁부터 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프 솥 앞에 줄지어 늘어선 포로들을 보면서, 요한은 자기가 보초를 서고 있다는 걸 잊고 자기 차례가 왜 이렇게 늦는가 하고 생각했다. 자기도 그 포로들 틈에 끼여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한은 첫날부터 포로들 속에 아는 사람이 없나 하고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독일에서 만도 열두 군데나 되는 수용소를 옮겨 다녔으니 이 스트라플라제의 포로들 가운데 한두 명쯤은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포로들과 얘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요한은 멀리서라도 아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요한 모리츠는 아는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자기가 군인으로서 보초라는 걸 잊어버리고 무심코 소리쳤다.
"조세프, 조세프!" 식기를 들고 마당에 모여 있던 포로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조세프도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요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요한은 또 한번 불렀다. 그러자 조세프는 밥그릇을 든 채 긴장함 몸짓으로 그를 주시했다.그래도 역시 못 알아보았는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봐, 조세프! 나 야노스 모리츠야!" 하고 요한은 외쳤다.
"야아! 살베 스크라베!" 그제야 요한을 알아본 조세프는 식기를 바닥에 놓고 철조망 쪽으로 달려왔다.
"자네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지? 장!" 조세프가 물었다. 요한 모리츠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군인이 되었는가를 대충 얘기해 주었다. 조세프는 그전보다 독일 말을 잘 알아들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나 떨어져 있어서 그들은 상대방의 말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되어서 이 곳으로 왔지?"
"탈출한 지 닷새만에 붙잡혔어." 조세프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베아트리스에게 편지 한 장 좀 전해 줄 수 없겠나? 이곳에 와선 편지를 보낼 수가 없어서 벌써 넉 달 동안이나 소식이 끊겼네." 하고 말했다.
요한은 주소를 묻자 조세프는 종이 쪽지에다 주소를 적었다. 그가 쭈그리고 앉아 주소를 적는 동안 요한은 어젯밤에 부대에서 배급받은 담뱃갑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철조망 너머 조세프의 발 밑에다 던져 주었다.
"내일 또 담배와 빵을 갖다 줄게........ 편지는 오늘 저녁에 꼭 부치겠네."
조세프는 허리를 굽혀 담뱃갑을 주운 다음 베아트리스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작은 돌멩이에 싸서 요한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 종이는 철조망과 철조망 사이에 떨어졌다. 조세프는 다시 주소를 적으려 했다.
"그만둬 내가 가서 집어올게. 나는 철조망 가까이 가도라도 총살당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요한이 초소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저 멀리서 교대할 보초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한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조세프를 향해 소리쳤다.
"교대할 보초가 와서 지금은 주울 수가 없어! 내일 아침 9시에 내가 또 근무하니 그때 종이를 주워 오지. 그럼 잘 있게!"
"살베 스크라베!" 조세프가 말했다.
조세프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막사 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전과 똑같은 회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그전보다 약간 더 해지고 얼굴도 유난히 수척해 보였다. 이 곳 수용소의 급식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보초 교대를 하면서 요한 모리츠는 멀어져 가는 조세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일은 빵 한 덩어리를 온전히 갖다 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84
그날 밤 요한 모리츠는 심한 열이 나서 그 다음날 날이 새기가 바쁘게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고열에 시달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빵과 담배를 얻기 위해 철조망 근처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조세프를 생각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주소가 적힌 종이 조각도 생각했다. 그는 조세프가 헛되이 자기를 기다리다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가엾은 조세프! 빵과 담배를 얻으려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요한 모리츠는 며칠만 지나면 몸이 완쾌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그러면 조세프에게 매일같이 빵과 담배를 갖다 줄 수 있을 것이고 베아트리스의 편지도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의 병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양쪽 폐가 모두 고장이 나서 두 달 동안이나 육군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2월 1일, 군의관이 그에게 말했다.
"이번 주일 안으로 퇴원할 수 있겠네. 퇴원하면 한 달 동안의 요양을 위한 휴가를 받을 수 있어."
요한 모리츠는 휴가를 얻게 되면 조세프를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맨 먼저 떠올랐다. 조세프는 아마도 매일같이 요한이 베아트리스의 주소를 가지고 가서 자기 대신 편지를 보내 주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가 약속한 빵과 담배도 가져다주기를 기다릴 것이었다. 요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조세프를 두고 휴가를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요양 휴가를 단념하고 곧 중대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자넨 아직 몸을 돌봐야 하네. 잘 먹고 안정할 필요가 있어 무리하면 생명을 잃게 돼. 어디가서 휴가를 보낼 작정인가?" 하고 군의관이 물었다.
이렇게 되자 요한은 휴가를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얼굴을 붏히며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자네 사정도 이해하네. 휴가를 얻어도 갈 곳이 없어서 그렇지? 회복기 환자들이 가는 결핵 요양원으로 자넬 보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자네에게 알맞은 곳은 그런 곳이 아닐세. 지금의 자네에게는 좀더 따뜻한 가정적인 분위기, 인간적인 훈훈한 정이 필요하거든......."
요한 모리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군의관이 자기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를 이렇게 깊이 이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가 바라는 것은 돈도 아니고 좋은 음식도 아니었다. 가족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아늑한 장소가 그리웠다.
"자네에게는 자네를 간호해 주고 보살펴 줄 여성이 필요하단 말일세. 환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힘들어. 요양원에 가면 물론 여자가 많지. 그러나 그 여자들은 그저 성적인 만족만을 제공해 줄 뿐이야.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지금 자네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애정이야. 자극이 필요한 것은 아니란 말일세."
의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내린 진단에 확신을 갖고 있었고 자기의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직업 의식은 이 환자의 회복에는 애정과 가정적인 분위기, 자신감과 한 여성의 헌신적인 봉사가 가장 좋은 처방이라고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환자에게 이와 같은 약을 줄 수는 없었다. 환자에게 꼭 필요하지만 의사로서는 줄 수 없는 약이었다.
군의관의 눈은 진료 카드를 손에 들고 자기 곁에 서 있는 간호원에게 쏠리었다.
"힐다 양! 어머니와 함께 이 근처에서 산다지?" 의사가 물었다.
"네, 병원에서 아주 가까워요." 그녀가 대답했다. 힐다는 엄숙하게,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병들이 갖는 그러한 신뢰감에 찬 시선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군의관은 싱긋 웃었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대상을 발견했다는 눈치였다.
"힐다 양에게 이 환자를 맡길 테니 남편처럼 돌봐 줘야겠어. 한달 후에는 완전히 회복시켜서 데리고 와야해. 원대 복귀하기 전에 한번 더 진찰해 봐야겠어. 지금 이 사람에게는 애인도 되고 누나도 되고 어머니도 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필요하거든!"
"알겠습니다, 선생님."
장밋빛 두 뺨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힐다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키는 좀 작은 편이었으나 그런대로 밉상은 아니었다.
군의관은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요한 모리츠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약을 그녀는 지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금발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갈색 머리카락은 환자에게 덜 좋거든. 금발은 곁에서 보기만 해도 환자의 마음이 가라앉는데.........'
"힐다 양에게도 15일간의 휴가를 주겠어. 그 동안에 성심껏 보살펴 주도록 해. 음식은 매일 병원 식당으로 가지러 와도 좋지만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이 더 좋을 거야. 이 환자에게는 공동 취사장에서 만든 음식보다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 더 필요하니까."

"알았습니다, 선생님." 힐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군의관이 자기에게 그런 명령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모두 부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빈방이 있나?"
"네, 있어요." 힐다는 이 대답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힐다는 이 사람에게 반한 모양이지?"
군의관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명령했다.
"이 사람의 퇴원증과 당신들 두 사람의 휴가증, 그리고 30일간의 두 사람의 식량권, 또 A급 특별 배급권을 타도록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힐다는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의사는 문을 나가다 말고 요한 모리츠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빨리 회복되어서 돌아와 주게."

85
요한 모리츠는 병원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 마당 끝에 철조망이 보였다. 그는 철조망을 바라보며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등뒤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별안간 차가운 손이 그의 눈을 가렸다. 간호원 힐다였다. 요한은 그녀를 깜박 잊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회계과에 가서 봉급을 받아 오세요. 퇴원증과 휴가증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제 휴가증도 받았답니다." 힐다의 말은 빨랐다.
그녀는 요한이 군복 입는 걸 거들어 주었다. 스웨터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규겨진 옷을 바로잡아 주었다. 힐다의 손길이 가슴께를 더듬자 요한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온 것처럼 친근한 체온을 느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기의 자식이나 자기의 남편인 것처럼 요한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힐다는 그에게 냉정한 태도로 대해 왔었다. 약을 줄때나 열을 잴 때나 사무적인 일만 치르고는 곧 나가 버리곤 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고분고분하고 다정스러워진 것이다. 스잔나와 율리스카보다도 더 다정스럽게 느껴졌다.
요한은 힐다가 자기에게 갑자기 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의사의 명령 한마디로 갑자기 요한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다니........ 그의 스웨터를 바로잡아 주고 웃옷의 단추를 채워 주는 그녀의 손길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손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의사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병원 침대를 하나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외과용 침대인데 무척 커요. 양털로 된 이불도 두 채 주신대요. 제 침대는 둘이서 자기엔 너무 좁아요." 힐다는 벌써 침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당신을 너무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옳은 말씀이세요. 당신은 중병을 치르고 나셨으니까요. 그러니 1주일간 식이 요법을 한 후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고 안정을 하면 모든 게 금방 달라지겠죠."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요한이 묻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차차 알게 되겠죠." 하고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봉급을 탔지만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군의관의 명령에 의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명령은 참호를 파는 공사나, 단추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수용소의 보초를 서라는 명령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한 달 동안 귀여운 처녀와 함께 살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니 명령치고는 근사한 명령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그것이 명령인 이상 요한에겐 어떤 명령도 반갑지 않았다.

86
"우리가 결혼을 하면 저는 2주일간의 휴가를 더 얻을 수 있어요." 요한 모리츠와 함께 1주일을 보낸 힐다가 이렇게 말했다. 요한은 다정한 눈으로 힐다를 쳐다보았다.
"지난밤에 결혼하자고 하셨잖아요."
"응, 그건 진심으로 한 말이야."
요한은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지난밤 힐다와 그녀의 어머니와 같이 포도주를 다섯 병이나 마신 기억이 떠올랐다.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빨리 서두르면 전 추가 휴가를 받을 수 있어요. 당신도 추가 휴가를 받게 될 거예요. 그럼 휴가가 연장될 수 있어요. 그리고 아파트와 가구와 2천 마르크의 장려금도 받게 돼요. 당신은 근무가 있는 날만 부대에서 주무시고 비번일 때는 집에서 잘 수 있어요. 어머니도 우리의 결혼에 찬성하셨어요."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다는 그가 그 수속을 밟기 위해 휴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당신은 가만히 계셔도 돼요. 모든 수속은 제가 밟겠어요. 호적계와 주택계, 배급소, 노동청, 경찰서 등등 가야 할 곳은 모두 제가 다니겠어요. 당신은 피로하면 안 되니까요."
요한 모리츠는 힐다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리에 맞았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그 결과는 이득뿐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했다. 덕분에 방 셋에 욕실과 부엌이 딸린 아파트가 배당되었다. 2천 마르크도 받았다. 침구와 속옷, 가구, 부엌, 세간들, 나무, 석탄, 포도주, 결혼식용 고기와 라디오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배급받았다.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억울할 뻔했지 뭐예요. 이렇게 많이 생기는데 말예요." 힐다는 부대로 나가는 요한의 옷시중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대에서 자는 것보단 집에서 주무시는 게 훨씬 더 편하시죠? 그렇죠?"
"그야 물론이지."
"제가 만든 음식이 부대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지 않아요?" 힐다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두 달 후엔 임신 신고를 할 거예요. 그러면 또 휴가를 얻을 수 있어요. 당신이 점심도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휴가를 받겠어요. 그 뿐인줄 아세요? 식량 배급도 더 많이 타게 돼요. 임신한 여자는 3인분의 식량을 받을 권리가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모습을 더 잘 대접할게요. 살이 찐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요한이 웃으면서 "힐다, 당신은 참 착한 여자야!" 하고 말했다.

87
판타나의 헌병 파견소는 상부로부터 두 장의 게시용 전단을 받았다. 소장 니콜라이 도브레스코는 그 서류를 읽었다.
유대인 모리츠 이온. 별칭은 요한 또는 야곱, 또는 양켈, 위 사람은 전국 경찰서에서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임. 이 자는 노동 수용소를 탈출했음. 이자를 숨겨 준다거나 그 소재를 알면서도 이를 알리지 않는 자는 범인 은닉죄로 징역에 처함.
전단 오른쪽 귀퉁이에는 요한의 정면과 측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소장은 그걸 읽고 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놈은 정말 유대인이었구나!"
그는 사병을 불렀다.
"총을 들고 가서 이 유대인의 아비와 어미를 당장 잡아와! 그리고 이걸 바깥 게시판에 잘 붙여 놔.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도록 말이야."
판타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장은 창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때 마침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있었다.
잠시 후에 소장의 명령으로 달려나갔던 부하가 돌아왔다. "마누라만 데리고 왔습니다. 영감은 누워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장은 화를 벌컥 냈다. 그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신문하려고 했던 것이다.
"명령이라면 강제로라도 끌고 오겠습니다만 그는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이불을 들쳐 보았더니 전신이 마치 가죽 부대처럼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소장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요한 모리츠의 아버지를 신문하는 건 단념하기로 했다. 그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파를 들여보내라고 사병에게 명령했다.
아리스티샤는 화가 치밀어 푸르뎅뎅해진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일로 큰 죄인이나 다루듯이 총 자루를 둘러멘 헌병을 시켜 선량한 나를 끌고 오는 거야? 도둑놈과 죄인이 그렇게 모자라더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죽을죄라도 저질렀단 말이냐? 어서 말해봐!" 아리스티샤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헌병이 집안에 들어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헌병대 소장의 두 눈알을 빼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신에게 죄가 있는 게 아니라 당신 아들이 전국에 수배된 죄인이라서 그런거요."
아리스티샤는 소장이 내미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자기 아들의 사진을 보자 노파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가엾어라! 어쩌면 이렇게도 말랐지. 불쌍한 자식!"
요한의 깡마른 모습을 보자 노파는 요한이 틀림없이 고생을 무척 많이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 노파는 아들에 관한 일 외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읽어보시오!" 헌병이 명령조로 말했다.
"읽어보면 뭘해?" 노부인은 눈물을 닦았다." 이 사진만 봐도 내 아들이 굶주리고, 이한테 물어뜯기고, 매를 맞아 가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뻔한데. 그런데 또 뭘 읽어보라는 거야? 난 이것만 봐도 충분해! 더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자 소장은 큰 소리로 그 전단을 읽기 시작했다. 아리스티샤는 첫 구절을 듣고 곧 소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시 읽어 봐. 아마 내가 잘못 들었겠지. 당신은 유대인 모리츠 이온이라고 했는데,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건 내 아들이 아닐 거야! 내게는 유대 인 아들이 없으니까!"
소장은 다시 게시용 전단을 내밀었다. 아리스티샤는 아들의 몹시 여윈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또 눈물을 쏟았다.
"어때? 틀림없이 당신 아들이지?" 소장이 물었다.
"아이고 가엾어라! 내 자식을 잡아넣은 그 죄 많은 놈들을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리스티샤는 대꾸했다.
"아들이 틀림없다면 무엇 때문에 유대인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거야? 쓸데없이 시간만 끌지 말고 내가 읽는 걸 들어 두는 게 당신에게 유리할 거야. 떠들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할멈의 말은 단순히 개인 의사에 불과하지만, 이 서류는 당국이 보낸 문서이므로 감히 거역 못 할 신성한 것이야. 여기에 당신 아들이 유대인이라고 씌어 있으니 그는 유대인이야." 소장이 말했다.
"한번만 더 내 아들이 유대인이라고 말해 봐.  눈깔을 후벼 놓을 테다! 불쌍한 자식! 집을 나갈 때는 참나무처럼 튼튼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는데 이 꼴이 되다니........ 뼈와 가죽만 남았구나!"
"당국을 모욕하면 큰코다칠 줄 알아!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정부 관리를 모욕한 죄로 고소할 테야!" 소장이 으름장을 놓았다.
"이보라고. 이온을 내 남편하고 만들었지 경찰 당국하고 만든 건 아냐! 그 자식을 뱃속에서 키운 사람도 나고 젖을 먹인 것도 바로 나지 당국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내가 그 자식이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아까도 말했지만 개인의 주장보다는 당국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 내무 장관이 발행한 문서에 그렇게 되어 있단 말이오."
"내무 장관인지 뭔지 그런 말을 할 배짱이 있거든 여기 내 앞에 와서 하라고 해. 내 뱃속에 있던 것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떠들어만 봐라. 그 놈의 낯짝에다 침을 뱉어 줄 테니!"
"할멈이 루마니아 사람이 틀림없다면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어쨌든 당신들 두 사람중의 하나는 유대인임에 틀림없어. 이것은 공문서란 말이오. 하긴 당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지금 제 정신으로 말하는 거야? 나 자신이 내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 모른단 말이야?"
"종교가 문제가 아니오. 유대인이면서 크리스트교를 믿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혈통이오."
"내가 가진 피나 우리 양반의 몸 속에 흐르는 피나 분명히 크리스트교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어. 오히려 내 아들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고초를 겪게 하는 자들이야말로 이교도들이지!"
"당신 남편이 크리스트 교도라는 건 확실하오?" 소장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그 동안 같이 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여자와 달라서 남자들은 보다 쉽게 그 증거가 눈에 띄거든. 어떻소?"
"35년간 그 옆에서 잠을 잔 내가 모르다니, 그런 말을 당신이 할 수 있어?" 아리스티샤는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매춘부도 하룻밤 같이 잔 남자를 알 텐데 하물며 35년이란 세월을 한 이불 속에서 잔 내 남편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어떻게 나에게 그런말을 할 수 있어? 우리가 그 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당국이 나보다 더 잘 아는 모양이지? 내 뱃속에서 나와 내 젖을 먹고 자란 그 애의 일이라면 네 상관들이나 네가 나한테 와서 그러한 것들을 물어 봐야 당연하지 않아?"
아리스티샤는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치뜬 눈으로 자기 앞에 놓인 잉크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게 붉어 보였다. 그녀가 집어서 헌병에게 던지려는 그 잉크병도 붉었다. 벽도 붉었고 헌병의 얼굴도 붉었다. 소장은 노파가 잉크병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는 슬그머니 자기 앞으로 잉크병을 끌어당겼다.
아리스티샤는 무기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흥분을 못 이겨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아리스티샤의 주름잡힌 넓은 치마는 마치 바람에 날리듯 올라갔다.
그 바람에 윗도리도 걷어 올려져 푸르죽죽한 주름이 늘어진 노파의 알몸이 드러났다. 거무스름한 빈 주머니 같은 젖이 양쪽 가슴에 매달려 있었다. 소장은 한참동안 멍하니 아리스티샤의 발가벗은 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헌병은 보다 못해 두 눈을 감았다.
사무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벽이 울리고 천장에서 흰 횟가루가 떨어졌다. 아리스티샤가 나간 것이다.
목쉰 아리스티샤의 목소리가 소장의 귀청에 왕왕 울려 왔다.
"너희 놈들에 대한 내 대답이다! 네놈이나 네가 떠받드는 상관 놈들이 차례차례 이 꼴을 당해 보면 알 게다!"

88
아리스티샤는 집에 돌아와 어깨에 걸쳤던 숄을 벗어 놓고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무를  넣어 불을 피우고 빨간 불꽃이 눈앞에서 춤추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이 양반한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말아야지! 그렇지 않아도 병석에 누워 있는데, 마음까지 괴롭혀선 안 돼.' 노파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다.
아리스티샤는 남편 쪽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억울하게 유대인으로 취급되어 5년 동안이나 경찰과 헌병한테 갖은 학대를 받고 고생을 했을 이온을 생각했다.
'불쌍한 녀석! 유대인도 아닌데 그 고생을 하다니! 아이고, 분통 터지는 이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한담! 정말 유대인이었다면 누가 체포될 때까지 집에서 그리 태평하게 있었겠어. 마음이 좋아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흠이란 말이야. 그 놈들의 매에 못 이겨 유대인이라고 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경찰 당국이 그 이를 유대인으로 인정한 거야!"
아리스티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도리가 없었다. 아들의 사진이 찍힌, 선거 포스터처럼 푸른 종이가 헌병대 게시판에 붙어 있다는 말만이라도 남편한테 알리지 않고는 배겨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온이 강아지처럼 바짝 말랐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가슴아파할 테니. 그렇지만 헌병놈이 이온을 유대인이라고 고집하더라는 것만은 이야기 해 줘야지.'
"여보 얀쿠, 눈을 떠 봐요! 낮에 그렇게 자면 밤에 못 잘 텐데!" 아리스티샤는 남편을 깨울 생각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노인은 여전히 벽 쪽으로 돌아누워 대답이 없었다. 노인은 아리스티샤가 깨울때 자는 체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목을 길게 빼고 벽 쪽으로 향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지 않고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말하기가 싫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리스티샤는 자기가 때때로 남편에게 귀찮은 존재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귀찮아도 자기는 남편의 마누라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얀쿠! 헌병놈이 글쎄 당신을 유대인이라고 하더군요. 정신 나간 놈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내가 한바탕 해 주고 왔으니 걱정 말아요."

노인은 입을 약간 벌리고 있어 빙긋이 웃는 것 같았다. 아리스티샤는 자는 체하고 흉물을 떨고 있는 남편에게 충분히 익숙해 있는 듯 자기 쪽에서도 빙긋이 웃어 주었다. 35년 동안 같이 살면서 둘은 말다툼도 많이 했지만 그녀는 항상 남편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악을 쓰며 대든 것도 남편이 너무나 순하고 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다. 아리스티샤는 정성껏 남편을 받들었다.
"얀쿠, 내일 아침에도 차도가 없으면 시내에 가서 의사를 불러 와야겠어요. 돼지 한 마리를 팔면 치료비는 될 거예요. 돼지야 다시사면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병부터 얼른 나아야지요."
노인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눈 좀 떠 봐요, 여보. 담배 한 대 드릴 테니. 당신 주려고 한 대 숨겨 둔 게 있다오." 그녀는 선반 위에 숨겨 놓았던 담배를 꺼냈다. "당신 머리맡에 성냥이 있죠?"
그녀는 담배를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서면 물었다. 그 옛날 신혼 당시에 아침마다 그랬던 것처럼 자기 손으로 남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그럴 때 아무리 잠이 덜 깨었어도 담배 냄새를 맡고 입술이라도 벌린다는 걸 아리스티샤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퉁퉁 부은 노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스티샤가 담배를 입에 갖다 대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생물과도 같아서 아리스티샤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웬일이세요, 얀쿠?" 노파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만졌다. 순간 싸늘한 감촉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일시에 전달되었다. 노파는 남편의 어깨를 끌어당겨 반듯이 뉘었다. 이마를 짚어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노인은 죽어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기급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다가 돌아서서 죽은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던 것이다. 그녀는 조금 전에 남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려던 성냥을 그어 초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촛불을 베개 맡에 갖다 놓고 목을 놓아 울었다. 아무리 큰소리로 울부짖어도 거기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9
아리스티샤는 눈물이 마르도록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쉬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소리로 그녀는 계속 통곡했다.
이제 그녀는 죽은 사람 곁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래도 슬픔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마저 지쳐 버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리스티샤는 그 때야 비로소 자기만이 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래도 울고 있는 동안엔 누군가가 자기 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었다. 왠지 억울해서 다시 울어보려 했지만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다. 방안이 어두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에 불을 켰다.
그녀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불 위에 물을 올리고 저녁 준비를 했다. 창문의 커튼도 내렸다.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앉아 있으려니 홀로 남았다는 생각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현기증이 나고 피곤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스티샤는 죽은 남편이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밤부터 남편이 묻힐 때까지 계속 사흘 밤을 죽은 남편 곁에서 잤다.
소장의 말이 생각났다.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그녀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팔짱을 끼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사람처럼 난감했다. 물을 끓이고는 있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침대는 엉망이었으나 거기 누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슬픔과 고독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노파를 이끌어갈 것 같았다. 아주 망연해진 상태에서 노파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몸을 움직여도 외로운 감정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공연히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헌병이 다시 뭐라고 뇌까리는 것 같았다.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아리스티샤는 죽은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이불을 들쳤다.
시체는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셔츠와 팬티를 훑어보았다. 올이 굵은 천으로 만든 팬티, 자기가 수십 번 빨고 다려 입혀 온 것이었다. 그녀는 팬티의 끈을 풀고 무릎 아래로 끌어내렸다. 시체의 빛깔은 보랏빛이었다.
"부끄러울 게 뭐람! 한평생 같이 산 내 남편인데!" 아리스티샤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둘이 한참 젊었던 그 시절에 남편이 알몸으로 자기 곁에 누웠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싱싱하던 육체는 지금 보랏빛이 되어 있었다.
'아마 당신 남편이 유대인이겠지!' 아리스티샤의 귓전에 헌병의 말이 들려 왔다. 그녀는 손을 배꼽 아래로 가져가 더듬어 내려갔다. 거기도 눈까풀이나 코나 입술처럼 보랏빛이었다. 차갑기도 했다. 아리스티샤는 순간 기습을 하고 손을 거두었다. 급히 팬티를 올리고 이불을 덮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성호를 그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느님, 마침 그 때 제 손을 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또 한 번 성호를 그었다. "하마터면 저는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질 뻔했습니다. 큰 죄를 지을 뻔했지요. 하지만 전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분이 유대인이건 아니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니까요."
아리스티샤는 죽은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용서하세요, 여보.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않았고요. 얀쿠,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내가 그런 죄를 지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예요. 헌병과 관리놈들이 내머릿속에 죄를 넣어 준 거예요. 그 놈들은 다 지옥으로 보내어 불에 태워 죽여야 해요." 아리스티샤는 훌쩍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90
사병 요한 모리츠는 5명의 포로를 거느리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침 7시였다. 그의 집 앞을 지날 때 힐다가 아들 프란츠를 안고 창가에 서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힐다가 아이에게 하는 말소리가 요한에게까지 들렸다. "저기 아버지 봐라. 철모를 쓰고 총을 메셨네!"
프란츠는 생후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총을 메고 포로들을 호송하는 군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걸 알 턱이 없다. 그런데도 힐다는 매일 아침 똑같은 광경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아이도 군인의 자식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 모리츠는 포로들을 호송하면서도 생각은 어린 자식과 힐다에게 가 있었다. 포로들은 거리를 빠져 나와서 목장을 지나갔다. 요한은 총을 어깨에 메고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강가의 다리 밑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들의 일터였다. 강물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강바닥에 이르자 포로들이 요한을 돌아보며 지껄였다. 여기까지 오면 아무도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살베 스크라베! 잘 잤나?" 포로 한 사람이 다정스럽게 요한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말했다. 조세프였다.
"살베 스크라베!" 요한은 다른 포로들과도 악수를 하고 총을 바윗돌에 기대어 세워 놓았다. 그러고 외투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 다섯 갑을 꺼냈다. "아직도 자네 돈이 15마르크 남아 있어." 요한은 이렇게 말하면서 조세프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비누는 사지 못했어 내일 가지고 오도록 해 보겠네."
그는 또 옆구리에 달린 자루같이 생긴 가방에서 빵을 한 덩이 꺼내어 조세프에게 주었다. 포로들은 땅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요한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리 밑에서 작업을 시작한 후로 그들은 매일 아침 이렇게 반시간쯤 요한과 함께 웃고 떠들고 쉬었다. 그러고 나서는 점심때까지 일을 했다. 이 시간이 포로들이나 요한에게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주소로 프랑스에서 오는 그들의 편지를 전해 주기도 하고 담배나 빵, 그 밖의 그들이 바라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시내에서 사다 주기도 하였다. 그런 일이 끝나면 일을 시작했다. 요한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로들을 도왔다.
그는 그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포로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불쌍한 포로들을 돕는 것이 즐거웠다. 5명의 포로들은 모두 육체 노동하고는 거리가 먼 지식 계급 출신들이어서 이런 일에는 아주 서툴렀다. 요한은 그들에게 삽 쓰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는 이런 일에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장, 우리는 탈출할 생각이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우리 다섯 사람 모두 탈출 할 작정이야." 요한과 단둘이 있게 되자 조세프가 말했다.
요한은 조세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은 알수 있었다.
"내가 자네들에게 뭘 잘못했나? 난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의를 다했어. 자네들은 내가 평생을 감옥에서 썩었으면 좋겠나 보군?" 하고 요한은 말했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네들이 탈출하는 것을 봐도 내가 총을 쏘지 못하리라는 걸 자네도 알 걸세. 난 자네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총을 쏘지 않으면 내가 대신 감옥살이를 해야해. 나는 지금 자네의 말이 농담이기를 바라네."
"아냐, 농담이 아니야. 우린 꼭 탈출해야겠어. 그리고 자네도 감금되지 않는 방법이 있어." 조세프가 말했다. 요한은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네 명의 다른 포로들은 이 쪽의 심각한 대화에 짐짓 관심이 없는 체 하고 그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대로 돌아가면 내 책임 부서를 바꿔 달라고 하겠네. 내일부터는 자네들을 만나지 않을 거야. 나는 자네들이 탈출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난 남을 죽이기도 싫고 또 나 자신이 감옥살이를 하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직 한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네. 그러니 내가 자네들에게 총을 겨누게 되기 전에 딴 곳으로 가겠다는 거야. 여하간 내일부터 난 자네들과 같이 오지 않겠어. 나와 같이 있지 않을 때 탈출하려거든 하라고. 자네들 마음대로 말이야."
"자넨 우리 계획을 왜 좀더 들어보려 하지 않지?" 조세프가 말했다."
자네도 우리와 같이 탈출하는 거야"
"난 탈출할 이유가 없어! 내겐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어. 그리고 난 포로가 아냐. 지금 내가 포로라면 탈출할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지금의 내 자유를 스스로 그르치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않아. 자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로나 다름이 없어, 장. 단지 자네는 어깨에 총을 멘 포로고 우리들은 총이 없는 포로라는 것 뿐이야. 이 점만 다를뿐 우린 똑같아. 그러니 자네도 우리와 같이 탈출하자는 걸세."
"내일 아침부터는 절대로 자네들과 같이 오지 않겠네." 요한은 이렇게 말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개졌다.
"이봐 친구, 우린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자네가 그 돌격대의 군복을 입은 채 연합군에게 붙잡히면 이번엔 자네가 처벌을 받을 거라는 걸 모르겠나?
그렇게 되면 자네는 10년이나 20년은 감옥살이을 해야 해." 조세프가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말게. 연합군이 온다 해도 나를 감옥에 집어넣을 하등의 이유가 없네. 난 아무에게도 나쁜 짓을 안 했는걸. 라디오에서도 연합군은 공정하다던데 뭘." 요한이 말했다.
"그러나 장, 자네는 연합군의 적이야. 그것은 자네가 입고 있는 그 군복이 말해주지. 자네는 나의 조국 프랑스와 또 모든 연합군의 적이란 말일세."
"내가 프랑스의 적이라고? 나는 자네들에게 빵과 담배, 그리고 자네들이 원하는 걸 전부 사다 주었어. 그것이 프랑스의 적이어서 그랬다던가?" 요한 모리츠는 화가 치밀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내던졌다. "자네들이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줄은 정말 몰랐어. 난 자네들을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자네는 독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히틀러의 군인이야. 그걸 잊어서는 안 되네. 자네와 우리가 친하게 지내 온건 우리들끼리의 문제야. 그 관계를 떠나서 생각하면 자네는 우리의 적이리 수밖에 없어."
"내가 맥주라도 한 병 생기면 독일 사람들과 같이 마시던가, 아니면 자네들과 함께 마시든가? 내가 부대에서 마시던가, 아니면 여기 이 다리 밑에 와서 자네들과 마시든가?" 요한은 골이 잔뜩 난 얼굴이었다. "대답 좀 해 봐, 조세프. 내가 지금 누구와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지? 내 가슴속에 있는 말을 누구한테 지껄이던가 말이야? 그 자들 한테든가, 아니면 자네들 한테든가? 난 부대에서도 그들과 말 한마디 주고받은 적이 없어. 내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곤 자네들 뿐이야. 그건 내가 자네들 친구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네들은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독일 사람들 편이라고 자네가 방금 말했으니 말인데, 내가 독일 사람들과 친하게 얘기하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난 옛날에도 자네들 편이었고 지금도 오직 자네들 편이야!" 담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요한의 손은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네는 연합군이나를 10년이나 징역살이를 시킬거라고 했지? 나를 집어넣는 건 결국 프랑스 사람들이겠지. 그렇지?"
"그래. 만일 프랑스군이 들어오면 그들은 자네를 감옥에 집어놓을 거야." 조세프가 대답했다. 조세프는 이런 요한을 열심히 달래야 했다. 그는 자기의 진심을 요한에게 충분히 전달시키고 냉정한 판단으로 그가 자신들과 함께 행동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맘대로 하라지! 그렇다면 이 세상엔 정의라는 건 사라지고 없는 거야.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 자들이 와서 나를 총살한다 해도 난 미련이 없어. 자네들까지도 날 적으로 생각하는 판국에 내가 더 살아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나? 난 내일부터 이 다리 밑에 자네들과 함께 오지 않겠어. 탈출하고 싶거든 맘대로 해. 난 참견하지 않을 테니. 자네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거나 자네들을 체포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 내 생명이 위협받는 일없이 자네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지만 말이야. 도망치려는 포로를 도와서 탈출 시킨다는건 좋은 일이니까. 그러나 난 자네들과 함께 탈출할 생각은 없어. 자네들 때문에 여생을 옥살이로 허송할 수야 없지."
"장, 제발 내 말 좀 들어보게. 문제는 탈출에만 있는 게 아냐. 우리들이 자네를 구해 주겠다는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우정에서 하는 말이야. 우린 자네를 프랑스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말일세."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는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몇 달 후엔 반드시 연합군이 들어오게 돼 있어. 그 때 우리들이 자네 아내와 자식을 프랑스로 데려다 줄게. 나는 파리 교외에 농장을 가지고 있어. 자넨 거기서 살면 되잖아? 자네는 농사꾼 아냐. 농장을 일구어서 돈을 벌면 다음엔 땅도 사고 집도 지을 수 있지. 프랑스는 아름답고 인심도 좋은 나라야. 종전 후 패전국 독일에서 자넨 뭘 하겠다는 거지? 그러니 우리들과 함께 탈출하도록 하세."
"그럴 수는 없어. 난 안 가겠네." 요한이 말했다.
"우리가 자네 아내를 프랑스로 데려갈 때까지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남겨 두고 가겠네. 그녀를 위해 우리가 5천 마르크를 준비해 두었어. 몇 달 후엔 우리가 돌아와서 자네 아내를 데리고 갈 테니까 그 동안만 참으면 되는 거야. 만일 자네가 다섯명의 프랑스 인 포로의 목숨을 살려 준다면 프랑스는 자네에게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걸세. 어때 같이 가지 않겠나?"
요한 모리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 가서 소유하게 될 농장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사게 될 토지와 짓게 될 집과 그리고 힐다와 프란츠와 함께 살아갈 그 곳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또 아이들이 생기겠지. 계집애를 하나 낳으면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아리스티샤라고 지어야지.' 요한은 미래를 상상해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요한은 침울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탈출할 수 없어!" 그러나 요한의 말은 완강하지 못했다.

91
외출복 차림을 한 힐다가 대문까지 나와 요한을 맞았다. 영화 구경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요한은 자기가 무슨 영화를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최근 전선의 전투 상황을 찍은 뉴스뿐이었다. 부서진 탱크, 타 버린 집들과 죽은 사람들, 그리고 지도였다. 전선은 독일 국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요한은 말할 기력을 잃었다. 힐다는 요한의 우울을 막연히 이해하려 했다. 그런 힐다가 요한은 고마웠다. 자리에 들기 전에 요한은 요람에 누워 잠이 든 아기를 들여다 보았다. 힐다와 함께 어린애를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며 안식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힐다, 만일 독일이 항복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요한이 물었다.
"독일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아요!" 힐다의 자신만만한 대답이었다. 요한은 영화에 나온 전선의 전투 장면과 지도와 조세프와 그리고 요람 속의 아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힐다, 결국 독일은 전쟁에 지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난 포로가 되겠지. 그러면 당신과 아기는 어떻게 살아가지?"
"이기든가 아니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든가 둘 중의 하나예요. 독일 국민은 한 사람도 점령당한 독일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만일 죽지 못하는 경우엔?" 요한이 물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우다 죽는단 말이에요!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어요." 힐다가 대답했다.
"그건 남자들이 할 일이고 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오?"
"여자도 다를 것 없어요 만일 우리 독일이 전쟁에 진다면 나는 프란츠와 함께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전 하루도 살수가 없어요. 하지만 독일은 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 항복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이젠 그만 주무세요." 힐다는 모로 누우면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요한은 힐다와 프란츠를 생각했다. 그들은 요한과 공동의 운명이다 자기는 그들의 가장이다. 요한은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밤새 그는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하고 탱크가 자기 집 앞까지 다가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힐다가 총을 들고 요람 속에 있는 프란츠를 쏘아 죽이고 나서 자신도 자살하는 광경도 보였다. 요한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눈을 떴다.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창이 훤히 밝아 있었다. 힐다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요한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 나와 옷을 갈아입고 부대로 갔다.
요한은 어제 마음먹었던 책임 부서 변경을 상관에게 신청하지 않았다. 조세프와 다른 포로들은 그가 나타나자 아무 말도 않았으나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요한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리 밑에 도착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조세프가 "살베 스크라베! 잘잤나?" 하고 소리쳤다.
순간 요한 모리츠의 뇌리에는 어젯밤에 꾼 여러 가지 꿈, 특히 힐다가 프란츠를 죽이고 자살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조세프, 만약 독일군이 항복하면 자넨 틀림없이 내 아내와 자식을 프랑스로 데려다 주겠나?" 요한이 물었다. 
"물론 연합군이 들어오는 길로 우리가 달려와서 파리로 데려다 주겠네. 하느님께 맹세하겠네."
요한 모리츠는 총을 옆에 놓고 어제 영화관에서 돌아와 힐다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자네들이 늦게 도착해서 내 처가 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후라면 어떡하지?"
포로들은 연합군 선봉 부대와 함께 진격해 올 것을 약속했다. 요한의 두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글썽했다. 
"자네들이 그 약속만 지켜 준다면 난 자네들과 같이 가겠네. 언제 탈출하게나?"
"내일 아침에. 다른 날처럼 일하러 나와서 수용소로 돌아가지 않는 거야. 지금 자네는 프랑스를 위해서 영웅적인 결단을 내린 걸세. 프랑스 정부는 반드시 자네에게 훈장을 줄 거야." 조세프가 말했다. 
"그런 말하지 말게. 자는 절대로 프랑스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요한은 말했다. "난 힐다를 잘 알거든. 그 여자는 자기가 말한 건 꼭 실행하는 성미야. 만일 우리가 제때에 오지 않을 때엔 어린애를 안고 틀림없이 자살하고 말 거야. 그녀는 바윗덩어리처럼 고집이 세니까. 자넨 재가 프랑스를 위해 탈출한다고 생각하나? 자넨 배운 것도 많고 책도 많이 읽었으니 모든 걸 잘 알겠지. 난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나와 프랑스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네. 내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그들의 목숨을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난 단지 그들을 위해서 자네들과 함께 탈출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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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얀 코르가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아버지, 외교관 통신을 통해 몇 가지 적습니다. 이 편지 받으시고 즉시 회답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신변에 혹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요. 공연한 기우라고 웃어 버리셔도 좋고 신경 과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단 곧 회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식이니까요.
제 소설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제 4장을 쓰고 있는데, 하얀 토끼가 죽은 지 세 시간째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각에 전세계의 기계노예는 자기들이 가는 길 위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하고, 빛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죽음을 두고 암흑 속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드라이얀 코르가 드림
1944년 8월 20일 달마티아 라구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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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가 사제는 드라이얀의 편지를 읽고 나서 곧 편을 들었다. 부부가 다 건강하고 판타나 마을도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요한 모리츠만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걱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제가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고 있는데 조르주 다미앵 검사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사제의 집에서 이틀 정도 머무르다 갈 생각으로 온 것이다. 그는 거의 주말마다 이 곳에 오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드라이얀은 여기 일이 몹시 걱정되는 모양이야." 사제는 조금 전에 받아 본 편지를 검사에게 보여 주었다. 검사는 미소를 띤 표정으로 드라이얀의 편지를 읽었다. 
"드라이얀은 시인입니다. 언제나 과장하는 버릇이 있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과로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을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편 마차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제가 유체부에게 편지를 부탁하자 우체부는 받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외국으로 가는 편지는 이제 받지 않습니다. 루마니아는 오늘 오후 6시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러시아 군에게 정복당했다고 국왕 폐하께서 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셨습니다!" 
코르가 사제는 할 수 없이 편지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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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마을의 농부들은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관 안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제의 의견을 들으러 온 것이다. 농부들은 사제가나오기를 기다리며 마을에 퍼져 있는 불길한 소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러시아 군이 벌써 이웃 마을에 진격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 사람들은 시골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고 남자들은 거리에서 마구 총살되었다는 무시무시한 행패의 소문이 파다했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가 발코니에 나타났다. 농부들은 근심에 싸여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외국이닝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인인 까닭에 지급까지 우리를 지배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독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트교인들은 그 무엇이든 지상의 완전한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왕국은 오직 하나, 천국뿐입니다." 사제가 농부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숲 속으로 들어가 숨어야 할까요? 아니면 점령군과 계속 싸워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젊은 농부가 물었다.
"교회는 크리스트교인에게 지상의 권력을 정복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쇠사슬로 묶어 달라고 스스로 손을 내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교회는 우리들의 아내가 욕을 당하고 우리들의 집이 불살라지는 데도 팔짱끼고 보고만 있으라는 건 설마 아니겠지요? 이럴 때 교회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회라면 우린 지금부터라도 교회와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농부의 주장에 다른 농부들도 찬성했다. 코르가 사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모든 통치에 복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루마니아는 지금 외국의 잔인한 이교도들에게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들도 역시 외국의 잔인한 이교도들에게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들도 역시 외국의 잔인한 이교도들이었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뒤 유대에서는 헤롯왕의 명령으로 수천 명의 어린애들의 목이 잘렸다는 걸 상기해 보십시오. 그 통치는 정말 잔인했습니다. 아마 공산주의자들의 통치만큼 잔인 무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항하지 않으셨으며 누구에게 대항하라고 선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신부님, 신부님은 스탈린을 위해서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아까의 젊은 농부가 물었다. "가령 신부님이 스탈린을 위해 기도를 하신다면 그건 크리스트 인의 적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두 번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자가 스탈린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지금까지 내가 국왕을 위해 기도해 온 것같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스탈린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라 할지라도 그가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벗어나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 사제는 인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더욱이 죄 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사제에게 맡겨진 의무입니다."
"신부님은 스탈린을 위해 기도를 하세요. 그러나 우리들은 두 번 다시 교회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젊은 농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들이 볼셰비키와 싸우기 위해서, 또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숲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면 신부님은 주일마다 교회에서 우리들을 위해 기도를 드려 주시겠습니까?"
"숲 속이건 산 속이건 나는 당신들이 어디에 있든 지간에 하느님의 보호를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하루에 두 차례씩 기도를 드릴 겁니다. 싸우는 사람들의 생명은 늘 위험 속에 빠져 있으므로, 사제의 기도와 성모 마리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군중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단 한 번이라도 우리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날이면 신부님은 총살될 겁니다." 바실 아포스톨이 말했다.
"우리 크리스트 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뒤에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드리는 기도를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어떠한 권력도 그 기도를 중단시키지는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숲 속으로 가겠습니다. 신부님은 출발하기 전에 우릴 위해 축복해 주시고 성령이 늘 우리와 함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들에게 앞으로 어떤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싸우러 갑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인 조국 루마니아를 위해 싸우려는 겁니다." 바실 아포스톨이 말했다.
바실 아포스톨은 농부들을 몇 개의 편대로 나누었다. 대부분이 숲 속으로 피난 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마을에서도 으뜸가는 늠름한 청년들이었다. 그 속에는 여자들도 끼여 있었고, 아직 학교에 다니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안마당 잔디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코르가 사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나서 마당으로 내려가 한 사람 한사람 축복해 주었다.
"저에게도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조르주 다미앵 검사가 말했다. 그는 사제앞에 꿇어앉았다. "저도 저 사람들과 같이 숲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울 생각입니다." 
"교회는 축복을 원하는 사람에겐 누구를 막론하고 축복을 베풀어준다네." 하고 사제가 말했다.
"악한 행위를 범하려는 자에게도 축복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부님은 우리의 동기가 정당 한 것임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검사가 물었다.
"자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하게, 다미앵! 자네의 행동이 진실한 마음의 충동에서 월난 것이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옳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니까."
조르주 다미앵 검사는 농부들이 한 것처럼 알렉산드를 코르가 사제의 손에 입을 맞추고 숲을 향해 떠나는 농부들과 함께 마당에서 나갔다. 방안에서는 사제의 아내가 흐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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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이 마을을 떠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사제는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 때 이 마을 사람이 아닌 낯선 농부 두 사람이 노크도 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왔다. 그들은 삼색 완장을 두르고 권총을 들고 있었다. 사제는 무기를 못 본 체하고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면사무소에서 나를 부르는 모양이군요." 사제는 옆방에 있는 아내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내에게 공포감을 주기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당신을 인민 재판에 회부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한 농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제는 아내가 있는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야 할텐데..........' 하고 생각하며 사제는 책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을 나오기 전에 그는 뒤를 한번 돌아다보고 작별의 눈길을 던졌다.
두 농부는 사제의 양쪽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사제는 태연히 머리를 치켜들고 대문을 나섰다. 얼핏보면 연행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사제는 태연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나 면사무소까지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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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재판 의장은 마르크 골덴베르크였다. 그는 면사무소의 회의실, 그전 면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죄수처럼 빡빡 깎은 머리였다. 렌겔 노인을 살해한 죄로 복역중이던 그를 며칠 전에 소련군이 석방시켜 준 것이다. 골덴베르크의 오른쪽에는 요한 모리츠의 어머니인 아리스티샤가 앉아 있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판타나에서 '제일 가난한 인민'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재판관으로 선정한 것이다. 왼쪽에는 몇 년 전에 도끼로 헌병을 죽였다는 이유로 재판관이 된 이온 칼루가루가 앉아 있었다.
코르가 사제는 세 명의 재판관에게 인사를 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사제를 빤해 쳐다볼 뿐 그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아리스티샤의 칼루가루는 눈을 내리깔고 사제를 못 본 체했다. 그들은 사제가 오기 전에 이미 여러 사람을 재판하고 난 뒤였다. 면사무소의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세 명의 판사들과 삼색 완장을 두른 농부 두 사람뿐이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사제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직업을 물었다. "사제란 직업이 아니오!" 골덴베르크가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구두장이는 구두를 만들고, 재단사는 옷을 만드오. 모든 노동자는 무언가 만들어 내고 있소. 그런데 사제가 만들어 내는 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아리스티샤와 칼루가루는 여전히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완장을 두른 두 농부는 사제 뒤에서 웃었다.
"당신은 아무 직업도 가지지 않았소! 아무 직업도 갖지 않았다는 건 하나의 죄악이오." 이렇게 말하는 마르크 골덴베르크의 얼굴은 레몬처럼 노랬다. 그의 얇은 입술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사제는 마르크의 아버지인 골덴베르크 영감의 입술도 저와 똑같이 얇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 영감의 입술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마르크의 입술은 긴장되어 있었다.
"어째서 인민 법정에 불려나왔는지 그 이유를 아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물었다.
"모르겠소." 사제가 대답했다.
"반동분자의 전형적인 대답이군!" 마르크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반동분자들은 늘 무엇 때문에 자기가 신판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잡아뗀단 말이야. 당신은 산으로 달아난 파시스트 도당을 조직한 사실을 인정하오?" 마르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도당을 조직한 일이 없소. 다만 마을의 젊은이들을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 집 뜰에서 기도를 드린 사실만은 인정하오."
"그러면 그 자들이 파시스트 도당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이 그 노상 강도들의 고해 신부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 놈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느냐 말이오!"
"내가 기도를 드려 준 그 젊은이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돕고, 그들을 진리와 정의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성모 마리아께 빌었던 거요." 하고 사제가 말했다.
"인민 재판은 네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너는 공공질서를 문란케 하는 반란군을 조직했으므로 죄가 있다고 인정한다!"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이렇게 말하자, 아리스티샤와 이온 칼루가루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마르크를 쳐다보았다. 골덴베르크는 서류에 무엇인가를 기재하느라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리스티샤와 이온 칼루가루는 사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코르가 사제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 새벽에 인민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한다!" 마르크가 말했다. 인민 재판은 이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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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가 사제는 삼색 완장을 두른 농부 두 사람에게 끌려 면사무소의 마구간에 감금되었다. 그 속엔 숲으로 떠났던 조르주 다미앵이 숲에 이르기도 전에 붙잡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판타나 헌병 파견소 소장과 바실 아포스톨과 마을에서 부유한 여덟 명의 농부가 함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인민 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 받고 내일 새벽에 집행 당할 예정이었다.
마르크는 인민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이들은 한밤중에 한 명씩 끌려나가 총살을 당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는 붉은 군대에 대한 집단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개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손으로 한 사람씩 목덜미에 총을 한 방씩 쏘아 처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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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지났을 때 아리스티샤는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요한 모리츠의 아내 스잔나였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아리스티샤는 러시아 군이 마을로 들어와 스잔나를 욕보인 거라고 상상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소련군 선발대가 마을에 쳐들어오면 여자들을 겁탈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인민 재판의 판사로 있는 자기의 며느리가 제일 먼저 그런 변을 당했다면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리스티샤는 문을 열고 물었다.
"코르가 신부님이 총살당하셨어요!" 스잔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내일 새벽에 교수형을 집행한다고 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신부님을 죽이진 못할거야. 나도 마을의 판사야. 골덴베르크 혼자서 형을 집행하진 못해. 내일 아침에 우리들은 다시 한번 심사를 해 보고 신부님을 석방시킬 생각이야. 칼루가루에게도 그 얘기를 했어. 그러니 신부 부인에게 가서 아무 걱정 말고 주무시라고 말씀드려라." 아리스티샤는 낙관적이었다.
"코르가 신부님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총살당하는 걸보고 온 사람들이 저에게 알려 주었어요."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그녀는 스잔나와 같이 면사무소로 향했다. 그녀는 잠옷바람이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두 여자는 말없이 길 한복판을 걸어갔다. 스잔나는 소리 없이 울면서 때때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스잔나가 자꾸 뒤로 처지자 아리스티샤는 급한 성미에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가다가 여러 번 며느리를 돌아보고 야단을 쳤다.
"넌 졸면서 걷는 거냐? 네 몸 속에 흐르는 건 피냐, 아니면 젖이냐?"
스잔나는 빨리 가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신부님은 이미 돌아가셨는걸 뭐. 누구도 이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단 말이야.'
면사무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구간으로 가 보자! 나는 재판관이니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어 보고 알권리가 있어." 하고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마구간 속은 캄캄했다. 문은 닫혀 있었으나 빗장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다 아리스티샤는 겁이 났다.
"성냥 안 가졌니?"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에게 물었다.
"없어요, 어머님."
"네가 뭘 가져 본 적이 있니? 시집올 때도 넌 빈손으로 왔으니까. 내 아들 같은 얼간이에게 걸렸기에 그런 빈털터리로 올 수 있었지 뭐냐!" 아리스티샤는 역정을 내며 말했다.
스잔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리스티샤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리스티샤는 사제의 죽음을 확인함에 있어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애꿏은 역정을 냄으로써 조금은 지연시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안에 누구 없소?" 아리스티샤가 외쳤다. 그녀는 마구간 문 앞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어머니. 마르크가 마구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어 거름구덩이 옆에서 총살해 버렸대요." 스잔나가 말했다.
"잠꼬대 같은 소리하지마! 아무러면 판사에게 통고도 없이 어떻게 형을 집행한 단 말이냐?"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스잔나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두 여자는 마당으로 나와 어둠 속에서 총살당한 시체를 눈으로 찾아보았다.
"마당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봐라. 네가 꿈을 꾸었다고. 아마 다른 곳에 감금시켜 놓았겠지. 그런 걸 마을의 반동분자들이 마르크가 그들을 총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노파는 여전히 사실을 부정하려 들었다.
스잔나는 아리스티샤에게서 떨어져 나와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거름 구덩이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르가 사제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믿고 있었다. 총살하는 광경을 본 농부들이 마을에 퍼뜨린 이야기로는, 마르크 골덴베르크가 마구간에 있던 포로들을 한 사람씩 끌어내어 손목을 묶어 놓고 등뒤에서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골덴베르크를 만나러 가자."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그 때 스잔나가 비명을 지르며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리스티샤는 화가 벌컥 치밀어 스잔나에게 달려가 "바보 같으니라고! 또 뭐냐? 네 그림자와 브딪치기라도 했단 말이냐?"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말소리는 목구멍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스잔나가 쓰러져 있는 옆의 거름 구덩이를 따라 시체들이 즐비하게 나동그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티샤의 눈에 제일 먼저 스잔나의 발치께에 놓여 있는 흰 셔츠를 입은 남자의 시체가 보였다. 거기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검정 옷을 입은 시체가 또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많은 시체가 그 근처에 잔뜩 널려 있었다.
"하느님!" 아리스티샤는 용기를 내기 위해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일어나라. 네가 도와야겠다." 그녀는 이렇게 명령조로 말했다. 시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만은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스잔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손을 잡았다. 두 여인은 몸을 구부리고서 시체를 하나하나 바로 뉘어 놓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체 아홉이 거름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었고, 셋은 구덩이 속에 빠져 있었다. 아리스키샤는 그중 한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그전 동장인 니콜라이 슈보타루 영감이야!" 그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슈보타루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보았다. 그러고는 곧 일어서며 말했다. "죽었구나!"
그리고 또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허리를 굽히고 또 다른 시체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몸은 아직 식지 않았는데 심장이 멎었군. 이 사람은 콘스탄틴 솔로몬이야. 하느님, 이 영감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젊었을 때 내게 청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공연히 또 스잔나에게 역정을 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너도 좀 살펴보려무나! 바보같이 왜 아까부터 훌쩍거리기만 하는 거냐."
"전 못 하겠어요, 어머니. 무서워요."
"무섭기는 뭐가 무섭단 말이냐?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에다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지 들어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하느님에게 ' 이 영혼을 받아 주소서.' 하고 기도하고 성호를 그으란 말이야. 알아들었냐?"
"네, 어머니. 그러나 무서워서.........." 스잔나가 이렇게 말하자 아리스티샤는 화가 잔뜩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바보 천치 같으니라고! 너같이 못난 것을 데려온 그 녀석도 한심하지." 아리스티샤는 핀잔을 주고 또다시 시체를 살폈다.
" 이사람은 가끔 코르가 신부님 댁에 오던 젊은 검사로구나. 드라이얀의 친구였지. 참 훌륭한 청년이었는데." 아리스티샤는 웃 저고리를 헤치고 귀를 갖다 대고 한참 있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하느님, 이 영혼을 받아 주소서! 이 사람도 역시 죽었구나. 이 불쌍한 사람에게도 집에서 기다리는 처자가 있을 텐데."
다시 시체 곁으로 갔을 때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듯 했다. 드디어 코르가 사제의 시체를 찾은 것이다. 노파는 존경심과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굽혔다. 그녀는 사제복을 헤치고 귀를 대고 듣더니 나지막히 속삭였다. "얘야, 신부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예측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스잔나는 사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니 너 정신이 돌았니? 신부님이 살아 계시다는데 기뻐하진 않고 왜 더 크게 울지? 얼마나 정확하게 심장이 뛰는지 가까이 와서 들어보렴."
스잔나는 무릎을 꿇었으나 감히 가슴에 귀를 대지 못하고 주저했다. 아리스티샤는 두 손으로 사제의 손을 움켜잡고 말했다. "아직 온기가 있구나. 얘야, 네가 좀 만져 봐."
아리스티샤의 귀와 눈과 손은 사제의 체내에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지를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손과 뺨의 온기와 심장의 고동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리스티샤의 감각으로는 그 이상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군. 가느다란 심장의 고동과 몸에 약간 남아 있는 온기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리스티샤는 그 고동과 온기가 너무도 희미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명이 이 정도의 것이라면 정말 산다는 것이 허망하구나."
하고 그녀는 말했다. 주위는 무서운 정적에 싸여 있었다.
"신부님한테서는 향기로운 박하 냄새와 향냄새가 나는구나. 신부님 몸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 때문에 마치 교회에 온 것 같구나. 정말 교회에 온 것 같아."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사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즉시 죽지 않고 오랫동안 풀 위에서 꿈틀대며 괴로워했던 흔적이 시체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은 시체들은 돌처럼 차가웠다. 그들은 총알이 체내에 들어가자마자 숨진 사람들이었다.
아리스티샤는 치맛자락으로 연거푸 두 손을 문질러 댔다. 똑같은 동작을 무의식중에 반복하는 동안 노파는 자기의 무릎에 피가 잔뜩 묻어 있음을 알았다.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군. 내 손과 발을 저들이 흘린 피 가운데 들여놓다니. 죽은 사람의 피를 밟는 것은 큰 죄악인데......... 하지만 어두워서 그랬으니까 하느님도 용서해 주시겠지." 아리스티샤가 거름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다른 시체들을 살펴보는 동안 스잔나는 사제의 얼굴을 정성껏 닦고 있었다
"상처는 어디냐?" 아리스티샤가 거름 구덩이에서 나와 다시 치맛자락에 손을 문지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어머니."
"넌 아는게  하나도 없지. 너는 도대체 변변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어. 상처를 찾아서 피를 멎게 해야 잖니. 그렇지 않으면 출혈이 심해서 생명을 건지기가 어려워지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아리스티샤는 피가 가장 많이 밴 곳을 손으로 더듬어 상처를 찾아냈다. 사제는 오른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피에 온통 젖어 있었다.
"상처를 싸맬 헝겊을 빨리 가져와!" 아리스티샤는 명령조로 말했다.
스잔나는 어디서 헝겊을 가져와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노파는 못 참겠다는 듯이 속옷이라도 찢으려고 치마를 걷어올렸다. 그러나 손으로 살과 옷 사이를 아무리 더듬어도 속옷은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께 까지 치마를 치켜올렸다.
"빌어먹을! 속치마는 대체 어디로 갔담!"이렇게 중얼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급하게 오느라고 속옷 입는 것도 잊었던 것이 생각났다. "쯧쯧, 속치마를 빠뜨렸군!"
아리스티샤는 사제의 윗몸을 안아 일으켜 사제복을 벗기고 상처 입은 어깨를 들추어냈다.
"네 속옷을 벗어 줘, 스잔나!" 아리스티샤는 연거푸 상처의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신부님 몸에서 나는 박하 냄새와 향냄새가 정말 향긋하구나. 신부님의 몸이 어쩌면 꼭 교회 같으냐?" 아리스티샤는 감탄하며 스잔나를 돌아보았다. 스잔나는 겉옷을 벗고 나서 속옷을 벗고 있었다. 스잔나의 벌거벗은 알몸이 드러나자 노파는 노발대발했다.
"너 정신 나갔니! 신부님과 이 많은 남자들 시체 앞에서 거리낌없이 벌거벗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구나!" 하고 아리스티샤는 소리를 질렀다.
"속옷을 벗으려면 어쩔 수 없어요." 스잔나가 대꾸했다.
"천한 계집같으니! 신부님과 시체들 앞에서 알몸뚱이를 내놓다니........."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변명을 못 들은 척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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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티샤와 스잔나는 옥수수 밭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제의 몸을 풀밭에 뉘었다. 두 여자는 사제를 홑이불로 싸안듯이 그의 사제복으로 싸 가지고 마구간에서 여기까지 옮겨 온 것이다. 처음엔 앞뒤에서 사제복의 한쪽 끝을 잡고 마치 들것으로 운반하듯 옮겼다. 그러나 어찌 무거운지 얼굴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걸음을 멈추고 쉴 때마다 아리스티샤는 허리를 굽혀 사제의 심장이 뛰는가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그러고는 또 걷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들것처럼 들고 걸을 수가 없어 사제복으로 싸서 질질 끌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 아무쪼록 신부님이 도중에 돌아가시지 않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빨리 가자. 쉬느라고 너무 시간을 허비했어. 우린 내일이고 모레고 얼마든지 쉴 수 있을 테니 부지런히 움직이자."
아리스티사는 사제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집에 옮겨다 놓기가 무서웠다. 공산주의자들이 와서 찾아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만일 들키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한 번은 구해 드릴 수 있겠지만, 두 번째는 꼼짝 못 할 게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차라리 숲 속에 있는 젊은이들한테로 데리고 가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어. 그들은 신부님을 간호해서 살려 낼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자들이 숲 속까지 들어가 찾아낼 리는 없으니까."
"그들 중에는 의사도 있어요. 우리가 그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구급약 상자와 붕대도 가지고 갔는데." 스잔나가 말했다. 
"그들을 꼭 찾아야 해." 노파는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숲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들의 희망은 점점 줄어들었다. 숲은 너무도 넓었다. 여기서 젊은이들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풀숲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하면 가급적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신부님을 숨겨야겠다. 그렇게라도 해 놓고 난 다음에 생각을 해 보자. 너는 신부님과 숲 속에 남아 있거라. 내가 마을에 다녀오마. 날이 밝기 전에 먹을 것과 물을 가져오겠다. 되도록 상처를 돌봐 줄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올 테니." 하고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100
스잔나는 울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숲 속에 혼자 남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께 마을 젊은이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소리 없이 빌었다. 
 한 줄기 길이 숲을 따라 뻗어 있었다. 아리스티샤는 그 길을 건너기 전에 누가 지나치지나 않나 하고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불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히 여러 대의 자동차가 오고 있는 소리였다. 자동차는 불을 끄고 조심하느라고 엔진 소리도 낮춰서 은밀히 어둠 속을 지나는 것 같은데, 나직히 죽인 엔진 소리가 마치 말벌이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자동차들은 언덕을 넘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 군의 자동차 행렬이다! 그러나 걱정 말아라.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테니까, 우릴 볼 순 없을 거야." 하고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자동차들은 오르막길의 마루턱까지 오자 멈추었다. 엔진 소리가 멈추자 적막이 어두운 공간을 덮었다. 어디선지 귀뚜라미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몇 명의 군인이 자동차에서 내려 나직한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두 여자는 잔뜩 긴장해 숨을 죽였다.
"독일 사람이에요!" 스잔나가 말했다. 아리스티샤도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옥수수 밭에 엎드린 자세로 기어서 그 행렬 가까이로 갔다.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정말 독일 사람이구나. 신부님의 상처를 좀 봐 달라고 해 보면 어떨까? 저 속엔 반드시 위생병이나 군의관이 있을텐데.........."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두 여자는 용기를 내어 옥수수 밭에서 기어 나왔다.
"너 혹시 독일어를 조금 할 줄 아니? 한마디만 하면 돼." 아리스티샤가 물었다. " 우리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우리를 적인 줄 알고 총을 쏠 거야."
"독일어라곤 한마디도 몰라요. 어쩌면 좋지요?" 스잔나가 미안하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행렬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몸을 붙이고 길 한가운데 나란히 섰다.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넌 나보다 젊으니까 독일어 한마디쯤은 기억할 수 있겠지. 독일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을 게 아니야? 네 아버지도 독일말을 했지. 잘 생각해봐. 젊었을 땐 기억력도 좋았건만.........."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아요. 루마니아말로 하면 안될까요?"
"루마니아말로 뭐라고 하겠다는 거냐? 저 사람들이 알아들을 게 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했다가 공산주의자로 오인되면 우리도 거름 구덩이의 그 시체꼴이 되는 거야." 아리스티샤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 우리 그리스도라고 외쳐 보아요! 독일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트 교신자 들이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적어도 우리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리스도란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럼 말해 보렴. 독일 사람들이 알아듣기만 한다면 너도 멍텅구리만은 아니라고 해 주지!"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하지만 저 혼자 어떻게 소리를 질러요. 어머니도 함께 해요."
두 여자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동시에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낮게 외쳤지만 차츰 더 큰 소리를 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누구냐?" 군인의 날카롭고도 강압적인 음성이 들려 왔다.
여자들은 독일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계속 목소리를 합해 '그리스도!' 하고 외쳤다.
두 명의 군인이 여자들을 향해 걸어왔다. 아리스티샤는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오히려 스잔나가 아리스티샤보다 덜 긴장한 것 같았다. 독일 사람들은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듣질 못했다. 두 여자는 옥수수 밭으로 가서 코르가 사제를 운반해 와서 길 한복판에 있는 자동차 앞에 놓았다.
독일 사람들은 램프에 불을 켜서 사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신부가 아냐?" 한 장교가 물었다.
"그리스도!" 아리스티샤가 말했다.
"볼셰비키가 쏘았소?" 하고 장교가 묻자, 아리스티샤는 그 장교가 부상자더러 볼셰비키가 아니냐고 묻는 줄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자신 있는 어조로 "그리스도!" 하고 되풀이했다.
독일군 대열은 후퇴하는 중이었다. 장교는 두 여자에게 사제를 옆으로 치우라고 손짓하고는 출발 명령을 내렸다. 아리스티샤는 장교의 손에 매달리며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고 열심히 간청했다.
자동차에 발동을 거는 소리를 듣자 아리스티샤는 당황했다. 독일 사람들이 출발하기 전에 붕대만이라도 얻어 사제에게 감아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체면을 불구하고 장교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최대의 경의를 표시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신부 살릴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원하는 게 뭐지?" 대열의 지휘관이 물었다.
"아마 시내까지 부상자를 데려다 달라는가 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정교의 신부 같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해 주지 않아! 우리들은 비록 패했지만 그래도 문화 국민이야! 의료차 에다 부상자를 실어. 빨리 싣고 어서 출발해.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아리스티샤와 스잔나는 군인들이 사제를 들것에다 싣고 이불로 덮는 걸 보았다. 이윽고 자동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리스티샤는 자신도 사제 곁에 태워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녀는 아랑곳없이 의료차의 문을 닫아 버렸다.
자동차 행렬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잔나는 그 행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마치 구원을 청하듯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또 무슨 일이냐? 러시아 사람들이 네 울음소리를 듣고 이리로 달려오면 좋겠느냐?" 아리스티샤는 스잔나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벌하실 거예요. 우리는 신부님을 독일 사람에게 넘겨줘선 안 되는 거였어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할는지 알수 없잖아요." 하고 스잔나가 말했다.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거지 뭐냐. 병원에 가시는 게 숲 속에 계시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텐데 뭐." 그러나 얼마 후에는 아리스티샤도 울기 시작했다. 
노파는 아무래도 일을 그렇게 처리해 버린 것이 후회 스러웠던 것이다. "독일군에게 사제님을 부탁하지 말걸 그랬나 보다! 우리들은 엄청난 죄를 지은거야. 우린 지옥으로 떨어져 불에 타 죽을 거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아무튼 독일 사람들에게 신부님을 넘겨 준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두 여자는 이제라도 쫓아가서 사제를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한길은 멀리까지 텅 비어 조용했다.
두 여자는 마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아리스티샤는 면사무소로 붙들려 갔다. 아리스티샤는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고는 거름 구덩이에서 사제를 끌어내어 독일군에게 넘겨주었다고 자백했다.
아리스티샤는 즉시 거름 구덩이 옆에서 총살당했다. 스잔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을을 탈출했다. 마르크 골덴베르크의 부하들이 그녀를 잡으러 갔을 때 요한모리츠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102
"내 생애 최고의 날이야." 조세프가 잠자리에 들면서 말했다.
요한 모리츠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한 프랑스 포로들은 몇 시간 전에 미군 전초선을 통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 모리츠와 조세프는 UNRRA(국제 연합 구제 부흥 사업국) 호텔에 들었다. 호화로운 방에서 그들은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포도주도 마시고 아주 값비싼 담배도 피웠다. 그리고 식량과 옷 등 일용품이 잔뜩든 상자가 몇 개씩이나 이들에게 안겨졌다.
요한 모리츠는 양탄자 위에 차곡차곡 포개 놓은 상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은 적은 없었다. 미군은 이들에게 새옷과 면도기, 구두, 비누, 담배까지 주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요한 모리츠를 보자마자 주었던 것이다. 그는 자랑스러웠다. 요한은 비로소 자기가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는 것을 실감하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내가 한 일이 대수롭지 않다면 미군들이 이렇게 훌륭한 선물을 줄 리가 없지.'
요한은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다. 미군들은 요한에게 이름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프랑스 포로들의 탈출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요한은 추측했다. 미군들은 그가 겪은 고통과 그가 보여 준 용기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모두들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피곤했지만 요한 모리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주위를 자꾸만 둘러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이 자기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의자와 탁자도 양탄자 위의 물건들은 틀림없이 모두 요한 자신의 것이었다.
그가 강제 수용소에서 프랑스 인 다섯명을 탈출시킨 공로에 대한 보상이리라.
"우리들의 탈출은 완전한 것이었어!" 조세프가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탈출 광경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 그는 다섯명의 포로들을 앞세우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거리를 지나갈 때 힐다는 여느때처럼 어린 것을 안고 창가에 나와 "저기 좀 봐. 총을 메고 군모를 쓴 사람이 바로 네 아빠란다." 하고 말하며 요한에게 손짓을 했다. 요한은 언제나 처럼 웃어 보였다. 그들은 길을 따라 걸었지만 다른 날처럼 다리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리를 지나 계속해서 걸었고 요한은 어깨에 총을 멘 채 산기슭까지 포로들의 뒤를 따라갔던 것이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의 눈에는 군인 하나가 다섯명의 포로를 호송해 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나, 다리 위를 지날 때 그들은 이미 탈주자들이었다. 한 여자가 오랫동안 그를 주시하는 듯 보였기에 요한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몇 명 수상쩍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았으나 요한 모리츠는 그들을 못 본 척해 버렸다.
그는 숲에서 포로들이 그를 위해서 가져온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조세프가 그의 총을 바위에 내려쳐서 부숴 버렸다. 그 조각이 튀어 요한을 때리는 순간 그는 자기 마음 속의 무엇인가가 깨어져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난 후 프랑스 포로들은 그의 군복을 불태웠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군복이 불에 타는 걸 보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사람들의 기분이 상할까봐 꾹 참고 있었다. 군복이 타는 동안 그들은 뭐라고 자기들끼리 히틀러를 욕하고 있었다. 그래도 요한 모리츠는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1주일 내내 숲 속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을 빠져 나오던 그들은 길가에 있는 미군 지프를 보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기쁜 나머지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 지칠 대로 지치긴 했지만 그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한결같이 단춧구멍에 삼색 리본을 달았다. 요한에게도 같은 것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지프 앞으로 달려갔다. 미군들은 마치 그 곳에 이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 담배를 주고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이 곳 호텔로 데려온 것이었다.
미군들은 매일 그들에게 갖가지 물품과 식사를 제공했다. 요한 모리츠는 마치 동화 속의 나라에나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자를 열어 물건을 확인하고, 또 조세프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꿈 같은 현실을 실감하곤 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위대하고도 뜻깊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주어진 대가라고 생각했다.
조세프는 잠이 들었다. 요한 모리츠는 여기서 프랑스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장차 지을 집과 힐다와 프란츠를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프랑스로 모셔와야지." 요한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요한은 잠을 자면서도 계속 프랑스에 대한 꿈을 꾸었다.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가로누워서 다가올 행복을 꿈꾸며 아침까지 달콤한 잠에 빠졌다.

103
요한 모리츠가 UNRRA에 온지 도 벌써 2주일이 지났다. 그는 미군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프랑스 인 5명을 탈출시켰는가를 얘기해 주었다. 미군들은 그에게 찬사를 늘어놓으며 탈출기를 쓰라고 권하기도 했다. 요한의 이야기를 신문에 발표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찬양할 것이고 그는 화제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날이 갈수록 요한 모리츠는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자기가 공로를 세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연합군을 위해 공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고 연합군이 그걸 자랑으로 여기고 자기를 달갑게 생각해 주는데 만족했다.
즐거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UNRRA의 책임자가 요한 모리츠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벌써 몇번이나 요한 모리츠를 불러 탈출에 관한 얘기를 묻곤 했었다.
요한 모리츠는 당당하고 호기 있는 태도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임자는 안락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담배 케이스를 내밀며 웃어 보였다. 요한 모리츠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푸는 과분한 대접에 그저 감동할 따름이었다. 번번이 이런 대우를 받았으나 언제나 익숙하지 못한 그였다.
"당신은 이제 UNRRA에서 숙식할 수가 없소."하고 책임자는 요한 모리츠의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방을 비워 주시오."
요한 모리츠는 사색이 되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 정도로 미군들을 노엽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나를 갑자기 길거리로 내쫓는 건 아마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탓인가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미군들은 여태까지 산더미 같은 선물을 요한에게 주었다. 그는 자기와 힐다 몫으로 여러 가지 물건이 든 상자 다섯 개를 장만했다. 미군들은 그에게 어린애가 있다는 걸 알자, 프란츠를 위한 장난감과 옷가지도 주었다. 그들은 프란츠와 사진을 보여 달라고 조르다시피 해서 모두가 사진을 돌려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나를 갑자기 내쫓는 걸 보면 잘못을 저질러도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나 보다.'
"UNRRA는 오직 연합국의 시민만 보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연합국의 적이니 더 이상 돌봐 줄 수가 없소."
요한 모리츠는 탈출한 경위를 듣고 찬사를 아끼지 않던 미군들을 생각했다. 누구나 다 그가 연합군을 위해 중요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며 수많은 선물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요한 모리츠를 연합국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신은 연합국의 적이오!" 책임자는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 하지만 저는 연합국에 불리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저는 맹세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하고 요한 모리츠는 말했다.
"당신은 루마니아 사람이죠?" 책임자는 엄한 말투로 물었다. "루마니아 사람은 연합국의 적이오. 당신은 루마니아 사람이니 말할 것도 없이 연합국의 적이 된단 말이오. UNRRA는 적국인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가 없소. 오늘로 당장 방을 비워 주시오."
요한 모리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 방에서 나왔다. 차라리 부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총은 산산조각이 났고 군복은 불태워졌다. 민간인 복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요한 모리츠는 멍하니 서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104
요한 모리츠가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힐다는 곧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했다. 힐다의 어머니도 역시 이틀 후에 체포되었다. 두 여인은 신문만 받은 것이 아니라 매도 맞았다.
그러나 신문관은 그들에게서 아무런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 헌병은 가택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뮐러 대령의 편지를 찾아냈다.
"그 분은 요한의 친구예요! 우리들한테 매달 200마르크씩 보내 준답니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뿐만 아니라 우리들 생일 때에도 여러가지 필수품과 담배까지 부쳐 주곤 해요." 힐다가 말했다.
헌병대는 도움이 될 정보를 입수할 생각으로 요한 모리츠의 탈출을 뮐러 대령에게 보고했다.
이틀 후 그들은 사령부로부터 한 장이 넘는 장문의 전보를 받았다. 뮐러 대령의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4세기이래 요한 모리츠가 속해 있는 영웅족의 일원이 탈출했다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다. 요한 모리츠의 탈주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의 실종은 유괴나 암살의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한다. 요한 모리츠의 실종은 영웅족의 역사상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므로,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 게르만 혈통 중 가장 용감하고 명예로운 종족의 일원을 탈출의 혐의로 더럽히지 말라. 요한 모리츠의 처자는 공식적으로 국립 민족 문제 연구소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요한 모리츠를 찾을 때까지 그의 처자는 연구소에서 부양료를 받게 된다. 지방 헌병대는 그의 처자를 특별히 보호할 것이며, 조사 경과를 수시로 본관에게 보고하라. 요한 모리츠에 관계되는 새로운 정보는 사령부 전용 전신망을 통해서 본관에게 보고하라. 
총사령부 뮐러 대령
헌병대의 책임자인 대위는 잔뜩 긴장했다. "요한의 아내를 체포한 사실이 대령에게 알려지면 우리는 24시간 이내에 징계 처분을 받고 전방으로 이송될 거야. 체포한 사실을 대령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그 아내에게 단단히 부탁해 놓는게 좋겠어."
"그러면 조서는 어떻게 할까요?" 사건 담당 중위가 물었다.
"당장 종결시켜 버려. 총사령부와 대립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대위가 말했다.
"제기랄, 탈영병에 대한 조사를 못 하게 하는 건 역시 바보 같은 짓이야. 높은 분들은 꽤 아는 체하지만 간혹 우리보다 더 큰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단 말이야. 
뮐러 대령은 학자이지. 나는 잡지에서 그가 쓴 논문을 더러 읽었어. 그는 저서도 몇 권 출간했지만 좀 지나치게 편협한 사람 같아. 요한 모리츠가 탈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의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야."
대위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는 힐다를 자기 자동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언제든지 자동차가 필요하시면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밤이든 낮이든 제 메르세데스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그밖에도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한테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부인께서 저희들에게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길까봐 본보기를 보이려고 한 일입니다. 그저 단순한 형식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럼 우리 주인은 탈출한 것이 아닌가요? 무슨 특명을 띠고 파견된 건가요?"
힐다가 물었다.
"그것은 대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주인은 탈영한 건 아닙니다.
그 밖의 일은 비밀입니다.
힐다는 기뻐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날부터 그녀의 생활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변했다. 그녀는 요한이 총사령부의 특명을 띠고 어디론가 파견되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대위가 내게 자동차까지 마음대로 쓰라고 할 까닭이 없지.'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창가에 기대서서 마치 모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신비에 찬 갖가지 장면 속에 처해 있을 남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이는 내가 경솔하다고 생각하고 비밀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야. 나를 보잘 것 없는 여자로 알았던 거야. 그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 힘껏 노력해야겠다. '그녀는 프란츠를 꼭 껴안았다.
"네 엄마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단다. 오직 요한 모리츠의 아내만이 이와 같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거란다."

105
"패전이라니,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 거리를 떠나 숲 속이나 시골로 피난을 갔어요. 그들이 그러는데, 소련군이 10킬로미터 밖에까지 왔다 더군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났어요. 그러나 난 믿어지지 않았어요. 반드시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적의 선전일 거라 믿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예요. 독일은 전쟁에 지지 않아요." 힐다는 장교에게 말했다.
"몸을 씻게 대야에 물 좀 떠다 주십시오." 힐다와 얘기를 하고 있던 장교가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가죽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군복 웃 저고리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스웨터 차림이었다.
힐다는 장교의 일거일동을 눈으로 좇았다. 가죽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군복 단추를 끄르는 모습을 힐다는 몇 시간이든 지루한 줄 모르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면도를 하고 싶은데 더운물을 좀 가져다주시오." 장교는 의자 위에 놓인 가방을 열면서 말했다. 힐다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방에서 나왔다. 부엌 창문으로 문 앞에 세워 둔 군용차가 보였다. 힐다는 부엌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장교가 여기에 온 지는 불과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오래 전부터 알던 분같아.'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힐다는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독일군 장교였다. 그는 옷을 좀 갈아입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자기 부하들한테 명령하듯 위압적인 말투로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뚜벅뚜벅 집안으로 들어왔다. 문지방에 서 있는 힐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가죽 코트에서는 바람과 먼지와 화약 냄새가 뒤범벅이 된 전진(戰塵)의 냄새의 냄새가 풍겼다. 힐다는 마치 그 냄새에 취한 사람처럼 뒤를 따랐다.
장교는 거인이라고 할 만큼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자기 집에라도 온 듯이 아주 익숙한 태도로 서슴지 않고 거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힐다는 문 앞에 서서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힐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군모를 벗자 은회색의 머리칼이 드러났다. 가죽 코트를 벗자 중위 계급장이 나타났다.
'예비역 장교로구나.' 힐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교는 몇번인가 힐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눈길은 그녀에게 공정된 것이 아니라 딴 곳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힐다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교는 대답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웃저고리를 벗고 나서는 물과 대야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힐다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으라고 권하고 싶었다. 이 집에는 훌륭한 목욕탕이 있었다. 그러나 대야를 가져오라고 그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대야에 물을 받으며 힐다는 문 앞에 서 있는 자동차를 또 한 번 내다보았다. 자동차는 장교의 가죽 코트처럼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대야를 가지고 힐다가 방으로 들어가자, 장교는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거울을 가져다 주시오." 장교가 말했다. 그는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골몰에 있는 것 같았는데, 몹시 피곤해 보였다. 아마 잠이 와서 그러나 보다 하고 힐다는 생각했다. 그가 자야겠다고 하면 침실을 기꺼이 내주고 푹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난 며칠 동안 숱한 군인들이 힐다의 집 앞을 지나갔다. 사병과 장교들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세수를 한다든가 통조림을 데울 물을 좀 달라고도 했다. 힐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해 주었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어딘가에 파견되었을 요한 모리츠를 생각했던 것이다. 남편의 영웅적 행위를 본받아 자기도 조국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자리를 원하는 군인들에게는 이제껏 거실을 내주었었다. 그러나 이 장교에게는 침실을 내주고 자신은 거실의 긴 의자에서 자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장교는 요한의 침대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침대를 택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요한이 면도할 때 쓰던 거울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수척한 목을 늘여 빼고 그는 방을 거닐었다. 거울을 걸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는 키가 너무 커서 탁자 위에 거울을 놓으면 몸을 구부려야 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힐다에게 양손으로 거울을 들게 하고 얼굴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좀더 높이!" 그는 퉁명스럽게 명령했다.
그의 얼굴은 햇볕과 바람에 그을어 있었다. 두 뺨은 온통 다갈색 수염투성이였다. 힐다는 거울을 입 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다시 이마 위까지 올렸다. 장교가 몸을 앞으로 숙였을 때 힐다는 그의 입김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거울을 꼭 붙잡고 서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좀더 높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장교가 다시 말했다.
힐다는 자기 이마보다 더 높이 거울을 쳐들었다. 팔이 저렸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비누거품투성이의 갈색 수염을 싹싹 미는 규칙적인 소리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힐다는 두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코를 발름거리며 비누 냄새를 맡았다. 단순한 비누 냄새가 아니라 남자의 체취와 전쟁과 끝없는 행군의 냄새가 뒤섞인 것이었다. 가죽 코트에서 나던 냄새와 같은 냄새다. 장교는 그녀가 현기증을 느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면도하는 데만 열중했다.
면도가 끝나자 그는 두 손에 비누칠을 했다.
"셔츠 소매 좀 걷어 줘요." 장교가 말했다. 힐다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주었다. 살이 닿을까봐 조심했는데도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스쳤다. 그녀는 다시 전율을 느꼈다. 장교의 몸에서 풍기는 숲과 바람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찬 듯했다. 힐다는 이 냄새가 가구와 양탄자와 벽 속에 스며들어 영원히 가셔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냄새는 또 그녀의 옷과 피부와 머리칼과 속옷에까지 배어들어서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잠시 혼자 있게 해 주시오."
힐다가 문을 닫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장교는 윗도리를 머리 위로 벗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는 옷에 덮여 보이지 않고 가슴만 보였다. 간호원이었던 힐다는 이제껏 수많은 남자들의 나체를 보아 왔지만 이런 가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힐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엌으로 가서 창문으로 자동차를 내다보았다. 아기는 잠들어 있었다. 힐다는 장교가 곧 출발할 것인지 아니면 떠나기 전에 한잠 잘 것인지 궁금했다.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그의 명령대로 해야 할 것 같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장교가 부르기만 하면 곧 달려갈 태세로 신경을 쏟고 있었다.
"소련 사람들이 3킬로미터 밖에까지 왔대요! 부인은 그냥 여기 남아 있을 작정이에요?" 창문 아래를 지나가던 이웃 아낙네가 물었다.
"저는 이대로 있겠어요." 힐다는 관심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힐다는 장교가 부르기만을 기다리다가 그가 왜 부르지 않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그 큰 사나이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가슴에는 훈장이 잔뜩 달려 있었다.
힐다는 감격해서 문지방에 멈춰 섰다. 거인은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 준 것이다. 방안은 바람과 전쟁과 가죽 냄새 대신에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부인이 정말 순수한 독일 여성인지 알고 싶소. 용감한 독일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부탁하고 싶은데...." 하고 장교가 말했다.
"저는 진정한 독일 여자예요! 뿐만 아니라 남편은 대 독일의 위대한...." 힐다는 남편에 대해 말하려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탁자 위에 아름다운 두 여자의 사진이 든 사진틀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남편의 이야기를 이 거인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들려 주려고 했던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 사진이 눈앞에 보이자 힐다는 비밀을 말하려고 마음먹엇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내 아내와 딸이오. 둘 다 죽어 버리고 말았소. 나는 이들을 무척 사랑했는데 이들은 나를 실망시켰다오. 아내와 딸이 나를 배반하고 말았단 말이오. 아내는 죽었지만 내 딸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보잘것없는 어떤 녀석은 따라갔으니 내게는 죽은 딸이나 마찬가지오." 장교가 말했다.
힐다는 두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나라면 이런 분을 결코 배반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여자의 사진 옆에는 가죽으로 테두리를 한 히틀러의 사진틀이 놓여 있었다.
"이제 총통도 돌아가셨소. 독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요. 지금까지 나는 총통과 독일을 위해 살아왔는데 둘 다 없어졌소. 젊었을 땐 말을 좋아했었소. 젊음이 넘치던 때였죠.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잃었소. 이젠, 내가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소. 마누라도 딸도 총통도 조국도.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보오. 소련군은 반 시간 이내로 쳐들어올 것이오. 그 자들이 오기 전에 나는 내 생애의 마지막 의무를 완수하고 싶소."
힐다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그녀는 그 큰 사람이 침실에서 잘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음식을 요구하면 무엇이든 대접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성장을 하고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어요. 그런데 어디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그녀는 장교의 군복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데도 가지 않소. 내가 수염을 밀고 몸을 씻고 정복을 입어서 어디로 떠나는 줄 알았소?" 그는 힐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자기가 갑자기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요한이 특사로 어디론가 파견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도 힐다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부탁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해 주시오.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만 독일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오! 내 아내는 이런 일을 못할 여자였소. 하지만 부인은 할 수 있다고 믿소. 그 여자는 그저 아내에 불과했고 너무 약했소. 나는 그녀에겐 이런 일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요. 당신과는 전혀 다르니까."
힐다는 그 거인이 자기 아내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일을 자기에게 부탁한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마당으로 끌어내다가 태워 주시오. 난 여기 이 천막 위에서 죽을 테니까."
마룻바닥엔 이미 군용 천막이 깔려 있었다. 방에 가득 찬 천막은 새것처럼 매우 깨끗했다.
"천막 끝을 잡아당겨 마당으로 끌고 가면 되오."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군용 수통을 탁자 아래서 끄집어냈다. "여기에 휘발유가 들어 있소. 비행기에서 사용하던 거요. 나를 마당으로 끌어내다가 천막으로 싼 다음 그 위에 휘발유를 끼얹으시오. 그런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 됩니다." 장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호주머니에서 금빛 라이터를 꺼내 힐다에게 내밀었다.
"혹시 처음 붙인 불이 금세 꺼지거든 두 번째 수통의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시오. 그러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오. 소련 놈들은 재밖에 보지 못할 거요. 진정한 군인은 비록 실체일망정 적의 손에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독일 병사는 전통적으로 이런 방법을 취해 왔소. 이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그리고 시체까지 형태를 없애 버려 적군이 볼 수 있는 것은 검은 재뿐인 것이오." 장교는 이렇게 말하며 두 손을 비비 댔다. 힐다는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도 태우고 싶으면 나와 함께 태우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걸 간직할 이유는 없을 거요. 나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 루마니아 출신이니까."
힐다는 장교가 천막 위에 쓰러져 있는 장면을 상상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힐다는 이 장교가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으로만 여겨졌다.
"두렵소? 독일 여성이라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거요. 더구나 조국을 위하는 일엔 용감해지는 법이오. 한 병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 조국에 충성을 다하는 길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고 나는 믿소."
"전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다만 이 모든 것이 사실 같지 않아서 그래요. 소련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요. 독일이 전쟁에 졌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힐다가 말했다.
"그러나 이미 끝나고 말았소. 우리는 되찾을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잃고 말았소. 이 권총도 가죽 총집에 넣어 나와 함께 태워 주시오. 병사는 무기와 함께 묻히거나 태워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장교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장교는 마치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상념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끝났소."
이 말에 힐다는 기겁을 하고 눈을 치켜떴다. 그 큰 사나이가 자기 앞에서 자살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곧 자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장교는 총통의 사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했다.
힐다는 그의 뒤에 서서 그의 어깨와 군복에 꼭 낀 몸매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대로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경례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팔을 내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팔을 들어서 이번엔 힐다에게 경례를 했다.
"안녕히 계시오. 동지에게 감사를 드리오. 나는 요르그 요르단 중위요. 그러나 내 이름을 딴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소. 이제부터 당신이 완수해야 할 일에 긍지를 가지시기 바라오. 군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는 건 독일 여성으로서 명예로운 일이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힐다와 악수를 했다. 최후의 악수답게 힘있게 쥐었다.
"그럼 이제 혼자 있게 해 주시오. 총성이 나거든 곧 달려와 주시오. 안녕히!"

106

힐다는 부엌에 가 있었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소련군 선발대 트럭이 집 앞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엌 창문으로 보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때까지도 총성은 나지 않았다. 총성이 날 때까지 절대로 들어와선 안 된다는 장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머뭇거리던 힐다는 소련군 트럭을 보자 서둘러 부엌을 나왔다. 큰길을 지나가는 소련군 트럭이 벽을 뒤흔드는 바람에 무서워서 힐다는 더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교는 방 한가운데 펼쳐 놓은 천막 위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왜 총성이 들리지 않았을까?' 힐다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군모를 쓰고 똑바로 누워 있는 그는 총통의 사진에 경례라도 하다가 죽은 듯 단정히 누워 있었다. 얼굴은 검푸른 보랏빛이어서 잿가루가 덮인 듯했다. 오른쪽 뺨과 입, 코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피는 그다지 흐르지 않았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보일 뿐이었다. 힐다는 그 시체 곁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어 가죽 총집에 넣었다. 그리고 그 덮개를 덮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총소리를 못 들은 것이 의아스러웠다.
어쨌든 군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줘야겠기에 힐다는 천막 끝을 잡아당겨 시체를 덮으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늠름한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도무지 시체 곁에 있는 것 같지 않구나! 아마 병원에서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겠지.....'
힐다는 시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천막으로 거인의 얼굴을 덮었다. 살아 있을 때는 여느 사람과 다르게 보이더니, 그도 역시 죽고 나니 힐다가 지금까지 보아 온 많은 시체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힐다는 그가 면도를 하고 군복을 입었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의 숨결이 와 닿았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들이 모두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졌다.
밖에서는 소련군의 트럭과 탱크 소리가 여전히 들려 왔다. 힐다는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기를 안고 정원의 작은 문으로 빠져나가 숲 속으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교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괜히 약속했어.' 힐다는 생각했다.
그녀는 시체를 정원으로 운반할 수가 없었다. 문 앞을 지나가는 트럭과 탱크에 탄 소련군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 저녁때까지 기다려야지. 밤만 되면 마당으로 끌어내다가 태워 버리고 아기를 데리고 도망치자.'
힐다는 아무 생각 없이 옆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자 집 안에 독일 장교의 시체가 있는 걸 소련군들이 알게 되면 붙들릴 위험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힐다는 옆방에 가서 아기를 안고 와 시체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열심히 생각했다.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없지.' 그녀는 궁리를 하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에 빗장을 지르고 창문도 꼭꼭 닫아 걸었다. 이제 두세 시간만 기다리면 어두워질 것이다.
힐다에게는 시계가 없었다. 장교가 손목시계를 차고 있던 것이 생각나 힐다는 손목을 잡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힐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새파랗게 질린 채 아이를 꼭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문 밖에서 소련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뒤뜰로 난 창문을 열었다.
'약속을 이행하기 전에는 도망칠 수 없어. 내 남편 요한은 영웅이야. 영웅의 아내가 비겁해서는 안 돼.'
힐다는 휘발유가 든 수통을 열고 천막 위에 끼얹었다. 이번에는 총대로 문을 치는 것이 마치 당장 부숴 버리고 뛰어들 것같이 들렸다. 힐다는 두 번째 수통을 열고 절반쯤 끼얹었다. 소련군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허둥지둥 뒤뜰로 난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창문을 뛰어넘은 다음 불을 켠 라이터를 방안에 집어던지면 불이 붙겠지. 그러면 약속은 이행한 것이 된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방안은 휘발유 냄새로 숨이 콱 막혔다. 아기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힐다는 다급해졌다. 그녀가 마당으로 뛰어내리려고 창문 난간을 넘어서는 것과 동시에 소련군은 어깨로 밀어 문을 열었다. 창문에서 정원 화단까지는 그다지 높지 않아서 힐다는 쉽게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소련군의 철모 세 개가 불쑥 창 밑에 나타났다.
뜰안에도 군인들이 있었다. 창에서 뛰어내리기엔 늦었다. 힐다는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휘발유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혀 아기는 요란스럽게 울었다. 그냥 뛰어내려 소련군을 밀치고 도망치리라 결심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들창 너머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발을 잡았다. 힐다는 비명을 질렀다. 몸부림을 쳤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습격을 당했을 때 그녀는 무의식중에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기듯이 라이터를 눌렀다. 순간 화염이 방을 덮었다. 그것은 아주 뜨겁고도 격렬한 결말이었다.
어둠이 깃들었다. 다시는 밝은 날이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진한 어둠이 주위를 내리눌렀다.
요르그 요르단의 시체를 태운 불꽃은 요한 모리츠의 아내 힐다와 그의 아들 프란츠까지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불꽃은 지하실에서 다락방까지 송두리째 집을 휩쓸고 집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태워 버렸다. 장교가 갖고 와서 탁자 위에 놓았던 그의 아내와 요한의 첫 번째 아내인 스잔나 사진까지 몽땅 삼켜 버렸다. 짙은 어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격렬한 불꽃은 주위로 번져 갔다.

107

드라이얀 코르가 부부는 바이마르의 미국 군정관 브라운 소령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군정관님." 드라이얀이 말했다. "루마니아가 손을 든 8월 23일, 제 처와 저는 우리 공사관 직원들과 함께 크로아티아 인에게 억류당했습니다. 외교 법규에 따라 모든 적국 대표와 같이 호텔에 억류된 것입니다. 다시 크로아티아가 티토의 빨치산에게 점령당했을 때, 우리들은 오스트리아로 옮겨졌다가 독일을 경유하여 마지막엔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송되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아무도 우리를 감금할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우리들은 서방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여기에 모두 희망을 걸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서방측을 향해 출발했던 것입니다."
엘레오노라는 자기들이 걸어온 200킬로미터의 여로를 돌이켜보았다. 다리는 부어오르고 발바닥은 물집투성이였다.
"우리는 모든 걸 버리고 왔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프랑스 점령 구역으로 들어오려고 수없는 산과 들을 지나왔습니다. 우리는 소련군이나 빨치산들에게 붙들리기는 싫었습니다. 그들에게 붙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요."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침착하게 말했다.
"왜 소련군과 빨치산을 겁냅니까?" 하고 군정관이 물었다. "그들을 무서워하는건 파시스트들뿐입니다. 소련군과 빨치산도 우리의 동맹국입니다. 우리와 함께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싸워 왔습니다."
"군정관님, 물론 당신은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도 볼셰비키 점령지역에 단 하루라도 부인을 머무르게 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불어넣는 잔인성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당신도 군복을 입고 든든한 호위병을 거느리지 않고서는 소련군 주둔지를 뚫고 들어갈 용기가 없을 겁니다. 우리같이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최신식 미국 무기를 든 야만인 무리들 속에서 왜 도망쳐 왔는가를 물어 보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립니다."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금 뭘 원하십니까? 당신들은 독일에서 떠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당신들은 적국 시민으로 취급을 받아야 하고, 독일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독일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하고 군정관이 말했다.
"말하자면 아무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군요. 지금 바이마르의 독일 여자들은 적어도 매주 한 번씩 부센발트 수용소의 변소를 청소하고 석방된 억류자의 속옷을 세탁해야 합니다. 당신은 외교관 가족인 제 아내에게도 이런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우리들은 미국과 연합국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거의 1년 동안이나 연합국의 적국에 억류돼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당신을 찾아온 까닭은 이 곳에 머무르게 해 달라는 허락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적어도 이 곳에서 다시 떠날 수 있도록 허가라도 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막연히 거리를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잠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몸을 씻을 장소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 머물러 있을 수도 떠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말했다.
"당신들은 적국의 시민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불행에 관심이 없소. 당신들은 엄연히 루마니아 여권을 가지셨죠? 그러니까 적국 시민입니다." 하고 군정관이 말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는 연합국측에 끼여 벌써 10개월 전부터 독일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우리들보다 군정관께서 더 잘 아실 줄 믿습니다. 8만명의 루마니아 인이 연합국을 위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신들 편이 되어 싸우는 사람들이 당신들의 적국이란 말씀입니까?"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말했다.
"루마니아는 적국입니다." 하고 브라운 소령은 거듭 말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어 큰 소리로 읽었다.
"적국은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는 이렇게 읽고 나서 말했다. "이렇게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아시겠소? 그러니까 당신들은 미국의 적입니다."
드러이얀 코르가는 벌떡 일어났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애원하듯 군정관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루마니아가 1년 가까이 연합국 측에 합세해서 싸워 온 걸 신문에서 읽은 일도 없습니까? 그 동안 우리들이 독일에 억류당했다는 사실이 적힌 우리의 신분 증명서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것이 못 된단 말씀입니까? 우리는 결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애원하듯 말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알 바는 아니오. 내가 받은 지시에 따르면 루마니아는 분명히 미국의 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쓸데없는 얘기를 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허비했소.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은 우리의 적입니다. 아시겠어요? 만일 내가 당신들 수중에 떨어졌다면 총살을 당했지 내가 지금 당신들과 얘기하는 것같이 내 얘기를 여유 있게 들어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의 지금 행위는 위법입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적과 토론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이마르의 군정관 브라운 소령은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이것이 서방측의 생리야. 그들은 사실에 대해서나 개인에 대해서 무관심해. 그들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무엇이든 규정에만 따르려 하고 있어." 드라이안은 계단을 내려오며 이렇게 말했다.
"전 더 걷질 못하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노라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이 곳에 오느라고 20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달리다시피 걸어왔건만...., 메카를 향하는 군중처럼 이 먼 길을 찾아왔건만...."
"후회를 해선 안 돼요, 노라. 어쨌든 소련군의 야만적인 공포에서 탈출해 온 것은 잘 한 일이오. 지금 이 시대의 인간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이란 아무데도 없어. 이 땅덩어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니까."

108

나흘 후,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다시 군정관을 찾아갔다. 바이마르에서 1주일만 더 묵게 해 달라고 청해 볼 생각이었다. 노라는 다리가 부어 올라 도저히 걸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고운 비단옷에 멋진 모자를 쓰고 하이힐을 신고 나섰다. 군정관을 만나고 싶다고 당번병에게 전하고 나서 드라이얀은 노라를 돌아보았다.
"파티에라도 초대받은 것 같은 차림인데...."
그녀는 웃어 보였다. 그 옷은 3년 전 어느 날 핀란드 대사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입었던 아주 멋진 옷이었다.
"군정관님께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당번병이 정중하게 말했다. 몇 분이 지났다. 노라는 흐뭇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다른 사병 하나가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군정관님에게 용무가 계신 루마니아 외교관이십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 군인은 사라졌다.
엘레오노라는 브라운 소령이 사실은 점잖고 예의바른 신사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기들을 몇 분 정도 기다리게 하면서도 그동안에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양해를 구하는 자세가 그녀를 조금 안심시켜따. 큰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군정 사령부의 홀은 매우 넓었다. 노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몸이 수척해져서 핀란드 대사를 방문할 때보다도 옷의 주름이 더 잘 잡혀져 우아한 것같이 보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두 번째 왔던 군인이 다시 와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미소를 머금고 거울 앞을 떠났다. 드라이얀은 그녀의 팔을 잡고 군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 군인은 전처럼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출입구 쪽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사병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프에 타라고 말했다.
"어디로 갑니까?" 드라이얀이 묻자 운전병은 다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지프는 미칱 듯이 속력을 내어 거리를 질주했다.
드라이얀은 안내하는 군인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역시 그의 동료가 그랬듯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드라이얀이 노라 쪽을 보았을 때 그녀는 두 손으로 모자 차양을 잡고 웃고 있었다. 노라는 전부터 빨리 달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드라이얀은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면서도 일상적인 아내의 표정에 자신을 억지로 안심시키려 했다.
지프는 시가지가 끝나는 곳의 어느 돌담 앞에 멈춰 섰다. 제모를 쓴 위병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지프는 마당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같이 온 군인이 위병에게 봉투를 전하고는 엘레오노라 베스트와 드라이얀에게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물었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노라는 독일어로 다시 수위한테 물었다.
"감옥이오." 이렇게 대답한 수위는 지프 쪽으로 다가와서 노라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노라는 군인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지프가 올 때와 같은 속력으로 재빨리 사라졌던 것이다.
노라는 드라이얀을 쳐다보았다. 그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철문은 그들을 받아 들인 뒤 곧 닫혀 버렸다. 두 사람은 감옥 마당에 서 있었다.

109

드라이얀코르가는 즉시 1층 독방 5호실에, 노라는 4층 독방 2호실에 각각 수감 되었다.
'그들이 뭔가를 오해한 모양이지.' 드라이얀은 혼자 있게 되자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오해를 받았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던 그는 노라도 지금 자기처럼 독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미칠 것 같았다.
감옥의 복도에서 서로 헤어질 때 드라이얀은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애정이 담긴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감시병이 그의 어깨를 난폭하게 낚아채어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고 말았다. 노라가 애원하듯 감시병을 쳐다보았으나 감시병은 그녀를 복도 저 쪽 구석으로 거칠게 떼밀었다. 그들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나와 이름이 같고 얼굴이 닮은 어떤 죄인과 나를 혼동한 모양이야. 그런데 노라는 왜 붙잡혔을까?'
드라이얀 코르가는 간수를 부르기 위해 주먹으로 감방문으로 두드렸다.
'소련군한테는 체포될 것을 예측한 적도 있었다. 소련에서는 매끈한 손만 가져도 붙잡힐 이유가 충분하지. 그러므로 내 손을 보지도 않고 나를 붙잡아 가고, 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감금했다. 해도 난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거다. 소련에서는 늘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유없이 체포되고 암살되고 유형을 당하는 그런 사회를 피하기 위하여 200킬로미터나 걸어왔던 것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주먹이 아프도록 문을 두드렸다. 이제 와선 단순히 간수를 부르기 위한 것보다는 200킬로미터의 길을 뛰어온 자기 자신을―그보다도 부어오른 다리와 피가 나는 발을 이끌고 울면서 쫓아온 아내 노라의 고생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자기 자신을 벌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노라를 체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독일은 나치스 국가이며 반유대주의자들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오?" 나타난 간수가 물었다.
"소장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아내와 나는 어떤 착오로 수감된 것 같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처음엔 어떤 착오로 그들이 붙잡혔을 거라고 하더군요." 간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비웃지 마시오. 당장 소장한테 말해야겠소." 드라인얀이 말했다.
"소장 같은 건 없소. 당신은 미군에게 체포된 거요. 우리는 관리만 맡아 보고 있을 뿐이오. 하긴 우리들도 일종의 죄수에 불과하지만."
"그럼 미군한테라도 말해 보겠소!"
"매주 월요일에만 한 번씩 오게 되어 있소." 간수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바로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걸 생각했다.
"그럼 내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당신들은 우리를 1주일 동안이나 이 곳에 가둬 둘 작정이오?"
"나도 어쩔 도리가 없소. 몇 시간이고 문을 두드리든 지껄이든 당신 마음대로 해 보시오. 소용이 없을 테니까. 나로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소. 담당 미군은 다음 월요일에나 오게 되어 있소." 간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좋소. 그렇다면 한 가지만 말해 두겠소. 이 일을 위사람에게 얘기하든지 아니면 혼자만 알고 있든지 맘대로 하시오. 나를 체포한 이유를 알기 위해 소장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음식은 물론 물도 건드리지 않겠소. 내가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오."
"단식 투쟁을 하겠다는 거요?"
"물도 마시지 않겠소!"
간수는 열쇠를 손에 든 채 잠깐 동안 감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드라이얀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딱하군! 당신은 가엾게도 아직 너무 젊구려!" 그러고는 자물쇠를 두 번 돌려 잠그고 사라졌다.

110

노라 베스트 역시 반 시간 동안이나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간수는 다가와서 문을 열지는 않고 문에 뚫린 구멍으로 감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계속 두드리면 처벌을 받소. 죄수는 감방문을 두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소." 간수는 이렇게 말하고 멀리 사라졌다.
노라는 침대에 축 늘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용수철에 퉁기듯 벌떡 일어났다. '이가 있을 텐네.' 하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문을 두드려 다른 이불을 하나 달라고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가 없는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금 문을 두드려서는 안 되낟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감방 안을 왔다갔다했다.
노라는 마음 속으로 자기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기의 체포도 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혈통을 속이는 문서를 위조하고 돈으로 매수해서 호적을 고친 뒤로 그녀는 밤낮 붙잡혀 감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강박과념에 시달렸다. 매일같이 그녀는 경찰이 곧 잡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발각되어서 경찰에 체포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독일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경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녀의 서류는 모두 위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수년간은 체포되어 끌려갈 날만을 기다리는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그 시간이 온 거야. 내가 유대 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어. 이젠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게 됐어.' 하고 노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몹시 가슴이 떨렸다. 공포감으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루마니아에서 서류를 위조했다고 해서 미군이 나를 체포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그러나 이 이유밖에는 내가 체포될 까닭이 없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내가 체포된 이유가 있다면 그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죄인이니까 벌을 받아야 해. 이젠 그 벌을 받게 되었다. 가장 엄하고 잔인하게. 그러나 응당 받아야겠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오한이 나기 시작했다. 비누거품처럼 가벼운 그녀의 속옷과 면사포같이 얇은 겉옷은 돌벽의 차디찬 습기를 막아 내지 못했다. 살갗을 통해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신장(腎臟)까지 떨리는 추위를 느꼈다. 신장뿐만 아니라 내장이 모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겉옷으로 무릎을 감쌌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침대에 앉는 것이 겁났다.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그녀는 와들와들 떨었다. 바깥은 따뜻했다. 그러나 엄동설한을 만난 듯 추위에 떨고 있는 노라에게는 바깥이 아무리 따뜻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조금이라도 몸을 녹이려고 감방 가운데 쪼그리고 앉았다. 그 때 갑자기 소변이 보고 싶어졌다. 당장 보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었다. 수백 개의 바늘 끝이 방광을 찌르는 듯이 팽창돼 도저히 근육을 억제할 수 없었다. 노라는 감방 안에 변기가 있다고 한 소설 대목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감방 안에는 침대와 작은 탁자, 그리고 창살이 달린 들창밖에 없었다. 노라는 문을 두드릴 생각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 변소에 가는 것쯤은 허락하겠지. 그 순간 독일인 간수의 목쉰 소리가 떠올랐다. '문을 자꾸 두드리면 처벌을 받소!'
그년 쳐들었던 손을 내렸다. 겁이 나서 두드릴 수 없었다. '두드려서는 안 될 때 내가 문을 두드린 것이 잘못이었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허리를 구부린 채 또 감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엉거주춤하게 서 있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을 자꾸 두드리면 처벌을 받소! 이 말이 귀에 쟁쟁히 울리는 동안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위험 신호다! 그녀는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얇은 속치마가 차차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뜨뜻미지근하고 척척한 것이 허벅지에서부터 스타킹을 따라 구두 속까지 흘러내렸다.
그녀는 점점 더 쪼그리고 앉았다. 속옷이 젖어 하반신이 뜨뜻해짐에 따라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최상의 해방감과 쾌감이 그녀를 방임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모든 근육과 털구멍과 힘줄이 느슨해졌다. 이러한 감정은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강한 것이었고 진정한 쾌감이었다. 그것은 쾌감이라기보다는 어쩌면 황홀한 경지였다. 그녀는 이 쾌감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의 모든 걸 잊어버렸다. 그녀는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듯한 해방감을 온몸으로 맛볼 수 있었다.
노라는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소변만 보아 온 것처럼 느긋해졌다. 그러나 정작 흥건한 시멘트 바닥을 목격했을 때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일어나서 몸을 숨기듯이 감방 한쪽 구석으로 피해 갔다. 그것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감방의 시멘트 바닥은 온통 축축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오줌은 침대 밑에서 탁자 아래로 흘러 마침내 그녀의 발 밑까지 젖어들었다. 그녀는 금지되어 있는 것을 범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 엄벌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간수의 음성이 위협하듯 그녀의 귓전에 울려 왔다. '당신은 처벌을 받을 거요!'
엘레오노라는 옷을 찢어서 바닥을 닦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소용없는 짓이다. 오줌은 너무 급히 흘러내려서 그녀가 입고 있는 종이같이 얇은 비단옷과 속옷으로는 도저히 다 흡수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귓전에는 쉴 새 없이 이런 말이 들려왔다. '처벌을 받아야 해! 처벌을 받아야 해!'
아무래도 끝내는 발각되어 처벌을 받고야 말 것이다. 노라는 거미줄처럼 생긴 레이스 장갑을 낀 조그만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절망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111

"당신들의 사정을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사과를 드립니다." 감옥 책임자인 골드스미스 하사가 말했다.
드라이얀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체포된 지 1주일이 지났다. 드라이얀은 침대에 누운 채로 이젠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이레 동안 그는 물조차 입에 대지 않은 것이다.
골드스미스 하사는 두 사람의 소지품을 자기 차로 실어 왔다. 그는 노라의 짐도 손수 풀어 주고 두 사람에게 담배도 권했다. 무척 미안해하는 태도였다.
"내일 아침에 두 분은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제가 두 분의 숙소를 구해 드리고 또 제 차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걸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와 드라이얀 코르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르가 씨 부부는 체포된 것이 아냐. 단지 이 쪽의 착오로 구류당했을 뿐이야. 내일 아침까지는 여기에 머물러야 하니까 두 분을 한방으로 모시고 깨끗한 시트와 이불을 가져오게. 이 분들은 우리들의 손님이시니까. 알겠나? 깍듯이 대접해 드려."
골드스미스 하사는 간수장에게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더니 약 반 시간 후에 무슨 꾸러미 한 개를 안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먹을 음식과 드라이얀을 위한 오렌지와 과일이었다. 그 곳을 떠나기 전에 하사는 거듭 사과를 하고 드라이얀과 약수까지 하고 갔다. 간수장은 기적이라도 보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 이 장면을 지켜 보았다.
"미군이 와서 사과하리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미국은 문명인들이 사는 나라니까요." 노라가 말했다.
드라이얀은 그날 밤 신열이 있었으나 곧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잠수함을 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많은 흰토끼를 보았는데, 토끼는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식은땀이 흘러서 잠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흰토끼가 다 죽어 버리면 아무런 희망이 없어.'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었지만 선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112

이튿날 아침, 골드스미스 하사는 오지 않았다. 노라는 하루 종일 골드스미스 하사를 기다렸다.
"필경 오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 거예요. 하지만 내일은 꼭 오겠죠." 그날 저녁때 노라가 말했다.
간수장도 이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골드스미스 하사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1주일이 지난 뒤 교체된 다른 하사가 감옥의 책임자로 왔다.
"나는 당신들에 관해 아무 얘기도 들은 바 없소!" 새로 취임한 감옥 책임자가 말했다. "골드스미스 하사는 귀국하면서도 당신들에 대해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회는 해 보지요. 다음 월요일에 그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나가 버렸다.
새로 온 하사는 붉은 머리칼에 얼굴이 온통 주근깨 투성이인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간수장에게도 자기 이름을 알려 주려 하지 않았고, 사인조차도 읽어 볼 수 없을 정도로 했다. 뿐만 아니라 줄곧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1주일 후에 그는 약속대로 감옥에 오긴 했으나 사무실에만 몇 분쯤 머물렀을 뿐이었다. 드라이얀이 그를 만나러 갔을 때는 이미 그는 떠나 버린 뒤였다. 다시 1주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월요일에 온 하사는 불쾌한 낯빛이었다.
"조회해 보았더니 당신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수감된 거였소. 특별대우를 하라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소!" 하사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며 간수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해도 좋아. 이들을 다시 독방에 분리시켜! 감옥 안에서는 어떠한 예외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간수장은 다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하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잘못된 지시가 아닌가 하고.
"알겠습니다. 보통 대우, 각각 독방에 수감, 예외는 없음." 복창하는 간수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113

"우리들을 떼놓으려 오나 봐요!" 복도에서 간수의 발소리가 들리자 노라가 말했다. 그녀는 드라이얀의 목에 매달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독방에 또 호자 갇혀 있을 바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겠어요!"
간수는 그들의 감방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추고 열쇠를 달그락거렸다. 노라는 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왜 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라이얀도 알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 5분 동안만이라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여름에는 나도 이 직업을 그만둬야겠소. 이젠 늙었어요. 이 나이에 더 이상 숨바꼭질을 배울 수도 없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아요." 간수는 잠시 말을 끊더니 힘에 겨운 짐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듯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있던 그대로 두 분이 한 방에 있으시오. 문을 열어 놓을 테니까."
"하사가 명령을 취소했나요?" 노라가 물었다.
"취소한 것이 아닙니다." 간수는 이렇게 말한 뒤 열쇠 꾸러미를 달그락거리며 가 버렸다. 감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114

"미국인들은 대체 무슨 감정이 있을까요? 무슨 이유로 우리들을 6주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는지 모르겠어요." 노라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나쁜 감정 같은 것은 품고 있지 않아. 우리의 존재조차 의식하고 있지 않으니까." 드라이얀이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가 감옥에 갇힌 것을 그들이 알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노라가 물었다.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이 우리의 사정을 알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요. 절정에 도달한 서구 문명은 이제 개인 같은 건 염두에도 없어. 문명이 개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는 건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야. 이 사회는 개인이 가진 약간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거든. 개인으로서 완벽한 인간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아. 죄도 없이 갇혀 있는 노라 당신, 그리고 나,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이젠 그들 자신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주 간단히, 우리는 단지 하나의 카테고리의 무한히 작은 분자로밖에는 좆재해 있지 않다는 거지. 예컨대 당신은 독일 영토 안에서 체포된 한 사람의 적국 시민에 지나지 않는 거야. 바로 이것이 서양의 기계 사회를 한결같이 획일화 된 사회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특질이지. 또한 바로 그것이 그들 앞에 당신을 나타낼 수 있는 전부이고, 이 사회는 당신을 그러한 특징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아. 결국에 가서는 곱셈, 나눗셈 또는 뺄셈의 법칙에 따라서 당신이 소속된 집단을 대우하는 식으로 당신을 대우할 뿐이오. 당신은 루마니아의 한 부분이니까, 그 작은 분자 하나가 붙들린 셈이지. 당신이 체포된 원인은―또는 잘못이라 해도 좋겠지―당신이 루마니아라는 집단에 속한 때문이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우리를 체포한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들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의심하고 있는 것도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벌써 석방되었을 거예요. 체포당한 이유를 모르니 더 괴롭군요.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이유가 있지.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땐 터무니없는 거야. 그러나 기계의 입장에서 볼 땐 아주 정당하지. 서구 사회는 인간을 기계의 눈을 통해서만 들여다보고 있어. 그들의 눈엔 살과 피를 가지고 기쁨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보이지 않아. 그 때문에 인간을 체포하여 감금하고 또 아무때나 없애 버리는 일이 죄의식 없이도 이루어지는 거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면 응당 범죄가 되지만 서구 사회는 살아 있는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그래서 누구를 붙잡는다든가 죽이는 경우에도 이 사회는 살아 있는 그 무엇을 붙잡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관념을 처벌하는 거요. 이 사회적 범죄는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성립되어 있지. 왜냐하면 기계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야. 인간을 개성 있는 생명체로 취급해 달라고 기계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렇다면 미국인들이 우리를 체포한 정당하고도 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라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건, 다만 인간을 기계의 법칙과 기준에 따르게 한다는 것은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오. 누군가를 물고기의 환경과 조건속에서 살라고 한다면 그는 몇 분도 못 가서 죽어 버릴 거고, 또한 물고기를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놓아도 마찬가지 결과가 오겠지. 서구는 지금 기계와 같은 사회를 만들어 놓고 인간을 그 사회 속에 살게 하면서 기계의 법칙에 순응해 나갈 것을 강요하고 있소. 어떤 면에서 볼 때 서구 사회가 성공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트럭과 크로노미터를 지배하는 것과 똑같은 법칙으로 인간을 지배한다는 건 인간을 죽이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인간은 서로 다르다. 나라와 나라도 서로 다르다. 지혜도 힘도 그 모든 것이 서로 같을 수는 없다.' (자와할랄 네루의 말) 기계만이 종류에 따라서 똑같을 수 있지. 기계니까 부속품을 바꿔 넣을 수도 있고 분해하여 각각 중요한 요소나 중요한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는 거지. 만약 인간이 기계를 닮게 된다면 그 때는 이 지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는 날이야."
노라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건 아니야." 드라이얀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신의 성미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즉 당신은 존재하고 있긴하지만 기계의 눈을 통해서 볼 때에만 존재하는 거야. 기계 사회는 야만 사회와 같아서 인간은 하등의 가치가 없는 개체에 불과ㅎ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야. 그러니 사실 당신은 붙잡혀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무슨 뜻이죠?"
"당신과 나는 벌써 6주일 전부터 감옥에 들어와 있지만, 감금당해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이야. 우리의 개인성은 서구 기계 사회에선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붙잡힐 수도 없고 또 붙잡힌 것도 아니라는 뜻이지." 드라이얀이 말했다.
"소용없어요. 그런 말은 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아요. 지금 갇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요. 뻔히 갇혀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알수 없군요. 그렇게라도 위안하려는 거예요?" 노라의 말에 드라이얀은 웃었다.
"맞아, 위안이지. 그것이 역사의 이 지체된 시간 속에서 단 하나의 가능한 위안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

115

"이젠 다 틀렸소." 간수가 코르가의 감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이 신문을 읽어 보시오. 튀링겐과 바이마르는 벌써 소련군의 수중에 넘어갔어요. 미군은 철수하고 붉은 군대가 이미 시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군인들을 트럭에 잔뜩 싣고 밤 사이에 쳐들어왔습니다. 미군은 겨우 군정 사령부 건물과 감옥, 그리고 민간 가옥 몇 채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헌병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요."
노라는 신문에 난 성명서를 읽어 보고는 드라이얀과 문에 기대어 서 있는 간수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감옥이 넘어갈 때는 물론 우리들도 함께 소련군에게 넘어가는가요?"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요. 오늘 저녁까지는 소련군이 인수하겠죠.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간수장이 말했다.
드라이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잠깐 동안 지나간 일을 더듬었다.
'탈출, 200킬로미터의 도보 여행, 소련, 공포, 강간, 시베리아, 노라의 상처투성이인 다리, 정치 위원, 감옥, 사슬에 묶인 채 노예처럼 인계되는 모습.....' 드라이얀은 고개를 들었다.
"노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숨길 것도 없으니 간수장 당신도 들어도 좋아요. 미군은 감옥에 우리를 가둔 채로 소련군에게 인계할 것이 분명하오. 이건 커다란 죄악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철로에 사람을 깔아 죽이고도 무심할 수 있는 기차와 같은 인간들이오. 서구인들은 죄악도 한 가지 차원으로 압축시켜 버렸소. 극도로 압축시킨 거지. 어쩌면 죄의식조차 전혀 안 느끼는지도 몰라. 그렇게 보면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죄가 있는 거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오. 내가 강조하는 것은 더 이상 환상이나 착각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거지. 지금이라도 우리는 곧 소련군의 수중에 넘겨질 운명에 있소. 말하자면 국가 기관의 명령이 전지 구상에 영향을 미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아야 할 잔인한 종족들에게 넘어가는 거요. 나는 로봇처럼 '단순화된 기계' 노릇은 참고 견딜 수가 있겠지만, 도저히 기계화된 야수와 맞서서 싸울 수는 없어. 소련군에게 넘겨지기 전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탈출하겠소. 그러다가 실패하면 자살해 버릴 작정이오." 드라이얀은 이렇게 말한 뒤 간수장을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가 탈출하는 걸 도와 주겠소?"
"힘이 미치는 한은 도와 드리지요. 나도 실은 여길 떠날 생각입니다. 나는 오스트리아 인이오. 빈에 있는 내 집으로 돌아가렵니다." 하고 간수장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좋아요? 무서워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요! 차라리 나를 죽여 주세요. 그편이 당신을 위해 낫겠어요. 드라이얀!" 노라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야." 드라이얀은 비장하게 말했다.
"우선 이 곳을 떠나십시오. 못 갈 것도 없소. 벽이 포탄에 무너져 버렸으니 마당까지만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 장난처럼 쉬울 겁니다."

116

"3층까지 밧줄을 타고 내려갈 용기가 내겐 없어요. 당신은 남자니까 할 수 있겠지만, 난 무서워요." 노라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홑이불과 담요를 찢어서 밧줄을 만들고 있었다.
"무서울 것 없어.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당신을 묶어서 창문으로 내려보내 줄 테니까, 마당에 내려서거든 벽을 따라 살며시 돌아가서 언젠가 당신한테 얘기한 적이 있는 그 나무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드라이얀이 연결하고 있는 밧줄을 잡고 있던 노라는 고개를 흔들며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저히 못 하겠어요. 내가 내려가는 동안 누가 총을 쏘면 어떡해요. 생각만 해도 스름이 끼쳐요. 제가 내려가는 동안에 총알이 날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 하세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총을 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는 편이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희망이 있을 것 같아." 드라이얀이 말했다.
"소련으로 가도 되잖아요?" 노라가 말했다.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독하지는 않을 거예요. 공산 치하에서도 사람들은 살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 살 리가 없잖겠어요?"
"당신 말도 옳아.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어쩌면 서양 사람들보다 나은 생활을 할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의 판단은 의존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 하긴 객관적인 진리는 없는 거지만, 모든 것이 주관적이야. 사람들은 객관적인 진리를 외치지만 그것도 어쩌면 주관적인 판단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어. 나로서는 소비에트적인 낙원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소. 부질없는 고집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나대로 내 생각이 옳다고 봐요. 나 개인적으로는 볼가 강변의 동력화한 야수들의 손아귀에 잡혀 들어가기는 싫어. 주관에 몰입하다 보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 지금의 내가 아마 그럴 거야.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히 여기는 정신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삶을 원하지 않아. 예지를 가진 정신은 오직 삶만을 아낄 수는 없는 법이오. 나는 그다지 생명에 대해 애착을 느끼진 않아. 난 언제든지 생명을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생명을 버리지 않을 경우엔 가장 적합한 생활 조건에서 살고 싶어. 내 인생관이 옳지 않다고 지적해 봐야 소용없을 거요. 난 어떤 의견도 듣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라 혹은 저렇게 살아라 하고 지시를 한다든가, 또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생활 태도를 나에게 강요하는 건 절대로 반대야. 내 생명은 내것이야. 내 생명은 집단 농장에도 공유 재산 제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 나는 나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살 권리가 있어. 하지만 나에겐 그럴 생각이 없는 걸 어떡해. 그리고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하고 시비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거야.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갈 테야. 누가 무어라 해도 소비에트식 생활 방식은 절대 반대야. 그것이 내 스스로 내 명을 재촉하는 이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노라는 울기 시작했다. 드라이얀은 여전히 밧줄을 연결하고 있었고 노라는 한쪽 끝을 힘껏 잡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마당의 초소를 떠났는지 살펴보구려." 드라이얀이 말했다.
노라는 복도를 나와 감방문 밖을 살폈다. 미군은 아직 있었다.
"5분마다 내다봐야 해. 미군과 소련군이 교체할 때가 가장 탈출하기에 좋아. 그 기회를 놓치면 그만이야." 드라이얀은 더 재빠른 손놀림으로 밧줄을 연결해 나갔다. 아침 나절 내내 작업을 계속했다. 그들은 밧줄의 길이와 탄력이 충분한가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5분 만에 한 번씩 감옥의 초소를 살피러 갔다와선 말했다. "아직도 미군이야!"
이 사실은 그들을 기쁘게 했다. 미군 보초가 감옥을 경비하고 있는 한 아직 전부를 잃은 건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117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6시경에 드라이얀 코르가와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감방에서 끌려나와 죄수들과 함께 미군 트럭에 실렸다. 노라는 울음을 터뜨렸고, 드라이얀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소련군에게 우리를 양도하는 장소를 다른 곳으로 택한 모양이야. 트럭이 동쪽으로 달리고 있으니 말이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바이마르 시가는 소련군과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다.
"트럭에서 뛰어내릴까? 우린 틀림없이 소련군 감옥으로 옮겨지는 거야." 드라이얀은 노라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들의 트럭은 시가를 벗어나 교외로 달렸다. 노라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양을 쳐다보았다. 트럭은 분명히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을 지나게 될 거야. 당신이 먼저 뛰어내려서 숲 속에 숨어 있어. 내가 당신 뒤를 따라 뛰어내릴 테니."
노라는 울기만 했다.
"준비해!" 드라이얀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은 너무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없어. 길가의 저 숲을 봐요. 이렇게 숨기 좋은 곳도 없어. 뛰어내리지 않겠소? 이것 봐, 트럭의 속도가 느려졌어!" 그는 노라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노라는 두 손으로 긴 의자를 움켜잡고 버티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못 하겠어요. 당신 혼자 가세요. 당신이 저를 여기에 두고 도망치더라도 저는 절대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노라 곁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떨구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숨기 좋은 숲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아까는 등뒤에 있던 태양이 얼굴 정면에 떠 있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드라이얀은 눈을 크게 뜨고 앞뒤를 두리번거렸다.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을 태운 트럭이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도 때로는 좋은 녀석들이군." 드라이얀은 노라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를 소련군에게 넘기지는 않을 모양이야."
"그럼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걸까요?" 노라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묻자, 드라이얀은 다시 침울해졌다.
"아마 미군 감옥이겠지." 드라이얀은 방금 좋아했던 것이 멋쩍어졌다.
"미안해, 노라. 이 정도 일로 좋아하다니, 이 감옥에서 저 감옥으로 이송된다고 좋아하다니 내가 미쳤군. 하지만 이것이 서구에 사는 인간이 도달한 최후의 단계야. 두 개의 감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유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야."

118

"당신이 요한 모리츠요?" 미군 장교가 물었다. 그는 다정스럽게 웃어 보이고 말을 이었다. "사령관님이 당신의 탈출 경위를 직접 들으시겠다고 데려오라고 하시는데..... 수용소에서 다섯 명의 프랑스 포로를 구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요한 모리츠는 기뻐서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의 공로를 듣기 위해 장교가 그를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사령관까지 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구나 하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자신 있게 말했다.
"네, 제가 바로 요한 모리츠입니다."
"그럼 내 차를 타고 같이 갑시다."
요한 모리츠는 셔츠 바람이었으므로 웃옷을 입고 싶었다. 맨발에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양말도 신고 싶었다. 그러나 장교는 급하다고 재촉했다.
"곧 돌아올 테니 번거롭게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대로 가도 괜찮소. 자동차로 데려다 주겠소."
두 사람은 지프에 올랐다. 숨길 것 없이 사실 그대로를 사령관에게 들려 주리라고 요한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요한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사령관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벌써 사령관 앞에 앉아서 자기의 탈출 경로를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 지프는 커다란 석조 건물 앞에 멈추었다. 장교는 그대로 앉은 채 요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내려서 좀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요한 모리츠는 차에서 내렸다. 장교가 같이 가 주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그가 곁에 있으면 얘기하기가 더 수월할 텐데..... 그러나 지프는 곧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정문에 서 있던 보초가 마당으로 요한을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의 독일 경찰이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따라갔다. 건물은 매우 지저분했다. 이런 누추한 집에 사령관이 살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감옥처럼 모든 창문에 쇠창살이 달려 있는 걸 보았다.
요한 모리츠는 물었다. "여기가 사령관이 계신 곳인가요?"
그 말에 경찰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을 참으려야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요한을 지하실의 캄캄한 독방에 가두었다. 자물쇠를 두 번 돌려 잠그면서도 독일 경찰들은 포로가 던진 엉뚱한 질문이 우스워 계속 킬킬거리고 있었다.

119

코르가 사제의 아내 코리나 코르가는 한밤중에 면사무소로 불려갔다. 삼색 완장을 두른 두 농부가 데리러 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코리나 코르가는 조심스레 문을 잠그고 열쇠를 손에 쥐었다.
면사무소에는 열 명의 소련군이 농부들과 술상을 벌여 놓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포도주를 한 잔 권하면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사제의 아내는 눈을 내리깔고 성니콜라이를 향해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군인들은 그 술을 마시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뿐더러 술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성니콜라이에게 계속 기도를 드렸다. 군인 하나가 그녀의 가슴에 술을 부었다. 또 다른 군인은 그녀의 치마를 들추고 속옷에 술을 끼얹었다. 그래도 사제의 아내는 가만히 있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남편을 닮은 성니콜라이에게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녀의 그런 태도가 술좌석을 더욱 흥겹게 했다. 소련군과 농부들은 그녀의 머리 위며 속옷 속이며 치마 속에 술을 부었다. 겉옷과 속옷은 술에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 군인들은 거친 동작으로 그녀를 마룻바닥에 사정없이 쓰러뜨렸다. 웃음소리가 크게 일었다. 사제의 아내는 옷도 몸도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다음엔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성니콜라이가 물가에 서서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이런 봉변이 있은 다음날, 코르가 사제의 아내 코리나는 닭장속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0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올드루프 강제 수용소에서의 첫날밤,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어떻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체포한 건 아니겠지.'
그녀는 매트리스도 이불도 없는 딱딱한 나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무 바닥에 몸이 닿는 대로 허리며 팔꿈치며 전신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바이마르에서 타고 온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그들 부부는 격리되었다.
여자 수용소는 목재 건물이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방에는 30명 가량의 여자들이 있었다. 노라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두워서 다른 여자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이 대개 젊은것으로 짐작되었다.
노라는 나무 침대에 드러누워 울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자정쯤 되었겠지. 여기 갇혀 있는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노라는 잠에서 깨어나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때 방 저 쪽 구석에서 억지로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 노라는 깜짝 놀랐다. 그 소리는 남자의 웃음소리였던 것이다. '여자 수용소에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귀를 곤두세웠다. 확실히 남자였다. 이제 웃음은 그쳤지만 거칠게 신음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가 엉겨서 내는 가쁜 숨소리였다.
남자는 또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의 다른 쪽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노라는 겁이 덜컥 났다.
'남들이 사랑을 속삭이는데 왜 내가 무서워할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노라는 발작적으로 귀를 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눈을 감아도 환상만은 떠올랐다.
노라의 침대가 흔들렸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감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또 다른 남자들이 감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방 한복판에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지껄였다. 잠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노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방에 사내들과 여자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무서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그들은 노라가 소리를 지르며 우는 바람에 자기들의 사랑을 방해 당했다고 그녀를 사정없이 때릴는지도 몰랐다.
'바보 같은 짓을 했지. 큰 소리로 울지 말걸. 그들은 이제라도 나한테 달려들어서 죽도록 때릴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때려죽여도 난 할 말이 없어. 내가 소리를 질렀으니까.' 하고 노라는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남자들은 기급을 하고 도망을 쳤다. 마룻바닥에서 뒹굴고있다가 달아나는 사내들도 꽤 많았다. 노라는 그들의 소리는 듣지 못했었다. 노라의 바로 옆 침대에서도 하나가 일어났지만, 노라는 그 남자의 소리도 못 들었던 것이다.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든 사내들은 키가 크고 검게 보였다.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남자들을 따라나갔다가 곧 발끝으로 살짝살짝 들어와서 자리에 눕는 여자들도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여자들은 제각기 제자리에 가서 누웠다. 그런데 두 여자만 방 가운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서 있었는데 짧은 속옷만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기대서서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노라는 그녀들이 입맛을 다시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초콜릿을 핥아먹고 있었다.
노라는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여자가 제자리로 가서 잠들기를 바랐다. 자기가 먼저 잠들게 되면 그녀들이 자기를 때리거나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좀처럼 침대로 갈 낌새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계속 입맛을 다시며 초콜릿을 핥아먹고 있었다.
"아까 소리 지른 게 누구지? 저녁때 새로 들어온 빨간 머리지?" 한 여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세, 모르겠어. 그러나 잘 됐어. 한 차례 끝난 뒤였는데 또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거든." 하고 다른 여자가 대답했다.
그 여자들은 계속 초콜릿을 먹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노라는 그들의 동작을 지켜 보았다. 드디어 두 여자는 헤어져서 각자 다른 구석으로 가 침대에 눕는 모양이었다. 침대 널빤지가 삐걱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그제야 잠을 잘 수 있으리라고 안심했던 노라는 이번에는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가라앉지가 않아서 아무래도 잠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널브러져 잠이 들고, 방에는 이제 남자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술냄새와 땀냄새, 그리고 남자에게서만 나는 독특한 냄새가 섞여서 강하게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복합적인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이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체포된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이런 숨이 막히는 곳에다 가두어 둘 리는 없을테니까....'
그녀는 기침이 나오려고 했지만 손으로 입을 막고 참았다. 여자들이 깨어나 자기한테 대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21

올드루프 수용소의 이튿날 아침이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눈을 뜨자 옆에 요한 모리츠가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밤새 함께 자고도 몰랐네! 자넨 어떻게 여길 왔나?" 드라이얀은 요한 모리츠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요한 모리츠는 자기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 주었다. 그는 사령관이 자기의 탈출 경위를 듣고 싶어하니 같이 가자고 하던 장교의 이야기도 했다.
"글세, 사령관에게 가는 줄 알았는데, 그들이 나를 속인 거죠. 하기야 감방에 넣을 생각이면 나 같은 사람 속이기야 어렵지 않은 일이죠. 창문도 없고 햇빛도 들지 않는 독방에 나는 8주간이나 갇혀 있었어요. 그동안 사령관이 나를 불러 주기를 줄곧 기다렸습니다만 통 소식이 없더니 결국 여기에 처박더군요." 요한은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나서 드라이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데를 오셨나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감금되어 있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맨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던 포로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황량한 들판에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올드루프 강제 수용소는 1만 5천 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하늘과 땅과 인간들뿐인 곳이었다. 철조망을 친 울타리 사방 구석에는 기관총을 손에 든 군인들이 탱크 곁에 서서 수용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판타나의 소식은 좀 들으셨습니까?" 요한 모리츠가 물었다. "선생님이 이런 곳에 와 계시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선생님과 제가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밤새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122

올드루프 수용소 소장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안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기대에 부풀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보다도 내가 받는 고통을 알아주겠지. 같은 혈족이니까 나를 도와 줄 거야. 아마 머지 않아 석방될지도 몰라.' 노라는 수용소장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도와 달라고 애원해야지. 마치 오빠에게 부탁하듯이.'
소장실의 벽에는 독일 강제 수용소에서 찍어 둔 유대인의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벽 전체에 가득 붙어 있는 그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교수형으로 목을 늘어뜨린 채 죽은 사람들, 굶어 죽은 사람들, 줄무늬 작업복을 입은 포로들, 어지럽게 쌓인 시쳇더미, 교수대, 여자 시체들을 실은 트럭들을 찍은 것이었다.
노라는 지금 자기가 나치 독일의 유대 인 말살 수용소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동정을 구하는 표정으로 붉은 머리의 소장을 바라보았다. 학살과 굶주림, 가스실과 고문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당신의 누이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제발 도와 주세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 자신이 유대인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중위님!" 노라의 음성은 떨렸다. 목이 잠기고, 울음이 터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묻기 전에는 말할 권리가 없어." 장교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입술을 깨물고 묵묵히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중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를 읽고 나서 쌀쌀하게 물었다. "네 이름은 엘레오노라 베스트 코르가, 틀림없지? 네 남편도 잡혔지? 그렇지?"
중위의 말투에 노라는 질려 버렸다. 그것은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친근한 말투는 결코 아니었다.
"네 남편은 반  연합 기구의 관리였지?"
"제 남편은 루마니아 왕국의 관리였습니다." 노라는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위는 얼굴이 빨개졌다. 노기가 서린 그 얼굴은 주근깨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루마니아 놈들은 지독하게 유대인을 배척했다지. 그렇지?" 하고 중위가 물었다. 그는 노라에게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루마니아에는 유대 인 강제 수용소가 있었지? 유대인들은 거기서 학살당하고 가스실에 감금되고 목이 잘리고 총살을 당했어. 유대인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중위는 제 흥분에 벌떡 일어섰다.
노라는 자기도 유대인이며 갖은 고생 끝에 위조 서류를 가지고 도망친 경위. 그리고 그 일로 해서 밤마다 공포에 떨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봐!" 장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노라 곁으로 다가왔다. 노라는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을 줄 알고 두 눈을 감고 주먹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전신이 떨려서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말들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네 손으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지 말해 봐! 대답하라니까! 말하지 않고 버틴다면 네 몸뚱일 가리가리 찢어 놓겠다. 네 손으로 유대인을 몇이나 죽였지?" 장교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노라는 그래도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 못 하겠어! 이젠 무서운 모양이로군, 오줌까지 싸는 걸 보니. 사람을 죽일 때는 무섭지 않았겠지?"
"저도, 저도 실은...."
노라가 더듬거리자 중위가 소리쳤다.
"닥쳐! 나치의 더러운 매춘부야. 썩 꺼져 버려!"
중위가 주먹을 휘두르며 후려갈길 듯이 위협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123

드라이얀 코르가는 글을 쓰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가 옆에서 마치 자기가 연필자루를 잡기라도 한 듯이 손가락을 오그리고 그가 진주 알을 꿰듯 정성스레 써 내려가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글 같은 것을 쓸 만한 참을성이 없었다. 또 쓰기도 싫어했다. 그러나 드라이얀 코르가가 쓰는 것은 몇 시간이고 싫증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코르가 씨가 글을 쓰고 있는 자세는 마치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 같단 말이야. 코르가 씨를 보고 있으면 포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언뜻 보기엔 맨발에 수염도 깎지 않고 구멍 뚫린 바지를 입은 포로에 지나지 않지만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영락없이 신사로 보이거든. 모자를 벗고 공손히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진단 말이야.' 요한은 드라이얀에 대해서 이렇게 느꼈다.
"자넨, 땅꾼 얘기를 들어 본 적 있나?" 드라이얀은 잠깐 손을 멈추고 물었다.
"네, 들은 적은 있어요."
"성다니엘은 사자 굴에 팽개쳐져 있었으나 사자들은 그를 잡아먹지 않았다네. 그가 사자들을 길들였으니까. 사람은 뱀이나 사자를 길들일 수 있어. 무솔리니도 자기 사무실에 호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있었지. 그 놈들을 잘 훈련시켰던 거야. 사람은 어떤 사나운 짐승도 길들일 수 있어.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지구상에는 새로운 종류의 동물이 나타났다네. 그 동물의 이름은 '시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숲 속이나 밀림의 사나운 짐승들보다도 더 잔인해. 그들은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사생아로 퇴화 족속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강한 종족이라네. 겉모양은 인간과 흡사해서 가끔 구별이 어렵지만, 꼭 기계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금방 식별할 수 있어. 그들은 심장 대신 크로노미터를 달고 있네. 그들은 야수와 같은 욕망을 지녔으면서도 진짜 야수는 아냐. 이 '시민'은 괴상한 잡종으로서 그들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네." 드라이얀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그 시민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는 잠깐 마르크 골덴베르크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드라이얀이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마르크에 대한 생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작가야. 작가는 인간을 길들이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고 있어. 아름다운,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인간에게 제시해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사람이지. 나는 시민을 길들이고 싶은 생각에서 작품을 하나 쓰기 시작했는데 제 4장까지 끝마쳤다네. 그런데 시민들이 나를 이렇게 감금시켜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질 못하고 있어. 제 5장은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형편이야. 더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네. 출판도 못하게 될 테니까. 나는 소설을 계속하는 대신에 시민을 길들이는 다른 글을 쓸 작정이야. 만일 그 일이 성공한다면 나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겠어. 자네에겐 내가 쓴 글을 읽어 주겠네. 이건 소설도 아니고 희곡도 아냐. 시민이란 종족은 도대체 문학을 싫어하거든. 그들이 좋아하는 단 하나의 형식이 있지. 그건 바로 '탄원서' 형식으로 쓰는 글이야. 시민들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읽느라고 허비할 시간이 없거든. 그들이 읽는 건 탄원서뿐이란 말이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124

  탄원서 제 1호
  경제 문제(지방질에 대하여)

앞으로 나는 여러분들께 여러 장의 탄원서를 보내 드릴 작정입니다. 우선 경제 문제에 관한 것부터 언급하겠습니다. 당신들의 기계 문명은 물질주의의 바탕 위에 이루어졌습니다. 경제는 당신네들의 유일한 복음서와 같은 것입니다.
나는 작가인데, 작가란 누구나 일종의 '증인'이지요. 증인으로서의 필수 조건은 공정성입니다. 따라서 나의 탄원서는 진리의 증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기하려는 것은 경제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지방질에 관한 것이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전 세계는 지방질의 결핍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내가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포로들은 땅바닥에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붙어서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을 좁게 만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용소 밖으로는 얼마든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 곳에는 1만 5천 명이라는 인간이 밀집하여 붙어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서 있을 때는 약간 틈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누워 잘 때는 공간이 너무도 좁아져서 서로 몸을 포개듯이 해야 합니다. 내 경우만 두고 보더라도 밤새도록 두 다리를 펴고 잘 수가 없습니다. 내 옆에서 자는 사람들은 내 머리 위에 다리를 얹기도 합니다. 무겁긴 하지만 그들의 다리는 따뜻하므로 그냥 참고 자면 춥지 않게 잘 수 있습니다.
나는 왜 당신네들이 수용소의 공간을 이렇게 좁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포로들이 풀을 짓밟아 버릴 것을 염려해서 풀잎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풀은 값진 것이니까 밟아 죽이면 큰 손해가 나겠지요. 젖소가 뜯어먹는다면 우유라도 되어 나오겠지만, 죄수들이 밟아서는 조금도 이익 될 게 없지요. 한편, 울타리를 더 넓게 했다면 더 많은 가시 철조망이 필요했겠지요. 강철 값도 비싼데 단지 죄수들에게 좀더 넓은 공간에서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경비를 낭비할 필요는 절대로 없었겠지요.
앞으로 겨울이 닥쳐오고 기온 차가 심해지면 많은 포로들이 죽을 겁니다. 혹은 그전에 죽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그렇게 되면 살아 남은 죄수들이 발을 펼 만한 공간이 생길 겁니다. 나는 당신네들이 수용소를 지으실 때 벌써 이 점을 계산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진 당신네들의 선견지명에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나는 취침 전에 베를린 대학 교수의 지방질에 관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 탄원서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강연에서 얻은 문제들입니다. 그 교수는 우리가 수용소에서 먹는 수프 속에 콩알이 몇알 들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한 달 동안이나 계속 조사해서 평균을 내어 보았더니, 포로 한 사람이 하루에 두 번 먹는 수프 속에는 열 개의 콩알이 들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교수의 조교들도 따로 조사해 본 결과 교수의 계산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했답니다.
다음으로 그 교수는 수프에 든 감자껍질과 밀가루의 양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양은 물론 그 교수가 부엌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근사치로 계산해 본 것이었습니다.
천하가 인정하듯이 독일인들은 측량에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콩알에 관한 조사는 정확하리라 믿습니다. 독일인들은 끈기가 있고 또 빈틈없는 치밀한 민족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동안이나 조사해서 내린 결론이므로 누구나 이 연구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본래 독일 민족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연을 듣는 것을 즐기지요. 그것은 중세기 때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습관입니다. 교수는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 수프를 여과시켜서 콩알을 계산했는가를 얘기한 다음 그 콩알 하나에 들어 있는 칼로리의 함량을 밝혔는데, 그 정확한 수치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그는 열 개의 콩알 속에 들어 있는 칼로리를 계산하고 감자껍질과 밀가루의 칼로리의 계수를 거기에다 합했습니다. 감자와 밀가루는 포로들의 수프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어쨌든 수용소의 포로 한 사람이 섭취하는 하루 평균 열량은 500칼로리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어떤 때엔 보다 적은 칼로리를 섭취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콩알이 한 개도 들어 있지 않은 수프를 먹게 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열다섯 개가 있기도 하고, 재수좋은 날은 열여덟 개까지 들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평균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수가 말하는 500칼로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매우 부족한 열량이라는 점입니다. 그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종일 누워지내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열량을 포로들은 눈을 뜨고서 소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최소한 하루에 1천 칼로리는 섭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500칼로리를 섭취한다 해도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부족한 500칼로리를 자기 몸 속에서 충당하여 움직이는 거지요. 몸 속에 비축되어 있는 생명의 재산을 조금씩 소모하는 것입니다. 결국 수용소에 올 때 지니고 온 축적되어 있는 자본에서 매일 500칼로리씩 빼내는 포로들은 한 달에 6파운드의 체중이 준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것은 교수가 손수 만든 저울로 체중을 달아 본 평균치입니다. 손수 만들긴 했지만 그 저울은 꽤 정확했던 모양입니다. 6파운드, 즉 개개인의 포로가 칼로리로 소모하는 3킬로그램의 지방질을 합쳐 보니, 당신네의 빈틈없는 관리 하에 배치된 이 올드루프 소용소 한 곳에서만 해도 매달 4만 5천 킬로그램의 지방을 잃고 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지방질을 잔뜩 실은 트럭 다섯 대가 이 수용소에서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막대한 손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당신들의 그 기술적인 방법으로 무가치하게 사라지는 지방을 당신들이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아까운 것을 그냥 버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상이 내 탄원서의 목적입니다.
기계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당신들은 내 의견을 충분히 납득하리라 믿습니다. 당신네 과학 연구원에 이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 줄 것으로 믿고 있겠습니다.
매달 4만 5천 킬로그램의 지방을 이렇게 손실시킨다는 건 문명인다운 태도가 아니지요. 다른 곳에도 수용소가 있을 것입니다. 독일에만도 몇 백 개나 수용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매일 산더미 같은 신선한 지방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수의 강연을 듣고 난 뒤 나는 욕지기가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습니다. 공기 속에서 나는 사람의 기름 냄새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소유의 이 수용소는 포로들의 고혈을 짜내는 거대한 압축기입니다. 나는 대기 속에서 그 기름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만, 사무실에 계신 당신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그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하긴 당신의 옷에도 그 냄새가 스며 들었을 테지요. 바라건대, 당신의 아내나 혹은 밤마다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당신 애인에게 당신 머리나 살갗에서 사람의 기름 냄새가 나지 않는지 물어 봐 주십시오. 여자들의 후각은 남자들보다 더 섬세하므로, 그 냄새를 놓칠 리가 없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지금 또 내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구역질이 나서입니다. 당신들의 문명에 대해 나는 언제나 변함 없이 마음 속으로 더할 나위 없는 찬양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가진 자원과 고등 기술로써 포로들의 지방질을 유용하게 사용하기를 탄원하는 바입니다. 나도 매달 3킬로그램의 지방을 당신들한테 제공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증 인

125

  탄원서 제 2호
  미학적인 문제(서구 기계 사회에 있어서의 이상적인 인간미에 대하여)
어젯밤 나는 어느 독일인 교수와 미학에 관한 토론을 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말다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인들이 거의 그렇듯이 독일인들도 아직 고전주의적인 미학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사회가 몰락한 이유이지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에는 당연히 거기에 맞는 현대적 의미의 미학이 뒤따라야 합니다.
독일인 교수는 수용소의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는 뼈만 앙상한 포로들을 보고 추하다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교수는 분명히 그리스 식 미학의 이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적 가치의 판단은 이미 낡은 것입니다. 전통에 도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는 현대에 맞는 미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내 눈에는 뼈와 가죽만 남은 그들이 정말 살아 있는 예술품이기나 한 듯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나는 당신네 사회가 지금까지 어느 사회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고, 오직 미학적인 목적, 즉 우주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인간 육체에서 지방을 빼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독일 교수를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고집쟁이 독일 놈 들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나는 매일 '현대 서구에 있어서의 인간미의 개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생각입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라는 스위스 조각가는 당신들이 인체에서 살과 지방을 제거한 것처럼 조각 계에서 같은 원리와 이상으로써 남성미와 여성미를 실현했습니다. 이 조각가는 인간의 육체를 조각할 때 되도록 지방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1차원적으로 줄어든 인체는 철사와 같은 굵기로 바싹 마른 기다란 형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증 인

126

"모리츠 군, 나는 지금까지 40통이 넘는 탄원서를 썼다네.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않도록 설득해 보려는 의도에서였지. 누가 보아도 내 탄원서는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어. 그것은 멋지고 옳은 것이었으나 결과는 헛수고였다네. 나는 법률 문체, 외교 문서체, 전보 문체, 심지어 광고 문체까지 모조리 동원했어. 때로는 감상적으로, 때로는 속되게, 또 때로는 애원하는 투로, 이렇게 다양하게 구사하여 내 앞에 놓인 이 절망적인 상태가 허락하는 한 온갖 수단을 총 동원해서 정의를 호소해 보았지. 오로지 진실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이 불쾌하게 여길 만큼 쓴 적도 있는데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어. 화도 내지 않아. 비굴할 정도로 허리도 굽혀 봤으나 가엾게 생각하지도 않아. 심지어 모욕적인 욕을 퍼부어도 까딱도 하지 않아. 그들을 웃기려고도 해 보고 호기심을 끌어 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헛수고였네. 결국 나는 훌륭한 감정도 비천한 욕망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말일세. 이럴 줄 알았으면 돌멩이들에게나 말해 볼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어. 돌멩이는 감정이 없으니까 미워할 줄도 또 복수할 줄도 모를 테니 말이네. 그들에게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없어. 그들은 계획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일만 할 뿐이라네. 내가 혈서를 쓴다 해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가 지금까지 보낸 탄원서들처럼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 말 걸세. 그것이 나의 피, 즉 따뜻한 사람의 피로 씌어졌다는 것도 알지 못 할거야. 바로 그것이 기계와 같은 시민의 인간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것이네."
"안됐군요, 선생님! 이젠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들에겐 무슨 말을 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 모리츠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난 계속 쓸 거야. 죽는 날까지 계속하겠어. 인간은 야수를 길들이기도 하거늘 시민이라고 안 될 게 있겠어?"
"탄원서로는 효과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할 것 같군요. 글로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겁니다."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정신은 결코 패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인간이 획득한 승리는 모두 정신의 승리였어. 시민을 길들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정신이야. 그들을 길들이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가르쳐야 하네. 우리가 그들에게 그걸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과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거든. 아마 뱀이나 사자를 길들이는 것보다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오늘처럼 낙관주의자가 된 적은 없다네. 이것은 타의에 의해 삶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만이 갖는 낙관이겠지만 말이야. 소설 '25시'에서 이 탄원서는 죽도록 괴로운 나의 마지막 발작이기도 해. 하지만 나는 그걸 꼭 쓰고 말겠네!"

127

  탄원서 제 3호
  경제 문제(자기 육체의 반, 또는 3분의 1밖에 소유하지 못한 포로들에 대해)

나흘 동안 나는 친구 한 사람과 같이 이 수용소 포로들 중에서 그들 신체의 반, 3분의 1, 또는 5분의 1밖에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세어 보았습니다. 빈틈없는 계산기인 내 친구는 아직도 통계를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서둘러서 탄원서를 쓰는 이유는 이 문제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당신들은 매일 수만 마르크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와 같이 갇혀 있는 1만 5천 명의 포로들 가운데 적어도 3천 명은 완전한 신체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 중 약 200명 정도는 두 다리가 다 없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안을 마치 파충류처럼 기어다닙니다. 그리고 1천 200명 정도의 포로들은 다리가 하나 뿐 이거나 팔이 하나 뿐 입니다. 또 몇몇은 두 팔이 모두 절단된 불구자입니다. 이상은 겉으로 나타난 불구자들의 통계입니다.
그러나 포로 중에는 상당수가 내장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폐장이라든가 신장이라든가, 또는 여러 군데의 뼈가 절단되었습니다. 또 40명의 포로들은 아주 앞을 보지 못 합니다.
이 포로들은 모두가 나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붙잡혀 온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친구 요한 모리츠는 수용소의 팔다리가 없는 불구자들을 보면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러니 요한 모리츠는 개화된 사람이 아니지요. 그로서는 모든 포로가 기계적으로 체포된 이상, 불구자라고 해서 석방 될 수 없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기계적으로 체포될 때는 불구라고 예외는 아니지요. 공평을 기하려면 마땅히 그래 야지요. 정의란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요.
이 수용소에는 팔 없는 교수 한 분이 계시는데, 전쟁터에서 두 팔을 잃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교수란 교수는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팔이 없다고 해서 그가 예외가 된다는 건 옳은 일이 아니지요. 체포되는 것과 팔이 없다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등의 관계도 없지요. 그는 교수이므로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의 훌륭한 문명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불구자들과 온전한 사지를 갖춘 사람들이 똑같은 양의 음식을 받는다는 건 매우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의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육체의 부피에 정비례한 양의 식량을 할당 배급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에 정부는 포로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확보하느라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으니까요. 포로라고 하면 완전한 신체를 갖춘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3천 명이나 되는 팔다리 없는 불구자를 모아서 그들의 손, 발, 눈, 그리고 폐를 헤아려 본다면 실제로는 최대한 2천 명의 포로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적어도 천 명의 식량을 절약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포로들의 신체에 붙어 있지도 않은 기관까지 먹이기 위해 돈을 낭비하십니까? 그런 후한 인심은 정말 쓸데없는 짓입니다.
나의 이러한 건의를 상부에 보고하면 당국에서는 매우 기쁘게 여기리라 믿습니다. 훈장이라도 받게 될지 누가 압니까? 또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국가 경제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됩니다. 식량 절감은 곧 돈의 절약이니까요.
 문제는 돈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도 바로 그런 신념을 가지고서 펜을 놓을까 합니다.
증 인

128

  탄원서 제 4호
  군사적 문제(성의 전환에 대하여)

굶주림으로 해서 이제 포로들은 당신들께 군사적인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익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군사적인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니 부디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체포되어서 매일 500칼로리만으로 살아온 포로들은 이젠 수염을 깎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엔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면도를 하던 정상적인 사람들이, 수용소에 와서는 이틀에 한 번씩 수염을 깎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엔 1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두 번, 그러다가 결국엔 전혀 면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수염은 날이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이윽고 솜털처럼 되더니, 마침내 그 솜털마저 부드럽고 매끈매끈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목소리도 여자의 음성으로 변해 가는가 하면 가슴도 부풀어올라 열세 살짜리 소녀의 가슴만 합니다. 몸가짐도 여성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국부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식이 요법으로(특히 식사의 양을 더욱 줄이신다면) 남자의 생식기는 모두 퇴화되어 여자의 것으로 바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사들의 설명을 들어 보면 그런 현상은 굶주림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영양실조는 호르몬 분비, 즉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을 많이 감소시키거나 거의 없애 버린다고 합니다. 더욱이 간의 호르몬 조절 기능 악화로 남성 호르몬은 무제한으로 파괴되지만 여성 호르몬은 계속 생성되기 때문에 인체 조직은 여성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당신네 문명에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야만적인 당신들의 적을 우리 포로들처럼 모두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하고 그들이 모두 여성화될 때까지 하루에 몇 백 칼로리씩만 공급해 준다면 전 세계는 당신들의 수중에 들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당신네 적국에는 남자란 씨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감히 대항해 올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위대하신 당신네 수뇌부가 나의 이 유용한 발견을 이용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당신네 문명이 현실적이고 특히 창의성이 풍부하다는 것을 참작해 보면 그와 반대되는 현상도 생기리라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싶어하는 당신네 조국의 여성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서 그들을 남성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동력이 점점 증대될 것 아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당신의 지휘 하에 있는 수용소의 포로들에게 허용된 500칼로리의 식량을 좀더 줄여야 한다고 제의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로들은 보다 빠르게 여성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증 인

129

새벽 3시.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1만 5천 명의 포로들은 다른 수용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탱크와 트럭들이 수용소 주위에 집결되었다. 탱크와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일제히 커져서 수용소는 대낮처럼 밝았다. 모든 자동식 기관포가 영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포로들의 무리를 향해 일제히 겨누고 있었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요한 모리츠는 나란히 걸어 나왔다. 요한은 추워서 이를 덜덜 떨고 있었다.
수용소 정문에는 곤봉으로 무장한 2개 부대의 군대가 포로들을 세어 조를 편성하고 있었다.
"보통 열 명 내지 열두 명이 타는 트럭에 60명은 실은 모양이야. 어떻게 할 작정이지? 자네는 인체 상호 불가침 법에 대해서 들어 봤나?" 드라이얀이 말했다.
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드라이얀은 첫 번째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있는 군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군인들은 처음에 20명을 올라타게 했다. 그것으로 더 이상 자리가 없을 만큼 꽉 찼다. 그러자 군인들은 트럭에 탄 포로들을 굵은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맞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몰렸다. 그러자 군인들은 서둘러 열 명 정도를 더 태우고 곤봉을 휘둘러 처넣었다. 그래서 약간의 공간이 생기자 군인들은 또 열 명을 태웠다.
이젠 어린애 하나도 더 탈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또다시 개머리판으로 포로들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또 열 명이 트럭에 기어올랐다. 이런 식으로 결국 60명의 포로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실렸다. 이젠 곤봉질도 끝났다. 트럭은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의 손을 잡고 트럭에 올랐다. 서로 떨어지기가 싫었던 것이다.
"요한, 절대적인 법칙이란 세상에 없는 건가봐. 물리학도 결국 불변의 법칙을 갖지 못하거든. 물리학에선 하나의 개체가 점유하는 공간을 두 개의 개체가 동시에 점유할 수 없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이 경우는 여섯 명이 단 한사람의 점유 공간을 점유하고 있거든. 이래도 물리학의 원리를 믿을 수 있겠어? 자네는 피카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없는데요, 선생님." 요한 모리츠는 짓눌리는 상태에서 숨막히는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드라이얀은 키가 컸기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으나 요한 모리츠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여러 사람의 가슴 사이에 꼭 끼여 있었다. 그의 짓눌린 가슴은 폐가 찌부러지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죽겠소!" 요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는 소리로 외쳤다. 꼼짝할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공기를 마시려고 콧구멍을 크게 벌려 보았지만 공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숨이 막혀 죽겠어요, 선생님!"
"대답해. 피카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없나?"
"없어요. 저는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아아, 숨막혀. 아마 이대로 끝장이 나나봐요."
드라이얀은 요한의 머리를 들어올려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자신의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드라이얀의 몸은 최소한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다만 키가 큰 덕분에 머리만은 솟아올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피카소는 유럽 사회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야." 드라이얀이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이 코만이라도 아니 콧구멍만이라도 좀 빼내 주십시오, 선생님. 절 도와 주세요. 정말 죽겠어요!"
드라이얀은 약간의 틈이라도 내주려고 몸을 틀어 보았다. 요한의 머리가 그의 가슴께로 겨우 빠져 나왔다.
"피카소는 자네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라네. 이렇게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트럭에 타고 있는 모습을 말일세."
"저의 초상화를요? 잘 안 들려요. 귀가 꽉 막혀 버렸어요."
"그래, 자네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은 것같이 그렸지. 여섯 사람이 한 사람의 공간 속에 엉겨붙은 모습이지. 어떤 사람은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다섯 개의 다리를 가졌으나 허파는 없다네. 자네만 하더라도 목소리는 있어도 입이 없잖나. 난 머리만 있지 몸은 없단 말이야. 트럭 위의 공간 속에 솟아 나온 머리.... 파리에서 내가 처음 그 그림을 보았을 때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지. 그런데 지금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타고 있는 트럭을 그린 그림이었어. 아주 정확한 묘사야. 빠진 것 없이 세밀해. 그는 우리의 수용소도 그렸어. 사진을 찍듯이 사실 그대로를 그려 놓았어. 그야말로 피카소는 천재적인 화가야."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은 어둠이 깔려 있는 시골길을 달렸다. 드라이얀은 자기 주변의 포로들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몰골들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생과 사의 중간을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살았다가 다음 순간엔 죽어 있었다. 또 때로는 생과 사를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점유한 부채꼴에는 공간이라는 것은 없었다. 공간은 제거 당하여 죽어 있었다.
그들의 부채꼴 속에 있는 것은 경련 뿐이었다. 눈이 경련을 일으키는가 하면 살도 피도 공기도 시간도 사상도 모두가 경련에 싸여 있었다. 인간은 형체와 정신을 상실하고, 허깨비 같은 인간만이 경련하고 있는 뿐이었다.
"숨쉴 수 있나?" 드라이얀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기는 해요. 그것도 한쪽 콧구멍으로 말입니다." 요한이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내 얘기나 듣게. 자네에게 아주 중요한 어떤 사실을 알려 줄 테니...."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용서하세요."
"들어야 해. 똑똑히 들어. 아주 중요한 거니까."

어떤 공포일지라도 한계가 있고
어떤 슬픔일지라도 그 종말이 있으니
살아가는 데 끝없이 슬퍼만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삶과는 관계없는 넋두리
이 세상은 간악과 불의가 끊임없으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악취와 괴이한 독벌레에 포위된 인간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집도 거리도 온 누리도 뒤덮고 있네.

"좀더 크게 말하세요! 한마디도 안 들려요!" 요한이 말하자, 드라이얀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댔다.

대기를 깨끗이 하라! 하늘을 맑게 하라! 바람을 씻어라!
돌에서 돌을 추려 내고 팔에서 살갗을 도려내고 뼈에서 근육을 갉아 내어
그것들을 모두 씻어라!
돌멩이도 씻고, 뼈도 씻고, 뇌도 씻고, 영혼도 씻어라!
그 모든 걸 씻어라!
T. S. 엘리엇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요한이 말했다. "선생님은 좋겠어요. 숨을 쉴 수가 있으니까요. 저는 질식할 것만 같아요!"
수용소 안에서는 몸집이 작은 사람일수록 덩치가 큰 사람보다 굶주림을 견디기가 쉬웠다. 그러나 60명을 한데 쑤셔 넣고 마치 괴물처럼 올드루프의 밤길을 달리는 이 트럭 위에서는 키가 작은 포로들은 숨을 쉬지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
"선생님, 이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도무지 들리지 않으니까요."
"자네가 내 말을 안 들으면 생명이 없어진다는 걸 알아야지...."
"뭘 들으란 말입니까?"
"그 독일인 교수가 돼먹지 않은 소리를 했거든. 그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으므로 벌을 받아 죽을 걸세." 드라이얀이 말했다.
"무슨 잘못을 범했는데요?"
"우리들의 지방과 살을 달아 본 교수 말일세. 그는 우리들의 고통의 양을 달아 볼 셈으로 아직 따뜻한 기름기를 달아보았단 말이야. 하지만 인간의 고통을 무게로 알아내지는 못하는 법이야. 생명이란 달 수 없는 거야. 감히 생명을 저울에 올리다니, 그런 놈은 극형에 처함이 마땅해!"
"안 들려요!"
"들리지 않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냐. 들리지 않더라도 죽을 때가 오면 죽게 되어 있어. 이 트럭의 운전병이나 보초들, 곤봉을 가진 사병들, 그리고 기관총을 가지고 우리들을 죽일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군인들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어. 누구도 듣지도 못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시각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는 거야. 그들이 죽어가는 게 보이나?" 드라이얀이 크게 소리쳤다.
"눈이 가려져서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느끼지도 못한단 말인가!"
"아무 것도.... 오직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생각뿐이에요."
"가장 중요한 본질을 느끼고 있군. 사람들 누구나가 자네와 똑같은 걸 느끼고 있어. 그런데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거든...." 드라이얀은 이번에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130

포로들은 다시 가축을 싣는 화차에 실렸다. 말 스무 필을 싣는 화차에 140명의 포로를 태웠다. 화차의 모든 문은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뒤에 붙은 화차에는 여자 포로 3천 명이 타고 있었다. 참으로 긴 열차였다. 드라이얀은 이런 긴 열차를 멀리서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마치 골고다의 언덕을 기어오르는 행렬과도 같은 거야.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기계화된 것뿐이니, 우리는 기계의 힘으로 골고다를 기어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예수님은 두 강도 틈에 끼여 매발로 그 언덕을 올라가셨어. 자넨 왜 예수를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는지 아나?"
"모르겠는데요." 요한은 대답했다.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하려고 일부러 죄인 두 사람을 들러리로 세운 거야. 옛날부터 해 내려온 술책이지. 예수가 죄인이 아닌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예수만을 벌하지 못한 거야. 처형장에서 군중의 주의를 딴 곳으로 끌기 위해 강도들을 동반시킨 거야. 나나 자네나 내 아내가 또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좌우에 한 사람의 죄인을 달고 있어. 골고다의 방법과 똑같은 술책이야. 수효의 차가 있을 뿐이지.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의 경우는 죄 없는 한 사람이 죄인 두 사람 사이에 끼였지만, 지금은 만 명의 죄 없는 인간이 두 명의 죄인 틈에 끼여 든 셈이야. 그러나 그건 별로 큰 차이는 아닐세. 방법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니까. 더욱이 우리들은 기계가 조정해서 자동적으로 십자가에 오르게 되는 거야. 하지만 그런 수작은 위험한 걸세. 왜냐하면 일단 처형이 끝나고 나면 군중은 예수만을 기억하게 된단 말이야. 그건 어느 때고 마찬가지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형 집행이 자동적으로 되든 기차를 타고 골고다 언덕에 드라이얀 코르가는 창가로 다가섰다.
열차는 정거하고 있었다.
"뭐가 보입니까?" 요한이 물었다. 그의 눈은 창가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정거장이야. 다른 기차도 들어와 있군."
"역시 포로 열차인가요?" 요한 모리츠가 물었다. 궁금했던 것이다.
"석방된 포로들이야. 독일에 노동자로 끌려 왔던 외국인들이 석방되었구먼." 드라이얀은 열차 주변에서 법석을 떠는 남녀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두들 담배를 피우는군." 드라이얀의 말을 듣고 요한 모리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여자가 열차에서 내리는군. 소시지가 든 흰빵을 먹고 있어." 드라이얀도 이 말을 하며 침을 삼켰다.
"나도 좀 봤으면.... 어쩌면 한 사람쯤 아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어느 나라 사람들이죠?"
"여러 나라야." 드라이얀은 화차 밖에 그려진 국가와 단추 구멍에 끼어 있는 작은 깃발을 쳐다보며 말했다. "버터 바른 빵을 먹고 있는 여자는 덴마크 여자로군. 그녀의 허벅지가 먹고 있는 빵처럼 하얀데.... 그 뒤에는 프랑스 여자가 있는데 아주 미인이야. 눈동자도 까맣고."
"그 여자말고 다른 프랑스 사람은 없습니까?" 요한이 물었다.
"우리가 탄 이 화차 옆에 한 무리가 있네. 벨기에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이 섞여 있어." 드라이얀은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을 좀 봤으면 좋겠어요!" 요한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옛정이 되 살아났던 것이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의 허리를 잡아 약간 위로 치켜올려 주었다.
"오, 프랑스 사람들이구나! 저기 이탈리아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은 조세프와 똑같은데요. 보이지요?" 요한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세프가 누구지?"
"제 친구 조세프 말예요.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제가 탈출시켜 준 친구 말입니다. 그 조세프가 지금 프랑스에 있다는 걸 아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저 사람이라고 믿겠는데요. 너무 똑같이 생겼어요! 저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 봐 주시겠어요?"
"뭐라고 하지?"
"무슨 말이든 해 보세요. 조세프와 기막히게 닮았군요. 무슨 말이든 한마디하고 싶은데 프랑스 말을 모르니까 답답해요. 프랑스까지 무사히 돌아가기 바란다고 말해 보세요." 요한은 프랑스 사람과 그냥 헤어지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다.
"보세요, 지금 막 우리 옆에 왔잖아요. 지금 뭐라고 말해 보세요!"
드라이얀 코르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독일어로 말을 붙였다. "프랑스까지 무사히 돌아가십시오!"
요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정답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반가운 나머지 생기마저 감돌았다. 그가 누구이든 그리운 프랑스 사람임에 틀림없었으므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던 것이었다.
플랫폼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뚝 그치고 조용해졌다. 무리 지어 있던 사람들은 긴장된 얼굴로 요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조세프를 닮았다는 사나이가 프랑스 말로 하는 걸 들었다.
"저 나치놈이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지?"
플랫폼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은 창가에서 정답게 웃어 보이는 요한 모리츠를 적의에 찬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저 자식이 아마 담배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조세프 같다는 청년이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다 말고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구부려 돌멩이를 주워서는 요한 모리츠가 여전히 웃으며 내다보고 있는 창문을 향해 힘껏 던졌다. 돌은 창을 뚫고 들어와 화차 한복판에 떨어졌다. 포로 한 사람이 이 돌에 맞았다.
"자, 네 담배다! 너희놈들 덕분에 나는 3년이나 고생했어!"
두 번째 돌멩이가 찻간의 벽을 때렸다. 그러나 이어 수많은 돌이 비 오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바닥에 엎드려 되도록 창에서 멀리 피했다. 돌멩이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마치 전쟁터에서 공격을 받듯이 화차 속은 저주와 아우성으로 온통 들끓었다.
플랫폼은 욕설과 아우성으로 요란스러웠다. 여자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 아이들 소리. 모두가 격분한 목소리였다. 프랑스 말, 이탈리아 말, 소련 말, 덴마크 말, 노르웨이 말 등, 세계 각국어로 부르짖는 요란한 아우성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저주는 똑같이 격한 분노를 터뜨렸고, 요한 모리츠를 치려고 날아드는 돌멩이의 뒤를 따라오는 욕지거리는 비록 나라에 따라 발음은 다를지언정 다 똑같은 의미였다. 나치의 개자식, 나치의 강도 살인마, 나치, 나치....
수송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내려 포로들이 탄 열차에 돌을 던졌다. 보초와 헌병이 달려와 질서를 잡으려고 했으나 군중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쩔쩔맸다. 사태가 너무 격해서 진정시킬 도리가 없었다. 범위가 점점 확대하고 사태가 더욱 험악해지자 헌병들이 공중에 대고 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치들을 보호하려는 헌병에 대해서 해방된 노예들의 가슴속에서는 일제히 반항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요한 모리츠는 첫 번째 돌멩이가 귀를 스치고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창가에 붙어 서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군중들이 돌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을 때도 요한은 이 떠들썩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사 이해를 했다고 해도 그는 조세프를 닮은 프랑스 인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안에 있던 포로들이 돌 세례를 피하느라고 아우성을 칠 때에야 비로소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기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군중을 내다보았다. 그때 화차 속의 포로들이 요한의 다리를 창가에서 낚아채어 마룻바닥에 쓰러뜨렸다. 포로들은 요한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증오와 절망과 야수성을 띤 수천의 발들이 요한을 짓밟는 사이에도 우박 같은 돌멩이들이 끊임없이 포로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포로들은 요한이 플랫폼에 있는 석방된 포로들의 증오와 공격을 촉발해 놓은데 대해 참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 그의 몸뚱이를 가리가리 찢어 놓고 싶었다. 모리츠를 깔아뭉개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묵시록에 나오는 수천개의 다리를 가진 괴수였다. 밖에서도 수천 개의 팔을 가진 괴수가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제 영락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죽을 각오를 하고 나자 자기를 짓밟는 장화 바닥도 자기를 후려갈기는 주먹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맞아도 아픈 줄을 몰랐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고난과 고통의 생애였다. 코르가 사제와 판타나 교회와 성모 마리아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평화가 그의 몸과 마음에 깃들였다. 돌멩이가 화차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이 공격이 자기 한 사람을 향해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짓밟아 없애려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다. 이제 그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살아나면 당장 온 세상이 끝장이 나기나 하는 것처럼, 아니면 퇴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단 하나의 죄인은 바로 자기, 요한 모리츠였다. 그래서 군중과 포로들은 누구나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헌병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요한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군중은 진정되지 않으리라. 헌병들 또한 요한을 죽이기 전에는 마음이 풀리지 않으리라. 기관총과 탱크로 무장된 군인들도 요한 모리츠가 가리가리 찢어지기 전에는 바다 건너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요한은 부득이 죽어야 할 몸이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그는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요한은 혼미한 상태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는 프랑스 인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은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드라이얀 코르가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탄 기차는 마치 골고다의 언덕을 기어오르는 행렬과도 같은 거야.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기계화된 것뿐이니, 우리는 기계의 힘으로 골고다를 기어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요한 모리츠는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생각되었다. 밤이 된 것 같았다. 깜깜한 어둠이 깃들었다.

131

요한 모리츠는 그 날 밤이 깊어서야 의식을 회복했다.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감고 드라이얀 코르가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요한은 자기의 뺨이 누군가의 맨살에 맞닿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건 셔츠도 입지 않은 드라이얀의 어깨였다. 드라이얀이 왜 셔츠를 벗고 있는지 물어 보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물 좀 주세요." 요한 모리츠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드라이얀 코르가는 못 들은 척 묵살했다.
"물 좀 주세요." 목이 타요!" 요한 모리츠는 거듭 말했다. 그는 드라이얀의 품에 안긴 채로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 동안에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기 셔츠를 찢어 상처를 감아 주고 자리를 만들어 그의 다리를 뻗게 했다.
요한 모리츠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가끔 드라이얀은 요한의 가슴에 손을 얹어 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는 걸 확인했다. 손을 떼고 붕대 위에 귀를 대고 들어 보기도 했다. 때때로 요한의 심장이 너무나 희미하게 뛰어서 손으로는 잘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를 바싹 갖다 대도 심장의 고동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요한 모리츠는 의식을 되찾아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기 자신이 죽음의 늪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요한 모리츠는 물을 달라고 하지 않는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그도 목이 탔던 것이다. 그러나 화차 속에서 무슨 수로 물을 구한단 말인가?
24시간 동안 포로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대소변을 보러 가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은 채 갇혀 있었다. 화차 안은 구린내와 지린내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으로 악취가 풍겼다. 화차 바닥은 오줌이 흘러 질퍽거렸다. 요한은 오줌 속에 누워 있었다. 요한도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오줌을 쌌다. 아직 눈은 뜨지 못하고 입술만을 간신히 달싹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 목이 타요!"
"안됐지만 물이 없어. 마실 거라곤 아무 것도 없네."
드라이얀은 요한의 입술만이라도 좀 축여 줄 궁리를 해 보았다. 그러나 마실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드라이얀은 칭기즈 칸의 군사들이 초원 지대를 통과할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떨어지면 타고 가던 말의 혈관을 칼로 따고 피를 빨아먹고 상처에 붕대를 매 준 다음 다시 떠났는데, 이렇게 몇날 며칠을 몇 방울의 뜨거운 피 외엔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드라이얀은 말의 피를 마시는 장면에 사로잡혀 있었다. 요한 모리츠의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피 몇 방울쯤 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피를 마시면 갈증도 해소되고 몸도 반드시 좋아질 것이다.
"아, 물 좀 줘요!" 요한 모리츠는 연거푸 애원했다.
"마실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네.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내 피밖에 없어. 그거라면 난 기쁜 마음으로 얼마든지 주겠네. 그러나 자넨 피를 마셔선 안 돼. 인간의 피를 마시는 자는 흡혈귀거든.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지만 그건 인간이 아니야. 그건 기계고 군중하고 악마야. 인간과 모양은 같아도 혼이 없는 인간 괴물이지."
"목이 타요!" 요한이 중얼거렸다.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만 자네는 피를 마셔선 안 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자네만이 인간의 피 맛을 본 적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야. 내 말이 들리나? 다른 자들은 모두 피를 마시고 흡혈귀가 되어 버렸어. 그들은 이제 인간이 아냐. 여기 있는 포로들, 보초들, 그리고 자네에게 돌을 던진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모두 인간이 아니야. 여기서 인간이라곤 단지 자네뿐일세. 자네는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드라이얀이 말했다.
"아, 목이 타요!"
"알고 있어. 자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네. 그러나 저 자들처럼 흡혈귀로 살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겠지. 인간의 피를 마셔서는 안 돼. 내 말을 알아듣겠나?"
"목이 타 죽겠어요!" 요한 모리츠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132

요한 모리츠의 탄원서

나는 루마니아의 판타나 마을 출신인 요한 모리츠입니다.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통치자 여러분들에게 이 탄원서를 드립니다. 내가 무슨 죄로 붙들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만이 받으신 고초를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진작 탄원서를 내지 않은 것은 내가 선척적으로 참을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농사꾼입니다. 농사꾼들은 무엇이든지 잘 참고 기다릴 줄 압니다. 그래서 나는 봄철 내내 여러분의 선처만 기다렸습니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도록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또 봄이 왔습니다. 나는 뼈와 살가죽만 남았습니다. 내 마음은 슬픔과 괴로움으로 타고 타서 석탄이나 먹물처럼 아주 새까맣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죄로 체포되었습니까?
나는 도둑질이나 살인을 한 일이 없고 누구를 속인 일도 없으며, 법이나 교회가 금하는 죄를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 강도도 사기꾼도 살인자도 아닌 내가 뭇 때문에 갇혀 일어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 갇힌 몸으로 온갖 고생을 겪은 나는 이제 허깨비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열네 군데의 수용소를 돌아다녔습니다. 이제는 내가 감금된 사유를 물어 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나로서는 이런 결심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심이 선 이상 나는 이 탄원서를 이 나라를 다스리는 여러분들에게 우편으로 보낼 것입니다. 수용소 문을 지키는 보초에게 부탁하여서라도 보낼 것입니다. 이 탄원서는 세계 각국을 돌고 돌아서라도 어느 때고 반드시 이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의 수중에 들어갈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 설령 그 분들의 귀가 막혔다 해도 이 탄원에 반드시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수용소의 모든 감방 문에 이 탄원서를 붙여 놓겠습니다. 탄원서에 돌멩이를 싸서 한길에 던질 계획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용소 위를 날아가는 새라도 붙잡아서 그 다리에다 이 탄원서를 매달겠습니다.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날라다 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정의를 위한 외침을 그치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은 이 외침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수용소 지하실에 나를 가두어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이 외침을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이와 연필이 없으면 손톱으로라도 수용소 벽에다 쓰겠습니다. 손톱이 다 닳아 없어지면 또 자라기를 기다려 쓸 작정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총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지옥에도 연옥에도 천당에도 가지 않겠습니다. 내 영혼은 이 땅 위에 그대로 남아서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입니다. 하룻밤에도 수백 번씩 꿈속에 나타나서 당신과 당신 옆에서 자고 있는 당신의 아내에게 나의 정당함을 호소할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은 평생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여러분들에겐 노래도 사랑의 속삭임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여러분들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여러분들의 귀에 들려 오는 건 오직 내가, 요한 모리츠가 하는 말뿐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차지하고 당신들의 눈과 귀를 지배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상 나를 가둬 놓고 괴롭힐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명과 나의 그림자는 바로 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제아무리 탱크와 기관총과 비행기와 수용소와 금전을 가진 자라도 나의 생명과 나의 그림자에 손을 댈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소망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일을 할 수 있고, 처자식과 함께 살 수 있는 장소와 먹을 것만 있으면 족합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체포한 이유입니까?
루마니아 정부는 무슨 물건이나 동물을 징발하듯 헌병을 보내서 나를 징발했습니다. 나는 순순히 징발되어 왔습니다. 맨손으로는 총이나 권총을 든 헌병들과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어머니가 지어 주신 세례명인 이온이라는 내 이름을 제멋대로 야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철조망을 친 수용소에 나를 유대인들과 함께 마치 가축처럼 잡아 가두고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우리들은 짐승처럼 떼를 지어 잠자고 떼를 지어먹고 떼를 지어 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가축들처럼 도살장으로 끌려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도살장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나는 탈출해 버렸습니다. 바로 이유로 여러분들은 나를 체포한 것입니까? 도살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탈출했기 때문입니까?
헝가리 사람들은 나를 야곱이 아니라 이온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몹시 괴롭히더니 나중엔 독일 사람들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나를 이온이라고도 야곱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야노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에서는 내가 헝가리 사람이라고 또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령 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이온도 야곱도 양켈도 야노스도 아닌 요한이라고 부르며, 나를 군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령은 먼저 나의 머리통을 재어 보고, 이를 세어 보고, 유리로 된 시험관 속에 피를 뽑아 넣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체포된 이유입니까?
군인이 된 나는 프랑스 포로들을 수용소에서 탈출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체포된 이유입니까?
전쟁이 끝나자 나는 당연히 내게도 평화가 올 줄 알았습니다. 그 때 미군들이 와서 나를 귀족처럼 대우하며 초코릿과 여러 가지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하루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나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열네 군데나 되는 수용소를 돌아다녔습니다. 천지 개벽 이래 일찍이 없었던 가장 흉악한 강도처럼.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왜 갇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따져 봐야겠습니다.
야노스, 이온, 요한 야곱 양켈이라는 내 이름이 비위에 거슬렸던가요? 여러분들은 또 내 이름을 바꾸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바꾸십시오. 이제 인간은 세례명을 고집할 권리를 상실했다는 걸 나는 충분히 알았으니까요. 이젠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체포되어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존경하는 통치자 여러분께
한 가정의 가장이며 농부인 모리츠(요한, 야곱 양켈, 야노스)

"자네 왜 우나?"
탄원서를 읽고 난 드라이얀 코르가가 요한에게 물었다.
"울지 않습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탄원서를 보내는 것이 겁나서 그러니? 아니면 사실과 다르게 썼단 말인가?
"겁이 나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점도 없어요."
"그런데 왜 울어?"
"너무나 진실한 이야기여서 눈물이 납니다.

133

탄원서를 보낸 지 사흘만에 요한 모리츠는 사무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기 셔츠와 바지를 빌려 주었다.
"우리가 이겼어. 탄원서가 효과를 낸 모양이야. 일이 잘 될 것 같군." 드라이얀은 기뻐했다.
요한 모리츠의 눈은 빛났다. 그는 벌써 석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이겼어요. 모두가 선생님 덕분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너무도 잘 쓰셨기 때문이에요." 요한이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 두려워할 사람은 저 자들이야. 저 자들이야말로 정말 죄인들이거든."
요한은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사무실로 갔다.
그는 한낮이 되어서 돌아왔다. 드라이얀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았다.
"어떻게 됐어? 석방해 주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았나?"
요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누가 무엇을 물으면 언제나 우물쭈물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중에 얘기할께요. 지금은 얘기할 기분이 아니에요."
"자네 돌았나? 무슨 좋은 일일까 하고 여태껏 기다렸는데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요한 모리츠는 사무실에서 주워 온 담배꽁초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천천히 알맹이를 까서는 똑같이 나누어 하나를 드라이얀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신문지에 말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석방이라고는 하지 않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때리던가?"
"아뇨!"
"그럼 왜 말을 하지 않지? 내가 보기엔 자네를 나쁘게 대하진 않은 모양인데."
"조금도 나쁘게 대하진 않았어요." 요한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자네 차례가 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괜찮아. 내일 다시 부를 테니까."
"제 차례였어요."
"심문하던가?"
"네." 요한 모리츠는 혀가 마비된 것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드라이얀은 갑갑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부 말해 보게. 처음부터 자세히...."
"제가 첫 번째였어요.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군요. 책상 앞에 놓인 의자였어요." 요한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시작이 정중하군.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는 건 좋은 징조거든. 자네 기록을 읽고 죄가 없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지. 아무나 의자에 않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그 다음엔?"
"심문은 중사 계급장을 단 자가 했어요."
"친절하던가?"
"네."
"처음에 무엇을 묻던가?"
"처음에 서류를 훑어보더군요. 그러고는 '당신이 요한 모리츠요?' 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그는 힐끔 나를 한번 쳐다보곤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더군요. 그러고는 '모리츠의 끝 글자에 T를 씁니까? 그렇지 않으면 TZ를 씁니까?' 하고 묻기에 둘 다 쓴다고 대답했어요. 루마니아에선 T를 쓰고 독일에서는 TZ를 쓴다고 했지요." 요한 모리츠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절망적인 눈초리로 드라이얀을 쳐다보았다.
"계속해 보게. 왜 이야기를 중단하나?" 드라이얀은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그러고 나선 '고맙소. 나가도 좋소.' 하더군요."
"그것 뿐이야?"
"네, 그게 전부예요."
"그래서 자네는 중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내가 가르쳐 준대로 말해 보지 그랬어?"
"저도 그러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그 중사는 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더군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음 사람.' 하고 불렀어요."
"그래서 자넨 뭐라고 했지?"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럴 수가 있나! 이 한심한 친구야. 그래서 자넨 그냥 나와 버렸단 말이지?"
드라이얀은 자기 머리를 움켜잡고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가 1년 간이나 기다렸던 기회야. 그래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다는 거야? 그밖에 다른 말은 없었어? 자네가 잊어버리고 무슨 말을 빼먹은 건 아냐?"
"아니에요. 그 외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나와 버렸어요. 문을 닫으려는데 다음 사람이 들어갔어요. 토마스 만이라고 하더군요."
"그에겐 뭐라고 묻던가?"
토마스만의 '만'에 N자를 하나만 쓰느냐, 아니면 둘을 쓰느냐고 묻던데요."
"그것뿐인가?"
요한 모리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슬처럼 굵은 눈물이었다.
"모리츠, 이젠 단념하게." 드라이얀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흰토끼가 죽고 나면 단념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어...."

134

  탄원서 제5호
  재판 문제(기계화된 심문에 대하여)
나는 여러분들이 이 수용소의 포로들을 심문할 때 개별적으로 하라는 특별 명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물론 어리석은 명령입니다. 체포될 때 기계적으로 무더기를 체포된 포로를 개별적으로 심문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는지 나는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당신네 문명은 오래 된 관습에 따라서 때로는 예의바른 제스처를 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예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교 한 사람이 아침나절에 500명의 죄수를 심문하고 오후에도 역시 또 다른 500명을 심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포로들에게 똑같은 심문을 하고 포로들의 대답에는 일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포로들이 지껄이는 구구한 사정을 일일이 들어 준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포로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가운데 신통하고 흥미로운 내용이 뭐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심문을 하느라고 허비하는 에너지를 생각해 봅니다. 하루에 똑같은 질문을 1천 번씩이나 하자면 매우 힘이 들 것입니다. 심문을 맡은 장교들은 밤이면 턱과 입술이 몹시 아플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질문을 레코드에 녹음할 것을 권유하는 바입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 하면 될 것입니다. 포로가 들어오면 우선 스위치를 누르십시오.
레코드가 말할 것입니다. '앉으시오.' 그러면 포로는 앉을 것입니다. 레코드는 계속 돌아가며 첫째, 둘째, 셋째 질문을 때맞추어 계속 던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선 맨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도 좋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레코드가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이렇게 레코드 한 장으로 힘들이지 않고 4, 5백 명의 포로들을 거뜬히 심문할 수 있습니다.
레코드가 포로들을 심문하는 동안 담당 장교는 탐정 소설을 읽어도 무방할 겁니다. 그러면 점심때가 되어 점심을 먹을 때도 턱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정상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심문을 하는 당신들은 질문한 할 뿐 대답을 듣는 것이 아니니까 이 방법은 가능한 것입니다. 심문 담당 장교의 수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방법입니까?
이건 아주 공정한 방법입니다. 문명 사회에서의 공정이란 기계적으로 부여되어야 합니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의 방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정히 레코드를 이용할 수 없대서야 그 많은 기술적인 발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35

열다섯번째의 강제 노동 수용소 다름슈타트도 지금까지 거쳐 온 열네 군데의 수용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리스정교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임시로 마련된 자그마한 바라크식 건물이었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요한 모리츠는 모자를 벗고 교회로 들어갔다. 천막을 친 보잘것없는 임시 건물이었지만 제일 안쪽에는 제단도 마련되어 있었다. 성모 마리아상이 목탄과 색분필로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져 있었다. 내부는 마룻바닥도 없는 맨땅이었다. 전날 밤에 비가 내린 탓으로 빗물이 천막 안으로 스며들어 바닥이 질퍽질퍽했다.
교회 한복판에는 사람의 키 만한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드라이얀은 그 앞에 가서 꿇어앉았다. 예수상은 두꺼운 마분지로 만들어졌고, 가시 면류관은 깡통을 가늘게 오려서 만든 것이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못 박힌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걸 그린 화가는 붉은색 분필이 없었던지 핏자국을 나타내야 하는 곳에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의 붉은 종이를 오려 붙였다. 검은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글씨를 읽어 볼 수 있었다.
'주여! 이처럼 괴로움으로 가득 찬 수난상을 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 상처를 위해 기도드리러 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상처를 위해 기도 드릴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여, 용서하옵소서! 저는 무엇보다도 담뱃갑을 오려 붙인 당신의 그 다리, 그 발, 그 손바닥의 핏자국에 대해서 기도를 올리겠나이다. 제 몸뚱이의 상처보다도 당신의 상처가 더 아파 보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한 당신의 머리 위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에 대해서도 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드라이얀은 예수상을 바라보다가 가슴께에 박혀 있는 M자를 보았다. 그것은 예수의 수난상을 오려 낸 마분지에 인쇄되어 있는 Menu Unit의 M자였다.
드라이얀은 몸을 일으켜 그리스도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야 저는 거룩하신 예수와 한 몸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희망, 영원한 Menu이신 구세주여! 저의 Menu Unit이신 당신의 육체가 우리들의 양식이라는 걸 저는 이처럼 절실히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포로 화가가 Menu Unit라고 씌어진 마분지에서 당신의 모습을 오려 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신앙과 빵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모두 상징하고 계십니다."
드라이얀은 황홀한 경지에 빠졌다.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아무한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매끈매끈한 담뱃갑 종이로 만든 천사들과 금빛 포장지로 목걸이를 한 성모 마리아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코르가 사제와 비슷하게 생긴 성니콜라이 상(像) 앞에 꿇어앉아 성호를 그었다. 그러고 나서 드라이얀 곁으로 가서 그리스도의 붉은 상처를 쳐다보았다.
"주여, 저는 제 입술에서 이 잔을 빼앗아 주십사고 비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이 잔을 다 마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1년 동안이나 저는 이 잔을 입술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1년이란 긴 시간을 저는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방황해 왔습니다.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맸습니다. 자유로운 시간과 유리되어 있으나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생명은 제 온몸의 털구멍을 통해서 모두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여전히 살아서 숨을 쉽니다. 그리고 먹고 싶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빵과 물을 몸 속에 집어넣어 신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고뇌는 제가 포로인지 자유인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갇혀 있기는 하나 제가 갇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영혼은 제가 자유롭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애매한 상태에서 오는 고통은 노예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보다 더 큰 것입니다. 저를 가두어 놓은 사람들은 저를 미워하지도 처벌하지도 죽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세계를 구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를 괴롭히고 불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 인류를 이렇게 괴롭혀서 죽이고 있습니다. 저 혼자만이 당하는 고통은 아니라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커다란 병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것을 병원이 아니라 감옥이었습니다.
그들은 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 사고(思考)가 이젠 이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죽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여, 저에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제 힘으로는 더 이상의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는 시간에 도달했습니다. 제가 처해 있는 이 시각은 25시, 그야말로 구원을 받기에도 죽기에도 살아가기에도 너무 늦은 시각입니다. 만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주여, 비옵건대 차라리 저를 한 개의 돌멩이로 만들어 주옵소서. 그렇다고 저를 영원히 삶에다 버리진 마옵소서! 당신께서 버리신다면 저는 죽을 수조차 없습니다. 저의 육체와 정신을 보시옵소서. 그 어느 것이나 죽음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숨을 쉬고 있습니다. 세상은 명맥만 겨우 유지할 뿐 죽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요한 모리츠가 어루만져 주려고 조심스레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드라이얀은 이미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제가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다른 포로와 마찬가지로 P.W.라고 전쟁 포로라는 표지가 붙은 미군복을 입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사제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계속 성상 앞에 꿇어 엎드려 있었다.
사제는 요한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또 어느 사람 사람이냐고 물었다. 드라이얀의 아내도 포로로 붙잡혔다는 말을 듣자 사제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그녀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사제는 자기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드라이얀에게 축복을 빌었다.
"매일 아침 6시에 미사가 있습니다. 나는 바르샤바 지구의 대주교입니다. 우리들 사제 교의회(敎議會) 전원이 이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미사는 장엄합니다. 당신들도 참석하세요. 루마니아에서 오신 신부도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입원중이십니다."
요한 모리츠는 대주교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병원에 가서 전하지요. 수용소에 루마니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시면 그는 당신에게 축복을 하러 올 것입니다." 대주교가 말했다.

136

6시경에 사제 교의회의 미사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포로의 군복 위에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대주교는 사제복을 입고 주교관을 쓰고 있었다. 의상을 장식하는 보석 같은 것은 없었다. 주교의 음성은 첼로의 음색처럼 아름다웠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요한 모리츠는 나란히 서 있었다. 드라이얀은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상 앞에까지 온 그는 갑자기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요한은 드라이얀이 미끄러져 넘어진 줄 알고 급히 달려가 부축하였다.
드라이얀의 몸은 뼈가 없는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천막 교회 안에는 사제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 모리츠는 도움을 받으려고 사제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드라이얀이 쓰러진 이유를 알았다.
"코르가 신부님!" 요한은 간신히 이 한마디를 중얼거리고는 사제 앞에 꿇어앉았다. 요한은 사제의 무릎이라도 얼싸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사제는 다리가 없었다. 그는 목발에 의지하여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드라이얀 코르가와 요한 모리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코르가 사제의 머리는 전보다 훨씬 세어 있었다. 그는 깊은 자애와 기쁨을 미소로 나타냈다. 그의 눈과 미소를 통해서 천국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드라이얀, 사랑하는 내 아들아!" 코르가 사제는 아들을 안으려고 허리를 굽히다가 목발 하나를 떨어뜨렸다. 한쪽 목발에 몸을 의지하고 서 있던 사제는 나머지 한쪽 목발마저 내동댕이쳤다. 그는 남아 있는 한쪽 다리로 화살처럼 꼿꼿이 서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아들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벌렸다. 요한 모리츠는 목발 주워 들고 코르가 사제와 그의 곁에 묵묵히 서 있었다.

137

이제 요한 모리츠와 코르가 사제와 드라이얀은 다름슈타트 수용소의 같은 천막 안에서 살게 되었다. 이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1년이 지나서야 포로들은 외부의 편지를 받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제일 먼저 편지를 받은 사람은 요한 모리츠였다. 힐다의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리운 요한.
1945년 5월 9일, 자네의 집에 불이 났다네. 자네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 불이 난 건 소련 군대가 우리 마을에 들어온 그 날 오후였다네. 불행히도 힐다와 자네 아들 프란츠가 집에 있었는데, 그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나는 1주일 내내 모르고 있었다네.
그런데 어느 날 혹시 무엇이라도 남은 것이 있는가 해서 잿더미를 뒤지다가 그들의 시체를 발견했지 뭔가. 힐다는 어린것을 안고 죽어 있었네. 불이 났을 때 힐다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힐다가 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힐다가 그 시간에 낮잠을 자고 있었을 리는 없어. 특히 그 날은 소련 군대가 시내로 밀려들어오던 날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도망을 치고 거리에 사람이라곤 없었어. 더구나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 자네도 알다시피 힐다는 좀처럼 낮잠을 자는 애가 아니거든.
나는 힐다와 자네 아들의 뼈를 주워 모아 같은 관속에 넣어 주었다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묘지에 묻었네. 관을 두 개씩 따로 장만할 수가 없었네.
관 값이 여간 비싸지 않고 또 관을 구하기도 어려워서 따로 입관시킬 수가 없었다네. 다른 사람들은 관을 구하지 못해 그냥 묻는 형편이었지. 널빤지가 귀할뿐더러 굉장히 비싸거든. 나는 벽에 박혔던 못과 액자에 박힌 못을 모두 뽑아 목수에게 갖다 주었어. 이런 조건에도 목수는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네. 관을 만들기에는 못이 너무 가늘고 짧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거였어.
그러나 어쨌든 만들어야 했으므로 목수를 달래느라고 자네 모자 하나를 주었다네. 자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짓을 한 것을 언짢게 생각지 말기 바라네. 그러나 그 모자를 주지 않으면 관을 짜 줄 것 같지 않고, 뼈는 아무래도 파묻어야 했으니 어쩌나. 시체를 1주일 동안이나 집에 묵혀 놓은 터여서 어쩔 수가 없다네.
힐다와 프랑의 무덤에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꽂았네. 자네가 돌아오거든 돌 십자가를 만들어 주게. 우리의 가족 묘지는 모두 돌을 만들 훌륭한 십자가뿐이라네.
잿더미 속에서 또 하나의 시체가 나왔네. 그는 필경 하루 묵어 가려고 들어온 장교이거나, 아니면 군복을 평복으로 갈아입으러 들어온 장교일 거라고 생각되네. 소련 군대가 들이닥치자 독일 군인들은 모두 이렇게 했다네. 그런데 그의 가죽 이름은 요르그 요르단이었네. 자네와 같은 루마니아 사람이었다네. 그래서 혹시 자네를 만나러 온 친구가 아니면 친척일지도 몰라서 이렇게 상세히 적어 보내는 걸세.

138

"그렇게 된 것이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요한 모리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위로해 주려고 애를 썼다. "만약 힐다가 살아 있었다면 자네는 석방되는 날 어느 쪽 여자한테로 돌아가겠나? 누구라도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을 택해야 할 테니까."
"스잔나는 저와 이혼하지 않았나요?" 하고 요한 모리츠는 물었다. 그제야 요한은 비로소 스잔나가 아직도 집을 충실하게 지키며 자기를 기다리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잔나가 저를 기다리고 있단 말씀입니까?"
"물론, 스잔나는 죽을 때까지 자네만을 기다릴 걸세. 스잔나는 영원한 자네의 아내야. 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한 거야.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 스잔나는 한번도 자네와 헤어졌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네." 사제가 말했다.
"그럼 이혼은 거짓이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전 바보같이 스잔나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줄로 알았어요. 그래서 힐다와 결혼했던 겁니다. 저는 스잔나가 저를 버리고 간 줄만 알았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이혼 서류를 본 이상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께선 저를 절대로 용서해 주시지 않을 거예요!"
"자네가 지은 죄는 용서하실 거야. 물론 이것은 중대한 일이긴 하지만 자네나 스잔나에게는 책임이 없네. 그 책임은 국가와 법률이 져야 해. 국가와 법률이 벌을 받을 걸세. 죄악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천벌을 받을 걸세. 불벼락은 우리 정부에만 내려지지는 않을 거야. 하느님을 노엽게 한 죄를 지은 오늘의 우리 사회 전체가 받아 마땅하네."

139
드라이얀 코르가는 처음으로 심문을 받기 위해 출두했다.
"당신은 1년 이상이나 억류되어 있으면서 왜 체포되어 감금되었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하기야 2만 5천 명이나 되는 포로들 중에서 자기가 왜 체포되었는지 그 이유를 안다고 말할 녀석은 하나도 없을 거야. 당신들은 모두 우리가 유럽을 침공해서 재판 없이 마구 잡아 가두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당신들의 잘못된 생각이야. 체포는 반드시 법의 명령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니까."
드라이얀 코르가는 싱긋이 웃었다. 장교는 그 웃음을 보고 드라이얀을 짓누르려는 듯이 강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우리 법률이 정의를 위한 불변의 원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지? 그러나 그런 주장은 매일같이 들어왔으므로 새삼스러울 게 없어. 당신들은 모두 당신들을 체포한 근거가 된 법률을 영원히 무가치하고 보편성을 잃은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정말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야! 우선 모든 국가는 그 나라가 원하고 그 나라에 적합한 법률을 가질 권리가 있는 거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법률은 우리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거야. 다음으로, 정의에 대한 영원 불변의 원칙이란 있을 수 없어. 정의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건 영구적인 것이 될 수 없어. 인간은 영원한 존재가 아냐.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법률이든 일시적인 것이지 영구적인 건 아니란 말이야. 그것을 반대하고 나서는 자는 스스로 자기 기만을 범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미군 점령지구에서 적용되는 현행법에 따라 적국의 고급 관리로서 체포된 것이야. 법률이 그렇게 제정되었거든. 당신 아내의 경우 역시 적국 고급 관리의 아내라 자동적으로 체포되었고, 당신 아버지도 역시 적국의 공무원이어서 자동적으로 체포된거야. 이런 법률이 당신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되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바로 그것이 법률이라는 거야. 역사를 되돌아보더라도 법률은 언제나 가혹했으니까. 여하튼 우리들이 우리의 법률을 제정할 때 당신들의 의견을 물어 봤어야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잖아!"
드라이얀 코르가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25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법률이 개인의 고유한 생활을 금지하기 시작했다는 걸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체포당할 때만 해도 아직 절망할 것은 아니라고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법률은 가차없이 시행되고, 장교는 그 법이 충분히 존중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죄 없는 사람도 법률의 규정에 따라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고 굶주림을 당하고 가죽을 벗김을 당하거나 참살을 당했어." 장교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무죄를 인정해. 그래서 자동적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개별적인 석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 번씩이나 당신 일가의 석방을 건의했어. 그러나 아직 아무런 회담도 받지 못하고 있어. 석방 명령은 개인적으론 불가능해.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의 모든 사람이 석방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각 개인이 죄가 있든 없든 간에 그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단 말입니까? 이런 사실은 단순한 호기심밖엔 아무 흥미가 없다는 거군요." 드라이얀이 물었다.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가령 이것이 당신의 개인주의적 사고 방식에 의해서 배양된 감수성과 배치되고, 신학적이고, 미학적이고, 또는 인도주의적인 당신의 관념을 손상시킬지라도 나로서는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야. 그럴 필요도 없지. 우리들의 제도가 너무 무정하고 기계적이고 수학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거야. 전 세계는 수학적인 기능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아무도 그 진행이나 방향을 변경시킬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설교를 위해서 불러 낸 심문에는 내가 흥미를 가질 수 없소. 개인적인 문제에 흥미가 없다면 구태여 포로들을 불러서 심문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건 단지 인적 사항에 관한 것 뿐이야.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정확한 성명, 생년월일, 출생지, 직업 등이지. 통계를 내고 신상조사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하거든. 또한 이 신문도 그러한 사실들을 여러 범주로 분류시켜 놓기 위해서 행해지는 거야. 체포나 석방에 관한 규정은 그런 범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의 직분은 각 개인을 그에게 해당되는 범주별로 분류하는 일이야. 이건 정확을 필요로 하는 수학적인 일이거든."
"그런데 당신은 인간을 폐쇄한다든가 어떤 범주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걸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아니, 난 그것이 비인도적이라고 생각지 않아. 이 제도는 실질적이고 신속하며, 게다가 가장 공정한 것이야. 공정을 기하려면 이 방법 뿐이야. 공정함은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 다시 말하면 가장 정확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야. 이런 방법을 거부하는 자는 시인과 신비주의자들 뿐이야. 그러나 현대 사회는 신비주의론과 시를 버리고 말았어. 정밀 과학과 수학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 만큼 감상적인 이유 때문에 뒷걸음을 칠 수는 없는 거야. 감상이라는 건 시인과 형이상학자들의 피조물에 불과해."
장교는 이제 심문이 끝났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느긋하게 마음 편히 먹고 있는 것이 좋아!"
드라이얀 코르가는 문을 열었다. 순간 그의 등뒤에서 자기를 심문한 그 장교가 냉정한 어조로 "다음 사람!"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140

요한 모리츠는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잔나가 본심으로 이혼을 원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어린것들과 함께 자기가 돌아오기를 충실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요한 모리츠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탈출은 꿈도 꾸지 말게. 철조망 근처로 가기만 해도 폴란드 군이 자네를 쏠거야." 드라이얀은 요한의 탈출을 말렸다.
요한은 푸른 미군복을 입은 폴란드 군 보초들을 쳐다보았다. 폴란드 군인들은 꼼짝도 않고 서서 마치 요한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총을 들고 쏠 것 같은 태세로 뚫어지게 요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일 폴란드 군이 자네를 놓치면 다음엔 미군이나 독일군에게 사살되고 말 걸세. 루마니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네는 도중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헝가리의 수사대를 차례 차례로 만나게 돼. 자네는 결국 집까지 돌아갈 가망이 없어. 도중에서 붙잡히고 말 테니까. 천행으로 한 나라의 총알을 어떻게 피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 나라의 총알은 도저히 피하지 못할 거야. 모리츠, 자네와 자네 집 사이, 자네와 자네 가족 사이에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무장을 하고 자네의 길을 가로막고 있네. 개인과 개인의 사생활 사이에 이렇게 국제적인 군대가 버티고 있는 거지. 인간에겐 이제 자기만의 사생활이 허용되지 않아. 그러므로 억지로 하려다간 총살당하기 꼭 알맞아. 그들이 탱크나 기관총, 탐조등, 그리고 철조망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어찌 되든 간에 저는 도망치겠어요." 요한 모리츠는 말했다.
초소의 폴란드 보초병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미군 장교 두 사람이 수용소 안마당으로 들어와 의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요한 모리츠는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드라이얀의 곁을 떠나 그들에게로 달려가 앞을 막아섰다. 두 장교는 똑같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요한 모리츠를 바라보고 요한 모리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었다. 그러자 장교 중의 한 사람, 꽤 뚱뚱한 편인 중년 장교가 요한 모리츠를 반가운 듯이 두 팔로 껴안았다. 포로들은 호기심에 끌려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미군 장교가 포로를 껴안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여전히 자기 어깨를 내맡긴 채 미군 장교를 따라 의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의무실 쪽으로 가서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서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요한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의 음성을 들었다. 요한은 의무실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미군 장교는 제 친구, 의사 아브라모비치 입니다! 첫눈에 알아보았어요. 저는 이 분과 함께 루마니아에서 탈출했지요. 저는 이제 틀림없이 석방될 겁니다!" 요한 모리츠는 이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그의 친구인 미군 장교가 그를 불렀던 것이다.

141

요한 모리츠와 의사 아브라모비치는 루마니아 수용소에서도 그렇고, 헝가리에서도 유대 어로만 말했었다. 그들은 지금도 유대 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용소의 의무관으로 있는 아브라모비치 중위는 요한 모리츠를 만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또 요한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요한은 그와 헤어진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들려주었다. 아브라모비치는 동정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고, 그 중에서도 요한이 근래 몇 년 동안 15개소의 수용소에서 겪은 고통을 이야기했을 때는 더욱 동정해 마지않았다.
"이젠 가 봐야겠는걸." 아브라모비치는 이렇게 말하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네는 내 도움이 필요하겠지. 나도 알고 있어. 물론 그럴 거야. 자네에게 필요한 게 있거든 뭐든지 말해 보게. 들어 줄 테니. 우리들이 함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는 걸 난 잊지 않고 있네." 의사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자네를 도울 책임이 있어. 자네는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을 걸세. 뭐가 필요한가? 담밴가? 먹을 것인가? 옷인가? 뭐든 말해 보게."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하고 요한 모리츠는 말했다.
"불가능한 소린 그만두게, 양켈. 내 힘으로 자네를 도울 수 있는 걸 말해 보게. 여기 있는 포로들은 누구나 석방을 원하지. 그러나 석방만은 자동적으로 그 시기가 돌아오게 되어 있다네. 그러니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게. 참고 기다리는 도리밖엔 없네." 의사는 요한의 부탁을 피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왜 나를 가두어 둡니까?"
"죄의 유무와 석방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일이라네." 이렇게 말한 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여 말했다. "양켈, 자네에게 죄가 있다고 누가 말하던가? 자네의 석방엔 인내심이 문제야."
"기다리는 것도 한도가 있지요!"
"그건 자네의 이론이야. 자네는 아직도 순진한 농부로구먼. 한 가지만 알고 다른 것을 모르니 말이야. 죄가 없는 포로라고 해서 어느 장교든 간단히 석방시켜 줄 수 있다고 믿나? 그럴 수만 있다면 수용소는 오늘내일 사이에 텅 비고 말 걸세. 어떤 나치 당원이든 자기의 무죄를 증명할 만한 증거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테니까. 석방은 프랑크푸르트 총사령관의 명령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되네. 사령부에서 내려온 그 서류는 워싱턴으로 갔다가 비스바덴으로 다시 옮겨가서 특별 위원이 그걸 취급한 뒤에 베를린으로 넘겨 보내지. 석방 명령이 베를린에 넘어오면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회부되지. 그 명령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뒤라야 수백 개의 포로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서류뭉치에서 비로소 포로 카드가 빠져나게 돼. 이런 절차를 다 밟고 난 후라야만 석방될 수 있다네. 그러나 이 수속은 아주 복잡하여, 이런 일을 착오 없이 해낼 수 있는 건 기계뿐이라네. 포로는 각자 자기의 기록 카드를 가지고 있어.  미국 사람들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카드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앞에 보이는 병영만 하다네. 석방 명령이 하이델베르크로 일단 보내지면 자동적으로 워싱턴, 슈투트라르트, 뤼드비스부르크, 뮌헨, 코른베스트하임, 파리,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에 비치되어 있는 카드 상자 속에서 카드가 빠져나가게 되지. 자네의 이름은 전 세계 방방곡곡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미국 연방 조사국을 비롯해서 파리 연합국 최고 사령부, 베를린 관리 위원회, 모든 수용소와 감옥, CIC, CID, MP, XP, SP, SOS 사무소마다 등록되어 있다네. 자네의 행동은 그것이 비록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한 수용소에서 다른 수용소로 옮겨 간 사실까지도-전체 카드 상자 속에 있는 자네 카드에 변화를 가져온다네. 알겠나?"
요한 모리츠는 자기 이름이 세계 각 국의 도시에 적혀져서 수용소 철조망 위의 탐조등과 같은 거대한 기계 장치에 의해 꺼졌다 켜졌다 하고 있는 광경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이제야 그는 자기의 모든 행동이 사진 찍혀 기록되고 조명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는 통 몰랐습니다."
"하기야 그걸 알았더라면 내게 석방을 부탁하지도 않았겠지. 내가 자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한 이유를 이제 알겠나? 자네는 나 혼자 힘으로 그 어마어마한 기계 속에서 자네 카드를 뽑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브라모비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건 미국 대통령이라도 안 되는 일이야. 조용히 차례를 기다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어."
"그래도 죄가 없는데 갇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쁜 짓이라곤 한 적이 없는 나를 그 기계는 왜 놓아주지 않을까요?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런 기계는 도둑놈이나 사기꾼 같은 범죄자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 요한 모리츠는 말했다.
"이봐, 양켈,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얼간이 같은 사고방식은 버려야 해. 자네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문제를 자네 개인의 일로 국한해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문명국에선 사사로운 개인의 일엔 관심을 두지 않아. 자네에게 죄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것은 자네의 개인적인 문제야. 그런 문제는 자네 아내나 자네 이웃이나 자네 마을 농민들에게는 흥미 있는 일일는지 몰라. 개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 정도의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문명국에서는 모든 일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기 때문에 개인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네."
"그러면 저를 왜 체포했을까요?"
"그것은 일정한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제히 취해진 조치야. 그들을 한꺼번에 감금해 놓고 있으면 어떤 피의자나 전쟁 범죄자를 잡으러 산과 들을 헤맬 필요가 없지. 시간과 수고를 덜 수 있거든. 이런 식으로 잡아 두고 각자 성명의 머릿글자가 붙은 단추만 누르면 하나 둘 셋까지 세기도 전에 즉시 우리 눈앞에 그 사람의 사진과 신장, 몸무게, 머리 빛깔, 출생 연월일 및 출생지, 이의 수효등 그밖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항이 적힌 카드가 나오게 마련이거든. 그러면 우리들은 수화기를 들고 그 자가 감금되어 있는 수용소나 또는 감옥에 통지만하면 두세 시간 후엔 뉘른베르크의 국제 법정으로 그 사람이 실제로 출두한단 말이야. 신기한 일이지.... 이것은 기술의 결과야.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전기로 움직여지지. 그런데 어떻게 자네가 석방되기를 바라나? 정신 나간 소리지. 자네는 방직 기계 속에 든 한 올의 실과 같은 존재야. 한번 들어가면 영영 빠져 나올 수 없네. 그 실이 다른 실과 함께 짜여져 저절로 나오게 될 시간까지 기다려야지 다른 도리가 없는 걸세. 기계는 정확히 움직이고 있으니까, 기계와 관련 된 일이라면 참고 견디어야 해. 자네는 기계 속에 들어가 버린 거야. 아무리 몸부림치고 날뛰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야. 기계는 귀머거리니까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일만 하거든. 기계의 작업 능률은 감탄할 정도지. 인간은 도저히 따르지 못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워. 기다리고만 있으면 차례가 온다는 건 확실해. 기계는 인간처럼 잊어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기계는 정확하니까. 어때? 내 말 알아듣겠나?"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 석방에 대해선 아무 힘도 되어 줄 수 없단 말씀입니까?"
"자네는 지금 기계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방금 설명해 주지 않았나?"
"그러나 당신이 힘쓸 생각이 있으시면 일을 좀 진전시킬 수 있잖겠어요? 사령관들도 당신이나 나처럼 똑같은 인간이니까.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고 또 아무 죄도 없는데 몇 년 동안이나 수용소에서 수용소로 끌려 다니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걸 설명하면 그 분들도 알아들으실 겁니다."
"쇠귀에 경 읽기로군!" 하고 의사는 화를 벌컥 냈다. "자네는 모든 걸 개인적인 문제로만 이끌어 간단 말이야. 자네는 자네 문제밖에 모르니 딱하네. 원시적인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사고방식이야. 그건 그렇고, 뭣이든 필요한 물건이나 말하게. 곧 가 봐야겠으니. 담배야? 먹을 거야? 옷이야?"
"내가 바라는 건 정당한 취급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는 지구의 어느 곳에도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요한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담배나 받아 두게." 아브라모비치는 요한에게 럭키 스트라이크 한 갑을 내밀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불행을 같이 겪은 친구가 아닌가, 양켈!"
요한은 담배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빈 갑이었다. 아브라모비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져보았으나 마침 가진 게 없었다.
"다음에 올 때 꼭 담배를 갖다 주지, 양켈!"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가 버렸다.

142

코르가 사제는 무릎 위에 목발을 올려놓고 심문 담당 장교 앞에 앉아 있었다. 
"당신은 나치 당원도 아니고 또 부역자도 아닌데 뭣하러 독일에 왔습니까? 당신 말처럼 어떻게 왔는지 모른 사이에 독일 육군 병원에서 정신이 들었다는 얘기는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할 수 있는 얘기요. 그런 얘기는 발칸 지방의 환상 소설에나 나오는 거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우리 미군 장교 눈으로 보면 그런 얘기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얘기에 지나지 않아요. 동화나 신화 같은 얘긴걸요. 친구도 협력자도 아닌 당신을 독일 사람들이 뭣 때문에 독일 병원에 다 입원시켰을까요? 그들은 왜 당신을 6개월간이나 간호해 주고 다리까지 절단 해 주었을까요? 당신이 그들의 적이기 때문일까요? 단순히 인도적인 감정에서였을까요? 언제부터 그들은 인도주의자가 되었던가요? 그들이 자기의 적이라면 누구든 가스실에 집어넣었어요. 틀림없이 당신은 그들의 부역자였소. 히틀러가 전쟁에 패해 몹시 슬펐겠습니다."
코르가 사제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땀방울이 진주알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기도 몹시 힘들었다. 다리를 자른 뒤부터 그는 항상 누워 있었다.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되도록 빨리 심문이 끝나서 의자에서 내려앉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히틀러가 이겼다면 퍽 기뻤을 테지요. 그렇죠? 전쟁에 이기기만 했더라면 히틀러는 당신을 루마니아의 대주교로 임명했을 테니까. 그런데 매우 유감이군요." 장교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유감스러울 것 조금도 없습니다." 사제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연합군의 승리를 바랐소?"
"그렇지도 않소."
장교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기의 힘으로 얻어진 승리는 내게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며 코르가 사제는 독일 강제 수용소에서 찍어 온 벽에 걸린 사진들을 줄곧 바라보았다.
마르크 골덴베르크의 총을 맞고 자기와 함께 면사무소의 마구간 뒤 거름구덩이 속에 던져진 조르주 다미앵 검사와 바실 아포스톨, 그밖에 판타나 마을의 농민들의 시체가 생각났다.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에서 학살된 어린이들의 시체도 눈에 선했다. 또 됭케르크와 스탈린그라드의 시체들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승리는 기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승리를 얻기 위해서 온 세계를 엄청난 죄 없는 사람들의 시체로 뒤덮은 것이다.

승리에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없으니
이를 아름답게 보는 자는
인간 살육을 즐거워하는 자이리라
살육을 즐거워하는 자는
세상을 정복할 자기 욕심을 결코 채우지 못하리라
참살된 군중 뒤에 죽음의 통곡이 있고
싸움의 승리는 장례 의식으로써 찬양을 받으리라.

"그 시 참 근사하군요. 당신이 지었소?" 장교가 물었다.
"2천 년 전에 중국의 시인 노자(老子)라는 사람이 쓴 것입니다."
"그걸 좀 적어 주시오. 미국에 있는 내 가족에게 보내고 싶군요."
장교는 웃고 있었다. 아마 가족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안색이 변하면서 다시 의심쩍은 눈으로 사제를 노려보았다.
"지금 당신이 읊은 시가 중국 시인이 지은 작품이라는 게 확실하오?"
"그렇소. 그러나 당신 마음에 드는 시라면 작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시가 아름답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어요? 그 밖의 것은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안 되지요."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천만에요. 시인의 국적도 중요한 겁니다." 장교는 즉시 대꾸했다. "작자가 중국인이라니 안심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우방국이니까요. 이 시를 보내 주면 우리 가족도 퍽 기뻐할 것입니다. 만일 이 시가 적국의 시인이 쓴 것이라면 보낼 수 없어요. 내일 아침까지 그걸 좀 적어 주십시오. 종이와 연필을 드릴 테니까. 신학 이외에 다른 공부도 했나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배우고 싶은 건 모두 배웠습니다."
"중국말도 아십니까?"
"모릅니다."
"유감이군요. 이 시를 한자로 써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느닷없이 중국말로 된 편지가 배달되면 가족들은 깜짝 놀랄 겁니다. 할 수 없지요. 중국어를 모르면 영어로 써 주세요. 이 시를 쓴 중국 시인은 유머 감각이 있어 좋군요. 또 연합국의 일원이기도 하고."
수용소로 돌아온 사제는 너무나 피로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요한 모리츠는 그를 침대에 누이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신부님을 석방시켜 준다는 약속을 하던가요?"
"아니." 노인은 대답했다.
"무슨 질문을 하던가요?"
"노자의 시를 적어 달라고 했다네. 중국말로 써 달라고 했는데, 중국말을 모른다고 했더니 아주 실망하더군."
"심문은 그저 그것으로 그쳤나요?"
사제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143

드라이얀 코르가는 노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노라가 체포된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노라만은 그동안 석방되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전쟁 포로라는 마크가 찍힌 봉투를 움켜쥐고 드라이얀이 말했다. "노라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갇혀 우리와 똑같은 괴로움을 겪고, 우리와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을 거예요.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옮겨 다녔을 것이고, 기관총을 맨 폴란드 군인이 철조망을 지키는 그 속에서 감시를 받고 있을 거예요."
노라가 편지를 쓸 때 드라이얀의 주소는 모르고 있었다. 겉봉에는 드라이얀의 이름과 미군 점령 지구에 있는 모든 수용소의 번호가 다 적혀 있었다. 그러므로 노라의 편지가 드라이얀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모든 수용소를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놈들은 내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는 모양이에요. 나한테도 노라의 거처를 알려 주지 않았거든요."
사제는 아들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는 물수건을 이마에 얹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요한 모리츠는 그 곁에서 사제를 간호하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어떤 위로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괴로움에도 한계가 있는 거야. 나는 이제 그 한계점에 도달한 것 같아. 그 어떤 인간도 이 한계를 넘어서서 계속 살아갈 순 없을 거야."
드라이얀은 이렇게 말하고는 천막에서 나가 버렸다.
"드라이얀 씨가 자살하려나 봐요." 깜짝 놀란 요한이 말했다.
사제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줄곧 기도를 하고 있었으므로 요한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드라이얀과 노라뿐만 아니라 요한을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 서구 기계 사회 속에서 사는, 그대로는 도저히 지낼 수 없는 생명의 극한점에까지 도달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다.
"드라이얀 씨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살할 거예요."
요한의 다급한 음성에 사제는 눈을 떴다. 그는 요한 모리츠의 손을 잡아 보고는 아들을 찾아나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144

"얘야, 네 손을 좀 다오." 코르가 사제가 말했다. 그는 두 눈을 반쯤 뜬 채 누워 있었다. 이마는 창백했고 뺨에는 핏기가 없었다. 노인은 드라이얀의 손을 아무말 없이 자기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두 손의 따스함이 서로 전해지고 피가 서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오직 부자간이라는 혈육끼리만 느낄 수 있는 친근감을 느꼈다. 심장의 고동이 서로 호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코르가 사제의 맥박은 점점 약해져 갔다.
요한 모리츠가 물수건을 갈아주려 하자 사제는 조용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요한은 침대 끝에 앉았다.
"지금 네 손의 열기로 내 몸이 더워진 것이 아니라 너의 생명의 불길에 의해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구나! 네 몸은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불꽃으로 타고 있다." 하고 사제는 말했다.
드라이얀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사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두 가지 꿈을 꾸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성직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은 뒤에 판타나의 묘지에 묻히는 것이었어. 드라이얀, 너도 잘 알지? 담도 철조망도 없는 묘지, 꽃과 들풀이 뒤덮인 그 묘지 말이다. 그 묘지는 목장처럼 평화로워. 거기에 묻혀 영원 속에서의 나의 여로를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싶었어. 그런데 내 꿈은 이상한 형태로나마 실현된 거라고 여겨지는구나. 미국엔 못 갔으나 미국이 내게로 왔어. 나는 지금 미국 성조기가 휘날리는 이 수용소에 있으니 말이다. 또 판타나 묘지에 가서 묻히진 못 하겠지만 판타나의 묘지는 판타나 마을에서 점점 확대되어 전 유럽을 뒤덮었다. 판타나도 루마니아도 그리고 유럽 전체가 오늘에 와서는 세계 지도의 커다란 검은 점에 지나지 않지. 마치 지도 위에 한 방울 떨어진 잉크 자국처럼 말이다. 대륙은 전체가 죽은 듯 고요해지고 기쁨은 사라졌어. 마치 기쁨이 판타나의 묘지를 떠나 버렸듯이 유럽 대륙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어. 그러나 이제 곧 온 세계가 판타나의 묘지처럼 꽃과 들풀로 무성하게 되겠지. 그러니 대륙의 어느 곳에 묻혀도 상관없어. 나는 어디에 있든 철조망 없는 우리 판타나 마을의 묘지 속에 묻혀 있는 기분일 테니까 말이다." 사제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피곤하실 텐데 이제 그만 주무세요."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래 자마. 그런데 네게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드라이얀, 생명은 객관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즉 사실적이고 진실한 목적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라는 걸 알아라. 그런데 서구 기계 사회는 생명에 객관적인 목적을 부여하려 하고 있어. 생명을 멸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지. 그들은 생명을 통계로 환원시켰어. 그런데 모든 통계는 분류에 있어서 유일한 것을 인정치 않아. 인류가 진화하면 할수록 중요한 건 개인과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가 가지는 유일성(唯一性)인데도 현대의 기계 사회는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래서 모든 걸 일반화하는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단일(單一)한 것, 즉 개인적 존재 가치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 건 너무나 일반화하고 또 일반적인 것에서 모든 가치를 찾거나 구하기 때문이지. 여기서부터 러시아적인 또는 미국적이라고 생각되는 집합주의의 커다란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이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 일거다. 이건 어느 날 저녁 판타나에서 너도 말한 적이 있지. 기계 문명의 사회는 개인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어. 그건 인간을 질식시키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네 소설 속의 흰토끼처럼 죽어가고 있지. 우리들은 그야말로 네가 책에서 쓰려던 그대로 기계 노예와 시민만이 활동하는 이 사회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느님에 대해서 죄를 짓고 있어. 우리의 고유한 선(善)을 망각하고, 특히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기를 쓰고 하고 있는 거야. 인간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전락 단계에까지 이른 거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숱한 사회가 몰락했듯이 이 사회도 몰락의 길을 달리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논리적 질서로 이 사회를 구하려고 하지만 그런 시도가 오히려 이 사회를 몰락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 여기에 서구 기계 사회의 죄악이 있는 거야. 그들은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이고 인간을 이론과 추상과 계획의 희생물로 만들어 버리지. 그야말로 인간 희생의 근대적인 형태이지. 화형(火刑)과 단두대는 사무실과 통계로 바뀌어졌을 뿐이야. 이것은 인간 희생으로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생겨난 두 개의 현실적인 사회적 신화(神話)지." 사제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 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전제주의보다 확실히 우수한 사회 조직의 형태이지만, 그건 사회적 차원밖에 나타내지 못해. 민주주의를 생명의 의미와 혼동하는 것은 생명을 줄이는 것이고, 또 단일한 차원으로 생명을 축소시키는 거야. 이런 과오는 나치나 공산당과도 통하는 큰 과오야. 인간의 생명은 그 전체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야만 의미를 가지게 돼. 생명의 궁극적 의미에 충실하려면 예술을 감상하고 종교를 이해할 때, 즉 모든 예술적 창조 행위에 필요한 감성 없이는 안 된다는 거지. 생명의 궁극적 의미의 발견에 관하여 이성(理性)은 부수적인 역할밖에 못하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합주곡을 이해하는 데 수학이나 통계나 논리가 필요 없듯이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는 그런 것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아. 그러나 서구 기계 사회는 베토벤과 라파엘로를 수학적인 계산에 의해서 이해하려고 기를 쓰고 있어. 또한 그 사회는 인간 생활도 통계학으로 이해하고 개선하려는 데에 열중하고 있어. 이러한 시도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일이야. 하기야 인간은 이러한 제도에 의해서 사회적 완성의 절정에 도달할 수는 있어. 그러나 그건 인간에게 아무런 구원도 가져오지 못하지. 인간의 생명이 사회적이고 자동적인 것에 환원되고 기계 법칙에 굴복하게 되어 버리는 날에는 그 존재 가치가 상실되는 거야. 기계 법칙은 결코 생명에 대해 어떤 의미를 줄 수 없는 거지. 만일 생명으로부터 그것이 가지는 의미-생명이 가진 독특하고도 완전 무결한 의미, 논리를 초월한 의미-를 제거한다면 그 때는 생명 그 자체도 사라지고 마는 거야. 생명의 의미는 논리나 이해 관계처럼 객관적으로 획일화되지 않고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거지." 사제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현대 사회는 오래 전부터 이 진리를 포기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필사적인 힘을 다해 다른 길을 향해 돌진하고 있지. 그래서 라인 강이나 다뉴브 강이나 볼가 강이 지금 노예의 눈물로 넘쳐흐르고 있는 거야. 이와 같은 눈물은 유럽의 모든 강변과 지구상의 모든 강둑을 넘쳐흘러 끝내는 온 바다가 기계와 국가와 관료와 자본의 노예가 된 인간의 피눈물로 붉게 물들 날이 오고야 말 거야. 결국 하느님이 인간을 불쌍히 생각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칠 거야. 과거에도 그랬듯이 인간성을 지닌 몇몇 사람만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처럼 바다 위에 떠오르게 하시겠지. 역사를 따라서 거듭 반복되듯이 인류를 구하는 건 바로 이 사람들이야. 그러나 구원은 참다운 인간, 즉 개인 개인에게만 내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결코 어떤 범주에 공통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야. 어떤 교회나 국가, 또 어떤 정권이나 대륙일지라도 범주별로 구원되는 일은 없을 거야.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종교나 인종이나 그가 소속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범주의 여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람을 그가 속한 범주별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범주는 인간의 두뇌가 산출한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악마적인 착오야. 우리의 적도 하나의 인간적인 존재이지 범주는 아니란 걸 잊어서는 안 돼."
드라이얀 코르가는 사제가 숨을 돌리는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무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네 말대로 하마. 곧 자야지. 그러나 자기 전에 지금 말한 것만은 꼭 얘기해 두고 싶었다. 이 점에 대해선 너도 같은 생각이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걸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테지. 요한 모리츠도 느끼고 있어. 다시 한번 되풀이했더니 어쩐지 기분이 좋구나. 너한테 이걸 말하지 않고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손이 차요, 아버지."
"알고 있어, 드라이얀. 아마 내가 이겨 내지 못하는 불안 때문에 오는 거겠지. 육체의 불안보다도 더 강한 불안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무슨 뜻이에요.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요?"
"아니다." 사제가 대답했다.
사제의 입술은 마치 전선에 번개가 통한 것처럼 고통을 못 이겨 일그러지며 경련을 일으켰다. 드라이얀은 몸을 굽혔다.
사제의 얼굴에는 온화하고 무한한 사랑의 미소가 떠올랐다. 탐조들이 이마 뒤쪽 어디선가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드라이얀은 임종이 가까웠다는 걸 알고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한이 일어나며 물었다.
"의사를 불러올까요?"
드라이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꼭 쥐고서 절망과 비통에 싸여 소리내어 울었다.
비로소 요한 모리츠도 사태를 짐작했다. 그는 모자를 벗고 드라이얀 옆에 꿇어앉아 성호를 그었다.
잠시 후에 요한 모리츠는 일어섰다. 포로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웃 천막의 포로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요한 모리츠는 모자를 벗어 들고 말없이 서 있는 많은 포로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초콜릿 상자 거죽에서 긁어모은 파라핀으로 만든 초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는 초에 불을 붙여 빈깡통 속에 세워 그것을 코르가 사제의 머리맡에 놓았다.

145

수용소의 포로 의사가 들 것을 든 두 위생병을 데리고 코르가 사제의 시체가 있는 천막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드라이얀이 물었다.
"시체를 운반하러 왔소. 수용소 안에 시체를 놓아 둘 순 없으니까요." 하고 의사는 말했다.
"어디로 모셔 갈 작정인가요?"
"수용소 밖으로요. 그러나 우리도 시체를 어디로 옮기는진 몰라요. 상부에 보고하면 미군 차가 와서 실어 가게 돼 있어요."
"나는 아버지의 시체가 어디로 운반돼 가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심정은 이해하겠소만 우리 역시 모르니 어찌하겠소?" 의사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두 위생병이 침대 곁으로 다가와 들것에다 시체를 옮기려 했다. 의사는 몸짓으로 그들을 잠시 중단시키며 말했다. "우선 사망 확인을 위한 진단이 필요해. 아직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사제의 손목을 잡고 잠시 진맥을 하고 난 다음 몸을 구부려 노인의 가슴에다 귀를 대었다.
"운반해도 좋아." 의사는 두 위생병에게 말했다.
"안 돼!" 드라이얀이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우리도 당신과 같은 포로에 지나지 않아요.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오." 의사는 말했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시체를 어디로 옮겨가는지 알아야겠소. 매장하는 장소까지는 따라갈 수 없는 몸으로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요. 아무리 포로지만 자식으로서 그것만은 알 권리가 있어요. 이 분은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신 그 순간부터 내 아버지는 이미 포로가 아닙니다. 어떠한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죽었을 때는 누구나 그 죽음에 마땅한 대접을 해야 하오. 죽은 사람은 응분의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오."
"누가 마구 다룬다고 했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다만 나의 아버지는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셨으니까 아버지가 일생 동안 봉사해 오신 교회의 의식에 따라 매장해 달라는 겁니다."
"내일 서면으로 미군 사령부에 청원해 보시오."
"내일 해도 늦지 않는다고 보장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소. 나도 아무 권한이 없는 당신과 똑같은 포로입니다."
"그럼 나의 아버지의 시체를 이대로 두어 주시오. 정교회의 의식으로 매장한다는 보증을 받기 전에는 내보낼 수가 없으니까요."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지 마시오."
"고집일진 모르지만 여하튼 나는 나대로 권리를 주장하겠소."
"우리는 시체를 운반해야 해! 수용소에 시체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당신은 지금 강제로 운반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드라이얀은 말했다.
위생병이 드라이얀의 팔을 잡아 난폭하게 침대 곁에서 떼어놓았다. 사제의 시체가 들 것 위로 옮겨졌다. 양팔을 꽉 잡힌 드라이얀은 몸부림을 쳤다. 들것이 그의 곁을 지나갈 때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기를 썼다. 그러나 그는 밝은 달처럼 훤한 아버지의 이마밖에 보지 못했다.
요한 모리츠는 모자를 벗은 채 아직도 촛불이 타고 있는 흰 깡통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위생병의 뒤를 따랐다.
"죄 값을 받을 거야!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야! 의사도 잘 들어! 넌 내가 수용소 정문까지 시체를 따라가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돼." 드라이얀이 외쳤다.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수용소 규칙이 그러니 난들 어쩌겠소."
""진정하게. 자네가 떠드는 소리를 미국 사람들이 들으면 틀림없는 영창 행이야." 수용소 소장이 드라이얀의 곁에 와서 말했다.
"이제부턴 아무도 내 입을 봉하지 못 할걸. 내 부르짖음을 가둬 둘 독방 감옥은 없어. 오늘부터 나는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음식을 전폐할 테야. 나는 수용소 포로 2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라도 단식할 거야. 나는 항거의 표시로서 시간마다 조금씩 내 목숨을 끊어 갈 작정이다. 내 죽음은 반항의 외침이 되어 내 주위의 사람들, 말하자면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이나 또 나를 붙잡아 넣은 사람들의 귀와 눈과 피부에 배어 들어갈 거다. 그 울부짖음은 감방을 울리고 수용소를 울릴 거야. 아무도 이 분노에 귀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는 부르짖을 거야!"

146

"정말로 죽을 작정이세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요한 모리츠가 드라이얀에게 물었다.
드라이얀이 단식을 단행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날씨는 무더웠다. 드라이얀은 그늘진 천막 안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걷는 것도 피로하고 얘기하는 것도 피로했다. 서 있는다든가 남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든가 하늘을 쳐다본다든가 하는 그 모든 것이 피로를 줄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도 피곤했다.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또 한 번 그를 설득하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선생님. 점심을 이리로 가져다 드릴까요?" 그는 드라이얀의 밥그릇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그들은 오히려 잘됐다고 좋아할 거예요. 그러니 죽으려는 생각은 포기하시는 게 좋겠어요."
"자네가 내 몫까지 먹게. 나는 생각이 없다네."
요한은 나갔다가 곧 수프가 가득 든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수프 그릇을 땅에 놓고 호주머니에서 숟가락을 꺼내어 손으로 닦았다. 그러고는 두 무릎 사이에 수프 그릇을 올려놓았다. 수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그 냄새를 맡았다.
"내 몫까지 타 오라니까. 자네 몫만으로는 양이 부족할 텐데. 하긴 두 사람 몫으로도 충분하진 않지만."
"선생님 몫까지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벌을 내리실 겁니다. 선생님이 괴로워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저만 배를 불립니까? 그건 죄악이죠. 저는 그런 짓은 못 합니다."
요한은 무릎 사이에 그릇을 놓자 머리를 들어 찌푸린 잿빛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반쯤 벌리고 내리 깔리기 시작하는 먹구름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성호를 그었다.
드라이얀은 요한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요한은 무슨 의식을 행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수프 속에 숟가락을 넣었다. 그는 숟가락에 절반쯤 수프를 떠서 성직자들처럼 여유 있는 동작으로 그걸 입술로 가져갔다. 그것은 마치 성례(聖禮)를 받을 때와 같은 동작이었다. 한 숟가락 삼킨 다음 잠깐 멈추더니 마치 그 속에 수프가 아직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숟가락을 꼭 쥐고 있었다.
그의 크고 검은 눈은 망연히 먼 곳을 더듬고 있었다. 그 곳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아득한 곳이었다.
요한은 다시 숟가락으로 수프를 떴다. 한 번도 숟가락 가득히 뜨지 않았고 또 절반 이하로 내려가게 뜨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처음처럼 천천히 위엄 있게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요한 모리츠는 미사를 올릴 때처럼 담담한 자세로 식사를 계속했다.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본래의 타고난 위엄성을 되찾는 영양 섭취의 행위인 것이다. 모든 본질적인 행위를 대하듯 그는 서두르지 않고 주의를 집중시켜서 신중히 이행하고 있었다.
한 방울의 수프라도 입술에 묻히거나 땅에 흘리거나 숟가락에 묻히지 않았다. 거의 신성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요한 모리츠의 그 행위는 모든 회의주의도 무력하게 만들고 침묵시킬 만한 힘이 있었다. 요한 모리츠는 식사하는 동안만은 대자연의 호흡과 일치하는 것이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수액을 빨아올리는 나무처럼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행위에 온갖 정성을 쏟았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시간만은 자아를 되찾고 자연과 정답게 융화된 자기 자신에 빠져 있었다.
수프 그릇의 바닥에 붙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긁어먹고 난 요한은 자기 눈앞에 벌어진 풍경 가운데서 자기만이 볼 수 있는 것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손가락 셋을 모아 다시 한번 성호를 그었다. 그는 마치 오랜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드라이얀을 돌아보며 말했다. "남의 것을 먹으면 큰 죄를 짓는 거지요." 그러고 나서 일어나 그릇을 씻으러 밖으로 나갔다.
드라이얀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망막에는 포기해 버린 영양 섭취의 엄숙한 의식을 올리는 요한 모리츠의 영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47

"어떤 치료도 사절하겠소." 드라이얀 코르가는 말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수용소 소장 야콥센 중위는 단식중인 드라이얀을 수용소 밖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미국 신문 기자단이 독일 포로 수용소 시찰을 위해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내려진 지시였다.
드라이얀의 경우는 참으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여지가 많아서 신문 잡지에 보도 되었다간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드라이얀 코르가는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최근에 죽은 그의 아버지는 사제였으며, 다리까지 절단된 불구자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유대 인이었다. 사냥개 같은 신문기자들이 좋아할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야콥센으로서는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만일 신문이 이 문제를 들고일어나 보도전이라도 벌인다면 그는 즉시 본국으로 소환 될 것이다.
그는 지금 독일 도자기 수집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이것들을 겨우 담뱃값이나 지불하고 사들여 이미 영국 지구내의 창고 속에 보관중인데, 이제 배에 실어서 미국으로 보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재수가 좋아 독일 각처에 흩어져 있는 도자기들을 모두 사 모을 수만 있다면 그는 여생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전부 사들이려면 당분간은 이 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달갑잖은 신문기자들이 슈투트가르트에만 오지 않는다면 코르가의 사건쯤 겁내지 않았을 것이다. 코르가의 단식 건도 보고서에 기재만 하지 않으면 완전히 묵살 해 버릴 수도 있었다. 수용소의 나날은 죽음의 연속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포로가 매일같이 충분히 먹지 못해서 굶어죽고, 스스로 먹기를 거부하여 죽어 가는 사실이 그에겐 별 중대한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 단계는 소문이 그의 모든 계획을 깨뜨려 버릴 위험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을 피하고 싶었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 SS(친위대) 대령이며 바이마르 경찰서장이었던 슈미트 시장은 야콥센 중위에게 되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이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 놓겠다고 약속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 줄 의무가 있어. 설혹 환자가 치료를 원치 않더라도 말이야. 자넨 열이 있군. 우리는 자네를 수용소의 의무실로 옮길 생각이야." 하고 시장은 드라이얀에게 말했다.
밤 10시경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드라이얀의 침대 곁에 있었다. 그는 슈미트 시장의 말소리를 들을 적마다 몸서리를 쳤다. 요르그 요르단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두 사람의 목소리는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소. 나는 당신들의 속셈을 알고 있소. 이 속에서 나를 끌어내려는 것은 내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으면 추문이 폭로될까 두려워서라는 것을. 그러나 그걸 숨길 순 없을 거요. 당신네들은 내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두렵소? 당신들은 죽어 가는 포로들에게 관심이 없었잖소. 이 수용소에는 2만 명의 시체가 있는 셈이오. 표나지 않게 서서히 죽어 가면 골칫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거요? 하기야 그들은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죽어 갈터이니 소문날 염려는 없소. 왜 그들은 병원으로 실어 가지 않소?" 드라이얀이 말했다.
"자네를 입원시키라고 명령하는 건 의사로서의 내 의무일세. 자네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에 있네, 코르가. 이대로는 오늘밤을 넘기기가 힘들어." 포로 의사 도프르 박사가 말했다.
두 명의 위생병이 드라이얀 코르가를 짐짝처럼 들어 들것에 올려놓았다. 요한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는 드라이얀을 보호해 볼까도 생각했으나 사태가 벌써 싸워 봤자 소용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부당한 이유로 정의를 행하는 체하는 건 말할 수 없이 큰 죄악이오." 드라이얀은 말했다.
의사는 들은 체도 않고 위생병에게 명령했다. "운반해!"
위생병들은 들 것을 수용소 밖으로 운반했다. 포로들은 말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잠을 안 자고 몰려와 있던 포로들은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죽음의 전주곡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침묵은 극히 중대한 어떤 돌발적인 사건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보름달이 훤히 비치는 밤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상여 뒤를 따르는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들 것을 따라 걸었다. 그는 드라이얀의 옷과 신발, 안경, 그리고 파이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들것 위에 누운 자기 친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곧 울음을 그쳤다.
의무실 문간에 이르러 요한 모리츠는 들어오지 말라는 제지를 받았다.
"너는 안 돼! 정식 명령이다. 아무도 드라이얀 코르가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면회도 금지야. 옷과 신발은 내가 가지고 들어가겠다." 하고 시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문 앞에서 쫓겨난 요한 모리츠는 밤새도록 의무실 철조망 밖을 홀로 서성거렸다. 그는 드라이얀을 남겨 두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148

드라이얀 코르가는 병실에 갇혀 있었다. 이 병실은 원래 6인용인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드라이얀을 혼자 있게 하기 위한 조처였다. 위생병 둘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의 입술은 횟가루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흐릿한 영화 장면을 보는 듯한 환영이 간헐적으로 그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네온 빛과 같은 광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눈이 부셨다. 그 빛은 그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눈꺼풀이 타는 듯한 뜨거운 빛이었다. 그의 모든 생각은 채색되어 번쩍였다. 온몸이 빛으로 화하여 꿈같이 가볍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공중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도를 닦는 사람들과 신비론자들이 단식하는 이유를 알겠다.' 하고 드라이얀은 생각했다. '굶으면 이 지상에서 벗어나기가 쉬워지는군. 하느님이 바로 곁에 계시거든. 이마가 하늘과 맞닿는 것 같아.' 드라이얀 코르가는 한동안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강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위생병 하나가 드라이얀의 침대 옆 의자에 음식을 담은 쟁반을 올려놓았다. 드라이얀은 쟁반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그는 그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먼저 버터에 튀긴 감자 냄새가 났다. 다음에는 커피 냄새. 그는 벌써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본 듯이 쟁반 위에 담긴 음식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그는 이처럼 정확하게 냄새를 구별해 본 적이 없었다.
쟁반 위에는 따끈한 우유도 놓여 있었다. 우유 냄새도 커피 냄새에 못지 않게 자극적이었다. 고기 냄새도 풍겼다. 특히 고기 냄새는 마치 그림에서 보는 강렬한 색채처럼 유난히 강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버터와 구운 고기 냄새는 다른 음식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었다. 이 냄새들은 이불과 셔츠와 머리와 벽에 점액질처럼 달라붙어 끈적거리며 그가 숨을 쉴 때마다 폐와 위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그 음식물들을 한창 먹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결사적인 단식의 부동성이 약화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숨을 쉴 때마다 음식 냄새가 섞인 공기를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프리즘을 통해 빛의 색깔을 구분하듯 그 음식 냄새를 냉철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후각 능력을 실험하는 한 방법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음식물을 과학적 분석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 먼저 알아낸 것은 고기가 쇠고기도 돼지고기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건 통조림 고기였다.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이긴 하나 닭고기 아니면 아마 칠면조고기 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계속 벽 쪽을 향하고 있었다. 우유에서는 약간 탄 냄새가 났다. 분유를 물에 탄 것인데, 농도가 너무 진해서 급히 데우는 바람에 탄 것이다. 쟁반 위에는 경동에서 꺼낼 과일도 있었다. 그 냄새가 제일 약했다. 드라이얀은 아주 연한 수채화 색깔처럼 감별하기 힘든 냄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탕에 졸인 과일 냄새라는 걸 알았을 때는 마치 자신이 신기록을 세웠거나, 또는 실험실에서 중요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강력한 지적(知的) 만족으로 흥분했다. 한 가지 남은 궁금증은 쟁반 위에 빵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있다면 그것은 전분(澱粉)만 남도록 정제된 미국산 밀가루로 만든 흰빵일 것이고, 딱딱하게 굳은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먹는 게 좋을 거요. 식으면 맛이 없을 테니까." 위생병이 그의 침대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드라이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끝내 음식을 보지 않고 계속 분석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방해 당하고 보니 다시 주의가 집중된다든가 아까처럼 평정한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냄새가 하나로 뭉쳐지고 말았다. 마치 스펙트럼의 일곱 빛깔이 하나로 합쳐져 흰빛으로 변해 버리듯이 위생병의 말 한마디는 샘물에 던진 돌멩이가 물결의 조화를 뒤흔들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냄새의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다시 냄새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음미할 수 없게 된 것이 서글펐다.
이튿날 아침까지도 쟁반은 그대로 거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드라이얀은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 냄새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음식물은 이제 말라붙었거나 혹은 죽은 것이었다.
드라이얀은 여전히 탈진 상태였다. 그는 벽 쪽을 향한 채 한 번도 돌아눕지 않았고 눈도 뜨지 않았다. 입술에 침을 발라 몇 번인가 적셔 보았으나 쓰디쓰고 칼칼한 맛뿐이어서 실망했다.
위생병이 새 음식을 가져와 침대 옆에 놓았다. 이번에는 계란 프라이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 냄새는 포스터 컬러의 짙은 색깔처럼 강렬했다. 달걀 곁에는 오렌지 잼과 우유, 커피, 그리고 버터가 놓여 있었다. 이 모든 냄새는 드라이얀의 육체를 화살로 찌르듯이 쑤시며 파고들었다. 드라이얀은 그 호된 고통을 참느라고 아예 눈을 감았다.
"주여, 어서 당신 곁으로 불러 주시옵소서. 이 육체 속에 갇힌 인간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유혹과 대결한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하고 드라이얀은 중얼거렸다.
그는 2, 3일만 참으면 육신이 굴복할 것으로 믿고 스스로를 달래었다.
"2, 3일 후에 나는 죽어 있을 거야."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

149

드라이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대낮이었다. 포로들이 벌거벗은 채 늘어서 있었다. 수용소 마당은 벌거벗은 남자들로 득실거렸다.
의무실 들창 바로 밑에 지프가 한 대 세워져 있고, 곤봉을 든 군인들이 그 주위에 늘어서서 껌을 씹고 있었다. 포로들은 한 사람씩 멈칫거리며 군인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벌거벗은 사람은 어색하게 걷게 마련이다. 드라이얀은 그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해 봤기 때문이다.
"또 검색이야? 이번에는 또 무엇을 찾을 셈인가?" 하고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검색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실시되었다. 마침 노인 한 사람이 군인들 앞으로 나왔다.
"바르샤바의 대주교로군." 드라이얀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바싹 마른 대주교는 등이 양간 구부러지긴 했으나 키가 컸다. 하도 여위어서 멀리서도 갈빗대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살가죽에 싸인 해골이었다. 대주교의 수염은 흰색이었는데 마당에서 유일한 흰색이었다. 그 흰 빛깔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채를 느끼게 했다. 그것은 흰 문장(紋章) 같은 느낌을 주었다.
군인들은 그가 다가오자 웃었다. 그러나 대주교는 그들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군인들의 모자 너머 활짝 트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의 하늘은 비잔틴식 성당의 둥그런 지붕처럼 푸른 색깔이었다.
군인은 대주교의 손가락을 조사했다. "손가락을 펴!" 통역이 소리쳤다. 노인은 잠자코 손가락을 벌렸다. 군인들은 대주교의 손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팔을 들어올려!" 통역이 다시 명령했다. 노인은 또 팔을 올렸다. 처음에는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처럼 가슴높이로 올리고 그 다음엔 머리 위까지 번쩍 들어올렸다. 그는 통역도 군인들도 보지 않았다. 통역과 군인들은 겨드랑 밑을 조사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보석이었다. 다음에 그들은 목덜미 위까지 늘어진 머리칼을 검사했다. 대주교는 흰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으므로 그 속에 보석을 감추려면 반지 하나쯤은 감출 수도 있을 것이었다. 군인들은 처음엔 곤봉 끝으로, 그 다음엔 손으로 머리칼을 가닥가닥 헤쳤다. 그들은 이렇게 머리 위에서부터 목덜미까지 빈틈없이 조사한 다음 수염 속에 감추지 않았나 하고 수염을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뒤로 돌앗!" 통역이 말했다. 노인은 군인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엎드렷!" 통역의 말이 떨어지자, 노인은 소리 없이 허리를 구부렸다. 마치 그리스도 상(像)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자세 같았다. 조사는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리를 벌려!" 통역이 말했다.
대주교는 다리를 벌렸다. 가늘고 하얀 다리였다. 통역과 군인들은 허리를 굽히고 가랑이 사이를 조사했다. 군인 한 사람이 귓속말로 자기 동료에게 무어라고 속삭였다. 노인은 등을 돌리고 다리를 벌린 채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이젠 가도 좋아!" 통역이 말했다. 군인들 앞에 다른 포로가 나섰다.
대주교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이 없이 멀어져 갔다. 그의 수염과 머리는 바람을 안고 하얀 비단 깃발처럼 휘날렸다. 드라이얀의 눈에는 대주교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옷을 벗은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그가 나체들의 대열에 끼여들 때까지 눈으로 그를 좇았다. 이상했다. 노인은 다른 포로들과 같이 있었음에도 군중 속에 아주 섞인 건 아니었다.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노인의 머리 주위를 감돌고 있어서 드라이얀의 시선을 끌었다. 아마 흰 머리칼과 흰 수염 때문이리라. 아니면 아마도 노인의 머리 모습 때문이리라. 그리스도의 성스런 모습을 우러러볼 때처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이제 알 것 같아.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드라이얀 코르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위생병이 그를 돌아봤다. 그러나 드라이얀은 그대로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위생병들이 옆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대주교의 머리는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후광(後光)이야. 그의 머리 위에선 네온이나 전깃불보다도 더 강한 빛이 비치고 있어. 그것이 머리 둘레에 빛을 퍼뜨리고 있는 거야. 금빛을 말이야.'
대열 속으로 들어간 노인은 의무실 들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를 싸고도는 후광이 더 찬연한 빛을 발했다.
'후광은 성상을 그린 화가의 창작물이 아니야.' 하고 드라이얀은 생각했다. 그는 다른 포로들도 살펴봤다. 후광을 지닌 포로가 몇 명 더 있었다. 그는 그들이 누군지 모두 알지는 못했다. 빈의 한림원 원장, 베를린의 젊은 신문기자, 그리스의 대신, 베를린 주재 루마니아 대사들이 머리 위에 후광을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의 이마는 강렬한 불꽃이나 전기 반사경처럼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을 불꽃이나 전깃불로 이루어진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들의 이마에서 발산하는 빛은 온 세계를 밝게 비춰 주리라. 그리하여 이 땅 위를 결코 밤이 짓누르지 못하게 하리라....

150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요?" 야콥센 중위가 물었다. 그는 드라이얀과 단둘이만 얘기하기 위해서 의사와 시장을 밖으로 내보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요? 이 수용소가 자선 사업소인 줄 아오? 소란을 피우는 당신을 달래면서 언제까지 우리가 참아야 하겠소?" 중위가 말했다.
"난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으니까 안 먹는 거요. 전혀 입맛이 없고 구역질이 나서 위가 뒤집히는 것 같소. 그런데 중위님! 당신은 이런 경험이 없나요?" 드라이얀이 물었다.
야콥센 중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드라이얀 코르가와 단둘이 남은 것을 후회했다. 이 포로는 틀림없이 정신이 돈 것 같다. 그래서 두 눈만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다. '갑자기 달려들어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지도 모르지!' 하고 장교는 생각했다. 그는 문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고 나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코르가 씨, 마음을 진정해요. 당신은 몹시 흥분해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엿새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있으니."
"나가지 말아요, 중위님. 나는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두려워할 것 없어요. 구역질이 나지 않느냐고 물은 건 내 어리석음 탓이오. 중위께서 메스꺼워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요. 처음부터 눈을 감고 코를 막고 시작하면 구역질이 날 염려는 없겠죠. 인간은 무엇에든 쉽게 익숙해지니까요. 메스꺼움도 마찬가지 일 거요. 이건 오직 의지력의 문제지요. 그런데 나는 의지력이 약한가봐요. 매번 속이 거북스럽고 구역질나니까 말입니다.
노동자들은 수채 구멍이나 변소 옆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지요. 습관이 되면 비위도 좋아지는 모양이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변소 바로 옆에서 소시지와 버터 바른 빵을 먹는 그들을 보았소. 그들은 입맛을 쩝쩝 다셔 가며 즐겁게 농담까지 하더군요. 아무리 지독한 악취일지라도 결국 습관들이기에 달렸나 봅니다. 수용소의 시체를 태우는 화부들도 화구만 닫히면 곧 유쾌한 기분이 되어 식사하러 가지요. 물론 메스껍다든가 속이 거북하다든가 하는 눈치는 조금도 없어요. 그들 가운데는 수용소에서 죽은 여자들의 머리칼로 요를 만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그 요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죠. 살해되어 화장 당한 여자들의 머리칼이 든 요 위에서 그들은 아내와 함께 아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 아무런 혐오감이나 메스꺼운 기분을 일으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이 잘 만들어져서 좋다고 아주 기뻐하더군요.
나는 침실과 응접실에서 사람 가죽으로 만든 전등갓을 비치했던 여자와 한 수용소에서 지낸 일이 있습니다. 그 전등갓은 누르스름하고 음란한 광선을 방에다 비춰 주더군요. 바로 그 빛 아래서 그녀는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사랑하는 사나이에게 몸을 맡기고 키스를 하면서 행복에 젖더군요. 인간은 구역질에도 곧 익숙해지게 마련이오.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습관과 의지력의 문제지요.
소련군들이 여든 살 난 노파를 강간했는데,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한 사람씩 차례차례 열 번 이상 윤간했다는 겁니다. 여든 살 먹은 노파와 관계를 한 뒤에도 그들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서 보드카를 마시고 웃으며 즐겼소. 당신네들은 물론 이런 짓은 안 하리라고 믿소. 당신네들은 강간 같은건 하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요. 당신네들은 또 동침을 하려면 여자에게 초콜릿을 주고 예방 도구 같은 것도 사용하실 겁니다. 나라에 따라서 습관은 다르게 마련이오.
문제는 어떤 짓을 하든 안 하든 구역질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오. 확언하건대, 당신은 그런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되오. 구역질은 나지 않을 테니까. 구역질은 아주 괴로운 것이오. 그것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는 잘 모르지요. 내 창자는 장갑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뒤집혀져 내 입까지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담즙도 거꾸로 올라오고 위장은 구역질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연민을 느낄 따름이오. 무서운 연민이지요. 이런 형편인데 내가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아직도 나에게 식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야콥셑 중위는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시장과 의사는 드라이얀 코르가가 미쳤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 환자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보고를 받았었으나 지금 환자의 얘기를 들어 보니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환자는 정신 이상이었다.
"당신 말이 옳소, 드라이얀. 이런 상태에서 식욕이 없는 건 당연하지." 중위는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도저히 일어설 기운이 없어. 그러니 들창 밖의 검사가 끝났는지 그걸 알려 주시오." 드라이얀이 말했다.
"아니, 아직도 하는 모양이군." 아콥센 중위가 대답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수용소 마당에서 저런 검사를 하는데 어쩌면 무감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곧장 식사하러 갈 수 있을까?
야콥센은 바로 식당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정오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죠? 지금 시작한 거나 다름없으니 곧 끝나진 않겠군요. 처음에 당신네들은 금을 찾으려고 가방 속에 집 안, 옷 속, 호주머니 속, 신발 속, 그리고 팬티 속 등을 뒤지더니 이제는 사람의 입과 겨드랑이, 사타구니까지 샅샅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벌거벗겼으나 아직 시작에 지나지 않지요. 내일은 아마 사람의 껍질까지 벗겨서 금을 찾으려 할 테지요. 그래도 부족하면 뼈를 쪼개고 인간의 두개골마저 부술 겁니다. 그들의 내장을 휘젓고 또 그 내장을 토막토막 자를 겁니다. 이 모든 일이 금, 금 조각, 금가락지를 찾기 위해서이죠. 나중엔 인간의 심장까지 난도질을 할거요. 금을 찾기 위해서. 금! 금!~ 금! 오늘은 시작이니까 아직은 피부가 남아 있어요. 그러나 결국 피부도 벗겨지겠지요. 검사는 얼마든지 계속될 터이니...."
야콥센 중위는 어느 새 나가고 없었다. 드라이얀은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151

  탄원서 제 6호
  경제 문제(포로에게서 발견된 가치에 대하여)
당신네들은 포로를 검색해서 반지, 팔지, 시계, 만년필, 돈, 기타 값나가는 모든 물건들을 모조리 압수합니다. 알몸을 뒤지며 법석을 떠는 당신들의 검색에는 아직도 충분치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오늘 나는 검색을 받는 몇몇 포로에게서 성상에 그려진 성인들의 후광 같은 광채가 그들 머리 둘레에서 빛나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내가 보아 온 성인들의 후광은 황금빛이었습니다만, 포로들의 그것은 금이나 다른 귀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런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들의 후광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금에 눈이 먼 당신들에게 벌써 몰수당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 후광들이 귀금속은 아니지만 그 가치는 업신여길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과학자가 아닙니다만 포로들의 이 후광은 굉장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직 몇몇 포로들의 '정신'이 발산하는 빛에 의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서구 기계 사회에서는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과 대조해 본다면 퍽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문명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 후광이 만일 어떤 가치가 있다면 포로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도록 버려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역사상 이런 종류의 관-또는 후광-이 몰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칭기즈칸 같은 야만적인 정복자도 포로들한테서 이런 후광을 발견하고 상당히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해서 그런 포로들을 골라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수송 방법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 후광의 형태와 빛을 그대로 보존해서 궁궐로 가져가려고 마음먹은 칭기즈칸은 후광이 감도는 머리만 운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중국과 아라비아 포로들 중에서 후광을 지닌 머리들은 줄에 꿰어져 말안장에 실려서 몽고까지 운반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서 기후 상태와 기온의 변화로 그만 후광이 사라져 어느 머리에도 그 웅장하던 빛은 스러지고 말았으니, 부득이 내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들 머리가 썩어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칭기즈칸이 한 것처럼 포로들의 목을 자르지는 마십시오. 귀중한 후광을 지닌 포로들을 잘 조절된 공기와 일정한 온도가 유지된 탱크에 넣어서 당신의 본국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리들의 사회는 필요한 기술적인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옛날의 정복자들이 입은 손해를 면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연대기를 들춰보면 이미 50만의 값진 후광이 이처럼 헛되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변함 없이 보내는 나의 무한한 찬사를 어여삐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웃음을!

152

"5분 이내에 병원으로 옮긴다." 슈미트 시장은 뒷짐을 지고 드라이얀의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거기 가면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어야 해. 강제로 먹이겠어. 우리들은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다. 야콥센 중위도 애를 많이 썼지. 그러나 자네는 우리들의 성의를 몰라 준단 말이야.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자네는 받아들이지 않았어. 우리들에게 등을 돌려 왔단 말이야." 드라이얀은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덮어놓고 거부만 했어!" 시장은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개인 문제로 의사들과 야콥센 중위는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어. 우리들은 2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상대해야 돼. 당신 하나에게만 매달릴 수는 없는 거야. 당신은 한 몸이지만 전체는 2만 명이야. 그러니 개인적인 문제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어. 우리에게도 처자식이 있어. 죄수들이 모두 자네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되겠나 말이야. 자네는 집단 생활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야. 자기 혼자의 일만 생각할 뿐이지 전체의 일은 모른 체한단 말이야. 야콥센 중위를 비롯해서 모든 미국인이 그러하듯 개인적으로 나도 낭만주의자고 또한 민주주의 신봉자야. 그래서 요즘 며칠 동안 나는 다른 2만 명의 포로들이 불편해할 거라는 것도 제쳐 두고 이 수용소에서 단 한 사람의 일로 적어도 다섯 시간을 소비했어. 이건 정신나간 짓이야."
"당신이 포로들에게 무슨 일을 해 주었다는 거요? 당신은 아무 것도 돌보지 않았소. 그저 그들을 관리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소. 이 수용소의 사람들을 카드 분류기나 타이프라이터 계산기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돌본 것은 그저 2만의 기계일 뿐이오. 아시겠소? 2만 명의 포로들은 살과 피의 정신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고통과 신앙, 욕망과 기아. 절망과 꿈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의 살과 피 같은 개인적인 요소도 돌보지 않았고 그들의 희망과 절망 같은 보다 더 개인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소. 당신은 숫자와 서류에만 관심이 있지 한 사람의 포로도 알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포로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당신이 어떻게 2만 명의 포로를 돌본다고 말하는 겁니까? 우습군요. 당신이나 야콥센 같은 비인간이 갖는 관심이란 건 관념이며 추상일 뿐이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도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당신의 눈에는 2만 중의 한 분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오. 당신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화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거요. 당신은 나를 개인으로 보지 않으니 말이오. 당신은 당신의 아내까지도 독립된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소. 당신은 아내를 자녀의 어머니, 또는 주부로서만 보아 왔지 결코 여자로 보지는 않았을 거요. 그러나 당신 부인은 분명히 하나의 인격체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요. 당신은 지구상에 있는 어느 한 인간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그 중의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은 1차원의 세계에서만 인간을 보고 있소. 그러나 그러한 당신의 눈에 비친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오. 그건 마치 삼각형의 한 변을 없애 버리면 더 이상 삼각형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요." 드라이얀은 시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위생병이 구급차가 도착했다는 걸 알려 왔다.
"내 친구 요한 모리츠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소." 드라이얀은 말했다.
"다른 포로와 말하는 건 금지되어 있어!"
드라이얀 코르가는 시장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위생병은 그를 이불에 둘둘 말아서 짐짝처럼 들어 구급차에 실었다.
구급차의 창문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가 의무실 문간에 서서 자기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라이얀의 입가에 따사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좋은 친구 요한 모리츠에게 마음 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있게!"

153

"미군 두 명이 수용소에서 발광한 포로를 데리고 왔습니다."
칼스루에의 포로 병원 원장은 침대에서 나와 전기 스위치를 누르고 시계를 봤다. 새벽 1시였다. 기다리고 있던 위생병이 옷을 입는 원장을 거들어 주었다. 의사는 잠을 설쳐서 언짢은 기분으로 방을 나갔다.
포로를 병원에 데리고 오려면 언제나 100명이라는 숫자가 차야만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위독한 환자라도 100명이라는 숫자가 차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더러는 3, 4주일을 기다리는 환자도 있었다. 지난 1년 동안에 예외는 두 번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예외였다.
"단 한 명을 이런 시간에 보내다니, 도대체 어떤 미치광이지?" 사무실로 들어가며 의사가 물었다.
"아마 대단히 중태인 모양입니다. 저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구급차 속에서 자고 있더군요. 미군 두 사람이 이런 시간에 수고를 무릅쓰고 일부러 데리고 온 것을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태인가 봅니다." 위생병이 대답했다.
바깥은 몹시 추웠다. 의사는 포근한 잠자리에서 금방 나온 참이라 포로의 입원카드에 서명하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환자를 운반해 온 미군들은 구급차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의사는 너무 추워서 포로를 진찰하고 싶지 않았다. 위생병에게 적당한 방에 넣어 두라는 지시만 내리고 곧장 잠자리로 돌아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중에 구급차가 고장을 일으켜 한밤중이 되도록 지체한 것도 몰랐다. 그에겐 시간 관념도 없었다. 들것에 실려서 병원 마당으로 들어섰을 즈음에야 잠시 눈을 떴을 뿐이었다. 그 때 그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았다.
"은하수다!" 드라이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별무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병원에 가면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이겠다던 시장의 말이 생각났다.
드라이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치료를 받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의식이 있는 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거절하리라.'
위생병들은 그가 '은하수다!'라는 말을 하자 낄낄거리고 웃었다. 드라이얀이 은하수를 감상한 데 대한 감탄과 조소, 그리고 광기에 대한 연민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들은 들 것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중 한 사람이 드라이얀에게 다가오며 농담을 했다.
"자, 은하수에 다 왔다."드라이얀 코르가는 그 농담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윽고 누군가 자기를 안아서 침대에 누이는 걸 알았다.

154

드라이얀 코르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천장에는 철망으로 둘러싼 등불이 걸려 있고 들창에는 쇠창살이 튼튼하게 박혀 있었다. 침대가 네 개 놓여 있었는데, 환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간밤에 드라이얀이 들어올 때도 본 체도 않고 이야기만 했었다. 둘 다 젊은 사람이었다. 또 한 사람은 침대 속에서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이불 밑으로 큰 구두 두 짝이 비죽이 나와 있었다. 드라이얀은 그가 왜 구두를 신은 채로 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문 옆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위생병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는 꼭 슈미트 시장의 머리와 비슷했다. 크고 네모진 머리였다. 그의 얼굴은 전혀 표정이 없어서 마치 나무로 만든 공작품 같았다. 두 눈도 역시 유리알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가 드라이얀에게로 다가왔다.
"너는 어떤 신세 타령을 할 셈이지?" 그는 어린애를 꾸짖을 때처럼 드라이얀의 턱을 치켜올렸다. 드라이얀은 대꾸도 하지 않고 얼굴을 돌렸다.
"아무 얘기도 안 들려 주겠단 말이지? 이 친구, 말이 없는 족속이로군." 위생병이 이렇게 말하고 드라이얀의 뺨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만일 노래가 듣고 싶거든 천장에 매달린 거미에게 들려 달라고 해." 이렇게 내뱉고 위생병은 문 옆에 놓인 자기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155

'이런! 단식 투쟁을 했다고 나를 정신 병원에 처넣었구나!' 드라이얀은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사라져 버리고 일순간 싸워 보리라는 강한 의욕이 불같이 치솟았다.
'나를 미치광이로 취급하다니, 참으로 기발한 수법이군. 소련 감방의 고문 광경을 묘사한 소설에도 없는 기막힌 발상이야. 수용소의 포로 의사도 교수라는 작자들도 모두 내가 미치광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서명을 했겠지. 나의 투쟁 선언이 하나의 광적인 행위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나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게 급속하게, 더군다나 그리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아야 돼. 나는 계속해서 투쟁을 할 테니 두고 봐!' 드라이얀 코르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선 그들에게 내가 정신 이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줘야지.' 드라이얀은 위생병에게 다가갔다. 그는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이 벽에 기대었다.
"드디어 신세 타령을 하시려고?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이렇게 말하며 위생병은 싱글싱글 웃었다. "여기에 들어온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세 타령을 하고 싶어하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지금 나는 네 얘길 들어 줄 시간이 없어. 내일이나 모레, 한 달 후, 아니면 1년 안에는 기회가 오겠지. 얘기할 시간은 넉넉하니까 말이야." 위생병은 읽던 신문을 계속해서 읽었다. "네 침대는 저 구석에 있는 거야. 가서 조용히 누워 있기나 해. 알아들었나?"
"당신에게 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소."
"네가 뭘 물어 보고 싶어하는지 난 알고 있어. 그러나 지금 나는 시간이 없다니까 그래. 어서 침대로 돌아가. 말을 잘 들어야지. 괜히 귀찮게 굴면 이 채찍 맛을 톡톡히 보게 될 거야!" 위생병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책상 서랍에서 채찍을 꺼내 드라이얀에게 들이밀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상대방은 듣지 않을 것이며, 미친 사람의 잠꼬대로밖에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침대로 되돌아와 누워 버렸다.

156

'감옥에 넣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던 모양이지. 그러니까 나를 정신 병원에까지 처넣었지.' 드라이얀은 눈을 감았다.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의 계획을 세워 보려고 했다. 그러나 체력이 견디지 못해 주먹을 꼭 쥐고 그냥 잠이 들었다.
"일어나!"
드라이얀은 놀라서 눈을 떴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다. 눈앞에는 전 날밤 은하수에 왔다고 놀리던 그 위생병이 서 있었다. 드라이얀은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호주머니 속에 있는 걸 모두 끄집어내!"
드라이얀은 일어났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먼저 손수건을 꺼내 위생병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호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 아까처럼 내밀었다. 윗주머니에는 조그마한 성상이 들어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 상이었다. 드라이얀은 성상을 잠시 바라보고 나서 위생병에게 내주었다.
"다 꺼냈나?"
"그렇소. 그게 전부요."
"팔을 들어 봐!"
드라이얀은 가슴 높이까지 팔을 올렸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 팔을 올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더 높이 들어!" 위생병이 명령했다.
"더 들 수가 없소. 속이 매스껍고 어지러워 더 올릴 수가 없소."
위생병이 드라이얀의 팔을 잡아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드라이얀은 자기의 팔이 건만 돌멩이를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팔이 이렇게 무겁다고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팔을 다시 내릴 수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위생병은 그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의 억센 손이 호주머니 속뿐만 아니라 살갗 속까지 휘젓는 것처럼 느껴졌다.
"팔을 내려도 좋아." 드라이얀이 팔을 내리지 못하자 위생병이 손을 잡아 가만히 내려 주었다.
"구두끈을 풀어!"
"이제 그만둬!" 병실에 있던 위생병이 말했다. "저 얼굴빛을 좀 봐. 양초처럼 하얘졌어."
드라이얀 코르가는 침대에 도로 뉘어졌다. 위생병들이 구두끈을 풀고 구두를 벗겼다. 그러고는 바지를 벗기고 군복 팬티의 끈을 빼내어 그것도 압수했다. 뒤이어 그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만은 그대로 두시오!" 드라이얀은 애원했다. 그는 대단한 근시였다.
"안경알로 동맥을 끊으려고 그러지?"
"아니오. 안경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소."
"여기선 아무 것도 볼 게 없어."
위생병은 안경과 손수건과 파이프,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의 성상을 한데 모아 쌌다. 그것은 드라이얀이 이 세상에서 간직하고 있는 전 재산이었다. 위생병은 그것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157

"일어나 밥 먹어!"
정신 병원에 들어와 처음 맞는 아침이었다.
드라이얀은 간수가 내민 수프 그릇을 힘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필요 없소. 난 안 먹겠소."
"그따위 고집을 부려도 소용없어. 여기서는 단식이 통하지 않아." 위생병이 말했다. 그는 침대 옆 마룻바닥에 수프 그릇을 내려놓고 다음 침대로 다가갔다.
"나는 엿새째 단식을 하고 있어요."
"너만 단식하게 놔둘 줄 알아? 여기서는 도대체 먹으려는 놈이 없어. 그러나 먹지 않고는 못 배겨!"
위생병은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구두를 신은 채 자고 있는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불을 잡아 젖혔다. 백발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두려운 듯 위생병을 쳐다보고는 베개 속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이오!" 노인은 이렇게 묻고는 또 베개 속에 얼굴을 묻었다.
"영감, 엉큼 떨지 말고 일어나! 딴 수작 부리면 따끔한 맛을 뵈줄 테니!" 위생병이 명령했다.
젊은 두 정신병자가 노인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들은 서로 떨어질 세라 꼭 붙어 있었다. 위생병은 그들을 '불독'이라고 불렀다.
"이봐, 불독! 영감을 일으켜 줘!" 위생병이 명령했다. 마치 개한테 명령하는 것 같았다.
불독 중의 하나가 노인의 뒤에서 겨드랑 밑에 손을 넣어 노인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머리를 잡아서 일으켜 앉혔다.
"살살 조심해서 다루어라. 뼈 부러질라." 위생병이 웃으면서 말했다.
노인은 울고 있었다. 가슴에 턱을 박고 마룻바닥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영감, 입을 벌려요. 유모가 젖을 먹여 줄 테니!"
노인은 여전히 턱을 가슴에 박고 있는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입을 열어! 조심해서!" 위생병이 명령하자 불독들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나가 노인의 머리를 뒤로 젖히자 다른 하나가 노인의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위생병이 코를 틀어쥐고 다른 한 손으로 수프를 입에 흘려 넣었다.
노인은 웃음을 터뜨린 불독 가슴에 수프를 뱉어냈다. 그러나 위생병이 다시 국물을 흘려 넣었을 때는 미처 뱉지를 못했다.
수프가 목구멍을 막아 버려서 질식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위생병이 코를 손가락으로 잡고 있어서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숨이 막혀!" 노인이 소리쳤다.
작업은 계속되었다. 노인은 가끔 숨이 막힌다고 비명을 지르며 힘껏 껴안고 있는 불독의 품속에서 몸부림을 쳤다.
"어때, 영감? 맛있지?" 위생병이 말했다. 노인은 양초처럼 얼굴이 하얘졌다. 이것을 지켜보던 드라이얀은 눈을 감았다. 차마 볼 용기가 없었다.
"무서워? 잠시 후엔 네 차례야." 위생병이 드라이얀을 돌아보고 말했다.
"저 녀석도 먹여 줍니까?" 두 불독이 동시에 물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먹여 줄 수밖에 없지."
두 불독은 노인에게서 물러서서 드라이얀의 턱과 목을 노려보았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몸을 굽혀 수프 그릇을 들고 단숨에 국물을 들이켜 버렸다. 다 먹고 나서 그는 말했다.
"당신네들이 옳아. 정신 병원에 와서까지 먹는 걸 거절한다면 정말 미치광이지. 미치광이가 어떻게 단식 투쟁을 하겠나? 미치광이는 책임을 질 수 없으니 의사를 표시할 수도 없어.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야. 내가 음식을 먹은 것은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일 뿐이야. 그러나 투쟁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야."

158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의사한테 보여 줘야겠어.' 드라이얀은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셨다. 또한 억지로 급히 삼킨 음식이 위에 큰 부담이 되어 괴로웠다.
그러나 드라이얀은 발을 땅에 붙이고 똑바로 서 보려고 노력했다. 미소를 지어 보려고 애쓰면서 그는 위생병 곁으로 다가갔다.
"담당 의사에게 할 말이 있소."
"회진할 때까지 기다려. 그 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위생병이 대답했다. "여기 환자는 회진 시간 외에는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되어 있어."
"알겠소. 미친 사람을 위해서 의사가 번거로운 수고를 하시지는 않겠지. 그러나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오."
"미치지 않았으면 왜 이리로 왔지?"
"단식을 중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데려온 거요. 나는 지금까지 단식 투쟁을 했었소.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부터 나는 먹기로 했소. 그러니 더 이상 나를 미치광이로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내가 계속해서 먹는 걸 거부했더라면 내 행동을 광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 단식은 포기했으니 문제는 해결된 거요."
드라이얀은 위생병이 자기의 말에 전혀 귀도 기울이지 않고 줄곧 신문만 읽는 걸 보았다. 그는 드라이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먹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아직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의 음성은 떨렸다.
"이제 가서 자! 신문 좀 읽어야겠다." 하고 위생병이 명령했다.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오!"
"알았어, 알았어. 물론 그럴 테지. 이젠 누워서 조용히 있어. 여기서는 말을 잘 들어야 해 말을 안 들으면 매밖에 돌아갈 게 없어."

159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도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오쯤 되어서 불독 하나가 위생병에게 불려 나가더니 반시간쯤 후에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뉘어진 그의 코에는 솜이 틀어박혀 있었는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마도 창백했다. 그는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푸르스름한 거품을 입에 물고 있었다.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드라이얀이 물었다.
다른 불독은 초주검이 되어 있는 자기 친구의 경련 하는 육체를 보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들것에 누운 불독의 가슴은 대장간의 풀무처럼 벌떡거렸고 팔과 다리가 몸에서 분리된 듯이 근육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척추가 죽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로봇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흡사했다. 다만 살아 있다는 단 하나의 표시는 입에서 흘러 가슴 위로, 다시 들 것 위로 번지는 푸르스름한 거품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드라이얀이 다시 물었다.
"별일 아냐, 주사를 한 대 맞았어." 위생병이 대답했다.
"무슨 주사기에 저렇게 되었습니까?"
"알고 싶은 것도 많군! 차차 알게 돼. 너도 내일이면 맞게 될 테니까."
"놀랐나? 겁이 많은 모양이군. 여기서는 모든 주사를 맞아야 해." 위생병은 불독의 코에 박혀 있는 솜을 새 것으로 갈아 끼우고 뺨을 꼬집어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럴 때는 칼로 살을 저며도 모른다니까. 발작이 계속되는 동안은 아무런 감각이 없어. 너희들도 모두 주사를 맞아야 해. 그건 신경을 자극시키는 주사거든. 저 녀석의 활동적인 몸짓 좀 봐. 얼마나 훌륭한 율동이냔 말이야."
드라이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 엎드렸다. 문이 열렸다. 드라이얀은 깜짝 놀랐으나 들어온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다. 남아 있던 불독을 데리러 온 위생병이었다. 그는 불독의 팔을 붙잡고 방을 나갔다.
얼마 후 그 불독도 들것에 실려와 그의 친구 곁에 뉘어졌다. 그도 역시 코를 솜으로 틀어 막히고 입에서는 미친개의 거품 같은 희고 푸르스름한 것이 부글부글 끓고 사지가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음식을 거부하던 노인도 끌려나갔다가 한참만에 들것에 실려 왔다.
드라이얀은 조금의 차이를 있을망정 거의 똑같은 리듬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세 개의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주사요?" 드라이얀이 물었다.
"카디아졸! 흥분제야. 신경에 충격을 줘야 하니까. 두뇌를 자극하고 체내의 독소를 없애는 작용을 하는 거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거야." 위생병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드라이얀은 나란히 누운 세 사람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경련은 기계처럼 규칙적이었다. 로봇의 동작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콧구멍은 같은 간격을 두고 같은 리듬과 강도로 벌름거렸다. 가슴은 피스톤과 같은 생명의 율동이 일정한 리듬으로 오르내렸다.
이들 육체에 아직도 남아 있는 생명의 율동이 자율 운동으로 환원되는 것이리라. 의지나 본능이나 정신은 죽어 버리고 오직 기계적인 반사 운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반사 운동은 점점 증폭되어 경련으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현대 기계 사회에 남아 있는 인간 생활의 환상을 그려보았다. 그가 있는 그 방은 전 유럽과 전 서양, 전 세계를 포함할 만큼 한없이 확대되어 갔다. 그 방안에는 로봇과 흡사한 반사 운동밖에 남지 않은 세 인간이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온 인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환상인지는 몰라는 드라이얀을 집요하게 따라 다녔다. 그 속에서 슈미트 시장이 코른베스트하임 수용소의 모든 것과 함께 악마적인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그와 나란히 야콥센 중위와 브라운 군정관, 사무엘 아브라모비치와 그 밖의 여러 인간들이 카디아졸의 자극으로 기계적인 율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든 문명이 똑같이 경련으로 비틀대는 것이었다.
드라이얀은 눈을 가리고 부르짖었다. "보기 싫다! 보기 싫어!"

160

"자네 개인 카드에는 자네가 말하는 단식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의사는 의심쩍다는 듯이 드라이얀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정말 단식을 했다면 틀림없이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말은 전혀 없고 다만 '신경 장애, 자살 집념, 횡포 발작, 강박 관념'만 적혀 있어. 단식에 대해서는 한 줄도 없어. 단식은 의식이 명료한 자의 행동이야.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여기에 없어. 이 진단서에 서명한 두 대학 교수는 독일 의학계의 권위자이시다. 그러니 나는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지? 자네야,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의 고명한 교수야?"
의사는 드라이얀의 얘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자네의 처도 갇혀 있다는 게 사실인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아직 결혼한 것 같지 않은데? 결혼 반지도 없잖아?" 의사가 물었다.
"수용소에서 압수 당했죠."
"있을 법한 일이지. 그러나 나로서는 믿을 수가 없네. 자네 카드에 적혀 있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어.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네. 증거가 나올 때까지 나는 다음과 같은 전제 하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네. 즉 자네는 아직 미혼이고 따라서 체포된 아내도 없다는 거야. 자네 아버지도 수용소에서 죽은 것이 아니며, 자네도 이유 없이 체포된 게 아니야. 결국 자네가 내게 말한 건 모두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거야."
드라이얀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행동도 일단 의심하기 시작하면 전형적인 광기로 간주되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 정상적이고 지적(知的)이라고 생각되는 말과 글과 의견이 정신 병원에서는 광기의 징후로 둔갑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한계는 모호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미치광이가 아님을 꼭 증명하고 말 테다!'
"제발 부탁입니다, 의사 선생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드라이얀은 간청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저를 믿어 주십시오!"
"물론 믿지. 그러나 그 말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믿는다고 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를 믿어 주십사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직접 엄밀한 종합 진단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네의 두 번째 부탁은 말 안 해도 해 주겠네. 종합 진단은 꼭 하는 거니까. 그러나 첫 번째 부탁은 들어 줄 수 없어. 나는 과학자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 이외의 것은 믿을 수 없어. 증거가 없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 말이야." 의사가 말했다.
"인간으로서 저를 믿어 주십시오!"
"나는 과학자야. 나의 직업 의식은 확실한 논증의 뒷받침이 없는 말은 믿지 않기로 되어 있어." 의사의 말은 냉정했다.

161

드라이얀은 종합 검진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양쪽 팔의 정맥에서 피를 뽑았다. 다음에는 손끝에서 피를 뽑았다. 그리고 팔에서도 피를 뽑았는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채혈이라고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 피를 내주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피를 제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검사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는지 뇌척수액을 몇 방울 뽑기 위해 머리 뒤 목덜미에 바늘을 찔렀다. 그런 검사가 몇번 반복되었다. 몹시 아팠으나 드라이얀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피만으로 부족해서 뇌수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할 권리를 빼앗기고 말 것이니까.
내분비선에서도 분비액을 뽑았다. 그것을 유리판에 떨구어 전깃불에 비춰서 분석했다. 그밖에도 오줌, 침 등 갖가지의 분비물과 기타 체내의 각종 액체를 채취해서 현미경으로 검사하고, 시험관에 넣어 무게를 달고 증류시켰다.
의사들은 폐의 X광선 사진도 찍었다. 다음에는 두개골도 찍었다. 전체의 골격과 관절 하나하나를 X광선에 비춰 보았다.
의사들은 정의를 부르짖는 인간의 절규의 원천인 상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 보일 리 없는데도 의사들은 드라이얀의 폐와 뼈, 두뇌, 피, 골수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골몰했다. 드라이얀은 그들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그들은 계속해서 반응을 보려고 모든 근육과 모든 신경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무릎과 손과 위장도 조사했다. 그들은 심장의 고동은 물론 폐부의 가장 하찮은 변화조차 세밀히 조사했다. 의사의 귀는 그의 핏속에 감춰진 모든 운동을 알아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드라이얀의 체중도 달아보고 다음에는 키, 가슴둘레, 뼈, 팔, 다리까지 엄밀하게 재었다. 의사는 입을 버리라고 명령하고는 상한 음식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혓바닥까지 조사했다. 드라이얀의 전신의 의혹이라는 그림자로 싸인 물건처럼 세밀히 조사되었다. 이것이 과연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다음에는 정신과 의사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의사는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때로는 밤까지 그와 토론을 했다.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까지 낱낱이 기록되었다. 수사관이 범죄 현자에서 지문을 채취하듯이 의사는 드라이얀에게서 미치광이의 흔적을 찾으려고 열심이었다. 의사는 드라이얀의 어린 시절의 일과 어머니, 누이들, 아버지, 그가 사귀어 온 여자들에 관해서 얘기하도록 화제를 이끌어 갔다. 드라이얀은 반의식 중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찾고 있는 의사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드라이얀의 영혼은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벌거벗겨졌다. 헌옷과 더러운 옷들로 가득 찬 옷장을 활짝 열어 놓은 것 같았다. 의사들은 그 속에 코를 파묻고 깊숙히 감춰진 생명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냄새를 맡았다.
드디어 검진이 끝났다.
"자네는 완전히 정상이야!" 의사는 결론부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열등의식, 영양 부족, 비타민 결핍, 평균 이하의 체중, 이런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하네. 다소 빈혈 증세가 있고 관절이 영양 부족으로 부어 있어, 치아도 같은 이유로 좋지 않아. 맥박은 기관의 쇠약으로 불규칙하고, 폐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반점이 약간 있으며, 류머티즘 증세도 다소 있네. 그러나 이런 건 현대병이니까 그리 걱정 할 것 없네!"
"그러면 제가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까?" 드라이얀이 물었다. 그도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만큼 탈진 상태에 있었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곧 내보내 주십시오."
"자네는 의무실에 수용될 거야. 몹시 쇠약해 있으니까." 의사가 말했다.
"저는 수용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드라이얀이 말했다.
"자네의 요구는 합당치 않아."
저를 한시라도 빨리 수용소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드라이얀 코르가는 1주일이 지난 뒤에 수용소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미치광이가 아니고 전에도 미친 적이 없었다는 증명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그의 눈은 승리의 기쁨으로 빛났다. 그러나 그의 온몸은 고통과 피로의 그림자처럼 떨렸다.

162

"자동적인 체포는 하나의 방법은 될 수 있어도 체포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말했다. "한 인간을 감옥에 넣는다든가, 죄인 취급을 해서 죽이려면 적어도 거기에 합당한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한테 무슨 죄가 있소? 내 아내와 내 아버지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또 요한 모리츠가 무슨 일을 했단 말입니까? 수용소에서 15개월이라는 세월을 보낸 나머지 절망 속에서 나오는 당연한 질문을 했음에도 당신들은 나의 외침을 다짜고짜 발광 증세라고 판단해 버렸습니다. 정의와 자유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광기로 통하는 이상,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역사상 가장 진보된 문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명 자체가 인간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콥센 중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드라이얀 코르가가 정신 병원에서 돌아오자 사무실로 오라고 명령했었다. 지금 그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당신들 유럽 인들은 모든 문제를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당신들은 매사에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야콥센 중위가 말했다.
"당신 생각이 옳을는지도 모르지요."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것이 유럽 인들의 결점임이 분명하오. 그러나 비극과 인간과 처절한 고통에 대해서 웃음을 띠고 방관만 한다는 것은 비길 데 없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단지 결점이나 과오로만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자네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노력했네. 석방시키려고 애도 써 보았지만, 그건 허사였지. 나는 자네가 석방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어." 야콥센 중위는 말했다.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잘 압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당신의 도움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누구나 남을 자유롭게 해 준다거나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후부터 차차 약세에 몰릴 것이고 손에 쇠고랑을 차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라는 사슬에 묶일 따름입니다. 현대 서구 문명이 우리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쇠고랑뿐이오." 드라이얀이 말했다.
"그만 하고 천막으로 돌아가서 좀 쉬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있어. 그리고 다시는 어리석은 짓은 말란 말이야." 야콥센 중위가 말했다.
"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방법을 되풀이할 것이오."
"자네는 또 위선자 행세를 하려 드는군. 그런 우울한 얼굴은 보기도 싫어. 담배나 피우는 게 어때?"
"고맙소." 드라이얀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다시 말했다. "야콥센 중위님, 우리는 연극이 끝난 뒤에도 좌석에 그대로 앉아 있는 관객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어 보았자 우리는 결국 극장 밖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극장 안을 환기시켜야 하고 청소도 해야지요. 그처럼 대륙도 환기를 시켜야 합니다. 얼마 후에 연극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역사는 프로그램을 바꾸어 가며 공연하는 극장과 같은 겁니다. 어제까지 상연된 것은 '탄원서'였습니다. 기계 문명의 관료들한테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인간의 가련한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선고받은 인간이 특사를 부탁한 탄원서는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탄원서는 서두도 읽혀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 연극은 실패했습니다. 해피 엔드가 아니었습니다. 내일부터는 '기계 문명'이라는 연극이 상연됩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아요. 무대에는 로봇과 기계와 평범한 '시민'들만 출연하지요. 그런데 나는 그 연극을 못 볼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때 이미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당신은 좌석을 예약해서 첫 장면만은 볼 수 있겠죠. 가서 마음껏 즐겨 보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좌석도 공연 초기의 것만 예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드라이얀은 피우던 담배를 중위 책상 위의 재떨이에 놓고 밖으로 나왔다.

163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를 수용소 문 앞에서 만났다. 요한은 매우 우울해 있었다. 요한은 드라이얀을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어요."
"그것이 마음에 걸리던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요한 모리츠는 드라이얀의 손을 잡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떠나실 때 작별 인사조차 못 했잖아요. 아무리 사정을 해 보았지만 저는 의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정신 병원에 끌려갔었지."
요한은 놀란 눈으로 드라이얀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정신 병원이라뇨?"
"정말이야. 잠시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었지. 담배를 얻어 왔는데 함께 피우세." 드라이얀은 담배꽁초가 몇 개 들어 있는 손수건을 펼쳤다.
"선생님을 정말 정신 병원에 가두던가요? 나쁜 놈들!" 요한의 놀라움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드라이얀과 요한 수용소 문간에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말았다.
"자넨 전부터 내 파이프를 좋아했지?"
"그것만 있으면 어떻게든 피울 수 있거든요. 종이에 말 수 없는 적은 분량이라도 다져 넣어 피울 수 있어요. 그래서 나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파이프는 수용소에서 꼴 필요한 물건이에요."
"이걸 자네에게 주지."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에게 파이프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파이프는 지난 18개월 동안 항상 가지고 다녔던 거야. 피울 담배가 없어도 늘 입에 물고 있었지."
"그건 안 됩니다. 수용소에서는 파이프가 귀중품이에요. 그걸 제게 주시면 담배를 어떻게 피우시려고요?"
"다시는 안 피울 거야. 이게 마지막 담배야."
"왜요? 의사가 담배를 끊으라고 하던가요?"
"아니, 그런 말은 없었어. 끊으려고 생각했을 뿐이야."
요한 모리츠는 파이프를 받아들고 그 속에 담배를 다져 넣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면 곧 돌려 드리겠어요. 꼭 그렇게 하겠어요. 피우시지 않는 동안만 제가 사용하겠습니다."
"괜찮아. 이젠 영원히 피우지 않을 테니까."
요한은 빙그레 웃었다.
"저도 지금까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여러 번 맹세했었지만 며칠 못 가던데요. 담배를 끊는 일이 그리 쉬운 게 아닌가봐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이번만은 정말이야." 드라이얀은 마지막 궐련에 불을 붙이고 요한 모리츠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드라이얀은 안경을 벗어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고급 테로 된 안경이었다. 드라이얀은 안경과도 작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이라곤 이 안경뿐이었다. 담배 케이스, 결혼 반지, 지갑, 만년필, 연필 등은 하나하나 몰수를 당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드라이얀이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는 아버지의 임종시에 같이 묻히도록 아버지에게 걸어 드렸다. 그리스 정교회 사제는 제의를 입고 가슴에 성상을 안고 매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제의를 입지 못한 채로 묻혔다. 등과 소매에 P.W.라는 글자가 찍혀진 미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속옷도 입지 않은 채였다. 한 벌밖에 없는 속옷을 요한 모리츠가 아침에 빨아 널었는데, 그 옷이 마르기 전에 운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드라이얀은 목에 걸고 있던 조그마한 십자가를 황급히 아버지 작업복 속에 집어넣었다. 십자가는 아버지와 함께 묻혔거나 태워졌을 것이다.
드라이얀은 마지막 소지품인 안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기 뭄뚱이 이외의 유일한 소유물이다. 몸뚱이와 안경만이 과거의 생애에서 구출된 유일한 물질적인 존재들이었다. 드라이얀은 안경을 애석한 마음으로 요모조모 들여다보며 만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그것마저 요한 모리츠에게 넘겨주었다. "내 안경도 좀 간수 해 주게."
"이제 안경 없이도 볼 수 있습니까?" 한평생 안경을 써야 하는 사람은 참으로 무거운 형벌이나 짐을 지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고 생각하던 요한은 기쁜 낯으로 물었다. 드라이얀에게 안경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요한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아니, 안경 없이 조금도 볼 수가 없어. 그러나 안경이 없는 편이 더 편할 성싶어서 그러는 거야. 이제부터 안경을 쓰지 않기로 했네."
"저는 선생님이 하루 종일 안경을 쓰고 있는 걸 신기하게 생각했었어요. 주무실 때만 벗곤 했었지요? 안경을 벗은 선생님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만약 자네가 나보다 먼저 석방되면 이 안경을 내 아내에게 전해 주게. 금방 아내를 찾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자네가 간수하고 있게. 언제 만나게 될는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루마니아에서 만나게 되겠지. 아무튼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게."
요한 모리츠는 안경을 받아 쥐고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드라이얀 코르가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파이프와 안경을 자기에게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염려 할 것 없어, 모리츠." 드라이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한테 그냥 이 안경을 맡아 달라고 부탁할 따름이야. 나는 이제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되네. 그 안경 덕분에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보아 왔으니까. 이 안경이 내겐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알겠지? 내 아내 된 사람을 처음 본 것도 이 안경을 통해서였지.... 내가 하늘과 바다와 산을 본 것도 이 안경 덕분이야. 또 몇 백 권의 책을 밤을 새워 가며 읽은 것도 이 안경 덕일세. 나는 이 안경을 통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자네를 비롯해서 많은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네. 이 안경을 통해서 유럽의 붕괴를 보았고, 인간이 굶어죽는 것을 보았고, 강제 수용소에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 가는 광경을 보았지. 이 안경으로 성인도 인간도 미치광이도 보았지. 나는 이 안경으로 인간과 율법, 신앙과 희망을 안고 죽어 넘어지는 대륙도 보았네. 그 대륙은 수용소와 야만적인 규율을 지키는 사회의 기계 법칙 속에 갇힌 채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네. 모리츠, 이 안경은 내 눈과 같아. 이따금 나는 안경을 눈으로 착각하기도 했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지. 나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이 안경으로 봐야 할 모든 것을 보았네. 그러나 오늘부터 나는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피곤해. 연극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야. 앞으로 안경을 쓴다 해도 나는 이미 황폐해지고 파괴된 도시, 희망을 잃은 인간, 멸망한 나라, 허물어진 교회, 무너진 희망밖에는 볼 수가 없을 거야. 나는 또 이 안경으로 나 자신의 파멸을 보았어. 파멸 속의 파멸을 본 거지. 나는 사디스트가 아니므로 차마 그것들을 바라볼 수가 없네. 사방이 온통 폐허뿐인 광경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 폐허 밑에서 새로운 개척자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태어난 신세계의 시민일세. 그들의 건설은 다소 광적이야. 그들은 문명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우선 감옥부터 지었네. 그것이 그들의 수법이야. 나는 그들의 재건 작업에 참여할 마음이 없어. 이젠 방관만 할거야. 그러나 방관자로서, 즉 증인으로서만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지. 하지만 서구 기계 사회는 인간에게 방관자의 지위만 허용한다네. 그들이 내 소지품을 압수해 가면서 안경만 남긴 것은 가혹한 풍자야. 군인이 안경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은 관대성이 아니라 사디슴이었어. 그들은 나에게 억지로 방관자 역할을 하게 했을 뿐 아니라 꼭 봐야 할 것만 지정해 주었단 말이야. 그것은 바로 수용소지. 그들은 수용소와 정신 병원, 감옥, 군인들, 그리고 한없이 긴 철조망 외에 다른 것은 보여 주지 않았네. 바로 여기에 내가 안경을 포기하는 이유가 있어. 나는 이 세상에서 내게 허용된 단 하나의 물건을 포기하려고 해. 안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하고 그럴싸한 피조물 중의 하나지만 그것도 살아 있을 때의 얘기지. 목숨이 다했을 때나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국한된 곳에서만 살도록 허용되었을 때, 그 때는 안경이라는 것이 불길한 조롱거리밖에 안 되는 걸세. 뭘 보겠다고 안경을 쓰겠나? 자네, 안경을 쓴 주검을 본 적이 있나?"
"하지만 선생님은 아직 살아 계시잖아요."
"물론 그래.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지. 그러나 희망은 생명과 바꿀 수 없어. 희망은 묘지 틈바구니에서 자라나는 잡초 같은 것이야."
"그러나 우리들은 살고 있어요, 선생님."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
요한 모리츠는 한참 동안 드라이얀을 바라보았다. 그는 드라이얀이 정신 병원에서 막 돌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이 점에 대해서 드라이얀 자신이 해명을 했다.
"염려하지 말게, 모리츠. 나는 미치지 않았어. 자네까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면 가슴 아픈 노릇이네. 아직 내가 살아 있다고 자네가 주장하는 것은 나의 시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 눈을 감고 심장의 고동이 정지되고 전신이 싸늘한 시체를 볼 수 없으니까 하는 소리야. 그러나 모리츠, 세상에는 시체를 남기지 않는 죽음도 있다네. 대륙은 죽어도 시체를 남기지 않네. 문화와 종교와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인간도 때로는 시체로써 죽음이 확인되기 전에 이미 죽어 있을 수가 있지. 내 말뜻을 알아듣겠나?"
요한 모리츠는 울기 시작했다.
"왜 우나?"
"선생님은 병이 나셨어요...."
"내가 헛소리를 하고 미쳤단 말이지?"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어떻게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어요?"
"자네 눈엔 내가 미치광이로 보이는 모양이야. 그래서 우는 게 틀림없어. 그러나 울지 않아도 돼. 나는 미치지 않았으니까. 모리츠, 나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정신이 말짱하다네."
"정말이세요, 선생님?"
"물론이지, 모리츠. 난 보통 때와 마찬가지야."
"저는 선생님이 미쳤다고는 생각지 않고 다만 심한 두통을 앓고 있는 줄로 알았어요. 선생님은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신데다, 또 그 곳에서 고생도 하셨을 게 아니에요.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아요. 선생님은 아무래도...."
요한 모리츠는 미쳤다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드라이얀은 또 담배를 한 대 말았다. 그는 서구 문화의 붕괴를 서러워하는 사람들은 그 문화와 더불어 소멸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아 남는 자는 영원한 비극의 방관자가 될 것이다. 예컨대 드라이얀을 미치광이로 취급한 야콥센과 같이 기계 문명에 속한 부류의 인간들이 아니면, 본능과 맹목적 신념을 가진 요한 모리츠 같은 소박한 부류의 인간들이다. 유럽 문화와 그들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같이 정신적인 고뇌의 최고 한계점까지 다다른 인간을 미치광이로 여기는 것이다.
드라이얀의 언행을 한낱 광기로 보지 않고 고뇌의 절규임을 이해할 사람은 아내 노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야말로 생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믿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수천년간의 노예 상태와 굴욕의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인종은 피라미드를 세울 당시부터 이집트에서 노예 상태와 외로움에 익숙해 있었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종교 박해를 받았고, 러시아에서는 유대 인 배척 운동을 당했고, 독일에서는 강제 수용소에서 고통을 겪었다. 그녀의 민족은 새로운 기계 문명에 대해서도 항거하고 나섰다.
드라이얀은 노라를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자네 파이프에 불을 붙이게, 모리츠. 그리고 안경을 갖다 두지 그래. 아내에게 온전한 걸 전해야 하지 않겠나?"
"곧 갖다 두고 오겠습니다. 선생님."
요한 모리츠는 천천히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파이프를 물고 걸어갔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요한 모리츠가 수용소의 마당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몇 세기를 횡단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걸음걸이는 주위의 모든 것을 망각한 것 같았고, 대지 위에 꽉 박힌 채로 끊임없이 변해 가는 푸른 하늘의 기적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이 왜 푸른가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드라이얀은 요한 모리츠와 노라 베스트는 유럽에 그대로 살아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구 기계 사회 속에서 그대로 버티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오래 계속하지는 못하리라. 다음에 상연되는 연극의 첫 장면을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최후의 인간, 가장 강인한 인간들이 퇴장한 뒤에는 이 지구상에 동서남북으로 로봇들이 번식하게 될 것이다.

164

요한 모리츠는 천막 사이로 사라졌다. 드라이얀은 피우던 담배를 내던지고 수용소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포로들은 정문으로 통하는 마당에 들어가지 못하게끔 금지되어 있었다. 드라이얀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침착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두르지도 않고 늑장을 피우지도 않는 가장의 걸음걸이였다.
수용소 마당에 있던 3, 4천 명의 포로들은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는 드라이얀을 발견하고 철조망 쪽으로 우르르 달라붙었다. 금지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소장의 비서나 의사뿐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벌어지기를 바라는 포로들은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수용소 안에서 수천 명의 눈이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매일 같은 일만 보아 오던 눈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새로운 사건이라면 신기하게 생각했다. 기계적인 일상에서 벗어나려 하고, 생활에서 특수한 변화를 찾으려고 하고, 생의 근원적인 요소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원시적인 요구인 것이다.
포로가 금지 구역을 대답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킬 만한 사건이었다. 그 지역을 통과할 자격이 있는 의사나 사무관이라 해도 이것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이다. 그러므로 금지된 구역을 걷는 자라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시선을 집중시킬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드라이얀은 수천의 시선이 자기를 좇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철조망을 지키고 있는 감시탑 속의 폴란드 보초병들도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를 궁금해하며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드라이얀은 자기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포로들도 보지 않고 탑 위에 있는 폴란드 보초병들도 보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려고 결심한 노한 인간의 꿋꿋한 걸음걸이였다. 확고하면서도 경쾌한, 즐거운 걸음걸이였다.
드라이얀 코르가는 걷는 그 자체에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에 의의가 있고, 또 충분히 정신적인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걸음걸이는 기계적인 움직임처럼 단조로운 것도 아니고 감정에 사로잡힌 맹목적인 것도 아니었다. 미친 사람의 걸음걸이는 더욱 아니었다.
드라이얀은 눈을 크게 뜨고 걷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의 눈은 예리해서 자기가 가는 길의 의의를 알고, 그 길에서 벌어질 비극과 희극을 내다 볼 수가 있었다.
진정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드라이얀의 걸음걸이에서, 모래 위에 자국을 내며 걸어가는 그 걸음걸이에서 은근하나마 깊은 슬픔을 알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것은 집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의 슬픔이요, 먼 곳으로 출항하려는 선원의 슬픔이었다. 진정한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래 위에 남긴 그의 발자국에서 그 슬픔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볼 만한 눈은 그 곳에 없었다.
폴란드 보초와 포로들이 본 것은 드라이얀이 차츰 철조망 가까이로 접근해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금지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1.5미터 이내로 철조망에 접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드라이얀 코르가는 지금 그것을 감행하고 있다.
포로들은 드라이얀의 행동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이마에 손을 얹어 차양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주먹을 입에 갖다 대고 있었다. 마치 축구 시합이나 모험 영화나, 또는 탐정 소설의 아슬아슬한 장면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불안마저 느끼면서.
감시탑의 폴란드 보초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총만 없었더라면 주먹을 입에 갖다 댔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팔을 들었을 때 총도 같이 들려 올라왔다. 그 순간 포로가 철조망 가까이로 접근해 오면 자기에게는 사격할 임무가 있다는 것을 상기했고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튀어나갔다. 폴란드 보초는 아차 하고 생각했다. 겨냥을 하지 않고 쏘았던 것이다. 그는 사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잠재의식이 되살아났다. 그는 즉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철조망 밖으로 나온 목표물을 겨냥했다.
드라이얀은 첫 번째 총성을 들었다. 이어 두 번째 총성이 났다. 그는 눈앞에 교차되는 번갯불 같은 빛을 보고 전신이 한없이 내리 깔리는 듯한 피로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 피로는 더운 방안에서 뜨거운 독주를 마신 뒤에 오는 그런 기분과 비슷했다. 그의 손등으로 무엇인가 뜨뜻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다음 그의 몸은 비틀거리며 철조망 아래의 찌는 듯한 모래밭에 고꾸라졌다. 옷걸이에서 벗겨져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외투처럼 소리없이 쓰러졌다. 모래밭은 부드러웠다.
드라이얀은 땅 위에 소리없이 쓰러진 자기 육체에 강한 연민을 느꼈다. 그 육체는 그의 가장 좋은 벗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이 육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달았다. 다음으로 자기의 육체 못지 않게 사랑했던 노라와 아버지를 생각했다. 어머니와 요한 모리츠와 다미앵 검사와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한순간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박혀 있던 못을 뽑으면 말없이 떨어지는 액자처럼 그의 시야에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드라이얀의 육체도 떨어져 그 위에 포개졌다. 그의 의식은 이제 그들의 모습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럴 기운이 없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약간 가눌 수 있었던 것은 머리뿐이었다. 그의 이마는 아직 땅 위에 들려져 있다.
그러나 곧 머리의 무게를 감당할 기운마저 사라졌다. 그는 뜨거운 땅에 뺨을 대고 아직 무엇엔가 매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지난날의 일들을 깃발처럼 접어 버렸고, 심한 출혈로 그의 육체는 늘어졌다.
드라이얀은 꼭 말해야 할 무엇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그러나 이 기도도 그의 생애의 갖가지 일들이 그랬듯이 실현되지 않은 채 끝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다지 긴 것도 아니었다. 그가 다만 몇 분 동안이나마, 아니 단 몇 초 동안이나마 더 숨이 붙어 있었던들 이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지여, 사랑하는 그대 대지여!
  그대에게 내 몸을 바치노라
  영원히 영원히 그대 품에 안겨 있으리
  나는 멀리서 흘러온 이름 없는 몸.
                                               R. M. 릴케

그의 뺨과 입술은 애정과 그리움을 담고 대지에 입맞춤했다. 그는 체념과 사랑의 표정을 지닌 채 뜨거운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모든 것은 장엄하고 완전무결했다.
타오르던 불꽃이 사라지듯 장엄하고 엄숙한 종말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수용소 마당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에 손을 대고 간신히 자신을 억제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성호를 그었다.

165

드라이얀 코르가가 죽은지 나흘째 되는 날 요한 모리츠는 스잔나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리운 요한!
당신은 저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실는지도 모르겠군요. 서로 소식을 모르고 지낸 지 벌써 9년이나 되었어요. 저도 몇 번이나 당신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성당에 가서 당신의 명복을 빌려고도 해 봤으나 마지막 순간에 언제나 생각이 달라지곤 했어요. 저의 마음은 당신이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 생각하면 빌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돌아가시지 않은 분의 명복을 빈다는 것은 불행을 불러오는 일이니까요.
스위스 적십자사의 페루세 씨가 당신의 주소를 알려 주었어요. 당신이 그동안 계속 억류되어 있었다는 것도 말해 주더군요.
저는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 주신 데 대해 감사 드리고, 당신이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도둑이나 죄인처럼 감방에 몰아넣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루바삐 깨우쳐 달라고 기도했어요.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할 말이 태산 같아요. 지난 아홉 해 동안 어찌나 여러 가지 일이 많았는지 편지로는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독일에 있다는 것을 아시면 당신은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군요. 집과 토지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이들은 외국인들 틈바구니에서 자라고 있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사유를 말씀드리겠어요.
당신은 오순절이 지난 다음 다음날 떠나셨어요. 마을 사람들은 제게 와서 헌병이 당신 등에다 총부리를 들이대고 데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더군요.
저는 당신이 총부리에 밀려 죄인처럼 붙잡혀 갈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어요.
당신이 떠나신 후 4주일 동안 저는 매일 따뜻한 빵을 구워 놓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거든요. 빵이 굳어지면 아이들에게 주고 당신 몫은 늘 새로 만들었어요. 당신이 꼭 돌아올 것으로 믿고 있었어요. 저는 매일 기다렸어요.
저는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오신 당신이 대문 앞에서 잠시라도 기다릴 것을 생각하고 매일 대문을 열어 놓고 잤어요. 그러나 요한, 당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밀가루가 떨어져서 빵은 만들지 못했으나 그래도 저는 매일 당신을 기다렸어요.
하루는 헌병이 나타나서 당신이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집을 몰수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려면 이혼장에 서명을 하라더군요. 그래서 저는 서명했어요. 겨울이라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었어요. 그러나 정말로 이혼한 것이 아니고 전처럼 간절히 당신을 기다렸어요.
소련군이 들어오더니 코르가 신부님과 마을 유지들을 총살했어요. 저와 당신의 어머니는 그 날 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신부님을 면사무소의 거름 구덩이에서 끌어내다가 숲 속에 숨기려 했어요. 도중에 우리들은 후퇴중인 독일 군대를 만나 병원에 모시고 가 달라고 부탁하고 그들에게 신부님을 넘겼어요. 신부님을 그대로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어서 그랬는데, 이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일이 탄로 나서 이튿날 아침 어머님은 마르크 골덴베르크에게 총살당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에서 탈출했어요. 그 후 저는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고생도 무척 했어요. 저는 소련 사람이 저를 붙잡아다 당신 어머니처럼 쏘아 죽일까봐 겁이 났던 거예요.
저는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멀리 피해 갔어요.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저는 독일 땅에서 결국 소련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어요. 그들은 저를 죽이지도 않았고 여간 친절히 굴지 않았어요. 영락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저와 아이들에게 빵과 과자와 옷을 주어 어리둥절했지요. 저는 괜히 소련 사람들을 피해 판타나에서 도망쳤구나 하고 후회하고 했답니다.
이렇게 나흘이 지났어요. 그 때 저는 몸이 몹시 불편했는데, 집에 돌아가려면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어느 날 밤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어요. 소련 군인들이었어요. 그들은 문을 부수고 방으로 들어왔어요. 그들은 여자들이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열네 살밖에 안 된 주인집 딸과 저를 끌어냈어요. 그러고는 술을 먹였어요. 마시지 않으면 권총으로 쏜다고 위협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어요. 아이들도 방에 있었어요. 저는 죽으면 죽었지 아이들 앞에서 벌거벗지 않겠다고 버텼어요. 그러자 군인들은 제게 달려들어 옷을 막 잡아 찢었어요. 그러고 우리를 능욕했어요.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은 우리를 윤간했어요. 그들은 제 입을 억지로 벌려서 술을 퍼 넣고 또 귓속에까지 부어 넣었어요. 그러고는 다시 제 몸을 수 차례나 짓밟았어요.
사랑하는 요한, 이런 얘기를 전부 당신에게 전해야 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저는 당신에게 무엇이든 숨기고 싶지 않아요. 제가 눈을 떴을 때 소련군들은 이미 가 버리고, 아이들은 큰 소리로 울고 있었어요. 시체 앞에 모여 앉은 듯이 저를 에워싸고 울어댔어요.
소련군들은 이튿날 밤에도 또 왔어요. 전날 밤에 왔던 그들이었어요. 그들은 집주인의 딸을 끌어냈어요. 저는 아이들과 함께 지하실에 숨어 있었어요.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밤엔 결국 들키고 말아 똑같은 짓을 당했어요. 그 뒤로 매일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일을 당하기 전에 저는 언제나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아무 기억도 없어요.
이런 일이 두 주일이나 계속되었어요. 저는 마당으로, 옆집으로, 다락으로 숨어 보았어요. 그러나 소련군들은 언제나 저를 찾아냈어요. 단 하룻밤도 피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자살해 버릴 결심도 했어요. 무슨 얼굴로 이 다음에 당신을 만나겠어요.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어요. 아이들은 누가 키우겠어요? 아버지가 없는 것만도 불쌍해 죽겠는데, 아무도 돌봐 줄 사람 없는 외국에서 저까지 없어진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더러워진 몸이지만 아이들을 보면 차마 죽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저는 그 때마다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소련군들을 피하기 위해 저는 그 후 서쪽으로 도망쳤어요. 무작정 가다 보니 영국 점령지였어요. 그 뒤에 저는 지금 있는 미군 점령 지역으로 옮겼어요. 이렇게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수 차례나 소련군에게 붙잡혔어요. 그들은 아무 여자나 보면 겁탈했어요. 저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욕을 당했어요. 영국군과의 경계선에서 또 소련군에게 붙잡혀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욕을 당했어요. 그런데 야니, 마지막 곤욕을 치르던 날 밤에 임신이 되었어요. 뱃속에 어린아이를 가진 지도 어느 새 5개월이 되었군요.
저는 이제 어쩌면 좋지요?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아시고도 저를 당신의 아내로 생각해 주시겠는지, 그리고 영원히 제게로 돌아와 주시겠는지 회답해 주세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 눈물을 머금고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겠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갈 길을 택하겠어요.
                                                                     스잔나

166
편지를 다 읽고 난 뒤에도 요한 모리츠는 한동안 편지를 움켜쥐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도 꿈결인 듯 어렴풋이 들었다. 그는 침대에 벌렁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의 몸가짐은 여느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불과 몇 분전까지 지니고 있던 평소의 요한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요한 모리츠의 몸과 마음에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고압 전류가 통해진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요한 모리츠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와서 바늘로 그를 찌른다 해도 요한 모리츠는 아무런 감각을 못 느꼈으리라. 그는 굶주림도 갈등도 느끼지 못하고 기쁨도 슬픔도 몰랐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개의할 것이 없었고 살아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므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요한 모리츠는 벌떡 일어나 막사를 나와 어디를 간다는 생각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철조망으로 걸어갔다.
드라이얀코르가처럼 금지 구역을 넘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되는 대로 몸을 맡긴 상태였으므로 폴란드 인 보초가 총을 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넘어서는 안 된다는 자제력도 없었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잠시 후에 사진기를 든 두 명의 미군이 그의 모습을 찍으려고 다가왔다. 요한은 꼼짝도 않고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 뒤를 따라오고 있는 세 번째 군인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요한은 낮은 소리로 그 군인을 불렀다. "스트룰, 어떻게 여기에...."
미군은 놀라서 사진기를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요한 모리츠를 바라보았다. 그는 루마니아의 유대 인 수용소의 장교 사무실에 있던 스트룰이었다. 요한과 의사 아브라모비치와 함께 부다페스트로 도망했던 스트룰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요한이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입에 올렸을 때 그는 사진기를 눈에 대고 요한의 모습을 찍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요한 모리츠는 철조망에 붙어 서서 스트룰과 다른 두 사람의 군인이 지프에 올라타고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스트룰은 요한 모리츠 쪽을 슬쩍 훔쳐보고 겸연쩍은 듯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지프는 떠났다.
요한은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전 같으면 옛날 고생하던 시절에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처지로서 이렇게 모른 체 했다면 몹시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에나 관심이 없었다. 요한은 오랫동안 철조망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모리츠, 떠날 준비를 하게!"
요한 모리츠는 그제야 돌아다보았다. 석방 명령이 내린 줄 알았던 것이다. 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석방시켜 준다고?" 그는 어깨를 붙잡고 있는 막사 반장에게 물었다.
"아니야. 이 엉뚱한 친구야!"
"그럼 또 다른 수용소로?"
"뉘른베르크로 가는 거야!"
요한 모리츠는 관심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전부터 자기가 친위대원 이었으므로 도매금으로 전쟁 범죄자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 범죄자들인 괴링 원수나 루돌프 헤스, 로젠베르크, 본 파펜 등이 있는 뉘른베르크로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사형 선고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교수형을 받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그와는 별로 상관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철조망 너머 저 먼 곳을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막사 반장은 그의 어깨를 계속 흔들며 말했다. "반시간 후에 떠난단 말이야."
요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둘러서 짐을 꾸려야 해! 시간이 촉박하니까. 1시에 집합이야." 반장이 당부하듯이 말했다.
"꾸릴 짐도 없어."
"가지고 갈 게 없단 말인가?"
"아무 것도 없어."
"담요도?"
"필요 없어."
이 말을 듣자 반장은 요한 모리츠가 정말로 담요를 가져가지 않는다면 자기가 그 담요까지 두 장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잠자리가 좀더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반장은 그런 생각을 씻어 버렸다.
"담요는 가져가야지. 뉘른베르크 국제 법정의 감옥은 항상 춥고 눅눅한 곳이라니까 담요가 필요할 거야."
"이젠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늦지 않도록 하게. 출발은 1시야." 반장은 돌아서면서 당부했다.
요한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구두 끝이 백선 위에 있었다. 그 선은 포로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었다. 요한의 오른쪽 발끝이 앞으로 나가 그 선을 절반쯤 밟았다. 요한은 보초탑에 서 있는 폴란드 군인을 보았다. 보초는 개머리판을 뺨에 대고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잡아당길 자세였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는 백선을 넘지 않았다. 백선을 구두 끝으로 밟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요한은 반시간 후에 수용소의 다른 전쟁 범죄자들과 함께 뉘른베르크로 향해 떠났다.
스잔나의 편지는 요한의 모든 소지품과 함께 막사 안에 남아 있었다. 다른 포로들은 그것을 읽어보고 싶었으나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는 루마니아 어로 씌어져 있어서 한 자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편지지는 퍽 얇았다. 포로들은 그것을 잘라 담배 종이로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그 종이에 담배를 말아 피웠다.

167

  탄원서 제 7호
  공정 문제(전쟁 범죄자 요한 모리츠의 형벌에 대하여)-증인이 죽은 뒤에 사무국에 도착된 것임.

뉘른베르크 국제 법정은 52개국의 이름으로 내 친구 요한 모리츠를 전쟁 범죄자로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마땅한 처사라고 봅니다. 그래서 판결문이 공포된 다음부터 나는 그와 함께 수용소 마당을 산책하는 일을 일체 그만둘 생각입니다. 그런 범죄자와 같이 산책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을 것이며, 남의 눈에도 거슬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모리츠는 뉘른베르크 국제 법정의 판결과 자기 죄과에 대해서 아주 무관심해 보입니다. 본인이 진정서를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죽인 일이 없을뿐더러 파리 한 마리 죽여 본 일이 없으므로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제 법정에서 52개국이 요한 모리츠가 죄인이라고 결정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주장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의 말로는 자기는 그 52개국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데 자기가 그런 나라에 죄를 지었을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논법은 물론 단순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기소한 52개국의 이름을 모두 읽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그가 난생 처음 들어 본 나라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나라들이 이 지구상에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변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한 모리츠는 자기를 기소한 52개국 중에 프랑스와 그리스가 끼여 있는 것을 알고 분개했습니다. 그는 분노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내 말을 통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프랑스 인 포로를 다섯명이나 탈출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프랑스 인은 그들뿐인데, 자기가 프랑스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아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그에게 빵을 나누어 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의 관계되는 일은 그것뿐인데 그 나라가 자기에게 벌을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절대적이며 창백한 것입니다. 프랑스와 그리스도 요한 모리츠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연합국에 대한 자기의 죄를 알리는 방법으로, 요한 모리츠를 이들 각 나라의 감옥에서 1년씩 복역시킬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도 자기가 과연 전쟁 범죄자라는 것을 납득할 것이고, 또 지금의 무관심한 태도도 없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 모리츠-모든 전쟁 범죄자들이 똑같은 상태지만-몹시 쇠약해 있어서, 앞으로 52년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52개국 중의 몇 나라들은 그를 수감치 못하는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의 강제 노동의 기간을 6개월로 단축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도합 26년 간의 형을 치르는 셈이 되지요.
그 26년 후에도 그가 살아 있다면-그로서도 52개국의 순회 감금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그를 쇠사슬에 매어서 52개국의 감옥을 1개월씩 순회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한바퀴 돌고 나면 또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각 국은 공평하게 그의 죄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정성은 당연히 지켜져야 합니다. 공정성은 우리 서구 기계 사회 성립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나라(예를 들면 러시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죄수를 감금해 놓고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등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고려해서 나는 요한 모리츠가 각국을 순화하기 전에 체중을 정확하게 재고, 체내 각 기관의 자세한 명세서를 첨부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각국은 뉘른베르크 국제 법정에서 요한 모리츠를 인수할 때 명세서에 서명했다가 다시 그를 국제 법정에 되돌려 줄 때는 명세서에 기록된 대로의 상태로 그를 반환해야 할 것입니다. 즉 똑같은 중량을 유지해야 할 것이고, 또 명세서에 적힌 대로 완전한 사지(四肢)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요한 모리츠는 완전한 형태대로 유지되고, 또 52개국에 의해서 공정하게 형 집행을 운영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 기계 사회의 원칙은 무엇이든 파손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데 있습니다. 문명 정도가 낮은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위탁하는 물건을 야만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사명은 전 세계를 문명화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목적이며 따라서 우리들은 그걸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증  인

삽  화

요한 모리츠는 마침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13년 간의 감금 생활에서 석방된 것이다.
그동안 100여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했다. 이제 그는 비로소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밤 10시였다. 그들 가족이 한지붕 밑에 모여서 처음 맞이하는 안락한 밤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저녁을 먹고 나서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맏아들인 페드로는 열여섯 살이었다. 어느 새 청년이 다 된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이 꿈만 같아서 요한은 눈을 비비고 페드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미군용 푸른 운동 재킷을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페드로의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 페드로는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반백의 여윈 사나이가 자기 아버지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므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공장에게 얘기해 보지요. 그는 아마 일자리를 구해 줄 수 있을 거예요." 페드로가 말했다. 요한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부탁만 하면 채용해 줄 겁니다. 기술이 없는 사람이 채용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기술자가 아니시지만 제가 잘 부탁하면 특별히 채용해 줄 거예요."
요한 모리츠는 둘째아들 니콜라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스잔나 쪽을 많이 닮았다. 금발에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눈매였다.
요한 모리츠는 네 살짜리 셋째 아이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자기의 아들이 아니었다. 스잔나와 소련군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 요한 모리츠는 이미 스잔나를 용서했다. 아이의 출생은 스잔나의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한 모리츠는 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큰아들이 아버지를 환영하는 뜻에서 담배를 한 갑 선사했던 것이다.
요한은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방에는 침대가 둘밖에 없었다. 스잔나는 막내와 작은 침대에서 자기로 하고 요한 모리츠는 혼자 큰 침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큰 아이들은 마룻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게 되었다.
"우선은 불편한 대로 지내세요." 페드로는 이렇게 말한 다음 어른스럽게 덧붙였다. "앞으로 방을 하나 더 얻든지 침대를 더 마련하도록 하지요."
큰 아이들이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요한은 계속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페드로와 니콜라이가 옷을 벗고 자리에 눕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독일어로 밤인사를 했다. 요한 모리츠는 그들이 루마니아 말을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모국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스잔나는 어린것을 침대에 재우고 있었다. 소련놈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꽤 예쁘게 생겼다. 금발의 고수머리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 아이를 가급적이면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용소에서 스잔나에게 편지를 보낼 때 그 애도 자기의 친자식처럼 여기겠다고 말했었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스잔나 역시 요한이 고수머리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스잔나는 아이의 옷을 벗기고 감추듯이 이불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어쩔 줄을 모르고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이 있는 식탁 곁으로 가 앉았다. 그녀는 요한이 몹시 피곤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감히 그에게 자리에 누우라고 권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붙잡혀 간 것도 그가 수용소에서 보낸 세월도 당치도 않은 생각이었지만 소련군들이 자기를 범한 것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요한 모리츠의 시선을 똑바로 받을 수도 없었고, 그에게 어서 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석방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는 음식도 장만하고 잠자리도 마련했다. 그는 굶주린 이리처럼 돌아오기가 무섭게 식탁 위의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리고 페드로가 준 담배를 벌써 절반이나 태워 버렸다.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스잔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의 그 옷은 그 날 밤에 입었던 것은 아니오? 응?"
요한은 아내가 입고 있는 목이 깊이 팬 푸른색 옷을 기억했다. 그 옷은 요르그 요르단이 그의 아내를 죽이던 날 밤에 스잔나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요한이 스잔나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갔을 때도 요한의 어머니가 그들을 내쫓아 코르가 사제관에 갔을 때도 이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때 스잔나에게는 옷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요한과 함께 지낸 처음 한 달 동안 줄곧 이 푸른 옷만 입고 지냈다. 그녀는 밤이면 이 옷을 벗고 알몸으로 잤다. 나중에 다른 옷을 장만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 옷을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남편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신혼 초 한 달간의 행복했던 추억이 그대로 담긴 옷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판타나를 떠나신 이후론 한 번도 이 옷을 입지 않았어요. 당신이 붙들려 가던 날, 저는 당신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이 옷을 입지 않기로 맹세했었어요. 13년간 끊임없이 당신을 기다리면서 저는 어딜 가나 이 옷을 갖고 다녔어요. 그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입어 보는 거예요."
스잔나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 이렇게 말했다. 다시 머리를 든 그녀의 눈이 요한의 눈과 마주쳤다.
요한은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를 덥석 안아다가 무릎에 앉히고 무척 보고 싶었다고 한마디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담배 한 대를 더 붙여 물고 잠든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스잔나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그렇게 많이는 변하지 않았으나 얼굴에 약간 주름이 잡혀 있고 살결도 전처럼 부드럽지 못했다. 고운 머리칼도 빛이 변해서 삼빛처럼 되었다. 젖가슴도 좀 처졌다. 그러나 그녀는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요한 모리츠는 변하지 않은 스잔나, 판타나의 스잔나를 다시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그녀가 변함 없는 모습으로 자기 앞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좀 걷고 싶은데...."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잔나가 먼저 일어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함께 가도 좋겠어요?" 요한은 그녀가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묵묵히 기다렸다. 그들은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발끝으로 살며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웠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두어 번 서로 어깨가 부딪쳤다. 한참 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요한이 중심가로 나가고 싶어하자 스잔나가 그 곳으로 안내했다.
밝은 진열장 앞을 지날 때 스잔나는 자기가 사고 싶었던 구두를 보여 주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는 계속 손을 잡고 다른 진열장들을 들여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나 판타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때만은 과거를 잊고 있었다. 이날 밤만이라도 괴로웠던 추억으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2, 3일만 쉬고 일을 해야지. 페드로가 다니는 공장에 나도 일자리를 구하게 되겠지."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안 돼요. 당신은 몇 주일 동안 푹 쉬셔야 해요. 일자리는 천천히 구해도 좋아요. 지금 당신은 너무 쇠약해 있어요. 저와 페드로가 버는 것으로도 먹고살기엔 충분해요. 저는 빨래를 해 주러 나가고 있어요. 단골 손님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스잔나는 남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요한은 이런 아내가 무척 고마웠다.
그들은 교외에 다다랐다. 길 양쪽에는 과수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조용했다.
"마치 판타나 마을 같은 기분이 드는군." 요한이 말했다.
"정말 그래요."
그들은 걸으며 판타나의 밤을 생각했다. 부엉이 울음도 생각했다. 그들은 똑같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리가 아픈데 좀 쉬었다 갈까?" 요한이 물었다.
그들은 길옆의 과수원 안으로 들어가 풀밭에 앉았다.
"정말 판타나 같구먼!" 팔을 베고 풀밭에 벌렁 드러누우며 요한이 말했다. 그리고 돌아누워 얼굴을 풀 속에 묻었다.
"스잔나! 이 풀 냄새를 맡아 봐. 당신 집 뒤뜰의 그 풀 냄새야. 당신도 기억하지?  둘이 밤마다 만나던 그 뒤뜰의 풀 냄새...."
스잔나도 엎드려 풀 냄새를 맡았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메고 목소리가 떨렸다.
요한은 스잔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엎드린 채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떨어진 채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다만 요한이 스잔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을 따름이었다. 스잔나는 더 이상 다가앉을 용기가 없었다.
"스잔나, 수용소에 있을 때 나는 정말 당신이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어." 요한 모리츠가 말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스잔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고는 요한이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기대며 별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언짢아하지 마, 스잔나. 수용소에선 당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자주 눈앞에 떠올렸지. 감옥에 있으면 누구나 그래. 나는 당신에게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아. 당신 집 뒤의 풀밭에서 보았던 대로의 알몸의 당신을 꿈에 보곤 했어. 나는 왠지 그때가 가장 그리웠어. 그 여름이 우리들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여름이었어."
스잔나는 남편 요한에게로 다가앉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요한은 스잔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등을 쓰다듬고 가슴을 애무했다.
"13년 동안이나 소중히 간직해 온 이 아름다운 옷을 구기면 어떡하지?"
스잔나가 구겨져도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요한이 말을 계속했다.
"판타나에서 당신이 하던 대로 벗지 그래?"
스잔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몸을 가리듯이 하면서 재빨리 벗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검푸른 풀밭을 배경으로 그녀의 몸은 대리석같이 빛났다. 요한은 스잔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탄성을 올렸다.
"그대로야! 당신 몸은 그 때나 다름없군.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옛날 당신 집 뒤뜰에서 안았을 때와 똑같아.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았지."
"거짓말 마세요. 저는 많이 늙었어요. 당신이야말로 변하지 않았어요." 스잔나가 말했다.
요한이 끌어당기자 스잔나는 몸을 피했다.
"피하는 버릇까지 옛날과 똑같군. 그동안 1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지 않은 것 같단 말이야."
요한은 그 때처럼 스잔나의 허리를 힘껏 끌어 안았다. 그리고 스잔나가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의 입술을 자기 것으로 덮어 버렸다. 그녀는 자라등처럼 단단한 그의 가슴에 짓눌려 몸이 뻐개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옛날 그대로였다.
"당신의 몸도 판타나의 풀처럼 향기로워요. 당신은 언제나 풀 냄새와 건초냄새를 지니고 다녔어요. 저는 당신만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못 견디게 보고 싶었어요. 정말이에요. 밤이나 낮이나 늘 당신 생각만 했어요. 생각하는 것이라곤 모두 당신에 대한 추억뿐이었어요. 내겐 당신이 모든 것이었어요." 스잔나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은 스잔나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잔나는 거짓말을 모르는 여자였다. 스잔나의 모든 것은 요한 자기 한 사람의 것이었다. 타는 듯한 그녀의 몸을 통해서, 심장의 고동을 통해서, 귀에 대고 속삭이는 뜨거운 입술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또 자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뜨거운 확인 속에 지난 13년 동안의 모든 괴로운 일들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이제 다시 만났고, 이제는 두 사람만의 인생이 펼쳐질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이제 인생이 두렵지 않았다.
먼동이 틀 무렵에야 그들은 일어났다. 서로 왠지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예전처럼 우린 이제 젊지 않아요. 애들이 깨기 전에 속히 집으로 가 봐야지요." 스잔나가 말했다. 그 말에 요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다음날 밤에도 이 곳에 오기로 했다.
"이제부턴 매일 밤 오자고. 다른 데서 만나지 말고 꼭 여기서. 여기는 정말 판타나 그대로야. 나는 판타나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거짓말 같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은 내내 마주보고 웃었다. 이제야 서먹서먹하던 기분이 가셨다. 그는 여러 번 스잔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스잔나는 요한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그런데 여보, 난 조금도 고단하지 않아. 내일부터라도 당장 페드로와 함께 나갈테야. 몸이 멀쩡한데 집에서 놀 필요는 없잖아?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방을 더 마련하고 잘 살아 봐야지."
스잔나는 며칠 동안 더 쉬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요한은 이미 단단히 결심이 서 있었다.
"내일 아침 페드로와 함께 나가야겠어. 나는 일에는 익숙해진 사람이야. 13년 동안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해 왔으니까. 쉬는 것은 참지 못하겠어.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쉽게 해낼 수 있어."
그들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진열장은 휘황하게 불이 켜진 그대로 있었다.
"첫번 임금을 타면 당신에게 맨 먼저 목걸이를 사 주지. 저 빨간 구슬이 마음에 들어?" 요한이 물었다.
스잔나는 정가표를 살펴보고 나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너무나 기뻐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요한이 돌아오면 구슬 목걸이를 사 줄 거라는 그녀의 꿈이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아요." 스잔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면 적어도 토요일쯤에는 목걸이를 살 수 있을 거야."
그들이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땐 날이 거의 밝아 있었다. 요한은 스잔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집에서 키스도 마음대로 못 하겠어. 녀석들이 아마 놀려댈걸. 애들 눈엔 우리가 늙은이로 보일 테니 말이야. 그러나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어. 어때, 우린 아직 멀었지?"
집 앞에는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요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석방장이 들어 있는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서류는 그대로 있었다. 그래도 그는 웬지 불안했다. 트럭은 수용소에서 늘 보던 것과 비슷했다. 헤드라이트도 그처럼 번쩍번쩍 빛을 내뿜고 있었다.
요한은 완벽한 석방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수용소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트럭을 보고 겁에 질려 있었다.
"왜 그래요, 당신?" 스잔나가 물었다. 요한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요한은 집에서 막 나오고 있는 헌병 두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요한 모리츠의 아이들을 깨워서 7시까지 한 사람 당 50킬로그램씩의 짐을 준비해 가지고 문 앞에 모여 있으라는 통고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요한 모리츠를 계단에서 만나자 그에게도 이런 지시를 되풀이했다.
"7시 정각에 문 앞에 나와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는 거지요?"
스잔나가 물었다.
"동유럽의 외국인은 모두 억류하게 되어 있소. 이것은 정책입니다. 당신네 나라가 연합국 측에 선전 포고를 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염려할 건 없어요. 어디까지나 정책일 뿐이며 수용소는 아주 살기 좋게 돼 있으니까. 당신들은 미국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돼요. 단지 안전 책에 불과하니 겁내지 말아요. 당신들을 체포하는 건 결코 아니니까."
요한 모리츠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에도 속은 경험이 있었다. 시(市) 군정관이 프랑스 포로 다섯을 탈출시킨 경위를 듣기 위해서 부른다기에 믿고 갔다가 결국 체포되어 오래도록 감금 생활을 했던 것이다. 요한 모리츠는 이제 어떤 말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요한은 다하우 수용소에서 열여덟시간 전에 짊어지고 온 짐을 들고 작별을 하려고 아이들을 깨웠다.
"어디로 가실 작정이시죠, 아버지? 아버지는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저는 미국 사람을 잘 압니다. 미국인 친구도 많이 있고요. 그들과 매일 밤 어울리고 있어요. 미국인의 입으로 체포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면 그 말을 믿으셔야 해요. 헌병이 단지 정책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도 미국인과 같은 대우를 해 준다는 말이에요. 맛이 쓴 커피라든가 담배, 초콜릿을 배급받을 거예요. 강제 노동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도망을 치시다니 말이나 됩니까? 아버지는 미국 삶을 몰라서 그래요."
요한 모리츠는 미국인들 때문에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고통스럽던 여러 가지 일들..., 보아 온 여러 가지 일들..., 그러고는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서 아들의 꿈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 모리츠는 짊어졌던 짐을 도로 내려 식탁 위에 놓았다. 사실 가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미국 사람을 피해 가면 소련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욱 난처해진다. 소련 사람은 더 나쁘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페드로의 이야기를 전부 믿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사람에 대해서라면 요한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피로했다. 이제는 더 도망칠 기력조차 없었다. 그대로 눌러앉아 있다가 다시 체포당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도망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페드로는 아버지의 어깨를 다정스레 다독거리며 말했다. "아버지, 우리들은 미군에 지원병으로 참가하는 거예요. 우리는 소련 놈들을 무찔러야만 비로소 루마니아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건 문명과 야만의 전쟁입니다. 아버지도 지원병이 되지 않으면 안 돼요."
요한 모리츠는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하우, 하일브론, 코른 베스트하임, 다름슈타트, 올드루프, 지켈하임 등의 철조망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최근 수년간 전전한 36개소의 수용소 철조망과 알렉산드르 코르가 사제와 드라이얀이 죽은 수용소, 그가 하마터면 굶어죽을 뻔했던 그 수용소들의 철조망을 눈앞에 떠올려 보았다. 요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든 수용소의 철조망이 전부 자기 심장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기껏 열여덟시간 동안의 자유였어! 이제 다시 수용소로 가야 한다. 그러나 이번은 유대인이라든가, 루마니아 인, 독일인, 헝가리 인, 또는 친위대였다는 이유 때문에 체포되는 것이 아니다. 동유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체포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긴 요한의 눈에 눈물이 자꾸 괴어올랐다.
그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단지 스잔나와 미래의 설계에 부풀었던 열여덟시간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 미련도 갖지 않기로 했다. 눈물은 또다시 포기해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의 표시에 불과했다.
"아버지도 짐을 꾸리셔야죠?" 페드로가 재촉했다. 페드로는 떠날 생각에 무척 신바람이 나 있었다.
"떠날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다. 나는 지난 13년 동안 수용소에서 수용소로 옮겨 다닌 일 외엔 한 일이라곤 없는 사람이야. 언제나 떠날 준비만 하며 산 세월이지. 너도 곧 익숙해질 거다. 너희들에게까지 이런 일을 시킨다는 게 가슴 아프구나. 그러나 모두 그런 걸 어쩔 수 있겠니. 철조망과 수용소, 그리고 수송대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날이 곧 올 거야. 너희들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해. 나는 이번에 가는 곳이 백여섯번째가 된다. 겨우 열여덟시간 동안의 자유였구나! 죽기 전에 단 한 시간이라도 다시 자유를 누릴 수 있을는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겠지."
페드로는 요한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침통한 얼굴을 의아스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그래도 열여덟시간 동안은 참으로 행복했어. 내겐 그만한 행복도 분에 넘치지. 이젠 죽어도 한이 없어. 수용소에 있으면서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지. 정말 판타나의 시절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시간이었어. 그렇지, 스잔나?"

에필로그

"베스트 부인, 당신한테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는데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두 손에 들고 있던 소송 서류를 내려놓고 루이스 중위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기 책상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루이스는 외국인 지원병 징집 소장이었고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같은 사무실의 직원으로 통역을 맡고 있었다. 그녀가 루이스 중위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는 6개월이 되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양말을 단정하게 신지 못할까?'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나선형으로 꼬여 발목까지 흘러내린 루이스의 양말이 눈에 거슬렸다. 부둣가에서 일하는 뱃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의자에 걸터앉는 버릇도 눈에 거슬렸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자가 도무지 예의라곤 몰랐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사무실 같은 데서 여자한테 종아리를 내놓는 자세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라 베스트는 루이스가 입에 담배를 문 채 자기에게 악수를 청한다든가, 또는 마치 개한테 뼈다귀를 던지듯 탁자 위에 서류를 던져 줄 때마다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루이스 중위는 그런 노라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가끔 난색을 표하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렇다고 행동을 조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침착성을 잃고 초점 없이 움직였다.
"무슨 말씀인지 하세요." 노라가 말했다.
"내 아내가 되어 주겠소?" 루이스 중위는 몸을 한층 더 위로 젖히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네 발 달린 의자가 뒤의 두 발만으로 서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어요."
"무슨 다른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건 없지만 제 대답은 노예요."
노라 베스트는 건성으로 서류를 넘겼다. 마음이 산란해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지난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라는 2년 동안이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자동적으로 석방되었다. 자동적으로 체포되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석방된 그녀의 수중엔 한푼의 돈도 없었고, 더군다나 옷가지와 보석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압수 당하고 외국 은행에 예금했던 돈도 몰수당했다. 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알거지가 되었다. 그 무렵 드라이얀의 죽음을 알았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고 다만 자살했다는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다.
정작 석방은 되었으나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루마니아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딴 곳으로 갈 데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독일에 남아 신문사의 번역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동유럽 국적을 가진 자는 모두 억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쟁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자동적으로 억류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처럼 부자유스러운 것은 아니고 수용소에 있으면서 장병 사무실의 통역이 된 것이다. 급료가 지불되고 식량과 배급을 받는 안정된 생활이었다. 자유로운 시간에는 글도 썼다. 그녀는 드라이얀이 채 끝마치지 못한 소설 '25시'를 틈틈이 써 내려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인 4장까지의 원고 뭉치가 그녀에게 남아 있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래의 희망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장래에 대한 계획이 아니라 장래의 계획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는 이 일을 사랑하고 그것에 전력을 다했다. 되도록 드라이얀의 문제를 따르려고 노력했고, 드라이얀 자신이 쓴 것처럼 이 작품을 완성시킬 작정이었다.
소설을 쓰고 있노라면 드라이얀이 항상 옆에 앉아 있는 것같이 느껴졌으며, 또 그와 합작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라이얀은 이 소설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자세히 노라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되도록 충실하게 드라이얀의 의도를 따르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쨌든 좋아요! 거절하는 건 자유지만 그 이유를 들려 줄 수는 없소?" 루이스 중위가 물었다.
"굳이 듣고 싶으시다면 말하죠. 나이 차이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그건 말도 안 돼!" 루이스 중위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난 당신보다 꼭 한 살이 위요. 당신의 증명서를 봤소. 당신은 나보다 나이가 위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구실을 찾아낸 거요? 실은 그와는 정반대인데."
"잘못 알고 계십니다."
"괜한 농담은 그만 하시오. 그럼 당신은 몇 살이오?"
"다른 얘기나 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의 나이를 알기 전에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겠소."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더욱이 이렇게까지 강요를 하는 건 말이에요. 정 그렇게 아시고 싶다면 알려 드리지요. 내 나이는 999세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나이를 말할 때는 언제나 실제보다 적게 말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나는 사실은 그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노라가 말했다.
"알았소, 베스트 양." 루이스 중위는 꽤 즐거운 듯 껄껄 웃었다. 그러나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웃지 않았다.
루이스는 노라가 자기의 청혼을 반드시 허락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노라는 거듭 거절했다.
"언짢게 생각진 마세요, 루이스 씨. 나는 당신과 온종일 한지붕 밑에서 살 순 없어요."
"그 이유는?"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어요. 나이 차이 때문이라고요. 당신은 친절하고 이지적이고 매력 있는 청년이십니다. 모든 젊은이들처럼 말예요. 그러나 나는 딴 세계에 사는 여자거든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당신이 못 알아듣는 건 지극히 당연해요. 나는 1천년 동안을 살아온 사람이에요. 1천 년의 세월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아마 현재와 미래를 가졌겠지요. 여기서 내가 '아마'라고 한 것은 사실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결코 미래의 일까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 때문이에요."
"지나친 궤변이오." 중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조금만 더 들으세요, 루이스 씨! 페트라르카, 괴테, 바이런, 푸슈킨의 사랑의 말을 알고, 드라이얀코르가의 사랑의 입김을 받고, 서정 시인이 나를 위해 노래를 읊고, 마치 왕비 앞에서 꿇어 엎드리듯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걸 본 나로서, 그리고 나 때문에 왕과 기사가 자살하는 것을 봤고, 발레리아 릴케, 다눈치오, 엘리엇의 사랑의 말을 들어 온 나로서, 담배 연기를 제 얼굴에 뿜어 대면서 내뱉는 당신의 청혼을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빌어먹을! 한 여성에게 청혼을 하는 데 괴테나 바이런, 페트라르카가 무슨 상관이오?"
"오해하지 마세요. 여자에게 청혼하기 위해 릴케나 푸슈킨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청혼하는 남자는 적어도 그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들의 의견은 일치된 것이오." 루이스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소?"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사랑은 정열이에요, 루이스 씨. 적어도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쯤은 어디서 들었거나 아니면 분명히 읽었으리라 믿어요."
"또 한 번 우리들의 의견이 일치하는군. 물론 사랑은 정열이오." 루이스 중위는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정열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건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네들 문명국의 모든 사람이 그래요. 당신들은 어떤 종류의 정열도 지니고 있지 못해요. 사랑, 이 숭고한 정열은 상대방을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평가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당신네들은 언제든지 상대방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은 그 상대방 여자를 인간으로서 판단하고 있지 않아요. 따라서 사랑한다고 여기는 여성을 하느님이나 자연에 의해서 창조된 유일한 책, 단 한 권의 한정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당신들 나라에서는 인간은 모두 총서로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 눈에는 여자라면 어느 여자나 다 똑같이 보일 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당신들은 사랑의 진미를 모르실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무엇을 가지고도 이 아픈 상처를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연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대치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를 향한 정열이거든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이며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이 세상의 아무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느 누구와도 대치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한테 보여 줄 수 없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남자한테서 이런 믿음을 얻지 못하는 여자라면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서로 결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루이스 씨, 당신은 그런 확신을 나에게 가질 수 있게 할 자신이 있으세요? 저야말로 당신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여자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진정으로 생각하시는가요?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여자는 정말로 없을 거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으세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내가 거절하면 당신은 아내가 될 다른 여자를 찾으실 게 확실해요. 그리고 그 여자한테서도 거절당하면 다시 세 번째 여자를 찾으시겠지요. 내 말이 틀린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옳은 말이오. 그러나 당신의 거절은 참으로 유감스럽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감 천만이오." 루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루이스 씨!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두고 우리들의 이 신성한 사무를 계속하는 게 어떨까요?" 노라는 소송 기록을 뒤적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용소의 모든 사람들이 미군으로 지원하겠다고 야단들이에요. 아이들, 부녀자, 노인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원병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두들 당신들 편에 서서 싸우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소련의 점령 지구에서 서방 지구로 탈출해 온 수많은 외국 시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구의 안전한 곳을 찾아서 도피해 온 것이다. 그들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단순히 소련군을 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야만, 공포, 죽음, 고통을 피해서 도망쳤을 뿐이었다.
그들은 소련 군대만 없는 곳이라면 아무데든 상관치 않았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이 곳을 향해 달려왔다. 일단 고향을 떠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련군이 없는 이 땅에 첫발을 들여놓으며 입을 맞추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이 땅에 입맞추며 이 땅을 모든 희망과 구원의 땅이라고 불렀다. 이 곳의 형편이 어떤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들은 땅에 입부터 맞추었다. 소련군이 없는 땅,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누구의 땅이고 어느 나라가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소련군만 만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미군들이 그들을 억류했으나 그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하던 땅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련 지구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들의 소망은 성취된 것이다. 이것이 성취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할 바 아니었다. 설사 미국 사람에게 총살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항의하지 않을 것이다. 미군을 믿어서라기보다도 그 만큼 소련군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3차 세계 대전이다. 피난민들은 피로와 굶주림 속에 억류당해야 했다. 그들은 식량과 휴식과 일자리와 자유를 갈구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획득하지 못해도 반항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에겐 소련군을 피해 오는 데 성공했다는 그 사실만이 고맙고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들은 서방측 군대에 지원병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석방시켜 준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지원병이 되기를 원했다. 전투를 원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감금당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기아로 뱃가죽을 움켜잡지 않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멋지고 감격적인 일이오!" 루이스가 말했다. "서양이 동양의 미개인들과 싸운다는 사실에 저들 모두가 감동하고 있는 거요. 저들도 싸워 이기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이 싸움은 한 시대를 이루는 획기적인 전쟁이 될 거요. 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전쟁이 될 거요. 문명의 서양 대(對) 야만의 동양의 전쟁이오. 문자 그대로 세계 대전이며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전쟁이 될 것이오." 루이스는 두 손을 비볐다.
"이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운이오. 명예스러운 일이지요.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오. 이 전쟁이 끝나면 온 세계가 문명화될 거요. 그리고 전쟁이라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고 다만 진보와 번영과 안락 만이 앞날을 밝게 비출 것이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조금도 감격하지 않는군요. 우리 서양측 군대가 취한 행동에 조금도 열광하지 않아. 당신 혹시 친(親) 볼셰비키파는 아니오?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건 당신뿐이란 말이오." 루이스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감격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요. 다만 당신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지원병들이 반(反)볼셰비키가 아니라는 말이오?"
"물론 반볼셰비키지요. 그러나 단지 반볼셰비키일 뿐이에요. 그들은 조금이나마 공포를 느끼지 않고 죽음과 굶주림과 형벌과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걸 원할 뿐이에요.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건 죄악과 공포와 노예 상태를 눈앞에 둔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노라가 말했다.
"바로 그거요.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도 그들의 자유로운 생활과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오. 그래서 그들이 적극적으로 우리를 지원하는 거요. 이 정도면 됐지 그밖에 또 무엇을 바란단 말이오?"
"말로 현혹시키려 들지 마세요, 루이스 씨. 당신이 '3차 세계 대전'이라고 말하는 이 전쟁은 실제로 서양과 동양의 전쟁이 아닙니다. 좀더 파고든다면 설혹 전선이 남극에서 북극으로 퍼지고 지구 전체를 덮어 버린다 해도 이것은 서구 기계사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혁명에 불과해요. 그건 단지 내부 혁명에 지나지 않으며 전적으로 서구 사회에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동양과 동유럽 전체와 싸우고 있잖소?"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당신들 서구 사회는 당신들. 문명의 일부분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반박했다.
"우리는 러시아와 싸우고 있는 것이오."
"러시아도 공산 혁명 이후로, 서구 기계 사회의 가장 진보한 일부분이 되었어요. 소련은 서구의 합리적인 이론을 모조리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에 옮겼어요. 그들은 서구에서 배운 그대로 인간의 가치를 영점으로 내려놓고 있지요. 그래서 사회를 거대한 기계로 전환시켰습니다. 그것은 서구에서 배워 온 것입니다. 야만이나 미개인이 하는 식으로 서구 문명을 모방한 거지요. 그들 사회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특성은 광신과 야만입니다. 당신네들과 다른 점은 이것밖에 없어요. 피에 대한 갈증과 광신 이외에는 전부 서구에서 가져간 것이지요. 당신들은 지금 서구 문명의 한 부분, 즉 서구 기계 사회에서 공산 사회로 넘어간 일부분과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서구 기계 사회에서 공산 사회로 넘어간 일부분과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서구 기계 사회의 내부에서 폭발되었고, 또 그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혁명에 불과하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다시 말해서 서구 사회에 속한 대서양과 유럽적인 양상이 같은 사회 안에 있는 공산주의적인 양상과 투쟁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같은 사회 안의 두 개의 범주, 두 개의 계급 속에서 전개되는 내부 투쟁이지요. 그 예를 들면, 1848년의 부르주아 혁명과 똑같은 성질의 계급적 혁명입니다. 동양은 서양의 이 내부 혁명에는 개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혁명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구인들뿐이에요. 이 혁명은 전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으므로 인류 전체의 복리를 가져오는 싸움이 아닙니다. 서구 문명에는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엉뚱한 소리요?"
"간단한 얘기예요. 서구 사회의 이해 관계와 전 인류의 이해 관계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반대지요. 서구 기계 사회의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도처럼 무덤 속에서, 감옥 속에서, 교회 안에서, 유대인 거주지에서, 말하자면 인생의 테두리 밖을 헤매며 겨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숨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적인 생활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아무 곳에도 나타날 수 없으며, 특히 사무실 같은 데는 더 심했지요. 그 까닭은 사무실은 당신들 문명의 제단이니까요.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1차원으로, 즉 사회적 차원으로 환원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개념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시민'으로 전환되고 만 거지요. 그들은 인간을 시민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인식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을 위한 혁명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특히 서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이번의 혁명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는 아무 상관도 갖고 있지 않아요. 인간은 벌써 오래 전부터 당신들 사회에서 소수 무산 계급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인간의 현재 지위에는 변화가 오지 않을 겁니다. 이번 싸움은 살아있는 노예와 피와 살을 가진 노예를 거느린, 두 개의 상반되는 범주에 속해 있는 두 로봇 사이의 충돌입니다. 정말 인간다운 인간은 이번 싸움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고대 로마 노예선의 노예가 로마 제국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인간은 지금 진행중인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전쟁의 사슬을 짊어진 것뿐입니다. 사슬을 짊어지고서는 전쟁에 참여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럼 이 수용소에 수용된 자들이 그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 지원한 것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매우 위험한 생각을 가진 것 같소. 나는 당신을 위협할 생각은 없지만 동의할 수도 없소. 모든 지원자들은 절대 자신의 의사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당신은 우리가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그것을 강요했다고 단언할 수 있소? 지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직접 당신의 눈으로 보았을 거요. 심지어 지원을 받아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사람까지 있었소. 그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더 열광적이었소. 지원을 거절당하면 마치 무거운 형벌이나 받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오."
"그들은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었어요. 오직 이 길만이 그들의 도피 수단인걸요. 그들은 불길에 쌓인 감방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불길에 쌓인 감방에서는 단지 하나의 길뿐입니다. 바로 서방측 군대에 지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원자가 매일 사무실에 쇄도하는 겁니다. 모든 지원은 자유로 통하는 유일한 길을 찾는 처절한 부르짖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원을 해 왔습니다. 동부에서 도피해 온 유럽 인뿐만 아니라 전 유럽 인이 모여들었습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말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그들이 불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더 있소. 그들은 지원병이 되지 않아도 타 죽을 염려가 없소. 소련군에게 갈 수도 있는 거요. 그런데 그들은 왜 우리한테 왔을까요?"
"아니지요. 그것은 불길을 피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건 불난 집에 기름통을 안고 뛰어드는 격이에요. 그들은 틀림없이 타 죽고 말아요. 그러나 나가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이 있으니까 모두 그 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 문이 바로 이 사무실입니다. 우선 불길은 피해야 하니까 어디로 가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뛰어나오는 거예요. 불타는 방보다는 뚫린 문이 아무래도 나으니까요. 뛰어나온 문 밖도 역시 불 세상 일 망정 그들은 우선 문으로 쇄도하는 겁니다. 한순간이나마 불길을 피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없는 편보다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헛된 꿈일지라도 꿈을 지닌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은 모든 걸 비극적으로 보는 버릇이 있소. 지원자들이 모두 당신처럼 생각하는 줄 아시오? 우리들이 지원서를 수리해 주면 그들은 참으로 감격해하오. 그들은 생명을 내걸고 우리들의 목적을 위해, 또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싸우길 원한단 말이오. 그들은 우리의 막강한 군인들이오.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문을 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좀 보시오. 수백, 수천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들 지원병으로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소. 모두들 문명의 크나큰 목적을 위해서 싸우려는 거요. 모두들 내일의 위대한 승리를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하고 있소. 우리의 승리는 행복과 자유, 빵과 평화, 그리고 문명과 민주주의의 길로 인류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될 거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소?" 루이스는 말했다.
"내 생각은 달라요. 그 사람들은 싸움의 목적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아요. 생각하기에 너무 지쳐서 어쩌면 나의 생각과 다른 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너무도 많은 고통을 겪어 왔기 때문에 생각할 여력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와 같이 느끼고, 저와 같이 괴로워하고, 저와 같은 절망 상태에 있는 것만은 분명해요. 유럽 전체가 저와 똑같이 느끼고 있어요."
"실례를 들어 봅시다. 베스트 부인! 지원병으로서 참가한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열광적으로 협조하고 있는지를 증명해 드리겠소. 여럿 중에서 아무나 한 사람을 선택하지요."
루이스 중위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보시오. 오늘도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소." 그는 문 앞에 늘어서 있는 긴 대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맨 앞에 있는 사람 들어와!" 그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첫 번째 사람을 사무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내와 세 아이가 함께 들어왔다. 관자놀이 근처가 희끗희끗해진 검은머리의 중년 남자였다. 야윈 뺨은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수심에 가득 찬 안색이었다. 크고 검은 두 눈은 슬픔을 띠고 있었으나 아름다웠다.
노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 생각했다. '숭고한 슬픔이 깃들여 있구나.'
그는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눈동자 속에 빛나고 있었다. 확고한 의지가 숨어 있는 눈빛이었다. 그의 슬픔은 단순한 육체적 슬픔이 아니었다. 영혼에서 풍겨 나오는 슬픔이었다.
그의 옆에 붙어선 여자는 헐렁한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금발에도 역시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몸매만이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우아함이 전신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동생을 대하듯이 친근한 웃음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슬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한 아이는 아버지를 닮아 검은 눈이었다. 그 아이의 눈에는 슬픈 빛이 없었다. 그의 타는 듯한 대담한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금발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네 살쯤 돼 보이는 제일 작은 아이는 고수머리에 푸른 눈이었다. 겉으로 봐선 여잔지 남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아기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보시다시피 가족 전체가 참가하러 왔소. 이들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직접 물어 보시오. 절망감을 안고 이 곳으로 탈출해 온 건지 아닌지를 당신은 곧 알게 될 거요. 이들이 우리를 찾아온 건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평화와 문명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지원한 거요. 이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가 과연 옳은지 확인해 보시오. 이들은 분명하게 대답할 거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나는 이 분들의 속마음까지 들춰내고 싶지는 않아요. 나 혼자만의 고민으로도 족하니까요. 왜 다른 사람의 절망까지 확인해야 하나요? 당신이 으레 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질문이나 하세요."
"그럴 게 아니라 마음대로 물어 봐요. 그러면 당신 생각도 달라질 테니까 말이오."
루이스의 마지막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좋아요, 물어 보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노라는 눈을 들어 모자를 벗어들고 문 옆에 서 있는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이름은?"
"요한 모리츠." 사나이가 대답했다. "가족 전체가 지원병으로 참가하는 것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규정보다 나이가 많으니 잘 배려해 주십시오. 젊은이들 못지 않게 일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또 너무 어려 게시에 공고된 나이에 미달이지만 모두 정직하고 부지런합니다. 우리들은 게시판에 적혀 있는 그대로 반볼셰비키 들입니다. 그리고 서방측의 문명이 승리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만 나이입니다. 부디 선처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만약 저희들을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앞날이 막막합니다. 우리는 이 이상대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검은 눈을 가진 큰아이가 아버지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너무 말이 많다는 것을 주의시키는 것이었다.
요한 모리츠는 하던 말을 중단했다.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것을 하고 생각했다. 이런 실수 때문에 지원을 받아 주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우리들을 받아 주십시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일꾼들입니다." 그든 또다시 간청했다.
페드로는 아버지에게 좀더 다른 것을 이야기하라고 권했지만 요한은 빈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페드로한테서 서구 문명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문명과 서구 사회를 신뢰하고 있다는 따위의 낯간지러운 말은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말하지 않으면 사무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아들이 화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부드럽고, 아름답게 빛나는 눈매를 갖고 있었다. 요한 모리츠의 아내와 아이들도 이 여인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 여자는 물끄러미 요한 모리츠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루이스 중위가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요한 모리츠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드라이얀 코르가를 아십니까?"
요한 모리츠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늘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가급적이면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페드로가 집에서 그런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말라고 누누이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에 직원이 묻는 발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드라이얀에 관한 일이라면 자기에게 어떤 불이 닥치더라도 말하리라 생각했다.
"우리들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그 분과 코르가 사제님도 함께 게셨어요. 그 분들이 돌아가실 때에도 저는 곁에 있습니다...." 요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 분은 제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성인이었습니다. 당신도 드라이얀 씨를 아십니까?"
"나는 드라이얀코르가의 아내입니다."
요한 모리츠는 문에 기대서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에 땀이 배었다. 손수건을 찾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손가락이 유리에 닿았다. 드라이얀코르가의 안경이었다. 그 날 아침에 가죽으로 안경집을 만들 생각으로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다. 보따리 속에 넣어 두면 깨어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안경을 꺼내어 잠시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젠 안경집을 만들 필요도 없고, 자기 보따리에 넣어 간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요한 모리츠는 안경을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책상 위에 밀어 놓았다.
"드라이얀 선생님이 제게 맡긴 안경입니다." 요한은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목이 메는지 말소리도 더듬거렸다. "그 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이걸 저한테 주시며 부인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분은 이걸 저에게 주신 뒤 곧...."
요한 모리츠의 모리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손수건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안경집을 만들려던 가죽 조각이 손에 잡혔다. 그는 그것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들고만 있을 수 없어 그 가죽을 탁자 위 안경 곁에 놓았다.
"안경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가죽집을 만들려 했었습니다."
요한은 다시 가죽을 집어들었다. "이 곳 수용소에서는 시간이 충분하니 안경이 깨지지 않도록 가죽으로 안경집을 만들어 드리지요. 부인께서 거기다 안경을 넣어 보관하세요. 그러면 깨질 염려도 없고 안전합니다."
이제 이들이 진심으로 지원해 왔다는 걸 알았소? 어떻소? 이들이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참가하러 왔다는 걸 알았소?" 루이스 중위가 사무실로 들어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목이 메어 침을 삼키고 기침을 했다. 그리고 억지로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이제야 알았어요. 이들은 모두 나이 제한에 대하여 통사정을 하고 있어요. 가족이 모두 애타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가족 전체가 말예요."
루이스는 만족한 듯이 껄껄대고 웃었다. "그럼 필요한 서류를 갖춰서 특별 허가를 신청하시오. 나는 이들 가족의 사진을 찍어서 신문에 내야겠소."
루이스 중위는 제일 작은 아이한테로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스잔나에게 물었다.
"이 아이도 역시 소련 사람이 싫다고 하지요? 그렇지요?"
스잔나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 이 아이도 소련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스잔나는 마지못해 대답하면서 자기 말이 남편에게 들리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요한이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스잔나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는 서류를 내놓았다. "오늘 저녁에 제 숙소로 오세요. 저도 이 수용소에 있습니다. 차나 함께 나누며 조용히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드라이얀에 관해서 아시는 대로 제게 들려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노라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서류를 꾸밀 수 있도록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1938년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조금도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 당신들의 지원은 허락될 테니까요."
제일 큰 아이가 웃어 보였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여간 기쁘지 않은 것이다. 맨 작은 놈도 역시 행복스러웠다. 루이스가 준 사탕을 먹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스잔나는 눈을 내리깐 채 서 있었다.
루이스는 사진기를 만지고 있었다. 사실을 증명할 근거가 필요했으므로 요한의 지원서가 작성되는 대로 전 가족의 사진을 찍을 참이었다. 모든 것은 정확해야하니까.
"1938년에 나는 루마니아의 유대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1940년에는 헝가리의 루마니아 인 수용소에, 1941년에는 독일에 있는 헝가리 인 수용소에, 1945년에는 미국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틀 전에 다하우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수용소 생활 13년이 끝난 나는 열여덟시간의 자유를 맛보았고 다시 여기에 끌려온 것입니다...."
"자, 웃어 봐요!" 루이스가 말했다. 그는 사진기를 요한의 가족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요한은 엘레오노라 베스트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보아 온 수백 킬로미터의 철조망을 생각했다. 그 철조망들이 다시 자기의 온몸을 친친 감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이스가 자기한테 말을 했을 때 요한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1938년부터 오늘까지 지내 온 내 인생입니다. 수용소! 수용소! 수용소에서만 13년을 보냈습니다."
"웃어요!" 하고 루이스가 또다시 재촉했다.
그제야 요한 모리츠는 이것이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채고 노라에게 물었다.
"저  미국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건가요?"
"당신보고 웃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책상 위에 놓인 드라이얀의 안경을 바라보았다. 철조망 옆에서 보초병의 총격을 받고 쓰러져 죽어 가는 드라이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던 수천 킬로미터의 철조망이 떠올랐다. 코르가 사제의 절단된 다리가 생각했다. 13년 동안 겪어 온 온갖 일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는 스잔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막내아이를 내려다보곤 침울한 기분에 싸였다.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웃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웃기는커녕 절망에 지쳐 오히려 여자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는 절망의 끝에 와 있음을 느꼈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이 시점에서 그를 더 이상 더 멀리 보낼 수는 없으리라.
"웃어!"
사진기를 들이댄 장교는 요한 모리츠에게 명령했다.
"웃어! 웃어! 그대로 웃고 있어!" *

게오르규와 '25시'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    )는 루마니아의 동부, 몰다비아 지방의 작은 산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루마니아는 5백여년에 걸친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 모처럼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고 어려웠다. 그것은 외세의 지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소수의 지배 계급에 의한 억압과 착취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국 루마니아의 운명은 그대로 게오르규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난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신부가 되려는 희망을 가졌지만, 학비가 없어 신학교 진학을 포기하였으며, 약소 국가의 민족으로서 후에는 파시스트 군대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인간으로서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아버지로부터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엄성, 신앙심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정교회의 신부이며 6남매를 키우는 가난한 가장이었지만, 게오르규에게는 거의 성인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게오르규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확고부동한 사상은 신앙심 깊은 아버지로부터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게오르규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늘 그로 하여금 인간을 소중한 '개인'으로서 보게 하였다. 그에게 한 사람의 개인은 개인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간 전체의 실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자의 죄과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으며, 한 인간의 생명을 구제하는 자의 공로는 전 세계를 구제하는 자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오르규의 이와 같은 인간관은 그의 작가 정신으로 이어져 전 작품에 흐르고 있다. '키랄레사의 학살'(1966년) '가죽채찍'(1960년) 등에 나타나는,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준열한 비판은 인간 개개인의 모습을 전체 인간의 실상으로 파악한 결과이다.
어머니에 대한 게오르규의 기억은 다음과 같은 말로서 단적으로 표현된다. '어머니는 고통을 주면서 상처를 고쳐주는 불에 달군 쇠붙이 같은 일면이 있었다.' 이 말에는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어머니의 단호함과 사랑이 함께 담겨 있다.
이러한 어머니를 한편 게오르규는 시인이라고 불렀다. 게오르규에게 로마의 대시인인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풍습도 거역하고 남편과 다투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아름다움에 쏟는 사랑과 감성이 지극했다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풍습대로라면 성 요아힘의 날인 9월 9일에 태어난 게오르규의 이름은 요아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게오르규의 표현대로 시인인 그의 어머니가 언어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진 결과로서 그는 비르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게오르규는 그의 어머니가 '폭풍이 몰아치는 날 밤이면 산 속을 헤맬 길손들을 위해 창마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그들을 위한 기도시를 쓰셨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른봄 꽃샘 추위에 얼어죽는 꽃망울과 새싹들을 위해서도 어머니는 시를 쓰곤 하셨다.'고도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종교적이고 다감한 어머니로부터 게오르규는 시인으로서 필요한 '사랑'과 '감성'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게오르규에게는 세 분의 커다란 스승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그의 불행한 조국이고, 나머지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이 세 스승으로부터 받은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사랑,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경도, 그리고 깊은 신앙심은 게오르규의 인격의 바탕이 되어 이에 반하는 어떠한 것에도 그는 저항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인간적인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기도하고, 글을 쓰고, 항거하였던 것이다.

'25시'는 게오르규의 대표작으로 그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25'시로 게오르규는 작가로서의 명예와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제2의 찬스'(1952년) '고독한 나그네'(1954년) '기적을 구걸하는 사람'(1958년) '가죽 채찍'(1960년) 등의 역작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작가로서의 성공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63년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어릴 때의 꿈이었던 신부 서품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게오르규는 문학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게오르규는 동양의 문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유명하다. 그는 한국을 세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해 그가 품고 있는 깊은 회의와 반감을 동양의 정신적 문화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25시'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도 서양문화의 말기 증상으로 나타난 기계문명에 대한 강한 반발과 비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게오르규는 아주 동양적인 한 인물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인간주의와 동양적 정신주의가 작품의 저류에 흐르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게오르규는 '25시'를 통해 자유와 개성, 신앙심과 같은 인간적인 모든 가치를 암살하고 병들게 하는 적으로 기계 문명을 지목하고, 기계 문명은 또한 기계주의적 전체주의를 낳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나치의 등장은 기계 문명의 필연적 산물이며, 물질 문명을 추구해 온 서양문화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인 것이다. 따라서 게오르규의 인간주의는 단순한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잘못된 서양 역사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출현 또한 기계 문명의 속성인 획일성과 전체성으로부터의 산물이라고 보고 잇다. '25시'의 인물인 드라이얀이 소련 점령 지역을 탈출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회의의 감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게오르규는 전쟁이 끝난 후 조국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것은 루마니아가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 공산주의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게오르규의 적대감은 신부의 입장에서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일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로부터 인간을 지키려는 그 자신의 인간주의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25시'에서 또한 주목되는 것은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의 인간상이다. 어찌 보면 요한은 백치라고도 할 만하다. 그만큼 그는 인간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백치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가 잃지 않고 있는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요한의 순수성은 그가 기계 문명에 오염되지 않음으로써 지킬 수 있었던 것인데, 기계 문명의 물결, 즉 역사의 물결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잘못된 역사는 모순과 배반과 억압과 고문으로 사정없이 그를 상처 내었고, 여기에 요한은 끝까지 제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인간적인 자유와 순결을 지켜 내었다.
수십 군데의 포로 수용소를 거치면서 온갖 노동과 굶주림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꺼지지 않는 요한의 생명력은 기계 문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처절하면서도 끈질긴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25시'가 던지는 문제성은 아직도 25시의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늙고 병든 요한의 모습처럼 지금 인간은 기계 문명의 전횡 앞에 힘없이 팽개쳐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절망적 상황인 25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성을 되찾는 일이다. 기계 문명의 획일성과 편의성, 폭력성을 극복하고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찾아 돌아가는 일이다. '25시'가 말하려는 주제도 바로 인간성의 회복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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