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마리언 라이트 에델만

by Casey,Riley 2023. 6. 1.
반응형

  (저자 및 역자 소개)

  * 저자: 마리언 라이트 에델만(Marian Wright Edelman)
  여성 인권 운동가 마리언 에델만(Marian Wright 
Edelman)은 미시시피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자,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전국적 규모의 아동 
관련 단체인 '아동 보호 기금(Children's Defense Fund)'의 
설립자이자 회장이다.
  스펠만 대학을 거쳐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였으며, 스펠만 
대학의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맥아더 상과 슈바이처 인권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한 
에델만은 피터 에델만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고, 
워싱턴에서 살고 있다.
 

    
  (서)

  이 책을 나의 부모님 아서 제롬 라이트와 매기 리올라 
라이트의 영전에 바칩니다. 아울러 두분의 자랑스러운 
자손들인 조슈아, 조나, 에즈라, 줄리언 2세, 스탠, 스테파니, 
크리스털, 데비, 해리에타, 해리 2세, 슈와나 팬디트, 
아서2세, 크리스나, 조이, 매기에게도 바칩니다. 
  (이 책의 구성)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도덕성 부재' 및 '가치관 상실'의 시대에서는 정신과 양심의 
빈곤을 일깨우는 일련의 목소리들이 한층 더 고조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목소리들을 담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는 삶이 진정한 삶인가'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 장 사이의 
연계성이 긴밀하지 않기 때문에 꼭 순차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핵심 
부분인 제 4장만 읽더라도 진정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 있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차례차례 읽는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더 
성숙해질 것임에는 틀림없다.
  1장에서는 '가족의 정신적 유산'이 청소년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과 부모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2장에서는 청소년들이 확고한 내면의 나침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며, 3장과 4장에서는 인생의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실용적인 삶의 철학과 스물다섯 
가지의 인생 지표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어서 5장에서는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장만이 미래의 참된 번영을 약속한다는 
논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삶의 지표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특히 3, 4장을 좀더 
꼼꼼하게 읽기를 바란다. 이 두 장이 읽는 이의 마음 속에서 
무한한 효용을 발휘할 삶의 노하우(know-how)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서문)

  너무 힘들어 무력감에 휩싸일 때, 나는 어머님이 물려주신 
유산 한 가운데 있는 사랑을 상기한다.

  우리 집 거실에, 유독 눈에 잘 띄도록 놓여 있는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로 세로가 각각 20cm, 
25^356,14,134,256^ 정도 되는 그 사진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록으로서, 유달리 
다양한 내 유산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 한가운데에는 나의 부모님이 서 계시고, 그 양쪽으로 
머리가 허옇게 세신 삼촌, 숙모, 이모, 이모부 들이 보인다. 
또, 멀고 가까운 여러 조부모님들도 근엄한 얼굴로 서 
계신데 그 중 몇몇 분은 이제 뵐 수 없는 고인이 되셨다.
  아버지 쪽 친척들은 러시아 이민 삼대째인 미니애폴리스의 
보수적 유태인들로, 가난에서 벗어난 첫 세대이다. 
언제나처럼 엄격한 얼굴의 할아버지는, 당신이 그러셨듯이 
나도 어떠한 상황에서건 굴하지 말고 버텨내라고 눈짓을 
보내신다. 할아버지는 열두 살 때부터 살을 에는 추위 속 
세인트 폴 가 모퉁이에서 신문팔이를 하여 전 가족을 
부양하셨다. 자신의 두 어깨로 가족들을 책임지셨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고난이 끝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음을 
말씀하시려는 듯 인상을 쓰고 계신다.
  어머니의 왼쪽에 선 하객들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베네츠빌의 흑인 침례교도들이다. 그분들은 내 눈을 
날카롭게 쏘아보면서, 목화밭과 설교단에서 쌓아올린 땀과 
노고와 긍지의 전통을 이어 가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어머니, 마리언 라이트 에델만은 아동 권익의 
대변자로서, 남을 돕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침으로써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가치관을 이어 왔다. 아마도 
세상에서 우리 어머니만큼 정직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해 왔으며, 
자신의 올곧은 주장을 결코 굽힌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조상들의 유산은 우리들 각자에게 제각기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우리 가족의 과거를 민감하게 의식한다. 그것은 
버거우면서도 동기 유발이 되는 일이며, 부담스러우면서도 
사기를 북돋워 주는 일이다. 내가 만약 우리 친척들이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장애에 똑같이 부딪쳤더라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궁금하다.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이겨 내기가 특히 더 힘들고 
고단했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대의 명분을 찾기는 
쉬우나 그것의 대변자가 되어 효과적으로 싸우기는 쉽지 
않고,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지면서도 아이를 
키우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됨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못지 않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1970 년에 태어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처럼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인종 차별주의에 
대항한 민권 운동의 혜택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입었다.
  민권 운동의 단계가 없었다면 문화적인 제1 대 흑백 
혼혈아이자, 정치 상황에 관심 깊은 유복한 흑인 
자유주의자이며, 흑인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싸울 수 있는 
유태인 소년으로서의 현재의 나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이 사회가, 이토록 다양한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 발전해 나가도록 놓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들은 나를 실수하게끔 내버려 두고, 실수했을 
때에는 도와 줌으로써 나를 한 사람의 인격체가 되도록 길러 
주셨다. 국민학교 1 학년 때의 영어 철자법 대회에서 
'남자(m-e-n)'를 공중 변소에 씌어 있는 것처럼 대문자 
M으로 말하여 틀렸을 때, 두 분은 그래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또 내가 야구선수로서 신인티를 못 벗고, 최대의 
대학 리그전에서 한 회에 세차례나 에러를 냈을 때에도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다. 언제나 '무척'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우리는 네가 '무척' 자랑스럽단다."라고 하시는 두 분의 
격려 말씀은, 여러 해 동안 내게 무한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내가 듬뿍 쏟아부어 주신 칭찬에 감사할 줄 알게 되면서, 
이제 나는 두 분이 나를 받아 줄 때는 받아 주면서도 꾸짖을 
때는 적절히 꾸짖어 주신 것에도 감사하게 되었다.
  일례로, 내가 완두콩이나 강낭콩, 기타 녹색 야채를 먹지 
않으려고 이 호주머니, 저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닌 것은 
대수롭잖은 잘못이었고, 부모님도 그렇게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가게에서 초콜릿을 하나 훔친 것은 사소
  한 문제가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지시를 하는 아버지에게 리틀 리그에서 
유격수를 맡았던 내가 온 동네 부모들 앞에서 "엿이나 
드슈."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놀랄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너그러이 받아 
주셨다. 그러나 고등학교 다닐 때 새벽 네시에 집에 
들어와서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미친 듯이 옷을 
벗어 던지고,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닌 척했을 때는 그런 
식으로 넘어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코믹하긴 하나 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부정직한 일이었기에 나는 외출 금지 
처분을 받았다. 외출 금지는 그 경우를 포함하여 이제껏 단 
두 번밖에 실시되지 않는 중벌이었다.
  이러한 벌과 꾸지람으로 나는 정직성과 솔직함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부모님의 칭찬으로 자신감을 얻게 되었듯이 
두분의 꾸짖음도 내게는 자양분이 되었다.
  어머니의 저서 출간은 나로선 두려워하면서도 환영해 온 
일이다. 두려워한 것은 내가 묶여 있는 가족적 유산과 내가 
지켜나가야 할 도덕적 규범이 얼마만한 것인지를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처럼 그토록 엄격한 
규범에 맞추어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이유로 해서 이를 환영한다. 격려와 
자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저서는 당신 삶의 신조를 글자를 통해 고백해 
놓은 것으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교훈 중 많은 것에 공감하고 있으나, 나는 
그 중 특히 세가지를 내 선조들의 정신적 유산으로 여기게 
되었다.

  1. 땀 흘려 노력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
  2. 결코 포기하지 말아라.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이겨 낼 수 있다.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치고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3.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너희는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 너희가 무슨 말을 하듯 무슨 행동을 
하든, 나나 하느님의 사랑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 과제에 봉착하여 무력감에 휩싸일 때, 
나는 우리 가족과 부모님들이 내게 물려주신 유산 한가운데 
있는 사랑을 상기한다. 그 사랑에서 힘을 얻어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조나 마틴 에델만
            1991 년 11월 
  @[  1장 가족의 유산

  아무도 우리를 업신여기게 하지 말며, 우리 또한 아무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

  내 고향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이고, 나는 침례교 
목사들의 이모이며 손녀이며 딸이며 여동생이다. 예배는 
먹고, 자고 학교에 가는 것만큼이나 내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교회는 흑인 어린이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 활동의 중심이었고, 우리를 보살펴 주는 흑인 
어른들은 인종차별적이고 적대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완충제 
역할을 해주었다.
  외부 세계에서 우리들은 하찮은 존재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선생님들 
역시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셨으며, 목사님들까지도 우리들은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종적으로 차별받던 
어린 시절에 내게 전해진 메시지는 '아무도 우리를 
업신여기게 하지 말며, 우리 또한 아무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을 놀이터에서 놀거나 의약품을 파는 매점에 
앉아 콜라를 사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교회 
뒤에 놀이터와 간이 매점을 지어 주셨다. 아버지는 필요한 
점이 눈에 뜨일 때마다 늘 이에 대처하려고 애를 쓰셨다.
  베네츠빌에는 흑인 양로원이 없어서, 아버지는 길 건너에 
양로원을 하나 지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요리를 하고 시중을 들고 청소를 맡았다. 우리들은 
집안의 노인이나 연로하신 이웃 분들을 돌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어머니가 양로원 일을 
책임지셨고, 1984 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오빠 
줄리언이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다.
  언니와 나와 세 오빠들이 성장하여 집을 떠난 다음에는 
부모님의 수양 아들, 딸 열두 명이 우리가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육아와 부모님의 일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다녔고, 부모나 
다름없는 신도들과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분들은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동안 나를 데려다 돌봐 
주셨고, 내 행동이 우리 교회와 마을 공동체가 기대하는 
올바른 품행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나를 꾸짖고 부모님에게 
알렸다. 대신, 내가 잘했을 때에는 이를 칭찬하고 자상한 
손길로 한껏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였다.
  잘한다는 것은 성적을 잘 받는다든지, 주일학교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누군가를 도와 주고, 
예의를 지키며, 독서를 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이것저것 잔일을 시키지 않았을 
때라고는 우리가 책을 읽고 있을 때뿐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는 
늘상 "할 일이 그렇게도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일거리를 
주시곤 했다.
  우리는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를 일찍부터 배웠다. 아이들은 설교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너무 비천해서 못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체득해 갔다.
  내가 여덟 살이었던가, 아홉 살이었던가. 오빠 해리와 
함께 중환을 앓고 있는 가난한 여인의 침대를 정리하고 
욕창을 닦아 주는 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리지 않을까 
하는 문제로 부모님이 논쟁을 하시던 일이 기억난다. 결국 
나는 오빠를 따라 갔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도움이나 친절이라도 정말이지 큰힘이 된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교회와 마을의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스스로를 
가치있고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그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우리들에게 관심을 쏟아 주셨다. 우리에게 
각자의 적성에 맞는 일거리를 마련해 주려고 애를 쓰신 
것이다. 생활은 힘들었고 돈은 없었으나,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항상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의 가치를 재는 
척도는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에 있는 것이지, 소유한 
물질이나 피부색 같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에는 난관이 많으며, 
흑인들에게는 더 많은 난관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들과 싸워 변화시킬 능력과 의무가 있다는 
것도 말해 주셨다. 가난하다는 것 자체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데 대한 변명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지적, 
물질적으로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질 책임과 권리가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남을 
위한 봉사는 삶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와 같은 것이라고 배웠다. 봉사는 바로 삶의 
목적이지, 시간이 남아 돌아갈 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부모와 교회와 선생님들이 우리 세대의 흑인 어린이들에게 
남겨 주신 유산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일상적인 봉사 활동으로 나타나는 
살아 있는 믿음, 힘들여 일하고 끈기 있게 버티는 훈련, 
역경에 처했을 때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 같은 것들이었다. 
'포기한다'거나 '지쳐 떨어진다' 같은 말은 어른들이 쓰는 말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서, 제대로 해낼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투지가 있었다. 그들은 가정 생활과 
가족만의 대소사를 소중히 여겼고, 스스로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어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려고 애를 썼다.
  역할 모델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마리언 
앤더슨(필라델피아 태생의 흑인 성악가; 옮긴이)처럼 세상에 
나아가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다. 또 하나는 그다지 많은 
교육을 받거나 멋진 옷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는 특별한 기품을 통해 하느님의 왕국은 우리 
마음 속에 있음을 가르쳐 준 사람들이다. 즉 하느님의 
왕국은 가진 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에 
깃드는 것임을 보여 준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 톨스토이, 간디, 도로시 데이(뉴욕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카톨릭 개혁가; 옮긴이), 그리고 킹 목사의 
메시지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아직도 루시 멕퀸, 티 켈리, 케이트 윈스턴 같은 
우리 교회와 마을에 계신 흑인 어른들의 반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었으면 한다. 그들은 어린이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참을성있고 애정 깊은 탁월한 여성들로, 내가 
스펠만 대학에 진학했을 때 구두 상자 속에 닭고기와 
비스킷과 기름때 묻은 돈을 넣어 보내 주셨던 분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전 과목 A학점을 받고도 인생에서는 
낙제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혜로운 그들의 영향을 받아 내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한 몫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버렸듯이, 나와 내 
오빠, 언니들도 자칫 희망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가정과 학교, 교회, 그리고 사회 
생활 및 정치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변함없이 보살펴 주고 
관심을 기울여 주는 어른들이 계셨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에 
대항하여 싸우고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우리가 갈구했던 
가능성에 대한 꿈을 불러 일으켜 주었던 분들이다.
  애틀랜타의 스펠만 대학에서는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예배 시간이 있었다. 나는 자신의 교육과 성숙은 
자기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치관을 
매일매일의 예배 시간을 통해 받아들였다.
  예배 참석은 의무적이어서 결석을 하면 평점에서 감점을 
당해야 했다. 당시에는 이에 대해 많은 반발을 했으나, 지금 
나는 예배 시간의 설교자들이 들려 준 인생과 배움의 목적에 
대한 얘기를 그 어떤 수업 내용보다 휠씬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스펠만 대학의 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나는 
매일은 아니더라도 월 한 차례씩의 예배 참석을 
의무화함으로써 예전의 나 같은 젊은 여성들이 우리 
어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설교를 듣게 말들었다.
  그 당시 모어하우스 대학의 총장이셨던 벤야민 메이스 
박사, 보스턴 대학의 신학대학장인 하워드 터먼 박사, 
그리고 마틴루터 킹 목사 같은 분들이 스펠만 대학의 여학생 
예배에 와서 설교를 해 주었다. 나의 스승이자 역할 모델인 
이분들은 모두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교육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향상 시키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이 
세계를 자신이 태어났을 때 보다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가르침과 그들이 보여 준 모범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살아 온 바로 그 시대를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 왔으며, 
어른으로서 그리고 흑인 여성으로서 나는 내 주변 세계를 
커다란 애정의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2장 봉사라는 유산의 계승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보다 강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곧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다.

  어른들 모두, 특히 부모와 교육자와 종교적 지도자들은 
인생을 통해 배운 교훈을 어린이들에게 들려 줄 책임이 
있다. 또한 우리 어른들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되풀이해서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는 흔히 결과가 먼저 오고, 교훈은 나중에 얻는 
수가 많다. 에이즈와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고 점점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맺게 되는 오늘날에는, 그 결과가 자칫 
치명적이거나 평생 동안 따라 다니는 수가 많다. 따라서 
부모 자식 간의 숨김없는 대화 속에서 어른이 모범을 보이고 
바르게 지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대부분은 청소년들은 인생의 역경을 타개해 나갈 
방법도 미처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있다. 희망도 없고 
적적한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도 없다. 성인이 되기까지 
부딪쳐야 하는 험난한 인생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해 나갈 
확고한 내면의 나침반도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젊은이들을 마약과 폭력, 미성년자들의 
무분별한 출산, 좋지 않은 건강과 취약한 교육, 실업 및 
가정의 붕괴 속에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초래하는 원인인 동시에 이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이기도 한 정신적, 육체적 빈곤이 그들을 삼켜 버리려 
하는 것이다.
  수백만 명의 라틴계, 인디언, 기타 소수 민족 자녀들도 
비슷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모든 계층의 백인 청소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술적, 정치적으로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개혁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한 국민으로서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우리 세대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은 몇 번씩이고 규범을 
이탈하여서라도 융통성 있고 재빠르고 영리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야 하는 실정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 아니 우리 모두는 어지러울 정도의 
국제적 변화와 도전 그리고 엄청난 사회적^5,23^경제적 
격변에 직면해 있다. 무역 수지에 있어서의 불균형, 차츰 더 
고령화하는 노년층 등이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은 점점 더 
감소해 가는 젊은 근로자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교육 제도는 후기 산업 사회의 경제가 
요구하는 새롭고 유연성 있는 기술 교육을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대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고,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편모나 편부 슬하에 자라나게 되면서, 
그들을 애정으로 돌보고 양육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다.
  청소년들에게는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사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따위의 귀 따가운 문화적 
메시지가 들이부어지고 있다.
  반면 너무나 많은 가정에서는 거의 아무런 우려의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개인 생활에서도 공공 
생활에서도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제시할 도덕적 지도자가 
너무나도 없다. 그러는 동안 시간적, 경제적 압력은 
가중되고, 가중된 압력은 범가족적 연계 조직이나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한 민간 및 공공 기관의 정책으로도 해소시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것이 현재의 사회 문화적 조류이다. 그러기에 나는, 각 
가정과 국가가 1990 년대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 되찾아야 
할 변함없는 정신적 가치와 교훈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보다 강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곧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 
아키볼드 맥클리시(미국의 시인, 비평가; 옮긴이)의 말에 
공감한다.
  맏아들 조슈아가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그 아래인 
조나와 에즈라도 성년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달에 걸쳐 
해보았다. 다음 장의 '내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인생을 
위한 스물다섯개의 교훈'이 내게 떠오른 해답이다.
  나의 부모님들은 일과 가정을 동시에 잘 꾸려 나가셨다. 
물론 그때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당시의 주변 상황은 보다 
단순하였고 대처하기가 용이하였다. 나도 이 둘을 함께 엮어 
가려고 노력하긴 했으나 얼마만큼 성공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어렸을 적에 나는 부모님의 삶의 자세를 본받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내가 넘어질 때면 두 분은 나를 
일으켜 세워 주셨다. 내 자식들이 그때의 나처럼 내게서 
무언가를 분명하게 보고 배우는지는 잘 알 수 없다.
  1989 년에 나는 이탈리아 벨라지오 지방의 아름다운 
언덕을 거닐고 있었다. 눈앞에 코모 호의 기막힌 경관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부모님이 우리 다섯 
형제들에게 남겨 주신 정신의 닻과 발판과 나침반을 가슴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인생의 험산을 넘고 계속과 
사막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거나, 목전에 닥친 임무를 완수할 능력이 내게 몹시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가슴 속에는 
곡조도 안 맞는 콧노래로 아버지가 자주 흥얼거리시던 
'길레아드에는 향료가 있다네.'라는 영가가 솟아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심부름꾼이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나 마틴 루터 킹이나 제시 
잭슨(침례교 목사로서 민권 운동가이며 정치가; 옮긴이)처럼 
꼭 설교를 하는 목사일 필요도, 또 하버드나 예일 
졸업생이어야 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굳이 국회의 
일원이나 백악관의 주인공이 될 필요도 없고, 또한 이 
사회의 어떤 공인된 기준에 부합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점점 더 가중되는 일과 가족 사이에서 더러는 길을 
잃어버리고픈 유혹을 느낀다. 한편 우리의 문화는 내실과 
통찰력, 봉사와 구체적인 행동보다 눈앞에 드러나는 형식과 
포장과 명성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런 문화의 요구 
속에서 갈등을 느낄 때에 나를 붙들어매 주는 것은 언제나 
부모님이 몸소 보여 주신 본보기와 메시지들이다.
  많은 여느 부모들처럼 나도 자식들에게 내가 가져 보지 
못한 모든 기회와 물질을 마련해 주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았나 염려스럽다. 흑인으로서 내 자신이 부딪치고 
극복해야 했던 온갖 곤란과 장애로부터 자식들을 보호하려고 
애쓴 나머지, 정작 내가 성장할 때 가졌던 가장 중요한 
것들, 즉 가족과 지역 사회로부터 받은 정신적 가치관을 
그들에게 확실하게 나눠 주지 못한 것이나 아닌가 두렵다.
  그러한 가치관들은 나와 우리 세대의 많은 흑인들로 
하여금 무관심과 패배주의, 부정적인 사고 경향, 이기심 및 
좌절 등의 질병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우리의 
의지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내면적인 
투쟁을 통해 단련되었다.
  내 아이들은 나의 어린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경쟁적인 메시지와 가치관의 집중 포격을 받으며 자라났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기억하도록 가르침 받은 것들을 
그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 덧붙여 독서와 명상, 기도, 침묵, 
개인적 경험, 그리고 주어진 임무를 파악하고 수행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내가 직접 배운 것들도 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는 내 아이들이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날마다 내 생각과 기도 속에 그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그들 각자는 내 가슴 속에서 매우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다른 
형제가 빼앗아가거나 대신 차지할 수 없는 자기 몫의 사랑을 
받고 있음도 알아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내 자식들을 위해 쓰여진 것인 동시에, 나의 
아들들처럼 일정한 나이가 지나 이제 충고를 달가워하지 
않는 자녀를 둔 부모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 글이 독선적이고 설교적으로 보이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저 나는 맨 앞줄에 서서 매 순간마다 내가 부르짖은 
대로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만 알아 주었으면 
한다. 
  @[  3장  나의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

  희망이란 최선을 다 한다는 것 자체가 선한 일이라는 
믿음으로 일에 매진하는 능력을 말한다.

  성장하여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열정을 지니며, 신의 뜻을 발견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너희들처럼 인종적, 
종교적으로 혼합된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힘들 수도 있다. 일부 못나고 자신 없는 
소인배들은 자기들과 '달라' 보이는 사람들을 깔보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우려 드는 수가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너희의 풍부한 이중적인 유산을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또한 너희들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너희가 
누구인지를 느끼고, 흑인가 유태인이라는 피압박 민족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으로부터 힘과 자부심을 이끌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더한 핍박 
속에서도  살아 남은 민족이 아니냐.
  근세사에 있어서 이들 두 민족은 남을 노^36^예로 삼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노^36^예였으며, 인종 차별을 
한 사람이 아니라 차별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업적이란다. 모든 위대한 종교의 첫 번째 가르침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더냐,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인생에서 필요로 하는 유일한 도덕적 
규범이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너무나 힘든 노릇이다. 많은 소수 민족이나 
여성들도 이와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기는 하지. 그러나 
피부색이야말로 우리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니냐? 
끊임없이 자신의 피부색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 아무런 
부담이나 책임감도 없이 너희에게만 유독 문화적, 인종적인 
시선을 던지는 수많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게다. 사람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흑인으로만, 여자로만, 유태인으로만 판단하려는 
이들과 교제한다는 건 너무나도 피곤한 일이지.
  너희들을 비슷한 또래의 백인들보다 무조건 열등할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는 '백인'대학 캠퍼스에서 흑인 
학생으로 지낸다는 건 무척 힘들 수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이 있는 '백인'기관에서의 흑인 직원 노릇도 
마찬가지로 힘들지.
  적어도 다른 인종들만큼 똑똑하고, 정직하고, 재미있고, 
폭넓고, 열성적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끊임없는 
부담감은 너희를 지치게 하겠지. 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매번 저울질해야 한다는 
것 역시 기운 빠지는 노릇일 것이다.
  "뭣 땜에 그러고 살아?" 하는 불쾌감에 자기들의 존재가 
끊임없는 공격과 시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 흑인 대학으로 
진학하는 흑인 청년들의 태도를 나도 이해한다. 그들은 
흑인이라면 아침, 점심, 저녁을 막론하고 줄곧 모든 흑인 
문제에 대한 전문가이기를 기대하는 일부 백인들의 한결같이 
무신경한 태도를 무시해 버릴 것인가, 고려해 볼 것인가, 
아니면 반박할 것인가 등의 하찮은 문젯거리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지. 한동안은 말이야.
  그 대신 예술을 논하거나, 소문을 얘기하거나, 아니면 
그저 남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을 수도 있을 테지. 
백인들은 또 흑인 학생들이 '적극적 차별해소정책'(소수 민족 
차별 해소, 여성고용 등을 추진하는 미국의 적극적 정치 
사회 정책; 옮긴이) 덕분에 백인 학교에 입학이 되긴 했지만 
실은 자기들보다 성적이 못할 거라고 넘겨짚기도 하지.
  흑인 대학들이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을 이 사회의 주류 
속에서 헤엄쳐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맡아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 보았자, 숨을 데라고는 
없단다. 정치와 언론이 교묘하고 냉소적인 조작으로 인종적 
반발심을 부추기고 있는 이상, 이 시대의 부정적인 편견에서 
도피할 길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며 
그들을 변화 시킬 준비를 갖출 수밖에 없는 거란다.
  '적극적 차별해소정책'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이득을 얻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성공을 
하려면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누구나 공부와 일을 잘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적극적 차별해소정책을 
하나의 특혜나, 버팀목으로 삼아선 안 되지. 일류로 일을 
해낼 능력을 갖추지 않거나, 성심 성의껏 일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된다. 반대로, 오명을 들씌울 
핑계로 삼아서도 안 된고 말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메이저 그룹이라 일컬어지는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은 수세기에 걸친 '적극적 
차별해소정책'과, 이것과는 별개인 고용상의 할당제도(교육 
및 고용에서 일정 수의 흑인이나 여성에게 자리를 할당하는 
제도; 옮긴이)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 과거, 
그들은 유태인과 소수 민족,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일자리를 
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차별해소정책을 구실로 흑인 전체나 너희들에게 
개인적으로 얼마간 오명을 씌우려 드는 일부의 태도에 대해 
굳이 반발하고 나설 건 없다. 너희는 각자의 능력, 열성, 
부단한 노력을 바탕으로 잘 해내야 하고 또 해낼 수가 
있단다. 그저 너희 능력이 닿는 한도껏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너희가 비교해야 할 대상은 너희 자신뿐이다. 성취 목표와 
행동거지에 있어 너희 각자의 높은 기준을 설정해 두어야 
한다. 나나, 너희 아버지나, 너희 고용주나, 친구들의 기준을 
따를 필요는 없는 거다.
  미국의 끊임없는 인종 문제에는 속시원한 해결책이 없다. 
너희보다 앞서간 사람들이 그랬듯이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 
밖엔 다른 도리가 없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거야. 그 누구도 오로지 인종에 의해 
너희를 구속하거나 규정짓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인종 때문에 손상을 
입어서는 안되는 거야.
  인종과 성별은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그 누구도 
선택하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인종이란 하나의 
주어진 사실일 뿐이다. 반면 인종 차별주의자나 성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정신 상태이며 선택인 
것이지.
  킹 목사, 말콤 엑스 같은 분들도 모두 "백인 우월주의란 
정신상태이다."라고 상기시킨 바 있다.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한 투쟁은 양심의 투쟁이지 인종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고 
말이다.
  따라서 소수 민족들도 자기들을 학대한 이들과 똑같이 
나서서 인종 분열을 부추긴다면, 그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비록 그러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거야 이해한다 해도 
말이지. 조지 워싱턴 카버(흑인 식물학자; 옮긴이)도 언젠가 
상대방을 미워할 정도로까지 누군가에게 끌려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지 않는냐.
  간디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맨 먼저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한다. 
아무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는다. 누구로부터의 불공평에도 
굴하지 않는다.
  루스벨트는 아무도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를 열등하게 
느끼도록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할 
말들이다.
  사람을 오직 그들 각자의 인격과 개인적인 노력, 그리고 
업적에 의해서만 존중하여라. 결코 인종, 종교, 성별, 계급, 
명성, 부, 또는 직위 때문에 경의를 표하지는 마라. 백인들이 
흑인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창조하지도 
기독교인들이 유태인들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감히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판단하고 
축소시키고 소외시킬수가 있단 말이냐? 또 어째서 그런 
현상적인 것만을 바탕으로 존경을 바랄 수가 있단 말이냐?
  인생을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서 훨씬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전혀 또는 극히 조금밖에 
못받고 시작하는 사람들보다 더 찬사를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아무도 남의 꿈에 재를 뿌릴 권리는 
없다. 아무도 남을 소유한 재산이나 그의 생김새를 근거로 
규정할 권리는 없는 거란다.
  이 세상이야 뭐라고 판단하건 너희들 내면의 참모습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라. 하느님과 이 엄마의 더없이 소중한 
자식들이라고 말이야. 너희가 하는 일이나 외모나 소유한 
물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말이야.
  부모로서 우리는 이런 마음을 자식들에게 전달할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있다. 너희가 잘 알 듯이 나도 예외가 
아니다. 너희도 그랬듯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성공하고 
일등을 하고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아야 한다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고 있지. 훌륭한 직업을 얻고 학과 공부 
이외의 것에서도 잘해 나가야 한다고 말이야.
  그 모든 것이 인생에서의 선택 가능성을 넓혀 주는 자기 
훈련을 쌓는 데에 중요한 것들이긴 하다. 우수한 성적과 
업적이야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거지. 그러나 너희 고유의 
가치나 너희를 한 인간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야. 그 어떤 상도, 너희들이 우리에게 
주었고 지금도 계속 가져다 주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란다.
  너희들 말에 귀 기울여야 했을 때였음에도 오히려 내가 
떠들어댔던 모든 때를 용서해 다오. 참아야 했으나 화를 
냈던 때, 기다려야 했으나 행동을 했던 때, 기뻐해야 했으나 
두려워했던 때도 많았지. 격려를 해야 했으나 꾸중을 했던 
때를 용서해라. 칭찬을 해야 했으나 비난을 했던 때를 
용서해라. 허락을 해야 했으나 거절했던 때, 그리고 
거절해야 했으나 반대로 허락을 했던 그 모든 때를 용서해 
다오. 나도 엄마 노릇이 서투른 때문이었다. 너무 잘 하려 
한 나머지 너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했지. 생긴 
그대로의 너희를 계발하고 길러 주는 대신, 때로 너희를 
내가 바라는 이미지 속에 끼워맞추려 한 잘못도 저질렀단다.
  너희들 각자가 모든 면에서 자랑스럽게 성장해 주어서 
엄마, 아빠를 훌륭한 부모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무엇보다도 너희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 말해 
주고 싶구나. 그리고 얼마나 잘 했는지 칭찬해 주지 못한 
때가 많았음을 용서해 다오. 그냥 내버려 두었거나 그리 잘 
하지 못한 일에 대해 부모로서 꾸짖기에만 너무 급급했던 것 
같구나. 뭐든 잘 해내야 한다는 기대치 때문에, 아직도 나는 
너희들과 너희 아버지와 동료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과 자구만 씨름하게 되는 구나. 축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어렸을 때부터의 내 기질이지.
  이 사회는 이제 타인에 대한 배려에 너무나 인색해진 
나머지 평범한 인간적인 나눔이나 마음씀이 '인도주의 
상감'이라고 생각될 지경이다. 근면한 노력을 당연한 일이 
아니라 아주 예외적인 일로 여기는 듯한 이 사회풍조에 
아직도 내가 주춤하고 움츠러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과 남의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내 
노력이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염려스럽다. 나는 
너무나 힘들게, 더러는 광적이기까지 한 노력을 
기울였으니까. 그 아이들이야말로 학교와 거리와 이 나라와 
세계를 너희와 공유하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냐.
  너희들을 염려하고 너희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으면 
싶을수록, 역설적으로 나는 우리보다 훨씬 더 못 가진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단다. 너희들 중 
하나가 고열이 나거나 귀앓이를 하거나 하면, 나는 곧바로 
소아과 의사에게 전화하여 즉각 데려가 보일 수가 있었지. 
심한 천식을 일으키거나 운동 중 부상을 입었을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내 처지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부모들의 경우, 자녀들의 고통과 부모 자신의 
공포를 덜 길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가난이, 검은 피부 색깔이 그 같은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의 
전부라니^5,5,5^.
  나는 자영업자인 셈이기 때문에 위급시에는 너희가 
최우선이라는 내 원칙을 따를 수가 있었다. 만약 너희가 
아픈데 너희 아버지가 집에 계실 수 없을 때에는 나는 
언제라도 집에서 너희곁에 머물 수가 있었단다. 그래도 역시 
고민스런 선택을 내려야 했던 적이야 있었지.
  그러나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진짜 선택권은 내게 
있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너희를 돌보기 위해서 
사무실을 비우고 회의에 불참하면서도 직장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없이 너희 선생님과 면담을 할 수도 
있었지. 뿐만 아니라 내게는 너희를 길러 주는 파트너가 두 
분이나 있지 않았느냐. 너희 아버지와 십삼 년 동안이나 
같이 살면서 너희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준 '에이미' 
할머니 말이다. 이렇게 훌륭한 파트너가 있긴 했지만, 아픈 
너희를 집에 남겨두고 나가야 했을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이런 불편한 마음 때문에, 병든 가족의 간호를 위한 
결근을 허용치 않는 국가적, 기업적 정책과 우선 순위들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 것이란다. 선진국치고 어디 이런 나라가 
있느냐 말이다. 아픈 너희들을 혼자 집에 놔 두고 업무에 
집중한다는 것은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학교 자모 회의에 대부분 다 참석하긴 했으나, 지쳐 
있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갔을 때가 많았다. 각각 다른 
세 학교에 다니는 너희들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고, 밤에 
자모회의에 참석하고, 낮에는 중요한 학교 회의나 조회나 
교사 상담 같은 것에 일일이 참석하기란 벅찬 노릇이었지. 
그럴 때면 나는 안전하지도 못한 동네에 사는 수백만의 
가난한 편모, 편부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자동차나 아이를 돌봐 주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자녀들의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나도 모임에 내 몫의 빵이나 과자를 구워 가려고 애쓰기도 
했단다. 또한 내 부모님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들 
각자의 방식으로 짚어 가야 할 문제에 대처하려고 노력했다. 
너희들에 대한 보호는 단지 우리 부엌이나 우리집 현관, 
또는 너희들의 개인적인 필요에만 좁은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믿고 있다.
  성인이 되어 가면서 너희는 교육적,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너희의 생활을 이 세상, 이 나라, 심지어 우리가 사는 
도시의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누리고 있는 게 아님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워싱턴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에서 살고 있지. 반면, 우리 집에서 고작 십 분 
떨어진 곳에서는 수천명의 어린이들이, 그들을 공포와 가난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범 지대에서 살고 있지 않는냐.
  제 1세계의 혜택과 제 3세계의 궁핍과 분노가 이 나라의 
수도뿐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 뒤섞여 있단다. 그 모두가 
청소년들을 보호할 능력은 있으나 도덕적 관심과 정치적 
의지가 없기 때문이지.
  너희도 다른 사람의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다른 
사람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한다. 또한 수백만 
명의 남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오염된 공기 속에서 숨을 
쉬고 오염된 음식을 먹지. 그리고 농약과 화학 물질과 
유독성 폐기물, 그리고 구멍 뚫린 오존층의 위협을 받고 
있지. 거리의 음주 운전자들과 마약 중독자들은 모든 미국 
청소년들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고 말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 끊임없는 
광고와 문화적 신호들은 방탕한 소비와 폭력을 부추기며, 
번드르르한 외양이 실체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의 개인적인 
관심만으로 이러한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일 뿐 아니라 비현실적이다.
  어머니로서 나는 너희들의 모든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듬뿍 사랑해 주고 싶었다. 동시에 책임을 다 해야 할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공공 지대로 넘쳐 들어와 모든 
미국인의 삶의 질과 안전, 그리고 지갑과 미래를 위협하는 
비행 청소년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한 내가 물려받은 
것보다 좀더 안전하고 희망적인 지역 사회와 미래를 
너희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단다.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상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야.
  부모가 자식의 인격 형성을 돕는 것처럼 자식 역시 그 
부모의 인격 형성을 돕는 법이란다. 너희는 나를 성장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렇게 나를 많이 도와 주고 참아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너희들의 청소년기 추억이 주로 긍정적이고 사랑에 찬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머니로서의 나의 결점들이 
너희의 성장을 구속하거나, 너희의 자부심을 약화시키지 
않았기를 하느님께 많이 기도하고 있다. 나의 약점이 너희를 
강하게 하고, 내가 역설하는 대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내 
노력이, 너희의 인성 발전에 장애가 아닌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비록 내 노력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부모란 때로는 약하고 불안한 존재란다. 그러면서도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보호와 지지를 받게 되면 강인해지고 이내 
원기를 회복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줄곧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너희들처럼 계속 
성장하려고 애를 쓰고 있단다. 얘들아, 우리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다 너희 
덕분이다. 너희의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만한 메시지를 너희에게 전해 주려고 우리는 
노력한단다.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말이다. 
언젠가는 나도 더욱 크게 성장하여 바로 그렇게, 또한 
바대로 되었노라고 자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내가 늘 확신에 차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내가 뒤따르려고 하는 수많은 
선배들처럼 나도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너무도 
많단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꼭 해야 할 일을 대면하기가 
두려운 때도 부지기수란다. 미국이란 이 나라가 인종적, 
경제적, 성적 평등의 보장을 위한 작업을 언제쯤 마무리지을 
것인지 낙담하고 좌절한 적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텔레비젼에서 냉소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정치가들을 볼 
때면, 나는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또 다시 이 지점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는지 의아해진단다. 지난 삼십 년간에 걸친 
그 모든 투쟁과 발전 다음에 말이야. 나의 자식들이 나는 
끝난 줄로만 알았던 싸움을 처음부터 다시 전개해야 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구나.
  우리를 뒤로 돌려보내려는 사람들이 멈추지 않는 한 나도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점차 도를 더해 가는 우리 
사회의 폭력과 그를 부추기는 무관심과 무지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에게 물어 본단다. 적대 감정을 
부추기는 선동가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전보다 내 믿음이 혹시 덜 굳건한 건 아닐까 하고. 
그리고는 변화를 위해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내게 부여되었던 모든 것과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상기해 본단다.
  나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예중의 하나란다. 1940 년대와 1950 년대 내 어린 시절의 
인종 차별은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철벽 같아 보였단다. 내가 
성장하면서부터 보아 온 긍정적인 변화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그러나 나의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은 그런 
꿈을 꾸었고,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단다.
  나도 미국의 가장 양심적인 자의식이 점점 증폭되어 가는 
인종적, 계급적 분열을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하벨 대통령은 감옥에 있을 때, 
희망이란 이 세계의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묘사하였지 않느냐.
  "희망은 영혼의 한 차원이다. 이러한 깊고 강력한 
의미에서의 희망이란 단지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선한 일이라는 믿음으로 
일에 매진하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지금 우리들의 현실처럼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힘과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 의지를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희망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긍정적인 열정을 찾아내기 바란다. 또한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갈 사랑하는 동반자를 만나기를 바란다.
  이제 무한한 사랑과 기도로 스물다섯 개의 교훈을 
너희들에게 준다. 너희들 앞에 가로놓인 바윗덩이를 넘어 
자신감과 여유를 가지고 꿋꿋이 길을 헤쳐 나가는 데에 
이것들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편지와 교훈들을 너희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말해 주는 표징이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안내서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너희들은 물론 그것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고 
혹은 일부만을 필요한 대로 사용하겠지. 너희들 스스로 
취사선택을 내릴 능력이 있으리라 믿는다. 너희들에게 주는 
이 유산의 일부나마 너희의 자식들과 자식들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져 내려갈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면 
한다. 너희와 자식들의 길을 밝히고 계도시켜 줄 사랑의 
등불로서 말이다.
  모든 면에서 이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단다. 
너희들에 대한 내 사랑이 얼마만한 것인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구나. 
  @[  4장  인생을 위한 스물다섯 개의 교훈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은 이 세상을 재창조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1. 공짜란 없다. 땀 흘리고 애써 노력해 구하지 않은 것은 
가질 자격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각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우리가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프레데릭 더글라스(반노^36^예 운동가이자 사회개혁가; 
옮긴이)도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환기시키지 않았느냐.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값을 치른 모든 것을 다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들이 얻는 모든 것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만 한다."
  오늘날 대학 졸업장이 직장을 얻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경력의 사다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주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거기 머물러 있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올라가야 하는 거야. 한발 한발 공들인 
노력으로 말이야.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자녀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업무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며, 세부 사항을 꼼꼼히 살피고, 
정성들여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해야 한다고 말이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인생을 흔들거리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는 거야.
  우리들 각자는 앉아서 행운을 기다릴 게 아니라, 앞장 
서서 우리의 기회를 창조해야만 한다. 문이 닫혀 있다고 
체념할 게 아니라 밀쳐 열어야 해. 문이 어제 닫혀 있었다고 
해서 오늘도 닫혔을 거라고 예단하고 겁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우리는 케이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다."(We could have our cake and eat it 
too, 좋은 건 다 누려도 된다는 뜻; 옮긴이)고 한 1980 
년대의 수사학은 국가적 재난을 부르기에 꼭 알맞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나눌 줄을 모르거나 나누기 싫어하는 
국민, 희생할 줄 모르는 국민에게는 가족과 지역 사회를 
재건설하여 미래에 대비하는 용기와 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많은 백인들은 상황이 현재대로 유지되는 한 인종상의 
정의를 외쳐대겠지. 많은 유권자들이 국회를 비난하지만, 
자기네의 특별한 권익을 보살펴 주는 한, 자기네가 뽑은 
국회 의원을 좋아한다. 많은 남편들은 집안일 분담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아내의 수입을 공유하는 것은 
기뻐하지. 많은 미국인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중산층 사이에서 점점 더 벌어지는 소득 격차를 소리 높여 
비난하고 점점 가중되는 어린이들의 고통에 분개하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절대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남의 세금이 
인상되고 남의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이 삭감될 때에만 
정부의 조처를 지지할 따름이지.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은 개인과 지역 사회의 꾸준한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것들이다. 민간 기관과 정부 차원의 
노력으로 해결 가능한 것들이지. 과연 우리가 국가적 
사춘기에서 벗어나 성숙된 국민으로서 이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
  2. 목표를 설정하고 체계적으로 그것을 향해 나아가라.

  우리는 임시 변통으로 손쉬운 해답과 수월한 이익을 
얻으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런 것들은 흔히, 얻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법이란다.
  우리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말은 크게 하고 행동은 
작게 한다. 엘리엇도 그의 희곡 '칵테일 파티'에서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해악의 절반은 자신을 중요하게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일을 하되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성취할 수가 있을 
거야. 자기가 한 일은 자신이 알고 하느님이 아신다. 
그것으로 족한 게 아니냐.
      ------------
  3. 일을 찾아서 하여라.

  너희 외할아버지는 나나 너희 외삼촌들에게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는지 묻곤 하셨다. 숙제가 없다고 대답하면 
외할아버지는 "그럼, 너희가 직접 내서 하렴." 하셨지.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상관이나 동료나 배우자가 
시킬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라. 그럭저럭 모면할 정도로 
조금만 하려 들지 말아라.
  누가 A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B와 C도 분명 잘 할 
필요가 있는 일일 경우에는, 부탁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완벽한 일처리를 해주어야 한다. 또 노벨상이라도 받을 
듯 으쓱대지 말아라. 단지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
  투표에 참여하여라. 한 표가 무슨 힘이 있느냐는 구실 
뒤로 숨지 말아라. 정치가들에 대해 그냥 불평만 하고 있지 
말아라. 공직, 특히 학교 이사진에 출마하여라. 어린이와 
가정과 빈곤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공직을 맡아서 해낼 일이 많단다. 그러나 일단 공직에 
들어서고 나서는 그 자리 자체나 재선에만 집착해서는 
안돈다.
  어떤 필요가 눈에 보일 때 "왜 누가 어떻게 좀 하지 
않지?"라고 묻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무엇을 하라고 남이 말해 줄 때를 기다리고 
있지 말아라. 되풀이해서 부탁을 하고 상기시켜야 하는 
사람보다 더 피곤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고된 노력, 독창성, 그리고 끈기는 성공에 이르는 
정도란다.
      --------------
  4. 단지 금전이나 권력만을 위해 일하지 말아라. 그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구제하지도, 원만한 가정을 이루게 해 
주지도, 밤에 단잠을 자게 해주지도 못한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다. 그러나 투옥된 
사람과 마약 중독자, 그리고 빈민 아동의 비율은 선진국에서 
가장 높다.
  지위 고하, 흑인, 백인을 막론하고 도덕적 부패를 
용서하거나 묵인하지 말아라. 설사 온 나라 사람이 다 
그런다 하더라도, 마약을 권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업이나 공직자들, 그리고 
너희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런다 해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직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도 정직을 
요구하여라. 합법성과 도덕성을 혼동하지 말아라. 킹 목사는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가 저지른 모든 짓은 합법적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아무에게도 너희 양심을 위임하지 말아라.
  그리고 합법성과 공정성을 혼동하지 말아라. 빈민들과 
중산층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빼앗아 세법상의 허점과 자본 
이득을 통해 최고 부자들에게 혜택을 준 1980 년대의 
정책들은 합법적이었지. 그러나 공정치는 못하였다. 
어떻게든 우리는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과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히 '충분'의 개념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다수를 위한 필수품이 소수를 위한 사치품에 매물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수입보다 지출이 더 커서는 안된다. 
한푼이라도 저축을 하고 한푼이라도 남과 나누어 써야 한다.
      --------------
  5. 위험을 무릅쓴다거나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한 이름 모를 현자가 말하기를 "비판받기를 원치 않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되지 
말아라."고 하였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럼으로써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몇 번 
쓰러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일어서는가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이의 등 뒤에서 눈치나 살피며 
편하게 따라가려 하지 말아라. 무언가를 완수하고 움직여 
나가는 것은 언제나 소수에 불과했다. 이 나라에는 현명하고 
용감한 목자가 보다 많이 필요하다. 길 잃은 양은 적을수록 
좋지 않느냐.
  내가 미시시피 주의 젊은 민권 변호사였을 때 일이란다. 
그 때 나는, 월남전에 공공연히 반대하여 친구와 적으로부터 
동시에 비난을 받고 사면초가가 된 킹 목사에게 뭔가 위안을 
주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루스벨트가 한 말을 적어 보냈지.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니다. 강한 자가 어디서 
비틀거렸는지, 위대한 일을 한 자가 어느 때 더 잘 할 수 
있었는지를 지적하는 사람도 아니다. 공적은 실제로 
경기장에 나간 사람, 그 얼굴이 먼지와 땀과 피로 얼룩진 
사람의 것이다. 용감하게 투쟁하고, 잘못을 저질러 자꾸자꾸 
실패하는 사람의 것이다. 위대한 도전을 통해 자신을 가치 
있는 목적에 바침으로써, 그는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저들, 
냉담하고 소심한 무리 속에 끼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젊은이다운 격려의 몸짓은 불필요했더구나. 킹 
목사는 '양심의 트럼펫'지에 자신의 사명 의식과 용기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사람들은 내게 '당신은 민권 운동가가 아니오?'라고 
묻는다. 민권 운동가이니 민권 운동만 하라면서, 평화를 
위한 운동에서 나를 배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나는 공공 시설에서의 인종 
분리에 반대하여 너무나 오랫동안 힘들게 일해 온 나머지, 
이제 내 도덕적 관심을 분리시킬 수가 없게 되었노라고. 
정의는 분할될 수 없다. 나는 흑백 통합 학교의 구현을 위해 
정열적으로, 쉬지 않고 일해왔다. 그런 내가 통합 학교가 
존재하게 될 이 세계의 생존을 염려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6. 부모 역할과 가정 생활을 진지하게 여기고, 너희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처신하도록 요구하여라.

  우리의 지도자들은 가정의 소중함을 입으로만 떠들지. 
자기네는 그 소중함을 가꿔 가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 결과 우리의 어린이들은 유아 사망률, 
가난, 그리고 가족 부양 등과 같은 주요 아동 지표에 있어 
다른 나라 어린이들에게 뒤지고 있다.
  70개 국가가 임산부들에게 의료 및 재정 보조를 하고 
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17개 선진국에서는 출산 휴가를 
지급하고 있지. 하지만 우린 그렇지가 못하단다. 1990 년에 
미국 대통령은 출산을 하거나, 양자를 입양하거나, 자녀가 
아플 때에 부모가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붐의 무급 
휴가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실업계도 이를 반대하였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그 반대는 계속되고 있는 상태지.
  유아를 둔 엄니의 절반 이상이 취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의회와 백악관에 있는 남성 의원들은 모든 유자격 
빈민 아동들에게 취학 준비를 시키는 헤드 스타트(불우 
아동과 가정에 대한 교육, 의료, 사회 복지 지원을 위한 미 
정부 프로그램으로서 1965 년에 시작됨; 옮긴이) 유치원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 보장에 관하여 아직도 입씨름을 하는 
중이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제정된 포괄적인 육아법에 
대한 예산 지원을 망설이고 있다. 밖에 나가 일을 해야만 
하는 수백만 명의 부모들에게 안전하고 비용도 적당한 
양질의 육아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또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집 안에 남아 가사를 돌볼 경우 
당연히 배려되어야 할 적정 수준의 세금 공제와 의료 보험 
혜택 등에도 인색하기만 하단다.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 
중 너무 많은 남자들이, 일과 가정이라는 두 짐을 동시에 
꾸려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나라의 악전 고투하는 어머니들과 협력적인 
아버지들이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알량한 정치적 위선일랑 
집어치우라고 말할 때가 왔다.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걱정에서 해방되어, 집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밖에 나가 일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남자들은 출산의 결과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질 능력이 
있을때까지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은 젊었건 늙었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자기 
자식에 대한 양육 책임을 져야 한다. 이혼했거나 결혼 안 한 
아버지들 중의 극히 일부만이 일정하게 부양을 책임지고 
있다.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1990 년의 웰슬리 대학 졸업식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역설한 부시 여사의 생각에 나도 공감한다. 아무리 많은 
상을 받거나 직업적 성공을 얻을지라도, 나도 역시 내 
자식들에게는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을 통해 더 잘 기억되고 
싶다. 동시에 나는, 부시 여사나 내가 다른 대다수의 
부모들보다 상당히 좋은 조건하에서 자녀들을 교육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단다. 즉, 부시 여사와 나는 가정에서 
최상의 육아를 할 수 있을 만한 수입이 있기 때문에, 집 
밖에 나가 일을 할 것인지, 일을 한다면 언제 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가 있는 셈이지.
  집 밖에서 일하는 가난한 부모와 중산층 부모들에게 더 
이상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선택다운 선택이 절실하단다.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 및 중산층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은 현재 자녀들을 
위한 의료혜택과 식비 및 주거비에 대한 걱정 없이 가사만 
돌보고 있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적정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는 직업을 얻을 수도 없고, 훌륭한 탁아 
시설을 구해 그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들을 보살필 책임이 있는 거야.
  전 세계적으로 63개국이 근로자들과 그 자녀들에게 가족 
수당을 지급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그 
한가지 원인은 우리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생활 보조를 받기 위해 아기를 많이 낳으며, 
그렇게 해서 받은 보조금은 자녀를 위해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믿기 때문이야. 그러나 가난한 가정의 거의 
3분의 2 는 고작 두세 명의 자녀를 두었을 뿐이란다. 
우리들보다 결코 더 많은 게 아니지. 그들은 대다수의 
미국인들로선 생각할 수도 없는 힘든 방식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단다.
  자녀가 있는 전형적인 빈곤 가정은 그 수입의 70 
퍼센트를 주거비로 지불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면 
으레 도심부의 방종한 일부 흑인들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대다수는 일을 하며, 그 대부분이 도심에 
살고 있지 않단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야. 마약에 
중독된 아기는 자기가 원해서 중독된 것이 아니지 않니? 
어린 소녀가 낳은 아기 역시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이런 어린이들에게도 우리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활기차게 생활하고 사회에 기여를 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겠니?
  부모가 나쁘다고 그 자녀들을 벌하는 건 옳지 못하다. 
모든 어린이들을 귀중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투자하고, 
그들을 보호해 줘야 하는 거야.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서 생활 보조금 수혜자와 실업자, 한발 더 나아가 
범죄자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화를 
자초하고 있는 실정이란다.
      --------------
  7. 아내는 어머니나 하녀가 아니라, 너희의 동반자이자 
친구임을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가 아들들을 여성들에게 공평한 사람으로 
키우기를 바란다. 육아와 집안일도 단지 돕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나누어' 하는 사람으로 말이야. 너희 
외조부모님은 딸과 아들에 대한 기대에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언제나 우리들 각자로 하여금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까지 뻗어 나가 유용한 곳에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하셨지. 너희 외삼촌들도 이모나 나와 마찬가지로 
청소를 하고 이불을 갰으며, 나도 그들처럼 차에 왁스칠을 
하고 타이어 갈아끼우는 법을 배웠단다. 나는 인형보다도 
자동차와 기차를 훨씬 더 많이 가지고 놀았었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지금도 바느질이라곤 변변히 할 줄 모른단다.
  젊은 남성들은 직장에서나 마찬가지로 집 안에서도 무슨 
할 일이 없는지 살펴보고 찾아낼 책임을 져야 한다. 훌륭한 
파티를 열고, 묵어 가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데에는 
계획과 궁리가 필요한 거야. 매일 밤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하고, 집 안이 언제나 난장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지.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을 배우고 연습하여라. 때로는 
아내가 늦잠을 자게 내버려 둬라. 너희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않느냐. 너희가 만약 새벽 세 시에 잠이 깨어 부르거나 
울거나 기침을 하는 아이 소리에도 귀가 먼 채 단잠을 잘 수 
있었다면, 다음날 아내의 일을 대신 좀 맡아 줌으로써 
간밤의 수고와 그로 인한 피곤을 달래 주도록 하거라. 
아내가 부탁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렇게 해줄까 하고 물을 
것도 없이 말이야. 그냥 하는 거야!
  아침밥이나 저녁 준비를 할 수도 있고, 사려 깊이 
생각해서 뭔가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요리, 설거지, 빨래, 쓰레기버리기 등의 일상적인 집안일들을 
돌아가면서 나누어 해라. 여자들만이 변기를 닦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토한 것을 훔치고, 잊지 않고 꽃을 갖다 
꽂고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아내들만이 결근하여 
집에 있어야 한다거나, 남편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쪽이라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가계를 책임진다던가, 
잔디를 깎거나, 차고를 대청소하는 게 너희 남자들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
  파출부도 없이 직장에 나가거나, 혹은 집 안에서라도 
일거리를 갖고 있는 아내나 어머니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무언지 아니? 너희들이 어질러 놓은 뒤치다꺼리를 너희가 
아니라 그네들이 하도록 미루는 태도야.
  너희가 어지른 것은 너희가 치우도록 해라. 너희가 사용한 
타월이나 너희가 벗은 옷가지는 스스로 치워라. 식사가 
끝나면 너희 그릇은 너희 스스로 내가도록 하고, 쓴 물건은 
다음 사람을 위해 제자리에 놓아 두어라. 간단히 말해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아내를 대접하라는 얘기다.
  나는 너희 아버지와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이런 
집안일들이야 일부든 전부든 기꺼이 한단다. 나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일이고 또 내가 
해주고 싶기 때문이지. 너희도 그런 마음이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결혼 생활의 
모델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집 안팎에서 자식들을 
돌보아 주셨고, 집이나 지역 공동체 가릴 것 없이 필요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도 집 
안을 깔끔하게 해놓고 있기를 더 좋아하신 만큼 일도 더 
많이 하셨지. 하지만 아버지는 머리를 땋는 것을 별로 잘 
못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뉴욕 외가에 가고 안 계실 때면 
나를 길 건너 이웃집에 보내어 머리를 땋아 오게 하셨단다.
  아버지는 목사요 교사였고, 어머니는 교회 업무의 
조직책이요 기금조성자였단다. 어머니는 교회의 금을 
마련하러 다닐 때나, 교회의 제반 행사들을 계획하는 
부녀회를 조직하고 모임을 가질 때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집이나 교회를 소제하는 것이든, 주보 발행을 돕는 것이든, 
환자와 빈민들을 심방하는 것이든, 두 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기만 하신 적이 없었어. 늘 우리와 함께 하셨지. 
밤에 식탁에 앉아 숙제를 살펴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였단다.
  아버지의 여동생인 아이라 고모가 남편을 잃었을 때, 
고모와 그 세 자녀는 벨네츠빌로 이사를 왔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카들을 당신 자식이나 마찬가지로 대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아버지의 고모인 코라 대고모가 
노환이 드시자, 어머니는 그 분을 베네츠빌로 모셔 와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드렸다.
  나의 사촌인 아티스는 최근 내게 긴 편지를 보내어, 
그에게는 제롬 외삼촌이 되는 너희 외할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충고를 하셨다는 얘기를 
해주더구나. 아티스는 너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일감을 만들어 줌으로써 그 사람의 자립을 도와 
주던것'을 회상하고, "그 댁에서는 사람 대접에 아무런 
차별이라곤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핵에서 회복 
중이던 아이도 모든 일에 다 함께 참여시킴으로써 강인한 
정신을 심어 주고자 했던 너희들의 외조부모님을 기억하고 
있었단다.
  어머니의 사업가적인 기질도 상당했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아버지를 전면에 나선 강력한 지도자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비상시를 대비해 얼마간의 돈을 비축해 
두고 있었고 한동안은 직접 낙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하면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있을지 
궁리를 잘 해 내셨다. 어머니의 기금 조성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버지는 교회를 운영해 나가지 못하셨을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쪼들리는 살림에 나와 너희 
외삼촌 줄리안을 대학까지 졸업시키면서도, 어머니는 열두 
명의 수양 자식들을 기르는 한편, 양로원과 교회를 위한 
기금 마련 및 오르간 반주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셨다. 
어머니처럼 나도 항상 내가 직접 돈을 벌기를 원해 왔다.
  내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나는 다른 남자들도 집안일 
거드는 것을 당연시할 뿐더러 어떻게 돕는 건지도 다 아는 
줄 알았지. 너희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처럼 말이야. 그러나 
실은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그렇지 못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더구나. 너희 세대는 이러한 세태를 고쳐 나가기를 
바라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는 듯한 조짐이 보이는 것 같아 
기쁘다.
  아내와 함께 직장 일과 집안일에 대해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아내의 상황과 욕구가 변화함에 다라 
적절히 대응하도록 하여라. 스스로를 아내의 입장에 한 번 
놓아 보고, 아내도 그렇게 해보도록 격려하고 말이야.
  너희 기분이 어떤지에 대해 건설적으로 자주 이야기를 
함으로써 울화나 분노가 쌓이지 않게 하여라. 만약 너희 
아버지와 내가 일과 가정 간의 변화하는 요구 사항과 
기대치에 대해 처음부터 의논하고 함께 나눌 수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내 세대의 수많은 다른 부부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말이지. 아무튼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우면서 그 
만큼 성숙해 갔단다.
  결혼한 부부는 서로에게 끝없이 주고 또 줘야 하는 
거란다. 그래야만 가족으로서의 유대가 스트레스로 인해 뚝 
끊어져 버리지 않고 자식들을 변함없이 보살펴 줄 수가 있는 
거야. 한편 고용주는 부모가 그 역할을 다 할 있도록 육아를 
위한 휴가, 융통성 있는 근무 시간, 탁아 시설 등에 대한 
정책을 개발해야만 한다.
      ------------
  8.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가정을 이루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신중한 계획과 일정한 
수입, 그리고 책임감이 필요하다. 임금 수준과 취업의 
기회가 하향 곡선을 ^4,246,5,135,4,136^ 있고, 보육비와 
주거비의 앙등으로 맞벌이를 해야 하는 이 즈음에는 특히 더 
그렇지.
  최근 한 중상위 계층의 내 친구는 다행히 자기에게 집이 
두채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시집 간 딸이 
무주택 서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더구나. 중산층 부모는 
예전에는 자녀들이 대학으로 떠나 버릴 때 섭섭해서 눈물을 
흘리곤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또는 이혼을 한 다음에 달리 생활을 꾸려 갈 
수가 없어서 부모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운단다.
  자식을 십팔 세까지 기르는 데 드는 비용은 대학 학비와 
장래의 인플레이션을 포함하지 않고도 11 만 4천 달러에 
달한다지.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경제적 책임을 
수반하는 일이란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감정적 책임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지.
  나는 아버지를 열네 살 때 잃었고 어머니는 내가 마흔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나는 아직도 두 분을 잃은 상실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단다. 이미 어른이 된 다음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가출하거나 버림받은 어린이들, 
부모의 양육 능력 부족으로 병원에 무기한으로 맡겨진 
아기들, 그리고 집 바깥의 탁아 시설에 내팽개쳐진 아이들로 
인한 끔찍한 결과는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 돈이나 혼자만의 
쾌락을 쫓다가 또는 일에 쫓겨 자기 자식을 정신적으로 
내버린 수많은 부유층 부모들의 이야기와 반대로 실업, 
무주택 등 가정 생활상의 비극과 고립으로 인해 생존도 
해나갈 수 없을 지경으로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부모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집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구하려고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갱과 특수 집단적 유행과 마약에 
눈을 돌리고 있느냐. 또 너무 어린 나이 때부터 섹스에 
탐닉하게 되고 말이다.
  나는 너희 셋을 무척 원했고, 계획을 세워서 낳았다. 
너희는 모두 내가 서른이 넘었을 때 태어났지. 부모 
노릇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 준 너희들에게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란다.
  너희 아버지와 나는 대부분의 젊은 부부들보다는 훨씬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만 그래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십대의 어머니나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 
또는 가난한 어머니들이 어떻게 자식을 길러 나가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축복받은 
셈이었지.
  부모로서 내가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얻고 있는 온갖 
도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내 사무실과 집안일 사이를 
왔다갔다 하느라고 쩔쩔매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너무 이른 성생활의 결과로 매년 거의 백만 명에 달하는 
십대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 거란다.
      ------------
      9. 정직하여라.

  너희가 말하고 주장하는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여라. 
사물을 올바른 이름으로 불러라. 자녀들에게 도덕적인 
모범이 되도록 하여라. 부모인 너희가 절약하면 자식들도 
절약하게 되고, 만약 너희가 거짓말을 하게 되면 자식들도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너희가 돈을 몽땅 너희 자신을 위해서만 쓰고 자선 
단체나, 대학, 교회, 유태교 회당, 그리고 기타 민간 모금 
운동기구에 내놓지 않는다면 너희 자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부모가 인종 차별적이고 성 차별적인 우스갯소리에 
낄낄댄다면, 다음 세대도 그 독소를 똑같이 물려받게 되는 
거란다. 어른들이 아직도 용기가 없어 뿌리 뽑아 버리지 
못하는 해악을 말이야.
  자녀들에게 훌륭한 예의 범절을 가르쳐라. '죄송합니다.' 
라는 말과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말이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야말로 너희와 이웃들 모두에게 그 
어떤 학위나 자격증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약속해 줄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가정의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가정의 전통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기도를 통해, 그렇지 않으면 규칙적인 가족끼리의 식사와 
모임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지.
  모든 청소년들에게는 거리를 나돌아 다닌다거나 폭력, 
마약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건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권태와 방황에 싫증난 나머지, 음주와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리고 너무 때이른 섹스에 빠져드는 것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정 및 지역 사회의 가치관 전도에 
부모들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야. 유명 인사들과 
광고주들이 음주를 즐거움과 기분 전환, 그리고 매력과 
동일시하려 드는 오늘날에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준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단다.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가 불필요한 폭력에 대한 
인간들의 탐욕스런 욕구를 부추기고 또 만족시키며, 잘 
팔리는 잡지의 표지마다 미혼 부모들의 사진으로 뒤덮인 이 
시대엔 부모 노릇이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지.
  부모와 기타 성인 역할 모델들은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아."라는 문화적 메시지와 행동을 보여 
주면서, 아이들에게는 "그러면 안 돼."라고 거부하라고 
가르치지. 얼마나 위선적인 노릇이냐.
  미혼인 채로, 혹은 미성년 상태에서 부모가 된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게다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생활 
보조 수혜자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너무 가난한 나머지 당장의 의식주부터가 걱정인 처지란다.
  이런 판국에 아이들은 어디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안전지대와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느냐? 종교적 지도자들은 어디에 있고, 자상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던 확대된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대체 어디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어디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단 말이냐?
  함께 힘을 합쳐 전 국가적으로, 그리고 각 지역 사회마다 
봉사와 성취의 도덕률을 확립해야 한다. 빈민, 중산층, 
부유계층을 막론하고 우리의 모든 자녀들에게 포근한 가정, 
굳건한 안식처를 마련해 줘야 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그런 다음에라야 물질과 마약과 손쉬운 섹스 및 무감각한 
폭력에 대한 탐닉의 유혹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사이렌(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은 여자이고 반은 새인 
요정으로서,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지나가는 뱃사공은 꾀어 
들여 죽임; 옮긴이)의 섬이 가까워지자, 율리시즈는 사공들이 
사이렌의 음악 소리에 유혹되지 않도록 귀에 밀납을 
틀어막게 한 다음, 자기 몸을 배의 돛대에 묶었다. 그런가 
하면 오르페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곡을 
켬으로써 그녀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수 있었지.
  연간 1조 4천억 이상을 들여 청소년 보호 시설가 감옥을 
새로 짓는다 해도, 점점 더 증대되는 소외감과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젊은이들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그들에게는 
인생에서 불러 볼 만한 목적 의식 있고 기쁨에 찬 노래가 
없는 거란다. 가정에서 처음 배워야 할 노래, 우리 사회의 
종교적^5,23^정치적 가치관과 풍토에 의해 그리고 학교와 
기타 지역 사회 기관을 통해 보강되는 노래 말이야.
  오늘날 너무나 많은 청소년들이 방황을 하고 있지. 그 
모두가 부모나 다른 어른들,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긍정적인 본보기를 보여 줌으로써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따른다고 
했다. 너무나 옳은 말이다.
      --------------------
  10. 민주 사회에서는 같은 인종, 계급, 성별끼리의 
연대감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유대가 더욱 중요함을 
기억하여라. 또한 사회 전체에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라.

  겸손하고 공정하여라. 다른 이들도 너희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도록 촉구하여라.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또는 
성적인 우스갯소리는 하지도, 그런 것을 듣고 웃지도 말며, 
다른 인간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동조하지 말아라. 그런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말며, 그들을 너희의 집과 종교적 집회 및 
클럽에 받아들이지 말아라.
  인종과 민족과 종교 사이를 분열시키려는 확산된 
목소리들이 대학 캠퍼스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지지를 얻어 
가고 있다.
  매일매일의 도덕적 의식으로써 여기에 대항하여라. 점점 
커져가는 인종 문제들을 무시하지 말고 직시하여라.
  다음 세기의 미국을 이끌어 나갈 능력은, 백인가 혜택받은 
아이들에게만 잇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미래는 비백인이며 
가난한 아이들과도, 또한 아들들뿐만 아니라 딸들과도 떼 
놓을 수 없이 얽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 하나하나를 
짐이 아니라 축복으로, 잠재적인 지도자 또는 일꾼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기대하고 추구하는 대로 얻게 
마련이란다.
  상대방을 탓하고 거부하는 데 시감을 낭비하지 말고 
불화를 치유하자. 라비, 아브라함 헤셸은 이렇게 말했다. 
"부끄럽지 않고 정의로운 미국을 건설하는 도정에서 우리 
모두가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지라도 책임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져야 한다." 얼마나 적절한 말이냐.
  미연방을 유지하고 노^36^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남북 
전쟁에서 60 만 명의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북 전쟁 
이후로도 3,437 명의 흑인들이 린치를 당한 바 있다. 법 
앞에 평등한 미국의 이상에 걸맞게 살기 위한 1960 년대의 
비폭력적 민권 투쟁에서도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다. 온 
국민들은 앞으로의 모든 선거에서,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인종 간에 공포를 조작하는 여하한 후보도 거부해야만 한다.
  나는 아이오와 주의 공화당 출신 하원 의원, 짐 리치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는 '새로운 정치 윤리'를 주창하여 
모든 후보자들로 하여금 관용을 선언케 하고, 유권자들에게 
인종, 종교, 민족, 나이, 또는 출생 국가를 바탕으로 이 
사회를 분열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촉구한 바 있다. 
"미국의 현실을 국가적 이상에 부합시키려면 공직자들은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고 단결의 구심체 역할을 해야 한다. 
"고 그는 말한다.
      ------------
  11. 본질을 위해 껍데기를 버려라.

  스타일과 내용을 혼동하지 말아라. 정치적인 제스처나 
매끄러운 언변을 품위나 건전한 정책과 혼동하지 말아라. 
백악관이나 국회, 또는 주 의회 의사당에 가서 담소하는 
것이야 즐거운 일이지만. 그럴 때면 나는 말과 잡담만으로 
아이들이나 빈민들의 요구 사항이 충족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긴장시키곤 한다.
  정치적 지도력과 재정적 우선 순위가 중요하다.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여라. 가정과 강의실과 법률 회사와 
병원과 기업체 기타 너희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모든 
장소에서 가정과 자녀들에 대한 염려를 말로만 늘어놓지 
말고 너희 자신의 경제력과 지도력으로 뒷받침하여라.
  BMW 같은 고급 승용차와 멋진 옷을 원하는 것이 굳이 
잘못은 아니겠지. 그러나 BMW가 최고 학위는 아니며,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이 새겨진 외투나 재킷이 인생의 목적이거나 
인생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시시피 주에서 한 흑인 대학 총장 부인과 함께 
존슨 대통령의 취임 축하 무도회 중의 한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적이 있단다. 그대 미시시피 주의 위대한 
민권 운동가, 해머 부인이 화면에 나왔다.
  그녀는 대학 학위는 지니지 못했으나, 지력이나 뚜렷한 
목적 의식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는 
분이었다. 그러자 대학 총장 부인이 탄식을 했다. "저런! 
해머 부인은 대통령의 무도회에 오면서 파티복도 안 
입었잖아."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파티복도 입지 
않은 해머 부인은 저 자리에 가 있지만, 파티복이 잇는 
당신과 나는 가지 못했잖아요."
  랄프 번치(팔레스타인 분쟁 중재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외교관이자 흑인 민권 운동가; 옮긴이)나 라인홀드 
니버(정치사상가이자 신학자; 옮긴이)가 어떤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나 도로시 데이가 어떤 옷을 
입는지, 혹은 메어리 맥클리오드 베튠(흑인 여성 교육자; 
옮긴이)이 어떤 집에 사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외양과 속내를 혼동하지 말아라. 먼저 너희 속에 든 
것부터 가다듬고 방향을 분명하게 설정한 다음에 옷이나 
자동차 걱정을 하여라.
  우리 각자가 개인적 우선 순위를 정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속한 단체와 사회의 우선 순위를 
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 어떤 흑인 단체가 아직도 흑인 기관과 흑인 아동들을 
지원하는 것과 거의 맞먹는 돈을 술과 오락에 소비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큰 비극이지.
  만약 대다수 백인들이 아직도 아동 건강과 영양을 위한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을 오락과 사치품에 쓰기를 즐긴다면, 
미국은 미래로 가는 배를 놓치고 말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담배와 술은 흑백인을 막론하고 마약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있다.
  이제 비판적 의식을 가진 소비자 대중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운동 경기장과 공원, 텔레비전의 스포츠 중계와 기타 
프로그램, 영화, 또는 그 어떤 곳, 어떤 매체를 막론하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질병과 죽음을 판매하는 것이라면 
반대하고 종식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
  12. 결코 포기하지 말아라.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이든 상관없다. "너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지경에 달했을 때 하느님이 거기 살아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오랜 격언도 있지 않느냐.
  해리엣 비쳐 스토우('엉클 톰수캐빈'의 저자; 옮긴이)는 
"궁지에 몰리고 모든 것이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더 
이상 한 순간도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보일 때에도 결코 
포기하지 마라. 그때야말로 사태가 전환 될 시기이다."라고 
말하였다.
  살아서 버텨 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간다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밀고 나가야 한다. 
냉소주의나 절망에 굴하지 마라. 평화 유지나 핵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 인종적 분열, 빈곤, 환경의 황폐와 같은 거대한 
도전들을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 마라.
  한 작가는 자신이 쓴 전지집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난관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소원이나 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언제나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소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난관을 타개할 연구를 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검토하면서 그 효과를 측정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부분적인 해결책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포기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기 대문이다. 
그러나 포기하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인간됨의 위대성은 
포기하지 않는 데 있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이따금씩 내가 방문하는 수녀원에서 얻어들은 짧은 격언 
하나가 위의 작가의 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느님은 
삶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신다."
      ----------------
  13. 너희 힘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라.

  압도당할 것은 없다. 해내야 하는 여러 가지 일에 정신 
없이 허둥거리게 될 때, 나는 카알라일(영국의 사상가이자 
역사가; 옮긴이)의 충고를 상기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의 주요 과제는 저 먼 곳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는 게 아니라, 지금 손 안에 
확실하게 놓여 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전체를 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그때 그때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차분히 풀어 나가 
보아라. 또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려면 당장에건 
아니건 '이겨야'만 한다고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말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치고 우리 일생에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진실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치고 
당장의 역사에서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한다.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일도 혼자 이루어 지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된다. 그 어떤 고결한 
행위도 친구나 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관점에서만큼 고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라는 
사랑의 최종적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때로는 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잃어야만 할 때가 있으며, 
숱한 노고의 결실이 여러 해가 지난 후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굳이 커다란 파도를 
일으켜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의 역할 모델인 여자 
노^36^예, 서저너 트루스(해방된 노^36^예로서 사회 개혁 
운동가;  옮긴이)는 글을 슬 줄도 읽을 줄도 몰랐으나, 
노^36^예 제도와 여성을 이류 취급하는 것은 참지 않았다.
  어느 날, 노^36^예 제도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도중 
그녀는 한 노인의 야유를 받았다. "여보슈, 노^36^예 제도를 
갖고 암만 떠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 줄 아슈? 난 
당신이 씨부렁거리는 소리는 벼룩이 무는 것만큼도 신경 안 
쓴다고." 그녀가 응수했다. "그러실지도 모르지요. 허나, 
주님이 도우사 당신을 가렵게 만들 수는 있겠지요."
  많은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으려면 커다란 개 
정도는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냥 정의를 추구하는 벼룩이기만 하면 되는 거란다. 
좀더 살만한 가정, 이웃, 직장 내지는 미국을 이룩하고자 
하는 벼룩 말이야. 충분한 숫자의 벼룩들이 전략적으로 
물기만 하면, 제 아무리 큰 개라 할지라도 가렵게 만들 수가 
있고 제 아무리 큰 국가라 해도 변모시킬 수가 있다. 1990 
년대에 우리는 미국을 그렇게 변모시킬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인생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지 
간에 정치적^5,23^경제적 지도자들이 반응을 보일 때까지 
깨물어 미국을 변모시켜야 한다.
      ----------------
  14. 배움과 정신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뒤에 처지게 될 것이다. 세계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만화경처럼 변화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그만한 대가가 있는 훌륭한 투자이다. 
고등학교 졸업자보다 취업의 기회를 배로 늘려 준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거나, 정신과 영혼의 성장을 학교에서 배운 
것에서 끝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독서를 하여라. 강의나 직장을 위해 읽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지혜와 기쁨과 실수로부터 배우기 위하여 읽어라. 
책을 곁에 두고 있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
  너희 외할아버지는 독서를 기도와 봉사와 일과 거의 
마찬가지로 가치 있게 여기셨다. 손위 형제들이 집을 떠난 
다음, 아버지는 매일 저녁 침실 벽난로 앞 당신 옆자리에 
나를 앉혀 놓고 한동안 책을 읽게 하셨지. 내가 열두어 살 
때, 한번은 읽지 못하게 하신 '트루 컨페션' 잡지를 '라이프' 
잡지 속에 끼어 넣어 몰래 읽었단다. 눈치를 채신 아버지는 
그 책을 소리내어 읽게 하고 나서 그게 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잡지인지 말해 보라고 하시지 않겠니! 그 다음부터는 
'트루 컨페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우리 집에는 언제나 옷이나 다른 사치품보다 책과 잡지 
등속이 더 많았다. 마크 트웨인 전집, 칼 샌드버그가 지은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여러 권의 책들, 세계적으로 저명한 
미국의 흑인 지도자들에 대한 책들,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책들. 간디, 해리 에머슨 포스딕(침례교 목사이자 신학자; 
옮긴이), 폴 틸리히(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철학자; 
옮긴이), 라인홀드 니머, 벤야민 메이스, 그리고 랭스턴 
휴즈(흑인 작가이며 시인; 옮긴이)같은 이름들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내 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날마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러 들어가시는 서재 
벽에는 온갖 피부색의 위인들 사진과 역사적인 대사건들의 
기사를 오린 것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단다. 그것은 우리의 
작은 시골 마을 너머의 커다란 세계에 대한 아버지의 
게시판이었지. 아마도 나는 이런 모든 영향 때문에 온 
세상을 항상 직접 탐험해야 할 나의 무대로 여기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누가 제한된 영역만을 나나 아이들에게 
주려고 하면 저항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우리의 정신 세계를 끊임없이 넓혀 주셨고, 
믿음과 노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아버지는 모범과 경험의 삼투 현상을 통한 학습을 
믿으셨지. 어느 위대한 흑인 남녀가 우리 고향에서 2백 마일 
내로만 들어 왔다 하면, 자식들을 차에 싣고 가서 그들의 
강연을 듣거나 노래를 듣게 해주셨단다. 롤란드 헤이즈, 
도로시 메이노어, 마리언 앤더슨 같은 가수와 시인 랭스턴 
휴즈가 왔을 때에도 그랬단다. 위대한 흑인 설교자와 
교육자들은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백 마일이나 떨어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에 하버드 대학의 전 총장, 모디카이 
존슨이 몇 차례 온 적이 있었단다. 지금도 딱딱한 의자에 
앉아 때로는 꾸벅꾸벅 졸면서 세 시간씩, 네 시간씩 그의 
강연을 듣던 기억이 난다. 그 때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온 
몸이 뻣뻣하게 느껴진단다.
  나의 부모님과 나를 부모처럼 돌보아 준 분들은 우리들 
삶의 인종적 분리선을 초월하는 어떤 가능성을 자식들에게 
심어 주었다. 오늘날의 모든 부모들과 지역 사회의 
지도자들도, 이처럼 젊은이들에게 책과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 보다 넓은 세상으로 방향 제시를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의 모든 자손들은 인종, 성별, 계급 및 
물질로 인한 인위적인 경계선을 초월하는 생에 대한 의지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
  15. 힘든 일을 두려워하지 말며, 자녀들에게 일하는 것 
가르치기를 꺼리지 말아라.

  일은 긍지요 책임이며, 의미 있는 삶을 위한 바탕이다. 
메어리 맥클리오드 베튠은 그 모든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결코 실용적인 일의 중요성을 잊은 적이 없었다. 
기차 승무원으로부터 "부인, 맛있는 비스킷은 구울 줄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보세요, 나는 대통령의 고문이자 사년제 정규 대학의 
설립자요, 전국적으로 알려진 여성 지도자이며 
흑인여성전국위원회의 창시자^36^예요. 그리고 나는 맛난 
비스킷도 잘 굽는답니다."
  테일러 브랜치는 그의 저서 '파팅 더 워터스'에서 위대한 
흑인 전도사이자 킹 목사의 텟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전임자인 버논 존스의 언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텟스터 교인들이 일보다는 신분과 권위에 
집착한다하여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신도들이 
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백인들의 견해를 답습한다고 
비난하고, 흑인들은 그들을 천하게 만드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억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노동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백인들을 노^36^예제도라는 부패 
속으로 유혹해 들어간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오늘날 많은 자녀들이 일에 대한 확고한 도덕성이 없이 
자라나고 있으며, 아^36^예 일이란 것을 모른 채 자라나는 
자녀들도 너무나 많다.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에는 가정과 지역 사회에서 
어른들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말썽을 일으킬 시간이나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덕분도 있다.
      ----------------
  16. 속도를 늦추고 인생을 즐겨라.

  이것은 내가 목이 비틀린 암탉처럼 파닥거리며 돌아다닐 
때 머리 속으로 부르던 아프리카 노래이다.
  "형제여 속도를 늦추고 인생을 즐기세, 형제여 속도를 
늦추고 인생을 즐기세, 형제여 속도를 늦추고 인생을 
즐기세, 가야 할 길이 멀다네.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게,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게,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게, 가야 
할 길이 멀다네."
  나는 생각과 행동과 아이디어가 분출하듯 격렬하게 터져 
나오는 편이기 때문에, 가족들과 동료들이 증언하듯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흔히 거친 파도가 넘실대게 마련이다. 
한바탕 그러고 난 다음에는 살레스의 성 프란시스가 한 말이 
생각나곤 한다.
  "평야를 가로질러 부드럽게 흐르는 강들이 큰 배들을 
실어나른다. 들판에 가만가만 내리는 비가 초목과 곡식의 
결실을 거둔다. 홍수가 져서 땅 위로 넘쳐 흐르는 강물은 그 
곁의 농토를 망치며 상업적으로도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나운 폭우는 들과 초원을 망쳐 버린다. 급하게 하는 일은 
결코 잘 되는 법이 없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
  17. 친구를 조심해서 사귀어라.

  추월 차선에는 들어서지 말고, 군중 속에 휩쓸리지 
말아라. 너희는 하느님의 독창적인 피조물로 태어났다. 다른 
사람의 모사품이 되려고 하지 말아라. 벤야민 메이스 박사는 
모어하우스대학과 스펠만 대학의 학생들에게 친구들간의 
압력에 굴하지 말라고 얘기하곤 하였다. "여러분의 미래와 
운명을 넘겨 줄 만큼 현명하고 뛰어나고 또 여러분 자신보다 
더 여러분 생각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희 자신이야말로 너희가 경쟁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라비, 수시아는 "신은 내가 어찌하여 모세가 
아닌가를 묻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내가 수시아가 아닌가를 
물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두 흑인 대학, 모리스 대학과 
베네딕트 대학의 총장을 지냈으며 너희 외할아버지의 좋은 
조언자이셨던 스타크 박사는 학생들을 망치는 여섯 가지 
사항을 이렇게 나열하였다. "나쁜 친구,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 오락삼아 도박을 하는 것, 가치관을 무시하는 
것,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음주 습관."
  내 생각에도 아주 그럴 듯한 충고이다.
  인생에서 각자 고유의 영역을 발견하고 적어도 한 가지는 
뛰어나게 잘 하도록 배워 두어라.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라.
  주위 사람들의 욕구와 바람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그들이 
너희에게 어떻게 해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너희가 그들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가를 묻고 그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추월 차선을 따르는 친구들에게 유혹되지도 
않을 것이며, 목적 있는 일감을 못 찾아 헤매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일이 반드시 커다란 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남을 돕는 일이면 된다.
      ----------------
  18. '할 수 있어요. 해보겠어요.'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라. 미국은 
할 수 없다는 사람들로 인해 마비되고 있다. 하잘것없는 
비전과 그보다 더 하잘것없는 의지를 지닌 사람들 말이다.
  러시아 국민들과 그들의 탁월한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미국인들은 
아동에 대한 무관심, 가난, 그리고 가정의 붕괴 같은 
문제들을 내다보고 이에 종지부를 찍을 방도를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것들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장래에 
핵무기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동작가 셸 실버스타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얘야, 해서는 안 된다는 것들 좀 들어 보렴. 얘야, 금지 
조항 좀 들어 봐. 안 되고, 불가능하고, 하기 싫고, 안 해 본 
일들 말이야. 이제 다시 잘 들어봐. 뭐든지 일어날 수 
있단다. 얘야, 뭐든지 가능해."
  꿈을 꾸고 믿음을 지니고 그것을 위해 매진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 비록 오래 걸릴지라도 말이다.
      ----------------
  19. 지금, 여기, 현재 여건에 최선을 다하여라.

  또다시 살지 않을 어제와 확실치 않은 내일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끌고 다니지 말아라.
  워싱턴과 국회와 1990 년대의 육아 프로그램을 위한 
투쟁의 부담에서 잠시 벗어나려고, 나는 한 멋진 자연 탐험 
캠프에 따라 나선 적이 있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자그마한 
인용문 책자가 주어졌는데, 내게는 그 중 스톰 
제미슨(영국의 소설가; 옮긴이)의 말이 특히 감명 깊게 와 
닿더구나.
  "내가 보기에는 천 명 중에 겨우 한 명만이 진실로 
현재에 사는 요령을 아는 것 같다. 우리들 대부분은 한 시간 
중 59분을, 잃어버린 기쁨이나 잘못한 일 등 아무 짝에도 
소용 없고 기운 빠지는 과거를 사는 데 허비하거나, 아니면 
간절한 기다림과 두려움을 안고 미래를 산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은 지금 이순간, 바로 여기이다. 삶을 
치열하게 사는 유일한 길은 매 일 분을 반복 불가능한 
순간의 모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분이란 바로 하나의 
기적이며 되풀이 할 수 없는 순간이다."
      ----------------
  20. 너희의 힘을 너희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써라.

  투표를 하고 너희가 투표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라. 
1988 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고작 
36 퍼센트만이 투표를 했다. 1990 년에는 여성 유권자의 60 
퍼센트 미만, 그리고 흑인의 52 퍼센트 미만이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내보인 성의와 수준 만큼의 정치적 
지도자를 얻는 법이다. 미국의 어린이들과 미래는 그토록 
적은 숫자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들에게 맡겨 두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 귀찮아서 투표도 하지 않고 한 표 정도야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을 저버리는 짓이다.
  물론 정치 과정이 짜증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만약 정치 지도자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투표를 통해 분명한 의사 전달을 해야 한다. 
그것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함께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나라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투표나 정부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 등은 제한된 봉사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줌으로써 희망과 도덕적 모범 
회복 과정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게 할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자기들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어른들은 청소년들 모두가 각자 사회에 
기여할 몫을 가지고 있으며, 잘 길러 주고 아껴 줘야 할 
중요한 재원들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전국적인 청소년 봉사 
프로그램 개발로 젊은이들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장 시급한 
사회 문제 해결에 이용함으로써 방금 말한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봉사를 단지 교외 지역 중산층 젊은이들의 여가 선용으로 
생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만약 우리가 저소득층 지역에 
이런 기회를 제공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때로 가난한 
계층과 소수 민족 젊은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해 준다면, 그들이야말로 이러한 
봉사 활동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고 또한 가장 많이 기여할 
수가 있다.
  지도력과 봉사는 결코 눈에 보이는 공직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소리 없는 종복이요 지도자로서, 가장과 학교와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모범이 되도록 하여라.
  우리는 하루의 매 순간마다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의 본보기가 
다른 사람들을 뒤따르도록 자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줄 
안다. 불법 주차한 한 대의 승용차 때문에 다른 차들도 
덩달아 그러는 것을 보지 않는냐? 한마디의 인종 차별적인 
농담이 또다른 농담을 유발시키고 말이다. 한 명의 뚱한 
사람이 전체 분위기를 흐리게 하며, 한 명의 불평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기운이 빠져 달아나 버리지 않더냐? 
그런가 하면 그 반대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지.
  한명 또는 몇 명의 긍정적인 사람들이 사무실이나 교회, 
또는 학교의 분위기를 결정지을 수 있다. 옳고 바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상황에서건 다른 사람들이 뒤따를 
만한 선도자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당장의 결과야 어떻든 올바른 일을 하기로 
결정하는 일단의 도덕적 게릴라가 시급히 필요하다. 그에 
관하여 한 이름 모를 지도자는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다.
  "세계는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남녀들을 더욱 필요로 한다. 
편의주의를 위해 성실성을 희생시키지 않는 사람, 
악수만으로도 철통같은 계약을 맺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고 큰 일에서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정직한 사람, 포부가 다른 사람도 포용할 정도로 
큰 사람, 점잖게 이기고 당당하게 질 줄 아는 사람, 
교활함과 간교함과 무모함이 성공의 세 가지 열쇠라고 믿지 
않는 사람, 이십 년 전에 사귄 친구를 아직도 위해 주는 
사람,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의견 
충돌을 이해하는 사람, 이따금은 잘못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기꺼이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세계는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미국의 운명과 방향은 방방곡곡의 민간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다. 1990 년대에는 변화가 올 것이다. 위에서부터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목소리를 높여 올라오는 너희들과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 의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종교계, 정치계 및 각 전문 분야의 대변인들에게 우리한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고 그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그리고 체격, 피부색, 연령, 
지역에 관계 없이 배출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들 모두가 
뚜렷하게 눈에 보이거나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베드메타는 그의 저서 '모한다스 간디와 그의 사도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간디는 특출한 예술적, 학문적, 또는 과학적 재능을 타고 
나지는 않았다. 그는 학위를 받지도 않았고 특별한 학문적 
업적에 대한 상을 수상한 경력도 없다. 그는 어떤 선거에 
후보자로 나왔던 적도 없었으며 공직을 맡았던 적도 없다. 
그러나 그가 일흔여덟의 나이로 1948 년에 타계했을 때, 
글자 그대로 전세계가 그를 애도하였다."
      ----------------
  21. 너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명상을 하여라. 혼자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내면을 키워라. 아인슈타인은 "자기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자기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은 적다."고 하였다. 
하워드 터먼은(흑인 작가이자 침례교 목사; 옮긴이) 1981 
년에 스펠만 대학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각자에게는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만약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이 잡아당기는 줄에 매달려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잡다한 소음과 유혹과 경쟁적인 
욕구들이 있어서,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 속의 참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 속의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침묵과 고독, 그리고 기도는 규칙적으로 실천하기 
힘들지만 또 그만큼 필요하다. 나도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순간이 없다면 여러 가지 갈등을 견딜 수가 
없을 거야. 매 시간 마다 몇 분, 하루에 반 시간 또는 한 
시간, 한 달에 하루, 일년에 일 주일을 완전한 침묵 속에 
보내는 목표를 세워 보렴. 끊임없는 외부 세계의 소란 
가운데서도 자신의 내부에 조용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고독을 피하기 위한 구실로 오히려 지나치게 바쁜 삶 뒤로 
숨어 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기 쉽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그렇단다. 그러나 우리들은 
각자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살레스의 
성 프란시스가 들려 준 시에나의 성 캐서린 이야기도 있지 
않느냐. 성 캐서린은 기도하고 묵상할 시간과 장소를 빼앗겨 
버리자, 자기 가슴 속에 작은 방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살았더란다.
  "내게는 일하는 시간과 기도하는 시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해대고 
있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부엌에서도 내 안에는 마치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처럼 하느님이 지극히 고요하게 
들어와 계신다."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시에, 
내면의 평화와 균형을 얻기 위해 자신 속으로만 침잠한다면 
세상은 결코 구원되지 못하리라고 한 간디의 경고를 나는 
음미한다.
      ----------------
  22. 너희는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자기의 마음가짐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너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너희 스스로일 뿐이다.
  간디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위대함은 이 세상을 
재창조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원자력 시대'의 신화일 
뿐이다. 우리의 위대함은 우리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데 
있다."라고 말하였다.
  적성이나 집안 내력보다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더 많이 
걱정 해야 한다.
  "집단 수용소에서 살았던 우리들은 수용소 건물 사이를 
거닐면서 자기네의 마지막 빵 조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 위로하던 몇몇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숫자상으로는 몇 명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더라도 한 가지만은 
앗아갈 수 없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곧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마음가짐을 결정짓는 인간의 최종적인 
자유가 그의 갈 길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빅터 
플랭클(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옮긴이)이 한 말이다.
  투투 대주교(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권 운동가이며 성공회 
대주교, 1984 년에 노벨 평화상 수상; 옮긴이)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임을 강조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부끄럽지 않고 성실한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어떠한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의 인준 청문회 첫날 광경은 
너희도 기억하리라 믿는다. 빈곤했던 아동기, 수도물도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던 시절 등등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었던가 하는 그의 증언에 일부 상원 의원들은 눈물까지 
보였지. 상원 의원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세대 흑인들의 
절반은 죄다 현재 대법원 판사가 될 자격이 있는 셈이라고 
한 친구는 농담삼아 투덜거리더구나. 우리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백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경을 
극복해 가면서 토머스처럼 옥외에 변소가 있는 집에서 
자라났으니까.
  핑계를 대지 말아라. 너희가 가난하건 부자건, 부유층 
자녀들은 인생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생각지 마라. 실제로 부커 워싱턴은 터스키지 
대학(1881 년에 워싱턴이 세운 최초의 흑인 대학 중 하나; 
옮긴이)의 학생들에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축복받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일하지 않아도 돈이 있고, 아무런 애를 쓰지 않아도 
인생의 모든 안락함을 다 누리고 있는 남녀치고, 다른 
사람의 영혼은 고사하고 자신의 영혼이나마 구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낙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라. 물질적 
빈곤이나 정신적 빈곤을 변명하는 구실로 삼지 말아라.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공허한 느낌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지 말아라.
  부커 워싱턴은 성공은 개인과 단체에게 가난보다 더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나는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이고자 한다. 실로 미국은 좀더 배가 고파 
보아야만 국민 총생산이 우리보다 낮은 나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의 자녀들은 
고난의 여정에서 나온 힘으로 부자의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단다.
      ----------------
  23. 너희의 뿌리와 역사, 그리고 너희가 딛고 서 있는 
선조들의 어깨를 기억하여라.

  그리고 이러한 뿌리를 너희와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에게 
물려주어라. 자기들이 어디서 왔는지, 현재의 이 자리에 
자신들이 있기까지 얼마만한 투쟁을 거쳐야 했는지를 모르는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또한 요행히 어디엔가 도달한다 해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흑인들은 노^36^예제도 하에서는 해리엣 터브먼과 서저너 
트루스, 그리고 프레데릭 더글라스를 배출해 냈고, 인종 
차별의 역경 속에서는 벤야민 메이스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패니 루 해머 부인을 배출해 낸 꺾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모든 흑인 자녀들은 자신이 흑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미국을 이론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좀더 실질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데에 누구 못지 않게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역경을 이겨낸 흑인 지도자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모든 흑인 자녀들은 자기 유산에 대해서 이러한 자부심과 
역사 의식을 지녀야 하며, 이는 이 위대한 국가를 
모자이크처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타민족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흑인, 라틴계, 동양계, 그리고 인디언계 
자녀들은 모두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백인 자녀들 역시 도시와 국가와 세계를 공유해야 
하는 다양한 유색 인종들의 역사와 문화를 배워야만 한다.
  나는 통합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그 누군가가 
된다거나, 내가 누구인가를 무시하거나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스타 스팽글드 배너"(The Star Spangled 
Banner, 미국 국가; 옮긴이)와 "아메리카 더 
뷰티풀"(America the Beautiful, 국가 못지 않게 사랑받는 
미국의 애국적 노래; 옮긴이)을 배울 때 흑인 국가인 
"리프트 에부리 보이스 앤드 싱"(Lift Every Voice and 
Sing)을 함께 배웠다. 그리고 그 세 노래를 모두 다 
사랑하였지.
  나의 아들들아. 나는 너희들에게 다른 인종들을 
존중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좋은 모습의 너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타인종들도 자기 자녀들을 너희를 존중하는 사람들로 기르길 
바란다.
      ----------------
  24. 믿음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이 되어라.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맺어라.

  너희 이모가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과중한 교회 일들과 
지역 사회에서 맡은 일들 중 일부를 그만두시라고 종용한 
적이 있었지. 그 중에는 양로원 일도 들어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음식 수발을 드는 입주자들 대부분은 
외할머니보다도 오히려 손아래였단다. 외할머니는 또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와 주요 기금조성자 역할도 맡고 
계셨지. 외할머니는 그때 이렇게 대답하셨단다.
  "나는 주님께 어느 만큼만 하다 말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주님이 그만두라고 하실 때까지 끝까지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1990 년대의 미국은 독립 선언서와 헌법에 명시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인종과 
계급 및 성별간의 차별이 존재하였던 그리 좋지 못한 옛날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이 사회에서 
뒤쳐진 수백만 명에 달하는 모든 인종과 모든 소득층의 
자녀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
  25. 너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항상 기억하여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짓을 저지르건, 나나 
하느님이 너희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너희 외할아버지는 가정 생활과 자녀들을 위한 헌신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단다. 그런 말씀들을 그대로 옮길 수는 있어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1951 년의 한 
설교에서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오늘날의 부모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 가정은 자녀들을 양육하고 안전하게 지켜 주는 사랑의 
구심점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서 오는 압박감은 집이 
없고 사랑도 받지 못하는 자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이 시대에 점점 더 커져 가는 비극 중의 하나는 결손 가정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는 가장 
튼튼한 보호막 역할을 해야 할 가정은 급속도로 가장 허약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 무엇도 부모를 자녀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에게서 갈라 놓지는 
못하였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너희 이모와 외삼촌들과 
내가 한자리에 모일 때면, 우리는 모두 마치 두 분이 함께 
계신 것처럼 두 분께 얘기를 해드리면서 웃곤 한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딜 때면,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뭐라고 하실까 생각해 보지 않는 적이 
거의 없단다. 나 자신이나 너희들이 상을 받는 
수상식장에서나 또는 무슨 목표 달성을 해냈을 때면, 나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자랑스러워하며 함께 계시는 두 분의 
존재를 느끼며 그분들께 이야기를 한다.
  나의 부모님은 어떻게 살고 봉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이 세상에서건 내세에서건 그 어떤 것도 
선한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해 보여 주셨다.
  나는 부모님이 임종을 맞을 준비를 하실 때와 절실한 
신앙을 간직하고 돌아가실 때, 다행히도 두 분 곁에 함께 
있을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설교에서 나와 
신도들에게 시편 139장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새벽의 날개를 붙잡고 바다 저 끝에 가서 살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주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실 것입니다."
  운명하시기 전 마지막 몇 시간 동안 너희 외할아버지는 
올리브 이모를 침착하게 위로하셨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주님이 여기 계신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몇 순간까지도 외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고 
교육을 마쳐야 한다며 나의 장래 걱정을 하셨단다. 내가 
병실 옆 침대에서 자다가 거친 마지막 숨소리에 외할머니와 
이모를 부르러 갔을 때 복도의 간호사들이 외할아버지가 
운명하셨음을 알려주었는데, 그 분의 평화로운 얼굴은 내게 
자신감을 주었고 지금도 힘이 되어 준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시던 날 
밤 내가 시편 103장과 27장을 읽어 드리자, 외할머니는 
혼수 상태에 빠져들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셨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미하여라. 내면 저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생명력으로 그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여라."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외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들이쉬실 때, 올리브 
이모와 해리 외삼촌과 나는 찬송가로써 외할머니를 고향으로 
보내 드렸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나는 우리 집에서 신문 
기사 오린 것, 편지, 잡지, 그밖에 너희 외조부님의 헌신적인 
삶의 흔적들을 뒤져 보았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도 
어린이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참된 투쟁의 
씨앗들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미 내 아동기에 뿌려진 
것인가를 깨닫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단다.
  나는 십대 임신, 불평등한 교육 기회에 대한 기사들과 
가정과 지역 사회의 붕괴 및 곤궁한 이들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개탄하는 외할아버지의 설교문들도 발견했다. 
할아버지는 물질의 가난이 의지와 정신의 빈약함에 대한 
아무런 구실도 되지 못한다고 역설하셨다. 나의 깨달음의 
여정이 집에서 시작하여 결국 다시 떠나 왔던 집 문 앞에 
이르러 있음을 보고, 겸허해지는 마음과 함께 얼마나 용기가 
솟아올랐는지 모른다.
  축축한 뒤뜰 포치 안, 냉장고 꼭대기에 쌓여 있는 낡은 
'크리스천 센추리' 잡지를 뒤적이다가, 외할아버지가 빨간 
펜으로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어 놓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인용문을 발견했을 대의 기묘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내가 워싱턴에서 아동 보호 기금의 
포스터로 만들었던 바로 그 인용문이었거든.
  "새로 만들어지는 총 한 자루, 새로 진수되는 전함 한 척, 
새로 발사되는 로켓 한 대는 밥도 먹지 못하고 굶주린 
사람들, 춥고 헐벗은 사람들로부터의 도둑질을 의미한다. 
무기 경쟁을 하는 이 세계는 단지 돈만 소비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근로자들의 땀과 과학자들의 천재성과 
어린이들의 희망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들 셋은 성장기에 나와 함께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집안에서는 너희 아버지의 종교와 나의 종교적 전통이 
동시에 존중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 집 뒤뜰에서 열린 
너희들의 바르 미츠버(유태교의 13세 남자 성인식; 옮긴이) 
첫머리에 한 번은 너희 외할머니가, 다른 두 번은 
침례교도인 외삼촌들이 시편 139장을 읽어 주셨지. 
그럼으로써 유태교의 전통뿐만 아니라 개신교 목사이셨던 
외할아버지의 존재도 함께 확인시켜 준거야.
  내게 있어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너희들에게 우리들의 혼합된 종교적, 인종적 전통을 강력한 
정신적, 개인적 바탕이 되도록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단다. 이런 바탕이야말로 너희가 거센 바람에 부대낄 
때마다 몇 번이고 되돌아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겠느냐.
  나는 흑인, 백인, 유태인, 그리스도교인들로 구성된 이백 
명의 가족, 친지들이 우리 집 뒤뜰에 모여서 지켜 본 
너희들의 성인 의식 때마다 그러한 내 마음이 극명하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가족으로, 친구로, 
미국인으로, 그리고 이 지구상의 영적인 체류자로서 
단결시켜 주는 힘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요인보다 훨씬 더 
크단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 봉사하며 세상 속으로 뛰어들 때에도 
집은 늘 그대로 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 가든 영혼 속에, 
기도 속에, 사랑 속에 항상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너희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  5장  어린이, 우리의 미래

  어린이들을 가난한 국민으로 성장하도록 내버려두는 
국가는 정신적으로 가장 빈곤한 국가이다.

  1990 년대의 투쟁은 미국의 양심과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 미래는 백인, 흑인, 라틴계, 동양계, 인디언계, 
그리고 빈부고하를 막론한 모든 미국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통해 결정되고 있다. 미래를 위한 이런 
전투는 케티즈버그 전투나 월남전, 도는 사막의 폭풍 
작전(1990--1991 년의 걸프전 때 이라크로부터 쿠웨이트를 
탈환하려는 연합군의 군사 작전; 옮긴이)처럼 극적이지는 
않겠지만, 그 결과에 21세기의 미국이 형성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와해되고 있는 이때, 
아이러니컬하게도 온 미국 내에서는 모든 인종과 소득층을 
막론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지고 있다. 불확실한 경제와 
경기 침체로 인해 불안, 빈곤, 인종적 분열, 그리고 선동 
정치의 위험이 증대되면서 미국인은 미국인끼리 경쟁하게 
되었다.
  모든 인종과 소득층 사이에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관과 지지 기반이 붕괴되어, 미국 사회는 경제적인 
빈곤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황폐함마저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오늘날 도덕적으로 오염된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책임감 없는 즉흥적인 섹스,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인 보상을 바라는 태도, 희생도 없이 
당장에 해결을 바라는 마음, 주기보다 받기를, 나누어 
갖기보다 나 혼자 끌어모으려는 자세는 언론과 재계 및 
정계에서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공기와 물, 그리고 지구를 
오염시키는 살충제와 유독성 폐기물 등 화학 약품의 위협을 
받고 있다. 어떤 부모도 방송 전파와 오염된 대중 문화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극도의 폭력과 방탕한 
소비 생활, 손쉬운 섹스와 탐욕을 미화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술과 담배를 즐겁고 멋지고 남자다운 것으로 묘사한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사회 생활, 개인 생활을 막론하고 보고 
뒤따를 만한 남녀 영웅이 너무나 부족하다.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성공의 의미가 공익보다는 개인적 탐욕을 
뜻하게 되었고,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그저 그럭저럭 
해나가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다.
  고삐 풀린 총기의 유통과 어디에서나 횡행하고 있는 마약 
밀매는 폭력을 부채질하여 우리의 자녀들에게 해를 끼친다.
  우리가 미국의 장래를 위해 건강한 아기를 길러 줄 것으로 
믿고 있는 젊은 부부들은 어느 인종이나 극도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1970 년대 초부터 그들은 곤두박질치는 소득, 
미혼모의 배증, 결손 가정의 증가,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빈곤율의 무서운 악순환에 고통을 받아 왔다.
  자녀를 둔 젊은 부부의 평균 수입은 1973 년에서 1989 년 
사이에 26 퍼센트나 떨어졌다. 가장이 삼십세 미만인 가정의 
사십퍼센트가 빈곤층이다. 많은 중산층 젊은이들과 젊은 
부부들이 집을 마련하느냐, 아니면 아이를 낳느냐 하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서 고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직업도 갖지 
못한채 가난한 대도시 우범 지역에 갇힌 많은 청소년들은 
미래를 감옥이나 갱과 마약 밀매자들 손에 당하는 죽음 
사이의 선택으로 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이 뒤처져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중에도 빈곤층 어린이들이 가장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의 숫자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데, 
1990 년 한해 동안에만 해도 841,000 명이나 늘어났을 
정도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말해 줄 사람도 자기들을 
위해 싸워 줄 사람도 없는 여리고 얼굴 없는 희생자들이다.
  1987 년 리사 스타인버그의 죽음은 우리를 아연케 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아동 복지 기구는 입양 절차가 채 
끝나지 않았던 그 아이의 학대 사실을 적발해 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제시카 맥클리어가 시설이 미비한 보육원 뜰의 우물 속에 
빠졌다가 구조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초에 그런 위험 상황에 처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8개월짜리 샤말 잭슨이 죽었을 때, 
우리는 그 아기에 대한 얘기를 별로 듣지 못하였다. 아기는 
체중 미달상태로 태어나 영양 실조와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죽었다. 짧은 일생 동안 아기는 수용 시설에서, 
병원에서, 복지 후생 센터 사무실에서, 그리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어머니가 그를 안고 밤늦게까지 타고 다닌 지하철 
속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잤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이 나라에서 아기는 한 번도 아파트나 주택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빈곤과 무주택 때문이었다.
  우리는 불과 746그램 밖에 안 나가는 제이슨이 워싱턴의 
아동 병원에서 사투를 벌였다는 얘기도 듣지 못하였고, 미국 
전역의 유사한 신생아 중환자 병동의 수천 명의 다른 
아기들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예정일보다 3개월이나 앞서 태어났을 때, 제이슨의 
몸무게는 363그램이 겨우 넘었었다. 그나마 용케 살아 있는 
것은 폐와 몸 속의 모든 핏줄을 수많은 기계에 
연결시킴으로써 양분 공급과 체온 유지 및 호흡이 가까스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아기는 심장에 장애가 있으며, 이미 
뇌출혈로 인한 신경 계통의 손상으로 발작을 일으킨 바가 
있다. 설혹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후유증은 영구적일 
것이다.
  제이슨이 미숙아로 태어난 원인은 결코 알려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임신부가 초기부터 주기적으로 
출산전 진료를 받지 않는 한, 조산에 이르게 만드는 
원인들을 발견해 낼 수 없고 치료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미국 어머니들의 삼분의 일이 그들에게 필요한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료 제도가 다른 모든 
주요 선진국들과는 달리 모자에게 기본적인 진료 혜택을 
일괄적으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계 숫자 뒤에 있는 이런 어린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어린이들은 우리 장래 생활의 질과 안전과 경제적 
안정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린이들은 모든 
미국인들의 장래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내려야 할 결정은 어린이들에게 투자할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학교 중퇴자, 십대 부모, 생활 보조 
수혜자, 범죄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와 바람을 외면한 채 사회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 된다면 금세기 말에는 네 명 
어린이 중 한 명이 빈곤층에 들게 될 것이며, 결손 가정 
자녀의 비율 역시 올라갈 것이다.
  2000 년에는 다섯 명의 신생아 중 한 명, 그리고 세 명의 
흑인 신생아 중 한 명 이상이 임신 초기부터 적절한 출산 전 
진료를 받지 못한 부모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이십 세 
여성은 다섯 명 중 한 명 꼴로 어머니가 될 것이며, 그들 
젊은 어머니들의 다섯 명 중 네 명 이상이 미혼모일 것이다.
  우리 세대의 노년 생활을 보장해 줄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는 사회 보장 제도는 점점 더 적은 숫자의 자녀들이 내는 
기금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키워 
내지도 못하고 있는 자녀들 말이다.
  우리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에 즉각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을 불건강하고 집도 
없고 영양도 부족하고 교육도 못 받은 채로 내 팽개치게 될 
것이다.
  갓난아기들과 어린이들을 가장 가난한 국민으로 
성장하도록 내버려 두는 국가는 정신적으로 빈곤하기 짝이 
없는 국가이다.
  지금 이 부자 나라에서는 1천 3백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기본적인 편의 시설도 없이 살아간다. 이는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또는 플로리다 주의 전체 
인구보다도 더 큰 숫자이다. 만약 플로리다 주의 전 주민이 
빈곤층이 된다면, 대통령은 국가적 재난으로 간주하고 
비상령을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는 아직도 
빈곤층 어린이들의 참상을 사실 그대로의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폭풍이 휩쓸고 난 다음이나 지진 또는 화재 발생 후면, 
우리는 공동체적인 책임감을 동원하여 열성적으로 구조 
작업을 벌인다. 이와 같은 열성의 일부만이라도 장래의 
국가적 재난을 극복해 나가는 데 돌려야 할 것이다.
  1972 년의 사회 보장법 개정에 따라 고령 시민들의 수혜 
연금수준을 인플레이션에 맞추어 조정한 뒤로, 삼년 사이에 
백칠 십만 명의 노인들이 빈곤층에서 벗어난 바 있다. 
미국은 자녀를 둔 가정에도 이와 맞먹는 배려를 해줄 능력이 
있다.
  통학 버스와 유모차와 집 뜰과 학교와 극장과 그리고 
맥도널드 햄버거 식당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오염시키고 
죽음으로 몰아 가는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지 못할뿐만 
아니라, 그럴 의지도 없는 국가는 도덕적으로 실종된 
국가이다.
  죽음이 미국의 운동장과 거리를 선전 포고도 없이 
활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의회, 주지사들, 주 
정부와 지방 선거로 선출된 관리들 및 시민들은 지속적인 
염려조차 표명하지 않는 것이다.
  날마다 135,000 명의 청소년들이 총기를 학교로 가지고 
온다. 1987 년에는 415,000건의 폭력 사범이 학교나 학교 
주위에서 발생하였다. 어떤 도심 우범 지역 어린이들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많은 월남 참전 
용사들을 괴롭히는 것과 유사한 스트레스 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는 반자동 기관총을 시민들의 
손에서 빼앗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목숨도 이웃 나라의 국민들의 목숨만큼이나 
귀중하다고 외치던 도덕적 게릴라와 시위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미국의 비판적 대중들이 각종 법 집행 
기관들과 합세하여 우리의 정치적 지도자들로 하여금 총기의 
확산을 중단시키도록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미국 
내에서는 날마다 스물세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총기류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다.
  먼 나라의 폭군에 대항하여 우리는 수백 수천 명의 미국의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남편, 아내, 누이, 오빠들을 
페르시아 만으로 보냈다. 국방 장고나 제임스 베이커에 
의하면 걸프전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기준, 그리고 쿠웨이트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치러졌다. 적자 예산이나 
공황 따위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국내의 빈곤과 폭력, 그리고 가정의 붕괴라는 
적들에 대항해서 그와 똑같이 싸우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 군대를 동원하여 매일 밤 
집도 없이 떠도는 100,000 명의 미국 어린이들의 삶의 
방식을 위해 싸울 것인가?
  소득 능력은 감소하는 데 집을 마련하고 대학 학비 
융자금을 상환하고 보육비를 대기 위해 허덕이는 수많은 
젊은 부부의 생활 수준은 언제 지켜 줄 것인가? 점점 더 
낮아만 가는 임금에 기대어, 보잘 것 없는 살림이나마 
꾸려가려고 애를 쓰는 수백만명의 가난한 근로자와 중산층 
가정들을 우리의 지도자들은 언제 구조하러 나설 것인가?
  편모가 세대주로 있는 가정은 여섯 가구 중 하나 꼴이 
된다. 어째서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은 이런 가정들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가? 그들의 29 퍼센트는 
빈곤층인데도 말이다. 쓰러진 저축 금융 기관에 자그마치 
115조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긴급 지원되었다. 그와 같은 
열성으로 우리의 젊은 부부들을 구제해 달라고 지도자들에게 
말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대통령의 1992 년도 예산안은 헤드 스타트를 일 년간 
늘리는 데 고작 1억 달러를 책정했을 뿐, 근로자 가정의 
보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지원 계획도 없었다. 반면 '사막의 
폭풍' 작전을 위해서는 날마다 5억 달러를, 낭비 심한 주택 
저축 금융 기관에는 하루 9천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그 
외에도 수십억 달러를 부자들의 고정 자산 매각 소득에 대한 
세금 우대 조처에 쏟아 붓고 있다. 우리 미국인들의 
가치관이 진실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1979 년부터 1989 년 사이에, 전 국민의 밑바닥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가정의 평균 소득은 인플레이션 수당을 
포함하고도 6 퍼센트 감소하였다. 반면, 꼭대기 오분의 일의 
소득은 17 퍼센트나 급등했다. 자녀를 둔 적빈층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미국 가정이 수입의 21 퍼센트를 잃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몇 달 사이에 수백 수천 명의 군대와 
지원 인원을 사담 후세인과 싸우도록 동원해 낼 수 
있었을까? 절망적일 정도로 방치된 도심과 시골 지역에, 
가난과 무지와 아동에 대한 무관심과 학대라는 폭군과 
싸우도록 고작 몇백 명의 교사나 의사, 간호사 그리고 사회 
사업가를 동원할 수도 없었던 우리가 아닌가?
  대통령과 국회,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미국의 국가 안전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하고, 해외의 문제점에 대응할 때와 
같은 신속함으로 지도력과 에너지를 국내 문제 해결에 
투자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진실과 도덕적 모범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도록 내버려 둔 
나라는 '도덕적으로 혼동된 국가'이다. 우리들 중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부는 우리가 지닌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정부가 문제이다."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불법적 기업으로 비쳐진다면,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맡은 일의 공적인 목적을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정부가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면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모두에 있어서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억제력은 급속히 저하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고수하는 유일한 원칙이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르는 시장 경제의 원리; 옮긴이)뿐이라면, 인간의 손이나 
하느님의 손이 끼여들 여지는 거의 없어지거나, 아니면 
아^36^예 찾아 볼 수 조차 없을 것이다. 헤브루인 예언자 
미가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공정하고 의로우며 
자비로우라"고 명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구성원이 아무런 공통의 목적도 목표도 비전도 갖고 
있지 않은 사회의 중심에는 구멍이 뚫리게 마련이다. 자신의 
재산이나 권력의 증식 말고는 아무것도 믿을 게 없어지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우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준비를 
시키고 의료 혜택과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공언한 바를 지키게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앞날의 인구 통계 추세로 보면 근로자, 군인, 지도자, 
그리고 부모가 될 청소년이 부족할 것이 틀림없다. 미국은 
단 한 명의 어린이에게도 소홀히 할 여유가 없다. 지금 
우리는 해외에서는 전대 미문의 경제적 경쟁에 부딪히고 
있고, 국내적으로는 더욱 고도의 교육적 기능을 요하는 생산 
양식의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은 오늘과 내일의 일꾼들이 
쓸모 없고 따돌림받는 존재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훌륭하게 준비를 갖춘 사람으로 키워 
주어야 한다. 한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다.
  되돌아가서 지난 십 년간의 출생률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가정이 입는 손상을 방지 내지는 
감소시키고 모든 어린이들이 지금 당장 건강한 출발, 
순조로운 출발, 그리고 공정한 출발을 하도록 해줄 수는 
있다. 이십 세기가 저물어 가면서,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것이 곧, 우리의 경제적 생명을 구하는 필수적인 
일이 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경제 및 군사적 난제를 안은 
21세기가 시작되면 미국은 먼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 연후에만 경제적으로는 다른 나라와 
맞설 수 있고 도덕적으로는 그들을 선도할 준비를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1.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으로 개인적,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어린이들을 기만하고 방치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2. 인종 차별로 얼룩진 과거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이상과 미래와 운명은 유복한 어린이들과 백인 
어린이뿐만 아니라 가난한 어린이들과 비백인 어린이들의 
운명과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3. 서로를 불신하면서 가상적인 외부의 적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우리의 자녀들을 더욱 많이 사랑해야 한다.
  4. '내일' 좀더 잘 훈련된 노동력과 보다 안정된 미래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록 힘들지라도 모든 자녀들에게 '지금' 
조직적, 예방적으로 투자해야만 한다.
  5. 지나치게 부유한 자들의 욕망을 억제시켜 그들보다 덜 
운 좋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필요가 충족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죽음의 무기를 위해 쓰는 돈을 줄이고 우리 국민의 
건설적 발전을 위해서 보다 많은 예산을 책정해야 한다.
  6. 어린이들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뚜렷한 국가, 주 정부, 
시, 지역 사회 단위 및 개인적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도력, 책임감, 시간, 돈,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을 투자해야만 한다.
  7. 삶을 보다 덜 이기적이고 좀더 목적 있게 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만 한다. 성공을 국가적 소비와 인종과 계층 
간의 피상적인 장벽으로 정의하고 한정하기보다는 국가적, 
개인적 인격과 봉사에 두도록 재정의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과 가정의 고조되는 위기는 미국이 자처하는 
모든 것에 대한 꾸짖음이나 다름없다. 와해되어 가는 미국의 
국가적 기반을 수리하는 비용은 여러 모로 값비쌀 것이다. 
그러나, 수리를 하지 않거나 눈가림으로 때울 경우 나중에 
들 비용은 치명적일 것이 틀림없다.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관심을 가지자. 이 
나라에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가정을 만나거나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면, 당신 자신을 같은 
미국인으로서 그들 자리에 놓아 보라.
  당신이나 당신의 배우자가 임신을 했는데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거나 끼니마저 제대로 잇지 못한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의 자녀가 굶주리거나 다쳤는데 식품을 살 돈도, 진료를 
받을 길도 없다는 상상을 해보라. 일자리를 잃어 아무런 
수입이 없는데 실업 수당은 동이 났고 청구서나 집세를 
지불할 돈도 없고 아이들과 함께 잘 곳은 물론, 아무것도 
없다고 상상을 해보라.
  일생 동안 줄곧 일을 해왔는데도 교회나 구세군의 무료 
식사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야 하거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수용시설에서 잠을 자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곳을 찾아다녀야 한다고 상상을 해 보라. 그 날 
밤 또다시 거기서 잠을 잘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만약 이런 상상을 해볼 짬을 낼 수 있다면, 당신은 어쩌면 
그들에게 무언가 해줄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수용소나 빈민을 위한 무료 식당에서 자원 
봉사를 하거나, 방과후의 학습지도 프로그램에 참여하여라. 
투표를 하여라. 지역 사회의 조직을 도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발언하라.
  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이나 에이즈 및 보더 
베이비(부모의 양육 능력 결여로 병원에 무기한으로 맡겨진 
아기; 옮긴이)병동을 방문하여 아기들을 안아 주고 보살펴 
주어라. 아무에게서도 편지라고는 받아 보지 못하는 외로운 
아이와 편지 친구가 되어라. 젊은이들에게 여름 일자리를 
주어라.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녀에게 관용과 
포용력을 가르쳐라.
  개개인의 기본적인 봉사와 민간 차원의 자선이 공공 
정의를 대신할 수는 없다. 미국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것이다. 미국이 모든 
시민들에게 공평함과 기회를 주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면, 
집단적인 운동의 전개와 정치적 행동도 함께 필요하다.
  당신의 자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 적어도 당신의 
자녀가 아닌 한 명의 어린이를 책임지겠다는 맹세를 하여라.
  마지막으로 아이나 휴즈의 다음 기도문을 읽어 보면서 
'기도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덧붙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저녁 식사 전에 아이스 케이크를 몰래 먹는 
어린이, 자꾸만 틀린 나머지 산수 학습장을 구멍이 나도록 
지우는 어린이, 자기 신발을 어디다 벗어 두었는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철조망 저편에서 사진사를 멍하니 쳐다보는 
어린이, 새 운동화를 신고 길을 뛰어내려가 보지도 못하는 
어린이, 손뼉치고 노래를 부르며 놀아본 적이 없는 어린이, 
그런 곳에서는 죽고 싶지도 않을 곳에서 태어난 어린이, 한 
번도 서커스에 못 가본 어린이, 금지된 세계에서 사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저분한 입으로 입맞춤을 해주며 한움큼 민들레를 
따 오는 어린이, 급하게 껴안고 "다녀오겠습니다."하고는 
점심값은 잊고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번도 후식을 먹어 보지 못한 어린이, 
질질 끌고 다닐 담요도 없는 어린이, 죽어 가는 자기를 지켜 
보는 부모를 마주 바라 보는 어린이, 훔칠 빵도 한 조각 
없는 어린이, 치워야 할 방도 없는 어린이, 아무도 그의 
사진을 화장대 위에 올려 놓고 보아 주지 않는 어린이, 괴물 
같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화요일이 되기도 전에 용돈을 다 써 버리는 
어린이, 슈퍼마켓에서 떼를 쓰고 반찬 투정을 하는 어린이, 
귀신 얘기를 좋아하는 어린이, 빨랫감을 침대 밑에 밀어 
넣고 목욕 후엔 욕조 한 번 헹굴 줄 모르는 어린이, 이의 
요정이 찾아와 주는 어린이(뺀 이를 베갯머리에 놓고 자면 
밤에 이의 요정이 찾아와 이를 가져 가고 대신 돈이나 
선물을 놓고 간다고 믿는데, 요정 노릇은 부모가 하는 
것이다.; 옮긴이), 친구들 앞에서 입맞춤 받는 것을 싫어하는 
어린이, 교회나 사원에서 몸을 뒤틀고, 전화통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어린이, 눈물은 때로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미소는 우리를 눈물나게 만드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몽이 낮에 찾아오는 어린이, 
아무것이라도 주기만 하면 먹을 어린이, 치과라고는 가 
본적이 없는 어린이, 아무도 버릇 나빠질 정도로 사랑해 
주지 않는 어린이, 밥도 굶은 채 침대로 들어가 울다 잠이 
드는 어린이, 살아 움직이긴 하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안겨 가기를 바라는 어린이와 짐을 들고 가야 하는 
어린이,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없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사랑을 숨막히도록 좋아할 어린이와 
아무라도 친절하게 손만 내밀어 주면 붙잡을 어린이들의 
위해 기도합니다.

  부디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  (옮기고 나서)

  '세상에 홀로 서는 너희들에게는'는 러시아계 유태인과 
결혼하여 흑백 제 1세대가 되는 세 아들을 둔 한 어머니가 
자신의 세 아들과 미국 가정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개적으로 
띄우는 격조 높은 인생 철학서이다.
  사회 정의 구현의 파수꾼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인 이 책의 
저자 에델만은 자식들이 건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자녀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 후, 물질적인 풍요와 반비례하여 
급격히 상실되어 가고 있는 미국 사회의 도덕률 회복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부의 편재와 소외된 계층을 더욱 소외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적, 인종적, 성적 불평등에 분노하면서, 
민주 사회에서는 같은 인종, 계급, 성별끼리의 연대감보다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유대감이 더 중요함을 강조함으로써 인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기심으로 응어리진 현대인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워 줄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있다. 
'봉사'에 대한 개념 정리가 바로 그것이다. 즉, 봉사와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 대한 따뜻한 배려는 시간적, 물질적, 
정신적 여우가 있을 때 어쩌다가 하는 자선이 아니라 자기 
삶의 대가로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와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공'은 물질적 소비 능력이 아니라 인격에 
의해 정의내려져야 하며, 미래 사회의 질은 우리 자신의 
행동과 미래의 주인공인 자녀들을 어떻게 기르는가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급격한 산업화, 서구화 과정에서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너무나 많이 상실해 왔음을 깨닫고 몹시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세상에 홀로 서는 너희들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거나 
일부러 도외시했던 도덕적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애써 번역한 이 책이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려는 부모들과 
인생을 설계하는 청소년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를 
발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정성 담긴 책으로 
꾸미기 위해 애쓴 김영사 편집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