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덫 (1)
- 아가사 크리스티 -
무척이나 추운 날씨였다. 하늘은 어두컴컴하게 찌푸린 채 눈이 올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외투를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 한 사나이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런던의 컬버가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74번지에 다다르자, 그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며 집안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주방에서 바쁘게 설겆이를 하고 있던 케이시
부인은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휴, 시끄러워! 도대체 쉴 사이가 없다니까."
그녀는 물묻은 손을 닦고 숨을 가쁘게 쉬며 아래층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낮게 드리운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케이시 부인에게 쉰 듯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언 부인이십니까? "
"아니에요. 라이언 부인은 3층에 살아요. 올라가 보세요. 그런데, 오신다는
연락을 미리 하셨나요? " 하고 케이시 부인이 묻자,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올라가서 노크해 보세요."
케이시 부인은 그 남자가 낡아빠진 카페트가 깔린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나중에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는 그 남자가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렇게 속삭이듯 작고 쉰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계단이 꺾여지는 곳에 이르자 부드러운 소리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노래의 멜로디였다.
몰리 데이비스는 길 쪽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출입문 옆에 걸린 새로 칠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고급 하숙집
몽스웰 여관
몰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판은 전문가의 솜씨 못지않게 훌륭했다.
'하숙집'이란 글씨의 뒷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고, '여관'이란 글자가 조금 작게
쓰여진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가일즈는 훌륭한 간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몰리의 남편인 가일즈는 정말 솜씨가 좋았고,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몰리는 남편이 새로운 솜씨를 발휘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남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리는 남편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재능을 하나씩 알 때마다 놀랍기만 했다.
사람들이 해군 출신을 '솜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편이 지닌 재능은 이제부터 그들 부부가 시작할 새로운 사업에 꼭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몰리와 가일즈 부부는 하숙집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하숙집을 경영하게 되면
그들이 살 집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하숙집을 경영하자는 것은 몰리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캐서린 아주머니가
몰리에게 몽스웰 저택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는 사실을 변호사가 알려 주었다.
그래서 젊은 부부인 몰리와 가일즈는 당연히 그 저택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저택이지?" 하고 가일즈가 물었을 때 몰리가 대답했다.
"크고 넓고 오래 된 집이에요. 집안에는 빅토리아풍의 구식 가구들로 가득차
있어요. 정원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전쟁(제2차 대전)이후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답니다. 정원사라고는 늙은 노인 한 사람밖에 없었거든요."
그들은 저택을 팔려고 내놓았다. 그 대신 그들 두 사람에게 알맞은 작은 집이나
아파트에 필요한 가구만 갖기로 했다. 그런데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첫째는 작은 집이나 아파트를 구할 수 없었고, 둘째는 저택에 있는 가구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도저히 다 처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구까지 전부 팔아 버리면 되죠. 팔 수 있을거예요." 몰리가 말했다.
변호사도 요즘에는 무엇이든지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아마 누군가가 호텔이나 고급 하숙집으로 쓰려고 그 저택을 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집안의 가구도 전부 사게 될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저택은 손질이 잘 되어
있거든요. 돌아가신 에모리 양께서 전쟁이 나기 직전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해서
현대적으로 만들어 놓으셨지요. 손볼 데가 거의 없읍니다. 전쟁 뒤에도 아주
훌륭하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몰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여보, 우리가 하숙집을 경영하면 어떨까요?"
처음에 남편은 몰리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몰리는 남편을 계속
설득했다.
v"처음부터 손님을 많이 받을 필요는 없어요. 그 저택은 하숙집으로 쓰기에는
안성마춤이에요. 목욕탕에는 찬물과 더운 물이 나오고, 중앙난방시설도 되어
있어요. 또, 가스 조리대도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닭과 오리를 기르면 달걀도
구할수 있고, 채소를 직접 재배하면 반찬값도 많이 절약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일들을 전부 누가 하지? 일하는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우리가 해야죠. 어디에 살더라도 그런 일은 우리가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숙집을
시작할 때쯤이면 일하는 여자를 한 명 정도 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일할 사람을
많이 둘 필요는 없어요. 손님을 다섯 명만 받으면 한 사람이 1주일에 7기니를낼
테고...."
이렇게 말하며 몰리는 희망에 찬 설계를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해보세요, 여보. 그 저택은 우리집이예요. 그 집에 있는
물건도 전부 우리 것이고요. 우리힘으로 우리 집을 마련하자면 앞으로 몇 년이나
걸리지 않겠어요? "
그것은 사실이었다. 가일즈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을
한 뒤 지금까지 일 때문에 함께 지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집을
가지고 정착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숙집을 경영하는
큰일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방 신문과 '타임즈'지에 하숙집 광고를 냈더니,
손님들로부터 많은 문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오늘, 첫번째 손님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일즈는 철망을 싸게 판다는
광고를 보고서, 그것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반대편 지역으로 떠났다.
몰리는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야 하기 때문에 시내로 나갔다 와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갔는데, 단 한 가지 문제는 날씨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날씨가 무척 추워지더니 급기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몰리는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다.휘날리느 눈송이가 방수옷을
입은 몰리의 어깨와 윤기 있는 고수머리에 내려와 앉았다.
일기예보는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많은 눈이 내릴 것이 라는 내용이었다.
몰리는 수도관이나 하수도가 얼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숙집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 큰일이다. 몰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차마시는 시간이
벌써 지나 있었다. 남편이 돌아왔을까? 내가 어디에 간 걸까 하며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잊은 물건이 있어서 시내에 다시 갔었어요." 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남편은 웃으며이렇게말할 것이다.
"통조림을 더 사러 갔었나?"
통조림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통하는 농담이었다. 가난했을 때
그들은 통조림 식량이 바닥이 나지 않도록 항상 조심했었다. 지금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식료품 저장소에다 통조림 식량을 가득 채워 두고 있었다.
몰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이제 곧 그 만일의 경우가 닥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몰리가 집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남편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몰리는 우선 부엌에 갔다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해
놓은 방들을둘러보았다.
기둥이 네 개인 큰 침대와 마호가니(열대 식물의 일종) 가구로 장식된 남쪽 방은
보일 부인에게 주고, 떡갈나무 가구가 있는 푸른 벽지의 방은 메트카프 소령에게 줄
것이며, 밖으로 튀어나온 창이 달린 동쪽 방은 렌 씨에게 줄 것이다.
방들은 훌륭해 보였다. 캐서린 아주머니가 그렇게 많은 린넨 천을 남겨 준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몰리는 제자리에 놓인 이불을 한번 톡톡 두드려
보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밖은 거의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이 너무나
조용하고 텅빈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집은 마을에서 3km나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었다. 몰리가 말하듯 세상으로부터 3km 나 떨어져 있었다.
몰리는 전에도 집에 혼자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절실하게 혼자뿐이라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밖에서는 눈송이가 바람에 날리며 창틀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속삭이는 듯 하면서도 불안하게 들려 왔다. 만일 남편이
오늘밤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자동차가 다닐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만일 이 집에서 며칠 동안 혼자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몰리는 주방ㅇ르둘러보았다. 넓고 편안한 주방이었다. 덩치가 크고 마음씨
좋은 주방장이 요리를 하고, 몰리가 딱딱한 케이크와 차를 마시며 턱을 움직이고
있을 때 키가 크고 나이든 가정부가 식탁 한쪽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하녀들의 눈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식모와, 통통하고 얼굴이
발그레한 하녀가 식탁의 다른 한쪽에 서 있다면 참 잘 어울릴 그런 그런
주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 시작한 일을 서툴게 하고 있는 몰리 데이비스
혼자였다. 이 순간, 몰리는 자신의 인생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존재도 비현실적으로 생각되었다. 몰리는 자신이 마치 연극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때 어떤 그림자가 창 밖을 스치고 지나갔다. 몰리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낯선 남자가 눈 속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옆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 다음, 그 낯선 남자가 문간에 서서 눈을 털어내고는 몰리가 혼자 있는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때 갑자기 몰리의 착각이 사라졌다.
"어머, 당신이였군요!" 몰리가 소리쳤다.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기뻐요!"
"이제야 돌아왔어. 지독한 날씨군. 내 몸이 꽁꽁 얼었어."
가일즈는 발을 구르며 손가락에다 입김을 호호 불었다. 가일즈가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외투를 벗어 떡갈나무 옷장에 휙 내던지자, 몰리도 습관적으로 그것을
집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에서 목도리와 신문, 둥글게 감은
끈뭉치를 꺼내고, 아침에 서둘러 집어넣었던 우편물들도 꺼냈다. 몰리는 주방으로
가서 쇼핑한 물건을 찬장과 조리대 위에 놓고 가스 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철망을 샀어요? 당신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물건 말이에요." 몰리가 물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어. 우리에게 소용없는 것이었으니까. 싸게파는 다른
곳에도 가봤지만 그것도 좋은 물건이 아니었어. 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뭘 하며
지냈지? 아직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보일 부인은 내일 도착하다고 연락이 왔어요."
"메트카프 소령과 렌 씨는 오늘 도착한다고 했지?"
"메트카프 소령도 내일 온다는 엽서를 보냈더군요."
"그렇다면 렌 씨와 우리 두 사람이 저녁을 먹게 되겠군. 렌 씨는 어떤 사람일 것
같아? 내 생각에 그는 퇴직한 공무원일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예술가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가 예술가라면 만일의 경우에대비해서 1주일치 하숙비를 미리 받아야겠는걸"
"그럴 필요는 없어요. 손님들은 짐을 가지고 올 테니까, 만일 하숙비를 내지 않으면
하숙비 대신 그 짐을 우리가 맡으면 될 거예요."
"하지만, 짐 가방 속에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가득차 있으면 어쩌지? 여보, 우린
사실 이런 일을 처음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게 많아. 손님들이 우리가 하숙집을 처음
시작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보일 부인은 눈치를 챌 거예요. 그 여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거든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쟎아? "
몰리는 몸을 돌리고신문지를 신탁에 깔았다. 그리고 치즈를 가지고 와서 썰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치즈 토스트를 만드는 거예요." 몰리가 대답했다.
"빵가루와 으깬 감자를 섞어서 만드는 건데, 치즈를 아주 조금만 넣으면 치즈
토스트가 되는 거예요."
"당신은 정말 똑똑한 요리사인걸." 가일즈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걱정이 돼요. 한번에 한 가지 요리느 만들 수 있지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자면 연습을 많이 해야 되거든요.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제일
어려워요."
"왜 그렇지?"
"왜냐하면 한꺼번에 준비해야하니까요. 달걀, 베이컨, 뜨거운 우유, 커피, 그리고
토스트를 한번에 식탁에 올려야 하거든요. 잘못하면 우유가 끓어 넘치거나
토스트가 다 굳어 버리거든요. 불에 덴 고양이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며 한꺼번에
전부 살펴봐야 해요."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는 주방에 살금살금 내려와서 팔짝팔짝 뛰는 고양이 같은
당신의 모습을 지켜봐야겠는걸."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어요. 찻쟁반을 서재로 가지고 가서 라디오를 들을까요?
뉴스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우리가 앞으로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주방에도 라디오가
있어야겠군."
"그래요. 참 좋은 주방이에요. 난 이 주방이 마음에 들어요. 이집에서 제일 좋은
곳 이라고 생각해요. 조리대와 그릇도 좋고, 저 커다란 요리용 스토브도 마음에
들어요. 저 스토브를 쓸 만큼 많은 요리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요."
"그 스토브를 쓰려면 1년치의 연료가 하루 만에 바닥이나고 말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 안에서 구워지는 큰 고깃덩어리를 상상해 봐요. 소의
안심고기와 양의 등심고기를 말이에요. 구리로 만든 커다란 남비에도 설탕을 잔뜩
넣고 딸기잼을 만든다고 생각해 봐요. 빅토리아 시대는 정말 좋았을 거예요.
위층에 있는 가구들도 약간 화려하긴 해도 얼마나 크고 튼튼해요. 사용하기
편리하고 옷도 많이 넣을 수 있어요. 서랍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거든요. 전에 우리가 전세로 빌려서 살던 아파트 생각나세요? 겉모양은 그럴
듯 했지만,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죠. 서랍은 잘 열리지 않았고, 문도 한번
열리면 닫히질 않고, 또 닫히면 열리지 않았죠."
"맞아, 정말 엉터리로 만든 집이었어. 서랍이나 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당신은
절망에 빠져 주저앉곤 했지."
"자, 우리 이제 뉴스를 들어요."
뉴스의 내용은 주로 날씨에 관한 것으로, 눈이 많이 올 예정이므로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흔히 있는 외국과의 분쟁에서 생긴 교착 상태, 의회에서의 열띤
논쟁, 그리고 런던 패딩턴 구의 컬버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다.
"아─" 몰리가 라디오를 끄며 말했다.
"좋지 않은 내용들뿐이군요. 연료 절약을 강조하는 내용은 또다시 듣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가만히 앉아서 얼어 죽으라는
말인지 원? 하숙집을 이런 겨울에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봄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건데."
몰리는 약간 다른 말투로 계속했다.
"살해된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라이언 부인 말이야?"
"그 여자 이름이 라이언이에요? 누가 무슨 이유로 그 여자를 죽였는지 궁금하군요."
"아마 마룻바닥에 보물을 감추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경찰이 찾고 있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 부근에 있었다'는 남자가 살인범일까요?"
"그렇겠지. 언제나 그런 사람이 범인이니까. 경찰에서 그냥 찾고 있다고 점잖게
표현했을 뿐이지."
그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몰리와 가일즈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현관 문이군. 아마 살인범이 등장하려나 본데." 가일즈가 익살맞게 말했다.
"연극이라면 그럴 거예요. 어서 나가 봐요. 렌 씨일거예요.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드디어 알 수 있겠네요."
문을 열자 렌 씨와 눈보라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서재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검은 윤곽만 뚜렷이 보였다. 검은 외투에 회색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그
남자의 모습은 다른 남자들과도 똑같아 보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막으며 가일즈가 문을 닫자, 렌 씨는 가방을 내려놓고서
목도리를 풀며 모자를 벗어 던지는 동시에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성급하게
들렸다. 홀의 불빛 아래에는, 검고 윤기 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흐릿한 눈동자의 젊은이가 서 있었다.
"정말 지독한 날씨군요." 그가 말했다.
"디킨즈(1812~1870, 영국의 소설가, 「크리스마스 캐롤」「올리버 트위스트」「두
도시 이야기」등을 썼다)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크루지와 티니 팀이 살았던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최악의 영국 겨울 날씨예요. 여간 튼튼하지 않고서는 이런
날씨를 견디어 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웨일스 지방(영국의 서부
지방.참고로, 영국은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있다)에서
이곳까지 들판을 가로질러 왔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데이비스 부인이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뼈가 앙상한 손으로 재빨리 몰리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내가 상상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군요. 나는 부인이 인도에 주둔했던 육군
장성의 미망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죠. 지독하게 엄격한 마님 같은 분― 베나레스
(동부 인도에 있는 힌두교의 옛 성도) 영주의 마님 같고, 진짜 빅토리아 시대의
근엄한 체하는 마님 같은 여주인 말입니다. 혹시 밀립(꿀을 짜낸 찌끼를 끓여 만든
기름)으로 만든 꽃이 있읍니까? 아니면, 극락조를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 하지만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난 이곳이 혹시 아주 오래 되고
낡은 하숙집이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어요. 베나레스의 냄새가 나는
케케묵은 집이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이 집은 정말 훌륭하군요. 빅토리아 시대의
고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요. 아름다운 장식장도 있겠죠? 과일 무늬가 조각된
고운 자줏빛 마호가니 식기장말입니다."
"예, 사실은―" 몰리는 그 젊은이가 쉴 새 없이 애기해 나가자 정신이 얼떨떨해져서
더듬거리며, "갖고 있어요."하고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구경할 수 있겠읍니까? 지금 당장에요. 저 방에 있읍니까?"
그가 너무도 성급하게 구는 바람에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는 식당문의 손잡이르 돌려 문을 열고는 불을 켰다. 몰리는 남편이 언짧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그 젊은이를 따라 식당을 들어갔다.
그는 표면이 전부 조각으로 장식된 육중한 식기장을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돌아서더니 나무라는듯한 눈초리로 몰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은 없읍니까? 이 작은 테이블 몇개가 전부란 말입니까?"
"손님들이 그런 개인용 식탁을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몰리가
대답했다.
"아, 물론 그 말씀도 옳아요. 내가 너무 내 기분에만 빠져 있었군요. 그런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이라면 그 식탁에 어울리는 가족도 있어야겠죠. 콧수염을 기른
엄격하고도 멋있는 아버지와, 아이를 많이 낳아서 허약해진 엄마, 그리고
열한명의 아이들과 엄한 가정교사, 또 '불쌍한 해리엣'이라 불리는 가난한 친척
아줌마도 있어야겠죠. 집안일을 도와 주며, 자신이 화목한 가정에 속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가난한 친척 아주머니죠. 그 불쌍한 해리엣 아주머니의
등뒤에서는 벽난로의 불꽃이 타오르며 온 가족을 따뜻하게 해주겠죠.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신의 가방을 2층으로 옮겨야겠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동쪽 방이지?"
"예." 몰리가 대답했다.
가일즈가 2층으로 올라갈 때 그 젊은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홀로 나왔다.
"내가 머물게 되는 동쪽 방에는, 작은 장미꽃 무늬가 수 놓아진 사라사 무명천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네 기둥의 큰 침대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뇨. 없읍니다." 하고 대답하며 가일즈는 계단이 꺾이는 곳을 돌아 2층으로
사라졌다.
"부인의 남편께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어디에서 근무했읍니까? 해군이었나요?"
"예, 맞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보다 참을성이 없거든요. 결혼하신 지
얼마나 되셨읍니까? 남편을 무척 사랑하시겠죠?"
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2층에 올라가서 지내실 방에 둘러보시죠."하고 물었다.
"물론, 내가 무례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정말알고 싶군요. 사람들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직업과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느지를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렌 씨가 맞죠?" 몰리는 약간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난 항상 먼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이런답니다. 맞습니다.
내 이름은 크리스토퍼 렌 입니다. 웃지는 마세요. 우리 부모님은 아주 낭만적인
분들이셨어요. 내가 건축가가 되기를 바라셨죠. 그래서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 영국의 건축가. 세인트 폴(성 바울) 성당 외에 많은 교회
와 병원, 학교 건물들을 건축했다)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어 주셨죠.
말하자면 부모님의 요망 사항인 셈이죠."
"그래서 당신은 건축가가 되었나요?" 몰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예, 되었죠." 렌 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직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제 곧 유명한 건축가가 될 겁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 중에서 단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사실 내 이름이 오히려
방해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못 될테니까요. 하지만, 조립식 간이 주택 같은 것을
만들어서 유명해질 수는 있을 겁니다."
가일즈가 계단을 내려왔다.
"렌 씨, 당신이 지낼 방을 보여 드리겠어요." 몰리가 말했다.
몇 분 뒤에 몰리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가일즈가 물었다.
"그 떡갈나무로 된 아름다운 가구가 마음에 든다고 하던가?"
"렌씨는 네 기둥이 세워진 큰 침대를 무척 원했대요. 그래서 동쪽 방 대신
장미방에 묵도록 했어요."
가일즈가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더니,
".....버릇없는 젊은 녀석 같으니라고."하고 말을 끝냈다.
"여보―" 몰리는 약간 냉정한 태도로 가일즈에게 말했다.
"우린 지금 즐거운 파티를 열고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게 아니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사업이에요. 당신이 크리스토퍼 렌을 좋아하건 안 하건―"
"난 그녀석을 좋아하지 않아." 가일즈가 몰리의 가로채며 말했다.
".....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에겐 그가 1주일에 7기니를 지불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지불하기만 한다면 괜찮겠지."
"지불하겠다고 했어요. 그가 편지에 그렇게 썼으니까."
"당신이 그 사람의 짐가방을 장미방으로 옮겼나?"
"아뇨. 그가 직접 옮겼어요."
"꽤나 친철하군. 당신이 그 가방을 옮겼더라도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가방 속엔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들어 있는 게 분명해. 가방이 어찌나 가벼운지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어."
"쉬―잇. 그가 와요." 몰리가 주의를 하라는 듯 말했다.
몰리는 널따란 의자와, 통나무를 지피는 벽난로로 장식된 훌륭한 서제로
크리스토퍼를 안내했다. 그리고 30분 뒤에 저녁식사가 준비된다는 것과, 다른
손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는 자기도
주방에 가서 저녁식사 준비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내가 오믈렛을 만들어 들릴 수도 있어요."
렌 씨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결국 그는 주방에서 몰리를 도와 식사 준비를 했고, 나중엔 설겆이하는 일까지
거들었다. 몰리는 하숙집을 시작한 첫날치고는 어쩐지 평범한 시작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가일즈도 뭔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날 밤 몰리는,
'하지만괜찮아지겠지. 내일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면 오늘과는 다른 분위기가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잿빛 하늘에서 계속 눈이 내리는 가운데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가일즈는
근심스러운 얼굴이었고, 몰리도 마음이 무거웠다. 날씨 때문에 모든 일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자동차 바퀴에 쇠사슬을 감은 택시를 타고 보일 부인이 도착했다.
운전사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사람도 차도 다니기 어렵다는 우울한 말을 전하며,
"저녁 무렵이면 눈이 많이 쌓일 겁니다." 하고 예측했다.
보일 부인이 도착했어도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는 밝아지지 않았다. 보일 부인은
몸집이 크고, 울리는 목소리에 거만한 태도를 지닌 까다로운 여자였다. 원래부터
타고난 공격적인 성격은 오랫동안 군대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인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하숙집인 줄 알았더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이곳이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시설로 운영되고 있는 하숙집이라고 생각했지 뭡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에 머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일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나도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시다면 전화로 택시를 부르시죠. 아직은 길이 막히지 않았으니까요. 뭔가 잘못
생각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는 게 나을 겁니다."
가일즈는 다시 덧붙여 말했다.
"우리집에 오시겠다는 손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나가셔도 우리는
쉽게 다른 손님을 모실 수 있읍니다. 또, 앞으로는 하숙비도 올려 받을
예정입니다."
보일 부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가일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하숙집이 어떤 곳인지 지내 보지도 않고 떠날 생각은 없어요. 데이비스 부인,
큰 목욕 수건을 빌려 줄 수 있겠죠? 나는 손수건만한 타월로 몸을 닦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거든요."
보일 부인이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가일즈는 몰리에게 싱긋
웃었다.
"여보, 당신 정말 잘했어요. 참 용감하게 해냈어요." 몰리가 말했다.
"저런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꼼짝 못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여보, 저 여자가 크리스토퍼 렌과 잘 지낼지 모르겠어요."
"잘 지내지 못할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보일 부인이 몰리에게 말했다.
"크리스토퍼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젊은이더군요."하고 말하는 보일 부인의
목소리에는분명히 렌 씨를 싫어하는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빵가게 배달원이 북극 탐험 대원 같은 차림으로 빵을 가지고 왔다. 그는 이틀에
한번씩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씨 때문에 다음번에는 못 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길이 전부 막혔어요." 그가 말했다. "식량은 충분히 준비해 두셨겠죠?"
"예, 통조림 식량을 많이 저장해 두었어요." 몰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밀가루를 조금 더 준비해 두는 게 좋을것 같아요."
몰리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소다 빵을 생각하며, 만일 식량이 부족한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소다빵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
빵 배달원은 신문도 가지도 왔다. 몰리는 홀의 테이블에 신문을 펼쳐 놓고 기사를
훑어보았다. 외교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었고, 날씨와 라이언 부인 살해사건에 관한
기사가 신문의 제 1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몰리가 신문에 실린 살해된 여자의 흐릿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크리스토퍼
렌이 몰리의 어깨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더러운 살인사건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 지저분한 곳에 사는 행실이 나쁜
여자를 죽였으니 말입니다. 별다른 사연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고 그런 여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 뿐이예요."
보일 부인도 경멸하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렌 씨는 보일 부인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그러니까 부인은 그 살인사건이 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시는군요?"하고
말했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렌 씨."
"그렇지만 그 여자는 목이 졸려 죽었다지 않습니까?"
렌 씨는 하얗고 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사람의 목을 조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군요."
"아니, 렌 씨!"
크리스토퍼는 보일 부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일 부인? 목이 졸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만해요, 렌 씨!"
보일부인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몰리는 급히 소리내어 신문을 읽었다.
" '경찰이 찾고 있는 남자는 검은 외투에 밝은 색 홈버그 모자(챙이 좁고 가운데가
들어간 중절모자의 일종)를 썼으며, 중간 정도의 키에 모직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
그런 남자라면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죠."
크리스토퍼 렌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몰리가 말했다. "흔히 볼 수 있죠."
< 다음편의 계속 >
쥐덫(2)
한편, 런던 경시청의 파민터 경감은 자기 사무실에서 부장형사인 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두 노동자를 지금 만나 봐야겠네."
"예, 알겠읍니다. 경감님."
"어떤 사람들인가?"
"괜찮은 부류의 노동자들입니다. 반응이 다소 느리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좋아." 파민터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은 두
남자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파민터 경감은 재빨리
그들을 훑어보았다. 파민터 경감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데에는 숙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두 분이 라이언 부인 살해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앉으시죠. 담배를
피우시겠읍니까?"
파민터 경감은 그들이 담배를 받아서 불을 붙이는 동안 기다렸다.
"바깥 날씨가 무척 춥죠?"
"예, 그렇습니다, 경감님."
"자,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시죠."
두 남자는 말을 시작하기가 어려운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머뭇거렸다.
"자네가 말씀드리게, 조."
두 사람 중에서 덩치가 큰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조라는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일은 이렇게 된 겁니다. 그 때 우린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마침 성냥이
없었읍니다."
"그곳이 어디였읍니까?"
"자먼가였읍니다. 그 곳 보도에서 가스관 공사를 하고 있었지요."
파민터 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조금 뒤에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먼가라면 살인사건이 일어난 컬버가와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계속하시죠. 성냥이 없었다고요?" 파민터 경감은 그들을 격려했다.
"예, 제가 가진 성냥은 다 써버렸고, 이 친구 빌이 가진 라이터는 고장이 나서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냥 좀 빌려 주시겠읍니까?' 하고
물었죠. 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점은 없었어요.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요. 그 사람이 마침 우리 곁을 지나 가고 있었기에 -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 제가 우연히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파민터 경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성냥을 빌려 주더군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 그 때
빌이,'지독하게 춥군요.'하고 말하니까 그 남자가 쉰 목소리로, '예,그렇군요.'하고
대답했읍니다. 저는 그 남자가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변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 남자는 외투와 목도리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읍니다. 제가,'고맙습니다.'하면서
그에게 성냥을 돌려주었더니 그는 다시 재빨리 걸어가더군요.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그가 뭔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간 다음이었어요. 그가 떨어뜨린 것은 작은 수첩이었는데,
아마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낼 때 딸려 나온 것 같았어요. 저는, '이봐요, 뭘
떨어뜨렸어요!'하고 그를 소리쳐 불렀죠. 그렇지만 그 남자는 제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가 버리더군요. 그렇지,
빌?"
"맞아." 빌이라는 옆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마침 허둥지둥 도망치는 토끼 같았지!"
"그는 해로가 쪽으로 돌아갔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그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어요. 그가 길모퉁이를 들어갔기 때문에 쫓아갈 수도 없었죠. 그리고, 그
남자가 떨어뜨린 것은 지갑이나 뭐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작은 수첩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별로 중요한 것두 아닌 것 같았어요. 저는 빌에게 이렇게
말했죠. '웃기는 사람이군. 모자를 눈 위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외투 단추는 목까지
잠갔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악한 같은 모습이군.'안그런가, 빌?"
"그렇지. 자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 때 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렇게만 말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지. 그 남자가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읍니다. 그 땐 날씨가 지독하게도 추웠으니까요."
"굉장히 추웠지." 빌이 또 맞장구를 쳤다.
"저는 빌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죠. '이 수첩을 살펴보세.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니까.'하고 제가 말했죠. 컬버가 74번지와 무슨 하숙집 주소였읍니다."
"고급 하숙집 주소였어." 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는 이제 어색함이 사라진 듯이 몸짓까지 섞어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 '컬버가 74번지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군. 저 모퉁이만 돌면 되니까 일을 끝내고
그곳으로 가보세.' 하고 제가 빌에게 말했죠. 그리고 수첩에 적힌 주소 위에 뭔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띄기에, '이건 뭐지?' 하니까, 이 친구가 수첩을 받아들고
그걸 소리내어 읽었어요. '세 마리의 눈먼 쥐 - 이건 분명 누군가를 놀리는
밀이야.'하고 빌이 말하느 순간 - 예,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어떤 여자가
'살인이야!'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왔어요!"
조는 마지막 말을 좀더 의미 있게 끝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 '이봐, 자네가 얼른 가보게.' 하고 제가 빌에게 말했죠. 그리고 잠시 뒤에 빌이
돌아와서, 어떤 여자가 목에 칼에 찔렸거나 아니면 목이 졸려 죽어서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고, 경찰도 도착했다는 것과, 아까 그 소리는 그 집 여주인이 경찰을
부르려고 소리를 친 거라고 하더군요. '어디야?' 내가 물었더니 빌이,'칼버가야.'
하고 대답했죠. '몇 번지인데?' 하고 다시 물으니까 빌은 자세 살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읍니다."
빌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헛기침을 하며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댜.
조가 이야기는 계속했다.
"그래서 제가, '어디 우리 둘이 가서 자세히 알아보세.'하고 말하며 그곳으로
가보았죠. 살인사건이 일어난 집이 74번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린 이런 말을
주고받았읍니다. 빌은, '그 사건과 수첩에 적힌 주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몰라.'하고 말했고, 저는 어쩌면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읍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경찰이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그 집에서
나온 남자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그 사건을
담당하고 계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한겁니다. 우리가 말씀드린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잘 와주셨읍니다." 파민터 경감이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수첩은 가지고 오셨읍니까? 아, 고맙습니다."
그 다음에 파민터 경감은 좀 더 적극적이고 직업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로부터
정확한 장소와 날짜, 시간는 알아 낼 수 있었지만, 범인으로 생각되는 그남자의
정확한 인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인 하숙집 여주인이 말한 범인의
인상 - 눈 위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외투 단추를 전부 채우고, 얼굴 아랫 부분을
목도리로 감쌌으며, 쉰 듯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 라는
것이 전부였다.
두 남자가 나가자 파민터 경감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책상 위에 펼쳐진 작은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 수첩은 감식반으로 보내져서 지문을 채취하고 철저히
조사하면, 혹시 어떤 단서라도 찾아낼 수 있으리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경감의
주위를 끄는 것은 수첩에 적힌 두 군데 주소와 위쪽에 쓰여진 작은 글씨였다.
그 때 케인 부장형사가 들어왔다.
"케인,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게."
케인은 경감 뒤에 서서 수첩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놀랍군요!"
"그렇지." 파민터 경감은 서랍을 열고 공책에서 찢은 반쪽짜리 종이를 꺼내어, 책상
위에 놓인 수첩 옆에 올려 놓았다. 그 종이는 살해된 여인의 옷에 핀으로
조심스럽게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 종이에는 '이것이 첫번째'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 아래에는 어린애가 그런 것 같은 세 마리의 쥐그림과 한 소절의 악보가
그려져 있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그들이 달려가는 것을 보세요 ─"
"맞아, 그거야. 그게 바로 주제 음악이야."
"미친 짓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경감님?"
"그렇네." 파민터 경감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죽은 여자의 신원은 확인되었나?"
"예, 여기 감식반에서 보내온 보고서가 있읍니다. 살해된 라이언 부인의 본명은
모린 그레그였읍니다. 두 달 전에 형기를 마치고 홀로웨이 형무소에서
나왔읍니다."
파민터 경감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모린 라이언이란 이름으로 칼버가 74번지에 하숙을 정했네. 이따금 술을
마셨고, 한두 번 남자를 데리고 하숙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무엇인가에 겁을 먹거나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
그녀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도 전혀 없어. 그녀를 찾아 왔던 그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고 그녀의 방을 물은 다음, 여주인이 3층이라고 대답하자
계단을 올라갔다는군. 하숙집 여주인은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네.
단지 중간 정도의 키에, 목소리로 보아서 심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고만 했지.
여주인은 다시 아래층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그 뒤에는 수상한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네. 그 남자가 집을 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다네. 그리고 여주인은
10여분 뒤에 차를 타 가지고 라이언의 방에 올라갔는데, 그 때 그 여자가 목이
졸린 채로 살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일세. 이 사건은 흔한 살인사건이 아니야.
케인.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이란 말일세."
파민터 경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우리 나라에 '몽스웰'이란 이름의 여관이 몇 군데나 있는지 알고 있나?"
"아마 한 군데뿐일 겁니다. 경감님."
"그렇다면 천만다행이군. 우린 운이 좋은 걸세. 자세히 조사해 보게. 시간이 없네."
케인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칼버가 74번지'와 '몽스웰 여관'이란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경감님 생각은─"
"그렇다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파민터 경감이 재빨리 말했다.
"가능한 일입니다. 몽스웰 여관이라── 그게 어디였더라? 이 이름은 제가 어디선가
최근에 본 적이 있읍니다. 경감님."
"어디서 보았나?"
"글쎄요. 기억이 날 듯 말듯 합니다만. 아! 신문에서 봤읍니다. '타임즈'지의 뒷면,
그러니까 호텔과 하숙집을소개하는 광고란이었읍니다. 며칠 전 신문이었는데,
저는 그 신문에 실린 낱말 퀴즈를 풀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말하며 케인 형사는 얼른 사무실을 나갔다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여기 있읍니다. 이걸 보십시오. 경감님."
파민터 경감은 케인 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 '버크셔 군(런던의 서쪽의 군) 하펠든 시이 몽스웰 여관.'"
경감이 전화를 끌어당겼다.
"버크셔 군 경찰을 불러 주게."
< 다음편에 계속 >
쥐덫(3)
메트카프 소령이 도착하자, 몽스웰 여과은 바야흐로 여관다운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보일 부인처럼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고, 크리스토퍼
렌처럼 엉뚱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군복무를 인도에서 한 퇴역장교였는데,
군인다운 깔끔함과 엄격함이 엿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내게 될 방과 가구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메트카프 소령과
보일 부인은 직접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메트카프 소령은 푸타라는
곳에서 '요크셔 은행 지점'에 근무한 보일 부인의 사촌 형제들을 알고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들고 온 돼지가죽으로 만든 두 개의 가방은 가일즈의 의심을 풀어
주기에 족할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몰리와 가일즈는 자기들이 맞이한 하숙인들에 관해 알아 볼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하는 일 등을
해내기에 바빴다. 메트카프 소령은 커피 맛이 좋다는 찬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가일즈와 몰리는 잠자리에 들 때에 무척 피곤했지만 아주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새벽 2시경에 느닷없이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이런, 젠장." 가일즈가 잠이 깨어 투덜거렸다.
"현관문에서 들리는군, 도대체 이런 시각에 누가─"
"얼른 일어나서 가보세요." 몰리가 재촉했다.
가일즈는 몰리에게 귀찮다는 눈짓을 하며 가운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몰리에게 들려 왔다.
그녀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 위에서 홀을 살짝 내려다 보았다.
아래층 홀에서는 가일즈가 턱수염을 기른 어떤 낯선 남자의 외투 벗는 것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낯선 남자는 말투로 보아 외국 사람인 것 같았다.
"손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발도─"라고 말하며 그는 발을 굴렀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가일즈가 서재 문을 열며 말했다.
"이 안은 따뜻합니다. 제가 침대에 잠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이곳에서 기다리시죠."
"아!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낯선 남자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몰리는 호기심이 생겨 난간의 작은 기둥 사이로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턱수염을
기르고 메피스토펠레스(독일 작가 괴테의 작품「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처럼
음흉한 눈썹의 늙은 남자였다. 관자놀이께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젊은 사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갔다.
가일즈는 서재 문을 닫고 급히 위층으로 올라왔다.
몰리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누구예요?"
가일즈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집에 온 또 한 사람의 손님이야. 저 사람이 자동차가 눈더미에 미끄러져서
뒤집히고 말았다는군. 그래서, 뒤집힌 차에서 빠져 나와 눈속을 헤메다가 겨우
우리집까지 왔다지 뭐야. 밖에는 아직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어. 그는 길을 따라
걷다가 우리 집 간판을 발견한 거야.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다고
말하더군."
"그사람─ 괜찮을까요?"
"여보,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돌아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남자는 외국인인것 같던데요?"
"맞아. 이름이 파라비치니라고 했어. 그 사람의 지갑을 봤는데 - 아마 내가
의심할까 봐 일부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 - 돈이 가득 들어 있었어. 그 사람에게
어느 방을 줄까?"
"녹색 방을 주세요.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불만 가져다 주면 될
거예요.
"그 사람에게 잠옷을 빌려 주어야겠더군. 짐은 전부 차안에 두고 왔다니까.
자동차 문을 통해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지 뭐야."
몰리는 이불과 베개의 타월을 꺼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잠자리를 준비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어." 가일즈가 말했다. "눈이 많이 쌓여서
바깥 세상과 완전히 두절될 것 같아, 몰리.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겠지?"
"글쎄요." 몰리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보, 내가 소다빵을 만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당신은 뭐든지 만들 수 있어."
가일즈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난 아직 빵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걸요. 그렇더라도 빵 만드는
일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갓 구운 것이건 오래 되어
딱딱한 것이건 빵가게에서 배달해 주었는데, 눈 때문에 길이 막히면 빵
배달원이 못 올 거예요."
"정육점에서도 못 오고, 우편 배달부나 신문 배달부들도 오지 못하겠지.
그리고 아마 전화선도 끊어지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라디오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겠군요."
"어쨌든 전기는 자가 발전을 할 수 있으니까."
"당신, 내일 아침에 엔진을 다시 한 번 가동시켜야겠어요. 중앙난방에도 계속 불을
지피도록 하세요."
"그런데, 다음번 코크스가 배달되지 못할 것 같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머 큰일이네요. 우린 이제 어려운 때를 만난 것 같아요. 당신은 빨리 가서 파라
뭔가 하는 손님을 데려오세요. 난 침대로 돌아가겠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가일즈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모든 출입무고 창문은
1.5m 나 쌓인 눈으로 가려졌는데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고, 고요한 적막감은 어떤 위기를 몰고올 것만 같았다.
보일 부인은 식탁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그녀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옆에 있는 메트카프 소령의 식탁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렌씨의 식탁에는 아직도 아침식사가 놓여져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인 것 같았고, 렌 씨는 늦잠꾸러기가 분명했다.
보일부인은 아침 식사 시간을 9시로 정해 놓고 있었다. 보일 부인은 훌륭하게
요리된 오믈렛을 먹고 나서, 하얗고 튼튼한 치아로 토스트를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뭔가 불만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몽스웰 여관은 그녀가
생각한 곳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이곳에서 나이든 노처녀들과 브리지 게임을
즐기며, 자신의 시회적 경험과 훌륭한 친척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전쟁시에
자기가 얼마나 중대한 비밀업무를 수행했던가를 슬쩍 귀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전쟁이 끝나자, 보일 부인은 무인도에 버림 받은 사람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능률과 조직에 관해 열변을 토하며 바쁘게 지내왔었다.
그녀의 불 같은 열성과 박력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유능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가질 수 가 없었다. 전쟁때의 활동은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일들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못 살게 굴며 으스대고, 때로는
웃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맡은 일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녀의 여자 부하들은 그녀에게 쩔쩔매면서, 그녀가 약간만 얼굴을
찡그려도 겁을 먹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토록 의욕적이고 활기찬 생활이 끝난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생활로 돌아왔지만 전쟁 전의 생활과 같을 수는
없었다. 군대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징발 되었던 그녀의 집은 많은 수리와 단장을
해야만 했고, 집안 일을 해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찾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적당히 지낼 곳을 마련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잠시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호텔이나 하숙집이 좋을 것 같았기에 이곳 몽스웰 여관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일 부인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거짓말을 하다니.'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내게 하숙집을 새로 시작한다는 말을
미리 하지도 않고.'
그녀는 접시를 되도록 멀리 밀어 놓았다. 아침식사는 훌륭한 것이었고, 커피와
집에서 만든 잼도 맛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평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도 아주 편안했다. 자수로 장식된 이불과 폭신한 베개도 마음에 들었다.
보일 부인은 마음이 편안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흠잡는 것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일 부인은 당당한 태도로 일어나서 식당 문을 나설 때
문간에서 바로 그 이상한 붉은 머리의 젊은이를 만났다. 이날 아침 그는 진한 녹색
줄무늬이 모직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못하군.' 보일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우수꽝스러운차림새야.' 보일 부인은 그가 불안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뭔가 비웃는 듯한 그
눈초리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야. 틀림없어.' 보일 부인은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렌 씨가 허리를 잔뜩 굽히며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하자, 보일 부인은
거만하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넓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거실에는 안락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특히 장미꽃 무늬로 장신된 큰 의자가
보일 부인의 눈에 띄였다. 그녀는 그 의자를 자기 자리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앉지 못하도록 뜨개질감을 그 위자 위에 내려
놓고 난방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예상했던대로 난방기는 미지근하기만
했다. 이제야 불평거리를 찾았냈다는 듯 보일 부인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제 난방기를 구실로 뭔가 할 말이 생긴 것이다. 보일 부인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독한 날씨였다. 그녀는 이 하숙집에 손님들이 더 많이 와서 즐길 만한 곳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집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러져 내리며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보일 부인은
갑자기 펄쩍 뛰며, "싫어!"하고 소리쳤다.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어."
그 때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낄낄거리며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보일 부인은 고개를 홱 돌렸다. 렌 씨가 문간에 서서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시겠죠." 그가 말했다.
"나도 부인이 이곳에 오래 머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메트카프 소령은 가일즈를 도와 뒷문 앞에 쌓인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가 눈치우는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었으므로 가일즈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운동이 된다오."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운동을 매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메트카프 소령은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가일즈는 그것이 오히려
걱정거리였다. 왜냐하면, 아침식사를 7시 반에 준비해 달라고 말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일즈의 마음을 알아채기라고 한 듯 소령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이 내 아침식사를 일찍 준비해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읍니다. 갓 낳은 달걀도
함께 말입니다."
가일즈는 하숙집을 시작한 이후로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야 했다. 몰리와 함께 달걀을 삶고 차를 끓이고 거실을 정돈했다.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가일즈는 자신이 만일 손님이였다면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 없이 마음껏 늑장을 부리며 잠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손님인 메트카프 소령은 저렇듯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까지 끝내고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할 일거리를 찾아 집 안팎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잘 됐지.' 가일즈가 속으로 생각했다.
'치울 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일즈는 곁눈질로 소령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 같지 않아. 중년은 넘은
듯한데, 눈초리에는 어딘가 날카로운 면이 엿보이는군. 만만한 사람은 아니야.
어떤일이라도 허술하게 처리할 것 같지도 않군. 그런데 저 사람은 왜 하필 이
몽스웰 여관으로 왔을까? 아마 군대에서 제대를 한 다음 적당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파라비치니 씨는 뒤늦게 자기 방에서 내려왔다. 그는 간소한 유럽식 아침식사로
커피와 토스트 한 조각을 먹었다. 몰리가 그에게 아침식사를 가져갔을 때, 그는
발꿈치를들고 야단스럽게 과장된 태도로 인사를 하며,
"매력적인 부인이시군요. 이집의 안 주인이시죠?" 라고 말는 바람에 약간
당황했었다.
몰리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찬사의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도대체─" 몰리는 접시를 개수대에 마구 쌓아놓으며 말했다. "왜 손님들은 같은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지 못할까? 정말 힘들어 죽겠어."
그녀는 접시를 닦아서 천장에 넣고 침대를 정리하기 위해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아침에는 가일즈가 그녀를 도와 줄 수 없었다. 가일즈는 보일러실과 닭장에
이르는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몰리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각 방의 침대를 정리했다.
그녀가 목욕탕을 청소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일에 방해가 되자 처음에는 신경질이 났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전화가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며 좋아졌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재로 뛰어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밝고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몽스웰 여관입니까?"
"예, 몽스웰 여관입니다."
"주인이신 데이비스 씨를 부탁합니다."
"죄송하지만, 그이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 몰리가 말했다. "저는 이집
안주인인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버크셔 군 경찰의 호그벤 총경입니다."
몰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그─그러세요?"
"데이비스 부인, 급한 일이 생겼읍니다. 전화로는 길게 말씀드릴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부장형사인 토로터를 그곳 몽스웰 여관으로 파견했읍니다. 얼마 뒤에
도착할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지 못하실 거예요. 우린 눈에 파묻혀 있거든요. 완전히 파묻혀
있어요.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는 상태예요.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몰리의 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트로터 형사는 꼭 도착할 겁니다. 문제 없어요. 그리고, 데이비스 부인, 남편께
트로터 형사의 지시를 잘 듣고, 그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라고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아셨죠? 이상입니다."
"그런데 호그벤 총경님, 무슨 일이─"
찰칵 하며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그벤 총경은 할 말만 간단히 하고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몰리는 전화기를 한두 번 두드려 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때 서재 문이 열렸다. 몰리는 얼른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가일즈의 머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얼굴에는 석탄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불을 지피고 왔는지 더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난 석탄통을 가득 채워 놓고 장작을 날라다 놓았어. 이제부터 닭장을
청소하고 보일러실을 살펴봐야겠어. 아니, 당신 괜찮아? 무슨 일이 생겼어?
당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
"여보, 경찰에서 전화가 왔어요."
"경찰?" 가일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경찰에서 형사인지 부장인지를 우리 집으로 파견했대요."
"왜? 무슨 일로? 우리가 뭘 잘못했지?"
"모르겠어요. 아일랜드에서 사온 그 버터 2파운드 때문이 아닐까요?"
가일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라디오 수신 허가증을 받았던가?"
"예, 그건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비드록 부인이 낡은 트위드 코트를 구할 수
있는 자기의 구매표를 내게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건 아닐까요? 설마 그런게
다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코트가 한벌도 없는 사람이 옷 구매표를
가진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여보, 그 밖에 우리가 뭐라도 잘못한 일이 있었나요?"
"며칠 전에 자동차 접촉 사고가 생길 뻔했어. 하지만 그건 저쪽 차의 운전사가
잘못했기 때문이었어. 분명해."
"그래도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확실해요."
몰리는 울상이 되어 흐느끼듯 말했다.
"문제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다 위법이라는 거야."
가일즈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거야. 내 생각에는 이 하숙집을
경영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런 일에는 우리가 들어 본 적도 없고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들이 가로 막혀 있는 법이야."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술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우린 아직 손님에게 술을 팔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도대체 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숙집을
경영하지 못하고 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글쎄 말이야. 당신 말이 옳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법으로 급지된 일이 하도
많아서."
"여보, 하숙집을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몰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린 눈에 갇혀 있게 될 거예요. 그러면 손님들은 불평을
늘어놓을 테고, 저장해 둔 식량은 전부 바닥이 날 것이고....."
"여보, 힘을 내요.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좋아질 거야."
가일즈는 몰리의 이마에 건성으로 키스를 하고 나서 약간 심각하게 말했다.
"여보, 생각해 보니까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경찰이 이런 날씨를 무릅쓰고
우리 집에 형사를 보냈다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분명해."
가일즈는 창문 밖에 쌓인 눈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틀림없이 위급한 일이 생긴 거야....."
몰리와 가일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을 때, 서재 문이 열리며 보일
부인이 들어왔다.
"아, 여기 있었군요. 데이비드 씨. 거실이 지금 얼마나 추운지 알고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보일 부인. 코크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ㅡ"
보일 부인은 가일즈의 말을 냉정하게 가로채며 따지듯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7기니를 지불하고 있어요 - 7기니를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얼어
죽을 정도로 춥게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가일즈는 얼굴이 싱기되어 짧게 대꾸했다.
"제가 가서 연료를 더 넣겠읍니다."
가일즈가 방을 나가자, 보일 부인은 몰리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여기 손님 중에 정말 이상한 젊은이가 한 사람
있더군요. 그 사람이 태도와 그 넥타이하며, 머리는 빗질조차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 분은 아주 똑똑한 젊은 건축가예요." 몰리가 말했다.
"뭐라고요?"
"크리스토퍼 렌 씨는 건축가란 말입니다. 그리고ㅡ"
"아니, 이봐요, 젊은 부인." 보일 부인이 달려들듯이 말했다. "내가 그 유명한
크리스토러 렌 경을 모르는 줄 알아요? 물론 그 분은 건축가였죠. 세인트 성당을
세운 분이죠. 당신 같은 젊은 사람들은 이 나라에 교육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교육도 받지 못한 줄 알고 있더군요."
"저는 그 젊은 렌 씨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젊은이의 이름도 크리스토퍼
렌이에요. 그 사람의 부모님은 그가 건축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어 주셨다는군요. 그래서 그 젊은이는 이제 머지않아 유능한 건축가가 될
거라고 했어요."
"흥!" 보일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을 거예요. 그에 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있죠?"
"부인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 만큼은 알고 있어요. 말하자면, 부인과 그 젊은이가
우리집에 머물면서 일주일에 7기니씩 하숙비를 지불한다는 사실이죠. 제가 그 이상
뭔가를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 사실밖에
없어요. 손님이 제 마음에 들거나ㅡ"
몰리는 보일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건 아무 상관 없어요."하고 말을 마쳤다.
보일 부인은 몰리의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신처럼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기보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든 사람의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 수상한 외국인은 또 누구죠?
도대체 언제 이 집에 도착했죠?"
"어젯밤 늦게 왔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런 시간에 사람ㅇ르 집안에 들어오게 하다니."
"진실해 보이는 외국인 여행자를 쫓아낸다면, 그건 법에 어긋나는 일일 거예요."
몰리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아마 그걸 모르셨나 보군요. 그건 아셔아죠."
"그 파라비치닌가 뭔가 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ㅡ"
"그걸 아셔야죠. 아셔야 하고말고요. 부인께선 지금 악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
같군요. 그리고...."
보일 부인은 정말 악마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깜작 놀라며 펄쩍 뛰었다.
서재에는 파라비치니 씨가 보일 부인과 몰리가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살며시
들어와서 두 손을 비비며 늙은 악마같이 웃고 서 있었다.
"깜짝 놀랐쟎아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아니, 소리도 없이 들어 왔군요."
"발꿈치를 들고 들어왔으니까요, 부인." 파라비치니 씨가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걸어다니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한답니다. 살금살금 걸어다니면
아주 재미있읍니다. 이따금 듣지 않아야 될 말도 듣는 적이 있지만, 그것 또한
재미있죠. 그리고 나는 한번 들은 말은 절대로 잊지 않는답니다."
보일 부인은 겸연쩍은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아, 난 뜨개질감을 가지러 가야겠군요ㅡ 거실에 두고 왔거든요."
보일 부인은 황급히 방을 나갔다. 몰리는 당황한 채 파라비치니 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매력적인 안주인께서 기분이 안 좋은신 것 같군요." 하고 말하며 그는
몰리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몰리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몰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이 사람에게 좋게 대해야 할지 불쾌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하고 생각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늙은 사티로스(사람의 몸뚱이에 염소의 귀.뿔.다리.꼬리를 가진
괴물로,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함)처럼 몰리를 곁눈질해 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모리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전부 눈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눈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쉬워지기도 했읍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러시겠죠." 파라비치니 씨가 심각하게 말했다. "부인은 아직 모르는게 많을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부인은 하숙집 경영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자 몰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여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에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어쨌든─" 몰리는 딱딱한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리며, "제 요리 솜씨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부인의 요리 솜씨는 아주 훌륭합니다."
몰리는, '정말 불쾌한 외국인이군.'하고 생각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의 생각을 눈치챈 듯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심각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두 마디 조언을 해도 괜찮겠읍니까, 데이비스 부인? 부인과 부인의 남편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집에 온 손님들에
관해서 잘 알아보셨읍니까?"
"그러게 해야 되나요?" 몰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숙집이란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부인은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약간은 알아두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에게 몸을 굽히며 위협을 하듯이 몰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를 예로 들어 보죠. 나는 한밤중에 이 집에 왔어요. 내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뒤집혔다고 말한 것밖에 부인이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고 계신 겁니다. 아마도 부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죠."
"보일 부인은─" 하고 뭔가 말하려다가 몰리는 보일 부인이 뜨개질감을 손에 들고
다시 서재로 들어오자 말을 멈추었다.
"거실은 너무 춥군요. 여기 앉아 있어야겠어요." 보일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벽난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라비치니 씨는 발끝으로 한 바퀴 뱅글 돌고 나서 보일 부인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제가 부인을위해 불꽃을 돋우어 드리겠읍니다."
어제밤에 몰리는 파라비치니 씨가 젊은 사람처럼 활기차게 걷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그는 불빛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무릎을 굽히고 벽난로의 불꽃을 돋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하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파라비치니 씨는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늙은 남자는 젊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구나.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어. 지금 저 얼굴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니까 말이야. 젊은이 같은
걸음걸이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아마 사람들을 속이려고 꽤나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겠지.' 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때 메트카프 소령이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몰리의 생각은 다시 불쾌한 현실로
돌아왔다.
"데이비스 부인, 아무래도 화장실의 수도관이─저─" 하고 큰소리로 말하던 소령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래층 화장실의 수도관이 언 것 같습니다."
"어머, 큰일났네!" 몰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오늘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는 경찰이더니 이번에는 수도관이라니."
몰리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파라비치니 씨는 '쨍그랑'소리를 내며 부지깽이를 떨어
뜨렸고, 보일 부인은 뜨개질하던 손을 갑자기 멈추었다.
몰리는 메트카프 소령도 몸이 굳어지며 얼굴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소령의 표정은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나무로
깎은 목각 인형처럼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
˙˙˙˙˙ ˙˙˙˙
"경찰이라고 했읍니까? " 메트카프 소령이 스타카토처럼 한 마디씩 짧게 끊어
말했다.
몰리는 소령의 굳어진 태도 뒤에는 어떤 격한 감저이 불타 오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흥분된 감정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뭔가 숨기고 있어. 위험한 사람이 틀림없어.' 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메트카프 소령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경찰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몰리가 말했다.
"우리 하숙집에 형사를 파견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날씨에는 형사가 이곳에
오기가 어려울 거예요."
몰리는 창 밖을 쳐다보며 희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왜 형사를 보냈다고 하던가요?" 메트카프 소령은 모리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물었다. 몰리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가일즈가 들어왔다.
"이 형편없는 코크스는 반 이상이 돌멩이야." 가일즈는 화가 난 듯 말하다가,
"무슨일이 있었읍니까?"라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가일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온다고 하던데, 무슨 일입니까?"
"아,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일즈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런 날씨에는 아무도 못 올 겁니다. 눈이 1.5m 나 쌓여서 길이 전부 막혔거든요.
아무도 오지 못할 겁니다."
< 다음편에 계속>
쥐덫(4)
바로 그 순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세 번 들려 왔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잠시 동안은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 소리는 마치 유령의 경고처럼 크고 기분 나쁘게 들려 왔다.
갑자기 몰리가 비명을 지르며 프랑스식으로 된, 바닥까지 내려온 창문을 가리켰다.
그곳에 어떤 남자가 창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 그는 아무도 오지 못할 것 같은
이곳까지 스키를 타고 온 것이다. 가일즈는 소리를 지르며 방을 가로질러 가서,
손잡이를 더듬어 창문을 밀어 젖혔다.
"고맙습니다." 스키를 타고 온 남자가 말했다. 그는 흔히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도
활기찬 목소리에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의 사나이였다.
"나는 부장형사인 트로터입니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보일 부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르 가만히 쳐다보더니,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부장형사라니 좀 이상하군요?" 라고 믿을 수 없다는 말했다.
정말 무척 젊어 보이는 그 남자는 모욕을 느낀 듯, "나는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젊지는 않습니다, 부인." 하고 약간 화가 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가일즈에게 말을 했다.
"당신이 데이비스 씨죠? 이 이 스키를 어디엔가 넣어두어야겠는데, 좀 도와
주시겠읍니까?"
"예, 그러죠. 절 따라오시죠."
그 남자가 홀 안쪽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보일 부인이 언짢다는 투로
말했다.
"경찰관들이 스키를 타고 돌아다니며 겨울 스포츠나 즐기게 하려고 우리가
세금을 내고 있군요."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에게 다가와서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고 재빠르게 말했다.
"왜 경찰을 불렀읍니까, 부인?"
몰리는 원망이 담긴 것 같은 파라비치니 씨의 눈초리를 보자,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파라비치니 씨의 새로운 일면이었다.
몰리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느 그의 눈초리에서 잠시 두려움을 느꼈다.
"제가 부른 것이 아니에요. 전 경찰을 부르지 않았어요."
몰리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 때 크리스토퍼 렌이 흥분한 모습으로 들어오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홀에 있는 그 남자는 누굽니까? 어디서 왔죠?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기운이 넘쳐 보이던데요."
보일 부인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안 믿을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경찰이에요. 스키를 타고 온 형사라는 군요!"
이렇게 말하는 보일 부인의 태도에는 마침내 하층계급 사람들의 잘난 체하는 면모가
드러났다.
메트카프 소령이 몰리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이비스 부인, 미안하지만 전화를
써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소령님"
메트카프 소령이 전화기 곁으로 다가설 때, 크리스토퍼 렌이 째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지 잘생겼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난 항상 경찰관들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메트카프 소령은 조바심을 내며 전화기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몰리를 바라보며, "데이비스 부인, 전화가 통하지 않는군요. 완전히
먹통이에요." 라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도 통화가 되었었는데요. 왜―"
몰리의 말을 가로채며 크리스토퍼 렌이 큰소리로 웃었다. 쉿소리를 내며 거의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웃음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제 우린 바깥 세상하고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군요. 완전히
단절되었어요. 우습지 않습니까?"
"웃을 일이 아닙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굳어진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맞아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크리스토퍼 렌은 그래도계속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나만 알고 있는 농담 입니다."
라고 말하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쉿, 형사가 들어오는군요."
가일즈가 트로터 부장형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트로터 형사는 스키를 벗고
눈을 털어낸 모습으로 큰 노트와 연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냉정하고
침착한 재판관 같았다.
"여보―" 가일즈가 말했다. "트로터 형사님이 우리게 할 말이 있다고 하시는군."
몰리는 그들을 따라 방을 나갔다.
"독서실로 가시죠." 가일즈가 트로터 형사에게 말했다. 그들 세 사람은 홀 뒤쪽에
있는 바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작기는 했지만, 독서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품위 있게 꾸며진 방이었다. 트로터 형사는 방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몰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잘못이냐구요?" 라고 말하며 트로터 형사는 물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아닙니다, 부인. 오해를 하셨다면 내가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데이비스 부인, 그런 문제와는 전혀 다른 일 때문에 온 겁니다. 경찰의 보호나
필요한 문제가 생겼읍니다. 내 말이 이해하시겠읍니까?"
몰리와 가일즈는 트로터 형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트로터 형사가 유창하게 말을 계속했다.
"이 문제는 라이언 부인, 즉 모린 라이언 부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 부인은 이틀 전에 런던에서 살해당했읍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셨읍니까?"
"예." 몰리가 대답했다.
"우선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두 분이 그 라이언 부인을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전혀 모르는 여자입니다." 가일즈가 이렇게 대답하자, 몰리도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런데, 사실 라이언이란 이름은
살해된 여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읍니다. 그 여자는 죄를 짓고 형무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 그 여자의 지문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여자의 진짜 신원을 쉽게 알 수 있었죠. 그 여자의 진짜 이름은 그레그, 모린
그레그였읍니다. 전남편인 존 그레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는 롱리지 농장에서 살던
농부였읍니다. 두 분도 롱리지 농장 사건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있겠죠?"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지붕에쌓였던 눈이 미끄러지며
땅에 떨어져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뿐이었다. 침묵을 깨는 그 소리는 은밀하고도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트로터 형사는 말을 계속했다.
"1940년에 세 명의 전쟁 고아가 롱리지 농장의 그레그 부부에게 입양되었읍니다.
v 그런데, 얼마 뒤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그레그 부부의 범죄에 가까운
냉혹한
학대와 무관심 때문에 죽고 말았읍니다. 그 사건이 보도되자 세상은 떠들석했고
그레그 부부는 감옥에 보내졌읍니다. 그러나, 그레그는 붙잡혀서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을 쳤읍니다. 그는 자동차를 한 대 훔쳐 타고 달리다가 경찰이 추격해
오자, 정신없이 차를 몰았죠.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당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읍니다. 한편, 그레그 부인은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두 달 전에
석방되었읍니다."
"그리고 살해당했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누가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트로터 형사는 가일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하고
천천히 물었다. 가일즈는 고개를 저었다.
"1940년에 저는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지중해에서 복무하고 있었읍니다."
그러자 트로터 형사는 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저는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몰리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 오셨죠? 그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죠?"
"당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스 부인!"
"위험이라고요?" 가일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트로터 형사를 보며 말했다.
"예,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겠읍니다. 라이언 부인이 살해된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수첩이 발견되었읍니다. 그 수첩에는 두곳의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런던의 컬버가 74번지 였읍니다."
"그 여인이 살해당한 곳이죠?" 몰리가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주소는 바로 이곳 몽스웰 여관이였읍니다."
"뭐라고요?" 몰리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소리쳤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래서 우리 호그벤 총경께서는 두 분, 또는 이 집이 롱리지 농장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읍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읍니다. 전혀 없어요. 그 수첩에 우리집 주소가 적혀 있었던 것은
아마 우연한 일일 겁니다."
트로터 형사가 차분히 말했다. "호그벤 총경께서는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읍니다. 사실은 총경께서 손수 이곳으로 오시려고 했었죠. 그런데 날씨
때문에 못 오셨고, 내가 스키를 탈 줄 알기 때문에 대신 나를 보내신 겁니다.
나는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관해 상세히 알아내서 전화로 총경께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도 받았읍니다."
가일즈가 소리쳤다. "안전이라뇨? 맙소사! 설마 우리집에서 누군가가가 살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트로터 형사가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부인을 상심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습니다. 호그벤 총경께서도바로 그 점을 염려하고 계신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이 우리 집에서―"
가일즈가 이렇게 말하자 트로터 형사는,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내가 이곳에
온 겁니다." 하고 말했다.
"미친 사람의 짓이군요."
"그렇습니다. 미친 사람의 짓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겁니다."
몰리가 말했다. "부장형사님,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더 있는 것 같은데요,그렇죠?"
"예, 부인.주소가 적혀 있는 그 수첩의 윗부분에는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글씨도
쓰여 있었읍니다. 그리고, 살해당한 여자의 옷에 핀으로 꽂혀 있는 종이에는
'이것이 첫번재'라고 적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세 마리의 쥐와 한 소절의 악보가
그려져 있었읍니다. 그痼?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동요였읍니다. 몰리가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세 마리의 눈먼 쥐
그들이 달려가는 것을 보세요.
그들은 언제나 농부의 아내를 쫓아다녔읍니다.
그녀는―
몰리는 갑자기 노래를 그치고 말했다.
"아, 무서워요. 끔찍해요. 롱리지 농장에는 아이들이 세명이었어요. 그렇죠?"
"예, 열 다섯 살 된 남자아이와 열 네 살 된 여자아이, 그리고 죽은 아이는 열 두
살 된 남자 아이였읍니다."
"그 뒤에 두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내가 알기로는 여자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입양이 되었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일 큰 남자아이는 지금 스물 세 살이 되었을 텐데,
그아이도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남자아이는 어딘가 약간 이상했다고
합니다. 열 여덟 살에 군데에 들어갔는데, 얼마 뒤에 탈영을 했다고 하는군요.
그뒤엔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군대의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라이언 부인을 죽인 사람이 바로 그 남자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일즈가 물었다. "그가 살인광이 되어서,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 집에
나타날 거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집에 있는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롱리지 농장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읍니다.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것만 밝혀낼 수 있다면,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당신은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부인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죠?"
"아―예, 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집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라는 것을 말해 주시겠읍니까?"
몰리와 가일즈는 보일 부인, 메트카프 소령, 크리스토퍼 렌, 그리고 파라비치니
씨의 이름을 차례로 말했다. 트로터 형사는 그 이름들을 적었다.
"일하는 사람은 없읍니까?"
"한 명도 없읍니다." 몰리가 대답했다. "아, 일하는 사람 얘기를 하니 어서 가서
감자요리를 해야 하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나는군요."
몰리는 급히 서둘러 그 방을 나왔다. 트로터 형사가 가일즈에게 다시 물었다.
"이 하숙집에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읍니까?"
"저―우리는―" 가일즈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우린 그 분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읍니다. 보일 부인은 본머스
호텔에서 편지를 보내 왔고, 메트카프 소령은 리빙턴에서, 그리고 렌 씨는 사우스
켄징턴의 어떤 여관에서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었읍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동자가 눈길에 미끄러지며 뒤집히는 바람에 푸른 하늘―아니,
하얀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났죠. 손님들 모두가 신분증이나 식량 배급증 같은
증명서를 지니고 있을 겁니다.
"그건 내가 조사를 해보겠읍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이런 날씨에는 살인범이라도 올 수 없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데이비드 씨."
"무슨 말씀입니끼?"
트로터 형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미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가일즈는 깜짝 놀란 눈으로 트로터 형사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레그 부인은 이틀 전에 살해당했읍니다. 그런데, 이집에 온 손님들은 전부 그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에 도착했읍니다."
"그렇긴 하지만, 예약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했읍니다―며칠 전에 말입니다.
파라비치니 씨를 제외하고는."
트로터 형사는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은 미리 계획된 범죄들입니다."
"범죄들이라고요? 사건은 한 번밖에 안 일어났는데, 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날
거라고 단정하십니까?"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날 겁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막아야 합니다.
어쨌든 범인은 사건을 꾸미고 있읍니다. 확실합니다."
"만일 형사님 말씀이 옳다면―" 가일즈가 흥분한 태도로 말했다.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읍니다. 범인의 나이와
비슷한 사람은 렌 씨밖에 없거든요."
트로터 형사는 주방에 있는 몰리에게 갔다.
"데이비스 부인, 나와 함께 서재로 가시겠읍니까? 이 집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내가 맡은 일에 대해 대충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데이비스 씨가
지금 준비를 해주셔서―"
"예, 저도 서재로 가겠어요. 하지만, 제가 이 감자요리를 끝낼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저는 이따금 월터 롤리경(1552~1618, 영국의 군인.탐험가.정치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영토를 확보하여 여왕에게 바침.
남아메리카에서 담배와 감자를 처음으로 영국에 들여왔다고 함)이 이 골치아픈
감자를 수입해 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답니다."
트로터 형사는 불만스렁누 표정을 한 채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몰리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이쟎아요―?"
"비 현실적인 일이 아닙니다, 부인. 이건 명백한 현실입니다."
"범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계신가요?" 몰리가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마른 체격이었고, 검은 외투에 밝은 색 모자를 쓰고
있었답니다. 얼굴은 목도리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고, 감기에 걸린 듯한 쉰
목소리였다고 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죠." 트로터 형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데이비스 부인, 이 집의 홀에는 검은 외투와 밝은
색 모자가 각각 세 벌씩 걸려 있더군요."
"예, 그렇지만 런던에서 온 손님은 한 분도 없는걸요."
"그럴까요?"라고 말하며 트로터 형사는 재빨리 서랍 달린 찬장으로 가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2월19일 런던에서 발행된 '이브닝 스탠다드'지로군요. 이틀 전
신문이죠. 누군가가 이 신문을 런던에서 사서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분명합니다,
부인."
"그럴 리가 없어요." 몰리는 신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뭔가 희미히게 떠올랐다.
"그 신문이 어디서 났을까?"
"부인, 사람의 얼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부인은 이 집에 받아들인 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 같군요. 부인과 데이비스 씨는 하숙집을 처음
경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예, 처음이에요."
몰리는 트로터 형사에게 경험없고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혼하신 지도 얼마 안 되었죠?"
"1년밖에 안 됐어요." 몰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갑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렸어요."
"첫 눈에 반해 버리셨군요." 트로터 형사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몰리는 트로터 형사에게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예"라고 말하고는 누가
뭐라 해도 좋다는 듯 자신있게 덧붙였다. "그이와 저는 알게 된 지 겨우 2주일 만에
결혼했어요."
몰리는 너무나 열렬히 사랑했던 14일 동안의 연애 기간을 생각해 보았다. 몰리와
가일즈는 그 때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느꼈으며,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그들은
근심 걱정이 많고 괴로운 이 세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사랑과 행복을 발견했었던
것이다. 몰리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트로터 형사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현실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 고장 출신이 아니죠?"
"예." 몰리는 막연하게 대답했다.
"아마 링컨셔 군(영국 중부의 군) 출신일거에요."
몰리는 가일즈의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에 대해선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일즈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몰리는 남편이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읍니다만, 내가 보기에 두 분은 하숙집을
경영하기에는 너무 젊은 것 같군요." 토로터 형사가 말했다.
"아, 글쎄요. 저는 스물 두 살이고―"
그 때 가일즈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몰리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준비가 다 외었읍니다. 손님들께 대략 말씀을 드렸읍니다." 가일즈가 말했다.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읍니다."
"잘하셨읍니다." 토로터가 말했다. "준비가 되셨죠, 데이비스 부인?"
트로터 형사가 서재로 들어서자, 그 방에 있던 네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렌은 제일 높고 날카롱누 목소리로, 이렇게 스릴 넘치는 일은
생전 처음이라서 오늘밤엔 한잠도 못 자겠다며 살인사건에 관해 자세히 알려 달라고
했다. 보일 부인은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도대체 알 수가 없군요. 살인범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경찰은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라고 말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말소리보다는 몸짓이 더 요란했다. 그의 목소리는 보일 부인의
목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고, 손짓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메트카프 소령은 이따금 한 마디씩 소리치고 있었는데, 단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만 있었다. 트로터 형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명령을 하듯 한 손을 쳐 들었다.
그러자 소란스러움이 그치고 놀라울 정도로 잠잠해졌다.
"고맙습니다." 트로터가 말했다. "자, 데이비스 씨가 여러분들에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대강 말씀드린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한
가지ㅡ 단 한지입니다. 그 한 가지를 속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 가운데
롱리지 농장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겁니다."
입을 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네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트로터 형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몇 분 전가지만해도 흥분과 분노, 히스테리와 질문으로
소란스럽던 감정들이 마치 분필 지우개로 칠판에 쓰인 글쒼씀? 깨끗이 지워버린
것처럼 전부 사라진 것이었다. 트로터 형사가 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판단에 의하면, 여러분 중의 한 사람이
지금 위험에 처해 있읍니다. 목숨이 위험하단 말입니다. 누가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고,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트로터 형사가
이번에는 화를 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씩 따로따로 묻겠읍니다. 먼저 파라비치니 씨?"
파라비치니 씨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는 외국인의
몸짓으로 양손을 치켜들었다.
"경감님, 나는 이곳에 처음 온 외국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이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을 내가 어떻게 알겠읍니까?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자 트로터 형사는 지체없이 다음 사람에게 물었다.
"보일 부인?"
"알 수가 없군요ㅡ왜ㅡ그러니까 내 말은, 왜 내가 그런 끔찍한 사건과 관련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렌 씨는?"
크리스토퍼 렌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어린애였어요. 들은 적도 없는 것 같은걸요."
"메트카프 소령님은?"
소령이 불쑥 말했다. "그 사건은 신문에서 읽었소.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에든버러에 주둔하고 있었소."
"여러분, 그게 전부입니까? 더 이상 하실 말씀은 없읍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트로터 형사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만일 여러분 중의 한 사람이 살해당한다고 해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하고 말한 다음 방을 나가 버렸다.
"이건 마치 멜로드라마 같군요."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그렇지만 정말 잘 생긴 경찰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경찰을 존경합니다.
엄격하고 비정하니까요. 이건 상당히 스릴 넘치는 사건이군요.
'세 마리의 눈먼 쥐'의 곡조가 어떤 것이었지?"
크리스토퍼가 그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자, 몰리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만둬요!"
크리스토퍼는 웃으면서 몰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 노래는 내 18번인걸요. 난 이퍼럼 살인범 취급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답니다!"
"이건 시시한 멜로드라마 같군요. 난 하나도 믿을 수가 없었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의 눈이 빛나며 장난기가 넘쳤다.
"잠깐 기다리세요, 보일 부인. 내가 부인의 뒤로 몰래 다가가면, 부인의 목에 내
손이 닿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몰리가 몸을 움츠렸다. 가일즈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아내를 겁주지 말아요. 엉터리 같은 농담은 그만둬요. 렌 씨."
"이건 농담할 일이 아닙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농담거리밖에 안 됩니다." 크리스토퍼가 마랬다. "미친 사람의 농담이죠. 그렇기
때문에 섬뜩하게 기분나쁜 겁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다시 웃었다.
"여러분, 지금 자신의 얼굴들 한번 보시죠." 그리고 그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보일 부인이 맨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저렇게도 무례하고 정신없는 젊은이는 처음 보는군. 아마도 양심적인 참전
거부자겠지."
"저 청년은 공습 때 땅속에 파묻혀서 구출될 때까지 48시간 동안 묻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태도가 저렇게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은 저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변명을 하죠.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보다 오랫동안 전쟁을 겪었지만 내정신은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당연하시겠죠, 보일 부인."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죠?" 보일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부인은 1940년에 이 지방에서 전쟁
고아들을 입양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던 장교였다고 하더군요." 라고 말하며
메트카프 소령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떡이는 몰리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보일 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녀는 항의하듯
말했다.
"세 명의 어린애를 롱리지 농장에 보낸 것은 부인의 책임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읍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까지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 농장의
주인 부부는 좋은 사람들 같았고, 또 아이들을 몹시 원하고 있었어요.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ㅡ"
보일 부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가일즈가 갑자기 말했다.
"왜 그 이야기를 트로터 형사에게 하지 않았읍니까?"
"경찰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 일은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보일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메트카프 소령이 조용히 말했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메트카프 소령도 방을 나가 버렸다. 몰리가 중얼거렸다.
"맞아요, 부인이 그 일을 담당한 장교였조. 저도 기억하고 있어요."
"아니, 당신도 알고 있었어?" 가일즈가 놀란 표정으로 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은 공유지에 큰 저택을 갖고 있었죠?"
"그 집은 전쟁 당시 군인들이 사용했어요. 그래서 망가지고 말았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죠. 정말이지 너무했어요." 보일 부인이 비통하게 말했다.
그 때 파라비치니 씨가 웃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거리낌없이
웃어댔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부인." 그는 헐떡이며 사과했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내게는 무척 우습게 느껴집니다. 재미있어요, 참 재미있군요."
그 때, 트로터 형사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파라비치니 씨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여러분이 이 일을 그렇게도 재미있게 생각하신다니 나도 참
기쁘군요."하고 비웃듯이 말했다.
"사과드립니다, 경감님. 정말 미안합니다. 경감님이 심각하게 경고한 말을 그만
우습게 만들고 말았군요."
트로터 형사는 양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내 임무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내 직책은 경감이 아니라 경사입니다. 데이비스 부인, 전화를 사용해도
되겠읍니까?"
"내가 부끄럽군요." 파라비치니 씨가 말했다. "조용히 사라져야겠읍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없이 사라지겠다는 말과는 달리 젊은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방을
나갔다.
" 아싱한 사람이군." 가일즈가 말했다.
"범죄자같은 사람입니다.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죠." 트로터형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저 분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걸음걸이는 젊은 사람 같지만, 얼굴에 화장을 했어요. 어쩌면 늙어 보이는 화장을
했는지도 모르죠. 트로터 형사님, 그러니까ㅡ"
트로터 형사는 몰리의 말에 냉정하게 대답했다. "무모한 추측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데이비스 부인. 호그벤 총경께 보고를 드려야겠군요."
그는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전화가 통하질 않아요." 몰리가 말했다.
"아니 뭐라고요?" 트로터 형사가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그의 날카로운 외침은 방에 있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불통이라니? 언제부터 그렇습니까?"
"조금 전에 메트카프 소령님이 전화를 하시려다 불통인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읍니까? 호그벤 총경의 전화는
받으셨죠?"
"예, 아마ㅡ10시쯤부터 불통이 된 것 같아요. 눈이 많이 쌓인 탓이겠죠."
트로터 형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전화선을 끊은 것은
아닌지ㅡ"
"그렇게 생각하세요?" 몰리가 물었다.
"조사를 해야겠읍니다."
트로터 형사는 급히 방을 나갔다. 가일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를 따라나갔다.
몰리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머나!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군요. 서둘지 않으면
식사를 못 하겠네요."
몰리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보일 부인이 투덜거렸다.
"저런 여자가 하숙집 주인이라니! 정말 형편없는 곳이군. 이런 집에서는 1주일에
7긴씩이나 하숙비를 지불할 수는 없어."
< 다음편에 계속 >
쥐덫(5)
트로터 형사는 몸을 굽히고 전화선을 따라가면서 가일즈에게 물었다.
"이 전화선은 어디와 연결되어 있읍니까?'
"예, 위층의 우리 침실에 설치된 전화와 연결되어 있읍니다. 제가 올라가서
살펴볼까요?"
"그렇게 해주시죠."
트로터 형사는 창문을 열고 창턱의 눈을 쓸어내며 밖으로 몸을 굽혔다.
가일즈는 얼른 위층으로 올라갔다. 파라비치니 씨는 넓은 거실에 있었다.
그는 방을 가로질러 그랜드 피아노로 다가가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그들이 달리는 것을 보세요......
크리스토퍼 렌은 자신의 침실을 왔다갔다 하며 휘파람을 불어대다 멈추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갑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중얼거렸다.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그러더니 다시 기분을 바꾸고 일어나 어깨를 펴고
말했다. "계속해야 해. 이겨 나가야 해."
가일즈는 자기들 부부의 침실에 있는 전화기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방바닥에 몰리의
장갑 한 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자, 몸을 숙여 그것을 집었다. 장갑 속에
있던 분홍색 버스표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만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던
가일즈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마치 꿈 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딴 사람이
되어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문을 열고 복도 끝의 계단을 응시했다. 한편,
몰리는 감자요리를 남비에 넣고 불 위에 올려놓은 다음. 오븐 속을 들여다보았다.
식사는 계획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에는 이틀 전의 '이브닝 스탠다드'지가 놓여
있었다. 몰리는 신문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저 신문을 가지고 왔을까?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몰리는 손을 천천히 내리고, 낯선 곳을 보듯 주방을 둘러보았다.
'맛잇는 요리 냄새가 풍기고 있는 이 주방은 얼마나 따뜻하고 안락한 곳인가.'
"아니야, 안돼." 몰리는 숨을 가쁘게 쉬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녀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거실로 통하는 문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누군가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만 들릴 뿐 집안은 고요했다. '저 멜로디는─'
몰리는 몸을 떨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서서 친숙한 주방을 또다시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 쪽으로
되돌아갔다. 메트카프 소령은 소리 없이 계단을 내려와서 잠시 홀에서 있다가 계단
밑의 큰 벽장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안이
고요했다. 그가 지금 하려는 일을 하기에 적절한 때였다. 보일 부인은 서재로
있었다. 그녀는 왠지 마음이 불안해져서 라디오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렸다.
어떤 방송에서 동요의 기원과 중요성에 관한 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내용 중의 하나였다.
다시 다이얼을돌리자 꽤나 학식이 있는 듯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포 심리학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방안에 혼자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대 뒤에서 문을 살짝 열리고─"
그 순간 실제로 문이 열렸다. 보일 부인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아, 당신이었군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라디오에서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군요. 들을 가치조차 없는 내용들뿐이에요!"
"그렇다면 듣지 마시지요. 보일 부인."
보일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라디오를 듣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어야죠. 바깥 세상과 단절된 이 집안 에서
살인자와 함께 있으니ㅡ사실 그런 멜로드라마 같은 말은 믿지도 않지만─"
"안 믿으십니까, 부인?"
"아니ㅡ무슨 말이요ㅡ?"
바로 그 순간에 허리띠가 보일 부인의 목에 휘감겼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감겼기
때문에 보일 부인은 영문조차 알 수 없었다. 라디오 소리가 높아졌다.
공포 심리학을 강의하는 박식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면서 보일 부인의 죽음에
따르는 소리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나 보일 부인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살인자는 그 점에 있어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주방에 모였다. 가스레인지위에서는 감자요리가
보글보글 즐거운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고, 오븐에서는 고기와 콩팥 파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네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섯 번째 사람인 몰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떨며 여섯번째 사람인 트로터 형사가 권한 위스키를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트로터 형사는 화가 잔뜩 난채, 굳어진 얼굴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몰리가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고, 트로터 형사와 나머지 사람들이
서재로 뛰어간 것이 바로 5분 전이었다.
"데이비스 부인, 부인이 서재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 보일 부인이 살해당한 겁니다."
트로터 형사가 말했다. "홀을 가로질러 갈 때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읍니까?"
"휘파람 소리가 들렸어요." 몰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어요. 어디선가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요ㅡ살며시 닫히는 소리였어요. 제가 서재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문이었읍니까?"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데이비스 부인. 위층─아래층─왼쪽─오른쪽? 어느 문인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생각이 나질 않아요. 정말이에요. 문소리를 확실히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몰리가 울면서 말했다.
"더 이상 내 아내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아내가 지금 겁에 질려 있는게 안
보입니까?" 가일즈는 화를 냈다.
"나는 지금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데이비스 씨. 아시겠읍니까,
데이비스 중령님?"
"나는 전생시의 게급 명칭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형사님."
"알겠읍니다." 트로터 형사가 뭔가 알겠다는 듯이 잠시 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지금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읍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사건의 중대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보일 부인도
마찬가지였었죠. 그 부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않았읍니다.
여러분도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보일 부인이 죽은 겁니다.
이사건의 진상을 알아내지 못하면ㅡ그것도 속히 알아내지 못하면 또 다른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라고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왜냐하면─" 트로터 형사가 심각하게 말했다.
"눈먼 쥐는 세 마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가일즈는 믿어지지 않았다는 듯, "한 마리에 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사이엔 무슨 관계가 있겠군요. 내 말은,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겠는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왜 이집에서 또 하나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겁니까?"
"그 이유는, 그 수처베 적힌 주소가 두 군데였기 때문입니다.
칼버가 74번지에는 살해당할 만한 사람이 한 사람뿐이었지만, 이곳 몽스웰
여관에는 여러 사람이 있읍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트로터 형사님. 이 집에 롱리지 농장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
우연히도 둘이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말도 안 됩니다."
"어떠한 상황하에서는 우연이 아닐수도 있읍니다. 잘 생각해 보십죠, 데이비스 씨."
트로터 형사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일 부인이 살해당했을 때
여러분이 어디에 있었는지 조금 전에 들었읍니다만, 이제 한 분식 확인 질문을
하겠읍니다. 렌 씨는 데이비스 부인의 비명을 들었을 때 침실에 있었다고 했죠?"
"예, 형사님."
"데이비스 씨는 위층 침실에서 연결된 전화를 조사하고 있었고요?"
"그렇습니다." 가일즈가 대답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했는데, 아무도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파라비치니 씨."
"아주 작은 소리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으니까요. 한 손가락으로 쳤읍니다."
"어떤 곡을 쳤읍니까?"
" '세 마리의 눈먼 쥐'였읍니다."라고 말하며 파라비치니 씨는 미소를 지었다.
"위층에서 렌 씨가 휘파람으로 불고 있는 것과 같은 멜로디였조. 그 멜로디는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잘 알고 있죠."
"그건 너무나 무서운 멜로디예요." 몰리가 말했다.
"전화선은 어떠했읍니까? 누군가 고의로 끊었던가요?" 메트카프 소령이 물었다.
"예, 식당 창문 밖에서 끊어져 있었읍니다. 데이비스 부인이 비명을 지를 때 나는
바로 그 끊어진 부분을 발견했읍니다."
"그것 참 미친 짓이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을까요?" 크리스토퍼가
날카롭게 말했다. 트로터 형사는 크리스토퍼를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아마 살인범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낳게 여길 겁니다. 자기가 우리보다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트로터 형사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 경찰에서는 훈련 기간 주에 심리학을 공부합니다. 정신분열증인 사람의
정신상태느 무척 흥미롭습니다."
"살인사건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가일즈가 말했다.
"그러죠, 데이비스 씨.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살인'과 '위험'
이라는 두 낱말입니다. 이 두 낱말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자, 메트카프 소령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소령님은 어디에서 뭘 하고 계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지하실에 계셨다고 하셨는데ㅡ왜 그곳에 계셨읍니까?"
"그냥 구경을 하고 있었소." 소령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계단 밑의 벽장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다가, 문이 하나 있기에 그 문을 열었더니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있더군요. 그래서 지하실로 내려가 본 겁니다. 참으로
훌륭한 지하실이더군요." 메트카프 소령이 가일즈를 보며 말했다.
"오래? 수도원의 비밀스런 지하실 같았소."
"우린 지금 고적 탐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메트카프 소령님.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겁니다, 데이비스 부인, 잠깐 내가 시키는 대로 해주시겠읍니까?
이제 내가 문을 열어놓고 나가겠읍니다." 트로터 형사는 문을 열어 놓고 나갔다.
잠시 뒤 밖에서 '딸깍'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부인이 들었다는 소리가 바로 이런 소리였읍니까?" 트로터 형사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것은 계단 아래의 벽장 문을 닫는 소리였읍니다. 그러니까 범인으 보일 부인을
죽인 다음, 거실로 걸어나오다가 부인이 주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급히 벽장으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닫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벽장 안쪽에 범인의 지문이 남아 있겠군요."
크리스토퍼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지문도 있을 겁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좋습니다." 트로터 형사가 조용히 말했다. "어쨌든 그 소리에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게 되었군요."
"그런데, 형사님─" 가일즈가 말했다. "형사님이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점은 잘
알고 있읍니다만, 여기는 우리 집이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머물고 계신 손님들께
어느 정도 책임을 느끼고 있읍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어떤 예방조치를 취할 순
없을까요?"
"어떤 예방조치를 말씀하십니까?"
"예, 솔직이 말씀드리자면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을 감금했으면 좋겠읍니다."
그러면서 가일즈는 크리스토퍼 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크리스토퍼 렌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서며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로 외쳤다.
"아니오! 난 아니란 말이오! 당신네들은 모두 날 싫어하고 있어. 사람들은 언제나
날 싫어해. 당신은 지금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어. 이건 학대야─날
학대하는거라고─"
"침착하시오, 젊은이."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진정하세요. 크리스토퍼" 몰리가 그에게 다가서며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렌 씨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몰리는 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사람을 학대하지 않습니다." 트로터 형사가 말했다.
"형사님이 렌 씨를 체포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도 해주세요."
"아무도 체포하지 않을 겁니다. 체포를 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증거도 없읍니다."
가일즈가 소리쳤다. "당신 미쳤군, 몰리. 그리고 형사님도 마찬가지라고요. 이 집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범인이 될 만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오. 그리고─"
"여보, 잠깐 기다려요." 몰리가 가일즈의 말을 막았다. "제발 조요히 하세요.
트로터 형사님, 저─ 형사님께만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도 이 방에 있겠어."
"안 돼요, 여보. 미안하지만, 당신도 나가 주세요."
가일즈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당신이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군"
가일즈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방을 나가면서 '쾅'하고 문을 닫았다.
"데이비스 부인, 이제 말씀해 보시죠."
"형사님이 롱리지 농장 사건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이번 사건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그 세 아이들 중에서 제일 큰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 소년에 대해서 잘 알고 게신 것 같지는 않네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군대의 정신과 의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약간의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그가
범인일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 알겠어요. 그래서 크리스토퍼를 그 젊은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 아이들에게는 부모나 친척이 있었겠죠?"
"예, 그 당시에 아이들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아버지는 외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읍니다."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나요?"
"모릅니다. 작년에 군대에서 제대한 것만 알고 있읍니다."
"만일 아들이 정신이상이라면, 그 아버지도 정신이상일 수도 있겠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젊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나이든 사람일 수도 있겠군요.
제가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는 말을 했을 때 메트카프 소령님이 무척 놀라더군요.
굉장히 놀라는 것 같았어요."
트로터 형사가 조용히 말했다.
"부인, 사건이 시작될 때부터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모두 생각했읍니다.
그 소년, 짐이라는 그 소년의 아버지, 그리고 소년의 누이동생까지도 생각해
보았읍니다. 왜냐하면, 범인은 여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모든 가능성을
전부 생각해 본 겁니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누가 범인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을 자세히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경찰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어떤 일들을 보게 되는지 아시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특히
결혼 문제가 그렇습니다. 전쟁시에 급히 서둘러 결혼한 사람들은 서로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채 서로의 말만 듣고 결혼해 버립니다. 남자가
자기는 공군 조종사라고 하거나 육군 소령이라고 하면, 여자는 맹목적으로 그 말을
믿고 결혼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몇 년이 지나서야 그 남자가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도망친 은행원이라든가, 군대에서 도망친 탈영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는 잠시 쉬었다고 다시 말했다.
"부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읍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살인범은 지금 살인하는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그 점을 확신하고 있읍니다."
트로터 형사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몰리는 얼굴이 상기된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오븐으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며 오븐 뚜껑을
열었다. 친숙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 냄새를 맡자 몰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매일매일의 정답고 친숙한 세계 속으로 둥실 떠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요리, 청소, 집안 꾸미기 등의 평범한 생활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던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여자들은 남편을 위해 요리를 해왔다.
비록 바깥 세상은 어지럽고 위험했어도, 여자들은 주방에서만 영원히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방 문이 열리며 크리스토퍼 렌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세상에, 이런 소동이 일어나다니! 누가 형사의 스키를 훔쳐 갔어요!"
"형사의 스키를! 왜 그랬을까요?"
"알 수 없죠. 형사가 이곳을 떠난다면 제일 좋아할 사람은 범인일 텐데,
이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남편이 그 스키를 계단 밑 벽장에 넣어두었는데요."
"그런데 없어졌단 말입니다. 어떤 음모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며
크리스토퍼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 형사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어요. 누구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흥분했어요.
메트카프 소령에게 달려들어 추궁하고 있지만, 늙은 메트카프 소령은 보일 부인이
살해 되기 직전에 자기가 벽장을 들여다보았을 때에 그곳에 스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요.
트로터 형사는 소령이 분명 스키를 봤을 거라고 우기고 있죠."
크리스토퍼는 몰리에게 다가서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이제 트로터는 지치기 시작했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요. 이런 일들은 나에게는 무척 자극적이에요. 모든 것이
너무도 비현실적이거든요."
몰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만일─만일 당신이 보일 부인의 죽은 모습을 보았다면
그런 말은 못 할 거예요. 난 자꾸 그 모습이 떠올라요. 잊혀지질 앉아요. 잔뜩
부어오른 그 자줏빛 얼굴─" 몰리가 몸을 떨었다.
크리스토퍼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엊으며 말했다.
"알아요. 난 멍청이에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군요."
몰리는 흐느끼듯 더듬거렸다. "지금은 괜찮아요─지금은─이 주방에서 요리를 할
때는, 그러다가 갑자기─다시 돌아가서─마치 악몽처럼...."
고개를 숙인 몰리를 보고 있던 크리스토퍼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스쳐갔다.
"알아요. 이젠 됐어요. 난 이방을 나가서 당신을 방해하지 말아야겠군요."
"가지 말아요!" 크피스토퍼가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몰리가 외쳤다.
크리스토퍼는 뒤돌아서서 묻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진심이세요?"
"예?"
"가지 말라고 한 것 말입니다."
"예, 진심이에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
크리스토퍼는 식탁 옆에 앉았다. 몰리는 오븐을 열고 윗 선반에 파이를 올려 놓은
다음 오븐을 닫았다. 그리고는 크리스토퍼 곁으로 왔다.
"참 이상하군요." 크리스토퍼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요?"
"당신은나와 단둘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군요, 그렇죠?"
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렵지 않아요."
"왜 날 두려워하지 않죠, 몰리?"
"잘 모르겠어요─두렵지 않아요."
"그렇지만 나는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예정된 살인범 말입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어요. 트로터 형사에게
그런 점에 관해 말했어요."
"그가 동의하던가요?"
"예, 동의했어요." 몰리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이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특히 그 마지막 말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읍니다.'
'알고 있을까? 내 생각을 정말 알고 있을까? 트로터 형사는 살인범이 살인을 즐기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일까?'
몰리가 크리스토퍼에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이 일들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죠? 조금 전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만에요. 아니에요.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아니에요.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트로터 형사가 한 말이예요. 난 그 사람이
미워요! 그 형사는─사실이 아닌 말들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었어요─그건
사실일 수가 없어요." 몰리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자 크리스토퍼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내리게 했다.
"자, 몰리, 왜 그러죠?"
몰리는 그가 자기의 손을 잡아 끌며 삭탁 옆의 의자에 앉히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의 태도는 더 이상 어린애 같거나 신경질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몰리?"
몰리는 한참 동안 뭔가를 알아보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엉뚱한 말을 했다. "우리가 안지 얼마나 됐죠? 이틀인가요?"
"그렇죠. 당신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군요. 우리가 만난 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우린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죠?"
"맞아요. 참 이상해요."
"우린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그건 아마 우리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은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느낌을 확인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몰리는
잠자코 있다고 조용히 말했다. 그것 역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당신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렌이 아니죠?"
"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왜 하필 그 이름을 선택했는냐고요? 그건 기발한 생각이었을 뿐이에요. 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은 나를 크리스토퍼 로빈이라고 부르며 놀렸지요. 로빈─렌,
비슷하지 않습니까?"
"진짜 이름은 뭐예요?"
크리스토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 건 밝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요. 난 건축가가 아닙니다. 사실은 군데에서 탈영한 도망병이에요."
순간 몰리의 눈빛에 깜짝 놀란 기색이 스쳐갔다.
크리스토퍼가 그것을 눈치채고, "예,우리가 말하던 그 수수께끼의 살인범과
마찬가지죠. 그래서 내가 살인범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읍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난 당신이 살인범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쟎아요,
자, 당신에 관해서 더 얘기해 봐요. 왜 탈영을 했죠? 심리적인 이유
때문인가요?"
"군대 생활을 두려워했느냐고 묻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어요. 사실 위급한 상황에선느 다른 군인들보다 더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전혀 다른 문제 때문이었죠. 우리 어머니 때문에
탈영했어요."
"어머니요?"
"예, 우리 어머니는 공습 때 땅속에 파묻혀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시체를 파내야만 했읍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도 놀라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나는 마치 내가 그 일을 당한 것처럼 느껴졌지요. 그래서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내 몸을 파내야 한다고 느낀겁니다─그건 뭐라 설명할 수
없는─정말 혼란스러웠어요─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느낌이었죠."
크리스토퍼는 얼굴을 숙여 두 손에 파묻고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방황했어요. 어머니를 찾아다닌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을 찾아다닌
건지─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 세월이 지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군대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어요. 아니, 어쩌면 돌아가서 보고를 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당신의 내 혼란된 감정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 이후로 나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아
왔어요."
말을 마치고 몰리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은 절망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몰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당신은 아직 젊어요."
"예, 그렇긴 하지만─난 갈 데까지 가고 말았는걸요. 이젠 모든 게 끝났어요."
"아니에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그러니까 모든 게 끝장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군요, 몰리?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틀림없이
그렇군요?"
"그래요."
"무엇 때문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겪은 그런 일이었어요. 나는 젊은 공군 조종사와 약혼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가 전사하고 말았죠."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없었나요?"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잔인하고 비참한 일들을 무척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인생이란 항상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거예요. 약혼자 잭이 전사했을 때, 인생이 잔인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내 생각이 더욱 굳어지고 말았죠."
"그런데 그 때 가일즈를 만나게 되었군요?"
크리스토퍼가 몰리를 쳐다 보며 말했다.
"예." 몰리의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가 감돌았다. "가일즈를 만나자 모든 것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느껴졌어요─그런데, 가일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고, 얼굴에 두려움이 나타났다. 몰리는 오한이 난 듯
몸을 떨었다.
"왜 그래요, 몰리? 몸을 떨고 있군요.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군요. 그렇죠?"
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남편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나요?"
"아뇨, 남편이 아니에요. 그 무서운 남자예요!"
"무서운 남자가 누굽니까?" 크리스토퍼는 깜짝 놀라 물었다.
"파라비치니 씨입니까?"
"아니, 아니에요. 트로터 형사예요."
"트로터 형사라고요?"
"그가 내 마음속에다 남편에 관해 무서운 생각들을 심어 놓았어요. 내가 몰랐던
그런 생각들을 말이에요. 아! 난 그가 미워요─정말 미워요!"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눈썹을 치켜뜨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가일즈? 가일즈! 그렇군요. 당신 남편 가일즈와 난 나이가 비슷하죠. 나보다
나이를 더 먹어 보이긴 하지만, 아마 나와 비슷할 겁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가일즈도 범인일 가능성이 있군요. 하지만 그건 말도 안돼요, 몰리. 런던에서
그 여자가 살해당한 그날, 가일즈는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었으니까요."
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 남편이 이곳에 없었읍니까?"
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혼란된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 없었어요─자동차를 몰고─철망을 싸게 판다는 저 반대편
지역에 갔었는데─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나도 그전까지─그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제까지 말입니까?"
몰리는 천천히 손을 뻗어 식탁에 놓여 있는 '이브닝 스탠다드'지의 날짜를
가리켰다. 크리스토퍼가 그 날짜를 보고 말했다.
"이틀 전 런던에서 발행된 것이군요."
"남편이 돌아왔을 때 주머니 속에 이 신문이 있었어요. 남편은─남편은 그날 런던에
갔었던 게 분명해요."
크리스토퍼는 신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몰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휘파람을 불려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갑자기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불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몰리의 시선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에 대해─어느 정도 알고 있읍니까?"
"그만둬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몰리가 외쳤다. "잔인한 트로터도 그렇게
말했어요. 여자들은─특히 전쟁시에는─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남자가 하는 말만 믿고 결혼을 해버린다고 말예요."
"그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까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난 참을 수가 없단말에요. 지금처럼 불안한
상황에서는 근거가 없는 말도 믿게 되니까요─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난─"
몰리가 말을 멈추었다. 주방문이 열렸던 것이다. 가일즈가 들어왔다.
그는 약간 험상궂은 표정으로, "내가 방해가 되었나?" 하고 말했다.
크리스토퍼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나는 지금 요리 강습을 받고 있었읍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이봐요, 렌 씨.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다시는 주방에 들어오지 말아요,
알겠소?"
"하지만 이건 분명히─"
"내 아내와 가까이하지 말란 말이오, 렌 씨. 내 아내가 다음번 희생자가 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나두 그걸 염려하고 있는 겁니다."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그 말에 중대한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해도 가일즈는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가일즈는 다만 얼굴이 덩구 상기되며, " 염려는 내가 하겠소. 내 아내는
내가 보호할 수 있으니까 당신은 어서 나가시지." 하고 소리쳤다.
몰리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나가요, 크리스토퍼포, 부탁이에요."
크리스토퍼는 마지못해 문쪽으로 걸어가며, "멀리 가지 않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말은 몰리에게 아주 분명한 뜻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어서 나가지 못하겠소?"
크리스토퍼는 어린애처럼 낄낄거리며, "예, 예, 중령님." 하고 말했다.
< 이제 마지막편을 향해 >
? 쥐덫(6)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가일즈는 몰리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이런, 젠장! 몰리,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주방 문을 닫고 저런
위험한 살인광과 단둘이 있다니!"
"그 사람은 그런─" 하고 말하려다가 몰리는 얼른 고쳐 말했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나도 조심하고 있어요. 내 몸을 내가 지킬
수 있어요."
가일즈가 씁쓸하게 웃었다. "보일 부인도 그렇게 말했었지."
"여보,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미안해. 하지만 저 불쾌한 젊은 녀석 때문에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이 그 녀석에게
잘 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
몰리가 천천히 말했다. "그가 불쌍해요."
"살인광이 불쌍하다니?" 몰리는 의미 있는 눈초리로 가일즈를 보았다.
"나는 살인광이라도 동정할 수 있어요."
"그 녀석을 크리스토퍼라고 부르더군. 언제부터 그렇게 부를 정도로 친해졌지?"
"여보, 그러지 말아요. 요즘에는 누구나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만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되었으면서? 아니, 그보다 오래 되었는지도 모르지.
그가 여기 오기 전부터 당신은 그 엉터리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을 알고 있었지?
우리집으로 오라고 당신이 그에게 권한 건 아니야? 당신이 그 녀석과 짜고 그런 건
아니냐고?"
몰리가 가일즈를 노려보았다. "당신 미쳤어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나보다 그 녀석을 더 잘 아는게 아니야?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아니냐고?"
"당신 정말 미쳤군요!"
"당신은 그 녀석이 우리 집에 오기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가 이런 외딴 곳에 와서 머문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메트카프 소령과 보일 부인의 경우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이제야 알겠어. 살인광들은 여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그게 사실인 것 같군. 당신, 그 녀석과 어떻게 알게 됐지? 언제부터
그런 사이로 지내왔지?"
"당신 정말 이상하군요. 그리스토퍼 렌이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를 본 적도
없어요."
"당신이 이틀 전에 런던에 가서 그 녀석을 만났지? 그리고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
집으로 오라고 서로 짠 거지?"
"내가 몇 주일 동안 런던에 가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가지 않았다고? 그것 참 재미있군."
가일즈는 주머니에서 가죽으로 안을 댄 장갑을 꺼내 들었다.
"이건 당신이 그저께 끼고 있었던 장갑 한 짝이 맞지? 내가 철망을 사러 사일햄에
갔었던 그날 말이야."
"당신이 철망을 사러 사일햄으로 갔었던 그날이었죠."
몰리는 가일즈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맞아요. 외출할 때 난 그 장갑을 끼고 있었어요."
"당신은 시내에 간다고 했었지. 당신이 시내에만 갔었다면 장갑 속에 왜 이런게
들어 있지?"
가일즈는 따짓듯이 분홍색 버스표를 내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런던에 갔었어." 가일즈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런던에 갔었어요." 몰리가 턱을 쳐들었다.
"크리스토퍼 렌이란 녀석을 만나러 갔었나?"
"아니에요. 크리스토퍼를 만나러 간 건 아니였어요."
"그렇다면 왜 갔었지?"
"여보,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흥! 그럴 듯한 변명을 지어낼 시간을 벌자는 거군."
"난 당신이 미워요!" 몰리가 말했다.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가일즈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나도 당신을 미워했으면 좋겠어. 난 더 이상 당신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나도 마찬가지 기분이에요. 당신은─마치 낯선 사람같아요.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그런 사람─"
"내가 언제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
몰리가 웃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이 철망을 사러 갔다는 말을 믿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날 당신도 런던에 갔었쟎아요."
"당신이 런던에서 나를 본 거로군.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당신을 믿어요? 난 아무도 믿지 않을거예요. 다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예요."
가일즈와 몰리는 주방 문이 살짝 열리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파라비치니 씨가
들어와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지들 말아요." 그가 중얼거렸다. "젊은 사람들이 감정이 격해져서 말을
지나치게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싸움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 마련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이라고요? 천만에요." 가일즈가 비웃듯이 말했다.
"알아요, 알아. 나는 두 사람의 기분을 잘 알고 있어요. 젊었을 땐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주방에 온 이유는, 저 형사가 우리 모두를 거실로 모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요. 그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 같더군요."
파라비치니 씨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경찰에서 단설르 잡았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우리의 트로터 형사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분명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여보, 당신은 가봐요." 몰리가 말했다.
"난 음식을 만들어야 해요. 내가 없어도 트로터 형사의 일은 상관없을 거예요."
"음식이라니 말입니다만─" 파라비치니 씨는 주방을 가로질러 깡총깡총 뛰며 몰리
곁으로 왔다. "프랑스 겨자를 묻힌 얇은 베이컨과, 타조의 간을 두껍게 바른
토스트와, 닭의 간을 조리한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에는 타조의 간을 구하기 힙듭니다." 가일즈가 대답했다.
"어서 가시죠. 파라비치니 씨."
"내가 주방에 남아서 도와 드릴까요, 부인?"
"당신도 거실로 가야 합니다. 파라비치니 씨." 가일즈가 말했다.
그러자 파라비치니 씨가 소리없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께서 부인을 걱정하고 있군요. 당연하죠. 부인을 나와 함께 주방에 남겨
놓기가 싫으신 겁니다. 부인의 남편게서 두려워하는 것은 남을 괴롭히는 내
성격이지, 불명예스러운 성격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어야겠죠."
그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키스를 해보였다.
몰리는 난처한 듯 말했다. "파라비치니 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파라비치니 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가일즈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주 똑똑한 젊은이로군요. '기회를 주지 말 것'─그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오. 내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나 형사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요? 아니오. 난 그럴 능력이 없어요. 아니라는 사실처럼 증명하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 그는 유쾌하게 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몰리가 움츠리며 소리쳤다.
"제발 그 끔찍한 멜로디는 그만두세요, 파라비치니 씨."
"아!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멜로디였군요! 내 머릿속에 박여 버렸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소름끼치는 내용이군요. 절대로 좋은 가사가 아니예요.
하지만 어린애들은 소름끼치는 걸 좋아하지요. 눈여겨 본 적이 있읍니까?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동요의 가사는 무척 영국적이예요. 목가적이지만 잔인한
영국 시골의 생활을 보여 주고 있어요. '그녀는 식칼로 쥐들의 꼬리를 잘라
버렸읍니다.' 아이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죠. 내가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를─"
"제발, 그만두세요." 몰리가 겁에 질려 말했다.
"당신도 잔인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높아졌다.
"당신은 지금 잔인하게 웃고 있어요. 마치 쥐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고양이처럼─쥐를 가지고─" 몰리가 마침내 울기 시작했다.
"여보, 진정해." 가일즈가 말했다. "자, 우리 함께 거실로 갑시다. 트로터 형사가
화를 내겠어요. 음식은 걱정 하지 말아요. 살인이 음식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이니까."
"난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뛰는 듯한 발걸음로 몰리와
가일즈를 따라오며 말했다. "사형수는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 말이
있읍니다."
크리스토퍼 렌은 홀에서 그들 세 사람을 만났다. 가일즈가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퍼는 재빨리 살피듯이 몰리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몰리는 고개를
쳐들고 똑바로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들은 행진을 하듯이 거실로 들어갔다.
파라비치니 씨가 맨 뒤에서 깡총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트로터 형사와 메트카프 소령이 거실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골이 난 표정이었고, 트로터 형사는 얼굴에 생기가 도는 기운찬 표정이었다.
그들이 전부 들어오자 트로터 형사가 말했다.
"됐읍니다. 나는 여러분이 전부 모여 주시길 원했읍니다.지금부터 어던 실험을
하고 싶습니다. 그 실험에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래 걸릴까요? 전 주방에서 할 일이 많거든요. 어쨌든 식사는 해야 할 테니까요."
몰리가 말했다.
"알겠읍니다." 트로터 형사가 대답했다. 식사를 염려해 주져서 고맙습니다, 부인.
그렇지만 식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읍니다! 예를 들자면 보일 부인은 더 이상
식사를 할 필요가 없읍니다."
"형사님은 꽤나 재치없이 얘기하시는군요."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 모두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스키를 찾으셨나요, 트로터 형사님?" 몰리가 물었다.
그러자 트로터 형사는 얼굴이 붉어지며, "아뇨, 아직 못 찾았읍니다, 데이비스
부인. 그러나 누가 무슨 이유로 스키를 훔쳤는지 확실한 짐작은 하고 있읍니다.
지금은 그 이상은 말씀드리지 않겠읍니다."
"제발 지금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파라비치니 씨가 말했다.
"그런 설명은 흥분된 마지막 순간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오."
"아닙니까? 그렇다면 형사님은 뭔가 잘못 알고 있군요. 내 생각에 이건
게임입니다─어떤 사람에게는요."
"살인범은 살인을 즐기고 있어요." 몰리가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몰리는 얼굴을 붉혔다.
"트로터 형사님이 제게 한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에요."
트로터 형사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이 일이 마치
추리소설처럼 스릴 넘치는 사건인양 마지막 순간이란 말까지 하셨는데, 이건
현실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크리스터퍼 렌이 손가락을 목에다
대며 말했다.
"이제 그만들 하시죠."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형사님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얘기해 줄 겁니다."
트로터 형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사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전에 여러분의 설명을 들었읍니다. 그 설명은 보일 부인이 살해당한
시간에 여러분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읍니다. 렌 씨와 데이비스 씨는
각자의 침실에 있었고, 데이비스 부인은 주방에 있었읍니다. 메트카프 소령님은
지하실에 있었고, 파라비치니 씨는 이곳 거실에 있었읍니다."
그는 잠시 뒤 다시 계속했다.
"이상은 여러분이 말씀하셨던 겁니다. 나는 여러분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읍니다. 사실일 수도 있겠고─아닐 수도 있읍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네 사람은 진실을 말씀하셨지만─한 사람은 거짓말을 했읍니다.
누굽니까?"
트로터 형사는 한 사람씩 훑어보았다. 입을 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읍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을 찾아내면─살인범이 누구인가도 알게 되는
겁니다."
가일즈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다른 이유로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난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데이비스 씨."
"그런데 어떤 계획입니까? 우리의 설명의 진실인지 아닌지 밝혀낼 방법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읍니까?"
"그렇죠. 하지만, 여러분이 그 당시와 똑같은 행동을 한 번 더 해주신다면
어떻겠읍니까?"
"아─" 메트카프 소령이 경멸하는 태도로 말했다.
"범죄의 재구성이군요. 외국 방식이죠."
"범죄이 재 구성이 아닙니다. 결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행동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그 방법에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읍니다."
"연극을 해보라는 말씀인가요?" 몰리가 물었다.
"예, 그런 겁니다, 데이비스 부인."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안감이 감도는 그런 침묵이었다. '이건 함정이야' 몰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함정이야─하지만 알 수 없어. 무슨 이유로─'
누군가가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 한 사람의 범인과 네 명의 결백한 사람이
아니라, 다섯 명의 범인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섯 사람이 의미스럽게
곁 눈짓을 하며, 결백을 증명할 행동을 요구하는 확신에 찬 미소짓는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때 크리스토퍼가 갑자기 소리쳤다.
"알 수 없군요─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똑같은 행동을 다시 한 번 하라고 해놓고
도대체 뭘 알아내려는 겁니까? 이건 우스운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렌 씨?"
"좋습니다. 당신 말대로 해보겠읍니다." 가일즈가 천천히 말했다.
"협력하겠어요. 그 당시와 똑같이 하면 되는겁니까?"
"예, 같은 행동을 해주시면 됩니다."
메트카프 소령은 토로터 형사의 말을 듣자 뭔가를 알겠다는 듯 예리한 눈빛으로
트로터 형사를 쳐다보았다. 트로터 형사가 다시 말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어떤 멜로디를 치고 있었다고 했읍니다.
그 행동을 다시 한 번 해주시겠읍니까, 파라비치니 씨?"
"물론 해드리죠, 형사님."
파라비치니 씨는 깡총거리며 방을 가로질러 가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지금부터 피아노의 거장께서 살인을 위한 주제곡을 연주해 드리겠읍니다."
그는 허풍을 떨며 말했다. 그는 싱긋 웃고 나서 한 손가락을 세련되게 움직이며
'세마리의 눈먼 쥐'를 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즐기고 있어. 즐기고 있는거야.'
몰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넓은 거실에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피아노 소리는
무시무시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파라비치니 씨." 트로터 형사가 말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도 같은 멜로디를 치셨죠?"
"예, 그랬읍니다. 이 멜로디를 세 번 되풀이해서 쳤읍니다."
트로터 형사가 몰리에게 돌아서며 물었다.
"피아노를 칠 줄 아시죠, 데이비스 부인?"
"예, 트로터 형사님."
"파라비치니 씨가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멜로디를 칠 수 있겠읍니까?"
"예, 물론이죠."
"그러면 피아노 앞으로 가서 내가 신호를 보내면 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줄실까요?"
몰리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는 피아노 옆으로천천히 걸어갔다.
파라비치니씨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항의했다.
"형사님, 우리는 각자 자기가 한 역할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피아노에 앉아 있었던 사람은 나였읍니다."
"당시의 상황과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된느 것이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할
필요는 없읍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이런 겁니다, 데이비스 씨. 여러분이 하신 말씀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특히 어떤 한 사람의 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자, 여러분의 위치를 지시하겠읍니다. 데이비스 부인은 이곳 거실 피아노
앞에 계시고, 렌 씨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살피고 계십시오. 파라비치니
씨는 렌 씨의 침실로 가서 휘파람을 불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십시오.
'세 마리의 눈먼 쥐'를 휘파람으로 부는 겁니다. 메트카프 소령님은 데이비스 씨의
침실로 가서 전화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데이비스 씨는 홀의 벽장 속을
들여다보시고 지하실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네 사람은 천천히 거실문으로 걸어갔다.
트로터 형사는 그들 뒤를 따라가며 뒤돌아보며 말했다.
"50까지 센 다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세요, 데이비스 부인."
그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거실으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파라비치니 씨가,
"경찰이 실내 게임을 이렇게 좋아하는지는 몰랐읍니다." 하고 말하는 소리가
몰리에게 들려왔다.
"48, 49, 50."
몰리는 트로터 형사가 시키는 대로 숫자를 50까지 세고 나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다시 부드럽고도 오싹하는 멜로디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세 마리의 눈먼 쥐
그들이 달리는 것을 보세요.....
몰리는 심장이 점점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파라비치니씨가 말했듯이
이상할이만큼 잊혀지지 않는 잔인한 가사였다. 어른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했을
그런 불행한 일을 무관심하게 넘겨 버리는 어린애들의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가사였다. 위층에서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크리스토러 렌의 역할을 하고
있는 파라비치니 씨가 크리스토퍼의 침실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옆방의 서재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트로터 형사가 라디오를 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보일 부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데 왜? 무엇 때문에 그 부인의 역할을 하는 걸까? 함정은 무엇일까?'
몰리는 함정이 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가 있었다. 갑자기 찬 바람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갔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닫힌 게 분명했다.
'누군가가 거실로 들어온 모양이지─아니야, 거실에는 아무도 없어.' 몰리는 별안간
두려움을 느꼈다. '누가 들어온다면? 만일 파라비치니 씨가 깡총거리며 뛰어 들어와
피아노 옆으로 다가와서 긴 손가락을 내밀며─'
'아, 부인은 지금 자신의 장송곡을 연주하고 있군요, 행복하시겠읍니다─'
말도 안 돼.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 그런 상상을 하면 안돼.파라비치니 씨가
지금 위층에서 불고 있는 휘파람 소리가 들리잖아. 내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그가
듣고 있듯이. 그 생각이 떠오르자 몰리는 피아노에서 손을 땔 뻔했다.
'보일 부인이 살해당한 시각에 파리비치니 씨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어! 그것이 함정이었을까? 파라비치니 씨는 피아를 치지 않았던게 아닐까?
거실에 있지도 않았고 서재에 있어다면? 서제에서 보일 부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트로터 형사가 몰리에게 피아노를 치라고 했을 때 파라비치니 씨는
무척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작은소리로 피아노를 쳤다는 것을 강조했었다.
물론 그는 피아노를 아주 작은 소리로 쳤기 때문에 거실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에게는 들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기에, 작은 소리라는 말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 때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했던 사람이 치고 내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면─트로터 형사는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거짓말을 한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거실 문이 열렸다. 파라비치니 씨가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던 몰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트로터 형사였다.
그 멜로디를 세번 되풀이해서 치고 난 다음에 그가 들어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데이비스 부인." 그가 말했다. 그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또한 태도도 활기차고 자신이 있어 보였다. 몰리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때며,
"원하는 결과를 얻으셨나요?" 하고 물었다.
"예, 내가 원하던 바로 그 결과를 얻었읍니다."
트로터 형사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뭐예요? 누구예요?"
"모르시겠읍니까? 데이비스 부인? 자, 그건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부인은 정말 어리석군요. 부인은 내가 세 번째 희생자를 추적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읍니다. 그 결과 당신은 심각한 위험에 빠진 겁니다."
"제가요? 무슨 말씀이죠?"
"부인이 솔직하지 않았다는 뜻입다. 데이비스 부인, 부인은 내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읍니다─보일 부인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모르실 리가 없죠. 내가 롱리지 농장 사퓻? 대해 처음 말했을 때 부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전부 알고 있었죠. 그래서 부인은 당황했었죠. 보일 부인이
이 지방에서 전쟁 고아를 입양시키는 일을 맞고 있었던 장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도 부인이었읍니다. 보일 부인과 당신은 이 지방 출신이죠. 그래서 나는 세
번째 희생자가 누구일까 하고 추측해 보았을 때, 그건 바로 부인이어야 한다고
단정한 겁니다. 부인의 행동과 말은 롱리지 농장 사건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읍니다. 우리 경찰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몰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전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나두 그건 이해할 수 있읍니다." 트로터 형사의 목소리가 약간 달라졌다.
"결혼 전 부인의이름은 웨인라이트였죠?"
"예."
"그런데, 부인의 실제 나이는 부인이 말하는 나이보다 약간 많죠?
1940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부인은 에비베일 학교의 교사였죠?"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데이비스 부인."
"난 아니에요. 사실이에요."
"죽은 그 아이는 죽기 전에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었죠. 우표를 훔쳐서 붙였어요.
그는 편지에다 도와 달라고 썼어요.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던
겁니다. 자기 반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왜 안 나오는지 알아봐야 하는것이
선생님이 해야 할이 아닙니까? 하지만, 부인은 알아보지 않았읍니다. 그 불쌍한
어린애의 간절한 편지를 당신은 모른 체해 버린 겁니다."
"그만하세요." 몰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형사님은 지금 제 언니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신 거예요. 언니는 학교 선생님이었어요. 그렇지만, 언니는 그 편지를 모른
체하진 않았어요. 언니는 그 때 아팠어요─폐렴을 앓고 있었던 거예요. 그 아이가
죽고 나서야 그 편지를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일 때문에 언니는 얼마나
괴로와했는지 몰라요. 말도 못 할 정도로 괴로와했어요. 언니는 무척 예민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 일은 언니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언니가 그토록
괴로와했기 때문에 저도 그 일을 다시는 생각하기 싫었어요. 그건 악몽과도
같았어요."
몰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뒤 손을 내렸을 때 트로터 형사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부인의 언니였군요. 하지만 어쨌든─" 그가 갑자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당신의 언니가─내 동생─"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행복하게.
몰리는 그가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는 경찰이 리볼버 권총을 안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요?"
"경찰은 리볼버 권총을 안 가지고 다니죠." 그가─그 젊은이가 말했다.
"그렇지만, 데이비스 부인, 나는 경찰이 아니거든요. 내가 바로 짐이에요.
죽은 조지의 형이란 말입다. 당신은 내가 시내에서 공중전화로 트로터 형사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경찰아리고 생각한 거죠.
난 이곳에 도착했을 때 집밖의 저노하선을 끊어버렸어요. 그래야만 당신이 다시
경찰서로 전화를 못 할테니까요."
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권총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데이비스 부인─소리를 지른다면─즉시 방아쇠를 당기고
말겠소."
그는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어린애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래요. 난 조지의 형이에요. 조지는 롱리지 농장에서 죽었지. 그 나쁜 여자가
우릴 그리로 보냈어요. 그리고, 그 농부의 아내는 우리를 잔인하게 학대했고,
그런데 당신은 우리를─세 마리의 눈먼 쥐를 도와 주기 않았어.
난 그 때 내가 크면 당신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맹세했지. 굳게 맹세했어.
그때부터 그 생각만 했어."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군대에서 사람들은 날 괴롭혔어. 그 의사는 자꾸 질문을 했지─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어. 나는 그 사람들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할까 봐 겁이 났던 거야.
그렇지만 이젠 나도 어른이야. 어른들은 하고 싶은것은 뭐든지 할 수 있거든."
몰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해. 생각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짐, 당신은 무사히 도망칠 수 없어요."
그의 표정이 어두어졌다. "누가 내 스키를 숨겼어. 그걸 찾을 수가 없어."
그러더니 그는 다시 웃었다. "그러나 상관없이. 이건 당신 남편의 총이니까.
그의 서랍에서 꺼냈지. 사람들은 당신 남편이 당신을 쏘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어쨌든─상관없는 일이지. 지금까지 정말 재미있었어. 경찰인 체한 건 정말
기막히게 재미있었어! 런던의 그 여자─나를 알아 봤을 때의 그 얼굴 표정.
그리고 오늘 아침에 죽인 그 멍청한 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어디선가 으스스한 휘파람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누군가가 '세 마리의 눈먼 쥐'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트로터가 깜짝 놀라자 권총이 흔들렸다. 어떤 목소리가,
"엎드려요, 데이디스 부인!" 하고 외쳤다.
몰리가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문 옆의소파 뒤에 숨어 있던 메트카프 소령이
일어나면서 몸을 날려 트로터를 덮쳤다. 권총이 발사되면서 총알은 죽은 에모리
양이 아끼던 유화 중의 하나에 박혔다. 잠시 뒤에 가일즈가 뛰어 들어오고, 뒤따라
크리스토퍼와 파라비치니 씨가 밀려 들어오자 거실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메트카프 소령은 트로터를 꽉 붙잡은 채로 짧게 힘주어 말했다.
"데이비스 부인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이에 소파 뒤로 숨어들었죠. 난 처음부터
이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읍니다. 나는 이 사람이 경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경찰은 바로 나니까요─나는 태너 경감입니다. 메트카프 소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 분 대신 내가 온 겁니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누군가를 현장에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죠. 자, 젊은이─"
태너 경감은 이제 온순해진 트로터에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게. 아무도 자네를 헤지진 않을걸세. 자네는 이제 괜찮아.
우리가 돌봐주겠네."
그 젊은이는 굳은 얼굴을 한 채 가엾은 어린애의 목소리로 물었다.
"조지가 내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요?"
"아니야, 조지는 화를 내지 않을 거야." 메트카프, 아니 태너 경감이 대답했다.
그는 가일즈 곁에 지나면서 말했다.
"불쌍하게도 완전히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소."
그들이 나가자, 파라비치니 씨가 크리스토퍼의 팔을 툭치며 말했다.
"당신도 나와 함께 나갑시다."
단둘이 남은 몰리와 가일즈와 서로 마주보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굳게
껴안았다. 가일즈가 먼저 말했다.
"여보 괜찮아?"
"예, 괜찮아요. 여보, 그 동안 내 정신이 어떻게 되었었나봐요. 난 정말
당신인줄─당신, 그날 왜 런던에 갔었죠?"
"내일이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잖아. 그래서 당신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갔었어.
당신에게 미리 알리지 않으려고 했던거야."
"어머, 이럴 수가! 나도 당신 선물을 사러 갔었어요. 당신 몰래 말이에요."
"난 그 이상한 젊은 녀석에게 불 같은 질투를 느끼고 있었어. 머리가 이상했었나
봐. 미안해. 날 용서해요. 여보."
그 때 문이 열리며 파라비치니 씨가 염소처럼 뛰어들어왔다.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화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군요─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아, 그런데 난 이제
작별을 해야겠어요. 경찰차가 눈을 뚫고 이곳까지 왔군요. 나도 그 차를 타도록
해야겠어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몰리의 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멀지않아 나는 몇 가지 골치아픈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그렇지만 그런 것쯤은
자신있게 처리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만일 부인이 어떤 상자를 배달받게 되면
─거위, 즉 칠면조와 타조의 간 통조림 몇 개,햄, 나일론 스타킹등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받게 되면, 그건 매력적인 부인에게 드리는 내 찬사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데이비스 씨, 하숙비는 테이블 위에 놓아 두었읍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의 손에 키스를 하고 깡총거리며 방을 나갔다.
"나일론 스타킹?" 몰리가 중얼거렸다. "타조의 간? 파라비치니 씨는 뭘 하는
사람이죠? 산타크로스일까요?"
"몰래 물건을 사고 파는 그런 장사꾼인 것 같아." 가일즈가 말했다.
그 때 크리스토퍼 렌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디밀고 말했다.
"저─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주방에서 뭔가 타는 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있어요.
내가 가볼까요?"
그러자 몰리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내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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