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김유식-맥주전쟁

by Casey,Riley 2023. 6. 12.
반응형


             <<맥주전쟁>>              김유식
                                                              
 소 제 목 : Text 01
     1999년 9월 19일. 일요일. 오후 4시 20분. 공주 교도소 2동 상6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돈 달라고 했는데 배 째라는 거야! 일 시킬 때는 굽신거리더니 말이지. 시팔
그래두 꾹 참았어. 잘 못하면  돈 떼이겠다 싶어서 다만 얼마만이라도  달라고
했지. 이자? 무슨 이자냐...원금도 못 받는데..."

 "그래서요?"

 "아...글쎄...그때 누군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녀석이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사장님 결제  부탁드립니다.』 하잖겠어?  그랬더니 이  사장  녀석이『얼마
지?』하면서 지갑에서 백 사십만 원인가를 꺼내 주잖어....돈 한푼 없어서  아
침도 굶었다는 새끼가...참나.."

 "그 새끼 나쁜 새끼네요."

 "그래서 그 기생오라비한테 물었어.『미안한데  그거 무슨 결제요?』  하니까
이 기생오라비 녀석이 대답을 안 하는 거야. 그러더니 영수증을 하나 끊어주더
라고 내가 냅다 빼앗아서 봤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내가 침을 튀겨가며 떠들기에 정신없다. 다들 무료하게
보내는 따뜻한 가을의 일요일 오후인데 이 사내는 신입이 들어올 때마다  자신
의 구속 사연을 자랑인양 들려주는 것이 취미였다. 신입은 신입대로 방안 분위
기도 잘 모를 때인지라 누가 이렇게 말을 걸어주니 흥미 있는 척 들어준다. 어
제 이곳으로 이감되어 온 신입은 폭력 재범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는데
곧 출소할 예정이었다. 징역 기간이 짧은데도 이감 온 것을 보니 사고를 쳤거
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보통은 지내고 있던 교도
소의 모범 재소자 실에서 출소 대기하며 지내는 것이 상례였지만 공주  교도소
의 이곳도 모범 재소자 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안 개방 교도소 같은 곳만큼은
아니어도 미결수들이 법정이나 교도소 밖으로 나갈 때는 사복을 입히는 등  인
권이 많이 개선된 교도소로도 이름이 높았다.

 "아...글쎄....영수증엔 말이야 이렇게  써 있던  거야.『황진이』라고..개새
끼!"

 "황진이가 뭔데요?"

 "가짜 과부들 득실거리는 과부촌이거든. 같은 동네에 있으니까 내가 모를  리
없지."

 "허...그래서요?"

 "잠깐...시팔 목 탄다. 물 한잔 마시고..."

 "......"

 사내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또 물었어. 『이 사장! 그래 인테리어 해 준 값 칠십만 원이 없
다는 사람이 황진이에는 무슨 돈으로 갔나? 정말 이럴 거야?』 하면서  대들었
더니 그 밑에 녀석이 나서는 거야! 『박 사장님 너무 하십니다.』 이러잖아."

 "밑에 녀석이라뇨?"

 "아...그 자식이 데리고 있는 부하 직원이지 뭐. 그래서 『넌 뭐야? 자네 일
아니니까 빠져!』 했지. 그랬더니 이 자식이 벽지하고 장식해준 거 다 뜯어 가
라잖아. 인테리어 했던 거 없던 일로 하겠다나?"

 "아니 그런 나쁜 새끼가 있어요? 그래서요?"

 "내가 그거 같은 동네 사무실이라고  얼마나 정성 들여 해줬는데  뜯어가라니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 같은 동네라고 계약금도 안 받고 한 거였어. 내가 다시
잘 말했지.『이 사장. 우리 이러지 맙시다. 돈 준다고 하면서 지금 몇 달째 안
주고 있잖아요. 내 오늘 다 달라는 것도 아니요. 다만 몇 십만 원이라도 줘야
되지 않겠어? 오늘 우리 딸애 스케치북 사달라는 것도 못 사줘서 속상하단 말
요.』하면서 애원했지."

 "한 번 안주는 새끼는 그래도 계속 안 주잖아요?"


                                            
 소 제 목 : Text 02


 "맞아. 밑에 녀석이『우리 사장님 돈 없으니까 다음에 오세요.』 하면서 또 나

서더라고...그 때 사장이란 새끼가 경리 보는 애한테  묻는 거야. 『박양아. 요

즘 스케치북이 얼마냐?』 그랬더니 경리가『이, 삼천  원쯤 하는데요.』 하더라

고...난 무슨 얘기하나 했더니, 사장 자식이 지갑에서  삼천 원 주면서, 그걸로 

애 스케치북인가 뭔가 사주고 다음에 다시 오라더만..."



 "햐...그런 개새끼는 밖에만 있었어도 내가 조져 버리는 건데!"



 "나도 야마 돌았지! 그렇다고 내가 뭐 힘이 있나? 싸움을 잘하겠나? 버럭 소리

를 질렀어!『그 돈 더러워서 안 받고 만다! 잘  먹고 잘 살아봐라!』 그랬더니, 

사장 새끼가 칠십 만원 굳었다며  경리한테 점심으로 청요리 시켜  먹자고 하는 

거야. 경리가 아무 말 없이  중국집에 전화 거는 거  보고 있으려니까 폭발하게 

되더만..."



 사내는 아직도 이가 갈린다는 듯이 연신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뵈는 게 없었지. 경리 책상 위에 거 뭐야? 그거 종이에 구멍 뚫는 거 있잖아? 

그걸 들어서 냅다 후려쳤어! 이 자식! 내가 딱 칠십 만 원 어치만 패겠다! 하면

서 대여섯 번 호박통을 찍었더니 직원 새끼는 파출소에 신고한답시고 도망가고, 

누가 내 귀를 물어뜯잖아. 정신 차리고 보니까 경리  년이 내 귀를 물어뜯고 있

더라구."



 "아니 그 년은 왜 형님 귀를 물어뜯습니까?"



 빼빼 마른 사내는 탄탄해 보이는 체구의 신참이 자신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주

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면서 계속 떠들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경리는 고등학생인데 월급을 안 주는 모양이야. 그 이 

사장이란 놈이 가끔 데리고 잘  때마다 몇 만 원씩  줬던 모양이더라구. 그래서 

정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가재는 게 편이라고...시팔 그래서  내 귀 이렇게 됐잖

아."



 사내는 뿌듯한 표정으로 신참에게 자신의 귀를  보여주었다. 사내의 귀는 괴물

이 뜯어먹은 것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난 귀가 아파도 계속 사장 놈을 줘 팼지! 많이도 아냐. 딱 칠십 만 원 어치."



 "그래서 달리셨군요?"



 "난 칠십 만 원어치 팬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사장  새끼가 성형해야 어쩐다 

하면서 칠천 만 원  달라잖아. 그냥 들어가  살겠다고 했지. 여긴  굶진 않으니

까...."



 "아니 진단이 어떻게 나왔기에 칠천 만 원이나 달래요?"



 "아...그게..."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나머지 재소자들은 책을 읽거나 장기를 두고 있었다. 

창살 근처에서 비둘기에게 땅콩을 주고 있던 이광혁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어이 동생. 넌 나가면 뭐 할 거냐?"



나직하고도 힘있는 목소리로 묻는 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양 눈매가 매섭게 생긴 

30대 중반의 재소자였다. 다려 입은 듯한 깨끗한  사제 재소자복을 입고 있어서

인지 전형적인 "빵잽이"로 보였다.



 "배운 것이 도둑질인데 뭐 하겠습니까요. 형님. 다시 우리 형님 모시고 살아야

지요. 우리 형님은 잘 계시는지..."



 "동생은 다음에도 같은 거로 달리면 감호처분 받겠구만?"



 "에고...형님. 우리가 언제 뭐 그런 거 걱정했습디까? 사회에서나 여기서나 인

생 좆같은 거야 매한가지 아뇨?"



이광혁은 징역살이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으며 최명규에게 대답했다. 






 소 제 목 : Text 03
 이광혁. 올해 서른 두 살. 폭력 전과를 비롯해서  다섯 개의 전과를 가지고 있
고 4년 전까지는 이름만 겨우 남아있던  신목포파의 행동대장이었다. 원래 출신
은 서울이었으나 고교시절 시내 버스  안에서 다른 고등학교 학생  십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나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잘 따르던 한 교사의 주선으
로 외삼촌이 있는 목포의 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된 것이  그가 한국 폭력계를 좌
지우지 한다는 전라도 깡패가 된 비결이었다.
 
 '90년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 때 신목포파는  이광혁을 제외한 나머지 조직원들
이 차례차례 구속되었고 조직은 무너졌다. 신목포파의 두목 유정후는 구속된 조
직원들의 뒤를 봐주다가 조직의 이권 대부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겼고, 자신
이 구속된 다음에는 애지중지 여기던  목포의 나이트 클럽과 자신이  살고 있던
건물마저 팔아치웠다. 전국의 조직폭력배들이 조직이고 뭐고  저만 살겠다고 서
로 이간질과 고자질하던 시기에  유정후의 "동생 다루기"는  다른 폭력배들에게
화제가 되었고 형사나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마음씨  여린 따뜻한 보스"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검찰 수사에서도 유정후는 구속된 동생들의 범죄는 자신이 시킨
것이라고 우겨댔으나 이미 형 확정을  받고 복역하고 있는 재소자들을  다시 소
환, 조사하기 꺼려한 검사는 다른 두목급보다는 약간  적은 10년 형을 구형했고
결국 유정후는 8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신목포파에서 혼자 남은 이광혁은  수십 개월 잠수함을 타다  뒤늦게 붙들려왔
다. 조직이 무너진 다음에는 도움을 받을 만한 처지의 아는 사람들도 없었고 잠
수 자금도 떨어졌다. 전담 수사관들이 그의 행방을 쫓는 와중에 한 곳에서 잘해
봤자 한 달 정도 밖에 지낼 수 없던 도망자의 심정도 그가 잡히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 운이 좋았던 것은 정권이 바뀌면서 재판부가 그에게 비
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었던  것이었다. 몇 년이나 늦게  구속되고도 출소는
다른 조직원들의 출소 시기와 비슷하게 맞춰졌다.
 
 그가 석 달 전 영등포 교도소에서 이곳으로 이감  왔을 때만해도 사방 안의 분
위기는 냉랭했다. 봉사원인 최명규 역시 조직폭력으로  들어온 유명한 주먹잡이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최명규는 부산 해운대파의 보스 이중은의 오른팔 격이었
고, 해운대파는 전라계의 조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0여 년 전
해운대파의 이중은은 후배의 부탁으로 서울 영등포  지역에 성인 오락실을 세운
적이 있었다. 전라도 출신이 서울 폭력계를 장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전라계가 침범한 적이 없던 곳이 영등포였다. 워낙  이권이 높은 지역이었기 때
문에 서울 출신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영등포를 사수해서인지 서울에서도 영등포
는 의미가 다른 곳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OB파니  서방파니 하는 전라도 조직들
이 서울에서 활개를 쳤기에 암묵적으로 경상도, 특히  부산의 폭력 조직들은 영
등포의 서울 조직과 서로 마찰 빚기를 꺼려했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서 특
별한 사건이 아닌 한 이권 다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오락실 설립 당시 이중은은 표면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영등포를 나와바리(관할
구역)로 삼고 있던 "감자"라는 폭력계의 대선배에게 상납을 바치도록 한 덕택에
오락실 운영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광주파의 조직원 한 명이  때마침 오락실에
들렀던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부산 깡패들이  영등포를 넘본다."는 소문을
흘려 결국 오락실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감자에게 물심양면으로 정중하게 사과를 한 후 오락실을 처분한 이중은은 다섯
명의 조직원을 동원해서 광주파가 관리하는 천호동의 한 호텔 나이트 클럽을 급
습했었고 이때 이십 대 중반의 똘똘한 꼬붕 최명규의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최
명규는 광주파의 중간 보스인 흰곰을 비롯해서 조직원 네 명을 사실상 은퇴시켰
다. 어찌나 잔악하게 굴었는지 그때 최명규의 칼부림을  봤던 나이트 클럽 안의
손님들 중에는 공포에 질려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닌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 사건 이후로 최명규와 해운대파는 복수하겠다는 전라도 출신 조직들의 표적
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해운대파로 청탁이나 폭력 청
부가 줄을 이었다. 심지어 다른 조직간의 전쟁에도 조직마다 최명규를 빌려오고
자 이중은에게 부탁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소 제 목 : Text 04


 폭력계에서 최명규의 칼 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는데, 희미하게 웃으며 그가 양

복 안으로 두 손을 넣어 한 손에 세 개씩, 모두 여섯 개의 칼을 꺼내는 동안 상

대방은 전혀 그의 손놀림을 보지 못하고, 어느 새인가  그 칼 중 하나는 상대방

의 허벅지나 옆구리에 박혀 있기 일쑤였다. 소문에는 그가 칼 한 자루를 던져서

30미터 밖의 사과를 두 조각 낸다고도 했다.



 최명규는 따르는 동생들에게 혹독하고 엄하게 대하기로도  유명했으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가끔씩 동생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닭과 개를 상대로 칼 쓰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동생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강

한 것을 신봉하며, 명령에 절대 복종할 줄 아는  건달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

는 국내 폭력 조직의 계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으며 싸움꾼으로 소문난 폭력배들

의 장, 단점을 분석해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



 실력이나 두둑한 배짱, 동생들을  휘어잡는 리더십 등을  감안하면 해운대파를

떠나 충분히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는 그였으나 이중은의 명령에는  한 번도

반대하는 적도, 일을 잘못 처리하는 적도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고의 파이터였던 시라소니 이성순(李聖淳)을 깊이 흠모하

고 있던 최명규는 깡패답지 않게  술과 담배, 여자를 멀리했고,  몸매와 긴장감

유지를 위해 과식도 하지 않았다. 단점이라면  지나치리만큼 까다로운 승부에의

집착과 다혈질이면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성격을 꼽을 수 있겠지만 상대

에게 칼을 쓰는데 있어서 생명에 지장 있는 부분은 피해서 찌르고, 쓰러진 상대

를 가격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또 그의 차가운 성격은  칼과  주먹이 난무하는

폭력계에서는 어찌 보면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과거 이광혁의 신목포파는 해운대파와 다툼이  없었고 이광혁은 자신보

다 나이도 많고 명성도 높은 최명규를 선배로서  깍듯하게 대접했다. 최명규 역

시 이광혁의 경력에 맞게 대우해  주었기에 두 사람은 별다른 문제 없이 출소일

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행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다.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게 된 계기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이광혁이 이곳으로 이감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목공반을 찾아갔던

최명규는 자신의 발 밑으로  나무토막이 하나 굴러오자 이를  피했다. 누군가가

그를 향해 잘못 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 덧붙여  『야. 그것 좀 이리 던

져라.』 라고 말했다. 피식 웃으면서 자리를 뜨려는 최명규의 뒤통수에『자식이

던지라면 던질 것이지.』라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폭력계 선배

재소자들과 보안과장을 제외하고는 소 내 누구도,  교도관들마저도 함부로 대하

지 못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도발이었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

고 있는 상대를 가늠해보니 목공반  반장을 맡고 있는 고기현이  틀림없어 보였

다.



 십여 년 간 원양어선의 기관사로 있었다는 고기현은 워낙 덩치가 좋아서 "남태

평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유도에도 조예가 있었으나 건달은 아니었다. 단

지 자신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최명규가 소 내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터였다. 다혈질의 최명규가 옆으로 성큼 걸어가 톱을 들었다

싶은 순간 번개같이 고기현에게 날렸다. 이때 더 빠른 속도로 다가가  최명규의

손을 떠난 톱을 걷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광혁이었다. 톱은 공중에

서 방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떨어졌으며 톱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세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고기현으로서는  최명규가 설사 화가 났더라도 바로 톱을  던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최명규는 자신의 행동을 미리  알아채고 막아

낸 이광혁의 빠른 몸놀림에 몹시 놀랐다. 그와 반대로 이광혁은 손으로 톱을 쳐

내긴 했으나 톱에 실렸던 힘에 자신의 팔이 저려 오는 것을 느끼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이광혁이 조용한 목소리로 "형님.  곧 나가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며  최명규에게  말을 건내자 최명규는 아무 말 없이 목공반을 떠

났던 사건이었다. 까딱하면 징벌을 넘어 징역살이가 늘어날 뻔했던 그로서는 내

심 이광혁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 제 목 : Text 05


 1999년 11월 5일 금요일

 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렉싱턴 스트리트(Lexington St.) 펍(Pub) 블루 라이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점심 시간에 이곳으로 식사를 하러 오는  손님들은 드물었다. 주택가가 아니라 

단골도 적었거니와 주위에는 야채상과 야채를 사러오는  손님들, 소호를 지나다

니다 잘못 들어선 관광객, 근처  학교들의 학생들 뿐으로 두  번씩 얼굴 보기가 

어려운 뜨내기 손님들이 많았다. 소호 지역은 저녁이  되면 시끌벅적해 지는 곳

이었지만 소호에서도 렉싱턴 스트리트는 예외였다.



 영업적인 측면에서는 주택가가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런던 외곽의 주택 지역보

다 불리했지만 늦은 오후부터 저녁 시간까지는 어느 주택 지역보다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부터는  - 어느 펍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 일반 

손님들로 넘쳐나는 데다 근처의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한 학교에서 스

쿨 펍(School Pub)을 열기 때문에 펍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발 디딜 틈 없게 되

었다. 학생들은 값싼 파인트(Pint, 0.57리터)나 하프 파인트(Half Pint) 크기의 

맥주잔을 손에 쥐고 찔끔찔끔 마시기 때문에 금요일의 스쿨 펍이라고 해도 매상

이 크게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쉴새없이 바쁘고 손님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

면 펍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같이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료했던 오후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깔리자 어김없이 스쿨 펍이 열렸다. 매번

은 아니라도 거의 매주 금요일이 되면 걸어서 200미터  거리에 있는 한 영어 학

교에서는 알림판을 통해 학생들에게  방과 후 블루 라이언으로  모이도록 했고, 

학생들은 선생들과 한데 어울려 밤늦은 시간까지 떠들며 술잔을 기울였다.



 "어 파인트 오브 포스터스 플리즈.(포스터스 맥주 1파인트 주세요.)" 



약간 두터운 재킷을 입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인파의  틈을 헤치고 나와, 

바(Bar)에서 정신없이 맥주를 따르고 있는 사내에게 주문했다. 사내는 손잡이를 

당겨 1파인트 잔에 맥주를  따르려고 했으나 마침 맥주가  떨어지고 꼭지에서는 

거품만 쏟아졌다. 능숙한 솜씨로 바 아래서 빈 맥주통을 꺼내고 새로운 통을 연

결한 사내는 몇 번 손잡이를  당겨 거품을 뽑아내고 나서 한  잔 가득히 시원해 

보이는 맥주를 담아냈다. 미소를 지으며 거품이 흘러  넘치는 맥주잔을 바 위에 

올려놓은 사내는 "1파운드 80펜스" 라고 말한 뒤,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기 위

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새로운  잔에 맥주를 따르며 20펜스  짜리 동전을 꺼

내, 조금 전에 주문했던 여성에게 내밀고 1 파운드 짜리  동전 두 개를 받아 금

전출납기에 넣었다.



 사내의 이름은 로버트 노블, 보통은 보비라 불리는 거한으로 블루 라이언의 랜

드로드(Landlord)였다. 사내 말고도 블루 라이언 안에는  깨끗하게 차려입은 두 

명의 남녀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일을 돕고 있었고 그  좁은 바 안에는 벗겨진 

머리에, 손에 코트를 들고 있는 50대의 동양인이 펍 안을 바라다보고 있는 중이

었다.



 블루 라이언이 세워진 것은 19세기 말이었고 한 번의  이사를 거쳤다. 보비 이

전에는 보비의 아버지인 이안 노블이 운영했었고, 지금도 펍의 소유주로 되어있

으나 더 이상 펍의 일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가끔씩 몇 안 되는 단골 손님들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 원래 펍은 오후 3시부터 5시 30

분까지는 문을 닫게 되어 있었으나  지난 1988년 여름부터 법률  개정으로 인해 

이런 규제가 없어지자, 더욱 힘이  들게 된 이안 노블은  아들에게 펍의 운영을 

맡기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큰돈을 만지는 장사는 아니었지만 런던의 펍 

대부분이 그렇듯 블루 라이언도 매일매일 새롭게  대하는 손님들의 웃고 대화하

는 모습에 일종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수세기의 역사를 지닌 런던의 

펍을 이끌어온 힘이었다.



 오후 11시가 넘어 마지막 주문 시간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붉어진 얼굴

에 조금씩 취해 보이는 학생 무리들이 다시 주문을 하기 위해 바로 모여들었다. 

바 안에 앉아있던 50대의 동양인은 11시가 넘어도 줄어들지 않는 손님들을 보며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일어나 힘겹게  3층으로 올라갔다. 블루  라이언은 건물의 

1, 2, 3층을 모두 쓰고 있었지만 학생 손님들이 넘치다 보니 층계마저도 인산인

해를 이루었다. 이것이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스쿨  펍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

는 동양인은 3층의 구석에 위치한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 백발의 노인 앞에 

앉았다.



 소 제 목 : Text 06


 피곤했던지 노인은 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으며, 벽 쪽의  TV는 켜진 채로 채널 

4의 방송을 내보내는 중이었다. 노인이 깨지 않게 코트를 조심스레 내려둔 동양

인은 이제는 왜소해진 체구의  노인을 바라보며 희미해졌지만, 잊을  수는 없는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초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벽안과 금발의 젊은 외국인 

장교와 함께 집으로 왔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아버지는 당시 소령의 계급으로 

연합군과의 연락 장교역을 맡고 있었는데 주로 미국이 아닌 다른 참전국 담당이

었다. 



 영관급 장교라고 해도 누구나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멋진 권총을  옆에 찬 

외국인 중위는 집에 올 때마다 통조림과 레이션, 밀가루, 군복 등을 산더미처럼 

놓아두고 갔으며 때로는 사병을  통해 대신 보내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장에 내다  팔았고, 그것은 가계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또래의 꼬마들이 "기브 미 쵸코렛"을  외치며 미군들 사이로 손 

벌리고 있을 때, 군인 아버지를 둔 소년은 쵸코렛을  입에서 뗀 적이 없을 정도

로 풍족하게 살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외국인 중위가 보내준 물품들을 금붙이나  은붙이로 바꾸어 가져왔고 

바꾼 금붙이의 반 정도는 외국인 중위에게 주는 것  같았지만 세세한 것까지 알 

수 있던 나이는 아니었다. 조금 더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그 외국인 중위는 자

신을 어눌한 발음으로 "나이스 보이  창환" 이라 부르며 몹시도  귀여워해 주었

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뛰어 놀았다. 한 번은 권총을 만져보다가 그에게 호

되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때 모은 재산으로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회사를 차렸고, 가족들은 남들보

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 나이스 보이라 불리웠던 창환은 대학 교

육을 마친 뒤, 유학까지 다녀왔다. 창환의 가족으로서는 그 외국인 중위가 구세

주나 마찬가지였고, 아버지는 외국인 중위가 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죽을 때

까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매년  중위의 생일과 성탄절에는 잊지  않고 값비싼 

선물을 보내주었다.



 외국인 장교의 이름은 이안 노블이라고 했다. 영국 남부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

들이었던 이안 역시 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군복을  벗고, 런던으로 가서 장사

에 손을 댔다. 그 장사는 지금까지 반세기 가깝게  이안과 그 가족의 생계 수단

이 되어왔지만, 다른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이안은 더 이상 펍을 유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김창환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노인을  깨우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인

데다가 실례인 것 같아 내일 다시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도 왁자지껄한 펍

의 1층으로 내려온 김창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바쁘게  일하고 있는 

로버트를 슬쩍 바라다보고는 묵고 있는 피카딜리  서커스의 리츠칼튼 호텔로 향

했다.



 이안 노블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이안은 자신이 빚에 쪼들리

고 있으니 여유 자금이 있다면 펍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든가, 아니면 직접 

운영해 보라고 했다. 김창환은 오죽 급박한  사정이었으면 자신에게까지 편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구미가 당기기도 했다.



 술 장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김창환은 한국에서 꽤 알

아주는 주류 유통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고, 한국의 한  맥주 회사의 지분도 상

당량 가지고 있었다. 남들은 50대라면 한창 일할  나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늙고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치의마저 장기간 요양을 권유했던 터라 이안의 제안

에 귀가 솔깃해졌다. 한국의 사업이야 동생이 관리하고  있으니 자신은 이제 일

선에서 빠져 런던 남부 해안의 브라이튼이나  헤이스팅스 같은 휴양도시에서 조

용히 지내보고 싶었다. 지난 30년  간은 사업 확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절이라 더 이상 사업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펍은 마음에  들었다. 저 정도의 크기에,  저만한 손님이라면 

투자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투자할 가치가 없더라도  투자해 줄 수밖에 없

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이안 노블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해왔

던 터라 이제 환갑이 가까워진 자신으로서도 이 때가  아니면 옛 은혜에 보답할 

기회가 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국인이 런던의 펍에 직접 투자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김창환은 자신

이 소유하고 있는 한국 회사의 런던 사무소를 개설한  뒤, 그 운영 자금을 이용

해 편법으로 돈을 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또, 펍의 운영은 로버트 노블에게 맡

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목 : Text 07


      1999년 11월 8일. 월요일. 오전 1시. 서울시 강동구 성내 2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탕탕탕!",  "문 열어! 문 열란 말야 이 새끼들아!"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2층 짜리 집 대문을 두드

리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대문 앞에는 여자 말고도 어깨가 떡 벌어지고 머리가 

짧은 두 명의 젊은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둘 

다 빌려 입은 것 같이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있었으나  한 사내는 광택이 

나는 검정 색 구두를, 다른 사내는 흰 색의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묘한 대조를 

이뤘다. 여자는 벌써 10분째나 앙칼진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정작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야이 개새끼들아! 너네가 평생 밖에 안 나오고 살 것 같냐? 빨리 안 열어?"



 고음의 여자 목소리에 하나 둘씩 동네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 쳐다보고, 밖으로 

나와보았다가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며 쳐다보는  어깨들의 눈초리에 기겁

을 하고는 모른 척 하기에 바빴다. 잠시 후, 주민의  신고를 받고 온 듯한 순경 

두 사람이 다가왔으나 이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돌아가 버렸다. 순경이 완전히 

돌아간 것을 안 여자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문 열어! 문! 내 돈 갚아!"



 이때, "땡"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자 세 사람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사내가 현관문을 세차게 흔들어 열다가 그만 현관의 유리가 깨지고 말았다.



 거실에서는 금새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얼굴의 40대  주부가 힘없이 

그들을 맞았고, 주부 뒤에는 중학생 정도의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베개를 들

고 잠옷 차림으로 떨며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문이 열려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짙은 화장의 여자가 화장대 위를 흘끔 보더니 팔을 휘저어 모두 바닥으로 떨어

뜨렸다. "김 사장! 이런 건 사서 뭘 해? 돈부터 갚고 살아야지!"



 자다가 깬 듯한 남자는 이부자리를 한 쪽으로 치우더니 묵묵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머리맡을 뒤져  일회용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이려는데 구둣발의 

사내가 라이터를 빼앗으며 말했다. "돈은 없어도 담배는 사 피우는 게벼 잉?"



사내는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며 한 마디 더 던졌다. 



 "아따! 천 삼백 원 짜리 피우고 댕기는구만..."



 다시 여자가 큰 소리로 다그쳤다.



 "언제 줄 거야? 응? 언제 줄 거냐고! 내 돈 이천만 원 빨리 줘야지!"



 거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핍박당하고 있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동시

에 우는 소리 같았다. 빚  독촉을 하던 여자는 마루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남자의 어깨를 세차게 잡아 흔들었다.



 "야...김 사장. 내가 지금 다  달래니? 이자도 필요 없으니  원금만이라도 줘! 

돈이 없으면 조금씩이라도 줘야지!"



 이때 남자가 피우고 있던 담뱃불이 여자의 팔뚝에  닿았다. "앗 뜨거워!" 외마

디를 지르며 팔을 감싸 쥐고 물러나는 여자 뒤로  구둣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미 씨부럴 놈이 돈 갚으라니깐 담뱃불로 지진다야..."



놀란 얼굴의 남자가, "안다쳤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 하면서 다시 담배

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따.. 징한 새끼...그러구두 담배 빠는구마잉. 돈은 도대체 언제 줄 거요?"



 "....."



 지금까지 아무 말 없던 흰 운동화의 사내가 바지춤을 잡고 허리띠를 풀더니 안

방 구석에 있는 20인치 TV에 대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누님. 지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부러여.  변소가 어딘지두 모르것구...어허 

시원타!"

 

                                
 소 제 목 : Text 08


 빚 독촉을 당하던 남자의 고개가, 방 안에서는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에 궁금했

는지 수평을 이뤘다가 황급히 꺽였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남자는 참담한 

표정이 되어 담배만 더욱 세차게 피워댔다. 여자가 말했다.



 "김 사장. 있으면 지금 돈 내놓고, 없으면 언제 줄 건지 말해."



 "우리 누님 바쁘신 분잉께잉. 싸게싸게 주소."



검정 색 구두의 사내도 거들었다. 



 김 사장이 꽁초만 수북히 쌓여있는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일어

서면서 말했다.



 "지금 돈이 조금 있기는 있소. 많이는 안되고..."



 "거 봐요. 누님. 직접 받으러 오니까 주잖아요."



 어느 새인가 소변을 마치고  바지를 추스린 사내가 방  한가운데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사내의 입가에는 가벼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돈이 있다는 김 사장의 말

에 희색이 만연해진 여자가 급하게 물었다. "얼마 있는데?"



 김 사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양복 안쪽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낸 후, 

전화번호를 하나 확인하고는 수화기에 손을 뻗었다.



 "재미없는 수작부리면 너 죽구 나 죽구 하는 거여."



 잠깐 흰 운동화의 사내를 쳐다본 김 사장은 기분 나쁜 것을 애써 참으려는 듯, 

역시 아무 말 없이 전화기의 보턴을 눌렀다.



 잠시 후 상대방이 나왔는지, "나다." 하며 말을 시작한  김 사장은 몇 번 긍정

과 부정이 혼합된 대답을 하더니 "좀 가지고 와라."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수

화기를 내리자마자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어울리지 않는 양복의 사내 둘과 짙은 화장의 여자는, 전화 걸던 김 사장의 말

이  '좀 가지고 와라.' 였는지, '돈 가지고 와라.' 였는지  잘 듣지 못했다. 아

마도 '좀'이나 '돈'이나 모두 돈 가지고 오라는 소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여자

가 말했다.



 "오늘 다 주는 건 아닐 테고, 얼마 가지고 온대? 얼마나 걸려?"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으니 이, 삼십 분 정도면 올 거요."



 "있을 때 진작 줬으면 우리도 이런 실례 안 하는 건데 미리미리 주지 그랬어?"



돈 가져온다는 말에 다소 누그러졌는지 여자의  말투가 아까보다는 훨씬 조용하

고 여성스럽게 변했다.



 "이십 분이라...누님! 우리 배도 살살 고픈데 야식이라도 시켜 먹읍시다."



 "형님. 거..좋구마. 족발에 소주 한 병 시키쇼."



구둣발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마, 넌 위, 아래도 없냐?"



흰 운동화의 사내가 주먹을 들어 치려는 기색을 보이자 구둣발의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미럴! 나가 시키면 될 거 아뇨?"



 "내가 시키지."



구둣발의 사내가 거실로 나가려고 하니 담배를 피우던  김 사장이 일어섰다. 이

를 흰 운동화의 사내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어허! 김 사장은 여기 있어야지."



맥없이 다시 앉은 김 사장이 또 담배를 꺼냈다. 거실에서는 구둣발의 사내와 김 

사장의 아내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구둣발의 사내는 야식 배달해 주는 

곳의 전화번호를 묻고 있었다.




 소 제 목 : Text 09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김 사장은 계속 애꿎은 담배만 피우고 있었고, 세 

사람의 불청객은 히히덕 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김  사장의 아내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거실과 부엌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거실에 있던 딸은 

아마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자는 모양이었다.



 - 딩동



 김 사장은 초인종 소리가 평소  때보다 더 요란하게 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김  사장은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

장 소리가 방 안의 세 사람에게 들릴 것  같았지만, 그들은 "왔다!"고 외치면서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안방 유리창을 통해 대문 쪽을 넘겨다보기에 바빴다.



 김 사장의 아내가 깨진 현관문을 제치고 슬리퍼를 끌며  나갔다. 김 사장은 아

마 야식이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청객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 온 다음에는 

아무도 나간 사람이 없으니 대문은 열려 있을 테고, 김 사장이 기다리는 사람은 

대문이 열렸다면 바로 집 안으로 들어올 사람이었다.



 역시 김 사장의 아내가 다시 거실로, 부엌으로 쪼르르  뛰어 가더니 작은 지갑

을 들고 나가면서 "아저씨 얼마예요?"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아내는 

일회용 용기에, 랩이 씌워진 족발과 양념, 쟁반국수,  소주 등을 가지고 들어왔

다.

 

 "워매...거 겁나게 빠르구마잉"



 아무 것도 깔지 않은 안방 바닥에 주저앉아 랩을 벗기면서 구둣발의 사내가 말

했다.



 "김 사장도 좀 드쇼?"



 흰 운동화의 사내가 김 사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권했다. 말이  권유지, '설마 

먹지 않겠지?' 하면서 지껄인 것이라고 생각한 김 사장이 씁쓸한 마음으로 말했

다.



 "난 됐소. 식기 전에 들 드시오."



 병따개를 달라고 했으면 가져다 주었을텐데 구둣발의 사내는 소줏병를 들고 입

가로 가져가 이로 따려다가 "아이고.." 하면서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벌개진 얼

굴로 소주병의 마개 부분을 화장대의 모서리에 대고 두꺼운 주먹으로 내리쳤다. 

"통" 소리가 나며 뚜껑은 열렸지만  화장대는 심한 흠집이 났을  것이 틀림없었

다.



 김 사장은 속이 타는지 끙끙 소리를 내면서 담배  연기만 내뿜었다. 짙은 화장

의 여자는 방바닥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족발에는 관심이 없는 듯 모른 척 하다

가 사내들의 권유에 나무 젓가락을 들어 쟁반국수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무언가 옆구리에 두껍게 신문지로 말아 넣은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

게 귀신같이 들어왔는지 김 사장을 비롯한 네 사람은 사내가 대문과 현관, 거실

을 지나는 동안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제일 큰  뼈다귀를 들고 뜯어먹던 

구둣발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워매...깜짝이여. 벌써 왔는게벼?"



 흰 운동화의 사내는 직감적으로 새로 방 안에  들어온 사내가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 직감은 구두를 벗지 않고 들어온 사내의 발을 보고는 

더욱 굳어졌다. 마시려던 소줏잔을 급히 내려놓고 김 사장에게 물었다.



 "온다던 사람이 저 사람이요?"



 김 사장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무 말 하지 않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리고는 새로 들어온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김 사장의 얼굴은 반갑기도 하면

서 무언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김 사장 돈 주려면 빨리 줘. 우리는 이거 다 먹었어."



 방 안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짙은 화장의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말을 마

치면서 슬금슬금 흰 운동화의 사내 뒤로 몸을 빼냈다.



 새로 들어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소 제 목 : Text 10


 "받을 게 총 얼마야?"



 세 사람은 순간 당황하였다. 김 사장의 백기사(白騎士)로 온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돈을 줄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그것도  그렇거니와 어려 보이는데 다짜고

짜 반말을 쓰는 것도 그들을 놀라게 했다.



 "워매...잡것이 시방 어따 대고 말하는 겨?"



빚을 갚으려는 것 같은 사내의 말투에 안심한 구둣발  사내가 들고 있던 뼈다귀

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입가에서 돼지기름이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받을 게 모두 얼마냐니까?"



 "이천만 원이야. 이천만 원. 이자도 필요 없으니까 원금만 갚아주면 돼."



싸움이 날 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짙은 화장의 여자가 급히  끼어 들며 말했

다. 만약 싸움이라도 나게 된다면 오늘 돈을 받기는 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로 방 안에 들어온 사내가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더니  신문지로 말은 것을 꺼

내 바닥으로 던졌다. 



 툭- 소리와 함께 다섯 뭉치의 돈 다발이 떨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오백이니까 그거 먹고 떨어져라. 더 이상 찾아오지 말고."



 바닥에 떨어진 돈 뭉치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아졌다가 돈을 던진 사내의 말을 

듣고는 잠시 어리둥절한 눈빛이 되었다. 흰 운동화의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돈 

뭉치를 줍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뭉치를 누님이라  부르는 사람의 손에 쥐어주

고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김 사장에게 말했다.

≠??사내를  바라다보았고, 그 사내는 여자 

앞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다섯 개의 돈 뭉치를 도로 나꿔챘다



 "이걸로 끝낼 거면 이 돈 가져가고, 더 받아야 한다면 못 주겠어."



세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 동시에 기분 나쁘면

서도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흰 운동화의 사내는 이런 일에 많은 경험

이 있는지 섣불리 손을 쓰려 들지는 않았다. 잘못  손을 댔다가 재수 없으면 오

히려 폭력으로 넘어 갈 수도 있는 일이고 체격이  듬직해 보이는 상대방이 누구

인지, 어느 바닥에서 노는 놈인지도 전혀 몰랐다. 또 같이 온 사람이 없는 가도 

확인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뒷짐을 지고 생각하는 척  하면서 안 방 창문을 통

해 대문 밖에 누가 있는가를 살폈다. 아무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거실에도 김 

사장의 마누라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자 실력으로 나가는 것이 사태 해결에 편할 

것으로 보였다.



 "그 돈 이리 내라."



 흰 운동화의 사내가 말하자, 돈 다발을 들고 있던  사내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

다. 운동화의 사내가 돈을 받아 양복 안과 옆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제

일 먼저 문지방을 넘어 거실로 나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김 사장! 나머지 돈은 되거든 연락하쇼. 연락 없으면 우리가 받으러 오고..."



돈을 주었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 안되겠다. 도저히 돈 못 주겠으니 꺼내놓고 사라져라."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둣발 사내의 주먹이 날아왔다.



 "쌍노무 새끼!"



 김 사장이 다급한 마음으로 "응진아!" 하고 외쳤다.  흰 운동화의 사내를 쳐다

보며 말하던 사내가 김 사장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다  그만 구둣발 사내의 주먹

을 맞고 말았다.



                                                   



                                                             
 소 제 목 : Text 11


 응진이라 불린 사내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용수철처럼 튀어 거실

과 방 사이에 있던 흰  운동화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흰  운동화의 사내가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응진이 뻗은 스트레이트가 안면에 작렬했다. 퍽! 소리

와 함께 흰 운동화의 사내는 뒤로 바르게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응진이 다시 문지방을  넘어 방  안에 있던 구둣발  사내의 면전까지  온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구둣발 사내가 날렸던 주먹이 미처 제자리를 찾기

도 전에 맞은 상대가 맞았던 자리보다 더 가까이 와 있는 셈이었다.   



 구둣발의 사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알고 

있는 흰 운동화의 사내는 맷집이 좋아 한, 두  대 맞고 뻗을 인물도 아니었거니

와 천부적으로 몸놀림과 눈치가 빨라서 쉽게  상대방에게 가격을 허락하는 인물

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방은  이미 분명 자신에게 한  대 맞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구둣발 사내의 두뇌회전도 여기까지였다.  자신의 복부에 응진의  주먹이 와서 

꽂혔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주먹은 맥없이 허공을 휘저었고 복부에 밀려드는 

고통에 상체가 앞으로 꺽였다.



 "끅!"



 고통은 상체뿐 아니라 무릎까지도 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두 손으로 배

를 부여잡고 후속타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몸을  굴렸다. 다행히 하늘이 노래졌

다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때까지 더 날아오는 주먹이나 발은 없었다. 구둣발 

사내는 공포심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15살 때부터 주먹 외에는  배워 본 적

도, 써본 적도 없는 자신인데....



한편으로는 전광석화와 같은 상대의 주먹과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단단히 혼

이 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은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었고 단지, 응진이라는 상대의 운이 좋은 것뿐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그러나....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점점 사실로 변할 것을 구둣발 사내는 모르고 있었다. 응

진은 구둣발 사내의 몸이 앞으로 꺽이고 옆으로 구르는 것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흰 운동화의 사내가 앞이 아닌 뒤로 쓰러졌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평상시의 

주먹이라도 한 대 때리면 앞으로 쓰러져 일어나는 상대가 없었는데, 조금 전 흰 

운동화의 사내에게 날린 주먹은 자신의 체중을 실은, 그야말로 황소라도 잠재우

기 충분한 주먹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은 고개를 흔

들며 일어나려 하는 중이었다. 그의 옆에는 어느 새 다가갔는지 짙은 화장의 여

자가 걱정과 경멸의 눈빛을 함께 발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응진이 다가가자 흰 운동화의 사내가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두 

주먹으로 상체를 가리며 전열(戰列)을 가다듬었다. 응진은 흰 운동화 사내의 네 

걸음 밖에서 그의 몸이 빠르게 싸울 채비를 갖추는 것을 보고 묘한 흥미를 느꼈

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적수다운 적수였다. 5년 전  전주의 한 나이트 클

럽에서 만났던 무서운 상대 -  이광혁 - 이후로 이런 맷집의  싸움꾼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응진 역시 싸움이라면 밥먹듯이 해  온지라 흰 운동화의 사내에게 

뻗은 한 번의 주먹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그였다.



 흰 운동화는 사내는 응진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자신이 일어나는 

동안 그는 공격하려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응진이라는  놈은 상대방이 

쓰러져 있을 때는 공격하지 않는, 깡패가 아닌 무도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짧게 친 머리며, 몸에서  풍기는 기도로 보아서는 폭력배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일어나는 동안 공격하지 않았다면 옷을 벗는 동안에도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

라고 생각한 흰 운동화의 사내는 어울리지 않던 양복  윗도리를 벗어 거실 바닥

에 던졌다. 생각했던 대로 응진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소 제 목 : Text 12


 어느 정도 싸움에 익숙해지면 상대의 눈빛만으로도 적의  공격 여부나 공격 방

향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돌발 사태와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

응도 빠르게 바뀐다. 응진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흰 운동화 사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응진은 번개처럼 오른쪽으로 몸을 이동시킨 후에 왼

쪽 발을 들어 뒤에서 달려 들어온 구둣발 사내에게 휘둘렀다.



 응진의 두 눈은 흰 운동화 사내에게 고정된  상태였다가 자신의 발이 헛발질을 

하게 되자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응진은  상대를 너무 과하게 평가

했다. 느린 구둣발의 사내는 응진의 왼발이 땅에  닿으려는 때가 되어서야 접근

해 오는 중이었다. 



 구둣발 사내의 달려오다가 응진의 발을 보고  주춤거렸다. 응진은 이때를 놓치

지 않고 반 바퀴 몸을 뒤집어 공중으로 떴고, 오른  발로 돌려 찼다. 무겁게 살

에 닿는 느낌이 다리를 통해 전해져 왔다. 문제는 응진의 등 뒤에 있는 흰 운동

화의 사내였다. 뒤에서 공격해 온다면 한 대 맞을 수밖에 없는 긴박한 위치이기

도 했다.



 '제길 아깝다.'



 흰 운동화 사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잠깐 동안 주저했던  자신을 욕했다. 등 돌

리고 있는 응진이라는 놈에게 주먹 한 방이면 게임이  끝날 것도 같았지만 속단

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언제 뒤돌아서 주먹을 날려 올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매너 좋은 파이터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도 용납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사태 해결에는 도움되지 않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 스스로 욕하는 중이었다.

 응진은 흰 운동화의 사내가 달려들지 않자 앞을 향해  두 번 연거푸 주먹을 휘

둘렀다.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 응진의 발에  얼굴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구둣발의 사내는 점점 밀리면서 다시 방 안으로 가서 쓰러졌다.



 구둣발 사내는 먹다 만 족발과 김치, 쟁반 국수  위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려는 순간 또 얼굴에 발을 맞았다. 이번엔 조금 더 멀리 가서 자빠졌다. 주위에 

누렇게 보이는 물이 튀었다. 역시 주춤주춤 일어서기는  했으나 꼴이 말이 아니

었다.



 TV 앞에 흥건히 고여있던 소변이 구둣발 사내의 온  몸을 적시고, 김치 국물로 

보이는 붉은 색이 바지를 물들였는가 하면, 얼굴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 흡사 괴

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눈빛은 괴물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미 

체념한 듯 온순하고 겁 많은 양의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후이우찌를 해?"



 다소 화가 난 듯한 응진이 큰 소리로 물었지만  구둣발 사내의 대답은 없었다. 

하긴 대답을 얻고자 물은 것도 아니었다.



 응진은 바닥에 웬 물이 고여있을까? 잠시  생각했다가 그것이 채무자를 괴롭히

기 위한 해결사들의 고전적인 방법임을 알아차렸다. 이 녀석들은 그래도 양반이

었다. 단체로 몰려와서 참았던 대변까지 보고 사라지는  놈들이 어디 한 둘이던

가? 응진은 방 바닥에 족발과 국수가 흐트러진 것을 보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넌 양아치냐? 돼지 새끼냐? 오줌싸고 그 옆에서 사료 처먹어?"



 이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근태야 이만 가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 사장. 오늘 대접 잘 받았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뵙게 되겠지요."





                                                   



                                                             
 소 제 목 : Text 13


 김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내심 통쾌했으나 흰  운동화 사내의 말은 곧 

복수하러 오겠다는 뜻에 다름없었다.



 TV 옆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잉~ 형님 그냥 가요? 허잉~"



구둣발 사내가 덩치에 맞지 않게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우리 상대가 아니다."



흰 운동화 사내의 짤막한 대답에 구둣발 사내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울음소리는 더욱 커진 상태였다.



 "힝힝~"



 짙은 화장의 여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흰 운동화의 사내와 근태. 둘

이서 같이 싸우면 되겠건만 흰 운동화의 사내는 여길  떠나자고 하는 중이 아닌

가? 흰 운동화의 사내는 자기 자신보다도 동생이  맞고 돌아오면 길길이 날뛰며 

못 참는 성격임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하물며 제일 가깝다는 근태가 저렇게 비

참한 꼴로 맞고 울고 있는데 특별한 외상(外傷)없이 그냥  가자고 하는 말에 귀

를 의심했다.



 "동생 그냥 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긴 했지만 말투에는 이해  못하겠다는 느낌이 담겨 있었

다.



 "누님은 빠지세요."



 흰 운동화의 사내는 대답을 마치고 거실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양복을 들었다. 

손을 넣어 다섯 개의 돈 다발을 꺼내 거실 한 구석에 던졌다. 그리고 몸을 틀어 

현관 쪽으로 향했다. 뒤따라 나오는 구둣발의 사내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현관까지 내려오자 더욱 북받치게 울어댔다.



 "흐잉. 형님은 내가 개 맞듯 맞는 거 보고도 괜찮으쇼잉? 엉헝"

 

 "가자."



 현관까지 내려왔던 구둣발 사내가 갑자기 몸을  틀더니 다시 거실로 올라섰다. 

주먹을 불끈 쥔 상태였다.



 "으헝. 형님! 지는 이대로 못가겄소! 지는 못가겠어라! 나 여기서 뼈다귀 묻을

라요! 헝엉"

 

흰 운동화의 사내도 속이 쓰렸는지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더 추한 꼴 보이

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스럽기는 했으나 근태에

게 한 마디 던졌다.



 "그럼 넌 더 맞고 오던가."



흰 운동화 사내의 쌀쌀맞은 소리에 근태라는  사내의 울음소리가 목청껏 높아졌

다.



 "허엉~ 광혁 형님만 계셨어도..히잉"



이때 거실에서 이들을 바라보던 응진이가 화들짝 놀랐다. 앞으로 나서면서 빠르

게 물었다.



 "양아치 새끼! 너 지금 무어라고 했냐?"



 "으엉..긍께 씨불놈아 니눔은 우리 광혁 형님만  나오시면 파리 목숨이나 진배

없는 거시여! 헝헝"



 응진이 놀라며 말을 되받았다.



 "광혁 형님이라고 했냐?"



 "그래 씨불놈아. 으헝"



                                                   



                                                             
 소 제 목 : Text 14


 1999년 11월 18일. 수요일. 오후 10시. 공주 그랜드호텔 지하 1층 단란주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하하핫! 그게 사실이냐?"



 "그렇다니까요! 저도 놀랐지요."



 이광혁이 크게 웃으며 앉아있는 테이블 양옆으로는 열  명 정도의 사내들이 술

을 마시고 있었고, 같은 수의 아가씨들이 접대를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광혁

의 출소일로서 먼저 출소한 동생들과 친구들이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

다. 이광혁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요. 교통 정리해 보니까 답이 딱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순서를 정

했죠."



 대답한 사내는 응진이었다.



 김응진. 원래 그는 깡패가 아니었지만 6년 전부터  전주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기도일을 봐주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태권도, 합기도,  유도를 비롯하여 권투까

지 했었던 그는 서울 태생이었으나 태권도 도장의 사범이 되어 전주까지 내려오

게 되었다. 태권도 사범이라지만 직접 운영하는 도장의 사범이 아니었고 나이도 

많지 않아 급료는 겨우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돈을 벌어볼까 하는 욕심에 

나이트 클럽의 기도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 밤의  생활에 뛰어들었

다. 하루에 세 시간씩 밖에 자지 않아도 멀쩡할 정도로 김응진은 체력이 좋았으

며 성격 또한 싹싹했다.



 클럽에서 일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김응진이  나이트 클럽의 술 취한 손

님과 시비가 붙었다가 그 손님에게 조금 무례하게  대했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마침 클럽에 영업 부장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놀러와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 예의 

없다고 면박을 당했던 것이었다.



 김응진도 화가 났었다. 무례한 것은  무례한 것이지만 영업 부장도  아닌 영업 

부장의 동생이 와서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중하게 

싸움을 신청하고 클럽 뒤의 주차장으로 와서  붙었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늘씬

하게 얻어터졌다.



 한 대도 때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확실한 한 수 위의 실

력이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무도를 배운 것은 아니

었으나 힘이 좋고 각도도 예리했다. 김응진이 깨끗하게  졌음을 인정하자 그 사

람은 악수를 청하며 통성명이나 하자고 했다. 그가 바로 이광혁이었다.



 김응진을 이광혁은 동생으로 삼았으나 신목포파 직계는 아니었다. 이광혁은 조

직원들이 대부분 구속된 상태에서 도망 다니던  중이라 김응진과는 형과 동생으

로 지내는 것뿐이었고, 김응진을  신목포파 두목인 유정후에게  인사시킨 적도, 

다른 조직원들에게 소개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김응진은 스스로 자신을 신목포

파의 일원으로 알고 이광혁의 출소를 기다려왔다.



 "이런 양아치 같은 자식들아! 그래 할 일 없어서 그런 짓들이나 하고 다녔냐?" 



 이광혁이 무섭게 말하자 술 마시던 열 명의 사내들  중 두 사람의 어깨가 찔끔 

움츠러들었다.



 그 중에서 얼굴에 아직도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사내의 이름은 김근태였다. 그

는 열흘 전 알고 지내던 카페 마담의 부탁으로  신목포파에서 가장 친한 이승영

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응진을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나

중에 김응진은 자신이 깍듯하게 모시는 행동대장  이광혁의 동생이라지 않는가? 

맞은 것은 억울했지만 저런 싸움꾼이 "같은 편" 이라는 데 억울한 마음은 눈 녹

듯 사라졌다.



 그런 생각은 이승영도 마찬가지였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빚 독촉하러 서울

로 나들이 갔다가 한 대 맞은 이승영도, 김응진이 광혁 형님의 동생이라고 나서

는 때부터 기분이 좋았다. 다시 그와 싸울 일이 없게 된 때문이었다. 





                                                   



                                                             
 소 제 목 : Text 15


       1999년 12월 13일. 월요일. 오후 6시 20분. 순천교도소 앞.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도관 한 명과 경비교도대원들이 철문을 열자, 대 여섯 명의 출소자들이 황급

히 걸어나왔다. 제일 뒤에 나오던 사람이 문을 열어준 교도관과 몇 마디 나누고 

목례를 한 뒤, 철문 밖을 나오자 철문은 끼잉 소리를 내며 육중하게 닫혔다.



 짧은 머리에 검정색 양복을 차려입은 이광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뒤를 이어 열 댓 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허리를  굽히며 역시 큰 소리로 복

창했다. 다소 초췌해진 얼굴의 출소자는 이광혁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들어가 있으니 네 면회도 한 번 못 가보고..."  말꼬리를 흐리며 이광혁의 어깨

를 살짝 안았다. 



 "하하. 형님 몇 일 전에도 면회로 뵈었는데요.  별 말씀을...먼저 차에 오르시

지요. 몸은 괜찮으..."



이광혁이 미처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사내가 그들에게 다

가왔다. 그 중 한사람의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어이..유정후 출소 축하하네. 아픈 데는 없는가?"



 그들이 누군지 알아본 유정후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덕분에 괜찮습니다. 잘 쉬었습니다."



 "허허...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만 나는 이제 경찰이  아니네. 벌써 정년 맞고

도 몇 년이 지났지..."



 서울 송파경찰서의 강력반 반장이었던 한광택은 조직 폭력 전담으로만 이십 여

년의 세월을 보낸 베테랑 수사관이었다. 그는 범죄와의  전쟁 당시 목포파를 맡

아 이광혁을 제외한 대부분의 목포파 조직원들을 검거해서 주가를 올린 적이 있

었다. 목포파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였으나 짧게는 4년, 길게는 8년

씩의 수형 생활을 한 조직원들은 더 이상 그에게 지난날의 앙금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광택은 3년 전 서내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사표를 썼고 지금은 흥신소를 운영 

중이었는데 주로 배우자의 불륜 관계를 조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이 온 

사내는 경찰인지 직원인지 구분이 안 갔으나 이광혁은 그에게서 곰의 냄새가 나

는 것을 느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한광택은  한 개비를 유정후의 손에  쥐어주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꺼내 물었다. 유정후가 한 모금  깊게 들여 마신 후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같이 가시죠. 저 출소한다고 동생들이 자리라도 마련한 모양인데...." 



 "아닐세. 우린 이만 가겠네. 서울에 오거들랑 한 번 놀러오게."



한광택이 말을 마치며 명함을 꺼내어 유정후와 이광혁에게  한 장씩 주었다. 그

들이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이광혁은 유정후에게  차에 오르자고 

했다. 길가에는 네 대의 그랜저와 한 대의 소나타가 줄지어 있었는데 제일 앞의 

차는 신형의 그랜저 XG였다. 유정후는 '조직에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랜저를 가져

왔을까?' 궁금해했으나 그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차 번호판이 "허"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씁쓸해 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팔레스 호텔로 가자."



앞좌석에서 운전대를 잡은 김근태에게  행선지를 알려준 이광혁은  고개를 돌려 

유정후에게 말했다.



 "형님. 저희 사업 뭐라도 다시 시작해야지요."



 "뭣 좀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나?"



유정후가 물었다.



                                                   


 PRINTER/CAPTURE를 종료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소 제 목 : Text 16


  2000년 1월 3일. 월요일. 오전 8시 2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山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소도 장소려니와 20여 년만에 치르는 중요한 의식인지라 장내는 시종일관 진

지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오늘은 히라타  구미(平田組) 7대목(七代目)의 습명

식이 있는데다가 조 내의 중요한 손님을 맞는 행사도 뒤따를 예정이었다.



 교토(京都)의 환락가인 산조(三條)와 시조(四條)를  주무대로 성장해온 히라타

구미는 오사카와 나라, 와카야마 등 관서지역 내에 열  네 개의 군소 조직을 거

느리고 있으며 도쿄와 후쿠오카에 연락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빠칭코와 마약, 매춘, 건설, 청부, 무기거래 등  폭력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

든지 뛰어들었으나 조세(組勢)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아 세인들에

게는 유명하지 않은 폭력단체였다. 폭력단으로 탄생한  지난 1940년부터 히라타

구미는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조직을 운영해 왔다.



 폭력단 사이에 알려진 그 배경에는, 히라타 구미를 만든 히라타 야스히로가 과

거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이며 야쿠자계의  총두목이었던 도오야마 미츠루(頭

山滿)의 사생아라는 설이 파다했다. 2차 세계 대전 전 일본 내각의 수상과 대신

들이 임명을 받으면 천황 다음으로 배알했다는 인물이 도오야마였다.



 일본의 중국 침략 시에는  대륙 낭인이라는 이름의 사무라이들을  정규군 주둔

이전에 보냈으며 5.15 쿠데타를  배후 지휘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소문에

의하면 히라타는 도오야마의 성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도오야마의 도움

을 얻어 조직을 세웠으며 그 증거로는 히라타 구미가  생기고 나서 터진 태평양

전쟁에 히라타 구미의 조직원들은 한 명도 끌려간 적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그밖에도 관서지역의 다른 폭력단체들을 비롯한  전국 광역폭력단체들의 원로들

은 다소 이권에 손해가 있더라도 히라타 구미와  대결하는 것을 꺼려했다. 심지

어 같은 관서지역의 고베가 본거지이며 한때 4만  여명의 조직원을 자랑하던 전

국 최대의 폭력단인 야마구치 구미(山口組)마저도 히라타 구미와는 분쟁을 일으

키지 않았다.



 한 가지 더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열 네 개의 산하 조직을 거느렸다는 히라타

구미였으나 다른 폭력단과 법무성, 경시청의 자료에는 열 세 개 조직에 대한 것

밖에 없었다.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이름만 있는 한 개의 조직은 오래 전에 사라

지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통의 화식(和式) 복장을 한 히라타 구미 산하의 지역 조장들과 부조장, 구미

내의 원로들과 조직원들은 7대목의 습명식을 마치고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히라타 구미의 고문이며 오사카의 우메다(梅田)에 조직과  사무실을 갖고 있는

요시이(吉井)가 눈짓을 하자 미닫이문이 열렸다. 긴장한 듯한 모습의 40대와 30

대의 남자 세 명이 검정 색 정장 차림으로 들어왔다.



 "앉으시오."



요시이가 말했다.



 단단해 보이는 체격의 남자 셋은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앉기 전에 새롭게 조장

자리에 오른 7대목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잠시 후,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

아 보이는 한 명이 커다란 대접에 담긴 술을  7대목과 함께 마셨다. 7대목이 원

로들과 각 지역 조장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습니다만 우리 히라타  구미는 한국의 부산  형제들과 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부산 형제들의  도움으로 서울과 부산,  제주도에 사무실을

개설할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 구미는 여기 계신 한국의 이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선생으로 불린 남자가 앉은자리에서 사방을 향해 한  번씩 인사를 했다. 히

라타 구미의 원로들과 조장들은 꿋꿋하게 앉아  고개만을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소 제 목 : Text 17


 한때 100여 명의 조직원을 거느렸고, 최대 동원 능력이 수백 명에 달했던 부산

해운대파 두목 이중은. 30대의 나이로 지난 '80년대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전성

기를 구가했으나 1990년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이후 이를 피해 다니다

가 구속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자신만 구속된 것

이 아니라 조직원들 중 소위 대가리급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기 때문에 사실상

조직이 와해되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이중은과 중간 보스들은 출소하기 1년 전부터 교도소 안에서 조직을 다시 세워

보고자 노력했으나 이미 해운대의 헤게모니는 신진 세력들이 쥐고 있던 터였다.

해운대파는 조직 와해 전 해운대 지역의 주류 유통과  연예인 공급만을 주로 해

왔던 터라 별다른 자금원이 없었고 워낙 오랜 기간 조직이 힘을 못쓰고 있던 나

머지 따르는 부하들을 다시 모으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예전에는 원래의 나와바리(관할지역) 오야붕이 구속되더라도 자금원이 있고 동

생들만 튼튼하게 받쳐주면 출소 후에 다시 조직을 꾸미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 해운대를 분할 관리하고 있는 젊은 조직들은 계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

린데다가 일면식 조차 없었다. 전성기 때 전국구  건달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이

중은이었기에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를 받은 것은 이중은 만이 아니었다.  보스급이 아니면서도 보스급의 형량

을 선고받고 비슷한 시기에 출소한 최명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구속되었을 때

광주파의 두목 배윤업을 비롯한 전라계의 주먹들이 들고 날뛰었다. 그들은 자신

들도 수배 받고 있는 와중에서도 최명규가 싹이 더 커지기 전에 잘라버려야겠다

고 생각하여 각계에 투서를 보냈고 특히 최명규에게 칼을  맞아 수십 개월씩 병

상에 누워있던 광주파 흰곰과 조직원들은 연일  검사에게 무기 징역을 구형해야

한다고 사정했다. 결국 최명규도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중은은 출소 후 조직 재건을 선포했다. 아직은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40대

의 나이였고, 그의 옆에는 가장 믿을 만한 동생인  최명규가 있었다. 이전 조직

원들을 다시 규합해 보니 스무명  남짓 모여졌지만 어떤 사업부터  손을 대야할

지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출소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검찰과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힘으로 해운대의 이권을 다시 빼앗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

니었다. 몇 일 동안 술로 시간을 보내다가 최명규의 직속 동생인 유형남의 제의

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조금은 껄끄러운 조건이었으나  자신과 조직에

하등 해가 될 것도 없었고  조직을 크게 확장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또 앞으로는 조직을 국제적으로 키우지 않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

라는 계산도 작용했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뒤 구속을 피해 부산에서  밀항하여 오사카로 도망갔던 유

형남은 이중은과 교분이  있던 한 재일교포를  찾아갔었다. 가네무라(金村)라는

이름의 이 재일교포는 숨겨주기를 원하는 유형남의  요구에 흔쾌히 아파트를 내

주었고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간단한 일이라도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한국계 술집들이 많이 모여있는 오사카 신사이바시(心齊橋)의  한 클럽에서 소

일하며 매니저(웨이터)일을 하던 유형남은 몇 달간은  말이 통하지 않아 조용히

지냈으나 일본어를 익히면 익힐수록 주먹을 사용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유형남은 비록 매니저의  신분이었으나 가네무라의 소개로  신사이바시 지역의

젊은 야쿠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비자는커녕 여권도 없던  터라 행동의

제약을 많이 받게 된데다 가끔씩 주먹도 휘두르다보니 조직이 있던 부산 시절하

고는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자신의 주먹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독고다이(特攻隊, 조직이 없는 건달)로는 폭력계에서 발붙이기 힘들었

다.



 어느 날 신변 보호를 위해 권총을 한 정  구하려고 우메다로 갔다가 요시이 구

미(吉井組)의 조직원과 싸움을 일으켰다.  값싼 중국제 토카레프 권총  한 정에

18만 엔이나 달라는 조직원의 요구에 화가 치민 나머지  상대가 권총을 들고 있

다는 사실도 잊은 채, 흠씬 두들겨 패고 권총을  빼앗아 버렸다. 권총만 빼앗고

도망치면 자신이 누군지 찾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유형남이었으나 상황은 그렇

지 않았다.



                                                   



                                                            
 소 제 목 : Text 18


 권총을 빼앗고 돌아온 다음날, 유형남이 신사이바시의 클럽에서 술병을 정리하

고 있을 때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무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곧 유형남을 찾아내어 덥쳤으나 유형남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보틀 킵(Bottle keep)해둔  진열장 안의 술병을 모두  깨가며 맹렬히

싸웠다. 요시이 구미 쪽에서 볼 때는 권총을 빼앗고 도망친 유형남에 대한 당연

한 행동이었으나 유형남과 가네무라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이는 영업 중인 클럽

에 난입한 것으로 야쿠자들끼리도 서로의 영업장  방해는 하지 않는다는 묵계를

깬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시이 구미는 신사이바시의 이 클럽이 재일교포들 중에

서도 마당발로 통하는 가네무라가 운영하는 곳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가네무라는 아는 루트를 통해 다른 조직의 야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곧 클럽 안은 요시이 구미의 조직원 다섯  명과 가네무라가 급히 모은

야쿠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기세 등등하던 요시이 구미의 조직원들이 갑자기  풀이 죽었다. 가네무라가 불

러온 야쿠자들 중 두 명의 양복 깃에 "야마구치(山口)"라고 적힌 금색의 뱃지를

본 때문이었다. 나이를 어림짐작해도 최소한 간부급 이상으로 보이는 것이 만만

한 상대가 아닐 것 같았다. 급히 휴대전화기를 통해  클럽 밖 승용차 안에서 기

다리고 있던 부조장에게 연락했다. 부조장은 부조장대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

다 여기고 급히 요시이 조장에게 연락했고 곧 소식은 본가인 히라타 구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히라타 구미의 6대목이었던 다케노우치 조장은 조직의 산하 조직원들이 클럽에

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지급으로 산하 지역  조장들과 원로, 고문들에게 회의

를 소집함과 동시에 조언을 구했다. 다케노우치 조장으로서  볼 때는 참으로 어

이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대치가  현재까지 한 번도 트러블이  없었던 야마구치

구미의 도발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얽히게 된 사건인지 궁금해했으나 조직원들로

서는 조장의 느리고 나약한 모습에 실망을 갖게 되었다.



 사건은 요시이 조장의 정중한 사과로  일단락 짓게 되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다른 조직의 나와바리에서 힘을 쓰는 행동을 하거나 영업을 방해

하는 일은 충분히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유형남이 빼앗은 권총은 돌려 받

고자 했다. 가네무라는 이에 덧붙여 유형남에게  매맞은 조직원들의 치료비까지

부담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가네무라의 명성은 높아졌고 사건을 일으킨 유형남은 오히려 요시

이 구미와 친해지게 되었다. 사과 차 우메다의 요시이  구미 사무실에 몇 번 놀

러간 것이 요시이 구미 조직원들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일본인의 민족성으로서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두고두고 미안해하였으나 유형남은 능글맞게 행동하면서 우

메다에 갈 적마다 사무실에 들렀던 것이 요시이 구미의 조직원들 사이에서는 남

자다운 모습으로 비쳐졌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주먹 실력도 한 몫 거들었다.



 유형남은 해운대파의 보스인 이중은과 자신의 직계 형님인 최명규의 출소를 기

다렸다가 두 사람의 출소시기에  맞추어 다시 한국으로 밀항해  왔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유형남은 요시이 구미의 조장인  요시이에게 한국의 해운대파가 다

시 조직을 재건하면 손을 잡고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였고 요시이는 이

를 몇 달간 검토한 뒤에 충분한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조직의 허락을

받아냈다.



 같이 일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히라타 구미가  한국에 투자하고 해운대파가

이를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해운대파와 히라타 구미가 형제의

의를 맺어야 한다는 선행 조건이 따라붙었다.



 일본의 야쿠자들은 조직에 입문(入門)하거나, 형제의 의를  맺거나, 습명을 받

게 되면 평생토록 조직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 만일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

을 하게 되면 파문(破門)을 당하는데, 조직은 파문장을  일본 내 주요 폭력단의

사무실로 발송하여 이를 알린다. 즉, 파문을 당한 야쿠자는 다른 조직에서 다시

일할 수 없게되므로 결국 폭력계를 떠나거나 아니면 조직  폭력이 아닌 일반 범

죄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파문을 당한다는 것은  협의도를 중시하는 일본의 야

쿠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이며 이 때문에 연간 자살하는 야쿠자들의 수도

무시 못할 정도이다.



                                                   



                                                            
 소 제 목 : Text 19


 이중은은 교토로 올 때 최명규, 유형남을 제외하고도 다섯 명의 조직원들을 더

데려왔다. 10년 전 해운대파가 부산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때 이들은

꼬붕으로, 조직이 관리하는 술집이나 나이트 클럽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10대

후반의 어린 양아치들이었다. 그래도 똘똘했던 최명규가 부산과 경남 지역의 제

법 힘깨나 쓴다는 고교생 주먹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고, 그 중에서는 조직에서

일하겠다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녀석도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범죄단체 구성  죄목으로 구속되어 수형 생활

을 했기 때문에 한창 실전과  실무를 익혀야 할 20대 초반의  시기를 그냥 보내

버렸다는 것에 있었다. 이들은 이중은과 최명규 보다는 일찍 출소하였으나 변변

한 조직도 없이 건달 생활하고 있던 것을 최명규가 다시 규합한 것이었다.



 한국의 조직폭력은 군대와 비슷하다. 조직간의 싸움에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그렇고, 대부분의 전쟁시에는  20세 전후의 어린 주먹들이  전면에 나서서

싸운다. 중간 보스급 이상은 함부로 싸움에 끼어  들지도 않지만 이들이 다치거

나 린치를 당하면 조직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다. 또 어느 조직이나 실전 경험

이 많은 소위 하사관과 같은 주먹들이 있어야 조직이  융통성 있게 돌아가게 마

련이다.



 폭력은 조직을 구성하면 그 힘이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독불장군은 없다. 아무

리 싸움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 두, 세  명 이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

고 그 수가 늘어나면 더욱  더 이기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자유당 시절 하늘이

내린 싸움꾼이라는 시라소니 이성순도  결국은 조직이라는 힘을  가진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가?



 해운대파의 이런 문제점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요시이였

다. 연배로 보나 극도(極道, 야쿠자를 일컬음)의  활동 경력을 보나 이중은보다

훨씬 선배였던 요시이는 해운대파의 젊은 조직원 다섯 명에 대해서 특수 교육을

시킬 것을 제안했다. 당연히 이중은을 비롯한 해운대파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

었다.



 15일을 머무는 동안 이중은, 최명규, 유형남은 카지노  경영, 무기, 마약의 거

래와 운송에 대한 기본 지식,  돈 세탁과 관련된 내용을  배웠고 나머지 조직원

다섯 명은 교토의 북쪽에 위치한 오오하라(大原)의  산골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

는 격투기를 익혔는데 그  교육과정 안에는 사격술까지 있었다.  이들을 가르친

교관은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미키(三木)라는 이름을  가진 40대의 사내였다.

별명은 미키마우스이지만 별명이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호전적인데다 싸움에

관해서는 오타쿠(お宅)로 불릴만한 매니아이기도 했다.



 해운대파의 조직원들은 비자가 끝나는 1월 17일에  부산으로 왔다가 하루도 쉬

지 않고 다시 오사카를 통해 교토로 가서 나머지 15일간의 교육을 마쳤다.



 한 달간의 교육기간을 가진  해운대파는 히라타 구미의 조직원들과  함께 사업

자금을 들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행 비행기 안에서  최명규는 거멓게 탄 얼

굴의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눈 덮인 겨울산에서 훈련받은 동생들은 하나같이 진

지한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미키의 교육은 싸움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재일교포인 통역을 통해 어떻게 하면 조직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까 하

는 사상교육까지 시켰다. 사실 일본의 폭력단은 종교와도 비슷해서 가문을 이어

가며 본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를 두고 많은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 가는 것은 야쿠자들뿐  이라고 까지

말하기도 했다.



 최명규는 가장 가깝게 앉아있는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칼 쓰는 것도 배우더냐?"



 "하모요. 헤임요. 케도 내사 마 아직 잘 모르겠심더."



28살이며 뚱뚱한 체격의 박정상이 대답했다. 유도와 씨름을 해서 상대방을 잡고

내 던지는 기술이 대단한 동생이었다.



 "너희 다섯 중에서 누가 제일 칼을 잘 쓰던?"



 최명규는 칼잡이답게 누가 칼을 잘 쓰는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동

생들을 보지 못했고, 칼을 써야할  만한 전쟁도 없었던 터라  잘 모르고 있기도

했다.



                                                   



                                                            
 소 제 목 : Text 20


 "그기 마. 재수라 안 합니꺼?"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대답하는 박정상의 모습을 보고  최명규는 그럴 줄 알았

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녀석으로 아직  서른이 되기도 전에 앞머리

가 제법 벗겨져 있는 동생이었다.  김재수의 왼쪽 귀 위에는  스무 바늘을 넘게

꿰맨 일자형의 상처가 있었다. 미키의  특수 교육을 받은 다섯  명의 동생들 중

유일하게 제 발로 조직에서 일하겠다고 들어온 놈이기도 했다.



 김재수의 칼 솜씨는 최명규가 몇  달간 직접 가르친 것이었다.  최명규는 잠시

눈을 감고 옛날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10년 전 어느 봄날 세 명의 고등학생이, 해운대파가 운영하는 대양프로덕션 사

무실로 찾아와서 무턱대고 최명규에게 다가가 동생으로 삼아달라고 했다.



 그 당시 폭력계에 한창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최명규에게는  코웃음칠 일이었

다. 새파랗게 어린것들이 선배의 소개도 없이 찾아오다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

었다. 세 명을 향해 싸움은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한 가닥씩은 한다고 대

답했다. 최명규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세 명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하고는 서

랍을 뒤져 날이 퍼렇게 서있는 부엌칼 하나를 꺼내 왔다.



 "담력 시험에서 통과하면 동생으로 삼아주지."



최명규가 고등학생들 앞의 소파에 앉아 노려보며 말을 했다.



 "이 칼을 던져서 날이  오른쪽으로 향하면 칼등으로, 왼쪽으로  향하면 칼날로

네 녀석들 머리를 찍을 건데 계속 해보겠나? 이것만 하겠다고 하면 내일부터 여

기로 나와도 된다."



 세 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런 씨팔 겁쟁이 새끼들! 못하겠으면 기어서 밖으로 꺼져!"



 최명규의 말이 끝나자 한 명의 고등학생이 가방을  들어 옆구리에 끼우더니 슬

쩍 일어났다.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해운대파에  들어온 지 얼마 되

지 않는 박정상이 달려들어 바닥에 쓰러트렸다.



 "문디 자슥아. 헤임께서 기어서 나가라카는 말씀 몬들었나?"



 비슷한 나이지만 짧게 친 머리에  양복바지를 입고 있어서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박정상의 일갈에 나가려던 고등학생은 급히  기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

고, 이를 본 나머지 고등학생 한 명도 아예  소파에서부터 기어서 나갔다. 최명

규가 한 명 남은 고등학생에게  눈길을 돌리자 그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말했

다.



 "지...지는 하겠심더."



 "그래? 좋다!"



 오히려 최명규가 적잖이 놀라며 손에서 칼을  놀렸다. 유형남과 박정상을 비롯

한 조직원들은 최명규의 손을 쳐다보며  최명규의 장난 어린 협박에  실실 웃음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명규의 칼 솜씨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아무리 그가 냉혹하다 하지만 조직에서 일하겠다고  찾아온 고등학생을 칼로 치

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휙



 검지손가락으로 부엌칼의 등을 튕겨 약 1미터쯤 공중으로 띄웠다. 부엌칼이 팽

그르르 돌면서 아래로 떨어지자 이를 최명규가 낚아채듯 잡았다. 태연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진 고등학생이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바라다보며 최명규는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오른손에 잡힌 부엌칼의 칼날은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소 제 목 : Text 21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말을 꺼냈으니 지키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들의 수도 무시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최명규의 손을 본  고등학생은 체념했는지, 덤덤한  표정으로 변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너털 웃으며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겠지만 최명규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 앞에  앉아있는 고등학생을 더 힘들

게 할뿐이라고 생각한 그는 칼 쥔 손을 위로 들어  고등학생의 왼쪽 귀 위를 향

해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광경에 유형남을 비롯해서 사무실 내의 동생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

지만 정작 당사자인 고등학생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눈을 감고 있어서 못했다

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최명규에게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그의 칼 휘두르는

동작은 크게 보였지만 살과 접촉하는 순간의 힘은  정확하게 빠진 상태였다. 상

대가 온 몸을 흔들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순간에도  정확히 급소를 피해 칼질을

하는 그가 아닌가.



 뼈에는 손상이 가지 않도록 휘둘렀지만 뺨을 타고 피가 줄줄 흐르는 것까지 막

을 수는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최명규가 말했다.



 "넌 오늘부터 내 동생이다. 네 이름이 뭐냐?"



 "김재수라 캅니더."



김재수 역시 당황했던지 흐르는 피를 막거나 닦으려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

은 채 말했다.



 "어이. 형남아. 얘 병원에 데려다주고 와라."



 이 일 이후로 최명규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주  김재수를 불러서 칼 쓰는 법

을 가르쳤다. 김재수는 열심히  따랐지만 얼마 안 있어  구속되었고 조직폭력에

관한 법률 - 범죄단체 구성 - 위반으로 결국 초범임에도 불구하고 4년형을 받았

다. 출소 한 뒤로는 정육점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최명규는 곧 김해 국제 공항에 착륙하겠다는 기내 안내  방송에 눈을 떴다. 김

재수의 상처를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이왕 가르치기로 한 것 제대로 가르치자.'

고 다짐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게이트를 찾아 공항을 도는 동안 스튜어디스가 양복 상의를

가져왔다. 총 여덟 명의  해운대파 조직원들과 히라타 구미에서  파견한 야쿠자

네 명이 같이 내렸다. 최명규가 입국심사를 마치고 문형탐지기(X-RAY 탐지기)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

신은 그 옆의 금속탐지기를  통과했다. 문형탐지기를 지나 온  가방을 집어들자

"삑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뒤를 따라온 김재수가 금속

탐지기를 지나면서 낸 소리였다.



 "잠깐만요."



 금속 탐지기 옆의 공항 세관원이 따라붙었다.



 "뭐 가져오신 거 있습니까?"



 김재수는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손바닥을 보이며 두 손을 들었다.



 "열쇠나 쇠붙이 같은 거 갖고 계시면 여기에 담으시고 다시 통과해 보세요."



세관원이 소쿠리를 내밀었으나 김재수는 꺼내는 것 없이 금속 탐지기 옆을 돌아

나갔다. 일순 김재수의 눈빛이 최명규를 향해 번득였다. 그리고 다시 통과해 들

어왔다. 이번에는 경고음이 울리지 않았다.



 "됐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세관원의 말을 듣고 김재수는 최명규 옆으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데이 헤임요. 미키상한테서 선물이라꼬 받았심더."



 가방 옆에 손잡이까지 깊숙히 꽂혀있는 칼을 보고  최명규는 김재수의 칼 솜씨

가 결코 자신보다 아래가 아니라고 느꼈다. 자기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기는 했

지만 칼을 꺼내 던질 줄은 몰랐다.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솜씨에 놀랍기도 했지만

더 이상 가르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필자주: 일본의 나리타, 간사이 등의 국제 공항과 우리 나라의 김포, 김해 국제

공항은 보안 방식이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출국심사 전에 금속탐

지기를 통과 한 뒤  금속탐지봉으로 다시 검사를  받습니다. 입국시에는 금속탐

지기 만을 통과합니다. 일본에서는 출국시에만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고 입국시에

는 검사가 없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출국할 때는  화약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합

니다만 칼이나 총기류(모형)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대합니다.  제 경우 한국에서

화약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습니다.  칼이나 총기류에는 어김없이 세

관검사에 협조에 달라는 노란딱지가  붙어 나오더군요. 이는 저의  경험에 의한

것이므로 혹시 이견이 있으시면 메일 또는 게시판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소 제 목 : Text 22


     2000년 2월 5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조직의 두목이면서도 마음 여리다는 말을 듣는  유정후에게 이런 일은 적성

에 맞지 않았다. 그는 간단하면서도 돈이 되는 일을  해왔고 또 지금도 그런 일

을 원했다. 비교적 고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유흥업소 경영이나,  건물, 대지

등의 경매 참여, 건설 회사의 입찰 담합과 건설  현장의 위력 시위 등이 그것이

었다.



 협박과 공갈을 통한 수금 같은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유정후 만이 아니

었다. 조직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이광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지금

조직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달리 없는 가운데 다른  사업을 해보자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달 전 이광혁은 유정후가 출소하면 새로운  사업을 해보자던 명성유통의 김

택환 이사를 찾아갔다.



 대표 이사가 아님에도 40대의  나이에 제법 탄탄한 주류  유통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택환 이사가 두 개의 회사 설립을 제안했다. 명성 맥주의 대주주이자 명

성 유통의 대표 이사를 맡고 있던 김택환의 친형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

라고 했다.



 유정후는 오래 전 명성맥주의 목포 지역 도매에 관여한 적이 있었고 나이트 클

럽을 운영했던 적이 있으므로 당시 명성 유통에서 영업 관리를 하던 김택환과는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자신이 명성 유통의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되고 새로 구상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

던 김택환은 마침 유정후가 출소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이 일해 보리라 마

음먹었다. 유정후의 사람됨은 자신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의  모질지 못한

성격이 새로 시작하려는 사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

만 곧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조금만 사업이  잘된다 싶으면 독립해서 차리거나

살모사처럼 남의 사업까지 잡아먹으려 드는 일이 다반사인 조직폭력계에서 유정

후는 믿을 만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 명성 파이낸스

 - 명성 신용정보조사



 명성 파이낸스는 목포에 설립한 사채회사였다. 지역정보 신문 광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채회사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으나 전주(錢主)가  명성 유통이니

만큼 회사 자본금이 넉넉했으며 인기도 좋았다.  김택환으로서는 돈을 벌어보자

는 것 외에도 명성 유통의 비자금을 조성하려는데 설립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명성 신용정보조사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직, 간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회사였다. 각 채권자인 개인이나 회사의 의뢰로,  채무자의 숨겨둔 재산을 찾아

내어 빚을 받아내는 것이 주된 업무였는데 아직 IMF 체재 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일거리가 넘칠 정도로 잘 되었다.



 은닉한 재산을 찾아내는 일은 새로 뽑은 똑똑한  대졸 사원들의 몫이었고 협박

과 공갈은 신목포파 조직원들의 일이었다. 조직원들 대부분을 이 회사의 직원으

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조직원들의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심지어 사장의 명의를 갖고 있는 유정후에게  깡패자식을 취직시켜 주어 고맙다

는 전화를 한 조직원의 부모도 있었다.



 낮에는 자고 저녁이나 되어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일하던 조직원들에게는 일

반 회사원들처럼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이면 퇴근하는  일이 따분하고 적성에 맞

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을  좋아하는 조직원도 있었다. 이광혁의  출소 전부터

채무자 협박으로 소일하며 돈이나  뜯어내던 것이 직업이었던  김근태에게는 딱

맞는 일이었고 이승영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협박이라면 자신들에게

맡기라며 열성적으로 일했다.



 유정후의 지시로 이승영과 김근태는 다른 조직원들에게  채무자 협박하는 방법

도 가르쳤는데 유정후는 절대 채무자의 자녀에게 손대는 짓은 하지 말도록 했고

채무자의 집으로 찾아가 대, 소변을  보는 일과 같은 행동은  일체 금지시켰다.

이때 김근태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형님은 잘 모르시는구만이라....웁따던 돈도 오짐 한 번만 깔겨 부리면..."



 유정후의 사나운 눈초리를 본 김근태는 찔끔하여 말끝을 흐렸다.





                                                   



                                                             
 소 제 목 : Text 23


 명성신용정보회사의 수익은, 더 이상 받을 길이 없어 보이는 악성 채권의 경우

최고 90%까지 였다. 보름 전 찾아왔던 개인  의뢰자의 경우가 그러했다. 친구가

사업한다고 해서 퇴직금으로 받은 팔천만 원을  빌려주었는데 사업이 망해서 돈

받을 길이 막막했다.



 하루 끼니 연명하기도 힘들다는 친구에게 돈 갚으라고  말도 못 꺼내던 의뢰자

는 어느 날, 쌀이라도 가져다 줄 생각에 집을  나섰다가 가족과 함께 고급 레스

토랑에서 나오는 친구를 목격했다.



 의심이 들어 뒷조사를 해보니 사업한답시고 이리저리  돈을 꾸어다가 중간에서

착복하고 고의로 부도냈다는 것을  알아냈다. 돈 갚을 것을  요구했으나 대답은

'있으면 뒤져서 가져가라.'였다. 괘씸하고  뻔뻔한 친구의 모습에  받을 돈이고

뭐고 혼이나 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의뢰자는 명성신용정보회사로 찾아왔다. 돈

을 받게되면 자신에게 10%만 달라고  했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는  받기 힘든

돈 약간이나 받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팔천만 원은 위임장을 휴대한 김응진과 김근태가 간단하게 받아왔다. 김응진은

뒷짐지고 서 있기만 했고 걸쭉한 사투리의 김근태가 속사포처럼 몇 마디 쏘아대

자 돈 없다던 채무자는 금새 오천만 원을  마련해왔다. 김근태가 성질을 부리며

몇 마디 더 하자 채무자가 나머지 삼천만 원을 더 가져오는데는 불과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김근태가 말했던 내용은 장기를 팔라는 협박이었다.  눈알 하나에 오백만 원씩

계산해서 마누라 것과 함께 이천만 원, 신장은 천만 원씩 치면 사천만 원, 나머

지 이천만 원은 간장이나 폐 등 필요한 것으로 뜯어가서 채우겠다고 했다. 원래

이런 협박은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죄목이지만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었다.



 채무자가 처음 오천만 원을 가져왔을 때,  김근태는 태연하게 고맙다고 인사하

면서 눈알 두 개와 신장 하나로 나머지 계산을  맞추자고 하자 채무자는 혼비백

산하며 잔액을 마련해 왔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정말  돈 없다고 버티는 채

무자들은 몇 일씩 미행하며 행적을 조사했다. 가족이나  친지의 계좌 추적은 물

론 전화 도청까지 했다. 그래도 돈 가진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깨끗하게 포기했

지만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돈이 있음에도 없다고 잡아떼며 배 째라는 식이었다.

 한국 사회와 신용 사회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사업하다 망했다는 사람은 그래

도 떵떵거리고, 죽어나는 것은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는 종업원들뿐이었다.



 '돈이 모이면 다른 사업을 해야겠어.'



유정후가 이런 일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담배를 하나 피워 물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혀어... 사장님."



아직 사장님이라는 단어가 입에 익지  않은 이광혁이 빨갛게 된  얼굴로 들어왔

다. 같이 들어온 김응진은 유정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빨간색 가죽 장

갑을 벗어 히터 옆에 올려두었다. 유정후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반갑게 맞았

다.



 "그래. 수고들 했다. 일은 잘 되었나?"



 "박 사장 그놈은 짱 박아 둔 돈이 십억이 넘습니다. 형...사장님."



이광혁이 큰 건을 하나 해결했다는 듯 목청 높여 말했다.



 "그래? 다 찾았나?"



 "어휴. 말도 마십쇼. 어디서 줏어 들은 건 있어서  합기도 좀 했다는 보디가드

두 명 쓰러뜨리니까 바로 통장하고  CD 꺼내 내밀더라구요. 더  쑤시면 또 있을

것 같은데 나머지는 나중에 받기로 하고 여기 이거 가져왔습니다."



이광혁은 빨간색의 베네통 학생용 가방에서 만 원 짜리  신권 수십 묶음을 꺼내

유정후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았다. 다 올려놓았을 즈음 주차를

마친 이승영과 김근태가 들어왔다.



                                                   




                                                             
 소 제 목 : Text 24


     2000년 2월 7일. 월요일. 오후 7시 20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님 피하셔야 겠습니다!"



다급하게 외치는 사내는 한쪽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들어왔

다. 바로 뒤에서 다른 사내가 뛰어오며 외쳤다.



 "형님 빨리 피하십시오!"



말을 마친 사내는 뒤에서 질러대는 발길질에  몸을 앞으로 휘청거리며 넘어지듯

들어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세차게 열리며 손잡이가 벽면에 부딪혔다.



 "뭐야!"



형님이라는 사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기 있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얼굴

에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미꾸라지맨쿠로 우예 도망가겠다능교?"



사람과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상이었다.  이중은의 지시로

열댓 명의 해운대파 조직원들과 함께 이곳으로 들이닥쳤다.



 한 달여간 이중은은 조직의 세(勢)를  착실히 불려왔다. 그 후  히로타 구미의

자금지원을 받게 되자 조직원을 보강하고 빼앗긴 나와바리를 다시 찾고자 했다.

해운대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운대 지역에  쓸만한 영업장 하나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사일은 바로 오늘이었다. 먼저 오늘 자정까지 다섯  곳의 룸살롱, 대형 단란

주점을 급습하고 새벽에는 나이트클럽 세 곳을 칠 계획을 세웠다.



 기존에는, 상대 조직이 관리하는 영업장을 빼앗으려 들 때면 미리 업주에게 관

리 조직을 바꿔줄 것을 요구한 뒤 허락을 받거나, 거절을 당하면 전쟁을 치루었

지만 성질 급한 최명규의 의견대로 일단 모조리 친  후에 업주에게 요구할 방침

이었다.



 히라타 구미로서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부산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힘을 쓰는 것

이 달갑지 않았지만 형제의 의를 맺은 조직의 힘이 커지면 결과적으로 자신들에

게도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여 돕기로  했다. 이미 와있던 네  명의 요시이 구미

조직원들 외에 추가로 다섯 명의  히라타 구미 본가 조직원들이  부산에 도착했

다.



 호랑이가 없을 때는 여우가, 여우마저 없을 때는 토끼가 왕 노릇을 한다고, 해

운대뿐만 아닌 부산 전 지역을 신진 세력들이  연합하여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조직들은 기존의 주먹 계보와 관계가 없는 것은 물론,  주먹 앞에 선배 같은 것

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만큼 의리도 없었다.



 이런 조직들에게 대형 조직들의 두목급들이 대부분 구속되어있거나 보호감호를

받고 있던 '90년대가 팍스 코리아(Pax Korea)였다. 관(官)과의 적당한 결탁, 경

찰과 검찰의 비호아래 성장하기는 했으나 천적이 없다보니 자연 주먹의 힘은 그

리 강하지 못했다. 적이 없으니 자연히 매너리즘에 빠지게 마련이었다.



 해운대 지역에서 대형 룸살롱으로 꼽히는 황제 비즈니스  클럽의 영업 상무 김

창순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5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울먹였다.



 "예. 사장님. 저와 제 아이들은 손떼겠습니다. 예. 앞으로는 이중은 씨 관리하

에 영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예. 그럼 이만."



 김창순의 뒤에는 스무 명 남짓한 동생들이 피투성이인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급습에 일방적으로 무너졌고 다른  조직에 도움

요청을 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없었다. 끝내 박정상의  협박에 김창순은 황제 비

즈니스 클럽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박정상이 내미는 몇 가지  서류에 도장을

찍고 대양프로덕션 사장, 즉 이중은의 명의로 되어있는 위로금 봉투를 받았다.



                                                   



                                                             
 소 제 목 : Text 25


 업소를 폐쇄하고 임시 휴업한다는 안내문을 써 붙인 박정상은 대양프로덕션 사

무실의 최명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임요. 지는 정상입니더. 예. 끝냈심더. 예...."



 이중은과 최명규는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체면도 있는지라  직접 나서지

않고 사무실에서 명령만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기소중지 중인 유형남도 전쟁터

에 나가보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단 새벽의 호텔 나

이트 클럽 급습 시에는 최명규가 일선에 서기로 했다.



 전화 보고를 마친 박정상은 이번엔 김재수에게  걸었다. 김재수 역시 동생들을

이끌고 해운대의 대형 단란주점인 스타포트를 습격하는 중이었다.



 "재수가? 우예 됐나?"



박정상이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시원치 않았다.



 "난중에 연락할끼구마."



김재수는 귀찮다는 말투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 그는 전화 받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홉 명의 동생들을 이끌고 스타포트를  습격했지만 마침 스타포트에

서는 인근 유흥업소 사장들이 모여 회식을 하던 중이었다.



 사장들만 있던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과 운전사들이 옆방에 따로 모여있었기 때

문에 숫적으로 크게 불리했다.  게다가 김재수는 주먹잡이가  아닌 칼잡이였다.

이중은이 가급적 칼은 쓰지 말도록 당부했기 때문에 김재수는 몸으로 치고 받는

중이었다.



 "개새끼! 뒈져라!"



스타포트 영업부장인 박세진이 알루미늄으로 된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켁!"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사내는 해운대파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

은 어린 동생이었다. 다행히 머리를 비껴 어깨에  맞았으나 탈골이 되었는지 축

늘어졌다. 박세진이 다시 야구방망이를 치켜올렸다. 다른 동생이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으나 박세진은 재빠르게 걷어찼고 동생은  사타구니를 움켜쥐면서 고꾸라

졌다.



 여종업원들의 비명소리가 울리는 홀 안에서 김재수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까지

포함해 열 명밖에 오지 않았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기껏해야 스무 명도 안

될 줄 알았던 스타포트의 종업원들은 룸마다 한 두 명씩 뛰어나왔고 유흥업소의

사장들과 식솔들까지 합쳐서 오십 명도 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스타포트 단란

주점에는 넓은 홀이 없었기 때문에 급습한 김재수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가라오케나 나이트클럽 같은 넓은  장소였다면 인원수에서 크게  불리한 김재수

일행은 이미 손을 들었을 지도 몰랐다.



 "이눔아들이 어데 와서 까부노? 니 누고?"



박세진이 야구방망이를 한 손으로 들고 김재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싸움은 잠시

중단되었다.



 김재수는 어쩔 수 없다고 느꼈다. 나중에 형님들에게 혼날 땐 혼나더라도 동생

들을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세 명의 동생들

이 바닥에서 신음 소리를 뱉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터였다. 발목에 숨겨두었

던 날 길이 25센치 짜리의 칼을 꺼내 던졌고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칼은 박세진

의 옆구리에 깊숙히 박혔다.



 박세진이 크게 놀라 뒤로 주춤한 사이 김재수는 반대편 발목에서 꺼낸 칼을 꺼

내 들고 뒤로 돌아가 그의 목을 겨누었다. 홀 조명에 반짝이는 칼날은 푸르스름

한 것이 상당히 날카로워 보였다. 박세진의 눈이 커졌다.  그 짧은 순간에 목젖

이 요동치며 침을 삼켰다.



 "죽여라!"



 스타포트의 정문으로부터 김재수는 평소  자주 듣던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정상이었다. 곧이어 후

문에서도 응원군인 동생들이 뛰어들어왔다.



                                                   



                                                             
 소 제 목 : Text 26


     2000년 2월 8일. 화요일. 오전 12시 50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명규가 이끄는 스물 세 명의 해운대파 조직원들은 그랜드 관광호텔 지하 1층

의 나이트 클럽으로 쳐들어갔으나 정보가 샜는지 호텔 주위에 경찰들이 좍 깔려

있었다.



 해운대파는, 전쟁을 오래 치루게 되면 경찰과 검찰이  냄새 맡기도 쉽고, 상대

조직의 반발도 강해질 것을 예상하여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여덟 곳의

대형 영업장 접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스타포트에서의 혈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몇 군데의 영업장은 다른 지역

의 조직 연계를 통해 방비를 강화했고 지금 도착한 곳은 경찰의 보호를 받는 중

이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나이트 클럽 하나도 챙기지  못한 채 이대로 물러나게

된다면 앞으로는 더욱 어렵게 될 것이었다. 최명규는  동생들을 태운 여섯 대의

승용차를 로얄 비치호텔로 보내고 자신과 요시이 구미의 조직원 두 명은 택시를

통해 이동했다. 동생들은 양복을 입히고 넥타이를 매도록 해 회사원으로 위장하

거나 모자와 낚시복을 이용해서 낚시꾼으로 보이도록 했다.



 로얄 비치호텔의 나이트 클럽은 해운대의 업소들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명소

였다. 하루 주류 판매량만 해도 이 지역 수위를 달리는 곳이었으며 연예인 공급

량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지난 '90년대 초반 이중은의 손에 넘어온 것이나 다름

없던 영업장이었지만 구속으로 인해 그 꿈이 좌절되었던 적이 있었다.



 워낙 매출액이 높은 곳이라서 이 호텔 나이트  클럽만 입수하게 된다면 4-50명

의 조직원들을 취직시키고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큰 먹이인 만큼

쉽게 물러설 곳도 아니었다.



 로얄 비치호텔 나이트 클럽의 영업부장은 칠성파 출신의 역전 노장 이승호. 부

산 지역 최대 폭력 조직이었던 칠성파에서  분가했으나 아직도 칠성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특별한 조직은 없어도 따르는 동생들이 많았

고 클럽 내의 웨이터, 보조, 기도들을 수족처럼 부려서  클럽이 한 개의 폭력조

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칼을 쓴 이상 한 번의 칼질이나 두  번의 칼질이나 혹은 그 이상이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중은은  김재수가 칼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왕에

이렇게 된 것 보다 확실하게 조직의 힘을 보여주라고 지시했다.



 냉혹한 최명규는 가차없었다. 선글라스를 꼈으나 그의 큰 키 때문에 나이트 클

럽의 기도들을 곧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최명규는 그들이  놀라고 있는 동안 사

정없이 그었다. 원래 칼잡이들은  내장 깊숙하게 찌르는  '담근다.'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최명규는 근육 조직이 상하지 않도록 허벅지나  등, 옆구리 등을 얇

고 길게 베어 가며 앞으로 나섰다.



 클럽의 영업은 정상적으로 되고  있었지만 화요일 새벽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

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자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고 최명규

와 그의 동생들은 입구로 몰려드는 손님들을 제치며 클럽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





 이승호의 대비도 만만치 않았다. 부산과 마산의  깡패들을 모조리 모아놓은 듯

나이트 클럽의 룸마다 대여섯 명씩의 사내들이 각종  연장을 들고 나타났다. 이

중은이 출소한 이상 한 번쯤 전쟁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승호였다. 칠성파

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기로 하고 동생들을 불러놓았다.



 원래 전쟁이란 기습하는 쪽이 조금 더 유리하게 마련.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

으므로 기습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김재수,  박정상을 비롯한

지옥훈련의 동생들 다섯과 함께 뛰어들어간 최명규는 전광석화와 같이 날아다녔

다. 이런 우두머리의 모습을 본 동생들 역시 용기백배하여 전력을 다해 싸웠다.



 10여분간 지나자 점차 이승호 쪽이 밀렸다.  해운대파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여기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터져 나왔다.



 요시이 구미에서 파견한 조직원 호시노(星野)는 사실 야쿠자라기보다는 샐러리

맨에 가까웠다. 명문인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것도  그렇고 영어와 한국어도 구

사할 줄 아는 인텔리였다.



 미국의 마피아, 홍콩의 삼합회나 일본의 야쿠자  같은 기업형 범죄조직들은 조

직원 개개인의 싸움실력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조직간의 전쟁은 주먹이 아니라 배짱과 두뇌회전을  동반한 화력이었다. 즉, 맨

손이나 칼이 아닌 총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방아쇠 당기

는 힘 앞에는 무력해 지는 것이 인간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고  있던 호시노에게 누군가 일본도

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것이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호시노는 다급한 나머지 이곳이 총기 사건에는 일본과 비교도 되지 않게 민감한

한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왼쪽 어깨 아래에 있던 홀스터에서 총신이 짧은

리볼버를 꺼내 상대를 겨눔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탕!



                                                   



                                                             
 소 제 목 : Text 27


     2000년 2월 8일. 화요일. 오후 8시 20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이고! 이런 머저리 등신 같은 새끼들!"



이승영이 읽던 신문을 내던지며 뱉는 말에 김근태가 쳐다보았다.



 "먼 일 있어라?"



 "돌탱아! 너도 맨날 만화만 보지 말고 신문도 좀 봐라!"



난데없이 욕을 먹은 김근태는 툴툴거리며 신문을 집어들었다. 1면에 작게, 사회

면에 크게 장식된 기사는 부산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폭력배 사이에서 총기 사건

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용의자는  잡히지 않았으며 피해자는  중태였다. 이권을

노리는 조직간의 세력 다툼이  원인일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도  들어있었다. 한

쪽 면에는 최근 1-2년 사이에 출소한 폭력  조직 두목급들의 리스트가 나와있었

는데 그 안에는 유정후의 이름도 보였다.



 "워매..징한 거 총질을 해버렸구만이라...음마  이러면 후리가리(일제단속) 뜨

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요잉? 형님."



 "부산이라 다행이지만서도 미친놈들 총질을 하면 어쩌겠다는 건지..."



이승영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총을 줬을까요잉? 형님"



김근태가 물었다.



준다는 말은 폭력계에서는 찌른다는 뜻으로 통하는 말이었다. "칼 준다." 는 식

으로 많이 쓰였는데 김근태가 총에도 준다는 표현을  쓰자 어딘가 어색했다. 김

근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워매..겁나부리는거...우리두 무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요잉? 형님.

부산 아그들이 총 들고 설치면...으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편 부산의 해운대파는 침통한 분위기였다.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에 착수했

고 여론이 들끓었다. 아직  해운대파에 경찰이나 검찰이 다녀간  적은 없었지만

곧 증거가 드러나면 해운대파로서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다.



 총성이 울리자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최명규는 곧 동생들을 수습해서 로얄비치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철수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빠트린  호시노는 오늘 오전

11시 출발의 일본국적의 비행기로 오사카에 보냈고  통역을 통해 요시이 구미에

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조직원들은 집으로  귀가 시켰고, 상처가 있

는 조직원들은 서울로 보내서 치료하도록 했다. 아직 경찰에서는 해운대파가 싸

움을 주도했다는 심증을 굳히지 못한 것 같았다.  이승호는 잠적했고 클럽의 관

계자들은 경찰과 이야기하길 꺼려했다.  또 총을 맞은 피해자는  응급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었다. 다만 경찰 끄나풀들의 귀띔을 통해 가해자로는 해운

대파가 유력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잠수를 타게되면 더 의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최명규는 조용히 부

산에 눌러있기로 마음먹었다. 뒤에서 조종했지만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이

중은은 별 문제 없었다.



 최명규는 어떻게 해서 호시노가 총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호시노는 입국

할 때도 자신과 같이 들어왔었다. 김해 국제공항의, 칼에도 삑삑 거리는 탐지기

가 그냥 통과시켜줄 리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변장을 하고 히라타 구미

의 조직원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그들은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있으면서 부산과 제주도, 태백 등의 지역에 대한  투자 가능성을 알아보는 중이

었다.



                                                   



                                                              
 소 제 목 : Text 28


 2000년 2월 8일. 화요일. 오후 10시 4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산시 중구 광복동 동양 관광호텔 804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명규가 방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히라타 구미에서 파견한 조

직원 다섯 명이 있었다. 요시노  구미의 조직원 세 명은  밖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본말을 하지 못하는 최명규는 손가락을  이용해 총 모양을 만든  다음, 쏘는

시늉을 하고 다시 손바닥을 펴서 가슴을 쳤다. 총을 달라는 뜻이었다.



 한국에서의 총기 사용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폭력 조직간의 피를 흘리는 전

쟁에서도 총기는 서로 쓰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없어서 못 쓰는

것이 아니다. 전국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총포상들이  있고, 인구의 9%가 정규

군이거나 예비군, 경찰 소속으로, 연간 분실되는 군용 총기의 양도 상당한 데다

가 매년 실시되는 불법 무기  자진 신고기간에 신고되는 수많은  총기들을 보면

한국도 총기에 있어서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회칼을 사용한 싸움에도 온 나라가 떠들썩한  한국 땅에서 총기를 쓴다

는 것은 한국의 폭력 조직으로서는 자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즉, 공멸을 막자

는 취지에서 서로가 총기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었다. 정부로서는 치안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들이 자제할 지는 미지수다. 한국의 폭력 조직이 더 광대한 조직력

과 자금원을 갖춘다면 거리에서의 총기 난사와 같은 사건이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최명규도 이러한 생각에 야쿠자들이  갖고 있는 권총을 빼앗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총을 갖고 있는 이상 오늘 새벽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

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물며 이들은 전투 요원으로 온 것이 아니라 투자 자문역

으로 온 것이 아니던가.



 최명규의 행동에 히라타 구미의 조직원 한 명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을 지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호시노가 아침에 귀국해 버렸으므로 통역이 없

으면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았다. 답답한 최명규가 다시 손가락을 접어 총을 만든

후, "건(Gun)! 건! 구다사이!" 라고 말하며 이번엔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

나 돌아온 답은 역시 모르겠다는 시늉이었다.



 답답한 최명규는 객실 전화기를 들어 프론트에 이  호텔의 나이트 클럽을 연결

해 주도록 요청했고, 곧이어 연결된 나이트 클럽의 담당자에게는 지배인을 바꿔

달라고 했다.



 지배인 조준현은 최명규가 첫 번째로 구속되었을  때의 미결수 동기였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8년간은 만난 적도 없었다. 단지 서로의 소

식만 듣고 있던 터였다. 성격 급한 최명규는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804

호실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이윽고 올라온 조준현과 인사를 나누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조준현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겐쥬 못테마스카?(권총 갖고 있습니까?)"



조준현이 물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려오자 다섯  명의 조직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

다. 최명규는 이들이 틀림없이 총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직원들 중

한 명이 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다시 총이  있느냐고 묻자 히라타 구미의 선

임조직원인 우에하라(上原)가 대답했다.



 "권총이 있는지는 왜 묻습니까?"



 최명규가 거짓말을 섞어 말했다. 한국에서는 폭력법이  아닌 별개의 총기 관리

법이 있고, 또 권총을 갖고 있다가 걸리면 간첩으로  몰릴 수 있다는 요지의 이

야기였다. 이를 조준현이 전했다.



 다섯 명의 야쿠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를 마친  후 우에하라가

옷장에서 다섯 정의 권총을 꺼내 놓았다. 미국제  콜트와 중국제 토카레프가 섞

여 나왔다. 이들이 의외로 순순히 권총을 꺼내는  것을 본 최명규는 일본에서부

터 가져온 권총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 제 목 : Text 29


 최명규는 출소 전 공주 교도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러시아 선박이

부산에 입항하기 시작하면서 권총 구하기가 쉬워졌다는 이야기였다. '90년대 초

반만 하더라도 100만 원을 호가하던 권총이 최근에는 25만 원만 주어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소문으로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초코파이 한 상자와 권

총 한 정을 맞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도 떠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권총을 갖

고 싶어 초코파이 한 상자를 가져가 건네주었더니 권총이 없다며 대신 기관총을

주는 러시아인도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최명규의 짐작대로 히라타 구미의 조직원들은 조직과  연계된 러시아 조직으로

부터 권총을 구했다고 말했다. 최명규는 대양프로덕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꼬

붕 한 녀석을 시켜 권총을 가져가도록 일렀다.  그리고 자신은 택시로 사무실에

돌아오면서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형제의 의를 나누긴 했지만 차후에 국적이 다른  히라타 구미와의 트러블이 생

기면 어떻게 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원을 갖춘 국제 폭력

조직을 한국땅에 불러들인 마당에, 한국땅에서 총기를 사용한다면 해운대파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폭력 조직이 무너지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무장하려고 하지

않겠냐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날 처음으로 최명규는 히라타 구미와의 연계는

잘못된 행동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





 2000년 2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55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샤프츠베리 애비뉴(Shaftesbury Avenue) 카지노 골든 너겟.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 모어 벳! 땡큐!(더 이상 베팅할 수 없습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육감적인 원피스 유니폼을 입은 여자  딜러가 강한 어조로 말

했다. 항상 제일 늦게 베팅하거나 베팅한 후에도 칩의 위치를 자주 바꾸는 동양

인이 이번에도 역시 볼이 서려고 할 때 칩의  위치를 바꾸었다. 항상 웃는 얼굴

로 손님을 대해야 하는 딜러였지만 이 손님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큼 얄

미웠다.



 한 마디 들은 동양인은 급히 손을 떼 내며  봐달라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동양인이 베팅한 곳은 21번과  24번. 두 개의 숫자였다.  17배의 배당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볼의 속도가  떨어지자 불안했는지 19번부터 24번까지

의 여섯 개 숫자 위로 칩을 옮겼다.



 "트웬티 원. 레드. 오드.(21에 레드, 짝수입니다.)"



  데구르르 구르던 볼이 멈추어 서자 여자 딜러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1번 위에 마크를 올려두고 살짝 동양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소하게 생각하

는 모습이었다. 동양인이 칩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받을 수 있었던 17배

의 배당이 다섯 배로 줄었기 때문이었다.



 동양인이 뭔가 빠르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일본말이었다.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딜러  옆의 감시인에게 능숙한 영어

로 말했다. 자신의 칩은 베팅을 하면 안 되는 시점에서 옮긴 것이니 그 전의 위

치로 바꾸어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감시인과 딜러는 서로 어이가 없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잠

시 생각한 감시인이, 그렇다면 베팅을 못하는 때에  배팅한 것이므로 아예 무효

로 하자고 나왔다. 일본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냥  다섯 배의 배당이나 달라

고 했다.



 일본인이 베팅했던 금액은 천 파운드.  다섯 배의 배당금 오천  파운드와 베팅

원금을 포함해서 육천 파운드에 해당하는 칩이 그의 앞에 쌓였다.



 빅 그린 칩. 이 카지노에서 가장 큰 금액이 적혀있는  칩으로 한 개에 천 파운

드 짜리였다. 여섯 개의 빅 그린 칩을 만지작거리던  일본인은 한 판에 한 개씩

베팅했고, 여섯 번의 룰렛 휠이 돌아간 뒤에는 빈털털이가 되었다.





                                                   



                                                             
 소 제 목 : Text 30


         2000년 2월 10일. 목요일. 오후 2시.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번이 정말...마지막이다.'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의  일원인 모리시타(森林)는 역  지하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다짐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한 다짐이었지만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굳게 다짐했다.



 아사히 UK.는 일본 최대의 맥주 회사인  아사히맥주 주식회사의 영국 법인으로

이미 영국에 진출한 지 6년이나 된 회사였다. 작년까지는 주로 일식 요리점이나

고급 레스토랑을 상대로 수입된 아사히의 병맥주 판매를 해왔다.



 일본의 맥주 시장은 크게 기린과 아사히, 삿포로 등  세 회사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97년까지 일본 최대의 맥주 회사는 기린이었다. 그러나 아사히가, 지

난 '87년에 개발한 "슈퍼드라이" 덕택에 결국 기린을  제치고 업계의 수위로 떠

오르게 되었다. 슈퍼드라이 맥주를 개발한 지  10년만의 쾌거였다. 아사히는 그

동안 일본인들의 입맛을 바꿔놓았다.



 아사히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세  회사들 중 가장 먼저  유럽에 진출했으며

영국의 맥주 공장 설립을 위해 런던 지사의 인원과  규모를 대폭 확장하고 전략

적인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었다.



 모리시타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피카딜리 서커스 지하철역에서 나왔다.



 '잘못 나왔군.'



 트로카데로 센터(Trocadero Centre) 쪽의  출구로 나와야 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반대편의 피카딜리 쪽으로 나온 모리시타는  에로스 상을 지나 샤프츠

베리 애비뉴의 카지노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성공한다고 손 뗄 수 있을까?'



 하와이 태생으로 호세이(法政) 대학을  마친 모리시타는 타고난  말재주에 4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실력, 깨끗한 일 처리로  사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사원

으로 통했다. 물론 장래가  탄탄하게 보장된 젊은이였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22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맥주에 입사한 지 3년  차가 되어 런던 법인으

로 오게되었고, 그가 모시던 상사는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런던 법인의 정식

직원이 아닌 파견 형식으로 보내주었을 정도였다.  '97년 영국의 광고계를 시끄

럽게 했던 히라가나 표기의 아사히 맥주 광고 카피는  그가 런던에 오고 나서의

첫 작품이었다.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아직도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많은 영국의

출판물에 아사히의 맥주와 그 옆의 "100년 전 일본에는 차도 맥주도 없었다."라

는 카피의 광고는 많은 영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 겨울. 일밖에 모르던 모리시타에게 동료 중  한 사람이 도박을 가르쳤다.

많은 사람들이 도박을 통해  망가진다고 하지만 모리시타는 그  속도가 빨랐다.

가지고 있던 스미토모,  사쿠라, 미츠비시 은행의  구좌는 바닥이  났고 비자와

JBC 등의 신용카드사에서는 연일 경고장이 날아왔다. 하와이의 부모, 일본의 형

제와 친구들에게 빌릴 수 있을 만큼 빌려 썼으며  회사 동료와 상사들에게도 거

리낌없이 돈을 빌려 썼다. 그러나 도박을 시작한 후로  한 번도 갚은 적은 없었

다.



 도박에 빠지다보니 일에도 관심이  떨어졌다. 회사는 건성으로  다닐 뿐이었고

출근 후에는 카지노가 개장하는 오후 2시까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80kg에 달

했던 몸무게는 65kg이 되었고 머리 속에는 온통 일확천금을 꿈꾸는 생각밖에 없

었다.



 모리시타는 시계를 보았다. 2시 10분. 카지노가 개장한지 10분이 지났다. 이윽

고 카지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리셉션에서 반갑게 인사한다.



 "헬로우. 미스터 모리시타!"



 모리시타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멤버쉽 카드를 내밀었다.  리셉션에서 건내

주는 종이에 사인을 한 후, 그는 "굿 럭." 이라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바쁘게 엘

리베이터로 향했다.



                                                   



 소 제 목 : Text 31


 2000년 2월 10일. 목요일. 오후 6시 3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렉싱턴 스트리트(Lexington St.) 펍(Pub) 블루 라이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버트 노블은 매우 짜증이 났다. 그를 짜증나게  하는 손님은 벌써 8파인트나 

되는 스텔라 아토이즈의 생맥주를 마셨다. 조금 꼬부라진  혀로 한 시간이 넘도

록 떠들고 있었다. 그 손님이 또 맥주 주문을  한다면 축객령을 내릴 생각인 로

버트는 묵묵하게 일하며 미스터 킴. 즉, 김창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버트는 김창환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 이안 노블로부터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김창환은  아버지에게 거액의 자금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담보로 잡힌 펍도 그대로 자신이 운영하도록  해주었고, 간섭도 하지 않

았다. 영국 남부의 휴양도시  브라이튼의 한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는 김창환은 

세상일과는 담쌓고 살았지만 영국에 오기 전부터 꿈꾸어 왔던  한 가지 일은 그

대로 추진했다.



 그것은 자신이 대주주로 있으며 유통까지 맡고 있는 명성맥주의 영국 수입건이

었다. 이미 명성 맥주와 다른 한국산 맥주는  "Imported"라는 딱지를 붙여 다른 

회사가 수입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국산 병맥주의 영국 판매량은 미미한 수치였

지만 그래도 2만 명에 달하는  교민과 주재원들, 한국 식당의  고객이 있었으며 

맥주를 좋아하는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한국산  맥주의 맛을 좋아하는 매니어

들도 있었다.



 영국의 맥주 시장은 연간 24억 달러 규모.  전체 소비량은 6천만 헥토리터(hl)

에 달한다. 흔히 맥주 왕국은 독일이라 하지만 독일은 지역마다 특색 있고 개성 

있는 소규모 맥주회사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진출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영국은 독일과는 다르다. 대표적인 맥주라고는 스타우트(Stout) 종류인 

기네스(Guinness)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대륙에서  건너온 브랜드였다. 또한 

납세를 마친 맥주 수입의 제한도 없었다.



 독일에서는 라거(Lager), 영국에서는 스타우트인 기네스만 마시는 것처럼 알려

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국의 음주자들은 자신들의 소득 중 6퍼센트를 

음주에 쓰고, 그 중의 반은 맥주를 마시는데 쓴다. 또 마시는 맥주의 반 이상은 

라거이고 나머지는 스타우트, 비터, 에일 종류의 맥주가 차지한다.

 

 로버트는 김창환의 요청대로 블루 라이언 안에 천연  암반수로 만든 명성의 병

맥주를 진열해 두었고 포스터와 스티커도 곳곳에 붙여두었다. 예상했던 대로 판

매는 극히 부진했다. 값도 비쌌지만  원래 펍에서 판매되는 맥주의  90% 이상은 

생맥주였고 나머지 10%의 대부분은 안호이저 부쉬사의 병맥주, 즉 버드와이저의 

차지였다.



 "원 모어 파인트 플리즈!(1파인트 더 주세요.)"



 로버트의 귓가에 술 취한 손님의  맥주 주문이 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제는 

내 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리시타는 울적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어제 카지노에서 마지막  돈을 잃고 

난 후 모리시타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룰렛 판의 칩을 모두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새벽까지 카지노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다가 숙소로 돌아갔으나 잠이 올 

리 없었다.



 그가 속해있는 특수영업팀은 발로 뛰며 미소와 화술을  이용한 영업 전략을 구

사했다. 아사히의 구로나마(黑生)라는 이름을 가진 생맥주를 판매하는 것이었는

데 런던의 펍 마다 돌아다니며 랜드로드를  설득하는 것이 특수영업팀의 일이었

다.



 각 펍에는 레벤브로이, 칼스버그, 밀러, 포스터스  등의 생맥주가 공급되고 있

었는데 이런 인지도 높은 브랜드 맥주를 밀어내고 신생 아사히의 생맥주를 공급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대신 아사히로서는 자사의 생맥주

를 공급받는 펍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펍의 단장은 물론 자금 지

원과 홍보용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방침을 세웠다.



                                                   



                                                              
 소 제 목 : Text 32


 오늘 새벽 일찍 회사로 온 모리시타는 어차피 망가진  인생, 마지막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이미 모리시타는 도박 중독 말기에  들어서서 도박과 관계된 것이 

아니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특수영업팀에게 영업 지원용으로 할당된  다섯 대의 아우디 80  승용차 중에서 

한 대를 몰고 가 런던 남부 복스홀 지역의  한 창고에 넣어두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온 모리시타는 같은 방법으로 모두 네 대의 아우디를 복스홀에 가져다 

두었고 마지막 차를 가지러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 했을  때는 시간이 늦어 버렸

다. 다른 사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모리시타는 전화를 걸어 불러낸 흑인 남자와 대 당 오백 파운드씩에 거래했다. 

그래서 손에 쥔 돈은 이천 파운드. 지금까지 잃은  액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액수였지만 카지노에 갈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떴다.



 회사에서 지급한 노키아 휴대폰은 꺼 두었고, 오후  2시까지 성 제임스 공원에

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회사에서 카지노로 자신을  찾으러 올 지도 몰랐지만 

사내에 골든 너겟 카지노 멤버는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멤버가 아

니면 출입이 안 되는  곳이었으니까. 모리시타를 카지노에 출입하게  한 동료는 

이미 카드를 없애 버린 후였다.



 모리시타가 지금까지 골든 너겟 카지노에서 잃은 금액은  총 7만 파운드. 엔화

로 따져서 천만 엔이 훨씬  넘는 거액이었다. 카지노에는, 그  정도 금액이라면 

눈 하나 깜짝 않는 부자들이 많았지만 월급 30만 엔 짜리 샐러리맨에게는 몇 년

씩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카지노는 이런 사실을  잊게 해 주었다. 오

늘 갖고 있는 이천 파운드를 룰렛의 한 숫자에 걸어 맞추기만 한다면 35배의 배

당을 받을 수 있고, 이는 단숨에 그간 잃었던  모든 돈을 만회하고도 남는 금액

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모리시타는 주위를 살피며 카지노에  들어갔다. 자신이 첫 번

째 손님이었다. 가장 큰 금액까지 베팅할 수 있는  룰렛 테이블 앞에 앉자 머리

가 맑아졌다. 도박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딜러에게 오십 파운드 짜

리 지폐 마흔 장을 내밀었다. 무슨 칩을 원하느냐고  묻는 딜러를 '그것도 모르

느냐?'는 뜻으로 쏘아보다가 생각을 바꿔 핑크 칩으로 달라고 했다.



 빅 그린 칩 두 개로 승부 하려던 모리시타는 스무  개의 핑크 칩을 받았다. 한 

두 사람씩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딜러가  룰렛 휠을 돌렸다. 카지노에서는 

룰렛의 휠이 멈추어 있지 않도록 항상 돌아가게 해둔다. 볼은 휠이 도는 반대편

으로 퉁기지만 능숙한 딜러들은 그  볼이 어느 지점에서 떨어질  것인지 안다고 

했다. 즉 정확한 숫자는 맞추지 못해도 대략은 가능하기 때문에 딜러 출신의 도

박사들은 볼이 돌아가는 힘과 휠의  속도를 파악하여 '몇 번  근처'라는 식으로 

베팅한다. 때문에 많은 룰렛 도박사들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딜러가 볼을 퉁긴 

이후에 베팅했다.



 딜러가 웃으며 볼을 퉁기자 모리시타는 0번에 핑크 칩 열 개를 올려두었다. 볼

은 신기하게도 0번의 바로 옆인 26번에 떨어졌다. 모리시타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딜러도 안됐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 숫자만  옆으로 지나갔어도 

삼만오천 파운드의 돈이 생기는데 아쉽다는 생각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아쉽다는 마음은 지난 3개월 동안 수도 없이 가져본 모리시타였다.



 다시 핑크 칩 열 개를 0번에 올려두었다. 딜러의 장난인지, 하늘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볼은 0번 옆의 32번에 떨어졌다. 모리시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낄낄 웃어댔다. 이제  남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본국으로 소환 

당하게 되어 있었고, 회사 차를 팔아먹었다고 하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회사에서 

사법처리를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모리시타는 카지노에서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왔고 생각 없이 길을  걷다 가장 

가까운 펍에 들어왔다. 블루 라이언이었다.



 어지간히 취한 모리시타가 또 맥주를 주문하자  로버트 노블이 다가왔다. 그만 

나가달라고 할 참이었다. 그때 뒤에서 "보비!"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김창환이 펍 입구에 서 있었다. 로버트는 실질적인 블루 라

이언의 주인이 보는 앞에서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반갑게 인

사를 하면서 모리시타에게 다시 1 파인트의 맥주를 따라주었다.



                                                   



                                                             
 소 제 목 : Text 33


 "오, 보비 잘 지냈나?"



김창환이 펍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



 "미스터 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창환의 인사에 130kg이 넘는 거한 로버트가 어린이처럼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

했다. 김창환이 의자를 끌어다 바 앞에 놓고 앉았다. 

 

 "아버지도 안녕하신가?"



 "무적의 왕실해군 출신이신데 여전하시죠. 한 잔 하시겠습니까?"



 로버트의 말에 김창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우리 것으로 한잔 주게."



 로버트는 김창환이 말한 '우리 것'에 대해서 짧은  시간동안 생각하다가 씩 웃

으며 병맥주를 꺼냈다. 한국에서 대 히트를 쳤다는  명성의 천연 암반수 맥주인

데 로버트는 이 맥주의 맛이 독특하다고 느꼈다.  물이 깨끗하지 못한 영국이나 

유럽에서 만드는 맥주하고는 무언가 다르기는 했지만  펍에서 병맥주를 찾는 손

님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어도 명성 맥주는  아니었다. 김창환이 한국에서 이 

맥주의 유통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로버트가 잔을 꺼내어 김창환 앞에서 맥주를  따랐다. 시원하게 거품이 올라오

면서 잔 옆으로 약간 흘러내렸다. 김창환이 앉은 바 위에 잔을 올려놓으며 물었

다.



 "술은 드셔도 되는 겁니까?"



 "걱정은 고맙네만 나는 환자가 아니네. 난 단지 요양을 하고 있을 뿐이야."



말은 마친 김창환이 잔에 담긴 맥주의 반 정도를 단번에 마셨다. 건강하다는 모

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한 모리시타는 로버트에게 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가방에서 몇 가지 팜

플렛과 서류를 꺼냈다. 



 로버트는 이 취객이 왜 자신을 부를까?  귀찮아하는 얼굴로 모리시타에게 다가

갔다. 맥주를 더 주문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지만 조금 전 모리시타에게 

준 파인트 잔에는 맥주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모리시타는 본국으로 쫓겨가기 전에  회사에 좋은 일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블루 라이언이 있는 소호지역은 자신의 담당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

도 상관없었다. 한 개의 펍이라도 더 끌어들여  아사히 맥주의 꼭지를 설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로버트 앞에서 팜플렛를 늘어놓으며 자신이 일본계  아사히 맥주회사의 직원이

라 밝힌 모리시타는 아까보다는  정확한 발음으로 아사히의  생맥주를 공급받는 

다면 펍의 매상이 이전보다 훨씬 늘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로버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모리시타에게 정중한 어조로, 이런 영업에 관한 이

야기를 바쁜 저녁시간에 하는 것은 실례이며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 다른 손님이 맥주를 주문하자, 로버트가  '익스큐즈 미'라고 말하고는 모

리시타 앞에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누가 주인이냐며  모리시타가 큰 소리로 물

었다. 이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고 있던 김창환이 끼어 들었다. 김

창환이 모리시타에게 동양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말하자 모리시타는 일본인

이냐고 물어왔다.



 "한국. 나는 한국에서 왔소."



김창환의 대답에 모리시타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한국이라면 우리 아사히의 맥주 맛을 볼 수 없는 나라로군요."



모리시타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김창환이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좋은 물로 만드는 맥주가 있다오."





                                                   



                                                             
 소 제 목 : Text 34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김창환이,



 "세토(瀨戶) 사장 못 본지도 오래됐군."



이라며 중얼거렸다.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닌 지라 무심코  한국말을 썼다. 

술에 취한 모리시타는 "세토"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사히를 일본 맥

주업계 1위의 회사로 올린 장본인이 아닌가? 다만 김창환이 한국말을 썼다는 사

실은 모른 채, "세토? 세토? 왓?(What)" 하면서 김창환을 쳐다보았다.



 김창환은 이제서야 모리시타가 취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근무 시간도 

아닌 이 시간에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아사히의  맥주를 선전하는 그가 똑똑하

고 유능해 보였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김창환은 아사히와 세토의 

공격적인 해외 영업 전략이 훌륭하다고 느껴왔었다.  아사히는 기린이나 삿포로

보다 빠르게 해외에 진출했고 이미 영국 데번셔에 영국의  에일 맥주 전문 회사

인 배스 양조(Bass Brewer)와 함께 합작 공장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한국 회사

들이 그 정도까지 되려면 아직은 힘들겠지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펍의 주인이고 나는 한국의 명성 맥주에서 일하는 사람이오."



모리시타는 두 눈을 꿈벅이며 김창환의 말을 들었다. '명성 맥주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펍의 주인이라고?' 머리가 아파 왔다.



 "보비. 우리 맥주 한 병 더 주게."



김창환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훑어보며 로버트에게  말했다. 로버트는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맥주를 꺼내 김창환 앞에 내놓았다.



 "잔도 하나 주게나."



잔을 주며 로버트는 모리시타를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김창환은 역시 동양인

이라 같은 동양인에 관심을 가지나보다 생각했다. 



 잔을 받은 김창환이 모리시타를 향해 말을 했다.



 "이것이 우리 명성이 한국에서 주력으로 삼는 맥주요. 한 잔 드리지."



 모리시타는 기계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잔을 들어  김창환이 따라주는 맥주를 

받았다. 모리시타의 두 눈이 풀린 상태였으나 김창환은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건배합시다."



 두개의 잔이 부딪히고 김창환이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세토 사장의 용인술이 대단하다더니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군요."



오후 일곱 시가 넘은 시간에  펍에서 자기 회사의 맥주를  선전하는 모리시타를 

두고 김창환이 한 말이었으나 모리시타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뜻의 말이 되었

다. 모리시타는 이 동양인이 자신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

다. 회사에서 쫓겨나기 전에 회사의 차까지 팔아먹고, 모든 돈을 도박으로 탕진

한 자신에게, 회사 사장의  이름까지 들먹여가며 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갈 곳도 없는 모리시타였다. 마지막으로 회사를 위해 좋

은 일 하나 해보겠다고 팜플렛을  꺼낸 것이 이렇게 놀림 당하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몸을 일으키면서 명성의 맥주병을  들었다. 팔을 

뒤로 돌려 있는 힘껏 김창환에게 휘둘렀다.  불행하게도 휘두르면서 모리시타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체중이 실렸고 반이나 남아있는 맥주병이 김창환의 이

마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원심력을 받은 맥주는 맥주병 안에서 세차게 폭발했다.  무엇에 맞았을 때, 어

느 정도 충격이 완화되는 빈 맥주병의 강도는 맥주가 차 있는 병의 강도와는 천

지차이다.



 맥주병의 깨지는 소리에 이어 로버트의 고함 소리가 펍 안을 진동시켰다. 모리

시타는 깨져서 손잡이만 남은 맥주병을 들고 김창환의 목을 찔러댔다. 김창환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숙여졌다.





                                                   



                                                             
 소 제 목 : Text 35


     2000년 2월 11일. 금요일. 오전 8시 40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정후와 이광혁은 김택환의 이야기를 듣고 침묵에  잠겼다. 형과는 달리 성격

이 괄괄한 김택환은 당장 런던으로 날아가서 어느 놈인지 요절을 내야 되겠다며 

날뛰었다.



 유정후의 신목포파로서는 김창환이  런던에서 당한 테러가  조직과는 관계없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의리상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김택환은 오늘이

라도 항공권을 끊어 런던으로 가려고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형이 무슨 이유

로 일본 맥주회사 놈들에게 당했는지 사정을 알아 본 후,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덜컥 형이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유산 배분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형이 맡긴 명성 유통의 문제도 그렇고, 자신이 명성 유통

의 자금으로 설립한 명성  파이낸스와 명성 신용정보조사의  문제도 복잡해지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남는 것 하나 없이  조카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재산

이 모두 넘어갈 지도 몰랐다. 명성 유통의 고문이자 수석 변호사인 이태진은 김

창환이 죽기 전에는 절대 유서 내용을 알려줄 수 없다고 해서 더욱 속이 답답했

다. 



 재산 문제가 아니더라도 김택환은 형의 문제를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아사히 

맥주의 직원이 형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명성  맥주의 수입과 관계된 문제로  

판단했다.



 아침에 온 로버트의 전화는 빠른 영어라 알아들을 수 없어서 영어를 곧잘 하는 

딸을 바꾸어 주었는데 그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아사히 맥주의 영업 직원이 김창환이 주인으로 있는  블루 라이언에 아사히 맥

주를 공급하려다가 김창환을 폭행했고 로버트가 김창환에게 응급조치를 하고 있

는 틈을 타서 아사히 맥주회사의 동료인 듯한 동양인들이  펍 안으로 우르르 들

어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해자인 모리시타를 데리고 바로 도망쳤다고 했다. 

로버트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가해자는  아직 잡지 못했으며  김창환은 뇌진탕과 

출혈 과다로 인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로버트의 이야기대로라면 런던의 김창환은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인 테러를 당한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사히 UK.의 특수영업팀은 오후 다섯 시에  일과를 마치고 모리시타를 찾으러 

나섰다. 숙소와 골든 너겟 카지노를 탐문하다가 모리시타가 카지노에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카지노 부근을 뒤지고 다니던 중이었다.



 모리시타가 김창환의 목을 몇 번 찌르고 나서 우연히 펍의 입구로 고개를 돌린 

순간 같은 회사의 직원들이 펍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놀란 모리시타는 

펍의 다른 입구로 뛰었다. 대부분의 영국 펍은 두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 하

나는 중산층을 위한 입구이고, 또 하나는 노동자층을  위한 입구지만 현재 이런 

구분은 없고 단지 과거의 전통을 살려 입구만 두 개로 만들어 둔다.



 모리시타는 펍 밖으로 도망쳤고 아사히의 직원들은 펍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를 

잡으러 쫓아간 것이, 로버트나 펍 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모리시타가 도망치

는 것을 한 떼의 일본인들이 도와준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김택환은 비서를 시켜 런던행  비즈니스 클래스의 항공권 열  장을 끊어두도록 

했는데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유정후가 가능한  만큼 많이 도와주었으면 하

는 바램에서 한 것이었다.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던 유정후가 이광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애들 데리고 광혁이가 가지. 일본놈들이 많이 들어왔었다니 적어도 애들 다섯 

명은 데리고 가야 되겠어. 그 놈들이 다시 시비 걸러 올 지도 모르고..."





                                                   



                                                             
 소 제 목 : Text 36


 "아니 형..사장님. 제가 가서 뭘 어쩝니까? 말도 한마디 못하는데..."



이광혁이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자다 급히 불려나와 

머리가 삐쳐있는 김근태가 끼어 들었다.



 "워매. 형님은 먼 말씀을 그렇코롬 섭섭케 하신다요? 우리 이사님의 형님이 타

국에서 개 맞듯 맞았다는...끅!"



김응진이 김근태의 머리를 때려 입을 막았다.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김근태

는 항상 남들, 특히 형님들이 말할 때 끼어 들다가  혼나는 일이 잦았다. 몇 번

이나 김응진에게 주의를 당했음에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김근태는 뒷머리를 매만지며 김응진에게 눈을 흘기려다가  이광혁의 매서운 눈

빛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지금은 섣불리 농담할 때

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이 안 통하면 주먹이라도 써야지. 어느 나라나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우니까 

말이야."



 유정후는 이광혁에게 대답을 하고 나서 김택환에게 물었다.



 "명성 유통의 런던 사무소에는 한국인 직원이 없는지요?"



 "있기는 있습니다만 몇 명 안됩니다. 근데 그 녀석들에게 아직 연락도 없고... 

뭘 하고 있는지 원..."



 근심 어린 표정의 김택환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광혁이 다시 나섰다.



 "사장님! 외국까지 가서 주먹질 해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유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광혁의 질문은 무시하고 지시를 내렸다.



 "광혁이는 똘똘한 애들 중에서 여권 있는 애들 먼저 찾아보고 출발 준비하도록 

해. 하던 일 인수인계도 빨리 마치고.."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광혁이 공손히 대답을 마치고 일어났다. 이것이  이광혁의, 동생들이 그를 따

르게 하는 요인이었다. 위에서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한다. 설사 그 일이 옳지 않

고,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이광혁은 실행하고 나서 불만을 토로했다.



 "이사님도 가시겠습니까?"



유정후가 김택환에게 물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가야지요. 윤양아! 여행사에 전화 넣어봤나?"



 서울에서 런던으로 직항하는 항공기는 대한항공  907편뿐이었다. IMF 이전에는 

브리티쉬 에어웨이즈도 직항 노선이 있었으나 한국이 IMF  위기를 맞고 난 직후

에 노선을 폐지해 버렸다. 이때 브리티쉬 에어웨이즈는 런던에서 서울간의 마지

막 운항 티켓을 단돈 1파운드에 팔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네, 이사님. 오늘 오후 한 시에 출발하는 대한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이 

있답니다. 도착은 오후 다섯 시구요"



 윤양이라고 불린 어린 아가씨가 적어놓은 메모지를 보며 대답했다. 



 서울과 런던과의 시차는 아홉 시간 런던이 늦다. 직항편의  비행 시간은 열 세

시간 정도 되지만 시차가 있으므로 서울에서 오전에 출발해도 당일에 도착할 수 

있다.

 

 "여권 있는 애들이 누구 있나? 광혁이는 있는데..."



유정후가 묻자 김응진이 나섰다.



 "사장님. 저도 여권 있습니다."



 "그래 잘됐군. 승영이와 근태는 없지?"



 "예. 저희는 없지라."



김근태의 대답에 김택환이 얼굴을 찡그렸다.





                                                   



                                                             
 소 제 목 : Text 37


    2000년 2월 11일. 금요일. 오후 12시 10분. 김포 국제공항 제 2청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어라. 집 떠나

면 그저 먹는 게 제일이야."



 "알았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2층의 출국 로비에서 커다란  손가방을 들고, 태극  마크가 붙은 배낭을 

맨 청년이, 청년의 어머니로 보이는 듯한 중년 여성에게 인사를 했다. 청

년의 이름은 김도현. 올해 스물 다섯으로  작년 가을 군에서 제대하고 복

학하기 전에 어학 연수를 목적으로 런던행 비행기를 타려는 중이었다. 김

도현은 고교시절 공기총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으며 군에서는 11공수사

단 708특수 임무대대 출신으로 2년  여간 저격병으로 지내다 군생활을 마

쳤다.



 출국 전 세관 검사를 마친 김도현이 출국 심사를 받기 위해 심사대 앞에 

줄을 섰을 때 공항 청사 입구에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자자 조용히들 하고 이거 하나씩 받아라."



 "예. 형님"



 이광혁은 파견 나온 명성 직원이 건네준 여권과 탑승권을 받아 동생들에

게 나누어주었다. 



 "형님! 비행기 안에서 술은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겁니까요? 형님."



 산적이란 별명을 가진 백준영이 능글맞은 웃음을 띄우면서 물었다. 백준

영은 이광혁이 특별히 생각하여 데려온  동생이었다. 작년 가을 이광혁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이감되어 온 주먹잡이로 나이는 어렸

지만 붙임성이 좋았고 주먹 실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백준영이 재목감이라는 것은 공주 교도소  시절 최명규가 먼저 알아보았

다. 최명규는 공주 교도소에서 친하게  지내던 보안과장에게 백준영이 왜 

이감되어 왔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안양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던 백

준영이 왜 출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공주로 이감되어 왔는지 궁

금하게 여겼던 때문이었다.



 보안과장의 말에 따르면 안양 교도소에서 그가 다른 사동에서 복역 중인 

광주파 두목 배윤업과 싸웠기 때문에 이감시켰다고 했다. 보통 같은 사방

에서 폭력 사건이 나면 싸운 당사자들은 물론 사방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

자들도 다른 사방이나 사동으로 옮겨진다. 화해를 한다고 해도 악의를 품

은 재소자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도소로서는 싸운 상대가 일개  조직의 보스나 골통이라 불리는 

양아치라면 아예 이감시켜 버리는 것이 재소자 관리에 편하다. 조직의 보

스급이라면 그 휘하의 주먹잡이들이 언제 복수를 할 지 모르고, 골통들이

라면 무슨 짓을 해댈 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백준영은 운동시간에 광주파 졸개와 시비가  붙었다가 끝내 광주파 조직

원 세 명과 말리는 배윤업까지 운동장  바닥에 쓰러트렸다. 이름 없는 어

린 깡패나 양아치들이 가장 빨리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것

이었다. 조직을 거느리는 이름난 주먹들을 상대했다면 져도, 이겨도 이름

이 높아지기 때문에 조직의 보스들은  이런 상대들을 피해버리는 것이 편

했다.



 백준영이 목적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소문은 전국에 빠르게 퍼졌고 

최명규는 백준영에게 손수 음료수를 주는  등, 호의를 베풀면서 출소하면 

꼭 다시 만나자고 했었다.



 하지만 이처럼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최명규였어도 정작 그를 데려 온 것

은 이광혁이었다. 이광혁은 출소한 뒤 백준영의 출소일에 맞추어 마중 나

갔다. 나이가 어린 백준영은 유명한 주먹잡이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사

실에 감격하여 이광혁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 제 목 : Text 38


 "산적! 술은 무슨 술이야...잔말 말고 잠이나 자두는 게 좋을 거다. 장거리 비
행에서는 자는 게 남는 거라더라."

 매사에 착실한 김응진이 대신 대답했다. 이승영과  김근태가 유독 친한 것처럼
김응진도 백준영과 마음이 잘 맞았다. 이광혁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 명성 신용
정보조사의 업무를 처리할 때에도 자주 둘 씩 내보냈지만  조직 내에 파벌이 생
기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도 잘 해냈다.

 "형님! 술 안 마시면 열  세 시간이나 어떻게 갑니까요?  형님. 제가 가게에서
소주라도 사오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요? 형님."

 눈웃음치며 말하는 백준영에게, 이광혁이  '우리는 지금 놀러 가는  것이 아니
다.' 라고 말해주자 조용해졌다.

 "시간이 늦었으니 빨리들 서두르지?"

 김택환의 재촉에 신목포파의 이광혁,  김응진, 백준영과, 명성  유통에서 나온
직원 한 명이 부지런히 출국심사를 마쳤다. 이미  시간은 12시 30분이 지나있었
고 안내 방송에서는 승객들의 런던행 대한항공 907편  탑승을 재촉하고 있는 중
이었다.

 유정후의 지시로 이승영과 김근태는 여권이 나오는  대로 뒤따라오기로 했으며
이때까지 그 누구도 이들의 런던행이 괴롭고 힘든 싸움이 되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따! 이쁜 아가씨 고맙네!"

 좌석에 앉자마자 오렌지주스를 따라주는 스튜어디스를 향해  백준영이 한 말이
었다. 김응진은 머리가 아파 왔다. 백준영이 녀석이 이 정도라면   몇 일 후 오
게될 김근태 녀석은 아예 스튜어디스를 무릎에 앉히고 술을 따르라고 할 녀석이
었다.

 좌석은 김택환과 이광혁이 붙어있었고, 그 옆의  좌석에는 명성의 직원과 김응
진이 붙어 앉았는데, 백준영만 따로 김응진의 뒤에 앉아있었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백준영이 '여권 만들어 두길 잘했다.'고 떠들며 창 밖을
구경하고 있을 때, 뒤늦게 옆 좌석에 20대 초반의  여성 승객이 앉았다. 여성이
라고 하기보다는 다소 상기된 얼굴의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였다. 백준영의 입이
찢어지며 싱글벙글거렸다.

 907편이 이륙했다. 이제나저제나 말을 걸어볼까 기회를  노리던 백준영이 갑자
기 손을 내밀어 옆자리 승객에게 열 세시간 동안  같은 운명이 되었으니 통성명
이나 하자고 했다.

 백준영의 투박한 손이 스르르 다가오자 옆의 아가씨가 깜짝 놀랐다.

 "네? 네?"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통성명이나 하자고 내미는 손이요."

 백준영이 느물거리며 재차 손을 들자 아가씨는 단지 목례만 살짝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손 둘 곳이 없어져 무안을 당했다고 느낀 백준영이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어 덥네?' 라고 말하자 통로를 사이에 둔 아가씨 건너편의 한 청년이
크게 웃었다. 목소리가 큰 백준영의 행동을 보고 웃은 것이었다.

 백준영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으나  참고, 창가를 보는 척  했다. 몇 분이
지나자 눈을 흘겨 어떤 녀석이 웃었나 쳐다보았다.

 태극마크가 달린 배낭에서 무엇인가 꺼내고 있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명색
이 조직폭력배인 백준영이 때는 이때다 하면서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군을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무서운 것이 없던 김도현도 지지 않고 맞섰다.

 기가 막힌 백준영이 이번엔 주먹을 들어 보이며 더욱  눈을 부라렸다. 이때 옆
자리의 아가씨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백준영의  무서운 눈초리와 주먹을 보
고 기겁을 했다. 백준영이 급히 자세를 고치며  주먹을 내렸으나 귓가에는 아까
그 청년의 웃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소 제 목 : Text 39
    2000년 2월 11일. 금요일. 오후 1시 40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해운대파의 꼬붕 김근열은 중학교 때부터 홍콩  영화를 좋아했다. 특히 갱영화
를 즐겨 보곤 했는데, 언젠가는  자신도 멋진 킬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꿈을 실현하고자 고교 졸업 후 폭력계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멋진 킬러가 되기는커녕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들
의 잔심부름이거나 청소가 고작이었다.  전화 받는 일도 가끔씩  있었고 때때로
대리운전도 했다.

 그가 처음 해운대파에 들어온  날은 기억하기조차 싫었다.  최명규는 김근열을
보자마자 화장실 청소를 시켰고, 다섯 시간 후에는  직접 검사를 하겠다고 으름
장을 놓았다. 경남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구 깡패로 이름높은  최명규의 지시에
김근열은 두 시간 정도 열심히 대양 프로덕션의  화장실을 청소했다. 별로 크지
않은 화장실이었기에 30분 정도 청소하니까 더 할 것이 없었다. 나머지 세 시간
동안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다섯 시간 후에 찾아온 최명규는 깨끗하게  닦았냐고 물어보았고, 그렇다는 김
근열의 대답에 화장실 변기를 모두 혀로 핥아보도록  시켰다. 김근열이 눈을 크
게 뜨며 주저하자 바로 최명규의 발이 날아왔다.  김근열은 황급하게 변기를 안
고 핥았으며 최명규가 보통 깐깐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김근열이 지금까지 해운대파에서 했던 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폭력배다
운 일은 3일전 화요일 저녁에 있었다. 최명규의 전화를  받고 광복동에 있는 동
양 관광호텔로 가서 그가 건네주는 쇼핑백을 받아 가져오는 일이었다. 최명규는
중요한 물건이니 조심해서 가져가되  대양 프로덕션의 사무실이  아닌 김근열의
자취방에 가져다 두도록 했다. 절대 열어보지 말고  깊숙이 숨겨두라는 말도 잊
지 않았다.

 내용물이 마약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김근열은 그것이 다섯 정의 권총이라는 것
을 알고 나자 묘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그  권총 안에는 탄알도 가득 차
있었다. 공터에 가서 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김근열은 이틀 동안 자취방에 권총을 두고 다녔으나 몸에 지니고 싶어 견딜 수
가 없었다. 같은 또래의 양아치들에게도 권총을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었다. 이
틀이 지나는 동안 최명규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이 때문에 김근열은 자신에
게 권총을 맡겼다는 사실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즉,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최명규가 자신에게  권총을 소지하고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갖고 다니라는 해석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절대 최명
규로부터 권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우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보
스들은 특별한 지시가 없더라도 부하들이 알아서 행동하지 않던가?

 오늘 아침 김근열은 평소보다 두껍게 입고 권총 한 자루를 소지한 채 사무실로
출근했다. 머리에 무스도 잔뜩 발랐으며, 어울리지  않는 양복과 롱코트도 차려
입었다. 콜트의 총신이 짧은 파이슨 권총은 코트의 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약간 어색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오전을 보낸 김근열은, 이중은과 김
재수, 박정상 등과 함께 느지막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평소에는 사무실로 음
식을 주문해서 먹는 일이 잦았지만 오늘따라 이중은은  외식을 하자고 했다. 김
근열은 같이 낄 만한 위치가 아니었으나 이중은을 비롯한 형님들이 술을 마실지
모른다고 해서 운전대를 잡게 됐다. 조수석에는  김재수가 앉았고, 뒷자리의 상
석에는 이중은이 앉았다. 최명규는 다른 곳에 일이 있다며  몇 일간 얼굴 한 번
내일지 않고 있었다.

 장어구이와 백세주로 배를 채운 이중은 일행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김
재수와 김근열이 급히 내려 이중은이 앉아 있는 쪽의 좌석 문을 열었다. 이중은
이 몸을 일으켜 차에서 나오는 순간 차에 무엇인가  박히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소 제 목 : Text 40
 화요일 새벽에 급습을 당한 로얄 비치호텔 나이트클럽의 영업부장 이승호는 분
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싸워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가 총까지 쓸 줄은 생각
지도 못했다. 최명규가 이끄는 해운대파는 로얄  비치호텔에 난입하면서 권총까
지 쓰고 달아났다. 즉, 어린이와 싸우는 어른이 몽둥이까지 든 격이었다.

 부산지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칠성파 출신답게 그는  잠적 후 복수를 계획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칠성파를 통해  투투총이라고 불리는 중국제 노링코
사의 22구경 소총과 스코프를 구했다. 최대 200미터 밖의 목표물까지 저격할 수
있으며, 사격 실력이 좋다면 이 보다 더 먼 거리에서도 살상이 가능했다.

 화요일과 수요일 오전까지는 산에 올라가 총 쏘는 연습을 했다. 스코프가 달려
있지 않아도 100미터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맞출 자신이 있었는데,  성능 좋은
스코프는 200미터 밖의 타겟도 커다랗게 보여주었다.

 이승호는 수요일부터 계속 이 자리에 숨어있었다.  여기는 대양 프로덕션 건물
에서 대각선상에 있는 5층 짜리 건물의 옥상으로, 3일째 꼼짝 않고 기회가 오기
를 기다렸다. 이중은의 휘하에는 날고 긴다는 부하들이 많은데다가 최명규 까지
있어서 주먹이나 연장을 써서 직접 복수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권총을 구
해 가까운 거리에서 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 지가 걱정거리였다.

 '이 자리에서라면 문제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 때마다 비명에
쓰러져간 동생을 떠올렸다. 숨어있던 이틀 동안 몇  번의 저격 기회가 있었으나
망설이는 동안 그 기회가 사라져갔다. 이제는 보이기만 하면 방아쇠를 당기겠다
며 수 없이 다짐했다.

 금요일 오후에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이중은과 부하들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가, 예상과는 달리 한 시간만에 일찍  돌아왔다. 이승호는 총부리가 보이질
않도록 해서 이중은이 타고 있는 차를 겨누었다.

 이중은이 내리기 전에 김재수와 누군지 모르는 꼬붕 한 명이 먼저 내려 이중은
이 타고 있는 쪽의 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 때문에  잠시동안 타겟이 보이질
않았다가 곧 이중은의 뒷머리가 스코프의 십자눈금 안에 들어왔다.

 단 한 발에, 그것도 초탄에 명중시키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이승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쏘면서 마음속으로 '명중!' 이라
며 쾌재를 불렀다. 이중은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몸을 급히 차 밑으로 숙인 것이었다.

 '이런! 좆같을 데가!'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이승호의 머리가 여러 가지 생각을 토해냈다. 지금
빨리 도망쳐서 다음의 복수 기회를 노릴 것인지, 아니면 눈에 들어오는 대로 총
알을 몇 발 더 발사할 것인지 갈팡질팡하다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는 것이 아
니라는 쪽에 더 마음이 끌렸다.

 차를 향해 총을 여러 발  더 쏘았다. 그렇다고 마구 쏜  것은 아니고 스코프를
보아가며 한 발씩 쏘아댔다. 산에서는 그리 크게 울리지 않던 총소리가 건물 밀
집지역이라 그런지 귀를 따갑게 할 정도로 크게 퍼졌다. 그 총소리는 건물 벽을
맞고 메아리처럼 퍼져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노린 것과는 달리 이승호가 쏜 다섯 발의 22구경  투투탄은 모두 차에 가서 박
혔다. 총알이 떨어지자 이승호가 총을 거둬 세 발을  재장전했다. 이것만 다 쏘
고 나면 비상계단을 통해 도망갈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쏘고자 이승호가 위치를 바꾸고 옥상 외곽에서 총부리를 내밀었다. 재장전한 총
알 중에서 첫발을 발사하고 나서 그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소 제 목 : Text 41


 김재수와 차에서 같이 내렸던 꼬붕 한 명이  권총을 꺼내들고 자신이 숨어있는 

건물의 옥상을 향해 총을 쏘며 달려왔다. 이승호는 그 권총탄이 먼 거리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날아올 수 없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다급한 마음으로 총을 

버리고 비상 계단 쪽으로 뛰었다.



 '저런 미친 새끼!'



 이승호가 속으로 욕을 해대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동안, 저격자를 발견하여 

총을 쏜 김근열도 나름대로 계산을 한 것이었다. 차에 무언가 박히는 소리가 나

자 그것이 본능적으로 총알임을 알게 된 김근열은 김재수, 이중은과 함께 차 밑

에 숨어있었다. 박정상은 아직 차에서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총소리

가 나고 차 상부에 총탄이 박히는 것을 눈치챈  김근열은 차의 앞쪽으로 기어가

서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

다. 저격은 틀림없이 보스를 노린 것으로 보고, 총알이  날아온 각도를 통해 저

격자의 위치를 파악해 보았다.



 자신이 속해 있는 해운대파는 앞으로 일본의 자금을 받아 크게 성장할 것이 틀

림없었고, 이런 기회에 용감한 모습을 보스에게 보여두는 것이 미래의 자신에게

도 득이 될 것이라 생각한 김근열은 잠시동안 총소리가  나지 않자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그러자 길 건너편 건물  옥상에 검정 색의 총부리가  보였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비호처럼 뛰었다. 노리는 것은 이중은이었으므로 

잽싸게 뛰어나가서 지그재그로 달리면  자신을 겨냥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느꼈

다.



 김근열의 손은 코트 안 쪽에 있던 콜트 파이슨 권총을 꺼냈고, 주저 없이 눈에 

보이는 총부리를 향해 쏘았다.  뛰면서 쏘는 것이라 상대를  맞추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다만 이렇게 총을 쏘며 가까이 다가가면  상대도 겁을 먹으리라고 생각

했다. 김근열의 생각이 옳기는 했다.  더 이상 저격자의 총부리가  보이지 않고 

총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권총을 

처음 쏘아보는 김근열은 그 권총탄이 옥상까지 날아가다  힘을 잃어, 건물의 다

른 층 벽면이나 유리창을 뚫고 사무실 안으로 간다는 사실은 몰랐다. 건물에 대

고 권총을 난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네 발의 탄을 쏘며 건물 안으

로 진입했다.



 우동 거리의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지나가던 차들은 경

적을 울리며 멈춰 섰다. 이중은과 김재수는 영문을 모른  채, 대양 프로덕션 사

무실 안으로 피신했고, 이중은의 뒤는 박정상이 가리며 들어왔다.



 김근열이 건물의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향하던 시간에, 이승호는 비상계단으로 

내려왔고 두 사람은 엇갈렸다. 옥상까지 올라간 김근열은  소총 한 정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들고  내려오려다 건물 아래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비상계단이 있는 줄 몰랐던 김근열이었으나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

은 없었을 것이었다. 용감하기는 했으나 무모했다. 몇 분  전 만해도 무서울 것 

없이 총을 쏘아대던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경찰차에 태워진 김근열은 어

떠한 경우라도 최명규로부터 권총을  받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

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벌건 대낮에 건물에 대고 권총을 난사한 10

대 어린 폭력배의 이야기가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  게다가 경찰은 지난 화요

일 새벽 나이트클럽 발포 사건 때 사용된 권총과  김근열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

이 같은 것임을 발표하자 더욱 시끄러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감하게 된 

것은 김근열의 자취방에 대한 압수수색이었다. 추가로,  장전된 네 정의 권총이 

발견되자 이는 더욱 큰  사건으로 바뀌었다. 언론사나 관공서에  시민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말단 꼬붕이 권총을 소지하게  된 사연을 최명규로부터 들은  이중은은 대노했

고, 해운대파는 전 조직원이 잠수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 것인

지 논의했다. 그러면서도  이중은을 저격하려했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다. 



 나이트클럽 사건과 이번 권총 난사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해운대파였으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김근열이 해운대파로 영입된 것이  불과 몇 달 전으로, 아

직 경찰은 그가 해운대파의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 제 목 : Text 42


     2000년 2월 11일. 금요일. 오후 9시 10분.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국의 입국심사는 미리 받아야하는 비자가 없는  대신 까다로웠다. 특히 EC회

원국이나 영연방 국가가 아닌 제3국의 국민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매년 영국으

로의 불법 취업을 위해 입국하는 다른 나라 국민들 수가 적지 않은 관계로 영국

의 입국심사는 일본과 비슷할 정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영어를 대충이나마 구사할 줄 아는 김택환과  김응진, 명성의 직원은 문제없이 

통과했으나 이광혁과 백준영은 꽤 오랫동안 절절맸다.



 두 사람이 입국심사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김도현이 거들

어 주었다. 관광을 목적으로 왔으며,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자 

입국심사관은 두 사람의 여권에 각각 6개월 간 체재할 수 있다는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외국에 나오면 한국인들끼리 서로 도와야지요."



 입국심사대를 빠져 나온 이광혁의 고맙다는 인사에,  김도현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김도현이 화물을 찾으러 가야한다고 말하자 이광혁은 재차 고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헤어졌다. 이광혁의 뒤를  따르는 백준영은 고맙다는 

말 대신 김도현에게 눈을 흘겼다. 



 김택환 일행은 명성 유통 런던  사무소에서 마중 나온 직원의  차를 타고 런던 

시내의 세인트 제임스 병원으로 향했다. 아직 김창환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데

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가더라도 형의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직원의 

말에 김택환은 크게 낙심했다.



 "경찰에서는 뭐라고 그러나?"



김택환이 물었다.



 "가해자는 아사히 UK.의 직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직 잡히지도 않았고, 확

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닙니다만..."



 명성 유통 직원의 대답에 이광혁이 물었다.



 "펍인가 술집인가에 들어왔다던 그 놈들이 주먹을 쓰는 놈들이던가요?"



 명성 유통 직원이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김택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김택환이 일러주었다.



 "아사히 놈들이 깡패나 야쿠자나 뭐 그런 놈들이냐고 묻고 있는 거야."



 한국의 주류 유통은 폭력을 동반하는, 아니  동반해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무

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명성 유통  직원은 다시 고개를 가

로 저으며 말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사히 UK.의 특수영업팀이라고 하는데요. 아

직 뭘 하는 팀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펍마다 돌면서 맥주

의 공급 계약을 따내는 거라고 합니다만..."



 "음...."



 김택환이 신음소리를 내뱉고, 이광혁의 얼굴 표정을  본 김응진이 그들이 우려

하던 말을 꺼냈다. 과거에 클럽에서  기도로 일한 적이 있던  지라 제법 눈치가 

빨랐다.



 "그 특수영업팀이라는 것이 우리 나라에서처럼 폭력배 동원해서 술집 협박하고 

술 공급받게 하는 녀석들 아닐까요?"



 김택환은 당장이라도 아사히 UK.의  사무실로 가서 항의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어떻게 된 사연인지 잘 모르므로 내일 로버트 노블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행

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 제 목 : Text 43
            2000년 2월 12일. 토요일. 오전 7시 20분. 런던 핌리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흐느끼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장  나가시마의 마음이 흔들
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고 아까와 같이 말했다.

 "그러지말고 경찰에 자수하게. 지금 어디에 있나? 내가 데리러 가겠네."

한동안 수화기 저편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보게 모리시타. 내말 듣고 있나?"

 "예."

 모리시타 사건으로 인해 상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들었던 나가시마였지만 그가
이렇게 울면서 전화해 오자 마음이 아팠다. 모리시타는  지금 약간의 돈을 마련
해주면 대륙으로 도망쳐 이름을 바꾸고 살겠다고 했다.  자신이 잡히게 되면 회
사의 이름에도 누가 된다며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랜시간 모
리시타를 설득하려던 나가시마는 끝내 결정을 내렸다. 동족을 돕자는 쪽이었다.

 "11시까지 우리가 자주 점심 먹던 곳으로 오게."


  2000년 2월 12일. 토요일. 오전 10시 4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스트리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의 당직을 맡고 있는 로드 딜런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
었다. 아사히 U.K에 입사하고 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엄청난 거구의 백인 한 명과  동양인 여러 명이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백인은
자신에게 숨겨둔 모리시타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중이었다.  동양인들 중에는
머리가 짧고 눈매가 매서운, 중국계 마피아로 보이는 남자가 셋이나 있었다. 이
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고  있어서 로드 딜런으로서는 더
욱 당혹스러웠다.

 '어제는 경찰이 찾아오고, 오늘은 마피아라니..'

 몇 번이고 모리시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설명했지만  로버트는 빨리
경찰에 그의 소재를 알려주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며 반협박조로 말했다.

 "이건 업무방해입니다. 여기를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젠 나가주시죠."

 로드 딜런의 말에 명성 직원 한 명이 로버트를  제지하고 나섰다. 욕을 섞어가
며 소리치던 로버트는 몸을 돌리면서 월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로버트의 모습을 본 백준영이 급히 따라나가려다 테이블에 부
딪혔다. '엇' 하는 백준영의 외마디 소리를 듣고 로버트가 다가왔다. 마침 백준
영이 부딪힌 테이블 위는 "MORISHITA" 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파일과 사진이 들
어있는 조그만 액자가 있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어떤 여자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백준영이 좀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눈앞에서  액자가 사라졌다.
다가온 로버트가 두 팔을 뻗어 테이블을 힘껏 밀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로드 딜런이 무슨 짓이냐며 항의했지만 그 목소리는 작았다. 하나를 밀었을 뿐
인데 주위에 붙어있던 네 개의 테이블이 동시에 쓰러지는  것을 본 그의 목소리
는 작아 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대륙으로 도망친 것이 아닐까요?"

엘리베이터를 나오며 로버트가 김택환에게 말했다. 김택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준영이 앞으로 나서서 일행에게 빌딩 문을 열어주었다.

                                                        



                                                             
 소 제 목 : Text 44


 일행이 모두 빌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백준영이 문을 닫고 나왔다. 이 빌딩

과 옆 빌딩 사이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던 백준영이 공원 한 가

운데의 벤치 앞에서 한 동양인이 모자를 들고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려고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김응진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백준영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다.



 "어디서 보긴 본 새낀데요..."



 백준영이 기억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잡자 김응진은 더 묻지 않

았다. 일행이 탄 차가 런던 브릿지를 건너 블루  라이언이 있는 소호로 향했다. 

차가 다리를 다 건너서야 백준영은 공원에서  서성이던 동양인을 어디서 보았는

지 기억해냈다.



 "그 새끼다!"



 "뭐냐?"



 김응진의 물음에 백준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형님! 아까 공원에 있던 놈요.  그 놈이 모리시탄가 하는  놈 같습니다요. 형

님."



 이광혁이 그걸 어떻게 아냐며 묻자 백준영이 조금 전 사무실의 사진에서 본 사

람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김택환과 로버트가 탄 차는 이미 다리

를 건너 테임즈 스트리트로 들어섰다. 차를 운전하던  명성 유통의 직원이 룸미

러로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뒷좌석의 이광혁이 명성 유통 직원에게 차를 돌리라고  말한 다음 로버트의 전

화번호를 알고 있냐고 물었다. 이미 명성 유통  직원은 전화기를 꺼내는 중이었

다. 차가 다시 런던 브릿지를 건너 토마스 스트리트로 진입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리시타는 돈도 떨어졌고, 배도 고팠지만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손을 벌린 곳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던 팀장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팀장이 지시한 대로 회사 건물 옆의 작은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의 말 

대로라면 자신은 이미 전국에 수배 중이었고  하루빨리 자수하는 편이 좋겠지만 

모리시타는 나름대로 도망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차가 잘 다니지 않는 토마스 스트리트에 급정거하는  차 소리를 듣자 모리시타

는 팀장이 온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 차는 좀 전에  출발했던 차와 동일한 

차종이었고 모리시타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어야  팀장을 만날 수 있

었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는  편이 좋겠다고 느낀 모리시타가  천천히 타워 

브릿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엇. 저 새끼 도망치는데요?"



 "저 사람 확실해?"



 이광혁의 질문에 백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에서랑 약간 다른 것 같기도 한데요. 좀 말랐습니다요. 형님."



 김창환이 당한 테러에 분개하고 있던 명성 유통 직원이 차를 천천히 앞으로 몰

며 창문을 열고 크게 불렀다.



 "모리시타 상!"



 걷던 모리시타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쩌면 팀장이 보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본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라서 경찰은 아닐  것 같았다. 고개를 돌

려서 대답했다.



 "하이?(네?)



 차 안에서 김응진이 이광혁을 보며 말했다.



 "저 새끼가 맞는 것 같은데요."



                                                   



                                                             
 소 제 목 : Text 45


 이광혁은 모리시타를 찾아서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했다. 김창환이 그에게 폭

행을 당했다고 한국에서처럼 똑같이 복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는 한

국도 아닌 먼 영국 땅이었다. 김택환은 형이 당한 만큼 손봐주고 싶어했지만 이

광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냥 잡아다가 빨리 경찰에  넘기고 자신과 동생들은 한

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일 것이었다.



 김응진에게 눈짓을 하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명성 유통 직원은 클러치에서 

발을 떼어 차를 좀더 모리시타에 가깝게 했다.  모리시타가 몸을 움찔하더니 타

워 브릿지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저 새끼 튑니다. 형님."



 "잡아!"



 백준영의 외침에 이광혁이 말했다.  차가 급발진 하면서  순식간에 모리시타를 

따라잡았다. 모리시타는 몸을 돌리더니 이번엔 런던 브릿지 쪽으로 방향을 바꾸

어 뛰었다. 차가 급히 U턴을 할 수 없는  곳이라 따라오는 동안, 시간이 걸리리

라 예상한 행동이었다. 센트럴 런던 지역은 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곳이 드물

었지만 런던 외곽을 도는 순환 도로와 이스트 엔드 지역은 다니는 차가 많지 않

아 속도를 내기가 쉬웠다. 특히 오늘은 토요일이라  도로가 비어있어 빨리 다니

는 차들이 평일보다 많았다.



 이광혁이 탄 차가 U턴을 하지 못해 우물쭈물하자 김응진이 뛰어내렸다. 모리시

타는 벌써 30미터 밖으로 내빼고 있었다. 김응진이  뛰어오는 것을 본 모리시타

의 뛰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모리시타가 아사히 U.K의 특수영업팀 사무실이 있는 빌딩을 지나고 있을 때 앞

에서 걸어오고 있는 동양인의 모습을 보았다. 팀장인 나가시마였다. 모리시타는 

나가시마의 팔을 끌어 계속 앞으로 달렸다. 런던  브릿지 아래까지 내려가면 차

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나가시마는 영문도 모르는  채 모리시타와 같이 뛰

면서 물었다.



 "뭔가? 왜 그래?"



 "헉헉. 뒤에 누군가가 쫓아옵니다. 일본사람 같은데요? 아는 사람입니까?"



 나가시마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맹렬히 쫓아

오고 있었다. 그 동양인 옆으로 승용차 한대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조수

석에 앉은 머리 짧은 남자가 창문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백준

영이 장난 삼아 지르는 소리는 "스톱! 게 섰거라!" 였지만 이 말로 인해 나가시

마는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며, 호의적인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리시타에 팔을 잡혀 끌려가던 나가시마가 반대로 모리시타를 잡아끌었다.



 "일본인이 아니다. 뛰어!"



 모리시타와 나가시마가 토마스 스트리트가 시작되는 교차점에  이르렀을 때 이

광혁이 타고 있던 차가, 뛰어 쫓아오던 김응진보다  더 빨리 모리시타에게 접근

했다. 다급해진 나가시마가 런던 브릿지 역이 있는  모퉁이를 돌아 다리를 향해 

뛰려다가 그만 차도까지 들어섰다.  이때 런던 브릿지를 건너오던  낡은 재규어 

승용차가 나가시마의 몸을 들이받았다.



 나가시마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고 재규어가 미처 브레이크도 밟기 전에 공중에

서 떨어지는 나가시마의 몸을 또다시 치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뛰어오던 김응진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이광혁이 탄 

차가 급제동을 걸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재규어의 운전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육중한 몸집 

때문에 운전석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았던 그는  로버트였다. 뒷좌석의 김택환도 

몸을 일으켜 나왔다.



 나가시마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던 모리시타는  차에서 내린 이광혁과 

로버트, 김택환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을  눈치챘다. 나가시마처럼 자신도 위험

하다고 느낀 모리시타가 뒷걸음질치며 런던 브릿지 쪽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아

무도 쫓아오지는 않았다.





 소 제 목 : Text 46

 런던 브릿지 아래의 공원길로  도망친 모리시타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누군지
모르는 동양인 무리들이 자신의 상사를 차로 치었다. 나가시마는 보나마나 중상
아니면 사망을 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모리시타는 정신을 가다듬고 템즈강 난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랬을까? 왜 자신과  나가시마를 죽이려 들었을까? 이
일은 틀림없이 블루 라이언에서 일으킨  일에 대한 단순 복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술에  취해 김창환의 이마를 병으로  때린 것은
기억이 났다. 그 사람이 누굴까? 마피아 두목은 아닌가?

 '나는 한국의 명성 맥주에서 일하는 사람이오.'

 '이것이 우리 명성이 한국에서 주력으로 삼는 맥주요. 한 잔 드리지.'

 모리시타는 조금씩 감이 잡혔다. 술에 취해  있었으면서도 김창환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분명히 김창환은 한국 맥주 회사의  오너 또는 고위층이었고 마피
아 같은 동양인들은 그의 수하라고 단정지었다.

 '하필이면 그런 사람에게 폭력을 쓰다니'

 자책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주류 유통은 폭력으로 시작해
서 폭력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일본  야쿠자의 가장 큰 수입원
도 건설업이고 그 다음은 술과 관계된 유흥업이다.

 이번 일을 미끼로 한국의 맥주  회사가 폭력을 써서 아사히  U.K가 구축해놓은
생맥주 유통망을 장악하려 든다면  아사히 U.K는 앞으로 상당한  고전을 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모리시타에게 일본인 특유의 애사심이 살아났다. 한국의 맥주회사가 폭력을 사
용하기 시작했다면 나가시마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수영업팀
을 비롯한 아사히 U.K 전체의 문제였다.

 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가 약간  넘은 시간. 일본의 시간으로는  저녁 9시가
되기 전이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했다. 전화기를  꺼내 아사히 맥주 본
사에서 근무했을 때의 동료에게 전화했다. 아사히  U.K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전했다. 한국의 맥주회사가 마피아들을 동원해  아사히 U.K의 영업을 방
해하고 있는 중이라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특수영업팀장 나가시마는 10
분전에 차에 치었고 자신은 도피  중이라고 알렸다. 법 보다  주먹이 빠른 것을
아는 일본 아사히 맥주의  직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모두가 퇴근한
저녁이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상부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2000년 2월 12일. 토요일. 오전 11시 15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스트리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차에 치인 동양인을 앰뷸런스에 태워 보낸 이광혁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로버트와 김택환은 경찰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에 치인 사람은 모리시타와 같이 뛰었으니 분명  관계가 있는 사람일텐데 아
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앰뷸런스에 탈 때만 해도 숨이 붙어있었
으나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요? 형님."

 백준영이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응진도, 이광혁도 꿀 먹은 벙어
리였다. 명성 유통 직원이 이들을 잡아끌었다.  늦기 전에 변호사를 선임해야겠
다며 명성 유통의 런던 사무소로 가자고 했다. 나이가 많은 이안 노블에게는 당
분간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터였다.


                                                   





                                                            
 소 제 목 : Text 47

     2000년 2월 12일. 토요일. 오후 9시 20분. 부산시 해운대 경찰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면 안에는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비춰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
는 손님들 사이로 회칼이나 각목 같은 것을 든 여러 명의 사내들이 지나가는 것
이 보였다. 화질은 좋지 않았고 조명이 어지러워 화면 안의 사내들이 누군지 분
간하기는 어려웠다. 싸움이 거의 끝나갈 때 화면이  일순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
운 배경으로 돌아갔다. 화면 속 누군가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
였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한 사람의 얼굴 윤곽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발
포시의 화염 때문에 총을 쏜 사람의 얼굴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제일 들어보이는 사람이 물었다.

 "아직도 누구 아는 사람없나?"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요?"

모니터를 보고 있던 대 여섯 명의 강력반 형사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로얄 비치호텔 나이트클럽 총기 사건과 해운대파 두목 이중은 저격 미수 사건,
김근열의 우동 거리 발포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경찰은 사건 당일의 나이트클럽
내부가 찍힌 비디오테이프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비디오 테이프 안에는 조
직 폭력배들의 싸움 광경과 요시이 구미에서  해운대파로 파견한 조직원 호시노
의 권총 발포 장면이 들어  있었지만 경찰은 호시노가 일본  야쿠자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조직 폭력배로  보고 어느 파의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부산과 경남 지역의 조직폭력배들에 관한 베테랑  수사관들도 알아내지 못하자
다급해진 경찰은 검찰의 영상정보 시스템으로 관리 중인 전국 조직폭력배 1만 2
천 여명을 검색해 보았으나 맞는 용의자가 나타나질 않았다.

 "이 자식 어쩌면 야쿠자 아닙니까?"

나이 어린 수사관이 꺼낸 말에 모두들 얼굴을 마주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
다.

 "글쎄, 야쿠자가 한국 땅에 들어와서 총질이라....그게  사실이면 보통 사건이
아닌데..."

 "해운대파가 얼마 전 일본에 가서 오사카 야쿠자의 동생이  되고 돈을 얻어 쓴
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그래?"

강력계의 수사관 한 명이 피곤한  표정으로 담뱃재를 털며 몰랐다는  듯이 말했
다. 로얄 비치호텔 사건 발생 이후로 한 번도  집에 들어가 보지 못해서 얼굴이
까칠하고 옷깃도 꼬질꼬질 했다.

 "그리고 애들 말로는 김근열이 해운대파의 꼬붕이  맞는다고 하는데요. 저렇게
아니라고 우겨대니..."

 "그 점에 대해서 더 조사해보도록 하지. 나는 상부에 보고 드리겠네."

 나이 어린 수사관의 말에 강력계 반장이 서류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때마침 수
사를 지휘하기 위해 경찰서에 온 검사에게 로얄 비치호텔의 총기 사건이 야쿠자
와 연관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보고하자 검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본 경시청
에 화면 안의 남자에 대해서 조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또 법무부에 요청하여 이
중은과 최명규 등 해운대파 조직원들의 출입국 기록을 알아보는 한편 이들이 귀
국한 시기에 한국으로 입국한 일본인들에 관한 면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소 제 목 : Text 48


  2000년 2월 13일. 일요일. 오전 9시 2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도쿄(東京) 스미다쿠(墨田區) 아사히 맥주 본사 중역 회의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0여 년간 본사에서만 근무해온 백발의 스즈키  전무가 회의실로 들어오자마자

급히 물었다.



 "런던의 나가시마가 어찌 되었다고?"



 "네. 어제 저녁에 런던에서 한국계 야쿠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쫓기다 차에

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의식 불명인 상태입니다."



 해외영업부의 쿠보가 대답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

았으나 세토 사장이 아직 자리에 없는 이상 스즈키  전무의 발언권이 제일 강한

지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국 야쿠자가 왜 우리 아사히의 나가시마를? 개인적 원한인가?"



 "그...그게..."



 "빨리 말해 보게!"



 "예. 아직 확실하게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저희 해외영업부 산하 특수영업팀의

모리시타에 의하면 한국의 맥주 회사 사람들이 우리 특수영업팀을 쫓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쫓아다니는지 알고 있나?"



 궁금함이 지나쳐 참을 수가  없었는지 사토 영업본부장이 쿠보의  말을 끊으며

질문을 꺼냈다. 이렇게 많은 상사들 앞에서 말해본 적이 없는 쿠보는 어색해 하

면서 말했다.



 "모리시타의 말로는 한국의 명성이라는 맥주 회사가 의도적으로 그런다고 하는

데 자세한 이유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모리시타는 어디에 있는가?"



 스즈키가 물었다.



 "모리시타 역시 신변에 위험을 느껴 피신 중이라고 합니다. 숙소에는 갈 수 없

다고 했습니다. 본사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회의실 내의 몇 사람들 입에서  깊은 신음소리가 삐져 나왔다.  스즈키가 재차

물었다.



 "영국 경찰에는 이야기했을테지? 대사관과도 연락되었겠지?



 "그게...아직...어제 저녁의 이야기라서 상황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아사히

U.K의 직원들은 대부분 출근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말이라서요. 그쪽은 아직 별

문제없다고 합니다. 저희가 연락 받은 것은 특수영업팀으로부터입니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스즈키가 또 물었다.



 "아사히 U.K의 호리구치 사장은 연락이 되었는가?  다른 중역들은 연락이 되는

가?"



 쿠보는 자신이 야단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답하는  것 모두가 좋지 않

거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들뿐이었다.



 "호리구치 사장과는 지금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부장들  중 몇 명은 나가시마

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이때 회의실 제일 안쪽에서 회사 고문이며 회의 참석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도오야마의 질문이 터져나왔다.



 "모리시타란 사원은 믿을 만한 인물인가?"



 "네. 여기 있습니다."



 쿠보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내밀었다.  쿠보가 제대로 준비한 것이

라고는 모리시타와 나가시마의  인사관련 파일이었다. 인사부의  입사 동기에게

특별히 부탁해 작성한 서류였다. 이를 꼼꼼하게 읽어보던 도오야마가 말을 꺼냈

다.



 "모리시타의 말이 사실인 것 같구료. 대처 방안을 논의해 봅시다."





                                                   





                                                             
 소 제 목 : Text 49


   2000년 2월 13일. 일요일. 오후 12시 10분. 도쿄(東京) 스미다쿠(墨田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번 일은 세토 사장께 알릴 필요 없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잔에 든 위스키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은 도오야마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직급은 더 낮았으나 연배로 따지자면 한참 선배라 할 수 있는 도오야마에게 스

즈키 전무가 한동안 뜸을 들인 다음 공손히 물었다.



 "전무께서도 아시다시피 나는 이제  은퇴해야 할 몸입니다. 지난날  내가 극도

(極道)와 교류가 있었던 만큼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 보

겠습니다."



 도오야마의 말을 듣고 스즈키는 적잖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사히 맥주가

설립된 1949년부터, 아니 아사히 맥주의 전신이었던 오사카 맥주 시절부터 일본

의 주류 회사는 극도, 즉 야쿠자와 공생관계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술

과 야쿠자는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관계

는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술에는 범죄 조직이 연관되어 있

다.



 과거 수십 년간 아사히 맥주의 영업 활동은 일본 야쿠자계의 어느 계보와도 폭

넓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던 도오야마의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과 야쿠자와의  관계를 입 밖에 내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스즈키가 알고 있는 도오야마는 분명 야쿠자는 아

니었다. 그는 항상 정시에 회사에 출근했으며 야쿠자와  관계 있을 것을 암시하

는 아무런 특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동안 야쿠자가 개입된 아사히 맥주의 영업이나  유통 상의 문제점은 소리소

문 없이 도오야마가 처리해 왔다. 스즈키는 벌써 몇 십 년간이나 도오야마를 알

고 지내왔어도 그의 신분이  무엇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까지는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세토 사장도 그에게는 한  수 접고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는 아사히  맥주의 대주주 중 한 명

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에는 도오야마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가 맡아왔던 음지(陰地)의 문제 해

결을 위해 미즈다 철기연합의 4대 조장을 지냈던  인물을 영입한 것으로 알려지

고 있으나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전무이사로  있는 스즈키로서도 알지 못했으며,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회사의 정도(正道)가 아닌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알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스즈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더 묻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도오야마는 더 묻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응

대했다. 그런 도오야마의 입으로 독한 위스키가 또 들어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도오야마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던 비서를

불렀다. 그리고는 스즈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무슨 뜻인지 눈치챈 스즈키

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서려는 스즈키에게 도오야마가 한 마디 말을 더 건넸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일을 사장께 말씀드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스즈키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사장도 모르는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한다는 것은 차기 사장 자리는 노리고 있는 스즈키로서는 기

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 제 목 : Text 50


 2000년 2월 13일. 일요일. 오후 1시 1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렉싱턴 스트리트(Lexington St.) 펍(Pub) 블루 라이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낮부터 맥주를 한 잔 마신  김택환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같이

차에 타고 있었던 것 외에는 아무 잘못도 없는 김택환은 영국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고 풀려 나오긴 했지만 운전을 했던 로버트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앞으로 있

을 재판도 걱정이지만 아사히 U.K의 대응도 어떻게 될 지 답답했다.



 김택환은 명성 유통의 업무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있는 형과 사고를 낸 로버트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형이 당한 테러에 복수를 꿈꾸며 왔다가 엉뚱한 일만 저지르

고 가는 꼴이었다. 그래서 이광혁에게 좀 더 런던에  머물러 주기를 바랬다. 또

가능하다면 다시 한 번 모리시타를 찾아 본때를 보여주기를 원했지만 전처럼 강

력히 부탁하지는 못했다. 이미 모리시타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어디론가 도망가

깊숙이 숨어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김창환이 당한 것이 아사히 U.K의 계획적인 테러

라면 아사히 측에서는 또 사람을 보내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김

택환과 이광혁은 아사히 U.K가 블루 라이언에서 벌였던 일이 계획적으로 저질러

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여기서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어차피 처음

부터 전쟁을 목표로 하고 벌인  짓이라면 또다시 블루 라이언이나  명성 유통의

런던 사무소로 폭력을 가해 올 것이었다.



 히드로 공항을 통해 김택환이 서울로 떠나자 이광혁은 유정후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장님. 저와 동생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동생은 당분간 거기 있게. 그 놈들이 다시 올 지도 모르니까..."



 이광혁은 복수로 뭐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이런  먼 곳까지 와서 조

직이 아닌 다른 사람의 복수를 대행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승영이과 근태는 여권 나오는 대로 보내주세요."



 "그래. 아마 다음주 초에는 여권이 나올 거다."



 두 명의 동생들이 필요하게 되어서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권을  만들고 첫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며 좋아하던 두 녀석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또 혹시 있

을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해서 미리 대비를 해 놓자는 계산도 있었다.



 이광혁은 오랜만에 동생들과 쉬기로 했다. 출소하고 나서 제일 시간이 많이 남

는 때였다. 이곳에는 명성 신용정보조사의 일도  없었고, 전쟁을 중재해 달라는

청탁도 없었으며, 각종 슈킹(돈 뜯는 일)으로부터 사설 도박장을 지켜주도록 부

탁해 오는 일도 없었다. 명성  유통의 직원에게 부탁하여, 모리시타  찾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런던 시내 관광을 나갔다.



 이광혁 일행이 수많은 비둘기 떼를 헤치며 트라팔가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을 때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뒤에서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이광혁과 김응진은 손을 내밀어 반갑게 대했으나  백준영은 그렇지 않았다. 팔

짱을 낀 상태로 콧방귀만 뀌었다.



 청년은 백준영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무섭게 노려보다가 혼자서  큰 소리로

웃었다. 백준영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화는 났지만 형님들

앞에서 나설 처지도 아니었다. 이광혁과 김응진, 명성 유통의  직원 등 세 사람

은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 했다. 그 청년은  런던행 비행기를 같이 타고 왔

던 김도현이었다.



                                                   





                                                              
 소 제 목 : Text 51


  2000년 2월 13일. 일요일. 오후 6시 1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山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검을 들고 있는 등  넓은 사내가 고풍스런 옛

목조건물 뒤에서 20분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댔다.  사내의 등에는 귀여운 꼬

마가 커다란 잉어를 안고 있는  모습의 문신이 있었는데 흘러내리는  땀에 의해

번들거렸다.



 소문 만들기 좋아하는 야쿠자들 사이에서는 이 문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것은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내가 진정으로 화가 날  때면 등에 그려져 있는

어린이의 눈이 흡사 괴물의 눈처럼 무섭게 바뀐다는 것이었다.



 검정 색 양복을 입은 네 명의 수행원들은 목검에 다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치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를 꺼냈다. 그는

무전기에 대고 짤막하게 대답을 한 후, 수건을 들고 잉어 문신의 사내에게로 다

가갔다.



 "7대목 님. 도오야마 님께서 교토 역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문신 사내의 어깨가 약간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검을 수행원에게 건네주

고 수건을 받았다. 군살이 없어  보이는 배와 등의 땀을  닦고는 가운처럼 생긴

욕의(浴衣)를 입고 경내로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지역 조장들은 다 도착했나?"



 "네. 모두 모여있습니다."



 히라타 구미의 7대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몇 개의 계단을 지나 목욕탕으로

들어섰다. 탕 안에는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두 명의 어린 유나(湯女)가 그를 맞

았다. 옷을 벗겨주었고 그가 탕에서 나오자  등에 비누칠을 해주었다.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유나들은 7대목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

의 등에 물을 끼얹었다.



 잠시 후 7대목이 화식 복장을 차려입고 이곳에서 가장 넓은 방으로 향했다. 열

세 명의 지역 조장들과 대여섯 명의 고문들, 본가의 조직원들이 앉아 있다가 황

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조직과는 달리 절도 있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이

곳이 천년간이나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라는 데에 연유했다.



 7대목이 자리에 앉자 오사카 우메다의 지역 조장인 요시이가 급하게 물었다.



 "7대목께서는 무슨 일로 긴급 호출을 하셨는지요?"



 요시이는 요즘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 자신의  제안으로 히라타 구미가 한국의

해운대파와 협력 관계를 맺게 된 것까지는 그럭저럭 좋은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는 진전이 없었다. 이미 해운대파와 형제의 의를 맺게 된 지 한 달도 넘게 지났

다. 7대목의 습명식도 같은 날에 치루었다. 그 뜻은  히라타 구미의 7대목이 출

범하고 나서 처음 계획한 조직의 사업이 제대로 진전되고  있지 못한 것을 의미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예기치 못한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히라타  구미의 투자

자금으로 한국의 해운대파가 조직을 확장하려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조직에 있는 호시노가 한국땅에서 권총을 사용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해운대파

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고  서울과 부산, 제주도에 사무소를  개설하려는 계획

도, 태백과 제주도의 카지노 지분 매입 계획도 지지부진한 상태가 되었다.



 요시이는 요시이대로 이중은에게 항의했지만 이중은도 할 말은 있었다. 호시노

가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고, 다른 요시이 구미 조직원들이 러시아 조직으로부터

권총을 제공받지 않았다면 한 달  동안 많은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라고 되받아

쳤다.



 혹시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던 요시이의 귀에 무덤덤

한 느낌을 가진 7대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7대목의 말이 끝나자 7대목을 제외한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오야붕이 긴급 호출을 해놓고 모르겠다니....





                                                   




                                                             
 소 제 목 : Text 52


 지역 조장들은 무언가 중대한 내용을 발표할 것  같으면서도 비교적 평온해 보

이는 7대목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큰 키의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와서 7대목에게 알렸다.



 "도쿄의 도오야마 님께서 거의 당도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나가보도록 하지."



 7대목은 짤막하게 대답하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렸

다. 도대체 누가 오기에 7대목이 직접 영접을 나간단 말인가?



 조장이 직접 손님을 맞으러 나가는데 본가에 충성을  바치는 지역 조장들이 가

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역 조장들과 히라타 구미의 고문들은 이

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7대목을 따라나갔다. 나가면서 저마다 '도쿄의 도오야

마'가 누군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극도의 인물,  즉 야쿠자라면, 그것도 7대

목이 직접 영접해야할 사람이라면 일본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았다. 7대

목의 나이가 젊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토를 주무대로 관서 지역에서는 어

느 정도 이름난 조직의 두목이 아닌가?



 산하 지역 조장들 가운데서도 7대목보다  나이가 많은 몇 명의  조장들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과거 히라타 구미를 세웠던  히라타 야스히로가 일본의 대표

적인 야쿠자 두목이었던 도오야마 미츠루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

이다.



 7대목과 무리들이 대문밖에 나와 기다린 지 10여 초  정도 지나자 국화 모양의

문장을 앞에 장식한 일곱 대의 벤츠가 차례로 대문  앞에 섰다. 7대목의 마음속

에서 감탄이 터졌다. 7대목이 도오야마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오후 1시가 갓

넘은 시간으로 분명히 도오야마는  신칸센(新幹線)을 통해 교토  역으로 온다고

했다. 그런데 전국 최대의  광역폭력단인 야마구치 구미의 문장이  달린 벤츠를

이용해서 오다니 놀랄 지경이었다. 단지 7대목  스스로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자

내색은 하지 않았다.



 놀란 사람은 7대목만이 아니었다. 히라타 구미 산하 조직원들과 본가 조직원들

도 마찬가지였다. 히라타 구미는 야마구치 구미와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고 앙숙

도 아니었다. 그들이 알기로는  지금까지 야마구치 구미와의 협력  관계를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앞, 뒤 각각 세 대씩의  벤츠에서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야쿠자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가운데의  벤츠에서는 조수석의 야쿠자가 나와  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지팡이를 쥔 도오야마가 수행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도오야마가 데리

고 온 야쿠자들은 모두 24명이었고 이들은 도오야마의 뒤에 도열해 있으면서 도

오야마의 거동에 시선을 모았다. 도오야마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길쭉한 나무상

자도 함께 들어있었는데 이를 운전하던 젊은 사내가 꺼내왔다.



 일개 조직의 두목인 것을 의식해서인가? 도오야마가 7대목에게 허리를 굽혀 정

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와 동시에 24명의  도오야마 뒤의 야쿠자들도 7대목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7대목도 질세라 이에 답례했고  7대목 뒤의 지역 조장들

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인사치레가 끝나고 7대목은 도오야마를 안으로 맞아

들였다. 7대목은, 6대목이었던 다케노우치로부터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히라타

구미 산하 열 네 개 조직들 중 세간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한 개의 조직을 이

끄는 것이 바로 도오야마 구미라는 것을.



                                                   





                                                             
 소 제 목 : Text 53


 "7대목께서는 모쪼록 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도오야마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한 후, 고개를  돌려 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커다란 나무 상자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도오야마가 이를  열어 한 길쯤 되는

길다란 칼과 그보다 약간 짧은 칼을 7대목에게 보여주었다. 도오야마가 짧은 칼

에 손을 대자 7대목 좌우에 앉아있던 미키와 요시이가 손을 바닥에 짚고 여차하

면 일어나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7대목의 손이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짧은 칼을 꺼내 든 도오야마는 두 손으로 7대목에게 주었고 7대목은 이를 역시

두 손으로 받았다. 칼집에는 도오야마 미츠루의 이름이 있었고, 그 밑에는 히라

타 야스히로의 이름이 보였다.



 도오야마 미츠루의 사생아이면서  도오야마의 성을 쓰지  못했던 히라타였지만

폭력단을 만들면서 도오야마 미츠루, 즉 아버지로부터 암암리에 많은 도움을 받

아왔다. 히라타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

다.



 도오야마 미츠루와 교토 기온(祇園)의 기생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성

을 따르지 못했던 히라타는 도오야마가 죽고  나자 도오야마가(家)와의 끈이 없

어져 버렸다.



 '50년대에 도오야마가의 상속 배분 문제가 터지자  자신도 같은 친족임을 인정

해 달라던 히라타에게, 배다른  형제들과 그 후손들은 더러운  자식이라며 욕을

해댔고 이에 히라타는  도오야마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도움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었기에 상속을 받으러갔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조직들 중 한 개를 도오야마가에 주었고,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칼 마저 돌려주

었다.



 히라타는 칼을 돌려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도오야마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한 번은 도와주겠노라고.



 "저는 여식밖에 없거니와 본가는 더 이상 극도와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

다."



 도오야마가 말했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도오야마 집안은  어디까지나 정객을 배출했지 극도

의 인물을 만드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가 야마구치 구미에

서 제공한 차를 타고 왔다는  것은 은연중 도오야마가가 일본  극도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도오야마의 부탁은 어려워서

하는 것이 아닌 히라타 야스히로가  했던 말을 꺼내어 일종의  명분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7대목은 자신의 친가(親家)의 일은 아니었지만 광역폭력단 건설을 꿈꾸는 그로

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선조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2000년 2월 13일. 일요일. 오후 11시 5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山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것은 선대(先代)의 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오야마가 돌아간 후 정적이 흐르던 방안에서 히라타  구미 본가의 미키가 눈

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당장 선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호전적인 미키의 말에 다른 조장들이  움찔했다. 맨 주먹뿐만 아니라

총기와 화약을 잘 쓰는 야쿠자로 이름을 드날리다가 돌연 프랑스로 건너가 외인

부대에 들어갔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뒤로부터는 히라타 구미의 조직원들 교

육에 힘쓰고 있던 미키였다. 최근에는 조직간에 커다란  전쟁이 없어서 몸이 근

질근질하던 그에게 흥미 있는 일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소 제 목 : Text 54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은 좀 들지 모르겠군요."



고문인 미야자키의 말이었다.



 "도오야마 님께서 스무 명도 넘는 수하를  우리 조직으로 넘겨주셨으니 그들을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흠...본 조(組)로 돌아오자마자 일을 맡긴다면 불평 같은 것은 없을까요?"



 "조장부터 선임하는 것이 어떨까요?"



지역 조장들이 여러 가지 의견들을 쏟아낸 후,  7대목의 말을 기다렸다. 심사숙

고하던 7대목의 입이 열렸다.



 "도오야마가로부터 돌려 받은 조직과 관할 사업은 미키가 맡도록 하는 대신 도

오야마의 부탁도 해결하도록 하시오."



 행여나 떡고물이 떨어질까 기대했던 조장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다

른 몇몇 조장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도오야마는, 히라타 야스히로가 아

버지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며 넘겨준 조직과  이권을 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가

다시 히라타 구미로 돌려주었다. 한 가지씩의 장, 단점이 있다면 도오야마가 넘

겨준 조직의 나와바리는 도쿄에 있다는 것이었다.



 히라타 구미가 광역폭력단으로 변모하기 위해서 관동지역에  작으나마 한 개의

조직을 갖게 된 것은 조직  확장을 위한 교두보 차원에서는  훌륭한 일이었으나

그와 반대로 도쿄의 폭력단으로부터의 시달림도 감내해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

지 많은 폭력단 사이의 전쟁을  중재하던 도오야마가 더 이상  히라타 구미와의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도쿄의  신조직은 다른 조직들로부터 각종

견제를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히라타 구미 산하 열 세 개 조직들 중 비교적 튼튼하고 재정이 좋은 조직의 조

장들에게는 도오야마가 돌려준 조직을 맡아 도쿄로  진출해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에 아쉬워했으나 반대로 힘이 약한 히라타의  다른 산하 조장들은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에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7대목이 도쿄의 신조직을 호전적인 미키에게 맡긴다는  것은 무슨 힘을 써서라

도 도쿄로 진출하겠다는 7대목의 강력한 의지 표명으로 풀이될 수 있었고, 도오

야마의 부탁까지 미키가 처리하도록 한 것은 한 번도  조직을 이끌어 보지 못한

그에게 실무를 익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요시이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

다.



 "미키 상이 처리하신다면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나

라에서 해야할 일도 아닌 것을 힘들게 하실 필요 있겠습니까?"



 "무슨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7대목이 발언권을 주자 요시이가 말을 이었다.



 "도오야마 님의 부탁은 영국에서  활개치는 한국의 야쿠자들을  응징해 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손을 쓸 필요 없이 형제의 의를 맺은

부산의 형제들을 보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순순히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겠습니까?"



 "장담하건대 그들은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죄송스럽습니다만 본 조

의 호시노가 일으킨 사건 때문에 부산 형제들은  경찰에 쫓기는 형편입니다. 여

기서 우리가 약간의 자금만 지원해준다면  아마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 같습니

다."



 요시이의 말에 미키만 불만을 가졌고, 방안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

은 제안이라고 느꼈다. 미키로서는 혼자로도 멋지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빼앗

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요시이로서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이전에 제안한 한

국 투자 건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키가  득세를 하게 된다면 자신

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도오야마의  부탁은 미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처리하도록 하는 편이 좋았다.



                                                   





                                                              
 소 제 목 : Text 55


    2000년 2월 14일. 월요일. 오후 11시 20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중은과 최명규는 오전부터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게다

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는 데에 더욱 놀랐다.



 요시이와 미키는 해운대파 사무실로 찾아와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현

재 해운대파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한국에서 벌일 사업을 일시  중지하고 잠시

피해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요시이는 한국에 대한 투자 계획을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해운대파의 사정이라면 누구보다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호시

노의 총기 사건에다 김근열의 권총 난사 사건 등으로  경찰은 점점 수사망을 좁

혀 오고 있었고, 한국 경찰이 일본 경시청에 공조 수사를 의뢰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중은은 망설였다. 철저하게 법적으로만 대응하는 일본의 경찰에 비해 한국은

다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마구잡이식 수사를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번 일로 인해 조직이 와해되어  버릴 위험도 있었다. 자신

이 직접 표면에 나서서 지휘한 일은 아니지만 김근열만  입을 열게 되더라도 구

속 수사는 면치 못할 터였고 또다시 수년간 교도소에서 썩어야 할 판국이었다.



 이중은이 최명규와 의논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하자  요시노와 미키는 호텔에

서 기다리겠노라고 대답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이중은의 제의에 이들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경찰 끄나풀이라도  보게 된다면 귀찮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였다. 이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김재수와 박정상이 들어왔

다.



 늦게 사무실로 출근한 김재수와 박정상은 미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1

월 한 달간 미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었기에 두려워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미키는 김재수를 보고 어깨를 두드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김재수의 칼 솜씨를

높이 평가한 미키는 그에게 프랑스 외인부대 시절에 어렵게 구한 칼까지 선물로

주었던 적이 있었다.





    2000년 2월 14일. 월요일. 오후 2시 35분. 부산시 해운대 경찰서 앞.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침도 못 먹고 점심마저도  늦은 시간에 먹게된 최명규였으나  밥맛은 조금도

없었다. 설렁탕에 한 공기 말아 넣은 밥은 돌가루를 씹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수저를 뜨다가 살며시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콧 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허겁지겁 설렁탕을 먹고

있는 동생 한양수는 설렁탕 그릇에 큼직한 다데기 덩어리를 또 집어넣으며 물었

다.



 "헤임요. 왜 그러시능교?"



 최명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직 폭력의  세계에 있으면서 동생들을 가혹하

고 냉정하게 대하기로 유명한 최명규는 그 유명세에 걸맞게  한 번도 동생들 앞

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냉정하게 대한다고는 하지만  동생들 즉,

조직의 필요성과 힘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동생들에게 챙겨줄 것이  있을 때는

조금도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시오."



 한양수는 최명규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가 아는 최명규는 술과 담

배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헤임요. 우짤랍니꺼?"



 식당 주인이 소주를 가져오자 최명규는  대답 대신 병을 기울였다.  아직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잔에 담긴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소 제 목 : Text 56


 회식으로 나이트 클럽이나 룸살롱을 갈 때도 술은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 최

명규가 이렇게 단숨에 소주 한 잔을 마시자 한양수는  겁이 더럭 났다. 무슨 영

문인 지도 몰랐다. 오전부터 자신을  불러내었고, 별 다른 말없이  계속 경찰서

앞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라면  그는 변장한 모습으로 있었

다. 가발과 안경을 썼고, 눈썹을 보다 진하게 그려  누구도 그가 한국을 대표하

는 칼잡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옷도 평소  입던 양복대신 허름한 차림으

로 바꾸어 입어서 더더욱 몰라보게 되었다.



 최명규가 다시 소주병을 들었다. 한양수가 그  병을 나꿔챘으나 번득이는 최명

규의 눈빛을 보고는 넉살좋게 말했다.



 "지가 따라 드릴랍니더."



 두 잔의 소주를 연거푸 마신 최명규의 얼굴이 타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한

양수가 다시 술을 따르려고 하자 최명규가 손을 내저었다.



 "아주머니, 여기 얼마요?"



 "만 원 주이소."



 최명규가 주머니를 뒤져 만 원 짜리 지폐를 내고는 가게 밖으로 나가자 한양수

가 급히 따라나갔다. 식당에서 조금 떨어진 가게에서  껌을 산 최명규는 한양수

에게 물었다.



 "너 연장 갖고 있지?"



 "하모요."



 "그 연장 이리주고 너는 사무실로 들어가라."



 한양수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최명규의 성격을  잘 아는 탓이었다. 허

리춤에서 길이 40cm짜리의 회칼을 꺼내자 최명규가 그것은 너무 길다고 말했다.

한양수는 발목에 차고 있던 15cm의 날 길이를 가진  단도를 꺼내 최명규에게 주

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근처 건물 지하 다방으로 간 최명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의 액정에

는 부재중 전화가 아홉 통 왔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모두 대양 프로덕션에

서 걸어 온 전화였다. 최명규는  이를 못본 척 무시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

다. 누구에게도 부탁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그가 전화 상대에게 짧게 부탁을 하

고 끊었다.



 10분도 채 안되어 경장 계급의 경찰 복장을 한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최명규를 한  번에 찾지 못했다. 최명규가  손을 흔들자

그의 변장 솜씨에 감탄하면서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웃으며 앉았으나 최명규

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데다  표정 또한 굳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얼굴

표정을 고쳤다.



 "무슨 일 있습니까? 요즘 형님이 잘 나가신다고 들었는데요."



 "승욱아. 나 한 가지만 부탁하자."



 "저는 형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합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우리 애 하나만 보내다오."



승욱이라는 이름의 경찰은 '보내라'는 말의 뜻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내 보

내 달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세상으로 보내라'는 뜻인지...



 "보...보내다니오? 어디로요?"





                                                   





                                                              
 소 제 목 : Text 57


 최명규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 말하기는 어렵다는  모습이었다. 그제

서야 승욱이 눈치를 챘다. 죽이라는 것은 알아듣겠지만  '우리 애'라는 것이 마

음에 걸렸다. 해운대파라면 수많은 칼잡이들이 우글우글 대는 곳인데 도대체 누

구를 손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누굽니까? 호...혹시?"



두 눈을 크게 뜨며 묻는 승욱에게 최명규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는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의 신문 밑에는 한양수로부터

받은 칼을 놓아두었다. 최명규가 승욱의 어깨를 두드리자 승욱은 단호하게 말했

다.



 "제가 누구 때문에 사는데 형님 부탁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걱정마세요."



 "그럼 난 간다."



 최명규는 차가운 표정으로 총총히 다방을 떠났다. 승욱이 일을 제대로 끝낼 지

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그 이상의 다른 방도는 없었다. 조직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생들을 아끼는 그에게  아무리 큰 대의명분이 있다

해도 가슴 아픈 일에는 틀림없었다.



 승욱이 칼을 품고 경찰서로 들어갔다. 사뭇  상기된 얼굴이었으나 모두가 바쁘

게 움직이고 있는 서 내에서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유치

장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 두 명의 동료 경찰이 슬쩍 쳐다보

았다. 승욱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창살 밖에서 유치장 안을 기웃거렸다. 김

근열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밖에서 조사 받고 있는 것을 못보고

지나친 것이었다.



 해운대 경찰서는 로얄비치 관광호텔  총기 사건의 열쇠를 김근열이  쥐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입을 열도록 온갖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그의 입은 자물쇠처럼

꾹 잠겨 열리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김근열이 갖고 있던 총을 어떤 루트로 구했

는지, 해운대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잠도 재우지 않아 가며 물

어 댔지만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이중은은 김근열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두었고 또  변호사를 통해 김근열에게

절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지만 변호사의  말이 없었더라도 김근열은 마음속으

로 굳게 다짐을 해두었다. 최명규를 비롯한 조직에 누가 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취조하던 수사관들이 회의를 하기 위해 김근열을 잠시 유치장에 넣어두기로 했

다. 수사관 한 명이 김근열을 데리고 서내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 승욱은 유치

장 밖으로 나와서 김근열을 찾고 있었다.



 복도에서 승욱과 김근열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이었지만 승욱은 마

음속에서 수십 번도 넘는 갈등을 느꼈다. 그때였다. 복도 뒤쪽에서 누군가가 김

근열을 데리고 오던 수사관의 이름을 불렀다. 수사관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승욱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칼을 꺼내 수정을 차고 있는 김근열의 손을 잡았

다.



 김근열의 크게 눈이 떠졌다. 이 사람은 경찰인데  나를 구해주려는 것일까? 하

는 의문을 품은 순간 그 경찰의 손은 칼과 자신의 손을 잡은 채로 목을 향해 다

가오고 있었다. 빠른 속도였다. 김근열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고 상대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끅!"



 비명과 동시에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승욱의  얼굴에 튀었다. 김근열이 주저앉

았다.



 "뭐야?"



 김근열을 데리고 들어오던 수사관이 쓰러지는 김근열을  피해 주춤했다가 그의

몸을 피가 적시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서 내의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 달려왔다. 김근열은  "끅끅" 거리며 아무 말

도 하지 못했다. 칼을 뽑아든 승욱이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흥분하여 외쳤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했어요!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지요!"





                                                   
















 소 제 목 : Text 58


    2000년 2월 14일. 월요일. 오후 8시 20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술을 마셔 벌겋게 된 얼굴의 최명규가 한양수와  김재수의 부축을 받고 들어왔

다. 사태를 짐작하고 있는 이중은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최명규

가 김근열을 죽이도록 시킨 것이 그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

음을 알고 있기에 할 말은 없었다. 이제는 해운대파 스스로가 함정을 깊게 파고

있는 셈이었다.



 최명규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두목인 이중은 앞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눈가에는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최명규의 눈물을 본 적이

없는 한양수와 김재수는 이중은의 눈짓을 보고 자리를 피했다.



 잠시 망설이던 이중은이 애초부터 잠수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최명규에게 히라

타 구미의 제안을 말해주자 그는 좋은 계획이라며 찬성했다. 몇 달이 걸릴지 모

르는 잠수였으나 한국에 숨어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국땅은 좁기 때문에 언젠

가는 꼬리가 잡히는 곳이었다.



 이중은과 최명규는 사무실을 빠져 나와 택시를  타고 미키와 요시이를 만났다.

이들은 밤늦도록 해운대파의 도피계획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전 11시 20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내로는 안 갑니꺼?"



 영문도 모르고 새벽부터 일찍 소집을 당해 오사카까지 오게된 박정상이 투덜거

렸다. 하지만 그의 칭얼거림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명규도 조용했고 김

재수나 유형남, 한양수 등은 얼굴만  굳힌 채 간사이 공항에서  시간만 보냈다.

오사카에는 요시이와 미키도 같이 왔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로얄비치 관광호텔 나이트 클럽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법무부에 이중은을

비롯한 해운대파 핵심 조직원들에 대한 출국 금지를 요청하기도 전에 이미 늦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운대파의 대부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최명규와

그의 동생들은 일본으로 이미 출국을 마친 상태였다.



 해운대 경찰서에서 벌어진 용의자 자살 사건은  관계자들에게 총기 사건만큼이

나 큰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는 자살 사건이 아닌 피살 사건이었지만 경찰서 내

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서로 쉬쉬했다. 몇 언

론들은 "중요한 용의자 경찰서 안에서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뽑았고, 지

방의 작은 신문사들은 경찰관이 용의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도

했다.



 폭력 조직과 관계가 있는 경찰관이 중요한 용의자의 목에 칼을 댔다면 이는 선

진국형 조직 폭력 범죄로 단순하게 취급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미국만 해도

연간 상상도 못할 만한 액수를 용의자나 증인 보호에  쓰고 있고 유럽의 국가들

이나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경찰이 최명규와 해운대파를 검거하기  위한 결정적인 제보를 받은  것은 오늘

오전이었다. 동양 관광호텔 나이트 클럽의 지배인인  조준현이 밤새도록 고민하

다가 검찰에 보호를 요청함으로서 김근열이 없어진  대신 새로이 중요한 증인을

얻게 되었다.



 전날 저녁 조준현은 해운대 경찰서 안에서 김근열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

고 화들짝 놀랐다. 일주일 전 동양 관광호텔에서 최명규와 다섯 명의 일본인 야

쿠자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조준현은 김근열의 권총 난사사건에 대해 누구보

다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불안했다.



 '김근열은 절대로 자살한 것이 아닐 것이다.'



 분명 그날 최명규의 지시로 다섯 정의 권총을  받아갔던 동생의 이름은 김근열

이었다. 그의 죽음이 차갑기로  소문난 최명규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다. 최명규가, 같은 조직의 동생도  죽이는 판에 교도소에서 겨우

한 번 만난 적밖에 없는 자신은 더더욱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잠을 이

룰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이 되자 경찰서로 달려가다가  마음을 고쳐먹었

다. 경찰서도 결코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에  김근열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

고 있는 검사에게 직접 연락했다. 검사는 조준현의  신병확보를 위해 검찰 수사

관들을 급파했다.





                                                   





                                                            
 소 제 목 : Text 59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전 11시 21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멀리서 미키가 몇 명의 야쿠자들을 데려오는 것을 보고 최명규가 입을 열었다.



 "오사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영국으로 간다. 히라타 조직의 부

탁으로 손봐야 할 놈들이 있어."



 박정상이 계속 투덜거렸다.



 "하고마! 우리도 할 일이 태산같은데 외국까지 가서 무슨 일을 한다꼬요?"



 "이건 형님께서 직접 내리신 오더다."



 최명규가 이중은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생들은 입은 다

물었다. 이중은이 시켰다면 뭐든 해내는 최명규였다.



 여권 만기일이 지난 데다 수배 중이었던 유형남은  요시이가 만들어준 위조 일

본 여권으로, 나머지 해운대파의 조직원들은 지난 1월 일본에 가면서 만든 여권

으로 전일본공수의 912편 여객기를  통해 런던으로 향했다.  최명규와 유형남을

제외한 동생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로  영국에 가는지 잘 알지  못했다. 몇 달간

해야하는 잠수치고는 꽤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동행자로는  히라타 구미의 조직

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이끄는 것은 미키였다. 조직원들은 미키를 조장으로 부

르며 깍듯이 대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이들이 새로 히라타 구

미에 편입하게 된 조직원들이라는 사실은 최명규도 알지 못했다.



 미키는 가급적 많은 조직원들을 데려가고 싶어했으나  7대목의 명령으로 세 명

밖에 데려갈 수 없었다. 이것도 요시이의  생각이었다. 미키가 인솔하는 인원보

다 최명규가 인솔하는 인원수가 많으면 미키보다는 최명규에게 공을 돌릴 수 있

겠다는 속셈에서였다.



 "형님. 일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유형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생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물었다. 최명규

에게 묻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였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최명규는 오늘 아침 이중

은과의 통화에서 자신을 비롯한 핵심 조직원들에게  모두 지명 수배가 떨어졌다

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부산으로 갈 수 있을까?'



 요시이는 그에게 영국에서의 비자는 6개월을 받게 될  것이며, 영국 입국 후에

는 위조한 일본 여권을 주겠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 처리가 제대로 안될

때는 위조 여권을 줄 수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이후 런던 시간) 센트럴 런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에 대한 테러는 더  이상 없음에도 특수영업팀의 직원들

은 본사의 지시로 인해 출근하지 않았다. 싸움에  굶주린 미키는 히드로 공항에

서 벗어나자마자 적이 미적미적하게 굴  때 오히려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바로 일을 시작하자고 했다.



 도오야마를 통해 받은 자료에는 한국  명성 맥주의 이사 중  한 사람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곧 병원에서 입원 중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가 아사히 UK.의 모리시타에게 맞아 입원했다는 사실은 아직 몰랐다. 단지 테

러를 일으킨 명성맥주의 우두머리라면 입원 중이건  아니건 한시라도 빨리 히라

타 구미의 맛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조직이든 두목을 쓰러

뜨리고 나면 상대하기가 쉬웠다.  40년 가까이 폭력으로만 살아온  미키가 몸소

체험한 바로는 그랬다.





 소 제 목 : Text 60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세인트 제임스 공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도현은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같은 클래스라지만  이렇게 매너 없는 친구들

이 있다니....군에서 제대하고 처음 가지는 데이트였는데 군식구들이 셋이나 늘

었다.



 소호에 있는 영어학교에 처음 등교한 날부터 김도현은 알 수 없는 야릇한 흥분

에 휩싸였다. 중급 영어 클래스에  들어간 그는 같이 공부하는  열 명의 학생들

중에서 그림처럼 예쁘게 생긴 아가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왕메이린(王美林)이라는 이름의 스무 살 먹은 아가씨는 등 안에 날개를 숨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예쁘고 깜찍했다. 북경에서 왔다는 그녀의 미모는 김도현

이 한국에 있었을 때 좋아하던 20대 초반의 여성 4인조 그룹 멤버들보다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수업 개시 첫날부터 김도현은  왕메이린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쉬는 시간마다

우유를 넣은 홍차를 사다 주었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가급적 옆에 앉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같은 클래스에 있는 다른 두  명의 홍콩에서 온 짱꼴라들이었

다. 한 명은 작달막하고 몸집이 비쩍  마른 자오이(趙一)라는 녀석이었고, 다른

한 명은 큰 키에 비대한 몸집을 가진  시랭(石冷)이라는 놈이었다. 언제나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사내 녀석도 역시 왕메이린의 근처에서 떠나질 않았다.



 왕메이린과 같은 중국인이라는 것을 빼면  아무 것도 호감 가는  것이 없던 두

사람에게 김도현은 체면을 차리느라 역시 홍차를 사다 줄 수밖에 없었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해야했다. 홍콩은 오랫동안 영국의 치하에 있어서 영어가 공용어나

마찬가지였는데 홍콩에서 런던으로 영어 공부하러 왔다는 이들은 둘이서만 붙어

다녔고 사교성도 없었지만 왕메이린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김도현에게 힘을 주는 것은 왕메이린의 미소였다.  김도현은 영어 공부를 위해

먼 영국에 오게된 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왕메이린이 보고 있다

는 생각에 수업 중에는 진지했으며 쉬는 시간에는 차 배달을 하느라 바빴다. 가

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고 왕메이린도 가끔씩 학교 휴게실에서 김도현에

게 커피를 대접하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선수치고 돈을  내는 것은 자오이가 아

니면 시랭이었다.



 오늘 오전 쉬는 시간에 김도현은 용기를 내어  같이 샌드위치를 사들고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왕메이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서 듣고 있던 자오이가 대뜸 안 된다고  대답했고 김도현은, 자신은 왕메이린에

게 물은 것이지 자오이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 왕메이린이 웃음을 터트

렸다. 웃음을 멈춘 그녀가 좋다고 말하자 이번엔  시랭이 자기도 같이 가겠다며

끼어 들었다. 같이 갈 수 없겠냐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가겠다는 통고

나 마찬가지였다. 김도현은 불쾌했지만 왕메이린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공원에 오게된 사람은 한 명의 일본인 여학생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

나 되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번다더니...'



 왕메이린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말한 사람은 자신인데  엉뚱한 중국 사내녀석들

두 명이 더 동행하게 되자 입이 뾰족하게 나왔다. 공원에서 두어 시간 떠듬거리

는 영어로 대화하던 김도현은 한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홍콩식의 요리가 나오는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자고 한다면 혹시  두 명의

홍콩 녀석들이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가장 원하는 상황은 왕메이린과 둘이서

만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는  경우였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예상과는

달리 왕메이린, 자오이, 시랭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한 명 남은 일본

인 여학생만 찬성했다.



 '오우! 마이 갓!'



 이미 말을 꺼냈으니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도현은 떫은감을 씹은

표정으로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소 제 목 : Text 61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드로 공항에서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고 런던 시내로  나온 것이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미키는 오랜 기간 프랑스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안내원

은 필요 없었다. 숙소를 정하기도 전에 그가 이끄는  세 명의 미키 구미 조직원

들과 일곱 명의 해운대파 조직원들은 김창환이 입원하고 있는 세인트 토마스 병

원을 찾아갔다. 빅벤 뒤, 웨스트민스터 브릿지 건너편에 있는 이 병원의 안내원

은 아무 의심 없이 김창환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미키는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세 명의 조직원들을 데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최명규도 질세라 따라 들어갔는데 미키는 이를 모른 척 했다. 매사에

꼼꼼한 최명규는 동생들이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라도 부르면 올

라 올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시간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김근태는  따분했다. 뒤늦게 이승영과 같

이 가기는 하지만 런던에서의 상황이 미묘해지면서 특별히 해야할 일이 있는 것

은 아니었다. 처음 유정후가  설명한 대로라면 한국의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가

일본 맥주사의 시비로 싸우게 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로버트가  사고를 내고

모리시타가 잠적해 버리자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김근태는  런던에서 머무는

동안 흑인 아가씨나 한 번 건드려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유정후는 김택환에 대한  체면치레로서 동생들을 영국에  보냈다가 데려오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이승영과 김근태를 보냈다. 가서 몇 일 쉬다가 이광혁 등과 함

께 돌아오라는 것이 유정후의 지시였다.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의 직원과  이광혁이, 이승영과 김근태를  맞으러 히드로

공항으로 갔다. 김창환이 누워있는  병실을 지키거나 펍 블루  라이언을 오가며

소일하던 김응진과 백준영은 병원에서 이광혁이 오기를  기다렸다. 김택환은 형

인 김창환을 잘 지켜달라며 부탁하고 갔지만 김창환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위험

은 없어 보였다. 오늘도 김응진은 백준영과 함께 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잡담

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 805호.



 병실 문을 열려던 미키는 병실에서 나오려는  백준영과 마주쳤다. 백준영의 체

격과 용모를 보고 한 눈에 싸움꾼임을 간파한 미키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제

아무리 날고뛰는 고수라도 기습에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광주파 두목 배윤업을

쓰러트린 경력의 백준영이 미키의 주먹을 맞고 병실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어찌

나 주먹이 매서웠는지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두 번째 주먹마저 맞고 말았

다. 싸움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경험도 중요했다. 스무살을  갓넘긴 백준영에게

이런 기습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다. 하지만 두 대의 주먹을 맞고 뒤로 쓰러지려

는 백준영에게 다가가던 미키도 경솔했다.



 병실 안의 사정도 모르는 채 마구 주먹을 휘두르며 전진한다는 것은 평소 미키

의 행동 방식이 아니었다. 다만  의욕이 너무 앞서다 보니  백준영에게 두 번째

주먹을 날린 이후 자신에 대한 방비가 너무 약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키가 주먹을 휘두르기 몇 초 전 자리에 앉아있던 백준영이 일어나서 문 쪽으

로 걸어갔을 때, '화장실에 갔다오겠다.' 라고 말했다면 아마 미키의 급습은 성

공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준영은  아무 말도 없이 병실  문을 향했고 이를

김응진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김응진은 미키의 주먹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

고 있던 중이었다. 첫 번째  주먹이 터지고 두 번째마저  성공하자 역시 노련한

파이터인 김응진이 앉고 있던 의자를 박차고 올라 병실  문 밖의 얼굴을 모르는

상대에게 긴 다리를 뻗었다. 그가 계산하고 내민 발차기는 항상 적중했다. 짜릿

한 가격 느낌과 함께 상대방이 문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소 제 목 : Text 62


 문밖에 얼마나 많은 적이 있을지 모르는 김응진은  자세를 낮추어 구르듯이 뛰

쳐나갔고 휘청거리는 미키 외에도 적이 세 명쯤이 더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복

도를 지나다니고 있던 사람들도 있어서  정확히 몇 명인지 셀  수는 없었다. 또

그럴 틈도 없었다. 미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의 특기인

돌려차기를 선보였다.



 - 퍽!



 미키의 수많은 싸움 경험은  젊은 한국인 파이터의 순발력에  여지없이 무너졌

다. 입안이 터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로 비명소리를

지르며 또다시 휘청거렸다. 이때 다른 누군가가  김응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가 허리춤에서 번쩍이는 물체를 꺼냈을 때 김응진은 비웃으며 그것을 발로 쳐냈

다.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것이 잭나이프라는 것을 알 수

있던 김응진이 미키의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사내에게 주먹과  발을 사정없이

휘둘러댔다.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 이  싸움을 보고 있던 최명규는  김응진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한국의 폭력 조직 계보는 훤히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가 조금

도 본 적이 없는 사내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응진의 실력과 나이

정도라면 조금 어려 보이기는 해도 이미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졌어야 했다. 최

명규는 그가 한국에서 자란 것이 아닌 교포 싸움꾼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곧 고

개를 저었다.



 가끔씩 LA나 오사카에서 활약한다는 국외의 싸움꾼들이  한국땅을 밟기는 하지

만 실력은 형편없었다.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개개인의 싸움 실력보

다는 화력이 중요했기에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고 해도 상대해보면 소

문 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키가 맞고 있었지만 최명규는 섣불리 도와줄  수 없었다. 야쿠자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기에 행여  잘못 도와주었다가는 미키가  최명규에게 화를

내며 덤벼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장이 불리한 상황에 빠지자 세 명의 미키  구미 조직원들이 김응진한테 달려

들었으나 그는 조금도 밀리는 기색 없이 잘 싸웠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김응

진이 이기기에도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멀리서 호각소리가 들리고 병원 직원들이 뛰어왔다.  병원 복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미키가 소리 없이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805호 안으로 들어서자 자

신에게 맞아 쓰러진 백준영과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김창환이 눈에 들어왔

다.



 '저자가 우두머리다.'



 김응진에게 두 대 맞고 난  후에 판단력이 흐려진 미키는  구두 밑창에서 날이

짧은 칼을 꺼냈다. 그는 7대목에게 깨끗한 일 처리 능력을 보여야 했다. 불과 5

일전에 깨진 병이 박혔던 김창환의 목에 다시 칼이 박히고  그는 비명 한 번 질

러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미키는 날이 짧고, 폭이  넓지 않은 칼을 쓰면서

도 정확히 김창환의 인후를 두 동강냈다.



 병실에 들어간 미키와 또 그가 벌인 일을 모두  보고 있던 최명규는 자리를 떠

야했다. 혼자만 도망가면 소용없었다. 먼저 미키를 내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김

응진에게로 다가가 공격하는 시늉을 했다. 그 틈을 타서  세 명의 미키 구미 조

직원들이 도망치는 조장을 따라 나섰다. 김응진이 쫓으려 했지만 최명규의 공격

에 길이 막혔다.






 소 제 목 : Text 63


 최명규는 김응진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병실 안

을 가리켰다. 눈이 휘둥그레진 김응진이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다 나오려던 백

준영과 부딪힐 뻔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린 백준영이 김창환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 의사를 부르기 위해 나오려던 참이었다.



 미키가 세 명의 수하들과 함께  김재수 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뛰는 것을

보고 최명규는 반대편 복도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면서 몰려들

었고 병원 경비원들도 보였다. 그 틈새를 빠져 나와 병원 후문에 이르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최명규는  그것이 자신을 잡기 위한  소리인지 아닌지

몰랐으나 일단은 튀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건너, 사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빅벤 쪽으로 온 최

명규는 난감했다. 아직 숙소나 연락처를 정하기 전이라 이대로 동생들과 헤어진

다면 어떻게 만나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부산의  대양프로덕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방법이 있었지만 쉽게  만나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또 들려왔다. 다시  병원으로 방향을 바꾸려던 최명규는

마음을 고쳐먹고 주위를 살피며 북동쪽으로 걸었다. 동생들을 찾으려면 다시 병

원에 가보아야 하겠지만 오늘은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느꼈다.



 백인과 흑인들이 와글거리는 거리에서 최명규는 두 명의 동양인을 만났다. 남,

녀 한 명씩이었는데 남자의 배낭에 태극 마크가 붙은  것을 보고 반갑게 다가갔

다.



 "저 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시죠?"



 김도현은 눈매가 매섭게 생긴 사내가 자신을 보며  다가올 때까지 경계하는 마

음을 품었다가 그가 한국말로 물어오자 안심했다.



 "아! 한국인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최명규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여권과 한국의 지폐와 수표뿐이

었고 그는 런던 지리도 모르고,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이 학생에게 도움을 청하

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고생문은 뻥 뚫린 것이었다.



 "무슨 일로?"



 김도현이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으나 최명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일로? 뭐라고 대답하지?'



 부산에서 런던까지 피신해 왔다고 할 수는 없었고  그나마 양복을 입고 있으니

업무 차 방문했다고 둘러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예. 회사에서 출장을 나왔는데  일행과 헤어졌어요. 이거  아무런 연락처도

모르고...."



 "그럼 회사로 전화해 보시면 되잖아요?"



 김도현의 대답에 최명규는 찔끔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

로 말했다.



 "저...국제 전화 거는 방법도 모르는데요."



 "그럼 저 따라오세요."



 김도현이 공중전화 부스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최명규의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저...아직 환전도 못했는데 한국 돈도 바꿔주나요?"



이 말을 들은 김도현이 한심하다는 듯 최명규를 쳐다보았다.










 소 제 목 : Text 64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6시 2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미 심장 박동이 멈춘  김창환을 살려보려는 의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

다. 김창환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이 없는  이광혁은,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화를 내며 김응진과 백준영을 야단쳤다. 야단쳐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으나 한국

의 유정후와 김택환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사건 직후 도착한 영국 경찰들은 병원과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의 직원들과 이

야기를 나누며 조사했으나 살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조사는 형식적인 것에 그

쳤다. 치안이 훌륭한 런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백인들에게 한해서였다. 유색

인종에게까지, 그것도 런던 거주자가 아닌 관광  비자로 입국한 김창환에게까지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는 일년에도 여러  번씩 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런던이었다.



 유정후에게 전화하기 전 이광혁은 김응진에게 습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섯 명의 야쿠자가 병원으로 들어왔으며 그중 네 명과 싸웠으나 혼자서 김창환

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말을 하자 백준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주 교도소에서 만난 이광혁이 직접 픽업해온  주먹이었지만 신목포파에 들어

온 이후로는 한 번도 실력을 보인 적이 없는  백준영은 이광혁의 얼굴이 어두워

지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형님. 접니다."



 이광혁은 일부러 사장님이라는 호칭대신 '형님'이라고  불렀다. 잠에서 깨어난

유정후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고 물었다.



 "형님. 김창환 씨가 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수화기 건너편에서 대답이 없자 이광혁은 말을 계속했다.



 "야쿠자로 보이는 일본인들이 몰려와서 칼을 썼습니다. 형님."



 "우리측에서는 다친 사람 없나? 승영이도 도착했을텐데..."



 항상 동생들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유정후의 말에 이광혁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6시 20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양프로덕션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새벽의 부산에서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최명규가 낭패한 표정을 짓자 김도현은 식사라도 같이  하러 가자고 말했다. 열

두 시간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몹시 피곤하고 출출하던  최명규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김도현이  차이나타운에 밥을 먹으러 간다고  하자 더욱

환영했다. 런던 사정을 잘 모르는 최명규는 차이나타운에 있으면 숨기에 좋겠다

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WONG KEI RESTAURANT'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식 레스토랑에 도착한 세 사람은 볶음밥을 주

문했다. 싸고, 양이 많지만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레스토랑

인데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도 꽤 인기 있는 곳이었다.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하지

않는 대신 팁도 필요 없었다.



 이 레스토랑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미국인 네  명이 이곳에 와 음식을

주문했는데 종업원들이 너무나 불친절하자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나섰던 일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종업원들이 쑥덕쑥덕 대더니 식당  안쪽에서 야구배트와

몽둥이를 들고 와 미국인들을 사정없이 두들겼다는  이야기다. 미국인들이 매맞

고 식당을 나와 영국 경찰에게 가서 하소연을  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소호

의 차이나타운을 관리하는 것은 영국 정부가 아닌 중국인들이었다. 이곳의 치안

은 영국 경찰이 아닌 중국인 마피아가 담당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도현 등 세 명이 식사를 다 마쳤을 즈음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숨을 헐떡이

며 식당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김도현을 보고 숨을 세차게 몰아쉬면서도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왕메이린이었다.






 소 제 목 : Text 65

 반가움에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 김도현이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왕메
이린은 집으로 돌아가려다 김도현이 여기  있을 것 같아 와본  것이라고 대답했
다. 영어를 모르는 최명규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김도현은 웃으며 애인이 찾아
온 것이라고 했고 최명규는 왕메이린의 미모에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식당을 나온 이들은 가까운 펍으로 들어갔다. 달리 갈  곳도 없는 최명규는 미
안한 얼굴로 동행했다.

 떠듬거리는 영어로 왕메이린, 일본인 여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후 아
홉 시가 넘어 자리를 옮길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지  의논하던 이들 앞에 또다
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나타난 사내 둘이 있었다. 자오이와 시랭이었다.


        2000년 2월 15일. 수요일. 오전 4시 30분(한국시간) 서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에서 깨어난 김택환은 길길이 뛰었다. 형이 당한 폭행에 복수하기 위해서 기
껏 사람들을 보냈더니 복수는커녕 오히려 야쿠자들에게 형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던 유정후는 책임을 지겠
다고 했지만 그 말은 들은 김택환은 어떻게 책임을 지겠냐며 더욱 화를 냈다.

 김택환과의 통화를 마친 유정후는 이광혁에게 전화했다.

 "당분간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기고 애들 나돌아다니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명성 사람들이 더 다치거나 일 생기면 곤란하니까 주의 기울이고."

 "예. 형님."

 "아사히 맥주 놈들에 대해서 알아볼  일 있을 때는 우리 애들  말고 다른 사람
시키는 것이 좋겠다. 누구 아는 사람 없겠나? 영국인이면  더 좋겠지만 일이 시
끄러워질 수도 있는데..."

 이안 노블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로버트 문제도 있고 해서 그러고 싶지
는 않았다.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김도현이었는데 그가 응해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9시 10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에는 이겼다.'

 외인부대원으로 활약했던 미키의 자위였으나 꼴은 비참했다. 새로운 조직을 맡
은 지 삼일도 지나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었고 어금니를 합쳐  세 대나 부러졌
다. 최명규의 해운대파 조직원들을 보기에도 창피했다.

 그래도 런던 명성 맥주의  우두머리라는 김창환을 없앴으니  7대목에게 내세울
만한 거리가 생겼다.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자 교토의 7대목은 이후의 추이
를 보고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일러주었다. 또한 가급적 아사히 맥주의 사람들과
는 접촉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키도
동감이었다.

 미키와 미키 구미의 조직원 세  명, 최명규의 동생들은 모두  안전하게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인 노스 액톤으로 도망쳐왔으나  최명규는 홀로 떨어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된 유형남과  김재수가 한국의 대양프로덕션 사무
실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한국은 새벽이라서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최명
규가 없는 해운대파 조직원들은 불안했다. 유형남이 있어서 미키와의 의사 소통
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조직에는 항상 우두머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런던에 와 있는 목적이 잠수만은 아니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소 제 목 : Text 66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9시 10분. 런던 외곽. 서리 뉴몰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목포파의 이광혁, 김응진, 이승영, 김근태, 백준영 등은 명성맥주 런던 사무

소 직원과 친분이 있는 한 한국인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뉴몰든이라면 한국

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이광혁 등이 몰려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의심받을

걱정은 없는 곳이었다.



 비로소 야쿠자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이광혁은 그답지 않게 겁을

먹었다. 한국에서라면 일대일의  싸움이던 패싸움이던 조금도  무섭지 않았으나

여기는 한국땅도 아니고, 상대는  그 흉악하다는 야쿠자였다.  맨주먹이나 칼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오싹해졌다.



 무기는 쓰지 않지만 폭력계에 있으면서 주워들은 상식이  있는 그가 보기에 김

창환이 당한 자상(刺傷)을 보면 상대방은 보통 솜씨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전

문적으로 칼을 배운 사람들만이 보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어떤 상대들인지 알면 대응이 쉬워지겠기에 귀찮을 정도로 김응진에게 묻고 또

물어댔지만 김응진의 대답은 별  것 아니라는 투였다. 주먹  실력도 형편없었고

세 명이 동시에 덤볐어도 밀리진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응진으로서도 나이

가 약간 들어 보이는 키 큰 사내는 도무지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응진이 미키의 뒤를 쫓으려고 했을 때, 키 큰 사내가 가로막았고 그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그냥 흘려들

을 수 있는 이야기였으나 무도를  익힌 김응진의 말이라 이광혁은  '키 큰 새끼

라..' 하며 심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명성맥주 직원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전

화를 받은 직원은 연신 머리를 굽신거리더니 이광혁에게 바꾸어주었다.



 "여보세요."



 "나. 김택환일세. 형님의 이야기는 조금 전에 들었네."



 "죄송합니다. 다른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고.  자네 형님으로부터 무슨 지시가  있을지 모르겠네만

이번 일은 나로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네. 그래서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

하는 것인데 아사히 녀석들 뿌리를 뽑아주었으면 하네."



 "예."



 "돈이나 사람이나 필요한 것 있으면 무엇이든 마련해 주겠네. 그럼."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 이광혁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김응진을 바

라다보았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9시 10분. 런던 켄설 그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책상 앞에 앉은 김도현은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오이와 시랭, 왕메이린이 서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이 밤 늦게 소호의 펍들을 뒤져 왕메이린을 데려가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

았다. 덕분에 왕메이린의 집까지 데려다 주려던 김도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

고 엉뚱한 최명규만 데려왔다. 가까운 호텔이나  B&B(아침이 나오는 여관)에 데

려다 줄 수도 있었지만 그가 갖고 있는 돈이  한국돈과 수표뿐이었고 말도 통하

지 않는지라 부득이 집으로  데려왔다. 물론 집주인에게는 미리  전화로 양해를

구해두었다.



 맥주라도 한 잔 드시겠냐는 김도현의 제의에 최명규는  술은 하지 않는다며 바

로 잠자리에 누웠다. 김도현은 자신의 싱글 침대에서  곤하게 자는 최명규를 쳐

다보며 꽤나 피곤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숙제를 하기 위해 사전을 펼치고

펜을 잡았다.




 소 제 목 : Text 67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전 11시 10분(한국시간) 김포 국제공항 제 1청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직에 큰 누를 끼쳤으면 몇 대를 걸쳐서라도 갚아내야 한다.'



조장인 요시이의 평소 지론이었다. 명문 오사카 대학을 졸업하고 우연찮게 극도

의 길로 들어선 사내는  똑똑하기만 하였지 담력이나 배짱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과 몇 일전 부산에서 일으킨 잘못으로 조직의 사업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

자 그는 크게 괴로워했다. 조장인 요시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한동안 조직의 벌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요시이의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 알

게 모르게 같은 조직의 미키 조장과 암투를 벌이고  있는 요시이는 런던의 미키

가 공을 세우길 바라지 않았다.



 어느 조직과 상대하든지 조직의 우두머리를 제거해야  겨루기 편하다는 사실은

미키나 요시노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이는 다른 루트를  통해, 런던의

아사히 맥주를 괴롭히는 것이 한국의 신목포파이며 이 조직의 두목은 한국에 남

아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미키가 전술가라면 조직의  고문인 요시이는 전략가

였다. 즉시 호시노에게 한국에 있는 우두머리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이번 일

을 성공시키면 얼마 전 부산에서 저질렀던 잘못은 불문에 붙이겠다고도 했다.



 호시노라는 사내는 김포 공항을 빠져 나왔다. 여권은 물론 자신의 것이 아니었

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 교포의 것으로  위조했고, 출장 온 비즈니스맨으로

위장했다. 앞으로 다섯 시간 후면 그는 이전에 한  번 접촉한 적이 있던 러시아

조직원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최명규에게 빼앗겼던  것과 같은 권총들을 손

에 넣게 될 것이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영국시간) 런던 소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도현은 최명규와 같이 학교까지 오게되었다. 좀처럼  늦잠을 자는 일이 없는

최명규가 시차 적응이 안되어서 그랬는지 새벽에  일어나 한국으로 전화해야 한

다는 사실을 잊었다. 김도현이  다니는 학교까지 와서야 겨우  부산의 동생들과

연결된 그는 미키의 소재를 알게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김도현에게 인사도 없

이 떠날 수는 없었기에 쉬는 시간까지 기다린 최명규는 교실에서 나오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같이 온 동료들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았다며 노스

액톤까지 가는 길을 물었지만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지하철 탈  일이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결국 김도현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타게  된 최명규는 지갑을 꺼내

집히는 대로 돈을 집어 한사코 거절하는 그에게  주고 학교를 떠났다.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다보고 있는 김도현 앞에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이! 잘있었나? 걱정했는데 쉽게 찾았군."



 "어? 안녕하세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광혁의 인사에 김도현이 놀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이광혁이 아무런 대

답도 없이 자신의 손에 시선을  두고있다는 것을 느끼고, 무심코  손에 쥔 것을

들여다 본 김도현은 깜짝 놀랐다. 기껏해야 만 원 짜리 몇 장 일줄 알았는데 최

명규가 준 것은 수표 뭉치였기 때문이었다. 김도현이 '다음에 다시 만나면 돌려

주어야겠다.' 고 생각하며 수표를 주머니에 넣자 김응진이 한마디했다.



 "햐. 보기보다 부자시군?"



 이광혁은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뭔가 부탁할  일이 있는데 시간이 있으냐고

묻자 김도현은 아직 수업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고 말했다. 이광혁이 기다릴 수

있다고 하자 김도현은 근처에 멋진 펍이 있으니 거기서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냐

고 물었다. 펍 이름이 블루 라이언이라는 말에  이광혁과 김응진은 서로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소 제 목 : Text 68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영국시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헤임. 고생 많았심니더."



 "하루 동안 고생은 무슨 고생이냐."



 반가워하는 김재수의 말에 최명규가 무안해 했다.



 "별 일 없었지?"



 "없었심더."



 북적거리는 소리에 미키가 밖으로 나와보았다. 미키의  얼굴을 본 최명규는 실

소를 터트렸다. 하루 사이에 미키의 얼굴이 두 배  가까이 퉁퉁 부어있었다. 하

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럽다는  기색 없이 최명규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이로

치자면 미키가 훨씬 연장자였으나 그는 최명규에게 함부로 하대하지 못했다. 최

명규는 한 조직의 이인자였으며 어디까지나 도오야마의 부탁을 일선에서 처리하

도록 명령받은 것은 미키의 조직이 아닌 최명규의 해운대파였다.



 "최상. 앞으로 우리 계획에 대해서 의논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형남이 통역으로 나섰다. 미키의 주장은 간단했다.  아사히 맥주를 괴롭히는

한국의 맥주회사와 이를 돕는 한국의 깡패들을 처단하면 그만이었다. 한국 깡패

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니는 일이 힘들겠지만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 건물만

지키고 있으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미키의 생각이었다. 이점에 대해

서 최명규는 영국의 경찰을 두려워했다. 싸움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는 그에게도

외국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최명규가 아무 대답이 없자 미키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대안이 없이

따라온 최명규는 그제서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12시 30분(영국시간) 런던 소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김도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앞에 앉은 이광혁과  김응진이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저와 친구 한 명이  그 사무실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면 연락해달라고 하시는 거로군요."



 "맞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몇 일만 고생해주면 보수는  충분히 줄게.

좀 도와줘."



 김응진의 말에 김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얼마 주실 건지 미리 말씀해 주시면 안될까요?"



 이광혁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인상도 좋지만 성격도  시원시원한 김도현이

마음에 들었다. 명성맥주 직원에게 눈짓을 하자 직원이 지갑에서 수표책을 꺼냈

다.



 자신 앞으로 지급된 수표를 바라보며 김도현은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생

각했다. 오전에는 한국의 수표가  다발 채로 들어왔고 오후에는  개인 수표까지

받았다. 갑자기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운수 좋은  날" 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생

각났다. 오전 내내 무거웠던 기분이 잠시나마  풀어졌다. 오늘 왕메이린은 등교

하지 않았다.








 소 제 목 : Text 69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12시 30분(영국시간) 런던 외각. 서리 뉴몰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뉴몰든으로 돌아온 이광혁은 동생들의 표정에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이승영과 백준영은 표정이 굳어있었고 김근태는 "형님!"  이라 큰소리로 울부짖

으며 이광혁에게로 달려왔다.



 "무...무슨 일이냐?"



 이광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세 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 열기를

주저했다. 잠시 후 이승영이 말을 꺼냈다.



 "형님. 놀라지나 마시오."



 "알았으니 말해봐라."



 이승영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떨어졌다.



 "큰형님이 총에 맞으셨다는구만요. 지금 막 연락받았오"



 이광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다급하게  이승영의 멱살을 잡고 따지

듯 물었다.



 "그...그래서? 어..어떻게 됐어?"



 "모르겠오.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는 하는데 가망은 없다네요."



 "이...이런! 누..누가 그랬지?"



 "그건 아직 모르겠답니다. 권총이라는데요. 누군지는..."



 눈가가 붉어져 있는 동생들과는 대조적으로 이광혁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가

흰색으로 바뀌었다. 얼굴 색의 변화를 본 이승영은 그가 극도로 화가 났다는 것

을 알았다. 이광혁과 몇 년간  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이승영으로도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일대일의 맞싸움에서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다는 싸움꾼

의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자 이승영  등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

울에 연락해 누가 가해자인지 알아볼 참이었다.



 이들이 다른 방으로 옮겨가자마자 명성맥주 직원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뱅크

지역에 있는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야쿠자로 보이는 동

양인 사내들이 사무소 빌딩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광혁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이승영과 김근태, 김응진 등이 가보기로 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10시 20분(한국시간) 서울 강남구 삼성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짜 수염을 떼어내고, 가발을  벗고, 눈가의 잔주름을 지운  호시노는 서둘러

지하철 역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몇 십 분간  화장실에서 숨어 있다가 나온 호

시노는 그야말로 상쾌했다. 호시노가 히라타 구미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처리

했던 일들 중에 오늘 같이 깨끗한 살인은  없었다. 이유는 몰랐으나 신목포파의

두목이라는 유정후는 사무실에서 혼자 걸어 내려왔다.  지하 주차장의 렌트카에

서 기다리고 있던 호시노는 유정후가  차에 타자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건넨

후 그의 왼쪽 귀 위에 소음기가 달린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즉사였다.

호시노가 차를 버리고 걸어서 비상구로 나가자  그제 서야 유정후의 운전기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호시노는 그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택시를 타고 명동에 도착한 호시노는 하룻밤을 묵은 후 내일 다시 오사카로 돌

아갈 예정이었다. 호텔 방문을 열고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그는 자신이 사용했

던 권총을 가발과  수염과 함께 지하철  역 화장실에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 제 목 : Text 70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1시 50분(영국시간) 런던 뱅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침으로 먹은 시리얼과 우유가 맞지 않았는지 한양수는  오전 내내 배가 살살

아팠다. 명성맥주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지키고 있다가  화장실이 급하게 된 그

는 화장실을 찾아 다녔으나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아무 건물에나 들어가면 되었지만 영국은 달랐다. 모두  문이 잠겨있는 것이 아

닌가? 현관의 보턴을 누르자니 뭐라고 말해야 할 지도 몰랐고 공중 화장실도 눈

에 보이지 않았기에 마음은 점점 급해져왔다.



 미키의 명령으로 미키 구미의 조직원들 세 명과 이곳을  지키고 있은 지 한 시

간이 지났을 때, 한양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 미키에

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다. 유형남을 통해 들은 미키의 대답은 근처의 아무 펍

이나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 멀리 보이는 펍이 있었기에 그곳 화장실에 갔다 온 한양수는 엉덩이를 감

싸쥐고 뛰어갔을 때와는 달리 느긋하게 걸어왔다. 명성맥주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일본인 조직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다는 것을 알

았다.



 같은 시간. 김응진과 이승영,  김근태는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 앞에는 세 명의 일본인  야쿠자가 있었는데 모두 김응

진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어제 김응진의 주먹에 맞아 왼쪽 눈이 퍼

렇게 멍들어 있는 상태였다.



 "저 자식들이 왜 사무실 앞에 있는 거지?"



 "워매 형님. 저런 잡것들 당장 줘 패버리지라."



이승영의 말에 김근태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말했다.



 "기다려라."



김응진이 제지했다. 그로서도 저들이 왜 사무실 건물  앞에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같이 따라온 명성맥주 직원에게 야쿠자 세  명을 사무실 안으로 불러들

일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뱅크 거리의 흔치 않은 동양인이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한 명의 미키 조직원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동양인이 한국의 깡패는 아니라고 생각했는

지 곧 길을 비켜주었다. 명성맥주 직원은 그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들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세 명의  젊은 야쿠자가, 서로 이

야기를 나누더니 직원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들이 사무실 안으로 사라지

는 것을 보고 나서 김응진 등이 뒤따라 들어갔다.



 뒤에서 인기척이 있자 황급하게 뒤돌아본 세 명의 야쿠자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뒤에서는 어제 싸워본 적이 있는 김응진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김응진 한 명도 상대하기 어려운 마당에 그의  뒤에는 더욱 우락부락하게 생긴

두 명의 동양인이 더 있었다. 서로 뭐라고 떠들던  세 명의 야쿠자가 동시에 큰

소리를 지르며 김응진에게로 달려들었다.



 김응진은 비스듬히 옆 벽면을 박차고 뛰어 오르며 외쳤다.



 "끼어 들지 마라."



 김응진의 싸움 실력을 아는 이승영과 김근태는 팔짱을 낀 채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김응진이 위험하다 싶을 때면 언제든지 싸움에 끼어 들 태세였다.










 소 제 목 : Text 71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상대방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김응진이 전력을 다해

싸우자 결과는 어제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벽을 차고 날아오른 김응진의 오른발

이 한 야쿠자의 광대뼈에 정확히 적중했고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착지한 김응

진은 조금도 쉬는 틈 없이 뒤돌려 차기와 주먹을 휘둘러 남은 두 명을 쓰러트렸

다. 이들이 모두 쓰러지기까지는 5초도 채 흐르지 않았다.



 이승영과 김근태가 감탄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김응진은 눈을 돌리

지 않고 명성맥주 직원에게 말했다.



 "형님께 전화 좀 걸어주세요."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자 김응진은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형님. 접니다. 괜찮으세요?"



 "응. 나는 괜찮다. 그런데 어딜 가 있는 거냐?"



 수화기 저 편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야쿠자들 중

한 명이 꿈틀거리며 일어설 기색을 보이자 김응진이 빠르게 물었다.



 "형님. 어제 병원에 왔던 놈들 중 세 명을  여기 잡아다 놓았는데 경찰에 연락

할까요?"



 이 말을 들은 이광혁은 눈이 번쩍 뜨였다.  어제였다면, 아니 오늘 아침까지였

다면 그는 당연히 경찰이 잡아가도록 하고 자신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을 터

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십 수년간 믿고  따르던 유정후가 총에 맞

았다지 않은가? 경찰을 통한다면 더 이상의  복수는 생각하기 힘들었고, 더군다

나 상대는 야쿠자였다. 야쿠자가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이건 간에 폭

력계의 싸움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한국에서도 폭력 조직들이 서로 싸우긴 해도 관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 경찰의

손을 통하게 되면 다시는  폭력계에 발을 붙이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설령

누가 칼을 맞아 죽을 위험에  빠졌다해도 경찰이 스스로 알기  전에는 가해자가

치료비 정도만 대 주고 서로 서로 쉬쉬하는 것이  관례였다. 싸움에 진 쪽도 그

것을 빌미로 고소하고 돈을 요구한다면 양아치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진정한 건

달들은 실력이 모자랐음을 자책하고 은신했다.



 이광혁은 야쿠자도 다를 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갈등하던 그가 말했

다.



 "이름이나 묻고 보내줘라. 어디로 가는 지도  알아보고. 그리고 사무실에는 당

분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알겠습니다."



 김응진은 이광혁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김응진도 동감이었다.

세 명의 꼬붕들을 경찰에 보내버린다고 해서 일이 수월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

았다. 김응진은 전화를 끊고 세 명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전의를 상실했을 법

한데도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덤벼들려고 했다. 그런 모습에 김근태가 달려들어

한 대씩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어찌나  매섭게 때렸는지 세 명  모두 뺨이 금새

부풀어올랐고, 그 중 한 명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김근태를 김응진이 제지하며 남아있는 세 명의 사무실 직원들에게 말했다.



 "저희 형님께서 지금 바로 여기  일을 마치고 당분간 출근하지  말라고 하십니

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밖으로 나왔고 그  중 세 명은

호출한 미니 캡* 에 태워졌다. 세 명의 야쿠자들이었다.








 * 미니 캡 : 허가 없이 운행하는 영국의 사설 택시, 불법은 아님





 소 제 목 : Text 72


 사무실 앞에서 30분간 기다린 한양수는 일본인 조직원들이 보이질 않자 용기를

내어 건물 앞으로 가서 명성맥주의 사무실 호출  보턴을 눌렀다. 하지만 안에서

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그는 하는 수 없이 최명규가  있는 노스 액톤으로

전화를 걸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2시(영국시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굴은 제외한 몸에 특별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으나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돌

아온 세 명의 조직원들을 보고 미키는 분통이  터졌다. 명색이 조장이었지만 조

직원들을 만난 지는 몇 일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히

라타 구미의 알려지지 않았던 열 네 번째 조직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더

욱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조직원들이 그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적의 우

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를 칼로 찌른  것이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붙잡혔던 조직원들의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왔다는 것은 그에게나 최명규에게 상

대가 만만하지 않음을 알려 주었다.



 조직원들의 모습에 창피함을 느끼는 미키와는 달리 최명규는 그들에게 많은 질

문을 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당했으며 상대는 많았는지 등을  진지한 모습으로

물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한양수의 안위였다.  야쿠자 세 명은 맞고서도

돌아왔지만 한양수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한

양수였다.



 "헤임요. 같이 있던 쪽발이 녀석들이 어디로 갔는지 안 보입니더."



최명규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수화기에 대고 외쳤다.



 "너 어디냐?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라."



 "알겠심더."



 최명규는 유형남과 박정상을 대동하고 집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택시를 집어타

고 뱅크 지역으로 향했다.



 벌건 얼굴의 동양인 세 명을 노스 액톤까지 태워다  준 미니 캡의 흑인 운전사

잭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택시 안의 무전기를  들어 손님을 무사히 도착시켰

음을 미니 캡 본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휴대 전화를 꺼내어 종이에 적힌 전화번

호를 눌렀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2시 10분(영국시간) 런던 소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치를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명성맥주 직원의 외침에, 뉴몰든으로 가던 김응진은 어떻게 해

야할 지 망설이다 이광혁에게 전화했다.



 "형님. 접니다. 그 녀석들이 있는 주소를 알아냈는데요. 어떻게 하지요?"



 "주소 알려주고 그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해. 어떤  녀석들인지 얼굴 좀 봐야겠

다."



 "알겠습니다. 그럼 빨리 오세요."



 김응진은 뒷좌석의 이승영과 김근태를 바라다보며 드디어 몸 풀 시간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김근태가 웃으며 말했다.



 "그 씨불눔덜 한 대 쳐서 뒈지면 어쩌지라?"










 소 제 목 : Text 73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2시 40분(영국시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2세의 노무라는 투덜거리며 식료품과 술 등을 차로 날랐다. 아버지가 시킨 일

임에도 입은 삐죽 나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옛 친구라는 사람

이 느닷없이 찾아와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는지,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거처

를 옮겼고 방 다섯 개 짜리의 집은 인상이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게 되었다. 그 뿐이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아버지는  이들의 수발까지

들도록 시켰다. 슈퍼마켓에서 쌀과 빵을 사다 나르는 것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

다.



 오늘 아침에는 기분 나쁜 일도 있었다. 아끼고 아끼는 소니 게임기의 조이패드

와 게임 시디를 어떤 뚱뚱한 녀석이 밟아 박살냈던 것이었다. 그 뚱뚱한 녀석은

한국인이라 했다. 노무라는 눈물이 나오도록 아까웠지만 말은 하지 못하고 속으

로만 끓고 있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노무라는 집 근처에서 한 대의 로버 승용차 안에 네 명

의 동양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 안에 몇 명이나 있는 건지 여기서 알 수가 있나?"



주택가의 한 이층집을 노려보며 꺼낸 김응진의 말에 김근태는 주먹을 흔들며 말

했다.



 "광혁 형님 오시기 전에 나가 다 조져 뿌리지라."



 "조용하게 있어라. 싸움도 제일 못하는 게 말은 좆나게 많아요."



 김응진 대신 이승영이 한 마디 했다. 김근태는 약이 바짝 올랐다. 고등학교 때

만 하더라도 맞장 뜰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던 그였는데 신목포파에 들어온 이후

에는 오히려 실력이 준 것 같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나중에 싸움이 일

어나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김근태가 고개를 돌렸을 때 옆으로 지나가는 차를 보았다. 차를 운전하고 있던

동양인은 자신들을 쳐다보며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형님! 형님!"



 김근태의 외침에 김응진과 이승영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노무라는 차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떠들자  집에 들어와 있는 일

본인들이거나 아니면 한국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서진  게임패드를 떠 올

렸다. 주의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차를 세우고 윈도우를 내려 정중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노 나카노 모노오 갓테니 사와라나이데 구다사이 오네가이시마스.(집안의

물건을 함부로 손대지 말아주세요. 부탁합니다.)"



 말을 마친 노무라는 그들의 눈빛을 보고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있지 못하는 것

을 느꼈다. 그렇다면 한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상대가 영어를 알아듣는지

어떤지 판단한 겨를도 없이 같은 내용의 말을 영어로 쏘아댔다.



 "워매. 저 씨불눔이 뭐라고 떠드네요잉?"



 김근태가 중얼거리는 동안 김응진과 이승영은 명성맥주 직원을 쳐다보았다. 무

슨 말을 하는지 알려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일본인  특유의 묘한 액센트를 알

아듣지 못한 명성맥주 직원도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집에 있는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 같은데요?"



 "워매. 그럼 저 씨불눔이 시방 혼자 와서 협박하는 겨?"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김근태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소 제 목 : Text 74


 차에 몰래 숨어있는 자신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김응진과 이승영은 궁금해했

다. 하지만 더욱 급한 것은 김근태의 행동이었다. 그는  차 밖으로 나가 노무라

가 타고 있는 앞좌석의 문을 강제로 열었다.  노무라가 무어라 외쳤으나 김근태

는 이를 못 들은 척하고 주먹을 들어 한 대 후려치려는 기세였다.



 노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기가  될만한 것이 없나 찾았

지만 눈에는 아무 것도 띄지 않았다. 와인은  모두 트렁크에 넣어두었고 차안에

있는 것은 봉제인형 한  개뿐이었다. 자신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는 김근태를

절망적인 눈으로 쳐다보다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발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30센티미터 가량 떴다가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 덕택에 노무라의 오른

쪽 발이 차의 악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게 되었다.  김근태의 손에 잡힌 노무라의

셔츠가 주욱 찢어지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 급출발했다.



 김근태는 앞으로 끌려나가듯이 몸을 틀며 쓰러졌다. 그 다음엔 차 밑으로 멱살

을 잡았던 손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차의 뒷바퀴에 김근태의 왼팔이 깔

리려는 찰나에 그는 급히 손을 빼냈다. 황급히  일어나 보니 옷도 더러워져있는

데다 앞으로 끌려나간 부분의 살점에서는 피가 맺혀있는  것을 보았다. 화가 머

리끝까지 치밀었다.



 룸미러를 통해 뒤에서 정신없이  쫓아오는 김근태의 모습을 본  노무라는 계속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바퀴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노무라의 차

는 집 정원까지 도달했고 집 벽면에 살짝 부딪히며 섰다. 노무라가 재빨리 좌석

문을 열고 집 현관에서 벨을  눌러댔다. 김근태가 인상을 쓰며  거의 다 따라온

순간이었다. 노무라가 집의 현관문을 세차게 두들기고 있을 때 김근태의 왼손이

노무라의 어깨에 닿았다. 김근태의 오른손은 뒤로 한껏 젖혀져 있었다.



 김근태의 주먹이 육중하게 휘둘러졌을  때 현관문을 연  미키는 아연실색했다.

친구의 아들인 노무라 히데아키가 처음 보는  동양인의 주먹을 맞고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미키가  발을 들어 김근태를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집안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데키다!!(적이다!!)"



 미키의 발이 김근태의 배에 꽂혔다. 김근태가 흠칫거리며 다시 주먹을 쥐고 공

격하려 하다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노무라는 이틈을 타서 집안으로 들어왔

고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미키가 재차 김근태를 공격하려고

현관문을 나섰다가 뛰어오는 김응진과 이승영을 보았다.  이승영은 누군지 몰라

도 김응진은 일면식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키의 얼굴을  퉁퉁 붓게 만든 장본인

에다 보기 드문 실력파 파이터이지 않았던가. 미키에게도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2시 55분(영국시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방에서 뒹굴고 있던 김재수는 누군가가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

께 미키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자 같이 방안에 있던 세 명의 야

쿠자가 후다닥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무언가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미키의 조직

원들은 빠르게 일어나서 창문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려 했다.



 "아이츠다조!(그녀석이다!)



 미키 조직원들 중 한 녀석이 집 앞까지 뛰어오는 김응진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

렀다. 나머지 두 명의 조직원들이 창 밖을 쳐다보고 나서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

로 바뀌었다.



 그런 야쿠자들의 모습을 본  김재수는 상대가 대단한 인물인가  보다고 생각했

다. 침대 밑을 뒤져 두  개의 칼을 꺼냈다. 부산에서 지니고  다니던 긴 회칼이

아닌, 과도(果刀)와 같은 짧은 칼들이었다.




 소 제 목 : Text 75


 현관 앞에서 마주친 미키와 김응진은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대낮 주택가에서 

싸운다면 경찰에 날 잡아가 달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으로

서는 서로가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런 생각에 미키는 

집안에서 싸워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랐다. 

김응진도 남의 눈이 띄지 않는 곳에서 싸우는 것이  편했으나 집안에 적이 얼마

나 모여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현관문에 기대어 선 미키가 손을 들어 김응진과 이승영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을 때,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김근태가 비로소 몸을 추스리며 일어났다. 호기 

어린 미키의 손짓에 김응진은 그의 눈빛을 살폈다.



 사뭇 진지한 미키의 눈빛을  보고 김응진은 집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눈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비굴한 빛을 발견했다면  이광혁이 올 때까지 기다

렸을 테지만 어차피 그가 오더라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김응진이 걸어오자 미키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손바닥을 펴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무기는 갖고 있지 않다는 표시였다. 미키의 뒤에는 미키 구미의 조직원 

세 명과 김재수가 서 있었다.



 3대 5



 적이 다섯 명뿐이라면 김응진은 자신 있었다. 이미 미키와  다른 세 명과 함께 

싸워보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처음 보는 얼굴을 가진 사내의 실력은 알 수 없

었고, 어제 스쳐 지났던 키 큰 사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현관

문을 지나 복도로 들어선 이상 몸을 돌려 다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미키가 등을 돌려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소파와 테이

블을 치우도록 명령했다.



 '1대 1의 싸움을 하자는 것인가?'



 김응진으로서는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맞장" 이

니 "잇뽕다찌"로 불리는 1대 1의 고전적인 싸움은  이미 사라지지 않았던가? 과

거 수많은 한국의 정통 건달들은 1970년대, 양은이파의 조양은이 휘두르기 시작

한 회칼에 낭만적인 싸움 방식을 잃어버렸다.



 김응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미키가 싸울 태세를 취했다. 조장의 싸우는 모

습을 보게된 세 명의  야쿠자들과 김재수는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도 이승영과 

김근태는 팔짱을 끼고 구경하게 되었다.



 미키 구미 조직원들과 김재수의 서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 김응진은 뒤에서 

공격이 들어오지 않을 장소를 골랐다. 그는 어제  미키의 실력을 간파하기는 했

으나 신중한 모습으로 상대의 눈빛과 숨 고르는 것을 살폈다. 자신에게 맞고 나

가떨어지는 했어도 이렇게 다시 도전해 온다는  것은 무모하거나 아니면 그만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였다. 김응진은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자

신의 기습이 성공한 것이지 제대로 맞붙어 본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연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키의 발이 김응진의 안면에서 슬쩍 휘둘러졌다.  일종의 위력정찰과 같은 눈

속임이었다. 김응진은 그의 발이 얼굴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서도 슬쩍 뒤로 피하는 척  했다. 미키의 발이 원을  그리며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 김응진은 놓치지 않고 낮은 자세로 공격하려 했으나  미키의 발은 땅에 닿기

도 전에 다시 날아왔다.



 움찔한 김응진이 미키의 다리를 양손으로 막고  오른발로 넓게 바닥을 쓸었다. 

그러나 미키는 예상했다는 듯이 공중으로 뛰었다.  빠른 솜씨였다. 김응진이 뒤

로 급하게 1미터 정도 몸을 내뺐다.



 이들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김근태는 자신의 실력을  부끄러워했다. 이승영은  

김응진의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기보다는 집안에 있는  나머지 네 명의 일거수일

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얼굴이 부어있는 세 명의 사내는 손을 빼고 있어서 괜

찮았으나 머리가 짧은 한 사내의 양손은 실내임에도 걸쳐  입은 점퍼 안으로 들

어가 있었다.



 소 제 목 : Text 76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10분(영국시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차를 타고 노스 액톤으로 향하던 이광혁은 유정후의  죽음이 명성 맥주를 괴롭

히는 아사히 맥주와 야쿠자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아무리 생

각해도 서울에 있는 유정후가 한국인들에게  총을 맞은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

다.



 서울에서 총질을 했다면 결코 간단한 상대는 아닐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얼

마 전에 있었다는 부산의 총기 사건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일단 김응진이 알아놓은 곳으로 가서 어떠한 놈들인가  파악해 보고 복수를 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서울에도 돌아가 보아야했다.  유정후가 없어서 

우왕좌왕할 동생들과 사업체들을 다독거려 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차를 운전하던 명성 맥주의 직원이  전화를 받더니 곧 이광혁

에게 바꾸어 주었다.



 "나. 김택환일세. 서울에서의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들었습니다."



 침울한 목소리로 이광혁이 대답했다. 김택환의 말이 이어졌다.



 "뭐라 할 말이 없네. 우리 형님에다 자네 형님까지....보통 일이 아니네. 급히 

한국으로 들어오려 하지는 말게. 내가 이곳에서 좀 알아보고 연락해 줌세."



 이광혁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야쿠자들이  모여있다는 곳으로 들어서고 있

었다. 너무 가까이 차를 댈  필요는 없겠다고 느껴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차시킨 

후, 김응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을 찾으며 

고개를 돌리는 이광혁의 눈에 저 멀리 이승영과 김응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차로 뛰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이광혁과 백준영이 뛰어갔

다. 이승영의 등에는 큰 몸집의 김근태가 업혀  있었는데 이승영의 바지를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광혁이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왔다는 것을  알게된 김응진은 "죄송합니다. 

형님!"이라고 외치고 차에 올랐다. 이광혁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이들

이 도망가는 것인가? 이광혁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근태는 왜 저래?"



 "저 집안에 여섯 명이 있는데 근태가 당했습니다."



김응진이 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다란 몸집의 김근태를 차의 뒷좌석에 억지

로 뉘인 이승영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승영이 김근태 옆에, 김응진은 앞좌

석에 타면서 이광혁에게 말했다.



 "저희는 병원으로 빨리 가야겠습니다. 저도 좀...."



 "그....그래...승영이는 가면서 내게 전화해라. 곧 뒤따라가마."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본 이광혁의 눈에 반짝이는 빛이 들어왔다. 그것이 무얼까 

생각하던 이광혁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김응진의  어깨에는 칼 하나가 손

잡이까지 박혀있었다.




 소 제 목 : Text 77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런던 세인트 토마스 스트리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두 시간 정도 세인트 토마스 스트리트의 아사히  맥주 특수영업팀 사무실 근처

에서 배회하고 있던 김도현은 꽤나 심심했다. 오후  다섯 시까지 일하기로 하였

으므로 앞으로 두 시간이 더 남았다. 빨리 홈스테이 하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호스트 마더는 오늘  저녁 메뉴로 해물 스파게티를  준비하겠다고 했었

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한 동양인이 건물에서  주위를 살피며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양손에 무거워 보이는 것을 들고 있었는데 주위를 계속 살피는 것이 어

딘가 수상쩍어 보였다. 이광혁이 말한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깡패 타입은 아니

었지만 이상하게 여긴 김도현은 그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건물을 나온 동양인은 세인트  토마스 역으로 걸어갔고 김도현은  그를 미행했

다. 이광혁으로부터 받은 휴대 전화기로 그에게 전화를 시도했으나 이광혁의 전

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지하철 안까지 들어간 김도현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동양인을 쫓았다. 지하철

은 런던 시내로 향하는 중이었다.  10분 정도 지난 후  김도현은 동양인을 따라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서 내렸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미행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도 그는 떨어지지 않고 뒤를 밟았다.



 동양인은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서 나와 트로카데로 건물 옆의 으슥한 골목길에

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노키아 휴대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걸었고 곧 이어 터

어번을 두른 사내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멀리서  지켜보던 김도현은 그들이 돈

과 가방을 서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터어번의 사내는 바로 사라졌

고 동양인도 레스터 스퀘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할 지 김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많은 보수를 받고  아무런 성과가 

없으면 이광혁에게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동양인을 끝까지 따라

가 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동양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졌다.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CASINO GOLDEN NUGGET"



 동양인이 들어간 건물의 간판이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그가 1층 카운터에서 위

층으로 가는 것을 보고 김도현도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무턱대고 따라 들어

가려니 카운터의 나이 많은 영국인이 제지했다. 멤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카지노를 나온 김도현의  눈에 카지노 앞의 거리를 지나

는 흰색의 리무진 행렬이 들어왔다.



 두 대의 리무진이 카지노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차가 막혀 도로에 멈춘 상태였

다. 왕족이나 귀족, 아니면 연예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두 번째 리무

진의 검정 색 코팅 윈도우가 내려가는 것을 보던 김도현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리무진의 뒷좌석에는 왕메이린과 똑같이  생긴 아가씨가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을 내지른 김도현이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하자 차가 출발하고 말았다.



 한동안 멍하게 있던 김도현은  정신을 차린 다음 전화기를  꺼내어 이광혁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통화를 못하니  답답했다. 왕메이린을 

닮은 아가씨 생각도 났고 카지노로 들어간 수상한 동양인도 쫓고 싶었다.



 카지노 앞에서 서성이던 김도현에게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학교에서 

같은 클래스의 이탈리아인 친구인 니코가 카지노에서  돈을 땄다고 자랑하던 모

습이었다. 학교가 소호에 있으므로 카지노와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어쩌면 니

코가 다닌다는 카지노는 이곳일지도 몰랐다. 그는 학교로 뛰었다.




 소 제 목 : Text 78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응진을 따라 병원으로 가려던  이광혁은 마음을 바꾸었다.  김창환이 살해되

고, 한국의 유정후가 총에 맞아 죽은데다가 김응진, 김근태  마저 칼에 맞자 이

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들의 아지트가 발각된  이상 옮기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여기서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찾아다니기

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이광혁은 차안에서 이승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태는 어떻게 당했지?"



 "네. 옆구리에 칼을 맞았는데 칼날이 길진 않아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응진이는 어때?"



 휴대전화기의 작은 스피커를 통해 이광혁의 말이  들렸는지 김응진의 "형님 전 

괜찮습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진 형님은 어깨에 칼을 맞았는데요. 그 자식이 칼을 날렸어요."



흥분한 듯 이승영이 횡설수설했다.



 "똑바로 말해봐라. 그 자식이란 누구냐?"



 "누구인지는 모르지요. 왜놈일텐데... 그런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놈 같기도 

하고..."



 "그 놈이 칼을 잘 쓰나?"



 "빨랐어요. 근태가 찔린 것과 응진 형님이 칼 맞은 게 순식간이었어요."



확실하게 이승영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주먹이나 발은 안 쓰던가?"



 "네. 못 봤습니다. 칼잡입니다."



이광혁은 결심한 듯, 명성 맥주 직원에게 손짓해서  김응진이 알려준 주소로 가

도록 시켰다.



 "집안에는 몇 명이나 있지?"



 "모두 다섯 명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 세 명은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응진 형

님이 아주 박살냈어요."



 "알았다. 병원에 가거든 연락해라."



 "형님 조심하세요."



 "그래. 걱정 마라."



조심하라는 소리가 연거푸 두 번  들려왔다. 한 번은 김응진이  지른 소리였다. 

이광혁이 고개를 들어보니 목적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깡패

처럼 생긴 두 명의 사내가 한 사내를 부축하며  집으로부터 데리고 나오고 있었

다.




 소 제 목 : Text 79


 이광혁과 백준영이 같이 차에서 나왔다. 명성 맥주 직원도 따라 나오려는 것을 

이광혁이 제지했다.



 백준영이 부축 받아 나오는 미키를 보고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혀..형님!"



 "왜 그러냐?"



 "저...저 자식입니다. 어...어제 병원에 와..왔던 놈입니다."



 이광혁이 가까이 다가가자 미키를 부축하던 두 명의  야쿠자가 조장의 앞을 가

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 둘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었다. 번개처럼 몸을 날

린 이광혁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야쿠자 두 사람의  얼굴에서 터졌다. 이 때문에 

현관문을 나오려는 세 사람이 다시 복도 안으로 밀려 쓰러졌다.



 부축해주던 두 사람이 바닥에 나 뒹굴자 미키는 주저앉고 말았다. 당황한 얼굴

로 그는 구두 밑창에서 날이 짧은 칼을 꺼내려고  했으나 이광혁의 구둣발이 그

의 손과 발목을 짓이겼다.  비명을 질러대는 미키에게 얼굴을  가져간 이광혁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인기척이 나서 이광혁이 앞을 쳐다보자  처음 보는 사내가 칼  두 자루를 들고 

부엌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들고 있는 짧은 칼 하나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

었고, 다른 칼은 약간 길었는데 날이 톱니처럼 달려있어서 스테이크용으로 보였

다. 칼이 모자라 부엌에서 집어온  것이리라 생각한 이광혁은 한  번 더 미키의 

발목을 지끈 밟고는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비명을 지르려는 미키에게 이

번엔 백준영이 "쉿!" 하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칼을 씀에 있어서 넓은  곳보다는 좁은 곳이 김재수에게  유리하게 마련임에도 

김재수는 부엌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광혁이 이유를 간파했다. 칼잡이들은 주먹

이나 발 쓰는 것에 약하다. 칼이 손에 쥐어져있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김응진의 

어깨에 박혀있는 칼도 상대가 날린 것이라고  했으니 복도보다는 넓은 부엌으로 

데려가는 것은 그곳에 날릴 만한 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김재수는 칼 하나를  김응진이 가져가자 부엌으로 내려가서 

쓸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보았다. 한 두 자루의  칼을 쓰는 한국의 가정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적어도 5-7 종류, 많으면 열 자루도 넘는 종류의 칼을 사용한다. 그 

중에서 제일 쓸만한 것을 가지고 나온 김재수는 이광혁의  눈빛을 보고 결코 만

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갖고 있는 짧은  칼 두 자루를 날려 성공한다 

하더라도 쓰러질만한 인물은 아닌 듯 했다. 김재수는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부

엌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면 최명규가 돌아올 것이니 시간은 끌면 끌 수록 

유리했다.



 같이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이광혁이 팔을 휘둘러 김재수를 몇 걸음 뒤로 더 이

동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공격할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김재수의 어깨 넘

어 칼과 식기가 모여있는 곳을 파악한 이광혁이 그곳을 차지하려는 행동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김재수가 몇 발자국 뒤로 움직이자 부엌의  식기와 칼이 있는 곳

은 이광혁의 등뒤에 위치하게 되었다. 미세하게 김재수의 얼굴이 떨렸다.



 두 사람은 공격 타이밍을 잡기 위해 서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광혁은 서둘지 

않았다. 김응진이 칼에 맞을 정도라면 상대방은  절대 하수가 아니었다. 김재수

의 눈빛과 어깨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그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

다.



 김재수는 초조해졌다. 최명규라도 빨리  돌아와 주었으면 했다. 평소의  칼 두 

자루를 지닌 그였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을 테지만 상대방은 빈틈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동시에 두 자루의 칼을 휘둘러보았다.



 "삭!"



 이광혁의 윗도리가 칼에 베여 찢어졌다. 상대의 빠름에 이광혁은 놀랐고, 김재

수는 자신감을 얻었다.

 


 소 제 목 : Text 80


 작년 언제쯤이었던가?



 '선배님 칼잡이랑 대적 할 때 알아야할 점이 있다면 뭡니까?'



 어느 날 운동시간에 최명규에게 물었던 말을 떠올렸다.



 '자네에게 그걸 알려주면 난 흙 파먹고 살아야하지 않나?'



그때 최명규는 껄껄 웃으면서도  성심 성의껏 대답해주었다. 그  내용의 요지는 

이러했다.



 먼저, 칼은 휘둘러야 하기 때문에 칼이 공격할 수 있는 범위는 한 개의 면(面)

으로 국한된다는 것이었다. 즉, 상하전후좌우  여섯 방향의 공간들 중  한 곳만 

공격할 수 있을 따름이고  나머지 다섯 개의 방위에서는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또 칼의 단면(斷面)과 몸이 같은 지역에 있더라도 칼이  자르고 나가는 것은 결

국 한 개의 선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이광혁이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최

명규는 한 단계 더 심오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칼이 아무리 넓고 많은 단면을 베고 찌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간을 느리게 해

서 본다면 그것은 한 개의 면도 아닌 한 곳의  점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

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칼은, 일정 시점에서는 단 한 곳만을 공

격할 수 있다. 단면을 베는 와중에서도 공격시간  이전의 단면 아랫면은 안전할 

것이고, 공격시간 이후의 단면 윗부분은 안전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칼을 

피할 수 있는 위치는 상하전후좌우의 방위들 중 다섯  곳이 아니라 가로와 세로 

각각 열 두개의 방위를 곱한 숫자 - 144 -에서  143곳이나 될 수 있다고 알려줬

다. 물론 싸우는 당사자가 눈썰미와 몸놀림이 빠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

기였다.



 여기까지 말해 주고 나서 최명규는 피할 곳을 알아내는 경지를 넘어서면 피하

면서도 맞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이광혁은 숨을 고르게 내 쉬면서 김재수의 눈빛을 살폈다. 김재수의 칼에 베여 

찢어진 곳에서 조금씩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은 듯 했다.  

베이고 나서 낫처럼 크게 보이던 김재수의 칼은,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며 최명

규가 해주었던 말을 기억해내자 점차로 작아졌다. 처음에는 낫에서 칼로 보였다

가 못으로 바뀌고, 급기야는 압정 크기로 점점 작아져 보였다.



 어느 순간, 김재수의 칼이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이광혁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최명규의 말대로 피할 곳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피할  곳은 칼의 

아래에도, 위에도, 좌우에도, 앞에도 있었고, 뒤에도 있었다. 오히려 앞으로 달

려들어 왼팔로 칼을 쥔 그의 오른팔을 가볍게  물리쳤다. 이광혁의 오른손은 단

단히 주먹이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 퍽!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김재수가 무너져갔다. 그

러나 그는 쓰러지면서도 왼손의 칼을 이광혁에게로 날렸다. 이미 던지려고 마음

먹었던 행동 같았다. 공격이  성공했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던  이광혁이 때늦은 

후회를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상대의 칼을  보지 못했으니 피할 곳도 

없었다. 김재수는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칼을  날렸다. 다급해진 이광혁은 몸을 

움직일 겨를도 없이 어깨를 틀어 상체 앞면을 보호했다. 어깨와 등이 무방비 상

태가 된 것이었다. 



 이광혁은 경솔했던 자신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등을 더 돌렸다. 날아온 

김재수의 칼은 등에 맞고 말았다.




 소 제 목 : Text 81
   2000년 2월 15일. 수요일. 오후 3시 3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응진과 김근태는 좀 멀긴 했지만 어제 김창환이  살해됐던 세인트 토마스 병
원으로 오게 되었다. 사건이 있었던 곳이라 다른  병원들보다는 이곳이 더 안전
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김근태는 오른쪽 허리에 10센티미터나 칼이 박혔지만 워낙 덩치가 있어서 그런
지 멀쩡해 보였다. 김응진의 어깨에 박힌  칼은 응급실 간호사가 처리해주었다.
뽑힌 칼을 바라보던 김응진은 칼 손잡이에 한자로 된  문장이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平田組 第六代目 竹之內"

 이 칼은 과거 히라타 구미의 6대목이었던  다케노우치 조장이 습명식을 치르면
서 만든 기념도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칼들 중 한 개는  미키의 손에 들어갔고
미키는 7대목의 습명식을 마치고 나서 이를 김재수에게 주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라 여
긴 김응진은 이를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2월 15일. 수요일. 오후 3시 5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샤프츠베리 애비뉴(Shaftesbury Avenue) 카지노 골든 너겟.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난생 처음 카지노에 들어가 보는 김도현은 휘황찬란한 조명에 잠시 한 눈을 팔
았다가 미행해 왔던 동양인을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그리
넓지 않은 카지노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많은 사람들, 특히  중국사람들이 많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같은 클래스의 친구 니코가 이 카지노의 회원이었
기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던  김도현은 도박에의 유혹을 뿌리치고  계속 수상한
동양인을 찾아다니며 틈틈이 이광혁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이광혁은  받지 않았
다.

 - 와와!

 어느 테이블에서인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기심에 이끌린 김도현이 시끄럽게
소리나는 쪽으로 가보았더니 룰렛 테이블 옆에서 니코가 김도현을 잡아끌었다.

 "해브 어 룩. 그레잇!(좀 봐봐. 대단해!)"

 김도현이 고개를 들이밀자 딜러의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얼굴이 보였다. 빙글빙
글 돌고 있는 휠의 0번 숫자에 흰색 볼이 들어가 있었고, 테이블 위에 0번 숫자
위에는 핑크 색의 칩이 열 개  가까이 올려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0번과 1
번, 0번과 2번, 0번과 3번 등, 0을 중심으로 한  다른 베팅 장소에도 핑크 칩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어림짐작해도  10만 파운드가 넘는 고액의  배당금을 주어야
할 판이었다. 너무나 고액이었기 때문에 딜러와 뱅커는  칩을 계산해 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치프 딜러와 지배인을 호출했다. 룰렛  테이블에 모인 손님들은 도
대체 누가 이런 거액을 베팅해서 맞추었는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찾았다.

 "축하합니다. 미스터 모리시타!"

 혈색이 좋아 보이는 지배인이 와서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모리시타라는 사람
이 일어나 지배인과 악수를 했다.

 '저 자식이다!'

 조금 전까지도 김도현이 미행했던 동양인의 이름은 모리시타였다. 배당금을 수
표로 주겠다며 사무실로 갈 것을 제안하는  지배인에게 모리시타는 우쭐대며 말
했다.

 "5만 파운드는 수표로, 나머지는 빅 그린 칩으로 주시오."


     
 소 제 목 : Text 82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50분.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광혁은 운이 좋았다. 그의  등은 외상(外傷) 하나 없이  멀쩡했다. 김재수가 

날렸던 칼은 비도(飛刀)가 아닌 스테이크용 칼이었다.  칼날보다 손잡이의 무게

가 무거워 칼이 날아가긴 했지만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에 이광혁의 등

에 맞은 부분은 칼의 손잡이였다. 그러나 김재수는  그런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

에 이광혁의 주먹을 맞고 정신을 잃었으며 그의 머리는  부엌 바닥에 세차게 부

딪혔다.    

 

 아무나 잡아 배후 세력을 알아보려던 이광혁은 미키와 다른 세 명이 사라진 것

을 알았다. 위층에서 인기척이 나자 백준영이 2층으로 올라갔고, 이광혁이 김재

수와 싸우는 틈을 타서 미키와 세 명의 야쿠자들은 소리도 없이 도망친 뒤였다.



 김재수가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한 이광

혁은 2층의 백준영을 부르러 갔다가 노무라가 침대  밑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야쿠자가 두려움에 떨며 울지는 않을 것이었다. 노무라가 우는 이

유는 다른 것이었다. 백준영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노무라의 소니 게임기를 

밟아 박살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백준영과  이광혁은 서로 한 번 

쳐다보고는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차에 오르자 이광혁은 자신의 휴대 전화기가 계속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여보세요?"



 "아. 통화되는군요. 저, 김도현입니다."



 "응. 자네 웬일인가?"



 "혹시 찾으시는 사람들 중에 모리시타라는 사람도 있습니까?"



 "모리시타? 자네가 모리시타를 어떻게 알지?"



 "말씀하신 건물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따라왔습니다. 지금 저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지?"



 "소호의 카지노입니다. 지금 도박을 하고 있어서 금방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지

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죠?"



 "곧 그리로 가겠네."



 김응진과 김근태가 치료받고 있는 병원으로 가려던 이광혁은 마음을 바꾸었다. 

모리시타라면 아사히 UK.의 직원으로 김창환에게 폭행을 가했던 인물이 아닌가?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5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샤프츠베리 애비뉴(Shaftesbury Avenue) 카지노 골든 너겟.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블랙잭에 열중하던 모리시타는 누군가가 자꾸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아챘다. 지난 10일 이후 숨어 지내듯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도 눈치가 제법 빨

라졌다고 느끼고 있던 모리시타였다. 20대 중반의 동양인과 나이를 제대로 짐작

할 수 없는 서양인 등 두 명이 계속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모리시타는 

겁이 났다. 지난 토요일 차에 치인 나가시마 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 제 목 : Text 83


 그러나 설사 아무리 간악한  깡패들이라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수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 런던 시내 한복판의  카지노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기

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또 자신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는 동양인은 평범

한 카지노 손님일지도 몰랐다. 만일을 대비해 카지노  밖으로 나가자니 그 역시 

망설여졌다. 오히려 더 위험할 지도 몰랐고 지금 자신은 엄청난 액수의 돈을 따

고 있는 중이라 도박을 그만두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4시. 런던 노스 액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양수를 데리고 노스 액톤으로 돌아온 최명규는 집의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

을 보았다.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부엌 바닥에 김재수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최명규가 불안한 마음으로 김재수의  코에 손을 대 보았다.  그는 죽어 

있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4시. 런던 워털루 스테이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까스로 도망친 미키는 생각하면 할  수록 분통이 터졌다. 그가  사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한 사람에게 이토록 당해본 적이  없었다. 오야붕으로부터 인정받아 

명실공히 한 개 조직의 장이 되었는데도 꼴은 말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조직

원 세 명들도 반병신이 되어 같이 빌빌대는  중이었다. 그는 교토의 요시이에게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다른 방법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4시 2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샤프츠베리 애비뉴(Shaftesbury Avenue) 카지노 골든 너겟.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도현은 니코와 함께 카운터에서 기다리다 이광혁과 백준영을 맞았다. 



 "모리시타는 어디 있지? 혼자인가?"



 "혼자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 말을 듣자 이광혁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서든 밖으로 데리고 나와야할

텐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광혁과 같이 온 명성 직원이 슬쩍 경찰 이야기

를 흘리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김도현이 보이지 않자 블랙잭에  열중하던 모리시타는 자신의 주위로  몇 명이 

더 늘었음을 알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모리시타 씨. 경찰을 부를까요? 아니면 조용히 나가실까요?"



모리시타가 고개를 들어 옆 사람을 쳐다보며 주위를  살폈다. 서너 명의 동양인

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모리시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앞에 여

러 줄로 높다랗게 쌓여 있는 칩들을 정리하며  일부는 주머니에 넣었다. 모리시

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에 남아있던 한 개 100파운드 짜리

의 핑크 칩들을 이광혁과 백준영을 향해 뿌려댔다.



 소 제 목 : Text 84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9시. 런던 얼스 코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굴이 벌개진 최명규가 독한 스카치 위스키에 손을 또 뻗쳤다. 박정상이 말려

보려 했으나 유형남의 눈짓에 그만두었다. 



 '형제의 의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그는 히라타 구미, 특히 김재수의 시체만 남겨두고 도망친 미키 일당에게 심한 

분노를 느꼈다. 이역만리에서 불쌍하게 죽어갔을 동생  김재수를 생각하니 가슴

이 미어지는 듯 했다. 부산에서 김근열을 죽이도록 사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아

픔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나 공중  전화를 찾았다. 1파운드 짜리  동전을 잔뜩 

쌓아놓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님, 접니다."



 "오! 명규냐? 잘 있냐?"



 "형님. 재수가 죽었습니다. 크흑!"



 최명규는 꼬부라진 혀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잠수를  타는 도중에 간단한 일을 

봐주면 자금도 주고 숨어 지낼 곳도 마련해 준다던  미키가 김재수의 시체만 남

겨놓고 도망갔다는 것과 김재수의 시체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였다.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놈들이 이게 뭡니까? 형님."



 이중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기 전에 겨우 몸조심하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한국 시간은 오전 6시. 그는 두어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요시이에게 

항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9시 10분. 런던 외곽. 서리 뉴몰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 한 반장님. '평전조 제육대목 죽지내'라고 쓰여있는 칼인데요. 혹시 뭔가 

아실 만한 것 없습니까?"



 이미 옷을 벗은 지 꽤 되었음에도 이광혁은 그에게 반장님이라고 불렀다. 전화

의 상대는 서울에서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광택으로 과거 신목포파의 대부

분이 그에게 검거된 적이 있는 조직폭력에 관한 베테랑 수사관이었다.



 "평전조...평전...아. 히라타  말이로군. 그거  간사이 지역의  야쿠자 조직인

데....죽지내...죽지내라...다케노우치라면 내가 경찰  생활할 때의  두목일 거

야. 아마 맞을 걸세. 지금도 두목인지는 모르겠네만....."



 "그럼 제가 내일 다시 전화를 드릴 테니 히라타 조직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시

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그리고 유정후 씨 일은 안됐네. 경찰에서도  아직 잘 모르는 모

양이던데...그럼 연락 주게."



 이광혁과 김응진은 비로소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가 히라타라는 이름의 야쿠자 

조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소 제 목 : Text 85


         2000년 2월 16일. 수요일. 오후 9시 20분. 프랑스 파리. 몽빠르나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군."



 갈색 눈과 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털을 가진 사내가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흔

들며 말했다.



 "나도 부끄럽군. 그러나 사실은 사실일세."



 "우리 제4 외인연대의 가장 훌륭한 교관이었던 자네가 누구한테 그렇게 당했는

지 모를 일이군.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나?"



 "자네가 취급하고 있는 것을 좀 구해줬으면 하네.  대금은 우리 조직에서 보내

줄 테니..." 



 "호오! 미키! 설마 그것들을 런던으로 가져갈 생각인가?"



 "자네는 운반까지 해주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대륙도 아니고 바다 건너라...쉽지는 않을텐데..."



 "날 속일 생각은 말게. 작년 10월, 밸파스트에서  사용됐던 FA-MAS하고 MP5 기

관단총도 자네가 거래했던 것이 아닌가?"



 "으음..."



 "같이 피레네 산맥에서 훈련하던 때를 생각해서라도 도와주게."



 "음...그렇게 하지. 어느 정도면 되겠나?"



 미키는 1980년대 후반, 5년간의 프랑스 외인부대 생활을 마치고 프랑스 시민권

을 얻어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무스타파를 찾아와 매달렸다. 미키가 제4 외인

연대에서 교관생활을 하고 있을 때 배속되어온  무스타파는 터키의 군인 출신으

로 유도와 동양 무술에 능해 역시 격투기를 좋아하는 미키와 쉽게 친해졌다. 



 외인부대를 나온 후 미키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무스타파는 파리에 남아 무기

거래에 손을 대고 있었으며 소문으로는 전차와 전투기, 전함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미키는  무스타파에게 약간의 화력 지원을 

요청했으며, 무기 외에도 런던의 한국 조직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베테랑 

킬러들도 몇 명 수배해 주도록 부탁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전 8시(한국시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음대로 하라고 해!"



 이중은은 전화기를 들고 있는  직원에게 소리질렀다. 런던으로  보낸 동생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이중은의 의견에 요시이는 짜증을 내며 같은 조직의 미키

마저도 연락이 안 되므로  부산 형제들은 당분간 숨어있으라고  했다. 김재수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요시이는 못들은 척 했다. 



 경찰의 수사로 궁지에 몰리고 있던 이중은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였다. 야쿠자

의 힘을 빌려 해보려던 사업은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  거의 포기한 상태였고, 

핵심 동생들은 경찰을 피해 외국으로 잠수를 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죽었

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 가지 믿고 있는 것은  히라타 구미의 한국 투자 자금은 

한국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중은의 명의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의 동의 없이는 다시 일본으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중은은 교토로 건너가 형

제의 의를 맺은 7대목과 상의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소 제 목 : Text 86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전 10시. 런던 세인트 토마스 스트리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촤르륵!

 

 동료들 앞에 칩을 늘어놓은 모리시타는 큰 소리를 쳤다.



 "나 이제 카지노에서 손뗐어. 보라구! 이 칩들을! 다 해서 12만 파운드라네."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의 직원들은 모리시타가 무슨 꿍꿍이속으로 이 사무실에 

다시 찾아왔는지 눈들을 껌벅거리며 바라보았다. 직원들에게 돈을 꾸어 갚지 않

았음은 물론이고, 소호의 펍 폭력 사건을 일으켰으며, 회사  차량 다섯 대가 없

어진 것도 모리시타의 소행으로 밝혀진데다가 어제는  사무실 내의 노트북 컴퓨

터들마저 모조리 사라지기까지 했다. 모리시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에게 한 가

지 다행인 것은 펍 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김창환이  화요일에 죽었기 때문에 폭

력사건에 관한 조사는 흐지부지 될 것이었다.       



 성질 급한 동료들 중 한 명이 모리시타의  멱살부터 잡으려 들었지만 모리시타

는 이를 살짝 피하며 도난 사건들과 관련해서 경찰에  수사 의뢰한 것을 풀어주

면 모든 피해 금액을 갚고 영국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돈은 오늘 카지노에서 현

금으로 바꾸어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어제 도망쳐 오느라 현금으로 바꾸어 오지 

못한데다 카지노로부터 받은 5만 파운드 짜리 수표는 현금화하는데 시일이 필요

했다. 



 어제 필사적으로 도망친 모리시타는 딴 칩들을 미리  현금으로 바꾸어 두지 않

은 것을 후회했다. 다시 카지노로 돌아가자니 한국의 마피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아사히 맥주 도쿄 본사로  전화하여 아직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하니 본사에서는 아사히 UK.의 특수영업팀 사무실로 연

락을 주겠다고 했었다.



 자신에게 온 연락이 없었는가 묻는 모리시타에게 누군가가 팩스 용지를 내밀었

다. 본사에서 의뢰한 경호팀이 오후 3시에 피카딜리 서커스의 애덤스 립 레스토

랑에 도착할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원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본사에서 보

낸다는 경호팀의 팀장 이름은 미키라고 쓰여있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전 11시(영국시간). 런던 외곽, 서리 뉴몰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이광혁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광혁군인가?"



 "예. 접니다."



 "유정후 씨 살해 용의자를 찾았네. 지금 수배중이야."



 "네! 정말입니까? 누굽니까?"



 "어제 자네가 일러줬지 않은가? 히라타 조직이라고. 내가 좀 짚이는 게 있어서 

법무부와 경찰 쪽에 정보를 주고받았지. 오늘 아침에 지하철 삼성역 화장실에서 

권총이 발견 됐다네. 자네가 말해준 대로 히라타 조직원들의 지문과 대조했더니 

호시노라는 인물의 지문과 같은  것이 검출됐지. 자네도 알겠지만  여긴 부산의 

총격사건 때문에 야쿠자들의 지문 정보가 다 들어와  있다네. 호시노는 어제 아

침에 입국한 것으로 밝혀졌고..."



 "그렇다면...."



 "맞네. 자네가 런던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엄청난 상대

를 적으로 고른 거야. 호시노야 곧 잡히겠지만 말이네..."



 "알겠습니다. 다른 소식이 있으면 또 알려주세요."  



 "히라타 조직에 관해서는 관련 서류가 제법 있으니 DHL로 보내주겠네."





 소 제 목 : Text 87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1시.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광혁과 김응진, 이승영, 백준영이 문병 차 병원에  도착했을 때 김근태는 코

를 골며 자고 있었다. 김근태는 4주간  입원치료를 해야한다는 진단을 받았어도 

체력이 좋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여기 일이 좀 정리되면 나는 일본으로 가겠다. 형님의 원수와 같은 땅에서 살 

순 없다."



 이광혁의 말에 셋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의리도 의리지만 이 바닥에서는 살

아남으려면 진 빚은 확실하게 갚아주어야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었다. 설령 

상대의 힘이 너무 세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하더라도 최소한  복수의 시도는 

해야했고, 정 안되겠으면 꼬리를 말고 상대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한국 정통의 주먹 계보를 가지고 있는 이광혁으로서도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

었고, 꼬리를 말 생각은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형님! 지두 가겠어라."



 자는 줄 알았던 김근태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2시. 런던 소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



 학교의 스터디 센터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도현은 흰 원피스의 아가씨가 들어오

는 것을 보고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왕메이린이었다. 그녀는 화요일 늦게 돌아

간 이후 어제도, 오늘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원래 김도현은 오늘도 오전 수업이 끝난 후에  토마스 스트리트로 가서 험상궂

은 얼굴의 사람을 찾아야 했으나 어제 모리시타를 놓친  후 이광혁이 오늘은 하

루 쉬라고 했다. 할 일이 없어진 김도현은 모처럼 학교 스터디 센터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공부보다는  혹시 왕메이린이 학교에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었다. 틈나는 대로 입구 쪽을 

흘끔거리던 김도현이 탄성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왕메이린을 보고 김도현은 급히 책과 노트, 사전 등을 정리

했다. 빨리 정리하려다 보니 실수하여 가방 속  내용물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

졌다. 시끄러운 소리에 스터디 센터 내의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김도현

은 씨익 웃으며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고 오히려 왕메이린이  붉어진 얼굴로 

뒤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학교 커피 바에서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

만 아직 서로의 영어가 잘 통하는 편은 아니었다. 김도현은 점심 먹었느냐는 질

문을 겨우 하고는 자신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에서도 한

국 사람들의 가장 흔한 인사 중 하나가 식사했느냐는 것이었다.



 왕메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쥬스라

도 사서 공원이나 가자는 그녀의 말에 김도현은 좋은 생각이라고 웃으며 대답했

다.  



 김도현과 왕메이린이 학교 문을  나섰을 때 멀리서 왕메이린의  이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왕메이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김

도현도 그들의 얼굴을 파악하고는 떫은 감 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전

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떨거지들이  매번 따라붙는지 굿이라도 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오이와 시랭이었다.




 소 제 목 : Text 88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11시(한국시간) 교토(京都) 타워호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본어가 가능한 두 명의 부하를 끌고 교토에 도착한 이중은은 내일 아침 일찍 

히라타 구미의 본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화가 나  있는 이중은은 지금이라도 찾

아가고 싶었지만 밤이 늦었기 때문에 7대목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자제하기

로 했다. 다만 요시이에게는 타워호텔에 와 있다고 전화를 해 두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2시 13분. 런던 워털루 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도버해협의 바다 아래를 통해 파리에서 런던까지 단  세 시간만에 이어주는 유

로 스타 9027편이 도착했다. 미키와 세 명의 야쿠자들이 기차에서 나와 역 광장

의 편의점인 WHSmith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을 때, 짙은  선글라스를 쓴 두 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이들은 빠른 불어로 물었고 미키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지원해 주기로 한 무스타파의  약속은 지켜졌다. 불어를 쓰는  두 명의 

사내는 가방을 들어 보이며  차로 가자고 했다. 무스타파는  파리에서 런던까지 

무기를 운반해야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런던  내에 있는 무기를 미키에

게 전해주고 운송료를 받아낼 것이 분명했다. 미키는  아직도 멍이 들어있는 자

신의 눈두덩을 매만지며 김응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괘씸하고 

건방진 그 한국인 녀석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제 미키가 교토의 히라타 구미 본가에 전화했을 때, 미키는 조직의 미야자키 

고문으로부터 모리시타라는 사람을 만나 도와주도록 지시  받았다. 이들은 약속 

장소인 피카딜리 서커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2시 15분(영국시간) 런던 얼스 코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가자."



 "형님이나 저희들이나 이 동네는 까막눈인데 어디로 가시려구요?"



 "잘 아는 식당이 있어."



 유형남과 박정상, 한양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밤새  과음을 한 네 사

람은 오전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났다. 미키는  연락이 안되었고 어제까지 묵

었던, 김재수가 쓰러진 곳에도  다시 갈 수 없었으므로  이들은 이중은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명규는 호텔에서만 있자니 갑갑하다며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 하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따라나섰다. 최명규 일행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여러 번 헤맨 끝에 피카딜리 라인을 탔다.



 "대체 어딜 가는 거요?"



속이 쓰리다는 유형남은 배를 매만지며 물었다.



 "중국 식당이야.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지."



최명규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곳에 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유형남은  그가 언제 중국식당에 갔었

다는 지 이상했다. 최명규의 말을 들은 한양수는  짬뽕 곱빼기를 떠올리며 입맛

을 다셨다.



 소 제 목 : Text 89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2시 50분 런던 소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스터 스퀘어 공원에서 반은 웃는  얼굴로, 반은 찡그린 얼굴로  시간을 보낸 

김도현은 싸리비가 내려 추위도 느꼈고 슬슬 배도  고파왔다. 시간이 지나면 지

날수록 자오이와 시랭은 자신에게 아주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노골적으로 내 비

치기 시작했다. 왕메이린의 머플러가 벗겨져 다시  묶어줄 때도 그랬다. 그들은 

둘이 함께 불쾌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아마도 이  둘은 서로 왕메이린을 좋아하

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김도현은 속으로 흐뭇했다.  왜냐하면 왕메이린은 자오이

와 시랭에게는 거의 말을 붙이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과 대화할 때는 예의 그 눈

웃음치며 짓는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 것은 오로지 김도현을 대할 때뿐이었는데 도대체 자오이와 

시랭은 무슨 희망으로 왕메이린을 따라다니는지 궁금했다.



 성질대로라면 두 녀석을 쥐어박고 왕메이린과 함께 다른 곳으로 놀러가고 싶었

지만 차마 왕메이린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예쁜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김도현은 어디까지나 친절하고 자상한 한국 청년의 모습을 보여야했다.



 왕메이린마저 추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도현은 따뜻한  곳으로 가자고 권유했

다. 왕메이린은 찬성이었고 찡그린 얼굴의 자오이와 시랭도 좋다고 했다. 네 사

람은 소호 스퀘어를 나와 피카딜리 서커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로 어디에 

갈까 의견을 나누던 중 김도현은 배도 고팠고, 따뜻한 자스민 차를 무료로 마음

껏 마실 수 있는 WONG  KEI 레스토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가는 곳이지만 싸고 양 많은 곳이라 매일 가도 질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김도현에게는 돈이 많지 않았다. 잘못해서 값비싼 음식점에라도 들

어가게 된다면 생활비가 부족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왕메이린에게 쓰는 

것이라면 리츠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쓰는 돈도 아깝지 않을 테지만 자오이와 시

랭은 항상 따라다니면서도 짜게  군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왕메이린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본 김도현은 자오이와 시랭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트로카데로 

건물을 지나 WONG KEI 레스토랑 쪽으로 향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런던 소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줄곧 칩을 만지작거리며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골든  너겟 카지노 입구를 바라

보던 모리시타는 깜짝 놀랐다. 눈을 비비고 창가에  가까이 다가가 다시 쳐다보

았다. 



 '저 자식은?'



 트로카데로 건물 건너편 2층의 애덤스 립  레스토랑에서 미키를 기다리던 모리

시타는 어제 카지노에서 보았던 김도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다른 한국인 

야쿠자들과 자신을 잡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휴~'



 모리시타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만약  미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늘도 혼자 

카지노에 갔었다면 꼼짝없이 잡혔을 것만 같았다. 이때 일본인으로 보이는 듯한 

사내 넷과 국적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사내가  2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을 본 모

리시타는 다급하게 물었다.



 "미키 상?"



 "맞소. 모리시타?"



 "저기 그 놈들이 지나가고 있어요! 저 놈들입니다!"



모리시타가 손을 들어 창  밖을 가리켰다. 복수심에 불타는  미키는 모리시타의 

손을 잡고 올라왔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그 뒤를 따랐

다.



                                                   




 PRINTER/CAPTURE를 종료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소 제 목 : Text 90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스 코트에서 넉넉하게 15분이면 올 수 있는  소호를 최명규와 그의 동생들은

45분이나 헤매다가 오게 되었다. 피카딜리 서커스 역까지는 그런 대로 찾아왔으

나 역에서 한 번 밖에 가  본적이 없는 WONG KEI 레스토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WONG KEI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서자 중국인 종업원이 물어왔다.



 "하우 마니?(몇 명입니까?)"



 김도현이 그랬던 것처럼 최명규도 손가락 네 개를 펴서 보였다.



 "업 스테어 플리즈.(윗층으로 가세요.)"



 네 사람은 비좁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서도 테이블에 앉기 전

에 몇 명인지 밝혀야 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은 메뉴판을 받아들

었으나 도대체 어느 것이 무슨 음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최명규마저도 전에 김

도현이 추천해준 볶음밥을 먹고  싶었으나 메뉴판을 아무리  보아도 까막눈이었

다.



 "이거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자장면이나 짬뽕은 없어요?"



 유형남이 물었지만 최명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다른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있으면 같은  것을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5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도현은 앞장서서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샤프츠베리  애비뉴의 골든 너겟 카

지노를 지나 몇 개의 클럽을 지난 다음 오른 쪽 골목으로 꺽어졌다. 왕메이린은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고 자오이와 시랭은 뒤를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골목

을 돌고 나면 피자 레스토랑이  보이고 그 다음이 바로  WONG KEI 레스토랑이었

다.



 입구에서 종업원이 몇 명이냐 물었지만 김도현은 한  두번 오는 것이 아니라는

듯 건성으로 네 명이라 말한  다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갔

다.  그 모습을 본 왕메이린은 김도현이 꽤 배가 고팠나보다고 생각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7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리시타의 가리킴에 미키와 야쿠자 셋, 그리고 불어를 쓰는  두 명의 외국 사

내들이 빠른 걸음으로 김도현의 뒤를 쫓았다. 미키의  눈에는 김도현 보다 김도

현과 같이 다니는 두 명의 동양인이 수상쩍었다. 한  사람은 비쩍 말랐고, 다른

한 사람은 몸집이 대단했다. 대체  저들도 싸움을 하는지, 한다면  실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상당한 무술 실력을 연마한 사람들만이 보

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몸집만을 보자면 싸움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상대는 여자를 제외한다면 겨우  세 명이었고 미키 일행은  그 두 배인

여섯 명이었다. 모리시타의 말로는 어제 김도현과 같이 있었던 한국의 야쿠자들

은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의 팀장인 나가시마도 차로 치었다고 했다. 벌건 대낮

에 차로 공격하다니 잔혹한 놈들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미키는 이번만은 손에

사정을 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김도현을 따라 WONG  KEI 레스토랑으로 따라 들

어갔다.










 소 제 목 : Text 91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8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문을 하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던 최명규의 눈에 구세주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다름 아닌 김도현이었다. 이곳에  오면서 어쩌면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더 했

다.



 "나 잠깐만.."



 "형님! 주문하다 말고 어디 가세요?"



 "기다려라."



 몇 개의 테이블을 지나 입구에 서있는 김도현에게로 가던 중 그의 뒤에서 다리

하나가 뻗어 나와 김도현을 세게 걷어차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우당탕!



 허리를 걷어 채인 김도현이 앞으로 쓰러지면서 제일  가까이에 있던 테이블 위

를 덮쳤다. 일곱 명의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던 테이블이  넘어지며 식기와 찻

잔,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명규가 놀라 제자리에 멈추었다. 이윽고 김도현을  찬 다리의 주인공이 모습

을 보였다. 미키였다!



 미키는 식당 안으로 들어와 거만한 모습으로,  어리둥절해서 바닥에 엎어진 채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다보고 있는 김도현을 쳐다보며 외쳤다. 일본어로 말했기

에 김도현과 최명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지 못했다.



 화가 치민 김도현이 벌떡 일어나 미키에게 달려들었으나 다시 미키의 발길질이

그를 저지했다. 김도현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재차 바닥에

쓰러졌다. 왕메이린이 급히 다가와 부축해주었지만 자오이와  시랭은 남의 싸움

에는 끼지 않겠다는 듯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 김재수를 두고 도망간 미키를 하루만에 다시 만나게 된 최명규는 뭔가 오

해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어학연수생인 김도현에게 발길질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미키가 재차 김도현

을 때리려고 하자 최명규는 테이블  하나를 훌쩍 뛰어넘어 그의  다리를 손으로

잡았다. 어림 잡아 3미터는 될 듯한 거리를 단숨에 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

성이 터져 나왔다.



 미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기에 최명규는  그의 눈을 노려보며 슬며시

다리를 내려놓았다.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의혹의 눈빛을  교차시켜 나타낸

미키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최명규가 넘어져 있는 김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키의 눈이  커졌다. 미키

뿐 아니라 세 명의 야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도현은 확실히 웃기는 구석이 있는 청년이었다. 군대에 있었을 때도 항상 돌

발적인 행동을 하여 좌중을 썰렁하게, 혹은 폭소탄이 터지게 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최명규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를 한 후,  그가 주고 간 수표

다발에 생각이 미쳤다. 한 손으로는  최명규가 내민 손을 잡아  일어나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어 수표 뭉치를 꺼

낸 김도현은 피식 웃으며 최명규에게 건네주었다. 무심코  수표들을 받아 쥔 최

명규도 황당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미키의 눈은 더욱 커졌다.










 소 제 목 : Text 92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10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갑을 왕메이린에게 살짝 던진 김도현이 비장한 표정과  함께 미키를 향해 뒤

돌려 찼지만 미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손으로  막고 주먹을 들어 김도현

에게 휘둘렀다. 김도현을 보호하려는 최명규가 발을 들어 그의 주먹을 막았지만

상황은 좋지 않게 바뀌었다. 발만으로 미키의 팔목을 살짝 막으려는 의도였으나

실제로는 미키의 팔꿈치가 최명규의 구두코에 심하게 가격 당했다. 탄성인지 비

명인지 모르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난 미키에게서  의혹의 눈빛이

더욱 크게 나타났다. 최명규가 양손을 뻗어 손바닥을 내 보이며 흔들었다. 아니

라는 뜻이었다.



 어느 새인가 유형남을 위시한 세 명의 해운대파 조직원들이 최명규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유형남이 미키에게  인사하며 뼈아픈 한 마디를

던졌다.



 "미키 상. 어디에 갔었지요? 우리 동생 김재수는 어제 죽었습니다."



 미키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머리를 스치며 이해될 듯했다가 다시 의혹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생이라...조직원 하나가 죽었다고 내게 보이는 적대감은  뭐지? 왜 저 녀석

편을 드는 거지?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는 미키는 유형남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의

불어로 무스타파가 지원해준 두 명의 선글라스를 낀 사내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몇 사람은 칼을 잘  사용하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선글라스

사내들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가득 흘렀다. 그 중의 한 명, 프랑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긴 코트를 입은 사내는 "지금이 중세시대냐?"라는 농담으로 말을 받았다.



 미키는 이미 김도현과 알고 있는 사이인 것으로 보이는 최명규를 더 이상 신뢰

할 수 없었다. 돈처럼 생긴 것을 주고받는 것도  자신의 눈앞에서 똑똑히 본 상

태였다.



 최명규가 유형남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말해라. 여기 도현 군은 내가 아

는 사람이야."



 유형남이 말하려고 하는 순간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연거푸 두 대나 맞은 김도현이, "시팔! 이거 좆같은 새끼네? 날 왜 때려?" 라며

다시 덤빌 기색을 보이자  왕메이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미키와 김도현의

사이로 들어와서 연약해 보이는 팔로 김도현의 어깨를 밀며 미키와의 거리를 떼

어놓으려 했다. 뒤늦게 두 명의  WONG KEI 레스토랑 종업원들도  쓰러진 테이블

주위로 다가와 깨진 접시 조각들을 주워담으며 미키에게 빠른 중국어로 뭐라 말

했다. 말투와 눈빛이 절대 고와 보이지 않았다.



 종업원들의 말과 최명규에게 채인 오른쪽 팔꿈치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극

도로 화가 치민 미키가 왼손을 길게 뻗어  왕메이린을 향해 휘둘렀다. 돌발적인

행동이었기에 김도현도, 최명규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퍽!



 소리와 함께 왕메이린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김도현이 그녀를 급히 안았

다. 입과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때였다!



 두 개의 그림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미키에게로  쏘아졌다. 한 개는 공중으로,

다른 한 개는 정면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다시 터진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김도

현이 고개를 들어보니 몸을 날린 두 사람은 자오이와 시랭이었다.










 소 제 목 : Text 93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12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련한 미키는 자오이의 수도(手刀)를  일단 막기는 했으나 육중한  몸을 던져

덤벼든 시랭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미키는 자신의 가슴에 시랭의 어깨가 닿았다

고 느껴진 순간 뒤로 튕겨지며 하늘이 노래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 큭!



 미키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야쿠자 역시 밀려 넘어질 뻔했고 그 뒤의 프랑수

아는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동물적인 싸움 감각으로  몸을 돌린 미키의 등뒤로

다시 자오이의 발이 날아왔다. 야쿠자 한 명이  주먹을 뻗어 공격했으나 자오이

는 그 야쿠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팔을 들어 막은 후, 미키를 노려보며 두 번 연

거푸 수도를 날렸다.



 이번에도 미키가 얼굴을 돌리며 피하기는 했으나 자오이의  손 날에 왼쪽 눈가

가 길게 찢어졌다. 삽시간에 미키의  왼쪽 얼굴은 흐르는 피로  범벅이 되었다.

조장의 피 흘리는 모습을 본 다른 두 명의 야쿠자들이 모두 나서서 자오이를 막

으려 했다가 두 명 동시에 시랭에게 덜미를 잡혀서 버둥거렸다.



 2대 4로 싸우는데도 자오이와 시랭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키 일행

을 데리고 노는 꼴이었다.



 난투가 일어나자 지배인과 종업원들이  몰려왔다. 김도현을 따라  무작정 WONG

KEI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미키는 한가지 커다랗고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다. 이곳은 런던 안에서도 영국의 공권력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차이나타운

이었다. 잠시 쑥덕거리던 몇 명의 종업원들은 자오이와  시랭을 도와 미키 일당

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엉뚱하게 돌아가자 최명규는  유형남을 돌아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오이와 시랭이 누구이며 그들이 왜 미키에게  덤벼드는지 알 수 없었

지만 김도현과 같이 있던 것으로 보아서 아마 김도현을  돕고 있는 것이라고 생

각했다.



 김재수의 일로 미키에게 크게 섭섭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최명규는 미키와 한

배를 탄 처지였다. 당분간 한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고 이곳의 일을 끝내면 일

본측의 도움을 받아야되는 최명규와 그의 동생들은 싫던 좋던 간에 히라타 구미

의 눈밖에 날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의 싸움은 김도현을 둘

러싸고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최명규의 눈짓에 한양수와 박정상

이 싸움을 말리러 난투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싸움을 말린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는 자오이와 시랭만 떼어놓으면 되었다. 둘은 일방적으로 미키 일행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양수와 박정상은 그 둘에게 다가가 팔을 잡으려고 했다



 팔과 다리를 휘젓고 있는 상대에게 다가가 그 공격을 멈추게 한다는 발상은 참

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 미키와 세  명의 야쿠자들은 정신을

추스릴 수 있었다. 한양수가 자신에게 덤벼들 의사가  없다는 것을 느낀 자오이

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왕메이린을

상당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왕메이린은 김도현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

했다. 김도현은 물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피 묻은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다시

홀 안에서 손님들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박정상이 꺼낸 칼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박정상이 자신 보다 몸집이 큰 시랭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유도와 씨름으로 단련되었으며 체격으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박정상이었기에 시랭에게 다가가  그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었지만 시랭의

힘은 그 보다 세었다. 또한 시랭은 자오이처럼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자신의

공격을 가로막는 박정상도 미키와 같은 일행으로 보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싸울

의사는 없던 박정상이 시랭의 주먹을 맞자 반사적으로 칼을 꺼낸 것이었다.










 소 제 목 : Text 94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15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칼은 집어넣어라!"



 최명규가 급하게 소리치자 박정상이 쭈삣거리며 칼을 발목에 있는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미키가 유형남에게 물었다.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거지?"



유형남은 미키가 아주 뻔뻔하다고 느꼈다. 맞고 있던  그들을 말려준 것은 한양

수와 박정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유형남의 뇌리 속에  죽은 김재수의 모습이 떠

올랐다. 대꾸를 하려는데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과 허리를 굽혀 칼을 집어넣고  있던 박정상의 고개가 길이  300mm가 넘는

시랭의 발에 맞고 뒤로 젖혀졌다.  시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발을

박정상의 목에 둔 채 천천히 밀었다. 워낙 발이 컸기 때문에, 둔한 몸집의 박정

상은 피하기도 전에 자빠졌고 시랭의 발목은 박정상의  목 위에 놓여졌다. 여차

하면 박정상의 목은 으스러질 판이었다. 동생의 위험을  느낀 최명규가 놀라 달

려들었다가 그 위급한 상황을  보고 멈추었다. 시랭은 으르렁거리며  발에 힘을

주려는 시늉을 하며 최명규에게 손을 뻗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을 알린

뒤 주위를 둘러보며 빠른 중국어로 물었다.  북경 표준어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는 다시 능숙한 영어로 물었다. 역시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시랭은 계속

해서 빠른 영어로 물어댔다.



 시랭의 영어를 듣고 김도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랭과는 같은 중급 클래

스에서 공부하는 처지였는데 지금 들어보니 그의 영어는 절대 중급 수준이 아니

었다. 그러나 왕메이린이 정신을 차리며 김도현의 이름을 불렀기에 시랭에 대한

생각은 곧 사라졌다. 자오이가 전화를 하며 왕메이린의 옆으로 다가와 중국어로

몇 마디 물었다. 왕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김도현은 아마도 괜찮

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큰 소리로 계속된 시랭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미키였다.



 "우리는 사해방(四海幇)이 아니다. 나는 일본 히라타 구미의 조장 미키다!"



 불어 악센트가 섞인 영어였다. 미키는 스스로  조장이라고 말한 뒤 자랑스러워

했다. 물론 조장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히라타 구미 하부 조직의 조장이

었으나 미키는 누가 알랴 싶어 크게 외쳤다.



 시랭은 미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에 힘을 주었다. 박정상

의 목에서 컥컥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키의  말을 들은 자오이도 전화기

에 대고 무어라 빠르게 말했다. 박정상이 계속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최명

규가 박정상의 눈을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박정상의 발목에 있는 칼집의 똑딱단추는 미처 채워두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

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끅끅대며 슬며시  무릎을 접었

다. 칼은 5cm 정도 밖으로 삐져 나와 있어서  손에 쥐기 편했다. 박정상은 마지

막 힘을 다해 칼을 뽑았고, 그 칼은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는 시랭의 장딴지를

베고 허벅지에 가서 깊이 박혔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눌리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이 따끔하다 느껴지면 힘을 더 주기보다는 들어올리게  된다. 시랭 역시 발을

들었고 박정상은 목을 죄고 있던 힘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시랭이 발을 드

는 것과 동시에 최명규가 공중으로 떴다.



 최명규의 오른발은 시랭의 몸집을 지탱하고 있던 왼발에 가서 꽂혔다.



- 뚝!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평형 감각을 잃은 시랭이 박정상의 몸 위로 넘어졌다.










 소 제 목 : Text 95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17분. 런던 뱅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르겠습니다. 지금 시랭이 묻고 있습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자오이의 목소리를 듣고 긴  턱수염과 땋은 머리를 가

진 50대의 남자가 그대로 전했다. 그는 검정 색의  단추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

는데 옷의 등 부분에는 용의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 시랭이 묻고 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옆 좌석의 머리가 벗겨진, 체격이 좋은 사내가 말했다.



 "자오이가 전화할 수 있을 정도면 우리 애는 안전하겠군. 빨리 밖으로 내 보내

라구!"



 옆 좌석의 사내는 직접 수화기를 잡고 있지 않아  그다지 걱정되지 않는 것 같

은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으나 말투는 제법 떨리고  있었다. 50대의 남자는 옆

을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카폰에 대고 말했다.



 "아가씨를 빨리 밖으로 모셔라. 할 수 있겠지?"



 [예. 싸움은 거의 끝났습니다.]



 [아! 사해방의 인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히라타 조직이라고 합니다.]



 "누가 말하던가?"



 50대의 남자가 수화기를 아랫부분을 손으로 막고  옆 좌석의 사내에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수화기를 막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것은 오래된 그의 습관이

었다. 이번에도 들은 내용 그대로 옆자리의 사내에게 전했다.



 "사해방은 아니라고 합니다. 히라타 조직이랍니다."



 "도대체 히라타가 뭐야? 일본 놈들인가?"



체격 좋은 사내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가 타고 있는 흰색 리무진 승용차는

뱅크를 지나 뉴 옥스포드 스트리트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져서 차가 밀리고 있었지만 퇴근시간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런던에서도 가장 정

체가 심한 곳 중 하나였다. 보통 때라면 10분 이내에 차이나타운까지 도달할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밀린다면 30분이 걸릴지도 몰랐다. 답답했는지 그는 대답

을 듣기도 전에 수화기를 빼앗았다.



 "일본 놈들이 왜 거기서 설치는 거야?"



 [네? 어? 시랭이!]



 자오이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자 체격 좋은  사내는 몇 번 자오이의 이름

을 부르더니 다시 걸어 보라며 옆 좌석의 50대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전

화는 신호음만 들릴 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초조해 했다



 "어떻게 된 건가?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지?"



 체격 좋은 사내의 호통이 터지자 50대의 남자는 고개를 또 조아리고는 다른 번

호를 눌러댔다.



 "지금 어디냐?"



 [식당 앞입니다. 지금 들어갑니다.]



 "아가씨부터 빨리 모셔라!"



 [예! 알겠습니다.]








 소 제 목 : Text 96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20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명규는 처음 보는 시랭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김도현의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지 싸움을 말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동생을 잃고

난 후, 박정상 마저 위기에 빠지자 최명규의 발에는  힘이 들어갔다. 슬쩍 발목

을 쳐서 시랭을 쓰러뜨리겠다는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시랭의 발목은 누가 보아

도 처참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각도로 꺽였다.



 "크아아아아!"



 동물의 울음소리와 같은 비명이 WONG KEI 레스토랑 전  층에 가득 퍼졌다. 2층

에서 일어난 싸움을 모르고 있던 지하와 1층, 3층의  손님들도 2층에서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의 큰 비명 소리였다.



 한편, 차이나타운 각지에서 셀 수없이 많은 중국계  청년들이 WUNG KEI 레스토

랑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손에 각목과 칼을  들고 레스토랑의 현관을 지나

종업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2층으로 이르는 층계

로 제일 앞서 가던 청년 셋이 시랭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시랭의 목소리 아냐?"



 "조심해서 올라가!"



 시랭이 박정상의 몸 위에 쓰러지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간에, 전화를 하고 있던

자오이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왕메이린이 앉아있던 의자  앞의 테이블을 딛고 최

명규에게로 날아갔다. 그는 발을 뻗어 최명규의 얼굴을 노렸다.



 등뒤에서 자오이가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명규는 결코 당황

하지 않았다. 그의 다리는 시랭의 발목을 가격했는지라  이미 뻗을 만큼 뻗어져

있는 상태였다. 다리를 접지 않고 그대로 들어올려  자오이가 공격해 오는 방향

에다 두었다. 그 덕택에 팔다리가 짧은 자오이는  고슴도치에 돌진하는 쥐 꼴이

되었다. 급히 공중에서 최명규의 다리를 잡고 위치를  틀어 착지했는데 마침 그

곳은 미키가 서 있던 자리였다.



 자오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고권 - 손목을 이용해  가격하는 것 - 으로 미키

의 코를 올려친 후 재차 최명규에게 달려들었다.  현란하게 보이는 발기술로 최

명규를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최명규는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싸우려는 모습

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김도현이 자오이에게 멈추라고  몇 마디 외쳤으나 자오

이는 이를 무시했다. 시랭은 계속 괴로워했으나 아무도 그쪽으로 다가가지 않았

다. 2층에 있는 사람들은 시랭의 비명 소리보다는 최명규와 자오이의 혈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최명규는 시랭의 발목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자오

이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피하는  것만으로는 싸움은 멈춰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돌려 멀찍이 도망을  가든지 아니면 자오이에게 쓴맛

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 쓴맛을 보여주려는 사람은 최명규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김도

현으로, 그는 이유도 모르고 미키에게 맞은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자오이에게

계속 멈추라고 외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의 생각에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모두 미키 탓이었다. 미키는 지금 코를 움켜쥐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미

키의 다른 일행들은 최명규와 자오이와의 싸움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김도현은 왕메이린을 부축하며 작은 엘리베이터로 음식을  나르는 카운터 쪽으

로 움직였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그는 왕메이린을 앉히고는 엉뚱

하게도 카운터에 늘어져 있는 찻주전자 두 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주전자 안에

는 뜨거운 자스민 차가 가득했다.








 소 제 목 : Text 97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22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홍콩에서 건너 온 스물 네 살의 리지펭(李稚鳳)은 왕메이린을 흠모해 왔다. 엄

밀히 말하자면 조직의 누구나  보스의 딸을 좋아했다. 그녀는  예쁘고 상냥했으

며, 다른 고위 간부의 자녀들처럼 도도하거나 건방지지도 않았다.



 리지펭은 왕메이린과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의 사부는 자오이와 시랭이 왕메이

린의 경호를 맡도록 시켰다. 자신의 무술실력이 그들보다  특별히 약한 것도 아

니었는데 보디가드에서 탈락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체구가  듬직하고 자오이와

시랭보다 잘 생긴 용모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이 원하던 좋은 기회였다. 사부는 아가씨부터 잘 모시라고

했고, 시랭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니 이번 기회에  왕메이린을 무사히 구해내면

보디가드는 바뀌게 될 것이었다. 잘 하는 영어도  못하는 것처럼 보여가며 그녀

와 같이 학교 다닐 생각을 하니 절로 힘이 솟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검정 색 가방을 든 두 사람이  문을 막고 식당 안을 들여다보

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큰 소리를 지르며 모두 함께 들어갈까? 아니면

자신만 슬쩍 들어가서 아가씨를 구해올까?



 멋있어 보이기는 후자였다. 리지펭은 북적북적 소리를  내고 있는 다른 중국인

청년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시키고는 입구의 두 사람을 밀치고 고개를 내밀었다.



 무언가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리지펭은  몸을 옆으로 빼려고 했으나

두 사람 사이에 끼여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앞으로 나서던지 뒤로 빠져야할 판이

었다. 하는 수없이 그 자리에서 날아오는 물건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뜨거

운 것이 온 몸을 덮쳐왔다.  리지펭은 한순간 폭탄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 소호는 특히 폭탄테러가 많은 곳이었다.



 뜨거운 찻물은 리지펭과 그 옆의 프랑수아와  알렝에게도 쏟아졌고, 싸움을 구

경하던 손님들과 미키 조직원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뜨거움을 선사했다. 김도

현은 던진 차주전자가 미키에게 제대로 맞지 않을 것을 알자 계속 던져댔다. 사

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리지펭의 시선이 훤하게 뚫렸다. 주전자를 던지고 있는 괴청년의 옆

에 왕메이린이 이마에 한 손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그렇다. 저 녀석이 우리 아

가씨를 잡고 있구나! 다가오지 못하도록 주전자를  던지고 있구나. 리지펭의 생

각이었다.



 순간 리지펭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양팔로  얼굴을 가린 뒤였지만 날아

오는 주전자의 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새롭게 날아오는  주전자를 정통으로

맞고 리지펭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우습게도 주전자의

뜨거운 찻물은 그 용기를 차갑게 식혀버렸다.



 리지펭의 비명 소리까지 들려오자 계단에 몰려있던 중국인 청년들은 서로들 얼

굴을 쳐다보더니 역시 큰 소리를 외치며 뛰어들어왔다. 자이오와 싸우면서도 누

군가 김도현에게 덤비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최명규는 유형남에게 눈짓을

했다. 김도현을 보호하라는 신호였다.



 미키는 더 이상은 화가 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아직 아물지 않은 자신의

얼굴에 자오이의 수도(手刀)와 주먹이 더해져서 피투성이가 된데다가 뜨거운 물

세례까지 받았다. 코는 자리에 제대로 붙어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아팠다. 건방

진 한국의 야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가 또 매만  맞은 것이었

다. 무스타파가 붙여준 두 명의 사내들을  보기에도 창피했다. 그들도 외인부대

출신이라고 했다. 하물며 자신은 외인부대의 교관출신이  아니던가? 제4 외인연

대의 명예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진흙밭을  헤치며" 라는 외인부대의 구

호가 떠올랐다.



 '그래 이런 진흙들을 깨끗이 쓸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진흙 안에 최명규를 넣어야할지는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소 제 목 : Text 98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25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같은 시간에 프랑수아와 알렝도 미키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무스타파는, 미

키를 돕는 것은 좋으나 가급적 사건을 일으키지 말라고 못을 박아두었지만 뜨거

운 물을 뒤집어쓰자 생각이 바뀌었다.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도 않았다. 더 시

끄러워지기 전에, 경찰이 오기 전에 일을 마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은 총기 사용에 대해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시끄러운 곳이었

다. 특히 지난 '96년 토마스 해밀턴이라는 남자가  유치원에 난입, 어린이와 교

사 16명을 쏘아 죽인 이후로 더욱 총기의 소지가 엄격하게 다루어졌다.



 수많은 중국 청년들과 미키 조직원들, 최명규와  그의 동생들이 싸움에 가담했

다. 서로 누가 적인지도, 왜 싸우는 지도 몰랐다. 리지펭은 김도현을 치라고 떠

들어댔고 최명규는 자오이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도 청년들이 몰려갔

다. 나머지 손님들은 앞을 다투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던 가운데 프랑수아가 가방을 열어 소총 한 정을 꺼내 들

려고 하자 미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꿔챘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것이라 반가우

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다. 미키는 '79년부터 프

랑스군의 사용해온 FA-MAS를  가장 좋아했다. 외인부대원들은  좋아하는 무기가

있다면 아무 것이나 사용할 수 있다지만 미키는 입대했을 때부터 FA-MAS만을 써

왔다. 3.6kg의 육중한 무게가 손으로 느껴졌다.



 "탄창은?"



 "물론 채워두었지. 여분의 탄창도 이쪽에 들어 있소!"



 알렝이 손가락으로 가방 안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키는 등을 돌려 소총에  탄창을 결합했다. 25발이 들어가는

탄창이었지만 탄알을 얼마나 채워 넣었는지는 몰랐다.  과거 외인부대원 시절에

는 소총을 들어보기만 하면 탄알이 몇 발이나 들어있는지 척척 맞추었던 미키였

다.



 탄창을 끼우는 짧은 순간에 미키는 어떻게 할까 고심했다. 제일 죽이고 싶도록

미운 녀석은 어제 일대 일로 싸운 한국인이었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엔 없었다.

그 다음은 자신의 뺨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도록 만든 자오이와 김도현이었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야쿠자는 무고한 사람에게

는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주의해 왔고 미키도  그러고 싶어했다. 이렇게 이전투

구가 벌어지는 곳에서 총을 쏜다면 틀림없이 엉뚱한 사상자가 생길 것이었다.



 미키는 노리쇠를 후퇴전진 시킨 후, 몸을 돌려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 탕!



 귀청이 떨어지도록 큰 화약 터지는 소리에 비디오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이 눌

려진 듯 난투극이 멈추었다. 그 큰 소리가 총소리라는 것을 파악하기 시작한 사

람들부터 바닥에 낮게 몸을 움츠렸다. 모두들 몸을 낮추었지만 해운대파의 조직

원들은 미키가 낸 소리임을 알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몸을 낮추지 않은 사람

은 한 명 있었다. 김도현은 총소리가 들리자 바로 왕메이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던 왕메이린을 안아 내렸고 미키를 향해 등을 돌렸다.



 애초에 자오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려던 미키는  사선(射線)에 자오이와 최명규

가 겹쳐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김도현이 대담하게도 총을 든 자신

앞에서 꼼지락거리자 총구는 그쪽으로 향했다.



 총소리가 나기 이전부터 최명규는 암암리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오이와 싸

우면서도 미키의 행동을 예의 주시해  온 그는 총소리 때문에  자오이의 공격이

없어지자 가죽 재킷 안에 손을  넣어 손가락 사이에 세  개의 칼을 끼워두었다.

양손 도합 여섯 개의 칼 날리는 기술은 최명규의  전매특허였고 이는 한국의 폭

력계에서는 전설과도 같은 신기로 알려져 있었다.










 소 제 목 : Text 99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27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키의 총구가 김도현에게 향하자 서너 명의 중국 청년들이 미키에게 달려들었

다. 김도현과 왕메이린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와 알렝이 2층 입구

근처의 중국 청년들을 밀치고 퇴로를 확보한 순간 사방에서 빛이 난무하고 총성

이 연발로 울렸다.



 - 탕탕탕탕탕!



 미처 미키 앞을 완전히 막아서지 못한 두 명의  중국 청년들 어깨에서 피가 터

지고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총탄을 맞은 천장에서는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도현을 향해 한 발만 쏘려던 것이었는데 소총의 탄알이

연발로 발사되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미키는 한 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짧은 칼 하나가  박혀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

다.



 "안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똑똑한 우리말이었다.  김도현이 쓰러져 가는

왕메이린을 붙들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자신은 미키를 향해 등을

돌렸는데 어째서 왕메이린의 흰 원피스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인지... 곧 그녀

의 몸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탄공(彈孔)은 어딘지 몰랐으나 김

도현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내며 넘쳐 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차! 한 발 늦었구나!'



 좁은 공간에서 울린 커다란  총소리에 짧은 시간이나마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 상황을 파악한 최명규의 후회였다.



 최명규의 칼 세 자루는 총구에서 불을 뿜는 순간에  그의 손을 떠났다. 싸움에

물러서는 법이 없는 최명규였어도 이런 협소하고 적이 많은 공간에서 총을 사용

하는 것은 그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히라타 구미를 통해  생긴 총 때문에

해운대파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는 총에  심한 반감을

느껴왔다. 총이 있으면 그 외의 실력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대 일의 싸움

이라면 절대로 지지 않고, 칼 한 자루만 있으면  혼자로도 나와바리 한 개를 접

수할 수 있는 최명규로서는 총기 사용이 달가울 리 없었다.



 세 자루의 칼 중 하나는  미키의 어깨에, 다른 하나는 미키  옆의 벽면에 가서

박혔고, 마지막 한 자루는  미키가 들고있던 소총을 쳐서  튕기고는 프랑수아의

눈썹과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번째로 정신이 돌아온 자오이가 알 수 없는  큰 소리를 외치며 미키에게 달

려들려다 멈칫 하고는 왕메이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른 중국 청년들은 동료

두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왕메이린이 다쳤다는  사실을 깨우치자 눈에 핏발

을 세우며 미키를 노려보았다.



 중국 청년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미키는 자신의 어

깨에 박혀있는 칼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해하고 있

을 때가 아니었다. 각목과 쇠몽둥이를 든 청년들이 한 걸음씩 더 다가오고 있었

다. 곧 각목을 휘두르면 미키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미키는 침착하

게 다시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성을 울리지 않았다. 0.07초마다

한 발씩 발사할 수 있는 FA-MAS는 순식간에 탄창의 탄알을 모두 소비하고 난 후

였다. 당황한 미키가 뒤를 돌아다 본 순간 귀가 멍멍하게 연발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어느 새 프랑수아가 같은 소총을 꺼내어  쏘고 있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2층 전체에 또 빛이 난무했다.










 소 제 목 : Text 100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28분. 런던 토튼햄 코트 로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히라타라는 이름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예. 저도 금시초문입니다."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검정색의  바탕의 용 그림 옷을  입은 사내가 다시

카폰을 들었다. 자오이와는 연락이 두절 상태였으며,  무슨 일인지 리지펭도 받

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사내는 급히 수화기

를 귀에 가져다 댔다.



 "누구냐?"



 "와...왕대인 님께 빨리 알려주세요! 여기 왕케이 레스토랑에서 총소리가 들립

니다!!"



 "총소리요?"



 "예! 빨리 조치를 취해주세요!!"



 "아...알겠소."



 옆 좌석의 머리 벗겨진 사내가  등을 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았다.

'총소리'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저...그곳에서 총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음..."



 차는 시내 중심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센트럴  포인트의 30미터 전방에서 멈

추어 있었다. 아직 네 시도 안되었지만 날은 조금씩  어두워져 갔고 한 두 방울

씩 빗줄기도 보였다. 차링 크로스를 지나 샤프츠베리 애비뉴에만 들어서면 바로

차이나타운인데도 길이 막혀있자 두 사람은 안절부절하며 애꿎은 카폰만 노려보

았다. 잠시 생각하던 옆 좌석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리우쉥(劉 )도 그쪽으로 가고 있지?"



 "예!"



 사내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경찰이 못 들어오도록 막아라."



 "예? 하지만 왕케이에서는 지원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인원으로 당한다면 리우쉥이 가도 당하는 건 마찬가지야."



 "예. 알겠습니다."



 또 머리를 숙이며 사내가 카폰을 들어 단축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전화

기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컸지만  흔들리는 것이 뛰면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나다."



 [예! 사부님!]



 "왕케이로 가지 말고 일대를 봉쇄해라. 경찰 개입을 막아야한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사내는 옆 좌석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 이상의 대화는 오고가지 않는 가운데 차는 센트럴 포인트를 돌아 차링 크로

스로 진입했다.










 소 제 목 : Text 101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0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이게 아닌데...?'



 최고의 용병집단인 프랑스 외인부대 중에서도 가장  엘리트 부대로 통하는 제2

공수연대 출신의 프랑수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던 공포에 휩싸였

다.



 가방 안쪽에 있던 새 탄창을 꺼내 FA-MAS 소총에 장착하려 했으나 잘 끼워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첫 번째로  던진 최명규의 칼 세 자

루 중 한 자루가 프랑수아의  눈썹과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7cm 가량의 긴

상처를 만들었다. 중국 청년들이 다가오자 그는 소총을  꺼내 갈겼고 그 흔들림

에 상처에서 피가 흘러 눈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 어깨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각목에 맞은 것 같았

다. 이번엔 누군가가 총부리를 잡아끌었다. 다시  연발의 총소리가 들리면서 주

위의 중국 청년들이 발바닥 아래 쓰러지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보았다. 알렝이나

미키가 방아쇠를 당겼으리라. 이때  몇 미터 앞에서인가 총구에서  나는 빛과는

종류가 다른 번쩍임이 있었다. 동시에 자신과 미키 조직원들 중 한 명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졌다. 프랑수아는  오른쪽 팔에 단도가 꽂혀있다는  것을 알고는

왼손으로 이를 뽑아냈다.



 그는 더 이상 소총에 탄창을 끼울 수 없게 되자 둘  다 던져 버리고 양복 안의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해 주저 없이 총알을

선사했다.



 미키와 프랑수아의 뒤쪽에 있었던 알렝은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채 총질을

즐겼다. 가끔씩 그는 무스타파의 명령으로 총을 사용하는 기회를 가지기는 했으

나 이렇게 유쾌하게 적을 학살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일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

가면 무스타파에게 위험했던 일이라며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할 작정이었다. 무스

타파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그는 벌써 여러 개의 탄창을 갈아 끼웠다.



 눈앞에 달려드는 동양인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프랑수아는  이제 이곳을 벗어

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원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

하여 런던에서 무스타파의 연락 업무를 맡고  있는 동료들에게 차량지원을 요구

해두었다.



 "밖으로 나가자!"



 미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불어와 일어로 한 번씩 외치자 프랑수아와 알렝, 미

키 조직원들이 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야쿠자들 중 한 명은 배를 부여잡고 식당

바닥에 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 식당 안에서 다시 몇 명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자 프랑수아가 권총을 쏘고 미키가 소총으로  후려쳤다. 상대는 쓰러졌지

만 미키는 어깨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아직 어깨에 박혀있는 칼을 뽑지 않았

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싸우는 와중에 뽑을 만한 시간도 없었다.



 계단에서도 왕케이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이 부엌칼을 들고  달려오자 알렝이 소

총을 휘두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FA-MAS 소총의 특징 중 하나는 좁은 곳에서 휘

두르기 좋다는 것이었다. 알렝 일행이 총구를 앞세우고 1층으로 내려오자 더 이

상 덤벼드는 무리들도 없었고 1층은 텅 비어있었다.



 프랑수아의 동료들은 두 곳에 차를  대기해 두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 곳은

왕케이 레스토랑 왼편의 샤프츠베리 애비뉴에 있는  앵거스 스테이크 하우스 앞

이었고 다른 한 곳은 왕케이 레스토랑 오른편의 플래닛 헐리우드 앞이었다.



 레스토랑의 정문 앞을 나서자 수십 명의 관광객들이 웅성대고 있었지만 적대감

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알렝은 안심하며 프랑수아에게 어느 쪽으로 도망

칠 것인지 물었다. 프랑수아의 경험으로는 관광객들이 많은 쪽이 도망치기에 편

했다. 그는 턱으로 플래닛 헐리우드 쪽을 가리킨 후 뛰기 시작했다.










 소 제 목 : Text 102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2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양수야!"



최명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양수를 흔들며 불렀지만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심장만 약하게 뛰고 있었다. 의사를 부르기 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최명

규는 무수히 쓰러져 있는 동양인들 사이에서 동생들을 찾았다. 한 쪽 벽에 기대

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유형남이 눈에 들어왔다.



 "형남아 괜찮냐?"



 "혀...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총에 맞았나봐요. 옆구리가 뜨겁네요."



 카운터 안쪽으로 피신했던 김도현은  의외로 멀쩡했다. 그는  왕메이린이 총에

맞은 후 급히 그녀와 함께 기어 카운터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미키 일행의 총

질이 끝나고 이들이 도망간 것을 확인한  김도현은 왕메이린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오고자 했다. 카운터를 돌자 바닥에  버려져 있는 FA-MAS 소총  한 정이 발에

걸렸다.



 미키 일행의 일방적인 총격이 계속되는 동안 빨리 왕메이린을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도현이지만 총소리가 멈추고, 또  총을 보게되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히 타올랐다. 소총 주위를 둘러보니  옆에 탄창도 하나 떨어져

있었는데 묵직한 것이 탄알이 꽤 들어있는 것 같았다.  미키 일행이 좀 전에 왕

케이 레스토랑을 뛰어나갔으니 얼마  가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김도현은

왕메이린을 바닥에 뉘어놓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레스토랑의 커다란 유리를 깨

버렸다.



 - 와장창!



  레스토랑 한 쪽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던 유리가  깨지자 김도현은 소총과 탄

창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 섰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미키를  비롯한 네 명이 왕

케이 레스토랑의 오른편, 즉 스위스 센터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FA-MAS를 다

루어본 적은 없어도 2년간 저격수로 활동했던 김도현에게  큰 문제는 되지 않았

다. 그가 복무했던 한국군 11공수사단의 708특수임무대대는 저격병 양성을 전문

으로 하는 특수 부대였다. 김도현은 소총의 연발 스위치를 단발에 맞춰 놓고 총

을 들어 겨누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2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리우쉥(劉 )은 사부의 명령대로 차이나타운 특히,  왕케이 레스토랑으로 향하

는 모든 길을 막았다. 관광객들의 항의가 이어졌지만  거대한 몸집의 그를 보고

억지로 들어오고자 하는 관광객들은 한 명도 없었다. 잠시 후에는 말을 탄 경찰

두 명이 왕케이 레스토랑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가려 했으나 리우쉥이 막았다.

평소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으나 오늘만은 사정이 달랐다. 리우쉥이 이끄는 스

무 명 남짓한 중국 청년들이 곳곳마다 길을 막고 서있었다.



 모든 통행자들을 차단하고 있는 중에 플래닛 헐리우드  앞에서부터 검은 색 코

팅을 한 포드 승용차가 천천히  KFC 앞으로 미끌어져 들어왔다.  포드 승용차는

대담하게도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중국 청년들을 밀쳐내고 KFC 앞을 지나 "플

레이 투 윈" 오락실 앞에까지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리우쉥이 다가가 차를

빼달라고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고압적인 그의 자세는 당장이라도 차를 빼지

않으면 후려칠 것 같은 기세였다.



 이때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 명의  동양인과 두 명의 서양인

들이 차를 향해 뛰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길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리

우쉥으로서는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모두 막아야 했다.



 미키 일행이 차에 가까이 다가오자 리우쉥이 양팔을 들어 막았다. 상대가 소총

을 들고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적은 겨우 네 명이었고 리우쉥과 중국 청년들

은 수가 훨씬 많았다. 또 그들이 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리우쉥이 나갈 수 없다고  외치자 프랑수아는 왼팔을 들어올려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 제 목 : Text 103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4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리우쉥이 겁먹은   표정을 짓는  순간  프랑수아의 두개골이   박살났다. 구경

5.56mm의 FA-MAS 소총탄은 100M 미터 거리에 있는 프랑수아의 머리를 통채로 날

려버렸다. 검붉은 피와 흰 뇌수가 리우쉥의  얼굴 전체를 물들였다. 프랑수아의

손가락은 미처 쏘려던 권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못한 채였다.



 미키 일행이 프랑수아의 쓰러지는 몸뚱이를 보고 있다가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

으나 그들 외에는 아무도 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차안에서는 빨리 타라는 외침

이 들려왔다. 리우쉥이 막을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허둥지둥 미키의 팔을 잡아

끌자 이번엔 한 동양인이 소총을 얼굴에 들이댔다. 미키 조직의 야쿠자였다. 리

우쉥이 미키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또 그 야쿠자의

머리통이 터져 나가며 약간 늦게 총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피와 뇌수는 어김

없이 리우쉥의 얼굴에 달라붙어 흡사 딸기잼이 얹혀있는 흰 크림 케이크를 얼굴

에 맞은 듯 했다.



 미키와 알렝, 이제 한 명  남은 야쿠자 등 세 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앞을 다투어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총소리가 조금 늦게 나는 것으로 보아 어디

선가 멀리서 저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는 곧 시끄러운 소리를 내

며 피카딜리 서커스 쪽으로 긴 스키드 마크를 남기고 사라졌다.



 리우쉥이 두 번째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그는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픔이 너무  커서인지 총성은 듣지도 못했다.  차를 타고

도망가던 알렝이 쏘아 맞춘 것이었다. 뒤를 돌아다본 미키는 리우쉥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엘리트 제2 공수연대 출신은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빠르

게 움직이는 차안에서 적을 쏘아 맞추기란 날고 있는 참새를 맞추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4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도현이 총구를 들었다. 도망치는 차를 향해 연발로 더 쏠까도 생각했지만 잘

못하면 관광객들에게 맞을 위험이 있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총에 묻었을지

도 모르는 지문을 지우고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왕메이린에게 다가갔다.

다치기는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두어 명의  중국 청년들이 왕메이린을 부

축하여 나가려 하고 있었다. 김도현은 앞을 막아섰다가 등을 돌리고는 그들에게

왕메이린을 업혀달라는 손짓을 했다.



 김도현이 왕메이린을 업고 계단으로 가려고 할 때 1층에서 무장한 중국 청년들

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사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최명규와

김도현 뿐인 것 같았다. 김도현은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았고 최명규는 어깨 위

로 두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4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차이나타운 입구에 있는 앵거스 스테이크 하우스 앞에서 차를 대놓고 프랑수아

와 알렝을 기다리던 피에르는 미키 일행이 반대편으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차를 슬금슬금 차이나타운 안쪽으로 진입시키고 있었다.



 리우쉥의 지시로 이쪽을 지키고 있던 헤타이렌(賀泰仁)은 차가 더 이상 들어오

는 것을 막았다. 피에르가 무슨 일이냐며 소리를  지르자 헤타이렌은 뭐라고 대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피에르가 비키라며 팔을 흔들자  어깨 안의 권총이 보였

다. 헤타이렌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마침 그때 자주 보던 흰색의 5단 리무

진이 앵거스 스테이크 하우스 앞으로 들어와 피에르가 타고  있던 차의 뒤에 섰

다.



 리무진의 문이 열리면서 중국 전통복장을 한 50대의 사내가 내렸다.



 "사부님!"



헤타이렌이 50대의 사내를 보고 반가워하며 외쳤다. 그가 사내에게 뛰어가 귓속

말을 하자 사내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피에르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들어 목을

찔렀다. 피에르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소 제 목 : Text 104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3시 35분.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중국 청년들은 곧 왕메이린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김도현의 등에 업혀

있었으므로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김도현이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외치자 그들은 길을 터 주려 했다. 김도현이 계단으로 나가기 전에 맞닥뜨린 것

은 체격이 좋고 머리가 벗겨진 사내와 머리를 땋은 전통복장의 사내였다. 둘 다

50대 정도로 보였다.



 중국 청년들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따꺼!"

라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전통복장의 사내가 날랜 몸놀림으로  식당의 중앙까지 왔다.  김도현의 눈에는

그가 땅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쓰러져  있는 한 중국 청년을 안

아들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의식이 없던 청년의 몸 몇 군데를 만지자 중국 청년

이 울컥 피를 토하며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그리고는 힘들게 눈을 떴다.



 "사부님!"



 "그래."



 "죄...죄송합니다."



 중국인 청년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꺾였다. 회광반조.  죽기 전에 정신을 잠

깐 차렸으나 이제 숨이 끊어진 청년은 자오이였다.



 좋은 체격의 사내는 김도현의 등에 업혀진  왕메이린을 바라보았다. 중국 청년

들 중 한 명이 그에게 중국어로 뭐라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옆으

로 돌아온 전통복장의 사내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사내는 김도현 앞으로 다가와  왕메이린을 내려달라고 말했다. 영

어였기에 김도현이 곧 알아듣고 그녀를 사내에게 조심스레 인도했다. 사내는 왕

메이린을 들쳐업고는 김도현이 깨어버린 유리 벽면이  있던 곳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사뿐하게 1층으로 뛰어내렸다. 김도현이 놀라며 창가로 다가가 보았으

나 사내는 어느새 흰색 리무진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체격 좋은 사내가 김도현에게 왕메이린과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김도현은 같

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라고 대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자오이도 알겠군."



 "예."



 "일본인인가?"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



 김도현의 옆에서 최명규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새삼스럽게  최명규의 존재를

눈치챈 중국 청년들이 최명규를  에워쌌다. 그도 한 동양인의  시체를 안아들고

슬퍼하는 중이었다. 시체의 얼굴은 완전히 망가져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얼

굴에만 연발로 서너 발의 총탄을 맞은 듯 했다.  그러나 최명규도, 김도현도 시

체의 옷을 보고 그가 박정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체격 좋은 사내가 김도현에게 재차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예."



 체격 좋은 사람이 큰 소리로 몇 마디 하자  중국 청년들이 바닥에 쓰러진 동료

들을 일으켜 세우고 총격전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김

도현에게 다가와 자리를 피하자고 했다. 김도현과  최명규는 유형남을 부축하며

2층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중

국 청년의 안내를 받아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오늘 있었던 총격 사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지만  런던 경찰은 사전 연락

을 받은 듯 왕케이 레스토랑 2층이 깨끗하게 치워진 이후에야 나타났다.










 소 제 목 : Text 105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런던. 레스터 스퀘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홍콩 삼합회(三合會).



 트라이어스라고도 불리는 이 단체는  미국의 마피아, 일본의  야쿠자와 더불어

세계 3대 범죄단체지만 그 크기나 규모로만 따지자면  세계 최고라고 해도 이상

할 것은 없다. 중국인이 있는 곳은 항상 삼합회가 있게 마련이고 이들은 중국인

이 모여있는 곳을 발판으로 삼아 그 활동 무대를 넓혀왔다.



 삼합회는 넓게 중국과 대만의  폭력 단체들을 합쳐서 말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홍콩과 마카오에서 활동하는 60여 개의 단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외에도 미

국, 일본과 동남아, 유럽의 영국과 네덜란드 등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국은 홍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런던 차이나타운을 관리하는

것은 홍콩의 조직들 중 가장 큰 14-K였다. 그러나 지난 '98년 14-K의 보스가 마

카오 경찰에 의해 검거되면서 조직은  큰 분란을 겪었다. 조직  내 여러 지역의

보스들이 서로 이권을 위해 혈전을 벌였고 이 와중에서 런던 차이나타운의 보스

도 바뀌게 되었다. 새로 14-K의 보스가  된 장홍타이(張弘泰)는 본토 해남성(海

南省) 출신으로 어렸을 적의 친구였던 왕타이렌(王泰仁)을  영입해 런던으로 보

냈다. 그는 해남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본토 조직인 남패천(南覇天)의 핵심 간부

로 활약하고 있던 중이었다.



 원래 1990년까지 런던 차이나타운을 관리하던 조직은 대만의 월청회(越靑會)였

다. 그러나 이 조직은 대만의 2대  폭력조직인 사해방(四海幇)에 무력 흡수되면

서 힘을 잃었고, 그 사이에 차이나타운 대부분의 이권을 14-K에게 빼앗겼다. 10

년이 지나 14-K역시 조직 내 분란이 일어나자 사해방의 주요 인물이 된 전 월청

회 간부들이 다시 차이나타운의 이권을 빼앗으려고 노리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차이나타운에는 사해방에서 사주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장홍타이가 남패천의 왕타이렌을 영입한 이유는, 남패천이 본토 해남을 주무대

로 활동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만의 조직들과 다툼이  많았다. 특히

왕타이렌은 대만 조직들이면 가차없이 응징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

라서 장홍타이의 왕타이렌 영입은 14-K로서는 절대로 런던 차이나타운을 빼앗기

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왕타이렌은 베이징에서 공부하고 있던 딸과 함께  런던으로 왔다. 아내가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에 왕타이렌의 딸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지만 딸이 지금까지 혼

자의 힘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세세하게 간섭하지는 않았다. 불만이 하나 있다면

영어 학습을 위해 개인 교사를 두지 않고 보통의 영어학교, 그것도 학비가 저렴

한 곳에 다니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



 왕타이렌이 주재하는 14-K 런던 지부의 비상  회의가 열렸다. 장소는 차이나타

운에서 불과 2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레스터 스퀘어의  한 빌딩 6층이었다. 상

석에 앉은 왕타이렌이 물었다.



 "상태는 어떤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녁이 고비라고 합니다."



 40대로 보이는 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히라타는 무슨 단체지?"



 왕타이렌의 질문이 이어졌다.



 "히라타는 일본에서도 군소 조직입니다. 일본 관서지역  내에서만 주로 활동하

는데 최근 도쿄로 진출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열  네 개의 산하

조직이 있으며 본가는 교토에 있다고 합니다. 총  조직원 수는 알려지지 않았습

니다."



 "사해방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히라타 조직과 사해방이 접촉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소 제 목 : Text 106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런던 소호. 차이나타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아아악!"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살려달라는 애원이 뒤따랐다. 그 애원은, 처음에는 영

어로, 나중에는 불어로 튀어나왔다가 나중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 20여 년을 총과 주먹으로 살아왔고 남에게 굽신거린 적이

없던 피에르는 이런 두려움에 떨어 본 적도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안에서 정신을 잃었던 피에르가 깨어난 곳은 촛불  하나만 켜져 있는 어두운

방안이었다. 고개를 들어 일어나려던 그는 머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게되었다. 손을 이용해 일어나 보려했으나 그의 팔을 허무하게 허공만 휘저었

다. 발목에 심한 통증을 느낀 그는 곧 자신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소

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를 듣고 다가온 두  명의 중국인은 긴 채찍을  들어 피에르를 후려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피에르가 더 이상  비명을 지를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채찍 끝의 쇠구슬은 피에르의 몸에 닿을 때마다 살점을 조금씩 뜯어가 피에르가

정신을 잃을 즈음에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에르의 협박도, 애원도 무시하고 채찍만

휘둘러댔다. 그러나 또다시 정신을  잃었던 피에르가 깨어난 지금은  아까 채찍

맞고 있었을 때가 행복했다고 느낄 만큼 더욱 무서운 상황이었다.



 중국인들 중 한 명이 피에르의 몸에 흰색  가루를 덕지덕지 바르더니 비스듬히

깍은 대나무를 들고 와 그의 가슴, 배, 다리,  등, 어깨 등지에 꽂았다. 대나무

를 통해 피가 흘러내렸다. 여러 대나무에서 피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 피에르

는 그것들을 떨어뜨리려고 사정없이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으나 헛일이었다.

오히려 흐르는 피의 양을 늘려줄 뿐이었다. 피에르를 더욱 무섭게 만든 것은 자

신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두고 중국인들이 방밖으로  나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바닥에 흥건히 피가 고이자 피에르는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질렀다. 피

가 눈으로도 들어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5분 정도 지나자 피가 응

고되면서 각 대나무마다 흐르는 양이 줄어들었다.



 이때 잠깐 방안이 밝아진다는 느낌과 함께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 왔다. 그들

중 한 명이 영어로 말했다.



 "피가 멈췄다. 흰 가루 더 뿌리고 대나무 다시 꽂아라."



 "예!"



두 명이 같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에르는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소리질렀다. 중국인들이 피에르의 몸에서 대나무들을 뽑고 흰 가루를 바르고 있

을 때 다시 누군가가 말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한 번에 제대로 대답하면 너를 풀어주겠다."



 "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피에르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차이나타운을 습격한 놈들이 누구냐?"



 "습격에 대해서는 전 모릅니다. 다만 프랑수아의 요청대로 온 겁니다."



 "프랑수아는 누구지? 조직이 있는가?"



 "네. 저희들은 파리의 무스타파라는 사람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화

받은 것이...."



두려움에 떠는 피에르는 묻지도 않은 대답까지  하면서 그들이 살려주기만을 바

라고 있었다.










 소 제 목 : Text 107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님, 응급실에 다친 사람이 많이 들어오네요. 피를 흘리는  것이 꼭 총에 맞

은 것 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터졌나?"



 "떼놈들이 무더기로 다친 모양이던데요. 경계도 삼엄하구요."



 다시 잠든 김근태 옆에서 이광혁과 김응진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이들은 김근태의 병실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형님, 저도 구경하고 오겠습니다요."



 "나도 같이 가자!"



 백준영의 말에 이승영이 맞장구쳤다.



 "너무 멀리가지 마라."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20분. 런던 킬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키와 알렝 등 세 명은 차를 두 번 바꿔 탄  끝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주로 모

여 사는 킬번으로 도망쳐왔다. 무스타파가 IRA(아일랜드 공화군)에 무기를 공급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은 그들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어깨에 박힌 칼을 뽑고 치료를 마친 미키는 두 시간 전의 격전을 상기했다. 처

음 방아쇠를 당기고 나서 그는 어깨에 칼을 맞았다.  칼을 던질만한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최명규였다. 또 최명규는 미키의 부하들  중 한 명을 쓰러뜨

렸다. 아마 죽었거나 중국인들 수중에 떨어졌으니  산다하더라도 죽은 목숨이나

같은 것일 터였다.



 '왜 최명규가....?'



 미키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 한 가닥 잡히는 것이  있었다. 오늘 최명규는 기이

하게도 중국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자신이 한국인 야쿠자들에

게 습격 받았을 동안은 김재수를 제외한 동생들을 이끌고 시내에 나가있었지 않

은가? 게다가 죽기살기로 덤벼들던 중국놈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미키는 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먼저 무스타파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몹

시 안 좋게 되었으니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것과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는

내용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본 시간이 오

전 2시가 넘기는 했지만 7대목과 지역 조장들, 고문들 중에는 아직 잠자리에 들

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고 또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시간에 관계

없이 빨리 알려야했다.



 "네! 히라타 구미입니다."



씩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인물은 본가의 경호책임을 맡고 있는 사사키였다.



 "나는 미키다. 7대목 님은 주무시고 계신가? 지급상황이다."



 "예? 아! 안녕하십니까?  7대목 님 말입니까?  아직 안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만..."



 "빨리 연결해라!"



20여 초를 지루하게 기다리자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키, 자네인가?"



7대목이었다. 오야붕으로 모신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목소리를 듣고 미키

는 눈물이 울컥 솟았다.










 소 제 목 : Text 108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병원 복도를 지나면서 최명규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누군가가 알아보

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불과 5일 전 최명규와  미키는 이 병원에 침입하

여 김창환을 살해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소호와 가까운 이 곳은 홍콩

14-K의 런던 조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병원이었고,  왕타이렌은 최명규와 김도

현, 유형남 등에게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시해 두었다. 최명규

로서는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유형남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고, 언어

소통의 문제도 있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유형남은 심하게 다친 중국 청년들과 같은  병동에 입원하였고, 별다른 상처가

없는 최명규와 김도현은 간단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왕타이렌은  또 있을지도

모르는 테러에 대비하여 런던의 조직원들을 모두 모아  병원 내, 외곽에 경비태

세를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도 아시아와 유럽에 퍼

져있는 전 14-K 조직을 상대로 수소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치료를 마친 김도현은 왕메이린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몇 번이고 병원을

지키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는  대답들뿐이었다. 낙담한 김

도현은 유형남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 잠시  후에 수술에 들어갈 예정

인 유형남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김도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최명규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게. 치료가 끝났나보군."



 "네. 별로 다친 곳도 없는데요."



 최명규는 유형남을 한 번 쳐다보더니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짐작하겠지만 우리는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이야. 부산에서 왔지."



김도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회사에서 출장 왔다는 건 거짓말이지. 미안하네."



 "아닙니다."



 최명규는 김도현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영국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세세

히 말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최명규의

이야기가 끝나자 김도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일본놈들을 도와  한국 사람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 온  첫날부터 들은 이야기가 그것이

에요. 외국에 오면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라더군요. 한국인 등

쳐먹는 사람들은 한국인들 밖에 없다고요. 물론 저...그냥 형님이라고 부르겠습

니다. 형님께서 그러셨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 왜 우리가 그런 이야기

를 듣고 살아야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도 아옹다옹 싸우

고, 밖에 나와서도 또 싸우고....  몇 년 전에 일어났던  LA 폭동사건 기억하시

죠? 흑인과 멕시코 사람들이 코리아타운만 약탈했잖아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차이나타운에는 무서운 중국 마피아가 지키고 있고, 리틀 도쿄에도 야쿠자가 지

키고 있어서 함부로 습격하지 못했던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LA의 한국계 갱

들은 다른 민족들한테는 관대하고 한국인들 괴롭히고  등쳐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동족의 가게가 약탈당하는데 막아 주기는커녕 자기들도 같이 약

탈했다고  하더군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사회 경험이 없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인지... 집안에서는 싸워도 밖에 나오면 서로 돕는 것이 가족

이라면  우리 한국 사람들도 외국에 나오면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요."



 김도현이 이야기하는 동안 최명규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늘 최명규는 운이 좋아 총알에  맞지 않은 것뿐이지 자칫하면  자신도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애초부터 일본놈들과 손잡는 게

잘못이었어.'








 소 제 목 : Text 109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3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네 친구는 괜찮은가?"



 "시랭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보려고 하던 참입니다."



 "나도 같이 가지."



 최명규와 김도현이 병실을 나와 시랭이 입원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거구

의 시랭은 2인용 병실의 침대 두 개를 이어놓고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다

친 곳은 부러진 발목과 몇 군데의 가벼운 총상이었다.



 손님이 들어오자 어렵게 몸을 일으켜 앉은 시랭은  최명규의 얼굴을 보고 나서

얼굴을 돌렸다. 이유야 어찌됐건  자신의 발목은 최명규가 부러뜨린  것이 아닌

가? 김도현이 다가가 다친 곳은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다

시 한 번 물으려고 가까이 다가간 김도현은 시랭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

리는 것을 보았다.



 왕메이린이 다치고 자오이가 죽자 사부인 후앙바이수(黃白水)는 시랭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속상하기는 해도 참을  수 있었지만 왕메이린이 죽기

라도 한다면 조직에 대한 자신의 죄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었다.



 "아가씨의 상태는 어때?"



 시랭이 '왕메이린'이 아닌 '아가씨'라고 묻자 좀 어색하다고 느낀 김도현이 대

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거든."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김도현과 최명규가 문을 쳐다보자

리지펭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생긴  붉은 부분과

물집은 김도현이 던진 주전자 때문이었다. 순간 리지펭이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내밀며 앞으로 튀어왔다. 김도현과 최명규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가 뒤에서 들리

는 총성에 고개를 홱 젖혔다.



 코끼리 같은 시랭의 몸이 침대에 걸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오른

쪽 머리에 붙어있던 베개가 떨어지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권총이 드러났다. 리

지펭이 침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시랭은 울고

있던 모습 그대로 죽었기에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메이린이 총에

맞고, 자오이가 죽은 것을 알았을 때부터 자살을  생각해온 시랭은 복수를 부탁

하는 쪽지를 남기고 죽었다. 그 쪽지는 김도현 앞으로 남겨진 것이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30분. 런던 킬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키는 다소 횡설수설하면서도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했다. 한국의

맥주 회사 배후에는 한국의 야쿠자들뿐만 아니라  중국 조직도 개입되어 있다는

것과 형제의 의를 맺은 한국의 부산 조직은  배신자들이라는 내용이었다. 또 조

직원 둘을 잃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현재 남은 자신과 조직원 한 명으로서

는 도오야마의 부탁을 해결하기란 어림도 없으며, 그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아니

면 추가로 상당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이것은 한 번  결정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는 7대목의 성격을 알고  있어 하는 말이었다. 어

차피 도오야마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하였으니 중도에서 그만 두지는 않을 7대목

이었다.








 소 제 목 : Text 110


 '80년대까지 프랑스가 참전했던 전투에 파병되어 실전  경험이 적지 않은 미키

였지만 그는 교관이었기에 실제로 적과 총을 쏘며 대치해 본 적은 드물었다. 오

히려 지금의 전투가 매우 위험한 일이기는 해도 더  박진감 넘치고 스릴 있다고

느꼈다. 호전적인 성격의 그에게 앞으로는 더더욱 흥미로운 일이 전개될 예정이

었다. 회의를 열어 결정하겠다고 했으나 7대목이 지원을 해주리란 것은 불을 보

듯 뻔한 일이었고, 무스타파도 정예 킬러들을  더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차이

나타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더 대대적으로 쓸어버린다면

한국의 맥주회사 정도는 꼬리를 말고 철수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잠시 후 알렝의 친구들이 들어오더니 맥주를  꺼내놓았다. 이들 역시 외인부대

출신들로서 불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자신에게도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들도 미키를 기억하는지 깍

듯이 대했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미키는 피곤함을  느꼈다. 맥주를 마시고 샤워

를 한 후에 조금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명 남은 조직원에게는 옷가지

와 구두 등을 사오도록 시켜 두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두 캔 째의 맥주를 마시며 미키는 새로운 병력과 무기가 오면

어떻게 차이나타운을 공격할까 구상했다. 적은 한낱  깡패들에 불과하지만 우리

들은 어느 나라의 정규군보다도 더 가혹한  군사교육을 받은 외인부대 출신들이

다. 우리가 진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맥주가 떨어지자 그는 빈 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도 친구들 사

이에서 알렝이, 오늘 있었던  자신의 전과를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곳이었는데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거실과 제일 가까운 욕실의 문을 열어 보고는 미키는 손

에 든 빈 캔을 떨어뜨렸다.



 세 사람이 모두 욕조 앞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두 사람은 놀란 듯

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목이 졸렸는지, 잘렸는지  몸뚱아리에서부터 기묘한

각도로 꺽여 있었다. 알렝의 친구들이었다. 시체 하나는 다른  두 시체의 등 뒤

쪽으로 기대어져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알렝일 것이었다. 식은땀이 흘

렀다. 집안은 정적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들을 이렇게 죽였는가? 기억을 더듬

어 보았지만 지금까지는 알렝의 목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미키는 욕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의 깊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던 미키는 지금 이 순간 제일  반가운 것 하나를 찾아냈

다. 알렝이 들고 다니던 검정 색 가방이었다. 그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누르며

살금살금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가방을 들자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최소 세

정 이상의 FA-MAS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가방을 들고 그는 베란다를 등지고 섰다. 여기는 아파트 7층이므로 엘리베이터

나 층계가 있는 현관보다는 안전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베란다 안에 아무도 없

다는 것을 확인한 미키는 가방의 지퍼를 열어  손을 집어넣었다. 플라스틱과 철

제로 이루어진 FA-MAS 소총의 단단한 감촉을 기대하고 있던 그의 손에 물컹하고

기분 나쁜 것이 잡혔다. 의아해진 미키가 가방을 활짝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순

간 뒤로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방 안에 들은 것은 알

렝의 머리였다. 미키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 흐흐흐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와 있었는지 검은 색의 중국 전통 복장

을 한 사내가 거실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사내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베란다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겁에 질린 미키는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좁은 베란다에서는  더 갈 곳도

없었다. 검정 옷의 사내가 몇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미키의 머리 속에 아까

욕조 앞에서 목이 꺽여 죽어있던 알렝의 두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 7층이지만 뛰어내린다면 6층이나 5층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

을 것이었다.



 미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난간을 잡고 점프했다.










 소 제 목 : Text 111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6시 16분. 런던 킬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렝이 일러준 대로 킬번 하이 로드의 시장과 막스 앤 스펜서에서 옷가지와 구

두 등을 사들고 오던 고이즈미는 조장이 바뀌자마자 별  일을 다 겪는다며 불평

했다. 몇 일전만 해도 도쿄에 있는 폭력단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교토

로 오게되었고, 또 지금은 런던으로 최근 몇 일  동안을 아주 정신없이 보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런던에 오던 날을 포함해서  세 번씩이나 한국의

싸움꾼에게 매를 맞았는가 하면 오늘은 총에 맞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고이즈미는 알렝의 아파트를 못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비슷

비슷한 모습의 아파트가 여러 채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7층 어디였더라?

한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던 고이즈미에게 3일간 생사를 같이 해 온 조장의 모

습이 눈에 띄었다. 반갑다는 생각도 잠깐뿐,  조장은 난간에서 버둥거리다가 아

파트 아래로 추락했다. 고이즈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을 질끈 감은 고이즈미의 귓가에 육신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장이 떨

어진 곳까지는 20초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두려웠다.  위를 올려다보니

한 사람이 베란다에 서서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호의적인

인물은 아닐 것이었다. 여기서 조장에게 달려간다면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

이라고 느낀 그는 눈에 띄지 않도록 천천히 역을 향해 걸었다. 조장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었고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갈 곳이 없어진 고이즈미는 15분 후, 킬번 역  근처의 공중전화기에 매달려 흐

느꼈다. 도쿄의, 이제는 조장이 죽어버린 미키  구미의 다른 조직원들과의 통화

였다. 미키의 사망 소식은 곧 교토의 히라타 구미 본가에도 전해졌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6시 2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얘들이 어딜 가서 이렇게 안 오지?"



 "제가 가서 찾아보지요."



 "같이 가자."



이광혁과 김응진이 병실 문을 나섰다. 응급실을 구경 간다던 이승영과 백준영이

돌아오질 않자 찾으러 나온 것이었다. 1층을 향해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5층에

서 멈추어 섰다. 여러 사람이 탔는데 그 중에는 두 명의 동양인도 끼어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을 알아본 이광혁이 반갑게 불렀다.



 "자네, 도현 군이 아닌가? 여기는 웬일이지?"



우리말로 부르는 소리를 듣자 두 명의 동양인이 같이 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김도현의 옆에 서 있던 최명규는 이광혁을 쳐다보고  크게 놀랐다. 그것은 이광

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선배님 아니십니까? 여기 웬일이십니까?"



 "아우님이 아닌가? 정말 여기는 무슨 일로?"



 네 개의 눈빛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한국에서도  웬만하면 서로 마주칠 일없는

두 사람이었다. 잠시 서로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최명규는 기분이 착잡했다. 한국 맥주회사의 사주를  받고 폭력을 휘두른 것이

이광혁의 신목포파란 말인가? 그렇다면 김재수를 죽인  것도 그란 말인가? 최명

규는 재빠르게 사태를 파악하였지만 이광혁으로서는 작년까지 같은 교도소의 같

은 사방에서 복역하던 최명규가 왜 이곳에 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어렵게 최명규가 입을 열었다.



 "아우님이 명성맥주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이광혁은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최명규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이광혁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딱딱한 어조로

되물었다.



 "선배님이 저희 형님께 총을 줬습니까?"










 소 제 목 : Text 112


 "응? 유 선배님께서 총을 맞으셨는가? 나는 모르는 일이네."



 최명규가 유정후를 죽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안 이광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는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명성맥주 때문에  이곳에 와 있습니다. 선배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그렇군. 아우님이었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최명규는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바쁘지 않으시면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저는 도현 군과도 구면입니다."



 김도현이 동의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명규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

지만 사양했다.



 "아닐세. 우리는 가보아야 할 곳이 있네. 아우님 연락처가 있다면 알려주게."



 왕타이렌은 최명규와 김도현이 치료를 마치고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와 주길 바

라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그리로 가려던 중이었다.  이광혁이 종이를 꺼내어 묵

고 있는 곳의 전화번호와 휴대전화기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헤어지기 전 이광혁

은 생각났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있는 최명규에게 급하게 물었다.



 "선배님, 혹시 히라타라고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알고 있네. 같이 일하고  있어.'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최명규는

김도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하며 "없네."라고 대답했다. 문답이 또 이어졌

다.



 "유 선배님이 히라타 사람에게 총을 맞으셨는가?"



 "네. 히라타 조직의 호시노라는 사람이라더군요."



 두 사람은 눈빛으로 대화가 끝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최명규는  더 할 말이 있

었지만 여기서 접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2월 17일. 목요일. 오후 8시 10분. 런던. 레스터 스퀘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똘똘해 보이는 중국 청년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뭔가?"



 "13일, 일요일에 야마구치 구미의  간부들이 히라타 구미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간부들인지는 파악되지 않습니다만 야마구치 구미의 벤츠 일곱 대

가 히라타 구미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히라타의 조장이 직접 나와서 영접했다는

소식도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왕타이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곱 대의 벤츠가 히라타 구미를 찾았다는 이

야기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도오야마가 한 개의 산하조직을 이끌고 야마구치의

벤츠를 빌린 후 히라타의 7대목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왕타이렌은 이

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홍콩 삼합회의 대표격인 14-K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대만의 사해방은 십 수 년 전부터 일본 최대의 광역폭력단체인 야마구치 조직과

형제의 의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끈끈한 교류는  '96년 2월에 있었던 사해방의

보스 천융허(陳永和)의 장례식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시  야마구치는 고위

간부 중의 한 명인 노구치 마츠오(野口松男)와 함께  100명도 넘는 조문단을 보

냈다.



 열 명도 넘는 조직원이 총에 맞아 죽고,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자 왕타이렌은

짐작을 사실로 단정해 버렸다.  사해방은 형제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에게 런던

차이나타운을 테러하도록 사주했고,  광역폭력 조직인 야마구치는  이를 히라타

구미에게 맡겼다는 것이 그의 시나리오였다. 오차는 없어 보였다.










 소 제 목 : Text 113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전 12시(프랑스시간). 프랑스 파리. 몽빠르나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콩코르드 광장 옆의 한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브릴 앙드레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경보를 하는 것 같아 보일 정도로 빨리 걸었다. 매

일 오후 11시에 일이 끝나는 그녀는 자정이 넘어서  돌아오면 터키 태생의 애인

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최근 한 달 동안 한  번도 늦지 않았는데 오늘은 늑장을

부리다가 드디어 한 시를 넘겼다.



 우락부락한 그녀의 애인은 용서라는 것을 몰랐다.  오늘도 분명히 그녀의 얼굴

은 붓고, 터질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상처난 얼굴로  오후에 클럽에 나갈수 있

을지의 여부를 걱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도망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능력 있는 그의 부하들은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든지 3일 이내

에 찾아내곤 했다.



 집의 거실과 침대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

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누군가가 TV나 비디오를 보고 있어야할 1층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소 두

명씩은 와 있던 그의 부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외출했기를 바라는 아브릴

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침실로 갔다. 침실 문을  열자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애

인의 모습이 보였다.



 무스타파의 목에는 뒤로부터 커다란 칼이 앞을 향해 관통해 있었다. 두 눈알이

빠지고 혀가 턱 아래까지 빠져 나와 있는 상태였다. 아브릴은 크게 놀랐으나 소

리는 지르지 않았다. 더 이상 매맞을 일은 없다! 무스타파의 부하 둘은 각각 침

실 바닥에 무스타파와 비슷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아브릴은 침착하게 무스파타의 지갑과  패물들을 찾아다녔다. 10분  후 그녀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가지고 집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부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지만 지문은 이리 저리 남아있을  것이었다. 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며 윗층을 슬쩍 올려다본 아브릴은 침실 창문에서 검정 색 인영이 번득이

는 것을 보았다. 잘못 보았거니 생각하며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전 8시 10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山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늦은 조찬을 함께 하기로 한 이중은은 두 명의  통역 겸 부하들을 이끌고 히라

타 구미의 본가에 도착했다. 김재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의하러 온 이

중은은 오히려 히라타 조직 내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오전  7시에 데리러

온 차는 벤츠였지만 달랑 운전사 한 명뿐이었다. 7대목이  직접 오는 일은 없더

라도 최소 조직의 고문이나 산하 조직의 장이 왔어야  하는데도 약간 거만해 보

이는 운전사 한 명만이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곧 기모노를 차려입은 젋은 여성의 안내를 받아 7대목이 기다리고 있다는 장소

로 움직였다. 정장 차림의  야쿠자들이 미닫이문을 열자 방안에서는  여러 명의

낯익은 얼굴들이 이중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석을 보니 아직 7대목은 도착하지 않았다. 상석 아래로 한 개의 자리가 비어

있고, 그 주위에는 조직의 고문이자 히라타 구미 내에서 가장 큰 조직을 이끌고

있는 요시이가 앉아 있었다. 고문인 미야자키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어서 오

라며 인사를 건네긴 했으나 앉은 채였다. 이중은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요시이에게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꾹 참고 7대목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자 시

종이 따라준 차를 몇 모금 마시는 중에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

다. 차를 다 마셨을 즈음 젊은 야쿠자 한 명이  문을 열고 7대목이 오고 있다고

알려왔다. 모두들 보스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났다.










 소 제 목 : Text 114


 이중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어났고 곧 미닫이문이 열리며 진지한 얼굴의 7

대목이 너댓 명의 부하들과 같이 들어왔다. 7대목이 상석에 앉으며 오른손을 상

위로 올려 흔들며 다들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전통 일본무사 차림의 7대목은 과연 일가를 이루는 조직의 두목답게 절도 있는

행동을 보였다. 사람들이 앉는 동안 다소  일었던 소음이 사라졌는데도 7대목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자 장내의 분위기는 점차 냉랭하게 변했다. 이

중은은 개인적으로 인사하고 영국에 있는 동생들에  대한 보호를 보다 강화시켜

줄 것을 요청하려 했으나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2분 여가 지났다. 침묵을 지키던 7대목이 입을 열었다.



 "미야자키, 우리 조직이 제일 금기시 하는 것이 무엇이지?"



 "예! 에, 그것은 조직에 대한 배신입니다."



7대목보다 십 년 연상인 미야자키가 "하이!"라는 대답을  하고 잠깐 생각한 뒤,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7대목이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우리 히라타가 7대까지 오는 동안 배신자들은 어떻게 처리했지?"



 "예!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죄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맞아. 그랬었지."



 이중은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통역으로 따라간 박용

준은 왜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조직 내에

누군가 배신을 해서 분위기가 심각해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박용준이 이중

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들의 대화를 알려주려 했으나 이중은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외국인은 자신 한 명 뿐으로, 이런 분위기에서 통역의 이야기

를 듣는다는 것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다시 지속된 얼마간의 침묵 뒤에 7대목이 이중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제, 자네의 동생들이 우리 조직을 배신했네."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이중은의 귓가에 박용준의 이야

기가 들려왔지만 믿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7대목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라 생각하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7대목의 말은 계속됐다.



 "오늘 새벽에 미키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그 미키도 죽었다. 아마 알고 있을지

도 모르겠지만..."



 빠른 통역의 말의 이어졌다. 이중은은 7대목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 되었지만 장난이라면 너무 심하다 생각되어 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다.



 "도대체 형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중은의 물음이었다. 박용준이 그대로 일본어로 바꾸어 물었다가 그만 옆자리

의 덩치가 산만한 한 40대의 야쿠자가 휘두르는 손바닥에 맞고 말았다. 철썩 소

리와 함께 박용준이 뒤로 쓰러졌다. 40대의  야쿠자는 교토의 시치조(七條)에서

조직원 서른 명을 관리하고 있는 도리야마(鳥山)였다. 그는 감히 오야붕이 이야

기하고 있는 중에 끼어 들어 질문을 하는 무례를  범했다며 나직한 목소리로 쓰

러진 박용준을 나무랐다.



 이중은의 안색이 변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박용준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으나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입안에도 잔뜩 피가 고인 것이 입

안이 터졌거나 이가 부러진 것 같았다.










 소 제 목 : Text 115


 부산의 대표 폭력조직인 해운대파는 평범한 인물이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박

용준이 뺨을 맞은 순간부터 약 10초간 이중은의 머리  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생

각이 번개처럼 떠오르고 정리되었다.



 자신 앞에서 통역으로 데려온  동생을 후려쳤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으나 이런 호랑이 소굴 안에서 큰소리치며 덤벼들었다가

는 오히려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분함을 꾹 참으며 자세를 고쳐

잡고 7대목을 향해 말했다.



 "형님,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십시

오."



 박용준은 입에서 흐르는 피를 훔치며 이중은의 말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전달

했다. 말을 하게 되자 입안에 피가 더 빨리  고였다. 뱉을 수도 없었고, 삼키려

니 구역질이 났다.



 7대목이 눈짓을 하자 오른쪽 옆에 앉아있던 본가의 경호 담당의 사사키가 벽장

을 열고 긴 상자를 꺼내  7대목 앞에 내려놓았다. 지역조장들과  고문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히라타의 오야붕이 된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7대목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한 번쯤 조직을 휘어잡으려

면 누군가 하나는 족쳐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일본인 고위간부보다 바다

건너 온 조직원 아닌  조직원을 이용한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라타 구미의 숙원 사업인 한국  진출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하므로 다소

늦어질 예정이었다.



 7대목이 상자를 열어 날의 길이가 1M는 족히 됨직한 칼을 꺼냈다. 칼집을 살펴

보다가 두 뼘 길이 정도 칼을 꺼내어 이번엔  날의 상태를 확인했다. 좋은 것이

었는지 칼날에서 반사되는 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

이 없는 이중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박용준은  놀라 입안에 고여있던 피

를 조금 삼키고 말았다. 비릿한 피가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느끼자 속이 느글거

리기 시작했다.



 "자네는 형제의 의를 맺은 나의 아우로서 예를 다해 벌을 받도록 하게."



 7대목이 한 말이었으나 박용준은 이를 전하지 못했다.  꾹 참고 피를 삼키려고

해보았으나 이번엔 부러진 이 한 개가 뽑혀  입안에서 돌아다녔다. 도저히 삼킬

자신이 없었다. 이중은이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손짓으로 7대목의 말을 전하려 했다. 벌을 받으라니  어느 정도의 벌을 말

하는 것일까? '형제의 의', '나의 아우'와 같은 말을 사용했으니 단지(斷指) 정

도의 징벌일 것이다. 박용준은 왼손의 검지 손가락을  내밀고 오른손 검지 손가

락을 사용해 자른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이중은은 자신의 왼손을

펴서 한 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하나 정도쯤이야!



 이중은이 7대목을 바라보며 비장한 눈빛과 함께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7대

목은 그가 반항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벌을 받겠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칼을 들고 일어섰다.



 이중은 옆에 앉아있던 야쿠자들이 좌우로 물러섰다.  이중은은, 자신의 손가락

은 자신이 직접 자르는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7대목이  직접 칼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마도 일본에서도 조직마다 조금씩 방법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남기고 싶은 말은 없나?"



 7대목이 말을 마치자 "큭!" 소리와 함께 한 컵 분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

는 곧장 7대목에게 날아가 그의 기품 있어 보이는  일본 전통 복장을 붉게 물들

였고 얼굴에도 튀었다.



 손가락 한 개정도 자르는 줄 알았던 벌이란 것이  목을 자르는 일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박용준이 놀라서 입안의 피를 뿜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즉시 외

쳤다.



 "형님! 피하십시오! 소..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자르려고 해요!"



 박용준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도리야마가 다가와  다시 손을 휘둘렀다. 이중은

은 상황을 파악했다. 앉은자리에서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로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나이가 들어 예전 만한 위력은 없었지만 한때는 부산 전체는 물론 전국

에 명성을 떨쳤던 것이  이중은의 발차기였다. 다가오던 도리야마는  배를 맞고

주저앉았다.










 소 제 목 : Text 116


 히라타 구미 산하 열 세 개의 지역 조장들과  고문들이 모두 일어났다. 30대부

터 60대까지 다양한 나이 분포도를  가진 이들 중에는 용감한  자들도 있었으나

각각 한 개의 조직을 맡고 있는 조장들인 만큼  직접 몸을 쓰는 것을 꺼려했다.

이중은과 박용준에게 달려들기보다는 재수 없으면 오야붕이 휘두르는 긴칼에 맞

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마침 도리야마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자 이

들은 더욱 겁을 집어먹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몇 명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의 수행원을 불러댔고, 몇 명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 우당탕!



 두 개의 미닫이문이 크게 부서지며 뛰어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가려던

야쿠자들과 부딪혀 방안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중은이 통역으로 데려온

동생들 중 한 명이었는데 박용준의 친동생인  박상준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문을 지키고 있던 다른 야쿠자들을 물리

치고 뛰어들어 온 것이었다.



 반역자를 빨리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한 7대목은 눈으로 들어간 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칼을 휘둘렀다. 바닥에 있던  이중은이 황급히 옆으로 굴

러 피했다. 칼끝이 지역 조장 중 한 사람인  이케다의 옆구리를 살짝 베며 지나

갔다. 재차 칼을 치켜 든 7대목이 이중은을 향해  아래로 그었다. 살과 뼈가 싹

둑 잘리는 느낌이 칼날을 타고 전해져왔다.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

는 7대목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그러나 칼을 쥔 채로  뒤로 물러선 7대목은

흠칫했다. 이중은이 즉사했다면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팔을 들어

눈 주위를 훔쳐 피를 닦아냈다. 고통에 겨워 지르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 사내가 바닥에서 뒹굴며 울부짖고 있었고, 처음 보는 사내 한 명은 잘린 팔

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7대목의 눈에  천천히 일어나는 이중은의 모

습이 들어왔다.



 이중은에게 내려꽂히는 칼을 막은 것은 박용준이었다.  그의 왼쪽 팔은 팔꿈치

부터 잘려나갔다. 박상준이 형의 잘린 팔을 들고 바라다보고 있던 중이었다. 이

런 끔찍한 광경에 지역 조장들은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사사키를  비롯한 젊은

야쿠자들 서너 명이 들어와 이중은 일행을 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 그대로 두어라. 셋 모두 여기서 처리하겠다."



7대목의 말이었다.



 "우리 함께 여기서 죽자."



 이중은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그는 허리띠를  풀어 꺼내들었다. 히라타 본가에

들어올 때뿐만 아니라 김해 국제공항과, 간사이 국제공항에서도 금속물 탐지 검

사와 함께 무기를 지니고 있는지 검사를 받았지만 이중은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가죽 허리띠는 한 번도 의심을 산 적이 없었다.  가끔씩 금속 탐지기에 걸려 삑

삑 거리는 소리를 내기는 했어도 누구도 그 허리띠의  가죽 안에 얇은 금속판을

감추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허리띠를 푼 이중은은 그것을  반으로 접어 부러뜨리고는 바클이  있는 부분과

허리띠의 끝 부분을 손으로 잡고 한바퀴 감았다.  그리고 가죽을 들어내자 면도

칼처럼 얇고 부드러운 금속이 빛을 내며 나타났다.  흐늘거리던 금속띠는 두 겹

으로 뭉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중은이 무슨 짓을 하나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던 젊은  야쿠자들 중 한 명은,

그가 허리띠를 이용해 칼처럼 생긴 것을  만들어내자 "코노야로!(이 새끼!)" 라

는 외침과 함께 달려들었다. 히라타의 본가 정문에서 손님들의 몸수색을 담당하

는 가와츠였다. 흥분을 가라앉힌  이중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뻗어 손목을

조금 흔들었다 싶은 순간, 가와츠가  얼굴을 감싸며 쓰러졌다. 얼굴을  가린 두

손 사이로 흐르는 피가 삐져  나왔다. 옆에 있던 사사키가  가와츠의 손을 떼어

얼굴을 살폈다.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와 입은 형

체도 없이 잘렸고 이마와 뺨,  눈 등에 있는 수십  줄기의 상처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왔다.










 소 제 목 : Text 117


 사사키가 부하들 중 한 명을 향해 고개 짓을  하자 이번엔 유도를 배웠다는 모

로보시가 이중은을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슷했다. 이중은이 살

짝 피하며 허리띠를 흔들자 모로보시의 두 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의 열 손

가락들 중 다섯 개가 잘렸다. 타다미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들 중 몇 개가 파닥

거리며 움직였다.



 "다들 물러서라."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깨끗하게 닦아낸 7대목이  칼을 치켜들었다. 이런 좋은

기회는 없다. 이중은이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칼은 배 이상

길지 않은가? 행패를 부리는 배신자 처단이라는  명분도 확실하고, 지역 조장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 강화에도  도움이 되는 기회였다.  7대목은 전광석화처럼

앞으로 튀어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칼을 통해 무언가 닿았다는 느낌이  전해져왔으나 이중은을 베기에는

아직 가까운 거리였다. 이중은의 앞을 막아서며  7대목에게 달려든 인물은 박상

준이었다. 가련하게도 그는 무기대신 피가 빠져 하얗게 된 형의 팔을 들고 칼을

든 7대목에게 할퀴듯이 달려들었다.  7대목이 냉소와 함께 박상준의  가슴 깊게

박힌 칼을 뽑아냈다. 옆가슴부터  심장까지 박힌 칼이 뽑히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상준아!"



 박용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박상준은 7대목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상체가 앞으로 꺾이면서도 그의  팔은 7대목을 할퀴려고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박상준은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고개를 돌려 이중은을 쳐다보았

다.



 "크...큰형님. 죄...죄송합니다."



 박용준, 박상준 두 형제와의 나이 차가 20년 가까이 되는, 평소라면 얼굴도 제

대로 바라다보기 어려운 경상도 폭력계의 거물  이중은이었다. 형님이라고 부르

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기회도 없었다. 죽어가면서  박상준은 처음으로

이중은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유가 어찌됐던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보람있는 일일

수 있지. 하지만 네 놈들은 곧 죽을 목숨이라  보람은커녕 개죽음이 되겠지. 더

이상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순순히 벌을 받아라.  영예롭게 할복할 수 있는 기회

를 주겠다."



 7대목이 한껏 위엄을 부리며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박용준은 그

의 말을 이중은에게 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보스는 자살을 하

느니 싸우다 죽을 사람이었다. 지금 박용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현재의 상황

을 부산에 알리는 것이었다. 양복 주머니 안에는  어제 김해공항에서 로밍 서비

스를 받아온 휴대전화기가 들어있었다. 양복으로 잘린 팔을 감싸기는 했으나 피

는 심장박동이 있을 때마다 뿜어져 나왔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이 떨리는 것

이 쇼크가 오려는 것 같았다.



 이중은이 앞으로 나서 허리띠 칼을 들었다. 몇 명의 야쿠자들이 덤벼들려 하자

7대목이 제지했다.



 "흠...내 손에 죽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며 칼을 번득였다. 아무리 이중은 이라도 무기의 길이에

는 당할 수 없었다. 한 치가 길면 그만큼 유리한 것이 칼이다. 검도의 달인인 7

대목의 칼은 이중은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두 동강냈다.



 이중은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박용준을 바라보았다. 7대목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 순간 이중은이 바닥을 굴러 7대목의 다리를 안고 쓰러졌다. 이때 박용준

은 왼팔을 감싼 채로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두 명의 야쿠자들과 부딪히기는 했

지만 잡히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한바퀴 구른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

며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렸다. 뛰면서 오른팔을 이용해 양복 주머니에 있는 휴

대전화기를 꺼냈다. 그 바람에 상처를 감쌀 수가  없게되자 양복이 떨어졌고 왼

팔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늘어났다. 땅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는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 야쿠자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뛰면서 번호를 누르자니 버튼 크기가 작아서 엉뚱한  것이 눌러졌다. END 버튼

을 눌러 취소하고 다시 입력했다. 부산에 있을 때는 작아서 좋다고 자랑하던 모

토롤라 8900형 전화기가 이렇게 불편할 때도 있을 줄은 몰랐다. 눈이 커다란 여

고생의 광고가 마음에 들어서 산 것이었다.



 번호 입력을 다 하고 나서 SEND 버튼을 눌렀다.  야쿠자들은 뒤에서 계속 쫓아

오고 있었다. 박용준은 정신없이 뛰면서도 전화기의 신호음에 귀를 기울였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어제 공항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저녁 늦게 왔기 때문

에 로밍 서비스는 다음날 아침 아홉 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왼쪽 팔이 잘렸기

에 시계는 없었다. 박용준은  고통스러움을 동반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곳을 찾아 뛰었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8시 10분이었으니 곧 아홉 시가 될 것

이었다. 더 이상 뛸 힘이 없었다. 커다란 나무 뒤의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한 번 SEND 버튼을  눌렀다. 운 좋게도 이번엔  신호음이 들려왔다. 두어

번 울리자 대양 프로덕션 사무실 여직원의  "안녕하세요? 대양입니다." 라는 소

리가 들리자 박용준은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둣발이 날아와 그의 전화

기를 차버렸고 다시금 그 구둣발에 의해 머리를 가격  당하자 그는 정신을 잃었

고 오분 후부터는 과다출혈로 인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긴 대양 프로덕션에서 히라타 구미 본가로  전화를 해 보았으나 얻

은 대답은 이중은 일행이 모두 죽었다는 말이었다.










 소 제 목 : Text 118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전 9시 20분(영국시간) 런던. 레스터 스퀘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았다."



최명규는 침착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14-K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로 힘겹

게 돌아갔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십니까? 경찰들이 쫙 깔렸을 텐데요."



 김도현의 말대로 어제 있던 총격 사건으로 인해 런던, 특히 소호의 차이나타운

과 인접해 있는 이곳은 거리마다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최명규

는 대답 없이 코트를 벗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  밖으로 경찰차 한 대가 요란

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이것 좀 드시지요. 리지펭이라는 친구가 주고 간 겁니다."



 김도현이 알루미늄 호일로 포장되어 있는 음식들을  내밀었지만 최명규는 고개

를 내저었다.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요."



 "잠시 혼자 있겠네."



 창 밖을 바라보며 최명규가 말했다.



 아무리 결탁과 배신을 밥먹듯 하는 곳이 폭력계라지만 최근 최명규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좀 전에 들은 소식은 그가 최근 겪었던 일 중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이중은의  죽음! 최명규는 그와 같이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으나 슬픈  마음은 누구 못지 않

았다. 그가 따르던 이중은의 죽음은 친형제의 죽음 이상으로 슬픈 것이었다.



 이제 주위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유형남과 한양수  밖에 없었다. 불현듯 둘밖에

남지 않은 동생들이 보고 싶어진 최명규는 다시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병원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가줄 수 있을까?"



 힘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최명규의 말에 김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이 방문을 닫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

리며 리지펭이 뛰어나왔다. 그는 두 사람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영어로 말했다.

오늘 새벽에 한양수가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분간 이동할  일이 있을

때는 조직에서 선임한 변호사를 대동하고 움직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김도현이 최명규에게 그 소식을 전하자 그는 고개를  꺽으며 몸을 돌렸다. 2-3

초 후에는 다시 몸을 김도현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병원으로 가지."



 세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영국인 변호사 한  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이 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늘이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졌다.










 소 제 목 : Text 119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한국시간) 서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겠네. 고마워."



 전화를 끊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일을 이광혁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 궁금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한광택은 옛 부하로부터 유정후  살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호시노가 부산역에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런던의 이광혁에게 빨리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복을 입

고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2000년 2월 18일. 금요일. 오후 3시 10분. 런던 외각. 서리 뉴몰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차가 점차 속도를 줄였다. 좌석에서 일어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명규

는 차창 밖으로 흘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그쳤다

했는데 지금은 또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멈추었다.



 "여기입니다. 선배님."



 미리 연락을 받은 이광혁이 플랫폼에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

다. 최명규와 함께 온 김도현도 이광혁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최명규가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작년에

같이 교도소 생활을 했던 백준영이었다. 같은 사방(舍房)에 있었을 때는 자신을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신목포파 이광혁의

수하로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교류관계는 없으나 최명규의 명성을  알고 있는 김응진도 이광혁을  따라 나왔

다. 이승영은 토마스 병원에서 김근태와 함께  있었다. 이광혁이 김응진을 소개

했을 때, 최명규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폭력계의 계

보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응진이라는 이름을 머리 속에 새겨두었

다.



 최명규는 백준영을 쳐다보며 광주파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가 광주파를 한 주먹에 쓰러뜨렸었지."



 "별 말씀을요."



 "나도 광주파 덕택에 옥살이를 심하게 한 적이 있지."



 이광혁은 그의 말을 듣고 더 손해를 본 것은  광주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

명규 혼자서 광주파의 조직원 네 명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 결국 은퇴시킨 적

이 있었으므로. 그때부터 최명규의 이름이 높아졌고 광주파는 현재 이름만 겨우

내걸고 있는 조직이 되었다.



 "가시죠. 여기는 한국 식당도 많습니다."



 최명규는 다시 하늘을 한 번 바라본 후 이광혁이 씌워주는 우산 아래서 발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산은 두 개뿐이었는데 김도현은  우산을 들고 있는 김응

진 옆으로 붙었다. 그러자 마침 김응진의 우산  안으로 들어오려던 백준영이 밀

려 옆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김도현은 그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짐짓 험상궂

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 제 목 : Text 120
 병동으로 들어서자 두 명의 덩치 큰 동양인이 막아섰
다. 김도현이 뭐라 설명하려는데 뒤에서 중국말이 들려오고 덩치들이 물러났다.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리지펭이었다. 그는 원하던  대로 왕메이린의 보디가드가
되었으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미 크게 다쳐있었다.  왕메이린의 상태는
아직도 불분명했다.

 "오늘은 혼자로군?"

김도현은 최근 몇 일 동안 항상 같이 다니던 최명규를 떠올렸다. 최명규와 이광
혁 일행은 세 시간 전 히드로 공항에서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응. 일본으로 갔지. 무슨 일로 갔는지는 묻지마."

 김도현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말하자 리지펭은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런 일이라면 우리 조직이 빠르겠지. 아마 손을  쓰고 있을 것 같은데....우
리가 지구상에서 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지."

 리지펭이 차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와 김도현에게  내밀었다. 그가 따라주는 차
를 받으면서 김도현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몇  일전 자신이 내던진 주전자에
화상을 입은 리지펭이었다. 아직도 그의 얼굴에는 상처가 남아있었다.

 김도현이 무언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그 문제 때문에 온  건데....그 조직의 힘으로 부탁하나  들어줬으며 해
서.."

 "부탁?"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부탁이야."


   2000년 2월 23일. 수요일. 오후 4시(일본시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온 최명규는 열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국 경찰에 쫓기어 런던으로 도망갈 때도 이 공항을 이용했었다. 불과 열흘 전
의 이야기지만 1년이나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항의  분주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었지만 최명규의 마음은 더 이상 쫓기고 있지 않았다. 목적
없이 무작정 런던으로 갈 때보다는 오히려 이중은의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와 있
는 지금이 더 편하다는 느낌이었다.

 "가시죠."

 이광혁이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는 난카이(南海)선 티켓을  사 가지고 왔다. 여
기까지 같이 온 사람들은 최명규와 이광혁 외에  김응진, 이승영, 김근태, 백준
영 등이었으나 김응진과 김근태는 상처를 입고 있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이
승영과 백준영의 여권에는 일본  비자가 없었지만 오사카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24시간의 임시 체류 스탬프를 받을 수 있었다.

 난카이선 플랫폼으로 들어와서 이광혁은 다시 특급  티켓을 샀다. 이 특급열차
를 이용하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오사카 시내의 난바(難波)까지 30분밖에 걸리
지 않는다.






 소 제 목 : Text 121
   2000년 2월 23일. 수요일. 오후 7시(일본시간) 오사카 난바. 난카이 호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난카이 호텔 로비 카페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최명규의  무릎 위에 호텔 여종
업원이 종이 쪽지를 내려놓고 갔다. 누가 볼세라  몰래 펼쳐본 쪽지에는 그더러
호텔 밖 난바역 정면의 사쿠라 은행 뒷편으로 오라고 쓰여있었다.

 사쿠라 은행 뒷편으로 50m 쯤  걸어가자 약도의 내용대로 작은  라면 가판대가
나타났다.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일본에서는 흔치않은 가게들 중 하나였
다. 어찌해야할 지 모르는 최명규에게 라면집 주인이  슬쩍 눈짓을 하며 한국어
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라면입니까?"

 최명규가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능숙한 솜씨로 라면을 만들어 내왔
다. 어차피 저녁 먹을  시간도 됐는지라 최명규는 내색하지  않고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최명규처럼 서서 라면을  먹고 있는 손님들은 아
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 맛에는 못 미친다고 느끼고 있을  때, 옆에 새로운 손님
한 명이 나타났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사람이었는데  그를 흘끗 바라본 라면
집 주인은 주문을 받지 않고도 라면 한 그릇을 만들어  내왔다. 잠시 후, 두 사
람 외의 손님들은 모두 계산을 마치고 사라졌다.

 "가네무라(金村) 씨의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지요? 가네
무라 씨께서는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시라고 말씀하셨습니만
총기는 어렵습니다."

 콧수염의 사내가 라면을 먹으며 최명규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결례인줄 압니다만 여기 적힌 것을 지원 받았으면 합니다."

 최명규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고 쪽지를 내밀었다.

 "언제까지입니까?"

 "내일 아침까지면 좋겠습니다. 새벽이라도 되는대로 즉시."

 "곧 준비하도록 하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콧수염의 사내는 500엔 짜리  동전 하나를 내려놓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히라타 조직과 싸우기 위한 준비는 런던에서부터 진행되었다. 한광택이 보내준
경찰청의 자료를 기반으로 히라타의 본가에 방문한  적이 있는 최명규의 기억이
보태졌다. 작전을 짜기 시작했을 때부터 최명규는 말을 아꼈다. 몇 일전 이광혁
이 히라타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다가 김재수를 죽인  장본인이 이광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중은의 복수도 복수였지만 김재수의 죽음에도 책임을 져야하는 최명규였다.

 최명규도 500엔 짜리 동전을 내려놓고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갔다. 난바역 앞의
대형 전광판들에서 나오는 휘황찬란한 광고들이 거리를 밝게 비추었다. 1월 3일
히라타 조직과 형제의 의를 맺기 위해 일본에 왔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달라
져있었다. 많은 수의 형, 동생을 잃고 이제 남은  것은 그와 유형남 뿐이었으나
그마저도 병원에 누워있는 신세였다. 맥주라도 한 병  사들고 돌아 갈까하다 마
음을 고쳐먹은 최명규는 호텔을 향해 힘든 걸음을 옮겼다.







 소 제 목 : Text 122


     2000년 2월 24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오사카 난바. 난카이 호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객실로 돌아간 최명규는 윗도리를 벗어두고 다시 나왔다. 옆 객실의 문을 노크

하자 백준영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 선배님. 어딜 다녀오십니까?"



 "여기에 아는 분이 있어서 뭣 좀 부탁하느라.... 다른 사람들은 어딜 갔나?"



 "네.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들어오십시오."



 백준영의 말대로 최명규가 침대에 걸터앉은 지 오래되지 않아 이승영이 김근태

를 데리고 돌아왔다.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했다. 4주의  치료 진단을 받은 김근

태는 아직 혼자 움직이기에는 무리였다.



 "광혁 형님은 어디 가셨나?"



 "응진 형님과 같이 나가셨는데 지도를 사러 가신 것 같아요."



 이승영의 질문에 백준영이 대답했다.  한광택이 보내준 자료에  의하면 히라타

조직의 본가는 교토 사쿄쿠의 야마바나에  있는데 이 주위는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미리 탐색하기가 쉽지 않았고 지도도 작고 조잡해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히라타 구미 산하의 열 네 개 산하 조직을  차례차례 공격하기란 불가능할 것으

로 판단한 이들은 본가로 직접  쳐들어가 유정후와 이중은의 원수를  갚고자 했

다. 내일부터 이들은 교토와 주변의 비파호(琵琶湖)를  둘러보는 관광객으로 위

장해서 잠입할 예정이었다.



 최명규는 런던의 혈전에서 칼을 모두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칼이 필요했다. 일

본은 한국보다 칼의 종류도 많고 구입하기도 수월했으나 그가 일본어를 잘 모르

기 때문에 괜한 의심을 살수도 있었다. 그래서 예전  이중은과 친분이 있고, 유

형남의 뒤를 봐준 적이 있던 재일 교포인 가네무라에게 전화해서 칼을 구해달라

고 부탁했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에 노크를 했다. 백준영이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어주려 문

앞으로 갔다.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최명규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잠깐! 지금 노크하면서 들어올 사람이 있나?"



 현재 신목포파에서는 이광혁의 위치가 제일 높았다. 따라서 객실에 들어오고자

할 때는 노크할 필요 없이 그냥 문을 열고 들어 올 것이었다.



 백준영이 걸음을 멈추고 이승영과  최명규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그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문 앞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문밖에서 인기척은 있었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백준영이  얼굴을 최대한

문 가까이 대고 다시 물었다.



 "응진 형님이세요?"



- 쾅!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충격으로 백준영이 문에 밀려 쓰러졌다.










 소 제 목 : Text 123


 처음 보는 얼굴들이 객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일본어로 말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쓰러졌던 백준영이 덤벼들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남의  방에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치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명규는  거사를 앞두고 필요치 않

은 분쟁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백준영이 손을 쓰는  것을 보고 역시 앞으로

뛰어나가 우두머리 사내에게 주먹을 뻗었다.



- 퍽!



 사내는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내와 함께  온 여섯 명의 일본인들

이 최명규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의  서너 명은 유도를 했는지,  아니면 스모를

했는지 체격이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이승영은 김근태를 방 깊숙한 쪽으로 밀어두고  팔을 걷으며 최명규를 도왔다.

백준영은 행여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객실 문을  잠그고 싸움에 끼어 들

었다. 세 명 대 일곱 명의 격전이었는데 좁은  곳에서 싸우려니 제대로 된 실력

발휘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최명규 쪽이  잘 싸웠으나 일본 청년들  중 세 명이

칼을 뽑아들자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방 한쪽에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김근태는 스탠드를 들어  비틀거리고 있던

한 일본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스탠드의 전구가 깨지면서  곧 그 일본인의 머리

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때, 잠궜던  방문이 활짝 열리며 일단의  무리들이 더

뛰어들어왔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호텔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문을

열고 나서 곧 사라졌다.



 최명규와 이승영은 일본인들이 더 들어오자 상황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고 느끼

면서도 공격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승영은 자신을  찔러오는 칼 하나를 피

하며 상대방의 턱을 올려치자 적은 턱을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공

중을 날아다니며 발길질을 하던 최명규가 입구를 슬쩍 쳐다보니 새로 들어온 일

본인들은 싸울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이상한 분위기에 싸움이 중단되었다. 처음

에 들어왔던 일본인들도 싸움을 멈추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좁은 호텔방 안에서 십 수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졌다. 다시

방문이 열리면서 콧수염을 한 사내가 넘어지듯 쫓겨 들어왔다.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최명규가 그가 30분전 같이 라면을 먹던 가네무라의 부하임을 알아보

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콧수염 사내는 말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콧수염 사내의 뒤를 따

라 들어온 남자는 마흔 살 정도의 나이에 위풍당당해  보이는 체격을 갖고 있었

는데 그는 발로 콧수염 사내의 옆구리며 등을 몇 번이고 걷어찼다.



 그가 일본어로 먼저 들어왔던 일본인들에게 몇 마디  하자 그들의 표정이 굳어

졌다.



 "최명규 씨가 누구지요?"



 이번엔 우리말로 물었다. 최명규가 나서서 자신을 밝히자 그 체격 좋은 남자는

자신이 가네무라라며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악수를 하게 된 최명규는 얼떨떨

한 표정이었다. 이름을 안 지는 오래되었으나 직접 대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

다.



 "최명규 씨, 반갑습니다만 죄송하게 되었소. 급히  여기를 뜨시는 것이 좋겠는

데요."



 자신을 가네무라라고 소개한 남자는 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 제 목 : Text 124


 "최명규 씨를 돕겠다고 한 것이 도리어 힘들게 만들었으니 사과하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최명규의 물음에 가네무라는 콧수염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이 요시이 애들과  친하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최명규  씨하고 헤어진

뒤 요시이 쪽에 알려준  모양이더군요. 요시이라면 아시겠지요.  히라타의 하부

조직이니까..."



 "그렇다면 이미 이야기가 새어나갔다는 뜻입니까?"



 어느 새 들어왔는지 얼굴이 상기된 이광혁이  크게 물었다. 유정후가 호시노의

손에 죽었고 호시노가 요시이  구미의 조직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네무라의 대답이 없자 이광혁은 그의 옆을 지나면서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곧장 바닥에 앉아있는 콧수염의 사내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접은 채로

앉았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콧수염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콧수염 사내는 곧 의식을 잃고 길게 뻗었다.



 "저 야쿠자들은 요시이 구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소. 만약 그들이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좀 더 윗선을 보냈을  텐데....아직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아닌 것 같소만...."



 가네무라와 함께 온 사람들 중 한 명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최명

규에게 말했다.



 "최근 요시이 구미는 자잘한 공격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오늘 일도 평소와 비

슷한 도발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아직 히라타 전 조직에  알려진 것 같지는 않습

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빨리 피하는 것이 좋겠군요."



이광혁와 같이 돌아온 김응진이 말했다.



 "그렇지."



최명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 친구들은 우리가 몇 일 데리고 있겠습니다. 되도록 손을 빨리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네무라가 요시이 조직원을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가네무라

가 데리고 온 사내들이 요시이 조직원들의 손을 끈으로  묶은 다음 입에 테이프

를 붙였다. 요시이 조직원들은  고분고분하게 몸을 내맡겼다.  그들은 야마구치

구미와 손이 닿아있는 가네무라를 무서워했다. 각자 싸워서 죽거나 다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행여나 요시이 구미가 야마구치 구미와 싸우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조직에 큰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라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일곱 명의 요시이 조직원들이 줄줄이 끌려나갔다.  이 호텔은 가네무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지 호텔 복도에는 아무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거 최명규 씨에게 드려라."



 가네무라의 말에 옆에 있던 수행원 한 명이 큼직한  가방 두 개를 들어 최명규

앞에 내려놓았다. 가네무라가 계속 말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준비했소.  우리가 직접 나서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이중은 씨의 일은 정말 안됐소.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건투를 빌겠습

니다. 밖에 차를 준비해 놓았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고 가능한 한 일은 빨리

시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최명규가 무어라 인사도 하기  전에 가네무라는 말을 마치고  수행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최명규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광혁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아닙니다. 빨리 여기부터 뜨지요."



 이광혁이 가방을 챙기며 대답했다.










 소 제 목 : Text 125


   2000년 2월 24일. 목요일. 오후 6시 10분(영국시간)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꼭 이렇게 가야 하나? 우리 조직이 곧 손을 쓸텐데..."



 "안가고 후회하는 것보다 가서 후회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왕메이린이나 잘

부탁해. 성공하게 되면 바로 돌아올 테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잘 생각해보지."



 "꼴 보기는 싫었지만 자오이와 시랭은 너뿐만 아닌 나의 친구였다는 것도 생각

해."



 "알겠네. 결심을 꺾을 수는 없겠군. 조심해서 다녀오길 바라겠어."



 "그럼."



 짙은 선글라스의 청년이 멀어지자 리지펭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지펭

은 생각했다. '한국에는 저렇게 멍청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일

까? 그래서 우리  중국인들이 한국 땅에서는  제대로 발붙이지 못하고  사는 걸

까?'



 청년은 일본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여권을  내밀었다. 비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흔쾌히 있다고 대답했다. 15일 짜리의  단기체재 비자였다. 여권에 찍혀있

는 이름은 리우데산(劉德山)으로 되어있었고, 이미 한 번 일본에 체류한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리우데산이라는 홍콩 남자는  카오룽(九龍)의 빈민가에

살고 있으며, 소아마비를 앓아 외국은커녕 집밖에도 나가기 힘든 청년이었다.





 2000년 2월 25일. 금요일. 오전 10시(일본시간)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홀리데이 인(Holiday Inn) 호텔 1층의  맥도날드에서 다카노천(高野川)을 바라

보며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최명규는 복수심에 불타 몸을 떨었다.



 조직의 원수들이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히라타  구미의 본가가

있는 야마바나(山端)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까운 만큼 위험도 뒤

따랐기에 최명규는 평소와는 달리  안경도 썼고, 수염도  달았다. 가네무라에게

부탁한 것들이었는데 이 때문에 최명규의 외모는 아무리 젊게 보아도 40세 이상

으로 보일 정도로 변장 효과가 좋았다.



 잠시 후, 객실에서 내려온  이광혁과 이승영, 백준영이 커피를  들고 최명규의

앞에 와서 앉았다. 김응진과 김근태는 어제 서울로 떠났다.  그 두 사람은 아직

치료가 필요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을 이광혁이 억지로  공항으로 보냈

고, 출국 게이트까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작전은 오늘 저녁부터였는데 계획은 두 가지로  꾸며 놓았고 의외로 간단했다.

한 가지는 히라타 본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  하나를 타고 본가까지 침투해

막바로 7대목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적은 인원으로서는 최상책이었지만 7

대목이 어느 건물에 있는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광

혁이 내놓은 계획으로 정문으로부터 들어가  때려부수자는 것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모한 계획이었으나 어쩌면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또한 그만큼 이광혁이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한광택이 보내준 히라타 구미에 대한 정보에는 본가의 건물 배치까지는 나와있

으나 어느 것이 무슨 건물인지까지는 나와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전적으로 최명

규의 기억에 의존해야했다. 하지만 저녁 늦은 어두워진  시간에 한 번밖에 보지

않은 건물을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밖에 나가지 않고  호텔에만 눌러 있으면 의심

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들은 점심때를  이용하여 야마바나 근처까지 걸어

가 보기로 했다.





  2000년 2월 23일. 수요일. 오후 4시 30분(일본시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혹시라도 입국심사관이 어려운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걱정하던 김

도현에게 입국심사관은 한마디의 질문 없이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미스터 리데우산?"



 세관검사를 마치고 나와 입국 로비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김도현에게 동양

인이 다가와 물었다. 영어였다. 잠시 자신의  이름을 잊어먹은 김도현이 맞다고

대답하자 그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김도현과 동양인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소 제 목 : Text 126


 밴에 올라탄 김도현은 동양인으로부터 몇 가지  주의를 받았다. 요코하마의 차

이나타운에서 왔다는 그는 리지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14-K의 일원

으로 김도현이 부탁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왕메이린의 아버지 왕타이렌의 요청에 홍콩14-K의 보스  장홍타이는 수명의 킬

러들을 오사카로 파견했다. 도쿄의  신주쿠를 지배하고 있는 중국인  킬러들 중

최 정예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몇 일 전부터  교토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

었다. 14-K의 정보망은 세세한  곳까지 미치고 있어서 그들은  최명규와 이광혁

일행이 홀리데이 인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 경에 히라타 구미를 급습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최명규 일행이 급습

에 실패했을 경우 경비가 강화될  것을 감안하여 14-K는 최명규  일행이 싸움을

시작했을 때 같이 끼어 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야쿠자나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될 경우 14-K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입밖에 꺼내

지 말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김도현은 커다란 가방 한  개를 받아들고 차에서 내

렸다.



 김도현이 공항의 도착 로비로 나와 교토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려고 에스컬

레이터에 올라타 있을 때였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입국 도착문이 열

리면서 어디서 본 듯한 사람 둘이 눈에  띄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높이 올라갈수

록 자세히 볼 수 없게 되자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 김응진

과 김근태라는 것을 기억해 내자 김도현은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뛰어 내려왔으나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000년 2월 25일. 금요일. 오후 8시.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광혁은 나갈 준비를 하면서 일행 중 한 명이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까 오후 두  시에는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응

진과 김근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두 사람은 원수는  살아있는 동안 천천히 갚

아도 늦지 않는다며 몸조심하라는 말을 수 없이 반복했다.



 문이 열리며 최명규가 들어왔다. 40대의 관광객  차림으로 주머니가 잔뜩 달린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아무도 그 주머니들 안에  수십 개의 작은칼이 들어있으

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이승영과 백준영도  마찬가지로 주머니가 많은

윗도리를 입고 나타났다. 바지는 움직이기 편하도록  운동복으로 입었으나 구두

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신어 좀 우스꽝스러운 복장이었다.



 최명규는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하다며 거절했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가네무라

가 구해 준 보호 조끼를 입었다. 일종의 방탄  조끼였는데 그 중에서도 얇은 것

이었다.



 "모두 준비 됐나?"



최명규가 물었다. 세 사람은 대답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이광혁이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호텔의 체크아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걸어

서 5분 거리인 이즈미야 슈퍼마켓과 미스터 도너츠 가게를 지났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백준영은 배가 고팠다. 이광혁이나 최명

규 모두 저녁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승영도 배에 음식물이 차

면 몸이 무겁고 졸음이 올지 모른다며 일이 있는  날에는 식사를 조금만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소 제 목 : Text 127


 네 사람은 에이잔 전철을 이용해서 다카라가이케 역까지 세 정거장를 갔다. 다

리를 건너 다카노 천을 지난  후 다카라가이케 어린이 낙원에서부터  천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히라타 구미의 본가는 야마바나의 히가시 산과 다카노  천 중간 지점에 있었는

데 앞에는 개천이, 뒤에는 해발 200미터의 히가시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침투가

쉽지 않았지만 경비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이들은 개천을 따라 내려오다 아무

도 지나는 사람이 없자 최명규의  지시를 받고 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히라타 구미의 본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이들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히라타 구미의 사유지임을 알리는 철책선  앞까지 다가갔다. 시간은

오후 9시를 지나고 있었다. 아직 여유가 있었으므로 땅을  파고 들어가 몸을 숨

겼다.



 옷은 두껍게 입었지만 아직 추운 겨울 날씨에다가  산중이라 더욱 몸이 떨려왔

다. 이승영이 작은 위스키 병을 하나 꺼내어 이광혁에게  주었다. 한 모금 마신

이광혁이 돌려주자 이승영은 벌컥벌컥 마신 후, 백준영에게 건넸다.



 "형님이 다 마시면 어째요!"



병을 입에 가져갔던 백준영이 투덜거렸다. 위스키 병  안에는 술이 거의 남아있

질 않았다. 이때 최명규가 손을 입에 댔다.



 "쉿!"



 멀리서 빛이 다가왔다. 철책선을 따라 순찰을 도는 히라타 조직원들로 보였다.

대형 랜턴을 들고 있는 이들 두 사람 외에  경비견도 한 마리 있었다. 최명규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광혁을 쳐다보았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다면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겠지만 개의 이목까지 속이기는 힘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최명규는 칼 세 자루를 꺼냈다. 두 명의 조직원과 경비견을 죽이

고 나면 곧 발각될 것이었다. 침을 삼키고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50M

쯤 다가왔을 때 돌연 빛이 사라졌다. 최명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길! 걸렸나?'



 최명규 일행은 숨소리마저 최대한 줄이고  눈을 크게 뜬 채로  사방을 살폈다.

랜턴의 빛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들의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약 30분간을

식은땀을 흘리며 기다려보았으나 아무 기척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최명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네요."



 이승영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녀석들 그 자리에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추운데요? 그냥 돌아간 게 아닐까요?"



 "으음..."



 "그럼 걸리지 않은 것으로 믿고 시작하자."



 최명규가 살금살금 다가가 철책선을 살펴보았다.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철책

은 자르거나 넘으면 바로 경보음이  울릴 것 같았다. 철책선  아래를 파자니 몇

시간이 걸릴 지 몰랐고 뛰어 넘자니 너무  높았다. 최명규가 이광혁을 돌아다보

자 그는 실실 웃으며 철책을 받치고 있는 받침목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뚝 부러

지는 소리와 함께 철책이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고 이광혁

은 태연히 쓰러진 철책을 밟고 히라타 구미의  본가 안으로 들어갔다. 이승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광혁을 따라 들어갔고 최명규는  이광혁의 배짱에 혀를 내

둘렀다. 백준영은 최명규마저 들어오자 철책을 바르게 세워놓았다.










 소 제 목 : Text 128


  2000년 2월 25일. 금요일. 오후 11시.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공수사단 708특수 임무대대는 대대원 대부분이 하사관이었고 사병은 많지 않

았는데 그 사병들도 육군의 각  보병 사단에서 이름난 특등  사수들을 차출하여

데려온 것이었다. 이 저격병 대대에서 지난 2년간 한  번도 저격왕 자리를 놓친

적이 없던 인물은 직업 군인이 되라는 장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석 달 전 병장

으로 제대해 버렸다.



 검은색 마스크로 위장한 김도현은 가장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세 시간이나 히

가시 산 중턱을 맴돌았다. 산꼭대기 근처에는 히라타 구미 본가의 전경이 한 눈

에 들어오는 곳도 있었지만 너무 트여있어서 발각되기에도  쉬울 것 같았다. 지

금 찾은 이 자리는 히라타  본가의 2/3 정도만 보이는  자리였고 나머지 부분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격은, 단 1초만에 임무가 끝날 수도 있지만 저격병끼리의  승부 등, 때에 따

라서는 수십 시간이나 한 자리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도현

은 춥다고 느끼면서도 한국의 겨울에 비하면 따뜻한 봄 날씨라고 스스로 위로했

다.



 별빛을 4만 배로 증폭해 볼 수 있다는 스타라이트  스코프에 눈을 붙여 사방을

살펴본 김도현은 히라타 구미 본가의 경호 인원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들은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도 건물 곳곳에 배치되어 지키는 중이었다.



 공항에서 얼핏 본 김응진의 모습에 오늘은 히라타  구미와 싸우지 않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한 두 시간 전  그는 스코프를 통해 일어난  광경을 보았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순찰 중인 것 같은 두  명의 남자와 개 한 마리의

모습이 스코프 안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놀란 그는 스코프의 광량(光量)을 증폭

시켜  보았는데 두 사람과 개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 이광혁 일행이거나

신주쿠에서 파견했다는 14-K 킬러들의 솜씨일 것이었다.



 김도현은 빵을 하나 물어들고 가방에서 레이저  거리 측정기와 소총을 꺼냈다.

미국 콜트사의 M16으로 훈련병  시절에나 만지던 것이지 별로  좋아하는 기종은

아니었다. 저격병 시절에는 한국군이 몇  정 가지고 있지 않다는  독일 H&K사의

MSG90을 주로 사용했었기에 김도현으로서는 손에 익은 이 모델을 구해주길 바랐

지만 14-K로서도 짧은 시일 안에  전문 저격용 총을 구해주는  것은 무리였다고

했다. 그래도 값비싼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가져다 준 것은 뜻밖이었다. 야간에

영점도 맞지 않은 소총을 쓰려면 거리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 편이 좋았다. 구하

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전을 찾아가며 부탁했던 것인데 가방 안에 들

어있었다.



 스위치를 넣고 버튼을 눌러 거리를 쟀다. 5미터  단위로 측정되는 계기판에 가

까운 곳은 230미터, 먼 곳은 445미터라고  표시됐다. 김도현은 20발들이 탄창을

꺼내 M16에 장착했다. 소음기를 끼우고 스코프를 단 그는  소리 나지 않게 빵을

먹어가며 스코프를 통해 히라타 구미 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본가 안을 순찰 중인 여러 표적들에게 번호를  매겼다. 북한과 싸우기 위

해 배운 이런 기술들이 일본인들을 향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스코프 안

에서 7-8개의 표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잘못해서  이광혁 일행이나 14-K의 조

직원들을 쏘게 될까봐 김도현은 표적들의 모습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2000년 2월 25일. 금요일. 자정.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철책선 넘어 약 50미터를 지나 온 최명규는 멀리 개 한 마리가 매여져 있는 것

을 보았다. 경비견은 아닌 것 같았고 애완견이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컸다. 아직

짖지는 않았지만 작은 개라도 짖게 된다면 귀찮게 될 것이었다. 거리가 멀어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칼 하나를 꺼내어 약간 높게 날렸다. 쉭! 하

는 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개가 픽 쓰러졌다.  백준영이 소리는 내지 않고 박

수 치는 시늉을 했다.










 소 제 목 : Text 129


 히라타 본가 정문 앞의 건물 안으로 어려 보이지만 키가 훤칠한 사내가 들어갔

다. 미야자키 고문의 막내아들로 본가에서 극도(極道) 수업을 받고 있는 청년이

었다.



 "외곽 순찰 나갔던 후쿠다와 모토키가 돌아오질 않습니다."



경호책임 사사키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뭐야? 얼마나 지났나?"



 "예, 평소라면 한 시간 전에는 돌아왔어야 하는데...."



 "바카야로! 당장 확인해봐!"



 "제가 가보겠습니다."



 사사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낮에  요시이 조장으로부터 받은 전화에

서 요시이 구미의 조직원 일곱 명이 동시에 없어졌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

어 신경이 쓰이는 참이었는데 후쿠다와 모토키마저 돌아오지 않다니. 그러나 다

행인 것은 어제 히라타 조직의 정례회의가 있던 날이라 수행원들을 대동한 산하

조직장들의 반 이상이 본가에 와 있었기에 평소보다는 조직원들의 수가 많았다.

불현듯 사사키의 머리속에 일주일전 죽은 이중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야붕의

허리를 안고 쓰러졌던 그는 오야붕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피투성이를 만드는 분

전을 했으나 결국 오야붕의 칼에 목이 뎅겅 잘리고 말았다. 잘린 머리는 사사키

앞까지 굴러왔는데 눈을 부릅뜬 채였다.



 산하 조직장들이 데리고 온  수행원들을 깨울까 말까 망설이던  사사키는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정문 옆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야자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 * *



 "형님 저 새끼 들어갔습니다."



 "쉿! 목소리 낮춰라."



주위를 둘러보던 이광혁은 상당히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을 발견해냈다. 그 앞에

는 유리창이 검정 색인 벤츠가 십 수대나 도열해  있었다. 두 명의 야쿠자가 가

옥 앞에서 두툼한 외투를 입고 지키고 있었다.



 "저 건물에 있을까요?"



 "모르겠는데?"



 나무 뒤에 숨어있던 이광혁과 이승영은 뒤를 보며 오라는 손짓을 했다. 최명규

와 백준영이 허리를 낮추고 빠르게 뛰어왔다.



 "저 건물일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앞에 차가 많아요. 헙"



 최명규가 급히 이승영의 입을 막았다.  멀리서 가옥을 향해 네  명의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오고 있었다. 최명규 일행은 몸을 더욱  낮추었다. 네 명의 여자

들은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가옥 앞을 지키고  있던 야쿠자들이 여자들의 엉덩

이를 쓰다듬으며 들여보냈다.



 "두 명이 지키고 있고 여자들이 들어가는 걸 보니 누군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

데...?"



 "들어가 볼까요?"



                                   * * *



 김도현의 스코프에 한 사람의 인영이 들어왔다.  양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이광혁 일행도, 14-K 조직원들도 아닐 터였다. 그 인영은 아까 두 명이 순찰 중

이었다가 쓰러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스코프 안의 사람이 화들짝 놀

라며 뒷걸음질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는 것을 보고 김도

현은 방아쇠를 당겼다. 영점을 맞춘 총이 아니었으나 이 정도 거리라면 자신 있

었다. 어깨를 치는 둔탁한 반동과 함께 쓰러지는 표적이  보였다. 그 표적은 쓰

러진 후에 엉금엉금 기었다. 김도현은 스코프의 광량을 높이고 자세히 보았다.



 '약간 우탄(右彈) 났군.'










 소 제 목 : Text 130


 김도현은 기고 있는 표적의 심장보다 조금 왼쪽을 향해  다시 한 발을 쏘았다.

두 번째 총탄에 맞은 표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저격 후 바로 자리

를 이동하도록 배웠으나 그대로 눌러있기로 했다. 그의 스코프 안에 꾸물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광혁과 이승영의 모습이

보이고 최명규도 보였다. 본가를 지키고 있는 야쿠자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아직

본가에 대고 총질할 수는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상황을 봐서 화력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 * *



  달빛에 날이 살짝 빛나는 비도(飛刀) 두 개를 꺼낸 최명규는 한 번에 한 개씩

있는 힘을 다 해 던졌다. 목을 향해 던지면 비명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

만 칼이 빗나가게 될 확률도 높았다. 다행스럽게도 두  명 모두 작고 짧은 비명

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칼을 쓸 줄 모르는 이승영의 눈에

는 최명규가 한없이 신기해 보였다. 그는 감탄하면서 가옥의 문 앞까지 몸을 날

렸다. 쓰러진 두 명의 야쿠자는 벤츠 사이에 끌어다놓았다. 이광혁의 눈짓에 백

준영과 최명규는 가옥 주위를 한 바퀴 살펴보았다. 쓰러진  두 명 외에는 더 지

키는 사람이 없었다.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대 여섯 명의 나이든 야쿠자

들이 기생을 옆에 두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안이 더웠는지  야쿠자들 중 두

명은 훈도시 차림이었는데 배가 많이 나와 추하게 보였다.



 이광혁이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고 구두를 신은  채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이광혁을 발견한 기생 한 명이 놀라 술잔을  떨어뜨렸다. 다들 놀라 북적거렸으

나 이광혁에 뒤이어 최명규가 칼을 보이며 들어섰기 때문에 소리는 지르지 않았

다. 하지만 나이든 야쿠자들은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곧 평정을 되찾고 의젓하게

물었다.



 "오마에라와?(네놈들은?)"



 이광혁이 최명규를 돌아보았다. 이  중에 7대목이 있냐는  뜻이었다. 최명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들은 산하 조직의 조장들을  따라온 수행원들 중 부조장

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최명규가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대

답이 없자 훈도시 차림의 한 40대 야쿠자가 호기 있게 일어났다. 지원을 요청하

려는 의도로 큰소리로 물었다.



 "나니 모노다?(웬 놈들이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광혁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입을 막으려는

의도로 내뻗은 주먹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기생들의 입에서 더 큰 비명이 터져 나

왔다. 야쿠자 한 명이 자신 앞에 놓여져 있는  작은 상과 식판을 엎으며 일어났

고 다급해진 이광혁은 그에게도 주먹을 퍼부었다. 기생들의 비명이 그치질 않았

다. 이러다가는 복수는커녕 7대목을 보기도 전에 잡히거나 죽게될 것이었다. 최

명규는 칼 네 개를 꺼내  한 번씩 던졌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이광혁에게 맞아

쓰러진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목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겁에 질린 나머지

기생들의 비명이 멈추었다.



                                   * * *



 도리야마 조장의 아내 도리야마 사치코는 여걸 중의  여걸로 관서 지역의 야쿠

자 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오사카의 명문인 텐노지

고등학교 출신으로 여고생 폭주족의 리더였으며 고교  시절 자신보다 예쁜 얼굴

의 여학생은 그녀가 내뱉는 면도칼에 상처를 입기  일쑤였다. 항상 구멍이 송송

뚫린 검정 색 가죽 마스크와 자전거 체인을 온 몸에 감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했

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면도칼이 떠나본 적이 없다는 말도 있었다.



 나중에는 근처 남자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하수가  되기를 원했다. 사치코가 적

수를 만난 것은 고교 졸업 후 교토로 놀러 왔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남자 고등

학생 무리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그녀의 면도칼과 체인이 춤을  추자 열 명 가까

이 되는 고등학생들이 모두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체격이 큰 고등학생 한 명만

남았는데 의기 양양하게 돌아서던 그녀를 번쩍 안고 내팽개친 그 학생은 얼굴에

상처를 입어 가면서도 사치코를 범했다. 난생 처음 당하는 일에 놀란 그녀는 일

단 오사카로 돌아갔다가 무리들을 이끌고 복수하러 왔으나 번번이 체격 좋은 고

등학생에게 당하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싸움이 끝나면 그  고등학생은 꼭

사치코를 능욕했고 다섯 번째 찾아가서도 복수에 실패하자 그녀는 더 이상 싸우

는 것은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몸을 주러  가는 것 같아 포기했다. 그

리고 나중에는 그 고등학생과 결혼했다. 그 남자가 도리야마 조장이었다.



 사치코가 방에서 비치는 모습을 보니 다들 일어나 있는  것이 이상했다. 네 명

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남편의  부탁으로 심복 야쿠자를 부르러  오는 길이었

다. 발걸음 소리를 줄여 미닫이문을 살짝 열자 처음 보는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

고 기생들의 벌벌 떠는 모습도 눈에 비쳤다. 갑자기  그녀에게 20여 년 전의 용

기가 솟았다. 미닫이문을 열면서 꺼낸 면도칼로 문 앞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사내의 등을 긋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 제 목 : Text 131


 "아아악!"



 방안이 떠나갈 듯한 비명을 듣고 최명규와 이광혁은 한 걸음씩 물러나 벽을 등

지고 섰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두 사람은 야쿠자들의 시체가 모여있는 앞쪽 대

신 뒤쪽에서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승영이 몸

을 돌리자 그제서야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자가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등에 길다란 고통을 느낀 이승영이  뒤돌아 본 것은 실수였다.  싸움에 경험이

많은 최명규나 이광혁이라면 앞으로 뛰어나간 후 뒤돌아보았을 테지만 이승영은

그냥 뒤로 돌았기 때문에 이번엔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배까지 이어지는 긴

자상(刺傷)을 입고 말았다.



 눈앞의 여자는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을 뿐인데 이승영의 온 몸에서는 피가 솟

구쳤다. 배에서는 피와 함께 장(腸)까지 살가죽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순간적

으로 '좆됐다.'고 느낀 이승영이 뒤로  물러섰지만 더 이상 서  있을 힘은 없었

다.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백준영이 달려들다가 그녀가 이승영에게 더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멈춰 섰

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이광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승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형님, 괜찮으신가요?"



 "저년이나 빨리 죽여라. 큭!"



 최명규나 이광혁이나 누군가가 다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

런 적진에서 다친 사람을 챙겨준다는 것은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 구

해내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승영을 흘끔 쳐다본 이광혁이  일본 여자 앞에 나

서려는 것을 최명규가 손을 들어 막았다.



 배짱 두둑한 사치코는 소리를 질러 응원군을 부르겠다는 의도는 처음부터 가지

고 있지 않았다. 이들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토록 시

건방진 녀석들 네 명쯤이야 한 손으로 끝내고  나서 남편과 7대목으로부터 칭찬

을 들으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최명규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활동하기

불편한 기모노 상의의 왼쪽 어깨를 내렸다. 그  바람에 젖가슴과 어깨에 그려진

문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요대(腰帶)에서 나무로 만든 칼  한 자루를 꺼내 들었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사치코였으나  상대는 한국 최고의 칼

잡이로 이름높은 최명규였다. 그는  상대의 칼이 단지 눈속임에  불과하고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손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두 사람이 맞붙었다 싶

었는데 어느 새 사치코는  문밖을 절룩거리며 뛰어 나가고  있었다. 임기응변에

빠른 그녀는 상처를 입자마자 도망친 것이었다. 백준영이 뒤쫓으려고 했으나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귀 옆을 스치며 공기를  가르는 최명규의 비도는 사치코

의 등을 향해 쏘아졌고 그녀는 정원에 쓰러졌다.



 "선배님,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백준영의 감탄에 최명규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내가 아닌데..."



 "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아무 것도 아니다."



 방안에 있던 이광혁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생들의 옷을 벗겨 몸을 묶은 다음

이승영의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를 지압했다.  이승영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모양이었다. 형님께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 * *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쏘아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던 김도현은 잠시 후, 그녀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방아쇠를 당겼

다. 미야자키를 상대로 영점 조준을  마친 M16의 5,56mm 총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본 여자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소 제 목 : Text 132


 신경이 곤두서 있던 사사키는 정원에서 나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순찰 나간

두 명의 부하들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데다 찾아오라고 보낸 미야자키도 함흥차

사였다. 불길한 예감에 오야붕의 거처를 경호하는  선임조직원 우에하라에게 전

화를 걸었다.



 "우에하라, 그쪽에서는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어, 사사키인가? 난 듣지 못했는데?"



 "7대목께서는 아직도 연회 중이셔?"



 "응. 도리야마 조장이 좀 취한 것 같아.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사사키는 조금 뜸을 들인 다음 거짓없이 말했다.



 "우리 애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 그리고 정원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여

기는 인원이 없네. 자네가 가까우니 가 봐 주겠어?"



 "그러지. 또 연락함세."



 수화기를 내려놓은 우에하라는 두 명의 야쿠자를 불렀다.



 "어이, 쇼켄! 이치로! 잠깐 일어나지."



                                   * * *



 옆 건물을 찾아 뛰어갔던 이광혁 일행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문을 열어

보았으나 아무도 없는 것에 실망했다. 이제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므로 되도

록 빨리 7대목을 찾아야했다. 여태까지 왔던 것과는 반대편으로 100미터쯤 떨어

져 있는 곳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건물이 보였다. 그곳은 최명규가  1월에 가

본적이 있던 연회장이어서 처음부터 가볼 계획이 없는 곳이었지만 이 늦은 시간

에 불빛이 비치니 의심스러웠다. 최명규가 말했다.



 "저기 불빛 나오는 데까지 뛰자."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광혁과 백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명규가

먼저 달려가고 두 사람이 뒤를 따라 뛰었다. 중간쯤 뛰어온 세 사람은 정원에서

세 사람의 야쿠자들과 맞닥트렸다. 부산까지 갔었던  우에하라가 최명규를 알아

보았다.



 "최상!"



 일단 아는 척은 했지만 얼마 전 최명규가 모신다는 사람이 이곳까지 와서 맞아

죽은 일이 생각났다. 양팔을 뻗어 쇼켄과  이치로에게 물러서라는 손짓을 했다.

밤늦은 시간에 조직의 본가 내를 뛰어다니다니 필시 좋은 감정으로 나타났을 리

는 없다고 생각했다. 쇼켄과 이치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니모노다!(뭐하는 놈들이냐?)"



 "사사키 상! 사사키 상!"



 최명규와 이광혁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복수의 길은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백준영이 우에하라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

리며 외쳤다.



 "형님,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매한가지인데 싸우다 죽읍시다!"



 갑자기 날아온 주먹에 우에하라가 황급히 뒤로 피했으나  백준영이 두 번째 주

먹을 날리자 우에하라는 발을 길게 뻗었다. 백준영의 팔은 우에하라의 다리보다

짧았기에 얼굴을 강하게 맞은 백준영이 내던져진  개구리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우에하라는 발에 힘을 주었다. 백준영의 얼굴은  바닥에 박힌 채로 짓이겨졌다.

최명규가 구해내려 하자 우에하라는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취하

면서 발에 힘을 주었다. 백준영은  이를 악물고 신음이 삐져  나오는 것을 참았

다. 최명규는 시랭의 발에 밟혔던 박정상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가?"



 경호 책임의 사사키가 다섯 명의 부하를 이끌고 왔다.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우에하라가 한국인들이  침입했다고 말하자 사사키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입을 꽉 다문 최명규가 뭔가 생각해낸 듯 마주보고 있던 우에하라를 피해 옆으

로 두어 걸음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있던 이광혁을 반대편으로 슬쩍 밀었

다. 이광혁도 두 걸음 정도 옆으로 옮겨가자  의기 양양하던 우에하라의 가슴에

서 피가 터지며 휘청거렸고 백준영이 벌떡 일어났다.










 소 제 목 : Text 133


 우에하라가 총에 맞았다는 것을 짐작한 사사키는 빠르게 몸을 움츠렸으나 사사

키를 따라온 야쿠자들 중 한 명의 머리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사사키가 소

리질렀다.



 "모두 엎드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시 한 명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사사키가 재차

외쳤다. 움직일 수 있는 다섯 명의 야쿠자들은 각기  제 살길을 찾아 몸을 숨기

거나 뛰었다. 몸을 낮춰 엄폐물을 찾아 움직이던 사사키의 발에 물컹한 것이 걸

렸다. 확인해보니 도리야마 조장의  부인인 사치코의 시체였다.  눈알이 돌아가

흰자위만 내놓고 있어서 두려움을 느낀 사사키는  사치코의 시체를 던져놓고 최

명규가 가고자 했던 연회장을 향해 뛰었다.



 "저 새끼를 따라가자!"



 최명규가 어리둥절해 있는 이광혁과 백준영의 팔을 잡아끌고 사사키를 쫓았다.

백준영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모르겠다. 누가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아."



 사사키는 이미 모퉁이를 돌아 연회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무엇보

다 오야붕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적이 저격수까지 데려온  것을 보니 단단히 준

비한 것 같았다.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조장들을 위해 사사키는 연회장

의 미닫이문을 박살내며 들어갔다. 조용히 문을 열고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난다? 사사키!(뭐냐? 사사키!)



 마침 물어온 사람은 도리야마 조장이었다.



 "크..큰일 났습니다. 저..적이 쳐들어왔습니다."



 더듬거리는 사사키의 대답에 이케다 조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떤 겁 없는 놈들이 간사이 히라타 구미에 쳐들어온단 말인가? 그렇지 않소?

도리야마 상."



 "그렇습니다. 이케다 상. 그래도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볼까요? 안내해라!

사사키."



 사사키는 이들의 태연함에 아연실색했다. 말장난 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그

는 상을 부수며 연회장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7대목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7대목.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지요."



 사사키의 돌발적인 행동에 약간 취기가 오른 도리야마가 큰 소리를 쳤다.



 "사사키. 무례하구나! 나가서 어떤 놈인지 냉큼 잡아오지 않고!"



 사사키가 발끈했다.



 "도리야마 조장. 도리야마 부인께서 왜 안 돌아오시는지 모르시겠습니까?"



 도리야마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 * *



 김도현의 시야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최명규가 뛰어간 쪽은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김도현은 이동할 준비를 했다










 소 제 목 : Text 134


 사사키가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최명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조심

하라는 한 마디를 하고 부서진 미닫이문을 뜯어냈다.  몸집이 좋고 머리가 짧은

야쿠자 두 명이 가로막았다. 최명규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광혁의 어깨가 흔들

거리더니 야쿠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최명규는  이광혁의 주먹이 야쿠

자들의 몸에 닿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들이 나가떨어져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빠르다고 생각했다.



 연회장 내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사사키는 7대목의  팔을 끌고 자리를 피

하려 했으나 7대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생각보다는 적이 누군지 궁

금했던 모양이었다. 사사키는 적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으나

지금 보니 빈손이라 다소 마음이 놓였다. 경호를 맡고 있는 그는 조장과 고문들

을 물리치고 문 앞으로 나갔다.



 아직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도리야마가 일본말

로 묻고 있었으나 이광혁은 알아듣지 못하고 성큼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

다. 연회장 내의 사람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도리야마 조장, 그들은 한국인들입니다."



 "호오...한국? 그러면 부산 놈들인가...그런데 내 아내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

이지?"



 사사키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저들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만...."



 도리야마는 불과 서른 명의 조직원들을 거느리는 작은 조직의 조장이었으나 그

래도 우두머리다운 모습을 보였다. 몸을 떨며 분노를 참으면서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이광혁에 이어 최명규와 백준영도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이들 세 사람은 연

회장 중앙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최명규가 한  바퀴 돌며 야쿠자들을 노려보

았다. 큰 키에 차갑고 매섭게 생긴 그가 노려보자 움찔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

다. 이케다 조장 옆에 있던 야쿠자 한 명이 허리춤에서 슬쩍 권총을 꺼내려하자

최명규가 놓치지 않고 칼을 날렸다. 작은칼은 정확히  그의 손등을 꿰뚫고 허리

에 박혔다. 그래도 그 야쿠자는  오야붕 앞인지라 신음 소리를  내지 않고 칼을

뽑았다. 총은 아직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총을 뽑으려던 지역 조장들 몇 명이 뜨끔했는지  총으로 가져가려던 손을 멈추

고 머쓱하게 서 있었다. 최명규는 7대목을  알아보았다. 그가 7대목을 쳐다보자

칼을 날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사키가 앞을  가로막았다. 최명규의 발이 올

라갔다. 사사키도 쉽게 상대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이 서른 다섯으로 최명

규와 같은 나이였고 극도에서의 경력도 만만치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히라타 구미에 들어와서 야쿠자 생활을 한 지 18년이  되었다. 그중 5년간은 다

른 조장을 대신해 형무소 생활을 했었고, 3년 전부터는 본가의 경호책임을 맡고

있었다. 일본의 야쿠자는 개개인의 싸움실력보다는 두둑한  배짱과 명석한 두뇌

회전, 경찰, 정계와의 연계력이나 언변 등이 더  중요했다. 아무리 싸움을 잘하

고 몸이 빠르다해도 총과 같은 화력에는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

사키는 실전공수로 유명한 극진공수의  명인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었

다.







 소 제 목 : Text 135


 - 휙!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사키의 수도(手刀)가  최명규의 눈을 향해 날았다.

야쿠자들의 실력을 얕보고 있던 최명규는 적잖이 놀라며 급히 피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거리를 두고 서로의 빈틈을 찾으려 눈을 번득였다. 일순 사사키가

날아오르며 최명규에게 다섯 차례나 연거푸 발 공격을 퍼부었다. 최명규는 뒤로

피하다가 벽에 기대어 섰다. 사람들이 좌우로  피했다. 사사키의 마지막 발차기

는 벽에 맞았는데 그 충격에  나무벽면이 뚫리고 연회장 안에  먼지가 피어올랐

다. 다시 사사키의 발이 올라간 것을 보고 피하려는 최명규의 몸을 누군가가 꽉

붙들었다. 도리야마 조장이었다. 움쭉달싹 못하게 된 최명규의 복부에 사사키의

발이 꽂혔다. 숨이 막히고, 내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넘어왔다. 도리야마가 팔을

풀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만 우세를 점한 것이 아닌데도  사사키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일어서라고 했다. 건방진 모습이었다. 이광혁이 최명규를 부축하려하자 그는 손

을 저었다. 최명규가 힘겹게 일어나 손을 들어 얼굴을 막고는 싸울 태세를 취했

다. 사사키의 손날과 발이 날아왔다. 최명규가 잘 피했다 싶었는데 이번엔 나이

많은 미야자키 고문이 최명규의 등을 걷어찼다. 그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

에 미야자키 고문이 소리내어 웃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이든 미야

자키의 발차기에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우스웠던 모양이었으나  외곽 순찰을

보낸 미야자키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사사키는 웃지

않았다.



 "비겁하다!"



이광혁이 분통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먼저 사사키에게 달려들어 눈부

시게 빠른 주먹을 날렸다. 사사키도 물러서지 않고 발을 들어 공격했다. 그러나

이광혁의 공격은 눈속임이었다. 그는 바로 뒤쪽으로 돌면서 발을 들어 도리야마

의 얼굴을 가격했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도리야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

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자 이광혁은 흠칫했다. 이 정도의 충격

을 받았으면 기절은 하지 않더라도  잠시 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어야 했다.

도리야마가 팔을 뻗어 이광혁을 붙잡고 사사키를 불렀다.



 사사키가 아까와 같이 발을  들어 공격하려는데 부서진 문틈에서  날아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로 사사키의 얼굴과 가슴을 연타하

고 뒤로 물러섰다. 사사키의 얼굴빛이 노랗게 변하며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응진 형님!"



 백준영이 반갑게 외쳤다. 검은색 무복을 입고 들어온 사내는 김응진이었다. 그

는 백준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눈웃음을 쳤다.



 "근태도 오고 있어."



 이광혁이 도리야마의 팔에서 빠져 나오며 그의 턱을 올려쳤다.



 "선배님, 이러다가 우리 여기서  모두 죽겠습니다. 7대목인가 하는  놈을 일단

죽입시다!"



 "좋다!"



 최명규가 7대목에게 달려들자 지역 조장들이 막아섰다. 이광혁과 최명규는 7대

목을 잡으려 난투극을 벌였고 얼굴을 훔쳐 피를 닦아낸 사사키는 김응진이 맡았

다. 나이든 원로들이나 연회장 밖으로 피하려는  야쿠자들은 백준영과 김근태의

몫이었다.










 소 제 목 : Text 136


 히라타 본가에서 제일 가까운 산하 조직은 이케다 구미였다. 이케다 조장은 휴

대 전화기를 꺼내 자신의 폭력단 사무실로 연락했다.



 "어이, 이케야마! 당장 애들 규합해서 본가로 와라! 급히!"



 이케다는 전화를 끊고 권총을  손에 쥐었지만 워낙 아수라장이라  함부로 총을

쏠 수는 없었다. 7대목은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워낙 이광혁과 최명규가 거세게

밀고 들어와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연회장은 넓었지만  들어올 수 있는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7대목은 연회장 상석 바닥을 열고 무엇인가를 꺼내려 했다.



 김응진의 태권도에 사사키의 공수도가 무너졌다. 도리야마는 바닥에 대자로 뻗

어버렸다. 덤벼들던 나머지 야쿠자들은 이광혁과 최명규의 손과 발에 쓰러졌다.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7대목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야쿠자들은 얼마 되지 않

았다. 이광혁이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이케다가 천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 탕!



 그 총성을 듣고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너 명의 야쿠자들도 서둘

러 총을 꺼내 이광혁과 최명규를  겨누었다. 상황이 급반전했다. 지역  조장 중

한 사람인 야쿠시마루가 교활하게 웃으며 권총을  들어 이광혁의 머리를 겨누었

다.



 - 탕!



 권총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총성이  터졌다. 7대목 머리 위의 벽

에 구멍이 뚫리고 연기가 나는 것이 보였다. 연회장 안 사람들의 귀가 멍멍해졌

다. 누가 쏘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연회장 안에서 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안에서 야쿠자들이  들고 있는 권총은 제일  크다하더라도 38구경을

넘지 않았으니 이런 큰 총성이 날 리 없었다.



 - 탕!



 한 줄기 빛이 다시 7대목의  머리 위를 지나가 벽에  구멍을 냈다. 예광탄이었

다. 총을 쏜 장본인이 연회장  밖 정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마스크와

방탄 조끼를 입고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사람

은 김도현이었다. 누군가 야쿠자 한 사람이 7대목과 김도현의 사선 사이에 서자

또 다시 총성이 울리며 야쿠자가 쓰러졌다. 이번에도 예광탄이었다. 김도현이 7

대목의 20미터 가까이 까지 걸어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권총을 꺼내든 야쿠자들은 그 의미를 깨달았다.  김도현의 M16은 언제든지 7대

목의 머리를 박살낼 수 있으니 들고 있는  권총들을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야

쿠자들의 권총은 20미터 밖의 김도현을 쏘아 맞추기 어려웠으며 그런 모험을 하

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야쿠시마루가 권총을 내려놓자 이케다를 비롯해 모두 여섯 정의 권총이 연회장

바닥에 놓여졌다. 총을 싫어하는 최명규가 이를 멀리 차버렸다.



 김도현은 M16을 든 채로 7대목의 앞까지 왔다. 아직  검정 마스크의 사내가 누

군지 모르는 이광혁 일행은 김도현이 마스크를 벗자  탄성을 질렀다. 김도현 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던 최명규는 얼굴을 찡그리며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

며 말했다.



 "고맙네. 자넨 학생인줄 알았더니 우리보다 더한 깡패였군?"



 김도현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최명규가 없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김응진이 반가운 듯  김도현의 옆으로

와서 섰다. 7대목이 뒷짐을 진  채로 주춤거리자 김도현이 총을  치켜들며 말했

다.



 "영화에 보면 악당들을 빨리 죽이지 않다가 나중에  손해보죠. 빨리 죽이고 도

망갈까요? 아니면."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새 꺼냈는지 7대목이 조금 짧은 일본도를

꺼내 휘둘러 김도현이 들고 있던 M16의 총신을 베었다. 쨍강! 하는 소리가 들리

고 손바닥과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 김도현이 총을 떨어트리고 말

았다.










 소 제 목 : Text 137


 김도현이 급히 뒤로 물러섰고 재차 휘둘러오는 일본도에 김응진의 오른쪽 어깨

가 베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김도현이 떨어진 M16을  집으려 하자 7대목이 칼로

바닥을 찔러왔다. 기겁을 한 김도현은  총을 포기하고 뒤로 도망쳤다.  대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최명규와 이광혁이었다. 칼을 든 상대임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이광혁의 주먹이 활개쳤고 최명규의 단도가 춤을 추었다.



                                   * * *



 히라타 본가 정문에서 망원경을 들고 보던 사내가 말했다.



 "차가 오는데요? 지원 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중국어로 말한 사내는 분부를 기다렸다.



 "보스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으니 다 없애자고. 몇 명이나 되지?"



 "승용차 다섯 대입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



 말을 마친 사내는 독일제 경기관총인 MP5에서 탄창을 꺼내어 확인하고 다시 장

착했다. 게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히라타 본가의  경호원으로 위장한 이들은 단

2분만에 다섯 대의 차로 지원 온 이케다 구미의  조직원 스물 두 명을 쓰러뜨렸

다. 히라타 본가의 정문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피와 비명이 뒤범벅되어 차

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중국인들은 이곳을 떠나며 세 명의

시체를 떨어뜨려 놓고 갔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노구치  게이스케. 다른 두 사

람은 노구치 게이스케의 수행원이었다. 어둠에도 불구하고  노구치의 가슴에 달

린 금색의 뱃지가 선명하게 빛났다. 한자로 山口라고 쓰여있는 즉, 야마구치 조

직의 뱃지였다. 노구치 게이스케의 아버지는 야마구치 구미의 핵심 간부인 노구

치 마츠오였다.



                                   * * *



 가슴의 이광혁의 주먹을 얻어맞은 7대목이 비틀거리자  최명규의 칼이 그의 등

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7대목은 용케 피하기는 했으나  등의 옷이 주욱 찢어

졌다. 걸리적거리게 된 옷을 벗어버린 7대목은 조금씩 연회장의 입구 쪽으로 움

직였다. 보다 넓은 곳에서 싸우고  싶기도 했고,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

다.



 자신의 휘두른 칼을 피해 이광혁의 주먹이 또 날아와 턱을 가격했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의 충격이 온 몸에 전해졌다. 이런  놈들에게 당하다니! 7대목이 움직

일수록 몸에서 열이 나 온 몸이 붉게 변해갔다.  등에 새겨져 있는 어린이 문신

의 눈 흰자위 부분은 문신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몸이  붉게 변하자 어린이의 눈

도 붉어지며 그 모습이 점차 괴물처럼 무섭게  변했다. 울긋불긋한 색상의 등을

바라보자니 최명규의 눈이 어지러워졌다. 7대목의 칼이  다시 허공에서 빛을 뿌

렸다. 이광혁이 운 좋게 피하기는 했으나 최명규는  길쭉한 상처를 입었다. 7대

목은 그 틈에 연회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연회장 밖의 김근태가 막아섰으나  7대목이 칼을 들어 찌르자  피하지 못했다.

김근태는 비명을 지르고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백준영이 7대목에게 달려들

었다. 김근태의 배에서 칼을 뽑은 7대목이 백준영의 다리를 베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백준영이 쓰러졌다. 최명규는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7대

목을 향해 칼을 날렸다. 그 순간 최명규의 앞을  막아선 사내가 가슴에 칼을 맞

고 쓰러졌다. 사사키였다. 그의 눈빛은 제발  자신의 오야붕은 살려달라고 애원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광혁이 뒤쫓으려 하자 김도현이 소리질렀다.



 "쫓지 마세요!"



 하지만 최명규와 이광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빠르게 달려나갔다. 7대목

은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연회장 안에는 김도현의 M16 소총이 있었다.

스코프는 깨져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은 그는 바닥에서 소총을 집어들고 연회장  밖으로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7대

목은 이미 30미터 바깥으로 도망치고 있었으나 가늠자를  통해 본 7대목의 모습

은 아무렇게나 방아쇠를 당겨도 맞힐 수 있을 만큼 커다랗게 보였다. 잠깐 동안

이광혁의 모습에 가려서 7대목이 보이지 않았다.



 뒤쫓던 이광혁이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쫓다 조금  뒤 처진 최명규는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한 자루 남은 칼을 날렸다. 달리던 7대목이 뒤를 살짝 돌아보

았다. 빛은 보았지만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머

리가 터지며 피와 뇌수를 쏟아냈다. 이광혁의 주먹이  채 닿기도 전에 최명규의

칼이 이마에 박히면서 같은 시간, 그 자리에 초당 900미터의 속도로 나는 M16의

총탄이 그의 머리를 깨트렸다.










 소 제 목 : Text 138


 7대목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김도현은 몸을 돌려 총구를  뒤로 돌렸

다.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스위치를 단발에서 연발로 변경했다. 20발

들이 탄창에 남은 탄알 수는 10발. 순식간에 열  개의 총알이 한 개의 총신에서

퍼져나가며 권총을 들고 겨누던 야쿠시마루의 몸에 구멍을 냈다. 총알이 떨어져

"철컥" 소리를 내며 노리쇠가 뒤로 젖혀지자 김도현은 재빨리 노리쇠 멈치를 눌

러 아직 총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케다가 권총을 들고 자신을 겨누고 있었지만 김도현은  태연한 척 총구를 들

어 금새라도 총을 쏘겠다는 시늉을 했다. 김도현의  오른손 검지는 방아쇠에 올

려져 있었으나 왼손의 엄지손가락으로는 자신의 방탄 조끼를 가리켰다. 쏠 테면

쏴보라는 뜻이었다.



 다른 야쿠자 한 명이 권총이 놓여져 있는  곳으로 가려하자 김도현은 그쪽으로

도 총신을 옮겼다가 그가 걸음을 멈추자 다시  이케다를 겨누었다. 식은땀을 흘

리던 이케다가 천천히 권총을 발 밑에 내려놓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김

도현은 싱긋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탄창 한 개를 꺼내어 교환했다. 상황을 알

아차린 이케다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굽혀 권총을 집으려 했으나 이미

늦어있었다. M16의 노리쇠를 후퇴전진 시킨 김도현은 방아쇠를 당겼고 이케다는

가슴이 터지며 뒤로 쓰러졌다. 나머지 야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김도현은 총을 들고 어깨를 감싸고 있는 김응진에게  뛰어갔다. 얼마 전 김재수

가 던진 칼에 상처 입었던 김응진의 어깨는 그때보다 더욱 심하게 다쳤다. 김도

현은 김응진을 부축했다.



 최명규와 이광혁이 각각 백준영과  김근태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검은 복면을

한 서너 명의 사람들이 연회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주위의 이상한

기류에 정신을 차린 최명규가 이광혁에게 눈짓을 하고 일어났다. 김도현도 급히

김응진을 내려놓고 총을 들었다. 검은 복면들 중 한 사람이 복면을 벗으며 말했

다.



 "Well Done!(웰 던!)



 김도현이 곧 그를 알아보았다. 후앙바이수(黃白水).  시랭과 자오이, 리지펭의

사부로 총보스인 장홍타이와 왕타이렌의 명령을  받고 온 14-K의 킬러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야마구치 녀석들 세 명  처치한 것 밖에 없는데 미스터  리우가 혼자 다

해치웠군?"



 얼떨떨해 있는 김도현이 자신의  이름이 리우데산인 것을 기억해  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여기를 뜨도록."



 후앙바이수의 말이 떨어지자 중국인 킬러들 중 한 명이 누구 것인지 모를 벤츠

를 가져왔다. 이승영과 김응진, 김근태와 백준영을 태우고 벤츠가 사라졌다. 남

은 최명규와 이광혁, 김도현은 히가시 산으로 뛰어갔다.



                                   * * *



 몇 일전 런던에서 혼자 돌아온 고이즈미는 연회장 옆 건물에서 자고 있다가 총

성을 듣고 몸을 숨겼다. 얼굴에 수십 줄기의 상처를  입은 가와츠와 몇 개의 손

가락이 잘린 모로보시와 함께 자고 있던 그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런던에서 겪

은 일로 인해 공포에 떨던 고이즈미는 혼자 교토로 돌아와 가와츠, 모로보시 등

과 함께 생활하던 중이었다. 다락으로 올라간 고이즈미는  밖을 살폈다. 그는 7

대목과 이케다, 야쿠시마루 조장이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나중에 검정 색의 복면을 쓴 사람들이 오자  고이즈미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복면을 벗은 사람은 틀림없이 2월 17일,  미키 조장을 아파트 7층

에서 떨어뜨린 사람이었다.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그는  이가 딱딱 마주치는 것

을 알면서도 참지 못했다.










 소 제 목 : Text 139


     2000년 4월 29일. 토요일. 오전 12시 20분. 서울시 중구 중앙시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청계 고가에서 내려오던 에쿠스  승용차가 중앙시장 뒤쪽 입구에서  멈추어 섰

다.



 "여기입니다. 형님."



 "알았다. 이 자식들이!"



 승용차 뒷좌석에서 내린 고급  양복 차림의 사내가 중앙시장  안으로 걸어가자

수행원 한 명이 따라붙었다.



 "넌 들어가라."



 "형님, 그래도.."



 "들어가."



 "예."



 30미터쯤 걸어 들어간 사내는 연기가 자욱한 한 좌판 곱창 가게를 바라보았다.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많은 손님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

가 누구를 발견한 듯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환자복을 입은  두 사내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한 사내는 팔이, 다른 사내는  발이 무릎에서부터 잘려져 있었

다.



 오른쪽 팔이 없는 사내는 왼손으로 젓가락 질 하는  것이 서툴었다. 볶은 곱창

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기는 하지만 태반은 테이블  위에 떨어뜨렸다. 발목이 없

는 사내는 두 손으로 곱창을  볶아대며 팔 없는 사내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고 곱창을 집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몇 걸음 더 다가가 이

들 앞에 섰다.



 "엇! 형님!"



 발목 없는 사내가 목발을 떨어뜨리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팔 없는 사내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 자식들 또 병원에서 도망쳤구나!  이런 나쁜 놈들! 아줌마,  여기 잔 하나

주세요."



 양복 차림의 사내가 의자를 끌어  앉으며 주방을 향해 외쳤다.  목발을 집으며

자세를 고쳐 앉은 사내는 자신의 소주잔을 비우고 내밀었다.



 "광혁 형님은 여길 어떻게 아시고 오셨어요? 하여간 귀신이라니까!"



 양복 차림의 사내, 이광혁은 소주를 들이키고 나서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이 자식들 앞으로 한 달은 더 병원에 있어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이고 형님, 따분해서 잠깐 나왔는데 그냥 넘어가시죠. 응진 형님은 안 나오

시겠다는 거 제가 억지로 끌고 왔어요. 자, 한 잔 더 받으시고..."



"아녜요! 준영이가 잠들려고 하는데 제가 잠 안 온다고 끌고 왔어요!"



 세 사람은 소주병을 비우며 꽤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 제 목 : Text 140


     2000년 4월 29일. 토요일. 오후 8시 50분.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장님, 벌써부터 테이블이 꽉 찼는데요. 예약석에도 손님 받을까요?"



 "안돼. 예약석은 놔둬라. 단골은 단골이야. 단골 무시하면 이 장사 못해먹어"



 "예. 알겠습니다."



 보기 드문 호황이었다. 로얄 비치호텔 나이트  클럽의 영업부장 이승호는 지난

2월 최대한 방비를 했음에도 해운대파에게 영업장을 빼앗기고 잠적했었다. 잠적

한지 한 달이 지나자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해운대파가 로얄 비치에서 손떼

고 나가려한다는 소문이었다. 궁금한 나머지 이승호는 꼬붕을 보내 진상을 알아

보았다가 횡재를 하게 되었다. 빼앗긴 로얄 비치 나이트 클럽의 영업권을 단 돈

5억 원에 돌려주고 해운대파가 관리하던 다른 곳의 나이트 클럽 두 개를 덤으로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평생 다시 빼앗으려 들지 않겠다는 조건도 덧붙여

졌다. 자신이 관리하던 영업장을 다시 돌려 받으며 5억 원을 내주기는 아까웠지

만 덤으로 받는 클럽 두  개는 그 값어치 이상 나갔기에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순순히 주었다.



 해운대파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관리 업소들이 모두 헐값에

팔려나갔으며 급기야 사무실 즉, 대양 프로덕션도  간판을 내렸다고 했다. 항간

에는 대양 프로덕션의 직원들이 거액을 받고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소문도 돌았

다.



 되찾은 로얄 비치의 나이트 클럽에는 연일  손님이 들끓었다. 시기적으로 손님

이 많을 때기도 했지만 고맙게도 해운대파가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갈아준 때문

이기도 했다.



 "부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야? 한창 바쁜 시간에..."



 "잘 아시는 분이시라던데요?"



 "3번 룸 비었지? 거기서 기다리시라 해라."



 잠시 후 3번 룸을 찾은 이승호는 낯선 얼굴의  사내에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고, 어딘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사내였다. 선글라

스를 끼고 있는 눈 아래로 긴 칼자국이 목까지 나 있어서 주먹계의 사람인 것은

분명했으나 한 번도 이런 용모의 사람과 통성명을 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궁금

했다.



 "이승호 씨 오랜만입니다."



 "저..누구시더라?"



칼자국의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최명규였다. 이승호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최...최명규! 어...어떻게?"



 "놀라지 마시지요. 자리에 앉으시면 빨리 이야기를 끝맺겠습니다."



이승호는 누가 더 오지  않았나 문을 바라보며 쭈삣쭈삣거렸다.  그가 의심쩍은

눈초리로 의자에 살짝 걸터앉자 최명규가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우리 해운대파는 정리됐습니다. 이곳 나이트 클럽 영업권을 5억에

인수해서 우리  체면 살려준  것, 고맙다는  인사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자, 여

기..."



최명규는 두툼한 봉투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무기명 CD 5억입니다."



이승호의 입이 벌어졌다. 5억 원을 도로 돌려준다니...



 "아니...이..이걸 왜?"



 "우리 해운대 파는 이제 없어졌으니  더 이상 묵은 감정  없애는 걸로 합시다.

로얄 비치 나이트야 원래 우리도 한 번 손에  넣었던 것이라는 거 아시지요? 그

래도 최근 몇 년간 이승호 씨가 관리하던 것이니  우리도 인정하고 깨끗하게 물

러서겠습니다."



 이승호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최

명규의 이름만 가진다면 부산 지역을 넘어 전국 규모의  조직을 만드는 것은 어

린애 팔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제  그런 상대에게 영업장을 빼앗

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전에 주신 나이트 두 곳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맡고 계시다가 나중에 주세요. 그럼..."



최명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룸을 빠져나갔다. 이승호는 뜻밖의  일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5억  원을 그냥 돌려주다니.... 이승호는  최명규가 5억

원 정도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부자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 제 목 : Text 141


   2000년 4월 30일. 일요일. 오전 8시. 교토(京都) 사쿄쿠(左京區) 야마바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대목이 죽고, 네 명의 지역 조장들과 서른 명도 넘는 조직원들이 죽거나 중상

을 입어 불구가 되었다. 성질 급한 산하  조직원들은 야마구치 구미의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간부들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두 달 여의 진통 끝에 조직을 개편한 히라타  구미는 8대목을 선출했고 오늘이

그 습명식 날이었다. 새로이 8대목으로 오른  인물은 오사카 우메다(梅田)에 조

직을 갖고 있는 요시이(吉井)였다.  요시이의 등극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한국 조직과 손을 잡도록 주선한 장본인이 바로 요시이였는데 그 덕택에 조직이

괴멸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만들었다. 요시이는 반대파들에게 무참한 테러를 가

하거나 회유하여 결국 8대목의 자리를 차지했다. 또 그는  습명 인사로 현 조직

의 가장 큰 목표를 7대목의 원수를 갚는 것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히라타의 또 한가지 커다란 실책은 한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그대로 떼인 것이

었다. 이중은의 이름으로 한국에  유입되었던 거액의 자금은 3월  초, 이중은의

먼 친척의 명의를 통해 모두 빠져나갔다. 겉으로  투자했던 자금은 세탁되어 비

밀리에 한국으로 투자된 금액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히라타는 조직이 관리하

는 몇 개의 클럽과 빠칭코 등의 영업장을 팔아치워  손실을 충당했으나 무기 거

래에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무기  거래를 하는 조직이 겨우  한국인이 들고 온

M16 한 정에 당했다는 소문이 일본 야쿠자계에 퍼지며 히라타의 위신은 땅에 떨

어졌다.





       2000년 4월 30일. 일요일. 오후 3시. 런던. 세인트 제임스 공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메이린, 무리하면 안돼!"



왕메이린이 휠체어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 않았다. 김도현이 그녀를 번쩍 안

아들고 벤치에 앉혔다. 펠리컨 한 마리가 다가오자 왕메이린이 무서워하면서 손

에 든 팝콘을 던져주었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의  새들은 똑똑해서 멀리서 펠리

컨이 팝콘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온갖 새들이 몰

려들었다. 김도현은 왕메이린이 들고  있던 팝콘 봉지를 받아들고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뿌려댔다. 잠시 새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도현은 왕메이린과 휠체어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30미터 밖에서 자신과 체구가 비슷한 청년이  휠체어를 밀며 도망가고 있었다.

김도현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뒤쫓았다.



 "리! 내 여자를 훔쳐가다니!"



 "무슨 소리야? 나는 보디가드야! 넌 새 모이나 줘!"



 세 사람이 웃어댔다. 잔디밭 안에서  이들이 웃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고이즈미였다. 고이즈미는 세 사람의 사진을  찍고 수첩에 무엇인가 끄

적였다.










 소 제 목 : Text 142


      2000년 5월 1일. 월요일. 오전 2시 20분. 서울시 송파구 중앙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백준영의 눈이 확 떠지며 잠이  깼다. 그는 자면서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죽은 히라타 구미 7대목의 등에 그려진 어린아이 문신이 꿈에

나타나 계속 노려보았다. 커다란 잉어를 안고 있는  꼬마의 눈은 피가 흘러내리

는 듯 붉었고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이었다.



 김응진은 밖에 나간 듯 침대 위에 없었다. 이불이  자다가 빠져나간 상태로 말

려있었다. 요즘 김응진은 밤에 잠이 오질 않는다며  휴게실로 가서 케이블 TV를

보거나 300미터나 떨어진 풍납동의 인터넷 게임방에 가서 인터넷 게임을 즐기곤

했다.



 불을 켜려고 일어난 백준영의 눈에  희끗희끗한 실루엣이 비쳤다. 문  옆에 서

있는, 어쩌면 옷걸이처럼 보이는 물체였다. 갑자기  백준영의 몸에 소름이 돋으

며 오한이 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 물체는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누...누구요?"



 흰색 가운은 백준영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의 메스를 들고 소

리 없이 다가왔다.



 "누...누구냐니까!"



 겁에 질린 백준영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의 목발을 잡으려다 놓치고

말았다. 병실 바닥에 목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들리며 메아리

까지 치는 것 같았다.





 2000년 4월 30일. 일요일. 오후 8시 55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런던. 소호(Soho) 샤프츠베리 애비뉴(Shaftesbury Avenue) 카지노 골든 너겟.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 모어 벳! 땡큐!(더 이상 베팅할 수 없습니다.)"



 딜러가 더 이상 베팅 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백 파운드 짜리 핑크 칩을 올려놓

은 동양인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비굴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늦게 베팅했지만 봐달라는 뜻이었다. 통통 튕기던 볼이 멈추어 섰다.



 "트웬티 원. 레드. 오드.(21에 레드, 짝수입니다.)"



 사내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21번을 주위로 간 칩들이

모두 고액 배당을 터트렸다. 딜러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배당액을 계산해

칩으로 주었다.



 최근 두 달 반 동안 이 카지노에서 30만 파운드도 넘는 거액을 딴 동양인의 이

름은 모리시타였다. 카지노에서는  매일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리시타지만 최근

에 겪은 몇 가지 사건  때문에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보름 전에는

친구에게 빌려준 차의 브레이크 파열로 친구가 큰  사고를 당했으며, 열흘 전에

는 가끔씩 들어가는 자신의 집에서 가스가 폭발해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타버

렸다. 아직 아사히 UK.의 직원 신분인 그는 한 번  더 일본 본사에 보호를 요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5월 1일. 월요일. 오전 5시 20분. 서울시 송파구 중앙병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시간 동안 인터넷 게임방에서 라면을 먹어가며 그의 표현대로, '적을 응징'

하고 돌아온 김응진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병실 안의 무서운 장면에 먹었

던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그는 급히 병실을 뛰쳐나와 이광혁에게 전화했다. 눈

을 부릅뜨고 엎어져 있는 김근태의  등에는 언젠가 그가 한  번 보았던, 어깨에

박혔던 칼에 새겨져 있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한자가 그대로 쓰여있었다.



 "平田組"



                                                   감사합니다.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주영-객주(5)-1  (0) 2023.06.13
99 우리 시대의 화제소설  (0) 2023.06.12
진짜 유럽이야기 [이원복] 02  (0) 2023.06.12
진짜 유럽이야기 [이원복] 01  (0) 2023.06.12
진시황제 [류홍택] 03  (0) 2023.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