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라이벌
김진국
남과 여, 그 영원한 대결
- 아담과 하와
태초의 아침이 깨어났다.
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물과 그 물이 지표면에 형성해놓은 예술적인 경관은 실로 아름
다움 그 자체였다. 모든 생명체의 탯줄과 같은 하천들은 단 1퍼센트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
함으로 광활한 대지에 영양소와 생기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대지 위에는 온갖 화초와 수목
들이 하나님의 솜씨를 확인이라고 시켜주는 듯 자기 존재에 드리운 고유한 아름다움을 뽐내
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생명은 본래 같이 출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인가? 태초는 그
렇게 생기가 넘쳐났던 것이다.
하늘의 새와 땅 위에 뛰고 기는 모든 야생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창조적 법칙인 본능
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특수한 감각과 기관들로 마치 처음 산 자동차를 시운전하듯이 날
고 뛰고 헤엄치면서, 베풀어진 세계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은 종국에는 자신들을 지배하고 심지어는 멸종시키기까
지 할, 철없는 막내 피조물의 탄생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나님의 마지막 손짓으로 마
치 자화상을 그리듯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킨 최고의 명작은 그렇게 고요함 속에 탄생되었
다.
인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에덴 동산의 한 구석에서 아담은 일을 하고 있었다. 온갖 짐승과 식물들을 분류해서 이름
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수백년이 걸리는 힘든 작업이었지만 오직 신이 인간에게만 허락한
지혜로 묵묵히 신의 창조 작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마치 생물학자와 같이 자신의 일에 골몰
하고 있는 아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의 여인 하와에게도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하와는 그와같은 아담의 모습을 늘 존경했을 뿐 아니라, 일하는 남성의 아름다움을 자신
의 가슴에 넉넉히 담아두었다. 물론 화와도 놀고 먹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섬세한 감
각으로 자칫 같은 종류로 착각해서 놓치기 쉬운 화초들을 찾아내어, 아담의 작업을 말없이
도와주었다.
그날도 하와는 아담을 도우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에덴 동산의 수목들을 하나씩
다시 점검해 나가는 중에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아담, 그런데 참 이상하죠? 왜 선악과는 한 그루밖에 없죠? 다른 나무들은 같은 종류가
여럿 있잖아요?"
선악과라는 말에 아담은 순간 흠칫했지만 재빨리 감정을 수습했다.
"만일 두 그루나 세 그루가 있었다면 우린 훨씬 유혹에 힘겨울 게 아니오?"
하지만 하와의 호기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예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아담의 예민한 반응이 자제력을 밀쳐내고 튀어나왔다.
"어허, 불경스럽게 어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오?"
하와는 선악과 문제로 아담과 다시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참에 자신의 궁금증
과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제가 자꾸 묻는 것은 그 얘길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하고 당신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분
명하게 알아두려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왜 저는 항상 모든 것을 당신을 통해서 알아야 하
죠?"
하와의 내면에는 아담에 대한 일종의 열등의식이 은근하게 숨어 있었다. 하와가 그런 식
의 질문을 던질 때마다 아담의 대답은 뻔했다.
'그야 뭐, 당신은 내 갈비뼈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렇지!'
수도 없이 그런 말을 듣지만, 그때마다 하와의 마음 한구석에는 석연치 못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왜 창조 과정이 달랐을까, 하와는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하와의 심정은 아
랑곳 없는 듯 아담은 늘 자연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당연
한 일이리라. 반면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지음 받았기 때문인지 늘 남자인 아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아담은 자연을 정복하려 하고, 하와는 아담을 정복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하와가 느끼기에 무슨 일이든 결정권은 남편에게 있는 듯 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남자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도 아담
을 통해서 들었다는 것이 하와는 못내 아쉽고 불만스러웠다. 하와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린
아담이 말했다.
"여보,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을 보시오. 고등동물일수록 나중에 지음 받지 않았소? 당
신은 맨 나중에 지음 받았으니까 분명히 최고로 고등한 피조물이오.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선악과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합시다."
모든 대화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하와는 늘 퍼내는 식이고 아담
은 늘 덮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날 밤, 아담은 여느때처럼 편히 잠들 수 있었지만 하와는 밤새워 생각을 퍼내고 있었다.
그녀는 발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다투며 빛나는 창공의 별들을 보면서 아담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아담, 당신은 도대체 내게 어떤 존재인가요?'
아침 이슬이 야생의 풀잎을 타고 내려와 하와의 자존심같은 코 끝에 떨어졌다. 아담은 마
치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찍 일어나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침 식사는
지극히 간단하였다. 음식을 장만하는 수고나 설거지를 하는 수고가 별로 필요치 않았고, 따
라서 그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일과 세상을 즐기는 데 사용할 수 있었으리라. 하와는 손을 머
리 위로 뻗어 과일 몇 개를 땄고, 아담은 채소를 몇 줌 취했다.
식사를 마친후 두 사람은 별 말 없이 각자의 일터로 나섰다. 하지만 하와의 발걸음은 일
터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하와는 무의식 중에 에덴 동산의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알다시피
그곳은 금단의 열매가 있는 곳이었다. 동물들도 함부로 다가가지 않는 두렵고 신비한 곳, 근
처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아담의 분노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그곳을 가보려
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걸음 한 걸음에 금기를 깨뜨리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그녀는 선악과를 향해 걸음을 옮
겼다. 선악과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면 자신의 의문에 다소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그녀를 인도했으리라. 그곳에는 아직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실로 하와는 자기 암시를 걸고 있었다.
짐승들의 울음 소리조차 접근을 허용치 않는 듯 고요 속에 싸여있던 선악과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와를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으니 마치
거미줄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날벌레와 같이 그녀의 운명은 점점 위기를 향하고 있었다.
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기원 탓인지도 모르지만, 그 생김새와 치명적인 독성 때문에
인간에게 원수처럼 되어버린 동물, 하지만 애초에는 그다지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
던, 오히려 인간의 눈과 생활에 익숙했던 피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와가 놀란 까닭은 뱀의 흉물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때문이었다. 뱀은 마치 자신은 선악과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나
무를 타고 기어다니면서 하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뱀이 하와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던?"
그것은 뱀이 쳐 놓은 함정이었다. 그녀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너희가 아니고 아담이라고 해야 옳아. 하나님은 아담에게만 말씀하셨고 난 아담에게 전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유혹 앞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하기 위해 뱀에게 말했다.
"동산 나무의 실과는 먹을 수 있지만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그러면 반드시 죽는대."
하와는 자기도 모르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말을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라고
바꾸어 말했다. 직접적인 표현을 회피하고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미 그 명령의 진
위에 대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뱀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뱀은 하와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은 채 선악과의 줄기
를 한 차례 더 휘어 감았다. 그리고는 그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은 뿐만 아니라 눈이 밝아
져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미끼를 던졌다. 하와는 한참을 서서 망설였다. 그녀는 애초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어본 적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이 아담에게 와서
다소 왜곡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고 만일 그렇다면 실제로는 선악과를 먹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해버린 하와에게
뱀의 유혹은 그럴 듯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이 열매를 왜 금기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두려웠던 거야.
만일 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기회는 내가 아담을 주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셈이지. 정말로 죽는지 먹어보자. 결과는 둘 중의 하나, 죽음 아니면 승리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 금단의 열매는 한결 빛깔스럽고 먹음직하게 보였다. 에덴동산 수풀
은 여느날과 똑같이 새소리, 바람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로 태고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인류의 비극이 한입에 삼키워지고 있었다.
한편 아직도 동식물의 이름짓는 일을 못다 끝낸 아담은 하와가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어
그녀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에덴 동산의 중앙까지 오게 되었다. 설마 했던 아담은 어렵지
않게 그곳에서 자신의 여인을 발견했다. 그순간 아담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나 분명히 하
와가 선악과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
로 그녀를 불렀다.
"여보오…."
그러나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이미 다 먹어버린 뒤였으며 두 번째 열매를 아담에게 내밀
고 있었다. 아담은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어찌된 일이오?"
하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한 개 먹어 봤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이미 죽음이 그녀의 몸 속에 들어와 있음을 하와는 알 턱이 없었다. 그녀는 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아담에게 전했다.
이제까지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쪽은 항상 아담이었는데 이번에는 하와가 아담에게 말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아담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하와는 죽지 않았고 버젓하게 살
아 있었다. 과일은 정말 먹음직스럽게 보였고 뱀의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여겨졌다. 이전
보다 더욱 요염하게 보이는 하와가 아담을 유혹했다.
"한 개만 먹어 봐요. 어서. 난 이미 먹었는데 당신만 빠져 나가겠다는 건가요?"
아담은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일을 손에 받아쥐었다. 설사 그것을 먹어서 문제가 생긴다
해도 일을 먼저 저지른 쪽은 하와가 아닌가. 또한 그 여자는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
나님이 임의로 만들어 준 사람이 아닌가? 아담은 과실의 책임을 지더라도 전적으로 자기 잘
못은 아니며 자신에게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의 또 다
른 한 구석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려왔고 그것이 양심의 문을 두드렸다. 아담은 그쪽으
로 마음을 기울여 보았다. 만일 금단의 열매를 먹게 되면 이제 평생 하와에게 끌려 왔고 다
니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그 열매를 던져버릴까도 싶었다. 그러나 만
일 그렇게 하면 영원히 짝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열매를 던져버리지 못
했다. 아담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할건지 아니면 하와의 뒤를 따라
야 할건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아담은 선악과일을 입 안에 넣고 말았다.
서늘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나뭇잎사귀로 알몸을
가리고는 에덴동산의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마침내 올 것이 왔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전과 똑같았지만 그들에게는 마치 뇌성과 같이
들렸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절망
적으로 깨달았다. 숨겼던 몸을 드러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누가 너희 벗은 것을 알게 했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
었느냐?"
하나님의 물음에 자기 잘못을 뒤로하고 아담은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하나님께서 제게 준 이 여인 때문에 먹었습니다. 이 사람이 유혹하지만 않았어도 전 끝
까지 약속을 지켰을 겁니다."
아담의 변명은 하와에게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 내 인생의 전부로 믿었던 남자가 내
게 주는 것이란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울컥 배신감이 솟구쳤다.
'과연 나는 아담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아담의 모든 말이 하나하나 고통의 못이 되어 마음깊이 박혀왔다.
'난 아직도 아담에게 그저 '여인'으로 밖에 표현되지 못하는 존재구나!'
아담은 하와가 생겨나기도 전에 이름짓는 일을 해 왔지만, 여태 같이 살면서 자신의 이름
조차 지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슬픔의 눈물을 쏟아냈
다. 그러한 사랑의 고통도 결국 선악과를 먹은 탓일까?
하나님은 또 하와에게도 물으셨다. 하와도 역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담에 대한 배신감은 잠시 접어두고 하와 역시 빠져나
갈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와 뱀은 하나님으로부터 네 가지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반드시 죽게 되었고, 남자는 종신토록 노동을
해야 하며,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끝으로 에덴동산에서 당장 추방당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두려웠던 형벌은 네번째였다. 에덴에서의 추방,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도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세 가지는 미래형이기 때문에 아직 실감나지 않았지만
에덴에서 추방당하는 그 순간에 앞으로 그들에게 따를 나머지 형벌은 충분히 예감할 수 있
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주신 가죽옷을 입고 황무지를 향해 발을 내
디뎠다. 아담은 하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론 책임을 떠넘긴 데 대해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여인을 하와라고 이름지어 주며, 이제 형벌의 세월을 살아갈 유일한 동반자로서, 그리고 자
신의 여인으로서 하와를 맞이하였다. 하와 역시 자신의 빗나간 판단과 생각을 뉘우치며 이
제 다시금 남자의 그늘에서 자신의 안락을 찾는 도리를 선택해야 하였다.
하와의 반란이 그 이후에 또 어떤 형태로 틈새를 비집고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 사
건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 결국 서로를 황폐하게 했을 뿐 아무 소득도 없는, 인류 최초
의 남자와 여자간의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천사들이 에덴동산의 모든 출구와 입구를 봉쇄하고 화염검을 둘러 울타리치고 있었다. 에
덴 동산의 추억은 이제 그들의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어준 가죽옷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척박한 땅을 말없이 걷고 있었지만 머리
속엔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며 걱정없이 살던 때가 불과 어제의 일이다. 바로 어
제.
아벨의 후예는 없다
- 가인과 아벨
세 명의 사나이가 마치 들짐승처럼 산양들을 뒤쫓고 있었다. 산양떼는 이리저리 도망가면
서도 우두머리 산양의 지시를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바위산 꼭대기에 먼저 오른
우두머리 산양은 뒤처진 산양과 사냥꾼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담은 그 늠름하고 여유있는 산양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번 사냥도 실패했
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 명의 사나이가 바위산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는 우두머리 산양이 양
떼들을 거느리고 이미 반대편 산으로 가 버린 뒤였다. 벌써 세 번째 실패한 사냥이었다.
아담과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산아래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보면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아담은 먼 곳을 향해 뜻없는 시선을 던지며 상념에
잠겼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아왔으므로 아마도 또 에덴 동산을 생각
하시나보다 짐작만 할 뿐, 그 마음을 헤아릴 길 없었다. 가인과 아벨은 매일같이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살기 좋
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금방 비가 오기 시작했다. 집안에 있던 두형제가 일어나서 급히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가인은
밭에 고랑을 파기 위해서였고, 아벨은 양떼들을 우리에 넣어야 했다.
아담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나무 막대기로 마찰을 일으켜 간신히 불꽃을 피워냈다. 집
안이 눅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제 우기가 시작되려나 봐."
마른 나뭇가지를 불에 집어넣으며 아담이 하와에게 말했다. 하와는 자식들의 옷을 짓고
있다가 따뜻한 죽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하던 일을 바꾸고 있었다.
"당분간 당신은 사냥을 하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하겠군요."
하와는 남편이 피워 놓은 불위에 냄비를 얹어놓고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하와가 덧붙여
말했다.
"아담, 저는 지금보다 옛날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아담은 하와가 또 에덴 동산을 들먹이는 줄로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는거요?"
하와도 아담이 잘못 짚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 말은 아이들과 당신이 함께 사냥다니던 시절을 말하는 거예요. 그때는 온 식구가 함
께 과일도 따고 물고기를 잡는다고 온통 젖어서 돌아오곤 했잖아요? 먹을 것이 모자라서 서
로 아웅다웅 하다가도 노루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이면 흥에 겨워 날뛰었죠. 그때는 가난했어
도 사는 재미가 있었어요. 고생했지만 그때가 행복했었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그 말에 아담이 반문했다.
"지금이 어때서?"
"당신, 애들한테 신경 좀 써요."
"잘 크고 있잖아. 큰애는 농사기술을 터득했고, 둘째는 목축에 성공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
는데 무슨 문제야?"
아담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옛날보다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지만 각자의 일이 달라지고 나
니까 서로 같이 보내는 시간이 없어서 대화가 없잖아요."
세 번째 사냥에서 실패했던 그날 바위산에서 막 내려오려고 할 때 산양 한 마리가 나뭇가
지 사이에 뿔이 엉긴 채 꼼짝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아벨의 제안으로 새끼를 밴
그 암양을 집에서 키우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인류 최초로 가정
의 경제구조를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아벨은 부모의 칭찬을 듬뿍 받아 즐거워하였지만 가인은 은근히 시기가 났다. 그래서 한
때는 집을 나가기도 했다. 동생과 함께 목축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기 때문이
었다. 가인의 가출은 반항과 시기와 모험심의 합작품이었는데,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덴 동산의 입구를 찾는다고 무작정 집을 나간 것이다.
가인의 시도는 허사였다. 하지만 그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강변을 지나다가 밀밭
을 발견한 것이다. 가인은 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몇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수확을 얻게 되었다. 수렵에서 목축으로, 채집에서 농경으로, 협업에서 분업으로 생산양식과
구조가 변화되자 잉여물이 생겨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 이제는 좀 살만해진 셈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식구들은 각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 서로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하와는 그것이 내심 마음에 결렸던 것이다.
아담도 자식들과 함께 사냥을 다니던 옛날이 새삼 생각나서 하와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
았다. 하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보. 정말로 염려되는 게 있어요. 요즘 애들끼리 통 말이 없어요. 세상에 형제라고는 둘
밖에 없는데 저렇게 우애가 없으니 어쩌죠?"
"괜한 걱정 말아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아담도 하와와 같은 생각이었다. 불위에 놓인 냄비에서 보글
보글 죽이 끓는 소리가 들릴 즈음 가인이 비를 흠뻑 맞고 들어왔다.
"하마터면 1년 농사를 모두 망칠 뻔했어요. 비가 안와서 걱정이었는데, 이제 비가 너무 올
까봐 걱정이에요."
가인은 열심히 농사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부모는 농사일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
담은 가인에게 불을 쬐며 몸을 말리라고 했고, 하와는 따뜻한 죽을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자
가인은 부모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농사에 관심을 좀 가져보세요. 사냥감을 쫓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끼
니를 때우는 시대는 지나갔어요. 앞으로는 사람들이 농사기술로 먹고 살 때가 올테니 두고
보세요."
아담이 죽을 먹고 있는 큰아들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네 동생은 어디 있니?"
그 질문에 가인은 지나칠 정도로 거친 반응을 보였다.
"제가 뭐 동생이나 지키고 있는 사람인가요?"
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을 조물주인 하나님 앞에서도 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리라.
"목장으로 갔으니 거기 있겠지요."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는다는 구실로 제 방으로 가고 말았다. 잠시 후 아벨이 들어왔다.
"형은 돌아왔어요?"
"응, 방금 죽 한 그릇 먹고 제 방으로 갔다. 너도 이것 좀 먹고 한기를 물리쳐라."
아담도 가인에게 했듯 말했다.
"여기 불 좀 쬐거라. 양들은 괜찮겠냐?"
"네. 나뭇잎으로 우리를 잘 덮어놓았으니 염려없어요."
그때 가인이 들어왔다.
"밭일은 상관 없으시다더니 양들은 꽤나 염려하시는군요."
아담이 대답했다.
"얘들아, 나는 너희 둘 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누구든지 자기 나름대로 기술을 가지고
살면 되는 거야. 나는 솔직히 말하면 양치는 일도 농사짓는 일도 관심이 없다. 난 옛날처럼
너희들하고 사냥을 나가고 싶다. 어떠냐? 이번 우기가 끝나면 들짐승들이 번성할텐데…."
가인은 농사 일이 바쁘다고 핑계를 댔고, 아벨도 양을 지키지 않으면 맹수의 밥이 되고
말 것이라며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아들로부터 보기 좋게 거절당한 아담
이 다시 말했다.
"좋다. 이번 사냥도 나 혼자 나가지. 하지만 이건 기억해둬라. 앞으로 달이 세 번 차면 하
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최고로 좋은 제물을 준비해 두거라."
언젠가 사냥할 때마다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던 무렵 뜻밖에도 새끼를 배고 있는 암컷 산
양을 신으로부터 선물받은 그들은 하산 후에 한 가지 언약을 세웠다. 아담은 자식들에게 각
기 자신의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후에는 반드시 1년에 한 번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하나님께 감사의 뜻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두 아들에게 제사지내는
법을 조목조목 가르쳐 주었다. 이제까지 아버지가 제사하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두 형
제는 이제 자신들 스스로 제사를 준비하고 드리게 된 것이다.
아벨이 아담에게 물었다.
"제사 드릴 때 가족이 다 함께 가나요?"
"아니다. 이번에는 각자 따로 가기로 하자. 어차피 너희도 어른이 되었으니 어른 구실을
해야지."
이번에는 가인이 독백조로 말했다.
"잘됐어. 그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아."
가인은 불 속에 마른 나무 한 토막을 넣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동생보다 더 낫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거야.'
가인은 어서빨리 제삿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우기가 지나가고 농사는 풍작이었다.
목축도 잘 되었다. 다행이 양들이 지난 우기에 병들지 않아서 양떼의 숫자가 줄기는커녕 날
로 번성했다. 아담도 제철을 만난 듯 하루에 한 마리 정도는 꼭 사냥에 성공했다. 잠시나마
집안에는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마침내 제삿날이 되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불러 준비물을 점검했다. 마치 전장에 나가
는 자식을 전송하듯이 꼼꼼히 챙긴 뒤에 신신당부했다.
"들짐승을 조심하거라. 그리고 제사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이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면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아. 명심하거라. 몸조심하고 잘들 다녀오거라."
아담은 다 큰 아들들을 한 번씩 안아보았다. 그것이 영원한 작별인사가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하와는 근심어린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두 아들의 뒷모습을 내내 지켜보았다. 하와는 아담
에게 당신이 따라가면 좋겠다고 말을 꺼내 보긴 했으나 아담이 그러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집을 향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와는 오래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할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오싹하는
전율이 하와의 몸을 타고 흘러 어디론가 빠져 나갔다. 하지만 에덴 동산에 관한 어떤 언급
도 아담에게 꺼낼 수 없었다. 아담이 싫어하는 까닭이었다.
하와는 아직도 자신에게 남은 형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늘 그녀를 불안하
게 했다. 하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두아들이 사라져간 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식들
은 이미 없었다. 하와는 고개를 돌리면서 '괜찮아. 아무일도 없을 거야'하고 자신을 위로했
다. 그날 이후 하와는 그 순간을 또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
바위산에 도착한 가인과 아벨은 각기 다른 봉우리에 올라 제단을 만들었다. 아벨의 제물
은 1년된 어린 양 한 마리였다. 하지만 가인은 곡식을 바쳐야 했기에 엄청난 분량을 준비해
왔다. 제사를 지내려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다 태울 만큼 넉넉하게
땔감을 얹고, 불을 피우고 그리고 제물이 탈 때 연기가 하늘로 잘 올라가도록 신경써야 했
다. 이 모든 순서가 힘든 일이었고 또 중요한 일이었다. 형제는 마치 경쟁이라고 하듯이 부
친으로부터 배운 방식대로 제사를 진행해 나갔고, 순서가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가인이 먼저 불을 피웠다. 그는 곡식단을 얹어 연기를 냈다. 낱알을 태우기가 힘들기 때문
에 곡식단을 통째로 얹어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이다. 곡식단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가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렀다. 가인은 저쪽 봉우리를 보았다. 아벨도 이제 막 불을 지펴 장작에
불을 붙기 시작했다. 가인은 속으로 뇌까렸다.
'어느 세월에….'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가인의 제물은 예상보다 너무 빨리 타버리고 말았다. 남은
것을 모두 얹어 보았으나 불꽃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장작만 타고 있었다. 연기가 하늘까
지 시원스럽게 올라가야 하는데 중간에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가인은 아벨쪽을 바라보았
다. 연기가 마치 곧은 강줄기처럼 하늘과 땅사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가인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자취조차 없고 안색이 온통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
하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가인은 뒷정리를 하고 봉우리에서 내려와 아벨을 기다렸다. 가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벨에게 제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들에는 여전히 꽃과 나비가 춤추고 있었다. 가
인은 문득 아벨만 없어져 준다면 아벨이 태어나기 전 부모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
지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
은 네게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가인의 시기와 질투는 이미
터져버린 화산 같았다.
가인은 잠시 과거에 아버지를 따라 첫사냥을 나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리를 저는 노루
새끼였다. 아담이 골라준 사냥감이었다. 가인은 과연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짐
승에 불과하지만 생명을 끊는 일이 어찌 쉬웠겠는가? 하지만 가인은 아버지 못지 않게 날쌔
게 달려가 노루 새끼의 목을 잡아 누르고 손에 들고 있던 날카로운 돌멩이로 두개골 사이를
힘껏 내리쳤다. 노루 새끼의 눈동자에 힘이 풀리자 가인은 노루의 목을 누르고 있던 팔에
힘을 뺐다. 첫사냥치고는 훌륭한 솜씨였다. 단번에 죽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가인의 발 앞에 피가 흥건히 고였다. 가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돌은 가인의 발아래 쓰러
진 아벨의 머리곁에 던져졌다. 살인, 그 행위 자체는 사냥하는 것과 유사했다.
그렇게 인류 최초의 살인은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 행해졌고, 백주에 들판에서 이루어졌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는 도주했고, 심판관인 하나님 앞에서도 순순히 자백하지 않았다.
가인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는데 왜 달아나야 하는지 모
르면서도 한참을 달린 후에야 바위산 언저리에 머물러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죽은 아벨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죽은 노루새끼처럼 자신의 팔에서 힘없이 빠져 나가던
동생의 모습은 그날부터 평생 그를 괴롭히는 장면이 될 것이다.
'맙소사,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가인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죄를 저질렀는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의
얼굴이 잠시 눈앞에 보였다. 두려웠다. 하지만 부모님보다 더 두려운 건 야훼였다. 아벨만
사라진다면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더 고
통스러울 뿐이었다.
왜 진작에 몰랐을까? 다시 처음으로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순 없을까? 아벨은 자기 손에
묻은 피를 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공포와 긴장 때문에 그의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잘 될거야!' 마음 한켠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신을 붙들어 맸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인이 바위틈에 주저앉아 스스로를 진정시
키고 있을 때 야훼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자신이 숨은 곳이 발각되자 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가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반문하면서 딱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그를 꾸짖으셨다.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
상을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편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가인은 처
음으로 아비인 아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을 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남은 그는 그곳에서 후손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가인의
후예는 있어도 아벨의 후예는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가인의 후손들을 만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안
에서.
사막의 두 여인
- 사라와 하갈
엘리아살이 하갈을 찾아왔다. 그는 아브라함의 충직한 심복이었으며 아브라함이 후사가
없었던 때 아브라함 가문의 상속자로 지목받을 정도로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우직한 성품에
일을 대할 땐 비상한 지혜와 용맹으로 뭇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엘리아살.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케하는 일이었다.
"하갈, 나와 잠깐 얘기를 나눠야겠소."
하갈은 본능적으로 뭔가 나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
나 먼 산 너머의 푸른 하늘과 점점이 흩어져 있는 흰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날 처음보는 하
늘이었다. 하갈은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엘리아살이 먼저 말을 건네주기를 기다렸다. 어
떤 슬픈 소식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태도였다. 하갈의 비장하고 불안한 침묵에
엘리아살도 잠시 침묵으로 응답했다.
마침내 엘리아살이 불편한 침묵한 깨뜨렸다.
"하갈, 당신과 나는 다른 측면에서 아브라함 주인님의 총애를 받아왔소…우리는 그분의
충직한 종이라오…."
엘리아살의 말은 하갈의 날카로운 눈빛에 잠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오늘은 이삭 도련님의 돌 잔치 날이 아니오? 아브라함가에 드물게 큰 잔치였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풀이하는 엘리아살의 태도에 하갈은 갑자기 짜증스
러워졌다. 하갈은 엘리아살을 재촉했다.
"그런데요?"
"헌데 좋지 않은 일이 생겼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소."
순간 하갈의 얼굴이 핏기가 사라진 듯 창백해졌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 마치 껍데기
만 남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간신히 의식을 가다듬었다.
"희롱이라니. 어떻게…어떻게 말인가요?"
"심하게 꼬집은 흔적이 있고, 이삭 도련님의 얼굴에 소변을 본 듯 하오."
하갈은 전율했다.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평소에도 사라와 알력이 있어왔기 때문에 오늘 발생한 사건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순간, 그녀는 사라를 피하여 도망다니던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과 불안감이 소름처럼
돋아났고 동시에 아들 이스마엘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녀석이 결국 만사를 그
르치게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가여운 아이였다. 이삭의 출생으로
그애는 아버지의 사람을 잃어 버렸고, 장자의 자리마저 빼앗긴 것이다. 아예 가져보지 못한
것이면 상실감도 덜 할테지만 가졌다가 잃는 것은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한때
정실의 위치를 넘보았던 적이 있는 하갈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가혹한 경험인 것이
다.
이스마엘의 불경스런 행동을 누가 이해해 주겠는가? 열세 살의 나이에 누가 일러주지 않
았는데도 몸으로 체득한 절망과 좌절이 아이의 내면에 그늘로 숨어있는 것을…. 지난 1년간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은 또 누가 알아줄까? 하갈의 마음은 분노와 연민으로 갈
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냥 고민에 빠져있는 겨를이 없었다. 뒷수습을 서둘러 해야 할
것이다.
"엘리아살님, 사라 마님이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렇소. 마님의 노기가 심상치 않소. 조만간 어떤 처벌이 내려질 거요."
"어떤 처벌인가요?"
"아무도 모르오. 마님도 아직 딱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닌 듯해요."
"엘리아살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다시 엘리아살이 대답했다.
"이스마엘을 사라 마님께 데리고 가서 무조건 빌도록 해요. 나도 마님께 선처를 부탁하겠
소."
그것은 하갈의 지위를 과거 몸종의 신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3년 동안
이나 공들여 쌓아온 그녀의 입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북받치는 설움에 흐느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아! 안돼요…."
엘리아살도 하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딴도리가 없다.
"노새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말이 될 수 없는 법이오.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
소."
엘리아살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있길 한참 뒤, 하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엘리
아살은 석양을 배경으로 저만큼 멀어져가고 있었다.
해가 언덕 너머로 고개를 떨구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어두운 밤이 하갈의 마음에 차라
리 위안을 주었다. 예상치 못한 평온은 지극히 일시적이지만 하늘이 베푼 안식의 시간이었
다. 철없이 자고 있는 이스마엘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던 하갈은 기억의 서랍 속에서 13년
전의 일을 꺼냈다.
주인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시간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마치 왕비라도 된 듯 기쁨에
넘치던 나날들, 갓난애였던 이스마엘의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며 이 가문의 후사를 훌륭하게
키우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던 순간…이제는 서자의 설움을 겪으며 고단한 방황에 지쳐 잠
든 아들의 얼굴을 보니 치밀어오르는 슬픔에 하갈의 마음은 미칠것만 같았다. 하갈은 가녀
린 손을 꽉 쥐었다. 생선가시로 만든 바늘이 부러지고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똑똑 떨어졌
다.
날이 밝았다. 아침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하갈은 광야로 나갔다. 밤새도록 내리지 못한 결
심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야산 바위틈 앞에서 두 마리의 독사가 싸우고 있는 장면을
발견하고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마리 뱀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달아나려 하고 있
었다. 하갈은 무의식적으로 돌멩이를 주워들어 뒤쫓는 독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하지만
돌은 빗나가기만 했다. 잠시 광야에 나왔던 목적을 잊고 했던 하갈은 자기 앞에 벌어진 장
면이 마치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는 듯해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자신의 장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온통 이슬과 먼지에 젖은 그녀가 장막 앞에 다다를 즈음 장막 앞에 서 있는 엘리아
살과 연로한 여종의 모습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엘리아살은 하갈의 눈빛에서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을 알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사라 마님을 찾아가야만 한다고 강권했다. 한때 하갈의 보모였던 연로한 여종은 일전에 하
갈이 사라에게 쫓겨났었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번에도 사라 마님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
지 피신해 있으라는 제안을 했다.
어느새 태양은 껑충 떠올랐고 그날따라 태양의 이동이 빨라진 것 같았다. 태양이 동쪽에
서 떠올라 그 궤도를 따라 돌다가 서산으로 기울듯이 모든 인생이 어쩌면 정해진 방향으로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하갈은 자신의 결
단이 엘리아살이나 보모의 생각과는 달리하게 될 것 같았다. 무슨 뾰족한 수도 없지만 그들
의 생각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때 마침 이스마엘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장막밖으로 나왔다. 이스마엘의 손에는 아브라
함이 만들어준 장난감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스마엘은 수년동안 그 목검을 지니고 다니
며 애지중지해왔다. 그 순간 이스마엘을 바라보던 하갈의 눈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사라와의 정면대결이다.'
하갈은 최악수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하갈은 이스마엘의 목검을 엘리아살에게 건네주면
서 아브라함에게 메시지와 함께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칼에는 '아브라함의 장자'를 상
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만일 아브라함이 친히 만들고 새겨 넣은 칼과 문양을 상기한
다면 충분히 옛언약을 기억해 낼 것이다. 하갈은 자신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호해 달라
는 절박함을 아브라함이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눈치 빠른 엘리아살이 그 의미를 모
를리 없었다.
"하갈, 그래선 안돼요. 주인님을 끌어 들이면 문제만 커질 뿐… 또 주인님의 입장만 난처
해질 것이오."
곁에 서 있던 노종이 엘리아살의 말을 거들었다.
"만일 이 사실이 사라 마님께 알려지면 더 이상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돼. 하갈! 제발 정
신 좀 차려."
"그 수밖에 없어요."
하갈의 결심은 단호했다. 엘리아살은 하갈의 고집을 꺾을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지만 이대
로 놔두면 큰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라와 하갈의 정면 대결 만
큼은 피하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갈, 내 생각에는 우선 사라 마님이 부르시기 전에 먼저 찾아가서…."
하갈이 엘리아살의 말을 가로채 말꼬리를 돌렸다.
"찾아갈 거예요. 하지만 우선 그렇게 해야 해요. 엘리아살님, 제 생애 마지막 부탁이 될지
도 모르겠어요.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속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는 가엾은 여인의 요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
하였다. 그것은 일에 있어서는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엘리아살이 자신의 철칙을 깨뜨리
고 감정에 이끌려 처리한 유일한 일이 되고 말았다. 연로한 여종은 앞으로 닥칠 먹구름을
예감한 듯 우왕좌왕하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노종은 연신 하갈과 이스마엘의 얼굴을 쓰다
듬으면서 솟구치는 슬픔을 말없이 삼키고 있었다.
한편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목검을 엘리아살로부터 전해 받고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었
다. 이미 백 살이 넘은 노인의 눈이지만 그 목검 속에 새겨놓은 자신의 추억과 언약을 어찌
못보랴. 또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돌보지 못한 사이에 이스마엘에 의해 생겨난 흠집
과 손때묻은 흔적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심한 세월도 짐작해 내고 있었다.
'왜 하갈이 이 목검을 나에게 전했을까? 이미 이삭의 출생으로 대리모의 역할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스마엘도 서자의 위치로 되돌려진지 1년이나 되었건만 또 다시 그 문제를 거론
하자는 뜻일까?'
아브라함이 엘리아살에게 말했다.
"이 늙은 노인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오?"
엘리아살이 대답했다.
"덮어두었던 불씨가 되살아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충복 엘리아살도 사라와 하갈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쪽만의 입장에 설 수 없었기에 난
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십여 년전 도적떼들과 전쟁을 할 때도 이처럼 난처하지는 않았다. 언
제나 아브라함 가문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온 그도 앞 일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주인님께서 중재해 주시지 않으면 이번에는 문제가 심각해질 것 같습니다."
잠시 동안 아브라함은 말이 없었다. 다시 목검을 바라보고 있던 아브라함이 입을 열었다.
"산으로 갈 채비를 해 주시오. 야훼를 만나러 가야겠소."
오후에 아브라함은 혼자서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신앙의 사람인 아브라
함은 어떤 문제든간에 자신의 판단력으로 처신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하갈을 통해 후사
를 잇자는 사라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렇게 해서라도 야훼의 언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수락했었는데 그 일이 이토록 오랜 세월 고통을 주는 문제가 될 줄 몰랐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루 전만 해도 흥겨운 잔치로 시끌벅적했던
집안이었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긴장감이 노비들까지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사라는 이삭을 재우고 아브라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
중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다음 일을 진행시킬 수 있겠는데 아브라함이 야훼를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가서 언제 올지도 모르니 분한 마음이 답답함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사라는 기다림의 초조함과 답답한 심정을 가누기 위해 아브라함 장막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이스마엘에 대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생각하기도 싫은 질투에 사로잡히게 했던 그 물건이 아브라함
의 수중에 와 있는 것을 보자 분노의 눈빛이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이삭을 낳기전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멸시하기까지 했던 과거의
하갈을 잊지 않고 있었던 사라였다. 한때 쫓겨났던 하갈을 다시 받아들여준 관용을 베풀었
는데도 은혜를 모르는 하갈, 이스마엘을 앞세워 늘 당당했고 오만하기까지 했던 하갈의 옛
모습은 기억만으로도 얄밉고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라가 이삭을 출산하고 난 뒤 하갈이 기가 죽어 지내는 것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든 적
도 없지 않았지만, 바로 어제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삭에게 한 행동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도 사라지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다. 이삭이 어떤 자식인가? 하나님 야
훼의 약속과 은총으로 구십 세의 나이로 기적같이 낳은 유일한 아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가문을 이어갈 장자에게 모욕과 상처를 내다니? 하갈이 시켜서 이스마엘이 그렇게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평상시에 하갈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언행은 이스마엘에게 그같은
행동을 저지르도록 하는 동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만일
오늘이라도 하갈이 그녀를 찾아와 용서를 구했다면 자신의 생각을 바꿔볼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그 최후의 기회마저 하갈이 외면했을 뿐 아니라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은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사라는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마치 독사가 독을 머금은 것과 같이.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하갈도 밤새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친
히 자신의 장막을 찾아와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하인을 통해 어떤 전갈이라도
보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빗나가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엘리아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노여종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안부를 묻고 집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을 따름이다. 하갈은 잠시 옛추억을 떠올렸다. 밤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막을 찾아왔고
그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분주하게 치장을 했던 그 날들이 새삼스러웠다.
철없는 이스마엘이 목검을 찾아 달라고 어미를 조를 때 노비가 하갈에게 전갈을 가지고
왔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전갈이 온 줄로 생각하고 반겼는데 그것은 사라의 장막으로 오라
는 전갈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올것이 왔구나. 아브라함의 구원의 손길은 왜 이리
늦는 것일까?
연로한 여종은 눈물을 흘리며 이스마엘을 단장시켰다. 하갈은 사라의 전갈을 가지고 온
노비에게 아브라함 주인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는지를 물어보았다. 아브라함이 한밤중에 하산
했다고 전해듣고 하갈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도와주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녀는 믿었다. 가엾은 하갈은 자신의 신변에 관한 모든 결정권을 아브라함
이 사라에게 전폭적으로 넘겨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사라의 장막을 바라
보며 돌멩이 하나를 주워 불끈 쥐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두번째 돌팔매질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아브라함 족속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의 장막앞에 모였다.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재판이
행해지는 자리였다. 하갈은 곁에 앉아 울고 있는 이스마엘에겐 아랑곳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라보다도 아브라함에 대한 원망이 더 컸던 것이다.
사라가 모인 사람들에게 사건에 대해 설명한 뒤 직접 판결을 내렸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
던, 아니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판결이 내려졌다.
'광야로의 추방!'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물과 양식을 구하지 못하면 이내 죽을 수밖에 없고 다행히 물과
양식을 구한다고 해도 야생짐승들의 위협으로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다. 신의 은총이
없이는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없는 지옥행과도 같은 길이다.
아브라함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할 말을 잊고 있었다. 하갈
은 변변히 대항해 볼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생각에 억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
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최후의 순간에 맞섰다. 이제 그녀는 예전의 나약한 여비가 아
니라 어머니였다.
"아브라함님, 저는 당신을 야훼보다 더 믿어왔어요. 그런데 제게 어떻게 이러실수 있어
요?"
아브라함의 노구가 떨렸다. 그는 진정으로 죄스러웠다. 비록 여종의 신분이었으되 한때는
사랑했던 여인이요, 서자이긴 하나 혈육인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모는 정경은 가슴이 찢어지
는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야훼의 뜻이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메마른 노인의 눈에도
눈물방울이 맺혔다. 이어서 하갈은 사라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외쳤다.
"사라, 제가 졌어요. 그러나 당신도 이기진 못했어요. 당신은 내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어
요. 애초에 내가 원해서 이스마엘을 가졌던가요? 이제와서는 나가라구요? 당신의 그릇된 판
단과 질투가 우리 모자를 이렇게 만든거죠.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 야훼의 뜻이라고 당신은
착각했고, 우리는 당신의 착각으로 죄없는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당신
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거예요."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누구 한 사람 하갈을 말리지도 못했다. 하갈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비장한 표정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추방 판결을 거부합니다."
그말에 사람들은 또 한 번 충격으로 술렁거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사람들은 혼란스러
웠다. 그러나 하갈은 곧이어 그 의미를 분명하게 했다.
"나 스스로 나갑니다."
사라는 지금까지 자신의 판결이 정당하다고 믿었고 야훼와 남편이 보증해 주었으므로 자
신의 판결에 더욱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갈이 그러한 태도로 나오자 그런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고 승리감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뭔가 잘못 매듭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균형감각을 잃고 흥분하고 말았다.
"안돼, 스스로 나갈 수 없어. 이건 엄연히 추방이야."
사라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갈은 미소를 지어보였고 하갈의 그러한 태도는 사라는 더
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하갈은 마음 속으로 야훼께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항상 선택의 순간에 저를 제외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먼저 선
택했습니다. 아브라함과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났지만, 하나님, 당신과 저는 이제 새로운 시
작을 해야겠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자리 곁에 놓인 자신의 목검을 발견하고는 천진한 기쁨을 얼굴에 그려
보이며 다시는 잃어 버리지 않겠다는 듯 손에 불끈 쥐고 어미 곁으로 왔다. 하갈은 이스마
엘의 손을 잡고 의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가자! 이스마엘.'
아브라함이 일어나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못볼지도 모를 이스마엘의 얼굴을 들
여다 보면서 각인이라도 시켜주듯 또박또박 들려 주었다.
"야훼께서 너를 돌보아 주실거다."
그리고 하갈에게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야훼께서 당신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로 세워주는 것이오. 잘 가시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의 구릉 하나를 다 넘을 때까지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
라함의 족속들은 두 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형제의 강
- 야곱과 에서
에서는 병사가 떠준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쪽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청명한 하늘 빛으
로 인해 얼핏 자신의 얼굴이 물 위로 스쳤다. 에서는 물을 떠다 준 부하에게 빨리 가서 자
신의 청동 방패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허겁지겁 가져온 청동 방패를 거울삼아 들여다 보
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온통 수염과 털로 뒤덮여 있고,
세월의 골을 짐작케 하는 주름과 거친 광야에서 얻은 상처자국으로 흉터투성이었다.
그렇게 늙고 변모한 모습 속에서 에서는 애써 어릴 적의 모습을 찾아 보려고 하였다. 아
니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정말로 찾은 얼굴은 자신이 아니라 쌍둥이 동생 야곱의 모
습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광야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하였다. 20년이라는 세월 탓일까? 그
는 방패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방패는 돌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참모들과 병
사들은 순간 긴장한 눈빛을 보였다.
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병사들이 모여있는 진영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한 병사가 물과 팥죽을 가져 왔
다. 팥죽을 보자 20여년 전 그 일이 불쑥 기억을 헤집고 솟아 나왔다. 그때 야곱은 팥죽 한
그릇을 주면서 자기에게 장자권을 팔라고 했고 에서는 반 농담으로 그러자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약조나 법적인 강제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형의 위치와 축복권을 노렸던 동생 야곱의 계책이었다. 에서는 그 기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실언도 후회스러웠지만, 동생의 교활함을 여실히 입증하는 상
징적인 사건이기에 에서는 팥죽만 보면 그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는 20년 동안 오직 동생에 대한 복수심과 축복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칼을 갈아왔
다. 야곱만 없어져 준다면 결국 장자는 자기밖에 없지 않겠는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이
제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야곱이 그의 소유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
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에서는 에돔 들에 진을 치고 야곱과의 일전을 위해 기다리
는 중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야곱과 얽힌 사연들로 겹쳐지면서 에서의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야곱은 얍복 나루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수많은 식솔과 재산을 가진 어엿한 족장으로
발돋움한 야곱의 얼굴도 이제 대장부로서의 위엄과 파란만장한 경륜을 짐작케 하는 성숙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면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함께 강가에 앉아 있었다. 라헬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20년 전의 일이오. 내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간지 만 20년이 지났소. 그때도 나는
형 에서를 피해 야반도주를 했었는데, 외삼촌 라반, 당신의 부친 집에서 나올 때도 역시 도
망쳐 나오지 않았소? 내 인생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소."
라헬은 아직도 남편의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얼마 전에 라헬의 부친 라반이 종들
이 이끌고 길르앗산까지 쫓아 왔었다. 라반은 잃어버린 신상 드라빔을 찾기 위해서였다. 라
헬이 훔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야곱은 라반이 수색 끝에도 찾아내지 못하자 역정을 내며 외
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을 비난하였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부를 얻긴 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결코 얻
을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라반이 야곱의 품값을 열 번도 넘게 변경하여
조금이라도 자기 재산이 축나지 않도록 애를 썼기 때문에 약아빠진 야곱조차도 장인의 수없
는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에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드라빔 분실 사건은 오히려 서로 화해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고, 장인이 화
평하게 되돌아 갔던 일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라헬은 드라빔을 자기가 훔쳤다는 것을
남편에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어서 때를 보아 오던 차였다. 하지만 야곱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보면서 라헬은 또다시 주저하고 있었다.
"드라빔 사건은 잘 해결되었잖아요. 아버님도 평안히 되돌아가셨고, 하란에서 도망쳐 나온
일도 이제 마음 쓸 일 없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모든 게 잘 되었지요."
야곱도 라헬의 위로가 죄책감 때문인 줄은 모르고, 오적 남편 걱정에 염려의 말을 해주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어쨌든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할지라도 인생의 고독은 함께 할 수 없
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야곱이 라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흐르는 듯하였다. 노을빛에 번들거리는 물결
이 끊임없이 이어지듯이 야곱의 상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가 끊기도 또 이어지곤 하였다.
야곱은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붙잡아 라헬에게 들려주었다. 라헬에게 꼭 들려줘야 할 이유도
없고, 어쩌면 과거에 지나가는 말로 이미 들려준 적이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야곱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다.
"라헬,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하란까지 2천리길을 홀로 걸었던 적이 있
었소. 쌍둥이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아버지를 속인 죄의 대가로 정든 고향땅을 떠나야
했던 거요. 양식 보따리를 챙겨주면서 눈물 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한데, 어머니의 임
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식으로 이제까지 살았단 말이오. 집을 떠났을 때 한 달 가량을
홀로 걸으면서 날마다 울었소. 무서워서 울고, 그리워서 울고, 고독해서 울었소. 내 인생의
미래에 무엇이 있을까? 그때 나는 하나님을 처음 만났고, 부친과 조부의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축복해 주어서 삶의 용기를 가졌던 것이오. 장인 어른의 집에서도 서러울 때마다 오
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오늘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요. 내가 축복받기 위해 장자의 위치를 빼앗은 죄는 부모와 이별하고, 형과 원수지간
이 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고, 이제 고향 땅에 돌아간들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날
죽이려고 기다리는 쌍둥이 형밖에 없으니, 도대체 내가 무얼 얻기 위해 살았고, 또 앞으로는
어떤 일들이 내 앞에 닥칠지 회의적인 생각만 드는 거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헬은 남편이 왜 그렇게 항상 외로워 보였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야곱에 대해 한없는 연민이 솟았다. 이제 드라빔 사건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
혔던 것은 뒷전이 되고,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용기를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면
야곱의 고독한 뜰에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장벽이 가로 놓인 듯 하였다. 아마도 그
울타리는 야훼 하나님만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라헬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치 상처입은 야생 짐승이 꼼짝 않고 스스로 치료하는 생체 능
력에 의존하듯이 그냥 홀로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몇 마디 격려의
말을 꺼냈다.
"하란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하나님이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있지 않을까
요?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당신을 신뢰하고 따르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라헬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밤이 깊어질수록 야
곱의 사색과 고독의 빛깔도 깊어만 갔다.
거리상으로 이제 훨씬 가까워진 곳에 있는 형 에서는, 그가 거느린 400여 명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주간 전투와 야간 습격 등 모의 훈련을 지시하는 에서의 고함 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격앙되어 있었다. 공중을 가르는 그의 칼날은 이전보다 더욱 예리하고 날카
로웠다. 부하들은 에서 대장의 광기에 기가 눌려 적병보다도 에서를 오히려 더 두려워했다.
모의 훈련일지라도 보호 장구도 변변치 않아 부상당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발생하곤 하였다.
연일 계속되는 훈련에 다들 힘겨워하고 있어서 안전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그날도 부상병이
발생하였고, 팔에 부상을 입은 한 병사가 응급 치료를 받기 위해 옮겨졌다.
20년 동안 여러 차례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외삼촌 라반의 집을 공격할
수는 없었기에 에서는 야곱이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려 온 것이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뻔뻔하게 생긴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대하게 될 것이다. 흥분과 회환이 엇갈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니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분노가 폭발할 것만 같았으므로 차라리 훈련에 열중해 생각을 떨쳐 버리려 했다. 그러나 사
병 한 명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훈련이 중단되었다.
에서는 자신의 장막에 들어가 횃불을 밝혔다. 아까 자신이 먹지 않고 두었던 팥죽 그릇이
한쪽 구석에 정성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에서는 당번병을 불러 그릇을 치우게 했다. 하지만
생각은 그릇처럼 쉽게 치워지지 않는 법이다.
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 오로지 쌍둥이 야곱과의 경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치고 받았던 그들은 세상에 나와서도 여
전했다. 기질이 달라서 덜 부딪치긴 했지만, 또 그 다른 기질 때문에 서로 융화되거나 편승
하지 못하고 끝까지 대립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에서는 아버지의 기질을 타고 나고, 야곱은 어머니의 기질을 타고났다. 부모님에게서는 서
로 다른 그 기질이 조화를 이루었지만 불행하게도 형제간에는 충돌의 요인이었다. 에서는
어머니의 비호 아래 자란 동생을 싫어했고, 그의 섬약한 기질도 싫어했다. 그리고 항상 자신
이 남성적이며 동생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왔다. 장자권을 훔쳐가기 전까지만 해도 에서는
야곱을 상대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아버지 이삭에게 갔을 때는 그 야비하기 짝이 없는 동생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뒤였다. 이미 야곱에게 다 축복해 주어 너에게 축복할 말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평생 에서의 가슴에 사무쳐 왔던 것이다.
그후 에서가 인생을 살아온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복수심 때문이었다. 이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된 마당에 에서는 20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어떤 두려
움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장막 주변 어디선가 독사라도 나올 것 같은 찜
찜한 기분이었다. 왜일까? 병사의 부상 때문인가? 아니면 팥죽 그릇 때문일까? 이 세상에
두려운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야말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에서는 허탈
해지는 느낌이었다.
'야곱을 죽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슨 목적으로 살지?'
그의 존재 이유는 오직 야곱 때문이었다. 적이 사라지면 군대도 필요 없듯이, 야곱을 죽이
는 목적을 이룬 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복수의 한
은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한 유일한 목적이었다.
한편 얍복 강가에 있던 고독한 사나이 야곱은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단했다. 자식도 아내
도 재산도 지금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야곱은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잃는 것? 죽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
다. 그는 재산을 나누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보내었다. 싸울만한 상대도 되
지 않겠지만 자신은 전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에서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었다. 에서를 자신의 주라고 표현한 것은 어찌보면 비굴하다는 인상까지 들었으나 야곱은
그만큼 낮아져 있었던 것이다.
늘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야곱이 기고만장할 때가 아니라 철저하게 낮아질 때 찾아오셨다.
그날 밤, 야곱은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을 건넜다. 그들을 데
리고 강을 건넌 다음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야곱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과 동이 트기까지 씨름을 했다. 그분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야곱의 엉덩이 뼈를 쳤다. 야
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심한 부상을 당하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분은 동이 밝아오니 이
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노라고 떼를
썼다. 일이 이쯤되자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
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그분은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내가 여기서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그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떠올랐다. 부상 때문에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과 평안으로 한없이 벅차기만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제밤까지만 해도 번민과 공포에 휩싸여 출구를 찾지 못하였는데
아직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겐 희망과 용기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에서도 야곱을 만나기 위해 한 걸음
다가왔다.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달려왔다.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달려왔다. 하늘이라도 무너뜨릴 기세였다.
야곱의 가족들은 생전 보지도 못한 광경에 그만 얼이 나갔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밖
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야곱은 처자를 뒤로 두고 황급히 달려나가 에서 앞에 무릎 꿇고 일
곱 번 절을 했다. 그것은 에서의 칼이 자신의 목을 내려칠 기회를 일곱 번이나 주었다는 의
미이기도 했다. 이미 목숨을 포기한 야곱의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야곱의 행동을 지켜보던 에서는 손에 든 칼을 땅에 던졌다. 야곱이 용기를 내 에서에게
다가가자 에서는 허망한 표정으로 야곱을 끌어 안았다. 그들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한없이 울기만 하였다.
증오심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두려움과 고독 그리고 미움은 모두 눈물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 세상에 유일한 피붙이였다. 증오심 너머 아무도 모르게 숨겨왔
던 혈육의 정과 형제애가 봇물터지듯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20년 동안이나 애써 부인
하며 참았던 회한의 눈물이었다.
이제 한 동네에 살면서 쌍둥이 형제는 누가 더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인가를 따지는 사
랑의 경쟁자로 변모하였다. 야곱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에서도 인생의 목표를 야곱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 증오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
라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들은 가끔 얍복강가로 함께 나가 과거를 떠올리며 멋적게 웃곤 했다.
대접전
- 모세와 바로
이집트의 태양은 강렬하다. 한낮에는 모든 사물을 증발시키고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군림
하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가장 위대한 신으로 숭배된다. 또 그런 이유에서 태양은 종종 왕
권에 신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들의 왕은 태양의 아들로 불러지기도 했다. 그 작열
하는 태양이 마치 말갈기같이 나일강 줄기를 따라 자라난 울창한 산림과 곡창지대를 건너
서쪽으로 기울 때면 이집트의 심장부를 흐르는 나일강은 홍해바다처럼 붉은 황금빛으로 출
렁인다. 붉은 빛이 시원한 느낌을 줄 때는 오직 해질녘 밖에 없을 것이다. 태양의 자비는 그
때부터 시작되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왕과 노예 모두에게 평등한 안식을 베푸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일손을 놓고 안락한 보금자리로 돌아갈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찰 때, 바로왕
은 위대한 왕국의 건설과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해진다.
이집트의 왕궁 오른쪽 베란다에 서면 라암셋이 내려다 보인다. 그곳에는 히브리 노예들이
흐르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체를 드러내 놓고 라암셋을 건축하고 있는 광경이 마치 한 폭
의 풍경화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의 궁에서 지켜보노라면 히브리 노예들은 마치 개미떼
처럼 보이는데, 사실 히브리 노예의 목숨은 바로왕 앞에서 한낱 개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
나 이집트의 영광은 그 개미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이집트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집트는 한때 전쟁을 통해 노예와 재물을 획득하기도 했지만, 노예의 번식과 관리만으로
훨씬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경제적 원리를 남들보다 빨리 터득했다. 따라서 이집트는
노예를 통한 건축과 농경으로 부국을 꾀하였고, 왕과 지배계층은 그들이 소유한 노예들의
불만 수위를 적절히 조절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바로 정치요, 바로왕에
게는 가장 큰 문제거리이기도 하였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베란다를 거닐던 바로왕이
석양을 뒤로 하고 궁내로 들어서자 백발의 두 노인이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집트 왕국의
역사가 그날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감히 상상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바로왕은 신하에
게 물어 보았다.
"저들은 누군고?"
신하는 모세와 아론에 대한 정보를 귀엣말로 낱낱이 보고했다. 보고를 다 듣고난 바로왕
은 말했다.
"노예의 후손들이군."
그 말 속에는 그들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모세, 드문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이름에 담긴 사연을 바로왕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형이 될 수 있었
던 사람, 만일 그러했더라면 능히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인물, 그러나 동족을
위해 이집트인을 죽인 혐의로 왕자의 영광을 버리고 달아났던, 이젠 보잘 것 없는 남자. 죽
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광야에서 40년을 살고 노인이 되어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
닌가? 바로왕은 다시 신하를 불렀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자가 모세인가?"
팔십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얼굴에는 청년과 같은 기상이 엿보였다. 바로왕은
왕좌에 앉아 두 노인이 찾아온 사연을 듣기로 했다. 모세가 말했다.
"내 백성을 해방시켜 주시오."
바로왕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내 백성? 해방? 이유는?"
이번에는 아론이 말했다.
"야훼께서 말씀하셨소. 히브리 백성들을 보내어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시
오."
바로왕은 가당치 않다는 듯 조소와 빈정거림으로 일관했다.
"히브리 민족에게도 신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그 신은 무슨 신인가? 광야의 신인가?"
모세가 대답했다.
"야훼께서 내게 나타나 말씀하시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소이다. 야훼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고 오늘날 그의 택하신 백성, 히브리인의 하나님
이 되어 주신다고 했으니 바로왕께선 반드시 이 민족을 해방시키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은 호통을 쳤다.
"너 모세와 아론은 어찌하여 내 노예들이 일도 못하게 부추기느냐? 썩 물러가서 일이나
하여라. 나의 보살핌으로 인해 히브리인들은 이 땅의 백성들보다도 더 불어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 은혜를 모르고 저들에게 노동을 시키지 말라는 거냐?"
바로왕은 그날로 이스라엘 백성을 관리하는 모든 공사 감독과 현장 감독들에게 명령을 내
렸다.
"너희는 이제부터 히브리인들이 흙벽돌을 만드는 데 쓸 짚을 대주지 말아라. 저희들이 돌
아다니며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그렇다고 생산량을 줄여서도 안된다. 지금까지 생산하던
것만큼 만들어내게 하여야 한다. 저들이 일하기 싫어서 자기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해
방시켜 달라고 떠들고 있으니 전보다 일거리를 더 많이 주어라. 눈코 뜰새없이 일을 시켜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일 틈을 주지 말아라."
바로의 계략은 효과를 나타냈다. 히브리 민족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부었고 그때문
에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은 큰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집요하게 바로를 괴롭
혔다.
모세와 아론이 다시 바로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더욱 당당했고 바로의 마음은 더욱 강
퍅해져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모세는 실력행사를 하기 위
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지팡이를 바로왕 앞에 내던졌다. 그러자 지팡이는 순식간에 꿈틀
거리는 뱀으로 변했다. 바로는 모세가 마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정도로 자신을
겁주려 한다는 것을 가소롭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로는 모세라는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무료한 왕궁생활에 심심
풀이 상대를 만난 정도로만 생각했다. 바로왕은 그의 박사와 박수를 불러 모세가 행한 마술
을 부리게 했다. 바로의 술객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뱀 두 마리가 왕궁의
넓은 홀에서 뒤엉켜 싸우더니 모세의 뱀이 술객의 뱀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결
과에 바로왕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모세와 바로왕은 서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모세가 예고한대로 첫 번째 재앙이 이집트 전역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이른바 피재앙이라
고 불리는데, 모든 물이 피로 변하여 마실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연이은 개구리 재앙까
지 이집트의 술객들도 흉내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데 세 번째 재앙이 곧 이어졌다. 땅의 티끌이 변하여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올랐다. 이
집트의 술객들은 바로왕보다도 그 기적의 의미를 빨리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들의 마술로
는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바로왕에
게 직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일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며 오직 신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이쯤되자 바로는 내심 모세의 위대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사실을 인정
해야만 한다는 것은 바로의 자존심이 송두리째 뽑히는 고통이었다. 결국 바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마음은 강퍅해질 뿐이었다.
곧이어 네 번째 재앙이 닥쳐왔다. 이번에는 파리재앙이었다. 바로는 그 재앙의 정도를 과
소평가 했다. 바로궁에서 라암셋을 바라보니 이전에 노예들이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집트의 창공은 새까만 파리떼로 점령당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파리떼가 어디
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이집트의 술객들은 아마도 개구리 재앙 이후에 죽은 개구리 무더기
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바로는 술객들의 해석을 억지로라도 믿으려 했다. 그때
고센땅으로 정찰 나간 관원이 돌아와 바로왕에게 보고를 올렸다.
"모세의 말대로 히브리인들의 모여살고 있는 고센땅에는 파리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
니다."
바로왕의 마음은 분노로 출렁거렸다.
'아름다운 나의 왕국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냐?'
바로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속히 모세를 만나보고 싶었다.
불려온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왕좌 앞에 예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일개의 자연인이 아닌 일국의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그러한 자세였다. 그러나 바로왕의
눈에는 그것마저도 거만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바로왕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그것은 불가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야훼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이집트 사람의 미워
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이집트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게 미워 우리를
돌로 치지 않겠소이까? 사흘길 쯤 광야로 들어가서 희생을 드리되 우리 하나님 야훼께서 우
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바로는 결국 마지못해 승낙했다.
"내가 너희를 보낼 것이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야훼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
무 멀리 가지 말라. 그리고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파리떼가 사라지자 약속을 지키려던 바로의 마음도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악질재앙과 독종재앙, 우박재앙, 메뚜기재앙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에도 바로는 여전히 약속
하고 파기하기를 거듭하면서 마음은 더욱 악독해지기만 했다.
예로부터 이집트 땅에는 그런 재앙이 간혹 있어왔기 때문에 우연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
고 그것이 히브리인들이 섬기고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아홉 번째로 흑암재앙이 닥쳐왔다. 칠흑같은 어둠이 삼일 동안 이집트 전국을 뒤덮
었다. 바로왕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태양신이 능력을 상실한 것인가?'
바로왕은 왕궁 곳곳에 횃불을 밝히고서 흑암에 맞서고 있었다. 신하의 보고는 늘 같은 말
이었다.
"히브리인의 땅 고센에는 광명이 있사옵니다."
바로는 그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것은 이집트의 태양신과 이스라엘 광야신의 대결이다."
한편 그는 마음 속으로 이 싸움을 이집트의 바로왕과 히브리인 지도자 모세와의 정면대결로
간주하고 있었다. 바로는 모세에게 협박조로 경고했다.
"너는 나를 떠나가고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너희가 죽을 것
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왕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마지막 재앙에 대해 모세에게 지시를 내
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 유명한 장자의 재앙이었다. 이집트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
란 예언이 있었지만 바로왕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줄로만 믿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재
앙은 이집트 왕궁에도 예외없이 찾아왔고, 바로의 장자인 왕자가 그 재앙으로 숨졌다. 이집
트 전국이 온통 초상집이 되었다. 한밤중에 마을과 집,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통곡
소리는 메아리치듯 점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에게 더욱 무서운 공포요
형벌이었다.
바로왕 앞에 선 모세는 마치 죽음의 사신과 같이 여겨졌다. 바로왕은 이제 모세보다 먼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주기를 요청했다. 이집트는 전쟁에 패한 것보다도 더욱 절망적
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다시 국권을 회복하려면 한 세대는 지나야
될 일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가장 혹독한 시련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기에 이르
렀고, 더 이상 노예들의 해방을 막을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왕은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를 바라보았다. 그를 향했던 무시나 분노에 빗장을
걸어 감춘 채 바로는 이제 현실을 직시했다. 왕자를 잃은 슬픔이 바로의 내면에 들어있는
감정의 파편들을 봉쇄했던 것이다. 바로는 모세를 일국의 지도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자신이야말로 태양의 아들로서 이 땅의 진정한 지도자임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는 모세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분노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모세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떠나달라고 조용히 말할 뿐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라암셋에 모여 출발하였다. 가축들은 이삿짐을 나르는 화물차 역할을
하였고, 이집트인들로부터 노획한 금은보물을 챙겨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430년 동안의
긴 노예 생활을 마감하고 마침내 해방의 길에 오른 히브리 민족들의 발걸음은 신이 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땅을 벗어나는 길이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비하히룻에 장막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곳은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
가였다. 홍해가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바로왕의 마음이 다시 심술을 부렸다. 노예들은
그 나라의 재산이었으므로 그들을 보내고 나면 이집트의 미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모세와 힘겨루기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고스란
히 백기를 든 것이 억울하기만 했다. 바로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지휘했다. 이집트가 자
랑하는 특수마차 600대와 모든 장관들과 군사들을 출동시켜 히브리 노예들의 뒤를 추격했
다.
정찰대가 바로왕에게 보고하기를 히브리인들은 비하히룻에 진을 치고 있고 홍해 바다를
건너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세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군사들에게 외쳤다.
"태양신이 우리를 돕고 있다. 저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으니,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진격하라!"
이집트의 기병과 군사들이 거대한 모래 연기를 일으키며 진군해 왔다. 히브리인들은 그야
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놓였다. 모세는 자신을 원망하는 소리를 잠재우고 이렇게 외쳤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라!"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으로 이집트 군대의 진행을 교란시키며 차단시켰고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큰 폭풍이 일더니 바닷물이 갈라지는 것이었다. 히브리인들은 마치 육지를 건
너가듯 바닷물이 갈라진 틈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모두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히브리인
들은 그 기적 앞에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체험하
게 된 사건이었다.
히브리인들이 바다를 다 건너자 이집트 군사들 앞에 있던 구름 기둥도 사라졌다. 이집트
군대도 그 기적 앞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그들이 진격중이었다는 사실조차 잠시 망각할 지
경이었다. 바로왕은 망설였다. 바닷속까지 그들을 추격해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나 그
의 갈등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다시 전군을 출동시켜 전진케 하였다.
바로왕의 군대가 전부 바닷길로 달려가고 있을 무렵에 하나님은 다시 모세의 손을 바다
위로 내밀게 하셨다. 그러자 갈라졌던 바닷물이 다시 합쳐지더니 이집트의 모든 군사는 남
김없이 바다에 생매장되고 말았다. 바로왕은 홀로 바닷가에 서서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예의 아들에 불과한 모세보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해 보이
는지 형언할 수 없었다. 이집트 왕국은 그 일로 인해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을 맞았
고 바로왕 역시 모세에게 패배함으로 일생일대에 더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히브리 백성들은 바다 건너편에서 기념비를 세우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춤추며 노
래하고 있었다. 그때 모세는 높은 곳에 올라 홍해 건너에서 쓸쓸히 말머리를 돌리는 바로왕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국의 지도자로서 동정의 마음을 마음으로 전했다.
'그대가 대적한 자는 내가 아니라 나의 배후에 계신 야훼 하나님이었소. 그것이 당신과 당
신의 군대가 우리를 이길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일 뿐이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로왕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모세를 볼 수 없었지만,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의 마음속 깊
이 자리잡고 있는 바로왕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수없이 만나고 겪어야 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이 노예근성을 보일 때마다 거대한 제국의 깊은 뿌리를 실감하였고 그때마다 바로왕
의 조소어린 얼굴이 망령처럼 머리 속에 떠올랐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은 홍해 바다에서 끝
난 것이 아니라 광야 40년 동안 계속 이어져 간 기나긴 전쟁이었다.
힘과 미, 승부없는 대결
- 삼손과 들릴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이 수수께끼같은 문제는 삼손이 딤나의 여인과 결혼할 때 블레셋의 동무들 30명에게 낸
것이었다. 7일 동안의 잔치에서 블레셋인들은 딤나의 여인을 협박해서 끝내 해답을 얻어내
고야 말았다. 그 사실을 알고 격노한 삼손은 내기로 걸은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약탈했다. 보복은 보복을 낳았고, 장인인 딤나 여인의 부친은 딸을 블레셋 사
람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삼손의 처음 결혼은 부모의 반대로 시작해서 블레셋인들의 농간과 훼방으로 결
국 파혼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삼손은 운명처럼 또 블레셋 여인 들릴라와 사랑에 빠졌다. 재
혼을 한 삼손의 마음 속에는 첫결혼의 실패가 아무런 장애도 교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나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삼손이었건만, 때때로 예전의 수수
께끼가 불길한 징조처럼 떠오르곤 했다.
기운이 충만하던 때, 삼손은 수풀 속에서 사자를 만나게 되었다. 사자의 턱뼈와 송곳니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서 들소의 뼈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다. 또 앞발의 타격으
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을 정도다. 거기에 굶주리기까지 한 사자 한 마리가 삼손
을 먹이로 보고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삼손은 사자라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괘씸한
사자를 혼내줄 작정이었다. 삼손은 민첩한 동작으로 몇 번 위협을 했다. 먼저 공격했다가는
당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사자에 물리면 단 몇 초에 끝장나고 만다. 삼손은 사
자를 흥분시켜 먼저 공격해오도록 유도했다.
마치 나는 새오 같이 사자가 공중으로 솟구친 순간 삼손은 사자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사
자의 몸뚱아리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고 두 손으로 사자의 주둥이를 쥐었다. 그 때문에 사자
의 공격용 무기들이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사자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삼손은 사자를 옥죄면서 양손에 더욱 힘을 가했었다.
흙먼지가 일었다. 사자와 삼손이 어떻게 엉켜 싸우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싸움
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며칠 뒤 우연히 그 길을 다시 지나던 삼손은, 자기가 죽인 사자의 주검에서 신기한 광경
을 보게 되었다. 벌들이 죽은 사자의 몸에 집을 짓고 꿀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손가락으
로 찍어 맛을 보니 달콤한 꿀맛이 느껴졌고 삼손은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잡아먹으려 하던 사자의 몸에서 먹는 것이 나오다니, 그것도 가장 무섭고 강한 동물
의 몸에서 단 것이 나오다니 재미있군!'
그것은 곧 수수께끼였고, 그 수수께끼는 단지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암시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들릴라와 결혼한 뒤에도 그는 죽은 사자와 꿀벌들
의 윙윙거리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힘도 그 사자처럼 한순간에 꺾여버릴 때
가 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자신을 당할 자는 없
다고 삼손은 확신했다.
삼손은 한때 딤나의 여인을 잃었을 때 괴로운 마음에 방황을 일삼던 적이 있었다. 그때
블레셋 지역에 있는 주막을 자주 드나들며 기생들과 어울렸다.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자주
경계를 드나들며 블레셋인들을 괴롭혀 왔기에, 삼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모인 주막에 들렀다가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과 운명적
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삼손이 주막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태도를 취
하거나 슬쩍 자리를 옮겨갔다. 그당시 삼손의 괴력은 온 천하에 소문났고, 그 무시무시한 사
나이를 제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던 들릴라만이 삼손의
등장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뛰어난 미모로 뭇남성의 가슴을 불태운 여인 들릴라는 두 가지 별명으로 불렸다. 사막의
전갈과 신기루. 그녀의 아름다움 속에는 독소가 감추어져 있었다. 마치 전갈의 독침과 같다
고 하여 사막의 전갈이라고 불렸고, 잡힐 듯 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는다 하여 신기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들릴라는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던 삼손을 만나게 된 것을 내심 기뻐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들릴라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삼손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고, 마치 사자를 상대할
때와 같은 긴장감으로 다짜고짜 그녀를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들릴라는 노련한 여자였다.
여자를 그렇게 짐승처럼 다루어서는 안된다며 그녀는 삼손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삼손의 구애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의 테스트를 거친
다면 구애를 받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가축의 힘으로 돌리는 거대한 맷돌을 들릴라
자신의 머리 위에 얹어놓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사랑에 빠진 장사는 그녀를 주막집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고 블레셋 사람들도 뒤따라 나갔
다. 그곳에 있는 집채만한 맷돌을 거뜬히 들어올린 삼손이 들릴라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그
리고 들릴라에게 소리쳤다.
"이제 당신에게 넘길 테니 받아드시오. 셋을 센 후에 팔을 내리겠소."
마침내 셋까지 가지 않아 들릴라는 삼손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들릴라는 삼손의 용맹성이
자신의 미모와 견줄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충분히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그녀가 삼손의 구애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내기에 대한 충
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모와 힘의 대결.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할까. 그녀는 누구와도 견
줄 수 없는 자신의 미를 삼손의 힘과 대결해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삼손과 들릴라 둘 중에
누가 이겼는지, 누가 먼저 유혹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삼손은 마침내 들릴라와 결혼하게 되어 행복했지만 수수께끼에 대한 의문은 줄곧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혹시 자신이 사자의 신세요 들릴라가 꿀벌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도 들곤 했다. 만일 그렇다면 결국 단맛은 블레셋 사람들의 차지가 되고 말 것 아닌가?
그때 이미 들릴라는 은 일천일백에 매수된 상태였다. 가룟유다가 오직 돈 때문에 스승을
팔아 넘긴 것이 아니듯 들릴라가 동족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나르시스의 신화처럼 자신의 미에 도취된 들릴라의 욕망은 삼손을 무너뜨림으
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들릴라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삼손의 얼굴 위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여자는 얼
마든지 눈물로 자기 감정을 위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삼손은 모르고 있었던 반면,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는 사실을 들릴라는 잘 알고 있었다. 들릴라는 흐느끼면서 삼손의 힘
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그 비밀을 캐고 있었다.
"삼손, 당신은 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죠?"
"난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왜 제게 당신의 그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 비밀을 말해주지 않는 거죠?
당신은 저를 세 번이나 속였잖아요?"
삼손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이 여인이 단지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블
레셋 사람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일까? 설마 자기 남편인데 넘겨줄 리가 있을까? 그러나 그
는 천성적으로 고민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들릴라, 당신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오?"
들릴라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러면 이 비밀을 당신만 알고 있기로 약속을 해주시오."
들릴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삼손은 자기의 힘은 사실 머리카락에서 나온
다는 비밀을 알려주었고, 이제 더 이상 들릴라가 보채지 않자 개운한 마음으로 단잠에 빠졌
다.
들릴라는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세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확인해본 뒤에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자고 있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자른
뒤 그를 괴롭혀 보았다.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들릴라가 보낸 신호에 숨어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결박했다. 밧줄에 묶인 상태에서
잠에서 깬 삼손은 이미 자기 몸에 신의 은총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후회와 비탄에 잠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순간 삼손의 머리 속에 사자의 주검과 꿀벌이 떠올랐다. 결국 그 꿈은
자신의 운명을 예시해 준 것일까?
삼손은 가나에 있는 형무소에서 유형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옥에서 연
자맷돌을 돌려야 했다. 그 맷돌에 빻아지는 곡식이 무엇인지 얼마나 많은 양의 곡물을 빻았
는지 알 수 없었다. 소가 하는 힘겨운 노동을 이미 괴력을 잃고 평범한 사람과 똑같아진 삼
손이 대신한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때론 빻을 곡물이 없는데도 간수들은 삼손을
괴롭히기 위해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힘으로 때워야 하는 일보다도 정말로 삼손을 괴롭히는 일은 간수들의 조롱이었다. 그들은
한때 천하장사였던 삼손을 수중에 넣고 맘대로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간수 한 명이 삼손에게 다가왔다. 그는 삼손의 코에 닭다리를 갖다대더니
냄새를 맡게 했다.
"이보게, 삼손. 얼마만에 맡아보는 고기 냄샌가? 목구멍에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군. 이건 자네 거야. 먹어봐."
삼손은 그가 또 어떤 조롱을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
욱 장난기가 발동한 간수는 삼손을 골탕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뜯어먹던 닭다리
를 발로 짓이기더니 삼손의 입에 강제로 넣었다. 삼손의 입에 흙과 모래가 잔뜩 들어갔고
화가 난 삼손은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넣어 공격하려다가 멈칫했다. 간수는 눈치채지 못하
였지만 삼손은 잠시 혼자만의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사라졌던 힘이 다시 솟아나오는 듯
했기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쇠사슬을 끊을 뻔 하였던 것이다. 간수는 감방을 나가면서 중요
한 소식을 들려주었다.
"모레 다곤 신전에서 큰 제사가 있어. 아마 신전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보다도 네 놈의
비참한 꼴을 보려고 오는 사람이 더 많을 걸."
간수가 나간 뒤 삼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옛날 보다야 못하지만 꽤 길어
있었다. 삼손은 자신의 두 눈을 빼앗은 블레셋들에게 보복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지금껏 잘 수행하지 못했던 사사로서의 사명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훨씬 더 컸다.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곧 야
훼 하나님이었고 그 긴 시간의 통로를 통해 이제 더이상 철없는 청년 삼손이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있었던 것이다.
삼손이 다시 과거와 같은 힘이 솟아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에 감옥 창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는데 삼손은 직감적으로 들릴라임을 확신했다.
시각을 잃은 대신 그의 청각과 후각은 정상인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었던 것이다. 간수가 나
가고 들릴라가 삼손에게 다가오는 불과 몇초사이에 삼손의 머리속에는 수많은 영상이 돌아
갔고 그 영상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체포되던 날에 잠시 멈추었다.
들릴라가 삼손의 이름을 불렀다. 삼손의 머리 속의 영상은 처음 들릴라를 만났던 주막으
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도 맷돌이 있었지. 묘한 우연의 일치군.'
삼손이 원망과 복수심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날 넘겨 주었지?"
"……."
"나는 이 맷돌을 돌리면서 헤아릴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봤지."
들릴라가 마치 준비해 둔 것처럼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왜 왔소? 비참한 내 꼴을 보기 위해서요?"
삼손은 귀를 곤두세웠다. 들릴라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목소리 떨림 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었다.
"모레 다곤의 신전에 블레셋 시민들이 모여요. 삼천명 정도 될거래요. 당신을 구해주고 싶
어요."
삼손은 그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눈이 멀쩡할 때도 당했는데 이제 장님이 된 처지에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또 그렇게 해서 탈출에 성공한다해도 어떤 행복과 의미가 남아있
겠는가? 삼손이 대답했다.
"왜 날 도우려는 건가? 속죄의 뜻인가?"
들릴라가 시간에 쫓기는 듯 성급히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신은 죽을 거예요."
들릴라의 손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삼손의 손 위에 포개졌다. 그 감촉은 여전히 감미로왔
고 삼손은 잊었던 자신의 수수께끼와 이상했던 꿈생각이 떠올랐다. 삼손은 들릴라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도 증오했던 여인인데 그 미움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마저도 야훼
의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들릴라가 마지막 부탁을 했다. 모레 다곤 신전을 떠 받치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서 자신
을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순간 삼손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들릴라! 나도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을 하겠소. 절대로 그날 다곤의 신전에 오지 말아
줘. 그리고 우리가 헤어질 때의 모습이 아니라 주막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만 기억해
줘."
마침내 다곤신전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었다. 삼천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들
었고 블레셋의 귀족들과 수뇌들이 다 한자리에 모였다. 들릴라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다. 블
레셋인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신이 우리의 적수 삼손을 잡아 주셨다."
"그 놈을 끌어내라."
"삼손을 끌어내라."
한 소년이 삼손이 손을 잡고 그들 앞으로 인도해 오자 사람들은 이제 이빨 빠진 사자나
다름없는 삼손을 향해 온갖 조롱을 퍼부어 댔다. 그러는 동안 삼손은 붙잡고 인도해 주는
소년에게 부탁하였다.
"이 신전의 기둥에 의지할 수 있게 나를 데려다 다오. 좀 기대어야겠다."
삼손의 모습은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움푹 파인 눈과 훨씬 야윈 삼손의 모습에 들
릴라의 마음이 괴로웠다. 처음에는 삼손을 굴복시켰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었고 블레셋 사람
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한때 사랑했던,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철저하게 망가지고 초
라해진 삼손을 바라보는 것이 이제는 괴로움이었다.
들릴라에게 있어서 삼손은 괴력을 상실했을 때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평범한 사내
에 불과한 삼손은 들릴라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들릴라가 굳이 삼손
을 살리고 싶었던 것은 삼손을 조롱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비굴함이 못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삼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손은 신전의 중앙에 있는 두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 기둥이 무너지면 신전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불레셋 사람들은 꿈에도 그런 일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설사
과거의 삼손이라 할지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삼손이 야훼께 부르짖었다.
"주 야훼여, 한 번만 더 저를 기억해 주시고 힘을 주시어 제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
에게 단번에 복수하게 해 주십시오."
삼손은 신전 기둥 하나에는 왼손을 대고 다른 하나에는 오른 손을 댄 채 다시 부르짖었
다.
"블레셋 놈들과 함께 죽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둥을 밀었다.
들릴라는 멀리서 삼손이 두 기둥 사이에 서는 것을 보고 내심 기뻐하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뭔가를 외치는 삼손의 얼굴을 본 순간 들릴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
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로소 삼손의 다시 자라난 머리카락을 본 것이다. 블레셋의 관리들
은 삼손을 희롱하는데 재미를 느낄 뿐 괴력이 어디에서 나왔던가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들
릴라는 그 비밀을 기억해 냈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거대한 신전은 강력한 지진이 발
생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뜻밖의 재앙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기 위해 아우성 치
는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유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곤 신전의 지붕과 천장이 무너
져 내리는 순간 들릴라는 분명히 그 이유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설마 하면서도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엄청난 괴력이 삼손에게서 솟아 나오는 것
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 힘이 단순히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야훼로부터 오
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들릴라는 힘과 미의 차원을 넘어선, 보다 더 근
원적인 어떤 힘에 압도당했다.
그것은 신이 내려온 모습과 같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삼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삼손의 마지막 부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부탁을 어김으로써 깨닫
게 되었다.
들릴라는 비록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도 삼손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을
오히려 행복하게 생각하였다. 신전의 기둥이 그녀의 머리위에 내려오는 순간 들릴라는 주막
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맷돌을 머리 위에 이고 다가오며 미소짓던 삼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영웅도 미인도 삼천명의 블레셋인들도 그곳에서 함께 눈을 감았다. 전설과 같은 그 사건
은 삼손의 수수께끼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었으며 영원히 승부나지 않은
삼손과 들릴라의 대결과 사랑 이야기도 되살아나고 또 되묻혔다.
영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갈등
- 사무엘과 사울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다. 때는 기원전 약 1천년경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시대였다. 수차례 수세에 몰리던 블레셋은 전열을 가다듬어 총공격을 감행해왔다. 사
울왕은 전쟁을 치르기에 이젠 너무 늙었고, 정신병에 가까운 광기로 인해 지도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광기의 타겟이었던 다윗의 세력을 추적하기에 급급해서 정세판단에 대한
안목조차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끊임없는 외세와 내분으로 장군들과 병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고,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었기에 하나님의 도움이나 요행이 아니고는 블레
셋과의 대전에서 이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진영의 나팔수가 뿔나팔을 불어 적이 공격해오고 있음을 알렸다. 왕과 장군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처들어오는 적병의 규모와 근접해 온 거리를 분석하면 달리 어떤 대
책이나 전략을 세울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블레셋 군사 중에 용감한 자들이
경계를 넘어 들어와 이스라엘 병사를 쓰러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화살수들이 울타리를 넘는
적병을 몇차례 명중시켜 저지했지만,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이제 블레셋 병사들은 화살도 필요없는 근거리에까지 밀려 왔고, 곳곳에서 칼싸움이 벌
어졌다. 사울왕의 눈빛은 점점 먹구름으로 덮혔다. 각개전투에서 승리하는 쪽은 벌써 블레셋
이고, 일어서는 이스라엘 병사는 블레셋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뿌우-."
퇴각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고,
사울왕과 지휘부는 이미 퇴각하여 길보아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블레셋 용사들이 빠
르게 추격해오고 있었다. 블레셋군은 이스라엘이 산악전에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부가 길보아산에 도착하기 전에 결단을 내야겠다는 생각과, 사
울왕을 쳐서 공을 세워보겠다는 야심으로 사나운 들짐승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도주하는 왕의 일행을 향해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왕의 일행은 날아오는 화살의 수
를 보아 대강 몇 명의 적병이 추격해오는지 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계산해 보았다. 왕을
호위하던 호위병들이 화살에 맞아 서너명 그 자리에 쓰러졌다. 조금전까지 그들의 뒷꿈치로
부터 약 3미터 뒤에 땅에 꽂히던 화살이, 이제는 머리 위를 지나갈 정도로 가까워졌다. 다윗
의 절친한 친구이면서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아비나답과 발기수아와 함께 블레셋 병사
들을 향해 달렸다. 왕이 달아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전사를 각오한 것이다.
블레셋의 용사가 던진 창이 요나단의 바로 앞까지 날아와 꽂혔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의
요나단과 병사들이 칼을 불끈 쥐고 함성을 지르며 적병을 향해 돌진했다. 칼과 창이 부딪치
는 소리가 요란했다. 최후를 각오하고 발악하는 이스라엘의 왕자와 호위병의 시체를 짓밟으
며 그들의 추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결사대의 항전은 왕의 일행이 길보아산까지 갈 수 있도
록 시간을 벌어주긴 하였으나 산 중턱에도 못미쳐 다시 적의 공격을 받았다.
블레셋 군사들이 일제히 화살 공세를 퍼부었다. 누가 쏘았는지도 모르는 화살들 중에 하
나가 사울왕의 복부에 명중했다. 처음에 사울 왕은 화살에 맞은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
지만 자신의 육신 속에 조직을 파괴하는 커다란 이물질의 존재를 의식으로 더듬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명적이었다. 사울은 이제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알았다. 그때 사울의 머리 속에 떠오
른 얼굴은 아들 요나단도 아니고 또 숙적 다윗도 아니었다. 그 얼굴은 바로 사무엘 선지자
였다.
사울이 선지자 사무엘을 처음 만났던 것은 우습게도 잃어버린 나귀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울은 평범한 시골청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는 준수한 용모와 훤출한 키로 인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금방 눈에 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무엘의 마
음에 든 것은 청년 사울의 겸손함이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그의 의식 속으로 대관식 때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이기도 한 사무엘은 12지파 족장들과 백성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약400년간 사사의 시대를 지내왔소. 다른 나라처럼 왕권제도를 두지 않는 것
은, 이 나라의 지도자는 오직 야훼 하나님이라는 민족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것이오. 왕을 세
우자는 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까닭에 여러분에게 왕을 허락하셨소. 이제 여러분이
운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여러분에게 곡식을 거두어 갈 것이며, 군마를 위해 여러분의
마굿간에서 말을 데려갈 것이요. 백성들이여! 이 땅의 평화는 왕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백성들은 외침으로부터 특히 블레셋으로부터 스스로의 재산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왕정을 실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긴 하지만 가장 연약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오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베냐민 지파의 이름도 없는 가문의
사울은 수줍어서 숨어버렸다. 그 일은 사울이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오래 간직되었다. 그때
사울은 머리에 기름부음 받고 결심했다.
'이스라엘을 아무도 얕보지 못하는 위대한 국가로 건설하리라.'
사실 그러한 사울의 야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국가조직을 정비하고 주변국과
분쟁을 치를 때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내세워 사사건건 왕정에 개입했다.
사울왕은 블레셋 용사들의 공격이 더 가열차게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어떻게든 몸을 움
직여보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복부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려 옷이 흥건
히 젖었고 그 불쾌한 느낌은 통증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사울왕은 자기를 따르던 몇 명
의 장군들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응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접전으로 인한 소음만이 귀에 쟁
쟁거릴 뿐이었다. 사울왕은 다시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갔다. 시작도 매듭도 분명치 않은
단편적인 기억들이 그의 혼미한 의식 속에서 파도처럼 다가왔다가 조개껍질처럼 기억의 물
결에서 건져지는 몇가지 잔상이 떠올랐다. 사울왕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무엘, 당신은 지금 어디 있소….'
사울왕이 집권한 뒤 꽤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아말렉 족속을 공격
하였는데, 그때도 사무엘은 남녀노소는 무론하고 가축까지 포함하여 생명있는 모든 것을 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내왔다. 사울은 사무엘의 신탁을 이행하지 않았다. 사울이 생각
하기에 그것은 정치적인 간섭이었다. 그는 장군들과 참모들이 있는 자리에서 끝내 분노를
표출했다.
"도대체 이스라엘왕이 누구요? 그 영감은 아직도 과거의 추억에 매달려 영적인 지도력과
정치적인 지도력을 분간하지 못하는 거요. 전쟁이란 곧 정치요 경제적인 수단인데, 노략물
없이 모든 것을 진멸한다면 도대체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장군들은 왕의 명령을 따랐고 전쟁은 대승이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나빠졌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왜 따르지 않았는지 사울에게 책임을 추궁하였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백번 지당하며 이스라엘의 금언으로 전해진 또 하나의 유명
한 명언이었지만, 사울은 모멸감으로 치를 떨었다. 결국 그 말은 자신이 사무엘의 명령에 순
종하지 않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순종하란 말인가?'
하지만 사울은 아직도 백성들 사이에 요지부동한 사무엘 선지자의 영향력 때문에 함부로 그
를 힐난할 수가 없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사무엘과 사울은 사실상 결별하게 되었다. 그때 사울은 확신했다.
이스라엘의 왕을 가장 힘없는 베냐민 지파에서 뽑은 이유는 사무엘 자신이 배후조종을 하려
는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사울왕은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왕권을 쥐고나서부터, 아니 사무엘과 결별하고 난 뒤부터
줄곧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것이었다. 그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종교와 정치의
이원화된 지도력 때문일까? 사무엘 선지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사실 사무엘 선지자가
두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있던 산당의 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비참한 최
후를 맞은 것이 사무엘 선지자 때문은 아니었지만 불운을 몰고오는 사자처럼 사무엘이 자기
에게도 그 비슷한 운명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고 사울은 생각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죽음의 사자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악몽을 자주 꾸었
다. 그의 말기에는 꿈과 현실을 혼동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울왕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사무엘의 예언처럼 신의 영광이 그를 떠난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다면 왕의 직위에 있다 한들 그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사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울은 그 두려움 때문에 사무엘 대신에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신의 홀(왕이 쥐고 있는 막대봉)은 이미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졌고 사울은
그런 일들이 자기를 괴롭히려는 사무엘의 간교라고 생각했다. 한때 그가 그렇게 아끼고 사
랑했던 다윗의 머리에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부터 다윗은 사울의 증오
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평생 사울왕의 뒤를 쫓던 두려움이 길보아산까지 온 것이다.
비참한 죽음보다 더욱 치욕스러운 것은 할례받지 못한 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모욕이었
다. 그것은 왕의 자존심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었다.
사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이었지만,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한 사람
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극적인 위인으로
기억되리라.
사울왕은 무기를 들고 있던 시종에게 자신을 찌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병기를 든 소
년은 감히 머리에 기름부은 자를 자기 손으로 해칠 수 없었다. 그것이 비록 어명이라고 할
지라도…. 그 사이 적병 블레셋 용사들의 목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사울왕이 쓰러졌다."
"생포하라."
사울왕은 다급해졌다. 그는 병사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쥐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사무엘, 그대의 시대는 지나갔소. 그리고 나 사울의 시대도 이제 끝났소. 이스라엘의 진정
한 지도자는 우리 둘 다 아니었소. 당신의 말대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는 과연 하나님
한 분 뿐이오. 후세인들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사울은 칼을 거꾸로 세워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찔렀다. 칼은 복부 깊이 박혔고 그는 단번
에 숨을 거두었다. 죽어가는 그 짧은 순간 사울왕은 다윗의 악기 연주를 들은 이래 처음으
로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길보아산은 사울왕 일가의 피로 얼룩졌다.
전쟁은 끝났고 들판은 고요했다. 세상에 남은 것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자들과 슬퍼하
는 자들 뿐, 그의 고뇌와 갈등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를 지어
내신 이, 그를 택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 야훼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그를 위해 슬퍼해 주
실 뿐 길보아산도 침묵으로 영원히 입을 닫았다.
길보아산의 마지막 전투
- 사울과 다윗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성이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위기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대가로 소년 다윗에게 부여된 영광스러운 칭송이었다. 비련의 왕 사울도 다윗의 승
전소식을 접하고 큰 감동에 사로잡혔다.
사실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골리앗은
키가 3m에 달하고 그가 가진 창날의 무게만 해도 6㎏이나 되었다. 그토록 엄청난 무게의
무기를 한 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괴력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도 짧은 창들과 장
검 등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해서 빈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수
많은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용맹한 장수로 골리앗의 이름은 이스라엘에도 그 악명이 높았
다. 한마디로 그는 괴물이요 돌연변이였다.
그에 비해 다윗은 어떠한가? 아직도 홍안의 얼굴인 다윗은 군에도 입대할 수 없을 나이인
데다 몸에 맞는 갑옷조차 없었다. 하지만 다윗도 목동으로 지내는 동안 들에서 익힌 나름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긴 지팡이와 짧은 막대기와 물매, 이 세 가지 도구로 웬만한 들짐
승들의 공격을 물리치는 담력과 실력이 있었다. 긴 지팡이는 맹수들과 갑작스럽게 맞부딪혔
을 때 쓰는 무기였고, 막대기는 조금 간격이 벌어져 있을 때 그 막대기를 집어던져 들짐승
을 쫓았다. 또 물매는 좀더 먼 거리에 있는, 양들을 공격하는 맹수에게 던지는 돌멩이로 그
쓰임새가 용이했다.
무엇보다 다윗이 물매를 던지는 솜씨는 매우 훌륭했는데 마치 서부 영화에 나오는 총잡이
들의 솜씨가 그러하듯이 정확하고 신속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만일에 다윗이 첫 공격에 실패하면 반격해오는 골리앗의 칼날은 훨씬 치명적일 수 있다. 다
윗과 골리앗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다윗에게는 승산이 없어지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
블레셋 진영의 군사들과 이스라엘 진영의 군사들 그 어느 누구도 소년 다윗이 이길 수 있
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리쳐서 골리앗 장군이 쓰러지
는 것을 기대하는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쪽에서 골리앗
과 맞서 싸울 장수로 소년 다윗을 내 보낸 까닭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사울은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서 출전시킨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만일 다윗이 사울
왕의 갑옷을 입고 장렬히 전사한다면, 용기있는 한 소년의 가련한 주검 앞에서 이스라엘 군
사들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저하된 사기를 의분으로 떨쳐내고 분투하게 되리라는 실낱 같
은 기대심도 있었을 터이고,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전략을 세워보겠다는 속셈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싸움터로 나갔고, 단 한번의 물맷돌에 골리앗은
급소를 맞고 거대한 빌딩이 무너지듯이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 싸움은 이스라엘에 전설과 같은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뜻밖의 승전에 사울왕도 놀라움과 승전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고 소년 다윗의 용맹과 기
개를 높이 치하하였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에게 포상으로 군대의 장을 삼았다. 그로 인해
다윗의 직책은 병기 든 자(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당번병이라고 할 수 있다)의 지위에서 일약
지휘관의 자리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계속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
리하였고 백성들은 나이 어린 이 개선장군을 향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사울이 입성하는 다윗을 맞이하려다가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순간
사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윗이 물러간 다음 홀로 궁내에 남아 왠지 모를 불쾌감을 떨쳐
보려고 했지만, 끝내 그 노래가사가 마음에 걸렸다.
'만일 내가 천천이고 다윗이 만만이라면 백성들의 민심이 다윗에게 쏠렸다는 말이 아닌
가? 그렇다면 다윗에게 돌아갈 것 중에 남은 것이라곤 나라밖에 없겠군.'
사울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윗에 대한 애정은 순간 사라지고 그에 대한 시기심의 싹
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질투의 나무는 사울의 남은 여생내내 줄기차게 자라났으며 어쩌
면 악신들린 사울의 남은 여생을 지탱시켜준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사울은 다윗을 불렀다. 왕과 백성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던 다윗은 아무 생각 없
이 오직 충성스런 마음만으로 왕을 알현하기 위해 나아갔다. 과거 당번병으로 있을 때도 자
주 나아갔던 자리이기에 다윗에게는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보다는 더욱 익
숙하고 친근한 자리였다. 골리앗 장수를 무찌른 일을 계기로 해서 왕자 요나단과는 둘도 없
는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많은 신하들이 이제는 자신에게도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
는 자리가 되었다.
성큼성큼 어전에 이른 다윗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어 왕에 대한 존경과 충성을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패기가 넘치는 청년의 우렁찬 목소리도 이제 사울왕의 귀에 거슬렸다. 사울왕은 낮고 차
가운 목소리로 응했다.
"그대의 명성이 나라 전역에 드높아진 듯하오. 그대는 이제 짐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오."
다윗은 사울왕의 칭송에 뼈가 들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다윗이 상투적인 긍정
언어로 대꾸하였다.
"황공하옵니다만, 소신은 전하의 종에 지나지 않사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인 줄로 아옵니
다."
사울왕도 다윗의 상투적인 대답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만 늘어놓았
다. 그렇듯 쌀쌀한 접견방식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사울의 모습이었다.
"장군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블레셋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소. 하지만 최근에
는 장군 덕분에 우리가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당분간은 국제 정세도 안정될 기미를
보이고 있소. 이 나라가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아직도 조직과 행정에 허점이 많으니
이제 장군은 천부장의 직책을 맡아 민사와 재판일을 보면서 짐을 돕도록 하시오.'
천부장, 그것은 좌천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다윗은 기분이 씁쓸했다. 특히 자신은 무관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왔고 보직을 옮기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도 궁금한 것은 왕의 의중이었다. 다윗은 자신이 부지중에라도 왕께 불충했던 일이 있는가
싶어 지난 일들을 되짚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윗은 이제 사울왕의 원수가 되어 그의 살기를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
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데 민심은 다윗이 천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더더욱 다윗에게로
기울었고, 광기에 가까운 사울왕의 행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요나단조차도 다윗의 편이 되
었다. 다윗은 그를 따르는 휘하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산이나 광야의 바위와 굴을 찾아다녔
다.
어느날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쉴 수 있을만큼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다. 사울왕의
군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므로 다윗과 일행은 동굴의 깊은 곳으로 은둔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얼마후 사울왕과 그의 군대가 같은 굴에 들어온 것이다. 동굴
초입에 거처를 마련한 사울왕과 그의 부하들은 피곤에 지쳐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막상
사울의 얼굴을 직접 대하게 되니 다윗은 마음 속에 품었던 적개심이 달아났다. 오히려 가련
하고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모두들 곤하게 자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는 지워 고하가 없고
분노도 증오도 없는 평화의 상태였다.
반면 다윗쪽에서는 모두 초긴장 상태가 들어가 있었다. 만일 사울왕 일행이 동굴 안쪽으
로 조금만 더 깊숙히 들어왔거나 동굴의 동태를 살피는 전초병들이 조금만 더 다가왔어도
전투는 다윗쪽이 훨씬 불리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초 한 명 세워두지 않
고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만일 다윗의 군사들이 사울왕을 기습한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일
수밖에 없다. 만일 사울의 군사중 한명이라도 인기척에 깨어난다면 다윗쪽의 출혈도 심해질
수 있고 다 된밥에 재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 좋을 때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태연자약할뿐더러 개인적인 감상에 젖어 망설이고 있으니 부관들의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들 중 한 명이 귓속말을 전해왔다.
"신이 내린 절호의 기호입니다."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사울왕을 거세한다면 다윗은
왕권을 쉽게 찬탈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백성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이미 민
심은 다윗쪽으로 기울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간단하게 사울왕은 역습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현재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쪽이 훨씬 불리하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친
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문제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다윗의 생각을 달랐다. 그도 인간인지라 사울왕에게 배신감이나 증오심 등의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왕의 옷자락만 베어낸 후 말했다.
"내가 손을 들어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야훼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
는 야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사울왕과 장군들이 잠에서 깬 후 동굴밖으로 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다시 다윗 추격전을
시작하려고 할 때 다윗이 동굴에서 나와 사울왕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사울왕의 겉옷자락을
내보이며 자신은 왕에 대해 죄과가 없음을 아뢰었다. 사울은 진정으로 감동하여 다윗을 향
하여 소리높여 말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
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라."
사울은 자신을 뉘우치며 다윗을 평안히 보내고 자신도 왕궁으로 돌아갔다. 사울왕이 눈물
을 보인 것은 위선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뉘우치고 또 다윗을 사랑했다. 한편으로 사울
은 곧 다윗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추대되어 백성을 영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알
고 있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백성들의 충성이 떠난 사울에게 남은 것은 왕관
뿐이었다.
하지만 왕관 뿐인 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한 현실이 사울에게는 도
무지 용납되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환영은 사울을 시기와 질투, 분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사울왕은 다윗에 대한 연민과 질투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
가며 정신적인 고뇌에 시달렸다. 또다시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였고 다윗도
또다시 도망다니면서 사울의 광기에 장단을 맞추어야 했다. 다윗은 하길라산 길가에서 지난
번 동굴에서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또 얻게 되지만 그때도 역시 사울왕의 창과 물병만 가지
고 그 자리를 물러났고 사울은 또다시 다윗과 상면한 자리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다윗
을 축복해주었으나 사울의 망령된 행동은 그칠 줄을 몰랐다.
끝내 다윗은 사울왕과의 피곤한 숨바꼭질을 피하는 방편으로 블레셋에 망명하였고 블레셋
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다윗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사울왕은 이제 더 이
상 다윗을 뒤쫓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에게 난처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블레셋이 군사를 모
집하여 이스라엘에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아기스의 수하에 있던 다윗도 용
사들을 거느리고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다윗은 이제 블
레셋편에서 사울왕과 전쟁터에서 맞서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도 사울의 얼굴을 피해
왔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사울왕과 숙명적인 대결을 하게 된 셈이다.
블레셋의 군대가 아벡에 모였다.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혹은 수천씩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하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블
레셋 방백들이 다윗과 용사들을 보고는 기수를 돌려 아기스의 진지로 찾아왔다. 그들은 아
기스에게 다윗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요구했다. 한 방백이 과거를 상기시키며 말했다.
"이 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의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던 바로 그
다윗이 아닙니까?"
다윗이 막상 전쟁터에서 생각이 달라질 수 있고 칼날을 돌려 블레셋에 대적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결국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다. 극적인 순간에 극적인
방법으로 다윗은 사울왕과의 직접적인 접전을 피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일까? 다윗
의 중심을 헤아리신 야훼께서 그에게 피할 길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진영의 나팔수가 퇴각을 알리는 경보를 울렸다. 사울왕과 장군들은 사색이 되었
다. 적군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도무지 이번 공세를 막아낼 다른 묘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블레셋 군사들이 성내에 진입해 왔다.
"뿌우-."
다시 퇴각 나팔소리가 울렸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달
아나고 있었다. 사울왕은 가까스로 길보아산으로 피신하면서 만일 다윗이 있었다면 이스라
엘이 이렇게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다윗이 공적
을 세워 또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총애를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다시 저주스러웠다.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은 사울왕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저녁때까지 금식하였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7일 동안 금식하며 왕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
토록 허무하게 갈 것을 그토록 증오하고 시기하며 다윗을 추격하던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
었던가? 그렇듯 죽음은 삶을 가르치고 역사는 인간에게 교훈을 주지만 사울과 다윗이 나누
었던 애정과 증오는 풀 한포기 틔워내지도 못할 이스라엘의 광야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예상 밖의 상대
- 모르드개와 하만
울부짖는 소리와 대소동, 뇌성과 지진으로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때였다. 두 마
리의 커다란 짐승이 서로 다가서더니 금시라도 달려들어 싸울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그 자
극적인 소리에 흥분을 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치려고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온
땅이 고통과 번민과 불안, 대혼란으로 뒤덮였다. 의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닥친 재
앙에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때 그 부르짖는 소리
가운데서 마치 작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큰강이 생겨나 물이 넘쳐 흘렀다. 그러자 태
양이 뜨고 날이 밝아지더니 비천하게만 여겨져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히려 힘센 자들을
집어 삼켰다.
모르드개는 꿈에서 깨어나 그 꿈이 무슨 뜻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았지만 도무지 그
꿈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때 다니엘이 있었더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지만 마땅히 물어볼만한 사람도 없거니와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서 무슨 특별한 계시를 하시겠는가 싶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꿈은 너무
나도 선명하고 분명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잊어지기는커녕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
다. 모르드개는 하루종일 꿈생각을 하다가 야간 근무를 하러 나갔다. 성문지기였던 모르드개
는 교대시간에 한 번도 늦는 일이 없는 성실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주변은 이미 칠흙같이 어두워졌다. 모르드개는 줄곧 꿈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만 엉뚱
한 길로 들어섰다. 그는 내관들이 머무는 숙소 앞에 이르러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
리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언뜻 들으니 대화의 내용은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에 관한 것이 아닌가? 모르드개는 사시나무 떨 듯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놓으
며 문틈으로 눈과 귀를 갖다 대었다. 벌어진 문틈으로 안에 있는 어전 내시들의 모습을 확
인할 수 있었다. '그래 저자는 빅단과 테레스야.' 그런데 음모를 지시하는 자의 모습은 잘 보
이지 않았다. 고위직인 듯 싶은 그자는 빅단과 테레스에게 일이 성사되면 높은 관직과 부귀
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노라고 약조했다.
모르드개는 그 자리를 몰래 빠져나와 에스더에게 달려가 자기가 들은 사실을 그녀에게 알
려주었다. 왕비좌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은 에스더는 그 사실을 아하수에로 왕에게 알려주
었다. 왕은 음모자들이 자기를 음해하기로 한 날에 근위대 병사들을 잠복시켜놓았다. 그 사
실을 모르고 있던 빅단과 테레스는 단검을 몸에 숨긴 채 왕의 침실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침상은 이미 비어 있었고, 그때서야 두 사람은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도
망치려 했지만 미리 잠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순
순히 자백했지만 배후세력에 대해서만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며칠 뒤 그들은 사형에 처해
지고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왕은 사건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그런
이유와는 상관없이 모르드개의 공로를 치하하는 일을 잊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사건과 모
르드개의 이름은 궁중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해는 왕에게나 모르드개에게 중대한 의미를 가진 해였다. 아하수에로 왕은 그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 궁중에서 큰 행사와 잔치를 열었다. 고관대작을 비롯하여 페르시아와 메
대의 장군과 귀족과 각 지방 수령들을 초대하여 왕실의 부귀와 눈부신 영화를 자랑했다. 그
기간이 끝나자 왕은 다시 궁궐 안뜰 정원에다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지막 날에 불
행한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왕은 잔뜩 오른 취기에 흥이 돋아 왕후 와스디를 화관으로 단장시켜 모셔오라고 명을 내
렸다. 왕은 왕후의 아름다운 자태를 백성들과 고관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의 그런 유치한 행동은 자신을 노리개감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와스디는 왕의 명
을 거절했다. 왕후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한 왕은 결국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궁
녀들 가운데 미모가 뛰어나고 총명함까지 갖춘 에스더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촌오빠인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비에 오르던 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유다왕 여고니
아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잡혀 올 때 예루살렘에서 함께 잡혀온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부모형제도 없었고 친족이라고는 전쟁고아가 된 사촌동생 에스더 뿐이었다. 가난과 온갖 핍
박 속에서 그 코흘리개를 키워 마침내 제국의 왕후가 되던 날 그 누구보다도 감격스러웠을
테지만 모르드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그녀를 간택하신 것이라고 확신했다. 빅
딜과 테레스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해서 왕의 목숨을 구한 것도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해는 모르드개에게 큰 축복이 임한 해인 듯 싶었
다. 그런데 그에게 큰 환란이 닥칠지도 모르는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하였다.
마케도니아 출신 하만의 총리대신 취임연설을 문밖에서 듣고 있던 모르드개는 순간 온몸
에 전류가 흐르는 공포를 느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지난번 왕의 암살을 지시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고발할 아무 증거도 없었고 게다가 총리대신이면 나라안
의 제2인자인데 감히 그를 모함했다가는 파리목숨이 되고 말 것이다. 모르드개는 기억을 더
듬어 그때의 정황을 떠올렸다. 그는 하만이 분명히 자신의 음모가 발각된 원인을 캤을 것이
고 그것이 모르드개 자기때문이었음을 파악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떤 누명으로 처단될
지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더 염려되었다.
하만이 결코 총리대신 정도로 만족할 리 없을테고 제2의 역모를 꾀해 집권하게 된다면 왕
후의 목숨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만의 연설이 끝나자 왕은 모든 신하들과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불러들여 하만이 입궐할 때마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도록 왕명을 내
렸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절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함께 있
던 문지기들이 날마다 충고했지만 모르드개는 끝내 듣지 않았다.
한편 왕의 신임과 총애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하만은 날이 갈수록 의기양양했다. 그는 잠
시동안 총리대신 자리에 만족해볼까도 생각 해보았다. 그러나 왕위의 권세에 비하면 그 자
리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하만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르드개를 제거하는 문
제였다. 수많은 난관과 경쟁을 물리치고 총리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별 어려움없이 자신
의 숙적들을 물리쳐 왔다. 그런데 일개 문지기 하나 때문에 큰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일
전에 빅단과 테레스가 체포되던 때 자신의 음모임이 드러날까봐 얼마나 가슴졸였던가? 그는
모르드개가 어떻게 그 음모를 알아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음모에 자신이 연
루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드개가 알고 있는지 몹시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배후세력을
캐기 위한 더 이상의 조사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모르드개가 자신의 존재를 모
르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대하는 모르드개의 불손한 태도를 보면서 마음 속의 의심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어쩌면 저 녀석이 다 알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총리 앞에서 머리를 세
우고 있겠어?'
그는 모르드개를 제거해야만 뒤탈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총리가 된 지 얼마되지
도 않아 권력의 칼을 휘둘렸다가 왕의 눈총이라도 사지 않을까 싶어 적당한 기회가 올때까
지 당분간은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모르드개에 대한 하만의 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제국의 총리가 일개
문지기에게 업신당하고 또 경계의 대상이라는 자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모르드개로부
터 늘 관찰당하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가졌던 하만은 이제 더 이상 모르드개를 그냥 두어서
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그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모았다. 마침내 그는 모르드개를 합법
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유대인 전부를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서를 만들었다.
- 제국의 대와 나 아하수에로는 인도에서 에디오피아에 이르는 127개 주의 통치자들과
그 예하 지방장관들에게 이 조서를 보낸다. 수많은 백성들을 통치하고 온 세상을 지배하는
나는 결코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정도를 지키면서 관대하게 다스리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
의 백성들에게 파탄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살게 해주며, 나의 왕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에게
나 문명의 혜택과 거주이전의 자유와 통행의 권리를 주며,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한다. 그런
데 이 땅위에 사는 모든 부족 가운데 유독 못된 민족이 섞여 살고 있으니, 그들은 다른 모
든 민족을 적대시하는 율법을 가지고 있어, 언제나 왕명을 거역하며 온 백성의 권리를 보장
하려는 나의 통치를 방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별난 이 민족이 온 인류와 사사건건 충돌하
며 괴상한 법제도로 우리의 이익을 해치며 극악한 범죄를 저질러 마침내 이 왕국의 안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음을 경고하며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공직의 제1인자이며 나에게는 아버
지와 같은 하만이 보낸 편지 속에 지적한 자들을 금년 12월 13일을 기하여 여자든 어린이든
가릴것없이 모조리 없애버리라. 앞으로 이 나라가 안정과 번영을 누리도록 단 한사람도 남
기지 말 것.-
하만은 왕의 허락을 얻어내어 왕의 제후들과 각 지방총독들과 각 민족 수령들에게 칙서를
보냈다.
그 조서로 인해 나라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 나붙은 방을 보고 이 사실
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분노의 치를 떨었다. 이것은 자기 혼자만의 안전이나 에스더 왕후에
게 닥칠 위험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나 모르드개에게는 하만을 대
적할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고 대책도 없었다. 오직 살 길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길뿐이라고
생각하며 에스더 왕후에게 포고령 한 장을 보내 자세한 내용을 알리고 왕께 나아가 호소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왕의 허락없이 왕께 나아간 자에게 왕이 금지팡이를
들어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하는 관습이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에스더는 결단을 내린 뒤 시녀를 통해 모르드개에게 전갈을 보냈다.
"온 유대인에게 알려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 뒤에 국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왕께 나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죽겠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에스더는 기도를 마치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두 명의 시녀를 데
리고 나섰다.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진 그녀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
며 여러 개의 문을 지나 왕앞으로 나아갔다. 왕은 허락도 없이 불쑥 나타난 에스더를 보자
노기 띤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순간 왕후는 그만 실신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
에 놀라고 당황스러워진 왕이 옥좌에서 달려와 에스더를 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
였다.
"에스더, 이게 웬일이오? 안심하시오.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오. 내 명령은 평민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오. 그러니 어서 정신을 차리시오."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가 포고령 때문에 어전에 나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에스더는
가냘픈 음성으로 대답했다.
"왕이시여, 제게는 왕이 하나님의 천사처럼 보였고 그 당당한 위풍에 두려움을 잊었습니
다. 당신은 진실로 훌륭한 왕이시고 인자하시며 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다시 실신하고 말았다. 왕은 몹시 근심하
였고 시종들은 에스더를 깨어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에스더는 일단 어전
에 나가 아하수에로 왕을 만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다시 원기를 회복한 에스더에게 아
하수에로 왕이 말했다.
"에스더, 도대체 무슨 일이오? 내게 무슨 간청이라도 있소? 그대가 원한다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리다."
그러자 에스더가 간청을 올렸다.
"제가 왕을 위해 오늘 잔치를 차렸습니다. 좋으시다면 하만총리와 함께 와주셨으면 합니
다."
왕은 에스더의 지혜로움에 감탄하였다. 그 자리에서 소원을 말해도 못들어줄 리가 없건만
왕의 기분을 즐겁게 하고 여유롭게 하여 간청하려는 사려깊은 생각은 왕의 눈에 더욱 사랑
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기꺼이 가겠다고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아하수에로 왕과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다. 잔치
의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자 왕은 에스더의 간청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왕은 자신의 사
랑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그녀의 소원이 무
엇인지 물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제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왕께서 저를 귀엽게 보아주신다면 또 왕께서 좋으시다면
내일도 잔치를 베풀고 두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하만 총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와 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간청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그저 잔치의 즐거움에 취해 에스더의 요청을 기분좋게 받아들였다. 그날
밤 하만은 자기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뿐인줄 아는가. 에스더 왕후께서 손수 베푸신 잔치에 나 혼자만 왕과 자리를 같이 했
다네. 게다가 내일도 왕과 함께 초대를 받았지."
하만의 아내 제레스가 뭐가 그리도 즐거우냐고 묻자 하만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
다.
"모르는 소리! 왕실을 장악하려면 왕실의 열쇠를 쥐고 있는 왕후부터 잡아야 하는 거요."
"그런데 왕후가 왜 자네만 왕과 함께 초대한 것 같은가?"
"그러면 이 페르시아제국에 나만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자가 또 누가 있겠나? 왕후도 나
의 영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겠어? 그건 그렇고 명단은 다 됐겠지? 유대인들의 분위
기는 어떤가?
그들은 12월 13일에 유대인들을 모두 없애버린 뒤 그 기세를 몰아 왕궁까지 쳐들어갈 작
정이었다. 그래서 하만과 그의 친구들은 유대인의 명단과 함께 정치적 숙청 대상들에 대해
서도 따로 명단과 함께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하만의 친구가 유대인들의 동태에 관해 상
세한 보고와 아울러 모르드개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모르드개의 이름이 언급되자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던 하만은 애초의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왕과 왕후의 신임을
확실하게 받아두었으니 그까짓 하급관리 한명쯤 처단한다고 해도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
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성미 급한 하만은 모르드개를 제거하는 계획을 12월 13일까지
미뤄두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르드개 그놈을 당장에 요절 낼 방법이 없을까?"
"높은 기둥을 세우고 내일 아침 왕께 청을 드려 모르드개를 매달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개운한 마음으로 왕과 함께 잔치에 나가게나."
하만은 그말에 솔깃해서 하인들에게 날이 밝는 대로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다고 생각하니 하만은 설레임으로 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도 어떤 일인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무료해진 그는 신하를 불러 궁중실록을 가져다
읽게 하였는데 빅단과 테레스가 자기를 암살하려던 것을 모르드개가 알려주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고 늦었지만 그에게 무슨 상으로 공을 치하해야 할 지 궁리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치하기 위한 계획을 위해 허락을 받으러 왕을 찾아왔
다. 때마침 찾아온 하만에게 왕이 의논차 질문했다.
"내가 상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하만은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자기 말고 누가 있겠는가 하고 내심 기쁜 마음에 아뢰었
다.
"왕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대신을 시켜 왕께서 입으시는 의복과 타시는 말을 내어 오
게 한 다음 상받을 자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왕복을 입히시고 말을 태워 성내 광장을 돌게
하십시오. 그리고 말을 타고 돌면서 '왕께서 상을 내리시려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주신다'
고 외치게 하십시오."
하만은 꿈에도 그리던 왕복을 입어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였다. 이제
왕의 입에서 분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하만에게 청천벽력 같은 어명이 떨어졌다.
"그 말대로 시행하라. 그대는 내 옷과 말을 내어다가 성문지기 일을 보는 모르드개에게
지금 말한 것을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그대로 해주도록 하라."
하만은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셈이었다. 그는 왕복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입히고 말
에 태운 다음 광장을 돌면서 '왕께서 상을 내리시려는 사람은 이같이 해주신다'고 외쳤다.
울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하만의 집에 그 광경을 지켜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만
은 참고 참았던 분을 터트리느라 소리지르며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집어던져 보았지만 그래
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모르드개를 제거하는 일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제 그는 12월 13일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
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중 누구도 모르드개 보다 하만이 먼저 불행해지리라고 생각지 못했
다. 그들이 다시 모의를 꾀하고 있을 즈음 왕을 모시는 내관이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내관
하르보나는 하만의 집앞에 세워진 나무기둥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에스더 왕후가 베푼 잔치에 하만을 모시고 오라는 왕명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하만은 왕과 함께 에스더 왕후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두 번째 잔
치에서도 왕은 에스더에게 물었다.
"에스더, 어서 그대의 소원을 말해보시오. 내 무엇이든 들어주리다. 진정 소원이라면 나라
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그러자 왕후 에스더가 대답했다.
"만일 왕께서 저를 귀엽게 보아 주신다면 이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제 소원은 이것입니다.
저의 민족도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지금 저와 저의 민족은 다 죽어 멸종될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종으로 팔려간다고해도 아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왕께서 그일로 인
해 당하실 손해는 무엇으로 메우시겠습니까?"
아하수에로 왕은 제가 허락한 일도 모르고 발끈 화를 냈다.
"도대체 그런 음모를 꾸미는 자가 어디에 있소?"
에스더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에스더가 말하는 동안 하만은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왕이 치미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앞뜰로 나간 사이 에스더는 긴장
을 풀기 위해 평상에 기대어 누워있었다. 하만은 에스더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빌다시피
통사정을 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왕의 진노를 피하게만 해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에스더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하만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
나 에스더가 그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하만이 붙잡고 있던 에스더의 치마
가 뒤집혀 왕후의 살결이 무릎까지 드러났다. 바로 그순간 술자리로 돌아온 왕의 눈에 그
장면이 붙박혀 들어왔다.
"네놈이 내 거처에서, 더구나 내 앞에서 왕후를 겁탈하려느냐?"
왕의 호통소리를 들은 신하들이 곧장 달려와 하만을 체포하고 하만의 얼굴을 보자기로 가
렸다. 그때 하만의 집에 명령을 전하러 갔던 하르보나가 왕에게 말했다.
"마침 하만의 집에 높이가 쉰자나 되는 기둥이 하나 서 있습니다. 알아보니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하만이 세워 둔 것이랍니다."
왕의 분노는 걷잡을 길 없이 더욱 커졌다.
"내 목숨을 구한 충신을 죽이려 했다고? 그 기둥에 저놈을 당장 매달아라."
왕의 명령에 따라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워놓은 기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게 되었
다. 그 날로 왕은 하만의 집과 재산을 몰수해서 왕후에게 주고 모르드개에게는 높은 관직을
주어 어전에 나오게 했다. 에스더는 왕에게 다시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하만의 음모를 알리
고 유대 민족을 살려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왕의 인장이 찍힌 칙령은 왕도 취소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로서도 달리 도울 방도가 없었다. 고민 끝에 왕은 모르드개를 불러 의논했다.
모르드개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의 인장이 찍힌 문서는 아무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 포고령을 취소하신다면
대왕의 권위는 추락하고 백성들은 왕명을 잘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국가에서도 비
웃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포고령은 그대로 두시되, 유대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또다른 칙서를 공표하시면 누가 보나 합당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왕을 우러러 볼 것입
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의 지혜에 감탄하여 새로운 칙령을 작성하도록 모르드개에게 전
권을 위임하였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칙령이 작성되어 전국에 뿌려졌다.
"나 아하수에로 대왕이 인도에서 에디오피아에 이르는 127개 주의 통치자들과 그 예하의
지방장관들과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보낸다. 마케도니아 사람 함다다의 아들 하만에
의해 12월 13일로 정해진 유대인 말살에 관한 음모에 관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
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게 하라. 그리고 그대들은 그날에 유대인들을 도와주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멸망의 이 날을 당신의 선민들을 위하여 기쁨의 날로 바꾸어 놓았다.
어떤 도시든지 이 지시를 지키지 않으면 칼과 불의 무자비한 응징을 받아 폐허가 될 것이
며,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게 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야수나 새들의 영원한 저주까지
받게 될 것이다."
왕의 조서대로 그날은 유대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는 구원의 기념일이 되고 그들의 원수에
게는 멸망의 날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라이벌
- 욥과 사탄
햇살은 거칠 곳 없이 우스땅을 뻗어 나갔다. 둔덕으로 인해 굴곡진 들판이지만 부분적으
로 하늘과 맛닿은 지평선 위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섬처럼 군데군데 모여 자라난 잡초들은 간간히 부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거렸고 역시 듬성
듬성 자란 가시나무들의 그림자가 간신히 풍경의 음양을 이루어 주었다. 한낮의 정경은 마
치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 온 들녘에 고요의 물결을 이루어냈다.
욥은 그의 정원 한 모퉁이에 앉아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묵상에 잠겨 있었
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 진공상태와 같은 정적에 빠졌고 마치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
는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소스라치듯 몸부림쳤다.
눈과 손,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고 마침내 결리는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했다. 그가 막 일어나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고요한 들녘을 가르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덕을 넘어 달려오는 하인이 외쳐 부르는 소리였다. 순간 욥은 난생 처음 느껴보
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으나 설마 그것이 엄청난 재난과 불행을 알리는 서곡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인은 욥의 발 앞까지 다달아서 철퍼덕 주저 앉았다. 몹시 답답했지만 욥은 다그쳐 묻지
않고 하인이 호흡을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하인은 헐떡거리면서도 다급하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 하인이 그렇게 애쓰는 동안 이번에는 또 다른 하인이 달려오는 모습
이 보였다. 먼저 당도한 하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들은 그 곁에서 풀을 먹고 있는데 난데없이 스바 사람들이
나타나 가축들을 약탈해가고 종들을 닥치는대로 죽였습니다. 저만 간신히 살아남아 주인님
께 보고 드리는 겁니다."
그 하인이 말하는 중에 도착한 또다른 하인이 연이어 보고를 하는 통에 욥은 자세한 내용
을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게 내려와서 양떼와 종들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저만 목숨을 건져
이렇게 주인님께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은 당시 거부였다. 그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쌍에다 암나
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다. 양과 소와 나귀들을 모두 잃었다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낙타밖에 없는 셈이다. 그런데 미처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한 세 번째 하인이 달려와서 두
번째 하인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또 불행한 소식을 전했다. 그는 낙타를 돌보는 하인이었
으므로 그가 무슨 말을 꺼낼 것인지 짐작 되고도 남았다.
"주인님, 큰일났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세 패로 나뉘어서 저희 낙타떼를 마구 노략질해
갔습니다. 다른 종들은 모두 죽고 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졸지에 모든 재산이 사라지다니 믿을 수 없군!'
세 번째 하인의 보고가 다 끝나기도 전에 또 한명의 하인이 달려와 욥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순간 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는 잔치를 열고 있던 맏이 집에 열 명의
자녀와 함께 따라갔던 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의 자녀들이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 집이 무
너져서 모두 죽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욥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맑던 하늘이 절망의 빛깔로 보였다. 갑작스런 재난으
로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자 그는 넋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갈
기갈기 찢더니 재를 머리에 뿌리고 오열을 터트렸다.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
을 온통 뒤덮었다. 그러나 욥은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
이 침착하게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했다. 그는 땅에 엎드린 채 말했다.
"벌거벗고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 가시
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하인들은 욥이 마침내 실성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욥이 어느때 보다도 더 처절하게 깨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범죄치 않고 오히려 거룩한 경지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 사건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사탄이었다.
사탄은 심사가 뒤틀렸다. 분하지만 일단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갔다. 사탄은 예전
에 하나님에 대한 반란의 무리를 형성할 때 노아라는 사람을 놓침으로 인해서 큰 손해를 입
은 적이 있었다. 이제 사탄은 다신교를 퍼뜨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욥이 그 계획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을 하나님께 대항시키기로 결심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욥
을 시험하는 문제에 대해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욥이 시험에 들기 하루 전, 하늘의 영들이 야훼 앞에 모이게 되었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보시고 야훼께서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오느냐?"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여 두려워하고 악한 일
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
오. 그는 반드시 당신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생명만은 손대지 말아
라."
하나님은 사탄의 간계를 꿰뚫어 보셨다. 다른 말로 사탄을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간단하
게 허락하셨다. 야훼 하나님은 사탄의 말대로 욥이 진정으로 악에서 떠나 당신을 경외하고
있는지 시험하시려는 의도로 허락하신 것은 아니었다. 욥이 하나님을 믿듯이, 하나님도 욥을
충분히 믿고 있었고, 욥을 통해 대적하려는 사탄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놓으시려는 것이다.
반면 사탄은 야훼와 욥의 신뢰관계를 깨뜨려 야훼의 영광을 깨트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
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하는 욥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탄의 시
험을 받게 되었지만 사탄의 처음 공격을 멋지게 물리쳤던 것이다.
사탄의 두목이 초조한 심정으로 졸개 사탄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녘으로 나간 부
하 하나가 급히 달려와 흥분과 기쁨에 가득찬 보고를 하고 있었다.
"두목님, 대성공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조금도 차질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바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소와 나귀를 몽땅 노략질하고 하인들을 무차별 살육했으며 지시하신 대
로 딱 한명만 살려 욥에게 보냈습니다.'
사탄은 졸개의 보고에 만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명의 졸개가 나타나서 연이어 보고를 올렸다.
"하늘에게 불덩어리가 떨어지게 해서 모든 양떼와 종들을 살라버리고 단 한명만 살려 두
었습니다."
두목 사탄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는데 세 번째 졸개가 쫓아와 보고하는 바람에 길게 웃
어댈 시간조차 없었다. 역시 세 번째 졸개 사탄의 보고도 성공적인 작전수행이었다.
"기뻐하십시오, 두목님. 갈대아 사람들을 앞세워 낙타떼를 노략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세 패로 무리를 지어 조직적인 전투를 벌였는데 말씀하신 대로 한명의 종은 살려 두
었습니다."
두목 사탄은 작전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만족했다. 그는 마지막 네
번째 졸개의 보고에는 너무 감동이 되어서 하마터면 '할렐루야'를 외칠 뻔 했다. 천사로 있
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오랜 언어습관 때문이었다. 그가 마지막 보고를 듣기까지 시간은 오
래 걸리지 않았다.
"두목님, 기뻐하십시오. 돌풍이 불어 욥의 자녀 열명 중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는데
성공 했습니다."
마지막 졸개 사탄의 보고에 두목 사탄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졸개들에게 말했다.
"이제 남은 일은 욥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탄의 두목과 졸개들은 비탄에 젖어 울부짖고 있는 욥의 곁에 나타났다. 그런
데 욥은 말 없이 울기만 할 뿐 좀체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답답해지기 시작한 사
탄은 졸개를 시켜 욥에게 원망하는 마음과 저주하는 입술과 절망적인 생각을 불어 놓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과 마음을 지켜내고 있었고 그 순
간에도 그는 자신이 사탄과 대결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였다. 사탄 하나가 욥의
입을 열려고 안간힘을 쏟을 때 욥은 제단을 쌓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
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예상치 않은 욥의 고백에 사탄은 격분했지만 끈질긴 사탄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졸개들과 함께 제2의 도전을 위해 쉬지고 먹지도 않았다.
한편 욥은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그는 아침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정감이 넘치던 장막과 살림세간들도 저만치 물러나서 자신을 외면하는 듯 하였고 초목과 삼
라만상이 자신을 저주하는 것만 같았다. 재산이야 어찌 되었든 괘념치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어찌 자식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욥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믿었던 친구들의 조롱은 그
에게 임한 불행을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며칠 뒤 욥의 소문을 들은 친구들 엘리바스, 빌
닷, 소발이 찾아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소 욥의 재산과
그의 행복한 가정을 부러워하면서도 은근히 시기해 왔던 그들은 욥을 위로하는 척 하면서
완벽하기로 소문난 욥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흠을 잡아내려 하였다.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
게 임한 고난의 원인을 캐려고 노력하였다.
"욥, 그렇게 엄청난 불행 속에 빠지다니,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네. 자네처럼 의로운 사람
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을 수가 없어."
피부병으로 온몸에 진물이 흐르고 참을 수 없이 가려웠던 욥은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며
대답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러울 뿐일세. 내가 왜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죽지 않았던가? 이
날을 보려고 여태 살아왔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네."
이번에는 발닷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불행이 더 크게 번지지 않도록 냉철하게 그 원인을
따져 봐야지 않겠나?"
소발이 발닷의 말을 이었다.
"신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지. 신의 징계가 분명해. 욥, 자네를 흠잡으려는
것이 아니니 오해없이 듣기를 바라네. 어둠 속의 번개가 어느 하늘을 갈랐는지 알 수 없듯
이 사람의 기억도 믿을 만한 일이 못된다네. 혹시 과거에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가 않지 않
겠나? 잘 생각해 보게나."
욥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과연 자신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한 적이 있는지, 아
니면 부지중에라도 불경스런 범죄를 했는지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그 분의 뜻을 의심한 적이 없고, 또 날마다
그날 지은 죄를 속죄하면서 살아온 터였다. 욥은 친구들의 근심어린 조언을 진지하게 숙고
해 보았으나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생각도 변치 있었으니, 고대 사람들
은 야훼가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죄인에게는 벌을 내리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까닭없는 축복과 저주가 없으니 야훼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반드시 욥에게 문제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욥의 아내는 이미 이성을 잃고 주체할 길 없는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기왓장을
들고 있는 욥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뭐가 그리 대단해요? 자식들이 몽땅 죽었는데도 당신은 하나님만
두둔하고 있군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당신도 죽어 버려요.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날거
예요. 이런 저주받은 땅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요."
욥의 아내는 마침내 욥을 떠나갔다. 그 많던 재산도 잃어버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식
열을 졸지에 모두 잃어버린 처지에 그 땅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 땅엔 희망이 없었다. 오로지 끝없는 절망과 비탄의 그림자만 존재할 뿐이다. 떠나는 것만
이 유일한 선택이리라. 욥은 아내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행복했던 가정이 단 하루 사이에 풍비박산나고 희망의 터전이 절망의 자리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또 엄청난 시련을 당할 때 믿었던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
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어쩌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본질이 어
떤 계기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욥의 세 친구는 아내마저 떠나가버린
욥을 지켜보면서 몸둘 바를 몰라했다. 하지만 그들도 욥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욥은 이제 완전히 혼자였다. 그는 진정 절망이 무엇인지 사무치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를
더욱 힘겹게 하는 것은 재산을 잃은 슬픔이나 친구들의 몰이해, 아내의 배신보다도 고독함
이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외로움이나 일시적이고 낭만적인 고독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에
서 비롯되는 근원적인 고독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저버려도 참을 수 있었다. 자식이 모두 죽
어도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또 육신에 임한 병이야 어찌 못 참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부르짖어도 신의 응답이 없다는 것은 죽기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차가운 밤 공기가 광야에서 불어왔다. 그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추위를 이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온몸에 난 욕창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몸에는 진
물과 악취가 진동했고 견딜 수 없는 가려움 때문에 바닥에 이리저리 뒹굴어 보기도 했다.
멀리서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욥은 차라리 저놈의 밥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해 보았
으나 그 소리는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와 정신마저 희미해졌다. 차라
리 그대로 드러누워 눈을 감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욕창으로 인한 가려움과 쓰라린 고통이
순간순간 졸고있는 그의 의식을 자극하고 깨어있게 했다. 욥은 야훼께 하소연도 해 보았으
나 막을 내린 무대처럼 공허감만 짙어질 뿐이었다.
어떻게 날이 샜는지 알 수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사람들의 무리가 욥의
앞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의 몰골이 아닌 욥을 보면서 혹시라도 자기들
에게 병균을 옮을까 도망치듯 달아났으며, 침을 뱉거나 저주를 퍼부어 욥의 재앙에서 멀리
벗어나려고 했다. 욥은 이대로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나가
던 상인이 그에게 말했다.
"욥,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소? 당신처럼 의로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이건
분명히 당신이 섬기는 신에게 문제가 있소. 이 꼴을 보니 야훼는 정의로운 신이 아니라 나
쁜 신이 분명하오. 나는 어떤 신보다도 당신을 믿소."
마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가 구원병을 기다리듯, 정신마저 혼미하던 욥은 그 상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 상인의 말을 듣는 순간 욥은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저주와 고통 속에 처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상인의 말을 듣고 이제서야 그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고난의 출처를 캐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신의 침묵에 호소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욥은 그 엄청난 사역의 핵심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정의와 공평이 바로 자신을 통해서 지켜질 수도 있고 흐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욥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욥은 사탄의 정체와 간계를 파악해 낼 수
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보이는 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적과 싸워서 반
드시 이겨야 한다고 각오했다. 그와 같은 욥의 각성은 앞으로 어떤 고난을 만난다해도 싸워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한편 사탄의 진영에는 비상이 걸렸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내 마침내 욥의 육신을 공격
하고 그의 아내와 세 친구를 동원하여 욥을 옥죄어 갈 때는 승리의 조짐이 보이는 듯해서
기뻐하였다. 또 욥이 재앙과 질병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차
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는 거의 승패가 결정났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진
전되면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졸지
에 또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탄의 두목은 진상을 조사케 했고 졸개 사탄이 분석한 보
고는 이러했다.
"두목님, 욥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배역케 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상인을 투입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습니다."
상인을 시켜 욥을 두둔하고 하나님을 저주한 것이 역반응을 일으켰다는 분석이었다. 그
계획을 제안한 사탄은 심한 문책을 받아야 했고, 사탄의 우두머리는 남은 모든 수단을 동원
하기로 했는데, 이미 그들의 탄약고는 바닥이 난 셈이었다. 사탄은 다시 한번 욥의 세 친구
들을 동원하여 욥을 회유하면서 쓰러뜨려 보기로 하였다.
엘리바스가 욥을 찾아와 세 차례에 걸친 변론을 하였지만 별 소득이 없자 다른 방법으로
욥을 회유하려 들었다.
"자네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면 복이 다시 임하리라 믿네."
얼마나 그럴싸한 말인가? 고통중에 있는 욥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바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 말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욥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다는 전제가 되는 말이 아
닌가? 욥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문했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내게 임한 줄로 아는가? 내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줄로 아는가? 내게 임한 이일이 하나님이 내리신 일이라면 내가 어찌 항변할
수 있겠는가? 재앙이 내 탄식보다 중요하네.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을 내게 이루신 것이네.
내가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주가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
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진정으로 신을 이해하는 경지에 오른 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
다. 사탄은 이번에는 어리긴 하지만 총명한 엘리후를 등장시켜 보았다. 믿음이 좋은 엘리후
였지만 욥의 고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엘리후와 세 친구들은 욥이 의롭
지 못한데서 재난의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인간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대립시키
지 않으려는 욥의 신념을 바꿀 수는 없었다.
토론은 지루해지기만 할뿐 욥의 마음을 돌려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탄은 욥의
입에서 단 한마디도 배역한 말을 끄집어 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 어디선가 폭풍이
밀려왔다. 욥의 주변에서 그를 시험하던 사탄의 무리들은 그 폭풍 속에 하나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는 모두 달아났다.
그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이제 너
에게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
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는 바로 저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
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
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은 고난의 끝에 하나님을 뵐 수 있었다. 신의 침묵과 그의 고독도 이제 끝났다. 신의 음
성 가운데 욥은 하나님의 정의는 스스로 지켜지는 것이지 인간인 자신의 입으로 지켜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을 의롭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자기 스스
로는 온전한 의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놀라운 신의 은총이었다. 그토록
고민하던 문제가 야훼의 출현으로 모두 풀려 나갔다. 마치 봄날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듯이
신의 위엄 앞에 모든 문제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변하였다.
욥의 시련은 끝났고 하나님 아훼는 욥을 더욱 의롭게 하시고 복을 주시어 그 소유가 예전
보다 갑절로 불어나게 되었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어 다시금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
다.
욥은 그에게 닥친 재난과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인내함으로써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싸웠는지도 모르면서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
이다. 욥의 고난은 그 이후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교훈도 함께
전해 주었다. 사탄은 노아에 이어 두 번째 의인인 욥을 넘어뜨리는 데 실패하였지만 또 다
른 의인의 출현을 기다리며 복수의 재기를 꿈꾸고 있다고 전해온다.
고대 제국의 정치와 숙적
- 다니엘과 페르시아 장관들
BC 602년 남왕국 유다에서는 여호야김이 왕위에 즉위했다. 하지만 멸망을 향해 기울고
있던 때에 여호야김도 열조의 악에서 떠나기는커녕 멸망을 향해 가속의 페달을 밟았다. 그
당시에 활약하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토굴 속에서 야훼의 계시를 받았고 예레미야의 곁에는
충실한 서기관 바룩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나갔다. 그리고 기록된 그 말씀은 바
룩에 의해 야훼의 집에서 백성들에게 읽혀졌다. 그러자 황실 조사위원들은 바룩을 불러다가
그 두루마리를 다시 읽게 하였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든지 여호야김 왕은 칼을 빼
들더니 그 두루마리 책을 갈기갈기 찢어 불 속에 던져 버렸다. 말할 것도 없이 예레미야와
바룩은 체포령을 받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숨기셨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어느날 예레미야는 성전문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나 야훼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이나 그 목으로 바벨
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을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
으로 벌하리라."
예레미야의 말에 두려워하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평화가 지속될 것이다'라고 외
치는 선지자들도 많은 까닭에 대다수의 백성들은 야훼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관군
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예레미야는 성전문 맞은편에서 유심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총명한 소년을 발견했다. 예레미야는 그 소년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어 보
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니엘입니다."
"내가 한 말은 야훼께서 주신 말씀이다. 명심해라. 조국의 미래는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야훼께서 너를 축복하시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예레미야는 그 소년을 축복하고 사라졌다. 다니엘은 그의 당당함과 진지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예레미아가 떠나고 잠시후 소년 다니엘 앞에 예레미야를 잡으려는 군사들이 들이닥
쳤다. 한 군사가 다니엘에게 물어 보았다.
"너 혹시 방금전 여기서 연설하던 노인을 보지 못했니?"
다니엘이 그 군사에게 반문했다.
"흰 수염이 길게 나있고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군사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맞다. 그 사람 봤니?"
다니엘은 우선 예레미야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정말 말로만 듣던 예
레미야 선지자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뭔가요?"
결국 이름을 확인해낸 다니엘은 그 군사에게 예레미야가 달아난 반대방향을 가리켜 주었
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다니엘은 그의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함께 여호야김 왕을
비롯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는 대열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예레미
야의 예언 가운데 서곡이 울린 것이다.
BC 606년경 여호야김이 즉위한 지 4년 되던 해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
략해 들어와 왕궁의 보물들과 하나님의 집에 있던 물건까지 약탈했으며 쓸만한 사람들은 죄
다 잡아갔던 것이다. 다니엘은 몇번씩이나 예루살렘을 뒤돌아보면서 과연 자신과 조국의 미
래가 어떻게 변할지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희
망의 얼굴로 예레미야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붙잡혀 가는 이들 속에는 없으나 그는 분명
히 살아 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리라. 성문 앞에서 자신을 축복해 주던 그 음성과 눈
빛을 상기했다. 그리고 언젠가 야훼께서 국권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희망의
돛대삼아 가슴 속에 굳건히 붙들어 매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세계 최강국이었고 수려한 건축물들과 각 나라에서 모인 수많은 물자
와 인재들로 득실거렸다. 긴 여행을 마친 포로들은 바벨론 제국에 도착하여 용도별로 분류
되었다. 왕실에 배속될 고급인력과 부역과 건축 등 단순 노동에 쓰여질 자들이 나뉘어 졌다.
왕실의 환관장 아스부나스는 어명을 받고 몸소 포로들이 입성하는 현장으로 나가 이스라엘
자손의 왕족과 귀족 가운데 재주와 지식을 겸비한 소년들을 선발했다. 그들 가운데 다니엘
과 그의 세 친구도 뽑혔다. 왕은 그 젊은이들에게 바벨론의 말과 글을 가르쳐 앞으로 왕궁
에서 일을 볼 수 있도록 3년 동안 교육을 받게 하였다.
환관장 아스부나스는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고쳐 주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부르게 하였
고 그들은 그 새 이름으로 후세에 기억되었다.
유대전통을 지키고 야훼의 뜻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했던 네 명의 젊은이들은 우상 숭배의
제물로 쓰였던 궁중요리와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환관장에게 말했다. 그들의 말을
들은 환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느부갓네살왕이 두려웠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포악하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왕이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신과 같은
존재였고 그의 말 한마디에 신하와 백성들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였으니 어명이라 하면
산천도 떨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왕명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오랜 궁중생활의 경
험으로 다져진 아스부나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당돌하게 자신들의 의사를 밝
힌 네 명의 유대인 청년들에게 말했다.
"나는 왕께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몸이다. 너희가 왕께서 정해주신 음식을
먹지 않아 얼굴이 너희 또래의 다른 젊은이들보다 못하게 보였다가는 내 목이 달아난다."
다니엘은 환관장의 지시대로 자신과 친구들을 보살피는 감독관에 청했다.
"저희들에게 열흘 동안만 시험삼아 야채와 물만 먹게 해 주십시오. 그런 뒤에 궁중요리를
먹는 다른 젊은이들과 우리 얼굴을 한 번 비교해 보시고나서 저희들을 나리 좋으실대로 하
십시오."
감독관과 환관장은 그들의 청을 받아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니엘의 말대로 열흘 동안
두고 보았는데 궁중요리를 먹는 다른 젊은이들보다도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 그래서 감
독관은 그들에게 궁중요리와 술을 주는 대신에 야채를 주도록 허락하게 되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학문과 지식과 재주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그외에도 다니엘은 환상이나 꿈을 풀이하는 재능까지 겸비했다.
마침내 3년 동안의 교육기간이 끝나자 환관장은 그 젊은이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왕은 그들을 테스트해 보았다. 교육생들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바
벨론의 말과 지식에 가장 능통했으며 왕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어떤 문제를 내어도 그들
은 나라 안의 어느 마술사나 술객들보다도 더 지혜롭고 슬기롭게 대답했다. 왕은 대단히 흡
족해 했고 왕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환관장은 안도의 한숨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왕궁의 일을 솜씨있게 처리해 나갔다. 하지만 바벨론 사람이 아
닌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 출신 대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고 그들에게
허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한시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궁중에서 대우
받으며 넉넉히 살아가면서도 고난받는 민족으로서 늘 마음 아파했지만 드러내 놓고 심경을
토로할 데라곤 그의 세 친구밖에 없었다. 다니엘은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예레미야 선지자
의 모습과 야훼의 말씀을 상기하였다.
'과연, 바벨론의 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충성하는 것이 야훼의 뜻이란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민족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느날 다니엘은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쬐는 왕궁의 뒷뜰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왕궁의
정원수인 백향목들이 힘차게 뻗어 있었고 바벨론 궁을 비껴 지나가는 유브라데 강물이 바라
보였다. 그가 고국의 무화과 나무와 종려나무들을 그리워하며 향수를 달래고 있을 때 궁중
의 술객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다니엘은 궁중 안에서 뭔가 큰 사건이 벌어
진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 술객의 말에 의하면 오늘 아침에 느부갓네살왕이 바벨론의 궁중 마술사들과 술객들과
술객들과 점성가들을 모두 불러들이더니 왕이 새벽에 꾼 꿈에 대한 해석을 하라는 어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성술사들이 아람말로 왕의 만수를 기리며 그 꿈을 소신들에게
알려주시면 해석하여 드리겠다고 아뢰었지만 왕은 막무가내였다.
"절대로 안된다. 만약에 내 꿈을 알아내어 해몽하지 못한다면 너희를 능지처참하고 너희
의 집을 모조리 쓰레기더미로 만들리라. 그러나 그 꿈을 알아내어 해몽해 준다면 후한 상금
을 내리고 큰 영광을 누리게 해 줄 터이니 내 꿈을 알아내고 해몽해 보아라."
다니엘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그도 꿈해몽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있지만 꿈을 알아맞춰
보라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점성가들이 다시 왕에게 그 꿈을 알려 주어야
해몽할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너희가 내 말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간이나 벌려고 그러지만 내가 그것을 모
를 줄 아느냐? 너희가 내 꿈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죽이리라.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나 꾸며서
시간을 끌려도 하지만 어림도 없다. 당장 내 꿈을 알아 내어라. 그래야 너희가 해몽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아니냐?"
점성가들의 태도는 왕을 더욱 분노케 했고 왕은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그들 중에 속하므로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다니엘은 마침 왕의 명령에 따라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려고 나서고 있는 시위대 장관 아
리옥과 마주치게 되었다. 다니엘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일이 그리 급하십니까?"
시위대 장관은 조금전 술객이 전한 말과 같은 말을 했다. 다니엘이 아리옥에게 말했다.
"제가 대왕께 말씀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왕께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러니 사형집행을 좀 늦추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리옥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다니
엘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의 세 친구에게 그 일을 알려주고 기도를 요청했다. 그날 밤, 다
니엘은 마침내 환상을 보고 그 비밀을 알게 되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리
고 나서 다니엘은 아리옥에게 찾아가 다시 청하였다.
"바벨론의 박사들을 죽일 것이 아니라, 저를 입궐시켜 주십시오. 제가 왕께 해몽해 드리겠
습니다."
그리하여 느부갓네살왕 앞에 이른 다니엘은 왕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해 나갔다.
"왕께서 자리에 드시어 앞일을 생각하실 때 모든 비밀을 밝히시는 분이 훗날 일어날 일을
대왕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왕께서 보신 환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매우 크고 눈부시고 번
쩍이는 것이 사람의 모양을 하고 왕앞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쇠요, 정강이는 쇠요, 발은 쇠와 흙으로 되어 있었습니
다. 왕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는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돌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들어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쇠, 흙, 놋쇠, 은, 금이 한꺼번에 부서
져 타작마당의 겨처럼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고 자취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을 친 돌은 산같이 큰 바위가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꾼 꿈을 정확하게 묘사해내자 놀라움과 기쁨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
다. 과연 그 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어지는 다니엘의 꿈해석을 듣기 위해 느부갓네살
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꿈은 이러합니다마는, 이제 그것을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왕일 뿐만 아니라
왕들을 거느리신 황제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대왕께 나라와 힘과 권세를 주
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다 어디에 있든지 그것들을 왕의 손
에 맡겨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금으로 된 머리는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십니다. 왕 다음에는
왕보다 못한 나라가 서겠습니다. 세 번째는 놋쇠로 만든 나라가 온 천하를 다스리게 됩니다.
네 번째로 설 나라는 쇠처럼 단단하겠습니다. 쇠는 무엇이나 부숩니다. 그 나라는 쇠처럼 모
든 것을 부술 것입니다. 왕께서 보신 대로 두 발과 발가락들이 진흙과 쇠로 되어 있는 것은
나라가 둘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쇠처럼 단단하지만 왕께서 보신 대로 쇠는 진
흙과 섞여 있습니다. 발과 발가락들이 쇠와 진흙으로 되어 있는 것도 단단한 편도 있고 무
른 편도 있다는 뜻입니다. 왕께서 보신 대로 쇠가 진흙과 섞인 것은 사람들이 인척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쇠와 진흙이 엉기지 않듯이 그들은 서로 결합되지 않을 것입니
다. 이 왕들 시대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고,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앞서 말한 모든 나
라들을 부수어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 나라는 길이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바위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놋쇠와 진흙과 은과 금으로 된 것을 부
수는 것을 왕께서는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왕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꿈은 분명 이런 것이었고 그 풀이 또한 틀림
없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가 끝나자 느부갓네살 왕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덕 일어나더니 다니엘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였고 다니엘은 물론 시위대장 아리옥과 모든 신하들도 왕의 그같은 행
동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왕은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신이야말로 정말 비밀을 밝히시는 분이요, 신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신이며, 만왕을
거느리시는 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어찌 이 비밀을 밝힐 수 있었겠느냐?"
그후 왕은 다니엘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많은 선물을 하사하고 그를 바벨론 온 지방의
통치자로 삼고 바벨론의 박사들을 거느리는 자리에 앉혔다. 다니엘은 왕에게 청하여 하나냐
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바벨론의 지방관리로 임명하고 그는 궁중에서 근무하였다.
바벨론의 궁중관리들은 다니엘의 비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모든 박사와 술객들은
다니엘 덕택에 목숨을 보전하여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 그런 반면 날로 세력이 커가는 다니
엘을 위험스럽게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왕이 엎드려 절을 한 인물을 감히 어찌
모함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아직 정체를 드러내거나 세를 결집하는 데까지 진전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다니엘은 왕과 고위직 관리로부터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니엘은 왕의 꿈해몽으로 인해 위기
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게 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어렴풋이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게 되
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조국으로 귀환해서 나라를 되살리려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큰 관직에 오르고 상승가도를 달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의 정치 사정
은 더욱 악화되었다. BC 597년에 에스겔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 귀족들이 2차 포로로 끌려
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왕국 유다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김을 포로로 잡아갈 때 여호야김의 동생인 시드기야를 왕위에 세우고 유다왕국
으로부터 공물을 받아왔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라 주위에 있는 방백
들의 손에 놀아나는 인물이었다. 시드기야는 곧잘 바벨론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느
부갓네살의 비위를 건드려왔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생각해서 예루살렘 침공을 오랜
시간 주저했으나 1차 포로 시기때와 같이 또 유다가 이집트와 동맹관계를 형성하려는 움직
임을 보이자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유다의 거짓 선지자들과 방백들은 예레미야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그를 감옥에 가
두었다. 그리고 시드기야왕에게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우유부단한 시드기야는 예
레미야를 중신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줄에 매단 뒤 진흙구덩이에 던져
넣어 그 속에서 굶어죽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 지상에서의 사명이 남
아있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 한 사람을 보내셨다. 에디오피아인인 에벳 멜렛이란 사람이 예
레미야가 곤경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드기야왕에게 간청하여 그를 구출해 주었다. 구
사일생으로 살아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에게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었지만
방백들을 두려워한 시드기야는 끝내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바벨론 군대가 진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지휘고하
를 막론하고 무차별로 살육을 감행했는데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죽
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드기야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을 만들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예루살렘성의 함락소식은 삽시간에 주변국과 바벨론에 전파되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으로부터 자세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한 소식을
물었다. 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부터 하나
님의 뜻에 따라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강권하였으나 시드기야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는 것이다. 역적이라는 모함을 받으면서도 그는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바
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해주는 한편 그가 원하는 어떤 지위든 허락해
주겠다고 했지만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대하여도 똑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케한
무서운 죄를 보응받을 것이요, 그로 인하여 영원히 파멸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전했다.
예레미야는 특별한 대접을 받아 자유를 보장받고 바벨론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을 결심했다.
다니엘은 혹시 포로들 중에서 예레미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의 기대는
어긋났다. 그가 그토록 예레미야를 만나기를 원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다니엘은 스스로
에게도 그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여느 포로들이나 희망하고 꿈꾸던 바처럼 나
라를 재건하고 속히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폐허가 된 조국에 남아 비천한 자들과 함께 거하며 선지자로서 남은 사명을
다하겠다는 예레미야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다니엘은 자신의
사명을 깨우쳤다.
'이제 내게 돌아갈 조국은 없어졌다. 아니 조국은 바로 여기 바벨론 속에 있다.'
그 후 느부갓네살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인 벨사살 왕이 암살당
하자 바벨론은 메대와 파사 즉 페르시아왕국으로 양분되었다. 페르시아제국에 즉위한 다리
오왕은 120명의 지방 장관을 세우고 그들 위에 총리대신을 세 명 두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다니엘이었다. 다리오왕은 다니엘로 하여금 전국을 다스리게 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총
리들과 지방장관들은 나라와 통치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의 신임을 얻어내는
다니엘을 시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리오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일을
막아야겠다고 생각을 모았다.
드디어 다니엘을 시기하던 자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만일 이번 기회도 놓친다면 그들은
영원히 다니엘의 수하에서 머리를 들 날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총리 두 사람은 생각을 같이 하는 지방장관들을 비밀리에 소집했다. 이른바 다니엘
총리 제거를 위한 반대파들의 결집이었다. 그들은 다니엘이 국사를 맡으면서 실정이 있었는
지 낱낱이 조사를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를 캐면 캘수록 오히려 위대성만 드러날 뿐, 빈틈이
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몇몇 장관들은 다니엘의 충성에 탄복하여
그를 모함하려는 세력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두 총리를 중심으로 모인 이번 비밀 회합에
모인 자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러설 자들이 아니었다. 그만큼 다니엘에 대한 시기와 질
투가 강렬하게 농축된 자들이었다. 느부갓네살왕 때 다니엘과 함께 3년동안 교육받았던 나
이 많은 장관이 발언했다.
"우리가 국사로 그를 책잡으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나는 왕실 문화생시
절부터 그를 지켜 보아왔기에 그를 잘 알고 있소이다마는 그가 믿고 있는 신앙 문제에 대해
걸고 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절대로 고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총리는 반색을 하며 그 의견을 채택했다.
"그렇다면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문제 삼으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겠소?"
그렇게 해서 꾸며진 음모를 가지고 총리들과 지방장관들이 다리오왕 앞에 나아갔다.
"다리오 대왕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방장관들과 대신들과 고문관과
관원이 의논하여 대왕께 아뢰옵니다. 앞으로 삼십일 동안 다리오 대왕 외에 다른 어떤 신이
나 사람에게 기도를 드리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지 사자 우리에 집어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시고 그 금령에 서명하시어 수정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은 수정하
지 못하는 법입니다."
교만했던 다리오 왕은 그들이 꾸며온 조서에 옥쇄를 찍어 금령을 내게 하였다. 음모자들
은 즉시로 왕의 포고령을 전국에 배부해서 금령을 시행에 옮겼다. 그리고 그들은 비밀리에
다니엘의 집에 자기 사람을 잠복시켰다. 다니엘이 금령을 어찌 못 보았겠는가마는 그와 가
까운 페르시아의 관료들이 필시 어떤 음모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조언
을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매일 하던 대로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예루살렘
이 바라다 보이는 방의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잠복한 자의 신고로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 다니엘의 집에 들어가 현장을 적발했으
나 다니엘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이 자신의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들이 다리오왕에게
다시 나아가서 그 일을 고발했다.
"유다 포로 출신인 다니엘은 대왕을 업신여기고 왕께서 서명하신 금령을 무시한 채 하루
세 차례씩이나 제멋대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리오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신하들을 물러가게 하고 홀로 왕
실에 남았다. 자신의 실수로 아까운 충신 다니엘을 잃어 버릴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다리오왕이 다니엘을 신임했었던 것은 다니엘이 비범한 예지력과 예언자적 자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항상 경우에 합당한 처신과 그의 충성심을 따를 자가
제국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바벨론에 귀화한 유대인이긴 하지만 페르시아
의 제왕인 다리오는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신들의 고발대로 다니엘이 야훼께 기도를
드렸다고한들 다리오왕은 결코 다니엘의 신앙을 범법으로 간주하거나 왕명을 거스리는 반역
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리오왕은 온종일 출입을 금하고 왕실안을 서성대며 다니엘을 구할 방도를 생각했지만
달리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다니엘을 미워하는 자들의 모함이 틀림없다.' 왕은 뒤늦
게 그 사실을 깨달았고 다니엘의 문제를 놓고 의논할 만한 자를 물색해 보았으나 믿을만한
자가 없었다.
날이 저물자 총리와 지방장관들은 다리오왕을 만나고자 다시 몰려왔다. 다리오왕은 아직
도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대신들은 간곡하게 고했다.
"왕께서 세우신 금령이나 법령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임을 잊지 마
십시오."
그들의 간언은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리오왕은 그들의 의
도대로 끌려갈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영을 내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우리에
집어 넣게 하고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굽히지 않고 섬겨온 신이 너를 구하여 주시기 바란다."
다니엘의 대적자들은 이미 왕궁내에 사자굴을 만들어 놓았다. 땅을 깊이 파낸 뒤 여러 마
리의 사자를 집어 넣고 입구는 굳게 막아 두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
자들은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않을 정도로 포악해져 있었다. 으르렁 대는 사자의
소리는 우리안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만으로도 지옥의 문 앞에 선 것과 같은 공포감으로 소
름이 끼쳤다.
마침내 형이 집행되었다. 다니엘은 굴 속에 던져지고 큰 돌로 입구를 막아 아무도 다니엘
을 건져내지 못하게 하였다.
다리오왕은 궁으로 들어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들이 왜 그토
록 잔인한 사형을 원했을까?' 다니엘의 무덤조차 만들어 줄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다
리오왕은 중신들의 간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비록 다니엘이 귀화한
포로이지만 제국의 일등공신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무덤조차 만들 수
없다니 왕은 새삼 치미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다음날 새벽 다리오왕은 일어나자마자 사자 우리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자굴을 향하여 목
멘 소리로 다니엘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살아계시는 신을 섬기는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겨 온 신이 과연 너를 사자들에게서 살
려내 주었느냐?"
왕의 말이 끝나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입구를 봉한 돌문틈 사이로 다니엘의 음성
이 들려왔다.
"다리오 대왕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제가 섬겨온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틀어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아무 죄도
없을 뿐더러 대왕께도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하여 주신 것입니다."
왕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지만 다니엘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예전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 불 속에서 살아나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굶주린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왕은 정말로 다니엘이 섬기는 신이 그를 구
해 주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은 지체없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
져올리게 하였다. 굴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마치 침실에서 자고 나온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
로 다리오왕에게 절을 하였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어디에서도 상처난 곳을 찾아볼 수 없었
다.
다리오왕은 그날로 중신들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인종과 말이 다른 모든 백성에게 새로운
금령을 반포했다. 서기관들은 왕의 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은 삼가 다니엘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공
경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살아계신 신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니, 그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으며 그 주권은 다할 날이 없으리라. 사람을 살리고 구하여 주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
적과 기적을 베푸시는 분께서 다니엘을 사자들로부터 살려내셨다."
그리고 나서 다리오왕은 시위대 장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내게 찾아와 음모를 꾸며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들은 그들의 처자들까지 모두
생포해서 다니엘을 넣었던 사자 우리에 집어 넣도록 하여라."
다니엘의 숙적들은 그날로 모두 체포되어 사자 우리에 던져졌다. 형을 집행했던 형리들이
그 참혹한 사형장면을 보고해 올렸는데 그들을 사자 우리에 던져 넣자 사자들은 그들이 바
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들어 뼈까지도 씹어삼켰다고 전했다. 다니엘의 숙적들은 무덤
조차 남기지 못하였고 그를 애도할 후손들마저 죽어서 대를 잇지 못하고 가문이 멸망하는
무서운 처벌을 받았다. 그 이후로 그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다니엘을 대적할 수 없었고 그
는 온 땅에 이름을 떨쳤다.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
뻐하고 만세를 불렀다.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정한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야훼께 기
도를 드렸다. 아직 살아있을 리가 없는 예레미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니엘은 마
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예레미야에게 한가지 소식을 전했다.
"오래전에 철없던 소년 한 명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소년은 그곳에서 멸망
해가는 조국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님처럼 조국과 함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야훼께서는 그 소년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왕궁에 거하게 했습니다. 그 소년은 왜 자
신이 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에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
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머리를 숙여야만
했던 그 이유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훼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제국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밑에 있습니다. 언젠가 나라를 재건할 때가 오면 그때 후손들에게 야훼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들은 일시에 사라졌지만 페르시아 제국에서 얼마나 더 살아야 할 지
모르는 다니엘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곳은 늘 시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케 하
는 시험대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끝까지 남아 사명을 다했고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에서 고난받는 민족과 함께 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온 세계 만방에 증거하는 위대한 사역자로 그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한때 그를 모함하는
반대자들로부터 벼랑 끝에 몰리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은 다니엘의 생애와
위상을 더욱 빛나게 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단한번의 만남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
민족의 강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강인 요단강은 히브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흐른다. 그 요
단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이른바 선지자 요한의 세례운동이었다.
이스라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각성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선지자 요한 앞에 다가서서 물 속에 머리를 담그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으로부
터 세례를 받기 위한 무리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무엘 선지자 때 미스바
에 운집한 민족 대각성 집회를 연상케 하였다.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에서 히브리 백성이 고통을 당하듯이, 북적대는 사람들로 인해 몸
살을 앓고 있는 요단강에 찾아온 낯선 방문객이 있었다. 그들은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바리
새인들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의 방문에 요단강은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그들의 방
문을 두고 호기심과 의아심으로 수군수군거렸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세 차례 금식하며,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규칙을 엄격하게 준
수하고, 안식일을 비롯해 율법의 많은 조항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과시하였고,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민중들을 죄인 취급하며 적대시했다. 그들의 죄인이라고
꺼려하던 민중들과 함께, 이제 같이 머리를 숙여 요한의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온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순진한 백성들의 기대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 전역에 물
결치는 이 거대한 세례운동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어떤 인물이나 집단도 진정한 히브리성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공신력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은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부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만 기거하며, 옷이라고는 약대 털옷 한
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가죽 띠를 불끈 맨 그의 모습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용사 같
기도 하고, 호렙산에서 신탁을 받은 모세 같기도 하였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연
명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
을 정도로 그의 생활은 신비로 가득차 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호하고 타협하
지 않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은 벌써 기가 꺾여 있었다. 만일 그들이 개였다면
벌써 꼬리를 감추었을 것이지만, 자신들의 위상을 흐트리지 않기 위해 애써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의 눈빛은 날카롭게 그들을 직시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간파한 세례 요한의 입에서 불꽃 같은 호령이 튀어 나왔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 이상의 치욕이 없었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고 자부하는 자신들을 사탄의 자식이라
고, 그것도 수많은 군중 앞에서 단정지어 부르다니 그들은 당황하고 충격 받지 않을 수 없
었다. 바리새인들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들중 어느 누구도 감히 세례 요한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오로지 어서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자신들이
공인을 받기 위해 요단강에 나온 것을 절절히 후회하면서 어색한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그
러나 요한은 그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부하느냐? 웃기지 마라. 하나님이 원하시면 돌멩
이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세례 요한의 펀치는 단 한 방으로도 KO당할 정도였지만, 물러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정
사정 없이 또 퍼부어졌다. 요단강의 많은 무리들이 물러나는 바리새인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요한에게는 박수를 보냈다. 생전에 그렇게 통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각있는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발언이 가져올 파문에 대해 두려움과 염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후 이 요단강에 또 엄청난 파문을 가져온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바로 인류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였다. 평상시와 같이 강물 중앙에 서서 한 사람씩 세례를 주고 있던
세례 요한은, 군중의 술렁거림이 심상치 않아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
에 들어온 사람은 그때까지만 해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였다. 세기의 만남
이 아니 우주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예수가 요단강을 찾아온 것은 바리새인들의 목적과는 뜻이 달랐다.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
를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
송된 예수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내진 하나님의 종인 것을 한눈에 알
아보았다. 세례 요한도 그가 가진 영감으로 예수가 곧 메시야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하
지만 그들을 둘러싼 군중들의 생각은 상상의 다른 레일을 달리고 있었다. 이제 백성들의 영
적 지도자였던 세례 요한에게 강력한 라이벌이 탄생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두 인물
이 역사의 질곡 속에서 함께 연대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세력의 다른 축을 달릴 것인지 궁
금했던 것이다.
이제 그 상상의 레일은 정거장 앞에 멈추었다. 모두 숨죽여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예수
는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했다. 요한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요한은 일전에 제자
들에게도 말한 바 있지만, 자신은 주님의 신발을 들고 다니는 시종의 자격도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
요한의 제자들과 요단강에 모인 사람들은 요한의 뜻밖의 진술에 놀라고 있었다. 세례 요
한을 고래로 비유한다면 나사렛 예수는 이제 겨우 세력을 얻기 시작한 피라미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례 요한은 주어진 사명을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니, 이스라엘의 그 어느 선지자보다도 더 위대한 선지자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범인들의 눈에는 예수의 세력이 세례 요한의 세력에 흡수되거나 아니면
굴복한 것처럼 보였다.
예수가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살
아온 목적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의 머리에 얹은 요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 속에 깃든 경외심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의 표현이
었다. 예수의 머리가 물 속에 잠겨졌다가 올라왔다. 요단강 물이 서른 살 청년 나사렛 예수
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그 순간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도 해석해내지 못하였다.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도.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세례 요한보다도 더 분명하고 똑똑히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
이다.
또 다시 요단강은 평범한 하루의 시간 위를 흐르고 있었다. 휴식 중에 있던 세례 요한의
곁에 몇몇 제자들이 모여서 근간의 소식을 주고 받았다. 요한의 한 제자가 자기들 중에 몇
몇이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들을 배반하고 예수의 뒤를 쫓았다고 보고했다. 그것은
배신감과 아울러 점차 확대되어가는 예수의 세력에 대한 시기심에 가득찬 보고였다. 세례
요한쪽에서도 어떤 수단을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포함된 셈이다. 세례 요한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의 생각은 제자들과 달랐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의 생각을 전했다.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그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잎사귀를 떨구어내는
나무처럼 이제 자신의 사명이 다한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바리새인들의 요
청에 의해 무장한 군인들이 기습해왔다. 세례 요한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세례
요한은 순순히 연행되어 갔고 헤롯궁에 감금되었다. 그리하여 요단강은 인적이 끊어지고 역
사의 강에서 자연의 강으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뜨거운 감자였다. 자신의 부정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다니는 행동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고 싶지만, 민중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
러지도 못하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관심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보고 만났기에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이 세상 속에서 그가 어떻게 역사하실지 자못 궁금하
였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당신이 참으로 메시야인지 물어보도록 지
시하였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못믿어서가 아니라 이제 자신의 명이 그곳에서 다했
는지, 아직도 남은 사명이 있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전갈을 받아온 요한의 제자가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 그리고 예수가 전해준 말을 그대로 또박또박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리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그동안 나의 제자로서 자네는 충성을 다했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나."
세례 요한의 제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스승님,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니까 풀려나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입을 다물었고, 그 말은 그 제자가 듣게 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한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회의에서 세례 요한의 문제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세례 요한의 처벌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
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헤롯왕처럼 민심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에 헤롯왕에게 아무
런 의견도 상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회의 중간에 식탁을 대하게 되었다. 그때 한 바리새
인이 말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도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있나?"
또 한 바리새인이 말했다.
"그놈이 우리더러 독사 새끼라고 그랬는데, 메뚜기만 먹고 사는 놈은 무슨 짐승인가?"
또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 강물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어서 손발에 물갈퀴가 달렸을
거라면서 마음껏 조롱했다. 그들의 여담 가운데 가장 큰 화젯거리는 요한과 예수 중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이었다. 한 서기관이 말했다.
"금욕주의와 탐욕주의의 대결이겠군요."
당연히 금욕주의는 세례 요한을 두고 한 말이고 탐욕주의는 예수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때부터 예수에겐 먹고 즐기는 자란 별명이 따라붙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철저하
게 율법적인 삶을 사는 세례 요한도 싫었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귀추도 민중들처럼 요한과 예수의 대결이 어떻게 결말지어질까에 있
었다. 한 바리새인이 말했다.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더구만."
또 다른 이가 말했다.
"그 뿐인가?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놨다는 소문이 전국에 파다해."
어떤 이는 거짓 소문이라고 토를 달았다. 제사장 중 한 명은 그래도 예수의 세력이 세례
요한처럼 막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대제사장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거요? 지금 거론된 두 인물로 인해 이스라
엘의 체제가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단 말이요?"
대제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못하면 우리 시대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의 종말을 보게 될 것이
오. 모세 이래 율법에 대해 이렇게 심각한 도전은 없었소."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타진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돈과
권력에 물든 이들의 머리로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두 인물에 대한 감찰이 철
저해지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예수는 게네사렛 호수와 언덕들을 두루 다니며 활동무대를 민중의 삶 속으로 옮기고 있었
다. 그의 메시지는 광야의 메시지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감찰하러 온 이들까지도 그의
기이한 가르침에 감동되고 변화되는가 하면, 또 어떤 가르침은 너무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제자되기를 포기하고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점점 조직화되고 세력화되었다.
예수는 들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에 유력한 소식통으로부터 감옥의 소식을 전
해들었다. 세례 요한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것과 같이 가슴이
아파왔다. 아울러 당신의 사역이 이제부터 본격화될 것이며, 당신도 역시 세례 요한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는 예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요한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물론 민심은 사
나와졌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민중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직적인 연대로 점화되지 못한 것을 두고 지도자들은 분석하기를, 민중들이 의지할 또
다른 영적 지도자 즉 나사렛 예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나사렛 예수의 메시지는 회
개보다는 용서를 강조하고 있기에 그들 지도자들에게 얼핏 덜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고, 바
리새인들은 예수의 세력을 살려주면서 이 기회에 세례 요한의 조직을 완전히 분쇄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이번엔 예수 앞으로 나아왔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 속에서 민심을
흐트려 볼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대부분이
세례 요한의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요한의 가르침과 그 영향력으로부터 완전
히 벗어나 있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만일 예수가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해 언급해서 책잡을
꺼리가 발견된다면 민심을 잃게끔 유도해 볼 작정이었다.
예수는 군중들 앞에 섰다. 수천명이 쥐죽은 듯 조용히, 빛나는 눈빛으로 예수의 말씀을 기
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 맞이한 새로운 국면을 나사렛 예수가 자신
의 세력을 확장할 호기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세례 요한을 운동의 제물로 제단에 올릴 것
인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새인이나 무리들의 기대와 상상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
을 전하셨다. 예수는 세례 요한이야말로 선지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셨다. 그 말
씀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는 이어서 말씀하시길, 그러나 하나님 나라
에서는 어린 소자보다도 요한이 작다는 말씀이셨다. 이 말에 사람들은 '땅에서는 요한이 크
고 나라에서는 예수가 더 크다는 말인가?' 하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관점과 기준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사람들의 땅에 대한 관심을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돌
려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비교는 종지부
를 찍었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는 아직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실은 그리스도 사역을 위한 가장 훌륭한 팀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종의 협력,
신과 인간의 협동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인류구원의 사역에 아름다운 수를 놓은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3년 후 고독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그 최후의 순간이 있기까지 최
소한 한 번쯤은 앞서간 팀 메이트인 세례 요한, 쓸쓸히 옥게 갇혔다가 참수당했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요단강은 과거를 간직한 채 지금도 역사 위에 흐른다. 오늘날 세례 요한의 후예들은 지구
상의 또 다른 요단강에서 끊임없이 예수와 조우하고 있을 것이다.
대역전의 드라마
- 바리새그룹과 예수
나사렛 예수,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이름이 많기도 해서 이름
앞에 지명을 넣어 부르기도 했지만 날로 커져가는 예수의 세력을 경계했던 자들이, 지극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을로 기억되는 나사렛을 이름 앞에 강조하듯 붙임으로써, 예수의
이미지를 작게 해보려고 즐겨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예수의 권세는 날로 커져
갔고, 예수가 회당에 나가 가르치는 일을 할 때에 예수의 대적자들은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어느날 안식일에 예수는 늘 하던 것처럼 회당에 나가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수가
서신 회당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거기에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동기가 있었다.
어느 무리는 예수가 전하는 말씀이 새롭고 혁신적이기 때문에 찾아왔고, 다른 무리는 병
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되고 치료받기 위해 찾아왔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가 일으키는 기
적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고, 심심한 노인과 아이들은 늘 힘에 밀려나면서도 군중
속에 끼어들어 있었다. 그밖에 여인들과 죄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한편, 전혀 다른 목적으로 예수의 언행을 일거수 일투족 감시하면서 트집을 잡아 마
침내 그를 제거하려는 바리새인의 무리였다.
예수의 추종자이건 대적자이건 그들의 예수를 따르는 목적과 동기는 세례 요한이 헤롯에
게 참수당한 이후로 더욱 강력해졌다. 추종자들로서는 이제 민족의 지도자로 믿고 따를 사
람은 나사렛 예수 밖에 없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대적자인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가 눈엣가
시가 되었다.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날씨가 건조한데도, 아니 그러하기에 무리들은 단비와 같은 말씀
을 더욱 사모하여 모였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율법의 정수를
꿰뚫고 있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얼핏 보기에는 반율
법주의자 같으나, 실은 왜곡된 율법정신을 살려내어 율법을 완성하려는 것이었다.
무리 속에 숨어있던 몇몇 바리새인들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예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한 사람 한 사람 응시하면서,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노한 파도와 같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의 눈은 마치 사람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는 듯하였고, 그 눈길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배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리 바보라고
하더라도 예수의 메시지가 바리새인을 염두에 둔 말씀이란 것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
다. 바리새인들은 치미는 분노를 어금니로 누르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지난번처럼 안식일에 또 병을 고치기만 해 보아라. 이번에는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
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분노를 다지며 결심하는 순간, 예수는 갑자기 말씀을 중단하셨다. 사
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여 주위를 탐색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럴 때면 예수가 두렵기조차
하였다.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아이들처럼 마음의 빗장을 확인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예수는 병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그 자는 손이 마른 병에 걸려 있었다. 원인도 알
수 없고 치료 방법도 알 수 없는 무서운 병을 몸에 지니고 살면서도, 신의 저주로 받아들이
고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는 신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
나 예수는 그의 손을 고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
"네 손을 내밀라!"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자 곧바로 회복되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
왔다. 바리새인들은 그 자리를 빠져 나가면서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까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 중에 지도급 인사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 몇 명이 대제사장 가야바
의 집에서 극비리에 회합했다. 완고하게 생긴 원로급 바리새인이 말했다.
"무슨 죄명으로 그를 고발하겠소?"
제사장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신성을 모독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바리새인이 말했다.
"그 이유가 헤롯 왕 앞에서도 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왕의 세례 요한을 처형
한 문제로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예수까지 처형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소."
이번엔 서기관이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총독부에 압력을 넣어 로마법으로 처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치범으로 몰아
세워 십자가에 매답시다."
서기관의 발언이 끝나자 좌중엔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십자가 형은 너무 잔인한 방법
이기도 하거니와 공개적인 처형방법이기 때문에 탐탁치 않았던 것이다. 대제사장 가야비가
말했다.
"어쨌든 거기까지는 가지 않도록 해 봅시다. 문제는 예수를 어떻게 생포하느냐는 것이오.
거처가 없으니 매복을 시킬 수도 없고, 항상 군중들 틈에 있으니 체포하는 데 번번이 실패
를 해왔는데, 무슨 묘책이 없겠소?"
사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해왔지만 예수와 열두 제자들은 신
출귀몰하여 흔적도 없이 잠적했다가 소문도 없이 나타나서 곤욕을 치루었다. 그때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가 일어나서 발언했다.
"이미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예수를 처형하는 것이 과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인지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그들을 설득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라도 그 극단적인 조치에서 예수를 구해내고 싶었다.
그 시간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 어떤 이가 찾아왔다. 하인들의 인도로 그는 대제사장 가야
바를 독대하게 되었는데, 니고데모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예수의 제자
가룟인 유다였다. 대제사장이 은 30냥을 유다에게 슬쩍 건넸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
어진 것이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니고데모는 손에 진땀이 났다. 이 사실을 속히 예
수께 전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니고데모도 예수가 있는 곳을 알 턱이 없었다.
방법은 한 가지, 유다의 뒤를 미행하는 것이었다.
유다가 대제사장의 집을 빠져 나간 직후에 니고데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고데모는 몸
이 좋지 않아서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지만, 바리새인들이 그를 만류했다. 그 회합이 은밀한
모임이기에 중도에서 자리를 뜨는 것은 큰 결례가 될 뿐 아니라 개인의 신상에도 좋지 않은
일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니고데모는 만류를 뿌리치고 나왔다. 사실 처음부터 있고 싶은 자
리도 아니었다.
니고데모가 황급히 대문 밖으로 나가 유다를 쫓아갔지만, 이미 유다는 자취를 감추고 말
았다. 니고데모가 그 다음으로 유다를 보게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바로 그날이
었다.
대낮에도 가기 싫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세 개가 세워졌다. 그 한
가운데 예수가 매달려 있으며, 아직 목숨이 남아 있어 간혹 짧은 말을 흘려내고 있었다. 니
고데모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잃었다는 슬픔으로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몇몇 여인들만
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오열할 뿐이었다.
니고데모는 인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열두 제자는 목숨에 위협을 느껴 달아
났겠지만, 단 한 명도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른 자가 없었다. 열두 제자는 차치하더라
도 갈릴리 해변에서나 예루살렘 거리에서,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은총을 받았던 수
천 수만 아니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빌라도가 바라바와
예수, 두 명의 죄수를 놓고 누구를 놓아주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그들은 왜 모두 바라바를
택했던가? 물론 바리새인들이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하고 깡패들이 동원하여 무리들 틈에서
선동하고 협박했던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들은 왜 모두 침묵했던가, 아니 불의에 동조했던
가?
니고데모도 사실 예수의 죽음을 가까이서 볼 수 없었다. 예수를 구출해 보려는 자신의 노
력이 너무도 미흡했다는 자책감이 들어서 예수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
다. 멀리서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던 니고데모는 이제 바뀌어버린 역사를 등지고 발길을 돌
렸다.
니고데모가 무심코 언덕길을 내려갈 때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스쳤다. 그는 바로 가룟인
유다였다. 가룟 유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니고데모는 심장이 멈추는 듯하였다. 불과 몇초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유다의 얼굴 표정에서 세상에 태어나 이제껏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음울하고 형용키 어려운 어두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할 때 표정이 그랬을까?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이 하나님의 낯을 피할 때 모습이 그랬
을까? 그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 같지 않았다. 유다는 가야바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이내 니고데모는 유다의 뒤를 쫓을 이유가 사라졌다. 이제 서로 각자의 인생길을 가야 할
뿐이다. 니고데모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예수께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생
겼다.
'주여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당신이 없는 세상을 무엇으로 산답니까?'
예수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기뻐하는 무리
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바리새 그룹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숙적이었고, 당대뿐 아
니라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기조를 형성했던 율법주의에 가장 위력적인 위협을
가했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율법의 핵심인 안식일 문제, 납세 문제, 정치적인 문제
등을 제기해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지만, 되레 자신들의 치부만 드러낼 뿐이었다.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싸움을 이제 단 한번에 끝내고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였던 것이다.
온 유대가 예수가 체포되면서부터 처형당할 때까지 술렁댔지만, 금세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잠잠해졌다. 니모데모가 예언한 것과 같은 더 큰 문제도 야기되지 않았다. 로마와 정치
적인 타협도 잘 마무리된 듯하고, 백성들이 항거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시
바리새인의 세상이 된 것이다.
바리새인 한 명이 시장에서 기도를 드렸다. 하루 세 번 하는 기도시간에 걸린 것이다. 그
들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한테서 요즘 떠도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
라는 소문이었다. 다 끝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제2의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 연대했다. 헛소문을 불식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정보를 동원하였다. 그들의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지, 사흘
이 지난 뒤에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는 듯했다. 역시 그들의 세력
이 아직 건재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제사장을 비롯한 소수의 바리새 지도자들은 단 한가지, 예수의 시신의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극비의 사실에 늘 마음이 찜찜하였다. 그러나 정말로 아무일 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이제 그 문제도 바리새인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도망갔던 예수의 제자들이 거리의 무대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한 관원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에게 달려와 자신이 목격한 사건을 보고했다. 수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가야바가 물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어떻게 일으켰느냐?"
관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그냥…말로만 고쳤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가야바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앉은뱅이
한테서만 위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또한 사람 가야바에게도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같은
말로 한 사람은 일어섰고, 한 사람은 주저앉았다. 바리새인중 한 명이 말했다.
"예수의 제자들까지 마저 처치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놈의 제자
들이 속을 썩이지만, 하나같이 촌놈들이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서기관이 이의를 달았다.
"이해할 수 없소. 예수의 제자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할 줄은…. 얕잡아 볼 문제만은 아닌
것 같소. 과거의 제자들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도 제거했는데, 제자들쯤은 크
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가야바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당신들은 아직도 사건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이 사건은 베드로의 사건이 아니
오.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란 말이요."
바리새인이 가야뱌의 말에 반문했다.
"예수는 그림자도 없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니고데모가 말했다.
"예수 사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이오. 앞으로도 수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행한 것과 유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이오. 그의 말대로 그는 부활했
고, 지금 이땅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요."
그때서야 다른 바리새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베드
로와 요한을 체포해 오도록 관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예수를 죽임으로써 이긴 줄로만 생각했는데, 예수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
오."
그때 니고데모는 속으로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요. 그분이 진리이기 때문이오. 당신들의 교만과 위선
으로는 결코 진리를 가두지 못하고 죽이지도 못할 것이오.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
계요.'
니고데모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바리새인의 옷을 벗고 그들 곁을 떠나갔다.
'주여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순간 니고데모의 머리속에 예수와 일대 일로 대면하여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와 같이 니고데모는 방향을 잃고 헤매는 처지가 되었지
만 그때는 절망으로, 지금은 희망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AD 72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인에게 파괴되면서 바리새 그룹도 괴멸되었고 유대인
들은 또다시 유리하는 백성이 되었으나, 나사렛 예수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 2천
년 동안 진리와 성령으로 새롭게 살아서 빛나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 어떤 사건
보다도 위대한 대역전의 드라마였다.
함께 승리한 여인들
- 마리아와 마르다
베다니 작은 동네에 세 남매가 살고 있었다. 그들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님 생애
에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으로 친밀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린 예수님이 부친 요셉의 목수일을 돕기 위해 베다니에 따라갔다가 그 집에서 며칠 묵
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과는 평생 한 집안처럼 지내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그들 세 남매는 유별나게 예수님을 좋아했고 친형제 이상으로 생각해 주었는데, 나
사로는 자신이 제일 아끼는 돌팔매를 예수님께 선물하면서 자신의 우정을 표시했고, 마리아
는 들꽃을, 마르다는 맛난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자신들의 애정을 표현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사렛 동네의 이야기와 이집트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세
남매는 저마다 흥미진진하여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곤 하였다.
그 무렵, 추억 속의 사진과 같은 이야기 거리가 있었다. 이웃에 살던 짖궂은 아이들이 오
손도손 놀고 있는 예수와 그 친구들을 훼방하러 나사로의 집을 찾아왔다. 우락부락하게 생
긴 한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사로야, 이리 나와봐!"
나사로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평소에도 달갑지 않은 녀석이라 상대를 안했었다. 그러나 지
금은 무조건 피한다고 될 상황이 아니었다. 나사로는 동생들 앞에서 오빠로서 책임감을 갖
고 훼방꾼을 물리칠 양 단단한 각오로 나갔다. 어린 예수님과 두 자매도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나사로의 꽁무니를 따라 나섰다.
나사로 집 앞에는 대여섯 명의 심술궂은 아이들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는데 한 놈이 다
짜고짜 깨진 항아리 값을 물어내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나사로가 돌팔매를 갖고 노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돌멩이가 그들의 집까지 날아들어가기에는 어림도 없는 거리인
데 공연히 심술을 부리느라 억지를 쓰는 것이었다.
화가 난 나사로는 그럴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애시당초 항아리 값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 동네 아이들은 이내 주먹질을 했다. 나사로가 힘도 못쓰고 당할 판이었다. 그때 어린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돌팔매질은 자신이 한 것이니 자신을 치라고 하셨다. 어린 예
수님이지만 용기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동네 아이들은 심술을 거두고 다들 돌아서 갔다. 마
리아와 마르다는 어린 예수님의 지혜와 용기에 감탄하였고, 이전보다 더욱 예수님을 흠모하
였다.
세월이 흘렀다. 친구로서 혹은 오빠의 친구로서 좋아하고 따르던 예수님이 어느 세월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당시 모든 계층을 넘어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이가 있었는데,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널리 알려진 세례 요한이었다. 유대 분봉왕조차도 감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시
대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 그런데 그의 영향력이 어쩐 일인지 점점 사그라들었고, 곧고
강직하기로 유명하던 그 세례 요한보다 더 널리 알려지고 소문에 소문을 몰고 온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어렸을 적 한 식구처럼 지내던 친구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세 남매는
남다른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매지간이면서도 성격과 개성은 몹시 달랐다. 마리아는 붙임성이 좋
아서 애교가 그만이었고, 모험심도 강하고 활달하면서도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반면
에 마르다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내성적이면서도 강단이 있었다. 특히 손맵시가 좋아서 요
리나 집안일에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었고, 손 닿는 것마다 마술사처럼 화려하게
변화시켜 놓는 재주가 있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모두 예수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애정이 이
성에 대한 동경이었는지는 분간할 수가 없지만, 어린 시절에 가진 순수한 사랑을 세월이 지
나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자 오래된 감정이 마
치 꺼져가던 불씨에 땔감을 넣은 듯 일시에 되살아났다.
청년 예수님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두 여인의 마음이 바
빠졌다. 물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익히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고, 그분이 곧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이 품었던 풋풋한 애정은 한 남
성에 대한연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그분의 사랑을 더 받아내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
는 두 사람의 경쟁은 치열했다. 마르다는 집안 단장보다 몸치장에 더 열중한 마리아에게 따
가운 눈총을 보냈다. 마리아도 평소에 다른 태도의 마르다가 아니꼬왔다.
마침내 세 오누이의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
아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간의 고식과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언니인 마
르다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준비할 일이 많았다. 언니 마르다는 자기 일을 거들어 주어도
시원찮은 판에 예수님 곁에만 앉아 있는 마리아의 태도가 눈꼴 사나웠다. 마르다는 예수님
께 가서 말씀을 드렸다.
"예수님, 내 동생이 저를 혼자 일하게 놔두고 여기 있는 것을 생각 좀 해주세요."
예수님은 마르다의 질투심에 찬 표정을 충분히 읽어내시고는 다정하게 충고 한 마디를 하
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지금 많은 것을 염려하고 있구나. 그럴게 뭐 있니? 남에게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에만 열심을 내면 된다. 사람은 한 가지만 열중해도 좋아. 마리아는 그렇
게 하고 있잖니?"
마르다는 지당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질투심이 노
출되어 자존심이 몹시 상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가 점수를 땄는데 자신은 오히려 점수를
잃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즈음에서 자신의 판정패를 인정하고 만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열심히 수집하며 정보를 서로 교환하곤 하였다. 시간
은 흘러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 나사로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
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자매는 즉시 예수님께 전갈을 보내어 부고를 전했다. 일전에
한 소녀와 청년을 살려내신 기적이 있어서 만일 예수님이 빨리 오신다면 죽은 오빠가 소생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나흘이나 지나버렸다. 돌무덤 속에 누운 나사로의 시신은 이제
부패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자매는 마지막 희망마저 포기하고 말았
다. 사람이 어떤 일을 포기하고 나면 기회가 뒤늦게 찾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수록 상심
은 더욱 큰 법이다.
드디어 나흘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마르다는 급히 동네 어귀까지 달려 나갔으나 마리
아는 집 안에서 시름에 잠겨 있었다. 동넬 들어선 예수님의 담담한 얼굴 표정을 살피며 마
르다는 푸념조로 말하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는 그 말씀을 마지막
날에 성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
이라고 강조하면서 마르다에게 물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주님을 믿었다. 그분의 능력과 권능을.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거의 동일
한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찾는다며 마리아를 불러냈다. 그 경황중에도 마르다는 잠재된 경쟁의
식을 감지했다.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동생보다 한 발 앞서 점수를 얻었다
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곧장 나사로의 돌무덤을 찾아가셨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유대인들 여러 명
이 그 뒤를 따랐다. 도대체 어쩔 작정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에게 이
유를 물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돌문을 열라고 명하셨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
했다. '이미 썩은 시신을 뭣 때문에 보겠다는 거야?'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예수
님은 마치 동네 친구를 불러내듯이 나사로를 부르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 순간 어릴 적에 심술궂은 동네 아이가 찾아와 오빠를 불러내던 일
이 기억났다. 그때처럼 오빠의 의젓하게 걸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 같은 생각을 하
고 있는데 놀랍게도 나사로가 살아서 수의를 입은 채로 걸어나왔다. 기적이었다. 꿈이 아니
고 현실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도 마르다는 마리아를 의식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을 때 마중 나오지 않은 것은 분명히 마리아에게는 점수 깎이는 일이었을 것
이다. 하지만 마르다에게도 감점의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돌문을 열라고
하실 때 오빠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고 예수님께 조언했는데, 신앙고백까지 해놓
고도 그것은 분명코 믿음이 부족한 발언으로 인정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감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그 일로 해서 그 두 사람이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확실한 계기가 되긴 했지만, 이젠 구주로서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 싶은 마음이 새롭게 피어났다.
나사로가 부활한 사건이 있는 뒤 얼마 후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
털로 발을 씻겨드린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뜻모를 눈물을 흘렸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유
다는 그 비싼 향료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더 의미있게 쓸 수 있다고 불평했
다. 아무도 모르게 유다의 의견에 공감을 박수를 보낸 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언니
마르다였다. 마르다의 생각에도 마리아의 행동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잘 보이려는 두
사람의 경쟁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유다를 책망하셨고,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 전해질 것이라는
예언까지 하셨는데, 마르다에게는 그 말씀이 마치 자기를 향한 책망처럼 들렸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 체포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마리아와 마
르다는 백방으로 쫓아다니며 주님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구하기 위
해 애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도망갔는지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
려웠다. 그도 그럴것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모두가 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 뿐,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
기에 연약한 여인들은 그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쫓아 다니기
만 하였다. 헤롯궁에서 빌라도 뜰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행적을 쫓은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
들이 아닌 여인들이었다.
예루살렘 성전과 마주보이는 총독부 앞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그들은 일제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고, 그들 속에 있던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들의 외침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자기를 못박는 듯 고통스러웠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옷은 찢겨지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힘조차 없었
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기를 몇차례 하자 로마군병은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지
게 한 뒤 예수의 뒤를 따르게 했다. 비참하기 이를데 없는 예수의 형상을 보고 여기저기서
여인들의 통곡소리가 높아졌고 그들 중에 마리아와 마르다도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
며 예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말
씀하셨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마침내 예수는 해골산이라고 불리우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다. 낮 열두 시
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더니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예수를 따라 다니던 여자들은 모두 멀리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 보았다. 예수께서 죽으
신 이후에 그를 애도하던 무리들과 구경꾼들은 뿔뿔히 흩어져 갔다. 로마의 사형 집행관과
관리들도 시체를 지킬 몇 명의 병력만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곧 저녁이 되어 어두움
이 찾아오고 있었고 로마 군병들은 나무장작을 끌어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멀리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있는 마리아를 위로하며 마르다가 말했다.
"주님의 장례를 위해 남은 일이 있지 않니? 그만 내려 가자꾸나."
마르다는 잠시나마 마음으로 질투하고 시기했던 동생 마리아가 그토록 슬픔에 젖어든 것
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주님으로부터 더욱 사랑받기
위해 서로 경쟁을 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 이후에 그들은 누가 더 그리스도
의 사랑을 많이 전할 것이냐 하는 새로운 경쟁자로 거듭났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의 부활
직후에 제자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부활의 주를 증거하였고 단순한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때때로 복음의 사역자로서 함께 동역하면서 그리스도의 여인들답게 위대한 생애를 살고 마
쳤다. 초대교회의 수만명에 이르는 교인들은 교육에 탁월한 은사를 발휘했던 마리아와, 교회
살림을 도맡아서 열심히 해냈던 마르다의 헌신을 오래토록 기억했다.
신앙의 사람들 속에서 때때로 마리아와 같은 사람도 혹은 마르다와 같은 사람도 보게 되
지만 역시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보기좋은 까닭은 그들이 갈등에 휘말
리지 않고 함께 승리한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새벽의 만남
- 빌라도와 예수 그리스도
총독부 관저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왼팔 위에 올려 놓은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
고 있던 빌라도는 독수리를 날려 보내고 양팔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
은 급히 총독의 관복을 대령하여 빌라도의 몸에 걸쳤다. 창밖을 응시하던 빌라도는 획 뒤돌
아 계단 위에 마련된 총독의 권좌로 향했다.
하인들은 빠른 걸음으로 포도주와 과일 쟁반을 총독의 자리에 두고 그 자리를 물러났고
보좌관은 호위병을 이끌고 들어와 양켠으로 배열시켰다. 곧이어 천부장과 휘하의 장교 2명
이 들어서더니 빌라도 총독 앞에 무릎을 꿇고 로마황제와 총독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총독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여리고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빌라도는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지휘봉을 들어 천부장의 경례를 응답하
였고, 천부장은 총독의 지시에 따라 일어서서 결과를 보고하였다.
"총독 각하!"
여리고로 넘어가는 언덕은 한 군데 뿐인데 치안이 허술한 탓에 강도들이 자주 출범하는
우범지대였다. 간혹 여리고로부터 세금을 거두어가는 로마군인들까지 습격당하는 바람에 항
상 총독의 신경을 건드리는 지역이었다. 이에 빌라도는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라는 특별명령
을 내렸고 군사 1천명을 거느리고 여리고로 갔던 천부장이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천부장은 부분적으로 얻은 성과를 자랑스럽게 보고하고 있으나 빌라도의 얼굴은 불만족한
표정이 역력했다. 빌라도가 원했던 것은 몇 명의 잔당을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
가장 적대적으로 저항하는 열심당과 여리고 지역에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도적떼들간의 연
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좋소. 그놈들을 심문하시오."
빌라도는 권좌에서 내려와 천부장과 나란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은밀한 보고를 받기
위해서였다. 천부장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빌라도는 엉뚱한 말을 했다.
"저 성전을 보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지. 저들의 종교
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저들을 통치할 수가 없다네. 그러면 여리고의 세리장을 한 번 보
도록 할까?"
빌라도가 왼팔을 내밀자 독수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와 그의 팔뚝 위에 사뿐히 내려앉
았다. 곧이어 아주 키가 작고 왜소한 유대인 한 명이 총독 앞으로 끌려왔다. 빌라도는 거만
스럽게 그를 내려다 보았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얼마나 고문이 심했는지 녹초가 된 듯한 유대인이 간신히 대답했다.
"삭개오라고 합니다."
발 빠르게 빌라도의 질문이 이어졌다.
"가장 세금실적이 좋던 자가 하루 사이에 유대에서 가장 실적이 나쁜 자로 전락한 데엔
어떤 이유가 있을거야."
삭개오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또렷이 응답했다.
"전 결코 세금을 포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 자네의 주님은 누군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입니다."
빌라도의 눈빛이 빛났다.
"아! 요즘 유대 전역에 소문난 자? 그가 다른 교리를 전한다는 말을 들었지."
그 말에 삭개오는 강하게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그분은 진정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십니다."
빌라도는 예전에 이렇듯 심문 받는 자와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참수당했으니 모르겠지만, 헤롯왕과 대제사장 가야바가 들으면 괘
씸해 하겠군. 그래 그자가 로마에 낼 인두세를 적게 내라고 지시했던가?"
"아닙니다. 그분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원수? 누가 원수란 말인가? 로마가 원수인가? 아니면 나 빌라도?"
"그분의 나라는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말을 잘하는군. 여봐라! 이자에게 태장을 가하고 고향으로 들려 보내라."
그리고는 고깃덩이 하나를 삭개오의 등 위에 얹어놓자 독수리가 날아가 그 고깃덩이를 쪼
았고, 삭개오는 독수리의 발톱과 부리에 찍혀 피를 흘리며 끌려나갔다. 천부장이 세리장을
갈겠다고 아뢰자 빌라도는 세리장 문제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불쑥 한마디를 내뱉을 뿐
이었다.
"그 나사렛 예수란 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군."
며칠 뒤에 로마의 원로원중에 한명이 유대 총독부를 방문했다. 원로원은 황제의 뜻을 전
함과 동시에 식민통치에 대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보낸 자였다. 빌라도는 그 원로원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려고 노력했다. 만찬의 자리에서 무희들의 춤을 바라보면서 빌라도와 원로
원은 식민지역의 토속과일과 각종 요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입가에 웃음소리를
흘려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어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마치 고향 친구들이 만나 과거의 추
억을 나누는 것처럼 다정해 보였다. 빌라도가 원로원에게 유대나라를 설명해주었다.
"이스라엘엔 두 세력이 있소. 하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계열이고 또 하나는 광
야를 중심으로 하는 선지자 계열인데, 즉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양대 축 위에서 이스라엘의
신 야훼는 시소를 타고 있는 것이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파는 기득권세력이고, 사해주변에
거점을 둔 쿰란종파 혹은 열심당은 부패한 기득권세력에 반발한 새로운 종교집단인데, 나는
그저 그들이 믿고 있는 신처럼 양쪽의 균형을 잡아주기만 하면 되지요."
원로원의 빌라도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관심을 보였다.
"유일신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 통치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황제께서 관심 갖는
부분은 정치세력과 집단이 아니겠소?"
"그들에게 정치는 종교요, 종교는 곧 정치입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
고 하나지요. 요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고 나사렛
예수란 사나이지요. 한 번 보고 싶은 인물입니다."
"종교적인 관심에서요? 아니면 정치적인 관심에서요?"
빌라도가 기름기 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굳이 말한다면 종교적인 관심이지요."
그때 총독부의 고위급 간부가 총독 빌라도에게 긴급한 보고를 귀엣말로 올렸다. 보고의
내용인즉 나사렛 예수가 대제사장 가야바에 의해 체포되어 헤롯왕에게 재판해줄 것을 요청
했으나 거절당하자 로마법으로 처형하고자 총독부로 몰려올 기미가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빌라도는 태연하게 원로원과 다시 환담을 나누었다.
"유대 통치기간중 가장 긴장되는 날은 유월절이지요. 이집트에서 보낸 430년간의 노예생
활을 마감하고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에 민심을 선동하는 온갖 저항세력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기간이지요. 올해는 열심당원들이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고 생각했더니 엉뚱
한데서 터졌소이다. 그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소."
"그자라면…?"
총독 빌라도가 뒷말을 이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나사렛 예수지요. 말하자면 빌라도가 신을 재판하
게 되는 셈이지요."
나사렛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섰다. 때는 새벽이었다. 예수는 관정에 서있고 가야바에게서
예수를 데리고 온 자들은 관정밖에 서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유월절 관습에 따라 더럽힘
을 받지 않기 위해서 관정에 들어오지 않고 다만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 빌라도가 밖으로
나갔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유대인 무리가 조용해진 가운데 어떤 자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 사람이 죄 받을 사람이 아니면 당신 앞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빌라도는 새벽공기를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유대인들의 내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뒤돌아서려는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이 반박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소이다."
그 짧은 순간 빌라도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살기를 느꼈던 것이
다. 빌라도는 휙 돌아서서 관정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식민통치를 받
고 있기 때문에 사형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예수의 세력을 무력화시키
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그를 죽여야만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빌라도는 몹시 불쾌했다. 어쩐
지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식민통치에서 가장 몹쓸 경우가 이런 경우다. 그들의 요구에 쉽
게 응했다가는 또 반대 세력의 원성을 사기 십상인 것이다. 그때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
푸로클라가 나타났다. 침착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빛엔 다급함과 초조함이 역력
했다. 그녀는 빌라도 곁에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여보, 새벽에 꿈을 꾸었어요. 꿈속에서 저는 예수 때문에 많이 괴로웠어요. 그분은 비범
한 사람이에요. 게다가 아무 죄도 없으니 이런 일은 결코 온당치 않아요. 당신이 자칫 그릇
된 판단을 할까봐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에요."
빌라도는 아내의 염려를 고맙게 여겼지만 그 조언이 그의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못했다.
이번 일은 어쩌면 총독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빌라도
의 전신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감지했다. 과연
그 힘의 실체가 무엇일까? 무리의 힘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역학 관계의 논리일까? 아니면
신의 섭리일까? 빌라도는 생각 이상으로 자신이 아주 빠른 속도로 음모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어 빠져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걱정하는 아내를 돌려보냈다. 빌라도는 관정의 상좌에 앉아 잠시 상념에 빠졌다. 정
보원들을 통해 얻은 정보로 예수의 행적들을 검산하는 것이었다. 수하들은 총독의 눈치를
살폈다. 빌라도는 예수를 직접 심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를 이리로 데려오너라."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도무지 이런 자가 유대인이 왕이
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향해 질문을 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해서 하는 말이냐?"
예수의 질문에 빌라도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대지방에서 최고의 권세가인 총독
앞에서 그가 전혀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오히려 당당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보는 안목이 바
뀐 빌라도는 역시 심문조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유대인들이 너를 내 앞에 넘긴 것이 무엇 때문이냐? 네가 무슨 일을 했기에 그러느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는 예수의 대답에서 혐의를 찾는 데 실패했다. 아니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
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그러면서 예수의 눈길을 바라보았다. 예수의 눈은 독수리의 눈보다 더 강하면서도 한편으
로는 온유했다. 빌라도는 지금껏 결코 그런 눈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수의 대답은 빌라도의 관심을 딴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빌라도는 잠시동안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고대 희랍사람들은 이 세상의 기본 원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물이라고 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불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예수가 증거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아내의 말대로라면 예수 자신이 진리라
는데 과연 그를 믿으면 진리를 알 수 있을까? 비범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도 구원하
지 못하는 자가 과연 신이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빌라도는 갑자기 화가 났다. 자기 자신이 오히려 나사렛 예수 앞에 불려 세워진 느낌 때
문이었다. 언젠가 예수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
는 것은 결코 반갑지가 않았다. 예수를 재판해야 하는 일이 왜 하필 자기에게 떠밀렸는지
그 운명적인 만남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좀 더 솔직한 그의 마음은 자기 앞에
죄수로 서 있는 예수라는 자에게 자신의 약점과 내면 속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자꾸 드러나
는 느낌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예수를 심문하지 않았다. 다만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말을 독백으로 뱉
어냈을 뿐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에게 포위당한 것처럼 고립감을 느꼈다. 예수, 그는 누구인
가? 빌라도는 결코 총독의 권위를 그에게 내세울 수 없었다. 오히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의 위엄에 압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빌라도는 예수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다가
자신이 뱉은 말 때문에 피식 하고 웃었다.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알량한 자신의 권세를 내세운 것은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빌라도는 생각했다.
'내가 그 자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자리밖에 없어.'
빌라도는 더욱 찜찜해졌다. 예수를 처형시킬 이유가 자신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
면 그가 예수를 심문한 의도는 조금이라도 존경스럽지 못하거나 못마땅한 점을 찾아내어 예
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는데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철저하게 빗나갔다.
빌라도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를 이 세기적인 재판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 마치 이리떼 같은 군중들은 빨리 먹이를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고 빌라도는
적당한 구실로 시간을 벌기 위해 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는 헤롯왕에게 예수를 심문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예수는 이내 총독부로 되돌려졌고 빌라도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하기 어렵게
되었다. 빌라도가 백성들 앞에 나가 소리쳤다.
"나는 이 자에게서 아무 혐의를 찾을 수 없도다."
빌라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의중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것은 백성들
의 반응을 보자는 것이었다. 머리 좋은 빌라도는 자신이 원치도 않았던 재판인데, 재판의 결
과에 따른 책임까지 자신이 떠 맡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책임을 유대인들
에게 되돌려 놓을 묘안을 생각해냈다.
유대 명절의 관습에 따라 죄수를 한명 놓아주는데, 빌라도는 가장 악명 높은 사형수인 바
라바와 예수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할 기회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솔직히 빌라도는 누
가 처형되고 누가 풀려나든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곧이어 백성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는 백성들의 살기가 무서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토록 증오하는 것일까? 한편으로
빌라도는 애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이 예수를 구제할 길은 전혀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라도는 한시라도 빨리 이 광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자신은 이 재판에서 결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손을 씻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씻기지 않았다.
예수는 빌라도의 군사들에게 온갖 희롱을 당한 뒤에 결국 십자가에 달렸다. 어떤 백부장
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뒤에 빌라도에게 보고했다.
"그가 운명할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무덤이 갈라지고 천지가 절망하듯 고통에 울부짖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전에 빌라도는 부하들의 보고 중에 주관적인 견해나 해석을 섞을 경우 불호령을 내렸
다. 그런데 그때 만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뒷뜰에서 빌라도는 땅바닥에 떨어진
예수의 핏자국을 만져보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왕이다. 그는….'
그후 빌라도는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푸로클라에 의해 새롭게 거듭나고 예수를 영접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전설도 있고, 유대통치의 실책으로 좌천되어 쓸쓸한 말로를 보냈
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빌라도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사실이
다. 그는 진리 앞에서 진리를 택하지 못하고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진리를 포기한 대
표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십자가 상의 대결
- 기돈과 살렘
로마제국의 앞제하에 있던 이스라엘은 그들의 독특한 신앙관 때문에 다른 점령국가보다도
통치가 어려운 대상이었다. 로마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론에 뿌리를 둔 히브리 민족
의 문화적인 관습과 국가통치체제의 수반인 헤롯 왕가를 인정해 주면서 융통성있게 식민지
국가를 다스렸다. 다만 총독부는 예루살렘 성전 곁에 두어 식민정치의 기반을 다지고, 조세
제도를 통해 로마제국의 확장에 대한 재정적인 출원지로 삼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여느 민족보다 자존심이 강한 유대민족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조직적이든 개별적이든
심심찮게 항거해 왔다. 그 중에도 열심당은 히브리 전통에 가장 뿌리 깊으면서도 조직력이
나 투쟁성 등에서 가장 앞선 집단이었으며, 빌라도 총독부의 수배 명단에도 단연 최다수를
기록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보다도 더 정국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일단의 무리가
발생하여 총독부를 긴장시켰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를 정점으로 12명의 제자로 일컬어
지는 중간지도부와 70명의 적극 가담자들이 조직원으로 구성돼 이스라엘 전국에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무리였다. 그 조직의 범위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예수가 히브리 민족의
메시아 사상과 히브리 민족의 해방이라는 거대한 이슈의 핵심 인물과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
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총독부의 근심은 다행스럽게도 빗나가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유대인들의 정치 종
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수는
빌라도궁에 와 있었다. 헤롯왕이 예수의 재판을 거부하여 유대 지도자들이 총독부에 재판을
의뢰해 왔기 때문이었다.
빌라도가 고심하고 있는 동안 감옥 속에는 또 이 정치적 소용돌이의 장식으로 쓰일 두 사
나이가 갇혀 있었다. 습기차고 음습한 곳, 쇠창살 사이로 희미한 불빛만이 스며드는 그 곳에
서 괴로운 잠을 청하는 두 사나이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기돈과 살렘이라는 자들이었다. 기돈은 흉악범 바라바의 존재 때문에 악명의 일순
위에서 밀려나긴 하였지만 세간에 꽤 알려진 인물로 반항적인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기도 한
인물이었다. 기돈이 옆방에 있는 살렘을 불렀다.
"살렘, 두렵지 않나?"
살렘은 대답이 없었지만 분명히 듣고 있었다. 예수의 재판에 대한 소문은 감옥 안에도 번
졌고, 오히려 바깥보다도 정보가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되기도 했다. 수인들은 동물처럼 자신
의 운명을 직감적으로 깨닫기 마련이다. 기돈이 다시 말했다.
"유월절 특사로 살아날 희망은 사라졌어. 빌라도가 바라바와 예수를 지명했기 때문이야.
그 망할 놈의 예수만 아니었어도 우린 기회가 있었는데 오히려 예수의 들러리 신세가 될 판
이야. 자네 아니면 나, 아니면 우리 둘 다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냔
말이야."
벽에 기대어 기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살렘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수개월째 감지 못한
산발한 머리와 수염에다 광대뼈만 드러난 얼굴은 거의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 눈빛 만큼은 부조리한 현실을 노려보듯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살렘이 대답했다.
"무엇이 두렵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법이야. 나에게 자꾸
최면을 걸려고 하는 걸 보니, 자네야말로 공포에 떨고 있군."
"천만에. 내가 죽음 따위가 무서운 줄 아나? 오히려 죽음이 날 두려워 할 걸?"
기돈의 대답에 살렘은 비아냥거렸다.
"그 용기가 어디까지 가나 봐야겠군."
기돈은 자기가 던진 질문이 자신에게 되돌아온 걸 알았지만, 사실 그에 대한 대답은 자신
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나는 여리고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로마인 3명을 죽였지. 나는 그들이 칼에 맞아 죽어가
는 고통의 모습보다 '이제 죽었구나'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공포의 눈빛을 더 즐
겼어. 그때까지 나는 타인의 목숨을 내 손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마력에 사로잡혔었어."
"그래서 사람을 죽이나?"
살렘의 음성은 시종 냉소적이었지만 그와 기돈의 관계가 애초부터 그러하였기에, 남들이
듣기에 충분히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이나 어투에도 불구하고 기돈은 개의치 않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신의 도구이든 악마의 도구이든 상관없어. 나는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니니까. 다만
누가 나의 편이 되어 줄 것이냐가 문제지."
살렘은 기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때 열심당원으로 활약하던 때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갈릴리 호수에서 자라난 기돈과 살렘은 한동네 친구였다. 살렘은 민족해방의
대열에 서기 위해 열심당에 입당하려 예루살렘을 향했고,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은 가룟인 유
다였다. 살렘은 열심당에 충성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민족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다.
그 흔한 연애 한 번 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효도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모든 것이 히브리
민족의 해방이라는 명제 아래 희생되었고, 그는 그것이 합당한 희생이라고 믿어왔다.
열심당에서 부여한 임무를 착오없이 수행해오던 살렘은 마침내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지는
사건에 연루되어 로마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미 수배된 몸이었고, 그의 화려한 전력에 따
르면 누가 봐도 살아날 가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체포된 다음에야 깨달은 사실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목숨을
놓고 총독부와 열심당 간에 모종의 협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속죄양의 역할을 해야 했
다. 애초에 알았더라면 그것조차도 충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할 때까
지 살렘에게는 비밀이었고,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살렘은 이미 사형수의 신세가 된 다음이
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면회온 가룟 유다에 의해서였다. 그는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
이다. 방금전 기돈이 말한 도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살렘은 면회온 가룟 유다에게 탈당을
선언했지만 ,유다는 새로운 제의를 했다. 지금 이 마당에 탈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
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감옥에서 만나게 되면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그가 지닌 초
능력을 발휘하도록 유혹해 달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촌에서 고생하는 부모형제
의 생계를 책임져 주겠다는 것이었다.
살렘은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예수의 제자가 된 가룟 유다. 한때는 자신을 도구로 이용했
던 그가 이제는 예수를 이용해보려는 속셈이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의 부정에도 불구
하고 유다는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서 면회실을 나갔다.
상념에 사로잡힌 살렘을 기돈이 불러 깨웠다.
"이봐 살렘, 지금 자고 있나?"
살렘은 기돈에게 가룟 유다의 제안에 대해 들려 주었다. 기돈은 가룟 유다의 제안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예수가 정말로 신의 아들이라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겠군. 혹시 알아. 마치 홍해 바다에
애굽 군대를 처넣고 민족을 구원했던 것처럼, 로마나 유대 지도자들을 몰살시키고 우리를
살려줄지도…."
"아직도 살기를 원하는 모양이군."
"난 죽고 싶지 않아. 다만 두렵지 않다는 것이지. 난 자네가 죽는 모습을 지켜 볼거야. 자
네는 한 번도 겁낸 적이 없었어. 갈릴리 바다의 폭풍도 내 주먹도.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벌
벌 떨걸."
갈릴리 호수는 낮에는 잔잔하다가도 밤이면 돌풍에 의해 파도가 더 쳐서 때로는 5미터까
지 높이 일 때가 있었다. 어린시절 기돈은 골목대장 노릇을 했는데, 살렘만큼은 자기 수하에
넣질 못해서 늘 불쾌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폭풍이 몰아칠 때, 기돈은 살렘을 불러내어
그의 용기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살렘을 어선에 오르게 한 뒤에 기돈은 닻줄을 풀었다. 배
는 풍랑에 이리저리 휩쓸렸지만 살렘은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기돈이 파도에 휩
쓸려 물에 빠진 것을 살렘이 구해주었고, 다행히도 배는 포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간신히 살아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기돈은 살렘에게 다시는 시비를 걸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렘은 갈릴
리 고향 땅을 떠나버렸다. 라이벌이 없어진 기돈은 고향이 심심해졌다. 살렘이 열심당원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기돈은 자기도 나름대로 실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혼자서 수도인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다. 그는 주먹세계를 주름잡으며 언젠가 살렘을 만날
날을 고대하며 지냈지만, 총독부의 감옥에서 사형수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
다. 기돈이 말했다.
"우리 어릴 적 밤에 갈릴리 호수에 나갔던 기억이 나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린 어쩌면 두 번째 동행을 하게 될지도 몰라."
살렘은 횃불의 흔들거림을 바라보다가 잠깐 졸음에 흔들렸는데, 기돈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무슨 말이야?"
기돈은 감방에서 들은 유력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총독부에서 십자가를 3개 준비하고 있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하나는 예수, 나머지
둘은 대기중인 사형순데, 순번을 따지면 결국 자네와 나지. 끝까지 동행하게 되어 기쁠 뿐
이야. 갈릴리 호수에서는 살아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죽어서 돌아가겠지…."
달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왔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는 그곳이 감옥인지조차도 모를 것
이다. 살렘과 기돈은 이제 죽을 목숨인지라 생명이라면 벌레조차도 부러운 신세가 되었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허기와 졸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
만, 그들의 대화는 결국 십자가 사형대까지 가야 끝날 일이었다.
다음날 마침내 기돈과 살렘이 불려나갔다. 온갖 희롱을 당하고 모욕과 고통을 받은 듯한
예수의 모습은 이미 초죽음이 된 듯 하였다. 기돈과 살렘은 과연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나사
렛 예수인지, 그리고 정말로 신의 아들인지 의심스러웠다. 해골의 언덕으로 악명높은 골고다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기돈과 살렘은 밧줄에 묶여 매달렸다. 그러나 예수는
못에 박혔다. 기돈은 로마인들에게 우리도 못을 박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사실
못을 박는 경우 훨씬 일찍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밧줄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보다 자비로운
사형방법이었다. 세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세워졌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꽤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현세와 분리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몸을
운신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말로 형언 할 수 없었다. 살렘의 표정을 지켜보던
기돈이 예수에게 시선을 돌리고 외쳤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당신 자신과 우리를 살려 보시지?"
기돈은 유다가 살렘에게 제의했던 일을 기억해냈다. 자신이 살렘보다 선수쳐서 어찌해보
려는 마음이었다. 즉 살렘을 철저하게 비참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란 단서는 정말로 유혹적인 말이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
할 때도 그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돈은 모르고 있었다. 기돈은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상관치 않았다.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없는 무력한 하나님이라면 신의 존재조
차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만일 신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견디지 못해
정말로 기적을 일으켜 살아난다면 그것 또한 이득이 될 것이고, 어차피 그렇게는 되지 못할
것, 말되는 대로 실컷 비방을 일삼았다. 기돈은 내심 살렘을 의식했다. 만일 살렘이 자기에
게 동조해서 같이 비방한다면 결국 자기에게 굴복하는 셈이 될 것이고, 끝까지 자기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비참한 최후를 더욱 비참하게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살렘은 가족들과 열심당원으로서 활약하던 때, 그리고 버림받은 일들을 회상했다. 그
가 일생을 통해 지향했던 삶이 모두 물거품이 된 마당에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예수의 존재
가 새롭게 와 닿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과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동행해 줄리 없었다. 고향 친구이자 사형수인 기돈을 운명적으로 다시 만났지만, 저 세상으
로 가는 길동무를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향 친구이자 사형수인 기돈을 운명적으로
다시 만났지만, 저 세상으로 가는 길동무를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살렘은 생각했다.
이 죽음의 순간에서 자신을 잠시 구제한들 이 땅에서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순간적인 삶을 붙들고 싶지 않았다. 부나방처럼 불꽃 속에 뛰어들어 타 죽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진리를 붙들고 싶은 것이다. 그 진리가 지금 자기 곁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자신을 외롭게 벼려두지 않고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아주는 것이
라면, 그것이 곧 신의 은총이요 사랑인 것을 깨달았다. 살렘은 기돈을 향해 소리질렀다.
"자네나 나는 마땅히 자기 죄값을 받는 거지만, 이분은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항상 옳은
일을 행하셨어. 자네는 이분을 비방할 자격이 없어."
기돈은 살렘의 뜻밖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돈은 그때 살렘에 대해 처음으로 깨
달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살렘이 자신의 삶에 대해 시종 진지하고 진실했다는 것이었다. 그
는 이번에도 역시 살렘을 꺾지 못하였다. 아니 영원히.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 대해
서, 그리고 당신 스스로 가장 연약하고 비참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존재를 바로 곁
에 두고서도 깨닫지 못하였다. 살렘이 이번에는 예수를 향해 말했다.
"하나님나라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미 죽은 듯 침묵하시던 예수가 오른쪽 십자가에 달린 살렘을 향해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인생은 선택의 문제였다. 최후의 순간, 그 순간에 살렘은 가장 위대한 선택을 한 것이다.
기돈과 살렘, 두 사람은 같은 고향에서 함께 자라났지만 그들이 선택한 인생은 정반대의 삶
이었다. 이제 함께 죽는 순간에 놓였지만, 그들이 선택한 죽음 또한 정반대의 것이었다. 한
사람은 구원에 이르고 한 사람은 영멸에 이른 것이다. 십자가 상의 짧은 순간의 삶으로 인
해.
예수는 일찌감치 운명하셨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대낮인데도 한밤과
같이 어두워졌다. 아직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기다리는 두 사람 중 기돈은 후회와 절망의
표정으로 공포스러운 하늘의 변동을 바라보고 있지만 ,살렘은 평안과 소망의 눈빛으로 저
먹구름 너머에 있을 태양과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류 역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
건의 휘날레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장식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이별
- 바나바와 바울
비탈진 예루살렘 시의 골목에서는 여느 때처럼 철없는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면서 뛰노
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아이들의 소리가 작게 들리는 곳에 있는 사도들의 처소에는 예수
가 부활 승천한 이래로 가장 심각한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회백
색 벽면의 고르지 못한 표면을 비추고, 창밖으로는 지중해성 식물들이 투박한 녹색으로 아
른거렸다. 특별한 장식도 없고 세간이랄 것도 없는 방안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군데군데 앉
아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은, 가장 자유로운 자세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런 자세를
취해볼 양이면 무척이나 불편한 그리스의 조각상들 같았다.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침묵하였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침묵
이 그들을 사로잡은 듯하였다. 종종 인간이 빚어내는 침묵은 자연의 태평스런 침묵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지금 한 집안에 모인 제자들을 둘러싼 침묵의 의미는 일종의 위기감이었다.
사도 베르도의 말은 그들이 처한 모든 상황을 요약하고 있었다.
"일곱 집사 중 한명인 스데반 집사가 며칠 전에 돌에 맞아 죽었소. 그렇지만 그것은 시작
에 불과할 뿐, 우리는 모두 이 일로 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한 교훈을 얻고 있소. 그런데 그자는 스데반이 죽은 바로 그 현장에 있질 않았소!"
수제자인 베드로가 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바나바에게 던진 말이었다. 바나바는
제자들의 극단적인 조심성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 보고서 판단해 줄 것을 정중하고도 간곡히 요청한 뒤에 문을 닫고 나갔
다. 그 후에 흐르던 침묵은 바로 바나바가 남기고 간 침묵이었다. 햇살에 드러난 먼지들만
공중 곡예를 할 뿐 다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필시 사도들의 생각도 더는 출구를 찾지 못
하고 제자리를 맴돌았을 것이다.
"똑똑….'
침묵을 깨는 소리로서는 충분히 큰 소리였다. 제자들의 눈이 일제히 출입문을 향했고 이
어서 문이 열리며 바나바와 바울이 들어왔다. 가장 반가운 얼굴과 가장 위협적인 얼굴이 동
시에 그들 앞에 나타나서 잠시 또다른 침묵을 그들 사이에 만들었다. 곧이어 바나바가 침묵
을 깨뜨렸다.
"사도들이여,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여기 있는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던
사울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바나바는 바울이 어떻게 예수를 만났으며 어떻게 그분의 제자가 되었는지 그 경
위를 들려주면서 바울에 대해 변호했다. 바나바는 모든 신앙신의 모범이자 사람을 보는 안
목이 탁월함을 이미 인정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제자들은 그리스도인 탄압으로 사울
의 악명이 워낙 높은지라 사울의 변화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베
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두
한 형제로 받아들였소. 만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울을 제자로 택하셨다면 우리는
더없이 감사할 뿐이오. 그런데 항간에서는 그대가 거짓 회개하여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잡
아가두려 한다는 오해를 하고 있으니 이점은 분명히 해명해야 할 것이오. 사울, 이제 당신의
해명을 듣고싶소."
바울이 된 사울은 제자들의 의심쩍은 태도에 조금도 불만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과거
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바울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
들 앞에서 간증하게 될 것을 사도들 앞에서 먼저 고백하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제자됨을 피력하였다. 바울의 말 속에는 인간의 신념에서 나오는 힘이 아닌, 하
늘에서 내려온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유의 주인이시며 죄인중의 괴수인 나를 구원하
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바울의 변론이 끝나자 처음 상면했을 때와는 다른 침묵이 흘렀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침
묵 속에는 확신과 의구심이 뒤섞여 흘렀다. 그 순간 또다시 침묵을 깨는 문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렸다. 어떤 신자였는데 다급한 목소리로 소식을 알려주었다. 유대인 한 무리가 스데반
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사울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곧 이리로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사도들과 작별하고 뒷문을 통해 그 집을 빠져나온 바나바는 바울을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피시켰다. 그리고 바울에게 고향 다소에 당분간 머물 것을 권하였다. 바울을 떠나보내면서도
바나바는 바울이 큰 일을 행할 사람이며 또 언젠가 함께 일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있었기에
아주 이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그 일이 있는 후에도 두 사람의 교분은 지속되
었고, 인재를 발굴하려는 바나바의 집념은 변함이 없었다.
어느덧 세월은 약 14년이나 흘렀다. 지중해와 접한 어느 바닷가에서 이제 바나바와 바울
은 두 번째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와는 달리 이번에는 다시 만날 수 없
는 이별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방금 청년 마가의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다.
우유부단함과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바울은 청년 마가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글세, 마가는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떠나 사역을 중도에 포기한 사람 아니오? 어떻게 그
리도 결단력이 없는 사람을 또 데리고 가잔 말이오?"
바울이 바나바에게 역정을 내었다. 바나바는 차분한 어조로 바울을 설득하려 했다.
"마가에서도 사정이 있지 않았겠소? 다시 한 번 기회를 줍시다."
바울이 주저없이 되받았다.
"절대로 안 됩니다. 빈대떡 뒤집듯이 변덕이 심한 사람과는 절대로 주님의 일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쟁이 끝나자 끓어 오르는 열기를 식힐 시
간이 필요했는지 뒤돌아 앉아서는 각자의 생각으로 돌아가 침잠했다. 바울은 해변에 부딪치
는 파도가 달빛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억은 수년 전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사역자로 부름받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바나바는 다소까지 찾아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안디옥 교회 사역의 동역자로 삼았다.
두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한해 동안 교회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물론
주도권은 믿음의 대선배인 바나바에게 있었다.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기 때문인지, 아
니면 지금 마가를 고집하는 바나바와 과거 바울 자신을 고집하던 바나바를 비교해 볼 양인
지는 몰라도 바울은 그때의 기억에 매달려 있었다.
한편 바나바는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다 저편 어딘가에 있을 바보섬이 생각에 짚
였다. 선교여행 초기에 바보섬에서 성령이 바울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그가 행하는 놀라운
일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바나바는 바울을, 아니 바울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성령이 바울과 함께 하신다.'
바나바는 그때 사역의 주도권을 바울에게 넘겼다. 그 당시만 해도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며 교회와 제자들한테서 사도성을 인정받기는 하였으나 바나바가 없는 바울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바나바는 바울의 후원자로서 공이 컸다. 심지어 바나바는 자신의
믿음의 선배로서 가진 기득권과 주도권을 바울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때는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울과 갈등을 빚게 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선교 사역의 주도권을 이양해
놓고서 시기심이 발동해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지만 결단코 그런 이유
는 아니었다.
바나바는 마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고된 선교 사역을 감당치 못해 밤빌리아에서 중도
하차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믿음이 신실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만일 이번
에 데려가지 못하면 마가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것이고, 다시는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모조모 따져 보았으나 결코 마가를 버릴 수 없
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해변 바위에 늘 똑같은 모양으
로 밀려와 부딪쳤다 흩어지는 것처럼 바나바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
다. 그는 바울한테서 이방인 선교자의 위대한 가능성을 보았듯이 마가에게서도 위대한 가
능성을 보았고, 그것을 결단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바나바와 바울은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두 번째 협상에 들어갔다. 저녁식사라고는 하지만
보잘 것 없었다. 빵 몇 조각에 생선 한 마리, 스프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바나바는 후식으
로 포도주와 종려 열매 말린 것을 내어 놓았다. 씹는 맛이 꼭 젤리처럼 쫄깃한데 여정의 피
로를 달래는 간식으로는 그만이었고, 그것을 먹을 때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일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을 때 바울을 동역자로 부르기 위해 다소까지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때도 바울과 함께 종려나무 열매를 먹은 기억이 있다. 바나바는 바울의 손
에 그 열매를 쥐어준 다음 자신의 입에 그 열매를 넣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함께 있
는 사람에게 먼저 권하고 난 뒤에 자기가 먹는 것이 바나바의 습관이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있는 동안 그러한 모습을 많이 보아 왔는데, 유독 다소에서 있던 일만이 기억에 새로
왔다.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의 동역자로서 실라가 어떠하겠느냐고 제의했다. 흥분이 상당히 가
라앉은 상태였기 때문에 바나바도 스스럼 없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바울, 실라는 참 좋은 사람이오. 그러나 마가를 제외할 수는 없소. 함께 데려가면 어떻겠
소?"
그러나 바울은 차라리 혼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마가와는 함께 가지 못하겠노라 했다. 바
나바는 이제 더는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을 설득하는 일은 예전에 회심한 바
울을 제자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을 설득한 일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나바는 드
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우린 여기에서 헤어져 각자의 길로 갑시다."
누군가는 꺼내야만 했을 말이었다. 동녘이 밝아오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를 향
하여 항해에 올랐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으로 떠났다. 바나바는 두
번째로 바울을 보내며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의 핍박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걸어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때에 만났다가도 어느 때에는 헤어지기 마련
이다. 바나바에게는 그들이 다시 만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바나바는 거의 빗나간 적이 없
는 자신의 직관에 의해 그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붙들린 바 되어 크게 쓰이게 되리라는 확신도 함께 하면서 그의 앞길을 위해 축복했
다.
그들이 두 번째 작별릉 고한 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가르치는 일과 전도를 계속하다가
주님께로 돌아갔다. 죽기 전까지 그는 무엇보다도 마가의 영적 은사를 계발하는 데 큰 역할
을 했다. 마가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완성했다.
사도 바울은 세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초인적으로 감행하였는데,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
지에서는 바나바와 다툰 일과 마가를 데려가지 않은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후회한
다고 썼다. 그리고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내 일에 유익하니라"고 요청하
기도 하였다. 바울에게 무익하던 마가는 바나바가 새롭게 다듬음으로 인해 결국 바울에게
필요한 자라는 고백을 듣게 되었다.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나 홀로 위태로운 길을 행할 때면 언제나 바나바를 생각했다. 따뜻
한 손길로 종려나무 열매를 내밀던 바나바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울은 그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내었다.
바울은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가마리엘을, 영적 스승으로서는 바나바를 꼽
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 바나바와 같은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
길 진심으로 바랐다. 두 번째 이별은 그들의 육신을 멀리 옮겨 놓았지만, 서로에 대한 그리
움과 필요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가슴 속에서 우뚝 솟은 섬처럼 선명해졌다.
알렉산드리아호의 침몰
- 바울과 율리오
나, 아리스다르코는 수년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호의 침몰 사건을 기억하면서 로마에서
순교한 청년 바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영혼은 마치 호렙산의 불타는 가시떨기나무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하나의 빛이었다. 비록 난파되어 지중해에서 사라졌
지만, 276명의 목숨을 건짐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호가 파선되기 전보다 더욱 유명해진 것
처럼, 사도 바울은 죽어서도 그 빛을 더욱 찬란하게 발할 뿐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비보는 나에게 슬픈 소식이지만, 단순히 슬픔을 넘어 숭엄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와 함께 잠시나마 동행했던 것을 더없는 축복으로 여기며, 그로 인해 잠시나마 동
행했던 것을 더없는 축복으로 여기며, 그로 인해 새로 얻은 목숨을 마케도니아에서 불태우
면서 그의 남은 사역을 대신 감당하려고 한다. 그리고 지난날 나와 함께 한 배 위에서 생사
를 같이 했던 이들에게 그 날을 상기시키고자 이 글을 기록한다.
때는 AD 59년 9월 초순경, 지중해의 북동풍이 불기 시작할 무렵 이었다. 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는 아주 위험하기 때문에 지중해의 모든 항해가 중단되는 시기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여름철 서풍이 불었고, 우리는 구브로 섬 동편을 따라 섬과 육지 중간의 항로
로 항해하며 미항까지 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송사로 아그립바 앞에서 변론해야 했는데, 아그립바는 바울에게서 큰
협의를 찾지 못하여 그를 놓아 주고 싶었으나, 이미 바울이 로마법정에 상고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로 호송되어가는 중이었다. 바울의 목적은 케사르 앞에 서는 것이었고, 칼로
세계를 정복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바울과 몇 명의 죄수들을
호송하는데 책임을 맡은 자는 해상경험이 탁월한 백부장 율리오였다.
율리오는 전형적인 무관 스타일로서 건장한 체구와 시원한 용모에, 부하의 발에 난 종기
를 직접 치료해 줄 정도로 인자함도 지니고 있었다. 율리오는 로마에 가는 일을 즐거워했다.
하지만 죄수들을 데리고 가는 해상여행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힘겹고 막중한 책임
이 따르는 임무였다. 특히 호송중에 죄수들의 탈출과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노
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는 가장 힘이 세고 거친 군사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는 죄수들을 호송중에 처단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율리오는 아그립바 앞에서 변론했던 바울의 학식과 인품에 탄복한 바 있어 그를
여느 죄수들과는 다른 격으로 대우해 주었다. 아드라미티움에서 온 배 한척을 타고 이틀 동
안 항해해서 시돈에 닿았을 때 율리오는 바울이 그곳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풀어 주었
다. 이례적인 대우였다. 율리오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바울을 신뢰했기 때
문이었다.
우리가 미항에 도착했을 때는 대속죄일 금식기간이었다. 문제의 발단이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야 했기 때문에 해상 여행은 더욱 위험한 시기
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마침내 백부장의 출항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눈 앞에 그 웅장한 자
태를 드러낸 알렉산드리아호에 승선하기 위해 줄을 지었다. 군사들은 지시에 따라 죄수들을
감시하는 일과 여행기간 동안 먹을 양식과 무역상품들을 운반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때 바울이 느닷없이 외치며 말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는 이대로 항해를 더 계속하다가는 짐과 배의 손실 뿐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잃을 큰 위험이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때 바울의 경고를 귀담아 들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
나 그들 중에 과연 누가 일개 죄수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겠는가? 모든 결정권은 백부장인 율
리오에게 있었다. 율리오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율리오 곁에 함께 서 있던 선장은 항
로와 해상일기, 특히 풍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듯 하였다. 선주는 장담했다.
"내 배는 로마에서 만든 배로 이 일대에서 가장 크고 안전한 여객선으로 알려져 있습니
다. 웬만한 강풍에도 끄떡 없습니다."
하던 일을 멈춘 군사들과 죄수들의 시선이 율리오의 입술을 향해 있었다. 죄수들도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의 경우 배가 파선된다면 그들은 손과 발에 수갑을 찬 채로 바다에
생매장되고 말기 때문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밀한 성격의 율리오는 날짜와 양식을
머리 속에 계산해 두었다. 그런 면에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어느 쪽의 말
을 듣는 것이 옳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율리오가 만일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통솔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틀림없이 군사들은
백부장이 결단력도 없이 죄수의 말을 듣고 따른다고 지휘관을 업신여길 것이다. 반면 비범
한 능력이 있는 바울의 말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잠시동안은 침묵이지만,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마침내 율리오가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결정한 사항을 통보했다.
"애초 계획대로 출항한다."
군사들과 죄수들은 당연히 그렇게 결정될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율
리오와 바울은 서로 침묵했다. 모두 배에 올랐다. 선실이 배정되고 선원들은 능숙하게 출항
을 준비하고 있었다. 율리오는 지중해와 하늘이 끝닿는 부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지도
자 한 사람의 결단에 어떤 행, 불행이 따를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신만이 그들이 가는
길을 사실 뿐.
드디어 출항. 남풍이 순하게 불어 배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
졌다. 출발이 좋아서 다들 안심한 듯했다. 누구보다도 선장은 득의만만했다. 배는 육지로부
터 점점 멀어지고 배를 따라오던 갈매기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바울
의 경고도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얼마 못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 뒤쫓던 물새들이
일시에 사라졌고,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북동쪽에서 불
어와 남풍과 정면 충돌했다. 그런 경우에 돌풍에 휘말리면 아무리 큰 돛배도 힘을 못쓰게
된다. 배 안은 일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그 순간, 나는 바
울의 경고를 상기하고 그를 찾았다.
선실은 술렁대는 사람들로 인해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고, 갑판위 에서는 선원들이 돛을
내려 배기둥에 묶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율리오는 선장과 함께 있었고, 군사들은 백부
장의 지시를 받아 죄수들의 거동을 감시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나는 선실 아주 구
석진 자리에서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바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근접할 수 없었다. 어떤 신비스러움이 그를 둘러싸 접근을 막는 듯하였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 갑판위로 올라갔다. 바람은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은 기
세로 돌변해 있었다. 배는 이미 통제능력을 잃은 상태로 바람이 부는 대로 두는 수밖에 없
었다. 선원들은 구명보트격인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은 선체와 함께 둘러감았다. 파도가
배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흘러나가는 모양이 마치 불의 혀와 같아 보였다.
알렉산드리아호는 마치 유라굴로 앞에 놓인 사냥감처럼 그렇게 희롱당하고 있는 것 같았
다. 선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강풍 그 자체보다도 스르디스였다. 스르디스는 바닷 속
에 형성된 모래언덕으로 만일 지나가던 배가 이 모래언덕에 걸리면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달
싹할 수 없게 된다. 누가 발견해서 구해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백골이 되고 마는 것이다.
스르디스에 걸리지 않으려면 배를 가볍게 해야 한다.
이튿날 선원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아예 배의 기구들을 떼어내
바다로 던졌다. 어쩔수 없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여러날이 지나도록 풍랑은 멈출 줄을 몰랐
고 해를 구경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있었다. 모두들 우리는 이
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바울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낙
심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나섰다.
"여러분. 내 말대로 그레데 섬을 떠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이런 재난
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기운을 내십시오. 배는 잃겠지만 여러분의 목숨
만은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어젯밤에 나를 지배하시는 하나님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나더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반드시 황제 앞에 서
게 될 것이며, 나와 동행하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이미 모두 나에게 맡겨 주셨다고 했습니
다. 그러니 여러분, 기운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
라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섬에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의 말에 적잖은 위로를 얻었다. 그가 죄수의 몸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런 회의적인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구원의 희망을 상실한 우리에게 그
의 메시지는 소망의 빛을 던져준 것이다.
한편 율리오는 피곤하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바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내심 바
울을 존경하면서도 못마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마 내가 그 위치에 있어도 그러
했을 것이다. 율리오는 백부장으로서 한 배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
공은 당연히 율리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바울로 인해 그는 자주 자신의 권한과 지휘권에
도전을 받은 것이다. 바울의 말 중에 우리 모두의 생명을 하나님이 바울에게 맡겨 주셨다는
말이 특히 율리오의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율리오는 마음의 갈등으로 평정을 잃은 듯해 보였다. 백부장의 체면을
버리고 바울의 통솔 밑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백부장의 권한을 내세워 바울의 행
동을 제어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곳이 육지였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극
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는 법이다. 율리오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번 임무수행이 성공하려면 바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의 선상 연설이 끝날 때 율리오는 피곤한 두 눈을 감았다. 그것은 자신
의 체면도 자존심도 눌러놓겠다는 말없는 표현이기도 했다.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하기 시작한 지 열 나흘 때 되던 날밤이었다. 한밤중에 선
원들은 육지에 가까이 온 것 같은 짐작이 들자 줄 끝에다가 추를 달아 물깊이를 재고 있었
다. 처음에는 스무 길(약 36m)이었고 다음엔 열다섯 길이었다.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잘못하면 배가 암초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4개의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모처럼 희망을 품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선원
들은 자기들만 배에서 빠져나갈 속셈으로 이물(선미)에게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거룻배를
물 위에 띄웠다. 그때 바울이 율리오와 군사들에게 일러주었다.
"저 사람들이 이 배를 떠나가면 당신들은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율리오는 바울의 말에 동의했다.
"거룻줄을 잘라라."
군사들이 밧줄을 끊어 거룻배를 떼어버렸다. 동이 틀 무렵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왔습니다.
자, 음식을 드십시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
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떼
어서 먹기 시작했다. 276명의 사람이 모처럼 용기를 얻고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남은 식량조차도 모두 바다에 던졌다.
이제는 선장의 역할도 필요치 않았고 백부장의 지휘도 소용없는 듯 바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하면서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우리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육지까지 안전하게 상륙하느냐 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는 또 한차례 불행한 상
황과 직면하게 되었다. 날이 밝자 모래밭이 있는 물굽이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
리쳤다. "스르디스다!" "암초가 많다!"
물길을 잘 따라가면 장애물과 피할 수 있겠는데 물살이 너무 심해서 위험스럽기 짝이 없
었다. 그래서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묶었던 밧줄을 늦추었다. 그리고 앞돛을 올려서
바람을 타고 해변쪽으로 배를 몰았다. 키를 잡고 있는 선장의 손뿐 아니라 우리 모두 손에
땀을 쥐고 그 위험한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선상 연설중에 배를
잃게 된다는 말을 상기했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 되는건가? 그런데 배가 파선되는데도 어떻게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다 살아난단 말인가?'
율리오의 머리속에 상념이 떠도는 동안 알렉산드리아호가 급한 물살에 끌려갔다. 아차, 하
는 순간 뱃머리가 바위 사이로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후미쪽이 그만 모래톱에 걸리고 말았
다. 선주쪽의 사정은 더욱 위험했다. 두 물살이 합쳐지는 곳이었다. 뱃머리가 이쪽저쪽 바위
에 부딪히면서 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 뒤켠으로 물러났다. 군사들은 죄수들이
탈출할까봐 그들을 모두 죽이자고 백부장에게 요청했다. 율리오는 그 순간까지 바울이 죄수
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침착하게 명령했다.
"아니다. 죽이지 마라. 저들이 도망칠 재간이 없으니 묶인 것을 풀어주고 헤엄칠 수 없는
사람은 먼저 뛰어내려 육지로 올라가게 하라."
헤엄을 못치는 사람들은 판자나 나무조각에 매달려 육지로 향했다. 육지에 올라와서 인원
점검을 해보니 276명 전원이 생존했다. 기적이었다.
우리는 그 섬에서 석달을 지내고 겨울을 난 뒤 디오스구로호라는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
로마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우리 모두는 바울을 믿고 있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멜리데 섬을 떠나는 날 율리오가 한 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이오. 나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주역이 되기를 원하였소. 그
런데 내 일생일대의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이번 항해를 느낀 것은, 죄수에 불과했던 바울이
야말로 이 드라마의 주역이었고 나는 단지 관찰자에 불과하였소. 나는 100명의 통솔권과 죄
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가 아니고 바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
었소. 아니,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진정으
로 중요한 것과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그가 나에게 깨우쳐 준 것이오."
율리오는 훌륭했다. 우리 모두는 죽었다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새로운 생을 맞이하게 되
었다.
나, 아리스다르코는 지금 지중해 한 연안에서 순교한 바울의 명복을 빌며 그에게 율리오
가 남긴 말을 전한다.
"알렉산드리아호의 진정한 선장이요, 지휘관은 바로 바울 당신이었소."
헌신된 교인들의 갈등
- 유오디아와 순두게
에바브로디도의 열띤 설교가 끝나고 이제 성경공부를 할 차례였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각기 말씀을 가르치는 장소로 향했다. 조금 뒤면 성경공부를
끝낸 교인들이 다시 모여 다같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먹음으로써 하루의 일정을 마무
리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오디아가 늦게까지 가르치는 바람에 저녁식사 준비가 좀
늦어졌고 그런 일조차도 순두게에게는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마침 유오디아 그룹에 속한 한 여자가 주방쪽으로 다가오자 순두게가 비꼬듯이 물어 보았
다.
"약속시간을 어겨야 할 정도로 성경공부에 꽤 깊이가 있었나 보죠?"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저희들 때문에 저녁식사가 늦어져서 죄송해요. 오늘 처음 나온 초신자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죄
를 안 짓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순두게가 많은 관심을 보이며 어떻게 그 이야기가 진행되었냐고 물었다.
"유오디아님은 '만일 그 사람이 거듭나기 전과 같이 계속 죄악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완
전한 중생 체험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셨지요."
그때 순두게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유오디아님이 틀렸어요. 사람은 죽을 때 까지 범죄의 가능성을 갖
고 있는 겁니다. 중생했다고 해서 사람이 완벽해질 수 있나요? 때때로 실수도 하고 죄를 짓
지만 점차로 신앙과 인격이 변하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는 유오디아의 귀에 곧장 들어갔다. 다음날 성경 공부시간에 유오디아는 순두게
의 이름을 거론하며 순두게의 교리체계를 반박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따라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얻고 다시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죠."
유오디아가 말씀 공부시간에 순두게를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순두게도
또한 말씀 공부하는 시간에 유오디아를 논박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빌립보 교인들은 양쪽으
로 견해가 갈라지더니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극단적인 대립양상으로 치달았다. 그
러면서 두 사람도 점점 그 사이가 벌어지고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그들의 갈등
이 순수하게 교리적인 문제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동기에 의해 라이벌
의식이 생겨났었다.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고 부흥하는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옷감 장사를 했던 루디아의 공이
컸었다. 하지만 순두게도 역시 개척공신이었고 개척을 시작할 무렵에는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숨은 공로가 많았다. 그런데 헌신이란 측면에서 순두게보
다 좀 늦게 시작한 유오디아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의 소리가 높아지자, 순두게는
자신의 공로를 기억해 주지 못하는 교인들보다도 사람들의 칭찬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유오
디아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봉사하는 일이든 선교한 일이든 그들은 앞다
투어 경쟁을 하였고 사람들로부터 서로 인정받고자 했던 것인데 그동안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교리 문제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인데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데는 하나님의 섭
리가 있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던 중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아시아쪽에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는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그의 진로를 유럽으로 옮겨놓으
셨다. 환상중에 마케도니아 사람 한 명이 바울앞에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도와달라
고 간청하는 것을 보고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이자 로마 식민지였던 빌립
보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고 특히 여성들
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사건으로 빌립보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복음을
전할 때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자색 옷감 장수인 루디아 도움이었다. 바울은 아마도 자신이
환상 중에 보았던 사람이 루디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또 하나는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었다가 그 소녀의 주인으로부터 오히려 고소를 당해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던 기억이
다. 하지만 그 사건은 오히려 사도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는데 용이하
게 한 전화위복의 사건이 되었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빌립보 교회를 세웠고 그가 세운 여러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만족스러운 교회였다. 바울이 볼 때 빌립보 교회를 세웠고 그가 세운 여러 교회들 가
운데 가장 만족스러운 교회였다. 바울이 볼 때 빌립보 교회는 중요한 사명과 의미를 지닌
교회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교리적인 문제로 교회 분위기가 양분되고 있었다. 에바브로디도
는 투옥된 사도 바울을 찾아와 교회의 내분 때문에 염려를 하였다. 사실 사도 바울에게 면
목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에바브로디도가 중병에 걸려 빌립보로 돌아오는 날이 연기되었다는 소
식이 전해지자 교회가 술렁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인들은 한자리에 모여 에바브로
디도를 위해 기도회를 가졌다. 그런데 좋은 의도로 모였던 기도회가 끝나자 교인들의 갈등
이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교회가 이렇게 시련을 겪는 것은 상대편 때문이라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넘겼던 것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애초에는 그렇게 문제 교인이 될만한
소지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존경받고 모범적인 일꾼들이었다.
유오디아는 비교적 집안이 부유하였고 교회공동체를 이룰 때 많은 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헌물로 드렸던 성도였고 모든 일에 열성과 적극성을 발휘했다. 학식과 교양도 뛰어나 교회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순두게 역시 유오디아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그
녀는 가르치는 데 탁월한 은사를 발휘하였고 앞에 나서기보다는 꼼꼼하게 수습과 정리를 잘
해나가는 스타일로 교회의 중직을 맡아 행했었다. 그렇게 믿음 좋고 신망있던 사람들이었기
에 그들의 갈등이 교회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결국 갈라진
그들 틈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고 오히려 교회에 어려움이 닥쳤는데도 더욱 불화의
불씨만 되어 덕스럽지 못하였다. 유오디아편에서 누군가 심한 말을 시작했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순두게님 쪽에서 교리문제로 시비를 걸어 교회 분위기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에바브로디
도님께서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번에는 순두게 편에서 말이 나왔다.
"말씀 한번 잘하셨어요. 유오디아님께서 제대로 가르쳤다면 순두게님께서 교리문제를 지
적하셨겠어요?" 그렇게 그들은 옥신각신 다투었는데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일
어나서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감옥을 지키는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흉악한 죄수들도 자기네끼리는
의리있게 잘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소한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동안, 우
리에게 믿음을 전하여준 바울 사도는 로마감옥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박해와 어려움을 겪
고 있고, 우리의 목회자이신 에바브로디도 목사님은 중병으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 우리가 이래도 되는 일입니까? 계속하시겠다면 저는 차라리 이 자리를 떠나는게 낫
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그렇게 해서 불씨
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순두게의 집에 교우들이 모였다. 물론 순두게 편에 있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다. 그들은 이
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그 집에 눌러 앉아 있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기본원리 중에
하나가 친교와 공동체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교회나 교인의 가정을 중심으로 자주 모여 말씀
을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파당을 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교회 입장에선 조심스
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은 목회자가 없는 공백을 이
용해서 비공식적인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순두게 집에 모인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나 에바
브로디도에 관한 소식을 나누었고 기독교에 대한 로마황제의 태도에 대해 관심의 귀추를 모
았다. 하지만 그들에겐 교회내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이 더 큰 관심거리였다. 마침내 누
군가가 유오디아에 관한 문제를 꺼냈다.
"사도 바울님께 면회가는 것도 당연히 순두게님과 저희들 중에 몇 명이 대표로 갔어야 했
어요. 유오디아님 쪽에서 나서지만 않았다면 목사님께서 분쟁을 막기 위해 몸소 여행을 떠
나지는 않았을 테고 그러면 병도 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성도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번일은 전적으로 유오디아님의 잘못이 커요.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교회의 질
서를 바로 잡아야만 해요."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중에 순두게는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산책이나 하면서 머리
를 식힐 요량이었다. 그녀는 이제 문제의 당사자들보다도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더욱 나쁜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며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
로 이 시점에서 유오디아쪽에 수그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분쟁과 다툼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순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매듭
을 지어야 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동네 아이들이 천진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순두게
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
당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순두게는 잠시 머뭇거렸다. 순두게의 집에서 사람들이 이제 막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
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이 잘 되게 할 것이니 힘을 내라며 그녀에게 용기를 심어주려고 애
썼다. '도대체 우리 믿는 이들이 용기를 내어야 할 대상이 누구란 말인가?' 그렇게 잠시 의
문을 가져본 순두게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돌려 보냈다.
얼마 뒤 사도 바울에게서 편지가 왔고 그 편지는 주일 모임에서 사람들 앞에 읽혀졌다.
그 편지에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반가운 소식이 담겨져 있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여러분 모두를 몹시 보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병으로 고생했다는
소식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것을 알고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죽을 뻔 했
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자비로 다 나았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빌립보로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는 같은 형제로서 그를 기쁘게 맞이하고 존경하십시오. 그는 목숨을 걸
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다가 죽을 고비를 겪은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편지내용이 읽혀지는 동안 모든 교인들은 그의 병세 회복에 감사와
기쁜 마음을 가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일으킨 분쟁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바울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
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돌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
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편지글이 읽혀지는 동안 유오디아는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특히 이 대목은 바로
자신에게 주는 말씀인 것 같아서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예전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를 지켜보며 감격했던 순간들이 그녀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사도 바울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많은 은혜를 체험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사도 바울에게 근심을 끼치는 성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 빌립보 교인들이 알지 못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듯이 그들의
마음 속에 반성의 싹이 돋기 시작한 것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교인들은 늘 교리문제로 공방전을 벌였고 이제 에바브로디도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의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지기만 하였다. 로마에서 빌립보 지방까지 여
행하는데 약 한 달 가량의 시간이 걸리므로 그 전에 승리의 깃발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었
는지 어쨌든 빌립보 교회는 그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사실 고린도 교회나 다른 초대교회들
이 안고 있었던 문제에 비하면 빌립보 교회는 큰 문제도 아니었고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
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분쟁하는 모습은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새로
운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에바브로디도가 돌아왔다. 그리하여 또 한차례 고비를 넘긴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
브로디도를 도와서 목회와 선교일에 생겨났던 공백을 메워나갔는데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큰 저력이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 속에 내재된 갈등의 골은 상당기간 치유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바브로디도는 교인들의 갈등과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도 아니었지만 그는 문제를 놓고 결코 한쪽으
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그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예의상
에바브로디도 앞에서는 문제없는 척 하다가도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또 충돌하곤 하였
다.
그러던 어느날 사도 바울이 결국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사도
바울이 영적인 부모나 다를바 없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
그러한 무서운 박해가 자신들에게까지도 닥칠지 모르는 일이지만 당장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바울 사도의 순교사건은 빌립보 교회의 분쟁을 근원부터 완전히 종
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빌립보 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순교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예배가 있었다. 그때 교인들은
깜짝 놀랄만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나란히 한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그 두 여인이야말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 사도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 중에 두 사람을 향해 언급했던 부탁 때문에 슬
픔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분에게 나는 간청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 마음이 되십
시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올라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서로 화해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마
음 아팠다. 결국 사도 바울은 죽어가면서까지 그들을 가르쳤고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그후로
는 서로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신앙의 동지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그렇
게 아름다운 관계로 변모하자 둘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던 교인들도 변하였다. 갈등과 분파
는 사라졌고 신앙의 라이벌이었던 두 여인의 화합으로 인해 평강이 찾아왔다.
그들 두 여인의 좋은 믿음과 헌신적인 삶의 모습은 초대 교회에 상당기간 동안 유오디아
라는 의미처럼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전파되었고, 순두게란 이름이 가진 뜻처럼 '행복스러
운' 여인들로 기억되었지만 그들의 일시적인 불화는 옥의 티와 같이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
과 함께 큰 교훈을 남긴 사례로 전파되었다.
만일에 오늘날 믿음의 후손들이 그러한 신앙적 교훈을 발견하지 못하고 비슷한 일들을 되
풀이 한다면 사도 바울의 죽음을 놓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던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하늘나
라에서 다시 한 번 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황제와 마지막 사도
- 사도 요한과 도미티안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집권 당시에 사도 요한이 로마의 옥에 갇힌 적이 있다. 그는 터키
동쪽에 살고 있는 파르티아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체포되
어 온 것이다. 이미 노인이 된 사도 요한이 옥살이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신체 곳곳에 스며든 듯 범접할 수 없는 그 무
엇이 느껴졌다.
어두운 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수 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잠 못이루는 맹수들의 으
르렁거리는 소리가 공포심을 자아내 감옥은 마치 지옥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처형 당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겠
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
한 친형 야고보가 부러웠던 적이 많았다. 요한은 최후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제자였으며 많
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이 티
투스에 의해 멸망당함으로써 예수의 예언이 이루어진 장면도 보았다. 박해가 심한 시대에
오래 살아남는 것이 그렇게 축복스런 일인 것만 같지는 않았다.
여느 날과는 달리 잠이 오지 않았던 사도 요한은 과거의 기억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참으로 끔찍한 시대를 살아왔기에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
은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를 따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던 시절이었던 것 같았다. 될 수
있으면 아름다운 생각들만 간직하고 싶었다.
상념에 잠긴 사도 요한. 그가 잠 못 이루는 까닭은 무엇일까? 날로 육신은 약해지지만 영
성은 날이 갈수록 맑아지고 깊어졌던 마지막 사도가 그의 앞에 다가온 운명의 날을 감지했
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햇살이 창살 사이로 들어왔다. 하룻밤은 무사히 넘겼지만 오늘 무슨 일이 벌
어질 것인지 요한은 본능적으로 알아 차릴수 있었다. 아침부터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콜롯
세움에서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기 위한 행사가 벌어지곤 했는데 피흘리며 쓰러지는
잔인한 장면을 즐기기 위해 로마시민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팡파레가 울리자 관중
들이 조용해지면서 황제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들은 환호를 보냈고 도미티안 황
제는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경기의 모든 순서는 나팔수의 나팔소리에 따
르며 때때로 황제의 뜻에 따라 순서가 바뀌거나 생략되기도 하였다.
맨 처음 경기는 격투였다. 세상에 그보다 더 비겁한 경기는 없을 것이다. 한쪽은 온갖 무
기와 갑옷으로 완전 무장을 했고 또 한쪽은 완전히 비무장이거나 혹은 한가지 무기가 선택
되기도 하였다. 경기가 끝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 감금되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로 경기장에 밀려 나왔다. 겁에 질린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뭉쳐 찬송과
기도로 자신의 영혼의 평안을 빌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곧이어 쇠문이 열리면서 여러 마리
의 굶주린 사자들이 뛰쳐 나왔다. 사자 한 마리가 먼저 사냥감을 발견하고 공격해 오자 한
곳에 모여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순식간에 뿔뿔히 흩어졌고 비명소리, 살려달라는 아우성 소
리와 함께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행사는 밤까지 이어졌다. 감옥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죄수 아닌 죄수들은 온 종일 공포에
서 떨면서 언제 불려 나갈지 알수 없는 두려움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울음
을 터뜨리고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밥이 제공 되었지만 누구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
다. 모두들 비탄에 잠겨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사도 요한이 말했다.
"나는 사도 요한입니다. 여러분,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제가 옛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우리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말씀을 여러분께 전하려고 합니다. 말
씀을 붙잡고 주님 앞으로 갈 때까지 힘을 얻으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에 많
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느니 가
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
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위안도 잠시, 곧이어 간수
들이 들이닥쳐 감옥문을 열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둘씩 불러냈다. 또 다시 공포감이 일었
다. 그때 사도 요한이 불려나가자 함께 나가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을 그나마 은총으로 생각했다. 그가 있어 한결 마음에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경기장 안은 밝혀놓은 횃불로 낮보다 오히려 밝았다. 밤에는 주로 화형식이 이루어졌으므
로 사자 밥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생각도 이내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말았다.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십자가와 그 아래 쌓인 장작들이 눈에 들어왔다.
형리들은 그리스도인들 수십 명을 십자가에 묶은 뒤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꽃이 어
두운 밤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고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꺼져가는 생명들은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냐? 더 빛나게 해주랴?"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조롱과 조소를 일삼았다.
마침내 사도 요한의 차례가 돌아왔다. 나무에 매달린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대신 보살펴 달라시던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
다. 그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죄스러울 뿐 빨리 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렸다. 집행사인을 받은 형리가 사도 요한의 발아래 있는 장작에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횃불이 꺼져 버렸다. 두번째 시도를 해 보았지만 또 바람이
불어 횃불이 꺼졌다. 세번째 다시 횃불에 불을 붙인 형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거듭 그런 일이 생기자 그를 처형했다가 자신이 어떤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흐르는 진땀을 닦
고 마침내 형리가 장작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순간 타오르기 시작하던 불
길이 형리를 덮치고 말았다. 그 불길은 사형집행인만 살라 죽였을 뿐 요한의 발 앞에 있던
장작은 마치 물을 끼얹은 듯이 불꽃이 꺼져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미티안 황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박해가 가장 심했던 네로
황제 때나 그의 형제인 티투스 황제때 그렇게 수많은 처형과 학살을 지켜 보면서도 그러한
예를 보지 못했었다. 도미티안은 사형집행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단지 우연한 사고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도 요한을 다른 방법으로 처형하려고 마음 먹었다.
형집행관들은 황제의 지시에 따라 기름이 펄펄 꿇는 가마솥을 준비했다. 마치 대형 목욕
탕의 욕조와 같은 크기의 가마솥은 보기만해도 끔찍스러웠다. 도미티안은 조금전의 충격과
흥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도 요한을 가능한 빨리 처형시켜야 겠다는 강박감에 사로 잡혀
있었고 그 입에서 불호령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집어 넣어라. 제 아무리 기적의 사도라고 하여도 그 속에서 살아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요한은 마치 냄비 속에 찌개 재료를 집어 넣듯이 그렇게 넣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가마솥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기적이 일어났다.
"저자는 사람이 아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용광로와 같은 가마솥에 들어간 요
한은 마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온전하게 살아 있었고 편안히 앉아 기도
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형집행관들은 더 세게 불을 지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
지만 도미티안의 생각은 달랐다.
"저자가 마술을 부리는군."
그 다음날 저녁만찬에 사도 요한은 왕실에 초대되었다. 도미티안은 다시 한번 사도 요한
을 회유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식탁 테이블에 황제와 사도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다. 사도
요한은 늙었지만 결코 행색이 초라하거나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말 한마디면 날아가는 참
새로 떨어진다는 로마황제 앞이지만 그는 당당하게 맞서고 있었다. 도미티안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예수의 제자 중에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그대마저 순
교당하면 기독교도들에게 얼마나 큰 손실이겠나? 그래서 그대를 처형시키려는 생각을 돌렸
다. 알다시피 신성한 로마제국의 시민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인정해 준다면 그대의 목숨도 살려주고 감옥에 갇힌 자들도 모두 풀어주겠다."
그러자 사도 요한이 대답했다.
"결코 황제는 신이 될 수 없소. 살아있는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면 불행한 일 밖에 닥칠 것이 없소. 나는 목숨이 두려운 것이 아니오. 그리고 갇힌 자
들도 우상숭배를 하느니 차라리 신앙을 지켜 순교하기를 원할 것이오. 만일 황제께서 신으
로 숭배받기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당신의 나라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듯이 로마제국도 멸망
당하고 말 것이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도미티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죄수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황제
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그대의 생각이 변함이 없다니 유감일세. 당신의 마술이 뛰어나긴 하지만 어디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도미티안은 시종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시종은 만일 사도 요한이 회유책에 넘어가
지 않을 경우 사전에 지시를 받은 대로 독배를 사도 요한 앞에 대령했다. 시녀가 황제의 잔
과 사도의 잔에 물을 따랐다. 그러는 동안 사도 요한은 황제의 말에 답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가 남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겁니다."
그러자 도미티안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스승이 마술사군. 그대의 스승이 어디까지 지켜주는지 한번 보세."
황제 도미티안은 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하고 물을 마셨다. 독이 들어 있는 독은 마
치 몸을 몇번 뒤감은 뱀의 형상처럼 연기가 되어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고 요한은 아무 탈이
없었다.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요한을 바라보며 그가 믿는 신을 실컷 조롱할 계획이었던 도
미티안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만 자신이 들고 있던 잔을 놓치고 말았다.
며칠 후 도미티안은 그의 고문관인 원로원 가운데 한사람과 사도 요한의 신변처리 문제를
놓고 논의를 했다. 사도요한에 얽힌 기적적인 사건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했
고 무엇보다도 사도 요한을 처리할 묘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내 사도 요한은 지중해에 있는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해상과 육로를 통해 삼
엄한 경비 속에 죄인호송이 이루어졌다. 그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모든 통로를
차단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신의 섭리일까? 그곳에서 위대한 묵시록이 탄생하게 되리
라고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요한은 인적이 드문 밧모섬에서 남은 여생을 어찌 보내
야할 지 막막했다. 지중해의 출렁거리는 푸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는 갈릴리 호수를 연상
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로 아지트를 옮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맨 처음 호수
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며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셨다. 그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진땀나는 대화를 주님과 나누었다. 주님
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
지 못했던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은 쓰라린 심정으로 자신들의 배신을 통회하였고 속으로는
베드로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 곧 자신들에게 주시는 교훈이었던 것을 깨닫고 공감했던 기
억이 났다. 그때는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던 상황이었는데 지금 생각
하니 오히려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사형당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모친과 함께 골고
다 언덕 십자가의 발 앞에 있었고, 부활의 무덤에도 가장 먼저 들어가 본 제자였기에 주님
에 대한 죄책감이 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요한을 각별히 생
각해 주셨고 그날도 베드로와의 일문일답을 마친 후 사도 요한이 시중들며 스승을 따르자
베드로가 주님께 질문하였다.
"주님, 앞으로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들 자신들은 그때 벌써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순교를 하게 될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받는 제자 요한의 미래가 베드로의 눈에는 각별한 의문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의미를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
다. 요한이 그 깨달음의 의미를 물으며 바닷가에 묵상에 잠겨 있을때 갈매기 한 마리가 그
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날리 않고 걸어가기만 하는 갈매기의 꽁무니를 따라 갔는데 얼마간
바위틈을 건너 뛰며 도달한 곳은 아포칼립스라는 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갈매기는 이내 종
적을 감추었다. 요한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임하리라는 응답을 받고 필기구를
구하였다. 그리고 평평한 돌로 테이블을 만들고 그가 임시 기거할 수 있도록 필요한 물건들
을 갖추어 놓았다. 그는 한참동안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서 한줄
기 빛이 내려오면서 환상과 음성을 듣게 되었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거룩한 기운에 휩싸여
묵시록을 기록해 나갔고 동물들은 그 근처에 얼씬대지도 못하였다.
한편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추방하고서도 도미티안 황제는 요한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
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새로운 구상을 했다.
"마술사에겐 마술로 대항해야 해."
그는 전세계에 내로라 하는 마술사들을 물색하던 중 키놉스라는 이교도 마술사를 불렀다.
키놉스는 물과 바람을 이용한 마술에 능했고 성격이 잔인하고 악독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특히 키놉스는 경쟁의식과 시기심이 많아 자기보다 낫다고 하는 자들과 대결하여 죽을 때까
지 결판을 내고야 마는 성미였다. 도미티안은 키놉스의 그러한 점을 이용해 그의 시기심을
잔뜩 발동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이 아포킬립스 동굴에서 계시를 받는 동안 그
는 뜻하지 않는 대적자를 만나게 되었다. 키놉스가 지중해의 물살을 가르며 밧모섬에 상륙
한 것이다.
키놉스는 날카로운 눈매로 섬 주변을 둘러본 후 요한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그리고 요한
이 머물렀던 동굴 앞까지 문제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요한, 당신이 마술이 상당한 경지라
고 들었는데 나와서 한 수 가르쳐 주시는게 어떻겠소?"
사도 요한은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낯선
방문객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침침한 눈을 비비며 바라 보았다. 키놉스는 요한에게 틈을 주
지 않고 공격을 해왔다.
그는 높이 솟은 바위 위에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거대한 파도가 요한을 향해 덮쳐왔다.
그리고 그가 바위 틈에서 해초를 하나 건져낸뒤 그 파도에 띄우자 집채만한 괴물로 변했다.
사도 요한은 파도를 피해 높은 곳으로 몸을 피하는데 성공했으나 두 번째 공격을 또 받았
다. 파도를 타던 괴물은 하늘 높이 치솟아 입에서 불을 뿜어 내었다. 생나무도 순식간에 타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절벽을 기어오르던 사도 요한은 머리 위에 올
랐다. 공중에서 요동하던 괴물은 요한이 "쌍크투스 그리스도" 즉 '거룩하신 주여'라고 외치
자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사도 요한은 상처 한군데 없이 아포칼립스 동굴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키놉스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 나를 해치려는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과 대결해서
그대를 죽게 하고 싶지 않소.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사명이 남은 나를 해치
려고 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당신을 없이 할거요."
키놉스가 대답했다.
"황제 도미티안이 이 말을 전하라고 했소. 로마 황제야말로 이 지상위에 군림할 진정한
신이다. 신의 뜻에 거역하는 자는 모두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마술에 능한 기적의 사도를
내 손으로 죽인다면 도미티안의 신성은 더욱 확실하게 증명될 것이라고 했소. 나 키놉스는
도미티안을 대신해서 싸우러 왔소만 막상 그대의 실력을 보니 흥미로와졌소. 나 키놉스와
대결하시오."
마술사 키놉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이 순식간에 돌풍으로
변해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나무가 뿌리채 뽑혀 하늘 높이 날아가 요한의 발 앞에 떨어졌
다. 사도 요한도 이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 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
를 드렸다. 그의 눈에는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바닷물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땅위의 식
물들이 죽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리운 주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키놉스가
일으킨 돌풍은 요한의 발 앞에서 그 위력을 상실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도
요한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그 광채 중에 빛 한 줄기가 뻗어 키놉스를 둘러쌌다. 마술사
는 당혹해 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발이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키놉스는
자신의 발등을 쳐다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안돼!"
그의 발이 돌로 변하더니 바위에 붙어 버렸고 그의 몸은 밑에서부터 점점 굳어지며 돌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문을 외워 보았으나 허사였다. 마침내 그의 머리까지 모두 돌
로 변한 다음에야 조용해졌다. 사도 요한은 진리에 대항한 거짓된 자의 말로를 지켜보며 남
은 집필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한편 키놉스의 승전보를 기다리던 도미티안은 키놉스의 참패로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온
몸을 떨었다. 도미티안은 본의와 상관없이 사도 요한이 조용한 곳에 머물러 신의 계시를 받
는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묵시록을 완성하는데 가장 큰 사탄의 세력으로 이용되
었다. 도미티안은 고민했다.
'과연 사도 요한의 신이 그를 보호하기 때문일까?'
그는 키놉스를 보내어 조용하게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고 성공하리라고 믿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사도 요한을 없애기로 하고는 당장 군대를
출동시키도록 명을 내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혀 군대조직이 가동되지 않았다. 심상
치 않은 왕실 분위기에 도미티안이 그의 심복을 불러 까닭을 알아보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
이었다. 원로원에서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15년간의 도미티안 황제
의 통치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직 황제 즉위식이 이루어지진 않았지
만 군대는 새로운 황제의 명령 없이는 충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로원에서는 도미티안의 실정을 성토하였다. 원로원에서 내린 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
용이 실려 있었다.
'도미티안이 행한 일들은 성토되어야 한다. 그가 부당하게 추방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집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좋은 점은 되살려야 한다.'
이 교서가 내려지자 사도 요한은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풀려났고 그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수의 모친을 모시고 또 여러 교회를 세우고 감독을 임명하면서 사도로서 왕성한
사역을 행한 후에 평안히 그의 생을 마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사도요, 기적의 사도인 요한을 바라보면서 사도 바울이 말했
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요한과 같은 자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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