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사이
-김지원 장편소설
----- 차 례 -----
1. 꿈결
2. 겨울나무 사이
3. 베갯머리꿈
4. 지나갈 어느 날
5. 시간과 강물
6. 마술의 사랑
7. 바닷가의 피크닉
8. 폭설
1. 꿈 결
[1]
일방통행인 좁은 거리는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옷가게, 캔디가게, 카페,
레스토랑, 가방가게, 장신구점,
기념품가게, 꽃상점, 빵가게.....
벗겨져 가는 금빛칠로 레오나드라고
상호를 쓴 캔디가게는 두어달 전부터
이태리인으로부터 한국사람에게로 그
주인이 바뀌었다. 레오나드 앞에 대형
오일트럭이 멎고 운전석에서 푸른 제복의
흑인이 내렸다. 그는 상점문을 밀고
들어섰다.
상점은 길고 밝게 조명되었으며 두 개의
카운터에서 잡담하던 두 사람 한국남자
중에 주인이 일어나 손님에게 담배 한 갑과
콜라 한 병을 내주었다. 이 손님이 사는
물건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하늘에다 전화 좀 거소. 이렇게도 비를
매일같이 내리시기냐고."
놀음판에서 포커 카드 던지듯 돈을
지불하며 흑인이 말했다.
신문과 문방용구 진열 카운터에 앉았던
문희가 유리창 밖을 내다 보았다. 숯검정
같은 눈화장을 하고 몸뼈가 단단한
여자였다. 사십 중반임에도 삼십 정도로
보였다. 잡지광고에 나오는 여자같이
모던해 보였다.
거대한 오일트럭이 가게 앞을 꽉 막고 그
트럭 위로 번질번질 비가 흐르고 있었다.
돌아갔다.
가게로부터 나간 흑인이 운전석에 올라
앉았다. 트럭이 떠나고 나니까 시야가
트이며 철문이 굳게 드리운 건너편 가게가
눈앞에 드러났다. 네 송이 수선화가 자물통
있는 곳에 꽂히고 길바닥에도 시든
꽃묶음이 놓여 있었다. 짙은 녹색바탕에
희게 쓰인 아라벨라 간판도 비에 젖었다.
사흘 전에 젊은 여자 주인이 강도에게
살해당하였다. 문희는 방금 칠한 손톱
에나멜의 효과를 살피려고 열 손가락을
부채살같이 꽉 폈다.
"로베타는 이 도시를 사랑했어요." 미스
로베타 카프란의 친구인 릴리안 벤손이
말했다. "로베타는 딴 도시로 갈 수도
성공이 가능하다면 이 도시에서 이루고
싶다고 했어요." 미스 카프란은 팔 년 전에
웨스트 3가 135번지에서 가게를
시작하였다. 삼십 이 세로 아름다운 미스
카프란은 손수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아라벨라라고 상호를 붙인 곳은 전에
퍼플오니온이라고 불리었던 나이트
클럽으로 고고걸들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작은 쇼윈도에 미스
카프란은 편물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이
동네야말로 그녀의 작품을 알아 주었지요.
참 재능 있는 여자였어요. 그녀는 일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그녀 작품을 좋아하면
감사히 여겼어요." 가게 뒤쪽에는 그녀가
디자인을 창조하던 작업장이 있다. "그녀는
마룻바닥 가운데 앉아서 여러 가지 빛깔의
집었지요." 미스 카프란은 흐린 금요일
정오 조금 지나 가게를 열자마자 강도에게
칼로 찔려 죽었다. 그녀는 어제 뉴욕
바할라에 묻혔다. 금요일 날 뉴욕시에서는
아홉 명이 살해되었으며 주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수는 스물로 늘어났다.
"운상이 엄마는 뭘 그렇게 읽으시오?"
주인남자와 잡담하던 임 선생이 허리를
펴며 문희에게 물었다. 임 선생은 문희네
이웃에서 꽃집을 하고 있었다. 읽고 있던
신문을 문희가 두 손가락으로 집게처럼
집어 쳐들어 보였다. 칠이 마르지 않은
손톱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죽은 여자의
숏커트머리 얼굴이 크게 실린 기사이므로
통로 건너편의 임 선생은 곧 알았다. 그
시간마다 찾아서 채널을 돌려가며 다
보았을 뿐 아니라 신문도 여러 가지로 사서
자세히 읽어 보았던 터였다. 희생자는 길
건너 상점의 주인이었어도 이들은
텔리비전과 신문에서 그 얼굴을 익혔다. 그
날은 경찰차와 앰블런스와 뉴스 보도진으로
거리가 소란하였었다.
"어떻게 됐어요? 범인은 아직 안
잡혔다죠?"
알고 있는 사실을 임 선생이 물었다.
"그런가 봐요."
문희가 말했다.
"만일 우리가 강도 손에 죽었다 할 때
신문에설랑 이렇게 떠들것 같소?"
임 선생이 말했다.
"보도 안 되는 사건도 많은 모양이야.
인간이었던가 보던데. 부모가 재산도 있고
지위도 있는데다가 본인도 재주가
출중했던가 봐."
가게 주인 한주익 씨가 말했다.
"신문의 역할이라는 게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거라네. 사람들이란 게 볼 것
같으면 남들은 다 훌륭한데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심리가 너나 없이 다 있다는 거라.
그러다가 신문에서 제 아버지 죽이고
도둑질하고 그런 나쁜 놈들 얘기 읽으면
아, 나는 아직 괜찮은 놈이구나 그런다는
거라."
임 선생이 말했다.
"그런데 그 가게 좀 으슥하잖소?
지나가면서 들여다보니까 속이 콱 막힌 게
강도가 들면 어디 샐 구멍이 없겠습니다."
"운이에요. 살 놈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도 살고 죽을 놈은 접시물에도
빠져 죽는다잖아요."
앞에 앉은 임 선생이 한 말이었는데
문희는 깜빡 잊고 말하였다. 아침이면 가끔
커피 한 잔씩들을 놓고 앉아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사람이 -- 특히 가게 주인들이
죽었는가, 어떻게 강도을 당하였는가, 누가
무엇으로 돈을 벌었는가를 주로
얘기하였다.
"여보 한형, <죄와벌>이란 걸 읽어 볼 것
같으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나서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며
괴로와 한다는데 여기 어떤 놈들은 그게
하나도 없다는 거라. 그냥 동물이래요. 총
가지고 길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자동차에
그런다니 그게 사람이요, 어디."
임 선생 입에서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어려운 이름이 술술 나온다고
"어머나 유식하셔라. 전직 국어교사
알아드려야겠네요."
문희가 까르륵 웃었다. 한주익 씨는 눈을
착 내리 깔았다. 앉는 것, 서는 것, 말하는
것, 걷는 것, 한주익 씨는 아내를 보아
내기 힘들었다.
더구나 새로 퍼머를 해서 검불 같은
머리가 한 아름인데 머리빛깔은 야릇하게
붉은기를 띠었다.
"그래도 미국이 마음 편치. 여기선 다른
놈 눈치볼 것 없이 육신써서 돈벌면 그게
내 돈인데. 뉴욕에서 제일 좋은 캔디가게를
가지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캔디가게를
물건을 미처 다 갖춰 놓지 못하여 선반이
텅텅 빈 가게에 앉아 한주익 씨가 말했다.
"에잇 우리도 여기서 야채가게,
생선가게, 구멍가게를 하고 있을게 아니라
백악관 쳐들어 가는 거라. 들어가 앉아서
크레믈린 불러서 너는 한반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 한번 해 보고 그러다가 금방
쫓겨나면 뭐 어떴소?"
가게문이 열리고 런닝샤쓰와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올리브빛 피부가
윤이 나고 눈썹과 눈동자가 그윽히 검었다.
비가 와서 눅눅한 실내에 청량한 바람을
몰고 들어섰다. 그는 일회용 면도기와
신문을 샀다. 흰 반바지 밑으로 들어난
다리는 근육질이었다. 그 사람의 종아리를
물어 뜯고 싶다고 문희는 생각했다. 물어
고기같이 세로로 쪽쪽 찢어질 것 같았다.
문희는 그 사람이 혹시 오마샤리프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평소에 품었었다.
"임 선생님, 저 사람이 오마샤리프예요?"
아내 목소리가 역겨워 한 주익 씨는 찔린
듯 눈을 내리 깔았다. 임 선생은 문희에게
대답하기 위하여 돈 내고 나가는 잘 생긴
남자를 날카롭게 살폈다.
"어? 오마샤리프가 저렇게 젊었을라구요.
피터오툴도 봤는데 노인이던데요. 목이
쭈굴쭈굴해요."
"스을스을 가 봐야지. 유리창이라도 좀
닦으라고 마누라가 양양 댈 테니까. 커피
고마왔습니다."
임 선생은 한 블럭 사이에 있는 자신의
꽃가게로 떠났다. 임 선생이 떠나고 입을
서렸다. 따로 특별히 노여웁지 않아도 입만
다물면 한주익 씨는 쓸개를 문 듯한 표정이
되었다. 가정이 있음에도 그는 뼈저리게
세상을 혼자 살았다. 아내와 자식은 그를
실망시켰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절망지경에 이르렀다. 갈비뼈 분신이라고
일컬어야 할 그의 아내는 순종의 미덕을
갖춘 여인이 아니며 사춘기에 들어선 그의
자식들은 영어 지껄이며 친구하고 붙어
다닐 궁리만 하였다. 일가친척 없고
언어소통이 불편하고 음식 다른 이 땅에서
고독은 그의 친근한 벗이 되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맑으면 친구가 없다는 공자 말씀을 가슴에
새겨 넣고 청정한 우월감도 느꼈다. 그는
홀로 깨고 홀로 잠들고 홀로 장사하고 홀로
것으로 보기 싫은 주변의 것들을 보지 않고
지냈다. 떠나온 조국도 악쓰고 날뛰는
뒤숭숭한 먼지구덩이라고 그는 경멸심으로
바라보았다. 독일산 셰퍼드만이 충성스러운
그의 벗이었다. 연료에 의지한 엔진만
가지고 별을 향해 나는 무인 우주선같이
한주익 씨는 공허하고 망망한 우주공간을
무섭게 질주하였다. 아무도 그와 함께 날지
않았다.
문희가 껌을 씹어 대면 한주익 씨는
자기가 문희 어금니에서 씹히는 물빠진
껌같이 느껴졌다. 거 좀 씹지 말라는
소리를 한주익 씨는 하지 못하였다. 내
숫제 말 안 하고 지내는 게 낫지. 침묵
속에서 모든 감정은 내부로만 뿌리를 뻗어
스스로도 지겨운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가게 뒤쪽에서 한주익 씨가 소리쳤다. 창
밖을 보며 껌을 짝짝 씹던 문희는 남편이
한국신문을 가져오라니 우선 반가왔다.
한국신문은 문희가 독자적으로 구독신청을
하였는데 과연 한주익 씨는 읽지를 않았다.
신문요금을 물지 않았음에도 신문은 계속
우편으로 배달되고 신문요금 청구서도
간간이 배달되고 있었다. 문희는 아래쪽
선반에 있던 한국신문들을 집었다.
순서대로 간추리는데
"빨리 가져와, 읽을라는 게 아니야. 듀크
치울라고."
개똥을 치울 모양이었다. 개똥 치우니까
영어신문 말고 한국신문 가져오라 하였다.
문희가 한국신문지를 움켜쥐고 갔다. 개는
미처 밖에 나가지 못하고 안에다 실수하여
쭈그리고 앉았다. 한주익 씨가 개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정성스럽고 눈길은
살뜰스럽고 듀크 듀크 부르는 그 음성은
다정하였다. 듀크라는 서양 이름은 한주익
씨가 붙였다. 개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한주익 씨가 문득 말하였다.
"나라마다 좋은 개가 하나씩은 다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도대체 뭐가 있나?"
한주익 씨는 우리나라에는 뭐가 있나
하는 소리를 잘 하였다.
"진도개."
껌을 따따딱 씹으며 문희가 말했다.
"에잉, 진도개는 그냥 독하기만 하지."
한주익 씨가 말하고 있음에도 문희는
샌들을 질질 끌며 개똥 묻은 신문지를
버리러 가게 뒷문을 나섰다.
[2]
아파트 건물만 쭉 늘어선 주택가였다.
밤이었다. 상점 같은 것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 중 한 건물 앞에 한
여자가 당도하여 우산을 접었다. 여자는
아래층 현관에서 3B 단추를 눌렀다. 여자가
입은 하얀 블라우스 한 쪽 어깨가 비에
젖어 살빛이 내비쳤다.
3B 부엌에서 접시를 씻던 안주인이
부저소리를 듣고 문 좀 열어줘요, 거실에
있는 남편에게 소리쳤다. 거실에는 이 집
주인과 삼십세의 키 큰 청년이 앉아
있었다. 두 남자는 초면으로 술잔 하나씩
들고 저녁에 초대된 다른 손님들을
텔리비전에 하염없는 눈길을 주고 있었다.
바깥주인이 술잔을 든 채 일어나 현관
옆에 놓인 단추를 눌러 아파트 아래층 문을
열어 주었다. 어안렌즈로 밖을 보고
있으려니 엘리베이터 멎는 소리가 나고
그로부터 흰 블라우스에 검은 프레어
스커트 입은 여자가 나왔다.
"인숙 씨가 오는군, 여보."
바깥주인이 부엌에 대고 말했다. 청년이
텔리비전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서고
부엌으로부터는 안주인이 나왔다.
화장기 없는 가느다란 여자가 실내로
들어섰다. 곡선 없는 몸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뒤로 느슨히 묶은 머리털이
옻칠같이 검고 굵었다.
"올캐언니 잘 있어요? 같이 오면 좋은데
안주인이 인숙에게 말했다. 한인숙은
한주익 씨의 여동생이었다. 안주인이
이번에는 청년에게
"내 친구 문희 아시죠?"
"네?"
"접 때 한 번 우리 집에서 봤잖아요. 거
이쁘네, 누구요? 하고 물어 봤잖아."
"그 정도 힌트 가지곤 모르겠는데요."
"이쁜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니는
모양인데 그래. 지적인 열망이 하나도
없다고 내가 말했던 여자 있잖아."
그래도 청년은 생각해 내지를 못 하였다.
"하여간 이 한인숙 씨가 그 사람
시누돼요."
청년이 반갑습니다, 하고 손을 쑥
내밀었다. 그는 인숙의 눈이 약간 사팔인
거실은 한국의 옛 가구와 민화로 꾸며져
있었다. 바다 건너를 끌어다 놓았다.
남자들은 거실의 텔리비전 앞에 다시 앉고
인숙은 안주인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창 밖 어둠 속에서 큰 나무가 비에
젖으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안주인은 소매를 걷고 큰 남비에다가
갈비 양념을 하였다. 손님을 청한 집 같지
않게 부엌은 휑하고 써늘하였다.
나머지 손님들은 한꺼번에 도착하였다.
아래층 현관에서들 만났다고 하였다. 한
쌍의 부부와 한 남자였다.
"비가 일주일 계속이군요."
안주인이 말하였다.
혼자 온 남자는 부인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 혼자 오게 되었다고 입술을
"그러니까 오늘 오실 분은 다 모인
모양이구먼."
바깥주인이 말하였다.
부엌에서 인숙은 안주인의 일을 도왔다.
집 안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바깥주인이
여러 사람들을 서로 소개시키고 좀 전까지
술잔들고 텔리비전만 응시하던 청년도
허헛허헛 잘 웃었다. 여러 사람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얼음이 유리잔 안에서 부딪는
소리, 어디선가 음악도 낮게 흐르고
있었다. 빗소리나 바람소리 같은 외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주인이 시키는대로 접시와 수저를
어색히 들고 부엌과 식탁 사이를 인숙은
왔다갔다했다. 인숙은 남의 부엌에서 자기
집 일보듯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사람이
고기가 익기를 기다려 갈비와
야채사라다뿐인 간소하고 세련된 식탁에
모두들 둘러 앉았다. 안주인은 전등을 끄고
촛대에 촛불을 켰다. 냉장고에서 차게 한
와인을 바깥주인이 꺼내었다. 바깥주인은
요즈음 와인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한
병씩 사다가 감상하는 재미가 대단하다고
말하였다.
"재미는 무어, 알코홀릭 되기 알맞지
뭐."
안주인이 말하였다.
촛대 두 대로만 밝힌 식탁은 어두워
음식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여기 뉴욕의 인텔리들은 다 모였군요."
안주인이 무릎 위에 냅킨을 펴고 앉으며
말하였다. 부엌에만 있었던 인숙을 위하여
바깥주인으로부터 있었다.
오늘 저녁 제일 먼저 당도하였던 키 큰
청년은 현대미술에 관한 석사학위를 하고
있고 서구적인 세련미를 보이는 중년부부는
연극을 하던 유명한 김선후가 남편이고 그
남편보다 더 이름을 날린 당대의 톱가수
유소라는 부인이었다. 혼자 온 남자는
영화감독이라 하였다. 그는 서울대학 다닐
때 젊은 나이로 광산촌에 관한 도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알 만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였다. 그냥 미술대학을
왔다갔다했던 인숙은 화가로 안주인이
소개하였다. 이집 부부는 언론인
출신이었다. 부인 없이 혼자 온 영화감독이
정말 인텔리들이시군요, 하고 말하였다.
화가로 소개된 인숙은 이 그룹에 누를
보아도 손색 없는 '인텔리'는 김선후
부부였다. 가수 유소라의 결혼은 은퇴인가
아닌가 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는데
오늘날 유소라는 자선 쇼에도 나가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내고 오히려 남편 김선후와
미국 문화계와 관계를 맺고 일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참석한 곳을 특별하고 중요하게
만드는 스타들만이 갖는 그런 분위기가
그들에게 있었다. 같이 있기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이집 주인 부부와 김선후
부부는 오늘 두 번째 만남으로 전에 어느
다른 집 파티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처지였다. 이집 부부는 앞으로도 계속
김선후 부부와 친목을 도모해 갈
생각이었다.
음식이 각자의 접시에 놓이는 동안은
응시하며 엄숙한 기마저 돌았다. 음식이
나누어지고 난 후에는 한동안 먹느라고들
조용하였다. 갈비고기 자르던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영화감독이 부인이 몸이 안
좋아 못 오게 된 데 대해 다시 한번
사과하였다.
"아까 미세스 김이 누군가를 지적해서
지적인 열망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석사학위 청년이 안주인에게 물었다.
"아, 그거요? 읽었다는 소리 듣고 싶어서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읽어 본다든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한 번쯤 들쳐
본다든가. 문희는 정말 그렇게 상관 안할
수가 없어."
바깥주인은 아내가 인숙 앞에서 인숙의
음흠음 큰기침으로 신호를 보내었다. 그들
부부는 요 몇 년 사이 서로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서로 용서하기가
힘들어지고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은 돌로
굳어가는중이었다. 다시 가까와지기 위하여
부부는 완전한 여성, 완전한 남성,
성공적인 결혼 이런 제목을 붙인 사랑과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을 상대방에게는
비밀리 제 각각 읽고 있었다.
얼랄라 지적인 열망이니, 인텔리니 하고
참 고상하게 노시는군, 이런 그룹은
질색이야, 오랜만에 뜨신 밥에
영양보충이나 하고 가는 거지. 석사학위
청년은 와인을 두 모금 연거푸 마셨다.
잔이 비는 것을 보고 바깥주인이 곧 그
잔을 채웠다.
"네."
석사학위 청년은 안주인으로부터 다시
갈비를 접시 그득히 받았다.
"요샌 노래를 통 안 하시나요?"
바깥주인이 유소라에게 물었다. 그가
유소라를 대하는 태도에는 은근함이
있었다.
"하고 싶어요. 내 살아온 거랑 내가
생각하는 거랑 내가 원하는 거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현재의 나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그런 노래가 있으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쯤은 부르고 싶어요."
유소라가 말했다.
"왜 당신이 직접 짓기도 하잖아."
김선후가 말했다.
"한 번 지었지. 샹송에 맞춰서 가사를
좋은 말은 다 들어갔다고 놀려요."
유소라가 웃었다.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실크 햇을 썼다 벗었다 하며 뮤지칼
카바레를 부르던 옛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게 수수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유소라 씨께서는 자기 전인격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내 전체를 가지고 연애를 하고 싶어요. 이
여자한테는 이런 면만 보이고 저
여자한테는 저런 면만 보이고 그런 거
없이."
석사학위 청년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일생 노래 부르는 가수가
많아야 해요. 결혼하면 인기 떨어지고
일류다가도 삼, 사류로 간단히 내려가고
그러지요."
때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와인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그 뿌듯함을 즐긴다
하였다.
"요새 노래하는 젊은애들 중에 재주 있는
애들이 많이 있던데요. 우리 때는 없던
재밌는 리듬 같은 것도 보이고. 노래란
이상해요. 한국노래는 한국말로 해야 돼요.
남미노래가 이 미국에서 히트하기도 하지만
일절은 영어로 하더라도 이절은 제 나라
말로 하고 그러더군요."
눈쌍꺼풀이 부자연스럽고, 유소라 실물이
별거 아니구나 첫인상에서 실망을 느꼈던
석사학위 청년은 시간이 갈수록 유소라가
참 괜찮다 싶어졌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인식하며 살고자
하는 그는 흐르는 자기 생각 속에 '이름은
박아 보았다.
"참 소설가들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어."
안주인이 말하였다.
"음흠흠 뭐 쓸데 없는 소리, 당신
예술소양이 부족해서지."
바깥주인이 아내의 말을 막으려 했다.
"아니야, 이건 꼭 말해야 돼.
소설가들한테 진정한 친구가 있을까요?
유옥신이라고 이름 들어 보셨어요? 그
여자가 내 동창인데 누가 그래요,
유옥신이가 니 얘길 썼다고. 그래서 읽어
보니까 이건 내 얘기도 아니고 아무 얘기도
아니에요.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다가
나한테 일어났던 사건을 넣었더라
그거예요. 격분했다고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정말 격분해서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더라구요. 차라리 내
얘기를 쓰려면 처음부터 제대로나 쓰던지
할거지 그렇게 밑도끝도 없이 이용을
했더라구요. 찾아갔지요, 벌려서. 이
여자가 운동을 좋아해서 매일 헬스크럽에서
산다잖아요. 나도 수영복을 싸들고 가서
벗고 일 대 일로 만났어요."
"뭐랍디까?"
유옥신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김선후가
분명한 호기심을 보였다.
"당신 같은 사람만 있으면 어떻게 글을
쓰겠느냐고 그래요. 어떤 남자가 모양낸다
하고 쓰다 보면 정말로 어떤 집 남자가
모양을 내고 있고 어떤 집 부부가 이혼하는
얘기를 쓰다 보면 어떤 집 부부 사이가 안
저가 화를 냅디다. 주인공 이름 붙이기도
겁이 난다고요. 남편 친구들이 의심할까봐
자긴 연애소설은 쓸 생각도 못한다
떠들대요. 어휴, 말하니까 다시 분해지네.
나도 여학생 때 문예콩쿨에서 상도 타고
그랬다구요. 유옥신이 보라고 내가 소설
쓸라구 그래요. 나는 유옥신이 같이 일상
잡사는 안 쓸거야. 육이오 사변을
다룬다거나 핵전쟁의 공포를....."
"어잇, 우리 유소라 씨 노래나 들읍시다.
한국 식품점에 갔다가 샀어요."
바깥주인이 의자를 소리나게 밀어내며
일어섰다. 술이 올라 그의 얼굴은 새빨갛고
반들거렸다.
"어마 그게 어디 있었어요?"
유소라가 바깥주인이 꺼낸 레코드를 받아
겉자켓에 있었다.
"한 장 있습디다. 보니까 어떻게
반갑던지 얼른 샀지."
바깥주인이 레코드를 후우 불어 턴
테이블에 얹었다. 이제까지 들릴듯 말듯 방
안을 감돌던 무드음악은 사라지고 유소라의
노래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모두들 리듬이 빠른 유소라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유소라는 뺨에 두 손을 대고
상기되어 자기 노래를 들었다.
"이게 언제 노래지요? 가만 있자아
(바깥주인은 레코드 자켓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유 벌써 이십 년이나 됐네."
"나는 이런 생각을 해요. 사람사는 게
모두 꿈 같다고요. 꿈속에서처럼 사람들이
논리를 가지고 일사불란히 움직이나 그
거죠. 안 그렇담 이 세상에 어디 시비가
있겠어요? 꿈속에서처럼 인간은 수동적인
입장으로 떠밀려 흐르지요."
석사학위 청년이 말하였다.
"아 사는 게 꿈이라서 예수 전도하는
사람들이 깨어라 깨어나 찬송하가
그러네요."
이제까지 가만히 앉았던 인숙이
말하였다. 인숙은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자고 차를 가지고 찾아오는 직장
여직원이 미안해서 도망다니는 지경에
있었다.
"그래요, 그거예요."
석사학위 청년이 크게 동의하였다.
유소라의 노래를 듣는 사람과 석사학위
청년의 말을 듣는 사람과 두 그룹으로
인숙을 은밀히 주시하였다. 딸 하나 데리고
사는 인숙에게 혼자 사니 좀 좋아 연애나
실컷 하지 하니까 인숙은 우선 누구를
만나야 연애도 되고 그러지요, 라며 대답한
일이 있었고 또 청년은 입버릇같이
한국에는 여자 같은 여자들이 있는데
여기와 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메마르고
사랑할 줄을 몰라서 차라리 동성연애하자고
자기 친구들하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하였었다. 안주인은 이 두 남녀를 한데
모아 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궁금하였다.
바깥주인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갑자기 밝아진 방 안에 사람들은 눈을
깜빡거리며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소라가 촛불을 불어 껐다.
"우리 인제 편안히 내려앉을까요."
바깥주인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냅킨을
식탁 위에 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소라가 스테레오로 가서 자기 노래를
멈추었다.
"늙었나 봐, 전에는 사람들이 내 노래
부르고 그래도 그냥 그렇더니 지금은
어디서나 저렇게 내 노래 들으면 좋고
그래요."
"아니 그건 왜 꺼요, 그냥 두시지."
"얘기하는 게 더 재미있잖아요?"
유소라가 소파에 와서 앉았다.
부엌에서 이 집 안주인은 후식준비를
하였다. 정작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목라
건성 서성거리는 인숙에게 안주인이 커다란
은쟁반 위에 커피포트와 커피잔을 놓아
주었다. 순은이라 쟁반 하나만의 무게도
커피기구들을 얹어가지고 인숙은 두팔을
바들바들 떨며 담배연기와 음식냄새 혼탁한
거실로 들어갔다.
바깥주인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신문에 활자화된 사실
뒤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기 마련이었다.
스포츠계가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면
거기는 무슨 이유가 따로이 있으며 영화상
미술상을 비롯한 각종 예술상이나 장한
봉사자로서 상을 타는 사람은 업적보다 또
다른 처세기술로 타는 것이었다. 꿈에
나타난 사물들이---이를테면 열쇠나 구멍
같은 것이 그 물건 그대로가 아니라 굴절된
다른 의미를 가지듯 그는 세상을
의심하라고 설득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신문에 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 따로이
"그럴까요? 일들이 잘못되어 가는 수도
종종 있지만 그래도 좋은건 결국
알려지더군요."
김선후가 말하였다.
"예술은 정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신선노름이에요. 못 믿을건 정부나
정치가뿐 아니라 먹는 것도 그래요. 우리
입에 들어가는 것 중 가장 건강식품이라
일컫는 채소를 보십시오. 딸기밭에서
딸기를 따 가지고 집에 오면 드라이브해
오는 불과 몇 시간에도 딸기가
뭉클어집니다. 그런데 야채가게에 있는
과일들을 좀 보세요. 캘리포니아에서 며칠
걸려서 오고 남미에서 오고 그런 과일들이
무슨수로 그렇게 싱싱합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그걸 우리는 좋다고 먹습니다."
시선을 주었으므로 유소라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였다. 바깥주인이 쏟아
주는 관심이 유소라는 즐거웠다.
인숙은 별 실수 없이 커피쟁반을 바닥에
내려 놓고 일곱 개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잔이 흔들려 다닥다닥 서로 부딪는
소리를 낼 때는 실수할까 봐 등에 땀이 다
흘렀었다.
"부인이 많이 아프신가요? 아주 기운이
없으시군요."
유소라가 영화감독에게 말하였다.
"아, 뭐....."
영화감독은 커피잔을 들고 우물우물
말했다.
"왕년의 그 날카로운 솜씨를 발휘하여
영화를 만들어 보시지 그러세요. 아직도
넘기지 않으셨소. 언제까지나 해야지
해야지 하고만 있으면 되나요? 해야
합니다. 삼십대까지는 배우는 과정이라
하여도 사십대에는 확고한 세계를 가지고
오십대 육십대에는 원숙한 작품을
해야지요."
김선후가 말하였다.
"영화가 무어요. 날 영화감독이라 하지
마시오. 난 아직 극영화 하나 만들어 본
일도 없으려니와 영화구경도 통 안 다녀요.
지금 같아선 조그만 가게나 하나 사서
밥술이나 먹게 되면 좋겠습니다."
말끝에 영화감독은 함숨을 달았다.
"불란서 영화가 나는 좋던데요."
안주인이 초컬릿 케익을 자르며 말했다.
"이태리 영화도 좋지요. 미국 영화는 못
바깥주인이 말하였다.
"정말이야 참."
안주인이 말하였다. 그들 부부는 단둘이
있을 때보다 이렇게 외부 사람과 있으면
의견일치가 수월하였다.
"자기가 안 가본 나라 영화는 그렇게
모든 것이 그럴 듯해 보이는 면이 있지요.
배우들의 연기며 풍물 같은 것이."
김선후가 말했다.
"불란서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언제나 뺨따귀를 철썩철썩 맞는 것 같더라.
뺨따귀가 얼얼해서 극장을 나온다니깐.
한국영화는 거 왜 시원하게 끝내 주잖우.
시원히 해결해 주구."
케익 한 조각씩을 접시에 담아 돌리며
안주인이 말하였다.
인숙을 깜짝 놀랄 멋장이로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수수한 인숙을
어떻게 만들까 궁리하면서 보니 점점 더
자신이 있어졌다. 머리 가리마를 옆으로
내라 하고 구두는 금사로 얽힌 것을 신기고
그러나 매력의 포인트는 흰 발목보다는
역시 눈이 되겠지. 짙은 인숙의 눈썹을
가다듬고 싶어서 그는 손이 다 떨렸다.
[3]
라디오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곡명을 알 수 없는 그 바이올린
소리를 인숙은 잘 듣고 싶은데 석사학위
와 있는 한국여자들이 명예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남자의 순정 같은 것은 아랑곳
않는다고, 어떤 무용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한 번 만나 주고는 바쁘다고 그만이라고,
하루 종일 치즈 한 조각 먹고 성공줄
잡느라고 오디션만 찾아 돌아다닌다고
석사학위 청년이 운전석의 영화감독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영화감독의 차였다.
김선후 부부는 그들의 차로 떠나고 파티
장소에서 나온 인숙과 청년은 영화감독의
차에 올랐었다. 올 때 젖은 청년의
트렌치코트는 아직도 젖어 있었다.
빗발이 다시 거세어졌다. 길거리
군데군데는 물웅덩이가 되어 달리는 차창에
물을 끼얹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며
가로등, 톨게이트의 환한 빛, 빌딩의 창
뒷자리에 앉은 인숙은 바이올린 소리를
잘 듣기 위하여 허리를 굽혔다. 인숙은
영화감독에게 라디오 볼륨을 좀 올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가 딸아이 바이올린 선생님이
내는 소리 같은가 알고 싶었다. 딸아이가
거실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동안
인숙은 선생님 집 부엌 의자에 앉아 있고는
하였다. 딸아이의 딱 막힌 바이올린 소리에
섞여 가끔 선생님의 물 흐르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길은 참 끝없이 뻗어 있군요."
영화감독이 말하였다. 그는 저녁 내내
말이 없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인은 많이 편찮으신가 보죠?"
청년이 물었다.
영화감독은 짧게 대답하였다.
"나 사는 아파트 건너편에 노인네가 혼자
살았는데 어쩌다 깨진 유리병 조각을
밟았대요. 그게 구두 밑창을 뚫고 발바닥을
찔러서 한참 절뚝거리고 쓰레기 버리러
나오더니만 아까 나오면서 보니까
죽었다잖아요. 사는 게 그렇게 간단한
거예요."
청년이 말했다.
청년이 '아까 나올 무렵'에 영화감독
부부도 샤워를 끝내고 나갈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동안 여기저기서 마련한
돈을 쥐고 남들같이 가게라도 하나 하려고
하루 종일 부르클린, 부롱스로부터 저쪽 롱
아일랜드까지 돌아다니다 파티 시간에 대어
급히 들어왔다. 영화감독 부인이 머리를
모습을 살피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부인은 손을 뻗어 경대 위에 있던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받는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영화감독은 욕실에서 면도하고
있었다. 면도를 마친 영화 감독이 와이샤쓰
팔을 꿰며 침실에 들어선 즉 부인은 완강히
등을 보이고 창가에 서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타탁탁
때렸다. 남편이 다가가도 부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늦지 않겠어? 뭘 하는 거야?"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은 와이샤쓰를 입고 넥타이를
매었다.
"왜 그래? 응?"
"....."
거울 속에 뻗치고 섰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태도는 그의 신경을 옭매기
시작했다. 남의집 초대를 받고 떠나려는
지금 그는 성을 내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잠시 망설였다. 자칫하다가는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말로만 듣던 김선후
부부를 오늘 만나게 된다고 하여 기다려
오던 초대의 밤이었다.
아내가 뜻밖에도 돌아섰다. 거울 속의
남편에게 말했다.
"방금 미지의 남자가 전화했겠지."
"아 들었어, 전화벨이 울리더군."
"그 남자가 나하고 연애하자나?"
넥타이를 다 맨 남편은 돌아서서 아내와
정면으로 대하였다.
"느닷없이 그랬어? 정말 모르는
"응."
"정확히 옮겨 봐, 했던 고대로."
"우리 연애합시다, 그랬다니깐. 당신
남편하고 내 아내가 연애하니까 당신하고
나하고 우리 연애합시다."
아내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오늘 저녁
입고 나가려고 침대 위에 펼쳐 놓았던
초록빛 원피스 일부분이 아내의 엉덩이
밑에 움푹 깔렸다.
바이올린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라디오에서는 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청년이 손을 뻗어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일기예보였다. "내일도 비라는군요. 쩟쩟."
청년이 말했다.
"독신이라 신나는 일 많으신가 보군요.
날씨 상관을 그렇게 하시니."
"좋은 일이라구요? 여자들이 하두 속을
썩여서 동성연애가 차라리 마음 편켓다
하고 있는 중이올시다."
일기예보가 끝나자 청년은 라디오를 아주
꺼 버렸다. 영화감독은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일 년도 훨씬 지난 이제와서
무엇 때문에 그 여자는 남편에게
고백이라는 것을 하여 두 가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나, 새삼스레 왜? 왜?
왜? 하이웨이에서 차 고장을 일으키고 서
있는 그 여자를 영화감독이 도와 준 것이
만난 시초였다. 집안 살림과 공부가 바빠
발을 동동동 구르고 사는 유학생이었다.
여학생은 책을 가슴에 한 아름 안고
도서관과 신혼 아파트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우연히 이루어졌던 정사는 단 한
"때로는 내가 미국 사는지 한국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악착같이 자기한테 따라다니는
건 제 성질 하나가 아닌가 해요. 사는 게
일장춘몽이에요. 내 말일 것도 없는 것이
유명한 어른께서 다들 그렇게 가르치셨는
걸요."
청년이 말하였다.
핸들 위에 얹은 영화감독의 손은 떨렸다.
세상에 갈 데라고는 없는 내가 집에서
쫓겨났다. 마흔 세 살 내가 초면의
사람들과 오늘밤 이 큰 도시를 달린다.
친구를 불러낼까, 이 옆에 앉은 젊은이
집에 가자고 할까, 그러다가 뭘 자꾸 물어
보면 거기 뭐라고 대답해. 말더듬다가 우는
꼴 보일지도 몰라. 나중 후회할 말 할지도
몰라.
꺼내었다.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영화감독이 차의 담뱃불을 빼내 주었다.
"낙엽이 쌓이는 날 모르는 여자들이
아름답다는 유행가 가사는 참 잘 지은
것이죠. 아는 여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거든요."
청년이 말하고는 뒷자리의 인숙을 흘깃
돌아다 보았다.
"인숙 씨는 독신주의자십니까? 가끔
여자들을 보면 남자 전체를 원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에요."
"왜 독신주의자 인상을 주는가 하면 인숙
씨가 초연한 듯 화장을 하나도 안
"했어요. 한 거예요."
인숙이 말했다.
요새 뒤에 몸을 안전히 숨기고 눈만으로
청년은 인숙을 살폈다. 접근이 가능한가
아닌가 하고.
"오늘 김선후 씨 부부들 화목한 인상이
참 좋습디다. 형님은 어떻게 느끼셨어요?"
청년이 영화감독에게 물었다.
"아, 좋으시더군요."
영화감독이 말했다.
"어떤 남자 뒤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
혹은 어떤 여자 뒤에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이런 게 참 좋은 건데,
이브몽땅하고 에디뜨 삐아프 관계같이."
말하며 청년이 다시 인숙을 돌아다
보았다. 다시 보아도 너무 빛깔이 없는
무리들이 그 권력을 놓지 않게 위해
모르며 같이 잘 수 있는 여자를 그렸다.
인숙에게 그런 여자가 되어 주겠냐고 묻고
싶었다. 남녀간의 눈치놀음에서 벗어나 단
한 번만이라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볼까
싶었다. 인숙에게 그런 소리를 하기는 쉬울
것 같았다.
청년이 핸들을 잡은 영화감독의 손 위에
섬세한 자기 손을 얹었다.
"가만! 댁이 퀸즈 쪽이시라면서 이거
너무 도시는 게 아닙니까? 저희를 여기에다
내려 주세요. 마침 비도 그쳤으니."
"어디요?"
"여기 아무데나요."
인숙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영화감독이 차의 핸들을 휘익 꺾어
길모퉁이에 갖다가 차를 세웠다.
"네."
영화감독이 너무 순순히 차를 세웠으므로
청년은 얼굴이 붉어졌다. 고맙습니다.
말하고 차에서 우선 내렸다. 내린 후
뒷자리의 인숙에게
"인숙 씨도 어서 내리세요."
청년이 말하지 않아도 맨하탄에 사는
인숙은 따라 내릴 참이었다. 인숙이
내리니까 영화감독이 오늘 '고마왔습니다'
했다.
"저희가 고마왔습니다. 뭘, 뭘."
청년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차에서 쫓겨
내린 것만 같아 머리꼭지가 뜨거웠다.
영화감독의 차는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간 길로 사라졌고 행인도 별로 없는 길
위에 청년과 인숙은 마주 섰다. 비도 그쳐
날리고 얇은 블라우스를 파르륵파르륵 떨게
하였다.
"춥지 않으세요?"
청년이 말했다.
"아니요."
말하며 인숙은 몸을 한번 떨었다.
"보세요, 추우시군요. 어디서 따뜻한
커피나 마실까요?"
"네, 그런데 문 연 집이 있을까요?"
그들은 거리를 둘러보았다. 오피스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가끔 보이는
상점들은 굳게 문이 잠기었다.
"여기가 세컨 애비뉴니까
브로드웨이쪽으로 내려가면 뭐가
있을거예요. 천천히 걸어 보죠. 차에서
내리겠다고 말하길 잘했지, 안그랬으면 그
저지를 뻔했어요."
청년이 말하였다.
"여기서 브로드웨이가 먼가요?"
"걷기 좋지 않아요? 추우세요? 이 코트를
벗어 드릴까요? 그런데 젖어서 축축해요."
인숙은 추워서 걷기가 싫었다. 어디
아무데나 들어가 앉을 곳이 어서
나타났으면 싶었다. 인숙이 말이
없었음에도 청년은 코트를 벗어 인숙의
어깨에 씌워 주었다. 코트 깃 안으로
들어간 머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며 인숙은
청년을 따라 걸었다. 코트를 걸치니 추운
것이 견딜 만하였다.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이 근처 어디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게 이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는 모르는 사람인데 이
"과거란 무엇일까요?"
청년이 물었다.
"과거요?"
왜 묻지? 인숙은 줄무늬 샤쓰를 입고
옆에 걷는 키 큰 청년을 약간 사팔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거란 기억하지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과거의 일이어도 현재
생생히 느끼면 그게 바로 현실이에요.
마찬가지로 공상도 현실이죠. 알랭 르네의
지난 해 마리앙 바드라는 영화를 보셨어요?
안 보셨군요. 이런 얘기에요. 어느 고급
호텔에서 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아요. 남자는 여자한테 과거를 만들어
보여 주는 거예요. 너와 나는 작년 마리앙
바드에서 이미 만난 사이이며 올해 다시
그래요. 팔찌를 보여주며 이건 네가 나에게
정표로 준 것이다 하고 집요히 설득해
대죠. 여자가 처음에는 안 믿어요.
그러다가 여자는 점점 그 남자가 만들어
보여 주는 자기 과거에 매혹돼요. 그런데
마리앙 바드라는 곳은 이 지구상에 없는
곳이 거던요."
인숙의 얼굴이 밝아지며
"내가 우리 애한테 어릴 때 얘기해 주던
것과 같네요. 우리 애는 자꾸 물어요. 엄마
그때 내가 어땠어? 내가 울었어? 내가
이뻤어? 그러거던요."
"혼자 사신다고 들었는데 아이가
있으시군요. 몇 살이에요?"
"열 셋인가?"
"저런 인제 처녀겠네."
있다니 끔찍스러워졌다.
"이젠 딸이 아니고 동무 같애요."
"그래도 그렇지, 그럼 인숙 씨는 몇 살에
애를 낳은 거예요? 도대체."
---나는 다시 악순환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 희망이 없지 않지도 않다는
기분이다. 뭐라고 말하느냐 아니면 이
사람의 말만 듣느냐 그런 문제가 다시
혼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둘 다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가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늘여 쥔 고무줄이 탁탁 도로
오므라들어 같은 문제들을 쳐대고 밖으로
팽팽히 뻗었다가 다시 오므라들어 같은
문제들을 쳐 댄다. 해결이 없어? 우리는
지금 바이올린을 들으러 가는 것 같다.
바이올린 선생님이 바이올린 켜는 것을
한다. 내 귀는 아주 멀리 있는 것 같다. 내
귀가 키 큰 가로등 위에 걸려 있다.
"아 여기가 어디인지 인제 확실히
알겠어요. 우리 아이 바이올린 레슨 받으러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여기를 와요."
낯익은 건물을 발견하고 이어 그 옆에
드라이크리닝 집과 한국인이 경영하는
야채가게를 본 후에 인숙이 말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라고 알게 되자 인숙은
막연히 불안이 걷히는 것 같았다.
과거와 미래와 현실에 대해 말하는
중인데 인숙이 느닷없이 생생한 목소리로
자기 말을 잘랐으므로 청년은 실망을
맛보았다. 애인이 되어 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보려던 것을 그는
단념하였다. 뭐하러 공연한 소리를 해?
않았어. 과일부터 시작해서 정치니 뭐니
믿을 게 없다고. 믿었단 큰일난다고. 이
봐, 이 여잔 내 코트까지 떡 받아 입고선
나보고 추우냐 소리 한 번 없고 내가 하는
얘기도 듣지를 않았잖아.
"아이나 바요링을 하나 보군요?"
청년은 마지못해 말하였다.
"시작한지 여덟 달 됐어요."
이 사람한테 참을성있게 내 말을 들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무슨 말을? 참 나는
바이올린 선생님에 대해서 얘기하려한다.
가슴에 품은 뜻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하는가 말하려한다.
물귀신같이 처연한 그 여자 몸이 그대로
향기인 듯 몸 속으로부터 소리가 흘러
나온다고 인숙이 말한다.
청년이 물었다.
"네."
"분명, 여자 선생님이죠? 한국여잔가요?"
"네."
"남편은 있는가요?"
"미혼이에요. 언젠가 정경화처럼 이
세상이 알 거예요. 악기 때문에 방 안에
습도계를 틀어 놓아요. 그 여자 정성은
바이올린 하나로 모아져요."
인숙이 바이올리니스트 얘기를 자꾸 할
때 청년은 아 이 여자와 바이올리니스트와
썸씽이? 했는데 이제 본 즉
바이올리니스트는 여성이었다. 청년은
인숙에 대해 또 한번 실망하는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고 편해졌다.
"나도 동성연애나 해야겠어요 정말.
암호를 캐려 하고 꼭 무슨 스파이 전쟁
같다니깐."
청년이 말하였다.
"동성연애하는 남자들을 봤는데 재미있어
보이던데요. 같이 술 마시러 다니고 낚시
다니고, 부인하고 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인숙이 말했다.
청년이 인숙의 어깨에 의미심장히 팔을
얹었다.
"알고 싶어요. 여자끼리는 어떻게
노나요? 손가락으로?"
바이올린 선생님이 얼마나 시간을
아끼는가 인숙은 말하려던 참이었다.
선생님 자신은 시간을 아낀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숙은 그 사실을 아는 것
주느라 저절로 손이 나가서 그 여자 구두를
발 앞에 놔 주었던 일도 있었다.
"열 손가락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소리가
난다니깐요."
"어떤 때는 사람 살이 그리워 정말
미치겠습니다."
청년은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자기 집
가는 직행이 서는 지하철 입구가 코 앞에
있음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여기서 타면
기차는 휙휙 웬만한 정거장 다 지나쳐 두
정거장만 가면 되었다.
"인숙 씨, 인숙 씨는 여기서 택시타고
가요."
"나 혼자만요?"
청년이 인숙이 입은 코트 깃에 손을
대었으므로 인숙은 청년의 코트를 벗어
"브로드웨이로 내려가 봤자 뭐 조용한
데가 있을라구요. 또 거긴 위험하구요."
인숙이 건네 주는 코트를 청년은 어깨
위에 아무렇게나 걸쳤다. 한쪽 소매가
등복판에 가서 얹혔다.
"인숙 씨가 간 다음 난 조기 보이는
지하철 입구로 들어갈 겁니다."
택시를 잡기 위하여 청년은 한 손을
수평으로 들고 길가로 나섰다. 일방통행인
넓은 차도에 차량들은 빛을 쏘며 한
방향으로 흘렀다.
"인숙 씨 저 차들을 보세요. 두 눈
부릅뜨고, 한 곳으로만 가고 있어요. 모두
마귀주문에 걸린 것 같죠? 사는 게 그런
거예요. 꿈속에서처럼 어떤 불가항력에
꼼짝없이 굴복하고 흐르는 거예요. 흘러가
"....."
"죽음.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수천만
수억만 개의 물방울들이어도 폭포 밑에
닿으면 한 가지로 되어 매섭게
조용해지지요. 죽음의 그 고요함. 저기
택시가 하나 오는군요."
인숙은 택시에 떠밀리듯 올라 탔다.
시트에 물이 있어서 얼른 앉지 못하는데
청년이 택시문을 닫아 주었다. 굿나잇,
문닫는 소리가 크게 났다. 택시가
출발했으므로 인숙은 몸의 균형을 잃고
젖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운전수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차 시트에 물이 있다고
인숙은 불평했다. 백밀러로 인숙을 한 번
살피고 운전수는 니앞에 탄 놈이 우산을
잘못 논 탓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몸을 돌려 지하철을 타러갔다. 지린내 나는
지하철 층계를 내려가서 토큰을 사고
지하철 플렛폼에 설 때까지 다른 승객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천정 위에서
우르르르르르 우르르르르 달리는
기차소리가 났다. 반대편 레일로 하행선
기차가 질풍처럼 달려들어와서 승객을 몇
명 토해 놓고 떠났다. 청년이 서 있는
플렛폼에 대여섯쯤의 승객이 모여 섰을 때
청년이 기다리던 기차가 왔다. 찻간은 거의
비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가죽손잡이들이 차의 진동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청년은 의자에 않았다. 청년은
지하철을 타면 곧잘하는 게임을 오늘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게임이란 눈감고 앉은
여자들에게 눈떠라 눈떠라 하고 무언의
게임의 대상자가 아름답거나 백발백중 눈을
뜨는 날은 참 재미있었다. 게임을 하는
대신 청년은 한 가지 생각을 골똘히
하였다. 인숙을 너무 소홀히 대하였다는
후회였다. 레즈비안이니 겁 안
나고(레즈비안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진짜
애인이 나타날 때까지 전화 걸고 싶을 때
전화 걸고 영화보고 싶을 때 같이 영화보고
잘하면 침대에 나란히 누울 수도 있는
여자로 청년은 인숙을 대기시켜 두고
싶었다. 정말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인숙이
있으니까 나는 자신 있게 접근해 볼 수도
있겠고 잘 안되면 다시 인숙에게로
돌아가서 소금 뿌린 듯한 내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겠다. 자기는 또 인숙을
멋장이 여자로 변모시켜 놓을 것이었다.
색깔 없는 여자를 색깔 있는 여자로.
내코트 정도는 그냥 입혀 보내는 건데
그랬어. 오늘 저녁 초대해 준 김아줌마한테
내일 인숙이 연락처를 알아보리라. 그렇게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되면서
청년은 일말의 죄의식으로 가슴이 아렸다.
자기가 주위 사람을 너무 이용해 먹는 것
같았다.
[4]
부루밍데일의 상품 카탈로그를 콜드크림
묻은 손으로 넘기다가 문희는 오늘 저녁
파티를 열었던 친구 김인향의 전화를
받았다.
"아니, 가게서 들어와 목욕하고 앉아
있던 참이야."
"신랑 진지 차려 드려야지 그럼?"
"우리 신랑은 오늘도 가게서 주무신다,
걔 데리고선. 글쎄 누가 아니래. 집에 좋은
침대 두고는."
"가게에 침대가 있니?"
"거기 어디 침대 펼 자리나 있니? 비치용
간이 의자에서 새우잠 자는 거지, 지금 나
혼자야. 우리 애 하나는 학교서 캠핑갔고
하나는 친구 집에서 자. 모여서 자는
생일파티래. 인숙이 딸이 숙제한다고
부엌에 앉아 있나 봐. 나 지금 뭐 하나 사
입을까 해서 카탈로그 보는 중이야. 이렇게
보면 뭐하니? 뭘 사 입재도 어디 사러 나갈
시간이 있니. 참 파티는 어땠니? 김선후
때는 앤크라인 블라우스 입었던데."
"니 시누 인숙이 말야, 아직 안
들어왔어?"
"응, 나 혼자라니까. 우리 시누 딸하고.
지딸 나한테 맡겨 놓고 니네집에 갔었어.
엄만나 이봐라. 전에 백 구십 구불 구전
붙였던 블라우스가 육십 구불 구십
구전이야. 반으로 내려 앉은 거 아니니?
어딘 어디야, 부루밍데일이지. 정말
틀림없어. 꼭 그 블라우스야. 몇 번
만지작만지작하다가 놓고 나왔었어."
"인숙이한테 남자 하나 소개시켰는데
아직 안 들어온 걸 보면 잘 돼 갈라나
몰라. 우리 집에서 같이들 떠났어. 인숙이
올해 몇이니? 그럼 남자가 좀 어리구나.
남자엔 서른이야. 직업? 직업은 학생이야.
밥은 먹어야지. 아직은 공부하는 몸이니
제대로 된 직장이 없이 가게 같은 데서
일하나봐. 뭐 결혼이라는 건 아니구 그냥
알고 지내면 좋잖니? 근대 얘, 인숙이
아직도 남편 생각해?"
"남편은 무슨 남편, 면사포를 어디
썼니?"
"어쨌든 자식 낳고 살았잖아, 인숙이 그
사람 아직도 못 잊어?"
"잊는지 안 잊는지 내가 어떻게 아니?
우리 남편을 보나 인숙이를 보나 우리
시집식구들은 하나 같이 그 속이 시껌해.
뭘 생각하면서 왔다갔다 하는지 통 그
내용을 모르겠다니깐. 인숙이 좀 이상하지?
혼 나간 년 같으지? 일? 응 직장에서 일은
꽤 하는 모양이야. 손재주 있는 데다가
걔 보스야 좋다고 하겠지."
"하품하는구나. 되게 졸린 모양이다."
"내 잠 부족한 거야 어디 하루 이틀이니,
그러나 저러나 인숙이 들어와야 잠도 자지.
걔 정말 어서 시집이나 갔으면 좋겠어.
아니 뭐 걔가 특별히 귀찮게 구는 건 없어.
그래도 혼자 사는 시누 보기 안됐지 뭐.
남편이란 게 뭔데 또 없으면 큰일나는 것
같고 응? 그래 그래 그래 어서 가서 문
열어
줘라."
문희는 수화기를 놓았다.
자정이 조금 못되어 인숙이 돌아왔다. 그
동안 문희는 실내 화분에 물을 주고 선반
가득 놓여 있는 인형이며 공예품 같은
한 질이 장식장 아래층에 묵중히 늘어서
있었다.
"늦었어요, 나 때문에 못 잤나 봐."
인숙은 말했다.
"시간 있을 때마다 씩씩 자는 사람이 난
부럽더라. 아가씨 때문에 못 잔 게 아니야.
재밌었어?"
"저녁 먹고 얘기하다가 헤어졌어요.
오빠는 주무세요?"
"가게서 잔대. 우리 애들도 다 딴데서
자니깐 진희 일부러 깨울것 없이 아가씨도
그냥 여기서 자고 가."
인숙이 구두를 벗어 신발장에 넣었다. 그
옆에 돌돌 접힌 우산도 놓았다.
"이봐, 아가씨. 바이올렛꽃 핀 거. 한참
안 피더니 또 피기 시작이야. 좋은 일
문희가 보랏빛 꽃이 다닥다닥 핀 화분을
가리켰다. 고요한 밤이었다. 램프 하나만
켠 실내에 화분들이 그늘지게 고요하고
춘향과 이 도령의 인형이 고요하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인형이 고요하고
불란서 인형들이 스커트를 넓게 펼치고
고요하였다.
"진희가 애먹이진 않았어요?"
"걔가 한두 살인가 뭐. 혼자 숙제하다가
쓰러져 자대. 애들 침대에 겨우 끌어다
눕혔지. 기집애 벌써 젖멍울이 섰어.
아가씨 오늘 인텔리 남자 만났어?"
"인텔리 남자요? 몰라."
"인향이 집 파티서 인텔리 남자 하나 안
만났어? 하긴 걘 인텔리 아니면 상대를 안
하지만."
말하면서도 방금 자기가 돌아가며 새로
꾸민 실내장식의 효과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빈 공간없이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인숙은 태도를 바꾸어 솔직이
"오늘 남자들이 세 사람 왔던데요.
남자들이 날 안 좋아해요. 애쓸수록 다들
도망가요."
인숙은 아이의 숙제장이 펼쳐져 있는
부엌 식탁으로 갔다. 숙제를 다한 것인가,
하다 말았나 살피기 위하여 인숙은 아이가
공책에 쓴 것을 읽어 보았다.
별은 하늘에서 빛나는 커다란
가스덩어리라고 합니다. 별은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빛이 오는데만도 몇
년씩 걸리고 어떤 것은 수십만 년이
걸리기도 한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밤
아닙니다. 옛날에 빛난 별이며 벌써 없어진
별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별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답니다.
우리가 다른 별에 가서 지구를 보면 지구는
지금 예수님 나신 때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별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이것만으로 보아서는 숙제를 마친 것인지
아닌지 인숙은 알 수가 없었다. 인숙은
아이의 공책을 잡고 연필을 필통 속에 넣어
주었다.
"진희가 그러네. 지금 어디 딴 별로 가서
보면 지구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날
때라고."
"걔는 요새 예수 소리 많이 해요. 카톨릴
스쿨 다녀선가 봐."
"그러단 걔 여자 교황 되겠네."
"아이 지겨워, 난 잠자라고 밀크를
마시는 거야. 아가씨도 마실래?"
"싫어요."
문희는 컵에 밀크를 따랐다. 빨간 손톱이
젖어 보였다.
"난 더두말구 나 처녀 때가 보이는 별로
갔으면 좋겠어. 처녀 때는 참 한가닥
했는데 말이야. 어디 가면 남자 하나는 꼭
따라 왔었어." 문희가 말했다. 한 남자가
인숙의 집 문 앞에 와 선다. 단발머리 열
아홉 살의 인숙이 문으로 간다.
내가 문을 열자 젊은 날이 내 눈앞을
지난다. 그 사람은 내 인생으로 서 있다.
나는 땀을 흘린다. 나는 기다린다.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본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인다. 어깨에 날개가 있다.
겸손하고 강하다. 그의 날개가 오므려진다.
그는 내게로 천천히 와서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내게 무어라 말한다. 그가
말하니까 둘러선 사람들이 모두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선다. 나는 결혼이란 말을
몰라, 내말 들으라. 받아들이라,
단순해지라, 그가 날개를 편다. 내 짝이
되려면 강해지라, 하늘이 빨개지더니
금빛으로 물들고 새벽이라 한다. 나는
둥그러니 솟은 내 배 위에 두 손을 얹고
온순한 채 서 있다. 나는 세상 중심에
있다. 아주 조용하다.
"달에서 이 땅을 보면 단 이 분 전
사실을 볼 수 있다는군. 그까짓 이 분 전
보러 달까지 뭐 하러 가. 참 어떤 때는
심심해 죽겠어. 이렇게 혼자 자게 되는
담배는 기침나서 못하겠고 그렇다고 껌을
씹기도 그렇고 어떻게 하나, 그러다 보니까
술이란 게 있잖어? 내일 술 한 병 사다
놔야겠어."
문희가 말했다. 문희는 인숙에게 잠옷을
내주었다. 젖꼭지와 음모가 내비치게 생긴
핑크 나일론이었다.
"내일 또 눈 뜨고 움직이려면 어서
자야지. 애들 침대에서 뭐 나와도 놀라지
말어. 사내애들 대가리가 커지니까 침대
시트 깔다 보면 담배가 안 나오나 춘화도가
안 나오나."
문희가 부엌 전등을 껐다. 거실의 램프
빛이 부엌을 반 어둠 속에 잠기게 했다.
(내 침대를 두고 나는 다른 사람의
침대에 누워 자는 것을 생각한다. 그
읽는다. 그 사람한테 가서 나도 내 침대
놔두고 그의 침대에 누워 책 읽겠다고
말하려한다. 그런데 그 사람 침대는 어디
있나? 그 사람 침대가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침대를 찾으려 나는 헤맨다.
사방이 막막한 공기 같은 것으로 막혀
있다. 나는 숨이 막힌다. 진희를 낳는데
나는 그 사람 침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진희가 열 세 살인데 나는 그의 침대가
어딨는지 모른다. 그의 침대를 어디다
두었나?)
거실로 들어간 문희가 거실의 램프를
껐다.
문희가 침대로 가서 눕는 소리가 났다.
인숙은 잠옷을 들로 아이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방은 낯설고 어둡고
인숙은 침대 위에서 자고 있을 그의 딸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침대의 윤곽조차
구별이 안 되었다. 짐작되는 곳 쯤을
향하여 인숙은 허리를 굽혔다. 더듬어 찾는
손에 이불을 덮은 아이는 보물로 와
닿았다. 그들은 모녀이자 친구이며 같은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들이었다.
생리주기까지 비슷하여 그때가 되면 서로
다투어 신경질을 부린다. 그들이 기다리는
남자는 옛날에 존재하여 오늘 밤 그들 눈에
반짝여 보이는 별과 같았다. 오토바이 타고
가던 그 남자는 그들 모르게 수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인숙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아이의
따뜻한 발을 만져 보려 하였다. 그 때
인숙의 귀가 어떤 소리를 따라 갔다. 그
소리를 잘 듣기 위햐여 인숙은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어서 깨어나.
깨어서 둘러보면 너는 어딨어? 너는 무얼
해? 너는 누구야?
2. 겨울나무 사이
[1]
숲에는 어느덧 어둠이 스며들었다. 뱀이
있어요, 조심 하세요. 우진이 말하였다. 꽤
경사가 급한 언덕길은 낙엽이 깔여 있었다.
낙엽은 여기저기서 계속 지고 있었다.
그들은 비틀거리고 웃으며 걸어
내려갔다. 세 사람의 남자와 두 사람의
여자였다. 그들 중 한 쌍은 부부로, 그
남편은 우진과 같은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였다. 우진과 함께 걷는 남자는 우진의
옛 친구로 탁이라는 이름이었다. 탁은
학창시절 때도 지금같이 마르고 창백한
모습이었다. 그때 시계 광고나 책 광고
남자 모델이 있었다. 탁의 우수에 찬
모습이 인기 모델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여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나 본 탁은
하내에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였다. 옛
그대로 미소년 같은 풍모 속에 비바람에
바랜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진의 동료인 대학교수 부인이 오솔길
가장자리로 빨리 걸어 하내 옆에 와서,
"어때요. 고국이 좋지요?"
"네." 하내는 대답했다.
"우리도 처음 귀국했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길에 가는 사람들이 전부
아는 사람 같고 라디오에서 들리는
말소리는 전부 아버지나 아저씨같이
친근하고, 그렇더니만 요샌 또 어디
요즈음은 옛날과 다르다죠? 우리 있을 때는
한국사람이라면 대개 유학생으로 그 수도
아주 드물었죠."
그들 앞을 조금 앞서 걷던 우진이 나무
밑에 서서 하내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코앞을 낙엽 하나가
뱅글뱅글 돌며 떨어져 내렸다.
"미국에 그렇게 오래 있어도 세련이
하나도 안 되었구나."
우진이 하내에게 말했다. 교수부인이
웃었다. 그 부인은 우진이 입만 열었다
하면 아무 말에나 웃었다.
"세련?" 하내는 우진의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응." 우진이 말했다. 대학교수 부인이
또 웃었다.
바보같이 느끼고 있는 터였다. 하내는
유행하는 노래를 모르고 새로운 말들을
몰랐다. 돈도 모르겠고 물건을 살 줄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하고 있는 말도 잘 못
알아들었다. 요즈음 사람들이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자기가 매력이 있는지
아닌지 모든 것에 혼란이 일었다. 꼭 오랜
감옥 생활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새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미국에 사는 동안에도 하내는
감옥에 사는 사람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감을 잡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을 때 하내는 무엇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학식이고
개성이고 내보일 필요 없이 그냥 하나의
오리엔탈 여자로 있으면 되었다.
보며 하내는 자기가 젊은 여자로 고국을
떠나 이제 젊다고 할 수 없는 여자로 그
앞에 서게 된 것이 미안하였다. 오늘 오후
서울에서부터 이 소도시로 탁과 함께
내려온 자기를 마중하느라 현관에 선
우진을 처음 보았을 때 하내는 우진이 오래
떨어졌던 식구같이 친근하였다. 그 감정을
하내는 소중히 생각하고 싶었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세련이 안 되었어."
이번에는 교수 부인뿐 아니라 일행이 다
웃었다. 하내도 웃었다. 아, 내가 웃는구나
하내는 생각했다. 내가 아주 기뻐서
웃는구나.
구두가 높아서 경사진 내리막길을 하내는
걷기가 불편하였다. 오솔길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자 넘어가는 햇살이 그들의
우진의 집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빨간
지붕 연립주택들이 무대장치같이 나타났다.
하내가 어려서 생각하던 서구풍의
집이었다. 미국에서도 하내는 그렇게
서구풍인 집을 보지 못하였다. 동화 속에
그려진 삽화 같았다.
하내는 가끔 현실과 환상이 혼동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분간이 안 되는 때가
있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하내는 시집을 안
가야겠다고 생각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자기 마음에 깔리는 그리운 우수
같은 것은 어느 날인가 옳은 남자를 만나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내가 시집가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키운 환상은 하내가 스물 일곱 살쯤의
현관에서 남편을 맞는 것이었다. 엄마와
아이가 같은 옷감으로 된 옷을 입고 물을
뿌려 깨끗이 청소한 현관에는 신발들이
정결히 놓이고 정원에는 화초가 많이 피어
있었다.
그 환상은 너무 오래도록 가지고
있어서인지 가끔 하내는 아직도 앞날에
그런 날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과거에 한번 그렇게 살았던 것 같기도
하였다. 가끔씩 그 환상이 훅 스치면
하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남편과 아이가
없는 자신을 생각하고 잃어 버린 꿈을
보았다.
하내의 결혼생활은 현관도 신발장도 따로
없는 뉴욕 아파트에서 이루어졌었다.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하내는 아이를
없었다. 하내의 서른 여덟 생일은 두 달
전에 지나갔다.
[2]
피아노를 가운데 하고 앉은 사람은
피아니스트, 그 옆에 사람은
콘트라베이스다. 피아니스트는 갈대같이
거친 콧수염을 기른 백인이고
콘트라베이스를 안고 앉은 사람은 나이가
든 흑인이다. 흑인은 연주하며 목에
용수철을 단 인형같이 머리를 흔들어댄다.
탁자마다 놓인 촛불들이 실내를 비추고
스탠드 바쪽에서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이슥한 탓인지 아니면 겨울치고도 호된
날씨 탓인지 이쪽 편 홀은 하내들을 빼놓고
두서너 그룹 손님들이 있을 뿐이다.
부엌이 닫힌다면 웨이트레스는 스프밖에
없다고 말한다. 웨이트레스는 곱슬거리는
빨강 퍼머 머리에 새빨갛고 또 새빨간
입술이다. 가면극의 인형 같다. 하내는
저게 바로 여자라는 거지 싶으다. 갓난애
때고 부모고 뭐고 없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여자.
스프밖에 안 된다고 하기에 하내와
하내의 사촌 오빠는 스프를 시킨다.
아무거나 되는 걸로 빵은 딸려 나오나요?
하내가 묻는다.
"물론," 웨이트레스는 대답하고 부엌으로
걸어간다. 몸동작이 새처럼 가볍다.
다 문을 닫아요."
하내가 말한다. 늘 이렇게 늦은 시각에
그와 마주 앉게 되는 것을 변명한다.
건포도가 든 검은 빵이 버터와 함께
조그만 바구니에 담겨 나온다. 빵이 몹시도
새까맣다.
"우진은 박사가 되었다더라."
어두워서 뭐가 들었는지 그저
희끄무레하고 걸쭉해 보이는 스프를 수저로
떠 먹으며 사촌은 말한다.
"그래요? 견주 공이 크네요."
사촌은 사업이란 것을 하고 있다. 그
사업차 그는 한국을 자주 다녀온다. 올
때마다 그는 하내에게 한국 레코드를 사다
준다.
하내는 사람들의 직업에 대해서 늘
사람들이 하는 일 말고
전무.이사.상무.장관.차관 이런 직함이
붙으면 하내는 막연해진다. 자기가 하고
있는 술장사까지 물건 하나를 얼마에 사
가지고 얼마 이익을 보고 또 되파는 그
사실이 이상하다. 올림픽이라든가
운동경기조차도 무엇 때문에 그것을 하는가
싶다. 세상 이치가 묘하다 싶다.
"우진 씨 만나 봤어요?"
"응, 우연히 산업회관 빌딩에서. 하내는
애가 몇 입니까 하더라"
하내는 웃는다. 우진과 돌아다닐 때 왠지
늘 괴로왔던 자신의 감정을 하내는
생각한다. 이제 다시 스물이 되어 그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라 하면 망설여질
만큼. 그러나 하내는 우진과 사이에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그 시절은 로맨스일
거라고 하내는 생각한다.
부엌이 닫힌다는 웨이트레스의 말과 달리
부엌은 문이 활짝 열려 안이 다
들여다보인다. 그 안에서 흰옷을 입은
쿠크가 후라이팬에 무엇을 만들고 있다.
촛불뿐인 홀은 어둡고 부엌은
비현실적으로 밝다. 흰 타일벽이며 스토브,
그리고 여기저기 놓인 남비며 접시들이
환히 보인다. 밝은 부엌이 촛불뿐인 홀의
분위기를 산란하게 깨어 버린다. 사촌은
부엌과 등을 지고 앉았고 하내는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쿠크는 가스불을 한껏 올린다. 높은 키로
불꽃은 자라나 춤추듯 흔들린다. 쿠크는 그
흔들리는 불꽃 위에 후라이팬을 대고
속에서 부대끼며 익는다. 저렇게 하는
요리가 무엇일까 하내는 궁금하다. 먹어
보고 싶다.
"이젠 우진 생각 안 하냐?"
"아니요."
그러나 하내는 그가 그립다. 이렇게
호젓한 시간이면 늘 누군가가 그립다.
"괜찮은 사람을 가지고 니 엄마가 그땐
무슨 큰 부랑자나 되는 듯이 야단을 쳤지."
"대학 나와 가지고 놀고만 있었으니
그랬겠지요. 그렇게도 반항적이던 우진
씨를 학위까지 얻게 했으니 견주는 참
용해."
자기는 견주같이 우진과 살 힘이 없다고
하내는 생각한다. 같이 계속 있었다면
자기는 우진을 망치고 자신을 망쳤을
생각에 또 의문을 가진다. 좀 생각해
보아도 구체적으로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진이나 자신이나 둘 다 지독히 미워하다
망쳐 버렸을 것 같은 느낌은 확실하다.
"그래 생활은 어떠냐? 장사는 잘 되니."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 없이 살아요."
"그래 오늘로 몇 살이지?"
"서른 여덟인가, 몰라 나이도 잊고
살아요." 오늘 오빠가 불러 주지 않았으면
생일인 줄도 몰랐을 거야."
서른 여덟은 여자의 절정이라고 사촌은
말한다.
"무슨 뜻이에요?"
그는 남자는 열 일곱이 절정이라고
말한다.
절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생각한다. 인생의 윤곽과 운명이 거의
정해져 있을 때 말고 가능성이 무한한 때
오는 것이.
"밤에 누워 이불을 끌어 덮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타일러요. 내 생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 뭐든지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그럴 때에 무슨 절정이라니
이상해."
가끔씩 사촌과 앉아 있으면 그가 무슨
애인 같은 생각이 든다. 애인은 애인인데
가짜 애인, 진짜 애인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하내는 생각한다. 어렸을 때
인형을 껴안고 진짜 애기를 느끼려 했듯이.
"너도 어려서부터도 이상하게 조숙했지.
늘 재미 없는 얼굴을 해가지고. 니 엄마도
"내가 그랬어요? 내 태도가 달라지면
내게 닥치는 인생이 달라질까요?"
"예를 들면?"
"예를 들어 누가 나를 예쁘다고 할 때
내가 그 말을 믿으면 나는 예쁜 사람이
되고, 누가 나보고 음식 잘한다고 할 때 그
말을 믿으면 내가 음식을 잘하고,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말을 정말
믿어도 되는지 ....."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말하는
사람의 태도와 또 그동안의 사귐 같은
걸로."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말의
포인트는요....."
하내는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것을
깨닫는다.
무슨 사실이 있다 할 때 의심 없이 믿고
있으면 다 그것이 긍정적인 사실이 되는가
하는 거지요."
"글쎄. 판단 잘해야 되겠지. 어떤 말이
나올 때는 언제나 그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하다가 하내는 입을 다문다. 진짜를
만나지 못하고 항상 임시인 듯한 자리에
머무는 자신이, 모든 것을 그대로 믿으면
세상 빛깔이 달라지는가 알고 싶다. 보이는
그대로를 믿고 싶은 자기에게 또 하나의
의심 많고 교활한 자기가 붙어서 모든 것은
순간일 뿐이라고 악마같이 속삭인다.
일순간의 즐거움으로 일생 신세 망치지
말라고 한다.
엄마를 두고 어딘가에 있을 진짜 엄마를
그렸음을 생각한다. 또 자신도 어딘가에
있을 정직하고 귀엽고 착한 어린이, 거짓말
안 하고 어여쁜 아이. 어른이 된 지금도
하내는 생각한다. 진짜인 자신은 아직 먼
데 있고 자기는 거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한다고.
사촌은 스프를 다 먹고 수저를 그릇에
놓는다. 그는 아내와 정이 없다고 불행해
한다. 담배를 꺼내 무는 그의 몸 움직임이
사업가답게 어른스럽다. 그가 이제는
이모를 따라 집에 놀러 오던 어린 소년일
수가 없듯이 또한 애인도 아니다. 가짜
애인도 아니며 영원한 사촌오빠일 뿐이라고
하내는 생각한다. 그런데 왜 그가 애인이
아니어서 지금 섭섭한가.
너무도 없다.
"꼭 시멘트 같애요, 빵이." 하내는
말한다.
"이걸 그렇게 많이 먹다니 정말 비위도
좋아요."
하내는 빵을 씹는다.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문다.
왜 사촌오빠를 가짜 애인이라고
느끼는가, 그는 남자이고 나는 여자여서?
밤 깊은 시각 이런 장소, 특히 인생의
피크라는 이런 날에는 애인과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서?
[3]
숲도 담도 또 그렇다고 뚜렷이 경계를
지을 만한 아무것도 없이 동그마니 나타난
뜰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제 내린
비로 해서 습기가 아직도 스며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삿갓을 쓴 램프가 불을 켜고 우진의 집
부엌 창에 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언제나 초저녁의 이런
어둠은 하내에게 밝고 따뜻하고 견고한
것을 그립게 하였다. 부엌 창에 달같이
둥실 뜬 램프를 보며 그들은 한 줄로 서서
세 개의 시멘트 층층대를 디디고 현관문을
밀었다. 어느덧 내려간 기온에 모두 몸을
떨었다.
우진은 뜰에 널린 빨래를 아무렇게나 한
아름 걷어 안고 제일 뒤에 있었다. 현관은
있었다. 부엌에 서서 견주가 울고 있었다.
"데었어요. 스토브에 손을 데었어요."
제일 먼저 현관에 들어서던 탁은 신발을
벗고 주춤 서고 (우는 남의 여자를
어찌할거나), 그 뒤를 이어 교수부부가 또
주춤 섰다. 그 뒤에 하내가 있었다.
"스토브에 데었어요. 그만." 견주는 또
말했다.
그들이 즐거이 웃으며 비틀비틀 내려오던
숲 사이 오솔길이 그곳에서 보였다. 더구나
앞서 가던 우진이 기다려 섰다가 하내에게
세련 안 되었다고 말하던 길목은 손바닥
안같이 빤하였다. 하내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하내가 안 보려 해도 그
숲길은 울고 섰는 견주의 등 뒤 부엌
창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위에 놓고
"그래 내가 뭐랬어. 같이 산보하자고
하지 않던가. 뭐하러 음식은 한다고."
허리를 구부리고 배를 내밀고 아무렇게나
울고 섰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엄연한 부부임에도 하내는 그들이 부부
같지가 않았다. 동고동락한 쌍으로 보이기
보다 그냥 우진은 우진대로 (아무리 그가
빨래를 끌어 안았다고 해도) 견주는
견주대로 (헌 슬리퍼를 끌고 끊는 남비
앞에 서 있다고 해도) 개인 개인으로만
보였다.
"어디 많이 데었니?"
하내는 견주 곁으로 가서 그 손을
잡았다. 아냐 아냐 견주는 손을 빼며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다. 목 하나 만큼
하내가 언강과 결혼하게 된 이유는
하내의 키였다. 언강의 자로재자면 백 육십
칠 센티인 하내의 키는 언강의 백 팔십 사
센티의 키와 맞았다. 힐을 신으면 꼭
맞는다고 언강은 말했다.
언강이 선을 본 수많은 여자 중
인품.학력.용모.집안 다른 것 다 젖혀 두고
자기가 키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얘기를
하내는 결혼초에 들었다. 자기의 키만큼
자신에게는 당연스런 것이 없었기에.
"맞다니 무엇이 잘 맞아요?"
"춤을 춰도 그렇고."
또 한번 놀랄 소리를 언강은 거침없이
하였다. 하내는 춤을 몰랐다. 춤이
그다지도 중요한가, 늦어지기 전에 하내는
말했다.
없어요."
언강은 조금도 동요 없이
"춤은 가르치면 되지만 키는 그렇게
못하거든. 생긴 거나 뭐나 다 노력하면
고칠 수 있지. 제 아무리 뚱보도 내가
운동시켜 날씬하게 해 놓을 수 있지만
키만은 그렇게 안 되지. 내가 너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로 만들어 줄
거야."
하내는 언강 같은 남자를 처음 보았다.
어디서 얘기로 들어 본 일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바로
남편이 되었다.
미국에서 왔다는 이십 삼 세의 남자가
널리 색시를 구한다고 하였다. 집안
아주머니가 가져 온 그 남자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하내는 졸업식장에 갔다.
명절날에나 입어 보던 한복 위에 졸업식
가운을 입었다. 아직 보지도 못한 남자의
사진이 하내의 브래지어 속에서 하내의
살을 찌르며 구겨지고 있었다. 그 사진의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하내는 생각했다. 내
인생이 이것만일 수 없어, 우진의
하숙방에서 끝일 수 는 없어. 우진이
견주에게 보이는 미묘한 반응이 하내의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전 날만 해도
우진은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견주의
얘기를 열을 내어 하였다. 그 여자는
가지고 아직까지도 국사니 지리니 교과서를
달달 외고 있지.
당시 견주는 같은 과의 남학생과
동거하고 있었다. 하내는 여자대학에
다니고 견주는 남녀공학 대학이었다.
견주가 임신했을 때 그 사실을 우진에게
알린 것은 하내였다.
하내의 말을 듣고 하내의 머리카락 속을
손가락 빗을 만들어 달리던 우진의 손이
흠칫하였다. 남자와 살고 있는 견주의
임신이 그렇게도 충격이었을까.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하내는 화가 났다.
도망가야지. 잘 해주고 도망가야지, 친절한
여자로나 추억에 남게.
하내의 가족들이 왔으므로 우진은
졸업식에 오지 못하고 있었다. 쌀쌀한
휩쓸었다. 마이크도 바람소리를 실어
내었다.
단상에 높이 앉은 내빈과 교수들의
옷자락이 바람을 받고 펄럭였다. 지루한
연설의 홍수 속에 앉아서 하내는 십 육 년
긴 교육을 마치는 것의 의미는 무언가
싶었다. 이제 더 이상 학생이 아닌 것이
서운하기도 하였다. 머리 위에 얹은
사각모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고 몸
치수보다 훨씬 큰 검은 색 가운이
어색하였다. 식장에 늦게 왔기 때문에
하내는 자신의 과를 찾지 못하고 가사과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내의 두어 줄 앞에서는 영화배우인
권수리의 모습을 사진기자들이 찍고
있었다. 식 중임에도 불구하고 권수리
몰려서서 사진을 찍었다. 권수리는 그것을
기대했던 듯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아무도 야단치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하내는 이상하였다. 학교라는 곳은 어떤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서 벗어날 때는 벌을
주었었다. 그런데 오늘 하내의 지각에
대해서 아무도 말을 안 했으며 하내가 첩첩
들러선 학부형들의 열을 뚫고 모두 같아
보이기만 하는 새까만 옷에 새까만 모자를
쓴 졸업생들 속을 걸어갈 때도 아무도 뭐라
안 했으며 또 하내보다도 더 늦게 지금 이
순간도 제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졸업생들이
있었다.
축사를 하는 내빈이 "여러분은 우리 나라
전인구에 비례하여 고등교육을 받은 소수
인텔리에 속한다. 이제 여러분은 이 사회에
사람이 되라. 한 가정 한 가정의 주춧돌이
되어 훌륭한 어머니 훌륭한 아내로 이
나라의 이세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남편들의
좋은 내조자가 되라. 한 가정이 바로 서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며 우리나라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내의 브래지어 속 사진의 남자는 내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내가 일찌기 가
본 일 없는 고급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하내는 거기에 시집가고 싶었다. 사진을
가슴에 품은 것은 하내로서는 간절한
기도였다. 하내는 넓은 세계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어떤 다른 곳으로.
아무 곳으로라도.
모르는 남자의 사진을 품고 (이미 자기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자기
자신을 하내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자신은 혼자라는
느낌이었으나 이상한 세상의 이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저 오케이인 사람이 되고 싶다. 평범함이
소원이다.
미국에서 선보러 왔다는 양가집 아들과
낯선 땅에서 하내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힘을 모두어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고 싶었다. 그저 오케이인 생활을.
[5]
하내 들을 마루에 앉게 하였다. 벽
한구석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우진은
손님과 아내 사이에서 두루 미안하여
부엌과 마루를 왔다갔다 하였다.
하내는 우진의 키가 작은 것이
이상하였다. 그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어째
자기는 이제까지 그것을 몰랐었는가.
우진도 새삼 하내의 키가 눈에 들어오는지
차 탁자 위를 닦으며
"너 키 더 커졌구나." 말했다.
이미 성년이 되어서 서로 떠난
사람들인데 그 동안 한 사람은 키가 크고
한 사람은 작아졌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내는 생각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남자의
용모가 구체적으로 하내에게 보여지고
있었다. 이 잘 생긴 나를 당신이 어찌 싫다
남자를 전에는 첫째가게 경멸했으나 요즈음
들어 하내는 그들이 그리 싫지가 않았다.
자신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게에 들르는 손님이거나 지나치는
행인으로 그런 타입을 만나게 되는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 앞에 섰을
때 하내에게 드는 본능적인 감정은 저들은
재미있게 살겠지 하는 선망이었다.
결혼하고도 한참까지 하내는 남자가
객관적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언강이 잘
생긴 남자라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었다.
육사에는 키가 얼마 이상이라야
들어간다는 얘기를 듣고 학창시절 어느 날
하내는 우진에게 물었었다.
"키가 몇 센티야?"
"나야 휘이청 크지."
휘이청 큰 남자인 줄만 알고 있었다.
오늘 저녁 함께 자리한 대학교수는 이웃
교수 사택에 살며 늘 왕래가 있어 보였다.
그 부인이 견주와 함께 부엌 일을 하고
있었다.
우진과 견주는 십 이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임에도 신혼집처럼 가구가 새로왔다.
늘 새로이 살림살이를 장만하며 사는 집
같았다. 하내는 그 두 사람이 부부인 것을
인정하기 힘들듯 손때 묻지 않은 가구나
집도 그들의 보금자리 같지 않아 했다.
우진이 칠 줄 모를 피아노가 낯설었다.
하내와 사귈 때 우진은 어떤 여자 때문에
고향과 집을 떠난 사람이었다. 우진에게
고향과 부모를 등지게 한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 하였다. 그 여자와
돌아가지 않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때로
연탄도 없고 때로는 쌀도 없었다. 친구들이
그의 하숙방에 드나들고 애인이라고
여대생인 하내가 있었다. 탁도 거기 자주
놀러 왔었다. 그 둘은 언제나 함께 붙어
다녔다. 한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끝맺도록 원앙같이 사이가
좋았다. 하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거기
드나들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견주와
견주의 동급생을 부러워하였다는 것이다.
우진과 하내가 시장에 같다가 견주를
만난 때가 있었다. 그 날도 학교 끝나고
하내가 책가방을 들고 우진의 집에 들른즉,
"하숙비가 집에서 왔어, 뭐 사다가 밥 좀
해 먹자."
우진이 말했다.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 바바리를 입고
견주는 시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들 셋은 이것저것 사 가지고 우진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산 것 중에
상추가 있었다. 수돗가에 하내와 견주가
야채를 앞에 하고 앉아 있으려니 하숙집
주인 여자가 나와서
"약혼자가 있다고 하더니 오늘 오셨구먼.
늘 동생만 드나들더니."
하숙집 대문을 흔들기 싫어하는 하내에게
우진이 약혼자가 있다고 해 놨으니까
괜찮아 했었는데 하숙주인은 그럼 이제까지
하내를 우진이 동생으로만 알았단 말인가,
진종일 우진이 방에서 뒹굴다가 얼굴도 잘
못 들고 나가는 자기를 우진의
있으세요? 저 이 과일 잡수세요, 하고 안집
방문을 두드릴 때 그들은 자기를
동생으로만 생각했는가, 그때는 그것이
재미 있는 에피소드로 상추쌈을 먹으며
셋이서 웃었지만 견주는 우진의 천생배필인
게야, 어째 첫번 본 주인여자가 견주를
대뜸 우진의 약혼자라고 하였겠는가.
하내는 부엌에서 움직이는 견주를
새삼스러이 바라보았다.
"거 요전 듣던 노래 있지요? 그 레코드
좀 들읍시다."
우진은 스테레오 옆에 놓인 자그마한
램프를 켜고 카세트 테이프가 담긴
나무상자를 꺼내었다. 무릎 위에 올려
놓고서 한참 찾았다. 그렇게 애써 찾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들었다. 박
"아, 꼭 그 노래를 듣자는 게 아니라 거
아무거나 트시지."
"아, 여기 있어요."
우진은 일어나서 카세트를 찰칵 끼웠다.
그는 정말 휘이청 큰 사람이 아니었다.
빛멀리 떠나간 친구여
사랑 찾아 떠난 친구여
"자아 오래 기다리셨죠?"
견주가 찌개 남비를 가져다가 탁자
가운데 놓았다. 빨간 고추, 파란 파, 또
굵은 조개도 두엇 들어 있는
생선매운탕이었다. 견주는 이제 밝은
얼굴이었다. 아무도 견주의 덴 손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다 있다지."
"응, 해먹기 싫으니까 안 해먹지, 혼자
사니까."
가끔 손님을 청하면 하내는 높이 올려둔
접시와 수저를 꺼내었다.
현관문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는 소리가
났다. 이어
"아빠 문 열어 빨리."
계집아이의 목소리였다. 빨리, 빨리,
아빠,
우진이 나가서 문을 열고 이어 빨간
골덴바지 흰 스웨터를 입은 눈이 크고 코가
뾰죽한 계집아이를 앞세워 들어왔다.
"인사해야지."
견주가 음식 그릇을 나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늘 보아 낯익은 박 교수쯤에다 대고 고개를
까딱했다.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내려왔다가 뒤로 바람을 일으키며
넘어갔다.
"그래 재미있었니?"
"응, 엄마, 거기서 나 뭐 많이 먹었어.
저녁은 안 먹을래."
"쟨 시집가면 남편을 종일 굶길 거라.
그렇게 뭘 안 먹는단다."
견주가 하내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이따 먹어." 우진이
선선하였다.
"이름이 뭐지?"
하내가 물어 보았다. 아이의 모습이나
표정 부분부분이 우진도 닮고 견주도 닮아
있었다. 이제 그들이 부부인 것을 하내는
힘이 드는지.
"원이."
"그게 뭐냐. 김 혜원이에요 해야지.
혜원아 이 아줌마는 엄마 옛날 친구야.
우리 딸 버릇 되게 없지?"
"무남독녀 외동딸 티 내는 거지요 뭐.
금이야 옥이야 하고 귀엽게 길렀습니다."
박 교수가 발했다.
혜원은 몸을 휙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이 탕 닫기는 소리가 났다.
혜원이 "아빠 문 열어"하던 것이 하내는
이상히 마음에 와 닿았다.
"혜원이가 왜 아빠 보고 문 열어
달래니?" 하내가 물었다.
"걘 쟤 아빠를 동무같이 안단다.
보시다시피 가정교육이 엉망이다."
"왜 그래두 공부를 얼마나 잘 하게,
사내애를 비켜라 하고 뭐든지 일등이에요."
교수부인이 말했다.
"엄마 닮았네." 하내는 감탄했다.
견주가 교과서 페이지를 마치 펴놓고
읽는 듯 환히 외었던 사실을 하내는
생각했다. 인간들은 이리저리 부딪쳐
흐르며 자신도 모르는 새 재생산을 해낸다.
아이에게 가문의 이름을 주고 세상을
해설해 주며 뭉쳐 살아간다. 아이는 자라며
운명같이 따라다니는 이름에 무슨 연관이
있나 하고 노여워서 반항하고 모험의
방랑도 해보지만 핏줄은 아이를 다시
유인해 들인다. 고향에 가면 어떻게 어떻게
된다는 생면부지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아이를 붙들고 다락의 잡동사니를 들추며
견주로부터 혜원에게 이어지는 그런 질긴
유대감을 볼 때 하내를 감싸는 것은
소외감이었다.
[6]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해변에서 햇볕 밑에 누워 있는 거."
하내는 비누 묻은 스폰지로 접시를
씻으며 언강의 말에 쉽사리 대답한다.
하내는 접시를 들어 불빛에 살펴본다.
기름기가 아직도 자국을 내고 있다. 하내는
다시 스폰지로 접시를 문지른다. 노란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골동품같이 낡아 보이는 거울이 하나 붙어
있다. 골동품 흉내를 낸 새 것이다. 어제
센트럴 공원 앞을 지나다가 행상으로부터
하내가 산 것이다. 모자이크로 꽃무늬가
들어 있다. 그 거울을 붙여 놓으니까
설겆이 할 때마다 콱 막힌 듯 답답했던
벽은 저 멀리 물러나 훅 트이는 느낌이다.
그 자그마한 물건이 하내를 기쁘게 한다.
눈을 들면 꽃모형 색유리 가운데 머리를
대강대강 걷어 올려 머리핀을 꽂은 하내의
핏기 없는 얼굴이 떠 있다.
난 화련한 여자가 좋더라. 언강의 눈이
되어 하내는 화려하지 못한 자신을 미안히
들여다본다. 어느 날이고 화려한 여자가
되리라. 하내는 이마 앞으로 늘어지는
머리를 고무장갑 낀 팔을 들어 쓸어
"내가 제일 좋아는 게 뭐라고?"
침대 위에 벌거벗고 고개를 번듯이
해가지고 누워서 언강은 다시 묻는다.
"해변에 누워 있는 거."
하내는 다시 대답한다. 단조로운 그 대답
소리에 언강은 빙긋 웃는다. 그의 웃음은
사심 없이 맑아서 행복한 느낌이 깃든다.
그가 웃으면 하내는 자기가 그를 행복하게
만든 것 같아 기쁘다.
비누질이 끝난 그릇들을 하내는 뜨겁게
흐르는 물에 헹군다. 싱크대에 수증기가
서린다.
언강은 구겨진 담요 위에 누워 있다.
하내의 기억 속의 모든 담요의 감촉은
불편하다. 언강의 피부가 되어 하내는
불편해진다.
언강의 몸은 그대로 무슨 작품같다.
작품같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뜻보다
언강이 타고난 자기의 몸을 가지고
노력하여 어떤 이상적인 형태를 지니려고
한다는 뜻에서 하내는 그렇게 느낀다.
때때로 두뇌 같은 것은 있는지 없는지
상관없을 씨옥수수나 종자말처럼 하내는
그가 인간 종족의 씨앗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내는 더운 물로 해서 얇아진
고무장갑을 벗는다. 창가로 간다. 커튼을
조금 들춰 본다. 가로등만이 호젓한 아파트
거리이다. 가끔씩 차가 지나간다. 하내는
커튼을 다시금 잘 여며 놓는다. 하내가
창가로 간 것은 커튼을 잘 닫기
위해서이다. 하내의 아파트는 일층으로
길거리에 면해 있어서 행인이 안을
하내는 마음이 쓰인다.
하내는 창에 등을 대고 팔짱을 낀다.
언강을 바라본다. 언강이 누웠던 몸을 반쯤
일으킨다. 유리잔을 들어 마시던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다시 드러눕는다.
설겆이할 때 젖은 블라우스 앞이 습기를
하내의 살에 전한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늘 앞이 젖는다. 무슨 일이든지 하면
하내는 흔적을 남기는 편이다. 음식을 하면
손을 베고 그릇도 잘 깬다. 하내는 젖어서
섬뜩한 블라우스를 벗기 위하여 단추를
뺀다.
"한국에서 햇볕에 몸 태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사람 봤어?"
언강은 두어 마디 사이에 꼭 질문을
넣는다. 이미 몇 번 들은 얘기건만 하내는
"그런데 난 어릴 때부터 선탠을 했어 집
옥상에다가 목욕대야 갖다 놓고. 애들 목욕
그릇 알어?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 조그만
거 말고 욕조같이 생긴 거 큰 거."
하내는 안다고 대답한다. 하내는 단추를
다 빼고 블라우스를 벗는다. 브래지어도
젖어 젖꼭지가 비쳐 보인다. 하내는
브래지어를 벗는다. 동그라니 단단한
유방이 나타난다.
젖꼭지가 무엇을 묻는 듯 뽈록 선다.
"욕조는 하늘색이었지. 거기다 물 떠다
놓고. 운전수 아저씨가 호스로 물 담아
줬지. 그러고 거기 누워 있었어. 조그만
놈이 동네 나가서 놀지 않고 그러고
지냈어."
한국 어느 집 옥상에 누워 있는 어린
그렇게 자라서 이렇게 장가 들었어?
하내는 바지를 벗는다. 소녀같이 마른 두
다리가 나타난다. 벗은 옷들을 하내는
의자에 걸쳐 놓는다. 하내는 욕실로 간다.
살이 빨갛게 되는 뜨거운 목욕이 하내는
좋다. 목욕을 하면 계속 뜨거운 물을
흐르게 해 놓는다.
언강은 날씨와 같다고 하내는 생각한다.
어느 날은 껑충껑충 뛰듯 행복해 하고
다정한 날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너무도
초조하여 안절부절을 못한다. 그는
날씨같이, 구름같이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며
그에게 무슨 잘못을 따질 수도 없다.
날씨에게 어떻게 왜 이랬나 왜 저랬나 할
수 있나. 하내는 더운 물 속에 몸을 깊숙이
가라앉힌다.
하내는 잘 듣기 위해 물을 잠근다. 욕조에
선 채 몸을 굽혀 욕실문을 연다.
"뭐라고 했어?"
"내 소원이 뭔지 아느냐고."
"빨가벗고 해변에서 어린애 목에 걸고
걸어가는 거."
얼른 대답하고 하내는 물 속에 앉는다.
잠깐 떠난 물의 뜨거움이 놀랄 만하다.
"음, 그거야."
언강이 다시 말을 못 붙이도록 하내는
도로 일어나서 욕실문을 소리나게 닫는다.
욕조에 몸을 눕힌다. 더운 물이 하내의
턱을 넘고 입술 근처까지 와서 찰랑인다.
크림을 바른 얼굴에 물방물이 맺힌다. 욕실
선반 위에는 언강의 화장용품들이 하내의
것과 섞여 죽 늘어서 있다. 범선이 그려진
뭉게구름 이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언강이
어린아이를 목에 걸고 걷고 있다. 소년도
언강도 빨가벗었다. 언강은 걷는다.
어디로, 하내는 알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어느 지점으로부터 다른 지점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은? 그는 자기
남편이지만 자기에게로 오는 것 같지 않다.
그는 살아 있으며 움직이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지 하내는 모른다.
거친 사막의 대상의 무리들도 가족과 다
함께 움직이며 집시들도 가족을 이끌고
유랑의 생활을 하건만 언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하나만 달랑 목에 걸고
해변을 걷는다.
언강의 꿈은 요즘 생긴 것이 아니다.
금방 결혼했을 때 언강은 이렇게 물었다.
"몰라요."
"빨가벗고 애기 목에 걸고 해변을
걸어가는 거야. 애 하나 낳아 주고 가야
해. 목에 걸고 해변을 걸을 애."
이제 결혼생활도 일 년이 되어간다.
하내에게는 아이가 없다. 하내는 몸에
비누질을 하며 '애 하나 낳아 주고 가야
해' 하던 언강의 말을 생각한다. 낳아 주고
날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내는 그렇게
말한 언강이 우습다. 자기 부인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유 그렇게도
말할 줄 모를까.
언강의 꿈은 어느 날이고 현실이 될
것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하내는 그의 목에
얹힌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언강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막연히 그날이 두려워진다. 그 두려움이 훅
덮칠 때 하내는 소스라쳐 놀란 듯 더운 물
흐르는 수도꼭지를 잠근다.
[7]
교수 부인이 집에 가서 오징어젓과
게장을 가지고 왔다. 술이 잔마다 가득
부어졌다. 하내는 곧 그 자리에서 자기가
술을 제일 잘 마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우진은 술을 못 마셨다. 하내의
기억 속에 있는 우진은 반항적이며
근심스러울 정도로 탐미적이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 보니 술도 잘 못 마실 뿐 아니라
살피는 착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오늘 밤
좌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마시는 자기의
술이 하내는 스스로 놀라왔다.
뉴욕에 있을 때 하내는 밤마다 포도주를
마시고 잠들었다. 손님들이 맛이 변했다고
가져 오는 병 중에서 아무거나 마셨다.
악마같이 뻘개진 얼굴로 하내는 이불을
끌어 덮고 잠을 청했다.
하내는 여기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잔이
부어질 때부터 정말 못 마신다고 손을
내저었다. 모처럼 방문한 고국에다가 그
동안 세련은 하나도 안 되고 박사도 안
되고 술꾼이 되어 왔단 말을 듣게 말자.
정숙한 여자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이 세상의 관념 속에 자신을 집어
"게장을 보니 생각나는구먼. 하내 씨하고
하내 씨 오빠집에 게장 가지고 갔었지요."
탁이 말했다.
담배는 줄곳 피우면서도 그는 술을 못
마셨다.
"언제요?"
"그때 왜 여름에, 오빠가 세검동
어딘가에 사셨지요 왜."
세검동? 하내의 오빠는 집을 지을 때까지
세검동 근처로만 셋집을 두어 집 옮겨
다녔었다.
"커다란 알루미늄통에 담아 가지고 가는
데 아주 더웠지요." 탁이 말했다.
그랬었나.
그날 아침부터 모친은 하내에게 결혼한
오빠네 집에 게장을 갖다 주라고 성화를
하였다. 뜰의 꽃이 축축 늘어지도록 날씨가
더웠다.
꼼짝하기 싫어서 하내는 그날 종일
모친과 냉전을 벌이고 있었다. 더우기
오빠네는 또 셋집을 옮겨 얼마 전 오빠가
그려 준 약도 하나를 들고 찾아가야 했다.
그때 탁이 들렀던 것 같았다. 그는 왜
들렀을까, 근처에 무슨 일이 있어서 왔다가
모친은 탁에게 약도를 보이며 하내와 같이
나가라고 하였다.
"그날 왜 세검동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저녁 먹고 왔지요, 버스 두 번 갈아 타고."
탁의 말을 들으니 하내는 자신에게도
청춘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 같았다.
"혼자 사니 홀가분하겠구나, 결혼 다시
하지 말어."
옆에 와 앉았다.
"왜? 지금 너 사는 것 보고 부러워
죽겠는데." 하내가 말했다.
난 점점 일하기가 싫어 죽겠어, 왜
이렇게 일이 많을까. 여자가 결혼했다고
해서 마음대로 어디 가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불러들이지도 못하는 게
갈수록 이상해."
"아유 김 박사님을 가지고 그런 말씀
하세요? 한국 남자들이 전부 김 박사님만
같아 봐요. 우리 집 선생님은 얼마나
뼛속까지 남자인 줄 아세요? 남자의식이
오천 년 이 겨레 핏줄 속에 흐르나 봐요."
교수 부인이 말했다.
"왜 나한테만 혼자 사니 좋겠다고 하니?
여기 탁씨도 혼자이신데."
말했다.
"그렇지, 남자는 결혼하면 덕을 보는
편이지."
우진은 아내에게 쉽게 동의하였다. 편견
없으려는 우진의 옛 면모를 하내는 보았다.
"우리 생활이야 보다시피 빤하지, 니
얘기 좀 해 봐." 견주가 말했다.
그래서 하내는 자기의 생활을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듯 들려 주었다. 아침부터
밤늦도록까지 하루종일 매달려 있어야 하는
가게, 영어도 잘 못하면서 하는 장사, 그
가게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면 앞 빌딩의
담벼락이 자기의 창을 콱 막고 있는 것,
그것은 어째 볼 수 없으며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모든 나날은
예측할 수 있어서 침묵하는 친구 같으며
죽어 있는 것같이 느낀다고.
그러나 하내는 또 전혀 다르게 자신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었다. 가게에 나가면
그 가게 내부에 깃드는 청신한 아침, 오후
한 시쯤 되어 유리창으로 들이밀리는
따뜻한 햇볕, 비오는 날 창에 맺혀 흐르는
빗방울,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래.
하내는 노래를 좋아하였다. 어느 때고 늘
노래 하나쯤이 가슴 속에 있었다. 아침에
훌쩍 들은 노래라든가 아니면 우연히
떠오른 노래 하나쯤.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노래가 아니더라도 노래 비슷한
무엇, 멜로디도 가사도 있는 그
무엇이었다.
가게가 한가하면 하내는 라디오를 끄고
거기 붙어 있는 카세트 테이프에 대고 아는
그렇게 부른 노래를 집에서 밥을 하고 밥을
먹으며 들었다. 언강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 언강이 그립고 오빠가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 오빠가 그립고, 우진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 우진이 그립고,
모친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 모친이
그리웠다. 그 끝에는 아득한 정욕이
있었다. 무엇을 하든 하내는 맨 밑바닥에서
자신의 정욕을 만났다.
또 일곱 살 연하의 어떤 남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는 가게에 술 사러 들르는
손님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술을 사가지고
나가다가 닫힌 문을 도로 밀고 들어와서
비밀히 해야 될 이야기가 있다고 "귀 좀
빌려요." 하였다. 하내가 귀를 주니까 그는
그 귀에다가 쪽 키스하였다. 그런 사소한
"자 술장사 한다면서 이건 와인인데."
탁이 하내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하내는 자기가 안 마신다면서 어느새 또
잔을 비웠음을 알았다. 언강 앞에서는 이런
면으로는 자유스러웠다. 언강은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해. 우리 집에선 한
번도 내가 술 먹는 거 하고 담배 피우는 거
가지고 말해 본 일 없어. 요새 와서 엄마가
술그만 마시라고 그러지. 어렸을 땐 가만
내버려뒀어. 어떤 날 이층 내 방 창앞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아버지가 오잖아. 얼른
감추려는 데 감출 데가 있어야지. 얼김에
놓는다는 게 창턱이야. 연기가 나잖아,
아버지가 보고 뭐랬는지 알아?"
"몰라."
불내겠다고."
"그때가 몇 살?"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럼 그때 아버지는 친아버지?"
"응."
언강은 국민학교 졸업하고 이혼한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하내는 늘 언강을 열
한 살같이 느꼈다. 어려서부터 조숙한
아이였으므로 어른이 누리는 쾌락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그가 부친과 조국을 떠난 열 한 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술도 여자도
담배도 그에게는 장난감 같았다.
언강 앞에서 하내는 술이니 담배 그런
면으로는 별로 자신을 감춘 것 같지
않았으나 또 그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왔던
"참 요전 날 하내 씨가 만든 쇠고기
요리는 어떻게 한 거예요? 거 맛이
괜찮던데." 탁이 말했다. 탁의 집에 갔을
때 하내는 탁의 집 가정부와 함께 마침
있던 고기로 음식을 만들어 보았다. 같이
갔던 다른 여자들은 다른 요리를 멋지게
만들어 내었다.
"그게 맛있었어요?"
"그럼요. 그 다음 날 가정부 아줌마한테
봤으니 똑같이 만들어 보라 했는데 맛이 영
다르던데."
"쉬워요." 말하며 하내는 그 요리법이
적힌 책이 놓여 있는 뉴욕의 부엌을
생각했다.
"두 테이블 스푼 버터에다가 고기를
넣어요. 중간쯤 되는 불에 여러 번
접시에 담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요. 그
다음에 한 테이블 스푼 버터를....."
하는데 견주가
"뭐 언제 한 컵 두 컵 하고 있니, 그냥
난 다 대강대강 한다. 그것도 십여 년
하고나니 손이 다 알아서 척척 한다.
그래서 맛이 요모양인지 모르지만."
"분량대로 하는 게 편해. 한 번 해 봐,
얼마나 편한가."
결혼 생활에서 하내는 순종의 편함을
터득하였다. 모든 것은 순종하면 편했다.
오트밀 같은 간단한 먹을 것을 만들 때도
하내는 오트밀통 겉에 프린트 된 대로
충실히 하였다. 사분의 삼 컵, 물에 소금은
사분의 일 티스픈, 그리고 보리는 삼분의
일 컵, 그 분량을 마치 먹으면 큰일나는
재었다. 일 분 동안 가끔씩 저으면서
끓이라고 써 있으면 남비 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목을 치켜 들고 손목시계의
초침이 정확히 일 분을 돌아가는 것을
지켰다. 그러면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이 만사 순조로왔다.
[8]
철망을 쳐두른 네모 반듯한 놀이터에서
흑인 청소년들이 바스킷 볼을 하고 있다.
런닝셔츠 밖으로 드러난 검은 팔뚝은
땀으로 번질 거린다.
흐린 날씨가 모든 것을 회색 속에 잠기게
내려앉는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쪼아 먹는다. 차도에는 차들이 전부 오른쪽
방향으로 달려간다. 일방통행인 길이다.
하내는 칠면조가 들은 수퍼마킷
종이봉투를 가슴에 안고 걷는다. 가슴에 한
아름이다. 오백 도에서 십 오 분, 삼백
오십 도에서 두 시간 반, 하내는 잊지 않기
위해 중얼거린다. 연필이 있어서 좀
적었으면 싶다.
녹색차가 저편에서 커브를 꺾어 모퉁이를
돈다. 언강이 오나, 하내는 그 차를 더 잘
보기 위하여 몇 걸음 뛰어 본다. 아니다,
빛깔은 같지만 차가 더 크다.
하내는 안았던 종이봉투를 길 옆 벤치에
잠시 내려 놓는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다시 핀을 꼽는다.
낚시 떠난 그는 두 주일 동안 소식이 없다.
하내는 다시 종이봉투를 안는다.
과일이며 쥬스가 들어 꽤 무겁다. 오백
도에서 십 오 분, 삼백 오십 도에서 두
시간 반, 처음 칠면조 요리를 해본다고
하내는 수퍼마켓에서 칠면조 하나를 사든
길로 서점에서 가서 요리법을 읽고 오는
길이다. 제일 작은 것으로 골라 들었건만도
이걸 누가 다 먹나 하게 크다. 칠면조가 큰
새라는 것을 비로소 안 듯하다.
오백 도에서 십 오 분, 삼백 오십 도에서
두 시간 반 외어대며 하내는 집을 향해
걷는다. 요리처럼 만사가 방법이
분명했으면 한다.
추수감사절이라고
술상점.야채가게.고기가게.생선가게마다
하내는 아파트 층계를 오른다. 밖의
거리와는 딴판으로 계단은 조용히
어둑시그레하다. 오백 도에서 십 오 분,
삼백 오십 도에서 하내는 아파트 문고리에
열쇠를 집어 넣는다. 잘칵 소리를 내며
열쇠가 돌아간다.
언강이 부엌 식탁을 가득히 어지르며
생선회를 뜨고 있다. 생선 머리토막이며
뻘건 내장이 두껍게 깔린 신문지 위에 굴러
있다. 언강은 생선껍질을 벗기느라고
벤찌를 들고 있다. 언강이 고개를 든다. 그
특유의 사심없이 행복한 웃음이 얼굴에
퍼진다. 얼굴이 알아보게 그을러 있다.
"왜 거기 서 있어? 사람 첨 봐?"
"언제 왔어?"
"이봐, 여기 와서 이것 좀 봐, 얼마나
잡았는데 다른 사람 다 주고 세 마리만
가져 왔어. 다른건 냉장고에 넣었어."
하내는 안고 있던 봉투를 의자에 내려
놓는다.
"자 요기다 뽀뽀."
언강이 지저분한 손을 옷에 안 닿게
주의하며 앞으로 뻗고 뺨을 내민다. 훅
하내는 웃는다. 내 생활은 내가 원했던
대로 평범하다. 하내는 머리를 쓸어넘긴다.
언강에게로 걸어간다. 언강의 뺨에 재빨리
입술을 댄다. 그 뺨에 립스틱이 묻는다.
"오늘 올 줄 몰랐어."
"그럼 언제 올 줄 알았어?"
"가봐야 안다면서 갔잖아. 전화 하나
없었지."
"낚시 담그고 앉아서 해지는 거 보려고
추워지고 쓸쓸해지고 그래. 해뜰 때는 물이
새까매지고 해질 때는 물이 금빛이야."
오븐 속의 칠면조는 앞으로 한 시간 반
더 있어야 한다. 언강이 샤워하는 소리가
욕실에서 들린다. 문득 욕실문이 열리고
언강이 고개를 내민다. 머리에서 흐르는
물로 눈을 잘 뜨지 못한다.
"우리 둘이 아이보리 비누광고에 나가
볼까?"
"혼자 나가 봐."
하는 생각마다 기발도 해라. 하내는
오븐을 들여다본다.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오븐 속에서 먹을 수 있도록 익어 가는
칠면조가 하내에게 안도를 느끼게 한다.
남편이 있고 잠자고 먹을 것이 있으며
유명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평범한 생활,
정말 만사 오케이다. 오케이이고 또
오케이이다.
욕실 문이 열리고 언강이 나온다. 타월로
탁탁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낸다. 오븐
앞에 꿇어 않았던 하내는 일어난다. 타월
장을 연다. 발 끝을 올리고 제일 윗
선반에서 비치타월을 꺼낸다. 언강은
그것을 발밑에 던지고 그 위에 올라선다.
"그 동안 여자를 못 봤어."
언강은 하내를 끌어당긴다.
식탁에 굵은 초가 타고 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언강과 하내의 그림자가 방 벽에
일렁거린다. 먹고 마시고 남은 음식도
계곡처럼 그림자를 여기저기 만들어 본래의
하내는 식탁 위에 놓인 언강의 담배곽을
집어 든다. 담배 하나를 꺼내 문다. 반쯤
일어서서 촛불에 불을 붙이려 한다. 술이
취하여 촛불이 둘로 셋으로 보인다.
흔들흔들하는 하내를 보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언강이 웃는다. 치직 하내의
머리카락 두어 올이 탄다. 마침내 담배에
불이 붙는다. 하내는 도로 앉는다.
"담배 한 모금 빨고 눈감고 가만 있어
봐." 언강이 말한다.
하내는 연기를 물고 눈을 감는다.
"뭐가 보여?"
눈앞에 빨간 점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난 연기가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게
왜 나는 안 보이는가, 하내는 자기도
언강과 똑같은 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플로리다에서 말이야, 벌거벗고
운전하면 순경이 쫓아와 마리화나 뒤지고
그래."
"벌거벗고 운전했어?"
"응, 나 옛날 플로리다 살 때 민희란
여자가 있었어. 중국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이번에 찾아가 보니 없었어."
질투를 아프게 느끼며 하내는 가만히
있는다.
"거기 살 때 말이야, 엄마는 내가 거기서
대학다니는 줄만 알았지. 거기는
시골이라서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다 나가.
아파트가 텅 비어. 주말이면 지루해
죽겠는거 있지. 아파트 앞 채양에 나가서
하내는 안다고 대답한다.
"거기 부대에 주둔해 있는 한국인들이
있었어. 김치 먹고 싶으면 가끔 와. 거기
충청도 출신 군인이 있었는데 괌에서 왔대.
장가도 가고 애도 있대. 하도 여자를 못
봐서 죽겠다고 그래서 민희를 데리고
나가라고 그랬지. 그리고 민희한테 한 번
만나서 얘기도 하고 밥도 해 주라고
그랬어."
"왜 그랬어? 질투가 안나?"
언강은 좀 생각하다가,
"질투가 났지, 그런데 어떻게 해. 그
군인이 정말 여자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걸. 민희가 군인하고 나간 날 나는 민희
애기 봐 줬어. 민희한데 너무도 예쁜
튀기딸이 있었어. 해피라고. 애를 데리고
떨어지니까 그러는지 잠을 통 안자. 거기
비행장이 있었어. 애가 하도 안 자서
창가에 데리고 서서 밤새도록 비행기 뜬다
봐라, 저기 간다 봐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놈이 나쁜 놈이야. 내가 형형 하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나중에 민희를 막
유혹했어. 민희 일 끝날 때쯤해서 내가
민희 데리러 식당에 가면 이놈이 먼저 와
있는 거 있지."
하내와 언강은 같은 나이이다. 하내가
삼십 이 일 먼저 났다. 하내는 삼십 이 일
먼저 난 것이 아니라 삼백 이십 년 먼저 난
것만 같다.
하내는 일어난다. 담배를 비벼 끈다.
식탁 위의 접시를 싱크대로 옮긴다. 컵
당신이 다정하면 세상이 내 발 밑에
당신이 냉정하면 난 가엾은 거지
당신은 날씨 무책임한 날씨
당신이 비 내 내리면 난 우산을 펴요
당신이 눈 내리면 난 덧옷을 입어요.
종이에 써서 하내는 침대머리에 붙인다.
여행의 피곤을 한꺼번에 안고 언강은 깊이
잠들어 있다. 하내의 블라우스 앞은
설겆이로 젖어있다. 하이힐을 신어야만
언강과 맞게 되어 있는 나의 키 -- 그
하이힐의 작은 차이를 메울 길은?
철망을 쳐두른 네모 반듯한 놀이터에서
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다. 겨울 햇볕이 연한 그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빛난다. 맑은 햇살 사이를 쌀쌀한
바람이 누빈다. 공터 앞 인도에 비둘기떼가
우 모여 앉는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쪼아 먹는다. 차도에는 차들이 전부
오른쪽 방향으로 달려간다.
택시가 한 대 온다. 길 옆에 스릇
멎는다. 문이 열린다. 하내가 내린다. 몸이
먼저 나와 꽤 큰 여행가방을 꺼낸다.
하내가 차문을 닫는다. 택시가 떠난다.
하내는 백을 어깨에 메고 여행가방을 한
손에 든다. 집을 향해 걷는다. 헐벗은 겨울
가로수가 뒤로 밀려난다. 목에 감은 길다른
출렁거린다.
하내는 아파트 건물 앞에 선다. 언강이
있으려나? 하내는 층계를 천천히 오른다.
계단은 늘 고즈넉하다.
층계를 오르다 하내는 고개를 들어본다.
언강이 보인다. 스웨터 입은 팔로 팔짱을
끼고 집 아파트 문에 기대어 서 있다.
"나야."
하내의 목소리는 층계 전체에 울려
퍼진다. 언강은 하내를 보고 조금
멈칫하다가 시선을 발께로 던진다.
"가방 좀 받아 줘." 하내가 말한다.
언강이 문에 기대었던 두툼한 등을 뗀다.
층계를 투더덕 투더덕 운동화발로 뛰어
내려온다. 그의 발소리가 층계 전체에
메아리져 울린다.
이빨로 물어 두 손의 장갑을 벗는다.
그것을 코트 주머니에 찌른다.
"전화로도 말했지만 차가 고장이야.
택시가 금방 있었어."
"응, 그런데 어디 아파?"
"아니."
그들은 아파트로 들어간다. 일주일 동안
비웠을 뿐인데도 하내는 자기 아파트가
낯설다. 생각보다 청결하고 길죽길죽 서
있는 듯 느껴진다. 진력나던 부엌 살림이며
가구가 모두 질서 있어 보인다.
사열대장같이 집 안을 들러보며 하내는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한다. 안도가 온다.
하내는 코트를 벗는다. 옷걸이를 꺼낸다.
거기에 코트를 건다. 길다란 머플러를 그
위에 또 걸쳐 건다.
말한다.
"응 운동했어. 운동했으니까 집이랑
깨끗했지. 그 동안 술도 안 먹고 과일 많이
먹고. 이거 봐, 이거 만져 봐."
언강이 팔뚝을 내민다. 하내는 스웨터
위로 솟사오른 그의 알통을 만져 본다.
하내의 손 밑에서 근육이 울끈불끈
움직인다.
"운동하는 데 가서 무거운 거 번쩍 들고
거울을 보면 얼굴이 시뻘개져 있어. 그
얼굴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 아, 이렇게
순진한 내 얼굴도 있구나 싶어. 거기
프로페셔날들도 운동하러 오거든. 그런데
운동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 있지,
운동하기 전에 한참 앉아서 생각하고 남들
하는 거 보고, 그렇게 한참 관찰하다가
운동하면서 생각한다는 말이 우스워서
하내는 웃는다. 언강은 웃지 않는다.
"그 사람은 다른 데는 다 좋아. 정말
미스터 유 에스 에이감이야. 그런데 배가
약간 나왔거든. (언강은 자기 배에 손을
대어 보인다) 배운동은 크게 하면 안
되거든. 그걸 그렇게 한참 생각하는 거야."
"근데 왜 울상이야?"
언강이 앉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낮춘다.
하내는 맞은 편 소파로 걸어간다. 그
밑에서 슬리퍼를 꺼낸다. 슬리퍼를 신는다.
한 무릎을 소파 위에 얹고 커튼을 조금
들춰 밖을 내다본다.
"오늘은 날씨가 많이 풀렸어." 하내는
말한다.
"시카고는 눈이 얼마나 왔는지 몰라.
논문만 쓰면 학위를 얻는대. 한 사람은
영어로 공부해서 박사가 될 판인데 나는
보통 쓰는 말도 못하잖아."
문득 언강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하내는
하던 말을 멈춘다. 창에서 얼굴을 돌린다.
"이봐, 니가 떠난 다음에 난 조금도 니가
안 그리웠어."
하내는 안 그리웠다는 것을 그리웠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부부인 사이에 그 말을
저리도 심각히 할 게 무언가 싶다. 언강은
계속 말한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생각이 안 날 수가
있을까."
하내는 그제야 언강의 말이 바로 들린다.
"우리 일년 반이나 붙어 살았지. 신혼도
아니고 결혼은 로맨스가 하나도 없는
있어."
하내의 말은 나직하고 느리다. 명랑하게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그렇게 침통히
나온다.
"난 쇼크야, 어떻게 내가 그럴 수가
있지? 정말?"
실망을 실어 언강은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이런 나하고 살다니 참 안 됐어. 너는
어디 가서 귀염받고 살 수도 있는데."
언강은 진심으로 하내편이 되어 그녀의
남편인 자신을 바라보는 듯하다.
"나는 한 번도 귀여워 본 일이 없어."
하내는 말한다.
언강은 가만 있는다.
"결혼은 해 있을 생각이야?" 하내가
"응, 나는 가정적이지. 그렇지 않아?"
언강의 말에 하내는 웃는다.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어?"
"누구?"
언강은 하내가 점지해 주는 여자가
누구인가 진정 알고 싶은 얼굴이다. 그
여자가 누구이든 그 여자와 살고 싶은
얼굴이다. 하내는 잠시 말이 막힌다.
"누구든지. 저 뭐 민희라고 했던가, 또
주유소 집 딸 셋에다가 꽃무늬 치마
입었다던 여자 (그 여자가 바위에 기대서서
날 기다리는데 바람에 치마가 하르르
날리는 게 그렇게 좋은 거 있지) 너무
많아서 들었는데도 다 생각 안 나. 아니면
아직 안 만난 여자 중에 아무나하고
라던가?"
독신으로 살 수는 없어. 육체적으로라도.
또 독신이면 다른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피곤해. 그렇지? 돈도 너무 들어."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은
해 있고 싶고 나랑 그냥 살지."
"너한테 불공평해."
하내는 무릎에 깍지낀 손을 푼다.
일어난다. 언강 앞으로 간다. 무겁게
팔걸이에 놓인 언강 손을 잡는다.
"그럼 이혼하는 게 나한테 공평해?"
하내는 언강 의자 앞 바닥에 앉는다.
언강 다리에 머리를 기댄다.
"남편한테 연애하는 여자 얘기 들어
봤어? 나야 나."
좋은 아내로서 자기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하내의 소망이 고개를 든다.
그런지 하내는 언강이 좋아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좋은 아내로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소망 때문인지 분명치 않다.
하내는 자신도 모르는 새 세상이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역을 하려 애쓴다. 할 수
있는 일도 연약해서 못하는 척하기도 하고
세상이 여자에게 원하지 않는 자신의
요소를 감춘다. 어느덧 의식과 행동 사이는
쉽게 분리되지 않고 아리송해진다.
하내는 자기가 언강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웃음은 언강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자신도 모르게
되었다.
언강이 하내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세례라도 주는 것 같다.
있었는데 그 불만이 아직도 있는 거 있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불만."
좀 쉬었다가
"언제나 가는 사람은 좋은 거야, 그거
알아?"
언강이 말한다.
[10]
학생들 데모 때문에 대학은 휴강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우진은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염려말고 자고 가도 돼."
우진이 말했다.
견주는 가만 있었다.
공부하다 말다 보냈는데 아직도 계속
이러고 있으니 슬픈 나라지. 사실 그런데
대학생 때 뭐 아니, 나는 공부 안 하면
좋기만 하고 그랬어. 시험 때가 되면
어디서 데모 좀 안 하나 궁금해지고."
하내가 말했다.
대학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직까지도
하내는 세상과 자기와 연관을 못 맺었다.
"난 반대로 생각해. 나는 대학 들어갔을
때가 내 일생에서 제일 성숙했던 것 같애.
밤잠도 안 자고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라 부모들이 성화댔지, 공부방을
따로 만들어 놓고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면 뭐가 되는 거
같았자.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인제 공부 그만하고 동양화
키우라고. 여자니까 공부는 더 할 필요가
없고 그림도 그냥 취미로 그쳐야 하는
거야. 졸업 때는 뭐가 뭔지 완전히 혼란
상태야. 남학생들도 그럴까?"
"나는 오늘 밤 서울로 갈 테야." 탁이
말했다.
"왜? 잘 데가 이렇게 많은데. 하내는
우리 딸하고 같은 방에서 자고 탁이는 여기
소파에서. 이 소파가 이래 뵈도 잘만 해."
우진이 말했다.
"출근 때문에 안 되겠어."
"하루도 못 빠지나?"
"응."
"그렇다고 지금부터 일어설 건 없잖아.
아직 여덟 시야."
"미국은 참 통행금지가 없지?" 견주가
"응, 그렇지만 밤이 되면 다 자고 별
다른 건 없어. 단지 여기 온 지 며칠 안
되어서인가 열 두 시가 넘으면 안 된다고
버스니 택시나 막 달리니까 날만 어두우면
불안해."
"언제 간다고 했지요?" 탁이 물었다.
"오는 이십 팔 일이요."
"아유 금방이네, 사흘 남았나?" 교수
부인이 손가락을 꼽았다.
"혼자 산다면서 뭐하러 도로 가. 여기서
친구도 보고 고국의 진한 맛을 보고 살지."
우진이 말했다.
"우리도 공부 끝나고 처음 귀국했을 때
택시들 달리는 게 참 무서웠어요." 교수
부인이 말했다.
"그렇지만 거긴 또 다른 게 무섭고 다
인종이 모여 사니까."
"참, 그렇다지요. 우리 아는 사람은 야채
가게 하다가 권총 강도 만나고선 미국이
좋다지만 내가 여기서 이러고 살게 됐냐고
보따리 싸 가지고 도로 왔어요."
"너는 가게 혼자 한다면서 괜찮아?"
우진이 물었다.
"인희 고모 있지? 그이가 미국 갔다가
너를 만났다면서 한국사람들이 가게를 많이
하더라고." 견주가 말했다.
"무슨 술이 제일 비싼가요? 난 미국 있을
때 씨그람 진이라는 것을 많이 마셨지."
교수가 말했다.
"그게 많이 나가요."
"값도 안 비싸고, 조니워커보다 훨씬
싸지요?"
"어떻게 가게를 할 생각을 했어?
남편하고 시작했었나?" 우진이 물었다.
"아니요."
언강이 죽고 난 후 언강의 모친이
하내에게 가게를 사 주었다. 좋은 주택지에
자리잡은 작고 아담한 술가게였다. 잔손이
안 가고 편하다고 해서 술 가게가 되었다.
처음에는 경험이 있다는 언강의 친척과
함께 하다가 이 년 전부터 하내가 혼자
맡아 하였다.
"권총 강도 같은 일은 없었겠지?" 견주가
물었다.
"응." 하내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권총이 아니고 칼을 가지고 들어왔으므로)
"그래도 무섭니 않니?"
"가게를 팔았어."
또 두려움이 가게를 팔게 하였다. 강도
같은 구체적인 것보다 막연한 두려움이
하내를 끌고 다녔다. 언강이 죽고 난 후
여기 이 자리에서 이것을 안 하면 하내는
무엇을 할지 몰랐다. 낯선 것은 우선 전부
의심쩍고 두려웠다. 그러다가 죽을 때까지
여기 이 자리에서 이것만 할까봐 또
두려워졌다.
문쪽이 잠시 인기척이 나는가 하더니
벨이 조심스럽게 울렸다. 우진이 일어나서
문께로 갔다.
"누구시오?"
"저예요, 길수."
작은 소리인데도 알아듣고 견주가 튕기듯
일어났다.
"웬일일까 이 밤중에."
먼저 문을 열었다.
"웬일로 갑자기."
"들어와 추운데."
갈래요,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하는
목소리가 섞갈려 들렸다.
방 안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문간을
바라보았다. 먼저 키가 큰 소년이 들어오고
이어 멈칫거리며 먼저 소년의 어깨에나
키가 닿는 소년이 꼬봉같이 따라들어왔다.
그들에게서 비냄새가 났다.
"웬일로?"
견주가 작게 길수라는 소년에게 물었다.
근심스럽게 들렸다.
"비가 오나 밖에?" 탁이 물었다.
"네. 조금 빗발이 돋더니 지금은
그쳤어요."
홀쭉한 청바지 다리 위로 잿빛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베이지 빛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눈썹이 짙고 눈이 검고 컸다.
"이렇게 말하면 알는지, 얘가 길수야."
견주가 하내에게 말했다. 하내는 그가
견주가 다른 데서 낳은 아이임을 알았다.
길수라는 이름은 몰랐지만 견주의 어조며
태도가 그렇게 알게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내는 그들 졸업 당시에 임신이던 견주가
아이를 어떻게 했는가 알고 싶었었다.
"참 잘 생겼네. 몇 살이지?" 하내가
말했다.
"열 네 살예요."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매력을 아는
태도였다. 이 잘 생긴 나를 당신이 어찌
싫다 하겠소 하는 그룹에 그가 속한다고
"열 네 살인데." 교수 부인이 감탄했다.
"요새 아이들은 모두 크지." 교수가
말했다.
"암만 그래도 열 네 살인데." 교수
부인이 말했다.
"앉지 그래. 뭐 저녁은 먹었나?" 우진이
말했다.
"네."
길수는 하내 옆 빈 자리에 앉으며 "너도
앉아." 같이 온 소년에게 말했다. 같이 온
아이는 길수와 달리 용모도 입은 옷도
거칠었다.
"오빠 왔어?"
방에서 혜원이 나왔다.
"저, 엄마 시간이 없어."
하며 길수가 금방 앉았던 자리에서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견주가 혜원과
길수를 데리고 저편 방으로 들어갔다.
견주는 우진의 기색을 살피며
어려워하였다.
함께 온 소년은 따라 일어나려는 듯
하더니 엉거주춤 앉았던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11]
"산부인과 닥터 장"
읽으며 하내는 벨을 누른다. 하내가 벨을
누르는 옆방은 치과이고 그 옆은 내과 또
그 옆은 외과 닥터 오피스들이 복도
양편으로 죽 늘어서 있다.
풍만한 중년 백인 여자이다. 소독약에 담근
듯 청결하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사무적으로 상냥하다. 그의 사무적인
태도는 누구에게나 건조하고 기분 좋게
느껴진다.
하내는 아무 자리나 빈자리에 앉는다.
오늘 닥터 장은 애기를 받은 모양으로
대기실 안에는 여자들이 많이 앉아 있다.
예약 시간을 오래 넘겨 기다린 분위기를
풍기며 여자들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일본
부인잡지들이며 한국 여성지들을 넘긴다.
영문으로 된 의학팜플렛 같은 것도 몇 개
있다.
몇 여자들은 당장이라도 책가방 메고
학교 가야 할 아이를 낳을 것 같은 커다란
배를 하고 있다. 그런 큰 배를 하고 앉은
붙어 앉아 성가시게 한다.
대기실은 어느 가정 집의 거실처럼
안락하게 꾸며져 있다. 램프니 탁자 소파가
묵중하고 천정에 매달린 화초들이 싱싱한
잎을 뻗고 있다. 화초가 너무 싱싱해서
모조품이 아닌가 의혹을 일으킨다. 배가
홀쭉하고 화장기 없는 여자가 일어나서 그
잎을 만져 본다. 화초를 가꾸며 사는
여자인 것이 그 손놀림에서 나타난다.
구석에 놓인 안테나를 길게 뺀 라디오에서
경음악이 나지막하게 들릴듯 말듯 흐른다.
여자들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안 불린
여자들은 고개를 들어 진찰 들어가는
여자를 본다. 배모양을 살피고 저 여자는
무엇 때문에 왔을까 한 번씩 생각을
해본다.
그 친밀한 행동에도 사무적인 분위기가
있다.
"닥터 장은 오늘 늦게 퇴근하시겠어요.
애기를 받았어요."
"알아요, 괜찮아요."
"오라잇."
간호원은 안으로 들어간다. 닥터 장이
요새는 오진을 많이 한다고 옆의 여자가 또
옆의 여자에게 말하는 소리를 하내는
듣는다. 하내는 한국말은 알아듣고
일본말은 못 알아듣는다.
대기실의 여자들은 전부 동양 여자들로
대개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들이다. 닥터
장은 일본 사람과 결혼한 한국 여자이다.
닥터 장의 일본인 남편도 의사이다. 닥터
장은 언강의 모친이고 하내에게는
여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가더니 드디어
대기실에는 하내 혼자 남는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지책들을 하내는 한 곳에 모아
놓는다. 마지막 환자를 보내며 닥터 장이
대기실 입구에 모습을 나타낸다. 잔주름진
얼굴이 예쁘장하고 키가 작은 여자가
언강같이 큰 아들을 낳고 닥터 오다에게서
넷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다.
"어떻게 왔어?"
"그냥요. 퇴근길에 들렸어요."
닥터 장은 가운을 벗고 구두를 갈아
신는다.
"어머니 인제 저한테 돈을 주지 마세요."
닥터 장은 간호원에게 먼저 가라고
말하고 하내에게로 돌아선다. 하내는
다시 말한다.
"왜?"
"어머니가 주시니까 언강은 어디 오래
붙어서 일하지도 않고, 언강도 그래요.
적어도 엄마가 없었다면 자기는 공부라도
했을 거라고."
닥터 장이 잠깐 씁쓸히 웃는다.
"제가 돈이 있다고 알면 언강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지려고 해요. 자꾸 싸우게
돼요. 언강은 어젯밤에도 열 한 시나 돼서
들어와서 목욕하고 옷 갈아 입고 콜론을
온몸에 뿌리고 어머니가 어제 준 돈 가지고
나갔어요."
옷 갈아 입은 간호원이 인사하고 떠난다.
잠시 침묵이 한 남자로해서 맺어진 두 여자
사이를 가른다.
"그 돈을 다?"
닥터 장이 소파에 앉는다. 팔걸이에 손을
얹는다.
"나는 밤에 누워서 언강이 생각을 많이
해. 언강은 언제나 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나는 몰라, 못 말리겠어."
"저도 못해요."
"나는 언제나 걔한테 가깝게 가서 안아
주고 싶었어. 내가 모르는 다른 방법으로
내 사랑이 걔 가슴에 닿도록. 갓났을 때 참
귀여웠지. 그때도 더 잘 안아 주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른다는 생각이었지. 나는
팔잔지 직업을 가지고 살림을 살고 또 걔
어릴 때는 정식 의사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해야 됐었지. 내가 바쁘지 않을 때 내가
피곤하지 않을 때 아이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 주리라고 별렀지. 놀이터에도 데리고
가고 장난감도 같이 놀아 주고 싶었어.
그러나 언제나 피곤했어. 내 이혼도 나쁜
영향을 미쳤겠지. 어느새 아이는 떠나가지.
가지마 하고 외치고 싶었어."
"언강이 말했어요. 가는 사람은 언제나
좋은 거라고."
하내는 밖에 나가 잔 언강을 생각한다.
집에 다시 못 들어오도록 새 자물쇠를
철커덕 문에다 달아 버리고 싶다.
[12]
조금 후에 견주가 길수를 앞세우고
방에서 나왔다.
"얘 간대요." 견주가 우진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신발을 신었다.
"왜 가? 자고 가지." 우진이 길수에게
말했다.
탁이 일어났다.
"나도 가야 돼. 같이 가지."
탁과 함께 길수 일행은 떠났다. 교수
부부도 반찬을 가져 왔던 빈그릇을 들고
함께 떠났다. 하내는 남았다. 우진뿐
아니라 견주도 이번에는 함께 자고 가라고
만류하였다.
"이번 금요일에 미국 간다면서 오늘 가면
언제 또 보겠니."
하내와 견주가 함께 그릇을 씻자 우진이
사양하듯 침실로 들어갔다.
"자, 대강 씻었지. 이 정도로만 하고
우리 차 마시자."
유리 주전자 안에서 이미 끓고 있던 물이
팔그르락 팔그르락 용솟음쳤다. 견주가
홍차를 만들어 쟁반에 담았다.
"이리 와 앉아."
"이건 혜원이 그림이니?"
견주를 따라가려다가 하내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어린애 그림을 가리켰다.
"응."
"참 잘 그리는구나. 너 자랄 때 같은가
봐."
하내는 견주가 시키는 대로 차탁자로
가서 앉았다.
"여자애가 공부 잘하면 뭐 하니? 혜원이
아빠도 그래. 혜원이 공부 많이 시킬 필요
없이 곱게 키워 시집 보내자고."
"어마, 우진씨가 그렇게 말하는 건
시오!"
그럼 뭘 하란 말이니."
"그렇지만 생각해 봐. 그게 여자한테 더
친절하잖니."
견주가 만든 홍차는 레몬과 설탕을 많이
넣어 젤리처럼 시고 달았다. 하내는
맛있다고 생각했다.
"욱씨는 더러 만나니?"
"아니, 길수 때문에 일 년에 두어
번쯤이나 전화하지. 욱씨는 지금 잘 살아.
몇 번 기복이 있었지만 사업가라는 거지.
부인이 무슨 미인대회에 나갔던 여자고.
그런데 길수 때문에 걱정이야. 봤지?
오늘도 한바탕 집에서 우당탕하고 나온
모양이야. 내일 학교도 가야 하는 애가
글쎄 여길 오면 어떡하니. 걔네 집은
서울이거든. 돈 달라고 온 거야. 툭하면
우진이 욕실이며 방 근처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거실에서도 느껴졌다. 하내는
우진이 와서 함께 앉았으면 싶었다.
이쪽편을 흘끔흘끔 보는 것이 견주가
오라고만 하면 우진은 당장 와 앉을 것
같았다.
"어떤 여자가 캘리포니아로부터 언강을
찾아 왔던 일이 있었어. 남의 차 얻어 타
가면서 스리핑 백 하나, 칫솔 하나, 칼
하나 가지고 두 주일 걸렸대. 칼은 과일
깎는 칼. 뭐 깎아 먹을라고."
"대담하다. 부인 있는 줄 몰랐었겠지."
"몰라, 놀라는 거 같지도 않았어. 한인
교포 주소록에서 찾아가지고 왔단다.
언강은 또 어디론가 떠난 후고 갈데 없다는
그 여자를 이틀 재웠어."
"하루 재울래다가 이틀 재웠어. 아프대.
미워서 혼났어. 막 구박했어. 그 여자
자궁이 뭐든지 삼켜 먹는 젤리휘시같이
느껴지겠지. 그 여자뿐 아니라 그때는 이
세상 여자가 전부 뻘겋고 번질거리는
자궁을 가진 동물들 같았어."
"그건 니 탓만이 아니야 니 남편
태도하고도 관계가 돼."
"그 여자는 정신이 헤성헤성하고 저만
생각하고 예쁘지도 않더라. 저는 잘 마셔야
기운을 차린다면서 우유도 한 통씩을
한꺼번에 다마시고 고기도 그렇게 먹더라.
그런 여자를 유혹한 언강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어. 너무 화가 나니까 몸이 다
떨리더라. 그렇게 먹는 거 보면서 정말
아래로 위로 뭐든지 다 삼키는구나 했다."
"언강은 가끔 권태로운 얼굴로 말을
했어. 자기는 뭐를 해야 좋을지 모른다고,
뭐가 좋은지 모르겠고 그저 여자하고
지내는 거보다 더 좋은 재미가 뭔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그럴 때 나는 분명
여자는 아니지?"
"그렇구나 참."
한참 기척을 내고 돌아다니던 우진은
이제 단념했는가 자리에 든 모양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진의 주의를 끌고 싶어서
하내는 높은 음성과 높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13]
쇼핑 백과 과일 칼을 들고 찾아왔던 여자
때문에 하내는 이혼하려고 생각하였다. 꼭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 아 이젠 끝내는 게
좋지 않아 하고 생각하였다. 그 폭풍이
지난 후 그들은 여행을 갔다. 시어머니인
닥터 장의 소유였다. 별장은 숲속에
등대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닥터 장이
일본인 남편과 주말이나 휴가 때 시간을
내어 손수 지은 집이었다.
숲 사이로 어둠이 서리기 시작하고
강으로 나간 언강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림처럼 하내는 창에 기대서 있다. 숲으로
밀리는 어둠을 바라본다. 별이 하나 둘
돋는다. 벽난로에 지핀 장작이 잘 타고
있건만 하내는 가벼운 한기를 느낀다.
하내는 주의 깊게 살피며 오늘 하루 종일
그가 자기를 내버려 둔 데 대해 크게 화를
내리라 생각한다. 두려움 없이 화를 내자
하내는 다짐한다.
인기척을 낸 그는 그러나 낯선 부랑자다.
백인이다. 머리에 허연띠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어스름 속에 흰빛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가 키가 크고 몸이 크다는 것
이에는 어둠이 가려 잘 살펴볼 수 가 없다.
하내는 문 빗장들을 다시 한번 잘 보고
창문들도 잘 닫혀졌는가 본다. 무섭다.이런
때 혼자 둔 언강에게 다시금 화가 치민다.
부랑자는 나뭇잎을 여기저기서 두 손으로
집어다가 한 곳에 놓는다. 여러 번
왔다갔다하며 그 일을 한다. 무슨 둥지를
트는 짐승같다.
검불더미에 구부려 대고 후후 입김을 불어
넣는다. 마침내 불이 활활 탄다. 불길은
따뜻해 보인다. 하내는 부랑자의 녹아나는
앞가슴과 시린 등을 느낀다. 부랑자가
일어나 검은 숲에 대고 오줌을 눈다.
그리고 다시 앉는다. 동작이 조용하다.
주머니에서 빵을 꺼낸다. 칼로 잘라
먹는다. 뭔가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반 시간쯤 후 부랑자는 떠나간다. 이미
사그라드는 불더미를 발로 비벼 끄고 그는
총총히 숲속으로 사라진다. 어느새 어둠이
짙다.
산은 어둑하였어
너는 가랑잎을 끌어모았어
거기에 불을 일구었지
처음에는 잘 안 탔어
너는 애썼어
마침내 불길이 일었어
언 손을 쬐고 빵을 먹고 담배를
피웠어(할거 다 했어)
가는 사람은 언제나 좋은 거라고?
가면서 너는 또 다른 불을 여기저기
일구었어
전심전령으로
추워서래, 자꾸자꾸 추워서래(언강은
얼어붙은 강?)
네가 불을 일군 가랑잎(그게 나야)
너는 들어? 괴롭게 온 몸으로 타오르는
내 노래
재로 다 타버리는 내 노래
언강이 돌아온다. 그는 반코트를 벗고
목도리를 풀어 낸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의자에 던진다. 냉장고를 열려다가
냉장고문에 붙인 하내가 쓴 것을 읽는다.
그는 언제나 무엇을 오래 걸려서 읽는다.
평소에 독서를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 이럴
때 나타난다. 마침내 언강은 문가에 버쩡
서 있는 하내에게 고개를 돌린다.
"이게 뭐야? 시라는 거야?"
"뭐 같애?"
언강이 기타를 꺼낸다.
"내가 이렇게도 좋아?"
언강은 마쵸맨으로 자라나고 하내는
자신도 모르는 새 순정 가련형의 귀여운
여자로 작아진다. 언강이 아는 모든
여자들과 경쟁을 한다.
본다. 쾌락을 따르는 그의 손이 기타줄
위에서 움직인다.
"가만 있어, 이 노래를 김세환식으로
할까. 아니 김추자식으로 해보자."
그는 님은 먼 곳에 곡조에다 가사를
맞추려 한다. 몇 번씩 불러 본다.
"에 말이 너무 많다. 곡조가 모자라."
언강이 웃는다.
"맥주 좀 줘."
하내는 언강이
김세환.송창식.서유석.조용필.김추자 여러
가지 곡조에다 자기가 쓴 말들을 맞추어
넣는 것을 들으며 냉장고에서 맥주와
안주가 될 만한 것들을 집어 낸다. 그것을
기타를 든 언강 옆에 놓고 길다른
화젓가락으로 불을 일구기 위해 벽난로
"내가 제일 행복한 때가 언젠지 알아?"
"지금?" 하려다가 하내는
"해변에 있는 거?" 해 본다.
"경마장에 가는 거야. 나는 가만 있는데
말이 달릴 때 그렇게 좋은 거 있지?"
그런 기분을 하내는 음식할 때 느껴
보아서 안다. 자기는 가만 있는데 불
위에서 음식이 익어 갈 때 안도가 오곤
한다. 그는 강에 간것이 아니라 경마장에
갔는가, 돈을 땄는가, 잃었는가, 상관
없지. 내 돈은 아니야.
언강이 기타줄을 울리며 말한다.
"할 수 없이 어디 못 가고 이렇게 있어야
하는 상태, 이게 좋아. 난 장가 갔으니까
어디 못가잖아. 싫으면서도 좋아."
당신이 못 간다고? 당신은 한 번도 내
있기로 한다. 언강이 아는 여자--과거 미래
현재 통틀어서 그중에서 자기가 그에게
제일 귀찮게 굴지 않는 여자가 되어 보자
생각한다. 이혼한다고 큰 씬을 벌이고 난
직후므로 적어도 그렇게 머물러 보려고
노력한다.
"이 노래 들어봐. 서울에서 우리 약혼식
할 때 내가 딴 노래하지 말고 이 노래할 걸
그랬어. 이것도 여자가 가르쳐 준 노래야.
하여튼 걘 이런 노래를 수없이 알아. 끝내
주는 애야."
언강이 노래한다. 흘러간 노래같이
곡조가 구성지다.
영자씨 내 자기씨 몸 성히 성히 성히 잘
있나요
여기에 있는 이 자기는 뉴욕하고도
맨하탄에서
야채 닦는 야돌이라오
노래를 마친 언강이 맥주를 쭉 마시고
말을 한다.
"내가 결혼식할 때 목사님한테 부탁해서
이 무식한 언강을 남편으로 삼겠느뇨 하고
물어보시게 할 걸 그랬어. 그러면 적어도
내가 무식한 데 대해서 너는 할 말 없을 거
아냐."
하내는 웃는다. 저런 사람을 미워해
뭐하리 생각한다.
좋은 아내로 내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싶으니까, 그 외에는 다르게 내보일
아무것도 내게 없으니까 그걸 이루어
가면 갈수록 당신은 더 쫓겨가는 것 같애.
나는 줄에 걸린 인형같이 피곤해. 나도
화낼 권리가 있지. 그렇지만 내가 화내면
당신은 들어주는 게 아니라 도망가. 내가
당신이 뭘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그걸 안 원한다는 것밖에 분명해지는 게
없어.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를 무시하듯
당신은 어떻게 살려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하는 것마다 반대로만 하려 하지. 우리
관계를 어떻게 개선해 가야할지 난 몰라.
내 열등감까지 합쳐서 엉망진창이야. 내
과일을 따 먹을 생각이 아니거든 내 나무를
흔들지나 말어.
기타를 치던 언강이 멈추고,
"나는 지독한 도박꾼이야. 니가 상상도
못할 만큼."
"포커나 경마 이런 거 말고 뭐에든지
승부가 보이면 거기 걸어. 여자들은 보면
다 목적이 있어."
"어떤 목적? 예를 들어봐."
하내는 언강이 말하는 여자에 자기가
포함되는가 아닌가 잘 모르면서 묻는다.
"예를 들면 어떤 여자는 결혼이
목적이고, 어떤 여자는 돈이고, 어떤
여자는 재미를 보기 위해서고, 어떤 여자는
외로와서고, 너는 결혼이 목적이었지."
하내는 언강이 말하는 여자에 자신도
포함되었음을 안다.
"거기 해당 안 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언강 자신도 그 대답을 모르겠는 듯 한참
생각한다.
"응, 그거야 그러." 너무도 기뻐하며
언강이 대답한다.
"순수한 사랑은 그럼 어쩌는 거야?"
언강은 가만 있다가
"나는 한국에 여자애 하나쯤 두고 뉴욕은
눈이 옵니다. 서울은 어떤지요 하고 편지
쓰고 싶었어."
언강의 말에 아 우리 둘은 어쩌면 똑같은
사람인지도 몰라 하내는 생각한다.
[14]
바스락바스락 기척을 내던 혜원이 잠이
들었는가 조용해졌다. 하내는 그 아래층
어린이용 벙커베드, 그 아래층의 나직한
높이가 하내는 불안하도록 답답하였다.
낯선 베개를 고쳐 베려고 고개만 들어도
이마가 침대 천장에 닿았다.
견주가 여기에 하내의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거기 놓여 있던 혜원의
장남감들을 끄집어내자 혜원이 싫다고
불평하였다. 그 옆에 서서 하내는 탁을
따라 서울로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하내는 다른 집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 지
늘 어릿하였다. 어구나 똑똑하다는 우진과
견주의 자식에게 하내는 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분이었다.
딸의 불평을 무시하며 견주는 혜원의
완구인형 같은 것들을 집어 내었다.
"이 침대는 우진 아빠 동료가 준 것인데
비어 있지. 이 침대가 이래 뵈도 참 편해.
가끔 혜원 아빠와 싸우면 난 여기와서
눕는다. 이상하게 편안해져. 너도 곧 알
거야."
견주의 말과 달리 하내는 혜원이 누운
위층 침대가 곧 무너져내릴 것만 같이
불안하였다. 혜원이 돌아누우며 내는
소리도 애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외등 탓으로 커튼을 친 창에 희끄무레한
빛이 들어오고 모든 것이 잠든 밤의 정적은
그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내는 이 조용함에 적응하기 위하여
돌아누울 수도 없는 듯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오줌이 마려운 것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되자 참을 수 없이 오줌이 마려웠다.
그런데 욕실은 우진 부부 방 옆에 있었다.
가는 것은 외설스럽고 미안하였다.
자기가 마신 물의 양을 하내는 생각해
보았다. 자리에 들기 전 견주와 마신 두
잔의 홍차가 마음에 걸렸다. 오줌이
마렵다는 것은 신경 탓만이 아니라 실제로
홍차가 지금쯤 방광을 채우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홍차가 담겼던 둥글고 큰
찻잔이 떠올랐다. 미술대학 학생이 직접
빚어 구웠다는 두툼한 찻잔은 국그릇 만큼
컸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방광은
풍선같이 부풀어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젠 정말
생리적인 문제였다.
하내는 몸을 굴려 침대를 빠져 나왔다.
그렇게도 납작하게 몸을 굴린다고 했건만도
어깨 한짝이 위층 침대를 아프게 스쳤다.
깼는가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기척 없이 그냥 곤히 자고
있었다. 하내는 도도한 이 계집 아이에게
질투 같은 미움을 불현듯 느꼈다.
하내는 어디다 조용히 오줌을 눌 만한
데가 없는가 하고 방 안을 휘이 들러
보았다. 장난감이며 책상 같은 낯선
물건들이 커튼을 비치는 희뿌연 빛 속에
이상하게 떠보였다. 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노는 플라스틱 물통 같은 것도 안 보였다.
하내는 용기 찾기를 단념하고 발소리를
죽여 욕실로 갔다. 살인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너무도 조심히 움직였건만 어떤
행동도 다 소리를 동반하였다. 드디어
욕실, 하내는 어두운 벽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음껏 오줌을 누었다. 시원히 오줌을 누며
생각했다. 우진을 만난 오늘 하루 십여
년을 성큼 하루같이 당겨 놓았던 은밀히
오갔던 정다운 시선, 따뜻한 정감 같은 것
그것을 다 깨고 가느라고 여기서 자는구나.
이게 바로 나란 거지, 생각하였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하내는 학교에
갈 것이다. 가게를 팔고 하내는 대학에
등록하였다. 지난 생일 날 사촌오빠와
헤어진 후 하내는 자신에게 자꾸
물어보았다. 내가 뭘 원하나, 내가 뭘 하고
싶어하나, 그 대답을 알기만 하면 어디서
시작해야 될지를 알 것 같았다. 언강의
사진을 품었던 졸업 무렵 같았다. 그러나
하내는 그때 보다 더 두려웠다. 그때는
그래도 세상을 어떻게 가질까 했으나
이제는 안다는 느낌이었다. 졸업식에서
반드시 좋은 아내여야만 하는가 하내에게
의혹이 일었다. 한 번도 공부를 좋아해 본
일 없는 자신이 대학에서 어떻게 변모되어
나올지 하내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쁜 결말은 너무도 많았고
새로운 시작은 너무도 적었다. 가끔씩
악성독감에 걸리듯 사랑에 빠졌다. 허우적
헤어나오면 현실은 의무만이 가득 찬
낯익은 빛깔로 다가들었다. 하내는 우진이
들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오줌소리를 큰
귀로 들었다. 밤에 깨면 왜 이렇게
절망스러운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낄
만큼 죽음이 무서워지는가.
하내는 물을 틀까말까 하다가 틀어
버리고 욕실을 나왔다. 폭포같이 크게
들리는 물소리가 하내의 등어리를
혜원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가에 서서
하내는 한동안 망설였다. 또다시 좁은 공간
속으로 몸을 굴려 들어가기는 싫었다.
하내는 자기가 베었던 베개와 담요를 안아
가지고 아까 견주와 차를 마시던 거실
쇼파로 갔다.
그곳에 드러누었었다. 거기는 또
이상하게도 움푹 꺼진 것같이 느껴졌다.
너무 푹신하고 움푹 꺼진 것 같아 하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 자기는
틀렸다. 하내는 생각했다. 같은 집에
잠들어 있는 우진을 생각해도 하내는
조금도 가슴이 설레지가 않았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하내는 꿈을 주는
사람으로 우진을 정해 놓았다. 언강과 사는
동안에도, 또 그 후에도 집을 어지르고
지금 이 순간 여기를 들른다면--하면
그것은 채찍 같은 효과를 내었었다. 그렇게
하내를 이끌어가던 우진이 이제 한 지붕
밑에 있건만 하내는 어서 날이 밝아 이
집을 떠나고만 싶었다.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으로.
잠을 청하려고 하내는 눈을 꼭 감았다.
너무 힘주어 감은 것 같아서 다시 눈을
떴다가 살짝 감았다.
발소리가 나더니 다가온 것은 견주였다.
"왜 여기 누웠니, 안 졸립거든 우리 방에
가서 같이 얘기할까?"
"너도 안 잤었니? 아니면 나 땜에 깼니,
내가 부시럭거렸지?"
"난 안 잤었어, 혜원 아빠도."
견주의 음성은 가라앉은 채 갈라져
"이리 올래?"
견주의 제안에 하내는 그냥 여기서
잘테야 하고 거의 말할 뻔하였다. 하내는
거의 나올 뻔한 그 대답을 누르고
"그럴까 그럼?" 베개를 안고 일어났다.
우진을 가운데 하고 하내와 견주는 각각
누웠다. 이상하도록 침묵이 깃들고 세
사람은 똑바로 천정을 보고 있었다. 내가
온갖 환상을 다 깨뜨리고 가는구나, 하내는
다시 생각했다.
"얘기 좀 해. 아무 얘기나." 가운데 누운
우진이 말했다.
"무슨 얘기를 할까." 견주가 말했다.
견주의 말에 우진도 하내도 웃음소리를
예의같이 내었다. 곧 이어 허공에 나부끼는
"동네가 너무도 조용하다. 나 사는 데는
그래도 밤새도록 뉴욕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거기서 나는 늘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으면 싶었었다. 손님을
청하면 너무 번거롭거든. 가게 닫는 일요일
같은 때 그냥 누가 들려 줬으면 싶었었지."
하내가 말했다.
"이런 얘기해도 괜찮은지. 아까 왔던
교수 부부있잖어. 그이들이 사실은 니 남편
죽인 여자 있지. 그 여자하고 무슨 일가가
된대. 네가 온다니까 보고 싶다고 해서
오늘 같이 지내게 된 거야. 아까부터 묻고
싶었어. 니 남편 죽인 여자가 슬리핑 백
들고 대륙횡단한 여자니?"
"아니야, 딴 여자야."
"뭐하러 그런 얘긴 꺼내?" 우진이
"괜찮아요. 어떤 여자가 언강을 쏘아
죽였다고 했을 때 나는 내가 죽인 것
같기도 했었어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어지니까 어떤 때는 그가 없는 게 낫다
했었으니까. 매일 그를 안 보는 게 낫다
싶고. 몰라, 안 보는 게 괴로웠지만 또
얼굴을 보고 괴롭고 여러 가지 괴로운 일
생각나는 게 더 괴로웠었거던."
언강은 이제 화제거리로 그들 앞에
떠올랐다. 하내는 우진 앞에 고자질하는
아이 같았다.
"그 사건은 여기서도 꽤 오래 얘기가
됐었다. 맹목적으로 미국이 좋다고 그냥
결혼해서 간 그런 결혼의 예로서도 네가
많이 들먹거려지고." 견주가 말했다.
"그랬었구나. 난 통 몰랐지." 하내가
"그런데 너희 시어머니가 훌륭하다며, 박
교수 부인이 그러더라."
"응, 며느리인 나한테도 시어머니보다
여자대 여자로 대하려고 했어. 내가
이혼하고 싶어 하면 하내야 방이 있어야
걔는 돌아와 내게 애걸했지. 언강은 친구나
적이나 누구한테서나 사랑을 받으려고
했어. 교통위반으로 딱지 떼러 온
순경까지도 미스터라고 불러 끄는 기술이
있었지.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사람을
대했어. 어떤 여자한테든지 세 마디가
오고가기 전에 벌써 반말을 했어. 언강을
죽인 여자는 동정을 많이 샀어. 그 여자가
법정에서 언강을 죽이기 위하여 총을
샀다고 했을 때, 그것이 이상하게 사람들
가슴을 아프게 했어. 그렇게 말 안 하고
형이 훨씬 가볍단다. 그 여자는 아주
조그매. 애같이 작아. 언강은 키 큰 여자가
좋다고 했었는데, 나한테는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작은 여자도 좋아했었나
봐."
문득 우진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는
견주 이마에 입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하내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짧게
스치듯 했다.
"이제 자자. 자, 이걸로 잠들기야."
하며 우진이 일으켰던 고개를 똑바로
베개로 떨더뜨렸다. 이미 새벽이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내가 온갖 환상을 다
깨뜨리고 가는구나, 하내는 다시금
생각했다. 나는 어떤 신비도 지탱해 내지를
못해.
언강과 즐길 수 없으니까 심술나서 같이
있기도 싫고 몸이 닿기도 싫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하기 싫었지. 가끔 내가 언강을
죽인 게 아닌가 싶어져."
"아이 무슨 말을." 견주가 말했다.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우진이 하내의 손을 견주 모르게 더듬어
쥐었다. 그 기척을 알기나 하는 듯 견주가
"너 탁씨 어떻게 생각해?"
"응? 뭐? 몰라. 왜?"
하내를 잡은 우진의 손에 힘이 주어지고
하내는 건둥 뜬 정신으로 대답했다.
"탁씨가 너도 혼자 되고 자기도 혼자니
너 생각이 어떤가 알아봐 달라고 그랬어."
견주의 말은 그들 셋은 이렇게 나란히
누웠지만 하내는 우진이나 자기와는 다른
있었다.
"이 얘긴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그냥
내 의견인 것처럼 탁씨는 물어봐 달라고
했는데." 견주가 말했다.
우진의 몸이 굳어지며 밭은 기침소리를
내었다. 우진을 스치는 질투를 하내는
느꼈다. 견주와 우진 부부는 묶여 있고
자신은 훨훨 나는 새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탁씨가 정말 그랬어?"
"응, 아까 가면서 나한테 부탁했어. 잘
생각하고 가기 전에 전화하고 만나 봐."
환상을 다 깨고 가느라고 납작이 누웠던
하내는 이제 끈적거리는 열기 같은 것에
꼬여 돌아갔다. 앞으로의 나날은
복잡해지고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가슴
[15]
잠깐 졸았는자 하내가 눈을 떴을 때
방에는 하내 혼자였다. 꽃무늬 자수가 놓인
노란빛 이불이 하내의 목에까지 얌전히
덮어져 있고 사람은 물론이고 하내 옆의
이부자리도 깨끗이 없어져 있었다.
정결한 장판방, 벽 한 면을 꽉 채운
장롱, 유리창으로 들이미는 아침의 빛깔.
여기가 어디인가, 자기가 잠이 들었던
이불임에도 몸에 닿는 침구의 감촉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눈이 뜨인
순간부터 베개니 침구가 곧 낯선 위치로
아이코, 하내는 벌떨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 우진과 견주와 함께 누웠던 일이
생각났다. 하내는 우선 일어나고부터
보았다. 다시 볼수록 이불은 예뻤다.
미국에 하나 사 가지고 가서 닥터 장에게
주고 싶었다. 이불을 개켰는데 접는 방법이
틀리는지 이불장 속에 들어가지지가
않았다.
하내는 이리저리 밀어 넣어 보다가 다시
이불을 바닥에 놓고 조그맣게 접어 보려
하였다. 하내는 나서부터 이제까지 이불을
이불장속에 넣어 본 일이 없었다.
하내의 집에서는 이불을 벽장 속에
넣었었다. 벽장에 넣을 때는 이렇게 접는데
애쓸 필요가 없었고 또 미국에서는 침대
생활이었으므로 담요와 시트를 몇 장 넓은
지냈었다.
침구를 개키는 간단한 일조차 할 줄
모른는 자기가 하내는 실패자만 같았다.
이제 우진과 사이에는 살짝살짝 걸리는
그리움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언제 다시
귀국한다고 해도 서로 만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어제 우진과 견주가 한 가족인
사실을 그리도 인정하기 힘들었건만 오늘은
그들이 무찌를 수 없는 한 가족이었다.
조그맣게 갠다고 했건만 이불은 역시
불안정한 형태로 접어졌다. 하내는
미끌어지려는 그것을 이불장 속에 꾹꾹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어쨌든 문이 닫겨
다행이었다.
방을 나가려는데 콩콩콩 발소리가 나더니
혜원이었다. 방으로 쑥 고개를 디밀어
"엄마아, 아줌마 깼어."
부엌쯤에 대고 소리질렀다. 견주가 오기
전에 하내는 나갔다.
"깼어? 왜 더 자지."
견주는 바지 밑을 한 단 접어 올린
진바지에 누런 무늬가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티셔츠가 흉하다고 하내는
생각했다. 왜 남편도 있는 여자가 저런
흉한 옷을 입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너무 잤어. 낮과 밤이 바뀐 탓인지
맨날 이런다."
변명같이 하내는 말했다.
"내가 혜원이 빨리 학교 데려다 주고
올께. 그리고 아침 먹자."
견주가 말했다.
"응, 우진씨는?"
혜원아, 아줌마한테 인사 해. 아줌마는
인제 미국갈 거야. 그러니까 인제 쉽게는
또 못 볼 거야."
견주가 혜원에게 인사를 시키고는 급히
재촉해 떠났다. 혜원의 가방을 견주가 들고
모녀가 부엌 창 앞길로 해서 사라지는 것을
하내는 부엌에 선 채 바라보았다. 역시
견주의 옷이 흉하다고 생각되었다.
견주와 혜원이 사라진 길로부터 눈을
들면 숲이 보였다. 어제 그 일행이 함께 가
보았던 오솔길이 낙엽에 덮힌 채
가리마처럼 뚫려 있었다. 그 어딘가를
우진은 걷고 있을 것이었다.
하내는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수면 부족으로 눈두덩이 뿌숭하게
부어 있었다. 머리를 빗는데 문득 무슨
머리 빗던 손을 멈추고 하내는 그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려 했다. 탁이지.
불꽃같이 떠올랐다. 그가 결혼하자고
한다지. 그런데 그게 정말인가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것인가. 새벽녘 잠깐 꾼 꿈 같기도
했다.
하내는 머리를 빗고 방으로 돌아와 자기
소지품들을 가방에 넣었다. 백을 정리하고
망연히 앉아 있었다. 견주가 주부인데 그가
없는 부엌에서 솜씨부리는 일은 삼가고
싶었다.
현관문이 탕 닫겼다. 들어온 것은
우진이었다.
"응, 잘 잤어요?"
우진이 말했다. 신을 벗고는 곧바로 부엌
스토브쪽으로 걸어갔다.
하내가 말하니까 우진이 웃었다. 우진은
하내에게 뒷 모습을 보이며 찬장에서 찻잔
같은 것들을 꺼내었다.
"견주는 애 데리고 학교 갔어요."
우진에게 집 안에 자기 혼자만이 있음을
하내는 알렸다.
"학교가 멀어요?"
"아니 가까워."
우진이 주전자에 물을 따라 스토브에
얹었다. 우진이 돌아섰는가 하더니 갑자기
하내 앞으로 왔다. 푸른빛 스웨터가
흔들리며 눈을 막는가 하는데 우진은
하내를 껴안았다. 반항을 해야지, 여자라면
그래야잖아? 하내는 생각했다. 적어도
반항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러나 하내는
가만히 있었다. 그의 혀가 하내의 입술로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왔다. 너는 처녀도
아니고 알건 다 알지 않아? 내가 너에게 첫
포옹을 가르쳤지 않아? 하고 거침 없는 그
손길은 말하는 듯했다. 무례하였다. 하내는
그에게 껴안기는 것이 너무도 좋았지만
그냥 좋다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얕보일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가만
있었다.
문 바깥쪽에서 발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하내가 몸을 떼려는 순간 하내보다 더
재빨리 몸을 떼고 얼른 의자에 앉은 것은
우진이었다. 하내는 껴안겼던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블라우스를 바로하며 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 브래지어가 거의 턱
밑까지 올라가 있었다. 하내는 브래지어를
잡아당겨 두 개의 유방을 그 속에 넣었다.
"커피물을 얹어 놨어."
우진이 들어오는 견주 얼굴에 대고
총이라도 쏘듯 말했다.
견주가 아침을 하는 동안 하내는 대강 집
안을 치웠다. 이틀에 한 번씩 가정부가
온다고 하였다.
우진과 견주와 함께 둘러 앉아 아침을
먹으며 하내는 가만히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넣어 자신의 살의 감촉을 느끼려
하였다. 손을 빼었다가 다시 넣고는 우진의
손이 되어 자기 살이 어느 만큼 부드럽게
그 손에 잡혔을까 알아 보려 하였다.
아침을 먹고 우진은 학교 연구실로
간다며 나갔다.
"내가 갔다가 열 한 시쯤 올테니까
하내는 그때까지 있어. 내가 고속버스
우진이 말했다. 하내는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내는 그릇을 씻었다. 놓여 있는
가정일들이 하내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내는 견주를 돕기 위해 설겆이를
하면서도 그 일을 싫다고 생각했다. 난
어쩌면 이젠 누구 시중드는 일은 못할 것
같아.
"탁씨 잘 생각해 봐."
견주는 그릇 씻는 하내의 옆에서 찬장을
정리하였다.
"탁씨가 진심이었을까."
"애들도 아니고 그런 말을 장난으로
하겠니."
불붙는 듯한 열정은 아니지, 하내는
생각했다. 그냥 나하고 와이프로서 살면
요행히도 맛있게 닿았던 고기요리쯤 며칠에
한 번씩 먹어 가면서, 아 싫어.
"아 싫어." 하내의 생각은 말로 되어
나왔다.
오늘 우진은 자기를 껴안으면서 한
마디도 정다운 말을 하지 않았다. 젊은
우진이 하내를 처음 껴안았을 때 그는
사랑해 하였었다. 한 번도 아니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했었다. 우진의
하숙방에서였다.
하내를 방에 앉혀 놓고는 연탄불을 보고
오겠다고 나갔던 우진이 문을 탕 닫고
들어오더니 하내를 껴안았었다. 하내는
그때 자기가 입었던 옷도 기억할 수
있었다. 자주빛 타이트 스커트에 빨강
스웨터였다. 그 스웨터는 하내가 좋아서
"어디 편물 잘하는 집 아니?" 하내가
말했다.
"왜? 갑자기, 여긴 시골이라 별게 없지."
"아니 서울이라도, 하나 사 볼까 하고."
자기를 껴안으면서 아무 말도 안한
우진이 더 고맙지 않은가 하내는 생각했다.
적어도 거짓은 없으니까. 그가 오로지 동물
같은 욕정으로 나를 안았다 하여도 뎃즈
오케이. 그 부분을 하내는 영어로
생각했다. 영어를 잘 못하면서도 어떤 말은
혼잣말로도 영어로 나오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릇을 씻고 하내는 전축에 스위치를
넣어 보았다. 어제 우진이 틀었던 노래의
후반이 느닷없이 나왔다.
옛미소 잃은 나의 친구여
하내는 지나치려다가 귀를 기울였다.
웃음 잃은 나의 친구여
방황하는 그 눈길
언강이 빨가벗고 아이를 목에 걸고 걷고
있다. 언강은 죽은 것이 아니라 어느
해변엔가 있다. 하내가 찾을 수 없는 곳.
멀리 떠나간 친구
노래는 이어졌다 언강이 친구인가 하내는
생각했다. 그리도 밉던 그가 친구일까.
"지금 떠나지 않으면 늦어. 버스는 오십
분에 떠나거든." 견주가 말했다.
보내고 싶어함을 알았다. 하내와 견주는
단둘이 있으면 소망과 절망을 얘기할 수
있는 친구인데 우진이 끼면 상황은
달라졌다. 하내는 일어나서 전축을 껐다.
"버스는 시간마다 있다며."
하내는 우진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우진의 감촉이 남아서 몇 분 간격으로
하내의 몸은 화끈화끈 더워졌다.
"응, 그런데 난 오늘 친정에도 들러야
해. 오늘 간다고 해 놨어."
"난 다 준비됐어. 백만 들고 나서면 돼."
하내가 말했다.
방금 설겆일 끝낸 참에 자기가 너무 서둔
것이 미안한 듯 견주가,
"오랜만에 왔는데 안 됐어. 이제 이
나이가 되니 믿고 의지했던 부모는
남편은 다른 사람으로 자라 버리고
일상생활은 전부 예측할 수 있는
권태이지."
하내가 방에 들어가서 백을 들고 나왔다.
"인제 가면 언제 보겠니. 차나 한 잔
할까."
그대로 부엌에 선 채 견주가 말했다.
"시간도 없다면서. 얼른 옷 입고 나와."
하내는 먼저 현관으로 가서 신을 신었다.
하이힐 뒷축에 어제 산길에서 묻힌 흙이
있었다. 하내는 그것을 현관에 놓인
구두주걱으로 긁어 내었다. 견주가 그 흉한
티셔츠 위에 바바리 소매를 끼며 나왔다.
우진을 못 보고 떠나는 것이 하내는
서운하였다. 우진도 돌아와서 서운해 할 것
같았다. 그 우진의 서운함까지 합쳐 하내는
사람은 좋은 거라고. 한귀퉁이가 허청
허물어지는 듯 허전한 마음으로 하내는
부엌 창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가는
사람이지, 다행이지.
견주가 신발장을 열고 손을 길게 뻗어
구석에 놓인 구두를 꺼냈다. 신을 신는
견주에게 하내가
"그 티셔츠 니가 샀니?"
"응, 빛깔이 괜찮지?"
"응."
하내는 현관문을 밀었다. 기다렸던 듯
단풍든 숲이 눈 안에 들어왔다.
"이제 곧 겨울이겠다."
"그래, 금방 새해라고 부산 떤 것
같았는데 벌써 가을이다. 세월은 정말 잘도
가."
"햇볕이 더 분명히 보이지."
"그래 햇볕이."
하내는 견주의 말을 따라 하였다.
"탁씨 일 잘 생각해 봐."
견주가 하내 옆으로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응."
언강 씨, 승부가 보이면 뭐에든지 건다는
나의 친구(죽어서 된 나의 친구), 탁씨와
결혼하는 것이 괜찮은가요. 괜찮은
도박인가요.
하내는 아이를 목에 건 언강에게 묻는다.
언강은 그냥 싱긋 웃는다.
언강 씨 여자가 승부에 걸 것은
무엇인가요. 관용? 자비? 희생? 그 외에 또
무엇? 젊음이라고는 말아요.
[16]
화요일 오전이어서인지 고속버스
터미널은 한가하였다.
"나 이제 미국 가면 공부할 거야."
하내가 말했다.
"무슨 공부?"
"사회학이란 거야. 공부하는 새, 내가
변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하필 대학이야?"
"어느 한 부분 학문이라도 열심히 공부해
보고 싶어서. 하긴 가게 팔고 그 돈을
교육에 쳐 넣는다고 하니 모두 말리더라.
늙은 개한테 새 재주 가르칠 수 없단
다룰 줄 알아도 내가 노래를 지을 것 같애.
노래를 짓고 싶을 때가 있거든."
"그럼 이왕 하는 거 그 공부를 하지."
"그 생각도 해 봤지. 그런데 그건
두려웠어. 노래 몇 개쯤 아마 지을 수 있을
거다 생각하고 있는 편이 나아. 언강이
나보고 노래가 생각나면 자기한테
말하라고, 자기가 콩나물 대가리 그려
주겠다고 했는데 정작 할래니까 그것도 안
되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
우리나라에선 갓쓰고 마차 타고 한문
공부할 때 미국 가서 박사된 사람들, 정말
그건 굉장한 거야."
실내에 놓인 전자오락 기계에 붙어서
국민학교 이 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 조그만 얼굴이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슛슛 치그륵
치르르륵 슈슛 우주전쟁은 치열하였다.
"지금 너는 너만 책임지면 되잖니. 니
인생에서 제일 좋은 땐지도 몰라. 난
부러워. 나도 너처럼 새로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언제나 누군가가 내게서
뭘 원해. 어떤 사람이나 일이 내 시간과
관심을 원해. 난 하고 싶은 데로 가서 뭘
할 수가 없어. 니 처지가 좋은 줄이나 알아
둬." 견주가 말했다.
"그렇대 서른 여덟이 여자의 피크래."
"어떤 의미로?"
"그건 나도 몰라."
어느 때부터인가 전자오락 게임에 붙어
있는 소년이 하내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하내가 볼 때부터만 해도 그는
기계에 투자하는 것 같았다. 몇 번씩, 근처
구멍가게에 가서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어
왔다. 둘러 보아도 소년에게는 보호가자
없었다. 그로 미루어 소년은 승객이 아니고
이 근처에 살면서 오락기계 때문에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너 우리집에서 나랑 같이 살지 않을래?"
견주가 말했다.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내는 견주를
보았다. 무슨 소리일까.
"길수 있지? 걔를 혜원 아빠가 참
싫어해. 보면 무섭고 싫대. 그래서 길수가
오면 난 어쩔 줄 모르겠어. 그런데 어젯밤
혜원 아빠는 전과 달랐어. 길수를 무섭고
싫게 느끼는 것 같지 않았어."
견주는 좀 쉬었다가,
길수가 와도 괜찮았던 거야."
탁도 날 오라 하고 견주도 날 오라
하고--하내는 다시 복잡해지는 자기 인생을
보았다.
"우리 둘이 같이 집안 일을 하고
그러면서 살면?"
하내를 어서 보내고 싶어했던 조바심을
견주는 잊은 것 같았다.
"글쎄, 우리 둘이 살면." 하내가 말했다.
날카롭게 맑은 가을 햇살이 고속 버스
터미널 앞 보도에 부서지고 있었다. 내가
가도 이 풍경은 그냥 남겠지. 우진의 집 앞
숲도 그냥 남겠지. 내가 안 봐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머물다 가겠지. 왜 나는
여기저기 모든 곳에 머무를 수 없나. 어느
한 자리만 정해 가지고 있어야 하나.
미워할지도 몰라, 우리 둘이 더 친해지고."
하내가 말했다.
"글쎄 그럴지도."
"우진 씨가 바람피러 가면 우리 서로
부둥켜 안고 위로하지." 하내가 말했다.
"그렇겠다."
떠날 차례인 서울행 버스가 객장 입구로
다가와 섰다. 하내는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가려고?" 견주가 말했다.
"그럼 버스가 왔는데."
"같이 살자고 했잖아."
견주의 말에 하내는,
"너 그게 진심이었니?"
"응."
"생각해 볼께, 서울 가서 생각해 볼께."
뒷모습이 큰 키로 우아하였다. 버스
터미널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하내를
바라보았다. 운전수조차 고개를 돌려
하내를 보았다. 아이를 안 낳은 몸의 선이
곱다고 견주는 생각했다. 여자여 너는
무엇을 증명하느라고 애를 낳느냐.
창가에 자리잡고 하내는 앉았다. 이제 내
앞에 무엇이 있나. 견주와 사는 것, 그들의
아이를 같이 기르고 우진의 시중을 들며
사는 것, 괜찮을지도 몰라. 한 남자
시중들기 사실 여자 혼자로선 좀 벅차지.
길가에 선 견주가 하품을 했다. 보기
흉한 티셔츠가 벌어진 바바리 틈 사이로
보였다.
나 때문에 모두 잠을 설쳤지. 우진도
지금 쯤 졸립겠다. 나도 졸립고, 하내는
괴었다.
견주들과 사는 것, 그들의 아이를 기르고
우진의 시중을 들며 사는 것, 아직은 싫어.
하내는 고쳐 생각했다. 적어도 아직은,
나는 더 배우고 더 좋게 변해 가야지.
불현듯 한 가닥 불안이 하내를 휩쌌다.
나는 실제로 어떤 관계에도 맞지 않는지
몰라, 아주 실패하도록만 태어났는지 몰라.
견주는 이제 무표정한 얼굴로 발 밑을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버스가 지체하지?
하내는 얼른 떠나지 않는 버스가 미안하여
창을 톡톡 두들겼다. 견주가 올려다
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하내는 웃었다.
그 웃음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비틀려
보였다. 그렇게 웃는 하내가 견주는
미웠다. 생각해 보면 자기는 언제나 하내를
같이 살자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나 견주는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소년은 아직까지도 전자오락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의 낭비가
하내는 가여웠다. 세월이 흐르면 저애도
어느 가정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심장이
되겠지. 색시를 얻어 가지고 그 색시의
나으리가 되고 우주가 되겠지. 하내는
소년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하여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저애에게 친절한
일일까, 하내는 다시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더 크기 전에 많이 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하고
중얼거리며 하내는 머리를 쓰다듬어
올렸다. 분명한 것은 내겐 저럴 시간이
없는 거지, 이젠 버릴 건 빨리 버리고
단념할 건 빨리 단념하고.....
버스가 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나려는 버스에 아이 업은 노파 하나가
올라탔다. 중심을 잃고 노파는 하내의
옆자리에 쿵 주저앉았다. 업힌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버스가 움직여서 다행이라고 하내는
생각했다. 견주가 발뒤꿈치까지 올리고
서서 멀어지는 하내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하내도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크게 흔들었다. 지나치게 극적으로
흔들므로 하내와 견주의 손은 서로를
거부하는 것같이 보였다.
3. 베갯머리꿈
[1] 육년전
그 사람은 구두가 복잡하게 놓인 이모
집의 현관 문간에서 손님들이 앉아 있는
실내를 훑어보느라고 잠시 서 있었다. 그
사람 등뒤에 흐린 하늘이 있었다. 그
사람은 현관에 들어섰을 때부터 나를 본
듯하였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본 것을
느끼고 1초보다도 짧은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놓쳤다.
나는 손님들이 먹고 난 음식 접시며 컵
들을 부엌으로 날라 가려고 쟁반에
모아들이고 있었다. 이모는 52세 생일에
대학에 들어간 큰딸이 좋은 장학금을 타게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집 안을
어지르고 싸움만 해서 나를 제 엄마로부터
야단맞게 만들었던 사촌 동생들이 이제는
공부를 잘하는 모양이었다. 이모가 괜히
자랑하나 했는데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되는 장학금을 타게 되었다니 정말
잘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쟁반위에
접시를 놓고 그 접시 위에 수저들을 올려
놓았는데 조금만 잘 못하면 수저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꽃을 단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들어선
것을 보고 반가와하며 아이구, 선생님했다.
선생님으로 불리운 그 사람은 부인으로
보이는 50대의 여자와 함께 있었다. 딸
담고
"아니, 왜 늦었어?"
하고 그 사람을 맞으러 나갔다.
부엌문 밖에서 갈비와 닭다리와 고추장에
재운 북어를 석쇠 위에다 굽던 이모부도
집게를 든 채 거실로 나와 그 사람을
맞이하였다. 머리털이 허연 그 사람은
세월의 바람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며 맞은
부드러운 풍모였다. 그 사람의 존재가 많은
손님들을 압도하는 집 안을 채웠다. 전류
같은 것이 그 사람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전류 같은 그것이 좋다는 것밖에 나는 그
정체를 몰랐다. 나는 이모로부터 집게를
받아 들고 부엌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잔디는 누렇게 말라 가고 낙엽이
우수수수 지고 있었다. 살아 볼수록 사는
하루 이틀 몸 가꾸는 것, 일하는 것을
포기하면 일주일도 못 되어 거지가 된다고
생각하면 나는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주 애써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애쓰는 동안 나는
거지가 안되기 위하여 애써야 하였다.
은색 차가 이웃 집 지붕 위에 난 길을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모두 천천히 차를 몰았다. 만하탄의
그리니치 빌리지 같은 좁은 길을 천천히
달려 전체 교통을 굼뱅이로 만들어 놓는
경우는 바로 이 동네 사람이 만하탄에
진출했을 때라고, 나는 새 사실을
깨달았다.
갈비와 동태는 시원스레 익지만 닭고기는
겉은 타고 속은 잘 안 익었다. 은박지에
들어가서 눈물이 났다. 이모부는 고기과
화덕을 내게 맡기고는 거실에서 술 한 잔
들고 있었다. 이모부는 커텐을 걷은 창턱에
팡파짐하게 앉아 있었다. 이모부의 잔에
이모가 얼음을 두 덩어리 집어 넣어 주고
있었다.
이모 집 큰애가 그 사람과 같이 온
여자에게 수저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다 주었다. 그 여자는 큰애에게
부모님을 저렇게 기쁘게 하였으니 그런
효도가 더 없다고, 어머니한테 좋은 생일
선물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바지
입기에는 몸집이 컸으나 하여간 입고
있었다. 술 한 잔 들이키고 기분이 좋은
이모부가 창턱에 앉은 채 연설을
시작하였다.
광주 등지로부터 떠나 와서 오늘 우리 집에
모여 앉았어요. 미국 생활 몇 십 년이
되어도 언제나 임시 사는 듯 죽음도 우리를
기다려 줄 것 같고 늙음도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씀이죠.....
그런 중에도 아이들이 잘 자라 주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사람 일생에
중요한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죽은
후에 그 사람에게 내려지는 평가이고,
생전에 볼 수 있는 큰 기쁨은 역시 자식들
잘 되는 거라고 이모부가 종횡무진 나가던
말에 결론을 맺었다.
듣던 사람들이 이모부의 말이 끝난 것을
다 다행히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람
가까이 가고 싶어서 갓 구은 고기를 접시에
담는데 빨간 보석반지 낀 여자가 자기가
나는 사과 쥬스를 마시고 있었다. 사촌
동생들도 부엌에서 나와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고 있었다. 그 사람은 빨간반지 낀
여자와 얘기하고 있었다. 이모가 내 뒤에서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손님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얘가 내 조칸데 우리
언니가 30에 청상과부가 되어 수절하시고는
얼마나 곱게 기르신 딸이라고, 우리 언니가
안 해본 장사 없이 얘 기를 때 정성들인 건
눈물나서 말을 못한다니까.
어디 좋은 신랑 있으면 소개 좀 해요,
나는 그 사람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가 시집 갔다 온 것을
이모는 왜 빼먹나? 또 깜빡 잊었나? 하고
있는데, 발은 좀 어떠세요? 걸을 때면
아프세요? 그 사람과 같이 온 여자에게
여자는
"네, 발이 차요. 피가 잘 안도나 봐요.
통 외출을 못하다가 오늘 나왔어요."
그 여자는 그 사람의 부인이 아니라고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의 부인인가
아닌가 하고 잘 보았더니 그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이층에 간 그 사람은 왜 안 내려오나,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장농을 보러 올라갔나,
그 사람이 만든 장농은 앞이 전부 거울인데
이모 집 이층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결혼하고 살아야 하나, 결혼은
해서 뭣하나, 그런 얘기들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자는 다 한국 가서 색시들을
데려 와서 여자가 남아 도는 사정이라고
하였다. 인물 좋은 올드 미스, 박사, 의사,
"아무리 재색 겸비한 여자라도 삼십 넘겨
보세요. 여잔 버젓이 행세할 신분증이
없어진다니깐"
누가 그러니까
"요새 세상이 어디"
그러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결혼에 대해 얘기하므로 나는
무엇을 말해야겠다고, 뭐라고 말할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말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이층에 있고 나도 그 사람 따라
이층에 있거나 아니면 이 집의 다른 방이나
뜰에 있을 수도 있는데 그냥 거실에
손님들과 앉아서 거북하게 결혼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모의 작은 딸이 음식 접시들을 치우기
앞에 놓인 접시 몇 개와 컵을 부엌으로
날라다 주었다. 그 사람이 만든 장농은
이층 계단 꼭대기 복도에 있어서
아랫층에서 올려다보면 거울 붙인 네 개의
서랍 탓인지 왕관같이 보였다. 차고
엄숙하고 네모지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거울이 이렇게 청명히 가라앉아 보이기도
하는구나, 나는 늘 생각하였었다.
이모 집 애들이 접시 씻는 것을 나는
도와 주고 있었다. 제아무리 야단법석하던
연애도 일년을 못 넘기고 날개 달고 치솟던
이상은 땅에 추락한다고 남자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사회가 남녀관계에 봉인 도장을 찍고
습관이 관계를 계속시킬 뿐이라고 하는 그
목소리에 동의를 나타내서 사람들이 나한테
느끼지 말도록 해야겠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거실로 가서 그 말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나는 부엌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거실
분위기가 활기 있어 지고 꽉차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듯하였다. 이모부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냉장고 꼭대기에 얹어
두었던 케익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 촛불을
쉰 두 개 착실히 세어서 꽂아 가지고는
불을 켜서 들고 나갔다. 이모의 두 딸과
나도 샴펜 병과 샴펜 잔과 커피 쟁반을
들고 따라갔다.
아이휴 하면서 사람들이 케익 위에
촛불이 많다고 웃었다. 이모는 나이를
거침없이 밝힐 뿐만 아니라 자기 나이에 더
오십 말고 말을 하더니 요전날 이모부와
말다툼을 할 때는 "나도 이제 육십이요.
당신하라는 대로만 어떻게 해요." 하였다.
30살 전에 아이을 낳아야 산모도 아이도
건강하다는데 난 26세니까 이모보다 더
시간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
샴펜 병은 비워지고 케익은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밤은 깊었고 손님들은 떠나기
시작하였다. 침실에 수북이 쌓였던
손님들의 코트며 마후라 등이 다 없어졌다.
폭풍이 몰아치니 나보고 자고 가라고 이모
식구들은 말하였다. 이모는 그 사람에게도
자고 가라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사양하고
딱정벌레 같은 차에 다리 아프다는 여자를
태우고 빗 속으로 떠나갔다.....
접시들은 다 치워지고 이모와 이모부도
있었다. 비는 내리고 또 내리고
샤워물소리까지 섞여 들어 모두 푹 젖어
나는 것 같았다.
다른 밤에 꿨던 내 꿈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꿈에서 아버지나 할머니를 보면 참
반갑고..... 아 죽은 게 아니었지, 하는 꿈
속의 내 목소리는 내 목소리 같지 않게
밝게 높이 들뜨고는 하였었다...... 몇 해
전에 나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서 무당이
시키는대로 산 닭 한 마리와 돈을 가지고
남편도 함께 오라고 해서 경수를 겨우
모시고 무당 집에 앉아 있었다.
무당이 북을 둥둥치더니 집 떠나 객사한
경수의 삼촌이 오시누만 말하고 또 북을
둥둥치더니 시어머니가 조그만 애를 데리고
들어오고 있다고 경수보고 죽은 동생
시아버지가 오시는구만 하더니, 잘 먹었소
잘 먹었소 사돈 잔치 잘 먹었소 하고
보이지 않는 시댁 식구들이 무당 입을
통하여 물러감을 알리고, 무당은 자꾸 북을
치더니 한참만에 멈추고 기운 빠진
목소리로 친정아버지는 안 오시네 하였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타울로 머리를 싸 올리고 콜드 크림 바른
얼굴로 이모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양손으도 크림이 잔뜩 묻어 있어 이모는
어디에도 안 닿도록 두 손을 토끼 앞발처럼
들고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김치 한
젓가락과 생선 저냐 두 개를 집고 식은
커피 한 잔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였다.
자는 것이 이층의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편하다고 말하였다. 이모는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관심을
가지면 이렇게 다 듣게 되는구나
생각하였다. 어쩌면 내가 먼저 그 사람에
대해서 물어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이 문열 씨의 소설 <레테의
연가>에 나오는 화가 남자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문열 씨가 그 사람 얘기를
썼는가 하여 이모가 그 사람보고 소설가 이
문열을 아느냐고 하니까 그 사람은 요새
소설가들은 한 사람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소설에서는 화가 남자는 불란서로 가고
젊은 잡지사 여기자는 레테의 강을 건너 딴
남자에게로 시집가는 게 끝이지만 이번
남편을 사별한 후 불란서로 그 남자를
찾아갔다고 하였다. 오랜 세월 속에 익어
온 연애 끝에 맺어진 그 사람과 부인은
지금 불란서로부터 미국 LA로 이사하여
살고 있으며 손녀 같은 어린 두 딸이 그들
사이에서 자란다고--.
그 사람은 공예인으로 뉴욕 부르크린
어디에 공방이 있어 일년에 서너 번은
뉴욕에 오고, 그 부인은 LA에서 잡지일을
보고 있고, 오늘 같이 왔던 허리와 엉치 큰
여자는 공방이 있는 건물의 주인
부인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이 지금
나를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흐르던 전류 같은 것, 그
사람이 얻고 있는 명성, 그 사람이
좋아했었다던 부인과 두 딸을 생각하고
이모의 큰딸이 들어와서 잘 잤느냐고
물었다. 나는 소파가 너무 푹신했다고
불평했다. 나는 거실 바닥에서 자는 게 더
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괜찮았지만
친하다는 듯 마음에도 없는 불평을 하였다.
동생은 제 학교와 내 직장에 늦지
않으려면 만하탄을 향하여 새벽에 떠나야
할 것이라고 서두르고 있었다.....
비에 씻긴 차창 밖의 경치를 뒤로
밀어내며 기차는 달리고, 동생과 내
무르팍에는 이모가 어제 남은 음식을 싸 준
봉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씨를
심고는 그 위에 흙을 잘 덮어 주어야 싹이
나듯이 그 사람도 싹으로 움트라고 나는 그
사람을 내 가슴 속에다가 깊이 묻기로
하였다. 그 사람이 싹으로 솟을 때까지
않겠다..... 동생이 내릴 때가 되었다고
흔들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아무렇게나 꾸겨
박고 자던 불편한 잠에서 깨어났다.
[2] 오년전
나는 아주 행복하였다. 그 사람은
우리나라에 다녀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시골 사람들 웃는 얼굴이 새삼 참
좋더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것을 친밀스럽게
들으며 나는 괜찮은 얘기를 하여 그 사람을
감동시켜야겠다고 마음을 졸였다.
카페 이름을 쓴 빨강 형광등 글씨가
얼굴과 우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과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모 집 이층에 놓인 그
사람이 만든 장농 얘기를 나는 하고
싶었다.
장농이 늠름하고 조용하였다고, 그
장농은 장농을 만든 당신을 만나기 전에
먼저 보았다고, 그리고 소호 레스토랑
입구에 놓인 당신이 만들었다는 키 큰
의자도 일부러 찾아가서 보았다고,
서커스단의 나무 다리 단 키다리나
앉음직한 발디딤이 있는 높다란 의자 밑을
투명한 직사각형의 유리방인데 형광등을
밝힌 그 안은 나무를 울울히 심어 놓아서
주인이 못 앉게 하여 못 앉아 보았으나
만약 앉았다 하면 푸른 숲을 깔고 앉은 것
그렇게 숨을 죽이고 가만 있는 듯한가, 그
주위에 정적이 흐르는가, 그리고 당신
주변에 흐르는 전류는 무엇인가 묻고
싶었다.
이모 집에 있는 장농 서랍을 열어 보았을
때 서랍이 예상보다 더 순순히 나오니까
뜨거운 기운이 내 발로부터 솟아올라
심장을 치고 머리 꼭대기로 휙 빠져 나가는
듯하였다고, 장농과 성교한 것 같았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이 지루한 말이 아닐지, 그
사람한데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여자들도
모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지, 나는 그
사람한테 남이 안 하는 특별한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그 사람이 좋아할 말을
내 가슴 속에서 고르고 있는데 이 세상에
한국에 가서 만났을지도 모르는 이쁜
우리나라 여자들과 그 사람이 좋아할 말과
행동을 할 미래의 여자들이 생각나서
고통스러웠다.
내 감정은 롤러코스터 위에 올라 앉은 듯
행복했다가 고통이 심하였다.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었다. 어안 렌즈를
통하여 보듯 그 사람과 내가 앉은 테이블만
중앙에 커다랗고, 커피기구와 생과자와
케익 종류가 놓인 앞 카운터와 다른
테이블은 원경으로 멀찍이 물러서서, 우리
테이블은 망망대해의 섬같이 고립되어 우리
자신만의 울림과 떨림으로 채워진
듯하였다. 우리 테이블 옆 창턱에 푸른
잎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단순히 물이 모자라는
그 사람에게 우리는 지난 해에
사사오입해서 한 달에 0.17번 만났다고,
그러니 한 달에 한 번도 안 만난 셈이라고
말하려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염려스러웠다. 내가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
가서 뉴욕에 없는 줄도 모르고 지난 일
년간 나한테 있는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주말만 되면 이모 집을 갔었던
것에 대해서도 말해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나,
나는 나를 지키는 데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을 지난 해 11월 이모의 생일 날
첫번 만나고 오늘이 두번째인데 오늘은
10월 5일이니까 아직 1년이 되려면 며칠은
마음같이 매일 만나면 한 달에 평균
0.17번을 당장 몇 배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일요일이서 빨래를 하고
집에만 종일 있다가 저녁이 되어 신문을
사러 거리에 나온 길에 까페에 들어왔다.
직장일은 끝도 없는 반복이고, 벌어논
돈도 없고, 서른 전에 아이를 낳으려고
했는데 서른 살이 거의 다 지나가는 중에
있고, 나쁜 일조차 남의 시선을 끌 만한 게
없이 보통 수준이고..... 나는 신문을 까페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차 한잔 시키고
있으려니 탁자가 워낙 작아 신문지가 자꾸
테이블 밑으로 흘러내리고 신문지에 밀려
차가 엎질러질 것만 같았다.
내 곁으로 난 유리 창문을 두들기는
쳐다보니까 그 사람이 키 작은 동양 남자와
땅거미 짙은 보도에 서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조금 후에 꿈처럼 그 사람은
혼자 들어와서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세상 어디에 가 있어도 사람들이 좋아할
그 사람과 같이 앉은 것이 나는 기뻤다.
처음에는 거의 비었던 실내에 어느덧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내 앞 테이블에는 동양인 남학생이 두
팔이 손목같이 마른 백인 여학생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과 풍경이 가로등 불빛에
젖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였으므로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나와
있는 이 순간을 좋아하기를 바랐다. 나는
웃고 편안하였다가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주
그 사람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던
반코트를 집어 입었다. 그 사람이 가려나,
앞으로 또 만나기가 이제처럼 어려울까,
나는 서운해지는 내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롱 아일랜드의 이모 집을 찾아가서
그 사람을 못 만나면 나는 근처 바닷가에
가서 그 사람 생각을 하였다. 그 사람
생각을 하여 그 사람을 내게 맞게 만들어
내속에 간직하였다.
그 사람이 웨이트레스에게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말하니까 웨이트레스가
조그만 앞치마 주머니에서 전표수첩을 꺼내
우리들 앞에서 계산을 시작하였다. 그
사람이 날더러 왜 오늘 저녁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 앉아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웨이트레스는 한국말을 모르니까 그
당연하지만 나 또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오늘 저녁 내내
머리와 가슴 속이 복잡하게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이 모르는
언어로 얘기하고 있었을까.
경수와 결혼생활에도 나중에는--자꾸
헤어졌다 자꾸 만났으므로 그 많은 처음에
이어 오던 그 많은 나중들마다--우리 두
사람이 서로 모르는 말을 써서 의사 소통을
못하였는데 그 사람에게도 내가 낯선
외국어를 쓰고 있었었나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은 이상한 여자야. 말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무슨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애요." 하였다.....
기둥 높이 위에 브로드웨이와 웨벌리
가를 손가락질하듯 붙어 있는 거리 표시를
사람을 만났구나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코트 단추를 채우며 나왔다. 씻긴 듯
깨끗한 보도에 건물의 창에서 새어 나온
불빛과 가로등 불빛이 어리었다.
오후에 잠시 비가 내렸었다. 내부는 좀
산만한 듯하였는데 밖에서 보니까 까페는
내가 미국 오기 전에 상상하고 그리던 외국
까페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쪽 골목 거리를 걷는 사람은 현재 없고
까페 안은 적당히 환하고 아늑해 보였다.
어떤 거리를 들어 서거나 길을 걷다가 내가
전에 여기 왔었던 것 같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생전에 그곳에 살아 보았다기보다는
외국 영화를 많이 본 영향일 것이다.
그 사람이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경수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경수와 다시 합쳐
살다 헤어졌다 했던 경험, 인공 유산을
포함한 성적인 경험, 자라면서 일반 남자에
대해서 품었던 꿈, 그 사람을 만난 이후
내가 만들어 보았던 공상의 시나리오, 그
모든것을 가지고 나는 준비하고 있었고
훈련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그 사람의 저녁
제의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나는 그 사람이 만든 의자를 장식으로
놓은 식당으로 가자는가 하였더니 피카소의
조각이 서 있는 아파트 광장을 지나 네온빛
밝은 거리를 좀 걸으니까 보도 넓이 만큼
차양을 길게 뺀 이태리 레스토랑이 보이고
한 무리 사람들이 그 곳을 나서고 있었다.
홍일점으로 낀 중년 여자가 핸드백을
한꺼번에 누르고 큰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진동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진동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고
그렇게 화답하듯 진동하고 있었으나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동차가 흐르는 거리와 가로수와
가로등과 건축물들과 무한히 깊은 밤하늘과
그 사람과 나--, 이 모든 것이 조화로운
화음으로 합창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발 밑이 잘 보이지 않도록 푹
꺼진 듯 어두운데 서너군데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촛불 켜진 빈
테이블마다 흰식탁보가 덮이고 스푼과
포크가 반짝이며 놓이고 분홍 나프킨이
모자같이 접혀 세워져 있었다.
내가 의자에 앉을 때 신사 중의 신사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그 사람은 내가
듣고 싶은 부인 얘기는 겸양에서인지
안하고 딸들을 학교도 안 보내고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와 다르게 산다는 게
힘듭디다. 사회와 유리되어 살려면 아주
많은 값을 치뤄야 하겠습디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 것이 아이들에게 친절한
일일까 생각해 보지요."
괜히 그 사람 가정 얘기를 물어 보았다고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인생
계획 속에 내가 안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저도 사회에 맞는
사람은 아니지요. 이혼했고 혼자 살고
뚜렷이 이룬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대가를 치룰 각오를 하고 선택해서
그렇게 됐어요. 꿈을 꾸듯..... 꿈에서
그냥 모든 일이 속수무책으로 일어나
버리지요, 하고 내가 챙피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둥그런 와인잔을 손에 들고 나는 이런
소리말고 똑똑한 소리를 적어도 한 번쯤은
하여야겠다고 궁리하였다. 나는 나와
분리되어 있으나 내가 궁리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에게 나는 나를
설명해야 되는 통역관이며 그 사람에게
내가 느끼는 것을 알리는 일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시나? 그 어느 날을 바라보며 사시나?
나는 그 사람의 부인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가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수원에 어머니가 한 분 계신다고
아버지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던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고 느끼기에.....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오직 좋은
기억뿐이라고만 대답하였다. 장성한 딸
눈에 비친 4,50대의 아버지는 어린 날 보던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 사람은 말하고
있었다.
그 나이의 아버지는 다시 사춘기를
지나듯 성질 부리고, 더 술을 마시고
울적하고 직업이나 여자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 사람은 자조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사실 건가요? 내가
말하고 있었다. 저는 한국에서도 살고
싶고, 이곳도 떠나기 싫어요. 제가
돌아서도 이 거리에 이 생활이 그냥 있고
상영될 것을 생각하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마음 빨리 정리하셔야지요.
멧돼지 잡으러 다니다가 집돼지 놓칩니다
하였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멧돼지가 되는가
집돼지가 되는가 생각해 보려 했으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생각을 조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내 생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영화 구경하듯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한 주일 정도 더 뉴욕에
있겠다고 하였을 때 나는 궁리중이던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무게 있어 보이는 것으로
선생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에요?
하였더니 그 사람은 뭐 그냥 장난하다
가는거지 하였다. 간다는 것은 뉴욕을
같았다.
택시에 오르기 전, 그 사람은 꽃송이에
입맞추듯 내 머리 꼭대기에 허리굽혀 입
맞췄는데, 그 즐겁던 기분이 계속되어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웃고
있었다.
[3] 사년전
나는 보온병에 커피를 담고 절인 오이를
가운데 박은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먹을 것이므로 대강 만들어 은박지에 쌌다.
나는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는가 하고
손거울을 쥐고 창가로 가서 쌀쌀해지기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건너편 국민 학교는
조용하고 아직 채 깨어나지 않은 거리에
십대의 소년 서넛이서 커다랗게 튼
라디오를 어깨에 얹어 놓고 가고 있었다.
나는 바지와 블라우스를 입고 캔버스 백
속에 커피와 주먹밥과 영화 잡지 한 권을
집어 넣고 스웨터와 깔고 앉을 작은 방석도
챙기고 있었다.
어느덧 기온이 내려가서 지난 주일에는
공원 벤치가 차가왔었다. 7년이나 살아 온
나의 아파트는 가정 같지가 않고 맨바닥
맨벽에 부엌 문턱 위에 푸른 잎 화분
하나가 매어 있을 뿐이다.
나는 가방과 열쇠를 집어 들고 향수를 내
앞에 뿌리고 그 속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하우스톤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내렸다. 그 사람은 까만 티틀 넥 스웨터를
입고 공원 벤치에 (물론)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가끔 고개를 돌려
버스가 지나다니는 길쪽을 살피며 그
누구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 누구는
나.....? 나는 공원 입구에 서서 공원
전체를 둘러보았다. 낯 익은 두 할아버지가
친구는 아니지만 말소리는 서로 들릴
정도의 예의 그 간격을 유지하고
앉아있었다.
그 사람은 오늘도 벤치에 없었다. 나는
곧 어그러진 내 기대를 현실의 렌즈에
맞추어 조종하였다. 수없이 해 보았으므로
하나도 어려울 것 없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여자들이 있는 데로 가서 앉았다.
있는데..... 으응? 나무등걸에 한 손을
대고 내게 등을 보이며 어린 계집애와
얘기하고 있는 희끗한 머리의 저 사람은?
희망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나의 몸은
굳어지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리고..... 나를
발견하면.....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보고 "당신두?" 하고 그 무엇을 알아보고
놀라와할 것 같았다. 정말 그
사람인가?..... 잘 보려고 두 눈에 정신을
쏟고 있는데 그가 돌아섰다. 나는 그를
보지만 그는 나를 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과 닮은 데라고는
없는 얼굴 모습의 그 스페니쉬는 작은
계집아이 손을 잡고 공원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읽었다. 인생 상담란을 빼 놓지 않고
읽는데 상담자가 재판관같이 당신이 옳소,
틀렸소, 이러시오, 저러시오 안하는 게
내게 용기를 주었다.
얼마 전에 나도 고민 편지를 써 보았다.
두어 달 동안 저는 아기를 갖은 데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계획하였습니다. 저는 서른
세 살의 독신 여자로 임신이 가능한 생리적
연령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오던지 저는 아기를 최선을 다하여
잘 기르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
두 번 인공 유산시킨 경험도 있으므로 이
결정은 막연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기의 아버지로 삼고 싶은
사람은 편견이 없고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알아보는 분으로 4년 전에 처음 만나
아기의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는 일단 임신이 된 후면 그 분과
다시는 연관을 안 맺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그분이 그렇게
원한다면요).--당신은 아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를 원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혼자서 그 남자를 이상화시켜
놓고 아이를 안아 주고 소중히 할 수 있는
그 남자의 연장으로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남자를 더 관찰한 후에 결정을
내리셨으면 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당신을
사랑해 줄 남자의 아기를 가질 시간이
충분히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뭇잎 하나가 뱅글뱅글 떨어져서 두
머리 위에 새처럼 앉아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을 골똘히 생각해서 그
생각이 아무리 생생한 모습을 갖춘다고
해도 그것은 실제의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이 만든 장농도 그 사람이 아니고
장농일 뿐이며, 그 사람이 설계한 이
공원에 앉아 있으면 그 사람 품에 든 것
같지만 공원일 뿐이었다. 더욱 애타는
마음만 나게 하였다.
내가 그 사람을 마음놓고 따라 다니려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하여야 하였다.
나는 고통으로부터 면역이 되고 싶었다.
나는 아픈 것을 모를 때까지 숨을 그치는
연습을 하였다.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엄마들은
황황히 아기들을 거둬 가고 벤치에 있던
비었다.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택시를 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어
택시잡기 경쟁자로 변하였다.
홀딱 젖어 하나 잡아 타고서 행선지를
말하니까 택시 운저사가 모르겠다고 해서
나는 내가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 같은 머리를 기른 택시 운전사는
대마초를 빨고 있어 택시 안은 독한 풀
냄새가 자욱하고 골 때리는 음악이 울리고,
택시는 비 퍼붓는 거리를 미친 놈같이
달려서 나는 택시 안에서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내 아파트 문턱에 들어서서 나는 비에
젖은 옷을 갈아 입고 타올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과 내 인생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씽크대에서 스타킹을 빨고 있는데 두터운
안개 속을 밀려 다니는 듯하였다. 갈수록
안개는 짙어 앞을 볼 수가 없고 택시타기
같은 일상 생활의 사소한 불편이나 내
자신의 실수, 기억의 혼란 같은 것이
쓰라리고 무겁게 여겨졌다..... 남에게
나타내 보일 만하게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조차도 내게는 없는 듯하였다. 나는
사랑과 꿈이 글러 버린 감옥 속에 갇혀
있으며 굳어 버린 내 얼굴은 금이 가서
부서질 것 같았다.....
비가 너무 와서 오늘 저녁을 언니 집에서
잤으면 좋겠다고 전화기 속에서 이모의
큰딸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근처 까페에
친구들과 앉아 있다고-.
나는 안 왔으면 싶었지만 올라오라고
볼륨을 제대로 해둔 TV의 화면이 펄럭펄럭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촌동생은
"카페에서 웨이트레스가 부어 주는데로
받았더니 커피를 너무 마셔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말하고 있었다.
퍼붓는 빗소리가 창 밖에서 들리고 어느
집 아파트 문 닫는 소리가 쿵 울려 들렸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서 나쁜 꿈에
시달리는 것 같은 날이 있어 보았느냐고
내가 동생에게 묻고 있었다.
좀 떨어져 있으면 알 것 같다고, 형체가
보이다가도 가까이 다가가면 아무것도
잡히는 것 없고, 그러다가 다시 멀어지면
좀 보이는 것 같고, 하고 내가 그 사람
얘기를 하는데 동생이 인생을 얘기하고
있어? 하였다. 아니, 인생이 아니고, 내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마음 속에다 잘 묻어
두었으므로 그 사람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괴로와하면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해 줄까..... 동생은 내 레코드를
구경하다가 한 장을 틀었다. 친구들이
결혼식 준비하는 것을 보면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너무 야단스러워서 저 결혼식
뒤에 무엇이 있을까, 그 뒤에 오는 것은
언덕구르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자기 눈에는 결혼식 대신 장례식 준비하는
것같이 보인다고 동생은 씩씩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동생은 이모의 특별한 친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행복해 하니까 엄마
친구를 찾아요. 엄마하고 그 사람은 아주
얘기를 애들같이 많이 해, 아냐, 그 사람은
호모가 아니고 엄마하고 자지 않을뿐이야,
나는 그걸 알아, 엄마가 젊었을 때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좋은
친구야, 나는 엄마가 모험을 한다고
알았지, 난 괜찮아, 우리는 찹쌀떡을 먹고
있었다. 한국식품점에서 덤으로 주었는데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지니까
졸깃졸깃 달고 부드럽게 되었다. 동생은
체중 줄이는 데 대해서 얘기하였다. 수영
클라스에 들어 좀 줄였다고..... 동생은
까만 티셔츠에 디스코 바지를 입었는데
현대 여성같이 보였다.
나는 이모의 남자 친구가 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요가의 연꽃 자세로 앉아서 오늘 밤
생각하고 있었다.
[4] 작 년
영화관 티켓의 반을 찢어 빨간 쟈켓
유니폼을 입은 검표원이 내게 주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천정으로 뻗은
에스커레이터를 타고 서너 층계쯤 되는
높이를 오르고 있었는데 검표원이 황급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올라가는 에스커레이터 계단을 거꾸로
걸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내가 틀린 극장을 향하여
올라갔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있었다.
한 건물에 극장이 다섯 개나 들어앉아
있었다. 고꾸라질 듯 에스커레이터에서
겨우 내려서니까 검표원이 나보고 술을
가지고 영화관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금빛 포장지에 금빛
리본을 붙여 포장한 술병을 들고 있었다.
이모부가 사무실을 확장 이전하는데 오늘
그 축하 칵테일 파티에 가려고 나선
길이었다.
그 시간까지 영화관에서 보내려고 타임즈
스퀘어에 촘촘히 붙은 극장 시간표를 죄다
읽어 본 후 시간이 맞는 것이 있어
들어왔었다. 한낮이므로 극장 안은
한산하였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 빌딩
냉방 기계가 잘못되어 유해 가스가
극장 로비에는 두 명의 검표원과 나밖에
없는데 빈 에스커레이터만 아깝게도
끊임없이 올라가고 또 그 옆 레일은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포장되어 있는 것을 술병이라고 알아본
검표원의 안목이 놀라와 절로 내 혀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것이 쥬스병일 수도
있고, 간장병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길죽한
또 다른 무엇, 장난감 같은 것 일 수도
있는데..... 나는 영화 본 후에 파티에
가는 길이라고 구구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검표원은 두 싸이즈는 작아 보이는
유니폼을 단추 한 개로 여며 입고 있어
그의 어깨부터 가슴 전체가 옹색하게 울고
있었다.
나는 영화관 안에 술을 가지고 들어가면
꼭대기를 왔다갔다 하던 역시 빨간 쟈켓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웬 일인가 해서
골짜기 밑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해보이고 있었다. 그는
아래층 내 앞의 검표원들보다 높은 사람인
듯..... 내 앞의 검표원들은 보타이를 목에
달고 있는데 그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 맨 남자가 내려오는
에스커레이터에 한 발을 썩 내디디고
있었다. 아래층 돌바닥에 선 우리 세
사람은 내려오는 그 남자를 입다물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에스커레이터 레일 난간에 한 손을 살짝
얹고 우리의 시선 속에서 점잖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한 가지로 태도가 정해졌다.
도로 나가겠다고 표를 물러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간파에 중국 무사 그림이 있었는데
어쩌면 무술 영화인지도 모르고.....
하여튼 내 타입의 영화가 아닌 것 같았다.
넥타이 남자가 내 손에 든 술병을 부드럽게
뺏아서 내 캔버스 빽 속에 꾹 찔러 넣어
주고 있었다.
어찌도 힘 있게 찔러 넣는지 내 몸이 다
휘청거렸다. 나는 포장지가 구겨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넥타이 남자는
누구에게도 술병을 보이지 말고 영화를
즐겁게 보라고 내게 말했다. 보타이
검표원은 안에서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재게 한마디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예쁘게 싼 술병은 내 빽 속에 꾸겨
보러 에스커레이터에 실려 올라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직분에 충성스런 보타이
검표원에게 한 번 강한 시선을 던지고
넥타이 남자도 내 아주 뒤에서 실려
올라오고 있었다. 이층에도 사람이 없었다.
팝콘과 캔디와 음료수를 파는 매장에는
유니폼의 여자점원 둘이 카운터에 손들을
얹어 놓고 잡담을 하고 여러 방에서
상영되는 영화소리가 흘러나와 먼 곳에서의
소리인 듯 복도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술병 때문에 내가 지체한
동안 영화는 시작된 듯 하였다. 윤기나는
검은 머리를 말꼬랑지같이 뒤로 잡아맨
중국인 무사가 빼들었던 긴 칼을 칼집에
쑤욱 집어 넣고는 어깨를 제치고 거친
황야를 으시대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스크린에 비치는 무사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영화가 금방 시작했구나, 하고
있는데 장내에 불이 켜지고 스크린이
하얗게 비었다. 열 명쯤 이곳저곳에 앉았던
관객들이 느릿느릿 일어나서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불이 켜졌다 하여도
영화관 안은 아주 밝지 못하였다.
영화가 상영될 때는 깜깜하다가 휴게
시간에도 프로그램 읽기도 어려울 정도의
침침한 밝음이었다. 영화관 안은 발 밑에
잠기는 스산스런 어스름 속에 먼지와
팝콘의 기름끼와 뱉어 버린 껌과 엎지른
음료수로 바닥은 끈적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안 그런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앉았던 데서 극장 중간쯤 되는
무사가 으시대며 걷는 것이 영화의 시작인
줄 알았는데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옛날 영화는 고조되는 음악이라던가
멀어지는 카메라로 대개 끝장면에
가까와짐을 알게 하지만 요즈음은 이와
같이 갑자기 영상이 스톱 모션으로
정지하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그냥 슬며시
사라져 버리거나 흐르는 영상 위로
캬스트와 스텝의 이름이 느닷없이 조용히
흐르기도 하였다.
스크린은 무엇이라도 담아 줄 듯
너그럽게 흰빛깔로 존재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해진 것만 보여 주고 있었다. 언제 다시
보아도 죽는 사람은 죽고 재채기하는
사람은 재채기했다. 나는 내 꿈을 보듯
고집스럽게 흐르는 그 영상들을
소설은 글자 끝나는 데가 그 끝을
의미함으로 읽는 나는 끝에 대한 준비가
있으나, 영화는 나를 실컷 끌고 다니다가는
극장의 딱딱한 의자 속에 곧잘 내동댕이쳐
버리곤 한다. 그 시원함과 충격은 영화만이
줄 수 있나.....
밖으로 나오니까 지는 해가 타임즈
스퀘어 주변을 지저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큰 도시와 넘어가는 태양이 힘겹게
힘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방금 본
영화는 피비린내나는 검객영화였는데 나는
누가 이길까 하고 마음이 졸여지지도
않았었다. 나는 외계인처럼 멀찍이 앉아서
죽고 죽이는 지구의 인간들을 지루하게
구경하였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좌판 앞에 머물러 보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뉴욕커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이 미국 어느 한
곳에도 내 추억은 물론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추억도 깃들인 데 없건만 몇 년
동안 살았다고 나는 뉴욕커가 되어 그들이
뉴욕에서 좋은 경험을 얻고 뉴욕을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밤의 카우보이(Midnight Cowboy)"나
"머리(Hair)" 같은 영화를 보면 이 땅에서
태어난 본토박이들도 시골이나
중소도시에서 뉴욕으로 떠난다 할 때는
한국 영화에서 두메산골 머슴 삼돌이가
서울로 향할 때보다 더한 각오를 하는
듯하였다.
어떤 영화나 소설은 끝에 주인공이
기차역이나 그 도시 공항의 씬만으로도
주인공의 미래를 힘차고 가능성 있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오는 듯하였다.
막 뉴욕에 도착한 촌사람들의 이 도시
생활을 그린 영화도 봤는데 거칠 것 없는
외양과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나와
다름없이 고립감과 좌절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존재를 익명의 바다 속에 파묻는
해방감을 누리기도 하였다.
나는 거쳐야 할 그 어떤 단계를 훌쩍
넘어 뉴욕에 살고 있는 듯하였다. 내가 이
도시에 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놓여진 듯이
내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누가
알기만 하면 나를 이 도시에서 추방시킬
것도 같았다. 새로운 사물과 뉴스와
낡은 것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보잘 것 없는 내 인생과 내 시간들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흔적 없이 말려들고
있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땅 속으로
뚫린 계단을 내려가면서 파티에 갈까말까
또 다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술상점에서
술을 사들 때까지만해도 그 사람을 꼭
거기서 만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생각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아주 복잡하고 힘든 사람같이
느끼고 있었다. 내 생활은 단세포동물같이
간단한데 내 감정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느끼고 있었다. 내 자신 이해할 수 없는 내
감정도 있는데 그것도 내 것이니까 나는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듯하였다..... 나는
말았다.
어둡고 기차소리 시끄러운 지하철 통로를
빠져 지상으로 나오니까 아직도 여름 해가
거리에 남아 있었다. 공원에서 아방가르드
댄스가 공연되고 있었다.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남녀가 자기들만 듣는 내면의
음악에 맞추어 춤추고 있었다. 단체
관광객들이 지도를 손에 들고 인도
레스토랑 앞에서 안내원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물에 만 밥과 손으로 찢은 김과
간장 종지와 파티에 가져 가려던 와인을 한
잔 쟁반에 담아 들고 창가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유리창 위로부터 비둘기떼가
날어서 건너편 국민 학교 지붕 꼭대기로
가서들 앉고 있었다. 좀체로 물러갈 것
세상은 밤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이 거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개인 날, 흐린
날, 눈 내리는 날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건너편 국민 학교의 3층
유리창은 형광등을 환히 밝히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른들이 7,8명 의자에 앉아 무엇을
토론하고 있었다. 그 옆은 6층 높이의 일반
아파트로 나는 어느 한 창문을 보고
있었다.
라틴 계통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아들
아이를 등 뒤 의자에 앉히고 기도드리고
있었다. 램프는 방 안쪽으로 있어서 그
모자의 모습은 실루엣으로 검게 떠 보였다.
여자는 성호를 긋고 오랫동안 고개
하품을 하고 창 밖을 보고 한시도 가만
있지를 못하였다.
그 엄마는 정성껏 기도하는데 아들
아이는 몸을 비비 비틀고, 그 광경을 또
내가 술 한잔 마시며 보고 있었다. 좀
참다가 나는 이모 집에 전화 걸어 보았다.
"언니가 으례 오려니 했는데 안 와서 무슨
일이 생겼나 했었어." 이모의 작은 딸이
말하고 있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칵테일
파티 끝나고 손님 중 몇 사람과 챠이나
타운으로 저녁 먹으러 갔다고..... 파티에
누구 누구 왔더냐고 내가 물어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안 온 듯하였다. 하나 하나
주의 깊게 들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없었다. 그 사람이 안 오리라는 사실을
있었다. 그 사람은 어쩌면 뉴욕에 없는지도
몰라..... 무당 집 방에 경수와 앉아
있었을 때 정말로 아버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만날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여늬 날처럼 트랜지스타 라디오를
가지고 침대에 들었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그 사람 생각을 음악에 실었다.
그 사람은 베갯머리에 나타나서 내
시름겹고 고단한 세상근심들을 없애 주고
이렇다 하게 그리워지는 애인 하나도 없는
나의 과거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나는 지갑에서 25전짜리 동전을 골라내고
있었다. 경수는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집에
새로 비치된 전자 오락 기계를 보았기
때문에 아이같이 기뻐하고 있었다. 내가
앉은 옥외 까페 의자는 불안정 하였는데
의자가 잘못 되어서가 아니고 보도의
표면이 고르지 못해서일 것이다.
경수는 내가 부엌 문턱에 매달아 놓은
화분의 덩쿨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밤에 부엌에 나가다가 그 풀이 목을 휙
감는 바람에 귀신인 줄 알고 되게
놀랐다고, 식물도 한 10년 지나면 요물이
되더라고, 풀 하나 가지고 밉고 괘씸한
원수놈 얘기하듯 말하였다. 놀라기는 정말
놀란 모양으로 침대에서 자던 나는 경수가
지갑 안에 있던 25전짜리 동전 전부를
골라서 나는 경수에게 주었다. 반바지에
티셔츠 입고 그 위에 와이셔츠 걸친 경수는
동전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서 전자
오락게임을 놀아 보려고 여름 밤의 인파
속에 섞여 안 보이게 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경수가 쭉 마신 맥주컵과 내가
주문한 아이스티컵이 있었다.
경수와 사이에 불꽃은 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경수가
사는 방식에 익숙해 있었다. 내 바로 앞
테이블에는 소매 없는 티 셔츠 입은 근육이
잘 발달된 청년이 담배 한 가치를 귀 뒤에
꽂고 앉아서 공들여 모양 낸 젊은 여자와
얘기하고 그 옆 테이블에는 중년의 동양
여자가 핸드백과 영어 회화책을 무르팍에
있었다.
여름 밤의 무더위는 사람들을 이 거리에
모이게 하였다. 도시 여러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어깨에 부딪치며 상점을
기웃거리고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앉아 있는
사람들을 거침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린애로 여기 던져진 듯 하였다.
나는 세상에 나와서 35년간이나
있었으므로 몸이 크고 성(性)을 아는 어른
모습이고, 따라서 때로 어른 같은 행동을
해볼뿐--, 내가 보는 앞에서 밤거리는 더
생생해지는 중이었다. 남자들은 성숙하고
잘나 보였으며 옷을 창의적으로 입은 젊은
여자들은 활달하게 걸어 다녔다.
아이새도우를 칠한 눈꺼풀, 아무렇게나 된
듯 슬쩍슬쩍 드러나 보이는 등허리와 쭉쭉
뻗은 팔다리는 세상을 헤엄치는 인간
물고기들 같았다. 거리가 미국 영화
장면같이 보였으므로 나는 정말 미국에 와
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영화 속에서
본 사람 같아져서 나는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믿었다. 요새는 AIDS나 허피스 같은 병들로
섹스마저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남자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섹스는 한번도
내게 안전하게 느껴진 일이 없으므로 나는
그 말을 누가 하나하고 둘러보고 있었다.
모두 지껄이고 있는데 그들이 하는 말들이
모두 무엇들인지..... 가끔 가다가 한마디
떠나고 있었다.
웨이트레스는 뮤지컬 영화에 출현하는
기분인 듯 쟁반을 들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손님들에게 연극적으로 다정하고
쾌활하였다. 개를 산보시키던 남자가
웨이트레스를 보고 반색을 하고 있었다.
오디션의 결과가 어땠냐고 개 데린 남자가
묻고 있으니 웨이트레스는 과연 배우나
가수인 모양이었다.
가 있으면 연락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안
된 거라고 웨이트레스는 명랑히 말하고
있었다. 개 데린 남자나 웨이트레스나 주위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 목소리였다.
웨이트레스는 내 뒤에 있고 개 데린 남자는
내 앞에 서서 나와 내 테이블은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게 되었다. 내 시야는
바지부분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남자가
데리고 있는 개는 개임에도 면양같이
생겼다. 양같이 생겼는데 양이 아니고 개인
것이 이상하였다.
개 데린 남자가 떠나니까 시야가
트이는데 행인 중에서 내가 얼핏 본 것이
정말 그 사람인가 하고 나는 시선을
모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잘 보아야
하였다. 키 큰 동양 남자라고 다 그 사람이
아닐 것이고..... 내가 잘 보려고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은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
밑에 서 있었다.
Don't Walk사인이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바심이 쳐졌다. Walk싸인으로 바뀌니까
서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가 앉은
보려고 애쓴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내 시선 속에서 내게로 가까이
오더니 개 데린 남자가 섰던 지점을 그냥
지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부르고 싶은데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내
모양이 이쁜지..... 일어나서는 따라
나가야 하나 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본 것
같았다. 그 사람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나를 본 것 같았다. 내가 남의 시선을
끌도록 이상하게 굴었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를 보고 반가와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언제나 나를 보고 반가와하였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내 앞자리에 앉으며
결혼하셨다지요 하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만하탄 동북쪽 공원으로 돌아다녔지만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언제나 우리 동네인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나는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생각하였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머리 속이 복잡했는데 지금은 그냥 즐기자
하였다.
그 사람이 어떤 여자들을 좋아할지, 그
사람이 나하고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지,
내가 그 사람에게 제일 가는 여자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 말자고..... 나는 느긋이
의자등에 기대 앉으려 하였다. 의자는
생각보다 더 뒤로 넘어가서 나는 그 사람
앞에서 넘어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의자는 한 번 되게 뒤로 됫똑하고는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 사람을 만난 게 나는 아주 기뻤다. 그
세상에 부딪하고 흘러다녀도 아무에게나
화제가 되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어디서 소식을 듣고 우리의 재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오는 생에 대한 연습을 하고
있다는 그런 기분으로 저는 사나 봐요,
내가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좀
생각하더니 한 번 사는 게 아닐까요, 나는
잘 모릅니다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현세의 인생뿐이겠지요 하였다.
그 사람은 웨이트레스가 날라 온
진토닉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느끼지 못하였다. 나는 나 같은
무엇이었다..... 나같이 느끼는 무엇,
나같이 사는 무엇, 나같이 생긴 무엇,
그러나 나 아닌 그 무엇..... 나는 내 가슴
있었다. 내가 부르면 당신은 오실 거예요?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나는 너무나 희망을 가져 당신이 올까
오히려 두려워..... 왔다가 사라질까
두려워..... (마음껏 원해봐 무엇이
두려워, 공상 속에서는 불가능이나 한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기다려 왔으며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그러나 당신은 주저하기만 하지요,
당신은 이제 내 것입니다.
나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
그는 없어졌다. 내가 불렀던 그 사람은
없고 그가 마시던 라임 조각이 바닥에 붙은
컵만 남았다. 웨이트레스가 와서 경쾌한
동작으로 그 컵을 집어 가고 있었다. 그를
그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과거의 어느 시간 어느 장소가
자유롭게 나다니는 그를 붙잡아가
버렸다.....
둥근 기둥과 높다란 천정, 희랍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늘어선 가운데 세 건물만
1과 2분의 1층의 높이로 있었다.
꽃모양으로 엮어 낸 쇠철창을 단
창문들이 불을 밝히고 레이스를 입은
여자처럼 고풍의 풍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콤퓨터 게임에 대해서 경수는 얘기하고
있었다. "외교관을 구출하라"는 게임을
만들어 콤퓨터 회사에 보냈는데 채택되면
우리는 돈 넣고 누빈 이불을 덮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돌아갈까 아니면 크리스토퍼 가에 가서
바다에 해뜨는 것 구경할까, 결정을 못하며
걸었다. 나는 거기가 이 시간이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내가 사는 곳을
조금만 벗어 나면 나는 위험을 느꼈으며
죽기 싫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내가 이미
죽었으면 이렇게 죽는 두려움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사라졌던 그 사람이 내 뒤로부터
나타나서 말하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갔어요? 그 사람은 내 한 어깨를
잡고 숨이 차하고 있었다. 나는 환희로
가슴이 높이 차오르는 듯하였다. 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리고
마음껏 자유롭기를 바랐다. 우리에게 결혼
선물을 주고 싶어서 서점에 갔었다고 그
잠을 잘 준비를 하고 욕실에서 나온
나에게 침대에 비스듬이 누워 그 사람이 준
책장을 펄렁펄렁 넘기던 경수가 여러
나라의 공원과 놀이터를 찍은 사진책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선풍기가 침대의 발 놓는
쪽 방향으로 고정되어 바람을 보내고
있었는데, 경수가 그 강도의 바람을
조종하여 놓았을 것이다. 선풍기 바람에
시달리는 방 안은 구겨진 침대 시트며
경수의 발께에 뭉쳐진 홋이불들로
후줄근하고 지전분해 보였다.....
경수가 창문가에서 내는 기척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팬티만 입은
경수가 뿌여스럼한 창문가에 서서 아래
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누가 강도를 당했나봐. 손 오버 비치가
총을 갖다 대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구,
경수가 말하고 있었다. 다른 집에 에어콘이
가동되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부드러운
소리, 쓰레기 차가 용쓰는 소리와 같은
도시의 새벽이 깨어나는 소리를 모로 누운
채 나는 듣고 있었다.
내가 꿈을 꿨나, 경수는 바깥 풍경에서
별 수상스런 것을 못 발견한 듯 다시
침대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일요일인 것을
생각해 내고 나는 다시 잠들고자 하였다.
잠길로 빠지며 베개 밑에 손을 넣으니까 그
사람이 준 책이 내 손 끝에 만져지고
있었다.
4. 지나갈 어느 날
[1]
조사 결과에 의하면 결혼한 여자 세 명
중 하나는 정부가 있다. 그러므로
영화관이나 은행 기타 공공 장소에서 줄을
서게 되는 경우에는 여자들 머릿수를 세어
볼 일이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 중
두 여자는 남편에게 충실했을 확률이지만
한 여자는 이번 주나 지난 주 아니면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에 다른 남자와 침대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읽던 책에서 눈을 들어 연자는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딸 아이가 어디있는가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목을 빼어
눈에 잡히지 않았다. 서점 아래층에 내려간
모양이었다.
연자가 서 있는 곳은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달톤 서점의 이층,
<여성>이란 표지가 붙어 있는 서가
앞이었다.
독일 여자 영화 감독인 리나
베르트뮬러가 오는 일요일, 저서에 자필
서명을 한다고 서점 입구 전광판에
안내광고가 돌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임에도 서점 안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소근소근 말하는
소리들을 휘감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나직이 실내악이 흐르고
있었다.
마이크로부터 부드럽게 울렸다. 아늑한
조명과 키 높이로 차곡히 서 있는 서가
때문인지 실내는 주저앉은 듯 정지된
느낌인데 직원을 부르는 암호와도 같은
마이크 목소리는 더운 물 속에 향료비누가
녹아나듯 연자 귓속에 아늑하고 수월히
풀려 들었다.
연자는 두 아이를 가진 가정주부였다.
머리를 쫑쫑 땋아 틀어올렸음에도 목 뒤와
이마에는 말 안 듣는 머리카락이 서너 가닥
내려지고 선이 단순한 원피스를 입은 마른
몸은 단정하였다.
연자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편들은 정사를 가지고는 공공연히
자랑한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는? NO.
아내들은 다른 남자와 자는 것, 비밀
아는 것, 그런 세계에 호기심을 가진다.
당신이 혹시 연애나 해볼까 생각한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작게 흐르던 음악이 멎고 아나운스먼트가
있었다. 곧 문을 닫겠습니다. 손님
여러분들은 1층 카운터 앞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속삭이는 듯한 마이크 목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연자가 서 있는
이층 조명이 소리 없이 낮아졌다. 책표지
글자나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안 보이던 딸아이가 연자 옆에 와서
섰다. 요 반 년 사이에 수림은 엄마를
내려다보도록 커 버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이거 사두 돼?"
있었다.
아래층 카운터 앞에는 길게 줄이
이루어져 있었다. 책을 사지 않고 서둘러
서점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래층도
조명이 낮은데 두 개 금전 계산기가 있는
카운터 주변만 환하게 밝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연자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앞에 선 여자들 머릿수를 세어 보았다.
셋에 해당되는 여자들은 비밀스러워
보였다.
연자 앞에 선 키 작은 남자 차례가
되었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을 카운터에
놓았다. 연자는 그 책을 읽었으므로 그
내용을 알았다. 소설가 잭 캐루악의
애인이었던 여자가 그와의 연애 얘기를
썼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필자인 애인
생기 있었다.
그들은 1950년과 60년대에 뉴욕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와 그리니치 빌리지를
왔다갔다 하였는데 이 두 곳은 연자가 잘
알았다. 연자 자신이 사는 곳이니까
빌리지는 알게 되었고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콜럼비아 대학 부근에는 연자 친구가 살고
있었다. 책을 읽어 보면 빌리지와
리버사이드는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책에 쓰여진 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는
장소를 책에서 재발견하는 재미가 컸다.
한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인도하여 연자는
캐루악의 전기를 사서 읽었다. 4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 속에서 그 여자 얘기는 넉
줄로 있었다.
"바이킹 출판사와 일을 마치기 위하여
뜨거운 가마솥에 빠지는 것 같은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 두 번째 아내인 죠안
해버티를 닮은 편집보조인인 죠이스
그라스만이라는 젊은 여자와 데이트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상류층 유대가정 출신인
그녀와의 불규칙적인 연애는 일년 반을
유지하였다."
캐루악의 일생에는 그의 어머니와 친구의
부인과 다른 남자친구들이 더 중요했음을
연자는 알았다. 일년 반 동안의 일을
죠이스 그라스만이라는 여자는 한 권의
책으로 썼는데 데니스 맥넬리라는 사람이
쓴 캐루악 전기에는 단 넉 줄로
처리되었으며 책 중간에 있는 사진들에도
그 여자는 없었다.
돈 계산하라고 연자의 딸 수림이가 들고
주었다. 죠이스 그라스만의 책을 산 키
작은 남자는 점원이 봉투에 책을 넣는 동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그
책을 읽을 것이 연자는 좋았다.
연자는 수림의 잡지 밑에 자기가 고른
책을 숨기듯 놓아 점원에게 내밀었다. 푸른
줄이 쳐진 면셔츠를 입은 남자점원이 책을
한권씩 눈앞에 집어 들고 기다란
일련번호와 가격을 콤퓨터 계산기에
쳐넣었다. 연자가 고른 책 표지에 선정적인
그림과 더불어 굵게 밝힌 글자는 줄 뒤
끝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보이려고 다투어
튀어나오듯 했다.
"애인을 가진 결혼한 여성들의 충격
보고서."
"모험심, 외로움, 복수심..... 결혼한
자체만큼 다양하다."
"당신은 과거에 애인을 가졌거나 혹은
현재 가진 주부인가?"
점원이 7불 49전이라고 말하였다. 연자는
뜨거운 얼굴로 돈은 내고 점원이 내미는
책을 받아 들었다.
냉방장치가 되어 있는 서점으로부터 길로
나서니까 여름 밤의 열기가 후끈하였다.
수림은 먼저 나가서 행상인이 펼쳐 놓은
귀걸이 목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검은 벨벳
위에 반짝이는 값싼 귀걸이들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서점과 마주 보고 제법 큰 약국이
있었다. 길모퉁이에 자리잡았는데 두 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유난히 환해 보였다.
연자는 그 가게도 책에서 발견하였다.
책이었다.
글 쓴 여자는 발목이 삐게 되어 마사지
기구를 사러 바로 6번 애버뉴와 8가
모퉁이에 있는 저 약국으로 갔다. 점원이
거스름돈을 줄 때 손바닥을 은근한 태도로
간질러 놓더라고 하였다. 때는 60년대였고
그 여자는 마사지 기구를 사는데 왜 점원이
이상하게 구는가를 그 때까지 몰랐다고
하였다.
그 글을 20년이 지난 80년대에, 60년대를
한국에서 보낸 연자가 그 가게를
내려다보며 달톤서점 이층에서 읽는 우연한
순간을 가졌다. 연자는 약국이 20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과 마사지 기구가 삔 발목을
시원히 나는 외에 다른 용도로 쓰일 수도
있는 것임을 문장의 느낌으로 알았다.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일반화시켜 주는 친구였다. 남에게 말
못할 자신의 감정도 책에서 발견하면
확실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감정이 되었다.
수림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별로 빨라
보이지 않는 수림의 걸음을 연자는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창백한 가로등이
여름나무를 비추고 있는 공원 옆쯤에서
연자는 수림과 나란히 설 수 있었다.
"엄마 자랄 때는 전쟁 직후라서 엄마한테
공부하라는 사람도 없었고, 책 읽으라는
사람도 없었어."
또 공부하라는 소리 시작하는 줄 알고
수림은 신호들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차도를
건너 길 건너편에 가서 섰다. 니가
죽을라고 그래 정말, 신호등이 바뀌자
수림을 야단쳤다. 다 크기 전에 지금
세상의 아이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연자에게 들고는 하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서 늙고
죽었던 태평성대가 아니라 핵전쟁으로
지구가 일순에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다.
이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고 법률책에
적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듯하였다.
핵전쟁뿐 아니고 교통사고도 날 수 있고
살해당할 수도 있고 공사장에서 떨어지는
벽돌조각을 맞고 죽을 수도 있었다. 집 밖
어디서나 위험을 느꼈으므로 연자는
아이들을 과잉보호하고 다소 귀찮게 구는
어른이 되었다.
"엄마는 늘 행복감이 있는데 왜 그런가
생각해 봤거든. 어려서 전쟁을 겪어서가
공원에서 연자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부리커와 맥두갈 거리가 교차되는 곳에
가로등 빛을 받고 스카이라인의 부분을
이루며 무대 장치인 듯 건물은 서 있었다.
캐루악의 애인이었던 죠이스 그라스만에
의하면 1960년경 바로 맥두갈과 부리커
스트리트에서 사람들은 캐루악이 더 이상
좋은 소설을 못 쓸 것이라고 쑤근거리고
다녔다고 하였다.
연자 아파트 아래층은 가방가게이고
이층에는 연자 시누이 일가족이 살고 삼
층은 연자네가 살고 사 층에는 은퇴한
노인부부가 살았다. 각 층마다 아파트가
하나뿐인 조그마한 4층 건물이었다.
아래층 현관문을 들어서면 낡은
나무층계가 가파르게 이마에 바싹 다가
희미한 조명에도 벽과 천정의 횟벽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것이며 금이 간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자와 연자
시누이네는 이 건물의 공동 소유자였다.
수림은 두 계단씩을 한꺼번에 디뎌
어느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연자가 한 계단씩 올라가는데 이층 문이
열리고 시누 남편이 썩 나섰다. 그는
연자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한국에서 유학 보낼 때는 인품 검사
같은 것도 안 합니까? 지도교수가 추천장
써야 되고 안 그렇습니까? 공원에서 한국
유학생이라는 놈을 두 명 만났는데 하나는
정치학이고 하나는 콤퓨터한대. 뭐 그런
것들이 있어 내 더러워서 침 한 번 탁 뱉어
주고 왔어."
잘못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분개하는 일이 한 가지 이상 있었다.
[2]
청명한 날 아침 열 한 시경이면 모시발을
드리운 부엌 창은 태양을 되쏘아 밖이
보이지가 않았다. 건너편 아파트 건물에서
이쪽을 본다면 연자의 집 부엌 창은
금빛으로 빛났다. 그 창 안쪽에서 연자는
아침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끼고 있는
노란 빛깔 고무장갑이 눅진히 녹아나도록
뜨거운 물이 접시에 묻은 기름기를 씻어
내었다. 연자는 설겆이를 끝내고
물이 튄 앞치마는 벗어 못에 걸었다.
결혼 전 연자는 남자들의 마음을 끌려고
몹시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제는 아내노릇
엄마노릇에 길이 들었다.
연자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닷새째 계속하고 있는 아침공부시간이었다.
연자는 무엇에 대해 마음 먹어도 실천에
옮기기 힘들었다. 추를 단 듯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 이것이다 하고
결단이 내려졌다. 그렇게 해서 잠옷 입고
아침커피 만들던 습관을 버렸고 그렇게
해서 야금야금 마시던 술을 끊었고 그렇게
해서 서성이던 바람기도 재웠으며
(잠재웠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해서
아침공부도 시작하였다.
하루 일과 중에 삼십 분쯤 공부시간을
가지고 할까 하고 교과서 정하는데 힘이
들었다. 읽어 보려 애썼으나 성경은 잘
읽히지가 않았고 결국 연자가 마음을 정한
것이 인도사상 책이었다. 읽으면 호소력이
있고 마음에 새로운 다짐을 주는 구절이
많았다.
새 피부가 자라고 세포가 새로 바뀌고
머리털과 손톱이 매일 자라듯 연자는
새로와지고 싶었다. 연자는 자신 안에서
되고 싶은 새 사람을 느꼈지만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하였다. 남편 앞에서
연자는 아직도 쩔쩔 매고 요구 많고 잘웃던
미숙한 신부였다.
요즈음 연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연자는
중학교 졸업 학력인데 결혼을 해서는 계속
지식은 다 골에서 빠져 달아난 것
같았었다. 생선 가지고 음식을 만들 때
동그랗고 뿌연 플라스틱 같은 눈을 달고
있는 생선 대가리를 만지며 생선은 생각을
이 대가리로 했을까, 믿기지 않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좋은 토막 떠주고 대가리를
뜯어 먹으며 두뇌를 먹는다고 농담도
했었다.
연자는 자기 머리나 생선대가리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었다. 이제 연자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가정 안에서
머리는 녹슬고 몸은 낡아지고 뒷걸음질치며
세월을 보낸 것 같았는데 그 동안은 퇴보의
세월이 아니었으며 아이들의 뼈가 세월
속에 굵어지는 것같이 연자 자신도 어느덧
뭔가를 알아지고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눈앞을 스치고 세상이 핑 도는 중에도 젊은
날의 연자라면 못했을 말을 감히 했었다.
죽이지 말아요, 애가 둘 있어요.
공부책을 펴 들고 부엌 식탁에 앉았다가
연자는 일어섰다. 워크맨을 귀에 꽂은 채
침대에 누워 유행음악 삼매경을 헤매는 열
세 살 난 아들아이에게로 갔다. 아이 귀를
막은 이어폰을 들치고 그 귓구멍에 연자는
제 목소리를 집어 넣었다. 너는 나이 40을
어떻게 느끼나 그것 좀 써 봐라. 이건
엄마가 내는 작문숙제야. 아이에게 숙제를
내거나 공부하라고 말하려면 연자는 아이와
씨름하는 듯 힘겨움을 느꼈다.
연자는 다시 부엌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아침에 욕실에서 젖어 나온 남편이
면도를 하며,
그때 당신 엄마가 마흔 둘이랬어. 지금
나보다 젊었을 땐데 그땐 그냥 노인네로
뵈더군. 당신은 지금 몇 살이야."
"마흔인가."
"아직 젊었는데 그래."
마흔 여섯인 남편은 말했었다.
열 세 살인 자기 아들은 40세를 어떻게
느끼는가 연자는 궁금하였다. 아이가 무슨
소리를 적어 오든 가지고 있다가 아이가
마흔 살 생일에 선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부책을 펼치고 연자는 오늘 해당된
부분을 한 자 한 자 읽어나갔다. 너무
힘주어 읽은 탓인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요리 조리로 뚫려 가는 말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물아물 머리가 아팠다.
순간에도 더 많은 지식 속으로 파묻혀 가고
있다.
그에 따라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도 무지와 어둠이 더욱 쌓이고 있다.
삶은 그 어떤 논쟁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실은 그대의 가슴만을 필요로
하고 있다. 머리로써의 논쟁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만이 필요할 뿐이다. 연자는 여기서
멈추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라 하는 것 같았다.
두 아이의 남편에게 아침마다 배웅하며
연자가 이르는 말은 조심조심 차조심
사람조심. 이 책의 가르침은 옛 인도에나
받아들인다는 듯이 살아도 될까. 모든
고통과 재난에 대비하여 탁 믿고 사는
태도와 조심스럽게 사는 태도와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무서운
것은 보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그냥
없어질까.
때마침 연자 아들이 40세에 대해 쓴 것을
부엌 식탁에 갖다 놓고 뭘 더 시킬 생각
말라는 듯 휘잉 제 방으로 돌아갔으므로
공부책을 덮고 연자는 아들의 작문을 읽어
보았다.
흠, 40이라, 거기 대해서는 뭐 그리
생각해 본 바가 없다. 내 나이로서
생각하기에는 너무 먼 날의 일이다. 차라리
20대를 생각하고 싶으나 40대에 대해
억지로 생각해 보겠다. 40세란 어른이 된
40세는 성숙과정으로 치면 마지막
단계이며 노년기로 보자면 첫발자국을
옮기는 때이다. 40세면 여러 가지 책임을
지고는 항구에 닻을 내리는 때다. 그
책임의 반은 생전 원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억울하다. 40이 되면 골프치거나 집에서
같은 책을 40번씩 반복해 읽으며 재미있는
척 군다.
아니, 40세라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40세면 어른이니까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좋은
친구들도 있고 안정된 직업도 있다. 남자는
40이 되면 약간 긴장을 푼다. 젊었을
때보다 걱정을 덜하는 대신 더 현명해진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40세가 되면 내가 너무
늙었나 하고 자기 자신한테 물어 볼 것
여자 40은 남자와 좀 다르다. 40세 된
여자들은 깨어 있고 귀신같이 뭘 잘 안다.
여자들은 나이 먹으면서 영리해지고
(바보짓도 잘 하지만)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 40세 남자와 얘기하는
것보다 40난 여자와 얘기하기가 쉽다.
40세에 대한 내 결론은 40이란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며 그냥 중간
지점이다 라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쓴 것이었으므로 연자는
재미나게 읽었다. 연자 자신으로 말하면
40이란 나이에 특별한 느낌이 없었으나
친정이라고 늙은 어머니 혼자 뿐인 것은
쓸쓸하였다. 연자가 태어나 자란 가정
자체가 한 단위로 묶이어 늙어 가고
있었다.
연자 동생은 이제 다른 가정 속으로 가서
어린시절 가난하고 불화가 끊이지 않던
가정과 초라한 가구들, 어머니 목소리가
묻어 다니는 여러 가지 살림방법, 먹던
음식, 가졌던 것 혹은 가지고 싶었던 것의
기억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다.
네 살 아래인 여자동생에게 연자는
일종의 어머니 같은 보호감정이었는데 이제
동생은 친구가 되었다. 동생은 연자대신
연자가 못 하는 다른 세계를 살아 주는
듯하였다. 동생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연자는 막 태어난 동생의
아이에게 벌써 사랑 같은 것을 느꼈으며 그
아이가 제 엄마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
알아 주었으면 싶었었다.
젊은 날 연자를 기쁘게 했던 일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
않으려 노력하였다. 행복은 자신에게
달렸다고 보았으며 요즘 닷새 동안 하는
아침공부에서도 가르침은 그것으로
요약되고 있는 듯하였다.
타고 난 자신을 좋게 만들어 나가는 것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 세상에 대한 자기
임무같이 여겨졌다. 답답한 것은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옳고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는 때가 많은 것과 이것이 내 몫의
삶이다 마음 먹어 봐도 뜻대로 안 되는
일에 실망하고 일상 사는 무게를 견디기
싫은 때가 있는 것이었다.
닷새 동안 계속되었던 아침공부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날 아침 공부를 끝내고
연자는 아래층 가방가게에 내려가 시누이
일을 저녁 다섯 시까지 보아 주었다.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치운 후 전 날
달톤서점에서 산 책을 집어 든 것이 기껏
닷새 계속되던 공부 중단의 원인이었다.
책이 재미있어서 뜨개질할 때처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은 퇴근해 온
남편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야
저녁밥을 지었다.
그 책에 나온 가정부들 중 어떤 여자는
나쁜 결혼을 끝내고 싶어서 애인을 얻었고
반대로 어떤 여자는 결혼 생활을 계속해
나갈 힘을 얻기 위하여 애인을 얻었다.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불길이 붙었고
어떻게 숨기느라 고심하고 어디서 몰래
만나고 다른 남자와 자는 것은 어떻고
남편에 대한 느낌은 어떻고 어떻게 정사가
발각되었는가 등에 대해서 얘기하였다.
그중 134페이지에 나오는 여자얘기가
연자는 제일 재미있었다. 그 여자는 35세
때 이웃집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였다.
이웃집과 이 여자 집은 온 가족이 모여서
차도 마시고 저녁도 먹고 때로는 한 차를
타고 피크닉도 가고, 일상적인 친한
이웃으로 지내는 처지였다.
그때까지도 이 여자는 이웃집 남자가
자기 인생에 중요한 몫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어느 날 여자는 이보다
더 나은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이웃집
그 말을 안 꺼냈으면 내가 꺼냈을거요."
하였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결혼 속에 있는
결혼> 같은 관계로 발전되었다. 이웃집
남자는 여자보다 15년 연상인 50세였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고 일 주일에 두 번
만나서 얘기하고 걷고 커피 마셨다. 처음
호텔에 자러 갔을 때 여자가 옷을 벗으려
하니까 이웃 남자가
"서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건 우리 일생에 있어서 첫출발에
불과해."
라고 말하였다. 그 말대로 관계는
15년이나 계속되었다. 관계는 갈수록
강해져서 여자와 이웃집 남자는 아이를
낳기로 결정을 보았다. 결혼은 각각 해
딸아이를 낳았다.
딸애는 여자와 이웃집 남자는 물론 자기
아이로 믿고 있는 여자의 남편에게도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여자의 남편은 늦게
태어난 딸애를 극진히 사랑하고 좋은
아빠노릇을 하였다. 이웃 남자는 딸애가
자기 아이라고 나서지 않겠다고 처음 계획
때부터 말하였으며 부인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여자도 바라는 바였다.
그들에게는 종교가 없어서 죄책감에
사로잡힐 종교적인 금지사항도 없었으므로
딸아이의 탄생은 오로지 기쁨뿐 어느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여자와 이웃
남자는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하였으며 따라서 이웃 남자는 아이의
딸애는 기르기 쉽고 우아하고
사랑스러웠다. 남편은 퇴근하면 딸애가
보고 싶어 집으로 달려왔으며 진짜
아버지인 이웃 남자는 닮지 않고 남편도
닮지 않고 심지어 제 엄마도 닮지 않고
훌쩍 건너 뛰어 제 외할머니를 닮았다.
이것만 보아도 딸애가 얼마나 착한지 알
것이다. 그 딸애가 지금은 23세가 되어 갓
결혼하였다. 성품이 밝고 고와서 사람들이
다 사랑하였다. 형제들도 다 걔를
사랑하였다.
읽어 나가던 연자가 어떻게 만사가
순조롭기만 할까 하고 의문을 품을
즈음해서, 이 여자는 이웃 남자와 살고
싶어서 괴로왔을 때도 있었으며 남편이
의심하여 레코드를 던져 깨며 화를 내기도
'물론 정열도 한가지 높이로 머물지는
않았어요.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고 그렇지요. 저 스스로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생의 목표도 변해요.
그러나 애인에 대한 좋은 감성만은
지속적이었어요'하고 말해 놓았다.
마침내 여자는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맞게 되었다. 이웃 남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어떻게 죽었는지는 말
안했다).
결혼기념일 날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로
집안이 북적거리는데 여자는 부엌에 들어온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결혼기념일에 우리는 별로 행복하지 못한데
손님들은 밖에서 저렇게 즐기는군요. 우리
이 결혼을 끝냅시다.
어디 산이나 갔다 옵시다 하였다. 여자가
싫다고 하니까 남편은 혼자 산에 갔다
와서, 산에 갔더니 외로운 여자가 많더군,
당신도 이혼하면 그런 여자 중 하나일거요,
하였다.
그 이후 매일 싸움이 계속되어 마침내
부부는 이혼하였다. 이혼할 때 다른
아이들은 담담히 받아 들이는데 이웃
남자와 낳은 딸애만이 몹시 반대하여
아버지와 헤어지기 싫다고 하였다. 이혼 후
남편은 위자료를 안 주려 노력하고 갖은
방법으로 여자를 괴롭혔다. 남편은 두 번
재혼하였다가 두 번 이혼하고 혼자 살다가
죽어 버렸다.
이웃 남자도 남편도 다 저 세상으로 보낸
후 여자는 50세에 30세 난 남자를 애인으로
부인에게 죄스럽지만 그 남자와 관계는
10년이 넘었다고 하였다. (그럼 이 여자는
이제 60세 노파게?) 젊은 남자는 부인도
사랑하고 아이도 사랑하고 결혼도
사랑하면서 일생 동안 정사를 가질 그런
타입의 남자라고 하였다.
'애인을 가져서 제일 좋은 점은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재미! 그 재미는 산다는 게
좋다고 느끼게 해주거든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한 가지 사실이 연자는 이상하였다. 결혼
중에 낳은 딸을 어떻게 애인의 딸이라고 이
여자는 단언할 수 있을까, 남편의 아이인지
애인의 아이인지 구별하기는 머리카락을 두
개로 가르는 것만큼 어려운 것 같았다.
만일 확연히 구별될 정도라면 남편도
여자의 얘기가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연자는 책 앞에 '이 책에 나온 여자들은
전부 실제 인물입니다. 그들이 한 말은
바로 그들의 언어이고 녹음해서
편집하였음--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역과 직장과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라고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결혼 일년만에 아이를 낳고 또
아이--울기만 하는 두 아이 기저귀를 갈며
축제 불꽃 같은 애정 모험을 그렸던 연자의
피가 얼마간 잠잠한가 하였더니 다시
술렁거렸다. 번뇌란 결국 바람기인가?
연자는 생각했다.
[4]
햇볕은 어느덧 맑고 바랜 듯한 가을빛을
띠었다. 가을빛이 까페와 레스토랑과 좁은
보도를 따라 일렬로 주차해 놓은 자동차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일요일이었다.
옥외 까페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혼자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는
낯익은 동네 사람도 보이고 머리 맞대고
얘기하는 카메라 멘 사람도 있고 길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머리카락이 햇볕에 유순하고 청결히
반짝여 보였다. 4층 부엌 창가로부터
내려다 보고 있는 연자에게 풍경은 수년간
이미 익숙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 보고
싶은 곳의 관광엽서 사진을 보는 것
연자는 창가를 떠났다. 부엌 식탁에는
늦은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간 아이들의
그릇들이 있었다. 연자는 그것을 씽크대로
옮기었다. 아이들 개학이 일주일 후로
다가와 있었다. 여름이 끝나 가는 것, 방학
동안 하루하루 놀아버린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 그런 것이 연자에게 막연한
불안감을 주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일이 없는 연자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몰랐으며 아이들이 노는
게임도 몰랐다.
남편이 거실에서 소리쳤다.
"커피 한 잔 부탁해."
연자는 주전자에 물을 받았다. 주전자를
스토브에 올려 두고 물이 끓는 동안 연자는
거실로 갔다. 커피 테이블에 않아 서류를
그림자가 떠 있었다. 연자는, '보세요.
남들은 밖에서 저렇게 즐겁게 지내는데
우리 이제 이 결혼을 끝냅시다.'해 보고
싶었다.
남편이 문득 서류뭉치에서 고개를 들고
"당신, 왜 거기 문간에 서서 웃고 있지?"
연자는 소리내어 웃으며 돌아섰다.
이혼을 죽을 만큼 두려워하였던 연자는
남편에게 우리 이제 결혼을 끝냅시다 하고
말할 것을 생각하면 재미스럽고 마음 속에
무기 하나를 숨겨 가진 것 같이 힘을
느꼈다. 남편 옆 침대에 몸을 누일 때,
새벽에 홀로 깨었을 때 그와 차를 탔을 때,
새 타올을 내어 줄 때, 창문을 열 때,
창문을 닫을 때, 비 올 때, 해 날 때, 바람
불 때, 남편이 왜 웃느냐 물으면 연자는 더
두 잔의 커피를 만들어 연자 부부는 부엌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 보며 마셨다.
그들은 이 땅에서 흉 잡히지 않게
공중도덕을 지키려 애쓰며, 뒷전에 물러나
소리 없이 사는 가정생활을 하였다. 남편은
26년 전에 부산에서 떠나는 배를 타고
유학와서 대학을 졸업한 후 17년 전에
한국에 가서 연자를 아내로 데리고 왔다.
그는 무명의 이방인으로 살 수 있는 이곳의
자유스러움을 좋아하였다.
"벌써 구월이군."
남편이 말하였다.
"애들 학교 가기 전까지 돈들을
일뿐이에요."
연자가 말하였다.
"참 유수같이 세월 흐르네."
남편은 코네티컷 숲속 호텔에 10월 달에 쓸
방을 하나 예약해 두었다. 미래의 애인과
지내려 하였다. 그는 2년을 계속 헛되이
시도해 왔다. 봄에 싹 틔우고 여름에
꽃피워 가을에 맺어지는 연애를 올해는 꼭
이루려 하였는데 벌써 내일이 9월 1일이다.
부엌 벽에 붙은 달력을 보다가 남편은
8월달 달력을 찢어 내었다.
[5]
연자는 언제 끝이 날까를 생각하며 저린
다리로 앉아 있었다. 정면 흰 벽을
배경으로 금물 입힌 부처님이 앉아 있는
스님이 말씀하고 있었다. 맨하탄 강물에
있는 물고기를 여기 법당에 가만히 앉아서
잡으려고 해서 되겠어요.
맨하탄 강물고기는 맨하탄 강에 가서
잡아야 하는 겁니다. 마이크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설법중인 스님은 가슴
높이로 닿는 탁상을 앞에 두고 서서
얘기하고 신도들은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부처님 모신 강단 한 옆으로 창문이 나
있고 열린 창문으로는 벽돌벽이 보였다.
벽돌벽에 담장이 잎사귀가 한 줄기 길게
드리워져 흔들리고 있었다.
연자가 하는 아침공부는 아침 설겆이가
끝난 직후에 하지 않으면 그 날은 책을
잡게 되지가 않았다. 공부를 하다가말다가
보았다.
대산림설법 안내 말씀.
특별계획으로 대승경전인법화경
대산림설법회가 봉행중입니다.
한만이 만나기 어려운 성스러운
대승경심지법문(大乘經心地法門)
범회상(法會上)에 백사를 뒤로 미루시고
꼭! 오셔서 무루지(無漏智)를 이루시고
법석(法席)의 주인공(主人公)이 되시어
부처님과 조상님의 혜목(慧目)을
원성(圓成)하여 불조혜명(彿祖慧命)의
상속자가 됩시다.
광고에 쓰인 주문과 같은 말이 연자에게
신비롭게 들렸다. 연자는 맨하탄 빌딩 숲
속에 자리잡은 절에 와서 앉았다. 와서
보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세상 이치
종교로 믿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무조건 믿는다는
마음이 전제되는 것 같았다. 스님은 말하고
있었다.
"부처님께 자꾸 비세요. 빌면 아들 낳고,
그런 기적은 불교 역사상에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죄 지으면 암만 도망 다녀도
경찰이 따라와 잡지만 죄 없으면
경찰에서는 내 발로 걸어 들어가도 아무도
안 잡아요. 내가 감옥에서 떡을 해가지고
부처님 말씀 전하러 갔는데 철문이 몇 개씩
철커덩 열리고 닫기고 간수들이 그렇게
많이 있어도 나는 지은 죄가 없으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돌아다녔어요."
스님의 말씀은 연자의 귓전을 스쳐
지나가고 연자 내부는 오늘도 깊은 잠에서
잠자고 있는 처녀로 느꼈다. 그 잠을 깨서
새 숨을 쉬며 이 세상에 나뭇잎인 듯 또는
빗방울인 듯 무리 없이 스밀 수 있기를
바랬다. 곧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기도 하였으나
그뿐 언제나 다시 잠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마침내 설법이 끝나 연자는 수많은 신발
중에서 자기 샌달을 가려 신고 밖으로
나왔다. 늘어선 빌딩의 거리에 회색길을
견고히 누워 있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길쭉하고 좁은
문으로부터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아시아
인종의 모습을 돌아다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소란스럽게 인사를 주고받고 슬슬
흩어져 갔다. 그 속에서 한 목소리가
"안녕하세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예쁘장한
젊은 남자 얼굴이 군중 속에서 가려
보았다.
"사시는 동네에 야채가게가 있지요?"
"네."
생각을 더듬느라 눈썹을 모으고 연자는
대답했다.
"저 거기서 일했지요."
"네."
군복 윗도리 같은 것을 입고 과일상자를
나르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도 같아
연자는 다행스러웠다. 통로를 막고 앉아
완두콩 다듬는 것도 본 것 같았다.
절 입구로부터 한 블럭 떨어진 거리 나무
밑에 나무벤치가 네 개 나란히 놓여
얘기하였다. 청년은 이찬준이라고 자기
이름을 소개하였다.
그는 야채가게 일이 너무 힘들어서
요즈음은 공사판에 가서 일을 하고 먹을
것만 있으면 며칠이고 일을 안한다며
일하러 다니다 보니 먹고 사는데 매어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 하였다. 연자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제자리에 잡으려
애쓰며 찬준의 얘기를 들었다.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는 사람을 많이
보았기에 연자는 찬준이 일하러 나가는
시간 아껴 가며 혼자 추구하는 일이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가족이 다 오셨나요?"
"아직 혼잡니다."
눈썹과 눈 근처가 깨끗하게 생긴 천준은
연자는 문득 허리를 펴고 어른답게 굴려
하였다. 찬준은 불경을 공부하는 십여 명이
모이는 작은 집회에 속해 있다고 말하였다.
"이런데 관심이 있으신가 본데요. 한 번
모임에 와 보시지요. 모이게 되면 안내장이
나가는데 전화번호와 주소 주시면
연락드릴께요."
연자는 절에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함께 오지 않는 한
일요일날 혼자만 나오기도 어려웠다.
오늘은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뉴져지
어디에서 열리는 고등학교 동창 골프대회에
참가 하였으므로 연자는 혼자만의 일요일을
가지는 셈이었다.
"어디서 모이는데요?"
"각 회원 집을 돌면서 하지요. 꼭
아무 주제로나 해요. 어떤 날은 유익한
말을 들었다 싶을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시간낭비다 싶은 날도 있어요."
찬준이 수첩을 꺼내 들고 연자의 주소를
적으려 하였으므로 연자는 전화걸면 남편이
싫어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는데도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저녁에 땀 밴 옷을 입고 남편과 아이들은
싱싱해서 돌아왔다. 추석 달이 밝은 밤이
되었다. 연자가 절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국
식품점에서 산 송편을 차와 함께 먹고
아이들과 연자 부부는 각각 잠자리로
들어갔다. 커텐을 열어 놓으니까 달빛이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서 낮에 절에서 십 분쯤
만났던 찬준에 대해서 연자는 생각했다.
연자는 찬준을 몰랐으면서도 지금의
자기보다 더라는 것이 꼭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더더 해야 된다던 그의 말을
생각하고 그가 높은 정신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남편을 향해 연자는 돌아누웠다. 남편의
멋없이 펀펀한 가슴에 한팔을 얹고 남편
어깨 우묵한 곳에 고개를 묻었다.
"요, 요, 우리가 언제부터 오누이가
됐어요?"
[6]
찬준으로부터 연락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일요일이 지나고 사흘째 되었을 때
곳의 약도와 날짜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들렸다. 마침 가게 일을 보고 있던 때여서
연자는 찬준을 직접 대할 수 있었다.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연자에게 찬준은
말하였다. 박 선생님도 같이 나오세요.
부부가 같이들 오시니깐요.
저녁 식탁에서 연자는 남편에게 뉴욕
근처에 사는 교수와 예술가와 의사들이
주멤버로 모이는 작은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안
갔으면 하면서 말해 보았다.
남편은 그런 훌륭한 데는 혼자 갔다
오라고 농담하였다. 가정주부란 한 나라의
문화와 같아서 바깥 바람을 좀 쏘여야
집안이 된다고 하였다. 17년 전 자기를 안
좋아 해도 좋다고, 자기가 두 몫으로
남편의 말은 남편보다 학벌도 낮고 가정
경제도 어렵던 연자의 로맨스한 이상에
들어맞는 듯하였는데 이 날 저녁 여자와
문화를 같이 말하는 남편에게서도 연자는
작은 기쁨을 느꼈다.
중세 서양에 태어났으면 기사가 나타나
채어 갈 타입이 못 된다고 연자는 자신을
생각해 왔다. 남자 우월주의로 나가다가도
남편은 가끔씩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남편을 압박자로 여겼던 순간이 있었던
아내를 그 앞에 무릎 꿇고 싶게 하였다.
토요일 날 저녁 식탁을 차려 두고 연자는
찬준이 준 길 안내도를 가지고 기차 타러
나갔다. 뉴잉글랜드로 나가는 기차
정거장은 얼마전 어떤 사람이 총기를
난사하였던 곳이었다. 총을 가졌으면
미친 욕망이 나라도 일런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까 흉기가 난무하는 이 세상은
다시 아이들 기르기 어려운 곳으로
연자에게 느껴졌다.
찬준이 준 안내도에는 이용수 박사
댁이라고 써 있었음에도 연자는 가는 곳이
절 비슷한 조그만 방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기차에서 내린 연자가
걸어서 막상 당도한 곳은 철길 연변 고층
아파트에 자리잡은 가정 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한국음식 만드는 냄새가 났다. 한국말
소리와 웃음 소리도 들렸다.
음식도 나오는가 본데 초대받지도 않고
어떻게 가나? 연자의 발걸음은 멈춰졌다.
그 때쯤 아파트 문이 수월히 열리더니
"오셨군요, 쉽게 찾으셨어요?"
찬준이 연자를 데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찬준이 미세스 박이라고만
소개했는데 얘기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묻지 않고 목례하고 소파에 앉았던
부인들이 자리를 좁혀 연자가 않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찬준은 그늘지고 엉성한
피아노 옆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 방의
사람들은 친밀한 교제가 있어 보였다.
오늘의 연사는 이집 주인인 이용수
박사였다. 스무 명쯤 모인 사람 중에서
누군가 녹음기를 틀고 강연은 시작되었다.
옛 우리나라 사람을 우리 주변 나라에서는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옛날 다른 나라
문서와 고분 벽화에 나타난 내용들을 이
박사는 얘기하였다.
바르다는 얘기가 많고 용맹스럽고 사냥을
잘 한다는 표현도 있었다. 방 안 분위기는
진지하고 엄숙하였다.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과 긍지가 대단하였다. 강연은 밤
열한시경 토닥토닥 치는 박수로 끝을 맺고
다음부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연자는 연사의 말씀이 끝나자 곧
일어났다. 찬준도 연자를 데려다 준다고
뒤따라 나왔으므로 연자는 그에게 부담이
된 듯하여 미안하였다.
낡아서 쇳덩어리같은 찬준의 차를 연자는
탔다. 창백한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하이웨이 상공에 약간
이지러진 달이 조용히 떠 있었다. 찬준과
연자를 태우고 자동차는 거의 빈길을
달려갔다. 앞 차의 테일라이트들이 멀리
떠가다가 사라졌다가 둘로 넷으로
나타났다가 하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뉴욕은 내게는 이미
놀라운 도시가 아니었어요."
찬준이 말하였다.
"....."
"내가 원하는 도시란 사람들이 가만히 서
있어도 에스카레이터에 탄 듯 길이 움직여
주고 자동차는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공중을 날아다니고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것처럼 마술 카펫트 타고 사람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요."
핸들에 손을 얹고 찬준은 단정하였으나
가끔씩 연자 눈에도 뜨일 만큼 고단한
표정이 얼굴을 스쳐갔다.
"미세스 박은 결혼하신 지 얼마나
"17년인가요?"
"댁의 가정이 참 단란해 보였어요. 모두
깨끗이 입고 평화로운 얼굴로 얘기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결혼 역사는 바로
전쟁의 역사였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완전 포기하고는 우리 형하고 나하고 내
동생 이렇게 세 아들을 정성들여 기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숭배했지요.
하느님같이 숭배하셨다니까요. 어머니
영향권을 떠나려는 일념으로 지금 나하고
형은 뉴욕까지 흘러나왔어요."
자기 가정이 다난해 보인다는 찬준의
말이 좋아서 연자는 웃었다. 자라는 동안
연자는 부모는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나
가족 중 가장 미친 사람이 한 가정을
지배한다는 말에 공감하였으며 히스테리를
앉아 있던 어린 동생의 모습도 보았다.
꺼떡하면 기절을 해버리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다섯, 여섯 살이
되었을 때부터 동생은 자기가 놀러 나가지
않고 어머니 옆에 있으면 어머니가 기분이
풀릴 거라고 생각하였다. 시한폭탄을 안은
듯 조마조마한 가정이었지만 그들 형제는
자기 가정이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전쟁 뒤여서 대부분이 가족의 누구인가를
잃고 가난했는데다가 연자 동네
이집저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보다 어린 동생을 업은 채 매맞고 우는
아이도 늘상 보였다. 연자를 비롯하여
아이들은 일들을 많이 하고 학교에
가엾게 여기고 쓸쓸해 하였다.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은 고통스러운
사춘기로 이어졌다. 어른이 되면 성과 같이
견고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따뜻한
가정을 이루리라고 연자는 결심하였고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지금의 결혼생활이 어릴
때의 원을 푸는 것같이 후련하였다.
그러나 가정은 또한 깊은 바다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헤엄쳐 나가야 할지 모르는
무거운 수압에 갇혀 앞뒤로 흔들리기만
하는 것 같은 어째 볼 수 없는 원인 모를
절망감도 연자에게 주었다.
"한국 어머니들은 딱 두 가지예요.
자식한테 미치든가 종교에 미치든가."
찬준이 말하였다.
연자 자신도 한국의 어머니이므로 찬준의
속해야 하였다. 믿는다는 문제가 늘 걸려
있어 종교는 아니니까 굳이 괄호 속에
들어가야 한다면 자신은 자식에 미친다는
쪽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 분류가
연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인류가 자자손손 이어질까요?
핵전쟁이라는 건 실수로도 일어날 수
있다던데요."
연자가 말하였다.
"참 그게 문제예요." 하고 찬준은 얼른
말을 하였다. 그는 작년 반핵 시위에 손수
만든 피켓을 들고 참가하였다.
"결국은 하나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안 되기를 원하고 기도하고 그 길밖에
없어요. 생각이란 게 우리가 느끼는 결과로
나온 거지요. 우리한테는 은연중 얻게 된
어떤 종족은 원수다, 어떤 놈은 우리가 꼭
이기고 봐야 된다, 그런게 자라는 동안
상식처럼 머릿속에 자리잡아요. 서로
만나고 얘기하고 그 길밖에 없어요. 모를
때는 상대방이 더 무섭고 나쁘게 보이지요.
대화만이 유일한 길 같아요."
"그런데 사람은 또 피가 끓기도 하지요.
KAL비행기 사고 때는 내 몸이 가미가제
조종사처럼 자폭하더라도 원수를 갚고
싶었거든요. 내 기준에 의하면 소련은 벌을
받아야 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지요.
벼락치라고 기다려지던데요. 그런 식으로
피가 끓을 때는 전쟁이 나는 거겠지요.
나야 평범하고 힘없는 여자니까
괜찮았지만, 그런데 이 통은 뭐예요?"
아까부터 발 밑에서 걷어 차이며
연자는 물었다.
"아, 그건 비올 때 새는 물을 받는
통이에요. 뒷자리에 던지세요."
연자가 집을 새 없이 찬준은 통을 들어
뒷자리에 던졌다. 잠시 차가 기우뚱하였다.
찬준은 말하였다.
"이차 대전 직전에 각 나라 모두가
대단히 애국적이었다지 않습니까? 편협한
애국심은 위태로와요. 과학의 발달로
지구는 이제 지구촌 시대예요. 혹시 비행기
사고로 누구를 잃으셨어요?"
"아니요."
"난 그 비행기 탈 뻔했어요. 떠나려고
짐이랑 다 싸 놨는데 형님이 추석이나 쇠고
가라고 붙잡아서 비행기표를 물렀어요.
KAL타고 가다가 죽었으면 식구한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은가 싶기도 해요. 죽을 때까지 세상에
신세만 지면 어쩌나 싶어요."
차는 어느덧 맨하탄 강변길을 달리고
있었다. 교통량이 많아지고 빌딩의
불빛들이 검은 강물 위에 어리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식 낳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내 자식이 지구를 더
좋게 만들겠다는 마음도 들겠고요.
TV뉴스에서 전쟁 현장을 보면 어느
나라든지 그 어머니가 죽은 아들 때문에
통곡해요. 죽은 테러리스트의 어머니도
통곡해요. 온 세상 어머니들이 손을 잡으면
세상 평화가 이루어지겠지요."
찬준이 말하였다.
"지금 몇 살이세요?"
"스물 아홉이에요. 몇 달 있으면 꽉 찬
삼십."
"네에."
찬준이 좋은 나이라고 연자는 생각했다.
연자에게는 지금 열 세살 정도된
남자아이들이 위험해 보였다. 자기 아들의
나이였다. 세상 곳곳에서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미국도 징병제를 다시
실시하고 있었다.
지구촌의 한 사람으로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도 전쟁이 나면 이상에 지나지 않고
아들은 어느 한 나라에 소속하여 총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연자 생각으로는
아들이 스물쯤 굵은 청년이 되었을 때 참다
못해 이 지구 어느 지역인가가 곪아 터져
세계는 다시 큰 전쟁 속으로 말려 들 것만
몇 년 전쟁 치루고 나면 그 뒤로 얼마나
또 조심스런 평화일 것이니 지금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이 클 때쯤 세상은 다시
조용할 것 같았다.
찬준은 부시럭부시럭 주머니에서 무엇을
찾아 입에다 넣었다.
"사탕입니다. 드실래요? 편도선이 부어선
내리지를 않아요."
연자는 찬준이 건네는 사탕을 받아
물었다. 레몬같이 시고 달았다. 사탕을 좀
빨아 먹다가 연자는 말했다.
"어떤 게 좋을까요?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나, 그냥 모든 걸 믿고 있어야
하나, 우리 딸애는 자전거 타고 집에서
센트랄 공원까지도 다녀오고 그래요. 뉴욕
시내 복잡한 교통 속에서도, 걔가 자전거
수가 없어요."
"믿으세요."
찬준이 말하였다. 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물고 있던 사탕을 손바닥에 뱉아
내었다. 찬준은 눈두덩이가 아기
볼기짝같이 불끈 솟아 오르도록 두 눈을 꽉
감고,
"걱정될 때는 믿사옵니다 하고 크게
소리내어 말하고는 걱정은 우주 순리에
맡겨 버리세요."
이 책 저 책 뒤지며 해답을 구하였던
연자의 의문에 찬준은 즉석 대답을 하였다.
오늘 저녁 강연에 모였던 사람 중에 제일
어렸건만 사람들이 찬준을 아끼는 태도로
대하던 것을 연자는 생각했다. 무엇을
탐구하여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살고 더 아는 듯하였다.
"지금 나한테 말한 걸 책으로 쓰세요."
연자가 말하였다. 성기가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귀 사이에 있는 듯
연자는 다리가 무거워지고 젖꼭지가
단단해지고 뺨이 붉어짐을 느꼈다.
"지금 매일 조금씩 쓰고 있어요."
찬준은 말하였다. 일하는 시간도 줄여
가며 매달리는 일이 바로 자기가 생각한
것을 적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 그는
플룻도 불고 명상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고
하였다. 없는 시간에 무엇을 그렇게 많이
하는가 싶기도 했으나 연자는 찬준의
재능과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싶지
않았다.
연자 집 앞에 차가 당도하였다. 토요일
복잡하였다. 흔들흔들 걷는 사람들 사이로
차들은 천천히 지나가고 말잔등에 높이
앉아서 기마순경이 거리를 굽어 보고
있었다. 말이 말똥을 흘리자 기다렸다는 듯
작달만한 초로의 남자가 삽을 가지고
나와서 담아 갔다. 화단에 비료로 쓰려는
듯하였다.
차에서 내리며 연자는 안녕히 가세요
말하였다. 찬준도 운전석에 앉은 채 안녕히
가세요 말하였다. 한국말 교습시간 같았다.
두 사람은 얘기를 많이 하였던 사이 같지
않게 서로에게서 물러섰다.
찬준의 차가 떠났다. 시누이 가방가게는
불을 환하게 켜고 영업중이었다.
관광버스가 근처 어디에 섰는지 여행객들로
가게 안은 복작거렸다. 연자는 아래층
후회감 같은 것이 연자를 훌치고 지났다.
젖 한쪽이 잘려 나가는 듯 허전하고
아팠다. 찬준 외에는 오라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었던 그 먼 데를 찾아간 것도
그렇고 오면서 차 안에서 남편도 아닌 젊은
남자와 너무 많이 지껄인 것 같았다.
연자는 허술히 서서 아파트 벨을 눌렀다.
남편이 문을 열어 주며,
"예술가들 많이 만났어?" 웃고 있었다.
연자는 메고 있던 숄더백을 신발장 위에
얹어 놓고 신을 벗었다.
"응, 박사 닥터들하구 의사 닥터들두."
"닥터들은 몰라두 예술가들은 좀 다르지,
위대했어?"
누가 닥터이고 누가 예술가였는지
몰랐으나 연자는,
대답하였다.
[7]
어느덧 시 월달도 반이나 지났지, 마루에
닿는 벗은 내 발이 시리다, 하고 연자는
부엌 식탁에 앉아서 동생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앞에는 방금 받은 동생의
편지와 동생아이 사진이 놓여 있었다.
아이는 하얀 운동모자 쓰고 빨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학교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편지에 동생은 쓰고 있었다.
오늘 헬렌 켈러가 쓴 짤막한 글을
읽었어. 헬렌 켈러는 그냥 눈, 귀 먹은
아니었어. 어린 시절 처음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치던 날의 얘기인데 나 역시
그런 어떤 순간을 맛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어.
거실에서 딸 수림이 피아노 연습을
시작하였다. 연자는 피아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수림이 내는 피아노 소리가
연자는 듣기 좋았다. 아들아이 운동복
치닥거리하기도 좋았다. 아들아이는 학교
농구부원이었으며 일주일에 세 번은 14가에
있는 태권도 학원에 다녔다.
태권도 옷을 보면 아이가 학원에 안 가고
다른 데서 놀다 왔는지 아닌지 연자는
느낌으로 알았다. 아이는 그것을 두렵고
신기하게 여겼다. 어른도 하루하루
바쁘지만 아이들도 바쁘게 지냈다.
문을 지나 세상으로 나갔다가 다시 똑같은
문을 지나고 똑같은 층계를 밟아 집으로
모여 들어서 각각의 잠 속에 빠졌다.
연자는 다시 볼펜을 집어 들었다. 연자는
동생에게 찬준에 대해서 쓸 생각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어도 편지를 보면
동생은 같은 방향으로 나이먹고 있는
듯하였다.
연자는 9월달에 다섯 번, 10월달에
들어서 두번 찬준을 만났다. 아까 낮에
찬준은 포스터 한 장을 연자 시누네 가게에
붙여 놓고 갔다. <평화의 콘서트> 라고 큰
글씨로 쓰고 흰 구름을 배경으로 승려옷을
입은 머리 깎은 흑인이 플룻을 부는 사진이
있었다. 구름 위에 사진을 몽타지하여서
사람이 구름 속에 두둥실 떠 있는
마음의 음악
스리 친모이씨의 명상 음악
입장 무료
만날 때마다 찬준은 새로운 면모를
연자에게 보여 주었다. 다른데서 놀다가
다른 향기를 가지고 낡은 집에 잠깐잠깐
들러 가는 바람 같았다. 연자가 찬준을
일곱 번 만났다고 하는 중에 오늘같이
포스터를 붙이러 찬준이 연자쪽에 들른
날도 있고 거리에서 색안경과 지등, 부채
등을 팔고 있는 그의 모습을 연자가 본
날도 있었다.
밤에 스물 네 시간 여는 수퍼마켓을
다녀오는데 향을 팔거나 가방, 악세서리,
붙여 놓은 동양풍의 지등이 연자 시선에
들었다. 지등을 따라 행길을 건너 발을
멈춘 즉 찬준이 있었다. 깜깜하게 문닫은
책방 앞이었다.
한 팔 안에 드는 목판을 벌여 놓고
찬준은 장사하느라고 바빴다. 이 책방
주인은 좀 알아요. 이렇게 작아도 역사도
오래되고요, 여기서는 미술서적,
종교서적을 주로 취급해요. 주인이 문 닫은
다음에는 와서 장사해도 좋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남의 집 일할 때보다 편해요.
매일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요.
찬준이 가만히 서서 말하도록 행인들은
그냥두지 않았다. 연인들끼리 휘감아 안고
심심풀이로 아무 물건이나 집어 만져 보고
안경도 써 보고 값을 묻고 하였다.
당사자인 찬준은 손님 시중을 들며
태연자약하였다.
길 저쪽에서부터 지등이 눈에 띄어
일부러 길을 건너왔다니까, 네 그게 좀
괜찮지요. 그는 좌판 옆 길바닥에 놓인
나이롱 가방에서 착착 접힌 지등을
꺼내었다. 이거 가져 가세요. 이걸 펴면
저렇게 돼요.
아니요, 연자는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연자는 찬준에 져서 지등을 그냥 갖고 필요
없는 부채 하나는 굳이 돈을 내고 사서
가졌다.
연자는 편지에 썼다. 이 사람은 나이도
어린데 사람들한데 존경받고 귀여움을
받아. 요새 사람 같지 않다고 노인들이
칭찬할 타입이야. 젊은데도 어깨에 힘을
앞으로 축 늘어뜨리고 다녀, 팔 어디쯤은
잘못 꿰매 붙인 인형같애.
쓰다 보니 연자는 찬준이 정말 인형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려서 인형을 안고
산 아기였으면 하고 생명을 넣으려 해도
결국은 물체이었듯, 찬준을 만난 후면 어떤
형태로인가 여운은 남았지만 그의 정신적인
차원이 높아서인지 인형을 안을 때같이
허전한 느낌이 연자에게 들었다. 성직자나
동성연애하는 남자를 대할 때같이
편안하면서도 영원히 안 통할 것 같은
이질감이 있었다.
언제나 고통 없고 편안하세요? 연자가
물으니까 되도록이면 내 둘레에 감옥을 안
지으려 노력하니까요. 찬준은 대답하였다.
"그럼 화날 때는 없고 우울하지도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필요한 공간을
주는 사람들하고만 지내요. 참견하고 요구
많이 하는 사람이랑은 친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 어머니
하나로써 족해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실 수 있나 봐요."
"왜요, 걷잡을 수 없는 감정도 있지요.
그럴 때는 심호흡을 해요."
그는 연자에게 배에 손을 대고 숨 쉬는
방법을 몇 번 시범해 보여 주었다.
"그래도 괴로우면 새파랗게 맑은
하늘에도 구름은 지나간다고 그렇게
자신한테 이르지요."
이 사람 속에는 남다른 의견들이 많아,
하고 연자는 동생에게 썼다. 무얼 골똘히
생각하고 그 생각들을 모아서 책을 내려
그가 젊어서 그럴 뿐 새로운 것은 없다고,
자기도 젊어서는 그랬다고 말한다.
연자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자는 찬준의
글을 읽어 본 일이 있었다. 각 나라의
입장으로 보면 어느 전쟁이든 정당한
전쟁이며 어느 나라나 신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보고 이기게 해달라고 빈다면
하느님은 어느 나라 기도를 들어 줘야
하겠는가.
핵무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전쟁하고 싶은 울분을 참고 견뎌 넘기며
참을성 있게 세월을 보내자. 가지고 있는
핵무기를 쓰지 않기란 몹시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자식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고 편견 없는 지식을 넣어 주고 있으면
우리 시대 말고 다음 시대에 세계평화를
그런 내용을 노트에 적어 가지고 와서
연자에게 보여 주었다. 네모지고 넙적한
그의 글씨가 읽기 어려워 그의 글씨 버릇에
근거하여 연자는 다른 종이에 새로
적어가지고 읽었다. 연자는 공부하는
입장에서 그의 글을 읽었다.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때와 달리 쓴
글은 납작하였다. 말할 때의 마력이 글에서
없어지는 것이 연자는 낭비같이 아까왔다.
연자 마음 밑에는 찬준에 대해 의문부호
같은 것이 있었다. 가끔씩 마음이 쓰였다.
찬준에게 책에서 읽었던 혼외정사 가진
여자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결혼해
있으면서 애인의 아이를 몰래 낳아 기른
얘기를 하였을 때 찬준은 의외로 관심을
나타내었다.
같았다. 책에서 읽은 얘기라고 말했음에도
내 얘기로 들은 것이 아닌가가 연자의
걱정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내 얘기가
아니라고 못박아 놓아야지. 하지만 정작
찬준을 보면 그 사람은 가만있는데 그런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말을 꺼내는 것은
이상하고 오히려 더 의심을 살 것도
같았다. 그 후로 찬준이 아들아이는 범상히
보면서 딸 수림은 특별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으면 연자는 다시 근심스럽기
시작하였다.
내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어, 이
사람하고 관계되는 일인데 언제나 말 많이
하고 나면 나쁜 기분이 남지. 이것도 내가
실감나게 말하다가 되어 버린 일이다, 하고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연자는 썼다. 잠시
감고 찬준이 가르쳐 줬던 대로 믿사옵니다
했다.
[8]
그 날 연자네는 손님이 왔다. 손님은
술에 취하여 침실에서 잠이 들고 남편은
소파에서 앉아 뉴욕타임스 일요일판을
뒤적이고 연자는 수림을 데리고 부엌에서
수북히 쌓인 그릇을 씻었다. 밤 열 한시가
넘었다. 두 귀에 라디오 헤드폰을 꽂고
아들아이는 침대에서 자는 체하여 파티
뒷일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오늘 온 손님은 여섯 사람이었다. 여섯
선생만 남았다. 이 선생은 오늘 온 손님
중에 리버사이드에 사는 연자 친구를
좋아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선생은 초면인
연자 친구에게 점잖게 굴고 국제정세에
대해 얘기하였다.
우리나라 남북한 통털어 육 천만 국민이
가슴터지도록 있는 힘껏 절규하여도
강대국이 우리나라를 놓아줄 것 같지 않은
현실인데도 육천만 국민이 이미 낡은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둘로 갈라져서 등을
대고 있는 처지라는 얘기는 좌중을
감동시켰다. 어디 강연에서 들은 얘기를
다시 옮기는데 자기 속에서 우러나온
생각같이 설득력이 있었다.
열변을 토하던 이 선생은 한 모금씩
입술을 축인다는 듯 마신 죠니워커에
따라다니고 손 좀 잡읍시다. 안아 좀
봅시다 하였다.
봉제공장을 하는 이씨라 하여 봉제리라고
스스로 부르는 이 선생은 연자 남편과 같은
시기에 생물학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미국에서 발간되는 한국 신문들에 가끔
사회 논평하는 그의 글이 실렸다. 이 선생
부인은 사업을 돌보느라 오지 못하고 연자
친구 남편은 여행중이었다.
술이 취해 연자친구를 따라 다니던 이
선생은 초대된 두 쌍의 부부에게 시비를
걸다말다 하다가 연자 부부 침실로 들어가
푹 쓰러지는가 했더니 잠들어 버렸다.
외로워서 저러시는 거예요. 부인이 잘
보살펴 드리면 될텐데, 부인 하고
상관없어요. 왕이 되고 싶은데 왕이 못
소리로 얘기하며 떠나갔다.
연자가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버릴 것은
버리고 냉장고에 넣을 것은 정리해 넣는
동안 수림은 접시를 씻었다.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다가 잠드는 이 선생이
연자는 쓸쓸하였다. 장난삼아 연애
걸었어도 그 여자 앞에서 잘 수 있는지?
적어도 연정이 하루 저녁은 지탱해야잖아,
그렇지?
하던 일이 대충 끝났으므로 연자는
수림을 일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수림이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연자에게 벗어
주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거실에서 남편이
받는 소리가 났다. 이 선생 부인으로부터
온 듯, 남편이 말했다. 지금 자고
있는데요, 술이 좀 과했던 것 같아요.
눈물나도록 하품이 나왔다. 오늘은 긴
날이었다. 어제부터 시장보고 음식
만들었으며 손님 초대는 오늘 오후 한
시부터였다.
남편이 부엌에 쑥 얼굴을 내밀었다. 나
쟤 데려다 주고 올께. 쟤 와이프가 온다는
걸 내가 간다고 했어. 남편은 부엌벽에
걸린 열쇠를 집어 들었다. 코네티컷 숲속
호텔에 방을 10월로 예약하였던 그는
애인이 없지만 올해에는 그 예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12월 중순으로
날짜를 옮겨 놓았다.
침대에 누운 아들아이를 일으켜 남편은
한량없이 무거운 이 선생을 부축하여
나가고 연자는 파티 뒷일을 마쳤다. 욕조에
물을 채우는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외로이 거닐고 있더라구."
꼬리란 찬준을 말함이었다. 머리 뒤쪽을
길러 새끼 손가락 만하게 땋고 다닌다고
해서 남편은 찬준을 그렇게 불렀다.
"꼬리를 만나서 그래도 힘이 됐어.
꼬리가 봉제 리를 차까지 운반하는데 힘을
보탰다구, 내가 꼬리더러 오늘 집에 음식이
있을 테니까 가서 먹으라고 했어. 그러니까
당신이 알아서 국이랑 부침개랑 좀 뜨겁게
해서 먹이라구. 너무 말랐더라구."
남편은 아래층 가게 앞에서 찬준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곧 꼬리라고 부르며 나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놀리는 태도를
취하였다.
남편이 가라고 했다는데 찬준은 연자
집에 오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 공중전화를
달라고 하였다. 찬준은 연자 아파트에 와
본 일이 없었다.
"애들 아빠가 방금 전화했었어요.
올라오세요."
연자가 말했다. 연자는 찬준에게 해 놓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찬준이 말하였다. 연자는 물을 받던
욕조의 물을 빼고 스웨터를 덧입고 밖으로
나갔다. 찬준은 현관 옆 외등 환한 곳에 서
있었다. 일요일 밤이므로 금요일이나
토요일보다 거리가 한산하였다. 가까운
까페로 그들은 들어갔다. 찬준은 탄산수를
주문하고 연자는 카페인 없는 커피를
주문하였다. 찬준은 술 담배 커피는 입에
대지 않았다.
전시되어 있었다. 주방 가까운쪽 테이블을
넓게 차지하고 앉은 일행은 화가와 그
동료들인 듯하였다. 한 갈론들이 포도주
병이 테이블에 올려 있고 그들은 흥겹게
취해 있었다.
찬준이 말하였다.
"마음이 안 잡혀 하루 종일 서성거리다가
밖에 나왔어요. 집에서 여기까지 걸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어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연자와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였다.
"같은 지붕밑, 같은 유리창 안에요."
찬준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연자는 심장에 총알을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무중력 상태로 있는데 키 큰
웨이트레스가 주문한 음료를 가져 왔다.
포도주를 얻어 마시고 기분이 좋았다.
음료를 내려 놓고 웨이트레스가 떠났다.
그 동안 남의 부인인 연자와 만날 때마다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므로 영혼이 한
계단씩 밑으로 내려가는 것 같더라고
찬준은 말하였다. 연자는 찬준이 자기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찬준은
아는 사람도 많고 하는 일도 많고 잘하는
영어도 아니면서 부끄럼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다니다가 바람이 가끔씩 추녀끝에
달린 풍경을 건드리듯 연자 시누이 가게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바쁜 사람이 잠시 와서 쉬는 것
같았었다. 잠깐씩 <들린> 찬준을 연자는
<만났다>는 느낌이었다. 연자는 주로
아이들 세계에서 살아왔다. 어른들 친구는
아픈 아이들이 다가 지금은 교과서와
이런저런 공부하는 아이들로 되었다. 그런
세계에서 가끔 찬준이 들렀다.
"더 이상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길밖에요. 이혼하고
저와 결혼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찬준이 물었다.
연자는 할 수 없겠다고 대답하였다.
말하는데 귀가 더워지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찬준이 같이 자자고 하였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연자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찬준은 고상한 사람이므로 그
말을 하면 자기를 멸시할 것 같았다. 또
여자인 연자의 자존심이 그 말을 못하게
하였다.
찬준과 헤어져 집으로 올라오며 연자는
깨달았다. 바깥을 향해 열렸던 단 하나의
문이 꽉 닫혀버린 것 같았다. 인형이라고
서운히 여겼던 찬준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찬준이 가 버린 뒤 연자는 뒤늦게 열병을
알았다. 연애 시(詩)들은 연자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였다. 어떤
초능력이 개성을 빼앗아가 버린 것같이
연자는 변하였다. 남편은 아내가 시선을
고정시키고 생각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았으며 식구들은 얼마 동안 맛있는
음식을 못 먹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꿈 속에 갇힌 듯
연자는 나날을 보내었다. 이제까지 나는
너무 어린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나는 또
너무 늙었나? 내 시간 동안에 무슨 일들이
서성이는 때가 없지도 않았으나 다시 집
안으로 돌아 가서 연자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거기 앉아서 연자는 커텐을
바꾸거나 새 그릇을 사거나 하였다.
[9]
가울은 겨울로 변해 갔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계획을 세우고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고 까페와 상점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로 떠나고 난 아침
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자는 찬준의
목소를 듣고 기뻤다.
연자는 찬준을 만나러 근처 공원 입구에
나갔다. 나무들은 많던 잎들을 떨구고
잔가지들을 부드럽게 회색 하늘 속에
펼치고 서 있었다. 군밤장수 같은 털모자를
깊숙히 내려 쓰고 코트에 두 손을 찌른
찬준은 연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익숙한
얼굴이었다. 연자의 베갯머리에 와 있던
얼굴이었다.
빈 어둠 속의 그 얼굴을 향하여 내게
찾아오는 당신은 실제인가 가동인가 하고
연자는 묻기도 했었다. 근처에 있는 햄버거
집으로 그들은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곳밖에 문 연 곳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주황과 오렌지 색조로 산뜻한 실내에는
커피 향기가 감돌았다.
찬준은 오렌지 쥬스 연자는 커피를 시켜
은행에는 상점주인들이 전 날 수입을
입금시키러 들어가고 있었다. 창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싼타클로스가 선물
쿠폰을 들고 웃고 있었다.
찬준이 군밤모자를 벗으니까 짧게 깎은
머리가 나타났다. 꼬리가 달렸던 뒷통수는
면도자리가 파르스름하고 머리 꼭대기는 막
자른 잔디풀같이 포르르했다. 깍은 머리
탓인지 찬준은 전보다도 어리고 단정해
보였다. 그는 연자를 떼어 놓고 훨훨
걸어가듯 하였다. 연자는 나이들고
위축되었다.
찬준을 만나러 나오며, 연자는 한낮이
되고 밤이 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지난 한 달을 얘기하고
싶었었다. 연자의 뺨은 들어가고 눈가에는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뭔지도 확실치
않았다.
찬준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제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으시고 우리 생각해 봅시다. 먼저 약속해
주세요.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겠다고요.
나쁜 예감이 연자를 스쳤다.
"네."
수림이 어젯밤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로
찾아왔더라고 찬준은 말하였다.
"거길요?"
수림이 자전거를 가지고 나간 것도
연자는 모르고 있었다.
"엊저녁에 학교 댄스에 간다고
나갔는데요. 걔가 찬준씨 아파트를
"벌써 몇 번씩 왔다 갔는걸요. 수림이가
말 안 하던가요?"
이번에는 찬준이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자전거 타고 다니면 엄마가
걱정하신다고 주의줬더니 지하철 타고 오곤
했었습니다."
"몰랐어요 난. 걔가 왜 거기에?"
"피아노 렛슨 받는 아파트 건물에 제가
살거든요."
"아, 네."
그것도 모르고 연자는 그 건물에
가끔씩이긴 하지만 삼 년째 드나들었다.
"한 달 전인가 수림을 우연히 문간에서
만났어요. 마침 명상한다고 친구들이 집에
와 있어서 같이 지냈지요. 수림이처럼 어린
사람은 없었지만 열 여덟 살된 여자애도
있었고요."
찬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나쁜 말을
곧 듣게 될 것 같아 연자는 몸이 굳고
차가워졌다.
"수림이가 임신했답니다."
찬준은 테이블에 시선을 박고 말하였다.
수림이는 죽고 싶다고, 엄마가 알면 같이
죽자고 할 거라며 울더라고 하였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려가듯 연자의
생각이 급히 굴렀다.
"갠 아직....."
땅이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연자는
가라앉았다.
수림은 아직 생리가 없었다. 적어도
9월달까지 없었다고 연자는 말할 수
있었다. 학기초인 9월달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신체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을 때
물어 보았었다. 닥터 리는 자기도 열 일곱
살에 시작했으므로 수림도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남자애는 누구라고 그래요?"
"말 안 합니다."
찬준의 손이 조심스럽게 와서 연자의
손가락을 잡았다.
"수림이의 친구가 됩시다. 내가
어머니한테 얘기했다고 수림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고 세상을 적으로 돌릴지 몰라요."
연자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놓고
찬준은 벗었던 털모자를 썼다. 정신 없는
연자 눈에도 찬준이 어쩌면 좋을지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찬준은 고개 숙이고
바지 무릎께의 헝겊 올을 손톱으로 세고
있었다.
어느 여자의 아들이라고 연자는 생각했다.
연자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였다.
연자는 몸을 끌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수림이 가엾고 아까왔다. 열
다섯 살로 그 자신이 아직 아이였다. 커서
말이 통하고 친구 같다 싶었더니 어느덧
이런 일이 일어났다. 연자는 자신을 비난
하였다. 찬준에게 마음을 뺏겨 딸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몰랐다.
찬준이 딸아이의 임신을 알려 주었으므로
연자는 두 곱으로 타격을 받았다. 어떻게
남편에게 알리나, 창 밖에 보이는 겨울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자는 날이
아무리 날카로와도 그것으로 무엇을 자를
수 없는 가위 반쪽같이 느꼈다.
[10]
수림은 임신을 하지 않았으며 남자
친구도 없고 아직 첫 생리도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수림을 일 초 일 초
기다렸다가 연자 홀로 알아낸
사실들이었다. 수림은 <꼬리 아저씨>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짓말을 해 보았다고 말하였다.
수림은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연자에게
맹세시켰다. 연자는 그 약속을 이틀 지키고
남편에게 말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아직도 수림을 귀여운 아기인 듯
대할 때 연자는 소리치고 싶었었다. 걔는
이제 애기가 아니라고.
연자는 맹세시켰다. 성적인 환상이 그런
거짓말을 하게 했나 보다고 남편은
말하였다. 참, 참, 남편은 혀를 찼다.
"니 딸이래서 얌전할 줄 알았는데 걔는
다르구나."
남편은 피아노 위에 놓여 있는 어릴 때
수림의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연자는 남편에게 수년간 거짓말을 하며
산 것같이 느꼈다. 한 말로서가 아니라 말
안한 말로서.
남편은 좀 있다가
"그런데 왜 꼬리한테 찾아가서 그런 말을
했지? 쟤가 가끔씩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수림의 비밀은
꼬리 아저씨가 더 이상 자기를 찾아오지
약속을 저버리고 엊저녁 일을 날이 밝자
곧바로 엄마에게 일러바친 꼬리 아저씨만
수림은 그가 자기를 귀중히 여긴다던 말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임신했다고 하니까
그는 등을 안아주고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산다는 것은 여행길같이 정거장과
출발점의 연속인데 중도에 머물러서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수림이도 지금 있는 고통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라고 말했었다.
나는 공기처럼 가볍고 몸 속에는 햇살이
가득 논다.
나는 걷지 못하고 뛴다.
구름이 내 발 밑에 있다.
창작시간에 시를 지었다. 거울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아저씨는 말하기도 하였다.
수림에게도 그렇게 되라고 --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걸으면서 생각하고
자면서 생각하고, 그 사람 생각하느라 아무
일도 못하고 그러지 말고 맑은 거울같이
사물이 있으면 비추고 없으면 안 비추라고.
그런데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수림은 거울같이 되기 싫었다. 만일 거울이
되어야 한다면 한 가지만 비치는 거울이
되고 싶었다.
[11]
코네티컷 숲속 호텔로 주말여행을 떠났다.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자동차 뒷자리에
태우고 앞자리에는 연자부부가 앉았다.
아이들을 이끌고 피로하고 지친 부부가
다시 애인이 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겨울 햇빛이 눈을 시게
하였다. 같은 기차 다른 차칸에 타고서
같은 정거장에 내린 모르는 사람같이
연자가족 네 사람은 말이 없었다.
"브라운 대학생들은 다음 주에 핵전쟁이
났을 경우 낙진 때문에 죽느니보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학교 내
보건소에 청산가리를 비치하는 문제에 관한
찬반투표를 하게 됩니다. 학부 재학생
7백여 명이 서명한 청원서에 따라 이
문제는 학생선거에서 학생총선에
살츠만과 크리스 퍼거슨은 1950년대에 나온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음악 프로그램 사이에 뉴스가 나왔다.
연자가 찬준을 알게 된 뒤부터 틀어도
아이들 숙제를 가끔 넘겨다 보아도 그런
것부터 연자 눈에 띄었다. 핵무기뿐 아니라
다른 사물들도 연자에게 보였다. 하늘, 새,
나무, 그런 것들로부터 입에 넣는 음식,
인간에 의하여 더럽혀지는 자연과 공기,
늘어나는 인구,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경계하는데도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놈들 참, 핵전쟁이 곧 나는 것
같구만."
남편도 뉴스를 들었는지 한 마디하였다.
"아니야 아빠,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 날
학교 다니고 공부해야 돼?"
아들아이가 말했다.
"중세기나 어느 시대나 다 자기 사는
세상을 말세라고들 떠들었었어. 그런데도
사랑하는 아들아 좀 보아라. 오늘도 맑은
하늘에 해는 저렇게 빛나지 않느냐."
무덤 같던 차 속이 활기있어졌다.
"아빠 그 때는 핵이 없었지."
아들아이는 지려하지 않았다.
연자가 말했다.
"지금은 전쟁할 때가 아니란다. 좋은
아이들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참고 견뎌야 한단다."
찬준은 연자에게 등을 보이며 먼 마을로
통하는 길로 미래의 아이들을 만나러 가고
있는 듯하였다. 그가 없어도 연자는 나쁘지
자기를 좋아했다는 따뜻한 느낌이 있었다.
찬준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아는
사람이니까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찬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 무엇이 변해 버리는 듯한 섬세한 감정이
되었다. 길에서 꽃을 보고 좋아서 집에
가지고 가려하면 꺾자마자 벌써 상하듯.
잠잠히 있던 수림이 꿈에서 가까스로
깨어나듯 몸을 움직였다. 우주인들이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 같았다.
"만약 핵전쟁이 난다면 말이야, 누구랑
있고 싶어? 아빠 엄마부터 말해 봐."
수림이 말했다.
"우리 수림이가 보이프렌드가 있는
모양인데 그래."
남편이 말했다.
몰라도 남한테는 정말 쓸 데가 없어."
아들아이가 누이를 놀렸다.
연자가 자동차 뒷좌석을 돌아다 보았다.
"엄마가 대답할께, 엄마는 너희들하고
있으련다."
"저런 저런 쟤들 생각은 다르구나."
남편이 말했다.
"아 그런가? 브라운대학 학생들은
청산가리를 학교에 비치하자고 했는데 그럼
걔들은 학교 친구들과 죽고 싶나?"
연자가 말했다.
숲길을 돌자 통나무와 돌로 멋을 낸 정취
있는 호텔이 나타났다. 호텔 뒤쪽에는
물소리 내며 도는 물방아도 있었다. 먼저
도착한 일가족이 자동차에서 스키 장비를
꺼내고 있었다.
알았어?"
아들아이가 감탄했다.
남편은 차를 호텔 입구에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찬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하였다.
쩡하고 우람한 산이 그들을 에워쌌다. 짐을
호텔 앞에 내려 두고 남편은 호텔 뒤켠으로
주차시키러 갔다.
먼저 온 사람들은 호텔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빈 뜰에 그들만 남았다.
고요하였다. 연자는 미국 생활에 진력을
느꼈다. 그냥 죽음이 일어나고 있으며 나는
죽음을 향해 소멸되고 있다고 느꼈다.
차를 주차시키고 난 남편의 모습이
바람에 불리듯 벽 한 옆으로부터 나타났다.
어제 저녁 연자와 남편은 어떤 것부터 돈
내야 하나, 어떤 아이 요구가 우선되어야
옮기자면 남편은 다른 일 하나 더하고
연자도 정식 직장을 가져야 하고, 그런
것을
얘기했었다.
"왜 추운데 들어가질 않구."
빠른 걸음에 어깨를 움츠리며 남편이
말하였다.
"애들은 안에 있어요."
남편이 여행가방을 집어 들었다. 연자도
세면도구와 옷가지가 든 가방을 들었다.
호텔 홀 안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 전등을 깜빡이며서 있고 낮게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고 있었다.
접수에서 남편이 지난 3월 달에 예약한 방
열쇠를 배당받는 동안 연자 가족은
오리떼처럼 그 곁에 붙어 서 있었다.
접수 사무를 보는 중년 여인의 뒤에
조그만 창이 있었다. 창으로 그림자처럼
부드럽게 먼 산 가까운 산이 떠보였다. 산
모습이 연자 마음을 끌어당겼다.
하루의 끝무렵 산이 검푸르게 변할 때
연자는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 산들은
웅기중기 서서 오늘 또한 지나갈 것이며,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참을성뿐이라고 연자에게 속삭였다. 지금은
전쟁하고 싶어도 전쟁할 때가 아니며
겸손히 참고 견뎌야 하는 때라고.
5. 시간과 강물
[1]
흑인 두 사람이 맨하탄 다운타운에 있는
술상점 문을 밀고 들어 섰을 때 점원인
도혜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힘든 인생이
작은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도혜의 까칠한 얼굴이 잘 말해주었다. 서른
중반도 되지 않았건만 도혜의 젊음과
여성다움은 바래가고 자존심은 매일 조금씩
찢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상점 안으로 들어선 것을
문소리로 알았건만 도혜는 뜨고 있던
뜨개질의 한 줄을 마저 마치고야 고개를
들었다. 마흔정도로 나이가 들고 턱 밑으로
보이는 흑인과 이십대 후반으로 키가 크며
얼굴에 사선으로 칼자국이 날카롭게 그어진
흑인이 서 있었다. 젊은 흑인의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은 앗 하고 소리치고 싶도록
도혜에게 아파 보였다. 이 두 흑인으로부터
도혜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도혜는
자기의 느낌을 믿지 않으려 하였다. 괜한
사람을 무서워하고 보면 늘 부끄러웠다.
도혜는 일어나서 카운터 앞에 섰다.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대바늘이 바닥에 댕가당
떨어지며 뜨게질의 76코가 스르륵 빠졌다.
"반 파인트짜리 고돈 진을 주시오."
카운터에 배를 바싹 붙이고 젊은 흑인이
말하였다. 나이든 흑인은 객장 복판쯤에
서서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하였다.
고객이 달라는 술병은 카운터 안, 도혜의
술상점같이 와인은 고객이 직접 고를 수
있도록 객장에 진열하고 그 외
하드리쿼라고 부르는 스카치나 진, 위스키,
버본 등은 카운터 안쪽에 두었다.
도혜가 고든 진 병을 집으러 돌아선다면
금전계산기와 그 계산기 앞에 서 있는
흑인을 등지게 되어 있었다. 무서워지는
마음과 사람을 무서워하는 데 대한
미안함으로 갈팡질팡하며 도혜는 진열
선반에 등을 납짝하게 붙이고 서서 옆으로
손을 뻗는 이상스런 모습으로 술병을
집었다. 이렇게 무서워지는 사람이
들어오는 경우에 도혜는 아저씨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는 하였다. 전화로 한국말을
하고 있으면 그들이 모르는 말로 외부와
연락이 닿아 있는 상태이므로 수상한 분은
지금은 전화기를 잡기에는 너무 늦었다.
사나운 기를 풍기는 이 고객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우려가 있기도 하거니와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손님을 세워 놓고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은 무례하게 여겨졌다.
카운터에 바싹 다가섰던 흑인이 돈 찾는
행동으로 홀쭉하게 재단된 검은 코트의
주머니를 뒤졌다. 거기 돈이 없는 듯 손을
빼고는 다시 안주머니를 뒤졌다. 흑인의
키가 훌쩍 커서 도혜는 굽어보는 탑 밑에
선 것 같았다. 돈 찾던 흑인이 일순간
카운터로 통하는 허리 높이의 쪽문을
발길로 콱 차고 카운터 뒤로 들어섰다.
쪽문이 발길질 힘의 여세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러 번 열렸다 닫혔다 하더니 바닥에
닿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쪽문 하나를
권총을 꺼내어 도혜에게 겨누었다.
이거였구나. 이걸 보려고 내가 이 사람을
무서워했구나. 도혜는 해답을 본 것 같고
무섭다가 미안했다가 두 갈래로 찢기던
마음이 정리되었다. 몸이 훅 뜨거워지며
아뜩해지는 정신으로 도혜는
금전계산기로부터 물러섰다. 학교에 가
있을 아이가 생각났다.
--제 아무리 잘난 놈도 이 세상을 살아서
빠져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까지 누가 봐도 사려
깊은 가치 감각으로 모든 일을 풀어 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도혜는 신문에서 읽어
두었었다.
나이든 흑인은 길가던 행인들이 안을
들여다 볼 것에 대비한 듯 뒷짐지고
복판쯤에 서 있고 권총 든 흑인은
금전계산기로부터 돈을 쑥쑥 빼내었다.
강도하는 방법도 강도에 따라 다름을
도혜는 알았다. 작년에 들어왔던 칼 든
강도는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카운터
주변에 놓여 있던 봉투를 집게처럼 손가락
사이에 쥐고 돈을 집어 내었었다. 그때
강도는 흉기를 도혜 목에 대고 있었으므로
도혜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 방법을 생생히
보았다. 도혜는 지금 권총을 처음 보는
중이었다. 장난감 총과 다를 것이 없었다.
보잘 것 없는 동그란 저 구멍에서 정말
총알이 나올까? 총알이 곧 날아올 것도
같고 강도가 실수하여 방아쇠라는 것을
당길까 두렵고, 장난감같이 생긴 총이니
정말 장난감인지도 모른다고 도혜는
그때 이웃에서 식품점을 하고 있는
신혼기에 있는 한국 남자가 은행에
입금하러 가기 전 일 달러짜리 잔돈을 바꿔
주러 술상점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이웃
남자는 이 시간에는 누가 근무하는가 하고
문 손잡이를 잡고 상점 안을 기웃이 들여다
보며 들어섰다.
들어오지 마세요, 도혜는 한국말로
그에게 말해야 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위험한 내 곳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도리일 듯하였다.
도혜는 말한 듯했으나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말하기는커녕 도혜는
강도 마음에 들고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닥에 동그랗게 폴싹 주저앉아 버렸다.
길게 빠진 얼굴을 더욱 기다랗게 만들어
누가 들어온 것에 충격을 받은 듯,
"변소로 가랏! 변소로 가!"
설쳐대기 시작하였다.
"빨리빨리, 허리 업."
강도는 발길질까지 하였다. 도혜는
날카로운 그 발길에 맞을 새 없이 앉았던
자리에서 용수철이 튕기듯 일어나 변소로
향하여 한달음으로 달렸다.
이웃 상점 주인도 객장에 서 있던 다른
흑인에 의하여 변소문 안으로 떠밀려지고
있었다. 찬 와인을 넣어 두는 냉장고 옆에
있는 나무문을 열면 오른쪽에 상점 바닥과
같은 높이고 세면대와 변기가 있고
왼쪽으로 지하창고로 통하는 좁고 가파른
층계가 있었다. 변소에는 청소용 물걸레와
물통, 빗자루 등을 두어 복잡하였다.
구르듯 내려갔다. 이웃 남자와 도혜를 몰아
넣고 강도는 문을 닫았으므로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아 축축한 먼지내 나는 어둠은
고체같이 짙었다. 전등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어둠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층계 끝나는 곳에 상점과 비슷한 면적의
지하실이 있었다. 술상자들이 현대
도시같이 통로만 남기고 반듯반듯 쌓여
있었으며 상점과 상점 위의 네 세대
아파트를 상관하는 보일러와 수도 계량기,
전기 미터기가 그 안에 있었다.
이웃 상점 남자와는 고개 인사나 하고
지내던 처지인데 이제 이곳에 갇혀 인간의
존엄성은 간 곳 없이 벌거벗긴 듯 무력하고
수모당하는 모습을 서로 보이고 보는 것이
"여기가 막혔습니까?"
이웃 남자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도혜는 지하실 입구를 더듬어 보는
중이나 찾을 수가 없었다. 덩지 큰 어른이
술상자를 안고서도 수월히 드나들던 입이
큰 통로가 깜쪽같이 없어졌다. 도혜는
강도들이 어느 순간 변소 문을 열고 시커먼
계단 아래쪽을 향하여 총질할 것만 같아서
지하 창고로 들어가 높이 쌓인 물건 상자들
속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그 입구를 찾는
일이 초를 다투며 죽고 사는 일같이
절박하였다. 지난 추수감사절 즈음에
물건을 많이 쌓던 때 물건 정리하는 청년이
잘못해서 입구를 막도록 물건을 쌓아
버렸다고 도혜는 생각하였다. 입구찾기를
단념하려니까 도혜에게 절망감이
밑바닥 흙먼지 속에 얼굴을 박았다. 층계
한 칸밖에 안 되는 면적에 물건상자가
버티고 높이 막았으므로 도혜의 엉치는
들려 있게 되었다. 모래 속에 대가리를
박은 타조 모양이 되었다.
"엎드리세요."
도혜가 말하였다. 한국말이 통하여서
편하였다. 이웃 남자는 도혜보다 두어 칸
위층쯤 되는 계단에 서 있는 듯하였다.
이웃 남자가 입은 스웨터를 도혜는 포근히
그 어디쯤 되는 어둠 속에 느꼈다.
"엎드리세요."
도혜는 이웃 남자에게도 자기처럼 하도록
간곡히 권하였다. 엎드린 면적이 서 있는
면적보다 작지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흉하게 구세요.
참 나쁜 놈들, 혼잣말같이 하였다. 이웃
남자는 도혜에게 무례하지 않으려고
마음쓰는 것 같았다. 일부러 쓴다기보다
부인네와 있다고, 한국적 교양이
걸리적거리며 작용하는 것 같았다.
권총이 장난감이라면 강도들이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닌데 필요 이상 무서워하고
있다는 생각과 강도짓 하는 것은 나쁜
일인데 악에 대항해 싸우지 않고 비위
맞추는 태도는 비겁하다는 생각과 아,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 것이라는 예감 같은
것들이 도혜 머리 속에 명멸하였다. 총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생각이 없이 아이가
어렸을 때 도혜는 여러 가지 모양의 장난감
총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죽어 넘어진
군인과 사격 자세의 군인, 죽어 넘어진
주었다. 장난감을 순진한 한갓
놀이감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길들여가는 것이므로 잘
선택했어야 했다고 도혜는 깨달았다.
상점 마루바닥에서 투다닥투다닥 구르던
발소리가 멎고 조용해진 것 같았다.
심상찮게 고요하였다. 빛은 어디서도
새어들지 않았으므로 그토록 오래 있어도
눈앞에는 짙은 어둠뿐 자신의 손 윤곽도
잡히지 않았다. 눈알이 빠져 나간 듯
아무것도 안 보였다.
"갔나 봐요."
이웃 남자가 말하였다. 몸도 좀
움직였다.
이웃 남자가 뛰어나갈 것 같아서 도혜는
짐작으로 그를 꽉 잡았다. 도혜 손아귀에는
잡혔다.
"나가지 마세요."
도혜는 말하였다. 변소에 갇혔다가 한 발
먼저 나가는 바람에 도망가던 강도 총에
희생된 한국 사람 이야기가 생각났다.
평소에 무엇을 많이 봐 두고 읽어 두고
생각해 두는 것은 중요하였다. 눈앞에서
사라지고 귓바퀴를 스쳐간 것들로부터,
체육시간에 손 한번 들어 보았던 것,
수학시간에 자 들고 줄 그어 보았던 것,
조회시간에 벌섰던 것 같은 실제의 모든
경험과 더불어 상상으로만 했던 경험까지
활발히 깨어났다.
"보세요, 갔나 봅니다."
이웃 남자가 고집부렸다.
"아직, 아직요."
스웨터를 놓아 주었다. 여자인 도혜가
남자인 이웃보다 더 뻔뻔스럽고 실력을
행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혜는 금년
봄에 이화여대를 졸업하였다는 그의 부인을
느끼고, 그 남편을 자기가 곤경치르게 하는
것 같아 그 부인에게 미안하였다. 새댁은
남편이 이렇게 있는 줄도 모르고 밝은
세상에서 지금 바쁘게 상점을 돌보고 있을
것이었다. 도혜는 바깥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무심한 사람들이 전부 부러웠다.
이웃 식품상점은 주인을 비롯하여 종업원
모두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한가할 때면
도혜는 쇼윈도 너머로 그 상점을
구경하였다. 개미처럼 쉬임 없이 과일을
쌓아 올리든가 상점 입구에 놓인 화사한
꽃다발들에 물을 뿌려 대든가 한 상자에서
갈라 놓는 것을 보기가 재미있었다.
"보세요, 누가 부르고 있어요."
이웃 남자가 말하였다. 도혜는 귀를
기울였다.
"헬로, 헬로우."
구김 없고 의심 없는 남자 목소리가 도혜
귀에도 들렸다.
"헬로우우? 에니 바디?"
나가도 될 것 같았다.
두 손을 헛짚어대며 도혜는 깜깜하고
가파른 층계를 올라갔다. 그 뒤에서 이웃
남자도 올라왔다. 변소쪽에 올라서니까
상점에서 부르고 있는 목소리가 더욱
뚜렷해졌다. 도혜는 변소문을 살며시 밀어
보았다. 꿈쩍 안 해서 도혜는 이번에는 두
팔에 꽤 힘을 넣었다. 뒤따라온 이웃
한다리를 문에 대고 온 몸으로 밀었다.
그제야 문이 마지 못해 밀리며 열렸다.
강도들이 상점 안에 놓여 있던 뜯지 않은
술상자들을 문 앞에다 쌓아 놓았음이
드러났다. 층계 아래층에서 도혜는
강도들이 총을 쏠까 두려웠었는데 강도들은
강도들대로 도혜들이 나올까 겁을 내었던
듯하였다. 싱겁게 끝났다는 기분도 들었다.
"유우후우우----. 헬로우."
휘파람 불듯 둥근 얼굴을 천정으로
향하고서 점원을 불러대던 초로의 신사는
거의 매일 들르는 단곡손님이었다. 낙타
코트에 두 손을 찌르고 섰던 손님은 도혜와
이웃 남자를 보자 반색을 하였다.
"대체 어디 있다들 오시오?"
도혜가 카운터 뒤쪽으로 돌아서니까
눈에 드러났다. 금전계산기 밑 선반에
넣어둔 봉투들이 쏟아져 나와 있고 서류를
두는 캐비넷 서랍도 전부 뽑혀져 있고 도혜
핸드백도 뒤집혔으며 도혜가 손 씻고서
만지던 뜨개질도 구둣발에 밟힌 채
나뒹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났었소?"
손님이 물었다.
대답하면 손님이 깜짝 놀랄 것이
확실해서 도혜는 절로 웃음이 나려 하였다.
도혜의 상점이니까 도혜 소관이라는 듯이
이웃 남자는 나서지 않고 한 쪽 벽에 서
있었다. 이웃 남자가 우아히 있으므로
도혜는 사지에서 살아났다고 해해해
무용담을 펼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강도가 들었어요."
앞에서 문법도 액센트도 이상스런 영어를
지껄이기도 주저되었다.
"아, 그래서 지하실에 있었소?"
머리숱이 적은 갓난애 같은 손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는 것은 표현하기 위한 말로서의
말이 아니라 정말 핏기가 그림자지듯 싸악
가셔 가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띔을
도혜는 알았다. 손님이 늘 사는 반
파인트짜리 버본병을 도혜는 집어 들었다.
"이거지요?"
도혜는 손님에게 그것을 그냥
주려하였다. 사람한테 지옥 구경을시켜
주고 막 가져가는 판인데 꼭꼭 돈내고
사갔던 단골인 이 손님에게 거저 주지 못할
게 무언가. 도혜가 손바닥 안에 드는
뒷걸음질로 상점을 나갔다. 크게 놀란 듯
그 사이에 입술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또
오겠소, 손까지 저어 보였다. 손님이
그러니까 도혜는 푹 느긋해지며 자신이
허풍장이같이 생각되었다. 강도가 들고 온
총도 장난감 같이만 생각되었다. 그 총이
장난감이 아니라면 왜 쏘지 않고, 도혜들이
지하실에서 못 나오도록 변소 문 앞에
술상자로 성을 쌓았을까.
손님이 나간 뒤 입 봉하고 섰던 이웃
남자가
"돈을 많이 잃으셨어요?" 물었다.
"금방 문 열어서 얼마 없었어요."
도혜는 이웃 남자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주인께 알리셔야죠."
않아도 도혜도 그러려던 참이었다.
술상점의 주인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상점을 열고 있으며 도혜 어머니의
동생이므로 도혜에게는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은 도혜를 누님한테 하나 있는 일점
혈육이라면서 잘 보살펴주고 있었다.
도혜는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도가 들었어요."
"어, 언제?"
외삼촌은 얼떨떨해 하였다.
"방금요, 지하실에 갇혔다 나왔어요."
이웃 남자가 듣는 앞에서 그를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지 몰라서 도혜는 이웃 남자도
같이 있었다는 얘기를 미처 못하였다.
그러고나니까 도혜는 또 혼자 야단스러운
것 같았다.
곧 갈께. 아무데도 다친 덴 없는 거지?"
오 분도 못 되어 외삼촌이 셰퍼드를
앞세우고 상점으로 들어왔다. 셰퍼드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상점 안을 뛰어다녔다.
"어떻게 된 거야?"
외삼촌이 물었다.
"은행에 가기 전에 잔돈이나 바꿔 드릴까
하고 들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들어오면서 보니까 시꺼먼 놈이 돈통 앞에
서 있더란 말씀이에요."
도혜를 혼자 두고 가기가 나쁜지 조용한
태도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이웃 남자가
외삼촌에게는 수월히 설명하였다.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그래서 도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여기 서
있던 한 놈이 내 목덜미를 잡더란 말이에."
정면으로 서서 얘기하였다. 그 동안 도혜는
강도들이 어질러 놓은 상점 안을 치웠다.
"가게 쇼윈도에 물건을 너무 많이 진열
마시고 밖에서 안이 환하게 보일 수 있게
하시지요. 여자분 혼자 계신 게 위태해
보였어요."
이웃 남자가 말하였다.
"참 세상에 안전하게 벌어 먹고 살
도리란 없나?"
외삼촌이 말하였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도혜가 물었다.
두 남자가 잠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입을 연 것은 외삼촌이었다.
"관두지, 경찰차가 요란스럽게 와서 쭉
늘어서면 창피스럽기만하고 범인 사진 보러
이웃 남자도 그 결정에 동의하는 수굿한
모습이었다.
"전 그럼 가 보겠어요."
이웃 남자가 말하였다.
"잘 오시지도 않더니 어쩌다 오셔
가지고는..... 괜히 와서 욕 보셨습니다."
외삼촌이 말하였다.
"부인이 얼마나 놀라실까요."
도혜가 말하였다.
문을 열고 두어 발짝 걸어나갔을 때,
이웃 남자가 상점 안으로 도로 들어섰다.
상점 문에 매단 종이 한참 쟁강거렸다.
"여기 잔돈 두고 가겠습니다."
이웃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일
달러짜리로 오십 달러 묶음을 건네었다.
"이거 드리려고 들렸던 거니까 드리고
하시지요."
"네."
도혜는 그가 건네는 돈을 받아 동전만
묵직히 앉아 있는 금전계산기의 일
달러짜리 두는 칸에 넣었다.
"그 봐, 개를 데리고 있으라니까. 이
놈만 있었어두."
외삼촌은 개를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 눈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개는 델롱델롱 고추를 흔들면서
상점 구석에가서 스핑크스같이 위엄 있게
앉았다.
"복동이 얼굴이 왜 저래요?"
높이 치켜 든 개 얼굴의 눈썹 근처가
잔디풀 뜯긴 마당같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외삼촌은 개를 도혜 상점에 남겨 두고
갔다. 외삼촌의 부인인 외숙모는 병원에
출근하고 낮에는 외삼촌 혼자 상점을
돌보았다.
떠난 주인의 발길을 도로 잡으려고 상점
문간에서 개는 길길이 뛰며 맹렬히 짖었다.
상점문 안에서 짖건만도 몇몇 행인은
질겁하며 차도로 내려섰다. 도둑이고
손님이고 아무도 상점에 근접을 못하게
생겼다.
짖는 개를 내버려 두고 도혜는 사다리로
쓰이기도 하는 동그란 나무 걸상에 높이
올라 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떻게 느끼는 감정이 옳은 것인지 도혜는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의 별로 도로 갈 수
없는, 잘못 실수로 이 땅에 떨어진 외계인
두어 번 목에다 감고도 한 자락은
허리까지 늘어지도록 털목도리를 두른,
남자가 개가 짖어대는 상점 문간에 바싹
붙어섰다. 그러나 그는 들어오지 않고 두
손으로 컵을 만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떠나갔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음을 도혜는
알았다. 건너편 인도 레스토랑의 차양이
팔락팔락 쉬임 없이 들까불고 있었다.
죽기 싫은데도 죽어 버리는 이 육체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내 입에 넣는 음식이
암을 일으키나, 내 몸 속에 혹이 생겼나,
내가 몇년이나 더 살겠나 하고 제 몸에
대해서 궁금히 생각한다. 육체는 정신을
배반하고 정신은 육체를 믿지 못해서
끊임없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만 같다.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도혜에게는 자기라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 아니고 버르장머리 없고
교활하고 성욕에 시달리는 덩어리이며
살아가려면 자기 몸 속에 있는 이런
동물성을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못
견뎌서 스스로 파괴되고 말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큰해를 끼칠 것
같기도 하였다. 판단만 자칫 잘못 내리면
아까 들어왔던 강도같이 될 것도 같았다.
속에 있는 것들이 부끄러워서 도혜는 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파묻고 고요한 구석에
숨어서 자기를 고치려고 하였다.
도혜는 얼굴 없고 이름 없는 하나의
느낌이었다. 느낌으로 의자에 앉아 도혜는
홀연 의문을 품었다. 조금 전 지하실에
입구가 찾고 찾았음에도 없었다. 정말
일하는 청년이 어린아이라도 안할 짓으로
거기를 다 막아 버렸을까?
도혜는 변소로 가서 전등 스위치를 올려
지하실의 불을 켰다. 밝은 형광등 불빛
속에 지하실 입구가 환히 드러났다.
술상자로 반만 막히고 입구는 엄연히
있었다. 저 넓은 공간을 아까는 왜 못
찾았나 도혜만 못 찾은 것이 아니고 이웃
남자도 못 찾아 내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대체 어디였어? 개짖는 소리를 들으며
지하실 층계 위에 도혜는 홀로 서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도혜 마음 속을
지나갔다. 도혜가 못 찾았어도 지하실
입구가 거기 있었듯이 도혜가 못 보고 못
들은 어떤 것들도 없는 것이 아니라 거기
차원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도혜는
유리되었다. 자기 감각과 느낌의 불확실에
놀라고 나는 누구인가 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도혜는 다시 동그란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2]
과수원은 몽롱한 달빛으로 가득 차고 꽃
피어나는 배나무는 희미하게 빛났다.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기 많은 바람에
설레며 열 여덟 살인 도혜는 잠들 수가
없었다. 시간은 순서대로 흐르지 않고 멀리
갔던 것이 되돌아 현재에 흐르기도 하였다.
어떤 자신은 깨달아지고 있으며 어떤
자신은 오로지 가능성일 뿐이었다.
도혜에게 분명한 것은 육체가 여자의
형체를 갖추었으므로 여자이고 세상이
여자같이 생긴 도혜에게 여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요구하였다. 여성이므로 남자를
그리워하고 배꽃 피어나던 밤에 임신이 안
되는 방법을 몰라서 아이를 가지니까
도혜로부터 새로운 도혜가 나타났다. 아이
겉에 있으면 도혜는 어머니인 자기가
낯설게 눈에 보였다. 앞서 살고 간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의 흐름 속에 합류하여
도혜 속에서 어머니는 강하게 되었다. 다른
어머니들도 누군가의 딸이었다가 아이를
낳고, 그 자신 안에 있는 꿈을 종종
배반하였으리라고 도혜는 생각하였다.
돈걱정 없이 실컷 놀고 싶었으며 그들도
나처럼 자식을 사랑하였으리라. 옛날
봉건시대 어머니들은 천성을 숨기고 일을
많이 하다가 긴장과 억제가 점점 커져서
어마어마한 육체적인 부담이 되던 어느 날
뚝 그 심장이 멈추었으리라.
[3]
강도당하던 날 오후 늦게 오십 달러가
모이자 도혜는 이웃 식품점에 오십 달러를
갚았다.
그 해 마지막 날에 이웃 새댁과 도혜는
내년에는 고통을 모르라고 축복의 말을
그러나 몹시 상심되는 일이라도 있는지,
[4]
1984년은 이미 지나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설날부터도 여러 날이
지났다. 아이는 매일 학교로 가고 상점
지키라고 데려다 놓은 개는 동네
도둑고양이들하고 싸움에만 골몰하여
지하실에 붙어 살고 강도당했던 날
들어왔던 첫 고객은 밖에서 상점 안을 살펴
보고야 문을 들어섰다. 혹시 길에서라도
강도가 알아볼까봐 강도 당하던 날 입었던
옷을 도혜는 입지 못하였다. 돈을 조금
늦게 내거나 코트 자락을 휙 들추고
도혜는 반사적으로 자지러졌다. 신문은
하루도 빠짐없이 범죄사건을 보도하였다.
집단 살인같이 대서특필되는 사건도 있지만
소소한 사건들은 실리지조차 않아서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세상은 말 그대로 고해(苦海)인
듯하였다. 도혜는 엄연한 이 현실에
적응하려 노력하였다. 도혜는 아이를 등에
지고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 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있는 힘껏 매달려야
하였다. 거기 매달리기 위한 육체적인
노력은 도혜의 에너지를 다 소모시키는 것
같았다.
그런 어느 하루 이번에는 이웃
식품점에서 강도를 당하였다.
[5]
같은 한국인이므로 잘 알리라 생각하고
이웃사람들이 식품점에서 일어난
강도사건에 대해서 도혜에게 물어 보았다.
그렇게 하여 오전 열 한 시경 상점 문을
열자마자 도혜는 이웃 상점에서 강도를
만난것을 알았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하는 말들이 틀렸다.
상점 사람이 강도에 죽었다고도 하고
사람이 다쳐서 병원에 갔다고, 치료받으러
두 발로 걸어간 듯 말하기도 하였다.
창으로 바라보이는 이웃 상점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름 없었다. 체격이나 옷으로
보아 새댁임이 분명한 여자가 다른 여자와
손님들은 상점용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한가히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강도사건이
있었던 상점 같지가 않았다. 도혜는
식품상점에 가서 직접 물어 보고 싶기도
했으나 상점을 비우기도 나쁘고 재미에
가깝게 솟구치는 자신의 호기심을 누르고
싶었다.
한 쌍의 할머니가 팔짱을 끼다시피 하고
도혜 상점 문을 들어섰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프리티 걸(pretty girl)의 남편인가
안경낀 여자의 남편인가를 알고자 하였다.
"이쁜 여자"란 새댁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누구누구가 식품상점에서 일하는지
도혜보다 할머니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
"사람이 죽었어요?"
도혜가 물었다.
도혜는 전혀 몰랐다고 대답하였다.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할머니들에게 아양 떠는 마음도 있었다.
"맨(man)이 죽었어, 코리언 맨. 가게에
가서 물어 보면 아무도 말 안 해. 난 그
심정을 이해해. 이해하구말구."
할머니들이 나간 뒤 도혜는 더 이상 못
참고 식품점에 전화를 걸었다.
"헬로."
가느다란 목소리로 새댁이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도혜도 새댁같이 구슬픈 목소리를 내고자
하였다. 아무가 가서 물어 봐도 대답을 안
했지만 도혜에게만은 무슨 설명이 있으려니
하니까 도혜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 같은
새댁의 남편인가, 그리고 정말 사람이 죽긴
하였나, 그런 것을 알고 싶었다.
"큰 일났어요."
새댁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요?"
새댁이 울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듣다가 도혜가
"무슨 부탁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하니까,
"네, 그런데 누구세요?"
새댁이 물었다.
목소리로 으례 알려니 하고 있던 도혜는
창피하였다.
"저어, 술가게 여자예요."
"네에, 고맙습니다."
곧 이어 <데일리 뉴스>지의 여기자가
들렀다. 도혜에게도 바쁜 날이 될
듯하였다.
사람을 둥둥 띄우는 듯한 오리털 넣고
누빈 코트를 입은 여기자의 뺨은 차가운
기온 탓으로 빨갛게 얼어 보였다. 턱선에
맞추어 깔끔히 자른 금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신을 소개한 후 여기자는 오늘
희생된 한국 사람인 미스터 리에 대해서
알려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도혜는 이웃
상점에서 이씨 성을 가진 한국 사람이
살해당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새댁도
남편은 아니라고 했지만 여기자도 미스터
리는 주인이 아니고 종업원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자는 34가에 가서 미스터
리의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눈 근처에
미스터 리는 37세라고 하였다. 여기자는
캔자스 어느 신문사에 있다가 뉴욕에 온 지
한 달도 채 못 되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강도살인 사건을 대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자는 도혜에게 선망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자는 이 땅에 뿌리박힌
백인이며 젊은 데다가 입사 경쟁이 심했을
큰 신문사에서 이런 강도사건을 취재하는
입장에 있었다. 아무 소리 못하고 강도의
총 앞에 무력히 무릎 꿇는 도혜네와는 다른
처지였다.
죽은 미스터 리에 대해서 도혜는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여기자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식품상점의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일한다고 말하니까 의외로 여기자가
수첩에 그 말을 적었다.
것으로 생각하고 의지하였다. 경찰관이나
재판장이나 대통령 같은 무엇, 구체적인
육신을 가진 인물을 넘어서 더욱 정의로운
그 무엇으로.
여기자는 떠날 무렵 도혜의 이름을
물었다. 도혜는 사기꾼같이 어떤 이름을
댈까 망설였다. 한국의 여자이름 중 어떤
것이나 대어도 좋을 것 같고 어떤 이름이
붙든간에 여기자 눈에 도혜는 답답하게
생긴 하나의 동양인일 것 같았다. 도혜가
얼른 말 못하니까 여기자는 시원히 웃으며
오케이 하고 수첩을 탁 접었다.
여기자가 가고 조금 후에 도혜 외삼촌이
들어왔다.
"아, 총 두 방에 생명이 가는구나."
외삼촌이 말하였다. 외삼촌의 목소리를
도둑고양이 들기만을 기다리던 개가
헐떡헐떡 올라와서 반갑다고 길길이
뛰었다.
"저어요, <데일리 뉴스>에서 기자가
왔었어요."
도혜가 말하니까 외삼촌이 대뜸
긴장하였다.
"뭣? 우리 가게 사진이랑 찍어 갔어?"
"아니요, 그냥 죽은 사람 아느냐고
물었어요. 모른다고 했어요."
말하며 도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뉴욕판 한국 신문>
<교포, 히스패닉 강도에 피격 사망.
8일 오전 7시쯤 맨하탄 그리니치 빌레지
중심가에 있는 교포 식품점에 강도가 침입,
현금을 빼앗아 달아났다. 왼쪽 눈 언저리에
두 발의 총을 맞은 이영수 씨는 인근
병원으로 급히 이송해 수술을 받았으나
오전 11시 숨졌다.
사건이 발생한 업소는 톰슨 스트릿 4가의
교차로 부근에 위치한 '해피 마켓'(업소주
김경환)으로서, 이날 오전 현재 경찰이
입구를 차단, 영업을 중단하고 있다.
사건 당시 피해자 이씨와 함께 있었던
종업원 송근인 씨는 경찰 신문을 통해
침입한 강도가 히스패닉계이며 2명 이상일
것으로 추측 된다고 진술했다.
송씨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 15분쯤
업소 내 뒤편 싱크대에 있던 송씨에게
강도가 들이닥쳐 송씨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강도는 송씨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강도는 달아났다는 것이다.
송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가
보니 동료 이씨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계산대 옆에 쓰러져 있고 현금이
없어졌다고 한다.
송씨는 경찰에 연락을 취하려 할 때 마침
부근을 지나가던 경찰차를 발견,
사건발생을 알리고 이씨를 근처의 세인트
빈센트 병원으로 옮기게 했다.
현장에 나온 6경찰서 소속 카펠로 형사는
송씨가 총으로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이씨가
총상을 당한 점으로 미루어 강도는 2명
이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6경찰 당국은 이날 현재 범인의
사건이 발생한 업소에는 오전 8시 30분과
오후 8시 30분의 2교대로 밤에는 송씨와
이씨 등 2명, 낮에는 남자 종업원 3명과
여자 종업원 2명이 일하고 있다.
동료 종업원들에 따르면 피해자 이씨는
나이 약 40세로서 이 업소에서 3년째 일해
왔으며 부인 염영애 씨와 플러싱에 거처를
정해 두고 있다.
이씨가 다니던 퀸즈 한인교회 교인들은
병원을 방문, 그의 임종 소식을 알았다.
그리니치 빌레지에는 사건이 발생한
'해피 마켓'을 비롯하여 교포 상점이 다수
있다.
그리니치 빌레지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난
사례는 더러 있었지만 교포가 인명피해를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드타운 일대 한인 상점 탐문수사.>
<맨하탄 그리니치 빌리지에 교포
식품업소에서 히스패틱계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이영수 씨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맨하탄 6경찰은 범인들이 밤늦게까지
영업하고 있는 맨하탄 미드타운 한인
상점을 노리는 불량배들로 추정,
범인수사에 한인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맨하탄 6경찰 강력반의 모나코 형사와
에델란 형사는 사건 당시 목격자가 없으며,
현장에서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이같이 말했는데, 수사협조를 자청한
한인회와 함께 미드타운의 삼십여개 한인
상점을 선정,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한편 가게주인 김경환 씨는 가게 일을
제쳐 두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으며
근무하고 있는 봉제업소의 주인 신일수 씨
등과 함께 범인 체포에 최선을 다해 경찰을
돕고 있는데, 범인 체포를 위한 현상금으로
천 달러를 모금했으며 유가족을 돕기 위한
대책을 강구중이다.
플러싱 아파트에서 비보를 듣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이씨의 부인 염영애 씨는
이씨가 다니던 퀸즈 교회 한길만 목사의
도움으로 오는 11일 이씨의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는데, 앞으로 서울 성북동에서
이씨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세 딸을
데려와 미국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지난 1981년 도미, 이씨의 뒤를 따라
1983년 도미한 부인 염영애 씨와 한 달에
단 하루만을 쉬며 억척스럽게 일해 온
이씨는 불법 체류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무관하다"고 절제하고 이씨 주변 교포들이
수사에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바랐다.>
한편 소식을 전해 들은 청과상조회는 9일
헌츠포인트에 나온 교포 청과상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이씨의 유가족을
위한 기금 모금에 들어갔다.
이영수 씨의 장례식 날은 조용하고
포근하게 눈이 내렸다. 인도 옷상점의
차양은 눈이 소복이 덮이고 자동차들은
천천히 흐르고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도혜는 창가에서 건너 식품상점을 보며
이영수 씨는 죽어서 장례식장에 있을
테니까 식품점 카운터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영수 씨가 살아서 거기 서
있으나 죽어서 거기 못 서 있으나 다른
있으나 죽어서 안 서 있으나 무엇이
다를까, 모습도 아슴프레한 이영수 씨의
자유로운 영혼이 마침내 도혜와 의사소통이
되었다. 도혜는 이영수 씨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강도 손에 도혜가 죽었다면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은 도혜였을 것이며
그 소식을 듣는 것은 이영수 씨였을
것이었다.(죽은 이가 키 큰이야? 전라도
말씨 쓰던 사람? --대신에-- 죽은 이가 애
데리고 살던 눈물점 박힌 여자? 근데 그
여자 남편은 뭐 한대? 남편은 통 안
보이지? 아리송한 여자지? 아이만 가엾지.)
육체를 떠나 이영수 씨의 영혼은 지금 옷을
입지 않고 어디 한 군데만 머물지 않고
여기 서 있는 도혜 자신보다 훨씬 더
무엇을 아는 순수한 정기일 것 같았다.
[6]
이번 사건이 났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이
기자들 대하기였다고 새댁은 말하였다.
"글쎄 사람이 죽은 집에 어떻게 알고
금방 기자가 여섯 명이나 몰려 왔어요."
"우리 가게에도 <데일리 뉴스>지에서
왔던데요."
"여자지요? 그 여자가 여기 와서
사진이랑 찍더니 거기루 건너 갔구나. 저
건너도 한국 사람 가게라고 하던데 그
가게는 괜찮았냐고 해서 난 모른다고
했어요. 꼭 한국 사람만 당한다는 듯이
물어서 기분 나쁘더라구요."
여기자를 만나 여러 가지 얘기 한 것이
처신을 잘못한 일 같았다.
"강도가 총을 떨어뜨리고 갔어요. 경찰이
주워 가지고 보여 주는데 꼭 장난감
같애요. 우리집 이가 그런 총에 맞았으면
안 죽을 텐데 어떻게 머리를 맞아서 죽었나
보다고 그래요."
새댁이 말하였다.
"아니요, 진짜 총이에요. 보니깐
장난감이 여간 잘 만든 거가 아니예요."
도혜가 말하였다. 자기 상점에 들어왔던
강도의 총이 진짜였는지 장난감이었는지
몰랐으며 식품상점에서 이영수 씨를 죽게
한 총을 본 일이 없으면서도 도혜는 힘있는
소리로 아는 척했다.
"범인이 잡혔대요. 형젠데 동생이 열
새댁이 말하였다.
"그럼 애들 아녜요? 우리 집 애 같은
애들."
도혜가 말하였다.
아이가 없는 새댁은 열 다섯이나 열
일곱짜리가 어린애라는 느낌이 없는지 거기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범인들은 항상 강도가 아니고 보통
아이들같이 친구하고 놀기도 하고 상점에서
돈 내고 물건을 살 때도 있고 밥 먹으며
얘기할 때도 있고 공원에서 공치기하며
놀기도 했을 것이었다. 도혜 상점을 털었던
강도도 범행을 마친 후에 흉기를 숨기고
거리 속에 태평스레 섞여 들었을 것이다.
햇살 속에 드러난 거리가 도혜 눈앞에서
수상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였다. 수많은
있었다.
[7]
<주택과 정원> 같은 주택잡지 화보에
나옴직하게 좋은 집의 이층이었다. 창문이
큼직큼직 시원히 나 있고 벽과 가구들은
호사스러운 흰 빛이었다. 커다란 유리
어항이 있고 잎이 커다란 화분들도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여 있었다. 무도장같이 널따란
나무 마루는 왁스칠이 잘 되어 깊은 윤이
흘렀다. 유리창문 밖으로 키 큰 나무들이
정연히 정돈된 정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바람에 나무들이 쓰러졌다
욕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푸른색 타올로 된
목욕옷을 입고 있었다. 도혜가 걷는 데
따라 마루에 젖은 발자국 자리가 났다.
젖은 머리를 타올로 문지르다가 도혜는
지금 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자기는 오고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므로 빨리 머리도 말리고 옷도 갈아
입어야 하였다. 아래층 현관문이 잠겼을까
도혜는 생각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층계를 내려가는데 도혜는 깜짝 깨달았다.
지금 오고 있는 누구는 자기를 해치러 오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 무서운 것이 이 집을
향하여 쳐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오기
전에 문을 잠가야 하였다. 계단을
내려서니까 놀라라, 안 내려와 봤으면
어쨌을까, 벽을 돌아가며 나 있는 창문들은
무섭게 들이치고 있었다. 아래층 전체가
바람을 탱탱이 품은 북 같았다. 현관문도
닫혀 있기는 하였으나 잠겨 있지 않음을
도혜는 알았다.
눈을 뜨니까 도혜는 초라한 가구가 놓인
낡은 아파트의 조그만 방에 누워 있었다.
몸에 땀이 흘러 있었다. 꿈속에서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장면들에 왜 숨이
막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이 격력하고
엉뚱한 감정이 동반되는지, 다른 사람들이
꾸는 꿈은 어떨까, 그 빛깔은? 형태는?
소리는? 도혜는 다른 사람이 꾸는 꿈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도혜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꿈 속의
도혜는 도혜의 취향과 다르게 꾸며진 좋은
집에서 값비싼 욕의를 입었지만 지금의
입고 있었다.
부엌은 어둠 속에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혜는 냉장고 문을 열고 찬
보리차를 꺼내어 마셨다. 찬물은 목구멍을
꽉 채우며 넘어갔다.
나는 꿈을 꾸었으며 꿈 속에서 살았던
경험과 현실에 산다는 것은 같지 않았다.
꿈 속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며 꿈
속에서 보았던 집과 가구와 나무는 내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 아니었다. 꿈이
지속되는 동안 그것들은 현실이었다.
도혜는 우리의 인생도 꿈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시던 컵을 도혜는 싱크대에 놓았다.
더듬더듬 침대로 돌아가다가 도혜는 아이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이의 방은 철야로
가로등 빛 때문에 연극무대의 밤장면 같이
푸른빛을 띠며 꽤 환하였다.
도혜는 아이가 덮고 있는 이불 한자락을
들추고 곁에 누웠다. 아이는 잠결에 몸을
움직여 자리를 넓게 해주었다.
"엄마가 죽거든 이모한테로 가라. 이모가
야단치는 말은 꼭 들어라."
잠든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인생은 꿈이다, 공수래공수거다,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이다, 하고 여러 가지로
정의를 내려보아야 시원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 많이 해야 하고 돈 낼데 많은
인생은 전과 다름없이 끝이라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같은 침묵으로 도혜를
누르고 있었다.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은
기억과 막연한 직관뿐, 꿈꾸다가 몇 번이나
파묻힐 것인지, 기진맥진 완전히 항복하고
도혜는 순종의 태도로 잠을 청하였다.
좀 누워 있으니까 잠이 왔다. 잠이
들자마자 시간의 강물이 도혜를 덮었다.
도혜는 아이 곁에서 시간 속에 가라앉아
모든 것을 잊어 버렸고 또 모든 것으로부터
잊혀진 바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에 도혜는 뻐꾹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 시간 속에서 떠오른
도혜는 곧바로 눈앞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6. 마술의 사랑
밤 아홉 시밖에 되지 않았건만 이미
폐점을 해버린 문방구점 앞에서 마술사는
여럿 되는 행인을 세우고서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대개의 상점들이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밤의 거리라 할 수 있는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그 문방구는
여덟 시 반이면 문을 닫았다. 불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를 하는 유대인 주인이
부인을 대동하고 집으로 떠나면 마술사는
그 굳게 닫혀진 상점 앞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다. 문방구 옆은 장의사이고 그 건너
편은 운동장도 없는 국민학교가 있었으므로
밤이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
주변에서 이곳은 좀 어두운 편이었다.
대부분 밝고 환한 곳을 택하건만 마술사의
자리는 늘 그 한곳이었다.
가끔씩 커다란 관광 버스가 비교적 좁은
차도에서 멈추어 서서 카메라를 멘 수십
명의 관광객들을 내려 놓았다.
마술사로부터 한 블록 떨어진 까페
앞에서는 심장 모양의 풍선을 팔고 있었다.
상인은 끊임없이 풍선에 공기를 채워 놓고
어른들은 마치 소풍나온 아이들같이 풍선을
사들었다.
문방구 앞의 마술사는 아주 작은 빨간
헝겊을 손가락 사이로 몇 번 빼어내더니
아주 없어지게 하고 동전을 하늘로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아주 동전을 사라지게
하였다. 마술사가 없어진 동전을 찾기 위해
하늘을 살피자 관중들도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이 있었다.
이윽고 마술사는 관중의 맨 앞에 있는
꼬마 아이에게로 날렵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아이 귀 뒤로부터 가라졌던
동전을 집어냈다. 꼬마는 신기해서 자기의
귀 뒤를 만져 보았다.
이번에 마술사는 접게 되어 있는 받침대
위에 얹힌 네모난 가방에서 동전을 일곱 개
꺼내었다.
"넌 몇 학년이지?"
마술사는 동전을 목판에 벌여 놓으며
꼬마에게 물었다.
"이학년."
"그럼 산수를 알겠구나. 이봐, 여기
동전이 다섯 개가 있지?"
말하고 마술사는 이어 빙 둘러선
알리었다. 길가던 행인들이 자꾸 발을
멈추어 이제 관중은 꽤 많아졌다. 인도뿐
아니고 차도에까지 몇 겹으로 둘러서고
주차되어 있는 차 위에도 올라가 있었다.
"여기 동전이 다섯 있습니다."
마술사의 눈이 길 건너의 가로등불을
받고 번들번들 빛났다. 마술사는 동전 두
개를 빼내었다.
"그럼 몇 개가 남지?"
시험이라도 치르는 양 꼬마는 열심히
대답했다.
"셋."
자, 세어보자 하며 편 마술사의
손바닥에는 다섯 개의 동전이 고스란히
있었다.
"운희, 욕실을 좀 써야겠어."
방으로 올라가자는 뜻이겠지. 생각하고
"갔다 오세요." 운희는 지갑에서 열쇠만
꺼내어 건네었다. 책상 위에 놓인 언니의
편지를 볼까봐 염려스럽고 자기방을 맘대로
볼까 쓰이는 신경을 모른 체하였다. 한수는
열쇠를 받아들고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운희가 마술사 앞에 그대로 서 있으니까
운희가 사는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마술사가 서 있는 바로 옆의 건물이었다.
현관 앞도 구경꾼들이 서 있었다.
한수가 간 후로도 동전의 갯수를 셈하는
같은 마술이 몇 번씩 반복되고 꼬마는 꼭꼭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대답은 또 꼭꼭
틀렸다. 꼬마는 콧등에 땀이 다 났다.
꼬마가 콧등에 땀난 것, 또 손바닥에 땀난
것을 관중이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었다.
밤시간에 아이는 보호자도 없이 어른들
틈에 끼어 일일이 대답해가며 너무도
재미있어 하였다. 뜻밖에 좋은 보조자를
만나 쇼가 잘 진행되어가므로 마술사는
점점 더 신이 났다.
그는 동전을 하나만 남기고 다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관중들에게 그 동전을
잘 살펴보라고 말했다. 마술사가 시키는
대로 사람들은 돌려가며 가로등 불빛에
동전을 비추어 보았다. 어떤 사람은 건네
받아서 건네주는 정도로 건성 보고 어떤
사람은 동전 수집가인지 앞뒤로 잘
살펴보고 동전을 만든 햇수까지 읽어
보았다.
"이것은 여러분이 아다시피 이십 오
전짜리 동전입니다. 이 동전으로 당신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상 상용하는 평범한
동전인 것입니다. 이제 이 동전을 담뱃불로
구멍 뚫어 보겠습니다. 아, 거기 태우고
계신 담배 좀 빌려 주실까요?"
뒤편쯤에 서 있던 중년 남자의 연기나는
담배를 마술사는 건네 받았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마술사는 동전을 높이
치켜 올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갈퀴
같이 꼬부려서 동전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관중의 시선이 전부 그 작은 동전에 가서
박혔다.
한수가 관중 틈을 조심스레 비집고
운희의 곁으로 돌아왔다. 운희가 사는 곳은
육층인데 엘이베이터도 없는 그 높은 곳을
그렇게 빨리 다녀올 수는 없었다. 그는
삼층 계단을 올라가다가 도로 돌아왔다.
동전 한복판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서서히
담배를 돌렸다. 가느스름한 연기를 내며
담배는 동전 속으로 어렵게 뚫고 들어가는
기색이더니 이윽고 동전을 허리에 두르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일고 누군가
박수를 치자 따라서 박수가 일었다. 박수
소리는 더욱 행인의 관심을 끌어 관중은
자꾸 불었다.
마술사는 담배가 꽂힌 동전을 앞자리의
관중에게 보였다. 몇 사람이 차례로 그
신기한 동전을 만져 보았을 때,
"거긴 잘 안 보이지요, 거기 젊은 레이디
이리로 좀 나오실까요."
지목된 레이디는 이십 안팎으로 흰
바지에 흰 자켓을 입고 있었다, 금발이
허리까지 길고 하루종일 욕실에서 시간
콧수염을 더부룩이 기른 그녀의 데이트는
목을 길게 빼고 자기의 여자가 뽑혀 나가
마술사 앞에서 동전을 검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별로 대단치 않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태도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담배는 정확히 동전의 한복판을
꿰뚫고 있었다. 그 신기한 동전을 이리저리
살피던 여자는 마술사에게 손을 보자고
말했다. 마술사가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한 손을 얼른 펴 보여 주었다. 그러나 가방
위에 놓인 또다른 한 손을 펴라고 했을 때
마술사는 주저하였다. 여자는 악의 같이
집요해지고 관중은 긴장하였다. 마술사는
도리 없이 손바닥을 폈다. 숨겨 놓았던
건강한 동전 하나가 반짝 하고 그
손바닥에서 빛났다. 어디선가 혀 차는
손끝을 잡고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정말 매
좀 맞아야겠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구제할 길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는 긴 머리가 허리께서 흔들렸다.
관중들이 하나 둘 흩어져 갔다. 속임수
마술사에게 시간 뺏기기에는 아깝도록 이
거리는 구경거리가 많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까이만 해도 한 젊은이가 기타를
두들기며 칸트리송을 부르고 또 얼마 안
가면 여자도 낀 세 명의 트리오가
모짜르트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저쪽 함성이
터지는 곳에는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삐에로와 불 먹는 사람이 있었다.
흩어져가는 관중 속에서 마술사 앞에
놓인 검은 실크햇에 몇 사람이 미안하다는
듯 묵묵히 동전을 던져 넣었다. 보통 한
이렇게 외치고는 하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본인의 마술을
즐기셨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놓인 이
모자에 여러분 재량껏 선심을
바라겠습니다. 일 전도 좋고 오 전도 좋고
십 전도 좋고 또 일 불, 십 불, 백 불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마술은 본인의 생활
방편인 때문입니다."
관중들이 앞으로 나가 동전을 넣으면
그때마다 마술사는 댕큐 댕큐 하였다.
그러나 오늘밤 그는 네모난 가죽 가방만
열었다 닫았다 할 뿐 절망적으로
침묵하였다.
"결국 그거였군."
한수가 운희에게 말했다. 모두 흩어진
자리에 아까의 꼬마가 그 자리에 그냥 서
중얼거렸다. 흰 옷의 여자는 허리를 유난히
흔들며 저편 모퉁이를 돌아가는 참이었다.
운희는 그 여자를 쫓아가서 욕을 해 주고
막 흔들어 놓고 싶었다. 그것이 신기한
술수인 것을 너는 몰랐니? 그가 담뱃불로
동전을 실제로 뚫을 수 있다면 이 세상
과학자가 그를 그냥 두었겠니, 신문사가
그를 그냥 두었겠니? 대통령이 만나자고
하지 않았겠니? 불가능한 것을 믿게 만드는
게 그의 재주가 아니니. 그가 오랫 동안
연마한 재주가 아니겠니. 너는 마술이
신기해 죽겠는 저 꼬마 아이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넌 대체 몇 살이니?
자리를 뜨며 운희는 일 불짜리 한 장을 그
모자에 넣었다. 마술사는 흘낏 두어 개의
동전 위에 놓이는 지폐를 보며 이런 밤이
"사실은 아까 운희 방에 들어가지
않았어, 주인도 없는 빈 방에 들어가기가
뭣해서. 욕실을 잠깐 쓸 수 있을까?"
한수가 말했다.
"그러세요."
한수는 운희의 방에 들어오기 위하여
욕실을 쓰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
참은 듯한 욕실의 세찬 오줌 소리를 들으며
운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훌쩍 큰
마술사의 키도 육층 높이에서 보면 그냥
땅에 들어붙은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조그만 빨간 헝겊을 손가락 사이로
빼어내고 빼어내고 하건만 좀처럼 행인은
멈추지 않았다.
몇 해 전 이맘 때에 운희는 저 욕실에서
오줌을 깔기고 있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아파트를 찾으면 운희와 운희의 룸
메이트였던 여진은 어려서 느끼던 성탄절의
흥분을 맛보았다. 그들은 같은 책을
돌려가며 읽고 같은 레코드를 듣고 한수는
운희와 여진에게 노래도 두어 개 가르쳐
주었다. 나이도 다섯 위이지만 그는
유학생인 그들의 보호자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수가 없을 때면 운희와 여진은
한수의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한수가 자기는 여자가 없으면 참
불안정해지고 초조해지고 외로와져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책을 읽든가 자신을
개발해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금방 미칠 것 같아서 자꾸
이렇게 쏘다닌다고, 자기는 육체적인
사람이고 또 따뜻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아니라고, 결국은 섹스로 귀착되겠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은 감정적인 따뜻함이며
여자를 안고 싶음이라고, 사람이 그립다고
해서 남자인 자기가 또 남자를 껴안을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했을 때 그 말은 운희의
가슴을 쳤다. 운희는 늘 솔직한 말에
감동하였다. 판단력을 잃었다. 한수가 몹시
외로와 보였다. 모두 술을 많이 마시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수의 그 말은
여진의 가슴도 쳤다.
그 해 성탄절 무렵에 여진은 임신해서
한수의 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애기를
낳은 후 결혼식을 올렸다.
욕실에서 나온 한수는 운희가 앉지도
않고 들어왔던 그대로 창가에 서 있으므로
작별 인사를 하고는 곧 떠났다. 그 날
결혼으로 학업을 중단한 여진은 애기
데리고 돈을 벌고 한수는 인생을 길게
봐야겠다며 뒤늦게 등록을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제 와서 한수에 대한 연정은 미열 같이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운희는
그를 이해하였다. 무엇인가가 서로
이해되고 있었다. 둘이 살았다면 나중에는
몹시 서로 미워했을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운희는 한수가 떠난 후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아직도 마술사 앞에는 관객이
없었다. 관객이 없기로는 칸트리송의
가수도 마찬가지였다. 이쪽 편의 거리는
여하간 좀 죽어 있는 편이었다. 마술사는
홀로 서서 동전 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가수가 마술사보다 더 적적해 보였지만
좀전의 일도 있어서 운희는 마술사에게
관객이 모였으면 하였다.
마술사는 운희가 전에 보았던 대로
동전을 몇 번 공중으로 던지다가 없어진
동전을 찾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았다.
주의를 끌기 위해 이리저리 연극 같이
몹시도 두리번대었다. 그러다가 걸어가는
행인을 쫓아가서 그 귀 뒤에서 동전을
꺼내었다. 그러나 행인은 자기 귀 뒤에서
무엇이 나왔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어떤 사람이, 이 거리에는 별 사람이
다 있으니 그런 사람 하나쯤이 나타나 자기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가 하고 걸음을
늦추어 보지조차 않았다. 마술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빨간 헝겊을 손가락 사이로
준다면 그 헝겊은 그 사람 눈 앞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멈추어
구경을 하면 또 하나 둘 발걸음을 멈추어
관객은 불어날 것이었다. 운희는 그 사실을
새로 알았으며 또한 마술사가 환한 곳으로
가지 않고 굳이 폐점후 불 꺼진 문방구
앞에서 마술을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운희는 가는 길 오는 길에
행인을 모아주기 위하여 마술사 앞에 서
있었다. 운희의 생각은 맞아 누군가 한
사람이 서서 있으면 지나던 사람도
기웃거리고 발을 멈추고 그리하여 떡에
고물이 붙듯 행인은 불어났다. 처음 나가서
그 앞에 섰을 때 그저 군중이고자 하는
운희의 뜻과는 어긋나게 마술사는 용케도
운희를 알아 보았다. 그는 운희를 의식하고
자, 이제 담뱃불로 이 동전을 뚫어
보겠습니다. 운희를 귀찮게 여기는 빛이
역력하였다. 그럴때면 운희는 그에게
전처럼 담뱃불로 당장 동전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 큰소리 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흥행이란 것은 확실히 연기자의
혼신이 성패를 좌우하는 것인 듯 마술사가
이렇듯 힘 없는 말을 하며 동전을 뚫어
보이면 그리도 사람의 흥미와 감탄을
자아내던 그 마술은 이제 그저 또닥또닥
두어 번의 박수만 받고 말았다.
운희는 대개 그 시간이면 도서관에서
돌아오든가 산책 겸 거리를 한 바퀴
걸어오다가 까페에서 차라도 마시던 습관이
있었으므로 마술사 앞에는 특별히 큰 맘
먹고 서 주는 것도 아니었다. 밤늦은
가슴 속에 차오르는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 자기 자신이 외롭게 단단해지고
강해지고 인생의 느낌이 하나로 뭉쳐지는
듯한 그 기분을 운희는 사랑하였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을 항상 그런 상태에 놓아 두고
싶었다.
어느덧 마술사는 운희를 안심스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 흰 옷의
레이디처럼 악의로써 지켜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회를 보다가 자기를 군중에게
망신시킬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는
운희가 서 있음에도 큰 소리치며 담뱃불
마술을 해낼 뿐 아니라 기다란 쇠바늘을
풍선에 꽂는 묘기를 보일 때 혹시 실수로
풍선이 터져 버리더라도 내가 잘 한다면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하지 길에서
볼때기가 불룩해지도록 불어대곤 하였다.
한 차례 공연이 끝나 사람들이 흩어질
때면 거기 가는 분 여기다 돈내고 가시오,
가지 마시오, 기부하시오, 영화 한 편
보는데 오불씩이란 걸 생각하시오, 그러나
어조는 전에 마술은 본인의 생활
방편입니다. 할 때보다 더 농담조이고 듣는
이에게 부담이 없었다. 운희는 그의 변모가
좋아서 맘껏 웃었다. 그렇게 방심하고
자유로워지는 운희에게 어느 날 마술사는
끓는 물 끼얹는 듯한 소리를 하였다. 한
차례의 공연이 끝나 구경꾼들이 모자에
동전을 던져 넣고 뿔뿔이 흩어진 후,
"어젯밤 나는 당신이 자는 방에 가
보았습니다. 요 앞 빌딩에 살지요?"
운희는 얼른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했다. 그냥 우뚝 서 있는 운희에게,
"당신은 영혼만 날아 본 일이 있어요?
어젯밤 내 영혼은 육신을 떠나 귀양 방에
가 보았습니다. 시간은 밤 세 시 정각.
귀양 방의 시계를 보았습니다. 깊이 잠자고
있더군요."
"옛?"
"못 믿겠다면 오늘밤 또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간이 좋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시간에 당신은 내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다. 베갯머리에 서
있겠어요."
정확한 뜻은 아직도 잘 모르겠으면서도
말할 수 없는 수치감이 운희를 휘까닥하며
휩싸안았다. 뭐라고? 내가 자는 것을
보았다고요? 그렇게 무방비 상태에 있는
운희는 한 마디도 입을 뗄 여유가 없었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인가, 정말 흔히 육신을
떠나 그렇게 남자는 방에 드나들 수 있기는
한 것인가. 그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자고
있던가요? 이불은 잘 덮었던가(제발
그랬기를!), 입을 벌리고? 다리를 벌리고,
단추 두어 개 떨어져 달아나 버릴까 말까
하는, 입은 초라한 내 잠옷을? 생거짓말이
아닌가 확인하는 질문 한 마디도 못하고
뒷머리가 뻣뻣해서 운희는 그 자리를 뛰듯
떠났다. 노엽고 부끄러워서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마술사는 뒷모습의
운희에게 빙긋 미소지은 후 다음 번 공연의
시작으로 빨간 헝겊을 손가락 사이로
빼내기 시작하였다.
크게 쇼크를 받은 운희는 그날 밤을
마술사가 운희를 놀래 주느라고 거저 해 본
소리일 거라고 위로해 주고 한수는 자기는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기절한다는 것이 바로
그 비슷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고통스런
육체를 혼이 떠나버리는 것.
그들 셋은 결혼 전처럼 모여 앉아 늦도록
얘기하였으나 그전 같은 재미는 없었다.
여진은 간간이 하품을 하고 아이는 손님이
왔다고 잘 시간임에도 생생하게
돌아다녔다.
"얘, 애 아빠는 너하고 나하고는 같이
있어야 매력이 있단다. 우리 둘이 같이 살
때, 나 처녀 때 말이야. 그때 우리 둘이
붙어 다니는 것 보고 자기 말로 황홀함을
느꼈댄다."
"한수 씨, 그건 무슨 뜻이에요? 우리
둘은 부족한 사람들이라서 한데 합쳐야
매력이 있어진단 뜻인가요, 아니면 여진이
옆에 내가 있어야 더 여진의 미모가 빛난단
뜻인가요?"
"운희는 뭘 맨날 그렇게 물어? 전에 두
사람 살던 방에 가면 뭐가 뭔지 그냥
좋기만 했었어. 그 뜻이야."
'아, 그럼 여진이 떠난 나 혼자만의 방은
옛 그대로인데' 하려다가 운희는 입을
다물었다. 한수가 운희의 방에 들른 일은
대단치는 않더라도 여진 앞에서는 비밀로
해야 될 것 같았다.
운희가 먹은 그릇을 씻을 때 여진은
거실의 소파 위에 운희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밤 두 시 쯤 되어서 그들은 각각
소파에 운희를 눕히고 여진 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들었다.
여진:점점 자신있어 가고 강해지는
운희를 보면 나는 우울해지고 고립감을
느낀다. 오늘 저녁만 해도 나는 뭔가
부적당한 자리에 앉은 듯 지루하기만
했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피아노
렛슨을 하고 훌륭한 연주가가 되어 보려는
꿈은 저 멀리 동댕이치고 점점 뚱뚱해지고
가끔 골치도 아프다. 운희는 노처녀임에도
조금도 초조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인다. 나와 같은 처지의 가정주부들은
모두 바쁘다고 한다. 나는 그들이 뭘하기에
그리 바쁜가 한다. 주의해 본즉 그들도 나
같이 청소하고 애를 돌본다. 살림살고 애
기르고 피아노 렛슨을 하여도 그 일이 그리
차지하여도 머리는 텅빈 채 바쁘다는
기분은 아니다. 어디 가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없어도 나는 늘 한가한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늘 지루함을 느꼈던 것
같다. 어려서도 여학교 때도 대학 때도
심지어 입시 지옥 때도. 나는 남편의 아주
작은 거짓말도 탐지하며 그것은 애인을
숨겼다거나 그런 일이 생길 것도 아니데 그
사소한 거짓말이 내 믿음을 흔들어 놓는다.
남편이 공부를 할때 나는 내 자신을
실패자로 결혼 생활이 울고 싶게 덫 같지만
그렇다고 다시 결혼하고 싶지도 않으며
혹시 이혼하여 일생 혼자 살게 될 가능성은
두렵기만 하다. 가끔 아이를 또 하나 낳아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 아이의 아빠가 또
그여야 한다는 데 절망한다. 그리고 남편에
있는 그는 혹시 운희를 그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확실히 뭔가 잘못된
사람이다.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한수:요가라든가 정신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면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된다는 사실을
전에 어디선가 들었다. 운희에게 한
마술사의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바
없으나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하고자하는
욕망이 내게는 늘 있었다. 나는 늘 고통을
안 느끼려고 노력을 해 왔다. 내 몸은 오랫
동안 만들어진 하나의 외로운 공 같다.
그것은 어디와 연결된 것이 아니고 그대로
하나의 완전한 공이다. 어디 한 군데만
만져도 전신이 떨고 감춰진 모든 것이
떤다. 이 내 감정 표현이 어느 한
사람쯤에게는 가능하리라. 운희? 내가
그런 역할을 해 주려 할까? 그러나 또
그렇다면 운희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
되어 버린다. 사람 사랑하기의 불가능성.
운희:이 집안은 이상하게 쓸쓸하다.
한수와 여진은 서로 별로 얘기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뭇시선을 끌던 여진의 미모는 이제
빛을 잃었다. 로맨스는 짧다는 것을 다시금
명심하자. 로맨스가 지나가도 남을 결혼을
할 것. 나는 항상 이웃의 아이들과 다르게
되리라고 느꼈다. 언제나 다르게 되려고
생각했으며 그러려면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 먹을수록 꿈은 점점
현실적이 되고 좁아져 간다. 마술사는
여진의 말처럼 엉터리인지도 몰라. 정말
제가 그런 능력이 있다면 신문지상에라도
한번 나지 않았을까.
세 사람이 다 각각 누워 생각을 이와
같이 달렸을 때 습관이 된 고마운 잠이
찾아와 그들을 소롯이 잠들게 하였다.
명멸하는 수많은 꼬마 전구들이
아치형으로 천공을 이루고 길 양편으로
늘어선 노점 철판에서는 지글지글 팔뚝
같은 소시지가 익었다. 얼음에 차게 한
맥주 깡통들이 피웅피웅 푸른 김을 내며
따지고 발디딜 틈 없이 혼잡한 인파 속을
여섯 명의 악대가 두 줄로 서서, 아마리
아마리 내 맘 속에 사무친 그대.....
요란히 연주하며 저편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악대원들은 이미 몇 잔 들이킨
알코올과 노점의 기름진 음식 냄새 속에
얼굴들이 불 위의 소시지나 다름없이
보이게도 구세군 같은 국방색 옷에 금테
모자, 하이칼라, 붉은 견장도 붙였다. 성
안소니를 모시는 성당의 축제였다. 성당 앞
일곱 블록 정도의 길은 완전히 교통이
차단되고 길 양편으로 노점이 늘어서고
각종 게임이 함성 속에 벌어지고 있었다.
악대의 연주뿐이 아니고 노점 곳곳에서도
확성기로 또 자기들대로 음악을 틀어대고
있는 데다가 회전목마와 함께 록앤롤이라고
탄 사람이 완전히 일 회전으로 뒤집혔다
바로 됐다 들볶이다 나오는 데서도 음악
소리와 함께 남녀의 웃음소리와 비명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고함치듯 말하지
않으면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시끄러웠다. 무엇을 먹을까, 운희는 음식을
파는 노점마다 기웃거렸다. 축제가 열리는
올라갔다가 도로 걸어 내려왔다. 운희는
결국 평범한 피자 한 조각을 사들었다.
그것을 물어 뜯으며 운희는 한 눈을 감고
물총을 집어 들었다. 그 옆에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부터 열 살까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쪼르르 늘어 서 있었다. 천막을
쳐 만든 게임장으로 이제 호루루기 소리와
함께 그들이 물총을 쏘아붙여야 할 과녁은
난장이 영감들이 벌리고 있는 입이었다.
쪼르르 나란히 앉아 동그라니 입을 벌린
사기 인형 영감들의 머리꼭지에는 시들은
풍선이 꽂혀 있었다. 물총으로 물줄기를
영감의 입구멍으로 쏘아대어 그 머리꼭지에
달린 풍선이 부풀어 오르고 그러다가 제일
먼저 풍선을 터친 아이 내지
어른(연령.성별 제한 없음)이 완구 인형을
그 간단한 게임에 오십 전이나 내어야
했다. 선반 위에는 이긴 자에게 줄 싸구려
완구 강아지들이 빼곡이 앉아 있었다. 한
게임의 단 하나 승자에게 돌아갈
상품이라는 것이 오십 전 짜리도 안 되어
보였다. 운희는 어른의 지능으로 다른
경쟁자 어린이들이 못 보는 것을 간파해
내었다. 그것은 전번의 게임에서 첫째로
풍선을 터뜨린 곳 말고 두번째로 커졌던
곳에 자리잡으면 이미 전회에 늘어날대로
늘어났던 풍선은 대개 쉽게 부풀어 오르고
또 첫번째로 터지기 마련이었다. 운희가
물총으로 물줄기를 쏘아댈 때 밴드는 록키
영화 주제가를 연주했다. 상품으로 완구
강아지를 건네받는데 뒤로부터 운희의
어깨를 치는 손이 있었다. 마술사였다.
"이겼군요. 내가 응원했지요."
마술사는 웃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 자체는 마술 부릴 때와 달리
낯설었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한 탓인지
그들 사이를 묶는 친밀감이 있었다. 그들은
혼잡한 인파 속을 걸어 나왔다. 마침내
축제의 거리를 지나 사차선 도로의 큰 길로
나섰을 때 완구 강아지를 옆구리에 끼고
운희는 숙제 같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았다.
"당신 혼이 내 방에 들렀었다는 것은
정말이었어요? 아주 정직하게 말해
주세요."
"물론. 책상이 창문 쪽에 붙어 있고
침대머리에 램프와 라디오가 있고.....
당신은 혼자 살지 않습니까?"
날아다니며 보지 않아도 얻을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를 대하는 운희의 태도는
순순하였다.
"네." 하고 우울한 운희는 신상에 관하여
한 가지를 더 알려 주었다.
"학교 다녀요."
큰 거리를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왜 그 동안 통 볼 수 없었습니까? 내가
방에 찾아갔다고 해서 화가 났어요?"
마술사의 물음에 운희는 한참 있다가,
"그 이후로 또 내 방에 왔던 일이
있었어요?"
"없습니다. 몸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들은 길을 건너갔다. 길이 넓어서
사차선의 중간까지 건너고 그곳에서 다시
건넜다.
"오늘 저녁은 공연을 안 하세요?"
까페의 처마 밑에 가수가 하나 서
있었다.
"아직 일러요."
그들은 가수가 서 있던 건너편 까페에
자리 잡았다. 축제 장소의 휘황한 불빛이
그곳에서 잘 보였다. 테이블 위 빨간 유리
컵에 담긴 초가 그들 얼굴 위에 붉은
조명으로 일렁거렸다.
커피잔 너머로 마술사가 상체를 깊이
굽혔다. 자기 눈의 반만한 운희의 눈을
들여다 보며,
"나와 함께 날아보지 않으렵니까? 영혼
여행."
"어떻게? 영혼이 난다는 것은 무슨
무엇을 알아낸단 뜻인가요? 영혼은 뭐예요?
어떤 물질적인 것인가요? 형체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순수하게
심리적인 것인가요? 영혼은 몸의 어느
부분에 머물러 있어요? 머리, 가슴, 손,
발? 나는 뭐든지 믿기가 힘들어요."
"영혼이 육체에서 제일 잘 떠날 수 있을
때는 본인 자신이 자기 몸에서부터 자기가
떠났다는 것을 모를 때입니다. 너무
분리시키려고 애쓰거나 오래 걸리거나 하면
어떤 때는 전혀 다른 결과가 되지요."
"그렇다면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보통 정신을 잃었다는 그런 상태에
이르러 본 일조차 없어요. 아마 내 영혼은
내 육신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떠날 염을
않는가 봐요. 내 육신을 꼭 붙들고 있나
그날 낮 운희는 여진과 두 시간도 넘게
전화하였다. 여진이 걸어왔다.
여진은 한수가 집을 나간 사연을 간간이
울음 섞어 얘기하였다. 정말 어쩌다가
여진이 외출에서 늦게 들어온즉 한수가 뭐
해 먹느라고 연기내며 부엌에 있다가
남편을 뭐로 아느냐고 화를 내었다. 서로
소리지르고 그들은 싸웠다. 한수는 짐을
꾸리고 여진은 그의 옷들을 침대 위에
동댕이치고, 한수가 두 개의 트렁크를 들고
층계를 내려갈 때 여진은 계단 위에 서
있다가 구두 두 짝을 그에게 던졌다.
여진은 한수가 아이가 보고 싶고 아내가
보고 싶어 집으로 돌아와 그의 잘못을
인정하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이었다. 여진은 그 동안 거의 죽는 것
청소기계를 움직일 때면 만약 그가 그 앞에
누워 있다면 기계를 그 위로 몰고 가고
싶었다. 저녁이 되면 외로와서 여진은 그를
그리었다. 한수가 떠날 때 여진은 자기
몸의 반쪽이 나간 것만 같았다.
쥐고 있던 수화기가 체온으로 더워지도록
오랫 동안 여진의 사연을 듣고 있는 운희는
그 동안 여진의 남편인 한수를 만나고
있었다. 한수는 이제 적극적으로 운희에게
구애하였다.
"나는 마귀 때문에 높은 탑 꼭대기에
갇힌 공주 같애요. 그 공주는 말예요,
자기의 긴 머리털을 땋아서 창으로 길게
땅까지 늘어뜨리고 누군가 와서 그 꽉 갇힌
불행으로부터 구해 주기를 소원 했어요."
운희가 한수에게 그 말을 할 때는 자신을
그것은 대단한 진실이기도 하였다.
"결국 어느 늠름한 왕자가 공주의
땋아내린 머리를 잡고 탑으로 올라가
공주를 구해냈지요, 동화답게."
한수는 곧 반박하였다.
"공주가 그 탑에서 뭘 했는지 알아? 이미
아시겠지만 그 공주는 노래를 불렀어.
왕자는 노래 소리를 듣고 탑으로 갔거든.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중요해. 그냥 머리채
늘어뜨리고 팔짱끼고 기다리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불러 왕자를
유인했지."
"한수 씨는 여진하고 내가 같이 있을 때
매력있다고 했지요?"
"그랬었나?"
결혼생활로 한수는 애무에 능숙해
"우리 셋이 같이 살아버릴까요? 나는
여진이도 좋거든. 어떤 저녁 같은 때
불현듯 여진을 불러내고 싶은 때가 있는데
여진이는 살림하느라 꼼짝을 못해요. 나는
애기 낳기 싫으니까, 내가 당신들 애기를
같이 기르고 그러면서 살면?"
한수는 입이 쭉 찢어지게 웃으며,
"그렇다면 나야 잃을 게 없지."
진정 행복한 얼굴을 지었다. 운희는 그가
자기를 구해 줄 기사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발 앞에 엎드리게 할
인간도 아니며 또한 부자가 될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운희는 한수에게서
자기가 가진 한계를 보았다. 운희 자신이
공주가 아니듯 그도 여러 모로 괴로운 한
인간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가
간간이 흐느낌으로 떨리는 전화 속
여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운희는 죽고 살
정도의 각오도 없이 자기가 책임 없이 한수
앞에서 부렸던 여자가 부끄러웠다. 자신이
때묻고 더러워진 것 같았다.
마술사를 대하는 운희에게는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내 정신은 너무도 건강해요. 아무리
괴로워도 까무러치거나 기절해 본 일도
없어요. 고통을 늘 생생하게 체험하고
괴로워해요. 자살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어찌나
건강한지 사랑에 빠지는 일조차 불가능한
것 같애요. 까막눈되어 사랑하는 것,
맹목의 사랑이란 것, 그게 안 되어요."
"우리의 육체는 영혼이 잠시 사는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나고 그러지요.
이 정도의 믿음은 동야에는 상식으로 되어
있지 않나요?"
접시를 걷어가는 청년이 바구니에 빈
접시를 집어던지듯 모아 넣었다.
왈가닥달가닥 소리가 났다. 운희 앞
테이블의 중년 여자가 무슨 접시가
이다지도 튼튼한가 궁금해서 접시를 뒤집어
상표를 읽었다.
"뭣하러 우리는 자꾸 태어나는가요? 거듭
태어나고 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앞날을
이와 같이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판단내리기조차
힘들다면."
차값은 각자가 내었다. 까페에서 나와
마술사는 공연 장소를 향해, 운희는 집을
마술사는 다시금 영혼 여행의 동반을
제의하였다. 자기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는 가로등 바로 밑에 서 있어서
그늘이 막 내려앉아 길고 가파른 얼굴이
형체를 허물었다.
"마술이란 좋은 것 같애요. 어떻게
마술사가 될 생각을 했어요. 불가능한 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해 주는 것, 사랑도
결국은 그게 아닌가요? 믿게 해 주고 꿈을
주는 것."
얼마 뒤에 운희는 리챠드 무슨
콥스키라는 낯선 이름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마술사의(그의 이름은
빌리였다) 영혼이 날으다가 그만 육체로
들어오는 데 무리가 생겨 빌리는
혼은 그의 육체를 떠났다가 들어왔다가
들락날락 중이며 가끔 정신이 맑을 때면
운희에게 영혼의 여행을 같이 해 보자고
중얼거린다는 것이었다.
운희는 그 편지를 마침 놀러왔던
여진에게 보여 주었다. 한수는 이제
여진에게로 아이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진 것 없이 그들 결혼
이력에 또 하나의 추한 기억만 더 했을
뿐이라고 여진은 한숨지었다.
한수가 돌아간 것이 운희는
다행스러우면서도 그가 굳게 맹세했듯
운희를 사랑해다면 운희에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그는 그리 쉽사리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중년티가 나는 여진이 아이를
것을 운희는 창문에서 내려다 보았다.
운희에게 있어서 여진은 이제 친구가
아니라 한수와 껴안고 입맞췄다고 야단칠
무서운 엄마였다.
주말이어서 거리에는 사람이 평일의 세
곱은 되어 보였다. 마술사 빌리가 섰던
자리는 당연히 비어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제 그 마술을 익힌 잽싼 손놀림의 마르고
키 큰 육체를 떠나면 다시 무엇으로
태어나려 하는가.
불멸이라는 내 영혼이여, 외부로부터는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내가 이 인생에서
근본적으로 행복했다는 것, 외롭고 쓸쓸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늘 행복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다오. 햇볕
밑에 있는 모든 자연이 내게 기쁨을
주었다는 것, 오늘 밤의 내 방 풍경과
더불어 부디 아로새기어 다음 생 어느 날
꿈에라도 한 번 보여다오. 그리하여 내가
지금 하는 노력을 그때도 계속할 수
있도록.
여러 인생을 거쳤다면서도 아직도 해답을
모르고 갈팡질팡 흐르는 자기를 운희는 두
팔로 감싸안았다.
7. 바닷가의 피크닉
미스터 호레이스의 한국인 신부(新婦)를
환영하는 피크닉이 죤즈 해변에서 있게
되었다. 눈 많고 길던 겨울도 물러가고
이젠 누가 뭐라 해도 봄이 완연하기도
했지만, 그들 고등학교 동창들은 모두
아파트 살림이므로 아이까지 달린 온 가족
네 집이 한데 모이기란 야외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미스터 호레이스는 오늘 모이는 네 명
가장(家長)의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었다.
지금은 모두 아버지가 된 삼십대의 그들이
까까머리로 고등학교 다니던 그 무렵에도
미스터 호레이스는 결코 젊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들 영어독본의 이름을 따서
그들은 특별한 그의 애제자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그들이 가르침을
받던 고등학교 일학년 때 미스터
호레이스는 한 학기만 마치고 곧 정년
퇴직으로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으므로
그들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생도
아니었다.
짧은 동안이나마 그들이 그때 유니온
할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사랑이라기보다 우리 나라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듯한 열등감이었다.
신문이고 잡지에서고 또 학식 높고 견문
높은 분의 강연에서 그들은 선진국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하며 아이들은 얼마나
자립심을 가지고 크는가를 듣고 있었으므로
교통의 무질서나 골목 같은 데서 눈에 띄는
자기들의 영어 실력, 버릇 없음 같은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던 그들은 대학, 군대를 거쳐
뉴욕으로 오게 되면서 미스터 호레이스
앞에 하나씩 뚜렷이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었다.
김승언만 빼 놓고는 모두 가족을 한국에
두고 먼저 온 사람들로 당장 숙소가 없어
남의 집 신세를 지는 그들에게 미스터
호레이스는 기꺼이 숙식을 제공하였다. 단
혼자 몸인 그의 아파트는 넓고 연금으로
사는 그의 생활은 소박한 대로 안정되어
보였다. 물론 그들 세 명은 단체로 미스터
호레이스에게 밀어달친 것이 아니고 일이
년 이상적 간격을 두고 미스터 호레이스의
신세를 졌다. 룸메이트를 찾던가 아파트를
한 달은 넘지 않았지만, 이 한국의
아들들은 고달파 불평하는 아내 때문에
친구도 자기를 받아 주기를 꺼려하던 그
시절의 미스터 호레이스 은헤를 결코 잊지
않았다.
한국에 두고 왔던 가족이 수속을 마치고
와서 종이에 싸 쥔 햄버거를 서서 먹고
누워서 먹고, 요리라 하면 냄비를 태워가며
라면이나 끓여 먹던 그들이 더운밥에
불고기를 먹게끔 되면서 그들은 아내더러
미스터 호레이스에게 가져갈 김치나 반찬
같은 것을 만들게 했다.
물론 바쁜 생활들이므로 일 년에 두어
번씩 정도로 마치 명절날 웃어른 찾아뵙듯
아이를 조롱조롱 앞세우고 반찬 같은 작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갔다. 그런 날 미스터
한국 음식은 대개는 이미 그 전에 다른
동창 부인이 만들어 온 것이었다. 그들
외에 특별히 미스터 호레이스가 아들이라고
하는 한국 청년이 보스톤에 있다고 하였다.
호레이스와 그들이 모여 앉을 때면
처음에는 영어로 시작들 하다가 나중에는
대개 한국판 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알아듣지 못하는 호레이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영어로도 별로 말이 없는
조용한 노인이었다.
일생 독신으로 지낸 그가 이제 일흔이
되어 휴가 여행으로 한 달 남짓 한국에
다녀 오면서 결혼을 했다고 하였다.
"결혼하러 간 건 아닌데 떠나기 전, 바로
이삼 일 전에 그렇게 됐다는군."
"아이구, 영감님이 미국 오고 싶어
"아니 나이가 지긋하다는데?"
"야, 넌 봤니?"
"아니, 아직 색씬 안 왔대. 영감님만
먼저 오고 색씬 수속해서 올거라는군."
"나이 지긋하다면 요염한 다방 마담한데
홀딱 반한 건가."
정작 신부가 왔다고 했을 때는 이미 봄이
가까왔건만도 연일 눈이 내리는 나쁜
날씨였다. 그러다가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신혼의 호레이스 부부를 청했을
때, 그들 중 김승언 가족은 갑자기
귀국하게 되어 범상해 보이는 피크닉이
사실은 축하와 송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시내에는 봄이 완연하건만 해변은 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차만 안 와서 먼저 도착한 김승언을 포함한
세 가족은 무료히 자동차 주변에 서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소식도 없이 갑자기
떠나세요? 오늘 여기 나오라고 전화 안
했으면 가신 줄도 몰랐겠어요."
미세스 한의 말에 정이는 웃었다.
"모레라지요? 몇 시예요?"
"네 시요, 비행장에 나오지 마세요."
"네 시라, 아이참 가게가 한창 바쁜
때네. 아 어쩌면 윤애 아빠만 갈 수 있을
거예요."
"정말예요, 나오지 마세요."
정이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간곡히
말했다. 남편은 어디 있는가? 남편
김승언은 저편에 친구들과 둥그렇게 둘러서
머리 주변에 금빛 띠를 둘러 놓았다. 왜
저렇게 좋은 용모가 어떤 때는 괴물로
여겨지는가, 왜 우리 사이에는 전혀 가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가, 정이는
아파오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눌러 놓았다.
"어디 좋은 자리가 있어 가시나봐,
그렇죠? 대학에서 오라고 해요?"
"아니요."
"아이, 터 놓고 말해 보세요. 학위도
따셨겠다 잘 돼서 가신다면 누가 뭐라나요,
친구 중에 끝까지 공부한 사람은 미스터
김밖에 더 있어요.?"
너무 괴로와서 정이는 앉았던 풀밭에서
일어섰다. 남편과 성격 차이에서 오는
갈등으로 나갈 길이 없이 꽉 막힌듯
답답했을 때 이 도시의 누구에게도 눈물을
놓았던 것을 새삼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
친구는 지리적으로 딴 도시에 살기도
하지만 남의 말을 잘 안 하고 자기 일에만
열심이고 또 이해심이 넓은 것을 떠올리며
정이는 아파오는 자기의 가슴을 위로하려
하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비싼 장거리
전화를 걸어 친구에게 하소연했던 일이
이젠 또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친한 자기
남편을 남에게 함부로 내돌린 듯한
죄책감으로 변하여 정이를 괴롭혔다.
"어떤 대학인가요? 모교요?"
"아니예요, 그냥 가는 거예요."
하이웨이 저편에서 노란 빛깔의 택시가
한 대 나타났다. 하이웨이에서의 택시는 곧
눈에 띄었다.
"아, 오시나 봐요."
갔다. 남자들은 모두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었다. 택시의 주인은
양무인으로 그는 아직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채 뉴욕 시가지를 누비며 착실히 돈을
벌었다.
택시가 와 멎자 먼저 와 있던 일행
사이에 호레이스 신부에 대한 호기심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먼저 내린 것은 잠바차림의 호레이스로
그는 언제 보아도 꼿꼿하고 깨끗한
노인이었다. 차에서 얼른 몸을 잘 빼내지
못하는 호레이스의 신부는 해변의
나들이건만도 신부답게 흰 투피스로 정장을
하고 있었다. 신부는 먼저 발부터 차 밖에
내놓아야 된다는 것을 몰라 차 안에서
뚱기적거리다가 부축하는 사람들의 손을
금니를 입안 가득히 물고 호박꽃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 보니 참 좋구만."
호레이스의 신부는 나이를 종잡을 수
없이 버스 차장에게고 누구에게고 그냥
할머니라고 불리울 사람이었다. 일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듯한 밭고랑 같이 깊이
패인 주름, 광대뼈가 둥글고 넙적하게 튀어
나오고 검게 그을린 원시인 같이 생긴
얼굴, 숨가빠 보이도록 짤막한 목, 작은
키, 보통 날은 아들이나 남편의 구멍난
런닝셔츠를 입고 어디라도 다니다가 특별히
좋은 날 싸구려로 야하게 번쩍거리는
한복을 입고 호사스런 외출을 하는 저
할머니를 서울 어느 골목에서 본 듯 그들은
느꼈다.
만지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웃었다.
검은 얼굴에 흰 분이 얼룩지고 입술에는
핑크 계통의 립스틱이 두껍게 칠해져
있었다. 그는 화장도 양장도 일생 중 처음
시작한터였다.
"야, 이눔아야, 그래 소식도 없이 사알
빼서 한국 가기가?"
운적석에서 내린 양무인은 호레이스 신부
쪽에는 눈도 두지 않고 다짜고짜 달려와
정이 남편의 등판을 치며 말했다.
"인정머리 없는 놈, 내 오늘 혼내줄라고
나왔다."
무료히 있던 그들 사이에 갑자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에 씻기고 햇볕과 해충에
바랜 야외 식탁에 각자의 차에서 내린
아이스 박스가 얹혀지고 석탄이 내려졌다.
준비해 온 음식을 식탁 위에 펴 놓았다.
저편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모두
불리어왔다.
"자, 자, 고기 구워 밥 먹자. 먹고 가서
놀아."
호레이스의 신부는 오늘 손님으므로 물론
그냥 맨 손이고 정이 부부도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살던
아파트는 짐뭉치들이 널리고 웬만한
살림도구는 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
식탁이 차려지는 동안 빈 손으로 온
정이와 호레이스의 신부는 한옆 풀밭에
앉아 있었다. 이 해변은 수영을 할 수 없게
자갈이 많은 곳이었다. 이곳으로 정한 것은
조개를 캐서 구워 먹기 위해서라 했다.
푸른 바닷물이 펼쳐진 아물아물 시양 한
포함한 남자들은 둥글게 서서 맥주들을
마시고 있었다.
"이봐, 색씬 언제 미국 왔는가?"
호레이스의 신부가 물었다.
"벌써 사 년 돼가나 봐요. 미국이
어떠세요?"
정이는 애써 호칭을 피하였다.
"글쎄 뭐 나야 아나, 그저 끼니 때 되면
밥 만들고, 저 양반이 참 정말로 양반이야.
하루 종일 가야 뭐 해달라 소리 안 하고 통
말이 없으셔. 밥도 해선 거진 나 혼자
먹어. 저 양반은 달걀하고 토스트 그런 거
잡숫구. 어떤 땐 하루 종일 아파트에 박혀
있을려니 답답 하지만서두..... 난 아직 한
번두 수퍼마켓 안 가 봤어. 다 저 양반이
사다 주시구."
스커트보다 레이스가 달린 속치마를 더
보이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는 스커트 자락은 올라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속치마만 자꾸 밑으로 당겨
놓았다.
갑자기 남자들 편에서 왁자 웃음 소리가
나더니 한길훈이 다가와서는,
"아주머니, 할아버지가 뭐 물어볼 때 꼭
물어보는 것만 대답하세요. 이러신다죠,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밥이요 그런다죠,
그러면 잘 모른다고 그냥 밥, 그래요.
밥요인지 밥인지 잘 모르시겠대요."
남자들 사이에서 다시 웃음이 일고 그들
웃음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소리로 호레이스
신부는 웃었다.
"밥요 그러지요, 신발요 그러구요, 국요
한길훈이 남자들 그룹으로 돌아간 뒤에도
두 눈을 질끈 감고 호레이스의 신부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 신발두 저 양반이 아침에
사오신거야."
호레이스의 신부는 신고 있는 흰
운동화를 가리켜 보였다.
"아침에 어딜 나가셔서 어딜 가셨나 하고
있었더니만 이 신발을 가지고 오셨어. 뭘
뒷등에다 숨겨 가지고 와서 자꾸 신어
보라고 하셔. 저 양반이 구두도 두 켤레나
사준 게 있거던. 그런데 이런데 올려면
구두는 안 된다고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는
게야. 신어 봤더니 좀 커. 그래도 자꾸
괜찮다고 하는데도 또 나가서 바꿔 가지고
오셨어. 말이 통하나, 말이 통하면
"오세요, 이리 오세요."
어느새 석탄불 위에서 고기가 익었다.
아이들은 벌써 종이 접시에 고기와 밥을
받아가지고 앉아 먹고 있었다.
정이는 자기의 아이가 어디쯤 앉아 있나
눈으로 찾아 보았다. 대강 그 또래의 여러
아이들과 섞여 앉아 웃으며 먹는 것이 몹시
귀엽게 느껴졌다. 저애가 있는 한 앞으로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남편과는
헤어지지 말아야지.
해가 구름 속에 가리면서 바람이
세어지더니 불편할 만큼 추워졌다.
"그래 색씬 어디 살우? 난 어디가 어딘지
모르지만서두 혹시 가까우면 좀 놀러 와.
너무 심심해. 참 색씬 일해? 여긴 모두
나가서 남정네마냥 일하더구만."
가요."
"아니, 왜 가?"
호레이스의 신부는 펄쩍 뛰듯 물었다.
아니 왜 간다지? 내가 가까스로 온, 아 이
좋은 데를 두구, 하는 듯했다.
"자, 아주머니도 오시고 모두 오세요."
둘러서서 맥주를 마시던 남자들이 고기가
익고 있는 불께로 다가서며 호레이스의
신부와 정이를 불렀다.
해는 이제 완전히 두꺼운 구름 뒤편으로
들어가서 바람부는 잿빛 해변을 물새가
낮게 날았다.
"내 서울 가면 니 와이프 만나보지.
아직도 친정에 계신가?"
김승언이 양무인에게 말했다.
"친정 있으면 내가 와 걱정해. 우리집에
고 사라져
갔다.
시키는 모양이라, 가거던 내 잘 있다고 해
주고 내 사고난 얘기는 하지 마래이, 그냥
잘 있다고만 해다고."
처음 계획은 조개를 잡아온 뒤 밥을 먹을
생각이었으나 주빈 호레이스 부부를 태운
양무인의 차가 너무 늦게 나타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났으므로 그들은 대강 우선 요기를
하였다. 고프던 배를 채운뒤 남자들은
조개를 잡는다고 바람을 옆구리로 맞으며
해안을 따라 걸어갔다.
해변에는 여자와 아이들만이 되었다.
먹고 남긴 음식들을 식탁 한가운데로
모아놓고 호레이스의 신부를 위시한
여자들은 자갈밭에 편안히 내려 앉았다.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의 무엄한 분위기가
되었다.
손으로 섬세한 속치마 레이스를 만지면서
십 년도 훨씬 전에 호레이스가 영어 교사로
처음 한국에 와서는 자기 집에 하숙을 했을
때 오늘날 이와 같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또 호레이스가 자기 아들을 보고
시내 구경을 시켜달라고 했을 때 자기
아들이 쓰고 남은 비용을 그에게 돌려
주었던 것 같은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얘기하였다.
"아마 그때 이 양반이 우리 아들이
마음에 들으셨는가봐. 그때까진 한국 사람
죄다 속인다고 생각하셨던가봐. 그랬다가
우리 아들이 오늘 차비, 점심값 얼마 얼마
비용 제하고 이거요 내놓으니까, 니 주머니
좀 보자 하시더래. 그랬는데 숨긴 게
없거든. 그 다음부터는 딱 믿고 어디든지
공부 올 때도 저 양반이 많이 도와 주셨어.
서류랑 다 챙겨 보내구."
호레이스의 신부는 황후 같이 앉아 빙
둘러앉은 여자들을 둘러보며 한국말을
마음대로 해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침팬지가 양장한 듯한 어색한 모습으로
신이 나서 점점 내려가는 기온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찬 바람은 그
얼굴에 주름살 뻗힌 대로 분고랑을
푸르딩딩 이루어 놓고 두터운 입술도 세로
주름대로 립스틱을 더깨로 뭉쳐 놓았다.
여자들은 사실 호레이스 신부를 오늘
처음 보게 된다고 남편으로부터 들었을 때
새색시가 물론 살림에 짓눌린 자기들보다
훨씬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하고 질투도
했었다. 이제 그 질투가 안도로 변하자 곧
그래서 그들은 호레이스 신부의 말 중간
중간에 서로 우습다는 시선을 몰래
교환하였다.
정이는 다시 한 번 자기가 남편과 헤어져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결심을 이들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우리 남편 살았을 때 너무
고생스러워서 어느 날 정말 죽어 버릴라고
그랬었지. 그러면서 마루끝에 앉아 있는데
웬 중이 들어왔어. 동냥중. 그 중이
말이야, 날 보고 이 고생도 지나고 말년에
가서 두 발 쭉 피고 있는 호강 다 한다고
하더구만. 아마 지금이 바로 그 호강줄로
들어섰나봐, 허허허. 내가 한국 있는
애들이 너인데 막내가 시방 중학교 다니지.
그 기집애가 오빠들 밥해줄 테니 염려말고
분명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남녀노소가 이쪽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만큼 그쪽도 서너 가구가 모인
듯 대부대였다. 조개를 잡아 가지고 오는
길로 이 손 저 손에 비닐 쇼핑백들이 들려
있었다. 바닷가 돌밭의 황량한 풍경 속에
빠지며 치마들을 둥둥 걷어올린 그
모습들이 몹시 을씨년스럽고 지저분해
보였다.
한국 사람인가, 이쪽도 얘기를 멈추고
보고, 걸어오던 그들도 정이들을 보고
있었다.
"한국분들이세요?"
그 중 한 청년이 시원스레 먼저 물었다.
"네에, 조개 많이 잡으셨어요?"
미세스 한이 말했다.
별루 없구만요. 하두들 잡으니까 씨가
말르나봐요."
"어디 보세요."
그들은 모두 몰려가서 청년이 들고 있는
쇼핑백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가 낯선
총각임에도 애들을 낳아 본 여자들은 모두
바싹 붙어서서 들여다 보았다.
"꽤 큰데요, 그만하면 커요."
"우리집들도 모두 지금 잡으러 갔는데
아직도 많이 있는가요."
"조개 캐는 사람들이 많던가요."
한마디씩 하는데 청년이,
"혹시 석탄불 남았으면 불 좀 붙일까요?"
"그러세요."
그때 저쪽 편의 여자 노인 한 사람이
문득 호레이스의 신부에게 물었다.
호레이스의 신부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중간하게 예에 하고 손을 저었다. 노파는
다시.
"딸네 집이셔, 아들네 집이셔? 서울서
오셨어? 서울에서 사셨어?"
백설 같은 투피스에 레이스 달린
속치마에 스타킹에 또 화장까지 신식으로
했건만 저 노인네가 날 애봐 주러 온
자기하고 같이 취급하는가 싶어 호레이스의
신부는 골이 좀 났다. 난 이래 뵈도 뽑혀
가지고설랑 시집온 사람이야. 그래서
호레이스의 신부는 이번에 좀더 시무룩하게
그냥 에에에 하고 다시 한번 손을 저어
보였다.
이제 그들은 정이들에게서 가져간
석탄불을 일구느라고 저편 야외 식탁에
핸드백을 열고 콤팩트를 꺼내었다. 아주 새
것으로 위에 깐 동그란 세로판지도
유리창같이 깨끗하였다. 호레이스의 신부는
그 조그만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이미
과하게 분이 몰려 있는 콧등과 턱에 다시금
분을 두들겼다.
"이봐, 애기 엄마."
콤팩트를 검은 칠피 가죽 핸드백에 넣던
호레이스의 신부가 문득 정이를 불렀다.
호레이스의 신부는 좀 외로왔는가 이 일행
중 정이를 친밀한 사람으로 삼은 듯했다.
"저 노인네하고 나하고 누가 더 늙어
뵈?"
정이는 아까 호레이스 신부에게 말을
걸었던 노파를 찾아 보았다. 그 노파는
서너 살된 아이를 느슨히 업고 식탁 주변에
얼른 대답이 없자,
"응? 나하고 저 할먼네하고."
호레이스의 신부가 더 나이가 많은 것이
명확했다. 정이는 그를 얕잡아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나이답지 않게 들떠 있고
남의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마치 사랑에
빠진 사춘기 같이 오로지 영감님과 자기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가
서운하였다. 아까 정이의 아이가 머리에 맨
리본을 다시 고쳐 매달라고 왔을 때 아이의
발이 스커트에 살짝 스칠락말락 했건만
호레이스의 신부는 그 자리를 털고 또
털고, 아직까지도 자꾸 그 자리를 들여다
보며 께름히 여기고 있는 듯했다. 결혼
전에는 자신도 그랬을지
모르지만(그랬었나?) 이젠 아이가
기어올라도 싫은 줄 모르게 되었으므로
자기보다 곱절은 더 살았을 것 같은
호레이스 신부가 그러는 것이 인격의 결함
같이 정이에게는 보였다.
"비가 오네."
누군가 말했다. 과연 빗방울이 가끔씩
후둑후둑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은 더욱
세어지고 파도는 높았다. 조개 잡으로
떠났던 방향으로부터 남자들이 홀연
나타났다. 그들 등 뒤로 마구 흔들리는
광활한 잿빛 하늘이 무한인 듯 펼쳐져
있었다.
남편도 바지 자락을 걷어 붙이고
있었으므로 그가 가까이 왔을때 정이는
말했다.
"당신도 물에 들어갔었어요? 춥지요?"
비가 온다고 해도 아직은 가끔 뿌리는
상태이므로 일껀 잡은 조개를 우선 구어
먹기로 얘기가 되어졌다. 사위어가는
석탄불에 다시 새로운 석탄이 얹혀졌다.
저편 식탁의 동포 일행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더니 곧 모두 황황히 거두어 싣고 떠나
버렸다. 바람이 귓가에 빨래 퍼덕이는
소리를 메어 붙여서인지 급히 떠나는
그들은 무성영화 같이 보였다.
이제 바닷가의 야외 바베큐 장소는
호레이스들만이 되었다. 하이웨이
건너편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서머
하우스의 지붕 위로 키 큰 나무들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했다. 고만한 비에
호레이스 신부가 핸드백을 자기 머리 위에
달랑 얹어 놓았다.
있던 옷들을 벗어 입혔다. 호레이스도
슬그머니 자기의 잠바를 벗어 신부 어깨
위에 얹어주었다. 신부는 그것을 받으며
흐흐덕 웃었다.
"이 양반이 참 부끄럼을 타셔."
호레이스가 옆에 서 있건만 호레이스의
신부는 그가 한국말을 모르므로 거리낌
없이 말했다.
"밤만 되면 이 양반이 침대 저편짝으로
가서 벽을 보고 누우시지. 문쪽으로만 보고
누워도 부끄러우신가봐. 그래서 나도 얼른
방 이짝편에 붙은 내 침대로 가서 눕지,
허허."
자기 얘기를 하는 아내 옆에 호레이스는
아주 순하게 서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조개가 익었다.
집어서 조갯살을 먹고 조개껍질 안에 고인
짠 물을 마셨다.
너무 추워 별 맛도 느끼지 못했다.
강풍에 실려 날이던 빗방울은 더 이상
세어지지 않고 다행히 얼마 후에 그쳤다.
이미 황혼으로, 두껍던 하늘의 한 귀퉁이가
열리며 바다 위에는 엷은 노을까지 섰다.
헤어지는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찬 바람과 간간이 뿌린 비에
시달린 그들은 이제 한시라고 빨리 차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차가 없는
호레이스 부부는 한길훈 가족의 차에
타기로 되어 정이네는 양무인의 택시에
타게 되었다.
"오늘 재밌었어. 맛있는 것두 많이 먹구.
시상에 음식 솜씨들두 어쩌면 그렇게 좋지,
하루 동안 덤덤히 보던 여자들의 손을
붙들고 호레이스의 신부는 부산스럽게 작별
인사를 했다. 차에 오르려던 호레이스가 꽤
오래 걸리는 아내의 작별을 지켜보다가 She
is 이팔청춘 하고 자기가 아는 한국말
단어를 섞어 농담을 했다. 건성 들떠 좀
놀러 와 놀러 와 하고 여자들 손을
덤썩덤썩 잡던 호레이스의 신부는 이번에는
정이에게,
"아이 시상에 서운해서 어떡하지, 그럼
서울루 잘 가슈."
그래도 하루 동안 제일 친했던
정이에게는 훌러덩 팽개치듯 말하고
한길훈의 아이들이 먼저 타고 있는 차
속으로 내릴 때와 마찬가지로 몸을
비비대듯 어렵게 올랐다.
친구들을 못 잊어 차 뒷창에 달라붙어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길과 그 주위의 들판 위로 어둠이
서리는가 싶더니 금시 어두워졌다.
가로등은 이미 불을 켜고 달리는 차들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다.
"호레이스 영감 따라다니는 양아들이라고
하는 놈이 나쁜 놈이야."
핸들을 잡은 양무인이 말했다.
"왜?"
"제 엄마를 갖다가 결혼시키는 놈이 어디
있어."
뭔가 상당히 부도덕하다는 투였다.
"그래 안 맞기는 해. 학식으로 보나."
정이 남편 김승언이 무감동하게 말했다.
"그 할머니 남편은 작년에 죽었다더라.
거라."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양아들인가?"
"아니야. 그냥 파파 파파 하고
따라다니는데 그 자슥 와이프가 곧
해산이란다. 그래서 제 어무이를 데려오는
거지. 아까 호레이스 영감이 그러대, 인제
와이프는 한 달 뒤엔 보스톤 가서
살꺼라고."
"그럼 그 아들은 제 어머니 자기 힘으로
초청도 못했나."
"할 수 없지 유학생이거든."
차는 마치 밤을 향해 달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달릴수록 어둠은 짙어져 들판을
지나고 인가와 아파트가 보이는 도시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이미 화려한 밤이었다.
"나는 그래 여기서 오줌도 제때 못 누고
니는 메칠 후면 벌써 서울 사람이지.
아침에도 딱 밥상 채려 따신 밥 묵겠네."
남편과 헤어져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해서 여비도 없으면서 정이가 여행사에
전화를 우선 돌려 보았을 때,
"언제 떠나실 겁니까?"
건조하고 상냥스런 여자 음성은 대뜸
물었다. 죽기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헤어져 귀국하는 문은 아주 넓게 수월히
열려 있었던 것이었다.
"가믄 어디서 일할 거지?"
"아직 몰라."
양무인의 물음에 김승언은 간단히 대답해
버렸다.
"정말 자꾸 물어보지 마세요. 그냥
가보는 거예요. 왜 여기 농담도 있잖아요.
그러느니 가는 게 낫겠다, 그런 거예요."
정이가 딱한 남편을 거들었다. 학위가
끝난 후 일 년간 남편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지냈다. 어느 날의 말다툼 끝에
정이는 이혼과 같은 귀국을 생각하였으며
짐싸는 아내를 보고 남편도 같이 가겠다고
하여 이루어진 황황한 귀국길이었다.
창 밖으로 정이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이
보였다. 창문은 전부 불이 꺼지고 현관에
외등만이 호젓이 켜져 아이가 매달려 놀던
그네나 시소를 비추었다.
"아까 호레이스 영감이 그러는데 한국이
물가가 비싸다는데. 여기랑 거진 같다는데?
가서 살 일이 걱정이다."
김승언이 말했다.
"호레이스 영감 말이다. 차라리
진득한 여자나 택하지 그거 어디 딱 미친
년 같은 걸."
양무인이 너무 심하게 하는 농담이
우스워서 정이는 웃었다.
"그래도 두 분 사이에 전기 작용이 있는
것 같잖아요? 혹시 그 아들이란 이가 시킨
결혼이라 해도 할머니는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전기라, 헤헤....."
양무인이 웃었다. 김승언도 따라 웃었다.
"한국 가서 좋은 자리 있거든 내도 좀
불러라." 말하고 양무인은 아파트 앞에
정이 부부를 내려 주고 떠나갔다.
열쇠를 꺼내다 남편이,
"어, 이거."
하며 주머니에서 열쇠와 함께 집혀 나온
잠든 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까 바다에서 주웠는데 어디
쓸만한가."
구멍이 숭숭 뚫린 얇은 조개껍질이었다.
"아, 이뻐라. 목걸이에 낄까?"
남편이 열쇠를 돌리는 등 뒤에 서서
정이는 그 조개껍질을 한 손바닥에 놓고
가만히 보았다. 정이는 수집가였다.
이와 같은 작은 조개껍질로부터 뜻
아니한 타인의 친절, 꽃, 정다운 말씀,
아름다운 사람, 노래, 날씨, 풍경, 한 번
지나가면 언제 다시 그같은 것과 만나게
될런지 전혀 확신이 없는 때문이었다.
8. 폭설
[1]
도시는 눈에 묻히고 허드슨 강은 수많은
등불을 품에 안고 검게 흘렀다. 의외로
교통이 혼잡하지 않아 보통보다 한 이십
분간 시간의 이득을 보았다는 데 생각이
미친 진주는 미드타운 터널 입구에서 차를
돌려 그리니치 빌리지로 향했다.
어제 제야의 자정 올드랭사인이 흐르는
가운데 타임즈 스퀘어 전광판에 새해의
숫자가 깜박이고 고깔모자며 피리를 든
사람들은 오색 종이 테이프를 맞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한껏 센티멘탈한 감상에
젖었지만 정작 새해인 오늘, 거리는
있었다.
반 년 전 정섭이 떠난 이래로 진주 앞에
미래라는 것은 모친을 무겁게 등에 지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기쁨 없이 펼쳐져
있었다. 직장 때문에 떨어져 있는 듯
주위에는 그렇게 알려 놓았지만 오정섭과
진주의 약 일 년 반 동안의 결혼생활은
이미 끝나 있었다. 정섭이 뉴욕에서
스위스로 굳이 직업을 얻어 갔을 때 정섭과
진주를 묶어 놓는 끈은 없었다. 결혼하기
전 함께 유학생으로 서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하던 그들은 배 고프고 고단하지만
좋은 동무이자 좋은 연인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 어느새인가 그 우정은 죽어 버리고
정섭과 진주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
버렸는지 서로의 감정 전달이 어려웠다.
습기찬 차창으로 세상은 눈물인 듯 번져
보였다. 진주는 문득 뻗어 있는 이 길
끝까지 달려가 대륙의 저쪽 끝에 파도치는
바다까지 가 볼까 생각했다. 그곳은 지금
한여름철로 열대식물이 우거지고 파인애플
같은 달이 둥글고 맛있게 떠 있을까.
진주는 가끔씩 이런 종류의 환타지를
보고는 하였다. 불이 환히 켜진 대륙횡단
버스 같은 것을 타고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흔들려 가는 것. 책임 없이
생각 없이 그렇게 끝까지 실려 가 보는 것.
그러나 진주는 이 대륙에서는 뉴욕 외에
아무데도 알지 못하고 또 가장 쓸쓸한 것은
그렇게 가 봐도 별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워싱턴 광장은 눈 속에 마치 한 장의
눈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빌리지는
시내와는 달리 카페와 바아와 상점마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들어차고 거리에는
예쁘게 치장한 여자들이 남자들의 팔에
휘감겨 몸을 흔들고 드높이 웃으며
지나갔다. 인생이 지닌 방황과 꿈의 향기
같은 것에 접하고 진주의 심장에는 심지를
한껏 돋운 그리움의 램프가 켜졌다.
진주는 좁은 거리를 천천히 운전해 가서
장신구며 기념품 그리고 티셔츠 같은 것이
쇼윈도우에 지저분하도록 촘촘히 걸린
조그만 가게 앞에 멈추었다. 차창을 내리고
진주는 그 가게안을 살폈다. 기(起)는
있었다. 그는 그 사이에 수염을 깎지 않아
구렛나루 자리가 시커멓게 되어 진주는
얼른 그를 몰라 보았다. 물이 낡은
프린트를 하느라고 한 옆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에게 무엇 때문에
들렀다고 말할까 진주는 생각에 잠겼다.
진주가 기를 처음 만난 것은 두 주쯤
전의 일로 미스 오의 아파트에서였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반짝 오색등을
켰다껐다 하고 이십 칠 층 아파트 창으로
왕관같이 찬란한 뉴욕의 밤거리가 발밑에
깔려 있었다.
진주가 갔을 때 미스 오에게는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 손님이 있었다.
음악은 낮게 흐르고 그들은 몹시 편안한
자세로들 앉아 있었다. 기도 그 중
하나였다.
"파티를 하나 봐. 내가 전화했을 때 왜
아래층 도어맨한테 맡길 걸 그랬지."
진주는 금방 미안해서 사과하였다.
"아니야 괜찮아. 파티가 아니라 이분들이
그냥 들른거야. 연극 구경하고는. 진주야.
들어와. 저녁 전이지?"
어깨뼈가 앙상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미스 오는 패션 모델같이 화장을 하고
있었다. 짙은 자주색 루즈를 바른 입술이
말할 때마다 꽃잎 같이 움직였다.
정섭과 진주가 학생일 때 미스 오도 그들
옆 방에서 그림 학교를 다니며 그들이나
다름없이 고달프게 지냈다. 이제 미스 오는
상업디자이너로 안정이 되고 서양인 보스의
애인도 되어 행복해 보였다.
"난 가야 돼요. 엄마가 저녁을 안 먹고
기다리시거든."
하나가 알아듣고
"그건 당신 엄마가 엄살떠느라고
그래요."
그가 기였다. 진주와 초면인 손님들이
웃었다. 미스 오도 조금 웃었다. 화를
내어야 하는지 아니면 함께 웃어야 하는지.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진주는 얼른
태도를 정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늘 말을 저렇게 해. 기분
나빠하지 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미스 오가 진주에게 작게 속삭이고 이어
큰 소리로
"자. 인사하세요. 친구예요. 나이는 좀
틀리지만."
미스 오 비슷이 화려한 여자와 시를
피아니스트라는 남자와 기에게 진주는
인사했다.
대뜸 기가 시를 쓴다는 여자에게 말했다.
"요전 번에 발표된 시 말이요. 거 맨날
망향가만 부르던가 소수 인종의 비애만
읊을려거든 한국으로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나는 그런 글을 보면
그건 마치 시어머니께 애 맡기고 나가는
며느리가 미안하니까, 가기 싫은데 가야
한다고 시어머니한테 엄살떠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에 예술은 그 이상의 것이요.
그렇게 고국이 그리우면 왜 못 돌아가는가.
여기서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아주 쉬워요.
비행기 표만 사면 돼요."
여류시인은 욕인지 농담인지 얼른 분별이
안 가 애매하게 웃으며 듣고 있었다.
마시오. 그런거 쓰려면 정말 여기
이민이라고 와서 살려고 생존 바탕이
흔들리는 가운데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얘긴
그런 사람에게 맡겨요. 당신이 그런 사람을
위해 뭘 하겠다는 거요? 진정한 의미의
코스모폴리탄이 되던가 한국으로 가던가 둘
중 하나요."
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주는 도어
손잡이를 쥐었다.
"전 정말 가야 돼요. 차도 자리가 없어
더블파킹을 해 놨고."
"아. 차가 있으시오."
떠들던 입을 다물고 기가 앉았던 허리를
펴며 물었다.
"그럼 빌레지까지 좀 태워다 줄 수
"왜 가게에 가실라고? 아깐 안 가겠다고
하더니."
화려한 여자가 말했다.
"자꾸 빠지면 안 좋아요. 먹고
살아야겠으니 차편도 있는데 출근하지 뭐."
진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기는 침실로
들어가 털모자와 반코트를 들고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약간의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며 이십 칠 층을 내려오는 동안 진주는
초면인 처지에 승차를 부탁하는 이
사람에게 처음으로 시선을 주었다.
덥수룩한 머리, 마른 얼굴에 짙은 눈썹,
긴코. 그러다가 진주는 그를 서울에서 두어
번쯤 본 일이 있었던 것을 문득 깨달았다.
"저. 윤마 언니 남편되시지요?"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대고 무심한
경계하는 빛이 스쳤다.
"윤마 언니 싸롱에 갔을 때 뵌 일이
있어요. 그 언니 좀 알아요. 내 친한
친구가 그 언니하고 아주 가까왔어요."
"아. 그래요."
차에 올라 기는 털모자를 벗었다. 진주는
늘 하듯 음악을 틀까 하다가 그만 두고,
"윤마 언니는 요새 뭘 하세요? 여기서도
양장일인가요?"
"아. 그 사람은 안 왔어. 나만 왔어요."
차가 빌리지 입구 워싱턴 광장을 꺾어 올
때 이상스레 침묵하고 있던 기가 문득
말하였다.
"당신 상당히 창백하구만. 그 대리석
이마에 파란 연필로 실핏줄을 그려 넣고
싶소."
닫으려다가 다시 열고 허리를 굽혀 그는
진주를 들여다 보았다.
"이 가게가 내 가게요. 물론 나는
꼬붕이오. 시간 있으면 들려요. 다시
만나고 싶소이다."
손님인 듯 쇼윈도우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진주는 가게 문을 밀었다. 물건을 포장하던
기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여어, 어쩐 일이시오."
그가 일을 마칠 동안 진주는 가게의 여러
가지 물건을 돌아보았다. 손님을 보내고
기는 다짜고짜 와서 진주의 팔꿈치을
잡았다.
"자, 나갑시다."
"그래도 되세요? 방해되지 않아요?"
함께 있던 백인 남자에게 뭔가 얘기하고
진주가 요전 날 보았던 바로 그 털모자와
반코트 차림으로 기는 강아지를 몰아내듯
진주를 밖으로 몰아내었다.
"전 곧 가야 돼요."
"당신 엄마 엄살 때문에 말이오?"
기가 웃었다. 오늘 여기 온 것은 어쩌면
기의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진주는 생각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진주의 팔을
잡고 기는 길을 성큼성큼 건너갔다. 인도고
차도고 없이 흰 눈 속을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가끔씩 자동차가 그
사람들 사이를 비켜 조심스러이 지나갔다.
기가 데려 간 곳은 길 건너의 바였다.
가발 같은 머리를 어색하게 늘어뜨린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라고는 테이블마다 켜진
촛불과 가수를 비추는 동그란
조명뿐이었다. 서로의 무릎이 닿도록
조그만 테이블에 앉아 진주는 기가 주문한
차거운 포도주를 마셨다.
오늘 새해 첫날 진주는 모친, 그리고
모친의 친구 권양혜 씨 일가족과 함께
권양혜 씨 남편의 묘소를 돌아보고 집으로
왔다. 눈이 내리려고 그랬는지 누렇게
퇴색한 겨울 잔디 속에 돌비석이
얼음덩이인 양 서 있는 산은 발이 동동
굴러지도록 추웠었다. 얼마 전만 해도
건강히 웃던 사람은 이제 이역의 언 땅에
한 줌 흙으로 묻히어 말이 없고 다섯
여자는 귀를 에어부치는 강풍 속에 말을
먹고 진주는 권양혜 씨 일가를 집에까지
차태워 주었다.
진주는 시계를 보았다. 아무리 교통이
복잡하고 권양혜 씨가 권했던대로 그 집에
잠시 들어가 차(茶)를 했다 하여도
지금쯤은 집에 돌아가 있어야 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왜 엄마 때문인가?"
"네, 안 주무시고 기다려서요."
"당신 몇 살이오? 지금까지 처녀요?"
처녀라는 그 말이 육체적인 것을
뜻하는지 아니면 법적인 결혼 경력을
뜻하는지 잘 모르며 진주는 어둡게 춤추는
촛불 빛에 얼굴을 숨기고 대답하였다.
"아니에요..... 윤마 언니는 언제쯤 오게
되나요?"
아프다 해요. 그 친구 잘 알아요?"
"아니, 잘 모르지만....."
"당신 이름이 뭐더라? 무슨 꽃이름
같았는데."
"진주예요."
"꽃이 아니구 보석이구만."
아무리 교통이 복잡하고 혹시 길에
사고난 차라도 있어 도로가 잠시 막히고
권양혜 씨 집에서 차(茶)를 마셨어도
집에까지 두 번은 왕복할 만큼 시간이
지났다. 잠든 모친을 깨울까봐 진주는 집에
전화도 걸지 못하였다. 나는 좀 이런
시간을 가져도 괜찮지 않은가 엄마는
언제나 행복하면 큰 일나는 듯 내 마음을
잡아다니는가. 진주는 속에 차는 화를
느끼며 기에게 돌아갈 것을 말했다.
모자랐다. 집에서 입던 옷에 코트만 걸치고
나왔기 때문에 진주에게도 돈이 없었다.
다음날 갖다 주기로 기가 카운터에
얘기하고 그들은 바를 나왔다.
정월 초하루는 저물고 어둠 속에서 이미
새해의 이튿날이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신 발이 시렵겠구만. 다 젖었어. 내
방에 가서 말리고 장화 신고 가지 않겠어?"
"괜찮아요. 차에만 타면 히터에 곧
말라요."
차를 세워 둔 기의 가게 앞까지 와선
진주가 차에 오를 때 기는
"내일 나와요. 바에 돈 갖다 줍시다. 내
재밌는 데 구경시켜줄께."
직장도 휴일이므로 진주는 어떻게든 나와
볼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지말고 전화번호 좀 줘요."
기는 쟈켓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모친은 창문을 열고 설경을 향해 어두운
창가에 서 있었다. 진주가 들어가자 창문을
탁 내리고 돌아서는 얼굴이 깊은 바다의
인광같이 푸른 빛이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니? 난 큰 일난 줄
알았구나."
크게도 말 못하고 모친은 음산히 몸을
떨었다.
"으응, 누구를 만나서."
"누구?"
모친은 갈퀴로 잡아채듯 물었다.
"아는 사람."
진주는 모친의 시선을 피하며 코트를
세우고 걸어오는 동안 다시 눈에 빠져 발이
몹시 시렸으나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행복한 빛이 진주에게서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정말 난 큰 일난 줄 알았다."
모친은 울 듯 했다. 뱉지 못하는 그
울음이 뒤로 돌린 어깨와 목에
설움덩이처럼 잠겨 있었다. 진주는
욕실문을 닫다가 다시 그런 모친에게 큰
소리로 반항했다.
"엄마. 나도 인제 스물 여덟이야. 엄마가
나를 업고 눈보라 속에 피난길을 떠나던
나이야. 어른이야. 어디 가서 죽든 말든
엄마 그냥 나를 상관 마."
"니가 자식이 없어서 그래. 자식이란 게
그런게 아니야. 얼마나 마음이 쓰이는지
모친은 끄응 침대에 누웠다.
새벽에 진주는 모친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진주야."
진주는 모친이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정신이 들기도
전부터 진주는 우선 겁이 난다. 위경련이
일어나던가 혈압이 높던가 모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었다. 진주는 침대위에
일어나 앉았다. 거리 가로등의 흐린 빛
속에 잠옷을 입은 모친이 머리를 산발하고
침대머리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혈압이
높아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고 모친은 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했다.
"혈압이 올라 죽겠다. 미진 엄마
부를까."
간호원으로 지금 저녁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또 내일의 근무를 위하여 곤히 자고
있을 것이었다.
"엄마, 아주 아파?"
의미 없는 말을 던지며 진주는 전등부터
켰다.
"관두지. 아침까지 기다리지."
숨이 끊어지듯 가는 모친의 말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는 미진 엄마를 이 밤중에
깨울 용기가 진주에게 없었다. 그리고
진주는 모친의 혈압이 정말 놓은 것인가
아닌가 잘 모른다. 모친의 병이 진주는
겁이 나면서도 한편은 꾀병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친 자신이 내가 안 아프리라
정신만 굳게 먹으면 날을 듯 안 아플
것같이 느낀다. 모친은 진주를 얽어매기
느낀다. 병간호를 잘하는 효자 효녀의
얘기는 늘 그러한 진주를 당혹시켰다.
자신을 몹쓸 아이 같이 느꼈다.
날이 밝자 미진 엄마를 부르고 의사의
처방을 받아 진주는 눈 속을 뛰듯 달려가
약을 사 왔다.
"왜 갑자기 혈압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미진 엄마가 약을 먹이고 모친을 침대에
눕혔다.
"쟤가 어제 늦게 들어와서. 걱정이 돼서
그냥 창문을 열고 서 있었더니. 세
시간인가 네 시간을 꼬박."
"저런, 저런, 그렇지. 뉴욕이 이렇게
험한데 나가서 안 들어오면 정말 별 생각
다 나지요. 나도 미진 아빠가 어디 가서 안
그런데 노인네가 서너 시간을 그러셨다니."
미진 엄마는 혀를 찼다.
"노인네 건강이란 정말 몰라요. 이제
약을 드셨으니까 한잠 푹주무시고 나면
혈압도 내리시고 그럴 꺼예요. 이브닝
근무니까 낮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염려말고
날 부르세요. 집에 있을 테니까."
미진 엄마는 가 버렸다. 모친의 혈색은
몹시 나빴다.
"진주야."
모친은 가늘게 진주를 불렀다. 혈색은
나쁘고 목소리는 모기소리 같았지만 끝내
아프고 말았다는 어리광인지 승리감 같은
것이 모친에게 있었다.
"내가 참고로 얘기하겠는데 내 의식이
없거들랑 베개를 빼고 차게 눕혀라."
들어갔다. 새해의 이튿날이 우중충한
날씨에 잠겨 흘러갔다.
"인제 오나 인제 오나 연방 문만
쳐다보며 기다리다가 한번 걸어 본 건데
아직까지 집에 있으면 어떻게 해요? 빨리
나와요."
밤 아홉 시가 되어 기가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세요. 못 나가요."
속삭이는 소리로 진주는 재빨리 말했다.
"아."
기는 잠시 주춤하다가
"많이 아프신가?"
"네."
"엄살 아니고?"
"네. 어제 내가 올 때까지 서서
아, 기는 한번 다시 말하고 잠시
쉬었다가,
"그래도 나와. 뭐 거기 있다고 엄마가
낫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늦게 들어가서
엄마가 삐친 거라."
"아녜요, 참."
정말 기의 말처럼 엄마가 삐쳐서 아픈
체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봐, 어서 나와. 내가 기다릴 테니까.
오늘 저녁 시간 낼려고 아침부터 일했단
말이야. 시간 얻어 놨으니 나와요. 딸이
늦게 들어와서 무슨 일인가
걱정했다면--어디 하나 안 다치고 웃으면서
들어오는 딸을 보고 사지에서 살아온 듯
반가와하고 잔치라도 해야지. 그래 무사히
들어온 딸을 보고 혈압이 높아지다니."
? 기는 소리내어 웃었다. 진주는 기의 웃는
소리에 아연하여 귀에 대었던 수화기를
떼어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나의 엄마에 대해 무례할 수 있는가.
"어쨌든 오늘은 못 나가요. 난 있어야
해요."
"에에, 그러면 전화해."
기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잘깍 끊기고
주변은 조용하고 진주는 모친의 겁나도록
큰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동그마니 앉아
어두운 창 밖을 응시하였다.
[2]
눈에 덮인 산장은 조용히 아침을
공기가 낯선 창으로 스미는 것을 진주는
낯선 침대에 누운 채 바라보았다. 반듯하고
깨끗한 천장, 유럽풍의 창문, 그리고
물결같이 주름을 넣은 밝은 빛깔의 커튼,
견고해 보이는 가구. 옆에 미스 오는
베개를 껴안듯 하고 곤히 자고 있었다.
눈화장이 눈밑에 번져 있었다. 나무에
쌓였던 눈이 둔한 소리를 내며 가끔씩 땅에
떨어졌다. 아무도 눈 뜬 사람이 없는 듯
야트막한 지붕의 벽돌 산장은 아직 아무런
기척 없이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지난 밤 담요 밑으로 손을 뻗어 자기
허리를 만졌던 기의 손을 생각하고 진주는
행복감을 느꼈다. 어제 기와 미스 오와
진주는 미스 오의 차로 이 산장을
찾아왔다. 날씨는 흐리고 들판은 눈이어서
흐린 경치 속을 그들은 뉴욕으로부터 다섯
시간 달려왔다. 산장의 주인인 닥터 송
내외는 집문간에서 그들을 맞아 들이며
"길이 나쁘지 않았어요? 걱정했어요."
"뭐 일행이 좋아서. 자, 이 사람이
진주라고 내가 전화로 말했던 사람이요."
"어서 오세요."
미쎄스 송이 큰 살림하는 여주인답게
밝은 인사성으로 진주를 맞았다. 그들은 곧
저녁을 먹고 새벽 세 시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술을 마셨다. 벽난로의 불길이
장난치며 타오르는 새벽에 이야기에도 지친
일행은 담요를 덮고 카펫트 위에 엎드렸다.
장작이 타닥탁 소리를 내며 탔다. 졸음이
먼 해안의 물결처럼 밀리고 진주는 팔에
고개를 묻고. 행복이란 이렇게 순간적인
처음 미스 오로부터 기와 함께 떠나자는
여행의 제안을 받았을때, 그때 진주는
이상하게 설레이며 기쁜 기대에 금시
두둥실 뜨는 기분이었다. 진주는 기를 눈
덮인 정초의 밤에 만난 이래로 다시 만난
일이 없었다. 진주는 이 여행을 위하여 큰
마음 먹고 꽤 비싼 스웨터를 사고 진바지도
하나 샀다.
"어른들 노느라고 애들 안 봤더니 입은
옷 그대로 모두 침대에 들었지 뭐예요."
미쎄스 송이 애들 침실을 돌아보고 와서
아이들이 귀여운 듯 남편에게 말했다.
"애들은 금방 크지요?" 미스 오가
말했다.
"네 정말이에요. 금방 난 것 같은데 벌써
큰놈이 열 두 살 아녜요? 혼자 손으로
"그래도 키울 때 느낀 즐거움이 있잖소.
그걸로 만족해야지. 아이란 크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마련이오."
기의 말에,
"아이 참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색씨랑
애를 낳고 살지 않아요?"
미쎄스 송이 말했다.
"이미 세상에는 애들이 많이 있어요."
기가 대답했다.
"기씨는 박애주의자예요. 예수 같은 그
사랑이 한군데로 몰리는 날에는 큰
일날꺼라. 그 여자 하나는 그만 박살이
날꺼라."
미스 오가 농담했다.
기의 손이 담요 밑으로 기어들어와
진주의 허리를 만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보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도로 거두어가
버렸다. 섬광 같은 전류가 진주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다. 놀란 진주가 눈을 떴을
때 기는 잡아 먹을 듯 열에 뜬 시선으로
진주를 보고 있었다. 짙은 성(性)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제 침대에 누워 진주는
그 순간 그들 주위를 떠돌던 행복한
긴장감을 되풀이 되풀이 생각해 보았다.
산장의 아침은 밝았다. 여러 방문이
열렸다 닫기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아이들이 층계를 오르내렸다. 안주인인
미쎄스 송과, 미스 오, 진주, 이 세 여자가
아침을 준비하는 부엌 창 밖에는 고드름이
투명히 빛났다. 커피 향기가 퍼지고
토스타에서 빵이 구워졌다. 닥터 송과 기와
그리고 닥터 송의 두 어린 아들이 씻은
장작불 앞에서의 기의 감촉이 그리워
얼굴을 붉히고 기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미스 오가 잔에
커피를 따르고 미쎄스 송이 계란부침과
구운 베이컨을 각각의 접시에 나누었다.
기의 접시에 빵을 놓는 진주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기는 접시를 들고 냉장고에 가서
깻잎장아찌를 두어 장쯤 집어왔다. 아침을
먹고 설겆이 그릇은 그냥 쌓아 둔 채
일행은 차에 올라 이십 분쯤 걸리는
스키장으로 향했다. 한 차에 일곱 사람이나
타게 되어 모두 좁게 끼어 앉았다. 차가 눈
덮인 겨울 나무 숲 사잇길을 달릴 때 기는
문득 진주의 머리에 고개를 묻어 진주는 또
다시 정신이 없어지고 누가 알까 두려워
흐린 구름을 헤치고 어느새인가 해가
비치어 그들 일행이 스키장의 빨간 지붕을
보았을 때는 맑고 눈부신 햇살이 백설의
벌판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스키화가
마룻장을 굴르는 소리가 꽤 멀리서도
들렸다. 스키가 능숙한 닥터 송 내외는
케이블카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남은 세 사람과 두 아이들은 스키화를 빌려
신고 백설의 벌판에서 눈강아지같이 웃고
넘어지고 뒹굴었다.
미스 오는 이번 주말 애인인 보스가
가족을 데리고 버뮤다 여행을 떠나
우울하다고 말했다.
"진주야, 너는 앞날을 생각할 수도 없고
꽉 덫에 갇힌 것 같고 도대체 내가 여기서
탈출하는 순간이 있을까 생각해 본 때가
"많아요. 아주."
미스 오는 스키탈 흥미도 없는 듯 눈
위에 주저앉아 스키화를 벗었다. 진주도
자기 신을 벗어 들고 두 여자는
카페테리아로 올라갔다.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 사는 게
진력나."
"그런 때도 있지만, 그러다가도 곧 또
잊어 버리지요. 이런 노래도 있지요.....
미안하지만 난 장미화원을 약속하지
않았어요. 해가난 다음에는 소나기도
와요....."
기 때문에 진주는 들떠 있는 상태이므로
미스 오의 탄식에 유행하고 있는
컨트리송을 작게 흥얼거렸다. 진주는 두
면의 벽이 유리로 된 그곳에 앉아 미스
아이들을 데리고 눈 언덕에서 노는 모습을
찾아 숨듯 바라보았다. 기는 까만 바탕에
흰 선을 두른 털모자를 쓰고 있어 그것이
표적이 되었다.
스키장에서 돌아온 그들은 다시 전
날처럼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술을
마셨다.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소음 같기만 했다.
"평화가 좋아요. 누가 이러고 저러고 안
하고 옆에 있는 누구의 불행 때문에 같이
우울해 있어야 한다던가 그런게 아주
질색이거든. 결혼생활과 지금과를 비교해
볼 때 지금 쪽이 훨씬 좋아요."
왜 독신으로 지내느냐는 미쎄스 송의
질문에 기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들의 말
분위기로 자기가 정섭과 이미 무관하게
안도감을 진주는 느끼었다. 그러나 진주와
정섭의 관계는 이 세상에 그들 두
사람밖에는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모친도 아마 알고 있겠지만, 모친은 시침을
떼고 짖궂게 굴기로 작정한 듯 매일 정섭의
편지 없음을 한탄하였다. 아이구 어쩐
일이냐, 오늘도 없으니, 그 사람은 마음이
변한 사람이다, 내 마음이 이렇게
후두두하면 틀림없이, 어쩌니 니
앞일이..... 오늘 또 하루 웃지도 말고
즐겁지도 말고, 너는 어디 돌아다닐 생각
말고 이와 같이 걱정스럽게 살아가자 하는
듯 모친은 얼굴을 똥똥 붓게 만들어 가지고
왔다갔다 한숨을 쉰다. 정섭이 돌아와
자신이 외롭게 되는 두려움을 모친은
그렇게 표현한다.
껐다.
"그래도 외롭지 않으세요? 이 세상은
남자 여자가 함께 살기 마련이에요."
"친구가 오면 같이 지낼 수 있지요."
기는 진주를 건너다 보았다. 진주는
시선을 피하여 술잔을 입에 대었다.
"여자도 서넛 만나게 되면 그중 하나가
더 특별히 흥미를 끌고."
기의 말을 듣고 모두 웃었다. 전부터도
짐작은 했지만 이 남자는 대단한
바람둥이라고 진주는 속이 서늘해졌다.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여자들은 너무
지배적이 돼 버려요. 누구를 염려해 주고,
또 누가 나를 염려해 주는 게 좋지만 누가
내 정신 자유를 가지고 흔드는 건
질색이오."
계속하였다.
"하지만 장래에는 결혼할지도 몰라.
약하고 늙어지면 지속적인 관계를 원할지
몰라. 그때까지는 오로지 나 하나에 충실할
생각이요. 나는 근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요. 그런데 그놈의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내 몸 하나뿐인데도 노예 같아.
나는 마음대로 여행도 다니고 화랑도
다니고 주위에 여자들을 많이 있게 하고
싶거든. 아직 매력있는 많은 여성들을
포기할 준비가 안 돼 있어요."
갑자기 미스 오가 왁 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어나갔기 때문에 말하던 기도 느슨히
기대 앉아 조는 듯 불길을 바라보며 기의
얘기에 귀 기울이던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진주가 곧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미스
오는 변기 주변을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
"진주 괴로와 죽겠어. 윽윽윽 괴로와."
닥터 송이 주는 약을 먹고 다 토해낸
미스 오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어질러진
욕실 바닥을 진주는 치웠다. 애인 때문에
고민이 대단해요. 다른 방에서 소근거리는
미쎄스 송의 소리가 들렸다.
이박 삼일의 여행에서 진주가 피는 꽃
같은 얼굴로 돌아온 후 모친은 침울하고
냉담하였다. 울고 혈압이 높아오고
육체적으로 아플때나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현상은 아니지만 너 때문에 불행한 내가
여기 있노라 하는 듯한 말없는 모친의
태도는 역시 진주를 괴롭혔다. 한 집안에서
모녀는 말없이 생활해 나갔다. 기와 진주는
늦게 전화를 걸었다. 모친이 듣는 줄
알면서도 진주는 수화기에 정다운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실어 보냈다. 밤이면 기의 말을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마음껏 웃어보기
위하여 일찍 불을 껐다.
진주에 대한 모친의 적의는 침묵 속에
비수같이 날카로와 갔다. 진주는 모친과
자신의 생명의 시합을 하고 있는 듯
느꼈다. 모친의 목숨이 진주의 목숨을
짓밟고 넘어가는 순간도 있었으며 자신의
목숨이 모친의 목숨을 짓밟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키가 자라고 나이 먹는 게 성장이
아니요. 당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게
성장이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가정과 가족을 떠나는 것뿐
것이요."
행복과 극락을 약속해 주는 신흥 종교의
교주처럼 기는 만날 때만도 모자라는 듯
전화선 너머로 진주에게 설교를 흘려
보내었다.
"당신은 추격당하는 사람 같애. 늘
무엇이 뒤쫓는 듯해. 당신은 무엇엔가 잡혀
나중에 꼼짝없이 먹히리라고 쫓기고 있어.
그게 바로 가족인거요. 수천 리 수만 리
바다와 육지를 격해 있어도 아직도 그들의
요구를 느낀다면 그건 자기 인생을 사는게
아니지. 반면 한집에 살면서도 자기 본연의
자신이 될 수도 있어요. 감정의 격리는
무감정하고 달라. 그건 차겁고 멀고 그런
감정이 아니요. 그건 바로 당신은 당신이고
그들은 그들인거요. 자기 자신의 인생을
거요. 다른 사람의 인생에 폭군이 되지
않는 것이지, 인간의 개성을 받아들이고
각각 살 수 있고 숨쉴 수 있게 하는
것이지."
진주는 기에게 점점 깊이 매혹되어 갔다.
혼돈이었다.
"누가 자기 자식을 효도가 극진하다고,
이러저러하게 자기를 잘 해 준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부모를 볼 때면 나는 그
밑에서 신음하고 죽어가는 자식들을
생각하고 몸서리가 쳐져. 자기 인생의
행복이 오로지 남의 손에 달린 듯, 남의
책임인 듯 행동하는 사람이 무서워. 그런
타인을 당신 내부에 두면 당신 인생은 그
타인이 늘 자리를 차지하게 돼. 당신
자신의 인생에겐 자리가 조금밖에 없어요.
그 내부의 어머니를 돌보느라 너무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어머니에겐 소비할 에너지가 안 남아요."
진주는 실제로 자기가 늘 모친에게 성이
나 있고 좋은 딸이 못 되는 이유를
알아들었다. 기는 암흑에 갇힌 진주에게
새로운 빛을 비춰 주는 성자였다.
"어머니가 당신에게 뭔가 요구하면
당신은 반항해. 왜냐? 이미 당신은
어머니에게 전인생을 바치고 있는데 어떻게
더 줄 수가 있어. 당신 어머니를 당신
밖으로 몰아내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도
또한 어머니에게도 잘 해 줄 여유가 생겨.
환타지 속의 어머니를 포기하면 당신은
진정한 어머니를 얻게 돼요."
기의 설교를 듣고 모친을 대할 때,
진주의 자유를 구속하고 진주에게 마음대로
요구해 댈 때, 진주는 냉정한 시선을
모친에게 보내며 불쌍한 나의 엄마여,
당신과 나는 남남입니다, 속으로 외쳤다.
진주은 이미 모친의 말을 듣지 않고 모친의
병고도 냉정히 대하였다. 질병과 비참은
엄마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은..... 나의
인생은 사랑의 인생, 장미와 노래의 인생,
어딘가 있을 그런 내 인생을 엄마 나는
추구할거야. 내게는 이미 그런 세계로
이끌어 줄지도 모르는 길잡이가 있어요.
주말이면 돌아다니고 한밤중에는 전화통
앞에 앉아 사내와 시시덕거리고 어미에게는
점점 당돌해지고 버릇 없어지는 진주에게
모친은 당황하고, 바위에라도 부딪는
심정인 듯 더욱 아픔을 호소하고 불면을
같이 자기 부모를 학대해도 좋은 것인가,
가끔 진주는 깊은 양심의 아픔을 느꼈다.
"죄의식을 느끼지 마시오. 당신은 실제로
있는 인간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이미지 속에 있는
가상의 인물 감정을 상하게 한 것뿐이요."
기 옆에 있으면 기의 말이 절대로 옳은
것 같지만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환상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상심해
피 흘리는 병들고 늙은 사자 같은 모친을
볼 때 진주는 곧 미로에 빠진 듯 당황했다.
[3]
아파트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난 아직 저녁 전이야. 당신은?"
"전 먹었어요. 먹고 다 치우고 오는
길이에요."
층계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올라가면
꽉 차도록 좁고 가파랐다. 저녁만 되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이 거리와는 달리
굳게 닫힌 문들 뒤로 각자의 생활로
숨겨지고 복도는 적당히 침침한 조명 속에
가라앉듯 조용하였다. 이층 층계 모퉁이에
검은 외투를 입고 스카프를 쓴 나이든
여자가 종이 쇼핑백을 벽에 붙이고 기와
진주를 지나가게 하였다. 그들은 그 여자
앞을 한 줄로 서서 걸어 지났다.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 한번 상상을
동원시켜 봐."
뒤로 흘깃 돌아보고
"가정주부?"
"그래, 여자들은 가정 일을 오래하면
저절로 저렇게 참을성 있는 분위기를
풍기게 마련이지. 그리고?"
"우울하고, 참 우울해 보이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왜 물어 봤어요?"
"저 여자는 말이요, 이혼해 버린 병든 전
남편을 찾아오는 거요. 죄의식에 사로잡힌
늙은 옛 와이프란 말이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요. 와선 몸을 씻기고 약을 주고
침대를 바로 해 주고 수프를 만들고 방을
정돈하고 집으로 떠나. 진주, 생각만 해도
숨막히지 않아? 다른 사람의 심장에 한 발
박아 놓고 사는 그 전 남편이라는 인간이.
그 폭군이. 젊은 시절에는
삼 층 층계참에 이르렀을 때 기는 어느
집 닫힌 문 앞에서 발을 한 번 탁 굴렀다.
"죽어 버려."
사 층 계단을 오르며 기는 뱉듯 말했다.
"아까 거기가 그 벌레 같은 인간 집이야.
건강한 자는 병자 앞에 죄인이고 산 자는
죽은 자 앞에 죄인이야."
"알아요."
그를 그토록 성나게 하는 것이 무언지 잘
모르겠으면서 순하게 진주는 대답했다.
기는 그을음과 음식 넘긴 자국이
지저분한 알미늄 커피 주전자에 두 컵의
쌀을 얹었다.
"여기다 밥하면 물을 많이 부어도 밥물이
주둥이란 뚜껑구멍으로 적당히 빠져 나가서
밥이 잘 돼요. 학교 다니면서 하숙 할 때
기의 단칸 방은 한 눈에도 여러 기능을
발휘하도록 보이지 않는 선으로 적당히
나누어져 있었다. 왼쪽 벽은 작업장으로
커다란 책상과 램프가 있고 칼이니 붓
공예도구를 담은 통이 있었다. 책상 밑에는
프라스틱, 나무토막, 실 같은 것을 담은
나무상자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냉장고가
세워져 있는 스토브 옆으로 두 사람이 앉게
된 네모난 식탁이 있고 다른 쪽 벽에는
튼튼한 생나무로 짠 큰 침대가 떡 버티고
있었다. 구겨진 시트와 담요가 보였다.
진주는 그 침대 때문에 방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쉐이드를 조금 올린 창으로 보이는 건너편
길모퉁이에 한 청년이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탤리 레스토랑
식탁 위에는 개봉된 편지들이 신문지,
담배, 재털이 등과 함께 어질러져 있었다.
기는 파를 썰며,
"밥 먹고 왔다지만 진주도 좀 먹어요.
여자가 먹을 음식을 요리하는 게 좋거든.
아니면 여자가 나 때문에 요리하는 걸
보던가. 혼자 먹는 게 싫어.
마스터베이트하는 것도 싫고."
어마, 저이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눈도 돌리지 않고 기는 썩둑썩둑 썰은
파를 고기와 함께 후라이판에 볶았다. 지직
기름타는 소리가 났다. 그릇이나 스토브
주위는 지저분했지만 기의 칼 쥐는 솜씨는
능숙했다.
"진주, 당신 남편에게서는 무슨 소식이
있는가?"
소식 전하나요?"
"그 친구는 지금 굉장히 아프다고 해.
벌써 몇 년째. 진주, 이봐."
갑자기 팔 하나 거리 앞까지 기가
다가왔다.
"윤마가 말이야. 아까 봤던 여자 있지?
쇼핑백 든 여자. 그 여자 남편보다 더
심하게 아프다고 해."
그들은 붉은 포도주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반찬은 김치과 고기
볶음뿐이었으나 진주에게는 놀랍도록 맛이
있었다.
기와 함께 있으면 진주는 자기 자신이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언제나
진주 자신이 비밀스러이 희망했던 그런
사람으로 진주를 만드는 기는 그러니까
하기가 쉬웠다. 그는 진주의 말은 무슨
말이든 금방 다 알아 들었으며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는 진주의 외로움과 꿈과
절망을 알아보았다. 기가 옆에 있으면
복잡다단한 이 세상은 진주에게 갑자기
단순해지고 아름다와졌다. 그는 숲이니,
꽃, 나무, 냇물, 하늘, 햇볕, 구름, 비,
바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즐기고 진주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들은 침묵 속에 차를 마셨지만 방
안에는 친밀한 따뜻함이 있었다. 진주는
찻잔을 차접시에 놓고 행복과 찬미의
눈길로 기를 바라보았다. 기가 문득,
"당신 첫인상이 아주 시원했어. 뭐라던가
저 닥터 송 와이프도 당신 인상이 좋다고
했지."
"그렇지만도 않아요. 당신 인상이 꽃
같아서 내가 당신 이름을 꽃이라고
기억했던가봐."
"내 한 가지 더 말할까. 처음 만난 순간
말이요. 난 당신이 내 타입의 여자라고
알았어요."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소리를
내며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가 일어나 스테레오에 레코드를 한 장
얹었다. 느린 트럼펫이 정감 있는 선율로
흘렀다. 기가 진주에게로 와서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들은 꼭 껴안고 춤을 추었다.
"모험을 안 하면 잃을 것도 없다. 이런
모토에서 벗어나 상처받아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을 열어 봐. 진주 당신은 좋은 게
많은데 전부 묻혀 있어."
매혹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 애쓰며
진주는 물었다.
"아마 그럴 꺼야,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혼수상태로 들어갔다고 해."
의견차는 많아지고 오가는 말은
사나와지고 침묵은 길어진 윤마와 결혼생활
칠 년째 되는 어느 날, 기는 집으로
들어가서 부엌에 있는 윤마에게 말하였다.
"저녁 짓느라 수고하지 마시오. 나는
떠날거요."
조그만 가방 하나 들고 목욕이라도 가듯
집을 나온 기는 그 길로 윤마의 친한
친구와 시골로 사랑의 도피행을 떠났다.
자기의 친구와 기가 떠난 것을 알고 윤마는
에고의 이중으로 타격을 받았다. 윤마가
병이 난 것은 그 이후 일이었다.
윤마의 친구라는 나중 여자에게 걷잡을
도리 없는 질투를 느꼈다. 그 여자에게도
기는 당신은 내 타입의 여자라고
말하였을까. 기의 앞을 꾸러미에 꿰듯
지나가는 여자들의 열 속에 자기는 줄을
서지 말아야겠다고 진주는 느슨해졌던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하면
할수록 진주는 기에게 깊이 빠져 들어가고
기의 주위 모든 것에 질투를 느꼈다. 기는
진주의 뼈에 와 부딪는 듯 했다. 밤이면
베갯머리에 조그맣게 음악을 틀어 놓고
누워 진주는 기를 생각하였다. 기가 혼자
여행을 떠나면 진주는 안정을 잃고 밤의
반은 가슴이 아파 베개를 가슴에 대고
엎드려 있고 새벽의 반은 잠을 잤다.
속은 구름이 낀 것 같았다.
미스 오는 일부러 직장까지 진주를
찾아와 기를 심각히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사실을 말하면 한 때 나는 기씨하고
부부같이 지냈었어. 기씨는 요즘도
서울에서 온 사람들에게 첫부인과 두 번째
여자 얘기를 묻고 다녀. 왜 그러겠니? 그
여자들이 그저 행복을 찾았으면 해서
그러는 거다. 첫부인은 식물 인간이고 또
한 여자는 정신병원에 있단다. 그 두
여자가 그의 마음을 잡고 있어. 자기가
살인자같이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고 했어.
너는 정섭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게 좋아.
진주야 어찌된 게 나는 언제나 가능성이
없는 남자에게 끌린다. 결혼한 남자,
고립된 남자."
미스 오는 곱게 한 화장이 얼룩이 지도록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말이에요, 기씨하고는 이상하게
운명적인 그런 느낌이 들어. 기씨도 나를
자기 타입이라고 그랬어요."
"기씨가 진주를 좋아하는 건(미스 오는
적당한 말을 찾다가) 아마 진주가 미인이기
때문일거야. 기씨가 좋아하는 타입의
미인."
진주는 거울을 들여다 보며 미스 오의
말을 생각했다. 지금의 모습은 잠시이고
꽃잎지듯 기운이 없이 시들고 기가
돌아보지 않을 날을 두렵게 생각했다. 오
년이면 늙을 거야. 서른 셋이 될테니까.
그리고 그는 바람둥이가 아닌가, 미스
미워지겠지만, 진주는 지금 현재도 자기가
기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매력
있는 여자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매력 있는 여자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분간은 그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만간 껍질은 벗겨질 것이고,
속을 보게 되면 기는 실망하고 떠나가리라.
나중에 버림을 받느니 지금 그를 떠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 결혼에 진주는
도달했다. 기에게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편지를 보내고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듯
마음이 안 잡혀 멍하니 앉아 있는 진주에게
기는 전화하였다. 내가 바로 앞에 와
있어요. 현관까지 좀 내려와 봐요.
편지가 하루만에 들어갔을까 생각하며
정다운 기의 모습이 길 건너편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진주의 아파트쪽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차 한 대 오가지 않는 길에
신호등이 그 빛깔을 바꾸었다.
"누가 왔니?"
텔레비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모친이 물었다.
"응."
"또 그 늙은 녀석이냐? 안 만나겠다고
하더니."
진주는 대답 않고 스웨터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는 현관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린 남자 같았다. 기는
걸어나오는 진주에게 다가와 진주의 가는
팔을 아프게 잡아 쥐었다.
"그래 도망간 남편이라도 들어왔단
"아니요."
"이봐 진주, 그럼 이게 뭐야?"
기는 진주의 편지를 포켓에서 꺼내어
놀리듯 진주 눈 앞에 흔들어 보였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뭐야?"
코 앞에서 달랑거리는 자기의 편지를
수치감으로 얼굴을 붉히며 진주는
잡아채었다.
"편지에 쓴대로예요."
"읽어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던데."
"기씨 생활과 나는 맞지가 않아요. 너무
힘들고 감당할 수가 없어요."
"뭘 감당 못하겠단 말이야."
"나는 말이에요. 지속적이고 안정된 게
좋아요. 기씨는 기분 내키는대로 하지만
나는 뭐든지 중대해요."
지나갔다.
"너같이 좋은 애가 또 어디 있니."
혼잣말 같은 그 말에 진주는 무엇 때문에
기와 다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잊어
버렸다. 훨씬 풀죽은 목소리로 진주는
말했다.
"그러니 이제 공연히 전화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게 서로 편해요."
"절대로 안 될 걸, 진주. 평생 안 놓아
줄 걸."
부지중 말한 기도 그 말을 들은 진주도
두 사람 다 쇼크 속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위에 무거운 정적이 왔다.
유월에 진주는 기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에 수정 같은 고드름을 달았던
기와 진주는 서로의 생활을 전혀 간섭
않고 자기의 인생은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
그런 생활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기는
다시는 이런 가까운 인간관계는 안 맺으려
했지만 진주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겠고
그래서 함께 지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하였다. 아파트 세도 반씩 내고 전기세,
전화 값도 반씩, 식료품도 같이 사기로
하였다. 기가 제의하고 진주는 알아들으려
애썼다.
모친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같이 있기
힘든 사람이나 환경을 개선하던가 혹은
적용할 도리가 없으면 빠져 나오도록
하시오. 그런 성가신 것들에 빼앗기긴
인생은 너무 짧아. 기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모친이 기와 함께 살 수만 없는 것이므로
보았다. 엄마, 나는 엄마의 전인생이 될 수
없어. 엄마 혼자 힘으로 서서 어떠게든
행복해 보세요.
모친은 몸을 떨며 울었다. 내 너를
자식이라 생각 않겠다. 그저 이 세상 어디
살고 있겠거니 하고 있겠다, 어쩌면 나는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어 버리겠다, 내
속에서 난 딸이 어쩌면 이럴 수 있는지.
모친은 떠나고 모친의 웃는 얼굴, 흰 발
같은 것이 떠오르면 진주는 괴로왔다.
그러한 진주의 귀에 기는 속삭였다. 진주,
당신 생의 한 계단이 지난 거요. 끝난
거요. 그 다음은 무엇인가? 당신은 살아
있어요. 당신은 혼자요. 알에서 깨듯
혼자요.
두 사람은 밤바다에 나가 수평선 저쪽
들었다. 보도워크에는 전등이 휘황하고
밤바람 쏘이러 나온 사람들 속에 두 사람은
말없이 누워 무한히 어두운 하늘에
환상같이 흔들리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숲으로 소풍도 나가고 영화도 보러
가고 멀리까지 굴요리를 사 먹으러도
다녔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밤늦도록
놀기도 하였다.
진주가 살러 왔을 때 기는 진주의
가구들을 창고에 두라고 말하였다.
남보기는 우스울지 몰라도 적어도 이 방에
내 마음에 안 드는 물건은 하나도 없어요.
가구가 달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진주이므로 책과 레코드와 옷가지, 그릇
외에 옮겨 올 가구도 없었지만 그의 생활의
독립성을 진주는 단단히 확인하였다.
사는 것 같지만 진주 자신은 손님 같았다.
진주는 끊임없는 기의 기분을 살피고 기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되려고 애썼다.
기는 냉장고 옆에 작은 칠판을 하나 사서
걸어 놓았다. 누가 쓰레기를 버리고 누가
접시를 씻고 장을 보는가, 퇴근길에 누가
얼마만큼 식료품이나 가사용품을 샀는가.
약속대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등한하지 않은가 해서 신경을 쓰는 그런
일이 진주에게는 점점 부담감으로 왔다.
무슨 일이든 반씩의 분량을 재기란
어려웠다. 칠판에 딸기 98전, 밀크 49전,
고기 2불 90전 비누 1불 8전하고 적어 넣을
때면, 얼마나 이같이 살아야 할까 진주는
생각했다.
기가 혼자 여행을 떠나 버리든가 외박을
먹었다. 그럴 때 진주는 재미있게 사는 듯
보이는 기를 질투하며 자신을 무시당하고
매력 없고 찌꺼기인 듯 느꼈다.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 아니고 기 또한 물론
자기 것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이와 같이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최악의
모습으로 굴러 떨어지다가도 기가 다정히
해주고 보석이 가득 들은 광맥 같은
여자라고 진주를 칭찬해 줄 때 진주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일도 보석이 가득 들은 광맥 같은 여자로
기에게 보일지 자신이 없었다. 가끔씩
그들은 다투기도 하였다. 진주는 늘 너무
참고 있었기 때문에 창문을 닫자는 말도
입으로 나올 때는 이미 절망적인 어조였다.
폭풍처럼 밖으로 나가 버리곤 하였다.
기가 없으면 낮은 길고 저녁은 쓸쓸하고
밤은 공허했다. 그래서 진주는 창을 열고
거리의 악사라던가, 무용수, 가수들이
보도에서 공연하는 것을 무료히 내려다
보았다.
"여자들이 아내나 어머니로만 살고
싶어하지 않듯 남자도 아버지나 남편으로만
살고 싶지가 않은 거요.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 외로운 두 인간이 서로를
방해하며 사는 인생방법이 싫어."
기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진주는 기와
결혼하고 싶었다.
"미스 오, 벌써 이렇게 사는 것도 일
년이 넘었어요. 지금 상태라면 기씨하고는
그저 같은 상자 속에 속해 있다는
가족이란 것을 짐으로밖에 안 느껴요.
기씨는 나보고 애인도 만들고 재미있게
지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나마저 충실치 않으면 우리 사이에 뭐가
남겠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기씨도
뭐 대단히 즐겁게만 사는 게 아니지요.
우선 직장 일이 고되고 집에 오면 다음
날을 위해서 자기 바쁘지요. 나는 언제나
가정 안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결혼이
주는 한계가 좋아요. 뭐는 해야 되고 뭐는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
싸움하고 짐을 나간 경우 기는 며칠이
지나서 진주가 새로 힘을 모두어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마치 검사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돌아오고는 하였다. 진주가 웃는
얼굴로 맞으면 기는 저으기 안심스러운 듯
나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왕자님과
춤추며 발에서 피를 흘리는 인어공주를
생각했다. 바람이 안 불어도 숲의 나무들은
머리를 빗듯 낙엽을 털어내었다.
어느 날인가 진주는 램프를 거울 앞에
바싹 당겨 놓고 파란 화장 연필로 이마에
실핏줄을 그려 넣어 보았다. 이마를 거의
거울에 대다시피 하고 오랜 시간 걸려
섬세하게 진주는 그 일을 하였다. 에에,
송장 같애. 외출에서 돌아온 기가
말하였다. 진주는 욕실에 가서 세수하였다.
오정섭 씨에게.
보내 주신 편지 잘 받아 보고 스위스로
떠나는 날 케네디 공항에서 마지막 뵌 후로
이 년여의 세월이 흐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만나 뵐 날이 더욱 먼 것
같군요. 저는 떠나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
직장에 그냥 있고 생활도 여전합니다. 물론
아직 시집도 안 갔고요. 진주의 소식을
물으셨는데 진주는 그 주소에서 이사를
했어요. 편지가 도로 돌아간 것도
당연하지요. 진주는 이사를 했을 뿐 아니라
전과는 아주 다르게 살아요. 진주의 얘기를
알고 싶어하시니 말씀드리는 건데 진주는
지금 빌리지에서 기라고 하는 좀 별나고
커다란 목소리로 말 많이 하는 사람과 살고
있어요. 그 집에 가면 전부 기라는 이가
만든 물건들이고 그릇도 잔도 모두 기가
만든 거친 도자기지요. 거기 담아서 홍차와
꿀을 마셔요. 커피도 마시고.
우리 언젠가 바다에 조개 구워 먹으러
그리고 모래 위에 담요들을 펴 놓고
밤늦게까지 놀았어요. 맥주들을 마시고
분위기가 아주 풀리고 재미있었는데 같이
갔던 사람 중 하나가 진주에게 달려들어
입맞췄어요. 진주가 당황하니까 기씨가
누워 올려다 보고 웃으며 당신 에고에 좋은
일이야 하고 말했어요. 그때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고 말았지요. 그날은 누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해도 웃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입맞춘 사람이 나중에 보니까
진주가 바다를 보고 앉아 몰래 울더래요.
그 사람은 지금 진주한테 반했다고 그러고
돌아다녀요.
그 기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주위에
특별히 영향을 주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에요. 엉터리같이 보일 때도 있지만
말을 잘 따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진주를 대하는 태도에는 특별한 것이
있어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진주가 참
좋은 여자라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나는 기는 여자를 만드는
남자인가 생각해 보지요.
전에 우리가 조그만 방에서 살 때,
천장의 석회가 막 떨어져 내리고 쥐가
다니던 그곳에서 살 때 진주가 저녁 해
놓고 부르던 일이며(국 한 가지 밥 한
가지의 저녁), 정섭 씨가 내방 스토브
고쳐주던 일이며 또 우리 두 사람의 성씨가
같아 불과 몇 달 차이밖에 안 나지만 내가
정섭씨를 오빠라 부르고 진주를 올케라
하던 일들이 아주 옛날 같군요. 혹시
뉴욕에 들리실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문간에 인기척이 있어 몸을 돌려 무심히
내다보던 진주는 거기에 정섭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래었다. 미스 오로부터
정섭에게서 편지가 왔더라는 것과, 그
편지에 의하면 정섭이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어 귀국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지만 정섭이 이같이
홀연히 자기 집 문지방에서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였었다.
"어머."
우선 진주는 부르짖었다. 그때 진주는
영화 장면처럼 쎈시한 잠옷차림이 아니고
낡은 반바지와 티셔츠에 비눗물을 튀기며
욕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스 오한테서 대강 들었어."
돌아보았다. 레코드와 책이 나무 궤짝에
담겨 있고 튼튼해 보이는 생나무 의자 위에
거친 천으로 만든 쿠션들이 놓여 있었다.
좋은지 나쁜지 우선 사는 사람의 개성이
첫눈에는 두드러져 보였다.
"기라는 분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정섭은 쳐들어오듯 갑자기 온 것을
사과하고 싶은 듯했다.
"그 사람은 남 노는 날도 일해요. 가게에
나가거든요. 남들 일할 때 놀기도 하고."
진주가 권하는 의자에 정섭은 앉았다.
"요새도 그냥 직장에 나가나?"
"네, 그동안 조금 승진도 했어요. 한 달
됐나. 그동안 결혼했어요?"
"아니."
잠시 쉬었다가 솔직한 어조로,
"색시도 안 보고?"
"봤어. 스위스에 그 아버지와 여행했던
여자인데....."
"아유, 세상 구경 막 다니고 양갓집
규수인가봐. 그렇지요?"
진주는 정섭을 놀렸다. 지금만큼 정신을
차리고 살았더라면 정섭과도 잘 되었지
않았을까, 진주는 생각했다. 그것이
유감스러웠다. 진주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들은 거리로 나갔다. 현관문을 잠그기전
스토브 개스를 다시 한번 살피는 것을 보고
정섭은 웃었다. "여전하군." 도시 전체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밤안개 속에 가로등이
빛났다. 여늬 날과 다름없이 노천 까페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린 뉴욕에 살면서도 한 번도 이런데
"마음이 바빴지요."
--그리고 조그만 여유가 생겼을 즈음에는
우린 서로 미워했지요.
"어머니는 천안 계시다지?"
"네."
"건강하시대?"
"잘 몰라요."
"미스 오와는 여전히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더군. 어제 저녁에 미스 오 만났어."
"전처럼 서로 화낼 일도 생기고 그러지만
그래도 제일 가까와요. 이젠 정말 친해진
것 같아요. 내가 그 약혼했다는 분한테
선물 하나 사도 괜찮아요?"
'온 세계의 장신구'라고 간판을 걸은
상점으로 진주는 정섭을 끌고 들어갔다.
보지도 못한 정섭의 색시를 위해 조그만
중국의 본마누라라도 된 기분이었다.
정섭이 지하철 층계를 내려가다가 높이 서
있는 진주에게 오빠같이 혹은 아저씨같이
문득 두어 번 손을 흔들었다.
[4]
그 겨울은 춥기도 했지만 눈이 많았다.
한 번의 눈보라 강타로 마비 되었던 도시의
교통이 뚫리기 시작한 즈음 관상대는 다시
제 이의 눈보라를 예보하였다. 길 옆에는
아직도 눈이 산적해 있는데 그 눈더미 위에
다시 몇 십 인치의 눈이 강풍에 실려
들이치리라는 것이었다.
잘 닫히지 않아 잠기지 않은 문 안에서
간지르듯 킥킥킥 웃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연 진주는 삼십 중반으로 보이는 성숙하게
아름다운 동양 여자를 보았다. 굽실거리는
삼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고 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여자의 긴 장화를 벗겨 주고 있는
참이었다. 기가 잠깐 그 무릎 안쪽을
쓰다듬는 것을 진주는 보았다. 낯선 여자는
진주를 보고 다리를 모두고 앉았다. 기는
당황한 듯,
"진주, 집에 있었군. 필라델피아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눈이 온대요. 지금도 오지만."
진주는 식탁 위에 세탁물 바구니를 올려
놓았다.
여자가 진주에게 인사했다. 양심을
지키고 사회적인 관습에는 타부 사항이
별로 없어 보이는 정직하고 활달한 태도가
있었다.
"중국 여자야, 박물관에서 만났어."
기가 말했다.
"진주, 여기 같이 앉지."
기가 찬장에서 유리잔을 꺼내어 물에
씻었다. 한 마디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진주는 식탁 의자에 앉아 깨끗이 빨린
세탁물을 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리 오세요. 같이 마셔요. 내 이름은
아이린."
중국 여자가 친밀히 웃으며 말했다.
여자는 마흔 여섯 살의 기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이제까지 진주에게 막강한
없이 허송하는 한갖 신경질적인 자유
주의자로 보였다.
"진주, 이봐. 이리 오라잖아."
마침 기의 런닝셔츠를 개키던 진주는
그것을 그대로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런닝셔츠 한 자락이 대나무로 짠
쓰레기통 변두리에 걸리며 쓰레기통이
넘어졌다.
"셋이 같이 주지육림의 향연이라도
벌이자고요?"
고개도 들지 않고 진주는 이사이로
뱉았다. 뜻밖에 그만한 소리라도 내어
체면을 세워 준 자기의 목청에 대해 진주는
감사하고 싶었다. 그에 힘입어 진주는
앉았던 식탁 의자에서 몸만 돌려 아이린을
보았다.
노세요. 이 방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영어로 지껄이고 어쩌려고 그러는 가운데
자신도 놀랄 충동으로 진주는 이번에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에요 나를 없다고 생각하세요.
공기같이 그렇게. 그냥 공기라고만
생각하세요."
이번에 진주는 두 팔을 벌려 보았다.
"보세요. 나는 정말 해롭지 않아요.
공기예요."
말을 마치고 앉는다는 것이 의자 자리를
잘못 겨냥하여 진주는 그만 바닥으로 나가
동그라졌다. 엉덩이와 허리가 눈물이 콕
솟게 아팠으나 눈에 고이는 뜨거운 눈물은
반드시 아픔 때문만 아니라는 것이 진주는
"아유 오라잇?"
아이린이 한 발은 신을 신고 한 발은
스타킹뿐인 다리로 절뚝거리며 진주에게
왔다.
"네, 괜찮아요."
아픈 허리에 힘을 주고 의자 다리를
붙잡고 진주는 일어났다.
"재밌게 지내세요. 제발 간청이에요."
힘껏 웃어 보이고 절둑거려지는 자기의
걸음을 저주하며 진주는 그 방을 나왔다.
진주는 전등빛이 어둠침침한 층계를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간신히 걸어 내려갔다.
---기는 시종 가만 있었다. 그는 골이
났을까.
일기예보대로 과연 심상치 않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센 바람에 실려 과자만큼씩
진주는 휘익휘익 휘파람을 두어 본 불었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겨 늘 눈물을 보이던
모친이 진주는 싫었다.
현관 입구에 진주는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는데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손님을 끌고 들어올 수 있을까.
내가 어디 간 줄 알았다 하더라도 나중
이렇게 된 경우에는 기는 그 여자를 끌고
모텔이라든가 호델로 갔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공원이라던가 숲으로, 눈이 오면
어때, 얼음덩이라도 녹일 만큼
부풀었을텐데, 하여튼 방에서는 나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의 사이사이에 기의 손이
여자의 다리를 더듬어 올라가는 상상을
하고 진주는 아픈 신음소리를 내었다.
지금이라도 쳐 올라가서 내 권리를
강조하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성숙한 인간으로 기의 생활과 엉키지 않게
나는 내 즐거움, 내 자유를 찾아 내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그래도 같이 세를 내고
있는 방인데 역시 그 방을 그렇게
뚜장이처럼 선뜻 비워 준 것은 잘못된 것
같았다.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진주는 다시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걸음걸이가 훨씬 자유로와졌으나 진주는
혼란된 생각을 수습하기 위하여 천천히
층계를 한 계단씩 올라갔다.
이 눈 오는 밤에 어디선가 파티라도 하는
듯 왁자지껄 웃는 소리, 전축 소리가 크게
울려 왔다. 삼층을 다 올라가도록 생각의
갈피가 잘 안 잡혀져서 진주는 복도벽에
등을 붙이고 한동안 서 있었다. 설령 내가
끌어들인 것은 용서할 수가 없어. 내가
없더라도 그 침대의 반은 엄연히 내
것이고---. 바로 앞에 방에서 크윽 재채기
소리가 들려 나쁜 짓을 하던 아이처럼 놀라
벽에 붙었던 등을 떼었다. 소리가 난 곳은
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저 죄의식에
사로잡힌 여인이 방문하는 방이었다. 지금
진주가 서 있는 곳 쯤에서 기는 발을 탕
구르며 죽어 버려, 내뱉곤 하였었다.
진주는 짙은 녹색의 그 도어를 가만히
밀어 보았다. 문은 잠기지 않아서 그대로
열렸다. 방문하는 여인도 열쇠를 쓰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던 것을 진주는
보았다.
어둠침침한 방안 침대 위에 고목같이
마른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음 재채기를
무릎을 짚고 있었다. 가구도 별로 없는
방에 신문지며, 빈 깡통, 옷, 식품봉투,
비닐봉투 같은 것들이 되는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조명은 침대 머리에 있는 독서용
작은 램프 하나뿐이었다.
진주가 살며시 문을 도로 닫고 돌아서려
할 때 방 안의 노인이 고개를 휙 돌렸다.
주름진 백발의 얼굴에 두 눈이 크게 뜨이고
입술이 조금 열려 달싹거렸다. 이 사람이
나를 무서워하는구나. 미안해서 그럼 안
되지. 진주는 거진 닫았던 문을 열고 한 발
방문턱을 넘어 들어섰다.
"나는 해롭지 않은 사람이에요.
공기같이."
이십 구 년 동안 자신을 기체와 같다고
생각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건만 이 밤
"당신 와이프는 잘 알아요. 여기
방문하는 여자. 나는 당신도 두 어 번 본
일이 있어요. 복도 끝에 나와 창 밖 바람
쏘이는 것을 봤어요. 나는 요 위층에
살아요."
손가락 한 개를 펴서 진주는 천정을
똑바로 가르켜 보였다. 진주는 자신의 짓이
미치광이처럼 느껴졌지만 그냥 나오기도
어색하여,
"뭐 도와드리고 싶어요."
노인은 한 차례 기침을 하더니 진주에게
보냈던 시선을 자신의 앙상한 무르팍으로
떨어뜨렸다.
"아무 일도 없으세요? 그럼 전 가요.
빠이빠이."
손바닥을 보이게 흔들고 진주는
"더운 차 좀 만들어 주겠소?"
노인은 처음으로 우물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진주는 귀를 의심하며 발걸음을
멈칫하였다. 유리 같은 노인의 눈에 한
줄기 교활한 빛이 반짝 떠올랐다 사라졌다.
"커피로요?"
"아니, 홍차. 거기 그릇장 안 어디 있을
거요."
스토브는 지저분했다. 물소리에 커다란
바퀴벌레가 열 마리쯤 재빨리 흩어져
달아났다.
"당신 결혼했소?"
노인이 물었다.
"네."
"아이도 있소?"
바람이 창을 드르릉 흔들고 지나갔다.
진주는 창가로 가서 낡고 찌든 두터운
커텐을 걷어 보였다. 방 안의 모습이 깊은
거울로 비치는 유리창 어두운 밖에 눈이
빠르게 흐르듯 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다시
기침을 했다. 진주가 커텐을 놓고 스토브
앞으로 돌아가자 방 안은 도로 고인
웅덩이같이 되었다.
"설탕을 몇 넣을까요?"
스토브 주변에 어지럽게 놓여진 조미료며
그릇들 속에서 진주는 설탕그릇을 찾아내어
커피 테이블에 갖다 놓았다. 찻잔과 수저는
더운 물에 오래도록 씻었다.
두 잔의 홍차를 만들어 램프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셨다. 사나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진주는 지금 방안에 있는 기와
여자를 괴롭게 떠올렸다.
식료품도 다 떨어지고 냉장고 안에 배가
하나 있을 거요. 그거 먹어요."
"괜찮아요."
이 방을 기와 여자 앞에 또 내가 공기
같은 인간이라고 선언하고 버티고 앉아야
할까 아니면 나의 시간을 이 방에서 이
사람과 어줍잖게 보내어 기 앞에 그와
무관한 나의 인생으로 내세울까.
"당신 와이프 자주 봤어요. 한 번은
우리집에 성냥 빌리러도 왔어요."
"아, 저 스토브 때문이지. 어떤 땐
성냥을 그어야 돼. 낡아서 가스 구멍이 다
맥힌 모양이야. 동양 여자들은 친절하지.
당신 어느 나라에서 왔소?"
왁자지껄 떠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층계를 올라와 방 앞을 지나갔다.
진주는 다시 물을 덥혀 차를 만들었다.
"캐시는 내가 뭘 요구하면 화를 내요.
다음 잼을 살 때는 마말레이드로 하지 말고
포도로 해 달라고 해도 화를 내요."
죽어버려, 기는 저 사람에게 말했었지.
진주에게 비로소 노인에 대한 부드러운
감정이 솟았다.
"남편은(남편이 아닌 기는 그러면
친구인가? 적수인가? 아니면 원수인가?)
당신 와이프 얘기를 많이 해요. 당신
시장을 봐 오고 목욕을 시키고....."
"캐시 그년이 제 입으로 말했겠지."
노인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인간을 돌봐
주는 자기는 얼마나 고매한 인간인가
하고."
우울하고 말이 없던 것을 생각했다.
성냥을 빌리러 와서도 웃지 않았다.
"그래, 그 고매한 희생 정신의 인간이
어째서 마말레이드 말고 포도젤리를 사
달라면 화를 낸단 말이요? 자기가 해 주는
것은 신이 주는 것으로 알고 고맙게 받고만
앉았어라 이런 태도란 말이요."
다 마신 찻잔을 씻어 엎어 놓고 진주는
어질러진 신문을 대강 개어 놓았다.
"당신은 정말 착한 여자요."
---그렇지 못해요. 의무가 아니니까 착한
짓 할 수 있어요.
진주는 TV를 틀었다. 영상이 제대로 안
잡히는 흑백 TV는 일기예보를 하고 있었다.
알라바마 근처에서 생긴 폭풍은 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적어도
이 겨울, 눈 때문에 도시는 수백만 불을
이미 지불하였다. 밤이 지나기도 전에 벌써
도시의 교통은 마비되고 시내의 호텔은
만원이고 식당과 바는 큰 혼잡을 이루었다.
이번가(二番街)에서 누가 스키이를 타고
있다고 아나운서가 말했다.
"이렇다면 내일 캐시가 못 오겠는데."
노인은 가식 없는 초조함을 보였다.
"염려 마세요. 집에 사다 놓은 식품 좀
드릴께요."
그러나 노인의 관심은 단지 식료품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진주의 말을 듣고도
얼굴을 펴지 않았다. 또한 진주 자신도 눈
때문에 모든 교통이 두절되듯 이 방에 꽉
갇혀 다시 자기 집의 냉장고를 여는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코리안이겠지."
"네, 아이들이 있으세요?"
"있지, 아들 둘이. 다 커서 멀리서들
살고 있지. 이봐요 아가씨, 저쪽 벽에 붙여
놓은 종이가 보이는가? 스위치를 올리고 좀
읽어보아."
그의 말대로 진주는 스위치를 올리고
벽에 가 보았다. 거기에는 네모난 종이가
붙어 있었다. 푸른 잉크로 프린트된 그
글씨를 진주는 읽어 보았다.
로빈새의 생활
아빠 로빈과 엄마 로빈이 사과나무
가지에 둥우리를 만든다. 아빠 로빈이 풀을
가지고 오면 엄마 로빈이 튼튼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로 엮는다. 보금자리가 지어지면
푸른 빛이 섞인 알들은 대단히 예쁘다.
엄마 로빈은 자기 몸으로 알을 따뜻이
지킨다. 엄마 로빈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아빠 로빈은 먹이를 가져 온다.
새끼 로빈이 알로부터 나오면 엄마
로빈은 부지런히 먹이를 갖다준다. 새끼
로빈은 언제나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로빈
새끼들이 튼튼해지면 엄마 로빈은 그들에게
나르는 법을 가르친다. 때로 엄마 로빈은
새끼를 둥우리로부터 밀어내어 나르도록
한다. 새끼 로빈은 일단 날게 되면
둥우리를 떠나 돌아오지 않고 아주 훨훨
날아가 버린다.
"다 읽었어요."
진주는 뒤돌아섰다. 노인은 무표정히
"로빈새의 얘기지요?"
"어디까지 읽었소?"
진주는 프린트된 글씨의 마지막 부분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었다. 새끼 로빈은
일단 날게 되면 둥우리를 떠나 돌아오지
않고 아주 훨훨 날아가 버린다.
"아, 그것 말고 그 밑에 뭐라고 연필로
쓴 것이 보이지 않소?"
가까이 눈을 대고 진주는 들여다 보았다.
남의 집 가족 사진을 볼때처럼 지루하였다.
이거 보세요. 난 지금 이런 거 들여다보고
당신하고 얘기하고 그럴 여유가 없어요.
"거기 연필로 뭐라고 쓴 거 안 보여?"
"네. 있는 것 같애요."
"그게 내 작은 아들이 생물시간에 배운
교재요. 국민학교 이 학년인가 삼
뭐라고 썼는지 아오? 슬프고 슬픈
스토리라고 적었어. 날게 되자마자 새끼
로빈이 둥우리를 아주 떠나는 것이
슬프다는 얘기지."
듣고 본즉 연필 흔적은 Sad, Sad Story
인 것 같았다.
"그랬던 죠지도 로빈새처럼 떠났지.
떠나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거든. 그도
지금은 벌써 외손자를 보았어. 요새
아이들은 빨라. 그 딸이 열 네 살인데
아이를 낳았어요."
노인의 기분을 살펴서 진주는 프린트물을
좀더 들여다 보는 체하다가 전등을 껐다.
다시 침침한 방이 되었다.
"굉장한 폭풍이군. 망할 놈의 세상, 전부
눈구덩이에 묻혀라."
했다.
"묻힐 거예요. 일기예보가 그래요."
"아무리 심한 폭풍도 이틀을 가는 법이
없어. 알겠소?"
진주는 누우려는 노인을 부축하여
주었다. 오줌이 찌든 습한 체취가 진주의
코에 닿았다.
"멸 살이세요?"
"예순 둘이요."
"내 어머니와 같은 나이에요."
노인은 곧 잠이 들고 진주는 남의 방,
별로 편안치도 않은 의자에 둥그랗게 올라
앉아 있었다. 이까짓 세상 눈이 펑펑
퍼붓고 또 퍼부어 종말이나 오라. 진주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 구멍이 아닌
다른 구멍에 박혀 다른 짓들을 하고 있는
나는 윤마나 정신병원에 있다는 그
뒷여자처럼 결코 되지 않으리라. 진주는
몰래 눈물을 씻었다. 미스 오처럼 울지
않으리라. 기가 내 앞에서 기는 날이 있게
하리라.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날이
있게 하리라. 질투로 온 몸이 초록색이
되는 날이 있게 하리라. 어떻게? 그건
생각해 봐야지. 차차 잘 생각해 봐야지.
하여튼 내 꼭 그런 날을 보고 말리라.
정섭이 떠날 때 천지가 없어지는 줄 알고
길거리를 울며 다녔던 내가 드디어 정섭
앞에 웃으며 설 수 있었듯 그렇게 기와
대적할 힘을 기르리라.
세벽 네 시에 진주는 노인의 방을 나와
층계를 올라갔다. 전등이 호젓한 층계
그도 또한 지옥을 지나온 듯 핼쓱하고
창백한 쌍통을 하고 있었다. 주위는 죽은
듯 고요하였다. 기는 진주를 보고 펄쩍
뛰듯 일어났다.
"어디 갔었어?"
아무 대답 없이 진주는 현관문을 열었다.
기는 바싹 진주 뒤를 따라 들어왔다.
"눈보라가 심한데 어딜 갔었어? 코트도
없이. 나는 어디가서 영 죽어버린 줄
알았지."
"내가 갈 데가 없을 줄 알구?"
진주는 비뚤어진 웃음을 띠웠다. 여자가
있을 때 꺼내었던 컵들도 다 치워주고
진주가 만지던 빨래도 안 보이고 방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진주, 지금은 지하철도 기차도 막히고
죽을뻔 했어. 내가 너를 학대하는가.
아이린이 나를 그렇게 비난했어. 화를 내고
가 버렸어. 우리는 둘이 행복하지 않았어?
진주 그렇지?"
기는 진주를 껴안았다. 진주는 기의 품에
안기며 왕자님과 춤추며 발에서 피 흘리는
인어 공주를 또 생각했다.
"아, 진주 정말 걱정했어. 윤마와
경애처럼 나는 또 너마저 어떻게 되는가
했지. 내가 주변을 망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되는가 했지."
어둠에 눈이 익자 방 안은 이상한
밝음으로 차 있었다. 쉐이드를 올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빛의 하늘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환상의 세계로 세상을
이끌고 가는 듯했다.
너는 행복하라. 기쁜 생활을 이루라."
폭풍은 이틀도 가지 않아요. 위잉위잉
회초리같이 우는 바람 속에 진주와 기를
싣고 방은 하나의 애드벌룬인 양, 손바닥에
받아보면 금방 녹아 버리는 한 송이 눈인양
공중에 떠 휘날렸다.
[5]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짐승의 털처럼
빽빽히 내려 박힌 계곡은 깊이 무겁게
밑으로 쑥 빠지듯 뻗어 내리고 그 밑바닥
숲 가운데에 작은 마을이 아스라히 내려다
보였다. 스카이라인 산정 이곳은
중세기의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날씨였다. 신랑 신부를
가운데로 하고 결혼식의 하객들은 부드럽게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따뜻한
햇살에 목욕을 하듯 전신을 맡기고 서
있었다.
그날 오전에 기와 진주는 시청에 가서
법적인 혼인신고를 한 후 미스 오, 닥터 송
가족 그리고 그외 여러 차에 분승한 열 명
가량의 하객들과 함께 베아마운틴 산정에
올랐다.
"독립된 정신만이 자유의 정신" 또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그 중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한다." 부르짖던 기는
이제 멍에 같은 신랑이 되어 검은 예복을
입고 구름을 등에 지고 웃었다. 산정의
진주가 머리에 꽂은 꽃 탓인지 자꾸 벌이
날아들었다. 그때마다 기나 하객들은
달려들어 벌을 쫓아 주었다.
"잘 됐어. 정말 잘 됐어. 결혼을 안 하고
살면 여자만 손해야."
말하는 미스 오에게 진주는 활짝 웃으며
"미스 오도 얼른 결혼하세요."
이 결혼으로 진주는 늘 자기가 손님 같던
것, 당장이라도 짐을 꾸릴 용의가 있다는
듯 방어적으로 되어 살던 것,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도 사랑할지 자신이 없던
것, 부엌에 걸린 칠판을 떼어 내는 것 그런
추운 세계로부터 창문에는 묵중한 커텐이
내려지고 현관문이 튼튼히 닫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진주에게 있어서 결혼은
인생의 성취로서 어린 시절처럼 가족으로
방법이었다.
"신랑이 자꾸 웃어 싸서 딸만 낳겠다."
주례를 맡은 닥터 송이 말했다.
"제기 악담하네."
"딸이 뭐 어쨌다고. 전 근대인
사고방식은 기씨답지 않아요."
미스 오의 말에 기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다가
"나는 말이오, 딸이고 아들이고 아이들
필요 없어요. 애들이란 일단 크면 부모를
좋아하지 않거던. 내 경우는 그랬어요.
어릴 때는 부모가 좋지만 일단 크면 안
그렇단 말이오."
"또 괴변 지껄여 대네."
닥터 송이 말하자
"나는 그런 큰 실망 얻고 싶지 않소. 날
돌리고 당신은 낡고 지루한 잔소리장이요.
다시보고 싶지 않소, 할 것 아닌가."
"에에 알았소 알았어. 당신 생각
알았으니, 그런 얘긴 신부와 의논해 할
일이고 이제 그만 식을 시작하지."
닥터 송이 부인에게서 흰장갑을 받아
들고 풀 위에 섰다. 길웅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접는 의자에 앉아 금방이라도
바람따라 떠날듯 한 모습으로 로만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숲 향기 머금은 바람이
음향을 싣고 흩어졌다.
그러자 알민트라는 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여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해 말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또 영원히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어
사라지게 할 때까지 함께 있으리라.
아 그대들은 함께 있으리라. 신의 말
없는 기억 속에서까지도
허나 그대들의 공존(公存)에는 거리를
두라. 천공(天空)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
말라
차라리 그대를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저희와 빵을 주되 어느 한편 빵만을
먹지는 말라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은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 줄처럼.
서로의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나무,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심각히 들리는 경상도 액센트로 서너
군데 더듬으며 닥터 송은 지브란의
예언자를 읽고 기는 진주의 손가락에
주었다. 진주의 이름과 같은 그 보석을 기
자신이 사서 손수 디자인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또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자신의 실제는 없어지고
진주는 기와 주위 여러 사람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매개물 같은 투명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햇볕의 미립자가
바람따라 흔들리는 첩첩 산 너머 너머
광활한 바다 저 건너 건너에서 이쪽 들녘을
바라보며 숨쉬고 있는 천안 모친의 심장
고동까지도 진주는 느꼈다. 엄마.
미움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 다시
만나요. 엄마 사랑해요.
오 분도 안 걸리는 예식이 끝난 후
일행은 또 여러 대의 차에 분승하여 바로
품속에 공원은 풍선같이 부풀어 보였다.
차뚜껑을 빛내며 파킹장에 빽빽이
딱정벌레같이 엎드린 차, 풀밭에서 딩구는
아이들, 로라스케이트장에서 흐르는 레코드
음악, 볼을 차는 사람, 호수에 떠 있는
보트.
결혼식에 참여했던 지루해진 아이들은
차가 서자 차에서 튕기듯 달려나가 푸른
물이 묻어 나는 잔디밭을 마구 굴렀다.
여러 대의 차에서 아이스박스가 내려지고
피크닉 테이블 위에 내프킨과 수저, 케익,
떡, 김밥, 각종 나물 같은 것들이 차려지고
남자들은 불고기를 구울 석탄불을 피웠다.
그 동안 진주는 휴게실로 가서 드레스를
벗고 기가 진주에게 제2의 피부같이 잘
맞는다고 말하는 진바지로 다시 옷을 갈아
"잡혔어, 딱 잡혀 버렸어. 색시 어디가
그리도 좋던가."
큰 소리로 들려 진주는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기와 주례를 보았던 닥터 송이 옷을 갈아
입고 나가자 사람들이 기를 놀리는
소리였다. 풀밭 위 식탁 위에 음식이 가득
차려지고 바베큐 고기는 연기를 내며 익고
사람들은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진주는 자신이 너무 행복한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웃고 즐거워하면
이날의 행운은 곧 떠나 버리고 어쩌다가
잡혔다고 후회하고 당황하며 다시 멀어지는
기, 다시 불확실한 주변들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다. 행복이라면 진주는 그것을
지탱할 힘이 없음을 느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확신이 없다는 것, 그것을 안다는
확신밖에 없었다. 자신의 인생은 가식과
방어로 일관해 온 것 같았다. 어른임이
분명한데도 언제나 모친을 의식하는
아이같이 느꼈다. 우울하고 실망하고
비참해 있으면 이 행복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쏘아보는 듯 한 눈을
하고 벗은 드레스는 마치 쓸모 없는
짚단이기나 한 듯 아무렇게나 옆에 끼고
진주는 일행에게로 걸어같다. 그런 진주를
향해 기가 사진기의 샤터를 연방 눌러
대었다.
"헤에 보소 보소, 그리도 신부가
고운가."
"신부는 무슨 신부, 구부요, 구부."
기가 카메라를 거두며 웃었다. 맥주로
백 명, 천 명의 딸이라도 낳을 듯 웃고
즐거워 하였다.
신선한 공기 탓인지 시장했던 탓인지
음식은 전부 맛이 있었다. 식탁에 앉은
때가 이미 오후 세 시나 되었기 때문에
먹는 사이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햇볕
가득 찼던 공원은 습기를 머금고 땅거미에
잠기었다.
미국식으로 신부한테 뽀뽀 좀 합시다.
농담 속에 손을 맞잡고 흔들고 등을
두들기고 축복하는 사이 아이스박스가 도로
여러 대의 차에 실리고 식탁 주변은 깨끗이
치워지고 결혼식의 하객들은 올 때와 같이
여러 대의 차에 분승하였다.
베아마운틴 산 전체가 자기 집이기나 한
듯 기와 진주는 파킹장 입구에 서서
꼬부라져 돌아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하였다. 그 많던 아이들과 어른들이
마음껏 뛰놀던 산은 이제 전설의 거인처럼
무겁게 침묵하기 시작했다.
기가 진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산 위로
덮이는 청회빛 하늘을 우러르며,
"아이 좋다, 그런데 진주 너는 그렇지
않아? 왜 말도 없고 웃지도 않아?"
후회 없는 얼굴로 기가 좋다고 하므로
진주는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우리 저기까지 경주, 하나 둘 셋."
힘이 남아 도는 듯 기가 먼저 셔츠에
바람을 넣으며 이제는 거의 빈 파킹장을
건너지를 때 진주도 땅거미를 힘껏 밟으며
그 뒤를 이어 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차에
올라 그곳으로부터 두어 시간 거리에 있는
항로를 출범하는 돛배인양 지도를 꺼내들고
산을 떠났다.
[6]
파, 다시마 넣고 무우국을 끓이고
은빛으로 번쩍이는 갈치는 소금을 뿌려
오븐에 굽는다. 직장에서 돌아온 진주는
옷도 갈아 입을 새 없이 에프론만 두르고
스토브 앞에서 움직였다. 일곱 시가 되어
별일 없다면 기는 두 블럭 떨어져 있는
가게로부터 돌아올 것이었다.
국과 밥이 끓는 동안 진주는 아침에 급히
나가느라 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살림이므로 그것은 바닥에 떨어진
타올이라던가 기의 속옷, 혹은 진주의 머리
부러시 같은 것을 바로 하는 정도였다.
기에게 맛있는 음식과 깨끗하고 안락한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진주는 새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가정주부들
모양으로 진주는 고단하다든가 바쁘다는
소리를 못 할 뿐 아니라 오늘은 빨래,
내일은 수퍼마켓하고 직장에서 돌아와 바삐
시간을 내는 눈치를 보이면 기는 성가신
표정으로 말하였다.
"진주, 좀 쉬어. 편안히 기대 앉아 사는
것 좀 즐겨요."
딩동 딩동.
벌써 퇴근일까, 벗던 스커트의 지퍼를
도로 올리며 진주는 문께로 걸어갔다.
"나예요. 아파트 2C"
진주는 문에 붙은 어안 렌즈로 밖을
내다보았다. 뜻밖에도 아래층 노인의
이혼한 전 처인 캐시였다. 진주는 문을
열었다. 캐시는 다른 때처럼 식료품이 담긴
쇼핑백을 무겁게 들고 있었다. 그는 그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루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아무리
두들겨도 기척이 없어. 문도 굳게 잠그고."
말하던 입을 다물면 마치 자물쇠를 채운
듯 입술이 옆으로 길게 꼭 다물어졌다.
진주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캐시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경찰을 부를까요?"
"우선 창문으로 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볼까 싶어서. 루이를 본게 언제쯤 돼요?"
몰라요."
"지난 주에 왔을 때는 오히려 건강해
보였는데."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전과는 달리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기는 하지만 저
눈내리는 겨울밤 이래로 진주는 루이와
오래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열흘 전 쯤인가 집에 친구들이 왔을 때,
그중 한 사람이 훌라멩고 춤을 춘다며
마루짱을 막 구르자 아래층에서 빗자루고
천정을 두들겼다.
"에이 아래층에 병든 영감쟁이가 하나
있는데 좀 조용히들 하시오."
주인인 기의 말을 아랑곳 않고 술취해
버릇 없어진 손님들이 밤새도록 웃고
떠들고 춤을 그치지 않았건만 루이는 다시
모양이었다.
"영감쟁이 심술이 보통이 아닌데
웬일인가." 기가 말했다.
진주는 루이에게 감사를 느꼈다.
"창문을 좀 올려 주겠어?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 보게."
진주는 힘껏 창문을 위로 올리고 커텐을
쳐들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천정을 두들겨서 곧
알리세요. 구급차를 부를께요."
캐시는 스커트를 넙적다리까지 올리고
창턱을 넘었다. 정맥이 푸르게 돋아난 굵은
흰 다리가 쇠다리 비상계단에 위험해
보였다.
"조심하세요."
아래로 내려갔다.
오래 생각을 더듬어 루이가 살아 있는
기척을 느낀 것은 지금으로부터의
열흘쯤이던가, 시끄럽던 그 파티 때가
마지막인 것을 진주는 깨달았다. 먹고
마시고 그 파티 마지막쯤에는 전등을 끄고
모두 뺨을 대고 몸을 붙이고 춤을 추었다.
기는 아이린과 온 밤 내내 친밀히 굴었다.
아이린은 폭설로 온 도시가 마비되었던 날
집에 왔던 여자였다. 진주가 보는 눈앞에서
기는 곧잘 다른 여자들과 팔을 낀다거나
비스듬히 안고 있다거나 그런 행동을 잘
하지만 진주는 어쩐지 아이린에게는 신경이
쓰였다. 아이린 옆에 있으면 진주는 자기
자신이 접시만큼 깊이가 없고 어리게
느껴졌다. 아이린은 파마를 해서 늘인
밀빛깔의 피부, 용모도 무르익은 듯 성숙해
보이지만 성품도 사방으로 툭 터져서 그와
있으면 진주는 아이린의 봉투 속에 싸인 듯
느꼈다. 그것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이유로
별로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고 위협으로
왔다. 인생이 한결같은 음률인 진주와 달리
아이린의 생활은 늘 무슨 급박하고 중요한
일이 닥치고 있으며 아이린은 그 모든
일마다 심사숙고 끝에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듯했다. 아이린 옆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다 중대한 의미가 있어
보였다. 아이린의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린이 만나는 사람은 다 특별한
사람들이며 특히 아이린의 두 딸은 보통
아이들이 아니고, 아이로서도 모든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앞날의 인류, 여성
ERA(여성동등권) 자금모집에 수표를 보낸
후 아이린은 말하였다. 나는 오늘 우리 두
딸들에게 큰 투자를 했어요.
기와 아이린이 꼭 껴안고 음악에 맞추어
돌아갈 때, 기의 손이 파진 옷을 입은
아이린의 등을 어루만질 때, 서양 사람인
아아린의 남편은 연기낀 듯한 안경알 속에
시선을 감추고 말없이 소파에 몸을 낮추듯
기대 앉았고 진주는 램프 밑 바닥에 앉아
레코드를 걸기도 하고 재털이도 비우고
먹을 것도 내오고 누가 권하면 춤을 추기도
하였다. 진주의 신경은 아이린과 기에게 가
있지만 아이린의 남편은 어떤지 진주는 그
속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새벽 무렵 모두
작별할 때 아이린의 남편은 조금도 나쁜
내색 없이 아이린에게 쇼올을 씌워 주고
"Oh my God"
창 밖에서 부르짖는 캐시의 소리에
진주는 불길한 상념을 털며 창으로
달려갔다. 캐시가 한 손은 쫙 펴서 자신의
머리를 덮고 한 손을 쇠난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내 가발."
캐시의 가발이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거리를 걸어가던 사람들 몇이 멈추어서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진주는 안도하며,
"내가 가서 주워 올께요."
"그래 줘요."
캐시의 흰 머리가 쇠계단 아래로 쑥
사라졌다. 죽어버려, 언제부터인가 기는
루이의 방앞을 지나며 그런 소리를 하지
들고 문으로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기였다. 오늘 늦겠다는
말씀이었다. 사원의 기둥같이, 두 개의
싸이프러스 나무같이 그대들은 서로 떨어져
있으라.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두라. 천공(天空)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요전 날은 자칭 훼미니스트라 떠들어
쌌는 미국 여자 친구집 파티에 갔는데
여자가 뭐든지 다하고 그 여자
보이프렌드라는 자식은 앉아서 술이나 퍼
마시고 아무것도 안 해. 대개 여성
운동가라 하는 여자들은 실제 행동보다
말로만 해방된 것 같아요. 난 그런 건
질색이오. 말로 그림 그리고, 말로 영화
만들고, 말로 시 쓰고 그런 사람들 말이요.
안 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겨요. 우리들이
사는 방법에 대해 진주는 가끔 실망하지.
난 알아. 진주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대개
그렇듯 스스로 금기사항이 많고 자유롭지
못해요. 진주더러 애인도 얻고 좀 재미있게
살라고 나는 말해요. 한번 사는 삶인데
다른 사람한테 폐만 안된다면 누구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자유가 있지 않소."
친구들에게 기가 일장 연설을 하면
진주는 시장에 팔려고 내 놓은 여자
노예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인 나의 남편보다
여자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바보입니다.
나는 무서운 남편이 사냥개처럼 떡 지키고
섰는 보통 가정주부와는 달라요. 진주는
기의 영혼과 자기 영혼의 기슭 사이에서
딩동 딩동.
캐시였다. 두 손을 머리에 얹어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캐시는
"영감이 웬일인지 골이 잔뜩 났어. 골이
나서는 날보고 다시 오지 말라는 거야.
문도 안 열어 주고 겨우 창문에 매달린
내게 소릴 지르는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캐시는 진주가 집어 준 가발을 들고
욕실로 가서 머리에 쓰고 나오며,
"이놈의 영감 버릇을 고쳐 줘야지."
화가 안 풀리는지 캐시는 씩씩 숨을
쉬었다.
"이렇게 심술을 부리면 장차 어떻게
되는가 단단히 교훈을 줄 참이야. 벌레가
든 깡통을 연 것은 내가 아니고 영감이니
아프건 내 소관이 아니야. 물 한 컵
주겠어요?"
진주는 캐시를 식탁에 앉히고 얼음을
넣은 냉수를 주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결혼이었어. 처음
단추를 잘못 잠그면 끝까지 틀리게
마련이지."
물컵을 비우기도 전에 평소에 별 말이
없던 캐시는 꼭 다문 입을 열고 이미
얼마나 인생이 자기를 잘못 대우했는가
한탄하였다.
"사실은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하고 한번 살아 봐야
하는건데....."
캐시는 작은 마을의 캔디 가게 집 딸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연인은 같은
집에서는 캐시를 떼어 놓기 위하여 아들을
큰 도시로 유학시켜 버렸다. 열 아홉
살이었던 캐시는 자살해 버릴 마음을
먹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마음이 잡혔을 때 캐시는
자기도 큰 도시로 떠나고 싶었다. 부모는
혹시 의사와 결혼할 수 있을까 하고 딸에게
간호원이 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내렸다.
"그 당시에는 간호원은 변기나 피 흘리는
사람을 만지는 어렵고 나쁜 직업으로
여겼지."
캐시는 도시로 나와 간호원이 되었으나
애인이었던 남자는 양가의 처녀와 결혼해
버린 후였다. 캐시는 첫번으로 구혼한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 그가 루이였다. 그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아이들은
"그런데 말이야, 요전 날 신문을 봤더니
옛날 남자가 상처를 했더군. 카드를 사서
조의를 표했어."
"아직도 그 애인을 만나고 싶으세요?"
"이예스."
캐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와 사는 중에도 나는 늘 그를
구명대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루이하고
이혼할 때까지 나는 루이한테 불행하다고
말할 뱃장이 없어서 옛날 애인하고
연애하는 공상을 계속했어. 루이는
술주정뱅이고
게을렀거든."
"그럼 지금은 혼자 사세요?"
"응, 이혼했을 때는 후회도 했어. 아무리
그런 남편이라도 헤어지고 나니까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지. 그렇지만 결국은
잘 된 일이었어."
"그렇지만 지금 계속 이렇게 루이를
보살펴 준다면 별로 자유로와진 것도
아니지요."
"그래도 하여튼 결혼 생활은 견딜 수
없었어."
캐시는 문득 일어나서 벽에 붙은 동그란
거울로 다가갔다.
"뭐든지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지겠어. 어쨌든 오 년만 지나면 나는
할머니가 되니까 건초는 해났을 때 말리는
것이지. 우리 모두는 늙어가."
캐시는 오 년이 지나면 몇 살이 되는가,
도대체 몇 살부터, 할머니인가. 진주는
오년이 지나면 기가 늙어 버린 자기를
있었음을 생각했다. 누구나 다 오 년이
지나 늙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젊은 거겠지.
"보니까 여자들은 모두 새로 시작하고
싶어해요.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기와의 생활은 요즘에 들어 극히
평온하고 자유롭고, 때로는 아버지같이,
딸같이, 친구같이 다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 폭력의 형태이기도 했다. 기는
진주에게 좋은 것은 뭐든지 가지라고
하지만 진주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몰랐다. 진주는 천천히 자살하고
있었다. 기와 진주 자신이 거대한, 육체가
분리된 두뇌로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기의
두뇌는 진주의 두뇌보다 훨씬 컸다. 혼자
외롭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바쁜 저녁에 내가 너무 시간을 뺏는 게
아닐까."
"괜찮아요. 남편은 늦을 거예요."
무우국이 맛있다며 캐시는 진주와 저녁을
먹고 쇼핑백을 무겁게 들고 가 버렸다.
"이놈의 영감, 이걸 시궁창에다 던져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저를 주나 봐라."
책을 펴 들고 침대에 앉아 있으나 진주의
신경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기에게 가
있었다. 그는 설겆이를 마치고도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
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이러한 순간이야말로 그들 사이에 언제
같은 때였다.
이렇게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것은
단순히 기 탓이거나 환경만이 아닌 어쩌면
내 내부에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몰라. 기도 그랬지. 내가
보물이 가득들은 광맥 같다고. 내 안에
보물이 들었는지 (그럴까?) 몰라도 차라리
내가 아무것도 안 가진 것이 낫지
않았을까. 진주는 자신이 자기를 학대하고
고통을 이겨 나가는 굉장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주는 펴
놓은 책 위에 이마를 대었다. 달리고 싶어.
껍질을 벗고 나 자신으로 부터 달려나가
기가 추천하고 권하여 마지않는 내게 좋은
것이란 것을 얻고 싶어. 기는 가지라지
않던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여자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란 오직
한 가지, 기가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방패가
되어 나를 세상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막아 주는 사랑의 확인이다. 기는 내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날보고 가지라
한다.
앞날에 나는 어떤 여자가 되어 있을까,
그것이 가슴 가득히 자리잡던 소녀 시기가
있었다. 맛있는 음식과 웃음이 가득한
가정에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고 성실하고
다정한 남편과 자녀들을 기르며 사는 것을
공상하였다. 그러한 앞날을 위하여 진주는
스타킹을 재빨리 신는 연습을 하고 자던
대로 곱게 깨는 연습을 하였다. 여러면으로
인생에 닥칠 불행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진주는 모친이 겪었던 것과
대등소이한 인생이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삶이란 병들고 늙고 죽어야 된다는 대전제
아래 계속되는 것이며 일을 많이 해야하고
어떠한 억울한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여자에게 있어서 옳은 것이란 도대체
뭘까요?"
"지성을 가지고 기쁜 일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지. 인생에서 좋은 자극을 얻으려
애쓰는 것이지. 굳이 여자뿐 아니라 어떤
인간에게도 해당되겠지."
"맨날 인생이니 주의니 하지만 말고 먹고
사는 얘기 좀 해 봐요. 나는 그런 게
중요해요. 머리가 깨지게 경제적인 것이
벌어들이지만 저축 하나 없지요. 나는
당신과 달라 돈이 있어야 기를 펴요.
누구에게 금전적인 폐를 끼치면 금방
기운이 없어져요."
기는 대꾸 없이 앉았다가 불쑥,
"진주, 너는 지금의 우리 생활을 어떻게
생각해?"
진주는 바가지를 긁은 것이 문득
부끄러워졌으므로 이번에는 조용히,
"글쎄요, 우리가 부부인 것을 만족하는가
봐요. 단지 웬지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것
빼고는."
"이제 곧 좋은 사람도 만나고 그러게 될
거야."
진주는 수치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혹이 있어요. 남자나 여자나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예요."
기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이 미워라.
진주는 기의 웃는 얼굴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알고 있어. 그러니 날 그렇게 보지
말고, 지금 우리집에 나 좋다고 오는
친구들 사실은 다 진주 네가 좋아서 오는
거야."
"어마, 어떻게 그런 소리를."
진주는 들고 있던 책을 힘껏 집어 기에게
던졌다. 책은 기 못 미쳐서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당신은 어떻게 된 사람이에요? 당신이
나를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얘기를 안 할 거예요.
싶어. 귀찮게 이혼도 할 것 없이 그냥
도망치고 싶어. 당신이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다른 여자들을 유혹하고 다른
여자들도 와이프 같은 건 무시하고
대담하게 당신에게 접근하고 전화걸고 그런
거 볼 때 내 마음이 어떤지 아세요?
질투하리라 생각하세요? 천만, 천만,
천만예요. 당신이 얼마나 흥미 없어지는지.
무슨 추물 같고 괴물단지 같고."
무슨 더 아픈 소리가 없을까, 한 마디
말로 그 심장에서 붉은 피가 하늘로 치솟는
그런 말은 없을까.
"진주, 내 말 좀 들어봐. 결혼이 파탄이
나는 건 대개 다른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야. 그런데 그 좋아지는 것이란 게
대단히 일시적인 것이지. 나는 누가 우리
두려워. 나는 우리 결혼의 반석 같은
안정을 구해. 진주 너도 알겠지만 나는
너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슷한 점이 너무 많다. 우리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정답게 해 두고
싶다."
낯선 눈으로 진주는 기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나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요?"
"진주, 나는 늘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
너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연애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니?"
정섭과 둘이 피크닉을 갔을 때였다.
아람드리 나무가 하늘을 찌를듯 서 있고
들꽃들이 발 밑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점심 바구니를 풀며 진주는 불현듯
것이다. 내가 꿈꾸던 것은 이것이다. 이게
내가 가질 것의 전부이다. 그리고 이건
충분치 않다. 충분치 않다..... 내부의
소리를 들으며 진주는 미지의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였다. 그런 감정은 가끔씩
나타나서 진주를 두렵게 하였다.
"요샌 떠다니는 당신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내가 비행긴가, 떠다니게."
기는 씩 웃고,
"우리 일주일에 하루는 각자 자유의
시간을 가지기로 하자. 반드시 이성을
만나야 된다는게 아니라 서로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시간
말이야. 우리 생활을 봐. 노예제도는
없어졌다 해도 우리 모두 경제적인
비록 육체는 허덕이더라도 정신은 저 높은
곳에서 구름같이 지내야지."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지금
그러고 있지 않아요?"
"그래 문제는 당신이야. 나는 혼자 어디
가면 죄의식을 느껴. 집으로 돌아올 때
진주 당신을 볼 일이 늘 신경이 쓰여."
나보고 바람 피우라고, 외로운 들개처럼
이 도시를 쏘다니며 남자 사냥을 하라고?
"당신은 와이프하고 너무 가까와 지는 게
두렵죠. 엄마에게 삼켜졌듯 내게 또 삼켜져
버릴까봐 겁내지요. 윤마나 경애같이
지긋지긋한 인간관계가 될까 두렵죠.
똑똑한 당신 친구 제리가 내게 가르쳐
줬어. 심리학적으로 그런 카테고리에 드는
사람이라고. 당신은 자유롭지 못해요.
"제리 제까짓게 뭘 알아. 하고 있는
핵무기 반대운동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내가 무슨 카테고리라고?"
"당신 친구들이란 게 전부 머리통하고
입만 있는 사람들 같애. 문어 같애요. 그런
괴물들이 국가 인종 성별을 초월하여 모여
앉아 괴변을 지껄이고 있어요. 덕분에 나는
점점 똑똑해 가요. 내가 정말 점점 이렇게
똑똑해 가다가는 나중에 도로 작아지지
못할까 염려가 될 지경이에요. 부부 중
하나가 애인을 가지는 건 섹스보다
프라이드의 문제예요. 이제까지 가만
있기는 했지만 난 정말 싫어요."
"정신이란 떠돌아다니는 집시다.
부부랍시고 붙어 앉아 있어도 그런 거야."
"그래도 나는 서랍에는 양말이 있고
나오게 되어 있고 이렇게 모든 것이 책임
있는 게 좋아요. 믿을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게 좋아요. 이상해, 당신은 반석같은
결혼의 안정을 위해서 오히려 연애를
하자고 하니."
"호오, 진주, 말이 많이 늘었어."
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진주는
분연히 일어나 욕실로 갔다. 단간방의
아파트이므로 진주가 기로부터 몸을 숨길
곳이라고는 그곳 밖에 없었다. 문을 잠그고
진주는 타올 선반에 놓여 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볼륨을 있는 대로 크게 틀어
놓았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좁은
욕실 공간을 휘저으며 음향은 되는 대로
벽이니 창문에 부딪쳤다. 저 년이 미치나
부다 기는 그러겠지. 그러라지.
당신에게 복수하겠어. 그런데 저
자식에게는 어떤게 복수일까. 아이를 한
열쯤 낳아 안겨 줄까.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 그곳에서 진주가 나왔을 때 기는
이미 없었다. 집 안은 안절부절 못하리만큼
공허해 보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듯
진주는 그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
자신 탄생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이를
가져.
[7]
빌리지 거리는 해가 지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활기를 띠우기 시작하였다.
비지니스 사람들도 제 자리를 찾아가고
거리의 악사며 무희도 이곳저곳 처마 밑에
서면 거리는 연인과 관광객들로 붐비었다.
낮에와는 다른 빌리지 특유의 예술, 사랑,
술 같은 인생의 꿈 빛깔을 띠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려는 듯 그
좁은 길 한복판을 간혹 앰블란스, 경찰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곤 하였다.
손금보고 카드 점치는 여자들도 낮에는
여늬 아낙네나 다름없이 야채가게에서
과일을 사고 소다수를 사 먹고 길에 나와
아이들을 놀리다가도 밤이 오면 갑자기
신비로운 집시가 되어 고객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
진주는 성장을 하고 거리에 나섰다. 매주
진주여 즐기라. 맘껏 즐기고 돌아오라.
삶의 기쁨같은 것이 넘쳐나는 거리를
진주는 공허하게 걸어갔다. 진주는
되도록이면 시간을 끌기 위하여 양품점의
쇼윈도우를 기웃거리고 어느 한 곳에
들어가서는 집에 가지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옷을 입어 보기까지 하였다.
"여자들은 남편에 대한 복수로 옷을
산다. 무시당하거나 섹스의 불만 혹은 권태
같은 데 대해 복수하느라 옷을 산다."
기의 말이 떠올라 진주는 입어 본
블라우스를 화난 듯 벗어 도로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어떤 행동이나 사고에도 기는
진주를 이끌고 다니는 듯했다.
이제는 부틱크나 옷가게를 기웃거리지
않고 진주는 볼 일이라도 있는 사람인 양
지하철을 탔다.
영화는 현대 남녀의 사랑얘기였다.
병아리는 필요 없어도 달걀이 필요하듯
인간관계도 병아리는 안 좋아도 달걀을
갖게 되는 부수적인 것 때문에 이럭저럭
지속된다는 것 같았다. 빌리지 거리에서
진주가 한 번 본 일이 있었던 여배우가
실물보다 훨씬 크고 생생한 모습으로
주인공역을 해내고 있었다.
뉴욕의 밤거리는 여자 혼자 걷기는
무서웠다. 창녀들이 선정적인 옷차림으로
서 있고 외설영화가 돌아가고 불량해
보이는 소년들이 이리저리 뛰었다. 기는
진주가 얼마나 특별한가, 진주가 떠나면
그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며 진주와 될
수가 없으면 아무하고도 될 수가 없다고
사람을 이러한 거리로부터 걱정해 주고
지켜 주어야 하지 않는가.
진주는 피자집에 공중전화가 있는 것을
보고 미스 오에게 전화를 돌려 보았다.
미스 오는 집에 있었다. 옷감에 염색을
하느라 온 집안에 일감이 흩어져 있었다.
미스 오는 대강 치우며,
"내 생각에 기씨가 새삼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지금 어떤 여자가 있기 때문일 꺼야.
그냥 지내는 여자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여자. 진주야 넌 뭐
집히는 데가 없니?"
"미스 오도 잘 알지요? 그 사람한테는
여자가 많은 것 같지만 또 특별한 여자는
없는 것 같고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씨하고 미스 오도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사람도 실제로 있고. 그 사람은 나한테
물어 보기까지 했는 걸."
"그래, 넌 뭐랬니?"
"모른다고 했지. 정말 모르니까?"
미스 오는 재미있는 듯 웃었다.
"넌 그럼 지금 기씨가 누구한테 반해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진주는 흐린 머리 속 구석구석을 뒤졌다.
글쎄, 갑자기 진주는 앉았던 소파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쳤다.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살다가
늙으면 나는 비비 꼬이고 사방에
히스테리나 부리는 늙은이가 되겠지. 그래
가지고 미움이나 실컷 받다가 죽어
버리겠지."
젊었을 시절에는 아름답고 명랑했던
할머니로 변하는 것을 진주는 많이 보아
왔다.
진주는 계속 수요일이면 혼자 거리로
나왔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에게 보이기
싫었다. 진주는 영화를 많이 보고 친구들도
가끔 만나고 장신구나 향수 같은 것을 사서
선물인 듯 포장하여 기의 눈이 뜨일 만한
곳에 놓아 두기도 하였다.
전화가 왔을 때 진주는 어린애 우는 소리
때문에 전화를 안정된 마음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헬로우 진주."
아이린이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시골에서 보낼까
하는데, 그 집 부부 우리 집 부부 이렇게
두 집에서, 진주는 어떻게 생각해요?
"시간이 맞을지요. 우리는 십 일부터
휴가예요."
"알아요. 우리도 그때로 잡았어요."
진주 품안에서 아이는 몸까지 뒤로
버팅기다 더욱 극성스럽게 울었다.
"난 뭐 괜찮지만 기씨가 어떨지요."
"아 그러면 됐어요. 기는 좋다고 이미
말했으니까. 그런데 웬 애예요."
"그럼 진주, 가는 걸로 알겠어요. 빠이."
전화가 끊겼다. 진주는 우는 아이를
밀차에 태우고 실내를 돌아다녔다. 창 밖을
내다보면 손바닥만한 아파트 뒷뜰은
나무로부터 꽃가루가 떨어져 깔려 있었다.
마미 마미 마미 아이는 계속 울었다.
아가야 마미가 뭐야 엄마지. 그런데 아가야
너네 엄마는 이따가 온다. 이따 저녁
진주는 어쩌다 쉬는 휴일에 할 일도
못하고 이런 고생을 하는가, 그야말고
"노(No)"라고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침에 이 아이의
엄마는 전화를 걸고,
"오늘 시간 있으세요?"
진주는 아침 커피하자는 말인 줄 알고
선선히 네, 대답하였다.
"그럼 잘 됐어요. 오늘 어디 좀 나갈
일이 있는데 우리 광희 좀 봐 주시겠어요?
오늘 고등학교 동창 대항 볼링대회를
하는데 우리 부부가 선수로 뽑혔으니 안
나갈 수도 없고 좀 부탁해요."
그때 가서야 진주는 오늘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할 계획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음 주말까지
보았다. 진주는 또 아이린의 제의에 선뜻
허락을 해버린 것도 화가 났다. 언제나
아이린에게는 다 양보만 하게 되는 것 같아
정말 싫을 때 "노"라고 말하는 법을 단단히
배워야겠어.
커다란 관광 버스가 두 대 천천히 진주의
집 앞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연기 낀 듯
푸른 빛깔의 유리창 안의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가 바로 오헨리가 즐겨 그렸던 뉴욕의
명물 빌리지 거리입니다. 여자들이 더 예쁜
거리입니다. 혹시 이 거리에서 수염을
기르고 일 미터 칠십 정도의 키에 말랐지만
준마와 같이 민첩해 보이는 몸집을 가진
동양 남자를 보게 되면 그것은 저 동양의
코리아로부터 온 기라는 사람이라고
스포츠, 각 분야에 걸쳐 평론가 내지는
논평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인생
전반에 걸쳐 기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 그냥 평론가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론가들의 평론가 같은
사람입니다. 나는요, 그 평론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꼭두각시요.
아마도 아이린의 제안을 받고 기는
이렇게 말하였겠지. 나는 좋아요.
진주에게는 직접 물어 보시오. 잘 생각해
보면 아이린은 기가 진주에게 되라고 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자기의 인생을
책임지는 여자, 자기가 일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여자, 게다가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의 머리가 돌려지도록
아름다왔다.
심각히 생각하는 여자가 있다면 아이린은
아닐 것이, 아이린이라면 기가 얼마든지
진주의 눈앞에서 스스럼없이 정다히 굴고
있는 터였다. 그런 아이린 때문에 특별히
일주일에 한 번씩 진주를 거리로 내보낼
필요는 없었다. 진주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쿵쿵쿵 마룻짱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래층의 루이겠지. 심심한가 언제는
마나님을 쫓아 보내시더니 오늘은 나를
불러 동무하자시는 건가.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눈을 비비고 있는 아이를 안고
진주는 침대로 갔다. 잠이 오는 가 봐.
아가야 착하지. 아줌마랑 침대에 눕자.
누워서 코오 자자. 잠만 온다면 자는게
제일 편하지. 근심 걱정 다 잊어 버리고.
쿵쿵쿵쿵 다시 마루치는 소리가 났다.
루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건가. 몹씨
아픈가? 진주는 눕히려던 아이를 다시
일으켜 안았다. 열 번만 자장자장하면 금방
자게 생겼는데. 아이는 한동안 너무 울은
탓인지 이제는 기운없이 가만히 있었다.
진주는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루이가 현관 문을 열고 벽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 어깨는 새같이 굽고 바지 위로
엉덩이의 윤곽이 앙상하게 나타났다.
진주를 보고 루이는 이마를 벽에 쿵쿵
찧었다.
"왜 그러세요?"
"캐시가 자살했어. 약을 먹었어."
"어마, 죽었어요?"
"아직.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루이는 울며 소리를 질렀다.
죽으려 하다니 이기적이야. 제가 없으면
내가 꼼짝 못하는 줄 알면서....."
그는 미친 사람 같았다. 진주 품의
아이가 또 울기 시작했다.
캐시는 옛 애인 윌리의 와이프 부고를
신문에서 보고 카드를 사서 부치었다. 그
후 윌리에게서 감사 편지가 왔다. 그들이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흐른 뒤였으나
그것은 적어도 40년 만의 해후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들은 침대에 들었다.
"윌리는 많이 변했어. 십 년 전에 중풍이
왔대. 그래서 몸을 떨면서 잘 걷지고
못하고 몸에서는 늙은이 냄새가 났어.
루이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었어. 게다가
윌리는 아들, 딸 여섯에 손자가 열
다섯이나 되고 시골에 땅이 있고 외롭지가
번이나 걸었어."
병원에 찾아간 진주에게 캐시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담담히 말하였다.
[8]
하이웨이를 버리고 차는 주유소며
쇼핑센터가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기가
운전하고 진주는 지도를 보고 있었다. 이
근처에서 길을 잃어 그들은 같은 길을 몇
번이나 돌아다녔다. 날씨는 덥고 기는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뭐야? 좌회전이라고? 쎄다 스트릿을
지난 거야, 안 지난 거야. 에잇 (지도를 확
어디야?"
기가 한번 이와 같이 신경질이라는 것을
내기 시작하면 진주는 죽었다 살았다 했다.
기는 친구고 여자고 체면이고 뭐고 없이
미친 사람같이 되어 야단을 치고는 하였다.
기가 그럴 때면 진주는 입 막고 귀 막고
시간이여 흐르라 하고 가만히 있으면 곧
기는 내던 화 끝에 쿡 웃음을 터뜨리고
소낙비 뒤에 햇살처럼 더 신선하고 더
정다와지고 더 이성적이 되었다.
기와 진주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덮이어 아이린 내외가 빌린
썸머하우스는 창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진주는 곧 축축한 대기 속에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변은 만월의
은빛 달빛 속에 목욕하듯 젖어 있었다.
기가 감탄하듯 말했다.
"아이린이 구했으니까요."
잠깐 현관쪽이 어수선해지는 듯하더니
아이린 내외가 나왔다. 아이린은 가슴만
겨우 가린 손수건만한 핼터에 흰 반바지를
입고 벤도 역시 반바지 차림이었다.
아이린의 머리에는 뜰에서 꺾은 것으로
보여지는 시든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생각보다 늦어 오늘 안 오나보다
했어요."
아이린이 서양식으로 떠들썩하게 기와
포옹하며 말하였다.
"길을 못 찾아 한참 헤맸어."
진주 부부는 그들이 앞으로 일주일을
지내게 될 썸머하우스를 대강 둘러 보았다.
걸어나가면 호수가 있었다. 낮이면 그들은
호수에 나가 수영을 하고, 낮잠도 자고
공치기도 하고 각각 적당한 데 틀어 박혀
책을 보거나 레코드를 듣거나 했다.
아이린의 계집아이들은 곧 이웃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몰려 다니며 잘
놀았다. 시간은 느릿느릿 지나갔다. 매일
점심은 포도주를 사다 놓고 맛있게 해
먹었다. 네 사람의 어른이 돌아가면서
음식을 하고 접시를 씻었다.
"여자에게는 남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야
되는 홀몬이 따로 있는게 아니예요."
아이린의 말이었다.
모두 모여 앉아서 요리책을 들고 요리
메뉴를 짤 때, 제일 화제가 풍부하였다.
이제까지 먹어 본 음식, 한국 음식, 서양
돼지새끼 같은 진기한 음식에 대해
아는대로들 떠들었다.
"오늘 식사당번은 나란 말이지."
기는 식탁 위에 놓인 요리책을 덮으며,
"내 조개를 구울까."
기는 혼자 차를 몰고 생선시장으로 가고
그 동안 벤은 뜰에 바베큐 불을 피웠다.
샤워를 하고 난 진주는 부엌 창으로 지는
해를 받으며 불을 피우는 벤을 바라보았다.
기와 아이린 사이에 일고 있는 안타까운
정욕 같은 것이 그들 주변의 공기를 팽팽히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어떤 때 진주는
자기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모를
듯 느낄 때도 있었다. 혼자 생각인가
아니면 벤도 나와 동감인가. 벤은 석탄불의
연기를 피하여 지금은 나무 밑에 가서 서
묻혀 지나갔다. 진주는 잔디 위를 맨발로
걸어도, 창가에서 머리를 빗어도, 의자에
앉아 있어도, 무언가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며 인생의 끝 같은 것을 느꼈다.
아이린의 계집아이들이 제 친구들을 끌고
와 재깔재깔 떠들 때도 기와 아이린과 벤과
또 자기 자신이 먹고 마시며 웃고
얘기하다가도 진주는 갑자기 자신의 내부에
참을 수 없는 돌 같은 정적을 느꼈다.
그러나 이 휴가도 이제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진주에 이어 샤워를 마친 아이린이
들어오며,
"아이스 티 하겠어? 아니면 소다?"
"아이스 티로 주세요."
아이린은 두 컵의 아이스 티에 얼음을
젖은 머리의 그 둘은 한동안 말없이 창
밖을 응시하였다. 아이린과 진주 사이의
침묵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진주 어제 저녁에 마음 상하지
않았어요?"
아이린의 어조에는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이 스며 있었다.
"나하고 기씨 둘만 산보를 가서 너무
늦게 돌아왔지. 내 마음이나 우리 주변
일들에 대해 나는 진주와 의논하고 싶어요.
삼 년 전쯤인가, 박물관에서 기씨를 만나는
즉시 나는 이상하게 기씨한테 끌렸어.
그렇지만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요."
"....."
"나는 다른 여자를 짓밟고 그 남편되는
사람과 지낼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아이린은 대학 다닐 때 남자들이 젊다는
그 이유로 젊은 여자들에게 빠지는 것을
보고 그런 남자의 아내들에게 깊은 동정을
느꼈으며 동시에 힘겹고 더러운 집안 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자기 아내들을 대하는
남자들 태도에 같은 여자로서 분노를
느꼈다고 말하였다. 아이린의 말도 기의
말처럼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기에게 끌리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진주에게 끌리고 있어. 처음
기씨 집에 갔을 때 그때 나는 기씨가 혼자
사는 남자인줄로 알았어요. 그랬다가
진주를 보고 상당히 미안했어요."
그 눈 내리던 밤의 수치스럽고 괴롭던
기억을 진주는 아이린의 머리로부터 씻어
없애고 싶었다. 그러려면 저 여자가
둥글고 신선한 얼굴을 바라보며 진주는
사는 것이 핏기없이 창백한 것 같은 그
익숙한 우울감을 다시 느꼈다.
"나는 남편을 훔치려는 게 아니예요.
이렇게 넷이 휴가를 같이 지내고 여행
다니고 그러는 것이--내가 기씨와 자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애. 절대로 자지는
않겠어. 이렇게 친구로 다같이 지내요.
진주 괜찮지?"
"왜 내 허가를 받으려 하세요. 나한테
무슨 권리가 있다고.....나는 말예요.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여 안 하려 노력해요."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져서 진주는
당황히
"아이린의 마음을 벤도 알고 있어요?"
"응, 벤은 내가 기와 지내도 좋다고
얘기를 하고 벤은 늘 허용해요. 벤은
질투처럼 무모하고 파괴적인 감정은 없다고
말해요. 나는 이때까지는 다른 여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싫어서 애인을 독신
남자나 미혼인 사람들로 택해 왔어요.
그러다가 그만 기에게 빠져서, 진주 잘
알잖아요. 그 특별한 기의 매력."
"아, 그럼 당신이 기와 지내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란 말이지요."
벤은 이제 나무 밑에 등을 보이며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이 아이린의
봉투 속에 진주는 싸이고 있었다. 아이린의
봉투는 더욱 두껍고 커지는 듯했다. 진주는
아무 의지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음을 느꼈다.
"이제는 여자도 뭔가 원하는 것을 가질
아이린은 기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 기가
낡아 빠진 그들 부부의 폭스바겐 자동차를
몰고 자랑스럽고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여이, 이리들 와서 조개 좀 봐요.
얼마나 크고 좋은가."
조개들은 불 위에서 입을 딱딱 벌려가며
익었다. 아이린과 기는 석탄불 주위에 서서
술잔을 들고 웃었다. 이제 그들은 벤에게도
진주에게도 공인된 사이였다. 거의
절망적인 눈길을 진주는 그들에게
보내었다. 벤은 안경알을 햇볕에
반사시키며 늘 하듯 말없이 진주의 건너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기가 구워진 조개를
접시에 수북히 담아 가지고 와서 식탁에
놓았다.
"아, 맛있게 됐어, 먹어요."
꽂고 이제는 아이린도 식탁에 돌아왔다.
"오늘 부두에 갔다가 좋은 식당을 봐
뒀어. 우리 내일은 거기서 저녁을 먹지.
물탱크 속에 든 산 가재를 즉석에서
요리하더군. 노천 식당인데 갈매기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고."
"굿, 그럼 내일은 산으로 피크닉을
갔다가 거기서 저녁 먹고 오도록 합시다."
벤이 수월히 동의하였다.
구워진 조개에 기는 고추가루를 뿌려
먹고 벤은 버터를 발라 먹었다.
"진주, 보이프렌드 얘기 좀 해 봐요."
"아이린."
벤은 아이린의 말이 적당치 못한
화제라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아이린은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숨겼지만 요새는 애인 없는 것을 숨겨요."
아이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급히
마신 포도주가 올라 어찔어찔 얼굴이
빨갛게 된 진주는,
"대부분 남자는 나한테 어필하지 않고요.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겠지요. 그 남자들도
나를 매력 있다고 안 봐요. 그런 의미로
기씨는 특별해요. (진주는 술을 한 모금
삼켰다.) 기씨는 정직하고 또 굉장히
성적인 분위기를 풍기지요 (아이린
당신이라면 또 달라질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도 못하지요)."
진주는 술을 또 한 모금 꼴깍 삼켰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해요(아이린
너만 좋아한다고 포옴 잡지 말아라). 바로
기씨 같은 사람이 애인이면 좋겠어요. 정말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은지 천진한
소년같이 빛나는 웃음을 웃고 있는 기에게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고 진주는.
"당신은 정말 같이 지내기 좋은
사람이에요. 저 말이지요. 우리가
이혼하거든 가끔가다 와서 나하고 지애요,
네?"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주의 팔을
잡았다.
"진주, 너무 술을 많이 마신 게 아니야?
수영도 많이 했는 데다가 날씨도 덥고 얼굴
안색이 나빠요."
아이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주는
토하기 위하여 맨발로 욕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내내
진주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커튼이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가 납작해졌다
했다. 진주는 이상하게 안식을 느꼈다.
아이린은 얼음을 싼 수건으로 진주의
얼굴을 닦아 주고 얼음물을 마시게 하였다.
가끔 눈을 떠보면 초저녁 어스름 속에
아이린은 진주의 손을 잡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진주가 잠이 깨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머리 속도 맑아져 있었고 약간 시장기가
느껴지며 몸도 아주 편안하게 되어 있었다.
달빛에 바깥이 환하였다. 건너편 침대에서
잠든 기를 건너다 보며 진주는 침대를
벗어나 나왔다.
밤이면 이 집은 하나의 북으로 변하는 듯
조그만 소리 하나도 온 집 안에 울려
부엌 바닥에 달빛이 들어와 있었다. 진주는
냉장고에서 과일 쥬스를 한 컵 따라 가지고
뜰로 나왔다. 검은 호수에 빛기둥이 길게
드리우고 잔디에는 이슬이 내려 앉았다.
달려드는 모기를 쫓으며 진주는 곧
거기에 한 사나이가 서 있음을 보았다.
벤이었다. 그는 진주를 보고 걸어 왔다.
"진주, 당신이로군. 좀 나아졌는가요?"
"네 아주 좋아요."
그들 머리 위에서 나무 잎사귀가 소리를
내었다.
"잠이 안 와, 당신은 해 뜨는 것
구경하고 싶지 않아? 바다로 나갈까?"
벤과 진주를 싣고 차는 젖은 풀잎 위로
굴러 뜰을 빠져 나갔다.
않으므로 아이린과 기는 그들이 어디
산보를 나갔거나 쇼핑을 하러 갔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린의 다섯 살, 여섯 살, 두 딸들은
평소에 훈련이 된대로 저희들끼리 토스트도
굽고 씨리얼에 우유를 부어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양쪽으로 땋은
밤색 머리카락에 노란 리본이 매어 있었다.
쟤네들은 네 살 때부터 혼자 샌드위치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햄이니 치즈를 잘 싸
놓지 않아서 말라 가지고 샌드위치 한
조각에 오 불씩 드는 결과가 되지만 그래도
자기 일은 자기가 한다는 자각 그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사내애들이라도 그런 훈련을 시켰을
거예요. 사내라고 해서 와이프가 없으면
어른으로 애들을 기르는 것은 정말 여자의
수치예요. 여자가 남자들을 그렇게
만들어요 하고 아이린은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한 바 있었다.
아이린과 기는 손을 잡고 아침 해가
부드럽게 퍼진 뜰을 거닐었다. 기는 피어
있는 들꽃 하나를 꺾어 아이린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오전 열 한시가 되어도 진주들이 안
돌아오기 때문에 그들은 과일과 토스트,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기는 뜰로
내려가고 아이린은 강연 원고를 쓰기
위하여 타자기 앞에 앉았다. 이제 휴일도
오늘로 끝나고 내일은 일찍 도시로 떠나야
했다. 아이린은 뜰의 장의자에 앉아 페퍼로
나무토막을 갈고 있는 기를 잠시 바라
것도 내일로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린은 불현듯 불행을 깨달았다. 진주를
의식하고 모랄과 자유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이 세상의 단 하나의 기혼녀인 듯
괴로왔다. 자기와 같은 운명의 배에 탄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자신에 대해 죄의식과
노여움을 동시에 느꼈다. 거칠게 아이린은
타자기를 두들겼다. 중국인 교회 부녀회에
나가서 할 연설이었다.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제
여성에게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짙은 구름 뒤에
숨어 비치는 단 한줄기의 은빛 광선과 같이
약한 것이지만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
사회는 여자에게도 독립된 인생이 있다는
여자는 바보니까 교육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인권이 가장 존중되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라는 이 미국에서조차 백인이고 젊고
예쁜 여자에게는 그런대로 그 권리가
부여되고 있지만 나이가 들었다거나
흑인이거나 혹은 우리같이 소수 인종인
경우에는 아직도 갈 길이 험난합니다. 이
사회에서는 아이를 가진 삼십 세 이상의
여자는 언덕을 이미 넘은 것으로 느낍니다.
의술의 발달에 따른 피임의 보급은
여성해방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자기
몸의 완전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암살 당한 케네디 대통령의
모친인 로즈 케네디 여사도 남자들이 애를
낳는다면 이미 유산은 이전에 합법화되었을
여성해방이 반드시 여자들에게 행복을
가져 올까요? 일부에서 인식하듯
남자들에게 밥과 청소나 시키자는
것일까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어떤 한
쌍의 남녀가 동거생활을 했는데 여자가
아이를 가졌어요. 그 후 여자는 그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남자와 정식 결혼을 했어요.
아이의 아빠는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런 경우
얼른 보면 이거야말로 여권 신장이 가져온
현상의 하나라 생각하겠지만,
아이로니칼하게도 이 남자가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남녀
동등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중에
남녀 동등권이 되면 법률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가 조목조목 설명해
더 고독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의
인식, 그리고 주체성은 남자나 여자나 다
중요한 것이며 인류 각자가 다 그것을
깨달을 때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여성은 이제 서로 연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들
여성사회속에서 서로를 해쳤던 성의 추악한
경쟁의 안개 속에 다시는 사로 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여성은 자매들이며
서로의 아픔과 이해를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단숨에 쓴 후 아이린은 다시
한숨을 쉬고 뜰의 기를 바라보았다. 기는
아이린이 자기와 자지 않는 것을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화를 내고
"난 배 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자요.
그 이상한 독선 좀 집어쳐. 일단 성인 남녀
두 사람이 만났으면 그 뒷일은 누가 뭐라
안 해도 다 생각해서 하기 마련이오."
그럴 땐 꼭 어린애 같으지, 아이린은 손
끝으로 책상을 툭툭쳤다.
아이린의 모친은 열 여덟 살 처녀로 중국
광동땅으로부터 미국에서 나서 성장한
아이린의 중국인 부친에게로 시집을 왔다.
아이린이 태어났을 때 이미 양친은
중국인들이 많이 하는 직종인 조그만
세탁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가게는 좁고
빨래 보퉁이가 널리고 어두웠으며 그
어두운 가게의 더 어두운 조그만 골방에서
양친과 아이린의 언니 그리고 아이린,
변소는 옆에 있는 피자집과 공동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나가는 통로는
좁고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대낮에도
자기 손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였다.
아이린이 무서워했으므로 변소에 갈 때면
모친은 손전등을 들고 문에 지켜 서
있었다.
아이린의 모친은 지금도 영어를 잘
못하지만 그때에는 지금보다 더 서툴렀다.
가게에 도둑이 들면 당황하지 말고 자꾸
말을 시키라고 부친은 모친에게 일러
주었다.
어느 날 가게에서 혼자 아이린의 모친이
재봉틀을 돌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거기에 불량배로 보이는 낯선 청년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린의 모친은
문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창문으로 들어
오셨습니까. 도둑은 잠깐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마치 고객이기나 한 듯 그냥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자식이 큰 이제 와선 공허해진 모친은
자식들을 잡으려 하고 자식의 생을 살려고
하고 남편의 생을 살려 하고 물건에
집착하였다. 아이린은 모친처럼 도둑에게
아자찌 아자찌 문으로 들어오셨습니까 하고
물어 보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자식에게 헌신하여
인생을 보내고 만년에 이르러 노여워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기가
해 준 음식을 안 먹으면 어른의 상식을
벗어나고 인간의 센스를 벗어나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엄마가 되고 싶지
진주와 벤을 태운 차가 돌아와서
아이린은 책상에서 일어났다. 차가 멎고
벤과 진주가 차에서 내려 나무 그림자 속을
걸어왔다. 뜰에 있던 기가 먼저,
"어이 어디들 갔었어? 아침을 안 먹고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먹어 버렸지."
아이린은 벤과 진주 둘이 다 머리가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즐거운 듯,
"벌써부터 수영?"
"목욕해서 그래요."
진주는 짧게 대답했다. 낯선 여자 같은
태도가 있었다.
"나 이층에서 좀 쉬게 올라오지 마세요."
기에게 말하고 진주는 층계를 올라갔다.
진주의 벗은 발이 나무 계단을 밟는 것을
모습이 안 보이고 이층 침실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벤은 문득 뜰 저쪽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를 불렀다. 벤은
아이들을 데리고 호수로 낚시하러 가
버리고 얼굴을 마주 보던 기와 아이린은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진주에게 의논한
이래 사정은 더욱 견디기 어려워진것을
아이린은 깨달았다. 천천히 머리를 흔들고
강연 원고를 마치기 위하여 자신도 침실로
향했다. 이층에 올라온 아이린은 진주의
침실문이 반쯤 열린 것을 보고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디밀어 보았다. 진주는
침대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창의 빛을 역광으로 받고 앉은 탓으로 미처
그 표정은 보이지 않는데 문득 꽉 잠긴
듯한 진주 목소리가 들렸다.
"....."
"난 벤하고 잤어요. 당신이 시한
폭탄처럼 조마조마하게 구는 게 싫었어요.
남의 남편이나 아내를 뺏는 것은 인간 역사
이래 쭉 있어온 일이에요. 영화도 소설도
전부 그런 얘기예요. 당신은 좋은 대로
하세요. 나 상관 말고."
아이린은 놀란 듯 걸어와 진주 옆에
앉으며,
"진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그건 짐승도 하는
행동이에요. 그런 일을 가지고 아이린
당신은 유난하게 굴 것 없어요."
"진주, 나는 정말 마음 상하게 할 생각은
없어. 기씨는 머리가 좋고 사려가 깊고
재미있는 사람이야. 벤으로 말하면
방랑자지. 나는 기씨를 내 생에 하나의
더하기로 원하는 거지 벤과 이혼할 생각은
없어요. 기씨처럼 자기가 살고 있는 생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분이 좋아요. 남편이 남편이 아니고
주인이 주인이 아닌 남자."
---기도 그래요. 성숙한 성인이라면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고. 무감동한
시선을 진주는 자기 발가락께로 던졌다.
아이린은 진주에 대한 감사의 념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듯,
"이제 우린 친구 이상의 것이야. 진주
정말 괜찮아? 어쩐지 상심하고 있는 것같이
보여요. 후회 안 해?"
---후회? 천천히 자살해 가고 있다고
너무 괴로와 중간에서 마음을 돌렸을 때
뽑아버려 줬는데요.
"어느 때보다도 편해요."
[9]
겨울의 초입이 되었다. 천둥번개가
우르릉꽝 번쩍이는 부엌쪽 창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진주는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물보라를 뿜으며 굵은
빗방울이 잇닿은 지붕 위로 번질번질 흘러
내리고 있었다. 늘 이쪽 창의 풍경은
진주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여러 아파트
건물들이 등을 대고 있는 곳으로 이
도시에서는 드물게 지붕과 지붕이 사각의
오지 않는 날은 지붕을 가로 지르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달아맨 빨래줄에 누군가의
빨래가 하나 가득 널리어 나부끼고는
하였다. 잎이 큰 남양풍의 나무 하나가
지붕 위로 그 잎을 펴올리고 있었다.
나무는 마음이 함께 흔들리는 진주의
친구였다.
오늘은 주말이고 기는 지금 가게에
근무중이지만 일과가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오늘 저녁 진주도 제리와 영화를 볼 약속이
있었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진주는 창을 떠났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으며 자신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변해 갈 것인지 진주는 문득
두려워졌다.
진주가 레인코트를 입고 우산을 꺼낼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진주?"
아이린의 목소리였다. 진주는 대뜸
방어적이 되는 마음을 숨기고
"아, 아이린"
"진주,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오겠어요?"
늘 그랬지만 특히 여름 휴가 이후로
아이린은 여러 가지로 진주에게 마음을 써
주고 좋은 선물도 가끔씩 사 주었다.
진주는 아이린에게 방어적이 되다가도 곧
부끄러움으로 큰 파도 같은 그녀의 온정에
방어적이 되었던 것만큼이나 굴욕적이 되어
굴복하였다. 기의 사랑을 나눠 가지려면
아이린과 친구가 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 알아. 제리 말이지. 테이트 끝나고
와요. 아무리 늦어도 좋아요. 기씨도 매듭
클래스 때문에 오늘 늦게 온다고
했으니까."
아이린은 제리와 약속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와 아이린은 얼마나 친한
사이며 그렇게 무슨 얘기든 다 하는
것일까. 기가 일주일에 한 번씩 노부부에게
매듭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도 진주는
아이린을 통해서 들었다. 진주가 묻자,
"응, 아이린이 소개해 줬어. 네가 나보다
돈을 더 벌면 곤란하잖아!"
기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린이 당신에 대한 얘기 이것저것
해줄 때는 싫어요. 그런 친절은 필요
없다고 하세요. 비밀이 있는게 좋아요.
같은 게 있어요."
"그 친구는 비밀로 하기에는 대단히
정치적이야. 자기 생은 혼자가 아니라
인류와 연결이 되어 있다. 자기는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뚜렷하고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저질렀던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자야. 어떻게 보면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지적이라 정말 원하는
생을 찾을까 싶어. 이 친구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은 때도 있어. 지금 나보고 사랑
사랑해대지만 사랑보다 아이린은 사랑이란
이래야 한다는 플롯을 찾는 것 같애.
그렇지만 아이린에 대해 찬양심이 생겨,
용기 있고 훌륭한 여자야."
기는 아이린과 진주 사이에서 안정을
얻는 듯했다.
숫벌이에요?"
그 소리에 기는 입을 벌리고 한참
웃었다.
"진주 너는 말이야."
기는 웃음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어떻게 그렇게 어린애 같은 말로 정수를
꼭꼭 집어내니. 이상한 유모어 센스가
있어."
진주는 정말로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기가 칭찬을 했어도 웃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금 내 친구들이 진주 너 좋다고
야단났어."
여전히 마음을 풀지 않고 진주는 말했다.
"실컷 구박하다가도 누가 데려 갔으면
해서 당신이 나를 선전하니까. 장사꾼이
데가 있다느니. 그럼 그 소리 듣고
인사로라도 그런 말 안 할까."
기는 또 고꾸라지듯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는 챠프린의 옛날 잘품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까 이미 어둠이
덮이고 비는 그쳐 있었다. 뒷뜰의 한 그루
나무만큼도 요즈음 진주의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은 없었다. 술주정뱅이 걸인 하나가
진주가 그냥 지나가자 "거지 같은
챠이니즈가 아이리쉬를 몰라 봐?" 주먹을
공중에 내저으며 소리질렀다.
"릿슨!" 제리는 발을 멈추고 진주에게
인종적인 모욕을 가한데 대해 걸인에게 한
마디 할 생각이었다. 그는 늘 홀로 온
세상을 개혁시킬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이 세상은 위기로 가득
"그냥 가요. 정신 없이 취해 있어요."
진주는 제리를 잡아 당겼다.
"난 괜찮아요."
식당을 찾으러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고인 물에 거리의 네온이 떠 있었다.
진주는 요즈음 제리와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제리는 몇 해 전
남태평양에 이 년간 갔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악성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는 아직도
병원에 다녀야 하는 아픈 사람이었다.
진주가 그를 만나는 것은 사랑이나 섹스
때문이 아니라 나가서 누구를 만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걸으면서 제리는 아동 학대에 대한
얘기를 하였다. 요전에 만났을 때는
산아제한을 역설했었다. 지구상에는 1초에
무섭게 불어나는 인구가 먹을 음식을
생각해 보라.
제리의 방에 가면 "이 세상 젊은이는
뭉쳐라, 미래는 당신의 것", "총을 들지
말고 책을",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젊은 얼굴이 헐렁한 바지를
입고 여러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그는 이미 젊은이가 아니었다.
오므렛을 먹으며 제리는 말하였다.
"아이는 제 아비의 팔에 꽉 붙들린 채
몹시 울었어. 트렁크를 들고 제 엄마는
아이의 한 팔을 잡아 쥐었어. 부모 둘 다
술에 취해 있었어."
길에서 벌어진 흑인 부부의 부부싸움
광경이었다. 아이는 건장하고 힘센
아버지의 손아귀에 꽉 쥐어서는 도망간다고
필사적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그때 그 아이의 슬픔은 순전히 어른들
때문이야. 생각해 봐, 아이라고 해서, 단지
아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겠지요. 아이라고 해서,
챠이니즈라고 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박해 받으면 안 되겠지요."
열성도 없이 진주는 동의하였다.
"그래, 그런데 지금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울고 있을까."
아이린의 아파트까지 제리는 진주를
지하철로 데려다 주었다.
아이린의 아파트는, 검소하고 실질적인
진주의 아파트와 달리 고급스럽고
묵중하고 커다란 소파, 마루에는 두텁고
커다른 방석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호사스런 가정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얼굴이 비치는 전기기구들과 은그릇들이
늘어 놓여진 밝은 부엌에서 기가 혼자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진주는 먹었어?"
아이린이 물었다.
"안 먹었으면 와. 여기 김치도 있어."
기가 입에 음식을 넣은 채 말하였다.
아이린은 기를 위하여 김치도 사는
모양이었다.
"먹었어요. 먹고 바로 오는 길이에요."
진주는 레인코트를 벗었다. 남의 집
부엌에서 커다란 식탁을 앞에하고 혼자
벤이 와서 진주의 머리에 키스했다.
"베니, 당신의 노래 진주에게 좀 들려
주세요. 진주, 베니가 오늘 오전에 노래를
하나 작곡했어."
진주는 마루에 놓인 방석을 편안하게
만든 다음 벽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뻗고
앉았다. 기가 다 먹은 그릇을 씻어 놓고
술잔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기는 앉으며
하품을 했다.
벤이 피아노 앞에 앉아 러시아의
민요풍으로 들리는 노래를 연주했다.
"아름답지 않아요? 참 훌륭해요. 벤."
이미 들어봤으련만 아이린은 놀랍다는 듯
앞장서서 남편을 칭찬했다.
벤이 피아노에서 몸을 돌리고
"진주, 우리는 저 방에 가서 와그너
"잠깐, 오늘 이렇게 모이게 한 것은 다
같이 의논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예요.
참 진주, 요전 날 맛있다던 치즈케익 사다
놨어, 가지고 올께요."
피아노로부터 벤이 진주 옆에 와서
앉았다.
"제리는 잘 있나?"
"네, 사기는 여전해요."
그 말을 듣고 기가,
"진주, 다른 사람을 만나 봐요. 제리는
환자야. 그리고 그 사람 좀 지루하지 않아?
남이 예전에 다 해 놓은 소리만 하는 것
같애."
남의 집 부엌에서 밥을 먹고 게다가
그릇과 수저까지 씻어 엎어 놓고 들어온
"사람은 다 다른 방법으로 친구가 돼요.
(벤에게) 애들은 어디 갔어요?"
"다 자."
아이린이 케익과 치즈와 과일을 내왔다.
아이린은 중대한 말을 할 때는 늘 그러듯
긴 머리를 한 번 뒤로 젖히고,
"아다시피 지금 기씨와 나는 산발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이런 관계는 정력과 돈의
낭비가 많아요. 예를 들어 이미 약속이
있지만 기씨가 시간이 빈다 하면 나는
선약을 취소하고 기씨와 지내요. 우리 네
사람의 시간이 함께 관계 돼요. 이렇게
우발적인 관계는 싫어.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벤도 기도 잠자코 있었으므로 진주도
가만히 있었다.
싫어요. 또 진주도 벤도 그러리라 싶어요."
기의 컵 속에 든 얼음이 소리를 내었다.
"애인과 지내는 것은 남편과 지내는
것보다 즐겁지요.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애들이 없다는 것이에요. 애들이
자고 있는 침대위로 난장판으로 기어오르지
않고 밤중에도 일어나 샴페인을 마시고
야간 레스토랑에도 나갈 수 있어요. 이혼한
남편들은 한 달이나 일 주일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애들을 만나지요. 이때에
아이들을 맡았던 아내들은 자유시간을
가지게 돼요. 그 시기가 정기적이므로
아내들은 시간계획을 세울 수가 있어요. 왜
이 사회에서는 결혼중에는 그런 자유를
허용 안 하나요? 꼭 이혼이라는 큰 값을
치러야만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나요?"
기가 한국말로 대답했다. 그 단어는 벤도
아이린도 알고 있어서 잠시 웃음이 일었다.
"나는 기씨와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고 일주일에 두 번은 점심,
그리고 두 밤은 밖에서 지내고 싶어요.
나는 아이들이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을 보는
게 좋아요. 엄마의 생에 아버지 외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게 나빠요. 특히 걔네들은
여자들이 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므로 해서
안정감 내지 자신감을 얻을 거예요."
"뭐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닐 걸 가지고
길게 굴고 있어. 지금도 뭐 그 정도로
지내고 있지 않소?"
기의 말에,
"그렇지만 시간표를 짜 놓는 게 나아요.
지금은 그냥 들뜬 상태니까요."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주는 어때요? 진주도 그렇게 정해
놓는 게 좋지? 그래야 다른 일을 계획할 수
있으니까."
"네. 지금은 사는 게 복잡해요."
"우리 네 사람의 관계는 대단히 귀중하고
가치가 있어요. 인생의 경험을 넓히고 현재
결혼생활이 주는 여러 가지 불합리성을
극복하고 우리 모두 함께 자라갈 수
있지요. 여성회 모임에 나가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모두 나보고 행운이라고 그래요.
우리 네 사람처럼 다같이 그렇게 지적
수준이 맞기가 어렵다고 말이죠."
"우리 한번 다른 사람들 앞에 내보일 수
있도록 훌륭한 이 인간관계를 지속시켜
가요. 사실 애인 때문에 부부가 헤어져야
없어요. 부부생활에도 아이들이 방해될
때가 많은데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들이 뭘
요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남의 아이고 내
아이고 간에 아이란 것은 사랑스럽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거리예요."
"그런 복잡한 소리 그만 집어치고 오늘
모두 모였으니 좀 재미있게 놉시다."
기가 벽 램프 하나만 남기고 방 안의
불을 전부 돌아가며 꺼버렸다.
"얼음이 더 있어야겠어."
아이린이 어름통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진주, 우리 같이 레코드 들어, 자
여러분 우린 저쪽 방으로 옮깁시다."
벤이 이끄는데로 진주는 스테레오가 놓여
있는 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진주는 조금
열린 문으로 미래의 여성인 아이린의 두
보았다.
레코드를 얹고 벤은 진주 옆에 와서
앉았다.
"베니 당신은 정말 질투를 안 해요?"
레코드에 귀 기울이던 벤은 처음에는
진주의 말뜻을 얼른 못 깨닫는 듯하더니,
"응, 질투는 바보같은 짓이지. 결혼 전에
좋아했던 여자가 딴 사람하고 결혼했을
때는 정말 화나고 가슴이 아파서 혼났어.
아무것도 못하고 아, 그 감정과 육체의
소모."
진주에게 있어서 그는 다른 세계, 다른
별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음악만 들리고 한동안 조용하였다. 벤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진주에게
입맞추었다. 몹시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어린 계잡아이처럼 그의 목에 팔을
돌리었다.
벤의 품에서 진주는 문득 잠을 깨었다.
음악은 멎어 있고 무거운 커텐이 내려진
실내를 호젓이 램프가 밝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진주가 몸을 일으키자 잠결에
벤은 소파 등받이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진주는 주변에 떨어진 자기의 옷을 집어
들고 욕실로 갔다. 가는 길에 부엌 창 밖에
희뿌연 새벽이 와 있음을 보았다. 기도
아이린도 이집 어느 방 구석에선가 잠들어
있으리라. 욕실은 넓고 다른 어느 방보다
사치스러웠다. 바닥에는 주홍빛 카펫이
깔리고 선반에는 향료가 든 예쁜 비누와
샴푸, 여러 가지 빛깔의 타올들, 전기
것들이 놓여 있으며 아이린 것으로 보이는
분홍빛 욕의, 물빛 전화기 같은 것도
보였다.
진주는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아주
멀고 다른 세상같이 느껴지며, 답답하고
두꺼운 공기 안에서 이루어지듯 샤워의
물을 조절하는 자신의 동작이 영화 속의
슬로우모션 같았다. 세게 샤워를 틀고
진주는 그 속에 가서 섰다. 물방울은
진주의 얼굴과 몸을 때리고 비누거품은
허물처럼 진주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주는 문득 욕조 주변에 놓여 있는 크림곽
하나를 집어 거울을 깨뜨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진주는 미친 듯이 손에
잡히는 것마다 집어 던졌다. 그래서
떨어져 행인을 다치게 하고 경찰이 앵앵
달려와 벌거벗은 진주를 잡아갔다. 연상이
거기까지 이르자 진주는 몸을 떨었다. 나는
늘 착하고 말 잘 듣고 남의 마음에 드는
아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얼마든지
기분 좋고 예절 바른 손님일 수가 있지
않은가. 집어 던져서 거울을 깨고 싶던
사기빛 크림곽을 진주는 오히려 벽쪽으로
잘 갖다 놓았다.
물소리가 센 탓인지 기가 어느새 샤워
커텐을 들치고 들어선 것을 진주는 모르고
있었다. 기는 뒤로부터 진주를 안고 그의
손은 미끄러운 진주의 몸을 헤매었다.
한동안 진주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였다.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진주는 그를 뿌리쳤다. 기우뚱 기가
밖으로 튀어나와 문 손잡이를 쥐었다.
자신도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기를 안아 줄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
욕실을 안 튀어나올 수 있었을 것도
같은--- 안 그래도 되는데 공연히 화를 낸
것 같은, 알 수 없는 스스로의 감정이
유리창 저편으로 보듯 둔하게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물방울이 몸에서 흘러 바닥을
적셨다. 머리카락으로부터 눈으로 흘러드는
물기를 한 손으로 씻어내며 한 손으로는
문에 귀를 대어 보았다. 물소리만 들릴 뿐
욕실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진주는 대강 옷을 입었다. 몸이 젖어
있어서 옷은 잘 입혀지지 않았다. 진주는
발 끝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층계를
걸어내려 밖으로 나갔다. 어제 내린 비가
빛으로 불을 켜고 서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집에 가기 위해---집 밖에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으므로---진주는
택시를 잡으려고 차도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아찔하더니 갑자기 진주는 장님이
되었다. 태양을 직시 할 때 처럼 모든 것은
어지러운 암흑으로 변했다. 차 지나가는
소리는 들렸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발 한 짝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모든
세상은 갑자기 진주로부터 절연되고 이방이
되었다. 예기치 않게 닥친 이 현실에
진주는 겁이 났다. 마침내 한 노파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른 새벽 개를
산보시키러 나온 노파였다.
"내가 도와 줄까? 아파 보이는군."
"네."
"저를요, 저 아파트 안으로 좀 데려다
주세요."
진주는 금방 자기가 나온 아파트의 방
넘버를 겨우 들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그 날 진주는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차량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달려온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 침대에 눕혀지고
강한 진정제 주사를 맞았다. 진주는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 어수선한 꿈길을
헤매었다. 식은 땀을 흘리고 깼는가 하면
꿈은 다시 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악몽에서는 소리를 지르고 깨었다.
진주에게
부탁한 책 다섯 권과 슬리퍼, 향수 하나,
잡지 한 권 사서 보낸다. 잡지는 왜냐 하면
때문이야. 그 두 부부는 결혼한지 십
오년이 되었는데, 이제 이 세상과 아주
절연을 하고 부부와 아이 둘, 이렇게 네
식구가 인적 미답의 벌판에 가서 살기로
작성했어. 남자는 대학 교수였는데
직장에도 사표 내고 집도 재산도 정리하여
떠나는 건데, 그 이유가 재미있어. 사람
많은 곳에 살면 친구니, 식구니 해서 무슨
트러블이 있을 때마다 가서 상대방의 나쁜
점을 호소하고 위안을 얻고 또 간혹 연애도
하게 된대. 그러나 아이들이 있는 한
부부는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이 두 부부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살기로 한 거야. 부부는 그렇게 외부적인
조건으로라도 꽁꽁 묶여 같이 가야 하는지?
결혼하는 순간을 생각해 봐. 얼마나
헤쳐 나가는 인생길이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인터뷰하는 사람이 조금치의
주저도 없느냐 한즉, 그 남편이 짐 싸고
주변 정리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가끔
와이프가 미울 때면 맙소사 내가 저 여자
하나 믿고 거기까지 가야 하나 생각한다고
대답했어. 천천히 시간 있으면 읽어.
시집가고 싶다가도 이런 거 볼 때면 혼자가
편하지 싶구나. 이제 거진 회복되었다지?
아마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쌓였다가 잠시
폭발 되었는가 봐. 의사도 그렇게 말했어.
나도 말이다. 허리도 결리고 너무
고단하고 그래서 종합 진단을 받아 봤다.
그 병원에서 만일 죽으면 어떻게 하겠다고
유서 같은 거 쓰는게 있더구나. 여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외로운 몸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거기에
내가 미국에서 죽으면 기씨와 너 부부에게
화장을 해 달라고 쓰고 만일 한국에서
죽으면 고향에 묻으라고 그랬다. (너는 또
금방 새침해지는 너 특유의 표정으로
그까짓 죽은 몸 하나 고향까지 못 데려가
줄까 봐 그러겠지만, 그렇게 믿어지는
우정이 어디냐) 그렇지만 내 죽은 몸뚱이
뭐 하러 귀찮게 끌고 다닐 필요가 있니?
병원에서 그러고 오니 네가 입원했다는
소식이더라.
기씨는 네가 정신병원에 묶여 실려간
것이 그렇게도 큰 충격일 수가 없는가 봐.
네가 부탁한 책 찾으러 너의 집에 간즉,
기씨는 술을 마시고 마루바닥을 뒹굴며
소리지르고 울더라. 진주는 자기 내면을
친구도 많고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다니, 그런 소리도 하면서.
이제 겨울이다. 너 있는 곳은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라지. 아이린이 다녀와서
그러더라. 곧 퇴원할 거라고? 아이린은 좀
싫기도 하지만 굉장히 능력 있는 여자지?
병원에 가서도 의사니 누구니 다 만나 보고
왔는가 봐. 하여튼 누구를 잘 해 주면
얼마든지 잘 해줄 힘이 있는 사람이더라.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는 크게 해야지.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린다.
오 수 강
마차가 있는 마을에 아득히 눈이 내리는
좀 이른 미스 오의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을
진주는 한동안 들여다 보았다. 흐린 하늘
어제 의사는 앞으로 석 달간 직장에만 안
나간다면 퇴원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내가 집에 가서 전과 같이 살 수 있단
말이지요?"
"그렇지요."
진주를 돌봐 주는 중년의 여의사는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한참 동안 공허한
시선으로 진주는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전 여기 있겠어요."
실제로 진주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집도, 미치광이들이 들끓고 있는 병원도 다
무서웠다. 이 병원을 나가 집으로 간다면
이제까지 자신이 이루려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만 그 노력을 다시 해야 될 것이
두려웠다. 진심으로 건강해지고 싶어서
진주는 의사의 말을 잘 따르고 맑은 공기를
많이 했다. 자신의 운명이 경애라던가 하는
미친 여자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운명 속에 미친 운명이 있는가 두려웠다.
진주의 병으로 기는 덫에 갇히었다. 좋은
동무였던 진주는 이제는 기의 인생을
위협하고 어렵게 하고 외롭게 하고 그 외
기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주었다.
진주는 힘겨운 짐이 되었다. 윤마나
경애처럼 일생의 짐이 될지도 몰랐다. 기는
진주가 나올 것을 진주 못지 않게 바라고,
그리하여 자기가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될
것을 간절히 바랬다.
그 새벽 아이린의 집에서 낯선 노파의
부름을 받고 놀란 기와 아이린 부부가
로비로 내려갔을 때 오래 앓은 환자같이
진주는 벽에 두 손을 짚고 간신히 서
탓으로 진주는 머리와 블라우스의 등
군데군데가 젖어 있었다.
"진주 웬 일이야. 어딜 갔었어?"
기의 손이 진주의 팔에 닿자 갑자기
진주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의
손길에 소리를 지르다니, 기로서는
쇼크였다. 스위치를 넣은 자동 경보기같이
진주의 그 비병은 앰블런스에 실려 주사를
맞을 때까지 멎지를 않았다.
퇴원해도 좋다는 소리를 듣고도 두
주일을 더 병원에서 지내고 진주가
퇴원하였을 때 진주와 기의 이별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서로
함께 지내기를 두려워하였다. 회복되었다
해도 기는 진주가 언제 또다시 그렇게 될까
겁이 났다.
얻어 진주는 짐을 옮겼다.
그러나 진주와 기는 생각보다 깊이 엉켜
있어서인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진주가 다시 출근하게 된 후에도 몸에 밴
나쁜 습관같이 그들은 가끔 만나고 한 번은
여행도 갔었다. 그들 사이에 미래란
없었다. 멀어지는 기를 문에서 전송하며
여러 번 진주는 오늘로 끝 하고 자기
자신에 다짐을 주었다. 그것은 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으로, 그도 몇 달씩 소식을
끊기도 하였다.
기가 총 오발 사고로 죽을 때까지 그런
관계는 계속되었다. 기는 방에 앉아 일을
하다가 벽을 뚫고 날아온 총알에 머리를
맞고 숨을 거두었다. 옆 방 남자가 총을
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총알이 자기를
다치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간 것만을
안심하고 있었다.
기의 죽음은 옆의 방 사나이를 감옥 속에
집어 넣었을 뿐 아니라 그를 일생토록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진주, 미스 오, 그 외 여러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미스 오는 울며
진주에게 말했다.
"기씨가 날 용서해 줄까, 그냥 왠지 자꾸
기씨한데 잘못한 것 같구나. 얼마나
가엾니. 죽은지 일주일만에 발견했다니."
장의사는 빨리빨리 차에 오르라고
재촉하였다.
"거기 열 두 시까지 못 가면 땅 파는
사람들이 점심 먹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벤과 이혼중이어서 장례식에 아이린은
혼자 참석하였다. 벤은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어느 날 이혼을 요구하였다.
언제나 벤에게 충실했던 아이린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혼만은 피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린에게도 어려운 시기였다.
남편은 떠나고 애인은 죽었다.
기의 죽음으로 제리는 여생을 총기
없애자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미 구문이 되겠지만 자살 미수가 된
캐시와 루이는 플로리다 노인촌으로 이사해
함께 살고 있었다.
[10]
오늘 아침 진주는 길을 가다가
'진주'하고 부르는 그 특별한 억양의 기의
목소리를 듣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그가 이 세상에는 아무데도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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