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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제37 장 출발연습
영희 보아라
그간 어린것들 데리고 별고 없었느냐? 에미는 이곳 집안 사람들의 보살핌 덕에 잘 지낸
다. 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13정짜리 산이 겨우 5만 환이니 일가들은 모두 반값이라고 말하
지만,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당장 급한데 어쩌겠느냐. 보릿고개가 한창인데 석공(대한석탄
공사)이라도 있어 산을 사주니 오히려 생광스럽게 여겨야지.
하지마는 명훈이한테 일이 있어 너희들에게는 얼마 보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답답하기 그
지없다.
네 서울 오라비도 이번 학생들 소동에 휩쓸렸다가 어디 좀 다친 모양이더라. 거기다가 직
장도 그만두었다며 돈을 좀 보내달라는 편지가 왔다. 어지간해서는 내게 그런 소리를 안 하
는 네 오라비라 거기 우선 만 환 보냈다. 생각 같아서는 서울로 가보고 싶다마는 제 말이
두번 세번 별거 아니라 하고, 또 나도 여기서 달리 알아볼 일이 있어 돈만보냈다. 그 만 환
빼고 그 동안 여기서 빚진 푼돈 갚고 나니 너희에게는 겨우 5천 환밖에 보낼 수 없게 되었
다. 잔금은 다음달말이 되어야 결제가 된다 하니 부디 이 돈으로 아껴 그때까지 견뎌보아라.
내 생각에는 우선 이걸로 모두 보리쌀을 사고 거기 있는 밀가루 보태면 저번에 보낸 5천 환
도 있고 해서 어째 견딜 만도 하지 싶다. 땔감은 아이들 하고 강가 무나무라도 주워 보태고
반찬은 안집에 얘기해 나물 좀 외상으로 얻어먹어라.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다만 지금 여기
도 보릿고갤 접어들어 하마 때거리(끼니거리) 떨어진 집이 태반이 넘는다.
내 있는 횡계댁만 해도 아침 저녁, 밥보다는 산나물이 훨씬 많은 나물밥 아니면 송기죽이
다. 곱삶은 보리라도 세 끼 이을 수만 있다면 오감은(분에 넘치는) 줄 알고 에미가 갈 때까
지 어떻게 견뎌보아라.
그리고 네 학교 얘긴데, 너는 아이가 어찌 그리 염량이 없느냐? 우리 형편 뻔히 알며 어
느 입으로 학교 타령이 나오느냐?
그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도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해 어미 마음 실로 걱정이
고 걱정이다. 나는 그래도 네가 화낙(울분 섞인 짜증 또는 심술)을 부리기는 해도 지난 몇
달 곱게 들어앉아 있는걸 보고 염량이 돌아온 줄 알았다. 모든 거 없었던 일로 치고 한 몇
년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맞춤한 신랑이나 만나 시집이나 갈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런
데 학교라니? 그것도 남녀 공학인 농잠고등학교에 편입하겠다니 그게 도대체 어느 입으로
나온 소리냐?
명훈이가 쎄워(우겨) 마지못해 보내기는 했다마는 나는 하마 네가 중학 간다고 나설 때부
터 반마음에도 안 찼더랬다. 그래 그 꼴난 학교 하다가 어떻게 되었느냐? 작년 내가 서울서
내려올 때만 해도 네 학교는 그쯤 하고 함께 데려갔으면 했는데, 너희 남매가 뻗대 기어이
서울에 남더니 무슨 영광 보았느냐?
학교는 이제 그만 끝난 줄로 알아라. 돈이 썩어 문드러져도 네가 다시 집 밖을 나가 돌아
다니는 건 안 보기로 작정한 에미다. 부디 흘려 듣지 말고 행여라도 딴생각 말아라.
편지를 쓰다 보니 마음이 격해 좀 심한 소리가 됐다마는, 이게 다 널 위해 하는 소리다.
세상에 제 새끼 잡아먹는 법이 있다더냐? 오늘은 이만 쓴다.
부디 당부 잊지 말고 그대로 하고 에미가 갈 때까지 기다려라. 아이들 잘 돌보고, 어쩌면
노리골 있는 참나무산도 석공이 맡아줄지 모르는데, 그리 되면 작은 점방 하나 차릴 밑천은
될 듯싶다.
경자년 양력 5월 7일
돌내골에서 에미 씀
다 읽고 난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 편지를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
며 손발이 떨려 그대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역시 이 여자는 어머니도 뭣도 아니야!'
영희는 그런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느 정도 어머니의 반응을 예측했지만 그렇게까지
모질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감정이 더욱 격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은 영희가 편지에 학교 얘기를 써 보낼 때만 해도 어머니가 순순히 허락하리라는 기대
는 거의 없었다. 돈과 함께 들어 있는 어머니의 편지가 전에 없이 다정한 데다, 마침 이웃집
명자로부터 농잠학교에는 편입이 쉽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지나가는 소리로 슬쩍 내비쳐본 것
뿐이엇다. 오히려 그런 영희의 참뜻은 학교보다는 어머니와의 화해라는 쪽이 옳았다.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응석 삼아 그렇게 말해 그때껏 막혀 있던 거나 다름없던 어머니와의 통로
를 한번 열어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비정한 거절은 영희에게 일종의 모욕감까
지 느끼게 했다. 영희는 그 편지의 행간에서 어머니의 날카롭고 차가운 꾸중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름끼쳐하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겁나기보다는 반발부터
먼저 느끼게 되는 어머니 특유의 목소리였다.
'역시 어머니하고는 이제 틀렸어.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부모의 정 같은 건 없었어...'
갑작스런 환청까지 들려오자 영희는 그대로 방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화해
의 손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한 이상의 분노가 오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미움과 서러움의
기억들을 일시에 의식 표면으로 끌어낸 까닭이었다.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고 일어난 영희는 습관적으로 머릿수건을 찾으며 작은 벽
걸이 거울 앞에 섰다. 분노로 달아오른 얼굴과 한층 치찢어진 듯한 두 눈꼬리에 이어 이제
제법 국민학교 계집애들의 단발 머리만큼 자란 머리칼이 거울에 비쳤다.
영희는 잠시 거울에 붙어서서 자신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밤중에 마구잡이로 한 가위질이라 군데군데 움푹움푹 들어간 곳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수건을 쓰고 나가야 할 만큼 보기 흉하게 짧은 머리칼은 아니었다. 머리칼을 되찾은 기쁨이
영희의 격한 감정을 조금 다독여주었다.
둑길로 나서니 어느새 봄은 초여름으로 무르녹아 있었다. 억센 갈퀴로 여러 차례 뿌리까
지 긁혔는데도 강둑의 잔디는 새파랗게 되살아나 있었고, 군데군데 이름 모를 풀꽃들이 무
리지어 피어있었다. 남녘이라고는 하지만 섭섭하리만큼 빨리 지나가버린 봄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한동안 강물을 바라보던 영희는 뱃다리거리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
았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읍내 쪽에서 은은히 들리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소리가 그
녀를 이끌었다는 편이 옳았다.
거칠고 격정적인 만큼 섬세하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한 그녀의 감정은 좁고 어두운 방안을
벗어나 탁 트인 둑길로 오라서는 순간 태반은 풀어지고 없었다.
브라스 밴드는 공교롭게도 읍내 저쪽에 자리잡은 농잠고등학교의 것이었다. 무슨 행사가
있어 삼문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에라도 가는지 영희가 느릿느릿 뱃다리거리에 이르렀을 때
브라스 밴드를 앞세운 농잠고등학교생들도 읍내 쪽 뱃다리거리로 올라서고 있었다.
영희는 몇몇 할 일 없는 늙은이들과 어린아이들 틈에 끼여 서서 다가오는 학생들의 행진
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번 편입해보았으면 했던 학교라 더욱 흥미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를 화려한 제복을 감싼 악장이 은빛으로 도금된 지휘봉을 휘두르며 뒷걸
음을 브라스 밴드를 지휘해 다리를 건너고 이어 쑥배바지 하복의 학생들이 줄지어 그 뒤를
따랐다. 흔해빠진 구경거리라고도 할 수 있는, 시골 고등학생들의 시가 행진이었다.
영희도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그런 그들의 행진을 바라보앗다. 그러다가 그 행력의 끄트
머리를 따르는 여학생들을 본 순간 눈시울이 화끈해질 만큼 묘한 충격을 받았다. 모두 합쳐
서른쯤 될까, 남학생들의 행령이 끝난 뒤 한 칸쯤 띄워 여학생들이 뒤따르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들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 목깃과 소매에 검은 테가 있는, 어쩌다 읍내에서 한둘씩 마주
칠 때에는 촌스러움까지 느껴지던 흰색 블라우스 교복이 어찌도 그리 고귀한 신분의 상징처
럼 보이던지.
영희는 한때 자신도 그녀들과 같은 학생이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은 두 눈으로 뒤쫓았
다. 안광에서 껌통을 들고 역전 거리를 돌던 어린 날 또래의 여중생들에게 보냈던 부러움과
시새움의 눈길 이상이었다.
영희가 막연히 꿈꾸어오던 가출을 구체적으로 결의한 것은 아마도 거기서 돌아가는 둑길
에서였을 것이다. 그전에도 '머리만 자라면...'하는 되뇌임을 곱씹어왔지만, 그 다음은 뚜렷하
게 떠오른 것이었다. '집을 나가야 한다. 어머니의 손아귀를 벗어나 학교ㄱ를 계속해야 한
다...'
하지만 목표와 결의는 구체적이 되어가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아직도 막막했다. 세상일에
어느 정도 닦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녀는 홀로 걸어본 적이 없는 열아홉의 계집아이일 뿐
이었다. 어렵다어렵다 해도 완고하기 그지없는 어머니와 정 많은 오빠가 꾸려온 가정에서
자라나.
그래도 방안으로 돌아간 영희는 한동안 집 떠날 일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가면 서울이
겠지만 취직은 잘될까, 명훈 오빠는 뭐라고 하며 여기 아이들은 또 어떻게 될까, 정말로 혼
자 힘으로 학교는 갈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뀌었다는데 서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때로 황홀
한 상상에 가슴 뛰기도 했지만 또한 어김없이 그 상상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힘없이 스러지
곤 했다.
영희, 너 이리와. 그 머리 아예 깎아버려야겠다. 안 돼요. 싫어. 그렇게 서캐가 많아가지고
이가 네 머리통을 다 파먹겠다. 이봐, 여기까지 헌 데투성이잖아. 싫어요. 머슴같이 까까머리
는. 이제부터 머리 자주 감을게요. 빗질도 잘 하고, 안 된다니까. 어서 오지 못해. 밉상스러
운 게 고집은 또 세서. 엄마가 집게 같은 손으로 영희의 손목을 잡아끌고 대청을 오라간다.
싹뚝싹뚝, 싹뚝싹뚝... 신문지 위에 부스스 떨어지는 머리칼. 박박 깍은 머리에 군데군데 아
카징키를 발라 아이들이 새끼 도깨비라고 놀려대고, 울며 돌아가자 엄마의 꾸중. 못생긴 게
아무려면 어때서. 꼴에 멋은 알아가지고... 하지만 아빠가 오셨다. 여보, 영희 머리가 저게 뭐
요? 서캐가 들끓어서요. 그래도 벌써 학교에 다니는 애를. 평소에 자주 빗질하고 씻기지 않
고. 언제 그럴 시간 주셨어요? 식모를 두는 건 부르주아 근성이라고 안 된다. 그래도 손님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고,몸은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인데 언제 한가롭게 계집아이 빗질이나
하고 앉았을 수 있겠어요? 엄머와 아빠가 가볍게 다툰다. 아빠가 편들고 나서니 갑자기 설
움이 복받쳐 눈물이 난다. 아이구, 꼴에 응석까지. 울긴 홰 울어. 눈에 재를뿌려놀라. 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당신 참 이상해. 다른 데는 안그러면서 얘한테는 왜 그렇기ㅔ 모질어?
아직도 욱이 죽은 게 얘 때문이라고 믿는 거야? 애 상대로 무슨 앙갚음이라도 하는 거야?
안 되겠다, 영희야, 내 방으로 가자. 아빠의 가슴은 넓고 따뜻하다. 아빠, 내가 많이 보기 흉
해? 아니, 아빠 눈에는 우리 영희가 세상에서 젤 예쁜데. 볼에닿아오는 구렛나룻의 꺼칠꺼칠
함이 오늘은 싫지 않다. 아빠, 요즈음은 왜 그렇게 나가다녀? 그러니까 엄마가 내 머리를 깎
아버렸잖아? 막 때리구. 인제 좀 나가지 마. 그래, 안 나가지. 다시는 엄마가 영희를 때리지
도 못하고 머리도 못 깎게. 정말이야? 약속해? 약속하지. 피이, 거짓말. 아빠는 또 혁명하거
나가야잖아. 왓하하, 혁명이 뭔데? 거 왜 있잖아. 살마들하고 모여 수군수군하는 거. 그래.
그럼 앞으로 혁명 안 할게. 이젠 눈물 닦아. 머리칼은 곧 자랄거야...
"이영희씨, 이영희씨. 도장."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바람에 영희는 두서 없느 꿈에서 깨어나싸ㄷ.
아이들 점심을 차려준 뒤 다시 빈방에 누워 공상에 잠겼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보니 낯익은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 한 통을 들고 서 있었다.
"오늘 학생 집에 웬일고? 하루에 등기 편지가 두 통이 오다이..."
우체부 아저씨는 수취 확인표를 겉봉에서 떼내고 편지를 내밀다가 그체서야 영희가 선잠
에서 깨나 줄 알았는지 좀 미안한 듯 덧붙였다.
"아이고, 단잠을 깨왔는가 베. 글치만 우야겠노? 학생이사 팔자가 좋아 늘어지게 낮잠을
잘 수도 있지만 내는 일이 있으잉께. 어서 도장이나 찾아온나."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든 영희는 목도장을 찾아 내준 뒤에야 발신인 주소를 살폈다. 어
머니가 갑자기 돈이 생겨 또 부쳤나 해서였지만, 발신인은 뜻밖에도 모니카였다.
멋부린다고 일부러 삐뚤빼뚤하게 쓴 모니카의 글씨를 알아보는 간 영희는 반가움보다 까
닭 모를 불안이 먼저 일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뒤 넉 달이 가깝도록 엽서 한 장 없던 그녀
였다. 두어 달 전 명훈에게서 느닷없이 다시는 그녀와 만날 생각을 말라는 편지가 온 것과
그 얼마 뒤 형배의 편지에서 짧게 언급된 그녀 얘기 외에는 전혀 소식이 끊겨 있었는데, 갑
자기 편지를 보내온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는 편지 같은 걸 쓰지 않는
그려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희가 겉봉을 뜯자 겉봉의 글씨와는 달리 노트에 연필로 마구 흘려 쓴 편지 한 장이 나
왔다.
영희에게
그간 잘 있었니? 막상 펜을 들고 보니 어째 서먹서먹하네. 하지만 이 일은 네게 꼭 알려
야 할 것 같아서 망설이던 끝에 이렇게 쓴다. 실은 형배 오빠가 죽었어. 지난달 19일 데모대
에 끼였다가 어떻게 된 모양인데 집에서 안 것은 그 다음날 저녁때야. 병원에 누워 있는데
우리가 가니 인사불성이더구나. 결국 깨나지 못하고 그저께 죽었는데, 참 이상하더라. 죽기
전에 나보고 꼭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한 눈길을 몇 번이나 보냈거든. 물론 고종간이라도
남다르게 가까웠던 사이라서 그랬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 밖에도 꼭 무슨 딴 할말이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오늘 아침 고모의 전화를 받고 그 오빠네 집엘 갔다가 문득 나는 그게
네 얘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고모가 오빠 서랍에서 나왔다며 네 사진을 한 장 주
는데 그게 여간 정성스럽게 보관돼 있는게 아니었거든. 거 왜, 오빠하고 사귄 지 얼마 안 돼
서로 나눈 그 명함판 사진 말이야.
게다가 그걸 보니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었어. 오빠가 죽기 한 달 전쯤이었을 거야, 아
마. 하루는 술이 취해 내게 찾아왔더구나. 네가 있던 치과엘 갔던 모양인데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던지 한참을 다 알았다는 소리만 되풀이하더라. 네가 왜 멀어졌는지, 그리고 왜
서울을 떠났는지를 다... 그러면서도 너를 잊지 모ㅅ해 괴로워하는 눈치였어. 지금에사 드는
의심인데, 어쩌면 오빠가 그렇게 데모에 열심 이었던 것도 너를 위한 노력이나 아니었는지
몰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거룩한 4,19 혁명의 순국 영령을 너무 욕보이는 게 될까.
물론 형배 오빠에 대한 감정은 내가 잘 알아. 다 끝난 일 더 듣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겟
지.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오빠가 너무너무 불쌍하다는 기분이 들어
편지가 두서 없이 길어졌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이만 잘 있어.
4293년 5월 11일
서울에서 모니카가
모니카의 편지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군데군데 맞춤법이 틀리는 데가 있었지만 언제나
머리 한구석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니카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리 있는 내
용이었다. 그러나 읽고 난 영희는 그 내용이 주는 충격 때문에 잠시 그것조차 느낄 수가 없
었다.
'형배, 형배가 죽었다구...'
영희는 한동안 멍한 머릿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형배는 너무 평범
해서 도무지 그런 별나고 갑작스런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떤 때는 구멍가게
주인에다 통장을 겸한 그의 아버지의 늙은 모습이 바로 수십 년 뒤의 형배 자신일 것 같아
혼자서 쿡쿡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신문마다 그렇게 요란스레 떠들던 바로 그 혁
명의 날 데모대의 선두에서 피를 뿜고 쓰러져갔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모니카가 거짓말ㅇ르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전해 가을 마지막
으로 그를 만났을 때 언뜻 본 예사롭지 않은 변모도 그런 영희의 짐작을 뒷받침했다. 그때
는 자신이 평범하지 않음을 애써 내보이려고 허풍을 떤 것쯤으로 가볍게 보아넘겼지만 그때
이미 형배의 내부에서는 영희가 모르는 또 다른 그가 자라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하
여 형배의 죽음이 정말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영희의 감정은 먼저 느닷없이 원망의 형태
를 띠었다.
'못난 사람, 그렇게 죽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 이제 어떻게 묵은 감정을 풀고, 어떻게
다시 시작해볼 수 있는냐구...'
영희는 그와 다시 만날 굳건한 언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 형배의 환
상을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사실 따져보면 영희의 그런 원망은 억지나 다름없었다. 밀양으로 끌려내려와서 어둡고 짓
눌린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 무든 원인이 도니 박원장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형배에 대한
기억을 호전시킨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를 다시 만나 어떻게 새로 시작해보겠다는 정도까지
는 아니었다. 어머니처럼 철저한 것은 아니라도 은연중에 주입된 정조 의식이 형배에게로
돌아가는 길목을 완강히 막아서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서울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단정에 가까운 예감도 현실적인 그녀에게 체념을 강요했다.
그러다가 영희가 다시 형배와 만날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된 것은 느닷없는 그의 편지가
온 뒤였다. 그가 말하고 있는 종말의 예감이라는 것이 어쩌면 과장된 그리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며, 헤어지고 거의 처음으로 그와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느낌
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재회의 형식이나 시기는 상상 속에서조차 막연하기 그지없었
는데,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이 그녀에게 그런 착각을 일으킨 듯했다. 되풀이 다짐한 재회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형배 쪽에서 파기한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곧 갈 건데. 가서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무릎 꿇고 빌고, 형배가 다시 받아만
준다면 새로 시작해보려 하는데...'
영희는 한동안 그런 원망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그걸 위해 목숨을 내
던졌던 대의나 그에게 그런 자기 투척을 강요했던 상황에는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유
년의 기억에는 가위눌림과도 같이 혼란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추상이었고, 조금 철이 들어서
는 금단의 과일을 엿보는 듯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그리고 지난 한 달은 까닭 모를 가슴
두근거림인 동시에 어두운 예감의 근원이었던 그 혁명이란 것에도.
그리하여 얼마 뒤 다시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엉뚱한 서두름이었다. 그전보다 훨씬 구체
적이긴 해도 아직 행선지나 시기는 막연한 상상 속에 방치되어 있던 가출의 결의가 갑작스
레 실천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가서 형배씨도 만나고 학교도 계속해야 한다. 이제 여기를
떠나야 돼...'
이윽고 영희는 자신이 받은 충격과 그런 결정 사이의 논리적 연관에 개의함이 없이 그렇
게 중얼거렸다. 형배가 이미 죽어 그와의 만남은 집을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이 언뜻언
뜻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그녀의 서두름을 달랠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뒷날 그녀의 삶을 또래의 여인들과 판이하게 이끌어간 성격상의 묘한 불균형도 영희의 첫
출발에 한몫을 했다. 크고 중요한 결정은 격정과 직감에 의지해 쉽게 끌어내는 데 비해 그
세부적인 과정에는 치밀하고 현실적인 계산으로 빈틈이 없는 게 그녀의 한 특성이었는데,
그때도 바로 그랬다. 기본이 되는 결정은 두 번 되풀이 생각해보는 법 없이 영희는 곧 출발
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에 들어갔다.
그러자 무엇보다도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출발에 필요한 돈이었다. 어머니의 뜻에 맞서
떠나는 이상 오빠 명훈을 찾아가는 것은 단념해야 했고, 그러자면 혼자 시작할 준비가 넉넉
해야 했다. 흑석동이나 구로동 같은 변두리가 되더라도 방을 따로 하나 얻으려면 적어도 만
환은 있어야 하고, 학교로 돌아가려면 두 학기분의 공납금에다 책값 합쳐 또한 적어도 6천
환, 거기다가 취직을 할 때까지 버티는 데 또 적어도 면천 환, 하다 보니 줄잡아 2만 환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거기서 영희는 나머지 계획이나 걱정은 모두 돈이 마련된 뒤로 미루고, 먼저 필요한 돈을
만들 궁리에 온 정신을 쏟았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까지 다니 적이 있는 열아홉의 여자
아이로서는 놀라운 대답성인 동시에 단순함이기도 했다.
뒷날 영희는 그녀와 비습한 삶의 길을 걷는 여인네들로부터 해결사란 별명을 얻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구체적인 목표가 결정된 뒤면 곧잘 발휘하는 그녀의 남다른 수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수완은 그때도 이미 어지간히 자라 있어 곧 몇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그녀가 첫째로 찾아낸 재원은 그전에 사라호 태풍 때도 어머니가 그것 하나만 이고 피난
갔다는 재봉틀이었다. 헌 걸 샀지만 일제라서 틀 대가리만 뽑아가도 만 환은 받을 수 있다
던 말을 언젠가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설령 어머니의 말이 과장이라 하더라도 그
절반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두번째는 영남여객댁이었다. 어머니의 옛말 삼아 하는 소리나 처음 밀양으로 왔을 때 걷
어붙이고 나와 도와준 걸로 보아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친분과 인연이 얽힌 집 같았다. 당
장은 감정이 나서 발길을 끊고 있지만, 잘만 하면 얼마쯤은 빌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서울에 있는 막내이모댁이었다. 이모부가 중령으로 서울 근처의 부대에
근무하고 있어 신촌 쪽에 살고 있었는데, 영희네가 찾아가면 겉으로는 바기면서도 속으로는
어딘가 경계하는 눈치가 느껴지곤 했다. 아마도 아버지 때문일 테지만-영희는 이모부가 얼
굴도 모르는 빨갱이 동서 때문에 진급에 지장이 많다고 불평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 그걸 거꾸로 이용해볼 작정이었다. 가서 눌어붙으면서 졸라대면 자신이 집 안에 있는 게
싫어서라도 얼마간은 빌려줄 것 같았다. 그 밖에 서울에 대여섯 집 되는 친가 외가의 친척
집도 급할 때는 약간은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대강의 방도가 서자 영희는 곧 행동에 들어갔다. 먼저 어머니가 신주단지 모시듯
몇 겹으로 싸묶어 시렁 위에 얹어둔 손재봉틀을 내려 상태를 살펴보았다. 'D'란 글씨에 금
박이 몇 군데 헐어 있었지만 어머니가 기름칠해 닦아둔 몸통은 아직 새것처럼 검고 반질거
렸다.
그러나 그 재봉틀을 이고 막 나서려던 영희는 문득 새로운 문제점에 부딪혔다. 그 재봉틀
을 처분할 곳이었다. 서울처럼 전당포가 흔한 곳이면 그곳에 잡히는 게 자신과 어머니를 위
해서 좋을 듯한데, 그런 작은읍에 전당호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거기서 중고품을 산다는
말은 들었지만, 출처를 의심해서 캐고 들면 일이 난감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옥경이가 뜻밖에도 좋은 곳을 일러주었다.
"언니, 재봉틀은 왜 내려놨어? 구제품 옷집에 갈 거야?"
방바닥에 내려놓은 재봉틀을 보자 어머니가 그걸로 일하던 헌옷가게가 생각나 물은 말이
지만 영희에게는 그런 옥경이 훌륭한 암시가 되었다.
'그래 거기 가보자. 그곳은 이 재봉틀이 필요한 곳이고, 값도 제대로 알 것이다. 옥경이를
데려가면 출처를 의심하는 일도 없을 게고. 또 원집산가 뭔가 하는 이북내기 아주머니는 우
리 사정을 잘 아니까 우리를 돕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영희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럴 참이야. 그런데 그 가게를 잘 몰라서 널 기다리는 중이었어."
"거긴 왜? 어니도 틀일 하려구?"
"아니, 이 틀 팔려구."
"뭐?"
옥경이가 놀란 듯 눈을 오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머니가 너무 아끼던 물건이라 어린 생
각에도 의심이 든 것 같았다. 영희는 옥경이부터 속여두어야 할 필요가 있어 필요 이상 세
밀하게 설명해주었다.
"오늘 엄마 편지가 왔는데, 거기서 그러라고 말씀하셨어. 서울 큰오빠 있지? 그 오빠가 데
모하다 다쳐 거기에 돈을 보내시는라 우리한테는 돈을 부치지 못하게 되셨대. 그래서 이걸
팔아 다음에 돈 부칠 때까지 쓰라는 거야. 쌀도 사고 반찬도 사고 옥경이 신발도 사고..."
그러자 옥경이도 의심이 가신 듯 쫄랑쫄랑 앞장을 섰다.
헌옷가게에서의 일은 기대 이상으로 잘 풀렸다. 원집사란 아주머니는 정말로 영희네를 동
정해서인지 아니면 재봉틀이 탐이 나서인지 여러 소리 없이 재봉틀을 7천 환에 맡아주었다.
돈은 어머니의 장담보다 줄어들었지만, 언제는 그 돈에다 5부 이자만 더해주면 물어주겠다
는 말이 영희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좀 어긋난 게 있다면 7천 환 중 4천 환을 이틀 위
인 장날에 받기로 한 것 정도일까.
거기에 힘을 얻은 영희는 돌아오자마자 영남여객 아주머니에게 쪽지를 썼다.
밀양 이모님께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이라 차마 찾아가 뵙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말씀드립니다. 당돌하다
나무라지 마시고 읽어주십시오. 오늘 어머님께서 편지가 왔는데 서울 명훈 오빠에게 아주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데모하다 가슴에 총을 맞아 목숨을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그 바
람에 어머님께서는 그 동안 고향에서 마련하신 돈을 모두 가지고 서울로 가시면서 저희들에
게 당부하셨습니다. 다음 돈은 내달말경에야 한 3만 환 나올 게 있으니 우선 이곳 생활을
만 환쯤 꾸어서 어떻게 꾸려나가보라는 것입니다. 옛정을 보아서라도 차마 거절하시지는 않
으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밀양 이모님. 이 은혜는 꼭 잊지 않을 터이니 가엾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한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어머님이 이곳을 떠나신 지는 벌써 두 달이 가까우나 이제껏 부쳐온 것은
가신 지 한 보름 만에 5천환 온 게 전부였습니다. 벌써 일주일째 아이들은 도시락도 싸가지
못하고 아침저녁 밀가루로 끼니를 때우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
오.
4293년 5월 14일
영희가 엎드려 빕니다.
철이가 한사코 영남여객댁으로의 심부름을 마다하는 바람에 다시 옥경이를 앞세워 보낸 그
편지는 이번에도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바라던 돈 대신에 쌀 한 가마니와 간장, 된장이
왔지만 그리 큰 차질은 아니었다. 영희는 쌀을 가마니째 싸전에 넘겨 목표한 금액을 쉽게
손에 넣었다.
그렇게 영희의 첫 출발은 채비가 갖춰져갔다. 멀지 않아 닥쳐올 산업 사회의 그늘을-흔히
매음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문명의 그 질펀한 밑바닥을-직접 그 몸으로 뒹굴며 헤쳐나가
야 할 운명의 길로 접어드는 첫 출발은.
제 38 장
G 현
버스가 역전통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제법 어둠살이 깔리고 있었다. 낮 동안 찌푸리고 있
던 하늘이 그예 비를 뿌리는 듯 차창에 가는 빗살들이 내리그었다. 기차역이 가까워오자 누
나도 마음이 여려지는지 보퉁이를 부둥키듯 안고 있던 손 하나를 빼내 철의 손을 꼬옥 잡았
다.
"철아, 꼭 내가 시킨 대로 해야 돼. 내일 당장 등기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우는 거야.
나는 가고 옥경이는 아프고 먹을 건 없다는 걸 써서... 그래야 남겨놓은 쌀이 떨어지기 전에
어머니가 온단 말이야."
평소는 좀체 듣기 어려웠던 부드럽고 살가운 목소리였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무도 돌
보아줄 사람 없는 곳에 어린 두 동생만 남겨두고 가는 게 걱정스러워진 모양이었다. 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부엌 살림의 요령을 이러주기 시작했다. 이미 이틀 전무
터 되출이 실습까지 한 것들이었다.
"쌀 이는 거 이제 알지? 세 번은 꼭 일어야 해. 쌀을 안칠 때 물은 손등이 보일 듯 말 듯
해야 되고, 밥이 끓어 밥물이 넘치면 불을 그만 때는 것도 잊지 말아. 콩나물국 끓일 때 냄
비 뚜껑 자주 열면 비린내 난다는 것도 알고 있지? 김칫단지 부뚜막에 얹어두면 군내 난다
는 것도..."
누나는 전에 없이 세밀하게 이것저것을 말해주었다. 철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생
각은 진작부터 딴 곳을 헤매고 있었다.
'누나가 떠난다. 어쩌면 영원히... 어머니는 결코 이런 누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
니가 용서하지 않으면 누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우리 남매는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누나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철은 그런 생각으로 누나인 영희보다 오히려 속깊은 비감에 젖어 있었다.
그것도 조숙 탓인지 모르지만, 철은 진작부터 누나가 돌아온 그 이튿날 아침부터였을 것
이다. 전날 밤 누나가 형과 어머니에게 끌려나가듯 나가는 걸 보고 불안스레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신의 상고머리보다 조금 나을까말까 한 까까머리로 변한 누나가 돌로
깎은 사람처럼 방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때마침 아침밥이라도 지으려는 듯 방을 나서는 어
머니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누나의 두 눈이 어찌도 그리 무섭게 번쩍이던지.이미 그것은 어
머니를 보는 딸의 눈이 아니었다.
그뒤 한 두어 달 , 어머니와 누나가 보이지 않는 싸움에 들어가 집안이 겉으로는 평온을 회
복한 듯할 때도 철의 그런 예감은 짙어만 갔다. 누나 뿐 아니라 이따금 누나의 등허리에
쏘아보내는 어머니의 눈길도 이미 피를 나눈 딸을 바라보는 눈길은 아니었다. 어떤 때-아주
드물었지만-그런 어머니와 누나가 말없이 등지고 앉은 걸 보면, 철은 조금도 과장 없이, 커
다란 얼음덩이와 한창 불붙은 장작더미가 한 구덩이에 던져져 김과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갑작스레 어머니가 고향으로 가서 방안에 누나 혼자서만 남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없어져도 누나는 여전히 그 방안에 남아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하루의 대부분을 망상하며 보내는 것은 틀림없이 그곳에서 먼 어떤 다른 세
계였고, 매일처럼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자라가는 머리칼과 함께 길러가는 것도 그 세계를
향해 떠나려는 결의임에 분명했다.
거기다가 언제부터인가 철의 의식을 건드려오는 이질감도 그녀가 떠나리란 예감을 길러주
었다. 먼저 그 이질감은 그녀의 예쁜 손목시계와 반짝이는 구두와 고급 만년필 같은 것으로
부터 왔다. 모두 서울에서 지니고 온 것들로, 초가집 아래채의 단칸 셋방에서뿐만 아니라 읍
내의 여학생들에게서조차 보기 힘든 물것들이었다. 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간 그날 오후부
터 방안을 떠돌게 된 럭스 비누의 향기나 그때로서는 값이 짐작 안 갈 만큼 비싼 나일론 스
카프며 늘어가는 크림통 같은 것도 그랬고, 고향의 어머니에게서 돈이 왔을 때 누나가 서슴
없이 한턱 내는 탕수육이나 생과자도 먹는 즐거움보다 그 같은 이질감의 원인이 되는 수가
더 많았다. 누나는 그런 것들이 예사스런 다른 세계에서 자기들의 어둡고 더러운 방으로 잘
못 굴러떨어진 사람이었다...
하기야 그 이질감의 부분에서는 철에게도 반발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철을 반발하게 한
것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누나가 평범한 가족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는 기억이었다. 그
때도 누나는 사지 스커트나 군데군데 가죽 장식이 달린 고급 책가방 같은, 그들의 살림살이
에는 어울리지 않게 비싼 물건들을 가질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혹독한 대가를
치른 뒤였다. 어머니는 그런 사치스런 물 것을 조른 누나와 덥석 사준 형을 몇 날이고 꾸중
과 잔소리로 들볶음으로써 누나의 그 같은 누림이 턱없는 짓임을 분명히했다.
역시 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간 뒤의 일이지만, 누나의 그 같은 누림이나 씀씀이가 철에
게 주는 피해도 적지 않은 반발의 원인이 됐다. 어머니와 함께일 때 같으면 한 달 생활비로
도 넉넉할 돈이 누나의 손에서는 열흘을 제대로 견디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것도 탕수육이
나 생과자처럼 셋이 함께 한 지출이 아니라 그녀 혼자만을 위한 지출로 끼니까지 위협 받게
되면 원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철이 누나에게 느낀 이질감이란 기실 호의적인 승인이라기보단 적의 섞인 체념에
가까웠고, 그녀가 떠나리란 예감도 가만히 따져보면 가정의 평온을 위한 바람(희망)에 지나
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나가 떠날 채비를 갖추는 그 며칠 간 철이 이렇다 할 슬픔
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 것은 분명 그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어린 옥경이와 둘만 남
겨지게 된다는 불안보다는 누나가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시작된 그 몇 달의 숨막힐 듯한 분
위기며 어머니가 떠난 뒤로 자신과 옥경이 받게 된 피해가 이제 끝나게 된다는 홀가분함이
더 앞섰다.
하지만 그날 저녁 무렵 막상 누나가 보따리를 꾸려 집을 나서는 것 보자 철의 마음은 갑
자기 변했다. 그게 바로 피의 끈끈함일까, 호오나 이해 타산만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새로운
감ㅇ정이 일며, 그때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그 떠남의 여러 의미를 돌아보게 하였다. 누
나가 마다하는데도 철이 굳이 기차역까지 따라 나오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란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는 비감에 젖어들
게 된 것이었다.
"역전 다 왔심더, 내리이소. 역전 다 왔십더, 역전요..."
그새 버스는 역전 광장에 멈추어 서고, 남자 차장이 반쯤 쉰 목소리로 그렇게 외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줄곧 이것저것 당부하고 다짐받던 누나가 보따리를 안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철이 넌 여기 앉아 있다가 이 차로 바로 돌아가. 옥경이가 기다릴 거야."
그제서야 깊이 모를 비감에서 퍼뜩 깨어난 철이도 몸을 일으켰다.
"아냐, 나도 내릴래. 어차피 이 버스는 누나가 탈 기차에서 내린 손님을 받아 태우고 읍내
로 돌아갈 거야, 누나를 바래주고도 넉넉히 탈 수 있어."
그런 철의 목소리에서 무얼 느꼈는지 영희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몇 방울씩 듣는 줄만 알았던 비가 제법 굵은 부슬비로 변해 있었다.
그때쯤은 누나도 철이와 같이 꽤나 감상적이 되어 둘은 빗발은 아랑곳 않고 천천히 역사 쪽
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막 켜진 외등 주위로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빗줄기가 까닭 없이
음울하게 느껴졌다.
대합실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당시 밀양에서의 서울행 기차는 낮차보
다 밤차가 더 인기있었다. 급행도 열 시간 가까이 거리던 시절이라 서울역에 떨어지면 아침
이 되는 밤차 쪽이 여러 가지로 편리한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그날은 비까지 내려 마중 나
온 사람이 더 많아지는 바람에 대합실이 전에 없이 붐비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떠나는 것일까. 서울의 누구를, 무엇을 찾아 떠나는 것일까...'
누나가 기차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동안 대합실 벤치 한 모퉁이에서 옷보따리를 맡
아 앉아 있던 철은 다시 자신만의 생각으로 빠져들어갔다. 한편 어둡게 보기 시작하자 그때
껏 아이다운 낙관으로 은근한 부러움까지 느끼며 상상했던 누나의 앞길도 갑자기 두렵고 불
안하게만 여겨졌다. 그가 읽은 책 속의 모든 집 나간 소년 소녀들이 겪어야 했던 슬픔과
고통이 일시에 누나를 덮치려고 기다리는 듯했다. 그 갖가지 슬픔과 고통이 다시 피를 통
해 자신에게도 전해오는 것 같아 철은 가볍게 진저리를 했다.
'내가 잘못했어.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에게라도 의논을 드리는 건데. 그 아주머니가 못 말
리면 어머니를 모셔와서라도 누나를 못 가게 했어야 하는 건데. 아냐, 지금이라도 말려야
해. 누나를 그냥 가게 해서는 안돼. 어쨌든 내 누나야. 이대로 잃어버릴 순 없어.'
이윽고 철이 그렇게 마음을 굳혀가고 있는데 차표를 산 누나가 돌아왔다.
"이제 됐어. 자, 일어나. 기차는 십 분 뒤에 도착이래. 그 보따리 이리주고 너는 그만 버스
로 가봐."
누나는 그 말과 함께 철이 안고 있는 보따리를 가볍게 나꿔챘다. 철이 두 손을 풀지 않고
누나를 올려보며 아이답지 않게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누나, 정말로 가야 돼? 서울 거기 뭐가 있어? 누가 기다린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가 이렇게 가볍게 받았다가 철의 얼굴에서 어떤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던지 갑자기 정
색을 하며 말했따.
"그래, 가야 돼. 거기서 날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여기 있는 것보다는 좋을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엄마가 그랬잖아? 여자는 집 밖으로 나돌아서는 안된다구. 더구나 누나
는 형도 찾아가지 않을 거 아냐?"
"그렇지 않아. 오빠는 찾아봐야지. 곧 찾아보고 되도록이면 전처럼 함께 있어야지."
"거짓말 마. 형한테 가면 형이 엄마한테 편지 안 할 것 같애? 그리고 엄마가 그걸 알면
누날 그냥 가만둘 것 같애? 당장 쫓아올라가 잡아올거야."
그제서야 누나도 철을 어린아이로만 취급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털
어놓았다.
"물론 당장은 곤란하지. 그렇지만 성공하면 오빠를 찾아갈 거야."
"성공이 뭐야? 아무도 없는 곳에 누나 혼자 올라가 어떻게 성공을 한다구 그래?"
철은 나름대로 제법 배섭게 따지고 든다고 따지고 들었으나 누나는 별로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취직, 학업, 훌륭한 사람 따위 추상적인 말로 어렵잖게 철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오래잖아 철은 아직 논리로 누나를 잡아둘 수 없다는 걸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은 뚜
렷하게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번에는 재빨리 감정쪽으로 매달려보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떠나면 나와도 마지막이야. 어쩌면 우린 이 세상에서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성공해서 돌아온다구 하잖았어?"
"엄마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엄마가 용서하시지 않으면 나도 누나를 다
시는 못 보게 돼. 성공 못 하면 더욱 그렇구... 결국 이걸루... 영원한 이별이야..."
거기까지 말해놓고 나니 철은 절로 눈물이 솟았다. 어쩌면 그대 철은 이별의 슬픔 그 자
체보다 책에서 읽은 여러 가지 감동적인 장면들 주의 하나를 자신의 실연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감정이 과장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억세고 꿋꿋하다고는 해도 누나는 역시
열아홉의 처녀 아이일 뿐이었다. 철의 눈물을 보자 그녀도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넌 왜 여기까지 따라와 사람을 울리구 그래? 쬐그만 게..."
누나가 울음 섞인 소리로 그렇게 철을 나무라는데 갑자기 개찰구 쪽이 수런거리며 사람들
이 그리로 몰렸다. 개찰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자극이 되었는지 무엇에서 퍼뜩 깨
난 사람처럼 눈가를 만져 눈물 흔적을 없앤 누나가 세차게 옷보따리를 채갔다.
"어쨌든 나는 떠나야 돼. 여기 있다간 미치거나 말라죽고 말 거야."
누나가 다시 철에게 입을 뗀 것은 개찰구를 두어 걸음 남긴 곳에서였다. 그새 눈물을 씻
고 곁에 붙어선 철에게 누나는 다시 약간 떨림 섞인 목소리로 작별의 다짐을 건넸다.
"철아, 잘 있어. 공부 열심히 하고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 나도 잘할거야. 꼭 성공해서 돌
아올 거야."
그때 그녀가 말한 성공이란 말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의 어떤 보통명사보다 더 뚜렷
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말로 어김없이 믿으며 둘이서 주고받은 그 추상명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날 철은 누나가 보슬비 속을 뚫고 어두운 플랫폼 쪽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을 더 개
찰구의 나무 난간에 기대서 있었다. 비에 젖어 번쩍이는 철길을 건너 상행 승강장 쪽을 멀
어져가는 누나의 뒷모습이 어찌도 그리 자그맣고 외로워 보이던지. 그 바람에 갑자기 추상
화된 슬픔을 잡을 수 없는 눈물이 되어 철의 두 볼을 줄줄이 타고 내렸다. 모르긴해도, 어쩌
면 그때 철이 눈물 흘린 것은 거칠고 어두운 세상 속으로 떠나가는 한 피붙이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황무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내던져진 인간 일반의 쓸쓸한 몸부림 그 자체에 대해
서가 아니었는지.
뒷날 한 말(언어)의 장인이 된 철이 역을 소재로 쓴 어떤 소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그 무렵의 나는 주로 대합실의 나무 벤치 위에 막연히 앉아 시간을 보냈었다. 아마도 내
어린 영혼이 미처 주체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그만큼 찬란한 공상에
잠겨서였을 것이다. 따로 그 대합실 주변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장소
와 결합된 기억 중에서 그때의 내 슬픔이나 공상의 두터운 벽을 뚫고 내 의식에 아프게 와
닿은 것들만이 때때로 애련한 슬픔 속에 떠오른다.
가출하는 누님을 식구들 몰래 전송해주었던 저녁, 내가 난생 처음 삶의 우수에 가슴 저려
한 것도 그 대합실에서였고, 질주하는 야간 열차의 창에서 새어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을 느
닷없는 애상에 젖어 바라보며, 그 속에서 떠오르는 창백한 얼굴들에게 알지 못할 연민을 느
끼기 시작한 것도 그 대합실에서였다. 아아, 부슬비 오는 날 심금의 G현을 울린 것은 산굽
이를 돌아가는 열차의 긴 기적 소리였지. 어느 곳으로든 떠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을 실천
하고자 하는 장한 결심으로 내 작은 주먹은 얼마나 자주 텅 빈 대합실의 나무 벤치를 내리
쳤던가...
모든 자전이 어쩔 수 없이 소설적이듯이 모든 소설 또한 어쩔수 없이 자전적이다. 틀림없
이 철은 그 소품의 주인공처럼 기차역 주병에서 자라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역에서 그
날 밤과 같은 인상적인 사건이 일생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 작품도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39장
그해 6월의 캠퍼스
자유, 너는
피를 머금어 피어나는 꽃
소유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열망한는 자의 것...
자신의 시름 소리내어 읽는 유만하의 목소리가 오울리지 않는 노랫가락처럼 강의실을 휘
젓고 다녔다. 토요일 오후라 벌써 조용해진 운동장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던 명훈은 높아진
유만하의 목소리에 놀라 그가서 있는 족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런 명훈의 귓속으로 한층 높
아진 유만하의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불의한 총칼이 파리한 심장을 찢어
더운 피 남김없이 *도를 적셔도
오오, 자유여
너는 영원하라
그러므로 더욱 세차게 타오를 우리의 열망처럼 영원하라...
거기까지 읽은 유만하는 상기된 얼굴로 원고지를 넘겼다. 그즈음 들어 매주 토요일마다
있는 합평회에서 녀석이 발표하는 시는 거의가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회원들의
표정은 심드렁해 보였다. 실은 유만하뿐만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걸핏하면 그 비슷한 시로
열을 올리곤 했다. 그날도 유만하에 앞서 '늦어버린 혁명가'란 제목의 시를 읖은 회원이 하
나 있었다.
대학생이란 신분 하나만으로도 야릇한 승리감에 들떠 있는 그들에게 혁명, 자유, 피라는
단어는 특별히 세련된 구조로 얽히거나 절묘한 경구로 수식되지 않더라도 쉽게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 바람에 5월 한 달은 온통 혁명시와 참전기로만 합평회를 채워가다시피 앴다.
말할 것도 없이 명훈도 그런 분위기에 적지 않은 유혹을 느꼈다. 더구나 회원들도 그 모
임에서는 유일한 의거 부상자인 명훈에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거기다가 입원해 있던
열흘 동안 겪은 새로운 의식과 발의 세계는 김형과 황의 논쟁을 경청하면서 익힌 것돌과 더
불어 명훈에게도 그런 종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을 주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막상 펜을 들고 써보면 도무지 시가 얽어지지 않았다. 부상의 참
된 까닭이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라는 데서 온 마음석 깊은 속의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했지
만, 그보다는 갑작스레 세상을 파도처럼 휩쓰는 의사 의식에 대한 반발 탓이 더 컸다. 합평
회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마다 넘쳐나는 말이 민주 자유요 혁명이요 정의였다.
'이러다간 애국문인**날까 걱정'이란 제목의 비꼬임 섞인 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신
문의 사회면이 연일 자유당 간부와 그 협력자들의 구속 기사로 메워지는 것과 짝을 이루어,
문화면은 4월 19일에 일어난 일이 정말로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로 그날의 일인가 의
심이 갈 만큼 엄청난 해석과 의미 부여로 넘쳐나고 있었다.
신문과 잡지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도 모두 스스로를 승리한 혁명군의 일원으로 착각하
는 것 같았다. 모두들 갑작스레 의사 표현에 용감해져서 전리품을 요구하듯 떼를 지어 거리
를 휩쓸고 다녔다. 강화도의 어떤 패륜아는 혁명의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때가 왔따 하며
평소 거추장스럽게 여기던 아버지를 때려죽였다는 기사까지 보였다. 종류는 달라도 대학 또
한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주자처럼 학원으ㅗ 돌아갔지만 학업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다 풀지 못한 열정은 학내로 옮아붙어, 특히 5월 한 달은 캠퍼스마다
어용 교수시비로 왁자했다.
명훈에게는 차츰 그런 현상이 사회 한구석에서 일고 있는 광기가 아니라 전체를 휩쓰는
분위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득 아득한 유년의 기억에서 한 섬뜩한 인물이 떠
올랐다. 전쟁 전 혜화동에 살 때 그곳 통장 노릇을 하던 영감이었다.
...땅을 좀 사서 농부로 위장한 아버지가 하계에 숨어살기 전의 일이었다. 그 무렵 영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명훈네 집을 들렀는데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가 다녀갈 적마다 화를 냈다.
"저 영감쟁이는 뭣 땜에 매일 남의 집을 삐꿈삐꿈 들여다보나?"
"그러게 말예요. 무슨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아들이 민청에 나간다고 그랬지만 아무래
도 수상쩍어요. 접때 한 열흘 우리집 부근에 잠복했던 그 형사들 있잖아요> 한번은 그 형사
들하고 요 앞 골목에서 쑥덕대는 걸 봤다데 여간 사이가 은근해 뵈지 않던데요."
대개 그런 의심과 경계에서 나온 수군거림과 함께였다. 그리고 하계로 옮겨갈 때도 무엇
보다도 영감의 눈에 띄는 걸 겁내며 야반도주를 하듯 식구들 몸만 혜화동 집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며칠 뒤 혜화동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머저 뛰어와 넉살을 떨고
없어진 가구나 집기를 되찾아주는 데 열심히던 사람이 바로 그 통장 영감이었다. 영감은 명
훈네가 집을 비워두고 있던 동안 몰래 가구자 집기를 집어간 사람들을 알아두었다가 되찾아
들인 것이라 떠벌렸지만 동네 사람들의 비쭉거림에 따르면 그 태반은 자신의 집에서 가져왔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맏아들이 민청 간부로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고 있고 영감 자신ㄷ 어느새 동
인민위원이가 뭔가가 되어 있어 할머니와 어머니도 예전같이 무턱대고 경계와 의심으로만
대하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인민군 환영 대회를 전후해서 그가 보여준 열성은 어린 명훈까
지 예전의 까닭 모르게 싫던 감정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때 그는 가장 큰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동네 사람들을 대회장으로 이끌었는데, 동네 골
목을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위대한 인민 해방군 만세'와 '남조선 해방 반세'의 선창으로
목이 쉬어 있었다. 아버지를 인민군 대장쯤으로 착각하고 있던 그 무렵의 명훈으로서는 감
동되지 않을 수 없는 열성이었다.
그러다가 9,28 서울 수복 뒤의 어느 날 밤을 마지막으로 그에 관한 기억은 섬뜩함 속에 굳
어지고 만다.
S시에 황망히 북으로 떠난 아버지를 따람 남은 식구들도 모두 북쪽으로 딜을 잡았다가
그새 북진한 경찰과 군대가 무서워 더 북쪽으로 가지 못하고 서울에 자리잡은 며칠 뒤의 일
이었다. 명훈은 할머니와 어머니 몰래 혜화동 옛집으로 숨어들었다. 별달ㄴ 준비 없이 나선
길이라 먹을 것과 바꿀 만한 물건이 없는 식구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몰래 모험을 한 것
이었다. S시로 옮겨가지 전, 당장에는 필요없지만 그래도 좀 값나가는 것은 뒷마당의 작은
방공호에 감춰두고 나온 일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그 모험에서 명훈은 세 번씩이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첫번째는 기름 종이에 따둔 겨울옷
뭉치에서 양단 치마저고리와 공단 두루마기를 꺼내가 쌀 두 되와 바꾸었고, 두번째는 놋그
릇과 놋제기 한 자루를 가져나와 또한 시구들의 먹을 것을 얻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
다. 세번째는 무얼 꺼내왔는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어쨌든 그걸로 떡을 바꿔서 돌아도는 길
에 명훈은 그 통장 여감과 마주치게 되어싸ㄷ.
"보자, 너 저쪽 큰 유리 대청집 애지?"
명훈을 보자 영감은 달려와 손목을 잡듯 그렇게 물었다. 자신을 겨우 그렇게밖에 기억해
주지 않는 게 한편으로는 서운하면서도 명훈은 앞서는 반가움에 눈시울이 다 화끈했다. 그
바람에 명훈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당부도 잊고 그가 묻는대로 그들 가족의 근황를 사실 그
대로 말해주었다. 다 듣고 난 그가 별내색 없이 말했다.
"굳이 딴 곳에 숨어지낼 거까진 없는데... 가서 할머님이나 어머님께 말씀드려가. 내가 임
시로 이곳 치안대장을 맡고 있으니까, 돌아오셔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 말ㅇ르 전해들은 어머니와 할머니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 그 사람이 멀쩡하게 동네를 나다니더라고? 도군다나 치안대장까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또 경찰 쪽에 붙었다는 말 아녜요? 우리를 끌어들여 경찰에 넘기려는 수작일 거예요."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할머니는 좋게만 생각했다.
"그 사람같이 열렬한 일꾼이 어째 그리 되겠누? 다 수단일 게라. 자기 한몸 살고 우리 같
은 사람도 도우려구 수완을 부린 게지. 분명히 무슨 딴 내막이 있을 게야. 만약 우리를 붙들
생각이라면 명훈이는 뭣 땜에 놓아주었겠누? 바로 애를 붙잡아 앞세우고 여길 찾아오면 되
지..."
거기서 고부간에 한동안 가벼운 말타툼이 있었으나 곧 절충이 이루어졌다.
"그럼 나 혼자 먼저 가보마. 만약 붙들리면 내 한 몸 입 다물고 죽지. 내가 저물어도 안
오거든 아이들 데리고 달리 빈집을 찾아봐라."
할머니가 그렇게 나오자 어머니는 더욱 반대하고 나섰으나 끝내 말리지는 못했다. 벌써
날은 추워오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옷밖에 없는 그들이었다. 먹을 것도 멀을 것이
지만 문종이도 제대로 발려 있지 않은 빈집에서 떨며 밤을 나야 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
다.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할머니는 해질 무렵 이불 보퉁이를 이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글쎄, 그 사람이 정말로 그 동네 치안대장이더구나. 몸이 아파 여름에 벌써 동 인민위원
을 그만두고 있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경찰이 들어와 전에 통장질한 것만 가지고 치안대
장을 시켜주더라지 뭐냐? 그래서 자기 한 몸도 지키고 다른 일꾼들 가족도 보호할 생각으로
맡았다는 거야. 내 짐작이 맞았ㅈ. 워낙 수완이 놓은 사람이었으니... 어쨌든 내일은 혜화동
집으로 돌아가자."
할머니가 직접 가보고 돌아와 그런 소리를 하자 어머니는 드디어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렇다면 내일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요? 저물더라도 오늘 당장 우리 집으로 돌아가죠.
어차피 돌아갈 양이면 하룻밤이라도 내 집에서 자는게 편하지 않겠어요?"
오히려 그렇게 서둘러 앞장을 섰다.
그리하여 그들 일가가 혜화동 옛집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막상 마
음먹고 돌아오기는 했어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옛집이 공연히 불길하게 느껴져 머뭇머
뭇 다가서는데 갑자기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 같은 게 났다. 이어 집 안과 골목 구석구석에
서 우르르 달려나온 것은 그동네의 우익 청년들이었다.
"왔구나! 드디어 몽땅 제 발로 걸어들어왔구나!"
그들이 그렇게 소리치며 플래시를 비춰댔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게 몹시 실망스러운 모
양이었다.
"낌새를 알고 다른 데로 툰 거야."
그렇게 저희끼리 주고 받는데 플래시 불빛 아래도 한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에 어
울리지 않게 군 작업복을 걸친 통장 영감이었다.
"모두 끌고 가."
영감은 명훈네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원들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실제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나는 순간의 환상이었다. 명훈은 그 영감이 이번에
는 커다란 태극기를 휘두르며 진주해오는 국군과 유엔군을 맞아들이는 모습을 본 듯했다.
애국가로 벌써 목이 쉬어...
그런데 명훈이 그 해 5월의 시위 군중들에게서 언뜻언뜻 보는 것은, 진정한 정의감과 용
기로 나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도, 바로 그 통장 영감이었다.
그들이 앞세운 플래카드에서는 그 영감이 흔들고 나서던 인공기나 태극기가 느껴졌고, 그
들이 외치는 구호도 옛날의 그 목쉰 만세 소리처럼 들리곤 했다. 어떤 때는 신문의 이부 기
고람이나 심지어는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데모에서까지, 절반은 겁에 질리고 절
반은 아첨에 찬 그 만세 소리를 들을 때가 있었다.
'차라리 가만히들 있기나 했으면...'
명훈은 언제부터인가 시위대만 보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소박한 견해로는 그
혁며의 과일을 움킬 자격이 있는 것은 실탄 사격에도 꺾이지 않고 경무대나 서대문에서 공
방전을 거듭하던 그 학생들 몇 뿐이었다. 뒤에 가세한 구두닦이나 양아치들은 말할 것도 없
고, 제법 학생들과 함께 어울린 어른들도 그 본질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보면 혁명을 가장 순진하게 이해하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리 되
고 보니 그런 주제에 제대로 감흥이 일 리 없고, 감흥이 없다 보니 혁명시 같은 게 씌어질
리 없었다.
그사이 시 낭송이 끝났는지 유만하가 원고를 접어들고 명훈 곁에 있는 제자리로 돌아고있
었다. 몇 사람의 박수로 미지근한 호평을 나타냈다.그제서야 명훈도 마음 안 내키는 박수를
보탰으나 속으로는 한 달 전 병원으로 찾아온 유만하가 부끄러운 고백처럼 뇌까리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시인은 역사의 조연에 불과하다더니 젠장할, 내가 꼭 그 꼴이 되고 말았어. 그 전날 결심
이야 장했지. 특히 고대생들이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나도 한판 박터지게 붙어볼 참이
었어. 그런데 그 웬수놈의 술이, 울분을 핑계삼아 초저녁부터 모여 퍼마시기 시작한 술이 새
벽 2시까지 뻗쳤거든. 다음날 깨고 나니 벌써 12시데. 학교에 가봤자 모두들 떠났을 테고,
그렇다고 혼자서 데모를 나설 수도 없고... 그래서 에라, 하고 다시 누워버렸지.다시 이어나
니 하마3시야.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좀 심각한 놀이 같은 데모만 생각하고 있었지 혁명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했거든. 그런데 밖에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 말씀이 숙취를 싹 가
시게 하더군. 경찰이 총질을 하고 학생들이 수없이 죽고, 그 소리를 듣자 그제서야 이건 아
니다 싶더군.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 위대한 역사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 가기를 꺼려하는 택시 운전사를 달래 남영동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중앙청 앞
까지 걸어갔을 때는 이미 상황 끝이더군. 계엄령이 선포되고 탱크가 시가지로 들어서고 있
었어. 젠장할, 조연은커녕 구경꾼 노릇조차 제대로 못한 셈이야. 그 이튿날부터 열심히 뛰었
지만 역사의 핵심이 되는 무대는 19일 하루로 막이 내려져버린 뒤였어. 기껏해야 뒷불이야.
우리의 시처럼..."
그날 그렇게 뇌까리던 유만하의 눈길에는 무엇을 향한 것인지 모를 통분 같은 게 번들거
렸다. 명훈으로서는 얼른 이해 안 되는 감정이었다.
"어땠어? 너무 산문적인 것 같지 않아?"
자리에 앉은 유만하가 명훈의 허리를 꾹 찌르며 물었다.
"으응, 뭐?"
명훈이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되물었다. 유만하가 조금 겸연쩍어 하는 얼굴로 물음의
내용을 바꾸었다.
"내 시 말이야, 너무 아폴리즘에 집착한 거 같지 않아?"
그러나 명훈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마침 그 문학회의 회장인 영문과 3학년 학생
이 비슷한 요구를 거기 있는 회원 모두에게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국문과 1년 유만하씨의 '자유송'낭독이 있었습니다. 회원 여러분의 활발한 비판과 토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회장의 제안에 이어 곧 열기 없는 합평이 시작되었다. 너나없이 문예론에는 그리 밝지 못
해 장님이 장님 길 인도하기 식의 어설픈 인상 비평이 한동안 오갔다. 불문과에 다닌다던가,
우리말보다는 외래어를 더 많이 섞어 알아듣지도 못할 논리로 딴 회원이 발표하는 작품마다
난도질 해대던 안경잡이가 안 나온 게 오히려 합평회의 열기를 줄여버린 느낌이었다.
명훈은 언제나 그렇듯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원래도 남의 작품을 평할 만큼
이론이 있는 편이 못 되는 데다. 민주니 자유니 하는 시에는 더욱 입댈 자신이 없어서 였다.
유만하를 빼고는 아직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할 만큼 서먹한 나머지 다른 회원들과의 관
계도 명훈을 뻣뻣이 굳어 있게 했다.
명훈이 그 문학회에 나가게 된 것은 퇴원하고 며칠 안 돼서였다. 깡패들에 대한 경찰의
수배망이 점점 촘촘해져 백구두나 살살이 정도의 골목 오야붕들까지 쓸어가는 걸 본 명훈은
학교를 유일한 피난처로 삼았다. 자취방에 있는 것조차 불안해 학적은 야간에 두고 있으면
서 아침부터 학교에 나가 저물도록 어정거리는 식이었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보내준 만 환
이 힘이 되어 헤프게 쓰지만 않는다면 방학까지는 어떻게 견뎌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러나 억지 춘향이 꼴로 학교에는 하루종일 붙어 있어도 강의를 듣는 데는 끝내 별재미를 붙
이지 못했다. 꼭 필요한 강의만 때우고는 빈 강의실을 찾아 낮잠을 자거나 기껏해아 도서관
에서 소설 나부랭이를 읽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유만하도 주간부에 나타나 그런 명훈을 문학회로 이끈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시란 명훈에게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멀고 그리운 고향 같은 것이었다. 저
안광에서의 암담한 시절, 자포자기와 다름없는 심경으로 역전 뒷골목을 헤매며 소년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우연히 얻어 읽게 된 소월 시집이 준 것은 감동이라기보다는 섬뜩한 충격이
었다. 자신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면 그 까닭은 바로 그러한 세계를 몰랐기 때문이며, 요행
가치 있는 삶으로의 복귀가 가능하더던 그것은 틀림없이 그 세계를 통해서일 것 같았다. 몸
은 소매치기의 바람잡이로까지 전락해가면서도 소월 시집의 맨 첫머리부터 끝 구절까지를
줄줄 외다시피한 그 엉뚱한 열정은 바로 그런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안광을 떠날 때까지도 시는 아직 막연한 동경에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알 수
없는 충동으로 일상의 말과는 다른 체계와 용도를 가진 구절들을 얻어내고 가슴 설레한 적
은 있었지만, 그게 시로 접어드는 길목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던 명훈이 시를 한 구체적인 구원의 가능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서울로 옮겨온 뒤
고등학교에 편입하고 나서였다. 정규 교육이 국민학교 6학년 1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끝
나버린 뒤로는 고향 돌내골에서 친척 형들이 옛 서당 자리를 빌려 열었던 야학을 한 일 년
오락가락한 고등공민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그에게 갑작스레 시작된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은
거의 생소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유일한 예외가 국어 과목, 그 중에서도 특히 시였다. 어
둡고 거친 세월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읽은 흥미 위주의 소설 덕분인지, 국어만은 논설문의
예문으로 시작된 첫 시간부터가 낯설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틀림없이 우리말이면서도 뜻모
를 낱말이 튀어나와 암담해지고, 쓸데없이 길게 길게 이어놓은 문장 때문에 뻔한 낱말로 이
루어졌는데도 그 뜻이 얼른 오지 않아 가슴이 철렁한 적도 있었지만, 국어 사전의 힘을 빌
리고 거듭된 정독을 거쳐 그 문장이 뜻한 바에 이르는 과정은 차라리 기쁨에 가까웠다. 그
러다가, '시의 이해'란 그 다음 단원이 시작되면서부터 시는 막연한 동경에서 구원의 가능성
으로 명훈에게 다가왔다. 틀림없이 실패한 시인인 듯한 털보 국어 선생을 통해 그때껏 나름
의 이해와 감동으로 알아왔던 시의 또 다른 의미에 어렴풋하게나마 닿게 되면서, 명훈은 비
로소 자신도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더불어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 것
이었다.
그때 그런 명훈을 격려해준 게 '학원'지였다. 물론 그전에도 명훈은 그런 잡지가 있는 줄
은 알았으나 어쩌다 손에 들어와도 구석구석 살피지는 않았다. 그저 팔자 좋은 학삐리들이
나 끼고 다니는 잡지쯤으로 여겨 은근한 반감까지 느끼며 만화나 훑고 내던져오다 드디어
자신도 학생이 되자 어떤 의무감 같은 걸 느끼며 꼼꼼히 일게 되었는데, 거기서 보게 된 학
생 문예란이었다. 명훈은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벌써 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
과 시새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 못지않은 것이 거기 실린 작품이 대단찮아 보임에서
오는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이 정도는 하는 생각이 비로소 그에게 시를 써볼 용기를 준것이
다.
예상외로 그 성과는 컸다. 인색한 대로 국어 선생의 칭찬으로부터 맛보기 시작한 시의 달
콤한 과일은 마침내 자신의 글이 인쇄된 걸 보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시를
통해 경애로부터 스스로 인정 받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인으로서의 삶을 꿈
꾸어보기까지 했다. 그로서는 좋은 시적의 얘기였다.
하지만, 가정이 흩어지고 경애가 떠나가면서부터 헝클어지기 시작한 그의 감정은 서정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시까지 헝클어놓고 말았다. 그러다가 잘못된 정보로 집요하게 추적해온
경찰의 시달림을 받고 직장을 잃고 배석구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거친 뒷골목 생활로 되돌
아 가게 되자. 시는 음침한 여정의 형태로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숨어버렸다. 특히 대학에 등
록하기 전에 대여섯 달은 야릇한 반감까지 느끼며 의식적으로 시를 외면하기까지 한 시기였
다.
그런데 막연하게 시작된 대학 생활과 거기서 만난 유만하가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흔이
사람들에게 미신처럼 퍼져 있는 국문과와 시의 연관성에다, 실제 이상으로 명훈의 재능을
높이 보는 유만하의 부추김이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추억을 되살려주듯 시에 대한 명훈의
열정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특히 어쩔 수 없이 학교를 피난처로 삼게 되고, 거기서 고등학교
때와 다름없이 어떤 학문적인 성취보다는 졸업장이나 기다려야 할 삭막한 대학 생활이 시작
되어서는 다시 옛날 시에서 보았던 구원의 가능성까지 되찾을 수 있었다. 유만하에게 억지
로 끌려온 척했지만, 모임에 참여한 뒤로는 매주 있는 합평회에 한번 거른 적이 없었던 것
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마침 그 문학회를 휩쓰는 분위기는 명훈이 홀로 길러온 그런 시에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의 말은 겨우 그가 살아온 세월의 황폐하고 신산스러움을 아득한 슬픔과 외로움
의정조로 바꾸는 데나 익숙해 있을 뿐이었다. 그걸 삽시간에 설익은 관념과 과장된 감격으
로 엮어진 혁명사로 바꾸기에는 이미 말한 까닭 외에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회장, 동의가 있습니다."
어떤 웃음 헤픈 여학생 회원의 지리멸렬한 평을 끝으로, 더 나서는 평자가 없어 다음 회
원의 발표로 넘어갈 무렵 강의실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명훈이 보니 언제부터인가
까닭 모르게 관심이 가던 회원 하나가 앉은 채로 손을 들어 하얀 손바닥을 펴보이고 있었
다.
명훈이 참가한 다섯 번의 합평회에서 한번도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어 시 쪽인지 산문 쪽
인지조차 잘 알 수가 없었으나, 명훈은 왠지 그가 남다른 무엇이 있는 무엇이 있는 사람처
럼 느껴졌다. 그도 명훈처럼 줄곧 침묵으로 다른 회원들의 글과 말을 듣기만 하는 쪽이었지
만 그 입가를 떠도는 엷은 웃음은 어쩐지 경멸과 냉소의 혐의가 가는 것이었다.
"장형수 회원, 말씀하십시오."
회장이 뜻밖이라는 듯 그를 멀거니 건너다보며 발언을 허락했다. 그러자 장은 앉은 채로
가볍게 몸을 뒤채며, 회장에게라기보나는 여럿을 향해 말했다.
"이제 앞으로 이 합평회에서의 작품 발표는 주제를 좀 제안했으면 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를 말씀하는지요?"
회장이 더욱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러자 장이 악의가 드러나는 말투로 그 물음
을 받았다.
"민주 타령, 자유 타령에 되다 만 혁명 환상곡은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이겁니다."
그 말에 일순 실내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명훈도 생각은 비슷했지만, 막상
그렇게 드러내어 말하는 것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 장을 보았다. 장이 꼿꼿하게 그런
명훈의 눈길을 되받았다.
여럿 앞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쓴 꼴이 된 유만하가 애써 감정을 감추며 말했다.
"물론 나도 우리의 솜씨가 미숙하고 낱말 선택이 서투르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무
엇보다도 시는 한 시대의 의식의 결정입니다. 따라서 주제로는 방금 장형수 회원의 빈정거
린 그것들이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듯싶은데요."
"나는 회원들이 발표한 시의 기교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 회원들이
발
표한 작품들은 아직 길 위에 있는 우리 처지로선 감탄할 만한 수준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시대 의식이란 겁니다. 어거지로 덧씌어진 것 같은 그 의사 의식이 메스껍
단 말입니다."
장은 그렇게 맞받아놓고 한층 혐오 섞인 말투로 말했다.
"어제까지 서정만을 시의 요람으로 여겨오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의 아들이여,
정의의 순교자여!" 하며 생경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것이나, 덜 소화된 실존을 꺼억꺼억 토해
낸 것에다 꼬부랑 단어 몇 개 웃기로 얹어 모더니즘이네 뭡네 하고 사람 겁주던 양반이 갑
자기 '그놈의 사진부터 밑씻개로 쓰자!' 따위를 비명처럼 질러대는 게 구역질나지 않습니
까? 좀 가혹한 말이지만, 우리는 부디 그런 기성 세대의 뇌동에 다시 뇌동하지 말자 이겁니
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이제 이만큼 푸닥거리를 했으면 가당찮은 혁명 콤플
렉스에서 벗어나 이제 제노래를 부르자는 말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고함처럼 터져나왔다.
"뭐야? 그럼 그런 시는 모두 부화뇌동이란 말이야? 모두가 숭어 따라 뛰는 망둥이 새끼들
이란 말이지?"
"저 자식 적 수상한 자식 아냐? 야, 너 정체가 뭐야? 우리의 피로 이룩한 거룩한 혁명에
무슨 불평이 있느냐구? 뭐가 못마땅해?"
둘 다 전에 혁명시로 갈채를 받은 적이 있는 회원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4,19날 몇 안
되는 그 학교 데모의 주동자 였다는 소문도 있어 시가 한층 실감 있게 들렸었는데, 그쪽 목
소리가 훨씬 거칠고 시비로였다.
"조용히 합시다. 지성인다운 토론이 되도록 유의해주십시오."
회장이 그렇게 둘을 주저앉혀놓고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장에게 물었다.
"확실히 장형수 회원의 말씀에는 우리가 귀모아 경청할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혁명 콤플렉스란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상대가 워낙 예절을 갖춰 묻자 알 수 없는 악의에 내몰리는 듯하던 장이 오히려 어쓱해
말을 더듬었다.
" 이를테면, 혁명 그 자체보다 지각한 혁명 의식,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부재감, 전혀 기
대하지 못했던 복권이 맞아떨어졌을 때와 같은 당혹 따위가 있겠지요. 넓게는 불안에 찬 관
망과 능동적인 참여의 혼동,군중 심리에 의한 돌팔매질과 혁명 이념으로 치른 역전의 혼동
따위도 포함되겠지만..."
"야, 말 어렵게 만들지 마."
"공연히 잘난 척 뒤틀지 말라구."
다시 앞서의 둘이 성난 소리로 끼여들었으나, 역시 회장은 회장다운 데가 있었다. 그 둘을
엄격한 눈길로 제지하고 난 뒤 다시 조용히 물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 혁명에 대해 떳떳하지 못함이 더 큰 목소리의 노래로 나온다는 뜻으
로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감정의 투기도 있습니다. 우연한 휩쓸림을 의도적인 투쟁으로 미화하거나 대단찮은 동참
으로 결정적인 기여로 과장해 남과 자신을 함께 속이고 원래 이상의 몫을 차지하려는 것 따
위지요. 비록 그것이 무형의 감정적인 도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장이 이죽거리듯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그때껏 용케 참고 있다 싶던 유만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문학적인 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문학과 본질적인 관련을 가진 부분이 있어 이
논의를 본격적으로 끌어나갔으면 합니다. 과연 장형수 회원의 준엄한 지적은 그날 불행하게
도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했던 저 같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일으키게 하는 데가 있
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먼저 지각한 혁명의
해석에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뒤늦은 의식에는 앞선 행위를 보완하는 효과가 전혀 없는
것입니까?"
"물론 모든 혁명이 혁명 의식의 형성과 혁명적 행위의 착수 순서로 진행된 것은 아닙니
다. 때로는 그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고, 한꺼번에 뒤엉켜 있기도 하겠지요. 또 행위보다 늦
은 의식이라도 행위를 보완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기능은 내
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성찰과 회개의 촉구 없이 목소리만 높여 불려지는 승리의 혁명가
는 다만 의사 의식을 양산할 뿐입니다."
장과 유만하의 공방이 그렇게 진행될 때만 해도 명훈은 은근한 감탄까지 머금고 귀를 기
울였다. 황과 김형이 학적을 둔 명문에 주눅이 들어, 자신도 그들 중의 하나이면서도 동문들
을 '형편없는 따라지 대학' 하는 눈으로 보아오던 명훈에게는 제법 자부심까지 느낄 만큼
조리 있는 논쟁으로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조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면적인 성찰이나 회개의 촉구 없이 다만 목고리만 높여 불러 지는 혁명가는 의사 의식
을 양산할 뿐이라는 지적, 이 시점에서 적절하고 유익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노
래가 그러했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
습니다. 조금 전 장형수 회원께서 기성 시인들의 예를 들며 그것을 부화뇌동이라고 잘라 말
하셨는데, 거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두번째로 예를 삼은 시인은 저도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듯합니다만 과연 장형수 회원께서는 지금까지 그분이 발
표해온 시와 그의 지내온 삶의 궤적을 충분히 검토해보셨는지요? 덜 소화된 실존이라 하든
사람 겁주기 위한 꼬부랑말이라 하든 상관없으나 그분의 시가 자유를 향한 열망이나 부조리
에 대한 저항의 의지와는 무관한 말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는 확신은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
합니다. "
"너무 가혹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발표된 그 시인의 시로서는 그
랬습니다. 시인 모두에게 공통된 리버럴리즘 정도라면 모를까, 4월 26일 아침의 그것처럼 격
렬한 노래를 부를 저항 시인의 모습은 그 이전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장형수 회원처럼 그 시인에 고나해 철저한 검토를 해보지 못해 그 점
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설령 장형수 회원의 검토가 정확하고 면밀한 것이
었다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곧 어떤 특정한 사회적 사건이, 특히 혁명 같은 대사건
이, 한 시인의 몽롱하던 의식을 일깨웠다 해서 그것이 꼭 부정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하는지
요? 잠든 자는 언제나 잠들어 있어야 하고 몽롱한 의식은 어제나 몽롱한 대로 남아 있어야
부화뇌동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물론 어떤 사회적 사건을 계기로 한 시인의 몽롱하던 관념이 뚜렷해지고 마비되었던 의
식이 깨어나는 수가 있음은 인정하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바로 역사에 나타나는 그 빛
나는 혁명 시인의 참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르지요. 출발이 좀 늦기는 해도 이제야말로 그 의
식은 빛나는 출발을 했으며, 지난날의 그 어떤 성과보다 더 큰 성과를 바로 이번에 그가 새
로 품게 된 자유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저항에서 이뤄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것은
먼 앞날의 불확실한 성취이고 당장 미망한 것은 그런 갑작스런 눈뜸이 우리의 의식 상황에
주는 나쁜 본보기입니다. 특히 시인 지망생들이 그런 그의 변용에서 어떤 지름길을 찾아내
려 한다면, 다시 말해 시의성과 대중적 분위기에의 영합을 자기현시의 가장 효과적인 방편
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건 나쁜 본보기를 넘어 해악이 됩니다..."
유만하와 장형수의 공방이 거기쯤 이르렀을 때였다. 용케 참는다 싶던 둘 중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집어쳐, 이새끼야!"
유만하와 장형수의 공방에 취해 있던 명훈이 퍼뜩 눈길을 돌려보니 바로 4,19시위 때 그
학교 주동자 가운데 하나였다던 4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험한 욕설로 그치지 않고 똑바로
장형수가 앉은 수강용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너, 일어나. 좀 따져보자."
금세 주먹을 내지를 듯한 기세에 장형수가 순간 움찔했으나 강의실 가득한 회원들의 눈길
을 의식했는지 곧 냉정하게 받았다.
"따질 게 있으면 그냥 따지슈."
"그래, 좋아. 너 이 새끼 바로 불어. 너 자유당한테 붙어 뭐 얻어먹었지? 지금 뭐 하는 수
작이야?"
"그게 무슨 소리요?"
"몰라서 물어, 새꺄. 입으로야 이리 비틀고 저리 싸발라 그러듯하게 줘섬겨대고 있지만 한
마디로 뚝 뿌러뜨리면 우리 혁명 엿먹이자는 수작아냐? 이쯤에서 적당히 구정물 끼얹어 자
유당한테 함숨 돌릴 틈을 주려는 수작이지?"
"여긴 문학회 합평 모임이지 정치 토론장이 아니오. 거기다가 이건 아무리 상급생이라도
폭언이 너무 심하지 않소?"
장형수가 여전히 꼿꼿이 앉은 채로 그렇게 대꾸하자 데모 주동자는 마침내 폭력으로 나왔
다. 목을 자른 군홧발로 힘껏 장형수의 의자를 걷어차는 바람에 장형수는 앉은 채 의자와
함께 강의식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 장형수에게 다시 덮치려는 그를 몇 사람이 나와 말렸다.
"피 흘리고 쓰려져간 4,19 영령들이 지하에서 울고 있다. 이 썩은 새끼야. 뭐 의사 의식?
혁명 콤플렉스? 이게 어디서 함부로 나불거려? 주둥이가 달렸다고 마음대로야? 어서 꺼져!
가서 이제껏 핥던 자유당 뒤나 핥으란 말이야!"
그는 여럿이 떼어놓는 바람에 제자리로 밀려가면서도 무엇이 그렇게 분한지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소리 질렀다. 명훈은 잠시 아연해 그런 그를 살펴보았다. 장형수가 한 말을 아무리
되씹어봐도 그가 그렇게 분해 해야 할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난폭하기 그지
없는 언행에서 명훈이 느낀 것은 그가 그깨껏 자신이 몸담아온 세계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인간이리라는 짐작이었다. 학도호국단이나 반공청년단과의 연결은 없었지만, 틀림없이 그 대
학 한 모퉁이를 휘어잡고 있는 주먹인 것같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곳에 함께 있던 스무남은 회원들의 동향이었다. 먼저 판을 깼
다 할까, 문학적인 논의를 벗어난 것도 그였고, 논리고 뭐고 없는 마구잡이 욕설로 분위기를
망친 쪽도 그였으나 아무도 그를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 분개하는 게
의식이 있는 표시라도 되는 듯 그를 제자리로 끌어들이면서 장형수를 보는 눈길들은 사뭇
험악했다.
명훈처럼 어정쩡한 기분으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 축도 없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장형
수에게 동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분개하지 못하는 게 무언가
겸연쩍은 듯 이쪽저쪽을 번갈아 살필 뿐이었다.
하지만 장형수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실내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별로 유리하지 못하
다는 것쯤은 느낄 만한데도 숙어드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한동안 의자와 함께 넘어진 채
찬웃을을 흘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날아간 만년필과 노트를 차근차근 챙긴
뒤에 누구에게라 할 것도 없이 깐깐하게 쏘아붙였다.
"진작 집어쳤어야 하는데 턱없이 질질 끌려다니다 결국 욕을 보는군. 그러잖아도 이번만,
이번만 하던 중이었소. 하지만 이왕 논의가 비문학적으로 발전하고 말았으니 나도 주제넘지
만 정치적인 충고 하나 하겠소. 윤선배, 아까 자꾸 자유당, 자유당 하셨는데, 정말로 자유당
을 무덤속에서 다시 끌어내올 사람은 누구인지 아시오? 아니 어쩌면 자유당보다 더 파렴치
하고 가혹한 극우 보수 세력에게 이 사회의 상부 구조를 송두리째 갖다 안겨줄 사람이 누군
지 아시오? 바로 선배 같은 사람들일거요. 선배가 들떠 있는 그 의사 의식은 틀림없이 전혀
값 치르지 않고 얻은 것도 아니니 이 혁명을 한판 잘 맞아떨어진 역사의 복권으로 만들고
말 것이오. 당신들이 근거 없는 승리감에 취해 쌓고 까불고 하는 동안에, 이 혁명의 과일은
마침내는 이전보다 더 가혹한 주인에게 되돌려지고 말 것이며, 어림없는 허영으로 설익은
자유와 민주를 즐기는 사이에 엄청난 반동의 날은 밝아올 것이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두에야 명훈은 그의 이름을 한 저항 시인으로 신문 기사의 행
간에서 읽게 된다. 그러나 그날 장형수가 그 말을 내뱉고 강의실을 나설 때 이미 명훈은 그
에게서 쉬이 잊혀지지 않을 한 시인을 본 듯했다. 그가 말한 극우 보수 세력의 대두에 대해
서는 아무런 예감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장형수가 그 강의실을 나가버린 뒤의 분위기였다. 모두가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데서 만들어진 동료 의식일까, 그의 말에 까닭 모를 섬뜩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들은 곧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무학 회원으로 되돌아갔다. 또 한 회원의 수필인지
소설인지 모를 지루한 작품 발표와 건성의 합평이 이어지고 그 마지막에는 학교 앞 대폿집
으로 몰려가 단합을 과시했다. 장형수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썩 마음이 내켜서는 아니었지만, 명훈도 끝내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거의가
함께 몰려간 대폿집뿐만 아니라, 회장과 윤무언가 하는 그 데모 주동자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2차까지 함께 갔다. 그리고 또 무슨 들뜸에서였을까, 실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라 저
희끼리는 사전에 짜놓은 모임에 가까운 그 자리에서는 오히려 엉뚱한 역할까지 자청해 떠맡
게 되었다.
"우리 학교가 비록 따라지 대학이라고 하지만, 사람까지 따라지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
야. 듣자니 서울대학교에서는 국민 계몽대를 만든다는 말이 있고 다른 대학에서도 신생활
운동이나 공명 선거 운동 같은 활동을 벌일 단체들이 구성되고 있는 거 같아.그런데 우린
뭐야? 4,19날도 서울대,고대 ,연대가 모두 거리로 나섰단 말을 듣고서야 우리 몇몇이 한 2백
명 끌고 나가 겨우 이름만 내걸었을 뿐이잖아? 그래놓고 그 후속 활동까지 따라지 대학답다
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 마침 법정대 녀석들이 뭘 꾸미는 모양인데 우리 그쪽
하고 손잡고 한판 화끈하게 벌여보는 게 어때? 하다못해 자유당 잔당 까부수는 운동같은 거
라두 시작해보자구. 모르긴 하지만 민주당도 법만 가지고는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구석이 있
을 걸. 그럴 때 우리가 나가서 가려운 데를 긁어주면 그 사람들도 우리 괄시를 못할 거야..."
제법 술들이 거나해진 걸 보고 윤이 그렇게 속셈을 털어놓았을 때였다. 그의 말투에서 지
난날의 배석구를 연상한 탓일까, 명훈이 불쑥 자신도 예비하지 않았던 맞장구를 치고 만 것
이었다.
"좋지요. 사실 나는 서울대 쪽, 고대 쪽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의 그런 단체들과도 연결이
있습니다. 그쪽과 손잡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제가 다리를 놓지요."
술기운 못지않게 알 수 없는 영웅 심리에 내몰리어 한 말이었다. 그리고,"이형쯤이면 그러
줄 알았지. 실은 우리도 그럴 것 같아 이형을 불러들인 거요."
윤의 그런 부추김을 받자 명훈은 까닭 없이 우쭐해져 자취방과 병원에서 몇 번 본 황의
친구들 얘기를 과장스레 떠벌렸다. 제41장
홀로 가는 길
영희가 양장점 문을 열었을 때 시다 계집애는 바로 영희의 옷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어찌나 일이 밀리는지, 이제 겨우 끝냈네."
양재사 아주머니가 변명인지 거드름인지 모를 소리로 영희를 맞았다. 재봉틀 선반에 놓인
일감이 헌옷가지인 걸로 보아 가겟일이 그녀의 말처럼 바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다됐어요. 한번 입어보세요."
영희보다는 두어 살 아래로 보이는 시다 계집아이가 곧 다림질을 마치고 옷을 내밀었다.
첫물인 포플린으로 지은 여름 교복 윗옷은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까지 돌았다.
아직 남은 다림질의 온기가 종종걸음 쳐온 영희에게 후끈하게 느껴졌지만 그리 불쾌하지
는 않았다. 새 옷을 입게 될 때 품게 되는 여자 특유의 기쁨과 들뜸 덕분이었다.
"어때, 잘 맞지? 학교 앞에서 학생들만 전문으로 상대하는 싸구려 맞춤집과는 다를 걸야."
양재사 아주머니가 어느새 제법 큰 벽거울을 떼어 영희를 비춰주며 제 솜씨에 스스로 만
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바람에 영희도 더욱 기대를 가지고 거울 속을 차분히 들여다보
았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옷은 틀림없이 교복의 격식을 갖추었고 몸에도
잘 맞았지만,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것은 아무래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아니었다. 몸매나
표정이 교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 꼭 교복을 빌려입고 여학생 행세를 하려 드는 논다니처
럼 느껴졌다.
작년에 입던 교복이 어울리지 않은 걸 그저 옷이 작아지고 낡아서 그리 된 줄로만 알았던
영희는 새로 맞춘 교복에서까지 그런 느낌이 들자 문득 섬뜩해져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일 년 동안에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왜 교복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되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빠 명훈 때문에 집으로 끌려가 넉 달 가까이나
못 나가게 된 학교였다. 박원장과 어머니에게 음험한 원한을 불태우며 밥짓기와 설거지와
빨래로 보낸 그 넉 달이 자신에게서 학생티를 벗겨버렸으리라는 짐작이 든 것이었다. 하지
만 그것과 거의 동시에 짚여오는 또 다른 짐작은 미처 누구를 원망할 틈도 없이 영희를 풀
썩 주저앉고 싶을 만큼 상심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녀의 몸이 겪은 변화였다. 그 교복이 어
울릴 대부분의 계집아이들과는 달리, 남자를 알아도 깊숙이 알게 된 자신의 몸이 교복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유별난 징표를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왜? 맘에 안 들어? 어디야? 어디가 어때서 그래?"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굳어지는 영희의 표정에 양재사 아주머니가 약간 당황하
는 눈치로 물었다. 영희가 거울 속을 살피느라 그녀의 수다를 무시한 게 옷에 대한 불만으
로 받아들여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영희는 또 영희대로 양재사 아주머니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묻는 게 당황스러웠
다. 그저 눈치만 살피는 게 아니라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보는 듯 느껴진 까닭이었다.
금세 자신의 몸이 겪은 변화를 알아보고 빈정거리는 것 같아 속으로 울컥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교복인데 가슴을 너무 사린 거 아니에요? 에리(목깃)도 너무 좁고..."
영희가 얼른 눈에 띄는 대로 불만을 털어놓자 양재사가 넉살좋게 받았다.
"이 학생 이제 보니 영 쑥이네. 요새 학생들 젖통 크게 보이게 하지 못해 안달인 줄 알았
는데... 그리고 에리도 그래. 아무리 교복이라 해도 에리가 너무 넓으면 촌스럽다구. 썩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
그렇게 받아넘기는 양재사의 말이 영희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지게 했다. 아무런 근거 없
는 지레짐작으로 그녀에게 화를 낸 게 오히려 미안해 옷에 대한 불평은 그쯤에서 거두었
다. 그리고 어떻게 좀 깍아볼까 하던 바느질삯을 그대로 치르고는 다시 종종걸음 쳐 이모네
집으로 갔다.
집을 나설 때 이미 자욱이 감돌던 전운은 그 사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명인 이모는 아
직도 간밤을 새운 그 자리에 앉은 채 표독을 부리고 있었으나 외박을 하고 돌아온 이모부는
이불을 둘러쓰고 눕는 대신 시원스레 벗어부치고 수도간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 영희에게는 오히려 위험스럽게 보였다. 영희가 알고 있는 그들 내
외의 관계로 미뤄보아서는 그런 이모부의 태도는 터무니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싸움은 까닭 없이 조마조마해진 영희가 식모 후불이의 부엌방으로 피해 들어앉은 지 몇
분 안 돼 터졌다.
"김일병, 김일벼."
이모부가 큰 소리로 운저병을 부른 뒤,
"부관에게 연락해. 나 오늘 점심 먹고 들어간다고 작전과장보고 부대 좀 잘 장악하고 있
으라구 그래."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는데 그때껏 표독을 부리지 않았던 이모의 앙칼진 목소리가 끼여들
었다.
"아이고, 이제 아주 부대까지 팽개채고 나서네. 당신 그전에 나 좀 봐요."
"또 왜 그래?"
이모부가 적어도 기가 죽은 것은 아닌 목소리로 그런 이모의 말을 받았다.
"어쨌든 들어와서 얘기해요. 애들하고 김일병 보는 데서 창피당하지 않으려거든."
이모가 다시 그렇게 쏘아붙이자 이모부는 마루에라도 걸터앉는지 삐걱 하는 마룻장 소리
를 내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거 우리 영천 마님께서 왜 이러시나? 그래, 무슨 얘기야."
"당신 똑바로 말해요. 어제 왜 외박했어요?"
"내 말하지 않았어. 동기생들하고 술 한잔 하다가 늦어졌다구."
"둘러대지 말아요. 전에는 통금이 돼도 잘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럼 새벽 다섯시싸지
얘기했단 말예요?"
이모가 그렇게 따지고 들자 이모부는 대답이 좀 궁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
죽어하지는 않았다.
"남자들간에는 밤새워 이야기할 일도 있는 법이야."
그렇게 머뭇머뭇 말하자 갑자기 이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 또 그리로 둘러대려구. 그래, 당신 동기생 몇이 참모총장을 몰아냈다구 당신이 덩달
아 들뜰 건 뭐예요? 누가 그 참모총장 자리에 당신 앉혀준답디까?"
"바깥일을 그렇게 안에서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왜 말 못 해요? 당신 그대 보지 않았어요? 김중령 부인이 울고불로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꼴 말예요. 죄목이나 적어야지. 국가반란음모죄라니, 끔찍하지도 않습디까? 다행히 송장군이
점잖아 조용히 총장직을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뭐예요? 더군다나 당신
은 뒤늦게 뭐 어쩌겠다고 그 사람들과 어울려요?"
"어어? 이 여자 봐. 그러니까 당신, 내가 기생집에서 오입질하느라 외박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부리는 강짜요?"
"그래요. 어느 쪽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가 당신까지 나서서 덤벙대는 게 못마땅하단 말
예요. 혁명이고 민주고 학생들이나 민간인들이 떠들고 나서는 거지, 군인인 당신들이 어떻다
는 거예요? 왜 쓸데없이 모여 수군대는 거예요?"
"어라, 이 똑똑한 여자가 점점 더 못 할 소리가 없네. 남 들으면 우리가 모여 무슨 큰 역
적질 모의라두 하는 줄 알겠어. 그건 그렇고-군인이 어쩌고 하는 당신 말투도 아주 기분 나
쁜데. 그럼 군인은 이 나라 국민도 아니란 거야? 군인이라고 해서 나라가 썩어문드러져도
보고만 있으란 말이지?"
"도대체 당신들이 뭘 안다고 나서는 거예요? 정치라면 그쪽으로 수십년 부대끼고 닳은 정
치가들이 있잖아요?"
"시끄러!"
갑자기 이모부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전의 관계로 보아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위엄과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기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이모부의 그 같은 표변에 아연했는지, 이모도 잠시 말대꾸가
없었다. 그 때문에 생긴 바깥의 짧은 침묵을 다시 이모부의 삼엄한 말소리가 깼다.
"당신이 나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하겠는데, 제
발 이 일만은 좀 아는 척 나서지 말아. 당신도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입 좀 다물고 있
으라구. 군이 여편네 노릇을 하마 십 년이나 했으니 이게 무슨 소린지는 알아듣겠지?"
그리고는 삐걱이는 마룻장 소리르 내는 게 마루를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아니, 저 양반이 이제는 아주..."
이모가 발끈해 뒤따라 들어가며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싸움은 그뒤로 별진전이 없었다. 한
동안 말다툼은 계속되었어도 어디까지나 주위를 의식한 자제된 것이어서 주고받는 내용은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모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 않았음은 분명했
다.
"김일병, 시동 걸어!"
잠시 후 군복으로 갈아입은 이모부가 그새 운전병이 번쩍이게 닦아놓은 군화를 발을 꿰면
서 외치는 목소리에는 조금도 억줄린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작과는 달리 오히려 몰린
누치가 보이는 것은 이모 쪽이었다.
"저 맺고 끊고 못 하는 양반이 공연히 무슨 일을 내지..."
미모부가 탄 지프가 사라진 쪽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영희ㅣ
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말끝을 흐리는 게 평소의 싸움 끝과는 많아 달랐다.
이모 내외의 싸움이 그렇게 가라앉는 걸 보고 영희는 곧 제 볼일로 돌아갔다.
"후불이 너 미안하지만 아이롱에 숯불 좀 피워줄래?"
영희가 그렇게 부탁하자 영희 못지않게 주인 내외의 싸움에 신경을 쓰고 있던 후불이가
까닭 없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이 더운 날에 엇다 대림질을..."
"교복 스커트르 ㄹ좀 다렸으면 해서. 어제 빨았는데 사지라서 그런지 영 쭈굴쭈굴해."
"학교는 저녁태 가잖아요?"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유월 중순의 한낮 햇볕에 숯을 피우기가 아무래도 마음내키지 않는
지 후불이가 탐탁잖게 대꾸해따.
'이 기집애가...'
영희는 후불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훅 치밀었느나, 아직 얼마나 더 그 집 신
세를 져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이모네 식모라지만, 더부살이하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그녀와 틀어져 지내 이로울 게 없는 까닭이었다.
"낮에 어디 좀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럼 숯 있는 데나 알려줘."
영희가 그렇게 숙이고 들자 후불이도 좀 미안한지 배시시 웃으며 일어났다.
"새 옷 찾고 스커트 다려 입고- 어디 애인 만나러 가요?"
"애인은 무슨 -숯 있는 데나 알려줘."
"숯불은 제가 피워줄게요. 한번 피웠다 물을 부어 꺼둔 거라 언니 솜씨로는 어려울걸요.
대신 바른 대로 고백해요."
겨우 두 살 아래인데도 까마득하게 어린 것처럼 느껴지는 후불이의, 남녀 관계에 대한 호
기심이 진득이 밴 말투였다.
영희는 적당히 능쳐 그 호기심을 곱게 살려줄까 하다가 이내 바른 대로 말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실은 취직을 하러 가. 면접 시험이 있어서..."
"취직요? 어딘데요?"
"몰라, 조그만 회사래. 경리를 뽑는다는데..."
"학교는 어떡하구요?"
"야간은 어떻게 다니게 해주겠대."
그러자 후불이는 좀 전과는 달리 사근사근해져 부엌으로 나갔다. 후불이가 부엌에서 숯불
을 피우느라 풍구를 돌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이모가 들어왔다. 어렸을 적
그렇게 눈부셔 보이던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젠 살이에 찌든 중년 여인의 화장 짙은 얼굴 속
에 희미한 자취로만 남아 있었다.
"영희, 나 좀 보자. 안방으로 건너와."
이모는 그 말과 함께 문들 닫고 나갔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나-영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모를 따라 안방으로 건너갔다.
"너 말이야,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있어 집 나온 거 아니냐?"
이모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물었다. 영희가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무슨...다른 일이라니요?"
"하마 네가 온 지 스무 날 가까운데 어째서 언니한테는 한번 연락도 없지? 언니 성격으로
는 말만한 처녀애를 내보내놓고 하루도 못 배길 텐데 편지 한 장 없는 게 이상해. 그리ㅣ고
명훈이는 또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와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한번쯤은 여길 들여다봐야 할
거 아냐?"
"이모님한테 미안해서일 거예요. 둘 다."
"아냐. 무언가 좀 이상해. 너 밀양서 올라온 게 언제라구 그랬지?"
"이모님댁에 외기 전날요."
"명훈이는 보고 왔니?"
"네."
"그때 남매가 같이 자취한다는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왜 여기로 오게 됐니? 물
론 나한테 온 게 잘못이란 뜻은 아니다만..."
"말씀드렸잖아요? 그 방은 오빠 친구들이 둘이나 와 있어서..."
"그래도 어떻게 구처를 해봐야지..."
"그러잖아도 오빠는 지금 방을 얻어 나오려 하구 있어요. 곧 연락이 올거예요."
영희는 그렇게 둘러대면서도 새삼 자신이 너무 오래 이모님댁에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었
다. 평소에 별로 왕래가 없는 것만 믿고 온 것이었지만, 거꾸로 이모 쪽에서 어머니와 오빠
에게 연락을 할 위험이 있다는 걸 잊은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모는 그 일을 더 꼬치꼬치 캐지는 않았다. 원래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었
는지 잠시 침묵으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다, 너 알다시피 이모부는 군인이다. 더구나 지금은 진급을 앞두고 있어 주위에
신경을 써야 할 땐데 영 걱정이구나. 너야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마는 너희 아버지가 워낙
좌익으로 드러나 사람이 돼서 어째...물론 이모부는 내가 이런 소리를 한 걸 알면 펄쩍 뛸
거다. 그 양반은 4,19로 세상이 온통 뒤집힌 줄 믿고 있지만 사상 문제만은 그렇지 않아..."
거기까지 듣자 영희는 더 듣지 않아도 이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것 같았다. 하기 힘
든 말을 빙빙 둘러서 해야 하는 어려움에서 이모를 빼내줄 양으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떻게 해보려던 참이었어요. 취직도 곧 될 것같고..."
그렇게 생각도 안 한 거짓말을 둘러대었다. 사실 취직만 된다면 구태여 남의 눈칫밥을 먹
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영희가 그렇게 나오자 이모도 더 길게 늘어놓지는 않았다. 영희가 나가기를 바란 게 자신
의 무정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변명 비슷한 말만 두어 번 되풀이하고 영희는 놓아주었다.
영희가 명인 이모네 집을 나선 것은 11시가 넘어서였다. 벌써 6월도 중순이어서 가로수
잎새가 한창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차림도 거의가 반팔 소매였다.
신촌 로터리까지 걸어나온 영희는 거기서 청계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주머니에
서 다시 한번 종이쪽지를 꺼내 찾아가는 곳을 확인했다. 청계천 3가 수도 빌딩 맞은편 대흥
기업- 몇 번이나 읽어 벌써 머릿속에 박히다시피 한 내용이었다.
"학교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개인적으로 더 잘 아는 곳이다. 이북 사람들이라 지독한
구석은 있지만, 속은 알차지. 내일 오전중으로 찾아 가봐라."
쪽지를 건네주며 하던 담임선생의 덤덤한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그게 행운이라면 실로
뜻밖의 행운이었다. 겨울 방학, 봄방학을 빼고도 80일이 넘는 결석을 그 동안의 밀린 월사금
을 일시에 내는 걸로 해결을 보고 복학을 하던 날 그가 교무실로 부를 때만 해도 영희는 취
직 부탁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장기 결석 사유를 묻는 그에세 어려운 가
정 형편을 둘러대다가 건성으로 한번 부탁해본 것인데, 한 달이 지난 어제 불쑥 그 쪽지를
내민 것이었다.
"드디어 개헌안이 통과됐군. 양원에 내각책임제라, 밥그릇 수를 이만큼 늘려놨으니 이제는
그놈의 쌈박질이 좀 숙질까."
앞좌석에 앉아 신문을 펴들고 앉았던 신사복이 동행인 듯한 옆사람에게 신문을 넘겨주며
말했다. 둘 다 왠지 대학 교수거나 그 비슷한 직업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밥그릇 수만 늘려서 뭘 해? 밥을 늘려야지, 밥을..."
상대가 그렇게 받자 처음 사람이 그 말을 받는 식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누구에겐지 모를
빈정거림을 계속했다. 그러나 취직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는 영희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청계천 3가에 내린 영희는 수도빌딩을 찾는 데 한동안 진땀을 뺐다. 빌딩이라는 말에 높
고 큰 건물로만 생각했으나 겨우 찾아내고 보니 길가의 낡은 일본식 3층 건물이었다. 대흥
기업이 있을 그 맞은편은 언뜻 보아 작은 고물상 같았다. 가게 앞 길가에 이런저런 잡동사
니를 늘어놓아 그러잖아도 작은 가게를 더욱 초라하고 옹색해 보이게 하는 업체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 거리 어디에도 영희가 상상해온 대흥기업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영희는 자신
이 길을 잘못 찾아든 것 같아 다시 한번 수도 빌딩을 확인해보았다.
일층에 세들어 철물가게를 하는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틀림없이 거기가 수도빌딩이란 대답
이었다. 그렇다면 대흥기업도 틀림없이 맞은편 거기에 콧구멍만한 점포들 중의 하나일 것이
란 생각이 들자 영희는 그대로 돌아서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 거리 어디에도 경리나 사무원
은커녕 심부름하는 계집애라도 제대로 월급 주어가며 부릴 만한 업체가 없어 보이는 까닭이
었다.
그렇지만 기분대로 할 수 없는 게 또한 그 무렵 영희의 사정이었다. 밀양에서 재봉틀을
잡히고 쌀을 팔아 일만오천 환이 넘는 돈을 마련했을 때만 해도 영희는 그 돈이면 무엇이라
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복학 때문에 두 학기분 공납금을 한꺼번에 내고 책가방에 책권 마련하느라 거의 8천 환이
날아간 데다, 한 열흘 모니카네 집에 얹혀 지내면서 모니카와 함께 흥철거리느라 또 몇천
환이 날아가 이모네 집으로 옮길 때는 1천 환 가까이 줄고, 그 동안 조금씩 쓴 잡지도 있어
벌써 영희에게 남은 돈을 3천 환이 채 안 됐다. 용케 취직이 된다 해도 골방 하나 세 얻을
돈도 안 남은 것이었다.
'어쨌든 사람을 구해달랬으니까 그만 힘은 있겠지. 설마 월급도 안 주고 사람 부릴 생각
을 했을라구...'
영희는 까닭 모르게 한심해지는 기분을 달래며 길을 건너 대흥기업을 찾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 거리의 간판들이었다. 길 건너서 보기에는 초라한 고물상 같은 가게들이었
는데도 간판만은 한결같이 어마어마했다. '경원기계' '영남공업' '흥국철물' '한남전업' ...
그러다가 얼마 안 가 찾고 있는 대흥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시대냉동'과 '진흥기계' 사이에
끼인 두어 평의 점포로 그 앞 보도에는 부서진 선풍기와 녹슨 철사 뭉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철제 상자 같은 것들이 함부로 무더기져 있었다.
영희가 쭈뼛거리며 다가가니 가게 안에서 두 사람이 무언지 알 수 없는 기계를 좁은 바닥
가득 뜯어놓고 마주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나이 마흔쯤 되었을까, 땀과 기름때에
절은 러닝 셔츠를 걸친 채 이리저리 헝클어진 상고머리 젊은이로, 어딘가 약간 겁먹은 듯한
눈길로 나이든 쪽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어드렇게 된 거이야? 같은 냉장고가 와 이래 다르네? 학교서 뭐 새로 들은 거 없
어?"
아니든 쪽이 젊은이를 향해 시비하듯 물었다. 젊은이가 어깨까지 움찔하더니 더욱 겁먹은
눈길로 더듬거렸다.
"냉장고는... 학교서 한번도..."
"그놈의 학교는 뭐 하는 곳이가? 필요한 것만 골라 안 가르치는 덴가?"
나이든 쪽은 금방 쥐어박기라도 할 듯한 눈초리로 젊은이를 쏘아보다가 다시 그 기계에
달라붙었다.
뒷날 이 나라 냉동기기 제조업계를 주름잡게 될 그들이었지만 그날의 영희에게는 땀과 기
름때에 절은 그들이 바로 그 가게의 주인 부자라는 것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
인이 일꾼에게 가게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 것이라는 근거 없는 단정으로 그때까지의 쭈뼛거
림에서 벗어나며 물었다.
"저어,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뭐이가? 무슨 일로 왔네?"
아니든 쪽이 여전히 시비라도 받는 말투로 물었다. 고등학생이라고는 해도 나이가 있어선
지 그 무렵은 낯선 어른들이 자신에게 말을 놓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 사람이 대뜸 반말로
나오자 영희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쩌면 앞으로 그와 함께 일하게 될지 모른
다는 짐작에서 나온 계산이 그런 영희를 다랬다.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영희는 치미는 부아를 억누르며 그렇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가 더욱 거칠게 받았다.
"그러니까 뭣 땜에 왔느냐고 묻지 않았네? 사장은 무슨..."
그제서야 영희는 그가 바로 주인이라는 걸 알았다. 머쓱함과 아울러 다시 한번 한심한 기
분이 들었으나,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어야 하는 다급함에 몰려 공손하게 자신이 온 목적은
밝혔다.
"명신여상에서 손병규 선생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사람을 구한다고 하시기에..."
"아, 손병규 선생?"
담임선생의 이름을 듣자 그의 말투가 좀 풀어졌다. 그러나 재빨리 영희를 훑어본 눈길이
이내 실쭉해지며 말을 이었다.
"글티만 뭐 하이칼라 여사무원을 쓰자는 건 앙이고, 가게 청소부팀 자질구레한 수금까지
막 부리 체니아일 찾은 거인데,학생이 할 수 있갔어?"
"네, 일은 뭐든 할 수 있어요."
사람을 대하는 데 너무도 자신있어하는 그의 말투에 오히려 까닭 모를 기대를 걸게 된 영
희가 고까움을 참고 그렇게 받았다. 그가 이래두냐는 식으로 덧붙였다.
"것두 한 달에 몇천 호나 겟구서."
그런데 그 '몇천 환' 하는 말이 또 너무 수월하게 들려 더욱 영희의 마음을 끌었다. 보기
에는 꾀죄죄해도 벌이는 좋은 모양이로구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몇천 환을 가볍게
말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영희가 처음과는 달리 대답에 정성과 간절함을 담게 되자 그뒤는 쉽게 풀렸다.
월급은 3천5백 환. 거기다가 더욱 좋은 것은 그 가게 뒤의 작은 골방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었다. 가게도 지킬 겸 해서 그때까지는 아들인 그 젊은이가 기거해도던 한 평 남짓의 방으
로, 그렇잖은면 따로 돈을 들여 방을 얻어야 할 영희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 동안도 영희는 일자리르 ㄹ얻기 위해 두 군데나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첫번ㅉ는
전봇대에 붙은 '종업원 구함'이란 쪽지를 보고 찾아간 시장 근처의 식당이었는데, 학교에 갈
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월급도 침식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겨우 1천 5백 환밖에 안
됐다. 무슨 봉제공장이라는 곳도 대우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학교 갈 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침식밖에 안 재주는 견습 두 달이 끝나 정식 재봉사가 되어도 월급은 3천 환
이 차지 않았다.
거기 비하면 대흥기업의 조건들은 바로 영희를 위해 일부러 마련된 것처럼 맞아떨어지는
세미이었다.
영희에게는 거짓말처럼 일이 쉽게 풀려, 다음날부터 일을 나가기로 하고 그곳을 나선 것
은 점심때가 다된 뒤였다. 그들의 단골 밥집에서 점심상이 배달돼오자 주인 아저씨는 무뚝
뚝하고 거친 말투와는 달리 옷자락을 잡듯 영희에게 함께 먹기를 권했지만 영희는 왠지 쑥
스러워 그대로 털고 일어났다.
그녀 자신에게는 몹시 심각한 일이라 영희가 긴장해서 그랬던지, 가게 안에 있을 때는 몰
랐으나 거리에 나와보니 날은 6월 같지 않게 무더웠다. 하지만 영희의 기분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종로 쪽으로 길을 건너다 가만히 돌아보았을
때 이미 '대흥기업'은 처음 볼 때처럼 초라한 고물상같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은 지나서야 꽃필 이 나라의 산업사회,부정적 의미로든 긍정적인 의미로든,
로의 튼실한 싹을 거기서 보았다는 식의 대단한 발견은 아닐지 몰라도, 기름때에 절어 선진
문명의 이기를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그들 부자에게 어떤 믿음 같은 걸 품게 도니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늘은 오빠에게나 가볼까...'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기분에 우쭐해지기까지 하며 영희는 불현 듯 명훈을 떠올렸
다. 서울에 온 지 한 달이 넘도록 오빠르 ㄹ찾아가지 않은 것은 지난 일로 먹게 도니 앙심
보다는 그에 다시 어머니에게로 끌려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말은
웬만하면 그대로 따라주는 오빠의 성격으로 미루어 어머니의 엄한 당부가 있을 때는 머리채
를 끌고라도 집으로 데려갈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를 것 같았다. 아무리 오빠라도 혼자서 학교를 마칠 수 있도록 되었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벌써 넉 달째나 오빠를 못 본 데서 생
긴 그리움 같은 것이 한 달이나 혼자서 객지를 떠돌면서 느낀 외로움으로 과장되어 영희를
명훈의 자취방으로 끌었다.
영희에게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으나 따지고 보면 겨우 넉 달 남짓이어서
그런지 동네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취방으로 오르는 골목길 어귀의 헌책방에는 주인
아저씨가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해 거들거리고 있었고, 악착스런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가게
앞 골목길에 물을 뿌린다, 쓴다 하며 바지런을 떨고 있었다. 형배에게 뺏기듯 입맞춤을 당한
공터도 아직 그대로 였다.
영희는 몇십 년 만에 귀향하는 사람처럼 그 모든 걸 감회 어린 눈길로 보며 천천히 언덕
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그 무슨 조화였을까. 저만치 눈에 익은 자취방 창문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문득 섬뜩하게 가슴을 스쳐가는 예감이 있었다. 무언가 그 집 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바람에 영희는 무턱대고 집 안으로 들어가
는 대신 잠시 창문 밑에 붙어서서 방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방안에서 새어나오
는 말소리가 있어 절로 기울이게 된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기집애가 거길 뭣 땜에 갔겠어요? 어머니만 올라오시면 맨 먼ㅈ저 들이다칠 줄 뻔히
알면서..."
명훈이 무엇엔가 마음내키지 않아 내는 볼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이어 어머니의 성
난 목소리가 심장에 얼음덩이를 갖다대는 듯한 느낌으로 영희의 고막을 찔러왔다.
"그 덜돼먹은 년이 돈이사 몇 푼 뭉쳐갔다 카지마는 뻔하다. 내 속으로 난 자식 내가 모
리고 누가 알겠노? 보나마나 학교 드가는 데하고 번쩍번쩍하는 구두에, 시계에, 옷에 다털어
옇고 벌씨로 한푼 안 남았을 끼다. 그래서 이집 저집 떠댕기다 지금은 너그 셋째이모 집에
처억 들앉았을 끼란 말이다. 어서 일어나라. 집이나 좀 갈채다고..."
얼어붙은 듯 창틀 밑에 굳어 있던 것도 잠시 영희는 곧 절박한 위기감까지 느끼명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금세라도 어머니가 뛰쳐나와 머리채를 휘어잡을 것 같은 공포에 쫓기며 뛰
듯이 골목길을 내려갔다.
영희가 겨우 제정신을 차린 것은 지나가는 시발 택시를 잡아탄 뒤였다.
"신초으루 가요. 신촌으루."
허겁지겁 차에 뛰어올라 그렇게 소리치자 덩달아 긴장해 속도를 내던 운전사가 길게 한숨
을 내쉬는 영희에게 물었다.
"학생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네 좀..."
영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비로소 자신의 행동이 지나치게 남의 눈길을 끈 데 대해 경계
심을 느꼈다. 만약 이모네 집에 가서까지 그렇게 허둥대다간 눈치 빠른 이모에게 붙들릴지
도 몰랐다. 책가방이나 옷보따리라도 잡고 늘어지며 이것저것 캐묻는 사이에 어머니와 오빠
가 들이닥치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어싸다.
다행히도 이모는 집 안에 없었다. 영희는 의아롭게 여기는 후불이를 무시한 채 짐을 쌌다.
책가방과 옷 몇 벌이 든 영행가방뿐이라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모네
집을 나와 갈 곳도 정하지 않고 아무 버스에나 오를 때까지도 금세 오빠와 어머니가 뒤쫓아
오는 듯한 절박감에 내몰려야 했다.
'어디로 간다?'
영희가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버스가 어느덧 이모네 집 동네에서 서너 정류장
을 지나고 나서였다. 조금 가라앉은 마음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니 모니카네 집이 있는 마포
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얼결에 뛰어올랐지만 실은 버스에 오를 때부터 그 집을 향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친척집은 안전할 수 없게 된 그때로서는 사실 거기밖에 찾아갈
데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모니카네 집으로 갈 생각을 하자 영희는 이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아무리
다급해도 거기만은 다시 가고 싶지 않다.그게 영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처음 서울로 올라
와서 한 열흘 잘 지낸 집인데도 그토록 강한 거부감이 이는 게 스스로도 이상해 영희는 잠
시 그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짐을 꾸려 나오기 전날 저녁 모니카네 어머니가 빈정대듯 한
말 한마디뿐, 그렇게 그곳이 싫어야 할 까닭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영희는 그게 바로 모니카 자신과 그 집을 감싸고 있는 야릇한 분위기 때문임을 알았다.
처음 서울로 온 영희가 모니카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영희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일 정
도로 반겼다. 그뒤의 대엿새도 한편으로는 형배의 추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넉넉한 시간과
돈으로 사게 된 이런저런 즐거움으로 둘은 그 어느 때보다 잘 아귀가 맞아돌아갔다. 형배의
묘소를 찾아가고 어마어마한 합동 위령제에 제법 고인의 미망인이라도 되는 듯 참석해 눈물
을 흘리기도 했다. 대단찮은 형배의 추억을 과장해 주고받으며 밤을 지샜고 한번은 용기를
내어 그의 집을 들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둘은 형배를 위해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둘만의 즐거움을 찾아
냈다. 전에는 쉽게 들어갈 수 없던 고급 빵집에서 깔깔거리고, 영화관을 있는 대로 도는가
하면, 그 무렵 새로 생긴 음악실을 기웃거리며 남은 해를 보내기도 했다. 영희에게 복학을
하고도 몇천환이나 되는 돈이 아직 남아 있어 원래 돈에는 쪼들리는 법이 없던 모니카와 함
께 흥청대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형배에 대한 영희의 열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와의 추억을 과장하면 과장
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공허해졌고, 그의 죽음에 대한 살아남은 이들의 찬사가 화려하면 화
려할수록 그 진상이 수상쩍어졌다. 흥분한 신문의 보도에만 의지해 밀양에서 상상했던 혁명
이란 말은 엄청나기 짝이 없었지만, 실제 서울에 와서 보니 달라진 것은 다만 사흘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데모대로 미어지는 거리와 득세한 정당 및 정치인의 이름뿐이었던 것처럼,
형배의 죽음도 우발적인 사고 의 터무니없는 감정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
문이 들었다. 곧 억눌리고 불만스런 밀양에서의 나날이 있지도 않은 감정을 과장하여 서울
로 돌아와야 할 구실 하나를 보탰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날이 줄어드는 돈도 영희의 남다른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오랜만
에 되찾은 자유와 여유에 취해 보낸 것도 한동안일뿐, 영희는 곧 호로 걸어야 하 ㄹ멀고 험
한 길을 떠올렸다. 밀양에서의 출발은 바로 가정과 부모 형제로부터 떠남이었으며, 이제 그
녀의 삶은 오직 그녀 자신에 의해서만 개척되고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어
깨를 짓눌러왔다. 눈앞의 즐거움에 쉽게 빠지는 것만큼이나, 아무리 황홀한 도취 속에서도
선뜻 깨어 현실로 돌아설 수 있는 게 또한 그녀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급하게 영희를 모니카네 집에서 떠나도록 한 것은 바로 그때껏 숨겨
져 있던 모니카와 명훈의 파국이었다. 영희가 온지 엿새짼가, 모니카는 무슨 큰 고백이나 하
듯 그녀와 깡철,명훈 사이에 벌어졌던 치정극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오빠 명훈뿐이었음을 눈물 섞어 얘기할 때만 해도 영희는 하마터면 그녀를 용서할 뻔했다.
어떤 일을 다해도 더럽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순지한 영혼, 그녀에게서 엄청나 고백을 들을
때마다 놀라움이나 경명을 느끼기에 앞서 빠져들게 되는 그 야릇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집 밖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에 모니카가 눈치를 할금 할금 보며 집을 빠져
나가도, 나중에 그 휘파람의 주인이 바로 깡철이며 또 몇 시간을 어디선가 그녀가 그와 뒹
굴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영희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오빠 명훈을 위한 것만도 아
닌, 알 수 없는 굴욕감과 불결감 때문이었다.
그 동안 무심히 참아 넘겨온 모니카네 집 분위기도 점점 견뎌내기 어려워졌다. 모니카네
어머니가 요정이거나 그 비슷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전에도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영희
는 그 장사의 냄새가 그렇게 집안 속속들이 배어 있을 줄은 몰랐다.
낮 동안 화트를 치거나 낮잠을 자면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해거름만 되면 찍고 바르고
해서 휘황하게 집을 나서는 젊은 여자들, 새벽녘에야 술에 취해 돌아오기 일쑤인 모니카의
어머니, 그리고 이따금씩 대낮에 찾아와 몇 시간이고 문을 닫아걸고 그녀와 시시덕거리다
돌아가는 모니카의 의붓아버지라는 배불뚝이...그런 게 바로 그 지독한 직업까지 곁에서 들
여다본 적이 없는 영희에게는 그 모든 게 차츰 끔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뒷날
자신이 겪게 될 그런 종류의 삶이 한불길한 예감으로 와 닿아 그녀을 섬뜩하게 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그런 여자들이 자주 그러하듯 모니카의 어머니도 영희가 얹혀지내는데 대해서는 관대했
다. 아직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먹는 걸 해결한다는 이유로는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로는 모니카에게 와 함께 적잖은 용돈까지 나누어줄 정도였다. 그러다가 열흘짼가
되던 날 전혀 경제적인 것과는 무관한 한마디를 던졌는데, 결국은 그게 영희가 그 집을 나
설 결심을 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얘, 너 보니까 집을 나온 모양이구나. 여자하고 사기 그릇은 집 밖에 내돌려서는 안된다
던데, 너 조심해라, 자칫하면 쟤들 꼴 난다."
저녁 장사를 나서다 문득 돌아서서 앞서가는 색시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별성의 없이 던
진 말이었으나 영희에게는 이상하게도 아프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 당장은 갈 만한 데도 없고... 거기다가 내일부터는 가게 골방을 쓰게
되니까 하룻밤뿐이잖아. 그것도 학교 갔다 오는 시간 빼면 겨우 몇 시간인데 뭘...'
마음속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희는 이윽고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아직 혼자 여인
숙 방을 찾아들 만큼 대담하지 못한 그녀였다.
영희는 되도록 시간을 끌어 등교 시간쯤 모니카네 집으로 가려고 했으나 거추장스러운 옷
가방 때문에 뜻 같지가 못했다. 모니카네 집 앞 빵집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며 시간을 끈
다고 끌었는데도 모니카네 집에 갔을 때는 아직 오후 네시가 안 되었을 때였다.
모니카의 어머니나 젊은 여자들을 만나는 게 난감스러워 대문께에서 기웃거리던 영희는
전에 없이 집 안이 조용한 걸 보고 살그머니 모니카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모니카까지 없
으면 어떡하나 싶었으나 방문을 열어보니 모니카는 방안에 있었다. 그것도 방안에 오두마니
앉아 소주병을 홀짝이면서였다.
"어머, 이 계집애 좀 봐. 너 지금 뭐 해?"
영희가 놀라 지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술병을 반나마 비운 모니카가 그녀답
지 않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 마셔."
"미쳤어? 지금 네신데 학교 갈 준비 안 할 거야?"
"나 오늘 학교 안 가."
"뭐라구? 어머니가 가만두겠어?"
학교만 보내면 다된다는 듯 학교에 보내는 데는 무엇보다 극성인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
교 영희가 다시 물었다.
"엄마는 없어. 어느 밸 빠진 영감탕구가 언니들이랑 싹쓸어 극장에 데려갔어. 영화 구경하
고 바로 업소로 들어갈 거야."
"그래두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 쬐그만 계집애가... 그 독한 소주를..."
"그러지 말고 들어와봐. 술 이거 참 좋은 거다. 너도 한번 마셔봐. 이거 한 병만 마시면
다 좋아지거든. 세상 모든 일이 다..."
"어머, 이 기집애가 점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주 술꾼같이..."
영희는 그렇게 나무라며 술병을 뺏으려 했다. 그러자 그녀의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
던지 모니카가 세차게 술병을 빼내며 표독스레 소리쳤다.
"이거 놔! 날 가만두란 말이야!"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전에 못 보던 파란 불길 같은 게 뚝뚝 듣는 듯했다. 거기 긴장한
영희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물었다.
"너 정말로 무슨 일이 있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문득 그 야릇한 불길이 꺼진 모니카의 퀭한 두 눈 가득 눈물이 괴더니 뒤이어 얕
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말했다.
"깡철이 그 새끼가 오늘 갔어..."
"가다니? 어딜..."
"군대에. 깡패라면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니까 겁이 나 튄 거지. 개새끼. 그럴 걸 가지고..."
영희로서는 아연할 수밖에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눈물이 깡철이를 향
한 것이라는 게 왠지 불쾌했다.
"그래, 그게 그렇게 괴로워? 네 말로는 그 사람에게 어거지로 당했다며?"
"그 새끼 때문에 괴로운 게 아냐."
"그럼 뭐야? 눈물까지 흘리구선."
"내가 우는 건 니네 오빠 때문이야. 그 깡철이 짜식이 망쳐놓은 우리 사랑 때문이라구..."
이번에는 좀 전과는 다른 종류의 아연함으로 영희가 그런 모니카를 보았다. 그새 술이 올
라 발그레해진 얼굴에는 제법 괴로워하는 표정까지 떠올랐으나, 그게 그리 절실한 것 같지
는 않았다. 어쩐지 영화에서 보는 실연한 여배우의 술주정처럼 순간적인 감동은 주어도 속
깊은 동정이 일지는 않았다.
모니카가 넋두리처럼 이어갔다.
"그래도 그 짜식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악착을 떨 때는 깜박깜박 명훈씨를 잊곤 했었
는데... 너 알아? 깡철이 그 새끼가 얼마나 악종인지. 한번은 독한 마음을 먹고 관계를 딱 끊
어보려는데 소포가 왔어. 끌러보니 글쎄, 손가락 한 마디가 들어 있지 않겠어? 피로 써서 시
커멓게 굳은 글씨, 나는 절대로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하고... 생각하면 걔도 안됐긴 해. 고
못된 소가지로도 내가 웃으며 꼬시면 뭐든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해주려고 기를 썼지. 엊저녁
에는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자더라구. 경찰 등쌀에 억지춘향이로 지원은 했지만 나와 헤어지
게 된 걸 참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 같이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소리까지 하더라구..."
"거봐, 네가 우는 건 결국 깡철인가, 그 사람 때문이잖아?"
영희는 다시 울컥 역거움이 치밀어 그렇게 퉁을 놓았다. 모니카가 그 말에 소스라치듯 도
리질까지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냐. 그 짜식은 어쨌든 깡패이고 개새끼야. 그 짜식이 우리 사이를 망쳐놨어. 명
훈씨하고 한참 잘돼가고 있는데... 너 알아? 명훈씨의 성난 얼굴. 정말로 무섭더라. 여길 봐,
여기 이 눈썹 모양으로 찢긴 흉터 있지? 그때 명훈씨가 발길질해 생긴 거야. 어쩌면 내가
그뒤로도 계속해 그 짜식과 만난 건 명훈씨에게 당한 앙갚음을 해주려고 그랬는지도 몰라.
그 짜식이 한껏 달아서 설치도록 놔뒀다가 잔인하게 걷어차 버릴 작정이었지. 내가 모질지
못해 좀 끌려다닌 구석은 있지만 꼭 그러려구 했는데..."
영희로서는 통 종잠을 수 없는 소리였다. 닳고닳은 탕녀의 넋두리 같기도 하고, 정신의 성
숙보다 지나치게 앞당겨온 육체의 체험에 성적으로 온전히 망가져버린 여자의 어처구니없는
자기 고백 같기도 했다. 그 어느 편이든 이제 겨우 열여덟의, 그리고 적어도 고등학교에 적
을 두고 있는 계집아이의 말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자신도 그 방면의 남다른 체험이 있고, 고생스레 자라는 동안 복 들어 알게 된 성년의 비
밀도 또래와는 비교 안 될 만큼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영희는 그날의 모니카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내심으로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긴장으로, 모니카가 소주병을 홀짝거
리며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특히 모니카가 영희로서는 아직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육
체와 성의 신비를 태연스레 말할 때는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하면서.
뒷날 명훈 오빠는 모니카를 '혼돈의 여자'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그게 선악과 미추를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비정형적 인격을 가리킨 것이라면 그녀의 특성을 제대로 나타낸 말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도 그 특성을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깊이까지 알게 된
성년의 비밀스런 체험과는 무관하게 모니카가 흘린 눈물이 결론은 뜻밖일 만큼 단순하고 백
치 같은 것이었다.
'6,9식 장총'이라든가 '얹어놓고 돌려서 녹여보린다' '잼핥기' 따위. 어지간한 영희로서도
낯달아오르는 짐작밖에 가지 않는 성희의 기교까지 거침없이 입에 올리며 명훈과 깡철을 번
갈아 추억하던 모니카가 갑자기 그새 눈물이 마른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 깡철이 걔도 갔으니까, 니네 오빠와 다시 어떻게 안 될까> 아니 하
룻밤만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잘해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어때, 영희 너 좀 도와주
지 않을래? 그래, 오빠에게 잘 말해 한번 만나보게만 해줘. 응, 한번만."
"그렇담 계집애야, 네가 직접 찾아가보렴."
영희는 모니카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
나 모니카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명훈씨는 내가 다시 눈앞에 보이면 죽여버리겠댔어. 정말 이대루 불쑥 찾아갔다간 맞아
죽구 말 거야. 그때 명훈씨의 눈길이 그게 참말이라구 말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될 거야. 아직도 그런 마음 변하지 않았는지만이라도 알아줘."
그렇게 말하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영희에게 매달리듯 했다.
"너 미쳤니? 나는 집을 나왔다구 그러지 않았어? 오빠에게 붙들리면 바로 밀야행이야. 그
놈의 지긋지긋한 감옥 생활로 돌아간다구."
영희가 얼결에 몸을 뒤로 배며 가출을 핑계대고 거절의 뜻을 말했다. 거의 본능적인 방어
에 가까운 거절이었다. 그러다가 모니카가 손까지 더듬어 쥐고 간절하게 매달리 때에야 비
로소 그 부탁을 거절할 감정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그만큼 모니카의 온몸에서 뿜어나오는
치정의 열기는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구 너 말이야, 계집애가 아주 못돼먹었어. 오늘 새벽까지 깡철인가 뭔가 하는 그 작
자하고 뒹굴다가 이제 그가 가고 나니 오빠하고 다시 어째보겠다구? 도대체 너 날 어떻게
보는 거니? 남도 아닌 바로 오빤데. 그런 널 다시 붙여줄 것 같아? 더럽게..."
영희는 갑작스레 덮쳐오는 불결감에 몸까지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니카의 눈길에 반짝
하면 다시 푸른 불길이 일었다. 처음 방안에 들어서서 소주병을 뺏으려다 언뜻 본 그 불길
이었다.
"뭐. 더럽다구? 너까지 그렇게 생각해?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명훈씨 뿐이었는데두? 어쩔
수 없이 깡철이에게 깔려 있을 때두 내가 머릿속에서 안고 있던 사람은 니네 오빠였어. 아
냐, 옛날 암것도 모르구 담임선생님에게 당할 때도, 가짜 형사에게 당할 때두 머릿속에서 똑
같은 사람을 안고 있었는데, 나중에 니네 오빠를 만나보니 니네 오빠가 바로 그 사람이었어.
거짓말 아냐, 너는 믿지 않겠지만 나는 니네 오빠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니네 오빠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애. 쬐그만 계집아이 시절 막연하게 뒷날 함께 살게 될 사내애를 상상하기 시
작하면서부터..... 착각하고 있는 건 세상과 그 사람들뿐이야. 어쩌다 어거지로 나와 살을 맞
댔다구 해서 나를 소유했다거나 나하구 사랑을 나누었다구 믿는 그 나쁜 자식들... 나는 니
네 오빠라고밖에 진정으로 마음도 몸도 나눈적이 없어..."
영희로서는 오랜 세월 산업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 진창을 허우적거린 뒤에야 겨우 이해하
게 될 괴상한 논리였다. 그나 ㄹ영희가 끝내 모니카를 쓸어안고 알 수 없는 연민에 가슴 저
려하게 된 것은 다만 한번 쓰기 시작하면 같은 여자이면서도 버텨내기 어려운 모니카의 눈
물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난 언제나 널 언니처럼 여겨왔어, 날 좀 도와줘. 어니. 난 명훈씨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죽고 말 거야. 난 알아. 내가 손댈 수 없이 망가져버린 애라는 걸. 하지만 명훈씨만
은 날 고쳐놓을 수 있어. 그와 함께할 수 있게만 된다면 나도 온전한 여자로 잘 살게 될 거
야. 깨끗하게 구원받게 되는 거라구. 언니, 날 좀 도와줘 응."
이윽고 따지고 대드는 대신 눈물에 젖은 얼굴로 모미타가 그렇게 다가들자 영희는 잠시
자신이 이제 홀로 걷게 될 멀고 산산스런 길에 대한 걱정도 잊고 그녀의 등르 쓸어주며 다
래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널 도와주구말구. 가엾은 것..."
제 40장 귀향
"오빠, 배고파."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옥경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둘만의 여행이
라 잔뜩 긴장한 탓인지 평소의 몸에 밴 응석은 들어 있지 않았다. 철은 대답 대신 벽에 걸
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9시 45분. 여름 아침으로는 꽤 늦은 편이었다.
"알았어. 우선 차시간부터 알아놓고."
철은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기분으로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해놓고 다시 얼른 부드럽게
덧붙였다.
"조금만 참아, 내 맛있는 것 사줄게."
따지고 보면 옥경이도 그때까지 무던히 참은 편이었다. 가나하게 자라도 막내여서 그런지
언제나 참을성 없게 졸라대기 일쑤였지만, 둘이서 하게 된 긴 여행에 지레 주눅이 든 것임
에 틀림없었다. 철은 그게 전에 없이 안쓰럽게 느껴져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은 것이었
다.
안광읍으로 가는 기차는 50분 뒤에 있었다. 정확히 27분 뒤에 급행이 있었지만 철은 굳이
50분 뒤의 완행으로 표를 끊은 뒤에야 역광장으로 나왔다. 안광에서도 고향까지는 꽤 먼 버
스길이 남아 있음을 아는 그였으나 안광까지 가는 차표를 산 것만으로도 어쩐지 고향에 거
지반 이른 기분이었다.
역광장으로 나오니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문득 그 시간이 첫 수업 시간쯤 되리라는 게
떠오르며 말없이 학교를 결석한 일이 새삼 철의 마음에 걸려왔다.
"오빠, 우리 저기 가서 국수 먹자."
옥경이가 문득 관장 한 모퉁이의 나무 그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머니 몇이 잇대어 놓
은 나무 탁자 저편에서 삶은 국수가 든 함지박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 국수, 낮 얘기 세 자리(토막)라는데, 아침부터 국수는?"
철이 그렇게 퉁을 놓았다가 다시 옥경이가 자신의 보호 아래 있음을 상기하고 목소리를
바꾸어 물었다.
"국수가 먹고 싶어?"
"아냐, 어른도 없이 우리끼리 국밥집에 들어가려니까 그래서……"
"어른이 없으며 어때? 우리가 뭐 얻어먹으러 가나?"
"돈두 이쪽이 쌀걸……"
옥경이 그렇게 말하자 철은 옥경이 무얼 걱정하는지를 알았다.
"걱정 마, 우리 밥 사먹을 돈은 있어."
그렇게 대답은 해도 철 또한 갑자기 고향까지의 여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기찻삯까지
는 알았지만, 나머지 버스 찻삯이 얼마인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안광 가서 버스비 알아보고 배불리 먹지 뭐, 군것질두 하구……여기서는 국수로 해."
옥경이가 또 어른 같은 소리를 했다. 그때서야 철이도 못 이기는 척 국수 목판 쪽으로 걸
음을 옮겼다.
역광장의 국수 목판 앞의 조잡한 나무 의자에 쪼그리고 앉은 철의 눈에 맞은편 역사 벽의
'영천(永川)'이란 역 이름 팻말이 번뜩 들어왔다. 보호자도 없이 하는 긴 여행이 주는 긴장
으
로 다만 기차를 갈아타야 할 곳으로만 알아두었던 그 역 이름에 문득 새로운 기억과 감회가
첨가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멀지 않은 외가 때문이었다. 철이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들른 것
은 겨우 서너 살 때라 이렇다 할 기억이 남았을 리 없고, 그 뒤 외가에 대한 어머니의 언급
도 무언가 감정의 앙금이 가라앉은 것이었으나, 철은 왠지 그곳이 낯익고 정답게 느껴졌다.
"너 아니? 여기서 얼마 안 가면 금호면이 있는데 거기 우리 외가가 있다."
국수를 마는 아주머니의 손길에 눈을 팔고 있는 옥경에게 철이 어른스레 말했다. 외가란
말에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옥경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정말? 오빠 가봤어?"
"그래, 큰 기와집이 있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도 있었어."
철이 어렴풋한 기억을 무슨 대단한 추억처럼 늘어놓았다.
"그게 언제야? 언제 가봤어?"
"6·25 사변 나고. 그때 그리 피난을 갔지."
"뭐? 그럼 그게 몇 살 때야?"
"네 살 때……"
집에서 치는 나이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만으로는 채 세 살이 차지 않았을 때였
다. 그게 철을 좀 머쓱하게 만들어 말끝을 흐리는데 옥경이 배식 웃으며 말했다.
"에계, 그럼 애기 때쟎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그 말을 빈정거림으로 받아들인 철은 블끈 화가 났다. 남은 일껏 진지하게 말하는 것 그
렇게 받는 데 대한 얄미움이 그때껏 어른스레 수행해온 보호자 역할을 잠시 잊게 한 것이었
다.
"기집애야, 난 그래도 다 기억난단 말야!"
그 바람에 철은 대뜸 그렇게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철의 성난 기색에 기가 죽은 옥경이
어쩔 줄 몰라하며 겁먹은 눈길로 할금거렸다. 그걸 보고 다시 안쓰러워진 철이 공연히 성낸
걸 후회하고 있는데 마침 국수장수 아주머니가 목판 위로 국수 그릇을 밀어놨다. 멸치 우린
국물에 미리 삶아두었던 국수 가락을 풀고 그 위에 살짝 데쳐 짧게 썬 미나리 한줌과 양념
간장 한 술을 떠놓았을 뿐인 싸구려 막국수였으나 배고픈 그들 남매에게는 세상에서 더없이
맛난 음식으로만 비쳤다.
"자아, 국수 먹자."
철은 국수 그릇을 옥경이에게 먼저 밀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화가 풀렸음을 간접적으로 표
시했다.
그제서야 옥경은 마음을 놓은 듯 들고 있던 대젓가락을 국수 사발로 찔러넣었다.
밀가루 음식에는 어지간히 질려 있는 그들 남매였지만, 그날만은 둘다 달게 그릇을 비웠
다. 실로 각별한 맛이었다. 뒷날에도 철은 영천역에 내릴 일만 있으면 별로 식욕이 없을 때
도 역광장의 막국수 목판을 찾곤했다. 그때의 그 기막힌 맛에 이끌린 것이었는데 번번히 실
망하면서도 막국수 목판이 번듯한 역전 식당 골목으로 온전히 사라진 70년대초까지도 철은
그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철과 옥경이 안광으로 가는 완행 열차에 오른 것은 오전 11시가 넘어서였다. 기차가 20분
이나 연착하는 바람에 은근히 맘을 졸이던 철은 옥경과 함께 빈자리를 찾아 앉고서야 겨우
여유를 찾았다. 배가 차자 다시 신나고 즐거운 기차 여행놀이로 돌아간 옥경이 차창에 붙어
서서 바깥 풍경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철은 애늙은이 같은 얼굴로 그 전날 있었던 일을
쓸쓸하게 되씹었다.
영희 누나가 떠나면서 시킨 대로 철은 그 다음날 돌내골로 편지를 띄웠다. 누나가 써두고
간 편지는 따로이 봉함이 되어 있어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대강 짐작은 가는 데
가 있었다. 집을 나가는 누나의 변명과 함께 어머니가 빨리 돌아와 자기들 남매를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 씌어 있을 것이었다.
누나의 눈물 섞인 설득에 넘어가 역까지 바래줄 정도로 그녀의 가출에 찬동하긴 했지만
막상 아무도 없는 도시에 어린 옥경과 자신, 둘만 남겨지게 되자 철은 갑자기 불안과 외로
움에 빠져들었다. 거기다가 누나가 남겨두고 간 살 몇 되와 돈 5백 환도 너무 적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누나는 어머니가 편지를 받는 즉시 달려올 거라고 단언했으나 세상일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철이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바로 가장 걱정스러워한 대로 되어갔다.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는커녕 답장조차 없었다. 아끼느라고 아껴지만 누나가 남긴 쌀과 돈으
로는 열흘을 버텨낼 수 없었고, 헌옷가게 원집사나 읍내에 꼭 한 집 있는 먼 친척집을 찾아
빌리는 것도 어린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모두들 넉넉한 살림들이 못 돼, 어린것들만 남겨
놓고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만 나무랄 뿐 손에 쥐어주는 것은 많지가 않았다.
그래도 철은 한 보름은 갑작스레 떠맡게 된 어린 가장 노릇을 용케 해냈다. 동네의 구멍
가게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때는 어머니를 따라 몇 번 갔다가 겨우 낯이나 알아볼 만한
싸전에 가서 봉지쌀을 외상으로 얻기도 했다. 심지어는 목사님댁에 가서 훌쩍이며 쌀 몇 되
와 김치를 얻어다 먹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열세 살인 나이로는 한계가 있었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빌리러 나서기
는 해도, 같은 집에 두번째로 찾아갈 뻔뻔스러움까지는 없어 스무 날이 지나자 이제는 더
손을 내밀려야 내밀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하기야 그 동안도 끊임없이 철의 굶주린 마음을 유혹하는 곳은 있었다. 바로 영남여객댁
이었다. 한때 그 읍내에서는 그 어떤 친척보다 가까이 지냈던 집안이고, 또 그때껏 철이 찾
아가 손을 벌린 그 어떤 집보다도 살이가 넉넉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철은 이를 악물고 그 유혹을 이겨냈다. 무엇보다도 명혜에게 자신이 빠져 있는 참
담한 곤궁이 알려지는 게 싫었고, 동정과 함께 자신이 떠오르게 될 게 두려웠다. 어머니의
당부―이제는 그 집에 얼씬도 말라는―도 그렇게 되자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거기다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누나가 서울로 떠날 때 이미 쌀 한가마니를 빌렸다는
게 또 영남여객댁을 찾는 발길을 엄하게 가로막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견뎌내지 못한 철이 영남여객댁을 찾은 게 바로 그전날이었다.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간 옥경이가 어지럽고 메스껍다며 조퇴를 하고 와 누운 걸 보고 철은 막다
른 골목에 몰린 심경으로 영남여객댁으로 갔다. 끼니를 제대로 찾아먹지 못한 것은 벌써
사나흘 되었고, 특히 그 전날은 안집에서 보다못해 갖다 준 보리밥과 삶은 감자로 겨우 한
끼니만 때운 터라 철이도 허기를 느껴오던 중이었다.
그러나 철이로서는 거의 필사적인 용기를 짜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집 앞에 이르자
대문을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출입을 금하던 아저씨의 괴로운 표정보다도, 어쩌다 길거
리에서 마주쳤을 때 보이는 아주머니의 까닭 모를 허둥거림보다도, 동정 어린 명혜의 눈길
을 받게 되는 게 훨씬 끔찍했다.
죽고 싶다―철이 그의 일생에서 그런 중얼거림을 최초로 절실하게 되뇐 것은 아마도 그때
그 집 앞이었을 것이다. 만약 쉽게 죽을 길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괴로운 자리를 피하고 싶
다는 게 그때 철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 바람에 철은 늘어져 누운 옥경이를 남겨놓고 집
을 나설 때의 결심은 까맣게 잊고 영남여객댁 뒷문 앞에서 잠시 망연하게 굳어져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명혜 때문에 본래보다 몇 배나 과장된 참담함은 끝내 철을 뒷문으
로 내려가는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게 만들었다.
뒷날 철은 어떤 책에선가 한 동물학자가 흰 쥐들을 상대로 한 실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가
진 여러 욕망에 순서를 매긴 걸 보고 은근히 반발한 적이 있다. 먼저 그 학자는 건장한 흰
쥐 수컷들을 오랫동안 격리해두었다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망 건너편에 발정기의 암놈을
넣어보았다고 한다.
그때 숫쥐들은 물론 암놈을 보고 몰려갔으나, 앞선 몇 마리가 철망에 걸려 타죽자 나머지
는 모두 달려가기를 멈추었다. 그 다음 다시 그 학자는 그 숫쥐들을 며칠 굶긴 뒤에 이번에
는 철망 너머에 먹을 것을 놓아두어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한 마리까지 그 철망으
로 돌진해 모조리 고압 전류에 타죽어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동물학자는 그 실험을 바탕
으로 인간에게 있어서도 애정(또는 성욕)보다는 물욕(또는 식욕)이 우선하는 욕망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읽은 철은 몇 번인가 은근한 분노까지 느끼며 그의 논리
적 비약을 여럿에게 비판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날 영남여객댁 뒷문 돌계단에 주저앉아 흘
린 눈물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고, 이기 누고? 철이 아이가?"
울다 보니 더욱 비참해져 제법 소리까지 내가며 흐느끼던 철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런 나직한 외침을 듣고 난 뒤였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보니 흐릿한 시야에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의 놀란 얼굴이 들어왔다.
"엉야, 니가 여다서 웬일고? 우쩨서 이래 울고 앉았노?"
아주머니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연신 집 안 쪽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아저씨가 집 안에 있
어 자신이 아직도 철이네와 왕래를 하고 있는 걸 들키는 게 겁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철은 아주머니를 보자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대답을 할 겨를도 없었
다. 연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코만 쿨쩍이자 아주머니가 가만히 말을 끌었다.
"안 되겄다. 저다 쫌 가서 얘기하자. 안에 병우 아부지가 있어서……"
눈물로 앞뒤를 못 가리는 중에도 그 말만은 또렷이 철의 귀에 들어왔다. 어쩌면 아젔보다
도 바깥의 인기척에 쳐다볼지 모르는 명혜 때문에 벌써 다급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둥대면서도 작은 샛골목을 빠져나와 강둑 시멘트 난간 있는 데로 갔다. 시원한 강바람 덕
분인지 눈물이 좀 진정되며 자신이 찾아온 목적이 떠올랐다.
"뭐가 우예 됐노? 답답따, 어서 말해봐라."
뒤따라온 아주머니가 다시 그렇게 재촉하자 철은 띄엄띄엄 말문을 열었다.
"옥경이가 아파요……집에는 아무도 없고……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못 먹었어여."
"뭐시라? 영희는 어데 갔노?"
"서울요. 벌써 한 달쯤 됐어요."
"서울? 서울은 왜?"
"학교를 마쳐야겠대요. 성공하면 돌아온대요……"
그제서야 아주머니도 짚이는 게 있는 듯했다.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거라믄 느그 어무이도 알고 있나?"
"편지했어요. 두 번이나……"
"그런데도 안죽 안 왔단 말이제? 어린 너그 둘이만 내삘어져 있는데도."
"네……"
"보자―글타 카믄 어제 저녁부터 암것도 못 묵었다는 거 아파서 글탄말가? 묵을 기 없어
서 글탄 말인가?"
"먹을 게 없어서……"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다시 눈물이 쏟아져 눈앞이 흐려졌다. 앞서의 참담함에다 알 수 없
는 굴욕감까지 곁들여져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글치만 쌀 한 가마이 보낸 기 한 달도 안 되는데, 그건 다 우쨌노?"
"누나가 팔아가지고 갔어요"
"우야꼬! 참말로 몬됐데이. 몇 살 안 먹은 가시나가 우째 그래……"
아주머니는 그렇게 영희를 나무라다가 갑자기 철의 등을 밀 듯 말했다.
"알았데이, 먼저 가 있그라. 내 쪼매 있다가 느그 집에 가꾸마."
그리고 종종걸음 쳐 다시 짐 안으로 돌아갔다.
아주머니는 그로부터 오래잖아 철이네 집으로 왔다. 식은 밥과 반찬을 따로 담은 찬합 둘
을 싸들고 왔는데―뜻밖에도 명혜를 뒤딸리고 있었다.
옥경의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은 아마도 허기진 속 때문이었던 듯했다. 옥경은 밥을 보자
핼쑥해져 누워 있던 아이답지 않게 허겁지겁 퍼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은 명혜를 보다 새
로이 샘솟기 시작한 눈물 때문데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가 억지로 쥐어주는 숟갈
로 몇 술 뜨다 끝내 흐느낌 속에 삳갈을 놓고 말았다.
"엉야, 머스마가 저래가지고 우야겠노? 저러코름 맘이 약해가지고 뭐에다 쓰겠노?"
아주머니가 그렇게 핀잔을 주었으나 목소리는 측은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철이 그 새로운 눈물에서 놓여난 것은 눈물을 훔치면서 흘깃 훔쳐본 명혜의 표정 때문이
었다. 맑은 두 눈 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철을 바라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
리는 게 갑작스런 깨달음과도 같은 자극이 되었다.
'그래, 못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철은 그런 마음속의 결의로 이를 악물 듯 턱없이 과장되기만 하는 감정을 억눌렀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철은 눈물을 거두고 그로서는 최상의 말을 골라 그렇게 고마움부터 나타냈다.
"은혜는 무신……우선 밥이나 먹그라. 엊저녁부터 굶었으믄 얼매나 배가 고프겠노?"
아주머니가 그러면서 다시 숟갈을 쥐어주었다. 그러나 철은 아무래도 밥을 먹을 수가 없
었다. 식욕이 없어서라기보다 묘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적어도 명혜가 보는 데서 걸신들린
듯 밥을 퍼넣을 수 없다는 엉뚱한 고집이, 두어 술 떠넣은 밥 때문데 오히려 더욱 치열해진
배고픔을 이려나가게 한 것이었다.
"보자, 너그 고향이 돌내골이라 캤지? 니 차비 있으면 거다까지 갈 수 있갰나? 너그 어무
이 있는 데 말다."
아주머니가 그걸 물은 것은 찬합을 반 넘게 비우고서야 겨우 오빠 생각을 옥경이가 아쉬
운 듯 숟가락을 놓은 뒤였다. 그 말을 듣자 철이도 문득 그때껏 그 생각을 못 한 게 억울했
다.
진작에 어머니를 찾아나섰더라면 명혜에게 자신의 그런 참담한 꼴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
으리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네, 찾아가려면 갈 수는……"
철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아주머니가 미리 생각해온 게 있는 듯 결정을 내렸다.
"그라모 이래 하자. 내가 차비를 해줄 낀게 며칠 결석하더라도 니가 너 그 어무이한테 함
갔다 온나. 콩낱만한 알라들만 놔뚜고 시상에 이기 무슨 일고? 우짜든지 너그 어무이나 데
불꼬 오그라. 그 동안 옥경이는 우리 집에 와 있고……"
"싫어요, 저도 오빠 따라 갈래요."
곁에 있던 옥경이가 입부터 비쭉이며 그렇게 끼여들었다.
"갈 거라면 옥경이도 데리고 가죠 뭐."
철이도 이와 어머니를 찾아간다면 옥경이 혼자 남겨두고 가고 싶지는 않아 거들었다. 아
주머니 역시 국이 옥경이를 잡아둘 생각은 없었던지 그런 남매의 희망을 쉽게 들어주었
다.―철과 옥경의 그 돌연한 귀향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평소에는 거의 잊고 지냈으나 한번 되살려지자 문득 한없는 정감으로 다가오는 고향이란
낱말과 그리로 돌아간다 싶자 느닷없이 이는 가슴 설렘.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들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빨고 다리고 하는 동안 당연히 울적해야 할 그 귀향길은 어느
새 신나고 즐거운 여행길이 되고 말았다. 서투른 빨래와 다리미질로 법석 같던 그 하룻밤,
새벽 안개 자욱한 길로 내일동 버스 정류장을 향하던 때의 야릇한 흥분과 난생 처음 스스로
기차표를 사던 때의 으쓱함―그러나 그 모든 유쾌할 수도 있는 회상에도 불구하고 철은 끝
내 옥경이처럼 즐거운 어린 여행자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는 듯한 명혜의 눈길 때문이었다. 칡뿌리 사건 뒤로 어쩌다
먼빛으로 마주쳐도 공연히 심술스런 표정을 지어대는 철에게 겁먹은 대로 무언가를 호소하
는 듯하던 그애의 눈길이 그날은 철이 알 수 없는 어떤 괴로움으로 젖어 있었다. 제 어머니
곁에 작은 그림자처럼 붙어앉아 있다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돌아갔지만, 철은 그애의 두
눈에 흥건히 괴어 있던 눈물이 단순한 동정에서 우러난 것만은 아닌 어떤 괴로움이라고 단
정지었다. 그리고 그런 단정을 바탕으로 삶의 한 시기를 지날 때마다 새로워지는 그 눈물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그의 삶에서 소중한 역할을 했다.
외롭고 불우했던 소년 시절, 자칫하면 순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무식과, 평범이란
그럴싸한 수식 뒤의 패배적인 삶으로 굳어졌을 그를 배움과 남다른 자기 형성의 길로 이끈
것은 바로 그애의 그런 눈길이었다. 배움과 출세 지향의 길을 떠난 후에도 종종 그를 주저
앉게 만들던 여러 삶의 불리한 여건들에 대해 분발과도 같은 용기와 참을성으로 맞서게 해
준 것 또한 그 눈길이었으며, 이것저것 다 지쳐 그대로 침몰했을 뻔했던 그의 젊은 날에 말
과 글로 이루어진 가능성의 섬을 찾게 해준 것도 틀림없이 그 눈길을 대상으로 한 오랜 감
정 연습의 한 부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삼십 분마다 한 번씩 절망이 강요되는 그 허
망한 노력 속에 그 젊은 날의 나머지가 탕진되는 동안에도 비뚤어진 집착으로 언어의 가소
성(可塑性)과 형상성에 매달리고, 모든 혁명 도는 반역의 아들들이 그들의 이념에 대해 품었
던 것과 마찬가지의 어두운 열정으로 그 마술적 효능을 신앙할 수 있었던 데도, 그때 그녀
의 눈물 괸 눈길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은 분명 무시 못 할 힘이 되어주었다.
이제 더는 젊음과 사랑을 스스로의 것으로는 얘기하기 쑥스럽게 된 불혹(不惑)의 문턱에
서도 이따금씩 그 눈길을 꿈꾸다 깨어난 새벽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그대로 하얗게 밝기
일쑤였다……
기차가 안광읍에 닿은 것은 오후 4시가 가가울 무렵이었다. 뒷날에는 특급으로 두시간 남
짓 걸리게 된 거리가 그 시절은 거의 다섯 시간이나 잡아먹은 것이다.
가끔은 창밖의 풍경에 눈을 팔기도 하고, 잡상인들이 파는 김밥이나 실로 얽은 풋사과에
정신을 뺏기기도 했지만 그때까지의 주된 정조는 명혜의 눈물을 자신에게 불리하게만 해석
한 데서 온 울적함이었던 철이도 안광역에 내리면서부터 기분이 달라졌다. 까마득하게만 느
껴지던 안광에서의 어린 시절이 역광장 앞 거리의 낯익은 풍경으로 문득 생생하게 살아난
까닭이었다.
저만치 자신이 입학해서 이 년 반이나 다닌 국민학교가 그리운 옛집처럼 눈에 들어왔고,
자기들이 살던 구시장 골목길도 조금만 정성들여 더듬어가면 금세 찾아갈 것 같았다.
시외버스 정류장인 통일역도 3년 전과 같은 자리에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
었다. 아무리 변화의 속도가 느린 50년대말의 3년이라 해도 그때 나름으로는 꽤나 달라졌겠
지만, 서울 같은 대도시를 본 눈에는 오히려 전보다 더 작고 초라해진 듯 보일 뿐이었다. 거
기다가 사탕과 껌, 멀미약 따위를 펼쳐놓은 작은 목판을 메고 이 버스 저 버스를 옮아 다니
는 난쟁이 아저씨도 그대로인 걸 보고, 철은 잠시 자신이 그곳을 그토록 까맣게 잊고 지낸
게 스스로 이상할 지경이었다.
철의 그 뒤 귀향담은 다시 나중에 그가 쓴 어떤 자전적인 글을 통해 들어보기로 하자.
《……아직도 약간은 그렇지만, 그때 내가 벌써 고향 동구를 느낀 석은 안광에서 고향으
로 가는 막차에 오르면서부터였다. 마침 그 노선의 읍면에는 장이 없었던지 어렵지 않게 나
리를 차지하고 앉자마자 나는 그 동안 아득히 잊고 지냈던 고향을 일시에 흠씬 느낄 수 있
었다. 그 지방 특유의 거치고 억센 사투리로 격한 말싸움처럼 주고받는 왁자한 농담, 정한
차시간이 있는데도 하염없이 느긋한 운전사와 조수, 어디로 새들어오는지 버스가 철발히고
전에 차 안 가득 차 들어오는 가솔린 냄새……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향을 가깝게 느끼도록
한 것은 군데군데 박혀 앉은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 편에서는 자라나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
해도 우리는 금세 알아볼 수 있는, 언제나 그저 조금 늙었을 뿐인 그들, 그때만 해도 고향
가는 막차의 절반을 차지했으나, 고향의 해체와 더불어 점차 줄어들어 이제는 차 안에서 한
둘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그 낯익은 사람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우리들 기억의 추상성이다. 뚜렷하고 개별적인 기억이 오
래갈 것 같지만 가장 오래가고 쉽게 되살아나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인 느낌이나 막연한 분
위기 쪽이다.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겨우 다섯 살 때였고, 그 뒤로 나는 단 한 사람도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을 스쳐간 막연한 느낌만으로 나는 그들을 알아맞
혔는데, 나중에 고향에 가서 확인해보니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착오가 없었다.
버스 차창으로 내다본 고향까지의 백이십 리 길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에 대한 내 기억은
할머니 품에 안겨 높게 올라앉았던 원목 실은 산판 트럭과 이따금 깊게 내려다보이는 산골
짜기뿐이었다.
그런데 안광읍을 벗어나고 얼마 안 돼서부터 나는 차멀미로 얼굴이 핼쑥해진 어린 여동생
에게 늘 다니던 길을 일러주듯 고향으로 들어가는 백리 길 굽이굽이를 일러주기 시작했다.
"저기는 맑으내인데 우리 진외가가 있어."
"이건 똬리재라 그러는데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왔대."
"여기가 임안인데 안광과 돌내골 사이에 꼭 중간이 되지……"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물으면 전혀 대답할 길이 없는 기억의 신비였다.
버스가 돌내골로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갈림길을 지나서부터는 고향쪽에서도 신호가 왔
다.
"가마히 있그라. 보자, 너 인제 보이 돌내골까지 가는 모양이제. 누구집 아이들이로?"
버스가 한참씩 쉬는 면소재지 정류장마다 토하는 옥경이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차 안으로
돌아오다 보면 어김없이 정류소 앞 국밥집에서 막걸리 사발을 들이붓듯 마시던 옆자리의 중
년이 불쑥 나를 보고 물었다. 일가 아저씨거나 할아버지일 것이란 짐작이 퍼뜩 떠올랐으나,
어떻게 대답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다시 물었다.
"너 웃대 택호가 뭐로 이말이따."
"택호요? 택호가 뭔데요?"
내가 그렇게 묻자 그가 공연히 소리내어 웃더니 택호를 설명하는 대신 물음을 바꾸었다.
"너어 외가나 진외가가 어디로 이 말이라."
"외가는 영천이고 진외가는 맑으내예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차 안 여기저기서 알은체들을 했다.
"그케, 어딘동 물상이 많이 낯익드라 했디……"
"아이, 그래믄 거 뭐시고 밀양인가 어딘가서 오는 길이란 말가?"
"니 몇 학년고? 야는 니 동생인갑제?"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아주머니는 어렵잖게 내 이름과 여동생의 이름까지
금세 기억해내기도 했다. 어머님의 근황도 그때 벌써 다 알 수 있었다.
"금호댁이 여 온 지 하마 몇 달 된 거 같은데 안죽 안 갔나? 석공에 산도 하나 팔았다 카
디……"
"어디 명훈이 대학 씨겠는다꼬 그거 가주고는 안 되는 갑더라. 요새는 재 너머 큰산 흥정
하고 댕긴다 그카지 암매."
"그라믄 요 메칠 왜 안 비노? 통 못 보겠는데."
"그 소리 못 들었나? 상계 참나무산을 궁씨네 서사란 놈이 가마이(몰래) 다 비먹었뿌렸제.
그놈 찾으러 갔다 카던데 인제는 왔는동 몰따."
그럭저럭 차가 고향 장터에 이르렀을 때는 유월의 해도 석병산 쪽으로 뉘엿할 때였다. 나
는 그 장터에서 또 한 번 기억의 불가사의함을 경험했다. 현실이 잠재 의식 속에서 기억을
건져올렸다고나 할까, 한번 그곳을 둘러보자마자 그때껏 한번도 구체적으로 떠올라본 적이
없는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며 눈앞의 사물들과 일치되었다. 진성댁 술도가, 태갑씨네 점
방, 동묵씨네 정미소, 형분이네 주막, 그리고 저만치 돌내국민학교……많아야 만 다섯 살이
채 안 되는 어린 날의 몽롱한 의식을 스쳐간 사물들이 다시 대하자마자 금세 생생한 기억으
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특히 태갑씨네 점방을 상품의 진열까지도 어린 내가 빨간 일환짜리 지폐를 들고 드나들
때와 똑같았다. 대패질하지 않은 송판으로 만든 다섯층의 계단식 진열장 맨 위에는 몇 종류
의 아메다마(눈깔사탕)가 든 크고 목이 넓은 유리병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층은 울긋불
긋한 종이로 싼 질 낮은 포도주(실은 화학주)에다 석볼이 그려진 조잡한 상표가 붙은 소주
병과 숫제 상표조차 붙지 않은 청주 됫병 따위가 늘어섰으며, 그 다음 층은 성냥과 양초갑,
비누, 실 같은 일용 잡화―하는 식으로 내려가다가 맨 아래 납작한 유리상자에는 센베이, 비
가, 꽈배기 따위의 과자류가 담겨 끝이 나는.
하지만 그 첫번째의 귀향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두들(언덕)이라고 불리는 언덕 마을
과 거기선 여남은 채의 고가였다. 이번에는 기억이 그때껏 부려온 것과 정반대의 요사를 부
린 탓이었다.
고향의 다른 사물들과는 달리 그 언덕 마을과 고가는 어렴풋한 대로 내 기억에 있었고,
이따금씩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기껏 나지막한 산자락과 고만고만한 기와집 몇 채로 이
루어진 평범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너무나 달랐다. 아름드리
참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자 상상 속에서나 그려보았던 덩그런 기와집들이
잇따라 나타나 이미 도회적인 안목으로 내게 느닷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뒤 사흘 고향에 머물면서 들은 여러 자기 옛 고향의 영광은 그것을 한때의 충격에서 깊
은 감동으로 키워 마침내는 뒷날의 내 의식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하기야 그전에도 내게는 영락 의식 또는 유적감이라 이름할 수 있는 특이한 종류의 의식
이 어렴풋한 대로 형성되어 있었다. 곧,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무언가 잘못
된 힘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받고 고통당한다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우리가 옛날에는 부자
였다던가 아버지가 동경 유학을 다녀오고 어머니는 전문학교를 중퇴했다던가 하는 따위에
근거한 것으로, 어쩌면 그것은 결핍과 불안의 현실에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지
어낸 미신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 귀향에서 본 고가들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집이
었다는 사실은 그 뒤 알게 된 몇 가지 과장된 보학적 지식과 더불어 내 영락 의식 또는 유
적감에 그 어떤 것보다 든든한 근거가 되어주었다.
그뒤로도 줄곧 펴지지 않은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 탓일까, 예순 칸 남짓의 그 고가는 그
대로 고색창연한 고성으로 자라갔고, 제법 철이 들어서까지도 자신은 그 어떤 음험한 저주
로 영지에서 쫓겨나 방랑하는 소공자 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패배한 비극적인 영웅으
로 망상하곤 했다. 나이가 들고 식견이 자라면서, 그리하여 자신이 기껏해야 흔해빠진 토반
의 후예요 실패한 식민지 지식인의 아들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 차차 벗어나게 된
의사 의식의 일종이지만, 한때는 내 삶의 많은 선택과 결정이 그 비장감과 자부심에 좌우됐
다는 점에서 또한 내 정신의 형성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41장
홀로 가는 길
영희가 양장점 문을 열었을 때 시다 계집애는 바로 영희의 옷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어찌나 일이 밀리는지, 이제 겨우 끝냈네."
양재사 아주머니가 변명인지 거드름인지 모를 소리로 영희를 맞았다. 재봉틀 선반에 놓인
일감이 헌옷가지인 걸로 보아 가겟일이 그녀의 말처럼 바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다됐어요. 한번 입어보세요."
영희보다는 두어 살 아래로 보이는 시다 계집아이가 곧 다림질을 마치고 옷을 내밀었다.
첫물인 포플린으로 지은 여름 교복 윗옷은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까지 돌았다.
아직 남은 다림질의 온기가 종종걸음 쳐온 영희에게 후끈하게 느껴졌지만 그리 불쾌하지
는 않았다. 새 옷을 입게 될 때 품게 되는 여자 특유의 기쁨과 들뜸 덕분이었다.
"어때, 잘 맞지? 학교 앞에서 학생들만 전문으로 상대하는 싸구려 맞춤집과는 다를 걸야."
양재사 아주머니가 어느새 제법 큰 벽거울을 떼어 영희를 비춰주며 제 솜씨에 스스로 만
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바람에 영희도 더욱 기대를 가지고 거울 속을 차분히 들여다보
았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옷은 틀림없이 교복의 격식을 갖추었고 몸에도
잘 맞았지만,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것은 아무래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아니었다. 몸매나
표정이 교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 꼭 교복을 빌려입고 여학생 행세를 하려 드는 논다니처
럼 느껴졌다.
작년에 입던 교복이 어울리지 않은 걸 그저 옷이 작아지고 낡아서 그리 된 줄로만 알았던
영희는 새로 맞춘 교복에서까지 그런 느낌이 들자 문득 섬뜩해져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일 년 동안에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왜 교복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되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빠 명훈 때문에 집으로 끌려가 넉 달 가까이나
못 나가게 된 학교였다. 박원장과 어머니에게 음험한 원한을 불태우며 밥짓기와 설거지와
빨래로 보낸 그 넉 달이 자신에게서 학생티를 벗겨버렸으리라는 짐작이 든 것이었다. 하지
만 그것과 거의 동시에 짚여오는 또 다른 짐작은 미처 누구를 원망할 틈도 없이 영희를 풀
썩 주저앉고 싶을 만큼 상심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녀의 몸이 겪은 변화였다. 그 교복이 어
울릴 대부분의 계집아이들과는 달리, 남자를 알아도 깊숙이 알게 된 자신의 몸이 교복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유별난 징표를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왜? 맘에 안 들어? 어디야? 어디가 어때서 그래?"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굳어지는 영희의 표정에 양재사 아주머니가 약간 당황하
는 눈치로 물었다. 영희가 거울 속을 살피느라 그녀의 수다를 무시한 게 옷에 대한 불만으
로 받아들여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영희는 또 영희대로 양재사 아주머니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묻는 게 당황스러웠
다. 그저 눈치만 살피는 게 아니라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보는 듯 느껴진 까닭이었다.
금세 자신의 몸이 겪은 변화를 알아보고 빈정거리는 것 같아 속으로 울컥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교복인데 가슴을 너무 사린 거 아니에요? 에리(목깃)도 너무 좁고..."
영희가 얼른 눈에 띄는 대로 불만을 털어놓자 양재사가 넉살좋게 받았다.
"이 학생 이제 보니 영 쑥이네. 요새 학생들 젖통 크게 보이게 하지 못해 안달인 줄 알았
는데... 그리고 에리도 그래. 아무리 교복이라 해도 에리가 너무 넓으면 촌스럽다구. 썩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
그렇게 받아넘기는 양재사의 말이 영희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지게 했다. 아무런 근거 없
는 지레짐작으로 그녀에게 화를 낸 게 오히려 미안해 옷에 대한 불평은 그쯤에서 거두었
다. 그리고 어떻게 좀 깍아볼까 하던 바느질삯을 그대로 치르고는 다시 종종걸음 쳐 이모네
집으로 갔다.
집을 나설 때 이미 자욱이 감돌던 전운은 그 사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명인 이모는 아
직도 간밤을 새운 그 자리에 앉은 채 표독을 부리고 있었으나 외박을 하고 돌아온 이모부는
이불을 둘러쓰고 눕는 대신 시원스레 벗어부치고 수도간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 영희에게는 오히려 위험스럽게 보였다. 영희가 알고 있는 그들 내
외의 관계로 미뤄보아서는 그런 이모부의 태도는 터무니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싸움은 까닭 없이 조마조마해진 영희가 식모 후불이의 부엌방으로 피해 들어앉은 지 몇
분 안 돼 터졌다.
"김일병, 김일벼."
이모부가 큰 소리로 운저병을 부른 뒤,
"부관에게 연락해. 나 오늘 점심 먹고 들어간다고 작전과장보고 부대 좀 잘 장악하고 있
으라구 그래."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는데 그때껏 표독을 부리지 않았던 이모의 앙칼진 목소리가 끼여들
었다.
"아이고, 이제 아주 부대까지 팽개채고 나서네. 당신 그전에 나 좀 봐요."
"또 왜 그래?"
이모부가 적어도 기가 죽은 것은 아닌 목소리로 그런 이모의 말을 받았다.
"어쨌든 들어와서 얘기해요. 애들하고 김일병 보는 데서 창피당하지 않으려거든."
이모가 다시 그렇게 쏘아붙이자 이모부는 마루에라도 걸터앉는지 삐걱 하는 마룻장 소리
를 내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거 우리 영천 마님께서 왜 이러시나? 그래, 무슨 얘기야."
"당신 똑바로 말해요. 어제 왜 외박했어요?"
"내 말하지 않았어. 동기생들하고 술 한잔 하다가 늦어졌다구."
"둘러대지 말아요. 전에는 통금이 돼도 잘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럼 새벽 다섯시싸지
얘기했단 말예요?"
이모가 그렇게 따지고 들자 이모부는 대답이 좀 궁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
죽어하지는 않았다.
"남자들간에는 밤새워 이야기할 일도 있는 법이야."
그렇게 머뭇머뭇 말하자 갑자기 이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 또 그리로 둘러대려구. 그래, 당신 동기생 몇이 참모총장을 몰아냈다구 당신이 덩달
아 들뜰 건 뭐예요? 누가 그 참모총장 자리에 당신 앉혀준답디까?"
"바깥일을 그렇게 안에서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왜 말 못 해요? 당신 그대 보지 않았어요? 김중령 부인이 울고불로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꼴 말예요. 죄목이나 적어야지. 국가반란음모죄라니, 끔찍하지도 않습디까? 다행히 송장군이
점잖아 조용히 총장직을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뭐예요? 더군다나 당신
은 뒤늦게 뭐 어쩌겠다고 그 사람들과 어울려요?"
"어어? 이 여자 봐. 그러니까 당신, 내가 기생집에서 오입질하느라 외박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부리는 강짜요?"
"그래요. 어느 쪽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가 당신까지 나서서 덤벙대는 게 못마땅하단 말
예요. 혁명이고 민주고 학생들이나 민간인들이 떠들고 나서는 거지, 군인인 당신들이 어떻다
는 거예요? 왜 쓸데없이 모여 수군대는 거예요?"
"어라, 이 똑똑한 여자가 점점 더 못 할 소리가 없네. 남 들으면 우리가 모여 무슨 큰 역
적질 모의라두 하는 줄 알겠어. 그건 그렇고-군인이 어쩌고 하는 당신 말투도 아주 기분 나
쁜데. 그럼 군인은 이 나라 국민도 아니란 거야? 군인이라고 해서 나라가 썩어문드러져도
보고만 있으란 말이지?"
"도대체 당신들이 뭘 안다고 나서는 거예요? 정치라면 그쪽으로 수십년 부대끼고 닳은 정
치가들이 있잖아요?"
"시끄러!"
갑자기 이모부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전의 관계로 보아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위엄과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기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이모부의 그 같은 표변에 아연했는지, 이모도 잠시 말대꾸가
없었다. 그 때문에 생긴 바깥의 짧은 침묵을 다시 이모부의 삼엄한 말소리가 깼다.
"당신이 나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하겠는데, 제
발 이 일만은 좀 아는 척 나서지 말아. 당신도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입 좀 다물고 있
으라구. 군이 여편네 노릇을 하마 십 년이나 했으니 이게 무슨 소린지는 알아듣겠지?"
그리고는 삐걱이는 마룻장 소리르 내는 게 마루를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아니, 저 양반이 이제는 아주..."
이모가 발끈해 뒤따라 들어가며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싸움은 그뒤로 별진전이 없었다. 한
동안 말다툼은 계속되었어도 어디까지나 주위를 의식한 자제된 것이어서 주고받는 내용은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모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 않았음은 분명했
다.
"김일병, 시동 걸어!"
잠시 후 군복으로 갈아입은 이모부가 그새 운전병이 번쩍이게 닦아놓은 군화를 발을 꿰면
서 외치는 목소리에는 조금도 억줄린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작과는 달리 오히려 몰린
누치가 보이는 것은 이모 쪽이었다.
"저 맺고 끊고 못 하는 양반이 공연히 무슨 일을 내지..."
미모부가 탄 지프가 사라진 쪽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영희ㅣ
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말끝을 흐리는 게 평소의 싸움 끝과는 많아 달랐다.
이모 내외의 싸움이 그렇게 가라앉는 걸 보고 영희는 곧 제 볼일로 돌아갔다.
"후불이 너 미안하지만 아이롱에 숯불 좀 피워줄래?"
영희가 그렇게 부탁하자 영희 못지않게 주인 내외의 싸움에 신경을 쓰고 있던 후불이가
까닭 없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이 더운 날에 엇다 대림질을..."
"교복 스커트르 ㄹ좀 다렸으면 해서. 어제 빨았는데 사지라서 그런지 영 쭈굴쭈굴해."
"학교는 저녁태 가잖아요?"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유월 중순의 한낮 햇볕에 숯을 피우기가 아무래도 마음내키지 않는
지 후불이가 탐탁잖게 대꾸해따.
'이 기집애가...'
영희는 후불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훅 치밀었느나, 아직 얼마나 더 그 집 신
세를 져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이모네 식모라지만, 더부살이하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그녀와 틀어져 지내 이로울 게 없는 까닭이었다.
"낮에 어디 좀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럼 숯 있는 데나 알려줘."
영희가 그렇게 숙이고 들자 후불이도 좀 미안한지 배시시 웃으며 일어났다.
"새 옷 찾고 스커트 다려 입고- 어디 애인 만나러 가요?"
"애인은 무슨 -숯 있는 데나 알려줘."
"숯불은 제가 피워줄게요. 한번 피웠다 물을 부어 꺼둔 거라 언니 솜씨로는 어려울걸요.
대신 바른 대로 고백해요."
겨우 두 살 아래인데도 까마득하게 어린 것처럼 느껴지는 후불이의, 남녀 관계에 대한 호
기심이 진득이 밴 말투였다.
영희는 적당히 능쳐 그 호기심을 곱게 살려줄까 하다가 이내 바른 대로 말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실은 취직을 하러 가. 면접 시험이 있어서..."
"취직요? 어딘데요?"
"몰라, 조그만 회사래. 경리를 뽑는다는데..."
"학교는 어떡하구요?"
"야간은 어떻게 다니게 해주겠대."
그러자 후불이는 좀 전과는 달리 사근사근해져 부엌으로 나갔다. 후불이가 부엌에서 숯불
을 피우느라 풍구를 돌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이모가 들어왔다. 어렸을 적
그렇게 눈부셔 보이던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젠 살이에 찌든 중년 여인의 화장 짙은 얼굴 속
에 희미한 자취로만 남아 있었다.
"영희, 나 좀 보자. 안방으로 건너와."
이모는 그 말과 함께 문들 닫고 나갔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나-영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모를 따라 안방으로 건너갔다.
"너 말이야,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있어 집 나온 거 아니냐?"
이모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물었다. 영희가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무슨...다른 일이라니요?"
"하마 네가 온 지 스무 날 가까운데 어째서 언니한테는 한번 연락도 없지? 언니 성격으로
는 말만한 처녀애를 내보내놓고 하루도 못 배길 텐데 편지 한 장 없는 게 이상해. 그리ㅣ고
명훈이는 또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와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한번쯤은 여길 들여다봐야 할
거 아냐?"
"이모님한테 미안해서일 거예요. 둘 다."
"아냐. 무언가 좀 이상해. 너 밀양서 올라온 게 언제라구 그랬지?"
"이모님댁에 외기 전날요."
"명훈이는 보고 왔니?"
"네."
"그때 남매가 같이 자취한다는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왜 여기로 오게 됐니? 물
론 나한테 온 게 잘못이란 뜻은 아니다만..."
"말씀드렸잖아요? 그 방은 오빠 친구들이 둘이나 와 있어서..."
"그래도 어떻게 구처를 해봐야지..."
"그러잖아도 오빠는 지금 방을 얻어 나오려 하구 있어요. 곧 연락이 올거예요."
영희는 그렇게 둘러대면서도 새삼 자신이 너무 오래 이모님댁에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었
다. 평소에 별로 왕래가 없는 것만 믿고 온 것이었지만, 거꾸로 이모 쪽에서 어머니와 오빠
에게 연락을 할 위험이 있다는 걸 잊은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모는 그 일을 더 꼬치꼬치 캐지는 않았다. 원래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었
는지 잠시 침묵으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다, 너 알다시피 이모부는 군인이다. 더구나 지금은 진급을 앞두고 있어 주위에
신경을 써야 할 땐데 영 걱정이구나. 너야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마는 너희 아버지가 워낙
좌익으로 드러나 사람이 돼서 어째...물론 이모부는 내가 이런 소리를 한 걸 알면 펄쩍 뛸
거다. 그 양반은 4,19로 세상이 온통 뒤집힌 줄 믿고 있지만 사상 문제만은 그렇지 않아..."
거기까지 듣자 영희는 더 듣지 않아도 이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것 같았다. 하기 힘
든 말을 빙빙 둘러서 해야 하는 어려움에서 이모를 빼내줄 양으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떻게 해보려던 참이었어요. 취직도 곧 될 것같고..."
그렇게 생각도 안 한 거짓말을 둘러대었다. 사실 취직만 된다면 구태여 남의 눈칫밥을 먹
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영희가 그렇게 나오자 이모도 더 길게 늘어놓지는 않았다. 영희가 나가기를 바란 게 자신
의 무정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변명 비슷한 말만 두어 번 되풀이하고 영희는 놓아주었다.
영희가 명인 이모네 집을 나선 것은 11시가 넘어서였다. 벌써 6월도 중순이어서 가로수
잎새가 한창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차림도 거의가 반팔 소매였다.
신촌 로터리까지 걸어나온 영희는 거기서 청계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주머니에
서 다시 한번 종이쪽지를 꺼내 찾아가는 곳을 확인했다. 청계천 3가 수도 빌딩 맞은편 대흥
기업- 몇 번이나 읽어 벌써 머릿속에 박히다시피 한 내용이었다.
"학교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개인적으로 더 잘 아는 곳이다. 이북 사람들이라 지독한
구석은 있지만, 속은 알차지. 내일 오전중으로 찾아 가봐라."
쪽지를 건네주며 하던 담임선생의 덤덤한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그게 행운이라면 실로
뜻밖의 행운이었다. 겨울 방학, 봄방학을 빼고도 80일이 넘는 결석을 그 동안의 밀린 월사금
을 일시에 내는 걸로 해결을 보고 복학을 하던 날 그가 교무실로 부를 때만 해도 영희는 취
직 부탁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장기 결석 사유를 묻는 그에세 어려운 가
정 형편을 둘러대다가 건성으로 한번 부탁해본 것인데, 한 달이 지난 어제 불쑥 그 쪽지를
내민 것이었다.
"드디어 개헌안이 통과됐군. 양원에 내각책임제라, 밥그릇 수를 이만큼 늘려놨으니 이제는
그놈의 쌈박질이 좀 숙질까."
앞좌석에 앉아 신문을 펴들고 앉았던 신사복이 동행인 듯한 옆사람에게 신문을 넘겨주며
말했다. 둘 다 왠지 대학 교수거나 그 비슷한 직업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밥그릇 수만 늘려서 뭘 해? 밥을 늘려야지, 밥을..."
상대가 그렇게 받자 처음 사람이 그 말을 받는 식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누구에겐지 모를
빈정거림을 계속했다. 그러나 취직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는 영희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청계천 3가에 내린 영희는 수도빌딩을 찾는 데 한동안 진땀을 뺐다. 빌딩이라는 말에 높
고 큰 건물로만 생각했으나 겨우 찾아내고 보니 길가의 낡은 일본식 3층 건물이었다. 대흥
기업이 있을 그 맞은편은 언뜻 보아 작은 고물상 같았다. 가게 앞 길가에 이런저런 잡동사
니를 늘어놓아 그러잖아도 작은 가게를 더욱 초라하고 옹색해 보이게 하는 업체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 거리 어디에도 영희가 상상해온 대흥기업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영희는 자신
이 길을 잘못 찾아든 것 같아 다시 한번 수도 빌딩을 확인해보았다.
일층에 세들어 철물가게를 하는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틀림없이 거기가 수도빌딩이란 대답
이었다. 그렇다면 대흥기업도 틀림없이 맞은편 거기에 콧구멍만한 점포들 중의 하나일 것이
란 생각이 들자 영희는 그대로 돌아서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 거리 어디에도 경리나 사무원
은커녕 심부름하는 계집애라도 제대로 월급 주어가며 부릴 만한 업체가 없어 보이는 까닭이
었다.
그렇지만 기분대로 할 수 없는 게 또한 그 무렵 영희의 사정이었다. 밀양에서 재봉틀을
잡히고 쌀을 팔아 일만오천 환이 넘는 돈을 마련했을 때만 해도 영희는 그 돈이면 무엇이라
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복학 때문에 두 학기분 공납금을 한꺼번에 내고 책가방에 책권 마련하느라 거의 8천 환이
날아간 데다, 한 열흘 모니카네 집에 얹혀 지내면서 모니카와 함께 흥철거리느라 또 몇천
환이 날아가 이모네 집으로 옮길 때는 1천 환 가까이 줄고, 그 동안 조금씩 쓴 잡지도 있어
벌써 영희에게 남은 돈을 3천 환이 채 안 됐다. 용케 취직이 된다 해도 골방 하나 세 얻을
돈도 안 남은 것이었다.
'어쨌든 사람을 구해달랬으니까 그만 힘은 있겠지. 설마 월급도 안 주고 사람 부릴 생각
을 했을라구...'
영희는 까닭 모르게 한심해지는 기분을 달래며 길을 건너 대흥기업을 찾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 거리의 간판들이었다. 길 건너서 보기에는 초라한 고물상 같은 가게들이었
는데도 간판만은 한결같이 어마어마했다. '경원기계' '영남공업' '흥국철물' '한남전업' ...
그러다가 얼마 안 가 찾고 있는 대흥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시대냉동'과 '진흥기계' 사이에
끼인 두어 평의 점포로 그 앞 보도에는 부서진 선풍기와 녹슨 철사 뭉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철제 상자 같은 것들이 함부로 무더기져 있었다.
영희가 쭈뼛거리며 다가가니 가게 안에서 두 사람이 무언지 알 수 없는 기계를 좁은 바닥
가득 뜯어놓고 마주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나이 마흔쯤 되었을까, 땀과 기름때에
절은 러닝 셔츠를 걸친 채 이리저리 헝클어진 상고머리 젊은이로, 어딘가 약간 겁먹은 듯한
눈길로 나이든 쪽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어드렇게 된 거이야? 같은 냉장고가 와 이래 다르네? 학교서 뭐 새로 들은 거 없
어?"
아니든 쪽이 젊은이를 향해 시비하듯 물었다. 젊은이가 어깨까지 움찔하더니 더욱 겁먹은
눈길로 더듬거렸다.
"냉장고는... 학교서 한번도..."
"그놈의 학교는 뭐 하는 곳이가? 필요한 것만 골라 안 가르치는 덴가?"
나이든 쪽은 금방 쥐어박기라도 할 듯한 눈초리로 젊은이를 쏘아보다가 다시 그 기계에
달라붙었다.
뒷날 이 나라 냉동기기 제조업계를 주름잡게 될 그들이었지만 그날의 영희에게는 땀과 기
름때에 절은 그들이 바로 그 가게의 주인 부자라는 것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
인이 일꾼에게 가게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 것이라는 근거 없는 단정으로 그때까지의 쭈뼛거
림에서 벗어나며 물었다.
"저어,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뭐이가? 무슨 일로 왔네?"
아니든 쪽이 여전히 시비라도 받는 말투로 물었다. 고등학생이라고는 해도 나이가 있어선
지 그 무렵은 낯선 어른들이 자신에게 말을 놓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 사람이 대뜸 반말로
나오자 영희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쩌면 앞으로 그와 함께 일하게 될지 모른
다는 짐작에서 나온 계산이 그런 영희를 다랬다.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영희는 치미는 부아를 억누르며 그렇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가 더욱 거칠게 받았다.
"그러니까 뭣 땜에 왔느냐고 묻지 않았네? 사장은 무슨..."
그제서야 영희는 그가 바로 주인이라는 걸 알았다. 머쓱함과 아울러 다시 한번 한심한 기
분이 들었으나,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어야 하는 다급함에 몰려 공손하게 자신이 온 목적은
밝혔다.
"명신여상에서 손병규 선생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사람을 구한다고 하시기에..."
"아, 손병규 선생?"
담임선생의 이름을 듣자 그의 말투가 좀 풀어졌다. 그러나 재빨리 영희를 훑어본 눈길이
이내 실쭉해지며 말을 이었다.
"글티만 뭐 하이칼라 여사무원을 쓰자는 건 앙이고, 가게 청소부팀 자질구레한 수금까지
막 부리 체니아일 찾은 거인데,학생이 할 수 있갔어?"
"네, 일은 뭐든 할 수 있어요."
사람을 대하는 데 너무도 자신있어하는 그의 말투에 오히려 까닭 모를 기대를 걸게 된 영
희가 고까움을 참고 그렇게 받았다. 그가 이래두냐는 식으로 덧붙였다.
"것두 한 달에 몇천 호나 겟구서."
그런데 그 '몇천 환' 하는 말이 또 너무 수월하게 들려 더욱 영희의 마음을 끌었다. 보기
에는 꾀죄죄해도 벌이는 좋은 모양이로구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몇천 환을 가볍게
말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영희가 처음과는 달리 대답에 정성과 간절함을 담게 되자 그뒤는 쉽게 풀렸다.
월급은 3천5백 환. 거기다가 더욱 좋은 것은 그 가게 뒤의 작은 골방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었다. 가게도 지킬 겸 해서 그때까지는 아들인 그 젊은이가 기거해도던 한 평 남짓의 방으
로, 그렇잖은면 따로 돈을 들여 방을 얻어야 할 영희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 동안도 영희는 일자리르 ㄹ얻기 위해 두 군데나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첫번ㅉ는
전봇대에 붙은 '종업원 구함'이란 쪽지를 보고 찾아간 시장 근처의 식당이었는데, 학교에 갈
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월급도 침식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겨우 1천 5백 환밖에 안
됐다. 무슨 봉제공장이라는 곳도 대우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학교 갈 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침식밖에 안 재주는 견습 두 달이 끝나 정식 재봉사가 되어도 월급은 3천 환
이 차지 않았다.
거기 비하면 대흥기업의 조건들은 바로 영희를 위해 일부러 마련된 것처럼 맞아떨어지는
세미이었다.
영희에게는 거짓말처럼 일이 쉽게 풀려, 다음날부터 일을 나가기로 하고 그곳을 나선 것
은 점심때가 다된 뒤였다. 그들의 단골 밥집에서 점심상이 배달돼오자 주인 아저씨는 무뚝
뚝하고 거친 말투와는 달리 옷자락을 잡듯 영희에게 함께 먹기를 권했지만 영희는 왠지 쑥
스러워 그대로 털고 일어났다.
그녀 자신에게는 몹시 심각한 일이라 영희가 긴장해서 그랬던지, 가게 안에 있을 때는 몰
랐으나 거리에 나와보니 날은 6월 같지 않게 무더웠다. 하지만 영희의 기분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종로 쪽으로 길을 건너다 가만히 돌아보았을
때 이미 '대흥기업'은 처음 볼 때처럼 초라한 고물상같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은 지나서야 꽃필 이 나라의 산업사회,부정적 의미로든 긍정적인 의미로든,
로의 튼실한 싹을 거기서 보았다는 식의 대단한 발견은 아닐지 몰라도, 기름때에 절어 선진
문명의 이기를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그들 부자에게 어떤 믿음 같은 걸 품게 도니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늘은 오빠에게나 가볼까...'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기분에 우쭐해지기까지 하며 영희는 불현 듯 명훈을 떠올렸
다. 서울에 온 지 한 달이 넘도록 오빠르 ㄹ찾아가지 않은 것은 지난 일로 먹게 도니 앙심
보다는 그에 다시 어머니에게로 끌려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말은
웬만하면 그대로 따라주는 오빠의 성격으로 미루어 어머니의 엄한 당부가 있을 때는 머리채
를 끌고라도 집으로 데려갈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를 것 같았다. 아무리 오빠라도 혼자서 학교를 마칠 수 있도록 되었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벌써 넉 달째나 오빠를 못 본 데서 생
긴 그리움 같은 것이 한 달이나 혼자서 객지를 떠돌면서 느낀 외로움으로 과장되어 영희를
명훈의 자취방으로 끌었다.
영희에게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으나 따지고 보면 겨우 넉 달 남짓이어서
그런지 동네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취방으로 오르는 골목길 어귀의 헌책방에는 주인
아저씨가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해 거들거리고 있었고, 악착스런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가게
앞 골목길에 물을 뿌린다, 쓴다 하며 바지런을 떨고 있었다. 형배에게 뺏기듯 입맞춤을 당한
공터도 아직 그대로 였다.
영희는 몇십 년 만에 귀향하는 사람처럼 그 모든 걸 감회 어린 눈길로 보며 천천히 언덕
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그 무슨 조화였을까. 저만치 눈에 익은 자취방 창문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문득 섬뜩하게 가슴을 스쳐가는 예감이 있었다. 무언가 그 집 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바람에 영희는 무턱대고 집 안으로 들어가
는 대신 잠시 창문 밑에 붙어서서 방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방안에서 새어나오
는 말소리가 있어 절로 기울이게 된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기집애가 거길 뭣 땜에 갔겠어요? 어머니만 올라오시면 맨 먼ㅈ저 들이다칠 줄 뻔히
알면서..."
명훈이 무엇엔가 마음내키지 않아 내는 볼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이어 어머니의 성
난 목소리가 심장에 얼음덩이를 갖다대는 듯한 느낌으로 영희의 고막을 찔러왔다.
"그 덜돼먹은 년이 돈이사 몇 푼 뭉쳐갔다 카지마는 뻔하다. 내 속으로 난 자식 내가 모
리고 누가 알겠노? 보나마나 학교 드가는 데하고 번쩍번쩍하는 구두에, 시계에, 옷에 다털어
옇고 벌씨로 한푼 안 남았을 끼다. 그래서 이집 저집 떠댕기다 지금은 너그 셋째이모 집에
처억 들앉았을 끼란 말이다. 어서 일어나라. 집이나 좀 갈채다고..."
얼어붙은 듯 창틀 밑에 굳어 있던 것도 잠시 영희는 곧 절박한 위기감까지 느끼명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금세라도 어머니가 뛰쳐나와 머리채를 휘어잡을 것 같은 공포에 쫓기며 뛰
듯이 골목길을 내려갔다.
영희가 겨우 제정신을 차린 것은 지나가는 시발 택시를 잡아탄 뒤였다.
"신초으루 가요. 신촌으루."
허겁지겁 차에 뛰어올라 그렇게 소리치자 덩달아 긴장해 속도를 내던 운전사가 길게 한숨
을 내쉬는 영희에게 물었다.
"학생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네 좀..."
영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비로소 자신의 행동이 지나치게 남의 눈길을 끈 데 대해 경계
심을 느꼈다. 만약 이모네 집에 가서까지 그렇게 허둥대다간 눈치 빠른 이모에게 붙들릴지
도 몰랐다. 책가방이나 옷보따리라도 잡고 늘어지며 이것저것 캐묻는 사이에 어머니와 오빠
가 들이닥치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어싸다.
다행히도 이모는 집 안에 없었다. 영희는 의아롭게 여기는 후불이를 무시한 채 짐을 쌌다.
책가방과 옷 몇 벌이 든 영행가방뿐이라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모네
집을 나와 갈 곳도 정하지 않고 아무 버스에나 오를 때까지도 금세 오빠와 어머니가 뒤쫓아
오는 듯한 절박감에 내몰려야 했다.
'어디로 간다?'
영희가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버스가 어느덧 이모네 집 동네에서 서너 정류장
을 지나고 나서였다. 조금 가라앉은 마음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니 모니카네 집이 있는 마포
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얼결에 뛰어올랐지만 실은 버스에 오를 때부터 그 집을 향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친척집은 안전할 수 없게 된 그때로서는 사실 거기밖에 찾아갈
데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모니카네 집으로 갈 생각을 하자 영희는 이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아무리
다급해도 거기만은 다시 가고 싶지 않다.그게 영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처음 서울로 올라
와서 한 열흘 잘 지낸 집인데도 그토록 강한 거부감이 이는 게 스스로도 이상해 영희는 잠
시 그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짐을 꾸려 나오기 전날 저녁 모니카네 어머니가 빈정대듯 한
말 한마디뿐, 그렇게 그곳이 싫어야 할 까닭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영희는 그게 바로 모니카 자신과 그 집을 감싸고 있는 야릇한 분위기 때문임을 알았다.
처음 서울로 온 영희가 모니카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영희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일 정
도로 반겼다. 그뒤의 대엿새도 한편으로는 형배의 추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넉넉한 시간과
돈으로 사게 된 이런저런 즐거움으로 둘은 그 어느 때보다 잘 아귀가 맞아돌아갔다. 형배의
묘소를 찾아가고 어마어마한 합동 위령제에 제법 고인의 미망인이라도 되는 듯 참석해 눈물
을 흘리기도 했다. 대단찮은 형배의 추억을 과장해 주고받으며 밤을 지샜고 한번은 용기를
내어 그의 집을 들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둘은 형배를 위해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둘만의 즐거움을 찾아
냈다. 전에는 쉽게 들어갈 수 없던 고급 빵집에서 깔깔거리고, 영화관을 있는 대로 도는가
하면, 그 무렵 새로 생긴 음악실을 기웃거리며 남은 해를 보내기도 했다. 영희에게 복학을
하고도 몇천환이나 되는 돈이 아직 남아 있어 원래 돈에는 쪼들리는 법이 없던 모니카와 함
께 흥청대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형배에 대한 영희의 열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와의 추억을 과장하면 과장
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공허해졌고, 그의 죽음에 대한 살아남은 이들의 찬사가 화려하면 화
려할수록 그 진상이 수상쩍어졌다. 흥분한 신문의 보도에만 의지해 밀양에서 상상했던 혁명
이란 말은 엄청나기 짝이 없었지만, 실제 서울에 와서 보니 달라진 것은 다만 사흘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데모대로 미어지는 거리와 득세한 정당 및 정치인의 이름뿐이었던 것처럼,
형배의 죽음도 우발적인 사고 의 터무니없는 감정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
문이 들었다. 곧 억눌리고 불만스런 밀양에서의 나날이 있지도 않은 감정을 과장하여 서울
로 돌아와야 할 구실 하나를 보탰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날이 줄어드는 돈도 영희의 남다른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오랜만
에 되찾은 자유와 여유에 취해 보낸 것도 한동안일뿐, 영희는 곧 호로 걸어야 하 ㄹ멀고 험
한 길을 떠올렸다. 밀양에서의 출발은 바로 가정과 부모 형제로부터 떠남이었으며, 이제 그
녀의 삶은 오직 그녀 자신에 의해서만 개척되고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어
깨를 짓눌러왔다. 눈앞의 즐거움에 쉽게 빠지는 것만큼이나, 아무리 황홀한 도취 속에서도
선뜻 깨어 현실로 돌아설 수 있는 게 또한 그녀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급하게 영희를 모니카네 집에서 떠나도록 한 것은 바로 그때껏 숨겨
져 있던 모니카와 명훈의 파국이었다. 영희가 온지 엿새짼가, 모니카는 무슨 큰 고백이나 하
듯 그녀와 깡철,명훈 사이에 벌어졌던 치정극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오빠 명훈뿐이었음을 눈물 섞어 얘기할 때만 해도 영희는 하마터면 그녀를 용서할 뻔했다.
어떤 일을 다해도 더럽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순지한 영혼, 그녀에게서 엄청나 고백을 들을
때마다 놀라움이나 경명을 느끼기에 앞서 빠져들게 되는 그 야릇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집 밖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에 모니카가 눈치를 할금 할금 보며 집을 빠져
나가도, 나중에 그 휘파람의 주인이 바로 깡철이며 또 몇 시간을 어디선가 그녀가 그와 뒹
굴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영희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오빠 명훈을 위한 것만도 아
닌, 알 수 없는 굴욕감과 불결감 때문이었다.
그 동안 무심히 참아 넘겨온 모니카네 집 분위기도 점점 견뎌내기 어려워졌다. 모니카네
어머니가 요정이거나 그 비슷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전에도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영희
는 그 장사의 냄새가 그렇게 집안 속속들이 배어 있을 줄은 몰랐다.
낮 동안 화트를 치거나 낮잠을 자면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해거름만 되면 찍고 바르고
해서 휘황하게 집을 나서는 젊은 여자들, 새벽녘에야 술에 취해 돌아오기 일쑤인 모니카의
어머니, 그리고 이따금씩 대낮에 찾아와 몇 시간이고 문을 닫아걸고 그녀와 시시덕거리다
돌아가는 모니카의 의붓아버지라는 배불뚝이...그런 게 바로 그 지독한 직업까지 곁에서 들
여다본 적이 없는 영희에게는 그 모든 게 차츰 끔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뒷날
자신이 겪게 될 그런 종류의 삶이 한불길한 예감으로 와 닿아 그녀을 섬뜩하게 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그런 여자들이 자주 그러하듯 모니카의 어머니도 영희가 얹혀지내는데 대해서는 관대했
다. 아직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먹는 걸 해결한다는 이유로는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로는 모니카에게 와 함께 적잖은 용돈까지 나누어줄 정도였다. 그러다가 열흘짼가
되던 날 전혀 경제적인 것과는 무관한 한마디를 던졌는데, 결국은 그게 영희가 그 집을 나
설 결심을 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얘, 너 보니까 집을 나온 모양이구나. 여자하고 사기 그릇은 집 밖에 내돌려서는 안된다
던데, 너 조심해라, 자칫하면 쟤들 꼴 난다."
저녁 장사를 나서다 문득 돌아서서 앞서가는 색시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별성의 없이 던
진 말이었으나 영희에게는 이상하게도 아프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 당장은 갈 만한 데도 없고... 거기다가 내일부터는 가게 골방을 쓰게
되니까 하룻밤뿐이잖아. 그것도 학교 갔다 오는 시간 빼면 겨우 몇 시간인데 뭘...'
마음속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희는 이윽고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아직 혼자 여인
숙 방을 찾아들 만큼 대담하지 못한 그녀였다.
영희는 되도록 시간을 끌어 등교 시간쯤 모니카네 집으로 가려고 했으나 거추장스러운 옷
가방 때문에 뜻 같지가 못했다. 모니카네 집 앞 빵집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며 시간을 끈
다고 끌었는데도 모니카네 집에 갔을 때는 아직 오후 네시가 안 되었을 때였다.
모니카의 어머니나 젊은 여자들을 만나는 게 난감스러워 대문께에서 기웃거리던 영희는
전에 없이 집 안이 조용한 걸 보고 살그머니 모니카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모니카까지 없
으면 어떡하나 싶었으나 방문을 열어보니 모니카는 방안에 있었다. 그것도 방안에 오두마니
앉아 소주병을 홀짝이면서였다.
"어머, 이 계집애 좀 봐. 너 지금 뭐 해?"
영희가 놀라 지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술병을 반나마 비운 모니카가 그녀답
지 않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 마셔."
"미쳤어? 지금 네신데 학교 갈 준비 안 할 거야?"
"나 오늘 학교 안 가."
"뭐라구? 어머니가 가만두겠어?"
학교만 보내면 다된다는 듯 학교에 보내는 데는 무엇보다 극성인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
교 영희가 다시 물었다.
"엄마는 없어. 어느 밸 빠진 영감탕구가 언니들이랑 싹쓸어 극장에 데려갔어. 영화 구경하
고 바로 업소로 들어갈 거야."
"그래두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 쬐그만 계집애가... 그 독한 소주를..."
"그러지 말고 들어와봐. 술 이거 참 좋은 거다. 너도 한번 마셔봐. 이거 한 병만 마시면
다 좋아지거든. 세상 모든 일이 다..."
"어머, 이 기집애가 점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주 술꾼같이..."
영희는 그렇게 나무라며 술병을 뺏으려 했다. 그러자 그녀의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
던지 모니카가 세차게 술병을 빼내며 표독스레 소리쳤다.
"이거 놔! 날 가만두란 말이야!"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전에 못 보던 파란 불길 같은 게 뚝뚝 듣는 듯했다. 거기 긴장한
영희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물었다.
"너 정말로 무슨 일이 있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문득 그 야릇한 불길이 꺼진 모니카의 퀭한 두 눈 가득 눈물이 괴더니 뒤이어 얕
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말했다.
"깡철이 그 새끼가 오늘 갔어..."
"가다니? 어딜..."
"군대에. 깡패라면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니까 겁이 나 튄 거지. 개새끼. 그럴 걸 가지고..."
영희로서는 아연할 수밖에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눈물이 깡철이를 향
한 것이라는 게 왠지 불쾌했다.
"그래, 그게 그렇게 괴로워? 네 말로는 그 사람에게 어거지로 당했다며?"
"그 새끼 때문에 괴로운 게 아냐."
"그럼 뭐야? 눈물까지 흘리구선."
"내가 우는 건 니네 오빠 때문이야. 그 깡철이 짜식이 망쳐놓은 우리 사랑 때문이라구..."
이번에는 좀 전과는 다른 종류의 아연함으로 영희가 그런 모니카를 보았다. 그새 술이 올
라 발그레해진 얼굴에는 제법 괴로워하는 표정까지 떠올랐으나, 그게 그리 절실한 것 같지
는 않았다. 어쩐지 영화에서 보는 실연한 여배우의 술주정처럼 순간적인 감동은 주어도 속
깊은 동정이 일지는 않았다.
모니카가 넋두리처럼 이어갔다.
"그래도 그 짜식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악착을 떨 때는 깜박깜박 명훈씨를 잊곤 했었
는데... 너 알아? 깡철이 그 새끼가 얼마나 악종인지. 한번은 독한 마음을 먹고 관계를 딱 끊
어보려는데 소포가 왔어. 끌러보니 글쎄, 손가락 한 마디가 들어 있지 않겠어? 피로 써서 시
커멓게 굳은 글씨, 나는 절대로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하고... 생각하면 걔도 안됐긴 해. 고
못된 소가지로도 내가 웃으며 꼬시면 뭐든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해주려고 기를 썼지. 엊저녁
에는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자더라구. 경찰 등쌀에 억지춘향이로 지원은 했지만 나와 헤어지
게 된 걸 참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 같이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소리까지 하더라구..."
"거봐, 네가 우는 건 결국 깡철인가, 그 사람 때문이잖아?"
영희는 다시 울컥 역거움이 치밀어 그렇게 퉁을 놓았다. 모니카가 그 말에 소스라치듯 도
리질까지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냐. 그 짜식은 어쨌든 깡패이고 개새끼야. 그 짜식이 우리 사이를 망쳐놨어. 명
훈씨하고 한참 잘돼가고 있는데... 너 알아? 명훈씨의 성난 얼굴. 정말로 무섭더라. 여길 봐,
여기 이 눈썹 모양으로 찢긴 흉터 있지? 그때 명훈씨가 발길질해 생긴 거야. 어쩌면 내가
그뒤로도 계속해 그 짜식과 만난 건 명훈씨에게 당한 앙갚음을 해주려고 그랬는지도 몰라.
그 짜식이 한껏 달아서 설치도록 놔뒀다가 잔인하게 걷어차 버릴 작정이었지. 내가 모질지
못해 좀 끌려다닌 구석은 있지만 꼭 그러려구 했는데..."
영희로서는 통 종잠을 수 없는 소리였다. 닳고닳은 탕녀의 넋두리 같기도 하고, 정신의 성
숙보다 지나치게 앞당겨온 육체의 체험에 성적으로 온전히 망가져버린 여자의 어처구니없는
자기 고백 같기도 했다. 그 어느 편이든 이제 겨우 열여덟의, 그리고 적어도 고등학교에 적
을 두고 있는 계집아이의 말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자신도 그 방면의 남다른 체험이 있고, 고생스레 자라는 동안 복 들어 알게 된 성년의 비
밀도 또래와는 비교 안 될 만큼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영희는 그날의 모니카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내심으로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긴장으로, 모니카가 소주병을 홀짝거
리며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특히 모니카가 영희로서는 아직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육
체와 성의 신비를 태연스레 말할 때는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하면서.
뒷날 명훈 오빠는 모니카를 '혼돈의 여자'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그게 선악과 미추를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비정형적 인격을 가리킨 것이라면 그녀의 특성을 제대로 나타낸 말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도 그 특성을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깊이까지 알게 된
성년의 비밀스런 체험과는 무관하게 모니카가 흘린 눈물이 결론은 뜻밖일 만큼 단순하고 백
치 같은 것이었다.
'6,9식 장총'이라든가 '얹어놓고 돌려서 녹여보린다' '잼핥기' 따위. 어지간한 영희로서도
낯달아오르는 짐작밖에 가지 않는 성희의 기교까지 거침없이 입에 올리며 명훈과 깡철을 번
갈아 추억하던 모니카가 갑자기 그새 눈물이 마른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 깡철이 걔도 갔으니까, 니네 오빠와 다시 어떻게 안 될까> 아니 하
룻밤만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잘해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어때, 영희 너 좀 도와주
지 않을래? 그래, 오빠에게 잘 말해 한번 만나보게만 해줘. 응, 한번만."
"그렇담 계집애야, 네가 직접 찾아가보렴."
영희는 모니카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
나 모니카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명훈씨는 내가 다시 눈앞에 보이면 죽여버리겠댔어. 정말 이대루 불쑥 찾아갔다간 맞아
죽구 말 거야. 그때 명훈씨의 눈길이 그게 참말이라구 말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될 거야. 아직도 그런 마음 변하지 않았는지만이라도 알아줘."
그렇게 말하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영희에게 매달리듯 했다.
"너 미쳤니? 나는 집을 나왔다구 그러지 않았어? 오빠에게 붙들리면 바로 밀야행이야. 그
놈의 지긋지긋한 감옥 생활로 돌아간다구."
영희가 얼결에 몸을 뒤로 배며 가출을 핑계대고 거절의 뜻을 말했다. 거의 본능적인 방어
에 가까운 거절이었다. 그러다가 모니카가 손까지 더듬어 쥐고 간절하게 매달리 때에야 비
로소 그 부탁을 거절할 감정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그만큼 모니카의 온몸에서 뿜어나오는
치정의 열기는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구 너 말이야, 계집애가 아주 못돼먹었어. 오늘 새벽까지 깡철인가 뭔가 하는 그 작
자하고 뒹굴다가 이제 그가 가고 나니 오빠하고 다시 어째보겠다구? 도대체 너 날 어떻게
보는 거니? 남도 아닌 바로 오빤데. 그런 널 다시 붙여줄 것 같아? 더럽게..."
영희는 갑작스레 덮쳐오는 불결감에 몸까지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니카의 눈길에 반짝
하면 다시 푸른 불길이 일었다. 처음 방안에 들어서서 소주병을 뺏으려다 언뜻 본 그 불길
이었다.
"뭐. 더럽다구? 너까지 그렇게 생각해?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명훈씨 뿐이었는데두? 어쩔
수 없이 깡철이에게 깔려 있을 때두 내가 머릿속에서 안고 있던 사람은 니네 오빠였어. 아
냐, 옛날 암것도 모르구 담임선생님에게 당할 때도, 가짜 형사에게 당할 때두 머릿속에서 똑
같은 사람을 안고 있었는데, 나중에 니네 오빠를 만나보니 니네 오빠가 바로 그 사람이었어.
거짓말 아냐, 너는 믿지 않겠지만 나는 니네 오빠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니네 오빠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애. 쬐그만 계집아이 시절 막연하게 뒷날 함께 살게 될 사내애를 상상하기 시
작하면서부터..... 착각하고 있는 건 세상과 그 사람들뿐이야. 어쩌다 어거지로 나와 살을 맞
댔다구 해서 나를 소유했다거나 나하구 사랑을 나누었다구 믿는 그 나쁜 자식들... 나는 니
네 오빠라고밖에 진정으로 마음도 몸도 나눈적이 없어..."
영희로서는 오랜 세월 산업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 진창을 허우적거린 뒤에야 겨우 이해하
게 될 괴상한 논리였다. 그나 ㄹ영희가 끝내 모니카를 쓸어안고 알 수 없는 연민에 가슴 저
려하게 된 것은 다만 한번 쓰기 시작하면 같은 여자이면서도 버텨내기 어려운 모니카의 눈
물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난 언제나 널 언니처럼 여겨왔어, 날 좀 도와줘. 어니. 난 명훈씨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죽고 말 거야. 난 알아. 내가 손댈 수 없이 망가져버린 애라는 걸. 하지만 명훈씨만
은 날 고쳐놓을 수 있어. 그와 함께할 수 있게만 된다면 나도 온전한 여자로 잘 살게 될 거
야. 깨끗하게 구원받게 되는 거라구. 언니, 날 좀 도와줘 응."
이윽고 따지고 대드는 대신 눈물에 젖은 얼굴로 모미타가 그렇게 다가들자 영희는 잠시
자신이 이제 홀로 걷게 될 멀고 산산스런 길에 대한 걱정도 잊고 그녀의 등르 쓸어주며 다
래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널 도와주구말구. 가엾은 것..."
제42장
갈아타기
교정의 일부가 된 야산 비탈은 마지막 강의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교문을 빠져나가는 대여섯의 남녀 학생이 아니었더라면 일요일쯤을 착각할 정도였다.
"진작 이렇게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
야산 비탈의 손바닥만한 그늘을 찾아 자리잡고 앉은 윤광렬이 까닭없이 빙글거리며 허두
를 꺼냈다. 그날 우왕좌왕하는 학생들을 휘몰아 늦게나마 자기네 대학도 4,19의 대열에 동참
하는 영광을 갖게 해준 용기와 결단의 사람, 또는 문학회에서 '행동하는 문학'을 외치던 선
배로서의 위엄이나 권위 같은 것은 그 웃음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명훈은 그게 고맙
고 송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막연한 경계심이 일었다.
실은 둘이서 조효ㅇ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그가 찾아왔을 때부터 그랬다. 문학회의
첫 모임에서 유만하가 소개한 뒤 먼빛으로 네댓 번 본것에다 지난번의 술자리 외엔 전혀 접
촉이 없던 그였다. 그 술자리에서 그가 이끈 분위기와 갑작스런 자시 현시의 충동에 빠져
책임 못 질 허풍을 떨긴 했지만, 막상 그가 진지한 얼굴로 찾아오자 명훈은 왠지 자신이 다
시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 것 같은 불안에 그에게서 느껴지던 뭔가 마뜩찮은 냄새,뒷골목의
허세와 조잡한 감상 같은 게 그가 그렇게 다가듦으로써 한층 진하게 풍겨오며, 이젠 멀리
가고 없은 배석구를 문득 연상시킨 까닭이었다.
그런데 방금의 빙글거림이 또 그랬다. 체면이니 계산이니 하는 따위는 모두 훌훌 털어버
리고 너에게는 마음을 터놓기로 했다는 식의 그 같은 웃음은 배석구가 어려운 부탁을 하거
나 힘든 일을 시킬 때 허두를 떼던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턱없이 성난 표정이거나
심각한 기색을 지어 거절은커녕 반문을 할 엄두조차 나지 않게 하는 방식이 더 있었지만,
배석구는 웃음 쪽을 더 자주 써먹은 편이었다.
"뭐 그렇게 긴장할 건 없어. 좀 진지하게 의논할 게 있는데, 그건 그렇고, 학번이 넷씩이
나 빠른 데다 고등학교까지 겹친 선배니까 말은 놔도 되겠지?"
명훈에게서 경계하는 눈치를 느꼈는지 윤광렬이 문득 웃음을 거두고 그렇게 물었다. 자신
의 마음속을 들킨 데 찔끔해 명훈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아, 네. 좋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대학 생활은 어때? 할 만하나?"
그가 대답 대신 뜻 모를 빙글거림을 되살리며 도리어 그렇게 물어왔다. 그런 질문은 나중
에 하지, 라는 말을 그 빙글거림으로 대신한 셈인데 묘하게도 명훈에게는 그런 뜻이 바로
와 닿았다. 명훈이 남의 부림을 많이 당해봐서라기보다는, 남을 부려본 것임에 분명한 그의
몸에 밴 특유의 표현 방식 때문인 듯했다.
"아직은 별로... 생각보다는..."
명훈이 그렇게 더듬거리자 다시 그가 물었다.
"문학회는 어때? 꽤 열심인데."
"것두 별로... 뭐 아는 게 있어야지요."
"하기야. 총알도 겁 안 내고 뛴 혁명 투사가 고리타분하게 시라니... 그럼 만하한테 끌려나
온 건가?"
"꼭 그건 아닙니다만... 실은 할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혁명 투사라고 불러주는 바람에 다시 찔끔해진 명훈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다가 수줍음
섞어 말했다.
그러자 그는 모든 걸 다 안다는 투로 빙글거렸다.
"그래? 내가 그럼 잘못 보았나? 나는 너도 나처럼..."
"그럼 선배님께서는 글을 공부하기 위해 문학회에 나오신 게 아닙니까?"
"물론 나도 읽는 것은 좋아하지. 하지만 감히 나도 무얼 써보겠다고 나간 건 아냐. 말이란
게 사람을 다루는 데는 무척 중요한 도구라서 그걸 좀 배워보고 싶었을 뿐이었어. 거기다가
회원 서른 명이 넘는 단체라니 나름대로 힘도 가졌을 것 같고..."
뜻밖으로 솔직한 대답에 명훈은 그 문학회의 한 회원으로서 무시당한 것 같은 불쾌함보다
는 갑작스런 호감 같은 걸 느꼈다. 무언가 음흉한 술수를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으로
마음 한구석이 굳어 있었던 터라 그의 솔직함이 더욱 효과를 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훈
의 짐작처럼 남을 부려본 경험이 많아서인지 이번에도 윤광렬은 명훈의 은밀한 동요를 알아
보았다. 이제야말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라는듯, 한층 허심탄회한 목소리가 되어 명훈을 따
로이 불러낸 까닭을 밝히기 시작했다.
"내친김이니 마저 털어놓기로 하지. 실은 내가 문학회에 나간 데는 마음 맞는 동지를 찾
아본다는 목적도 있었어. 4,19는 틀림없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혁명으로는 아
직 완성된 것은 아니야, 아니, 어쩌면 겨우 걸음마를 떼어논 것에 불과할지도 몰라. 위대한
혁명은 파괴와 건설을 아울러 수행해야 해. 그런데 우리가 한 것은 파괴, 그것도 기껏해야
그 첫 단계인 정치 권력의 외형적인 파괴일 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학생의 활동은
계속되어야 하고, 실제로도 여러 갈래로 계속 되고 있지. 윌 대학이 비록 따라지라 해도 조
국과 민족을 위한 이 활동에서는 예외일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도 옛날의 학도호국단을
대신 했을 뿐인 학생회같이 의례적이 아닌 단체를 몇몇 뜻맞는 동지들끼리 얽어봤지. 정예
한 투사들로 만들어진 혁명 완수의 전위부대를 말이야."
거기서부터 명훈은 다시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윤광렬이 얘기하고 있는 내용의 거창
함 때문이 아니라, 그 거창함이 그가 지금껏 내비친 실제와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아름답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실제와 동떨어진 것일 때는 거짓과 속임수를 경계해야 한
다, 거친 세상을 살아오면서 익힌 눈썰미 덕분이랄까, 명훈은 바로 윤광력의 경우가 그럴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명훈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광렬은 조금씩 자신의 얘기에 취해가는 듯했다.
끊임없이 명훈을 살피던 그의 눈길이 먼 도심 쪽을 향하며 목소리에 좀 전과는 다른 무게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다른 대학들은 벌써 소박한 질서 회복 운동 단계를 벗어나 여러 가지로 혁명의 완수를
위한 활동에 돌입했어. 너도 들어보았겠지만 신생활 운동인니, 국토 개발 운동이니, 공명 선
거 계몽 운동이니 해서 벌써 조직까지 끝낸 곳도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신생활 운동이나
국토 개발 운동은 아직 정치적 혁명도 완수되지 않은 이 마당에서는 너무 버릴 간 듯하지
않아? 그런 것들은 이 땅에 진정한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에라도 늦지 않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공명 선거 계몽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지. 너도 알다시피 이제 한 달도 안 돼 총선거
가 있는데, 그게 잘못되면 다른 게 무슨 소용이야? 자유당 찌꺼기들이 다시 국회라도 차고
앉게 된다면 4,19혁명은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고 마는 셈 아니냐구. 어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그 독재가 싫어 들고 일어난 게 불과 얼마전인데..."
마치 가만히 있으면 자유당이 다시 민위원과 참의원 의석을 모조리 차지하고 말리라는 것
처럼 과장하는 게 너무 엉뚱스러워 명훈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렇게 받았다. 윤광렬
이 갑자기 울화까지 섞인 목소리로 몰아세우듯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마. 그놈들은 무엇보다도 십 년 동안이나 이승만이 밑에서 해먹은 놈들이야.
그렇게 긁어모은 돈을 퍼부으면 어리숙한 촌사람들 안 넘어가구 어떻게 배겨? 그 동안 경찰
과 행정관서의 비호 아래 길러둔 조직도 민주당으로서는 족탈불급일거. 거기다가 이미 달려
간 대가리 몇을 빼면 자유당 잔당에게는 이번 선거가 사활이 걸린 중요한 고비가 되지. 최
소한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개인적인 몰락은 물론 민주당 주도하의 국회가 제정한 엄격
한 법 아래서 혁명 재판소에 서야 할 판이니까. 그런 그들이 이판사판으로 덤비면 어떻게
되겠어? 더구나 인정에 약하고 무엇이든 잘 잊어주기로 유명한 게 이 나라 유권자들 아냐?
결코 낙관할 일이 아니라구. 만약 모두가 너처럼 보고만 있다간 자유당한테 큰코다칠걸."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전 왜?"
그의 목소리가 하도 강경해 더 맞서지 못한 명훈이 우선 궁금한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계몽 운동이라면 아무래도 자신과는 맞지 않을 것같아서였다. 윤광렬도 그제서야 자신이 엉
뚱한 쪽에 열을 오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는지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었다. 이어 사람 좋아
뵈는 너털웃음을 깨달았는지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었다. 이어 사람 좋아 뵈는 너털 웃음을
짓던 그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그때껏 미뤄온 용건을 말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몽대에서 뛰어줬으면 해서야. 데모대의 선두에서 부상까지 당한 네
가 이런 혁명의 위기를 못 본 체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제가 뭘 아는 게 있어야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국민 계몽 운동에 아는 거 모르는 거는 왜 따져?"
"계몽이라면 여럿 앞에 나가 연설도 하고 이론도 밝아야 되잖습니까?"
"아, 그거? 뭐 대단할 거 없어. 우리가 맡을 지역은 농촌이니까. 연설이랬자 농군들 여남
은 명 이장 집 마당에 모아놓고 자유당 찍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이나 받는 정도라구. 오히려
필요한 건 다른 걸걸."
"다른 거라뇨?"
"주먹. 자유당 잔당들에게 푼돈이나 받아먹고 설치는 촌놈들한테는 열번 타이르는 거보다
그거 한 방이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지. 투개표 감시 때도 그래. 그 방면에는 이력이 붙을
대로 붙은 놈들이 그놈들 아냐? 또 옛날식으로 깡패들 동원해 투표함 바꿔치기라도 하려 들
면 어쩔 거야?"
거기까지 듣자 명훈은 비로소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상정
하는 상황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는 그럴 듯하게 둘러댔으나 공명 선거 계몽
운동과 주먹이 도대체 연결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글쎄요..."
명훈은 그렇게 말끝을 흐리다가 문득 그보다 더 궁금한 게 떠올라 물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주먹이 있다고..."
"아, 그거 만하에게서 들었지. 상당하다던데 뭘 그래?"
윤광렬이 좀 전과는 뜻이 달라 보이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가
갑자기 자신에 차 보이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가 갑자기 자신에
차 보이는 게 명훈에게는 왠지 불아했다.
"그거야 고등학교 때 일 아닙니까? 하도 그쪽이 텃세를 하길래..."
"그래도 대단한 근성이던데. 또 주도극장인가 거기서 기도를 선 적도 있다며? 청계천 건
너 제법 반듯한 골목에서 논 적도 있다던데, 그건 잘 못 들은 건가?"
놀라는 명훈을 지그시 바라보며 윤광렬이 그렇게 덧붙였다. 유만하도 잘 모르는 일까지
그가 아는 걸 보고 명훈은 가슴이 섬뜩했다. 진작부터 여느 대학생은 아닌 것 같다는 짐작
은 했지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딘가 뒷골목물이 밴 데가 있음을 느껴왔지만, 그토록 가까
이서 자신을 들여다본 사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명훈은 퍼뜩 그가 자신을 아는 게 어느 정도며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를 좀더 자세히
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명훈이 미처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틈도 없이 그가
찍어넘기듯 다시 한마디를 더 보탰다.
"길은 다르지만 니네 돌개형도 알 만한 사이지. 솔직히 말하면 그 패에게 한 팔을 빌려줄
뻔한 적도 있어. 그랬다면 지금쯤은 한창 지명 수배에 쫓기고 있을 테지만..."
그 말에 명훈은 힘이 쭉 빠졌다. 어쩌면 자신의 가장 모양 좋은 가면인 의거 부상의 진상
까지도 그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뻗대기는커녕 궁금한 걸 물어볼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나까지 이상하게 보아서는 곤란해. 나도 주먹은 있지만 대의가 없으면 움직이
지 않는 사람이야. 뒷골목도 알 만큼은 알지만 아직 거기서는 쓴 막걸리 한잔 얻어마신 적
없다구. 거기다가 보다시피 문학회까지 기웃거릴 만큼 지식욕에 찬 학도구... 대학도 빵빵 군
번으로 군대를 때운 몇 학기를 빼면 개근상르 받을 만큼 착실하게 나오고 있지. 학점도 올
는 될걸. 아마..."
말을 잃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명훈에게 윤광렬은 한동안 약간의 거드름까지 섞
어 스스로를 과시했다. 그러나 명훈은 그런 그의 말에서 감동이나 놀라움보단ㄴ 신이 나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늘어놓던 좋은 시절의 배석구를 떠올림과 함께 이번에는 또 다른 뜻
에서의 섬뜩함을 느꼈다.
배석구가 떠나 뒤로 명훈은 종종 그리움으로 그를 떠올렸다. 정도 별로 없이, 그리고 어울
려 다녔다기보다는 데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도치네 패거리보다는 그가 더 절실
한 그리움의 사람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알아주던 그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
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자신을 뒷골목의 어둠속으로 되불러들인 것이 결국 그였
다는 깨달음으로 그와의 추억조차 섬뜩해질 때가 있었는데, 이제 윤광렬에게서 바로 그런
배석구를 느꼈던 것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따. 그때껏 윤광렬이 내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민주고 대
의 였으면 그가 암시한 대가도 '혁명 완수의 전위 부대'나 '정의의 젊은 사자' 같은 정신적
인 영광뿐이었다. 거기다 몇 군데 수상쩍은 구석이 있기는 해도 윤광렬은 어디까지나 대학
4학년에 재학중인 학생 신분이고 나이도 배석구보다 대여섯은 아래로 보였다. 그런데도 명
훈은 왠지 그에게서 반공과 애국심으로 자유당 옹호의 논리를 펴던 뒷골목의 '형님' 배석구
를 느끼게 될 뿐이었다. 이 사람의 대의뒤에는 틀림없이 감추어진 개인의 이익이 있을 것이
다, 하는 의심과 함께.
명훈의 그런 마음속의 의심이 다시 그에게 가 닿은 것인지, 윤광렬이 갑자기 입을 다물더
니 우려 섞인 관찰의 눈길로 명훈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엿다. 이내 명훈의 침묵이
무엇 때문이니지 알았다는 듯 그 동안 잊고 있던 너털웃음과 함께 물었다.
"별로 흥미가 없는 얼굴인데, 왜 갑자기 열정이 식었나?"
"아뇨.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무언가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말이 있는 듯한데..."
그 말에 명훈은 다시 한번 찔끔했지만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오기가 일었다. 나도 오도
꼬란 게 무엇인지는 좀 아는 놈입니다."
명훈은 어느새 목소리까지 뒷골목의 과장된 억양을 되살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광렬의
눈길에서 반짝이고 긴장의 불빛이 이는 듯하다가 이내 빙글거림 속에 묻혀버렸다.
"그건 내가 알지. 그래, 뭐야?"
"우선 선배님을 나를 투사, 투사 하시지만 실은 그리 대단한 투사는 못됩니다. 이미 짐작
하시는 대로 내가 그날 이기붕의 집 앞으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혁명이니
민주니 하는 말은 지금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명훈은 허세 겨룸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털어놓았다. 중요하지 않은 진실
을 되도록 많이 털어놓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진실, 실은 이기붕의 집을 지키는 동료들과 합
류하려 했다는, 을 더 깊이 감추는 방법을 명훈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었다.
"겸손 지나치군. 왜 갑자기 그 얘기는..."
기선 제압의 효과가 나타난 것인지 명훈의 그런 계산된 솔직함에 윤광렬이 희미한 동요를
내비치며 말끝을 흐렸다.
"별로 세상물을 많이 먹지는 않아도 그럴듯한 명분 뒤에는 반드시 그걸 주장하는 개인의
이익이 숨어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화끈하게 까놓고 말해서, 사람이란 게 본래 그런
거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공명 선거 계몽 운동이건 신생활 운동이건 다 좋습니다. 그러데 우리가 그걸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지요? 뭣 땜에 나서야 하는 겁니까? 단, 민주니 자유니 하는 거창한 명분
은 빼고 말입니다."
명훈은 그러헥 말해놓고 대담하게 윤광렬을 쏘아보았다. 거기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윤광렬은 단순히 기선이 제압당한 이상의 충격을 받은 듯해 보였다. 놀라움과 곤혹스러움과
망설임이 착잡하게 얽힌 눈길로 명훈을 마주보다가 애써 여유를 가장하며 그 말을 받았다.
"호, 이건 완전히 기습을 당한 기분이군,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인데..."
'뭐가 있구나...'
명훈은 그런 짐작이 드는 수간 재빠른 넘겨짚기로 들어갔다.
"그럼 역시..."
"그렇지만 아냐! 우리가 맡으려는 선거구의 민주당 입후보자는 틀림없이 내 당숙이지만
거기서 뭘 얻어먹겠다고 이러는 건 아니라구. 우리는 전국적인 공명 선거 계몽 운동의 일환
으로 그 지역을 맡은 거뿐이란 말이야.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자유당의 폐허 위에 올바른
민중 정부가 무사히 들어서는 걸 보는 것뿐이라구. 만하 그짜식이 멋모르고 나불댄 소릴 곧
이들어서는 곤란해."
윤광렬은 명훈이 만하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걸로 단정하 듯했다. 마지못해 일부를 털어
놓기는 했지만 몹시 못마땅한 눈길이었다. 명훈은 나머지를 다 듣지 dkg아도 그가 왜 그렇
게 계몽대 조직에 열을 올리는지를 알 만했다. 고단한 소녀기를 보내느라 대의가 인간 활동
의 모든 동기를 실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중년이 되도록 야당 언저리에서 행동대나 이끌고 있게 될 그의 뒷날이 보여주듯, 윤광렬
의 정치적 기질도 그리 대단한 것은 못 됐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더 민주와 공명 선거로 뻗
대었지만, 이윽고 제풀에 지친 듯 뒷골목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명훈이 쉽게 그의 대의를 받
아들여주지 않고 침묵과 심술궂은 탐색의 눈길만으로 그의 말을 받자 마침내 과장된 한숨과
함께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호가이'는 '후이후지'를 않는다... 널 '오도꼬'가 있는 놈이라고 보고 '아싸리'하게 말
해주지. 그 대신 너만 알고 있는거야."
먼저 그렇게 다짐을 받아 놓고 명훈으로서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말을 무슨 큰 비밀이나
들려주듯 말했다.
"실은 이 선거만 잘되면 당숙은 나를 비서관으로 써주시기로 했어. 나도 어차피 내년에는
졸업이구... 너희들에게도 구체적으로 무얼 약속할 수는 없지만 섭섭하게 하시지는 않을 거
야."
하지만 막상 털어놓고 나니 허전한 모양이었다. 뒤이어 다시 전에 없는 열정으로 민주화
혁명을 떠들어댔다.
"마, 정치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이제 해도 슬슬 기울고 하니 우리 어디 가서 한잔 하
며 얘길 계속하도록 하지. 통할 만한 놈이다 싶어 솔직하게 털어놓기는 했지만 어째 좀 맹
송맹송해."
이윽고 윤광렬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5시가 훨씬 지난 뒤였다. 명훈
의 미지근한 반응이 자꾸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오늘은 약속이 있습니다. 다음에 한잔 하도록 하지요."
명훈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약속을 퍼뜩 생각해내고 그렇게 사양했다. 그러나 윤광렬은
명훈이 핑계를 대는 것으로 여기는지 한층 간곡한게 권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 내 낫게 한잔 사지. 아직 못다 한 얘기도 있어..."
그러다가 끝내 명훈이 거절하자 덮어씌우듯 말했다.
"좋아, 그럼 다음에 하지. 네가 우리하고 같이 뛰어보기로 결정한 걸루하구... 오늘은 실한
팔 하나를 얻은 든든한 기분이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의 말투에 이상한 거부감을 느끼며 명훈은 진심 이상으로 냉담하게 그의 말을 받은 뒤
언덕길을 내려왔다. 서둘러도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였다.
실은 윤광렬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명훈은 줄곧 그날 저녁의 모임을 생각하고 있
었다. 모인댔자 한방에서 먹고 자는 김형과 황에 명훈 자신을 합쳐 셋뿐이었지만, 그 모임에
는 전 같지 않게 유별날 뜻이 있었다.
여덟 달이 넘는 세 사람의 공동 생활이 드디어 끝나게 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빨리 건너가야겠어. 학기야 아직 서너 달 남았지만 하루라도 일찍 가서 적응하
는 게 나을 거야. 파파도 오케이야."
그저께 김혀이 그런 말과 함께 출근한 지 얼마 안 돼서 였다. 그날따라 일찍 하교에서 돌
아온 황이 김형과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불쑥 말했다.
"정들자 이별이라니 이놈의 오르막도 이젠 다돼가는군. 다음 주부터 다시 입주하기로 했
어. 그 동안 신세 많이 졌다."
학교를 나와 버스 정류장로 가면서 명훈은 잠시 그들과의 나날을 떠올려보았다. 아홉 달
이 채 차지 않았는데 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것같은 느낌을 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명훈이 그들의 갑작스런 떠남에 적지 않이 충격을 받은 것은 반드시 그 동안에 든
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에 무슨 애틋한 정 같은 걸 내세울 만큼 가까이 지낸 것 같지는
않은데도 불구하고 명훈이 말 못 할 허전함을 느끼게 된 것은 순전히 그들에게 의지해 의지
해오다시피 한 정신적인 부분 때문이라는 편이 옳았다.
김형과 황이 가진 것 중에서 무엇보다 명훈이 귀하게 여긴 것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그들
의 독특한 해서과 이해였다.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들의 방식은 명훈과는 사뭇 달라 명훈
이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과 물질적인 동기인 데 비해, 그들은 보이지
않는 본질과 정신적인 계기를 중시했다. 방향은 그들간에도 상당히 다르고, 또 그들 방식의
해석과 이해에 명훈이 언제나 동의해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 모든 것에 겉으로 드러
나는 것 외의 질서가 있다는 짐작은 가게해주었는데, 그게 명훈에게 새롭고 귀중한 경험이
었다. 특히 그들이 정치를 비판하고 사회를 분석할 때는 명확히 알아듣지 못하면서 자신의
안목까지 넓어진 것 같은 느낌에 까닭 모르게 가슴 뿌듯해지기도 했다.
명훈이 그날 밤 술자리를 제안한 것은 그런 그들과의 이별이 주는 허전함 때문이었다. 다
음날 아침 김형이 돌아왔을 때 명훈이 약간 쑥스러워하면 그 얘기를 하자 먼저 김형이 평소
의 그답지 않게 판을 키웠다.
"그래야지. 하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좀 그럴듯하게 마시자. 아니 내가 한잔 사지. 내일 저
녁 어때? 내일 저녁은 남이 만들어준 안주에 남이 따라주는 술로 한번 취해보자. 그러잖아
도 명훈에게는 보증금 없이 방을 얻어쓴 신세도 진 게 있으니까."
그러자 황이 한술 더 뜨고 나섰다.
"명훈에게 신세를 졌다면 그건 내가 더할걸. 지나 몇 달은 밥까지 공짜로 먹은 셈이니까.
마침 눈먼 돈이 생긴 것도 있으니 오늘 저녁은 내가 한판 걸판지게 사지. 김가 네놈 취해서
고꾸라지는 꼴두 한번 보구 말야."
그렇게 돼서 무교동 쪽에서 만나기로 한 게 그날 저녁 일곱시 였다.
때맞추어 온 버스에 올라 시계를 보니 신간은 그럭저럭 늦지 않게 닿을 것 같았다. ㄱ 잠
깐의 여유가 명훈의 생각을 다시 윤광렬과의 만남쪽으로 이끄렁ㅆ다. 차근차근 그의 얘기를
돌이켜보면 특별하게 불퇘할 것이 없는데도 왠지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겉으로는 전혀 다
른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배석구를 연상시키는 윤광렬의 접근 방식 탓인 듯하였다. 역시
회답을 피한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 건너편 골목의 약속된 다방으로 들어가니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김형이 벌써
와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 무얼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김형이 벌써 와 있었다. 희미한 조
명 아래 무얼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무슨 외국 주간지였다.
"김형, 웬일이야? 벌써부터 출근 않는 거야?"
명훈이 다가가 가만히 어깨를 건드리며 그렇게 묻자 김형이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니, 부대에 들러서 왔어. 실은 오늘 저녁까지 근무해야 달을 채우지만 조장이 하루 봐
주더군. 어차피 봉급도 받아야 하고 정리할 것도 있으니 한 번은 더 나가야겠지만..."
"출국 날짜 언제랬지?"
"7월 10일쯤 될 거야. 별일이 없다면."
"그럼 송별 파티가 너무 빠르잖아? 아직 열흘도 더 남았는데 그 동안은 어디 가 있으려
고?"
"여기저기 인사도 다니구 고향에도 다녀오구."
"고향? 김형한테 고향이 있었어? 고등학교까지 고아원에서 마쳤다구 하잖았어?"
"고향 없는 사람이 어딨어? 하기야 자칫 그곳을 잊어버리고 고아로만 자랄 뻔도 했지. 그
렇지만 그 동안도 일 년에 한두 번씩 눈물 질금거림며 찾아주는 고모가 있었어. 그 고모가
나를 끝내 고향에 얽어놓은 셈이지."
그때 레지 아가씨가 차 주문을 받으러 왔다. 그 바람에 화제가 잠시 단 곳으로 흘렀으나
무심코 던진 명훈의 한마디가 다시 화제가 잠시 김형의 고향 쪽으로 돌렸다.
"고향이 어디랬지? 하도 김형과 고향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
실은 그게 명훈의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회적으로만 세련돼있는, 악의적으로 말
해 도회에서 닳고닳은 그에게 어떤 고향이 있을까가 궁금했다.
"경남, 거창 쪽..."
"뭐야? 김형이 경상도라고? 그런데 어떠헥 말이 그렇게?"
"말이야 경북인 너도 꽤 표준말을 쓰잖아?"
"나야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녔으니까. 또 그쪽에 내려가 산 것도 몇 해 안 되고...."
"그렇다면 나는 더하지. 전쟁 전 방학 때 두어 번 고향에 간 걸 빼면 22년 모두 서울에서
살았으니까..."
"언젠가 부친은 고향 쪽에서 좌일 활동을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양반은 그랬지. 하지만 무슨 맘에선지 어머니와 나는 일찌감치 서울로 옮겨뒀거든."
"그럼 고향에 선산 같은 것도 있어?"
"선산?"
거기서 문득 김형의 눈빛이 묘해졌다. 미처 그걸 못 알아본 명훈이 부연해서 물었다.
"작별 인사를 드릴 부모님 묘소라도 있는가 이 말이야."
명훈은 거기까지 말해놓고서야 아차 싶었다. 언젠가 그의 아버지가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형은 명훈이 걱정한 만큼 자극
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런 것도 있지. 한꺼번에 쓸어놓고 묻은 구덩이를 덮고 봉분을 한 ... 임 시체가 부패해
버려 끝내 신원을 밝혀내지 못한, 여남은 명이 한꺼번에 묻힌..."
그러나 그 다음은 달랐다. 곧 전에 없이 감상에 젖은 얼굴이 되어 묻지 않은 것까지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그 무덤이 아니야. 오히려 아버지가 사살됐다는 그 골짜
기를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 아버지를 포함해 야산대 스물한 명 전원이 군경의 포위 공격
에 끝까지 저항하다 몰살됐다는 그 골짜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을 나와 잠시 고모
집에 들렀을 때 고모가 울며 그 언저리를 손짓해 가리켜줬지. 동네 나무꾼을 따라가보니 뒤
틀린 다복솔과 떡갈나무숲으로 뒤덮인 꽤 긴 골짜기 였는데, 그때부터 내게는 이상하게 그
골짜기가 선산같이 느껴지데..."
그럴 때의 김형은 전혀 딴사람같이 느껴졌다. 모든 걸 냉정한 계산과 시리에 따라서만 결
정하는 영악한 처세가의 모습은 나이보다 겉늙어 뵈는 그 얼굴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았
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그리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는거야? 미국에 죽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김형은 얕은 졸음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놀라는 시늉까지 하며 화제를 바
꾸었다.
"그런데 석현이는 왜 안 오지?오늘도 또 모여 쑥덕거릴 일이 있나..."
그러자 명훈은 그의 몇 마디가 주는 알 수 없는 감동에서 쉬이 깨어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아버지에게 공통되는 어떤 특성이 새삼 진한 동료 의식으로 그와 김형을 얽으며, 아
마 일치하는게 많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 오래 그리고 더 깉이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
끼게 했다.
하지만 명훈이 입을 뗀 것보다는 때마침 그 다방으로 들어선 황의 수선스런 외침이 먼저
였다.
"여, 벌써들 왔군."
다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힐끗거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뒤이어 그들에게 다가온
황이 대뜸 김형의 손에 있는 주간지를 뺏어 탁자에 팽개치며 말했다.
"또 이놈의 꼬부랑 책이야? 이제 미국 가면 신물나게 읽을 텐데 여기까지 들고 와서... 자,
모두 일어나. 이만 나가자구."
김형이 그 주간지를 찬찬히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빈정거림으로 받았다.
"하지만 내가 뭘 읽고 있었는지 알면 그런 소리를 못 할걸. 한국 군부 소장파의 동향에
대한 관찰인데."
그 말에 앞서 걸어나가려던 황이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물었다.
"뭐? 그 원본이야? 언젠가 신문에서 요약해 난 적이 있는 그 군부 동정?"
오히려 그런 황의 등을 미는 것은 김형이었다.
"그것 봐, 어쨌든 일어났으니 나가자구, 자리를 옮겨서 얘기해."
다방을 나오면서 명훈은 비어홀 '풍차'를 생각했다. 짱구는 깡패 검거 선풍에 지레 겁을
먹고 튀어버렸지만 얼굴을 아는 똘마니들은 몇 남아 있어, 외상술까지는 몰라도 턱없는 바
가지는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실내 장식이나 분위기도 그럴듯해 그들과 이별의 술
잔을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일 성싶었다.
그러나 명훈은 '풍차'에 도사리고 있을 여러 가지 위험을 떠올리고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자신이 경찰의 리스트에 오랐다는 정보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
술집은 배석구가 무슨 아지트처럼 써오던 곳이었다. 자신이 배석구의 여러 '똘똘한 아우'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잘 아는 지배인과 마담이 있고 골탕깨나 먹은 여급들도 더러는 남아 있
을 것이다. 어느 굼뜬 형사가 그때쯤은 깊숙한 산속 절간에 머리 깎고 들어앉았을 배석구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고, 세상이 바뀌어 주먹 걱정은 안 하게 된 지배인이나 여급이 그 사실
을 그 형사에게 귀띔이라도 해주게 되면 엉뚱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둘 모두 자기가 술을 사겠다고 장담했지만, 김형이나 황의 호주머니 사정도 생각했다.김형
은 월급 때가 다됐고, 황도 그 무렵은 어디서 돈이 생기는지 술잔깨나 낫게 마시고 다니는
눈치기는 해도, 그들이 '풍차'의 술값을 감당해낼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보통 술꾼은
어지간해서 마실 엄두가 안 날 만큼 비싼 맥주와 재료비의 열 배는 될 만한 안주값에다 술
따를 여급이라도 하나 붙는 날이면 설령 김형이 봉급 봉투를 고스란히 넣어왔다 해도 모자
랄 판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주량은 셋 모두 남다르게 센 편이었다.
입 밖에 낸 적조차 없으면서도 그들을 '풍차'로 데려가지 못하는 게 공연히 미안해 터덜
거리며 뒤따르는 명훈을 보며 황이 기세를 올렸다.
"어니 명훈이, 어디 근사한 집 없어? 모르긴 해도 이 방면으로는 우리보다 한수 위 같은
데. 돈 걱정은 말고 한번 안내해봐."
그때 명훈은 다시 한번 '풍차'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캥기는데가 있어 어물어물 잡
아떼는데 김형이 끼어들었다.
"야, 너희 김의원이 몇 푼이나 쥐어주었는지 모르지만 너무 거품 뿜지마. 차라리 알맞은
방석집이나 찾아내 조용히 마시는 게 어때?"
김의원은 황이 그 무렵 반해 있는 어떤 젊은 민주당 의원이었다. 그러나 그 김의원이 황에
게 돈까지 집어준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는 것이라 명훈이 어리둥절해 쳐다보자 황이 손까
지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사람 모함하지 마. 남 들으면 내가 뭐 국회의원 뒷돈이나 얻어먹고 다니는 놈 같잖
아? 이 돈은 어디까지나 내 노동의 값이라구. 어떤 대한민국 사업가의 돌대가리 자식 새끼
들을 가르치는 데 한 달 내내 진을 뺄 대가를 미리 반쯤 가불한 것일 뿐이란 말이야."
황은 그러면서 한 움큼의 백환짜리 지폐까지 내보였다. 어림잡아 오천 환은 넘을 듯한 액
수였다. 입주 가정교사의 반달 치 봉급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돈이라 명훈이 다시
이상히 여기고 있는데 김형이 빈정거림 섞어 그 말을 받았다.
"그게 그거지 뭘. 그 사업가 김의원이 소개한 사람이라며?"
"그래도 김의원은 김의원이고 그는 그야. 나와 그 사이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고용 계약이
있을 뿐인데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닐걸.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이제 파트너를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바꾼 것 같
은데.전형적인 관료 매판 자본가의 길을 향해...그래서 김의원에 바칠 정치 자금의 일부를 가
정교사 봉급이란 그럴듯한 명목으로 그 젊은 추종자인 네게 나눠준 것 같은데..."
그러자 황이 벌컥 화를 냈다.
"너 정말... 헤어지는 마당까지 사람 자꾸 한심하게 만들래? 도대체 왜 그래? 내가 김의원
하고 어울리는 게 그렇게 맘에 안 들어? 그럼 내일부터라도 당장 손을 끊지.내가 그를 만나
는 건 어디까지나 차기의 수권정당으로 예측되는 정당의 유력한 의원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 운동 단체의 대표로서일 뿐이야. 사람을 꼭 국회의원 뒤나 핥고 다니는 개새끼 취급을
하구..."
그러나 김형도 먹은 마음이 있는지 수그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악의까지
섞인 비꼼으로 황의 말을 받았다.
"하기야 너같은 정치 지망생에게 현실 정치를 미리 보아두는 것도 좋겠지. 그렇지만 제발
작은 정치가 흉내는 내지 마라. 그들이 습관적으로 건네주는 금박 찍힌 명함이나 거드름 섞
어 청하는 악수에 감동하거나 우쭐해져서는 안 돼. 특히 그들이 모이 뿌리듯 던져주는 푼돈
에 맛들이지 말고... 나는 한 훌륭한 이념가의 재목이 초라한 현실 정치의 소도로 깎여지고
말까봐 진정 겁난다."
떠난다는 것, 특히 자신의 조국을 떠난다는 것이 사람의 감정을 엄숙하고 진지하게 만든
것일까. 악의 섞인 비꼼으로 시작한 김형이었으나 끝낼 때는 걸음까지 멈춘 신중한 말투였
다. 실은 벌써 두어 달 전부터 김형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영악스럽다 할 만큼 실리에 밝고 얄미울 만큼 약삭빠르며 심각함을 곧 바보스런 것으로
단정하는 게 명훈이 처음 만났을 때의 김형이었다. 그뒤 유별나게 셋이 자주 어울리면서 그
들 사이에서는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들었지만... 셋의 공동 생활이 시작된 뒤까지도 여전
히 김혀의 그런 특성은 남아 있었다. 턱없이 덤벙대다가 턱없이 심각해지는 명훈이나 황에
게는 경멸스러우면서도 이따금씩 부럽기 짝이 없는 특성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김형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닳고 찌든 애늙은이 같은 허물을
벗고 외국 유학을 앞둔 스물세 살의 진지한 학도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 무렵은 황도 그런 김형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는지 속은 상하면서도 전처럼 마구잡이로
몰아대지 못했다. 오히려 애써 화를 억누르면 순수하게 김형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런 걱정이라면 안심해도 돼. 나 아무렇게나 남의 발 아래로 기어드는 사람 아니야. 앞
으로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되더라고 네 충고를 꼭 기억하지."
하지만 그 바람에 분위기가 적잖이 어색해진 건 사실이었다. 명훈은 그런 분위기를 위해
아무 곳이나 눈에 띄는 술집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전주옥'이란 간판이 붙은 골목 안 술집
이었다. 두 사람도 그런 명훈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군소리 없이 뒤따랐다.
알고 찾아간 술집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알맞은 곳으로 찾아든 셈이었다. 낮에는 주로 한
식을 팔고, 저녁에는 값싸고 실속 있는 요정 역할도 하는 그런 집이었는데, 아직 날이 저물
지 않아서였는지 집 안은 조용했다.
"그게 수주 선생이었지, 아마. 술 마시고는 아예 찬바람 부는 곳에 서지 않는다던가... 술
이 깨게 된까 말야. 우리도 저녁은 그만두고 술을 바로 시작하지. 밥을 먹으면 도통 술이 오
르지 않아서... 솔직히 술맛이야 빈속에서 싸르르하게 퍼져가는 술맛보다 더한 게 어딨겠
어?"
자리에 앉자마자 이번에는 황이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술상이 들어와 제대
로 분위기가 어우러지기까지 또 한차례의 입씨름을 거쳐야 했다.
"아까 한국 군부 소장파가 뭐 어쨌다구? 어디 그것 좀 봐."
화장을 짙게 한 중년의 마담이 주문을 받고 나간 뒤 황이 김형의 상의 주머니 영문 잡지
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김형이 아무 말 않고 잡지를 내주자 대강 훑어본 황이 말했다.
"이거라면 벌써 이달 초순에 AP통신으로 우리 신문에도 난 거 아냐? 우리 영관급 장교들
의 군 숙정운동을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걸. 끝까지 읽어봐."
김형이 그렇게 받으면서 이제는 거의 습관적인 그들의 설전이 슬슬 시작됐다.
"이건 뭐 그저 추측아냐? 군인들이 스스로를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학생들과 똑같은 위
치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거 누가 확인해 봤어? 또 그들의 숙정 운동은 승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고 단정했는데 그건 좀 지나친 해석 아냐? 3,15부정 선거에 협조한 썩
은 장성들에 대한 젊은 장교들의 순수한 의분이라고는 왜 못 봐?"
"그렇지는 않을걸. 군부와 정치와의 관련이라면 우리보다 더 풍부하고 구체적인 경험을
가진 게 그쪽 사람들이야."
김형은 그렇게 말해놓고 좀 뜸을 들였다가 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기사에는 적어도 두 가지 암시가 들어 있어. 하나는 한국의 군이 혁명의
주체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 내부의 적체 현상이 외부의 관찰에도
드러날 만큼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거지."
"군이 혁명 주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럼 그게 바로 쿠데타 아냐? 그건 틀렸어. 외국인들이
우리의 오랜 문민 정치의 전통을 모르고 하는 소리야. 이성계의 등극을 쿠데타로 본다 쳐도
그뒤 5백 년의 세월은 그대로 문민 정치였다고 할 수 있지. 이승만에 대한 장성들의 충성
경쟁만 보아도 그 전통은 충실히 계승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그건 그렇고, 군 내부의 적
체 현상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외국인들이 보는 대로 이번
의 참모촌장 축출을 진급을 위한 소장파의 밀어내기로 본단 말이야?"
"충분히 가능하지. 우리는 인구와 영토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거기
다가 군대의 역사가 짧아 장성의 태반은 30대를 넘기지 않은 젊은이들이야. 6·25가 있어
얼마간 여유를 주기는 했지만 그들이 늙어 은퇴하기를 기다리자면 인사의 적체는 필연적이
지.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느끼지 못하고들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되풀이될 심각한 문젯거리 중의 하나야."
"네 눈썰미가 매서운 줄은 알지만 그건 아무래도 지나친 관찰 같은데."
"더구나 정치에는 언제나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처지에 말이지. 그러나 때로는 멀찍이 떨
어져서 보기 때문에 더욱 잘 보이는 수도 있지. 이 기사를 쓴 기자처럼…… 내가 보기엔 이
기자는 대단한 한국통일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환은 김형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곧 무어라 그 특유의
열정 섞인 목소리로 김형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까닭 없이 섬뜩해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이고 있던 명훈은 문득 며칠 전 영희를 찾으려고
들렀던 셋째이모네를 떠올렸다. 한참을 영희 이야기로 보낸 뒤 어머니가 이모부의 근황을
물었을 때 이모는 푸념처럼 말했다.
"모르겠어, 덤벙대다 뭔 일 내려고 그러는지. 이번엔 뭐 그 양반 동기들이 주동이 돼 참모
총장인가 누군가를 몰아냈다나. 그게 뭐가 신나는 지 요새 한참 기가 살아 돌아다니느라 날
이 새는지 지는지 몰라."
그때는 별생각 없이 들었는데, 김형의 얘기와 맞춰보니 갑자기 뭐가 있는 듯도 싶었다..
그러나 입밖에 내기에는 공연히 으스스한 말이라 마음속으로만 되씹고 있는데 김형이 무슨
결론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외국 잡지 한 구절로 지나치게 비약하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군의 동향이 이번 혁병의
추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의 논의가
민주의 단계를 넘어 민족이나 섣부른 통일 논의에 이르면, 특히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우리의 분단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 외에 혁신과 보수라는 실질도 있다고. 그 혁
신 내지 진보를 독점한 게 이북이고 보수의 몫이 이남이라는 것 말이야. 따라서 남한은 더
이상 진보나 혁신 쪽에 무얼 내줄 여유가 없어. 남한에서 다시 진보나 혁신이 몫을 요구한
다면 틀림없이 우파는 위기감으로 극단화되고 거기서 우리는 엄청난 반동을 경험하게 될 수
도 있을 거야. 그런데 그 우파의 핵심이 바로 군이란 말이야. 더군다나 분단만이 그 기형적
비대를 정당화하는……"
"요컨대 또 그 소리군. 민주까지만 가고 민족까지는 가지 말라는…… 그게 아메리카 제국
의 변경에서 가능한 혁명의 한계라는……"
황이 그렇게 빈정거려놓고 다시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데 방문이 열리며 술상이 들어왔다.
그 술상의 풍성함이 셋의 주의를 끌러 얘기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황의 허풍스런 주문을 충
실히 지켜 그 집으로서는 아마도 최고급일 술상이었다. 거기다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색
시까지 상머리에 않자 자리는 그대로 흥청거리는 술판으로 바뀌었다.
김형도 그 동안의 절제와 검소를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듯 전에 없이 호기
를 부렸다. 김형이 그렇게 자신을 풀어놓고 술에 빠져드는 게 명훈에게는 신기하다 못해 불
안스럽기까지 했다. 황은 한술 더 떴다. 아직 술이 제대로 오르기도 전에 색시를 끼고 앉아
제법 그럴듯한 난봉꾼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화제는 두 번 다시 딱딱한 쪽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제대로 결론지어지지 않
은 군에 관한 얘기도 황의 빈정거림을 끝으로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어쩌면 김형도 황
도 워낙 실감나지 않는 가능성의 부분이라, 겉보기와는 달리 그냥 해본 소리였는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명훈도 그 화제에 그리 오래 집착하지는 않았다. 이모부의 일이 잠깐의 긴장을 주기는 했
지만 그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뒷날 다시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을 때도 허황되게 느껴지다
못해 풀썩 웃음까지 일곤 했다. 적어도 그 이듬해 5월 16일 새벽, 비상이 걸려 단밤에서 깨
어날 때까지는.
그날 밤 술상이 들어온 뒤로 정치나 사회 쪽의 논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명훈의
물음으로 시작되었다가 색시의 노랫가락으로 흐지부지되어버린 공명 선거 계몽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명훈은 꽤 진지하게 물었으나 윤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주먹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소리를
차마 못해 순수한 학생 운동의 한 갈래로만 말한 탓인지, 김형도 황도 문제없이 명훈의 가
담을 찬동해주었다. 특히 황은 공명 선거가 곧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라는 의심쩍은 등식까
지도 거침없이 승인했다. 술에 취해 들뜬 까닭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그 무렵의 철저하
지 못한 학생 운동권에 공통된 표면적인 의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셋은 색시 둘을 더 불러 통금이 지나도록 마시다가 결국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술집에서 곯아떨어졌다.
제 43 장 그해 여름의 풍경 하나
"기호는 7번, 기호는 7번, 민주 투사 김×× 선생을 국회로 보냅시다……"
교문을 나서는데 그런 확성기 소리가 삐익삐익 하는 기분 나쁜 이음과 함께 귀를 찔러왔
다. 철이 반사적으로 골목 끝 큰길을 바라보니 검고 붉은 글씨로 된 현수막을 둘러쓴 지프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들어 부쩍 요란스레 읍내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선거 운
동차 가운데 한 대였다. 이제는 별로 신기할 것도 없어진 일이라 철은 아무런 감동 없는 눈
길을 발 아래로 거두고 터벅터벅 걸었다. 7월 하순 한 낮의 뙈약볕에 모래 섞인 길바닥은
무슨 하얀 빛이라도 내쏘는 듯 눈부셨다. 철은 새삼 숨이 턱 막혀오는 듯한 더위를 느끼며
그늘을 찾아 길가로 붙었다. 그러나 정오가 가까워서인지 어디고 마땅한 그늘은 눈에 뛰지
않았다.
"니, 아나? 기호 7번 김×× 말따, 국남이네 외삼촌이라 카드래이. 인자 그 사람 국회원
되믄 국남이 글마 폼 막 잴 끼라. 국회원 그거 얼매나 높은 긴데……"
"글치만 김××는 안 된다 카드라."
"아일꾸로. 울 아부지 말루는 인기가 좋다 카든데, 우짜믄 대빵(최고) 묵을 끼라꼬……"
내일동 패거리가 뒤따라오면서 저희끼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지나간 선거 운동용
지프가 그들의 주의를 끈 탓인 듯 화제는 흔치 않게 선거에 관한 것이었다. 철은 흘려들으
며 걷고 있었으나 이내 그들 쪽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소리 마래이. 택도 없다 카드라. 나도 어제 울 아부지가 어른들하고 술 묵으며 하
는 소리를 들은 기 있단 말따."
"그기 뭔데? 와 김××는 떨어진단 말고?"
그렇게 이어져가던 그들의 대화 다음에 나온 말 때문이었다. 앞서의 물음을 받는 것은 아
버지가 군청인가 세무서의 계장이라는 윤상도인 듯 했는데, 그애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죽이
며 대꾸했다.
"김××, 숭악한 빨갱이랬다 카드라. 세월이 좋아 껍죽대고 있지마는, 안마(맞아)죽으믄 다
행일 게라 안카나? 느그도 허뿌(허투루) 그 사람 편들라 카지 마래이."
빨갱이란 소리에 철은 저도 몰래 걸음을 늦추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라믄 그 사람이 괴뢰군 대장이라도 했단 말까?"
"몰라, 우예튼 숭악한 빨갱이랬다 카드라. 그 사람하고 한패는 6·25사변 때 뱃다리거래에
모가지가 매달래 있었다. 카든데."
"뭐시라, 모가지가?"
"그래, 이래 돼가지고 ……"
철이 힐끗 돌아보니 상도는 손바닥으로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아이답지 않게 심각
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뱃다리거리에, 읍내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
하루 한 번은 지나다니는 그곳에, 사람의 잘린 목이 걸려 있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탓인
지 아이들은 일순 걸음까지 멈칫하며 상도를 쳐다보았다. 상도도 갑자기 제김에 겁을 먹었
는지 말끝을 사려 뒤이은 아이들의 질문 공세를 흩어버리려 했다.
"글치만 몰라, 내가 본 게 아니께는. 우예튼 어른들이 그카더라."
하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이미 발동된 뒤였다. 저마다 무언가를 물으려고 입을 벌리려는
데 가까운 발 아래로 물리 쏟아지며 뒤이어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마들아, 조심하그래이."
골목 어귀 구멍가게 아저씨였다. 긴 나무 자루가 달린 바가지로 수챗물을 떠서 먼지가 풀
썩이는 길 위에 뿌리면서 내지른 소리였다. 아이들의 일부는 길바닥의 마른 흙이 묻어 물방
울이라기보단 흙방울에 가까운게 바지에 튄 탓에, 그 나머지는 갑작스레 코를 찔러오는 수
채의 퀴퀴한 냄새에 잠시 그 동안의 화제를 잊어버리고 흩어졌다. 철이도 마찬가지였다. 발
등에 떨어진 몇 방울 흙탕물이 기분 나쁜 감촉에 펄쩍 놀란 사람처럼 뒤어 가게 앞을 지나
기에 바빴다.
하지만 철이도 다른 아이들도 끝내 그 끔찍하면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화제로 되돌아가
지는 못했다. 그렇게 내몰리듯 큰길로 나서자 이번에는 다시 가까워오는 확성기 소리가 그
들의 주의를 끌었다. 공설운동장 입구 쪽에서 차를 돌렸는지 얼마 전에 큰길을 지나간 바로
그 지프가 돌아오며 내는 소리였다.
"기호는 7번, 김XX 선생을 국회로 보냅시다……"
뱃다리거리로 이르는 곧은 길에 이를 때까지도 고막을 찢을 듯 왕왕거리며
느릿느릿 지나쳐가는 그 확성기 소리 때문에 그들은 말을 주고 받을 엄두를 내
지 못했다.
그 지프는 삼사당구장 앞에서 다시 방향을 역전 쪽으로 돌렸다. 오래잖아 확
성기 소리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또 새로운 광경이 아이들의
눈길을 그쪽으로 끌었다. 불쑥 솟아나듯 눈앞에 나타난 때아닌 만장(輓章)의 행
렬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물론 철이도 처음에는 그게 흔한 장의 행렬의 선두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깃발이 너무도 크고 호화스러운 데다 숫자까지 여느 장례 때와 견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게 이내 다른 예감을 주었다. 단순한 장례가 아니라 무언
가 의미 있는 사건 또는 볼 만한 구경거리가 이어질 것 같았다.
더구나 보통의 장례식에는 만장이나 명정이 읽기 어려운 한문으로만 되어 있
게 마련인데 거기서 펄럭이는 것들 중에는 한굴로 된 플래카드까지 섞여 있어
철의 호기심을 더욱 키웠다.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학살 원흉 처단하고 유족에게 보상하가!'
철은 그때 틀림업싱 그런 플래카드 구석에 한글로 씌어진 '보도연맹'이란 글
씨를 보았다. 또 '경상남도 피살자 유족회'란 것도 읽은 듯했다. 그러나 그 장의
행렬이 바로 어머니가 몸서리까지 쳐가며 말하던 '보련(保聯)'의 희생자들을 위
한 것임을 안 것은 그로부터 휠씬 뒤의 일이었다.
명정과 플래카드의 행렬에 이어 보기 드물게 큰 상여가 따르고 다시 그 뒤를
수백의 소복 행렬이 뒤따랐다.
노인들, 할머니들과 젊은 아주머니며 철이 또래의 아이들까지 섞여 있었는데
모두가 방금 상을 당한 사람들처럼 울부짖으며 걷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을 압도한 것은 그들이 업은 소복의 흰빛이었다. 7월의 햇살 탓일까, 대개는
광목으로 지어진 소복인데도 그 흰빛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간간이 끼여 있는
옥양목이나 포플린으로 지은 소복은 희다 못해 눈알이 시릴만큼 섬뜩한 빛을
뿜어댔다. 어떻게 보면 길거리를 메운 울부짖음이 그 같은 기억의 왜곡을 일으
킨 듯도 하지만, 철에게는 아주 뒷날까지도 그날의 광경이 무슨 현란한 빛의 축
제처럼만 기억날 정도였다.
반드시 철이 받은 느낌과 똑같은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뒤따라오던 내
일동 패거리들도 그대로 조용했다. 길가에 늘어서서 구경하는 어른들 틈에 끼어
들면서 슬쩍 돌아보니 녀석들도 한결같이 무엇에 질린 듯한 표정들이었다.
분명 어린 날의 신나는 구경거리와는 종류를 달리하는 광경이었지만, 철은 그
날 그 행렬이 다 지나가고 어른들이 모두 흩어질 때까지 길가에 붙어서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괴한 감동에 떨며 섰는 철의 귀에 구경하는 어른들의 수
군거림이 흘러들어왔다.
"아이, 이쪼맨한 읍내에서 그 일로 맞아죽은 사람이 이마이(이처럼)많단 말
가?"
"죽일 놈들."
"하마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카믄 얼추(대개) 한 짓이 별기 아이가나 맴(마음)
약한 사람들뿐 아이가? 그라이믄(그렇지 않으면) 참말로 이짝(쪽)으로 돌아선
사람일 테고……"
"와 아이라, 그런데 그걸 한 구딩이에 씰어(쓸어)넣었뿌랬으이…… 엥이, 승악
한 놈들!"
"그래놓고도 십 년이 되도록 보도연맹 관계로 징역 갔다는 순사 따까리 하나
못 봤으이, 하늘이라 카는 게 없는 기제."
그런 분노에 찬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보다 조심성스런 걱정도 있었다.
"김XX, 아무리 표도 좋지만 이래도 괜찮을까이?"
"그라이 말이라. 인자 제우(겨우) 몇 년 됐다고, 남로당 경남도당 간부가 다부
(거꾸로) 경찰 자(잡아)묵자고 푸랑카드 들고 나서노?"
"니도 알아봤나? 죽은 지 알았디 어디 살아 있다가 나왔노? 그라고 하필이믄
그노마를 앞장세워 김XX, 그 사람 뒷감당은 우랼라 카는지 몰라, 백지로 국회
위원도 몬 해보고, 가로늦가(뒤늦게) 콩밥 묵게 안 될란강."
"하기사 그 시절 한패이깨는 그 일이라믄 글마밖에 앞세울 사람도 없겠제. 글
치만 우얀지 성그리(섬뜩)한 기 표 찍을 맘 안 나네. 내사 잘 몰따마는 그 노마
들 기 살려놓으믄 세상깨나 시끄러불 꺼로."
그런가 하면 앞서와는 전혀 질을 달리하는 분노도 있었다. 그날 행렬이 사라
지고 난 뒤 흩어지는 구경꾼들 사이를 빠져나온 철이 강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
아갈 때였다. 다리를 저는 중년 하나와 그보다는좀 젊어 보이는 한복 차림의 사
내가 무엇에 성이 났는지 큰 소리로 떠들며 앞서가고 있었다.
"세상 됴쿠나야! 뭐이야? 위령탑에다 보상비 내놓으라구? 아예 금성무공훈장
을 내놓으라고 하디 그래. 빨갱이짓 하다가 죽은 공으루다가……"
처음에는 그 낯선 억양에, 그리고 나중에는 조금 전에 들은 어른들의 수 거
림과는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그 말으 내용이, 아직도 기괴한 감동에 젖어 멍해
걷고 있는 철의 주의를 끌었다. 절름거리며 걷는 쪽의 수리운 실린 말이었는데
한복 차림이 좀 가라않은 목소리로 받았다.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지. 정말로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 솔직히 말해 그때
는 이쪽도 제정신들이 아니었거든."
"썩어빠진 소리 말라우야. 너 정말 갸네들 악질인 거 몰라서 그러네? 초반에
드세게 잡도리쳐서 그렇디 그냥 뒀으면 그 빨갱이 새기들 무스게 짓 했을지 몰
라야. 보지 않았늬? 무슨 일이 터지믄 얼치기들이 더 설쳐대는 거. 북쪽 아이들
이 내려왔을 때도 죽이고 패고 한 거 뭘 좀 아는 진짜배기 빨갱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얼치기들이었다는……"
"그렇더라도 아무것도 한 짓이 없는 사람들을 한 구덩이에 쓸어넣은게 잘한
일일 수는 없지. 더구나 보도연맹이란 게 원래가 전향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
한다는 뜻에서 설립한 게 아닌가. 말하자면 품안으로 날아들어온 새를 때려잡은
셈이지."
"글타고 미 군정 때도 아닌데 빨갱이 새끼들이 백주로 패를 지어 거리를 휩
쓸게 한단 말이야? 그짓 하자고 삼팔 이북을 떼어가지 않아서? 그런데 정작 맞
아 뒈져야 할 놈들이 운좋게 살아남아 거꾸로 몽둥이를 들고 설쳐대야 하는 거
야."
"이쪽이 구실을 준 거지.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놨으니 입이 열 개라
도 할말이 있겠어?"
한복 입은 쪽이 그러헤 변호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자신있어하는 말투는 아니
었다. 그 또한 적어도 그처럼 떠들썩한 행렬은 못마땅한 듯했다. 그런 그를 메
어꽂듯 절름발이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좆같은 소리 말라우야! 너나 나나 어드레 카다 이꼴이 되었네? 이놈의 다리
몽뎅이 어드렇게 날아갔테? 김xx, 이 가이새끼, 제놈이 얼마나 배기는지 두고
보갔어. 이 남한 천지에서 그놈덜 득세가 며칠이나 가는지 두고 보갔다구!"
거기까지 엿들으며 따라가는데 어느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가 발 밑까
지 와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둑길을 내려서야 하는 곳에 이른 셈이었다. 그런데
도 눈앞의 두 사람은 여전히 열을 올리며 걷고 있었다. 아마도 집이 삼문동이어
서가 아니라 치미는 울화를 삭이기 위해서 강둑을 따라 걷고 있는 듯했다.
철은 잠시 더 따라가볼까 망설였으나, 십 년 전의 진상에 대한 무지와 그날 벌
어진 일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의 충돌에서 오는 혼란이 그의 나이로는 아무래도 뛰어넘
을 수 없는 걸 느끼게 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길로 돌아온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
의 편지는 이내 그를 참담한 현실로 끌어내 그날의 별난 기억을 그쯤에서 끝나게 했다.
철이 보아라
찌는 듯한 삼복지절에 옥경이 다리고 잘 있느냐? 엄마가 일이 있어 한 열흘 서울을 다녀
온 새 너희들 편지가 두 통이나 와 있더구나. 돌아간다는 약속도 못 지키고 돈도 보내지 못
했으니 너희들 고생이 오죽하겠느냐?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빈손으로 가
무엇 할까 싶어 한푼이라도 만들려 하다 보니 답장이 늦었다.
그러나 타는 것은 애간장뿐이고, 돈은 쥐어지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느냐? 거기다가 너는
또 과외 수업이 시작되어 여름 방학이 돼도 이곳으로 올 수 없다니 더욱 기막힌다. 여기만
와도 죽이든 밥이든 너희들 배곯리는 일은 없을 듯하다만, 코앞에 둔 중학 입시를 외면할
수 없지 않느냐?
생각다 못해 또 한번 영남여객댁 신세를 져보기로 했으니 너는 이 편지를 받는 즉시로 그
댁엘 가보아라. 아주머니보다는 아저씨한테 이 편지를 보이고 넉넉잡아 두 달만 어찌 돌보
아달라고 청해보아라. 지금 애쓰고 있는 일이 잘 성사돼 석공 쪽에서 20정짜리 큰 산소들만
사주면 웬만한 장사 밑천은 될 게고, 그러잖아도 햇곡식만 나면 찌끄러기 위토를 팔아 신세
는 같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럼 할말은 태산 같지만 이만 쓰낟. 공부 열심히 하고 옥경이 잘 돌보아라. 어린 너에게
못할 짓 하는 것 같아 어미 마음 미너지는 듯하다. 4293년 7월 돌내골에서 어미가 쓴다.
어머니의 편지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저번 고향에 가서 얼마 얻어온 돈은 벌써 열흘 전
에 다 떨어진 터라, 그 동안 다시 힘겨운 싸움 같은 나날을 보내오 철에게는 어머니가 돈을
보내지 못한다는 게 암담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또다시 영
남여객댁에, 아니 명혜네 집에, 구걸과 다를 바 없는 빌리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선거,
보도연맹 위령제, 어른들의 서로 다른 견해가 주는 모한 긴장감 따뒤는 씻기듯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고통이요 충격이었다.
하지만 또한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기억이다. 비록 강렬하긴 했으나 잠깐 동안 어린 날의
몽롱한 의식을 스쳐갔을 뿐이라 해도 좋을 그날의 기억은 세월이 지날수록 생생하고 뜻깊게
재생되었다. 결국 선거에서 떨어진 김xx 후보는 그해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구속되었으며
다시 이듬해 그가 군사 법정에서 무거운 형을 받았다는 불확실한 소문이 그 일을 상기시킨
탓도 있지만 철의 성장 조건이나 의식 상황도 그 같은 기억의 재생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
다.
월북자나 부역자의 버림받은 자식들에게는 어느 정도 공통된 정신의 단계가 있다. 하나는
아버지와 그의 이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단계요 다른 하나는 흥미와 동경의 단계다.
분노와 원망의 단계는 대개 겪어야 했던 혹독한 성장 환경에서 비롯된다. 육체는 밑바닥
삶의 진창을 기고 정신은 끊임없는 좌절과 억압을 맛보면서 이념 그 자체보다는 그 이념이
자신에게 끼친 결과에 속깊은 원한을 품게 되는 것이다.
분노와 원망이 다분히 후천적인 데 비해 흥미와 동경은 거의 선천적이다. 그 이념이야말
로 인류가 가장 늦게 고안한 것인 만큼 그들이 빠져 있는 여러 문제들에 가장 가까운 근사
치의 답을 주리라는 따위 논리적인 추측의 도움도 받지만, 그보다는 피의 동질성이 그 아버
지가 소중하게 품고 죽어갔던 이념에 대해 호의 어린 탐색의 눈길을 보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단계의 순서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동시적이기도 하다. 또 그런 단
계들이 개인의 정신에 남기는 흔적도 여러 가지로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원
하으로만 결정되고 어떤 이에게는 아버지의 적에 대한 때늦은 복수감으로 자리잡으며 드물
게는 객관성을 유지한 채 그들의 화해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철에게 있어서는 분노와 원망이 먼저였고, 흥미와 동경이 나중이었다.
혹독한 유년과 소년기를 다 보낸 뒤의 일로, 그 무렵의 한때 그는 아버지의 적들이 저지
른 잔혹한 사례들에 열중한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때 수집한 보도연맹 관계의 기록과 증
언들도 60년 여름의 그 하루를 생생하고 뜻깊게 되살리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제 44장 헛구역의 날들
"그래, 어땠어?"
점심 숟갈을 놓기 바쁘게 투표장 분위기를 살피러 간다며 나갔다가 들어오는 태욱을 향해
윤광렬이 물었다. 사뭇 보고를 요구하는 상관 같은 어조였다.
"신통찮아예, 말이사 이꾸저꾸 해싸도 꿍심은 따로 있는 눈치들이라예."
태욱이 공연히 주눅든 얼굴로 목소리를 떨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곳 출신이라 윤광렬과는
국민학교 때 한 번 더 선후배 관계를 맺어서인지 처음부터 다른 대원들보다는 한 풀 더 접
혀 지내던 태욱이었다. 그러나 그전의 태도는 그런 평소의 공손함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바깥의 좋지 않은 공기를 절로 짐작케 했다. 윗통을 벗어부친 채 막걸리 잔을 비우고 있던
윤광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꿍심이 따로 있다면 어느 쪽이야?"
"소금 문(먹은) 놈이 물 킨(켠)다꼬 암캐도 신가 쪽으로 기우는 갑데예."
"아니, 반혁의 세력 규탄 데모가 스렇게 시끄러웠는데도 자유당 부스러기 한테 표를 던진
단 말야? 더구나 이번에는 고무신 한 짝 술 한잔 제대로 돌리기 어려웠는데."
윤광렬이 애매한 태욱을 노려보며 따지듯 말했다. 더욱 움츠려든 태욱은 말까지 더듬거렸
다. "와예, 그래도 민주당이라 카는 거 하나만 믿고 말만 푸짐했던 우리하고는 다를 낍니더.
구석구석 퍼부은 거 행임(형님)도 잘 알끼로요."
"그럼 박가네는 어때?"
"그거사 지가 하마 안캅디꺼? 혁명 계열이라 카는 거 촌에서는 맥 못춘다꼬, 행임이 백지
로 갋아 글체, 처음부터 우리 상대는 글마였던기라예."
거기서 무엇 때문인가 조금 자신을 얻은 태욱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래도 나라 전체의 분우기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이야. 마산서는 자유당 입후보자를 하
루 앞두고 구속까지 했잖아. 물론 시민들의 반혁명 큐탄 데모에 경찰이 못 배겨서였을 테지
만." "바로 그거라예. 얻어문(먹은)것도 얻어문 거지만, 너무 그루싸이 실찌기 동정이 인 것
같아예. 이번 선거에 떨어지문 인자 신머시기는 죽는다꼬. 그래도 어디 학교 풍금 사다준
것도 신머시기고, 어디 또랑에 세멘(시멘트) 다리 놔 준 것도 신머시기인데, 캐싸며 말입니
더." 태욱이 그렇게 받아놓고 약간 항변까지 섞어 덧붙였다.
"4.19 혁명, 4.19 혁명, 도시 사람들이나 떠들어 쌌지. 촌에서야 어데"
그 말을 듣자 윤광렬은 갑자기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잔을 툇마루에 소리나게
놓으며 그 곁 감나무에 걸쳐둔 남방 셔츠를 걸쳤다.
"어이, 누구 나하고 나가볼래?"
함부로 구두를 꿴 윤광렬이 여인숙 본채 마루에 줄줄이 누워 있는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그들 중에서 지금껏 윤광렬과 태욱이 주고받는 말을 흘려듣고 있던 명훈은 그 소리에 짐짓
눈을 감았다. 더운 날씨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며칠 전부터 그를 억누르고 있는 무력감
탓이 더컸다.
다른 대원들도 모두 식사 후의 노곤함에 잠이라도 들었는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마, 지하고 함 가봅시더. 멀리 갈 것도 없고, 교문 앞 느티나무 안자 살찌기 조(주워)들어
도 감은 올 끼라예."
태욱이 그렇게 나서자 윤광렬도 굳이 쉬고 있는 대원들을 끌고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
의 멀어지는 발소리에 묘한 안도를 느끼며 명훈은 문득 그 낯선 곳 여인숙 마루에 누워
있는 자신을 씁쓸한 웃음으로 돌아 보았다.
명훈이 D대 공명선거 계몽대에 끼여 서울을 떠난 것은 7월 10일 경이었다. 3.15선거 때의
씁쓸한 경험 때문에 그럴듯한 명분 뒤에 감쳐진 윤광렬의 마뜩찮은 의도를 알기 전에도 명
훈은 그런 일에 끼여드는 게 마음내키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깡패의 전력을 숨겨
줄 적당한 보호색이었을 뿐 민주 운동 그 자체는 아니었다. 아니, 그 이상 조금이라도 정치
적인 색채를 띤 활동이면 본능적으로 경원을 느끼는 그였다. 작별의 술자리때 김형과 황은
이례적으로 함께 그 운동에 찬동해주었지만, 그것도 명훈의 마음을 별로 돌려 놓지는 못했
다. 명훈이 차마 감춰진 의도까지는
밝히지 못해 그들이 들은 것만 다만 그럴듯한 명분뿐이었는 데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공
명 선거가 곧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라는 억지 등식조차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광렬이 주도하는 그 수상쩍은 명훈이 끼여드는 데 황과 김이 도운 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떠나버린 뒤의 공허함이었다. 지난 아홉 달, 정신적인 것은 거의 그들에게 의지하다
시피 해온 명훈에게 홀로 남겨짐은 단순한 외로움 이상의 고통이었다. 거기다가 방학이 도
어도 갈 곳 없어 훅훅 찌는 듯한 자취방을 뒹글며 하루하루를 죽여가야 했기 때문에 그 괴
로움은 더욱 컸다. 전 같으면 밀양에 내려가 지낼 수도 있고 고향을 찾아 볼수 있었으나,
경찰의 수배가 있을지 모르는 마당이라 그런 연고지에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철저하
게 신분을 위장하고 얻은 그 자취방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세차게 명훈을 윤광렬에게로 몰아붙인 것은 그러다 더욱 꼼꼼하게
읽게 되는 신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매일매일 사회면의 머릿기사로 나오는 부정선거
원흉들의 재판 사이에 낀 정치 깡패들의 이름들이 전에 없는 위기감으로 숨을 곳을 찾게
한 것이다. 임화수, 이정재.유지광 또 누구누구, 전에는 감히 이름조차 그대로는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거물들이 굴비 엮은 듯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었고, 한때 술잔을 바로 받기조차
어렵던 그 빛나던 '형님들'은 아예 조무래기들로 불리며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게 한편
으로는 나 같은 것쯤이야 하는 안도를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몸담았던 뒷골목에 대한
사회 전반의 거대한 분노와 증오를 확인하는 거 같아 그대로는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 맞추어 찾아준게 유만하를 앞세운 윤광렬이었다. 윤광렬은 마치 명훈의 그런 심
리 상태를 훤히 읽었다는 듯이 일방적인 통고처럼 말했다.
"내일 출발이야, 전화가 없으니 연락할 수가 있어야지. 애들을 대신 보낼 수도 있는데도
내가 직접 온 거 더 말 안 해도 되겠지? 내일 아침 열시에 서울역 광장 집결이야."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명훈 그 자신이었다. 그도 마치 미리 약속한 듯 한마디의
이의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굳이 빠지려드는 유만하에게 함께 가기
를 권하기까지 했다.
목적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대로 윤광렬의 당숙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경남의 어떤
군이었다. 생각보다 출발은 그럴듯했다. 무궁화호로 여덟 시간에 다시 버스로 시간 반을 달
려 군청소재지가 있는 읍내에 이르었을 때부터가 그랬다. 윤의원(전에 도의원을 한 경력 때
문인지 아니면 당선될 거라는 믿음에서 그리 부르게 된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 후보
를 한결같이 의원님이라 부르고 있었다.)의 배려인 듯 계몽대의 숙소로 정해진 곳은 이름이
여인숙이지 속은 어지간한 여관 빰치는 건물과 시설이었다. 그 여인숙 입구의 철근 아치에
'공명 선거 계몽 운동 6지구대 숙소'란 현수막을 걸고 들어앉았으니 내막을 잘 모르는 대
부분의 대원은 물론 명훈까지도 정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슨 큰 일을 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이 실은 민주당 후보 선거 운동원의 한 별동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상대편 후보
들에게 뚜렷이 인식될 때까지의 일주일도 신나는 나날이었다. 그들이 묶고 있던 여인숙의
마당은 열한 명의 민의원 입후보자와 아홉 명의 참의원 입후보자가 경쟁하듯 들여놓은 과
일과 음료로 비좁을 지경이었고 밤이 되면 '격려차'란 명목으로 각 입후보자의 간부 운동원
들이 여기저기 술자리를 마련하고 불러댔다. 속셈은 따로 있으면서도 윤광렬은 그런 입후보
자들의 접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쪽 저쪽 가리지 않아야 위장이 잘 되는 거야.골빠진 놈들, 제 좋아서 내미는 거 마다
할 거 없어."
명훈에게 귀뜀해주듯 그렇게 핑계를 댔지만, 때로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흥정하는 눈치까
지 보이는 게 그 방면의 마뜩찮은 관록을 짐작게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들이 내건 깃발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믿음과 격려를 받고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가 명훈과 태욱을 비롯한 몇몇을 빼면 나머
지는 모두가 순수한 계몽 운동의 이상에 이끌려온 학생들이라, 처음 출발 때보다 더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공명 선거와 민주 혁명의 완성에 헌신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먼저 문제가 생긴 것은 그들 내부에서였다. 그곳에 온 지 일주일 만인가, 계몽
강연회를 핑계로 혁신 계열 후보로 선거 연설을 철저하게 방해한 날이었다. 결국은 자기들
이 하고 있는 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걸 알아차린 법정대학 쪽의 대
원 하나가 성과 토론 시간에 이의를 제기했다.
"오늘 사회대중당 후보의 선거 연설 봉쇄는 성공적이었습니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의 4월 혁명이 이 따의 적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반혁명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자유당 잔당과 혁신 계열을 빼
면 남는 것은 민주당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민주당 후보의 지지 운동
일 뿐이란 말입니다. 민주당 집권이 곧 혁명의 완성이라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점
검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윤광렬의 속셈은 모르고 대의메만 이끌려온 하급 학년 대원몇이 그런 그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태욱을 비롯한 몇몇이 어떻게 그 문제를 얼버무려보려고 했으나, 한참 뒤
에 나선 윤광렬은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넘겼다.
"물론 거리 대해서는 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됐지만 현재로서는 민주당
집권이 곧 혁명의 완성이란 등식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최선일 수는 없어도, 거의
유일한 차선이라는 게 내 개인뿐만 아니라 운동 본부의 결론이었다."
그 존재는 짐작해도 대원 대부분이 직접적으로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게 계몽운동 본부
였다. 그러나 본부란 말이 가지는 위력은 컸다.
"본부의 결론이라고?"
처음 문제를 제기한 대원이 미심쩍은 듯 그렇게 되묻기는 했지만 기세는 이미 한풀 꺾여
있었다.
"틀림없이. 그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보다 몇 배나 격렬한 토론을 거쳐 얻어진 결론이댜."
윤광렬은 흔들림 없는 말투로 그렇게 받아놓고, 이어 그런 데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그
논의를 손쉽게 끝내버렸다.
"하지만 이왕 문제가 제기된 이상 나는 여러분의 의사에 따르기로 하겠다. 여기서 거수로
투표해 다수결로 결정짓기로 하지. 이런 종류의 계몽 운동이 불만스럽다는 쪽이 많다면 내
일로 돌아간다. 본부에 우리 지대의 해체 경위를 보고하기가 좀 뭣하겠지만, 어쨌든 다수의
뜻을 따라야 하니까..."
그 결과는 잔류 8명에 귀경 3명으로 윤광렬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나중에야 그런 운동을
통합으로 관장하는 본부 같은 건 없었고, 무슨 지대니 하는 명칭도 윤광렬의 창안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의 대원들로서는 어쩌면 그 운동으로부터의 이탈
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귀경 쪽에 선뜻 손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윤광렬은 별로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그 결정을 따랐다. 어디까지나 다수의 의견에 충실
한 지도자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다음날 어쩌디 명훈과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그의 회심
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라리 일찍 날 터졌어. 어차피 곪은 것은 터져야 하니까. 이제부터 화끈하게 밀어붙이자
구."
명훈이 새롭게 그를 보게 된 그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윤광렬은 그 동안 감춰왔던 속셈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양심에 따른' '
공정한' 선거의권유에서 '민주 투사'의 지지를 공공연히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관된 계몽 운동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런 이름의 당에 오래 몸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미주 투사'란 호칭을 독점하고 있는 민의원 후보가 있는 그곳에서는 달랐다. 소박한 그곳
주민들에게 은연중에 공명 선거가 곧 민주당 호보의 지지란 등식을 심어주는 셈이었다.
다른 후보에 대한 방해 활동도 한층 공격적이고 치밀해졌다. 자유당 출신의 무소속 후보
나 혁신 계열의 후보가 터를 잡은 선거 유세장 부근에서 공명 선거 구호를 높이 외쳐대면
연설을 벌이는 정도를 넘어 직저 그들의 선거 유세장을 자기 편 지지 군중으로 휘저어버리
기까지 했다. 특히 자유당 출신의 무소속 후보가 하는 선거 유세장은 '반미주 세력 타도'의
프래카드를 앞세운 데모대로 밀어붙여 그대로 흩어버린 적도 있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결정하고 따라나선 길이라 명훈도 처음 얼마 동안은 별생각 없이 그런
윤광렬과 함께했다. 그러나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과 3,15때 배석구를 따라다니며 한 일
사이에 비슷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차츰 묘한 흥미가 일었다. 피를 흘려가며 뒤집어엎은
자유당의 부정을 이번에는 그 반대편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그때 그 선거구에서 벌어진 일은 민주당 진영 전체로 보아서는 극시 예외인 경
우였을 것이다. 5,16 뒤의 군사 법정 재판 기록에는 당시 민주당의 폭력적인 서거 난동의 예
가 여러 건 실려 있지만, 거기에는 미주당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군사 정
권의 의도적인 과장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훈이 그때 경험한 그 예외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흔적을 그의 정신에 남겼다. 명
훈이 그 생애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벗어나게 된 듯 보이는 정의의 상대성에 대한 믿음이 바
로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두어해 뒤 지적 허영에 빠진 명훈은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여 정의
의 절대성에 관한 프라톤의 설교를 읽게 되지만 끝내 그것을 승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뒤에도 몇 번인가 정의의 이름 아래 움직이게 되지만, 그 가장 격정적인 순간에조차 자신
의 정의가 곧 모든 사람의 정의와 일치한다는 믿음은 가져보지 못했다.어쩌면 그가 목숨을
던져 움키려 했던 마지막 정의에서조차도.
하지만 며훈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그런 불행한 믿음이 아주 뒷날까지도 뚜렷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때는 그저 모햐ㄴ 흥미와 좀 짓궂은 구경꾼의 의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벌어질까 조마조마하면서
도 은근히 기다리던 한 차례의 피투성이 싸움을 겪고서야 애매한 깨달음의 형태로 그 불행
한 믿음은 그의 정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었다.
그 싸움은 선거를 나흘 앞둔 장날에 있었다. 그날 자유당 출신의 무소속 후보가 읍내 국
민하교 운동장에서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쏟은 군중 동원으로 마지막 기세를 올리려 한다는
정보를 들은 윤광렬은 그 전날부터 치밀한 방해 계획을 세웠다. '반혁명 세력 타도 군민 궐
기 대회'란 긴 이름의 행사가 그것이었다. 그는 그 행사 끝에 3백 명 정도의 민주당 지지
세력을 동원하고 멋모르는 장사꾼들은 약간 끌어들여 시위를 벌이려 했다. 그전에 두어 번
한 시가 행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규모의 군중 동원이었는데 무서운 것은 거기 덧붙여
진 계획이었다. 윤광렬은 그 행렬의 방향을 무소속 후보의 선거 우세가 있을 국민학교 운동
장으로 이끌어 그쪽 후보를 지지하는 군중과 고의로 충돌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윤광렬도 고의적인 충돌 부분만은 대원 모두에게 알리기 거북한 듯했다.
그는 대원들에게 궐기 대회에 이은 시가 행진으로 자유당 잔당의 선거 유세장에 모인 청중
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준다는 데까지만 얘기하고 회의를 끝냈다. 그러나 밤이 이슥해지자
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명훈과 태욱, 그리고 유도부 하나, 축구부 둘만 따로 불러내 말
했다.
"니네들을 믿고 하는 말이지만 내일은 시시한 데모 정도로는 안 돼. 아예 깡그리 뒤집어
놓아야 된다구. 니네들이 앞장서서 데모대를 그 국민학교로 유도하는 거야. 그리고 되도록이
면 그쪽 운동원 녀석들ㅇ게0게 시비를 걸어. 우리 당원들의 협조가 있을 거니까 떨 건 하나
도 없어. 촌놈 건달들 아예 깨강정을 내버리라구. 단, 무기를 써서는 안 돼. 그 부근에서 각
목을 구해 몽둥이로 쓰는 것 정도는 좋지만 칼 같은 걸 써서는 안된다구. 그리구 편싸움 요
령 잊지마. 니네들이 앞장이니까 니네들이 및리면 그대로 끝장나는 거야. 우리 당원들도 발
벗고 나서겠지만, 역시 촌놈들이라 크게 믿을 건 못 돼. 니네들이 본때를 뵈줘야 한다구. 알
겠지?"
명훈은 어젠가 그런 사태가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어도, 막상 윤광렬이 내놓고 그런 소리
를 하자 다시 한번 배석구를 떠올렸다. 상황이 달라지고 때리는 쪽과 맞는 쪽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배석구와 윤광렬이 조직하고 지도하는 행위의 본질은 아무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
다. 하지만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명훈 그 자신이어다. 이번에는 배석구와 함께일 때보다 더
욱 뚜렷하게 죄의식을 느꼈으나 그게 조금도 행동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마음 깊은 곳의 거
부와 머뭇거림도 잠시, 명훈은 곧 서글픈 체면으로 그 싸움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정치적 대
의나 이념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자신의 삶에 그어진 한계요 떨쳐버릴 수 없는 아버
지의 유산이란 의식 때문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뒷골목 세계에 익어버린 그의 몸은 오랜만의
편싸움에 오히려 야릇한 긴장과 흥분까지 느끼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일은 윤광렬이 짜놓은 대로 잘 풀려나갔다. 논매기가 끝나서인지 흥청대는 선
거 분위기에 이끌려서인지 그날딸 읍내가 비좁도록 모인 장꾼들은 힘들여 불러모으지 않아
도 이러저런 현수막이 나부끼고 마이크 소리가 왕왕거리는 계몽대의 궐기장으로 모여들었
다. 공명선거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울서 왔다는 대학생 계몽대에 대한 호기심탓인 듯했다.
거기 힘을 얻었는지 말솜씨 좋은 법정대 쪽 대원의 연설에 이어 연단에 올라서 윤광렬은
그 어느 때보다 선동적으로 민주 투사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람을 잡기 위
해 동원된 사람들 백여 명을 뺀 나머지 장꾼들에게선 별로 감동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연
설이 끝나고 시가 행진이 시작되어도 그랬다.
'반혁명 세력 처단하여 민족 정기 바로잡자.'
'피 흘려 얻은 민주, 공명 선거로 지켜내자.'
'자유당 잔당은 물러가라!'
그런 현수막을 떼어 시위용 플래카드로 삼고 행진을 시작하자 수백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런 주장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있을지 모르는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였다. 공연히 분위기에 들떠 동원된 지지 세력에 휩쓸린 약간을 빼면 대개는 구호조차
따라하는 법 없이 몇 발짝 떨어져 슬금슬금 따라올 뿐이었다.
하지만 윤광렬은 그런 군중들의 동향에 조금도 실망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 없이 행렬을
군청 앞 거리로 몰아갔다. 아직 윤광렬의 숨격진 속셈을 알지 못하는 대원들도 처음으로 성
공한 대규모의 군중 동원에 흥분했는지 특별히 몰아대지 않아도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고 플
래카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 대열이 좁은 읍내 바닥을 한바탕 휩쓸고 무소속 후보의 유세 장소인 국민학교
로 향하는 도로에 막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서른 명 정도의 젊은 패거리가 길을 막
았다. 그 패거리 중에는 명훈에게도 낯익은 얼굴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 대개 주먹깨나 씀
직한 시골 건당풍으로, 자유당 시절부터 그 무소속 후보의 신변 호위를 맡아온 듯한 청년들
이엇다. 그러나 지난 몇번의 방해 때는 애써 명훈네와 패싸움이 되는 걸 피하는 눈치였는데
그날은 달랐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상기된 얼굴에는 한바탕의 혈전도 마다 않겠다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잘됐어. 일부러 시빗거리를 찾아야 할 판에 제 발로 기어나왔으니 일은 제대로 된 거지.
단단히 준비를 하라구."
윤광렬이 명훙에게 그렇게 수군거린 뒤 큰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때맞춰 저쪽 편의 오야
붕인 듯한 맥고모자의 얼굴에서 검은 안경을 걷어내며 꽥 소리쳤다.
"야, 거기 서. 서란 말따."
그 소리에 구호가 멎으면서 행렬의 선두가 멈칫했다. 명훈네를 뺀 나머지는 모두 그를 알
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나 윤광렬은 대원들을 돌아보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슬쩍 보내고 그대
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윤광렬이 학생답게 꾸벅 절까지 하며 깍듯한 경어로 그렇게 물었다. 그게 더욱 화가 나는
지 맥고모자가 목소리를 한층 놓였다.
"느그들 임마, 참말로 학생가?"
"왜 수상합니까? 학생증을 보여드릴까요?"
윤광렬이 남방 셔츠 윗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며 더욱 공손하게 물었다.
"그 소리가 아이란 말따!"
맥고모자가 그 소리와 함께 손을 쳐들어 윤광렬을 따라 걸어나오는 대원들을 주욱 손가락
질까지 하면 반욕설로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느그 이누묵 새끼들, 느그가 바로 그 깡패제? 윤xx그누마 새끼가 서울서 돈 주고 사온
깡패 아이가?"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뭣 때문에 오해를 하신지 모르지만..."
윤광렬은 빙글거리기까지 하며 그렇게 받앗다. 그게 더욱 화를 돋우는지 잠시 기묘한 말
싸움이 이어졌다.
"느구 이누묵 쌔끼들, 글찮으믄 뭐로?"
"우리는 공명 선거 계몽 운동 대원 경남 6지구 대원들입니다."
"뭐시라? 공명 선거라꼬? 야, 이누묵 쌔끼들아, 그기 공명 선거라믄 3,15보다 더 깨끗한
공명 서거도 없을따. 이쪽저쪽 다 방해해뿌고 한 놈만 편드는 기 공명 선거가?"
"우리는 진정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할 후보를 뽀아달라고 유규 자들에게
부탁드렸을 뿐입니다. 우리가 피 흘려 되찾은 민주주의를 빨갱이나 자유당 잔당에게 다시
짓밟히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민주주의? 민주주의, 그기 무너데? 일제 때는 며서기질 하며 누구 집에 놋대집이 몇 개
있는 거까지 다 왜ㅣ놈한테 오아바치는게 민주주의가? 해방되고 용케 안 마 죽으이께는 이
번에은 한청인동 뭔동에 붙어 생사람 빨갱이로 몰아붙인 게 민주주의가?"
"그런 민주주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뭣 땜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라믄 지 조상보다 더 위하던 이박사 자유당, 택도 없이 국회의원 나설라 카는데 공천
안 준다고 민주당으로 해딱 넘어가믄 민주주의가? 그 감정으로 한 몇 년 이박사 자유당 욕
하고 댕깄다꼬 민주 투사가?"
"그럴 리야 없겠지요, 누구 얘긴데요?"
"바로, 일마, 느그가 응큼하게 밀고 있는 윤xx글마 아이가, 글마가 어떤 놈인지는 이 함청
땅이 안다!"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자유당 때라면 몰라도, 저희들은 어떤 특정 후보를 지지하
려고 내려온 건 아닙니다. 그건 아직도 자유당 시절로 착각하는 선생 같은 분들의 오해겠지
요."
"자유당 자유당 캐쌌지 마라, 이 새끼야. 느그들 하마 해쌌는 꼬라지 보이 훤하다. 우리
보다 훨씬 숭악한 놈들이라. 솔직히 말해 우리도 이런 저런 짓 다해봤지마는 너같이는 안
했다. 일마!"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공명 선거 궐기 대회가 불법이라는 겁니까? 서로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비켜주십쇼."
"택도 없는 소리 마라, 이누묵 새끼야. 어디 가서 무슨 수작 할라꼬."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집회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만 비키시죠."
"집회의 자유, 니 말 잘했다. 너 이 누묵 새끼들 바로 말해라. 암것도 모리는 촌사람들 몰
고 가 우리 김선생님 선거 유세 방해할라 카는 수작 아이가?"
맥고모자가 그렇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는데 갑자기 그 등뒤에서 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
부치며 나섰다.
"이누묵 새끼들, 우리도 일마, 참으로 대로 참았다. 닌주, 일마, 느그끼리 다 해쳐무라, 글
치만 이롤는 못 같다. 길이 어디 여뿐이나? 절로 돌아가라. 택도 없다."
그런 그의 벗어부친 윗몸은 제법 볼 만한 데가 있엇다. 군용 밴드로 허리를 졸라매 유난
히 벌어진 어깨가 거꾸로 세운 세모꼴을 이루고 있는 데다, 울퉁불퉁한 근용고 꽤나 위협적
이엇다.
그러나 명훈은 그에게서 위압가마을 느끼기보단 쓴웃음이 났다. 편싸움이 벌어질 판에 웃
통을 벗어부치고 근육 자랑을 하는 순지함 때문이엇다.
윤광렬도 그 순진한 촌 가다의 정체를 알아보았는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없었다. 오히
려 그가 나선 게 잘됐다는 듯 이번에는 그를 상대로 약을 올렸다.
"겁주지 말아요. 고대생 습격 사건 알지요? 깡패들이 대학생들을 습격 했다가 4,19가 난
겁니다."
그러자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는 듯 그 촌 가다가 주먹을 내지르며 고리쳤다.
"오이야, 이누묵 새끼, 우리는 깡패다! 느그는 정의에 불타는 대학생들이고..."
아분히 반어적으로 한 말이었으나 그 자리에 썩 합당한 것은 못 됐다. 거기다가 그의 실
수를 도운 게 윤광렬의 멋진 연기여싿. 틀림없이 ㅈ그렇게 빠르지도 세지도 않아 보이는 그
의 주먹인데도 윤광렬은 땅바닥에 몸을 굴릴 정도로 심한 타격을 받은 시늉을 했다. 뒷골목
세계에서 오야붕에게 맞을 때'예의상'으로 아픈 척해주는 꼬봉들의 연기 그것이엇다.
"저놈들이 사람을 친다. 저 깡패놈들이..."
마치 그런 사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선두에 있던 지방 당원들이 내달아나오고, 이미
윤광렬의 의도를 알고 있는 태욱과 두명의 체육과 학생들은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말로
길게 설명해서 그렇지, 실은 윤광렬과 맥고보자가 맞닥뜨린 순간부터 채 5분도 안 돼 벌어
진 일이었다.
냉정히 말해 적어도 주먹을 쓸 줄 아는 그룹의 전력으로 보면 상대편 후보 쪽이 우세했
다. 그쪽은 처음부터 편싸움을 각오하고 뽑아 보낸 서른 명 정도의 그 바닥에서 제법 알아
주는 주먹들이었으나, 이쪽은 명훈이 보기로 주먹의 숫자부터가 모자랐다. 대원 여남은이라
고 해도 주먹을 쓸만한 것은 자신을 비롯한 네댓뿐이었고, 선두의 당원들 중에도 제대로 주
먹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윤광렬이 그 전날 밤 자기들 몇을 불러 특히
당부한 것도 그런 상황을 예측해서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패싸움에서 실제의 전력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세였고 그 기세에 있어서는 명훈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들의 등뒤에는 수백의 지지 군중이 있는 데다 명분도 그들 편
이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는 인간의 모든 약점-천한 권력욕, 비열한 복수심, 자기 반성 없는
분노를 비롯한-을 가려주는 면죄부였으며,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단순한 분위기를 넘어 누
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런데 명훈 쪽은 그걸 휘두르고 있었고, 상대편은 그걸 거
스르는 집단으로 낙인 찍혀 있었던 것이다.
싸움은 명훈이 자신의 솜씨를 보일 틈도 없이 그들 쪽의 승리로 끝이 났다. 술기운을 빌
려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지르는 촌 건달 하나를 한 발길질로 내려앉히고, 다시 길고 멋진
이단옆차기를 달아나는 녀석의 옆구리에 찔러넣고 나니 이미 저항은 멎어 있었다. 싸움에
졌기보다는 기세에 눌린 시골 건달들이 자기 편지지 군중이 있는 쪽으로 달아난 탓이었다.
"잡아, 저 깡패 새끼들!"
윤광렬이 앞서서 달리며 그렇게 소리쳤다. 어느새 계몽대와 한 덩어리가 된 군중이 그런
윤광렬의 뒤를 따라 맥고모자네 패가 달아난 국민학교 교정으로 몰려갔다.
안이 안 보일 정조로 빽빽한 측백나무 울타리를 돌아 교문으로 꺾어드는 선두의 눈에 운
동장 가득 들어찬 청중이 들어왔다. 그걸 보자 한껏 치솟았던 그들의 기세가 멈칫했다. 그
들 속에 끼여 있던 명훈도 예상외로 많은 청중에 위압되어 뛰던 속도를 줄였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윤광렬이 앞장선 계몽대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겁낼 것 없어! 술잔이나 얻어걸리려구 모인 촌놈들이야."
그리고 다시 한층 목청을 높여 지지 다원들 쪽을 보고 외쳤다.
"여러분, 저 뻔뻔스런 민주 역적놈을 보러 갑시다. 저놈은 맞아죽어도 몇 번은 맞아죽었어
야 할 자유당 찌꺼깁니다. 그런 놈이 더러운 돈으로 국회의원 자리를 다시 넘보고 있습니
다. 우리가 피로 연 민주의 대도(大道)를 부정축재한 돈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 호응하듯 플래카드 자루로 쓰던 각목을 휘두르며 한 지방 당원과 태욱이 달
려나가고, 이어 나무지 시위대도 우, 하는 함성과 함께 달려나갔다.
과연 그곳의 청중은 윤광렬의 말대로였다. 시위대가 몰려들자 맞서기는커녕 길을 틔워주
듯이나 양편으로 갈라져 흩어지기 시작했다. 술잔에 팔렸건 지난날의 정분에 이끌렸건 또는
사심 없는 지지에서였건 자기들이 선 자리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의식은 공통된 것임에 틀림
었었다.
그렇게 확 트인 길로 윤광렬이 앞장선 시위대는 연단을 향해 돌진했다. 그제서야 다급해
진 아까의 맥모자자 패거리 중 몇이 다시 막아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연단 위에
있던 무소속 후보와 지지 연설을 하던 연사는 볼품없이 끌려내려가고, 윤광렬이 낚아챈 마
이크는 공명선거 구호를 쏟아냈다.
"반민주 세력 타도하자!"
"공명선서 이룩하여 민주 혁명 환성하자!"
"돈에 팔린 내 한 표, 나라 팔고 민족 판다!"
그래도 그 무소속 후보에게는 이선(二選)의 관록과 국회의 무슨 상임 위원장을 지낸 이다
운 배짱이 있었다. 멱살을 움켜잡혀 컥컥거리면서도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놈들아, 이게 민주가? 조자룡이 헌 칼 쓰듯 아무데나 휘두르믄 몽지리(모조리) 민주가?
여러분, 속지 마이소. 이거는 자유당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요!"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군중들은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맥고모자네 패거리만이 명훈
네가 연단을 점령한 데 만족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자기들의 후보를 빼내갔을 뿐이었다.
윤광렬은 그런 그들을 야유하듯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구호가 아니라 승리의 노래 같
았다. 반민주 세력 타도하자, 자유당 잔당 물러가라..........
하지만 흩어지는 청중을 살피던 명훈은 그들에게서 심상찮은 빛을 보고 섬뜩했다. 애써
무표정하게 돌아서기는 해도 그들의 눈길에서 은근히 쏟아져나오는 것은 틀림없이 분노의
불길이었다. 윤광렬과 그쪽지지 당원들이 번갈아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쳐대는 연단을 힐
끔거릴 때에 더욱 강하게 쏟아져나오고 았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명훈은 그때껏 군중 심리
에 휩쓸려 취해 있던 승리감에서 깨어났다. 난장판이 된 연단 위에서는 아직도 마이크 소리
가 왕왕거리고ㅡ 그 아래는 자기편이 동원한 군중만 동그마니 남아 이제는 더 뻗쳐볼 데도
없는 기세를 뜻 보를 함성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걸 보며 명훈은 문득 언젠가 책방 아저
씨가 황을 내쫓으며 하던 말을 떠올렸다.
'돌계집(石女)의 헛구역질 같은 세월........'
4.19와 이승만의 하야로 그것만은 틀린 것으로 단정했던 말이었다. 거기다가 이제 새로운
정권과 정부가 태어나려는 마당인데도 명훈은 왠지 책방 아저씨의 그 말이 이번에도 맞아떨
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겉보기만 현란한 이 세월로는 아무것도 새롭게
태어날게 없는지 모른다.........
명훈의 그 같은 예감을 더욱 짙게 한 일은 그날 밤에 한 번 더 있었다. 낮의 일을 자신에
게 좋게만 평가한 '의원님'의 선심이 있었던지 윤광렬은 그날 저녁 대원들에게 크게 한턱
을
썼다. 유권자들의 눈길을 의식해 색시집으로 옮겨앉지 못했을 뿐, 초저녁부터 여인숙 대청에
서 벌어진 술판은 술과 안주 모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술판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초저녁부터 못마땅한 얼굴로
마지못해 술잔을 받고 있는 듯하던 법정대 쪽 둘이 술기운에 힘을 빌렸는지 갑자기 윤광렬
을 보고 따지기 시작했다.
"선배님,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처음부터 이거였지요? 우리는 결국 특정 후보의 지원을 위
해 동원된 거지요?"
둘 중 최(崔)뭐라는 학생이었다. 별생각 없이 취해가던 명훈은 그 물음에 슬며시 긴장이
되었으나 이미 취한 윤광렬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또 그 소리야? 그 때문에 초장부터 벌레 씹은 얼굴이었어? 내 말하지 않았나, 본부의 결
정이 원래가 그랬다구."
"제가 묻고 있는 건 선배님의 의돕니다. 본부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는 무관한...."
"그게 그거지 뭐. 어차피 우리 학생들이 정권을 잡을 수 없을 바에야 기성의 정치 서력
가운데 어느 편엔가 맡겨야 되고, 또 그렇다면 당장은 이 길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야. 설령
내가 처음부터 우리 윤의원님과 어떻게 선이 닿아 있었다 쳐도 무슨 상관이 있겠어?"
"아니죠. 그건 달라요. 우리 운동 본부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처음부터 어떤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공명 선거 계몽대의 깃발을 훔쳐 쓰는 것은 별개의 문젭니다. 후자 쪽이었
다면 우리는 아예 이곳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윤광렬은 별로 긴장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한층 더 느긋해지며 이번에는 공범
의식으로 그들을 주저앉히려 했다.
"어쨌든 그게 그거야. 더구나 니네들도 벌써 보름이나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어? 오
늘은 제법 의자까지 들부숴놓고 왜 그래?"
"그건 이 마당에 다시 의석을 차고 앉겠다고 설쳐대는 잔당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습니다.
편리하게만 해석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선배님돠 고의(故意)를 같이 하는 공범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자자, 그만 해둬. 어렵게 따져봤자야. 이제 며칠 안 남았어. 이왕 적신
몸이니까 끝까지 봐주자구. 이대로만 가면 의원님 당선은 떼논 당상이고, 또 그리 되면 의원
님도 가만있지 못할 거야. 우리는 우리대로 공명 선거 계몽 운동의 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
한 게 되고.....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거 아냐? 특히 강병식이 너는 정치과라며?
잘은 모르지만 사적 이익을 공적으로 전화(轉化)시키는 게 정치라는던데, 그렇다면 이게 바
로 그런 경우 아냐?"
아마도 윤광렬은 지나치게 일을 낙관한 듯했다. 이제 알아듣겠지, 하는 눈길로 최와 강을
둘러보았으나 반응은 뜻밖으로 강렬했다.
"더 따질 것 없어. 이제 알았으면 그만 일어나!"
최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자 강이 두말없이 뒤를 따랐다. 너무도 매몰찬 기
세들이라 모두 아연해 보고 있는 사이에 함께 쓰던 방으로 돌아간 둘은 언제 챙겨두었던지
가방 하나씩을 찾아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어이, 뭣들 하는 거야? 어딜 가려는 거야?"
그제서야 윤광렬이 놀라 몸을 일으키고, 대원 몇은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내려가 둘을 붙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발을 빼겠어요. 이건 공명 선거 계몽도 뭣도
아니란 말입니다."
최가 싸느랗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며 잡힌 손을 뿌리치자 마침 그를 잡고
섰던 태욱이 절반 위협 섞어 말했다.
"인자 가믄 우얍니꺼? 거기다가 행임도 안캤습니꺼? 이거 중앙 본부의 결정이라꼬."
"내가 알기로 이 운동은 대학별로 이뤄지는 겁니다. 중앙 본부가 어디 높다랗게 따로 있
는 게 아닌 줄 아는데요. 또 그렇다 쳐도 그 결정은 따를 수가 없어요. 이해도 안 되고.....비
켜요."
그 밖에도 몇 사람이 그들을 붙들고 늘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윤광렬까지 달
려나와 하룻밤이라도 더 잡아두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두 어지간히 취해 있어 뭇매질이라
도 할 듯 험한 분위기가 되어도 둘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여인숙을 나가버렸다.
"저 새끼들 저걸....."
윤광렬이 험한 눈길로 그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문득 화를 누르며 명훈을 돌아보았다.
" 어이, 네가 한 번 따라가봐. 보내더라도 알고 보내야지. 어차피 이 밤에 서울로 가는 차
는 없을 테니 여기 어디서 자고 떠날 거 아냐? 네가 비교적 표시 안 나게 움직였으니까 슬
쩍 따라 술이라도 함께하며 속셈을 떠보라구. "
그러쟎아도 갑자기 떠나는 그들에게 적지않은 흥미를 느끼던 명훈은 두말없이 신을 꿰고
그들을 뒤쫓았다.
명훈이 여인숙 문 앞에서 둘러보니 둘은 시외버스 정류장 쪽으로 저만큼 가고 있었다.
명훈은흥분해서 뒤도 돌아보는 일 없이 저희끼리 떠들며 걷는 그들을 한참 조용히 뒤따르다
그들이 어떤 대폿집 앞에 머뭇거리는 걸 보고 얼른 다가갔다.
" 어 --- 이형, 웬일이요 ? "
강이 불쑥 나타난 영훈을 반가움 반 경계 반의 목소리로 맞아들였다.
명훈은 그들의 물음이 되풀이될 때까지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 윤선배와의 안면 때문에 함께 따라나서지는 못했지만 나도 의심가는게 좀 있어서...... 몇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들어가도 되겠소 ? "
그러자 들은 별로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명훈이 설령 윤광렬이 보낸 사람일지라도 상
관없다는 투였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됐다는 듯 대폿집 나무 탁자에 앉기 바쁘게 자기들
이 못다 하고 떠난 말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 낮의 일이 아무래도 꺼림직해서 윤후보의 경력을 주민들을 통해 알아보았소. 선거 포
스터에 있는 민주 투사로의 화려한 경력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증인들을 잘못 고르지 않
았다면, 윤후보의 경력은 선거 포스터 쪽보다는 낮에 맥고모자가 빈정되던 쪽에 훨씬 가까
웠소. 또 아까 말했듯 중앙 본부의 결정이란 것도 의심쩍기 그지없소. 한마디로 말해 우리
는 처음부터윤광렬의 농간에 놀아난 거요. 자유당과 한 뿌리에서 난 다른 가지를 다만 줄
을 잘 섰다는이유만으로 민주 투사로 추켜세운 셈이오. "
" 아니, 이번에는 민주당이 당연히 집권해야 된다는 보편적인 미신도 이 기회에 다시 검
토되어야해. 우리는 단순한 반사 이익에 지나지 않는 그들의 공로에 너무 많은 것을 걸려
하고 있어.그들이 건국 초기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친일 보수 세력의 한 분과일 뿐이라는
걸 현실적으로 정권 담당 능력이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잊어준 거
야. 설령 이곳의 경우가 아주 예외적인 것이라 해도 말이야. "
" 그 이상 우리 학생 운동의 방향도 다시 한 번 검토돼야 해. 나는 진작부터 계몽 운
동이다뭐다 하는 방향이 미심쩍어. 만약 우리의 4.19가 혁명이란 이름을 획득하려면 본질적
이고 구조적인 접근이 있어야 해. 우리가 해낸 것은 겨우 부조리와 모순의 외부 구조인 독
재 정권의 타도 뿐이야. 나는 이번에 돌아가면 우리 운동 방향의 새로운 모색과 설정을 제
의하겠어...거기 실패한다면 4.19는 영원히 미완의 혁명이 되고 때에 따라서는 언젠가 한낱
역사의 복권쯤으로 조롱당할 가능성까지 있어... "
적어도 떠나는 그들의 속셈이 어쨌든 윤광렬과 더불어 갈 데까지 가봐야 하는 자신과
현실적으로 거의 무관한 것은 다행이었다. 폭로나 반(反)선전으로 남은 대원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뜻은 전혀 내비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헤어져 여인숙으로 돌아가면서 명훈은 문득 말못할 쓸쓸함과 울적함을 느
꼈다.
뒤틀리고 헝클어진 밑바닥을 젹셔오는 그 감정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면 대강 이렇게 되
었
을것이다.
'아아, 나도 될 수만 있다면, 너희같이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이념의 아이들이 되고 싶구
나...
그들이 가는 길이 괴롭고 거칠며 끝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식 한구석
의
섬뜩한 예감을 빼면.
" 어이, 모두 일어나라구 ! "
이런저런 생각 끝에 아슴아슴 잠속으로 빠져들던 명훈의 귀에 그런 운광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잘 모아지지 않는 시선으로 소리나는 쪽을 보니 운광렬이 여인숙 대문 위에 걸
쳐 있던 '공명 선거 계몽 운동 경남 6지구대 '란 현수막을 떼어내며 서두르고 있었다. 대청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축구부가 물었다.
" 형, 무슨 일이우 ? "
" 아무래도 안되겠어. 우리가 나서봐야겠어. "
" 뭘 하려구 ? 곧 투표 마감 시간이 다돼가는데...... "
" 아직은 두어 시간 남았어. 우리 깃발을 앞세우고 투표장엘 가는 거야. 정 안 되면 구호
로 촌놈들 겁이라고 줘야겠어. 자, 빨리들 나오라구. "
그러나 아무도 선뜻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늘 밑에 있어도 숨이 콱콱 막히는
7월말의 한낮에 그늘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무얼 외쳐대야 한다는 게 생
각만 해도 끔찍한 듯했다. 그런 감정을 문리대 쪽 대원 하나가 반론으로 드러냈다.
" 그건 3.15때 자유당이 써먹은 수법 아뇨? 완장 부대 말이오, 그게 또 통할까요 ? 자칫하
면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는데...... "
" 마, 그때완 사정이 달라. 그건 자유당 완장이고 우리가 내세우는 건 공명 선거 깃발이
야. 잔말 말고 어서 가자구. "
그러자 이번엔 유도부가 근거 없는 낙관으로 마음내키지 않는 출동은 피해보려 했다.
" 형, 혹시 지레짐작으로 너무 부산떠는 거 아뉴 ? 그 사람들 마빡에 자유당 찍고 나오는
길이라고 씌어져 있기라도 합디까 ? 아마 안 그럴 거유. 지금이 어느 땐데 촌놈들이 감히
그러겠수 ? 틀림없이 우리 윤의원님이 당선될테니 느긋이 기다리다가 저녁에 당선 축하 파
티나 합시다. "
" 김칫국부터 마시고 자빠졌네. 얌마, 내 눈은 폼으로 뚫려 있는 줄 아니 ? 척 보면
삼천리야. 지금 손 안 쓰면 가망 없어. 촌놈들이 의뭉 떨면 더 무서운 거 물라 ? "
윤광렬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런저런 핑계만 계속 쏟아져나올 뿐 아무도 움직이
려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당 가득 쏟아지고 있는 것은 햇볕이라기보단 하얗게 달
군 강철 창날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기권을 했으면 했지, 그 시각에 투표하러 나서는 사람
은 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지난 스무 날의 강행군도 그들의 진을 어지간히 빼놓고 뒤였
다. 이제 투표가 시작 되었으나 자기들 몫은 끝났다고 몸과 마음을 풀어놓고 있는 참이라,
윤광렬이 아무리 몰
아대도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더욱 꽥꽥거리는 운광렬과 전에 없이 불퉁거리는 대원들간에 불쾌한 줄다
리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태욱이 뒤늦게 달려와 양쪽을 모두 주저앉혔다.
" 행임(형님), 마 파입니더. 치앗뿌이소. 가봐야 벼볼일 없을 같심더. "
그 소리에 윤광렬이 놀라 물었다.
" 뭐야 ? 무슨 일이 있어 ? "
" 내 알아보이. 하마 투표율이 80푸로 가깝다 캅니더. 인자 와보이 얼매나 더 오겠습니꺼?
날 은 꿉는거 같은데 촌 투표로 백 푸로 참가가 있겠어예 ? "
" 그래도 아직 10푸로는 남았을 꺼 아냐 ? 어나, 단 한 표라도 그게 어딘데 ? 딴소리 말
고 너도 나설 준비해. "
윤광렬이 그렇게 뻗댔으나 기세는 이미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태욱의 다음 말이 그런
기세마저 꺾어벼렸다.
" 의원님 쪽에서도 그까지는 안 바래는 모양입니더. 사무장이 행임만 쫌 와달라는 기라예.
지금 학교 느티나무 밑에 있으이 글로(거기로) 함 가보이소. "
" 사무장이 ? "
" 예, 육발이 형하고 같이 있던데예. "
그러자 운광렬도 끌려 들고 있던 현수막을 마지못한 듯 마루 구석에 놓고 여인숙을 나섰
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여럿에게 얼러대듯 한마디 던지는 것은 잊지 않았다.
" 어쨋든 여기 모두 대기하고 있어. 선거란 게 투표만으로 끝나는 게 아냐., 남의 일을
봐주려면 삼년상까지 봐주랬다구. 개표 끝날 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 ! "
그렇게 불려간 윤광렬은 꽤 오랜 뒤에야 돌아왔다. 낮잠은 자다 깸 대원들은 다시 대청에
드러 누워 코를 골고, 잠이 DQJT는 축은 여인숙 펌프가에서 동물을 찬다 어쩐다 법석을 떨
고 있을 였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여인숙 대문께에 멎으며 윤광렬이 EFMDJ와 말했다.
" 자, 더운데 집 안에서 궁상들 떨지 말구 나가자구. 자동차를 빌려왔으니 어디 시원한
강가에 미역이나 감으며 술이나 한 잔 하는 거야. 개표 때나 돌아와 봐주면 우리 임무는 끝
나니까. "
나갈 때와는 딴판인 표정과 목소리였다. 시원한 강가라는 말에 선잠에서 깨어난 축들까지
도 별불만 없이 따라나섰다.
명훈이 나가보니 여인숙 문밖에 서 있는 윤의원의 선거 유세에 쓰였던 지프였다. ' 민
주 투사 윤XX를 국회로 보냅시다 ' 따위, 어지럽게 감겨 있던 현수막은 떼어지고 없었다.
운전석 곁에는 안주 꾸러미와 소주 궤짝이 실려 있었는데, 명훈은 왠지 그런 윤의원측의 배
려가 마음에 걸렸다.
" 우리가 너무 과민했던 것 같애. 그쪽에서는 부정 선거만 아니면 당성은 확실하다고
믿더군. 우리가 할 일은 개표 감시밖에 남지 않은 셈이야.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땀
이나 씻고 오는 거야. "
윤광렬이 운전석 곁에 앉으며 달라진 상황을 그렇게 알려주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 밝은
게 다시 명훈의 마음에 걸렸다. 일이 끝난 게 아니야. 이 사람은 아직 우리를 쓸 일이 남아
있어. 어쩌면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게 써먹을 일이 ...... 하지만 다른 대원
들은 그런 윤광렬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모두 끝났다는 표정으로 찌는
듯한 지프 속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첨벙댔다.
여름 강가에서 시원한 미역 뒤에 삶은 개고기와 잘 익은 수박을 안주 삼아 마시는 소주맛
은 유별났다. 토종 똥개라 그런지 소금에만 찍어먹는데도 구수하기 그지없었고, 동이만한
수박은 독한 소주를 알맞게 묽게 해 평소에는 즐겨 마시지 않는 사람들까지 겁없이 마시게
했다. 명훈도 마음 개운치 않은 대로 멋모르고 흥겨워하는 분위기에 차츰 휩쓸려 들어갔다.
윤광렬을 통한 윤의원의 대접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이미 어지간히 취하고 어지간히
배불렀지만 윤광렬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지프를 숙소에서 멀지 않은 중국집 앞에 세웠
다. 해가 아직 남았는데도 저녁 식사를 핑계로 그들에게는 호화판이랄 수밖에 없는 술자리
를 벌였다. 탕수육, 나조기에 배갈로 한 번 더 대원들을 삶아놓은 것이다. 그러다가 그 끝에
얼핏 보아도 만 환은 넘어 보이는 돈 뭉치를 흔들어보이며 기세를 올렸다.
" 물론 우리가 이걸 바라고 온 건 아니지만. 한 번 해볼 만한 거 아냐 ? 이거, 윤의원님께
서 우선 집히는 대로 내려주신 거야. 개표 끝난 뒤엔 정말로 화끈하게 한잔 마시자구. 어
이, 여기 아직 딱지 못 뗀 친구 없어 ? 내 오늘밤 책임지구 이 고을에서 제일 이쁜 색시로
다가 딱지 떼어주지. 그뿐만 아니야. 니네들 다음 학기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윤의
원님 이번에 서울로 올라오면 우릴 무른다 하지는 못할걸. "
취한 중에도 그 말이 너무 지나치게 들렸던지 문리대 쪽 대원 하나가 물었다.
" 아직 개표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십니까 ? 선거랑 개표가 끝나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 더나 공기도 별로 좋지 않았다면서요 ? "
얻어먹은 게 있고, 분위기가 있어, 드러내놓고 따지지는 못했지만 운광렬로서는 꽤나 아플
소리였다. 그런데도 윤광렬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진자부터 그런 물음을 기다
렸다는 듯 기세 좋게 받았다.
" 공기 ? 그걸 누가 알아 ? 아까 태욱이가 하두 호들갑을 떨어 좀 흔들리긴 했지만, 도대
체 그런 게 어딨어 ? 이 선거는 처음부터 우리 의원님이 이기게 돼 있었다구. 이 빛나는 민
주 시대에 민주 투사인 우리 윤후보가 아니고 누가 당선된단 말야 ?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
건 부정선 거라구, 부정 선거 ! "
그때껏 은근히 윤광렬을 살펴오던 명훈도 그 소리를 듣고서야 아, 하고 깨달아지는게
있었다. 부정 선거랑 낱말을 유달리 힘주어 하는 데서 그만이 알앋르을 수 있는 섬뜩한 암
시를 받았던 것이다. 명훈의 짐작이 옳음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윤광렬이 더욱 열을 올
렸다.
" 만약 그리 된다면 진짜 우리가 나솔 때지. 공명 성거 계몽 운동이란게 뭔데 ? 바로 그
런 부정 선거 막자구 우리가 이렇게 먼 산골짜기까지 온 거 아냐 ? "
윤광렬은 벌써부터 부정 선거가 판명나기나 한 듯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나머지 대원들이었다. 술기운 탓일까, 그들도 윤광렬 못지 않게 상기되어 '부정 선거
결사 반대 '를 맞장구쳐댔다.
' 좋지 않다 ...... '
명훈은 본능적으로 그해 봄 3월 15일 밤을 떠올리며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술이 다
확 깨는 기분이었다.
' 거기까지 따라갈 수는 없어. 이건 아니야. '
잠깐 사이에 그렇게 마음을 정한 명훈은 그쯤에서 어떻게 대원들을 깨우쳐 보려 했다.
최소한 아직 부정 선거가 있었다는 한 가닥 단서더 없었다는 것 정도는, 그리하여 대원들의
턱없이 격앙된 채 개표장으로 가는 일이라도 막아볼 작정이었으나 --- 미처 그럴 틈이 없
었다.
" 아이,이 사람들 여다서 뭐하노 ? 개표가 시작된 게 하마 언젠데 아직도 여기서 밍기작
거리고 있노 ? "
누군가가 열어놓은 방문 안으로 머리를 디밀고 그런 타박을 주었다. 명훈이 보니 며칠 전
무소속 후보의 유세장을 뒤엎을 때지지 당원들을 이끌고 앞장서 뛰던 청년부장인가 뭔가 하
는 사람이었다.
" 아니, 육발이 형, 벌써 그렇게 됐어요 ? "
윤광렬이 건성으로 시계를 보며 되물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시계에서 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윤광렬의 눈빛에는 단순한 놀라움 이상의 어떤 감춰진 물음이 느껴졌다.
" 허 참, 이 사람 보래이, 죽이 넘는지 밥이 타는지 모리는구만. 이러이 무슨 공명 선거가
되겠노 ? 부정 선거 아이라 뭔들 몬 해묵겠노 ? 어서 가보라꼬, 가서 뭐 일이 벌어지고 있
는동 함보라꼬. "
벌써 뭣에 뒤틀려왔는지 격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그가 그렇게 내쏘았다. 그리고 부두
들 충동질이나 하듯 덧붙였다.
" 공명 선거 계몽 운동반이라 카디 이거 말짱 헛거 아이가 ? 장장이 돌며 요란만 떨었
지. 된기 뭐가 있노 ? 이런 사람들이 이승만이는 우예 내쫓았는가 몰라. 소 뒷걸음질에 쥐
잡기랬제 암매(아마) ...... "
그들이 꾸미는 일을 짐작하고 있는 명훈까지도 울컥 속이 치미는 소리였다. 그때 이미
4.19는 명훈 같은 엉터리 대학생들에게까지도 함부로 건드리기 싫은 보람으로 자리잡아가
고 있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그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먹고 있던 마음을 깜박 잊고 물었다.
" 아니, 그럼 무순 부정이라도 있었습니까 ? 잡힌 증거라도 있어요 ? "
" 세상에 참말로 --- 증거 터억 내주고 하는 부정이 어딨갰능요 ? 학생들이 저래 쑥이
라카이.
"그렇게 쏘아붙인 청년부장은 이제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휙 돌아서 가벼렸다. 그 터
무니없이 과장된 태도에서 명훈은 다시 그들이 꾸미고 있는 일의 모습을 더 뚜렷이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신의 짐작을 다른 대원들에게 암시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 가자 ! "
윤광렬이 벌떡 몸을 일으켜 달려나가고, 그 뒤를 나머지 대원들이 우르르 따라나갔다. 생
각보다 훨씬 더 흉흉한 기세들이었다. 거기에 압도된 명훈도 이제는 어떻게 하겠다는 뚜
렷한 생각조차 없이 그들을 뒤쫓았다.
아직 어둡지 않은데도 전깃불이 밝혀진 개표장에 가보니 이미 개표가 진행된 지 한 시간
가까이나 지난 뒤였다. 그 동안 개표된 결과를 알아보니 오는 동안의 예상대로 ' 민주 투사
'는 벌써 '자유당 진당 '에게 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결과를 놓고 양쪽 운동원이 티
격태격하는 소리가이 구석 저 구석에서 들려왔다.
" 니거미, 이거 부정 선거 어이가 ? "
" 느그 후보 안 찍는다꼬 다 부정이가 ? "
" 안 보이니 아나 ? 뭔 짓을 했는동. 신XX 자유당 때부터 부정에는 이력난 놈 아이가 ? "
" 말 조심하라이. 민주, 민주 캐쌌지마는 느그 윤XX는 어떻고 ? 우에다 줄 바꿔 선 게 바
로 민주당이라꼬 다 민주 투사가 ? "
그러는 중에도 개표는 진행되어 아홉시를 넘기면서 윤곽이 차츰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붓
대롱 약간 삐딱하게 찍힌 것, 용지 모퉁이 조금 접힌 것까지 다 시비가 붙어 개표가 늦어
졌는데도, 워낙 군(郡)이 작아서였는지 예상보다 일찍 형세가 굳어진 것이었다. ' 민주 투
사 '가 ' 반혁명 세력'에게 2천 표가 넘게 뒤져, 남은 투표함에서 몰표를 얻는다 쳐도 당
락을 뒤집기는 어려워 보였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럴 때 진 편의 운동원들은 기가 죽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민주 투사의 운동원들은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부정 선거의 주장을 상대
편 운동원들과의 티격태격에서 일방적인 단정으로 바꾸더니, 마침내는 공공연한 구호의
형태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3·15 재판이다. 부정 선거 다시 하자!"
"독재 잔당 신××가 최고 득점 웬말이냐!"
"반혁명 세력 물러가라!"
물론 상대편 운동원과 참관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시끄러버! 부정이라 카믄 느그는 입이 열 개라도 말 몬 해!"
"민주, 민주 카다 별민주 다 보겠네. 투표에 지자 부정 선거라이, 민주주의 선거는 그
런강?"
그렇게 이따름씩 악은 써댔으나 대단한 기세는 못 됐다. 그런 그들에게는 승리를 지켜
야 할 입장이 주는 부담 이상의 야릇한 불안과 초조가 엿보이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그곳에 나와 있는 경찰관들과 개표에 종사하고 있는 임원들이었다. 경찰
관들은 무엇에 주눅이 들었는지 명백한 개표 방해까지 못 본 척했고, 선관위원들은 차라리
그런 개표 결과가 죄스럽고 송구하다는 태도로 허둥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게 무슨 신호였는지 운동장 쪽에서 총소리 같은 것이 두 번 나면서 민주 투
사 쪽의 운동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지 고함과 욕설로 개표만 중단시키고 있는
데, 그때껏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않던 윤광렬이 갑자기 일어나 소리쳤다.
"여러분, 이건 명백히 부정 선겁니다. 우리 공명 선거 계몽 운동대는 이 지역 민의원 선
거가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아무런 근거 없는 선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효과는 이미 붙기 시작한 불에 기름을 끼
얹은 것과 같았다.
"맞아, 이 선거는 무효라꼬, 다부(도로) 자유당 뽑는 기 무신 선거고?"
"긴말 할 거 없이 투표함 조뿌샀뿌리, 확 싸질러뿌리자꼬!"
윤의원 쪽 운동원들이 그렇게 외치며 투표함이 있는 데로 몰려가고 뒤이어 개표장 부근
에 있던 친척과 지지자들이 쏟아져들어와 합세했다. 태욱을 비롯한 계몽대원 태반도 그
들과 한덩어리가 되어 날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오래잖아 명훈은 아득한 무력감과 당혹감에 빠져 밤하늘을 붉게 비추며 타오르
는 투표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광란 상태에 접어든 수백의 군중이 살기 띤 눈을 번들
거리며 '반혁명 분자'를 찾아 우르르 운동장을 뛰쳐나가는 광경은 섬뜩함을 넘어 공포 그
자체로 심장에 닿아왔다.
제 45장 굶주린 넋
어머님, 그간 옥체 만안하시온지요? 소자도 어머님 염려지덕에 옥경이 데리고 잘 지냅니
다. 이 곳은 벌써 가을 기운이 완연하여……
철은 거기까지 쓰다가 와락 편지를 찢어버렸다. 어머니가 형에게 보내는 편지의 대필과
형이 어머니에게 보내오는 편지들을 대독하는 동안에 익힌 어려운 한자어들로 편지를 쓰는
것은 철의 제법 오래 된 글버릇이었다. 읽은 어머니가 기특히 여길 뿐만 아니라 쓰는 자
신도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알지 못할 자부심까지 느끼며 써온 문투였는데
그날은 달랐다. 도무지 그런 말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너무도 오랜 굶주림이 그의 순한
성격을 난폭하게 만든 탓이었다.
철은 한 장 남은 편지지를 꺼내 이번에는 퍼부어대듯 단숨에 써내려갔다.
어머니 보세요. 이게 쌀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고도 세 번째 편집니다. 도대체 어찌 된 겁
니까? 옥경이는 굶어 학교에도 안 가려 하고 나도 길을 걸으면 어질어질합니다. 디 더 가
볼 데도 없어요. 영남여객댁은 차마 낯이 없어 못 가겠고, 다른 데도 세 번 네 번 들러 이
제는 찾아가봤자 돈 10환 꿔주는 데도 없습니다. 어린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대로
앉아서 굶어죽을까요? 아니면 옥경이 데리고 도둑질이라도 나설까요? 물론 그곳에는 그곳
대로 사정이 있겠지요. 또 설마 낯선 객지에 우리 어린 남매를 버리고 아주 가신 건 아니
겠지요…… 어머니, 이번에는 답장이라도 해주세요.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라도 속시
원히 해주세요. 깡통 들고 거리로 나서라는 말이라도……
거기까지 써놓고 나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더 써내려갈 수가 없었다. 지난번 어머니
의 편지로 영남여객댁 아주머니가 쌀말과 돈 3천 환을 가져다준게 거덜난 것은 벌써 한달
전의 일이었다. 다시 목사님 사택, 원집사네 헌옷가게, 한곳 있는 친척집을 돌며 쌀 한두
되, 밀가루 몇 줌씩 얻어나르는 것도 보름 전에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악
전고투였다. 한 반 애네 아버지가 경영하는 식료품 가게에서 외상라기보다는 구걸로 얻었다
는 편이 옳은 국수 몇 묶음, 이웃에서 이따금씩 보다못해 들여주는 보리밥 그릇이나 찐 감
자 소쿠리 따위가 그 뒤 그들 어린 남매의 목숨을 잇 준 식물(食物)의 전부였다.
따지고 보면 철에게 있어 굶주림이란 그리 낯선 게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억이 쌓
여가기 시작하면서 가장 친숙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그 굶주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안광
에서 서울로 올라간 뒤의 한 일년과 밀양으로 옮겨온 뒤의 한 반년 하는 식으로 굶주림과
한동안 멀어질때도 있었으나 그마저도 불안하기 그지없는 예외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굶주림이라도 어머니와 형이 있을 때와 그들 남매만이 따로 떨어져 겪는 것은 달랐다. 비록
세 살 터울이지만 자신이 손위가 되어 어린 옥경이를
데리고 헤쳐가야 하는 굶주림은 우선 그 정신적인 쪽의 무게 때문에 훨씬 견디기 어려웠
다. 곧 어머니와 형이 있을 때 같으면 당당히 다툴 수 있는 몫까지도 옥경이에게 내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한번은 한 반 아이네 원두막을 지나다가 참외 한 개를 얻은 적이 있는
데, 그걸 가지고 돌아온 철은 한 입 베어먹지도 않고 옥경이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자신은
원두막에서 배불리 먹었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거 참, 이상하다. 이기 와 이리 됐이꼬?"
철이 편지를 쓰다 말고 망연한 슬픔에 젖어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들으라고
하는 듯한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에 나갔다 막 돌아온 듯했다.
"어예, 참 기가 차제? 볼쌀(보리쌀) 한 소쿠리 삶아놓은 기 반뿐이다 아이가? 글타꼬 쥐가
파먹은 것 같지도 않고……"
방안에서 아무 대꾸가 없자 주인 아주머니가 한 번 더 그렇게 떠들었다. 밖에 다른 사람
의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철이네 방 쪽에 대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철이 그렇게 물으며 문을 열다 말고 옥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옥경이는 철이 편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눈을 말똥거리며 곁에 누워 있었는데, 그새 눈을 감고 자는 척하고 있었
다. 그런 옥경의 어깨 어름에서 가는 떨림이 느껴지는 게 왠지 꺼림칙했다.
"이 보라카이, 여 보래, 볼쌀을 아미아 삶아 걸어놨디 이 모양인 기라, 쥐가 파묵으믄
한군데를 푹 파묵제, 이래 여기저기 긁어가미 파묵지 않는다꼬. 이거이 틀림없이 사람 손자
국이라..."
아주머니가 그러면서 내보이는 삶은 보리 소쿠리에는 정말로 한눈에 알아볼 만큼 손가락
으로 긁은 자국이 보였다. 그걸 본 철은 낯부터 달아올랐다. 자신이 훔쳐먹어서가 아니라
꼼짝없이 그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데서 온 당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인집 아주머니는
붉어진 철의 얼굴에서 확증을 잡은 듯이 나무라는 투가 되었다.
"배가 고프믄 달라 캐서 얻어묵제, 이기 뭐꼬? 이거 믿고 저녁 안치러왔다가 반마이(반
밖에) 안 남았으이 우짤 것고? 언제 새로 볼쌀 삶아 저녁하노? 아이들도 참 많이도 묵었
제, 이 억신 볼쌀을…"
그러다가 느닷없이 말머리를 그 자리에 없는 어머니에게 돌렸다.
"그 아주무이, 비기(보이기)는 안 그래 비디마는 참 너무한데이. 우짜자꼬 아무도 없
는 객지에 알라들만 척 팽기쳐놓고 하마 몇 달째 오도가도 않노? 말이사 고향에 천금을 묻
어논 디끼(듯이) 떠들어쌌지마는 혹 어디 영감 하나 정해가지고 도망튔뿐 거 아이가? 우야,
안글나?"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철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이 그 삶은 보리를 먹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나 아주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의심을 부인한 걸로 알아들을 모양이었다.
"아이긴 뭐가 아이라. 틀림엄따. 어데 영감 하나 정한 기라. 아이믄 하마 반년이 넘도록
우째 이래 콧배기도 안 빈단 말고? 참말로 느그 전에 고향 갔을 때 영감 하나 몬 봤나?"
"아니에요. 그런 일 없어요. 그리고 그 보리쌀도 내가 먹지 않았어요."
철이 한층 강경한 어조로 그 둘을 함께 부인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의 눈길이 실쭉해졌
다.
"뭐시라? 그럼 이거 귀신이 긁어묵고 갔나? 도둑놈이 들어왔으믄 소쿠리째 들고 갔뿌지
우예 이래 반만 긁어묵고 갔겠노? 마, 이캐도 알고, 저태도 안다. 묵은 거 묵었다(먹었다)
카믄 그만인데 뭔 아아가 억다구(악다구니)가 그래 시노? 글타꼬 하마 뭐뿐 거 토해내라 카
겠나?"
이번에는 잡아떼는 게 괘씸하다는 듯 제법 목소리까지 높였다. 철은 그게 억울해서인지, 이
미 상해 있던 감정 탓인지 다시 앞뒤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목소리도 절로 울먹임으로 떨
렸다.
"아니에요. 굶어죽으면 죽었지 우리는 남의 거 훔쳐먹지 않아요. 우린 그런 얘들이 아니에
요!"
철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아주머니도 약간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다시 삶은 보리가 담긴 소쿠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거 참, 이상하다. 그라믄 이게 우예 된 기고? 걸버시(거지)가 와서 긁어뭇다 캐도 이래
되지는 않을 낀데…… 글타고 니 하는 짓 보이 니가 그랜 거 같지도 않고…… 참말로 귀신
이 곡할 노릇이제……"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때껏 죽은 듯 방안에 드러누워 있던 옥경이 엉금엉금 기듯 방문
을 열고 나왔다. 샛노란 얼굴로 입을 막고 있는 게 토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
았다.
"자가, 자가 와 저라노? 어디 아픈가 베?"
아주머니가 놀란 눈길로 옥경이를 보며 다가가려 했다. 허둥지둥 신발을 꿰던 옥경이 달
아나듯 변소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러나 몇 발 옮기기도 전에 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가 허연 토물을 쏟아놓았다. 마당
에 떨어지며 튀는 걸 보니 제대로 불지도 않은 삶은 보리쌀이었다.
철이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어도 그러면서 허물어지듯 폭삭 주저않은 옥경이에게 애처로
움부터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달리 그런 쪽에 결벽을 가진 열세 살짜리 소년에겐 그런
누이동생이 밉살맞기만 했다.
"이 기집애, 이 도둑년, 네가 보리쌀을 훔쳐먹었구나……"
격분한 철은 그렇게 소리치며 우르르 달려가 아직도 토물을 쏟아내고 있는 옥경이에게 발
길질을 해댔다. 아주머니가 보리쌀 소쿠리를 마루에 놓고 허둥지둥 달려와 철을 떼오놓았다.
"야가 와 이카노? 참말로 큰일내겠데이. 성찮은 아한테 이기 또 무슨 짓고?"
아주머니는 그런 고함과 호되게 철의 등짝을 후려쳤다. 철이 더욱 화가 나 소리쳤다.
"놔둬요. 이런 기집앤 맞아죽어야 돼. 도둑질을 하다니, 도둑질을……"
철이 그러면서 다시 옥경이에게 덤벼들자 아주머니는 몸으로 옥경을 감싸 안채 쪽으로 안
고 가며 정말 성난 눈길로 철을 돌아보았다.
"아리고, 가 참 순한 같디 인자 모이 못됐데이, 니는 어린 게 불쌍치도 않나? 오직 배가
고팠으믄 볼쌀 삶아논 걸 간도 없이 묵었겠나? 그 야들야들한 빈속에 이 억신 볼쌀이 그마
이 드갔으이 지가 우예 쌔겨(삭여)내겠노?"
그리고 다시 오들오들 떨고만 있는 옥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이다, 니 잘했데이, 배고프믄 뭐든동 묵어야제. 묵고 목숨부터 살아나야제. 느그 오빠는
아이라도 모삼(무시무시의 작은말)하데이. 아아가 우째 저래 독하겠노? 니 이 방에 드가
누워 있거라이. 잠시만 있으믄 내 흰죽 쪼매 끼려(끓여)주꾸마."
그 소리를 듣자 철의 분노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흰죽이라는 소리를 듣자 정말로 옥경이에
게 무슨 병이 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큰 분노의 뒤끝이라
얼른 감정 전환이 이루너지지 않았다. 더는 옥경이를 몰아낼 수 없어 그 자리를 떠나면서도
한마디 성난 목소리를 덧붙였다.
"나는 갈 거야. 너같은 도둑년 기집애하고 부끄러워서 어떻게 한 집에 살아!"
그리고 제 성을 못 이겨 우르르 골목길로 달려나갈 때에야 비로소 옥경의 울먹이는 목소리
가 따라왔다.
"오빠, 같이 가. 잘못했어……"
그 소리가 다시 야릇한 아픔으로 철의 성난 발길에서 힘을 뺐다. 그 바람에 옥경이 뒤따
라 달려나오면 한바탕 부둥켜안고 울고 싶어져 한참이나 골목 끝에 붙어서 있었으나 옥경은
뒤따라 나오지 않고 달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만 판자 울타리를 넘어 새나왔다.
"다가, 성찮은 기 어딜 갈라 카노? 느그 오빠 어디 안간다. 지가 니 나뚜고 가이 어디
가겠노? 니는 여다 누웠다가 흰죽이라도 한 그릇 먹고 기운차리야제."
그런 아주머니에게 붙들렸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옥경이 나오지 않자 철은 혼자서 둑길
로 올라섰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식혀주는 듯 기분이 좀 새로워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음먹고 뛰쳐나온 길이 아니라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을 막연히 서 있던 철은 이윽고 둑길을 딸 강 하류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남이 보기에는 제법 어린 사색가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머릿속은 그의 위처럼 텅 빈 채였
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강둑길이 끝나고 누렇게 익어가는 강 건너 들판이 두 눈 가득 들어
왔다.
가을이 새삼 가슴 찡하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굶주림에 억눌려 오래 잠들어 있
던 그의 유별난 감성이 가만히 되살아나며, 거기에 이어 또한 오래 잊고 지냈던 명혜의 얼
굴이 떠올랐다.
철이 누렇게 익은 들판을 보고 명혜를 떠올리게 된 것도 아마도 그 전해 가을의 어떤 일
때문이었다. 그 전해의 가을 들판은 사라호 태풍 때문에 먹을 것이 흔했다. 강가의 덤불에
는 홍수에 떠내려온 사과가 아직 썩지 않은 채 걸려 있기도 했고, 뿌리째 뽑힌 땅콩 줄기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또 그 어떤 현상 때문이었는지 그해에는 메뚜기도 유별나게 많았다. 그
래서 됫병 하나를 들고 들판을 나서면 그 됫병 가득 메뚜기가 차는 것뿐 아니라, 재수
좋으면 사과와 땅콩 따위까지도 한 보자기 주워 담아오는 재미로 아이들은 학교만 파하면
곧장 강가 들판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철이도 종종 그들을 따라나섰는데, 한번은 잡아온 메
뚜기가 너무 많아 그걸 영남여객댁에
가져간 적이 있었다. 됫병 가득 든 메뚜기를 보고 아주머니보다 더욱 반가워하는 것은 아
이들이었다. 부모의 지나친 보호 때문에 언제나 집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명혜네 남
매에게는 됫병 가득 든 메뚜기가 신기할 뿐만 아니라 그 메뚜기를 잡는다는 일이 또한 즐겁
고 신나는 모험으로 비친 듯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치마꼬리에 매달리듯 해 다음 일
요일 철과 함께 메뚜기 잡이를 나가는 걸 허락받아냈다.
철은 그 뜻밖의 행운에 며칠 밤잠까지 설치며 일요일을 기다렸다. 명혜와 아무의 방해
도 받지 않고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드디어 일요일이 되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온 세상을 다 얻은 기
분이었지만, 들판 어디서도 메뚜기는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의 짐작으로는 그 사
이 몇 차례 된서리가 온 탓인 듯 했다.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한 그때로서는 그게 어찌도
그리 부끄럽고 당황스럽던지. 속절없이 거짓말쟁이가 되어 그대들 남매들의 놀림 속에 돌아
올 때는 볕 밝은 가을 정오의 들길이 다 캄캄하게 느껴질 정도였었다...
하지만 굶주림에 짓눌린 어린 영혼에게는 일껏 되살려낸 감상을 키워갈 힘이 없었다.
벌써 몇 달째 가까이서 마주하지 못한 명혜의 얼굴이 시리도록 맑은 가을 하늘에 아련히
떠오르는 듯했으나 가슴 저림 애틋함까지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부터 오래잖아
다시 무슨 예리한 아픔처럼 철의 몸과 마음을 죄어오는 것은 이제는 거의 추상화된 배고
픔이었다. 철은 그 배고픔에 내몰리듯 둑길을 되돌아 나와 읍내 쪽으로 갔다.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은 그쪽에, 곧 사람들이 모여 다투며 북적대는 그곳에 있다
는 거의 본능적인 방향 감각에 따른 것이었다. 뱃다리거리에 이를 때까지도 추상적이기만
했던 철의 욕망은 다리를 건너면서 차츰 현실적
인 계획들로 바뀌어갔다. 먼저 가능한 대로 외상을 뚫어보고, 안 되면 아는 사람들에게 차
용의 형식을 빈 구걸로 읍내를 한바퀴 돈다는 것이었다. 그가 외상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것은 그쪽이 갚으리라는 전체를 보다 강하게 내세우고 있어 아무래도 더 떳떳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철이 그런 계획에 따라 맨 먼저 찾은 것은 원집사네 헌옷가게 곁에 있는 쌀가게와 그 두
집 건너의 잡화점이었다. 두 곳 다 어머니를 잘 알고, 그래서 전에도 외상 거래를 트고 지낸
터였으나, 지난 반년 서너 번씩 신세를 지는 동안에 거래가 끊겨버렸던 가게들이었다. 마지
막 거래 때의 매몰찬 거절이 기억에 생생했지만 철은 있는 용기를 다 짜내 먼저 쌀가게를
찾았다.
"안 되겠데이. 누구는 흙 파다가 장사하는 것도 아이고...."
다급한 김에 양을 줄이고 줄여 쌀 한 되 외상을 빌었으나 주인 아저씨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들 중에는 가난하고 비참해질수록 더 강하게 개결한 자존심에
매달리는 이들이 있다. 마음이 굳센 쪽보다는 여린 쪽에서 더 자주 그런 경우를 보는데, 아
마도 그것은 모든 사태를 너무 일찍 비관해버린 나머지 생겨난 절망적인 자기 방어의 한 수
단일 것이다. 철이도 대개 그런 비뚤어진 자존심으로 자기를 버텨가는 쪽이었지만 그날만
은 달랐다. 그가 떨어져 있는 상황은 그 같은 비관과 절망조차도 마음놓고 선택할 수 없게
한 까닭이었다.
"동생이.....아픕니다. 우린 며칠째...."
정히 안 된다면 동정심에라도 의지해볼 양으로 철은 다시 그렇게 더듬거렸다. 주인 아저
씨가 이번에도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짜증 섞어 말했다.
"그 얘기를 와 여다 와서 하노? 우리가 어디 고아원 채리놓고 있나?"
그래놓고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문득 철의 얼굴에서 무얼 읽었는지 목소리를 조금 부드
럽게 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느그 집은 도대체가 뭐가 우째 된 긴지.....지난봄에는 난데없이 쌀을 한 가마이나 팔고
가디, 보름도 안 돼 다시 외상을 시작 하이......그게 하마 얼매고? 쌀보리 합하믄 닷 말이
안 넘었나?"
"그건 누나가 .....누나가 달아나면서.....실은 그 땜에......"
철이 눅어진 그의 목소리에 그렇게 매달려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
림 쌀가게 아저씨가 한꺼번에 그걸 만회하려는 듯이나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런 거 저런 거 내가 다 알아 뭐 할 끼고? 외상은 마 안 되겠다. 네보이 느그는 부모
있는 집 아이들이 아이라. 매삔(내버린) 자식들이라꼬. 안 그라믄 우째 어린 너그 둘만 놔
뚜고 하마 반년이 넘도록 느그 엄마는 오도가도 않노?"
그리고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돌아서서 가겟방 쪽으로 가버렸다. 철이도 돌아섰다. 도대
체 눈시울이 화끈거려서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뛰듯이 쌀가게를 나온 철은 가게 모퉁이 전신주에 부딪듯 기대서서 한참 동아 눈물이 멎
기를 기다렸다. 모든 것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말했듯, 그가 떨어
진 상황은 그런 섣부른 절망까지도 턱없는 감정의 사치로 느껴지게 할만큼 급박해 그럴
수도 없었다. 어쩌면 그때쯤은 정말로 병이 나서 누웠을지 모르는 옥경이를 위해서도 무엇
이건 먹을 것을 구해 가야 했다. 눈가가 마르고 절망적인 충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철이
두 번째 목표로 다가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때였다. 되도록 별일 없었던 것처럼
활기차게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가게에는 할머니 혼자뿐이었다. 그걸 본 철은 조금
힘이 났다. 할머니는 아들 내외보다 훨씬 정이 많
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는 같은 교회에 나가는 교우이기도 했다. 아들 내외가 외상 거절한
뒤로도 철이 두 번이나 더 외상을 얻은 것은 바로 그 할머니에게였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철은 걸음걸이 이상의 활기참으로 그 할머니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가 애써 활기참
을 가장한 것은 조금 전 쌀가게에서의 실패에서 받은 암시 때문이었다. 동정심에 빌어보
기보다는 우리에게서 외상값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 외상을 얻어보자-뚜렷하지는
않았지만 대강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이고, 조집사님네 아들이구나. 우예, 조집사님은 왔나?"
할머니가 눈치 없이 반기며 그렇게 인사를 받았다. 철은 됐다 싶어 계획에도 없던 거짓
말을 늘어놓았다."낼모레는 오실 거예요. 편지가 왔거든요. 일도 잘되셨는가 봐요. 할머님께
고맙단 말씀도 하고, 오시는 대로 외상값을 갚겠댔어요."
"그거 다행이네. 인자 애비에미한테 쿠사리(핀잔) 안 먹어도 되는 갑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을 받았으나, 정말로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왜 그렇게 반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일부러 꾸
며 보인 쾌활함에 어머니가 돌아온 줄 알았던 가겟집 할머니가 그렇지 않다는 말에 실망한
까닭이란 추측까지는 아직 철에게 무리였다. 어떻든 가게로 들어설 때 그 할머니가 보인
반가움만을 믿고 철은 조심스러운 대로 처음의 목적에 바로 다가섰다.
"할머니. 저.....그래서 말씀인데요. 이번 한 번만 더 외상을 주세요. 쌀이 아무래도 좀 모
자랄 것 같아서 국수 두 타래하고.....또 오늘 담임선생님께서 가정 방문이 있어 봉지에 든
도나스와 과자좀....."
철은 거기까지 단숨에 말해가다 비로소 그 할머니의 냉담해진 표정을 보고 얼결에 말을 그
쳤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할머니가 억지로 지어 뒤틀린 듯 보이는 미소로 말했다.
"외상이라믄 안 되겠다. 이기 내 가게가 아이고 애비에미가 뻬빠지게 일해 겨우 요마
이 어불어(어울어지게 해)논 게라. 하마 쟁긴(잠긴) 천이백 환도 걱정이 늘어졌는데......저
번에 느그 또 뭔 일 있다고 외상 줬다가 얼매나 쿠사리 문지(먹었는지) 아나?"
"그래도 낼모레면 어머니가 오시는데....."
철이 그렇게 매달려보았으나, 직감적으로는 이미 글러버린 일 같았다. 그걸 확인시주듯,
파리채로 파리도 없는 진열장 한 곳을 치며 할머니가 이제는 완연히 찬바람이 느껴지는 말
투로 잘랐다.
"우쨌든 안 된데이. 참말로 조집사가 낼모레 돌아와 날 원망한다 캐도 할 수 없는 기라.
이기 어디 내 끼라야제....."
그렇게 되면 하는 수 없었다. 철은 말없이 돌아서서 그곳을 나섰다. 은근히 믿었던 두 곳
에서 연거푸 실패를 하고 나니 다시 섣부른 절망의 유혹이 시작되었다. 결국 되지도 않는
걸 괜히 창피만 더 당하는 꼴이 나지 않을까. 차라리 옥경이와 나란히 누워 곱게 굶어죽는
게 낫지 않을까.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저 네로 소년처럼.....
하지만 철은 끝내 세 번째의 목표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한계에 이른 기아 심리가 위기
감의 형태로 그를 내몬 것이었다.
말이 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때를 전후해서 한 콤플렉스의 형태로 그의 의식 밑바닥
에 가라앉게 된 기아 심리는 나중 철이 경제적으로 상당히 성공을 거둔 뒤까지도 종종 기
이한 행동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먹고사는 일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가 잡혔는데도 여유만 생기면 쌀가마니를 사들여 좁은 마루 구석에 재놓기를 좋아하던
남편을 별로 고생 않고 자란 그의 아내는 가끔씩 의아하게 바라보곤 했다.
생각 끝에 어머니 외가 쪽의 먼 친척이 사는 북성 거리로 가기 위해 철이 작은 언덕길
을 내려가고 있을 때는 어느새 해거름이었다. 유독 저녁놀이 빨간 게 까닭 없이 철의 가슴
속을 어지럽혔다. 어쩌면 그 전날 저녁 이웃집에서 가져다준 찐 감자 몇 알을 먹은 게 음식
으로는 마지막이었던 그의 몸이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집 대문
앞에 이르자 철은 그 위기감과도 같은 배고픔 속에서도 다시 한 번 가벼운 망설임에 시달렸
다. 어머니의 종이모가 된다던가 하는 그 집 할머니가 지난번에 갔을 때 소리쳐 하던 말
때문이었다.
"우린들 뭐 억시기 잘산다꼬 너그까지 와서 이래노? 아 아바이 군청촉탁 나가가주고 쪼매
씩 벌어오는 거 이 많은 식구에 택이나 있는 줄 아나? 촌에 있는 논마지기서 쌀가마이 안
올라오믄 우리도 식구대로 깡통들고 나서야 할 판이라....."
쌀 한 되에 김치 한 포기, 보리쌀 두 되에 된장 한 대접하는 식으로 주는 게 많지도 않
지만 몇 번을 찾아가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는데 맛을 들여 다시 찾아갔다가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 소리만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런 철을 그 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마침 군청에서 퇴근해 돌아오던 그 집 아저씨였다.
"이기 누고? 니 돌내골 누님 아들 아이가? 왔으면 들어가잖고 와 여다서서 밍기작거리고
있노?"
그 아저씨는 그러면서 철의 손목을 잡고 들어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법도 없이 밥상만 재
촉했다. 그리고 밥상이 들어오자마자 아주머니를 윽박지르듯 밥 한 그릇을 더 내놓게 하고
숟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자, 먹자. 지금 니한테 젤로 급한 거는 빨리 먹는 거 같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전 같으면 다시 앞 뒤 없는 눈물부터 쏟아낼 순서였으나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음식
물을 보자 갑자기 속을 뒤틀고 쥐어짜듯 하는 배고픔이 일어 철이로 하여금 모든 걸 잊고
밥상머리에 달라붙게 했다. 철은 한동안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숟갈질만 해댔다.
비쩍 마르고 노랑꽃이 핀 얼굴만 가지고도 철이 떨어진 처지를 짐작한 그 아저씨의 애처
롭게 보는 눈길이며, 일터에서 돌아오는 가장을 위해 정성 들여 마련한 저녁상을 마구잡
이로 퍼 먹어대는 어린 불청객에게 그 아주머니가 보내는 못마땅한 눈길, 그리고 신기한
구경거리나 생긴 듯 쪼르르 몰려와 철의 숟갈질에 넋을 잃고 있는 그 집의 조무래기 남
매...... 그러나 철은 굶주린 나머지 발광 상태가 된 어린 짐승처럼 오로지 먹이만 탐했다.
그러다가 철이 비로소 인간다운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아저씨가 금세 비워버린 철
의 밥그릇에 자신의 밥을 반이나 퍼 넘겨줄 때였다.
"니 속에 쇠는 못 쐐길(삭일)라마는 좀 천천히 무라. 밥은 얼매든지 더 있다."
그 같은 아저씨의 말이 꿈결에서처럼 아득하게 시작되더니 여름날의 선잠을 깨우는 천둥
소리처럼 끝을 맺었다. 그 바람에 왁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듯 깨어난 의식이 일시에 작은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느끼게 하였다. 먼저 자기에게 보내지고 있는 여러 개의 눈길들이
각기 거기 담긴 의미대로 의식에 와 닿았고 이어 자기가 거기까지 오게 된 경위가 되살아났
다.
여러 갈래의 의식이 한꺼번에 깨어난 것처럼 거기에 대한 감정의 반응도 한꺼번에 일어
나 철은 잠시 질식할 듯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고마움과 굴욕감과 슬픔과 원망에 한
덩어리로 뒤죽박죽이 되어 무엇부터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와 갑자기 안 묵고 그래 있노? 어서 무라."
복잡한 표정으로 숟갈을 든 채 굳어 있는 철이 이상했던 지 아저씨가 그렇게 말해놓고
주위를 둘러보다 꽥, 소리를 질렀다.
"모도 다 여서 뭐 하노? 무신 구경났나? 삐꿈히 들따(들여다)보기는....."
그 소리에 아이들과 아주머니가 찔끔해서 물러났다.
철이도 그 소리에 휘몰린 듯 감정의 표현을 우선 뒤로 미루고 다시 숟갈질을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철이 비로소 그런 감정표현을 하게 된 것은 두 번째 밥그릇이 다 비어버린 뒤였다. 아저씨
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말은 들었다마는 우예 된 기고? 와 느그 엄마는 이래 오래 걸랬는(걸린)다노?"
"큰산을 하나 팔려는데, 살 사람 쪽에서 오늘내일 하는 바람에 늦는답니다. 그냥 빈손으
로 와봐야 별수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데 벌써 두 번째 감정인 슬픔이 자기 표현을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그것이었다. 샛노란 얼굴로 허기져 늘어져 있을 옥경이도 그때 비로소 떠
올랐다. 만약 그 무렵 해서 나타난 친척 할머니만 아니었더라도 그날 그 집에서의 기억은
온통 감격과 감동으로만 가득 찼을 것이다. 친척 할머니가 나들이에서 돌아온 것은 마침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윽박질러 뒤주에서 쌀을 퍼내게 하고 있을 때였다.
마지못해 남편의 말을 따르던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돌아오자 백만 원군이나 얻은 듯 쌀
퍼내기를 멈추었다. 할머니는 또 할머니대로 펄펄 뛰는 아들 대신 철이의 염치없음을 나
무라고 나섬으로써 철로 하여금 더 무엇을 얻어갈 마음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철은 그러는
친척 할머니의 압박보다는, 자기 때문에 곤란에 빠진 아저씨와 어른들의 불화에 벌벌 떨
고 선 꼬마들에게 미안해서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철은 방금도 아주머니에게 무언가 성난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아저씨 등뒤에다 꾸벅 절
을 하고 그 집을 달려나왔다. 하지만 결국 그날 그 집에서는 아무것도 얻어갈 운이 못 되었
다.
몇 발짝 걷기도 전에 갑작스런 구역질을 느낀 철은 그 집 대문께가 보이지 않을 만큼 골
목 을 돌기 바쁘게 쪼그리고 앉아 먹은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나게 쏟아
져 더미진 토물을 보고 한동안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로부터 아주 여러 해 뒤 철은
한 문학 청년이 되어 크누트 함순을 읽다가 비슷한 대목을 보고 눈시울이 화끈해진 적이 있
었다. 함순의 문장력이나 구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같은 경험을 가진 적이 있어서 더 커졌
음에 분명한 어두운 감동 때문이었다.
제 46장 그 가을의 만남
버스에서 내려 모니카가 그려준 약도대로 따라가던 명훈은 슬몃 불안한 느낌이 들어 주위
를 돌아보았다. 벌써 여섯 달이나 지나 이제는 괜찮을 듯도 싶었지만 그래도 4·19 전에 깡
철이네 패거리와 함께 차지하고있던 골목이 너무 가까워서였다. 하기야 7월인가 8월의 어떤
신문에 보니 금방 총살이라도 당할 것 같던 이정재가 겨우 10년을 구형받고 있어 자기 같은
조무래기 주먹은 잡힌다 해도 몇 달 이상은 살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 그 괴상한
공명 선거 계몽 운동 참가로 더욱 뚜렷해진 대학 안 그런 쪽 단체에서의 위치가 경찰에 잡
히는 것으로 끝장나는 것은 아무래도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7월말의 개
표장 난동에서도 명훈은 아찔한 경험을 해야 했다. 그날 윤의원의지지 군중은 투표함을 불
살랐을 뿐만 아니라 당선이 거의 확정돼가던 무소속 후보를 잡아 린치까지 가함으로써 전
국적인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됐고, 그 때문에 경찰의 예외적인 검거 선풍이 일자 윤광렬의
계몽대로 경찰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기서 명훈은 자칫하면 경력이 들춰질
뻔했으나, 워낙 대학생들의 위세가 대단하던 시절이라 하룻밤만에 훈방의 형식으로 풀려난
덕택에 운 좋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개학이 되자 윤광렬은 뱃심 좋게도 교내 단체 연합 대회에서 결과 보고까지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공명 선거 계몽 운동을 수행한 게 자기들이었다. 그
때 먼저 돌아갔던 법정대의 두 학생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윤광렬의 힘 앞에서는 아무 소용
이 없었다. 이미 이런저런 수당으로 교내 단체들을 휘어잡아가고 있던 윤광렬은 대범한 웃
음으로 그들의 성난 외침을 무력하게 만든 뒤 다른 패거리를 시켜 오히려 그들이 설 자리를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새로운 학생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걸 파벌주의로 몰아붙이
는 식의 술수였다. 그 과정에서 명훈은 절로 중요한 인물이 되어갔다. 윤광렬은 말끝마다 의
거 부상자를 들추며 명훈을 여럿에게 추켜올렸고, 윤광렬이 거느린 주먹패들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명훈에게는 한 팔씩 접어준 덕분이었다.
거기다가 윤광렬은 또 이번에는 어디에 선을 대 돈을 끌어냈는지 명훈의 2학기 등록까지
해주어 명훈의 엉거주춤한 대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곧 명분의 단맛에는 맛을
들여가면서도 실질의 거짓됨에는 불안해하는 배석구 밑에서와는 앞뒤가 뒤바뀐 듯한 건달로
서의 대학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애가 어디 있다는 걸 알면서
도 찾아보지 않을 수는 없지...
명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모니카가 그려준 약도를 바라보았다. 중요함을 나타내기
위해 빗금으로 표시해준 건물 표시 곁에 멋을 부리느라 그림같이 써둔 수도빌딩이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빌딩만 찾으면 영희가 근무하는 점포는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법 큰 건물인 듯 그려져 있고 빌딩이란 이름이 붙은 걸로 봐도 큰 건물이어야
하지만 수도빌딩은 잘 찾을 수가 없었다. 5층만 되면 찾아가 물어봐도 도무지 그런 빌딩은
모르겠다는 대답들이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한 번 더 약도를 들여다보았다. 시옷 밑에 자를
너무 한쪽으로 몰아 써 '싀'자로 읽힐 수도 있었으나 '싀도'란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갈보 같은 기집에가 무슨 멋은 부린다고...'
명훈은 공연히 화가 나 모니카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이번에는 좀 작은 가게 건물들을 대
상으로 수도빌딩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은 모니카에게 쌍욕을 퍼부으면서도 몸은 무
언가를 줄곧 아쉬워하고 있었다.
모니카가 불쑥 명훈을 찾아온 것은 그날 오전의 일이었다. 명훈이 그전날 받은 입대 영장
을 놓고 어떻게 해야 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이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모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훈 오빠 있어요?"
그게 모니카의 목소리인 걸 알아듣자 명훈의 몸과 마음은 야릇한 긴 장으로 굳어졌다. 혐
오감과 반가움이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어 순간적인 대결을 벌인 데서 온 긴장이었다.
"아직 주무세요?"
명훈이 미처 간정을 정하지 못해 잠시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모니카가 축대로 올라
서서 문고리에 손을 대며 한 번 더 물었다. 상상되는 그녀의 동작이 너무도 스스럼없고 그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해맑은 게 갑자기 명훈의 마음속에서 유지되던 야릇한 균형을 깨버렸
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당연히 그 방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처럼 다
가드는 태도가 뻔뻔스러움으로 느껴지면서 혐오감 쪽이 주된 감정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뭐야? 네가 어떻게 여길 또 왔어?"
명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문을 열어제쳤다.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데 대한
완강한 거부 의사가 포함된 행동이었다.
"어마, 앗!"
짐작대로 문고리 근처에 손이 와 있었던지 모니카가 거칠게 열어제친 방문에 맞은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며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아픈 곳을 호호 부는 것 같은
자세였는데, 이미 그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명훈까지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귀엽고 순진
하게 보였다. 거기다가 코앞에 다가선 그녀의 잘 빗어 탄 가리마의 고운 선과 정갈한 머리
칼 내음은 문을 열 때의 앞 뒤 없는 혐오감이 멈칫해질 만큼 고혹적이었다.
"아이, 깜짝이야. 오늘은 영희 때문에 왔단 말예요, 영희!"
이윽고 고개를 든 모니카가 토라진 애들 같은 목소리로 앙탈부리듯 말했다.
살짝 노려보는 눈길에 돌고 있는 물기가 다시 명훈의 가슴속에 부글거리는 혐오감을 반나
마 가라앉혔다. 영희의 문제도 속대로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이 억센 아이니
까,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오긴 해도 벌써 몇 달째나 자취를 알 길 없는 영희가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집을 떠날 때 만 환이 넘는 돈이 있었고, 또 이모네 집을 나설 때도 취직이
되어 그리로 옮긴다고 했다지만, 서울이란 도시가 열아홉 살의 여자 아이에게 그리 만만할
수만은 없을 것이었다.
"뭐, 영희? 영희, 그 기집에 지금 어딨어?"
이래저래 어정쩡해진 명훈이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방문을 막
아선 자세는 아직 완강했다.
"오빠도 차암... 제가 무슨 흉측한 문둥이라도 돼요? 이렇게 문밖에 서서 어서 할말이나
하고 가라는 거예요?"
모니카가 완연한 앙탈로 대들었다. 표독스레 쏘아보는 젓은 눈길이 공연히 명훈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앙탈이었지만, 당장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데는 어쩔수가 없었다. 그전뿐만 아니라 그뒤까지 거듭거듭 당하면서도
명훈이 한번도 성공적으로 저항해본 적이 없는 그녀 특유의 기이한 힘이었다. 그날도 그랬
다.
'정말 당해낼 수 없는 아이로구나...'
명훈은 속으로 그런 한탄 아닌 한탄을 하면서 방문 앞을 비켜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지은 명훈의 쓴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니카는 방안에 들어서자 더욱 기가 살
아나 부산을 떨었다.
"아휴, 방안이 이게 뭐야? 꼭 돼지우리 같애."
그러면서 코를 쥐는 시늉을 하다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이건 참을 수 없다-- 그녀가 너무 설쳐대는 바람에 비로소 처음의 혐오감을 되살린 명훈
이 그녀의 손에서 빗자루를 거칠게 뻣어 방 한구석으로 내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 말아. 영희 소식을 가지고 왔으면 그거나 일러주고 가란말야."
그러자 휘둥그런 눈으로 명훈을 쳐다보던 모니카가 이내 거짓말처럼 풀이 죽어 제자리에
앉았다.
"알았어요.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곧 갈 테니 너무 성내지 마세요."
그러면서 한숨까지 푹 내쉬자 이번에는 까닭 모를 애처로움이 다시 명훈의 감정을 어정쩡
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바람에 묻기 시작하는 명훈의 목소리는 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너희들? 영희 그 기집애 다시는 너와 어울리지 못하게 했는데..."
"우리는 친구걸랑요. 영원한 친구..."
무엇에 다시 기가 살아났는지 모니카가 이내 그렇게 재잘거리며 영희가 서울로 올라온 때
부터의 일들을 길게 늘어놓았다. 형배라는 뜻밖의 인물과 영희의 일자리가 학교에서 소개한
것이라는 정도의 소득은 있었으나, 나머지는 쓸데없는 잡담에 지나지 않았다.
"좀 간단히 애기할 수 없어? 아니 여기다 약도나 그려주고 그만 얘기끝내. 나머지는 영희
그 기집에 만나서 들으면 되니까. 또 돼먹잖은 짓하고 돌아 다니는 중이면 다리몽뎅이를 부
러뜨려 집에 데려가야지."
듣다못한 명훈이 그렇게 모니카의 말허리를 자르고 종이와 연필을 내밀었다. 그 거친 말
투에 놀란 듯 자라 모가지처럼 목을 쏘옥 움츠린 모니카가 방바닥에 엎드려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꼼지락거리고 그려가는 게 꼭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국민
학교 아이들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토록 추악하고 불결한 과거가 깃들이고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명훈에게까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그때의 명훈에게 더 솔직한 충동은 동그렇게 엎드려 있는 그녀를 포근히 안아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거기까지 갔던 감정의 화해를 오래잖아 파국이 왔다.
"옛어요. 이대로 찾아가면 될 거예요."
이윽고 모니카가 그 말과 함께 약도를 내밀고 나서 얼마 안 된 때였다. 명훈이 그걸 찬찬
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무언가 볼을 따끔따끔 찔러 오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약도에서 눈
길을 땐 명훈이 그쪽을 보니 모니키가 빤히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아주 탐나는 것에 반한
아이처럼 반쯤 입을 벌린 채였는데, 그 눈빛이 문득 명훈에게 오래된 기억을 섬뜩하게 일깨
웠다. 바로 그녀가 남자를 원할 때 보여주는 그 눈빛이었다.
명훈은 그뒤로도 오랫동안 그녀의 그런 눈빛을 욕정과 혼돈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것이
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욕정의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남자가 즐거워하는 걸 보는 게
즐거울 뿐이에요 - 언젠가 그녀가 말했듯 그녀 자신의 몸은 끝내 성적인 쾌락을 모르는 채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눈빛을 그녀의 되바라진 욕정의 표시로만 단정하고 있던 명
훈이었다. 그걸 문득 그녀에게서 느끼자 그 동안 이래저래 수그러들었던 혐오감이 일시에
들고일어났다.
"이 못된 기집애,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 거야?"
명훈이 보고 있던 약도를 팽개치듯 방바닥에 내려놓고 차갑게 물었다. 만약 모니카가 그
때라도 그런 명훈의 감정을 알아차렸더라면 여섯달 망네 이루어진 그들의 재회가 그토록 볼
품없이 끝장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니카는 그때 이미 그 느닷없고 몽롱
한 열정에 깊이 빠진 뒤였다. 명훈의 감정 같은 건 살펴보려고도 않고, 그럴 때 흔히 하는
코맹맹이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오빠... 우리 다시는 ... 예전처럼 안 될까? 깡철이 그 새낀 나쁜 짜식이야. 그리고 이제는
군대에 갔어... 그 일... 잊어줄 수 없어?"
그 말뿐만이 아니었다. 모니카는 명훈의 일그러진 표정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마치 그게
바로 허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만히 몸을 기대왔다. 코끝을 스쳐오는 그녀의 살냄세에 잠
깐 몸이 움찔했으나 명훈의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가 있었다.
"정신차려! 이 순 갈보 같은 기집애야. 이게 어따..."
명훈은 세차게 모니카의 따귀를 때려주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개가 홱 젖혀질 만큼 충
격을 받았으면서도 모니카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방바닥에 푹 엎드렸다. 그 완전한 피학
의 자세가 오히려 불붙기 시작한 명훈의 가학 의지에 찬물을 끼얹어 다시 더 하려던 발길질
을 멈추게 했다. 대신 정신은 한층 더 광포해져 누가 듣는 것에도 상관치 않고 고래고래 소
리쳤다.
"내 그때 말했지? 다시 한번 내 눈앞에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구. 잘들어. 앞으로 또다시
내눈에 띄면 그때가 너 죽는 날인 줄 알아!"
'흥, 어디서 순 똥치 같은 게 사람을 어떻게 보구...'
겁먹은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등을 떠밀리듯 방을 나가는 모니카가 머릿속에서 지워
질 때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골라 입은 화사한 가을 나들이옷
속에 감춰진, 그러나 그의 기억에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생생한 그녀의 몸이 아쉬움으로 언
뜻 떠올랐지만, 후회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육체적 필요에는 충분하게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정신이 젊고 맑다는 뜻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
서야 있게 될 그들의 재회가 그뒤의 광기 어린 뒤엉킴에 견주어보면. 다행히도 수도빌딩은
오래잖아 찾아낼 수 있었다. 명훈은 거기서 시커먼 물이 흐르는 청계천 건너편을 바라보았
다. 영희가 나가는 곳이 무슨 기업이라길래 좀 큰 회사로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편에 다닥
다닥 들어선 것은 고물상 같은 점포들밖에 없었다.
오래된 시멘트 다리를 건너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명훈은 모니카가 일러준 영희의 일터를
찾아보았다. 간판들이 어울리지 않게 커서인지 이번에는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ㅕ나 종
로 쪽에서 예감한 대로 그곳도 좀 정돈되었을 뿐 역시 고물상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느낌을
주기에는 그 곁의 다른 점포들과 차이가 없었다.
한눈에 들여다뵈는 점포 안에는 머리가 헝클어진 기름투성기 젊은이하나가 성깔깨나 있어
뵈는 중늙은이와 어떤 기계를 조심스레 뜯고 있었다.
명훈은 다시 한번 모니카가 그려준 약도를 펴서 자기가 맞게 찾아왔나를 확인해본 뒤 잠
시 점포 앞에 서서 그 안을 살펴보았다. 파란 페인트를 입힌 중고 선풍기 몇 대와 냉장고인
듯싶은 상자 모양의 기계 하나를 빼면 상품다운 상품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구석구석
쌓인 것은 한눈에도 폐품임을 알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전기 제품과 뜯어서 분류해놓은 듯한
부품 무더기들뿐이었다.
그 기계들 대부분에 영어로 된 마크가 찍혀 있는 걸 보자 명훈은 문득 그 점포의 주인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군 부대에 있을 때 미군들에게는 이미 더 손대볼 수 없는 폐품
인데도 탐욕스레 그것들을 거둬가던 이들을 종종 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이 땅
의 산업 사회를 앞당기는 일을 하고 있으며, 방금 눈앞의 두 사람도 바로 그걸 위해 원시적
이긴 하지만 가장 확실한 기술 습득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저어... 실례합니다.."
한참을 둘러본 명훈이 조심스레 다가가며 그렇게 소리치자 두 사람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
어 쳐다보았다. 기계를 뜯는 데 너무 열중해 명훈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눈
치였다.
"무슨 일임매?"
명훈이 고객은 아닐 거라는 짐작이 가서인지, 몰두해 있던 일에서 깨난 게 성가셔서인지,
별로 반갑잖은 목소리로 나이든 쪽이 물었다. 아마도 그쪽이 영희의 고용주일 것이라는 짐
작에서 명훈은 되도록 공손하게 말했다.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이영희라는 여학생인데... 여기서 일한다고 해서..."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 쪽이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어쩐지 경계와 적이 같은 게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잠깐 그를 눈여겨보
았다. 울퉁불퉁한 인상이었지만 거칠거나 포악해 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경계와 적의를 내
비치는 까닭을 알 수 없어 명훈은 계속해 그럴 살피면서 대답했다.
"제 누이동생입니다. 오래 소식이 없어서..."
그 말에 젊은 쪽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단순히 경계와 적의를거둔 정도가 아니라
갑작스런 호의를 보이는게 거북해 차라리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이명훈씨...인가요?"
젊이가 엉거주춤 몸까지 일으키며 알은체를 했다. 나이든 쪽도 매몰차게 보이는 인상에
비해서는 제법 반기는 기색을 드러냈다.
"길타믄 영희 학생 오라버니 되는구만. 들어오시라요."
그 두 살람의 태도를 보고 명훈은 슬며시 안도감을 느꼈다. 영희가 적어도 그들로부터 미
움이나 구박을 받고 있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 데서 온 안도감이었다.
"철부지를 맡겨놓고 진작 한번 와서 찾아뵙는다는 것이..."
명훈이 그런 인사치레를 하자 나이든 쪽이 다시 받았다.
"그게 어드레 쉽갔시오. 같은 서울에 살아도 어려운데..."
그 말로 미루어 영희는 서울에 홀로만인 것처럼 꾸며댄 모양이었다. 그럴 짐작으로 알아
둔 명훈이 다시 의례적인 말을 했다.
"너무 모자란 것이 많은 아이라 심려는 끼쳐드리지 않는지요?"
"심려는 무슨... 되레 너무 똑똑하디. 일 잘하고 있시오."
나이든 쪽이 천만에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친절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희가 맘에 들기는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이라는 듯 명훈에게 의자 하나를 내주
며, "여기 앉아 기다리시라요. 곧 올 거니께" 해놓고 공연히 머리만 긁적이며 서 있는 젊은
이를 몰아세우듯 말했다.
"야, 앉으라야. 마저 해야디. 냉각이야 그렇다 해두 방열(放熱)은 어드러케 되는 거이야?"
그말로 미루어 아마도 냉장고를 분해하다 일어선 듯했다. 젊은니도 못마땅한 대로 그 일
에 다시 끌려들어가 한동안 명훈은 별흥미 없는 그들의 작업을 구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희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반시간 뒤였다. 냉각 장치를 분해하는 그들의 자세가 하
도 진지하고 정성에 찬 것이라 명훈은 저도 몰래 구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
서 영희의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받았어요. 받아냈어요..."
영희가 무언가를 자랑하려다가 힐긋 돌아보는 명훈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인 듯했는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반가움과 기쁨으로 눈물
을 글썽이며 안길 듯 다가왔다.
"오빠, 오빠 왔구나!"
집을 나가 떠돈 대여섯 달 동안 무던히도 외로움에 시달린 듯했다.
모니카 탓도 있지만 원래 명훈이 영희를 찾아나설 때의 감정은 엄격하고 약간은 비정한
데까지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영희가 뜻밖으로 밝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게 먼저
명훈의 감정을 누구러뜨렸고, 거의 열 달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 함부로 집을 나간 누이를
찾아온 오빠로서의 엄격함을 거의 잊어버리게 했다. 그러다가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점포
에 붙은 골방으로 들어가 교복으로 바꿔입은 영희가 책가방을 챙겨들고 나올 때쯤은 나무람
은커녕 칭찬하고 격려할 마음까지 일었다.
'너는 참으로 강하고 지혜로운 아이로구나. 출발의 방식은 다소 무리한 데가 있었지만
이제 보니 네게는 그만한 권리가 있었어...'
그 바람에 그들 남매의 만남은 명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짧아졌다. 만약 영희가 잘못
되어 있으면 밤 새워 달래더라도 그녀를 다시 집으로 내려보낸다는 게 집을 나설 때 명훈이
한 결심이었다. 그러나 영희의 등교 시간이 다된 데다, 그렇게 길게 붙들고 앉아 해야 할 이
야기도 없이, 마주앉은 지 30분을 못 채우고 이어나게 되고 만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어머니께 글 올리도록 해라. 설령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옳다 해도 그런
식으로 집을 나서는 게 아니다. 박원장을 찾아가지 않았다니 잘했다.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만날 생각은 마라. 아니, 아예 네 기억에서 그 작자를 지워버려라. 너는 애초에 그런 작자를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 모니카도 다시 만나지 마라. 너무 썩어 곁에
있는 딴 생선까지 썩게 만드는 썩은 생선 같은 아이다. 착하냐 아니냐로 그애를 재지 말고,
그 썩음과 타락으로 그애를 봐라."
헤어질 무렵에 명훈은 그런 당부를 주었지만, 그것도 그 효과를 믿어서라기보다는 오랜
보호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학교 쪽으로 가는 버스에 영희를 태워보낸 뒤 혼자 종로통을 걸으니 명훈은 왠지 쓸쓸한
함음이 들었다. 걱정해오던 영희가 뜻밖으로 잘해나가고 있는 걸 본 뒤라 오히려 마음이 홀
가분해져야 마땅한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오랜 세월 자신의 보호 아래서
자란 영희가 드디어 혼자 걷기를 시작한 걸 보고 온데 비롯된 감정일 터였다.
어느 사이에 그토록 가을이 깊어졌는지 거리에는 제법 낙엽이 날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서편 하늘에 붉게 비친 저녁놀이 거든 탓일까, 명훈의 감정은 차츰 서글픔과 외로움으로 흥
건히 젖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내면을 분석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명훈은 그 얼마나 전부터 조금씩 외로움
의 병을 앓고 있었다. 가만히 헤아려보면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 그를 떠나갔다. 먼저
어머니와 아이들이 떠나고, 경애가 떠나고, 미군 부대와 더불어 낯익었던 많은 사람들이 떠
나갔다. 모니카도 떠났고, 배석구도 떠났고, 깡철이와 도치네 패가 떠났으며, 마침내는 김형
과 황도 떠나갔다.
물론 새로이 만나게 된사람도 적지는 않았다. 대학 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유만하를 만나
고, 윤광렬과 그의 패거리도 만났다.
공공연하게 호의의 눈길을 할금거리며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같은 과의 여학생도 만났고,
『학원』에 실린 시 한 편을 대단한 관록으로 여겨 교우를 구하는 문학 지망생도 만났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로는 무언가 억지로 끼워맞춘 듯 거북살스럽고 어색해, 떠나간 그 어
느 누구의 자리도 채워주지 못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동대문을 지나다가 깡철이와 함께
그 주인의 팔을 꺾어놓은 적이 있는 술집이 저만치 보이자 문득 깡철이가 보고 싶어 눈시울
이 화끈한 적도 있었다. 언제나 싸늘한 비웃음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녀석의 불길
한 눈길도, 모니카와 뒤엉켜 있던 그 구역질나고 치떨리는 광경도, 그때의 불현듯한 그리움
을 깨끗이 지워내지는 못했다.
'아아, 가랑잎처럼 모두 흩어져 가버렸구나...'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영화의 자막에서 본 주인공의 독백을 되뇌며 갈 곳 없는 사람처
럼 거리를 따라 걸었다. 실은 마땅히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아직 저물지도 않았는데 자취방
으로 돌아가 궁상을 떨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딱히 찾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은 가깝게 지내는 윤광렬이 있지만 술 몇 잔 값으로 명훈에게도 수상쩍기 그지없은
그의 정치 철학을 듣는 게 지겨울 뿐만 아니라, 그 시각엔 만나려 한다 해도 연락이 닿을지
가 의문이었다. 유만하도 그랬다. 시에 빠졌다기보다는 홀려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그
시인 지망생은 그 무렵 명훈이 이해할 수도 없는 외국의 시 이론으로 괴우들간의 술자리를
망쳐대고 있었다. 황은 가정교사로 있던 사업가 집을 나와 버려 찾아보려야 찾아볼 길이 없
었고,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명훈 쪽에서 만나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모니카나 불러내 술이나 퍼마시고 개처럼 어울려볼까...'
마침내는 그런 비뚤어진 생각까지 해보던 명훈이 화신 앞에 이르렀을 때는 거리가 퇴근
인파로 제법 붐비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오라이-"
버스 벽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그렇게 외치는 여차장의 앳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명
훈은 무심코 이제 막 떠나려는 그 버스에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그 눈길이 버스 앞문을 지
나 첫 번째 차창에 이르렀을 때였다. 무슨 강한 예감처럼 명훈의 의식을 직러오는 여자의
뒷모습이 하나 있었다.
'경애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린 명훈은 미처 덜 닫힌 버스뒷문에 매달렸다. 막
차문을 닫으려는데 뛰어든 명훈에게 놀란 남자 차장이 험한 눈길을 보내며 무어라고 쏘아붙
였으나 명훈의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잡히는 대로 백 환짜리 한 장을 차장에게 던져준 명훈은 미친 사람처럼 사람들을 헤집고
앞문 쪽으로 나아갔다. 발을 밟힌 아가씨 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심하게 떠밀린 중년이 호통
에 가까운 불평을 했지만 이번에도 명훈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경애였다.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경애임을 확인하자 명훈은 갑자기 온몸에
서 힘이 쭉 빠졌다.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그녀가 거기 앉아 있다는 게 도무지 실감나지 않
았다. 그 바람에 명훈은 거기서 멈칫 굳어진 채 한참이나 그녀를 살폈다.
명훈의 두 눈에서 쏘아져간 예사 아닌 빛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
켜 운전석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던 그녀도 이내 명훈이 다가온 걸 알아차렸다. 일순 얼
굴이 묘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어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네가 먼저였군."
경애가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 말뜻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무언가 말했다는
게 순간적으로 막혀 있던 명훈의 말문을 열리게 했다.
"경애, 너야? 너 맞아?"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부근에 있던 승객들이 모조리 호기심 어린 눈길을 그들에게 보
냈다. 경애가 민망했던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나무람 섞어 대답했다.
"틀림없어. 하지만 목소리는 낮춰."
그래도 명훈의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해 큰 소
리로 되풀이 물을 뿐이었다.
"경애 너란 말이지? 제가 정말로 이 서울에 남아 있었단 말이지?"
"목소리 낮추라니까!"
경애가 이번에는 쏘아붙이듯 말하더니 발딱 몸을 이르켰다.
"안 되겠어. 여기서 내려."
그리고는 마침 선 버스 승강구로 먼저 내려갔다. 명훈이 기계적으로 따라 내려보니 세종
로였다. 거리의 서늘한 바람에 비로소 자신이 경애를 만났다는 게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
지만, 아직도 감정이 제대로 추슬러지지 않아 그냥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경애가 한곳을 턱
짓하며 나직이 말했다.
"저리루 가, 저기 가서 애기해."
그녀가 가리킨 곳은 '진주탑' 이란 다방이었다.
명훈이 자신의 감정과 언어를 여느 때처럼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그 다방 안에 자
리를 잡은 뒤였다. 조금 전 버스 안에서 흘려들었던 그녀의 첫마디가 뒤늦게 떠올라 명훈은
그것부터 물었다.
"이번에는 네가 먼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뒤에 두 번쯤, 너를 본적이 있지. 흑석동하고 서대문 가는 전차 안에서..."
경애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뭐야? 나를 보고도 그냥 지나갔단 말이지? 나를 보고도-"
"멀찌감치서 피했지."
"왜-"
명훈은 그렇게 물으려다 갑작스레 힘이 빠져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경애가 벌써 오래
전에 자신으로부터 떠나간 사람임을 괴롭게 상기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무력감은 쓰라린
대로 명훈의 앞뒤 없는 들뜸을 가라앉히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명훈은 그녀를 만나고
처음으로 냉정을 되찾아 그녀의 얼굴에만 모아져 있던 자신의 눈길을 몸 전체로 돌렸다. 비
로소 그녀가 환상의 얼굴이 아니라 한 실제의 인간으로 비쳤다.
경애는 많이 변해 있었다. 검은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에 수수한 바바리 코트를 걸친 그녀
에게서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아니라도 여대생 티가 물씬 났다.
일 년 전만 해도 미군 부대 하우스걸로 미군 장교들의 침대 시트나 개고 있었다고는 누구
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모습이요, 분위기였다. 그런 그녀의 알몸을 싸구려 여관방에
서 안아본 적이 있다는 기억 자체가 못 미더워지며 갑작스런 서먹함에 명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경애는 명훈의 그런 눈길을 악의 어린 탐색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한 동안 말없이 명훈
의 눈길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비꼼 섞어 물었다.
"내게서 뭘 찾고 있는 거야? 버터워스의 흔적?"
그 말에 그때껏 깜박 잊고 있었던 버터워스 중령의 표정 없는 얼굴이 불쑥 떠오르고, 이
어서 수없는 밤을 명정에 젖게 한 질투의 염염한 불길이 서서히 가슴속에서 되살아나기 시
작했다.
"그래, 눈알도 파래지지 않고 머리칼도 아직 검은 게 어째 믿어지지 않는군."
비틀어진 웃음과 함께 명훈이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이나 그렇게 받았다. 경애의
눈길에 새파란 불꽃 같은 게 반짝하더니 이내 스러졌다.
"그래, 네 말처럼 그렇게는 아니지만 그의 흔적은 있지? 이거-"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말을 가벼운 웃음으로 대신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에메랄드인
듯싶은 팥알만한 녹새의 보석이 박힌 반지 하나가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약혼 반지야. 9월에 약혼했어. 결혼은 졸업 뒤에 하기로 하고..."
"토민 처녀와 결혼하는 주둔군 사관치고는 꽤나 격식을 차리는 편이군."
"대로마 제국 천부장의 자존심이지. 그는 토민 처녀와 결혼하는 게 아니고 헤롯
대왕의 딸쯤과 결혼하겨는 거야. 요즘 대학에서의 공부보다 내거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게
무너지 한번 볼래?"
경애는 명훈의 악의쯤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 책과 함께 들고 있던 꾸러니 하나를 풀었다.
작은 발 같은 것에 말아둔 크고 작은 붓이었다. 깨끗이 빨려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성화로 서예와 문인화를 배우고 있지. 내 성이 경주 김(金) 가인 것을 가지고 한국
에서 자장 오래된 왕족 가문의 숙녀로 본궁의 친척들에게 나를 소개했거든. 어쩌면 결혼해
서 그리로 갈 때는 궁중 예복을 한벌 해입고 가야 될지도 모르겠어."
"그거 혹시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 아냐? 비뚤어진 신데렐라의 꿈..."
이번에도 경애는 명훈의 악의를 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운 한숨까지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최소한 한줌의 달러에 팔려온 위안부 출신의 신부로는 오해받고
싶지 않거든."
"하기야 그가 준 달러로 울긋불긋한 옷이나 해입고 화장품이나 사대는 것과 대학 배지를
달고 배우는 것은 아무래도 좀 다르겠지."
그러자 경애가 한동안 말없이 명훈을 건너보앗다. 예전의 오만하고 곧잘 경멸에 차던 그
눈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한 조용하고 정감 어
린 눈길이었다.
"물론 날 많이 원망했지..."
"아냐, 좀 비웃었을 뿐이었어."
"이쨌든 좋아. 이제 그애기는 그만해. 벌써 일 년 반 전의 일이야."
경애는 그 말과 함께 쓸쓸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그 동안 넌 어땠어?"
이상하게도 명훈의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악의를 담숨에 가라앉게하는 어조였다. 그 바
람에 혀 밑까지 차오른 악의를 주체하지 못해 명훈이 잠시 대꾸를 못 하는데 경애가 다시
물었다.
"너도 다행히 대학은 간 것 같은데, 대학 생활이 어때? 우리 아도니스를 안아줄 비너스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거야?"
"그만 해-"
비로소 할말을 찾은 명훈이 차갑게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는 이미 스
러져가는 악의를 짐짓 되살리려 애쓰며 쏘아붙엿다. "너무 태연하면 뻔뻔스러운 것으로 보
이기도 하지. 이렇게 만난 걸 조금은 감격하고 당황해도 좋지 않아?"
하지만 경애는 조금도 저항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어깨까지 움츠리며 나직이 말
했다.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해. 그렇지만 일부러 꾸민 건 아니야. 너에 대한 내 감정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야."
다시 까닭 모르게 명훈을 맥빠지게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잦아든 것은 적의와 복수심
같은 격렬한 감정이었을 뿐 그녀를 향한 애증 그 자체는 아니었다. 아마도 명훈이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하게 된 것은 적의와 복수심의 빈자리를 슬금슬금 메워들기 시작하는
알 수 없는 비감과 미련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감정 전환의 밑바닥에는 영희를 만나고 돌아오던 때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짙게 깔려 있었다.
"좋아, 하지만 나는 마시지 않겠어. 나는 아메리카 제국에도 유서 깊은 동부 출신의 고급
사관과 약혼한 이 땅의 명문 규수니까."
때로 어떤 종류의 동요와 혼란은 오히려 술로 가라앉기도 한다. 그날 명훈이 그 다방에서
겪은 것도 그런 동요와 혼란이었던 듯 술이 오르면서 감정이 정리되고 이야기도 술술 풀려
나왔다. 명훈은 조금도 과장하는 기분 없이 그녀가 떠난 뒤의 공허함과 상실감을 이야기하
고, 그녀에게 걸었던 지난날의 꿈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지나간일 - 시종
그런 눈길로 명훈의 말을 받다가 명훈이 조금이라도 어느 한쪽으로의 감정 과잉을 보이면
이내 새로운 질문의 형태로 말머리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갈수록 더해가는 취기 속에서도 경애의 그 같은 태도는 명훈에게 뚜렷이 느껴졌다. 얼마
되지 않아 명훈의 화제가 데모아 학생 운동 쪽으로 열을 뿜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
을 것이다. 그해 4월을 애기하던 끝에 무심코 걷어보인 팔둑의 상처에 그녀가 전에 없는 감
동의 표정을 보이자 명훈은 거의 필사적으로 그 화제에 매달렸다.
명훈은 그의경험과 언어가 터득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해 그 방면으로의 자신
을 미화하고 과장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내부의 열정이 가세해 나중에는 자신이 그 화제에 매달리게 된 최초
의 동기까지 까맣게 잊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까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사람들 중에는 이 혁명의 한계를 민주, 그것도 자본주의적 질서가 말하는 민주까지만이
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오히려 민주는 이 혁명의 첫 번째 단계일 뿐이고 우리
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돼. 그것은 민족이고 통일이야. 민족과 통일 앞에서는 민주도 공산
도 극복되어야 해. 그런데도 우리 학생 운동은 지금껏 방향을 잘못 설정하고 있었어. 애써
획득한 혁명 주체의 자리를 수상쩍기 그지없는 보수 정치인들에게 내주고, 우리는 무슨 계
몽 운동이다 무슨 생활 운동이다 하는 조연(助演)의 자리로 물러나버린 것이지. 반성이 있어
야 돼. 새로 시작해야 한다구..."
명훈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 중에―특히 황과 김형의 논쟁에서 들은 게 많지만―멋
있어 보이는 것들로만 연결해 그렇게 실감도 안나고 자신도 없는 소리를 떠들었을 때였다.
그때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경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게 그 소리였나..."
"뭘?"
명훈은 취한 중에도 그녀가 오랜만에 반응을 보인 게 반가워 그렇게 그녀를 자신의 화제
속으로 끌어들였다.
"버터워스는 우리의 4·19를 변경을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일 뿐이랬어. 그것도 아메리카
가 멀리서 은근히 부채질해준 바람... 그런데 이 바람의 끝은 좀 묘한 형태일 거라고 했어."
"어떻게?"
"꼭 혁명처럼 불지만 기껏해야 개량으로 주저앉거나 반동의 역풍(逆風)으로 뒤바뀔... 그때
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 그 사람 정보 출신이란 거 알아? 그 출신답게 조금이라도
캐묻는 눈치가 보이면 아내가 될 나까지도 경계하지 ― 이제 네 얘기를 들으니 알 듯도
해."
명훈은 전에도 그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것 같은데도 경애가 뜻하는 바가 얼른 머릿속에 들
어오지 않았다. 술기운에 허세까지 섞어 슬며시 경애의 풀이를 유도해보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민족과 통일이라고 하니까 문득 그가 말한 반동의 역풍이란 게 무엇인가 짐작이 갔
어. 그래, 그 역풍은 무엇이든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
그제서야 명훈은 그녀가 무슨 소리기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취한 머릿속으로 김형
의 깐죽한 목소리가 울려오고, 이어 그걸 반박하던 황의 고함이 왕왕거렸다.
"그러니까 민주까지만 가고 민족까지는 가지 마라. 그게 아무리 더디고 불철저하더라도
제도의 개량에 의지하지 체제의 변혁에 기대하지 마라. 두 제국(帝國)의 변경으로 분할되어
대립하고 있는 이 땅에서는..."
"그렇게 거창하게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직도 민족과 통일을 말하가에는 거기 상반된 이
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 많아. 그들의 힘이 너무 커."
"그걸 패배주의라고 하지. 달리는 허무주의라고도 하고..."
명훈은 목소리까지 황을 흉내내며 그렇게 소리쳤다. 술집이 작아 구석까지 다 들릴 만한
소리였지만, 다른 탁자에 앉은 두어 패의 술꾼도 저마다 무언가를 떠들고 있어 명훈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경애가 갑자기 철없는 동생을 달래는 누이의 말
투가 되어 나직이 말했다.
"너 많이 변했구나. 설마 너까지 의사 의식에 들떠 어떻게된 건 아니겠지? 너는 스스로
정치 쪽으로는 원죄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이 피로 내 원죄를 씻었어!"
명훈은 불빛에 번질거리는 흉터가 드러나는 팔을 높이 쳐들며 소리쳤다. 그래놓고 나니
정말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이는 듯했다. 거기다가 술이 거들어 갑자기 알 수 없는
열정에 들뜬 명훈은 이제 아무런 논리도 이념도 없는 자신의 포부를 한동안 떠들어댔다. 김
형과 황의 기억이 거덜나 주로 배석구와 윤광렬의 기억에 의지한 허풍이었다. 그 사이 두
주전자나 비운 막걸리만 아니었더라도 명훈은 갈수록 감동을 잃어가는 경애의얼굴을 알아보
았을 것이다. 그러나 술 못지않게 턱없는 자기 도취에 빠져들고 있던 그는 그런 느녀의 변
화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차츰 그녀에게로 방향을 바꾸어 전져가는 엉뚱한
음모와 야심으로 가씀까지 드근거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널 놓아보내지 않겠다. 어쨌든 너는 내게 정복된 여자, 나는 내 기득권을 결
코 포기하지 않겠다. 만약 거절한다면 힘으로 찍어 누르더라도 네가 내 여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겠다. 그래서 함께 친창을 구르든 병랑에서 떨어지든 남은 이 삶은 너와 함께하
겠다..."
그리고 그 실천의 한 단계로 화제를 다시 그들만의 추억으로 돌려 감상적으로 회상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줌마, 여기 화장실 어디 있죠?"
경애가 마침 술상 곁을 지나가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소곤거리며 묻더니 살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가지고 있던 책과 붓싸개를 두고 일어난 것이라 명훈은 별의심 없이
그녀를 보냈다.
경애는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
별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쯤 뒤 명훈의 아우 인철은 이상한 아메리카인이 되어서 이따금
고국을 찾는 경애와 우연히 만나게 되지만 그때 이미 명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명훈이 경애로부터 전해받은 마지막 의사 표시는 그녀가 나간 지 30분쯤 되어 어떤 껌팔이
소녀가 가져온 쪽지 한 장이었다. 그렇게 나간 사람답지 않게 또박또박 쓴 그 쪽지에는 이
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명훈, 이렇게 그 자리를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나를 이해해줘.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일 뿐이라는 것도. 그리하여― 우리가 다시 이 거리에서 마주
치더라도 서로 외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다시 한번, 이제 우리가 만나서 함께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럼 안녕, 이제야말로 영원히 안녕.
제47장 저류
"야 너 정말 와 이러네? 어서 못 일어나간" 셈이 질겨 고래심줄이라는 별명이 있다는 장
사장도 며칠 시달린 끝이라선지 마침내 못참겠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영희는 짐짓 몸을 조
그맣게움추리며 그러때 최상의 무기가 되는 눈물을 가만히 준비했다. 어쨌든 그를 성나게
했으니 목적의 절반은 이룬셈이었다.
" 광도 그 새끼가 시키데? 더런새끼. 그건 그렇고 도대체 넌 뭐이가? 학생이라더니, 술집
다방 안가리고 따라 붙는게 영 아이다이. 와 사업하는 사람 여럿 앞에서 창피주고 그러네?"
"그러니까 돈만 주시면 되잖아요? 전 오늘 그걸 받아서야 월사금을 낸단 말예요. 제 월급
이 이리루 밀렸단 말예요?."
영희가 일부러 말 끝에 울먹임을 섞었다. 시장바닥에서 오래 굴러서 그런지 사장은 그만
연기에는 눈썹 하나 까딱 않았다. " 그건 또 무슨 개수작이가? 천하의 홍광도가 급사 아이
월급 몇 푼 못 줘 내 돈 받아 월사금 내라 했단 말이디? 앙큼 떨디 말라우. 나도 다 들은게
있디. 그 간나 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디. 못된 애미나일 시켜서 동업자들에게 어떤
떼거질 쓰고 있는 디 말이야."
아무래오 이대로는 안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영희가 그새 제법 뜻대로 할 수 있게 눈물을
쏟으며 따지고 들었다. "아저씨, 정말 말씀 다하셨어요? 아저씨는 저 같은 딸도 없으세요?
에미나이가 뭐예요? 에미나이가. 그리고 떼거지라나. 빌려준 돈 외상값 받는게 떼거지는 무
슨 떼거지예요? 아저씨 너무 그러시는 거 아니예요. 남의 집에서 심부름 하는 계집아이라고
그렇게 막보는게 아니라구요. 고학생이 월사금을 동냥하러 와도 이래서는 안돼요. 그런데 받
을 거 받으러 온 사람을..."
다방안의 사람들이 다 돌아다 볼 만큼 높고 떨리는 소리였다. 그 격렬한 반격에 어지간한
장사장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거 정말 못 당하겠구만..."
남이 들으란 듯 하는큰 중얼거림과 겸연쩍은 웃음도 한 순간이고 마음속의 분노를 이길
수 없는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좋아, 오늘 내가 가디. 홍광도 그 새끼보고 어디 나가지 말고 있으라구 그래. 이 종간나
새끼. 같은 삼팔 따라지 신세에 이렇게 막보고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이기야"
"그걸 어떻게 믿어요. 아저씨가 약속 어긴게 어디 한두번이예요? 까짓 1만3천환. 이웃 가
게에서 빌려도 어렵잖을 분이..."
영희가 이번에는 그의 말을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번 더 그렇게 옥죄었
다. 장사장이 다시 불끈하며 금세 뺨이라도 후려 칠 듯 눈을 부라리다가 애써 화를 억누르
고 말했다.
"이거 여럿 앞에서 사람을 아주 죽여놓는구만. 그럼 함께 가자구. 지금 당장"
그가 씩씩대며 앞장을 서는 걸 보고, 영희는 속으로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한껏 겁
먹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점포로 돌아가니 마침 주인아저씨는 없고, 정섭이만 또 무언가 기
계 하나를 뜯어 점포 바닥 가득 벌여놓고 있었다.
"광도 이 새끼 어디 갔어? 광도 이 새끼 나와!"
저만치 점포가 보이는 곳부터 그렇게 씨근대며 달려간 장사장이 그런 정섭의 등허리에다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야 늬 아부지 어디 갔어?"
"아, 아저씨 오셨어요? 아버지요? 아까 저쪽 순댓국집에 점심 잡수러 가셨는데..."
"어디야? 저기 저 집?" 장사장이 턱짓으로 멀지 않은 순댓국지블 가리키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그리고 우르르 달려갔다. "영희씨, 저 아저씨, 왜 저러시죠?"
장사장의 뒷모습을 쫓던 정섭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영희를 보며 물었다. 영희가 비로소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하두 질기길래 약을 좀 올려줬어요. 은근히 그 집 마담을
맘에 두고 드나드는 다방까지 따라가 떼거지를 썼거든요. 이제 화를 냈으니까 돈 곧 갚을
거예요. 돈 있으면서 안 내놓는 저런 사람, 한번 속이 뒤집혀 봐야 해요."
"그렇지만 좀 심한게 아닌지.. 몹시 성나셨던데. 그 분 말입니다. 흥남부두에서 우리와 같
이 배를 타고 월남한 분이라구요. 거래는 좀 질기지만 아직 떼먹은적도 없고..."
"거래가 좀 질기다구요? 아니 물건이고 돈이고 한번 갔다 하면 빨라야 반년 결제니... 그
리고 요즈음 이자가 얼만지 알아요? 한달에 7부라구요 7부. 그것도 급전이면 1할이 넘고, 딸
라 빚은 2할 가까운 것도 있다구요. 한번 계산해 보세요. 7부로 쳐도 여섯달이면 4할 2부,
원금의 절반이 날아가는 거예요. 장사장이 가져간 1만 3천환. 벌써 6천환은 죽은거라구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아버지 친군데..."
그말에 영희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남은 자기들을 위해 들을 소리 안들을 소리 가리잖고
들어가며 겨우 돈을 받게 만들어놨는데, 정작 정섭은 그걸 나무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만..." 영희가 화난 눈치를 알자 정섭이 드러나게 허둥댔다. 영희는 더욱 기가
살아 그를 몰아붙였다.
"이봐요, 정섭씨. 아무리 주인댁 아드님이시지만 맺고 끊는 건 좀 분명히 하라구요. 더구
나 사장님은 아침에 틀림없이 장사장 돈 빨리 받아내라고 하셨다구요."
"........."
"그러니까 노상 아버지한테 욕이나 얻어먹지. 그렇게 물렁해가지고 이 가게 제대로 이어
받겠어요?"
그러자 정섭이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퉁명스레 받았다.
"말 함부로 하지 마쇼. 아버지 신임을 받는 줄은 알지만 여자가 너무 드센 것도 보기 좋
은 건 아뇨."
그리고는 뜯고 있던 기계에 달라붙었다. 그새 는 안목으로 살펴보니 냉방기 종류인 듯했
다. 영희는 그가 벌써부터 작은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꼬워 한바탕 퍼부으려다 그만두
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평범에도 못 미쳤지만 한번 기계에 열중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무
슨 위엄 같은 게 그 주위에 서려 함부로 다루기 어려웠다.
홍사장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쯤 가게로 돌아왔다. 언제나 무표정한게 굳어 있던 그의 얼
굴이 그날따라 어둡게 찌푸려져 있는 것 같아 공연히 불안했다. 그가 돌아오는 기척에 정섭
이 기계에서 눈길을 떼며 물었다.
"아버지, 곽산 아저씨 만났어?"
"만났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숨결에 제법 짙은 술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 술이 장사장의 분노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영희의 불안은 한충 커졌다. 그러나 그런 불안도 잠
시, 곧 영희의 거센 성격이 반발을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은 일을 했나, 뭐. 남은 애써 받아내려 했는데, 야단만쳤단 봐라...'
영희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먹고 오히려 건드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홍사장이 영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왜 시키잖은 짓을 하고 그러네?"
"녜에?"
"저것 말이야. 저거 얼마에 받았어?"
그제서야 영희는 그가 장사장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님을 깨닫고 손가락질하는 곳을 보았
다. 전말 오후에 잡아둔 무슨 모터 같은 기계였다. 천 환을 요구하기리래 제딴에는잘한다고
5백 환으로 깍아 맡아둔 것이었다.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한 것은 먼저 그걸 가져온 사람의
차림이나 거동에서 이딘가 정상적인 거래를 하러 온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정상적인 거래가 아니라면 값은 쌀 터, 그나마 약간의 실랑이 끝에 5백 환으로 깎아 사게
되자 영희는 은근히 자신의장사 수완에 자부심까지 느꼈었다. 거기다가 가져온 물건이 전기
제품이라는 것도 영희를 안심시켰다. 홍사장은 전기 제품이라면 중고품이고 폐품이고를 가
리지 않고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벌건 녹을 뒤입어쓴 삭아빠진 기계도 몇 천
환씩 내놓았다.
고작 나무라려는 것이 그 기계라면 더욱 자신있다는 기분으로 영희가 대답했다.
"5백 환요. 왜, 너무 비싸게 샀어요?"
"비싸고 싸고가 문제가 아니야. 너 출처가 어딘지 알아봤어?"
"그런 걸 뭣 땜에 물어봐요? 값만 맞으면 사는 거지."
"그러니까 돼먹잖은 거디. 내가 언제 너보구 장물까지 받으라 그랬네? 이 장사 이거 장물
받기 시작하면 끝장이란 거 몰라?"
"장물이 어디 장물이라고 씌어 있나요? 경찰도 아니면서 어떻게 일일이 그런 걸 조사해보
고 받아요?"
영희가 기어이 제 성질을 못 이겨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홍사장의 짙은 눈썹이 움찔하며
이마에 골깊은 주름이 패었다가 천천히 풀어졌다.
"너 여기서 벌써 네댓 달 됐는데 아직 고철값도 모르네? 저건 고철값만 해도 5백 환은 되
잖갔어?"
"그래서 제가 물어보지도 않구 받아둔 거 아녜요? 이익이 많이 남겠다 싶어."
그렇게 대꾸해놓고 나니 영희는 더욱 화가 났다. 장사장 일도 그렇지만 그 기계도 제딴에
는 잘한다고 했는데 욕만 먹는 게 참을 수 없어 쏘아붙이듯 덧붙엿다.
"좋아요. 이건 제가 책임지죠. 그 돈 5백 환 제가 물어내면 되죠 뭐. 물건은 장물이라니까
아무데나 버리면 되고..."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드디어 홍사장도 목소리를 높였다.
"에미나이가 어째 그리 버르장머리가 없네? 주인과 고용인이 아니라두, 나이든 사람 말
끝에 이럴 수 있는 거이야?"
갑자기 서북 사터리가 심해지는 게 홍사장도 화가 단단히 난 듯햇다. 영희의 억센 성격은
그럴수록 강하게 반발했다.
'이거 정말 못 참겠어. 오늘 한바탕 하고 여기서 보따리 싸버릴까?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 있어? 장물, 장물 하지만 자기도 이따금씩 수상쩍은 물건들을 받지 않았는가 말이야. 장
사장 일로 비틀어진 모양이지만 것두 그래. 자기가 싸워가며 받아내지 못할 거 같아 내가
나선 거 아냐? 나는 자기들을 위해 한다고 했는데...'
아마 일 년 반 전만 해도 영희는 그런 감정을 격한 소리로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희
는 이미 억세고 거칠기는 해도 순박하기 그지없었던 그때의 영희가 아니었다. 사랑을 알고,
남자를 겪고, 무엇보다 집을 나와 벌써 반년째나 홀로 세파에 부대끼며 사는, 열아홉이 꽉
차가는 여자 아이였다. 충동적이고 감정에 휘몰린 행동들이 자신에게 준 여러 불리(不利)에
시달려본 사람답게 무턱대고 반발하는 대신 계산부터 해보았다.
잠깐 동안의 계산이지만 답은 어쨌든 스스로를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먼저 아까운
것은 그 일터였다. 월급 5천 환은 대단할 것 없다 쳐도 저녁 다섯시면 어김없이 등교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은 흔하지 않았다. 점포 뒤에 딸린 방도 좁은 대로 포기하기 쉽지 않은 그
일터의 이점이었고, 특별히 어렵거나 힘들 것 없는 일도 그런대로 매력이 될 만했다.
그 동안 그들과 맺은 인간 관계도 영희의 거센 반발을 누르는 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얼
핏 보면 무뚝뚝하고 인색한 장사치지만 홍사장은 여러 가지로 영희를 감동시키는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겉보기보다는 엄청나게 실속 있는 그 점포의 사업 내역, 때로는 답답하게 보일
만큼 끈질긴 기술 습득의 집념, 인색이라기보단 검소와 절약으로 이해해야 하는 편이 옳은
그들 알가의 생활 방식... 그러나 그 무엇보다 영희를 감동시킨 것은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이
었다. 그는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던 그녀의 특성들을 하나같이 좋게만 보아주었
다. 억셈은 꿋꿋으로, 고집은 심지 깊음으로조심성 없음은 활달함으로 쳐서 높이 사고 북돋
아주는 것이었다. 영희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것, 특히 그를 위한 일이라면 궃은 소리 힘든
싸움도 마다 않고 기어이 해내고 만 것은 아마도 그런 그의 인정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
다.
그의 아들 정섭도 굼뜨고 미련해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가끔씩 영희를 감탄시켰다. 아버지
의 살림이 그만한 만큼 당연히 대학 진학을 졸라댈 만했고, 또 그게 안 되더라도 멋이나 부
리고 돈 쓸 궁리나 하기 십상인데,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충실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처
음에는 사람이 모자라거나 무슨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착하고
순할 뿐, 때로 그의 머리는 비상한 번득임까지 보였다. 그런 데다 영희를 대하는 태도도 은
근하기 그지없어 함께 있기가 결코 싫지 않은 사람이었다.
영희는 이런저런 계산 끝에 홍사장과의 다툼을 쓸데없이 격화시키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자리를 수습해야 될지가 당장 막막했다. 쉽기로야 잘못을 빌고 드는 게 있지만,
아직 영희의 성격이 그코록 결이 삭아 있지는 못해다. 또한 얼마 전에 장사장에게 그랬듯
눈물을 앞세우는 방식도 있었지만, 그걸 다시 쓰는 것도 영희에게 그리는 마음내키지 않았
다. 적어도 그들 부자에게까지 거짓 눈물을 쓸 만큼 영악해져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거주춤 서 있는 영희에게 홍사장의 고함 소리가 한 암시를 주었다.
"내래 기래두 널 아주 좋게 봤디. 요새 세상 살아갈라믄 너만큼은 당차고 똑똑해야 된다
구 보아서. 그런데 이거 뭐이야? 오냐, 오냐 하니까 이건 아주 개지구 놀려구... 주인도 아래
위도 없이..."
"알겠어요. 그런 저를 지금까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영희는 못 미더운 대로 자신에 대한 그의애착을 담보 삼아보기로 하고 침착을 과장한 목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뭐이야?"
"절 그렇게 보신는데 어떻게 여기서 더 있을 수 있겠어요? 그만두겠어요."
영희는 스스로도 대견스럽다 싶을 만큼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해놓고 골방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소리내어 옷가지와 책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점포 쪽에서 정말로 화난 홍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눔의 에미나이, 앞뒤가 콱 멕혀개지구선... 그래 좋아, 맘대로 하라우!"
그때 정섭이가 나섰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제딴에는 잘해본다고 한 건데... 제가 좋은 말로 타일러보지요."
그러면서 홍사장의 옷깃이라도 끄는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야, 이거 정말 겁나는구나야, 아무렴 저깐 에미나이 하나 없다구, 이 가게 못 해먹겠니..."
"글세, 고정하시라니까요."
"기래도 길티..."
홍사장은 정말로 화가 난 듯했지만 그날 일은 결국 영희가 노린 대로 결말을 보았다. 잠
시 후 돌아와 어떻게 달래본답시고 더듬거리는 정섭에게 영희는 마음껏 속풀이까지 하고 학
교로 나설 수 있었다.
그날 영희가 학교에서 돌아온 것은 밤 아홉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여상인 데다 졸업
때가 가까워 취업 나간 아이들 자리가 듬성듬성 빠진 학급은 벌써 지난 주부터 수업이 제대
로 되지 않았다. 차라리 집에서 입시 준비에나 힘을 쏟을까 싶다가도 학교에 안 나가는 게
불안해서 나가보면 두세 시간 수업이 고작이었다. 그날도 수업은 두 시간뿐이어서 오랜만
에 학교에서 만난 모니카와 방집에서 한 삼십 분 잡담을 하고 왔는데도 그시간 밖에 안 됐
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점포문을 점검하고 골방으로 들어가려던 영희는점포 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에 섬뜩해 걸음을 멈추었다. 간혹 홍사장 부자가 남아 야간 작업을 하는 수도 있지만, 먼저
떠오른 것은 도둑이었다.
영희는 무턱대고 고함부터 지르려다가 아직 밤이 깊지 않은 데 힘을얻어 가만히 쪽문을
열어보았다.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점포 안이 반쯤 눈에 들어왔다. 점포 바닥에 무언가를 늘
어놓고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홍사장이었다. 영희는 낮의 일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앞서는 감정은 알지 못할 반가움이었다.
"사장님이 지금까지 웬일이세요?"
영희는 특별히 계산을 하는 법 없이 제 감정대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 솔직함이 실은 원
래의 영희에 가까웠다. 영희의 목소리가 예상외로 밝은 것에 어리둥절했는지 홍사장이 한동
안 멀거나 영희를 돌아보다가 역시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대답했다.
"응, 너를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낮의 술기운이나 흥분의 그늘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나처
럼 표정 없고 굳은 얼굴이었다. 그게 더욱 쉽게 낮의 일을 잊게 해주어 영희는 벌써 별어색
함을 느끼지 않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절, 기다리셨다구요?"
"그래, 할 애기가 좀 있어서, 우선 거기 좀 앉으라야."
영희의 물음에 턱짓으로 손님용 나무 의자를 가라키며 그같이 대답한 그가 이어 무언가를
확인하듯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네?"
"뭘요?"
영희가 짐짓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그럼 점을 좋아하디만,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데. 정말 잊어버려서?"
"아, 낮에 그 일요? 죄송해요."
영희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그렇게 가볍게 받았다. 그가 잠깜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
이더니 특별히 꾸미는 기색 없이 말했다.
"미안한 건 되레 나디. 실은 너한테 화를 낼 일이 아니었어."
"아녜요. 제가 아마 너무 눈치 없이 굴었던 것 같아요." 영희가 시원스레 대답하자 다시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걱정했디. 나는 말이야, 널 보내고 싶
디 않아야" "..."
"셈이 빠르구, 지기 싫어하구, 마음먹으면 무어든 해치우는 힘도 있구, 그러면서도 여자디.
그게 우리한테는 필요해. 욕심대로라면 한식구가 돼서..." 한식구란 말에 담길 수 있는 뜻이
두 볼을 화끈하게 했으나 영희는 굳이 못 느낀척 그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그도 그걸 알
아차린 듯 얼른 말을 돌렸다.
"한식구가 된다는게 꼭 뭐 딴 뜻이 있는 건 아니구, 너 우리하고 오래 함께 일해보지
않겠니? 지금 이 일말구 새로 시작할 일..."
"그게 뭔데요?"
"기렇디, 것부터 애기해야겠지만, 하지만 그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 이 가게
어떻게 생각하니?"
"보기보다 아주 실속 이는 장사죠."
"나하고 정섭이는 어떻게 보네?"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들이죠. 검소하고."
영희는 조금도 아첨하는 기분 없이 평소의생각대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나게 퍼지
며 눈에 갑작스런 생기가 돌았다. 이제 얘기할 기분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잘 봐주니 고맙다야. 그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니?"
"뭐, 돈 많이벌어 잘 사시겠죠."
"계속 이 장사루다가?"
"점포도 늘리고 다른 가게도 내고... 시골에 논밭을 많이 사기두 하고..."
그러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희미하면서도 이상하게 야심과 자만을 느끼게 하는 웃음이
었다.
"그건 틀렸어. 우릴 너무 작게 보았디. 우리 꿈은― 그보다는 훨씬커."
"그게 뭔데요?"
영희는 정말로 호기심이 일어 물었다. 그때부터 대답하는 그의 눈에 이상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사, 그거 물론 잘하면 얼마큼은 벌겠디. 길티만 닥쳐올 세상에서 큰 돈은 못 만들어.
나는 또 알디. 논밭전지나 고깃배·어장으로 큰 부자행세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걸. 광산이
니 뮈니도 금노다지가 펑펑 쏟아지지 않은 담에야 한물갔디. 닥쳐올 세상은 공장만이 진짜
큰 부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이야. 값싸고 좋은 물건을 강물처럼 쏟아내는 공장... 하기야
지금도 그 비슷하게 공장과 돈쟁이들은 있디. 방직공장, 설탕공장, 밀가루공장― 겉보기엔
그럴듯해 뵈디. 길티만 기건 아니야. 좀 통큰 장사치, 아니 질 나쁜 노름꾼들일 뿐이야. 장사
해 번돈 와이로(뇌물)로 써서 들어온 원면(原綿),원당(原糖),통밀 많이 빼돌리는 놈이 이기는
노름판이라구. 자본도 기술도 원료도 정치에 목을 매고 있고, 생산이란 것두 따지구 보면 가
공에 지나지 않아. 그걸 혼자 차고 앉았거나 몇몇이 갈라먹기로 나눠개지고 있는 시장에 별
경쟁없이 퍼앵기는 거디. 것두 두 배 세 배 장사루다가..."
요컨대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상업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었고, 꿈꾸고 있
는 것은 진정한 산업 사회였으며, 비판하고 있는 것은 관료 매판형 자본주의와 독과점 체제
였다. 그러나 듣고 있는 영희는 물론 말하는 그 자신도 그런 것을 뚜렷이 의식하지는 못해
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앞서가는 상인의 감각뿐이듯이, 영희도 소박한 당시의 상식으
로만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업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녜요? 국회의원 장관과 교제두 하구, 와이로두 쓰
고..."
"아니디.. 기래서는 안 되디. 국회의원, 장관은 갈리구 정권도 바뀌지만 기업은 기렇게 갈
리구 바뀌는 게 아니잖네? 기런데 정치에 목을 매 어떡하갔어? 사업가가 무슨 기생이간 ?
양갈보간? 사업하는 놈뿐 아니라 나라 경제를 위해서도 기래서는 안 되는 거이야. 생각해보
라우. 정권 바뀌고 장관 갈린다구 기업이 망했다 흉했다 해서야 쓰가서? 기업이 누구 혼자
서 하는 거이야? 그 밑에서 밥 빌어먹는 숱한 일꾼. 거기서 나온 물건 사다 쓰는 일반 국민
은 어쩌가서? 기업하는 놈은 것두 없구..."
그가 열올려 나무라는 것은 이른바 정경유착쯤 될 것이었다. 그러나 상식에 절어져 있는
영희에게는 도무지 모를 소리였다. 잘은 모르니반, 도대체 정치에 줄 안 대고 사업한다는 게
될 일 같지가 않았다. 그게 그를 생각하는 마음과 어울려 제법 걱정에 찬 물음이 되었다.
"그러지 않고 되는 사업도 있을까요? 사장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그 돼먹잖은 장사치들에게 본때를 봬주가서. 학생이니까 말해주는데,니북에서 내려올 때
는 빤스 바람이었지만 그 동안 돈 좀 모아서. 발써 부평 쪽에 공장 부지도 마련해뒀고, 이
장사 한두 해 더 허리띠 졸라매면 제법 버틸 만한 자본도 거머쥐게 되디. 허풍서니로 공연
히 공장부터 커다랗게 짓구 나서지 않는다면 말이야."
"사업하는 데는 그것말고 또 뭣뭣이 더 있어야 한다면서요?"
"기술 말이가? 것두 차근차근 쌓아나가구 있디. 우리 부자 맨날 고물 기계 뜯어놓고 뭐
하는지 아니? 뭐 땜에 다된 폐품사다가 밤낮없이 뜯어내고 있는디 알아? 모두 기술 익히는
거라구. 우리 정섭이 공업학교 보낸 것두 마찬가지디. 난들 왜 귀한 자식 좋은 대학 보내 편
한 월급쟁이로 사는 거 보기 삻갔네? 까짓 기술이야 최신 외국 기계 턱 사다 들여 놓으면
무든 게 절루 될 것 같디? 길티만 안 그래. 기곌 부리는 건 사람이구, 그러자면 우리가 만들
어내려구 하는 것은 내 몸처럼 알아야 된다구. 기리구― 인제 까놓구 얘기지만 이 마당에서
기술 하면 우리 부자 만큼 되는 놈도 없을걸. 발써 작년부터 양코배기들까지 우리한테 수리
를 부탁하니깐..."
"그렇다면 사장님이 세우시려고 하는 것은 냉장고 공장? "
"그뿐인가? 제빙기, 냉방기― 좀 거창하게 말하믄 냉동 산업이디. 왜 하필 그거냐고 묻겠
지만, 건 또 까닭이 이서. 내가 젊었을 때 원산서 왜놈 얼음공장을 다닌 적이 있디. 오뉴월
겹옷을 꿰고 일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 신기한 것은 거의 공짜인 물을 얼려놓은 게 같은
무게의 곳식이나 물고기보다 더 비싸다는 거여서. 이제 농사짓고 고기 잡아서는 떵떵거리고
살기 틀린 세상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거기서디. 이런 세상에서 천석꾼 만석꾼
은 공장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만. 나는 처음 그 얼은공장을 포부로 삼고 정말
로 열심히 기술을 익혔디. 한때 '홍상'아라면 원산이 다 알아주는 기술자여서, 기런데 전쟁
이
터지고― 어떻게 흘러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디. 이 자리에 움막을 얽고 고물상을 시작할
때는 먹고 사는 게 당장 발등에 불이어서, 하지만 쌍팔년(4288)을 전후해 좀 먹고 살 만해지
자 다시 그눔의 얼음공장이 떠오르더만. 그때 때맞춰 거래를 튼 게 미군 부대 폐품 취급하
는 패거리였디. 나는 선풍기서부터 냉방기까지 그 방면의 기계는 폐품 중고 가리잖고 사들
여서. 그러다 보니 얼음공장은 그 얼음을 얼리는 기계 자체를 만드는 공장으로 바뀌고 말았
디."
얘기에 회상이 끼여들어 그런지 홍사장의 목소리에 감동이 서렸다. 그 감동이 갑자기 영
희의 의식 깊이 가라앉아 있던 옛 기억을 건져올리며 갑작스런 경계로 홍사장을 대하게 했
다. 바로 박원장의 기억이었다. 그가 미움과 원한의 사람으로 변하자, 불그레 취해 뒤틀린
목소리로 늘어놓던, 그때는 가슴 저린 연민으로만 들었던 그의 씁쓸한 회상도 교활하고 비
열한 술수로만 떠오르는 그즈음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의 그런 크신 포부에 제가 무슨..."
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차고 어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홍사장이 갑작스레 기습다안 사람
처럼 움찔하는 게 더욱 수상쩍었다. 나중에 이 일 저 일로 짜맞춰모면 기실 그날 저녁 홍사
장이 하려 했던 것은 영희를 장래의 며느리감으로 속셈을 한번 떠보려 한 것뿐이었다. 그러
나 그걸 알리 없는 영희에게는 그 시각 그가 거기 았다는 게 그저 불안할 뿐이었다.
"아니디, 너 같은 젊은 여자가 꼭 필요해. 안에서 휘어잡고 뒤를 받쳐주는 힘이..."
영희의 목소리에 담긴 변화를 어떻게 느꼈는지 그가 허둥대듯 말했다. 그러나 듣기게 따
라서는 한층 노골적인 흥정의 시작처럼 느껴질 수 도 있었다. 그게 영희에게 어떤 위기감까
지 주어 목소리를 한층 더 쌀쌀맞고 단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전 대학에 가야 해요. 거기서 공부를 더 할 거예요."
"바로 그 얘기야. 그 대학, 꼭 가야 하겠니?"
영희가 마침 알맞은 얘깃거리를 찾아주었는 듯 그가 반가운 빛까지 띠며 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 불리한 오해만 일으켰다. '흥, 이제는 대학으로 나를 꾀어보려 하는구나―
'
그런 생각이 들자 영희는 더 볼 것 없다는 뜻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 대학 얘기는 더 하지 마세요. 어쨌든 제 힘으로 갈 수 있어요."
영희가 그러면서 입구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자 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이 떠올랐
다. 그실망을 제멋대로 해석한 영희는 잔인한 쾌감까지 느끼며 즉흥적인 거짓말로 무언가
더 할 얘기가 있는 듯한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어쩌시겠어요? 여기 좀더 계시겠어요? 전 오늘 이모님댁에 가봐야 돼요."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점포를 나와버렸다. 어쩌면 정말로 그곳을 그만둬야 할지 모
른다는 게 잠깐 아쉽게 느껴졌지만, 당장은 그녀를 몰아대는 위기 의식에서 빠져나오는 게
급했다.
산업 사회의 구조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2차 산업, 특히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제조업
의 발흥이라면, 그날 밤 홍사장이 영희에게 보여준 것은 틀림없이 그 산업 사회로 가는 흐
름 중의 한 갈래였다. 비록 그 주류는 그 뒤 20년이 넘도록 지속된 보상적(報償的)정권의 경
제 우위 정책과 야합해 관료 매판 자본이란 병근(病根)을 지닌 채 꽃피게 되지만, 그때 우리
사회에도 분명 진정한 산업 사회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
도 성적인 피해 의시기에 짓눌려 있어 엉뚱한 오해를 품게 된 영희에게는 그 흐름이 보였을
리가 없었다. 뒷날 이 나라에서 알아주는 냉동 기기 제조 회사의 부사장이 된 정섭이 외국
인 바이어들과 영희가 경영하는 요정으로 찾아들었을 때는 그 같은 그의 성장이 뜻밖이다
못해 신기하게 느껴졌을 만큼.
제48장 또 다른 전야
"오랜만이다!"
명훈이 강과 최의 안내를 받아 중국집 골방으로 들어가자 몹시 낯익은 청년 하나와 마주
앉아 있던 황이 손을 내밀며 큰 소리로 반겼다. 그 뜻밖의 만남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뜻밖의 청년이 알은체를 했다.
"반갑소, 이명훈씨. 따지고 보면 알 만한 사인데 몰라봤소."
그제서야 명훈은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이런저런 학내 모임에 이따금씩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나 구경하다가 차가운 웃음으로 돌아서곤 하던 법정대 쪽의 상급생이었다.
어떤 모임에서도 말 한마디, 움직임 한번 제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만 그의 존재는 명
훈을 비롯한 윤광렬의 패거리 전체에 진작부터 인지되고 있었다. 특히 차가운 웃음은 까닭
없이 음흉하게 느껴지는 눈길과 함께 여럿 가운데 끼여 있어도 금세 알아볼 정조로 드러나
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 대한 느낌이 좋을 턱은 없었고, 따라서 윤광렬을 따라 다니는 녀석들 중에는
가끔씩 만만찮은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윤광열은 어찌 된 셈인지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
하게 했다.
"어어, 저 새끼가 또 와서 실실 쪼개고(웃고)있잖아? 형님, 저 새끼 바짝 태워버릴까요?"
공명 선거 계몽 운동 결과 보고 때인가, 성미 급한 체육과 녀석 하나가 그를 손가락질하
며 윤광렬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내버려둬. 저 자식은 내가 알아. 타고난 음모가야. 가만히 둬도 경찰이 데려갈걸. 감옥에
서 반평생을 착실히 써고 나면 철이 들겠지."
윤광렬은 그를 무시하듯 대꾸했으나 명훈에게 더 뚜렷이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어떤 자신
없음이었다. 그 때문에 다시 한번 그를 눈여겨봐 그날 그렇게 낯익은 얼굴로 보였는지 몰랐
다. 그러나 일종의 동료 의식이랄까, 자신이 윤광렬의 패거리에 들어 있음으로써 품게 된 서
먹함은 금세 없어지지 않아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황이 자기 앞에 있던 뱃길잔을 명훈에게
내밀며 활기차게 말했다.
"자, 앉아. 우연히 이 근처에 왔다가 저기 저 노형과 최·강 두 친구를 만났지. 거기서 명
훈이 애길 듣고 부르러 보낸 거야. 오늘 수업 더 있어?"
"수업은 무슨..."
명훈이 공연히 계면쩍어 말끝을 흐리며 앉아 최와 강도 따라 앉았다. 눈치로 보아 그들은
윤광렬이 주동하는 학내 단체를 떠난 뒤로 노(盧)라는 그 상급생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 같
았다.
"명훈이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노형을 간단히 소개하지. 지금은 너희 선배가 되었지만
실은 우리 학교 선배이기도 해. 시대를 앞지르는 사고(思考) 때문에 한 일 년 옥고를 치르고
니네 대학에 편입하게 됐지. 이시대의 드문 이념가야."
이념가란 말에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상하게도 윤광렬이 말한 음모가와 동의
어로 느껴지며 가슴이 섬뜩해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듣고만 있는 명훈에게 황형이 말한 걸
간추리면 대강 이랬다.
"여러 가지로 미뤄 윤광렬이란 그 친구 아주 안 좋은 것 같애. 어용(御用)의 체질을 타고
났거나 이미 작은 정치 모리배로 썩어버린 것 같더군. 그 희한한 공명 선거 계몽 운동 등
애기도 여기 있는 최·강 두 분에게서 잘 들었어...
그런데 명훈이 그자를 거들어 한 팔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며? 언제 보수 반동 정치인
들의 개가 되어 새로운 반공청년단 노릇을 하게 될지 모르는 그자들 패거리의 앞잡이라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이기붕이 집앞에서 흘린 피가 아깝지도 않아? 의거 부상자란 명예
를 그렇게 값싸게 팔아치울 수 있는 거냐구.
명훈이, 내 말 들어. 하루라도 빨리 윤광렬과 손을 끊어야 해. 그자는 가장 악질적인 반혁
명 분자야. 우리 학생 세력을 분열시켜 오히려 그일부를 보수 반동 정치인의 도구로 팔아먹
르려는 자라구. 정히 무엇이든 해야겠다면 차라리 여기 있는 이 노형을 따라. 이 동지들처럼
말이야. 앞서가는 그 정신 때문에 아직은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오래잖아 우리 학생 운동의
주류는 이쪽 노선을 잡게 될 거야. 또 반드시 그래야 하구...
하기야 명훈이는 언제나 나보다 김형 쪽에 더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으니까 이쪽 노선이
불온하고 위험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차라리 이쪽저쪽 다 끼여들지 말고 물러나
있어. 근 일 년이나 한솥밥 먹고 한 방에서 뒹군 정리로 하는 충고야. 거 뭐지, 그시로라고
물러나 가만히 보고만 있어. 윤광렬은 안 돼. 명훈은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엇다
구..."
만약 그 며칠 전의 명훈이라면 그 자리에서 제법 거센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명
훈이 못 미더워하면서도 계몽 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은 언젠가 그들의 자취방에서 황이 그
동료들을 설득하던 논리에 힘입은 바 컸다. 거기다가 공명 선거 계몽 운동을 떠날 때즘 해
서는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축 처지고 우울해져 있는 그날의 명훈에겐 그런 황을 반박할 흥은커녕 황이 그 무
렵 들어 갈아타게 된 노선의 정확한 내용에 대한 흥미조차 일지 않았다. 며칠 전 꿈결인가
싶게 나타났다가 어이없이 사라져버린 경애와 그날 오전 느지막한 등교길에 받은 입영 통지
서 때문이었다.
집결 장소: 안광역 앞 광장.
집결 일시: 1960년 11월 5일 오후 두시.
지참물: 도(시)민증, 세면 도구함...
우체부가 내민 등기 봉투 안에서 그런 내용물들이 프린트된 쪽지가 나오자 명훈은 경애를
만난 날부터 슬금슬금 밀려들었던 알 수 없는 종말감의 구체적인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었
다. 입대― 전투는 벌써 7년 전에 멎었으나 전선은 아직 유지되고 있었고, 소규모 충돌의 끔
찍한 결과들도 확인할 수 없는 풍문으로 떠도는 시절의 군대는 소집되는 젊은이에게 종말감
의 형티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명훈이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황도 기리게 늘어놓지는 않았다. 노라는 그 음모가― 명훈
에게는 그뒤로도 언제나 그렇게만 떠올랐다―는 심지 기피고 참을성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
었다. 틀림없이 명훈을 설득할 논리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한데도 저쩍에서 서둘러 이야기
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시종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다가 명훈의 무덤덤함에 자리가 어색해
질 것을 우려한 황이 서둘러 일어날 때에야 작별 인사 삼아 한마디 했다.
"이명훈씨, 만나서 반갑소. 다음에는 뜻맞는 동지로 만나게 되길 빕니다."
중국깁을 나와서도 명훈이 학교로 돌아갈 기색을 보이지 않고 함께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자 황이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가의 남은 거 없어?"
명훈이 별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요없어. 어치피 새로 해야 될 학기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영장이 나왔어. 11월 5일이 입대야."
명훈은 그 말과 함께 입영 통지서를 내보였다. 황이 힐끗 보더니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
다.
"그래서 우리 명훈씨가 심드렁했군. 그것도 모르고 공연히―"
황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어 덧붙였다.
"모두 가는구나. 보자 11월 5일이라― 그럼 열흘도 안 남았잖아? 안되겠어. 어디 가서 정
말로 한잔 해야겠어."
그게 꼭 자기의 입대를 서운히 여겨 하는 소리 같지만은 않아서 명훈은 물었다.
"모두 다 가다니? 또 누가 갔어?"
"김가에다 이제 너까지..."
"김형은 몰라도 나야 뭐― 그렇지만 사람 그리운 황형은 아닐 텐데. 무슨 회(會)다, 무슨
동지다, 많잖아? 그리고 그 예쁘고 교양 있는 국회의원 따님은 어떻게 됐어? 그때 잘돼가지
않았어?"
"김가 그 새끼, 떠나면서까지 사람 모함하고 갔네. 그 꼴값 얘기는 하지도 마. 그 애비에
그 딸아야. 애비가 정치로 모리해준 돈에다 껍데기 반반하니 어디 공부가 되겠어? 거기다가
실속 없이 양풍(洋風)이 들어 그것까지 헤프니 이건 뭐 허가난 화냥년이지. 애비도 딸도 다
끝났어. 오래 전에 그놈의 집구석하고는 끝나고 말았지."
말은 한껏 경멸조로 내뱉었지만 눈길에는 누를 수 없는 분노 같은 게 어른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상적인 어조가 되어 있었다.
"나야 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명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겐 명훈이 그
리 흔한 사람은 아냐. 김가도 그렇구, 직장에서 오다가 만났고, 어쩌다 한 집에서 몇 달 함
께 지냈다는 것 정도로는 다 설명 못 할... 실은 오늘 여기 온 것도 어저면 명훈이 널 보러
왔다는 편이 더 맞을 거야. 노형이나 최·강이야말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라구. 그런데 뜻
밖으로 네가 그들에게 화제의 인물이 되었길래 그들을 통해 부른 것뿐이야. 실은 지난달에
도 두 번이다 그 자취방엘 갔었지. 그때마다 네가 없어 허탕치고 말았지만."
그 말을 듣자 명훈에게도 단순한 반사적 감정 이상의 감동이 일어났다. 황 같은 이, 특히
그 같은 지식과 이념의 사람이 그토록 자기를 깊이 생각해주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황형이야 나와는 다른 정신 세계에 사는 사람이니까. 거기다가 이래 저래 바쁠 것도 같
고... 또 만나봤자 제대로 말 상대도 못 될 거고... 하지만 나도 만나고 싶을 때가 많았지. 특
히 요즈음 들어 무언가 끝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그때 황이 길가의 술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대낮이라 안됐지만 저기가 어때? 저기 가서 애기 좀 하고 가지."
명훈도 이제는 마다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다시 찾은 경애를 어이없게 잃
어버리고 괴로움과 무력감에 짓눌려 술로 보낸 그며칠의 응어리진 정이 새로운 형태의 발산
과 해소를 요구하고 있어서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그 술집에서의 나머지 시간은 그런 명훈의 감상적인 기대와는 멀었다. 처음
한동안 그들은 함께 지내던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형의 안부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우연히 만난 경애 얘기며 황이 경멸과 증오 속에 떠나온 국회의원과 그의 딸
얘기도 오갔다. 그러나 오래잖아 그들의 화제가 멈춘 곳은 역시 그 무렵의 사회 상황이었다.
뒷날의 그의 삶이 보여주듯 황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사람이엇고, 명훈 또한 아버지가 물
려주고 떠난 원죄 의식으로 비뚤어져 있기는 해도 결코 비정치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까 그 노형, 어떤 사람이지? 왜 나보고 그와 어울리기를 권했지?"
술이 몇 잔 돈 뒤에 명이 불쑥 그렇게 물은 게 시작이었다. 그 중국집에서 너무 심드렁하
게 대한 게 문득 미안해져 명훈이 그렇게 물음으로써 그쯕으로 돌아간 화제는 자리가 ㄲ,ㅌ
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 이어져오는 어떤 전통의 한 멕이지. 정확히 말해 좌파적 전통의. 이쪽에는
어떻게 알려져 있어?"
"알려져 있다기보다는 음모가로 통하지. 무언가 음침하고 위태로운..."
명훈이 무심코 그렇게 대답하자 이내 황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어갔다.
"그건 윤광렬인가 뭔가 하는 그 친구의 얘기겠지. 하기야 이런 학교에서 그가 그 이상으
로 이해받기를 기다리는 것도 무리지만..."
"아니, 내게도 그렇게 보여. 황형도 아까 이념가란 다른 이름으로 그런 내 짐작을 뒷받침
해줬고..."
별로 애정을 느끼며 다닌 것 아니지만 황이 '이런 학교'라고 할 때의 경멸 섞인 표정에
묘
한 반발심을 느끼며 명훈이 불쾌하게 받았다. 실수를 알아차린 황이 가벼운 웃음과 함께 손
을 저었다.
"'이런 학교'는 취소, 취소. 명훈이 있다는 걸 잊었군. 하지만 음모가와 이념가를 동일시하
는 건 좀 심한데..."
"아니, 이념가라면 내게도 한 서린 추억이 많지. 우리 아버지는― 좀 얼치기인 듯한 혐의
는 있지만 틀림없이 그 이념가의 부류일 거야. 그런데 그와 그 동지들이 우리 골방에 모여
수군대는 것은 언제나 음모였지. 가장 눈에 띄는 행동이랬자 피신과 감옥살이 정도였을까.
언제나 투쟁적인 행동은 누군가 남에게 맡기는 게 그들의 특징이더군. 얻어맞고 피 흘리고
죽는 것은 언제나 그들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
명훈은 까닭모를 전의까지 느끼며 그렇게 받았다. 그때껏 한번도 황에게 맞서 무슨 논쟁
을 벌이는 것은 꿈도 꾸어본적이 없는 그라 스스로도 좀 놀라웠다.
"그런 뜻이라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모든 이념가를 한낱 음모가로만 본다는
건 아무래도 좀 지나치지 않을까?"
황은 여전히 가볍게 받았으나 웃음기는 이미 가시고 없었다. 명훈도 더는 몰아대고 싶지
는 않아 조금 말투를 부드럽게 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그가 이 학교에서 꾸미려는 일이
뭐야?" "꾸미는 게 아니라 이미 오른 불꽃을 이곳에도 옮겨 붙이자는 거지"
"이미 오른 불꽃?"
"그래, 민족주의와 통일의 불꽃. 우리의 혁명은 위기를 맞고 있어. 여기서 대전환이 있지
않으면 우리의 4·19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만 바뀌어진 권력자와 집권당의 명칭뿐이야."
며칠 전 자신이 술에 취해 경애 앞에서 떤 허풍을 황이 되풀이하고 있는 게 어이없어서
명훈이 얼른 대꾸를 못하고 있는데 황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실은 우리가 질서 회복 운동과 이런저런 계몽 운동으로 전환활 때도 이런 오늘을 예언하
며 우리를 비웃던 그룹이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소수였고 또 그들의 논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수준을 지나치게 앞질렀어. 그래서 바로 너처럼 우리도 그들을 음험하고 위태로운
음모가의 집단으로 보고 우리 운동에서 소외시켰지. 아니, 지도부는 은근히 그들에게 경쟁
의식까지 느꼇음이 분명해. 우리 방식대로 밀고 나가 그들에게 보아란 듯이 이 혁명을 완성
하고 싶엇을 거야. 본질과 형상을 구별 못 한 맹복이었지. 강도에게 좀 심하게 얻어맞았다는
이유만으로 사기꾼을 정의의 투사로 오인하고, 그를 도와 정의의 실현을 기대한 꼴이라고
할까. 그 결과가 이 오늘이야. 독재와 부패란 형상을 타도했고 해서 본질인 체제까지도 변혁
시켰다고 단정한 대가가... 그래서 이제는 이런 대전환이 시작되고 있어."
명훈이 이번에는 진심으로 물었다. 민족이나 통일이란 말이 너무 엄청나고 어마어마해 거
기 무슨 구체적인 방안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까닭이었다.
"먼저 조직해야지. 떠도는 꿈이나 추상적인 열망을 이념력(理念力)으로 가꾸어갈..."
황이 이미 여러 번 해본 적이 있는 소리를 되풀이하듯 대답했다. 조직이란 말이 섬뜩해
명훈이 물었다.
"그럼... 학생 운동 단체말고?"
"물론 출발은 학생 운동의 한 갈래로서지. 그러나 무슨 회니 무슨 서클 같은 식은 아니야.
그보다는 훨씬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조직이 될 거다."
황이 그렇게 자신있게 말해놓고 약간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민족통일촉성동맹― 아마, 그런 이름쯤 될걸."
"동맹이라구?"
이번에는 동맹이라는 말에 움찔해 명훈이 다시 그렇게 묻자 황이 그것 보라는 듯한 너털
웃음과 함께 받았다.
"왜? 어때서? 훨씬 힘있게 들리잖아?"
"그렇지만 왠지 섬뜩한데. 무슨 청년 동맹, 무슨 부녀 동맹 하던 게 떠올라서..."
"바로 그거야. 우리는 오히려 특정한 용어 한마디에 주눅들어하는 이 사회의 왜곡된 의식
부터 바로잡고 싶어. 모두가 그런 의식에 짓눌려 있고, 통일 논의가 금기로 되어 있는 한 자
유와 민주는 백날을 떠들어봐도 알맹이 없는 구호일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명칭부터 기성
의 주눅든 의식에 작극을 주고 싶은 거야."
"우리라면... 많아? 그런 학생, 황형네 학교엔?"
"아니, 아직은 유사 의식의 바다에 갇힌 작은 섬이지. 하지만 우리가 한번 깃발
을 올리면 그 바다는 오히려 우리의 호수가 될 거야. 그게 방황이든 모색이든, 아직 제 길을
잡지 못해 시행 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젊은 의식은 틀림없이 그 깃발 아래로 모
인다."
"그래서... 모인다면?"
"우리끼리, 실천 가능한 것부터 시작한다."
"그런 게 있을까?"
"있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압력을 배제하는 것이고, 안으로는 민족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접촉의 시도. 물론 기성 세대, 특히 기득권 층과의 악전 고투가 예상되지만..."
"제국주의의 압력을 배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남쪽으로서는 미국이 그 중요한 대상이 되겠지. 통일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영향력
을 극소화시키는 모든 투쟁이야."
"접촉의 시도란 어떤 거야?"
"아직은 직접적으로 맞부딪친 적이 없는 계층간의 대화와 교통을 말해. 이를 테면 남북
학생들의 만남 같은 것. 이제 통일 운동의 주도권은 남북 모두 그런 계층으로 넘겨져야 해.
기성 세대가 마음에도 없는 통일 문제를 주절대면서 이것저것 말아먹는 작태를 더는 용서해
선 안 돼."
황의 목소리는 갈수록 열기를 띠었다. 그런나 명훈에게는 그럴수록 그가 멀어 보였다. 동
맹, 조직, 제국주의― 그대로 두면 오래잖아 인민(人民)이란 말까지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
이 일었다. 무엇이든 아버니와 연관된 기억을 건드리면 본능적으로 섬뜩해서 움츠러드는 그
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명훈이 묻기를 그친 뒤에도 황은 한동안 더 그 동맹에 대해 열을 올렸다.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벌써 몇 차례의 노선 검증을 거쳐 실제적인 결성 단계에 이른 것
같았다. 황은 처음부터 그 동아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끼여들게 된 모양인데 그 바
람에 오히려 '새로 시작하는 자'의 열정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생각 나? 그게 4월말쯤 같은데... 그때 우리 자취방에서 주장한 것은 뭐지? 7월
에 내가 공명 선거 계몽 운동에 낄까말까를 망설일 때 한 소리는? 겨우 서너 달 전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 애 보기엔 꽤나 심각한 전향 같은데 그게 겨우 몇 달 사이에 손바닥 뒤
집듯 일어날 수 있는 거야?"
명훈이 그걸 물은 것은 황이 너무 들떠 있는 게 은근히 고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반격의고의 섞인 물음에 황은 잠깐 머쓱해하는 눈치였으나 아내 그전보다 더한 기세로
받았다.
"이건 전향이 아니고 회귀야. 처음부터 우리가 설정한 목표는 여기까지 와 있었어."
"그럼 4·19 직후의 성명은 뭐야? 그때는 왜 그런 생각들을 했지?"
"그건 일시적인 오류였지. 아니 너무 안일하고 낙관적인 단계적 발전 이론에 홀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크게 보아 그것도 오늘의 이 길로 접어들기 위한 모색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르
지. 값은 좀 비싸게 먹혔지만 그런대로 소중한 훈련과 습득이었는지도..."
"김형 같은 사람들의 견해는? 그건 논리적으로 극복된 거야?"
"아, 거 뭐야? 그 얄팍한 변경 이론? 그건 교묘하게 포장된 신(新)식민주의야. 그때도 그런
노의 자체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진 못했지. 기껏 있다면 거기 포함된 개량주의적 요소
정도였을까?"
"신식민주의가 뭔지, 개량주의적 요소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김형의 얘
기에는 무시 못 할 현실성이 있어 뵈던데..."
"천만에, 거기에는 제국의 시민권을 열망하는 변경 지식인의 편의가 있을 뿐이야. 교활한
자기 정당화의 욕구와 그래도 지워버릴 수 없는 종족적 양심이 고투(苦鬪)와 타협 끝에 짜
낸..."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이 땅을 열 번이라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제국의 현실
적인 힘을 지워버릴 순 없을걸. 또 어떤 이름 아래서든 공산주의자와 이마를 맞대고 살기는
글러버린 극우 보수 세력의 존재는? 그들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물리력
은?"
명훈은 퍼뜩 경애를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 앞에서 취해 떠든게 부끄러움으로서보
다는 이상한 안도로 떠올랐다. 황 같은 사람들이 놀리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더 많은 학생들
이 거기 가담해 새로운 운동 주류를 이루어준다면 자신의허풍도 터무니없는 것은 되지 않으
리란 계산에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가 황을 상대로 펴고 있는 반론도 실은 그 터무니없는
객기의 논리적 보완을 기대해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믿고 지지하는 길이 어
느 쪽인가에 상관없이.
"그런 걸 우리는 허무주의라 규정짓지, 이명훈씨."
황은 그렇게 빈정거려놓고 이어 전에 없던 자신으로 덧붙였다.
"과연 아메리카 제국은 강력하지. 세계를 뒤덮을 만한 군대와 물량, 그리고 핵무기로 상징
되는 가공할 신병기(神兵器)―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의 출현은 우리들의 역사 경험에 하
나도 새로울 게 없어. 지금까지의 세계 제국치고 그들의 물량과 군대가 변방의 소수 종족에
게 준 위압감이 오늘날의 아메리카가 우리에게 주는 그것보다 더 작은 적이 있을 것 같아?
핵무기도 그래. 아직 청동제 무기를 쓰는 종족에게 자기들의 무기르 진흙 베듯 하는 제국의
철제 무기나, 아직 비행 무기라고는 활밖에 모르는 종족에게 쇠와 불을 뿜어대는 제국의 대
포가 오늘날의 핵무기보다 덜 위력적일 것 같아? 만약 김가의 노리대로 따른다면, 세계사는
하나의 제국만으로 충분했을 거야.
내부적인 반동 세력도 마찬가지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건 한 강력한 제국이 휩쓸고
들어오면 그들에게 영합함으로써 자신의 이득을 구하는 무리가 새겨나지. 그리고 그 제국에
의해 기득권이 확보되면 그걸지키려는 열의와 저력 또한 대단한 법이지. 김가처럼 그걸 크
게 승인하고 나면 그 종족의 운명은 언제나 예속과 굴종만으로 이어질 거다. 하지만 역사가
알려주는 바는 그와 달라. 오히려 그런 세력과의 과감한 싸움을 통해 종족의 역사는 한 단
계씩 발전해왔지..."
만약 그때 명훈에게 '혁명의 미적분(微積分)'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 '비극
적 소모'를 따져볼 능력이 있었다면 또 다른 문의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쓸쓸하게도
명훈에게는 거기서 더 물음을 계속할 능력이 없었다. 김형에게서 귀동냥한 논리가 끝나자
그 방면에 대해서 별다른 모색도 습득도 없었던 그의 정신은 온전히 황에게서 쏟아지는
설득의 포화 아래 맡겨지고 말았다.
"김가는 우리 4·19가 혁명이라는 걸 인정하는 데로 인색했어. 우리의 기세에 눌리지 않
았다면 '용케 한판 맞아떨어져준 역사의 복권'으로 계속 우겨댔을걸. 나중에야 '옆으로부터
의 혁명' 어쩌고 하며 겨우 승인하는 척했지만 놈의 심중은 여전히 그 승인을 유보하려는
것 같았어. 그게 놈의 한계지. 아메리카의 환상에 홀려 있는 변경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고.
물론 이 혁명의 주체인 우리도 한동안은 어리둥절했다. 생각보다 쉽게 독재와 부조리의
형상을 타파한 까닭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제는 확실하다. 그것은 틀림없이 혁명이었고 우
리는 그 첫 번째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이제는 그 실질까지 변혁시켜 혁명을
완수할 책무가 남았다. 이게 위로부터냐 옆으로부터냐 밑으로부터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
지 않다. 역사적 행운과 사회적 필연의 비율을 따지는 것도 이제는 무의미해 아직은 미완일
지라도 지금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 혁명이다...
"김 가의 이분법도 비판받아야 돼. 민주 혁명과 민족 혁명은 본질적으로 같은 거야. 민주
까지만 가고 민족까지는 가지 말라―얼마나 간교한 편의주의야? 기성 세대의 비굴과 탐욕을
그보다 더 그럴듯하게 분석 할 수도 없을걸. 도대체 왜 그런 한계를 스스로 설정해 그 안에
갇히려드는 거야? 철저한 민족주의적 혁명 없이, 특히 민족적 통일 없이 진정한 민주가 가
능할 것 같애? 두 제국에 분할된 상태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있을 수 있느냐구."
그 자라에 김형이 없는 게 새삼 분하다는 듯 한동안 그렇게 퍼부어대던 황은 날이 저물어
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기야 내일모레 영장을 받아놓고 있는 너에게는 이제 관심 밖의 일이겠지. 왠지 네가
늘 김가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내가 공연히 열을 올렸는지 몰라. 언제즘
서울을 떠날 거야?"
갑자기 스스로가 열없어졌는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던 황이 변명 비슷한 말로 물었다.
"글세, 잠깐 밀양에 들렀다가 집결지로 가야 되니― 입대 사나흘쯤 전에는 서울을 떠나야
겠지."
"어쩌면 우리 소식 듣고 가겠구나. 그때쯤은 우리 대학에 내가 말한 조직이 생긴 뒷일 테
니까. 이름이야 어떻게 되든... 어쨌든 떠나더라도 성원 잊지 마라."
"알았어."
명훈은 그렇게 담담히 대꾸했으나 속으로는 지난번 함창에서 강과 최를 보낼 때의 중얼거
림을 다시 되뇌고 있었다.
'나도 너희들과 함께이고 싶구나.'
논리적으로 설득당했다기보다는 그런 황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순수한 열정에 감동된 까닭
이었다. 본질적으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념적이 될 수 없는 한 불행한 영혼의 쓸쓸하기
그지없는 궤적을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황과 헤어질 때까지도 강하게 명훈을 사
로잡고 있었던 그 감동 역시 그리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만난 독각 선생 때문이었다.
명훈이 만만찮은 술기운에 건들거리며 헌책방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맞은편 술집에서 유
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뒤걸음질쳐 나왔다. 둘 다 신사복 차림에 한 사람은 제
법 중절모까지 반듯하게 얹고 있었으나 몰골은 뒤입어쓴 술과 안주로 말이 아니었다. 그 뒤
를 따라 무언가를 휘두르며 달려나오는 것은 바로 헌책방 주인 아저씨인 독각 선생이었다.
한 팔로는 출입문을 짚고 외다리로 선채, 오른손으로는 왼발에서 떼낸 듯한 의족을 무섭게
휘드르고 있었다.
"어서 가! 요 날라리 새끼들, 골통을 바숴놓기 전에 썩 없어지지 못해!"
독각 선생은 낭패스럽기도 하고 겁나기도 해서 제대로 대꾸조차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
질치는 두 신사를 금세라도 덮칠 듯 노려보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이 년 가까이 드나들면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포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고함에는 어딘가 절실한 부르짖음 같
은 게 섞여 있는 듯했다.
"이 박영규 하나 남은 다리가 그렇게 탐나? 차라리 그냥 떼줘?"
그의 젊은 아내가 언제나처럼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빼꼼히 가게문을 열고 소리나는 쪽
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마침 그 부근에서 걸음을 멈추고 있던 명훈이 무심코 그녀에게 물었
다.
"아주머니, 저 어저씨가 오늘 왜 저러죠?"
그러자 그녀가 새빨갛게 루즈를 칠한 입술을 비쭉이며 말했다.
"빌어먹을 영감쟁이! 저 신사분들이 찾아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모셔가려 하는데 저 지랄
발광을 덜고 있잖아? 술은 처먹어도 뭔가 있는 줄 알았은데 아주 갔어, 갔다구."
그때 다시 독각 선생의 거친 고함 소리가 명훈의 주의를 끌었다.
"예라이, 똥파리 같은 새끼들. 무슨 냄새를 맡고 또 모여 웅웅거리는거야? 돌계집의 헛구
역질 소리만 듣고도 돌 잔칫상 차리고 자빠질 눔들, 진보? 혁신? 뭘 재건한다구?"
내용은 뚜렷이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명훈의 의식 밑바닥을 휘저어대는 데가 있는 말이었
다. 명훈은 반사적으로 그 상대방 쪽을 보았다. 신사복 차림의 두 사람은 드러나게 변한 안
색으로 마주보더니 무슨 말인가를 수군거린 뒤 종종걸음 쳐 그 골목을 빠져나갔다. 가끔씩
뒤를 힐끔 거리는 게 갑작스레 불안해진 모습니다.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독각 선생이 그런 그들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제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훈이 정작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황에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에 빠진 것은, 의족을 내던진 독각 선생이 갑자기 술집 문 앞에 퍼질러앉아 앞 뒤 없는
넋두리를 시작한 뒤였다.
"불쌍한 놈들, 지금이 어느 철이라고 함부로 고갤 내밀어? 더구나 이 박영규의 시체를 끌
어다가 어디 쓰겠다는 거야? 흐흐... 그런데 박영규동지, 그대는 왜 죽지도 못하는 거요? 더
부를 무슨 노래가 남았다는 거요... 일생을 가슴속에서 타오를 이데아의 광휘― 그런 게 아
직도 있다는 거요..."
그런 그의 넋두리에는 피를 토하듯 하는 비통함과 처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명
훈을 그에게로 이끈 것은 그 넋두리에서 오는 감동 보다는 그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 그
의 이름이었다. 박영규란 이름을 두 번째 듣는 순간부터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때마다 어머
니가 하나하나 꼽아보던 아버지의 옛 친구들 이름 속에서였다.
"영규씨, 그 사람은 암매(아마) 죽었을 끼라. 너그 아부지하고 같이 붙잡해(혀) 십 년인가
징역을 받고 감옥살이하는 중에 사변이 터졌으니께는. 우예 용케 살았다 캐도 남쪽에 있을
사람은 몬 되고..."
어머니가 언제나 한쪽으로 체쳐놓던 이름이라 제대로 기억 속에 자리 잡지 못했는데. 거
기서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독각 선생에게 다가가면서도 명훈은 아직 '영규씨'가
바로 그일 것이란 믿음까지는 갖지 못했다. 삼십대 중반인 아버지의 모습밖에 없는 명훈의
기억에 비해 그는 너무 늙어 있었고, 출신이 의심스런 그의 아내나 초라한 삶의 방식도 동
경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그의 전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언젠가 황과 함께 찾아
갔다가 쫓겨난 날의 기억이 아이었더라면 어머니의 '영규씨'와 그가 되뇐 박영규가 같은
인
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이만 고정하시죠. 일어나십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명훈이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이란 존칭까지 쓰며 부축하려 들자 자기 연민으로 풀려 있던
그의 눈길에 다사 적의와 경계의 불길이 일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날아온 똥파리야? 아, 저 위 따라지 대학생이구만, 생 사람 찜져 먹으려
들던 그 얼칠기하고 몰려다니던... 그래, 넌 뭐야? 또 무슨 냄새를 맡고 내게 엉겨붙지? 너도
저것들과 섞여 한바탕 웅웅 거려보고 싶은 거야?"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독각 선생이 세차게 명훈을 뿌리치며 쏘아 붙였다. 그 기세에
머쓱해져 명훈이 한번 찔러나보나는 기분으로 불쑥 말했다.
"언젠가 신생님은 제가 왠지 낯익다 하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성함을 듣고 보니 저도
그 성함이 귀에 익습니다. 아니, 저도 영규씨란 분을 알고 있습니다."
"뭐? 영규씨?"
대폿집 불빛에 비친 얼굴이 갑자기 묘하게 굳어졌다. 긴장이라기보단 무언가 퍼뜩 짚여오
는 게 있어 자신의 기억에 골똘하게 매달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느닷없는 확신으로 두근거
려오는 가슴을 누르며 명훈은 짐짓 빙빙 돌려 말했다.
"그 영규씨는 아버지 친구분인데 사변 전에 사상 관계 일로 십 년이가 징역을 선고 받았
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변을 만났는데, 어머님 말씀은 아마도 거기서 죽
었을 거라더군요."
"그럼, 그럼 네가?..."
독각 선생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더듬거리다가, 문득 그때까지도 남
아 있는 몇몇 구경꾼을 의식했음인지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명훈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받았다.
"네가 아는 영규씨는 틀림없이 거기서 죽었어. 후퇴하는 경찰의 사상범 처리 때. 그렇지만
네 아버지는 알듯하다. 아마도 이동영이란 얼치기였겠지."
그러면서 몸을 일으킨 그는 문짝을 짚고 비틀비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명훈이 자연스
럽게 그를 부축하며 다시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얼치기까지도."
"네가 낯익게 느껴지던 까닭도 이제 알겠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네가 턱없이
신식 얼치기를 따라다니던 까닭도. 신식 얼치기 알지? 거 뭐야 황 뭣이던가..."
그들이 그렇게 주고받으며 자리를 잡는데, 갑자기 그의 젊은 아내가 분을 뒤집어쓴 것 같
은 얼굴을 출입문 쪽으로 디밀며 째지는 소리를 냈다.
"야, 너 또 퍼질러앉을 거야? 증말 누구 속터져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래? 아이그!"
틀림없이 자신을 향해 퍼붓는 악다구닌 줄 알면서도 독각 선생은 전혀 듣지를 못하는 사
람 같았다. 태연히 대폿집 아줌마를 향해 술을 청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 주쇼."
"아쭈 저게... 저걸 그냥..."
그의 젊은 아내가 더욱 앙칼지게 소리치며 주르르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금세 독각 선생
의 멱살을 잡고 따귀라도 후려칠 기세였다. 보다못한 명훈이 일어나 그녀의 두 팔을 잡으며
말렸다.
"아주머니, 걱정 마세요. 오늘은 제가 책임지고 선생님을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덤벼들 때에 비해 그녀의 기세는 쉽게 숙어졌다. 가볍게 뿌리치는 시늉뿐 명훈이 끄는 대
로 술집을 나갔다. 명훈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한번 참아준다는 듯한 태토였지만, 문밖에서
덧붙이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콧소리가 섞인 게 그 이상의 뜻이 있었다.
"선생님은 무슨... 하지만 좋아요. 그럼 학생만 믿고 가요. 학생도 저 술귀신한테 홀려 너
무 마시지 말고..."
어쩌다 골목에서 마주칠 때마다 헤픈 웃음을 보내는 게 까닭 모르게 불쾌했는데, 그날 밤
은 그 덕을 단단히 본 것 같았다.
명훈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니 그새 소주 한 잔을 털어놓은 독각 선생이 다시 미친 듯이
웃어제치기 시작했다. 마침 초저녁이라 다른 손님이 없어서인지 주인 아줌마는 못마땅한 듯
이마만 찌푸릴 뿐 달리 몰아대지는 않았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한참을 웃어제치던 독각 선생이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눈물 고인 눈으로 명훈을 보
며 말했다.
"동영이 그 친구도 겨우 제 한 몸밖에 건지지 못했군. 아니 제 한 몸이라도 제대로 건졌
는지 몰라..."
그리고는 한동안 멀쩡한 사람처럼 명훈에게 쓰라린 그들 이산의 역사를 캐물었다.
이따금씩,"그는 드디어 무를 얻었으니, 그쪽 세계에서는 전부가 됐을까"라든가, "근거 없
이 이상화된 과거와 도그마로 화석화된 미래 사이를 떠도는 몽상이 섬, 오직 그 것만이 우
리 것이었나..." 같은 중얼거림을 끼워넣을 때는 감형이나 황에게서보다 훨씬 깊이 있고 다
듬어진 지성까지 느끼게 했다.
명훈이 얘기가 과거를 지나 현재에 접어들면서도 한동안 그의 광기는 드러나지 않았다.
명훈이 배석구와 뒷골목은 빼고 대학 진학까지 얘기했을 때는 제법 아버지의 옛 친구다운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다.
"어쨌든 잘됐어. 이동영의 가족이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더구나 그 맏아들은 최고 학부
까지 갈수 있게 되나니... 이남도 그리 몹쓸 땅은 아닌 듯 하군."
"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다고 다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죠. 대학도 대학나름이고..."
명훈은 그가 모든걸 낙관적으로만 보는 것 같아 그렇게 이의를 달았다. 그래서 괴롭고 쓰
라렸던 지난 십년과 방금도 하나같이 불구인 그들 일가의 삶을 보다 어둡게 윤색해 털어놓
으려는데 그가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요즈음도 그 얼치기를 따라다니나? 아니 요즈음 그 얼치기들은 무슨 수작들을 k
하고 있어?" '따라다닌다'는 말이 묘하게 명훈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에게 반발하게 했다.
"선생님은 얼치기, 얼치기 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강력한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또 선생님은 그때 이 세월을 돌계집의 헛구역질 같은 거라고 하셨지만, 그리도 그 돌계집은
민주 정부라는 옥동자를 낳았습니다."
"우리라... 그럼 그 얼치기를 그저 따라다닌 게 아니라 제법 한몫 거들기까지 한 모양이
군."
"어쨌든 저도 이 땅의 대학생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명훈은 별로 과장한다는 느낌 없이 왼팔을 걷어 흉터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김형과는 또
다른 그의 냉소주의를 탐색해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움이
나 감동보다는 엉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까지도..."
그런 그의 대꾸에서 느껴지는 빈정거림의 억양이 더욱 명훈을 반발하게 했다. 갑자기 얼
마 전 황에게서 받은 감동이 되살아나 희미한 적의까지 느끼며 그와 맞서게 했다.
"또 얼치기들의 수작이라지만, 그들은 드디어 기성 세대의 가장 큰 실패에 도전을 시작했
습니다. 통일 말입니다. 저는 열흘 뒤로 영장을 받아놓고 있어 참여하지 못하는 게 한스럽지
만..."
"벌써 거기까지..."
"네, 패배감과 허무주의에 빠진 기성 세대가 방치하고 있는 민족의 가장 큰 상처를 치유
라려는 겁니다."
드디어 그의 얼굴과 말투에 동요가 이는 걸 명훈이 은근한 쾌감가지 느끼며 그렇게 말했
을 때였다. 그가 다시 뒤틀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 웃어제친 그가 쿨룩거림과 함께 웃음을 멈추더니, 완연히 뒤틀린
말투로 돌아갔다.
"내가 언젠가 말한 얼치기의 특성 아직 기억해? 바로 그런 턱없는 서두름 말이야."
"?...."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큰 배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가장 먼전 날뛰는 것은
쥐새끼들이지. 노련한 선원은 쥐새끼들이 까닭 없이 갑판 위를 떼지어다니거나 돛대로 기어
오르는걸 보면 배가 침몰하고 잇음을 아라차린다는 거야. 사회도 그래. 한 사회가 침몰의 징
후를 보이면 가장 먼저 날듸는 것은 천박한 의사 의식이지. 바로 침몰하는 배의 쥐새끼들이
라구."
"그들은 결코 의사 의식으로 날뛰는 게 아닙니다."
"신념의 깊이도 없고 희생의 각오도 철저하지 않다. 과거에는 반성이 결여됐고 현재에는
인식이 결여됐으며 미래에는 통찰이 결여돼 있다. 현실에 대한 사적(私的)인 불만, 또는 변
혁에 따를 막연한 기대 이익이 행동의 동기이고, 변혁의 대의는 그저 그럴듯한 구실일 뿐이
다. 자란 것은 의식이 아니라 탐욕이며, 홀려 있는 것은 건설의 의지가 아니라 파괴의 욕망
이다― 대개 그런 게 의사 의식의 정표지."
"물론 너는 그런 의사 의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주장할지 모르지. 처음에는 의사
의식으로 출발하더라도 실패와 좌절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진정한 의식으로 자라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불행히도 의사 의식의 본질은 그렇지가 못해. 그것은 애초부터
의식이 아니고 불안감과 기대 의식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광기일 뿐이야. 곧 어떤 계기로 보
태려는 탐욕이 갑자기 부풀어 달아오르게 됐지만, 또한 언제든 지키려는 욕망으로 후퇴할
태세가 되어 있는 광기. 그리하여 기대이익이 남아 있는 한 의사의 미망 속에 끝없이
내닫지만, 한번 불안감이 일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또한 그 반동에 끝없이 양보하
게 되어 있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무력한 왕을 기어이 처형한 지 20년도 안 돼 철권의
황제를 환호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말이야."
"적어도 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엄격한 반성과 냉철한 인식과 깊이 있는 통찰을 갖추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 의사 의식은 결코 아닙니다."
명훈는 자신없으면서도 그렇게 뻗대었다. 그가 한층 뒤틀어진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그래? 그럼 과거와 미래는 그만두고 현재만이라도 따져보자. 우선 통일 문제부터. 너는
그들이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다지만, 도대체 그 냉철한 인식이란 게 어떤 거냐?"
"........"
갑자기 말문이 막힌 명훈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소주 한 잔을 털어넣은 그가 이죽거리듯
계속했다.
"찢겨진 국토의 아픔 같은 거 말이야? 나뉜 형제의 슬픔? 외세와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대
한 분노? 아니면 남과 북의 형제들이 얼싸안는 날의 감격? 이어진 국토가 우리에게 줄 축
복? 산업의 상호 보완성? 결집된 민족적 역량의 눈부신 성취?"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현실 인식의 중요한 내용은 되겠지요."
"아니야, 천만에. 그건 냉철한 인식이 아니고 얄팍한 감상이야. 통일을 염두에 둔 그들의
인식이 냉철함을 획득하려면 힘의 산술이라도 정리돼 있어야 해."
"힘의 산술?"
"그게 명확한 수치로는 나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가늠은 필요하지. 첫째로 우리가 계
산해야 될 것은 우리의 분단에 투입된 힘의 총량이야. 45년 당시 소련의 극동 전략과 미국
의 태평야 전략이 38도선에 균형을 이루게 될 때까지 그들이 각기 한반도에 투입한 힘, 그
리고 미국의 그늘에서만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우익 보수 세력과 소련식의 체제
아래서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좌익 급진 세력이 각기 분단을 지향해 투입한 힘의 총량. 둘
째로 계산할 것은 그 뒤 15년에 걸친 외부적·내부적 가감이야. 먼저 미국과 소련은 그 뒤
얼마를 더 투입하고 얼마를 빼내갔는지를 그들의 정책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계산해내
야 겠지. 그리고 다시 남북한의 이념적 응고 및 분단 고착을 기도하는 세력들의 강화와 민
족적 각성 및 통일 의지의 성장을 각기 가감 요인으로 삼아 현재의 분단을 유지하는 데 투
입되고 있는 민족 내부적 힘의 총량을 산출해야지. 셋째로 계산할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통일을 위해 최대한으로 집결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이야. 최악의 경우는 극좌·극우
와의 내전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대소, 대미전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힘
의 총량 말이야. 그래서―두번째 계산에서 산출해낸 힘의 총량과 세 번쨰 계산에세 산출해
낸 힘의 총량이 균형을 이룰 때에 나온 통일 논의라면 최소한의 현실 인식은 확보했다 할
만하지. 그런데 그 얼치기들이 과연 그런 초보적인 산술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어쪄면 그 이상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명훈은 자신없는 뻗대기를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독각 선생의 표정이 갑작스런 악의로 심
하게 일그러졌다.
"만약 그런 계산이 있은 뒤의 결론이 통일 운동으로의 전환이라면 그건 더욱 큰일이지.
두말할 것도 없이 엉터리 산술이니까. 첫째로 한반도의 분단에 투입된 외부적 힘의 가감 문
제에 있어서 내가 보기에 남북 어느 쪽도 감소는 확인되지 않아. 이를테면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미국이 방관했다고 해서 그것이 남한의 유지를 위한 미국의 투입이 감소됐다는 뜻은
아니지. 이승만 정권은 틀림없이 미국이 바란 이상으로 그들의 극동 정책에 협조적이었지만,
동시에 그 부패와 권위주의로 미국에게 부담을 준 것도 사실이야. 특히 이승만 하야를 전후
한 그들의 태도를 보면 단순한 부담감을 넘어 적극적인 배제 의지까지 느껴질 정도지. 모르
긴 해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4.19를 통해 오히려 강화됐을걸. 그렇다고 북쪽에
투입된 소련이나 중공의 힘이 드러날 만큼 감소한 것같은 조짐 또한 어디에도 없어. 결국
분단에 투입된 외부적 힘의 총량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내부적
인 분단 고착의 에너지도 마찬가지로 낙관적이 못 돼. 남과 북의 어느 쪽 기득권층도 특별
히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거나 각성의 징표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거든.
그럼 그 모든 걸 압도할 만큼 총일을 향한 민족적 의지나 역량의 성숙이 이루어진 것일
까. 아마도 그 얼치기들의 산술은 이 부분에 가장 큰 기대를 걸겠지만, 안됐게도 가장 큰 오
차는 거기서 나오겠지. 그 까닭은 내가 이미 말한 그 의사 의식에 있어. 물론 그 의사 의식
에도 순간적인 파괴의 에너지 정도는 뽑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공허한 에너지야. 경
우에 따라서는 좌우 양쪽의 극렬 분자와 내전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대미·대소전을 치러야
할지 모르는 통일 작업의 에너지원(源)으로 산입(算入)할 수는 결코 없는... 그걸 무슨 큰 힘
으로 믿고 일을 벌였다간 앞선 시대의 얼치기들이 해방 정국에서 6·25에 이르기까지 당한
것보다 훨씬 험한 꼴을 보게 될걸."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선생님의 이른바 내부적·외부적 에너지가 새로운 분단 고착의 논
리를 정립할 때까지 두 손 처매고 구경이나 하는 것이 겠군요."
"패장(敗將)은 군진(軍陳)을 논하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리고 젊은 너희들에겐 비참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오히려 기다림을 권하고 싶다. 더솔직히 말하면 서세동점이 시작된 이후
백 년 가까이나 준비되고, 필경에는 동족 상잔의 피반국으로 굳어진 분단의 벽을 그 총성이
멎은 지 8년도 안 돼 순수한 열정 하나만으로 허물려 드는 그 성급함을 경계하고 싶은 거
야.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말한 방관이나 막연한 기다림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의사
(擬似)의 미망에 휩쓸리고 있는 이 사회의 의식을 순화시켜 민족의 정신에 내재화·보편화
시켜야 한다. 진정으로 필요한 시기가 오면 죽음을 마다 않는 이념력으로 분출할 수 있도록.
그 다음은 남과 북이 은연중에 강요받고 있는 비정치적 예속부터 배제해야
한다. 이를테면 경제적 예속이나 문화적 예속 같은 것. 너희들은 그게 모두 정치와 한 끈으
로 연결돼 있어 정치적 매듭부터 풀어나가야 다른 것도 예속에서 풀려날 수 있으니라 단정
하지만, 내가 참담한 실패를 치르고 얻은 눈썰미로는 그렇지가 않다. 경제는 경제대로 문화
는 문화대로 각자의 메커니즘이 있어. 어쩌면 뜻박에도 헐거운 매듭을 그쪽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서 안으로는 서로 총칼을 맞대었던 극렬한 이해 당사자들이 늙어
죽거나 무력해져 자연 도태되고, 밖으로는 두 제국의 이해가 일치할 때 ―누가 알아? 미·
소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격퇴하지 못할 경력한 외계인이라도 나타나 줄지―를 기다리는 거
지..."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갈수록 그의 악의가 자조로 변하고 뒤틀린 목소리고 처음의 깐깐
함을 잃어가는 점이었다. 갑자기 그가 말끝을 흐리고 안주도 없는 소주를 두 잔이나 거푸
털어넣을 때는 희미한 자학의 낌새까지 느껴졌다. 그게 그의 논리에 빠져들어가던 명훈을
다시 반발하게 했다. 명훈은 스스로도 감탄할 만큼의 순발력으로 그의 약점인 성싶은 곳을
헤집었다.
"그 기다림의 부분이야말로... 산생님께서 급조하신 대안이지요? 오래 전부터 진득하게 모
색해온 길이 아니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된다 하다 보니 문윽 그럼 너의 답은 뭐냐,
하는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만든 건 아닙니까?"
그러자 그의 눈길에서 적의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모를 빛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이내
스러졌다. 이어 술꾼 특유의 퀭한 눈길로 돌아간 그가 모든 걸 툭툭 털어놓는다는 투로 말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아니지. 하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야. 금년 들어, 아니
어쩌면 그 신식 얼치기가 내게 무슨 낌새를 느끼고 내 몽롱한 의식 안을 기웃거리게 되면서
부터일 거야. 오늘처럼 옛날의 얼치기들이 찾아와 나를 지분거리면서 한층 모양을 갖추게
되고..."
"실은 두려울 뿐이지요? 젊은 세대의 앞 뒤 없는 열정이 이끌어낼 새로운 시대가 지난 시
대의 비관론과 허무주의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
명훈이 한층 더 악의의 강도를 높여보았다. 이번에도 그는 가볍게 어깨를 움질할 뿐 더는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하면― 네가 바로 본지도 모르지. 그토록 완강해 보이던 이승만 정권이 어이
없게 무너져내린 아침부터 나는 줄곧 불안한 기다림속에 지내왔다. 무언가 끔찍한 세월이
일찍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형태로 준비되고 있는 것 같은 예감, 우리가 다시 이승만 시
절을 향수로 되돌아볼 시대가 올 것 같은 예감, 우리가 다시 이승만 시절을 향수로 되돌아
볼 시대가 올 것 같은 예감... 4·19는 성공이나 완성이 아니라 보다 참혹한 반동의 시대를
예고하는 잛은 막간극에 불과하고, 그게 맛보여준 자유니 민주니 하는 것도 한번 우리 입천
장에 박히면 죽음 같은 고통 없이는 빼내지 못할 낚싯바늘을 감추고 있는 그럴듯한 미끼에
지나지 않은 듯한 예감... 아니, 이건 예감이 아니야. 인간의 의식이 망가지고 짓무를수록 어
떤 종류의 감각은 더 발달하는 법이지. 틀림없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어. 피비린내까지 섞
인 그 무엇이..."
사실 그 피비린내는 그로부터 여러 해 뒤 인혁당(人革黨)이나 통혁당(統革黨)때부터야 조
금씩 비치기 시작하지만, 그 말만으로 명훈의 기를 꺾어놓기에는 충분했다. 갑작스런 섬뜩함
에 잠시 멈칫해 있는 사이에 완연히 취한 술꾼으로 돌아간 목소리로 그가 불쑥 물었다.
"참, 영장이 나왔다구 했지? 입대가 언제야?"
"다음달 초순입니다."
"잘됐군, 참 잘됐어. 군소리 없이 다녀와. 지금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피난차야. 거기서 몸
을 감추고 가만히 살펴봐. 그래, 황가란 그 얼치기가 그랬던가, 기특하게도 쓰러 만한 말을
찾아냈더군.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 이 황량한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에 이제 어떤 일이 벌
어지는가를... 한 발 떨어져 차분히 바라보라구."
그때쯤에야 겨우 좀 전의 악의를 회복한 명훈이 대담하게 그를 비꼬았다.
"저는 인간이 보수적이 되는 게 무언가 지킬 게 있을 때라고 들었습니다마, 오늘은 좀 별
난 보수의 놀리를 들은 셈이군요."
"인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무언가 지킬 게 있는 법이야."
"처량한 목숨이라도..."
굳이 명훈의 악의를 못알아들은 척 담담하게 받는 그를 다시 그렇게 빈정거린 명훈이 느
닷없는 가학의 충동에 휘말려 덧붙였다.
"게다가 아저씨는 더 지킬 게 많지요. 소주값은 댈 만한 헌책방, 가끔씩 멱살은 잡혀도 따
로이 화대는 물지 않아도 되는 젊은 아주머니, 옛날의 얼치기들은 때를 기다리는 와룡 선생
쯤으로 착각해주고, 신식 얼치기도 곰삭은 이념가쯤으로 여겨 찾아와주는 이 그럴듯한 무
대..."
그날 자신이 왜 그렇게 공격적이고 악의에 차게 되었던지를 명훈은 뒷날까지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몇 시간 전 황에게서 받은 감동이 일부 살아 있었다고는 해도 극적으로 만난 아
버지의 옛 친구를 그렇게 모질게 몰아낼 만큼은 아니었다. 막연한 감으로만 의식 속을 떠도
는 자신의 상황 인식을 그가 명쾌하게 정리함으로써 은연중에 그런 자신에게 느끼던 혐오의
감정까지 그가 뒤집어쓰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명훈의 심리를 온전히 설명
하기에는 부족하다. 어쩌면 그 두 가지 이유에다 오래 부성(父性)에 굶주려온 명훈의 때아닌
응석이 더해져 그런 터무니없는 공격성과 악의로 나타난 것은 아닌지.
"그만 해!"
독각 선생이 낮지만 힘 실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힘주어 술병을 잡았다. 그때는 명
훈도 어지간히 취해 있었지만 그의 손아귀에 스스러질 듯 잡힌 술병이 본능적인 위기감을
건드려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도 독각 선생은 두어 번 거친 숨을 몰아쉬었을 뿐 발작에까지
는 이르지 않았다.
"역시 이동영의 아들이라 제법 눈도 밝고 말도 다를 줄 아는구나. 이제 일어나 가봐라. 그
리고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내게는 대를 이은 얼치기의 가계를 마음졸이며
구경하는 취미가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우리가 자주 만나 외로울 건 하나도 없어..."
이윽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취한 사람답지 않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차츰
흉맹한 광기를 뿜기 시작하는 그의 핏발선 눈길은 전보다 휠씬 높은 강도로 명훈의 위기감
을 자극했다. 거기다가 그때껏 그를 몰아댄 까닭 모를 공격 심리와 악의도 어느 정도는 충
족되었던지 명훈은 그쯤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술집을 나오는데 다시 독각 선생의 높고 공허한 웃음 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제49장
검은 별 아래서
방안의 이상한 기척 때문에 철은 새벽녘에야 빠져든 단잠에서 다시 깨어났다. 문틀이 겨
우 희끄무레할 뿐 방안은 아직 짙은 어둠으로 차 있었다.
철은 금세 쏟아지는 잠을 힘겹게 떨쳐내면서 무엇이 자신을 깨웠는지를 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먼저 전해온 것은 곁에 누운 어머니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었다. 이어 숨죽여
흐느끼다 내는 콧물 빨아들이는 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가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자극적
으로 그때껏 그의 의식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잠을 털어 냈다.
'어머니가 울고 계신다....'
겨우 생각이 거기에 이른 순간 잠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철
을 걷잡을 수 없는 울음 속에 빠지게 했다.
"엄마..."
철이 울며 와락 부둥켜안자 어머니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를 얼싸안으며 흐느낌과
함께 넋두리를 쏟아놓았다.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들. 너그들 거다 보내놓고 내가 우예 살꼬? 이것들을 띠(떼어)놓고
내가 어딜 간단 말꼬..."
그때 다시 선잠에서 깨어난 옥경이가 완연한 회울음으로 어머니에게 감겨들었다.
"엄마, 엄마아..."
몸을 돌인 어머니가 한 팔을 내어 옥경이를 받아안자 그들 세 식구는 한 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전날 밤만 해도 이웃 알까 두려워 소리 없는 흐느낌으로 대신해오던 울음을 드디어
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쏟아내었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돌아온 것은 가을도 깊어 가는 10월말의 어는 날이었다.
"에휴, 여름에 뒷골 산 팔았을 때 다문(겨우) 몇 만 환이라도 챙기올 거로. 어중간한 형광
씨 말만 믿고 큰 산 바랬다가 또 빈손이 되고 말았으니 이 일을 우예믄 좋겠노?"
어머니는 방안에 들어앉는 길로 그렇게 걱정부터 늘어놓았지만 철이와 옥경에게는 어머니
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실제에 있어서도 어머니가 돌아온 그 시
각부처 그들 남매는 지난 여덟 달의 온갖 고통에서 풀려났다. 빈손으로 왔다는 말과는 달리
어머니는 그날 저녁으로 아이들에게는 집 안이 그득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쌀 말과 찬거리를
들였고, 다음날은 학교까지 들러 그들 남매에게는 지옥 같던 공납금 독촉을 없게 해주었다.
"교인이라꼬 다 믿을 갓도 아이라. 영희 그년이 잽혀먹은 틀 대가리 이자가 6부가 뭐꼬?
7천 환 가지고 간 게 하나 만 환이 넘었뿌랬으이 인자 그틀대가리는 우리 끼 아이라. 글타
고 또다시 영남여객댁에 손 내밀 수도 없고, 참말로 이걸 우예믄 좋노?"
어머니는 또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도 그들 남매의 새 겨울옷을 한발씩 구해왔고, "인자
철이 니 중학은 우야노?" 하며 가망 없다는 한숨을 지으면서도 『4294년 중학 입시 예상 문
제집』을 사오기도 했다. 따라서 어머니의 그런 걱정과 넋두리에 진작부터 익숙해 있는 철
이와 옥경이에게는 그 모든 게 그저 들을 때만 좀 심각한 어머니의 입버릇쯤으로만 여겨졌
다.
그러다가 11월 초순 서울의 명훈 형이 느닷없이 찾아듦으로써 철의 행복한 유년은 꺼지기
전의 촛불처럼 마지막 불꽃으로 타올랐다. 어머니는 객지를 떠돌다가 입대를 며칠 앞두고
돌아온 맏아들을 위해 안간힘을 써, 집안에는 근년의 그 어느 때보다 먹을 것이 풍성했다.
또 명훈형은 명훈 형대로 그 동안 소흘했던 형제간의 정을 그 명칠 간에 다 만회하기도 작
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철이를 얼싸안고 돌았다. 철에게는 괴롭기 그지없었던 지난 여덟 달
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한 느낌뿐만 아니라, 앞날까지도 그대로 밝고 넉넉하고 따뜻하리란
믿음까지 준 그 며칠이었다.
하지만 형이 장정 집결 장소인 안광으로 떠나기 전날 밤부터 그 불꽃같이 빛나던
날들은 불안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날 낮 명훈형과 무언가를 어두운 얼굴로 의논하던
어머니는 밤이 되자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철은 처음 그게 3년이나 맏아들과 헤어져 있어
야 하는 게 서운해서인 것으로 짐작했지만 이내 그뿐만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자신을 보
는 형의 눈길에 단순한 우애나 석별의 정 이상의, 하염없는 연민 같은 게 서려 있음을 문득
느낀 까닭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날 밤늦도록 깊은 한숨을 쉬며 잠 못 이루던 형이 갑자기
자신을 와락 쓸어안으며 해준 말도 반드시 입대를 염두에 둔 당부 같지만은 않았다.
"철아, 사내는 굳세고 씩씩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울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지지 않아
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어둡고 괴로운 앞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풍기는
어조였다.
그러다가 그 예감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형이 떠나고 열흘쯤 뒤였다. 그 동안
도 무언가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듯 이곳저곳을 바삐 돌며 길을 찾던 어머니가 마침내 지쳤
다는 표정으로 철을 불러 말했다. 일제고사가 있어 일찍 돌아온 날이었다.
"철아, 할 수 없데이. 니하고 옥경이하고 한참만 고아원에 가 있거라. 소도 부벨(비빌) 언
덕이 있어야 한다꼬. 엄마가 그 동안 백방으로 애써 봤지만 도대체가 길이 없다."
"고아원요?"
철은 갑작스런 한기까지 느끼며 그렇게 되물었다. 고아원 아이들, 고아― 한 반에 두엇씩
은 끼여 있는 그 더럽고 깡마르고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표독스런 아이들, 여름철은 검은 광
목 팬티와 러닝 셔츤지 남방인지 모를 갈색 체크무늬의 시마즈천 윗도리로 나고, 겨울철은
낡고 몸에 맞지 않아 우스꽝스런 구제품 차림에다 갈라터진 발등이 내보이는 검정 고무신으
로 나는 그 아이 들, 교실에서 사소한 물건이 없어져도 일쑤 반 아이들의 의심적어하는 눈
길을 받게 되지만, 그 아이들 중 누구 하나만 건드려도 학교 안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벌
떼처럼 모여드는 그 무서운 패거리... 철은 자신이 그들 중에 하나가 된다는 게 아무래도 쉽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 엄마는 남의집살이라도 갈란다. 영희 그년 그렇게 달라 빼고(달아나고) 너그 형까
지 군대에 갔뿐 이 마당에 어예 요동을 쳐볼라 캐도 도리가 없다. 글치만 오래는 아일 끼다.
다문 얼매라도 모아 다시 한테 살 수 있으믄 곧 너그들 데리러 오마."
"그래도 어떻게 고아원엘..."
"아이다. 고생스럽기야 하겠지만 꼭 고아원이래야 된다. 인제 니는 곧 중학을 가야 될 낀
데 무신 재주로 그 비싼 입학금, 월사금을 대겠노? 글치만 거다 가면 중학교는 공으로 댕길
수가 있다. 꼭 너그 먹이고 입히는 거 몬 해서가 아이라. 아아 키운다는 데 그뿐이라믄, 굶
기든동 벗기든동 내가 끼고 있제, 거다는 안 보낸다."
철은 다시 그쪽에 기대를 걸고 슬쩍 어머니에게 상기시켜보았다. 모든 중요한 일에서 다
그렇듯 그때쯤은 어느새 명혜가 눈앞에 떠올라 슬픈 얼굴로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세계가
고아원의 담으로 갈라져 있어 한번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다시는 명혜가 사는 세계로 되
돌아나올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거는 개않다(괜찮다). 벌씨로 박장로님한테 얘기가 다 됐으께는. 니 알제? 교회 박장로
님. 그 어른이 바로 고아원 원장 아이가? 오히려 너한테는 남다르게 대해줄 끼다. 최집사네
남매도 거가 가 있는데 잘 지낸다 카드라."
그렇다면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은 암담하면서도 아직 절실한 슬
픔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 채 고아원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채비에 들었다. 어머니도 그때
까지는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학교에서 돌아와 그 말을 들은 옥경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분위기는
일시에 달라졌다. 어머니가 기어이 눈물을 닦아냈고, 철이도 갑자기 덮쳐온 아득한 슬픔의
정조를 못 이겨 눈물을 쏟았다.
그 뒤 일주일― 그들 세 식구는 쓸쓸한 이별의식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 동안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팔아 그들 남매와 먹고 즐기는 일에 썼다. 밥상은 끼니마다 쌀밥과
고기 반찬으로 푸짐했고, 철과 옥경의 용돈도 그 어느 때보다 퐁족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는 '국민학생 입장가(入場可)'란 팻말만 붙었으면 비싼 입장료를 겁내잖고 그들 남매를 극
장으로 데려갔고, 어떤 때는 정성들인 도시락으로 진 늪이나 백송 있는 데까지 세 식구만의
야유 외를 나서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긴 잔치 같은 일주일이었으나, 어른도 아이들도 의식
의 한 꺼풀만 벗기면 슬픔이 핏물처럼 괸 내출혈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날은 다
해 그들 세 식구는 그 마지막 밤을 새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남자 꼬리를 달았다고 셋 중에서 거장 먼저 눈물을 씻고 일어난 것은 철이었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우리가 뭐 죽을 곳에라도 가나요? 걱정 마세요. 우리 반의 김형선
이도 고아원 아이지만 작년에 우등상까지 받았어요. 잘 해볼게요."
철이가 어른처럼 그렇게 어머니에게 말해놓고 다시 옥경이를 달랬다.
"옥경아, 울지 마? 나하고 같이 가는데 뭘. 더구나 어머니도 그냥 밀양에 계실 거라 하시
잖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어머니도 볼 수 있을 거야. 일요일 예배 때 교회서 만나면
되니까."
그런 철이 대견스러워서였을까, 어머니의 흐느낌도 이내 잦아들었다. 눈물을 씻고 목소리
를 가다듬은 어머니가 몸을 일으키며 아직도 한 팔에 매달려 있는 옥경이를 다독였다.
"옳다. 철이 니 말이 맞다. 딴 거는 아무것도 변한 거 없다. 잠하고 밥먹는 거만 잠시 거
기서 한다고 행각 하면 되는 거라. 자, 그러이 고만 울고 일어나거라. 우리 찬송하고 기도나
드리자."
그러자 옥경이도 울음소리를 죽였다. 옥경이의 울음이 딸꾹질 비슷한 마른 울음으로 가라
앉기를 기다려 어머니가 둘에게 말했다.
"너그들 '태산을 넘어...'알제? 그부터 하자."
어머니가 그 말과 함께 음정이 맞지 않은 그녀 특유의 찬송가를 시작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그쯤에서 철이가 목소리를 합치고, 다시 옥경이도 훌쩍거림 섞어 따라 불렀다.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 넘치네...
찬송이 끝나자 어머니가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를 만들며 나직이 말햇다.
"그럼 기도하자."
찬송가 덕분인지 한층 마음이 가라앉은 철은 왠지 그 기도가 영험할 것 같은 기대가 들어
얼른 엎드렸다. 옥경이마저 엎드리기를 기다려 어머니가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 아부지, 지들을 불쌍히 여기시소. 오늘 죄 많은 딸은 아부지가 맡기신 짐을 감당
하지 못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냅니더. 글치만 다시 생각하믄 이것도 아부지 뜻이라 싶고,
견디야 할 죄갚음 같기도 합니더. 지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지만 실을 아부지께 맡기는
택이니께는, 아부니 우자든동 이 아이들 잘 보살펴주이소. 지가 다시 데리러 갈 때까지 어긋
지지 않게 길러주시고 건강하고 공부 잘하게 보살펴주시이소. 비는 이 딸은 아무 공로 없지
만 예수 님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빕니더..."
《여러 가지 고통스런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고아원행(行)은 내 정신에 몇 가지 깊은 흔
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삶이 특별한 노력이나 인내를 요구하
는 고비에 이를 때면 일쑤 빠져드는,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는 버릇이다.
우리가 고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피할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진 뒤 며칠은 어린 내게도
고뇌라 이름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픔과 번 민에 찬 나날이었다.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 같
지는 않지만, 아직 전쟁이 그친지 7년밖에 안 된 그때의 아이들에게 고아원이란 바로 인생
의 막장이란 말과 다를 것 없었다. 사회는 부모 있는 아이들도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할 만큼
보편적인 가난에 짓눌려 있는 데다 전쟁은 너무 과다한 비율로 고아를 떠맡긴 까닭이었다.
학급에 두엇씩은 있게 마련인 원생들의 굶주림과 헐벗음이 드러나는 외양, 그들에게 보내
지는 천대와 멸시, 기기다가 서양 동화 속의 고아원이 주는 어두운 인상들과 내 별난 상상
력이 겹치면 내가 갈 고아원은 말 그대로 끔직한 나락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는 벌써 완연하게 모양을 갖춘 내 첫사랑도 그 고뇌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나는 무
엇보다 그 읍내에서 그런 처지에 떨어져 내 베아드리체에게 참담한 꼴을 보여야 하는 게 견
딜 수 없이 괴로웠다. 지저분한 그 소화 과정과 배설을 상기시키는 게 두려워 그녀에게 먹
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꺼렸던 그때의 내 극단한 결벽으로 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며칠 어떻게든 우리 남매를 즐겁게 해주고 애쓰신 어머니에게는 죄스럽게도,
나는 몇 번인가 진지하게 가출을 꿈꾸었다. 그 봄 나는 이미 누나의 가출을 배웅해준 경험
이 있는 데다 그 얼마 전에는 입해하는 형으로부터 그 가출의 성공을 암시하는 말까지 들은
터였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미지(未知)가 차라리 명확한 나락보다는 훨씬 매혹적으로 비친
것도 나를 부추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출 쪽으로 내 마음이 끌리게 한 것은 그렇게 떠
나감으로써 내 베아드리체에게 나의 참담한 전락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결심은 장해도 가출을 막상 실행하기엔 열세 살의 나이는 너무 어렸으며, 집은 뿌
리 없이 떠돌았지만 나는 어머니와 형의 두터운 보호 밑에 자라난 아이였다. 아직 미지란
호기심이나 희망이 아니라 불안이나 공포의 동의어에 가까웠고, 삶도 구체적인 생산과 소비
의 고리로 전환시키기에는 너무 몽롱하고 추상적이었다. 요컨대 알라딘의 램프도 도깨비방
망이도 없이 낯선 곳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상상뿐이었던 것이다.
그럴 때, 곧 가출이란 대안이 며칠 밤 잠만 설치게 한 망상으로 끝장을 보고 고아원이 받
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 굳어져갈 때, 나를 위로하고 격려한 게 바로 삶의 객관화
였다. 삶의 어떤 순간을 현재에서 떼어내 연속된 흐름 위에 놓고, 그리하여 닥쳐올 시간에다
현재를 보완할 책임을 부여하는 것, 삶의 어떤 부분은 그때의 주관적인 인식과 판단을 보류
하고, 완결된 뒤의 총체적이고도 객관적인 조감과 평가에 기대를 거는 것 따위로― 바꾸어
말하면 삶의 전기화(傳記化)일 수도 있다. 뒷날 나는 어렵고 힘든 삶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지금 내 전기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솟는 전의와 약간은 전체하는 기분까지 느끼며 그 쓰라림과 서글픔을 달래
고 패배감이나 수치심을 이겨나갔다. 비록 뒷날처럼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 같은 삶의 객
환화 또는 전기화는 그때 그 고아원을 받아들이면서 습득하게 된 삶의 기교가 발전한 것임
에 틀림이 없다. 그 후로로 수없이 되풀이된 내 삶의 부침(浮沈)과 연관지어 돌이켜보면 나
는 유용하기 그지없는 정신적 도구를 일찍도 장만했던 셈이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를 괴롭
힐 꼴사나운 발버둥이나, 열에 아홉은 불행한 끝장을 보게 되어 있는 모험에 나를 맡김 없
이 그 새로운 운명 속으로 들어갔다...》
철은 뒷날 그 고아원과 관련지어 그런 술회를 한 적이 있다. 그게 참 말이라면 그의 조숙
은 다른 쪽으로도 제법 감탄할 만한 수준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의 추억을 따라가 보면, 그 '새로운 운명'으로의 들어섬이 그의 술회처럼 그렇게
전기적(傳記的)은 못 되었다. 그 새벽 어렵게 회복된 그들 세 식구의 냉정은 어머니 곁에서
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고아원으로 떠날 채비를 할 무렵 해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이와 옥경이가 가지고 떠날 책과 공책을 챙기고 있는데 어머니의 느닷없는 넋두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구 이 양반아, 어디 있노? 인제는 당신 한 몸뿐 아이라 내꺼지 죽었데이. 야들이 고
아원 가는 거는 당신하고 내하고 다 죽었다는 말 아이가 ? 몸이 살았다고 다 사는 기가?
시퍼렇게 눈뜨고도 자식새끼 고아 맨들믄 그게 바로 죽은 기제. 그래 인제 이래 되이 좋
나?
아니, 이래 안 하믄 혁명 안 되겠드나? 늙은 어마이 처자슥 다 안 자(잡아)먹고는 혁명이고
건국이고 안 되겠드나? 세상에 참말로 별난 혁명 다 봤데이. 참말로 몸서리 나는 건국이데
이..."
그때껏 잘 견디던 옥경이 다시 싸고 있던 책보따리를 버려두고 어머니에게 감기며 울먹였
다.
"엄마, 우리 정말로 고아원에 안 가면 안 돼? 우리 셋이 어디 멀리 가서 살면 안 돼?"
슬픔과 눈물도 전염되는 것일까, 철이도 그때껏의 장한 자제를 잃고 다시 샘솟는 눈물을
닦았다. 거시거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눈물 속에 한동안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옥경이의 말에
무슨 암시를 받은 듯 철이가 그때껏 생각해본 적도 없는 얘기를 불쑥 꺼냈다.
"어머니, 우리 차라리...돌내골로 내려가는 게 어때요? 접때 보니까... 일가들도 많고... 찾아
보면 논밭도 남은 게 있을 거라면 서요? 거기서 농사나 짓고 살죠 뭐."
"까짓 거, 찌끄레기(찌꺼기) 땅 남았다 캐봤자 얼마겠노? 게다가 농사를 지으이(지으니)어
예 짓겠노?"
어머니가 무심코 그렇게 받다가 갑자기 몸서리를 치며 옥경이를 떨치고 일어났다.
"아이다. 거기서는 안 된다. 천석지기 문전옥답이 있다 캐도 거다는 못간데이."
"왜요? 거긴 고향이잖아요?"
"글세, 거기는 무조건 안 된다 카이!"
갑자기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철의 눈물 젖은 두 눈과 마주 치가 한숨과 함께 목
소리를 낮추었다.
"니는 큰어무니(할머니)말 기억할지 몰따마는 돌내골은 우리가 가 살 땅이 아이라. 거기는
모두 우리가 누군동 잘 알고 또 산골이다. 전쟁만 터졌다 카믄 우리는 초다디미(첫머리)에
붙들리게 돼 있제. 어디 그뿐인가? 거기는 도시하고 달라 법도 없고 재판도 없다. 저 그가
급하믄 사람 생으로 땅에 묻어도 꼽다시(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게 그런 산골티기라. 철
이 니 내 말 알아듣겠제?"
이제는 철이도 그만한 나이는 됐다는 듯 전에 없이 설명조였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사
로잡히게 된 위기 의식에 힘을 빌렸는지 금세 냉정을 회복했다.
"내가 백지도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갑다. 하도 너그 아부지가 야속시러버서 글타. 그거는
그거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 궁리를 해야제."
어머니는 그 말과 함께 옥경이 싸다 만 책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 세 식구가 집을 나섰을 때는 좀 이른 등교 시간이었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 하늘
까지 흐려 첫눈이라도 흩뿌릴 것 같았다.
"철이 니 내 시킨 말 기억하고 있제? 꼭 그대로 하고... 부디 마음 단단히 먹거래이. 자,
그러믄 인제는 너끼리 가그라."
저만치 고아원이 보이는 길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철이와 옥경이의 등을 다독거주며
말했다. 고아원 안까지 따라가줄 수 없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표정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다시 옥경이를 돌봐야 한다― 그런 생각에 애써 마음을 다잡아먹은 철이 짐짓 흔들림
없는 어조를 지으며 도리어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잘할게요."
그리고 옥경이의 손을 잡으며 고아원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어머니의 발소리가 갑자
기 다급해지며 멀어졌다.
'어머니가 우시려고 저렇게 달려가시는 구나. 우리가 안 보이는 곳에서 마음껏 우리려
고...'
그렇게 헤아리자 철의 콧머리가 다시 시큰해졌다. 그러나 고아원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눈
물을 보이는 게 싫어 철은 속으로 이를 악물며 옥경의 손을 끌었다.
"옥경아, 걱정하지 마. 어쩌면 어머니가 돌내골 가고 없을 때보다 저기서 사는 게 더 나을
지 몰라."
철은 뒤돌아보는 대신 그 말로 자신과 옥경의 주의를 한꺼번에 저만치 있는 고아원 쪽으
로 쏠리게 했다. 그러나 옥경이는 어머니 쪽이 못내 궁금한지 대답은 않고 뒤만 연신 돌아
보았다. 철이 한층 어른스런 목소리를 지어 그런 옥경을 어르듯 말했다.
"뒤돌아보지 마. 이젠 너도 어린애가 아니잖아. 우리 저기서 잘 지내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자."
그러면서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고아원의 철문이 눈앞에 다가왔다. 갈릴리保育院―대문
위에 세운 철제 아치 앞면에 그렇게 씌어진 간판이 보였다. 그전에도 몇 번 지나치며 본 적
이 있건만 그날은 어쩐지 생판 처음 보는 느낌이었다.
"야, 너희들 어떻게 왔니?"
철이 쭈뻣거리는 옥경을 끌 듯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대문 왼 편의 부속 건물에서 낯익
은 얼굴 하나가 나오며 물었다. 정수언이란 교회 반사(班師)였다. 수요일 저녁 예배 뒤에 그
가 들려주는 재미난 얘기(나중에 알고 보니 '세계 명작 다이제스트'였다) 때문에 철이 홀
딱 반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거기서 나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저어― 조정인 집사님이 원장 선생님을 찾아뵈라고 해서..."
철은 반가움과 괴로움이 반반 섞인 어정쩡한 기분으로 그렇게 더듬거렸다.
"아, 그게 너희들이었니? 그럼 들어가 봐. 저쪽이야."
그가 얼굴 가득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손가락으로 원장 사택을 가리켰다. 원장인 박장로
는 마침 아침 식사 중이었다. 잠깐 안방에서 나와 그들 남매를 훑어본 뒤 다시 상머리로 돌
아가며 짤막하게 말했다.
"알았어. 가봐. 총무 선생님께 말씀드려."
철은 총무 선생이 누구인지,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왠지 그런 물음으로 박장로
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대로 물러났다. 어쩌면 대문께에서 만난 정수원 반사를
믿어서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총무 선생님? 지금 식당에 계셔. 여기서 좀 기다려, 모셔올게."
짐작대로 정수원은 철의 은근한 불안을 가볍게 해결해주었다. 그가 식당으로 간 뒤 철은
남매만 남겨진 실내를 찬찬해 둘러보았다. 두 칸방 정도나 될까, 천장도 벽도 바닥도 시멘트
미장으로만 마감질된 방안에는 커다란 나무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한쪽에 세워진 작은
서류함이 전부였다. 굳이 더 있다면 한쪽 벽에 걸린 대략 신문지만한 크기의 예수 수난상과
원아(院兒) 현황판 정도일까.
철이 그런 걸 하나하나 돌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아―철은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하마터면 그런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실제로도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옥경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사람의 얼굴 한쪽에 난,
화상이 남긴 듯싶은 끔찍한 흉터 때문이었다. 왼편 관자놀이에서부터 입 끝까지 살 한 겹을
베어내고 다리미로 누러버린 듯한 상처가 음산한 빛을 뿜으며 번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하얗게 질린 채 굳어 있는 그들 남매를 힐끗 쏘아보더니 책상 뒤의 의자에 털
썩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책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철이 그 소리에 찔금
하여 훔쳐보니 자반 길이 정도의 철사 같은 것이었다.
"총무 선생님이시다. 인사드려."
뒤따라 들어온 정수원의 목소리가 가벼운 마비 상태에 빠진 것 같은 철의 의식을 깨웠다.
철이 펄쩍 놀란 사람처럼 총무 쪽을 향해 꾸벅 절을 했다. 옥경이도 오들오들 떨 듯하고 섰
다가 얼른 머리를 숙였다. 총무는 한동안 말없이 그런 남매를 훑어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이름이 뭐냐?"
"저는 이인철이고... 쟤는 이옥경입니다."
이상스레 음산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움츠러든 철이 까닭 모르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철의 표준말 때문인지, 그의 성한 오른편 눈이 한번 번쩍하더니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자애는 바들로매실로 보내면 되고 여자애는 엘리사벳실로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 얘
들 나이도 그렇고 방 사정도 그렇고..."
정수원이 이 번에는 총무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다시 남매에
게 물었다.
"들고 있는 건 뭐야?"
"책과 옷입니다."
철은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더욱 움츠러들며 대답했다.
"옷은 안 돼!"
그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드디어 구실을 찾아냈다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덧붙였다.
"너희들 말이야. 정신차려. 여기 들어오면 모두 고아야. 부모도 가까운 친척도 없는 거야.
공연히 누가 있다, 누가 있다고 나불대서 딴 아이들 기죽이면 아주 혼날 줄 알아! 그리고
바깥에서 하던 엉뚱하고 돼먹잖은짓 여기서는 용서 없어. 내가 오늘부터 지켜볼 거야. 그럼
나가봐."
어지간한 철이도 곧 그들 남매를 다독여준 정수원이 없었더라면 그 길로 울며 어머니에게
로 달아났을 것이다. 그만큼 총무의 첫인상은 공포스러웠다.
"겁내지 마. 그렇게 나쁜 사람 아냐."
정수원은 총무실을 나오기 바쁘게 철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철은
그 말에 어떤 위로나 격려를 느끼기보단 그때껏 없었던 어둡고 새로운 종류의 불길한 예감
에 가슴이 무거워질 뿐이었다.
그 얼마 뒤 철은 한 방을 쓴 고등학생형의 미술책에서 우연히 고흔가 하는 사양 화가의
「검은 별 아래서」란 그림 하나를 본 적이 있다. 겨우 엽서크기도 안 되는 조악한 복사물
이고, 그림의 내용도 추상적이었지만 철은 왠지 얼른 그 그림을 이해할 것 같았다. 커다랗고
무성의하게 그려진 검은 별 아래 한 사내가 절망적으로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그림이었는
데― 놀랍게도 철은 그때 벌써 그 사내에게서 겨우 열세 살인 자신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
이다.
제 50장
한 종장, 또는 긴 막간의 시작
1961년 5월 16일
"원산 폭격 실시!"
함병장의 나직한 목소리에 황급히 머리를 발 앞에 처박으며 명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괴롭기야 마찬가지겠지만 기합으로 시작하면 일단 빳다는 없다는 게 육개월 남짓
의 쫄병 생활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그대로 듣는다. 니네들 요새 군대 생활 어떻게 하는 거야? 아주 군기들이 싹 빠졌어. 쫄
병들을 한 내무반에 놔두고 특명(特命) 고참이 밥까지 굶어야 하겠어? 제대 말년 우리가 취
사병 새끼들에게 굽신거리며 밥 얻으러 다녀야 하느냐구?"
함병장의 깐깐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쏟아지듯 들려왔다. 제대 특명을 받아 벌써부터 열외
인 고참 하나가 술에 취해 자다가 저녁 식사 시간을 놓친 게 그날 집합의 발단이었다. 그럴
때 누군가 밥을 타놓아야하는데 모두가 잊어버려 일이 났다.
"야, 니네들은 제대 특명 안 받을 줄 알아? 말년 고참 이렇게 괄시하는 거 아냐."
그 고참이 바로 아래 기수(基數)인 함병장 또래에게 한마디하자 함병장이 뒤늦게 취사반
에 달려가 밥을 얻어왔는데 그때 이미 내무반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러다가 30분도
안 돼 귀엣말로 전해온 것이 '25개월 이하 기재 창고 뒤로 집합' 이었다.
"니네들 어쩔래? 정말로 줄빳다 한번 맞고 정신차리겠어? 그러잖아도 우리 3내무반 요즈
음 말썽 많은 거 몰라?"
함병장이 다시 그렇게 이었다. 줄빳다란 말에 힘을 주는 게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도 기합으로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상
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공포였다.
여럿이서 함께 당하는 구타는 어째든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또 그런대로 공평해서 맞는
데는 어느 정도 단련된 명훈에게 그토록 두려울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당하게 되면
옆사람의 것까지 전염되어 그런지 바깥 사회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크기의 공포에 떨
게 되는 것이었다.
명훈의 우려는 오래잖아 현실로 나타났다. 흙바닥에 처박은 머리가 제대로 배겨오기도 전
에 몽둥이를 끌고 함병장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몽둥이가 이따금 땅에 박힌 돌과 부딪쳐 내는 소리가 짧고 탱글거리는 게 목질의 단단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작업용 곡괭이 자루가 아니면 야전 침대의 마후라(머플러)같았다.
"야야, 설교 필요 없어. 이 새깨들은 맞아야 정신차려, 며칠 손 안 댔더니 엉덩이가 말랑
말랑해진 모양이지."
쫄병들에게는 악명 높은 최상병이었다. 군번은 함병장과 비슷하지만 술로 두어 번 사단
영창을 들락거린 것 때문에 계급은 상병에서 굳어 있었다.
"모두 일어나. 그리고 엎드려 뻗쳐!"
최상병이 몽둥이를 고쳐 쥐며 뻑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들며 힐긋 보니 기재 창고 창 틈
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옆으로 받고 있는 그의 얼굴이 표독스런 악귀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구원이 왔다. 감작스런 군홧발 소리와 함께 선임 하사가 나타나 수선
스레 외쳤다.
"새끼들, 여기 모두 자빠져 있었구나. 뭐들 하는 거야?"
"기합 좀 주고 있습니다. 군기들이 싹 빠져서."
최상병의 한풀 꺾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임하사가 평소답지 않게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시끄러. 어서 빨리 내무반으로 돌아가!"
"그렇지만 교육할 건..."
"육갑 떨고 있네. 임마, 비상이란 말야, 비상. 어서 돌아가 군장 꾸리고 출동 대기해!"
그러자 한번 버텨보려던 최상병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몽둥이를 소리나게 내던지며 기함을
풀어주었다.
"모두 일어나 내무반으로 돌아가. 오늘 용꿈 꾼 줄 알아!"
명훈은 처음 선임하사가 비상이란 말을 했을 때, 그게 한번 해본 소린 줄 알았다. 사람 좋
은 그는 전에도 이따금 쫄명들이 기합받는 걸 보면 되도록 고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하사
관들의 관례를 깨고 이런저런 핑계로 구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이마에 흐르는 땀에 씻으며 내무반으로 들어 가던 명훈은 전투복
에 철모까지 쓴 중대장·소대장이 통로를 왔다갔다하는 걸보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전에도 비상 훈련은 몇 번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중대장·소대장의 얼굴이 그렇게까지 굳
어 있는 걸 보기는 처음이었다. 쫄병들뿐만 아니라 고참들까지도 움찔하는 눈치인 게 명훈
과 비슷한 느낌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긴장도 잠시, 내무반은 곧 군장 꾸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소청이 침상
에 쓰러지며 요란스런 소리를 내고 반합이 침상을 구르고, 서투른 신병들을 닦달하는 고참
들의 욕설이 끼여들었다. 그런 내무반의 분위기를 더욱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선임하사의
까닭 모를 흥분이었다.
"실전 상태와 똑같이 꾸리도록 해. 수통에 물도 채우고... 실탄도 지급 될 거야."
통로를 왔다갔다하며 떠들어대는 그에게서는 어떤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그렇지만 잘 단
련된 현역병들에게는 완전 군장을 꾸리는 데 그리 오랜 소동이 필요하지 않았다.
30분도 안 돼 군장 꾸리기를 마친 중대원들은 군화끈까지 깨끗하게 여민 채 침상 끝에 줄
지어 앉아 있었다.
"전원 현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대기하도록."
이것저것 까다로운 점검을 마친 중대장이 삼엄한 얼굴로 그런 지시를 하고 내무반을 나갈
때만 해도 내무반의 긴장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후속 지시 없이 한참이 지나자 분
위기는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곁에 사람끼리의 귀엣말이 수군거림으로 변하고, 다시 그
수군거림은 제법 대담한 잡담으로까지 번져갔다. 그러다가 선임하사까지 자리를 비울 때쯤
에서 내무반은 제법 불평의 기운까지 의문들로 떠들썩했다.
"이기 대체 우이 된 일고? 난데없이 출동이라 카이 어디로 출동한단말고?"
"출동이라믄 큰 훈련인디 큰 훈련을 사전 계획도 없이 마구 해두 되는 거여?"
듣고 보니 명훈도 그들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그 의문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다. 계급은 같은 일등병이라도 군번은 대 여섯 달 빨리 받은 옆자리의 권일병이
갑자기 편지 한 통을 내민 까닭이었다.
"이일병, 이것 말야, 깜박 잊었는데... 저녁떄 내가 받아뒀지. 집에서 온 편지 같은데..."
명훈이 얼른 받아 겉봉을 살펴보니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머니...' 명훈은 편지
를 뜯어보기도 전에 가슴부터 미어져왔다. 그녀가 벌이고 있는 힘겨운 싸움이 떠오르며
잠시 글씨가 안 보일 정도로 눈앞이 흐려졌다.
명훈이 보아라
그간 몸 성히 지내고 근무에도 충실하냐? 이 죄 많은 어미도 별고없이 잘 지낸다. 네가
저번에 보낸 편지는 어제사 받았다. 내가 주소를 옮겨 한 달이나 있다가 옛날 집에 들러보
니 네 편지가 와 있더구나. 편지 보고 한없이 울었다.
영희는 여기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 어디를 돌아다니며 남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걱정되고 겁난다. 전생에 무슨 악연이 꼈는지, 아니 하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토록
나를 시험하시는지. 이제야 돌아와봤자 다시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만, 그래도 종
적조차 알지 못하니 어미 가슴 찢어지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철이와 옥경이가 다녀갔다. 철이는 중학교에 잘 다니고 있고 옥경이도 오히
려 내가 끼고 있을 때보다 살이 올라 한 가닥 위로는 되었다.
참, 철이는 이번 중학 시험에 몇 등인가 해서 특대생이 되었다더라. 등록금 공납금이 면제
되었으니 먹여만 줄 수 있으면 내가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리 못 하니 안타깝다. 꼭 하려
고 들면 못 할 곳도 없으나 공연히 잘 있는 아이들 끌어내 저희 배곯리고 내 고생하느니보
단, 이렇게 지내며 한 푼이라도 모아 우리 모두 함께 모여 살 날을 기약해야 되지 않겠느
냐?
옛말에 자식 떼놓고 돌아서는 에미, 발자국마다 피가 괸다 했지만, 이제는 많이 진정되어
아이들을 보낼 때는 눈물을 안 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너도 이곳 일로는 너무 상심하지 말
고 네 몸이나 잘 간수해라. 아이들은 물론 이 어미도 네가 제대해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
린다. 그리고 오랜 기도 끝에 결정했는데 영희 일은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 나는 작년 겨울
밤 그 아이의 머리를 깎으면서 실은 머리카락을 끊은 게 아니라 부모 자식의 정을 끊었다.
거기다가 어린 동생들을 굶겨놓고 이것저것 쓸어 모아 달아난 것이니 진작부터 더 볼 게
없는 아이였다. 공연히 그 일로 속썩이지 말아라. 내게 자식은 이제 너희 삼남매뿐이다.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쓰니 너를 대한 듯 만단정회가 쏟아져 쓸데없이 편지가 길어졌다.
벌써 외출을 나왔더라니 첫 휴가도 멀지 않겠구나. 휴가 맞거든 지체 없이 어미에게로 달려
오너라. 그때는 박장로님께 말씀드려 아이들도 불러내고 함께 모여 소회를 풀어보자. 그럼
이만 쓴다. 부디 몸조심하여라.
4294년 5월 11일
죄 많은 어미가 쓴다
편지지 석 장을 앞뒤로 채운 어머니의 편지는 그랬다. 지난번 첫 외출에서 돌아와 쓴 편
지를 며칠 전에야 받고 답장을 쓴 듯했다.
홀로 남의집살이를 하게 되니 외로움을 타는지 전에 없이 긴 편지였다. 명훈은 마흔 훨씬
넘겨 평생에 해본 적이 없는 식모살이를 나선 어머니가 그만큼이라도 꿋꿋이 버티는 게 다
행스럽게 여겨지면서 한 편으로는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특별한 신념이나 열정도
없이 공연히 들떠 지낸 그전 한 해 때문이었다. 어차피 겉모양뿐인 대학 따위는 집어치우고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면 어머니와 동생들이 그런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
다.
혹시 남이 볼까 염려해서 어머니는 빙빙 둘러 말하고 있었지만 철이와 옥경이가 간 곳은
고아원이었다.
"아무래도 이래가지고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아이들은 연말쯤 고아원에 였고(넣고), 나
는 나대로 벌이를 쪼매씩이라도 모아야제. 그래가지고 니 제대할 때까지 모도 고생하며 힘
을 키우는 게라. 더구나 철이는 내년에 중학을 가야 하는데 이대로는 당최 자신 없다. 철이
중학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그 길밖에 없다."
입대 전 밀양을 들렀을 때 어머니는 초췌한 얼굴로 한숨 섞어 말했다. 그때 어머니는 그
고아원이 그녀가 나가는 교회의 장로가 경영하는 곳이며 설비 좋고 아이들 잘 거두기로 이
름난 곳이라는 걸 여러번 강조했지만 고아원인 이상 뻔했다. 명훈은 언젠가 우연히 들여다
본 서울 변두리의 고아원을 떠올리며 갑자기 시큰해지는 콧마루를 감싸쥐고 마른 코를 풀었
다. 건물은 번듯하고 설비도 그럴듯했지만 그곳의 아이들이 걸치고 있던 누더기와 받아들고
있던 음식은 구경하기에도 눈물겨웠었다. 더군다나 끊임없이 눈치를 보던 그 핏기 없는 얼
굴들― 그런데 이제 철이와 옥경이가 그 속에 끼여든 것이었다. 그러나 철이와 옥경이 못지
않게 명훈을 괴롭혀오는 것은 영희의 일이었다.
지난달의 첫 외출 때 명훈은 모든 걸 제쳐두고 영희부터 먼저 찾아갔다. 괴롭고 힘든 신
병(新兵) 생활이 혈연의 따뜻한 정을 그리게 한 탓이었는데, 명훈은 찾아간 영희의 일터에서
뜻밖의 일을 당했다. 영희를 찾는 그에게 주인 남자가 덤벼들어 멱살이라도 잡을 듯하며 거
칠게 물었다.
"이거 무스그 수작이야? 솔지기히 말하라우. 무얼 살피러 왔네?"
그러고 보니 그토록 친절하던 젊은이의 눈길에도 예사 아닌 적의가 번쩍이고 있었다. 명
훈은 직감적으로 영희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큰일을 저질렀음을 알았다. 마구잡이로 퍼부어
대는 주인 남자의 욕설에 불끈 치솟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조용히 까닭을 알아보았다.
"그 간나, 돈을 훔쳐 내뺐디. 것두 자그마치 삼만 환씩이나..."
주인 남자는 그렇게 씩씩거리며 말하고 그때껏 보관하고 있던 쪽지를 꺼내 명훈의 코앞에
흔들어대며 덧붙였다.
"이것이 장난하는 거가 뭐이가.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엇다 숨겨놓고 우리 눈
치 살펴보러 오지 않아서?"
아저씨,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 돈이 꼭 쓸 데가 있어 허락 없이 빌려갑니다. 뒷날 성공하
면 꼭 갚겠어요. 용서해주세요. 영희 씀.
급하게 흘려써도 눈에 익은 영희의 필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명훈은 먼저 자신의 외
출이 입대 5개월 만에 하는 첫 외출인 점을 들어 그의 의심을 푼 뒤에 오히려 자신이 궁굼
한 점을 캐물어 보았다. 그에게도 영희의 그 같은 행동은 너무도 뜻밖인 까닭이었다.
"내가 어뜨케 아네? 그래도 우리는 저를 믿었는데... 성깔은 있어두 억시고 부지런한 게...
정말 알고도 모를 게 사람 일이디."
이윽고 주인 남자는 약간 넋두리조가 되어 그렇게 말하고 한숨까지 곁들였다. 뭔가 아쉬
운 데가 있어 영희가 더욱 괘씸하다는 투였다.
"자꾸 말해 뭐 해요? 그까짓 기집에..."
곁에서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내뱉는 젊은 쪽의 말투에도 단순한 금전의 손실에서 온 분노
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그 바람에 명훈은 서울에 있는 몇 안 되는 친척집을 모조리 돌고 마지막에 들러본 모니카
네 집에는 모니카 자신이 집을 나가버리고 없어 영희의 행방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귀중한 첫 외출 하루를 그 일로 몽땅 날려버린 뒤, 혹시나 싶어 어머니에게 편지로 영희소
식을 물어본 것인데 역시 그곳에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어디로 갔단 말인가...'
거기서 명훈은 다시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영희의 간 곳과 아울러 그녀가 그 돈을 훔친
까닭을 헤아려보았다. 그녀가 돈을 훔칠 무렵이 대학 입시 철이라 그쪽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었으나, 그것도 아닌 듯했다. 영희의 성격으로 보아 그렇게라도 여대생이 되었다면 보아란
듯이 면회라도 왔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가 좋지 않은 쪽뿐이
었다. 나쁜 남자의 꾐에 빠져서...와 같은.
동생들 때문에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던 명훈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은 갑작스런 비상
해제 소동 때문이었다.
"비상 해제. 각자 관물 병기 원위치하고 취침 준비!"
대대 본부 쪽이 좀 웅성거리는 것 같더니 무엇 때문인가 허둥거리며 달려온 선임하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야간 출동이 달가울 리는 없지만 그래도 완전 군장까지 꾸리고 대기하고
있던 끝이라 그런지 사병들이 툴툴거리며 군화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처 그 군화를
벗기도 전이었다.
내무반 출입문을 걷어차듯 들어온 중대장이 빽 고함을 질렀다.
"동작 그만!"
그리고 선임하사를 성난 눈길로 노려보더니 다시 한층 소리를 높였다.
"아직 비상이 발령중이다. 전원 대기하라."
사병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 수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라는 듯 선임하사
가 혼란된 표정으로 그런 중대장을 쳐다보았다. 중대장이 찬바람 도는 얼굴로 선임하사에게
지시했다.
"선임하사도 쓸데없이 이동하지 말고 여기 앉아 병력이나 장악하고 있으시오."
"그럼 ××연대장님의 명령은..."
"글세 이 출동은 작명(作命:작전 명령)에 딸라 준비된 것이오. 아무리 상관이라도 지휘 계
통이 다른 연대장의 전화 한 통으로 취소될 순 없소."
"그래도 괜찮을까요? 틀림없이 사단장님 명령이라고 못박았는데..."
"어쨌든 계통을 밟은 작명 취소의 전통(電通) 없이는 비상을 풀 수 없소. 출동 준비 태세
를 유지시키고 영외 거주자도 계속해 영내 대기하도록 하시오."
듣고 있던 사병들이 있음을 의식했는지 중대장은 한 충 더 확고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
고 내무반을 나가버렸다. 그쯤 되자 선임하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명령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못내 꺼림칙 한지 볼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금방 병력을 해산하라고 전화 지시가 있었는데, 이쪽
은 또 그대로 대기하라니..."
그 말에 간이 커진 고참 몇 명이 불평 섞어 지휘부의 상황을 떠보았다.
"선임하사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작전 명령이 출동 직전에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
수도 있습니까?"
"누가 아니래? 나도 전쟁 끝나고는 첨이야."
"무슨 일인데요?"
"사단 사령 실에서는 분명히 병력 해산 지시가 있었는데, 이쪽에서는 지휘 계통을 밟은
작명 취소가 아니라고 버티는 거야. 대대장님은 출동 시간이 됐는데도 뵈지 않고..."
"혹시 괴로군놈들이라도 쳐내려온 거 아닙니까?"
"임마, 그럼 더욱 출동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지. 어째든 이만 됐어. 중대장님 말씀대로 해.
모두 언제든 발령만 되면 달려나갈 준비 갖추고 대기하도록."
선임하사는 더 이상 사병들에게 지휘부의 혼란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지 그쯤
에서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나 마음속은 여전히 복잡한지 침상 한구석에 털썩 얹으며 수통
을 빼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이마를 심하게 찡그리는 게 수통에 소주라도 채워둔 듯했다.
풀었던 군화끈을 졸라매고 건성으로 군장을 점검한는 것도 잠시, 사병들에는 다시 방치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한동안 흘러갔다. 그사이 밤 열한시가 넘어서인지 하나둘 조는 사
병이생기고, 배짱 좋은 고참들은 아예 철모를 벗고 침상에 드러눕기도 했다. 이따금 중대장
이나 작전과장이 초조한 얼굴로 내무반을 둘러보러 왔지만 사병들의 그런 자세까지 나무라
지는 않았다.
갑자기 헌병 백차에서 나는 것인 듯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몇 대의 차량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에 내무반이 다시 긴장된 것은 11시 30분경이었다.
"무슨 일이야?"
수통 속의 술을 찔금찔금 마셔대던 선임하사가 내무반을 나가고 뒤이어 제대 말년의 고참
두엇이 따라 나갔다. 한참 뒤에 돌아온 고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고받았다.
"이거 오늘 정말로 무슨 일 난 거 아냐? 이 오밤중에 백바가지(헌병)가 한차라니."
"뒤따라오는 차는 사단 1호차 같던데. 초소 외등불빛에 번쩍번쩍하는게 틀림없이 별판이
었어."
"그럼 사단장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무슨 일이 난 거야. 근데 ― 무슨 일일까..."
그때 가까운 행정반 쪽에서 한껏 소리 높여 붙이는 경례의 구호 소리가 내무반까지 들려
왔다. 꼭 사단장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대단한 사람이 온 것만은 들려왔다. 그 바람에 잠시
풀려 있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들며 내무반 안이 조용해졌다.
그로부터 한 3분쯤이나 됐을까, 이번에는 여러 사람의 군홧발 소리가 요란하게 가까워지
더니 막사 문께에서 멈춰서며 누군가 위엄 있게 말했다.
"어서 병력 해산시켜. 영외 거주자는 주번사관 외에 모두 귀가시키고, 돌아오면서 다시 확
인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각하."
그런 대답과 함께 낯색까지 하얗게 질려 내무반으로 뛰어든 것은 한 반시간 전까지만 해
도 출동 태세 유지를 되풀이 확인하던 중대장있다.
"비상 해제! 모두 군장을 풀고 취침 준비에 들어간다. 모든 관물과 병기는 제자리에 정돈
하도록. 실시!"
중대장은 바깥 사람에게 들으라는 듯 전에 없이 쉿소리를 냈다. 그러나 바깥의 군홧발 소
리는 그의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이웃 막사로 옮겨지고 있었다.
"참말로 쫄빙 더러웟 몬 해묵겠네. 연병장을 빡빡 기든동 잠을 자든동 우예 된 긴지 셈판
이나 알아야제. 야, 이일빙 이것쯤 풀어 제자리에 갖다놔라."
중대장이 나가자마자 김병장이 소총을 소리나게 관물대에 기대 세우며 자신의 배낭을 명
훈에게 밀어보냈다. 명훈이 당번처럼 맡아 시중을 드는 말년 고참 중의 하나였다. 이 촌놈의
새끼가, 하고 내뱉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명훈은 자신의 배낭을 제쳐놓고 그의 배낭부터
풀어 관물 정돈을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이래저래 시달려서인지 그날 따라 유달리 피로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었을까...'
명훈이 잠시라도 그쪽으로 생각을 돌린 것은 열두시 무렵 소등이 된 뒤였다. 형식적인 비
상 훈련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예고되었던 훈련 출동이 그 직전에 취소된 것은 신병인 명훈
에게도 좀 이상했다.
그것도 그 취소를 놓고 한 시간을 넘게 옥신각신하다가 사단장이 직접 나타나서야 결말이
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그러나 그 의문에 비슷하게라도 답을 찾는 것은 그때의 명훈에게는 능력 밖이었다. 눕기
바쁘게 짓눌러오는 눈시울의 무게를 못 이겨 명훈은 곧 신병의 단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그날 밤은 이 땅의 역사 속에서 못지 않게 명훈 개인에게도 유별난 밤이었다. 언
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지 두어 시간이나 되었을까, 명훈은 꿈결인가 싶게 중
대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상, 기상! 모두 일어나!"
명훈이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 몸을 일으켜 소리나는 쪽을 보니 정말로 중대장이
서있었다. 사단 BOQ로 가 자는 줄 알았던 그가 비상 때의 복장 그대로 다시 나타난 것이었
다.
"불침번만 빼고 모두 단독 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
중대장이 다시 악을 쓰듯 외쳤다. 전날 밤 같은 그 소등 끝에도 잠들기 전에 몇 잔 걸쳤
던지 함병장이 술기운 남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씨팔, 이거 새벽 두시잖아? 무슨 놈의 비상이 밤새껏 오락가락이야?"
그러자 마침 알맞은 시범 케이스를 찾았다는 듯 중대장이 대뜸 침상으로 뛰어올라 아직도
앉은 채 뭉그적거리는 함병장의 가슴패기를 걷어찼다. 일부러 소리나게 찼는지 쿵 하는 소
리와 함께 함병장이 벌렁 자빠졌다. 중대장은 침상 마룻바닥을 군홧발로 요란스레 굴러 한
번 더 내무반의 주의를 자기에게로 끈 뒤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고참이라는 새끼가 이 모양이니... 안 되겠어. 모두 단독 군장으로 대대 연병장에 선착순
집합!"
그리고는 문짝을 걷어차듯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다급해진 사병들이 화닥닥거리며 단독
군장에 들어갔다. 선잠에서 깨어난 데다 선착순이란 말에 서두르느라 간밤과 비교할 수 없
는 소동이 다시 한바탕 벌어졌다.
간신히 단독 군장을 차린 명훈이 헐떡이며 연병장으로 내려가니 연병장에는 벌써 스무남
은 명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저만치 어둠 속에서 야전 플래시를 번쩍이며 서 있던 중대
장이 차갑게 말했다.
"선두 세 명 빼고 모두 엎드려뻗쳐!"
그 바람에 줄이 갑자기 배나 늘어나며 주르르 뒤로 밀렸다. 명훈은 하마터면 자신의 소총
에 걸려 엎어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가누어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오월도 반이나 지났
건만 새벽 두시의 연병장 바닥은 차고 축축했다.
다행히도 중대장의 목적은 기합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지간히 모였다 싶자
중대원들을 이르켜세우고 그제서야 어슬렁거리며 연병장으로 내려오는 선임하사에게 인원
파악을 지시했다. 말이 중대일뿐 예비 사단이라 병력은 이런저런 열외와 휴가를 빼면 완편
(完編)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됐다.
중대장은 거기서 다시 특명 고참과 환자를 열외로 빼고 좀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사단의 정예 부대로 지목돼 특별히 사령부의 호출을 받았다. 모두 사단 직할대
연병장으로 구보!"
그리고 스스로 앞장서서 느린 구보를 시작했다. 대대를 벗어나 사단 영내 도로로 접어들
무렵 어디선가 1소대장 이 소위가 나타나 중대장 대신 선두를 이끌었다.
그들이 직할대 연병장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명 남짓의 병력이 모여 웅성거리
고 있었다. 사단 직할대 병력인 듯싶었다. 중대장이 그속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작업모 차림
의 소령에게 도착 보고를 하자 그 소령은 그들을 받아들여 전 병력을 4개소대로 나누었다.
명훈의 부대는 좀 인원이 넘치는 대로한 소대로 편성되었다.
아직 출동 목적은 몰랐지만, 그런 비상 편제부터가 자다가 끌려나온 사병들에게는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그 위기감을 더한 게 사단 수송부에서 전조등만 켠 채 몰려든
병력 수송용 트럭이었다. 밤이 깊고 어두워서 그런지 엔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며 까닭
모를 불안을 자아냈다.
열등감이랄까 자격지심이랄까, 명훈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화의 감정이 대단찮은 것이리라
단정하고 있었다. 어쩌다 신산스런 인생의 한 굽이를 잠시 함께 걷게 되었을 뿐, 한 친구로
느끼기에는 여러 가지로 거리가 있는 황이었다. 명훈으로서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의 정
신적인 우월도 그렇지만, 특히 지나칠 정도의 정치적 지향은 적지 않은 경원까지 품게 했다.
그런데 그 황이 지난 주 목요일 느닷없이 면회를 왔다. 또 무슨 일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더 들뜨고 열이 올라 있었다.
"마침 구파발 쪽에서 모임이 있어 왔다가, 문즉 네 편지가 떠올라..."
사단 면회실로 불려나온 명훈에게 황은 솔직하게 면회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밝히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입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면회를 나간 명훈은 그저 그가 반갑고 고
맙기만 했다.
황이 그 무렵 열중해 있는 일은 오래잖아 밝혀졌다.
"거 뭐냐, 통일촉성동맹인가 뭔가는 어떻게 됐어?"
군대 면회실에서 흔히 주고받게 마련인 이런저런 얘기 끝에 바깥 세계, 특히 그 무렵의
대학 분위기가 궁금해진 명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황은 진작부터 그런 화제를 기다렸
다는 듯 대뜸 신이 나 떠들었다.
"아, 민족통일연맹? 그거야 버얼써 결성됐지. 아마 네가 입대하기도 전일걸. 우리 학교에
서 시작하자 다른 대학에서도 줄줄이 뒤를 이었어. 지금도 도(道)·시(市) 지부까지 결성하
고 점점 그 조직을 확대중이지. 오래잖아 범민족적인조직으로 자리잡아 실효성 있는 통일
운동의 주체로 활약할 거다. 실은 오늘 모임도 그 때문이었지."
황은 그곳이 군대 면회실이라는 걸 아주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명훈은 그곳에 근무하는
고참에게 눈치가 보였으나, 그보다는 바깥 세상에 대한 궁금함이 앞섰다. 문득 며칠 전 행정
반에서 주워 읽은 날짜 지난 신문의 제목을 떠올리며 명훈은 다시 물었다.
"그럼 남북 학생 회담 얘기도 거기서 낸 거야?"
"물론이지. 요즈음은 악법(惡法) 개폐 운동이나 2대 협정 반대 운동보다 그쪽에 더 많은
힘들을 쏟구 있어."
"2대 협정?"
"한미 행정 협정과 경제 협정 말이야. 장면 정권이 획책한 대미(對美) 불평등 협정인데 우
리는 혁신 세력과 손잡고 반대 운동을 이르켰지. 그러나 신식민지적 종속을 저지하는 것도
중요한 건 통일 그 자체 아니겠어? 그래서 남북 학생 회담 쪽으로 전환한 거야. 두고봐, 이
제 곧 무언가 손에 잡히는 통일 방안이 나올 거야. 남북의 청년 학도가 이마를 맞대고 마주
앉는 것도 며칠 안 남었어. 이달 29일이야."
그러는 황의 눈길에서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더 세찬 빛줄기가 뿜어져나오는 것 같았
다. 하지만 명훈에게는 불길하게만 느껴지는 빛줄기였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특히 분단 체제 아래서만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기성 세대가 가만
히 있겠어? 언제 신문인가에서 보니 무슨 경북연맹인가 하는 단체의 자금 모금을 경찰이 수
사한다고 났던데. 그게 바로 남북 학생 회담을 지원할 자금이라지, 아마."
"알아, 그거 민족통일경북연맹 얘기야. 별문제 없어. 물론 분단 고착화를 기도하는 극우
반동 세력이야 기를 쓰고 막아보려 하겠지. 하지만 이건 대세야. 민족적 결의고 열망이라구.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는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
이 얼마나 감격적인 외침이야? 기성 세대에서 누가, 언제 이런 소릴 해본 적이 있어? 까짓
한줌도 안 되는 반동 부스러기들, 용을 쓰고 짖어대봤자지. 기세로 밀어붙여도 그쯤이야...
낼모레 12일에는 남북 학생 회담 환영(지지)대회를 거창하게 열기로 되어 있어, 10만 정도의
군중 동원은 어렵지 않을 거야. 그걸 보면 좀 정신을 차리겠지."
황이 너무도 자신있게 떠드는 게 더욱 불안해 명훈은 마음에 없는 반발을 해보았다.
"한줌도 안 되는 반동 부스러기라구?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만은 없을 텐데. 군대가 있
고, 경찰이 있고, 자동 화기가 있고, 장갑차가 있는데... 게다가 군종이란 게 과연 그렇게 믿
을 만한 거야? 10만 아니라 100만을 모은다구 그 군중만 가지구 뭐가 될까? 어릴 때 기억
안 나? 남로당 말이야. 그 사람들이 군중 못 모아 그쪽이 났어? 더군다나 그때는 경찰 3만
에 국방 경비대 10만밖에 없었다던데..."
"아하, 아하, 우리 이명훈씨가 영광스런 육군하고도 일등병이란 걸 내가 깜박 잊었군. 70
만 대군을 전우로 가진... 하지만 민주 사회에서 군대는 뭐고, 경찰은 뭐야? 모두가 시민의
일부 아냐? 그런데 그들이 꼭 반동의 총칼로만 기능한다는 단정은 어디서 나왔지? 특히 군
대는 너도 보지 않았어? 그들을 동원한 건 독재 정권이었지만, 과연 그들이 충성스럽게 그
독재 정권을 지켜주겠어?
그리고 남로당도 그래. 그들의 이념 활동과 우리의 민족 운동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건 아무래도 좀 심한 것 같지 않아? 그때 남로당이 얼마만한 군중을 동원했건, 그들이 휘두
른 것은 기껏해야 반쪼가리 이념일 뿐이었어. 그러나 우리는 아냐. 우리는 이쪽저쪽을 초월
한, 총체적 이념으로 이 일을 밀고 있어.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의 단호한 결의와 처절한 열
망을 실현시켜가고 있는 거라구. 그런데 말이야―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너란 친구야. 너는
당연히 이 통일 운동의 제 1차적 수혜자가될 텐데도 언제나 회의적이고 비판적이거든. 네
불행한 가족사적 체험 탓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 안 되는 구석이 있어. 김가 그
자식이 뿌리고 간 비관주의 내지 허무주의의 독물이 뼛속 깊이 스몄다 쳐도 이해 안 되
는..."
그러자 불쑥 독각 선생이 명훈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가 말한 '힘의 산술' 같은 것은 틀
림없이 황에게 유력한 반박이 될 수 있었다. 또 미국에 가 있는 김형과 그가 말한 테르미도
르 반동도 떠올려보았다. 그 정확한 의미가 역사적 배경은 잘 모르지만 그걸 황에게 상기시
켜주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명훈은 결국은 몰리고 말 논쟁을 쓸데없
이 키우는 게 싫어 그걸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황은 입대 6개월만에 처음 찾아
온 면회객이었다. 그런데도 황은 한참이나 더 자신이 들뜬 논리로 명훈을 몰아붙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고된 신병 생활을 하고 있는 명훈에게 면회 온 처지란 걸 알고
있다는 표시는 갖다 먹은 빵과 음료수의 값을 치를 때뿐이었다. 작별 인사조차 명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에 가까웠다.
"두고 봐. 4·19로 시작된 우리의 혁명은 금년 5월 29일로 한 단계 도약하게 될 거다. 잘
있어. 다음에 면회 올 때는 평양 소식을 가져오지."
명훈이 까닭 모를 쓸쓸함까지 느끼며 황을 떠올리고 있는데 다시 선임하사가 무어라고 대
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 출동이 꼭 그런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쯤은 누군가 통일 얘기를 꺼낼 때
도 되지 않았습니까?"
듣다 못한 구건상병이 대드는 기색 없이 선임하사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선임하사는 버
럭 소리를 질렀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너도 대학물 좀 먹었다구 그 새끼들을 편드는 거야? 좋다. 통일,
물론 해야지. 그렇지만 한번 물어보자. 어째서 그 새끼들 통일은 언제나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고 자빠지는 통일이냐? 간 쓸개 다 빼주고 날 잡아잡수 하는
통일이냐구? 손뼉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는데 통일이 즈이 혼자서 되는 거야? 아무리
×꼴려도 벌려주는 가랑이 없으면 용두질밖에 더 되겠어?"
할말이 없다기보단 국방 경비대 시절부터의 노병(老兵)인 선임하사의 험한 기세에 눌렸는
지 권상병은 더 대꾸가 없었다.
그 사이 차는 벌써 수색을 지나고 있었다. 새벽 3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어느새 출발 때
의 긴장이 풀어졌는지 차 안쪽에서 누군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코고는 새끼가 누구야? 깨워!"
선임하사가 카빈 개머리로 적재함 바닥을 치며 턱없이 높은 목소리로 악을 썼다. 권상병
이 말대꾸를 안 한 것은 역시 잘한 일 같았다.
하지만 그날 밤 선임하사가 사병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는 더 악을 쓸 필요가 없었다.
차가 조용한 가운제도 왠지 수런거리는 듯한 두심으로 접어든 지 얼마 안 돼서였다. 뚝두둑,
뚝뚝, 뚝뚝뚝뚝뚝... 갑자기 고요한 밤하늘을 찢어오는 용산 쪽(실은 한강 쪽)에서 요란한 총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사병들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움찔움찔하며 자세를 바
로 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선임하사가 그 소리와 함께 일어나더니 운전석 뒤쪽 창 곁으로 선임 탑승자인 2소대장과
높지 않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주고받았다. 총소리에 관한 물임인 것 같았으나 소대장도 달
리는 차 안에 앚았기로는 마찬가지여서인지 신통한 대답을 주지는 못한 듯했다.
"모두 안정 장치 잠그고 탄 장을 끼워. 제 위치에서 앉은 채 사주 경계!"
제자리로 돌아온 선임하사는 그렇게 명령을 전할 뿐 상황 설명은 없었다. 그 총소리가 무
슨 자극을 준 것일까. 명훈이 비로소 그날 밤의 사태와 연관지어 중령인 이모부를 떠올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지난번 외박 때, 영희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이모님댁을 찾자 작년 여름
과 똑같은 불만과 걱정을 되풀이했다. 이모는 "아이고, 저 속없는 양반 저렇게 얼려다니다
뭔 일 내지..." 주색잡기에 밝고 친구 좋아하는 이모부라 그때는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고 흘
려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날 저녁 늦게 얼큰해서 돌아온 이
모부가 전에 없이 이것저것 캐묻던 것도 지내놓고 보이 이상했다.
"비록 군대에 있지만 대학 친구들하고 왕래는 계속되겠지. 요즘 대학 분위기는 어때. 듣자
하니 4·19 일주년을 전후해서 대규모 데모가 있을 거라면서..."
명훈네 부대가 시청 앞에 이른 것은 새벽 4시가 가까운 때였다. 시청앞 광장으로 들어가
기도 전에 차량이 멈추자 혼자 내려갔다 온 선임하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해병대가 먼저 와 있지?"
"그럼 우리가 늦은 거 아닙니까? 반란군이 먼저 서울을 점령해..."
누군가 이렇게 걱정스레 묻자 갑자기 차안이 새로운 긴장에 휩싸였다. 반란군이 먼저 시
가를 점령하고 있다면 곧 시가전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선임하사가 앞서와는 달
리 지어낸 듯한 태평스런 목소리로 차안의 긴장을 풀었다.
"반란군 같으면 우리가 여기까지 접근하도록 가만뒀겠어? 해병대가 먼저 온 게 이상하지
만 우리 경비 부대야. 사단장님 지프가 방금 시청 앞 광장으로 들어갔으니까 틀림없어."
그래도 사병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기색들이었다. 얼마 전에 들은 요란한 총소리 때문
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훈도 금세 발사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아 자신도 모르
게 엠원 방아쇠에 손이 갔다.
까닭 없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침묵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갑자기 사단장의 지프가 돌아
오는 엔진 소리가 나더니 연락병이 각 차량의 선임 탑승자를 호출해갔다.
잠시 후 군홧발 소리와 함께 그 소대장이 운전대에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트럭이 움
직이기 시작했다. 선임하사가 운전석 뒤쪽에 난 창으로 고개를 디밀 듯해 다시 한동안 무어
라고 떠들었다. 행선지를 묻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간답니까?"
함병장이 제자리로 돌아온 선임하사에게 물었다. 선임하사가 갑자기 어색하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우리는 중앙청이라는군, 중앙청을 경비하러 가는 중이야."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자기들의 출동 목적이 또 한번 달라졌다는 걸 아는
사병은 아무도 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이 혁명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차량
행렬은 텅 빈 세종로를 달려 이내 어두운 중앙청 앞에 이르렀다.
"전원 하차!"
이상하게 떨리는 것 같은 명령 소리에 사병들은 차례로 차에서 내렸다. 내려서 보니 가로
등과 몇 군데 외등으로 제법 훤한 중앙청 뜰에도 이미 다른 부대가 와 있었다.
부대가 소대별로 정렬하는 사이 지프에서 내린 사단장은 부관과 참모 한 사람을 데리고
먼저 도착한 부대의 지휘관을 만나보러 갔다. 정렬한던 명훈이 무심코 보니 왠지 사단장의
뒷모습이 지치고 맥빠져 보였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명훈의 부대는 경복궁 쪽과 외곽 경비로 들어갔다. 산개한 입초 형
태의 경계였다.
모르는 새에 자신이 혁명군의 일원이 된 걸 명훈이 안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 뒤였
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거리로 또 한 부대의 육군이 증강돼오자 명훈의 부대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쪽으로 밀집되었다. 그런데 그게 왠지 밀려나는 기분이어서 명훈은 새로
온 부대의 한 사병에게 그들의 소속과 출동 목적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김포에선가 강화에
선가 온 부대였는데, 그 사병은 소속과 함께 자기들이 혁명군임을 자랑스레 밝혔다.
충돌할 때 틀림없이 반란 부대로부터 관공서를 경비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온 명훈은 그
사병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런데도 그들을 저지하지 않고 오히려 자리를 내주라는
자기 부대 지휘관의 명령이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뭐래? 어디서 온 부대래?"
경계 구영기 좁혀지는 바람에 바로 곁에 서게 된 권상병이 물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강환가 김폰가에서 왔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혁명군이라는데요."
"뭐?"
권상병도 처음에는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나 이내 짐작이 간다는 듯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럴 줄 알았지. 아무리 예비 사단이라지만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사단이 겨우 4개 소대
병력 긁어모아 허둥지둥 달려올 때 알아봤어. 아마― 우리가 시청에서 만난 것도 혁명군일
거야. 아니, 지금 서울 시내에는 모두가 혁명군뿐일 테지. 우리까지도."
"하지만 우린..."
"아직도 몰라? 시청 앞에서 우리는 이미 혁명군이 된 거야."
그제서야 뚜렷하지 않은 대로 명훈도 일의 경과가 짐작이 갔지만 군인과 혁명이란 말이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마침 상대가 다른 사람 아닌 권상병인 걸 다행으로 여기며
가만히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군인이 무슨 혁명을..."
"그럴 수도 있지. 특히 우리에겐."
"그럼 이게 테르미도르..."
"아니, 이제 보니 비르메르 18일 같은데. 어쩌면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장면 정권이 초특급
으로 때우고 말이야. 하기야 우리의 나폴레옹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게 한 종장인지
긴 막간인지 모르지만..."
권상병은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충분히 가능하고 또 예측할 수도 잇는 일이었는데... 왜 아무도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
까..."
그때 누군가가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듯한 가까운 차량의 라디오에서 전에는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선언문 같은 게 흘러나왔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구호에만 그친 반
공 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하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5권에 계속〕
책,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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