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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문열 변경 3

by Casey,Riley 202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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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경 3
 이문열
 
  

    제 25장 추억의 쇠기둥
  무엇이 한 어린 영혼을 들쑤셔, 말과 글의 그 비실 제적인 효용에 대한  매혹을 기르고, 스스로
도 알 수 없는 모방의 열정과 그 허망한 성취에  대한  동경으로 들뜨게 한 것일까. 스스로의 문
학적인 재능에 대한 과장된 절망과 또 그 만큼의 터무니없는 확신 사이를  오락가락 하며 소중한 
젊은 날을 탕진하게 한 뒤, 마침내는  별 가망 없는 언어의 장인이  되어 남은 긴 세월 스스로를 
물어뜯으며 살아가게 만들 것일까.
  이따금씩 독자나 청중 또는 문학 담당 기자로부터, 왜 당신은 말과 글을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
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젊은 날 내 재능과 자질에 대해 그토록 자주 느꼈던 것보다 더 컴
컴한 절망을 느끼곤 한다. 실로 그 무엇이 일찍이 내 눈앞에  펼 져져 있던 그 숱한 가늘 성중에
서, 투입과 산출의 균형이 현저하게 깨져있는  이 감정적 생산을 나의 일로 결정하게  한 것일까. 
문단 한 모퉁이에 이름 석자를 얹은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그리고 거듭되는 그 질문에 
괴로워하면서 답을 마련하려 애썼지만, 아직도  나는 다른 사람이 벌써  말했거나 이런저런 문학 
이론서에 씌어진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해줄 말이 없다.
  뒤틀리고 부풀어진 언어가 연출하는 이 기묘한  성취의 분야에 관한 한 어이없게도  내가 먼저 
품었던 것은 희망이나 동경이 아닌  불길한 예이었다.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범상치 
않은 저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일찍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젊은 날의 많은 부분
을 그 운명을 거부하기 위한 싸움으로 보냈다.
  따라서 오히려 내게 더 익숙한 것은 언어의 그 별난  전용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논리였다. 나
는 힘들여 그런 생산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그  효용성 가치를 부인했으며, 그런 저런걸 바탕으로 
정교하게 그지없는 반문 학의 주장들을 짜 맞추었다.  스스로를 설득해 보다 유망한 가치의 길로 
접어들게 하려 함이었는데 그 깨의 내 노력은 자못 진지하고 치열한 데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버리고 떠난 말과 그르이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따로 스스로를 설계
하거나 권유할 필요가 없었다. 날 저문 길 위에서 나그네가 고향집을  그리워하듯이, 장한 결심으
로 떠났던 새로운 길에 작은 좌절의 징후만  보여도 나는 두고 온 그 세계를  참회하듯 떠올렸으
며, 비록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판단만 서면 무슨 권리처럼 그 세
계로 당당하게 되돌아가곤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나를 이 오늘로 이끈 것이 피 또는 기
절에서 비롯된 어떤 힘이 아닌가 묻는다. 나도 때로는 그런 의심에 동조하는데 ,거기네 는 확실히 
약간의 근거가 있다, 직계 조상들이 남긴 큰  문집도 그렇거니와 어머니의 추억에 따르면 어울리
지 않게도 내 아버지까지 그런  방향으로 경사를 보여주고 있다. 곧  자신이 말려든 그 어림없는 
싸움에 몰려 지치고 고달플 때 그는 이따금 대학 시절 한 동안 탐닉했던 말과  글의 세계에 그대
로 주질러앉지 못한 것을 한탄했으며, 그와는 달리 그 싸움이  잘 풀려 기가 나가고 자신에 차게 
될 때도 혁명 투쟁의 장엄한 서사시를 남기리라는 따위 가당찮은 희망을 말하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비슷하게는 삶을 채우진 못했지만, 내 형 또한 죽는 날 까지 그 성추를 갈망하고 동경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시였다. 소년 시절의 끄트머리에 어쩌다 한 번 미소 보낸 적이  있을 뿐, 끝
내 그를 받아들여주기를 거부한 그 비정한 마음이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도  때묻고 찌든 한 
권의 필사 시집으로 어설픈 소월풍의 가락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피나 기질만으로 나의 본능과도 같은 지향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이 
모자란다. 일찍이 그렇게 나를 앞 뒤 없이 휘몰아댔고 아직도  의연히 무시 못할 힘으로 나를 충
동질하는 여러 비문학적 열정이나 야망과 견주어보면 그게 얼마나 무리한  설명인가는 금세 드러
난다.
  내 그런 피나 기질이 예사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모든 세속적인 열정과 야망을 온전
히 앞도해버릴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말과 글은 생각이나 느낌을 담는 그릇, 말과 글의 장인은 먼저 생각과 느낌에서 장인이어야 한
다. 그런데 내 삶의 과정에 특히 내가 생각을 키우고 느낌을 넉넉하게 만드는  어떤 부분이 있어, 
마침내는 나로 하여금 말과 글의 그 생각과 느낌을 펼쳐내지 않고는 못 베 기게 만들었다고 추측
할 수도 있다. 역시 근거 있는 추측이다. 어머니로서는 밝혀주기 싫거나 설명하게 어려웠던, 그리
고 초자아의 결여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아 담을 수 없는 아버지의 부대, 알지 못할 불안에서 나
중에는 피해망상으로까지 발전해간 연좌제의 그늘 작은 파산에서 파산으로 이어지는 것과 다름없
었던 가계, 한곳에서 3년 이상을 머무른 적이 없을 만큼 떠돌이에 가까웠던 생활, 불규칙한  데다 
중단되기 일쑤였던 학업, 그러면서도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할만큼은 아니어서 학교에 묶여 있었
던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던 시간의 여유- 이런 것들은 한 말과 그르이 사람을 걸
러내는 토양으로 매우 그럴 듯 해 보인다. 특히,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빈둥거리며 택을 읽거
나 몽상에 잠길 시간들이 많았다는 것은 아 자신도 내가 오늘날에 이르는 데 거의 결정적인 계기
를 주었으리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직 머리가 여물지 않은 나이에 적절한 충고나 이끌어주는 스승도 없이 하는 마구잡이 책읽기
는 틀림없이 가볍고 달콤한 애깃거리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점 읽기
에 익숙해지면서 갈증은 점점 고급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며 거기서 마침내  나는 일찍부터 문학과 
대면하게 되었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아비 없는 아이, 가난뱅이 떠돌이가 다 말과 그르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독학의 끝
장이 한 작가 지망생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그런  내 성장의 환경이 이 오늘날에 중
요한 못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쓸쓸하고 하염없는 쓰기를  내 일생의 일
거리로 정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너무 일찍 왔고, 또 그만큼  허망히 끝났는데도 가슴속에서는 남달리 오래  끈 내 첫사랑 또한 
한 번쯤은 이 오늘로의 길잡이로 의심해  볼 수 있다. 그 뒤의  길고 외로운 세월 동안 이상화된 
그 첫사랑은 틀림없이 나를 땅 위에 없는 것을 사랑하는데 익숙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특별하
다 해도 사랑이 곧 말과 글의 사람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설명 역시 무리하기는  앞서와 크게 다
르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은 시인과 작가로 넘칠 것이다.
  이제쯤은 종합의 미덕을 끄러대,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서로의 모자람을 메워가며 나는 오늘
의 이 길로 들어서게 했다고 설명해봄직도 하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걸로 모든 것이 풀렸다고 볼
지 모르나,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다.
  차라리 그 모든 조건보다 내가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앞서  말했던 그 예감이다. 까닭은 
모르지만, 일찍부터 무슨 각성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그 불길한 예감, 내가 결국은 한 몽롱한 언어
의 조종사로 끝장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불ㄹ안 그 자체가 어떠한 거역 못 할  암시의 힘으로 나
를 이끌어, 오늘날의 이 헤어날길 없는 말과 그르이 진창에다 아를 내팽개친 것은 아닐까.
  듣기로 방울뱀은 나무 위에 앉은 다람쥐를 잡기 위해 위로  오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나무 아
래서 방울 소리와 함께 독기 품은 눈길로 가만히 올려보고만 있으면 불안에  미친 다람쥐가 공연
히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다니다가 제검에  방울뱀의 턱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동물학
자들은 그걸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지만, 혹 그 다람쥐는 삶의 긴장을 견디다 못해 오히려 스스
로를 내더진 것은 아닐까. 피니, 기질이니, 환경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다만  그 불길한 예간
을 절망적인 자기 투척으로 몰아간 자질구레한 동인들에 불과하지 않을까...  
  뒷날 어떤 자전적인 글에서 철은 스스로를 그렇게  분석하고 있다. 군데군데 과장의 혐의와 한 
중견 작가로서의 `~체`가 섞인 대로 그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글이다. 그러나 한 번 열두 
살의 그로 돌아가면, 비록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의 문학이 그 첫사랑에  진 빛을 그가 
지나치게 줄여 말하고 있음이 금방  드러난다. 그 자신이 의식했던 못  했건 초기 습작의 태반은 
바로 그 첫사랑에 바쳐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처음  `말과 글의 비 실제적인 효용`에 대해 매
혹을 느끼게 된 것도  바로 열두 살 그 나이의 첫사랑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해 연말이 다되가는 어느 날 철은 아무도 없는 방안에 엎드려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뱃다리
거리에 있는 헌책집에서 빌려온 `좁은문`이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는 사이에 동화는 물론 
학원사 소년소녀 문고도 시시해서 어떤 여고생 누나가 빌려갔다 들려놓는 그 책을 빌려온 것이었
다.
 그 읍뿐만 아미라 어디고 그랬지만,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집안은 그리 좋은 놀이터가 못 되었
다. 세 끼를 굶지 않고 넘길 수 있는게 유복한 편에 들만큼 보편적인 가난은  오늘날처럼 흔하게 
군것질 거리를 집 안에 있게 하지 못했고, tv는커녕 만화나 장난감도 홀로 놀기에 넉넉할 만큼 가
질 수 있게 해주지  못했다. 거기다가 아직도 어린들의  의식 속네 진하게 남아  있는 전쟁 뒤의  
각박한 분위기는 아이들의 호전성 또는 공격성을 사내다움으로, 영악스러움은 똑똑함으로 여기에 
해 도대채 아이들의 집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걸 싫어 했다. 따라서  정상적인 아이들의 놀이터는 
언제나 바깥이 되었고, 거기에 걸맞게 놀이들도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었다. 설령 공부를 위해서라 
할지라도 아이가 지나지게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오히려 어른들의 걱정거리가 될 정도였다.
  그런 뜻에서 철이 그 무렵부터 부쩍 더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책 읽기는 그  나이에는 좀 유별
난 것에 속했다. 그것도 만화나 동화가을 읽고  있음을 그때의 어른들이 알았다면 틀림없이 호된 
꾸중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을 이해하려고만 들면 그게 꼭 어려운  것은 아니다.
  철이 처음으로 교과서의 외의 읽을거리를 대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3  학년초 연광읍에서 서울
로 갓 이사했을 무렵이었다. 야반 도주와도 같은 이사라, 전학이 아니라 편입을 해야 되는 바람에 
아직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이웃에 이렇다 할 동무고 없이  두 달 가까이를 보냈는데, 그때의 지
리함이 먼저 누나 영희가 구해다준 책에 손을 대게 했다.
  "야, 너 정말로 그거 읽고 있는 거야? 재매있어?"
  어느날 철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있는 걸 보고  영희가 신기한 듯 물
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빌려왔지만 별 재미없어  팽개쳐둔 책이라 더욱 철이 신기하게 느껴졌
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나뿐 아니라 어머니와 형 명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그들에
게 은근히 기특하게 여기는 기색까지 섞여 있었다. 거기 힘을 얻은 철은 다음부터는 약간의 노력
까지 보태 책 읽기에 젖어들기 시작해 나중에 다시 학교 생활을 잊게 되고 동네에 새로운 동무들
이 많아 생겨난 뒤까지도 한 취미로 길러가게 되었다.
  철의 그런 그 시절의 아이로서는 좀 별난 취미는 밀양으로 옮겨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번에는 실제적인 필요에서였는데, 특히 그것은 명혜와의 만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별목
적 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바깥에서의 놀이가 불가능할때도 그들을 자연스럽게 마주 앉을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스럽고  맑은 영혼의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데도 뜻밖으로 
효과적임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철이 빠져 있는 책 읽기는 그 목적이 또 달라져 있었다. '추억의 두 번째 기둥'
이라 이름한 그날 밤의 일 뒤로  왠지 명혜를 만나기가 부끄러웠고 어색해지면서  그의 챍읽기는 
온전히 자신들에게 자신의 지력을 과시하거나, 슬프고 애뜻한 줄거리로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
함 같은 이전의 목적에서, 순수하게 읽는 즐거움으로 바뀌기 시작한 셈인데,  그런 철을 이끌어가
고 있는 힘은 이제 완연히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바로 그 첫사랑이었다.
  남달리 조숙하고 또 어는 정도 책읽기에 단련돼 있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열두 살인 철에게'좁
은문'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저 책 앞머리에부터 예감되는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에 이끌려 어려
운 말이 섞인 감정 묘사나 지리한 풍경 묘사 따위를 건성으로 뛰어넘으며  줄거리만 대강 읽어나
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가기도 저에 철은 이내 묘한 종류의 장애에 부딪쳤다. 한 젊은 중위가 
줄리엣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속삭이는 대목이었다.
   "뷔콜랭, 뷔콜랭, 내게 한 마리 어린 양이 있다면 그 이름을 뷔콜랭이라고 지어줄 것을..."
  이게 무순 소린가- 한마디도 어려운 말이  없는데 철은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뷔콜랭은 줄리엣 어머니의 이름인데 왜 그이름을 새끼양에게  붙인단 말인가. 그 바람에 철은 다
시 한 번 그 앞 부분을 읽어 보았으나 알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있는 
여자가 바로 자기 집 안에서, 그것도 어린이들을 침대 발치에  둔 채 외간 남자와의 사랑을 속삭
인다는게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 막히기 시작하니 그 뒤도 그랬다. 알리사가 왜 눈물을 글썽이며 제롬에게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라고 그러는지, 또 그  자상한 아버지를 왜 불쌍하다고 표현하는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다른 세상 일에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닳고닳은 편이지만, 그런  성년의 비밀들은 아버지의 
부재로 체험이나 관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책에서 마음이 떠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딜 갔다  왔는지 옥경이가 수선
스레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바깥 날씨가 찬지 양볼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아이, 추워, 발이 다 젖었어."
  옥경이가 젖은 양말을 벗고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발을 디밀었다. 그 얼음장 같은 발을 건드린 
철이 얼른 몸을 일으키며 산경질을 냈다.
"아얏, 뭐야? 기집애가... 어디 갔더랬어?
"남천강에, 얼음 참 잘 얼었더라. 오빠는 스케이트 타러 안 가?"
옥경은 철을 놀라게 한 게 미안하지 무슨 큰 정보라도  전해주는 양 그렇게 말했다. 의식을 자우
룩이 감싸고 있던 문자의 안개를 걷어내며 다시 물었다. 
  "남천강이 얼었어?복판까지?"
 "그래. 애들이 삼문동에서 내일동까지 썰매로 건너 가는 것을 봤어."
  그렇다면 그것은 확실한 뉴스였다. 며칠  전부터 철은 멋진 썰매  하나를 장만해두고 남천강을 
얼기만을 기다려오고 있었다. 가로 세로 두치 두께의 각목에 톱으로 깊은 홈을 만들고 양동이 대
를 잘라 만든 칼날을 끼워 만든 썰매였다.  대장간에서 맞춘 썰매날보다는 못했지만 철사로 날을 
대신한 썰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잘 나갔다. 철은 전날도  그  썰매를 가지고 강가에 나가 보
았느나 아직 굵은 돌이 여기저기 불거진 가장자리 밖에 얼지 않아 신나게 달려 볼 수가 없었는데 
밤새 마져 얼어붙은 모양이다.
  "그럼 뱃다리거리 밑도 얼어붙었어?"
  그 기막힌 뉴스에 '좁은문' 따위는 잠깐 잊은 철이 그래도 못 미더운 듯 물었다.
  "아니, 거긴 아무도 썰매를 타지 않는 것 같아. 그렇지만 변전소 쪽 얕은 곳은 틀림없이 한복판
까지 얼어붙었다. 가봐. 애들이 왔다갔다하니까."
  그러는 옥경의 표정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철은 다시 따라나서려는 옥경을 야단쳐  방안에 가둬놓고 집을 나섰다.  바로 전날이 삼한사온 
중 삼한의 마지막 날이었던지 옥경의 호들갑가는 달리 밖은 그리 춥지 않았다.
  골목을 나오면서 길바닥에 썰매를 밀어 썰매날을 한 번 더 길을 낸 철은 서둘러 둑길로 올라섰
다. 옥경의 말대로 변전소 쪽 넓은 느린목이  모두 얼어붙어서 아이들이 얼음을 지치며 이쪽저쪽  
오가고 있었다.
 잘 얼어붙은 넓은 얼음판과 거기 모여 노는 아이들을 보자 철은 온전히 열두  살의 나이로 돌아
갔다. 어둑한 방안에서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들 대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원래 자신이 있었어야 
할 그 놀이판을 뛰어들었다. 여기서 다시 그 시절에 대한 철의 회상 한 토막을 들어보자.
  ...여름의 미역감기나 고기잡이에 못지않게 겨울 남천강에서의 얼음 지치기도 밀양에서 자란 아
이들에게는 빼놓을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제법  큰 강줄기라 그랬겠지만 겨울의 남천강은 그 
얼음부터 가 다양하기가 그지없었다.
  먼저 물 흐름이 빠른 여울살의 얼음들, 물살의 움직임과 싸워 이긴 간밤의 추위가 물가 자갈에
다 띠를 두르듯 남긴 희고 삐죽삐죽한 얼음들은 한겨울의 나뭇가지에 핀 설화에 못지않게 아름다
웠다. 그리고 작은 만처럼 굽이져 흐름이 약간 느려지는 곳에서는  또 해가 뜨면 녹기 시작해 한 
낮이면 온전히 없어지는 얇고 맑은  얼음판이 있었다. 떼어낸 그  조각들은 기껏해야 구멍뚫기나 
하다가 강변에 내던지기 마련이지만, 그 맑고 투명한 머릿속에 새겨둔  깊은 인상을 그 뒤 잘 닦
인 유리창만 보아도 그 겨울 강가를 떠올리게 하곤 하였다.
  국민학교 이하의 조무래기패들에게 주된 놀이터가 되는,  깊어봤자 허리밖에 차지 않는 느린목
의 희고 두텁던 얼음도 남천강의 추억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겨루던 썰매 달
리기며 팽이치기도 재미 있었지만 까닭 모르게 젖게 되는 손발과 언 볼을  녹이기 위해 피워두곤 
했던 강변의 깡통불도 잊기 어렵다. '고무다리'라 해서, 멀쩡한 곳을 돌로 내리치고 쇠꼬챙이로 질
러대 만든 별난 얼음판, 깨어지고  금이 가도 얼음의 두께 때문에  서러 맞물려 내려앉지는 않는 
그 얼음판 위를 세차게 달려 나가지면 정말로 고무로 만든 다리를 지나는  것처럼 탄력이 으껴진
다.
  그래도 아이들이 지나 다니는 사이에 맞물려  있던 곳이 조금씩 내려앉아 누군가  하나는 끝내 
얼음과 함께 물에 주저앉게 되지만, 아무도 그 고무다리를 무서워 하지 않는다. 누가 빠져도 그는 
다만 재수없을 뿐인 작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겨울 남천강의 참모습을 보는 것은  아무래도 뱃다거리 위쪽 무봉산 발치의  깊고 넓은 
강물이 얼어붙었을 떼였다. 강물도 한 생명체처럼 곳곳에  숨구멍을 가지고 있어 그리로 겁 없는 
아이들을 삼켜댄다는 어른들의 말에 으스스해하면서도, 한  겨울이 되어 그곳이 얼어붙기만 하면 
아이들이 그리로 몰렸다.
  어린 시야에는 끝없게만 보이던 그 넓은 얼음 벌판, 거기다 그곳의 얼음은 어찌 그리 깨끗하고 
맑았던지, 쇠꼬챙이로 그런 얼음에 흠집을 내는게 공연히 죄스러워 썰매를 지치며 강심을 건너노
라면 자신이 타고 있는 게 썰매가 아니라 작고 요동 없는 배처럼 느껴지곤 했다. 발 밑에서 놀라 
흩어지는 물고기 떼와 작은 산처럼 물 속에 웅크리고 있던 바위들...
  너비는 몇백 미터밖에 안 되지만 길이는 2킬로미터가 실이 되는 얼으판이라  한 겨울의 그곳은 
꼭 아이들만의 놀이터는 아니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형들도 나름대로  얼음을 지치려 나왔고, 때로는  어른들도 끼여들었다. 어느 
병원집 아들, 아무개 극장 딸로 알려진 외지 유학생들이 대도회지에서 산 번쩍거리는 스케이트화
를 신고 멋지게 얼음판을 지쳐갈 떼면 아이들은 감출 수 없는 부러움에 넋을 잃고 점점 작아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눈길로 뒤쫓았다.
  어떤 겨울인가, 읍내 중학교의 젊은 체육 교사가 그 약혼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검은 빛깔의 몸에 착 달라붙는  스케이트복에 털실로 짠 
알록달록한 모자를 쓰고 서로 손을 잡은 채 춤추듯 드넓은 얼음판을 돌던 그들 남녀의 모습은 거
기서 썰매타고 있던 아이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사랑과 행복 그 자체를 본 듯 착각마져 불러 일으
켰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의 미화와 언어의 덧칠로 추상화된  기억일 뿐, 현실에서의 놀이로서 그 강
가의 썰매타기가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관된 것만은 아니다.
  그날도 그랬다. 처음 얼음판으로 뛰어들 때의 기분과는 달리 철은 한 시간도 안 돼 썰매타기가 
시들해졌다. 설매타기 자체도 따지고 보면  단순한 놀인 데다, 그날따라 동네의  동급생과 시비가 
있어 일찌감치 흥이 깨져버린 탓이었다.  집을 나설때부터 흐릿하던 날씨가  점차 검은 구름으로 
짙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 철에게 슬슬 뜨듯한 아랫목이 생각날 무렵이었다.
  "야, 문이 올라는가 베."
  썰매를 타던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철도 이미 시들해
진 썰매타기를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을 생각하자 갑자기 철의 머리속에 거의 잊고 지내던 서울 거리가 떠올랐다. 조금 전 시비했
던 아이의 욕설 중에 끼어 있던 '서울내기 다마내기'란 말이 어떤 자극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눈 덮인 안암동 골목길과 거기서 하던 여러 가지 재미있던 놀이며 정답게 지내던 아이들이 새
삼 그리워지면서 그렇지않아도 시들하던 썰매타기는 더욱 마음이 없어졌다. 점심때가 가까워서인
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제법 우글거리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얼음판을 떠나고 있었다.
  하늘에서 기어이 눈발이 하나둘 흩날릴 때쯤 하여 철이도 마침내 썰매를 쇠꼬챙이에 꽂아 어깨
에 둘러맸다. 그런데 막 둑으로 올라서던 그의 눈이 멀리  강 건너 영남여객의 정원수와 그 위로 
솟은 양철 지붕이 들어오면서 그때것 그가 후줄거니 젖어있던 그리움의  대상이 느닷없이 바뀌었
다.
  그렇게 절실할 것도 없는 서울과 그곳 사람들 대신, 점점 더해가는 눈발 사이로 작고 희미해져
가는 그 집과 어쩌면 그 시각 창틀에  붙어서서 자기 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명혜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라호 태풍 뒤로 철은 거의 명혜를 보지  못한 셈이였다. 새로 들어온 명혜네 가
정교사가 전에 없이 그 애들 남매를 닦달해 공부방에 가둬놓은 탓도 있고 영남여객댁에 어머니의 
발길이 전보다 뜸해진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집수리가 있던 날 밤의 일로 공연히 쑥스러워진 철
이 일부러 그녀를 피한게 더 큰 원인이었다.
  모두가 그날 밤의 일을 알고 있어 자신과  명혤 유심히 살피는 것 같은 느낌에  둘이 마주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겨울 방학을 하기 전에는 먼빛으로나마  명혜를 볼 수 있었다. 여학생반은 교사 
한 끝에 따로 몰려 있어 복도 같은데서 스치게 되는  행운은 흔치 않아도, 등하교때나 그애네 반
의 보건 시간 같은 때, 교실  창틀에 붙어서 있다 보면 하루  한두 번은 어렵잖게 그애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애는 아무리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크기의 계집아이들 틈에 묻혀 있어도, 무슨 휘항
한 빛무리에 싸인 듯 금세 분간되어 철의 두 눈속으로 파고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학이 되면서 그렇게 명혜를 남몰래 훔쳐보는 것 마져 어렵게 되었다. 그 바람에 방학 
후 며칠 간 철에게는 일없이 영남여객댁 주위를  맴도는 버릇이 생겼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
았다. 명혜를 우연히 만나는 기쁨대신 심술궂은 종숙이  누나에게 먼져 들켜 변명에 진땀을 빼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눈이 온다면 오후에는 그애네 집에 놀러 가야지.'
  갑작스런 그리움으로 져려오는 가슴을 억누르며 철은  그렇게 마음을 다졌다. 휘날리는 눈발에 
충동된 소년의 애뜻한 감상이라기 보다는 필사의 싸움터로 나가는 전사의  비장한 각오와도 같은 
다짐이었다.
  그러나 집 대문간에 들어서면서부터 철은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
물어야 돌아오시는 어머니가 벌서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부터 어머니는 읍네 시장의 헌옷가게에로 날품일을 나가고 있었다. 구제품 옷가지를 줄
여 파는 곳으로서 홀로 사는 여집사가 교회와 고아원의 은밀한 지원아래 꾸려가는 가게였다.
  구멍가게는 드디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고 근처 농부들을 상대로 하는 바느질도 벌이가 쉬
원치않아, 품삯은 낮아도 고정적인 수입이 되는 그 일에 어머니는 만족하고 니었다.
  "어머니, 오늘 웬일이세요?"
  철이 떨더름한 기분으로 방문을 열기 바쁘게 물었다.  방금 돌아왔는지 돌아앉은 채 무언가 가
져온 보따리를 풀던 어머니가 밝은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응, 손님이 올끼라서."
  "손님요?"
  그러면서 방안으로 들어서던 철은 어머니가 방바닥에 풀어놓은 뜻밖의 물건들을 보고 놀랐다.
생과자라고 불리던 케이트점에서 만든 고급 빵이 여러 종류로 한 상자, 명절 때 영남여객댁에서 
한움큼씩 얻어먹을 뿐인 고급 과자 몇 봉지, 굵고 싱싱한 사과와 배들, 그리고 형이 미군 부대 다
닐 때 이따금 가져온 적이 있는 커피 한 병과 설탕 따위였다. 
  "그래, 조선생이라꼬, 니 모르나? 왜 너 외가 쪽 아저씨 말이다. 어무이 6촌 된다 안카나?"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져 보고 있는 철에게 전에 없이 세밀하게 그날 오게 되는 손님을 설명
  했다.
  듣고 철도 그를 기억할 수 있었다. 태풍이 나고 얼마 안 돼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와 함께 
찾아온 적이 있는 남자였다. 얼굴이 희고 눈썹이 짙은 게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긴 했지만 옷
차림은 추레한 편이었는데,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누님,누님 하던 게 어색해
보였다. 
  "그럼, 아주머니도 와요?"
  철은 무억보다도 그가 아주머니와 함께 올것이 마음에 걸려 물었다. 만약 그렇게 되다면 명혜
네 집에 놀러 가기는 글러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거기 가기는 어머니와 함께가 자연스러운데, 금세 집에서 아주머니와 함께 지낸 어머
니가 다시 그 집을 갈 리는  없었다.
  "뭐라꼬?"
  어머니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지면서 손놀림을 멈추고 물었다.
  "니, 그게 무슨 소리고? 우에서 조선생 온다카는데 아주머니 오는걸 묻노?"
  "그냥... 접대도 같이 오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표정이 굳어지는데 찔금한 철이 까닭모르게 죄지은 기분이 들어 그렇게 더듬거렸
다. 그런 철을 유심히 살펴보던 어머니가 이내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굳이 대단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 참, 그랬지. 글치만 오늘은 몰라.. 그때는 우에다 그래 된 기고..."
  그래놓고 곁에 있던 다른 보따리 하나를 풀며 덧붙였다.
  "모르제, 우예믄 오늘도 아주머니가 올동..."
  철에게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새로 푼 보따리에서 나온 것들이 다
시 철의 주의를 그리로 끌었다. 무늬가 예쁜 커피잔 세트에다 길쭉한 쟁반이 셋,  고기가 싸여 있
는 듯한 종이 꾸러미와 네모진 양주병 따위가 새로 푼  보따리에서 나온 물건들 이었다. 이미 펼
쳐져 있는 물건들과 그걸 더해 생각하니 앞으로 벌어질 것은 틀림없이 작은 잔치였다. 그 바람에 
철은 이번엔는 다른 쪽의 관심으로 물었다.
  "그 조선생.. 언제 오는데요?"
  그것은 언제 그 고급한 과자와 빵이며 과일과 고기를 먹게 되느냐는 뜻이었다.
  "이따가, 저녁때."
  실망스럽게도 어머니의 대답은 그랬다. 그러나 어디선가  쪼르르 뛰어든 옥경이가 조르자 과자 
한 움큼과 빵 한 개씩을 내줌으로써 어느 정도 그 실망을 달래주었다.
  거기다가 한차례 퍼부 울 것 같던 눈은 미처 땅바닥조차  덮지 못하고 그쳐, 거세게 철을 몰아
대던 그리움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직도  입 안에 담은 케이크의 미각이 그쪽에
서 같이 한 몫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철은 명혜를  못 만나게 된 게 아쉬운대로 입과 배
의 풍성한 잔치에 대한 기대에 더는 큰 불평 없이 그날 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쳤던 눈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짧은  겨울해가 져 어둑할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목화
송이 같은 함박눈이었다. 어머니의 재촉으로 저녁을 먹고 무심히 방문을 열었다가 쏟아지는 눈송
이를 본 철은 엉덩이를 무엇에 호되게 찔리기도 한 사람처럼 펄쩍 뛰어 일어났다.
  바깥에 나가보니 그 사이 세상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철은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를 기
묘한 혼성을 내지르며 벌써 발 밑이 미끄러울 정도로 눈이 쌓인 골목을 뛰어나가 둑 위로 올러섰
다. 강변의 강둑도 어느새 눈으로 하얗게 덮이고 아직 얼지 않은 강심의 강물만 한 줄기 검은 띠
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눈이 오는 날,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억보다도 그것이 연출하는  순백의, 그리고 
거의 완전한 아름다움때문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그리움으로 솟고, 또 그 아름다움이 이내 스러질 것이란 것 때문에 그 그리움은 더욱 강렬해지는 
것이나 아닌지.
  한동안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명혜가 다시 머리속 가득 떠 오르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심리에서였을 것이다. 눈 덮인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것도 잠시, 철은 이지는 형제조차 잘 
보이지 않는 강 건너 명혜네 집 쪽을 건너버려, 그 나이에는 흔치 않은 열정 같은 그리움을 앓기 
시작했다. 그 집 어름에서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하는  불빛들이 눈발 사이로 깜박이면서 묘한 밝
혀지기 시작하는 불빛들이 눈발 사이로 깜박이면서 묘한 정치를 나아낸 더욱 철을  못 견디게 했
다.
  "아아아아"
  마침내 북받쳐오르는 갑정을 이겨내지 못한 철은 온몸의  힘을 모아 그렇게 소리쳤다. 그 알아
듣기 어려운 외침에 숨은 것은 간절한 부름이었다.
  '명혜야아...'
  그런데 뜩밖에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거기 철이 아이가?"
  틀림없이 명혜의 목소리가 저 만큼서 그렇게 물어왔다. 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하얀 둑길 위로 두 사람의 크고 작은 그림자가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까지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 얼굴은 얼른 알아볼  수 없었으나 틀림없이 영남여객 아주머니와  명혜 같았
다. 
  "참말로 철인가 베. 철이 날 저문데 거기서 뭐 하노?"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그래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철에게 한 번  더 스스로를 확
인시켜주었다.
  그제서야 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도 헛것을 본 것도 아님을 알았다.
  '명혜가 왔구나, 정말로 명혜가 왔어'
  이번에는 또 아른 감정으로 벅찬 속으로만 그렇게 망연히 뇌까리며 서 있다가, 그네들이 몇 발
자국 앞으로 다가든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려 꾸벅 절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그 황급한 짧은 인사말이 그때의 철에게서 짜낼 수 있는 숫기의 전부였다. 철은 아주머
니가 무어라 인사말을 받기도 전에 후다닥 돌아서서 집을 향해 냅다 뛰었다. 급하게 둑을 내려가
다가 미끄러지고 자빠지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까르르 맑은 명혜의 웃음 소리가 그런 철을 한동안 
뒤쫓아왔다.
  철이 집으로 돌아가니 이미 방안에 불이 켜져있고, 손님도 와 있었다. 전같이 추레한 차림은 아
니었으나 텁수룩한 머리결과 턱수염은 비슷했가. 어머니는  부엌으로 갔는지 그 쪽에서 상차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 굽는 내음이 풍겨왔다.
  무엇에 쫓긴 사람처럼 쿵쾅거리며 철이 방안으로 뛰어들자 먼저 조선생이란  그 손님이 어리둥
절한 눈으로 그를 보았고, 이어 부엌에서 어머니곁에  붙어있던 옥경이가 삐곰히 문을 열고 들여
다보며 말을 하였다.
  "오빠, 무슨 일이야?"
  그러나 철은 대답 대신 부엌에 있는 어머니쪽을 보고 소리쳤다.
  "엄마, 와요."
  "아니, 누가?"
  어머니가 부엌에서 얼굴도 내밀지 않고 물었다.
  "밀양 이모요-"
  철은 그렇게 대답해놓고 이어 공연히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엿다.
  "명혜하고..."
  그러나 어머니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더니 한참 있다가 방문을 열고 조선생에게  뜻 모를 눈짓
을 하며 물었다.
  "동생 보래이, 영남여객댁이 오는 갑다. 거 왜 알지? 전에 한 번 안 봤나?"
  그러자 조선생이 얼굴을 붉히며 철을 쳐다보다가 우물우물  말했다.
  "그래요?"
  그때 빠드득빠드득 바짝 소리가 나며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와 명혜가 들어섰다.
  "이 집에 누나왔나? 우에 이리 시끄리하노?"
  아주머니가 그런 소리로 방문을 열다가 조선생을 보고 놀란 체했다.
   "아이구 이거 조선생님 아입니까?"
  "네, 누님댁에 놀러왔다가..."
  조선생님이 다시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우물거렸다. 그때  부엌 쪽으로 나 있는 방문이 열리며 
옥경이, "어디야? 정말로 명혜 언니가 왔어?" 하고 뛰어들고 이어 아주머니 행주치마에 손으로 닦
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들어오이소, 서로 못 볼 사이도 아니고..."  
  어머니가 자연스런 목소리로 아주머니를 방안으로 청해들렀다. 그러나 마주않은 두사람은 우연
한 마주침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
  신발이 져졌던지 한참 뒤쳐져 방안으로 청해들었다. 외투에 달린 모자 위에 눈이 한줌 얹혀 있
다가 어머니께 안사를 하는 바람에 방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구, 이거 누고? 우리 이쁜이 아닌기? 눈 속에 온다꼬 애먹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명혜의 얼굴이 뿜어내는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물기로 더욱 검고 반
짝이는 머리칼과 하얗게 빛나는 이마, 발그레한 볼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내손 어떤 아름다운 빛
이 이목구비의 단정한 선을 느낄 겨를도 없이 철의 시각을 아뜩하게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철아, 니는 야 첨 보나? 왜 그리 뻘주미 서 있기만 하노?"
  어머니가 그런 철을 나무람 비슷이 일깨웠다. 철이  겨우 정신을 차려 더듬거리며 뒤늦은 인사
말을 던졌다.
  "명혜 왔어?"
  "야는 아가 봐놓고."
  명혜가 철을 돌아보며 살풋 웃더니 눈치없이 한마디 더 보탰다.
  "나는 참말로 이상터라. 요새는 놀러도  안 오고, 길거리에서 만나도 천장만장  달래 빼기만 하
고..."
  어른들은 이미 자신들끼리의 얘기에 들어가 명혜의 말을 지나쳐 들었으나 철은 다시 자신의 심
장 뛰는 소리가 귓속에 가득할 만큼 당황하고 낭패에 빠졌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내온, 오후 내
내 군침을 흘리며 기다려온 과자와 과일들까지 모래 씹는 맛이었다.
  철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조선생이 술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집에 마침 좋은 술이 있는데 줄까?"
  어머니가 조선생에게 그렇게 묻자 왠지 거북해하던 조선생이 흔연히 말했다.
  "좋지요, 술이라면 모든지 사양하지 안겠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다가 홀깃  철을 건너보며 뜻 모를 눈짓과  함께 한마디 
던졌다.
  "야들아, 너는 밖에 안 나가노? 눈이 저렇구롬 좋은데..."
  사전에 달리 들은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철은 단번에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어른들이 우
리가 여기에 있는 것을 거북하게 여기고 있다...
  "맞다, 명혜 니도 철이, 옥경이하고 놀러 안왔나? 인제는 밖에 눈이 제법일 걸로."
  아주머니도 되도록 자연스런 표정으로 명혜쪽으로 모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먼저 쫄랑거리
며 나선 것은 옥경이였다.
  "그래 오빠, 우리 밖네 나가 눈사람 만들어. 눈싸움도 하고."
  공연히 어른들과 함께 있기가 거북하고 숨막히던 철은 속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마지못한 듯 몸
으로 일으켰다.
  "그럴까..."
  "엄마야, 나는 장갑을 이자부고 안 끼고 왔는데."
  명혜도 그렇게 말하며 따라나섰다. 마당에 나오니 눈은  어느새 발목까지 빠질 만큼 쌓여 있었
다. 거기다가 눈이 그치면서 하늘이 걷히기  시작해, 엷은 구름을 뚫고 우러난 달빛과  온 세상을 
뒤덮은 눈빛은 박에서 뛰어놀기에 꼭 알맞는 밤으로 만들었다.
  집 뒤의 이백 평 남짓한 텃밭으로 달려간 셋은 먼저 눈사람부터 만들었다.
  방으로 나올 때만 해도 틈으로 보아 명혜에게 무언가 뜻깊은  마음속의 애기들을 털어놓으려던 
철이었으나, 눈 쌓인 달밤의 정취가 금세 그른  나이에 알맞는 동심으로 되돌려버리고 만 것이었
다.
  셋은 처음 솜씨 자랑이라도 하듯 따로따로 눈사람을 하나씩 만들었다. 흰손을 펼쳐놓은 듯하던
전 텃밭에 이내 거뭇거뭇한 얼룩이 졌다.
  "우리 이번에는 아주 큰 걸러 하나 만들자. 내일 아침에 사람들이 감짝 놀라라구..."
  고만고만한 눈사람을 하나씩 만들어 세운 다음에 명혜가 다시 그렇게 제안하고 철과 옥경이 두
말없이 따랐다. 셋은 다시 흩어져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됐을까, 이미 혼자서 굴리기 거
북할 만큼 커진 눈덩이와 시름하고 있는 철을 명혜가 불렀다.
  "철아, 여 온나. 암만해도 혼자서는 안 되겠다. 우선 이거부터 같이 밀자."
  철이 힐긋 그쪽을 보니 벌써 운동회 때 굴리는 공만큼이나 커진 눈덩이 뒤에서 명혜가 손을 호
호 불며 소리치고 있었다. 철은 굴리던 눈덩이를 놓아두고 명혜에게로 달려갔다.
  "젖었지만 이거라도 껴."
  철이 장갑을 벗어 명혜에게 내밀며 눈덩이에 붙어섰다.
  "니는 우짜고?"
  명혜가 그런 소리와 함께 철을 빤히 보더니 그 중에서 한 짝만 받으며 다정스레 말했다.
  "그라지 말고 우리 한 짝씩 끼자."
  이상하게 철의 가슴에서 아이다운 유희 기분을 흩어버리는 목소리였다. 철은 말없이 그녀 곁에 
붙어섰으나 이제는 그저 눈이나 굴리는 열두 살짜리 머슴애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밀자 눈덩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먼저 세워둔 눈사람 곁으로 옮긴 철은 
다시 자기가 굴리다 만 눈덩이 쪽으로 명혜를 데려갔다..
   "야, 이것가지 굴려가 눈사람을 만들면 괭장하겠다. 그지?"
  몸을 맞대다시피 하며 곁에서 눈덩어리를 밀던 명혜가  문득 철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따
뜻한 입김이 볼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철이 펄쩍 놀라며 명혜쪽을 돌아보았다. 뽀얀 얼굴이 부
딪칠 듯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럴 거야.."
  철은 애서 침착을 가정하려고 그렇게 대답했으나 마음속로는 벌써 엉뚱한  기원으로 가득차 있
었다.
   '이대로 영원히 눈이나 굴렀으면... 이 애와 함께 영원히...'
  그렇게 되고 나니 더는 눈사람 만들기가 전처럼  재미있고 신날 리가 없었다. 명혜와 옥경이도 
두번째 큰 눈사람을 만들어 세우고 난 뒤에는  그 놀이에 시들해진 것 같았다. 이미 만든 눈사람
의 눈코를 이리저리 옮기며 깔깔대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른 놀이를 제안했다.
  "우리 이제 그만 숨박곡질이나 하자."
  조금 전부터 놀이하는 아이이기를 그만둔 철에게는 그 또한 그리 마음에 끌릴 리 없겠지만, 명
혜기 원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유치한 놀이를 할 이유는 충분히 되었다.
  철은 꼭 철부지 어린애를 데리고 노는  어른처럼 적당히 속아도 주고 바보스런  짓으로 명혜와 
옥경이를 웃기기도 하며 숨박꼭질 했다.   
   하지만 원래 그 놀이가 셋이서 하기에는 그리 알맞지  못했다. 텃밭에서 옮겨 새 기분으로 시
작하긴 해도 금새 금새 술래를 바꿔가며 서너 차례 돌고 다시 시들해 지기 시작했다.
  뒷날 철이 '추억의 세기둥'이라 이름지은, 명혜와의 추억 가운데 소중한 세가지 중 마지막은 그
래서 바꾸게 된 눈싸움에서 완성된다. 숨박꼭질이 시들해져 제대로 숨지도 않게끔 되었을때 옥경
이 불쑥 말했다.
  "오빠, 이제 눈싸움이나 하자."
  마약 그들을 기다리는게 무언가 아이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어른들로 가
득 찬 방이 아니었더라면, 철은 아마도 그 제안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턱 없는 놀이에 
신명을 내는 옥경이만 아니었더라도 명혜와 함께  어디 비어 있는 원두막 같은  데나 찾아들어가 
벌써부터 마음속에 들 끓고 있는 얘기나 나누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그 애를 좋아하는지, 또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따위를.
  별수없이 옥경의 제안에 따라야 하리라고 생각은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는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가 명혜와의 누싸움이라니. 명혜와 한 편이 되어서는 공격할 상대가 없고,  명혜와 다른 편
이 되어서는 공격할 마음이 일 리 없지 않은가.
  "눈싸움? 셋이서 어떻게 눈싸움을 해?"
  그 바람에 철이 그렇게 심통을 내 옥경이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옥경이는 눈에 마음이 들떠
더 단단히 들떠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우겨댔다.
  "왜 안 돼? 명혜 언니하고 나하고 한 편이 되고 오빠가 딴 편이 되면  되잖아? 남자가 우리 둘
도 못당해?"
  "참, 그렇네. 왜 혼자서는 안 될 것 같나?" 
   명혜도 어찌 된 셈인지 옥경이를 편들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하는 수 없었다. 철은 다시 명혜
와 옥경이를 상대로 마음에도 없는 눈싸움을 시작했다.
  무엇이 그렇게 신나는지 명혜와 옥경이는 쉴새없이 깔깔거리며 눈덩이를 던져 댔다. 철이 던지
는 시늉만 하며 고스란히 맞아주어 더 신이 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이서 워낙 재미있어 하는 바람에 철도 차츰  흥이 살아낫다. 되도록 눈을 부드럽게 뭉치기는 
해도 제법 상대가 될 만큼  둘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날아간  눈덩이가 그들에게 맞아 하얗게 
부서지는 걸 보는 것이 꽤나 유쾌했다.
  눈덩이를 맞아봤자 별로 아프지 않다는 데  힘이 났는지 명혜와 옥경이는 더욱  적극적이 되었
다. 눈을 던지다 말고 둘이서 무언가 수근거리더니  갑자기 어린애 머리만한 만들어 들고 다가왔
다.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이며 무른 눈덩이를 던지는 사이에 바짝 다가온 둘이 각기  들고 있던 눈
덩이를 철에게 내던졌다. 옥경이의 것은 철의 무릎에  맞아 깨어지고 명혜의 것은 어깨에서 부서
졌다.
  맞은 곳이 아프지도 않고 맞았다는게  분하거나  불쾌한 것도 아니었지만 철은 반격에  들어갔
다. 그래야만 그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마침 뭉쳐 들고 있던 눈덩이를 쥐
고 둘을 따라가게 만들었다. 둘은 너무 가까이에서  들고 있던 눈덩이를 던진 까닭에서인지 다시 
눈덩이를 뭉칠 어두도 못 내고 갈깔거리며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좁은 텃밭을 반쯤이나 가로질렀을 때였던가, 손을 잡고 뛰듯 하던 둘 가운데 명혜가 누에 미끄
러져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옥경은 제김에 다급했던지 그런 명혜를 버려두고 어두운 발 모퉁이로 
달아나버렸다.
  철은 내친김이라 그런 명혜에게 덮칠 듯 달려갔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명혜였다. 다시 몸
을 일으켜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고 눈밭에  퍼질러앉은 채 다가오는 철을 보고 깔깔거릴  뿐 었
다.
  그 깔깔거림이 문득 자신감 또는 비웃음으로 느껴지면서 철은 슬며시 솟는 오기로 눈덩이를 든 
손을 쳐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달이 구름에서 벗어나면서 달빛이 쓰러진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
다. 눈빛이 거든 탓인가. 고른 치아며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맑고 평온한  눈길까지 또렷이 
분간될 정도였는데 그런 명혜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철은 그대로 동화속의 소금 기둥처럼 굳어
버렸다.
  아주 오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때 철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킨 것은 바로 감탄을 넘
어 신비감까지 자아내던 아름다움의 힘이었다. 뒷날 철은  어떤 술자리에서 그때 그는 도저히 땅 
위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이데아를 명헤의 얼굴에서 보았노라고 과장스레  술회한 적 까
지 있다.
  "철아, 니 와 그러노?"
  그런 철의 얼굴이 어떻게 비쳤는지 명혜가 문득  웃음을 멈추고 걱정스레 물었다. 그제서야 퍼
뜩 정신이 든 철이 들고 있던 눈덩이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갑자기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저... 암것도 아니야."
  그러자 명혜도 마음이 놓인다는 것처럼 살풋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날 일으켜세워줘."
  철은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눈을 뭉치느라 장갑 한 쪽마져 벗고 있었
던 듯 장갑을 안 낀 철의 왼손에 잡힌 명혜의  오른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차가운 느낌이 
야릇한 연민을 일으키나 싶더니 느닷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 야릇한  연민과는 무관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남자가 뭐시 이래 힘이 없노?"
  몸이 휘청거리며 간신히 자신을 일으켜세우는 철에게 그런 핀잔까지 주며  일어선 명혜가 철의 
두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던지 화들짝 놀라 다가들며 물었다.
  "엄마야, 니 왜 그라요"
  '"암것도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갔는가 봐..."
  철은 그렇게 얼버무리며 얼른 눈물을 닦고 돌아섰다. 어디선가 옥경이 쪽을 달려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언니 , 무슨 일이야? 싸웠어?"
  그러나 철은 아무 대꾸없이 집으로 향했다. 명혜도  그런 철에게서 어떤 심상치않은 느낌을 받
은 듯 말없이 뒤따라 걸어갔다. 옥경이 혼자서  이쪽저쪽을 번갈아 따라붙으며 흥겹던 놀이가 갑
자기 깨지게 된 이유를 캐다가 기어이 철에게서 퉁명스런 핀잔을 듣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럭저럭 밖에서 뛰어논 시간이 꽤나 되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방안에
서 흘러나오는 조선생의 목소리에는 그새 술기운이 완연히 풍기고 있었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을 자부하는 것입니다. 곡 들어주시는 거지요?"
  철이 알아들은 말은 그랬다. 그러나 그게 낮에 그렇게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뷔골랭, 뷔꼴랭, 내
개 한 마리 어린 양이 있다면 그 이름을 뷔꼴랭이라 지어줄 것을 ..." 하는 구절과 비슷한 말이라
는 걸 깨닫게 된 데는 몇 년이 더 걸려야 했다. 그 이태 뒤 철은 중학교에 가서 미술교사로 근무
하는 조선생을 만났는데, 그는 어머니와 다를  성이 다를 조씨였다. 그리고 다시 이태인가  세 해 
뒤 고향으로 돌아가 있을 때 문득 떠올린 철이 어머니에게 뒤늦게 그 이상함을 묻자 어머니는 잠
시 머묻거리다가 일러주었다 
  "그 아주머니와 조선생은 의남매를 정해 더러 만났제, 그대는 아마 모델 쯤 서달라꼬 부탁하는 
갑드라. 그 사람 화가랬거든. 거기 같이 쫍은 데에서 만나기가 만만찮으니  우리집에서 만났던 긴
데 뭐 글케 나쁜 데서는 만나기가 만만찮으이 우리집에서 만났던 긴데 뭐 글케 나쁜 일은 없으었
을 께라. 아저씨를 보나마나 그게 안 좋은 기분 내가 우예 다리를 놔줬겠노?"
  그렇지만 그날 방문을 열였을 때,  어머니는 부엌에서 무언가를 떨그럭거리고  두 사람만 술상 
곁에 호젓이 앉았다가 놀라 돌아보던 기억 탓인지, 철은  언제나 그 조선생을 [좁은문]의 젊은 중
위와 같이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추억의 세 번째 기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예감까
지를 곁들어 명혜와의 첫사랑을 한층 굳건히 떠받쳤던 것이다.
  
    제 26장  수렁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욱 박사는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성명을 발표하고 항간
에 떠도는 자유당의 조기선거 실시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짖고 있네. 거봐, 분에 
넘치는 짓을 하니까 몸이 그 꼴이 나는 거야. 신익회 급살 맞는 거 안  봤어. 자기 살아서 돌아오
기는 힘들걸. 감히 국부 리박사에 대항하여 들다니. 입에 혀같이 놀려 이회장 들락거리던 게 언제 
일인데... 시꺼, 이 새까. 네가 뭘 안다고 나불거려. 상관없어. 자유당은 벌써 다 이기게 되어 있다
구.그렇게 모진 소리까지 할 거 없어. 아이구, 돌개 형님, 오늘은 왠일이셔. 갑자기 민주당으로 돌
았수? 살살이 저 새낀 아다마가 잘 돈다  시다 보면 순 형광등이라니까, 임마, 정치 얘기는  집어
쳐. 내가 뭘 안다구.
  명훈은 취기와 두통이 한덩어리가 되어 흐릿한 머리로 앉아 있었다. 술집을 그대로 점령하다시
피 이리저리 어가면서 펴마셔대는 얼굴들이 모두 낯익다 싶으면서도 누가누군지 분간이 안 될 만
큼 눈앞이 흐렸다. 자, 받아. 오늘 정말 애썼어.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전이  두셋으로 겹쳐 보이
는 막걸리 사발을 내민다.
  명훈은 기계적으로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 사이에도 열려 있는 귀로는 술집 안의 왁자하게  흘러든다. 그런데, 이건 또 왠일인가, 어지 
된 셈인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지도 않은 황과 김형의 목소리도 그 소음속에 끼여든다.
  이거 각급 기관 장들에게 내무부가 내린 지시라는데 말야, 첫째가 4할 사전  투표. 선거 당일의 
자연 기권표와 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
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로 만든다. 그래서 투표 시작 전에 그걸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하
고 투표함에 넣어둔다는 거지. 둘째는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야. 미리  공작을 해돈 유권자라 
도 그렇게 조를 지어 정말로 자유당에 표를 지었냐를 확인하겠다는 수작이지.
  셋째는 완장 부대 활용, 곧 자유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자유당'이라 씌어진 완장을 착용
시키고 투표장 주위를 돌아다니게 한다는  거야. 마치 자유당 일색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는 거지. 넷째는 야당 참관인의 축출이야.  민주당 쪽 참
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표시시키거나 그게 뜻 대로 안될 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투표소 밖으
로 쫓아낼 것. 나도 들은 게 있어. 뭐  '공무원 친목회'라던가, 거기서도 이런저런 포섭 공작을 지
시 받았더군. 이를테면, 관공서와 관련된 사업이라든가 인허가  대상업자, 행정 법규 단속 대상자
는 이권과 관련시켜 포섭하고, 구진보당과  족청계인사 및 언론인, 요시찰자, 월북자,  가족, 무당, 
점쟁이, 계주, 선거 위원등은 위협하여 회유한다든 따위지.  명예심이 강한 사람이나 정계 진출에 
관심이 있는 삶에게는 거기 상응하는 행정 기관장이나 위원에 임명할 듯 암시를 주고, 뭐 생활이 
어려운 자는 돈으로 매수하라던가.
  하지만 그것은 환청이었건지 곧 깡철이의 취한 목소리가 김형과 황의 목소리를 훓고 고막을 찔
러온다.
  그 새끼, 안 죽은 개 천행인지 알아. 당구 큐대로 골통울 까버렸더니 켁 하며 뻐드러지거군. 선
거 얘기에서 다시 싸움의 얘기로 돌아간 듯  했는데, 명훈에게 막연하기는 앞서의 화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속까지 뒤틀려오면서 아물거리는 기억으로는  자신이 그 싸움에 끼어들었던지 아
닌지는 물론,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곰보 그 새끼 악종이더만. 왼팔이 꺽
어져 덜렁덜렁하는데도 아이구찌를 뽑아들고 악을쓰는 거야. 간다, 제 왜 저러는 거야. 어이 간다, 
어디 안 좋아. 펄펄 날 때는 언제고 왜 그리고 우거지상이야.
  누군가 자기 쪽을 보고 그렇게 떠들어댈 때쯤 두통과 매스꺼움움을 견디지 못한 명훈은 자리에
서 일어났다. 취기도 한몫을 거들어 술탁자 모서리를 잡지 않고는 발자국을 떼기 어려울 만큼 몸
이 휘청거렸다.
  변소간은 좁은 술집 마당을 지나 이웃 건물에 잇대어 있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어두운 마
당을 가로지르던 명훈은 갑자기 온 몽이 뒤트이는 것 같은 구역질에 폭삭  꼬꾸라지듯 주저 앉았
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넣을 필요도 없이 허연 막걸리가 굵은 줄기를 이루며 발 곁으로 쏟아
졌다.
  한차례 토악질이 긑나자 조금 정신이 들며 두어  발자국 앞에 수도가 보였다. 명훈은 엉금엉금 
기듯 수돗가로 가서 이번에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쑤셔넣어가며 서너 차례  더 토했다. 온몸에서 
진땀이 솟았지만 위와 머리속이 한층  개운해졌다. 그제서야 토막토막 기억이  나며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알 듯했다.
  "야, 너 언제까지나 기도 시다바리나 할 거야? 나도 살살이 없는 가오 세워주기도 이젠 지쳤어.
우리도 애들하고 어디 한 골목 자리잡고 앉아보는게 어때?"
  대낯같이 벌겋게 술이 올라 극장을 찾아온  깡철이가 그렇게 명훈을 꼬드긴 것은  그 전날이었
다. 그러나 그때 명훈은 한창 깡철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안광 시절에 함께 일 해본 적이 있는 
날치 녀석 때문이었다. 녀석이 난데없이 청산빌딩 근처에서 외따통(바람잡이 없는  뜨네기 소매치
기)을 놀다가 살살이 패에게 걸려, 초주검이 되어 걸 용케 알아 빼내준 적이 있는데, 그때 날치에
게 가장 독살을 떤게 강철이었다. 명훈이 안다고  나서서 말리는데도 깡철이는 몇 번이고 모질게 
짓이긴 뒤에야 날치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안광 시절에는 그렇게 친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며칠째 가까운 여인숙에서 끙끙대며 누
워있는 날치를 찾을 때마다 명훈은 깡철에게 원한과도 비슷한 분노를 느끼곤 했다.
  "뭐 너도 형님 노릇하고 싶으냐? 아서라, 학삐리(학생)꼬리 뗀지 며칠 됐다고 벌서 골목 타령이
냐? 살살이형 밑에서 술잔이나 얻어먹다가 곱게 군대나 다녀오는게 어때?"
  명훈은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그렇게 빈정거렸다. 그러자 깡철이가 교활한 눈
웃음을 치며 눙쳤다.
  "새끼, 옛날 동기생 때문에 그러는구나. 날치라 그랬어? 간도 크지. 혼자서 맘 상했지만 이해해
줘라. 그런 뜨내기들이 한 건 쳐 뛰면 골탕은 우리가 먹는단 말이야. 아예 발을 못 붙이게 해줘야 
한다이거야, 게다가 애들이 보고 있었잖아. 아이구찌랑 꺽다리네 애들 말이야..."
  그러고는 몇 마디 변명을 늘어 놓더니  전에 없는 붙임성으로 명훈을 제  계획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그러지 말고 내 말 들어봐. 내가 보아둔 대가 있는데 말야. 우리 한 번 그거 어떻게 먹어보자. 
씨팔, 이왕 아쿠샤 물 먹을 바엔 쇠꼬리보단 닭 대가리가 낫지 않겠어?"
  명훈은 보아둔 곳이 있다는 데 다소 관심이 일었으나 아직도 녀석과 무슨 일을 꾸미고 싶은 마
음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빈정거려주는데 녀석이 틈을 주지 않았다.
  "원래는 제법 깡다구깨나 있는 새끼들이 대여섯  되었는데 최근에 두 놈이 빵간으로 달려갔대. 
옆골목 카바레를 넘비다가 한판 붙으면서  저쪽 칼잡이를 끝장내버린 모양이다.  다른 한 녀석은 
흔적 없이 튀고.. 지금은 용케 그 싸움에서 빠진 녀석 둘이 똘마니 몇 데리고 버티는데 너만 있으
면 우리 애들 가지고도 어떻게 될 것 같아. 생각없어?"
  "어디야 그게?"
  "나와바리로는 명동 쪽이야. 그렇지만 그쪽 큰 주먹들이 관심을 둘만큼 먹을게 많은 곳은 아니
고, 위치도 경우에 따라서는 종로쪽이라고 우겨볼 만하던데..."
  "그래도 그렇잖을걸. 한 번 그쪽 나와바리가 되었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끼고 도는 게 그 사람
들이야. 바꿔 생각해봐. 아무리 죽은 골목이라도 창신동 귀퉁이에  청량리패가 자리잡는다면 동대
문 쪽에서 가만있겠어?"
  명훈이 그제야 꼬투리를 잡았다는 느낌으로 그렇게  빈정거렸다. 그러나 깡철이는 별로 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것도 알아봤어. 명동 쪽은 이제 그렇게 힘을 못 쓴다는 거야. 뭐, 그쪽 최고 오야붕이 자유당
과 손잡기를 마다했다던가. 어쨌든 요즘은 경찰로부터 제  몸들 지키기도 바빠 몸을 사리고 있다
더군. 그런데 그까짓 찬바람 도는 골목 모퉁이 땜에 나서줄 것 같애?"
  그 말은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되지는 않았지만 명훈은 주먹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정치 바람을 배석구를 통해 실감하고 있었다. 배석구는 하루하루 사람이  달라져, 그 무렵은 
무슨 정부의 고관으로 들어앉은 듯한 태도였다. 그런 데 비해  명동 쪽의 주먹이 활기를 잃고 있
다는 것은 뒷골목의 말단인 명훈에게까지 뚜렷이 느껴졌다.
  명훈이 그 생각으로 잠자코 있자 힘을 얻은 깡철이가 한층 더 적극적로 나왔다.
  "그러지 말고 나하고 돌개 형한테 가보자.  너까지 거든다면 들어줄 거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렇게 되면 돌개 형도 좋지 뭐. 가만히 앉아서 골목 하나가 느는데 왜 마다하겠어?"
  그러자 명훈은 그때까지도 마음이 안 내켜 깡철이를  그대로 돌려 보내고 말았다. 골목을 하나 
가진다는 게 어떤 뜻인가를 또래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명훈으로서는 그런  깡철의 제안이 제
법 솔깃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엄청나  보였다. 거기다가 깡철이와 함께  일을 벌여 성공한다 
해도 그와 은근한 경쟁 관계에 떨어져야 한다는게 까닭 없이 부담이 돼 굳이 그의 제안을 외면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저녁때 배석구가 갑자기 명훈을 '풍차'로 불렀다. 가보니 깡철이가 이미 배석구 곁에 착 
붙어앉아 있었다.
  "깡철이 얘기 들으니까, 한 번 해볼 만하던데 어때, 생각없어?명동쪽이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건 
내가 보장하지. 아니, 어짜피 이번 선거 끝나면 우리가 거기까지 도리하게 될 꺼니까, 미리 그 한 
모퉁이에서 상륙해두는 거라고 생각해."
  명훈은 배석구까지 그렇게 나오면 어쩌는 수가 없다 싶으면서도 속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배석
구가 그런 명훈을 기운을 돋아주듯 말했다.
  "실은 너희들에게 살살이 자리를 내줄까도  싶었는데, 이 바닥에서는 서열도  있고해서. 어쨌든 
한 번 해봐. 애들은 너희 학교 패 여섯하고 아이구찌네 넷 합쳐 열 명이면  될거야. 그 밖에 지프 
한 대 내주지. 우리 반공청년단 깃발을 꽂아서 말이야. 경찰이 끼어들면 단부에서 그 녀석들을 소
환하는 거라고 말해. 그냥 까부숴도 되겠지만 합죽이 사건도 있고 해서 구색을 갖춰둔 거야."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합죽이 사건으로 그 위세 좋던 임화수가 모든 직책에서 물
러난다고 항복을 한 일 때문에  경찰쪽도 은근히 겁났는데, 배석구는  거기까지 배려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훈의 기억이 거기까지 더듬어갔을 무렵, 누군가가 비틀걸음으로  나오다가 명훈
을 보고 어깨를 치며 말했다.
  "누구야? 여기서 뭘 해?"
  혀가 약간 꼬부라져 있기는 해도 도치임이 분명했다.  명훈은 그 경황중에도 녀석에게 약한 꼴
을 뵈기 싫어 천천히 몽을 일으켰다.
  "음, 속이 좀 거북해서..."
  "어, 간다야? 너 돌개 형님이 찾더라."
  도치가 그렇게 말해놓고 비척대며 화장실 쪽으로 갔다. 명훈은 입안이라도 헹굴 양으로 수도꼭
지에 손을 댔다. 손이 수도꼭지에 척 달라붙으면 언 쇠붙이 특유의 한기가 명훈에게 비로소 그곳
이 한겨울의 찬 마당임을 일깨워주었다. 수도관이 얼어붙었던지 힘들여 꼭지를 돌려도 물이 나오
기는커녕 헛바람 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명훈은 마당 쪽으로 불빛이 내비치는 주방으로 가서 찬 물 한바가지를 얻었다. 그걸로 손을 씻
고 입을 헹구니 정신이 더욱 맑아졌다. 그동안 머리속을 짓찧어대는 것 같은 두통도 토물과 함께 
씻겨나갔는지 제법 견딜만 했다.
  다시 술집 홀로 돌아갔을 때 명훈은 그곳을 차지하고 앉은 얼굴들도 하나하나  분간이 갈 만큼 
회복이 되어 있었다. 탁자 셋을 붙여놓고  좌우로 깡철이, 호다이, 명구 같은  동창들과 아이구찌, 
꺽다리, 돼지네 패가 마주앉아 있고 안쪽 끄트머리 상좌에는 배석구가 벌겋게 술이 올라 켵에 앉
은 살살이에게 무언가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깡철이는  이마께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고 호다이
도 눈두덩이에 주먹 같은 게 부풀어 있었다.  아이구찌의 오른손은 술잔을 집을 만큼의 손가락만 
내놓고 아예 왼팔에 부목을 대 붕대로 목에 걸고 있었다.  그걸 보며 명훈은 새삼스레 낮의 싸움
을 돌이켜 보았다. 모두들 어지간히 술이 올랐던지, 사람이 드나드는지도 모르고  하던 얘기에 열
중해 있어 명훈은 아무런 방해 없이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었다.  
  배석구가 반공청소년단의 깃발을 매단 검은  지프를 극장 앞으로 보낸  것은 오후 세시께였다. 
명훈은 미리 거기 와서 있던 아이구찌네 넷과 호다이, 명구를 데리고 지프에 올라 깡철이와 만나
기로 한 곳으로 달려갔다. 깡철이는 도치와 한칠이를  데리고 미리 그쪽 패거리가 본부처럼 쓰고 
있는 다방에 숨어 들어갔다.
  명훈이 그 다방 골목 앞에서 지프를 세우고 내리자 입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한칠이가 주
루루 달려왔다.
  "어디 있어?"
  명훈이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한칠이가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헸다.
  "다방에 둘, 위층 당구장에 셋, 깡칠이가 그러는데 진짜는 당구장에 있는 새끼들이래. 딱새 찍새
가 몇 더 있겠지만 그건 걱정할 거 없다구 그랬어."
  그러나 명훈은 벌써 낯빛까지 핼쑥해진 녀석의 말로는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한 군데 몰려
있는게 다섯이라면 자기들 열명이 꼭 그리 넉넉한  머릿수는 아니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곳은 그
들이 몇 달 혹은 몇 년을 터잡고 견더온 제 바닥이기 때문이었다.
  "너, 깡철이 잠깐 나오라고 그래. 수선 떨지 말고 슬며시."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두목 같은 명령투로 그렇게  시켰다. 한칠이가 아무런 이의 없이 다방으
로 뛰듯이 되돌아갔다.
  오래잖아 깡철이가 가죽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찌른채 어슬렁어슬렁 지프쪽으로 다가왔다. 애써 
태연한척 하고 있어도 긴장한 빛을 감추지는 못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왔으면 바로 처들어오지 않고..."
  깡철이가 왠지 일을 서두르는 기색으로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꼭 노련함을 과시하려는 것
보다는, 깡철이가 그렇게 나오는데 대한 반발로 명훈이 느릿느릿 말했다.
  "우선 알아볼게있어. 지금 그 다방과 당구장에 있는게 정말 대가리들이야? 공연히 피라이 새끼
만 몇 놈 때려잡고 대가리들을 놓쳐버리면 일은 글러버리는거야."
  "틀림없어. 대가리라고 할 만한 새낀 당구장에 두 놈뿐이고 나머지는 어차피 똘마니들이야."
  깡철이가 그것만은 자신있다는 듯 말했다.
  "당구장 뒷문은 없어?"
  "다방하고 한 입구를 쓴다니까."
  "뛰어내릴 창문 같은 건?"
  "뒤쪽은 딴 건물로 막혔어. 앞쪽은 바로 저기구. 그런데 왜 쓸데없는 것만 묻고 어물거려.  눈치
채고 튀면 어쩌려고 그래?"
  깡철이가 다시 재촉했다. 그 턱없는 서두름에, 내가 너보다  낫다면 바로 이점일 게다, 하는 기
분으로 간단한 작전 명령을 내렸다.
  "어이, 호이다하고 도치는 차 옆에서 기다려.  차는 다방 입구에 바짝 들이대고, 만약  몰려드는 
새끼들이 많으면 크략숀을 울리고, 차안에 있는 철봉과 도끼를 쓰며 버티는  거야. 이쪽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놈이 있으면 놓치지 말고, 그리고 깡철이, 우리는 먼저 다방 출입구부터 막고 일을 시
작해야 되겠어. 다방 안에 있는 두 놈부터 때려잡은 뒤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거야. 되도록 당구장
에서 눈치 못 체게 조용히 일을 끝내고 말이야.어때?"
  "당구장에 있는 두 놈만 단부로 끌고 가면 되는데 왠 수선이야?"
  깡철이가 그렇게 구시렁거리면서도 명훈의 말을 따라 주었다.
  저녁때라 그런지 별로 손님이 들만한  골목이 아닌데도 다방 안은  사람들로 왁자했다. 명훈은 
거기에  자신들과 맞설 사람은 똘마니뿐이란 걸  알면서도 다방 안으로 들어 닥치는  자신들에게 
보내는 다수의 눈길에 까닭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저쪽 모퉁이에 앉은 새끼들이야. 가죽 잠바하고 머리에 찍고(포마드) 뒤집어쓴 새끼."
 깡철이가 눈길을 한쪽을 가르키며 나직히 일러주었다. 도치와  한칠이가 뻣뻣하게 굳어 앉은 탁
자 건너편에 있었다.
  "어이, 너희들 좀 보자."
  다섯을 데리고 성큼성큼 그들 앞으로 다가가 명훈이 허세 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거렷다. 무
언가 저희들기리 히ㅣ덕거리던 두 녀석이 갑자기 긴장한 낯빛이 되어  명훈과 깡철이를 올려보았
다. 지구로 제임스딘과 같은 머리 모양을 낸 녀석은 스물을  많이 넘긴 것 같지는 않았으나 가죽 
점퍼를 입은 쪽은 함부로 말  놓기가 민망할 만큼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쳐다보는 눈길이 
교활스럽기는 해도 표독해 뵈지 않는게, 깡철이의 정보가 없었더라도 진짜배기 주먹이 아님은 금
세 짐작할 만했다. 양아치나 뜯어먹는 조무래기 왕초이거나 아직 영업 시간이 안 돼 다방에 나와 
있는  고급 술집 주방장쯤으로 봉ㅆ다.
  "새끼들아, 사람이 보자는데 왜 반응이 없어, 반응이."
  깡철이가 자신의 각오를 세울때는 바로 그때라는 듯 아직도 자기들이 빠진 상황을 가늠하지 못
해 누치만 보는 그들 중에서  만만한 찍구 쪽을 골라 가슴패기를  걷어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바람에 시글벅적하던 다방이 고요해지며 이번에는  그 고요함이 명훈에게 다시  까닭모를 위압을 
주었다.
  흑, 하는 비명과 함께 찍구가 가슴패기를 싸앉으며 탁자에 엎드렸다. 얼핏  보아서는 급소를 맞
아 그럴 듯했지만 엄살도 상당히  섞여 있음이 분명했다. 가죽 점퍼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놀라 
물었다.
  "아니, 형씨들, 왜 이러시오? 형씨들은 어디서 왔소?"
  벌서 낯빛이 변하고 목소리가 떨리는게 짐작대로  주먹은 아니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로나마 
그를 버티고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곰보하고 악어 어디 있어?:
  명훈이 가볍게 손을 들어 깡철이를 말리는 시늉을  하며 짐짓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명훈의 속셈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깡철이가 깐족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똑바로 대. 쌩(거짓말) 까면 꼴통을 쪼개놓을 거야."
  가죽 점퍼가 능청스레 되물었다. 단단하게 뭉쳐있는  놈들이로구나 명훈이 그렇게 짐작하며 한 
번더 그들을 떠보려는데 성미가 급한 깡철이가 을러데며 소리쳤다.
  "야,이 새꺄, 너 정말 오리발 내밀래? 니네 오야붕도 몰라?"
  그러자 가죽 점퍼는 그것까지 잡아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머뭇머뭇 말했다.
  "곰보라면 혹 삼식이 말한는거 아뇨? 내 고향 후배 아인데..."
  "삼식인지 사식인지 여기서 왕초 노릇하는  곰보 새끼 말야, 그  새끼 지금 어딨어? 당장 불러
와."
  "발 달린 짐승이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데 낸들 어떻게 알겠소? 그런데 왜 개를 찾으시오?"
  말로 둘러대기라면 자신있다는 듯 가죽 점퍼가 그렇게 명훈의 패거리가  몰려온 까닭부터 캐려
고 들었다. 주먹은 없어도 꾀 하나로 뒷골목에 빌 붙어 산지는 오래인 듯한 느낌이 드는 치였다.
  "어, 저 새끼, 저 새끼 잡아!"
  맞은편 탁자에 앉아 다방 입구 쪽을 보고있던  도치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명훈이 
그 쪽을 보니 뒷골목의 똘마니 녀석 하나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뜨는 손님을 해집고 다방 입구로 
달아나는게 보였다. 명훈은 차 앞에 있는  호다이와  명구를 믿기로 하고, 침착을 과장하며  가죽 
점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뛰어받자 벼룩이지, 어때? 곰보가 어디있는지 말해주지 않겠니?"
  명훈이 그렇게 묻자 가죽점퍼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내비쳤다. 드디어 자기들이 떨어진 상황
을 가늠하게 된데서 온 동요인 듯했다. 그러나  가죽점퍼에게는 끝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 않았
다.
  "시간 끌거 없어, 개새끼!"
  깡철이가 그렇게 내뱉으며 무방비한 가죽 점퍼의 턱에 모진 주먹 한 대를 날렸다. 가죽 점퍼의 
고개가 홱 젖혀지며 벌렁 자빠지듯 다방 의자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곰보하고 악어, 당구장에 있는거 다 알고 있다. 이 새꺄. 어떻게 나오는가 보려고 물었더니 끝
까지 오리발이야."
  깡철이는 그런 가죽점퍼를 노려보며 이를 갈 듯 쏘아붙이고는 도치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너하고 한칠이는 이 새끼들 끌고 나와."
  명훈에게 동의를 구하는 법도 없이 아이구찌네 패들을 데리고 다방  입구쪽으로 달려가는게 그 
싸움에서는 반드시 주도권을 잡겠다고 미리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 바람에 명훈은 하는 수 없이 
아이구찌네 패와 함께 돌진하는 깡철이를 뒤따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앞서 빠져나간 
똘마니를 바깥은 호다이와 명구가 제대로 잡아 두었는지가 궁금해 잠깐 차 곁으로  나가 본게 깡
철이와 아이구찌네 패거리가 당한 뜻밖의 낭패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 새끼 어디갔어?"
  다방 입구에서 지프에 붙어있는 호다이와  명구에게 명훈이 그렇게 묻자  호다이가 어리둥절해 
되 물었다.
  "누구 말이야?"
  "방금 똘마니 한 놈이 빠져나갔는데?"
  그런 명훈의 말에 호다이가 어림없다는 투로 받았다.
  "나오긴 뭐가 나와? 밖으로 나론 건 늙다리들 서넛뿐이었다구."
  그렇다면 바로 이층 당구장으로 튀었구나. 명훈은 퍼뜩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깡철이네 패
가 걱정이 되었다. 그 똘마니 녀석이 곰보에게로  달려갔으면 당구장에 있는 저쪽 녀석들은 모두 
넷, 그것도 아래층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넷이었다. 그런데 깡철
이가 데리고 간 것은 아이구찌네 패 넷이었으니, 생각 없이 덮쳤다간 거꾸로 당하기에 꼭 알맞았
다.
  "쇠빠이뿌하고 도끼 어딨어?"
  명훈이 급하게 묻자 명구 녀석이 얼른 차문을 열고 그것들을 꺼냈다.
  명훈은 쇠빠이프를 받아 쥐고 도끼를 든 채 멀거니 서 있는 명구에게 소리쳤다.
  "너도 따라와!"
  명훈이 나무 층계를 쿵쾅거리며 뛰어 올라가  당구장 문울 열었을 때는 바로  걱정했던 공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깡철이네 패 다섯이 한덩어리로 문께로 밀려나오는데, 어찌 덴 셈인지 깡철이는 
이마를, 아이구찌는 왼팔을 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서! 말리지마!"
  깡철이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를  본 까닭일까,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흉맹한 살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그때 뭔가 땅하고 귀  밑을 스쳐갔다. 언뜻 보니 등 뒤  시멘트벽에 맞았다가 
꺽다리의 웅크린 등허리에 떨어지는 붉은 당구공이었다.
  그제서야 명훈은 덩어리진 깡철네 패거리들 너머 상대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 녀석은 당
구 큐대를 휘드르고, 한 녀석은 당구알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 기세의 명훈도 하마터면 돌아서
서 다아날 뻔 했으나, 안광 시절과 최근 대여섯달의 경험이 어울려 간신히 그를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가 보고 듣고 도 스스로 경험해서 알게된  편싸움의 요령은 무엇보다도 기세에 달려 있었다. 
한 번 밀리면 웬만한 힘의 차이는 무시되 버리고 마는  게 기세였다. 그런데 깡철이 녀석이 턱없
이 서두르다가 머릿수와 질에 있어서 다 같이 우세한 패거리를 데리고도 상대편의 기세에 몰리고 
있던 것이었다.
  바로 그 녀석이 몰리고 있다는게 이상한 오기로 명훈을 충돌질했다. 나는 저래서 안 된다. 이제 
본때를 보여주겠다. 갑자기 그런 결의가 선 명훈은 손에 든 쇠 파이프를 휙휙 소리나게 휘두르며 
멍청이 서 있는 명구에게 소리쳤다.
  "새꺄! 정신차리고 날 따라와."
  뜻밖의 거센 기세로 맞부딪쳐오는 명훈의 쇠파이프에다 천방지축 휘두르기는 해도 명구의 손에 
쥐어든 등산용 손 도끼가 꽤나 위협적이었던지 곰보네 패거리가 주춤했다.
  그러나 그대로 밀고 나가기에는 명구 녀석도 미덥지 않아 명훈은 우선 깡철이네가 싸움 테세를 
정비한 시간부터 벌어보기로 했다. 냉철한 계산이라기보다는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길
러진 감각 같은 것에 의지한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어이, 악어 곰보. 너희 둘 중 누가 진짜 왕초냐?"
  명훈이 이제는 제법 몸에 익은 허세로 그렇게 묻자 낯모르는 사람에게서 느닷없이 자신의 별명
을 불린 두 녀석 중 하나가 그새 되잡은 공격이 자세를 멈추며 갑자기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 넌 누구야?"
  '저 녀석이 악어로구나,' 명훈은 녀석이  삐어져나온 턱과 여드름이 숭숭  난 얼굴을 보며 그런 
단정을 내렸다.
  "악어, 너냐?"
  "그거야 어쨌건 도대채 너희들은 누구야? 어디서 왔어?"
  그때쯤야 겨우 정신을 차린 깡철이와 아이구찌네 패들이 우르르 당구장 계산대 옆에 있는 큐대
거리로 달려가 각기 큐대 하나씩을 빼들었다. 명훈은 그들이 등뒤로 와 서 기다려 짐짓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우리는 반공청년단 동대문 특별단부대에서 왔다. 널 좀 데려가야겠다."
  "동대문? 거기서 왜? 미안하지만 우린 명동 지부 소속이야."
  그렇다면 굳이 사울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악어의 말이 약간 설명조가 되었다. 
명훈은 더욱 목소리를 차갑게 해 그런 악어의 기대를 흩어버렸다.
  "모르는 소리 마라. 여기는 동대문 나와바리야. 꼭 명동 지부를 하겠다면 명동으로 가. 여길  뜨
란 말이야."
  "붜?"
  "여긴 반공청년다느이 활동상 필요한 곳이라서 우리가 접수하겠어."
  "무슨 소리야. 거기다가 여기는 명동 지부 나와바린데 동대문에서 함부로 빼앗아?"
  "그건 우리 단부에 가서 따져봐. 높은 사람들에게 따져보라구."
  명훈이 그렇게 잘라 말하자 악어의 표정이 험학해졌다. 그러나 이미 모두 무언가를 손에 든 일
곱을 보자 자신이 서지 않는지 공격해  오지는 못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곰보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야, 이 새끼들, 이제 보니 순 날 강도  아냐? 까놓고 말해. 우리 딱부리네 애들이 경찰에 달려갔
다구 얕보고 덤비는 거지? 대가리 수로 밀어 붙여 이 골목 먹자는 거 아냐?"
  그러면서 손바닥에 침을 뱉어 큐대를 고쳐잡는게 꽤나  위협적이었다. 그런데도 그 동작 을 그
저 허세나 엄포로 본 게 명훈의 큰 실수였다.
  "의심나면 한 번 내려가봐. 네놈들을 모셔가려고 우리 단부의 지프가 와 있어."
  명훈이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이죽거림으로 그들이 기를 꺽어놓으려고 하는데  딱 하는 소리가 
나며 눈앞이 아뜩했다.
  뒤이어 '비켜!' 인지 '쳐!' 인지 모르는  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사람이 어른거리는  것 같은 것을 
본 뒤에야 명훈은 비로서 자신이 지나치게 방심하고 있던 것을 후회했다.
  '당했구나'
  간신히 버티고 서 있기는 해도 갑자기 온몸이 굳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명훈이 퍼뜩 정신을  되 찾았을 때는 이쪽저쪽이 거칠게 뒤엉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꽤 오랜시간으로 느꼈지만, 실은 잠깐 동안의  현기증 같은 것이었던 
듯했다. 오히려 머리에 가해진 그 불의의 타격이  명훈의 맹목적인 분노를 건드렸는지 한동안 명
훈은 그 다신도 기억 못 하는 난투에 몸을 맡겼다.
  "어이, 간다, 너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냐?"
  명훈의 기억이 마침내 당구장 바닥에 길에 누운 곰보와 악어의 피투성이 모습에 이르렀을 때쯤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쳤다. 얼른 기억을 떨치며 쳐다보니 얼굴에 벌겋게 술이 오른 배석구가 제
법 걱정해주는 듯한 얼굴로 서서 내다보고 있었다.
  "아뇨, 그저."
  "머리를 된통 맞았다며? 그럴 땐 차라리 머리가 깨져 피가 나야 하는 건데."
  "괜찮습니다. 속이 좀 울렁거려 토하고 왔을 뿐이에요."
  "네 주량에 벌서 토했어? 정말로 머리를 상한 거 아냐? 언젠가 나도 한 번 각목으로 머리를 맞
은 적이 있는데 자꾸 속이 울렁거려 치료까지 받은 적이 있지.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요. 술이나 한잔 마시면 괜찮을 겁니다."
  명훈은 왠지 그와 얘기하는 게  싫어져 앞에 놓인 막걸리 사발을  들며 그리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시키거나 은근히 부추겨 힘든 싸움을 해치우고 난 뒤에는 꼭 느끼게 되는 묘한 감정이었다. 
그의 인정을 받는 것에 우쭐했다가도 갑자기 자신이 그에게 조종되는 꼭두각시 같은 느낌에 처량
해지는 것이었다.
  한 번 뒤틀린 속이어서인지 술은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겨우 한 사발을 들이켰으나 이내 
속이 울렁거려 다시 토하고 나니 술자리에 더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자, 일차는 이쯤으로 하고, 이차로 가지. 청운각 어때? 거기 가서 맑은 술이나 마시자고,"
  배석구가 그렇게 호기를 부리고, 녀석들이 환성을 지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날 무렵 해서 명훈
은 슬그머니 술자리를 빠져 나왔다. 술을 받아주지  않는 속뿐만 아니라 기분까지도 그날따라 이
상하게 울적해 도무지 웃고 떠드는 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양이 정치 현상의 일부로 뒷골목의 주먹  세계에까지 조직적인 관찰의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아마도 이십세기에 들어온 뒤 일거야, 그런데 동양은 벌써 2천년 전 부터 이 적법성 없는 정치적 
영향력에 유의하고 있었던 듯해. 또 무슨 거창한 오해와 독단이야? 사마천의 [사기]를  봐. 사마천
은 장군, 대신문사들과 나란히  협객 열전을 덧붙여놓고 있거든.  그건 역사사로서의 기록이잖아. 
뭐 뒷골목 세계를 정치 현상의  일부로 파악하고 조직적인 관찰을 한  것 같지는 않던데. 그렇지 
않아. 어쩌면 중국의 왕조들은 그런 세력을 효과적으로 흡수함으로써 일어나고,  억제력을 상실하
면서 사양길로 접어든다는 공식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거든. 원인과 결과를 뒤 바꾼거 아냐? 왕
조가 성공적으로 지배력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런 세력을 흡수하고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사양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상실한게 아니냐구? 그건 그렇구,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엄숙하게  나와? 왕조는 아니지만 이승만 정권과 정치  깡패들 
말이야. 요즈음 부쩍 활발하거든. 해방 직후의 반공 주먹은 말하자면 왕조  창설기의 효과적인 흡
수 같은 걸로 볼 수 있겠지.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깡패들이 반공청년단 머리띠를 두르
고 시가 행진을 하다니 왠말이야? 명색 민주주의 나라로서는 정권 말기에 해당되는 지금 말이야. 
이왕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인데 계속하지 그래. 실은 말이야, 어쩌면 지금 자유당 정권은 깡패를 
이용하는게 아니라 억제력을 상실한 게 아닌가 싶어.  정통성과 정당성의 빈 곳을 그들의 폭력으
로 메워오다 그 의존도가 억제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버린 것 같아.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 그들이 주인을 갈아치울 궁리라도 하고 있다든? 그런  뜻이 아니고, 말기적 증상의 하나
라는 거지. 국가에 충성 겨쟁을 하고 있는 듯싶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자유당 정권을 ,끝
장내는 데 기여할까 궁금해. 결국 그 얘기야? 그 끝장에는 별흥미 없어. 집권당의  이름이 바뀌고 
정권 담당자가 갈릴 뿐 나머지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정권 교체에 너같은  이상주의자 뭘 그
리 기대해. 그렇지는 않을걸.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보수 정당이라 해도  민주당이 집권하면 우리 
사회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을거야.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떼밀려 그들은 근본적
인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만약 않는다면? 국민적인 저항을 받고 붕괴될걸.  국민적인 저항? 
나는 그런 게 가능할 의식의 성숙도 확인할 수 없고 그들 역량의 결집 방안도  전혀 집히지 않는
데. 또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그들이 무너진  곳에 들어설 수권단체는? 시대의 필요가 산출하겠
지. 그런 막연한 거라면 더욱  암담하지. 기껏해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극우 반동의 대두뿐일걸. 
도대체 그럼 넌 뭐야? 자유당이  이승만에서 이기붕으로 바뀌어가며 천년만년 해먹으란  얘기야? 
이 부정과 부패가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게 옳다는 얘기야? 미안, 미안. 나는 그저 너희 모임의 사
람들이 철저하지도 못하면서 성급하기만 한 게 걱정이 되서.
  배석구의 말대로 정말 뇌를 다친것인지, 아니면 다시 들이켠 두어 사발의  막걸리 때문인지, 찬
바람 부는 밤거리에 나와도 명훈의 의식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한자리에 앉아
서 있을 때보다 더 뚜렷하게 황과 김형의 대화가 길게 떠오르는가 하면, 난데없이 배석구가 나타
나 어깨라도 치며 얘기를 건네듯 그의 말소리가 머릿속을 윙윙거렸다.
  대학은 말이야, 어짜피 간판이니까 과가 시시한 것 가릴 것 없이 이름만 그럴듯하면 원서를 내
라고. 등록금은 걱정마. 단부에서 나올 거야. 안 되면 내가 대지. 옛날 빨갱이 때려잡을 때도 학교 
주먹은 중요했어. 주먹쓰기는 마찬가지라도 학생이라면 한풀 접고 봐주거든.  들은 얘기지만 그때 
학련패는 10.1 폭동가지 진압하러 나갔다구.  너 요즘 이상하게 기죽어  뵈는데, 혹시 발들여놓은 
걸 후회하고 있는거 아나? 스물이 넘어 삼류 고등학교 야간부에 나가는 등 마는 등  하면서도 공
부해서 출새할 꿈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거 아니야. 더군다나 그 잘드는  솜씨 가지구. 여기도 
출세의 길이 없는건 아니야. 요새 한창 설치는 김두한이, 뭐 배운 거 많고 공부 잘해서 출세한 줄 
알아? 이회장(이정재), 임단장(임화수)이 열 장관 안부러운것도 마찬가지야.  주먹이야, 다 주먹 덕
분이라고. 그 사람들 말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뛰어준 우리들 주먹 덕분이란  말이야. 우리라구 맨
날 옹달에서 마뜩잖은 푼돈이나 만지란 법은  없어. 두고 봐, 이 배석구,  돌대가리에, 똥배짱뿐인 
저들하군 다르다구. 넌 나만 믿으면 돼.
  그 소리에 이어 이제는 아예 정신적인 스승 노릇을 하려 드는 황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명훈의 의식은 틀림없이 그들과 연관된 어떤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걸 정리해서 자신이 괴로워하는게 무엇인지 알아낼 힘이 없었다.
  어이, 명훈이, 현인은 시장에 숨어 있었다니 정말로 그렇더군. 독각 선생알지? 거 왜 책방 주인 
아저씨.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더라. 거기 언제 한 번 같이 가보자구. 들을 만한 게 많아.
  독각 선생이라 흠,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름이군. 외다리라고  하면 대뜸 병신이 연상되는데, 그
걸 한문으로 바꿔놓으니 꼭 뭐같이 들리는 구나. 출신이 뻔해 보이는 마누라에게 쥐어사는 그 알
코올 중독자가, 겨우 중학생들에게 방인근이 소설이나 빌려주는 작자가, 우리  혁명가 황아무개의 
선생이라, 잠시 그쪽으로 모아졌던 명훈의 생각이 회상인지  환청인지 구분 안 가는 목소리들 속
에 흩어졌다.
  "젊은 사람이, 초저녁부터 정신차려요?"
  비틀거리며 걷다가 발등이라도 호되게 밟았는지 한 중년 부인네가 앙칼지게 명훈에게 쏘아붙였
다. 퍼득 정신을 가다듬은 명훈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한없이 걸은 듯한 느낌이었으나 겨우 골목
길은 벗아나 종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3가와 4가 중간쯤이었다.
  습관적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던 명훈은 거기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마침 몇 발 안되
는 곳에 멈추어선 시발 택시가 그를 일깨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택시, 택시."
  명훈은 주머니도 확인해보지 않고 택시를 불렀다. 왠지 머뭇거리는 것 같던 택시가 몇 걸음 다
가와 명훈 앞에 섰다.
  "용두동 쪽으로 갑시다."
  자리에 앉아 그렇게 갈 곳을 일러준 뒤에야  명훈은 점퍼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다행히도 천환
짜리 한 장에 백환짜리 몇 장이 집혔나왔다.
  "못하는 술을 억지로 마셨군."
  나이 지긋한 운전사가 명훈을 힐끗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명훈이 얼른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운전사가 다시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술냄새는 나는데, 안색은 금방 쓰러질 사람처럼 창백해."
  "아, 네. 원래 술을 좀 하는 편인데 오늘은 통."
  명훈이 그렇게 대답하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산란되어서인지 그날따라 밤거리가 
유난히 휘휭스러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가족들이 있는 집.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가 다 있는 ,영희와 철이
와 옥경이가 반가와 매달리는 ,"
  명훈이 문득 그런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차가 신설동 로터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어떻
든 자신이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서 헤메고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갑작스런  피로가 가정적인 휴
식에 대한 그리움을 일으킨게 틀림없었다.
  명훈이 자취방에 있는 언덕으로 이르는 골목길을 제쳐놓고 박치과로 차를 돌리게 된 것도 그런 
감정 때문일 것이다. 느닷없이 영희가 보고 싶어져  막 차를 꺽으려는 운전사에게 다급하게 말했
다.
  "아저씨, 바루  쭈욱 가서 저쪽 사거리에 세워주십쇼."
  운전사가 쓰다 달다 말도 없이 명훈이 시키는 대로 해주었다.
  실망스럽게도 박치과에는 벌써 불이 꺼져 있었다. 진료야 겨울철은 일곱시면 끈다는 건 명훈도 
알고 있었지만 영희가 숙소처럼 쓰는 대기실마져 불이 꺼져 있다는 게 좀 뜻밖이었다. 학교는 아
직 방학중이었고 자취방에에도 황과 김형이 오고 나서는 발길이 뜸해진 영희였다.
  '벌서 잠들었나.'
  명훈은 가로등 불빛에 시계를 비춰보았다. 생각보다는 오래돼서 아홉시 반이 넘었으나 아직 잠
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출입문으로 다가간 명훈은 가볍게 창을 두드리며 영희를 불러보았다.
  "영희야, 자니? 나야, 오빠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놓고 보니 새삼스런 살가움으로  콧마루가 시큰했다. 객지에서 홀로 고생하
는 어린것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후회가 일며 그 어느 때보다 진한 혈연의  정으로 누이동생이 보
고 싶었다.
  짐작대로 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초저녁잠에 빠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어 차례 더 
창문을 요란하게 두들겨 보았느나 마찬가지였다.
  명훈은 하는 수 없이 자취방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인지, 몇 발자국 
떼어놓기도 전에 영희가 어디선가 금세 나타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어디선
가 금세 나타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서너 발자국을  뗀후에 되돌아보고, 여
남은 발자국에 한 번은 멈춰서서 기리라는 식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명훈이 아직  치과 앞의 사거리를 벗어나기도 저에 치과 
안에서 불이 켜졌다. 그렇게 자주 돌아보았건만 사람이 들어가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는 못했는데
도 안에서 불이 켜진 게 한편으로는 신기하면서도 까닭 모를 불안을 일으켰다.
  '영희에게 무슨 일이 있다.'
  뛰듯이 치과 출입문께로 다가간 명훈이 다시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렇게 
느껴서 그런지 안에서 새어나오는 잘 들리지  않는 수선거림이 딱 그쳐지며 잠결에서  깨어난 것 
같은 영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응, 오빠? 잠깐만 기다려"
  그리고 옷을 걸치는지 잠시 꾸물대는 영희가 이윽고 슬리퍼를 길게 끌며 출입문께로 다가와 문
을 따주었다.
  얼른 명훈이 눈에 들어온 실내의 광경은 영희가 자다가 일어난 것임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눈
에 익은 군용 야전 침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폈던 담요도  구겨진 채 흩어져 주인이 급하게 
빠져나갔음을 일러주고 있는 듯 했다. 영희도 그랬다. 아무렇게나 급하게 걸쳐 그런지 목이 긴 스
웨터는 목깃이 가지런히 접혀 있지 않았고 몸 옆쪽으로 나 있어야 할 단추도 몸 앞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빠, 왠일이야?"
  영희가 잠에 취한 듯한 실눈으로 명훈을 맞으며 물었다. 조금 전 방안의 은밀한 술렁거림을 느
끼면서부터 어딘가 억지로 꾸민 데가 있는 듯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너, 왜 아까 문 안 열었어?"
  "아까, 응 그게 오빠였어? 꿈결에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는데."
  "그럼 그렇게 깊이 잠에서 지금은 어떻게 깨어났지?"
  영희는 천연스레 둘러대고 있었으나 무언가 수상쩍은  분위기가 끊임없이 직감을 건드려 왔다. 
오래 걸리지 않아 명훈은 이상한  것을 찾아냈다. 야전 침대 옆  의자 등받이에 남자용에 분명한 
갈색 머풀러 하나가 걸려 있었고, 의자 발치에도 틀림없이 남자용인 머플러  하나가 걸려 있었고, 
의자 발치에도 틀림없이 남자용 가죽 장갑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저, 마후라 누구 거야?"
  명훈은 우선 그것부터 물으며, 노려보듯 영희를 살펴보았다.
  "그거, 아, 원장 선생님 거야. 퇴근하실 때 두고 가신 모양인데."
  영희는 여전히 그렇게 둘러대고 있었으나 낯빛은 이미 전 같지가 않았다.
 불그스레하던 영희의 볼에 핏기가 싹 가시는 걸 보자 명훈은 갑자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하며 잠시 맑아졌던 머리속이 다시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너의 원장이란 작자 거냐? 내 보기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작자 같던
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추운 날 마후라도 안 하고, 장갑까지 한 짝은 떨궈놓고."
  "참 그렇네. 그렇지만 오늘 급한 일이 있었어. 집에."
  이미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기를 쓰고 그렇게 꾸며대는 영희가 명훈을 더욱 못 참게 하였다.
  "못된 것, 바로 말해! 누구야? 누가 여기 왔다 갔어?"
  명훈은 들고 있던 가죽 장갑으로 영희의 얼굴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영희는 가죽 장갑에 맞아 
흐르는 코피를 씻으면서도 오히려 그녀 특유의 엇셈을 되찾아버렸다.
  "오빠, 왜 이래? 있긴 누가 있어? 어디서 술에 취해 와 갖곤 이래?"
  영희가 그렇게 나오면 억지로 입을 열게 하기는  틀린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한번 뻗대기 시작
하면 불칼 같던 어머니도 손을 들고 마는 게 영희의  고집이었다. 하지만 일이 일인 만큼 명훈은 
이를 사려 물었다. 초주검을 시키더라도 그 일만은 밝힐 작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지만 틀림없는 인기척이 
갑자기 명훈의 육감을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진작부터 어딘가 수상쩍던 헝겊 칸막이 저편의 진료
실 안이었다.
  "누구야? 나와."
  명훈은 이상한 불길까지 뿜는 눈길로뻗대고 서있는 영희를 버려두고 그 칸막이 쪽으로 가서 소
리나게 휘장을 걷어치우며 소리쳤다.
  무슨 괴물차람 버티고 있는 치료용 의자  곁에서 급하게 양복 윗도리에다 팔을  꿰마다 그대로 
굳은 채로 명훈을 마주보고 선 것은 바로 박원장이었다. 그새 넥타이까지 맨 단정한 정장 차림과 
그가 병원의 원장이란 사실이 앞 뒤 없이 다가들던 명훈을 멈칫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직 양말도 신지 못한 하얀 맨발과  그 곁에 가지런히 놓인 잘 닦인 
구두가 견딜 수 없는 혐오감과 분노로 명훈을 돌게 했다.
  "이 새끼, 정말로 너였구나. 이 나쁜 새끼."
  명훈은 거대한 탄환처럼 온몸을 날려 그를 받아넘겼다.  무방비 상태로 굳어 있다가 그대로 반
듯이 넘어가는 그가 무슨 가벼운 짚단 같았다. 명훈은 이어  캄캄한 의식의 밤을 해매듯 그 저하
없는 몸을 두들기고 있었다.
  무어라고 찢어지는 듯한 외마다소리를 질러대며 매달리는 영희가 꼭 어지럽고  사나운 꿈 속의 
악귀 같았다.
  
    27장 그 겨울의 끝
  날이 희붐히 새기며 기차 안은 더욱 썰렁해졌다   윈래도 제 구실을 다 못하던 스팀  장치였지
만, 대구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빈자리가 없을 만큼 들어찼던  사람의 온기로 기차 안은 견딜 만
했었다. 그러다가 대구에서 객석까지 듬성듬성 빌 만큼 승객이 내려버리자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늦겨울의 새벽 추위가 슬금슬금 스며든 것이었다.
  초저녁 술에 취해 가까운 승반대 위에 기어올라가던 청년이 술한기라도  들었는지 이를 덜덜거
리며 되내려오는 것을 보며 영희도 갑작스레 옷깃을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웅크렸다 대구역에서 
왁작거림에 수잠에서 깨어난 그녀였다, 그러나  곁에 앉은 오빠 명훈은  초저녁의 자세 그대로인 
듯 했다. 물들인 미제 야전 점퍼만으로는 영희가 걸친 목 긴 털 스웨터보다 나을 게 없는데도 전
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미루어 무언가 모진 결심을 되풀이 다짐하고  있거나 추위를 이
겨낼 만큼 이겨낼 만큼 큰 충격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거 같았다.
  그 바람에 새삼 겁이 난 영희는 가만히 눈길을 훔쳐보았다. 명훈은 나무로 꺽은 사람처럼 이제 
막 희뿌옇게 밝아오는 차창 밖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 같아 영희는 하
마터면 그런 명훈을 건드려볼 뻔했다.
  "영희야, 우리 집으로 가자. 어머님께로."
  전날 경찰서에서 풀려나면서 금방 허물어질 듯한 표정으로 한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갑자기 
실어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말이 없는 명훈이었다.
  오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영희는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게  막연한 의문에 빠졌다
가 문득 모든게 자신 때문이란 걸 기억하고 섬뜩함 속에 그 전날 하루를 떠올렸다.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어느 정도는 그 노력의 효과를  보아, 가수와도 흡사한 상태에서 한동안
이나마 잊고 있었던 사람과 사전들이었다.
  명훈이 미친 사람처럼 박원장을 짓밟고 두들길 때  영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
이 아닐 뿐 아직은 쾌락과는  거리가 먼 박원장과의 육체적 맺음이  낳은 감정 때문일까. 영희는 
몸을 일으켜 웅크린 채 바닥을 뒹구는 박원장보다 더 격심한 아픔을 느끼며 명훈에게 매달렸다.
  그러던 영희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제정신을 되찾은 것은 메스라도 집어 명훈을 찌르고 싶
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바깥으로 뛰어간 그녀가 지나가던 사람에게 신고를 부탁하고 가시 치
과로 뛰어들어왔을 때였다.
  "꿇어앉아, 요 쥐 같은 새끼야!"
  영희가 진료실을 되돌아가니 명훈은 어느새 마구잡이 주먹질을 멈추고 그렇게 으르렁거리고 있
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터지고 부은 박원장이 흘금흘금  명훈의 눈치를 보며 정말로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 참담한  모습이 갑자기 그녀의 거센 성정  속에 숨어 있던 나약과 
비굴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불러일읔키면서 그때까지 영희를 앞 뒤 없는 보호 본능에서 끌어냈
다.
  "어떻게 된 거야? 똑바로 대. 똑바로 안 대면 죽여버릴거야!"
  명훈이 겁먹은 국민학교 생도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박원장에게 다시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박원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더듬거렸다.
  "자, 잘못했어. 영희 오빠가 용서를."
  영희는 명훈이 더는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가 어떻게 대답하는가
를 알고 싶어 그런 것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박원장은  곁에 영희가 있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명훈만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명훈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
지자 재빨리 덧붙였다.
  "어쩌다보니 죽을 죄를 지었어."
  "뭐? 어쩌다 보니라고? 언제부터야?"
  명훈이 다시 광기 섞인 고함으로 물었다. 그러나 영희는 벌써  그때부터 더 듣고 싶지 않은 기
분이었다.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사랑에 대한 동경' 이나  '젊은 날에 대한 불 같은 향수'같은 말
들은 다 어디 가고 어쩌다 보니라니...
  "얼마 되지 않았어. 저 정말이야. 학생이 이해해줘."
  "새꺄, 이게 얼마 되고 안되고의 문제야? 이제 어떡할 거야?"
 "최대한으로 보상하겠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거기서 영희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서 경찰이 빨리 와주길 빌었다. 나중에 잡아떼더라도 박원
장이 책임진다거나 결혼하겠다는 소리를 해주기를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바랬다. 최소한 진심으
로 사랑했노라는 말이라도.
  그러나 경찰이 온 것은 주먹질에 질린 박원장이 영희가 들을 소리를 못 들을 소리를 넋나간 사
람처럼 다 털어놓은 뒤였다. 이어 파출소에서의 그  악몽과도 같은 하룻밤 그어떠한 고문보다 더 
괴롭던 이죽거림과 욕지거리 속의 신문,  연락을 받고 박원장이 아내와  처족들의 악다구니와 위
협...
  명훈에 대한 고소를 취하한다는 조건이 아니었더라면 영희는 혼인방자간음으로  박원장을 고소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지장을 찍어주었을 것이다. 그만큼 하루낮 박원장이 직접 간접으로 보여준 
그의 실상에 대한 환멸은 컸다. 한때는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은  게, 그리고 자
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 게 스스로도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오후까지도 영희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한 가닥의 미련마져 무참하게 끊겨나간 것은 
박원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였다. 여기저기 살갗이 터지고 찢긴 것말고도 이빨이 셋이나 부러
지고 갈빗대에 금이 가 가까운  병원에 누워 있는 박원장을 영희는  마지막 오기로 만나러 갔다. 
금세 깨물어 뜯을 듯 표독을  부리는 그 아내의 악다구니보다는 말끝마다  '천한것'을 되풀이하는 
장모의 깔보는 눈길이 영희가 억센 기질을 자극해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각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박원장부터 만나바야겠다고 뻗대게 한 것이다.
  "네가 어떻게."
방문을 열자 박원장이 나직한 신음과 함께  영희를 맞아들일 때만 해도 영희는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을 만큼 마음이 풀렸다.  그 동안의 혐오와 경멸에도 불구하고  흰 붕대에 감긴 찢기고 
터진 그의 얼굴이 너무도 애처롭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눈길도 어쩔 수 없이 그녀
를 부인해야 했던 자신의 비굴과 나약을 괴로워하고 있는 듯했다.
  "원장 선생님, 괜찮으세요?"
  영희는 갑작스레 잔인한 복수감에 휘몰려 박원장에게 그렇게 나직이 물으면서 씩씩거리며 뒤따
라 들어오는 그의 장모를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애정에 찬 말 한마디만 끌어내도 그 밉살맞은 여
자에게는 훌륭한 복수가 될 것 같았다.
  박원장의 말소리에서 이미 어떤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는지 장모의 눈길은  드러나게 실쭉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영희가 느꼈던 복수의 쾌감은 너무 짧고 허망했다.
  "나가, 이 못된 것. 술 취한 사람에게 꼬리를 쳐 낯을 못 들게 해놓고 또 무슨 수작을 하려고."
  갑자기 박원장의 격분에 찬 고함  소리가 날카로운 송곳처럼 영희의  고막을 찢어왔다. 영희에 
대한 미움보다는 뒤따라 들어온 장모를 보고 놀라  지른 비명에 가까웠는데. 그러나 그의 눈길에 
번쩍이는 것에 놀라 지른 비명에 가까웠는데, 그러나  그의 눈길에 번쩍이는 것은 틀림없이 궁지
에 몰린 들짐승의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비열하고도 절망적인 살기 같은 것이었다.
  "영희야."
  보지 않아도 조금 전의 움직임에서 그녀가 자지 않고 있었음을 알았다는 듯  명훈이 메마른 목
소리로 영희를 불렀다. 영희가 움찔해 돌아보자 명훈은 애써 그 눈길을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이 기차가  철교를 지날 때  함께 뛰어내리든지 싸이나(청산가리)한덩이  사서 갈라먹을
까?"
  하지만 거의 열두 시간 가까운 침묵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영희는 그게 터무니없는 감정의 과장
으로 들렸다. 솔직히 영희는 자신이 한 짓이 죽을 만큼 큰 잘못이라고 느끼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전쟁 뒤의 황패한 도회 언저리를 떠돌며 채운  열아홉 살의 문턱은 아직 그 일이  앞으로의 삶에 
어떤 불리로 작용할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면 넌 영원히 사랑스럽고 순결한 내 누이로 남아 있게 될 텐데. 언제나  가엾고 보고 싶은 
누이일 수 있을 텐데."
  이닌게아니라, 명훈에게도 어느 정도의 감정의 과장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가  점점 깊이 빠
져들고 있는 질척한 수렁 같은 삶에 대한 회유가 그런 식으로 투영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빠, 잘못했어. 그 사람이"
  겨우 그런 말을 생각해낸 영희가 짐짓 울먹임 섞어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죽고 싶지는 않겠지. 아니 죽울 수도 없어. 어떻게 살아온 우린데."
  그러다가 무슨 큰 결심을 발표하듯 명훈이  이렇게 말한 것은 차창밖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였
다. 
  "그래, 낙끝을 기억하자. 돌내골의 낙끝, 기억나지? 전쟁이 난 그해 겨울, 영천 외가에서 돌아가
다가. 할머니가 어머니를 닦달하던 곳. 다 잊고  다시 출발하는거야. 이쯤에서라도 네가 빠져나온 
걸 다행으로 여기고. 너는 이제부터라도 죽은 듯 움츠리고 집에서 쉬는거야.네  상처가 회복될 때
까지. 아니, 그냥 기다려. 우리의 해가 뜰 때까지. 서울은 나 혼자면 돼. 나는 반드시 우리의 날을 
앞당겨오게 하마."
  자신이 빠져든 불행보다는 오히려 그게 슬퍼 영희의 눈시울이 화끈해질  만큼 쓸쓸하고 공허하
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명훈과 영희가 여름의 기억을 되살려 집으로 찾아갔을 때 인철과 옥경 남매는  아직 늦잠에 빠
져 있었다. 윗목에 밥상이 차려져 있고,  이불 발치에는 밥그릇이 묻혀 있는 걸로  보아 어머니는 
벌써 시장으로 나간 듯 했다. 편지에서 읽은 그 헌옷가게로.
  방학중이니 굳이 깨울 것도 없다 싶어 언 몸이나 녹이려고 이불속으로 발을 들여넣으려는데 그 
동안의 수런거림 때문이었는지 인철과 옥경이가 차례로 깨어났다.
  "어? 형, 누나"
  "으응, 큰 오빠, 언니."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눈을 비비며 번갈아 안겨오는 인철과 옥경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을 부
둥켜안으면서 영희는 비로서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이 그 집에서 
너무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 그 어떤 질책보다 그녀를  참회스런 기분에 젖
어들게 했다.
  인철과 옥경이 뛰어가 알렸는지 어머니는 점심때도 되기 전에 돌아왔다. 여름 바학 때 뒤로 여
섯 달 만에 4남매가 나란히 앉아  아침밥을 나눠먹고 식곤증과 이틀 동안의 부실했던  잠 때문에 
곯아떨어져 있는 영희의 귀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먼 하늘 위에서 천둥 소리처럼 울려왔다.
  "아이고 야들이 우얀 일이고? 우예서 전보 한 장 없이 남매가 아 왔노? 설도 아닌데."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아직 놀라움보단  반가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영희는 왠지 
그 반가움 뒤에서 의심의 칼날이 번득이는 것 같아 선뜻 눈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명훈은 영희보다 훨씬 깊이 잠에 빠져 있는  듯 했다.어머니가 다가가 이리저리 쓰다듬으며 잠
에서 깨우려 애쓰는데도 나무토막처럼 반응이 없었다. 영희는 명훈이 정말로 긴밤 한숨도 눈붙이
지 못한 것 같아 그게 미안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여겨졌다.
  어머니는 곧 깨우기를 단념했다.
  "야들이 밤차를 타고 와 억시기 피곤한 모양이네. 아침들은 묵었나."
  그러면서도 오히려 인철과 옥경을 밖으로 내몰고 자신도 따라 나가는 것이었다.
  "엄마, 어디 가?"
  "장 쯤 봐올라꼬. 큰 오빠하고 언니가 왔으니 점심이나 따스분이 해먹여야제."
  부엌 쪽에서 옥경이와 어머니가 그렇게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영희는  다시 아슴아슴 잠속ㅇ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결국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잠은 아니었다. 얼마나 더 잤을까. 이번에는 철이
와 옥경이가 뛰어들어와 수선을 떨며 명훈과 영희를 깨웠다.
  "야들아,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그만하면 엉간히 잤다."
  부엌문을 통해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이제는  별 수없이 일어나야겠구나, 
영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직 어머니를 바라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은채 망설이고 있는데 명
훈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철이하고 옥경이구나, 이리와."
  그러는 명훈의 목소리는 어느새 다정하고 부드러운 큰형, 큰 오빠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철과 옥경이 응석 섞인 환성을 지르며 명훈의 무릎을 다투는 걸보고 영희도  몸을 추슬러 일
어났다. 방안의 기척으로 명훈과 영희가 모두 깨어난  걸 알았는지 어머니가 부엌으로 대뜸 상부
터 들어밀었다. 부엌 천장 어디에선가 뚫린 구멍으로  한 줄기 햇살이 새어들어와 김이 피어오르
는 상 위에 희고 긴 장대처럼 엇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아침에는 장캉 밥캉 먹니라꼬 힘들었제? 배가 고파 그랬는지 그릇은 다 비웠드라만."
  어머니가 뒤이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 말이  아니라도 마음먹고 차린 상인 것은 한눈에 
알만했다.
  양멸치라고 부르는, 말라 꼬부라진 손가락 굵기의 생선과 넓적하고 두툼하게 썬 두부가 뒤섞인 
찌개 냄비를 가운데로 하고, 김.구운 꽁치 토막.시금치 나물, 시장을 보아야 마련될 수 있는 반찬0
들이 좁은 상을 뒤텊여 된장과 김장김치는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방삽머리에 앉아 어머니가 기도를 시작했다. '일용한  양식을 주어 감사합니다'란 구절이 되
풀이되는 것과 다름없는, 십 년이 지나도 별로 늘지 않는 기도 솜씨였다.
  "자, 뜨실 때 얼른 먹자. 아이들이 깝쳐(재촉해) 밥이 설지나 않았는지 모리겠다."
  기도가 끝난 뒤 그렇게 수저 들기를 권하던 때만 해도 어머니는 객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자
식들에 대한 반가움만으로만 들떠 있는 듯 했다. 밥상을 물린 뒤 거들겠다는 영희를 구지 마다하
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흥얼거리전 찬송가도 틀림없이  반가움이 변한 감사의 표시였고, 이
어 들고 들어온 사과 광주리에세 굵고 잘익은 것만 골라 명훈과 영희에게 하나씩 권할 때도 아직
은 오랜만에 곁으로 돌아온 자식들을 맞는 어머니의 마음뿐이었다.
  "자, 모두 세수하고 영남여객댁에 가자.  해도 바뀌였고 하니 아자씨  아주무이한테 인사디려야
제."
  그렇게 명훈과 영희를 앞세우고 영남여객을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희를 그 아침 잠결에
서 소스라쳐 깨어나게 한 의심의 칼날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본능적인 감각이라고 할까, 진작부터 그들 남매의 돌연한 귀가가 어딘가 불길
한 예감을 건드리고 있었음이 또한 분명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캐묻기를 이루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드디어 명훈에게 묻기를 시작한 것은 목사관까지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자, 인자 좀 물어 보자. 아까 니는 그냥 내려왔다 캐지만은, 내가 보기에는 그게 아인 동싶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었 던 같은데, 함 말해봐라. 무신 일고? 무슨 일 때매  방학도 다 끝나가는
데 남매가 전보도 한 장 없이 이래 왔노? 더구나 영희도 글코 니도 글타. 모두 형용이 말이 아니
다. 뭐로? 무슨 일꼬?
  여기저기 다니는 사이 짧은 겨울  오후가 다해 어둑해진 방안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어머니가 
갑자기 사람이 변한것처럼 그렇게 물었다. 명훈이 왠지 움찔했다가 떠듬떠듬 입을 떼어놓기 시작
했다.
  "아무래도 영희는 집에 와 있어야겠어요. 내가 바빠서 돌볼 틈이 없고,  나이가 찬 계집애가 객
지에 혼자 있는 건 안 좋은 것 같아서."
  "그거야 첨부터 내가 안 캤나?  그런데 니가 학교를 해야  한다며 쎄와(우겨서) 서울에 아뚜고 
온 기제. 글치만 각중에(갑자기) 와? 거기가 일껀 시작한 학교는 우야꼬? 인자 2학년도 다 마쳤으
이, 한학년만 하면 더 하믄 되는데."
  "학교도 좋지만 멎저 사람이 성해야지요. 사람 잘못되면 학교는 해서 무슨 소용있겠어요?"
  명훈은 아마도 서울에서의 일은 어머니에게 묻어둘 작정이었던 듯했다. 그것은 또한 감히 그에
게 물어보지 못해도 영희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영희가 내려오는 기차간에
서만도 몇 번이나 불에 달군 인두로 자신의  종아리를 지지던 어머니를 섬뜩하게 떠올렸다. 서른
둘에 혼자 되어 거의 십년동안이나 아직 다 시들지 않은 몸과 그 몸이 마지막 안간힘으로 호소해
오는 욕망을 상대로 그토록 끔직한 싸움을 벌이던 어머니를.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용서 못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륜한 남녀  관계일 것임에 틀림없
다. 서 자신과 박원장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귀가는 애초부터 잘못된 셈이었다. 그  점은 명훈도 
잘 알고 있어 되도록 그것을 숨긴채 영희를  어머니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태연히 거짓
말을 해치우기에 스스로가 받은 충격이 너무 컸던지  이내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머니가 날카롭게 그 헛점을 파고들었다.
  "먼저 사람이 성해야 한다이? 그럼 여으히 쟈가 어디 성찮단 말이지? 어디  병이라도 났니? 말
해봐라, 무슨 병이고?"
  "병이 난 게 아니라 여자가 객지에 꼭 병이 난 것만 성치않은 건 아니죠."
  빈드시 거짓말에 서투른 것도 아니었으나 명훈은  더욱 드러나게 허둥댔다. 그러잖아도 죄어드
는 것 같던 영희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나다를까, 어머니는 벌써 일의 진상을 반나마 알아챈 눈
치였다.
  "뭐시라? 그라믄 저게 서방질이라도 하고 댕긴다 말이가?"
  그렇게 다그쳐놓고 갑자기 곁에 옥경과 인철이 있는 걸 깨달은 듯 둘을 보고 소리쳤다.
  "옥경이하고 철이는 좀 나가 있거라."
  "밖은 벌써 어두운데."
  인철이 오랜만에 돌아온 형과 누나 곁을 떠나는게 싫었던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러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게 한편으로는 어쩌면 어머니와 형의  말을 다 
알아듣고 걱정하는 것같이도 보였다.
  "어머니는 무슨 그런 소리를 누가 영희를 그랬다고 했어요? 이제 나이도 열아홉에 들고 하니까 
그쪽으로 걱정이 돼서 집에 데려다놓겠다는 뜻이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명훈이 부인을 대신한 짜증까지 섞어  그렇게 잡아뗐으나 소용
없었다. 한 번 더 탐색을 시도하고는 있어도 어머니 의심은 이미 그쪽으로 기운 뒤였다.
  "봄에 같이 데리고 올라갈 때는 괜찮고, 인제 겨우 몇  달 안 된 지금은 걱정이 됀 단 말이제? 
갑자기 왜 그리 됐노? 우째서 갑자기 걱정이 돼  편지 한쪼가리 없이 밤차로 짜들고(막무가내)로 
내려왔노? 둘 다 모도 죽구재비(죽을상)가 돼가지고 말이다."
  "그 때는 한집에 있었으니 그렇지만, 가을 부터는  따로 있게 됐다고 편지하지 않았어요? 거기
다가 내가 자주 가보지도 못하게 되어 집에 데려다 놓기로 한 겁니다."
  침착을 되찾은 명훈의 거짓말이 한층 조리있게 되어갔지만 어머니는 용케 거기서 또 다른 암시
를 찾아 낼 뿐이었다.
  "옳다. 가을에 뭔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도 거다(거기) 하나뿐인 동생은 쳐매삘어(내버려)둬놓고 
쏘댕기다가 겨우 그걸 알았구나. 그래서 밤새로 천둥치둥 끌고 오는 길이제?"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나 벽에 걸어둔 구제품 오버를 벗기며 명훈에게 차갑게 말했다.
  "이래도 알고 저래도 안다. 그러이 옷 뜨시게 입고 따라 나온나. 아아들 날 춥고 저문데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고, 집 안에서 큰 소리내 이웃 부끄럽게 할 거 없고."
  명훈이 제법 화까지 내며 뒤늦게 강경한  부인을 거듭했지만 끝내 어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했
다. 아무 대구없이 목도리에 머리수건까지 덮어쓰고 방  밖으로 나가 어떻게든 방안에서 버텨 보
려는 명훈을 재촉해 불러낼 뿐이었다.
  명훈이 마지못해 따라나서자 어머니는 비로서 영희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아이들 저녁해 멕여라. 쌀은 윗목 쌀자루에 있고 반찬은 낮에 먹다 남은 거 뎁히믄 될 꺼다."
  이상하게도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벌서 얼마 전부터 오빠가 끝내 견뎌내지 못하리란 예감
에 온몸의 힘이 쑥 빠져 멀거니 앉아 있기만 하던 영희는 그 소리에 화들 짝 놀랐다.
  그러나 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나가는 어머니의 차갑게 굳은 뒷모습에  절로 입이 얼어붙었는지 
대답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어머니와 오빠가 방을 나간 뒤 영희는 옥경과 인철이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훔쳐
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한동안 막연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그 일을 아는 한 지붕 
아래 있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자기 앞의 막연한 희망과 불안의  교차가 아니라 구체
적인 공포로만 그녀를 짖누리기 시작했다. 찬 겨울  들판을 헐벗은 거지로 떠도는 자시의 모습이 
엉뚱하게 떠오르며, 그땠것 느껴본 적이 없는 비감에 느닷없이 젖어들기 까지  했다. 여자로서 좀 
고집에 세고 격정적이기는 하지만, 영희는 그때까지 해도 아직은 혼자만의 삶을 결행하기에는 이
른 열아홉 초입의 여자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누나, 왜 그래?"
  영희의 눈에 괴는 눈물을 보았는지 전등불을 켜고  앉던 철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 유순하고
도 생각깊은 눈길이 황급히 눈물을 씻어낸 영희에게 굳이 명훈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간 어머니
의 분별을 흉내내게 만들었다.
  '그래, 이 아이들에게까지 알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쌀자루 어딨지?저녁 해줄게."
  영희는 그렇게 철의 주의를 돌리고 부엌으로 내려가 저녁밥을 지었다.
  그러나 쌀을 안치고 제재소에서 나온 피쪽나무로 불을 때는 동안 영희는 다시 그녀만의 생각에 
빠져들어갔다. 이번에는 어쩌다가 자신이 그렇게 몰리게 되었는지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이
상하게도 절실한 후회나 죄책감 감정이 있다면  기껏해야 박원장에 대한 깊이 모를  미움과 원한 
정도였을까.
  어머니와 오빠 명훈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도 두어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가 
오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지 못하는 체질인 데다, 타고난  억센 성격이 될 대로 되겠지만 결론과 
함께 이끌어낸 여유로 영희는 그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을 아이들과의  시답잖은 얘기로 죽여나갔
다.
  "나는 오빠의 야망을 안다. 일기에서 보았거든."
  영희가 여유를 되찾은 걸 보고 이내  평소의 까불거림으로 돌아간 옥경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불쑥 그렇게 말하고, 갑작스레 상기된 철이 
  "기집애, 너 함부로, 나불거리면 죽어."
  하면서 주먹을 들어보임으로써 방안에는 갑자기 작은 소동이 일었다.
  "첫째, 우리나라를 정복하는 것, 둘째, 명혜 언니와 결혼하는 것."
  옥경이 '우리의 맹서'를 외듯,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야망이니 정복이니 하는 말을 그렇게 천방
지축 떠들고 영희의 등뒤로 숨자 철이  벌겋게 달아 주먹으로 을러메며 옥경에게 덤벼들었다. 영
희가 가운데서 그걸 말리며
  "명혜, 명헤가 누군데?" 하고 옥경에게 묻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왔다. 
새파랗게 굳어 있는 얼굴이 반드시 바깥의 추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너도 좀 나가자."
  어머니는 영희를 본 척도 않고 있는 반짇고리로 다가가 무언가를 찾으며 차디차게 말했다.
  "오빠가 다 말했구나."
  영희는 어머니의 그런 목소리만으로도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렇게되자 영희는 새삼스런 공포로 뻣뻣히 굳어 왔다.
  "아이들 놀래기 전에 나가자 카이뭐 하고 있나? 귀구라마(귓구멍)까지 막힜나?
  드디어 필요한 걸 찾아냈는지 가벼운 쇠 부딪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돌아선  채 오버깃 속으
로 감추며 어머니가 한 번 더 내촉하였다. 눈길을 맞대기도 싫다는, 그래서 네가  나가야 나도 돌
아서겠다는 듯한 뒷모습이었다
  "어머님 말대로 나와."
  마당의 어둠 속에서 침울하게 가라앉은 명훈의 목소리가 그런 어머니를 거두었다.
  영희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내몰리고  이끌리듯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명훈이 말없이 
돌아서 앞장서고 이어 방문을 거세게 닫은 어머니가 고무신을 끌며 뒤따랐다.
  어머니와 오빠 사이에서 미리 맞춰둔 말이 있었던지 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앞뒤에서 끌고 밀 
듯 영희를 데리고 골목길을 벗어났다. 벌써 겨울밤은 깊어 골목에는 나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 멀미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만 아니라면 정말로 마을 가운데에  골목을 걷고 있는가도 알 
수 없을 만큼 캄캄하고 종용한 밤이었다.
  영희의 눈이 어느정도 어둠에 익숙해졌을 무렵 골목이 끝나고 희끄무레한 강둑이 나타났다. 거
기서 확인하듯 힐끗 뒤 돌아본 명훈이 성큼성큼  강둑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희
는 기계적으로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강둑으로 올라선 명훈이 다시 강바닥 쪽으로 내려서자 영희는 문득 덮쳐오는 새로운 종
류의 공포로 오싹했다.
  '어쩌면 어머니와 오빠는 나를 죽이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 오빠가 기차간에서 한  말은 나를 
의심없이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몰라.'
  퍼득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명훈의 모습이 무시무시한 거인처럼 느껴지며 얼어붙은 듯 걸음
이 떼어지지 않았다.그런 영희의 등을 어머니의 차가운 목소리가 칼날처럼 찔러왔다.
  그 바람에 영희는 다시 걸음을 떼어노았으나, 명훈이 얼어붙은 강둑 쪽으로 걸어들어가자 더는 
따를 수가 없었다. 심장에 얼음가루를 퍼부은 듯이나 온 몸을 얼어붙게 하던 싸늘한 공포가 영희
를 차츰 미칠 듯한 위기감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오!, 오빠, 어딜가?"
  영희는 비명이라도 질러 구원을 청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렇게 물었다. 명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자갈밭으로 걸어들어가며 음산하게 대답했다.
  "그냥 따라와."
  "싫어! 더는 못 가. 여기서 말해.:"
  영희는 갑자기 발작 직전의 심경이  되어 강하게 소리쳤다. 어머니와  오빠가 억지로 끌고가려 
들면 발버둥이라도 쳐서 버텨볼 작정이었다.
  "그래, 멀리 갈 거 없다. 여기서 마 결판 냈뿌자."
  뒤따라오던 어머니가 불쑥 그렇게 말하며 명훈을 되돌아서게 했다. 그러자 명훈도 더 고지부리
지 한고 저벅저벅 되돌아왔다. 어머니는 명훈이 그들 곁에 와 나란히 서기를 기다려 귀까지 느껴
지는 목소리로 영희에게 말했다.
  "니 얘기는 오래비한테 다 들었다. 긴 말은  놔두고 앞일이나 결정짓자. 자, 어쩔래? 마 내하고 
같이 얼음 깨고 강물로 뛰들래? 아이믄 우예(어떻게) 니는 한 번 죽은 걸로 치고 다시 태어난 새 
사람 될래?
  "잘못했어요, 어머니,오빠, 살려주세요."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떨며  그렇게 애원했다. 그전에도 그뒤로도 두  번 다시 써본 적이 
없는 가장 진실한 굴복의 언어였다. 그만큼 그녀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하지마는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게  쉬울 택(턱)이 없다. 우예문 니  억대구(억대우:여기서는 
거센 고집)로는 죽기보다 더 할 꺼다.
  "아니에요, 뭐든지 할께요. 살려만 주세요."
  영희는 조금도 비굴함을 느낌이 없이 진심으로 빌었다.  그 또한 앞서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일
생에서 단 한 번 말 그대로의 애원이었을 것이다.
  "정 글타면 한 번 속아주꾸마, 여 앉거라."
  어머니가 여전히 변함없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저기 남아 있
는 눈더미와 강바닥이 반사한 빛 때문일까. 어둠 속에서도 그게 가위라는 걸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영희는 어머니가 그걸로 무얼 하려는지를 짐작해볼 겨를도 없이 강가의 마른 풀밭에 앉았
다.
  "어머니, 꼭 이러셔야겠어요?"
  그때것 장승처럼 굳어 있던 명훈이 감정을 가늠할  길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명훈에게 손이라
도 잡혔는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고 날카로왔다.
  "놔라, 이래야 야도 살고 나도 산다."
  그리고 영희의 긴 머리칼을 감아쥐는가 싶더니 싹둑 하는 가위 소리와 함께  영희의 정수리 쪽
이 섬뜩해졌다.
  긴 머리칼 한 줌이 발 곁에 떨어지는 걸 보고서야 영희는 비로서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마비되어버리기나 한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은커녕 머리속에조차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머니는 영희의 발치에 머리칼이 제법 수북한 더미를 이룬 뒤에야 가위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가위를 내던지더니 흑, 하는 소리와 함께 영희 옆에 퍼질러 앉았다. 가위가 자갈밭에 떨
어지는 소리에 이어 통곡 섞인 어머니의 넋두리가 아직도 마비 상태와 흡사한  영희의 의식을 천
천히 헤집고 들어왔다.
  "아이고, 이 야속한 양반아, 이래도 살아  있기만 하믄 되나? 이것도 사는 거라꼬  칼 수 있나? 
갈라꺼든(가려거든) 총이라도 한 구뎅이에 묻어주고 가지. 그래놓고 혁명이든지  건국이든지 해보
고 싶은 대로 하지. 이기 뭔 일고? 인제 나는 우짜꼬? 9대 만에 난 딸이라  카디, 12대 종녀라 캐
쌌디."
  누군가가 끈임없이 소곤대고 있는 것 같은  소리에 명훈이 깨니 동남쪽으로 난  봉창에 햇빛이 
눈부셨다. 소곤대는 소리는 다름아닌 김형의  회화 레코드 소리였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척되
어, 김형은 9월에 미국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제너럴 톰슨이 정말로 파파(아버지)노릇을  하기로 
작정했는지 김형의 졸업을 기다려주지 않고 서둘러 9월 학기부토 동부의 어떤 대학에 편입하도록 
주선한 것이었다.
  김형의 회화실력은 보일러맨뿐만 아니라 하우스 보이, 영내 식당 웨이터를 통털어 가장 나았다. 
사투리가 심한 검둥이 사병은 물론  고급 장교들과 제법 심각한 토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유학 날짜를 받자마자 전에 없이 회화 공부에 극성을 떨었다. 정신차려 들으면 명훈조차 대강 그 
뜻을 알 수 있는 일상의 대화까지 몇 번 되풀이 들으며 소리 죽여 되뇌는 것이었다.
  "젠장, 어디 미국 유학 못 가는 놈  기죽어 살겠나? 제발 그놈의 축음기 좀  꺼. 아니면 혼자만 
들을 무슨 장치를 알거나, 신새벽부터 귀가 느끼해 견딜 수 있어야지."
  황이 수건으로 얼구의 물기를 닦으면서 들어서더니 받드시 농담만은 아닌  듯한 말투로 김형을 
몰아댔다. 그래도 김형은 못들은 척 레코드 소리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황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김형 앞에 놓인 축음기를 덥석 집어 소리나게 스위치를 그며 짜증을 냈다.
  "우리 곧 나갈 테니 제발 좀 꺼두자구."
  그러자 김형이 멀거니 황을 쳐다보며 사정하듯 맣랬다.
  "왜 그래? 밥은 벌써 뜸을 지어놨구. 이제 비지찌게만 끊으면 되는데."
  "어쟀든 못 견디겠어. 이것 저것 패대기쳐 부숴버리기 전에 대강 해두란 말이야."
  황이 그렇게 한 번 더 짜증을 부리자 비로소 김형도  얼굴이 굳어졋다. 들고 있던 책을 천천히 
덮으며 목소리에 언짢은 기분을 실었다.
  "너, 요즘 이상하더라. 도대채 이런 시국에 영어 회화라니? 그것도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 안될
까봐 걱정되어서러라면 몰라. 교양 있고 예절바른 상류사회의 말솜씨를 익히려고 학교도 안 가도 
하루종일 축음기만 끼고 앉았단 말이야?"
  "시국? 시국이 뭐 어때서?"
  무슨 까닭에선지 그렇게 되묻는 김형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빠졌다. 황이 단순한 짜증 이상
의 적의까지 내비치며 한층 소리높여 되쏘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정말로 그게 네가 말한 그 면경인의 합리적인 태도야?"
  명훈은 그제서야 황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뚜렷히 짐작이  갔다. 그는 3월 초부터 어떤 고
급 공무우너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 있었다. 숙식에 잡비 5천 환까지 있는,  그때로는 흔치 않은 
조건이었다.그런데 선거 바로 다음날 그는 미련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와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
다.
  "그 집에 있다가는 나도 흐믈흐믈 같이 썩어문드러질 것 같애. 또 그 집 밥을 얻어  먹으면서도 
아마도 그 집 주인이 깊이 관여한 듯한 부정선거 규탄하는 데모도 할 수 없고."
  "그게 황이 가정교사를 때려친 이유였다. 이따금씩 교복 차림으로 가방에 노트 몇 권과 연필 두 
타스를 넣고 집집마다 돌며 구걸하듯 팔아 생기는 허전해 그런 황의 객기가 꼬박꼬박 자취방으로 
돌아와던 명훈에게는 오히려 그런 황의 객기가 부러웠다. 김형도 몇 마디 빈정거렸을 뿐 그런 황
을 별로 짐스러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황에게는 단순한 객기 이상 어떤 학과한 행동의 결의가 있었던 듯했다. 남은 
3월을 어디론가 부지런히 뛰어다니더니 개학을  하기 바쁘게 데모와 그 비슷한  종류의 모임으로 
학교 생활을 대신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유학 날짜가  잡히면서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고 회화
공부에만 몰두하는 김형과 그런 식으로 충돌했다.
  황이 적의까지 내비치며 몰아대자 김형도 더는 그 말을 눙치거나 회피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시 정색을 하며 깐깐하게 받았다.
  "결국 그 얘기야? 좋아, 그럼  오늘은 짚고 넘어가기로 하지.  너 아까부터 시국,시국 그러는데 
그것부터 한 번 물어보자. 그래 요즘 시국이 어떻다는 거야?"
 '정말오 홍몽천지 같으니 내 말해주지. 첫째는 오래 전부터 언론과 야당이 예측하고 경고해온 대
로 국민의 신성한 주권에 대규모의  조직적인 부정이 저질러졌다. 그리고  둘째는 그걸 항의하던 
고등학생이 눈알에 최루탄이 박힌 끔직한 시체로 바닷물 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
요한 것은 셋째, 이제는 항의가 한 계층 또는 어떤 특수 집단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까지 확산되었다는 거야. 김도 드디어 항의에 가담하게 된 거지. 그런데  그게 지적이고 합리적인 
변경인에게는 핵심에서나 통용될 언어의 교양과 예절을 익히는 게 훨씬 중요하단 말이지?"
  황은 오랜만에 옛날의 기세를 회복해 해 볼 듯 김형을  몰아댔다. 함께 생활하게 된 뒤로는 없
는 일이었다. 김형은 그런 황을 곤혹스럽게 바라보며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망설이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말로 이게 모엇일까"
  그새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명훈은 갑자기 그런 의문에서 빠지며 김형의 엷은 입술을 바라보았
다.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와 뒤이은 마산 사태에 요란한 보도에다 눈에 띄는 서울 거리의 술
렁 거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훈의 의식에는 이렇다 하게 닿는 게 없었다.
  "사전 투표를 놈 해달라고 해서 리승만, 이기붕이 찍힌 투표 용지를 한 뭉치 안고 투표장에  나
갔더니. 놀라지 마, 아직은 투표를 하기 전인되도 투표함이  벌써 꽉차 있더라구. 거기다가 뒤 쳐 
온 연락이 뭔지 알아? 사전 투표가 너무 많이 되었으니 오히려 이미 들어가 있는 투표 용지도 절
반쯤 내빼라라는 거야. 참 기가 막혀서."
  자신이 그날 직접 겨를 것은 물론, 어떤 하꼬방 동내의 투표소를 맡았던 살살이의 그런 킬킬거
림을 들었을 때도 명훈은 그게 정치의 당연한  과정으로만 여겼고, 마산 사태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요란스럽게 알려지며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끼들, 일은 벌써 시마이됐는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들 내세워 어쨌다는 거야?"
  "선거 뽀이콧 좋아하네. 안 될 성싶으니 뻔할 걸 가지고 개기는 거지."
  그런 배석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적이 되어 철없는 고등학생들 뒤에 숨어  있는 듯한 야
당만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더 있다면 '공산분자'  또는 '불순분자'의 개입 어쩌고 
하는 당국의 서슬 퍼런 발표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까닭 모를 섬뜩함 정도일까.
  하지만 며칠 전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뒤로는 명훈에게도 무
언가 와 닿는 게 있었다. 3월 15일의 사태로 사람이 몇 죽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짐나, 
그게 풍문이거나 활자로 된 보도일 때는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른 사진을 보자, 갑자기 유년에 본 여러 주검의 형상들과 연결이 지어지며 거의 충격에 가까
운 실감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죽었다. 실연이나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도 아니고 살인 강도도 든 것도 아닌데, 전쟁도 
없었고, 굶거나 얼어서도 아닌데.'
  그렇게 그 주검을 더듬어가더니 보니 나중에는 어럼풋하게 정치와도 이어졌다.
  '경찰은 빨갱들의 짓이라지마, 내 기억  속의 그들과 이 아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해서 주로 떠들었는데 이 아이들은 그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들은
평등을 더 자주 내세우는 것 같았는데 이 아이들은 오직 자유만을 외친다. 거기다가 더욱 뚜렷한 
차이는 선거에 대한 양쪽의 태도였다.  어렸을적 정부 수립 때 그들의  벌인 싸움은 이러한 선거 
자체의 거부였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들은 오히려 그 선거를 올바르게 지키지 위해서 들고 일어
났다.'
  하지만 거기서 그뿐, 그런 일들이 명훈의 정치  의식을 자극하거나 사회 상황의 인식으로 이끌
지는 못해다.
  "개새끼들, 어쩌다 재수 없어 죽은 녀석 앞세우고 되게 지랄떠네. 하기야 이제는 이박사가 돌아
가셔도 만송 선생이 떠억 이어받게 되었으니 발악할 만도 하지. 시체 아니라 뭔들 이용하혀 들지 
않겠어?"
  그런 배석구의 풀이 탓이라기보다는 아버지를 통해 핏줄로 이어받은 듯한  어떤 적개념과 전쟁 
뒤 어머니가 은연중에 길러준 순정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뒷날까지 
변함없었던 명훈의 고정관념 중에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에서 멀어질수록 아버지의  사상에 대해
선은 관하리라는 것 같은 게 있었는데, 명훈이 그해  4월에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냉정하고 무감
동하게 바라볼수 있었던 것도 그런  고정관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거기서 어떤 국외자 의식이 
생기고, 따라서 이따금씩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면서도  그런 상황의 총제적인 의미는 그의 의
식에 그리 절실하게 와 닿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훈이 온존히 불문으로만 그해  4월을 맞은것은 아니었다. 우선 명훈에
게는 호전이라고 해도 좋을 몇가지 사정의 변화가있었다. 좋든 나쁘든 대학에  입학하게 됐고, 고
향으로 간 어머니에게서도 어쩌면 큰  산 하나가 팔리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에 찬 소식이 왔다. 
지난달의 그 비오는 날에 마지막 불꽃을 빛내며 타올았던 경애의 추억도 더는 고통으로 되살아나
는 법이 없었고, 시작과 끝이 없던 모니카의 일 또한 차츰 의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하
여 그 모든 호전에서 온 여유일까, 명훈도 무언가 심상찮은 예감을 자아내는 거리의 시위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가지고 싶어졌다.
  특히 대학 입학과 뒷골목 생활이 조금씩 심드렁해져 다시 소설이나  시집을 뒤적이게 되면서부
터 명훈의 그런 욕구는 더욱 절실해졌다. 그는 몇 번인가 김형이나 황에게 방금 거리에서 벌어제
고 있는 사태의 진상과 의미를 터놓고 물어보려 했다. 마침 그 무렵은 싸구려 여관방에서 뒹구는 
것도 싫어져 되도록 잠은 함께 쓰는 자취방으로  돌아가 잘 때라 그들은 대할 기회가  전에 없이 
많을 때였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김형은 난데없이 영어 회화에 열을 올리느라 말  븥일 틈을 주
지않았고, 황은 황대로 대우 좋은 가정 교사  자리까지 팽개치고 무언가에 열중해 밤늦게까지 쏘
다니다 들어와 진득하게 얼굴 맞대고 앉을 겨를이 별로 없었다.
  '정말로 지금 거리네서 벌어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일
까? 아무래도 끝까지 나와 무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게 어떤 의미로 내게 다가올까?'
  명훈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기대에 차서 김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이 물은 것이 아
니라서 그들 나름의 공방으로 끝나고 말 테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그들의 어휘나 논리에 익숙해
진 명훈이었다. 시원스런 풀이까지는 할 수 없다 해도 어느  정도의 상황 인식은 가능할 것도 같
았다.
  "네가 굳이 듣고 싶어 하니까 말해주지. 나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꽤나 심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결과가 날 수  있다는 것쯤은 알아. 하지만 또한  그래봤자 그것은 결국 제국의 
변경을 불어가는 한바탕 회오리에 지나지  않을리라는 것도 알아. 곧 이  땅을 규정하고 있는 몇 
개의 기본적인 구조 자체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뭐야? 불어가는 한바탕 회오리일  뿐이라고? 집권당이 바뀌고,  한 체제가 무너질지 모를는데
도?"
  "그래, 집권당이 바뀌는 것은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체제는 아니랴. 체제라는 것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맺고 있는 것이라는 내 이해가 틀린 게 아니라면,  이런 제국의 변경에서는 한 번 자리잡
은 체제는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게 아냐. 제국의 핵심부에서 큰 변화가 오기전에는."
  "그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도 체제가 바뀌는 건  아니란 말이지? 이 
부패한 권위주의자와 독재가 타파되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선다고 해도?"
  "그리 되기도 힘들겠지만, 그리 된다고 해도 체제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 역시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지? 어떤 사회 변화가 혁멱적이려면 다른 체제를 예비하고 있는 수권 세력이 자라 있어야 
해. 그런 세력은 아니야. 이념이 아니라 이해가 달라서 갈라졌을 뿐인 자유당과 민주당은 큰 정치 
세력은 아니라구. 그들이 다른 것은 기껏 동일한 체제와 이념의  운용 방식 또는 방안 같은 것일 
뿐이라말이야."
  "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하지만 그들을 뒷받침해주는 국민적 욕구가 그렇니 않다면 그들의 체
제 구상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올수 있지. 만약 그들이 이 거대한 국민적인 욕구를 종합적으로 수
용하지 못하면 제 3의 수권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걸 세상살이에서 익힌 눈썰미 만
으로 함부로 단정해 말할 수 있어?"
  "눈썰미라구? 그래. 정말로 정확한 표현이야. 내가 의지할  논리적인 지식인이라고는 네가 강요
해 읽은 몇 권의 얼치가 정치 이론서와 조잡한 혁명사 정도뿐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보고 
느끼는 게 더 자유로울 수도 있겠지.  네가 말하는 기존 야당의 체질  변화나 제3의 수권 세력도 
그래. 도대체 너는 이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초강대 제국과 그들에 의해서 부여된 분단
이란 이 따의 엄혹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들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들이 남북에서 
강요하고 있는 체제 이외에 또 다른 선택이 있을 거라고 믿는 거야?"
  그 무렵 들어서는 황과의 입씨름뿐만  아니라 신문까지도 애써 외면하는  것 같던 김형이었다. 
뻔한 일에 나까지 들떠서 곤란하지. 그런 핑계와 함께 얄미울 만큼 제 일에만 몰두하던 그였는데, 
실은 나름대로 황과의 그런 맞딱뜨림에 대비해오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공격을 시작한 건 틀림없
이 황이었지만, 어느새 논쟁의 주도권은 김형에게도 넘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도 그놈의 결정론과 역사적 허무주의 설교야?"
  황이 격한 체제는 미.소가 부여한 둘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도 우리의 의지
보다는 그들의 실세에 따라 결정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외에 제3의  길은 없으며,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그들 두 제국의 협력에 의해 가장 비참한 결말에 이를 뿐이다. 역사
적으로도 두 개의 제국 사이에 끼여 있던 변경 국가를 봐라.  둘 중 하나는 선택 이외 달리 생존
에 성공한 나라가 있던가."
  "결정론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말고는 대체로 정확하게 내 말을 기억하는 셈이군. 당분간이
라는 단서가 빠져 있기는 하지만."
 김형이 조금 긴장하는 빛을 띠며 그렇게 말을 받았다. 황이  거기 힘을 얻은 듯 전에 김형이 한 
말을  빈정거림으로 도풀이하기를 계속했다.
  "물론 민중의 혁명 의식이 국민젇 합의  형식으로 성숙한다면 제 3의 길도 가능해겠지.  하지만 
거기끼지는 꽤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한다. 이 땅의 진보적 의식들은 십 년 전의 그 무자비한 불
과 피의 세례로 일소당했다. 간혹 땅쏙  깊이 남아 있는 뿌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참혹한 
기억이 얼음처럼 두껍게 덮여 있어 다시 싹틀 날은 멀었다. 있다면  의사 혁명뿐이었다. 기껏해야 
지도자의 선동에 들뜬 의사 의식과 의사 혁명뿐이다. 기껏해야 지도자의 이름과 통치방식을 일부 
변경 및 풍성한 말의 잔치를 혁명이라고 믿는."
  "하나 더 있지. 위장된 선택의 변경."
  "야, 참, 그걸 빠뜨렸군, 그래. 또 하난 제 3의 길로 착각할 수 있는 것으로 위장된 선택의 변경
이 있다. 겉으로는 이쪽 저쪽 제국의 체제를 받아들여 분단의 극복을 지향하는 것. 이를테면 자유
민주주의로는 소비에트 제국의 체제를 지향하는 방식.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부르주아 
혁명은 그런 방식에 대한 경계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기도는 부르주아 
혁명마져 불가능한 극우.반동의 체제를 생산할지 모른다."
  "좋아, 됐어. 이번에는 그런데도 우리가 모두 거리로 뛰언나가야 할 이유나 말해봐. 며칠 전부터 
틈만 나면 내게 권유하려고 별러온."
  김형이 이지는 까닭 모르게 초조한 빛까지 띠며  황에게 물었다. 황도 문득 빈정거리는 말투를 
털어버리고 신중하게 그 말을 받았다.
  "나도 과거에 대한 너의 이해나 현실에 대한  인식 일부는 승인한다. 하지만 너의 현실에 대한 
대응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에는 솔직히  불만이 많다. 어쩌면 너의 들을  만한 역사 이해나 상황 
인식이 그런네 태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구실로 교묘하게 구성된 것이 아니가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너를 정치적 허무주의자라고 몰아치지 않고 합리적인 개량주의자로 보아준다 해도 이런 상황에
서 우리가 싸늘한 눈길로 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충분히 성립된다. 비겁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방관자니라. 식의 몰아치기가 아냐.  네가 말한 대로 지금 익어가고 있는  이 변혁의 
기운이 기실은 의사 의식 또는 일시적인 집단 광기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어둔해질 수 있는 것 
또한 지도자와 통치 방식의 교체에 불과하다 해도  지금의 움직임은 지속되고 성취돼야 해. 체제 
자체는 그대로라 할지라도 자유당의 정권이 지금까지 자행해온 비리와 부패와  폭력이 추방될 수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진보고 개량이야. 비록 모든 것을 한  꺼번에 다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얻
을 게 있다면 얻어두어야 하지 않겠어?
  둘째로 환기시켜고 싶은 것은 민족주의적  입장이야. 네가 가진 일종의  결정론적 사고 방식의 
약점은 역사는 물론 미래까지도 화석화하는 점이지. 민족주의에도 결정론적 요소가 없는 건 아니
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는 크게 달라.  어쩌면 그것은 논리나 이념을 초월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어. 너는 전에 국민적 합의 형식으로 성숙된 혁명 의식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
으나 지금 극도로 위축돼 있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소생하면 꼭 안될 것도 없지.  인류의 진보, 특
히, 정치적 진보에 대해 역사는 많은  비관적인 실레를 보여주고 있기는 해. 그러나  그 못지않게 
그림 같은 성취를 보여주기도 해. 그 중에는 민족주의가 일으킨 여러 정치적 기적은 그런 비관적
인 실례를 덮고 남을 만해.
  그 다음 특히 너에게 경고해주고 싶은 것은 너와 같은 형태의 사고가  역사와 사회에서 수행하
는 기장이야. 비관적인 전망이나 개량주의가 저지르는 죄악중에서 가장 큰 것은 그것이 부조리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불의한 세력의 놀리적 기반이 되거나 때로는  옹호의 수단으로까지 악용
되는 셈이지. 생각해봐,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논리나 태도가 이 추악한 자유당 정권의 유지를 
도와주고 있다면 너무 끔직하지 않아?"
  말뜻은 앞서의 그 어떤 때보다 공격적인 듯한데  오히려 차분한 설득조였다. 그런 황의 물음에 
김형은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언뜻 이맛살에 졌다 지워진 골 깊은 주름과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적지 않은 마음 속의 동요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하지만 김형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도 나 같은 사람들의 견해가 불의한 권력의 유지.옹호에 악용되는게 괴롭고 쓸쓸하다. 또 나
의 그런 견해가 내 개인적인 가족사에 불필요하게 얽매인 결과며, 지금은 더욱이 내가 애써 확보
한 삶에서의 유리한 위치 때문에 다분히 자기 방어적인 데가 있음도 고백한다. 이 60년대 벽두의 
남한에서 내가 손에 넣은 미국 유학의 특전은 내가 이 땅으로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앞으로의 
나의 개인적인 삶에 예사 아니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구태여 
그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거나 변명을  하려고는 않겠다. 내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가진 견해가 악용된다면 그것은 악용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도 이데와는 달릴 이데올로기는 
그 말 자체가 그것을 선택하는 개인의  신분, 배경, 이해 관계 같은 현실적인  동기들에 바탕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김형의 목소리에는 조금전에 언뜻 내비쳤던 마음 속의 동요는 자취도 보이지 않
았다. 황 또한 조금전의 여유를 조금도 잃지 않고 그 말을 받았다.
  "나도 굳이 너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너의 생각에 어떤 위험이 있다면 적어도 네  자
신에게는 그것이 인식되어 있어야 해. 그런 인식 없이는 자칫  구제받을 길 없는 반동의 길로 접
어들고 말리라는 경고를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황의 마지막 말이 김형을 자극할 만했음에도  김형은 애써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지나가듯 몇 마디 받을 뿐이었다.
  "고맙다. 그 보답으로 나도 하나 충고하지.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 순수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 
부르주아 혁명이라 해도 될는지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억눌려 있던  욕구가 한 번 
분출하기 시작하면 그걸 제어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드시l 과격한 변혁의  욕구와 무분별한 민족주
의가 이 사회를 휩 쓸 것이다. 그때를 경계하라. 그게 저편 제국의 체제를 이 땅에 가져오는 것은 
결말이 나든, 극우 반도의 대두로 이편  제국이 베푼 체체를 더욱 공고한 것으로  만들든, 너희들 
같은 이상주의자들이 설땅은 없을 것이다. 가장 조악한 형태로 실현되고 있는 이 따의 정치적 허
무주의가 우리 세대에게서 다시 답습되는 것은 정말로 보고 싶지 않다."
  먼저 일어나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한 뒤라 상을 차려오는 것은 명훈에게  시켜도 되었으나 굳
이 부엌으로 나가는 거승로 보아 김형은 그쯤에서 얘기를 끝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도 그 뜻을 순수히 받아들여 굳이 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서둘러 이부자리를 
개는 명훈을 거들어 밥상 받을 채비를 했다.
  뜨거운 밥에다가 비지찌게와 버터 한 숟갈 그리고 왜간장을 떠넣어 비벼벅는 아침상 머리는 한
동안 어색한 침묵으로 까닭없이 무거웠다.그걸 견디다 못한 명훈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밥
을 십고 있는 황에게 물었다.
  "정말 그쪽 대학은 모두가 들고 일어나는거야? 맨손으로 경찰과 싸울 각오들이 되어 있나구?"
  "니네 학교는?"
  제 생각에서 얼른 빠져나온 황이 대답 대신  그렇게 되물었다. 명훈은 갑자기 야릇한 부끄러움
을 느끼며 더듬거렸다.
  "우리야 뭐, 따라지 대학에다 야간부니까. 몇몇이 울근불근거리기는 해도 데모하러 자가잔 소리
는 없던데."
  "그럼 그쪽 거리 쪽은 어때?"
  명훈이 아직도 극장에서 기도 일을 보고 있는 줄 알고  있는 황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명훈이 
더욱 움츠러들며 심하게 더듬거렸다.
  "거기야 맨 장사꾼들뿐이니까, 장사꾼들이 뭐 경찰이나 공무원 눈  밖에 나려고 그러겠어. 다방
이나 술집의 손님들 중에는 더러 떠드는 사람도 있지만 명색 점포라고 가진  사람이라면 그저 수
군수군일 뿐이야. 그것도 눈치보아가면서."
  "아직도 그 정도야?"
  명훈의 말에 약간 실망한 듯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한 황이 그때까지 맛나게 퍼먹던 밥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한 숨 섞어 말했다.
  "하기야 이 나라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대학도 아직은 절반이 안되니까. 감정적으로 모두 동조하
는 것 같은데도 뛰어나가자면 영  아니거든. 워낙 관제 데모만 하며  자라온 애들이라 선뜻 서지 
못하는지도 모르지."
  그런 황의 얼굴은 무언가 갑작스런  걱정거리라도 생긴 사람같았다. 김형은  다시 그런 화제에 
끌려드는게 싫어서인지 두르이 대화를 못 들은 척 열심히 숟가락질만 했다.
  처음에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을 작정으로 그 얘기를 꺼냈으나 명훈도  이내 마음을 바꾸었
다. 자칫하면 자신의 그즈음 행적이 드러날 것 같아서였다. 야당의 시국  강연회 청중을 흩어버리
고 황금 다방에 모였던 것이나 선거일 당일 야당 참관인을 두들겨  내 좆은  것 따위, 그때는 이
렇다 할 느낌없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했던 일들이 새삼 죄의식이 가슴속을 눌러왔다. 
김형과 황 둘 모두가 제 일에 골몰해서인지 아침상을 물린 뒤에도 대화는 일상적인 것을 넘지 않
았다.
  "밥상은 그대로 나둬, 어차피 나는 오늘도 학교 안갈 거니까."
  요리에는 워낙 소질이 없어 함께 밥을 끓여먹은 뒤에는 흔히 설거지를 도맡는 명훈이 주섬주섬 
빈그릇을 챙기는 걸 보고 김형이  말했다. 뒷골목으로 돌아가면 작은  우두머리로서 오히려 남의 
섬김을 받는 편이지만 셋의 생활에서는  스스로 서열을 맨 끝으로  두는 명훈이었다. 나이보다는 
그들의 지식이 은연중에 내리누르는 힘 때문이었다. 더욱 정확히 분석하면, 삶이  그런 것에서 멀
어져갈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명훈의 정신적인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는 펴닝 옳았다.
  "그것도 직장인데 어서 시형이 말대로 하지.  데모애에라도 걸리면 턱없이 늦어질 수도 있으니
까. 벌써 아홉시가 넘었어."
  김형에게 설거지까지 맡기는 것이 미안해 그대로 그릇들을 양철 바께쓰에  쓸어담고 있는 명훈
에게 황이 다시 그렇게 말했다. 어찌 됀 셈인지 황은  밥을 짓는 데도 설거지를 하는데도 당연스
럽게 빠졌다.
  "맞아, 석현이 말대로 해. 오늘 아침 빨래할 것도 있고, 그때 한꺼번에 해치우지. 어서 가봐."
  김형이 나른한 듯 기지개를 켜며  한 번 더 명훈을 재촉했다.  세수와 면도는 자신의 골목으로 
돌아가면 절로 해결되는 이발소가 있었다.


    제 28장 잠과 마비
  인간의 의식, 특히 정치적 .사회적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자라는  것일까. 뒷날 성년이 
되어 인간의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작업을 자신의 일로 삼게 된 철은 오랬동안 진지하게 
그런 물음에 골몰한 적이 있었다.
  의식의 산물인 말과 글을 다루게 되면서 이런저린 까닭으로 생겨난 그의 반대자들은 종종 
그의 의식을 문제삼았다. 적극적인 악의를  품은 이들은 그의 보수성을 거론했으며,  때로는 
반동 성향으로까지 의심했다. 온건한 평자들은 그 의식의 파행이나  어떤 특정한 부분의 마
비와도 그 의식의 파행이나 어떤 특정한 부분의 마비와도 같은 둔감을 이상히 여겼고, 애정
을 가진 이도 이따금씩 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의 결여를 애석히 여겼다.
  그 바람에 처음 한 동안 물 흐르듯 하던 그의 말과 글은 차츰 막히고 머뭇거렸으며  나중
에는 무슨 강박관념처럼 그런 비판과 의심에 짓눌리게 되었다.
  학자들은 흔히 인간의 정치 의식, 특히 격렬하고 진보적인  의식이 바탕으로 유년기에 겪
은 가치 박탈에 체험을 말한다. 원래 있었던 여러 생존의  필요 조건을  적극적으로 빼앗아
본 체험뿐만 아니라 , 소극적인 결여 의식도 한 인간의 의식을 역동적으로 변형시킨다는 그 
논의가 근거 있는 것이라면 철이야말로 가장 풍부하게 가치 박탈을 체험하고 자란 정신이었
다. 그는 빼앗기던 나머지 청소년 꿈조차 일그러지게 된 아픔을  일생 기억 속에 간직 하고 
살아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초자아나 부성의 결여에서 우리들 일부가 종종 사회나 정치에 품게 되는 
어두운 열정과의 관련을 찾으려고도 한다. 그것이 극우이든 극좌이든 파괴적인 충동을 정당
화한 변혁의 논리를 창안하고 실천한 성장 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그러한 흠결에 착안한 듯
하다.
  그 또한 근거 있는 논의라면 철은 그런 점에서도 어두운 열정을 배양하기에 알맞은 성장 
혼경을 가졌던 셈이 된다. 몇 방울의 정액만으로 추상화되어 있을   뿐 기억에는 그대로 무
인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국민하교 상급반이  되어서부터 그에게는 집안에서 아무
도 정신적인 권위가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
  인간의 의식이 물질적인 환경의 소산일 뿐이라는 논의도 그렇다.  만약 어떤 인간이 성장
기에 겪은 밑바닥 삶의 혹독함이 그의 의식을 한  사회의 구조와 제도에 반항적이고 도전적
이 되게 만든다면 철은 틀림없이 끔직한 체험들을 그런 불공정한 분배가 가능하게 했던 사
회의 구조나 제도에 대해 분노와 원한을 키워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교육이나 반복적인 의식으르도 뒷날 그를 지배한 의식의 형성 과정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가 지신의 정신을 길러나간 과정은 거의가 정규의  교육 과정에서 일탈한 것이었
고, 따라서 기성의 권위와 체제를 승인하고  순종하는 것을 첫째로 삼는 교육의 목표,  흔히 
국민 형성이란 말로 표현된다는 그에게 그리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어
두컴컴한 독학의 골방에서 더 자주 만난 사람들은 혁명과 유혈의 휘항스러움을 성찬하고 용
기와 아름다움의 극치로 대항 엘리트의 길을 권유하는 수상쩍은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뒷날의 그를 만들었을까. 무엇이  간교한 의회주의를 믿지도 않으면서도 
다른 권위주의적 지향에 진저리치며 고개를  돌리게 하고. 무엇이 무지하고  끔직한 극우에 
본능적인 증오를 품고 있으면서도 일쑤 좌경과 혼동되는 급진적인 주장들에 또한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젓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 시대에 걸맞지 않게도 한 이념의 미아 또는 
정신적인 무정부주의자가 되게 한 것일까. 그나마 허전함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휴머니즘
이나 민족주의자 같은, 한 이념이기보다는  모든 이념의 보편적인 바탕이거나  우리 생존의 
기본 윤리인 것들을 어정쩡하게 대체물로 끌어대기도 하는. 물론  철은 뒷날 어떤 대담에서 
독기 어린 응수를 겸해 이렇게 스스로를 방어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어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망을 걱
정한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을 의심쩍어하지만 나는 또한 오히려  당신들의 이념 과잉이 못 
미덥다.
  우리는 분열된 세계 제국의 변경인이다. 이 두 세계제국의 뿌리를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
에서 찾든, 너무 익은 서유럽 문명의 자기 분열로 보든, 우리는 오랫동안 그 제국의  판도밖
에 있었다. 그러다가 이 세기에 와서 그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이번에는 단순한 주변이 아
니라 변경이었다. 주변과 변경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그저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
을 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 경계선 너머 또 다를 적대세계 제국이 존재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변경이 제국이 가져올 것은 뻔하다. 그것이 변경의 확대를 위한 것이건, 유지를 위한 
것이든, 제국이 가장 힘주어 그 원주민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 적대의 논리다. 결국  당신들
이 요란하게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와 소비에트로 표상 되는 두 제국의 
적대적 논리 내지 그 변형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당신들이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다.
  때로 당신들도 그 실상을 꿰뚫어봐  이번에는 이른바 제3세계를 빌려  온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보는 것은 검은 피부나 갈색 피부를 빌린 제국의  정신이다. 간혹 그것이 자기가 속
한 제국에는 변경 혹정을 돕는 이념 장치로 기능할 분인, 소르본에서 또는 옥스퍼드에서 공
부한 아프리카 상사 아무개씨하며,  하버드에서 공부한 중남미의  종속이론가 아무개씨하며 
해방 신학과 아무개씨, 그들이 과연 검은 아프리카의 정신이고 누런 아마존의 이념일까.
  더군다나 일류의 정신은 앵무새처럼 되뇌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제국이 짓고 퍼뜨린 
노래는. 다만 이류의 정신만이 기억과 지혜를 혼동하고 암송을 선각과 착각하며, 즐겨  제국
의 책상물림이 책임 없이 읽어놓은 이념의 헌신적인 사도를 자처한다.    
   그런 그의 말에 전혀 들을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심술궂은 아이들에게 시달린 
나머지 앙칼스러워진 길 갓집 강아지의 과잉 방어 심리가 엿보였다. 따라서 그 자신이 말하
길 그 유년의 삶에서 뒷날의 그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쪽이 보다 온당한 것이다.
  1960년 2 월 16일 몽롱한 유년의  날들 중에서 철에게 묘하게 뚜렷한 기억을  술렁거림이 
느껴졌다. 주로 라디오가 놓여 있는 곳 주변으로, 어른들은 거기서 서로를 흘금거리며  뉴스
를 듣다가 낙담한 표정으로 흩어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철은 그런 데까지  깊이 신경쓸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한 스무 날쯤 
전에 갑자기 서울서 명훈 형과 돌아온 영희 누나 때문이었다.  처음 형과 누나가 불쑥 내려
왔을 때만 해도 자신과 옥경은 물론 어머니까지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 형
과 어머니에게 어디론가 끌여갔던 누나는 자신의 상고머리보다 머리칼이 더 짧게 깍여져 돌
아왔고 무엇 때문인가 성난 얼굴이던 형은 그날 밤차로  돌아가버렸다. 유난히 길고 암울하
게 느껴지는 지난 스무날을 그렇게 시작된 것이엇다.
  영희 누나는 밥을 지을 때와 생리를 위해 꼭 필요한 때를 빼고는 하루종일 방안에서만 지
냈다. 철은 처음 그에 방안에서도 쓰고 앉은 수건 아래 밤송이 같은 머리칼 때문인 줄만 알
았으나 차차 보니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손으로  깍지를 껴 무릎을 싸안고 앉았을 
때는 꼭 나무로 깍아놓은 사람 같아도 다가가 그 얼굴을 보면 그녀가 입은 심상찮은 마음속
의 상처가 어린 철에게까지 금세 느껴질 만큼 처참함과 억눌린 광기가 전해져왔다.
  그러나 집안을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만드는 것은 그런 누나뿐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나 철을 얼음판 위에 선것처럼 조마조마하게  하는 것은 그런 누나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였다.
  그날 누나의 머리를 깍아버린 날을 뒤로 해서 어머니는 어찌 된 셈인지 누나와 말을 나누
기는 커녕 눈길이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어머니가 헌옷가게에서  돌아오는 밤이나 일 나
가지 안은 일요일 오후 같은 때 한 방에 있게 되어도 마주앉는 게 싫어 등을 맞대고 돌아앉
을 정도였다.
  그런 모녀의 의사 소통은 언제나 인철가 옥경을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가게에 나
갈때 그날 할 일을 모두 옥경과 인철에게 일러주었다.
  "오늘은 수요일 이니까 거 가서 한술 얻어먹고 예배까지 보고 오꾸마. 날 기다릴 거 없이 
저녁은 너그끼리 먹어라."
  "내복 빨래는 매매(단단히) 삶으라 캐라. 어디서 올랐는 동 꼭 볼쌀(보리살)만한 이가 굼실
구실 기댕기드라."
  "쌀이 다됐을 테이 저녁쯤에 인철이 우리 점방에 왔다 가거라. 몇몇 되 팔아주꾸마."
  "옥경이 학교 가기 전에 머리 좀 빗고 가라. 걸뱅이 아맨치로 쎄가리(서캐)가 하옇더라. 참
빛 당시게(반짇고리)안에 있으니 매매 빗으믄 된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는 뭘 해먹지? 김치도 떨어지고 간장밖에 없는데."
  "이불 호청 그냥 삶아도 되는 거야? 양잿물은 벌써 그저께 떨어졌어."
  "쌀집은 무어라고 하지? 벌써 세 번째나 돈을 받으러 왔잖아?"
  그렇게 뻔히 어머니게 해야 할 일을 인철이나 옥경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가 
바로 그 말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형식은 역시 인철이나 옥경이를 통해서였다.
  "양잿물이 없으면 꺼먼 비누 썰어넣으면 안되나? 언제부터 양잿물 없으면 빨래 못 삶노?
  "쌀집은 월말에 보자 캐라. 쌀 서말 값 있는 거 억시기로 쪼아(졸라)쌀는다."
  하는 식으로.
  철이 보게에 영희 누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어딘가로 점점 삐뚤어지고 뒤틀려가는 듯한 분
노와 격멸이었고, 어머니를 지배하는 것은 깊이 모를 증오와 공포의 뒤엉킴이었다. 둘  모두 
서로에게나 철에게 그런 감정을 표현한적은 없지만 이따금 서로의 뒷모습을 홀깃  쏘아보는 
눈길만으로도 그런 감정을 느낄수 있었다.
  철은 그녀들의 그런 반목 상태를 풀어보려고 나름대로 애써보았다. 그러나 그 첫걸음으로 
알아보려고 하다가 양쪽 모두에게 호된 꾸중울 듣고는 찔금해 물러나고 말았다.
  "아아들아 몬댔구로(못되게). 그런 거 알아 머 할꼬? 공부나 똑똑히 해라. 일은 무슨 일."
  '쬐그만게 쓸데없는 눈치만 늘어가지고, 알 거 없어. 못 본새 철이가 아주 나빠졌어."
  그게 철의 물음에 대한 그네들  모녀의 칼날숨긴 대꾸였다.그러나 침묵과  단절 중에서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거세게 드녀들에  그 겨울의 끄트머리는 뒷날 오래오래  기억될 
만한 암울한 속에서 지나버린 것이었다.
  그날 수업을 마친 철이 집 안에 있지 않고 만화가게에 처박히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형태로  터질 듯한 누나의 침묵을  마주하고 어두운 
방안에 처박혀 있기 싫어 철은 삼문동 삼거리 쪽에 있는 만화가게로 갔다. 돈이랬자 십환짜
리 동전 하나가 전부였지만,그걸로 두 권을 빌려본 뒤 다른 애들에게 곁다리를 붙으면 오후
는 그럭저럭 보낼 수 있지 싶었다.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만화는 역시 재미있었다. 소설 쪽에 재미를 붙인 뒤로 발길이 뜸
해지기는 해도, 그 또한 새로운 권이 나오는 대로 빼놓지 않고 읽은 연속물이 있었는데,  그
날은 그 중에서도 벌써 2부로 넘어간 라이파이란  국적 불명의 만화 제 8권이 나온 날이었
다.
  그 라이파이와 철인 28호 두 권을 후딱  읽어치운 후에 다시 곁에 아이의 책을 훔쳐보고 
있던 철이 만화의 재미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은 오후 서너시경 석간이 배달된 뒤였다. 그때
까지 철에게는 꽤나 부담이 되는 감시의 눈길을 보내던 만화가게 할아버지, 20년 뒤에도 비
슷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때 할아버지까지는 못 되었다가 돋보기를  꺼내 
쓰더니 이내 신문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눈치 안 보고 여기서  저녁때까지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분으로 곁의 아이에게 바짝 다가앉아느데, 갑자기 가겟문이 열리며 중늙은 
둘이 들어왔다.
  "늦추위에 햇늙은이 얼어죽는다 카디, 우수 경첩(경칩)이 메칠 남았다고 날이 이래 칩노?"
  둘 중에 개털모자를 쓴 중늙은이 쪽이 그렇게 수선을 떨며 아직 불을 지피고 있는 만화가
게의 톱밥난로 곁으로 다가갔다. 꾀죄죄한 양복 차림도 말없이  뒤따라 들어와 톱밥난로 쪽
으로 손을 내밀었다.
  "보자, 너는 절로 쪼매 비켜앉그라. 볼때기가 뺄간 거 보이 엉간한 갑다. 아아들이사 본래 
열물(熱物) 아이가?"
  개털모자 쪽이 다시 그런 소리와 함께 아이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난로 곁 의자에 비
집고 들자 비로소 만화가게 할아버지가 눈길을 돌려 그들을 보았다.
  "남의 손님은 와 쫓고 난리고? 아무데나 대강 앉제."
  신문을 그대로 펼쳐든 채 코 끝에 걸친 안경테 위의  맨눈으로 그를 보며 하는 소리였다. 
개털모자가 그런 그의 신문을 뺏으며 말했다.
  "그눔의 신문 쫌 촤라. 벌씨로 조간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라디오로 시간 시간이 불어쌌는
데 뭐 더 볼 게 있다꼬  눈까리 빠지게 봐쌌노? 백지로 역분(울화)만 난다.  말캉 죽은 자석 
불알 만지기라."
  "이 사람이 언제부터 민주당 했다꼬 이 야단이로? 뭐 내가 조병옥이 죽었다꼬  이래는 줄 
아나? 앞으로 어이 될 동싶어 한번 보는 기다."
  만화가게 할아버지가 심드렁하게 신문을 거두며 말을  받았다. 그러자 개털모자가 발끈했
다.
  "이건 또 무신 소리고? 아무리 돌아서서는 못 할 말이 없다 캐도 조박사 돌아가셨는데 뉘
집 아 죽은 거매치로. 내사 민주당도 아이따마는 어제 첨 그 소리를 들으이 눈앞이 다 캄캄
하더라."
  "자네가 와?"
  "참말로 몰라서 묻나?지금 그 사람 가고 나믄 누가 이승만이를 갈아치우노?가로늦이(때늦
게) 장면이를 후보로 세우나?"
  "그 사람 살았다꼬 선거에 이기는 보장이 어데 있노? 자네가 삼천만 앞앞이  댕기며 물어
봤나?"
  "사람이 절타(젏다)카이. 그저 뭐든지 까구질랑해가지고. 자네는 귀도 없나? 못 살겠다. 갈
아보자는 소릴 못 들었나? 이승만이가 천년만년 대통령질 해묵는 게 옳단 말이가?"
  거기서 갑자기 개털모자 중늙은이가 시비조가  되었다. 그러나 철이 만화에서  눈길을 뗀 
것은 그런 시비조로 몰고 온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날부터 이상스
레 어른들의 세계를 술렁거리게 하던 그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때문이라는 편이 옳았다.
  조병욱 박사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리는 철도 들어 알고 있다. 집에 라디
오가 없고, 신문도 보지 않았으며, 정치 얘기를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지난 연말껜가 한동
안 어른들을 떠들썩하게 해 흘려듣기라도 거듭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 철은 진작부터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학교와 담임선생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이름 앞애 당연히 국부라
는 호칭을 붙이도로 교육을 받았느며, 상급반이 되어서는 우남이라는  그의 호를 쉽지 않은 
한자로까지 익히게 해 사회 생활 시험이나 국어 시험에 곁들여  내곤 했다. 또 철의 담임선
생님은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열렬한 자유당 지지파였다. 그는 겨우 5학년밖에 안 
되는 아이들에게 조병욱 박사가 이승만의  형편없는 '졸병'이었음을 일러주며, '감히  맞서려 
한다'는 식으로 말해 은근히 배신의 인상까지 심어주었다.
  철이 가진 그 사람이 대통령되믄 우얍니까?  옛날에도 이승만이보다 더 무섭던디 한민당
이야요. 참말로 언성시럽게. 그 사람이 된다 카믄 우리매이(우리 같은 것)는 이래도 몬 살끼
라. 명혜 어무이는 안 겪어봐 모를 끼리요."
  언젠가 아마 조박사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고 며칠 안  되어서 였는데, 영남여객 아주머
니와 얘기 끝에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가는게 어깨까지 떨었다.
  '그 사람'이 누군가는 끝내 밝혀  말하진 않았지만, 그게 바로  조박사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물론 철도 그런 그의 느낌과는 다른 공기가 사회의 구석구석 떠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
고 있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자주 여러 사람에게 되뇌어지고, 술 취한 어른들이 
공공연히 자유당을 욕하는게 자주 들린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철에게는 오래되고 애매한 대로 정치적인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제법 선
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게 잇었다. 안광읍의 시장 모퉁이  판자집에 살 때 누군가 대통령 
후보가 죽었는데(나중에 신익회라는 걸 알았다) 왠  사람들이 옆집 매폭집에서 고래고래 같
은 노래를 되풀이하다 경찰에 끌려간 걸 본 적이 있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뒤를 따라아 대개 그렇게 시작하던 노래로 그 무서운  순경에
게 끌려가면서도 혀 꼬부라진 호통을 멈추지 않던 게 어린 그에게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느낌에도 불구하고 철은 거기에 대한 혼란을 느끼거나 강한 
의문을 느끼게 되진 않았다. 철이 그렇게 된 데 먼저 한몫을 한 것은 누구의 설명이나 가르
침보다는 집안의 분위기와 자라난 환경에서 몸에 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도 않고 따져볼 
수도 없는, 그래서 거의 본능적인 그런  쪽으로의 무관심, 또는 선험적이라 표현할 길  밖에 
없는 혐오와 공포가 어린의식에 안겨준 마비였다. 거기다 '추억의 세 기둥'이 완성됨과 아울
러 점점 유년의 단순함과 변덕에서 멀어지고는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맹목 또는 의식의 잠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사랑이 거들자 관심의 방향이 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마비와 같은 
잠은 어쩌면 그뒤로도 한 동안 그의 의식 형성을 풀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만화가게 중늙은이들이 어쭙잖은 시비로 철의 의식 깊이 묻혀버렸던 그 사건이 다
시 표면으로 떠 오르게 되었다고나 할까. 철은 차츰 정신을  모아 그들의 얘기에 귀를 귀울
였다. 사뭇 시비조인 개털모자에 대한 만화가게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받았다.
  "언제는 백성이 우너하는 대로 했나?  글타 카믄 분단은 왜 되고,  전쟁은 왜 났노? 젊은 
아이들도 아이고 나잇살이나 먹은 기 주척주척 나서기는."
  "뭐시라? 그라믄 니는 조박사가 잘 죽었다 말가?"
  "내사 그런 소리는 안 했다. 니가 하도 나서야 하는 소리라. 저희끼리 손 발 잘 맞아 해먹
을 때는 언제고, 인자 와서 이승만이만 나쁜 놈 만드는 기 앵꼽더라(아이꼽더라) 이기라. 죽
은 사람 평하기사 안 됐다만은 말 났으니 한 번 해보자. 그  사람이 설사 살아 대통령이 됐
다 치자. 달라지기는 뭐가 달라지겠노? 그래봤자 이 나라 이 땅에 이 백성이고 미국놈 밑에 
눌리 살기도 맹(매) 한가질 낀대. 뭐 그 사람 이라고 용 빼는 재주가  있나? 거기다 벌써 십 
년이 지났다고 이자뿌랬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활인불도 아니고 바로 그때 장택상이 
조병욱이 카든 바로 그 조병욱 아이가?"
  "아 인자 보이 무신 소린지  알겠다. 글치만 니사말로 십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못 이짜 
분나? 택도 없이 뿔뜨그레(불그레) 해가지고 촐랑거리고 설쳐쌌다가 경찰에 잡히가 피똥 싸
게 맞은 한이 여직 남았단 말이제? 나라사 독재가 디든동 말든동 국민이사 굶어죽는 동 말
든동 조박사 돌아가신 것만 잘됬다 말이제?"
  "봐라, 서로 늙어가미 막말은 하지 말제이. 택도  없이 촐랑대다가, 이쪽이 시다(세다)싶으
믄 태극기 흔들고 쫒아가고, 조쪽이 시다 싶으믄 인공기 흔들미 쫒아나가는 것보다 
본새가 나을 거로."
  무엇이 심사를 건드렸는지 만화가게 할아버지 목소리에도 드디어 결기가서렸다. 개털모자 
낯색까지 변해 발딱 일어섰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 하노? 인자 보이 참  몹쓸 사람이디이. 내가 언제 그랬노? 내 
잘못한 거는 너가 이쪽저쪽 패갈라 촐랑거리쌀 때 입 꾹  다물고 땅이나 판 죄뿐인데. 뱃다
리 거리에 사람 모가지 달아놀 때 벌벌 떨미 대가리 처박고 기척 없이 지낸 죄뿐이라."
  그대로 두면 삿대질이라도 해댈 기색이었다. 그때 우울한 얼굴로 둘이 하는 말을 듣고 있
던 양복 차림 쪽이 나섰다. 차림 때문만은 아니라 자세히 보니 나이도 둘 보다는 젊어 보였
다.
  "형님, 각중에 왜 이래 쌌소? 이 형님 불러내 술이나 한잔 묵자 카디 케케묵은 일로 쌈질
이나 하러 왔소? 고마 앉으소. 참말로 심사 안 좋은 거는 내쪽이야요."
  양복 차림은 그렇게 개털모자를 말려놓고 만화가게 할아버지 쪽을 향했다.
  "형님, 가마이 보이 조박사한테 별로 감정 안 좋았던 갑는데 함  물읍시다. 돌아가신 조박
사 빨갱이 잡은 거말고 형님한테 잘못 한 거 뭐 있소? 아이, 도대체 우리 조박사가 뭣 때에 
그리 싫소?"
  "니 민주당이라꼬 내한테 시비거나? 왜 목소리를 착 깔고 사람 흘키며 따지노?"
  목소리는 낮아도 양복 차림의 묻는 투가 개털모자를 편드는 것으로 들렸던지 만화가게 할
아버지가 한층 소리를 높였다.
  "꼴난 민주당이라꼬 카는 기 아니라, 형님 말에 어페가 있어 그렇소.  온 국민이 울고불고
한는데 형님 혼자 꼬시(고소)한 표정이이 이상 안 하요?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믄 애비 죽인 
원수도 다 이자뿌는 법인데."
  "마, 니캐도 알고 저캐도 안다. 그라믄 내가 한번 물어버자. 빨갱이 잡은 거 그 사람 공이
라 쳐도, 그 땜에 삼팔선 더 꾿어진 거는 우짤래? 그라고  빨갱이 잡았다 카지만 참말로 빨
갱이 잡았나?"
  "내사 참말로 이상하요. 삼팔선이 우째 우리 조박사  죈교? 그라고 빨갱이만 안 잡았다믄 
누굴 잡았단 말인교?
  "그라믄 한청, 김두한 씨게(시켜) 마구 잡이로 때려잡은 게 다 빨갱이란 말인가?"
  "조 박사 누구 사람 잡았다는  것도 글치만 큰일날 소리네. 나도  형님 옛날에 좌익 쪼매 
한 거 알지만 아즉도 이런 줄은 몰랐소.  그래도 형님 오늘 이마이(이만큼)라도 살게 된 거, 
다 여다는 인민군 총알 하나 안 떨어지게 대구 사수를 주장한 조박사 덕일낀데."
  "대구 사수, 낙동강 방어 다 좋제. 글치만 최능진이  죽인 것도 빨갱이 개안코(괜찮고), 보
도연맹도 빨갱이 개얀탄 말가? 지도 모리는 새에 면 인민위원 명단에 드간 기 겁나지 발로 
가입한 사람을 생으로 구딩이에 파묻었뿐게?"
  "아, 인자 보이 그거구나, 대수 보도연맹으로 죽은 거 못 잊어 그래는 모양입니더만, 그기 
우리 조박사와 무신 상관인교? 지지꿈 누까리가 뒤집히서 골골이 일난 일이 우째서 조박사
한테 다 점어 가능교? 최능진도 글코. 그래다가 잘못하면 6.25 때 죽은 사람 다 조박사한테 
물래(물러)달라 안 카겠나?"
  양복 차림의 중년이 그렇게 대들자 갑자기 만화가게 할아버지의 기세가 숙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도 평소 같잖게 번쩍이던 눈길이 힘없이 풀리며 이전의 만화가게 할아버지로 돌
아갔다. 코흘리개들과 한푼 두푼으로 다투는 꾀죄죄한 영감쟁이에 어울리게 힘없이 말했다.
  "뭐 그래까지 니설 꺼는 없고. 자네들이 하도 조박사, 조박사 캐싸이 해보는 소리라."
  "그냥 한 번 캐본느 것 같지는 않는 갑던데."
  "언중유골이라꼬, 뭔 말을 그래 하노? 꼭 애맨 사람 빨갱이로 몰랐고 드는 형사맨치로. 그
만 해라, 내 잘몬했다. 하기사 아까운 인물 죽었제."
  거기서 한창 달아오르던 그들이 말다툼은 흐지무지 되었으나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
던 철에게는 석연찮은 데가 많았다. 만화가게 할아버지의 말투에는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지꺼렸다는 듯한 후회 같은 것이 서려 있었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말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
았다. 무언가 두려움에 질려 갑자기 자신의 생각을 마음 깊이  감추기로 했다는 게 철의 짐
작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어째서 그렇게도 다른 판단을 하고 있을까.  철의 
담임선생님과 어머니와 개털모자 늙은이와 만화가게 할아버지의 말을 번갈아 떠올리며 퍼뜩 
그런 의문에 잠겼다. 한 번 그렇게 마음이 돌자 곁눈질해보는 만화는 더욱 재미가 없어졌다. 
원래도 순정 만화인가 뭔가여서 그다지 재미가 없었는 데대 어른들의 얘기가 귀기울이는 사
이에 몇 장인가가 넘어가 버려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이야, 그라믄 그 집에 가 있그래이. 쪼매 있다가 아이들 나오믄 나도 점방 맽기고 글로 
가꾸마."
  그 사이 더욱 급속한 화해가 이루어졌는지 만화가게 할아버지는 그런 말로 개털모자와 양
복 차림을 보내고 있었다.
  철은 그런 만화가게 주인에게 건성으로 듣고 있던 만화를 되돌려 주고 그곳을 나왔다.
  밖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저물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강둑길에서 보니 얼음 풀린 강물
이 벐서 저녁 어스름 속으로 희미하게 잠겨들고 있었다. 습곤처럼 강건너 명혜네 집을 바라
보는 철이 눈앞에 하얀 명혜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그날만은 철도 웬일인지 곧장 명
혜 생각으로 빠져들수가 없었다. 웬 사람이 술 취해 비틀거리며 부르는 유행가 때문이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부울러야 옳은건가.
  그 무렵 들어 새로 유행하는 노래였는데  이상하게도 철에게는 그게 단순한 이별  노래로 
들리지 않았다. 그 또한 예민한 감각 중에 하나일까,  웬지 예날에 들은 '가아련다아 떠나련
다아' 와 같은 가락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다시 조병욱이란 사람의 죽음으로 생각이 돌아간 철은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게 
영희에게 물었다.
  "누나, 저어 조병욱이란 사람 알아?"
.   "조병욱?그건 왜?"
  벌써 저녁밥을 다 지어놓고 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듯 철이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부엌
으로 나가려던 영희가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그 사람이 죽었대. 그래서 어른들이 울고불고 난리야."
  철이 거짓말 섞어 그렇게 떠벌려놓고 다시 덧붙여 물었다.
  " 그 사람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다는 건 알겠는데, 정말은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
야?"
  그래놓고 나니 갑자기 자신이 한결 어르스러워진 것 같았다.  영희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가 이내 흥미 없다는 듯 부엌문은 열고 나가며 말끝을 흐렸다.
  "어른들이 울고불고하더라며? 그럼 좋은 사람이겠지 뭐."
  하지만 철에게는 무언가 그녀가 알면서도 일부러 말해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잠시 후 밥상을 들고 들어온 그녀에게 다시 그 얘기를 꺼내게 했다.
  "그런데 말이야, 어른들 중에는 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던 것 같던데? 나쁜 사람이
래."
 "뭐?"   
  누나의 얼굴에 약간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철은 그걸 보고 까닭없이 으쓱해져 말했다.
  "사람 많이 죽였대. 그리고  이승만 박사하고 한패였는데 원수가  되었데. 그래 그 말  맞
이?"
  "건 잘 몰라. 하지만 아버지가 몹시 싫어하셨던건 기억나."
  "아버지?"
  아버지란 존재는 전혀 실감나지 않았느나, 철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조병욱이란 사람이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도 관련이 있는 구체적인 인물로 느껴져왔다.
  "아버지가 왜?"
  "그런 건 몰라도 돼. 밥이나 먹어."
  영희가 갑자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표정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철은 아이다운 식욕에 
몰리어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밥을 퍼 넣기 시작했으나 생각만은 여전히 조병욱이란 인물
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그들 삼남매가 막 밥상을 물리려 할 때였다.
  "상 새로 차릴 것 없다. 밥이나 가주고 온나."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어머니는 영희에게 바로 대고 그렇게  말했다. 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가려던 영희가 멈칫하며 어머니를 쳐다 보았다.
  "누가 올지 모르니 빨리 저녁상을 치아뿌래야지. 수저하고 밥이나 들라카 카이."
  영희의 시선을 받자 잊었던 불쾌감이 되살아난 듯 어머니가 짜증섞어 말했다.
  영희는 벙어리처럼 시키는 대로 햇다.
  낮 동안의 고된 일에 시장했던지, 보리밥에 먹다 남은  김치와 식은 된장뿐이었지만 어머
니도 달게 저녁밥을 먹었다. 그 상머리에 앉아 있던 철이가 불쑥 물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왜 조병욱 박사를 싫어했나요?"
  "뭐시라?"
  어머니가 흠짓 놀라며 숟가락질을 멈추고 철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말에 어머니가 놀라는
데 공연히 우쭐해진 철이 눈치없이 덧붙였다.
  "아버지가 몹시 싫어했다면서요?"
  "뭐시라? 누가 카드노?"
  어머니가 소리나게 숟가락을 밥그릇에 걸쳐놓고 엄한  눈길로 철을 쏘아보았다. 그제서야 
철은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으나, 그 정확한 까닭을 몰라 얼른 대답을 못했다.
  "지가 뭐 안다꼬, 아아들한테."
  금세 철이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짐잠한 어머니가 험학한 눈길로 영희를  흘긴 
뒤 다시 철에게 되 물었다.
  "그건 못 땜시 알라카노?"
  "이승만 박사하고 조병욱 박사하고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 알아보려구요."
  철은 어머니의 눈길에 질려 얼결에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기는 똑같은 것들이제."
  어머니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가 갑자기 도리질까지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따,아이따. 이박사가 훌륭하제. 이박사  덮을 사람이 어데  있노? 이박사가 대통령이 
디야제. 그라이 하늘도 무심찮아 조병욱이가 죽은 기라."
  그래놓고 누가 밖에서 엿듣기라도 하는 듣 문께를 흘금거리며 억지를 쓰듯이 했다.
  "그라고 이박사는 바로 우리를 살리준 사람이다.  그때 이박사 특명 아니였으면 옥경이는 
세상 구경도 못했을 끼고 나도 벌써 죽은 목숨이다. 우리 식구 죽을 목숨을 살리준 기라. 그 
은혜 때문이라도 우리는 이박사하고 자유당 지지로 돌아야 한데이."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따금식 가는 진저리까지 치며 한 동안을 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 들으라는 듯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나 철의  기억에 더 선명히 찍힌 것
은 '똑같은 것들' 하는 어머니가  무심코 불쑥 뱉은 말이었다. 뒷날  그 어떤 논리와 상황도 
좀체 수정할 수 없던 철의 야당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은 그때 씨뿌려진 것인지도 모를 일
이었다.
  무슨 영험있는 주문이라도 외 듯 한동안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지지를 소리내어  밝힌 
뒤에야 마음이 놓이는지 어머니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그 숟가락질은 이미 조금 전
처럼 달아 보이지 않았다. 한술 한술 밥을 떠넣으면서도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한
참씩 수저가 한자리에 머물러 있곤 했다.
  "철아, 보자"
  이윽고 밥상을 물린 어머니가 나직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철을 불렀다.  어머니가 무엇에 
심상찮은 사람처럼 잘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떠들어댈 때 철이 움찔하며 어머니를 쳐다보았
다. 
  "니 아까 그걸 왜 물었노? 이승만  박사가 옳은지 조병욱 박사가 옳은지 쪼매는  기 알아 
뭐 하라 카노?"
  '어른들이 자꾸 그 얘기를 해서요.'
  "그야 조병욱이가 죽어 뿌랬으닜게는. 쪼매 안된 것도 있고."
  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
던지 그렇게 목소리를 풀었다가 갑자기 서슬푸른 표정과 말씨가 되어 철을 을러댔다.
  "글타 캐도. 철아, 내 말 잘 듣거래이. 어느 쪽이 옳든 그르든, 어느 쪽이 이기든 지든, 우
리한테는 매한가지라. 택도 없이 나서서 떠들 거 없고오. 그저 가마이 보고 있다가 이긴  쪽
만 편들면 된다 말따. 어느 쪽도  우리를 곱게 보는 사람들은 아이께는.  아이, 편이고 뭐고 
도무지 거다는 마음 쓸 것도 없다. 니도 인자 6학년이 되고  곧 중학교 고등학생이 될 꺼이
께 카는 소리다마는 정치란 애시당초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기라. 허뿌라도(어쩌다가도) 
그쪽에는 눈돌릴 게 없는 기라. 니도 인자는 쪼매 알제? 우리가 왜 이 모양이 돼 떠 댕기는
지는. 천석 만석하던 친가 외가가  우에다가 절딴나고, 느그 아부지가 외아제(외아저씨)둘도 
우에다가 없어졌는지를, 크일나는 기다. 인자 또 그쪽(정치)으로 껍죽대다가는 터도 방도 없
이 우리 모두 죽는기라. 저어사 찌지는동 뽁는동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으이, 니는 우예트
동 공부나 열심히 하믄 된다. 알겠나? 알아듣겠지?"
  어머니의 나중 말은 거의 사정조였다. 아마도 어머니는 잠깐 철을 그의 나이 이상으로 착
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남달리 조숙하고 어휘력이 풍부한 철에게는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같은 어머니의 말은 거의 그녀가 의도한 대로 철에게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그
것은 '조병욱 박사 서거'란 사건으로 모처럼 오랜 마비에서 깨어난 그의 의식을 전보다 한층 
깊은 마비로 되몰아넣었다. 본능적인 무관심 또는 선험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공포
와 혐오가 진작부터 마비시켜온 그의 정치 의식을 .
  내게 있어서 정치 의식이란 선험적인 관념들의 산물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 모든
걸 주입당한게 아니라 유전받았다. 내 정신은 어렸을 적부터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위에 대
한 혐오와 부정 속에 자랐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은, 이념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도니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증거들과 반공 교육이 호들갑스럽게 비롯되니 끔직한 사례 같은 것들
이 후천적인 강화를 도왔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따의 젊은 정신들이 너무나쉽게 떨어지는 
그 사상에 대한 이론적인 매혹을 솔직히 나는 한 번도 경험헤 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의회주의 간교함과 대중 선거의 불합리. 그리고 경제적  평 등의 바탕이 없는 
정치적 자유당 공허함에 대해서도 내  지식은 거의 선험적이었다. 나는 그  뒤 10년에 걸친 
공미, 일반 사회 같은 교과목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논리를 배웠지만, 습관적인 승인 이상의 
설득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내 젊은 날의 대부분은 극우  파쇼에 가까운 군사 정부의 통치 아래 흘러갔지
만, 나는 절실한 저항을 느껴봄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때로는 차가운 방관자의 눈으로  조소
까지 띠며 여러 가지 투쟁들을  구경했고, 때로는 아예 등지고 앉아서  이제는 거의 정치적 
이념으로는 힘을 잃은 아나키즘에 취해 지내거나 '지식인 폴리스' 같은 휴머니즘이나 턱없이 
확대된 민족주의의 연막 뒤로 슬그머니 숨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진리가 어느 쪽에 있건 지난 2,30년은 그 두 개의  사상에 바탕한 우리 의식의 일
대 발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뿌리에 관계없이, 그릇된 권위와 뒤틀린 제도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은 때로 경탄스러울 데가  있었고, 정의와 진리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은 
때로 경탄스러운 데가 있었고, 정의와 진리에 대한 용기와 열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감동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그 피와 땀의 열매를 움킬  듯한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새로운 개편을 겪게 
될 지 모른다는 관측이 생겨날 만큼.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정신은 여태껏 이렇다 할 동요를 느껴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
것은 일시적인 의식의 유행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일고, 오히려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경박
한 들뜸이나 천박한 이해 타산이 역겹기조차 하다. 정권이나 사회구조의 변화에도 유지에도 
나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해 관계를느끼지 못한다. 이제 부끄러움이 되어야 하는가 불행이 
되어야 하는가.
  그로부터 27년 뒤에 있게 된 어떤 대통령  선거 전날 밤 철은 그렇게 자신에게 문의하고 
있다. 새벽 4시까지 잠 이루지 못하고 흘려 쓴 것으로보아 자신의 말처럼 전혀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것이 어린 날에 빠져든 잠과 마비에서부터의 깨어남이란 증거 또한 
뚜렷하지는 못하다.
  뭉뚱그려 잠이라 표현된 정치 사회 쪽으로의 또 다른 무관심은 주로 다른 대상에 대한 과
도한 탐닉과 집착에서 비롯된 것인데. 뒷 날에는 그 대상이  여러 가지로 바뀌었지만 저 어
린 날 그 밤의 잠은 운명적인 그의 첫사랑으로부터 왔다.  어머니는 다짐이 끝나자 문득 잊
고 있었다는 듯 영희 누나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집 쫌 치와라. 영남여객 아주무이가 올 끼다."
  그 말에 철은 느닷없는 기대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번처럼 명혜를 데리고 올
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에 빠져들게  되면서 조박사의 죽음 같은 것은  그의 의식에서 씻은 
듯 사라졌다.
  
    제 29장 새벽 어스름 속에서
  널리 아려진 바와 같이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1공화정 수립 과정에서 과도하게 친일세력에 
의존했다. 그는 약간의 예외는 있었으나, 독립 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일제의 관료를  중심으
로 자신의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그 한 예로 경찰을 지적해보자. 조사에 따르면 1960년의 경
우, 일본 경찰 출신이 총경의 70%, 경감의 경우 40%, 경위의 15%를  차지했으며 전국 경찰
관 약 3만 3천명 가운데서 사복 경찰의 약 20%와  정복 경찰의 10%가 일본 경찰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비단 경찰뿐 아니었다. 자유당의 고위 간부들과 내각의 핵심적 인물도  예외 
없이 일제의 판검사와 경찰관 및 관료를 지낸 사람들로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게 맹목적
으로 추종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줄 몰랐다.  동시에 권력을 유지하야 한다는 식
민 통치적 사고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지도층의 하부에는 또 그들과 
비슷한 경력과 성향의 인사들이 관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들이 반공이라는 정치적 상징을 권력 투쟁 또는 권력 장악
의 중요한 무기로 악용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그들은  반공의 명분을 걸고 
사실상 강압력 또는 조직화하여 이승만의 집권 과정에서 중요한 도구로 기능했으며, 이로써 
이승만 체제가 출발부터 민중의 회의의 대상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승만은 집권과 더불어 일제의  유산을 청산하고 민족 정기와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에 입각한 진정한 새 나라를 건설하는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길이었다.
  미국의 냉전 정책이 미국이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충실했던 그에게는 민족주의의 길이란 
'불그스름한'길로 내비쳤다. 민주주의 길도 마찬가지였다. 이 왕가의 후예라는 긍지가 대단했
던 그에게는 '평화적 정권 교체'이든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란 모두 거추장스런 장애물이
었다. '그래도 이대통령은 지방 자치제를 했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그는 반대파가 장악하
고 있는 국회의 외적 압력을 가하는 수단의 하나로 지방 의회의 구성을 서둘렀던 것이다.
  여러 증거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승만 정권은 만주주의와 어긋나는 길이였다.
  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그의 지울 수 없는 반민주적 과
오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의 선거에는 대부분 갖가지 부정이  뒤따랐다. 
행정력과 경찰력이 개입되면서 정치 폭력배의 협박과 난동이 뒤따르기도 했다. 1958년의 신 
국가보안법 파동에서 보여지듯이 국화와  국회의원을 폭력으로 다뤘으며,  1959년 경향시문 
폐간에서 나타나듯이 공공연한 언론탄압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자유
당 정권이 정당성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집권자가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
고, 또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한다고 믿을 때 그 권력은 정당성을 갖는다. 여기서  중
요한 것은 '국민이 믿을 때'라는 대목이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 국민들이  그렇게 밎지 
않는 경우에는 권력이 어떠한 절차를  밟아도 정당성이 강화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자유당 정권은  확실히 정당성을 잃고 있었으며,  이른바 '정당성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정당성을 잃은 권력은 유효성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강해야 한다. 그러면 유효성이란 무엇
인가. 한 정치 체제의 업적이 정치체제 대한 권력의 실용적 보상에서 나온다. 특해 독재  체
제는 정당성이 약한 만큼 국민  생활의 향상이라는 보상을 증대시키고자  노력하며, 이것을 
'유상 독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유효성도 대단히 약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엇던 것이 자유당 정
권의 지주의 하나인 관료는 대게 일제 관리와 일제 은행 간부 출신으로서 다시 냉전체제에 
안주했던 인사들이었던 만큼, 경제 개발이든가 사회 개발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변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사회 개발, 경제 개발,근대화  등은 용공시하던 사회의 분위
기도 자유당 관료들로 하여금 국민의  생활고에 대해서 체념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따라서 
자유당 정권의 독재는 아무런 물질적 보상도 없는 일종의 '무상 독재'였다고 하겠다.
  이처럼 정당성과 유효성이 결여된 자유당 정권의 후기에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
고 있었음이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1960년 현재 29세 이하의 연령층이 
전체 인구의 68%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분명히 '낡은 사회,  젊은 나라'의 한 징표였
다. 교육 수준도 높아져 있어서, 1960년 현재 20-29세의 연령층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있거
나 받은 인구는 40-49세 사회이 연령층의 그것에 비해 7.5배 이르렀고, 50059세 연령층의 그
것에 비해서는 20배에 이르렀다.특히 이 젊은 층은 민주주의 교육을 받을 만큼 지배층의 정
치적 가치 규범과는 대립되는 입장에 있었다. 도시화의 수준도 높아져 있었다. 조사에  따르
면 5만명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는 살고  있는 인구는 1952년  현재 전체 인구의 
17.1%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적절히 관리할 안목(퍼스펙티브)과 능력을 정당성과 유효성을 결여
한 자유당 정권이 갖고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자유당  정권은 점차 권력은 친화적 권력
은 명분에서 나오는 권력으로, 바로 정당성에 바탕을 둔 권력이다. 실용적 권력은 보상적 권
력으로서 바로 유효성에서 나온는  권력이다. 한편 강압적 권력은  친화력(정당성)과 보상성
(유효성)을 상실한 정권이 마지막 단계에 의존하는 권력이며 여기에는 물론 '벌거숭이 권력'
인 폭력이 포함된다.
 자유당 정권이 말기에는 이 강압력에의 의존으로 특징지어진다.  폭력 또는 강압력의 조직
화와 지향했으며(반공청년단이 극한 보기이다),  정치 폭력배의 공공 정치  세계로의 노출이 
나타났다. 국민을 그들의 테러로써 굴복시키고자 했으며, 이 국면에서도 조공 기술자들은 반
공의 이름을 원용했다.
  이용이 좀 자의적이고 길었지만, 그때부터 꼭 22년 뒤의 어떤 잡지에서 한 정치학자는 그
렇게 우리 현대 사회사의 한 경이였던 그해 4월로의 정치적 경과를 요약했다. 어떤 일은 그 
일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그 의미가 명확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에메해지고, 어떤 일
은 그 당시에는 애매했다가도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명확해진다.
  그해 4월의 일은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그  의미가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채  그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수상쩍은 문의가 일기 시작하더니 30년이 가까오는 지금은 거의 애매함에 가
까운 해석의 편차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림 같은 민중의 승리'와 '우연히 한 판 잘 맞아떨
어진 역사의 복권'이란 양극단사이에 '미완의 혁명' '옆으로부터의 혁명''학생 의거'같은 말들
이 촘촘히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역사적.집단적 사건이 갖는 의미의 복합성  때문이
라.
  그러나 명훈에게는 그 당시도 그뒤도 그해의 일은 애매함으로만 이해되었다. 비록 살아가
는 동안의 필요가 이런저런 해석에 동조하게 만들었으나, 그의  내심은 끝내 하나의 해석에 
정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해 3월 초순도 그랬다. 4월 19일 혁명으로 한낮으로 본다면, 그때는 적어도 새벽 어스름
쯤은 되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들고일어난 뒤로 자유당의 선거 탄압에 대한 
항의는 소규모나마 이미 정국적으로 잇따르고 있었다.
  어디서는 입대 장병들이 '부통령 만세'를 외쳤고,  어디서는 대학생들이 '민주주의 만세'혈
서를 썼다는 등 뒤숭숭한 소문이  들렸다. 명훈은 황이나 김형과 아직  함께 기거하고 있어 
그런 소문에 더욱 밝은 편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명훈에게는 그런 일들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 예컨데 강도나 
일가 동반 자실 같은 것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작고 무의미한 
일로 비치기까지 했다. 정치적 저항은 물론 정치에 관계된 의사의 표현 자체가 하나의 특권
으로만 보여지는 그에게는 당연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해 3월 초순의 어느날 아마도 5일쯤 됐으리라 여겨지는데 명훈이 아침부터 마신 낮술도 
그런 의식의 연장에서였을 것이다. 그날 늦잠에서 깨난 명훈은 집을 나설 때부터 울적한 감
상에 젖어 있었다. 그 무렵  들어서 거의 잊고 지내던 경애가  간밤내 꿈속에서 아물어가던 
마음의 상처들을 헤집어놓은데다, 날씨까지 궂어 이년 전 경애와 처음 만나게 되던 날을 연
상케 한 까닭이었다.
  김형이 곰살갑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상스럽다는 표현이 알맞은 만큼 밥상을 차려두고 갔지
만, 명훈은 입맞이 당기지 않아 언덕 아래 시장 골목의 해장국 집으로 갔다. 그러나 전날 몇 
잔 걸치기는 했어도 해장술까지는 생각  않고 있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기는 뭣했거니와 
그보다는 오후의 소집 때문이었다.
  "내일 오후 두시까지는 애들 싸그리 몰아가지고 시장 옆 금란다방으로 와 있어. 너 알지? 
거 왜 포목점 들어가서는 골목 어귀. 니네들 아홉 다 와야 돼. 새끼들이 운동장에서 선거 연
설인가 뭔가 지랄 떠는 모양인데 확 떼려엎어야지. 그 새끼들  장춘단공원 때 본 맛을 하마 
잊어버린 모양이야."
  그 전달 지프를 끌고 명훈의 골목까지 찾아온 배석구는 명훈을 불러 심각한 얼굴로 그렇
게 말했다. '쌔끼들'이라며 민주당을 가르키는 말임에 틀림없었으나, 명훈은 특별한  감정 없
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민주당 선거 연설 방해가 가지는 의미를 헤아리기보다는, 내일 한
판 있겠구나 하는 짐작에서 온 육체적 각오와 결의를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해장국 뚝배기를 다 비워갈 무렵 갑자기 세비찬 밧줄기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대
로 버틸 만하던 명훈의 불안한 정서를 여지없이 휘저어놓고 말았다. 갑자기 2년 전의 그 출
근길이 떠을르고, 어른스레 자신을 부르던 경애의 목소리가 귀속 가득 울려왔다. 때마침  해
장국집 앞을 지나는 검은색 박쥐우산이 그런 명훈을 더욱 못 견디게 했다.
  "아주머니, 여기 막걸리 한 대포 주쇼."
  그 검은색 박쥐우산의 주인이 정말로 경애가 아니가 싶어 문밖까지 나가 확인하고 돌아오
던 명훈은 저도 모르게 불쑥 소리치고 말았다. 갑자기 되살안나  세찬 그리움과 또 그 그림
움만큼 과장된 상실감이 무슨 날카로운 발톱처럼 그의 심장을 할퀴었다.
  "학생이 아침부터 왠일이야? 아직 열 한시도 안 됐는데."
  해장국집 아주머니가 왠지 떨더름한 얼굴로 대포 한사발을 내밀었다. 명훈은 숨 한 번 내
쉬는 법 없이 대포 한 사발을 다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한 사발을 더 청하는데, 헌책방 아
저씨가 절름거리며 국밥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 여기 쏘주 한 병 주쇼."
  그도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지, 들어오자마자 목로 앞으로 의자를 당기며 술을 청했다.  명
훈에게 내줄 두 번째 대포 사발을 들고 나서던 아주머니가 반갑잖은 듯 퉁을 놓았다.
  "또 누굴 욕 얻어먹이려고 아침부터이래요? 아줌마 허락 말고 오셨수?"
  "쓸데없는 소리."
  그는 별로 탄하는 기색없이 그렇게 우물거려놓고 그제서야 실내를 돌아보았다.
  "이거, 저 이 명훈 학생 아냐?"
  "안녕하셨서요?"
  명훈은 까닭 모를 반가움으로 머리까지 꾸벅거리며 인사를 건냈다. 언젠가 황에게서 그가 
대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도 꽤나 반가워
하는 눈치였다.
  "왠일이야? 요즘 통 보이지 않더니, 대학 입시가 가까워 그런가보다 싶어도, 궁금했나. 그
래 고등학교는 졸업했어?"
  "예. 그럭저럭."
  "시험은 어느 대학 봤어?잘 쳤어?"
  "제가 어디 시험치고 자시고 할 주제나 되나요? 봐서 줄만 서면 되는 2차쯤이나 가야죠."
  명훈은 왠지 솔직하고 싶어 그렇게 털어놓았다. 실은 그  자체가 애메하게 되어버린 대학 
진학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로 옮겨온 뒤의 가치와 이상은 대학 진학으로 표상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
니었다. 대학 졸업장은 그를 정신과 배움의 사람으로 결정지어주는 마지막 증명서이며, 그의 
삶에 풍요와 합법을 동시에 보장하는 부적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처음에는 학문적인 노력
을 전제로 한것이지만 나중에 그 노력이 포기된 뒤에도 들어갈 때는 이름만의 대학 졸업장
도 한 유혹이 되었는데, 그 무렵 들어 갑자기 진학 자체가 불안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 걱정은 말라고 되풀이  큰소리치던 배석구는 어찌 됀 셈인지 정
작 입학 시험 공고가 나붙기 시작하면서 답답한 명훈은 몇 번 넌지시 물어버기까지 했느나 
대답은 영 시원치 못했다.
  "서두를 거 없어. 어짜피 시험쳐 들어가는 대학도 아니고. 때가 되고 갈 만해지면 가게 되
겠지."
  그게 알 듯 말 듯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머니에게 기댈 수도 없는 일이
었다. 어머니는 어린 삼남매와 살아가기조차 바쁘다는 걸 잘 아는데다, 그 동안 자신이 쳐온 
큰 소리도 거뒤둘 길이 없었다.
  그러자 대학 문제가 또 다른 종류의 울적함과 술에 대한 갈증을 키웠다. 거기다가 헌책방 
아저씨가 소주병을 끼고 명훈 맞은 편에 와 앉아 낮술은 제법 본격적이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알수 없는 것은 헌책방 아저씨였다. 한동은 좋은 술동무가 되긴 했지만 하
지도 않은 세상 얘기를 주고밭던 끝에 화제가 궁해진 명훈이  시국 문제를 꺼냈을 때다. 무
슨 큰 기대를 했다기 보다는, 깊이 알지도 못하고 나이도 손위인 사람에게 낯간지러운 경애
와의 사랑 얘기나 집안 사정얘기를 할 수없서였는데, 그 반응이 너무 급작스럽게 찾다.
  "정치라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애들한테 책이나 빌려주고 푼돈이나 몇 푼 뜯어먹는 
술꾼이야, 그저 술꾼일 뿐이라구."
  그 오만상에다 두 손까지 휘져으며 소리쳤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고 항의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정말 몰라서 그런 게 아닌 것은 그의 반응에  머쓱해 다음 말을 못 잇
고 있는 명훈에게 덫붙인 마디였다.
  "학생도 그새 먹물이나 들었다고 또 그쪽이야? 아서, 말아. 넘치는 건 때론 모자라는 것보
다 훨씬 나빠. 그런데 가만히 모니 또  넘치게 생겼어. 멀잖아 또 그뭄의 철철 넘치고  거기 
빠져서 숱한 놈 다리몽뎅이 날아갈 날이 오겠어."
  명훈은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말을 끝내기 바쁘게 자
기 술명을 집어들고 절름거리며 목로로 되돌아가는 그의 온몸에서 대상을 알길없는  적의가 
뚝뚝 듣는 것 같았다. 분명 명훈 자신을 향한 것만은 아닌 듯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사과
나 변명의 여지가 전혀 안 보이는 격렬한 적의였다.
  거기서 명훈은 잠시 어색함과 겸연쩍음을 잊고 진작부터 그에 애해 품어왔던 상상을 되살
렸다. 예사 아닌 배움과 지적 연미를 가진 사람, 화려한 과거를 지녔으나 무엇 때문에  참담
하게 몰락해버린 사람, 하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그만큼 빛나게 솟아오를 사람. 한창 싸구려 
연애소설에 미쳐 그의 헌책방을 그나들 때 그런 추측을 해본 적이 있었다. 이따금씩 어울리
지 안게 세련미를 내비치는 그의 말투도 그려거니와,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어버린 듯 어느 
책을 뽑아도 그 내용과 질을 금새 말해줄 수 있는 그의 박식은 진작부터 며훈에게는 경이였
다. 거기다가 그의 대한 추측은 은근한 확신으로까지 번져갔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의 명훈에게는 그 모든게 곧 터무니없어  모이기 시작했다. 목로로 돌
아가 앉아마자 명훈과의 일을 씻은 듯이  잊고 대폿집 아줌마와 시시덕거리는 그는  아무리 
보아도 초라한 헌책방 주인 아저씨일 뿐이었다. 그들을 속인 것은 어쩌다 주워들은 풍월 몇 
마디를 술김에 흘린 것일뿐, 달리 대단한 무엇은전혀 있는 성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처 그 
술 한 명을 다 비우기도 전에 그의 젊은 아내가 뛰어듦으로써 그에 대한 추측은 한층 더 어
이없는 끝장을 보고 말았다.
  "'이놈의 영감쟁이, 아침부터 가게는 비워놓고 여기 와서 무슨 발광이야? 어서 따라와. 술
로 흐물흐물 녹아빠진 걸 주워다 살려났더니 또 그눔의 술이야? 질리지도 않았어"
  그의 젊은 아내는 다자고짜 그의  멱살부터 잡고 그렇게 표덕스레  몰아붙이면 끌어냈다. 
취한 데다 한쪽 다리까지 없어 힘에 부친 탓인지, 아니면 모르는 저항 못할 또 다른 까닭이 
있는지, 그는 거짓말처럼 순순히 젊은 아내에게 멱살을 잡힌 채 끌려나갔다. 그러면서  흘리
는 백치 같은 웃음에는 틀림없이 참담한 인내가 깔려 있었지만, 명훈의 눈에는 그것조차 참
담한 그 자체로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그게 또 까닭 모를 쓸쓸함을 보태 명훈은 앞에 놓인 대폿잔을 황급히 비웠다.
  하지만 홀로 대폿집에 남겨지자 명훈의 상념은 다시 그  비 오던날과 경애에게로 돌아갔
다. 이어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감미롭게 더듬어가던 추억은 그녀와의 마지막 밤에 이르고, 명
훈은 다시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이 안 가는 감정에 대포 몇 잔을 더 걸쳤다. 한시쯤 되어 
일어나며 셈해보니 과하게 대포가 아홉 잔이었다.
  명훈이 금란다방으로 들어선 것은 두시가 훨씬 넘을 때였다.  동대문 근처에 이르기는 두
시 전이었으나, 머리라도 감아 술기운을 좀 없앤다고 이발소에 들어간 게 탈이었다. 머리 감
고 나니 면도, 면도 하고 나니 고새, 한 시간 가까이 잡아먹고 말았다.
  그제야 시간엔 꽤나 엄격한 배석구를 더올리며 걱정스레 다방문을 연 명훈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듯한 낭패감에 빠졌다.  배석구의 말대로라면 안면 있는 주먹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다방이 뜻밖에도 한산한 까닭이었다.
  벌서 다들 운동장 족으로 몰려갔는가 싶어 급히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문득 다방 구석에 
죽치고 앉은, 눈에 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언젠가 '풍차'의 짱구에게 놀러  갔다가 인사를 
나눈적이 있는, 4가 쪽의 잔챙이는 면한 주먹이었다.
  "어떻게 된 거요?"
  명훈은 얼른 그의 성이 기억 안 나 그 앞에 다가가며서 앞  뒤 없이 불쑥 내밀었다. 그가 
명훈을 힐끗 보더니 겨우 알은첼르 하며 되물었다.
  "뭘 말이요?"
  "돌게 형이 여기들 모이라고 했는데, 두시까지."
  "아, 그거? 그냥 깨졌소(흩어졌소). 형님들 생각이 바뀐 모양이야."
  "뭐야?"
  "비도 오고 사람도 많이 모일 것 같지 않으니까 그냥 보기러 했으나  아니면 옛날 장춘단
공원 뒤의 말썽이 걱정됬던 게지. 두 시 반쯤 전화가 와서 모두 제 갈데로 갔소. 민주당 새
끼들 꿈 잘꾼거지 뭐. 지금쯤 사람 여남은 명 모아놓고 악을 쓰고 있을걸."
  그 말에 갑자기 명훈은 힘이  빠졌다. 늦게 온 걱정이 풀어진  까닭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딴 종류의 은근한 안도도 있었다. 옳고 그름이야 어찌 됐건  한 정당히 선거 유세를 폭력으
로 방해하는 역할에 그는 기실 본능적인 두려움과 역겨움을 품어온 것임에 틀림없다.
  명훈은 퍼질러앉듯 빈자리에 있던 술기운과 함께 오전의 감상을  되살렸다. 다방 안을 홀
건히 적셔오는 듯한 구성진 경음악 가락과 창틀을 타고 내리는 빗물도 적잖은 감상을 보탰
다.
  다방을 나와 길가에서 산 종이우산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명동  쪽으로 
걸을 때까지도 명훈은 여전히 애절하면서 달콤한 감상에 젖어  있었다. 자신이 주먹으로 휘
어잡고 있는 골목을 둘러버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경애를 만나러 나
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머리속으로 시구까지  다듬게 되면서 그는 오
랜만에 한 가능성 있는 서정시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시인은 평소 그들 패거리가 본부
처럼 쓰고 있는 다방 안으로 명훈의 발을 들여놓으면서 끝장났다. 먼저 명훈의 감정을 절제
하게 만든 것은 불안정이나 그래도 한 패거리를 거느리고 있는 작은 오야붕으로서의 위신이
었다. 명훈은 그 안에서 기다릴지 모를는 깡철이와 아이구찌에게 나약하게 뵈기 싫어서라도 
감상을 떨쳐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명훈은 한차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짐짓 굳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뒤 다방문을 열었다. 
예상과는 달리 안에는  마지못해 반색하는 마담과 레지 아가씨 하나뿐 낯익은 얼굴이 하나
도 없었다.
  "다 어디 갔어?"
  되도록 무거운 몸가짐으로 구석자리에 앉은 명훈이 엽차를 따라주는 어린 레지에게  물었
다.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든 만나는 대로 그와  미진한 술이나 더 마실 생각
이었다.
  "몰라요, 모두 점심 먹고는 안 보이는데."
  레지가 성의 없는 말투로 그렇게 말끝을 흐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참,깡철인가 하는 그 삶만 한 반시간 전에 왔다가 나갔어요. 왠 아가씨하고."
  "왠 아가씨?"
  명훈이 그렇게 반문했으나 그때만 해도 건성이었다.  깡철이가 이런저런 계집에들을 만나
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래요. 예쁘장하던데요."
  그런 레지의 대꾸를 흘려들으며 명훈은 다방을 나섰다. 날도 궂고 하니 곰보 아줌마 집쯤
에 몇 녀석 몰려 있을 것 같아 그리로 가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거기 역시 아무도 없었다. 오전에 도치와 호다이가 대포 한잔씩을 걸치고 간 뒤로
는 아무도 못 봤다는 게 곰보 아줌마의 말이었다.
  '아직 동대문에서 돌아오지를 않은 모양이구나.'
  명훈은 그렇게 녀석들을 생각하고 거기 그대로  주질러앉았다, 그리고 대폿잔이나 비우며 
녀석들을 기다리는데 뭊득 열리며 또복이가 고개를 디밀었다. 명훈네  패가 그 골목에 자리
잡은 뒤에 주워들인 똘마니로 근처 '천안여인숙'에서 쪼바(잔심부름꾼)노릇을 하는 녀석이었
다.
  "얌마, 뭘 해? 들어오지 않구."
  명훈이 꿩 대신 닭이라는 기분으로 그렇게 불러들였다. 별로 거칠게 말한 것 같지 않은데
도 또복이가 움찔 굳어지더니 모뭇머뭇 안으로 들어왔다. 여차하면  뒤돌아서 뛸 궁리를 하
면서 마지못해 다가드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좀 전의 감상적인 결의로 다
른 쪽으로 신경이 무디어져 있는 명훈은 그런 녀석의 태도에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녀석이라도 말벗이 되어준다는게 반가워 대접 가득 술잔을 따라주며 자기 앞에 앉혔
다.
  "날도 축축하고 한잔 생각 있어  왔단 말이지? 여인숙에도 대낮부터 끼고  뒹구는 것들을 
없을 테고. 좋아, 내가 한잔 사지."
  명훈이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해서 그렇게 말하자 녀석의  태도도 좀 풀어지는 듯했다. 
명훈의 짐작이 대강은 맞은 듯 맏은 술잔을 달게 마셨다.  그러나 잔을 내려놓고 명훈을 바
라보는 눈길에 무언가를 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내몀의  동
요가 내비쳤다. 이번에는 명훈에게도 그런 녀석의 알지 못할  관찰과 망설임의 눈길이 느껴
졌다.
  "너, 무슨 일이 있구나, 왜 그리 안절부절못해?"
  "야, 아네유.그저."
  녀석이 그렇게 부인하며 얼른 눈길을  돌렸다. 명훈도 굳이 녀석의  마음속까지 캐보아야 
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짜식, 아침부터 악바리 아줌마한테 귀쌈이라도 한 대 얻어걸친 모양이구나. 알았어. 술이
나 한 잔 더해."
  그렇게 지리 짐작하면서 자신의 감정으로  돌아갔다. 또복이도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듯 
시답잖은 얘기로 마걸리 한 주전자를 다 비워갈 무렵이었다. 차츰 오르는 술기운 탓일까, 언
제부턴가 전과는 달아 보이는 이유로 망설임을 보이기 시작한 또복이가 마침내 참지 못하겠
다는 듯 불쑥 물었다.
  "형, 저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유."
  "뭐야?"
  명훈이 별 긴장 없이 되물었다.
  "그 여자, 학생이유? 똥치유?"
  "그 여자? 그 여자, 누구 알이야?"
  녀석의 말에 뚜렷한 설명이 있던 것도 아닌데 명훈은 느닷없이 모니카를 떠올리며 이번에
는 약간 긴장해 물었다. 그런 명훈의 눈길이 부담이 되었던지 다시 움츠러들며 목소리를 떨
었다.
  "거, 왜 형하고 이따금 우리 여인숙에 오는 단발머리 말에요. 접때는  파란 나일론 수건을 
쓰고 왔지 아마."
  틀림없이 모니카를 가르키는 말이였다. 비로서 명훈은 무슨 날카로운 섬광에 아프게 머리
를 찔린 듯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먼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울컥 치미는 
분노였다.
  스스로 모니카를 창녀같이, 백치같이 마구잡이로 다뤘지만, 남의 입을 통해 더러운 입으로 
불리는 걸 듣자 참을 수 없던 것이었다.
  "이 새끼가 얌마, 너 뭘 보구 하는 소리야? 걔는 엄연히 학생이라구. 이제  겨우 여고 3학
년생으로 올라갔단 말이야."
  실은 모니카 신분으로 그 어머니가 꼬박꼬박 내는 공납금과 몇 달에 한 번씩 담임선생님
에게 갖다 바치는 돈봉투로 유지될뿐, 공부에서도 품행에서도 그녀는 이미 학생이 아니라는 
게 더욱 명훈의 말투를 거칠게 했다. 일순간 또복이의 얼굴에 가벼운 후회의 그늘이 스쳤다. 
그걸 알아본 명훈이 더욱 험학하게 다그쳤다.
  "새까, 바로 말해. 너 뭘 보고 하는 소리야?"
  "아뇨. 그저 형하고 다니는게 학생이 그렇게 아주..."
  "그건 마(임마), 내 애인이나까 그렇지. 학생이 연애한다고 똥치가 되냐?"
  명훈은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또복이가 그런 말을 한  까닭이 그 뿐이기를 빌었다. 
여인숙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대낮부터 자신과 모니카가 함께 방안에서 뒹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는데서 온 잘못된 추측이기를. 그러나 명훈이 그렇게 비는 자체가 마음속에 아직 또 
다를 불안이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그건 아니지만유."
  명훈의 기세에 눌렸는지 또복이가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어이  다시 무슨 까닭에선가 망
설임에 빠져든 듯하더니 오래잖아 불쑥 물었다.
  "그런데 형하고 깡철이 형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유?"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지더라도 궁금한 건 물어봐야겠다는 결의 같은 것까지 풍기는 말이
었다. 깡철이란 이름을 듣자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참혹한  단정이 머리속을 후리면서 명훈
은 잠시 아찔한 현기증마져 느껴졌다.
  "깡철인가 하는 사람 얼마 전 흘려들은 다방  레지 아가씨의 말이 토막져 왱왱거렸다. 하
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음험하고 잔인한 침착이 명훈의 이를 사려물게 했다.
  "깡철이, 그야 내 친구지."
  "그럼 둘 중에 오야붕은누군감유?"
  "오야붕, 그런 건 없어. 우리는 그저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한 의리의 사나이들이라구."
  명훈이 조금 전 잠시 아찔해 있던걸 어떻게 해석했던지, 또복이 녀석이 그런 명훈의 과장
스런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아니면 서울하고도 명동의 뒤골목 거리에 끼여들어  벌써 몇 해째 밥을 빌어먹고  있어도 
천성이 아직 제데로 눈치를 익히지  못한 탓이었으리라. 녀석이 이번에는  머뭇거림도 없이 
불쑥 말했다. 
  "저어 형들, 형들은 한 패가 되면 여자까지 나눠가지슈?
  그 말에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따다닥 하며 몇 
군데 손가락에서 관절 꺽이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이 없구나.역시."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명훈에게 있어서 모니카는 언제 떠나도 무관할 듯 
싶은 하찮은 존재였다. 그는 잘해야 그녀를 여동생의 친구였던, 아주 못쓰게 망가져버린  도
시의 아이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을 뿐, 심하게는 화대가  들지 않으면서도 얼굴이나 몸매가 
아주 괜찮은 창녀로 대접하기까지 했다.
  물론 명훈도 그녀를 가슴 저린 연민과 동정으로 보았고, 어떤 때는 드디어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는가 의심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경멸의  말을 내뱉고 육체적인 학
대조차 서슴치 않았지만, 부르기만 하면 언제나 백치같은 웃음을 흘리며 안겨올때가 그랬으
며, 자신이 원한다는 걸 알면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안간힘을 다해 애쓰는 때가 그랬다.
  특히 명훈과 어울릴 때 실은 그게 그들 사랑의 유일한 내용이겠지만 그녀의 정성과 노력
은 애처롭게 느껴지는 데까지 있었다. 명훈의 비뚤어진 욕정에서  비롯된 온갖 변덕스런 요
구와 가학적인 탐닉을 그녀는 참을성있게 다해 받아 주었고, 더러는 그 이상을 위해 걸맞지 
않은 노력과 정성을 쏟기까지 했다. 어떤 늙은 갈보에게 들었거나 못된 도색 잡지에서 읽은 
듯한 성의 기교를 어설프게 흉내내는 게 그런 노력과 정성의 대표적인 예였는데, 처음 명훈
은 달아오르던 욕정마저 식어버릴 정도로 그녀의 그 같은 짓거리에 화를 냈으나, 실은 그와
의 성합에 있어서 그녀는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고백을 들은 뒤로는 까닭 모르
게 그녀가 가여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동정과 연민도 끝내 사랑으로는 전이되지 못  했다. 맥치 같은 웃음과 엉뚱한 
열중으로 특정지어지는 그녀의 망가짐과 뒤틀림보다는 명훈의 걸맞지 않는 자의식 탓이  컷
을 것이다. 일부는 아직 군데군데 생생한 빛으로 되살아나는 어릴 적의 추억에서 왔고, 일부
는 핏줄로 전해진 것이겠지만, 그의 의식 밑바닥에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자존심 또는 자신의 타고난 품격에 대한 믿음 같은 게 강하게 살아 있어 그녀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경애를 잊기를 여탯것 거부하고 있는 것  처럼 그리고 모니카에게 어쩌다 
희미한 정애를 느끼게 될 때 그걸 육체적인 어울림에서 생겨난 동물적인 감정으로 여겨 전
보다 한층 굳게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모니카 때로는 떼어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거추장스럽고 창피하게까지  느껴
지던 그 한심한 영혼이 깡철이와 무슨 일을 버리고 있다는 소리가 그렇게도 무서운 분노와 
격정을 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주 오래 뒤에는  뚜렷이 깨닫게 되지만 그때까
지만 해도 명훈은 갑자기 자신을 사로잡는  그 분노와 격정이 스스로에게 낭패스러울  만큼 
까닭을 알 수 었었다.
  그런 명훈의 얼굴이 어떻게 비쳤는지 또복이가 조금씩 풀려가던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까닭 모를 낭패감으로 잠시 망연해져 있던 명훈
에게서 갑작스런 움직임을 끌어냈다.
  "그것들 지금 니네 여인숙에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명훈이 벌써 어는 정도 몸에 벤, 격분할수록 차게 가라앉는 목소리
로 물렀다. 아마도 또복이 녀석은 그 직전까지도 명훈의 마음속을 크게 잘못 읽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고  놀라 떠러뜨리듯 술잔을 내려놓고  명훈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형님, 저 내 말을 더 듣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아직 있어 없어?"
  "저번에 왔을 때 둘이 꽤나 심하게 다투는 것 같았은데 오늘은 조용히 들어들 가길래. 형
님은 또 여기서 천연스레 술을 마시고 계시고."
  "그래, 그년은 내가 깡철이 짜식한테 이미 넘겼다. 어쨌든 지금 거기 있어,없어?:
  "그 중간에는 또 형님하고 왔길래. 나는 깡철이 형님 두 분이서 같이 나눠..."
  "야, 이 새꺄!"  명훈이 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 크게 지른 소리는 아니었는
데 그 어조가 어땠는지 저만치 조리대가 있는데서 설거지를 하던 곰보 아주마가 설거지하다 
그릇을 개숫물통에 툭 털구며 겁먹은 눈길을 보내왔다. 제법  불그스레 술이 오르던 얼굴에
서 핏기가 싹 가시며 또복이가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너 죽고 싶어? 왜 대답을 안 해?"
  "지금 있시유. 아직은 있을 꺼여유. 그렇지만 깡철이 형한테는 내가 그랬단 소리를..."
  "알았어."
  명훈은 그 말과 함께 그대로 뛰어나가도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고, 술값까지 치를 만큼 
침착을 과장하며 곰보 아줌마 집을 나왔다. 막 문을 밀치고 나서는데 어디서 아이구찌와 도
치가 빗속을 뛰어오다 부딧칠 듯 명훈 앞에 섰다.
  "어딜가? 여기 있을 줄 알고 나도 한잔 빨러 왔는데."
  도치가 그렇게 떠들다가 명훈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딜 가는데?"
  "몰라도 돼."
  명훈은 차갑고 억지로 지어낸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 떨치듯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갔다. 잠시 조용히 서 있는 것 같던 둘이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등뒤에서 소리
쳤다. 
  "어이,간다. 우리도 같이 가야 돼는 거 아냐?"
  "따라오지마."
  명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낮게 으르렁대듯 말했다. 발자국 소리가 그친 것으로 보아 그
런 식의 의사표현이 효과를 본 듯 했다.
  빗발은 봄비 같지 않게 거세였다. 그러나 명훈은 거의  빗발을 느끼지 못하고 천안여인숙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머리속이 텅 빈 듯 아무런 계회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도치와 아이구찌 때문에 볼썽사납게 뛸 수 없는게 괴로울 
정도로 다급할 뿐이었다.
  천안여인숙에 이르니 날이 궃은 때문인지 안내 창구는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이 어두웠다. 명훈이 손가락으로 작은 미닫이 창문을 두두리자 어두운 복도 쪽에서 악
바리 아줌마가 무엇에 뒤틀렸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오다가 명훈을 보고 눈길이 시쭉해
졌다.
  "왠일이야? 오늘은 아주 맞교대하는거야?"
  악바리 아주마가 그런 소리로 빈정거릴 때만 해도 명훈은 아직 이렇다 하게 정리된 생각
이 없었다. 분노와 격정에 막연히 들떠 아줌마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깡철이 어디있어요?"
  "저 안쪽 끝 12호실."
  악바리 아줌마가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시 빈정거렸다.
  "사내들이란 그저. 하지만 고 아가씨도 어지간한걸. 나이도 몇 되지 않을 것 같던데."
  그제서야 명훈은 그 아줌마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이마
가 터질 듯 부풀어오르던 분노와 더불어 맹렬하고 앞 뒤 없는 공격 심리로 변했다.  '용서할 
수 없다! 그냥 두지 않겠어.' 그런 결의로 이르 악문  채 후다닥 복도 안쪽으로 뛰어간 명훈
은 방안의 두런거림을 엿들을 것도 없이 세차게 방문을  열어제쳤다. 문고리를 걸지 않았던
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닫이가  열리며 방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이불 속에 
누운 채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있던 모니카와 이제 막 내의 윗도리에 목을 꿰고 있던  깡철이
가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채 가려지지 못한 깡철이의 허리께 맨살이 그때것 정해지지 않았던 공격의 순위를 순간적
으로 결정케했다. 명훈은 구두를 신은 채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깡철이를 덮쳤다.
  "어? 간다. 명..."
  깡철이가 그런 다급한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앉은 채로 주춤 몸을 뒤로 뺐다. 두 손
까지 휘젖고 있지만 저항의 결의나 위협의 뜻은 얼굴이나 표정 어디에도 없었다. 평소 싸움
에서든 공격에서든 방어에서든 그렇게 표덕스럽고 재빠르던 그라, 눈길이 서린 막연한 애원
의 빛과 무엇 때문인가로 마비된 듯한 몸이 뒤집힌 명훈의 눈에도 이상스레 비쳤다.
 하지만 그때 이미 명훈의 몸은 치욕감과 분노의 상승 작용으로 미쳐버리기 시작한 정신의 
무시무시한 흉기에 지나지 않았다.
  명훈은 방안에 뛰어든 것과 이어진  동작으로 그런 깡철이의 가슴패기를  걷어찼다. 새로 
맞춘 신은 단화를 통해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면서,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깡철이의 몸이 
거짓말처럼 두어자는 날아 벽에 부딪혔다가 방바닥에 널부르졌다.
  시시한 나와바리 싸움 때의 명훈 같았으면 상대방의 그런 반응에 생사부터 먼저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명훈을 몰아내고 있는 것은 살의나 다름없는 격분이었다. 오히려  어떻
게 깡철이 숨통을 빨리 끊어놓을까 궁리하듯 거의 저항 없는 깡철이를 모질게 짓이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부터인가 튀기 시작한  피로 완전히 미쳐 날뛰는  명훈을 누군가가 
뒤에서 껴안으며 소리쳤다.
  "뭐 하는거야? 애 죽이겠어."
  "그만들 해!그만"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은 명훈이 잘 맞춰지지 않는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며 돌아보니 어
느새 도치와 아이구찌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말리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모니카가 백치 
같은 얼굴로 겉옷을 걸치고 있었고 문께에  파랗게 질린 또복이의 얼굴과 함께  잔득찌푸린 
악바리 아줌아도 있었다.
  "놔! 이거 못 놔?"
  그래도 아직 격분에서 깨어나지 못한 명훈은 몸을 비틀어 자기를 껴안은 도치와 아이구찌
에게 빠져나오려고 했다. 팔힘이 세기로 소문난  도치에다 아이구찌까지 거들어서인지 쉽게 
빠져나올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꼬봉처럼 부리게 도니 그들에게  잡혀 꼼짝할 수 없다는 
게 생각보다 빨리 명훈을 앞뒤없는 격분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원래 있었던것인지 그 달 몇 
달 사에에 길러진 것인지 모르지만 그 무렵엔 자리잡기 시작한 자금의 오야붕 기질이 지켜
야 할 품위 같은 것을 문득 떠올리게 한 것이었다.
  "이것 놔."
  한동안 몸에 힘을 빼고 굳은 듯이 서 있던 명훈이 긴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가라앉혀  그
렇게 말했다. 등뒤에서 도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하듯 받았다.
  "안돼, 더 손대면 잰 죽어."
  그제서야 명훈은 발 밑에 구겨진  듯 쓰러져 있는 깡철이를 보았다.  얼굴이 찢겨진 내의 
속에서 피가 흐르는데,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몸은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그런 그의 오른손
에는 어떻게 간신히 꺼내기는 했으나 미쳐 써  볼 틈도 없었던 이발소용 접는 면도칼이 꼭 
쥐어져 있었다. 여간해서는 꺼내지 않는 그의 숨겨둔 무기였다.
  날이 반쯤이나 열린 그 면도날을 보자 명훈은 새삼스레  위기감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까
철이가 일어나 자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 같은 불안에  오싹해지며, 일초라도 빨리 도치와 
아이구찌로부터 벗어나려고 명훈은 다시 힘을 다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치와 아
이구찌가 명훈을 놓아준 것은 명훈이 힘보다 머리에 의지하기로 마음을 바꾼 뒤였다.
  "야, 이 새끼들아. 니네들이 누깔이 없어? 저 새끼 병원에 안 데리고 갈 거야?  이대로 피
를 쏟가다 뒈지게 버려둘 거냐구."
  명훈이 자유로운 다리를 하나 뻗어 깡철이 쪽을 발 끝으로 가르키며 그렇게 소리치자 그
들도 비로서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명훈의 고함이 그저 한본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깨우쳐줌이라 여겼던지 먼저 도치가 명훈
을 놓아주고 깡철이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아이구찌도 명훈의 팔을 놓고  깡철이에게 가서 
널부러져 있는 깡철이를 부축해 세워버려 했다. 깡철이는 뼈가 없는 사람처럼 두 사람이 일
으켜도 자꾸 몸이 접히며 허물어져갔다. 그러나 간간 약한 신음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그
렇게 위급한 상태는 아닌 듯 했다. 갈비뼈가 여러 대  나갔거나 허리를 심하게 다친 것임에 
틀림 없었다.
  "안 되겠다.업혀줘."
  도치가 넓적한 등을 들이대고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이구찌도  그 수밖에 없다고 판단
했던지 힘을 다해 까철이를 일으켜 도치의 등에 업혔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디 심하게 다친 
곳이 건들렸던지 깡철이가 작은 비명 같은 외마디 신음 소리를 냈다.
  도치가 깡철이를 업고 아이구찌는 그 뒤를 떠받쳐주는 형국으로 수선스레 여인숙 방을 나
간 뒤에야 아직도 그 방안에서 모니카가 있는데 생각이  미쳤다. 명훈이 모니카에게 눈길을 
돌리자 그새 겉옷까지 걸치고 파랗게 질린 채 방 한구석에서 굳어 있던 그녀가 파르르 몸을 
떨엇다. 명훈의 무자비한 공격에서 육체적 공포 때문인지 것처럼 보였느나 그게 아니었다.
  "오빠, 잘못했어."
  그녀는 육체가 받을 위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비나 움츠림의 자세를 보이지 않은 채 떨
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직 격분에서 다 깨어나지 못한 가운데서도 명훈은 그런 그
녀의 반응이 어이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가 잘못된 것  같군요. 잘못된 게 있다면  용서해주세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새 어는 정도 모니카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된 명훈은 그녀의 말을 그렇게 들었다. 그
녀가 떨고 있는 것도 죄의식이 아니라 명훈이 깡철이를 공격할 때 보인 무지막지한 그녀에 
관한 명훈의 그런 해석에 정확한 것에 가까웠다.
  잠깐 할 말을 잊은 명훈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던지 모니카가 이번에는 좀 자신을 얻
은 목소리로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접때 오빠를 만나러 가니까 오빠는 없구. 저 사람이 오빠가 여기서 기다린다구 가자길래 
모르고 따라왔다가 억지로, 정말이에요. 억지로 그랬어요. 따귀를 때리고 목을 조르고, 꼭 죽
는 줄 알았어요."
  "그담에는 서로 없던 일로 하 로 하구, 딱 한  번이니까. 나도 오빠에게 일르지 않구. 그 
사람도 아무한테나 말하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 오니까, 또  그러자구, 말 안들으면 접대 일 
모두 오빠에게 일러바친다구."
  "정말이에요.  딱 한 번만 더 들어주면 다시는 지분거리지 않겠다길래. 오빠한테는 영원히 
입을 다물어 주겠다길래."
  "시끄러, 이 쌍년아."
  마침내 더 참지 못한 명훈이 꽥 소리를 질렀다. '딱  한 번'이란 말을 무슨 영험한 부적처
럼 되풀이 쓰는 게 갑자기 역겨움을 일으킨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탯껏 문께에 붙어서는 
벌벌 떨며 귀를 모으고 있는 또복이 녀석 때문이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똘마니라지만,  모니
카의 그런 백치 같은 고백을 더 듣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참으로 알수 없는 것은 모니카였다. 그녀는 마치 그 두서없는 고백으로 이미 속죄
의 의식을 끝냈다고 믿었던지 오히려 명훈의 그런 격렬한 반응에 어리둥절해하는 눈치였다. 
거의 습관적인 교태인 울상을 지어버린 것도 잠시, 이내 투정조가 되서 감겨왔다.
  "오빠, 또 왜 그래? 막 고함지르고. 내 다 말했잖아? 그래도 모르겠어? 또 그 사람도 실컷 
두들겨패뒀잖아? 그래두 여태 속이 안풀려?"
  그런 그녀의 말이 ㅇ어이없어 명훈의 말문을 다시 막아버렸다.  한층 기가 살아난 모니카
가 이번에는 제법 달래듯 말했다.
  "나도 이제 다시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 사람도 그만큼 혼이 았으니 다
시는 추근 대지 않을 거구. 이만큼 하구. 이 일은 없었던 걸루 하자구. 그 대신 앞으로 오빠
한테는 더욱 잘할게.오빠만 좋다면 뭐든지 할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애구나."
  명훈은 머리 속의 어떤 부분을 들어내버리듯 그녀의 말에 증오나 미움보다는 알 수 없는 
착찹함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모니카가 죄없고 
가여운 동물처럼 보이고 그땟것 가슴 한구석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격분이 씻은 듯 
사라졌다.
  "예쁜 고양이가 도둑괭이 수컷과 교미했다고 해서 음란하고 불결하다고 나무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감정의 전개가 반드시 용서나  둘의 관계를 유지해나 간다는 쪽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격분이 가라앉으면서 차갑게 굳어져가는 결심은 그쯤에서 그녀와 절
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훈은 순식간에 냉철함을 회복한 머리속에서 그런 자신의 결심을 전달할 방도로  찾아보
았다. 자존심이나 그와 비슷한 감정의 섬세한 작용과는 담을 쌓은,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모
니카의 둔감과 마비를 오래 경험한 그에게는 그 방도가 막연했다.  그 바람에 한 참을 망연
히 서 있던 명훈이 마침내 의지하기로 작정한 것은 그녀의 망가진 정신에 감정적인 충격을 
주기보다는 육체적인 공포를 안겨주는 쪽이었다. 그때껏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깡철이의 면
도칼이 준 암시 덕분이었다.
  명훈은 무언가 좋은 결과를 기다린다는 듯 말똥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버려두고 
몸을 굽혀 방바닥에 있는 면도칼을 주었다. 날을 완전히 펴자 이상하게 싸늘한 기운이 돌았
다. 명훈은 그 칼날을 모니카의 볼에 바짝 들이대며, 뒷골목의 피투성이 싸움 때나 쓰는  허
세가 잔뜩 벤, 그러나 듣기에는 메마르기 그지없는 말투로 낮게 속삭였다.
  '너, 잘 들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낯짝 내밀 생각 하지마. 알지? 다시 내 앞에 그 쌍판
을 보이는 날에는 이걸로 그 쌍판을 확 그어버릴거야."
  일견 명훈이 찾아낸 그 방도는 매우 효과적으로 보였다.  갑자기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
진 그녀가 양볼을 두 손으로 싸안고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그러나 명훈이 바란 대로의 
효과는 아니었다.
  "오빠, 결국."
  그렇게 울먹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충격을  준 것은 면도날릐 날카로움이 준  공포가 
아니라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 때문임이 분명했다.  결국 그녀의 두터운 둔감과 
마비의 벽을 뚫은 것은 절교 선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명훈은 무엇이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는가를 굳이 따져보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혔고, 그녀는 그녀대로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는데 만족하며 소
리나게 칼을 접고 돌아섰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안아오던 육체가 괴로움에떨며 조그맣게 웅
크리고 앉아 있는 있는 데 퍼득 안쓰럽게 비쳤으나 우선은 그저 그곳을 떠나고만 싶엇다.
  그런데 명훈이 한 발짝을 옮겨놓기도 전에 무엇인가를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이어 바
지 천을 건너서도 뭉클하게 닿아오느게 있어 힐끗 돌아보니 모니카가 두 팔로 다리를 싸안
고 있었다.
  비록 몇 겹의 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모니카의 살이 자신의 몸에 닿고 있다는 
걸 느끼자 명훈은 견딜 수 없는 불결함을 느꼈다. 끈끈한 체액으로 뒤덮인 추악한 파충류가 
조금 전에 언뜻 느꼈던 안쓰러움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소름끼치는 혐오감으로 급변했다.
  "놔!"
  명훈은 조금도 과장하는 기분없이 모질게 다리를 빼며 소리쳤다.  모니카가 몸 전체로 다
리에 매달려 끌려오며 울먹였다.
  만약 평소 같으면 명훈은 모니카의 그런 모자람 또는 일그러짐에 틀림없이 어쩔 수 없는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몸서리쳐지는 혐오감에 눈과  귀는 물론 마음까지 닫
혀 있는 때였다. 후두둑, 바짓가락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차게 다리를 뽑아낸 뒤, 스
스로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면서 다시 다가드는 그녀에게 모진 발길질을 보냈
다.
  아, 하는 비명과 함께 모니카가 앞으로 폭삭 고꾸라졌다. 쫒기듯 방을 나온 뒤 힐끗  돌아
보니 왼쪽 볼을 싸쥐고 있는 모니카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어나 명훈
은 아직도 그 몸서리쳐지는 혐오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차가운 다짐만을 내뱉었을 뿐이
었다.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때는 죽는 줄 알아!"
  명훈이 도망치듯 그 여인숙을 빠져나와 거리에 나서니 그새 비는 봄바 같지 않게 폭우로 
변해 있었다. 명훈은 찬 빗발도 느끼지 못하면서 너풀거리는 터덜터덜 거리를 걸었다.  혐오
감이나 분노에서 비롯도니 격정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정신 또한 적지않은 상처를  입은 
것임에 틀림없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길로 빗속을 헤메던 명훈이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은 화신 앞 네거리였
다. 무언가 성난 사람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아 하나들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종로 쪽을 
보니 한떼의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몰려오고 있었다.
  "공명 선거 보장하라!"
  "장면 박사 다시 민주주의 지켜내자!"
  "못 살겠다. 같아보자!"
  명훈이 걸음을 멈추고 풀어진 눈길에 힘을 주어 그쪽을  살펴보았다. 군중의 태반은 고등
학생이었지만 군데군데 머리띠를 두루고 섞여 있는 민주당원들로 보아 운동장의 선거  유세 
끝에 모려나온 것 같았다.
  흥분한 군중이 내뿜는 열기가 헐클어져 있던 명훈의 의식을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
다. 그러나 워낙 뒤틀어져 있는 다음이라 그의 의식은 끝내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
  '제일교포 북송 반대'니 '반공 궐기 대회' 같이 데모라기보다는 전부의 동원에 가까운 행사
밖에 참여해본 적이 없 그라 그 같은  학생들의 가까운 반정부 데모가 신선한 충격일 수도 
있지만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시위 군중들의  뒤통수에 대고 명훈이 속으로 뇌까린  말은 
이앴다.
  "씨팔놈들, 육갑떨고 자빠졌네."
  어쩌면 그런 반응은 정치적 성격을 띠는 기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슨 특권처럼 보이
는 의식 상황 속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명훈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날 그의 의식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뒷날 그가  보여주는 
몇 가지 성격상의 특징들 때문이다. 부정적으로든 열기에 쉽게 함몰하는 것 같은 그 특징들
은 그의 삶 곳곳에서 불리를 입히다가  마침내는 너무 이르고 불행한 형태의  죽음오로까지 
인도하게 되건만 그날만은 냉담한 방관자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 밖의 그날 명훈의 의식이 정상적이지 못했다는 또 다른 근거로는 그날의 나머지가 거
의 기억에 없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풍차'로  가서 짱구의 눈총을 받으며 다시 술을 
퍼마시기 시작한거승로 그의 기억은 끊어져버리는데, 그런 앞 뒤  없는 폭음은 모니카의 일
로 받은 충격의 여진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런 그에게 그날의 시위가 저  4.19의 서곡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아듣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병원으로 업혀간 깡철이의 부상은 생각 밖으로 심했다. 갈비뼈가 석 대나 부러지고 두 대
가 금간 데다가 장기도 몇 곳 상했다는  게 명훈이 다음날 전해들은 의사의 진단 내용이었
다.
  명훈을 단부 건물 옥상으로 끌고  가 호된 몽둥이찜질을 했지만,  배석구는 후견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다. 그가 어떻게 어르고 달랬는지 석  달 진단을 받아 병원에 누워있
으면서도 깡철이는 경찰을 앙갚음은 하려 들지 않았다.
  또 배석구는 적지 않은 깡철이의 치료비 얘기를 명훈에게 한마디  꺼낸 적도 없고, 그 일
로 인해 명훈에게 반발하는 도치네 패들까지 어떻게 단속했는지 그 골목에 그대로 붙어 있
게 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모진 몸둥이질로  엉덩이가 찢겨진 병원에 누워 있
는 명훈에게 술병을 들고 찾아온 그가 한 말이었다.
  "나라가 군대를 기르는 것은 오직  한 순간을 위해서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가 자유당의 
별동대야. 거기서 필요로 한다면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가 돼 있어야 해. 그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문제없어."  
  
    제 30장 불만의 계절
  남녘의 봄은 빨랐다. 삼월 중순이라면 서울은 아직 쌀쌀했던  것 같은데 밀양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기껏해야 열흘 안팎인 절후의 차이이일 테이지만, 서울을 떠난게  늦겨울이서인지 
밀양의 몸이 서울보다 한 계절쯤 빠를 것처럼 느껴졌다.  펌프가에서 세수를 마치고 얼굴을 
닦는 영희에 눈에 들어온 이웃집 목련 꽃봉오리가 금세 껍질을 터뜨리고 허옇게 피어날 것 
같았다.
  집안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어머니는 일찍 시장의 헌옷가게로 일 나갔고 옥경이도 학교에 
간 지 오래였다. 주인집 내외도 가까운 밭머리에 온상 일을  보고 나가 집안에는 영희 혼자
였다. 실은 영희가 펌프가로 세수를 하러 나온 것 자체가 집 안에 혼자뿐이기 때문이다
  영희가 거의 문밖을 나오지 않은 것은 마음에 받은 상처보다는 집안으로 돌아온 날 밤 어
머니에게 잘린 뒤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머리칼 때문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써서 감추기
는 해도 워낙 머리숱이 없어 누구든 자세히 보면 금세 이상한 걸  알아챌 만 했다. 그 발에 
처음 한 달은 거의 방과 부엌만을 들락거릴 뿐 대낮에는 뒷마루조차 나앉는 법 없이 보내었
고, 수건을 써서 겨우 눈가림을 할 만큼 머리칼이 자란  뒤에도 내외가 있을 때에는 마당에 
나서는 것조차 되도록 피해온 것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온 영희는 습관처럼 앉은뱅이 거울 앞에 앉아  머리수건을 벗었다. 남자 애
들의 상고머리를 겨우 면한 올올이 선 머리칼이 보기  흉하게 드러났다. 어머니가 마구잡이
로 가위질을  해 길이마저 들쑥날쑥 한층 눈에 거슬렸다.
  '이건 어머니도 뭐고 아니야, 머리칼만 자라면.'
  영희는 새삼스런 원한으로 이르 사려물었다. 그러자 굳어진 거울  속의 얼굴이 짧고 둘쑥
날쭉한 머리칼과 어울려 어떤 험상궂은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 느껴젔다. 그게 영
희의 원한을 더욱 험하고 뿌리깊은 것으로 몰고 갔다.
  '맞았어. 그때부터 그 여자는 이미 내 어머니가 아니었어.  나를 무슨 천한 짐승처럼 학대
해왔지.'
  영희가 되뇌고 있는 '그때' 는 전쟁 전해,  그러니까 그녀가 여덜 살 때의 어느  날이었다. 
영희는 홍역이 유난히 늦어 국민학교 입학한 뒤에야 그걸 치를게 되었는데, 영희가 누운 며
칠 안 돼 다시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이 이름 모를 병으로 앓아 누웠다. 철이의 바로 손위 형
뻘인 명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아이로 어릴 적의 기억에도 달덩이처럼 환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한꺼번에 남매가 앓아 눕게 되자 어머니는 둘을 딴방에 뉘고 안절부절못하며 두 방 사이
를 오락가락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인가로 경찰에 잡혀가 벌써  한달째 돌아오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어머니는  명욱이의 병을 감기쯤으로 알았다. 그때만  해도 
홍역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아 그 때문에 어머니는 그 유별난 남존여비 사상에도 불구
하고 명욱이보다 영희의  방에 더 오래있었다. 그러다가 영희의 홍역이 막바지에 이르러 어
머니가 영희 곁에서 밤샘을 하는 사이에 일은 터지고 말았다.  겨우 한 고비를 넘기고 잠든 
영희를 놓아두고 명욱의 방으로 갔을 때 전날 초조녁때까지만 해도 그저 좀 칭얼댈뿐 대단
찮아 보이던 명욱이 가쁜 소리와 함께 불덩어리처럼 되어 혼절해 있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놀란 어머니는 명욱이를 업고 그 무렵 갓 개업한 진 외사촌 아저씨 병원으로 허
둥지둥 달려갔다. 하지만 이튿날 병졸에서 놓여난 영희가 미음을 마시고 있을 때 넋나간 사
람처럼 어머니는 혼자였다.
  "아이구, 어머님에. 인자 명욱이는 이 세상 아이가 아입니더."
  어머니는 그 무렵 좀체 쓰지 않던 사투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영희를 보살피다 궁금한 얼
굴로 그녀를 맞는 할머니를 쓰러앉으며 한동안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영희에게 지울 수없
는 기억으로 남은 것은 어머니의  그 다음 행동이었다. 한동안을 섧게  운 어머니가 갑자기 
핏발선 눈으로 영희가 있는 방 쪽으로 노려다보니, 우르르  방안으로 달려와 아직도 영희의 
손에 쥐어져 있는 미음 양재기를 빼앗아 마당에 내동댕이 쳤다.
  "이년, 죽어야 할 껀 닌데, 다부(오히려) 아까운 아들 자(잡아)머고 니까짓 년 홍역이 뭐라
꼬, 딜딩이(달덩이)같은 아 지프테리(디프테리아)롤 숨넘어가는데  약 한 첩 못  써보게 하고
오.그러면서 금세 잡아먹을 듯 덤벼드는 어머니의 모습에 고비는 넘겼다 해도 아직은  홍역
중이던 영희는 완전히 병줄에 잃은 데서 온 상심이나 몸에 벤 남존여비 사상만으로 다 설명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증오였는데, 그 일은 아주 오래  뒤까지도 영희의 가슴에 서늘한 기억
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들 모녀를 일생동안 괴롭힌 애증의 악순환은  바로 그 때 시작된 것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후 일 연도 안 돼 터진 전쟁의 완중에도 모녀 사이르 깊이 갈라놓았던 감정의 골은 어
느 정도 덮여진 것 같았다. 연이은 엄청난 일들과 시간이  지남에 힘입어 어머니는 이미 죽
은 명욱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난 대신 살아있는 아리들은 지나차다 싶을 만큼의 보호본능으
로 감싸안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삶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자 영희에 대한 어머
니의 까닭 모를 증오는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대채로 딸에게는  엄격하고 인색한 게 그때의 
어머니들에게도 있는 공통점이었ㅈ만, 영희는 그  이상 거의 학대를 받은  느낌으로 자라야  
했다.
  어린 시절 내내 영희는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따듯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어머니가 자신을 기쁘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며, 조르지 않고 무얼 
얻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의 필요는 언제나 견딜 수 없을 때에야 겨우 최소한으로 채워졌
고 심하게는 그마저도 거절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더욱 결정적으로 그들 모녀를 갈라놓은 것은 학교였다.  오빠 명훈이 영희를 학
교에 보내자고 말을 꺼냈을 때  어머니는 펄펄 뛰며 반대했다. 그리고  명훈이 우겨 억지로 
학교를 시작한 뒤에도 영희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은 겨우 방해가 아닐 정도의  도움이었
다.
  어머니는 영희가 쓰는 연필 한  토막 공책 한 권을 아까워했고,  옷차림에 대해서는 거의 
광적일 만큼 엄격했다. 그렇게 입고 싶던 사지 스커트를 영희가  처음 입게 도니 것은 명훈
이 미군부대에 일하게 된 뒤의 일이었다.
  명훈이 얻어온 미국 장교복 바지를 뜯어 만든 스커트 덕분에 3년이나 입어온 검은물 들인 
무명 교복 치마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락이 빤질빤질  닳고 허옇게 물바랜 그 끔직한 
교복 치마, 또 영희는 어머니 앞에서는 한번도 밥상 위에  밥그릇을 얹어놓고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온마리 생선은 말할 것도 업소 새로 썰어온 김치 포기에조차 먼저 젓가락을 대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가 인철과 옥경을 데리고 밀양으로 내려갈 때까지 영희의 밥상은 언제나 명훈과 어
머니와 인철이가 받고 있는 밥상머리 방바닥이었고, 밥과 반찬도 누릉지가 절반인 보리밥과 
뜨고 남은 된장 냄비가 전부였다.
  어머니의 매질은 이웃이 혀를 내두를  만큼 매웠다. 어머니로 보아서는  사남매 모두에게 
차별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영희가 보기에는 자신에게만 유달리 심한 것으로 여
겨졌다. 오빠인 명훈은 이미 나이로 매질의 범위를 벗어나도, 옥경은 어린 데다 유복녀란 점
이, 그리고 인철은 그 자신의 유순함으로 매맞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영희는 서울로 옮기
기 전만 해도 거의 하루 한 번은 무언가로 얻어맞곤  했다. 서울로 옮겨와서도 어머니는 여
전히 매질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매질이 드물어진 대신 매를 들면  전에 없이 길고 
모질었다. 이성 문제에서 특히 그래서,  제작년인가 형배의 쪽지를 들켰을때는 한나절  가죽 
혁대로 매질을 당했다. 나중에 옷을 벗고 거울에 비춰보니  온몸에 수십마리의 구렁이가 감
긴 듯 멍이 드어 있었다. 회상이 그렇게 번져나가자 영희는 갑작스레 끓어오르는 증오로 온
몸이 후끈 달아 올랐다. 어쩌면  영희의 억센 기질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런 어머니에게 
반발해오는 동안 은밀히 자라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그런 모녀의 갈등은 어느  한쪽만 탓 할 수가 없다는 편이 옳았
다. 한창 피어나던,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과 한창 성가시던 고집 세고 못 생긴 딸의 생사가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판단 착오로 뒤바뀌게 된 데 대한 자책이 영희에 대한 어머니의 기본 
감정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었으나, 영희가 단정하는 것만큼 그리 참담한 일은 솔
직히 어머니의 기억에 네 살 때 가엾게 죽은 아들의 일을 언제까지고 매달려 있게 버려두지 
않았다.
  영희가 학대라고 느끼게 된 어머니의 행동들은  오히려 생각보다 단순한 동기 쪽에  있었
다. 어머니가 다정한 미소를 보내지 않은 것은 영희에게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였고,  유
난스러워 보인 인색도 꼭 영희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린 사남매를 데리고 어렵게 살아
가는 홀어머니의 절약과 검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희가 딸  아이였기 때문에 그 적용이 
한층 엄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대의 고의 같은 것까지는 애초에 없었던 셈이다.
  어머니 쪽에서 보면 언제나 신경을 거스르고 사람을 앞 뒤 없이 격분하게 만드는 것은 오
히려 영희 쪽일 수도 있었다. 어떤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  잘못을 비는 법이 없는그 억셈
이나, 이를 악물면서도 신음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받아내는 거센 기질이 말로 매질을 
일에 매를 들게 처음 생각보다  훨씬 모진 매질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영희의 감정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어머니에게는 그 모든게 되잖은 반항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불행하고도 운명적인 모녀간의 뒤틀림같은 영희와 박원장의 일로 이제 그 절정에 이
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깍는 것으로 용서의의식을 마감하려 했다. 그러나 영희에게는 
머리를 깍임으로써 자신의 잘못 자체가 애초부터  속죄해야 할 구 무엇도 없다고  단정되는 
대신 어머니의 가혹한 징벌만 두고두고 분할 뿐이었다.
  '그래, 이 머리만 자라면'
  영희는 당장은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면서도 다시 이를 사려 물려 그 가혹함에 대
한 복수를 다짐했다.
  "편지요"
  갑자기 바깥에서 그런 나직한 외침과 함께 무언가가 튓마루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퍼뜩 정신을 차린 영희가 문을 열고 보니 툇마루에 누런 편지 봉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영희는 까닭모를 설렘으로  봉투의 
앞면을 살폈다. 갑작스런 예감으로 거기 씌어진 이름은 자신의 것이었다. 영희는 불쑥  모니
카를 떠올리며 봉투를 뒤집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형배였다. 지난  가을
밤의 쓸쓸한 만남 뒤에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다시 편지가 온 것
이었다. 봉투를 찢자 안에서는 정말 눈에 익은 글씨체로 된 편지가 나왔다.
  영희에게
  이 무슨 미련일까. 이미 모든 게 끝난 줄 알면서도 이렇게 펜을 든다. 네 주소를 알기 위
해 바친 내 노력만으로도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요즈음 서울은 연일 데모로 뒤숭숭하다. 대강 들어 알겠지만, 지난 15일 마산 사태는 아무
래도 마산의 일로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우리는 아직 개학을  안해 나서지못하고 있어도 
모든 항의를 어린 중고등학생들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게 대학가를  떠도는 공기다. 4월이 
되면 한층 더 씨끄러워질 것이다.
  결국은 연서의 일종일 수밖에 없는 편지에 첫머리부터 데모 얘기를 꺼내는 게 너는 어쩌
면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렵사리 네 주소를 알아내 글을 띄우게 된 게 바
로 그 때문이라면 너는 이해할 수 있을는지. 이 무슨  엉뚱한 예감인지 모르지만 나는 요즈
음 세계가 점점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껏해야 몇 백 명씩 떼지어
다니며 외치는 철부지 까까머리들이나 압살 직전에서 몸부림치는 야당 위원들의 침묵  데모 
따위로 드러나는 징표가 아니라, 이 사회의 전반을 무겁게 채워가고 있는, 억눌려 있으나 음
험한 열기를 더해가는 어떤 폭발의 조짐이 내게 주는 예감이다.
  그리하여 한 번 그것이 터지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이다. 그때는 다시 네게 이런 글을 띄
울 기회도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서두른 것이다.
  영희.
  그러나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그리 길지는 않다. 세삼스럽겠지만  나는 먼저 너는 
내 첫사랑이었고 또 마지막 사랑일 것이다는 걸 밝혀두고 싶다.  나에 대한 너의 감정이 어
떠한 것이었건 나는 성실하고 순수하게 너를 사랑했고, 사랑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 다음 덧
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평범해도 행위는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말
한 평범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삼류의 몸과 정신인지 모르지만, 비범한 상황이 비범한 행위
를 요구할 때는 얼마든지 나를 내던질 각오쯤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희, 나는 얼핏 들으면  거창하고 허황된 약속 같은 이말로  이미 끝나버린 우리 
사랑의 부활을 애걸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다시 우리가 만나게 되지 않는다 하더
라도 네 기억속에 남은 나는 지금보다 좀도 모양새와 품위를  갖추기를 바랄 뿐이다. 이 무
슨 부질없는 바람이겠느가만 무언가 지금 말해두지 않으면 선뜻 이해 안 될 내 마음을 전한
다. 부디 이해가 있기를, 연민이 있기를
  1960년 3월 20일 형배
  추신:어쩌면 이게 앞머리에 들어가야 할 질문인데 늦었다. 왜 갑자기 서울을 떠나게  되었
는지, 그리고 그곳의 생활은 어떤지?
  재추신: 모니카의 얘기를 들으니 여태껏  서로 연락이 없었던 모양인데. 걱정스런  그애의 
소식을 하나 전해야겠다. 고모님 말씀을 들으니, 그애는 한 보름 전 빰을 서너 바늘 꿰멜 만
큼 찢겨온  뒤로 일체 바깥 나들이를 않고 있다 한다. 다니는 등 하교도 아예 그만두겠다고 
뻗대 고모님이 몹시 속상해하더라. 내가 그애를 만나 물어보았으나 어울리지 않게 침묵으로
만 답했다. 한 번 알아보기를.
  어딘가 본문과 추신이 뒤바뀐 듯 좀 엉뚱하고, 내용도 과장된 감정으로 들떠 있었지만 적
어도 그때의 영희에게는 묘하게 감동을 주는 글이었다.
  영희는 형배의 편지를 두 번 세 번 거듭 읽었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애뜻
한 감정이 일며 수더분한 형배의 얼굴이 눈앞에 환하게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별로 절실하
지 않았던 절교의 구실, 평범, 그에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게 세삼 놀랍고 미안
했으며, 좀 엉뚱스럽기는 해도 그가 느끼고 있는 종말의 예감 또한 섬뜩함으로 영희에게 다
가왔다.
  만약 그곳이 서울이고 머리칼이 정상이었다면 영희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형배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보낸 괴롭고 쓸슬한 날 탓으로만 돌리기이는 너무도 세찬 감정이었다.
  그때만은 박원장과의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
던 일처럼 영희는 형배와의 새로운 시작을 그려보기도 했다.
  반성이나 참회 같은 과거 지향적 감정에 무딘 영희가 가진 성격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였
다. 과거에 짓눌리는 법이 없고  그 상처로 괴로워하지 안해도 된다는  점에서 그런 영희의 
특성은 삶에 여러 가지로 유리했다. 그녀의 전반생은 남이  보기에도 불행하고 가혹하기 그
지없는 것이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는 것 같은 게 유리함의  하나였
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소홀함은 또한 미래에 대한 맹목적으로 이어짐으로써 그녀의 삶에 치
명적인 불리도 작용한다. 뒷날 진창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나면서  그녀도 미래에 대해 조금
씩 준비할 줄 알게 되지만, 그 미래는 사실 현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뒷날 그
녀는 부의 증식과 관련해 많은 계획을 가지게 되지만, 엄격히 따져보면 그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위한 것이라는 편이 옳았다. 그리하여 그런 현실에서의 지나친 집착
은 종종 그녀의 삶을 가치와 의미로부터 갈라놓은 것이다.
  그 같은 영희의 특성은 그날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뉘우치거나 후회하는 것보다는  그녀가 
빠져있는 상태로 그녀 자신을 몰아넣은 구체적인 원인에다가 원망을 집중시켰다. 영희는 다
시 한 번 어머니를 향해 이를 갈고, 이어 오빠 명훈에게도 원한을 품었다.
  '오빠도 옛날의 오빠가 아니야. 무엇이든 나를 감싸주고 위해 줬는데 이젠 달라졌어. 어머
니에게 일러바친 것도 그렇게 내 머리칼이 이 모양이 되도록 팔짱끼며 구경만 한 것도 그렇
고. 이젠 오빠와도 끝났어. 나는 내 길을 갈 거야.'
  그녀는 자신의 길이 무엇이든지 모르며 그렇게 중얼대다가 비로소 앞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떠올렸다. 정말로 앞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괴로운 현재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것
임에 지나지 않는 그녀 특유의 계획을.
  '그래, 머리칼이 자라면 서울로 다시 가자. 가서 내  힘으로 일자리를 구하고 학교를 마치
자. 형배와도 다시 시작해봐야지. 까짓 박원장 따위는 잊어버리는 거야. 어머니나 오빠와 인
연을 끊고 박원장도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누가 알겠어. 나만  입 다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게 되고 말 거야. 아니, 나도 아예 잊어버려야지. 모든걸 새로 시작하는거야.  그리고 
모두가 놀라도록 성공해 보여야지. 좋아, 머리칼만 자라면 서울로 가는 거야, 머리칼만 짜라
면.'
  결심이 그렇게 서자 이번에는 원망 대신 갑작스런 희망과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왔다. 영
희는 그 시작의 준비로 먼저 형배에게 따듯한 낼 생각을  했다. 그녀가 그와 새로 시작하려
는 게 실은 정신적인 타락이며 간교한 속임수라는 것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영희는 방구석을 뒤져 아이들이 남긴 몽당연필과 빈 노트를 찾아 낸 뒤 방바닥에 엎드렸
다.
  아이들이 오면 편지지와 펜과 잉크를 사오게 하여 정서를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의례적
인 문안과 거짓으로 꾸며진 자신의 근황을 써놓고 나니 갑자기 글이 나가는 걸 가로막는 게 
있었다. 바로 형배의 편지에서 말한 '지난 15일의 마산 사태'였다. 신문도 보지  않고 라디오
도 없는 데다 어머니까지 바깥 일을 입에 담지 않아 영희는 그날 마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날이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는  것뿐. 여기저기 고등학생들이 데모
를 하고 있다는 것도 형배의 편지에서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산 사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답장을 써나갈 수 없어 연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마침 
철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침에도 도시락을 싸주었기 때문에 일찍 돌아온게 이상했다.
  "오늘 오전 수업만 하고 대청소를 했어, 내일 교육감 사찰이 있대."
  철이 묻기도 전에 그렇게 까닭을 말한 뒤 책보를 방바닥에 팽기치고 다시 뛰어나가려 했
다. 그때야 잘 안풀리는 편지에서 빠져나온 영희가 그런 철을 불러세웠다.
  "얘, 잠깐 서봐."
  "왜?"
  막 문고리를 잡고 문을 밀려던 철이 귀찮다는 듯  돌아보았다. 동무들과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듯 했다.
  "저 말이야. 3월 15일날 마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뭐 들은 거 없어?"
  "15일? 마산? 무슨 소릴 듣긴 들었는데. 아니 난 몰라."
  철이 그런 대답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정말로 몰라서가  아니라 영희에게 붙들려 놀이에 
늦어지는 게 싫어 모르는척 나오는 게 분명했다.
  "잠깐 서보라니까."
  영희가 급한 김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철이  움찔하며 방문을 되당기고 돌아
보았다. 워낙 거센 누나라 깔보지 못하는 데다 목소리까지 높이니까  약간 겁을 먹은 듯 했
다.
  "걸 알아서 뭐 하려구 그래?"
  "하여간 아는 대로 말해봐."
  "음 마산에서 큰 대모가 있었데. 뭐 부정 선거를 했다고. 투표함을  부수고 불지르고 총도 
쐈대. 사람도 죽고. 그런데 선생님은 빨갱이들이 그랬대."
  "뭐 빨갱이들이?"
  빨갱이란 말에 영희가 긴장해서 되물었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수군거리기는 경찰이 지어낸 말이래. 누가 진짠지 모르겠어."
  철이 자신없는지 그렇게 덧붙였다. 그 말에 영희는 더욱 알 수가없었다. 잠깐 생각하다 목
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말했다.
  "철아, 너 내 심부름 하나 안 해줄래?"
  "싫어, 애들이 둑에서 기다려. 빨리 가야해."
  영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자 다시 그렇게 뻗댔다. 영희가 그런 철을 달랬다.
  "20환 줄게. 문방구에 좀 갔다 와."
  "문방구가 얼마나 먼데? 학교 앞까지 가야 해. 그새 애들은 딴 데 가버릴거야."
  계속 뻗대기는 해도 돈을 주겠다는 말에 조금은 귀가 솔깃해진 것 같았다.
  "그럼 30환 줄게. 좀 갔다 와. 애들한테는 심부름 가는길에 가서 기달려 달라구 하면 되잖
아?"
  영희가 그렇게 말하며 백환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철이 못이기는 체 받으며 물었다.
  "뭘 사오라는 거야?"
  "응, 편지지하구 봉투,그리고 잉크,펜대,펜촉."
  "그거면 돼?"
  "또 있어, 어디 가서 신문 좀 구해줘. 어제오늘 거 다 좋아."
  "신문을 어떻게 구해?"
  "지국에 가서 남은 걸 사오든지, 문방구 아저씨나 약방 아저씨에게 한 번 졸라봐."
  그러자 철은 신문만은 자신없다고 한참을 더  뻗대다가 신문 한 장에 30환을  쳐주겠다는 
말을 듣고 서야 돈을 받아들고 나갔다.
  철이 다시 돌아온 것은 영희의 짐작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 뒤였다. 돈 안들이고 신
문을 얻으려고 영남여객 사무실까지 갔다 온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날 영희에게는 전에 어머니가 느닷없이 방문을 연게 일의 시작이었다.
  "이기 뭐 한다꼬 이 난리로? 꼴같잖게 신문을 처억 피(펴어)들고."
  영희는 황급히 신문을 걷어치우면서도 어머니가 갑자기 어딜 가려고 날품일도 치우고  들
어와 서두루는지 궁금했다. 그 때 다시 마당쪽에서 발짝  소리가 나며 영남여객 아주머니가 
열린 방문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옥경이 어무이, 빨리 가입시다. 하마 두시  반이 다돼갑니다. 하이야(택시)가 두시 반꺼정 
뱃다리거리로 올라 안켔습니까?"
  "인자 다됐임더. 맘 같아서는 세수라도 했으면 싶구만은."
  어머니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앉은뱅이 거울을 들어 옷매무세를 살펴 본 뒤 방을 나갔다.
  "아들 저녁해 믹여라. 그리고 영남여객댁에서 누가  찾아오거든 그기 언제라도 우리가 방
금 같이 나갔다 캐라."
  어머니는 전에 없이 영희에게 맞대놓고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을 다하기도 전에 고무신에 
발을 꿰고 영남여객 아주머니와 종종 걸음쳐 나가는 게 여간 급하지 않은 눈치였다. 영남여
객댁 아주머니의 옷차림도 눈에 띌 만큼 화려한 게 묘하게 영희의 궁금증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것일까?"
  영희는 어머니가 남긴 말 중에서 뒤에 덧붙인 부탁을 새삼 이상스레 여기며 총총히 골목
길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는지, 시무룩해  돌
아오던 철이 그런 영희에게 물었다.
  "어머니어딜 가신대?"
  "몰라. 택시 타고 좀 멀리 나들이 가는 모양인데."
  "택시 타고?"
  "그래. 그리고 영남여객댁에서 누가 찾아오면 그게  언제라도 이제 방금 나갔다고 거짓말
해달라던데."
  "왜, 그러니까 어디 가는지 알 것 같애?"
  때로는 놀랄 만큼 조숙함을 보이는 철이 그러는게 이상해  영희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철
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쩌면 그 화가 아저씨 하고 어디 갔는지 몰라."
  "화가 아저씨라고 ? 그게 누군데?"
  어머니 친척 동생 있어. 화가라는데 몸이 아퍼 여기 와서 쉰대. 접때 우리집에도 두 번 온 
적이 있어. 우리집에서 만나면 좋을 건데."
  "그건 왜?"
  "과일이랑 과자랑 맛난 걸 실컷 얻어먹을 수  있거든. 고급 과자랑 케이크랑 고기도 굽고 
전도 부쳐."
  철은 아직도 그 맛을 못 잊겠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무심결에 덧붙였다.
  "명혜를 데리고 오기도 하는데."
  "명혜, 아 네 애인 말이지? 옥경이가 그러는데 넌 개한테 홀딱 반했다면서?"
  영희가 잠깐 짖궃은 맘이 생겨 그때까지 궁금증을 잊고 그렇게 놀렸다. 철이 얼굴이 새빨
개지더니 이어 아이 같지 않게 성을 냈다.
  "그눔의 기집애가 또 그딴 소리를.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공연히 철의 심술을 건드려 궁금한 걸 못 듣게 될까봐 걱정이 된 영희가 얼른 말을  바꾸
었다.
  "아냐, 그건 농담이야. 그저 한 번 해본 소리야. 그건 그렇고 그래 여기 와선 뭣들을 해?"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벌써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지는 철이 그렇게 어긋매끼로 나갔다. 그 말과 함께 돌아서여는 
철의 손목을 잡으며 영희가 한 층 더 진지하게 물었다.
  "잘못했어. 그러지 말고 본 대로 말해. 그 화가하고 아주머니하고 어떤 사이 같던?"
  "모른대두. 우린 밖에 나가 노니까."
  철은 그 말과 함께 영희의 손을 뿌리치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버렸다. 그러나 영희는 그것
만으로도 대강의 상황이 짐작됐다.
  거기서 상상되는 여러 가지 광경이  잠시 영희에게 편지를 쓸 일을  잊게 했다. 그러다가 
겨우 다시 신문을 펴드는데 이번에는 징박은 구두 소리와 함께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계십니까?"
  "누구세요?"
  영희가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영남여객댁 아저씨였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 몇 번 만
난적이 있어 금세 알아 볼 수 있었다. 그어나 그의 표정은 지난 여름에 보았던 그것은 아니
었다. 그때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간데없고 대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와 광기로 번
쩍거리는 눈길이 영희를 오싹하게 할 뿐이었다.
  "니 영희구나. 언제 왔지? 느그 어무이는 어디 가셨노?"
  억지로 고함을 억눌러 뒤틀린 목소리와 힘들여 지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나가셨어요. 아주머니하고."
  "으음 그래? 그럼 그년하고 나간 게 정말로 느그 어무이란 말이제?"
  그가 찌푸린 얼굴로 신음하듯 말했다. 그러나 까닭 없이  질린 가운데도 끊임없이 살피는 
듯한 영희의 눈길을 의식했던지 더는 딴소리를 않았다.
  "그래. 알았다."
  그 말과 함께 비틀거리듯 돌아서 자가더니 그래도 혹시 하는투로 한마디 던젔다.
  "어디 간다꼬 말 안 하더냐?"
  "아뇨, 그저."
  "하기사 나한테 말할 택이 있나."
  그는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대문 쪽으로 나갔다. 우두둑 이빨 가는 소리가 방문에 붙어선 
영희의 귀까지 들렸다.
  '기어이 일이 났구나. 아저씨가 모든 걸 알아챘어.'
  영희는 제풀에 다급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소했다.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관계되어 있
는지 모르지만 그런 칙칙한 일에 아주머니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게 왠지 그녀에게 자신
을 주었다. 자신과 박원장의 일에 대한 어머니의 미친 듯한  분노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쪽
에 대한 그녀의 행실이 깨끗하고 단정하기 때문에 승인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근거가 생긴 것이다.
  어떻게 됀 것일까. 어머니도 어떤 남자가 있어 아주머니와 함께 만나러 다니는 것일까. 아
니면 아주머니가 화가라는 그 남자와 만나는데 그저 들러리만 서주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어느 쪽이라도 영희에게는 상관없었다.  어머니의 개결함으로 확보되었던 성적
인 방면에서의 권위는 그 정도만으로도 벌써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자신이 당
한 형벌이 터무니없이 가혹했다는 생각에 새삼 이가 갈리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신문을 다시 펴들어도 활자가 영희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마산 사태에 관
한 것이든 무엇이든지 눈여겨 읽어 보았지만 머리속에 남은 것은 철에게서 들은 것 보다 더 
많지가 않았다. 무언가 형배에게 멋있는 격려의 말 같은  걸 써보내는게 목적이었던 영희는 
하는 수 없이 답장을 다음날로 미루고  당장 궁금한 영남여객댁 아주머니와 어머니의  행적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날이 어둑할 무렵에야 돌아왔다,
  "안적 저녁도 안 먹고 뭐하노?"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서자 마자 그런 핀잔으로 영희를 부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방안에
서 수군거림과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밖에서의 일이 특별히 불쾌했던 것 같
지는 않았다.
  영희는 간간히 문틈에 귀를 대고 두  사람의 수군거림을 들어버려 했으나 워낙  목소리를 
낮춘 데다가 철이와 옥경이가 어울려 떠드는 바람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아주머
니 쪽이 더 들떠 있는 것과 그들이 간 곳이 어디 야외 한적한 물가 같다는 것 정도를  알아
냈을 뿐이다.
  그 사이에도 영희는 몇 번인가 영남여객 아저씨가 다녀간 일을 알려주려 했다. 그러나 부
엌 쪽으로 난 문쪽으로 열고 고개를 디밀 때마다 경계의 눈짓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멈추는 
두 사람의 하는 것이 얄미워 미루고 있는데 일은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마당 쪽에서 귀에 익은 구두 소리가 나더니 이어 뒤틀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자이 병우 어마이 여 있나?"
  그게 영남여객아저씨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듣고서는 영희는  아차했다. 그게 낮에 다녀
간 것을 작은 감정으로 감쳐버리기에는 어머니와 둘 모두에게 너무도 중대한 정보였음을 그
때서야 퍼뜩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게 누구 목소리고?"
  아주머니 놀란 목소리에 이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이어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
다.
  "아아니구, 이기 누굽니까? 아저씨가 우얀 일로."
  "와, 나는 여게 오면 안  됍니까? 동영이가 있있으므로 문지방이  닳아도 여러 번 달았을 
텐데."
  아저씨가 여전히 뒤틀린 목소리로l로 그렇게 받아넘기고 다시 찬바람도는 소리로 이었다,.
 "나는 여기서 잘 놀았나? 오후 내도록(내내)  이 좁고 캄캄한 방에서뭐 하고 놀았노?  날이 
가고 해지는 줄 모리도록 깨 쏟아지는 일이 있었는 갑제?"
  "아이, 병우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린교? 생전 안 오던 집까지 찾아와가지고는."
  그때쯤이야 정신을 수습한 아주머니가 시치미를 떼며 오히려 시비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이 집은 니 호믄차만(혼자만)대저냈나? 하이야 대절대드키로(내듯이)"
  "저 양반이 보래이, 그건 또 뮌 소린교? 백지로 짜들고 와가지고는."
  아주머니가 다시 그렇게 맞받았다. 그러자 아저씨의 인내도 더는 견더네지 못했다. 갑자기 
높여 야비한 말로 소리쳤다.
"뭐라꼬? 문 소리둥 모른다고? 이 호양년(화냥년)아, 어서 빨리 못 나온나?"
  "음마야, 저 양반이 입 험한거 보래이, 알라들 다 듣고 있는데."
  "그래, 좋다. 내 좋은 말로 하꾸마, 니 젊은 놈하고  하이야 대절내 읍내 갔다 온 거는 읍
내가 다 안다. 그라이 발뺌할 생각 말고 처뜩 나온나."
  "차암 내, 뭣 가지고 이래 샀노 캤디, 그 얘기구나.  글치만 어느 미친 기 물 밑 들여다보
듯 이 바닥에서 대낮에  아이야 대절내 호양질이겠습니꺼? 옥이  어무이 친정 동생이 밀양 
구경 씨게 달라 캐쌌길래 서이(셋이) 같이 한 번 가본 걸 가지고."
  아주머니가 제법 빈정거림까지 섞어 그렇게 눙치려  들었으나 어림없었다. 아저씨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안 나오나? 꼭 머리끄대이 잡혀 끌려나와야 되겠나?"
  "아저씨요, 아무래도 뭔 오해가 있는 갑십니더. 실은 그게 아니고 , 지하고."
  어머니가 그렇게 아주머니를 거들고 나섰으나 소용없었다.  어저씨는 귀에 딴소리가 들어
오지 않은 사람처럼 연신 아주머니만 을러 댈 뿐이었다.  당장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아주머
니를 끌어내지 않은 것먼도 용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좋아예, 나가자 카믄 나가지 뭐,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꼬."
  마침내 아주머니가 찬바람 도는 얼굴로 이를 사려물고 방에서  일어났다. 뻔한 일 같은데 
끝까지 뻗대는 게 영희의 눈에 참으로 기이하게 비쳤다.
  아저씨는 대문께를 나설 때에야 비로소 어머니를 향해 한마디  했다. 목소리는 조금도 높
지 않으나 곁에서 듣기에도 으스스할 만큼 차고 비정한 어조였다.
세상 다 썩어다 캐도 아주무이까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동영이가  여기 있다 카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낍니다, 우째  몇 살이 손위 되면서 말리지는  않고 다부 방패막이가 
됐습니까? 인자는 모든 기 끝났습니다. 동영이하고 인연 이만 끊기는 뭣합니다만, 인자 앞으
로는 내 집에 발길 들여놓지 마소. 뒷날 세상이 좋아  동영이를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내보
고 너무했다 소리는 안 할낍니더."
  어머니는 그 말에 몹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얼굴이 헬쓱해진 채 온몸이 굳어져 그들
에게 인사말조차 잘 건네지 못했다. 어두운 마당에는 영남여객 내외의 독기 어린 응수만 점
차 멀어져가며 흘러들 뿐이었다.
  "사람이 그저 속은 알라 손바닥만치도 안 돼가지고."
  "시끄러워!"
  "명색 배왔다는 사람이 뭘 알아보지도 않고 남새스럽구로.:"
  "주딩이가 광주리궁기라도 할 말이 없을 낀데, 뭐시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 그 일은 그날 아저씨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단정할 만큼 
칙칙한 치정이 얽힌 것은 아니었다. 여전에서는 음악을 전공했지만  부호의 아들과 일찍 결
혼하는 바람에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돈 많고 할 일 없는 안방 마님이 되어버린  아주머니
가 마침 신병으로 고향에 돌아와 쉬고 있는 화가를 상대로 자신이 끝내 채워보지 못한 예술
적인 허영을 위로해보려고 했을 따름이었다.
  그 젊은 화가도 뒷날 국전의 초대 작가로까지  자란 것으로 보아 단순한  육욕이나 다른 
어떤 음험한 의도로 아주머니와 만났던 거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서로가 뻔한 소읍이
라 둘의 만남은 금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더, 특히 그 날은 몇 대 안 되는 그곳의 택
시를 대절해 교외로 나가는 바람에 마침내 아저씨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들 내외가 떠나간 뒤 집 안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이윽고 정
신을 차린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꾸중이었다.
  "멀 뻐꿈히 내다보고 섰노? 어데, 뭐, 큰 구경났나? 어른들 일에 아이들이  암분(안는성)시
럽구로."
  어머니는 부엌문을 내다보고 있는 영희에게 방안에서 마당을 니다보고 있는 인철과  옥경
에게인지 쏘아붙여놓고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니갸 미쳤네. 그게 뭔 좋은 기라꼬 어예 말리지 않고."
  그렇게 스스로를 나무라다가는 "글치만 그 순한  양반이 설마 그만 일로." 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일은 영희에게 물론 대강의 윤곽을 아는 인철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희는 4.19말만 나오면 엉뚱하게도 그 일을 떠올렸도, 인철의 기억은 나중 그 일을 훨씬 확
대해서 이해해 제법 사회와 변혁에 대한 암시 담긴  중얼거림으로가지 발전했다. 혁명의 전
야까지도 사람들은 다만 작은 이해 관계와 애증으로 다툼에 빠져 있다.
  영희는  그날 결국 형배에게 답장을 하지 못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갔
을 때 그땟껏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어머니가 불쑥 내던진 말 때문이었다.
  "그래, 인자 여기서 사는 것도 끝이다."
  그리고 이어 스스로를 격려하듯 말했다.
  "뭐, 우리가 언제는 할애비 콩죽 먹고 살았나? 영남여객도 이만하믄 우리한테 할 만큼 했
으니, 욕시러운 꼴 보기 전에 딴 구처를  내자. 여다 있어봤자 삼시 세 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판에 무신 영광 보겠다고. 내일 모레쯤 돌내골 가보란ㄹ다. 그카이 글타마는 하마 십 
년이나 지냈는데, 이낮 저가 우얄 끼고? 가서 위토든 선산이든동 남아 있다믄 돈 되는 거야 
야지 미리 팔아 장사 밑천은 모지라지만 남은 게 있을  끼다. 그때는 한머리에서 아직 싸움
을 하는 중이라 올게 챙겨보지 못하 글체."
  "정말 돌내골에 가도 가도 될까요?"
  그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호랑이 굴 들어가는 만큼이나 겁을 내던 
어머니가 고향으로 가겠다고 나서는게 신기해 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어떤 의미에
서는 두 달만에 처음 이루어지는 모녀간의 대화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영희가 제법 상의
조로 반문하는게 놀라웠던지 어머니가 한참  영희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받았다.
  "인자 저 그들이 어예겠노? 거기다가 작년  여름 여다 캐도 벌써 경찰 손바닥  안에 있는 
꼴인데, 거기나 여기나 무슨 차이가 있겠노?"
  이제는 할 수 없으니 너하고라도 의논하는 수밖에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게 고마워 영
희가 다시 침묵으로 대꾸를 대신하는데 어머니가 결연히 말했다.
  "뭐든지 구처가 날 때까지 니가 아아들 데리고 쫌 있거라. 우선 되는 대로 양식말이나 받
아놓고 거기 가서 다시 돈 맹글어 부쳐주꾸마. 어디 점방이라도  하나 낼 만큼 팔아 모을라
믄 시간께나 걸릴 끼다."
  "명훈이 일도 꿈자리가 뒤숭숭한 게 우예 걱정된다.  지 힘으로 등록금 장만하고 대학 갈 
끼라고 큰소리사 쳐쌌지만은 아무래도 그기 수상시럽다. 요새 무신 직장이 뭉칫돈으로 대학 
등록금까지 대주미 사람쓰는 그런 데가 있겠노? 나이가 들었다 캐도  아(아이)는 아라,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기 전에 끼고 보징켜야 될따."
  "그럼 다시 서울로 옮기시려구요?"
  영희가 이번에는 어머니가 서울로 되돌아갈 뜻을 비치고 있는 데 마음이 움직여 조금 전
의 고마움도 잊고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인지 어머니가 잠깐 낯빛을 흐리다가 말끝을 사렸
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못 갈 것도  없제. 어예튼 그 동안 아아들 잘 살피고  살림 여물게 
살아라. 대올라지(막돼먹고 억센 사람)같은 짓 이제 고만 하고."

    제 31장 그 문안
  담장은 없으면서 정문만은 쑥돌까지 입혀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폭만 해도 한 발은 될 듯싶
은 그 정문 기둥에 풀로 붙인 모조지 안내문이 한  귀퉁이가 떨어진 채 바람에 펄럭였다. 휘갈겨 
씌어져 있지만 한눈에 보아도 아주 달필이었다.
  '문리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숀 본관 뒤 소강당.'
  오리엔테이숀 위에는 글자마다 붉은 동그라미  겹으로 그려놓은게 몹시 중요함을  강조하는 듯 
보였다.
  명훈은 버스 종점에서 1Km가 넘는  야산 비탈을 바삐 올라오느라 거칠어진  숨결을 잠시 고르
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자신의 마지막 모교가 될 대학 캠퍼스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입학 
원서를 사러 왔을 때와 등록금을 내러 왔을 때를 합 쳐  두 번이나 와본 적이 있지만 신입생; 되
어 돌아보니 역시 조금은 새로웠다.
  야산 중턱을 깎아 세운 본관 건물은 정문에 걸맞게 지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완공된 게 아니었
다. 3층까지 지어진 건물 옥상에 굵은 철근들이 숲을 이르듯 뻗어 있었다.  운동장인 듯싶은데 아
직 제대로 닦여지지 않아 가까운 야산 등성이와 비슷하게 마른풀이 바람에 쓸리고  있는 본관 앞 
평지는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 본관을 가운데 구고 훨씬  작지만 완공된 시멘트 건물이 두 동 
마주보고 있었는데 그 중 왼편이  대학 본부였다.소강당 본관 뒤로  한 모퉁이 빼죽이 내밀고 있
는 붉은 벽돌 건물이 성싶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한심해지는 기분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소
강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본격적인 개강이  시작되니 않아서인지 학생들은 그리 자주 눈
에 뛰지 않았다.
  "아직 등록 못 했지? 넉넉하지 않겠지만 이걸루 한  번 돌아봐. 사립대 중에는 원서 접수 기간
이 넘어도 받아주는 데가 있을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간판이니까 잘 골라서 가야 해. 야간부라도 
좋고, 청강생이라두 좋으니 받아만 주면 간판이 그럴듯한 걸 골라잡아야 된다구."
  배석구가 갑자기 명훈을 '풍차'로 불러 큰 선심이라도 쓰듯 돈뭉치를  던지면서 그렇게 말한 것
은 3월말이었다. 2차 대학 원서 접수가 끝나도록 대학에 대해 말이 없는 그에게 은근한 배반감까
지 느껴오던 명훈은 그 갑작스런 호의에 의심부터 일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시킬 힘든 일
이 있구나' 하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배석구가 그런 명훈의 마음을 읽은 듯이나 덧붙였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은근히 애가 탔다. 선거 끝나고는 어디선가 듬뿍 나올 줄 알랐는데  이건 
뭐 꿩먹은 소식이야. 마산 일 때문에 정신들이 없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 거  같단 말이야. 자유
당 그 사람들이 이거 우리한테 이래도 돼는 건지 몰라.  뭐니뭐니 해도 이번 선거엔 우리가 일등 
공신인데."
  그 말에 제법 솔직함이 풍겨  명훈의 의심은 줄어들었으나, 이번에는 그  돈에 대한 악의 어린 
해석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그래, 3월 15일의 일당이 이제야 나왔구나."
  그 말썽 많은 정부통령 선거날 명훈네 패거리는 자유당의 완장 부대로 동원되어 청량리 쪽으로 
갔다. 얼굴이 팔린 제 바닥 주먹들은 완장 부대로 썼다가는 자유당 인상을 그르칠지 모른다는 계
산에서 바꾼 것이었다.
  맡은 일이 바로 유권자에게 주먹질을 하는 게 아니라서 그날 명훈은 비교적  부담 없이 그리로 
갔다. 과연 오전은 자유당이라 쓴 완장을 차고 투표소 주위를 떼지어  돌아다니며 이승만. 이기뿐 
지지 구호나 외쳐대는 것으로 지나갔다. 엄밀한 눈으로  보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중대한 부정 행
위가 되겠지만, 그 정도로 죄의식을 느낄 만큼 예민하지는 못한 명훈이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아무리 서울이지만 자유당 지지율이 다른 투표구에 비
해 지나치게 낮아질 것 같아 초조해진 이웃 투표구에 지원  요청이 온 것 때문이었다. 자유당 완
장을 벗고 그리로 이동해, 악착을 떠는 민주당 참관인들을 끌어내 달라는 게 그 쪽의 주문이었다.
  아무리 자유당 세상이지만 대낮에 여러 유권자 앞에서 마구잡이로 야당 참관인을 끌어낼 수 없
어서 명훈과 아이구찌는 머리를 짰다. 그 무렵 아이구찌는 깡철의 빈자리를 차고 앉아 악역을 도
맡았는데, 그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  결과 나온 게 두셋씩 조를 이뤄 각기  다른 이유로 
참관인들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아이구찌와 멍게는 채권자를 가장해 지지도 않은 빚을 떼먹고 달
아난 나이든 참관인 하나를 끌어냈고, 명훈과 도치.호다이는 누이동생을 농락한 오빠와 그 친구들
이 되어 억울한 난봉꾼이 된 좀 젊은 야당 참관인  하나를 끌어냈다. 나머지 야당 참관인 깡철이
가 떠난 뒤로 한패가 되다시피 한 날치와 명구가 맡기로  했지만, 손을 쓰기도 전에 낌새을 알고 
제 발로 투표장을 나가버렸다.
  임마 니가 심했어. 돌개 형님 그 돈 만들려고  어쨌는지 알아? 어젯밤 여기서 상열이 형님하고 
대판 했다구. 나는 돌개 형님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이 돈 때문이었어. 결국 
여기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니가  엉뚱한 소리로 부아를 질러 놨으니  화 안 나게 됐
어?
  그리고 그때서야 뒤늦은 감격에 젖어 있는 명훈에게 이러 주었다.
  "돌개 형님 성질로 봐서 어디 만만한 곳에 틀어박혀 푸고  계실 거야. 한 번 찾아봐. '은성'골방
이나 '자매집' 아니면 '화통집' 같은 델. 가서 잘못했다구 빌어. 돌개  형님 이 바닥에선 그리 흔하
지 않은 사람이야."
  짱구의 말대로 배석구는 '화통집'에 틀여박혀 목소리가 커서 기차 화통  소리 같다는 과부 아주
머니와 퍼먀셔대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뜻밖으로 순진하고 여린 데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배
석구와 이미 꽤난 감격해 달려간 명훈의 화해는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틀어질 대로 틀어진 배
석구에게 명훈이 제법 눈물까지 질금거려 끌어낸 화해로,  그 때문에 그들의 인간적인 결속은 오
히려 더한 층 굳어지게 되었다.
  이튿날부터 명훈은 배석구에 충고에 충실하기 위해  이름있는 사립대부터 돌았다. 그러나 조금
이라도 그럴듯하다 싶은 대학은 야간부뿐만  아니라 청강생까지도 정원의 몇  배로 차고 넘쳤다. 
절반은 단념하고 있던 대학이라 그런지, 서너 군데나  퇴짜를 맞고 변두리의 신설 사립대로 밀려
나가게 되자 갑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허황되게 느껴졌다. 학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야심이 
없는 대학, 그러나 그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또 어떤 희생이 요구될지 모른다.
  하지만 성적이나 품행은 어찌 됐건 돈뭉치를  들고 찾아온 학생을 마다하는 대학은  그 당시만 
해도 주관적으로 느낀 만큼 많지 않았다. 그날 하루 해를 넘기기도 전에 명훈은 홍릉 쪽 야산 중
턱에 건물만 덩그렇게 올라앉은 어떤 삼류 대학의 청강생으로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짧은 기강
이나마 명훈의 최종 학력이 있는 곳이자 뒷날에도 대학 중퇴라는 학력으로 어설픈 지성인 흉내를 
낼 수 있게 해준 학교였다.
  명훈이 선택한 전공을 국문학이었다. 그때는 이미 끄적거리는 일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이따금
씩 무의식중에 그 과를 고르게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등록이 가져온 심경의 변화였다. 돈뭉치를  디밀고 사다시피 한 대학 
배지였느나 그걸 옷깃에 꽂자 세상이  갑자기 새로워진 듯한 느낌마져  들었다. 정말로 대학생이 
되었다는게 실감나면서 예전에 품었던 환상들이 되살아나고,  자신이 뒹굴고 있는 뒷골목의 진창
도 틀림없이 빛나게 되어 있는 앞날을 더욱 빛나게 모이도록 해줄 어두운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여겨졌다. 어울리지 않게 장황한 입학 안내문에 씌어진 '상아탑'이니 '진리의 추구'니'가치 있
는 삶'이니 하는 말들이 지닌 무게도 그런 감정의 전환을 거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뭐 네가 입학을 했다구?"
  이틀만에 돌아간 자취방에서 만난 황은 빈정거리면서도 축하해마지않았다. 밤늦게 돌아온 김형
도 제 일처럼 기뻐했다.
  "나는 요즈음 명훈이가 집에도 안 들어오고, 길거리에만 나도는 것  같아 걱정했지. 그냥 막 가
는가 싶어. 잘됐어. 정말 잘됐어. 그 대학,  그래도 괜찮은 대학이라구. 더구나 이제는 전공뿐이니
까 기초는 큰 문제가 아 됄 거야. 국문학이라면 그 방면의 기초는 명훈에게도 넉넉할걸. 열심히해
봐."
  그리고 그날 밤의 작은 잔치 함께 생활한지 넉 달 만에 처음으로 명훈도 열등감에 짓눌림 없이 
그들과 취하고 떠들었다.
  뒷골목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시팔, 나도 한 뭉치 싸들고 줄서볼까보다. 그게 진짜 대학 뺏지란 말이지?"
  아이구찌 같은 녀석이 그런 악의 섞인 농담으로 명훈의 속을 긁어 놓기는  했지만 패거리의 대
부분도 사심 없이 축하해주었다.
  하기야 대학 때문에 쓸쓸해지는 이로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무엇보다도 명훈을 쓸
쓸하게 하는 것은 경애가 곁에 없다는 것이다. 경위야 어찌  됐건 대학 배지를 달고 있는 명훈을 
보면 경애도 틀림없이 기뻐해줄 것 같았다. 모니카의 일도 그랬다.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는 명훈
의 귀에 난데없는 모니카의 캘캘거림과 함께 백치 같은 말투가 쟁쟁거렸다.
  "어머, 오빠가 진짜 대학생이 되었다구요? 그럼 나도 대학생 애인이 생겼네. 아이 좋아. 기집애
들한테 자랑해야지."
  명훈은 자신이 모니카와 나눈 게 몸뿐이며, 남은  것도 손끝과 피부에 남은 육감적인 기억뿐이
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경애를 잃었을 때 못지않은 상실감과 공허를 맛보게 된 것이
다.
  '어쟀든 오늘 아침까지도 내 기분은 모든 게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한심한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명훈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는 좀 많은 학생들이 이
미 들어와 앉아 있었다. 습기 머금은 샛바람에 몰리어 건물  안에만 쳐박혀 있다 보니 밖에는 사
람 그림자가가 드물어져버린 듯했다.
  "무슨 과요?"
  입구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던 교직원 하나가 두 번거리는 명훈을 보고 물었다.
  "국문과입니다."
  명훈이 공연히 위축돼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명훈의 말투나  태도에는 관심없다는 듯 
턱짓으로 강당 왼편을 가르키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국문과면 저쪽이야. 앞에 팻말이 있으니 되도록 과별로 앉아요."
  명훈은 의미하게 되살아난 환상과 자신의 경험에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데서 온 긴장감으
로 쭈삣거림에서 지정된 자석을 찾아 통로로 들어섰다. 명훈을 그런 쭈삣거림에서 벗어나게 해준 
게 어두운 강당 구석구석에서 발갛게 빛나는 담배불이었다. 대학의 첫 소집일 몇 시간을 못 참아 
담배를 댈 정도로 골초 신입생들이라면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의 품행을 뻔했다.
  한 둘 예외야 있겠지만  틀림없이 명훈 자신과 다름없는 학생 깡패거나 어찌해볼 길이 없는 농
땡이들이 돈뭉치만 디밀고 몰려든 것이었다.
  거기 이어 다시 명훈에게 제법 자신까지 되찾게 해 준  것은 화장품 냄새였다. 흰 종이를 붙인 
푯말에 '국문과'란 먹글씨가 씌어져 있는 걸 겨우 알아보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명훈은 무득 
코를 찔러오는 향수 냄새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따금식 모니카에게서 풍겨오는 향수 냄새였디 때
문이었는데, 그러나 코 앞에 앉은 것은 모니카가 아니었다. 제법 돈 들려 맞춰  입은 양자에 머리
까지 지진 여학생이었다.
  '여고를 졸업한지 며칠 됬다고, 머리 볶고 화장까지 했으며 너도 알 조루구나'
  명훈은 그런 짐작으로 대담해져 그 여학생에게 눈까지 찡긋해주고 푯말 쪽으로  갔다. 등록 마
감일이 지나고도 열흘 가까이 되었을때까지 빈자리가 남아 있던 과였으나 그곳이라고 다를 게 없
었다. 얕보기 시작해 그런지 여학생 쪽은  정숙해서라기보다는 얌전해진 꿔다놓은 보릿자루들 사
이에 좀 전에 본 것처럼 야한 옷차림과 화장의 후랍빠(플래퍼)들이 틈틈히 박혀 있는 듯한 구성이
었다.
  남학생들도 그녀들과 크게 차이져 보이지는 않았다.
  양복 차림에 제법 넥타이까지 늘여매고 머리칼에  포마드를 뒤집어쓴 날라리에, 부모들 성화로 
밀려오다 보니 거기까지 와서 앉게 되었다는 듯  눈만 깜박거리고 앉아 있는 머져리들을 합치고, 
거기다가 통로 쪽 벽에 붙어서 담배를 빨며 공연히 허세를 부리는 녀석들을 웃기로 삼은, 막돼먹
은 제상 같은 형국이었다.
  한 번 쓰윽 흝어본 것으로 성분을 그렇게 단정한 데는 그들의 차림이나 태도 못지 않게 명훈의 
뒤틀린 의시는 곧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서울로 옮겨오면서 그 무슨 아름다운 이상형처럼 그려온 
대학을 그런 마뜩찮은 돈과 타락한 방식으로 찾아들게 된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몇 가지 
구실을 얻게 되자 곧장 악의에 가까운 그런 단정을 날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타고난 자부심의 사
람들이 가까운 그런 단정을 낳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타고난 자부심의 사람들 이 종종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쓰는 방법의 하나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명훈이 아니야?"
  앞으로 과우라는 이름으로 묶일 그들이 까닭없이 싫어져, 그들이 덩어리져 앉은 곳으로부터 서
너 의자 자리잡은 명훈의 등을 치며 누군가 반가움을 과장했다.
명훈이 돌아보니 바로 통로 곁에  몰려 담배를 빨아대는 녀석들 중의  하나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야, 그새 동창 얼굴도 있었어? 3반 뮤만하, 정말 모르겠어?"
  그가 이번에는 섭섭함을 과장하며 그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워낙 3
학년 2학기 출석이 부실했던데다가 서로가 반이 다르고 또 녀석은 머릮까지  길러 얼른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명훈에게는 깡철이네 패를 빼면 가장 인상 깊은 동창생일 수도 있다.
  명훈이 유만하를 기억하는 것은 대강 두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하나는 녀석이 고등학교 때 있
던 그룹 때문인데, '이글스,'인가 뭔가 하는 그 그룹은 말 그대로 깡철이네 패와는 달랐다. 그들도 
가끔씩 패싸움을 벌이고, 주먹으로 급우들 위에  군림했지만 그들로부터 무얼 빼앗거나 까닭없이 
그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두엇 끼여 있어, 학교에서도 은근히  호의로 보아주는 패
거리 였다.
  말할것도 없이 그런 그룹이 깡철이네 패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들 때문에 자기들의 나쁜 
점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만도 은근히 부아나는 일인 데다 시력도 만만치  않아 때로는 자기들
의 횡포에 재동을 거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깡철이네 패가 된 뒤에 명훈도  여러 번 깡철이와도치가 '이글스'은 제법  구체적인 기습까지를 
의논하다가 그만두기까지 했는데, 까닭은 주먹에서 용케 이긴다 해도 뒤끝이  켕겨서였다. 그들이 
태반은 바로 학교가 있는 동내의 토막이었고 아마추어 싸움꾼들에 가깝기는 해도 꽤 만만찮은 동
네 건달들을 후원자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명훈이 유만하를 더 잘 기억하게 해준 것은 그 전 해 가을 무슨 바람이 불었
던지 어울리지 않게 교내에서 열린 백일장 때문이었다. 그날 명훈은 도무지 그런 데 나갈 기분이 
아니어서 못 본체하다가 우연히 명훈이 시를 쓴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호다이  녀석이 부추겨 
뒤늦게야 몽당연필 한 자루를 들고 나가게 되었다.
  삼류 공고라 그랬는지 명훈은 어렵잖게 시부에서 장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산문부에서의 장
우너이 바로 유만하였다. 나중에 듣기로는 시와 산문에 양다리를 걸쳤다가 명훈에게 시를 빼앗겼
다느 것이었다. 주먹의 주도권 싸움이 엉뚱하게 백일장에서  재주 겨룸으로 번진 셈이 되어 깡철
이네 패는 더욱 그를 미워하게 되었으나 명훈은 그날부터 그를 남달리 보게 되었다. 이상한 동료
의식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소속한 패거리가 달라 터놓고 오가지는 않
았으나 어쩌다 마주치게 되는 녀석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너도 이 학교에, 무슨 과야?"
  "국문과, 이제 보니 너도 한 과가 된 것 같은데?"
  "나야, 나 같은 농땡이가, 그렇지만 너는 어쩌다 이런 따라지 대학으로?"
  명훈이 애석함과 안도를 아울러 느끼며 물었다. 녀석은 '이글스' 중에서도 싸움패보다는 공부꾼
에 가까운 축이었다.
  "응, 간 크게 고대에 덤볐다가 미역국을 먹었지."
  녀석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 이어 정색을 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일껏  돈 대놓고 따라지라니? 앞으로 모교라도  따라지는 따라지지 
뭐."
  명훈이 그렇게 받았으나 갑자기 마음속이 편치 않았다. 불평이 뒤바뀌었다는 깨달음에 슬몃 속
이 뒤틀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잠시 정색을 하기는 했어도 녀석  또한 오래 그 화제에 잡혀 있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이, 이리와."
  유만하가 갑자기 통로 쪽을 향해 아직도 담배를 빨고 있는  두 녀석을 불렀다. 가까이 오는 걸 
보니 또한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너희들 알지? 이명훈이, 거 왜 2반 도치네 패를 혼자서 맞 푸레이 해논 친구지."
  "반가워, 여기서 다시 만나게 돼서."
  두 녀석 중에서 하나가 시원스레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동창이란게 묘한 힘으로 감정을 움직
여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재는 사학과이고 재는 철학과라나, 이제 이놈의 나라 사학이고 철학은 난리났지."
  유만하가 그렇게 놀림 섞어 말했으나 두 녀석은 별로 탓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얌마, 그래도 우리는 소신 지원이야. 너처럼 여기저기 줄섰다가 밀려온 게 아니라구."
  의미 모를 웃음으로 그렇게 받아넘긴 뒤에 누구에겐지 모를게 말했다.
  "야아, 이거 모아놓으면 동창이 꽤 많겠어. 동창회 한 본  하고 이눔의 하교 확 휘어잡아버리는 
게 어때?"
  그때 삐익하며 마이크가 작동하기 시작할 때의 귀에 거슬려 그드들의 눈길을 강단 쪽으로 끌었
다. 보니 한 젊은 교직원이 마이크를 잡고 성능을 시험하고 있었다.
  "아아, 마이크 시험중입니다. 아아."
  그대 무대 위에 놓인 빈  의자에도 교수인 듯한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성는 테스트를 마친 교직원이 짜증난 목소리를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신입생들은 각기 정한 자리에 가서 앉으세요. 남학생들 담뱃불꺼요! 여학생들은 껌 밷고."
  "이따가 봐."
  두 녀석이 마이크 소리에 쫓기듯 저희 자리로 돌아갔다.
  명훈도 새로운 긴장으로 전면 무대 쪽에 눈과 귀를 모았다.  이어 두 시간 남짓은 잠시 대학의 
품위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갓 생긴  학교 같았는데, 일제 시대의 무슨  전문학교에서부터 이어온 
전통, 실은 어거지거나 날조에 가까웠지만, 이  꽤나 깊어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된 학칙 
요약도 제법 삼엄하게 들렸다. 속이야 뭐가 들었건 학과장이나 교직원들의 면모도 하나같이 그럴 
듯 했으며, 거창한 가사로 된 새 교가를 배울 때는 뭉클한 감동까지 느꼈다.
  하지만 학과별 상견례가 시작되면서 명훈의 실망은 다시 시작되었다. 개강 뒤의 신입생회에 앞
서 신입생들과 주임교수 및 조교 한 삶과의 간단한 상견례는 학교 및 대폿집에서 벌어졌는데, 명
훈에게는 그 대폿집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영화에서 본 맥주집의 멋
과 낭만은 커녕 겨우 움막을 면한 그 하꼬방 대폿집은 신입생들 몇 명이 몰려들자 금세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마침내 후두득거리기 시작한 빗발에 젖은 탓인지 주임교수도 조금 전 멀찍이 무대 뒤에서 보던 
그 근엄한 학자는 아니었다. 조교가 '국문과의이 태두'에다 '문학의 길이  남을 작품'을 가진 '불후
의 시인'이란 과장된 찬사까지 덧붙었지만, 턱앞에 두고 보는 그는 생활과 술에 찌든 평범한 중늙
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철없는 신입생들의 막걸리잔 공새에 금세 흐믈흐믈해져 곁에 있
는 여학생들에게 게게 풀린 눈길로 웃음을 흘려보낼 때는 까닭모를 울화까지 치밀었다. 머리속이 
차 있지 못해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명훈만을 나무랄 수는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무슨 멋이라고 턱없는 새침이나 안 어울리는 애교로 마시고  건들거리는 남학생과 턱없
는 새침이나 안 어울리는 애교로 바보  아니면 기생처럼 보이는 여학생들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만하를 빼면 처음 강당으로 들어서면서 내린 단정 그대로였다. 그들이 무슨 대단
한 멋처럼 흉내내고 있는 게 실은 명훈이  일상으로 빠져 있는 뒷골목 생활에 가까운  데다 명훈 
자신도 심사가 뒤틀어진  채 술이 취한 뒤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학과별 상견례가 끝나고 유만하가 둘이서만 시내의 술집에 마주앉게  되자 명훈의 기분
도 또 한 번 달라졌다. 음울하고 성가신 일상을 깨끗이  잊고 자신없는 대로 시와 예술을 얘기하
는 동안 대학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찾아 낸 말의 특별한 질서
와 그 효용에 대해 유만하가 사심 없는 감탄과 격려를 보낼 때는 힘의 결의까지 솟구치는 것이었
다.
  '그래, 대학이 따라지면 어떠냐, 내겐 시가 있고, 또 어쨌든 나는 문안으로 들어섰다.'
  
    제 32장 거슬러 부는 바람
  누군가가 끈임없이 소곤대고 있는 것 같은  소리에 명훈이 깨니 동남쪽으로 난  봉창에 햇빛이 
눈부셨다. 소곤대는 소리는 다름아닌 김형의  회화 레코드 소리였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척되
어, 김형은 9월에 미국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제너럴 톰슨이 정말로 파파(아버지)노릇을  하기로 
작정했는지 김형의 졸업을 기다려주지 않고 서둘러 9월 학기부터 동부의 어떤 대학에 편입하도록 
주선한 것이었다.
  김형의 회화실력은 보일러맨뿐만 아니라 하우스 보이, 영내 식당 웨이터를 통털어 가장 나았다. 
사투리가 심한 검둥이 사병은 물론  고급 장교들과 제법 심각한 토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유학 날짜를 받자마자 전에 없이 회화 공부에 극성을 떨었다. 정신차려 들으면 명훈조차 대강 그 
뜻을 알 수 있는 일상의 대화까지 몇 번 셋 되풀이 들으며 소리 죽여 되뇌는 것이었다.
  "젠장, 어디 미국 유학 못 가는 놈  기죽어 살겠나? 제발 그놈의 축움기 좀  꺼. 아니면 혼자만 
들을  무슨 장치를 알거나, 신새벽부터 귀가 느끼해 견딜 수 있어야지."
  황이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면서 들어서더니 즉시 농담만은 아닌 듯한 말투로 김형을 몰
아댔다. 그래도 김형은 못들은 척 레코드  소리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황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김형 앞에 놓인 축음기를 덥석 집어 소리나게 스위치를 그며 짜증을 냈다.
  "우리 곧 나갈 테니 제발 좀 꺼두자구."
  그러자 김형이 멀거니 황을 쳐다보며 사정하듯 말했다.
  "왜 그래? 밥은 벌써 뜸을 지어놨구. 이제 비지찌게만 끊으면 되는데."
  "어쟀든 못 견디겠어. 이것 저것 패대기쳐 부숴버리기 전에 대강 해두란 말이야."
  황이 그렇게 한 번 더 짜증을 부리자 비로소 김형도  얼굴이 굳어졌다. 들고 있던 책을 천천히 
덮으며 목소리에 언짢은 기분을 실었다.
  "너, 요즘 이상하더라. 도대채 이런 시국에 영어 회화라니? 그것도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 안될
까봐 걱정되어서라면 몰라. 교양 있고  예절바른 상류사회의 말솜씨를 익히려고  학교도 안 가도 
하루종일 축음기만 끼고 앉았단 말이야?"
  "시국? 시국이 뭐 어때서?"
  무슨 까닭에선지 그렇게 되묻는 김형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빠졌다. 황이 단순한 짜증 이상
의 적의까지 내비치며 한층 소리높여 되쏘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 정말로 그게 네가 말한 그 변경인의 함리적인 태도야?"
  명훈은 그제서야 황이 무엇 때문에 그러지는 뚜렷이 짐작이  갔다. 그는 3월 초부터 어떤 고급 
공무원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있었다. 숙식에 잡비 5천 환가지 있는, 그때로는 흔치 않게 조건이
었다. 그런데 선거 바로 다음날 그는 미련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와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 집에 있다가는 나도 흐믈흐믈 같이 썩어문드러질 것 같애. 또 그 집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아
마도 그 집 주인이 깊이 관여한 듯한 부정선거 규탄하는 데모도 할 수 없고."
  "그게 황이 가정교사를 때려친 이유였다. 이따금씩 교복 차림으로 가방에 노투 몇 권과 노트 몇 
권과 연필 두 다스를 넣고 집집마다 돌며 구걸하듯 팔아 생기는 허전해 그런 화의 객기가 꼬박꼬
박 자취방으로 돌아오던 명훈에게는 오히려 그런 황의  객기가 부러웠다. 김형도 몇 마디 빈정거
렸을 뿐 그런 황을 별로 짐스러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황에게는 단순한 객기 이상 어떤 확고한 행동의 결의가 있었던 듯했다. 남은 
3월을 어디론가 부지런히 뛰어다니더니 개학을  하기 바쁘게 데모와 그 비슷한  종류의 모임으로 
학교 생활을 대신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유학 날짜가  잡히면서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고 회화
공부에만 몰두하는 김형과 그런 식으로 충돌했다.
  황의 적의까지 내비치며 몰아대자 김형도 더는 그 말을 눙치거나 회피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시 정색을 하며 깐깐하게 받았다.
  "결국 그 얘기야? 좋아, 그럼  오늘은 짚고 넘어가기로 하지.  너 아까부터 시국,시국 그러는데 
그것부터 한 번 물어보자. 그래 요즘 시국이 어떻다는 거야?"
 '정말로 홍몽천지 같으니 내 말해주지. 첫째는 오래 전부터 언론과 야당이 예측하고 경고해온 대
로 국민의 신성한 주권에 대규모의  조직적인 부정이 저질러졌다. 그리고  둘째는 그걸 항의하던 
고등학생이 눈알에 최루탄이 박힌 끔직한 시체로 바닷물 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
요한 것은 셋째, 이제는 항의가 한 계층 또는 어떤 특수 집단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까지 확산되었다는 거야. 김도 드디어 항의에 가담하데 된 거지. 그런데  그게 지적이고 합리적인 
변경인에게는 핵심에서나 통용될 언어의 교양과 예절을 익히는 게 훨씬 중요하단 말이지?"
  황은 오랜만에 옛날의 기세를 회복해 개 볼 듯 김형을  몰아댔다. 함께 생활하게 된 뒤로는 없
는 일이었다. 김형은 그런 황을 곤혹스럽게 바라보며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망설이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말로 이게 무엇일까"
  그새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명훈은 갑자기 그런 의문에서 빠지며 김형의 엷은  입술을 바라보
았다. 3월 15일의 정. 부통령 선거와 뒤이은 마산 사태에 요란한 보도에다 눈에 띄는 서울 거리의 
술렁거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훈의 의식에는 이렇다 하게 닿는 게 없었다.
  "사전 투표를 놈 해두라고 해서 리승만, 이기붕이 찍힌 투표 용지를 한 뭉치 안고 투표장에  나
갔더니. 놀라지 마, 아직은 투표를 하기 전인돼도 투표함이 벌써 꽉차 있더라구. 거기다가 뒤미쳐 
온 연락이 뭔지 알아? 사전 투표가 너무 많이 되었으니 오히려 이미 들어가 있는 투표 용지도 절
반쯤 내빼라라는 거야. 참 기가 막혀서."
  자신이 그날 직접 겪은 것은 물론, 어떤 하꼬방 동내의 투표소를 맡았던 살살이의 그런 킬킬거
림을 들었을 때도 명훈은 그게 정치의 당연한  과정으로만 여겼고, 마산 사태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요란스럽게 알려지며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끼들, 일은 벌써 시마이됐는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들 내세워 어쨌다는 거야?"
  "선거 뽀이콧 좋아하네. 안 될 성싶으니 뻔할 걸 가지고 개기는 거지."
  그런 배석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적이 되어 철없는 고등학생들 뒤에 숨어  있는 듯한 야
당만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더 있다면 '공산분자'  또는 '불순분자'의 개입 어쩌고 
하는 당국의 서슬 퍼런 발표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까닭 모를 섬뜩함 정도일까.
  하지만 며칠 전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뒤로는 명훈에게도 무
언가 와 닿는 게 있었다. 3월 15일의 사태로 사람이 몇 죽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게 풍문이거나 활자로 된 보도일 때는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른 사진을 보자, 갑자기 유년에 본 여러 주검의 형상들과 연결이 지어지며 거의 충격에 가까
운 실감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죽었다. 실연이나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도 아니고 살인 강도도 든 것도 아닌데, 전쟁도 
없었고, 굶거나 얼어서도 아닌데.'
  그렇게 그 주검을 더듬어가더니 보니 나중에는 어럼풋하게 정치와도 이어졌다.
  '경찰은 빨갱이들의 짓이라지마, 내 기억 속의 그들과 이 아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가지 자와 
못 가진 대해서 주로 떠들었는데 이 아이들은 그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들은 평등
을 더 자주 내세우는 것 같았는데 이 아이들은 오직  자유만을 외친다. 거기다가 더욱 뚜렷한 차
이는 선거에 대한 양쪽의 태도였다. 어렸을적 정부 수립 때  그들의 벌인 싸움은 이러한 선거 자
체의 거부였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들은 오히려  그 선거를 올바르게 지키지 위해서들고 일어났
다.'
  하지만 거기서 그뿐, 그런 일들이 명훈의 정치  의식을 자극하거나 사회 상황의 인식으로 이끌
지는 못했다.
  "개새끼들, 어쩌다 재수 없어 죽은 녀석 앞세우고 되게 지랄떠네. 하기야 이제는 이박사가 돌아
가셔도 만송 선생이 떠억 이어받게 되었으니 발악할 만도 하지. 시체 아니라 뭔들 이용하려 들지 
않겠어?"
  그런 배석구의 풀이 탓이라기보다는 아버지를 통해 핏줄로 이어받은 듯한  어떤 적개념과 전쟁 
뒤 어머니가 은연중에 길러준 순정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뒷날까지 
변함없었던 명훈의 고정관념 중에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에서 멀어질수록 아버지의  사상에 대해
서는 관하리라는 것 같은 게 있었는데, 명훈이 그해  4월에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냉정하고 무감
동하게 바라볼수 있었던 것도 그런  고정관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거기서 어떤 국외자 의식이 
생기고, 따라서 이따금씩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면서도  그런 상황의 총체적인 의미는 그의 의
식에 그리 절실하게 와 닿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훈이 온전히 불문으로만 그해 4월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명훈에
게는 호전이라고 해도 좋을 몇가지 사정의 변화가 있었다. 좋든 나쁘든 대학에 입학하게 됐고, 고
향으로 간 어머니에게서도 어쩌면 큰  산 하나가 팔리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에 찬 소식이 왔다. 
지난달의 그 비오는 날에 마지막 불꽃을 빛내며 타올았던 경애의 추억도 더는 고통으로 되살아나
는 법이 없었고, 시작과 끝이 없던 모니카의 일 또한 차츰 의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하
려 그 모든 호전에서 온 여유일까, 명훈도 무언가 심상찮은 예감을 자아내는 거리의 시위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가지고 싶어졌다.
  특히 대학 입학과 뒷골목 생활이 조금씩 심드렁해져 다시 소설이나  시집을 뒤적이게 되면서부
터 명훈의그런 욕구는 더욱 절실해졌다. 그는 몇  번인가 김형이나 황에게 방금 거리에서 벌어지
고 있는 사태의 진상과 의미를 터놓고 물어보려 했다. 마침 그 무렵은 싸구려 여관방에서 뒹구는 
것도 싫어져 되도록 잠은 함께 쓰는 자취방으로  돌아가 잘 때라 그들은 대할 기회가  전에 없이 
많을 때였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김형은 난데없이 영어 회화에 열을 올리느라 말  븥일 틈을 주
지 않았고, 황은 황대로 대우 좋은 가정 교사 자리까지 팽개치고 무언가에 열중해 밤늦게까지 쏘
다니다 들어와 진득하게 얼굴 맞대고 앉을 겨를이 별로 없었다.
  '정말로 지금 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일
까? 아무래도 끝까지 나와 무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게 어떤 의미로 내게 다가올까?'
  명훈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기대에 차서 김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이 물은 것이 아
니라서 그들 나름의 공방으로 끝나고 말 테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그들의 어휘나 논리에 익숙해
진 명훈이었다. 시원스런 풀이까지는 바랄  수 없다 해도 어느 정도의  상황 인식은 가능할 것도 
같았다.
  "네가 굳이 듣고 싶어 하니까 말해주지. 나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꽤나 심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결과가 날 수  있다는 것쯤은 알아. 하지만 또한  그래봤자 그것은 결국 제국의 
변경을 불어가는 한바탕 회오리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아. 곧 이  땅을 규정하고 있는 몇 
개의 기본적인 구조 자체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뭐야? 불어가는 한바탕 회오리일  뿐이라고? 집권당이 바뀌고,  한 체제가 무너질지 모를는데
도?"
  "그래, 집권당이 바뀌는 것은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체제는 아니랴. 체제라는 것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맺고 있는 것이라는 내 이해가 틀린 게 아니라면,  이런 제국의 변경에서는 한 번 자리잡
은 체제는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게 아냐. 제국의 핵심부에서 큰 변화가 오기전에는."
  "그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도 체제가 바뀌는 건  아니란 말이지? 이 
부패한 권위주의자와 독재가 타파되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선다고 해도?"
  "그리 되기도 힘들겠지만, 그리 된다고 해도 체제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 역시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지? 어떤 사회 변화가 혁명적이려면 다른 체제를 예비하고 있는 수권 세력이 자라 있어야 
해. 그런 세력은 아니야 . 이념이 아니라 이해가 달라서 갈라졌을 뿐인 자유당과  민주당은 큰 정
치 세력은 아니라구. 그들이 다른 것은 기껏 동일한 체제와 이념의 운용 방식 또는 방안 같은 것
일 뿐이라 말이야."
  "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하지만 그들을 뒷받침해주는 국민적 욕구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체
제 구상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올  수 있지. 만약 그들이 이  거대한 국민적인 욕구를 종합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면 제 3의 수권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걸 세상살이에서 익힌 누썰미
만으로 함부로 단정해 말할 수 있어?"
  "눈썰미라구? 그래. 정말로 정확한 표현이야. 내가 의지할  논리적인 지식인이라고는 네가 강요
해 읽은 몇 권의 얼치가 정치 이론서와 조잡한 혁명사 정도뿐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보고 
느끼는 게 더 자유로울 수도 있겠지.  네가 말하는 기존 야당의 체질  변화나 제3의 수권 세력도 
그래. 도대체 너는 이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초강대 제국과 그들에 의해서 부여된 분단
이란 이 땅의 엄혹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들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들이 남북에서 
강요하고 있는 체제 이외에 또 다른 선택이 있을 거라고 믿는 거야?"
  그 무렵 들어서는 황과의 입씨름뿐만  아니라 신문까지도 애써 외면하는  것 같던 김형이었다. 
뻔한 일에 나까지 들떠서 곤란하지. 그런 핑계와 함께 얄미울 만큼 제 일에만 몰두하던 그였는데, 
실은 나름대로 황과의 그런 맞딱뜨림에 대비해오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공격을 시작한 건 틀림없
이 황이었지만, 어느새 논쟁의 주도권은 김형에게도 넘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도 그놈의 결정론과 역사적 허무주의 설교야?"
  황이 격한 체제는 미.소가 부여한 둘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도 우리의 의지
보다는 그들의 실세에 따라 결정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외에 제3의  길은 없으며,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그들 두 제국의 협력에 의해 가장 비참한 결말에 이를 뿐이다. 역사
적으로도 두 개의 제국 사이에 끼여 있던 변경 국가를 봐라.  둘 중 하나는 선택 이외 달리 생존
에 성공한 나라가 있던가."
  "결정론이나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말고는 대체로 정확하게 내 말을 기억하는 셈이군. 당분간이
라는 단서가 빠져 있기는 하지만."
 김형이 조금 긴장하는 빛을 띠며 그렇게 말을 받았다. 황이  거기 힘을 얻은 듯 전에 김형이 한 
말을  빈정거림으로 되풀이하기를 계속했다.
  "물론 민중의 혁명 의식이 국민적 합의  형식으로 성숙한다면 제 3의 길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거기끼지는 꽤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한다. 이 따의 진보적 의식들은 십 년 전의 그 무자비한 불
과 피의 세례로 일소당했다. 간혹 땅속  깊이 남아 있는 뿌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참혹한 
기억이 얼음처럼 두껍게 덮여 있어 다시 싹틀 날은 멀었다. 있다면  의사 혁명뿐이었다. 기껏해야 
지도자의 선동에 들뜬 의사 의식과 의사 혁명뿐이다. 기껏해야 지도자의 이름과 통치방식을 일부 
변경 및 풍성한 말의 잔치를 혁명이라고 믿는."
  "하나 더 있지. 위장된 선택의 변경."
  "야, 참, 그걸 빠뜨렸군, 그래. 또 하난 제 3의 길로 착각할 수 있는 것으로 위장된 선택의 변경
이 있다. 겉으로는 이쪽 저쪽 제국의 체제를 받아들여 분단의 극복을 지향하는 것. 이를테면 자유
민주주의로는 소비에트 제국의 체제를 지향하는 방식.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부르주아 
혁명은 그런 방식에 대한 경계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기도는 부르주아 
혁명마져 불가능한 극우. 반동의 체제를 생산할지 모른다."
  "좋아, 됐어. 이번에는 그런데도 우리가 모두 거리로 뛰어나가야 할 이유나 말해봐. 며칠 전부터 
틈만 나면 내게 권유하려고 별러온."
  김형이 이지는 까닭 모르게 초조한 빛까지 띠며  황에게 물었다. 황도 문득 빈정거리는 말투를 
털어버리고 신중하게 그 말을 받았다.
  "나도 과거에 대한 너의 이해나 현실에 대한  인식 일부는 승인한다. 하지만 너의 현실에 대한 
대응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에는 솔직히  불만이 많다. 어쩌면 너의 들을  만한 역사 이해나 상황 
인식이 그런데 태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구실로 교묘하게 구성된 것이 아니가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너를 정치적 허무주의자라고 몰아치지 않고 합리적인 개량주의자로 보아준다 해도 이런 상황에
서 우리가 싸늘한 눈길로 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충분히 성립된다. 비겁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방관자니라. 식의 몰아치기가 아냐.  네가 마란 대로 지금 익어가고 있는  이 변혁의 
기운이 기실은 의사 의식 또는 일시적인 집단 광기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지도자와 통치 방식의 교체에 불과하다 해도 지금의  움직임은 지속되고 성취돼야 해. 체제 자체
는 그대로라 할지라도 자유당의 정권이 지금까지 자행해온 비리와 부패와 폭력이 추방될 수 있다
면 그건 틀림없이 진보고 개량이야. 비록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얻을 게 
있다면 얻어두어야 하지 않겠어?
  둘째로 환기시켜고 싶은 것은 민족주의적  입장이야. 네가 가진 일종의  결정론적 사고 방식의 
약점은 역사는 물론 미래까지도 화석화하는 점이지. 민족주의에도 결정론적 요소가 없는 건 아니
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는 크게 달라.  어쩌면 그것은 논리나 이념을 초월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어. 너는 전에 국민적 합의 형식으로 성숙된 혁명 의식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
으나 지금 극도로 위축돼 있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소생하면 꼭 안될 것도 없지.  인류의 진보, 특
히, 정치적 진보에 대해 역사는 많은  비관적인 실레를 보여주고 있기는 해. 그러나  그 못지않게 
그림 같은 성취를 보여주기도 해. 그 중에는 민족주의가 일으킨 여러 정치적 기적은 그런 비관적
인 실례를 덮고 남을 만해.
  그 다음 특히 너에게 경고해주고 싶은 것은 너와 같은 형태의 사고가  역사와 사회에서 수행하
는 기장이래. 비관적인 전망이나 개량주의가 저지르는 죄악중에서 가장 큰 것은 그것이 부조리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불의한 세력의 논리적 기반이 되거나 때로는  옹호의 수단으로까지 악용
되는 셈이지. 생각해봐,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논리나 태도가 이 추악한 자유당 정권의 유지를 
도와주고 있다면 너무 끔직하지 않아?"
  말뜻은 앞서의 그 어떤 때보다 공격적인 듯한데  오히려 차분한 설득조였다. 그런 황의 물음에 
김형은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언뜻 이맛살에 졌다 지워진 골 깊은 주름과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적지 않은 마음 속의 동요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하지만 김형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도 나 같은  사람들의 견해가  불의한 권력의 유지.옹호에 악용되는게 괴롭고  쓸쓸하다. 또 
나의 그런 견해가 내 개인적인 가족사에 불필요하게 얽매인 결과며, 지금은 더욱이 내가 애써 확
보한 삶에서의 유리한 위치 때문에 다분히 자기 방어적인 데가 있음도 고백한다. 이 60년대 벽두
의 남한에서 내가 손에 넣은 미국 유학의 특전은 내가 이 땅으로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앞으로
의 나의 개인적인 삶에 예사 아니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구태
여 그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거나 변명을 하려고는 않겠다. 내 의도는 그렇지 않은
데 내가 가진 견해가 악용된다면 그것은 악용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이도 이데와는 달리 이데올
로기는 그 말 자체가 그것을 선택하는 개인의 신부,배경, 이해 관계 같은 현실적인 동기들에 바탕
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김형의 목소리에는 조금전에 언뜻 내비쳤던 마음 속의 동요는 자취도 보이지 않
았다. 황 또한 조금전의 여유를 조금도 잃지 않고 그 말을 받았다.
  "나도 굳이 너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너의 생각에 어떤 위험이 있다면 적어도 네  자
신에게는 그것이 인식되어 있어야 해. 그런 인식 없이는 자칫  구제받을 길 없는 반동의 길로 접
어들고 말리라는 경고를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황의 마지막 말이 김형을 자극할 만했음에도  김형은 애써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지나가듯 몇 마디 받을 
뿐이었다.
  "고맙다. 그 보답으로 나도 하나 충고하지.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 순수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 
부르주아 혁명이라 해도 될는지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억눌려 있던  욕구가 한 번 
분출하기 시작하면 그걸 제어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드시l 과격한 변혁의  욕구와 무분별한 민족주
의가 이 사회를 휩 쓸 것이다. 그때를 경계하라. 그게 저편 제국의 체제를 이 땅에 가져오는 것은 
결말이 나든, 극우 반도의 대두로 이편  제국이 베푼 체체를 더욱 공고한 것으로  만들든, 너희들 
같은 이상주의자들이 설땅은 없을 것이다. 가장 조악한 형태로 실현되고 있는 이 땅의 정치적 허
무주의가 우리 세대에게서 다시 답습되는 것은 정말로 보고 싶지 않다."
  먼저 일어나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한 뒤라 상을 차려오는 것은 명훈에게  시켜도 되었으나 굳
이 부엌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아 김형은 그쯤에서 얘기를 끝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도 그 뜻을 순수히 받아들여 굳이 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서둘러 이부자리를 
개는 명훈을 거들어 밥상 받을 채비를 했다.
  뜨거운 밥에다가 비지찌게와 버터 한 숟갈 그리고 왜간장을 떠넣어 비벼먹는 아침상 머리는 한
동안 어색한 침묵으로 까닭없이 무거웠다.그걸 견디다 못한 명훈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밥
을 씹고 있는 황에게 물었다.
  "정말 그쪽 대학은 모두가 들고 일어나는거야? 맨손으로 경찰과 싸울 각오들이 되어 있나구?"
  "니네 학교는?"
  제 생각에서 얼른 빠져나온 황이 대답 대신  그렇게 되물었다. 명훈은 갑자기 야릇한 부끄러움
을 느끼며 더듬거렸다.
  "우리야 뭐, 따라지 대학에다 야간부니까. 몇몇이 울근불근거리기는 해도 데모하러 자가잔 소리
는 없던데."
  "그럼 그쪽 거리 쪽은 어때?"
  명훈이 아직도 극장에서 기도 일을 보고 있는 줄 알고  있는 황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명훈이 
더욱 움츠러들며 심하게 더듬거렸다.
  "거기야 맨 장사꾼들뿐이니까, 장사꾼들이 뭐 경찰이나 공무원 눈  밖에 나려고 그러겠어. 다방
이나 술집의 손님들 중에는 더러 떠드는 사람도 있지만 명색 점포라고 가진  사람이라면 그저 수
군수군일 뿐이야. 그것도 눈치보아가면서."
  "아직도 그 정도야?"
  명훈의 말에 약간 실망한 듯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한 황이 그때까지 맛나게 퍼먹던 밥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한 숨 섞어 말했다.
  "하기야 이 나라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대학도 아직은 절반이 안되니까. 감정적으로 모두 동조하
는 것 같은데도 뛰어나가자면 영  아니거든. 워낙 관제 데모만 하며  자라온 애들이라 선뜻 서지 
못하는지도 모르지."
  그런 황의 얼굴은 무언가 갑작스런  걱정거리라도 생긴 사람같았다. 김형은  다시 그런 화제에 
끌려드는게 싫어서인지 둘의 대화를 못 들은 척 열심히 숟가락질만 했다.
  처음에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을 작정으로 그 얘기를 꺼냈으나 명훈도  이내 마음을 바꾸었
다. 자칫하면 자신의 그즈음 행적이 드러날 것 같아서였다. 야당의 시국  강연회 청중을 흩어버리
고 황금 다방에 모였던 것이나 선거일 당일 야당 참관인을 두들겨 내 쫒은 것 따위, 그때는 이렇
다 할 느낌없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했던 일들이 새삼 죄의식으로 가슴속을 눌러왔다. 
김형과 황 둘 모두가 제 일에 골몰해서인지 아침상을 물린 뒤에도 대화는 일상적인 것을 넘지 않
았다.
  "밥상은 그대로 나둬, 어차피 나는 오늘도 학교 안갈 거니까."
  요리에는 워낙 소질이 없어 함께 밥을 끓여먹은 뒤에는 흔히 설거지를 도맡는 명훈이 주섬주섬 
빈그릇을 챙기는 걸 보고 김형이  말했다. 뒷골목으로 돌아가면 작은  우두머리로서 오히려 남의 
섬김을 받는 편이지만 셋의 생활에서는  스스로 서열을 맨 끝으로  두는 명훈이었다. 나이보다는 
그들의 지식이 은연중에 내리누르는 힘 때문이었다. 더욱 정확히 분석하면, 삶이  그런 것에서 멀
어져갈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명훈의 정신적인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는 편이 옳았다.
  "그것도 직장인데 어서 시형이 말대로 하지. 데모에라도 걸리면  턱없이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벌써 아홉시가 넘었어."
  김형에게 설거지까지 맡기는 것이 미안해 그대로 그릇들을 양철 바께쓰에  쓸어담고 있는 명훈
에게 황이 다시 그렇게 말했다. 어찌 됀 셈인지 황은  밥을 짓는 데도 설거지를 하는데도 당연스
럽게 빠졌다.
  "맞아, 석현이 말대로 해. 오늘 아침 빨래할 것도 있고, 그때 한꺼번에 해치우지. 어서 가봐."
  김형이 나른한 듯 기지개를 켜며  한 번 더 명훈을 재촉했다.  세수와 면도는 자신의 골목으로 
돌아가면 절로 해결되는 이발소가 있었다.

    제 33장 그하루 전날
  대문을 나서니 밖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웃집ㅈ 울타리에 막 피기 시작하는 개나리꽃이 눈부
실 만큼 화사했다. 명훈은 문득 음침한 뒷골목에 움츠리고 있는 사이에 봄이 다 지나가버리는 것 
같아 조바심과 쓸쓸함이 아울러 일었다.
  하지만 곁에서 걷고 있는 황은 그런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무언가를 꼴똘히 생각
하는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언덕길을 다 내려갔을 무렵 불숙 말했다.
  "나는 오늘 독각 선생님한테 좀 들러야갰어. 먼저 가."
  아마도 저만큼 보이는 대본점이 갑작스레  그런 생각을 들게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단달의 
그 비 오던 날 해장국집에서 본 그를 떠 올린 명훈은 별생각없이 물었다.
  "책방 아저씨한테? 거긴 또 왜?"
  "며칠 전 시형이가 한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독각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봐야겠
어."
  "그 사람한테 정말 그런 능력이 있을까? 황형, 뭘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냐?"
  "그렇잖아, 시치미를 떼고 있어도 분명히 그에게는 어떤 곰삭은  이념가의 냄새가 나, 틀림없이 
이 방면의 대선배야. 뭘 알고 있는 사람이야."
  황은 그렇게 자신있게 말했지만 명훈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전력이 의심스런 젊은 아
내에게 참담한 꼴로 끌려가는 걸 본  뒤로는 명훈이 그에게서 느끼는 것은  이미 정신분열증까지 
보이는 알코올 중독뿐었다. 이따금씩 무언가 엄숙하게 들리는, 그러나 잘 알아듣지 못할 구절들을 
읊조리기는 했지만, 명훈이 기껏 믿을 수 있는 것은 독각 안내인으로서 책방 주인 정도일까, 그러
나 '어떤 곰삭은 이념가'란 황의 말이 다시 갑작스런 흥미를 일으키면서 명훈의 발길을 멈추게 하
였다.
  "이념가라고 그럼 빨갱이?"
  "빨갱이라면 빨치산 두목쯤 하다 전향한 사람일거야. 하지만 공산주의만이 이념은 아니지. 어쩌
면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를 이념 쪽일수도."
  명훈이 걸음까지 멈추고 흥미를 드러내자 그렇게 대꾸한 황이 그제서야, 아  참, 너도 대학생이
었지,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 명훈이 너도 궁금한게 잇어?"
  "실은"
  명훈이 잠깐 망설이다가 속을 털어놓았다.
 "나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아니 이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
척 궁금해. 황형이 워낙 굳게 믿는 거 같아 다시 마음이 흔들린 거지만, 만약 정말로 그만한 식견
이 있다면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실은 며칠  전부터 황형이나 김형에게 한번 조용히 묻고 
싶었는데."
  "그래? 그럼 일단 같이 가. 네가 그에게서 본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먼저 독각 선생 얘기부터 
들어보자. 우리끼리 나중에 얘기해보기로 해"
  황은 그 말과 함께 명훈을 데리고 헌책방으로 갔다. 명훈은 그래도 아직 미덥지 않았지만, 호기
심은 일어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책방은 평소처럼 열려 있었다. 두어 평 되는 공간에 출입문 쪽
을 뺀 삼면의 벽은 모두 서가로 덮여 있고, 거기에는  대부분 누렇게 손때 묻은 잡동사니 소설책
들이 금세 쏟아질듯 꽂혀 있었다. 신간의   울긋불긋한 표지는 왼편 입구 쪽의 서너  줄뿐이었다. 
책방 아저씨는 그쪽으로 놓인 긴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는 왠지 평소 같지가 않
았다.
  "어, 학생들이 이 좋은 봄날 아침부터 여기 왠일이야?"
 그러면서 불편한 다리로 일러서는 그 곁에는 안주도 없는 소주병이 둘이나  얹힌 찌그러진 양은 
쟁반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하나는 벌써 거의 반 비워 있는 채였다. 언제나 물을 뿌려 개긋이 쓸
어놓던 시멘트 바닥도 부옇게 앉은 먼지에다 휴지 조각이 나뒹구는 게 며칠은 비질을 않은 것 같
았다. 그의 젊은 아내가 보이지 않긴 해도 그 모두가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선생님의 고견을 좀 들을 일이 있어서요."
  황이 변죽을 울리는 법 없이 바로 용건을 말했다. 책방 아저씨의 맘씨 좋아 뵈는 술꾼 같은 표
정에 가벼운 긴장이 이내 술꾼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돌아가 빙글거렸다.
  "고건? 나 같은 장바닥 술꾼에게 무슨 고견이야? 더구나 학생 같은 명문 대학의 수재에게 들려 
줄 만한게 있어야지"
  "그러지 마시고 이념의 선배로서 한마디만 들려 주십시요. 좋은 참고가 될 겁니다."
  황이 찌그러진 양은 쟁반 곁의 빈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면서 진득하게 말했다. 책방 아저씨
가 내어 웃으며 황의 말을 받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전에 명훈에게 대했던 것과는 전
혀 딴판이었다.
  "허, 이 사람봐라. 누굴 잡으려고, 이념의 선배라니? 학생, 착각을  해도 이만저만 아니 것 같은
데."
  "무어라 하셔도 저는 못 속이십니다. 접때 취해서 말씀하신 중에 몇 마디는 바로 [혁명의 서원]
애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어요. '일생을 가슴속에서만  타오르다 사그라져갈 이데아
의 광휘'란 말도 기억이나는군요."
  그러자 책방 아저씨의 얼굴에 일순 낭패한 기색이  스치더니 이내 어설픈 실소로 바뀌었다. 그
것 역시 명훈에게와는 딴판인 관대함이었다.
  "아하, 그래서 저번에는 술병까지 들고 찾아왔구먼, 그렇다면  잘못 짚은 건데. 내가 설령 그런 
소리를 지꺼렸다 해도 그건 그저 술주정이나 술꾼의  음흉한 연기일뿐야. 내가 젊었을 때 잘난척
하는 것들에겐 그런 따위의 위험하고 불온스런 구절을 외는 유행이  있었지. 그런 걸 몇 마디 기
어했다가 술주정 속에 끼워넣거나 학생들을 상대로  무슨 실패한 이념가 같은 연기를  해 지금의 
내 초라한 삶을 변명하려 든 것은 게야. 혹 그때 내 다리 얘기는 하지 않던가? 절름발이가 된 내
력을 거창하게 떠벌리지는 않던가 말이야?"
  그런 그의 말에 명훈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꼭 자신을 빈정대는 말처럼 들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황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그럼 다음번 고주망태가 되어 있을 때를 노려보게. 한층 감동적인 것이  있을 테니, 하지만 미
리 경고해두는데 속지 말아,간혹 삶에서 실패한 인간들  중에는 있지도 않은 화려한 과거를 조작
해 자신의 실패를 호도하려 드는 수가 있지. 특히 알코올 중독자에겐."
  책방 아저씨는 그 말과 함께 보란듯이 소주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셔댔다. 삼분의 일 가까이 남
아 있던 술병벼을 단숨에 비우고 입가를 닦으며 히죽 웃는 그는 어김없이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
였으나 명훈에게는 어느새 달리 보였다.
  "전에는 두 병이면 하루종일 견딜 만했는데, 요즈음은 턱없이 달려. 해도  기울기 전에 다 비우
고 말거든."
  책방 아저씨가 이빨로 남은 병의 마개를 까며 한 번  더 자신의 주량을 과장했다. 명훈은 그걸 
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사표시로 보고 황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황은 
무얼 믿는지 쉽게 물러서 기색이 아니었다. 잠자코 아저씨가 하는 양을 살피다가 오히려 더 확신
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피부에 닿아오는 변혁의 분위기가  가슴 깊이 묻혀 있는 이념의 불씨를 
쑤석이는 거겠지요. 이미 지나가버린 지신의 시대에 대한 향수와 회한에 부대껴서인지도 모르고."
  뜻밖에 그런 황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서둘러 두번째의 술병을 입에 대던 책방 아저씨가 무엇 
때문인가 움찔하더니, 술 한 모금으로 그치고 병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기
가 사라져있었다.
  "나가게, 내게는 이제 그런 종류의 심문을 견딜 만한 정신력이 없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좋
으니 여기서는 이만 나가 주게."
  그러자 황이 한층 여유 있는 말투로 받았다.
  "좋습니다, 본의 아니게 선생님의 묵은 상처를 건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묵은 상처? 내게 그런 건 없어!"
  책방 아저씨가 드디어 전에 명훈에게 보인 적이 있는 그 특유의 까닭 모를 적의까지 보이며 그
렇게 소리쳤으나 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격변의 시대를 먼저 사신 분의 경험에 묻습니다. 제 친구 하나는 지금 이 변혁의 기운이 취대
로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미 설정된 체제 안에서의 케이스별  개선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강력한 세계 제국의 의해 분열된 이 땅에서 그 이상 가는 것은 기껏  이편 제국에서 이탈과 
저편 제국으로의 편입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반동을  부를 뿐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선생님께
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몰라, 내가 살아본 세월은 모두가  돌계집의 헛구역질 같은 것이었어. 애도  안 가지고 집안을 
들뜨게 만드는 자, 이젠, 나가라구."
  "언뜻언뜻 내비치던 이념의 광휘 뒤에 기껏 그런 철저한 허무주의가  있었을 뿐이라니 정말 뜻
밖입니다. 그럼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도 돌계집의 헛구역질로 보신다는 뜻입니까? 이게 온
전히 불임의 세월일 뿐인가요?"
  "불임이든 회임이든 난 모른다니까. 이만 했으면 어서 나가. 멱살을 잡아 끌어내기 전에."
  갑작스레 험학해진 말투와 함께 책방 아저씨는 정말로 황을 끌어 내기라도 할  듯 불편한 몸을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명훈이 전에 한 번  본적이 있는 그로 온전히 되돌아간 듯  해싿. 그제서야 
황도 더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무엇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르지만 죄송합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앞으로도 잘 
지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머리까지 꾸벅하며 출입문 쪽으로 갔다.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명훈도 덩
달아 머리를 꾸벅하고 따라나섰다. 황이 뻑뻑한 출입구  미닫이를 힘들여 열고 있는데 책방 주인 
아저씨가 문득 명훈을 불렀다.
  "학생 잠깐."
  "네?"
  "저런 얼치기를 따라다지마."
  "얼치기의 특징은 서두르는 것이지. 그러다가 결국은 일을 망치고 자신도 당해."
  "그게 어떤 종류든 젊은 날에 이념을 품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실현을 서두루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일이야. 어떠한 세대이건 그들의 이념을 혁명이나 유혈없이 
실현할 기회도 함께 와. 20년 또는 3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서둘렀다가 좌절되고 변질되는 것보
다는 훨씬 나아."
  책방 아저씨는 명훈이 거의 대꾸할 틈도 없이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지난번에 자신이 
명훈으로부터 받게 된 오해를 한꺼번에 풀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명훈이 어럼풋하게나마 그 말을 
이해하게 죈 것은 그 뒤로도 20년은 지나서였지만,  그때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감동만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를 함부로 판단했던 것에 대한 말못할 부끄러움과 함께였다. 그러나 황은 달랐다.
  "틀림없이 저 영감쟁이야 말로 얼치기였을 거다. 함부로 날뛰다가 된통 당하고 다리몽뎅이가 날
아간 이승만 정부는 저런 얼치기들의 세계에 대한 비관과 체념 위에서 설립이 가능했을 거야."
  거리로 나가면서 이번에는 황이 더할 나위없는 경멸을 섞어 그렇게  내뱉었으나 명훈의 머리속
은 아직도 책방 아저씨의 말들을 꿰어 맞추느라 그런 황의 말이 비집고 들 틈이 없었다.
  명훈이 패거리의 연락처로 쓰는 다방에 이른 것은 오후 세시경이었다  마담이 명훈을 보자마자 
달려나오듯 말했다.
  "빨리 배사장님에게 연락해봐요. 오후에 두 번이나 전화로 찾았어."
  "돌개 형님이? 무슨 일이랍디까?"
  배석구는 전에 종로 4가 쪽에 작은 술집을 하나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그를 알고 있는 
마담은 언제나 그를 배사장이라 불렀다. 모르긴 해도 마담의 물장사 경력은 꾀나 되는 듯했고, 따
라서 뒷골목 세계에서도 명훈 이상으로 밝아 보였다. 이제 겨우 서른을 넘었을까말까한 나이면서
도 어쨌거나 한 골목을 휘어잡고 있는 명훈에게 스스럼없이 반말 짓거리를 하는  것도 그런 경력
의 은근한 과시임에 틀림없다.
  "몰라, 급히 단부 사무실로 연락해달라던데."
  그렇게 말해놓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마담을 따라 카운터 쪽으로 간 명훈은 얼른 단부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석구가 소리쳤다.
  "얌마,어딜 갔더랬더? 이 중요한 판국에."
  "야, 네 , 저 학교에."
  명훈이 까닭 없이 처진 기분이 되어 그렇게 말을 흐렸다. 배석구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학교? 한가한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건 그렇고 다른 새끼들은 다 어디 가 자빠졌어?"
  "방금 와서 하지만 찾아보면 근처 어디에 있을 겁니다."
  "그럼 빨리 찾아와. 되도록 많이  모아 중앙청 앞 본부로 가라구.  거기가면 살살이와 백구두네 
애들이 모두 와 있을 거야. 개들과 함께 행동해."
  "무슨 일인데요?"
  명훈이 어리둥절해 그렇게 묻자 배석구가 "햐,  이 새끼" 하며 답답해하다가 이내  마음을 비운 
듯 설명조로 말했다.
  "그 새끼들 아무래도 손 좀 바줘야겠어, 데모하는 세끼들 말이야."
  "그럼 대학생들이요?"
  "그래, 상부의 정식 허가가 떨어졌어. 단장님께서 우리 구단 부장님한테 전화를 주셨고, 구단장
님도 동의하셨다구.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놓으라는 거야. 이건 반동 투쟁  차원에서가 하는 거니
까 뒷일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돼. 지금 본부  단장실에는 오야붕들이 모두 모여 그 일을 의논하
고 있을거야. 나도 곧 여기 애들  있는 대로 긁어모아 그리로 갈  테니 가서 준비를 하고 있으라
구."
  전화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끈겼다. 비록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어찌나 삼엄한지 명훈은 스스로에게조차 반문해볼 틈도 없이 배석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도치와 호다이는 당구장에서, 아이구찌와 꺽다리는  새로 생긴 이발소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날치가 난데없이 끼어들어 명훈은 일행  여섯을 한 택시에 싣고 중앙청  쪽으로 달려갔
다.
  서두른 덕분에 명훈 일행이 반공청년단 본부에 이르렀을  때 아직 네시가 되기 전이었다. 건물 
마당 여기저기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몰려든  주먹들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중간 보스들도 두엇 
눈에 띄었더. 배석구 또래의 형들도 여럿 이른바 '동생들'을 이끌고 나와 무리지어 서성되고 있었
다. 줄잡아 백오십명은 돼 보였다.
  특별 단부 소속 단원들은 경기도청 쪽 마당에  몰려 있었다. 백구두가 무언가를 신문지에 싸고 
있다가 명훈을 보고 알은채를 해쌌다.
  "어이, 간다, 왜 이리 늦었어?"
  그러면 마지막 부분을 신문지로 사 여미는 걸  보니 자반 길이쯤으로 자른 쇠파이프였다. 패싸
움에서 흔히 사용되는 개인 병기인데 그걸 신문지로 감싸 왼쪽 소매 속에  감추고 있다가 필요할 
때 빼내 휘두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구두뿐아니라 그가 데려온 꼬봉들도  모두 무언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몽에 
감추고 있었다. 자전거 체인, 쌀가마를 나를 때 쓰는 쇠갈퀴,각목 따위였다.
  급하게 녀석들을 끌어모아 달려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명훈은 그런 흉기들을 보고서야 번
쩍 정신이 들었다. 자신은 지금 대여섯 정도의 패거리끼리 후다닥 붙어 해치우는 게 아니라 수백
명이, 어쩌면 수천명이 될지 모를는 데모대와 흉기를 가지고 맞붙게 되는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한 긴장이 그때껏 남아 있던 명훈의 술기운을 확 쓸어내며 문득 이제 자기가 
끼여 들게 될 일이 무슨 일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습격한다. 이게 무슨 일이까?"
  명훈은 얼마 전 학교에서 들썩이던 급우들을 떠올리고, 만약 그들과 휩쓸렸더라면 자신은 바로 
그 데모대에 섞여 있을 거란 점에서 먼저 묘한 거부감이 일었다. 자신이 그들을 외면하고 학교를 
빠져나온 것은 그들의 대의가 그리 절실하게 가슴에 닿아오지 않아서였지만, 끈끈한 동료 의식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그들을  공격해야 될 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빠지고 
나니 이제는 단순한 동료 의식 이상 꽤나 다급한 보호 의식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뭐 하는 거야? 멍청하게 너희들도 어서 준비를 하라구."
  "준비?"
  명훈은 아직도 자기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물었다. 백구두가 비웃듯 말했다.
  "짜샤, 그럼 돌맹이가 날고 몽둥이가 튀는데 난쟁이 거시기 기럭지만한 아이구찌 들고 설칠 거
야? 돌개 형님도 참, 저런 햇병아리들을 불러모아 무얼 한다구."
  자신을 완전히 깔보는  그 말투에 퍼뜩 그때까지 빠져있던 물음에서 깨어났다.
  "돌개 형님이 그냥 애들 모아 이리루 달려가라구만 해서."
  그렇게 변명하자 백구두가 턱으로 건물 한쪽을 가르키며 일러주었다.
  "그럼 저기로 가봐. 쇠파이프나 각목  토막 남은 게 있을지 모르겠어,  장갑이나 붕대도 얻어오
고."
  "붕대를?"
  "쨔샤, 우리끼리는 무슨 표식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가뜩이나 머릿수가 부족한데 우리끼리 치
고 받는 불상사가 벌어지면 어쩌라구 그래? 손에 붕대를 감거나 장갑을 끼고 있으면 우리 편이란 
말야. 그렇지 않은 녀석들만 무조건 조지는 거야. 알아 ㄷ겠어?"
  그러는 백구두는 차림도 평소 때와는  아주 달랐다. 별명이 되었을  만큼 애용하던 백구두대신 
끈을 단단히 졸라맨 워커를 신은 데다 옷도 검은 물  들인 군용 작업복이었다. 그의 왼손에는 자
신의 말대로 힌 붕대가 두껍게 감여 있었다. 그 빈틈없는 채비가 명훈으로 하여금 이상한 위압감
을 느끼게 하여 그의 명을 따르게 만들었다.
  백구두가 가리킨 곳에 가니 정말로 철근 토막과  각목 무더기가 있었다. 근처의 공사장에서 함
부로 쓸어온 것인 듯했다.
  명훈은 마음내키지 않는 대로 각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끝에  굵은 대못이 박혀 있는 게 마음
에 안 들어 시멘트 벽에 부딧혀가며 빼고 있는데 어깨를 두드렸다.
  "그걸 뭣 땜에 억지로 뽑아? 그대로 두면 훨씬 나을 건데."
  명훈이 돌아보니 살살이었다. 무슨 무기를 감추고 있는지 겉보기에는  빈손이었다. 공연히 뻐기
면서 사뭇 취급을 하려 드는 백구두보다  대하기가 좀 만만한 그에게 그곳의  사정을 물어버려고 
명훈이 좀 애매한 우승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러는 형은 빈손 아뉴?"
  "사나운 짐승은 원래 발톱과  이빨을 감추는 법이야, 나중에 보라구.  엉성한 각목 토막 따위하
고는 다를걸."
  스스로 살살이란 별명보다는 '구찌반찌(펀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그답게 허푸
을 떤 살살이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돌개 형님은 왜 안보여?"
  "곧 오실겁니다. 애들 좀더 긁어모아 오시겠다던데요."
  "언제? 상황 끝이 된 뒤에?"
  그 말을 싸움이 임박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명훈이 새삼 긴장하며 물었다.
  "상황 끝이라니요? 그럼 곧 싸움이 시작되는 건가요? 이쪽에는 데모가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상황 끝이라는 거지. 원래 우리가 모인 것은  새끼들이 경무대로 몰려들까봐였어. 그
런데 새끼들은 곧장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버렸거든. 벌써 거기서 두 시간째나 연좌 농성을 벌이
고 있다는 거야, 꿈 잘 꾼 거지."
  "어디 애들인데요?"
  명훈이 혹시 해서 그렇게 물어 보았다.
  "고대 새끼들이야, 부모 잘 만나 대학까지 갔으면 됐지. 뭘  잘났다고 정치까지 아는 척 나서는 
거야, 나서길."
  자신이 등록한 대학은 아직 거리로 나오질  않았다는 데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 명훈이 
물었다.
  "그렇지만 거기서 이쪽으로 몰려올 수도 있잖아요? 까짓 거, 몇발짝이나 된다구."
  "조금 전 전화로 연락해봤는데 그럴 생각까지는 아니 모양이야. 지금 유진오 총장하고 장택상이
가 말리는 중인데. 잘하면 그대로 흩어 질 것도 같다더군."
  "학생들말고 딴사람은 없던가요? 모두 은근히 학생들 편인 것 같던데/"
  아무래도 마음에도 없는 싸움에 휩쓸리기 싫은 명훈은 마지막으로 걱정되는 걸 물어보았다.
  "일없어. 구경뿐이 꽤 몰린 모양이지만 경찰 바리케이트에 막혀  그야말로 구경뿐일 뿐이래. 우
리는 신단장 폼만 나게 해주고 헛다리품이나 팔기 십상인걸."
  부디 그런 살살이의 말대로 되기를 빌며 명훈은 그때껏 각목 더미 쥐위에서  선 도치네 애들에
게 눈길을 돌렸다. 살살이와 명훈의 대화를 귀담고 있었는지 방금 찾아든 각목 토막을 휙휙 소리
나게 휘두르며 서운한 듯 말했다.
  "씨팔, 오늘 팔 좀 푸는가 했더니.영 김새는데."
  "맞아, 새끼들 걸리기만 하면 깨강정을 만들어놓는 건데."
  아이구찌가 곁에서 도치를 거들고 나섰다. 어딘지 모르게 명훈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나약
함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느껴젔다. 깡철이가 없어진 뒤 눈에 띄게 도전적이 되어가고 있는 녀석
이었다. '깡철이에게 두손들었지만, 너에겐 아냐, 너 같은  풋내기는 언젠가 한 번' 명훈은 녀석의 
눈길에서 종종 그런 마음 속의 소리를 읽곤 했다. '오냐, 걸리기만  해봐라' 명훈도 속으로 그렇게 
벼르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지만, 모질고  독한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함만은 떨쳐버리지를 
못했다. 그 섬뜩함이 짜증이 되어 애매한 도치에게로 쏟아졌다.
  "새꺄, 넌 마 그래도 대학 뺏지를 달고 다니는  놈 아냐? 아무리 공이나 차는 곁다리라도 그렇
지. 같은 대학생 처지에 무슨 큰 원수졌다고."
  그러자 도치가 불끈하며 받았다.
  "그 새끼들 고대생이라며? 명훈이 넌 쓸개도 없냐? 뭐 도 아닌 새끼들이 헛폼만 잡고, 그런 새
끼들 한 번 바짝 태워야 해. 즈의가 알면 얼마나  알고, 배웠다면 얼마나 배웠다구. 통 눈꼴 시어
서원."
  무디어 뵈는 외양과는 달리 녀석에게는 소위  일류대학에 대한 건달들이 흔히 품는  까닭 모를 
증오가 꽤나 큰 듯했다. 명훈이 좋은 대학과 지성에 느끼는 무조건의 동경이나 위압감과는 또 다
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얌마, 그렇다고 개들이 네 깔치를 꼬셔갔냐? 혼인길을 막았냐? 아니꼬우면 너도 박 싸매고 공
부해 거기 들어가지."
  그렇게 눙치긴 해도 그 또한 마음속으로는 갑작스레  희미한 동조를 느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명훈이 휩쓸리게 된 앞 뒤 없는  격정과 투지의 밑바닥에는 그때 느꼈던 그런  동조의 감정도 
한몫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배석구는 네시 반이 지나서야 그곳에 이르렀다. 어디서 끌어냈는지 육발이 트럭에 여남은 명의 
시장 똘마니들을 태우고 건물 뜰로 들어서자마자 직계라 할 수 있는  백구두, 살살이, 명훈이부터 
찾았다.
  "어떻게 됐어?"
  살살이의 호들갑스런 부름에 명훈이 애들을 데리고 트럭 쪽으로 가자  배석구는 누구에게랄 것
도 없이 물었다.
  "다 준비됐습니다. 형님, 새끼들 이리로 오기만 하면 골통을 까놓겠어요.:
  백구두가 왼손 소매에 숨긴, 신문지에  감긴 쇠파이프를 비죽이 꺼내 보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배석구가 거기 모인 여남은 명을 하나하나 살피더니 만족한 듯 말했다.
  "좋아, 내 올라갔다 오지."
  그리고 잰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약간 흥분된 표정이었는데 그의 차림 역시 평소
의 정장과는 달리 몸을 움직이기에 간편한 작업복 바지와 점퍼 차림이었다.
  금세라도 모두를 휘몰아 밖으로 뛰어날 것 같던 배석구가 잠시 뒤에 가지고  온 소식은 명훈조
차 실망스러울 만큼 뜻밖이었다.
  "모두 돌아가. 오늘은 아무래도 별일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다. 너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적당
히 흩어져. 대신 내일 다시 여기 모인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학생들  등교 시간까지는 여기 
모두 모여 있어야 해."
  배석구는 그렇게 말해놓고 성난 표정으로  트럭 운전대에 올랐다. 트럭을  타고 온 패거리들이 
우를 적재함으로 다시 뛰어올랐다.
  중간 오야붕들이 여럿 나와 다른 패거리에게도 방금 배석구가 한 것과 비슷한  통고를 해 돌려
보내고 있었다. 아망 가득히 모여 있던 건달들이 투덜거리며 떼를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치 
깡패롤 이름 높은, 동대문 사단의 병동대도 지프에 올라 휑하니 사라지는게 보였다.
  명훈도 약간 맥빠진 기분으로 도치네들과 청계천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
처 구내를 빠져 나오기도전에 누군가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특별단부 소속 단원들은 모두 남아. 특별 단부 소속은 모조리 트럭 앞으로 집합!"
  명훈이 돌아보니 꽤 낯익은 중년이었다. 언젠가  '풍차'에서 만났을 때 배석구까지도 그를 형님
으로 모시며 굽실대던 걸로 보아 동대문 사단의 꽤 서열 높은 오야붕 가운데 하나인 듯했다.
  그러나 그때껏 한 번도 직접적으로그 밑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명훈이라 돌아설까를 망설이고 
있는데 운전석에서 내린 배석구가 손짓으로 그들을 불렀다.
  "무슨 일이까?"
  명훈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이구찌가 뒤따라오며 받았다.
  "식권이라도 나눠주려는 거겠지.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불렀다가  그냥 보내겠
어?"
  도치나 호다이도 그런 아이구찌의 짐작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되돌아서는 기색이 그리 싫어보
이지 않았다. 그러나 명훈은 왠지 꺼림직했다. 간신히 빠져나온 수렁으로 되끌려들어가는 듯한 느
낌에다 까닭모를 불안까지 일었다.
  "모두 트럭에 타. 너희들은 따로 할 일이 있다."
  트럭 가까이에 가자 구 중간오야붕이의 명을 받았는지 배석구가 그렇게 소리쳤다. 명훈처럼 저
만큼 갔다가 되불러온 건달 하나가 배석구에게 투명스럽게 물었다.
  "형, 무슨 일이유?"
  "차에나 타, 가보면 알아. 구단장님도 다 아시는 일이야.:
  "어디로 가는데요?"
  "청계천 4가, 여기 이 형님께서도 필요하신 모양이구"
  그런 배석구에 이어 그 중년이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우님들, 어서 타라구.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단단히 쓰지."
  적재함이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들로 빽빽히 들어찬 트럭이 멈춰선 것은  특별단부 사무실이 있
는 종로 4가 쪽이었다. 트럭이 천일백화점 길 위에  설때만 해도 명훈은 단부사무실로 모이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아우님들, 저 다방에서 차나 한잔 하고 계시오."
  운전석에 내린 그 중간 오야붕이 차안에서 내린 사람들을 그 옆다방으로 끌어들였다. 대지인지 
하는 이름이었는데, 명훈도 전에 배석구를 만나러 왔다가 한두번 들른 적이 있는 다방이었다.
  험상궃은 인상에다 손에 붕대까지 감고 있는 젊은이들이 이삼십 명 떼를 지어 몰려들어가자 다
방 안은 갑작스런 긴장과 동요에 휩싸였다. 풋내기 레지 아가씨들은 말할 것 없고, 그 방면으로는 
제법 이력이 났다는 마담까지도 달라진 낯빛으로 그들을  살폈다. 손님 중에서도 마음 약한 이는 
하던 이야기를 덜 마치고 일어서기까지 했다. 긴한 일로 꼭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거나 하던 애
기가 중요한 것이라 몇몇 남아 있는 이들도 틈틈히 불안한 눈길을 그 때아닌 손님들 쪽으로 보냈
다.
  "야, 여기 차 한잔씩 돌려. 그리고 주인은 어디갔지?"
  앞장서 들어가 카운터 곁에 자리를 잡은 두꺼비(그게 그때서야 기억해낸 중간 오야붕의 별명이
었다.)가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릴 질렀다. 트럭에서 내린 주먹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일 때와는 판
아하게 다른 말투와 태도였다.
  "주인 아저씨는 조금 전에 볼일이 있어 나가셨어요. 차아 드리죠. 드리고 말고. 얘들아, 빨리 차 
한잔씩 올려라."
  마담 여자가 억지 아양을 떨며 대꾸하고 두꺼비 옆에 앉았다. 두꺼비가 그런 그녀를 거칠게 뿌
리치며 한층 엄포 섞인 목소리를 냈다.
  "떨어져 앉아! 주인놈이 버르장머리가 없으니 마담년까지  기어붙는 거야 뭐야? 곱게 보아주려
니 영 싸가지가 없어."
  얼결에 다방 안까지 쓸려 들어갔으나 아직 거기까지 온 까닭을 짐작 하지 못 해 그쪽을 바라보
고 있던 명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야? 마담한테 가오 세우려고 사람을 예까지 끌고 왔나?"
  그러자 아이구찌가 옆에서 낼름 그 말을 받았다. 
  "마담 한테가 아니 것 같은데, 아마  다방 주인이 상납을 제대로 않는 모양이야.  여긴 저 형님 
나와 있는데 주인 새끼가 뭘 믿고 까불어?"
  그 말로 미루어 아이구찌도 줄곧 두꺼비쪽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명훈이 듣기에도 아이구
찌네 해설은 그러는듯 했다. 그런 종류의 시위는 뒷골목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그땟껏 마음 한 구석에서 남아 있던  불안에서 헤어났다. 데모 학생들 과 나
투극을 벌이는 일만 아니라면 굳이 빠져나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진작부터 두꺼비
의 그런 속셈을 알고 있는 녀석도 있었던지, 몇몇은 두꺼비보다 한 술 더 설쳐댔다.
  "이 쌍년아 누깔이 삐었나? 왜 남의 말을 밟고 지랄이야?"  레지 아가씨가 지나가는 통로에 슬
며시 발을 내놓고 있다가 발 등을 밟히자 그렇게 욕설을 퍼부어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야, 누
가 네 뒷물맛 같은 커피 가져오랬어? 위티(위스키)가져와.  위티" 그렇게 드러내놓고 행패를 부리
는 녀석도 있었다.
  "별일도 아니 것 같은데 적당히 뜨지. 우리 골목도 오늘 하루종일 비워둔 셈인데."
  한차례 소동이 가라앉은 뒤 끼리끼리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걸 보고 명훈이 도치에게 
말했다. 두꺼비 때문에 문득 생각난 것이지만 명훈네가  자리잡은 골목도 그 무렵 상납이 시원치 
못했다. 원래가 신통치않은 골목인 데다, 악착을 떨던  깡철이가 없어지자, 이따금씩 들르는 배석
구가 보기가 민망할 만큼 걷히는 돈이 적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얻어 쓴 등록금만큼이라도 배석
구에게 빨리 되돌려주고 싶었는데 그게 영 안 되었다.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까 단부 사무실로 한패가 들어가는 걸 보니 여간 험학한  표정
들이 아니었어. 달이 뭐가 있긴 해도 있는 모양이야."
  도치가 왠지 축 처진 목소리로 명훈의 말을 받았다. 호다이가 아는 성스럽게 나섰다.
  "혹시 거, 옛날에 그랬다는 명동을 확 쓸어버리는 거 아닐까?"
  "머저리 같은 소리 하구 자빠졌네. 새꺄, 요새 명동파가 어딨어. 명동파가? 우리가 청계천을 건
너가 한 골목을 꼽사리 껴도 못 본척하고 있는데 그네들은 뭣 땜에 깨? 그것도  광화문에서 바로 
쳐들어가지 않고.4가까지 끌고 와 뜸을 들인 뒤에."
  아이구찌가 그렇게 쏘아붙였다. 아이구찌는 대가  약한 호다이를 아예 제 똘마니  다루듯 했다. 
깡철이가 없어져버린 뒤로는 까닭 없이 아이구찌에게 눌려 지내는 호다이가 머쓱해져서 어물거렸
다.
  "그럼 뭐야? 데모대는 오늘 안 깬다며?"
  "네가 어떻게 알아? 아직 고대 새끼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있다지 않아?"
  아이구찌가 다시 그렇게 쏘아붙여놓고 명훈을 향했다.
  "명훈이 너 뭐 바쁜 일 있어? 바쁘면 가봐. 여기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얘네들 데리고 어떻
게 해볼 테니까."
  겉보기에는 제법 생각해주는 것 같지만 속셈은 뻔했다.  애들을 데리고 명훈을 대신해 공을 세
워 돌개의 눈에 들려는 수작이었다. 그게 명훈을 한층 강하게 그 자리에 붙들어놓았다. 자신이 버
터내고 있는 작은 오야붕 자리가 흔들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배석구의 눈 밖에 나는 게 싫었다.
  "아냐, 돌개 형님이 올 때까지 있겠어."
  명훈은 그렇게 대답하고 그 무렵 들어 무쩍 는 담배를 빼어물었다.
 "야, 좀 있다가 저녁들이나 먹고 가라구. 한턱 단단히 살 테니까."
  명훈이말고도 그만 돌아가려고 일어선 녀석들이 있었던지 두꺼비가 다방 구석까지  다 들릴 만
큼 큰 소리로 그들을 말렸다. 그때 마침 다방 입구로 배석구가 들어왔다.
  "형님, 정말 무슨 일 있어요? 간다는 바쁜 모양인데."
  다바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명훈 일행을 찾아내고 다가오는 배석구에게 아이구찌가 몸을 일으켜 
차렷 자세를 하며 물었다. 할 일이 궁금하다기보다는  빠져나가려는 명훈을 걸고 접어지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안돼, 조금만 더 기다려라."
  명훈이 무어라고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배석구가  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시 방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온다,와."
  명훈이 보니 경위 계급장을 단 경찰관이었다. 아이구찌가 내준 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려던 배석
구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직이 소리쳤다.
  "왔다, 모두 일어나!"
  카운터 쪽에 앉아 여전히 애매한 마담에게 으르렁대고 있던 두꺼비도  마담을 버려두고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나가. 모두 거리로 나가!"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다방 안에  있던 패거리들이 대부분들이 누가 오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점이었다.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 입구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들에게 떠밀다시피 해 얼결
에 다방을 나온 명훈이 그때껏 곁에 있는 배석구에게 물었다.
  "온다니, 누가 온단 말입니까?"
  "누군 누구야? 시건방진 고대 짜식들이지, 그런데 넌 왜 아무 무기가 없어? 맨 주먹으로 뭐 할 
거야?"
  배석구가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이미 어두워지는 주위를 살피다가 무얼 찾았는지 가로
수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가로수에는 손에 잡고 휘두리기에 알맞은 각목으로 울이 쳐저 있었다.
  "이걸 써, 잭나이프는 여기선 쓸모 없어."
  배석구가 가로수 울타리를 부수어 각목 하나를 빼내면서 말했다.기어이 하는 기분에 아뜩해 있
던 명훈은 기계적으로  그 각목을 받았다. 그런 명훈의 표정이 이상했던 배석구가 설명조가 되어 
덧붙였다.
  "저런 빨갱이 앞잡이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야. 해방 직후에도 그랬다구. 경찰, 법 어쩌구 하며 
막으려 들다가는 되말리기 십상이지. 우리 반공청년단이란  게 원래가 저런 빨갱이 때려잡으려고 
만든 것이니까, 이건 아주 합법적인 투쟁이야, 뒷일 생각할  것 없이 박살을 내놓으라구."
  그리고는 바쁜 듯 길 건너  단부 사무실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미처  그가 길을 건너기 전에 
그쪽에서도 수십명의 단우너들이 큰길 위로 쏟아져 나왔다.  쇠파이프. 곤봉, 갈퀴 따위에다 반발 
길이로 자른 쇄사슬까지 절그럭거리는 것으로 보아 한층 준비에 치밀한 것으로 짐작했다.
  "길가에 나와 섰으면 어떻게 해? 골목으로 몸을 감춰!"
  주군가가 무리지어 몰려 있는 단원들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내몰린 듯 모두 가까운 
골목에 몸을 숨겼다. 
  그때로부터 오래잖아 몇 대의 경찰  백차를 앞세우고 데모대의 행렬이  다가왔다. 경찰 백차가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게 이상했으나 뒤이어  들어오는 그들의 구호소리가 곧 명훈을  야릇한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다.
  "민주 역적 몰아내자!"
  "기성 세대는 각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그런 외침과 함께,
  "경찰은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하지 마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같은 구호도 섞여 있었다.
  점점 가까워오는 그들을 보며 명훈은 먼저 습관적인  부러움에 빠져 있었다. 그 두려운 정부와 
경찰에 대해 그렇게도 당당하게 맞설수 있는 그들의 신분이 그 어떤 특권보다도  더 눈부시게 느
껴지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억제당하고 뒤틀려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 성
향은 멀지 않은 변혁의 예감과 더불어 그런 행렬에 섞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까닭 모를 불안과 
슬픔까지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런 피동적이고 방어적인 감정도 잠시, 명훈은 곧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기분으로 바뀌
었다, 누구의 부추김이나 충동질에 의해서가 아니, 순수한 감정의 전환이었다. '민주'란 말에 귀에 
거슬리고,'지식인'이란 말이 아니꼬워지며, '학원'이란 말이 시건방지게 들리면서 명훈은 조금씩 그 
목소리에 주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의를  길러갔다. 어둑한 골목 모퉁이에  함께 붙어선 패거리의 
이죽거림이 그런 명훈을 한층 자극했다.
  "새끼, 민주 좋아하네."
  "지식인은 몽둥이가 튀나?"
  "학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즈네 학교가 무슨 경무대나 된다고."
  그 밖에, 의식 표면으로 뚜렷이 떠오를 것은 아니었지만 , 반공과 연결된 민주란  말에 대한 음
흉한 복수심도 명훈을 충동질했다. 너희 민주가 쥐어준  반공의 몽둥이로 너의들 민주를 박살 내
겠다. 불현듯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명훈의 의식 깊은 곳에는 그런 조소까지 까려 있었다.
  "패싸움의 요령은 기세야, 먼저 앞장 선 놈부터 인정 사정없이 조져.  몇 놈만 재워버리면 저런 
학삐리(학생)새끼들은 되돌아가서 좃 빠지게 튈 테니까."
  험상궃게 생긴 중간 오야붕 하나가 소매에서 쇠파이프를 꺼내 쥐며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엄포 
삼아 덧붙였다.
  "절대로 저것들에게 등짝을 보이지 말아! 돌아서  도망치는 새끼가 있으면 그 새끼부터 꼴통을   
바숴놀 거야!"
  그때 경찰 백차가 천천히 큰 길을 지나가고 뒤따라 데모대의 선두가 길을 매우듯 휩쓸고 왔다.
  "처랴!"
  "죽여!"
   그런 외침과 함께 큰길 건너편 골목에서 열명의 단원들이 데모대의 선두를 덮쳤다. 명훈은 잠
시 그 싸움의 양상을 지켜보고 싶었으나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나가!"
  누군가의 그런 고함 소리에 내몰린 듯 같이 있던 단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고, 명훈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들 속에 섞여 각목을 휘두르며 뛰었다. 마음속으로 키워온 적개심이나 분노와는 
거의 무관한 집단 광기 속으로의 함몰이었다.
  그런 집단 광기로 의식이 마비된 것인지, 아니면  난생 처음 겪는 대규모의 마구잡이 패싸움에 
질려 순간적인 심신 상실의 상태에 빠진 탓인지, 그로부터 몇  분 간은 명훈의 기억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광포한 본능에 몸을 맡긴 채 휘두르고  치고 나간 사실만이 명훈의 기억에 남
은 전부였다.
  그러다가 명훈에 퍼뜩 정신이 든 것은 첫번째 부딪침이 가름난 직후의 짧은 정적 때였다. 기세
를 돋우기 위한 허세에 찬 함성, 악에 받친 고함  소리, 소름 끼치는 외마디비명, 그런 것들이 갑
자기 딱 멈추어지자 무슨 찬바람 같은 것이 머리속을 불어가며 잠시 마비되어  있던 의식이 일시
에 되살아났다.
  명훈은 섬뜩한 느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길바닥에  허옇게 쓰러진 동료들을 남겨두고 데모
대의 선두는 허둥지둥 흩어지는 중이었고, 그런 그들의 뒤를 턱없이 독이 오를 단원 몇이 뒤쪼증
며 악착을 떨고 이었다.
  "뭐 하는 거야? 그대로 밀어붙여!"
  누군가가 앞으로 달려나가며 야구 방망이로 명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충격과 자기 편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순간적으로 부풀어난 격정적인 심리가 명훈을 다시 앞으로 내닫게 했다. 실은 
정말로 정적이 있었던게 아니라 잠시 명훈의 청각이  닫혀 있을 뿐이었던지, 이내 이쪽저쪽 함성
과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무거운 신음이 귓속 가득 흘러들었다.
  명훈이 어지럽고 사나운 꿈과 같은 집단 광기에서 다시 깨어난 것은 피  흐르는 머리통을 싸쥐
고 비틀거리는 대학생의 등짝을 각목으로 쳐 주저앉힌 뒤였다.
  "억"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두어 발 앞서 기세 좋게 달려나가기전 하나가 앞으로 폭삭 고꾸라
졌다. 그때쯤 명훈의 발 앞에도  떨여져 부서지는 것을 보고서야 명훈은  그 단원을 쓰러트린 게  
시멘트벽돌이란 걸 알았다.
  앞장선 학생들이 당한 걸 전해들은 데모대의 후미가 가까운 공사장에서  날라온 것인지 시멘트 
벽돌이 우박처럼 단원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돌아서지마 마라, 그대로 밀어 붙여!"
  "튀는 놈은 죽어! 어서 나가!"
  군데군데서 중간 오야붕들이 그렇게 악을 썼으나 그때  이미 단원들의 공격은 끝나 있었다. 이
리저리 몸을 비틀어 날아오는 벽돌을 피할  뿐 앞으로 내닫는  단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벽
돌이 무서운 것보다는 편싸움의 정석대로 선두를 철저하게 때려 부셨는데도  허물어지지 않고 되
밀고 들어오는 학생들의 뜻 아니한 투혼이 준 충격 때문인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가로수 울타리 각목으로  무장한 반격의 제 2파가 밀려오자  단원들은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조금 전의 그 좋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모두 낯빛까지 질려 손에  든 무기를 내던
지고 사방으로 흩어져 냅다 뛰기 시작했다.
  "참말로 무섭대. 따지고 보면 머릿수로도 우리가 불리한 건 아니데. 각목을 들고 덤빈 학생들을 
보면 말이야. 뭣 때문에 그렇게 무서웠을까? 나는 달아나는데 오금이 저려 애를 먹었어."
  아주 오래 뒤에 안광에서 다시 만나게 된 날치는 그때 일을 추억하며 명훈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실은 명훈에게도 그때 경험한 공포의 원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을 때였다. 그날 그
는 달아나는 패거리에 섞여 종로 쪽으로 뛴 두, 거기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골목길을 돌아 자취
방으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법 바지까지 축축할 만큼 속옷이 쫓길 때 지린 
오줌에 젖어 있었다.
 


    제 34장 피의 화요일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
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 대학의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 우
리(의결의)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을 엄숙히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
려는 구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오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
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이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해설픈 것임을 가르쳐준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가 적색 전재
와의 과감한 투쟁에 계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 기간은 자유이다. 우리에게서 자유가 상실되었다고 있다는 것을 , 아니 송두리
째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이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
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풍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가장한  가부장적 전제 권
력의 하수인으로 발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인 공리인  선거권마져 권력 마수 앞에 농단 당
했다. 언론, 출판, 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날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
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사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벌거벗은 나상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한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물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의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가. 보라, 현
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에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
렬한 사람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그날 서울의 대학교들 중 가에서 가장 먼저 거리로 뛰어나온 서울대학교의 선언문은 대강 그렇
게 되어 있다. 출저에 따라 약간의 이동이 있고, 문장의 흐름이나  어휘의 선택은 거침도 눈에 띄
지만, 그 하루 전날 발표된 고대 선언문이나 그 밖의 대학 선언문도 그런  접에서 비슷해서, 그들 
대학생들의 데모 계획이 여러 날에 걸친 것임을  쉽게 짐작할수 있게 한다, 실제로 서울대에서는 
그들이 지향할 노선이나 투쟁의 한계에 대한 토론까지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역량이 4월 19일 그 하루에 폭발적으로 집결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날 자행된 
깡패들의 고대생 습격 때문이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날 아침 조간 신문의 1면 
머리를 시커멓게 메운 고대생 피습 기사는 학생들뿐아니라 시민들까지도 격분시키고도 남을 만했
다. 특히 '고대생 1명 피살?' 이란 미확인 유혈의 각오까지 다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 판 잘 맞아 떨어진 역사의 복권이건 도도한 민중사의 한필연이건, 또는 반도의 철권
에 좌절되기는 했어도 여태껏 진행중인  미완의 혁명이건, 감정의 과장과  정신적인 허영에 들떠 
용캐 손애 넣은 것까지도 되잃게 된 유사혁명이건, 흔히  '피의 화요일'이라 물리는 그 하루는 우
리에게 그저 감동적임을 넘어 경이롭고 전율스럽기까지 하다.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집단 광기와도 흡사한 부정과 불의에  대한 일치된 분노이며, 종교의 
어떤 단계에서 나타나는 맹목적인 순교열과도 같은 자유와 민주주의 열정이다. 특히 어머니가 유
서까지 남기고 거리로 뛰어나가 산화한 어린 여중생의 그  광기와 열정의 한 찬연한 결정 느낌마
져 준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무정선거(를 항의하는)데모로 싸우
겠습니다. 지금 저의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가는 저를 책하지 마십시요. 우리들이 아니면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
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
도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하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을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그런 유서의 말고 정신은 이미 열네 살 난 여중 2년생의 그것은 아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마
니아에 들린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들린'정신이 연출한 죽음의 미학은  경무대 앞에서 총상을 입은 한  서울대생에게도 펼쳐 
다. 그날 그는 복부에 총탄 세발을 맞아 출혈이 심한 상태에서  수도육군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 곁에는 고등학생 여덟명이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군의관은 가장 위독한 그부
터 수술하려 했으나, 그는 '제발 저 어린  학생들부터 살려달라"며 끝내 수술을 사양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군의관은 고등학생들부터 먼저 돌본 뒤 그를 치료하려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 
사이 상태가 악화된 그는 다음 날새벽 여섯시경 군의관와 간호장교들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날의 상세한 경과를 여기서 다 얘기하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꼭 필
요한 것도 아니다. 이 장은 명훈에게  바쳐진 것이며, 불행히도 그는 그날까지  '들린'정시의 편에 
서 있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이러니컬한 변신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거리에 나설 때까지 개략적인 경과
가 필요한데, 그것은 당시 대학 2년생으로 그 휘황한  피의 재전에 참여했던 어떤 언론인의 기록
을 빌리기로 한다.
  <오전 9시 20분 문리대생 2백명이 교문을 나섰다.(고등학생으로는 이미 한 시간 전에 대광고등
학교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문리대생이  데모에 나섰다. 바로 뒤이어  법대.약대. 수의대.치대생과 
나머지 문리대생이 데모에 나섰다,  모두 3천여명의 서울대 데모대는  우박처럼 돌팔매를 퍼부어 
쉽사리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고 태평로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같은 시각 동성고생 1천여명이  데모에 나섰고 9시 30분 서울사대  1천 명과 상대 2천명, 
10시 고려대 4천명, 10시 20분 건국대 2천명이 각각 교문을 나섰다.
  10시 30분, 서울대 문리대, 법대,미대 등의 데모대가 먼저 구괴 앞에 도착해고,  20분 뒤 서울대 
사대.상대, 건국대가 뒤따라 국회 앞에 도착하였다.
  오전 11시. 동국대 2천명. 성균관대 3천 명이 교문을  나섰다. 동국대 데모대는 11시 40분 의사
당 앞에 이르자 "동대는 경무대로 가자" 고  외치면서 중앙청 쪽으로 향해 나갔다. 그  바로 뒤를 
서울대 사대와 동성고 데모대가 합류하였다.
  이들이 세종로를 지나면서 새로운 구호가 데모 대열 속에서 터져나왔다. "이승만 물러가라!" "독
재 정권은 물러가라!" 당초 의사당을 목표로 삼았던 부정 선거 항의 대모의 대열이 어느새 경무대
르 표적으로 하는 혁명의 대열로 바뀌었다. 경무대를 향한 데모대의 선두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
씨로 '동국 대학교'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낮 12시, 연세대 5천명, 홍익대 1천명이  데모대에 나섰고, 같은  시각 중앙대 4천명은 한강 인
도교를 건넜다. 이즈음 경기대, 외국어대, 건국대, 단국대, 국학대, 서라벌예술대가 데모에 나섰고, 
서울대 의대, 세브란스 의대, 카톨릭  의대는 흰 가운 차림으로  데모에 나섰다. 숙명여대와 일부 
여대생도 데모 대열에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마치 장애물 경주를 하듯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며 도심지를 치달렸다. 연도의 시민
들이 무더기로 데모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정오 무렵이 되자 동대문에서 신촌까지, 서울역에서 중
앙청 앞까지 온통 데모에 대열로 뒤덮여버렸다.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남 북
  거리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을 부릅쥔 채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
  아, 신화같이
  나타난 다비데군들 
  신인 신동문의 노래처럼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리려는 '다비데군'의  행진은 시간이 갈
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한꺼번에 곳곳에서 대모가 일어나자 경찰의 저지선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경찰 수뇌부는 경
무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경찰 병력을 속속 효자동 방면으로 투입시켰다.
  내무장관 홍진기를 비롯한 각료들은 오전 10시께부터 경무대에 모여 경무대  경호 책임자 곽영
주, 치안국장 조인구 등 고위 경찰 간부들과 함께 대책을 숙의했다.
  낮 12시 20분, 경무대를 목표롤 삼은 동국대 데모대가  중앙청 아프이 1차 저지선과 해무청 앞
의 2차 저지선을 뚫고 국민대 앞의 3차 저지선까지 진출해을 때 무장 헌병 1백명을 실은 군 트럭 
4대가 데모대를 뚫고 효자동 쪽으로 사라졌다.
  오후 1시께, 시내 대부분의 중고교에는 학생들이 집단으로 데모에 나설 것을 우려해 오전 수업
을 마치고 서둘어 하교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강문고, 경기고, 경성전기공고 학생들은 교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교생이 데모에 뛰어들었다. 다른 고교생과 일부 중학생들도 떼를 지어 데모에 
합류하였다. 이때쯤 서울 시내 데모 군중의 숫자는 10만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오휴 1시 5분, 데모대 선두는 효자동 전차 종점까지 진출했고, 중앙청  쪽에서는 후속 데모대가 
꾸역꾸역 밀어닥쳐싿.
  1시 30분, 데모대 선두의 몇몇 학생이  데모 저지용으로 세워둔 소방차 3대에 올라탔다.  그 중 
한 학생이 1대를 우선, 경무대 언덕길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1천명이 소방차 뒤를 바짝 따랐다. 
경찰은 경무대 정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길 중간 지점에 최후 저지선을 펴놓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 소방차를 앞세운 데모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미터로 압축되었을 때, 경찰의 총
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4.19피의 대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삽시간에 경무대 어귀는 아수라장이 되고 길 위에는 7,8구의 세체가 나뒹굴렀다. 경찰은 필사적
으로 달아나는 데모대를 뒤쫓아 사정없이 구타하면서 끌고 갔다.
  경찰이 무차별 총격에 쫒긴 데모대는 잠시 후 동국대생을 선두로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경무대 
어귀로 육박하였다. 경찰은 거듭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쫓기던 데모대 가운데 동성고교 등 고교생들은 교모의 가죽 끈을 턱을 걸고 경무대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죽음을 각오한 이들 고교생의 대열에 새오 도착한 연세대 데모대가 합류하였다. 경찰은 
또 한차례 미친 듯 총격을 퍼부었다.>
  버스의 운행 기피로 동대문에서 걷기 시작한  명훈과 김형이 종로로 접어든 것은  벌써 경무대 
앞 총격의 소문이 거기까지 퍼진 뒤였다.
  뒤늦게 데모에 합세하려는 중고등학생들과 어느새 구경꾼 이상으로 격양된 일반 시민들로 술렁
이는 거리를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전날의 기억으로 섬뜩해하면서 4가를 지난 지 얼마 안 돼 두
두둑, 하는 총소리가 명훈의 귀에도 희미하게 들렸다.
  "총을 쏘는 데도 물러나지 않는단 말이지. 피를 쏟고 죽으면서도."
  총격의 소식을 듣고 난 뒤부터 얼굴이 굳어진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김형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
렸다. 그런 김형의 변화가 간밤 내내 악몽에 쫓긴 탓으로 흐릿한 명훈의 의식에 야릇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전날 밤 명훈이 자취방으로 돌아간 것은 10시께였다. 김형은 부대로 출근했고, 황은 아직 돌
아오지 않아 텅 방안에서 명훈은 한동안 자신이 한 일과 그제서야 불길한  조짐으로 다가오는 사
회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막연하게 자신이 잘못 편을 갈라선 것  같다는 불안뿐, 상황에 
대해선 뚜렷한 인식이나 구체적인 뉘우침 같은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무엇일까? 무슨 일이까'
  명훈은 벌써 달포 전부터 습관이  된 물움을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황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솔직하게 방금 진행되고 있는 사회에 음험한 움직임에 대해 묻고 똑
똑똑하게 알아둘 작정이었다. 필요하면 그 몇 달 자신이 해온  일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고대생 
습격까지도 고백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황은 통금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들어부터  잦은 황의 외박이었다. 
명훈은 통금 사이렌이 분 뒤에야 황을 기다리기를 단념했다. 술이라도  한 두 병 사두지 않은 걸 
후회하며 방 한구석에 밀쳐저 있던 이불을 되펼치는데 그 안에서 펄럭 하고 유인물 한 장이 나왔
다. 그 밖에도 무언가를 쓰다 만 시험지 몇 장이 구겨진  채로 요 틈에서 나오는 걸로 미루어 보
아 그 유인물을 참고로 무언가를 쓰다가 나간 듯 했다.
  무심코 그걸 집어든 명훈은 그 맨 끄트머리에 씌여진 '고려대하교  학생 일동'이란 글자에 화들
짝 놀랐다. 갑자기 거기 씌어진  내용이 자신에게 온 고대생들의 편디  같은 느낌이 들어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제의 최후적 발악은 바아
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 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표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하지 못하고 대 사회 투쟁에 참여하야  하는 오늘의 20
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바관하며.
  존경하는 학생 동지 여러분!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 항일 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직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사수
하기 위하여 멸공 전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 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들어야 겠다, 우리들 청년 학도만이 진정한 민주 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
하여 총궐기하자.
                              4293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일동
  읽기를 마친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그들을 습격한 패거리의 
하나인 줄 그새 알아차린 고대생들이 보낸 협박장은  아닌 까닭이었다. 그러나 거기 씌여진 글이 
바로 그들 고대생을 거리로 이끌어낸 대의라는 걸 알자 이번에는 또 다른 흥미가 일어 다시 한구
절 한구절 음미하며 읽어나기 시작했다. 그전과는 달리 조금실감은 났지만, 아직도 무언가 과장되
어 있고 들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버릴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런 추상적인 적어도 명훈에게 그
렇게 느껴졌다. 이유만으로는 위혐을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나오는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 가지 
그들이 주장이 반드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사회 현상 같았지만은 않다는 것은 그에게도 그게 막
연한 대로 어떤 섬뜩함에 빠져들게 할 뿐이었다.
  그 바람에 그날 밤 명훈의 꿈자리는 어지럽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서너 번이나 가ㅜ이에 눌려 
잠에서 깨어났다가 제법 창문이 희붐해진 뒤에야 제대로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잠도 오래가
지는 못했다. 두어 시간이나 잤을까, 그날따라 일찍 교대하고 퇴근한 김형이  또 그놈의 회화레코
드를 틀어댄 탓이었다.
  "오늘도 학교에 안 가?"
  레코드 소리에 이미 깊은 잠은 글렀다 싶은 데다 부대에서 가져온 깡통 소시지를 얇게 썰어 굽
는 냄새에 더 누워 있기를 포기한 명훈이 짜증을 감추며  김형에게 물었다. 물 묻은 손을 감추며 
들어오던 김형이 잘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 일어났구나, 자더라니 아침은 먹고 자."
  그리고 지나가는 소리로 명훈의 물음에 대한 답을 덧붙였다.
  "가봐야 뭘 해? 어차피 공부는 않고 데모할 궁리들이나 할 텐데."
  "왜, 형네 학교도 나선데? 오늘 나서기로 했어?"
 이야기가 데모 쪽으로 돌자 명훈은 대뜸 긴장해 물었다.
  "아마 틀림없을걸, 이걸 봐. 이걸 보고 가만히 있겠어?"
  김형이 그 말과 함께 주먹만한  활자로 시커먼 조간 신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고대생 귀교길 
피습'이란 글자가 가슴 철렁하게 두 눈을  찔러왔다. 명훈은 얼른 신문을 집어 기사를  읽어 보았
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으로는 한 순간의 충돌이었을 뿐인 그 일이 신문 한면을 넘
쳐나는 대사건으로 변해 있었다. 그게 엄청나고 심각한  것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그 전날 골목길
로 쫓길 때 어럼풋이 느끼고는 이었지만, 막상 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된 걸 보니 자기가 가담했
던 일과 신문에 난 사건과는 전혀 별개인 것 처럼 느껴졌다.
  "이게 이렇게 큰 일인가."
  신문을 다 읽은 명훈이 그렇게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마침 밥 냄비를 방안으로 들여놓던 김혀
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큰일이지. 자유당 정권이 근래 한 일 중에서 가장 졸렬하면서도  엄청난 짓이지. 아마 오늘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걸."
  표정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전에 없이 무거웠다.
  그런 김형에게 명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어째서 그럴까? 학생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면그  반공청년단원들은 정부를 지지
하는 세력으로 볼 수 있을 테고. 그래서 서로 의견이 다른 두 세력이 충돌한 것뿐인데."
  그러자 김형이 잠시 명훈의 얼굴을 가만히 건너보다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눈에는 이번 일이 그렇게  비쳐? 학생과 깡패들이 그렇게 한  정권의 지지파와 반대파로만 
간단하게 분류되느냐구."
  "그럼 뭐 어때."
  "첫째는 두 집단의 의지부터 다르지. 하나는 자기들의 양심과 지성에 따를 자발적인 것이고, 다
른 하나는 현실적인 이익에 따른 비자발적인 동원이니까. 아니 그런저런 것 따질 것도 없어. 정의
의 문제만으로도 쉽게 구분되지. 정의의 소재는 거의 논의할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자명하니까."
  김형은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귀찮아진 듯 말을 서둘렀다.
  "어쨌든 권력의 특징은 합법적인 폭력을 보유했다는 거야. 예컨데  경찰이나 군대 같은, 그리고 
권력이 그것들에만 의지할 때는 사람들의 저항도 대개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지. 그런데 자유당 
정권은 비합리적인 폭력, 곧 깡패들을 동원헤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저항을 유발시켰어. 두고 봐. 
오늘은 마산 사태보다 더 큰일이 터질걸."
  그리고는  두이어 석쇠에 구운 소시지와 김치 보시기를 방안으로 들였다.
  잠시 홀로만의 생각에 빠져든 김형의 수고에 의례적인 공치사를 하는 것도 잊고 기계적으로 숟
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모르면서 숟갈질을 하다가 다시 불쑥 
물었다.
  "그럼 그토록 자명하게 정의가 학생들 쪽에 있다면 왜 형은 가만히 있어? 함께 거리로 나가 싸
워야 하잖아?"
  "음. 그거."
  김형의 표정에 가벼운 곤혹이 스치더니 애써 꾸민 듯한 담담함으로 말을 이었다.
  "정의의 소재가 어느 편에 있다는 것과 내가 거기 가담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다르지. 행동한
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짓이니까."
김  "어제 데모대의 플랭카드를 보니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라는 게 있던데 혹
시 그거 형같은 사람에게 하는 소리 아냐? 학생들이 지금 떠드는 민주니 자유니 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몰라도, 그게 옳은 게 확실하다면 당연히 가담해야 하는 게 아니냐구."
  명훈이 진작부터 김형에게 묻고 싶어던 것을 불쑥  말했다. 황의 열정을 김형이 냉담하게 바라
보며 빈정거릴 때마다 그가 어떤 기본적인 원칙에 문제에서 황에 대한 우월을  유지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게 은연중에 명훈에게 힘이 되어주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싶자 갑자긋
런 실망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었다. 
  김형도 그런 명훈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유달리  맛이 있어 뵈는 그 특유의 
숟가락질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명훈을 바라보다가 이내 숟갈을 놓고 말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르지. 뻔히 알면서도 그 싸움에 휩쓸려들었다가 입게 될 손해가 섭나 몸을 사
리는지도. 특히 어렵게 손에 넣은 미국 유학의 기회가 쓸데없는 객기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명훈에게 오히려 송구스런 느낌이 들  만큼 진지한 어조였다. 뒤이어  어둡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에 까닭 모르게 가슴이 철렁해진 명훈이 황급하게 부인했다.
  "아냐, 형이 비겁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잖아.  실은 형의 마음속을 
듣고 싶어 해 본 소리야. 형이 황형을 몰아부칠 때 거기에는 어떤 문제에서의 자신 같은 게 엿보
였다. 틀림없이 형이 한 발 물러나 있어서  좋은 까닭이 있다는 것 같았어. 나는 바로  그걸 듣고 
싶어."
  그리고 명훈은 자신이 바로 그 고대생을 습격한 패거리 중에  하나였음을 고백하려다 그만두었
다. 어떤 계산보다는 감히 그걸 밝힐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명훈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김형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주섬주
섬 밥상을 챙기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명훈의 간곡한 눈길에 못 이기는 척 한마디 했다.
  "자신있는것 그런게 있지. 하지만 그건 예측의 부분이었어. 우리  사회의 이런 움직임이 몰아올 
미래에 대한 비관적 예측. 따지고 보면 그보다도 더 교활한 자기 방어도 없지.  비관하기 위한 비
관으로 얽은 결정론 뒤에 숨으려는 수작인지도 몰라.  제국이니 변경이니 하는 있지도 않은 개념
으로 한 껏 과징스레 비관한 상황 인식에 대해."
  그러다가 무엇 때문인지 말을 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오전 내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 생각만 골몰해 시
간을 보냈다. 어찌 된 셈인지 그날 김형은 그 어느 때보다 회화 공부에 열심이었다. 지리하리만큼 
같은 레코드를 반복해 듣고 또 따라서 발음했다.
  하지만 그도 마음은 명훈과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을 학생 데모에 쏠려 있었음에 틀
림없다. 산꼭대기 동네 사람들까지 거리에  데모 소식에 술렁거리게 된  점심나절이 되자 김형은 
거의 반발적인 동작으로 축음기를 끄고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도 나가보지 . 어쩌면 우리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감격적인 사건의 현장을 직접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명훈도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무언지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멀리 시내 중심가에서 차츰차
츰 번져나오고 있는 어떤 심각하고도 끔직한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강한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세종로에 가까워지면서 거리를 짓누르고 있는 위기감은  한층 강렬하게 의식을 휘져어왔다. 이
제는 학생과 거의 한덩어리가 되어 몰려 다니는 시민들의 험학한 기세나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거리를 질주하는 구급차도 그랬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여학생들이나 갑자
기 새로 나타난 듯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연출하는 분위기였다 물빠께스를 들고 나와 낯선 학생들
의 소매를 끌 듯 스스럼없이 바가지를 내미는 여학생들이나 치마폭에 돌을 싸서 데모대에게 날려
주는 아주머니들 그 누구에게서도 이성으로서  흥미나 생활에 찌든 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앙칼진 열기 같은 것이 또한 짐작하기 힘든  대파국의 예감을 강요하
는 것이었다.
  그 같은 사태가 변혁에 대한 기대나 들뜸보다 파국이나 위기에 예감으로 명훈에게  와 닿는 게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 변혁에 대한 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비록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전날까지 그가 가담했던 것은 그 변혁을 저지하려는 세력쪽이었다. 거기다가 아버지의 시대가 남
긴 어두운 기억까지 거들어 변혁의 예감은 그대로  파국이나 위기의 불안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변혁과 진보 쪽에 가담했던 아버지도 끝내 이긴 자로 살아남지는 못했다.
  두둑두둑, 하고 좀 전보다 훨씬  가까운데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시민과  학생들이 한 덩어리가 
된 데모대가 밀려왔다. 그들의 악에 받힌 고함과 두 눈에서 번들거리는 광기가 명훈을 암담한 무
력감에서 끌어냈다. 주위를 돌아보니 먼저 저만큼 화신백화점이 보였다. 그러나 뒤이은 폭음과 함
께 태평로 쪽에서 솟는 연기가 이내 명훈의 주의를 그리로 끌었다.
  "불이다!"
 "국회의사당인가?"
  그런 수근거림이 일더니 누군가가 단정적으로 소리쳤다.
  "서울 신문사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여럿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반공회관으로 갑시다!"
  "맞아, 반공청년단도 싸질러버려야해."
  누군가 명훈 곁에 섰던 중년 하나가 맞장구를 치자 울부짖음 같은 함성과  함께 사람의 물결은 
그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명훈도 그 물결에 떠밀린 채로  그들과 섞여 걸었다. 어디쯤에서 헤
어졌는지 김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공회관 근처에 이르렀을때 경무대 쪽에서 총격에 쫓겨난 듯 보이는 듯 학생들이 합류해 데모
대는 한층 거칠고 파괴적으로 되었다. 부상자들을 나르다가 묻었는지 학생들 중에는 피로 얼룩진 
옷을 입은 이도 여렷이었다.
  "경무대로 갑시다. 경무대로!"
  "경무대로 앞은 피바다입니다. 죄없는 젊은이들이 수백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인 경찰 몰아내고 이승만으 타도합시다!"
  그들은 한동안 데모대를 경무대 쪽으로 돌려보려 했으나 어찌 된 셈인지 선두는 반공회관 쪽을 
고집했다. 명훈도 그들을 따라갔다.
  나중에 돌이켜보았지만 , 그 무렵부터 명훈의 의식은 야릇한 마비에 빠져있었다. 그러면서도 일
종의 귀소 본능 같은 것에 이끌려 반공회관 쪽으로 다가간 듯했다. 불을 지르려는 군중에 동조해
서가 아니라 틈을 보아 그 건물 안으로, 더 정확히 말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패거리
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군중의 기세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깊어가는 알 수 없는 외로
움까지 느끼며.
  "야, 너 동대문이지?"
  갑자기 누가 어깨를 치며 그렇게 묻는 바람에 명훈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길을 모아 소리난 
쪽으로 보니 낯익은 얼굴 하나가 불쑥 떠오르듯 다가왔다. 배석구 또래의 시장 쪽 주먹 선배였다. 
그는 명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너 돌개 밑에서 노는 얘지?"
  "아,네"
  명훈은 이상한 반가움으로 콧등이 시큰해옴을 느끼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는 명훈
을 길 한켠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매섭게 다그쳤다.
  "넌 짜샤, 뭘 하겠다고 여기서 얼쩡거려? 돌개한테 뭐 들은 말 없어?"
  "실은 아직 못 만나서."
  "그럼 빨리 서대문 이의장(이기붕)댁으로 가. 경무대 쪽은 경찰이  철통같이 지키니까 필요없어. 
공연히 날뛰는 애새끼들 틈에 휩쓸려 다니다가 검정콩알 얻어걸리지 말고."
  그 말을 끝내고 그는 이내 군중 사이로 섞여들어갔다.
  그의 뒷 모습이 군중 틈에 섞여 사라져버린 뒤까지도 명훈은 그가 한 말을 
뚜렷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대문 이의장댁'이 어딘지는 얼핏 떠올라도 자신이 왜 거기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명훈은 서대문쪽으로 걸음을 제촉하게 된 것은 반공회관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기 시
작한 뒤였다. 뒤이어 치솟는 불길을  보고 더욱 광포해지는 데모대에게서  살기에 가까운 적의를 
느끼며 그느 비로소 서대문 이기붕  집으로 왜 가야하는지 깨달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편이 있다. 그걸 깨닫자 명훈은 새삼스럽고 절박한  공포까지 느끼며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듯한 
데모대를 빠져 나왔다.
  거기서 한 번 과장되기 시작한 감정은 명훈의 그런 공포를 점점 키워나갔다. 처음 소속돼 있던 
데모대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도중에만도 명훈은 몇번이고 머리 끝이  쭈뼛할 정도의 공포를 경험
해야 했다. 새로 국회와 중앙청으로 몰려나오거나 서대문  쪽으로 밀고 가는 데모대와 만나게 될 
때였는데, 그들 중에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섞여 있다가 금세라도 소리치며 달려나와 짓이
겨놓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의 거리는 어짜피 삶을  피해가며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못 되었다. 이기붕의 저택 
근처에 이르렀을 때, 명훈은 어느새 데모대에 휩쓸려 있었다.
  이기붕의 저택 근처는 이미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거기다가 선두는 한창 경찰
과 투석전을 하고 있어 어떻게 뚷고 나가보려야 나가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다시 얼마간을 
사람의 물결속에 표류하듯 떠돌아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수군거림을  들은 것 같은데도 데모대는 흩어질 
생각을 않았다. 이기붕의 집 앞 공터에는 먼저 도착한 대학생들이 몰려 앉아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광화문 쪽에서 소방차 한 대가 사람을 가득히  실은 채 질주해왔다. 경찰 병력이 증원돼
오는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소방차를 탈취한 데모대가  시가를 돌며 시위한 뒤 그리로 달려
온 것이었다.
  그 소방차는 요란한 구호와 함께 이기붕 집 주위를 한바퀴 돌더니 다시 집 앞에 이르러 무언가
를 던져댔다. 차 위의 데모대가 쥐고 있던 돌맹이거나 벽돌 따위인 듯했다. 갑자기  콩 볶듯 총소
리가 들리며 집 안에 허옇도록 최루탄이 터졌다.
  어지간한 학생들도 거기에는 견딜 수  없었던지 다시 흩어져 눈을  비비며 물러나왔다, 그러나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명훈이 사람들 틈 에 섞여  있는 곳까지 밀리더니 거기서 돌을 주워 
경찰에게 던지며 앞으로 되밀고 나갔다.
  그런 학생들을 경찰의 최루탄과 공포가 다시 흩고 하는 식으로 밀고 밀리기를  몇 차례인가 거
듭했을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그 총중에는 아직은 구경만 하고 있던 나이든 시민들이 술렁거리는 
것 같더니 이런 소리가 명훈의 귓가에 들려왔다.
  "깡패들이 데모하는 학생들을 잡아갔대." 
  "동양극장에 죽이고 잇던 놈들이 거야, 오늘 아침부터 거기 한 떼서리 몰려 있는 걸 보았어."
  "학생들에게 아려. 가서 구해와야 해."
  깡패란 말에 어떻게든 이기붕의 집 안으로  들러가는 데만 쏠려 있던 명훈의  주의가 동양극잗 
쪽으로 옮겨왔다. 잘은 모르지만 서대문 쪽 패거리는 오래 전부터 명동파와의 싸움에서 동대문쪽
과 함께 움직여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을  테지만, 동대문 쪽에서 지원을 나왔다니 동양극장 
안에 있다는 그 패거리들 속에서도 명훈이 아는 얼굴이 있을지 몰랐다.
  그 바람에 명훈은 사람들 속을 빠져나와 동양극장 속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벌써 
동양극장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의 떼가 이었다. 어느새  소문을 들은 학생들이 몇몇 흥분한 시민
들과 함께 잡혀간 동료를 구출하러 나선 것이었다. 이번에도 명훈은 그런 군중의 뒤를 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날은 아예 상영을 안 했는지  극장은 조용하기가 그지없었다. 성난  학생들이 잡아간 동료를 
내놓으란 외침과 함께 거세게 밀쳐보았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나와보는 사람도 없었다. 
  "분명히 이 안으로 끌려들었갔대. 이 안으로 있을 거야."
  "문을  부수어버여. 어서 그 학생을 구해야해."
 "깡패 새끼들 모두 죽여버려야해!"
  그런 움성임과 함께 출입문에 거센 발길질이 가해졌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판자 조각 찢어
지는 소리에 이어 넓은 출입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고함 소리와 함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도 그 안에 있는 패거리와 합류하기에는 틀린 일이었다. 거기 에는 몇 명이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 많은 학생들과 시민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구경꾼이  된 명훈은 극장문께서 붙어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만 기울였다.
  "없다, 아무도 없어."
  "벌써 튀었어!그 학생도 끌고 간 모양이야."
  "더 찾아봐.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몰아."
  "그래, 샅샅이 뒤져. 개구멍 마고."
  흥분하고 거침 함성 사이로 그런 외침들이 문께까지 흘러왔다. 그러다가 다시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나더니 "찾았어" 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영사실 안에 넣어두고 달아났구만."
  "이미 가망 없대, 그 죽일 놈들."
  뒤이어 그런 수근거림에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더니 학생들 몇이 사람들을 헤치며 피투성이가 된 
학생복 차림의 젊은이 하나를 떼메고 나왔다. 그들은  가까운 병원을 외쳐 물으며 사람들을 헤치
고 급히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이기붕 집으로 가자."
  "그렇다, 죽은 학생의 원수를 갚자!"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자 거기 왔던 사람들은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다시 서대문 경무대라 
물리던 그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때는  가끔씩 몸도 사리고 경찰의  반응도 살피던 이들이었으나 
그 처첨한 린치가 삽시간에 그들을 바꿔 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야먈로 성난 물결처럼 밀려들
었다.
  무서운 경찰의 공포소리와 눈을 뜰수 없을 만큼 짙은 최루탄 연기를 뚫고  군중의 선두는 바짝 
그 집앞으로 다가갔다. 명훈은 여전히 그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를 둘러싼 군중들과는 달리 그때 
명훈을 내몰고 있는 것은미칠 듯한 공포였다. 살기까지  번득이는 군중의 집단 광기는 만약 자신
이 그 대열에서 이탈한다면 금세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그들이 그대로 자신을  돌무덤에 짓이겨 
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거센 몰살에 떼밀리듯 나아가던 명훈이 의식적으로 걸음을 빨리한  것은 데모대의 선두
가 그 집앞 십여 미터 앞에 진출한 걸 본 뒤였다.  명훈은 극심한 공포 속에서도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암시를 받았다. 거기서 두  손을 들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경찰 쪽으로 뛰어들면 설마 
쏘지는 않겠지. 그래서 그 집안에 있는 패거리에 합류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  퍼뜩 든 것이었
다. 악귀처럼 느껴지는 군중들 틈에 있기보다는 어떠한 위험이 따르더라도 자기편 쪽으로 찾아가 
함께 있고 싶었다.
  "탕탕탕탕"
  명훈이 제법 선두에 가까웠다 싶을 무렵 경찰의 일제 사격이 있었다. 무언가 전과는 다른 느낌
이 든다 싶어 앞을 보니 풀썩풀썩 몇 사람이 쓰러졌다.
  "실탄 사격이다!"
  "경찰이 학생과 시민에게 총질을 한다!"
  그런 악에 받친 외침이 들렸으나 선두는 금세  기세가 꺽여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총알
이 정말로 자신을 향해 쏟아진다는 걸 알자 명훈은 새로운 종류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직접, 그리고 정면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죽음의 공포였다.
  명훈이 어디라고 방향을 정할 겨를도 없이 돌아서 뛰었다. 한참을 뛰다 보니 작은 골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앞으로 내닫는  것보다는 사격 범위를 벗어나는게  급하다 싶어 그리고 
뛰어오르는 왼팔 위쪽이 섬뜩했다.
  뒤이어 왼쪽 어깨와 팔꿈치 가운데쯤에 무언가 굵은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매만져보니 우릿한 
통증이 왔다. 골목으로 숨어들기 바쁘게 오른손으로  그곳을 매만져보니 어느새 손바닥이 벌겋게 
피가 묻어나왔다.
  뒷날 남앞에서는 언제나 훈장처럼 자랑했지만 혼자서 들여다볼 때는 또한 언제나 부끄러움이었
던 명훈의 상처는 그렇게 얻어진 것이었다.
  우릿하던 아픔은 차츰 물에 데인 듯 화끈거리고 쓰려오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총을 맞았다는ㄴ 
사실만을 알 뿐 총알이 어디를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라 그 아픔은 이내 야릇한 요사를 부리기 시
작했다. 왼팔이 그대로 마비된 듯 축 늘어지면서 정신까지 아뜩해오는 것이었다.
   "저런, 학생이 다쳤구만."
  미리 그곳에 쫓겨와 숨어 있던 사람 중에 노동자풍의 중년 하나가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형씨, 많이 다쳤소?"
  "병원으로 갑시다. 총을 맞았으면 병원으로 데려가요."
  대학생 두엇이 다가와 명훈을 부축하고, 한 여학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명훈의 상처를 살펴보
았다. 피부로 확 느껴지는 듯한 그들의 호의가 얼마 전까지 그들에게 품었던 공포를 이상한 감동
으로 비꿔 놓으며 명훈의 콧마루를 찡하게 했다.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동지는 가시오. 가서 안심하고 치료나 받으시오!"
  뭔가에  홀린 듯 벌겋게 상기된 대학생 하나가  명훈에게 그렇게 말해 노은 그곳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갑시다, 이 피를 헛되게 하지 맙시다. 불의는  반드시 거꾸러지고 맙니다. 정의의 승리를 믿읍
시다!"
  그러자 학생들은 다시 함성과 함께 골목을 나섰다. 몇 사람의 일반 시민만이 명훈을 부축해 반
대편으로 빠졌다.
  명훈이 그 골목길을 빠져나올 무렵 좁은  샛 골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아픔으로 무디어진 
청각을 일깨웠다.
  "야, 너, 간다 아냐?"
  명훈이 그리로 눈길을 돌리니 뜻밖에도 배석구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명훈은 반가운 나머지 눈
물이 핑그르 돌았다. 그러나 배석구는 매우 조심스런 표정이었다. 무언가 뜻 모를 눈짓을 하며 문
득 목소리를 높여 딴청을 부렸다.
  "넌 마 학생이 공부는 않고."
  그러다가 문득 명훈이 다친 걸 보았는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다쳤구나, 심해?"
  명훈을 부축하고 있던 사람이 명훈을 대신해 대답했다.
  "팔을 관통당한 모양인데 빨리 병원으로 데려갑시다."
  그러자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다가와 명훈을 부축하며 그때껏 부축해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얜 내 동생이니 내가 돌보지요. 여러분이 수고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혼자서 될까?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배석구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 중년이 걱정스레 명훈을 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형님만 계시면 됩니다."
  명훈도 그들이 따라와 곤혹스런 입장이  될까 겁났다. 아픔을 참고  그들에게 사정하듯 그렇게 
말했다. 배석구가 눈치 없이 자기들의 정체를 흘리게  되면 그때껏 자신에게 보이던 그들의 호의
는 일시에 분노나 실망으로 변할 게 틀림없이 보였다.
  명훈을 부축하고 오던 시민들도 굳이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듯 골목 반대
편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도 한 차례의 총격에 쫓긴 학생과 시민들이 허둥지둥 몰려들고있었다.
  "데모하다 총 맞은 거로 네게 불리한 생길지도  몰라. 좀 괴롭더라도 여기서 멀리 떨어진 병원
으로 가는 게 좋겠어. 데모 부상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갔다가 경찰 리스트에 올라 애매하게 손
해보지 않으려면 말이야."
  사람들을 모두 따돌린 뒤에 배석구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점퍼로 명훈의 어깨 
위를 덮어 피 흐르는 왼팔을 감추었다.
  배석구가 명훈을 데리고 간 병원은 서소문 근처에  작은 외과 병원이었다. 배석구는 되도록 상
처의 원인을 숨기려 했으나 젊은 의사는 한눈에 총상임을 알아보았다.
  "다행이도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군요. 힘줄이나 뼈도 다친 것 같지는 않고, 그러나 화농은 주의
해야 되겠습니다. 입원하셔야 겠습니까?"
  의사가 그렇게 묻자 배석구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원 않고는 안 되겠습니까?"
  "여러 날 통원 치료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치료에 들어갔다. 말로는 나타내지 않고 있었지마, 그  또한 명훈에게 예
사 아니 호감을 보이고 있음을  상처를 돌보는 손길 하나하나에서 잘  느낄 수 있었다. 간호원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의사를 거드는  틈틈히 명훈이 대학생인가,대학생이면 어느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가, 집은 어딘인가 따위를 물었다. 단순한 호감을 넘어  야릇한 호기심까  반짝이
는 눈길이었다. 하지만 그 병원이 보여준  무엇보다도 놀라운 호의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것이었
다.
  "아무리 정치와는 무관한 의사라 하지만 학생들이 옳은 일을 하다 다친 걸 어떻게 치료비를 받
겠소? 앞으로도 그냥 보아 들일테니 부담없이 오시오."
  의사는 그렇게 하라며 짐작에도 상당할  것 같은 치료비의 액수조차  밝혀주지 않았다. 거기서 
명훈은 다시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감동의 교차를 또  한번 경험했다. 배석구도 꽤나 놀란 듯했
다.
  "인심이 정말 이렇게 좋았나? 저 새끼 수상한 새끼 아냐?"
  말은 아직 반신반의 하고 있어도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대단치 않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서인지, 배석구가 곁에 있어서인지 상처가 욱신거리는 해도 처
음으로 정신이 아뜩아뜩 정도는 아니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흥분한 데모대가 들끊는 도심을 빠
져나오는 동안 명훈은 거의 부축 없이 걸었다.
  "어떻게 된 거야?"
  시청 앞에서 퇴계로 쪽으로 빠지면서 배석구가 비로소 물었다. 명훈은 그간의 경위를 얘기하고 
난 뒤 되물었다.
  "형님은어떻게 된 거요?"
  "나, 오늘 바빴지. 점심 먹는데 대망이 형이  이의장댁으로 애들을좀 보내더라군. 급한 대로 여
남은 명 긁어모아 보내고 다시 애들  모으러 갔다 왔는데 말이야, 벌써 길이  막혀버려 있더라구. 
그래서 개들은 동양극장에 진을 치게 해놓고 네게도 연락을 해봤지.  어찌 된 건지 한 놈도 연락
이 안 되어한 말이야. 그래서  다시 이의장댁으로 돌아갈 궁리로 형펀을  살피다가 너를 나나 거
야."
  배석구가 그렇게 말해놓고 불쑥 물었다.
  "야, 너는 일이 어떻게 될 걸 같애?"
 "일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형님이 높은 사람들과 교제가 많으니 알아도 형님이 더 잘 알
지 않겠어요? 그래, 그 삶들은 뭐라 그럽디까?"
  명훈이 그렇게 말을 받자 배석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야 늘 그 소리지."
  "무슨 소리요?"
  :빨갱이들이 끼어들었다. 힘으로 내리누르면 곧 가라안는다."
 "거시다가 계엄령까지 선포돼었다면서요? 곧 군인들이 들어올 모양이던데."
  "바로 그거야, 군인들가지 동원해야 된다는게 영 맘에 걸리거든."
  배석구가 그렇게 말해놓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괴로운 듯 속을 털어 놓았다.
  '실은 어젯밤부터 무언가가 잘못되가고 있다는 예감이야. 오늘 피를 보고 총소리를 듣게 되면서
는 더욱 너 도리짓고땡 히봤니? 이를테면 새벽녘 한창 열이 붙었을 때 같은  때 그때 활용하지도 
못해도 이상한 예감이 발달하게 되지. 패를 딱 짚는 순간 이건 틀렸구나, 하는  예감이 드는 수가 
있는데 그게 어김없이 들어맞는단 말야,  그런데 지금이 꼭 그 패를  잘못 짚었을 때의 기분이란 
말이야."
  그런 배석구가 하두 맥없이 초라해 보여 명훈이 오히려 그의 힘을 돋아주었다.
  "형님 왜 이러세요? 바짝 얼어버리신 모양인데 힘을 내십쇼."
  "아냐, 이것도 눈치라면 눈치야. 이런저런 눈치하나로 오늘까지 버텨온 나야."
  배석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렇게 말끄ㄷ을 흐렸다.  명훈 또한 모든걸 밝게만 볼 기분
이 아니어서 더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배석구를 위로하려 들 수 없었다.
  배석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마침 명동쪽에서 빠져나오는 시발 택시에 몸을  얹으며 미소와 함
께 배석구가 말했다.
  "아냐, 아까는 내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 오늘 네가 다친 거 어쩌면  영험한 부적이 되어 너를 
지켜줄지 모르지. 이제부터 너는 데모하다 총을 맞은 대학생이 되는 거야. 집이 용두동이랬지? 뭐 
착실한 대학생들과 함께 방을 쓴다며? 그들에게라도 데모대에 앞장을 서다가 총을 맞은 거루 해. 
그리고 며칠 집 안에 누워 있으면서 형편을 보아 나머지 세상 사람한테도 그렇게 나서도록 하구. 
네 예감을 믿어. 엉뚱한 소리 개들한테 하지 말고 우리 쪽 골목에는 얼씬 않도록 해. 만약 다행히 
이박사와 자유당이 버텨낸다면 그때는 또 내가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런 배석구의 목소리에는 왠지 핏줄의 정 같은 끈끈한 애정이 스며있는 듯했다.
  
    제35장 그봄 하루
  "또 수제비야?"
  옥경이 사정을 뻔 알면서도 들어오는 밥상을 보고  투정처럼 물었다. 굵고 질 낮은 멸칫국물과 
구제품 밀가루가 어울려 내는 역한 냄새에 비위가 확 틀러진 철은 숟가락을 들 생각고 않고 주섬
주섬 책가방을 챙겼다. 벌써 이틀째 국수 아니면 수제비였다.
  "난들 어떻게 해? 어머니가 사주구 간 쌀이 떨어지구 돈두 없는걸."
 영희가 좋은 얼굴로 옥경이를 달랬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옥경은 평소에 두려워하던 언니가 
곱게 나오는데도 투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국수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빵을 찌든가,  수제비는 밀가루 냄새가 나  먹을 수가 없잖
아?"
  응석받이긴 해도 기질은 보드라운 옥경이가 성격이 거센 누나를 상대로 전에 없이 덤비는게 이
상한 철은 챙기던 책가방을 놓아두고 그런 자매를  살폈다. 이미 실쭉해진 눈길이지만 누나는 애
써 화를 참았다.
  "국수는 아침부터 무슨 국수야? 조금만 참아. 오늘은 틀림없이 어머니가  돈을 부쳐올 거야. 저
번 편지에 한 닷새만에 있으면 산이 팔릴 거라 그랬거든."
  "그걸 어떻게 믿어? 그 전편 편지에도 곧 보낼거라 해놓고 또 닷새를 미뤘잖아?"
  마침내 영희도 슬그머니 화가 나는지 얼굴을 붉히며 옥경에게 쏘아붙였다. 그래도 옥경은 숙어
드는 기색 없이 맞섰다.
  "언니가 쌀을 좀 아껴쓰면 됐잖아?"
  "뭐야? 요 조그만 기집애가. 그럼 내가 쌀을 막 퍼내기라두 했단 말이야?"
  "접때 동동구리무도 쌀로 바꾸고 럭스 비누하고 마후라도 쌀 팔아서 샀잖아? 떡도 바
꾸고."
  그제서야 철은 옥경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맞서는지를 알았다.
  어머니가 모두 싸간 것 같은데 새  크림통이 방바닥을 굴러다니고 향기좋은 럭스  비누가 예쁜 
비눗갑에 담겨 있는 것은 철이도 이상스레 여긴 적이 있으나, 또 누나가 낯선 머릿수건으로 짧은 
머리칼을 감춘채 골목까지 나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는 그였다.
그런데 옥경은 진작부터 그걸알고 있었든 듯했다.
  "뭐? 요 기집애가 아주 못됐어. 그래, 네 말대루다. 빨래비누밖에 없어  세숫비누 하나 사고, 하
두 낯이 조여 크림두 한 통 샀다. 왜? 그리고 너는 이 기집애야, 열아홉 살이나 되는 언니가 선머
슴  같은 머리칼로 그냥 돌아다닌 게 좋갰어? 나이롱 수건 한 장 덮어쓰고 다니는게 그렇게 눈에 
거슬려?
  영희가 옥경의 머리채를 세차게 잡아채며 그렇게 소리쳤다. 영희가 워낙 거세가 나오니까 옥경
은 덜컥 겁이 난 모양이었다. 얼굴까지 핼쑥 해지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건 아니지마 쌀이 떨어졌으니 그렇지. 이거 놔."
  "요 기집애가 그래도 말대꾸야? 조그만 게 간섭은  어따대구 간섭이야?  너 정말 혼 좀 나  볼
래? 엄마도 없구 해서 곱게 봐줄랬더니."
  영희는 이번 기회에 단단히 길을 들여놓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옥경이의 머리채를 감아쥔채 힘
을 주며 남은 손을 쳐들었다. 얼굴이 홱 젖혀진 옥경은  완전히 기가 꺽였는지 대꾸도 하지 못하
고 눈물만 글썽였다. 어머니 있을 때는 그도 옥경과 자주 다투는 편이고, 이따금씩 놀이에 따라붙
을 대는 귀찮아서 구박도 주지만, 그렇게 되자 철은 옥경이 편이 되었다.
  "뭐, 누나가 잘한 것두 없내. 괜히 애매한 애한테."
  철이 영희를 쏘아붙이며 퉁명스레 말했다. 영희가 힐끗  그런 철을 보더니 갑자기 옥경의 머리
채를 놓고 덤벼들며 멱살을 잡았다.
  "요 자식 봐, 너 방금 뭐라 했어?"
  "누나가 잘한 게 뭐 있어? 이거 놔!"
  철은 아침밥을 거르게 된 원망에다 영희의 서투른 음식 솜씨와 학교만 다녀오면  뭔가 줄곧 부
려먹으려 드는 대 대한 불만까지 곁들여 그렇게 소리치며 세차게 몸을 비틀었다.
  6학년이 되어서인지 서울에 있을 때보다 좀 만만해진 누나였다.
  철의 힘찬 몸짓에 윗몸이 갸우뚱했지만  멱살을 쥔 채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몸의 균형이 
잡히는 대로 한 손을 빼네 찰싹 철의 따귀를 때렸다. 아침도  못 먹고 학교에 가게 된 판에 따귀
까지 맞고 나니 유순한 철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기집애가 왜 때려?"
  그런 소리와 함께 몸 전체로 영희에게 돌진하며 두 주먹을 번갈아 내질렀다.
  주먹은 뭉클한 젖가슴에 파묻혀 별힘이 못되지만 누나의 턱을 정통으로  들이받은 머리는 한목
승ㄹ 단단히 해낸 듯 했다. 떠덕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영희는 철의 멱살을 놓고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철은 그 틈을 타 벌서부터 챙겨놓은 책가방을 들고 잽싸게 방문을 나섰다.
  "이 기집애, 엄마 오면 다 안 이르는가 보다!" 
  고무신까지 꿰어 이제는 붙들릴 없다 싶자 철은  방안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방문이 열리며 
영희가 우르르 달려나갔다.
  "너 거기 서! 서지 못하겠니?"
  영희가 그 말고 함께 맨발로 마당까지 쫓아왔으나 철은 그때 이미 골목으로 뛰어나간 뒤였다.
  이제 더는 누나가 뒤쫓을 수 없다 싶은 곳에 이르러 발걸음을 늦춘 철은 비로소  그 아침의 돌
발사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언가 엄청난 짓을 했다는 느낌에 으스스
하기도 했지만 곧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가 대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서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꽉 잡혀 지낸 억센 누나를 드디어 혼자 힘으로  받아 넘긴 까닭이었다. 그러나 미처 학교에 
이르기도 전에 철은 가슴절인 후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누나가 무
언가 힘든 삶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것만은 철이도 피부로 느껴오고 있었다.
 형과 누나의 갑작스런 귀가, 그들과 어머니의 으스스한 그 겨울밤 외출,그 리고 참혹하게 가위질 
당한 누나의 머리, 거기다가 없어진 뒤로 누나는 어느 정도 미소와 말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
나 아직도 지난 두 달의 어느 정도 미소와 말을 되찾은  거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지난 두 달의 
억눌림과 뒤틀림에서 온전히 깨어나지는 못한 말과 미소였다.
  무언가가 꾹 찔러주기만 하면 금세 터져버릴 듯한 분노와 원한이 누나의 가슴에  가득 차 있는 
듯 느껴지곤 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 철이  더욱 그녀에게 고분고분했던 것은 그 원
인 모를 분노와 원한이 터져나올까 두려워서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누나도 잘못은 했으니까, 게다가 불쌍한 옥경이는 왜 때려.'
  어려움에 빠져 제정신이 아닌 누나에게 덤빈  게 어린 마음에 한껏 후회되었으나  철은 이듯고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고 어두운 생각을 털어내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차피 오래고 심각한 
고민은 그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때는 4월도 다 가는 봄날의 화창한 아침이었다.
  아침을 굶은 데다가 안김힘에 뜀박질까지 해서  그런지 한 번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자 답자기 
허기가 접힐 듯 배가 고파웠다.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교문으로 드는 긴 골목길 입새에 이르러 
있었다. 그 앞 중국집 입간판의 '우짜볶잡나돈초울'이란 글씨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두 눈을 찔
렀다. 우동,짜장면,볶음밥,잡채,나조기 따위를 가로 글씨로  위에서 아래쪽으로 늘어논 것인데,  그 
지점에서 그 입간판이 가리어  뒷글자는 안 보이고 머리  글자만 세로로 '우짜볶잡...'하며 보이는 
것이다.
그 글자들이 연상시키는 음식들과 중국집 안에서 풍겨나오는 듯한 구수한 냄새에 시달리는 개 싫
어 철은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교문에  이르는 골목길로 접어들자 거기에는 더욱 다양한 
철의 허기를 자극하는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아이들의  등교를 기다려 벌써부터 좌판을 벌인 잡
상인들이다.
  전분을 맣이 머금어 통통한(아이들은 그걸 알이 뱃다고 표현했다) 암칡들을  함지박에 가득담아 
칼이나 톱으로 썰어 파는 아줌마들,  하얗게 닦인 첲판 위에다 불에  녹인 설탕물로 나비와 꽃을 
그려 굳히고 있는 할아버지, 맞물고 도는 이가 넓은 톱니바퀴 사이에 구운 오징어를 밀어넣어 넓
게 펼치는 아저씨, 박하엿과 셀로판에 싼 왕사탕 따위를 손바닥만한 판자 위에 펼쳐놓고 앉은 할
머니, 바나나 모양의 풀빵 틀에 한창 숯불을 일구는 있는 부부, 미일은 아니지만  낯이 익을 만큼
은 자주 그곳을 나앉는 그들인데도 무슨 큰 장이라도 선 것처럼 현란하게 느껴지까지 했다.
  모든 것이 닫힌 유리창 미닫이 안쪽에 있어 상상으로만 떠오른 중국집과는 달리  처릉ㄴ 그 골
목길을 빨리해 지나치 수가 없었다. 허기진 뱃속에는  거의 고통과 같은 자극이 되는데도 마음은 
눈앞에 늘어선 음식물들의 매혹적인 선과 색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실은 며칠 전 곱삶아 먹던 보리쌀까지 떨어져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 만으로 끼니를 때워오면서 
굶주림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날은 아예  아침을 거르게 되자 철의 굶주림은 조금
씩 허물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회가 주워지면  거기 있는 먹을 것들을 훔쳐 달아나고 
싶었을 만큼.
  그런데 뜻밖의 일이 철의 그런  허물어짐을 다잡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뒷날까지도 굶주림에서 
쉽게 의연해질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  밀양으로 와서 형편이 좋았을 때, 마음내키는  대로 그런 
것들을 사먹을 수 있었던 행복한 기억으로 이제는 차라리 쓰라려온다는 표현이 옳은 위를 달래며 
느릿느릿 그 골목을 지나 철이 마지막으로 교문 앞에 세워진 칡장수의 리어카  앞에 걸음을 멈추
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우르르 학교에서 몰려나와 칡을 사는  조무래기 틈에 한 동네 녀석이 끼
여 있는 걸 보고 행여나 하며 서 있는데 등뒤로 여자애들이 제잘거리며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묘
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철은 틀림없이 그 여자애들  속에 누가 끼여 지나가는지 졸아보지  않고도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는 못 되더라도 그 묘한 느낌의 원인이 무언인가를 알기 위해 힐끗 돌아 봤
을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으로 걸신에 홀린 그날의  그에게는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하얀 가루 같은 톱밥을 
쏟는 칡장수의 톱질레 눈길을 붙들려 있다가, 다시 그렇게 잘라낸 칡을 받아 맛있게 베어무는 아
이의 입을 부럽다못해 괴롭기까지 한 심경으로  바라보느라 등허리에 와 닿는 그  묘한 느낌까지 
무시해버린 것이다.
  갑자기 교문 쪽에서 통통통 뛰어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눈에 익은 환한 빛무리가 아이들을 헤치
고 칡장수에게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철이 그 환한  빛무리를 눈여겨보았다. 책가
방은 조금 전 함께 등교하던 애들에게 맡기고 뛰어왔는지 빈손이었다.
  "아저씨, 칡 오십 환어치만 주이소."
 명혜는 한 손으로 반짝이는 은전 한 닢을 내밀고 한 손으로는 철을 가르키며 그렇게 말했다. 무
슨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오르던 것도  잠시, 명혜가 한 말을 겨우 
알아듣자마자 철의 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아, 아니."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말허려고 하는데 명혜가 재빨리 그 곁을 스쳐가면서 말했다.
  "니 꼭 저 칡 받아가그래이."
  철이 겨우 힘을 모아 그렇게 대꾸했을 때 이미 명혜의 세일러복 옷깃은 교문 안으로 꺽어든 뒤
였다.
  철은 그 뜻하지 아니한 사태에 까닭  모를 굴욕감과 수치심으로 잠시 눈앞이  아뜩하기까지 했
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굴욕감과 수치심은 맹렬한 분노가 되어 작은 몸을 불태웠다. 배고픔 따위
는 이미 그의 정신에 작은 자취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기집애가 사람의 뒤를 밟고, 뭐 하는 거야, 나쁜 기집애.'
  그렇게 앞도 뒤도 없는 욕을 속으로 내뱉고 그새 톱질을 마친 칡장수  아저씨가 두툼하게 자른 
칡토막을 몇 개 내밀며 소리쳤다.
  "야아, 이거 받아가레이,"
  "싫어요! 그 기집애나 주세요!"
  철은 자신도 모르게 빽, 고함을 치며 애매한 칡장수를 흘겨보았다. 철의  눈길에서 무엇을 보았
는지 멈칫하던 칡장수가 이내 너털웃음과 함께 달랬다.
  "하, 고노마 소가지하고는, 참한 가시나 친구가 사주는 갑는데 뭐시 그리 보골(화)이 나노?"
  그리고 주어주듯 칡토막을 넘겨주었다. 얼결에 받기는 했으나  이미 그 칡 토막은 조금 전까지 
그렇게 탐나던 먹을 것은 아니었다.
 철은 무슨 징그럽고 더러운 걸 모르고 손에 집은 사람처럼 그 칡 토막을  리어카 위에 팽개치고 
돌아서며 차게 쏘아붙였다.
  "싫다니까요, 뭐 내가 거지에요?"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절로 파들거리는 목소리였다.
  "하얏, 고노마, 인자 보니 서울내기네. 소가지도 참 못됐다."
  돌아서 뛰는 등뒤로 그런 칡장수의 빈정거림이 들렸다.
   헐떡 거리며 교실로 뛰어가던 철이 막 복도를 올라서는데 명혜가 그새  저희 교실에다 책가방
을 놓고 여자애들에게 둘러쌓여 맞은편에서 오고있는 게 보였다. 책가방 외에 비어 있는 철의 손
과 얼굴을 바라보던 명혜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뒤틀어질대로 뒤틀어진 철에
게는 그 놀라움조차 곱게 보이지 않았다. 만난 뒤 처음으로 무섭게 명혜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 무서운 눈길에 명혜가 질리는 걸 보고도 입까지 앙다무러지게 자신의  깊이 모를 분
노를 드러냈다.
  <1960년 4월의 대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열셋이란 나이는 그때의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뚜렷이 기억하는 나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일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나 감춰진 
의미까지도 닿을 수 있는 나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해  4월의 대사건은 몇 개의 단편적인 기
억뿐, 내 의식에는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거기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은 모두가 뒷날의 기록과 전문을 바탕으로 삼아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로 짐작되는 것은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나의 개인적인 불
운의 탓일 게이다.그때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어둡고 괴로웠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내가 살
고 있던 곳은 그 태풍의 진로에서 약간 비켜선 작은 읍이었다. 거기다가 무슨 천형처럼 어릴적부
터 강요된 정치적 무관심은 가능했던 기억과 이해조차 가로막은 것이었다.
  만약 그때의 내 삶이 정상적인 열 세 살 소년의 그것이었다면, 내가 살던 곳이 그 사건의 부분
적인 현장이라고 지켜볼 수 있는 도회였다면, 그리고 내가 라디오나 신문을 통해 전해지는 그 사
건을 자상하게 해설해주는 아버지와 형들이  있었다면, 아니 최소한 거기에  대한 정치적 관심을 
자주 주고 받는 이웃이라도 있었다면, 4.19에 대한 내 기억과 이해는 지금보다는  훨씬 달랐을 것
이다. 어쩌면 나는 혁명과 유혈에 대한 가슴 두근거리는 추억을 지니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어른
들의 들뜸에 휩쓸려 터무니없이 일찍 그런 종류의  들큰한 승리의 맛을 들였을지도 모른다. 거기
서 더 나아가 모든 변혁에 낙관적이고 , 거기에 기꺼이 나를 내던질 수 있는 어두운 열정을 길러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하게 그 갈피를 뒤져바도 내 기억 속의 4.19는 그런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한동안 먼 도시와 종잡을 수 없는 풍문의 일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신나는 경축 행사
와도 같은 고등학생들의 시위 행렬로 끝나고 만 부조리극 같은 것일 뿐이었다. 그것도 이미 시작
된 굶주림으로 모든 것에 시들해진 어린 영혼에게는 몽롱하게만 비치는>
  뒷날 철은 그해 4월의 대사건에 대해  그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명혜와  그런 일이 있었던 게 
바로 그 해의 4월 26일 아침이었던 만큼, 그 술회가 반드시 고의적으로 비틀고 과장한 기억에 근
거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철이 교실로 들어가니 아이들 몇이 교탁 근처에 둥그렇게 앉아 무슨 얘긴가로  열을 올리고 있
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래저래 참담한 기분이라 철은 녀석들을 알은채도 하지 않고 제자리로 찾
아들었다. 5분단 가운데쯤에 있는 자신의 의자에 언제부턴가  천근 무게로 느껴지던 가방을 내려
놓고 털썩 앉는데 교탁 쪽 아이들 속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이, 이인철, 왜 그래?"
  반갑잖은 눈길로 그쪽을 보니 용기 녀석이 앉은 채로 약간 고개를 빼어  자신이 불렀음을 알이
고 있었다.
  철은 그게 용기라는 걸 알자 그를 화풀이 상대로 삼으려는 생각을 얼른 거두웠다.
  철은 그 무렵 들어 이른바 우정이란 형태의 새로운 인간 관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사랑처럼 호들갑스럽거나 소모적이 아니며, 피붙이에 대한 정처럼 동물적이거나 눈멀지도 않은 
그 특이한 형태의 교류는 오늘날의  사회에 그리 대단치 않게 여겨지는  듯 보인다. 산업 사회가 
새로이 설정한 여러 가지 기능에 따라 만들어진 이런저런 집단에서 개별적 선택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요 의식이 고색창연한 우정의 개념을 잠식해간 탓이리라. 하지만 그때만 해
도 우정은 오늘날의 이해를 바탕으로 맺어지는  관계나 얄팍한 동료 의식과 달리  전인적인 어떤 
관계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이성에 대한 사랑이나 혈육에  대한 정보다 훨씬 멀어지 또 어른들의 
관계가 서먹해짐과 아울러 명혜를 상대로 동화적인 추상화를 겪게 되면서부터  철은 차츰 단순한 
놀이 동무나 환상의 소녀 대신 마음의 벗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대상 중의 하나가 용기
였다.
  용기는 말하자면 철이 속한 반의 작은 영웅이었다. 다른 반들과 달리 철의 반은 모든  리가 철
저하게 지능, 특히 학과 성적의 우열과 비례했다. 또 그 대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도 틀림없이 있
었으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의 충돌은 되도록 피했고, 어쩌다 충돌이 있어도 왠만하면 양보했다. 
그런데 용기는 바로 그 공부 잘 하는 아이 중에도 2등과 상당한 격차를 유지하는 1등이었다.
  철과 용기의 관계는 처음 서울서 전학 온 아이와 그  반 급장과의 덤덤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
면 용기에게는 지능이 우월로 근거한 자신의 권위가 그 새로운 전입생에 의해  도전받을 지도 모
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약갼의 견제 심리까지 있었을  것이다, 반 아이들 중에는 아무도 서울에 
가본 아이가 없음을 알 게 된 철이 서울 얘기를 조금이라도 허풍을 섞으면 용케도 그걸 알아채고 
꼬치꼬치 캐물어 철을 어렵게 만드는게 용기였다.
 그러던 그들이 좀 유별난 감정으로 서로를 보게 된 것 첫 번째 계기는 지난 봄 꽃상여 사건이었
다. 그날 자신도 모를 흥에 거짓말을 하면서도 철을 마음속으로 용기를 제일 두려워했다. 다른 아
이들은 다 속여 넘겨도 그만은 그럴 수  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기는 그 가장 어려운 
고비에서 철을 구해주었을뿐아니라, 그 뒤로는 이상한 관심의 눈길까지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니는 아무래도 우리하고는 뭔강 다른 것 같애, 서울내기라 그런강."
  때로 그런 감탄 비슷한 소리와 함께.
  그 다음으로 철이 용기와 가까워진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 무렵의 시골 아이들이 대게 그랬
듯이 철의 반에서 교과서 외에 재미로 책을 읽는 아이는  드물었다. 마땅하게 읽을 만한 책도 흔
치 않았지만, 아직은 모든게 안정되지 못한 사회의  분위기도 아이들이 책읽기에 재미를 붙일 만
하지 못했다. 그저 산과 들에서 뛰놀고 조잡한 놀이에 열중하다가 만화가게에 끼여들거나 기껏해
야 사뭇 꿈같이만 느껴지는 서양의 동화집을 권유에  못 이겨 건성으로 뒤적이는 정도였다. 그런
데 용기는 달랐다. 철이처럼 깊이 몰두하는 법은 없었지만 틈틈히 다른 책을 읽는 눈치였다. 어떤 
때는 학교에 가져 와서 읽기까지 했다.
  용기도 자신처럼 책읽기를 즐겨 한다는 걸 안 것은 그  전해 가을 부터였다. 점심 시간 용기의 
책상 위에 [솔로몬의 동굴]이란 책을 읽다가 엎어둔 책을 본 순간 철은 알 수 없는 반가움과 함께 
은근한 동료의식까지 느꼈다.
  "이거 재미있어?"
  마침 밖에서 돌아오는 용기에게 철은 전학 온 뒤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이미 다 읽었다
는 말은 안 했지만 표정으로 그걸 알아차린 듯한 용기가 애써 심드렁한 말투를 지었다.
 "쪼매, 니는 어떻드노?"
  "아주 재미있었어.[타잔]이나 [루팡]보다는 못했지만."
  "[타잔]도 일었나?"
  용기가 그렇게 묻자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글치만 모든 기 꾸며낸 기라. 말하자면 말캉 거짓말 아이가? 재미있어봐야 뭐 할 기고?"
어딘가 경멸이 스민 말투였다. 철은 그게 책읽기에서만은  못 당하겠다는 생각이 든 녀석이 억지
를 쓰는 것으로 알았다. 고까움이  이는 걸 같은 취향을 가진  동무를 찾은 반가움으로 억누르며 
그 말을 받았다.
  "소설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국어책도 절반은 거짓말이게."
  그러나 용기도 반드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철이 그뒤로 관찰해보니 녀석이 정말
로 재미있게 읽은 것은 주로 전기였다.
  그때껏 그런 책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용기  녀석과 공통의 화제를 가지는 기쁨 때문에 
철이도 자주 위인전을 읽었다. 그 바람에 책  얘기만 나오면 그의 주위에 몰려 있는 모든 아이들
을 제치고 용기를 독점할 수가 있었다.
  거기다가 6학년이 되어 본격적인 입시 준비에 들어가면서 담임선생님이 고안한 자리 배치도 철
과 용기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치
르는 실력 향상 고사의 성적순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였는데, 철이도 자신있는 과목만 치는 날은 
2등까지 올라가 용기와 짝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날은  용케 2등 까지 올라갔어도 바로 
그 다음날이나, 잘 견디어야 사나흘 뒤에는 다시 서너칸 저쪽 자리로  되밀려나게 마련이지만, 철
은 그렇게 용기와 짝이 되어 있으면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짜릿한 기쁨까지 느끼곤 했다.
  반드시 철과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용기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는 
무언가 철에게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는 특성을 찾아내고 그걸 높이 사는 눈치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철의 발달한 말과 어떤 방면으로의 특이한 조숙이었다. 둘 다 
뿌리 없이 떠돈 삶의 산산스러움이 철의 영혼에  남긴 흔적으로, 넉넉하지 못해도 그런대로 안정
된 가정에서 자란 용기에게는 경이와 흥ㅁ의 대상이 될 만도 했으리라.
  하지만 그날 용기는 인사말 대신한 그 짤막한  물음으로 철에 대한 관심을 마감했다. 짐작으로
는 그네 아이들과 하던 얘기에 어무 열중해 그 물음도 건성이었던 듯싶었다. 철이 나타나므로 해
서 얘기가 끊겼던 것도 잠시, 곧 교실 안은 아이들의 얘기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서울에서는 말이야, 국민학교 학생들도 데모를 하는 갑더라."
  "수송국민학교라 카던데. 뭐, '언니 오빠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카든강 우예튼 그런 글자를 크
단하게 쓴 베쪼가리를 피(펴)들고 있는 사진도 났드라."
  "와 그카는공? 참말로 자유당하고 이대통령이 나쁜 거 아이가? 글타믄 우리까정 데모해야 안되
나?"
  "이대통령이 나쁜게 아이고 이기붕이 나쁘다 카더라."
  "아이라, 우리 아부지가 그카는데 나쁜 거는 이대통령도 아이고  이기붕이도 아이다 카더라. 그 
밑에 있는 놈들이 나쁜 갑더라. 그것들이 살살거리며  거짓말로 오아바쳐 일을 이래 맨들었다 안
카나. 아매(아마) 이 박사는 암컷도 모리고 들어낮을 끼라던데."
  '19일날 사람도 많이 죽은 갑더라. 서울은 병원마다 시체가 한마당이라 카든강"
  "글나절 이리 우째 되꼬? 인자는 국군 아저씨들이 탱크까지 끌고 나왔다 카던데."
  "참말로 알 수 없제. 누가 잘못한 기교?  뭐가 우예 된 기고? 어른들도 이꾸저꾸(이리저리)말해
싸이 알 수가 있어야지."
  "오늘 우리 선생님한테 참 물어보자.뭐가 우예 된 기공."
  아이들의 두서 없는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떤 것은 철이도 아는  얘기였고, 어떤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머니가 집 안에 모든 것이 견딜  만할대 용기 녀석이 은근한 경쟁 심리에
서 어른들이나 읽는 [인간 나폴레옹]과 [영웅 디즈레일리]를 빌려 읽은 적도 있어 녀석들을 기죽일 
만한 말들도 많이 늘어 있었다.  그러나 굶주림에 시달리고 명혜 때문에  한껏 상심해 있던 그날 
철에게는 그럴 만한 흉도 힘도 없었다. 딴 나라 얘기처럼  아무런 감동없이 듣고 있는데 문득 용
기 녀석의 야무진 말소리가 결론처럼 들려왔다.
  "아이다, 물어 볼 것도 없이 뻔하다. 틀림없이 나쁜 기라."
  그말에 아이들이 놀란 듯 반문했다.
  "뭐,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 이승만 박사가 말이라?"
  "그리믄 지금까정 선생님들이 우리한테 얘기는 뭐꼬?"
  "작년에 단체로 가본 '독림협회와 이승만'은 우예 된 기고? 그마이 독립 운동 한 사람이 우째서 
나쁘노?"
  한꺼번에 네뎃이 따지듯 그렇게 반문했지만 용기 녀석은 조금도 움츠리는 기색이 없었다.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기제. 아이, 우짜믄 독립 운동  얘기도 이승만 대통령이 됐으이 지어낸 
긴지도 몰라."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철이도 그 화제로 관심이 갔다.  이승만에 대한 용기 녀석의 의심 때문이
었다.
  어린 날의 철에게는 이승만을 둘렀나  시비처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일도 드물었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적의 희미한 기억은 온통 이승만에  대한 비난과 함구투성이었다. 이승만이 독립 운동 
자금으로 광목 장사한 것, 임시 정부 대통령에서 쫓겨난 일, 미국에서 조선 왕자 행세한 것, 해방 
뒤 친일파와 손잡고 민족주의 세력 몰아낸 것 할머니는 그런 얘기들을 특유의  입담과 한껏 나쁘
게 만들어 어린 손자의 머리에 심어주려 했는데, 그 일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자 모든 것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철이 세 번이나 
학교를 옮기며 만났던 여러 선생님들은 그때만 해도 그들의 말 자체가 그대로  흔들림 없는 진리
였던 그들은 이승만을 가장 위대한 독립투사,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하도록 이런 머리속을 
주물러댔다.
  거기다가 철의 혼란을 더욱 가증시킨  것은 어머니의 변덕스런 태도였다.  어떤 때는 어머니는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이승만을 용하다가 어떤 때는 생명의  은인까지 추켜세우는 것이
었다. 그 중간에 끼인 넋두리에, 그래도 이승만이 한민당보다는  덜 흉학하던가, 미국 놈 물이 베
어 철에게는 아무런 판단의 기준이 되어주지 못했다.  필요에 따라 이쪽저쪽 떳떳하게 말하는 사
람들의 의견은 거의가 이승만을 추켜세우는  쪽이라는게 어떤 위압감으로 동조를  강요할 뿐이었
다.
  그러나 용기의 판단이 준 충격도 그날 아침의 불행에서 비롯된 철의 두터운  무관심의 벽을 끝
내 뚫지는 못했다. 아이들 쪽으로 가 어울릴까 하던 희미한 동요는 이내 가라앉고,  철은 다시 굶
주림과 참담함 속으로 깊이깊이 젖어들었다.
  그렇게 되고 나니 그 뒤 학교에서 있었던 이도 기억에 남을 리 없었다. 그날 넷째 시간에 들어
온 담임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 어쩌면 나중에 재구성된 기억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전 이박사가 하야한다는 방송이 있었다. 학생 혁명이 드디어 성공한 모양이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아마도 자신이 말하고 있는 상대가 겨우 국민학교 6학년  아이들이란 걸 깜
박 잊은 듯, 하야니 혁명이니 하는 말을 신문에서 읽었거나 방송에서 들은 그대로 되뇌었다. 예기
치 않은 역사의 복권이 한 평범한 시골 학교 교사를 멍하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그림같이 잘 맞
아떨어진 한판 승리의 민중극이 오랜 둔감과 무관심의 의식을 들쑤셔 그를 갑작스럽게 들뜨게 한 
것일까.
  철이 그날 학교길에 본 고등학생들의 시위 핼렬도  그리 선명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날따
라 오전 수업으로 학교가 파해 교문을 나서던 철은 교문과 큰길을 이은  골목길에서 한떼의 고등
학생들이 고함치며 열 지어 가는  걸 보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는  이미 배고픔을 넘어 가벼운 
현기증까지 느끼던 철이었으나 태어나고 처음 보는 시위 행렬이라 반짝 호기심이 인 까닭이었다.
  학새들이 역전 쪽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의 기세는 멀리서도 철의 긴장을 불
러일으킬 만큼 거칠고 험했다.
  "부정 선거 원흉을 처단해라!"
  "자유당은 물러가라!"
  "고문 경관 김봉구를 잡아라!"
  붉은 색과 검은 색을 번갈아 쓴 그런 내용의 플랭  카드도 그랬지만, 무엇엔가 홀리고 들뜬 듯
한 선두의 고함 소리는 더욱  그랬다. 그 중에는 각목이나 쇠막대를  휙휙 내젓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공연히 입간판을 툭툭 쳐서 분위기를 한층 더 거칠고 험하게 만드는 패거리도 있었다.
  하지만 금세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과 흥분도  잠시, 그들은 이내 철의 시야에서 사
라져버렸다. 그들이 지나가자 그들의 행렬에 가려져 있던 맞은 편 중국집 입간판이 드러나보이고, 
거기 씌어진 '우짜복접너"만 이제는 거의 고통이나 다를 바 없이 된 철의 공복감을 자극할 뿐이었
다.
  그 바람에 철은 함께 교문을 나선 반 아이들이 이상스레 여기는 것도 못 느끼고 한동안 걸음을 
멈춘채 큰길 건너 중국집을 바라  보았다. 어쩌면 마침 점심때라 그  집 주방장에서 퍼지는 요리 
냄새가 굶주림에 지친 철의 의식과 근육을 잠시 마비시킨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무척 낯익다  싶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철을  손짓으로 불렀다. 철이 퍼뜩 
정신이 들어 보니 뜻밖에도 누나였다.
  철은 대뜸 아침에 자기가 한 짓을 떠올리고 누나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약간 붉어진 볼로 웃고 있는 것이나  화사한 차림으로 보아 아침의 화풀이를  하려고 길목에서 
기다린 사람 같지는 않았다.
  "철아, 이리 와, 옥경이는 저 안에 있어."
  가만히 보니 건너다보는 철을 암심시키려는 듯 영희가 손가락으로 중국집을 가르키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자 뻑뻑하던 철의 머리속이 눈부시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옥경이가 저 안에 있다. 중국집 안에, 어쩌면 우동이나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렇게 시작된 추측은 이내 머릿속을 찬연한 빛으로 채우는 듯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엄마에게 돈이 왔구나. 그래서 누나가 아침을 못 먹은 우리를 기다렸구나. 틀림없이.'
  그 순간 철은 아침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고 껑충껑충 뛰듯 중국집으로 달려갔다. 먼저 중국집 
문에 이른 누나가 문을 열고 기다리다가 한층 다정하게 말했다.
  "배고팠지? 집에 가서 밥지을 때까지 니네들이 못 견뎌낼 것 같아 우체국에서 바로 일루 왔어. 
엄마가 돈을 보내셨거든."
  그 말과 함께 뒤따라 들어온게 원래는 그렇게 문앞에서 철을 기다렸던 듯했다. 전봇대 뒤에 숨
은 것은 갑자기 고등학생들이 떼지어 큰길로 밀려들자 얼결에 그리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철의 귀에는 그런 영희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중국집 안으로 들어서자 한층 짙고 자
극적이 된 음식 냄새에 취해, 그 구석 어딘가에 앉아 있을 옥경이를 찾기에  바빴다. 옥경이는 안
쪽 탁자 앞에 앉아 정신없이 우동 가락을 감아올리는 중이었다.
  "내 꺼는?"
  옥경이 혼자 먹고 있다는 게 까닭 없이 불만스러워 철이 투명스럽게 물었다.
  "내 것두 시켜놨어."
  먹기에 열중에 어른 대답을 못 하는  옥경이를 대신해 영희가 그렇게 대답하고  이어 주방에서 
얼굴을 내미는 중국집 아저씨가 소리쳤다.
  "아저씨, 아까 시킨 우동 곱배기 어서 갖다 주세요."
  "왔어? 왔어해?"
  그런 대답과 함께 한동안 꿈지럭거리던 아저씨가 보기에도 먹음직한 우동  사바과 단부지 접시
를 내왔다. 벌써부터 대젓가락을 뽑아 들고 옥경의 우동 그릇을 넘보던 철은 허겁지겁 자신의 우
동 그릇에 덤벼 들었다.
  그날의 기억 중에서 가장 생생한  부분은 그렇게 허기진 배가 채워진  뒤의 일이었다. 어찌 됀 
셈인지 한없이 후해진 누나는 우동 그릇을 다비운 철과 옥경에게 돈까지 백환씩 나눠주었다.
  그렇게 되자 철은 갑자기 세상이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오전까지도 어둠침침하게 느껴지던 세
상은 일시에 밝아졌고, 나름대로 비관적이기만 하던 삶이 다시 살아볼 만한 그 무엇이 되었다.
  뒷날 철은 서머셋 몸을 읽으면서 그가 말한 제육감에 대해 감탄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적이 있
었다. 돈은 우리의 나머지 다른 오감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 한그 
의 정의는 한 작가로서 그것을 거침없이 드러낸  뻔뻔스러움에 화가 치밀었던 것이며, 끝내 정신
의 사람이고자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질에 휘몰려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반감이 그렇
게 나타난 것인데, 어쩌면 그런 물질의 위력을 철이 가장  아프게 체험한 시기가 시작된 게 바로 
그 무렵부터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 아침과는 달리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다정한 남매가 되어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곧 각
기 자신의 일로 나누어졌다.
옥경은 갑자기 큰 돈으로 새앙쥐 고방 드나들  듯 구멍가게를 드나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누나는 
누나대로 무언가 필요한 품목들을 적어 시장으로 나갔다. 철이도 마찬 가지였다.  그대로 집에 붙
어 있기에는 좀이 쑤셔 가방을 방안에다 던져놓고 바쁘게 밖으로 나갔다.
  뱃다리거리에 이를 닦을 때까지도 철은 그냥 한없이 만족한 기분에 젖어 정한  곳이 없이 걸었
다.
  전에는 슬픈 일을 당하건 기쁜 일을 당하건  맨 먼저 떠올리는게 영남여객댁과 명혜였다. 그러
나 어른들이 왕래를 끊고 명혜마저  추상화되던 그 같은 연상의 버릇은 줄어들었다. 그녀를 곱게
곱게 꿈속에서 기르며 자신도 훌륭하게 자라 화려하게 만나는 기대로  순간순간 그리움을 억누른 
결과였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먼빛으로 매일 대하게 돼도, 실체는 오히려 그의 환상 속에서 더 생생하
던 명혜가 갑자기 그의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그를 한껏 참담하게 만든 까닭이었다. 이제는 자신
이 그녀가 볼 때처럼 굶주려 있지도 않고 주머니가 비어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앙갚음하듯 알려주
고 싶었다.
  그 때문에 철의 발길은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휘어졌다. 그러나 막상 영남여객의 정원 뒷담에 
이르자 철은 곧 그 안으로 들어갈 문이 모조리 닫혀 있음을 깨다름과 아울러 어머니의 엄한 목소
리를 기억해냈다.
  '너그들 듣거래이, 앞으로는 그 집에 가지 마라, 카이 말이제, 지가 우예 바로  내 앞에 대고 그
런 소리를 할 수 있겠노? 뭐 발도 들여  놓지 말라꼬? 내가 암만 잘못이 있다 캐도 그  아자씨가 
어예 내보고 대놓고 그런 마릉ㄹ 입에 담노? 우리 여 와서 일 년 덕 봤다 캐도 안죽은(아직은)기
죽을 꺼 하나도 없다. 처음 여기 와서 점방 채린다꼬 칠만  환 저그 돈 썼지만은 오만 환은 전세 
빼서 돌려줬고 나머지 이만 환은 땅 한 뙈기만 파믄 갚을 수 있었다. 글치만 저그는 그래 간단하
게 우리 한테 몬 갚을 끼다. 어그 아부지  동척 농장할 때 에이, 옛날 얘기 하믄  뭐하노? 우예튼 
인자 그 집에는 발도 다리놀 생각 하지 마라.'
  그러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불화가 갑자기 섬뜩한  운명의 예감으로 철
의 가슴에 와 닿는다. 그가 읽었던 소설 속의 불행한  애인들을 갈라놓던 그 속상하고 얄궃은 운
명들이.
  거기서 철이 이제 영원히 헤어져야 할 연인에게 마지막 결별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처럼 정원수 
사이로 솟은 그 집 2층 창틀께로 날고  헐어 보이는 흰색 창틀만 크고 공허한 눈처럼  그를 마주 
내려다보았다.
  철이 그 집 앞을 지나 사거리 쪽의  만화가게로 간 것은 아마도 명혜 때문에  더욱 음울해지기 
싫어서였을 거다. 읍내에 가장 책의 가짓수가 많은  대본점이기도 한 그 만화가게는 아직도 그때
그때는 철을 폭 빠지게 했다.
  평소에 그 자리에서 한 번 읽은 데 소설을 집에 빌려간 때와 맞먹는 돈이 드는 신간 만화를 읽
지 않았으나, 그 날은 바로 그 신간 만화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라도 빠져 어둡고 괴로운 운
명의 예감을 잊고 싶었다. 철이 그 집 유리창에 붙은 신간 광고지를 훑어보고 있을 때 갑자기 출
입구 미닫이가 열리며 용기가 나왔다. 용기의 손에는 그가 그 무렵 들어 첫 권부터 한 권씩 읽어
가고 있는 [세기의 위인상]이란 성인용 전기물 전집 중의  한권이 쥐어져 있었다. 짙은 청색 표지
로 눈에 그 책을 알아본 철은 문득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 바람에 말문이 막혀 우물거리는
데 용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철이 니도 여 와서 책을 빌려보니? 삼문동에도 책 빌려주는 데가 있을 낀데."
  "거기는 작아서 어디 보고 싶은 책이 제대로 있어야지."
  용기의 말에 암시를 받아 철이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 말이 곧이들은 용기가 은근한 경쟁심이 
이는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보고 싶은 거라믄 뭐 어떤 거?"
  "기미노나와."
  조금 답답해진 철이 다시 그렇게 둘러댔다. 언젠가  둑길에서 어떤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가 풀
숲에 던져둔 걸 표지만 훑어보고 외운 제목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도 한번 누가 그 책을 끼고 
가는 걸 본 적이 있어 그 무렵 어른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다느 짐작뿐, 그게 무슨
책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저 한글 제목 곁에 달린 일본어 제목이 신기해 그걸 배오았는데, 그야말
로 효과는 만점이었다. 용기가 대뜸 철의 분위기에 말려들어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기미노나와? 그게 뭔데?"
  "일본말인데 '그대 이름은' 이란 뜻이래. 요새 어른들이 많이 읽는 모양이드라."
  "그럼 어른들 연애소설 아냐?"
  용기가 비로소 철에게 약점을 찾았다는 듯 약간  나무라는 투로 물었다. 철은 거드름까지 섞어 
그런 용기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동화는 재미없어. 위인 전도  그렇
고."
  그러는데 시장 족 골목에서아이들이 와 몰려나왔다. 그둘  중에는 철과 같은 반 아이들도 두엇 
끼여있더었다.
  "어이, 최용기, 이인철이,너그는 귀경 안갈래?"
  "무슨 구경?"
  "방급ㅁ 사람들이 한 떼사리(떼서리) 집에 몰려갔데이."
  "박살을 내뿐다 카이"
  "박살이라니?"
  "글마 그거 미주당 하다가 자유당한테 팔리간 놈 아인가? 국회의원  될 때는 민주당 한다 카미 
며칠도 안돼 자유당에 팔리갔뿟는 갑드라."
  그런 구경이라면 철이도 마다할 리가 없다. 둘은 이내 그땟껏 하고 있던 은근한 겨룸을 그만두
고 그 아이들 틈에 섞여들었다.
  그들이 목적한 곳에 도착했을 때는 한창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지 아무런 저항 
없는 집을 사람들이 미친 듯이 부수며 욕설과  저주를 퍼부엇더. 만약 거기 국회의원이라는 사람
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떼려 죽였을 것이다.
  아이들도 이내 그런 분위기에 말려들어 돌맹이질을 하고 시멘트 벽에  어림도 없는발길질을 해
대기도 했다. 그러나 철은 왠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선악과 정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대
로, 아니 명확하게 그 집 주인이 잘못했다 쳐도, 거기서 미친 듯 설쳐대는  어른들 편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거의 여남은 명 중에서 자신 곁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서넛도 안 된다는 게  그 주된 원인이었다. 다만 그  속에서 용기도 있다는 게 한 
줄기 격려가 될 뿐이었다.
  "빙신이 같은 손(놈)들, 내낳고 (지금까지) 죽은 듯이 자빠져 있다가 인자 이박사가 물러났다 카
이. 문딩이 손들."
  한동안 말없이 구경하던 용기가 야말찬 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침에 학교에서 이박사가 
나쁘다고 할 때보다 철에게는 더욱 충격으로 들렸다. 그 충격이 막연하던 철의 감정을 뚜렷한 것
으로 바꾸었다.
  "야후"
  그때 철이 불쑥 떠올린 것은 [걸리버 여행기]의 야후였다. 말의 나라에서 천대받는 인간을 가리
키는 그말이 생각난 것은 거기서 읽은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쇠약하고 병들어 누운 권력자에게 
오줌을 누어 그가 건강하고 힘있던 대에 당한 복수를 하던 '야후'들의 혐오스런 모습이 방금 각복
을 휘두르고 고함을 질러대는 어른들에게서 내비친 까닭이었다.
  뒷날 자신이 고른 일과 거기에 잘 맞지 않는 보수적 성향 때문에 줄곧 괴로움을  당하게 된 철
은 언젠가 스스로 문의한 적이 있다.  그해 4월의 사건에 대한 것으로서 유일한 것이 된 그 기억
이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길렀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있던 보수적인 기질이 다른 아이들과 달
리 그런 기억으로 그날을 대하게 했는가를. 그  답이 어느 쪽이건 철에게는 마찬가지로 불리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었다. '들린' 시대의 미친 말(언어)을 몰고 가는 자신의 가치로 선택한 그에게는 
  
    제 36장 사월의 끝
  다친 곳이 덧났는지 팔이 몹시 욱신거렸다. 어둑한 방안에 누워 앞뒤없는 몽상에 잠겨 있던 명
훈은 가마히 몸을 일으켜 붕대를 끌러보았다. 아침에 김형이 상처를 소독하고 새것으로 갈아주었
는데도 어느새 붕대는 누런 물이 잔득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황의 말을 따르는게 나을 듯 싶었
다.
 "명훈이, 도대체 왜 그래? 수도육군통합병원이나 메디컬센터  가면 무료로 치로를 해 줄텐데 뭣 
땜에 이 궁상이야? 이제 4.19는 의거에서 혁명이 됐다구. 그리고 너는 그 명예로운 전선에서 자신
을희생한 전사란 말이야. 네게는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어."
  배석구의 부축을 받으며 다친 걸 알고부터 돌아가 누운 그 다음날 늦게 돌아온 황은 명훈이 다
친 걸 알고부터 줄곧 그렇게 권해왔다. 배석구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차마 그날의 진상을 말할 수 
없어 명훈이 둘러댄 망을 그대로 믿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명훈은 조금도 그럴 마음이 내키지 안았다. 배석구의 도 다른 충고,  데모에 가담해 부상
당한 것으로 경찰에 오인되면 어떤 불리를  입을지 모른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데모를  하다 다친 
게 죄 될일도 아니라는 것쯤은 명훈도 진작부터 알 수 없었다. 음급 치료를 위해 찾았던 개인 병
원의 의사나 간호원은 말할 것도 없고, 택시비  받기를 망설이던 운전사에게서 명훈이 느낀 것은 
당황스러울 정도의 호의였다.
  처음 한동안 명훈은 그들로 드러나는 사회 전체의 그런 분위기에 우쭐해 이와 시작한 거짓말의 
단 과일을 즐겨볼까도 싶기도 했다,  자신의 자세한 경력이 드러나면 좀  앞뒤가 맞지 않는 데가 
있기는 하겠지만 아무도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사람이 없는 만큼 우겨 안 될 것도 없을 듯했
다. 마산서도 가장 격렬하게 앞장선 패거리는 구두닦이와 양아치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정서에 어떤 품격이 있다면  명훈이 타고난 정신은 적어도 하품은  아니었던 듯 
싶다, 명훈은 곧 알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그런 내심의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리고 차츰 스스로에 대한 환멸  비슷한 감정가지 느끼며 자신의  거짓말을 후회히게 되었다. 
오히려 진실을 고백한게 방해가 된 것은 김형과 황의 지나친 추겨세움 때문이라는 편이l 옳았다.
  "뭐야?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서 갔다가 총을 맞았다구? 이거 정말 놀랐는데. 이명훈씨, 이제 
다시 봐야겠어."
  그 이튿날 아침부터 돌아온 김형은 그렇게 빈정거림 섞어 말했지만  명훈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눈치는 조금도 없었다. 무언가 명훈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차자낸다는 듯 새사스런 이 눈길을 보
냈고, 황이 돌아올때는 명훈이 입을 떼기도 전에 보지 않은 무용담까지 곁들여 부상의 경우를 들
려주는것이었다.
  그날 두러 신간 데모 구겨을 하다가  네시쯤 자취방으로 돌아와 천연스레 출근한  김형 자신의 
애기를 할 때와는 말투부터 다른  게 적지 않는 감동의 동요를  보이고 있어지만, 명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한 김형의 경의로운 느껴졌다.
  타고난 기질대로 화의 반응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는  김형의 말을 듣자마자 명훈의 성한 팔
을 움켜잡으며 감동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놀랐어, 명훈씨. 언제나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 듯기는해도 나는 명훈이 바로 말없는 투
사인지는 또 몰랐지. 국회의사당이다, 대법원이다, 몰려가도 총질  하지 않는 골라 다닌 우리하고
는 역시 달라."
  그렇게 스스로를 낯쳐가면서 까지 명훈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바깥에서 돌아
오면 묻지 않았는데도 보고하듯 자세히 데모의 결과를 말해 주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호랑이 등에 올라탄 느낌으로  거짓말로 버텨나갔지만, 무료 
치료만은 끝내 거부했던 것이다.
  "국회의원에 장관에 대통령까지 위문을 오지 않나,  예쁜 여학생들이 꽃다발을 들고 주릉ㄹ 서
질 않나, 그뿐이야? 먹을 것 마실 것 흔전만전 다발을 들고 장관에 대통령까지 위문을 오지 않나. 
그뿐이야? 먹을 것 마실 것 흔전만전  다발을 들고 줄을 서질 않나. 그뿐이야?  먹을 것 마실 것 
흔전만전 다발을 들고 줄을 서질 않나. 그뿐이야? 먹을 마시고 흔전만전이고 전국에서 답지한 위
로 성큼 나도 몇천만 환이 된다지 아마."
  이고 전국에서 답지한 위로 성금만도 몇천만 환이 된다지 아마."
 나중에 황은 그렇게까지 명훈을 달래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명훈에게는 바로 그런게 가장 두려웠
던 것이다.
  "그렇지 않지. 19일 날 나선  것들이야 머릿수는 많았는지 몰라도  감정은 일시적인 흥분 같은 
것이어서 구체적인 목표나 결과에 대한 예측 같은 게 거의  없었지. 그런데 이제 이 선생 양반들
이 모두에게 그걸 생각하도록 한 거야. 옛날의 군.사.부에서 오늘까지 그래도 제밥 권위를 가지고 
버텨낸 게 바로 그 사, 곧 선생들이거든. 나 같은  건달에게까지 이건 아주 심각하다, 이젠 좀 생
각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겠어? 또 여태껏 누르면 누르는 대로 찍소리 못 하던  교수들이 드디어 
학생들의 앞장을 서게 되었다는 데서 자유당과 이박사가 받은 충격은 얼마나 크겠어?"
  "그래도 무슨 대단한 일이야......"
  "아니지. 너보다 오래 세상을 산 내 눈썰미로는 이제 자유당 세상은 끝장이야. 두고봐. 모든 건 
시간 문제일 테니."
  배석구는 그렇게 음울하게 말해놓고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더니 
별일 없다 싶자 다시 이었다.
  "아울러 우리도 막판이지. 뭐니뭐니 해도 지난 15년 우리에게는  좋은 세월이었지. 주먹으로 밥 
먹으면서 폼까지 잡을 수 있는 세월, 앞으로는 흔치 않을 거야."
  그런 배석구의 표정이 얼마나 어둡고 진지했던지 명훈은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면 
겨우 일 년, 그것도 대개는 시키고 따르는 형태로 유지 된 그들의 관계였으나,  둘 사이에 흐르는 
정감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지난 가을 명훈이  본격적으로 뒷골목에 자리잡은 뒤로 배석구가 명
훈에게 쏟은 정은 그 세계에서도 흔치 않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처음부터 골목 하나를 맡긴 것도 
그렇지만 그뒤에 생긴 이런저런 사건 때 마다 배석구는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이 명훈을 편들
고 돌보아주었다. 어떤 속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복종이란 바대 급부 
외에 딴 것은 한번도 명훈에게 요구해본 적이 없는 배석구의 그런 베풂은  명훈에게도 그에 못지
않은 정이 우러나게 했다. 바로 그런 정이  이제는 갑작스런 안쓰러움으로 명훈의 말문을 막아버
린 것이었다.
  그새 답배를 붙여문 배석구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을며 닽식처럼 이어갔다.
  "생각하면 반탁 패거리에 휩쓸려 책가방을 팽개칠 때 이미 나는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지. 
사실은 깡패짓을 하면서도 자신은 애국을 하고 있다고 우쭐거릴 때부터. 그뒤  한4,5년 비록 똘마
니 중의 똘마니로 따라다녔지만, 주먹들에게는 한세상이었더, 반공만 달면 만사 오케이였지......
  6.25가 나고 빨갱이들이 자취를 감추자  잠시 막막하더군.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뒤에 재빠를게 
그쪽으로 끼여든 선배들이 부럽기 그지없었어. 하기야 선배들의 상당수는 6.25때  나라를 위해 전
사했지만......남은 우리는 일제 때 선배들처럼 뒷골목으로 되돌아가 영 거기서 썩는 줄 알았지.
  그렇지만 오래는 안 가더군. 사사오입 때부터 정치가 다시 우릴 쓰기  시작했어. 한강 백사장을 
휘젓고 장충단공원을 둘러엎었지. 좀 낡고 억지스런 대로 반공의 깃발을 휘날리며, 불교 정화에도 
한 팔을 빌려줬지. 반반한 절치고 대처승 쫓아내는 데 우리 주먹 안 빌린 데가 드물걸......
  동대문 사단과 서대문 이의장댁이 연결되면서 나는 새까만 꼬봉 시절에  그토록 화려하게 보이
던 황금 시대가 본격적으로 되돌아온 줄 알았어. 주먹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길인 시대가. 
그럴 법도 한 게, 아침저녁으로 모시는 오야붕이 몇억 재산에 국회의원 자리를 넘겨보고, 그 지역
구를 이기붕에게 뺏긴 뒤에도 내무장관설 치안국장설이  있었으니까. 또 다른 오야붕은 대통령의 
수양아들이 되고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경무대 경호 책임자오 형 아우  하며 몰려다니고 있었
으니까......
  거기다가 때맞추어 우리가 솜씨를 보일 기회도 왔어. 우리는 이기붕씨가 부통령이 되기만 하면 
바로 우리 세상이 오는 줄  알았지. 대통령이 여든둘의 고령이라 어쩌면  새 임기중에 그 대통령 
자리를 채우게 될지 모르는 게 이번 선거의 부통령 자리였지, 곧 단순한 부통령이 아니라 반대통
령 자리였던 거야. 그 자리를 우리가 힘써  그대로는 어림없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해준다면 그게 
누군들 가만히 있겠느냔 말이야?
  이제니까 고백하지만, 실은 나도 조그만 시골 읍의 경찰서장쯤으로 내 자리를 찍어두었지. 이번 
한번으로 이 지저분한 뒷골목과는 손을 꼲고 싶었어. 한 번 길로 쓸 수는  있지만, 일생을 몸담을 
수 없는 게 주먹 세계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거든......"
  배석구가 거기까지 말하자 명훈은 그가 지난 선거에 그렇게도 열심이던 까닭을 한층 뚜렷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아이구찌의  의심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이라는 식의 단정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유년의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보다 더 험한 일도 흐지부지 넘어가는 걸 그는 몇 번이고 본 듯했
다. 아니 도대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일반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세상이 뒤집히는 일이 벌
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의식 환경이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영향 아래 어린 날을 보냈으면서도 그 때문에 그의 기억은 오히려 그지없
이 반동적이었던 것이다.
  명훈은 그런 기억과 나름의 막연한 예감에 의지해 배석구를 격려하고 위로해보려 애썼다. 그러
나 배석구에게는 이미 모든 게 끝장난 듯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한 도망자의 티를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소주 두 병을 더 비운 뒤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만취돼 쓰러진 사람 같지 않게 배석구는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계엄 때문에 통금이 연장되
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새벽같이 떠났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갈 작정이십니까?"
  가까운 선술집에서 해장국을 먹으면서 명훈이  묻자 하룻밤새 한층 초췌해진  배석구가 대답했
다.
  "너만 알아. 강원도 쪽으로 가볼까 해."
  "강원도?"
  "옛날에 애들하고 박터져가며 봐준 절이 하나 있지. 그 절을 차지하고 있던 대처승들이 어찌나 
악바리들이던지......그때 친하게 된 땡초 하나가 지금 주지 노릇을 하고 있다더군."
  "안전할까요?"
  "거기까지 찾아오게 된다면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지."
  배석구는 그렇게 말해놓고 문득 명훈의 일을 떠올린 듯 자신의 애기를 할  때와는 달리 침착하
게 당부했다.
  "너나 잘해. 어쩌면 너희 같은 송사리들에게까지 그물이 덮어씌워질지도 몰라. 종로고 명동이고 
뒷골목 쪽은 되도록 얼씬도 마. 아니,  지금 이대로, 데모하다 부상당한 대학생으로  버티는 거야. 
내 말 꼭 명심해."

  ≪혁명은 독재 정권의 형상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권 
타도로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며, 그 정권이 존립할 수 있었던, 또 그와  유사한 정권의 존재
를 가능하게 하는 상부 구조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새로운 토대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4월 혁명은 독재 정권의 외형만 타도하고 그 실체를 타도하지 못한 점에서는 실패한 혁
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운동의 조직과 이론의 빈약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혁명의 사후 처리를 
자유당과 이념상 다를 바 없는  보수 정당인 민주당에 맡기고  의기양양하게 학내로 복귀하였다. 
그로부터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방황과 각성을 거듭해가면서  그들이 범했던 
오류를 청산하려고 처절히 몸부림치게 된다......≫

『해방 후 한국 학생 운동사』를 쓴 이재오는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6.3사태 사이으 학생 운동을 
그렇게 서술하고 그 장에 '방황과 각성'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하지만  그 방황이 '설정된 한계를 
인식하면서' 몰두한 모색이었는지, '무한한 가능성 앞의'  망연자실이었는지, 또 그 각성이란 것도 
절망적인 자기 투척의 각오일 뿐인지, 드디어 길을 찾아 다지게 된 매진의 결의인지는 쉽게 단정
할 수가 없다. 어떤 해석을 하게 되는가는 우리 현대사의 괴로운 족쇄라고도 할 수 있는 분단 구
조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겠는데 그게 사람마다 심한 편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낙관과 비관, 보수와 진보 같은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은 각자의 기질이나 성향에 더 많
이 좌우되는 여러 관점으로부터 갖가지 이데올로기며 국제 역학과 국내동인의  비교 우위에 따른 
편차에다 어쭙잖은 종족주의며 혈통적 신비주의까지 끼여들면 똑같은 낱말이  정반대로 해석되기 
조차 한다.
  그러나 방황이란 말의 상징성이나 포괄성으로 보면,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뒤 얼마간 학생들의 
의식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보다 더 적절한 낱말도 없을 성싶다.
  새롭고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될 때까지 그들이 보인 정신적 궤적은 앞서의 그  어느 편 해석을 
따르든 일관된 방향으로의 무수한  시도였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찾는  헤맴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명훈이 우연히 그런 그들의 방황을 엿보게 된 것은 그날 오후 늦게였다. 적어도 그때까지의 학생 
운동에서는 지도부의 일부를 담당했음에 틀림없이 보이는 학생 몇이 황의 안내로 명훈이 누워 있
는 방을 열띤 토론장으로 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토론을  옮기기 전에 그 오후 명훈이 잠
시 빠졌던 야릇한 감회를 먼저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되겠다. 오전 내내 상처의 욱신거림
에 시달리던 명훈은 두어시쯤 해서 상처가 곪는 것이라도 막아볼 양으로 마이신 몇 알을 사러 동
네 약방으로 나갔다가 거기서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었다.  황은 전날 밤 돌아오지 않았고,  김형은 부대에서 
퇴근하기 바쁘게 등교해버려 바깥 소식이 잠깐 끊겨 있는 사이에 일어난 뜻밖의 사건이었다.
  간신히 신문 한 장을 구해 그 일의 전말을 대강 알게 된 명훈은 이승만의  하야 성명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제서야 한 정권이 무너지고 세상이 바뀌어졌다는 게 섬뜩한 실감
으로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 국민이 운하는 것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나에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
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하고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
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재선거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을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명훈이 그런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들은 것은  동네 전파상 앞에서였다. 중대 발표가 있으리라
는 예고가 그 아침부터 여러 번 되풀이된 뒤라 라디오가 없는 꼭대기 동네 사람들이 여럿 길가에 
내놓은 대형 앰프 곁에 몰려 서 있다가 방송이 끝나자 환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명훈은 아무래도 
그게 자유당 정권의 붕괴음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국민이 원하다면'을 두 번씩이나 앞세운 게 못 
미더웠고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하고자 하는 공산군'이라는 구절은  은근한 엄포처럼 들리기
까지 했다.
  전날도 마찬가지였다. 이기붕.최인규.장경근을 비롯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당당하던 자
유당 의원들이 국회의 의원직 사퇴 권고를 받고,  자유당 간부들이 줄줄이 사퇴를 했으나 명훈에
게는 그게 모두 한때의 제스처로만 보였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시그러우니 물러나느 척
했다가 때가 되면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어린 날 보았던 그토록 격렬하던 좌익 
운동을 끝내 버텨낸 그들이었기에 명훈에게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기붕 일가의 시체를 찍은  사진까지를 곁들인 신문을 보자 명훈도  더는 그들의 
몰락을 의심할 수 없었다. 커다란  충격에 이어 섬뜩한 실감이 가슴에  와 닿고 마침내는 야릇한 
감회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도 똑똑하고 힘있어 보이던  아버지와 그 동지들을 간단하게 패배시
킨 게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또 다른 적에 의해 타도당했다. 이치로 따지면 
적의 동지가 된다. 그렇다면 자유당과 이승만을 쓰러뜨린 세력은......'
  그러다 보니 느닷없는 기대에 슬몃 가슴까지 부풀어왔다. 어쩌면 학생들과 그들에게 호응한 시
민들이 모두 아버지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 까닭이었다. 그러나 나날이 기세를 더해
가는 민주당과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던 시민들을 또올리자 명훈은 곧 그게 부질없는 기대임을 깨
닫고 씁쓸해했다.
  '정말로 악질은 이승만이보다 한민당이라......'
  어릴 적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할머니의 푸념에다 대개는 죽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만만찮은 
기세로 민주당을 이끄는 옛 한민당 출신에게 보이던 어머니으 이해 못 할  공포심이 새삼스레 떠
올라, 잠깐 기대로 환하던 머릿속을 어둡게 한 까닭이었다.
  황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적의 적이 꼭 동지가  되는 것도 아니구나-- 명훈이 그
런 음울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 변혁에  대한 냉담을 되찾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마당에서 여럿의 
발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가 소리나게 방문을 여러제치기에 명훈이 놀라 쳐다보니 바로 황이었
다.
  "오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어? 좀 어때?"
  황은 그렇게 건성으로 물어놓고 다시 마당 쪽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
  "이 방이야, 모두 들어와."
  그러자 발소리가 가가워지더니 낯선 얼굴 하나가 열린 문으로 고개를  디밀었다가 항의하듯 말
했다.
  "방에 사람이 있잖아?"
  "아, 명훈이? 얘기 안 했던가?"
  황이 그렇게 말을 받더니 가벼운 웃음까지 곁들여 그들을 안심시겼다.
  "걱정하지 마. 믿어도 좋은 친구야. 같은 대학생일 뿐만 아니라--19일 날은 이기붕이 집 앞에서 
총까지 맞았어.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한 전사라구."
  그 말이 어떤 효과를 보았던지 그들도 더는 군소리를 않고 황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왔다. 황을 
빼고 모두 셋이었다. 하나는 검정물 들인 군용 작업복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안경잡이였고, 
하나는 사지 학생복 차림인데 날이  꽤 더운데도 윗도리 단추를 목까지  꼭 채운 채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허름한 양복 차림인데 팔에 두른 '질서 유지반'이란 완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자, 서로 알고나 지내지."
  세 사람이 자리를 잡자 황이  그들과 명훈을 번갈아 둘러보며 인사를  시켰다. 둘은 황과 같은 
적을 두고 있었고 하나는 다른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명훈이는 그냥 누워 있지 그래. 어찌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인사가 끝나자 황은 그렇게 권해 명훈을 다시 눕게 했다. 명훈은 그들이 자신을 믿고 존중해주
는 게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사양 없이 누웠다.
  그러나 꼭 상처를 과장하려는 것보다는 자기가 끼여들어 무언가 긴요해  보이는 그들의 대화를 
잠시나마 겉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명훈이 눕자마자 그들은 곧 어디선가 벌이다가 자리를  옮겨온 듯한 토론을 계속했다. 먼저 안
경잡이가 사지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쪽을 몰아내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오면서 쭈욱 생각해봤는데--무조건하고 학교로 되돌아가야  한다카는 니 주장은 단순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기까지 한 기라. 여기까지 일을 끌고 와놓고 인자  다시 그 못 미더운 기성 세대
에게 모든 걸 맡긴단 말이가? 순수한 이념으로 댕긴 불을 간교한 정상배들에게  지켜달라꼬 부탁
하고 물러선단 말이제?"
  "맞아요. 이건 시작이지 끝이 아니오. 정말로 우리가 일해야 할 때는 이제부터요. 우리 학교 쪽
은 물러나는 것보다 우리가 마땅히 맡아야 할 역할 쪽에 논의를 모으고 있소. 지금 하고 있는 질
서 회복 운동도 그 하나지만......"
  완장이 안경잡이를 거들어 그렇게 말하며 교복 쪽을  살피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교복 쪽은 조
금도 몰리는 느낌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결정된 일을 새삼 더들 거 없다는 말투로 둘에게 
한꺼번에 대꾸했다.
  "질서 회복이라면, 그건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해온 일의 마무리니 당연히 우
리가 해야지요. 그러나 우리가 학교를 떠나 현실에 계속 참여해야 한다는 데는 반대요. 특히 정치
는 오랫동안 그걸 자신의 일로 삼아온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오. 그리고 너 말이
야, 너는 기성 세대의 정치인들을 한마디로 간교한 정상배라고 단정했는데, 혹시 그거 무슨 딴 저
의가 있는 몰아붙이기 아냐? 새 술은  새부대에라든가--어쨌든 정치권 권위의 공백 상태를 만들
어--터무니 없이 우리의 시대를 앞당기려고 하는 거 아니냐구."
  "뭐시라? 그건 또 뭔 소린고?"
  "어렵게 어렵게 공부해 고등고시를 뚫고, 다시 계장 과장 하며 수십 년 기다린 뒤에야 이를 곳
을 이판에 어물쩡 질러가고 싶은 생각이 난 건 아니겠지? 학생 대표라 입에  발린 칭송을 늘어놓
는 야당의원이나 까닭 없이 굽신대는 경찰 간부들과 어울리는 동안 너무 일찍  권력의 미각에 도
취해서--딴생각이 든 거 같아 해보는 소리야."
  "화--절마 저거 사람 잡겠네. 니 일마, 내이께는 그런 소리  해도 괜찮제, 딴 아들한테 가서 그
따우 소리 해봐라. 사람을 욕비도(욕보여도)분수가 있제......"
  안경잡이가 그렇게 언성을 높였으니 그만 일로 싸움을 벌일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교복이 조
금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기분 상했다면 취소하지. 아마도 내가 강호연군가의 전통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지도 몰라."
  "강호연군가의 전통이라꼬?"
  "대수롭잖은 일로 벼슬을 내던지고 산골에 내려가서  노래를 짓지. '강호에 병이 깊어......'  또는 
천석고황이 어쩌구 하며 시작하지만 끝은 언제나 '임그려  우노라'는 식으로......그러다가 조정해서 
다시 부르기만 하면 이건 새벽밥 먹고 뛰어가는 꼴이야. 거기다가  더 희한한 일은 그 길이 조정
에 틀어박혀 허리가 휘도록 굽신거리며 봉사해온 쪽보다  빠른 출세길이 되는 경우가 많지. 반대
하기 위한 반대라기보다는 자신의 찬성에 값을  올리기 위한 반대으 성공적인 연출이  되는 셈이
야."
  그러자 이번에는 완장이 안경잡이를 대신해 불만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형은 모든 걸 민주당에게 넘기고 학교로 돌아가잔 뜻인데, 그게 죽 쑤어 개 주는 꼴
이 안 난다는 보장이 어디 있소? 도대체 민주당이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유당과 다른 게 무어
란 말이오?"
  "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란  말이 있소. 민주당이나 자유당이나 그 큰 뿌리
는 해방 정국의 보수 세력인 한민당에  있다는 건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뉜 지 하마 십 
년에 가깝고, 또 이번에는 불의 세례가지 받았소. 자유당의 형태를 반복하지는 못할 것이오. 거기
다가 우리가 배워온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이번 변혁의 전과정을 통
해 국민들이 민주당에게 보낸 지지는 또 어떡하시겠소?"
  교복의 그런 반론을 안경잡이가 한층 열이 올라 되받았다.
  "그게 무슨 놈의 지지고? 그건 단순한 반사 이익에 지나지 않는 기라. 강도가 미우이까 시기꾼
이 좀 곱게 빈(보인)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꼬."
  "으음,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거야? 그들 기성 세대의 수십 년에 
걸친 체험과 경륜을 순수 하나로 대신할 수 있단 말이지?"
  "그건 아무래도 좀 어폐가 있는 말 같습니다.  저기 박형도 우리가 전권을 장악하고 모든 일을 
도맡겠다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배움 있고 때 묻지 않은 우리가 모처럼 찾아온 의식으 봄을 보
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뜻 정도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정도의 역할이라면 우리가 꼭 못 
할 것도, 해서 안 될 것도 없을 듯싶은데......"
  완장이 다시 그렇게 안경잡이를 편들고 나섬으로써 방안은 한동안 이대 일의 설전장이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황이었다.  김형과의 입씨름 때는 오히려 격정적이고 직선적이던 
그가 그날은 어느편을 거들지도 몰아붙이지도 않고 가만히  세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쌍
방의 의뢰가 있어야만 나서기로 마음먹은 노련한 조정자 같았다.  
  명훈은 말없이 그들의 논쟁을 관망하고 있는 황을 보며 뜻밖이란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 들어 
김형과의 입씨름에서는 왠지 황 쪽이  서투르고 철없게 느껴졌는데, 또래의  다른 학생들고 앉고 
보니 오히려 황이 훨씬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어 보였다. 언제나 반대하고 공박하면서도 은연중에 
김형의 의견을 참고 삼아왔음에 틀림없었다.
  황의 그런 새로운 일면은 곧 명훈의 생각을 그 자리에 없는 김형 쪽으로 돌리게 했다. 실은 함
께 생활하기 전만 해도 명훈은 김형의 정신을 크기에서 깊이에서도 황에게는 이르지 못하는 것으
로 알았다.
  둘의 입씨름에서는 그럭저럭 버텨가기는 해도 그것은 황처럼 두터운 책이나  깊은 사색에서 우
러나온 논리가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익힌 눈치와  상식을 재치있게 두드려맞춘 것으로만 알았다. 
무엇보다 황은 이 나라 제일의 국립대 학생인 데다 언제나 보기에도 심각해 뵈는 두툼한 책을 기
고 다녔고, 김형은 이류 사립대  학생에다 책보다는 미군 장교들과 어울리는  데 더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함께 있게 되면서부터 김형을 보는 명훈의 눈이 전과 훨씬 달라지기는 했다. 그저 매
운 눈썰미 정도로 생각했던 그의 견식도 생각보다는  깊은 통찰고 사색을 바탕하고 있었으며, 그
의 지식도 얄팍한 실용만을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
까지나 황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느낌 정도였지 조금이라도 김형의 우위를 인정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 황이 취하는 태도를 보면서--특히 그게 어딘가 김형을 닮아 있다는 점에서--명훈
은 문득 김형이 진작부터 황보다는 한  단계 높은 정신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 명훈의 느낌을 황이 더 짙게 만들어준 것은 세 사람의 토론이 한 30분은  좋게 진행된 뒤
였다. 점차 격앙되어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황이 말했다.
  "자, 그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선 우리끼리라도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로 하지. 양쪽
이 다 근거 있는 말이라 절충을 해보았는데--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원칙적으로는 학교로 
돌아간다. 하지만 기성 세대에 대한 감시 기능은 계속 맡고, 우리 신분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부분적인 참여도 한다......"
  김형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내놓았을 법한 그런 의견이었다. 안경잡이가 대끔 쏘아붙였다.
  "그기 무신 어정쩡한 소리고?"
  "아니, 어정쩡할 것도 없지. 우리가 계속 학교 밖에 남아 사사건건  기성 세대를 간섭한다면 우
선 여론의 외면을 당할 염려가 있어. 그건 앞으로 더욱 절실하게 필요해질 우리의 대사회 영향력
을 상실케 할 분만 아리나 자칫하면 이제까지  기여조차 무시당하거나 부인될 위험까지 있지. 그
래서 일단 외형상으로는 사회의 박수와 칭찬 속에 학교로 개선해 돌아가는 거야. 기성 세대에 대
한 감시 기능은 우리가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가능해. 그리고 부분적인 참여를 통해우리의 힘을 
더 조직화하고 동원 태세를 갖춰두면 언제든 기성 세대으 반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봐."
 황이 그렇게 받자 '질서 유지반' 완장이 못 미더운 듯 물었다.
  "그런 야수겸장이 어딨소?"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여럿이 머리를 짜내면 있을 거요. 예를 들면 지금 
가동중인 그 '질서 유지반' 같은 걸 '국민 계몽대' 쯤으로 확대해 대학마다 조직을 만드는 것도 생
각해볼 수 있소. 그들로 하여금 의식이 뒤진 벽지으 대중까지 일깨우게 하는 한편 대학간의 연계
로 언제든 쉽게 우리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두는  겁니다. 그리 되면 지금은 일부 대도
시로 제한되어 있는 시민 의식을 널리 파급시켜 기성 정치인에 대한 감시  기능이 확대되는 효과
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는 지난 19일의 몇 배 위력으로 우리의 주장을 내세울 수
도 있지 않겠소?"
  "그라믄 그거 점진적인 혁명론 비슷한 긴 갑네. 글치만 간대로(마음대로) 될 꺼 같나? 절마들이 
얼매나 딿고딿은 놈들인데. 일제 대도 해묵고 이승만이 때도 반을 해처묵고 한 몇 년 앙알거리다
가 인자 다시 또 해묵을라  카는 능구리(능구렁이)들인데, 그땨우 우리 수작을  모리겠나? 그라고 
또 그타, 원래 혁명이라 카는 거는 그기 철저하게 수행될라  카믄 약간 미친 듯하게 설치는 것도 
필요하고, 앞 뒤 없이 덤벙대는 것도  있어야 되는 긴데, 그라고 지금 사람들한테도  그런 기운이 
실실 도는 거 같은데, 우리가 들어 너무 빠리 찬물을 끼얹는 거 아이가? 사람들이 전부다 지정신
이 들어 맨송맨송해가지고 이거 살피고 저거  재고 하기 시작하믄 물러난 이승만이  또 하겠다고 
나서도 넘어가는 수가 있는기라."
  "맞아요. 약간으 비극적인 소모가 있더라도  이 혁명은 과감히 진행돼 나가야  한다고 봐요. 그 
전위를 우리가 맡자 이겁니다. 그런데 그런 미지근한 방안으로는 좀 곤란하지 않소?"
  이번에는 안경잡이와 완장이 한꺼번에 그렇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황은 김형과의 논쟁 때와는 
달이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있는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
이 되물었다.
  "대답하기 전에 묻겠는데-- 이걸 혁명이라고 치면 끝은 어디쯤 돼? 이미 독재 정권은 무너졌다
고 하면 말이야."
  "그기사 어디까지 독재 정권이 무너진 걸로 보느냐  카는 기 문제지. 이승만하고 자유당  쫓기
간 걸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고 본다 카믄 벌써 혁명이 끝난 기라꼬도 칼 수 있지만 내 생각은 그
런 기 아이라. 다시는 제이, 제삼의 이승만이하고 자유당이 나타나지 몬하도록 이 사회의 구조 자
체를 바꿔놔야 한다 이 말이라. 그기 진정한 이 혁명의 완성이라꼬. 왜 그렇노 카믄 뭔가 우리 사
회의 구조가 비틀래(비틀어져) 있지 땜에 이승만이도 자유당도 나올 수 있었다 싶거든."
  "구조라-- 그렇다면 어떤 구조 말이야?"
  "한마디로 비민주적 구조제.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그런 안경잡이의 말을 받아 완장이 보충했다.
  "더 기본적으로는 분단이라는 구조까지. 나는 이  혁명의 완성은 민족의 통일까지 가야 한다고 
봐요. 이 모든 왜곡은 바로 그 분단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기 때문이오." 
  그러자 황의 얼굴에도 긴장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  긴장에는 분명 감탄도 섞여 있는 듯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 문제라면 잠시 논의를 미룹시다.  아까 말한 그 트랙직 웨이스트--  비극적 소모란 개념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가 정면으로 대결할 문제이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소. 고전적인 민주조
차 성취가 불확실한 이 마당에...... 모든 건 단계가 있소. 각자가 생각하는 이 혁명의 완성이 어디
까지이든 우선은 이 단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만 결정합시다. 내가 쓸데없는 걸 물은 것 같소."
  그렇게 일단 화제를 돌리더니 원래의 주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절충안은 교복에게도 그
리 만족스런 제안은 못 되는 듯했다. 이번에는 그쪽에서 이의를 달고 나왔다.
  "그런 복귀라면 나도 썩 마음내키지 않는데. 나는 여기서 우리의 역할이 끝났다고 보고 무조건 
돌아갔으면 해. 나중에 우리가 다시 교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이 있더라도. 네가 말한 것은 전략
적인 철수일 뿐이잖아? 실은 돌아간 게 아니라 더 깊이 개입하려는 거잖아?"
  거기서 다시 황과 교복의 논쟁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황은 확실히 명훈이 알던 그와는 많
이 달랐다. 이쪽저쪽을 상대로 지루한 설득 끝에 결국은 자기가 주장한 쪽으로 의견이 모이게 했
다. 그로부터 한20년 뒤 이 나라 권력 핵심의 언저리에서 한몫을 단단히 할 그의 정치성은 그 때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자라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의 관심이 명훈의 상처 쪽으로 쏠린 것은 모든 게  황의 주장에 가깝게 결정된 뒤였다. 그
때껏 요를 깐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그들의 논쟁에 귀를 기울이던 명훈은 시작에  비해 좀 
싱겁다는 기분이 들 만큼 황의 주장대로  결론이 난 걸 q고 귀에  모았던 신경을 풀었다. 그러자 
욱신 하고 왼팔이 쑤셔오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신열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 바람에 자신
도 모르게 약한 신음을 흘리며 요 위에 드러눕는데 교복이 그 소리를 들었던지 힐끗 명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이고, 이형이라 캤나, 몸이  마이 안 좋은 갑네.  얼굴이 벌긴 기  열도 엉간이 있는 갑구마
는......"
  황도 명훈을 무시한 채 자기들의 논의에만 몰두한 게 새삼 미안스러웠던지 명훈에게 다가와 머
리를 짚어보았다.
  "정말이네. 이거 뭐 잘못된 거 아냐? 공연스레 결벽 떨더니......"
  명훈의 이마에서 손을 뗀 황이 걱정스레 물어놓고  다시 명훈의 상처로 덤벼들었다. 오전에 명
훈이 한 손으로 풀었다가 엉성하게 되싸매둔 붕대를 풀자 함부로 옥시풀을 쏟아부어 더러워진 상
처가 드러났다. 명훈의 눈에도 벌겋게 성나 보이는 게 오전보다 훨씬 나빠진 것 같았다.
  "이거 뭐야? 화끈하네."
  조심스레 상처 주위를 손으로 쓸어본 황이 놀라 소리쳤다.
  "뜨끈하다고? 글타믄 곪은 거 아이가?"
  "병원에는 다니는 거야? 그냥 소독하나 하고 넘길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안경잡이와 교복이 동시에 그렇게 거들었고 완장은 제법 따지듯 황에게 물었다.
  "19일 의거로 다쳤다면 왜 지정된 병원으로 보내지 않았소? 무료로 입원도 가능할 텐데......"
  "그게 저 친구의 결벽이오. 구경하다 유탄이 스쳤을 뿐이라지만 내 보기엔 그리 가벼운 상처도 
아닌 것 같은데......"
  황이 변명처럼 대꾸했다. 그러자 완장은 금세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명훈에게 권해왔
다.
  "갑시다. 마침 내가 우리 학교 대표로 접촉한 병워니 우리가 가는  길목에 이쏘. 가서 의사에게 
상처를 보이고 필요하면 입원하도록 합시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런 길을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완장이 그렇게 나서자  명훈은 다시 움츠러
들었다. 그런 속마음이 읽히는 게 싫어 짐짓 겸양을 떨었다.
  "정말입니다. 황형 말대로 그냥 구경하다가...... 그리고 상처도 대단치 않아요. 의사 말로는 살갗
이 조금 찢겼을 뿐이랍니다. 나보다 훨씬 심하게 다친 사람도 많다던데 나까지......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아갑니다."
  "혁명가한테는 바로 그런 구경꾼이 밑천인 기라. 일차적인 군중 동원에는  성공한 셈이거든. 어
떤 시위 군중이든지 태반은 그런 구경꾼들일걸. 우야믄  앞대가리 몇 빼놓고는 모두 다 구경꾼일
지 몰라. 참말로 구경 갔을 뿐이더라도 너무 자격지심을 묵지 마소. 그기 바로 그기이께는."
  안경잡이가 그렇게 나오고 교복도 거들었다.
  "다른 데서 넘어져 다친  사람도 의거 부상자라고 나서서  설쳐대는데 무슨 소리요? 일어나요, 
갑시다. 확인 수속은 저기 윤형이 맡아줄 거요."
  그러자 황도 오늘은 더 두고 볼 수 없다며 명훈의 허리를 끼고 나섰다.
  명훈도 마침내는 못 이기는 척  그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뒷날  명훈 자신도 깜박깜박 진실과 
혼동하곤 하던 기억의 왜곡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은 그렇게 하여 시작된 열흘 간의 입원 기간 
동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해 4월의 기억 중에  마지막으로 선명하게 명훈의 머릿속에 남
은 것은 그날 저녁 병원 침대에서 읽은 4.19 의거 대학생 대책위원회'란 긴 이름의 단체가 발표한 
호소문이었다. 그게 유달리 선명한 것은 거기 함께 발표된  110명의 진행 위원 명단에 황의 이름
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19 의거를 계기로 하여 일부 정치인은 마치 이번 의거가 자당의 이익을 위한 것인 양 여기고 
또한 일부 불량한 부랑자들은 방화.상해.파괴  등 난동을 자행하므로 우리는 모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니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
  1. 학도는 이제 학원으로 돌아가 진리 탐구에 일로 매진하기 바람.
  2. 학교는 공연히 학생 단체를 남조하지 말고, 대동 단결하여 학도의 위력을 과시하기 바람.
  3. 4.19 의거중 실종된 채 아직 그 행방이 묘연한 자에 대하여 본위원회는 기어이 그 행방을 밝
혀야만 되겠으니 모든 국민은 합심 협력하여주심을 바람.
  4. 4.19 의거 당시 사망한 거룩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국학도 합동 위령제의 거행과 학
도 위령탑 건립을 추진중임에 전국민은 거족적 협조를 베풀어주시기 바람.

  입원실을 굴러다니는 그날 석간에는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늘같이  쳐다보았던 오야붕들에 
대한 기사가 주먹만한 활자로 중간 머릿기사에 실려 있었으나 묘하게도 그쪽은 순간의 충격뿐 기
억에는 조금도 새겨지지 않았다. 임화수 범행을 순순히 자백, '데모대(고대생)  습격을 지시,' 이정
재와도 상의하고 유지광에게......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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