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 8 제 2부 시드는 대지
이문열
제 37장 주고받기
`싫어! 정말 싫어...'
영희는 화장을 하다 말고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음속이 그래선지 화장발이 영
받아주지 않았다. 로션부터 잘 먹지 않는 기분이었고, 크림도 파운데이션도 계속해 속을 썩
였다. 그래서 왠지 얼굴이 얼룩덜룩해진 것 같아 파운데이션을 진하게 발랐더니 이번에는
덕지덕지 들고일어나는 식이었다.
`망할 영감쟁이, 만난 지 며칠 된다고 대낮부터... 시답지도 못한 주제에.'
영희는 화장지로 거칠게 얼굴을 닦아내며 다시 애꿎은 박원장에게 욕을 퍼부었다. 지난
수요일에 만났으니 아직 나흘밖에 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박원장의 요구
가 그리 별난 것도 아니었다. 전에도 더러 그랬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영희 자신도 그걸 자
신에 대한 박원장의 짙은 애정으로 보아 은근히 기뻐하고 바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실은 별나진 것이 있다면 영희 자신의 감정이었다. 뜻 아니한 재회가 있고 나서 한때는
박원장과의 관계가 옛날 박치과 시절의 좋았던 한때 만큼이나 달콤한 애정을 회복한 적도
있었다. 그게 좀 심드렁해진 뒤에도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언
제부터인가 박원장과의 접촉이 조금씩 싫어지더니 그 무렵에는 거의 견디기 힘들어 졌다.
억지로 참아넘기기는 해도 그와 몇 시간 보내고 돌아오면 하루종일 구역질에 시달릴 때까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심경의 변화 뒤에는 다시 만난 창현이 있었다. 가만히 따져보면 창
현과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 박원장이 싫어지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사랑은 한꺼번에 둘
이 있을 수 없다더니 그게 옳은가 보았다.
그러나 영희는 자신의 변심 뒤에 창현이 있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그걸 박원장의 탓으로
돌리려 애썼다. 일종의 본능적인 방어 심리로서, 그래야만 배신과 불륜의 비난을 혼자서만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배신과 불륜의 시초는 도덕적인 마비나 망각에서 열
리지만 그 마비나 망각이 끝내 지속될 수는 없다. 결국은 나름대로 배신과 불륜의 논리를
만들어내 하는데 영희로서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영희가 근래 들어 박원장이 싫어진 까닭으로 드는 것으로는 침실에서의 짓거리가 전보다
더 지저분해졌다든가, 전과 달리 인색을 떤다든가, 의심이 늘었다든가 따위였다. 하지만 가
만히 따지고 보면 실은 그것도 그녀 탓이라는 편이 옳았다. 영희의 성적인 반응이 심드렁해
지자 박원장 쪽에서 적극성을 띠어본 것이 지저분함으로 몰렸고 갑자기 늘어난 씀씀이로 만
날 때마다 영희가 손을 내밀자 매번 들어줄 수 없게 된 게 인색으로 몰렸으며, 자주 미장원
을 비우는 것 같아 행방을 따져본 게 의심 많아진 것으로 몰린 것이었다.
그런 방어 논리의 취약성은 영희에게도 곧 의식되었다. 그래서 최근에 다시 되살리기 시
작한 게 옛날의 원한이었다. 곧 박원장이 어린 자신을 버려놓고 비정하게 처가의 등뒤로 숨
어버렸던 옛일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의 배신과 불륜을 변호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그 뒤 다시 영희를 만나 얼마나 성실하게 대했건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었
건 이미 있었던 일을 지워버릴 재간은 박원장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핑계를 대고 미뤄버릴걸. 아니,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 약속을 취소해버릴까. 그런
다고 지까짓 게 뭘 어쩌겠어? 지가 내 몸을 통째로 사기라두 한 거야.'
평소에는 잘 붙던 인조 속눈썹까지 말썽을 부리자 영희는 불쑥 그런 생각까지 했다. 그러
나 그 생각은 뒤이어 떠오른 창현의 어두운 얼굴로 이내 지워졌다. 지난번 만났을 때 영희
는 더 못 견딜 기분이 되어 모든 걸 박원장에게 털어놓고 떳떳하게 함께 사는 길을 찾아보
자고 제안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창현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영희를 보다가 한숨과
함께 우울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그래야지. 나두 하루라고 빨리 그러고 싶어. 그렇지만 산다는 게 그리 간단한 거야? 나도
유도 이젠 어린애가 아냐. 더구나 유의 나이를 생각해봐. 여자 스물넷이면 이제 몇 년 안 남
은 거라구. 그래, 우리 둘이서 시작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나 아직 이 모양이고... 당신도 털
터리나 다름없어. 그 미장원? 설령 그 사람이 인심 좋게 통째루 유에게 준다 해도 별거 아
니야. 갑이야 부르기 좋아 이십만 원, 삼십만 원 하지만 사실 거기 뭐 있어? 집주인 따루 있
고, 의자 거울은 한번 뜯어내면 반값도 안되는 고물이고, 고데기 몇 개 빠마약 몇 통... 그건
장사 안 되면 바루 빈손이 되다는 거나 같은 말이야. 게다가 요즘은 손님까지 떨어진다며?
나두 이런 소기 하기 정말 괴롭지만 얼마만 더 참아. 그리고 독한 마음먹고 뭘 좀 제대로
만들어봐. 최소한 명동쯤에 버젓이 차려진 마장원이거나, 아니면 변두리라도 집세 안 내는
내 물건은 차지하고 앉아야지. 막말로 닥터 박. 그 사람도 그래. 결국 그 사람이 유의 인생
을 망쳐놓은 사람 아냐? 거기다가 이제는 데리고 살다시피 하며 왜 그리 쩨쩨해? 저는 서
울에만도 세채 네채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유도 마찬가지야, 유가 무슨 몸 가지고 자선
사업하는 사람이야? 왜 꽃 같은 청춘을 바치고 헐찍한 미장원 하나 얻어걸린 걸루 떨어지려
는 거야? 정말루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모를까... 마음 단단히 먹어. 그리구 유가 정말루 날
사랑한다면 서둘러, 미장우너 명동으로 옮겨 비까번쩍하게 못 차려주겠으면 작더라도 건물
이나 한 채 사달라구 해. 안되면 부인한테 이르겠다구 공갈이라두 치구. 공갈 치는 일이라면
내가 친구들 시켜 도와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오해는 하지 마. 유, 유 나 잘 알지? 내가 얼
마나 유를 사랑하는지. 이 모든 게 다 유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만약 유가 정말루 그 사람
을 사랑해서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유의 행복을 위해 내가 떠나줄게, 이 세상에서 자취 없
이 사라져줄게..."
그리구 마지막에는 어린애처럼 손들으로 눈물까지 훔쳤다. 그런 창현을 떠올리자 영희는
문득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오죽하면, 싶자 절로 마음이 다잡아졌다. 암, 박원장을 만나야
지. 만나야 하고말고.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지. 내 청춘의 보상을. 나는 보상받을 권리가 있
어, 그는 보상해줘야 할 의무가 있고.
박원장은 늘 그래온 것처럼 호텔 커피숍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영희를 맞는 그의 태도였다. 전 같으면 먼저 알아보고 일어나 손짓을 보내게 마련인데
그날은 영희가 곁에 다가가 내려보고 섰는데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깨날 줄 몰랐다.
"으응, 언제 왔어? 앉아."
영희가 가만히 어깨를 짚자 그제서야 박원장이 놀라 깨어났다. 영희가 안 나오는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가벼운 농담처럼 물었다.
"뭘 하세요? 어젯밤 못 주무셨어요?"
"아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역시 전 같으면 그쯤에서 활짝 피어나야 할 그의 얼굴이 그날은 여전히 어두운 채였다.
뭔가 있구나... 영희는 그제서야 어떤 심상찮은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걱정할 만큼 심각한
문제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야말로 자신의 위로가 필요한 때이겠거니 해서 은근히
자신감까지 키웠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객실로 옮겨서 얘기해요. 몇 호실이죠?"
영희는 성적인 분위기를 암시하는 눈짓까지 찡긋하며 핸드백을 집었다. 이번에도 역시 전
과는 뒤집힌 순서였다. 평소에는 언제나 박원장이 객실로 옮기는 것을 서둘렀는데 그날은
영희의 그 같은 말을 듣고도 움찍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멀건 눈길로 영
희를 건너다 볼 뿐이었다.
영희가 조금만 주의 깊었더라도 그때쯤은 사태의 심각함을 얼마간은 깨달았을 것이다. 하
지만 창현과의 불장난에 빠져 총체적인 마비 상태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영희의 의식은 아
직 아무것도 감지해내지 못했다. 기껏 전에 효과 있던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는 게 짜증을
부리는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얘기나 하다가 헤어지자는 거예요?"
"오늘은 그래야 될 것 같은데..."
영희의 짜증이 조금도 먹혀든 것 같지 않은 듯 느리고 무거운 박원장의 대답이었다. 그게
정말로 짜증이 나 영희가 한층 목소리를 올렸다.
"증말 별난 일이네. 뭐예요? 무슨 일이 있어요?"
"아마- 들으면... 영희도 놀랄 거야."
박원장은 그렇게 느릿느릿 대답해놓고 다시 한동안 영희를 앞서의 그 의미 모를 눈길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묻고 있잖아요."
영희가 이제는 짜증을 넘어 성났다는 표정까지 지으며 다그쳤다. 그래도 박원장은 한참이
나 더 뜸을 들이다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정식으로 이혼 수속 시작했어. 서로가 동의한 합의 이혼이니까 곧 처리가 될 거
야."
"네?"
영희는 너무도 뜻밖이라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원장의 이
혼, 한때 그것은 영희가 꿀 수 있는 꿈 중에 가장 화려한 꿈인 적이 있었다. 다시 만난 지
석 달 이쪽저쪽의 일인데, 그때는 박원장도 꽤나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그 일을 시도했다. 그
러나 정이야 있건 없건 만난 지 벌써 이십 년 가깝고 자식이 둘이나 있는 부부의 이혼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일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오래짆아 영희가 다시 창현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 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없었던 일처럼 잊혀지고 말았다.
"아내 쪽에서 먼저 제의를 하더군. 아이들 데리고 미국 가서 살겠대. 우리 그 드센 처제 영
희도 알지? 미국서 살 만한 모양인지 장모님 모셔가겠다고 나왔는데 저희끼리 무슨 애기가
있는 모양이야. 그렇게 뻗대드니 자기 쪽에서 먼저 제의해왔어."
"그래두... 아무리 동생이 뭐라 했다지만 그걸루..."
"물론 이유야 따로 있지, 우리 일, 그 여자 말이, 진작 우리 일을 알았대. 아마도 흥신소를
쓴 모양인데 알 만한 건 다 알더군. 하지만 자기로서는 무력하더래. 법으로 아무리 이긴들
내 마음이 이미 떠나버렸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거야. 돈이나 넉넉히 주면 여기 남아 속썩이
고 살 것 없이 애들 데리고 미국 가서 남은 삶을 보내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그러면서 영희를 살피는 박원장의눈길에는 어떤 기대 같은 게 담겨 있었다. 그때쯤 해서
야 겨우 박원장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만큼 정신을 가다듬게 된 영희도 그 기대를 읽었
다. 결혼하자는 거겠지... 그 기대의 내용을 그렇게 해석하고 나니 영희는 갑자기 당황스러웠
다. 한때 그래야 할 수백 개의 이유가 있었고, 또 간절하게 원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새 그
기억은 새까맣게 지워져 생판 새로운 난관이 돌출한 듯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얼른 무
어라고 대꾸를 못하고 있는데 박원장이 일깨우듯 말했다.
"별로 기뻐하지 않는구나?"
"뭘요?"
"우리 이혼."
"제가 왜 그걸 기뻐해요?"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불숙 그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그때 박원장의 눈길이 번쩍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힘없는 탐색의 눈길로 돌아가 물었다.
"한때 너도 몹시 바랐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이제 내가 너에게 결혼하자고 청한다면?"
"그건..."
"안 되겠니?"
다시 말하지만 영희가 조금만 더 의식이 깨어 있었어도 바로 뒤에 있을 그런 무참한 낭패
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단순히 치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크고 근원적인 어떤 음산한 운명에 휘몰리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앞 뒤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의 기분만을 주의 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는... 이십 년이나 나이 차가 나고... 세상의 눈도..."
"그건 전에 상관없다구 한 것 같은데."
"집에서두... 어머니나 오빠가..."
"이미 떠난 집이잖아."
"제 과거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만둬라. 실은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갑자기 몸을 바로 세운 박원장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영희의 말을 끊었다. 그
리고 진작부터 탁자 위에 얹혀 있던 두툼한 봉투를 영희 쪽으로 내밀며 싸늘하게 덧붙였다.
"이걸 좀 봐라."
그때야 겨우 어떤 위기감을 느낀 영희가 반사적으로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모
두가 확대된 사진들이었다. 하나같이 자신과 창현이 나란히 나오는 것인데 둘이 팔을 끼고
걷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함께 여관 문을 들어서는 장면에, 드물게는 속옷 차림으로 방안에
함께 앉은 것도 있었다.
"이제 내가 어떻게 네 대답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알겠니?"
멍하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영희에게 박원장이 꼭 남의 일처럼 물었다.
"뭐예요? 이거..."
영희는 그렇게 소리치며 박원장을 쏘아보았다. 사진 중에 결정적인 정사의 장면은 없다는
것과 이런 일은 어떻게든 부인해놓고 봐야한다는 본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를 시작으로 몽롱한 잠 같은 마비와 둔감에 빠져 있던 영희의 의식은 다시 차갑게 깨어
났다.
"미안하다. 아내에게 배운 것인데- 나도 흥신소 신세를 좀 졌다. 꼴 사나워져도 속은 시원
하구나, 너무 성내지 마라. 나도 성내지 않으마."
그래도 영희는 저항해보려고 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매섭게 치뜨며 몸까지 과장되게 부
들부들 떨었다.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한, 또는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욕된 모함을 입은
사람 같은 연출이었다.
"정말로 실망했어요. 어찌 제게 이럴 수가 있어요? 뒤로 사람을 사서... 터무니없는 일을..."
영희가 그 정도로 성을 내면 어지간한 것은 박원장의 항복으로 끝나게되어 있었다. 그러
나 그날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박원장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다니? 어째서 그렇지?"
"이 사람 창현이란 사람인데- 옛날부터 알던, 친구같이..."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그저께 한남동 금수장에서는 주책없이 내가 직접 보고 듣
기까지 했다. 녹음도 있고... 어쨌든 그 얘기는 그만 하자."
그렇다면 더 안 들어도 알 만했다. 이제 잡아떼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자 영희는
순간적인 역습으로 나갔다.
"오해 마세요. 우리 사일 부인하려는게 아니라구요. 좋아요. 그랬다쳐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아무렴, 다 늙어가면서 절 아내로 맞을 생각은 아니셨겠죠? 철모르는 기집애 꾀어
망쳐놨으면 됐지. 평생 노리개로 가지고 놀려 하셨어요?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이대로 자선 사업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자 박원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무언가 스스로 처참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
나 이내 침착을 회복해 담담하게 말했다.
"네 말 잘 알겠다. 하지만 자선 사업이란 건 또 뭐지?"
"나이 들고 처자 있는 사람에게 아무 받는 것 없이 정조 바치고 몸 바치는 거 그게 자선
사업 아니고 뭐예요?"
"아무것도 받는 것 없이..."
"그래요. 제게 뭘 해주셨어요? 그 알량한 미장원?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몸 안 꿈지럭거리
면 밥벌이도 안 되는 그 미장원요? 그럼 그걸루 저를 통째 사신 줄 아셨어요?"
"목소리가 높다, 나는 지금 너를 나무라려 불러낸 게 아니다. 그러니 너무 긴장할 거 없
어."
박원장이 력렬한 분노로 맞섰으면 영희에게는 대응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
상 밖의 담담함이 오히려 영희를 맥빠지게 했다. 박원장은 영희의 감정이 좀 가라앉기를 기
다려 역시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이었다.
' 이 세상에서 너와 나는 두 번 악연으로 만났다. 먼저는 내가 너에게 악연이었고 이제
는
네가 나에게 악연이 되었다. 아니, 두 번 모두 내가 너에게 악연이었느지도 모르지, 어쩼든
이제 우리 악연을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어떻게 끝내시겠어요?"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영희는 여전히 도전적으로 받았다. 무슨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래야만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박원장이 조용히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사람의 인연은 만나지 않으면 끊어진다. 나는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 너도 어쩌다 길거
리에서 나를 만나게 되더라도 외면해다오, 지금 그 미징원과 그 동안 내가 해주었던 것은
모두 네가 가져라. 그리고 이거 십만 원이다. 얼마 전에 네가 필요하다고 한. 넉넉하진 않겠
지만 이걸루 이제부터는 혼자 어떻게 해봐라."
"참 후하신 네프로도프 씨셔."
영희는 이제는 거의 허세로 그렇게 버텼다. 영희가 네프로도프를 아는 것은 부활을 읽어
서가 아니라 박원장에게서 얘기를 들어서였다. 나중ㅇ 카추샤란 국산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그때는 카추샤가 하녀로 나오는 것 때문에 오히려 기분 나쁘기만 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떠
올라 불쑥 내뱉은 그 이름이 박원장의 감상을 자극한 것 같았다.
"아내가 이혼 제의를 하면서 내가 꾸기 시작했던 꿈을 너는 모를 거다. 너와 함께할 나머
지 삻을 얼마나 아름답게 상상했는지... 하지만 그래도 널 사랑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잘못이 있었다면 모두 내게 있었다. 어디를 가든지 부디 행복해라."
완연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마친 박원장은 그 길로 천천히 일어나더니 따로이
작별 인사도 없이 휘청휘청 걸어나갓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영희는 자신이 무엇을 얻
고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어렵게 생각했던 한판의 주고받기가 생각보다 조
용하고 깨끗하게 처리되었다는 홀가분함뿐이었다.
영희가 자신이 얻고 읽은 것에 대해 조금씩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그날 밤 그 일로 창현
을 만나고 나서였다. 박원장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당현히 기뻐할 줄 알
았으나 창현은 오히려 화부터 냈다.
"거봐, 조심하랬잖아? 이제 와서 이게 뭐야? 이거 오갈 데 없이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잖
아? 겨우겨우 뭐가 좀 되는가 싶더니.. 유가 너무 서두르더라구."
그러다가 느닷없이 박원장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쌔끼 정말 약은 쌔끼네, 남의 계집 싸게 데리고 놀다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잖아?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혼인 신고라두 해두구 그 새끼 멱살 한번 잠는 건데, 껍데기뿐인
미장원에 겨우 돈 십만 원? 그 새끼 정말 사게 데리구 놀았네. 더구나 늬 처녀까지 따먹은
쌔끼라며? 시팔, 지금이라두 혼빙같은 걸루 한번 걸어봐?"
아무리 그와의 치정에 눈멀어 이쓴 영희라도 아무런 절제 없이 드러내는 창현의 그 같은
천박함은 견뎌낼 수가 없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박원장의 인품이 그런 창현에 대비되
어 새롭게 돋보이며, 비로소 자신이 잃은 것이 생각보다 큰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두 쉽지 않은 사람이야, 내 앞에서 그사람 욕하지 마."
영희가 듣다못해 그렇게 말리자 창현은 더욱 펄펄 뛰었다.
"왜 아까워? 원장 싸모님 될 기회 놓쳐서? 지금이라두 따라가지, 그래, 맞아. 지금이라두
따라가라구. 나같은 딴따라 평생 따라다녀봤자 별볼일 없어."
전에 없이 야비하게 들리는 창현의 이죽거림이었다. 영희는 놀라 소스라치듯 자신만의 환
상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박원장이 말할 때는 흘려들은 것들도 비로소 제 의미로 되살아나
는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았는가. 나는 무얼 얻고 무얼 잃었는가....
제 38장 짧디짧은 봄
탕기에서 나는 냄새가 약이 거의 다 달여졌음을 알려주었다. 스무 첩 보약의 마지막 탕이
라 영희도 그쯤은 냄새로 분간할 수 있었다. 진흙 풍로 안의 숯도 다 사그라져 작은 불씨만
을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영희는 풍로의 바람구멍에서 신문지 마개를 빼고 연탄 화덕으로 돌아와 공들인 아침 준비
를 마무리했다. 밥과 국은 아미 방안에 들여놓은 터였다.
"아유, 이 집에 무슨 잔치해? 아침부터 웬일야? 지지구 볶구."
연탄불이 센지 양념 바른 장어가 타며 내는 연기와 냄새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부엌 쪽문
을 열고 들여다보며 물었다. 언제나 기분 나쁜 탬색의 눈길이었다.
"아뇨. 잔치는 무슨... 그냥."
영희는 그렇게 얼버무리려다 문득 마음을 바꿔먹고 자랑스레 말했다.
"실은... 오늘 우리 그이 카메라 테스트가 있어서요."
"카메라 테스트? 그게 뭔데?"
영희가 기대한 대로 집주인 아줌마가 반짝,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렇게 받았다.
"영화 찍는 카메라 있잖아요? 그걸루 그이의 실제 연기를 찍어보는 거라구요."
"그럼 신랑이 영화배우 모집에 나가는 거야?"
무엇에든 나서기 좋아하는 아줌마가 제법 말을 알아듣는 척했다.
"모집에 나가는 게 아니구요... 배우로 뽑힌 거예요. 그것도 주인공으로다가, 테스트는 무슨
시험을 치는 게 아니라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받는 확인 같은 거구요. 감독이 우리 그이 연
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나 알아보기 위해서 하는 절차인가 봐요."
영희는 창현에게 들은 대로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왠지 말을 하면서도 고소한 기분이 들
었다. 평소 창현을 못마땅하게 혹은 의심스럽게 보는 그녀의 눈초리를 의식해서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주인 아줌마가 갑자기 캐묻는 말투로 나왔다.
"그래? 그럼 벌써 배우가 된 거네. 그런데 감독이 누구야? 무슨 영화사구?"
그 물음에도 영희는 자신이 있었다.
"박노식이 주연한 <상하이 박>하고 황해가 주연한 <삼형제>아시죠? 그거 감독한 양일수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있다가 이번에 입뽕하는 김광배 감독이에요. 영화사는 대영이라구
충무로에서도 알아주는 큰 회사구요."
"그래? 솔직히 젊은 사람이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색시 신랑이 그
렇게 대단한 줄 몰랐네. 그럼 전부터 그쪽에서 일한 거야?"
말은 그래도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게 영희의 심사를 건드려 실제보다 과장된 대
답을 하게 했다.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충무로에서는 진작부터 그일 알아주었다구요. 배우 수업도 착
실히 해왔구요. 탐내는 감독두 많았구... 확실한 작품을 기다리느라 늦었지 시시한 데 출연하
려구 했으면 배우가 되어도 예전에 벌써 되었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우리 그인 이제 곧 스
타가 될 거예요."
"그래애? 그럼 스타 사모님 되거든 옛정 잊지나 말아요."
주인 아줌마가 애매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쪽문을 닫았다. 그 사이 장어가 익어 영
희는 연탄 화덕 위에 철판 뚜껑을 덮고 석쇠를 올려놓은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창현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전날 밤 자정이 가까워서야 돌아온 그였다. 김감독과
대본을 검토하며 한잔 했다는 것인데 기분이 몹시 들떠 있었다.
"내일 카메라 테스트 있고 곧 촬영에 들어갈 거야, 청춘물이라 석 달이면 끝난대. 그러면
이 김창현이도 뜨는 거야, 세상이 다 알아주는 스타가 되는 거라구. 유는 그 스타의 내조자
로 덩달아 유명해지구. 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창현은 자정이 넘도록 그렇게 되뇌다가 잠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영희에게 술주정을 할
엄두도 못 내는 그였으나 전날 밤은 제법 으름장도 곁들였다.
"이영희, 너 말이야, 너두 내일부터는 달라져야 해, 옛날이 너는 이제 없는 거야, 스타 김창
현의 현숙한 내조자로서 이영희가 있을 뿐이라구, 스타란 인기를 먹구 사는 직업이야, 그만
큼 비정한 거니까 옛날 냄새 조금이라두 피우다간 그걸루 우리 끝나는 줄 알아!"
전 같으면 아니꼽게 들을 말이었으나 전날 밤은 그저 황홀하기만 했다. 죽으라면 죽는 시
늉이라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현이 하도 깊이 잠들어 있어 영희는 깨우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벌써 여덟시
가 넘어 더는 늑장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 동안 정성들여 조리한 음식들도 식
어가 더는 깨우기를 망설일 수 없게 했다.
"창현씨, 창현씨이- 일어나요."
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섞어 창현을 깨웠다. 보기보다는 깊은 잠이 아니었던지
창현이 곧 눈을 떴다.
"으응, 지금 몇시야?"
"벌써 여덟시가 넘었어, 오늘 열시 약속 아냐?"
그러자 창현이 화닥닥 일어나더니 그 다음은 더 채근할 필요 없이 알아ㅓ 서둘렀다. 오래
찬물에 찜질하듯 하는 그 툭유한 세수에 이어 면도기와 쪽집게로 정성들여 얼굴을 다듬고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 사이 밥상을 다 차린 영희가 그를 달래듯 상머리로 끌어들였다.
"또 쇠고깃국이야? 술 먹은 다음날은 콩나물국 같은 거 시원하게 끓여볼 수 없어?"
창현이 수저도 잡지 않고 타박부터 했다. 역시 전에 없던 일이었다. 영희로서는 그게 창현
의 자신감에서 우러난 변화 같아 그저 대견스럽기만 했다.
"나도 그 생각을 해봤는데-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유가 힘들 것 같아 든든하게 먹고
나가라구."
영희가 마음좋은 누이처럼 그렇게 대답하자 창현은 겨우 잡은 젓가락으로 장어구이를 가
리키며 말했다.
"이것두 그래, 안 그래도 속이 느글거리는데 아침부터 이게 뭐야?"
그제서야 영희도 슬며시 속이 상했다. 특별한 날이라 참기는 해도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곱지 못했다.
"것두 몸에 좋다기에 비싼 값 물고 사온 거야. 유, 사람 인물이란 거 말야, 그게 다 음식이
고 영양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단 말 들어봤지? 그거 다 그 소리야. 잘 먹어야 인
물도 나는 법이라구, 양념을 짜고 맵게 했으니까 먹을 만할 꺼야. 먹어봐."
창현도 영희의 목소리로 그게 참을성의 한계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더는 타박을 주지
않고 상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젓가락으로만 께적거리는 게 영 밥맛이 없어 보였다. 영희
가 그런 상머리로 돌아가 어린 아이 밥 먹이듯 이것도 집어주고 저것도 덜어주자 겨우 몇
숟갈 떠넘기는 시늉을 했다.
창현이 밥을 반그릇도 비우지 않고 수저를 놓자 다시 속이 치밀어올랐으나 영희는 참았
다.
"다음에 중요한 일 앞두고 술 먹지 마. 그래 가지고 오늘 카메라 테스트 잘 되겠어?"
그런 가벼운 핀잔과 함께 자신도 따라서 수저를 좋안T다. 그제서야 창현도 미안한지 변명
조가 되어 말했다.
"나 술 좋아하지 않는 거 유도 잘 알잖아?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구 김감독님이 한잔 하
자는데 어떡해? 것두 예술하는 사람들은 술도 한잔씩 할 줄 알아야 한다는데."
그리고는 다시 정성들여 옷치장에 들어갔다. 원래부터 많던 색색의 와이셔츠에 그 무렵에
맞춘 세 벌의 새 양복을 번갈아 걸쳐보며 옷을 고르더니 영희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먼지
와 얼룩을 털고 닦았다. 옷을 입는 데도 어느 때보다 정성을 들였다. 와이셔츠와 양복의 재
봉성에다 넥타이와 혁대의 버클 사이 간격까지도 꼼꼼하게 따져가며 옷을 걸치는데, 보기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거 조금만 걸어다녀도 다 흐트러질 텐데 뭘 그리 꾸물거려? 차라리 이따가 카메라 앞에
설 때나 한번 매만지지."
보다 못한 영희가 가볍게 핀잔까지 주었으나 별로 송ㅇ이 없었다. 거기다가 보약을 떠먹
이듯 하느라 또 시간이 걸려 창현은 아홉시 반이 되어서야 겨우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
지만 영희는 정성들여 차려입고 나서는 그를 보면 가벼운 황홀감을 느꼈다. 그날은 평소보
다 훨씬 더해, 대문을 나서는 그의 주위를 무슨 휘황한 빛무리 같은 게 둘러싸고 있는 듯했
다.
"유, 정말 멋져, 신성일이 남궁원이 절루 가라야,"
영희가 그렇게 속으로 느끼던 짜증을 깨끗이 잊고 조금도 과장하는 기분 없이 그렇게 말
했다. 창현이 더욱 기특한 말로 받았다.
"저녁은 밖에서 먹는 게 어때? 잘하면 오늘 게랑트(개런티) 조금 나올지 몰라. 계약금조루
다가. 그럼 내 한턱 살게."
창현이 나간 뒤 영희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방안을 치우면서도 줄곧 황홀한 상상 속을 헤
맸다. 그녀의 머릿속 영사기에서는 그녀가 본 영화 중에서 멋지다고 생각한 모든 영화의 남
주인공이 창현으로 바뀌어 돌아가고 있었다. 대중 잡지에서 읽은 영화배우의 화려하고도 풍
족한 삶이 어김없이 자신의 것으로 바뀌어 떠올랐고, 그럴수록 현실은 더욱 무의미하고 추
상적인 것이 되어갔다.
행복이란 어떤 면에서는 개체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을 그 개체에게 가장 만족스럽게 소
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희의 상상력은 먼저 둘만의 소비에서 불타올랐다. 생물적
인 욕구부터 정신적인 혀영에 이르기까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획득의 수고로움 없이 소
비하는 과정이었다.
맛난 음식, 고운 옷과 좋은 집으로 시작한 상상이 값진 보석과 호화스런 외국 여행을 거
친 뒤 남에 베푸는 것으로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거기서 비로소 여태껏 고려되지 않았던 불
확실성과 위험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돌내골 집도 이젠 걱정 없어졌어. 오빠도 마음놓고 상록수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줄 거야.
오빠가 그렇게도 꿈꾸던 목장과 성채 같은 집과 풍차로 옮아갔을 때였다. 문득 모든 것은
창현의 성공이고 그의 획득일 뿐 자신이 가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떠올랐다. 그때 그이
가 내 말을 선선히 들어줄까...
그러자 그때껏 고려하지 않고 있던 다른 위험과 불확실성이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성공한
창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변화였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 모든 게 내가 뒷받침
이 된 성공인데, 자기가 어떻게 감히- 그 자리에 없는 창현에게 다짐이라도 받듯 그렇게 중
얼거려 보았지만 스스로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맞아. 오늘 창현씨가 영화의 주인공으로 뽑히고, 다시 계속해 스타의 자리를 굳혀간다 해
도 그건 그의 성공이야, 아무리 부부라 해도 그의 모든 게 바로 내 것일 수는 없지, 나도 무
언가를 가져야 해."
한번 깨어난 상상력은 이번에는 필요이상으로 엄격하고 냉정한 현실 안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성공도 그래, 오직 그가 떠벌린 것뿐, 아직 아무것도 보장된 것은 없어, 오늘 이날이
있기 위해 적잖은 경비와 노력을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배우가 된다는 게 그것만으로 전부
는 아닐 거야, 그렇게 쉽게 되는 거라면 스타가 왜 귀하겠어, 더구나 그의 재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좋을 때에 대해서는 따로 대비할 필요가 없어, 그러나 나쁠 때에 대해서는 대비가 필요해,
그래, 내가 너무 오랫동안 그이 한 사람에게만 목매달고, 사는 일을 앚어왔어, 오늘 일이 그
이 말대로 된다 해도 배우로서의 성공까지 보장된 건 아니야, 거기다가 오늘 당장도 그의
콘소리처럼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또 그가 성공한다해서 그게 바로 내 행복을 보장하는 것
도 아니고,,, 그 어떤 쪽이든 대비가 필요해, 이제라도 정신차려 현실의 삶을 돌아봐야 해.
모든 게 확실해지는 날까지 이 삶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해,'
영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무슨 길고 황홀한 꿈에서라도 깨난 듯 낯설어 보이는 현실을
돌아보았다.
한 달 전 박원장과 헤어질 때만 해도 영희의 경제적인 상태는 스스로도 흐뭇할 만큼 여유
가 있었다. 인수한 뒤 실내 장식과 설비에 들인 덧돈이 있어 불광동 미장원은 30만 원에 넘
길 수 있었고, 창현과 좀 흥정거리기는 했지만 그 동안의 저축도 10만 원은 넘었다. 거기다
가 박원장이 10만 원을 마지막으로 보탰고 지금은 인철 혼자 쓰고 있는 방의 전세금 5만 원
도 살아 있었다. 변두리로 나가면 집이라도 한 채 장만할 수 있는 돈이었다.
원래 영희는 그 돈으로 작더라도 종로나 명동 쪽으로 미장원을 옮겨보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창현의 배우 데뷔가 끼여들었다. 단칸방이지만 제법 부엌까지 딸린 별채를 빌려 두 사람
만의 공간을 마련한지 며칠 안된 어느 날이었다. 어디 나갔다가 대낮같이 돌아온 창현이 걸
신들린 사람처럼 영희에게 덤벼들어 한바탕 땀을 빼고 난 뒤에 담배를 물며 심각하게 말했
다.
"창피해서 말 안 했지만 실은 나 유가 없을 때 배우 학원 속성으루 마쳐둔 게 있어, 그때
두 동기들 중 가장 유망하다는 말들이 있었는데, 세상일이 그렇잖아? 손에 쥔 게 있어야지,
학원장한테 줄을 대 잘 나가는 감독이라도 소개받고, 감독한테도 뒷돈을 찔러줘야 잠시라도
화면에 얼굴을 내비칠 수 있는 게 그 바닥이거든, 지금은 누구누구 하며 잘 나가는 녀석들
도 시작은 다 그랬대. 그래서 요 모양 요 꼴로 떠돌이 악사 노릇이나 계속할 수밖에 없었는
데 말야. 이번에 기회가 생겼어, 아까 낮에 있잖아. 놀기 삼아 옛날 그 영화배우 학원에 들
렀더니 원장님이 불러 귀띔해주는 거야. 김광배라구 재주 있는 감독이 있는데 이번에 입뽕
을 할 참신한 배우를 찾고 있다나. 처음에는 독 들어갈 일이 겁나 손부터 내저었지만 듣고
보니 그게 아녔어, 큰돈 안 들어가고 스타로 뜰 길이 있을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된대?"
아뜩한 기분에서 미처 깨나지 못한 채 영희가 무심코 그렇게 받았다. 창현이 달라진 눈빛
으로 열을 올렸다.
"원장님 말로는 내가 경력이 좀 약하대. 그래서 한 3만 원 내고 속성 수강증 하나 더 끊으
면 1년 장기반 마친 걸루 쳐 김감독한테 소개해주겠다는 거야. 김감독한테 주는 뒷돈도 그
리 대단한 건 아니래, 그 사람이 원래 돈보다는 배우의 소질을 더 보는 사람이라 나 정도면
한 5만원만 쥐어줘도 될 거래. 그렇담 한번 해볼 만하잖아?"
그때 영희는 새로 시작한 둘만의 생활에 깊이 빠져들어 평소의 억셈이나 도시 밑바닥에서
단련된 경계심이 많이 느슨해져 있었다. 거기다가 가진 돈도 평생 처음 쥐어보는 액수라 그
런지 턱없이 여유 있게 느껴졌다. 설령 그 일이 잘못된다 해도 다시 미장원 하나 낼 돈은
넉넉히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발치 험한 판이에요."
그렇게 주의는 주어도 별 불안 없이 8만 원을 건넸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한 며칠
충무로를 싸돌아다니던 창현이 다시 풀죽은 소리를 했다.
"기계도 기름을 많이 쳐야 잘 돌아간다구, 아무래도 뒷돈이 너무 적었던가 봐, 김감독이 영
서두르지를 않아. 남은 바빠 죽겠는데 말이야, 그리구 원장님한테도 수강증 끊은 것만으로는
좀 야박한 것 같애, 한 5만원만 더 해줘."
그제서야 영희도 좀 긴장이 되었으나 이미 시작한 일이라 5만 원을 더 꺼내주었다. 다음
날 밝은 얼굴로 돌아온 창현이 이번에는 자신있게 요구했다.
"옷이 날개라고, 배우는 무엇보다도 의상이야, 유, 의상비 좀 투자하지 않을래? 나중에 몇
배로 갚아줄게."
그리고 영희를 명동으로 끌고 가 새 양복을 세 벌이나 맞췄다. 그 양복에 맞춰 구두며 와
이셔츠며 넥타이며 구색을 갖추고 영희도 덩달아 옷 몇 벌을 해입고 나니 다시 5만 원 넘는
목돈이 나가버렸다. 그러나 남에게 준 돈이 아니어서인지 그때는 돈이 줄어드는 것조차 느
낄 수가 없었다.
창현의 씀씀이도 점차 커졌다. 이전에는 돈을 얻어가도 며칠에 기껏해야 몇천원 정도였는
데, 그 무렵 들어서는 최소 단위가 아예 만 원이었다.
"교제비란 말 들어봤지? 은막 생활 하려면 꼭 와이로(뇌물)가 아니구두 교제비가 있어야
대, 하지만 이게 다 투자야, 소금 먹은 놈이 물켠다구 다 들인 대루 나오는 거라구, 이왕 시
작한 거 한면 제대로 해 보자구,"
그런데 이미 들어간 돈 때문일까. 그새 영희는 창현이 배우로 출세하는 데 본인보다 훨씬
더 맹목적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남은 돈을 셈하지도 않고 창현이 손 벌리는 대로 내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오래 셈을 안 했어, 보자, 남은 돈이 얼마나 되지? 일수 아줌마한
테서 돌아가고 있는 게 10만 원이고, 인철이 방에 5만원 그대루 있고, 헤라가 2만 원 빌려갔
고... 이 집에 사글세 보증금 3만 원이 있고... 그 다음에는 지금 내가 가진 것뿐이구나.'
가진 돈이란 은행을 싫어하는 영희가 겨울 옷뭉치 속에, 잘 안 보는 책갈피에, 장롱 바닥
따위에 뭉턱뭉턱 숨겨두었던 것들인데 그 무렵 들어 생각없이 여기저기서 꺼내 쓰나 보니
남은 게 얼마나 되는지 얼른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영희는 방안을 들쑤시듯 그 돈들을 찾아
냈다. 막상 찾아 꺼내놓고 보니 생각 밖으로 형편없이 줄어 있었다. 다 합쳐 3만 원 남짓이
었다. 줄잡아 30만 원은 되던 돈이라 영희는 처음 도둑이라도 맞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
나 다시 한번 꼼꼼히 따져보니 도둑맞은 것은 아니었다. 창현이 뭉칫돈으로 들고 나간 것은
13만 원뿐이었지만 의상비란 명목으로 5만 원이 나간 적이 있었고 또 교제비란 이름으로 오
천 원씩 만 원씩 가져간 것도 의상비만큼은 될 것 같았다. 새집을 얻어 살림을 차리는 데도
3만 원은 들었는데 침대라든가 호미아카 장롱 따위 당시로는 단칸 셋방에 어울리지 않게 고
급스런 가구들 탓이었다. 거기다가 벌써 한 달 가까이 둘이서 흥청거린 돈은 또 얼마인가.
오히려 3만 원이라도 남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안 되겠어, 이렇게 모든 걸 창현씨의 성공에만 의지하는게 아니었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최소한의 생계 수단은 마련해두어야지, 자칫하면 또다시 맨몸으로 거리에 나가게 될지 몰
라...'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영희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외출 채비를 했다. 낮의 남는 시
간으로 알아볼 걸 좀 알아보고 그 길로 창현과의 약속 장소에 나갈 작정이었다.
돈은 이미 반 넘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남아 있는 혀영이 있어 영희는 먼저 종로
쪽으로 나가보았다. 남은 20만 원 남짓으로 명동 근처에는 얼씬하지 못한다 해도 종로라면
어떻게 자리 잡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첫 번째 복덕방에서 영희는 이미 그게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작
년 처음 미장원을 보러 다닐 때부터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동산 임대료는 엄청나게 치
솟아 있었다. 종로는 대로가 아닌 뒷골목이라도 미장원을 할 만한 곳이면 전세로 50만 원
이하가 없었다.
20만 원을 보증금으로 넣고 나머지를 월세로 돌린다면 임대료만으로도 한 달에 5부 이자
쳐서 1만 5천 원을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기다가 시다바리를 두지 않는다 해도 미용
사 봉급 만 원이 추가되고, 빌려야 하는 설비비 이자에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태면 줄잡아
월 5만원 순익을 내야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려면 가장 비싼 파마 손님만으로도 하루 스무
명이 넘게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영희는 종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5가 쪽으로 내려가 다시 복덕방을 찾았다.
이번에는 싸게 나온 미장원을 중심으로 형세를 살펴볼 작정이었다. 결과는 좀 전과 마찬가
지였다. 나와 있는 미장원은 장사가 된다 싶은 곳이면 권리금이 붙어 말도 붙여보지 못할
만큼 부르는 값이 높았고, 무리를 하면 어떻게 맞출 수 있다 싶은 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망
하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몇 번 헛다리품을 판 복덕방 할아버지가 나중에야 영희의 사정을 짐작한 듯 권했다.
"색시, 보아하니 가진 돈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모양이구먼, 그렇다면 내 한군데 소개하지,
흑석동 쪽으로 가봐요. 거기서 복덕방을 하는 내 친구 말대루라면 색시가 찾는 물건이 있을
성도 싶소."
"흑석동이라면 중앙대 있는 그 허허벌판 말예요?"
몇 년 전 중앙대 근처에 가본 적이 있는 영희가 그렇게 물었다.
"그건 옛날 얘기요, 버스 종점 부근은 하마 오래 전에 여기 뺨치게 되었고 지금도 그 산둥
성이로 둥네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중이라 하더구먼. 새집이 많아 집세도 싸고 ... 꿩 잡는
게 매지 어디서 하든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거 아뇨? 없는 돈에 굳이 종로 고집할 게 뭐 있
소?"
원래 영희는 전에 있던 불광동 쪽으로 다시 가볼까 하고 있었다. 그곳이라면 지리도 잘
알 뿐만 아니라 이전 단골들이 힘이 되어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복덕방 영감의 말을 듣
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어차피 전보다 더 번듯하게 차릴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낯선 곳
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마음 편할 듯싶었다.
하지만 흑석동도 들은 것처럼 만만하지는 않았다. 집세는 대강 종로 절반을 조금 넘는 수
준이었으나 아직도 커가는 동네라 도무지 목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좀 자리가 잡혔
다 싶으면 이번에는 턱없이 권리금이 붙어 종로에 못잖게 부르는 값이 높았다.
첫 번째 복덕방에서 대강 그곳 사정을 알게 된 영희는 다음부터 복덕방 소개 없이 동네
변두리를 돌아보았다. 주로 새로 지은 집이 많은 곳인데 군데군데 집주인이 직접 써붙인 `
세점포' 광고가 붙어 있었다. 그 중 전봇대에 써붙인 고아고 하나가 영희의 눈길을 끌었다.
`점포 있음. 시장 골목, 신축 가옥. 12평에 살림방 딸림, 전세 15만원'
영희는 무엇보다도 전세금이 자신의 형편에 맞는 게 반가웠다. 그 정도라면 보증금 10만
원 정도의 월세로 돌리고 남은 돈으로 궁색하지 않게 미장원을 차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림방이 딸려 있어 따로 방을 얻지 않아도 되는 것 또한 그 점포의 매력이었다.
영희는 자신이 찾아가는 사이에라도 누가 먼저 계약을 해버릴까 걱정이 돼 종종걸음으로
광고 끝에 붙은 약도를 따라갔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영희가 찾아간 집은 그 동네 제일
끝 집이나 다름없는 새집이었다. 두 개의 좁은 골목이 만나는 곳이긴 해도 골목 건너편은
아직 야산을 벗겨놓은 허허벌판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기야 점포의 넓이나 살림방이 딸린 것은 광고에서 말한 대로였다. 시장 골목이란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장에서 동네 끝으로 가는 골목이라 손님을 보태는 데는 아무 도
움이 안 됐다. 일삼아 찾아온다면 모를까 그 시장에 장보러 온 사람이 자연스럽게 거기까지
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영희는 집주인을 만나보기도 전에 맥이 빠졌다. 마음속으로 `정히 안되면'이란 단서를 단
뒤에서야 겨우 점포의 양철 덧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두드려도 응답이 없다가
영희가 돌아설 무렵 하여 점포 곁 쪽문이 열리며 맑게 생긴 중년이 나왔다.
집주인과 몇 가지 계약 조건을 절충하는 중에 그 집에 호감을 가질 이유가 둘 늘어났다.
그 하나는 집주인이 좀 여유 있는 퇴직 공무원이어서 월세로의 전환을 선선히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융통성을 보여주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내부 개조나 외부 장식
에 관대한 점이 그랬다. 다른 하나는 그 시장 안에 미장원이 없어 시장에서 장사하는 여자
들이 얼마간은 고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시 오겠다는 말로 그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영희는 전혀 그 집에 세들 생각이 없었다.
버스로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택시를 타고 무교동의 약속된 다방으로 달려가니 창현은
듯밖에도 낯선 젊은이 하나와 함께 영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드려. 내 휘앙세야. 곧 와이프가 될 사람이야,"
그즈음 들어 부쩍 대화에 영어 단어를 많이 끼워넣는 창현이 영희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
하자 겉보기에는 창현보다 나이가 많을 듯한 그 젊은이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형수님, 인사드립니다. 저 박운규라고 합니다."
둘만의 호젓한 외식을 기대하고 나온 영희에게 처음 그 불청객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
러나 인사를 끝내고 둘이 기고만장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그도 창현과 같이
카메라 테스트를 받은 배우 지망생이어서 그를 통해 창현에게 듣지 못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원장님 왕년에 충무로에서 한가락 하던 분이라는 건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슴다."
"김감독님 이제 입뽕이라면서 끗발 쎄대요. 제가 듣기에는 이판에서는 제작자가 왕이라던
데 오늘 보니 영 아니잖아요? 김감독 페이스대루 나간다면 이번 영화 틀림없이 잘 빠진 영
화가 될 겁니다."
"하반기에는 신성일이 영화가 별로 없다죠? 그것도 우리 같은 신출내기들에게는 큰 다행이
라구요."
그런 일반적인 영화판 얘기로부터 그날 카메라 테스트를 포함한 창현의 근황까지 그는 잘
도 주워섬겼다.
"아까 말임다. 형님 차 멋있습디다.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버린다. 캬- 그거 죽여주는 대사
아닙니까. 거기다가 형님 그 연기, 그걸 보고 왜 제가 조연이 되고 형님이 주연급이 되었는
지 담박 알겠더라고요."
"어때요? 늦어도 8월에는 크랭크 인 하겠지요? 시나리오에 보니 여름신이 있던데, 설마 내
년 여름 기다리겠어요?"
"그나저나 형님 왕기 떴습니다. 하마 보니 김감독이고 제작자고 마음을 정한 눈치더라구요.
제길, 나는 언제 한번 주인공으로 떠보나..."
"형수님, 정신 바짝 차리셔야함다. 형님 대역할 계집애 여간 쌈빡하게 생긴 게 아녜요. 물
론 감독님하고 제작자 다음 차례겠지만 까딱하면 약혼자 잃어버림다."
뒷날 가만히 돌이켜보면 창현이 일부러 데리고 나온 바람잡이 같은 데도 있었지만 그날
영희에게는 하나같이 새로울 뿐만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눈치도 빨라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에는 스스로 빠져줄 줄도 알았다.
"그럼 두 분 즐겁게 식사하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슴다."
그가 그러면서 먼저 일어나는 걸 보고 영희가 잡았다.
"저희들하고 함께 가시죠."
처음과는 달리 그때 영희는 정말로 그와 함께 저녁을 먹어도 괜찮겠다고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마다하고 자리를 떴다.
"유 후배, 아주 괜찮은 사람 같은데?"
영희가 오히려 그렇게 아쉬움을 나타내자 창현은 마치 관록 있는 배우나 된 듯 받았다.
"충무로 바닥에 흔한 똘마니야. 눈치 하나로 사는 놈이 무슨 간땡이로 우리 저녁 식사판에
끼여들어 훼방을 놓겠어?"
그렇게 한마디로 그를 깔아뭉개버리는 게 영희에게는 또 그만큼 창현이 대단하고 믿음직
스러워 보였다. 그 바람에 영희는 창현을 만나기 직전까지 다져온 절약의 결의를 까맣게 잊
고 스스로 앞장서며 물었다.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것 먹고 들어가. 어디로 갈까?"
"오늘은 어디 가서 칼로 좀 썰자. 그래, 호텔 양식부 어때? 조선호텔."
그제서야 영희는 퍼뜩 돈 문제를 떠올렸다. 조선호텔 양식부라면 전에 박원장이 한번 데
려가준 적이 있는데 그 음식값이 엄청났던 게 기억났다. 그러나 당장 궁금한 것은 그날 창
현이 거둔 실제적인 성과였다.
"유, 그럼 오늘 정말 게랑튼가 뭔가 받은거야? 얼마나 돼?"
그 말에 창현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농담처럼 받아넘
겼다.
"오늘 같은 날 우리 휘앙세가 왜 이리 궁하게 나오시나? 입맛 떨어지게 돈부터 따지고 밥
먹을 생각이야?"
그리고는 앞장서 다방을 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찻값을 치른 것은 평소처럼 당연
히 영희였다.
조선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영희는 은근한 자부심과 함께 양식당에서의 식사 예절을 떠
올렸다.
"앞으로 국제화 시대가 오면 양식을 먹을 때의 매너도 알아야 돼. 지켜야 할 예절인 동시
에 이 시대의 교양이야."
다시 만난 한창 영희를 살갑게 대하던 시절 박원장은 무슨 생각에선지 영희에게 양식 먹
는 예절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값싼 경양식집에서 시작해 정식 코스를 내는 데까지 차례로
데려갔는데, 그 마지막이 조선호텔 양식부였다.
"미팔군 영내를 빼고는 여기가 제일 정통이라 할 수 있지. 그 동안 익힌 대로 하면 실수는
없을 거야."
그날 박원장은 무슨 시험이라도 감독하는 사람처럼 영희가 먹는 양을 눈여겨보다가 틀린
게 있으면 자상하게 바로잡아주었다. 그 덕분에 영희는 양식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
고 먹게 되었다.
고기를 너무 크게 썰지 마라. 칼을 입가에 가져가선 안 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입에 넣
지 마라. 트림을 하지 마라. 물로 입 안을 부셔서는 안된다.- 영희가 그런 주의들을 떠올리
면서 흘끔 창현을 훔쳐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양식이 뭔지나 알고 가자고 한 것일까.
영희의 짐작으로는 창현이 제대로 된 양식을 한 번이라도 먹어보았을 것 같지 않았다. 기
껏해야 허름한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나 썰어본 게 전부일 텐데, 싶자 가슴까지 두근거려왔다.
다시 한번 자신의 우위를 확인시켜줄 기회를 잡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양식을 주문할 때부터 창현은 결코 양식이 처음
인 사람이 아니었다. 웨이터가 고기를 어떻게 익혀야 할까를 물어왔을 때 창현은 언제 저런
영어를 다 알았지,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았다.
"미디엄으로 해줘요, 유는- 음, 웰던으로 하는 게 좋을 거야."
포도주를 주문할 때도 그랬다. 영희는 겨우 레드와 화이트 정도만 주문했으나 그는 레드
중에서도 다시 상품명까지 알아 주문했다. 보르더가던가. 샐러드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
다. 영희는 색깔로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소스를 그는 이름까지 척척 대가며 골랐다. 냅킨을
두르는 것이며 칼과 포크를 잡는 법도 영희의 눈에는 익숙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유, 전에 양식을 자주 해본 사람 같애. 언제 누구한테 배웠어?"
메인 디쉬가 나올 무렵 영희가 오히려 움츠러든 기분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창현이 무
엇 때문인지 멈칫하며 영희를 빤히 건네보다가 되물었다.
"유도 별로 서투른 사람 같지는 않네. 이런 데 오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여긴 전에 누
구랑 왔지?"
그 말에 영희는 화끈 낯이 달아올랐다. 한편으로는 박원장이 상기되어서였고 다른 한편으
로는 창현이 거기 오게 된 것 역시 자신과 비슷한 경로였을 거란 추측 때문이었다.
"국제화 시대에 익혀둬야 할 예절이잖아. 윤혜라라구 모르는 것 없는 애가 하나 있는데 걔
덕분에 공부하듯 한번 와봤어."
겨우 그렇게 둘러대기는 해도 마음속은 이미 뒤틀어져 있었다. 그런 영희의 속을 알아챘
는지 창현도 필요 이상의 설명조가 되어 받았다.
"난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구- 전에 밤업소 다닐 때 양식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어. 8군
무대에서 뛴 적도 있다는 선밴데, 어쩌다 한턱 쓰면 꼭 양식이었지. 근래에는 교제상 몇 번
왔고, 그래, 김감독하고도 한 번 왔었어, 자기 알다시피 나 술 별로 못하잖아? 술도 먹지 못
하면서 비싼 요정에 가기보다는 여기서 밥 한번 사면 돈도 적게 들고 모양도 그럴 듯 해
서..."
그러나 설명이 긴 게 오히려 어색하게 들렸다. 애인 중에 돈 많은 과부라도 있었던 게지-
그런 말이 입 안을 맴돌았으나 영희는 억지로 참았다. 거기에 맞춘 듯 창현의 다음 말이 자
칫 깨질 뻔했던 분위기를 살려냈다.
"나 빨리 성공해서 유랑 외국 여행 한번 그럴듯하게 가야 되는데 말야. 이렇게 흉내만 낸
게 아니라 본바닥에 가서 제대로 된 양식도 좀 하고."
"나는 스위스가 좋더라. 눈 덮인 알프스를 배경으로 그림같이 세워진 커다란 집들 말이야.
창마다 제라늄 화분이 늘어져있고... 정말 유가 성공하면 그런데 가볼 수 있을까?"
영희가 달력에서 본 스위스의 풍경 사진을 떠올리며 그렇게 받자 그 자리는 이내 둘만의
호젓하고도 화사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못 할 게 뭐 있어? 신성일이 말야, 올해만 벌써 서른 편에나 출연했대. 한 편에 백만 원만
잡아도 그게 얼마야? 외국 여행이 아니라 스위스에 별장도 사겠다. 그래, 까짓 거. 나중에
성공하면 유한테 스위스에 별장도 하나 사주지. 유가 원한다면."
창현이 한잔 마신 포도주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렇게 받았다. 영희는 그 말에 가슴이 저
려오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고마워, 말만 들어두. 하지만 필요없어, 나는 산골 오두막이라두 유만 있으면 돼. 유의 마
음만 변치 않으면 그걸루 행복할 거야."
"내 마음이 변하다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는 뭐야, 바로 나의 조강지처잖아? 내
가 어떻게 조강지처를 잊어? 아무리 해보는 소리래두 그런 소린 함부로 하지 마."
창현이 제법 정색하며 영희를 나무랐다. 그러나 달콤한 나무람이었다. 영희는 주책 없이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황급히 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런데 다시 그런 달콤한 분위기가 위협받을 일이 생겼다. 영희의 감격에 이은 물음이 그
발단이었다.
"헌데 말야. 유, 오늘 카메라 테스트 어떻게 됐어? 영화는 언제부터 찍게 된대?"
"또 그 얘기야? 밥 다 먹구 하면 안 돼?"
"이제 다 먹었잖아? 왜, 뭐가 안됐어? 아까 후배라는 사람이 하는 말로는 다 잘된 것 같던
데,,,"
"카메라 테스트야 그렇지, 내가 누구야? 그런데, 휘유- 영화란 게 어디 그래? 감독 맘대루
냐구?"
"그럼 뭐야? 왜 제작자가 틀어? 제작자도 유를 좋아한다구 했잖아?"
영희가 갑자기 불안해져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창현이 어려움에 빠지면 곧잘 하는 제스
처로 들어갈 듯하다가 갑자기 대범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건 그래. 하지만 제작자가 좋아한다는 것과 돈 문제는 다르지?"
"돈 문제? 또 돈 문제가 있어? 제작자한테두 돈을 줘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닌데-"
창현이 그러면서 무언가를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실은 아까 카메라 테스트 끝나고 제작자를 따로 만났는데 말이야. 제작비에 좀 투자할 수
없냐구 넌지시 묻더군."
"배우가 무슨 돈이 있어? 더군다나 영화 제작비라면 한두 푼도 아닐텐데."
"그러니까 투자라구 말하지 않았어? 워낙 출연진이 많은 데다 호화 로케가 잦아 제작비가
엄청나대. 그래서 한 백만 원만 투자하면 이익 배당을 해주겠다는 거야. 내 게랑티 백만 원
까지 보태 일할 배당을 하겠다는 건데..."
"뭐? 백만 원씩이나? 우리가 그런 돈이 어딨어?"
"그래서 나두 안 된다구 그랬어. 그 사람도 크게 서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왠지 찜
찜해. 오늘 같이 카메라 테스트 받은 녀석들 중엔 살 만한 집 애들두 있다구. 이것들이 돈보
따리 싸들고 매달리면, 또 알아? 연기력이고 뭐고 당장 제작비가 딸리는데..."
창현의 그 같은 말로 화사하던 외식의 분위기는 일시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워낙
가망 없는 돈이라 둘 다 체념이 빨랐다.
"그렇지만 걱정 마. 영화는 뭐니뭐니 해도 배우의 연기니까. 아무리 돈이 급하다 해도 되지
도 않은 것들 주인공으로 내세워 영화 망쳐먹이야 하겠어? 내 연기를 믿어. 아마 주연은 그
대로 내가 하게 될 거야."
창현이 그렇게 영희를 안심시켰고 영희는 영희대로 창현을 위로했다.
"맞아. 돈 백만 원 때문에 엉터리 주인공을 쓴다면 그 영화 보나마나 알조야. 그냥 제작자
가 한번 해본 소리겠지, 정말이면 그만둬도 하나도 아까울 거 없고..."
그러자 자리의 분위기는 다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둘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연
인으로 돌아가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거리는 걷기에 꼭 알맞은 초여름 밤이었다. 그게 또 영희의 현실감을 마비시켜 그때쯤은
꺼내도 좋을 궁색한 얘기를 자제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심하게 악화된 경제 사정이나 앞
뒤 없는 탕진을 함께 짚어보고 더 이상의 흥청거림을 경계하는 일은 필요했지만 적어도 그
밤은 아니었다.
영희는 오히려 내켜하지 않는 창현을 졸라 시청 앞 광장을 건넜다. 그리고 창현에게 기대
듯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걷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가 집 앞에 멎을 때
까지도 두 사람의 달콤한 분위기는 이어졌고, 그 바람에 그날 밤의 방사는 그 어느 때보다
요란스러웠다. 거의 끝나가고는 있지만 아직은 달디단 사랑의 봄날이었다.
제 39장 다가오는 출발
"차렷, 경례!"
자리에서 일어난 철의 구령에 따라 아이들이 앉은 채 꾸벅 머리를 숙였다. 조금 저까지도
시끌벅적했던 교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 사이 구령 전의 작은 긴장에서 벗어난 인철은
덤덤한 일상의 일부가 된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이인철, 앞으로 한 달 동안 임시 급장을 맡도록, 우리 반에서는 입학 시험 성적이 가장 좋
고, 나이도 평균보다 위라 담임의 직권으로 급장에 임명한다. 정식 급장은 서로에 대해서 좀
알게 된 한 달 뒤에 선거로 뽑는다."
입학식 다음날 첫 홈룸(실내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으로부터 그런 지명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뒤 급장 선거가 있었지만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어 그대로 급장 자리에 눌러앉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출석부를 펼친 미술 선생은 출석 번호 1번부터 하나하
나 이름을 불러갔다. 대답 소기와 함께 교실 안이 조금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미술 시간은 그 학교에서는 흔치 않게 숨통이 트이는 수업 시간 중의 하나였
다.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온 까까머리들에겐 취직률 백 퍼센트를 자랑으로 삼는 그
공전의 교가 과정이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교과의 태반인 공업 이론이란 것도 그들이 공상 과학 만화에서 선망을 키운 그 '과학'과
는
거의 무관했다. 거기다가 아직은 일주일에 두 시간밖에 없는 실습도 재미보다는 권태이거나
공포의 시간일 뿐이었다.
실습이라기보다는 견학에 가까운 선반 실습에서 지난달 벌써 한 아이가 손가락 한 개를
잃었다. 비록 개인적인 부주위 탓이라고는 하지만 한번 경험한 기계의 그 같은 파괴력과 폭
력성은 공업전문학교를 우주 로켓 조종사 훈련소쯤으로 공상하고 온 나이 어린 녀석들에게
는 낭패스런 감정까지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멋쟁이 시인이 맡고 있는 국어와 여선생님이 맡은 음악, 그리고 실기 위주인 체육
은 방금의 미술과 더불어 일주일에 몇 번 안되는 인기 과목이었다. 적성과 소질이야 어디에
있건 그들이 짓눌려 있는 공업 기술 교육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우선 해방감부터
주는 것이었다. 점점 터지는 아이들의 잡담에 활기까지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런 해방감 때
문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인철만은 그런 아이들과 기분이 달랐다. 급장으로서 그 미술 선생과 맺고 있는 특
수한 관계가 원인이었다.
그 미술 선생은 아이들에게 국전에 '파스'한 화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파스'란 게
특
선을 말하는지 입선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고, 그게 언제였는지도 밝혀져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화가 지망생인 미술 교사일 뿐이지는 않음이 분명했다. 마흔은 훨씬 넘어 보이
는 나이도 그렇지만, 수업중에 무심코 (어쩌면 고의적으로) 집어넣는 사담에서 더욱 그랬다.
그에 따르면 미술 교과서에 그림이 나오는 한국의 화가는 거의가 은사거나 함께 공부한 사
람이었고, 함께 공부한 사람의 태반은 또 '걔'거나 '그 녀석'이었다.
그림 실력에 있어서도-철의 안목으로는-대단한 사람이었다. 실기 시간에 학생용 물감과
도화지로 장난처럼 그리고 있는 그림을 훔쳐보아도 그의 놀라운 사실력은 금세 드러났다.
색채를 쓰는 법 또한 감탄할 만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어느 정도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갖게
된 인철이 기억을 더듬어 추측한 바로는 전기 인상파의 기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감탄시킨 것은 그가 앞뒤를 훤히 꿰고 있는 듯한 서양 미술
사였다.
그는 이름난 서양 화가와 그 작품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생활까지도 절친한 친구의 일처럼
시시콜콜히 다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수업 시간은 태반이 미술사 뒤에 감춰진 이런저런
재미난 일화로 채워졌는데, 그게 그 수업 시간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다.
인철도 처음 한동안은 그에게 매혹에 가까운 호감을 느꼈다. 비록 자신도 모르게 열중해
온 문학과 그 도구는 달랐지만 예술 일반에 길러온 친근감에다 미술의 산문적인 요소가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호감은 입학하고 나서 네 번째 미술 시간부터 엷어져가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부터는 석고 데생이다."
그런 예고로 세 번째 수업을 마친 미술 선생은 점심 시간에 인철을 미술실로 불렀다.
"에- 선생님이 조그마하게 미술 재료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목탄과 픽서티브, 켄트지는 시
중 가격으로 너희 반 전체가 우리 공장에서 공동 구입해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인철을 부른 그의 용건이었다.
돈을 거두고 물건을 나눠주고 하는 따위, 개인 구입에 맡기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떠맡
게 된 게 귀찮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그를 향한 인철의 호감을 거둘 정도는 아
니었다. 그 때문에 인철은 그런 일에 반드시 몇 명씩은 있게 마련인 반 아이들의 툴툴거림
을 달래가며 돈을 거두었다. 개인적으로 이미 가지고 있다든가 형이나 누나의 것을 쓰면 된
다고 우기는 녀석까지 설득해 육십 명 전원에게서 70원씩 거둔 것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미술 시간 시작 몇 분 전 교무실로 인철을 불러 미술 선생이 내민 재료
꾸러미는 참으로 한심했다.
시멘트 부대 종이에 싸서 새끼로 묶어 내민 그 꾸러미에는 그가 말한 목탄과 픽서티브와
켄트지가 분명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포장과 질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목탄이란 것은 붉
은 싸구려 마분지를 성의 없이 잘라 만든 작은 상자에 가늘고 구불구불한 숯이 몇 토막 든
것이었고, 픽서티브란 것도 레테르조차 떼지 않은 페니실린 약병에 든 희부연 액체 몇 방울
이었다. 그리고 켄트지는 전지를 사서 자른 것인 듯한데, 긴 자를 대고 면돗날로 긋다가 잘
못된 것인지 가장자리가 거칠고 들쭉날쭉했다.
그걸 인철에게서 나눠 받은 아이들은 한 입 가득 불평을 물고 수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된 지 5분도 안 돼 아이들의 입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일 못하는 대목이 연장 나무란다구, 뭐야? 목탄 어디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게 있어? 픽
서티브가 엉터리야? 그리고 켄트지 좀 산뜻하게 잘라져 있지 않다고 아그리파가 비뚤게 그
려져? 어릿한 것들, 눈동자는 흐릿하게 줄어들 가지고..."
미술 선생이 경멸에 찬 어조로 그렇게 소리치자 아이들은 도리어 죄진 얼굴로 수그러들었
다. 그들과는 달리 세상일에 닳을 만큼 닳은 인철도 그 순간만은 알지 못할 부끄러움이 앞
섰다.
요란스런 준비에 비해 두 시간 만에 석고 데생이 끝나자 조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게
시작되기 전에 인철은 다시 급장으로서 달갑잖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
"이번에도 재료는 우리 공장에서 공동 구입하도록. 찰흙과 석고 각 5백 그램과 분리제 한
병, 시중 가격으로 해서 일인당 1백 20원씩 거둬와."
그리고 철이 밝지 않은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리자 내리누르듯 덧붙였다.
"또 뭐 그눔의 포장이나 모양새 가지고 그러는 거냐?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봐? 그리구 문방구에서 백 그램짜리 봉지로 사면 석고 값만 해도 백 원이야."
인철이 군소리 못 하고 물러난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면...' 하는 그 멋진 구절 때문이
었을 것이다. 그게 이름난 선사의 명구라는 것까지는 아직 몰라도 인철의 남다른 언어 감각
은 그 미술 선생이 기대한 이상의 효과로 그의 불만을 눌러버렸다.
하지만 그 주 일요일을 계기로 어렵게 유지되던 미술 선생에 대한 호감은 끝장을 보고 말
았다. 그 전날인 토요일 부름을 받고 교무실로 간 인철에게 그는 성의 없이 그린 약도 하나
를 내주며 말했다.
"찰흙만 해도 너희 반 모두의 것을 합치면 30킬로나 되니까 미리 너희 교실에 옮겨놓도록
해야겠어, 내일 한 녀석 더 데리고 이 약도대로 찾아와. 우리 공장이야."
얼핏 약도를 보니 시작이 수유리 버스 종점이었다.
이듵날 인철은 수유리 버스 종점에서 부급장인 영완이란 아이아 만나 미술 선생의 공장을
찾아갔다. 약도가 가리키고 있는 곳은 여기도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버스 종점에서 먼 산기
슭 어떤 농가 마당이었다.
멀리서도 먼저 눈에 뛰는 것은 마당 한구석에 짙게 솟고 있는 연기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지런하게 찐 버드나무 가지를 밑 빠진 함석동이에 빼곡히 집어넣고
노천 화덕에 굽는 중인데 그게 바로 목탄 공장이었다. 지난 시간 이이들이 지급받은 목탄은
그렇게 해서 구워진 버드나무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부러뜨려 엉성한 마분지 갑에 집어넣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당 한구석에는 누군가 정성스럽게 이겨놓은 진흙 더미가 보였다. 흙
결이 곱고, 반죽이 되게 되어 있어 집 안의 흙일에 쓰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게 바
로 다음 조소 시간에 쓸 찰흙이란 것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미술 성생은 농가 아래채에서 허옇게 석고 가루를 뒤집어쓴 채 나왔다. 코 위까지 마스크
를 덮고 있는 게 무언가 먼지가 많이 나는 작업을 하다 나온 듯했다.
"들어와."
마스크를 벗은 그가 부급장과 함께 온 게 좀 의외란 듯 좀체 안 보이는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그가 나온 아래체 헛간에는 역시 눈썹까지 하얗게 석고 가루를 덮어쓴 중년부인과
인철 또래의 학생인 듯한 남매가 작은 비닐봉지에 석고를 담아 그 주둥이를 인두로 지지고
있었다. 석고는 원래 큰 시멘트 부대에 담겨 있었던 것인지 헛간 여기저기 여러 개의 빈 부
대가 눈에 띄었다.
그걸 보자 인철은 비로소 그의 '공장' 전모를 알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의 픽서티브
며 켄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짐작이 갔고, 다음 시간에 받을 찰흙과 석고, 분리제도
어떤 것인지 알 만했다.
"내일 수업이 모두 세 학급이라 바빠서 안 되겠다. 이왕 왔으니 너희들도 좀 도와다오, 이
비닐봉지에 바깥에 이겨놓은 진흙을 담아라. 대강 채우면 5백 그램쯤 될 거다."
좋게 이해하면 그 '공장'은 당시의 쥐꼬리만한 교원 봉급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비싼 재
료
를 다 살수 없는 가난한 화가의 눈물겨운 기지요 자구책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걸
이해할 만큼 너그럽지 못한 인철에게는 뜻 아니하게 들여다본 그의 진실이 실망스럽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그날 일을 마치고 진흙이 채워진 비닐 봉지 서른 개씩을 싸들고
나서는 인철과 영완에게 그가 돈 백원을 내밀 때는 가벼운 구역질까지 느꼈다.
"어디 가서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씩 먹구 가. 여기서 본 거 애들에게 함부로 떠들어대지
말고..."
다음날 인철이 가져간 진흙이 비어져나오는 비닐봉지와 석고 가루가 허옇게 새는 비닐봉
지, 그리고 분리제란 이름의 비눗물을 페니실린 주사약병으로 한 병씩 받은 아이들은 다시
술렁였다. 이번에도 미술 선생은 경멸 반 빈정거림 반의 응수로 아이들의 입을 막았으나 인
철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입만 천재인 얼치기 예술가들과의 피로한
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지만. 또 '~체"만 팔아 비루하게 살고 있는 예술하는 천민에 대
해
서도 들은 바 없지만. 인철의 마음은 이미 굳게 닫혀진 뒤였다.
그런데 그리고 얼마 안 돼 다시 인철의 속을 건드린 게 방금 아이들 몇이 못마땅하게 책
상 위에 펴고 있는 부교재를 둘러싼 시비였다. 조소가 끝나고 한 몇시간 재미나게 서양 미
술사로만 끌고 가던 미술 선생이 슬쩍 물었다.
"내가 서양 미술사를 쓴 게 한 권 있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니네들 어디 가도 그런 알찬
책은 못 구할걸. 지금 인쇄중인데 너희들 중에 살 사람 없어? 단체로 사면 내가 출판사에
말해 싸게 해주지. 거기 내가 이제껏 얘기한 게 모두 들어있지. 아니 훨씬 상세하고 재미있
게 정리돼 있어. 어때? 한번 사보겠어?"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와 샤갈의 굶어죽은 아내와, 난쟁이 로트렉 얘기에 한동안 빠져있
던 아이들 몇이 얼결에 입을 모았다.
"네, 좋습니다아-"
그 바람에 인철은 다시 마음에도 없는 수금원이 돼야 했다. 그날 교실에서 대답한 것은
아이들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미술 선생은 강요하다시피 전원에게서 책값으로 3백 원씩
거둬내게 했다. 괜찮은 참고서도 대부분이 2백 원이면 살 수 있던 때라 이번에는 수금에 적
잖은 애까지 먹었다.
책은 미뤄지고 미뤄지다 약속한 날로부터 보름 뒤에야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쇄된 게
아니라 미술 선생의 필적으로 등사된 등사물 묶음이었다. 아이들도 이번에는 가만있지 않을
눈치였다. 약삭바른 아이는 50원도 안 들어갔을 그 원가를 계산해 보이며 그 폭리에 화를
냈고, 셈이 느린 아이는 셈이 느린 대로 그런 미술 선생의 약속 위반에 혐오를 드러냈다.
미술 선생도 이번에는 방법을 전과 달리했다. 무턱대고 아이들을 억누르는 대신 자기를
이해시키고 동정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한편, 중간고사의 문제 태반을 그 책에서 냄으로
써 책을 산 아이들에게 보상하려 했다.
처음 한동안은 그런 방법이 통할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공장'소문이 아이들
에게 퍼지면서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그가 열올려 얘기를 해도 시답잖게 듣는 아
이들이 생겼고, 때로는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해도 킥킥거리는 녀석까지 있었다.
인철을 보는 미술 선생의 눈길이 험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는 인철이 학
급 아이들에게 그 공장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단정한 것 같았다. 부급장 영완이도
같이 갔지만, 그전에 인철이 몇 번 그의 처사에 가볍게 반항한 적이 있는 게 그런 단정의
원인이 된 듯했다.
인철은 인철대로 미술 선생의 그 어이없는 단정이 속상하고 분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
는 대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말라는 그 다짐만은 잘 지켜왔는데 그렇게 나오니 그를 이해
해보려는 노력보다는 반항심이 앞섰다.
따라서 다른 아이들은 그럭저럭 미술 선생과의 화해를 이뤄가고 있는데도 인철만은 점점
더 비뚤어진 눈으로 그를 보게 되었다.
"자- 어디지? 저번 시간에 인상파가 끝났으니 오늘은 후기 인상파겠군."
미술 선생은 그 무렵 들어 부쩍 자상해진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진도를 묻고 이어 수업으
로 들어갔다.
"에- 후기 인상파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사실 이 명칭과 분류는 정확하지도 적절하지도 못
하다. 여기 속하는 화가들은 모두 인상파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빼면 그 개성에서는 물론 기
법에서도 별로 공통성이 없다. 그러므로 좀더 정확하고 적절한 말로 이들을 묶는다면 '인
상
파의 그 후'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 그 미술 선생의 수업 내용은 고등학교, 특히 공업전문학교의 아
이들에게는 과분할 만큼 고급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더는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인철에게는 그런 수업 내용까지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인철은 미술 선생이 무언가 판서를 하고 있는 틈을 타 책상 안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책
한 권을 꺼냈다. 동네 책방에서 빌린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잠시 관념적인 읽을거리로 기울어졌던 인철이 다시 소설에 손을 대게 된 것은 갈수록 답
답하고 지루해지는 학교 생활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심성과 재능은-어쩌면 타고나
기를-공업전문학교의 교과과정은 맞지 않는 방향으로 형성돼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때까
지만 해도 인철 자신은 아직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 질척한 언어의 늪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워낙 요란스럽게 신문에 오르내려서 빌려온 것이기는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수업
시간중에 선생의 눈을 피해가며 읽기에 마땅한 책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는 비슷한 또래로 여겨지는 주인공의 비정상적인(적어도 그때의 인철에게는)
행동이나 샐린저 특유의 재치가 이따금 인철의 주의를 끌기는 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마
음이 쓰여지는 것은 흑판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수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미술 선생
쪽이었다. 그 바람에 인철의 머릿속은 소설과 그 시간의 수업 내용이 뒤범벅되어 윙윙거렸
다.
그런데 그렇게 수업이 한 십여 분 진행되었을까, 갑자기 복도에서 여럿이 수런거리는 소
리가 났다. 복도 쪽 창가에 앉아 있던 인철은 무심코 창호지가 발라져 있는 투명 유리의 가
장자리로 밖을 내다보았다. 3학년 학생들과 공업 실기 담당 교사가 덩이져 황급히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에워싸여 가는 것은 누군가의 등에 업힌 학생이었다.
어디를 다쳤는지 모르지만 축 늘어진 손끝으로 피가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습을
하다 기계에 다친 모양이었다.
인철처럼 창밖을 훔쳐본 복도 쪽 창가 아이들의 가벼운 동요에도 불구하고 미술 선생은
계속해서 이야기 반의 미술사를 풀어나갔다.
"고갱은 타이티에서 평생 그리고 애타게 찾아헤매던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강렬한 원색과
투박한 선으로 인상파의 또 다른 그 후를 발전시켰다. 그는 문둥병과 흡사한 그 섬의 풍토
병으로 죽었는데, 그와 타이티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이 아버지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
다는 게 얼마 전 해외 토픽에 난 적이 있다..."
미술 선생은 거기까지 얘기해좋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풀었다. 너무 세게
눌러 새빨개진 코가 방금 그가 펼쳐보인 환상적인 예술가의 생애마저 희극적으로 들리게 했
다. 그런 느낌은 인철에게만은 아닌 듯 했다. 미술 선생이 수건을 주머니에 챙겨놓고 교탁
위에 책을 집어드는 사이 소리없는 웃음의 물결이 교실 앞쪽에서 잠깐 일렁이다 가라앉았
다.
인철은 다시 접어두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가만히 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만큼의
주의도 소설의 문면에 집중되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 전 복도에서 본 광경 때문인 것 같았
다. 활자 위로 축 늘어진 팔과 피가 뚝뚝 듣던 손이 어른거리고, 이어 실습실의 비정한 기계
들과 기름때 절은 작업복의 선배들이 머릿속 가득 떠올랐다.
'여긴 아니야.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아...'
인철은 저도 몰래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소스라쳐 놀랐다. 자신이 부정하고 잇는 대상
이 바로 그토록 그리워하며 찾아든 학교라는게 뒤이어 깨우쳐진 까닭이었다. 어떻게 되돌아
온 학교인데..
사실 그 무렵은 인철에게 불만투성이의 나날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그 나이에 유독 예민한 결벽이었다.
누나의 생활이 배신과 타락으로 나날이 수렁 속에 잠겨드는 걸 보고 있노라면 거기에 의
지해야 하는 자신의 삶이 괴롭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다지고 보면 누나와 박원장의 관계부터가 인철의 감성에는 참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박
원장이 아무리 교양 있는 신사고 누나가 무슨 말로 자기들의 관계를 미화해도 냉정히 말하
면 누나는 결국 박원장의 첩이거나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라서 인철은 처음 그런 박원장
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런데 누나는 한술을 더 떴다. 언제인가부터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더니 지난번 어머니
가 왔을 때 창현이란 꼭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악사를 소개시켰다. 그리고 그뒤로는 내놓고
그와 어울려다니다가 끝내는 박원장을 배신하고 말았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누나는 그가 차려준 미장원을 급작스럽게 팔아치우고 흑석동 변두리에 새 미장원을
연 뒤 창현과 살림을 차렷다.
그래도 인철이 따로 자취를 하고 있을 때는 나았다. 눈치는 뻔하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니
누나의 이런저런 변명과 자기 미화를 억지로라도 믿을 수가 있었다. 이건 정당한 복수야. 배
신이 아니라구. 열여덟 내 순정을 짓밟은 그에게... 내 사랑은 오직 창현씨 그 사람 뿐이야,
너 그 사람 속되게 의심하지 마라. 네 눈에는 나한테 빌붙어 사는 건달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명색 예술가야. 내가 뒤만 잘 봐주면 언젠가는 스타가 될 수도 있는. 거기다가 내 과
거 다 알면서도 기꺼이 결혼해주겠다는 사람이야. 가을에는 식을 올리기로 했어...
하지만 살림을 합치게 되면서 인철의 그런 억지스런 믿음은 끝장이 났다. 새로 차린 미장
원의 벌이가 뜻 같지 못한지 누나는 한 달 만에 인철의 자취방에서 보증금을 빼고 인철을
미장원에 딸린 자신들의 살림방으로 데려갔는데, 인철이 거기서 본 것은 전형적인 탕녀와
그 기둥서방의 생활이었다.
참으로 기괴한 사랑이었다. 열여덟 그때는 물론 나중에 어지간히 성년이 된 뒤에도 인철
은 그들의 사랑을 떠올리면 알 수 없는 메스꺼움부터 느꼈다. 그들 사랑의 주된 내용은 동
물적인 성애였으며, 그 유일한 표현 방식은 물질적인 증여였다. 그들은 인철이 미장원 바닥
에 야전 침대를 펴고 자는데도 얇은 창호지 문밖에 가려지지 않는 그 살림방에서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방사를 벌였고,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은 창현에게 새 양복이 맞춰지거나
새 구두가 생겼다.
만약 인철이 순탄한 가정에서 자라난 소년이었다면 진작에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아니
최근 2년, 또래의 아이들이 걷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 외로움과 불안 속에서 보낸 돌내골의
세월만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인철은 그곳을 떠나고 보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당장은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었다. 돌내골이 좀 나아졌다고는 해도 다만 기대일 뿐이었다. 절망적이기에
더욱 절실해지는 기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인철로 하여금 쉽게 그 생활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 것은 학교 그
자체였다. 어쨌든 또래 집단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다는 소속감, 그대로 떠밀려가면 최소한
평균치의 삶은 확보되리라는 안도감 같은 것들은 오랜 세월 소외감에 시달려온 인철에게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키고 싶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소속감의 중심
이던 학교가 이제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야, 나는 바로 찾아왔어. 어쨌든 이제는 다시 혼자 걷기는 싫어...'
인철은 갑작스런 공포로 몸까지 부르르 뗠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불
만들로 풀어진 마음을 다잡기라도 한 듯 소설책을 책사 안에 지어넣고 흑판 쪽으로 눈과 귀
를 모았다.
그새 미술 선생은 피카소로 넘어가 있었는데, 내용은 교재를 벗어나 진진한 그의 애정 편
력을 그 특유의 입심으로 윤색한 것이었다. 모처럼 진지하게 수업을 들으려고 그를 향한 인
철에게는 그게 대시 아음에 거슬렸다. 나중에 그의 글 곳곳에서 흔적을 보이는 예술에서의
엄숙 지향이 벌써 그런 미술 선생에게 반발을 보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 역시 뒷날의 짐작이지만 그날 미술 선생은 수업 시작 때부터 줄곧 인철을 주세했음에
틀림없었다. 몇 번인가 인철을 곁눈질하던 그는 인철의 찌푸린 이맛살에서 무슨 암시라도
받은 듯 서둘러 피카소의 연애담을 끝맺고 아프리카 여행으로 얘기를 바꾸었다. 내용은 역
시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의 미술사로 적합한지 의문이었지만, 그 또한 진지해진 것만은 분명
했다.
"그(피카소)가 아프리카의 동굴이나 석벽에서 본 원시의 회화들은 그의 미술에 새로은 전
기를 가져왔다. 특히 구석기의 미술이 사실성에 충실하고, 신석기로 올수록 단순화와 상징성
에 의지하게 된다는, 상식과는 반대인 미술사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그 단순화와 상징성의 실례를 그가 들고 있을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애기에 흥미를 잃고 연신 하품을 해대던 뒷줄의 한 녀석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미술 선생이
드는 동굴 벽화의 예를 익살스레 부연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죽은 사슴'은 '원시인에게
얻
어터져 뻗은 사슴'으로, '역삼각형 같은 몸통 구조와 긴 머리칼로 표시된 여자'는 '히푸가
넓
고 간빵(가슴)이 큰 원시인 아가씨' 하는 식이었다.
그리 기분이 밝지 않은 가운데도 인철은 그 때아닌 익살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끼여
드는 녀석은 원래가 익살꾸러기로 반에서는 알려진 녀석인 데다 그날따라 언어적인 순발력
이 유별났다. 웃는 것도 인철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의 모든 아이들이었다.
미술 선생은 진작부터 교실 한구석에서 일고 있는 킥킥거림을 느끼고 있었던 듯했다. 그
러나 그게 무슨 큰 성공인 양 착각해 으쓱해진 그 동급생 녀석은 계속해 기지를 짜냈다.
이제는 미술 선생의 예시가 끝났는데도 '아구통 돌아간 들소' '멘스(월경)하는 운시인 아
줌
마' 하는 식으로 주절거렸다.
"이인철!"
갑자기 미술 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인철의 고막을 때렸다. 진작부터 적의 담긴 그의
곁눈질을 느끼면서도 웃을음 참지 못해 빙글거리고 있던 인철은 그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아차, 했다.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미술 선생이 들고 있는 책을 소리나게 교탁에 팽개치고 인철을 손가락질했다.
뒷날 인철은 한 유망한 작가로 인정받을 때까지 단 한 권의 문예이론서도 읽지 않았을 만
큼 이론에 대해 지나친 경계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방면으로 자리를 잡아갈수
록 이론으로만 예술하려는 무리, 특히 어쩌다 자신이 전공하게 된 인구어의 한 갈래가 결정
해준 특정의 이론에 송두리째 영혼을 내맡기고, 우매할 만큼 비판도 회의도 없는 습득 과정
을 반복한 뒤, 이윽고는 거기서 얻은 자로만 예술을 재려 드는 무리에게는 숨김없이 혐오와
경멸을 드러냈는데, 그런 성향의 뿌리는 아마도 그날의 미술 시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뒷날 인철은 예술과 인결을 분리시키려는 서구적인 예술가론에도 남다른 거부감을 나
타냈다. 예술하는 것을 무슨 대단한 권리인 양 착각하고, 그것으로 인격적인 결함을 얼버무
리려는 시도에는 무자비할 만큼 비판적이었고, 나중에는 그런 감정의 확대가 예술뿐만 아니
라 대의 일반에까지 번져 그가 산 시대와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시 말해, 휘두르는 깃
발이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데 악용되는 기색만 있으면 그 깃발 자체까
지 의심했으며, 특히 부도덕한 행실이나 대중적인 혀영심의 면죄부로는 당시 유행하던 민주
도 평등도 자유도 승인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그는 종종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하지 못하
는 사람으로 비난받았는데, 그런 성향 또한 그 미술 시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날 미술 선생에게 불려나간 인철은 그로부터 한 십여 분 간이나 무자비한 난타 아래 서
있었다.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미술 선생은 다 세 번의 배질로 쓸 수 없게 된 지시봉으로부
터 청소함에서 꺼내온 빗자루대, 방화용 낫의 긴 자루에 이르기까지 매로 쓸 수 있는 것이
면 무엇이든 가져다가 인철의 온몸을 후려쳤다.
"요 새끼, 요 나쁜 새끼, 난 네가 악질인 줄 알아. 야비한 새끼, 잔인한 놈..."
그렇게 두서 없이 대고 있는 매질의 이유도 그가 어지간히 제정신을 잃고 있다는 걸 잘
나타내고 있었다.
얼떨결에 불려나간 인철은 처음 한동안 제도의 위압 아래 무방비하게 몸을 맡겨야 했다.
그 곳은 학교였고 그는 선생이었으며 자신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미술 선생의 매질이 이미
제도가 허용한 처벌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자각이 든 뒤에도 한동안은 그대로 서 있었다. 이
번에는 미술 선생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살기가 그를 마비와도 흡사한 상태에
빠져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 혹독한 매질 아래서도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점
이었다. 그 대신 오히려 뒤늦은 죄의식까지 일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진짜 예술가이고, 내
가 비열이나 탐욕으로만 이해한 일들도 실은 우리가 모르는 예술가의 힘겨운 싸움이었는지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려 그의 무서운 고함 소리조차 애처러운 비명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육체의 마비도 끝나고 갑작스럽고 무자비한 공격이 암시하는 대로 때아닌
죄의식에 빠졌던 정신도 차츰 깨어났다. 아마도 더 이상 매로 쓸 것을 찾지 못한 미술 선생
이 맨손으로 따귀를 올려붙이기 시작한 때였을 것이다. 타격의 고통보다 더 선명히 빰에 느
껴지는 물컹한 손바닥 살의 촉감이 문득 상대의 인간적인 적의를 전함과 아울러 그 사이 어
느 정도 조리를 회복한 미술 선생의 욕설도 움츠러들어 있던 인철의 반항심을 일깨웠다.
"네가 이 새끼야, 예술을 어떻게 알아? 푼돈 몇 푼 걸린 일로 이렇게 내 예술을 막볼 수
있어?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거냐구?"
그러면서 이번에는 가슴께에 주먹질까지 퍼부어오자 인철의 감정도 일시에 변했다. 이건
선생의 체벌이 아니라 싸움이다. 인격 대 인격의, 그런 생각이 퍼뜩 들며 더는 자신의 몸을
그 분별 없는 폭력에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결의가 섰다.
그러나 반항의 방법에 생각이 이르자 인철은 다시 잠깐 암담해졌다. 적극적인 공격으로
나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소극적으로 몸을 빼 달아난다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학
교라는 제도에 대한 용서받지 못할 반항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아직도 그냥 머뭇거리고
서 있는 인철에게 발길질과 함께 한층 더 차분함을 회복한 미술 선생의 경멸 어린 목소리가
퍼부어졌다.
"너같이 비정하고 물질적인 것들이 이 사회를 채우고 있으니까 우리 시대에 예술이 죽어가
는 거야, 위대한 화가가 죽고 빛나는 시인이 죽고 천재적인 음악가가 죽어가는 거라구, 쓰레
기 같은 새끼..."
사실 이해라려고만 들면 그 미술 선생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인
철의 웃음은 그가 해석하듯 그리 거창하지도 악의에 찬 것도 아니었지만 인철의 마음속에
분명 그에 대한 막연한 의심 이상의 부정적인 감정이 존재하였고, 그게 끊임없이 그의 예민
한 감수성을 자극하다가 그 같은 오해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살이나 예술에 대한 이해에서 똘들보다 좀 낫다고는 해도 인철은 어디까지만
열여덟의 소년이었다. 자신의 웃음이 터무니없이 오해되었다는 억울함에다 그때쯤 해서는
은근한 복수감으로까지 자라있는 욱체적 고통의 기억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그를 반항으로
내몰았다.
"박선생님, 이제 그만 하시죠."
다시 얼굴로 날아오는 미술 선생의 주먹을 날쌔게 나꿔챈 인철이 차갑게 말했다. 지난 2
년 들일로 단련된 인철의 손아귀라 쉰이 다돼가는중년의 팔목 하나는 잡아둘 힘이 있었다.
잡힌 손목을 바르르 뗠며 인철을 쏘아보는 미술 선생의 눈길에 파란 불꽃이 이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웃은 것 그리 거창하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맨스하는
원시인 아줌마와 아구통 돌아간 들소 때문에 웃은 거라구요."
"이거 놔!"
"놔드릴 테니 이제 다시 제게 손찌검할 생각은 마십쇼. 나는 이 순간부터 이 학교 학생이
아닙니다. 진작 그만두려고 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겼군요."
거기까지 말해놓고 나니 인철도 문득 가슴이 섬뜩했다. 사실 그의손목을 잡을 때는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어떤 의도가 있다 해도 그것을 단순히 계속되는 그의 손찌검을 중단
시켜야겠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말해놓고 나니 가슴 후련한 데도 있었다. 그래, 이제 나는
떠나간다. 이학교는 애초부터 내게 맞는 곳이 아니었다.
"뭐야! 너 이새끼, 말 다했어?"
미술 선생이 풀려난 팔목을 털며 소릴 꽥 질렀다. 목소리는 날카로워도 기세는 전만 같지
못했다. 거기서 인철의 마음이 한번 가볍게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다시... 하지
만 알 수 없는 격정이 이내 그런 생각을 쓸어벼렸다.
"그렇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인철은 짐짓 예절바르게 머리까지 꾸벅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매질이 시작되면서부터
줄곧 얼어붙은 듯한 교실이라 인철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고도 엄청난 반항이라 미술 선생도 잠시 질린 모양이었다. 인철이 제자리
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저 아연히 보고 있다가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기는 것을 보고서야 겨
우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저새끼, 저 새끼 빨리 잡아!"
그 말에 화들짝 깨어나듯 아이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두 제자리에서 웅성거
릴 뿐 일어나서 길을 막는 아이는 없었다. 인철의 붉고 푸르게 멍든 얼굴이나 휜 교복 윗도
리에 점점 번져나오는 피에 압도당한 탓인지도 몰랐다.
인철은 그런 교실을 등뒤로 하고 한본 돌아보는 법도 없이 꿋꿋하게 걸어나왔다.
그날 인철의 새로운 출발을 재촉하는 일은 하나 더 있었다. 학교를 나온 인철이 겁없이
대낮부터 소주까지 한병 퍼마시고 미장원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누나의 성난 목소리가
거기까지 새어나와 인철의 술기운을 싹 걷어냈다.
"이 쌍년들이 어디다 손을 대구 지랄이야?"
"쌍년들이라구? 그래, 말 잘했어. 좋아, 그럼 집달 리가 와서 간판 때게 해주지, 너두 콩밥
좀 먹구."
가만히 귀기울려보니 맞받는 목소리도 귀에 익은 것이었다. 미장원협횐가 미용사협횐가의
간부라는 거세게 생긴 아줌마인 것 같았다.
"알았어. 이 개년들아. 개x 꼴리는 대루 하라구. 어디서 순 똥갈보 같은 년들이 떼루 몰려
와갖구선... 꺼져! 못 꺼져?"
인철이 그때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누나의 쌍욕에 이어 무엇을 마구 내던지는지 미장원
안에서 우당탕, 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인철이 짐작한 그 아줌마와 좀 젊은 여자
둘이 미장원 밖으로 쫓겨나오며 악을 썼다.
"오냐, 협회 가입 밍기작거릴 때부터 알아봤다. 허가도 없는 순 야메가 간판까지 턱 붙이
고... 당장 고발 안먹이는가 봐라."
그런 그들의 발치로 플라스틱 대야 하나가 굴러나와 맴돌다가 풀썩 먼지를 일으키며 길바
닥에 엎어졌다
누나는 벌써부터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 듣기로 저번 미자원이 꽤 요지에 있던 것이라 이
십만 원 넘게 받았다는데, 둘이서 얼마나 흥청거렸는지 집세 보증금 5만 원에 한 3만 원 들
여 시설하고 나서부터는 빈손이었다. 그 바람에 미용업 허가증 얻는 데 드는 경비는 불론
협회비 3천원을 못 내 개업 첫날부터 시달려왔다.
그런데도 누나의 계산은 어찌 된 것인지, 그 뒤 어쩌다 벌이가 좀 되면 창현의 구두다 양
복이다 취직 운동비다 해서 그 쪽으로만 슬어넣을 뿐 정작 급한 허가 문제는뒷전으로 밀어
놓았다가 기어이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인철은 갑자기 그런 누나 앞에 나타나고 싶은 마음이 가셔 재빨리 미장원을 지나쳤다. 동
네 만화가게에서라도 좀 쉬면서 자신도 아음을 가라앉히고 미장원도 제대로 정리된 뒤에 돌
아갈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 시간쯤 뒤 인철이 미장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 안에서는 더 기막힌 의논이 진행
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동정을 살피고 가려고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미장원 안의 소리
를 엿듣는 귀에 원망에 섞인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봐, 내가 뭐랬어? 미장원 벌이가 시원찮으면 진작에 나라도 나서야 한다고 하잖았어?
괜히 사람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난리더니 이제 뭐야? 이젠 돈을 구해와두 그것들과 싸워
이 바닥에선 해먹기 틀렸잖아? 어떡할 거야?"
"시끄러. 유가 나선다구 별수 있어? 좋게 달래 보내지 않구 괜한 성질부려 일을 망쳐놓구
선..."
창현이 제법 성깔 있는 누나를 타박했다. 누나도 아직 화가 덜 가라앉았는지 목소리를 높
였다.
"왜 별수없어? 진작 홀(백주홀)에라두 나갔으면 허가장 두 개두 샀겠다. 그런데 그 싸가지
없는 년들한테 설설 기라구?"
"X같은 소리 하지마, 홀에 나간다구 누가 뭉텅 돈 안겨준대? 기껏해야 그거 값이지, 그런
데 세상에 어느 놈이 계집 몸 팔아오라구 홀에 내보내?"
"어머, 이이 봐. 이젠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홀에 나간다구 다 그러는 줄 알아? 그럼 전에
나 홀에 나간 거 몸 팔러 나간 거 몸 팔러 나간 줄로 알았다 이거야?"
그러면서 시비는 딴 곳으로 번졌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의논은 뻔했다. 벌어오기는커녕
쓰지 않으면 다행인 창현이고 보면 미장원을 살리는 길은 누나가 나서는 것 밖에 없었고,
누나가 나선다는 것은 결국 그렇고 그런 벌이에 몸을 내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막판이구나...'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학교에서 그처럼 쉽게 자퇴를 선언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런 결말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 40장 목마른 계절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돌내골의 농부 대부분은 벌서부터 손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
며 한숨만 쉬고 있었지만 그들은 달랐다. 가뭄과 '싸운다' 는 말이 실감날 만큼 굽힐 줄 모
르고 물을 져날라 타들어가는 작물을 지켰다.
대구로 물건을 싣고 나간 작은 신씨를 뺀 네 남자가 저마다 물지게를 지고 가까운 계곡에
서 물을 져나르는 걸 저만치 내려다보며 명훈은 대견스럽기보다는 공연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저 결의와 인내심이 끝나는 날 그들이 개간지에 내리게 되 선고 때문이었다. 방금도
물을 져나르며 그들끼리주고받은 말 속에는 그 선고의 일부가 감지되고 있었다.
"하이고, 땅도 참말로 모질데이. 모질어, 화분을 걸꽈도(기름지게 해도) 이보다는 영판 나을
끼라."
"하모요. 이거는 땅이 아이라 세멘 바닥이라 카이요. 이길이(지금까지) 퍼부운 거만 해도
어지간한 땅에 몇 년 공력은 들인 택일 낀데... 우째 땅이 밑으로 잡아땡기는지 갈수록 오이
쭐거지(줄기)가 졸아든다 아잉교."
하기야 농사를 잘 모르는 명훈이 보기에는 괜찮은 작황이었다. 가지도 오이도 토마토도
돌내골의 다른 밭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굵고 탐스러웠다. 명훈뿐만 아니라 이웃 농부들
도 미슷한 느낌들인 듯했다. 그제 처음으로 토마토와 오이를 따는 그들을 보고 좀체 남의
농사에 입을 대는 법이 없는 진규 아버지까지도 감탄을 했다.
"이 사람들 참말로 억척스럽데이. 이 밸간 땅에, 이 가뭄에... 저 물외(오이) 함 봐라. 팔뚝
만하네. 도마도도 주먹만쿰씩이나 하고."
하지만 그것은 자급자족을 이주로 하는 재래식 농법에만 익숙해 있는 진규 아버지의 환금
작물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감탄일 뿐이었다. 입바른 작은 신씨가 겨우 짜증을 감춘 어조로
받았다.
"남의 속도 모리고 혀패 뒤집히는 소리 그만 하이소. 이런 생물은 다때라꼬요. 지때 나가야
지 망긴 후에(이미 늦은 뒤에) 나가보이 뭐 합니까? 하마 6월 다 보냈으이 온상 안 한 것도
마구잡이로 시장에 쏟아져나올 낀데. 그래도 다마(굵기)가 이거 뭡니까? 여다 앉아보이 혼
자 일등 같지마는 청과 시장에 함 나가보이소, 요새 같은 한철에 이거요, 중품에 끼기도 바
쁠깁니더, 물량도 이래가지고는 안돼고요. 이 평수함 보이서. 이 평수 가지고는 오이 가지
도마도 지지꿈(제각기) 한 도라꾸씩 나와도 시워찮은데 세가지 합쳐 한 도라꾸가 안 되이...
싣고 나가기는 하지마는 몰라, 차 운임이나 나올랑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들이 아직은 사태를 절망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자신이 어깨에 물집이 잡히도록 물을 져나르는 것도 그렇지만 더 감동적인 것은 그들
의 아낙들이 보여주는 내조였다. 청과물이 조금씩 수확되면서 아낙들은 둘씩 짝을 지어 그
것들을 가가운 시장으로 직접 내다팔았다. 리어카에 가듣 싣고 남자들처럼 밀고 당기며 장
터 거리는 물론 이십 리나 떨어진 진안장까지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참 이상테예, 여기 사람들은 도마도를 묵은 긴지 모르는 갑데예. 그경거리 생긴 거맨쿠로
나와서 한참이나 보다 가는 사람들도 있고예."
채소나 과일을 사고 파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산골 사람들을 흉보듯 말하면서도 차로 실
어낼 수 없는 맞물 몇 리어카는 어떻게든 그런 식으로 다 처분하는 억척을 보여주었다.
명훈은 그들이 정말로 지쳐 떨어지기 전에 비라도 시원스레 쏟아지기를 빌려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명훈은 다시 지금껏 건성으로 만지던
오이 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악착스레 물을 길어 부어도 줄기 끝은 워낙 가뭄이
심해선지 조금씩 말라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개간지를 잡히더라도 양수기를구입하는 게 옳았어, 아니, 지금이라도 어떻게 수를 내봐야
겠어.'
명훈은 문득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물을 져나르는 그들 쪽으로 내려갔다. 그런 명훈의 귀
에 이제 막 물지게를 지고 계곡 쪽으로 개간지 비탈로 놀라서는 큰 신씨와 하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향임, 이거 우리 말캉 헛지랄하는 거 아입니까? 딴 데 가서 이 공력 들였으믄 아무리 모
진 땅이라도 이보다는 나을 끼라요."
평소 말수가 적은 하씨가 원망을 숨기느라 애쓰면서도 더는 참기 어렵다는 듯 그렇게 볼
벤소리를 했다.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마라. 우리가 무극대도 신천지 찾아 온 기지 농사지서 돈 벌라꼬 여
다 왔나? 모여 일할 땅 있고 삼시 시 끼 밥이나 무을 수 있으믄 되는 기지."
"그 삼시 시 씨가 어딨는지 모르이 이카는 거 아잉교? 이래다가 모도 빈손 탈탈 털고 다부
내리가는 꼴 안 날까 모리겠네."
"기다려보자. 가아가 돌아올 때가 됐으이 우째 되기나 셈판이 나오겠제."
'가야'는 대구로물건을 내러 간 사촌동생 작은 신씨를 가리키는 말일 터엿다. 명훈도 실은
작은 신씨가 돈으로 바꾸어올 지난 석 달의 결실을 마음졸이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무극대도 신천지란 말이 훨씬 주의를 끌었다. 처음부터 그들을 어떤 종교적 집단으
로 의심해온 명훈은 그 동안 몇차례 비교적 말수가 많은 편인 작은 신씨를 상대로 탐색을
해보았으나 별로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몰라요. 행임하고 그 사람들 밤에 모예 쪼매쓱 공부하는거는 있심더마는, 뭐 종교라 칼 거
까지는 없고요, 누구는 삼신 단지 모시고 누구는 서낭당 섬기는 거 비슷하게 보믄 될 낍니
더."
작은 신씨는 대강 그렇게 얼버무리곤 했는데 이제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큰 신씨의 입에
서 무극대도란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 명훈은 무극이란 말이 태극, 무극할 때의 그 무극 같
기는 했으나 그게 어떤 형태로 믿음의 대상이 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벌써 며칠째 물 퍼나르시느라 고생 많으시지요? 애쓰신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명훈이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로 내려가며 큰 소리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틈이 나면 무극대도에 대해 물어볼 생각에서였다. 조금 전까지 빠져 있
던 생각과는 달리 엉뚱해 보이는 호기심이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명훈이 그들의
믿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믿음 그 자체보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더 개간지에서의 생활
을 버티어 나가게 해줄지 가늠해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큰 신씨와 하씨에게는 그런 명훈이 좀 뜻밖인 듯햇다. 비탈 저쪽에서 올아오느라
명훈이 내려오고 있는 걸 보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무언가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켜
버린 사람처럼 잠시 낭패한 기색이다가 큰 신씨가 먼저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을 회복해 얼
버무렸다.
"요마이(이만큼) 물 져나르는 것도 인자 마 파인(끝난) 갑심더, 또랑물도 다 말라가예. 글타
꼬 저쪽 큰 거랑까지 가서 물을 져올 수도 없고... 낼 모레까지도 비 안 오믄 참말로 마 파
입니더. 이것저것 다 거다뿌고 일찌감치 메밀이나 뿌리는 기 나을 낍니더,"
하씨도 화제를 가뭄 쪽으로만 몰았다.
"이주사, 어예 면에 양수기 한 대 일로 몬 돌리겠습니꺼? 까짓 거, 쌀농사 그거 얼매 나온
다꼬 모내기, 모내기 캐싸미 양수기란 양수기는 몽지리 논바닥에만 꺼다놓는가 몰라. 여다는
아직 멀었다 카이 , 농사가 뭔지 옳게 모린다꼬. 하모."
그렇게 되면 명훈도 그쪽으로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그래서 면에 한번 올라가보려는 참입니다. 관에서 내려온 것은 우리 차례까지 안 오
지만 어떻게 구입해볼 길이 없나 해서. 세상에 못 볼 일이 자식 죽는 거하고 농사 타들어가
는 거라더니, 정말 그런 기분입니다."
"살랑 카믄 중고라도 십만 원은 넘을 낀데, 그렇게사..."
먼서 신씨가 그 말과 함께 명훈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이어 하씨도 그런 신씨에
맞장구를 치며 물지게와 함께 휘청휘청 따라갔다.
"올 몽사지어 발동기 사는 데 다 때려옇는다면 모리까..."
온 지 넉 달밖에 안되지만 명훈네의 경제력을 알 만큼 아는 그들이라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게 명훈을 맥빠지게 해 그들의 무극대도에 대한 호기심은 다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야야, 이게 무슨 일고? 도대체 서울에 뭔 일이 난 기고?"
명훈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식당 나무 탁자에 앉아 있던 어머니
가 편지 한 장을 내밀려 말했다. 명훈이 보니 인철에게서 온 것이었다.
형님 읽어주십시오
지금 글월 올리는 아우의 심경 착잡하고 서글프기 그지없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제
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애써 숨겨왔지만 공전은 처음부터 제게 맞지
않는 옷과 같았습니다. 쇠를 깎고 기계를 만지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유망하더라도 결국 제
일은 못 되었습니다. 무엇이 저를 이렇게 길러버렸는지 모르나 이제 와서 절감하는 것은 제
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뿐입니다...
인철의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내용의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인철
의 성숙이 먼저 명훈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철의 편지는 어
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에 분명한 진부한 문틀에 의지하고 있었다. '형주전 상서'로 시작
하고 '그간 옥체만안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신지요' 로 시작되는 그런. 하지만 이제 아우는
그 문틀에서 벗어나 제 목소리로 이애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님. 제가 주관적인 감정으로 이같이 중대한 결정을 함부로 내린 것은 아닙니
다. 더욱 참담한 것은 지금 제가 던져져 있는 객관적 상황입니다. 애초에 저의 학업은 도덕
적인 애매함과 무언가 불결하고 칙칙한 예감 위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그 도덕적 애매함은 부도덕 족으로, 그리고 불결한 칙칙함의 예감은 현실로 진행되어왔습니
다. 내 학업이 의지하고 있는 누나의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우나 누나는 지금 조금씩조금씩 나락으로 다가들고 있는 느낌입니
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어떤 나락으로 말입니다. 그 나락의 정
체에 대해서는 어머님께서 어느 정도 짐작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나는
이제 그 최악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물론 누나의 그 같은 파국을 막기 위해 형님이나 어머니의 지원을 받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보게에 누나의 운명은 이미 우리 불행한 일가의 손을 떠
난 듯합니다. 누나 자신이거나, 그 파국 자체에서 오는 우리가 상상 못 할 변화가 아니고는
누나를 구원할 수 잇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돌내골을 떠난 후 일 년 동안
전보다는 자랐다는 저의 세상 읽기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답답합니다. 그리고 쓸쓸하기조차 합니다. 혈육의 뻔한 파멸을 방관할 수밖에 없
는 것도 그럿지만 그와 함께 다시 허공에 떠버린 학업만을 걱정하는 이 비정한 이기도 그렇
군요...
명훈은 거기서 다시 한번 읽기를 멈추었다. 이 녀석이 벌써 이렇게 자랐는가. 하는 기분이
댇견스러움으로서보다는 불안으로 먼저 다가온 것이었다. 헤아려보면 인철도 벌써 열여덟,
서둘러 어른스러움을 흉내낼 나이도 되었다. 그러나 명훈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아우의 글
투에서 감지되는 어떤 정신적인 경사였다. 그와는 다르지만 인철의 영혼 도 한 무언가 말과
그의 비실제적 효용에 적지 않이 기울어져 있다는 느낌이 바로 그러했다.
성취에 이르지 못하면 일생을 그 갈증에 시달려야 하고 성취에 이르러도 현실적으로는 무
력하기 짝이 없는 그 지향- 비록 그 자신은 아직 한번도 온몸을 내던져 몰두해본 적은 없
지만 그런 길의 괴로움과 고단함만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명훈이었다. 그런데 인철의 편지
는 이미 그런 길로 깊숙이 접어든 정신의 징표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현상의 이면에 대한
쓸데없는 눈길, 그것들에 대한 턱없는 민감함과 섬세한 반응, 거기다가 그것을 추상적인 언
어로 조직하는 방식 따위가 명훈에게 특히 그러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너는 좀더 굵은 선으로 세상을 보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랐는데, 하는 생각에 절로 어두워
지는 기분으로 명훈은 남은 글을 읽어나갔다.
형님,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그만둔 것은 이런 식으로 이어져가야 하는 이
런 내용의 학교 수업이지, 배움 그 자체는 아닙니다. 저는 좀더 당당한 방식으로 제가 일고
싶은 것을 공부하려는 것 뿐입니다. 이미 저의 삶은 책과 지식에서 유리된 것이 될 수 없음
을 저는 잘 압니다. 아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그것들에 의지해 살아야 할 것 같은 예
감까지 느낍니다.
거기다가 형님께서 더욱 안심하실 것은 그 방식도 제 마음대로 고르지는 않을 것이란 점
입니다. 반드시 형님과 어머님과 상의해서 심려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귀가를 미루고 있는 것은 방학도 아닌 때 불쑥 내려가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좋
지 않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게 싫어서일 뿐입니다. 며칠 더 이곳에 머물다가 방학 무렵
해서 내려가 모든 걸 형님과 상의드릴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이렇게 글월 올리
는 것도 그때 형님과 어머님 두 분께서 너무 놀라실까 걱정되어서일 따름입니다.
그럼 두서 없는 글 이만 줄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1965년 7월 5일
인철 올림
편지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시원한 설명 없이 그렇게 끝나
있었다. 읽기를 마친 명훈이 잠시 어두운 상상에 빠져 있는데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니 보기에는 어예 된 거 같으노? 뭔 일이 났이꼬?"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편지를 이따위로 쓰는지, 시건방진 놈... 하지만 곧 내려온다니 그
때 되면 알게 되겠죠."
명휸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어머니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어머니는 나
이가 들수록 인철과 옥경의 일이면 별거 아니어도 안쓰러워 못 견뎌했다.
"어린게 허뿌라도 딴맘 먹으문 어예노? 함 안 올라가보고 도리라?"
"어리긴 뭐가 어려요? 벌써 열여덟인데, 그 나이면 나는 그 험한 통일역 바닥을 구르며 장
사해 돈 벌어왔잖아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더구나 그놈은 나보다 몇 배 똑똑하니까."
명훈은 그렇게 말해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마음먹은 대로 면사무소를 한
번 찾아볼 작정이었다. 양수기를 사들이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면직원들에게 우격다짐 반
으로 떼를 쓰다 보면 며칠이라도 빌릴 길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새 면장은 바뀌어 스스로 무도인임을 자랑삼던 예비역 대위는 벌써 지난 가을에 갈려
가고 없었다. 뒤를 이은 새 면장은 서로를 물밑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돌내골 출신의 타성
이라 저번 면장 때 같은 호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지난 봄에 빌린 농자금 상환을 한 해
미뤄준 것만으로도 큰 선심 쓴 걸로 여길 정도여서 양수기 얘기는 꺼내볼 엄두조차 나지 않
았다. 거기다가 면장의 나이도 이미 예순에 가까워 주먹으로 겁줄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용기를 내 면사무소까지는 갔지만 차마 면장실은 두드리지 못하고 적당한 상대를 찾고 있
는데 때맞춰 박서기가 돌아왔다. 산업계를 맡고 있어도 농번기에는 영농 지도를 겸하는지
어디 가까운 들을 살피고 온 듯한 차림이었다. 평소 면서기답잖게 깔끔을 떠는 편인데도 그
날은 헐렁한 면바지와 남방 셔츠에 맥고자로 부채질을 하며 들어서고 있었다.
"어어 이사람, 나 좀 봐."
명훈은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목소리도 부드럽게 해 박서기를 한쪽 구석으로 끌었
다. 박서기는 별로 반갑잖은 얼굴이었으나 지난 봄에 한 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선지 마
지못해 따라갔다.
"자네가 웬일고? 날 다 만나러 오고."
그래도 아직 지난 봄의 앙금이 남았는지 뾰족한 목소리로 묻는 그에게 명훈은 한층 목소
리를 은근하게 해 허두를 떼보았다.
"양수기 문젠데- 박서기, 한번 봐주라. 어떻게 한 대 며칠이라도 빌릴 수 없겠어?"
"하이고, 양수기라꼬? 그건 내 소관도 아이지마는 말도 마라. 박이 터진다 박이 터져."
"언제 관에서 내려오는 거 박 터지지 않은 적 있어? 비료고 농자금이고... 그러니까 자네를
만나 특별히 부탁하는 거 아냐?"
첫마디에 꼬리를 빼는 게 불쾌해 목소리가 은근한 가운데도 명훈은 절로 얼굴이 굳어짐을
느꼈다. 그게 무엇을 상기시켰는지 박서기가 갑자기 나긋나긋해졌다.
"보자, 여기서 이럴 게 아이고, 어데 점방에라도 내려가 시원한 탁배기나 한잔 하미 얘기하
자. 마침 점심때도 됐고오- 나도 영농 지도 갔다오는 길이라 목이 컬컬하던 참이따."
그러고는 앞장서서 명훈을 장터로 끌었다. 명훈도 양수기만 구할 수 있다면 그에게 막거
리 한잔쯤은 살 용의가 있어 오히려 잘됐다는 기분으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국밥집에서 막
걸리 한 되를 사면서 사정하는 것은 오히려 박서기 쪽이었다.
"첨에 정부에서 양수기 지원한다꼬 스무남은 대 면소 마당에 실어놀 때는 양수기가 천지뼈
가리(하늘땅 가득)로 보엤을지 몰따마는 자네도 한분 생각해봐라. 우리 면에 동만 해도 서른
두 개따. 한 동에 하나도 안 돌아가는 게라. 하기사 그게 바로 이 나라 중농 정책의 현실인
지 모르제. 말로사 중농, 중농 캐싸도 돈 들어가는 일이라문 가뭄 만난 농촌에 발동기 하나
제대로 안 내라준다꼬. 포항 울산에 퍼붓는 돈 반에 반만 해도 평생 물걱정 안 하도록 동네
마다 관정을 돌릴 수 있을 껜데도 말이라. 그러이 어예노? 그 양수기 나놔주는데 하마 동장
들끼리 박이 터졌다. 그걸 어예어예 겨우 끼맞촤 동에 하나씩 돌리는 데도 머리가 보핳세
실 지경이더라 카이. 그런데 내가 어디서 양수기를 구해내겠노? 인제는 돈 주고 대처 나가
사오는 길밖에 없다마는 그것도 값이 엄청나다 카드라. 거다가 농자금 잔고도 없고, 있다 캐
도 자네네는 하마 밀랜 게 있어 파이라. 그러이 꼭 어예 볼라 카믄 자네 동네 동장하고 의
논해봐라. 동네 앞으로 나간 거이 자네한테도 몫은 있을 께라꼬, 우리는 참말로 어예 해볼
길이 없데이."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그렇게 좋은 말로 사정하고 일어나는 데는 더 억지를 써볼 수
가 없었다. 마침 장터 거리에 올라와 있던 동장도 만나보았지만 짐작대로 말해보나마나였다.
"내가 아무리 동장이라 카지마는 그런 일에사 무슨 용맥(대단한 힘)이 있니껴? 우리 동네
용소들만 해도 말라가는 논이 삼백 마지기가 넘는데 양수기 한 대로는 그거 지키기도 바쁘
이더, 집집이 돌아가며 십분이라도 더 틀라꼬 난리고, 물꼬 싸움으로는 살인날 판이시더. 그
런데 어제 아래 일군 산전으로는 양수기를 돌리자 카믄 싸움이 나도 덤불 싸움이 나고 피탈
을 봐도 큰 피탈을 볼 거로요."
사십 줄의 동장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 명훈이 개간지로 올라
오지 않고 정류장 앞 가겟집 살평상에 그대로 눌러앉아 실없이 술잔을 기울이게 된 것은 아
마도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양수기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실은 거기서 기다리다가 벌
이 좋은 산판쟁이라도 만나면 땅을 잡히고라도 돈을 빌려보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술로밖
에 풀 수 없는 답답한 속 때문이었다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여름은 산판에도 제철이 아니어선지 트럭 대나 굴리는 산판쟁이들은 보이지 않고
눈치보다 도벌이나 몇 차씩 해먹는 조무래기 도벌꾼 몇만 걸려 애매하게 막거리되를 사고
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어느새 다섯시 반 막차가 오는 시간이 가까웠다. 명훈은 딱
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막차가 오는 것을 보고서야 일어날 마음으로 내처
술잔을 기울였다.
그날따라 막차는 한 이십 분 늦어 도착했다. 명훈이 거물거리는 눈길로 차에서 내리는 사
람들을 살피는데 많이 낯익다 싶은 사람이 다가오면서 알은체를 했다.
"이주사 아잉교? 이주사가 우째 여다서...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교?"
풀린 시선을 모아 살펴보니 이틀새 더욱 쌔까맣게 그을린 듯한 작은 신씨였다. 명훈은 그
를 알아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으나 술이군을 이기지 못해 허허거리며 받았다.
"작은 신씨를 기다리고있는 중이었심다아- 그래, 잘 팔았어요? 그런데 어쩨 돈가방이 안
보이지? 모두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데."
"아이고 마, 그 일은 말도 마이소, 어지간 더지간 해야지에."
작은 신씨가 그러면서 털썩 마루 끝에 앉았다. 그리고 목마른 걸 어지간히 참아왔다는 듯
가겟집 안을 향해 소리쳤다.
"아주무이요, 여다 막걸리 한 되 더 내오소, 나도 마 한잔 빨아야겠구마."
그런 그를 보며 명훈은 술이 갑자기 확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술 한잔으로 목을 축이기
바쁘게 작은 신씨가 들려준 농산물 출하의 경과는 한심스럽다 못해 참담했다.
"나갈 때도 쪼매쓱 짐작은 했지마는 참말로 기막히데예. 그래도 물건이라꼬 들고 나갔는데
돌따보는 중매인이 하나도 없는 기라예. 겨우 달가드는 게 남의 꺼 걸(거저) 먹을라 카는 똥
파리들분이고... 갈수록 시절이 빨라진다 카는 거는 알았지만 7월 초순에 생물 지철(제철)은
또 첨이라. 밀양, 삼랑진 들 밭에 바로 심은 오이 도마도가 하마 쏟아진 기라예. 그래 되믄
결국 다마(크기) 값이 되게 마련인데 대낄(상품)이 지때 값 반도 안 됩니더, 어디 그뿐잉교?
거다 갖다 놓으이 우리 끼 우째 그리 다마가 쪼물든지. 다마로도 하빠리에 하빠리라. 그러이
언놈이 뒤돌따보겠습미꺼? 잘못하믄 청과물 시장 씨레기만 보탤따 싶어 처음에는 막바로 골
목골목이 돌미 팔아볼 생각도 해봤지예. 글치만 잘못하믄 돈 사는 거보다 차 운임이 더 많
아질 것 같아 안 되겠더라꼬예. 그래서 관문시장에 채소 장사하는 재종행임을 찾아가 떼를
섰지예. 손해보는 심 잡고 지한테서 차띠기로 받아 이웃 점방끼리 우째 나놔 팔아보라꼬요.
그 행임이 워낙 정이 많은 사람이라 받아주기는 받아줬는데 도라꾸 운임 물고 나이 돈이라
꼬는 이뿐이라예. 이기 우리 다섯 집 쎄빠지게 봄농사 지은 값이라예."
그러면서 오천원짜리 두 장과 천원짜리 몇 장을 흔들어보이는 것이었다. 명훈이 알기로
그 봄 그들 다섯 집이 투입한 농비만 해도 오만 원이 넘는데, 그 돈은 아무리 많게 보아도
이만 원이 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밭에 남은 것도 막물까지 두 차가 될까말까 하고...
명훈이 정말로 앞 뒤 없이 술을 들이켜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마다하는 신씨를 억
지로 끌고 도가 옆 형출네 주막으로 술자리를 옮긴 명훈은 결국 신씨에에 업히다시피 해 집
으로 돌아갔다. 그날 명훈의 마지막 기억은 술자리를 옮기다가 흘깃 쳐다보게 된, 가뭄으로
한층 선명하고 아름다워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지던 저녁놀이었다.
제 41 장 돌아오지 않는 강
여름 오후 다섯시란 시간의 어중간함 때문인지 함께 내린 승객은 많지 않았다. 인철은 이
상하리만치 고요하고 휑뎅그렁하게 느껴지는 역전 광장을 걸어나오면서 콧마루가 시큰해올
정도의 쓸쓸함을 느꼈다. 그렇게도 가슴 설레며 달려온 곳, 숱한 밤 꿈속에서 애타게 서성였
고 깨어난 새벽 어스름 속에서 가슴 저려하며 그렸던 곳, 첫사랑의 소녀를 기른땅. 거기 밴
그녀의 숨결과 눈길로 추상화되어가던 성지- 그러나 그리로 드는 현실의 입구는 몇 년 전
보다 훨씬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시골 역사와 광장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스런 역 앞 마
당일 뿐이었다.
"내일동. 내일동 출바알-"
합승버스의 양철 문짝을 탕탕 두드리며 차장 녀석이 목청을 높였다. 몇 안 되는 손님에
심통이 난 데다 턱없이 감회에 젖은 인철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늑장까지 부리자 거칠
게 경고를 보내는 셈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 경고는 효과가 있었다. 인철은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는 햇볕 아래 걸어야 할 먼 길을 퍼뜩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합승 족으로
종종걸을을 쳤다.
그러나 서둘러 창 오른 인철은 5분도 안 돼후회에 빠졌다. 합승버스가 역전 거리를 벗어
나 사라호 태풍에 떠내려간 뒤 새로 놓은 다리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시원한 강바람이 차
창으로 불어오고 오른쪽으로 멀리 강둑을 따라 무더기지어 서 있는 노송들이 눈에 들어오자
인철의 마음은 달라졌다. 천천히 강둑을 따라 걸으면 쓸쓸하면서도 또한 그래서 오히려 달
콤한 감회를 해치지 않고도 읍내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삼문동으로 접어들어 도로 양편이 집들로 막힌 거리로 들어서며서 다시 차 안이
찌 듯 더워오기 시작하자 인철은 더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공설운동장 입구 못미쳐
서였다. 거기서 공설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솔밭을 지나 강둑으로 간 뒤 강둑길로 따라 읍내
로 걸어들어갈 작정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역기가 훅 끼쳐왔으나 차 안의 후텁지근함과는 달랐
다. 운전석 쪽에서 새어나오는 가솔린 냄새와 사람들의 땀냄새가 뒤섞인 차 안의 공기에서
빠져나온 것만으로로도 상쾌할 정도였다. 공설운동장에 서린 갖가지 추억들도 이내 그 새로
운 더위를 잊게 했다.
먼저 거기서 벌어지던 갖가지 행사들이 아련히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아랑제 무렵이던가.
웁 사람들이 '흑국놈'이라고 부르던 아프리카 토인으로 분장한 농잠고 학생들의 가장행렬,
읍내를 한바퀴 돈 그들이 마지막에 그곳에 모여 연신 질러대던 야호, 야호 하는 기성, 봄가
을 거기서 벌어지던 각종 운동회. 특히 읍면 대항 군민 체육회의 열기와 흥겨움, 농악패의
흐드러진 풍물놀이와 처음 들을 때는 너무 경쾌해서 천박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결국은
그리운 가락이 되고만 [밀양 아리랑]. 한번은 그 운동장 가운데 허술한 링을 설치하고 인근
의 삼류 복서들을 불러들여 권투 시합을 벌인 적도 있었다. 시합 도중 터진 코피로 얼룩진
선수의 휜 팬티가 왜 그렇게도 처절해 보이던지. 또있다. 운동장에 넓게 목책을 둘러치고 벌
이던 소싸움과 출전한 황소들이 전의를 보이지 않을 때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던 우스꽝스런
지시, 싹불이, 싹불이, 암소를 준비하라..
그런다가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슴 저린 추억 하나가 떠올라왔
다. 육학년 때의 군민 체욱회던가. 어쨌든 군내의 여섯 개 국민학교가 겨루는 운동호가 있던
날이었다. 그날은 학교마다 수업을 쉬고 공설운동장으로 자기 학교 응원을 나가 소풍날이나
다름없었다. 저마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군것질 거리도 싸와 응원은 제쳐놓고 주변 솔밭을
뛰어다니며 하루를 마음껏 뛰어놀았다.
하지만 어머니도 없이 옥경와 한참 어려움을 겪던 그 무렵의 인철에게는 그래서 그날이
더 괴로운 날이 되었다. 도시락은 커녕 아침조차 교회에서 보내준 밀가루로 때우고 등교한
인철에게 구경이고 응원이고 흥이 날 리가 없었다. 겨우 출석이나 알리고 맥없이 반 아이들
틈에 줄지어 앉았다가 담임선생님의 눈치를 보아 슬그머니 솔밭으로 숨어들려는 때였다.
"인철아, 인철에이, 내 좀 보자,"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뒤를 따라오다 가만히 불렀다. 뜻밖이긴 하지만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지난 겨울 뒤로는 먼빛으로만 바라보며 지나쳐온 명혜였다. 그 눈 내
린 밤의 추억 이후 갑자기 생긴 쑥스러움에다 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간 뒤로 영남여객댁에
거듭 동정을 구걸할 수밖에 없어 상한 자존심 때문에 그 무렵 dslcjf은 줄곧 그녀를 피해오
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가오는 명혜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신문지로 싼 작은 꾸러미 하나를 내밀려 말했다.
"이거 가지고 가래이. 아침에 학교 올 때 울 엄마가 싸주더라. 안직 너그 엄마 안 돌아왔으
이 니나 옥경이나 벤또라도 올케 싸올 수 있겠나 카미."
그때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한 것은 오히려 인철 쪽이었다. 그녀의 말로 그 꾸러미의 내용
물이 짐작되면서 인철은 먼저 앞 뒤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발가벗긴 채 그녀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뒤돌아서서 냅다 달아나고 싶을 뿐이었다. 명혜가 그런 인
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달음질쳐와 길을 막으며 도시락 꾸러미를 쥐어주었다.
"니는 머스마가 어예 그렇노? 또 뭔 심술 부릴라꼬 그래 뻐덕하게 서 있노? 그래지 말고
옥경이 찾아 노나 묵어라."
명혜가 어른처럼 천연스럽게 나무라며 돌아서는데 그때부터는 왜 그렇게도 눈물이 쏟아지
던지, 명혜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로 돌아가 섞이기도 전에 인철은 굵은 소나무 등결 뒤에 몸
을 숨기고 그때는 까닭도 모를 눈물을 한참이나 줄줄이 흘렸다. 눈물이 마른 뒤에 옥경을
찾아 도시락 꾸러미를 풀었으나 이번에는 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속 때문에 김밥 한토막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느릿느릿 공설운동장을 가로지른 뒤 솔밭으로 접어들자 위쪽 방직 공장을 중심으로 한 일
련의 변화가 비로소 세월의 흐름을 깨닫게 해주었다. 전에는 낡고 허물어진 고성같아 멀리
서 바라보기에도 공연히 으스스했던 공장 건물들은 말끔히 손질되어 있었고, 잡초에 덮여
괴괴하기만 하던 빈터에는 그냥 지나치는 길은 아닌 듯한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는 기계의 소음도 제법 크게 들려왔다. 공장이 다시 가동되는 모양이었
고, 거기서 은근히 느껴지는 것도 틀림없이 생기와 활력이었다. 그러나 인철에게는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의 한 무대가 훼손되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 느낌을 떨쳐버리듯 걸음을 재촉해 강둑에 오르니 갑자기 다가선 듯 남천강과 영남루
가 펼쳐졌다. 강 이쪽저쪽에는 마지막기승을 부리는 햇살에 쫓겨온 아이들이 물놀이로 신을
내고 있었다. 인철은 갑자기 몇십 년은 늙어버린 사람처럼 강둑에 앉아 감회 어린 눈으로
뱃다리거리와 그 너머 펼쳐진 읍내를 바라보았다.
강을 따라 조는 듯 펼쳐진 작은 읍내의 스카이라인은 어느새 붉은 기운을 띠어가는 햇살
아래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군데 이르러 돌연히 생생한 선이 되살아
나며 눈부신 빛 같은 게 뿜어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도 보이는 영남여객댁의 정원수
와 지붕이었다. 이어 그 선과 빛은 폭발하듯 이웃으로 번져 이내 그 작은 읍내는 푸른 강물
과 붉은 놀을 배경으로 한 환상의 도시로 재구성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원래 돌내골을 떠나올 때 인철이 가진 여러 계획 중에는 영남여객댁을 찾아본다는 것도
들어 있었다. 자연스럽고도 정중하게 방문하고 역시 자연스럽고도 정중하게 명혜를 만나-
기호가 오면 그 동안의 사무친 그리움을 넌지시라도 전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인철이 펄쩍
놀라듯 그 계획을 철회한 것은 바로 그 강둑에서였다. 저 높고 눈부신 곳으로 나는 아직 들
어갈 수 없다. 멀리서 우러르는 것도 아직은 과분하다...
'그래, 이번에는 먼빛으로라도 너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넉넉해, 네가 어울릴 만한 멋
진 성을 마련하고 드높이 올라앉을 백마를 얻은 뒤에야 너를 찾아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겠
어.'
인철은 성안의 고귀한 숙녀를 짝사랑하게 된 나뭇꾼의 아들처럼 속절없는 심경으로 그렇
게 중얼거리며 도착한 뒤로 줄곧 잊고 있었던 친구들 쪽으로 상념을 돌렸다. 먼저 용기네
집으로 가리라. 재걸이며 광이도 만나리라. 지난 몇 년 내가 힘겹게 삶과 씨름하고 있는 사
이에 그들은 어떻게 자랐고 무엇을 이루었는지부터 알아보리라.
그러자 인철은 갑자기 조급해져 몸을 일으켰다. 찾아갈 곳이 용기의 집이고, 끼니때가 되
어 남의 집으로 찾아들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방직공장 쪽 둑길에서
무언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철은 무심코 돌아보니 노동자풍의 청년 둘이 얘기를
나누며 다가오고 있었다. 둘 다 훌쩍한 키와 벌어진 어깨에다 머리를 길러 넘기고 있어 스
물은 넘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 윤곽이 먼빛으로도 낯익은 데가 있어 인철이 머뭇거
리는데 둘 중에 하나가 먼저 인철을 알아보았다.
"니 인철이 아이가? 니 참 오랜만이다. 우째 된 기고? 그 동안 어데 있었노?"
그러자 다른 하나도 알은체를 했다.
"참말로 이인철이네. 야, 니 내 모리겠나? 문곤이, 김문곤이, 오륙학년 다 한 반이랬다 아이
가?"
그제서야 인철도 둘 모두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는 창식이라고 고아원에서 같이 지낸
아이였고 다른 하나는 국민학교 때 한 반이었던 아이였다. 둘다 나이는 인철보다 많아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이내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반드시 그같이 친하고 덜 친함에 달
린 것만은 아니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그들 모두가 한창 자라고 변하는 시간이었기 때문
이었다.
"아직... 밀양에 남아 있었어?"
인철이 먼저 창식이를 향해 물었다. 인철이 고아원을 떠날 무렵 그가 고아원에서 도망치
려다가 잡혀온 일이있었음을 상기한 까닭이었다. 창식이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내 같은 기 달라빼봤자제. 가보이 어디 가겠노? 그렁저렁 중학교 졸업하고 인자 진짜로
한번 달라빼볼까 싶은데 여다 일자리가 생기 마 주질러앉았뿟다 아이가."
창식이가 긴 한숨과 함께 남방 윗주머니에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담뱃
불을 붙이는 사이 문곤이가 묻지도않은 말에 대답했다.
"객지 생활이라 카믄 내가 쪼매 했제. 니 알다시피 중학도 몬 간 내가 할 끼 뭐 있겠노?
하마 불알 밸갈(발갈)때 대구 나가 한 삼 년 도라꾸조수로 따라댕깄디라. 그래다가 할매 아
파 들누우이 우짜겠노? 할 수 없이 여다 끌래와 요새는 기술 같지도 않는 기술 가주고 창식
이 절마하고 한 공장밥 묵는다."
그러자 인철은 문득 곱돌광산 산기슭에 있던 그의 오막살이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6.25때
전사하고 어머니는 재가해버려 늙은 할머니와 둘이서만 살고 있었는데, 인철이 어떤 일로
그 집에 들르게 되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담배를 붙여문 창식이 연기를 한 모금
길게 내뱉으며 문곤에게 말했다.
"야,우리 여다서 이럴 게 아이라 어디가서 대포라도 한잔 빨자. 인철이 일마, 니한테 동기
동창이지만 내한테는 형제라. 우리 갈릴리 형제라꼬."
그리고는 새삼 인철의 아래위를 살펴본 뒤 물었다.
"교복이사 입었다마는 고등학교 이학년이믄 술맛은 알겠제? 따라온나."
술에 취해 용기네 집으로 갈 일이 난감스러웠으나 인철은 내색않고 그런 그들을 따라갔
다. '갈길리 형제'란 말에 진득하게 배어있는 정감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자신보다 훨씬 빨리
어른들의 삶에 편입되어버린 그 둘에 대한 묘한 호기심에 이끌려서였다.
창식이 인철을 데려간 곳은 뱃다리거리 못미쳐 둑 밑의 허름한한 초가집이었다. 술집이라
기보다는 옛날의 주막 같은 형태인데 방 사이에 있는 두어평 마루방에서 막걸리도 팔고 국
수도 말아내는 모양이었다. 문곤에게도 단골인 듯 아직 할머니라 부르기에는 이른 안주인에
게 제법 농담까지 건넨 그가 술을 주문했다.
"할마시, 여다 막걸리 한 되만 꾹꾹 눌러 내오소, 파고 정구지(부추)고 있는 대로 찌짐도
몇장 꾸버주고."
"문eld이 같은 눔들아. 느그사 술을 목구무로 마시든동 코로 드러붓든동 머라 칼 사람 아무
도 없겟지마는 저짜(저쪽)는 안죽 애리에리한 학생 아이가? 학생을 술 먹이 우쨀라 카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주인은 별로 마다하는 기색 없이 사발 같은 대풋잔 셋과 술주전
자를 내왔다. 익숙하게 술잔을 채우면서 창식이가 지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철이 니 우째 된 기고? 언날 아침에 보이 니가 안 비는데 너그 어무이 찾아갔다 카기도
하고- 사실은 서울로 달라뺀 걸 원장 아부지가 그래 쏙이는 거라는 말도 있고오...나중에 성
춘이 형 말 들으이 고향 갔다 카든데 인자는 또 서울서 학교 댕긴다 카이 뭐시 우째 된 긴
지 모리겠네. 그건 글코오-니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되는 기라. 그래도 생(형)이야, 동생아
카미 강냉이죽이라도 이 년 넘도록 한솥밥 먹고 지낸 사람들한테 우째 편지 쪼가리 하나 못
보냈노? 사람 정이란 게 그런 기 아이라."
창식은 학교를 늦게 다녀 인철가 한 학년이라 학교에서는 남의 눈 때문에 서로 말을 트고
동급생으로 지내도 고아원 안에서는 인철이 그를 엄연히 형이라 불러야 했다. 그때는 그게
싫어 고아원으로 돌아가서는 되도록 말을 건네지 않았는데 그 같은 나무람을 듣고 나자 정
말로 그가 형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 그건 말이야-"
인철은 까닭 없이 죄진 기분이 들어 그간에 있었던 일을 더듬드듬 간추려 들려주었다. 누
나의 칙칙한 사생활 부분과 일학년이면서 이학년 배지를 달고 왔다는 것 외에는 모두가 사
실대로였다. 인철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형 대접을 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창식이 한층
살가움을 드러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별로 가까이 지낸 적이 없는 문곤이도 감격스러울
만큼 정을 썼다.
"그래도 용타. 중학도 다 졸업 안 하고 가가(가서) 서울서도 일류 가는 공전에 이렇게 처억
들어갔으이, 하기사 옛날에도 공부깨나 하기는 했다마는..."
그러는 게 대견한 동생이라도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한동안은 자신이 돌아온 게 그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던 듯한 착각에 빠져 술잔을 받던 인철이 문득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런데 형하고 문곤이 넌 내일 동창회 어쩔거야? 헤어진 지 오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건데
통 그 얘기가 없네."
"아, 그거? 그거야 너그같은 쪼무래기들이나 모예 해해닥거리는 데지 우리같은 나백이 곁
다리들이 무신 상관고? 말이사 바른말이지, 우리가 어디 너그 같은 아들하고 모예 동창회할
군번이가? 거다가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눈투나올 판인데."
창식이 뒤틀린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고 문곤이 역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비비 꼬인 소
리로 보탰다.
"글타. 그거사 잘 나가는 아아들끼리 모예 지지꿈(저마다) 있는 자랑 아는 자랑 하는 마당
이라. 우리같이 히마진(못쓰게 된) 인생들이 낑갤(낄) 자리가 아이라꼬."
"그게 무슨 소리야?"
"동창회 이게 첨이 아이라. 작년에도 함 했는데 참말로 눈꼴시러바서. 그게 어디 폼잡는 대
회지 동창회가? 부모 잘 만내 일류 중학교 나오고 일류 고등학교 간 놈은 그 잘난 교복 교
모 터억 받차입고 와서 꺼떡거리 쌌고, 객지 나가 싸움 구경이나 해본 놈은 틈만 나믄 구석
구석이 주먹이나 내지르고, 양곡 몇 곡 배운 놈은 마이크가 지 꺼맨치로 되도 않게 쎄(혀)
꼬부라진 노래만 불러쌌고, 춤 배운 놈은 트위스튼강 림본강은 또 어떻고? 발가벗고 남천강
에 목욕하던 게 언젠데 어디 가서 몬된 것만 배와갖고- 벌써 찌지고 볶은 머리에 홀테(몸에
꽉 끼는) 바지로 암내나 살살 피우는 기 없나, 그 노래 그 춤 어데서 배왔는지, 머스마들 절
로 가라 카는 논다이패가 없나, 교복 차림으로 말짱하게 앉아 잇는 것들도 그새 서로 눈을
맞차 뒷구무로 저어끼리만 만날 쑥덕궁리가 한창이고... 정말로 가관이더만."
문곤이가 한층 찌푸린 얼굴로 그렇게 지난해의 동창회를 전해주었다. 그 동창회에 대해
친철이 품고 있는 환상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
허전했다.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낼 함 가보라믄. 우짜튼 우리는 일없다. 내일이 광복절 휴무라 카지마는 창식이나 내나 잔
업도 있고오..."
문곤은 그렇게 말을 맺고 다시는 동창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반장. 잔업수당.
간조. 야참 따위 인철에게는 귀에 선 말들을 무슨 은어처럼 섞어가며 자신들의 얘기를 하다
가 이따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꼬'나 '에이고, 먹고 살기 힘들다' 같은 말들과 함께 깊은
한
숨들을 내쉬는 것이었다. 가끔씩 '무슨 반 가스나 아무개' 하며 여자 공원들 얘기로 낄낄거
리기도 했지만 인철이 그들에게서 본 것은 이미 허리까지 차오른 어른들의 신산스런 삶이었
다.
'우리들의 세계도 이미 둘로 갈라져버렸구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바보짓을 되풀이해가
며
아직도 자라가고 있는 아이들과 벌써 어른이 되어 고달픈 삶의 진창에 발을 들여놓은 아이
들... 그런데 나는 그 둘 중 어느 편에 속할까?'
그들과 헤어져 용기네 집을 찾아가면서 인철은 갑자기 울적해지는 기분으로 그렇게 중얼
거렸다 묘하게도 자신은 그들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더 희고 깨끗
하게 빨아 입고는 왔지만 교복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배움의 길을 계속 가려면
이제는 그 교복 밖에서가 아니면 안 되었다. 미술 선생에게 막말을 하고 스무 날 넘게 무단
결석을 한 것도 그렇지만 이제 막바지로 접어드는 듯한 누나와 창현의 생활도 그대로 학업
을 계속하기는 어려우리라는 예감을 주었다. 인철이 방학에 맞추어 돌내골로 내려가던 날,
전에 없이 손찌검까지 하며 누나와 싸운 창현은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변명하는 투도없이 말
했다.
"니네 누나 요새 비어홀 다시 나가는 거 너두 알지? 그런데 어젯밤 외박했다면 이건 무슨
뜻이야? 세상에 불알 차고 그런 꼴 그냥 보아넘길 핫바지가 어디 있어?"
그렇다고 당장 창식이나 문곤이처럼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려고'일터로 내몰릴 것 같지
는
않았다. 돌내골에 틀어박혀만 있어도 가족이나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할 처지까지는
아니었다. 어느 시기까지는 어두운 망상과 목적 없는 독서로 보내는 유예의 날들이 다시 이
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철은 이미 그 같은 유예의 날들, 두 세계가 불안하게 맞닿아 있는 그 자리의 고
통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지난 이 년 돌내골에서 보내야 했던 그 무료의 한낮과 번민의
밤들, 이제 다시는 속절없이 그런 시간들로 되끌려가지는 않으리라, 결단하리라. 내 갈 곳으
로 스스로 찾아 떠나리라-은근히 오르는 취기에 힘입어 인철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갑
작스레 발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전에 보낸 편지를 받은 용기가 몹시 기다리고있을 것임을
이미 밝혀진 거리의 불빛을 보고서야 상기한 까닭이었다.
인철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용기네 집을 찾아갔을 때는 여덟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햐, 일마 이거, 니 도대체 어데 있었노? 어데 있다가 인제사 오노? 내는 니가 안 오는 줄
알았다. 중앙선하고 접선되는 기차는 다섯시 그 차 뿐이다 아이가?"
용기가 구르듯 달려나와 인철을 반기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 역시 목소리가 굵게 변하고
키도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는 한 자나 더 자라 있었지만 몇 년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또한
그만큼 성숙한 우정은 그 모든 변화를 조금도 낯설지 않게 했다. 마침 용기의 방에는 재걸
이와 광이가 와서 기다리고 있어 인철이 걱정한 용기 부모님과의 인사도 마당에서의 선인사
로 때울 수가 있었다. 창식과 문곤에게서 얻어 마신 한 되 가까운 막걸리 때문에 방안에서
절을 올릴때 술냄새라도 풍기면 어쩌나 걱정하던 인철이었다.
골방을 겨우 면한 용기의 방에 그들 넷이 몰려앉자 그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국민학교 때 용기와 재걸, 광이는 모두가 학급의 모범생들이었고, 그뒤로도 착실하게 그들의
실을 가 이제는 모두가 튼 도시의 명문 고등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모여
이루는 세계는 크게 보아 아직은 자라고 있는 세계였지만, 창식이나 문곤이 비웃던 그런 방
향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때묻지 않은 이상이 있었고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야심이 있었으며 성스러움
에 대한 동경까지 남아 있었다. 조심스럽기는 해도 법관이 될 것인가 의사가 될 것인가. 혹
은 학문 속에 남을 것인가 실용에 몸 던질 것인가 따위, 다소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논의가
조심스럽게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싸구려 유행에 대한 앞 뒤 없는 뇌동이나 치기로
부추겨진 동물적인 투쟁심, 또는 무지하기에 더 조급하고 용감해지는 성적 호기심과는 분명
히 거리가 있었다. 열대야나 다름없는 좁은 방에 넷이서 살을 맞대다시피 누워 온몸 흥건히
땀을 흘리면서도 날이 흐부윰히 샐 때까지 얘기꽃을 피울 수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그
들의 순수와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날이 샐 무렵 용기와 재걸, 광이는 가는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인철은 창문이 훤
히 밝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창식이와 문곤에게서 받은 감동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에 내가 돌아온 것은 바로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머지
않아 나는 나만의 길을 떠나야 할지 모르지만 그 길은 너희들이 가고자 하는 길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은 벗어나도 끝내는 너희들과 만나게 될 길로 나는 가리라- 인철이 그렇
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순간은 그토록 소중하게 품어온 명혜의 환상조차 잠시 그의 의식에
서 지워졌을 정도였다.
동창회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진늪이란 곳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얘기를 나누느라
날이 샌 뒤에야 눈을 붙인 네 사람은 아홉시가 넘도록 곯아덜어졌다가 용기 어머니가 성화
를 부리듯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 용기 어머니도 동창회가 오전 10시에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 그 속에는 명혜도 있을지 모른다- 마
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을 갑작스레 상기해낸 듯 그 같은 동창회의 의미를 되살린 인철의
마음은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진늪은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소풍을 가본 남천강의 상류로
인철의 기억에는 상당히 먼 곳이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해도 닿을 것 같지 않아 은근
히 조급해하자 광이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 안 깝치도(재촉해도) 된다. 여다서 천천히 걸어도 반시간이믄 닥상이라."
용기도 태평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반시간 더 걸리믄 또 어떻노? 아이들이 아나, 여 있다. 지 시간에 잘도 나오겠다."
그러면서 할 짓 다하고 나서는 바람에 용기네 집을 떠날 때 시간은 이미 10시에 가까웠다.
다행히도 용기네 집에서 진늪까지는 그들이 말한 거리밖에 안 됐다. 북성거리를 지나자 이
내 읍내가 끝나고 눈에 익다 싶은 고갯길이 나왔다. 다락밭과 야산 사이로 난 국도로, 아직
포장조차 되지 않아 먼지가 펄펄 날리고 멀리로는 공동묘지도 보였다. 가만히 기억을 더음
어보니 역시 국민학교 5학년 때인가 공작 시간에 쓸 '쪼대'라는 이름의 고령토를 파러 왔
던
곳이엇다. 그때는 아직 영남여객댁을 내집처럼 드나들던 시절의 일로 그때 인철은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훨신 많이 파다 명혜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여기 어디 도자기공장 같은 게 있었는데..."
인철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광이가 싱긋 웃으며 받았다.
"도자기공장이 아이고 벽돌공장이다. 저기 고려내화, 저거라. 5학년 때 니하고 내하고 여다
쪼대 파로 안왔디나?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이라. 그때 쪼매만 파가도 되는데 니는 억시기
많이 파가주고 가디..."
그 말에 인철은 햇볕 따가운 여름 아침의 자갈길을 걸으면서도 안개 자우룩한 추억 속을
헤매는 듯한 감회에 빠졌다. 바로 네가 같이 갔었구나. 그런데 어째서 그건 까맣게 잊어버렸
을까. 억수로 내리던 비도... 그때 용기가 팔꿈치로 인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저기 바로 진틒 솔밭이다. 인자 아음이 놓이나?"
그러면서 용기가 턱짓을 가리키는 곳을 보니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 한 자락 강물이 보
이고 그 강물을 따라 시퍼런 솔밭이 펼쳐져 있었다. 빨리 걸으면 10분 거리도 안 될 것 같
았다. 거기서 다시 기억의 혼란이 왔다.
"우리 4학년 때 진늪에 소풍 가지 않았어? 그때는 영 이렇지 않았는데."
"아이구 빙신, 저기 참말로 밀양 살기는 살았나? 일마, 그때 소풍 가는데 왜 이 길로 오노?
영남루 밑으로 해서 백송 있는 데로 질러가믄 훨씬 가까운데."
이번에는 재걸이가 그렇게 핀잔처럼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더듬는 사이
인철은 더욱 자우룩한 추억의 안개 속으로 잠겨들어 주위도 잊은 채 남은 길을 걸었다.
그들이 솔밭머리에 이른 것은 10시 20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주최한 아이들이 구해온
듯한 마이크 소리가 들리고 솔밭 사이로 여름 교복을 입은 남녀 고등학생들이 희끗희끗 보
였다.
"봐라, 절타 카이, 하마 반시간이나 지났는데 절마들 저거 쫌 봐라. 우리 조럽생이 몇 명
고? 육육이 삼십육, 삼백육십 명 아이가? 그런데 절마들 저거 다 때려 웅치(합쳐)바야 서른
명도 안 되겠다."
용기가 보아란듯이 그렇게 말했고, 재걸이가 그 말을 받듯 솔밭머리에 있는 작은 가게를
가리키며 다른 제안을 했다.
"뻔하다. 다 모일라 카믄 안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우리 저다 가서 뭐 시원한 거나 한잔씩
마시고 가자."
하지만 그때 이미 인철의 감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발단은 솔밭 사이로 희
끗희끗 보이는 교복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직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여학생 몇이 서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소매 끝과 칼라에 검은 선을 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인철은 그
교복을 알고있었다. 옛날 명혜의 언니가 휴일이나 방학이면 자랑스레 입고 오던 부산의 그
명문 여고 교복, 명혜도 어쩌면 저애들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인철의 가슴에는 갑자기 찬바람이 일었다. 자신의 모습이 몇배나 초라하게 느껴지
며 그런 모습으로 그곳에 나타난 일 자체가 문득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후회는
때아닌 술생각으로 첫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소주도 한 병 주세요."
가겟집 평상에 앉자마자 사이다며 콜라를 시키는 아이들 틈에서 그렇게 덧붙이는 인철을
주인 여자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반드시 나무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용기네 아이들도
인철이 그렇게 나오자 갑작스런 객기를 부렸다.
"맞다. 동창회야 가봐야 뻔한 기고 여다서 술이나 한잔 걸치고 가자."
광이가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 나왔고 재걸이는 한술 더 떠 안주까지 청했다. 거기에 먼저
와 있던 지현이란 아이가 끼여 이내 술자리가 어우러졌다. 지현이 역시 중학교 때부터 대구
에 나가 공부한 아이라 현지에 남은 아이들과는 서먹해진 바람에 혼자 겉돌다가 그들 틈에
낀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 명혜 알지? 3반 가시내. 영남여객댁 딸 말이야. 갠 여고 어딜 갔
어? 중학은 일류로 갔다는 것 알고 있는데..."
인철이 그렇게 명혜 소식을 물을 수 있었던 것은 두어 잔 돌아간 소주가 붇돋아준 용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되도록 이면 지나가는 투로 물었지만 가슴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듯
쿵덕거렸다.
"절마가 왜 안죽도 그걸 안 묻노, 싶디. 글치만 맨입으로 되나? 나도 이거 알라 카다가 정
미 그 가스나한테 오해까지 받았는데."
명혜에 대한 인철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용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재걸이가 그렇
게 인철은 놀려놓고 이종간인 정미란 여자에게 들은 대로 전해주었다.
"학교사 괜찮제. 소피아여고라꼬 부산서는 일루로 쳐주는 사립이라. 글치만 내막을 들으믄
쪼매 실망스러블 끼로. 시험쳐 드간게 아이고 보결이라. 발렌강 뭔강 춤 특기생이라 카는
데, 실은 그 발레라 키는 걸 시작한 게 바로 입시가 자신 없어서라는 말이 있더라꼬, 하기사
가시나들 쫍은 속으로 등뒤에서 하는 소리 다 믿을 수 있나? 늦가 예술적인 자질을 발견해
그 길로 나설 수도 있는 거 아이가?"
그러나 인철의 귀에는 되도록 이면 좋게 해석한 뒷부분만 들어왔다. 발레, 예술적 자질-
그게 다시 명혜를 환상 속에서보다 훨씬 더 아득한 존재로 만들었다.
차라리 별의 이름을 붙이련다.
손 닿을 수 없이 아득한 너이기에.
그로부터 오래잖아 끄적이게 되는 인철만의 노트에는 그런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날의 감정을 시로 토로해보려 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다행히도 그 술자리는 곧 끝이 나 인철의 내부에서 불 댕겨진 감정의 상승 작용은 차단될
수 있었다. 11시 무렵 해 동창회를 주최한 지역 아이들이 그들을 데리러 온 까닭이었다.
아직 동창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거부할 만큼 되지는 않은 때라 인철은 말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강가에서 멀지 않은 솔밭 가운데 설치해 둔 마이크 쪽으로 가보니 그새 동창들은
백 명 가까이로 불어나 있었다. 총 동창생 수에 비하면 너무 적었지만 이미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 주최측은 개회를 서둘렀다. 이제는 네 반 내 반 가릴 것 없이 적당하게
덩어리져 앉은 남녀 동창들을 상대로 의례적인 석순을 섣루러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한군데 굵은 소나무 아래 용기네 아이들과 자리를 잡은 인철은 되도록이면 자연스러워지
려고 애쓰며 먼저 남자 동창들부터 둘러보았다. 교복을 입지 안은 이이들도 더러 있었으나
머리칼로 보아 모인 아이들은 애개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같았다. 그러나 열세 살부
터 열여덟 사이 헤어져 보낸 5년이 안팎으로 워낙 심하게 변하는 나이라 그런지 코흘리개
시절과 쉽게 겹쳐지는 얼굴은 많지 않았다. 중학교에서도 한반이었던 아이들 몇몇을 빼면
거의가 낯선 얼굴들이었다.
남자 아이들을 대강 후ㄹㅍ어본 인철은 다시 여자 아이들 쪽을 훔쳐보았다. 진작부터 궁
금한 것은 그쪽이었지만 왠지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짐짓 미룬 것이었다. 변화는 여자애들 쪽이 더 심했다. 단 하나 이웃에 살아던 적이 있던 정
순희라는 여자 아이를 빼고는 모두가 낯설 정도였다.
나라면 알아볼 수 있다. 네가 여왕의 야회복을 입고 있더라도, 거지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
더라도, 천사의 날개를 달았더라도, 악마의 탈을 썼더라도- 인철은 한편으로는 참담한 열등
감에 시달리면서도 아직 그보다는 몇 배 세찬 그리움에 휘몰려 열심히 명혜의 얼굴을 찾았
다. 그러나 없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 훑어보았지만 명혜의 얼굴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
다. 어느새 의례적인 식순은 끝나고 오락회에 앞서 차례로 자기 소개를 하는 순서가 되어
자리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나 인철의 마음속은 오히려 썰렁해지기만 했다. 한 해
늦어진 걸 밝히기 싫어 'H' 자 학년 배지를 달고 온 것조차 부질없는 짓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용기네는 달랐다. 인철이 그렇게 느껴서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눈빛까지 달라질 정
도로 활기를 띠며 자랑스레 학교와 이름을 밝혔다. 이어 오락회가 시작되면서는 더욱 그랬
다. 우선 주최측이 준비한 순서부터 벌써 그들과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세 명의 지방
고등학생이 나와 [더 영 원]을 원어로 부르는데 노래에 맞춰 추는 춤까지 [틴에이저 스토리]
의 장면 그대로였다. 자신이 어두운 골방에서 우울한 몽상에 잠겨 있거나 턱없이 심각한 독
서에 빠져 있는 동안 또래를 열광시키며 번져나간 그 노래와 춤. 그런데 용기네 아이들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인철이 그 자리를 빠져나온 것은 오락회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명혜도 없고 모
임은 전날 밤 창식이와 문곤이가 이죽거린 대로의 놀이판으로 굳어가자 인철은 슬그머니 솔
밭을 빠져나와 얼마 전에 술을 마시던 가겟집으로 갔다. 처음에는 꼭 그럴 작정은 아니었으
나 가게 앞에 이르러보니 갑자기 술생각이 다시 났다. 인철은 좀 전처럼 그대로 살평상에
앉아 술을 마시려다가 소주 두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봉지에 넣게 했다. 사방에서 다 보이
는 솔밭머리 가겟집 살평상에 편하게 퍼질러앉아 술을 마시기에는 차려입은 교복이 아무래
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마시기도 전에 용기네 아이들이 찾아와 훼방을 놓을 염려
도 있었다.
인철은 술병이 든 봉지를 끼고 동창회가 열리는 장소에서는 보이지 않는 강변으로 숨어들
었다. 그 사이 마이크에서는 아예 음악 반주가 흘러나오고 아이들의 노래는 합창으로 변해
있었다. 소나무 등걸 사이로 언뜻언뜻 살펴보니 몇몇은 앞으로로 나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 즐거운 것은 너희들이로구나- 인철은 쓸쓸하고 참담한 심경이 되어 되도록 이면
마이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강을 따라 내려갔다. 은어 낚시철인지 유난히 굵고 긴
은어 낚싯대를 든 사람들 몇이 하류 여울목에 허리를 잠그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왠지 눈에
익은 게 가까이 가서 보면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맞은 편 산도, 발 앞
까지 펼쳐진 강물도 예전의 기억과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사라지고 변하는 건 우리뿐인가.
강물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 인철은 앉으면 행사장이 전혀 보이지 않고 마이크 소리도 멀게
들리는 물가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병마개를 따고 나서야 잔을 구해오지 않은 게
생각났으나 낭패될 일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상당히 과장된 감정 탓인지 소주를 병째 마
셔도 평소처럼 그리 역하지 않았다. 오징어를 구워오지 않은 것도 별문제는 안 되었다. 평소
에는 콤콤함과 비릿함이 섞인 생오징어 특유의 냄새를 싫어했으나 그날은 어찌 된 셈인지
그것대로의 별난 맛이 느껴졌다.
첫 병을 비울 때만 해도 인철의 사고는 그런대로 나름의 조리와 단락을 가지고 있었다.
얼얼하게 취해오는 머릿속을 먼저 가득 채워온 것은 그 사이 훨씬 위험스럽게 자라 있는 열
패감이었다. 배움과 앎이 도구이고 힘인 시대에 그 과정도 내용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현재
의 자신과, 개선의 가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 앞날, 출발부터 뒤져버린 경주. 그럼에도 바라
보는 곳은 터무니 없이 높고, 열패의 아픔에는 남보다 몇배나 예민한 영혼- 그때 인철이 괴
로워했던 것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대강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같은 열패감의 해소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헤어나기
힘든 불행이나 곤란에 빠졌다고 생각될 때 흔히 공격적이 되고 또 그 공격 대상은 일쑤 자
신 이외의 개인이나 집단이 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불행을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설령 그렇더라도 그 공격은 기껏해야 개
인적인 복수로 인식될 뿐 사회적인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다.
거기 비해 집단을 공격하는 것은 결국 제도나 구조의 문제와 연결되어 모두가 행복한 완
전 사회가 아닌 한 많은 동조자를 얻게 되어 있다. 물론 거창한 대의나 그럴듯한 명분을 장
만한 뒤의 일이지만, 그럴 때 이 방식은 승리에는 영광과 화려함이 따르고 패배마저 비장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현실에서의 열패감이 종종 혁명가를 길러내는 온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중의 보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빠져 있는 불행의 책임을 망설임 없이
자시에게로 돌리고 그 해결의 방안도 자신에게서 구한다. 그들은 흔히 불행의 원인을 욕망
과 능력의 부조화로 진단하는데, 그때 그들이 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고르는 방식도 크
게 두 가지가 된다.
그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그들은 근면. 검소. 노력. 성실 따위 진부한 미덕
들을 신조처럼 껴안고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능력을 극대화하여 세상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 그 바탕에는 세계와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깔려 있는 이들로, 언
제나 자기 밖의 구조에서만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출세
지향주의자들로 낙인찍히기 일쑤이다.
다른 한 방식은 욕망의 축소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욕망의 축소가 불행의
축소에 광범위한 효과가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들이다. 안빈낙도, 안분지족 같은 옛 가르침들
은 그러한 앎의 고급한 진술이다. 역시 자기 밖의 집단과 구조에서만 문제의 해결을 찾는
이들에게는 쓸모 없는 방관자나 패배주의자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그들이야말로
삶의 달인들일 수도 있다.
개인의 불행을 해소하기 위한 그런 여러 가지 방식들 사이에는, 엄밀하게 말해 절대적인
우열이나 시비의 판가름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시대는 어두운 열정의 반항아, 혁명가들을 선
호하고 어떤 시대는 입지전의 자수성가형이나 삶의 달인들을 더 높이 세운다.
그런데 이제 막 홀로만의 걸음마를 시작한 인철의 정신이 선택한 방식은 불행하게도 입지
전 쪽이었다. 여기서 인철의 그 같은 선택에 '불행하게도'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 뒤 그
의 젊은 날과 중년의 일부를 보내야 할 시대의 성격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 밖의 집단과
구조의 문제로만 해석하려 들던 70년대와 80년대를, 어떻게든 세상의 시비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말과 글의 사람으로 보내야했던 인철이 그 같은 선택 때문에 받아야 했던 상처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날 인철은 틀림없이 견디기 힘든 열패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고 가슴을 싸안았지만 그
래도 철 이른 자포자기나 자기 비하와는 거리가 멀었다. 독한 소주를 병째 질금거리며 어둡
고 아늑한 상념 속을 헤맨 것도 잠시, 그는 이내 그것들을 털어내듯 세차게 머리를 저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늦엇지만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나는 저 아이들에게 뒤졌지만 그렇다고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저 아이들이 멀리 간 것은 아니다. 서울에 무엇이 기다리든 나는 다
시 돌아갈 것이고 거기서 다시 한번 힘을 다해 달릴 것이다. 자기 앞의 삶- 아직 경주는 끝
나지 않았고 나는 마지막에 웃겠다....'
그러자 인철의 비감은 방향을 달리해 그 모임에 나오지 않은 명혜에게로 향했다. 그 비감
은 이미 그 동안에 오른 술로 과장된 추억 때문에 조금씩 감미로움이 섞여들기 시작한 것이
었다. 그는 명혜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그 동안 그녀가 너무 높고 귀하게 자라버
린 탓이라고 문제 없이 단졍했다. 재걸이가 준 정보를 좋은 쪽으로만 해석해 이미 예술의
길로 접어든 그녀의 고귀한 영혼이 속세의 아이들로 저같이 상스럽고 떠들썩한 모임에 어울
리려 할 까닭이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어딘가 높고 빛나는 곳에서 내가 그리로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첫 술병이 비고 생각들이 한층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게 되면서 무슨 암귀같이
불길한 의심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는 혹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굳이 피한 것은 아닐까,
어느새 나는 그녀가 만나기 거북한 존재, 혹은 되도록이면 비껴가고 싶은 존재로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갑자기 추억과 망상의 감미로움은 사라지고 인철은 그 새로운 불안으로 다시 괴로워하며
머리를 싸안았다. 그러나 그 불안은 근거 없고 엉뚱한 만큼 오래가지도 않았다. 이제는 미각
과 취각이 아울러 마비되어 조금도 역하지 않은 소주를 몇 번 겁없이 꿀꺽이고 나니 그 불
안은 다시 새로운 종류의 감상으로 바뀌었다. 여름의 불어난 수량으로 하상을 넉넉히 덮고
쉼없이 흘러내리는 강물이 준 어떤 연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술 때문에 잠시 끊어진 상념을 메우려는 듯 무심코 강물에 눈길을 던진 인철이 아무런 앞
뒤 없이 연상해낸 것은 어린 날에 본 어떤 영화의 포스터였다. 마릴린 먼로라고 하는 화려
하게 생긴 여배우가 거친 물결 위에서 뗏목을 젓고 있는 그림이 먼저 머릿속 가득 되살아나
더니 이어 한자와 한글을 멋부려 섞어 쓴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제목이 이상하리 만치
선
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아직 고등학생이던 누나를 따라 관람한 그 영화는 감동적이기는 해도 주제가 그리 깊이
있는 것은 아닌 서부영화였다. '돌아오지 않는 강' 이 란 것도 그 영화에서는 어떤 강의 이
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제목을 입 속으로 가만히 되뇌자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 강'
이란 말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두 병 가까이 비운 소주의 취기와 그 동안 자
신도 모르게 의식 속에 축적된 문학적 소양이 어우러져 자아낸 감상이었다.
'강물은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사람의 삶은 시간의 강바닥을 따라 흐르는 강물, 한번 흘러
가버린 것들은 아무것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명혜, 너는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 존재, 이
제는 돌아오지 않는 강물이 되었는가. 세월의 강가에 이우는 바람 소리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선 이 길의 허망함이여...'
그때 거의 닫혀 있다시피 한 인철의 청각을 묘하게 자극하는 게 있었다. 멀게나마 끊임없
이 이어지던 미아크의 노랫소리가 뚝 그치고 이어 날카로운 이음과 함께 여럿에게 무언가를
알리는 말소리가 들려 온 것이었다. 인철이 몸을 일으켜 귀를 기울여보니 이런 소리가 토막
토막 바람에 실려왔다.
"고밥습니다, 동창 여러분... 오전 순서는 끝... 주최측에서 준비한 점심... 다시 오후 순서...
먼저 가시지 말고 다 함께..."
이미 짐작은 했지만 동창회는 오래 못 본 동창들의 공식적인 회합으로서보다는 하루의 진
진한 놀이판으로 짜여진 듯했다. 아침에 용기네 아이들이 늦는데도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던 것도 그런 그곳 동창회의 관행을 잘 아는 탓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다시 인철의 취
한 머릿속은 엉뚱한 추측으로 활활 타올랐다. 많은 아이들이 지루한 공식 식순을 피해 일부
러 늦게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명혜도,
추측은 이어 움직일 수 없는 단정이 되고 갑자기 다급해진 인철은 반홉 가량 남은 소주병
을 든 채 서둘러 행사장을 향했다. 두 발이 유난히 자주 돌부리에 걸리는 게 몸마저 적잖이
취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얼마 가지 않아 소나무 등걸 사이로 저만치 행사장이 보였다. 인
철은 알맞게 휘어져 절로 몸의 절반 이상이 가려지는 굵은 소나무 줄기에 기댄 체 가만히
그쪽을 살펴보았다.
취한 시선을 가다듬고 보니 원을 이루고 둘러앉았던 아이들은 주최측에서 내주는 도시락
을 받아 끼리끼리 흩어지는 중이었다. 한켠에는 그런 주최측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직도
미진한 흥을 풀고 있는 축도 있었다. 같은 도시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인 듯 남녀가
제법 자연스럽게 뭉쳐 트위스트를 추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어딘가 술기운이 느껴졌다. 그
러나 추측과는 달리 그들의 머릿수는 이쪽저쪽을 다 합쳐보아도 인철이 그곳을 떠날 때보다
조금도 는 것 같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길로 뒤쫓아보았지만 명혜는 없었다.
'그래서 너는 나의 명혜다...'
인철은 묘한 안도의 실망을 동시에 느끼면서 병에 남은 소주를 마저 비웠다. 그리고 꼭
훔쳐본다는 느낌도 없이 춤추는 아이들 쪽을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정말로 즐겁게 놀고 있
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남자애, 여자애 할 것 없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몸을 놀리는데, 표
정 또한 그렇게 진지하면서도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자, 림보."
갑자기 춤추던 아이들 중 하나가 바지의 가죽 허리띠를 풀며 소리쳤다. 다른 아이가 그
허리띠 끝을 들고 마주서고 나머지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리듬에 맞춰 팔짝팔짝 뛰며 허리띠
밑을 줄지어 지나갔다. 처음 가슴께에서 시작된 그 허리띠의 높이는 아이들이 한차례 지나
갈 때마다 조금씩 낮아졌다. 그래서 허리께에 이르면서 뒤로 넘어지는 아이들이 하나둘 생
겨났다. 그때마다 쏟아지는 웃음이 어찌 그리 재미나고 즐거울 수 있던지.
그들이 처음 인철의 눈길을 끈 것은 그 구김 없는 즐거움의 몸짓과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
다. 틀림없이 인철도 한동안은 그들의 흥겨움에 동화되어 제법 발끝까지 까닥거렸다. 그러나
의식 깊은 곳으로 밀려났던 열패감이 무엇 때문인가 되살아나면서 그들을 보는 인철의 눈길
은 뒤틀려갔다.
그로부터 일 년 뒤쯤 [토니오 크뢰거]를 읽게 된 인철은 성인이 된 주인공의 귀향 장면에
서 일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깊은 삼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이 주인공과
의 동일시에서 온 것이라면 그는 지나친 자기 미화의 감정에 빠져든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
다. 왜냐하면 그날 그가 겪은 것은 내면의 의식이든 그 외부적 표출이든, 또는 그 표출로 야
기된 결과든 [토니오 크뢰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제나 즐거운 것은 너희들이구나- 하는 단계는 틀림없이 인철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문
제는 그 다음이었다. 인철의 감정은 거기서 우수어린 관조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시기로, 근거 없는 경멸과 혐오로 악화되다가 나중에는 제법 격렬한 악의로 표출되었다. 춤
판의 허리띠 높이가 무릎께에 이르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밑을 지나가지 못한 채 뒤로 자
빠지게 되면서 웃음과 환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인철은 억누를 수 없는 악의를
그때껏 손에 들고 있던 빈 술병으로 드러냈다.
"가소롭고 한심한 것들."
품위를 지키면서도 최대한의 악의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고른 그 한마디를 차갑게 내뱉으
며 빈 소주병을 솔밭 한쪽으로 힘껏 내팽개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주병이 날아간 방향이 전혀 뜻밖의 형태로 인철의 동창회를 마무리했다. 인
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인철 못지 않은 열패감에 시달리다 무리에서 빠져나
온 또 다른 뒤틀린 영혼이 있었다. 지방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패싸움으로 퇴학을 당한 반이
다른 동기 동창으로, 유일한 자랑인 주먹 솜씨를 보일 구실을 찾아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
었는데 인철의 소주병이 알맞게 녀석의 발등을 스쳐준 것이었다.
"이누묵 새끼, 서울서 일류 고등학교 댕기이 눈에 비는 게 없나? 이기 누구한테 인냉(시비)
을 거노?"
인철이 기억하는 녀석의 말은 그뿐이었다. 자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로 응어리진 녀
석의주먹이 피스톤처럼 인철의 배와 가슴에 날아들고 두 병이 넘는 깡소주에 취할 대로 취
해 있던 인철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기도 전에 뒤로 나가떨어져 정
신을 잃고 말았다.
제 42 장 배신의 늪
"다음 분 들어오세요."
문을 빼죽이 열고 얼굴만 내민 간호원이 눈짓으로 영희를 가리키며 억양 없이 말했다. 영
희는 들고 있던 대중 잡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왠지 가슴이 떨려오기 시
작했다.
진찰실에서는 이제 막 진찰이 끝나 옷매무새를 고치는 젊은 여자를 남편인 듯한 남자가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부축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여자는 짐짓 짜증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남자는 환하고 만족한 얼굴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나오셔야 합니다."
그런 그들의 등뒤에 대고 중년의 의사 역시 밝은 얼굴로 다짐을 주었다. 짐작으로 첫 임
신을 한 젊은 한쌍인 듯했다. 영희는 느닷없는 부러움과 함께 전보다 몇 배나 무겁게 가슴
을 짓누르는 불안으로 혼란스러워 허둥거리며 그들 내외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불안은 그들
의 임신이 자신의 막연한 추측을 확정시켜주는 무슨 암시 같아서였다.
"거기 앉으시오."
의사가 웃음기 걷힌 얼굴로 영희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그렇게 느껴서인지 갑자기 엄해진
듯한 얼굴이었다. 공연히 주눅이 든 영희가 대답도 못 하고 앉자 이내 심문하는 투의 물음
이 나왔다.
"어떻게 오셨지요?"
"요즈음 왠지 속이 꽉 막힌 것 같고, 전에 없이 차멀미가 심해요... 구역질도 잦고..."
영희는 자신이 품고 있는 의심을 되도록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더듬더듬 말했다. 의
사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더 묻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영희를 살피더니 짧게 말했다.
"우선 그 윗도리 단추부터 좀 풀어요."
그러면서 청진기를 귀에 꽂는 게 바로 진찰로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브라자도 벗으세요."
그때껏 영희 뒤에 뻣뻣하게 서 있던 간호원이 그러면서 다가와 등뒤의 고리를 벗겼다.
영희에게로 다가앉은 의사는 아무런 거침없이 영희의 셔츠와 브래지어를 걷어올리고 청진
기를 갖다 댔다. 그러나 청진기 소리에 귀기울이기 전에 그의 눈길이 잠깐 영희의 젖꼭지에
머물렀다. 그 눈길이 욕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다는 게 오히려 영희에게 묘한 수치심을
일으켰다.
"저기 가서 누우시오."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청진기를 대보던 의사가 병실 한쪽의 철제 침대를 가리켰
다. 청진기도 그랬지만 침대의 비닐 바닥이 이상하리만치 섬뜩섬뜩했다. 의사가 얇은 고무장
갑을 끼는 사이 간호원이 다가와 영희의 속옷을 벗기고 스커트만 남겼다.
이번에는 조금 진지하고 시간 들인 진찰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건드려보고 하던 의사
가 수도 쪽으로 다가가 장갑을 벗으며 다시 짧게 말했다.
"이제 옷을 입고 자리에 와 앉으시오."
영희는 그런 의사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 왠지 굳고 엄해진 그 표정이 자신의
짐작보다 더 끔찍한 사태를 밝히려는 것 같아서였다. 그게 갑작스런 조바심을 일으켜 그때
껏 참아온 자신의 짐작을 스스로 털어놓게 만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임신 같아서..."
"임신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임신이오. 그것도 벌써 석 달을 넘긴 것 같소."
"네에?"
영희는 저도 몰래 놀라는 소리를 냈다. 석 달이 넘으면 수술은 어렵다는 것쯤은 영희도
알고 있었다. 병원을 찾아올 때는 수술 같은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왔었지만, 막상 수술조
차 어려운 상태라는 소리를 듣자 한층 암담한 기분이었다.
"왜 그래서는 안 될 일이라도 있소?"
의사가 묻기는 해도 실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영희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비로소 자
신이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음을 느낀 영희가 급히 얼버무렸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결혼은 했소?"
의사가 다시 뭘 그럴라고, 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그 무렵들어 결혼식 얘기만 꺼
내면 짜증을 내곤 하는 창현의 얼굴이 떠올라 문득 비참한 기분이 들었으나 영희는 애써 밝
게 대답했다.
"아직 식은 안 올렸지만, 가을에는 식 올리려구 해요."
"서둘러야겠구먼. 자칫하면 애가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결혼식 하는 거 봤다, 하겠소."
말은 틀림없이 농담이지만 의사는 조금도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바람에
영희는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것 같은 낙태 수술에 대한 상담을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
다.
병원 안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밖에 나오니 유난히 눈부신 초가을날이었다. 산부인과를
들러보기 위해 일찍 집을 나온 탓이기도 했지만 해가 다소간 짧아졌다 해도 9월의 오후 4시
경은 아직 한낮이랄 수도 있었다.
병원을 나와 기계적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하던 영희는 그대로 비어홀에 나가서는 안 되겠
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아기를 가졌다. 하지만 이건 내 아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아기다. 그도 알아야 돼.'
그렇게 생각을 맞춰나가는데도 몇 번인가 그즈음 들어 부쩍 차갑게 대해오는 창현의 얼굴
이 괴롭게 떠올랐다. 어쩌면 그와 상의도 없이 낙태를 먼저 생각하고, 임신을 끔찍한 일로만
걱정해온 것도 그런 그의 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우리들의 아기-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차츰 새로운 종류의 용기와 희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직 젊기는 하지만 내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그가 꼭 싫어하리
라는 단정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어쩌면 오히려 기뻐할지도 몰라, 아니, 그 때문에 요즈음
들어 시들해지고 있는 우리 사랑이 되살아날지도 몰라...
영희는 원래 그리 심각하고 비관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생각이 한번 밝은 쪽으
로 방향을 잡자 그녀 특유의 상상력이 멋대로 나래를 폈다. 그래서 미장원 문을 다시 열 때
는 뱃속에 커다란 근심 덩어리를 안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강력한 후원자
를 앞세우고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방을 나설 때만 해도 러닝 셔츠 바람으로 낮잠을 자고 있던 창현은 그새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친 뒤였다. 만지면 손이라도 베일 듯이 줄을 세운 새하얀 바지에 새하얀 구
두, 그리고 얼마 전에 새로 산 연두색 남방 셔츠에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방을 나오는 모
습이 영희에게 새삼 눈부셨다. 적어도 영희의 미적 감각으로는 그런 창현의 차림이 거리의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고상한 귀공자의 그것이었다.
"어? 유가 어떻게 되돌아왔어?"
창현이 괜스레 놀라는 척하면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영희는 터무니없이 그런 그에게 안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꼬듯 다가가며 콧소리까지 섞었다.
"유, 오늘 깜짝 놀랄 만한 소식 있다."
"뭔데?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창현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나 몸을 약간 비켜서는 게 흙투성이
강아지가 달려드는 걸 피하는 아이 같은 데가 있었다. 그것까지도 이상하리만큼 좋게만 본
영희가 그런 그의 팔목을 낚아채며 기분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알아맞춰봐, 어느 쪽인 것 같애?"
"흠, 나쁜 쪽은 아닌 것 같은데... 뭐야? 뭣 때문에 일도 안 나가고..."
기대 때문인지 전보다 한층 밝게 펴지는 그의 얼굴을 영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했
다.
"나, 오늘, 산부인과에, 갔었다."
영희는 어린아이처럼 낱말마다 딱딱 끊어 거기까지 말하고 그가 기뻐하는 걸 볼 양으로
그의 얼굴에다 눈길을 모았다. 그런데 영희가 그 순간 거기서 본 것은 그녀로서는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변화였다. 일순 창현의 얼굴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철저하게 혐오와
경멸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정말루 임신이란 말야?"
그의 물음도 욕설이나 저주보다 더 끔찍하게 들리는 그런 억양이었다. 그러나 영희의 감
정은 그처럼 빨리 전환되지가 않았다. 조금 어색해지기는 해도 아직은 불쾌함조차 제대로
싣지 못하고 있었다.
"석 달을 넘겼대, 이제 예닐곱 달 뒤면 유는 아빠가 되는 거야."
"뭐라구? 벌서 석 달을 넘겼다구? 그러면 떼지도 못하잖아?"
"떼내기는 왜 우리 아기를..."
"X같은 소리 마, 떼내버려, 아니 내가 알아보지, 접때 보니까 석 달 아니라 아홉 달이라도
떼내주는 데가 있대."
거기까지 동문서답에 가까운 대화가 이어지고서야 비로소 영희의 감정에도 전환이 왔다.
그러나 느껴진 충격이 너무 커서 이번에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격한 감정이었다.
"유, 정말 말 다했어?"
영희는 갑작스런 살의까지 느끼며 꽥 소리를 질러놓고, 이어 눈물까지 쏟으며 퍼댔다.
"우리들의 아기가 생겼다는데 겨우 그 소리밖에 못 해? 우리 사랑이 그뿐이었어? 그게 인
간 김창현의 전부였어?"
"우리들의 아기? 웃기지 마, 그게 누구 앤지 어떻게 알아?"
창현도 어찌 된 셈인지 전과 달리 강하게 맞받아왔다. 그때까지는 영희가 그 반 정도로만
거세게 나와도 죽어주던 그였다. 하지만 그도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을 정도가 된 영희가 자신의 블라우스 자락을 부욱 쥐어뜯으며 거품을 물자 효
과적인 후퇴를 시작했다.
"오호라, 그럼 박원장의 씨란 말이지, 그래서 넌 상관없다구..."
그러면서 할퀼 듯 덤비는 영희를 받아안고 갑자기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유, 우리 이성을 찾자구, 유가 하두 막무가내로 아이를 낳겠다니 해본 소리야. 우선 그 기
분부터 싹 없애버리려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거라구, 심했다면 용서해..."
그러다가 어느 정도 자신의 연기가 효과를 보았다 싶자 영희를 놓아두고 거울 앞의 미용
의자에 허물어지듯 앉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이제는 영희에게도 별효과가 없는 그 특유의
우는 소리를 보탰다.
"내가 못난 놈이지, 실은 자신이 없어 억지를 쓴 거야, 나 같은 놈의 아이를 낳아서 어찌하
겠다는 거야? 지금도 더부살이하는 놈이 유에게 아이까지 하나 더 짐을 지우란 말이야? 무
능한 놈은 괴로움도 모르는 줄 알아?"
그로부터 몇 달도 안 돼 영희는 그때 창현이 자신을 상대로 한판의 신파조 연기를 하고있
었음을 뚜렷이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녀 나름으로는 갖가지 사랑의 시련
과 고비를 넘기고 다시 만나 살게 된 지 이제 겨우 다섯 달 남짓, 아직은 신혼이라는 믿음
속에 있던 때라 그에게 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뒤이어 자포자기하듯 한 그의 양보도
오히려 그 자포자기하는 것 같은 태도가 믿음을 주어 영희의 격한 감정을 달래는 데 큰 몫
을 했다.
"유, 그렇게도 내 맘 몰라줘? 요즘 내가 괴로워하는 게 뭔지 알아? 이제 시작될 우리 신혼
생활이라구. 취직은 안 되지, 미장원 이거 이제는 완전히 껍질만 남았지, 유가 뭘 어찌해보
겠다고 나섰지만 사실 그게 사내 새끼로서 견딜 수 있는 일이야? 그것도 결혼까지 하구 비
어홀에 계속 나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날따라 말이 많아진 창현은 그렇게 영희를 달래다가 기어이 눈물까지 지어보였다. 눈에
뵈는 게 없이 화가 났던 영희도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화를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이상 그가 괴로워하는 게 조금씩 가슴 아파와 끝내는 포옹으로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유, 너무 괴로워하지 마. 우린 틀림없이 맨발의 청춘들이지만, 영화처럼 비참하게 끝나지
는 않을거야. 알겠어, 유의 맘 잘 알아. 실은 나도 조금은 막막해 있는데 유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화가 더 났을 뿐이야."
그렇지만 마음이 약해 우선은 그렇게 화해를 하고 말았어도 영희의 마음속은 왠지 썰렁한
바람이 불어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영희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창현에게도 역시 큰 충격이었던 듯했다.
창현은 다음날부터 영희를 일 나가지 못하게 하고 제가 벌이를 하겠다고 먼지 앉은 색소
폰 케이스를 들고 나갔다. 부모의 보조를 좀 받아야겠다며 수원으로 갔다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잘 아는 감독이 새로 찍는 영화에서 꽤 중요한 조연 자리를 주기로 했다고 들떠 말하
기도 했다. 영희는 물론 그 어느것도 그의 말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있었다.
악사. 악사 그러지만 그의 솜씨는 밤업소들이 반길 만한 수중이 아니었고 수원의 집오 영
희 자신이 나서서 얻어준 한옥 셋방과 아래로 줄줄이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이 전부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영화배우는 더했다. 비싼 돈 주고 3개월자리 연기 코스를 두 번이
나 수료한 데다 지난 초여름 한창 형편이 좋을 때 들인 덧돈만도 20만 원에 가깝지만, 영희
가 알기로 그가 화면에 얼굴을 내비친 것은 엑스트라나 다름없는 조연으로 몇 분씩 딱 두
번이었다.
"잰 말예요, 생긴 것도 성격도 청춘물 주인공으루 꼭 맞을 것 같은데 연기에만 들어가면
영 젬병이란 말예요, 충무로에선 아주 소문났다니까요."
언젠가 창현의 친구라는 건달이 영희에게 농담 삼아 그런 귀띔을 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미장원 판 돈은 거의 모두 그 밑에다 밀어넣었는데도 실적은 그 모
양이었다.
하지만 창현의 전에 없는 수선을 보고 있는 영희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 안에 들어앉아서 기분으로밖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뱃속의 아이를 어르며
지내는 하루가 달콤했고, 결과야 어떠하건 사는 일에 안간힘을 쏟는 창현이 대견했다. 그 동
안 비어홀에 나가며 미장원 영업 허가를 받으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곶감 빼먹듯 빼먹고 앉
아 있는 게 불안스럽긴 해도 어쩌면 행복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
다.
그렇게 되고 보니 방학 때 집으로 갔다 돌아온 인철이 며칠 전 이제부터는 혼자 어떻게
해보겠다며 짐을 싸서 나간 것도 더는 걱정되지 않았다. 제 말대로 우선은 이모네 집으로
가겠지, 그건 핑계고 실은 달리 갈곳을 정했다 해도 걱정할 건 없는 애야. 원체 영리하고 착
한 애니까 어디 가서도 별일 없겠지. 더구나 남자애니까 설령 무엇이 잘못됐다 해도 회복이
손쉽고- 그런데 그렇게 한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마지막 남은 오백원짜리를 들고 오늘은
결판을 낸다며 나간 창현이 낮술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 돌아왔다. 느글거리는 속 때문에 먹
는 둥 마는 둥한 점심상조차 치우기 전이었다.
"다 틀렸어. 김감독, 그 씨발놈이 또 사기쳤어, 오늘 캐스팅을 보니 난 또 엑스트라나 다름
없는 조연이야. 뭐, 그쪽 제작자의 결정이라나. 하지만 난 알아. 김감독 그 새끼 수작이야.
처음부터 뻔히 알면서 사기친 거라구,"
창현은 연신 술기운 섞인 한숨을 학학 내쉬며 그렇게 넋두리를 시작했다. 그 일에는 처음
부터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던 영희인지라 창현의 넋두리는 별로 충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
나 이어지는 넋두리는 달랐다.
"맨하탄도 그만뒀어, 무슨 미운 털이 막혔는지 가는 날부터 비딱하던 지배인 새끼가 우리
에게는 말도 없이 새 악단을 끌어들였다구, 정말 드러워서- 이제 손 벌릴 곳은 집밖에 없다
구."
하지만 이미 말했듯 그 집은 영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창현이 밤업소까지 그만두었다는 소리를 듣자 영희는 갑자기 길고 달콤한 꿈에
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미덥지는 않아도 그가 일 나가고 있다는 게 꽤나 든든하게 여겨졌는데 겨우 열흘도 안 돼
그것마저 끝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창현을 그냥 버려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걱정 마. 내가 나가 벌지 뭐."
영희는 늘 하듯 그의 반고수머리를 손가락으로 쓸며 그렇게 위로했다. 창현이 그런 영희
의 손길을 뿌리치며 느닷없이 소리쳤다.
"니가? 그 몸으루?"
"내 몸이 어때서?"
"여급이란 게 배가 북채만해서 술 따라주면 그 술손님 술맛 좋겠다."
그렇게 이죽거리는 창현의 눈에는 무슨 적의 같은 것이 이글거렸다. 모든 것이 너 때문에
망쳐졌다는 그런, 하지만 정작 영희가 오싹할 만큼 위기감을 느낀 것은 창현이 머리칼을 쥐
어뜯으며 울먹이는 그 다음 말이었다.
"모든 게 끝이야, 모두가 내 목을 옥죄는 것 같다구, 내가 혀 빼물고 목 매다는 걸 보고 싶
은 게야..."
창현은 그러면서 정말로 숨이 막혀온다는 듯 학학거리며 제 목을 잡았다. 그에 대한 애정
같아서는 함께 쓸어안고 울어야 할 대목이었으나 문득 가슴을 후벼오는 추억이 있어 영희
는 오히려 섬뜩한 기분으로 그를 보았다. 2년 전 군에 입대한다고 훌쩍 떠나가기 전날 밤의
창현이 꼭 그랬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가 나를 떠라려 하고 있다...'
영희는더 깊이 살펴볼 것도 없이 그런 단정을 내렸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절
망적일수록 더 치열해지는 사람의 애착이었다. 함께 살 때는 창현의 비정함뿐만 아니라 작
은 무관심에 대해서도 불같이 화를 내던 영희였지만 막상 그가 떠나려 한다는 단정이 들자
어이없이 약해졌다. 갑자기 창현이 세상에서 더없이 소중한 사람으로 과장되게 느껴지면서,
그를 잡아둘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결의가 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희는 그
의 변심을 따져보거나 원망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목소리까지 부드럽
게 해 그의 빈정거림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 뭣 땜에 세상이 창현씨만 몰아대겠어?"
"아니면, 어디 우리가 빠져나갈 길이 있니? 함께 약이라두 먹구 죽을까?"
"영화 같은 소리 하지 마. 찾아보면 길이 있을 거야."
"그럼 너희 집이 떼부자라서 달고 사위에게 한몫 갈라주겠다든?"
성난 김에 해보는 소리 같았지만 영희는 그게 아님을 직감으로 알아챘다.
인철이 말한 따의 넓이만으로 돌내골 개간지를 파악하고 있는 그는 은근히 영희네 집에
기대를 내비치곤 했다. 서울 부근의 땅값으로만 생각하고, 한 2천 평만 팔아주어도...하는 식
이었는데, 영희는 해로울 거 없는 오해다 싶어 그냥 보아 넘겨왔었다.
"정 안 되면 그것두 못 할 거 없지 뭐, 어쨌든 걱정 마. 너무 짜는 소리하면 오던 복두 달
아난대."
영희는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심경으로 그런 창현의 헛된 기대를 부추겼다. 알게 된
뒤로 한푼도 벌어오는 법 없이 자신에게만 의지해 살아온 그가 이제는 시골집의 살림까지
넘겨보는 게 밉살맞을 수도 있고, 인철의 학교도 못 시켜 자신에게 보낸 걸 번히 보았으면
서도 그런 기대를 하는 그의 머리가 한심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당장은 그런 걸 떠올릴 겨
를이 없었다.
과연 창현은 영희가 자신있게 나오자 금방 세상이 끝나는 것같이 비극적이던 표정과 몸짓
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영희에게 다짐을 받는 게, 만약 그게 안 되면
너와 나는 정말로 끝이야, 하는 것 같은 데가 있었다.
영희가 늦었짐나 그제라도 뱃속의 아이를 떼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그날 저녁이었
다. 몇 번이고 모든 걸 영희가 알아서 한다는 다짐을 받은 뒤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비극적인 대사와 연기를 다 펼쳐보이던 창현이 맥주를 다섯 병이나 비우고 곯아떨어진 뒤
영희는 비로소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걸로 우선 창현을 달래기는 해도 집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은 누구보다
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봤자 어머니가 있는 한 될 리도 없었지만, 설령
어머니가 나서서 도우려 해도 집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한 평에 몇십 원도 아닌 몇 원 하
던 그 버얼건 땅, 그 개간지를 통째로 팔아준다 해도 창현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었
다.
'결국은 나밖에 믿을 게 없구나. 그래, 내가 나서야지, 이 악물고 벌어 스스로 해결하는
수
밖에 없어...'
마침내 마음이 그렇게 정해지자 갑자기 뱃속의 아이가 짐스럽기 시작했다. 이미 도회의
진창에서 흐무러질 대로 흐무러진 그녀의 정신은 어느새 벌이라면 으레 자신의 몸을 상품화
하는 것만 떠올렸고, 또 그때에는 임신이 치명적인 악조건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어쩌면 창현도 처음부터 영희의 그런 결점을 노려 별로 대단찮은 그 배우 기질을 활용했
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 나 어젯밤 결정햇어."
다음날 아침 창현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콩나물국을 떠넣고 있는 상머리에서 영희가 그렇
게 말했을 때였다.
"뭘?"
창현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으나. 어딘가 짐작은 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영희가 편찮아진 속으로 결심을 밝혔다.
"우리 아기 말이야. 떼기루 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유 말대로 아기낳고 들어앉았다구 누가 밥 먹여준대? 그건 다 호강에 겨운 사람들이구-
난 벌어야 돼. 우선 미장원부터 살려놓고 봐야지."
"갑자기 무슨 소리지 모르겠네. 죄 없는 우리 아기를 왜..."
창현은 그렇게 우물거려놓고 이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법 정색으로 낙태를 반대했지
만 말투는 아무래도 건성이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그를 자기 곁에 더 잡아둘 수 있게 됐다는 확신이 서자 영희는 다시 그
런 창현의 성의 없는 만류가 마음에 거슬려왔다. 그러나 이미 결심한 이이라 그걸로는 창현
을 더 몰아세우지 않았다.
"나도 괴로워, 우리들의 첫아긴데 왜 떼내버리고 싶겠어? 그러니 유도 이젠 그 얘기 그만
해."
그렇게 창현을 달래기보다는 스스로를 달래는 기분으로 말을 맺었다. 묘하게도 창현이 그
어설픈 배우 기질로, 세상 구경도 못 하고 떠나야 하는 우리 애기, 우리 뒷날 옛말 하며 보
아라듯이 살자, 어쩌구 하며 눈물 몇 방울 질금거려준 게 영희에게는 적잖이 위로가 돼주었
다.
수술은 다음날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영희는 미장원을 세준 집 주인에게서 오천 원을 빌
려 수술비를 마련했다. 두 달 집세를 못 물어 4만 4천 월으로 줄어든 월세 보증금이 담보였
다.
창현이 그 수술에 영희 몰래 대비하고 있었던 것은 이번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거라고 우겨대긴 했지만, 그는 임신 4개월이 넘어도 낙태 수술을 해주는
산부인과를 길 한번 헷갈리는 법 없이 잘도 찾아냈다. 종로 근처에 어디 그런 골목길이 있
었나 싶을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막바지에 있는 음침한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아주 뒷날까지도 영희는 언제나 가슴 서늘함으로 그 산부인과를 떠올리곤 했다. 자신의
자궁에 처음으로 자리잡았던 생명을 떼어낸 곳, 일생에서 가장 통렬한 배신을 맛본 곳- 그
런 특별한 의미 부여에서도 그랬지만. 그 못지않게 그녀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언제
까지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산부인과의 음산한 분위기였다.
오래된 페인트칠이 벗겨져 바람에 푸슬푸슬 날리던 현관문, 분명히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도 발바닥이 젖어오는 듯한 물기가 느껴지는 어둑한 복도의 시멘트 바닥, 진료실과 수술실
을 겸해 쓰던, 대낮에도 벌겋게 백열등을 켜놓은 퀴퀴한 방, 방금 시술중인 젊은 여자의 몸
에 이어진 호스에서 수돗물처럼 콸콸 쏟아져 바께스에 담기던 핏물, 한눈에 실업자처럼 보
이는 앙상한 사내에게 업혀나가던 그녀의 축 늘어진 팔다리... 영희는 의자에 앉아 기다릴
때부터 자꾸 눈앞이 흐려왔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의사와 간호원도 분위기에 못지않게 음산한 얼굴들이었다. 의사는
시체의 살색이 그럴 거라 싶을 정도의 잿빛 도는 얼굴에 전혀 표정이 없는 중년이었고, 간
호원은 푸른 금 같은 주름을 가진 밀랍 같은 얼굴의 노처녀였는데, 둘 다 소리 안 나게 움
직이는 게 괴기스런 느낌까지 주었다.
그래도 가장 생기 있게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창현이었다. 앞서 수술 받은 여자가 골방
같은 입원실로 업혀나가기 바쁘게 창현은 그럴듯하게 꾸민 자기들의 사정 얘기를 쫓기듯 늘
어놓았다.
연말로 결혼 날짜를 받아두었는데 아무래도 남 보기에 너무 흉할 것 같다. 더구나 양가
모두 완고한 집안이라 이 일을 알면 결혼조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아직 아이를 갖기엔 둘
다 너무 이르고...
그러나 의사는 전혀 듣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의사는 자신의 무반응에 공연히 다급해
져 중언부언 간호원에게 메마른 목소리로 지시하는 것이었다.
"마취 준비해."
진찰조차 하지 않는 게 그에게 오는 환자는 아마도 일정한 것 같았다. 모체의 건강이고
태아의 상태고에 상관없이 반드시 낙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마취 주사를 놓은 뒤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입을 뗀 간호원의 목소리도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이었다.
"마취에 들어갑니다. 열까지 헤아리세요,"
귀에 대다시피 한 말인데도 이상하기 멀고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같았다. 영희는
마취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호원의 그런 목소리에 담긴 암시에 홀린 듯 겨우 여섯을
헤아리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영희가 깨어난 것은 좁고 어둑한 입원실에서였다. 말이 입원실이지 한 평 정도의 허름한
다다미방인데 안이 어둑한 것은 집 구조가 그럴 뿐 아니라 실제로 바깥이 저물어서인 듯했
다.
의식이 깨어나면서 시작된 아랫배를 후비는 듯한 통증에 영희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자 미닫이가 스르륵 열리며 어떤 중년여자가 얼굴을 디밀었다.
"색시, 이제 깨났수?"
목소리도 그렇지만 넓적하고 심덕 좋아 뵈는 얼굴로 그 병원에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사람
을 만났다는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입원 환자들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하는 아줌마인 모양이
었다. 그러나 영희는 대답 대신 창현부터 찾았다. 수술대에 누울 때까지도 걱정스런 얼굴로
의사 곁에 붙어섰다가 기어이 간호원에게 쫓겨나던 게 기억이 났다.
"그 양반 점심나절에 나가고 여태 안 돌아왔수."
"나가요?"
"수술이 뭐가 좀 꼬였나보우, 하혈이 멎지 않아 색시가 다시 수술실로 옮겨진 뒤에 돈을
더 구해온다며 나가는 것 같던데..."
영희에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영희는 갑작스런 불안감과
함께 전보다 몇 배나 더 심한 통증을 느꼈다. 창현따위는 이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신음과
함께 간호원을 찾앗다. 벌써 마취에서 깨어날 만큼 수술에서부터 긴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
다.
간호원이 다시 나타난 것은 영희가 모든 걸 잊고 오직 통증만을 상대로 진땀나는 싸움을
한참이나 한 뒤였다. 간호원은 전갈을 받은 대로 왔는지 모르지만, 영희에게는 영원처럼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게 영희의 거센 성격을 건드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무슨 심
한 욕설이라도 퍼부었는지 간호원이 짜증 섞인 핀잔을 주었다.
"이 아가씨가 왜 이래? 잘한 일도 없으면서..."
살갗을 찌르는 주삿바늘이 이상한 안도감을 주면서 영희는 겨우 그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다.
주사를 맞고 난 뒤 얼마 안 돼서부터 잦아지는 통증과 더불어 혼절하듯 잠이 들었던 영희
가 다시 깨어난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아랫배가 여전히 묵직하고 불쾌했지만 전날 저녁
무렵처럼 못 견딜 통증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통이나 다를 바 없는 허기가 영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 전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그런데 다시 전
날 밤의 아줌마가 무슨 구원의 천사처럼 나타났다. 잠을 안 자고 대기중이었던지, 영희가 깨
어난 기척을 한지 오래되지 않는데도 미역국까지 데워 들고 온 것이었다.
"색시, 속이 몹시 허할 거유, 우선 이것부터 먹고 기운 좀 차려요. 산모나 진배없으니까 몸
조리 잘해야 하우."
영희 같은 환자를 많이 다뤄본 나머지이기도 하지만 원래가 인정 많은 아줌마인 듯했다.
위는 쓰라릴 만큼 허기져 있었으나 입맛에는 그 미지근한 미역국이 잘 맞아주지 않았다. 살
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위기 의식이 갑작스런 비장감과 함께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영희는 아
마도 한 모금으로 그 미역국을 밀쳐놓고 말았을 것이다.
"저어... 그 사람 아직 소식 없어요?'
억지로 미역국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조금 정신이 돌아온 영희는 이번에도 창현부터 찾았
다. 살이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자기에 대한 애정이란 것도 의심쩍은 데가 많은 사람이었
지만, 그런 상황에 놓이고 보니 역시 기댈 곳은 그밖에 없었다.
"그 사람, 정말 약혼자유?"
아줌마가 뭣 때문인지 실쭉해진 눈으로 대답 대신 영희에게 물어왔다. 그게 창현에 대한
의심이란 걸 눈치챈 영희가 반발하듯 받았다.
"그럼요, 우린 12월 첫 주일 명동성당에서 식 올려요."
"거 참, 이상타. 어제 낮에 나가고 여직 전화 한 통 없수. 꼭 식 올릴 사람들이 벌서 넉 달
이 넘은 아이를 떼는 것 두 그렇구..."
"그건 말예요, 두 집안 모두 완고한 집안이 돼놔서..."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어제 창현이 의사에게 둘러대던 말을 되뇌었다. 아줌마가 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영희의 입을 막았다.
"아. 알겠수, 그런데 달리 어디 연락할 데는 없어요? 원장 선생님이 걱정하는 눈치던데..."
"걱정은 왜요?"
"아마 색시는 며칠 여기 입원하면서 경과를 보아야 될 모양이야. 치료비도 가외로 많이 더
들 것 같구... 그런데 보호자란 양반이 수속비 삼천 원만 달랑 내구 나간 뒤 가물치 콧구멍
이니..."
"돈 문제라면 걱정 안 해두 돼요, 창현씨도 그럴 사람 아니구..."
영희는 은근히 솟는 부아를 억누르고 창현의 말을 입 박에 내고 보니 누구보다도 그를 의
심스러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란 게 뚜렷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창현은 그날도 오후가 늦도록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시체 같은 얼굴의 의사와 괴기스런
느낌의 간호원이 두 번이나 영희의 방을 찾아와 경과를 살펴보고 가면서 달리 연락할 만한
곳을 물었다. 위독한 상태는 넘겼지만 마음 못 놓는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들의 태도가
영희를 한층 불안하고 외롭게 했다.
영희는 이미 그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 구실- 두 집안 모두가 완고해 그 일이 알려지면
안 된다는-로 다른 연락처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억지스레 맞섰다. 거기에는 아직 남은 창현
에 대한 믿음도 한 가닥 힘을 보태었다.
그러나 다시 날이 어둑해올 때까지도 버려진 듯 그 좁고 추레한 입원실에 홀로 누워 있게
되자 영희는 우선 사람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영희는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곳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헤아려보았다. 가까운 피붙이
로는 먼저 이모네가 떠올랐으나 집과 어머니에게 알려지는 게 싫어 이내 대상에서 지워버렸
다. 그 다음에 떠올린 건 모니카였다. 백치 같건 어떻건 그래도 가장 가깝게 지낸 애였고,
그럴 때는 어쨌든 도움될 만한 데도 있었다.
하지만 전해 여름 안광으로 가겠다는 뚱딴지 같은 소리로 호되게 몰린 뒤로는 소식이 없
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맡아 하던 술집을 닫고 어디론가 이사가고.
영희는 이어 조금이라도 자신과 가까이 지낸 사람이면 모두 기억에서 끄집어내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떠올리기조차 싫지만 박원장이 나오고 파라다이스를 그만둔 뒤에도 언제나 살
갑게 대해주던 지배인 김씨와 홀에 나가면서 마음 맞아 가깝게 지낸 적이 있는 몇몇 여자애
들도 떠올랐다. 그러나 누구도 그곳으로 부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
은 사람도 있지만, 부르려 해도 전화번호나 연락처를 몰라 부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떠올려보는 사이 영희의 외로움은 더욱 절실해졌다. 넓은 서울 거리에
서 그럴 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비참한 기분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와 반비례해 창현의 존재는 한층 크고 소중해지는 것이었다. 아니야, 그를 의심
해선 안 돼.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제오늘 나를 찾아올 수 없는, 무슨 급박하고 어려운 일
이.
그러던 영희가 불쑥 윤혜라를 떠올린 것은 창현에 대한 의심보다 오히려 걱정으로 마음졸
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무튼 불러 우선 미장원에라도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급해 있
던 영희에게 문득 백운장의 외우기 쉬운 전화번호가 떠오르고, 뒤이어 거기 아직 남아 있을
지 모르는 윤혜라가 떠오른 것이었다.
사실 윤혜라의 성격은 여러 가지로 영희에게 맞지 않는 데가 많았다. 모니카가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일로 티격태격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한번은 머리채를 휘어잡고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겨울 미장원을 하면서 다시 만난 뒤로 제법 가깝게 되었다.
"잘됐다. 이렇게라두 자리잡아 남은 인생 관리하며 사는 거지 뭐. 누가 차려준 거면 어떠
니?"
영희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박원장과의 일을 밝혔을 때, 혜라는 조금도 비꼬는 기색 없이
그렇게 축하해주었다. 우연히 그 미장원에 들러 영희가 주인인 줄 안 뒤로는 길을 돌더라도
반드시 영희네 미장원에 들러 찾아와 머리를 매만져주는 게 고마워 영희가 점심을 한턱 쓴
자리였다.
하지만 창현을 다시 만나고, 박원장에게 창현과의 일이 알려져 관계를 정리하고 미장원을
옮긴 뒤로는 몇 달째 만나보지 못했다. 영희가 그녀와 가까워졌다고는 해도 창현과 그 갑작
스런 이사의 내막을 떳떳하게 밝힐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혜라는 백운장에 아직 나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일찍 출근했다가 간병인 아줌마의 약간
허풍 섞인 전화에 금세 산부인과로 달려왔다.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그건 그렇고, 제 꼴이 이 모양이면서 그 사람이 걱정이라구. 나
는 안 그런 것 같은데... 자동차에 받혀 숨이 꼴깍 넘어갔음 모를까. 전화 한통 못 할 일이
어딨어?"
영희가 조금은 무안한 기분으로 창현의 얘기와 그 동안의 변화를 요약해 들려준 뒤 미장
원을 둘러봐달라고 부탁하자 혜라는 대뜸 창현부터 의심하고 나섰다. 영희가 아무리 변명을
해주어도 그녀는 확신에 차 단언하는 것이었다.
"너 내 말 믿어라. 나이야 비슷하지만 이 바닥에선 내가 선배다. 그런 둥기(기둥서방) 들
나 잘 알아. 이제 튄 거야. 이래저래 다 거덜난 너에게 뭐 바라고 눌러붙어 있겠니? 마음 굳
게 먹고 기다려, 내 알아보고 오겠지만. 좋은 소식은 기대하지 마."
그러면서 병원을 나간 혜라는 두 시간도 안 돼 돌아왔다.
"틀림없었어, 네 방에 가보니까 싹 챙겨 떠났더군, 그뿐인 줄 알아? 니네 미장원 월세 보증
금 오만 원이었다며? 그 중에서 삼만 원을 잘라갔어. 뭐, 네 수술이 잘못되어 죽게 되었다며
눈물까지 질금거리더래.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은 놀라 돈을 구해주고, 모두가 하마 어젯밤
일이야."
혜라가 전해주는 그 같은 소식을 듣는 순간 영희는 깊고 질퍽이는 늪속으로 아득히 가라
앉는 심경이었다.
제 43 장 도시로 가는 사람들
아직 대낮의 햇살은 따가웠지만 가까운 산과 들에는 조금씩 가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맞은편 등성이의 수수밭만 하더라도 푸르고 무성한 앞끝이나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이삭에
는 어딘가 누른 기운이 어린 듯했다.
명훈은 잠시 고무래질을 쉬고 자신이 한 일을 돌아보았다. 지난 장마에 녹아버린 밭벼를
거칠게 갈아엎은 땅은 이제 한 백 평 정도가 다시 밭모양을 이뤄가고 있었다.
"논이 없으이 여다 밭나락이라도 심어보자. 뭐니뭐니 해도 농사는 양식거리를 장만하는 게
먼저라. 또 들으이, 밭나락은 땅이 박해도 잘된다카고..."
어머니가 그렇게 우겨 구하기 힘든 밭벼씨를 서 말이나 구해 뿌렸는데 제대로 밭모양을
내보지도 못하고 장마를 만나 그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명훈은 그 땅이 골라지면 보리라
도 묻어볼 생각이었으나, 지난해를 떠올리자 절로 맥이 빠졌다. 이삭을 손으로 따서 풋바심
해 먹은 것까지 합쳐야 씨앗의 두 배를 겨우 넘긴 게 작년의 보리 수확이었다. 창년 사람들
이 손을 모아 거름과 비료를 넣어준다 해도 보리 농사에는 크게 기대할 게 없어 보였다.
명훈은 담배를 붙여 물며 남향 비탈에서 일하고 있는 창녕 사람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전에 거름더미를 뒤집은 그들은 점심 뒤부터 배추밭을 솎는 중이었다. 언제나 한데 뭉쳐
다니던 다섯 중에서 둘이나 없어져선지 일하는 게 왠지 외롭고 지쳐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 중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김씨와 하씨였다. 이미 그들이 떠난 지 한 달이 가까운
데도 아직 그게 느껴질 만큼 그들의 빈자리는 컸다.
처음 수확한 청과물을 싣고 대구로 나갔던 작은 신씨가 돌아와 그들 여름 농사의 여지없
는 실패를 확인시키고 난 지 며칠 뒤였다. 장마까지 겹쳐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는 명훈네
집으로 김씨와 하씨가 찾아갔다. 둘 다 대낮같이 취해 있었는데 명훈으로서는 처음 보는 그
들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이주사. 구구하게 말해봐도 글코예- 우리는 마 떠나볼랍니더."
성미 급한 하씨가 방바닥에 엉덩이를 내려놓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아니, 떠나긴 어디로 떠나요?"
전날까지 별다른 기색 없이 일에만 매달려 있던 그들이라 명훈이 놀라 그렇게 물었다.
"어디긴 어디라예. 처음부터 정부가 우리보러(보고) 글로 가라꼬 등을 떠민 곳이지예."
그런 하씨의 대답에 이어 김씨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생각해봤는데예- 이건 틀렸어예. 우리가 생각하던 그 땅이 아이라꼬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도 할 만큼 했어예. 그런데 이 농사 함 보이소. 달출이 아부지, 우리 여름 농사 실꼬
가 얼마 가(가지고) 왔습디꺼? 봄부터 꿈쩍거린 품값은 놔뚜고라도 들인 농비도 안 나온 게
이 땅이라예."
그때 다시 하씨가 소주 냄새 섞인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덧붙였다.
"하마 고향땅 공단이 돼가주고 터도 망도 없어질 때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아봐야 하는
긴데... 암만캐도 우리가 미련했어예."
"공단이라니요? 창녕에 무슨 공단이 있어요?"
아직 공단이라면 서울 구로동하고 포항, 울산밖에 없을 때라 명훈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모도 그래 부르이 그양 듣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창녕 사람들 아이라예. 울산 사람들이라
꼬예. 창녕은 우리도 객지랬다 아입니꺼."
"그럼 어떻게 다섯 집씩 함께 그곳으로?"
"니나 내나 튼 땅 없이 낑게(끼어) 사는데 그눔의 공단이 들어선 기라예. 쪼매쓱 받은 보상
금 가지고 가볼라 카이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예. 마침 달출이네 외가가 창녕이라 거기 살
만한 데가 있다 쿠길래 이웃에 살던 우리까지 다섯 집이 몰래(몰려) 가봤던 거뿌라예. 글치
만 사람 살기 어렵기는 거다도 마찬가지였어예. 땅금(땅값)도 수월찮고, 소작도 얻기 어렵고
- 막막해 있는데 거기서 지도원하던 김도훈씨가 여길 소개해 집 싸들고 일로 온 기라예, 글
치만 암만 캐도 여다도 영판 잘못 온거 같애예."
그런 하씨의 말에 김씨가 맞장구를 쳤다.
"암모. 글코말고, 잘못한 기라. 잘못햇지러, 애시당초 우리 갈 곳은 따로 있었다꼬예."
"그게 어딘데요?"
"도시고 공장이랬다꼬예. 함 생각해보이소. 농사지을 땅 파뒤배 공단 맹글 때는 그기 다 무
신 뜻이겠습니꺼? 안 그래도 조 은 땅이 댐이다 공단이다 들어서 더 좁아진 판에 다부 농
사짓는다꼬 촌구석으로 몰리가보이 뭐 합니꺼? 그래지 말고 도시로 가게나(가거나) 새로 들
어선 공단에서 품이나 팔아무라 쿠는 게 정부 시책인데 빙신이같이 그걸 몬 알아듣고오-
그것도 배운 도둑질이라꼬 꾸역꾸역 농사지을 땅이나 찾아댕깄으이..."
"참말이라. 이리저리 왔다리갔다리하미 쪼매쓱 받은 보상금만 깨묵었으이 인자 우야꼬? 가
로 늦가(아주 늦어서) 이 돈 가주고 도시로 가보이 누가 어서 오소, 카고 반기는 것도 아인
데, 곧 겨울은 다가오고, 대구 가서 단칸 셋방 얻을 돈이아 될랑가 몰라. 내 손가락으로 내
눈까리를 찔러도 오지게 찔렀제..."
명훈은 그제서야 그들이 산골에서 온 농부들 같지 않게 살이들이 탄탄해 보이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다급한 것은 그들이 떠나버린 뒤의 자시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의 시책이 꼭 그런 뜻만은 아닐 겁니다. 혁명 주체가 대부분 농촌 출신이고
- 그 동안 농촌에 쏟아부은 정성도 대단한 거 아니었습니까? 이를테면 이 개간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정부가 자기 땅 자기가 개간하는 데 보조금까지 준 적이 있습니
까? 영농자금, 비료 수급, 지금보다 더 나은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경지 정리, 농로 확장도
그렇고..."
"우리도 거기 속았다 아입니꺼? 공단 보상금 줄 때 차라리 이 돈 가주고 도시로 나가 거다
서 묵고 살 궁리나 하라꼬 바로 말해좄으면 이리저리 안 떠댕깄지예, 그런데 농사짓고 있으
믄 금방 무슨 수가 날 거맨키로 떠드는 바람에 곧 죽어도 농사. 농사, 카미 우짜튼동 산골팅
이로만 찾아든 거 아입니꺼? 글치만 이제는 알겠어예,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로예."
그렇게 받은 하씨에 이어 김씨가 하는 말은 명훈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데마저 있었다.
"맞심더, 이주사도 택도 없이 감격만 하지 말고 찬찬히 함 살펴보이소, 개간 보조금 몇 푼
나온 거 옛날에 없던 일이이 놀랍기사 하지마는, 내들으이 그것도 아이더만, 도시에 공장 지
으믄 정부에서 우짜는지 이주사도 잘 아시지 않십니꺼? 융자다. 지원이다- 어떤 놈아들은
맨손 가주고도 터억터억 잘도 공장 세운다 카데예. 그런데 내 땅 가주고 없던 농지 맹그는
데, 겨우 땅 파뒤집은 품값 약간 보조하고 다음은 내 몰라라아입니꺼? 이거는 농촌을 버린
거나 마찬가리자꼬예. 농사꾼한테는 바로 땅이 공장 아닌교? 그런데 이 모양이이- 하나 보
믄 열을 안다꼬, 딴것도 다 마찬가지라예, 아침마다 불어쌌는 새마을 노래 다 헛거라꼬예.
아직도 농촌 인구가 많으이 드러내놓고 괄세를 못 해 그렇지 속뜻은 뻔한 거 아입니꺼?"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살필 수 있었을까- 명훈이 놀란 나머지 무어라 답을 해
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하씨가 또 거들었다.
"나도 들은 게 있어예. 산업화다 공업화다. 공장만 덜썩 지어놓으믄 뭐합니꺼? 누구든지 그
공장에 나가 일할 사람이 있어야 안합니꺼? 그래도 그 일할 사람 빼낼 데가 농촌밖에 더 있
습니꺼? 그래자믄 도리 없이 농촌을 쥐짜는 수밖에 없다꼬예. 그래서 도시로 도시로 내모는
수밖에 없을 거라꼬예."
거기까지 듣자 명훈은 그들을 더 붙들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 그때껏 의심 없이
믿어왔던 정부의 중농 시책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게 그저 새롭기만 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깨어나게 하는 것인가- 말동이나 황의 말을 들을 때와는 달리 은근히
놀란 기분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씨와 김씨는 그로부터 이틀 뒤에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로 떠나버렸다.
명훈이 우울한 회상에 빠져 있는데 일하고 있던 창녕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
다. 거리가 멀어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듯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들 쪽으로 갔다.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말소리가 또
렷이 들렸다.
"고 참, 모질다. 이기 무신 별렐꼬?"
"글키 말입니더, 배추 벌레사 수타 봤지마는 이거는 또 첨이네예."
"거다뿌이가? 어데 더 있는지 살펴봐라."
그런 큰 신씨의 말에 작은 신씨와 부뜰이네가 여기저기 배추 이랑들을 살폈다. 순전히 그
들의 정성으로 이제 겨우 손바닥만하게 잎이 펴지고 있는 배추였다. 그대로 자라만 준다면
머지않아 묶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여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다시 가을의 김장철에 기대를 걸며 삼천 평이나 되는
땅에 배추를 갈았다. 그러나 명훈이 보기에는 이번에도 역시 그리 낙관적이 못 됐다. 대량의
환금 작물을 재배하기에는 돌내골이 너무 오지였고, 개간지는 너무 척백했다.
"무슨 일입니까?"
명훈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몸을 구부려 배추 이랑을 살피던 큰
신씨가 알아보게 시든 배추 한 포기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엉이, 이기 웬일인교?anjtl 배추 뿌리를 깔가무(먹어) 배춧잎만 고랑에 허당으로 얹히 있다
카이요."
명훈이 자세히 살펴보니 근처 밭이랑 군데군데 그렇게 시든 배추가 보였다. 몇 이랑 저족
으로 가 그곳을 살펴보고 있던 신씨가 탄식 섞어 소리쳤다.
"예헤이, 올해 김장 농사 조졌다. 여다도 전신만신이 깔가났어예."
그러면서 큰 신씨처럼 배추 한 포기를 들고 왔다. 역시 부리를 도리듯 갉아먹어 잎이 시
들어가고 있는 포기였다.
"이기 뭐시꼬? 뭐시 일케 모진 기 있시꼬?"
말수가 적고 신중한 부뜰이 아버지가 배추 부리 족을 찬찬히 살피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굼벵이가 그래는 수도 있지마는 이러쿠롬 모질지는 않고- 글타코 뒤뒤기(두더지)가 이랠
택도 없고... 우짜튼 여 함 파보자. 뭐가 있어도 안있겠나?"
큰 신씨가 그 말과 함께 시든 배추를 들어내고 호미로 그곳 밭이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을 파도 혐의를 둘 만한 벌레는 나오지 않았다.
"에이구, 햄임도. 마, 치우이소, 그게 아나, 날 잡아라. 카고 기대리겠심더. 그라지 말로 얼
매나 조지놨는지 그기나 함 살피보입시더, 인자 모종하기도 늦었지마는..."
그런 작은 신씨의 말에 따라 네 사람을 각기 배추밭에 흩어져 피해 면적을 조사해보았다.
명훈은 가장 가까운 밭 아래족을 살폈는데 대여섯발짝에 한 번쯤은 많건 적건 피해를 입은
곳이 나왔다. 다른 사람도 비슷한 듯 연신 탄식과 혀 차느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가장
위쪽으로 올라간 작은 신씨가 지른 또 다른 종류의 놀란 외침에 모두 그곳을 올려보았다.
"에헤이- 이건 또 뭐꼬? 뭐시 이랬노?"
"뭐가?"
"뭐신데?"
아래에 있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 말을 받으며 그리로 달려갔다. 명훈도 살피던 이
랑을 버려두고 그리로 가보았다. 작은 신씨 곁에 이르기도 전에 새로운 피해의 전모가 한눈
에 들어왔다. 산 가까운 곳으로 몇 이랑이 절반은 비어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짐승이 뜯
어먹은 자리였다.
"동네 소나 얌생이(염소)가 이랬나?"
"아이다. 소나 얌생이는 안 이랜다. 물뿌인(물뿐인) 배추를 뭔다꼬 이래 마이 뜯어묵겠노?
차라리 콩잎이나 수수 몽타리(이삭)를 뜯어묵제."
신씨 종반간이 그렇게 주고받는데 부뜰이 아버지가 그 위 고추밭 족을 가리키며 소리쳤
다.
"저건 뭐십니꺼? 조다 위쪽에 꼬치밭..."
나머지 세 사람이 보니 그 근처 고추 줄기가 무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살피자 몇
갈래이기는 하지만 뭔가가 산에서 내려왔다 산으로 올라간 흔적이 보였다.
"그라믄 이거는 산짐승이 그랬다는 긴데- 그 참 요상하다.... 안죽 산골티(골짜기)마다 풀이
퍼런데 산짐승이 내려와 김장밭 듣어묵었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겠네. 이기 도대체 무신 일
고? 이주사 여다서는 다른 밭에서도 이런 일이 있는교?"
큰 신씨가 명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명훈도 그런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초겨울이나 초봄에 노루가 보리밭을 뜯어먹었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것도 농사를 망칠 정도
는 아니었다.
"아뇨, 그런 소리는 못 드었습니다만..."
명훈은 그 모든 일이 개간지가 너무 산 가까이 있는 탓 같아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 신씨가 아무 말 없이 짓밟힌 고추밭과 시든 배추밭 이랑을 번갈아
보더니 맥없이 주저앉았다. 작은 신씨와 부뜰이 아버지도 누가 시킨 듯 큰 신씨 곁에 나란
히 앉았다. 큰 신씨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자 그들도 말없이 따라했다.
"참말로 죽으라 죽으라 카네. 우리가 어디 큰 욕심냈나? 고추근이나 따고 배추나 몇 차 해
서 겨울 약식이나 할라 캤디... 대구, 부산 내다 걸(걸어놓을) 꺼도 없고 안광쯤에나 내다 팔
아 곡슥(곡식)하고나 바꽜으믄 했디."
큰 신씨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렇게 말하자 작은 신씨가 한술 섞어 받았다.
"하모요. 기집 자슥 배나 안 곯리며 몇 해 나다 보면 뭐가 돼도 될 줄 알았디, 이거는
통..."
그런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명훈츤 무슨 무서운 선고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
행히도 그 자리에서의 선고는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손가락을 후후 불 듯 하며 필터
도 없는 담배를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빨아들인 큰 신씨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이 우예노? 자. 인자 고마 일나 일하자. 달출이(작은 신씨) 니는 장터 올라가 농약 함
알아봐라. 여자 벌레는 여다 사람들이 잘 알테이까는 농약도 안있겟나? 부뜰이하고 내는 바
소구리 지고 와 얼어진(떨어진) 꼬치하고 자빠진 배추나 조(주워)담을란다. 꼬치는 갈래(골
라) 말룰(말릴) 거는 말루고 풋꼬치로 실 거는 풋꼬치로 씨믄 된다. 배추는 다삶아묵지 못하
믄 시래기라도 묶는 기고..."
하지만 그 오후 내내 두 사람이 일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힘없고 지쳐 보였다. 명훈
도 맥이 빠져 아직 해가 지기도 전에 밭 고르는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명훈이 집으로 내려가니 저녁밥을 짓던 어머니가 물 묻은 손으로 두통의 편지를 내밀었
다.
"방금 쌀 안치는데 우체부가 들고 와 몬 뜯어봤다. 철이하고 누구로, 그 색시한테 온 것 같
드라."
그 말대로 편지는 경진과 인철에게서 온 것이었다. 둘 다 가슴 깊이 사랑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러면서도 해주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못 해주고 있는 사람들이라. 겉봉을 뜯
는 데 이미 가슴이 쿡, 하고 쑤셔왔다.
그리운 분께
그러나 또한 야속한 분께
이 여름 덜한가 싶었는데 다시 그 나쁜 버릇이 도지는 모양이군요. 무엇이든 멋대로 결정
하시고 침묵하시는 버릇. 저는 벌써 한 달째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거
예요?
하지만 이제는 약올라하고 악을 쓰기에도 지쳤어요. 되살아난 상록수의 꿈이 이 가을 어
떤 결실을 맺을지 궁금해하는 일에두요.
저는 직장에 잘 나가구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세월
이 지나도 전문성은커녕 경력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일터, 그게 60년대 중반 한국 여성의 일
터예요, 제가 일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달리 생각해봐야겠어요, 시작할 때는 한없이 긴 이야
기가 있는 것 같았는데 네 번이나 답장을 받지 못해선지 그만 맥이 빠지네요, 제가 애타게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리고 이만 줄일게요. 부디 답장 좀 주세요. 그곳에 무슨 일
이 있는지 알게 해주세요, 안녕, 그래도 그리운 분.
1965년 9월 25일
경진 올림
경진의 편지는 그렇게 짧게 끝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례적인 짧음이 명훈에게는 오히려
더 준엄한 추궁 같았다. 작은 신씨가 대구에 갔다 온 이후 다시 실패의 예감이 집어지면서
명훈은 그녀에게 답장을 내지 못하고있었다. 겉봉을 뜯을 때 쿡 쑤셔왔던 명훈의 가슴에 둔
하면서도 무거운 아픔 같은 것이 번졌다. 명훈은 그런 가슴을 가만히 쓸며 이번에는 인철의
편지를 뜯었다.
형님께
글월 늦었습니다. 그간 어머님 모시고 집안 모두 별고 없으신지요,
저는 어머님 말씀대로 누나 곁을 떠나 이모님댁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
든게 뜻 같지 못합니다. 우선 이모님댁 형편이 생각보다 말이 아닙니다. 남의 살이라 구구하
게 다 말씀 올리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길게 의지할 수 있는 집 같지는 않습니다. 학교도 지
금 형편으로는 막연합니다. 다니고 싶어도 공전에 계속 다린 수 없게 되었고 인문계 야간부
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을 해결할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지금은 이모부가 알아봐주시기로 한 취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틀림없을 것
같은 제 직감은 그게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모부님은 이미 공직에서
밀려나도 한참 멀리 밀려나신 분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심경으로 기다리고는 있지만 다른
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슴입니다만 어렵더라도 학원 수강비 좀 마련해주시겠습니까. 그곳의 사
정 뻔히 알면서도 이런 말씀 올리기 송구스러우나 이모님댁 골방에서 아무하는 일 없이 나
날을 보내기가 너무 힘들어 드리는 부탁입니다. 힘 닿는 대로 얼마만 이라도 만들어주시면
우선 아무 소속 없는 이 불안과 외로움에서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잖아도 힘든 형님께 밝은 소식 전해드리지 못하고 걱정만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머
님께 다로 글 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건강을 빕니다.
1965년 9월 23일
인철 올림
인철의 편지 역시 가슴아프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지난 여름 방학에 와서 철이 영희의
일을 털어놓을 때 명훈은 무엇보다도 그 아이가 받았을 내면의 상처가 걱정스러웠다. 그러
나 철은 거기에 대해 별내색 없었고 또 이번에는 이모 집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다시 서울로
보낸 것인데 형편이 어렵게 된 모양이었다.
"보자, 뭐라 캐놨노?"
두 통의 편지를 다 읽은 명훈이 암담한 기분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다가와 인철의 편지를 집어들었다. 보여주지 않는 편지를 억지로 빼
앗아 읽을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명훈은 어머니가 인철의 편지를 읽 사이 경진의 편지를
슬그머니 윗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철이가 영희 그년한테서 나왔다 카이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철이가 거다 이쓴 게 참말로
끼꿈(께름)하다. 끼꿈하고 끼꿈하디... 그런데 너그 이모부는 어예 된 기고? 김종필이하고 동
기고 또 누구하고도 동기라캐싸며 장청(허풍)을 떨어쌌디, 인제 참말로 끝나뿐 기가? 그게
하마 언젠데 안죽도 그 모양이라노?"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밀려난 거 같아요. 하기는 원래 정치판에 어울릴 분은 아니었죠."
"글치만 웃대가리에 앉아 돈 몇 푼 안 받아쓴 사람이 어딨노? 그보다 더한 죄 짓고도 잘
만 해먹더라마는."
"이제 보니까 그 수회죄 자체가 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모부 같은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 어거지로 덮어씌운. 그리고 아직까지 아무런 배려가 없는 걸 보면 다시 요직으로 돌아
가기는 틀린 거 같아요, 반혁명죄에 걸려 밀려자니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될지도 모르겟
습니다."
"참 튼일이따. 거다라도 기대 철이 고등학교나 마칠 수 있었으믄 했디... 인제 어예믄 좋을
로?"
어머니가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미련이 생기는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영희 그년 말이따. 그년은 어예 될 꺼 같노?"
"뻔하죠 뭐. 둘이서 다 털어먹고 나면 다시 술집에 나가든가 하겠죠. 철이가 영희 일을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걸 보아도 짐작이 가요, 그 기집앤 그만 잊어버리세요."
인철로부터 그 위장된 성공의 실상을 들은 뒤부터 영희에 대한 명훈의 정은 전만 같지 못
했다. 얼절 수 없는 핏줄로서의 연민과 동정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예전같이 살가운 정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영희가 가고 있는 길은, 그런 식의 밑바닥 삶을 잘 아는 명훈에게도
가장 최악으로 보이는 전락의 방식이었다.
'그럼 인제 철이는 어예노? 먹고 줄을라 캐도 없는 게 돈이고-당장 몇 푼 구해 보낸다 캐
도 대학 가도록 뒤를 대기는 클렸고오... 글타카믄 차라리 가아를 다부(도로) 일로(이리로)
불러들이는 게 안옳을라? 죽이든 밥이든 같이 먹으면서 여다서 거 뭐로, 검정고시라 캤나,
그거 해보는 게..."
어머니가 다시 인철이 걱정으로 돌아가 명훈을 쳐다보았다. 말은 그래도 막막한 눈길이었
다. 막막하기는 명훈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안 되니까 걔도 못 내려오고 거기서 버티는 거 아녜요? 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
시는 달라요. 학원이라도 나가 보충해야지 시골에서 혼자 할 순 없어요."
명훈은 그렇게 말해놓고 식탁에서 일어나 샘가로갓다. 세수를 마친 명훈이 안방으로들어
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밥을 듬들이던 어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애가 밥 다됐는데 어디 갈라 카노? 어딜 갈라꼬?"
"아무래도 장터 좀 올라가봐야겠어요. 강약국이나 구면장한테 얼마라도 빌려야 철이한테
보내줄 수 있지 않겠어요?"
"아이구, 고 양잿물 갈바리(자잘한 구두쇠)들이 물 보고 니한테 척척 돈을 빌리주겠노? 글
코 또 가서 말해본다 캐도 저녁은 먹고 가라. 백지로 빈 속에 생소주 퍼붓지 말고, 내 질기
(서둘러, 먼저) 저녁상 채리주꾸마."
어머니가 그렇게 잘라 말하고 뜸도 다 들지 않은 밥솥 뚜껑을 여는 바람에 명훈은 하는
수 없이 식탁 모퉁이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어머니의 성화로 입맛도 없는 저녁을 몇 술 뜬 명훈은 점포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힐 무렵
에야 장터에 이르렀다. 버스 정류장 맞은 편 강약국도 이미 불이 밝혀져 있었다. 말갛게 닦
은 유리와 갓으로 이웃의 어떤 점포보다 밝아 보이는 램프였다.
명훈이 쭈뼛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니 주인은 약국 진열대 위에 신문을 펼쳐놓고 거기 머리
를 박고있었다. 막차로 배달된 그날 조간인 듯했다. 명훈은 약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를
부를 호칭부터 골랐다.
약국 주인인 강상천은 장터에 하나뿐인 정육점에다 따로 색시집을 겸하는 화산이네 사위
였다. 살이는 넉넉해도 대접받지 못하는 집안의 사위였으나 아쉬운 사람들은 그를 강주사나
강약사로 높여 불렀다. 면허를 빌려 연 약국의 수입과 뒤로 놓은 사채가 그를 막볼 수 없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의 전력에 대해서는 구구한 말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육군 의무대 하사관 출신이라
고 하고, 어떤 사람은 원래 도시에서 장사를 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드물게는 정식으로 약대
를 나온 약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바람나 집 나온 화산이네 딸을 서울서 만나 처가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했다. 그러나 돌내골에 들어올 때부터 재력
은 상당해서 약국을 차리고도 꽤 많은 돈을 사채로 굴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뿐인 데다 수요자만 있으면 모르핀 주사를 놔주시고 마다하지 않는 약국이 주된 수입
원이 되었는지, 몇 년 전 고리채 정리 때 신고된 액수만도 2백만 원이 넘었다는 사채에 힘
입은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재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장터 거리뿐만 아니라 돌내
골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채를 주는 데는 원칙이 있었다. 아무리 이
자를 높이 준다 해도 먹물 든 사람들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그 다음에 담보를 따졌
다. 아마도 회수의 어려움을 염두에 둔 원칙 같았다.
명훈이 지금 그를 어떻게 부를까 고심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그의 원칙 때문이었다.
다급한 필요에 떼밀려오기는 해도 명훈은 그의 두 가지 원칙 중 어느 것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따라서 오직 그의 호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호칭부터 조심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평소대로라면 그 호칭은 강상천씨 혹은 강형으로 충분했다. 기껏해야 예닐곱 위인 데다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에게 그 이상의 경칭은 쓸데없이 자신의 구차스러움을 드러낼 염려마
저 있었다. 하지만 명훈은 결국 강약사로 호칭을 결정하고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강주사보
다는 강약사로 불리는걸 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강약사님."
명훈이 비굴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공손하게 들리는 어조를 골라 그렇게 말을 걸었다. 약
간 근시 기운이 있는 강약사가 신문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반기는 체했다.
"아이구, 이형이 웬일이십니까?"
객지 생활이나 진배없는 그에게는 따르는 동네 건달들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명훈은 함부
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명훈의 주먹 이력에 대해서도 들은 게 있고 명훈네
문중에게 텃세도 물 만큼 물어본 그라 공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신문에 뭐 재미있는 거라도 났습니까? 하도 열심히 들여다보시기에."
신문을 읽는 걸로 이웃의 무식한 장사꾼들에게 은근히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는 데가 있
음을 알아본 명훈이 그렇게 얘기를 풀어나갔다.
"별거 없어요, 맨날 그 소리가 그 소리지, 그냥 촌에 처박혀 살자니 바깥 소식이 궁금해
들여다보는 것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딘가 명훈의 물음을 반가워하는 데가 있었다. 한번 더 물어주면 신문
일면에서 사면까지 모조리 들려줄 수도 있다는 태도였다. 하기는 명훈도 궁금한 게 있었다.
하씨와 김씨가 떠난 뒤로 갑자기 관심가는 정부의 경제 정책이었다. 거기다가 바로 돈 얘기
를 꺼내기도 멋적어 명훈은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요새 우리나라 경제 정책 어떻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까? 듣기로는 공업화다. 산업화다. 해
서 그쪽으로 부쩍 힘들을 쓰는 모양인데 무슨 성과나 변화가 있어 뵙니까?"
"글쎄요... 그런 얘기는... 통 없는... 것 같은데."
강약사가 좀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럼 주로 무슨 얘깁니까?"
명훈이 다시 그렇게 물어주자 강약사는 비로소 기회를 얻었다는 듯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
했다.
"국내고 국제고 온통 정치 얘기뿐이라- 인도하고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때문에 박터지게 싸
우다가 휴전한 거는 이형도 아실 게고, 아인슈타인 박사 죽었고, 수카르노가 외국인 산업을
모두 국유화한 거... 뭐 요즘 국제 뉴스로 중요한 거는 주로 거기 얽힌 것들이죠, 국내 정치
도 뻔한 거 아닙니까? 한일 회담 국회 비준 두고 여.야간에 힘겨루기하는 거나 흐지부지 되
는 테러 수사... 아참, 그리고 난데 없이 정치 교수들을 대학에서 추방한다고 야단들이고..."
"국민들이 먹는지 굶는지는 우리 알 바 없다. 그거로군."
"그러고 보니 그런 셈이네. 요즘 본 거라고는 연탄값이 9원으로 올랐고, 공중전화 기본 요
금이 3원으로 올랐다는 식으로 물가 오르는 얘기 밖에 없었으니. 또 뭐가 있더라, 그렇지,
월 3부 이자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거하고 딸라 보유고가 1억밖에 안 돼 어렵다는 얘
기에다 우리 국민 소득이 95불 60선 밖에 안 된다던가..."
"포항, 울산에 공단 만든 건 어떻게 됐답디까?"
'그것도 요새는 조용하데, 포항은 무슨 제철 공장인가 뭔가 맨든다는 말만 있고, 울산은 정
유공장이 들어설 모양이던데..."
"그럼, 공장도 짓지 않고 사람만 내쫓아 어저려구들 그러지, 가뜩이나 좁은 농지 몇십만 평
씩이나 여기저기 파엎었으니 거기 살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가요? 거기다가 그거 만든다고 드
는 돈은 또 얼마구. 차라리 그 돈 농촌에나 쏟아부어 아직도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이나 잘
살게 해주지."
명훈은 내친김에 김씨와 하씨에게 들은 말을 약간 비틀어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기에는 아무래도상대한테 무리였다.
"요새 농촌 인구가 줄어든다는 기사는 근간에 어디서 본 거 같지만 그걸 국토 개발이나 공
업화하고 연관지어 하는 소리는 통 없던데. 뭐 아직 대규모로 해놓은 것도 없고... 더구나 박
정권 들어 농촌에는 한다구 하는 거 아뇨?"
명훈의 평소 생각이나 다를 바 없는 대답으로 그렇게 얼버무렸다. 명훈도 처음부터 그에
게 무슨 경제 시사 해설을 기대했던 건 아니어서 그쯤에서 묻기를 그쳤다. 하지만 아직도
찾아온 용건을 밝히기에는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이형, 초저녁같이 무슨 일로 여기 왔어요? 누가 아픕니까?" 명훈이 공연히 쭈뼛
거리는 걸 보고 강약사가 아직도 웃음기를 잃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
명훈이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며 그렇게 부인했다. 그러자 강약사에게도 짐작가는 일이 있
는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대신 억지로 꾸민 듯 예절바른 말투가 되어 물었다.
"그럼 이형 같은 분이 저 같은 장돌뱅이에게 무슨 일로?"
"실은.. 돈을 좀 빌릴까 해서요. 놀리시는 돈이 좀 있으시다기에."
명훈이 되도록 처량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용건을 말했다. 사람의 낯색이 어떻게
저리 갑자기 바뀔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낯색이 달라진 강약사가, 그러나 공손함을 잃지
않은 어조로 받았다.
"아. 그거라면 뭘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는 푼돈 조금씩 사채를 놓은 적이 있
습니다만 고리채 정리 때 다 날리고 요즘은 손뗐습니다."
"며칠 전에도 들은 말이 있는데... 그러지 마시고 급한 사정 한번 봐주십시오. 많은 돈도 아
니고."
명훈이 어쩔 수 없이 매달리는 어조가 되어 그렇게 말했다. 믿는 게 있다며 다만 빌리려
는 액수가 그리 많은 게 아니라는 정도였는데, 강약사는 아예 액수에는 관심도 없었다.
'저는 손을 털었다니까요. 떼돈 버는 일도 아닌데 저번 고리채 정리 때 지바닥(본바닥) 사
람들하고 원수만 지고."
"그러지 마시고 한 5천 원만 변통해주십시오. 추수 끝나면 꼭 갚겠습니다."
명훈이 치미는 속을 억누르며 한 번 더 사정해보았다. 그런 내심이 어떻게 표정에 드러났
던지, 아니면 뒤탈을 막기 위함인지 강약사라 무턱댄 잡아떼기에서 한 발 물러났다.
"몰라요- 안사람은 요즘도 몇 푼씩 알음 다라 주고받고 하는 모양이던데. 하지금 지금은
아직 추수철이 아니라 돈이 모두 나가 있을걸요."
그때 부른 듯 화산이네 달이 본채로 통하는쪽문을 열고 들어왔다. 돌내골이 떠들썩할 정
도의 처녀 때 경력만큼이나 요란스런 화장이었다.
"저녁 먹띠미로(먹자마자) 나가디 여다서 뭐 하노? 병구는 어데 가고요?"
그녀는 대뜸 남편부터 타박을 주고 나서 명훈을 돌아보며 알은체를 했다.
"왔니껴?"
나이가 서너 살 위고 한 동네나 다름없어도 자랄 때는 명훈이 잘 알지 못하던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 쪽에서는 명훈을 잘 알고 있었다. 강약사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
다.
"당신 마침 잘 왔어, 당신 놀리는 돈 좀 있지? 그거 지금 들어와 있는 거 없어?'
강약사가 별다른 누치를 보낸 것 같지 않은데도 그녀는 잘 알아들었다.
"하이고, 그 꼴난 돈도 돈이라꼬. 다 뚜다리 뭉치봐야 십만 원도 안 되는 거,. 그런데 와요?
아아부지가 그걸 왜 묻니꺼?"
"글세, 거둬논 게 있냔 말야?"
"그기 지금 있을 택이 있니껴? 골골이 사는 기집아들 죽는 소리 하미 빌 리가 이자도 가을
(추수)하고 보자 카는 판인데, 요새는 참말로 먹고 죽을라 캐도 없는 게 돈이라. 그런데 와
요? 뭐 할라꼬?"
"여기 이형이 돈이 좀 필요한가 봐. 당신 소문 듣고 온 모양인데 어떻게 좀 해드릴 수 있
어?'
그러자 그녀의 눈길이 실쭉해졌다.
"당신도 참 답답따. 그러이 내가 똑 도회지 일수쟁이 같으네, 잘난 서방 만나 몇 푼씩 훔친
돈 호호 불어가미 산골티기 안사람들한테 꿔준 거 뿌인데, 그걸 가주고... 그래고 요새가 어
떤 때이꺼? 아직 햇꼬치도 안 나오고 감장(연초 수남)도 멀었는데 무슨 돈이 들어와 내 손
에 쥐고 있는 게 있을리껴?"
역시 명훈이 내거는 조건도 액수도 들어보지 않고 잡아떼기부터 먼저 했다. 어떻게 보면
손발이 잘 맞는 부부였다. 그녀까지 그렇게 나오자 명훈도 더 매달려볼 기분이 아니었다. 그
래도 앞날을 알 수 없어 화까지는 못 내고 어색한 인사와 함께 약국을 나왔다.
명훈이 뒤이어 찾아간 구면장댁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자유당 때 막걸리로 우겨 민선
면장을 잠깐 지낸 적이 있는 그 중늙은이는 강약사처럼 별나게 먹물 든 사람을 피하지는 않
았지만 담보에는 한층 더 철저했다. 그것도 밭문서, 논문서가 아니면 도아보지도 않는 성미
라 액수 적은 것만 믿고 빈손으로 찾아간 명훈은 허탕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은 술이었다. 모든 게 메말라가는 농촌이었지만 술 인심만은 아직 좋았
다. 아무 일도 없이 술집 몇 군데 고개를 디민 것만으로도 답답한 가슴을 달랠 만큼은 얻어
마실 수 있었다. 까닭도 없이 명훈을 두렵게 여기는 국민학교 선생들의 술자리와 동장들하
고 연초 조합 총대들의 술자리를 오가는 동안이었다. 거기다가 어디서 불려온 듯 나타난 상
두 녀석이 소주병을 보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취한 명훈은 자정을 넘겨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껏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던 어머니가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명훈을 얼싸안
듯 맞으며 말했다.
"야가 또 어데서 이래 억병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오노? 사람들 와서 기다린 줄도 모르고.
큰 신씨, 작은 신씨하고 부뜰이 아부지 한 시간이나 넘게 니를 기다리다가 갔다."
취한 중에도 야릇한 날카로움으로 의식 깊은 곳을 찔러오는 말이었다. 그래, 선고를 내리
러 온 거겟지. 깨져가는 나의 꿈에, 시드는 나의 대지에,
그들 세 사람이 다시 찾아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자리에
누워 있는 명훈을 찾아온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명훈은 그런 그들의 신중
한 망설임이 더 불안했다.
"저 우리가생각해봤는데예- 이주사,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주시이소."
이윽고 우두머리 격인 큰 신씨가 급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명훈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
을 떼었다. 명훈은 그들의 다음 말이 벌써 짐작이 가면서도 짐짓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은 우리도예-이 가을 끝나면 길고 짜른(잛은) 걸 대보고 떠날라캤습니더마는 암만캐도
틀린 갑심더."
"뭐가요?"
"여다서 더 미련 대는 거 말입니더, 봉수(하씨) 글마들이 옳았어예. 떠날라 카믄 일찍일찍
싸말아야 하는 긴데."
"그럼 어제 그 일 때문에? 도대체 그 벌레가 뭐랍디까?" "까짓 벌거지 때무이 아임더. 그
거는 어디나 있을 수 잇는 기고예. 그 양 우리가 모예 가마이 생각해보이 미련했다 이깁니
더, 그래서 더 날 춥기 전에 떠나는 게 옳타꼬..."
웬일로 뒷전에서 보고만 있나, 싶던 작은 신씨가 빠른 말투로 끼여들었다.
그때 이미 명훈에게는 힘들여 그들을 말릴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있을
수 만도 없어 남의 일처럼 물어보았다.
"이 땅 그렇게 희망이 없습니까?"
"아임더. 이주사야 개얀치예. 땅이라 카는 거는 세월 지나믄 저절로 걸꽈(기름져) 지는 기
고오- 이 땅 다 걸꽈지믄 평수만도 얼맙니꺼? 하다못해 꼬치 농사만 지고 이주사네 살기는
넉넉할 낍니더, 문제는 우리라예. 결국 우리가 따먹는 거는 우리 몸 꿈지럭거린 품값 따먹는
긴데 그기 암만 캐도 여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깁니더. 말하자믄 품팔 곳을 잘못 찾아온
기지예."
"그럼 지난 봄에 하신 말씀들은?"
"우리가 몰랐어예. 땅은 다 울산이나 창녕같이 찰지고 바로 옆에 대구, 부산이 붙어 있는
거로 안 거라예. 하다못해 포항이라도 붙어 있는 거로... 거다가 옛날 생각만 하고 농사꾼은
농사만 지어야 되는 줄 믿고 우짜튼동 땅만 찾아댕기다 보이."
'그럼 무슨 다른 일이 있군요?"
그러자 이번에는 가만히 있든 부뜰이 아버지가 받았다.
"실은 어제 봉수 글마 편지 받았심더, 이주사 아시는지 모르지만 글마가 내 종질 아입니
거? 대구로 갔다가 안 돼 바로 부산으로 내뻗친 모양인데 거다 자리잡고 보이 아자비 생각
이 나는지 편지를 안보냈능교? 내도 고마 글로 오라 쿠는 긴데- 부산은 요새 무슨 공장도
마이 들어서고 해서 농사 아이라도 품팔 데가 많다꼬요. 거다가 부뜰이 학교 문제도 글코...
먹고 사는 일이라믄 여다서도 우째 되겟지마는 장래 생각하이 암만캐도 자리 있다 칼 때 가
보는 기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저 형님한테 의논하로 갔디마는 형님마이(뿐) 아이라 달출
이네까지..."
불뜰이 아버지는 사뭇 변명조였다. 명훈은 거기까지 듣고 나니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훤히
알 것 같았다. 그래, 결국은 도시로 가야 한단 말이지. 그때 큰 신씨가 역시 같은 변명조가
되어 받았다.
'글타꼬 우리까지 부뜰이네 따라갈라 카는 거는 아이고예. 나는 마 고향으로 다부 가볼랍
니
더, 공장이라 카믄 거다가 훨씬 크이께는. 정유공장인가 뭔가는 하마 터를 닦고 있고, 포항
에도 뭐신가 억수로 큰 공장이 곧 들어설 끼라 카이- 거다서 어리대다 보믄 무슨 수가 안
나겠습니꺼?"
"지는 아이라예. 한 번 떠난 고향 어시(별로) 잘되지도 몬하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예-차
라리 장터 쪽으로 옮겨볼랍니더, 남은 돈 가주고 쪼매는 점방이나 하나 열어가주고 알라 어
마이 맡기믄 어떨까 싶어예. 내는 또 내대로 일철에는 품팔로 겨울에는 나무라도 해 팔지예
뭐. 여기 인심이 후해 야박한 대처 나가고 싶은 맘은 없어예."
두 사람에 이어 작은 신씨가 그래도 자신이 체면치레는 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명훈이 듣기에는 다 같은 말이었다. 결국은 이곳을 떠나 도시 혹은 도시적인 삶의
양식으로 편입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럼 지금 지어놓으신 농사는 어쩌시구요?"
마침내 명훈도 마음을 가라앉혀 현실적인 일을 물었다.
"실은 그긴데예. 꼬치는 남았다 캐도 막물뿌이이(끝물뿐이니) 더 돈될거 없고... 이주사네나
따 자시이소. 남은 거는 배추밭인데 그 벌거지 아이라도 속이나 지대로 찰까 몰라예. 그래서
낼이라도 푸나물거리로 안고아에 한 차 내보내볼라 갑니더, 식구대로 차 따라가 골목마다
내다 팔믄 우리 떠나는 여비에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이미 의논이 되어 있었는지 큰 신씨가 머뭇거림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제 44 장 길동무
인철의 기억으로 그 청년이 기차에 오른 것은 대구에서 김천 사이의 어떤 시골 역에서였
다. 그는 나타날 때부터 까닭 모르게 사람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인철이 차분히 따져보니
대개는 생김과 차림에서 한눈에 느껴지는 불균형 때문인 듯했다.
먼저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은 괴이쩍을 만큼 아래위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윗
도리는 최근에 유행인 줄무늬에 남방 셔츠였는데 입고 길을 나서기에는 계절이 너무 늦었
다. 거기 비해 아랫도리는 굵게 골진 낡은 코듀로이 바지로 이번에는 계절에 비해 차려입고
나서는 게 너무 빨랐다. 거기다가 기차를 탈 정도의 장거리 여행 차림에 결정적으로 맞지
않는 것은 신발이었다. 그는 흔히 게다라고 부르는, 타이어 튜브를 잘라 끈을 댄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은 또 어울리지 않게 무늬가 화려한 나일론 양말에 싸여 있었다.
생김도 그랬다. 눈썹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시작했으면 코도 마땅히 우뚝해야 했건만
막상 붙은 것은 낮고 길쭉한 코였으며, 그 아래에는 느닷없이 메기 입이었다. 그것들이 제법
넓은 이마나 넉넉하게 빠진 하관과 어울려주는 인상은 정중하게 시작했으나. 성의 없이 마
쳐버린 인물화 같았다.
아주 오래 뒤에 인철은 그같이 어울리지 않은 차림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가난이었다. 먼 길을 떠난다고 제딴은 애를 썼지만 기껏 그가 할 수 있었
던 채비는 철 지난 남방 셔츠를 하나 사서 걸치는 것뿐이었다. 코듀로이 바지는 아마도 그
가 가진 유일한 것이거나 가장 색것이어서 계절을 따지지 못하고 입어야 했을 것이다. 나막
신도 마찬가지. 그에게는 구두는커녕 새 고무신조차 살 여유가 없었음에 틀림이 없다.
진작부터 인철의 눈길을 끌던 그가 직접 인철의 의식 속으로 뛰어든 것은 기차가 대구를
지난 지 오래잖아서였다.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대구에서 내린 사람이 많아 인철 앞의 자리가 비자 그가 다가와 예절 바르게 물었다. 완
행 열차의 자리야 나는 대로 누구든 차지해도 되는데 굳이 앞좌석의 사람에게 그렇게 동의
를 구하는 게 예절바름을 넘어 오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의, 무엇에든 자신없어하
는 태도를 드러내보이는 것이었다. 그걸 느낀 인철은 저도 몰래 고압적이 되어 고개만 끄덕
했다.
그 청년이 생김이나 차림이 좀 별나다 해도 기실 인철에게는 그걸 시시콜콜히 따지고 있
을 마음이 여유가 없었다. 인철은 지금 결사의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전사처럼 전혀 낯선
곳에서의 예측 못 할 삶을 향해 내닫고 있는 중이었다.
방학을 구실 삼아 돌내골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월래 인철에게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 별
로 없었다. 학교에서도 이미 마음이 뜬 데다 어떻게든 칙칙하고 욕스러운 누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유난히 길어진 그 방학 동안 새삼스레 실감한 돌내골의 현실과
밀양에서 받은 자극이 그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배움과 앎에 의지해 무언가를 성취하고
말겠다는 의지는 더 확고해졌으나 돌내골에서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껏 지내오던 그대로의 서울로 순순히 돌아가기는 정말로 싫었다. 고
생이 되더라도 누나의 그늘을 벗어나고 학교도 야간일망정 인문계로 바꾸고 싶었다. 인철이
누나의 상태를 숨김없이 털어놓고 학교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밝히자 형은 놀라하던 표정을
우울한 것으로 바꾸었을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던 어머니는 실제
적인 방안까지 생각해가며 인철의 희망을 지지해주었다.
"내 진작에 그럴 줄 알았다. 지깐년 하느 짓이 뻔하지. 할 수 없다. 이모부한테 바작 매달
래보는 게라. 니 서울 올라가디미로 짐 싸가주고 이모네 집에 들앉아라. 이모가 뭐라 총총거
려도 민주를 대고 무슨 구처를 내줄 때까지 버티란 말이따. 백서방 그 사람 지난 봄에 옷
벗고 나왔다 카지마는 워낙 수단이 좋은 사람이이 그새 무슨 수를 냈을 게라. 하다못해 일
마뜩고 일찍일찍 끝나는 회사에 급사 자리만 구해조도 야간 고등학교는 어예 마칠 수 안있
겠나? 그것도 안 되믄 그대로 거다서 묵사들이라(어거리조 얹혀지내라). 이질도 조칸데 설
마 끌어내기야 할라? 공납금은 우리가 어예 만들어볼 테이 저 먹는 대로 얻어먹으며 학교나
댕기는 것도 수가 될따."
거기 힘을 얻은 인철은 서울에 도착한 그날로 짐을 싸고 이제는 거짓말과 원망과 정액 냄
새만 가득한 누나의 미장원을 떠났다.
"혼자 해보겠다니 어린게 호자 해보기는 뭘 해봐. 이모네도 그래. 나도 서울 생활 오래하면
서 여러 번 겪었지만 그 집 믿을 거 못 된다. 5.16 덕에 이모부 몇 번 굵직한 감투 써보기는
했지만 실속은 별로 없었어. 공연히 감투만 믿고 번드레하게 살림만 벌여놨다가 뒷감당 못
해 쩔쩔매는 게 이모네 지난 5년이었다구. 그것도 이제 좀 자리잡을 만하면 뭔가 사고를 친
이모부는 쫓겨나고... 딴사람에게 들은 말이지만 5.16이 아니었더라면 이모부는 벌써 무능 장
교로 예편됐을 거래. 그런데 네게 뭘 해줄 수 있겠니? 먹고 자는 문제라면 여기나 거기나지,
뭐."
누나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렸지만 굳이 잡아두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장은 모든 게 뜻대로 된 셈이어서 인철은 앞날이 환히 보장된 새 출발이라도 하는 기
분으로 씩씩하게 떠났다. 어머니가 이모에게 써보낸 장문의 편지는 그 새 출발을 지켜주는
든든한 부적 같았다.
그런데 때가 나빴다. 이모부는 아직도 실직 상태나 다름없이 지내면서 술로 울분을 달래
고 있었고, 벌써 여러 달째 수입이 끊겨 살이도 말이 아니었다. 집은 커서 여름 장마로 새는
것조차 수리하지 못하고 자가용은 운전사 월급을 주지 못해 세워놓는 식이었다.
"말 마라. 우리도 이 집 팔아야 무슨 해결이난다. 벌써 넉 달째 네 이모부는 술만 고래고래
마셔대고 집구석에는 죽이 끓는지 밥이 타는지 나 몰라라다. 언니는 네게 급사 자리라도 마
련해주라지만, 글세-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다. 일 마뜩하고 야간 학교에 나갈 수 있을 만
큼 빨리 마치는 회사가 몇 군데나 있겠어? 있으니 그 어중간한 양반을 믿을 수가 있어? 차
라리 네 형 취직 자리라면 어떻게 옛날 동기생들에게라도 억지를 써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
만... 그렇다고 집에만 들어박혀 있는 내게 무슨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난 이모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난색을 지었다. 원래 정이 없는 사
람은 아닌 데다 표정도 싫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지쳐 있는 것이라 그게 오히려 이모네가 겪
고 있는 어려움을 더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날 밤 늦게 돌아온 이모부도 인철이 찾아온 때
가 나쁨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갠놈의 새끼덜, 뭐 나보고 강생회에 과장으로라도 나가보라고? 아, 이 나이에 김밥 땅콩
들고 기차칸을 왔다갔다하란 말이야? 저희들은 좋은 자리 다 차지하고 앉아서... 말이 났으
니까 그런데, 그놈의 수회죈가 뭔가만 해도 그래. 나만한 자리에 앉아서 업자에게 그만한 커
미션 안 먹은 놈 있으면 손 들고 나와보라 그래. 그것도 나만 먹었나. 쥐꼬리만한 월급에 쪼
들리는 밑에 애들 나눠주고 나는 술 몇잔 얻어먹은 거밖에 없어! 글너데 신문에까지 알려
사람을 병신 만들고- 그때 큼을 보아 인간 덜 된 놈들은 아예 다 쏴죽여버리는 건데..."
마중 나간 이모와 안방은 마주앉기 바쁘게 쏟아내는 술주정의 내용이 그랬다. 하지만 인
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평소의 사람 좋은 속내를 술로 더 과장해 드러냈다.
"서형이 고생 심한 모양이구먼. 진작 어떻게 한번 봐드려야 하는 건데, 명훈은 아직도 그
고집 부리고 촌에 처박혀 있어? 어쨌든 잘 왔다. 내 한번 알아보지. 아냐, 알아볼 것도 없어.
학교 가기 위해서라면 우리집에서 그냥 학교나 다니라구. 구태여 힘든 급사일 할 게 뭐 있
어?"
이모가 하얗게 눈을 흘기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큰소리쳤다. 글도 시작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어서 그날 밤 인철은 여전히 희망에 차 앞날을 설계했다. 우선 학교를
알아보자. 인문계 야간으로 옮기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마지막 승부를 대학에 걸면 된다...
하지만 이튿날 전학을 위해 다니던 공전을 찾아갔을 때 뜻 아니한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
다. 미술 선생이 인철의 반항 같지 않은 반항을 터무니없이 과장한 데다, 뒤이은 이십여 일
의 무단 결석이 그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무기 정학 처분이 내려져 있는 것이었다. 전학을
하려면 그처분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예삿일이 아니었다. 공립 학교라 그 기록을 지우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된다 해도 적지 않은 비용과 수단 좋고 말깨나 하는 사람의 품
이 들어야 했다.
인문계 야간부도 그랬다. 이름있는 사립 고등학교의 야간부는 자리가 없고, 있다 해도 엄
청난 경쟁을 거쳐야 했다. 간혹 그 경쟁을 피하는 뒷길이 있기도 했으나, 그때는 또 이런저
런 명목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목돈이 요구되었다. 변두리 삼류 고등학교의 야간부는
자리가 비어 있는 곳이 있었지만 그런 학교에는 인철이 마음내키지 않았다. 시설이 부실하
고 교원이 모자라는 데다 학생이란 게 태반은 다른데서 퇴학당한 불량 학생들이거나 며칠에
한 번씩 출석이나 해 졸업장이나 얻어두려는 이른바 깡패들이었다. 어떤 학교는 바로 인철
이 찾아가던 날 학교 앞 골목에서 경찰과 앰뷸런스가 출동할 정도로 큰 패싸움을 벌여 인철
을 질리게 만들었다.
인철은 고심 끝에 전학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를 아무에게도 알리지않고 학교를 포기하기
로 했다. 이모에게는 알리기가 싫었을뿐더라 뻔히 보고 있는 사정으로는 알려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돌내골의 사정도 익히 알고 있는 터, 알려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였고
누나 쪽은 더 그랬다. 대신 찾아낸 방안이 학원에 나가 검정고시를 치르는 길이었다. 전에도
한 번 해본 적이 있다는 게 그 같은 전환에 약간의 자신을 주었다.
인철은 첫 월급을 받으면 학원 야간부 단과반에 등록하기로 하고 취직이 되기만을 기다렸
다. 떠나올 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어머니와 형에게 그간의 변화를 알리고 학원 수강료 송
금을 부탁하기는 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당장은 학교도 학원도 나가지 않고, 이모가 진작에 예측한 대로 일자리도 쉽게 얻어지지
않자 인철은 그 집의 하릴없는 식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상실된 학생 신분이 또
예상 못 한 변화를 강요했다. 다같은 식객 노릇이라도 학생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많이
달랐다. 골방 하나를 얻어 하루종일 공부한답시고 들어앉았지만 거기에 고학의 명분을 걸기
는 어려웠다. 학원도 검정고시도 학업의 길로 보아서는 모두가 불확실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런 변화는 누가 뭐라기도 전에 먼저 인철의 의식을 건드렸다. 끼고있던 반지를 팔아 살
말을 바꿔와야 할 정도로 악화되는 이모네 형편이 인철을 더욱 그런 일에 민감하게 만들었
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그저 막연하던 미안함은 차츰 부담감으로, 마침내는 죄의식으로
가지 자라가기 시작했다. 와서는 안 될 곳에 와서 먹어서는 안 될 밥을 먹고 있다...
한 달쯤이 지나자 이모도 마침내는 그것을 구실 삼아 푸념을 시작했다.
"저 양반 꼴 보니 취직은 틀린 것 같고- 이왕에 혼자 공부할 거라면 집에서는 안 되니?
너희 집 끼니도 잇기 힘들 정도야? 언닌 왜 그렇게 살이가 펴지지 않는지 모르겠어. 우리
여러 형제 중에서 가장 시집 잘갔다고 하더니. 우리 살기 힘든 것도 그렇지만 매일 방안에
만 처박혀 있는 너 보기도답답하다, 얘."
그쯤 되면 인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욕스러움은 누나에게 얹혀 지낼 때에 못지않았다.
그 바람에 인철은 차라리 누나에게로 돌아갈까 싶어 이모에게는 내색없이 그쪽 형편을 살
피러 가보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온 누나의 파국이었다. 떠난
지 한 달 남짓에 미장원 자리에는 잡화점이 들어섰고 그 가겟방에는 새로세든 듯한 중년 내
외가 살고 있었다.
인철에게
네가 찾아올지 몰라 몇 줄 남긴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모든 것
은 끝났다. 누나는 완전히 빈손이 되어 새로 출발한다. 이제 없는 사람이려니 여겨라. 우리
남매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올지.
1965년 10월 7일
누나가
인철의 옷가지며 책들이 싸인 작은 보퉁이와 함께 누나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남긴 쪽지에
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중에는 뼈저린 아픔까지 느끼며 다시 읽게 되지만 처음 그 쪽지
를 읽었을 때에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멍해 있는 인철에게 주인 아주머니가 그때 이
른 파국에 대해 아는 대로 일러주었다.
"세상에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 속이지. 얼마나 정 있어 뵈던 내외였어? 그날 둘이 병원에
갈 때만 해도 그 사람, 새댁을 거의 싸안고 가다시피 하더라구. 그런 사람이 두 시간도 안
돼 새파란 얼굴로 뛰어들더니 새댁이 위독하다고 하는데 어찌 안 믿겠어? 연신 눈물을 훔쳐
가며 보증금을 담보로 3만 원만 급전으로 내달라는데 사람 정으로 못 본 체할 재간이 없더
구만. 이웃, 친척 가리지 않고 그 밤 안으로 3만 원 구해 줘보냈는데, 그 돈 들고 저만 달아
나버릴 줄이야. 병원에 혼절해 누운 여자 내팽개치고... 이틀 뒤에 새댁 혼자 곧 쓰러질 듯이
돌아와 그 사람을 찾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곡 망치로 정수리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더라니
까. 새댁 참 안됐어. 여기서 나갈 때까지도 몸이 성찮아 보였는데 그 몸으로 어딜 갔는지..."
거기까지 듣고 나니 벌써 누나에게 있었던 일이 훤히 짐작되었다. 그런데 비정한 이기일
까, 그때 인철의 가슴을 가득 채운 것은 온전치 못한 몸으로 벌림받고 돈 한푼 없이 거리로
나서게 된 누나에 대한 근심이나 연민이 아니라 이제 서울에는 달리 돌아갈 곳조차 없게 된
자신의 막막함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이모네 집으로돌아가 골방에 누운 인철은 불도켜지 않은 방안에 누워
밤늦도록 생각에 잠겼다. 이모네 집은 어느새 떠나야 할 곳으로 단정되어 있었다. 누나는 사
라졌고- 몇 군데 고향친척들의 집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넉넉잖은 60년대 중반을 어렵게
살아가는 실향민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돌내골로 내려가 가족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길뿐이었다. 지난 2년 처
럼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꿈꾸며 음울한 세월을 죽어가야 했다. 하지만 싫었다. 품을 환
상도 없이 벌거숭이 현실에 멱살을 잡혀 끌려가기는 정말로 싫었다.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돌연스런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발단은 무엇에
든 먼저 자신에게서 원인과 책임을 따져보는 그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너는 벌써부터 혼자만의 새로운 길로 떠나겠다고 공언해왔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운명
을
길들여 돌아오는 것이 지금의 저주스러운 싸우는 데 가장 유효하고 멋있는 방법이라고 떠들
었다. 실제로도 몇 번 인가 너는 그런 출발을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아니
었다. 너는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척했지만 실은 아는 사람을 찾아갔고 옛 인연에 의지하러
갔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저번 학교를 그만두고 돌내골로 내려갔을 때. 또는 밀양에
서 네가 생각한 새 출발은 이런게 아니었다. 그런데 기껏 네가 한 짓은 혈연이란 낡은 인연
에 구걸 떠난 것이었으며 이미 떠난 학교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학교
를 떠나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다시 욕스럽기 그지없어 스스로 떠났던 혈연에까지(누나) 연
연해하다가 이 같은 낭패를 당했다...'
그렇게 자못 준엄한 자기 비판에 이어 선고처럼 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에 가는 곳은 진실로 낯선 곳이어야 할 것. 아는 사람도 없고 호의를 구할 아무런
연줄도 없는 곳이어야 할 것. 오직 너의 땀과 눈물로만 너를 지탱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할
것.
오직 너의 땀과 눈물로만 너를 지탱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할 것. 그랴야만 그 출발은 진정으
로 새로운 출발이며 그 땅은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가 되고 거기서 만나게 될 운명도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 되자 비로소 인철은 그때껏 사로잡혀 있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자유
롭게 자신이 갈 곳을 찾아볼 수 있었다. 외국같이 절차나 경비 문제로 불가능하지 않은 곳
이면 어디든 고려의대상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이 땅의 모든 도시로 떠날 수 있게 된 것
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별로 고심할 것도 없이 한 도시가 결정되었다. 이 땅의 그 많은
도시들 중에서 어째서 부산이 결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
다. 인철이 설정한 낯섦과 새로움의 개념에 맞아떨어짐ㄴ서도관습이나 풍토에서도 적응이
손쉬운 곳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출발에는 서울다음으로 가능성이 높은 대도시라든가, 따위
가 그러하다.
하지만 그 결정에는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결정이 뜻밖으로 신속
하고 확고하게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그때에는 나름의 필연이 있었으나 오래 뒤에 되돌아
보면 쓴웃음이 날 정도의 하찮은 동기에서 결정이 날 수도 있고,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사의한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정도 있다.
어떤 이는 그 도시에 명혜가 있다는 것으로 어떤 단서를 삼으려 할지 모른다. 적어도 그
때 인철의 의식 표면만을 살핀다면 그런 추론은 어림없이 틀린 것이 된다. 열에 아홉 그곳
에서 새로 시작될 인철의 삶은 어쩌다 길거리에서 그녀와 마주치게 되어도 황급히 피해가야
할 상황에 그를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결정이 이루어지는동안
명혜가 인철의 의식 밑바닥에서조차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
다.
"도시락 있습니다. 따끈따끈한 벤또요."
용감하게 출발하기는 했지만 부산에 가까워올수록 막막하고 암담해져 이런저럭 생각으로
넋을 놓고 있는 인철의 귀에 그런 외침이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제복을 입은 강생회 판매원에 도시락을 한 팔 가득 안고 지나가고 있었다. 얇게 저민 버드
나무로 잔 그 도시락을 보자 인철은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서울역에서 아침 여섯시 기차를
탈 때 한 그릇 말아먹은 가락국수를 빼면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인철은 부산까지의 기찻삯을 물고 얼마 남지 않은 돈에서 30원을 빼내 도시락을 하나 샀
다. 벌써 오후 다섯시에 가까웠으나 배고픈 만큼 입맛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내용도 조악하
기 짝이 없어 인철은 밥만 대강 걷어먹고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그때 앞에서 새까만 두 손
이 불쑥 나오고 이어 예절바른 물음이 뒤따랐다.
"그거 버리실 거면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물음의 주인은 바로 얼마 전 인철 앞에 자리잡고 앉은 그 기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정
말로버리려 했던 것이라 인철은 별로 거부감 없이 그에게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도시락 뚜
껑을 연 그는 인철이 쓴 젓가락조차 닦는 법 없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을 먹어치웠다. 도시
락에 붙어 있는 밥알이며 젓가락에 노란색이 묻어나던 단무지, 배도 안 따고 간장만으로 볶
아 짜고 쓸 뿐이던 멸치볶음이며 삭지도않은 마늘장아찌 따위를 구별도 순서도 없이 입에
쓸어넣는 게 먹는다기보다는 마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작할 사이에 말짱하게 비운 도시락 껍질을 차창 밖으로 내던진 청년이 다
시 그렇게 예절바른 소리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자리에 일어났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의 입
가에 물기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열차 수도칸에 가서 흠뻑 물을 마시고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런 별난 형태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이번에도그리 오래 인철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
다. 그새 부산에 가까워진 만큼 더 어둡고 무거워진 머릿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래잖아 그
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저어-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
인철은 왠지 그 내용이 귀찮을 것 같아 짐짓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눈길로만 반문했다.
청년이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에 몸까지 비틀며 더욱 예절바르게 부탁했다.
"여기서 구표역을 지날 때까지 뒷문 쪽을 좀 맡아주시겠습니까? 길어야 반시간입니다. 승
무원이 오면 제게 좀 일러주십시오. 양쪽을 다 살피다가 자칫하면 한쪽을 놓치게 될까봐서."
아마도 무임 승차를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전에도 그가 불안한 눈길로 끊임없이
객차 앞 뒤 출입구를 살피던 게 기억났다. 그런데도 말투는 뭔가 나쁜 짓을 한 승무원들을
사진이 오히려 감시하고 있다는 투였다.
그러고 십 분도 안 돼 정말로 검표원이 뒷문 쪽으로 나타났다. 정확하게 삼랑진과 구포
가운데쯤이었다. 인철이 그것을 알려주자 청년은 반대족 출입구 쪽으로 태연하게 걸어나갔
다.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검표원을 피했는지 기차가 구포역을 지나기도 전에 게다짝을 떨
그럭거리며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 뒤 그 청년은 한결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창밖을 내다보기도하고 휘파람을 불기
도 했다. 그러다가 기차가 해운대를 지날 무렵 해서 다시 얼굴 가득 긴장하는 빛이 떠오르
며 무언가를 부탁할 때 특유의 예절바른 목소리로 인철에게 물어왔다.
"실례지만 본역에서 내리십니까? 진역에서 내리십니까?"
"부산역까진데요."
이번에는 정말 귀찮은 부탁이 될지 모른다 싶어 인철은 일부러 지은 쌀쌀한 목소리로 잛
게 받았다. 그러나 청년은 그런 인철의 속마음을 별로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초면에 죄송스럽지만, 이왕 여러 차례 신세를 졌으니 남은 일도 마저 부탁드립니다. 남의
일을 봐주려면 삼년상까지 치러주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제법 설득조의 척척 달라붙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간곡하게 덧붙였다.
"저를 도와주시는 셈 치고 부산진역에 내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차표를 본역까지 끊으셨다
니 먼저 내리는 것은 문제가 안 되고 기껏 버스 차비 몇 원 차입니다."
"제가 부산진역에 내리는 것이 어떻게 댁에 도움이 됩니까?"
아직도 그를 위해 귀찮음을 무릅 쓸 마음이 별로 되어 있지 않은 인철이 여전히 쌀쌀하게
되물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표가 없습니다. 본역에 내려서는 구내가 넓어 빠져나가기가 힘들지요. 하
지만 부산진역이라면 좀 쉽습니다. 더구나 형씨가 도와주신다면 결코 붙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
"잡히면 영창입니다. 운 좋게 영창을 면해도 따귀는 역무원들에게 맡겨야 하는 신세란 말
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이제 거의 울상이었다. 아무래도 비극적일 수는 없는 얼굴이지만 그
래도 그의 절실한 심경만을 어느 정도 내비쳤다. 그 바람에 마음이 약해진 인철은 마침내
그의 청을 들어주고 말았다. 일순 얼굴이 환해진 그 청년이 과장된 친근감을 드러내며 말했
다.
"형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알고나 지냅시다. 사람 서로 알아두어손해날 건 없
잖습니까? 저는 구미에 사는 박달근이라고 합니다. 병술생 스물이구요."
"저는 이인철이라고 합니다. 안광 근처 명양이 고향이고 나이는 48년생 열여덟입니다."
인철도 어떨결에 그의 격식에 따라 자신을 소개했다.
"하이고, 그라믄 같은 경상도 사람이네. 내는 또 서울 사람인 줄 알고 표준말 골라 쓴다꼬
얼매나 애를 먹었는동... 인자는 사투리로 합시다. 쓰지는 않아도 알아는 듣지요?"
박달근이 그렇게 반가워하더니 이내 묻지도 않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았다.
"아직 영장 나올라 카믄 멀었고, 촌에 처박혀 있자이 깝깝하고..."
그 동안의 표준말은 어디 갔는지 금세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바뀐 그의 신세 타령은 기
차가 부산진역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가난한 농사꾼 자식, 일찍 죽은 어머니, 젊은 계
모, 동복. 이복 합쳐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 자신을 소처럼 부려먹으면서도 눈앞에 못 서게
하는 비정하고 거친 아버지, 식구대로 새벽부터 저물 때까지 일해도 먹을 것조차 넉넉하지
못한 살림, 대처에 나와 취직을 해보려 해도 좀 반듯한 곳은 국졸 학력이 걸리고- 대강 그
렇게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기차가 부산진역으로 접어들면서 속도를 떨어뜨리 시
작하자 갑자기 긴장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내하고 같이 개찰구까지 걸어가는 기라요, 표 거둣는 역원 바짝 앞에 까지 태연히 가야
합니데이. 내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얘기도 해쌌고요."
달근이 알려준 인철의 역할은 그랬다. 그런 거라면 어려울 것도 없다싶어 인철은 조금 마
음을 놓았다.
"박형은 어떡하시려구요?"
"그거는 그때 가서 보면 알 끼라. 이형같이 순진한 사람에게 백지로(공연히) 미리 말해노믄
하마 표정이 변해 될 일도 안 된다꼬요."
달근은 그렇게 말해놓고 게다짝을 딸그락거리며 앞장서서 객실을 나섰다. 부산진역은 벌
써 짙게 어둠살이 깔려 있었다. 다른 승객들과 출발구로 나오는 동안 인철은 달근이 시킨
대로 뒤따라오는 그를 돌아보며 시답잖은 농담을 큰 소리로 주고받았다. 출찰구에 가까워질
수록 달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두 손으로 게다작을 나누어 쥐고 쉴새없이 사방을
살피는 게 나름으로는 준비를 단단히 갖추는 듯했다.
드디어 인철이 기차표를 내줄 차례가 되었다. 인철이 집표원에게 기차표를 내밀려 하는데,
그때까지 떠들썩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뒤따라오던 달근이 갑자기 인츨의 등을 세차게 밀
었다. 너무 뜻밖이라 인철은 그만큼 세게 집표원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굵은 각목으로 된
출찰구의 목책이 아니었더라면 인철과 집표원은 얼싸안은 채 시멘트 바닥을 나뒹굴 뻔했다.
그사이 달근은 재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출찰구를 빠져나가 역 광장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거기 서! 저 새끼 저거 잡아!"
다른 출찰구에 서 있던 역원이 그런 쇳소리를 냈고 뒤이어 인철에게 부딪혔던 집표원도
성난 소리를 보탰다.
"절마 잡아라. 어이, 글마 좀 뿌뜨소!"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달근의 그림자가 역 광장의 인파 속으로 스며든 뒤였다. 그러자 인철
에게 부딪혔던 집표원이 느닷없이 인철의 멱살을 잡으며 꽥 소리쳤다.
"니 절마하고 한패지?"
하도 세차게 부딪쳤던 터라 인철은 그때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겨우 몸만 바로 세우
고 멍한 눈길로 그 집표원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네에?"
"너그들 한패제? 둘이 짜고 이래는 거 아이가 이 말이다."
"아녜요. 이 손 놓으세요. 그 사람 오다가 열차 안에서 인사를 나눴을 뿐입니다. 생판 모르
는 사람이라구요!"
속으로 찔끔한 데가 없지는 않았으나 인철은 그렇게 강경하게 부인했다. 얼마간은 사실이
란 게 그런 인철의 목소리를 자신있게 해주었다. 그래도 집표원은 인철을 곱게 보내주려 하
지 않았다. 옷깃을 움켜잡고 역무실로 끌고 가 한동안이나 얼러댔다. 미필적 고의도 고의란
걸 알리 없는 인철도 지지 않고 맞서 곧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워낙 인철의 어조
와 표정이 단호해서인지 집표원의 기세가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라믄 서로 모리는 사람들끼리 우째 그래 다정하게 얘기했노?"
"뒤에서 자꾸 말을 걸고 대답 않으면 옆구리를 찔러대는데 어떡해요?"
조리 있고 또박또박한 대꾸에다 입고 있는 학생복이 어떤 보증이 되었는지 마침내 그 집
표원도 인철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대로 보내줄 수는 없다는 듯 한마디 엄한 주
위를 덧붙였다.
"학생, 앞으로도 조심하라꼬. 어룸(어릿)하게 서 있다가 조런 못된 종내기들에게 이용당
하지 말고."
다른 승객들보다 한 오 분 늦게 나와서인지 인철이 역 광장으로 나섰을 때는 사람들이 많
이 줄어 있었다.
'드디어 부산에 왔다...'
인철은 야릇한 감개에 차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난생 처음 와보는 곳이
라 그런지 정말로 낯선 곳에 왔다는 느낌과 함께 왈칵 외로움이 밀려왔다. 스산한 가을 바
람에 쓸려 다니는 낙엽과 어두운 도시 밤하늘이며 철 이른 포장마차의 흰 가스 불빛 같은
것들이 애상의 정조부터 자극한 탓이었다. 그 도시 어느 지붕 아래선가 명혜가 있다는 것,
그러나 당장은 더욱 만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고 자칫하면 영원히 그리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인철이 그 같은 정조에 빠지는데 은밀히 한몫을 거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 빠져 있을 감상도 못 되었다. 이제 남은 삶 모두를 건 싸움은 시작되었고
나는 스스로 뛰어들어 물러날 길이 없게 된 전사이다- 비록 과장되게 표현되기는 해도 이
성에 바탕한 것임에 틀림없는 그런 자각이 이내 인철을 나약한 감상에 끌어냈다. 그리고 그
를 기다리는 비정한 현실을 일깨워주며 거기에 맞설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기를 촉구했다.
힌철은 옷가지와 책으로 제법 묵직한 가방을 역 광장 끄트머리 벤치에 얹고 그 곁에 앉아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모네 어두운 골방의 몽상 속에서 그는 수많은 예상과 그 대응을
생각해두었고, 그 중에는 그런 상황에 대한 예상과 그 대응을 생각해두었고, 그 중에는 그런
상황에 대한 예상과 대응도 있었다. 우선 어디 가서 잠자리를 구하고 내일 날이 밝으면 스
스로 일자리를 구하러 나선다- 이윽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인철은 가방을 들고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등뒤에서 귀에 익은 게다짝 소리가 들렸다.
"이형, 내요, 박달근이. 내 때문에 욕은 안 봤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박달근이 인철을 멀지 않은 포장마차 쪽으로 끌었다.
"사람이 신세를 졌으면 갚을 줄 알아야제. 일로 오소. 내 대포 한잔 살게."
그러면서 달근은 꼬깃꼬깃 접은 백원짜리 한 장을 펴 포장마차 탁자에 놓고 크게 호기를
부리듯 말했다.
"아주무이, 여기 대포 두 잔만 주소."
인철 또한 술을 모르는 게 아니고 그때의 기분도 굳이 술을 마다할 상태가 아니었다. 달
근이 내민 백원짜리가 아마도 그가 가진 돈의 전부일 것이란 추측도 쉽게 그를 뿌리칠 수
없게 했다. 다만 사람이 많이 오가는 역 광장 모퉁이라 걸치고 있는 교복과 교모가 부담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만둔 학교라 그것도 꼭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인철은 교모만 벗어
가방 속에 쑤셔넣고 포장마차에 달근과 나란히 붙어섰다.
"카, 술맛 좋다. 그건 글코- 객지 벗 십년이라꼬. 두 살 차이뿌인데 우리 마 말놓자. 서로
친구하고, 이것도 인연이라믄 인연 아이가?"
아주머니가 내준 큰 대폿잔을 단번에 반 넘게 들이켠 뒤 손으로 입가를 닦으며 달근이 그
런 제안을 했다. 인철로서는 처음 겪는 형태의 인간 관계고 제안의 내용도 좀 엉뚱하게 느
껴졌으나 역시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오고 보니 달근에게 묘한 흥미까지 이는
것이었다.
"박형이 좋다면 그럽시다. 하긴 나도 외로운 처지라."
인철이 어른스런 말투를 흉내내어 그렇게 받자 달근은 정말로 신이 난다는 표정이 되었
다. 대폿잔에 남은 막걸리를 단숨에 비우고 호기의 강도를 높였다.
"까짓 거, 몇십 원 남구이 뭐 하노? 이 박달근이 언제 돈으로 살았나? 의리로 살았제. 아주
무이 이럴 것 없이 고마 여다 막걸리 한 되 퍼내소. 백 원이믄 대포 두 잔에 막걸리 한 되
값은 넉넉하지요?"
"안주는 뭘로 하고?"
달근이 부리는 호기에 비해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
덤덤함을 억누르고 있는 불만으로 해석한 인철이 나섰다.
"안주는 제가 사죠. 저..."
그때 달근이 눈을 끔벅해 안주를 고르려는 인철을 말리고 농담하듯 농쳤다.
"아따, 마실 술도 넉넉잖은데 안주까지 우째 사먹겠노? 오뎅 국물이나 꼬치까리 실실 뿌
려 한 꼬뿌 주소. 도둑차 타고 오입 나온 놈하고 학생이 무신 돈이 있겠소?"
그리고는 무슨 생각에선지 포장마차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그 포장마차에는 인철네말고
도 두 패의 손님이 더 있었다. 인철네와 다름없이 빈약한 안주에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두
양복 차림이었다. 양복 차림 쪽을 좀더 눈여겨보던 박달근이 인철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
했다.
"쪼매 있어봐라. 안주는 저다서 나올 끼다."
그러는 사이 아주머니가 찌그러진 한 되돌이 양은 주전자와 오뎅 국물 한 공기를 내놨다.
이제는 그럴 자격을 얻었다는 듯 달근이 먼저 포장마차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인철도 제
옆에 당겨 앉혔다.
인철이 새로 받은 잔을 겨우 다 비웠을 때였다. 그새 두 잔을 비운 달근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역시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양복 차림 쪽으로 갔다.
"아이구, 안주가 그대로 남았네. 이거 우리가 갖다 무도 되겠습니꺼?"
달근이 그렇게 묻자 얼큰하게 술이 오른 두 사람은 흔쾌히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인철 쪽을 힐끔 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바란 적 없는 인심까지 썼다.
"젊은 사람들이 안주가 없던가 베. 아주무이, 주리(거스름돈)는 마 놔두고 저 사람들 삼마
나 둬 마리 꾸어주소."
거스름돈을 꺼내고 있던 주인 여자도 자기 손해날 것 없다는 듯 기색 좋게 고개를 끄덕였
다. 그 사이 달근은 그들이 먹다 남긴 안주들을 한접시 쓸어모아왔다. 오뎅 조각이 몇 개,
뜯어먹다 남긴 꽁치, 시키기는 했으나 먹기는 포기해버린 듯한 닭발 두 개였다. 그걸 본 순
간 인철은 갑자기 스스로가 처량한 기분이 들었으나 달근은 즐겁기만 했다.
"봐라, 이만하면 안주는 만포장이라. 술 모자랠까봐 걱정이지, 안주없이 술 못 먹는 기 어
딨노?"
그러면서 가져온 것들을 안주 삼아 맛이게 술을 마셨다. 그전 같으면 인철은 아마도 달근
의 그 같은 천박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처지가 그래서인지 흥미로운 관
찰의 대상일 뿐, 반감이나 혐오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그래, 부산에는 우째 왔노? 여다 누가 사나?"
술잔이 돌수록 말이 많아진 달근이 지나가는 소리로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나 취한 척하
면서도 살피는 눈길을 참고 참아온 것을 물은 듯 했다. 인철은 거기서 잠시 망설였으나 왠
지 솔직하고 싶어졌다. 게다가 그 동안 오른 술도 한몫을 해 별로 숨긴 것 없이 대강의 형
편을 털어놓았다.
"아이고, 그라믄 니나 내나 갑자생이네. 교복 뺀드롬하게 채리입은 데다 그 맛있는 기차 벤
또도 몇 젓가락 께적께적하다 뚜껑 덮는 거 보고 어데 부잣집 도령님 행찬가 싶었디. 하기
사 이상한 구석이 없었던 거는 아이라. 교복을 입었지마는 학생이 왜 방학도 아인데 커다는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하노, 하로 말따."
인철의 말을 다 듣고 난 달근은 그렇게 말해놓고 그때부터 그 방면의 선배 티를 내기 시
작했다. 먼저 인철에게 적잖이 위로가 된 것은 일자리에 대한 장담이었다.
"지가 꿈지락거리기 싫어서 글치. 일할라 카믄 일자리사 왜 없겠노? 니는 내를 우째 볼지
모리겠다마는 내 이래도 부산에 아는 데가 많다이. 여다 오입 나온 것만 해도 이번이 벌씨
로 니번째라. 오늘 어디 가서 날 새거든 내하고 함 돌아보자. 세상일에 막말은 몬 하지만 찾
아보믄 맞촘한 데가 있을끼다."
반드시 그런 달근을 빋은 것은 아니지만 말만 들어도 막막함이 한결 가시는 것이었다. 게
다가 이상하게 술도 당겨 인철이 막걸리 한 되를 더시켰다. 그 바람에 술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져 둘은 제법 얼큰해져서야 그 포장마차에서 일어났다.
"뭐 이자뿠나? 뭐 찾노?"
역 광장을 빠져나오면서 인철이 싸구려 여인숙이라도 찾아볼 양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달근이 그렇게 물었다.
"오늘밤을 보내려면 어디 무허가 하숙집이라도 찾아봐야 하잖아?"
인철이 당연한 듯 그렇게 받자 달근이 손위다운 지슷함으로 말했다.
"봐라, 이 사람아. 돈이라 카는 거는 억만금이 있다 캐도 그래 쓰는 법이 아이라. 잠자는
데 우째 일일이 돈을 내고 자노? 여인숙, 하숙집, 그거 다 포시라운 사람들 얘기라. 니내없
이 집 나와 객지를 떠댕기는 것들이 무슨 잠자리 타령까지... 그래가지고는 객지 생활 몬 한
다. 딴소리말고 내나 따라온나. 눈비 가릴 지붕만 있으믄 흉감한 줄 알고."
달근이 그럼녀서 인철을 데려간 곳은 부산 본역 대합실이었다. 부산진역은 자기를 알아보
는 역원이 있을까봐 가방까지 들어줘가며 그리로 데려간 모양인데, 초행에다 밤길이라 그런
지 인쳘에게는 몇십 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마 열시 반 아이가? 여다서 대여섯 시간만 눈붙이믄 통금 해제라. 그라믄 될 일을 멀
라꼬 돈 들이가미 여인숙 찾노, 이 말이라."
인철이 오소소한 한기와 쓰려오는 속 때문에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새벽 4시 무렵이었다.
간밤에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밤차를 타려는 사람들과 밤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
들을 보내고 마중하는 사람들로 북적대던 대합실이었다. 그 바람에 인철은 특별히 처량한
느낌 없이 한구석의 벤치에서 잠들 수 있었는데 이제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남은 새벽의 대
합실을 보니 자신이 한없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인철은 얼른 달근을 찾아보았다. 대합실 의자의 벽 모서리 쪽에 가방을 놓고 그 가방에
기대 앉아 잠든 인철에 비해 달근은 의자를 키대로 차지하고 팔자 좋게 네 활개를 편 채 자
고 있었다. 자기 집 안방에 드러누운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편안하고 태연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대합실을 떠나고 싶어 달근을 찾았던 인철은 그가 가는 코까지 골며 달
게 자는 모습을 보자 깨울 수가 없었다. 하기는 밖에 아직 어두운 데다 통금도 해제되지 않
아 대합실을 떠난다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쓰린 속을 마른침으
로 달래며 다시 눈을 붙여보려는데 퍼뜩 떠오른 게 그 도시에 명혜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명혜가 그런 시각에 그런 곳에 올 리가 없지만 한번 그녀를 떠올리자 인철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나타나게 된다면, 하는 우려는 곧 틀림없이 그녀가 나타
나리라는 단정으로 바뀌어 그를 몰아댔다. 그는 가을 새벽의 쌀쌀함도, 무거운 가방을 끌고
다니는 귀찮음도 잊고 대합실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곳의 거울로 옷매무새까
지 바로한 뒤 의자로 돌아와 단정하게 앉았다. 첫 기차로 떠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
처럼, 또는 새벽 기차로 방금 도착해 통금 해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달근은 5시가 넘어 대합실이 다시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 뒤에야 일어
났다. 그것도 대합실 의자 하나를 다 차지하고 누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역원이 발길로
의자를 걷어차며 깨운 뒤의 일이었다.
"일찍 일났던가 베. 그라믄 날로 깨우잖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인철을 보고 그렇게 말한 달근이 한 번 길게 기지개를 켠 뒤에 몸을
털고 일어섰다.
"어디 가서 해장국이나 먹자꼬, 저쪽 광복동 있는 데로 가믄 먹을 만한 해장국집이 있을끼
라."
방금 생각해냈다기보다는 그 나름의 한 끈에 이어진 어떤 계획표에 무심코 따르는 것 같
았다. 무엇보다도 대합실을 떠나게 되는 게 반가워 인철은 얼른 따라나섰다.
달근은 버스 정류장 둘은 지날 만한 거리에 있는 어떤 해장국집으로 인철을 데려갔다. 나
중에 보니 국제시장 초입쯤 되는 곳으로 근처에서는 제법 알려진 곳인 듯 새벽인데도 손님
이 꽤나 많았다. 그런데 그 해장국집에서 보여준 달근의 행태가 또 재미있었다.
"할무이요, 여 해장국 하나 잘 말아주소."
앞장서 들어가 자리를 잡은 달근이 큰 소리로 그렇게 주문하자 음식을 나르던 아주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은 둘인데 우ㅉ 해장국은 하난교?"
"속이 쓰려 글쿠마. 다 먹지도 몬할 거 하나이 한 그릇씩 씨게봐야 글코- 숟가락이나 두
개 얹어주소."
달근이 그렇게 태연스레 대답했다. 인철은 정말로 그가 한 그릇만 시켜 둘이서 먹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해장국이 나오자 달근이 인철에게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내는 인제 돈이 다 덜어져 해장국값 물 것도 없다. 돈 없는 기 우째 끼니마다 온 상 받을
생각을 하겠노? 니나 옳게 무라."
"그렇게야 어떻게... 돈은 나한테 좀 남은 게 있으니까 박형도 하나 사키지, 그래."
"사람이 절타 카이. 그래도 내 말 몬 알아듣겠나? 돈이라 카는 거 그렇게 함부로 퍼매삐리
는 기 아이다. 더구나 니 하는 꼬라지 보이 앞으로 돈이 얼매나 필요할지 모리는데."
"그럼, 박형은?"
"바둑이 구무마다 수라꼬, 다 사는 수가 있다. 내 안 굶을 테이 걱정 말고 먼저 무라꼬."
달근이 그렇게 태평스레 대답해놓고 해장국에 양념까지 끼얹어주었다. 그리고 인철이 먹
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는 게 마치 자상스런 형 같았다. 해장국은 입에 맞았지만 인철은 아
무래도 혼자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달근의 눈이 쉴새없이 해장국집 안을 곁눈질하고
있음을 알아보고서야 짐작가는 데가 있어 비로소 제대로 국물을 떠넣을 수 있었다.
술꾼들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도 적당하게 마신 술꾼들만은 아니었
다. 개중에는 간밤에 지나치게 마셔 용케 거기까지는 찾아와도 도저히 해장국을 넘기지 못
하는 축이 있기 마련이었다. 겨우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하다가 찌뿌린 얼굴로 물러앉는
사람에 숟가락 조차 담가보지 못하고 국물만 겨우 몇 모금 마신 뒤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
다. 달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기차칸에서 인철에게 그랬듯 공손
하게 양해를 구하고 남긴 것을 물려받는 식인데, 그날 그는 그렇게 해서 겨우 숟가락을 대
고 만 해장국을 두 그릇이나 걷어 먹었다.
"우짜겠노? 당장 점심부터 끼니가 어데 있는제 모리는데 생길 때 마이 묵어놔야지."
해장국집 주인 할머니나 상 나르는 아주머니나 못마땅한 눈길로 보았지만 달근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돈 내고 먹은 사람보다 더 당당하게 이쑤시개까지 챙겨 물고 그 집을 나와
서는 때아닌 수박 타령이었다.
"고기 쪼가리를 너무 조 묵었나? 우째 속이 니글니글하네. 여름 같으믄 청과 경매하는 데
가서 수박을 실컨 묵을 수 있을 낀데..."
"청과 시장에 아는 사람 있어?"
"어디. 글치만 수박은 얼매든지 조 묵어낸다. 실꼬 오다가 익어서 지절로 터진 거, 차에서
내루타가 깨진 거- 그걸 산데미같이 처매삘어 놨다꼬."
그 기묘한 길동무가 다음으로 인철을 데려간 곳은 거기서 멀지 않은 용두산공원이었다.
"니 사십 계단 가봤나? 왜 유행가에 '사십 계단 청춘배에 국제시장 나그네' 카는 그 사
십
계단 말이라. 거다서 낼따보믄 부산 시장 중앙통이 훤히 빈다. 함 봐두는 것도 괜찮을 끼
라."
그렇게 용두산공원을 구경시킨 그는 다시 한 시간이나 인철을 끌고 광복동을 돌아다녔다.
처음에 인철은 그것도 그 방면의 선배 틴가 싶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 사이 해가 높이
솟자 비로소 달근이 제법 깊이 있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침 일찍부터 삐쭉 찾아가 일자리 달라 카믄 반가워하는 사람 없다. 그래서 시간 죽인다
꼬 일부러 여기저기 돌아댕긴 기라. 인자 시간도 엉간히 됐고 하이 내하고 함 둘러보자. 니
도 글치만 어차피 나도 몇 달 밥 빌어물 데를 찾아야 하고... 어지간하믄 같이 지낼 곳이 있
었으믄 좋겠다마는."
그런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은 토성동으로 올라가는 쪽의 어떤 중국집이었다. 전에 있던 곳
인 모양인데 그를 맞는 주인은 그리 호의적이 못되었다.
"배달하는 놈이가 있다. 그래고 사람이 없다 캐도 니는 몬 믿겠다. 일좀 한다 싶으믄 배달
통 팽기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뿔 낀데 그 낭패를 우예노?"
그래도 달근은 별로 무안해하는 법이 없었다.
"갑자기 집에 일이 있어서요. 그래도 배달통에 쪽지는 안써놨습디꺼? 수금한 거 내 반달
치 월금 치고 차비해 간다꼬요."
"그것도 글타. 이미 지난 일이지만 수금한 돈은 수금한 돈이고 월급은 월급이라. 무신 일이
있었는지 몰따마는 돌아와 내 얼굴 한번 보고 떠나는 기 그리 힘들더나?"
"알았십더, 알았심더. 구라믄 내는 글타 치고 야 함 써보이소. 야는 일 잘할 낍니더."
"니하고 무슨 관곈동 몰따마는 우리는 사람 있다 안카나? 그리고 짜장면 배달이라는 거 고
등학교까지 댕긴 하이캘래가 할 일도 아이고."
두 번째는 역시 그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어떤 떡방앗간이었는데 대접은 중국집보다 별
로 낫지 않았다. 세 번째가 어떤 잡화점, 네 번째가 간판집이었으나 대접은 역시 비슷했다.
주인들이 공통적으로 못 미더워하는 것은 달근이 진득이 배겨내지 못하는 점이었고, 그 다
음이 게으름이었다. 둘에 한번은 튀어나오는 '차비' 문제도 달근 자신의 생각보다는 나쁜 인
상을 준 듯했다. 달근은 제 받을 만큼만 가져갔다고 믿고 있었으나 주인들은 한결같이 그만
큼 횡령당한 걸로 여기는 눈치였다.
인철을 거절하는 이유도 여러 집이 다 비슷했다. 하나같이 인철이 입고 있는 교복을 보고
머릴 저었는데 그것도 급료와 관계가 있어 보였다. 달근이처럼 먹이고 재워주고 잡비 몇 푼
주는 정도로는 안 되겠다고 지레짐작한 것 같았다.
그래도 달근은 기죽지 않고 오후에도 세 군데를 더 데리고 갔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집
은 한군데도 빠뜨리지 않고 다 돈 것 같았다. 한군데 보수동 쪽의 서점은 인철도 마음이 끄
릴는 곳이라 용기를 내어 매달려 보았지만 불행히도 달근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달근이
제 발로 찾아들어 넉살을 떠니 그렇지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더라면 멱살이 잡혀도 단단히
잡혔을 것이란 추측이 들었다.
"그 참, 이상하네. 요새는 일자리 얻기가 와 이리 어려버졌노? 차비도 글네. 일하다 보믄
갑자기 모든 기 딱 싫어질 때가 있다꼬. 누가 부르드키 집에 가고 싶어지고... 그때 집에 간
다꼬 칼 낯이 없어 말 몬 하고 잽히는 대로 몇 푼 차비해간 거뿌인데. 내가 어디 훔치갔나?
내는 또 글타 치고오- 니 일이 더 이상타. 쪼매라도 더 배웠으믄 그만큼 부리기 좋을 낀데
하나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네."
해가 기웃해서야 겨우 단념한 달근이 멋쩍은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
다가 겨우 원인을 생각해냈다는 듯 말했다.
"니 다른 옷 없나? 교복말고... 낼부터는 딴 옷 입고 함 돌아댕기봐라. 그래고- 내하고 댕기
는 것도 글타. 동냥은 주지 못해도 쪽백이는 깨지 마라꼬. 내하고 댕기는 기 니한테는 도로
시 해로븐 거 같다. 그러이 내일부터는 니 혼자서 댕기미 일자리를 찾아봐라."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인철의 마음 한구석에는 달근에 대한 마뜩찮은 의심이 남아 있었
다. 그의 그런 친절이 어딘가 지나치고 과장된 데가 있어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듯 느껴졌
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남아 있는 몇백 원과 옷 몇벌에 책 몇 권이 전부인 가방이었지만
그래도 인철이 더 많이 가진 쪽이라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심도 부끄러움으로 거두어야 할 때가 왔다. 국제시장 그석에 그때껏 남아 있
던 꿀꿀이죽집에서 꿀꿀이죽으로 늦은 점심을 때울 때였다. 달근은 그때도 기어이 한 그릇
만 시키게 했다가 인철의 약한 비위가 난생 처음 먹어보는 그 괴상한 음식의 역한 냄새를
견디지 못해 한술도 드지 못하자 그걸 물려받아 달게 비운 다음 말했다.
"소똥도 층하가 있다 카디 참말로 그런가 베. 다 같이 떠댕기는 처지라도 니하고 내하고는
뭐시 마이 다르구마는. 나는 길동무 할라 캤디 영 아이라. 니 길은 암만캐도 내하고 다른 거
같다꼬."
그러다가 전날의 장거리 여행과 역 대합실에서의 새우잠, 그리고 그 날의 시내를 한바퀴
걸어서 돌다시피 한 구직길에 지친 인철이 다시 여인숙 얘기를 꺼내자 아무 미련 없이 결별
을 선언했다.
"맞다. 니는 어디 가 푹 쉬고 니대로 길을 함 찾아보라. 내는 이쯤에서 따로 가볼란다. 니
따라댕기봐야 니 신세밖에 더 지겠나? 보이 니도 여비 몇 푼 있다 카지마는 어시 넉넉하지
는 않은 거 같고오... 자리잡을 때까지 애기써야제. 나는 우짜든지 니한테 신세진 거나 쪼매
갚아볼라칸 거뿌이라."
그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그가 가르쳐준 여러 가지 살이의 기술도 실습할 기회는 끝내
없었지만 인철의 기억에는 강렬한 인상으로 오래오래 남게 될 길동무였다.
"니나 내나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으이 연락이나 할 데가 있겠나? 자리잡거든 용두산공원
에서 한번 만내자. 다음달 첫 일요일 12시에 사십계단 밑으로 나온나. 그때는 서로 연락처가
생기겠제."
헤어질 때 달근은 그렇게 말했고 인철도 그 약속을 기억했으나 결국 나가지 못했다. 어렵
사리 얻은 일자리에 그날따라 주인이 유달리 바빠 몸을 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요일 그는 약속한 장소로 나왔을까- 나중 상당히 나이가 든 뒤까지도 인철은 가끔씩 그
묘한 길동무의 철저하게 조화되지 못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곤 했다.
제 45 장 늪에서 늪으로
"또 나가볼 거야?"
영희가 방을 나서는데 자는 줄 알았던 혜라가 영희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영희를 보
는 눈길에 그저 안됐다는 느낌을 넘어 무엇인가 딱해하는 빛까지 어려 있었다.
"으응. 한바퀴 돌아올게."
영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그녀가 무엇을 딱해하는지 알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만이야."
그러자 혜라가 몸을 일으키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정말이지? 오늘만 찾아보고 이제 그만두는 거지?"
"그렇다니까? 나도 그만 염치는 있어. 더는 신세 안 질게."
"신세를 지고 안 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잊을 건 빨리 잊어.
그 몸뚱이 당장 죽이지 못하고 앞으로 몇십 년은 더 끌고 가야 할 거라면."
혜라가 그러면서 머리맡에 있던 핸드백을 끌어 백원짜리 몇 장을 내놓았다.
"이걸루 차비해. 끼니때 맞춰 밥 사먹는 거 잊지 말고."
그럴 때 혜라는 되바라진 동갑내기가 아니라 십 년은 손위인 언니 같은 데가 있었다.
'이런 게 사람의 정이로구나-'
영희는 문득 시큰해오는 콧등을 가만히 감싸쥐며 사양했다.
"돈은 안 줘도 돼. 그저께두 삼백 원 줬잖아? 그거 아직 절반도 더 남았어."
"그럼 이틀이나 돌아다니면서 백 원밖에 안 썼단 말이야? 것봐.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보
나마나 하루종일 빈속으로 이만 바득바득 갈로 다녔겠지."
혜라가 이제는 완연히 나무라는 말투가 되어 눈까지 하얗게 흘겼다. 묘하게도 영희는 그
눈흘김이 진정으로 겁이 나 다급한 변명조가 되었다.
"아냐. 어제 점심엔 우동 먹었고 그저께도 먹을 건 다 챙겨 먹었어. 너 나 잘 알잖아? 속상
하면 더 많이 먹는 거."
"지금의 너는 옛날의 네가 아니니까 그렇지. 어쨌든 이거 가지구 가. 길바닥에 쓰러지기 전
에."
혜라가 돈을 영희 앞으로 밀어놓고 다시 드러누웠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루 자야지, 하는
태도였다. 영희는 하는 수 없이 돈을 집어넣고 방을 나왔다.
밖은 눈이 부시게 맑은 가을날이었다. 노란 가로수 잎 위로 펼쳐진 하늘이 티 한점 없이
푸르렀다. 하지만 그 전날까지도 질척한 늦장마에 갇혀 있던 영희의 마음은 갑자기 엉뚱한
계절로 불려나온 듯 그런 날씨가 낯설었다.
'오늘은 어디를 찾아보지...'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면서 영희는 조금 막막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껍질뿐인 미장원을 정리하고 혜라의 셋방으로 옮기고 난 뒤 영희는 한 열흘 내
리 잠만 잤다. 무리한 인공 유산의 후유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창현의 냉혹한 배신
으로 여지없이 허물어져내린 정신이 그녀를 손끝 하나 까딱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슬러 일어나 찾아나선게 창현이었다.
영희는 지난 열흘 내내 낮 동안은 충무로와 명동을 무턱대고 헤매고 오후 늦어서부터는
창현이 다녔거나 다닐 만한 밤업소를 돌고 있었다. 면밀한 추적이라기보다는 막연한 조우의
기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날은 자신의 그 같은 일정마져 왠지 무모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
기 시작했다.
'너무 미련스런 짓이었는지도 몰라. 내가 깨어나면 자기를 찾아나설 걸 뻔히 알면서 그
바
닥을 어슬렁거릴 새대가리가 어딨겠어?"
하지만 달리 창현의 자취를 찾아볼 만한 곳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영희는 새삼 자신이
창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은 것이 있다면 수원의 본집과
단골로 다니던 악기상겸 수리점이었는데, 그곳이야말로 아직은 창현이 나타날 곳이 아니란
단정으로 미루고 있었다.
'그래, 오늘 하루만 더 충무로를 돌아보자. 그래도 안 되면 내일 수원으로 가보는 거다.
아
직은 남은 돈이 있을 테니 밤업소에 나가기 위해 그인간이 악기상을 들어야 할 일은 없을
테고.'
마침내 마음을 그렇게 정한 영희는 전날처럼 충무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충무로에 이른 영희는 전날처럼 먼저 김감독이 가끔씩 나타난다는 영화사 사무실부터 들
렀다. 소속사니 제작자니 하는 말은 모두 빈말이고 그저 김감독이 옛날에 조감독으로 따라
다니며 찍은 영화 중에 몇 편을 그 영화사가 제작했다는 정도가 김감독과 그 영화사가 맺고
있는 관계로, 김감독이 가끔씩 나타난다는 것도 그 손바닥만한 사물실 소파에 앉아 여직원
의 눈총을 받으며 담배나 몇 대씩 피고 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영희는 지난 열흘 동안 두 번 김감독을 만났다. 처음에는 영희가 창현을 찾는 목적을 잘
몰라선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만 했다.
"글세, 어떻게 다듬으면 될 만도 하다 싶어 몇 번 연기 지도를 해봤는데 요즘 갑자기 통
뵈지를 않네..."
그러다가 두 번째 만난 영희에게서 대강의 얘기를 듣고 나자 태도가 싹 바뀌었다.
"그렇담 그런 쌔끼한텐 아예 기대 끄슈. 실은 연기의 연자도 안 통하는 순 형광등이었소.
거기다가 웬 허영은 또 그리 많은지. 곧 죽어도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사람을 어거지로 졸
라대니. 그저 뭐든지 돈으로만 우기려 들고... 그래도 나는 돈푼깨나 있는 집 망나닌 줄 알았
는데 그게 그랬단 말이지. 알겠소. 대강 일이 어떻게 됐는지. 그 새낀 아마 이 바닥에 다시
는 얼굴 내밀지 않을 거요. 실은 한 달포 전에 내가 따끔하게 한마디 해줬소. 영화 예술이란
게, 특히 연기란 게 감독들한테 푼돈 몇 푼 뿌리고 다니는 걸로 되는 게 아니라구. 스타는
먼저 자신이 자신을 빛나게 갈고 닦아야 한다고. 게다가 아가씨에게 그런 몹쓸 짓까지 해놓
고 어떻게 이 바닥에 두 번 다시 얼씬할 수 있겠소?"
그날 영희가 다시 김감독을 만나보려 한 것은 그래도 창현을 알고는 있으니 혹시라도 창
현의 다른 알음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화사 사무실의 분
위기가 이상했다. 김감독을 찾자 총무라는 젊은이가 짜증부터 냈다.
"몰라요, 그런 사람. 이제부터 여기 와서 그 친구 찾지 마슈.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한다구.
갈 데 없어 빌빌거리길래 여기 와 몇 시간씩 죽치는 거 봐줬더니... 못된 자식, 남의 영화사
나 팔아 사기나 쳐먹구. 그 친구하고 무슨 관곈진 모르지만 딴 데 가서 알아보라구요. 우리
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돌아서는데 웬만한 감정은 마비되어버린 영희에게도 두 번 다시 말을 붙여볼 마음
이 안 날 만큼 찬바람이 돌았다. 그저 멍하기만 한 머리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늠하
고 있을 때 나이 어린 경리 아가씨가 영희를 동정하듯 말했다.
"누구한테 사기치다 된통 당했다나봐요. 경찰이 우리한테 뭘 자꾸 물어 골치 아파 저러는
거예요."
그녀는 영희가 김감독의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것으로 아는 듯했다. 그러나 영희는 창
현과 이어진 마지막 선 하나가 무참히 끊어지는 느낌만 받았을 뿐, 그 일이 바로 창현과
연관된 것인지는 짐작조차 못했다.
영화사를 나온 영희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많이 묵는다는 태화 여관으로 갔다. 싸구려 작
가들이 거기서 일주일 혹은 두 주일 만에 이른바 '고무신영화' 시나리오를 급조하는데, 그래
서인지 감독이나 배우 지망생들도 자주 드나든다는 말이 있어 영희가 들르게 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기는 영화사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따라 여관은 괴괴하
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다고 문을 두드려가며 물어볼 만큼 영
희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희는 맥도 빠지고 해서 근처의 다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영화 관계자들이 많이 드나든
다는 다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기대를 했다기보단 임신 중절 수술 뒤에 쉬
이 지쳐오는 몸을 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영희는 거기서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자릿값으로 차 한 잔을 시켜 마시려는데 입
구 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언젠가 창현이 후배라며 데려온 적이 있는 청년이었다. 무
엇 때문인가 기세 좋게 들어오던 그도 영희를 보자 흠짓했다. 영희가 겨우 그의 이름을 기
억해내 큰소리로 불렀다.
"저 박운규씨, 잠깐 뵈올 수 없을까요?"
그러자 금세 돌아설 듯하던 박이 마지못한 듯 다가왔다.
"저요? 저 말입니까?"
"그래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누구시더라?... 아, 형수님 아니십니까?"
박도 영희를 기억한 듯하지만 형수님이란 말에는 어딘가 어색해하는 듯한 여운이 있었다.
"이리 와서 차 한잔 해요.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영희가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박을 끌어다 앉혔다.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기는 했
지만 죽을 죄는 지은 적이 없다는 듯 박도 곧 평정을 회복했다.
"차암 안됐슴다. 나도 일이 그리 될 줄 몰랐어요."
박이 담배에 불을 붙여 물더니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의 과장된 말투가
아니라도 창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뭐가요?"
"나는 그 형이 그저 맘 좋은 물봉인 줄만 알았지, 그리 모진 대가 있는 줄은 또 몰랐다구
요. 하긴 김감독도 심했지..."
아직도 박은 영희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줄 믿는 눈치였다. 온전할 때의 영희 같으면
그런 그의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
고 있음을 털어놓고 바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창현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그제서야 박이 어리둥절해하는 눈길이 되어 영희를 보았다.
"그럼 형수씨는 엊그녁 일 전혀 몰라요? 그 일 때문에 여기 나오신 거 아닙니까?"
"저 창현씨 못 본 지 벌써 한 달 다돼가요."
"그래요-"
거기서 잠시 혼자 잔머리를 굴리는 듯한 표정이던 박이 다시 과장스런 한숨과 함께 말했
다.
"그게 말임다- 어제 저녁에 그 형이 김감독을 찔렀대요. 맥주홀에서 병을 깨가지구... 김감
독의 얼굴이며 배를 막 그어버렸다는 것 아닙니까."
"왜요?"
"형수님도 대강 짐작은 하실 텐데. 말하자면 김감독이 사기쳤다는 거죠. 둘이서 술을 마시
다가 갑자기 사기쳐먹은 돈 내놓으라구 그러더니. 그대루..."
그러면서 박이 슬쩍 영희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창현에 대한 영희의 감정을 가늠하지
못해 편한 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걸 알아차린 영희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펴엉신 쌔끼, 놀구 있네. 누가 누굴 보고 사기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어요. 저버너에 말이에요. 고 악종하고 함께 와서 절 만나신 적 있
죠? 카메라 테스튼가 뭔가 했다는 날 말이에요..."
"악종이라면- 그 형 말입니까? 그랬죠. 그런데..."
아직도 사태가 명확하게 가늠되지 않는지 박이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날 어떻게 된 거예요? 김감독이 주인공으로 써주겠다고 했어요? 영
화사 사장도 거기 나왔구요. 뭘 따지려는 게 아녜요. 사실만 알면 된다구요."
그제서야 박도 창현과 영희 사이가 짐작이 된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정
한 듯 말했다.
"실은 그게 말임다. 저 그날 그 형하고 처음 인사 텄어요. 그전엔 배우 학원과 영화사 신인
모집하는 데서 몇 번 부딪쳐 서로 눈인사나 하는 사이였다구요. 그런 그날 인사 트자마자
그 형이 점심을 한턱 잘 쓰고 부탁하더군요. 형수님한테 가오(낯, 체면) 세울 일이 좀 있다
면서 함께 가달라구 하데요. 그래서 연기 연습하는 셈 치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저에 대해서 뭐라고 했어요?"
"돈 많은 집 딸인데- 잠시 도움을 받고 있다구..."
"그러지 말고 들은 대루 말해주세요."
박이 어딘가 우물거리는 듯한 데가 있어 영희가 다잡아보았다. 박도 하기야, 하는 표정이
되어 시원스럽게 말했다.
"지 모찌방(얼굴)도 모르고 자기를 죽자사자 따라다니는 골빈 여잔데, 나중이 골치라고. 스
타만 되면 차버릴 작정이라나..."
"뭐야? 그 쌍놈의 새끼가?"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다가 박의 긴장하는 표정을 보고 퍼뜩 목
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어요. 김창현, 그 인간 이 충무로 바닥에서는 어떤 인간이었어요?"
"이왕 다 털어놓은 거 바로 말하겠슴다. 내가 일기로는 이번 봄부터 충무로 바닥에 혜성처
럼 나타난 물봉이라구 할까- 이 충무로 바닥에서 감독 비슷하게 생긴 사람치고 그 사람한
테 한턱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영화사도 어지간히 기웃거렸고, 그러다가 결
국은 김감독하고 단짝이 되어 붙어다녔는데..."
"그럼 김감독이 그 새끼 단물 다 빨아먹은 거예요?"
"그건 꼭 그렇지도 않슴다. 처음에는 김감독이 걔 돈으로 입뽕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
었던 모양이지만 걔가 그만한 큰돈은 없다는 걸 알자 포기했다구요."
어느새 박은 창현을 걔로 부르고 있었다.
"그럼 단짝으로 붙어다녔다는 건?"
"그저 만나면 좋은 소리 해주고 술밥이나 넉넉히 얻어먹은 정도죠. 그런데 이제 보니 갠
김감독이 뭘 해줄 줄 알았던 모양이죠. 실은 그 김감독도 이 바닥에선 아무도 믿어주는 사
람이 없어 영원한 조감독 신센 줄 모르고..."
거기까지 듣고 나니 알 건 다 알았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궁금함이 있어
한마디 더 물었다.
"그래, 지금 어떻게 됐어요?"
"뭘요? 아, 어제- 김감독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걘 튀었어요. 아마 지금쯤은 멀리 날랐겠죠.
지금 달려(잡혀)가면 한 몇 년은 곱게 살아야 할 테니까. 결국 이 바닥도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할 거구요."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창현 역시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과 그 또한 불행해졌다는 게
영희에게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런 덜떨어진 인간에게 자신이
그토록 모질게 당했다는 게 더욱 이가 갈렸다. 눈앞에 있다면 핸드백에 숨겨온 미장원용 면
도칼로 당장에 천토막 만토막 내버릴 것 같았다.
"괜... 찮으세요?"
영희의 얼굴빛이 어쨌는지 박이 겁먹은 눈길로 영희를 살피며 물었다. 영희는 그런 박을
향해 분별 없이 쏟아지려는 분노를 억누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을 길게 내쉬고
나니 화가 조금 가라앉았으나 박을 그냥 보내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이봐요."
"네?"
"댁에서는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남의 들러리를 설 때는 앞뒤를 재보고 서세
요. 자칫하면 영문도 모르고 자기 배창자 쏟아지는 꼴 구경하는 경우가 생겨요."
"네?"
"그리고 혹시라도 그 인간 만나게 되거든 꼭 전해주세요. 앞으로 말예요, 제 명대로 살고
싶으면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고. 아시겠어요?"
영희는 그래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희에게서 쏟아지는 표독스런 살기 같은 것에 질렸
는지 박은 제자리에 엉거주춤 앉은 채 영희를 쳐다보기만 했다.
영희가 그 길로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아 수원행 버스에 오른 것은 거기서 창현을 만나기
위함보다는 또 다른 결별의 의식이 필요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범법의 세계를 깊이 알
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수배를 받는 피의자가 뻔한 연고지인 자신의 집으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영희도 알고 있었다.
마침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 영희가 수원에 이른 것은 점심나절이었다. 창현의 집은 그새
셋방을 옮겼으나 영희는 전보다 쉽게 찾아갈 수가 있었다. 친척집에 집세도 안 내고 얹혀지
내다시피 하다가 쫓겨나 식구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 그곳에 두 칸 전셋방을 얻어
준 게 영희였기 때문이었다.
마침 점심상을 받고 있던 창현의 어머니와 누이가 눈에 띄게 허둥대며 일어나 영희를 맞
았다.
"왔니? 너... 왔어?"
창현의 어머니는 애써 침착을 가장했으나 목소리는 어딘가 떨리는 데가 있었다. 그 동안
서너 번이나 다녀갔고 한때는 여느 시어머니나 며느리보다 더 다정하게 연출되었던 사이라
잠깐 영희는 혼란에 빠졌다. 억지로 익혀 더 머릿속 깊이 경외의 감정과 창현에게서 이전된
애증이 갑작스레 충돌한 탓이었다.
"네."
영희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으나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그새 좀더 침착을 회복한 창현의 어머니가 말했다.
"앉아라.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한술 뜨자."
이번에도 영희는 거의 반사적으로 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너무나도 태연한 응대가 비로소
희미한 반감과 적의를 일으켰다.
"지금 밥 먹을 기분 아니에요."
영희가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하자 다시 창현의 어머니가 허둥대기 시작했
다.
"그렇겠지. 그래. 하긴 우리도 다 먹었다. 상 물리자."
그러다가 갑자기 애매한 창현의 누이동생을 몰아댔다.
"넌 뭐 하는 겨? 밥 다 먹었으면 싸게 상 물리고 공장에 돌아가보지 않고."
창현의 누이동생도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거북한 자리에서
빠져나가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싶은지 군소리 없이 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창현의 누이는 잠시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다가 바로 집을 나갔다. 부엌 쪽이 조용해진 뒤
에도 영희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동안 방안은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그 침묵을 못 견뎌 먼저 입을 연 것은 창현의 어머니였다.
"너희들 헤어졌다며?"
그제서야 영희도 할말이 떠올랐다.
"창현씨 다녀갔꾼요. 어제 저녁이었어요?"
"그래. 통금이 다돼 뛰어들어와 사람 혼을 다 빼놓고 되돌아나갔다."
"어떻게 된 거래요?"
"낯이 백지장처럼 되어 사람을 죽였다며... 정말 어떻게 된 거여? 니는 아능 겨? 너 이제
창현이 그리 됐다구 막보고 나오는 겨?"
갑자기 사투리를 쏟아내며 옷깃으로 눈가를 훔치는 게 어머니의 정은 마찬가지인 모양이
었다. 그러나 영희에게는 그게 작은 감동도 주지 못했다.
"죄 받아 싸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제 눈에서는 피눈물 난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
요? 그런데 하마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였으니 눈알이 뽑힌들 누굴 탓하겠어요?"
영희가 갑자기 되살아나는 적의와 원한으로 그렇게 받자 그녀 눈길에도 파란 불길이 피어
올랐다.
"야가 시방 무신 소리를 하는 겨? 그래도 한때는 시어머니 며느리간이 었는데 이렇게 막말
해도 되는 겨? 너 이제 창현이 그리 됐다구 막보고 나오는 겨?"
그런 그녀의 성난 목소리가 오히려 영희를 편하게 해주었다. 영희는 준비해간 것이 아닌
데도 이죽거리며 받았다.
"아줌씨, 아무래도 아줌씨가 뭘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나 아줌씨하고 그런 관
계 맺은 적 없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놈의 시어머니가 있고 며느리가 있었어요? 있다면 껍
데기까지 홀랑 뱃기고 피투성이로 버림받은 골빈 년과 그렇게 벗겨먹은 사기꾼 놈하고 그놈
싸지른 에미지."
"뭐, 싸질러? 에미? 시방 너 말 다했냐?"
그런 창현의 어머니는 금방 게거품을 물고 덤벼둘 것 같은 기세였다. 영희는 그런 그녀에
게 눈 한번 깜빡하는 법도 없이 핸드백을 끌어당겨 조용히 버클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서 접는 면도칼을 꺼내 천천히 날을 펼쳤다.
"아줌씨, 이 면도칼 말이에요. 이발소나 미장원에서 면도하는 데 쓰는건데 일제라 날이 아
주 잘 들어요. 조심하셔야 돼요."
그래놓고 왼손을 들어 그 날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금세 사납게 덤벼들 듯하던 창현의 어
머니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멈칫했다. 영희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듯 자신의 말을 계속했
다.
"알맹이를 다 빼가 허드레 집기만 남은 미장원을 헐값으로 넘길 때 이거 하나는 남겼죠.
원래는 창현이 그 개자식 그걸 싹 도려내버리려구 했는데요. 아니, 아예 멱을 따버릴려구 그
랬는데요-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밑지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어요. 똥개 잡고
살인 물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시, 시방 어쩌겠다는 겨?"
"더러운 게 사람의 정이라고, 그래도 혹시 미련이 남을까봐 그걸 끊으러 왔어요."
영희는 그러면서 면도칼을 든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럼 시방 나한테..."
그녀가 뒷걸음을 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게거품을 물려 다가들었다.
"오냐, 그래. 니 말대루 혀라. 나도 천금 같은 자식 잃고 살 맘 웂다. 어느 천지 해매는 지
생각만 해도 뼈가 저린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창현이두 니년 만나 잘된 거 하나 웂
다. 니년 바람질에 배운지 뭔지 된다고오- 오르지도 못할 나무 바라보다 이제는 살인 누명
쓰고 쫓겨다니게 생겼다아. 밤중에 반쪽이 돼 나타나아 따슨 밥 한 그릇 못 해맥이고오- 푼
돈 몇 푼 긁어모아 줬더니 바람같이 내뺐다아. 이 일을 어쩔거나. 이 일을 어쩔 거나..."
그대로 두면 거꾸로 머리채를 희어잡고 덤벼들 기세였다. 그러나 영희는 눈 하나 깜짝하
지 않고 천천히 면도칼을 치겨들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고정하세요. 그건 댁의 사정이고-"
면도칼을 치켜드는 속도의 느림이 어떤 위압감을 준 것일까, 금세 덤빌 듯하던 창현의 어
머니가 다시 멈칫했다. 영희는 여전히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천천히 왼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면도칼로 그었다. 싸악,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영희의 왼손에 잘린
머리칼 한움큼이 남았다. 영희는 그걸 손수건에 싸 창현의 어머니 쪽으로 밀어놓으며 말했
다.
"아주머니, 이걸루 우리 모진 악연은 끝난 겁니다. 이거 보관했다가 그 인간 돌아오거든 전
해주세요. 그리구- 또 하나 전해주세요. 몸 성하게 살고 싶으면 앞으로는 먼빛으로 날 보더
라두 피해가라구 하세요. 혹시 그때 또 내 맘이 변할지 모르니 절대로 내 눈에 뜨이지 말라
고 당부해주시고요."
그리고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본격적으로 악다구니와 하소연을 시작하려는 창현의 어머
니를 무시한 채 그 집을 나왔다. 날을 접기는 했지만 아직도 꺼내들고 있는 면도칼 때문인
지 그녀도 영희를 굳이 잡아두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희가 혜라의 셋방으로 돌아온 것은 5시 조금 덜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제 막 화장을 마
치고 출근 채비를 하던 혜라가 뜻밖이란 눈으로 영희를 쳐다보았다.
"이제 출근하려구?"
영희가 담담히 그런 혜라에게 물었다.
"응, 그런데 너 오늘은 일찍 돌아왔네. 무슨 일 있었어?"
"내 말했잖아 오늘로서 끝이라구. 그런데 말이야, 니네 보살 마담..."
"보살 마담이 왜?"
혜라가 반가움으로 눈빛까지 반짝이며 물어왔다.
"내가 다시 찾아가면 이제는 받아줄까?"
"뭐. 너도 이쪽으로 오려구?"
혜라가 다시 그렇게 물었으나 반대의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왕이면 네 말마따나 나두 큰물에서 놀고 싶어. 오늘 가거든 보살 마담한테 한번
얘기해봐. 다른 누구보다 화끈하게 나를 팔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해줘. 그리고 낼 당장이라
두 일 나갈 수 있다는 것두. 알았지?"
영희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여행용 트렁크를 끌어당겨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핸드백에
서 면도칼을 꺼내 트렁크 바닥 깊숙한 곳에 감추었다.
제 46 장 종장
동네골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일 년 중에 가장 큰 행사가 되는 운동회도 해가 기웃해지면
서 조금씩 시들해졌다. 운동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대항 마라톤의 선두 그룹이 운
동장으로 들어선 뒤부터였다.
해마다 그렇듯, 그해도 삼곡까지의 20리 국도를 왕복하는 그 마라톤의 우승자는 두들마을
뿐만 아니라 장터 사람들에게도 낯설었다. 그런 사람이 언제 이 면에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만난 적이 드문 담배 농사꾼이 고무줄로 검정 고무신 밑창과 발등을 동인 채 뛰어 두 시간
남짓에 결승골로 들어선 것이었다. 여름내 농사일에 그을어 새까만 피부에는 왕복 40리를
달려온 사람 같지 않게 땀 한 방울 내비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자신에게서 당수를 배운 청년 몇이 마을 대표로 출전한 터라 명훈도 그 마라톤에는 적잖
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로 고등공민학교의 젊은 교사와 앞서거니뒤서거니
들어오는 서넛 속에서도 자기가 찾는 얼굴이 없자 명훈은 천천히 결승점 부근을 떠났다. 자
기에게 당수를 배운 녀석들이 우승을 한댔자 특별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도 명색 운동을 했다는 것들이 6등 안에도 하나 못 들었다는 게 약간은 서운했다.
이웃 다른 면에서 흘러든 건달 몇에게 시비를 걸어 텃세 반 주먹 솜씨 반으로 그들을 제
압한 기분에 우쭐해 몰려다니던 상두네 패거리가 술이 꼭지까지 돌아 흔들거리다가 명훈을
잡고 늘어졌다.
"형님, 어디 갈라꾜요?"
"응. 이젠 돌아가야지. 운동회도 이만하면 파장이고..."
"뭐라 카시이꺼. 이제 시작인데요. 참, 형님, 명양 아이들 여다 들어온 거 아이꺼? 글쎄 글
마들이 여덟 놈이나 떼싸리를 지어 왔더라 카이요. 여어가 어디라꼬."
상두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보고 삼아 말했다. 담배를 삐딱하게 물고있는 게 평소의 그
몸둘 바 몰라하는 듯한 공손함에서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게 거슬려 명훈의 목소리가 절
로 엄해졌다.
"다른 면 애들 오는 거 그렇게 너무 몰아대지 마. 너희들은 걔들 운동회에 안 갈 거야? 똥
개 텃세하는 것두 아니구. 게다가 보니 술도 어지간해. 더 길게 끌다 괜히 남 보는 데서 창
피당하지 말고 이제 그만 돌아들 가."
"햐, 형님이 참 일타(이렇다)카이. 우리를 어데 물렁콩죽으로 보이껴? 걱정 마소. 글마들도
하마 선매(세워놓고 때리는 것) 몇 대 쥐박고 화우(화해)했니더. 저어쪽에서 오히려 저그 운
동회 놀라 오라 카디더."
취한 중에도 명훈의 굳은 표정은 보이는지 상두가 조금 조심하는 말투가 되어 받았다. 명
훈은 그런 상두와 그 패거리들에게 한 번 더 따끔하게 주의를 준 뒤에야 돌아섰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큰 구경거리에 골짝골짝에서 나온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져가고 있었
다. 돌아갈 길이 먼 처녀 아이들은 저물기 전에 돌아가기 위해 미진한 마음을 촌스런 키들
거림으로 감추며 교문 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몇 잔 걸친 술기운으로 숫기가 살아난 이웃
마을 총각들은 또 그런 처녀애들을 노려 뒤따라갔다. 대여섯 발자국쯤 뒤에서 공연한 히히
거림과 허풍으로 떠들썩하게 처녀애들을 뒤따르는 총각 아이들을 보면서 명훈은 문득 자신
이 늙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옥경이 오빠요, 옥경이 오빠."
교문께에 대여섯 그루 늘어선 오래된 수양버들 그늘을 지나는데 누군가 명훈을 불렀다.
해맑은 여자 목소리라 저도 몰래 가슴을 두근거리며 돌아보니 버드나무 그늘에 차일을 치고
국밥장사를 벌인 작은 신씨의 아내였다. 목소리만큼아니 상냥하고 고운 여자여서 볼 때마다
볼품없는 작은 신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다 와서 국밥 한 그릇 말고 가이소. 막걸리도 있심더."
발길을 멈칫하고 돌아보는 명훈에게 그녀가 상글거리며 한 번 더 불렀다.
안 본 지가 여러 날 되는 데다 끝도 그리 좋지 못하게 헤어진 셈이라 그녀의 부름이 뜻밖
이다 싶을 정도였다.
하씨와 김씨가 떠난 뒤에도 남아 있던 세 가족이 명훈네를 떠난 것은 가을걷이가 다 끝나
기도 전이었다. 그들은 큰 신씨의 말대로 일껏 지은 배추 농사를 끝도 보지 않고 푸나물
상태로 싸게 넘긴 뒤 각기 제 갈 길을 가버렸다. 큰 신씨는 울산으로 돌아가고 부뜰이네는
부산으로 떠났다. 단 한 집 작은 신씨네가 장터로 옮겨 돌내골에 남았으나 개간지를 떠나기
는 마찬가지였다. 그 봄 명훈의 새로운 희망으로 나타났던 그들은 절망만 확인시켜주고 떠
난 셈이었다.
그들에게 걸었던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혐의도 턱없었다.
"무극이라 카는 거는 천지의 시작이고 끝인 기라. 무극이 태극이되고 태극은 음양으로 갈
라져 팔괘를 만들면서 천지는 복잡해지고 서로 뒤얽히게 되지만 결국은 다시 무극으로 수합
될 끼라 이 말이라요. 또 지금 세상이 어지러븐 것은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서로 안 맞아 삐
그락거리는 긴데 무극대도가 열리믄 모든 게 지자리로 돌아가고 뒤틀린 거는 바로 피지고
(펴지고) 얼킨 게 풀릴 깁니더. 이 산술을 풀어나가는 게 한울님이고요. 뭐, 그런 긴데 우리
도 어시(별로) 마이 알지는 몬합니더. 고향에 있을 때 한 도사 선생님이 배워준 이치라 W
쪼매쓱 같이 공부해보기는 하지마는 맨날 지자리 곰배지예."
그들의 지도자로 지목한 큰 신씨가 언젠가 궁금해하는 명훈에게 그렇게 말해준 적이 있으
나 그때 명훈은 그가 자기들의 별난 신앙을 숨기려고 그러는 줄만 여겼다. 그런데 실제가
그랬던 것 같았다. 결국 그들은 명훈이 한때 억측했던 것처럼 종교적 신천지를 찾아온 사람
들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찾아온 실향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대를 걸고 찾아왔던
땅이 그들을 외면하자 그들 또한 비정하게 돌아서버렸을 뿐이었다.
"막걸리나 한잔 주십쇼."
차일 밑 가마때기에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명훈이 말했다. 작은 신씨의 아내가 살풋
눈을 찌푸려 명훈을 흘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구, 우째 그리 아던(알던) 정 보던 정 없는교? 우리가 여기 국밥솥 건 거 다 알면서
점심은 어디 가서 잡샀능교?"
그러면서도 손을 잽싸게 움직여 동그란 알루미늄 상에 술과 안주를 얹어냈다. 빡빡하게
뜬 개장국에 정갈하게 담은 포기 김치. 그리고 양념 종지와 금세 썬 돼지고기 수욱이 꽤나
먹음직스러웠다. 점심은 소위 지방 유지라는 이들과 명양옥에서 그럴듯하게 먹은 명훈이었
으나 느낌으로는 그녀가 내온 상이 더 푸짐했다.
"국과 고기가 아직 이렇게 많이 남은 걸 보니 오늘 장사 아주 조진 거 아닙니까?"
명훈은 뒤이어 그녀가 건네주는 술 주전자와 대폿잔을 받으면서 물었다. 작은 신씨가 잘
쓰는 '조진다'는 말을 섞은 게 농담으로 들렸던지 그녀가 호호거리며 받았다.
"아이라예. 조지기는 왜 조져예? 벌써 점심때 개값하고 재료비는 다 나왔어예. 이거 다 팔
리믄 곱쟁이 장사가 넘을 기고 언제 안 팔리믄 남는 걸루 식구들 보신이나 하지 뭐예. 그리
고 돼지고기는 내가 일부러 쪼매 꼬불쳐논 기라예. 우야믄 파장에 귀한 손님이 올 것 같아
서예."
"마판이 안 되려면 당나귀 새끼만 모인다더니 그 꼴 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주머니,
나 빈털터린 거 아시죠?"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은 느낌에 명훈이 솔직하게 자신의 빈 주머니를 밝혔다. 그녀가
이번에는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옥경이 오빠, 참말로 너무하네예, 아무리 하믄 내가 장사할라꼬 옥경이 오빠를 불렀겠어
예? 우리가 받은 기 얼만데..."
"제가 뭐 해드린 게 있어야지요. 농사도 안 되는 박토 가지고 공연히 사람 불러들여 오도
가도 못 하게 만든 것밖에..."
"아이라예. 도로시(오히려) 약속을 몬 지킨 건 우리지예, 게다가 마음 의지 하나만도 어딘
지 알아예? 이래 장터 나와 살아도 객지 같지 않은거는 다 옥경이 오빠 덕이라예. 아 아부
지는 우야는지 알아예? 쪼매는 시비가 생겨도 명훈씨고, 뭔 어려운 일이 생겨도 명훈씨가예.
하루맨쿠로 옥경이 오빠만 믿는다 아입니꺼..."
새로 비운 막걸리 사발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그녀의 말 때문인지, 명훈은 갑자기 치솟는
취기를 느꼈다. 그러나 호탕하고 유쾌한 취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형은 어디 갔어요?"
상념이 자신의 메마르고 거친 땅으로 끌려가는 게 싫어 명훈이 그렇게 화제를 바꾸었다.
"아 아부지예? 빌린 동기 돌려주러 갔어예. 인자사 점심때맨쿠로 한꺼번에 몽싹 몰리는 일
이 없을 끼라서..."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작은 신씨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고, 이거 이주사 아인교? 아까 언뜻언뜻 보기는 해도 높은 사람들하고 있는 바람에..."
이어 작달만한 신씨가 지게다리를 끌 듯 빈 지게를 지고 차일 안으로 들어왔다. 목소리뿐
만 아니라 표정도 진정으로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봐라, 뭐 하노? 여 술이고 고기고 있는 대로 내온나. 인자 장사도 끝나가이 나도 이주사
모시고 한잔 할란다. 뭐니뭐니 해도 옛날 주인 아이가? 한 여름이라 캐도 그 밑에서 빌어먹
은 거는 빌어먹은 기라."
작은 신씨가 그러면서 명훈의 상머리에 마주앉는 바람에 술자리는 생각 밖으로 길어졌다.
술이 들어갈수록 싹싹하고 재치 있어지는 작은 신씨에게서 명훈은 그네들 남도 사람들의 근
황에 대해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부뜰이네 하고 봉수는 둘 다 괜찮은 갑심더. 무슨 공사장에 함바를 같이 하게 됐답니더.
김씨도 대구서 우째 자리잡아가구예. 안죽은 관문시장 모팅이서 잡일이나 하고 지내지마는
안으로가 워낙 야물잖십니꺼? 곧 손에 쥐는 게 생기믄 좌판이라도 벌일 생각인 모양입니
더. 내만 여기 어중간하게 주질러앉았다가 꼽다시 중도 소도 아닌 장돌뱅이나 되고 마능 거
아잉가 몰라."
대강 그런 내용이었는데, 듣는 명훈은 떠난 그들이 야속하기보다는 왠지 그저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명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그래저래 막걸리를 한 주전자나 나눠 마신 뒤였다. 그
사이 운동회 행사가 전부 끝나 엉덩이 질기게 마지막까지 버티고 앉았던 패거리가 대포라도
마시려는지 차일 안으로 밀려드는 걸 보고 일어나는 명훈을 작은 신씨가 잡았다.
"이주사, 왜 벌씨로 일어납니꺼? 그라지 말고 이바구나 좀 더하게 어디 딴 데 가서 한잔
하입시더."
이미 마신 술이 있었던지, 그의 눈가도 알아보게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명훈은 더 마실
기분이 아니어서 좋은 말로 사양했다. 그때쯤은 상냥하기만 하던 그의 아내도 하얗게 남편
을 플려 작은 신씨도 억지로 잡지는 않았다.
표문을 나와 집 쪽으로 향하는 동안도 명훈은 두 번이나 사람들에게 옷깃을 잡혔다. 하나
는 중계 총대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북천의 젊은 동장이었다. 중계 총대는 저희 동네가 우승
한 기분에서였고, 북천 동장은 틈만 나면 술을 못 사 안달인 평소의 버릇대로였는데, 명훈은
그들도 굳이 뿌리치고 장터와는 반대쪽인 집으로 향했다. 그 무렵 들어 술은 다시 누가 언
제 사주어도 반가운 것이 되었으나, 작은 신씨 내외가 무얼 건드렸는지 그날은 영 그렇지가
못했다. 가을이 짙어서인지 해는 빨리 저물어왔다. 추수가 끝난 들판 사이로 난 국도를 휘
적휘적 걸으며 명훈은 그 가을 들어 부쩍 심해지는 외로움에 둔감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러
나 하루종일 여기저기서 얻어걸친 술이 적지 않은 데다 악의는 없어도 작은 신씨가 들쑤신
실패와 종말의 예감이 갈수록 심하게 그를 몰아내 우울한 감상에서는 끝내 벗어날 수가 없
었다.
-마, 안 되겠심더.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꼬, 이건 땅이 아입니더. 봄부터 쎄(혀)
빠지게 걸꽈도(걸게 해도) 모(모종)가 꺼꾸로 기드간다 아입니꺼.
-아무래도 우리는 뭘 잘못한 거 같아예. 농사짓다 조진 팔자는 암만캐도 도시에 가야 되는
긴데. 배운 도적질만 믿고 다시 촌구석에 찾아와 뭐가 될 끼라고. 이선생님네 땅이 우찌 된
기 아이라 우리가 잘못 생각한 기라예. 땅 없으믄 결국 날품 팔아 사는 긴데, 날품이라믄 사
시사철 일거리가 있는 도회지가 안낫겠어예?
-미안합니더, 우리가 안 왔던 거로 생각하고 다시 시작해보이소.
찾아올 때처럼 분명하게 떠나갈 뜻을 비치던 큰 신씨와 김씨, 하씨의 목소리가 되살아나
고, 마침내는 지쳐버린 듯한 어머니의 걱정 어린 표정도 떠올랐다.
-아야, 어예겠노? 하마 보이 다 파이따. 이 추수 가주고 겨울 날 일이 꿈같다. 하루이틀도
아이고 살 한 말 재놓은 거 없이 또 한겨울 어예나노? 고생, 고생 카지마는 내 아직 이래
가망 없는 고생은 첨이따. 거다 아아들은 풍비박산 흩어지고- 달리 구처를 내봐야 될따.
길에는 운동회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고, 개중에는 바쁜 걸음으로 명훈을 지나쳐
가면서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축도 있었다. 그러나 명훈은 아득한 벌판을 혼자 걷는 기
분이었다. 자신만의 생각에 골똘히 잠겨 걷는 사이에 어느새 저만치 솔무더기와 집이 보이
고, 그 위로 버얼겋게 펼쳐진 개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지울 때는 대궐같이만 느껴지
던 흙벽돌 집이 그날따라 납작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움막으로 느껴졌다.
어머니도 옥경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집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명훈은 그런 집
을 지나쳐 곧장 개간지로 올라갔다. 앞산 그리메엔 벌서 바알갛게 놀이 젖어들고 있었다.
나의 대지는 붉다... 개간지가 한눈에 내려다뵈는 산등성이까지 올라간 명훈은 거기서 쓰
디쓰게 읊조렸다. 세번째의 가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농사 솜씨 하나는 맵고 바지런하
던 남도 사람들 덕분에 개간지는 전해나 또 그 전해 가을처럼 황량하지만은 않았다. 결과는
김장거리는커녕 시래기로 말리기에도 한심스런 수확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집 근처
에는 파랗게 채전이 펼쳐져 있고 이번에도 결실이 시원치 않아 베어들이기가 망설여질 정도
인 콩밭도 겉만은 제법 밭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뒤 삼 년째 내리 심고 있는 메밀밭에 이르면 하이얀 메밀꽃으로 제법 풍성한 느낌까지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내려다보는 명훈의 마음은 첫해 가을보다 훨씬 비참했다. 처음 그 시
를 쓸 때만 해도 그의 비가는 과장 섞인 엄살에 가까웠다. 아직 크게 손상받지 않은 희망이
이제 막 출발한 자의 열정과 더불어 가슴속에 살아 있었고, 시간도 자신의 편으로만 여겨졌
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 여름을 마지막으로 탕진된 뒤였다.
'아아, 나는 무엇을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명훈은 특별히 스스로의 감정을 과장하고 있다는 기분 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하늘마져 자욱이 내려앉는 것처럼 암담해지면서 그동안 마음속에 아프게 쌓여오던 여럿의
목소리가 새삼 귓전에 되살아났다.
"자학할 건 없어. 어차피 시들게 되어 있는 농촌이야. 해방 뒤 우리가 수입한 개인주의는
종종 개인의 자유보다 책임 쪽을 강조하는 형태로 영향을 준 탓에 우리는 은연중 자신에게
비정하게 된 측면이 있지. 그렇지만 농촌 문제라면 곧 개인의 문제가 아니란 게 드러날 거
야. 틀림없이 너의 개간지는 박토고 또 너는 농사일에 익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서 네 실
패는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기실 처음부터 그 실패는 예정돼 있던 거야. 다
만 너에게 몇 년 혹은 몇십 년 일찍 찾아왔을 뿐이지."
"너는 농촌살이가 더 나아졌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어제와 오늘의 단순 비교
라면 확실히 나아졌지. 무상 분배도 아니었고, 철저하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토지 개혁은 자
작종의 비율을 크게 높여놓았고 고리채 정리는 제법 그럴듯한 효과로 농촌에서 점증되는 부
의 집중 경향을 차단했지. 보릿고개는 없어졌거나 없어져가고 있는 중이고 비료나 종자의
수급도 그 어느 때보다 원할래. 특히 군사 정권이 출현한 뒤 그들이 농촌에 보낸 성원과 격
려는 그 자체만으로도 농촌에 활력을 보태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요는 기준이야.
단순히 먹고 사는 게 삶의 전부라면 이제 농촌은 살 만한 곳이 됐지. 그렇지만 '인간다
운
삶'이란 명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지금의 허상과 착각은 곧 부서지게 되어 있어. 교육
과
문화란 개념만 끌어와도 지금의 농촌이 얼마나 불리한 형편에 있는지는 금세 알 수 있지.
당장 이 면에서 대학생 자녀를 둔 농가만 찾아봐도 사태는 명백할걸. 도시 인구와 견주어
진학 비율이 얼마이며, 그들이 그 값비싼 교육에 지불하는 대가가 어떤 것인지, 그것만 봐도
'잘사는 농촌'의 실상은 뚜렷해질 거야."
"이 정부의 중농 정책이라구? 지난 5년만 놓구 보면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
지. 고리채 정리부터 네가 그토록 감격한 경지 확대 사업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중농주의적
제스처를 쓴 건 사실이야. 그 효과도 상당했고, 또 앞으로도 그런 제스처는 계속되겠지. 하
지만 그걸 진정한 중농 정책이라고 믿는다면 틀렸어. 그보다는 군사 정권의 보상적 특질에
다 권력 핵심의 감상주의가 보태진 결과로 보는 게 훨씬 더 정확하지.
정통성도 없는 권력이 항상 의지하게 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지. 그런데 우
리 국민의 구성은 어떤가. 이제는 인구의 60%선으로 농업 종사자가 줄어들었지만 도회에
나와 딴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도 그 멘탈리티는 의연히 농업적이라구. 따라서 국민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이란 측면에서 그 대상으로는 농촌보다 더 효율적인 것도 없지. 국민이
곧 농민으로 치환될 수 있을 만큼 농업적 기반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말이야. 거기다가 지
금 권력의 핵심이 대개 농촌 출신이란 것도 그들이 보여주는 중농주의적인 제스처와 무관
하지 않아. 어떤 때는 진정한 애정과 신념으로 다가서는 듯해 중농주의라 불러줄 만도 하지.
그러나 지극히 감상적이고 불안정한 중농주의일 뿐이야. 언제든지 현실적인 필요에 쫓기기
만 하면 슬그머니 거두어들이고 말..."
"이 정권의 자가당착은 벌써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너도 5개년 계획이다. 공업화다
하는 소리는 들어봤지. 울산이나 포항에 대규모 공업 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것도. 공업화된
사회라는 거 그게 농촌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나 알아? 그건 결국 농업을 다른 산업의
부양을 받아야만 유지될 수 있는 애물덩이로 만들어버리다는 뜻에 지나지 않아. 특히 우리
처럼 지대가 높고 농업 생산 방식이 노동 집약적인 나라에서는..."
그 말들은 기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듣거나 어디서 구절구절 읽은 것들이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재구성된 것일 터였다. 특히 최근에는 6.23 사태로 제적당하고 여기저기 피
해다니다가 영장을 받고 돌아와 입대날까지 술로 보낸 문중 동항에게서 그런 말을 많이 들
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그 모든 말들은 만난 지 벌써 일 년이 넘는 황석현의 목
소리로만 들려왔다.
'그래, 그의 말마따나 어차피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라면 일찌감치 끝장이 나는 것
도
좋겠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여기서 떠나면 어디로 가나. 도회, 그 비정하고 가망 없는 아수
라장으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아무런 수단도, 재능도 없이 빈
손으로, 혼자,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가...'
명훈은 한 개비 남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진지하게 새 출발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이 개간지를 팔면 얼마간의 밑천은 되겠지. 평당 20원을 주겠단 작자가 있었으니
한
40만 원은 모아쥘 수 있겠지. 하지만 도회로 나가면 허름한 집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명훈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종말의 예감은 짙어져도, 새로운 출발의
각오와 용기는 전혀 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다시 망연한 상념에 빠진 명훈은 가까운 밭둑에 퍼질러앉았다. 자세는 개간지
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것이었으나 시선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덤가 도래솔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문득 그런 명훈의 눈길을 끌었
다. 웬 낯선 사람 둘이 도래솔 곁으로 난 길을 따라 개간지로 오르고 있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오는 데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제대로 갖춘 양복 차림이라 명훈은 슬그머
니 그들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자기를 찾아왔다면 당연히 집으로 가야 하는데 먼저 개간지로 오르는 것도 적잖이 이상했
다. 그러나 워낙 축 처진 기분이라 몸을 일으켜 그들을 맞으러 갈 생각까지는 나지 않았다.
명훈이 보고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은 개간지를 가로질러 명훈 쪽으로 올라왔다.
명훈은 그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오는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였다.
"오주사. 여기 웬일이십니까?"
둘 중 하나를 알아본 명훈이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
네자, 그때껏 무어라 손짓 발짓을 하며 양복 차림과의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오씨가 놀
란 소리를 내질렀다.
"억, 이게 누고? 아이, 이형 아이라?"
명훈이 산그늘 가까운 발둑에 앉아 있었던 데다 옷 색깔까지 갈색 계통이라 그때껏 몰라
본 모양이었다. 양복 차림도 흠짓하는 눈치인 것이 그 또한 명훈을 못 보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이구, 놀래라. 까딱했으믄 아(아기) 떨어질 뻔 안했나? 그래, 저물어가는 산모퉁이에 혼
자 앉아 뭐 했디꺼?"
오씨는 묻는 말에는 대답 않고 오히려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나 명훈은 그가 오씨란 걸
알아보면서부터 벌써 짐작가는게 있었다. 오씨는 말하자면 거간꾼이었다. 철따라 소장사하고
고추장사도 했지만 그의 수입은 그런 장사에서보다는 이따금씩 하는 부동산 중개에서 더 짭
짤하다는게 골내골 사람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었다. 얼마 전에도 석공과 어떤 산주 사이에
다리를 놓아 백이십 정보짜리 산 거래 하나에서 만 10만 원은 거뜬히 벌었을 거란 말이 나
돌고 있었다.
다만 데려온 사람이 워낙 도회물이 밴 양복 차림인 게 조금 미심쩍을 뿐이었다.
"그냥... 땅 좀 둘러보느라구요. 그런데 오주사는 어떻게 여길..."
명훈의 그런 물음에 오씨는 이번에도 딴말로 받았다.
"왜, 나는 이형 개간지 좀 구경하면 안 되이껴? 그거는 글코 낯선 사람이 처음 만나이 서
로 인사나 하소."
그리고는 양복 차림에게 명훈을 좀 과장스레 추켜올려 소개한 뒤 다시 명훈을 향했다.
"여기는 박선생이라꼬. 도청에서 높으게 있던 분이씨더. 진안이 고향인데 이번에 퇴직해서
아주 살라고 내려왔니더. 여러 가지로 훌륭한 분이니께는 이형도 알아두어 나쁠 게 없을 게
씨더."
하지만 그때 이미 명훈은 오씨가 하려는 말을 다 들은 기분이었다.
'역시 그렇구나...'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의 반응이었다. 작년 가을과는 달리 알맞은 작자가 나타
났다는 데 은근한 안도감까지 인 까닭이었다.
개간지를 판다고 해도 그걸 부근의 농민들에게 나누어 팔게 되면 몇가지 어려움이 있었
다. 어차피 한두 사람이 받을 힘은 없어 조각내 팔아야 하는데, 그게 과연 다 팔릴지, 그리
고 일정한 기간 안에 목돈으로 뭉쳐질지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가격도 그랬다. 2만 평을 한
덩이로 원하는 사람에겐 그 땅이 한끝에 이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한 값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각조각 팔 때는 오히려 그게 불리하기까지 했다. 농로를 따라 내주어야 하는 데다
사방 남의 땅 속에 갇히게 되는 부분은 값이 깎일 우려마저 있었다.
오씨는 돌내골 일대에서 셈 빠른 거간꾼으로 이름을 얻고 있는 만큼 눈치에도 밝았다. 명
훈이 사람 소개만으로 자신이 온 뜻을 알아차린 듯하자 쓸데없는 말로 변죽을 울리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나왔다.
"이형하고 내하곤데 빙빙 돌려 말할 게 뭐 있노. 고마 바로 얘기할라니더. 이형, 혹시 이
땅 팔 생각 없니껴? 그랠라 카믄 내 아주 무더기로 한판에 다 살 사람 소개시켜드림씨더.
여기 이 박선생임 같은 분도 계시이더만은 뭐 꼭 박선생임한테 팔라는 건 아이고..."
그가 그렇게 바로 찌르고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명훈이었다. 이상하게 아픈
곳을 건들린 것 같은 기분과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 때맞춰 찾아왔다는 기분이 묘하게 얽혀
한동안 그의 말문을 막았다.
"아니 오주사.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한번도 이 땅을 내놓은 적이 없는데..."
이윽고 명훈이 되도록이면 표정 없는 얼굴을 지으며 오씨의 말에 대꾸했다. 내심을 들켜
거래가 불리해지는 것도 싫었지만, 턱없이 매몰차게 잘라 중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해서
는 더욱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쩌면 명훈은 그때 이미 개간지를 팔아치우기로 경정하
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씨는 한동안 작은 눈을 깜박이며 명훈을 쳐다보았다. 명훈의 속마음을 읽기 위함인 듯
했으나, 오랜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어쨌든 명훈은 땅을 팔아야만 할 사람이란 자신의 단정
을 다시 확인하듯 오히려 전보다 더 자신있게 나왔다.
"이형, 또 왜 이카이껴? 땅이라 카는 거, 똑 팔겠다고 외고(외치고) 댕겨야 파는 건지 아이
껴? 그게 아이시더. 하마 보믄 다 안다꼬요. 팔아야 되게 되믄 임자가 아무리 거머쥘라꼬 애
를 써도 안 되는 게 바로 땅이란 말이씨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이 오병춘이 이런저런 거간으로 산 지 하마 이십 년이씨더. 척 보면 훤하다 카이요. 이형
은 땅을 뒤지기는(뒤엎기는, 개간하기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걸꿀(걸게 할) 농사꾼은 아이
라. 인제 여기서 이형이 할일은 끝났다꼬."
"어디 농사꾼의 씨가 따로 있습니까?"
"있지를, 있지말고요. 지게를 지면 등때기(등허리)에 지게가 차악 달라붙고, 밭에 붙어 앉으
면 몸이 반은 흙에 푹 파묻혀 비야(보여야) 하는게 농사꾼이씨더. 아이믄 외국맨치로 넉넉한
자본 가주고 트랙타다 뭐다 드리대던가... 그런데 이형은 이거저거 다 파이라. 오미 가미 내
눈여기보지만은 백날 가봐야 이래가주고는 안 된다꼬. 뒤진 지(개간한지) 하마 3년인데 이거
는 다부(도리어) 산으로 돌아가는 거 아이라? 고마 나서는 사람 있을 때 넘구소. 그게 이형
고생도 면하고 땅도 꼬라지가 된다꼬."
"..."
명훈은 할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오씨의 얘기를 마저 듣고 싶어 잠잠코 있었다. 오씨는
그게 자기의 말이 먹혀들어가고 있는 걸로 알았던지 한층 열을 올렸다.
"여기 이 박선생임만 해도 어예 해볼 수 있을 께라. 퇴직금으로 땅 사고, 대구 집 팔아 한
몇 년 퍼부으믄 이형하고는 얘기가 다르제. 거다가 축산과 나온 아드님이 군대 갔다 올아오
믄 여기는 똑 좋은 목장감이제. 큰길 가깝겠다, 지세 좋겠다..."
이제는 명훈과 박 뭐라는 그 사람을 아울러 겨냥해 중개인 특유의 입심을 부리는 것이었
다. 솔직히 말해서 그날의 원매자가 이웃의 농무였다면 명훈의 마음이 그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퇴직금으로 목돈을 쥐게 된 여느 도회인이라도. 거래가 정말로 성립될지
를 자신할 수 없어 그리 쉽게 땅을 팔 의사를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장과 축
산과 졸업생이란 말을 듣자 왠지 명훈은 그 거래가 이루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그런데, 오주사. 지금 이 땅을 내놓으면 평당 얼마나 받겠습니까?"
"그거사 시세란게 있으이께는. 묵은 땅 반값은 안될라. 개간지도 개간지 나름이지마는 여
기는 그래도 큰길가이께는."
오씨의 말투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그때껏 말없이 있던 양복 차림의 중년이 그 일만
은 자신도 관계 있다는 듯 끼여들었다.
"아니, 오주사. 묵은 땅도 층하가 있는 거 아니오? 문전옥답 절반값이라면 누가 이런 개간
지를 사겠소? 농사된 거 보이 아직 씨값도 안 나오는 땅인데..."
"그거사 그럴 리가 있니껴? 진안 들판 일등 밭값 반 내놓으라꼬는 안칼 테이께는 걱정 마
소. 여다도 아래위로 줄레줄레 붙어 있는 묵은 땅이 안있니껴?"
"그래도 마찬가질걸요. 저쪽 땅은 칠, 팔십 원이지만 이쪽 땅은 백 원도 더 달랄 텐데요."
이번에는 명훈이 그렇게 떠보았다. 오씨가 피식 웃으며 명훈의 말을 받아넘겼다.
"달라는 게 값이믄 평당 천 원은 왜 못 달라 카겠노? 칠십 원이든지 백원이든지 그 값 물
고 살 사람이 있어야 그게 값이지. 가을(추수)하고 쪼매 오른다 캐도 이 근처 밭은 평당 육
십 원이믄 닥상이라."
그럼 나는 평당 삼십 원은 받을 수 있겠군- 명훈은 속으로 그런 짐작을 했다. 지난번보다
평당 육십만 원도 안 되리라는 게 새삼 한심했다. 그게 은근히 그 거래에 걸었던 기대에 찬
물을 끼얹어 명훈을 다시 뻣뻣하게 만들었다.
"그럼 평당 삼십 원이란 얘긴데, 오주사. 그만둡시다.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달라질 거 없
을 바에야 그냥 버텨보지요. 개간지야 여기 아니라도 많이 있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쇼."
그렇게 잘라 말해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 사이 집에는 누가 돌아왔는지 굴뚝
으로 하얀 연기가 오르는 게 보였다.
명훈이 갑작스레 말을 자른 게 오씨에게는 뜻밖인 모양이었다. 조금전 제법 흥정을 붙이
는 투가 되었던 그의 목소리가 다급으로 떨리며 뒤따라왔다.
"아이. 이형. 얘기하다 말고 왜 이카노? 영 팔 생각이 없다믄 몰라도, 값이 문제라면 흥정
을 해봐야제..."
"삼십 원도 안 보는 땅이 흥정한다고 육십 원이 되겠소? 백 원이 되겠소? 아직 내놓을 마
음이 없으니 그 얘기는 이쯤 합시다. 이왕 구경 오셨다니 땅은 천천히 둘러보시고..."
명훈은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개간지를 내려왔다. 그때만 해도 일부러 뻗대본다는 기
분은 별로 없었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원매자라는 게 마음 한구석에 미련으로 남아 있었지만, 명훈이 흥정
으로 나가기에는 아직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자극은 바로 그날 저녁에 왔다. 옥경이가 지어준 저녁을 먹고, 깨기 시작하는
술과 오씨 때문에 생겼지만 내용은 분명찮은 울적함으로 불도 켜지 않고 건넌방에 늘어져
누웠는데, 제법 밤이 늦어서야 돌아온 어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를 찾았다.
"야야, 훈아, 어딨노?"
그 목소리에 섞인 심상찮은 떨림에 명훈이 놀라 문을 열었다. 열여드레, 한 모퉁이가 알아
보게 이그러진 달빛을 뒤로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자고 불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있었꾸나. 니 여 쯤 나온나. 얘기할 게 있다."
명훈은 그런 어머니에게 홀린 듯 까닭조차 물어보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가 종종걸음으로
앞서는 어머니를 따라 마당을 벗어난 뒤에야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그냥 따라온나. 저다 가서 얘기하자."
어머니는 그러면서 턱짓으로 개간지 위쪽을 가리켰다. 저녁 무렵 명훈이 올라갔던 곳이었
다.
어머니는 미리 봐두기라도 했다는 듯 해거름 때 명훈이 앉았던 자리 근처에 가서야 겨우
여느 때의 목소리로 돌아가 입을 열었다.
"옥경이 집에 있제?"
"네. 그런데 갑자기 옥경이는 왜?"
"휴우- 아무래도 안 될따. 이래다가는 아아들 다 잃어뿔따."
어머니는 밑도끝도없이 그렇게 한숨부터 쉬어놓고 다시 비밀을 주고 받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니 눈에는 옥경이 그 기집아, 이상한 거 없드나?"
"글쎄요... 왜 걔에게 무슨 일이 있어요?"
"일이 있고말고. 참말로 난리라. 기집아들이 아직 머리에 쇠똥도 안 벗어진 게..."
그래도 명훈은 무슨 일인지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언제나 코흘리개 막내에 응석받이
로만 생각하고 있는 옥경이라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 어머니가 저토록 상심하는지 가늠조
차 서지 않았다. 어머니가 명훈의 물음을 기다리지 않고 체한 것을 토해내듯 격하고 급하게
이어나갔다.
"니 명숙이 알제? 김고기쟁이네 둘째딸 말이다. 오늘 그 기집아가 운동회날이라꼬 설렁거
리는 틈을 타 저어 집 돈ㅅ에 손을 댔다 안카나? 적은 돈도 아이고 5천 원이나 되는 큰돈이
라. 저어 어마이가 암만캐도 수상시러버 지 방을 뒤져봤디, 참 같잖제, 이게 오입(가출)을 갈
라꼬 하마 보따리까지 다 싸놓은 게라. 그런데 더 기막힌 거는 뭔지 아나? 지 혼자가 아이
라는 게라. 같이 오입 가자고 약속한 기집아들이... 김고기쟁이 몽두리(몽둥이) 찜질에 튀나
온 말인데, 하이고..."
"그럼 옥경이도?..."
"그래, 옥경이하고 한골댁 인희하고... 뭐 셋이서 서울 공장에 나가기로 했다등강."
어머니가 그러면서 기어이 옷섶으로 눈물을 찍었다. 그러나 명훈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옥경이 나이도 벌써 열여섯이지만 섣달 생일이라 양력으로 치면 열다섯
이 더 정확할 만큼 서러운 나이였다. 거기다가 어제 그제까지도 업고 다닌 기억이 남아 있
는 막내라 더욱 그런 가출과 연관이 지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제 완전히 넑두리조가 되
어 이어나갔다.
"까짓 거. 시골 고공(고등공민학교) 나와보야 뭐 하노, 카미 서울 가 돈도 벌고 야학도 하
겠다는 게라. 시골 바닥엔 백날 썩어보아야 고생만 하이... 바람을 연(넣은) 거는 바로 김고
기쟁이 큰딸 그년이라. 거 왜 몇 해 전에 오입 나갔다가 이번 추석에 안댕기갔나? 대국년도
못 볼 꼬라지로 건청거리미(거들먹거리며) 장터를 씰고(쓸고) 댕기던 그 기집아말이따. 한눈
에도 기생 아이믄 다방 레지 꼬라지더라만, 그것도 입은 있다꼬 어린 기집아들 데리고 헛소
리를 한 게라. 지가 뭔 큰 성공이라도 한 것맨치로 말이따. 그래, 바람이 든 기집아들이 사
흘 뒤에 떠나기로 날을 맞촸고 준비를 했다고 안카나? 엉이, 이거 어째믄 좋을로? 이 기집
아를 어째야 되노?"
"설마 옥경이가... 그냥 얘기로 해본 거겠지요."
"얘기로 하고 만 게 저 집 금고를 뒤배(뒤져) 5천 원이나 훔치나? 지옷 뿐만 아니라 노리
개까지 채곡채곡 보따리를 싸나? 오다가 한골댁네 들러 인희도 보고 왔다. 김고기쟁이 딸
말, 하나도 틀린 게 없드라 카이. 그 기집아도 꼬치(고추)를 여남은 근이나 빼돌려 돈까지
몇천 원 가지고 있더라꼬. 참말로 이 일을 어째야 되노? 영희 그년이사 내 자식 아이라 캐
도, 철이 나가서 하마 몇 달째 이짝저짝에 다 소식 없제... 거다가 옥경이까지 나서이- 이래
다가는 아아들 하나도 안 남겠다. 전부 다 잃어쁠따..."
어머니의 얘기를 듣는 사이에 명훈에게도 차츰 옥경의 가출 계획이 실감으로 와 닿았다.
너무도 턱없는 것이라 오히려 더 충격적이었다.
"그래요? 안 되겠어요. 그 기집애가..."
명훈은 딱히 어쩌겠다는 계획도 없이 갑자기 몸을 돌려 집 쪽으로 행했다. 그걸 몹시 성
나하는 동작으로 안 어머니가 매달리듯 명훈의 옷깃을 잡았다.
"아이라. 니가 나설 일이 아이라꼬. 영희 그년 때도 봤지만 이런 일 어디 왈기(몰아대어)
되드나? 이번 일은 내가 살살 어예 달래보꾸마. 옥경이는 내가 맡으꾸마. 니가 할 거는 다부
(도리어) 따로 있다."
"그게 뭔데요?"
어머니가 다급하게 잡는 바람에 자신이 정말로 무슨 격한 짓을 하려했던 것처럼 느끼게
된 명훈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니, 참말로 이 땅 믿나? 이 땅이 우리한테 무신 큰 거를 줄 수 있을 것 같으나?"
"..."
"인자 이만치 했으믄 된 거 같다. 고만 이쯤치서 떠나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꼬.
배우지 않은 농사에 이 박한 땅을 가지고 무신 영광을 보겠노? 주는 대로 받고 팔아 다시
한번 도시로 나가보자. 죽이 되든동 밥이 되든동 우리가 살아야 할 데로 나가 살자. 철이도
얼른 찾고..."
어머니는 마치 오씨가 왔다 간 걸 알고 있는 듯이나 그렇게 울먹였다. 어머니가 자신의
입으로 그 땅을 포기하자고 나서기는 그게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명훈에게는 더 결정적으로
들렸다. 드디어 종장이 가까이 오고 있는가.
제 47 장 정착
집을 나온 인철이 온전히 홀로 헤쳐가야 하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처음 실감한 것은 부
산진역에 내린 지 겨우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몇푼 안 되는 돈마저 떨어져 저녁도 굶고 역
대합실로 향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 앞에 펼쳐진 삶의 가혹한 진상을 섬뜩한 공포로 바라
보았다. 서울을 떠날 때 은근히 가슴까지 설레며 떠올렸던 상상들은 결국 미문으로 과장된
방랑소설 또는 풍요한 서구 사회를 배경으로 한 감상적인 성장소설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며칠, 인철은 홀로 거리를 돌며 일자리를 구해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찾
아드는 낯선 일꾼에게 까닭 모를 불신을 품는 경향이 있었고, 인상에서 받은 편견으로 노동
의 질까지 단정했다. 틀림없이 일꾼이 필요한 듯한데도 인철이 찾아가면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인철의 짐작으로는 그 몇 달의 도회 생활로 다시 희고 맑아진 얼굴과
입고 있는 교복이 그런 거절의 원인인 듯했다.
몇 군데 생겨나기 시작한 직업 소개소도 인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겨우 산업
화의 문턱을 들어서고 있던 60년대 중반의 이 사회는 아직 그리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어내
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만으로는 열여덟도 채우지 못한 인철의 나이가 알맞은 일자리
를 찾는 데 더욱 어렵게 했다.
이도 저도 안 돼 맥이 빠질 때 인철은 용두산공원이나 광복동 거리를 배회하며 동화 속에
서나 있을 법한 행운을 기대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불치의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일생의
성취를 물려줄 똑똑하고 진실된 젊은이를 찾는 노신사도, 초라하지만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철을 알아보고 자식 삼아 데려다 기르려는 귀부인도 없었다. 한군데 조금이라도 오래 머
뭇거리면 의심쩍어하는 눈빛만 사방에서 번쩍거릴 뿐이었다.
우연히 만났고 길동무치고는 기묘했지만 박달근이 일러준 살이의 여러 기술들이 실제 유
용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름의 품위를 지키느라 일자리를 얻기도
전데 가진 돈이 거덜나버리자 인철은 비로소 그가 가르쳐준 변형된 구걸과 노숙의 여러 방
식을 보다 일찍 채택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바로 그날도 그랬다. 진작부터 역 대합실을 활
용해 숙박비만 아꼈더라도 그토록 빨리 끼니까지 굶어야 하는 처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
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새 날이 차가워진 데다 속이 비어서 그런지 대합실은 초저녁부터 썰렁하기 짝이 없었
다. 인철은 되도록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바람막이가 좋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
에서 한겨울에나 입는 점퍼를 꺼냈다. 좋은 시절의 누나가 사준 두터운 모직 점퍼였다.
인철은 그 점퍼의 유난히 넓은 목깃에 얼굴을 반나마 묻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하루종
일 돌아다녀 피곤하기도 했지만 새벽 추위로 잠을 설치게 될 때를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눈을 붙이고 잠깐 존 것뿐, 곧 어둡고 울적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앞 뒤 없는 상념 속에서 인철은 먼저 두 가지 유혹과 싸워야 했다. 하나는 그제나마
집으로 돌아가 다시 어머니와 형의 보호 속으로 숨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용기네 아이들
을 찾아가 그들에게 기댐으로써 보다 덜 궁색하게 그 도시에 자리잡을 시간을 버는 것이었
다. 그 며칠 사이에 그만큼 그는 도시의 비정함과 살이의 혹독함에 지쳐 있었다.
그 두 유혹 중에서도 끝내 승리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쪽이었다. 비록 형제같이 느끼는
친구들이라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그들에게 기대는 데는 어차피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거기다가 그렇게 한다 쳐도 그 도시에 자리를 잡는다는 힘든 일은 여전히 그에게 남겨지는
것이었다. 실제 인철은 그 새벽 하마터면 안광으로 가는 첫차에 뛰어오를 뻔했다.
그런데 뜻밖의 분발이 그 유혹을 끊어주었다. 뒷날에도 가끔씩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는 이상한 분기였다. 이제 정말 막장이다 싶을 때, 그리고 이제 더는 비참해질 수
없다 싶을 때, 느닷없이 그를 몰아가는 까닭 모를 망대와 호승심이 그랬다. 자, 이제 나는
내 전기의 가장 어려운 대목을 쓰고 있다...
'그렇다. 육체가 받을 고통이 두려워 일껏 떠나온 장한 길을 버리고 초라하게 되돌아갈
수
는 없다. 일생을 벗할 그 아이들에게 내 나약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짐이 되는 일이 있어
서도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내 전기 작가에게 이 우스꽝스런 패퇴의 꼴을 보
이고 싶지 않다.'
무임 승차를 위해 입장권을 사러 가던 인철은 그런 내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여지없는 결의로 바뀌었다.
'그래. 여기 남아야 한다. 남아서 싸우고 이겨야 한다. 자칫 범용하고 지루해질 수도 있
는
내 생애의 한 장을 여기서 인상적인 승리의 장으로 바꿔야 한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나는
이미 더 물러설 곳이 없는 필사의 전사였다.'
그러자 일찍부터 신산스런 삶을 통해 체득하기는 했으나 스스로 채용하기를 꺼려해온 살
이의 기술들이 눈부신 순발력으로 되살아났다.
이튿날 인철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중에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팔아 다시 한
번 시작할 밑천을 장만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역시 좋던 시절의 누나가 사준 손목시계가
있었고, 헌책방에 팔면 정가의 절반 이상을 받을 수 있는 두툼한 영어 사전과 몇 권의 이름
있는 고교 참고서들이 있었다. 인철은 전에 없는 신중함과 세밀함으로 다섯 군데 이상의 시
계방과 세 군데 이상의 서점을 돌아 값을 비교한 뒤 가장 후하게 쳐주는 곳에다 그것들을
팔았다. 시계가 특히 큰 몫을 해 2천 원 가까운 목돈이 되었다.
인철은 그 중에서 천 원을 빼재 차림부터 바꾸었다. 국제시장 헌옷가게에서 허름한 양복
상의와 코듀로이 바지, 그리고 천으로 된 싸구려 가방을 한 개 샀다. 그 옷으로 갈아입고 아
직 남은 책 몇 권과 세면도구와 교복을 비롯한 몇 벌 옷가지를 함부로 구겨넣어 울퉁불퉁한
가방을 드니 그제서야 제법 그럴듯한 도시의 산업 예비군 모습이 나왔다. 인철은 남은 돈을
주머니 깊숙이 갈무리한 뒤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성과가 있었다. 이튿날 인철은 국제시장 언저리에서 일은 험하지만 제법 월급까
지 있는 일자리를 찾아냈다. 믿을 만한 보증인만 있었다면 번듯한 옷가게의 점원 같은, 보다
마뜩한 일자리를 얻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인철이 하게 된 일은 가마니며 마대, 사과 궤짝, 마분지 상자 따위 당시 그 시장에서 쓰이
던 모든 종류의 내구성 포장 용기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월급은 먹고 3천 원이라 처음 받는
것치고는 높은 편이었고, 잠도 점포 겸 창고의 가마니 위에서 자면 돼 따로 하숙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장은 공부와 무관했지만 한 일 년 만 고생하면 무슨 길이 열릴 것도 같았
다.
그런데 문제는 인철이 맡게 된 일의 종류였다. 그 점포에도 남 보기 사납지 않은 일은 얼
마든지 있었다. 수집된 포장 용기들을 필요로 하는 업체에 되파는 일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대량으로 나오는 업체에서 정기적으로 거두어오는 일도 그랬다. 그럴 때는 주문이나 약속에
따라 손수레에 실어 나르면 그만이었고 그 경우에는 대개 물건들도 정품이라 깨끗했다.
하지만 또한 그 일은 수금이든 입금이든 대개 적지 않은 돈이 오가는 일이라 뜨내기인 인
철에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돌아온 일은 시장 구석구석에서 부정기적으로 생기는 용
기들을 눈치보아 헐값으로 거두거나 공짜로 주워오는 일이었다.
나무젓가락도 씻어서 다시 쓰고 휴지도 봉지를 만들면 훌륭한 상품이 될 만큼 아직도 일
회 용품이란 게 흔치 않던 시절이라 주인들이 버리거나 헐값으로 넘기는 물건들은 뻔했다.
소금 가마로 썼거나 쇠뼈, 내장등을 담아 다른 곳에 쓸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마대, 생선
좌판으로 쓰였던 사과 궤짝 따위가 그랬는데, 그런 것들을 거두는 방식마저 보기 사나웠다.
운반 수단인 지게 위에 물건을 많이 담기 위해 얹어놓은 대나무 바소쿠리가 벌써 이른바 양
아치들의 '찌께망태'와 비슷했다. 그런 바소쿠리에다 벌건 피가 배어 있거나 눈살이 찌푸려
질 정도로 더러운 가마니와 마대, 마분지 상자 따위를 가득 담아 지고 시장 바닥을 헤매는
일은 아무리 모질게 마음을 먹어도 열여덟의 수치심으로는 견뎌내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더욱 인철은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그 일자리가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점포 겸
상점에서 잔다는 게 전체로 보아서는 통금 시간밖에 잠자는 법이 없는 그 시장과 함께한다
는 뜻이었다. 그 물건들이 나오는 점포와 필요한 점포가 새벽부터 통금 사이렌이 불 때까지
이어져 있어 조용히 책을 읽기는커녕 잠조차 넉넉히 잘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인철이 주인의 마음에 썩 드는 것도 아니었다. 참을성은 있지만 워낙 처음이라
일마다 서투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장사에 필요한 숫기가 적어 물건을 수집하는 데도 불리
했다. 인철에게는 도무지 공짜로 얻어오는 재주가 없었고 헐값으로 후려칠 넉살도 없었다.
그 바람에 파국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날도 인철은 제딴은 힘들여 물건들을 거두어왔
다. 큰 국밥집에 쇠뼈며 내장, 피 같은 걸 담아왔던 마대와 생선 가게의 고기 상자. 젖어 뭉
크러진 마분지 상자 따위를 가득 지고와 창고 앞 마당에 부리는데 주인이 혀를 차며 말했
다.
"하이고, 그것도 물건이라꼬 거다 왔나? 그거 물건 만들라 카믄 넘굴 때 단가보다 씩고(씻
고) 말루는 데 드는 품값이 더 나가겠다.
그 말에 서운해진 인철이 자신도 모르게 시무룩하게 받았다.
"그래도 안 내놓으려는 걸 몇 원씩 쳐주겠다고 달래 얻어온 겁니다."
그러자 주인이 벌컥 화를 냈다.
"뭐시라, 그럼 저거를 돈까지 쳐주고 사왔단 말가? 그저 조도(줘도) 마다할 씨레기를, 안
되겠다. 다부(도로) 갔다 조삐라!"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날 주인은 다른 데서 기분 상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런 눈치까지 살필 만큼 닳아 있지 못하던 인철은 더욱 서운해 맞받았다.
"받아온 걸 어떻게 도로 갖다 줘요?"
"뭐시라? 야, 말하는 거 함 보래. 니 지금 내한테 말대척 하는 기가?"
주인이 벌컥 화를 내며 그렇게 나무라더니 무슨 일이 바쁜지 점포를 나가며 거칠게 쏘아
붙였다.
"그라믄 니가 가주 온 거이 니가 씩고 말라 팔아가 그 돈 갚아라. 내사 몰따. 하도 바빠 사
람 하나 더 돗띠(두었더니) 아가(애가) 우째 저러코롬 띠미하노?"
두 사람의 곱지 않은 대화는 그걸로 그쳤으나 인철에게는 결국 그게 그 점포에서의 마지
막 날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맞는 곳이 못 된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으나 그래도 이미 시
작한 것이라 얼마간 버텨보려 했던 인철은 그날 밤 생각을 바꾸었다. 주인에게도 만족하지
못한 일꾼이라면 구태여 매달릴 일이 아니었다. 이튿날 인철이 주인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
을 밝혔을 때 주인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맞다. 이거 딴맘이 있어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니를 위해서락도 보내주는 기 옳을 거 같다.
하마 니가 틈만 생기믄 책쪼가리 딜따볼라 칼 때 내 알아봤는 기라. 니는 이런 데서 구불
(구를) 아아가 아이라. 잘가거래이. 보자, 니 온지 열이레가? 약속이 있으이 월급을 날품같이
쳐줄수는 없고오- 반달 치 쳐주꾸마. 너무 섭섭어하지 마래이."
그렇게 나옴으로써 그런 헤어짐치고는 평온하고 반듯하게 끝을 냈다.
인철이 두 번째로 구한 일자리는 광복동 뒷골목의 경양식집이었다. 국제시장에서 나온 뒤
인철은 이번에는 시간을 들여 나름대로 생각하고 조사해가며 일자리를 골랐다. 그것도 경험
이라고 함부로 일자리를 얻었다가 다시 옮기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과 맞는 곳을
고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광복동과 충무동 일대를 사흘이나 돌아다닌 끝에 인철은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곳을 세 곳 찾아냈다. 한군데는 이발소였고 다른 곳은 양복점이었으며
세 번째가 그 경양식집이었다. 인철은 승낙하기 전에 먼저 고용의 조건들을 알아보았다. 시
간을 내기에는 이발소와 양복점이 유리했다. 둘 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여는 점포들이 아
니어서 잘만 하면 남는 시간을 공부에 돌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월급이 문제였다. 이발이든 재단이든 그것들은 모두가 기술과 숙련을 요구하는 직
종이었고, 그때만 해도 기술은 거의가 도제 형태로만 전수되던 때라 월급이 형편없었다. 둘
다 초보적인 기술을 습득할 때까지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게 고작이었고, 그뒤에도 겨우 잡
비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발소가 당장은 좀 나아 보였으나 인철은 다시 세 번째 집을 찾아
가보았다.
인철이 그 경양식집을 찾은 것은 새로 열어 겉보기가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입구에 '종업
원 구함'이란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계와 책을 팔아 마련한 돈이 아직
은
좀 남은 데다 전에 있던 점포에서 받은 반달 치 월급이 더해져 인철은 다소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에 의지해 이번에는 제법 세련된 방식의 구직에 들어갔다. 아무 내색 없이 그 집으
로 들어가 돈까스를 시킨 일이 그랬다.
식사를 하며 살펴보니 그 집은 주인 내외가 직접 하는 것 같았다. 주방 쪽에 전문 요리사
가 있는 모양인데 잘 보이지 않고, 홀 쪽의 서비스는 주로 주인 내외가 맡아하고 있었다. 경
양식집으로는 별로 크지 않아뵈는 스무 평 남짓한 홀에 손님이 없는 시간대인데도 일손이
부족해 보였다.
"저- 아저씨."
식사를 마친 인철이 테이블을 치우려는 삼십대 중반의 주인을 잡고 슬몃 물어보았다.
"밖에 종업원 구한다던데 어디서 일할 사람인가요?"
"이 쪼매는 집에 어데 주방하고 홀 구별이 있겠는교? 이쪽저쪽 닥치는 대로 해야제."
"월급은 얼마나 됩니까?"
"와예?"
그제서야 주인이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지 인철을 살펴보며 물었다.
"아뇨. 그냥 좀 알아보고 싶어서요."
"한 2천 원 생각하고 있심더. 기술 배우면 쪼매 더 얹어줄 생각이고예."
"여기도 기술이 있습니까?"
"있고말고지예. 요리도 좋은 기술인 거 몰라예? 보기에는 같은 돈까스라도 만들기에 따라
맛은 하늘땅 치입니더."
"하긴 그렇겠군요. 시간은 어떻습니까?"
"시간? 무신 시간예?"
그러다가 비로소 주인이 알겠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 공부 같은 거 할 시간? 그라이 학생이 시방 일자리 구하는 모양이제? 맞제? 바로 글
체?"
"실은... 좀 알아보고..."
"쓰기에 따라서는 억시기 시간이 없는 것도 아일 끼라. 저녁 늦가까지 문 여는 대신에 아
침에도 늦가 문을 여이께는, 어디 아침부터 돈까스, 바후스텍 찾는 사람이 있나? 그라이 12
시는 돼야 지대로 된 손님이 시작되는 기라. 글치만 어디 딴 데 나가고 할 수는 없을 끼라,
암매. 어떻노? 니 함 일해볼래?"
주인은 더 둘러 말할 것 없다는 듯 바로 물어왔다. 인철은 그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월급도 시원찮은 데다 공연히 으르딱딱거리던 이발사, 재단사 때문에 이발소와 양
복점은 단념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더 알아보면 나은 곳이 있을 성도 싶었다. 인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던지 경양식집 주인이 갑자기 덮어쒸우듯 말했다.
"안죽 머리도 다 안 길었는 거 보이 학생이었던 갑다마는, 그래고 우짜다 학교 때려치우고
일해야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마는, 고마 여다 함 있어봐라. 니 같은 어중간한 반피대기(반쯤
말린 것) 일꾼 찾는 일자리 어디 가나 뻔하다."
그러더니 인철의 대답도 들어보지 않고 주방 쪽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어이, 보래. 거 있나? 여다 함 나와봐라. 얼릉."
그러자 주방 쪽으로 난 쪽문이 열리면서 주인 남자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여자가 하나 나
왔다. 처음 들어서서 먼빛으로 볼 때는 종업원 아가씬가 싶기도 했는데 가까이 오는 걸 보
니 주인 아주머니 같았다.
"와 그라능교? 뭣 때메요?"
주인 아저씨가 왜 그리 인철에게 집착하는지는 그가 아내를 돌아보며 하는 말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봐라. 야 어떻노? 암만캐도 당장은 주방보다 식당 쪽에 많이 씰 낀데 물상도 훤하고- 때
묻고 깎인 데도 없는 게 여다 꼭 안맞으까? 거다가 얼매 전까지 학생이었던 모양인데, 고학
생이라 카믄 손님들한테 인상도 좋고..."
그제서야 주인 아주머니가 찬찬히 인철을 살펴보았다. 그 눈매가 맑고 고와 인철의 얼굴
이 공연히 화끈거렸다.
"카이, 그럴 것도 같고..."
"가시나들, 가시나들 캐쌌지만 손님들이 어디 가시나 얼굴 딜따보고 밥 무로 오는 것도 아
일 끼고- 또 가시나들 그거 이쁘믄 이쁜 대로 꼴 값해쌌는 거 몬 보겠고. 이양 그 가시나
함 생각해봐라. 우쨌노?"
"나간 사람 뒤에서 욕할 거는 없고, 당신 좋으믄 그라이소, 마."
그때쯤은 인철도 마음이 움직였다. 무엇보다도 주인 내외의 부드러운 인상이 인철을 끌었
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가 남편을 예쁘게 흘기며 말했다.
"글치만 엄마야. 이 학생은 손님 아이가? 당신 백지로 밥 무로 온 사람 부뜰고 헛소리하는
거 아이라예?"
"아이따. 난도 물어볼 거 다 물어보고 하는 소리라. 자. 학생 우짤래? 우리하고 함 지내볼
래?"
주인이 그렇게 나오는데 더 머뭇거릴 수가 없어 인철이 대답했다.
"네."
"그럼 됐다. 밥값이고 뭐고 때려찼뿌고 짐이나 가주 온나. 오늘 저녁 당장 바쁘다."
"짐은 이 가방뿐입니다."
"그라믄 저다 조짝 베니아문 비제(보이제)? 저다 가서 함 밀어봐라. 쪼매는 방 하나 있을
끼다. 거다 가방 갖다 놓고 주방으로 온나."
그 경양식집으로 가서 첫 일주일 인철은 자신이 그 낯선 도시에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는 확신으로 보냈다. 주인 내외는 그들의 인상대로 정이 많았고, 서른 이쪽저쪽으로 보이는
주방장도 말이 없는 대로 특별히 인철을 힘들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도 불평할 정도
는 아니었다. 낮 12시부터 2시까지, 그리고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빴지
만 아침을 9시까지 빈둥거릴 수 있었고, 오후에도 두어 시간은 한가했다.
인철이 책을 읽는 데도 모두들 관대했다. 성미가 까다로운 주방장도 인철이 제 할 일을
다 한 뒤에는 책을 읽건 글을 쓰건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주인 내외는 한
술 더 떠 정히 공부하고 싶으면 학원의 새벽 시간은 허락해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 경양식집도 오래 있을 곳은 못 됐다. 국제시장에서처럼 그집에서 일한 지 겨우
보름을 넘겼을까말까한 어느 날 오후였다. 교복과 책가방을 든 다섯 명의 남녀 고등학생이
그 경양식집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없는 일은 아니라 인철은 별생각 없이 그들을 맞아 자리로 안내했다. 그런데 교
모를 벗어 책가방 사이에 구겨넣던 남학생 하나가 인철을 뻔히 쳐다보며 말했다.
"가마이 있자. 이기 누고? 어디서 마이 본 얼굴인데..."
그 말을 듣자 인철도 그를 알아보았다. 반은 다르지만 틀림없이 국민학교 동창 녀석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인철은 애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녀석도
처음에 말을 걸 때와는 달리 긴가민가한 눈길이 되어 물었다.
"저, 혹시 밀양국민학교 졸업하지 않았습니꺼? 4반에 이..."
"아닌데요. 전 서울서 국민학교 나왔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뜻밖으로 인철을 잘 기억했다. 인철이 전학을 와서 다른 반 아이에게도 별
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고아원에 간 일도 그들에게는 따로 기억할 만큼 인상적일
수 있었다. 녀석이 지난 여름의 국민학교 동창회에 나오지 않은 것도 인철에게는 다행이었
다. 그랬다면 그때 취해 벌인 소동으로 인철을 더 뚜렷하게 알아봐 끝내 시치미를 떼기 어
려웠을 것이다.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봤나? 4반에, 이... 그래, 이인철이라꼬."
녀석도 꽤나 끈질겼다. 마침내는 인철의 이름까지 기억해냈다. 그 사이 다소간 여유를 찾
은 인철은 가벼운 웃음까지 먹므으며 거짓 이름을 둘러댔다.
"제 이름은 임동청인데요."
그제서야 녀석도 단념한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하기사 글마는 서울서 무신 고등학교 다닌다 캤제. 일류 댕긴다꼬 술 먹고 폼잡다가 종도
란 놈한테 되게 터졌다 카든강..."
그런 말로 미루어 그새 자란 머리칼과 새로 사입은 사복이 녀석을 속이는 데 특히 한몫을
한 것 같았다.
인철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문까지 받아서야 자리를 떴다. 돈까스 셋과 비후까스 둘이었
는데 끼니가 아니라 맛으로 먹으려는 듯했다. 식욕이 왕성한 고등학생들에게 흔히 있는 일
이었다.
"왜, 아는 아아들이가?"
인철의 표정이 어땠는지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 아저씨가 주문을 받아 적다 말고 인철
을 힐긋 바라보았다. 인철은 일부러 녀석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사람을 잘못 보았는가 봐요."
그 덕분에 녀석은 두 번 다시 인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곧 저희들끼리의 화제로
키들거리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음식을 나르면서 인철은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에 슬몃슬몃 귀를 기울였다. 들은 걸로 짐
작하면 그들은 남녀 두 학교의 문예반 반원들로 곧 있을 합동 시화전을 의논하고 있는 듯
했다. 곁들여 문학을 얘기하고 있는데 인철의 눈에는 그저 치기만만하게만 보였다.
그런데 식사가 끝난 테이블을 치우고 커피를 나른 뒤였다. 일없이 그들 곁에 붙어서 있기
도 뭣해 계산대 곁으로 돌아가 무심코 그들 쪽을 돌아본 인철의 가슴을 갑자기 쿡, 찔러오
는 게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싶어 살펴보니 창가에 앉은 여학생의 옆얼굴이었다. 약간 상기
되어 무언가를 떠들고 있는데 유난히 희게 보이는 귓바퀴와 그 곁에 늘어진 새까만 갈래머
리 하나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특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래, 나도 저런 갈래머리 아이와 만나고 싶었다. 저런 아이와 찻잔을 놓고 고귀하고 아름
다운 것들을 얘기하고 싶었다.'
인철은 마치 오래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다시 기억해낸 사람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다가가고 싶고 함께이고 싶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축복의 빛무
리 같은 것이 그들 다섯 모두를 환하게 둘러싸 바라보는 인철을 눈부시게 했다.
'아직 한번도 문학을 특별하게 유의해 보지는 않았지만 너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나도
읽은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너희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읽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더 많이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구나. 언제나 행복한 것
은 너희들이구나.'
인철은 난데없는 비감에 젖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급히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인철의 그런 감정 전개에는 틀림없이 그 특유의 비약과 과장이 거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혀 터무니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뒤 이어진 오후의 한가한 두 시간을 줄곧 음울하게 앉
아 있었던 걸로 보아서는 무언가가 그의 내면을 아프게 할퀴고 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곧 바쁜 저녁 시간이 되어 인철은 그런 감상에 오래 젖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따라 유난히 많이 몰려든 손님 때문에 잠시 숨돌릴 틈조차 없이 바쁘게 홀을 돌아야 했다.
9시가 넘어서야 먹게 된 저녁밥도 주방 조리대에 기대선 채였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11시가 넘어 주인 내외와 주방장이 퇴근하고 홀로 점포 안의 좁은 골방에 남게
되자 낮의 음울한 감상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원래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느새 그것은
일생을 어둡고 쓸쓸한 곳만 헤매다 끝나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운명의 예감으로 자랐다가 다
시 명혜를 향한 앞 뒤 없는 그리움으로 변했다.
한번 발동된 감정의 요사는 그뒤로도 오랫동안,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로 인철의 외로운
영혼을 쥐어짰다. 그 며칠 자족하며 적응해가던 현실은 다시 초라하고 서글프기까지 한 전
락으로 내려앉았고, 득의해서 세웠던 여러 장한 계획들도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흥행의
순서표 같이만 느껴졌다. 나중에 그때껏 당연하게 인정해온 삶의 다른 여러 가치들까지도
한낱 믿기 위한 미신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졌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감정 전개의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갖가지 괴로운
상념에 시달리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잠이 든 인철은 엉뚱한 악몽으로 날이 채 밝기도 전
에 깨어났다. 어제 다녀간 녀석이 그 도시에 와 있는 모든 동창생들을 데리고 그 경양식집
으로 찾아온 꿈이었는데, 그게 악몽이 된 것은 슬픈 얼굴을 한 명혜가 그들 안에 있었기 때
문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인철은 펄쩍 놀라듯 그 꿈이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을 깨우쳤다. 어제 녀
석은 나에게 속은 척 그냥 나갔지만 실은 나를 정확히 알아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재
부 동창회 같은 곳에라도 가서 떠벌리면 용기네 아이들은 물론 명혜까지도 여기서 접시나
나르는 나를 구경하러 올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번에는 의심이 암귀처럼 인철을 몰
아댔다. 맞아, 어제 나갈 때 녀석의 눈빛이 아무래도 이상했어. 나를 빠안히 쳐다보는 게 다
시 한번 틀림없는가 확인하는 눈치였어.
그렇게 되면 그 경양식집은 이미 더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상상만으로 후끈 달아 몸을 일
으킨 인철은 곧 무엇이 쫓기는 사람처럼 짐을 꾸렸다. 며칠 새 너절하게 펼쳐놓았던 책이며
옷가지와 소지품들을 그 볼품없는 가방에 다 쓸어넣고 세수를 마치니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인철은 금방이라도 아이들이 떼지어 몰려올 것 같아 다급한 마음 같아서는 그 길로 어디
든 멀리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힘들여 그것만은 참았다. 그러는 게 그 동안 잘 대해준 주
인 내외에 대한 예의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의심을 사는 게 싫었다.
주인 내외의 늦은 출근을 기다리는 동안도 인철은 가방을 문 앞에다 끌어내놓고 있었다.
그들보다 아이들이 먼저 나타나면 그 가방으로 자신이 그 집과 무관함을 증명하기 위함이었
다. 그전에 국제시장에서 했던 일이나 그 뒤 부산에서 그가 전전했던 여러 막일을 돌이켜보
면 어이없다 못해 쓴웃음이 나는 자존심이요 결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따라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나타난 주인 내외는 인철의 갑작스런 작별 인사를 섭섭해
하다 못해 화까지 냈다. 하지만 인철은 식당 안에 아무런 이상도 없어진 것도 없음을 확인
시키고는 도망치듯 그 경양식집을 떠났다.
그 위에 아무리 고귀한 목적이 설정되어 있더라도 비정한 삶의 현장에서 감상은 금물이
다. 감상은 원시적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그 효율적인 발현을 가로막는다. 목적보다는 과정에
필요 이상의 무게를 싣고 자기 내부의 욕구보다는 타자로부터의 신호에 더 민감해지게 한
다.
서울을 떠날 때 인철이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경계한 것은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드는 일이
었다. 오직 냉철한 이성에 인도된 생명력으로 그에게 닥친 삶의 비상한 국면을 전환시킬
결심이었다. 하지만 감상은 그에게 이미 한 성향을 넘어 자아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
엔가 한번 그 약점을 찔리자 자신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그는 무력하게 허물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양식집을 나온 그날부터 인철은 다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
만 공부라는 상위 목적에다 겉보기라는 다분히 감상적인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 구직이 전
같이 쉬울 리 없었다. 크건 작건 아직도 시혜자의 심리에 빠져 있던 당시의 고용주들은 일
을 시작하기도 전에 묻고 따지고 재고 고르는 그 별난 구직자에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
다. 그런데도 인철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완강하게 자신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키려
들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아무런 성과 없는 날들이 여러 날 지나갔다. 그 사이 인철
의 비축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시장통의 싸구려 국밥집과 허름한 여인숙에 의지
한 열흘이 지나자 인철은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턱없는 감상이 거기에도 적용돼 달
근이 일러준 살이의 요령을 지키지 않은 대가였다.
하지만 다시 빈속으로 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내면서도 인철은 며칠이나 더 버텼다. 날이
밝으면 거리를 돌며 언뜻언뜻 흐려오는 눈길로도 저 일은 남 보기에 어떨까, 이곳에는 용기
나 명혜가 와도 괜찮을까,를 살폈고 굶어 허옇게 말라오는 입술을 침으로 축이면서도 시간
은 많은가, 공부는 할 수 있겠는가,를 따졌다. 뒷날 돌이켜보면 어이없지만 그때로 보아서는
나름의 뜨거운 열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 차례 큰 전환이 일어났다. 그날도 하루종일 공공시설의 급수대 수도꼭
지에서 나오는 찬물 외에는 아무것도 찬 것이 없는 속으로 거리를 떠돌다가 겨울 기운이 완
연한 저녁 바람에 쫓겨 역 대합실로 가는 길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대합실의 온
기를 그리워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열심히 걸어도 도무지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들고 있는 가방도 천근의 무게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이게 왜 이럴까. 내가 병이 났나?'
인철은 매섭게 옷깃을 파고드는 거리의 바람도 잊은 채 걸음을 멈추고 멍한 머리로 남의
일처럼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긔 순간 무슨 각성처럼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니다. 이건 병이 아니다. 바로 굶주림이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동전을 털어 시장 좌판에서 막국수를 먹은 게 벌써 이틀 전이었다.
그전 며칠도 결코 온전한 식사는 못 되었다.
그런 것들을 차례로 떠올리자 몽환 속을 헤매이는 것 같던 인철의 정신이 팽팽한 긴장으
로 깨어났다. 아마도 소홀하게 보살펴온 게 후회스러워지고 그렇도록 부추긴 정신의 허영이
어리석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곧 일련의 기억 안 나는 사유의 과정을
거쳐 경구와도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육체는 내 존재의 그릇이다. 이게 깨어지면 나는 아무런 의미도 담을 수가 없다. 내줄 것
도 받을 것도 없게 된다.'
어쩌면 그같이 급속한 감정의 전환과 결론은 의기에 몰린 육체가 의도적으로 인철의 무의
식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어떤 정밀하고 조리 있는 사유의 결론보
다 더 큰 힘으로 인철의 의식을 이끌기 시작했다.
"날도 다 저물어가는데 젊은이가 길가에 뻔히 서서 뭐 하노? 술 취했나?"
누가 인철의 어깨를 치며 그렇게 말했다. 인철이 퍼뜩 정신을 차려 돌아보니 낮술에 알맞
게 취한 중늙은이였다. 그의 술기운과 쓸데없이 간섭하기 좋아하는 잔정을 알아본 인철은
준비해온 듯 받았다.
"아닙니다. 그저 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러자 인철의 예측대로 그 중늙은이가 바로 물었다.
"어려운 일이라이? 그기 뭔데?"
"실은 남부민동으로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습니다. 거기까지 걸을 일이 막막해서요. 혹 버
스표 한 장 빌릴 수 없을까요?"
남부민동은 지난번에 그의 책을 가장 후한 값으로 사준 헌책방이 있는 곳이었다. 그새 살
아난 인철의 현실 감각은 그때껏 지니고 있던 책을 팔아 당면한 위기를 벗어난다는 해결책
까지 찾아내고 있었다.
"거, 참말로 오늘은 요상한 구걸을 다 당하네. 나 같은 늙은이한테 무신 버스표가 있겠노?"
그렇게 중얼거리던 늙은이가 주머니를 털어 십원짜리 동전 두 개를 내밀었다.
"아나, 이걸로 차비해라."
다행히 버스 정류장이 멀지 않아 인철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남부민동에 있는 헌책방에
이를 수 있었다. 낯익은 책방 주인 아저씨가 서점안 진열대 모퉁이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들어서는 인철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그 앞에 놓인 빈 국밥 그릇으로 미루어 방금 저녁을
마친 것 같았다.
"아저씨, 제 책 좀 사주시겠어요?"
인철이 그러면서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의 지퍼를 열어 그때껏 남아있던 책을 모조리 꺼
냈다. 고등학교 2학년 주요 교과서들과 몇 권 사모았던 시집, 소설책 따위였다. 그런 책들과
인철을 번갈아 살피던 주인이 그제서야 정확하게 인철을 기억해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그 학생이로구먼. 그런데 이렇게 몽땅 팔아버리면 공부는 어떻게 하려구?"
"다 끝났어요. 우선 살고 봐야죠. 공부는 다시 여유가 생기면 하는 거구요."
인철이 자신도 모르게 뒤틀린 목소리가 되어 대답했다. 어쩌면 심중으로는 자신이 빠져들
게 된 위기가 바로 그런 허영 때문이라는 자각이 있어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책방 주
인이 거기서 무슨 흥미를 느꼈던지 갑자기 캐묻는 어조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교복도 안 입고 머리도 많이 길었네. 학교는 그만둔 거야?"
"그때도 학교 같은 데는 다니고 있지 않았어요. 지난 학기로 끝난 학굡니다."
인철은 일종의 방심 상태에 빠져 솔직하게 대답했다.
"집이 어디야? 여기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디서 왔지?"
"서울서 왔습니다만 집은 경북입니다."
"여긴 뭣 하러 왔어?"
"혼자 힘으로 어떻게 공부할 수 있나 해서요. 하지만 지금은 그만뒀습니다. 몸부터 살려놓
고 봐야겠어요. 그런데- 제 책 사지 않으시겠어요? 이거 얼마나 쳐주시겠습니까?"
그제서야 책방 주인치고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묻는다고 느낀 인철이 그렇게 흥정을
서둘렀다.
"그건 급하지 않아. 그래... 몸부터 살려야겠다고 했는데- 지금 여기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네."
"그럼 처음부터 일자리를 찾았는데 아직도 못 찾은 거야?"
"그건 아닙니다. 다만..."
거기서 인철은 말을 끊었다. 그 한 달 보름의 경과를 이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에게 얘기
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자신의 어리석음이든 세상살이의 어려
움이든 누구에겐가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도 있었다. 망설임은 오래지 않
았다. 인철은 곧 자신도 이해 못 할 솔직함으로 국제시장의 헌 가마니 수집상과 광복동의
경양식집을 얘기하고 그뒤에 있은 구직에서의 쓰라린 전전과 지금 이르게 된 결론까지 간결
하게 요약했다. 뒷날 빛을 보게 될 이야기꾼의 소질이 그때도 이미 자라 있었던 것일까, 어
딘가 감동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책방 주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책방에서 일해보는 게 어때? 지금은 이렇게 한가하지만 신학기가 되면
사람을 하나 두어도 눈이 팽팽 돌 지경이지. 두어달 앞당긴 셈 치고 점원으로 쓸 테니 생각
있으면 그렇게 해."
고마워서였까, 방금 고해하듯 자신의 심증을 털어놓은 뒤끝이라 감정에 못 이긴 탓일까,
그 말을 들은 인철은 앞 뒤 없이 눈물부터 쏟아졌다. 제안을 받고 보니 자기가 바로 그런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는 과장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눈물이 너무도 굵고 뜨거워 스
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정말..."
인철이 눈물을 훔치면서 그렇게 말끝을 삼키자 주인이 문득 사무적인 목소리가 되어 근무
조건을 일러주었다.
"잠은 가게 문닫은 뒤 저기 있는 야전 침대 펴고 여기서 자는 거야. 식사는 저 앞 국밥집
에서 갖다 줄 거고... 월급은 크게 기대하지 마. 지금은 잡비만 되면 다행이고, 신학기 되면
그 경양식집만큼은 맞춰보지, 그것도 일하는 거 보아가며야."
따지고 보면 결코 다른 곳보다 좋은 일자리는 아니었으나 그때의 인철에게는 지옥에서 부
처를 만난 것만큼이나 고맙고 기뻤다. 무슨 인연에 끌려 인철을 받아들였는지 책방 주인의
그 다음 말은 더욱 인철을 감동시켰다.
"자, 그럼 남은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저기 저 국밥집에 가서 밥부터 먹구 와. 우리 책
방에서 왔다면 잘해줄 거야."
그런데 무슨 변덕이었을까. 허겁지겁 국밥 한 그릇을 비운 인철이 몸과 마음 모두 젖은
솜처럼 되어 돌아왔을 때 책방 주인이 느닷없이 의심 많고 인색한 상인의 본색을 드러냈다.
"단 신원을 보증해줄 사람은 있어야 돼. 이 책방 겉보기에는 허름해도 내 전재산이야. 무얼
빼들고 가도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고, 이걸 아무 보증 없이 맡길 수는 없어, 어디 보증
인으로 세울 만한 사람 없어?"
그렇게 충족시키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었다가 다시 인철의 막막해하는 눈물을 보고서야
그걸 풀어주었다. 나중의 짐작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서 피고용인인 인철의 불비함을 깨우쳐
주는 동시에 고요주인 자신의 관대함을 강조하는 데 뜻이 있었던 것 같았다.
<... 그 헌책방은 도로를 무단으로 점유해 펼친 두 평 남짓의 긴 좌판과 그 위에 늘어놓은
책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제법 컸지만 실상은 길가에 길게 나 있는 네 평 정도의 작은 점
포였다. 밤이 깊어 좌판을 걷고 그 위에 있던 책들을 들여놓으면 점포 안에는 겨우 군용 야
전 침대 하나를 펼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거기서 난 한겨울은 돌이켜보기조차 끔찍하다. 남쪽 끝의 항구 도시지만 겨울은 내륙이나
다름없었고, 또 그 책방 한구석에는 작은 심구공탄 난로가 하나 들여져 있었지만 난방의 목
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점포라 서까래가 그냥 보이도록 둔 높은 천장이 그 보잘 것 없는
난로의 온기를 흩어버리는 데다 송판에 함석을 입힌 투박한 점포 문들 사이에는 불을 끄고
있으면 달빛이 새어들 만큼 틈새가 있어 습기까지 머금은 겨울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게 주어진 침구는 삐걱거리는 군용 야전 침대 하나와 역시 그만큼 낡은 군용 담요 두
장이 전부였다. 나중에 몇 푼씩 받게 된 잡비로 담요 한 장을 더 샀는데도 바깥이나 다름없
는 점포 안의 추위를 막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날이 새기 바쁘게 이빨을 덜덜거리
며 해장국 때문에 일찍 문을 여는 단골 국밥집으로 달려가는 게 그때의 내가 추위를 고통에
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 추위보다 더 기억에 생생한 것은 내가 한동안 빠져 보냈던 묘한 흥분과도 같은
자족의 세월이다. 일생 처음이어서인지 내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있다는 것은 은근한 자랑
을 넘어 그 자체가 무슨 큰 성취처럼 느껴졌다. 특히 그리로 가기 직전의 혹독한 경험은
더욱 그런 자족의 기분을 키웠을 것이다. 이제 진정한 내 전기는 시작되고 있다- 언젠가는
그렇게 중얼거린 기억도 난다.
거기다가 헤세나 체호프같이 한때 책방 점원의 이력을 가진 문학적 영웅들도 내개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과 긴 겨울 밤을 내 특유의 장기인 목적
없는 독서로 보냈다. 잊고 지나쳤지만 그 헌책방을 교과서와 참고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
라 모든 종류의 헌책을 다 사고 팔았다. 학기중에는 오히려 그런 일반 서적의 거래로 유지
되는 편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헌책방에서 거래되는 일반 서적은 태반이 소설류였다. 잠시
정규의 학과 공부에 질려 있던 나는 그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마침내는 나도 이런
것들을 쓰는 사람으로 끝장을 보지 않을까 하는, 불길하면서도 달콤한 예감에 빠져들곤 했
다...>
뒷날 인철은 어떤 잡문에서 그 헌책방을 그렇게 회상하고 있다. 험구를 하면서도 어딘가
우호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거기야말로 그가 그 도시에서 처음으로 정착다운 정착을 한곳이
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 48 장 꽃 피는 도회
모두 술에 취해가면서 그 술자리의 구성원이나 목적 같은 것이 조금씩 분명해졌다. 그들
이 술상에 둘러앉을 때만 해도 주마담 언니가 살림 차릴 영감이라도 되는 듯 매번 극진히
모시는 한사장이라는 사람을 빼고는 모두가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의 양주병이 비면서 고집센 시골 양반처럼 말수가 적던 중년이 면저 노래로 자기의
신분이나 경력을 은근히 내비쳤다. 몇 번인가 노래 순서가 와도 끝내 마다하던 그가 오래된
군가를 불러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놓고......"
그러자 그에 못지않게 노래라면 질색을 하던 맞은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짧게
깎은 점퍼 차림이 무슨 흥이 났던지 손바닥으로 상 모서리까지 쳐가며 합창을 하기 시작했
다.
"태애그기 걸어놓고 천세만세 부르세......"
그 투박하고 굵은 목소리의 군가를 들으면서 영희는 그들이 오래 군대에 있었던 사람들이
거나 어쩌면 지금도 군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아가씨들도 비슷한 느낌인 모
양이었다. 특히 그 집에서 가장 오래된 문양 언니는 영희의 그런 짐작이 맞았음을 이내 확
인해주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아아, 이이슬같이 주욱겠노라."
그들이 악을 쓰듯 그렇게 노래를 끝내자 그때껏 열심히 젓가락 장단을 맞추던 문양이 머
리를 짧게 깎은 중년에게 술 한잔을 받쳐올리며 말했다.
"아이, 장군님. 노래 잘하시면서 지금껏 빼셨네. 다시 봐드려야겠어요."
영희는 문양이 그 사람을 전에 본 적이 있어 알고 한 소리로 들었는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일순 그의 눈에 경계의 빛이 번쩍하다가 취기 속에 스르르 풀어졌다. 하기야......하고
말하는 듯했다. 맞은편 시골 양반 같은 중년도 이미 들켰으니까, 하는 기분이었던지 그때부
터 드러내놓고 감회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야, 어드러케 가락이 옛날 같지가 않네?"
"미친 자슥, 그게 하마 15년이 넘었는데 우예 같겠노? 니가 아작 밥풀때기 하나 신삥 쏘위
가?"
문양에게서 장군이라고 불린 사람도 더는 꺼릴 것 없다는 듯 그렇게 받았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아주 감격했다는 투로 끼여들었다.
"그럼 두 분이 소위 때부터......"
하지만 말끝을 다 잇지 못하거나 얼굴 가득 놀라운 표정을 짓는 게 아무래도 감격을 과장
하고 있다는 의심을 주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두 사람 사이를 알고 한자리로 불러모았
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잔을 받아 겉보기보다는 많이 취했던지 한번 자
신을 드러내자 걷잡지를 못했다.
"와 아이라. 그때 육개월 단기 교육 마치고 자대라꼬 찾아가서 저기(저것이) 지도(저도) 어
제 아래 온 신삥 쏘위면서 그래도 선임자라고 내한테 군기 잡을라 안카나?"
"야,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다 소리 못 들어봤네? 그때는 던시(전시)라구 던시......한 달에 다
이야몬드 한 개씩 즐 땐데 삼개월이 어드러케 짧네? 나이가 많아 봐준 거디, 아이면 대갈통
날아갔어야."
그렇게 술자리를 잠시 둘의 추억담에 이끌렸다. 각기 계통을 달리하는 장교 임관 과정을
거쳐 6·25 이듬해 초봄에 처음 만난 그들은 그 뒤 이 년 남짓의 남은 전쟁 기간을줄곧 한
사단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철원·김화, 피의 능선, 펀치볼...... 그런 귀에 익은 지명들과 함
께 한동안 둘의 얘기는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감으로 자리를 압도했다. 다른 사람들도 회고
조가 되어 한마디씩 6·25에 얽힌 기억들을 들춰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영희였다. 그녀는 마치 딴 나라에서 온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
는 게 없었다.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 대부분은 여럿에게 떠들 수 있는 성질도 아니거니와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그 나머지까지도 새카맣게 지워져 있는 게 스스로에게도 이
상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근래의 기억까지도 산부인과에서 퇴원한 이후 외에는 남
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어떤 때는 자신에게 부모 형제가 있었던가, 고향이 있고 과거가
있는가, 조차 아물아물했다. 아마도 창현의 배신이 그녀의 정신에 준 타격 때문이었겠지만,
그 창현마저도 이제는 애증의 빛깔이 없는 애매한 추상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냉정히 분석해보면 영희의 그 같은 의식 상태가 전혀 해명될 수 없는 것은 아니
다. 그녀에게서 현실에서의 좌절은 옛 의식과의 단절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그녀의 소녀 시
절을 지탱하게 해주었던 소공녀 의식은 대략 첫 번째 박원장과의 일이 있고 나서 지워지고
말았다. 박원장의 비정하고 무책임한 방관에서 받은 느낌이든, 그의 드센 처가가 벌인 소동
에서 받은 느낌이든, 그때 영희는 자신이 바람둥이 주인의 유혹에 넘어간 하녀에 지나지 않
음을 절감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 다음 그녀를 지탱한 것은 막연하나마 아직은 가족 의식에 바탕한 신분 상승의 욕구였
다. 밀양에서의 첫 번째 가출에서부터 돌내골로 돌아올 때까지로, 그때만 해도 영희에게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적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소극
적인 가족 의식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름의 윤리관을 형성하고 경계와 수치심의
바탕이 되어 그녀를 도회의 막다른 진창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영희의 신분 상승 욕구가 보다 원초적인 생존의 본능과 결합하게 된 것은 돌내골에서의
두 번째 가출 이후가 될 것이다. 그 출발은 창현의 첫 번째 배신에다 어머니와의 불화로 심
성이 황폐해진 그녀에게는 그저 암담하기만 한 농촌의 현실과 이미 그것을 배겨나기 어렵게
도회에 길들여져버린 자신을 위한 결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생존
환경을 향한 그 이상 그 또한 신분 상승의 욕구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로 온 뒤 그래도 한동안은 굳건하게 유지되던 예전의 윤리 의식이나 신분 상승의 욕
구가 차츰 원초적인 생존 본능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 것은 영희의 삶이 매음과 연관을 맺
으면서부터가 된다. 그 뒤 박원장을 다시 만나 그의 정부가 되면서 매음은 다소 은밀하고
기교적인 형태로 바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윤리에 바탕한 옛 의식이나 욕구가 모두 지워
지 것은 아니었다. 그게 적극적인 가족 의식으로 표출된 게 인철에 대한 실제 이상의 애정
과 집착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과장된 가족 의식으로 점점 분명해지는 자신의 윤락을 분식
하고 싶었음에 틀림이 없다.
창현과의 재회는 그렇게라도 유지하고 싶어하던 영희의 의식에 마지막 타격이 되었다. 이
미 남자를 충분히 알게 된 몸과 애증이 얽혀 더욱 치열해진 치정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의식의 흔적을 말끔히 태워버렸다. 그러다가 창현의 참혹하고 비정한 배신은 그녀의 기억에
서 과거에로의 통로까지 막아버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맹목적이어서 오히려 더
세찬 원초적 본능뿐이었다
따라서 그때 영희의 기억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두 달 전 혜라에게 이끌려 그 백운장
으로 온 날의 것이 된다. 그전에 혜라의 셋방에서 열흘이나 몸조리를 했고, 다시 보름 가까
이 창현을 찾아다녀 몸은 충분히 회복되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인가 갑자기 휑해
오는 머리와 휘청이는 몸은 겨우 가누고 앉았는데, 방으로 들어온 보살 마담이 혜라의 설명
은 별로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것 참 묘한 일이네. 내가 잘못 보았나? 사람의 상이 일 년 만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지, 원......업에 쫓겨와도 호된 업에 쫓겨온 상이야. 그때는 못 본 도화살까지 활짝 폈군. 할
수 없지. 기꺼이 맞고 거리낌없이 팔아주는 수밖에. 그게 또한 색도가를 하는 내 업이 아니
겠어? 여기서 네 남은 업을 풀고 미욱한 육신이라도 편히 고해를 헤쳐갈 길을 찾아봐라.
하지만 내 밑에 있으려면 세 가지는 꼭 지켜줘야 한다. 첫째로 남의 정을 가르는 짓은 하
지 말 것. 정히 서로 좋으면 몇 달 가만 살림 차리는 것은 좋지만 조강지처 내쫓고 안방 차
지하는 것은 못 봐준다. 둘째로 살림을 덜어내도 집과 양식은 남겨줄 것. 화류계 사랑, 재물
오가는 거야 당연지사지만 남을 거덜나게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좋은 벌치기는 꿀을 떠도
반드시 남기고 뜬다. 셋째, 기둥서방은 안 된다. 서로 좋아 결혼하는 거야 말리지 않지만 기
둥서방 두고 이 집 들락거릴 생각은 마라. 너희들을 위해서도 이 세 가지는 꼭 명심해야 한
다. 너희들이 다시 업을 짓게 되는 것은 대개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해서다. 됐다. 가서 며
칠 더 쉬고 다음 주부터 나오너라."
술자리가 한껏 풀어져 그새 그들의 신분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났다. 짧은 머리는 정말로
장군이었고, 시골 양반은 장군이 되면서 바로 예편돼 무슨 공사의 간부인 사람이었다.
영희도 세상이 군인들의 것이 되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술자리는 아
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낮에 한사장의 전화가 왔을 때 주마담은 반갑다기보다는 황
공해한다는 표현이 알맞을 만큼 호들갑을 떨었다. 한사장은 여러 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
는 사람으로, 그 중에는 영희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만큼 큰 기업도 있었다. 그런데 한
사장은 또 그들 두 장군을 상전 모시듯 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한사장의 친구라는 대머리
가 한 사람 더 있었으나 그의 공손함도 한사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전시도 아닌데......아무리 장군이라지만 군인이 사장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몇십억 재산을 가진 사람이 군인들에게 저리 빌붙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미 자신과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지 않은 세상일에는 무감각해져 있는 영희였으나 절로
그런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며칠은 내리 일본 손님들만 받아 헤픈 웃음에 몸만
내맡겨야 하는 술자리였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진행되는 그날의 술자리가 그녀의
의식에 어떤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영희의 그런 별로 중요할 것도 없는 의문은 갑자기 변한 술자리의 분위기 때문에
더 지속되지 못했다. 한사장의 친구라는, 웃음 소리가 호탕하고 기분파로 보이는 대머리가
이제 겨우 여유를 찾았다는 듯 한 차례 큰 잔으로 술을 돌리더니 갑자기 지갑을 꺼내 아가
씨들뿐만 아니라 주마담에게까지 빳빳한 오백원짜리 두 장씩을 돌렸다.
"아무래도 기름을 안 치니까 뭐가 잘 안 돌아가. 너희들 아직 신고도 안 했지? 자, 마담부
터 신고해봐."
장군들이 어지간히 취했다는 걸 알아보고 자신있게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인데, 영희가 보
기에도 때를 잘 고른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6·25에 얽힌 추억담도 시들해져 건성으로
소리만 높이고 있던 장군들이 기대하는 눈길로 아가씨들 쪽을 보았다.
"어머, 아까 인사 다 드렸잖아요? 무슨 신고를 또 해요?"
대머리가 원하는 게 뭔지 뻔히 알면서도 곁에 앉은 문양이 고참답게 새침을 피워 값을 올
렸다. 대머리가 노련한 전문가답게 그 말을 받았다.
"이거 엊그제 나온 시로도(신참) 아냐? 아직 신고가 어떤 것인지 모르면 내가 알려주지. 이
리 와!"
그러면서 문양을 와락 당겨 안더니 한 손으로 저고리 옷고름을 풀어 젖혔다. 문양이 앙탈
을 떠는 척하면서도 적당히 몸을 맡겨 이내 하얀 젖무덤이 드러났다. 대머리가 그 젖무덤을
두 손에 담아 받치듯 하며 소리쳤다.
"우리 문향이 윗동네 문안이오!"
대머리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다시 문양의 치마폭을 걷어젖혔다. 이어 그가 흰 인조견 바
지마저 벗기려 들자 이번에는 문양도 제법 거세게 양탈을 부렸다. 후드득, 하며 어딘가 옷솔
기 터지는 소리가 나고 문양의 몸부림에 상이 흔들려 술병이 쓰러졌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는 듯했으나 대머리가 다시 노련한 전문가답게 재빨리 수습했다.
"그래, 금테는 안 둘러도 오백원짜리 두 장으로는 안 되겠단 말이지? 좋아, 오늘 장군님도
모셨고 하니 특별 관람료를 내지."
슬그머니 문양을 놓아준 대머리가 넉살좋게 웃으면서 다시 지갑을 열어 아가씨에게 오백
원짜리 석 장을 더 돌렸다. 고급 요정에 속하는 백운장에 어지간히 익숙해진 영희에게도 횡
재를 만났다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일어날 때도 그냥 가지는 않을테니 자리팁만으로도 벌
써 비어홀 시절의 외박 화대를 웃돌 것이었다.
그때껏 제법 낯성까지 내며 앙탈을 부리던 문양의 얼굴이 절로 펴지고 신양, 유양은 환하
게 웃음까지 지었다. 대머리는 그러고도 서두르지 않았다.
"까짓 거, 한 잔씩 더 돌려버려!"
그리고 맥주컵에 반 이상 따른 양주를 아가씨들에게 한차례 돌린 뒤에야 후속 작업에 들
어갔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한사자의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방면의 재능 때문에 특별히 자
리에 끼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아, 문향이 아랫동네 문안이오!"
이미 현저하게 저항이 약화된 문양의 아랫도리를 다시 공략하기 시작한 그가 이번에는 어
렵잖게 목적을 이루고 득의에 차 그렇게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영희는 그날 참으로 묘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했다. 전에는 그렇게 드러나는 여자의 아랫도리가 역겹거나 기껏해야 애
처로웠다. 그 다음에는 무심해졌는데-그날은 같은 여자이면서도 희미한 욕정이 일 만큼 아
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문득 자정까지 되어 아무도 없다면 자신의 아랫도리를 열어보
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나의 아랫배도 저리 희고 매끈할 수 있을까. 나의 음모도 저렇게
탐스럽고 윤기 있을 수 있을까.
이어 한사장이 대머리의 예를 받아 곁에 앉은 신양을 신고시키고 영희에게도 차례가 왔
다. 그러나 치마가 젖혀지고 속곳이 흘러내릴 때에도 줄곧 영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엉뚱한 의구였다.
아가씨들의 속곳이 벗겨져 색기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술자리는 한층 질탕해져왔다. 유두
주, 배꼽주, 계곡주로 내려가면서 취해가는 그들은 몸에 밴 허세나 경계심, 거래적인 태도와
관찰의 눈길 같은 것들을 벗어부치고 대신 벌거벗은 인간 그대로의 희로애락에 충실해져가
는 것이었다. 중간에 보살 마담이 자기 집의 풍류와 품격을 내세우며 가야금과 장구를 들여
보냈으나 산조 한 가락을 다 못 풀고 뽕짝에 밀려났다.
그렇게 되다 보니 초저녁 아가씨들을 들이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내밀히 주고받은 거래의
내용도 노래와 춤 사이사이에 거침없이 툭툭 기여들었다.
"거 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가서. 외국 차관이라고 해도 공짜가 아니디 않네? 그런데......
공장도 짓기 전에 도대체 몇 할이나 떼이는 거이야? 여기 일 할, 저기 일 할-그러고도 뭐가
되가서?'
"이율이 있잖습니까? 내국 금리가 너무 높아서. 은행돈보다야 못하겠지만 사채 쓰는 것보
다야 몇 배 낫지요."
"혹시 대강대강 짓는 척하다가 이거 빼먹고 적 빼먹고 해서 껍데기만 남군 뒤에 벌렁 자빠
지는 거 아이가? 빚은 보증선 정부한테 떠너갔뿌고......"
"우리 한창산업, 외국 차관 떼먹자고 어제오늘 세운 회사 아닙니다. 회장님이 20년 피땀 흘
려 키운 기업이죠. 6·25때도 부산까지 피난가서 지켜냈습니다."
그런 알 듯 말 듯한 대화가 끼어드는가 하면 이미 아무런 저항이 없는 몸들을 구석구석
더듬고 주물럭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심각해져 혀 꼬부라진 소리로 주고 받기도 했다.
"거 말야, 잘은 모르디만 외국 차관 이거 준다고 함부로 들여 되는 거야? 무슨 공업이다,
무슨 단지다 하느 거 다른 말들도 있는 모양이라. 양코배기들 벌써 단물 쓴물 다 빨아먹은
거 비싼 값으루 우리에게 앵기는 거라구들 말이야. 뭐, 노후 산업이라던가, 공해 산업이라던
가......"
"한몫 끼지 못한 치들이 배가 아파 하는 소리들이죠. 산업이란 게 다 단계가 있습지요. 선
진국들도 그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겁니다."
"글치만 빌린 자본에 빌린 기계, 빌린 기술로 뭐가 되겠노? 거다가 석유 한 방울 원료 하
나 똑똑히 나는 기 있나? 외상이믄 소도 자(잡아) 먹는다꼬, 차관 덥석덥석 받았다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놈이 먹는 거 아이가? 아이믄 껍데기만 뺀지르르하게 공장 세아놓고
핑핑 놀루튼가(놀리던가)."
"막말로 공알이 빠져도 속곳 밑에 있다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 땅에 세워놓으면 결국은
우리 거 됩니다. 박대통령 각하께서 길은 바로 잡으신 거지요. 그리구 노후 산업, 공해 산업
타령도 그렇습니다. 선진국이야 밥술 먹을 만하니 효율이니 공해니 따지게 됐지만 우리야
어디 그렇습니까? 그런 건 우리도 살 만해진 뒤에 따져도 늦지 않습니다. 당장 굶어죽을 판
인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됩니까? 주겠다면 뭐든지 받아다가 많이 세우고 많이 만들어
파는 게 장땡입니다."
영희의 의식이 조금만 깨어 있었더라도 그런 귀동냥만으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거래
의 본질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두어 해 전의 영희였더라도 그들의 신분
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언뜻 품어보았던 그 의문을 계속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
한 대로 그때 영희의 의식은 임신 중절 수술 후유증에 그 석 달 자학으로 내굴린 몸보다도
더 허물어지고 황폐해 있었다.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훨씬 심각하게 들렸을 대화도 그녀에게는 소음이나 다름없는 주정
에 지나지 않았다.
"야, 그런데 어떠노? 군복 벗고 펜대 잡으니 할 만하나?"
"ㄷ을 맛이다야. 골병대(공병대)도 아닌데 내가 갈 닦는 거 어드러케 아니? 귀때기 새파란
것들 눈치보느라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드르륵드르륵 한다야."
"그라믄 군복 멀라꼬 벗었노? 철모가 빵꾸나도록 해먹지."
"말이야 바른 말이디, 내가 벗고 싶어 벗었네?"
"뭐시라? 그거는 또 무신 소리고? 척하면 삼천리디. 눈치 없이 미련 떨다가 된통당하고 밀
려나야가서? 관서 아이들 하나 옷 벗으믄 다음은 관북 아이 차례란 거 다 알어야."
"이기 참말로 취했는가 베. 도대체 니 제대하는 데 관북, 관서가 왜 나오노?"
"박장군, 서로 으르렁거리는 관북파와 관서파 정말 절묘하게 이용해먹었디. 그대 우리 관북
파가 벗어부치고 밀어주지 않았으믄 쿠데타가 되기나 했갔어? 박장군이 틀어쥔 뒤에도 최고
회의에 영남 아이들 몇이나 되었네?
그런데 이제 변소 갈 때하고 올 때 마음이 달라진 거라. 군을 믿을 만한 고향 아이들만으
로 짝고 싶은 거디. 작년 올해 옷 벗은 아이들 주로 출신이 어딘가를 살펴보라우. 아직 그것
두 몰랐네?"
"참말로 이기 클날(큰일날) 소리 하고 있네. 마, 안캐도 니 취한 줄 안다. 잔소리 말고 술이
나 무라. 아이믄 기집아들 사타리(사타구니)나 후비든가."
그런 장군들의 주정이 그 한 예였는데, 거기 담긴 의미는 전혀 의식에 닿아오지 않았다.
다만 영희가 그 밤의 나머지에서 본 것은 눈부시게 피어나는 도회였다. 하루 저녁 술값으로
3만 6천원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내던지는 돈 많은 사람들과 또 그 사람들이 상전처럼 모시
는 힘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제 곧 상상조차 안 되는 액수의 돈이 외국으로부터 흘러들
어와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고 거기서 홍수처럼 상품들이 쏟아져나올 곳, 모든 사람들이
풍요와 화려함 속에 번성할 땅-당장은 그렇게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해도 영희가 그날 밤
그들의 등뒤에서 본 도회는 그랬다
물론 그런 느낌 한편으로는 아주 먼 곳을 스쳐가는 풍경처럼 돌내골의 허물어져가는 곽들
이 피었다 스러지고 버얼건 개간지가 떠오르고 새카맣게 농투성이가 되어가는 오빠와 작은
가방 하나를 든 채 한없이 걷고 있는 인철이 지나가기는 했다. 음산한 바람처럼 어머니의
성난 눈길이 쏘아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이미 쓸 수 없을 만큼 그 믈코가 튿
어져버린 의식의 그물에는 잡히지가 않았다.
-그날 밤 영희는 아주 크나큰 행운이라도 잡은 느낌으로 대머리 술상무에게서 3천 원의
선화대를 받은 뒤 장군과 함께 외박을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다시 장군에게서 미장원
값이란 명목으로 2천 원을 더 받게 되었을 때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되었다.
제 49 장 떠나는 일가
그리운 분께
기다리던 편지는 언제나 음울한 안개에 싸인 황무지를 떠올리게 하고 저의 하루를 답답함
과 아득함 속에 저물게 합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혹시 그분께서 제게 보이고 싶
지 않아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까봐 그마저도 뜻 같지가 못합니다. 정말 무슨 일이 그곳에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아주세요. 어떤 결정을 하시든 저는 제가 믿음을 건 분의 결정을
옳게 여길 거에요. 저를 아직도 상록수의 꿈에 취해 있는 어린 계집아이로만 보지는 마세요.
실은 저의 부모님도 그곳의 결정에 반대하실 것 같지는 않아요. 며칠 전 제 불찰로 일기
의 일부와 그리운 분의 편제 몇 통이 아버지의 손에 들어가 집안에 발칵 뒤집힌 적이 있어
요.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 우리 사이를 반대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딸이 그
리워하는 이가 시골의 농투성이고, 그것도 메마르고 박한 개간지에 매달리고 있는 가난뱅이
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곳 생활을 정리하신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없어지겠죠.
전 같으면 이런 일은 숨기고 말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곳을 떠나기를 너무 망설이고, 또
제가 그 일을 반대하고 있는 걸루 지레짐작하시는 것 같아 이렇게 밝힙니다. 아버지를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좋으신 분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알려드릴 일은 어쩌면 제가 내달부터 다시 직장을 갖게 될지 모른다는 것
이에요. 아버지는 이번 일이 제가 너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 생긴 일로 단정하신 모양
이에요. 그래서 친구분들께 부탁해 어렵사리 만든 일자리인데 나가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
네요. 믿을 만한 직장에서 세상도 배우고 돈도 번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으시겠죠?
그곳 일 결정나는 대로 곧 소식 주세요. 제 운명에도 뭔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
아 신경이 쓰여요. 그럼 오늘은 이만 줄여요. 그리워하는 제 마음은 행간에서 읽어주세요.
1996년 1월 21일
경진 올림
명훈은 어둑한 방안에서 창호지를 뚫고 든 새벽 어스름에 의지해 다시 한번 그 편지를 읽
었다. 맞대놓고 당돌하게 명훈씨라고 불러도 글로 쓰기에는 쑥쓰러운지 호칭과 이인칭을 교
묘하게 피해 쓴 경진의 편지였다.
이미 몇 번이고 읽은 것이지만 다시 쿡쿡 가슴이 쑤셔왔다. 그녀가 더는 눈 덮인 목장과
호사스런 거실의 페치카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는 점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이제 자신이 다시
가망 없는 도시 빈민에 편입되게 되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게 더욱 마음 아팠다.
'아무래도 편지를 써야겠구나.'
명훈은 그런 생각으로 성냥을 찾아 남포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간밤에 쓰다 구긴 편지지
가 눈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된 원인도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식구대로 달랑 돈 50만 원만
들고 낯선 도시로 떠나야 하는 이 현실을 어떤 식으로 미화하고 꾸며대야 이 아이를 상심
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이대로 떠났다가 직장이 구해지든 장사가 자리잡
히든 하면 그때 무어라고 말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ㅡ 그런 기분은 한밤이 지나도 그대로였
다.
하지만 곧 수없이 반송되거나 누군가 엉뚱한 사람의 손에 떨어질 경진의 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명훈은 잉크병을 흔들어 질 나쁜 잉크를 고르게 한
뒤 펜을 들었다.
경진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 나는 이미 이곳에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끝났다. 상록수의 꿈
은 지고 나의 대지는 시들었다. 아니, 이제 나의 대지 같은 것은 없다. 지난 삼 년의 내 땀
과 눈물은 한줌의 지폐로 바뀌고 나는 그 미덥지 않은 지폐의 부피에 의지해 도시의 밑바닥
에서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한동안 내 삶은 그 어떤 뻔뻔스러움으로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 당분간 편지 보낼 것이 없어지더라도
너무 답답해하거나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래서 남
에게 보여도 좋을 만한 삶을 꾸릴 수 있게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너에게 달려가마. 이렇게
되고 보니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었음을겠구나.
1996년 1월 26일
명훈
되도록 짧게 쓴다고 썼지만 그래도 편지지 한 장이나 다 메워져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구절을 쓸 ㄸ는 절로 콧마루가 시큰해져 길게 콧숨을 들이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구나.....'
편지를 봉하면서 명훈이 망연히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안방 쪽에서 기척이 나더니 어머니
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림도 표정도 잠자다가 방금 일어난 사람 같지가 않았다.
"니도 잠을 설쳤구나. 어데다 편지 썼드나? 누한테 썼노?"
어머니는 그렇게 묻고 있었으나 누구에게 썼느냐가 정말로 궁금해서는 아닌 성싶었다.
"아뇨, 그저 ㅡ 친구에게....."
명훈이 제풀에 당혹스러워하며 우물거려도 캐묻기는커녕 진작부터 마음에 안고 건너온 듯
한 의논을 꺼냈다.
"우리 말이다. 차라리 다른 데로 가보는 게 어떻노?"
"예에?"
"우리가 하마 서울이 몇 번째로? 너의 아부지 때로부터 치면 솔가해 올라가본 것마도 벌씨
로 세번째라. 그러데 언제 한번 재미본 적이 있드나? 첫번째로 올라갔다가는 경찰에 쫓기
하계골터기로 숨었고, 두번째는 너 아부지와 생이별했다. 시번째는 식구대로 야반도주나 다
름없이 밀양으로 달라빼야 했고..... 그런데 또 서울로 가는 거 미련스러븐 거 아이가? 소도
한번 무릎 꿇은 언덕은 조심해 걷는다는데 거다 무신 영광 보겠다고 니번째로 다시 기올라
가노?"
"아무래도 거기가 가진 것 없이 벌어먹기 좋고..... 아는 사람도 많아 그렇게 결정한 것 아
닙니까?"
조금은 난데없는 말이라 명훈은 간밤까지 서로 아무 이의 없었던 의논을 상기시켰다. 어
머니가 자신은 한번도 거기 동의해본 적이 없다는 투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저어 우리 말이따. 부산으로 가보믄 어떻노? 인제부터 걷어붙이고 장바닥을 구불 생각이
라믄 차라리 생판 낯ㅅ너 곳이 안낫겠나? 거다서 이 눈치 저 눈치 볼 거 없이 신(신명)대로
한번 살앙보는 게라. 원래 물편가(물가) 상것 들(사는) 곳이니 인사가 있겠나 범절이 있겠
나? 더군다나 아는 사람도 없으이 백정질을 한들 누가 뭐라 카겠노?"
그렇지만 어머니가 부산으로 가자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둣했다. 명훈이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라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어머니가 스스로 나머지 이유를 덧붙였다.
"그래고, 철이를 찾아야 한다. 전번 편지 우체국 도장이 부산 꺼라 ㅋ제? 그게 맞다면 부산
에 있을 께다. 한 도시에 살다 보믄 오다가다 만나게 되는 수도 있고, 수소문해보기도 쉽다.
지 말로는 좋은 곳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이 걱정하지 마라 캤지만 뻔하다.
이 각박한 세상에 그 어린기 취직을 하이 무슨 취직을 하노? 별난 기술이 있나? 일을 지대
로 할 줄 아나? 어디 가서 이리저리 후지박히며(구박당하며) 눈칫밥 먹고 있는 꼴이 눈에
선하다....."
그러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벌써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명훈도 가슴이 먹먹해왔다. 한 달
전인가 인철이 발신인 주소가 없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만 해도 가슴을 쓸었던 그였다. 영희
가 참혹한 배신을 당한 경위는 가슴 아팠지만 인철의 근황을 밝히는 구절은 뜻밖으로 밝았
다. 어떤 책방에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내용인데 꾸며댄 이야기로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또 앞날에 대한 자신에 차 있었다.
인철의 소식이 끊어지고부터 밤낮으로 눈물 젖은 기도에 빠져 있던 어머니도 다소간 마음
을 놓는 눈치였다. 주소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때부터는 인철이 때문에 눈물을 비
치는 일을 없어졌다. 그리고 개간지가 덩이째 팔려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도 그랬다. 인철이
돌아올 것에 대비해 동네 사람들과 두들 마을 대소가에 연결 고리를 만들어놓는 일에만 열
심이었을 뿐, 인철을 찾아나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던 어머니였다. 그런데 출발의 날 아침
에 갑자기 그렇게 인철의 문제를 들고 나선 것이었다.
"뿌이가,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저대로 놔뚜믄 가이는 무식쟁이로 노가다밖에 안 된다.
아무리 머스마라 카지마는 영희 그년 꼴이나 다름없는 꼴 또 보게 된다 카이. 가아까지 그
래 되믄 내가 어예 사노? 니 하마 이래 나(나이) 먹어 인제는 공부해서 귀하게 되기는 글렀
고오 ㅡ 거다가 가아까지 그래 되믄 우리 집안도 끝이다. 어맴이사 어예튼동 살아만 있으믄
된다 카샀지마는 인제 보이 그것도 아이라. 너어 아부지 돌아와 우리집 다시 일으케세운다
는 거는 하마 틀린 일이라. 이 집 다시 설라 카믄 결국 너어밖에 믿을 게 없는데..... 아무리
세상이사 달라졌다 카지마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고? 삼대불하당은 옛말이라 캐도 대대로
글은 안 끊어졌는데, 내 대에 이래 결딴나다이..... 내 죽어 무슨 낯으로 조상을 대하겠노....."
어머니는 전에 없이 가문까지 들먹이면서 기어이 눈물을 비쳤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먼 길 떠나는 날 아침에..... 이러시면 객지에 있는 아이한테도 해로
워요."
명훈은 먼저 그렇게 어머니의 눈물부터 막아놓고 다시 차분하게 달랬다.
"어제 이미 짐까지 서울로 부쳤는데 이제 와서 다른 데 어딜 갑니까? 소도 비빌 언덕이 있
어야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서울이 미더워요. 부산은 서울서 정히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봐도 됩니다. 또 인철이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그애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곳
으로 간 것은 혼자 어떻게 공부를 계속해보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걔를 믿으세요. 어머
니가 걱정하시는 것 같은 상태라면 우리가 찾지 않아도 제 발로 돌아올 아이니까. 이제 남
은 짐이나 싸고 주계 할배댁에도 가서 아침이나 먹는 게 좋겠습니다. 자칫하면 낮 버스로도
못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겨우 진정된 어머니가 옷소매로 눈물 흔적을 지우면서 안방으로 건너갔다. 뒤이어
어머니가 옥경이를 깨우는 소리가 나더니 오래잖아 안방의 이불이 이불보와 함께 건너왔다.
"이불 새에 자자부레한 거 한데 묶어 한 뭉테기로 땐땐하게 묶어라. 그 다음에 옷 갈아입
고 가방도 꾸려놓자."
그렇지만 눈물을 볼 일은 그 아침에도 한 번 더 있었다. 세 식구가 아침상을 받게 된 주
계댁에서였다. 주계댁은 주계 할배가 손수 일할 줄 알아 논마지기를 제대로 보존한 데다 아
들들도 실한 직장을 잡아 문중에서도 살이가 넉넉했다. 거기다가 촌수로는 열두촌이 넘어도
명훈네와는 가장 가까운 집안들 중에 하나라 떠나는 그들 일가를 위하여 아침상을 차린 것
이었다.
귀한 닭을 잡고 해물전에 묵나물까지 갖춘 상머리에서 말수 적고 표정 없기로 소문난 주
계 할배가 주름 가득한 얼굴을 더욱 주름지게 하며 말했다.
"지대로(제대로) 들따보지는 못해도 큰집 종부하고 종손이 여다 와 있다 카이 지젤로 속이
든든하다 ㅡ 허엇, 그 참, 어예다 우리 큰집이 이 모양 났노."
그때부터 어머니의 눈에는 불그레한 기운이 비쳤다. 다행이 눈치 빠르고 말주변 좋은 주
계 할매가 그런 남편에세 익살 반으로 타박을 주었다.
"저 신농씨 같은 양반이 좋은 상 앞에 놓고 무신 소리 하노? 우리 큰집이 와 어때서? 그냥
두믄 얌생이나 묶는 밸간 야산 파뒤배(파뒤집어) 그만 목돈 쥐게 됐으믄 됐지. 인제 보소.
야들 서울 가믄 얼매나 큰 성공 하능강. 쪼매만 있으믄 서울서 새 부자 났다꼬 소문이 뜨르
르할 께씨더. 그런데 이 모양이라이? 이 모양이 어때서? 백지로(공연히) 길떠나는 아이들
기운 빼지 말고 고마 숟가락이나 드소."
그리고는 덕담과 인정으로 훈훈한 상머리를 만들어갔는데 상을 다 물리기도 전에 하나씩
둘씩 찾아든 문중의 할매 아지매들이 다시 분위기를 어둡게 만드었다.
"큰집 새댁이 이래 보내믄 또 언제 볼꼬. 부디 내 살아 있을 때 돌아오거래이. 옛말 하미
살구로."
"큰집 형님, 부디 성공해서 빨리 돌아오소. 참말로 간 사람도 야속하고 세월도 야속하데이.
큰집 아주버임은 어디서 뭘 하신다꼬 이길이 소리흔적 없으시노. 내 처음 시집올 때만 해도
세상에 큰집 형님처럼 갖촤사는 사람도 있을까, 싶다....."
저마다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코 막힌 소리를 하니 대답하는 어머니도 금세 목이
메어 수저질을 멈추었다. 주계 할매가 또 나서서 익살 반 타박 반으로 그런 눈치를 모르른
별사를 막았다.
"이 할마이들이 이거 모도 미쳤나 걸쳤나? 밥 잘 먹고 있는 종부 뿌들고 왜 이래 꼬치(고
추) 먹는 소리들을 해쌌노? 봐라, 천전댁이, 박곡댁이 너어들도 글타. 여 어디 심청이가 인
당수에 팔래라도 가나? 택도 없이..... 정 할 소리 없거든 빨딱 일라서이 '한양가'나 한 구저
러 뽑아라."
그렇지만 끝내는 주계 할매도 막아내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겨우 눈물 없이 밥상을 물
리고 감주 대접이 돌 무렵이었다. 마당에서 누가 숨을 헐떡이다 간신히 힘을 모아 소리쳤다.
"여다서 큰집 아침 한다 카디, 주계댁이 있나?"
"이거는 또 누고?"
주계 할매가 그러면서 문을 열고 내다보다 화다닥 몸을 일으켰다.ㅏ
"아이고, 동곡 아지뱀 아이껴?"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놀라 모두 몸을 일으켰다. 마당에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팔은 손주며느리의 부축에 맡긴 동곡 할배가 숨결을 고르며 서 있었다. 돌내골에 남아
있는 일문 중에는 가장 연배가 높은 어른으로 명훈에게는 열촌척의 가장 가까운 지하이기도
했다.
"우환에 계시다는 말 듣고도 한번 들따보지도 못했는데 ㅡ 동곡 형님이 여다까지 웬일인
껴?"
주계 할배가그런 동곡 할배를 방안으로 맞아들이고 물었다. 겨우 숨을 고른 동곡 할배가
그런 주계 할배를 나무라듯 받았다.
"여다까지 웬일이라이? 큰집 종부 큰집 종손이 다시 떠나간다는데 내가 어예 안 와보노?
아파 숨이 당장 껄떡 넘어간다믄 모리까....."
그리고는 명훈의 손을 쓸어잡으며 탄식하듯 물었다.
"여다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나, 엉이? 꼭 서울로 가야 살길이 나나, 엉이? 하마 이십 년이
나 비어 있는 큰집 또 얼매나 너어를 더 기다려야 하노? 너어 아부지사 수없이 떠나고 돌아
와도 아무치도 않디마는 너어는 어예 떠날 때마다 다시 안 돌아올 거 같노? 내 평생에 큰집
주인들 모두 되돌아와 옛날같이 와작거리는 거 볼라 캤디 인제 그거는 참말로 틀린게라?"
"저희는 영영 떠나는 거 아닙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보중하시고 기다려주
십시오."
동곡 할배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너무도 애절하게 들려 눈시울이 화끈해왔으나 명훈은 짐
짓 쾌할한 목소리를 지어 그렇게 자신없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동곡 할
배의 야위고 주름짐 볼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죄가 많다. 아이, 우리가 죄가 많다. 너어를 또 이래 기약 없이 떠나보내야 하나? 이
돌내골이 어느 집 때문에 원근이 다 알아주는 돌내골이 되었는데.....?
동곡 할배가 그렇게 한탄할 때는 벌써 어머니와 할매, 아지매들이 모두 코를 훌쩍이고 있
었고,
"인제는 돌내골도 다됐다. 엉이, 너 왕벌 없는 벌이통(벌통) 봤드나? 엉이, 너 등거리(줄기)
없는 가지 봤드나? 등거기 없는 가지에도 잎 돋드나? 종가 없는 문중이 무슨 문중이로?"
그러면서 앙상한 주먹으로 아이처럼 눈물을 찍어낼 때는 주계 할배의 메마른 눈시울에도
눈물이 고였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애써 버티던 명훈도 끝내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명훈네 가족이 개간지로 돌아오니 상두가 제 또래 건달 하나와 리어카를 끌고 와서 기다
리고 있었다.
"형님, 짐이 이러 가지(전부)껴? 이삿짐 한 번 단출해 좋니더."
벌써 집 안팎을 한바퀴 둘러본 듯 상두가 문 앞까지 끌어내놓은 이불보따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평소처럼 건들거리는 말투에는 이별을 앞둔 슬픔이나 아쉬움 같은 것은 조금도 느
껴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어제 벌써 부쳤잖아?"
"아, 그 버들고리짝하고 떨그덕거리던 냄비 보따리여? 그래봤자 세 덩거리뿐이잖니껴?"
"그만하면 됐지 임마, 사는 데 뭐가 그리 많이 필요해?"
사실이 그랬다. 유목민들처럼 이사가 잦은 명훈네에게도 내구재의 개념은 꼭 필요하면서
도 파손이 잘 되지 않는 침구와 식기류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짝이나 책상같이 이삿
짐의 부피를 늘이는 데 중요한 몫을 하는 가구류가 없다 보니 옮길 짐은 겨우 세 덩어리뿐
이었다. 전 같으면 식구대로 하나씩 맡아 들로 떠났을 것이짐나 이번에는 정기 화물로 부치
고 작은 가방만으로 차에 오르게 된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하기사 그거 들어냈다꼬 집 안이 디기 썰렁하네. 어느 거는 떠나가는 집 같다 카디, 바로
이긴 모양이라. 그럼 기다리소. 얼른 방천 가서 짐부치고 표쪼가리 받아줌씨더. 낮차 올 때
까지는 시간이 많으이 동네 인사를 돌던지."
리어카에 짐을 실은 상두가 마당을 나서면서 말했다. 그때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어머니
가 명훈을 가만히 불렀다.
"야야."
"네?"
"우리도 고마 같이 떠나자. 여다서 낮차 기다릴 꺼 뭐 뭐 있노? 보나마나 그 차에는 돌내
골 사람이 태반일 껜데 그 사람들한테 굿시러운 꼴 비줄거 없다."
"그렇지만 방천까지는 십릿길인데....."
"짐도 없이 걷는 거 십리믄 어떠나? 이 집도 글타. 이거 그래도 내 집이라꼬 우부릴(얽을)
때를 생각하이 한시도 여다는 더 있기 싫다. 고마 걷자. 거다서 짐 부치고 기다리다가 명양
서 나오는 차 있으믄 타고 나가는 게라."
그 말을 듣자 명훈에게도 새롭게 살아나는 아픈 감회가 있었다. 철들고는 처음으로 내 집
을 가져보는 뿌듯함의 기억이 건드린 상처처럼 가슴을 쑤셔오는 것이었다. 그 흙담집을 비
잉 둘러싼, 이제는 남의 땅이 된 개간지도 그랬다. 거기 걸었던 꿈과 그걸 위해 흘렸던 땀
도.
"그래요, 오빠. 이왕 떠날 거 조금이라도 빨리 가요."
애써 숨기고는 있어도 이 출발에 은근히 달떠 있는 옥경이도 어머니를 편들어 졸랐다. 명
훈도 그때는 마음을 정한 뒤였다. 굳이 집 앞을 지나가는 낮차를 고집해 그 썰렁한 집 안에
두 시간이 넘도록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 가방도 리어카에 실어."
명훈은 들고 가기로 한 크고 작은 가방 두 개마저 상두에게 넘겨주고 리어카를 따라나섰
다. 개간지에 특별한 이별의 의식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 의식은 몇 번의 통음과 그
이취상태 속에서의 배회란 형태로 치러진 뒤였다.
그들이 막 산고의 도래솔 그늘을 빠져나올 때였다. 도로에서 개간지로 접어들던 진규 아
버지가 큰 소리로 명훈에게 말을 건냈다.
"아이, 낮차로 떠난다 카디 벌써로 나서나? 방천까지 걸을라꼬?"
"짐도 없는데요, 뭐. 저건 어차피 방천에서 정기 화물로 부칠 거고....."
"글치만 이래 떠나는 법이 어딨노? 까딱했시믄 가는 것도 몬 볼 뿐 안했나?"
그러면서 다가오는 진규 아버지의 손에는 작은 보퉁이가 쥐어져 있었다.
"에이, 그럴 리 있습니까? 아무렴, 사범님께 인사도 안 드리고 떠나기야 하겠어요? 그러잖
아도 가다가 집에 한번 들르려고 했습니다."
명훈은 다시 애써 쾌활함으로 그렇게 받았다. 사범님이란 진규 아버지가 농사를 많이 가
르쳐주었다 해서 명훈이 농담 삼아 붙인 호칭이었다. 진규 아버지도 굳이 작별을 무겁게 하
고 싶지는 않아 보였다. 명훈과 비슷하게 농담조가 되어 받았다.
"인제는 사범도 아인데 장히 찾아볼 생각을 했을따. 그런 글코 ㅡ 옥경아, 아나, 이거 받
아라. 먼 길에 심심하믄 입이나 다시라꼬 달걀 몇 개 이핬다. 땅콩하고 밤도 한줌 옇고....."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걷는 걸 보고 말했다.
"그래, 마음 안돼할 거 하나또 없니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꼬, 하마 저 사람
은 여다 맞는 사람이 아이씨더. 내 한 삼 년 눈여기 봤지만 명훈이 저 사람은 여다 백년 있
어봤자 좋은 꼴 보기는 틀렸다꼬요. 일찌감치 잘 말아치웠니더. 엎어지든동 자빠지든동 저
사람이 정말로 뭘 걸어볼 데는 대처란 말이씨더."
"그 동안 여러모로 고마웠니더. 빌려 먹은 쌀말인따나 되도록 갚았는강 몰라."
어머니도 진규 아버지에게까지 처량한 기분을 내비치기가 싫었던지 평소의 말투로 짧게
받았다.
진규 아버지는 그리 멀리 따라오지 않았다.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밭두렁길 어귀에서 발
길을 멈추고 어디 가까운 데 장 보러 가는 사람이라도 배웅하듯 여전히 농담 섞어 작별을
했다.
"이 사람, 명훈이. 이번에 가거든 참말로 잘 해래이. 진짜 힘 쓸 때는 인제부터라. 그래서
돈 많이 벌거든 하이야(하이어 택시) 끌고 와 내 같은 뿔뜨럭농군(농투성이)한테도 맑은 술
한잔 사도고, 그럼 잘 가그라. 잘 가소. 옥경이도 잘 가고."
하지만 그 마지막 마디에는 어딘가 그답지 않은 떨림이 느껴졌다.
대한 무렵이어선지 휑하게 뚫린 국도로 들어서자 바람이 매서웠다. 그러나 아무도 추위를
타는 기색이 없었다. 상두와 그가 데려온 건달은 가방까지 실어 제법 한 짐이 된 리어카를
밀고 당기느라, 옥경은 서울로 가게 된다는 설렘으로, 그리고 어머니와 명훈은 어느새 정체
모를 괴물같이 되어버린 도시와의 임박한 대면에 망연해져서.
그래도 그 중 여유가 있는 것은 리어카를 밀고 있다기보다는 건들거리며 따라가고 있다는
편이 옳은 상두였다.
"형님이 있으이 언 놈이 와도 든든하디. 인제 내 혼자 어예꼬. 절마도 글치만 장터 찌씨래
기(찌끄러기)들 한 놈도 쓸 게 있어야제. 주먹이 시나(세나)? 글타꼬 깡다구라도 있나. 진안
놈들, 명양놈들 떼서리지아 와서 까불락거리믄 그 꼴 눈꼴시러버서 어예 보노, 내 참."
그렇게 명훈이 가고 난 뒤를 걱정하기도 하고, 아직도 그에게는 불쾌의 영웅인 명훈에게
은근히 앞날을 기대오기도 했다.
"형님, 자리잡거든 꼭 연락하소, 잉. 내 꼭 놀러감씨더. 그래고 좋은 구지 있거든 이 불쌍한
백성도 잊지 마소. 나도 오도꼬가 있는 놈이라꼬요. 언제까지 돌내골 장터 바닥에서 석을 수
는 없잖니껴? 구찌만 좋다카믄 가짓 거 논이고 밭이고 확 팔아가주고 길든 짧든 손금 한번
확 보고 치울라이더. 까짓 거, 사나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니껴? 짧게 살아도 한 번 확 굵게
살아볼라이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지는 않다 이 말이씨더."
"알았어."
이미 타이르거나 가르치기를 포기한 녀석이라 명훈은 그렇게 건성으로 대꾸해주었다. 그
러자 신이 난 녀석은 연신 '까짓 거'와 '확'을 끼워넣으며 거창하기는 해도 종잡을 수 없
는
포부를 끝없이 늘어놓다가 명훈의 따끔한 한마디를 듣고서야 머쓱해 입을 다물었다.
"떠나는 마당이라 이런 말은 않으려 했는데, 상두, 너 조심해라. 지금이라도 정신차리지 않
으면 굶어죽거나 칼 맞아 죽는다. 그건 오도꼬도 아니고, 짧고 굵게 사는 것도 뭣도 아냐!"
방천에 나와 있는 천일 정기화물 출장소에서 짐을 부친 뒤에도 명훈이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 돌아가겠다는 상두를 겨우 달래 돌려보내고 나니 적막한 한겨울 국도변에는 그들 세
식구만 남겨지게 되었다. 간이 정류장의 바람막이 있는 양지 쪽을 골라 서 있었지만 그나마
걷기까지 멈추어서인지 오는 동안은 잊고 있었던 매서운 겨울바람이 피부 깊숙이 찔러들어
왔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그 사이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귀에 익은 찬송 구절을 낮게 흥얼거리는 어머니
의 어깨가 추위로 유난히 좁아 보이고, 이제는 떠나야 할 곳에 대한 미련과 애착에 시달리
는 듯 눈에 보이게 침울해진 옥경이의 입술도 새파랬다. 버스가 올 시간은 아직 십 분이 넘
게 남아 있었다. 명훈은 자신보다 추위에 떠는 어머니와 옥경을 위해 정류장 옆 가게 안으
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난로 같은 것을 피우고 있지는 않아도 유리 덧문을 해 달아서인지 한결 따뜻했
다. 보기에도 답답할 만큼 옷을 껴입은 주인 여자가 안방문을 삐죽이 열고 내다보았다.
"어예 왔니껴?"
명훈은 추위를 피하게 해준 값 삼아 빵 한 봉지와 사이다 한 병을 샀다. 주인 여자가 굼
뜨고 성의 없는 몸놀림으로 물건을 내주고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굼뜬 몸놀림
과 무언가 불만에 꽉차 있는 듯한 얼굴이 문득 이태 전의 어떤 여름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
때 명훈은 가출하려는 영희를 잡아가려고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그 가게로 달려온 적이 있
었다.
그렇게 떠나야 하는 거, 바꿔 말해 농촌에서의 실패가 어쩌면 자신의 무능이나 개인적인
불운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럼 정말로 영희 그 아이는 진작부터 모든 게 이리 될 줄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 아
이
의 세상 읽기가 더 밝았다는 뜻인가. 도대체 그 아이가 도회에서 읽은 게 무엇이었길래 그
토록 참혹한 일을 당하고도 돌아오려고는 않는 것일까.'
영희의 기억에서 발단된 그 같은 물음은 점차 명훈에게 개인으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정연한 예정 혹은 완강한 구조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농촌에 대한
온갖 불리한 해석과 예측들은 그런 느낌을 한층 더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대지는 시들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
은성한 제국의 도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여
뜨겁고 매서운 유혹이여, 채찍이여.
사랑하는 이 하나둘 불려가고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잘 있거라, 내 나고 자란 변경의 산과 들이여.
캄캄한 원주민의 밤, 황무한 대지를 떠돌던 꿈이여.
끝내 상재되지는 못한 명훈의 시작 노트 마지막은 이런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한 시로 끝
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가겟집에서의 느낌에 충실한 명훈의 고향과 농촌에 대한 고별
사였을 것이다.
'내 실패에 개별적이고 특수한 게 있다면 정말로 그것은 남보다 몇 년 혹은 몇십 년 일찍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명훈이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관대하게 되었을 때 줄곧 밖을 내다보고 있던 옥경
이 소리쳤다.
"오빠, 뻐스가 오고 있어요!" [제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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