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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변경 9

by Casey,Riley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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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경9
이문열

  

    제3부 떠도는 자들의 노래 제1장 1968년 9월
  광산 지역이어서 그런지 길바닥부터 색깔이 달랐다.  포장 안  된 도로는 흙이라기보다는 
거무스레한 재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고 그 가운데 자동차 타이어로 다져진 곳은 잘 찍어낸 
연탄 표면처럼 까맣고 매끈했다.  도시의 연탄공장 정문을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스용차는 코로나에서 이름만 국산으로 바꾼 새나라였는데 한물간  논다
니 얼굴 가꾸듯 날마다 닦고 칠해 껍질은 아직 번지르르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지 
이미 대여섯 해가 지난 데다 그 중 몇 해는 택시로 굴러 속은 골병이 들 대로 든  고물이었
다.  그런 차가 그토록 기세 좋게 언덕을 오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솜씨 좋은 운전사를 만
난 덕분 같았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더해진 자동차의 속도 때문인지 뒤차창으로 검은 연기 같은 먼지가 따
라오는 게 보였다.  그 먼지를 막기 위해  차창을 모두 닫자 이내 차 안이 후텁지근해졌다.   
며칠 전 역전 광장에서 가출한 시골 처녀를 후려 하룻밤 데리고 잔 일을 벌써 한 시간째 떠
벌리고 있는 대동(대동일보 기자)에게 진력이 났는지 날치가 문득 운전사의 어깨를 치며 말
했다. 
 "야, 강군아. 너 청송 산골에서 아다라시 따먹던 얘기 좀 해봐라.  뭐가 좀 화끈한 게 있어
야지.  대동 저 새끼 얘기는 도무지 간지럽고 느끼해서 말야." 
 "에이구, 형님도 멀 그런 얘기를..."  강군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에  느물느물한 웃
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그냥 두면 하루종일 입을  열지 않아 곰이라고 불리는 
그였지만 묻는 말에 대답을 않는 법도 없었다.   날치가 그런 강군을 한 번 더 쑤석거렸다.    
 "너 거기서 한 달에 평균 서너 건은 올렸다구 했지?  그거 다 너 믿고 택시 타는  여자 승
객들을 해먹은 거야?" 
  그러자 명훈도 강군의 이력에 대해 들은 게 떠올랐다.  군대에서  운전을 배워 나온 그는 
논밭 팔아 낡아빠진 시발 자동차 한 대를 장만하고 시골 면에서 택시 영업을 했다.  그러면
서 밤이나 으슥한 곳에서 혼자 타는 여자 손님을 상습으로 욕보이다가 들통나 수배받는 중
이라는 게 잇뽕 형의 귀띔이었다.  아무래도 스물대여섯은 넘어  보이는데 아이에게나 어른
에게나 강군이라 불리며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운전을 하고 있는 것 역시 그 약점  때문인 
듯했다.
  "손님이 아이라도 내 차 한분 태아주고 나도 지 배 한분 타는 수가 있니더."
  강군이 느물느물한 웃음을 애써 감추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날치가 잇따른 물음으로 
얘기를 끌어냈다.
  "어느 미친년이 고물 시발 택시 한번 타고 그걸 대줘?  너 쌩 후라이 까는 거 아냐?"
  "다는 아이지만 심심찮을 만큼은 그런 미친갱이들도 있디더." 
  "그래도 그런 미친년들을 어떻게 알아봐?"  "다 아는  수가 있니더.  차를 몰고 신작로로 
가다 보믄 이래저래 댕기는 기집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걸음걸이가 벌씨로 수상무리하
고..." 
  "수상하면 수상하지, 수상무리한 건 또 뭐야?  그래, 그 다음은?"
  "차 속도를 늦춧고 크락숑을 한번 눌러보믄 그기 맥준지  오줌인지 대충 알게 되니더, 고
개 푹 숙이고 지 길(제 갈 길)만 솔방솔방 가는 건느 하마 틀렀고오... 고 중에 해딱 돌아보
는 기집아들이 있는데 그때는 거반 일이 된느 거씨더.  그 옆에 차를  갖다 붙이고 타라 카
믄 그런 것들은 열에 아홉은 달랑 올라타이께는요.  또 그래 내 차에  올라탄 거는 하마 이
까리(고삐)잡힌 소시더.  내사 말로 꼬우든동(꾀든지)힘으로 조지든동간에 지는 내 한 배 안 
받고는 못 튀니더."
 "굼벵이 굼불 재주(꿈틀거리는 재주)있다 카디 곰 같은 기 용한 걸 다아네.  씨팔, 나도 한 
매끼(몫)잡으믄 코로나나 한 대 빼가주고 그 재미나 쫌 봐야 될따."
  날치가 말허리를 끊어 머쓱해 있던 대동 박기자고 드디어 흥미를 느꼈는지 얘기에 끼어들
었다.
  "얌마, 그게 아무나 되는 줄 알아? 너같이 입만  가지고 설치는 놈에게는 다 그림의 떡이
야.  강군 이야기나 더 들어보라구."
  날치가 박기자에게 그런 핀잔을 주고 다시 강군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손님들은 보나마나 힘으로 덮쳤을 건데 그게 잘돼? 그리고 네 말대루 한 달에 서너 건이
라면 이 년에 수십 건이 넘는데 어떻게 뒤탈이 없었어?"
  "지가 안 줄을라 카믄 어예겠니껴? 지가 죽자꼬 삐덩거리믄 나도 설건드리 낭패보는 것보
다 참말로 죽이는 수밖에 없고오-글치만 그거 지키자꼬 쎄(혀) 깨불고  죽는 그런 기집아는 
하나도 없디더.  그래서 어예튼동 한분 묵어뿌믄 그마이씨더.  기집들이라 카는 거는 처자고 
새댁이고 그거 한분 대주고 나믄 입 딱 닫아뿌래요.  내가 띠들고 댕기거나 두분 세분 찾아
가 찝적거리지 않는 것만도 고마워하는 눈치더라꼬요."
  "그런데, 이번에는 왜 고발당했어?"
  "에이, 그 얘기 그거는 벌씨로 들어놓고..."
  "아냐, 난 못 들었어.  어쩌다 들통난 거야?"
  시치미는 떼고 있어도 날치는 알면서  묻는 것 같았다.  강군이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다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그날은 참 재수가 없는 날이랬다꼬요.  초저녁에 지서 차석이  하도 부탁을 해싸 오밤중
에 시체를 실꼬-무신 변사체라 카든강-무창재를 넘어가는데 아, 내리막길에서  뒷자석에 기
대둔 시체가 운전석으로 터억 안자빠지니껴? 시껍을 하고 차를 세워-삐삐선으로 시체를 뒷
자석에 묶고... 겨우 재를 넘어갔니더.   그래고 다시 돌아오는 길인데 한  열한시쯤 됐이까.  
신촌국민학교 앞을 지나는데-누가 손을 들더라꼬요..."
  강군은 말수가 적고 발음이 느릴뿐이지  결코 입담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날치도 그 
재미에 이미 들은 얘기를 또 시키는 것 같았고, 명훈도 어느새 그 색다른 경험에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보이, 국민하교 여선생이라.  재작년인강 사범학교 졸업하고 새로 왔다 카든데-키가 솔짝
하고 싼다구(얼굴)도 핼간(해말쑥한)게 어룸한(어리숙한) 사나 하나는 만판(넉넉히)  자아(잡
아)먹을 만하디더.  안 그래도 언제 한분 내 차 안 타나  카고 있는데-이기 얼매나 짠지 뻐
스 아이믄 진안까지 이십 리도 타박타박 걸어가는 독종이라...  그런데 일이 될라 카이 그런
지 바로 고기(고것이) 그 오밤중에 차를 세우고 진안까지 나가자 안카이껴?"
  "사설 빼고 따먹은 얘기로 곧장 들어가."
  "그래지요 뭐.  멀리 갈 것도 없고 월전 갱변(강변)에 차를 세우고 고장이 났으니 내리라 
캤제요.  거 왜 있잖니껴, 월전서 진안 가는 데  있는 십리 쪽(똑)바른 그 길 말이씨더.  그 
시간 되믄 어예다가 지나가는 도라꾸말고는 어리백이(어린친) 개새끼 한 마리 안 댕기는 데
라꼬요.  그런데 고 딸아(계집애)가 참말로 여시(여우)라.  그런 내한테 무신 기척을 느꼈는
지 그새 와싱톤(운동화)끈 꼭 쪼우고(죄고)있다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신작로로 쪼르르 내빼
더라꼬요.  학교서 아이들하고  맨날 쪼치바리(달리기)를  해싸 그런지 얼매나  빠르든동..."  
"사설 빼라 카이.  그래, 우째 됐노?"
  박기자가 다시 끼여들었다.  강군의 얘기에 완연히 빨려들어 얼굴에는 조급해하는 표정까
지 떠올라 있었다.
  "따라갈라 카이 잘못하믄 띄웠뿌(놓쳐버리)겠더라꼬요.  그때 얼핏 보이 희끔한 달빛에 맞
촘한 돌삐(돌멩이) 하나가 눈에 띄디더.  그래  그걸 조(주워)가지껏 용을 쓰고 던져뿌랬디.  
어디를 맞았는동 에코, 카미 폭삭 주저앉더라꼬요.  가보이 옆구리를 안고 살살 기고 있는데 
우째이껴? 하마 벌리놓은 일이고 그래서 갱변 뚝 아래로 끌고 갔니더."
  얘기가 그쯤에 이르자 이제는 아무도 강군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강군도 어딘가 그
걸 즐기는 듯 한참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째 된 셈인지 이기 끌리가면서도 끽소리 않는 기라요.  나중에 들으이 내 돌삐
에 갈빗대가 두 대나 금이  가 꼬무자꾸(꼼짝)못할 지경이었다 카디더마는  내가 그걸 어예 
아니껴? 하기사 왜 그런동 끽소리 없는 게 기분 나빠 그만  치아뿌까 싶기는 했니더.  글치
만 그때 내가 그 사정 알았다 칸들 어예겠니껴? 하마 일은 벌이났고 일 여물게 안 매조지믄
(매듭지으면)내가 죽을 판이이, 남의 사정 일일이 다  봐줄 수도 없는 게고-스카트도 안 벳
기고 대강 빠스만 내라 따까마시(닦아 먹다의 일본식 속어)해뿌랬지 뭐.  그래고 잘 서지도 
못하는 걸 진안 정류장 앞에 내라주고 왔는데 암만캐도 기분이 이상터라꼬요.  당하고 나믄 
울든강, 뭐라꼬 사설을 늘어놓든강, 패악을 부리든강 하기 십상인데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진안까지 가는 것도 글코, 차에서 내라줄 때  날 빤히 쳐다보는 눈길도 글코... 그래서  그날 
밤은 집에 안 들어가고 내 잘 댕기는 술집 건네방에서 잤는데..."
  "결국 그 여선생이 고소한 거야?"
  중요한 대목이 지나가서인지 그제서야 박기자가 끼어들었다.
  "글타 카이요.  참말로 독한 기집아라.  지만 입다물믄 그거야 한강에 배 지나간 자국 아
이껴? 그런데 아이, 뻔히 지 신세 조지는 줄 알면서도 그  밤으로 진안지서 쪼르르 달 리가 
말캉 찔러뿌랬다 카이요.  몬땐(못된) 기집아, 내도 내지만 지는 또 어예 되는가 보자.  내한
테 따먹힌 거 동네 방네 신문 방송 소문 다 나고 장히 좋은  데 시집갈따.  막말로 신세 조
지믄 내 혼차 조지나..."
  거기서 강군은 정말로 성이 나는지 뒷자리에서도 들릴 만큼 씩씩거렸다.  그런데 그 씩씩
거림이 오히려 그 동안 마비되어 있던 명훈의 분별력을 서서히 일깨웠다.
  이게 무지인가, 악인가.  죄의식이라고는 조금도 느끼는 기색이 없는 강군의 말투가 그런 
의문을 일으켰다.  캄캄한 밤 혹은 숲속에서 강간을 당하면서 느꼈을 시골 여자들의 공포와 
고통, 그리고 그들의 몸과 마음에 깊고 오래 남을 상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반성이나 
참회는커녕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은 피해자에게 원한까지 품고 있다.  재미있게만 듣고 있
는 나머지의 표정에서도 비난보다는 오히려 묘한 부러움 같은 것까지 엿보인다.  그런데 이 
강군은 충직하기 그지없는 우리 협회의 운전사이고  나머지는 손발이 잘 맞는 내  동료들이
다...
  그런 명훈의 의식을 한 번 더 자극하듯 조수석 유리창 위편에 걸린 팻말이 들어왔다.  신
문으로 치면 이단통 크기의 흰 종이 바탕에는 '안광기자협회'란 붉은 글씨가 위협적으로  씌
어져 있었다.  거의가 무보수나 다름없는 일간지의 안광 주재 기자  서넛을 웃기로 삼고 애
초부터 무보수인 지방지와 경제지의 지국 기자들 여남은 명이 모여 만든 협회였다.  하지만 
회원의 태반이 사기나 공갈.협박의 전과가 있어 내막을 아는 이들에게는 '안광전과자협회'란 
빈정거림은 듣기도 했다.
  까닭 모르게 한심한 기분이 든 명훈은 다시  자동차 보닛 위로 길쭉하게 솟아 있는 강철 
깃봉과 거기 매달린 깃발 쪽에 눈길을 주었다.  잔뜩 허세를 부려 금빛 수술을 두른 삼각형
의 깃발로 검은 바탕에는 '한국여론조사소'란 글자가 역시 금빛 실로 수놓여 있었다.  그 깃
발도 명훈에게 별위로는 되지 못했다.  5.16 혁명 주체 세력과 가깝다는 장성 출신의 실력가
가 조직한 전국적인 단체였지만 워낙이 그 실체가 공허했다.
  "너 미국 갤럽 여론 조사소란 거 들어봤지? 그거 대단하다던데 이제 여기도 시작된 거야.  
두고 봐.  이 조사소 끗발, 앞으로 시시한 신문 뺨칠테니."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여론 조사소란 게 일반에게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연줄을 대 그 
지부를 따온 잇뽕 형은 그런 큰소리와 함께 큼직한 사무실을 새로 얻고 조사원을 다섯이나 
뽑았다.  그리고 그 중에 한자리를 큰 선심이나 쓰듯 명훈에게 내주었다.
  명훈에게는 무엇보다도 그게 아무런 법적인 근거가 없는 사설  단체라는 게 못 미더웠다.  
거기다가 자체의 보도 기관을 갖지 못한 것도 어떤 한계를 예감케 했지만 처지가 워낙 이것
저것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도망이라도 치는 심경으로 안광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가까
워 옛정에 의지한 식객 노릇도 어려워진 그 무렵이었다.
  강군의 얘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이나 그 일을 곱씹으며 시시덕거리던 날치가 힐끗 명훈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조용히 생각에 젖어 있는 명훈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
다.
  "불알 냄새 나는 사내 새끼들만 태우고 먼 길 가자니 정말 지루하네.  형법으루야 강간이
고 파렴치범이지만 시간 죽이는 데는  아다라시 따먹는 얘기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니까."  
어두운 상념에 빠진 명훈의 표정을 자기들이 시시덕거리고 있는 화제를 못마땅해하는  것으
로 읽은 날치가 그렇게 변명 비슷하게 말해놓고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라도 
언론인다운 잡담을 하겠다는 신호 같았다.
  "근데 말야, 통혁당 사건 그거  어떻게 생각해? 작년 동백림 사건같이  김형욱이가 또 한 
건 크게 엮은 거 아냐?"
  "응?"
  갑작스런 날치의 물음에 명훈이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박기자가 그거라면  자기가 
다 안다는 듯 나섰다.
  "어예 되기는 뭐가 어예 돼?  승악한 빨갱이들이 또 뭔  수작 꾸미다가 도로맥이(도루묵) 
엮이듯이 줄줄이 엮인 게지.  동백림 간첩단 사건도 글코..."
  "아이구 저거도 기자라구... 대동, 너는 눈도  귀도 없어?  동백림 사건 재판하는 거  한번 
자세히 들여다봐.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그게 어디 재판이야? 그리고 외국 기자들은 
또 왜 그리 몰려들어? 진짜 간첩 잡아 재판하는 거라면 즈이들이 무슨 일로 눈에 불을 켜고 
난리냐구.  독일 정부의 항의도 만만찮은 모양이던데."
  "저게 또도 개도 모르는 게... 야, 니도 인제 지식인 하고 싶나? 뭐든지 색안경쓰고 삐딱하
게 딜따보고 뻔한 것도 배배꼬며 말하고... 동백림 재판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하노? 빨갱이
들 말 잘하는 거하고 양코배기들 싱거운 거 인제 아나? 간첩 글마들 이왕 죽을 몸이 머리에 
든 먹물 풀어 할 소리 안 할  소리 마구 씨부려대는 게 억시기 신기하든 게제.   또 양놈들 
그거 저어 나라에서는 훨씬 더 숭악한 짓 해싸면서도 남의 나라에 뭔 일 쪼매 있다 카믄 민
주다 인권이다 개싸며 달라들어 떠들어는대는 거 억시기 대단해 비던(보이든)게제."
  지역 분실 하급 정보원이라도 좋으니 중앙정보부에 몸 한번 담아보는 게 소원인 사람답게 
박기자가 그렇게 열을 올렸다.  다름아닌 간첩단 사건이라 명훈은 어차피 자신이 개입한 논
쟁이 못 된다 싶어 그런 둘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다  보니 날치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박기자에게만은 지기 싫다는 듯 뻗댔다.
  "그럼 무슨 간첩이 그래? 맨 박사. 석사에 날리는 예술가들이고 그 아래랬자 일류대 출신
의 독일 유학생들이잖아? 그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 간첩질하겠어? 말이 그렇지 독일 유학 
가는 거 그거 아무나 하는 거야? 광부로 가는 것도 돈 쓰고 빽 쓰고 난리들이었는데."
  "그러이 더 죽일 놈들이제.  여다서 좋은 거 다 해먹다가  운 좋아 독일까지 유학 가놓고 
김일성이하고 붙어먹어? 내 같으면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겠다.  그래고 날치  니 택도 
모자라면서 언론 함부로 하지 마래이.  여기는 우리끼리이 일 없지만은 까딱하믄 매가지(모
가지)가 열이라도 못 남아난다꼬.  니 김형욱이, 김형욱이하고 중정부장 이름은 누구  집 똥
개 부르드키 하지만 그것도 참말로 조심해야 된데이.  김형욱이 그  사람 그거 무서븐 사람
이라꼬, 천하의 김종필이를 누가 날린 줄 아나?"
  말이 그렇게 흘러가면 논리는 끝날 수 밖에 없었다.  박기자가 워낙 입에 거품을 물고 나
서자 날치도 은근히 뒤가 켕기는 모양이었다.
  "아이구, 여기 중앙정보부 안광분실장님 뜨셨네.  에,  알겠슴다, 나으리. 어리석은 백성이 
배배꼬인 지식인들 말만 듣고 함부로 언룬했으니 그저 너그러이 보아주옵소서."
  날치가 그렇게 빈정대면서도 꼬리를 사리자 정작 문제가 된 통혁당 사건은 제대로 얘기되
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잠시 휴전 말이 오가는 월남전이며  한창 건설중인 경부고
속도로에 얼마 안 남은 박대통령 51회 생신 따위가 화제를  채웠다.  기세가 오른 박기자는 
거기서도 정부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정부적인 결말로 김을 뺐다.
  "보래이, 너 아무리 언론밥 먹는다꼬 해도 그러면 안된데이.  월남전하고 고려 군사가  몽
고족 앞잽이로 일본 쳐들어간 거하고 어예 견주겠노? 월남전 덕에 국군 몇 개 사단이 신예 
장비로 무장하게 된 줄 아나?  그래고 월남 경기는 또 어예고? 고속도로도  글타.  야당 그
눔아들 개코도 모르미 반대해쌌는데 그기 바로 x도 모르는 게 탱자, 탱자 카는 게따.  대통
령도 닥쳐올 산업화 시대의 대동맥이라 안카드나.  두고 보라꼬.  지금 반대해쌌는 놈들 나
중에 부끄러븐 날 안오든강.  그래고 박대통령 51회 생신 얘긴데 그걸 신문에 쪼매 크게 다
뢌다꼬 뭐 그리 말이 많노? 다 같이 국가 원순데 김일성이는 그리 요란 뻑적지근하게 생일 
잔치해도 되고 왜 우리 박대통령은 안 되노? 대통령 생신을 개보름 쉬듯 해야 꼭 민주주의
라?"
  그러자 마음껏 찧고 까부는 데 재미가 있는 정치 얘기는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
가 비둘기 마음은 콩밭에 있다고 아무래도 그들  마음속의 관심은 그날 해야 할 일에 있어 
화제는 곧 그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말야, 수금이 제대로 될까.   두더지처럼 땅굴 속에서 석탄이나 파먹는  것들이라 
여론 조사소 같은 신규 업종을 통 알아줄 것 같지 않단 말이야."
  목적지가 가까워서인지 날치가 새삼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도 박기자가 이미 
버릇된 허풍스런 목소리로 받았다.
  "까짓 거, 안 되믄 광부들 여론이라 카며 사항 비리  있는 대로 캐내 중앙지에 확 날리삐
리지 뭐."
  "우리가 날린다고 중앙지가 받아주기나 하겠어? 그리고 사항  임금 체불, 안전 사고 어제 
오늘 새로운 일이야?  거기다가 무식한 놈 용감하다고 본사  기자가 내려와 찡(신분증)내밀
어도 눈 한번  깜짝 않는 놈들이  듣도 보도 못한  여론 조사소 지부  찡(증)을 먹어주까?"  
"그래믄  내 기자증도 안있나?  기자증하고 여론조사원증 야리끼리로(번갈아)  내밀어 양수
겸장으로 후리치는데 지깐 놈들이 어쩔 끼야?  추석을 앞두고 있으이 글마들도 떡값으로 쪼
매쓱은 각오하고 있을 께고..."
  "그럼 이렇게 하지.  네 말대루 처음부터 양수점장으로 치고드는 거야.  명훈과 나는 바로 
갱으로 내려가 광부들 잡고 여론 조사하는  척하며 겁줄 테니 박기자는 사무실로  쳐들어가 
기자로서 비리 취재를 시작하라구."
  날치는 그렇게 말해놓고 비로소 명훈이 명목상의 조장임을 의식한 듯 뒤를 돌아보며 동의
를 구했다.
  "어때, 이반장.  그게 낫지 않겠어?"
  그 말에 명훈은 음울한 기분에서 퍼뜩 깨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게 좋겠지.  하지만..."
  그런 쪽으로 머리를 쓰는 데는 언제나 명훈에게 한 팔 접어주는 날치가 기대하는 눈길로 
물었다.  명훈은 질문을 받고서야 떠오른 생각을 마치 오랫동안 가다듬어온 계획인 양 신중
하게 말했다.
  "무턱대고 겁만 준다고 될 일이 아냐.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지갑을  열게 하는 수도 있
지.  사람이란 게 워낙 감정의 동물 아냐?  제 죽을 뻔히 알면서 뻗대기도 하지만 기분나면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주머니끈을 푸는 게 사람이라구."
  "하긴 그렇지.  아다마(머리) 쓰는 일은 너한테 맡기라구 잇뽕 형이 네게 조장을 시킨 것 
같은데... 그렇지만 그 자식들 가려운 곳이 어딜까?"
  명훈은 그런 날치를 두고 박기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넌지시 물었다.
  "박기자는 여러 번 탄광을 훑은  걸루 아는데, 그 사람들 사업상  가장 아쉬워하는 게 뭐
요?"
  그러자 박기자가 한참이나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자신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 몇 번 탕광을 털어먹기는 했지만 그게 언제나 뻔한 껀수라-약점 잡고 찾아가서 몇 
푼 얻어쓴 것밖에 없으이... 하기사 몇 마디조들은 거는 있제.  석탄 파내는 것도 나라 산업
을 돕는 거이 길닦는 데라든가 비싼 장비 구입할 때는 나라에서 쪼매쓱 도와좄으믄 하는 게 
있고오-되지도 않은 게 까끄럽기(까다롭기)만 한 안전 규정 좀 풀맀으믄  하는 것도 있었고
오..."
  "그거 다 써먹을 수 있겠군.  그리고 그 사람들 군침 흘리는 이권이나 부대 사업 같은 건 
없었소?"
  "잘은 모리겠지만 조건 좋은 석공 하청은 니네없이 탐내는 눈치드마는."
  "석공 하청?"
  "석공이라꼬 탄광을 야지미리(모두) 직영하는 거는  아인 갑데.  탄맥이 있어도 이런저런 
까당으로 하청을 주는 모양인데 그 하청 한 건 잘 받으믄 노 나는(큰몫 잡는)모양이더라꼬.   
석공에서 규정대로 나오는 자재굴 안 무너질  정도로만 쓰고 빼돌리믄 그 재미만도  개얀은
(괜찮은)데 다 인건비 차액도 입댈 만한 갑데.  탄맥 실하고 탄질 좋은 게 걸리믄 가망가망
이 연탄공장에 탄 빼돌리는 재미도 있는 눈치라."
  그때 자동차가 갑자기 속력을 줄였다.  명훈이 앞을 보니 저만치  길이 갈라지는 곳에 석
탄 가루를 뒤집어쓴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백산탄좌 현장사무소 8km'란 글씨가 멀
리서도 알아볼 만했다.  그곳이 바로 그들의 첫 목적지였다.  자동차는 곧 팻말이 지시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부터는 사도인지 길이 좁고 거칠어졌다.  심하게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맡긴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명훈은 현장사무소 건물을 뚜렷이 알아볼 만한 곳에 
이르러서야 일행의 행동 지침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지.  날치는 강군 데리고 곧장 갱으로 내려가 여론 조사에 들어가라구.  처음부
터 공갈칠 생각은 말구 그저 광부들 편에서 애로 사항을  청취하는 척하란 말이야.  강군은 
보조로 머릿수만 더하고 그저 옆에서 어리대기만 하면 되는  거구.  현장사무소의 먹물들은 
박기자와 내가 잡는다.  박기자는 전처럼 약점될 만한 것부터 물고 늘어지고, 나는 여론 조
사소 팀장으로 박기자를 말리는  척하면서 저것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슬슬긁어보는 거야."  
"그눔아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래 어르고 등친다고  잘 넘어갈라? 그래고 여론 조사소란  게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많잖은데 미련하기로는 쇠보다 더한 놈들한테 먹히들라?"
  처음에는 큰소리치던 박기자가 새삼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명훈을 돌아봤다.  명훈에게 
기자의 이력이 없다는 게 아무래도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그럴 때는 무엇보다도 자신있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아는 명훈은 과장스러운 말투로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봤자 탄가루나 마시는 두더지들이지.  거기다가 우리 여론  조사소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게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어.  대통령의 밀명으로 특별 조직된  민의 수렴 기관 행세를 
할 수도 있으니까.  공연히 떨 것들 없다구.   정히 미련스럽게 굴면 정말로 확 조져버리는 
수가 없는 것도 아냐."
  사항으로는 규모가 좀 큰곳인지 현장사무소는 시멘트 블록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이었
고 집기며 인원도 명훈의 상상보다는 갖춰진 규모였다.  제법 가꿔진 현장사무소 마당에 차
를 세운 그들은 목깃 세운 장닭 모양 있는 대로 허세를 부리며 사무실 안으로 밀고 들었다.  
대여섯 앉아 있던 사무  직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아들어갔다.  
그러다 현장사무소장인 듯한 사내만은 달랐다.
  "어디서 나오신 분들이슈?"
  조수석 유리창에 붙은 위협적인 팻말이나 범퍼 귀퉁이에 꽂힌 삼엄한 깃발을 뻔히 보면서
도 그렇게 붇는 품이 벌써  예삿내기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었다.  명훈이 가만히 살펴보니 나이는 마흔에 가까워도 떡 벌어진 어깨
나 화살 꽂힌 심장을 새긴 팔뚝의 문신 같은 것들이 젊었을 때 한가락했음직한 느낌을 주었
다.  박기자는 그럴 때 나긋나긋하게 신분증을 내미는 걸 가장 못참아했다.  어떻게든 여기
서부터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덧이 갑자기 위압적인 태도를 지었다.
  "나 대동일보 박기자요.  취재할 게 있어 왔시다.  저분들은 여론 조사소 중앙본부에서 파
견된 분들이고."
  박기자가 한껏 턱을 끌어당기고 짐짓  무겁게 가라앉는 목소리로 그렇게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다.
  "신문이라면 지난번 우리 낙반 사고 벌써 나발불 대로  다 불었고, 그런데 여론 조사소는 
또 뭐요?"
  "이 양반이 학가산 밑에 사나? 아이, 요새  한창 전국적으로 끗발 날리는 한국여론조사소
도 몰라? 신문은 그래도 인정사정이나 있지마는 여다  걸리믄 바로 간다꼬, 바로 가.  난다 
긴다 하는 놈들도 여론 조사소 떴다 카믄 벌벌 기는데..."
  박기자가 잘 물어주었다는 듯 그렇게 허풍을 쳤다.  하지만 사무소장은 아무래도 그 방면
으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같았다.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이 박기자를 쳐다보다
가 느릿느릿 받았다.
  "나도 신문 보고 라디오 듣지만 그런 대단한 조사소라곤 통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쨌든 
여론 조사라면 사람 많은 도회지에서나 할 일이지, 이  깊은 산골 탄광에 무슨 일로 왔소?"  
  "허, 이 양반 보래이.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 카디 참말로 글네.  이게 말이라, 이 여론 조
사소, 이기 얼매나..."  박기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여론 조사소를 설명하려 했으나말이 워
낙 먹혀들지 않아서인지 얼른 뒤를 잇지 못했다.  상대가 모르쇠로  나오는 데는 날치도 뾰
족한 수가 없는지 입술만  핥고 있었다.  일이 되어가는  꼴을 말없이 살피고 있던  명훈이  
나섰다.
  "박기자, 그만 하쇼.  저쪽이 알아주건 말건 우리 일에는 별상관없으니까.  서로 제 할 일 
하면 되는 거요."
  그렇게 대범하게 말해놓고 상대에 맞게 여론 조사소의 위력을 과장할 말을 고르는데 갑자
기 바깥이 술렁거리며 직원 몇이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달려나갔다.  명훈이  창밖을 보니 
마당에 새로운 승용차 한대가 세워져 있고 누군가 신사복 차림 하나가 잰걸음으로 출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출입구에 이른 직원들이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사무소장도 황급히 달려
가는 것으로 보아 업주인 듯했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려다 갑자
기 상대를 잃어버린 명훈은 잠시 그 새로운 변화를 살펴보기로 했다.
  "사장이 왔는가 배, 하기사 저도 추석이 가까우이 현장을 한번 딜따(들여다)보기는 해야겠
제.  차라리 잘됐다.  조 뺀질뺀질한 현장소장놈보다는 퍼석한 사장을 바로 잡는 게 쉬울 께
라."
  박기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새 사무실로 들어서는  업주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아이구, 사장님이십니까?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러는 박기자의 목소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지만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이나  건들거리는 
어깨는 영락없는 시골 깡패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다는  듯 업주가 불쾌감을 숨기느
라 어정쩡해진 표정으로 손을 내밀려 불었다.
  "누구시더라?..."
  "대동일보 박기잡니다.  선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박기자가 제법 문자까지 쓰며 늘상 하는 방식으로 다가들었다.  그러자 업주의 표정이 알
아보게 굳어졌다.  그도 그런 쪽으로는 단련이 된 사람 같았다.  갑자기 거칠어진 말투로 사
무소장을 불렀다.
  "이봐, 남총무.  여기 또 무슨 사고 있어?"
  "아닙니다.  사고 없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총무라는 직급으로 사무소장  일을 맡기는 모양이었다.  총무가  굽신대며 
그렇게 대답해놓고는 못마땅하다는 눈치로 명훈 일행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때문에 애매한 
사람이 욕을 먹게 됐다는 뜻 같았다.
  "그럼 왜 기자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모두 다 기자들이 아닙니다.  나머지는 여론 조사손가 하는 데서 왔다는데요."
  "여론 조사소? 그건 또 뭐야?"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지금 묻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명훈이 나섰다.  그동안의 관찰로 업주의 성향을 대강 파악하고 나름대로 그에게 다
가갈 방향을 잡은 뒤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한국여론조사소 파견 조사원 이명훈입니다.  저희 조사소는 여론 수
렴 기구로서 아직 창립된 지 얼마 안 돼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습니다만 고위층의 특명으로 
조직된 관변 단체로 아시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저희  총재님은 예비역 중장 김성도 
장군이시고 고문 이사님들도 이름을 대면 하나같이 아실 만한 분들이십니다.  저희 여론 조
사의 결과는 각 매스컴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고위층의 국정 운영에  반
영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당에 세워둔 자가용이나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업주는 탄광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 같지
는 않았다.  곧 죽어도 자신은 사업가라고 우기고, 실제로는 탄광에 손을 대고는 있지만 본
질은 돈될 만한 일이면 무엇에 든 돈부터 질러놓고 보는 물주쯤으로 짐작되었다.  이번에도 
탄광이 돈이 된다는 주변 사람들 말만 믿고 승률 높은 노름에 밑천이라도 대는 심경으로 일
을 벌인 듯했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특혜나 이권 좋아하고 그래서 권력에 약한 점을 이용
할 속셈으로 명훈은 여론 조사소의 기능과 힘을 특히 그쪽으로 부각시켰다.  짐작대로 효과
가 있었다.  몇 마디 하기도 전에 말을 받는 업주의 목소리가 알아듣게 누그러졌다.  "그러
고 보니 들은 것도 같군.  그런데 이 궁벽한 탄광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광부들은 이 나라 산업의 역군들입니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문제점과 애로 
사항을 알아보라는 게 중앙의 지신데, 고위층으로부터 별도의 엄명이  있었는지 그 어느 때
보다 진실에 근접한 조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석공으로 가는 길에 여기부터 둘러
보게 된 겁니다.  사항의 광부도 엄연히 광부인 만큼 그들의  문제점과 애로 사항도 파악해
야 되니까요.  말하자면 이곳이 사항 중에서  표본 조사의 대상이 된 걸로 아시면  됩니다."  
여론 조사원의 일을 해보기로 한 뒤  중앙에서 내려온 유인물이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몇 
마디로 준비랍시고 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술술 말이 나오는 데는 명훈 자신도 은근히 감탄
스러울 지경이었다.  더구나 예정에도 없던 석공에 포본 조사까지 들먹인 것은 효과를 배가
시켰다.
  "저희야 석공 직영 광업소하고야 비교가 됩니까? 그래도 사항 중에는  광부들에게 해준다
고 해주는 편입니다만..."
  업주가 그러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언가 확실한 약점
을 잡지 않고서는 그의 단단한 옭아맨 주머니끈을 풀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요원들의 조사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어이, 김요원, 강요원.  여기 직원들 협
조받아 현장 조사 시작해.  갱으로 내려가게 되거든 안전 유의하고."
  명훈이 그렇게 지시하자 업주도 다시 긴장한 표정이 되고 총무는 드러나게 눈길이 실쭉해
졌다.  그때 박기자가 끼여들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나도 추석 앞두고 밥값은 해야 안되겠나? 임금 체불이든동 안전 설비 미비든동 일단짜리 
기사라도 한 줄 건져야제.  자, 함 가볼까?"
  그러자 업주가 완연히 험해진  눈길로 총무를 쏘아보았고, 총무는  그 눈길에 찔리기라도 
한 듯 펄쩍 뛰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이거 왜들 이러슈? 추석 대목이라 하루 3교대로 강행군인데 가긴 어딜 가요? 작업  방해
도 작업 방해지만 위험해서라도 갱 내에는 들어갈 수 없어요.  다음에 오슈, 다음에."
  "취재를 거부하는 걸로 보아 참말로 뭔 일이 있는 모양이네.  기자 십년에 내미(냄새) 맡
는 데는 똥파리 아이가? 보자, 이기 무신 냄새꼬?"
  박기자가 그렇게 걸고 들자 분위기는 한층 험악해졌다.
  "무슨 말을 그리 하슈? 우리는 다만 업무 방해가 싫단 말이오.  여기도 사람 있으니까 머
릿수로 밀고들 생각은 말고..."
  총무가 그러면서 주먹을 불끈 쥐는 게 필요하다면 곧장 실력 행세라도 들어갈 것 같은 태
세였다.  전에도 더러 그런 일을 겪어 단련이 된 탓인지 직원 몇도  언제든 가세할 수 있게 
일손을 놓고 이쪽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명훈은 이번에는 냉정한 계산에서가 아니라 타
고난 감각으로 박기자를 억눌러 험악해진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박기자, 관둬.  신문 기사란 게 남의 약점만 들춰내는 건 아니잖아? 좋은 얘기두  얼마든
지 기삿거리가 될 수 있따구.  그리구 우리 요원들도 저편에서  원치 않는다면 갱에는 들어
가지 말고 교대 시간을 기다려 작업하지.  보아하니 추석 대목 앞두고 석탄 한 삽이라두 더 
캐자고 열심들인데 생산에 방해가 되어서야 쓰나? 그건 이 나라 산업화 정책에도 역행하는 
짓이야."
  박기자와 명훈은 말도 트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날치 역시  배운게 없어 가끔씩 말
리기는 하지만 명훈의 지시를 받는 입장은 아니었다.  강군을 빼고는 모두 명훈의 일방적인 
지시에 조금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반발하지 않는 것은 그 동안 명훈이 
보인 그 방면의 순발력에 대한 믿음 떄문인 듯했다.
  "소장님, 흥분하지 말고 이리 와 앉으시죠.  여러 사람 거느리고 험한 일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 중에는 업체에 이롭지도 않고 해롭지도 않을 기
삿거리도 있을 텐데 그런 거나 몇개 들려주시죠.  아무리 개인 탄광이라지만 언론과 맞붙어 
이로울 것도 없고..."
  명훈은 총무를 소장으로 올려 부르며 그렇게 달래놓고 업주를 향했다.
  "사장님, 사장님께서는 업주 입장에서 저희에게 몇 말씀 해주십쇼.  탄광이란 게 광부만으
로 되는 건 아니니까.  업주는 업주대로 문제점과 애로 사항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 보
고가 얼마나 힘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고위층에서 특별히 국정에 반영한다는 언
질이 있었따고 하니 이 기회에 믿고 한번 말씀해보십쇼."
  그러자 먼저 업주의 얼굴이 알아보게 풀렸다.  그와 함께 총무의 표정도 원래대로 돌아갔
다.
  "총무, 아까 이분이 말한 그런 기삿거리라면 우리도 있잖아?  거 왜 지난 여름 폐에 석탄 
먼지가 잔뜩 껴서 죽었다던가 하는 영감말이야.  우리 광부들이  심시일반으로 거둬온 돈에
다 내가 좀 보태 유가족에게 이십만 원이나 전해줬잖았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인정담이
야? 제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더구나 가진 것도 없는 광부들이..."
  잠시 후 소장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사장이 명훈쪽으로 의자를 당겼다.
  "그렇죠.  여론 조사라면 광부들뿐만 아니라 우리 업주들 여론도 알아야지.  외손바닥으로 
소리가 납니까? 또 어떤 일은 광부들의 문제점과 애로 사항인 동시에 업주들의 문제점이고 
애로 사항이기도 하지요.  아니 어쩌면 모든 게 서로 맞물려 있따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그렇게 자리가 풀리면 일이 반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잘 아는 박기자와 날치는 그
제서야 각본에도 없는 명훈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표정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받아
들였다.  아마도 그 업주는 제 힘으로 한재산을  모은 사람인 듯했다.  고생도 많고 경험도 
많아선지 할말도 많고 말하기도 좋아했다.  거기다가 여론 조사가 탄광과 관련된 이권을 따
내는 데 유리한 근거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명훈의 암시에 넘어가 한번 말문이 터지자 오히
려 명훈이 말허리를 끊고 일어나야 할 만큼 길게 끌었다.
  "사실 원탄값이 너무 박해요.  하기야 원탄값 오르면 구공탄값이  오르고 그게 또 물가에 
영향을 미치니까 당국에서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우리라고 규정대로  동발 넣고 자재 쓰면 
좋다는 거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 보면  남는 게 없어 탄광 문닫아야 할 판이니 
뻔히 알면서도 무리들을 하는 거지.  광부들도 그래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우리가 규정대
로 하다가 자기들 밥줄 끊어지는 것보다는 다소간 위험하더라도 어떻든 탄광이  돌아가주기
를 바랄 겁니다.  그걸 이해해주셔야지."
  그런 하소연에서 제법 정책 건의 같은 것도 이었다.
  "도로 같은 것도 지원이 절실해요.  아까 보셨지요? 지방에서 여기까지 이십 리는 우리가 
닦은 사돈데 바위 깨고 흙 깍아 길 닦는 데 들어간 돈만 해도 엄청나요.  그런 거라도 사회 
간접 자본 확충이란 측면에서 정부가 맡아주면 큰 힘이 될 텐데.  길이란 어차피 한번 닦아
두면 누군가 쓰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정부는 나 몰라라  업주에게만 그 비용을 전가하
니 채산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지방도라고 있는  것도 제대로 쓰려면 장마 
때마다 제 돈 들여 도자(불도저)대야 할판이니..."
  그렇게 이어지는 업주의 얘기는 끝니 없었다.  명훈이 메모하는  척하며 곁눈질하니 박기
자도, 날치도 하품을 하며 기다리는 판이었다.   박기자는 소장에게서 인정 마담 한 토막을 
받아적었고 날치는 강군과 함게 마침 교대하고 나오는 갑반 광부들 몇을 잡아 여론 조사랍
시고 한참을 설친 뒤였다.  명훈이 적당한 떄를 보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갈 길이 바
빠서 이만..."
  "아 참, 석공 광업소에 가시는 길이라 했지.  이거 어쩌나? 귀한 손님들 오셨는데 차 한잔 
변변히 대접하지 못했으니..."
  업주가 그러면서 눈짓으로 총무를 부르는 게 더 구차한 절차 없이 일이 잘 풀릴 것  같았
다.  명훈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하고 쓸데없는 머뭇거림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어이, 어찌 된 거야? 챙길 거 챙겼어?"
  조바심이 난 날치가 사무실을 나오기도 전에 명훈을 다그쳤다.  내내 명훈과 같이 있었던 
박기자도 알 수 없다는 듯 볼멘소리를 했다.
  "이형 구찌빤찌(말주먹이란 뜻의 일본어와 영어 합작 조어)쎄다는 거는 잘 알지마는 어예 
된 거동 알다가도 모리겠네.  손도 한분 안 내밀어 보고 그양 털고 일라서믄 어째노?"
  "상대가 점잔을 빼니 우리도 한번 그래보는 거야.  정 안 되면  날치 네가 한 번 더 수고
해야지, 별수 있어?"
  그러는데 총무가 뭔가를 움켜쥔 주먹으로 뒤따라왔다.
  "이거 우리 사장님이 주신 건데 받아두슈.  먼 길 왔는데 맨입으로 보내면 손님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란 말씀이셨소."
  그러면서 내미는 걸 보니 제법 두툼한 봉투였다.  눈치 없이  봉투를 보고 반색하는 박기
자를 눈빛으로 말리며 명훈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어쨌든 사장님의 호의니 마다할 수도 없고.  어이,  강요원, 자네
가 받아둬.  기름값에나 보태쓰지 뭐.  어쨌뜬 사장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십쇼."
  그리고는 봉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에 올랐다.
  "강군아, 그거 일내보라.  얼매로? 얼매나 들었노?"
  차에 오르기 바쁘게 조급을 떨던 박기자가  사무소 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강군의  봉투를 
빼앗더니 속을 털어보고 만족한 듯 말했다.
  "하이고, 글마 그거 기마에 한번 크게 썼네.  시퍼런 천원짜리가 이거 몇 장이고? 한 삼만 
원 되는가 베.  참말로 여론 조사소 이거 머가 되기는 될 모양이따."
  하지만 출발이 조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당장 임금 체불로 
허덕이는 영세 업체여서 그런지 명훈의 단수 높은 접근도 박기자와 날치의 마구잡이 공갈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아이구, 들고 패든동 터줏든동(터뜨리든지) 마음대로 하소.  낼  모레가 추석인데 간조도 
못 주게 생깄구마는 무신 속씨끄러븐 소리껴? 육군(여태껏) 해오던  일이고 여다 밥줄 달고 
있는 많은 입에 거무줄 치까봐 어예어예 끌고 가고는 있니더마는 탄광이라 카믄 이제 덧정
(미련) 없니더."
  "참말로 언성시럽니더(끔찍합니다).  울고 싶은 놈 귀때기 때리기로 한번 시원하게 터자주
소.  신문 방송에 크게 한 방 맞디라도 그 길이(그 길로) 이놈의 탄광 문닫을 수 있으믄 도
로시(오히려) 속시원할시더."
  업주가 직접 나서서 그렇게 미련을  대는 데는 어찌해볼 길이 없었다.   박기자와 나치가 
오뉴월 문둥이 이 벼르듯 별러대다가 겨우 멱살잡이나 면하고 쫓겨났을 뿐이었다.  그 다음
에 찾아간 탄광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청(석공에서 하청 받아 석탄을 캐는 탄광)이라는 
말에 명훈이 나서서 석공을 팔아 구슬러 보기도 하고 박기자가 하청에 으례 있게 마련인 비
리들을 들먹이며 겁을 주기도 했지만 소 같은 총무는 꿈쩍도 않았다.
  "비리, 비리 하지만 정말로 큰 비리 잡고 싶거든 직영가서 알아보슈.  덩치가 커도 여기보
다는 크고 껀수가 많아도 여기보다는 많을 테니.  문둥이 콧구멍에서 마늘을 빼먹지...게다가 
지금은 사장님도 안계시고, 계신다 해도 신문 방송 겁내 벌벌 떨 분ㄷ 아니고오..."
  그러다가 마침 트럭에 실려나가는 동발(갱목)이 빼돌리는 자재임을 박기자가 눈치채고 말 
그대로의 협박 공갈로 나가서야 겨우 만  원을 뜯어냈다.  돈이 안 될수록 시비만  길어 그 
탄광에서 나오니 벌써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한군데를 더 들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탄광이란 게 대게는 산중에 있어 그대로 하기는 어려웠다.
  밤중에 험한 산길을 못 미더운 자동차로 오르내리는 일도 그렇거니와 무장 공비도 아직은 
겁이 났다.  비록 울진과는 몇백 리 떨어진 내륙이라고는 해도 백여 명의 무장 공비가 침투
해 동해안 일대가 발칵 뒤집힌 지 얼마 안되는 때라 소백산맥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아직 마
음놓을 곳이 못 되었다.  그 바람에 일정 하나를 취소한  그들은 가까운 주막거리에서 소주
를 곁들인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 뒤 영주로 나가 잤다.
  "개 보름 쉬듯 한다 카디, 이거 이래가주고 추석  제대로 쇨 수 있을라? 잘못하믄 자동차 
가시끼리(임대)값도 안 나올따.  어디 한 껀 왕창 끍어내는 수가 없을라?"
  아침에 여관을 나서면서 박기자가 풀죽은 목소리로 걱정했다.  날치가  그답지 않게 머리
를 굴려 명훈에게 제안했다.
  "씨팔, 이왕 후라이 까고 돈 뜯으려면 그 후라이가  먹혀들 큼지막한 데로 찾아가야 하는 
거 아냐?  어제 하청 총무 그 새끼  말이 맞아.  여기서 가장 가까운 석공 직영이  어디야? 
xx가 커야 애도 크다고, 물어도 덩치 큰 놈을 물어야지 임금도 못 줘 헐떡이는 쫄때기들 잡
고 어루고 옆맥여봐야 뭐가 나오겠어? 어제도 봐.  결국은 자가용이라도 번듯한 거 끌고 다
니는 놈한테 우리 말이 가장 잘 먹혀들지 않았어?"
  그러자 박기자가 기세를 되살리며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이형 구찌빤찌 믿고 하는 소리기는 하지마는 그것도 수는 수라.  수께줄(스케줄)이고 뭐
고 다 치았뿌고 바로 문경으로 넘어가보자꼬.  여다는 하마 석탄도 끝물이라 석공도 벌씨로 
싸발아 떠나고 백날 돌아봤짜 어제 같은 찌시래기들뿌이라.  글치만 문경.점촌 쪽은 안죽도 
한참은 더 파먹을 만한 모양이더라꼬.  석공 직영 광업소가 거다는 안죽 많으이께는.  더군
다나 요새는 낙하산 인사라꼬.  군대 뿌시레기들이 정치줄 타고 광업소장이다, 뭐다 턱턱 내
리온다 카는데, 글마들 그거 어떻노? 그러매이(그런 종류)들일수록 광산에 대해서는 x도 모
리면서 윗사람 눈치 살피는 데는 선수라.  언제 더 좋은 데 안불러주나, 카마 기다리는 처지
이 말썽시러븐 일은 얼살(몹시 겁내고 싫어함)일 수밖에.  그러이 그리 매이들 훌치기가 인
생 대꾸보꾸 겪을 대로 겪어 빤지라울 대로 빤지라워진 꺼저리 총부들 훌치기보다 훨씬 쉬
울꺼라꼬."
  "그뿐만 아냐.  돈은 시커먼 탄광에만 있는 게 아닌 보양이더라구.  문경에는 시멘트 만지
는 놈들이 탄 캐는 놈들보다 더 기름기 돈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아.  거기두 쳐들어가보자구.  
이 대한민국에 털어 먼지 안 나는 놈 어디 있어? 석탄이든 시멘트든 땅에서 파내기는 마찬
가지니까 달래든지 겁주든지 하여튼 부딪쳐보는 거야."
  날치가 다시 그런 제안을 보태었다.  명훈도 듣고 보니 그럴듯해  그들의 목적지는 그 자
리에서 바뀌었다.  결과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곧바로 석공 직영 광업소로 찾아
간 그들은 예비역 준장 출신의 광업소장에게서 큰 힘 들이지 않고  5만 원을 울궈냈다.  무
엇보다도 '각하 특명'과 '국정 운영에 반영'된다는 말이 번듯한 중앙 부서로 불려 올라가는게 
조원인 광업소장의 얼을 빼놓은 듯 했다.  소장의 전화 통보로 여론 조사가 아니라 민정 시
찰 격으로 돌게 된 소속항(갱)에서도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이름이 같아 항이지 구모는 어
지간한 개인 탄광만하다 보니 그곳 관리자들도 가만있지 않아 그날 하루 석공 직영에서 거
둔 것만도 십만 원을 넘겼다.  다음날 돌아본 시멘트 쪽에서도 소득이 나쁘지는 않았다.  켕
기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경기가 좋아서인지 점심  전에 들른 두어 곳에서 5만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들른 잘나가는 사항이 다시 2만 원을 보태주어 전날만은 못
해도 하루벌이로는 괜찮은 셈이었다.  추석이 이틀 뒤로 다가와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예
정에도 없는 단양을 거쳐 경북을 벗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사흘 동안에 본 재미와 
특별히 지부 표시가 없는 여론 조사소의  조사원 신분증이 그들의 배짱을 길러준  까닭이었
다.  그러나 내일 모레가 추석이어서 가봤자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만치서 돌아서기
로 했다.
  "방구 길들자 보리 양석 떨어진다 카디, 우리가 그짝일세.  인제 겨우 해먹을 만하다 싶으
이..."
  못내 아쉬워하는 박기자를 달래 점촌으로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오고 있었다.  읍
내로 들어가는 길목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안채에서 질펀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밖은 식당이라도 안채는 색싯집인 듯했다.   먼저 나온 소주를 홀짝이던 날치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이반장.  우리도 여기서 한판 벌리고 가지.  경비조로 한  3만원만 제치면 우리 모
두 짝짝 달라붙는 겐자꼬로 객고도 풀 수 있을걸..."
  "맞다.  지부장님이 우리 댕긴 데 일일이 찾아댕기미 얼매씩 뜯깄나꼬 물어보겠나, 어예겠
노?  우리도 그만 품은 했고오-고마 우리 여다서 한 뭉티기 꺼내 몸 한분 풀고 가시더.  월
급날 되믄 개도 천원짜리 물고 댕긴다는 데가 여기 점촌 아이껴? 물 좋은 데 고기 물리드키 
돈 많은 데 이쁜 기집아들 몰리는 거는 당연한 게고-어떠이껴? 그래 안될리껴?"
  박기자도 반색을 하며 날치를 거들고 나섰다.  그런 의논에 끼여들  처지가 못 되어 그렇
지 강군도 속으로는 그리 되기를 바라는 눈치 같았다.  그렇지만 명훈은 달랐다.  술과 여자 
모두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식으로 즐기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이번이 
자신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 여론 조사소의 첫 출진이란 점도 되도록이면 그 성과를 온전히 
보존하고 싶게 했다.  당분간은 싫어도 그 여론 조사소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
다.
  "길게 봅시다.  추석 대목에 차량 한 대와 사람 넷이 붙어 겨우 이십만원이오.  이 정도로
는 잇뽕 형의 욕심에 안 찰걸.  그걸 또 삥땅쳐 해롱대다가 괜히 먹피 보지 말고 그냥 곱게 
돌아가요.  술이야 안광 돌아가서 사달라면 되는 거구.   그리고 또-늦더라도 오늘 안에 돌
아가야 내일 추석 단대목 기관장들 촌지라도 몇 푼 거둘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둘을 달랜 뒤 밤길을 재촉해 안광을 돌아갔다.  밤길인  데다 도중에 타이어가 터
져 갈아끼우느라 늦어진 그들이 안광에  이른 것은 밤 열한시가 넘어서였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불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잇뽕이 그들을 보고 성급하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됐어? 잘 먹혀들어가?"
  명훈은 간략한 결과 보고와 함께 그 동안의 경비 빼고 21만 원이 든 봉투를 잇뽕에게  내
밀었다.  불콰하던 잇뽕의 얼굴이 일시에 환해졌다.  말은 없어도 만족한 기생이었다.
  "보자-차 밑으로 한 3만원은 갈라둬야 하고, 강군 저 새끼도 돈 만원은 줘야겠지.  그리고
오-사무실 유지비와 적립금으로도 한 5만 원은 제쳐두는 게 좋겠고..."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연 잇뽕은 시원스럽게 돈을 갈랐다.  그리고 남은 12만원을 자신까지 
넣어 네 몫으로 나누었는지 한 사람에게 3만 원씩을 돌렸다.  그에게도 한몫은 주어야 한다
고 생각들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떼내는 게 너무 지나쳐  보였다.  조심은 하면서도 그
냥 보아넘길 수는 없다는 듯 박기자가 퉁명스레 물었다.
  "적립금은 또 뭐이껴?"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언제나 추석 단대목일 것 같애? 너희들 벌이가 없을 때도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런 때를 위해 형편 좋을 때 조금씩 모아두는 게 적립금이야.  왜, 그
때그때 싹 쓸어 분빠이하는 걸 원칙으로 해? 그리고 벌이 없을 때 너희들 기본급은 내가 흙 
파서 줘?"
  잇뽕이 갑자기 날카로워진 눈매로 박기자를 노려보며 차게 반문했다.
  '삼대 일간지 주재 기자보다 더 많은 기본급'의 내막이  비로소 밝혀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는 중대한 항명으로 칠 수도  있는 박기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잇뽕의  기분이 
그리 많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곧 깊은 한숨과 함께 하소연 같은 설명이 이어졌다.
  "2조 정가하고 권가가 얼마 벌어오고 얼마 가져간지 알아? 겨우 7만원밖에 못 해온  주제
에 술에 취해 해롱대는 게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아고(턱)돌려 내쫓고 싶더라구.  하지만 어
떻게 해? 그래도 한솥밥 먹는 정으로 2만 원씩 줘서 보냈어.  적립금 떼기는커녕 운전사 낀 
자가용 사흘 대절비도 내 돈 보태야 하게 생겼단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요새 돈이라고 하
지만 3만 원 그거 작은 돈 아니야.  조금 보태면 소가 한 마리라구.  추석이 낼 모레고 그만 
실적이라도 올렸으니까 나눠주는 거야."
  그 말에 눈치 빠른 날치가 날름 올라탔다.
  "맞아, 대동 저 새끼 평생 무보수 기자로 푼돈이나 뜯어먹고 살다 보니 뭘 알아야지.   얌
마, 이돈 이거 우리가 거뒀다구 전부 우리 돈인 줄 알아?  이건 어디까지나 여론 조사소 안
광지부의 공금이라구.  형님이 몽땅 적립금으로 쓸어넣어도 할말이 없는 거야.  너 그러구두 
언론밥 먹는 놈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고도 언론인이라고 행세할  수 있는 거야, 엉?"  그
렇게 박기자를 몰아세워놓고 들큰한 목소리로 잇뽕에게 늘어붙었다.
  "형님,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저 새끼 괜히 한번 해본 소리예요.  제가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어디서 감히 형님이 하신 결정에...  더구나 나 같은 놈도 끽소리 없이  형님 
울타리 안에 엎드려 있는데, 글나저나  형님, 술이나 한잔 사슈.  잘했건  못했껀 개시란 게 
있는 거 아뇨? 아까 점촌서 술 한잔 제대로 빨고 올까 했는데 명훈이 저 새끼가 꼴에 조장
이라구 얼마나 병신 급수를 올리는지.  소주 한잔 걸치는 것도 안주는 손가락만  빨았시다."  
회사(소매치기단)를 걷어치우면서 잇뽕에게 의지할 게 더 많아진  탓인지 그런 날치의 말투
는 거의 아첨에 가까웠다.  잇뽕은 돈보다는 자신의 안목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는 데 마
음이 풀어진 듯했다.  다른 조가 형편없는 성과로 돌아와 맥이 빠져 있는데 명훈의 조가 돌
아오 자신이 새로 벌인 사업의 전망을 확인시켜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박기자의 은근한 반
발에 그 유명한 잇뽕(한 방)을 먹이는 대신 설명을 하는 참을성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좋아, 그럼 내 한잔 사지.  좀 늦었지만 대흥장으로  가자구.  통금되면 까짓꺼 거
기서 엎어지지 뭐."
  잇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호쾌한 목소리로 날치의 말을  받고 앞장을 섰다.  대
흥장에 가서도 잇뽕의 그런 기분은 이어졌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호기로 술과 안주를 시
키고 색시들까지 사람 수대로 불러들였다.  특히 명훈에게는 개선장군을 맞는 제왕처럼이나 
은근했다.  그날 명훈도 한동안은 개선장군처럼 흥겨웠다.  날치와 박기자가 과장하고 윤색
해 되씹는 무용담과 거기 감탄해 거듭 내미는 잇뽕의 술잔을 받으며 묘한 성취감까지 느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술이 오르면서 제딴은 명훈을 지켜세운다고 한  잇뽕의 말이 한 바가
지의 찬물처럼 다시 잠들어가던 명훈의 의식을 깨워놓았다.
  "역시 너는 그 방면으로 타고난 놈이야.  이번에 저  비리비리한 새끼들만 보냈다면 틀림
없이 정가하고 권가 꼴 났을 거라구.  도대체 아다마가 돌아야 뭘 해먹지.  더구나 여론 조
사소 같은 신규 업종을...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랬다고, 야쿠자 물을  먹
어도 서울 가서 먹어야 뭐가 제대로 돌아간다니까."
  그렇게 칭찬처럼 시작한 말은 이내 은근한 나무람으로 바뀌었다.
  "거봐, 내 뭐랬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구.  진작부터 너는 이 바닥에  자리
잡았어야 할 놈이었어.  개척? 상록수? 꿈은 좋지.  그렇지만  어찌 됐어? 삼 년 죽도록 고
생만 하고 겨우 돈 오십만 원 거머쥐었지.  그것도 네가 그 동안 피땀 흘린 값이 아니라 선
산 팔아먹은 것에 지나지 않아.  너는 결국 시골에서는 얻을 게 아무것도 없는 놈이었다구.   
아니, 농촌은 이미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어.  그래두 좋아.  그때 라도  내 말대로 
이 안광에다 집이나 한 채 번듯하게 장만하고 무보수라도 기자 자리 하나 차고 앉았으면 깨
를 볶았지.  대도시와, 네 말이따나 양지바른 삶이란 것도 네게는  가망 없는 꿈이었어.  넉
넉한 돈도 내세울만한 기술도 없이 시작하는  도회지의 삶-기껏해야 유식한 것들이 말하는 
그 도시 빈민으로 끝장나게 되어 있는 꿈이라구.  나는 네가  번듯한 회사에 취직했다는 말
을 들었을 때도 실제 네가  무얼 하는지 짐작했고, 장사한다구 다시  여길 오락가락할 때도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그건 결국 몇 푼 되지도 않는 네 밑천을 
까먹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빵꾸 랩'인가-자동차 뻥꾸 안나게 한다
는 약 대리점, 그게 마지막 한 방이 됐지.  세상에 이십만 원 보증금 넣고 한 달에 오만 원 
수입 보장되는 그런 장사가 어딨어?"
  그런 잇뽕의 말은 얼얼하게 취해오는 명훈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헤집고 들었다.  그리고 
잇따른 환경처럼 실패로 이어진 지난 삼 년을 짧은 시간 동안에 떠올리게 했다. 
  
  개간지를 팔아 만든 50만 원은 그들 일가가 도시 중산층으로 편입되기에 넉넉할 만큼 자
본으로서의 기능은 못 해도 일반적으로 '뿌리뽑힌 삶'으로 분류되는 이농과는  구별시켜주었
다.  서울로 올라간 그들 일가는 단칸방과 당장 필요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남은 40만 원
을 친척이 경영하는 보세 가공 회사에 넣었다.  미더운 만큼 당시로는  헐한 편인 월4부 이
자로 빌려준 것인데 그래도 배달 나오는 돈이 1만 6천 원이었다.  거기다가 명훈이 그 회사
에 일자리를 얻게 되자 그들 일가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옥경이를 중학교에 편입시키고 인철이를 찾아와 대학을 시킨다 해도 이자만으로 넉넉히 생
활이 되고 면훈의 벌이는 그대로 저축이 될 수 있었다.  그대로 간다면 집칸 장만해 서울에 
뿌리를 내리는 일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일가의 단꿈은 겨우  석 달 만에 끝
나고 말았다.  번지르르한 겉보기와는 달리 회사는 넉 달째부터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고 이
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놀란 명훈이 알아보니 회사의 상태는 이미 부도 직전이었다.  
명훈이 위협 반 애원 반으로 나서고 먼 일가붙이인 사장도 크게 선심을 써서 돌려받은 돈이 
겨우 30만원... 그리고 그때부터 무슨 예정된 순서처럼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고추장사를 해
본다고 나섰다가 몇 달만에 다시 10만 원을 줄이고 '펑크 랩' 대리점에서 마지막 20만  원을 
사기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늦지 않았어.  거 왜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나오잖아?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도로 찾자고-너도 서울서 잃은 걸 여기서 방까이(만회)하는 거야.  너는 할 수 있어.  이 여
론 조사소, 틀림없이 유망한 신규 업종이야.  우리 같이 잘 키워보자구."
  잇뽕은 격려하듯 그렇게  보탰으나 명훈의 머릿속을  떠도는 것은  속절없는 탄식이었다.  
결국 돌아오고 말았구나.  다시 제자리로, 다시 제자리로...
     
    제2장
  길 위의 혼
  해가 지면서 바람 끝이 한결 매서워졌다.  계절로는 아직 늦가을이고 바람은 습기를 머금
은 바닷바람이었지만 드러난 살은 견뎌내기  어려울만큼 따끔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까닭 모르게 코끝을 찡하게 하던 고운 저녁놀도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철은 점퍼
의 깃을 세우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벌써 한 시간 전에 지나온 작은 포구가 아득히 돌아
보일 뿐 인가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차라리 저 포구에서 잘 곳을 찾을 걸 그랬구나.'
  인철은 갑자기 난감한 기분이 되어 푸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은 거기서도 그런 생
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주막이 있는 포구인 데다 아직  해가 남아 
있어 구걸하는 티를 내지 않고 돈 안 드는 잠자리를 얻기에는 마땅치 못했다.  절박하지 않
은 때에 잠자리를 구하면 사람들은 열에 아홉 주막을 알려주고 돌아서버릴 것이기 때문이었
다.  거기다가 며칠 걸어본 가늠으로는  이십 리를 넘기지 않고  마을이 나타날 것 같았다.   
포구보다 농촌 마을의 인심이 후하다는 것도 인철이 무리해 길을 떠나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저물 무렵 작은 농촌 마을에서 잘 곳과 먹을 것을 구해본다는게 아무래도 일이 잘못
된 듯했다.  다시 한 시간은 좋게 걸었고 해도 졌는데 마을은 커녕 외딴집 한 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돌아갈까.'
  인철은 무거운 발길을 멈추고 저녁 안개  속에 희미해지는 포구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였
다.  앞길이 줄곧 바닷가의 야산을 끼고 뻗어 있어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라는 
농촌 마을이 나오려면 넓건 좁건 들이 먼저 펼쳐져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닷바람
에 헐벗은 바위산의 노을진 실루엣뿐이었다.  인철은 지도를 꺼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보
았다.  수첩 뒤에 곁들여진 조악한  지도로는 자신이 하서라는 곳과 감포라는  포구 사이에 
서 있으리라고는 짐작말고 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걸음을 멈추어서인지 더 매섭게 느껴
지는 추위는 그 사이에도 한창 급하게 인철의 결단을 재촉했다.
  '돌아간다 해도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앞으로 나가보자.  어
차피 걸어야 한다면 알 수 없는 쪽에 기대를 걸어보자.'
  이윽고 인철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어느새 저물어오는 바위산 그늘쪽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잠시나마 걸음을 멈춘 것이  마비되어 있던 감각을 살려내 다리는  굵은 쇠뭉치를 
단 듯 무겁고 부르튼 발바닥은 다시 쓰려왔다.  하지만 옷 속을 헤집고 드는 추위가 매서운 
채찍처럼 그를 몰아세웠다.  한동안 인철은 한발  한발 내딛기가 괴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미지는 스물한 살의 상상력을 다시 작동시켜 그럴 때 있을 수  있
는 온갖 구원의 양태들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바닷가 별장을  찾아가는 자가용으로부터 흔
히 시골 사람들이 막차라고 부르는 마지막 버스며 화물 트럭에 이르기까지, 온갖 탈것이 그
를 걷는 괴로움에서 구해주는 상상을 하고 거기에 탄 사람들과의 예사 아닌 만남에 가슴 두
근거려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
라도 한 듯 자전거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실러의 잠수부처럼
  끝 모를 여정의 심연을 자맥질하였네
  휘황했던 전설은 멸망당하고
  사어로 된 비명 만 스산스럽던 곳,
  따뜻이 손잡아줄 왕녀도 없고 
  이데아의 광휘도 마침내 이르지 못하는 곳을.
  
  인철의 젊은 날 노트에는 그런  설익은 시구가 남아 있는데, 여정을  그렇게 노래하게 된 
데는 아마도 그날의 혹독했던 체험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고통도 피로도  극단한 정도에 
이르면 축복 같은  마비가 온다.  인철의  무거운 다리나 부르튼 발바닥도 얼마 걷지  않아 
이전의 무감각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 무감각은 점차 온몸으로 번져나가 마침내는 의식 전
체를 마비시켜갔다.
  "아인잠카이트 이스트 마이네 하이마트(고독은 나의 고향이다).  아인 잠카이트 이스트..."  
인철이 앞뒤 없는 상상마저 놓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그런  독일어 
구절이었다.  그 무렵 제2외국어로 선택해 열을 올리던 독일어와  한때 깊이 빠져들었던 니
체의 무의식적인 결합인데, 그뒤 몇 시간 인철은 그 구절을 무슨 주문처럼 웅얼거리며 조용
하고 어두운 바닷가로 국도를 거역 못 할 본능에 이끌리는 한 마리 지친 짐승처럼 무턱대로 
따라갔다.  바람하고 아이는 해만 지면 잔다는 말이 있지만, 그날 그 바닷가를 불어가던 바
람은 그렇지 못했다.  밤이 깊을수록 기승을 더해 그 추위는 인철의 감각과 의식을 한층 두
텁게 마비시켰다.  나중에는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마비된 감각과 의식을 뚫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외침이 있
었다.
  "정지!"
  그러나 소리는 겨우 머리에 전달되어도 뜻은 얼른 떠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멍하니 걸음
을 내딛는데 다시 철커덕하는 쇳소리와 함께 한층 더 높은 외침이 들렸다.
  "손 들엇!"
  그 외침보다도 심상치 않은 쇳소리가 퍼뜩 인철의 의식을 깨웠다.  저것은 소총을 조작하
는 소리다.  실탄을 장전하는 소리는 아닐지라도 위협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아무래도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야겠다...
 "뒤로 돌앗!"
  다시 어둠 속의 외침이 들리고 인철은 비로소 손을 들었다.   그러자 플래시가 커지며 같
은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냐?"
  강한 플래시 빛이 시각을 자극해서인지 인철의 오관이 일시에  마비에서 깨어났다.  그러
나 추위에 굳은 입으로는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저어, 이, 이인철, 아니 지, 지나가던..."
  그때 플래시로 인철의 행색을 확인한 상대방이 다소 긴장이 풀어진 소리로 명령했다.  소
지품이라고는 주머니에 든 지갑과 수첩밖에 없는게 상대를 안심시킨 듯했다.
  "앞서 가. 저기 불빛 있는 데루."
  목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번쩍하는 곳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빤한 불빛이 보였다.  인철
이 못 본 것인지 등화관제가 철저히 되어 알아보지 못했는지 인철에게는 갑자기 나타난 것
처럼 느껴지는 불빛이었다.  인철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앞장서서 걸었다.  그새 온전히 
회복된 청각으로 헤어보니 뒤따르는 발소리가 여럿이었다.
  불빛이 있는 곳은 길가에 지어진 항군 초소였다.  그 며칠 걷는 동안 인철은 흙담으로 쌓
고 짚으로 이엉을 이은 한 평 남짓의 초소와 껍질만 벗긴 소나무로 얽은 조잡한 도로  차단
기를 곳곳에서 보았다.  연초 서울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북한 124군부대 특공조의 청와대 
기습 기도에다, 그 여름 삼척과 울진에 대구모로 침투한 무장  공비 때문에 강화된 향토 예
비군 초소였다 그러나 순사 시절로는 별로  실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 섬뜩한  위협으로 
다가든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인철이 등뒤의 명령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램프불 아래 얼룩덜룩한 예비군볼을 입은 청
년 하낙 총을 겨눈 채 인철을 맞았다.  바깥의 요란스런 수하 소리에 잔뜩 긴장해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다.  그러나 인철은 그에게보다는 초소 안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는 난루에 먼
저 눈이갔다.  깨진 몸통을 진흙으로 매운 것이라면 제법 연통까지 갖츤 배불뚝이 난로였다.  
인철을 뒤따라 들어온것은 전투복을 입은 경찰이었다.  나이는 스물대여섯이나 되었을가, 푸
른빛이 돌 만큼 흰 얼굴이 몹시 피로해 보였다.  그러나 환한 램프  불빛 아래 완연히 드러
난 인철의 행색으로 이제 대강은 알  만하다는 듯 긴장한 표정이었다.  인철은 지난  삼 년 
신분 확인이 있을 때마다 느껴야 했던 애매함과 당혹스러움을 다시 느꼈다.  학업을 포기하
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처할 수 없는게 그의 처지였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학생이 아무래
도 가장 유리한 신분 같아 버텨보기로 했다.
  "네, 지금... 재수중입니다."
  "그럼 정확히는 학생이 아니잖아.  주민증 없어?"
  인철은 그 말에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을 내주었다.  지난  8월에야 지급받은 새 주민등
록증이었다.  짙은 눈썹을 찌푸려 그렇잖아도 좁아 뵈는 미간을 더욱 좁게 만들면서 주민등
록증을 들여다본 전경이 다시 물었다.
  "이 밖에 다른 신분증은 없어?"
  그때서야 인철은 문득 학원 수강증을 생각해냈다.  달이 지난 것이기는 하지만 학생 신분
을 인정받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학원 수강증이 있습니다.  대입 학원요."
  인철은 새삼 버리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지갑 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난달 수강증
을 꺼냈다.  무심코 꺼내주다 보니 지난달 치 단과반 수강표 석 장이 한꺼번에 전경에게 넘
겨졌다.
  "이건 뭐야? 사진도 없고... 신분증이 못되잖아?"
  학원 수강증을 받아든 전경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장씩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
시 물었다.
  "무슨 학원 수강증이 이래?  수학, 수학, 수학, 맨 수학뿐이네."
  "수학 점수가 좀 모자라서... 수학만 집중적으로 듣다 보니..."
  마음의 상처가 건드려져서인지 희미하게나마 감정을 회복한 인철이 별로 달갑지 못한  기
분으로 까닭을 설명했다.  그런 인철의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전경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재수생이 여기는 웬일이야?  이런 시간에 무엇 때문에?"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학생이 이 오밤중에 걸어서 어딜  가노?  비척거리는 거 보이 잘 
걷지도 몬하는 모양이드마는."
  "참말로 깜짝 놀랬데이.  나는 무장 공비 한 놈 잡는가  싶어 가슴이 두근반 서근반 하더
라 카이."
  그때쯤에야 온전히 긴장이 풀렸는지 전경을 뒤따라오던 예비군 둘도 카빈 소총을  내려놓
으며 전경의 신문에 끼여들었다.  예비군복에 무장을 하고 있어도 말투에 별로 악의가 느껴
지지 않는 것이 가까운 마을에서 동원된 순박한 청년들 같았다.
  "조용히해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어."  전경이 만만찮은 성깔을 내비치며 그들을  나
무라놓고 다시 인철을 향했다.
  "그래, 어딜 가는 길이야?"
  전경의 그 같은 물음에 인철은 당황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어디로 가고 있
는가.  잠깐 넋을 놓고 인철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불기에 언 몸과 함께 마비돼 있던 의식
도 녹았는지 대답이 막막한 그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쓸데
없는 머뭇거림으로 공연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집으로,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집? 집이 어딘데?"
  "주민등록 본적지대롭니다."
  "재수한다면서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집에는 왜?"
  거기서 인철은 다시 대답이 궁해졌다.  인철이 머뭇거리자 전경이  한층 날카로운 눈매로 
따지고 들었다.
  "또 집으로 간다면 당연히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갈 일이지 이쪽으로는 왜 왔어? 보자.  현
주소가 부산직할시고 집이 경북 명양이라면 여기는  그리루 가는 철길도 없고 버스  노선도 
아니잖아."
  그래도 인철은 학생 신분에 숨어 간단하게 그 신문을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
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몇 달째 학비가 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지금 같은 세상에 육, 칠백 리를 걸어갈  생각을 한단 말야? 더구나 입시가 바
쁜 재수생이..."
  전경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인철로서는 이미 내친김이었다.  되씹기조차 울
적한 그 여행의 동기를 이제 와서 털어놓을 기분은 결코  아니었다.  거기다가 자신이 특별
히 경찰을 겁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도 인철의 오기를 돋우었다.
  "그거야 제 맘 아니겠어요? 기차나 버스를 타지 않고 여행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겠고..."
  "어, 이 사람 말하는 것 좀  봐.  아무래도 지서로 연행해 신원 조회라도  의뢰해봐야겠는
데."
  다분히 위협적인 말이었지만 인철은 별로 움츠러들지 않았다.  집에서  가출 신고라도 했
으면 조금은 귀찮아지겠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비록 발신인 주소를 쓰지는 않아도 어머니
가 걱정하지 않을 만큼은 안부 편지를 내온 그였다.
  "좋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러시죠.  하지만 지서가 어딘지 몰라도 지금은 다리가 아파 꼼
짝할 수가 없어요.  어디서 저녁도 좀 먹어야겠고."
  인철이 그렇게 나오자 전경은 무언가를 가늠하듯 잠시 말없이 인철을 살폈다.  인철의 말
투가 다소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 때문에 기분 상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봐요, 김득배씨.  지금 구판장에 가면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수 있을까?"
  전경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비군 중에 하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음을 받은 예비군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어려울 꺼로요.  하마 열한시가 넘었는데 그 할매가 안 자까요? 뚜드리 깨아 까자(과자) 
쪼가리나 산다믄 모리까."
  열한시가 넘었다는 말에 인철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다섯 시간 넘게 밤길을 걸은 
셈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먼 길을 걸었으며 여기는 어디쯤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의 
처지도 잊고 불쑥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아이, 그럼 어디가 어딘 줄도 모리고 걸어댕긴단 말인교? 이 오밤중에?"
  예비군 셋 중에 성마르고 말하기 좋아해 뵈는 청년 하나가 인철의 말을 받았다.  작은 눈
에 예사롭지 않은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해질 무렵에 물틴가 물친가 하는 어촌을 지난 것 같은데..."
  "물티를 말하는 갑구마는.  거다라믄 여다서 한 이십 리 되나?  그런데 거다서 여꺼정 오
는데 이르코롬 시간이 거렸단 말이오? 걸은 게  아이라 기왔구만, 기왔어.  학생 어디 아프
요?"
  "아픈 게 아니라 피곤했던 거요.  자신이 걷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그때 전경이 갑자기 끼여들어 인철을 대신했다.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진 게 이제 인철의 
정체에 대해서는 대강 가늠이 선다는  눈치였다.  유년 시절 이래도 인철은  경찰을 편견에 
가까운 경계심과 두려움으로 대해왔다.  그 많은 부분은 자신의  경험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무식하고 잔인한 집단으로만 이해해온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라면서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날 밤 그 전경을  대하는 인철의 의식 밑바
닥에도 그런 선입견은 여전히 깔려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대신하는 전경의 대답에서 풍기
는 지적인 분위기가 묘한 혼란을 주었다.
  "글치만 그거 요상하네.  요새 난데없는 김삿갓도 아이고-이 치운 밤길을 그래 걸어야 할 
까당이 있으까?"
  그때껏 말없이 보고만 있던 나머지 예비군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잠시 무언
가를 망설이던 전경이 가장 나이들어 뵈는 예비군에게 지시조로 말했다.
  "이봐요, 김득배씨.  교대가 한시죠? 그때까지 조원들과 여기  경계 좀 맡아주쇼."  "최순
경님은 어디 갈라꼬요?"
  "이 사람 우선 뭣 좀 먹여야겠어.  다음 교대조가 오기 전에 돌아올 테니 경계 철저히 해
요."
  그리고 인철에게로 돌아서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더라도 나와 함께 가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그의 태도가 그같이 급변한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악의가 아니라는 것에는 확신
이 서 인철은 말없이 따라나섰다.  인철이 너무 지쳐 그랬는지 전경의 말과는 달리 길은 꽤 
멀었다.  동그란 플래시 불빛을 따라 한 십 분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길 한편으로 호롱불 켜
진 창이 몇 보이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전경이 동구  쪽의 한초가로 인철을 안내하더니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기적문을 열었다.  유리 낀 초롱불이 걸려  있는 안쪽은 농가 별
채에 거적을 달아낸 듯한 부엌이었다.
  "이봐, 자?"  전경이 방문을 두드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깨웠다.
  "에? 예?"
  안에서 잠에 취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으면 이불 좀 걷지.  손님이 있어."
  전경은 방안의 여자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부엌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구석에 있
는 양은 대야를 찾아들고는 윤이나게 닦은 작은 무쇠솥 뚜껑을 열었다.  김이 나는 걸로 보
아 안에는 더운물이 있는 것 같았다.
  "이인철씨던가.  이 물을 퍼서 발이라도 씻지.   너무 뜨거우면 저기 바께쓰에 찬물이 있
어.  한결 나을 거야."
  전경은 그러면서 양은 대야를 인철에게 건네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으나 김이  오르는 더운물은 인철에게 큰 유혹이었다.   시키는 대로 
대야에 물을 퍼낸 뒤 한쪽 부뚜막에 앉아 목 자를 군화를 벗었다.   인철은 악취를 느낄 겨
를도 없이 때에 절어 뻣뻣한 양말을 말아 군화 속에 넣고 더운물에  발을 담갔다.  좀 뜨거
운 느낌이었으나 몸을 움직여 찬물을  탈 만큼은 아니었다.  그 동안  방안에서는 무언가를 
웅얼웅얼 불평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그걸 단속하는 전경의 나직한 목소리가 오갔으나  인철
은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
  "발 다 씻었으면 물기 닦고."
  이윽고 전경이 방문을 열고 깨끗한 타월을 내밀며 말했다.  발을 씻는 다기보다는 더운물
에 발을 담근 채 망연히 주무르고 있던 인철은 그 말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시키는 대로 
발을 닦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잠자다가 반갑잖은 손님을 맞게 된 안주인에게 그제서야 예의
를 차렸다.
  "밤늦게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머, 개얀심더.  그쪽으로 들따 앉으시소."
  전경이 어떻게 구슬렸는지 그렇게 받는  여자의 얼굴이 예상보다는 부드러웠다.   전경과 
동갑이거나 더 나이가 들어 뵈는 순박한 시골 새댁의 얼굴이었다.   저녁에 먹고 밀어둔 것
이 있었던 듯 방안에는 벌써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 밖에는 달리 밥 먹을 곳이 없을 것  같아서.  시장하실 텐데 찬밥이라도 좀 
드쇼."
  검문 때와는 달리 전경이 말까지 올려가며 호의를 드러냈다.  여자가 덩달아 인심을 냈다.  
"하필 오늘따라 찬밥이 쪼매 남아서.  우선 잡숫고 있으믄 라면 끓십니더."
  그러고 보니 윗목의 석유곤로에는 작은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파란 불꽃이 냄비 바닥을 
널름거리며 감싸고 있는 게 그을음이 나지 않는 한도에서 심지를 최대로 올린 듯 했다.  밥
을 보자 그때껏 추상적이었던 시장기가 절실한 고통처럼 인철의  위장을 자극했다.  김치와 
된장찌개 그리고 멸치볶음과 무생채가 전부였지만 인철에게는 그 어떤 잔칫상보다 더  눈부
셨다.
  "국이 없어서 어쩌나.  숭늉이라도 마셔가며 드쇼, 체하겠어.  라면도 끓을라면 아직 멀었
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인철을 걱정스럽게 보며 전경이 그런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인철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그런 인정에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보이, 라면 너무 퍼주울(퍼질) 필요도 없겠구마는. 즐기(서둘러) 떠드릴 테이 덜 퍼졌디라
도 꼭꼭 십어 자시시소.  알라들은 생라면도 잘만 빠사(부수어) 먹드라마는."
  여자가 그러면서 서둘러 퍼준 라면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은 뒤에야 시장기에 
내몰려 잠시 제구실을 못 하던 인철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무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인철을 그렇게 고마움으 나타내고 비로소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면을 'Sweet Home'
이란 영자와 몇 송이 장미를 수놓은 횃댓보가 덮고 있는 것이며 그 무렵 새로 나와 한창 인
기있는 알루미늄 옷궤짝과 그 위에 아직 박스째 쌓여 있는 집기 세트가 전형적인 신혼 살림
방이었다.  말쑥하고 앳된 전경의 얼굴도 아직은 새신랑다운 데가 있었다.  그러나 새댁치고
는 너무 퍼져 있는 여자의 몸매와 이불에 싸여 잠든 채 아랫목에 밀쳐져 있는 젖먹이가  왠
지 그 방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살피다 보니 신혼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램프 그늘쪽으로 놓여 있는 
앉은뱅이 책상과 책꽂이였다.  둘 다 낡아 둘 중 누군가가 결혼 전부터 쓰던 것인 듯했는데, 
특히 인철의 눈길을 끈 것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이었다.  그늘져 어두운데도 제목의 글씨가 
커서인지 먼저 [1996년도 대학  입시문제집]을 알아볼 수 있었고,  이어 [영어 정해][수 1의 
완성][정통 국어]같은 입시 참고서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모두가 인철도 가지고 있는 책
들이었다.  저 책들의 임자는 누구일까-대강  짐작이 가면서도 인철이 속으로 그렇게  묻고 
있는데 마치 그 물음을 들은  듯이나 그 입시 참고서들의 임자가  스스로 나섰다.  "저것들 
치워버리랬는데 왜 아직도 그냥 뒀어? 내일이래도 당장 내다 버려, 누굴 줘버리든지."  인철
의 눈길이 그쪽에 멈춘 것을  알아본 전경이 갑작스런 짜증으로 여자를  나무랐다.  단순한 
짜증이 아니라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날서 있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미욱스럽게 느껴질 
만큼 태평스런 목소리로 받았다.
  "인순이 아빠, 또 와 그래예? 집에 책이 있는 게  어딘데? 하마 방안이 얼매나 유식해 빈
다꼬. 그런데 멀라꼬 돈 주고 산 책 자꾸 갖다 내삐리라 캐싸예?"
  "입시책 몇권 가지고 크게 유식해 뵈겠다.  잔소리 말고 갖다 버리라면 갖다 버려!"
  "참말로 왜 저꾸 쌌는지 모리겠네.  내가 멀 보고 순사한테 반해 시집온 지 압니꺼? 바로 
저 책이라예. 저 책 보고 있는  모양 세상에 없이 좋드라마는 어예 다시  딜따볼 생각은 않
고..."
  "기집 자식 주렁주렁 달고 대학은 무슨 대학이야? 정말 못 알아듣겠어?"
  기어이 전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서야 여자가 겁먹은 눈길로 움츠러들었다.
  "알았심더, 알았다꼬예.  엿장수 오믄 엿이라도 바꿋지 뭐..."
  전경은 첫인상처럼 한번 성깔을 내면 매서운 데가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인철에게는 
그런 그가 매섭기보다는 애처롭게 느껴졌다.  왠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그의 상처 같아 
얼른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제 일어나지.  방이 좁고 어린애가 있어 재워줄 수는 없고, 나가자구."
  전경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무엇에 심사가 틀어졌는지  말투가 다시 해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인철은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그런 변화에 아무런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전경은 인철을 데리고 마을 안쪽 다시  한군데 불빛이 빠안한 집
으로 안내했다.  고맙게도 잘 곳을 마련해줄 작정인 듯했다.  전경은 찬바람 이는 걸음걸이
로 말없이 앞서 걷고 있었지만 인철은 그런 그에게서 오히려  따뜻한 정을 느꼈다.  더운물
에 발을 담그고 주무른 데다 저녁을 얻어  먹으며 쉰 덕분인지 이제는 걷기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따라가면서 보니 불이 꺼져 있어 그렇지 마을은 처음 느낀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어둠 속이지만 어림잡아 스무 집은 넘을 것 같았다.  하기야 전경이 배치된 향군 초소가 실
효 있게 운영될 만한 예비군 병력 자원을 가졌다는 점으로도 그만한 크기는 진작부터 예상
할 수도 있었다.  전경이 인철을 데려간 곳은  마을의 4H회관이었다.  4H운동이 한창 활발
하던 시절 정부 보조로 지어진 여남은 평의 블록집인데, 회의실로 쓰는 장방에 불빛과 함께 
두런두런 얘깃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어? 아직 교대들 안 했어요? 시간 넘었잖아?"
  방문을 연 전경이 나무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예비군복을 입은  청년 네댓 명이 둘러
앉아 화투를 치고 있다가 그 중의 하나가 넉살좋게 받았다.
  "이판 끝내고 일어설 낍니다.  촌에 뭐 시계가 있나, 라디오가 불어주나, 쪼매이 늦어보이 
어땁니꺼?"
  "이 냥반들 안되겠어.  예비군도 군인이야.  초소 근무도 작전이고,  교대 시간이 십오 분
이나 넘었는데 정말 영창 가고 싶어서 이래요? 어서 일어나요!"
  전경이 자신보다 나이들어 보이는 예비군들에게 반말까지 섞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서
야 예비군 셋이 화투판을 덮고 일어났다.
  "에헤이, 최순경 때메 본전 찾기 다 틀맀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꼬.  보자,  이거 
얼매 잃었노? 십원짜리 동전 내기에 잃은 게 이백 원도 넘는가 베."
  그렇게 우스개로 얼버무리기는 해도 지시를  가볍게 여기는 눈치들은 아니었다.   그들을 
끌어내듯 한 전경이 남은 한 사람을 보고 물었다.
  "김상철씨하고 정문기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문기 형님은 집에 제사가 들어 늦는다고 캤고예, 상철이  글마는 우째 됐는 지 모르겠심
더. 교대 시간 전에는 오겠지예."
  다음 교대조 중에 하나인 듯한 예비군이 그렇게 대답하자 전경이 지시하듯 말했다.
  "여기 이 학생 좀 재워 보내요.  마땅히 재울 데가 없어 데려왔으니까.  군불이라도 한번 
더 지펴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도록 해주쇼."
  "학생이라꼬예? 누군데 이 오밤중에..."
  "그건 내가 다 조사했으니까 더 따질 거 없고, 이 마을에 든 손님이라 생각하고 욕 안 먹
도록 해요."
  전경은 그렇게 말해놓고 인철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자고 내일 떠나.  그리고앞으로는 밤길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하고 이곳은 그래
도 남쪽으로 떨어져 좀 느슨하지만 울진 쪽으로 올라가면 아직도  경비가 심할 거야.  실탄 
근무라구."
  그리고는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돌아섰다.  인철은 전경의 그런 태도가 당황스러울 만큼 
뜻밖이었다.  겉으로는 냉정해도 은연중에 흐르는 따뜻한 정과 그  신혼방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인철에게 어떤 기대를 걸게 한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호젓이 마주앉아 자신의 곡
절 있는 삶을 털어놓고 인철이 떠도는 사연을 이해하며 들어줄 말상대로.
  "저..."
  앞뒤 없는 아쉬움을 이기지 못한 인철이 머뭇거리며 전경을  불러세웠다.  바깥으로 두어 
발짝 옮기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뭐, 더 필요한 게 있어?"
  인철의 주관적인 기대를 단번에 흩어버릴 만큼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아니, 그저...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인철이 그러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인철을 가만히 바라보던 전경이 조금 감정을 
회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다가 보면 떠돌게 되는 수가 있지.  그러나 떠돎 그 자체에 빠져들지는 말아.  그러다
가 때를 놓치면 일생을 떠돌게 돼."
  그리고는 돌아서서 마당을 나가버렸다.  초소 근무를 하면서 그 무렵 흔했던 무전 여행자
들에게서 느낀 감정을 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인철에게는 그의 말이 왠지 삶에 대한 깊숙
한 통찰에서 우러난 잠언처럼 들렸다.  방황하지 말라, 때가 온다.  아아, 방황하지 말라, 때
가 온다...
 "보소, 거 뭐 합니꺼? 하룻밤 자고 갈라 카믄 일로 들어오소.  날 치운데 문 옆어놓고 기다
리누마는..."
  인철이 어디선가 읽은 듯한 구절을 망연히  속으로 되뇌고 있는데 방안의 청년이  그렇게 
재촉했다.
  "아,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인철은 그러면서 신을 벗기 위해 방문 앞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열려 있는 방문으로 매
캐한 담배 연기가 아직도 빠져나오고 있었다.
  "학생이라 카디, 이기는 뭐... 그래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능교?"
  방안으로 들어서는 인철의 차림을 보고 방안의 청년이 노골적으로 불신과 경멸을  드러냈
다.  무엇 때문인가 비뚤어진  콧대가 그대로 그의 비뚤어진  성격을 드러내보이는 듯했다.    
  "네, 부산서 출발했는데 차를 놓쳐서 그만..."
  "지금 방학도 아닌데 학생이 와 이리 떠댕기노. 그래, 저녁은 묵었는교?"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일이 있어서... 저녁은 저분 댁에서 먹었구요."
  인철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지만 묻는  말에 예절바르게 대답해주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계속 삐딱하게 나왔다.
  "최순경 지가 대학에 포원이 졌으이 아무나 대학 얘기만 하믄  인심을 쓰는가 베.  고 못
된 소가지에 웬일로 저녁을 다 멕이고 잘 방까지 구해주노?"
  그렇게 인철의 말을 받아놓고는 빈정거림을 더해 오갈 데 없는 거지 취급을 했다.
  "나는 참말로 사람들 성미를 모르겠더라 카이.   무전 여행 그거 뭔 재미로 하는가  몰라.  
지 돈 없이 얻어먹고 댕기믄 그기 바로 빌어먹는 긴데.  오이 누가 반갑다 카나, 가이  누가 
좋다 카나... 우째튼 잘라 카믄 저짝에 아무데나 자리잡으소.  여기저기 끼여 자다 보믄 이는 
오죽할라.  내사 여기서 두어 시간 눈붙이다 가믄 되지마는 딴사람들 이 옮을까봐 걱정이구
마는."
  그때만 해도 인철은 밖에서 얼어죽는 일이 있어도 그 방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다.  다끔
하게 한마디 쏘아주고 방을  나가려는데 툇마루에 무얼  놓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램프 불빛 아래 얼굴을 드러낸 것은 나이가 좀 들어 뵈는 예비군이었다.
  "상철이 글마 그거 아직 안 왔는가 베.  이거 쫌 받아라."
  그가 그러면서 신문지로 덮인 커다란 쟁반 하나를 내밀었다.  비뚤어진 콧대가 사람이 달
라지기라도 한 듯 달려나가 그걸 받자 나이든 예비군은 신발 끈이라도 푸는지 다시 툇마루
에 주저앉았다.  방안으로 들어선 그가 비로소 인철을 알아보고 흠칫하며 물었다.
  "손님이 있었네. 낯선 양반이구마는. 누고?"
  "몰라예.  최순경이 데리고 와 재우라 카이 재우는 깁니더."
  "최순경이? 그라믄 최순경네 손님이가?"
  "그거는 아인 같고예. 아매 이리저리 떠댕기는 사람인 갑는데 인심 쫌 낸 모양입니더.  저
그 집에 델꼬 가 저녁까지 멕이고 델꼬 왔으이게는.  그란데 행임, 이기 뭐십니꺼?"
  "뭐시기는 뭐시라.  제사 음복이제.  너그들 속  출출할 거 같애 찌짐 쪼가리하고 톰배기 
몇 개 가주고 왔다.  소주 한 빙하고."
  그 말로 미루어 나이든 예비군은 좀 전에 비뚤어진 콧대가 문기 형님이라고 부르던 그 사
람인 것 같았다.
  "햐, 이거는 음복이 아이라 한상이네, 한상. 거다가 쏘주까지.  이거 먹고 근무 나가믄  새
벽가지 든든하겠구마는..."
  비뚤어진 콧대가 신문지를 걷고 쟁반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감탄했다.   그러다가 그도 다
시 인철을 의식한 듯 한마디 퉁명스럽게 건넸다.
  "뭐 하는교? 자든지 안 하고, 거 뻘주미 서서."
  한밤의 뜻 아니한 성찬에 인철이 끼여드는 걸 처음부터 차단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 말
에 인철도 더는 참지 못하고 말없이 방을 나와 신발을 찾았다.  나이든 예비군이 그런 인철
을 따라나오듯 하며 물었다.
  "아이, 학생 어딜 갈라꼬?"
  "제가 여기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서... 달리 잘 만한 곳을 찾아보지요.  아
니면 내처 걷든가."
  인철이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대답하자 금세 사태를 알아차린 나이든 예비군이 비
뚤어진 콧대를 나무랐다.
  "절마 저거 성질하고는... 니 일마 그래는  거 아이다이.  포수도 품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안 쏜다는데.  니 뭐 우쨌노? 저 양반한테 뭐라 캤노?"
  "뭐라 카기는요? 거다 자라 캤는데."  "니  성질 내 모리나? 뻔하다. 오죽했으믄 이  밤에 
다시 길떠날라 카겠나?"
  나이든 예비군은 한층 엄하게 비뚤어진 콧대를 나무라놓고 인철의 팔을 잡았다.
  "들어가입시더.  절마가 원래 말을 막하는 놈이라서.    글치만 속은 안 그렇심더.  하마 
열두시가 넘었는데 어딜 갈라꼬요.  고마 여기서 자고 내일 떠나이소."
  홧김에 자리를 차고 일어나기는 했으나 나이든 예비군이 그렇게 나오자 인철의 마음은 약
해졌다.  워낙 길을 떠나기에는 지쳐 있는 몸이고 무리한 시간이었다.  그때 다시 그 예비군
의 나이에 걸맞는 사려가 인철에게 결정적인 구실을 주었다.
  "그라고 이집 이거 절마(저놈)가 있으라 마라 칼 권리도 없는 집이라.  나라 보조로 세운 
4H회관이니께는.  백지로(공연히) 고생하지 말고 고마 여다서 하룻밤  우고 가소."
  인철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도 그 방에 묵어가기에 넉넉한 논리였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
기가 멋쩍어 쏘아붙이듯 한마디를 보탰다.
  "하긴 그렇군요.  동네가 다 제 집이라 똥개가 짖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여기서 몇 시간 
눈붙이고 떠날 테니 두 분은 절 없는 사람으로 치십쇼."
  그러고는 방 한구석으로 가 거침없이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비뚤어진 콧대의 눈길이 일
순 실쭉해졌으나 인철의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걸어올 만큼은 아니었다.   못 들은 척 젓가
락을 들며 딴전을 피웠다.
  "상철이 글마 어디 가 자빠져 있니라꼬 안죽도 안 오노? 음식 다 식는다마는.  마, 우리끼
리 한 병 까고 마입시더."
  그런 그를 나이든 예비군이 다시 나무랐다.
  "바라, 그런 게 아이다이.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꼬,  어예 사람을 옆에 놔뚜고 우리끼리 
먹노? 저 학생도 불러라."
  그러자 비뚤어진 콧대가 마지못해 인철을 보고 소리쳤다.
  "보소, 학생.  아직 자지는 않을 끼고,  일로 오소.  뭣 때메 맘  상했는지는 몰따마는, 촌 
인심 먹는 거에는 안죽 그리 안 박하다꼬."
  "전 방금 저녁 먹었으니까 두 분이나 드십쇼."
  인철은 팔베개를 풀지 않을 채 그렇게 사양했다.  이번에도 나이든 예비군이 나서서 억지
로 인철을 일으켰다.
  "그래도 안 글타꼬. 보소, 학생. 쏘주라도 한잔 걸치고 자소. 일마한테 감정 있으믄 그것도 
불고..."  
  그러면서 팔을 끄는 데는 더 마다할 수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풀고 음식 머리에 앉았다.  
비뚤어진 콧대도 생각이 얕고 말을  함부로 해서 그렇지 성품이 모진  사람 같지는 않았다.  
조금 전 인철의 독기 어린 응수는 까맣게 잊은 듯 음식에만 정신을 팔았다.
  "햐.  이거 제사라도 큰 제사였던가 베.  웃기가지 갖춘 어물을  썼던 걸보이.  술도 이거 
온병 아잉교? 그것도 막소주가 아이라 45도짜리 금곡일세."
  "퇴주가지고 올라 카이 좀 그래서 오다가 구판장 할매 뚜드려 깨았다."
  아직 술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에 인철이 자존심을 세울 기회를 잡았다.
  "구판장이 어딥니까? 여기서 멀어요?"
  "멀다 칼 꺼사 없지만 그건 왜 묻는교?"
  "그냥 얻어먹기 뭣해서 술이라도 한 병 더 살까 하고..."
  "그거라면 됐소, 고마. 나는 음복 마신 게 있으이 둘이 노나먹는 데 45도 한 병이면 잘 밤
에 어지간할 꺼구만.  우리는 근무도 나가야 하고."
  나이든 예비군이 그렇게 말려 결국 술은 사지 못했지만 자리는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
의 말대로 45도나 되는 독한 소주여서인지 두어 잔 얻어마셨는데 인철은 벌써 술이 올랐다.  
식곤증으로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머릿속에 피어오르던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그 속에서  잠
들어가던 감각과 정서들이 차츰 깨어났다.  허기지고 추위에 떨던 한 마리 외로운 짐승에서 
문득 인간으로 되돌아온 기분까지 들었다.  나이든 예비군은 음복이  과했던지 겉으로 보기
보다 많이 취해 있었다.  방안의 따뜻한 공기만으로 술잔을 받기도  전에 얼굴이 벌겋게 달
아올랐다.  비뚤어진 콧대도 술은 별로 세지 못한 듯 두 잔을 넘기면서 벌써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주로 '할 만큼 해보았다'는 '객지 생활' 경험담이었다.  그의 성격이 시골 사람 같
지 않게 모난 것은 바로 그 객지 생활 탓으로 짐작되었다.
  인철은 한동안 그런 그들을 상대로 시답잖은 세상살이를 주고 받았다.  집을 나와 떠돌면
서 사람들과 사귀는 데는 시답잖은 얘기일수록  정성들여 들어주는 게 가장 효과적이란  걸 
인철은 진작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인철을 느닷없이 사로잡은 슬픔과 외로
움의 정서는 오래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수 없게 했다.   자르르한 술기운이 머리를 적셔와
서 인철의 생각은 차츰 자신에게로만  모아졌다.  콧대 비뚤어진 예비군이 입대  전 도시를 
떠돌면서 겪었다는 고생은 이미 한가하게 들을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유치한 것으로만 들
어온 유행가 가사가 실은 가장 절실하게 삶을 노래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도 그날 
밤이었다.  절반은 유행가 가사를 섞어 그들이 말하는 나그네  설움과 타향살이의 고달픔은 
그 어떤 위대한 책들보다 진실하고 감동적이었다.  거기다가 불쑥 떠오른 전경의 마지막 말
이 겹치자 더는 의례적인 맞장구로 그 자리를 견뎌낼 수 없었다.
  "저는 이만 자겠습니다.  몹시 피곤하군요..."
  때마침 들어온 상철이란 예비군이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것을 기회 삼아 인철은 그들
의 술자리에서 벗어났다.  술과 음식이 다하고 근무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그들도 그런 인철
을 굳이 잡지는 않았다.  인철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리고 
까닭 모를 비감으로 눈가를 적시며  한동안 울적한 상념에 젖었다.  정연한  회상이나 자기 
성찰이라기보다는 과거 어떤 순간의 토막진 재현에 가까운 상념이었다.   하지만 워낙 지쳐
서인지 그런 상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인철이 어느 정도 냉정을 회복해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밤새 한 나그네가 되어 
끝없이 떠도는 꿈을 꾸다 깨어난 그 다음날 새벽이었다.  꿈속에서  가는 길마다 눈비가 뿌
렸던 것은 식어가는 방구들로 떨어지는 방안의 기온이 무의식에  반영된 것이었으리라.  실
제 그의 잠을 깨운것도 팔다리를 펴고 누워서는 견뎌낼 수 없는 추위였다.  심지를 한껏 낮
춘 램프 불빛 아래 돌아보니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철과 술잔을 나눈 교대조 외에 한 
조가 더 있는 것으로 들었는데 그들도 벌써 근무를 나간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
섯시였다.  무엇보다도 추위를 못 견딘 인철은 먼저 아궁이를 찾았다.  땔감이 있으니 불을 
한 부엌 더 지피고 자라고 한  전경의 말이 퍼뜩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러나  아궁이 곁에 
쌓여 있는 것은 제대로 짜개놓지 않은 잡목등걸이었고 불쏘시개도  없었다.  거기다가 바람
막이조차 없는 아궁이라 그곳의 추위가 더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방안으로 쫓겨들어온 인
철은 무엇이든 몸을 감싸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모두들 야간 근무에 대
비해 두껍게 껴입고 와서 잠깐씩 눈붙이다 가는 곳이라 그런지 헌 이불 한 채 눈에 띄지 않
았다.  방안에 있는 유일한 것은 화투판 받침으로 쓰는 군용 담요 한 조각뿐이었다.
  다급한 인철은 그 담요를 펴보았다.  얼마나 낡았는지 램프 불빛이 아른아른 새들어올 정
도였는데 그나마 반토막이었다.  하지만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그거라도 덮어쓰니 한결 추위
가 진정되었다.  인철이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몸의 떨림이  멎고 마음도 
조금 여유를 되찾은 뒤였다.  그는 되도록 감상을 떨어버리고 왜 자신이 거기까지 왔는가를 
차분히 되돌아보았다.  그때는 울적함이나 외로움도 사치로만 느껴졌다.  달포 남짓 부산을 
떠돌던 인철이 처음으로 자리잡은 헌책방에서 느꼈던 자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겨
울이 가고 신학기가 되면서 기연같았던 책방 주인과 인철의 만남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오
래된 갈등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 갈등의 불씨는 인철의 책읽기였다.  일반적으로 호인
이란 소리를 들을 만한 주인이지만 왠지 인철의 책읽기에는 진작부터 못마땅한 기생을 보여
왔다,
  "너 공부는 정말로 때려치운 거야?  시간 나면 네 말마따나 검정고시라도 준비하는 것이 
옳지 않아?"
  처음에는 그렇게 온당한 배려같이 시작한 간섭이었다.  그러나 신학기가  되어 인철의 책
에 대한 몰입이 실제적인 피해로 나타나면서 노골적인 고용주의 불만으로 드러났다.
  "맨날 소설 나부랭이에 정신이 빠져 있으니 제대로 되는 게 있어야지.  계산을 제대로 하
나, 책도둑놈이 집어가니 알아차리기를 하나.  이제부터 내 눈앞에서는 책  읽지 마.  갈 데 
없는 녀석을 붙여줬더니 이거야 원..."
  하지만 파국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신학기도 끝나가는  4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밤이 
늦어 책방 주인은 돌아가고 인철이 가게문을 닫으려는데 어떤 남자가 책 보따리를 들고 찾
아왔다.  헌책방의 일반적인 고객들과는 달리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주인은 안 계시냐?"
  그는 인철만 있는 걸 보고 약간 실망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때는  헌 책을 사고 파는 
요령을 어느 정도 익힌 인철이라 그의 실망한 표정이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렸다.
  "책 파실 거면 이리 내보세요.  제가 사드리죠."
  인철이 오래된 책방 점원 티를 내며 그의 책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왠지 그 손님
은 책 보따리를 놓지 않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 책 안 파실 거예요?"
  인철이 다시 한번 다그치자 사내는 마지못해 책 보따리를 놓으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런 표
정으로 말했다.
  "네가 살 수 있는 책이 아닌데..."
  보자기를 풀어보니 나온 것은 4X6배판 크기의  책 여섯 권이었는데, 비로드로 잘  장정된 
게 한눈으로도 우리 책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소화 12년판 전집인데-핵심들은 빠져 있어."
  사내가 얼른 알아듣기 힘든 말로 더듬더듬 책을 설명했다.  인철은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 
제목을 훑어 보았다.  일본 책이었으나 제목은 한자로 되어 있어  무슨 책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사회주이 사상전집6].  그걸 보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의어로  알고 있는 인
철은 일순 긴장했다.  오래 잊고 있던 원죄를 상기시키는 제목이었다.  이어 보다 큰 활자로 
된 제목이 들어왔다.  [무정부주의 선언].  저자는 일본어로 되어 있어 알 수 없었다.  다음 
책은 [자본 재축적론].  그리고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영구  혁명론].  자세히 보니 저자의 
이름들이 영자로 병기돼 있어 알 수 있었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룩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왜, 알 만한 책들이야? 사줄 수 있겠어?"
  어마어마한 책의 제목들과 저자의 이름들에 마비되어 멍하니 책을 바라보고 있는  인철에
게서 어떤 희망을 느꼈는지 사내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원래의 인철이라면 그 책들을 알아
본 순간 불에 덴 듯 내던지고 말았을 것이다.  길지 않은 교육 과정이었지만 국가가 되풀이 
주입한 반공 이데올로기에다 어머니의 과장된 경험이 의식 깊이 심어준 경원과  공포탓이었
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그것도 성장의  징표일까, 갑자기 아버지의 삶을 결정한  그 
사상이 저항 못 할 호기심으로  그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빠져 있지만 
어쨌든 젊은 아버지를 매혹시킨 사상들이다.   아버지를 부인하게 되더라도 알고 부인하자.   
이 책들은 남한 사회에서는 두번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은  일본어를 모르지만 
배우면 된다.  사자.  사두자.
  "아저씨, 이거 얼마나 받으실 거예요?"
  인철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차분히 물었다.  사내가 반색을 하며 받았다.  "이 책, 정말
로 네가 사줄 거냐?"
  "원래 사서는 안 되지만-값이 맞으면요."
  인철은 자기도 모르게 주인 아저씨의 흉내를 내며 흥정에 들어갔다.  사내는 무엇 때문인
가 돈에 몹시 쫓기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책들에 대한 애착도 만만치 않아 헌책방으
로는 큰 돈인 이천 원을 요구했다.  곁눈으로 보아온 대로라면  반드시 무리한 요구도 아니
었다.  그러나 실제로 인철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주인 아저씨가 간 뒤에 판  [동아전
과]한 권과 대입 참고서 두 권 값으로 오백 원 남짓에다 며칠 전 잡비로 받은 돈이 좀 남아 
천 원을 채우기에도 바빴다.
  "그럼 어렵겠네요.  값이 안 맞아서.  주인 아저씨는 보나마나 안 살 거지만 제가 어떻게 
사보려고 했는데."
  "네가?"
  사내가 잠시 아연한 눈으로 인철을 보다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물었다.
  "그래, 얼마면 살 수 있겠니?"
  "툭툭 털어도 천 원이 크게 넘지 않을 거에요."
  거기서 사내가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돈이 급한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그거라도 내놔."
  그리고 인철에게서 빼앗듯 천 원을 받아 돌아서다가 다짐처럼 덧붙였다.
  "무엇 때문에 샀는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서 간수해.  이 땅에서는  다시 찾기 어려운 귀한 
책이야."
  다음날 주인 아저씨가 점포에 나올 때까지 인철은 적잖이 고민했다.  간밤 자신의 독단으
로 사들인 책에 대해 사실대로 알리는가 마는가를 두고 한  고민이었다.  인철이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까닭은 책의 내용에 있었다.  집권과 함께 한층 강화된 군사 정부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인철을 주눅들게 하기에 넉넉했다.  하지만 알리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섭쓰레기 같은 책 한 권이 없어져도 금세 알아채는 주인 아저씨라 그가 퇴근한 뒤의 매상
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그걸 써버린 일은 어떻게든 해명되어야 했는데, 인철에게는 달리 둘
러댈 만한 구실이 없었다.  또 적당한  구실을 둘러댄다 해도 평소 돈 문제에는  맺고 끊는 
데가 있는 주인 아저씨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일은 인철이 오래 고
민할 필요 없이 진행되었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삼십 분을 일찍  온 주인 아저씨가 좌판과 
서가를 한차례 쓰윽 훑어보더니 자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어제 나 돌아간 뒤에 매상 더 없었어?"
  "네, 그게 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인철이 그렇게 머뭇거리는데 그가 다시 없어진 책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흠.  어제 산 [동아전과]가 안 보이는데.  보자, 저기 대입 쪽에도 두어권 안 보이는 책이 
있고."
  그렇게 되면 어쩌는 수가 없었다.
  "네. [삼위일체]와 [수 1의 완성]도 팔렸어요."  인철이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하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주인 아저씨가 전에 없이 손까지 벌리며 말했다.  "값은 제대로 받았겠
지.  돈 이리 내놔."
  "그게 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인철은 적당한 유용의 구실을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인 아저씨
는 단호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그러면서 찌푸리는 얼굴이 벌써 그 어떤 구실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호 같았다.  
인철이 제풀에 놀라 한쪽 구석 헌책 더미 뒤에 감춰두었던 책 보따리를 꺼냈다.
  "이걸 사느라고... 제 잡비도 보태서."
  "그게 뭔데? 무슨 책이야?"
  주인 아저씨가 그렇게  물으면서 보자기를  풀더니 인철이  알아볼 만큼  낯빛이 변했다.     
  "이거 언제 어떤 간나래 가져완? 뉘기야? 어떤 새끼야?"
  "어젯밤 열한시쯤에... 좀 나이드신 남자 분이..."
  "신분 확인했어?"
  형식적으로 헌 책을 살 때는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런 걸 
다지는 법이 없었는데 그날은  그러지 않은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따져 물었다.  
그 바람에 인철의 목소리를 더욱 기어들었다.
  "그건 저... 못 했습니다."
  "하긴, 고 빨갱이 새끼래, 지도 듁을  짓이야 않갓디.  네깐 게 묻는다고  주소 성명 칙칙 
바로 대가서?"
  주인 아저씨가 갑자기 냉소적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인철은 흥분한 그가 이북 사
투리를 쓰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필연적인 연상처럼 서북 청년단과 그들을 얘기하며  몸서리
치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 주인 아저씨의 내부에 숨어  있던 끔찍한 괴물을 갑자
기 발견한 느낌이었다.
  "기런데, 너 말이야-"
  무엇 때문인가 한참을 말없이 있던 주인  아저씨가 정말로 무슨 끔찍한 괴물처럼  험악한 
눈빛으로 인철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 저 책 와 산? 너 저 책 알안? 일본말 알안?"
  "아뇨, 그냥 책이 너무 번듯하고..."
  "기래서 장사될 것 같아 샀다 이말이디? 제 돈까지 털어넣어... 기리고 깊숙이 감춰? 도대
체 너 뉘기야? 어디서 뭐 하다 이리루 완?"
  그렇게 시작된 주인 아저씨의 심문은 그로부터 한참 더 계속되었다.   그 물음이 하도 집
요해 인철은 문득 모든 것을 털어놓아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까닭 모를 자
존심이 그를 강하게 버티게 했다.  왠지 모든 걸 털어놓는  것은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는 기분이었다.  마침내는 주인 아저씨도 인철에게서 더 들을 게 없음을 알아차린 듯했
다.  갑자기 물음을 멈추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
로 말했다.
  "알겠어.  어쨌든 너와 나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났다.  당장 나가.  너를 경찰에  넘기기 
전에.  다섯 달 한솥밥을 먹은 정이야."
  어휘와 억양도 어느새 표준말로 돌아와 있었다.  알 수 없는 자존심으로 버텨오던 인철이
었으나 일이 그렇게 엄중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급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사태를 완화시켜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인철이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주인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5백원짜
리 몇 장을 꺼냈다.
  "너 삼팔 따라지란 말 들어봤어? 내가 바로 삼팔 따라지야.  하마 이십년이 가깝고,  나도 
여기서 그럭저럭 발붙이고 살게는 되었지만 걔들은 용서 못 해.  내 땅  내 집 빼앗고 부모 
형제까지 해친 그놈들 말이야.  그 악질 빨갱이 새끼들... 설령 그게 한때의 호기심이라 하더
라도 너를 용서할 기분이 아니구나.  나를 이해해다오.  잘 가거라."
  주인 아저씨는 무슨 뒤집을 수 없는 선고처럼 그렇게 말해놓고 돌아서더니 인철이 가방을 
싸 그 헌책방을 나갈때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 다음 서너 달은 이른바 '고달픈  방
랑기'였다.  뒷날 인철이 곧잘 과장되게 추억한 삶의 밑바닥 경험이라는 것은 기실 그 짧은 
기간에 집중된 체험에 지나지 않았다.   헌책방을 나온 인철이 얼마간 몸담았던  곳은 서면 
쪽의 공사장이었다.  무슨 보세공장을 짓는다고 했는데 일손이 달렸던지  인철의 어린 나이
를 눈감아주었다.  어른들과 나란히 일당 3백원이나 되는 노가다판에  기게 된 것은 행운이
었으나 막일에 익지 못한 인철의 몸으로 오래 버티기에는 무리였다.  겨우 보름을 버티다가 
제 발로 물러나고 말았다.
  다음이 화교가 경영하는 중국집 배달원.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에 웃음이 헤프던  그 집 
딸 외에는 마음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는 일자리였다.  당장  거리에 쓰러질 지경이라면 모
를까, 이래 저래 몇천 원의 돈을 수중에 가진 인철에게는  음식 배달통을 들고 사람이 북적
거리는 광복동 거리를 해집고 다녀야 하는게 견딜 수 없었다.
  다음은 토성동에 있던 어떤 나고하가의 점포에서 조수로 일했다.   주인은 40대의 털보였
는데 여러 가지로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술고래였지만 불에 달군 인두로 나무를 지져 그리
는 그림 솜씨가 일품이었다.  사상 문제로 15년을 살고 출소한 지 얼마  안 된다는 말이 있
었고, 그래서인지 마흔을 넘긴 그 나이에 아직 홀몸이었다.  나중에 인철이 쓴 어떤 중편에 
소설적으로 변용되어 나온다.  하지만 그곳 역시 오래  있을 곳은 못되었다.  두달도 안 돼 
인철에게는 낙화가의 조수로서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음이 판명되었고,  점포 일꾼으로서도 
그리 소용되지 않음이 명백해졌다.
  그 낙화가의 수입이 일정치 않아 월급이 없다시피 한 것도  그 일자리의 약점이었다.  인
철이 몸담고 있는 낙화 공방은 큰 한의원의 부속 건물에 세들어 있었다.  따라서 공방 뒷문
으로 나가면 바로 그 한의원의 약재 창고로 연결되는데, 그게 인철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마
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막 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어느 날  오후 한가해진 인철은 별
생각 없이 그 약재 창고에 들르게  되었다.  두어 달 이웃하고 살아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낮은 익었지만 말을 트고 지낸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들이 오래 친해온 사람처럼 
맞아들여 그날부터 인철은 틈이 나면 가끔식 그 창고로 놀러 가게 되었다.  그 창고에서 일
하는 사람은 통상 셋이었다.
  장씨 아저씨라고 불리는 중년 하나와 김군이라고 불리는 청년,  그리고 창호라는 인철 또
래의 까까머리였는데, 한눈에 보아도 찌들은  도회의 하층민은 아니었다.  인철의 짐작이지
만, 나이 차이는 져도 모두가 하나같이 이제 막 도시로  편입되어 아직 전원의 풋풋함을 잃
지 않은 사람들 같았다.  컴컴한 창고 안에서 그들이 하루종일  하는 일은 본채 한의원에서 
쓰이는 약재를 손질하는 일이었다.  부술 것은 부수고 자를 것은  자르고 찔것은 쪄서 일정
한 무게를 달아놓으면 본채 조제실에서  가져가 의원이 내린 화제대로 약을  지었다.  처음 
인철을 놀라게 한 것은 그들 세 사람이  온종일 바삐 손본 약재를 그날그날 소모해대는 그 
한의원의 엄청난 번성이었다.
  부산뿐만 아니라 멀리 전라도에서까지 환자가 찾아들며 한번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사흘, 
나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경리가 둘인데 하루  입금만도 좋은 
집 한채 값인 백만 원이 넘으리라는 짐작들이었다.  그 한의원의 그런 믿지 못할 번성은 원
장의 신화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 시대 만주를 떠돌던 실향민의 후예였다.
  열여섯에 한 집의 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돌보아야 했는데, 의원이 되기 이
전에도 이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정미소의 용인으로 들어가 정미소의 주인이 되고, 서른
이 되었을 대는 이미 봉천에서도 알아주는 곡물상이 되어 관동군에 대두를 군납할 정도였다
고 한다.  그가 의술과 기연을 맺게 된 것을 서른여섯이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모르지
만 난데없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에게 습격당해 '인체 삼백육
십 마디가 다 부러지고 이미 심맥이 끊어졌을 때' 그를  구해준 중국인 의원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동양적인 사승 관계에 따르게 마련인 여러 진진한  얘기 끝에 중국인 제자
들을 물리치고 스승의 비법들을 모두 전수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인철도 그 효능을 목격하게 되지만  원장에게는 실로 비방이라고 할 만한  화제가 
몇 있었다.  맹장염과 늑막염. 축농증. 폐결핵. 위궤양이 특효를 보는데, 특히 양의에서는 외
과적인 치료밖에 없다고 믿는 맹장염과 축농증을  탕제로 다스리는 게 사람들을 놀라게  했
다.  이미 맹장이 터져 심한 복막염으로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가 실려와 사흘 만에 제 발로 
걸어나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약재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원장의 고향 친지들이었다.  장씨 아저씨는 만
주에서 함께 고생하던 사람의 동생이었고, 김군은 그의 집안 조카뻘이었으며, 까까머리 창호 
역시 동향을 인연으로 그곳에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인철은 그 중에서
도 특히 창호와 친해졌다.  창호의 순하고 인정 많은 성격에  끌리기도 했지만 저녁마다 말
끔하게 교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하는 모습이 부러워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철이 
그들과 친하며 그 한의원의 이런저런 사정들을 알게 되는 사이 그의 처지도 그들에게 알려
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창호가 일부러 인철을  찾아와 밖으로 불러내더니 물었다.   
"야, 니 일하는 데 옮기고 싶다 캤제?"
  "니, 우리 창고에서 일하는 게 어떻노?"
  그 말을 듣자 인철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감히 바라지는  못했으나 인철은 창호의 일
자리를 부러워해왔다.  비록 하루종일 컴컴한 창고 안에서 약초나  써는 일이었지만 거기에
는 안정된 숙식과 적지 않은 월급이 있었다.  거기다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라는 근
무 시간은 나머지 시간의 자유로운 활용 가능성을 의미했다.
  실은 그 무렵 인철은 은근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벌써 집을  떠난 지 일년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애초에 목적했던 학업은 여전히 내팽개쳐진 채였다.  책방에서뿐만 아니라 그때껏 
일한 모든 곳이 정시의 일터가 아니어서 규칙적인 학업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있는 
낙화 공방도 그랬다.  주인이 모질게 인철을 부려서가 아니라 일이 정한 시간을 낼 수 없게 
했다.  아직 독립적인 작품으로는 팔리지 않고 조잡한 목제 기념품의 장식, 또는 고급한 가
구의 문짝 정도로나 수요가 있는 낙화라 일거리가 대중없었다.  어떤  때는 며칠이고 할 일
이 없다가, 어떤 때는 밤새워 기일을 맞춰야 했다.
  "그걸 네가 맘대로 할 수 있어?"
  마음은 간절하지만 얼른  믿기지 않아  인철이 그렇게  묻자 창호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거는 아이지만 되는 길은 있다.  이따가 장씨 아저씨 찾아가 함 말해 봐라.  영구 형님
이 조제실로 올라가게 되어 어차피 사람 하나 구해야 된다.  장씨 아저씨도 니 싫어하는 눈
치 아이고."
  인철이 공부에 다시 마음을 쏟게 된 것은 그렇게 일자리를  바꾼 뒤였다.  창호는 인철에
게 자신과 같이 야간 고등학교 편입하기를 권했다.  정식으로 전학을  하면 이 년이나 늦어
지는 셈이 되니 변두리 신설 학교에 얼마간 내고 3학년에 편입해 입시 준비는 따로  하라는 
말이었다.  인철도 처음에는 그 말에 귀가 솔깃했으나 알아보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형들
의 시대와는 달리 하마 사회는 안정되어 그런 근거 없는 편입은 되지 않았다.  결국은 어떻
게든 학력을 위조하거나 인철로서는 엄두도 못 낼 고액을 치르고 부정하게 편입하는 길뿐이
었다.  그 때문에 인철은 다시 검정고시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학원에 나가 실력을 쌓아 검
정고시를 통해 떳떳하게 진학하는 길이었다.  그 일 년 정규의  학교 수업은 받지 못했으나 
어쨌든 책을 손에서 놓고 지낸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철의  자신에 보탬이 되었다.  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이듬해  가을의 첫번째 시험때는 운이 좋았는지  수학 한 
과목을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합격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다음 여섯 달 그토록 고심해 수학을 준비했는데도 떨어지자 인철은 갑작스런 위기
감에 빠졌다.  지난 여섯 달은 인철이 그런 위기감에 쫓겨 보낸 세월이었다.  그는 남는 시
간을 모두 수학에 투입해 학원에서 수학만 하루 다섯 시간씩 들었다.  그러다 보니 몇 종류 
안 되는 수학 참고서를 되풀이 듣게 되는 꼴이 되어 나중에는 해법을 깨우쳐서가 아니라 외
워서 답을 쓰는 식이 되었다.
  사실 이번에 시험을 치를 때만 해도 인철은 최소 합격점은  자신했다.  그러나 발표를 기
다리는 동안 실수의 의심은 불안으로 변하고 불안은 다시 고뇌로 깊어갔다.  이번에 떨어지
면 또래보다 세 해가 늦어지게  된다는 점이 더욱 그를 다급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발표를 열흘 앞두고 인철은 더 견디지 못해 길을 떠났다.  이번에 또 떨어지면 길 
위에서 이 삶을 마치리라,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면서.


    제 3장
  세상 끝에서
  '올 때가 되었는데...'
  영희는 난로가 꺼져 썰렁한 마루에서 열린 대문께를 바라보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손님
과 외박 나간 아가씨가 돌아오는 시간은 어느 정도 일정하다.   더군다나 상대인 손님의 습
벽을 잘 알고 있는 영희가 계산한 시간이고 보면 딱 맞아떨어질 법한데도 오양은 예상보다 
반시간 이상 늦어지고 있었다.
  바깥은 눈이라도 머금은 듯 흐린 날씨였다.  눈이 오면 첫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으나 이미 가슴 설렘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은 다만 오래잖아 돌아올 오양과 그녀와 치러야 할 한바탕의 악전고투뿐이었다.
  '하기야 그 미친 인간 변덕을 어떻게 점쳐...'
  이윽고 갑작스런 한기를 느낀 영희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손님들이 주는 술을 
눈치 없이 받아 마신 탓에 아직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져 있는 정양이 독차지하고 있는 안방
으로 들어가 뜨뜻한 아랫목에 몸이라도 지지며 느긋하게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대문께에서 인기척이 났다.  영희가 돌아보니 오양이 그 특유의 치켜든 
얼굴과 달랑거리는 걸음걸이로 대문께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유, 아무리 영업집이라지만 이렇게 대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되는 거야?"
  오양은 그렇게 코맹맹이 소리를 하다가 문득 영희를 보고 호들갑 섞어 말을 붙였다.
  "아이, 깜짝이야.  진마담 언니, 거기서 뭘 해요? 꼭 귀신 만난 기분이네."
  "응, 그래.  바로 널 기다리고 있었다."
  영희가 속으로는 한껏 입술을 사려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게 태연히 말을 받았다.
  "절요? 아니, 절 왜요?"
  오양은 여전히 해죽거리는 표정이었으나 어딘가 움찔하는 데가 있었다.  거기서 한 번 더 
전의를 가다듬은 영희는 몇번이고 점검해둔  집 안의 상황을 다시 점검했다.   주인 마담은 
식모와 함께 시장을 보러 나갔고, 아가씨들도 목욕이나 저마다의  볼일로 집을 비우는 시간
이었다.  있다면 오후 5시까지는 벼락이 떨어져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숙취가 심한 정양
뿐이었다.
  "몰라 물어? 너 좀 이리 따라와.  좋게 말할 때."
  영희는 위압적으로 그렇게 말해놓고 앞장서서 안방에서 가장 먼 별실쪽으로 오양을  유인
했다.  페더급인가 밴텀급인가 챔피언 후보를 데려와 허세를 부리던 권투 코치의 충고를 충
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었다.  게임에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있게 마련이라던.
  "진언니, 왜 그래요? 정말 머야? 사람 궁금해 미치겠네."
  오양이 수다스레 물어대면서도 마다 않고  따라왔다.  그녀도 나름대로는 전의를  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영희는  애써 무시했다.  별실은 그 아침  영희가 이미 
보아둔 대로 술병과 안주 접시들만 겨우 내갔을 뿐 더렵혀진 상보와 흩어진 방석은 간밤에 
어질러진 그대로였다.
  "이리 와, 가까이 앉아!"
  상석 자리에 방석을 바로해 앉으며 영희가 목소리에 한껏 위엄을 실었다.  지난 십 년 도
회의 밑바닥을 기며 그녀가 익힌 것들 중에는 뒷골목 건달들의  허세도 들어 있었다.  오양
의 얼굴에 비로소 긴장의 빛이 돌았다.
  "마담 언니, 왜 이래요? 나 겁나잖아?"
  그래도 오양은 몸에 밴 교태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영희 곁으로 
다가앉았다.
  "야, 김점순! 너 화류계 생활 몇 년 했어?"
  영희는 기습적으로 오양의 본명을 부르면서도 목소리는 한껏 내리깔았다.   군사 혁명 이
후 수그러들었다지만 요정에서는 아직도 심심찮게 깡패들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영
희는 지금 거기서 본 것을 그대로 응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게 깔아도 두 
눈에는 한껏 힘을 주었다.
  "그건 왜 물어요? 나도 할 만큼은 했다구요."
  오양도 마침내는 사태를 알아차린 듯 코맹맹이 소리를 거두고 맞받았다.
  "그래에? 그런 년이 화류계 의리도 몰라?"
  "너 어젯밤 누구하고 외박 나갔어?"
  "우리 사이에 그건 또 왜 물어요? 이왕 벌인 영업, 누구하고 나가면 어때서..."
  "물을 이유가 있으니 묻는 거야.  누구하고 나갔어?"
  그러자 오양은 더욱 거침없이 전의를 드러냈다.
  "우리 마담 언니니까 대답은 해드리죠.  영동 강사장하고 나갔어요."
  "영동 강사장이 누구야?"
  "누구긴 누구예요? 배추장수지.  아니 갑자기 땅값 올라 간이 부은 배추 농사꾼이지...  언
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걸 묻는 게 아냐.  강억만이 그 사람 누구야?"
  "억만인지 엉망인지 나는 그 사람 돈 많은 배추장수라는 거밖에 몰라요."
  "너 정말 자꾸 오리발 내밀래? 너 여기 온 지 몇 달 됐어?"
  "참 별걸 다 묻네.  그건 나보다 날 데려온 언니가 더 잘 알잖아요? 월급 두 달 받았으니 
두 달이지 뭐."  "그런 년이 강억만씨와 내가 어떤 사이란 걸 몰라?"
  "아, 그거? 그깟 거 가지구 화류계 의리 찾고 어쩌구  하셨어요? 몇 번 같이 외박한 사이
죠, 아마.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두 분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도 되나요?"
  이건 용서할 수 없다.  영희는 그런 기분이 들어 두 손에 가만히 힘을 모았다.  그러나 목
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래? 그럼 우리 사이를 잘 몰랐단 말이지?"
  "누구하고 한두 번 외박했다고 다 의리 찾다 보면 우리 장사 어디 가서 해요?  화류계 드
나드는 놈 그놈이 그놈이고 여기서 x장사하는 년 선배 아니면 후배지.  화류계물 먹을 만큼 
먹었다는 언니가 아직 그 이치도  몰랐수? 장사 어디 손님 얼굴  보고 해요? 언니 거나 내 
거나 다 팔려고 내놓은 물건, 값만 맞으면 아무한테나 파는 거지..."
  오양은 앳돼 보이는 겉보기보다는 그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자
신감이 오히려 허점이 되었다.  강하게 나와 영희의 기를 꺾어놓으려는 것도 햇내기가 세우
기에는 어려운 작전이었지만 영희가 냉정하게 적용하고 있는 남자들 세계의 폭력 원리를 당
할 수는 없었다.
  "얘가 생각보다는 무서운 애네..."
  년에서 애로 말을 올리고 목소리는 한층 차분했으나 그때 이미 한껏 힘을 모아 있던 영희
의 두 손이 오양의 길게 길은 생머리를 휘어잡았다.  잘 들어간 선방은 당수 초단을 잡는다, 
영희는 그런 깡패들의 경구를 떠올리며 있는 힘을 다해 오양을 패대기쳤다.  오양은 그제서
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두 손을 내뻗어보았으나, 영희는 이미 거기에 대해서도 준비가 있
었다. 아직 펼쳐져 있는 상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으로 내던져지듯 뒤집힌 오
양의 머리를 상 안으로 밀어넣고 벽 쪽으로 몰아붙이니 오양의 두 손이 영희의 머리칼에 닿
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영희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원래도 영희는 여자로서는  특출나다 할 만
큼 근골에 힘이 있었다.  거기다가 가슴까지 상 안으로 밀려들어가  두 팔이 뒤로 깍지기워
진 채 영희의 두 무릎에 짓눌려버린 상대를 새벽부터 다져온 전의로 공격하는 것이니 위력
적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돼 요양은 저항은커녕 버둥거림조차 멈추었다.   맞장까기(일 
대 일 싸움)에도 시야게(마감)가 있지.  시야게  잘못하면 잘 들어간 선방도 비겁한  꼼수가 
되고 말아.  권투에는 파이널 블로라는 것이 있어.  마지막 한 방 말이야.  되잖은 인정으로 
그거 아끼다가 다 이긴 시합 날린다구.  영희는 술상머리에서 주워들은 남자들의 비정한 승
부 요령을 실전에 응용했다.
  "야, 너 눈깔 크게 뜨고 여길 똑똑히 봐!"
  그새 말투까지 잔인한 주먹 세계의 흉내를  낸 영희의 손에는 미장원용 면도칼이  들려져 
있었다.  미장원에서나 이발소에서는 심상히 보다가도 흉기로  둔갑하면 유별나게 위협적인 
게 그 면도칼이다.  영희가 들고  있는 면도칼은 무허가 미장원을 경영하던  시절의 영업용 
집기 중의 하나였다.
  창현의 배신을 안 다음날 영희는 다른 집기들은 중고품을 취급하는 재료상에 모두 헐값으
로 처분하면서도 그것만은 남겼다.  배신자를  난자하든지 자신의 동맥을 자르든지  어쨌든 
쓸모가 있을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때는 전혀 쓰지 못하고 이제 삼 년이나 지난 후에 전
혀 예상하지 못한 용도로 쓰게 된 셈이었다.  영희는 이  별실을 자신의 싸움터로 정하면서 
미리 방석 밑에 그 면도칼을 숨겨두고 있었다.
  "으? 으어!"
  상 밑에서 끌려나올 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던 오양이 눈을 떴다가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
는 칼날을 보고 그런 비명을 질렀다.  상기돼 있던 얼굴이 일시에 희게 질리며 이빨을 덜덜
거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영희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여자의 주먹에는 아무
래도 한계가 있었다.  갑자기 공격을 당하고 눈 깜짝할 순간에 상 밑에 끼여 고스란히 맞고
는 있어도 오양에게는 아직 반격할 힘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만을 기다리는데 영희의 칼날이 끔찍한 빛을 뿜으며 코앞에 다가든 것이었다.
  "아, 언니, 진마담 언니, 왜, 왜 이래요? 자, 잘못했어요."
  이어 그렇게 더듬거리는 오양에게서는 이미 반격의 의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놀라움과 
공포만이 부들거리는 몸의 떨림으로 전해올 뿐이었다.  그제서야 영희는  오양을 옥죄고 있
던 팔과 다리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한차례 숨을 고른 뒤에 차갑게 말했다.
  "너, 고 반반한 낯짝 이 칼에 개가죽 나고 나두 손목 자르는 거 볼래? 아니면 곱게 내 말 
듣고 물러날래?"
  영희는 그러면서 금세 그어댈 듯 칼날을 더욱 오양의 눈 가까이 갖다댔다.  눈은 크게 뜨
고 있어도 오양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는 그녀의 바지 아랫도리가 물기에 젖고 있었다.
  "나 이영희, 벼랑 끝에 서 있는 여자야.  여기서 한 발 더 물러나면 이제 끝이라구.  그런
데 네가 왜 밀어? 왜 날 죽이려구 그래?"
  "제가 어, 언제..."
  "너도 알지? 내 나이 하마  스물일곱이야.  이 바닥에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끝물이지.   
이쯤에서 적당히 눌러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면 내 인생 뻔할 뻔자야.  그래, 겨우 한구석 보
아두었다 싶은데, 네가 초를 쳐?"
  영희는 강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짧은 침묵을 참지 못
하고 오양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정말 강사장하고?..."
  "그래.  나 그 자식 이름같이 엉망인 줄 잘 알아.  병신인 주제에 놀기는 좋아해서 오나가
나 봉이지.  지금은 잘 나가지만 싹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놈이라는 것도 알고."
  "..."
  "사업한답시고 애비 배추밭 판 돈 훔쳐내 계집 치마폭에 갖다 버린 지가 벌써 일 년이 넘
는다구.  아직 말죽거리 쪽으로 배밭도 있고 역삼동에도 논마지기 남아 있기는 하지만 거기
까지 손 내밀 수는 없을걸.  무지렁이 농투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아비 깐깐한 영감이야.  지
금까지 참은 것도 용하다 싶어.  게다가 나이도 나보단 한 살 어리지."
  "그런데 왜?"
  "그러니까야.  이미 꼬일 대로 꼬인 화류계 팔자 가정 가지고 살려면 그만해도  과분하지.  
그래도 본성은 순해 보이니까 잘 길들이면 내 팔자까지 펴볼 수도 있고.  그래서 공들인 지 
하마 일년이야."
  "..."
  "이제 네가 한 짓이 무언지 알겠어? 화류계 의리란 말뜻 알겟느냐구?"
  이때부터 영희의 말투는 차츰 호소의 여운을 띠어갔다.  그  역시 이른바 '시야게'의 일부
였다.  폭력을 폭력으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  승리를 담보하는 것은 감성적이든 이성적이든 
상대방의 심리적인 동의를 받아 내는 일이다.  대략 정리하면 그런 이치가 될 것이다.  영희
의 말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요양의 표정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속속들이 뉘우친다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희에게 미안하다는 기분은 든 것 같았다.
  "저는 별뜻 없이..."
  이윽고 오양이 그렇게 변명조로 나오는  걸 보고 영희는 이제 칼을  거둘 때라 판단했다.  
면도칼을 거두어 조용히 칼날을 접고 오양에게서 물러앉았다.  그리고 긴 한숨과 함께 탄식
처럼 덧붙였다.
  "하긴 나 같은 게 그래도 죽지 못하고 헛꿈을 꾸는지 모르지. 따뜻한 목욕탕에 들어가 이 
칼로 손목이나 한번 스윽 그으면 그만인데..."
  그러고 나니 정말로 눈물이 솟았다.  원래 각본에 없던 일이었다.  갑자기 약하게 보여 공
격을 유발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양을 감정적으로 설득해 앙심 품지 않고 물러나
게 하는 데는 해로울 것도 없다 싶어 영희는 굳이 눈물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 바닥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오양도 그리 모지 성품은 못 되었다.  반격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영희의 감정에 동화된 표정이었다.  조금 더 가면 영희를 따라 눈
물까지 흘릴 것 같았다.  너도 한 많고 설움 많은 화류계 갑자생(동갑내기, 혹은 같은 처지)
이로구나-영희는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자신이 너무 심했다는 자책까지 일었다.  하지만 
영희는 자신이 매듭지어야 할 일이 중요성을 상기하고 마음을 다졌다.  그녀에게는 아직 남
아 있는 연출이 하나 더 있었다.  영희는 그걸 위해 그 바닥  여자들이 들으면 함께 슬퍼해
주지 않고는 못 배길 넋두리를 한참이나 더 풀어놓았다.
  "이 방에 무슨 일 있어? 뭐야? 언니들이네..."
  그때쯤에야 겨우 그 방의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안방에 곯아떨어져 있던  정양이 
문을 열고 물었다.  숙취로 황폐한 느낌을 주는 얼굴에 두 눈을 크게 열려 있었으나 사물을 
제대로 분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희는 그녀의 출현을  장면 전화의 계기로 삼았
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자."
  그렇게 정양을 돌려보내고 미리 준비한 것을 꺼내 오양 앞에 내밀었다.
  "이것 받아."
  "?..."
  "5만 원이야.  네 월급 선불에 내 정성을  보탠 돈이야.  조금이라도 날 불쌍히 여긴다면 
아무 소리 말고 받아줘,"
  폭력과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데다 돈까지 보자 오양에게도 계산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빠안히 영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장 짐싸 떠나란 말이군요."
  "그래, 너를 위해서야.  아니, 너와 내가 피바다로 끝장보는게 싫어서 그래.  그 인간이 또 
찾아와 집적거리면 마음 약한 네가 어떡하겠어?"
  거기서 다시 영희의 목소리에는 차분하지만 위협의 어조가 실렸다.   오양이 깜빡 잊었던 
악몽을 되살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요.  주인 마담하구 소개소 뒤처리는 언니가 해줘요."
  그리고는 안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챙겼다.  좀 전의 드잡이질로  구겨지고 찢긴 외출복을 
갈아입고 밖에 나와 있던 옷가지를 거둬넣는 게 전부였다.  그녀가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서
는 데까지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거 갖구 가."
  영희가 그런 그녀의 가방에 좀 전의 봉투를 찔러넣었다.  오양도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돈을 보니 생각난다는 듯 핸드백에서 삼천원을 꺼내 영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따가 유양 돌아오거든 천 원 돌려줘요.   야메(암시장) 화장품 아줌마한테 칠백 원 있
구, 일수 남은 것도 대신 넣어주세요.  이 돈이면 다될거예요."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데서  그런 종류의 떠남이 이골이 난,  술집 색시로서의 짧지 
않은 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 마담이 식모 아줌마와 함께 장을  봐 돌아온 것은 그
로부터 오래잖아서였다.  영희가 큰일을 치르고 난 뒤의 허탈감으로 정양 곁에 멍하니 누워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마담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잘한다.  해가 살살이 퍼지도록 늘어져서... 딴 애들은 아직도 안 돌아왔어?"
  "오양만 돌아왔다가..."
  괴로운 듯 몸을 일으킨 영희가  짐짓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흐렸다.  "그년 어제 
외박 나갔잖아? 그래, 왔다가 또 어딜 갔어?"
  "짐싸 나갔어요."
  "뭐? 짐싸 나가? 아직 달 안 찼잖아?"
  "월급 안 받겟대요.  소개소(직업 소개소) 선금도 다 깠고, 빌린 돈에 외상값까지 다 쳐주
며 깔끔을 떨고 나가던데요"
  영희는 되도록 감정을 넣지 않으려고 애쓰며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 마
담이 그래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년 그거 봉을 물어도 크게 문 모양이네.  그렇지만 나도 안 보고..."
  그러다가 갑자기 영희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양 엊저녁에 강사장하고 나갔는데, 그럼 강사장한테 간 거 아냐?"
  "거기까진 얘기 안 했어요.  하여튼..."
  영희는 억지로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주인 마담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가억만이 그 새끼 정말 엉망이네.   진마담 아니면 못 산다고 뻔질나게  여길 드나든 게 
언제야? 그런데 바로 네 밑에 있는 오양을 빼내가?"
  "화류계 사랑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영희는 울음 섞어 그렇게 대답하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였으나, 생각보다 쉽게 눈물이 났다.
  "하긴 엊저녁 그년 외박을 내보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돈 주면 몸 파는 색도가라지만 
그래도 그 의리는 있어야 하는데."
  그제서야 영희가 우는 까닭을 알아차렸다는 듯 주인 마담이 뒤늦은 자책을 했다.  영희가 
더욱 처량한 어조로 받았다.
  "요새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요? 손님이 왕이잖아요?"
  "왕 좋아하네.  손님도 손님 나름이지, 여기 드나드는 것들 그게 어디 왕이야? 순  개새끼
들이지. 억만이 그 새끼 이걸..."
  "그분 너무 욕하지 마세요.  난 그분 원망하지 않아요."
  그러자 다시 주인 마담이 끌끌 혀를 찼다.
  "으이구, 여기 춘향이 났구나.  하지만 이도령이 딴 기생첩부터 먼저 들였단 소리는 못 들
었다. 앓느니 죽는다구, 그렇게 늘어져 있으니 오양 그년하고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이지. 뭐, 
화류계 십 년? 앞집 진돗개가 들어도 웃겠다."
  "화류계도 순정은 있는 법이에요."
  영희는 그렇게 강하게 받아놓고 어떤 알 수 없는 결의를 보여주듯 지그시 입술을 사려물
었다.  영희가 짜놓고 있는 또 다른 연출을 알 리 없는 주인 마담은 그런 영희를 더욱 기막
혀했다.
  "진마담, 정신차려.  나이가 몇이야? 나이가 몇인데 아직 순정 타령이야? 혹시 나한테  경
력 속인 거 아냐?"
  이 여자를 속이기는 힘들겠구나.  차라리 바로 털어놓고 도와달라고 할까.  거기서 영희는 
잠시 망설였으나 처음 의도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슬며시 눈을 감았다가 맥없이 쓰러지듯 다시 정양 곁에  누웠다.  주인 마담은 그제
서야 일이 심상찮다고 보았는지 영희 곁에 앉아 어르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민양과 허양이 목욕탕에서 때맞추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날 영희는 주인 마담이  화류
계 20년에 만났던 그 숱한 남자들을 그녀의 얘기 속에서 모두 만나야 했을 것이다.  민양과 
허양에 이어 무슨 일인가로 아침 일찍부터 외출했던 장양이 돌아오고 식모 아줌마가 점심상
을 내오면서 요정 만화장은 차츰 일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 동안도 영희는  줄곧 그녀가 정한  방향으로 그들의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다.  
점심도 거르고 외진 방에 누워 무슨 일만 있으면 사람들이 그리로 찾아오게 하는 것이었는
데, 그때마다 상심한 나머지 무언가 저지를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 있는 연기력을 다했
다.  영희가 양면괘지에다 강억만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날 오후2
시 무렵이었다.  미리 생각해둔 문안이 있었지만 막상  쓰려 하니 마음 같지 않았다.  원래 
영희에게는 약간의 글솜씨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솜씨를 감추고 강남에 있는 시골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강억만을 감동시킬 글을 쓰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내 진정 사랑했던 당신, 억만씨!  억만씨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 이  한 많고 슬픔 많은 
영아의 혼은 쓸쓸한 황천길을 걷고 있을 거예요.  믿고 사랑했던 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
의 갈 곳이 죽음의 세계말고 그 어디에 있겠어요!! 하지만 나는  억만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천애고아로 외롭게 자라 거친 세파에 내던져진  이 몸을 그만큼이라도 사랑해준 분은  오직 
억만씨밖에 없었어요.  기억나세요? 지난 봄 창경원 밤사쿠라 밑에서 제  손을 꼬옥 잡으면
서 저와 결혼해 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신  말. 그날 이후 저는 벌
써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었답니다. 저는 억만씨를 이해해요. 사랑은 주는 거라 했잖아
요! 오양은 저보다 예쁘고 나이도 어리죠. 저보다 훨씬 억만씨를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 그
러니 진정으로 억만씨를 사랑한다면 제가 당연히  양보해야죠! 안녕히 계세요. 부디 오양과 
행복하세요!! 할말은 태산 같으나 이게 억만씨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라 생각하니 피눈물이 
앞을 가려 더 써나갈 수가 없네요. 마음 변한 임을 두고 안녕, 안녕, 세상이여, 아-안녕.
                            1968년 11월 9일  당신의 영아가 최후의 독배를 앞두고
  
  그렇게 자신도 쓴웃음이 도는 유서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시침은 벌써 오후 3시를 넘어가
고 있었다. 영희는 편지를 정성껏 접어 미리 준비한 흰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또한 미리 준
비해둔 약봉지를 꺼냄으로써 그날의 마지막 처절한 싸움을 준비했다.  자기와의 싸움, 자신
을 담보로 하는 싸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가혹한 세상에서  번성하며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
  영희가 꺼낸 약봉지에는 스무 알의 세코날이 들어 있었다.  음독이 발견될 때까지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는 시간과 자신의 현재 건강 상태를 고려해 죽음의 결의를 충분히 드러내면서
도 치명적이지는 않을 것으로 계산한 양이었다.  영희는 자신의 계산이 맞는가를 동네 약사
에게 직접 확인해보기까지 했다.
  "몸이 건강하고 빨리 발견됐다면 그 정도로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위장은 좀 상
하겠지요."
  영희가 음독한 친구를 걱정하는 척하며 묻자 젊은 약사는  그렇게 안심시켜주었다.  영희
가 있는 방은 겉보기에는 그 집에서 가장 외진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세면대와 화장실이 
있는 별채로 가는 길목이어서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사람들 눈에 띌 방이었다.  거기
다가 그때까지 주욱 집안 사람들에게 미리 심어둔 인상도 있었다.  그들은 영희가 신음하는 
걸 보면 실연을 비관해 음독한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영희의 건강도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창현의 배신 뒤로도  남자야 수없이 겪었지만 유
산 같은 것으로 건강을 해친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가오(얼굴) 마담으로 물러나 앉은 뒤로
는 색시 때처럼 과음하게 되는 경우도 줄었다.  하지만 막상 약을 꺼내놓고 보니 왠지 으스
스했다.  자신이 세코날에 약한 특수 체질일 수도 있고 일이  꼬이려면 너무 늦어버릴 때까
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죽는다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대문께가 수런거렸다.  하꼬비(출퇴근하는 기생) 아가씨들이  출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게 내 팔자라면 하는 수 없지.  하긴 이 세상 쓴맛 이만하면  볼 만큼 보았어.  구태여 
미련 품을 일도 없다.'
  이윽고 영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한꺼번에 다 넘어가
지 않아 세 번에 나누어도 목구멍이 얼얼하고 배가 불렀다.  문득 눈물을 치솟게 하는 비감
이 일었으나 한편으로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영희는 그런 생각까지 하며 차츰 혼몽한 꿈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상하게도 처음 한동
안은 밝고 즐거웠던 삶의 한때들이 토막져 나타났다.
  어린 볼에 비벼대던 아버지의 꺼칠한 턱수염, 혜화동의 옛집, 할머니의 자애로운 부름, 오
빠 명훈 덕분에 몇 년 만에 다시 교복을 입게 되었을 때, 형배와의 첫 키스,  창현과의 즐거
웠던 한때... 그러다가 고통이 시작되면서 사납고 어지러운 꿈들이 시작되었다.  영희의 음독
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도 그 사납고 어지러운 꿈속에서였을 것이다.  정작 영희에
게 이발사용 면도칼의 위력을 알려준 음험한 얼굴의 변태, 섬뜩한 그 칼날의 위협에 밤새도
록 짐승 같은 짓을 강요받고 있는데 누군가의 호들갑스런 비명이 들렸다.
  이어 사람들이 몰려드는 기척과 몸이 떠메어져가는 느낌,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영
희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역겨운 위세척 과정의 끝머리쯤이었다.  그러나 
영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잃고 있는 시늉을 냈다.  아직은 깨어날 때가 아니었다.  
목표로 삼고 있는 강억만이 병실에 나타날 때까지 영희는 사경을 헤매는 가여운 순정의 여
인이어야 했다.
  "이상하다, 이만하면 깨어날 때가 됐는데..."
  응급 처지를 마친 뒤 영희의 팔에 링거액을 찔러넣던 중년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
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다리던 강억만이 병실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반시간쯤 뒤였다.   
민양만 남아 병실이 조용해졌는가 싶더니 복도 쪽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나고 누군가 황급
히 뛰어들었다.
  "진마담, 아니 영희, 영희. 이게 무슨 짓이야? 흐윽, 이게 무슨 짓이냐구?"
  그러면서 얼굴을 부비며 우는 억만은 마치 처음으로 주역을 맡은  삼류 배우 같았다.  과
잉 연기로는 그를 찾아온 듯한 민양도 지지 않았다.
  "강사장, 보셨죠? 이제 어쩌실 거예요? 착하고 예쁜 우리 언니를 이꼴로 만들어놓고 혼자 
행복해지실 것 같아요? 오양, 그 쌍년 어디 있어요?"
  "아니라니까, 아침에 헤어진 뒤로 콧배기도 못 봤어. 지가 꼬리를 치니까 그냥  재미로 한
번 데리고 잔 걸 가지고 진마담이 오해한 거야. 내가 왜 영희를 두고-흐윽..."
  둘이서 그렇게 서투른 연기 대결 같은  입씨름을 벌이는데 억만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뒤쫓아온 듯한 주인 마담이 다시 병실로 뛰어들었다.  연기라면 주인 마담이 더욱 일품이었
다.  다짜고짜 억만의 멱살을 거머쥐었는지  억만이 캑캑거리는 소리에 이어 거품  문 주인 
마담의 악다구니가 들렸다.
  "이눔, 강억만이 너 이럴 수 있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춘, 파리 목숨같이  끊어놔도 되
는 거야? 얘 살려내. 친동기보다 아끼던 애야. 얘 죽으면 나도 그냥 못 있어."
  그렇게 영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가 하면,
 "얘 x이 어때서? 그거 좋다고 밤늦으로 빨고 핥고 할 때는 언제고, 오양 그년 거기 금테라
도 둘렀던?..."
으로 시작되는 듣기 민망한 쌍욕도 있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억만의 이름을 가지고 시비
를 벌일 때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저걸 새끼라고 내지른 애미가 불쌍하다.  뭐 억만이? 억만금 벌라고 억만이? 예라, 이 나
쁜 놈아, 지옥에나 억만 번 가거라. 매나 억만 대 맞고 뒈져라."
  거기다가 민양이 다시 의리를 발휘해 중구난방으로 끼여드니 병실은 한동안 여자들의  악
다구니 소리로 시끄러웠다.  간호원이 달려오고 의사가 달려왔으나 소용없었다.  눈을 뜨고 
보지는 못해도 마음 약한 억만은 반나마 넋이  빠져 주인 마담에게 멱살을 내맡긴 채 숨만 
헉헉거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저 인간 너무 몰아대서는 안 되는데, 한편으로는 슬슬 추켜올
려 좋은 답을 끌어내야 하는데... 이쯤에서 눈을 뜨고  말릴까-영희는 은근히 조바심이 났으
나 결말도 보기 전에 털고 일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자들의 악다구니를 못 견딘 억만
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빙모님, 아니 처형. 제가 변심한 게 아니라니까요.  영희 깨어나면 결혼하면 되지 않습니
까? 결혼할게요.  까짓 거, 여기서 날 잡읍시다."
  그러자 먼저 주인 마담이 그 말에 매달리듯 다짐했다.
  "정말이야? 너 정말로 우리 진마담하고 결혼할 거지?  나중에  오리발 내밀면 너는 죽어.  
나 이래봬도 야쿠자 동네 발 넓은 여자야.  명동 신상사하고도 오라버님 동생하는 사이라구.  
너 같은거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도 있어."
  그 길로 보아 처음부터 과장된 듯하던  그녀의 악다구니에는 그런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음에 분명했다.  민양도 잽싸게 그 결혼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제게 형부가 되겠네요.  형부, 앞으로는 제발  맘 변하지 말아요.  우리 
언니 제발 행복하게 해주세요."
  "물론이지.  그러고말고."
  억만이 그렇게 넙죽 받자 병실의 악다구니는 거짓말처럼 끝났다.  주인 마담과 민양은 할 
일이 끝냈다는 듯 다시 저녁 장사로 돌아가고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던 억만도 무슨 일인가
로 병실을 나갔다.  그러자 처음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간호원이 가만히 영희의 어
깨를 찔렀다.
  "이제 그만 눈뜨세요.  깨어나신 거 알고 있어요.  일 다 잘 끝났잖아요?" 
  
    제4장
  돌아가는 길
  "이게 누구야? 거, 저, 인철이 아냐?"
  책방 아저씨는 금세 인철을 알아보았다.  열아홉에서 스물하나까지의  2년은 외모가 크게 
변하는 시기가 아니어서 그런 듯했다.  다시 찾아온게 2년 전 인철에게 품었던 의심을 풀어
주었는지 그의 표정에도 경계하거나 못마땅해하는 그늘은 없었다.
  "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저. 그럭저럭... 그래, 넌 그 동안 어디 있었어?"
  "부산에 있었습니다.  이집 저집... 하지만 이제 떠나게 돼서."
  인철은 그러면서 들고 있던 책 보따리를 슬며시 좌판 위에  놓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거
기까지 오는데도 어깨가 뻐근할 정도의 무게였다.  그걸 보자  헌책방 주인으로서의 근성이 
발동했는지 책방 아저씨가 물었다.
  "근데, 그건 뭐냐? 책이냐?"
  "네, 실은 그 때문에 왔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익숙한 솜씨로 보따리를 펴 한눈에 보기 좋게 책을 펼쳤다. 고등학교 교
과서 대부분과 낡은 기초 참고서 여남은 권이었다.
  "뭐야? 또 고등학교 책들이구나.  어떻게 된 거냐?"
  "이젠 필요없어져서요.  들고 다니자니 짐만 되고..."
  "그럼 그뒤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이제 정말로 집어치우는 거냐?"
  "그게 아니라 이 책들이 필요없어졌단  말입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대입  준비를 해야 
되니까요."
  "하지만 예비 시험이 아직 남았잖아? 올해 새로 시행되는 시험이라 모두 긴장들 하는  모
양이던데.  그걸 치르자면 이 책들 모두 필요한 거 아니냐?"
  주로 입학 시험 참고서를  취급하다 보니 입시  제도는 누구보다 밝은  책방 아저씨였다.  
인철에게는 그게 자랑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성취를 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건 검정고시 준비할 때 쓰던 책들입니다.  괜찮은 대학엘  가려면 아직까지 이런 책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되죠."
  "오호, 그래? 그럼 결국 해냈군.  하기야 책은 지독하게  읽어대더니... 모든 책은 서로 통
하나보지.  어째든 축하한다.  보자아-"
  그러면서 책방 아저씨는 인철이 싸가지고 간 책들을 뒤적였다.  책값을 가늠하는 것 같았
다.
  "꼭 돈 때문에 가져온 건 아닙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들고 다니자니 짐되고 해서..."
  "아까 떠난다고 한 것 같은데 어딜 가려고?"
  "집으로 돌아가려구요.  남은 두 달은 본고사 준비에 힘을 보아야지요."
  "집? 집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나를 공부시켜줄 집이 없었다는 뜻이죠.  하지만 시험 때까지 두 달 잠재우고 먹여줄 집
은 있습니다.  다른 건 내가 다 준비해서 돌아가니까요."
  그때까지도 인철은 집이 돌내골에 있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슨 치기에선지 발신인 주
소를 쓰지 않아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적어도 석 달에 한 번은 안부  편지를 내온 그였다.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불현듯 집과 식구들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책방 아저씨는 그런 인철
의 감상에는 무관심했다.  어느새 책방 주인으로 돌아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몇 달 데리고 있었던 정으로 여비를 주는 셈 치면 모를까, 돈 된 만한 책은  아니군.  교
과서는 입시 제도 따라 모두 바뀌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무얼 생각했는지 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은 생각이 있지
만 말하기가 망설여진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너 그때 그 책 기억해?"
  "네?"
  인철이 얼른 알아듣지 못해 그렇게 되물었다.  거기서 다시 한번 머뭇거리던 책방 아저씨
가 다시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네가 나가기 전에 사둔 책  말이야.  너를 내보낸 뒤 차분하게  목록을 훑어보니 그렇게 
펄펄 뛸 책들은 아니었어.  거기다가 그 책들 살 때 네 잡비도 좀 넣었다며?"
  "아, 네.  그랬습니다만..."
  그제서야 인철은 책방 아저씨가 말하는 책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들었다.  그 헌책방을 떠
난 뒤의 날들이 하도 힘들고 괴로워선지 그때의 그 강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
기에도 이상하리만치 까맣게 잊고 있던 책들이었다.
  "그 책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데... 찾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경찰서에 갖다 주기에는 
성가시고 해서.  그걸 주면 어떨까? 왠지 모르지만 네가 그 책들에  예사 아닌 애착을 품었
던 걸루 기억되는데."
  그 말을 듣자 인철은 새삼 그 책을 살 때가 떠오르며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동시에 완
고한 반공주의자로서의 책방 주인이 상기되어  은근히 경계심도 일었다.  인철이  반가움을 
내색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은 그 사상이 몹시 궁금합니다.  대학에 가 틈이 나면 일본어도 배우고 한번 훑어보고 
싶습니다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걸 알고 있으면 돼.  그럼 그걸 가져가."
  그러면서 책방 아저씨는 상품 가치가 없어 함부로 쌓아둔 헌 책 더미속에 감춰져 있던 그 
책들을 찾아주었다.  인철로서는 그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에 참으로 묘한 선물을 받은 셈이
었다.  인철이 약재 창고로 돌아오자 등교 준비를 하고 있던 창호가 인철의 책 보따리를 가
리키며 말했다.
  "와 그양 가지고 왔노? 헌책방에서 안 살라 카드나?"
  "아니, 다른 책으로 바꿔 왔다."
  "딴 책으로, 무슨 책?"
  그 무렵 인철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존경 섞인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창호라 등교가 바쁘
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덤벼들어 책 보따리를 펴보려했을 것이다.  창호는 그의 방식대로 그
해 다시 줄만 서고 등록금만 내면 받아주는 신설 대학 야간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일찍 첫강의가 있는지 다섯시도 안 되었는데 서둘러 약재 창고를 빠져나갔다.
  "책은 갔다 와서 봐야겠다.  오늘은 일찍 돌아올 테이 우리 이별주나 한잔 하자.  열시까
지는 여다 돌아와 있거래이."
  인철은 잘됐다 싶어 그 책들을  얼른 구석방으로 가져갔다.  약재 창고  한구석에 판자로 
칸막이를 한 방으로, 인철이 지난 2년 간 창호와 함께 거처로 삼아온 방이었다.  인철이 쓰
던 책상 아래에는 이미 싸둔 인철의 짐이 있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가방이었다.  하나는 
주로 책들이 들어 있는 질긴 천으로 된 작은 가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 옷가지와 자질구
레한 소지품이 든 비닐로 된 큰  여행 가방이었다.  인철은 가져온 책들을 헌  옷가지 속에 
넣고, 다시 한번 가방을 여몄다.  잘못하여 부실한 가방이 터져도 그 책들이 그대로 쏟아지
는 일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장씨가 뜻밖의 전갈을 가지고  인철을 찾아온 것은 인철이 
크고 작은 두개의 가방을 제자리에 밀어넣고 있을 때였다.
  "인철이 너 여기 있었구나.  쪼매 있다가 여섯시 진료 끝나거든 막바로 원장실에  가봐라.  
원장님이 널로 보자 하신다."
  "원장님이 절요?"
  워낙 없었던 일이라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장씨 아저씨의 말을 되풀이해 물었다.  2년 넘
게 한 집에 있어도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먼빛으로만 올려보아온 원장님이었다.
  "나쁜 일은 아인 갑드라.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다가 여섯시  되거든 바로 원장실로 가거
라.  아이, 함부래(미리) 진료실에 가 있다가 진찰 끝나는 대로 따라나서거래이."
  인철이 그 부름을 걱정하는 걸로 안 장씨가 그렇게 안심시켰다.  창호에게만 귀띔하고 무
단으로 일주일이나 약재 창고를 비웠다가  돌아왔을때만 해도 장씨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창호의 허풍으로 무언가 어려운 시험에 인철이 합격했으며,  또 곧 그곳을 떠난다는 
것이 갑작스런 도회 편입으로 긴장해 까다롭고 심술궂어진 그 시골 출신 중늙은이의 심사를 
풀어준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죠."
  전에 없던 일이라 잠시 의아했던 인철이었으나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  원장이 이 
집에서 아무리 놓은 사람이고 나는 구석진 약재 창고에서 약초나 써는 하찮은 일이나 했다
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밑에서 2년 간이나 일하던 사람이 아닌가.   이제 떠난다니 몇 마
디 객쩍은 덕담이라도 하려는 것이겠지, 인철은 원장이 부른 뜻을 그쯤으로 헤아렸다.  그런
데 그날 원장실로 간 인철은 책방 아저씨에 이어 원장으로부터도 전혀 예상 못 한 큰  선물
을 받았다.
  "약재 창고 이군입니다."
  인철이 시간을 맞추어 원장실로 가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황서사가 인철을 방안으로 밀어
넣으며 그렇게 큰소리로 알렸다.  하루종일 진료에 시달린 머리를 쉬게 하고 있는지 회전의
자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원장은  그 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칼에 희고 둥근 얼굴이라 마치 참선중인 고승 같았다.
  "약재 창고에 밤마다 늦도록 불이 켜져 있더니 자네였구먼."
  이윽고 눈을 뜬 원장이 그렇게 말했다.  그 역시 인철에게는 무슨 선문답처럼 들렸다.  무
어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 우물거리는데 원장이 다시 말했다.
  "손목을 내놔봐."
  인철이 얼떨떨떨한 기분으로 손목을 내밀자 원장이 가만히 맥을 짚었다.  눈을 지그시 감
는 게 공을 들이는 진맥 같았다.
  "상만큼 좋은 근골을 타고났군.  오장육부가 고루 튼튼해.  오랜 객지 생활로 허해진 기나 
보하면 되겠어."
  다시 눈을 뜬 원장이 그렇게 느릿느릿 말하면서 책상 위에 비치되어 있는 붓을 들어 처방
전에 무언가를 썼다.  그리고 인철에게 슬며시 종이를 밀면서 남 얘기하듯 말했다.
  "내려가다 이걸 조제실에 주고 약 한 재 지어가.  내 집에 있는 동안 보살펴주지 못한 무
심함이 마음에 걸리는군."
  그래놓고 다시 느릿느릿 서랍을 열더니 미리 준비한 것인 듯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살이가 넉넉하다면 그 나이에 왜  어렵게 객지를 떠돌며 독학을 했겠나.   성의로 몇 푼 
넣었으니 유용하게 쓰게."
  내미는 봉투를 보니 꽤나 두툼했다.  두 가지 모두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라 인철
은 고맙기에 앞서 당황스러웠다.  평소의 과묵함을 가진 자의 오만이나 비정함 정도로만 이
해해온 탓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어라 고마움의 뜻을 드러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원장이 빙글, 의자를 돌려 창밖을 향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가봐.  조제실 아이들 퇴근하기 전에."
  크고 느닷없는 감동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그때껏 막연한 감동으로 굳어 있던 인철은 볼
일 다 끝났다는 듯한 원장의 태도를 보고서야 겨우 몇 마디 할말을 찾아냈다.
  "고맙습니다.  베푸신 후의 잊지 않겠습니다."
  인철은 마치 틈을 타서 도망치는 사람의 변형처럼 그렇게 말하고 꾸벅 절을 한 뒤 원장실
을 나왔다.  원장이 준 봉투 안에는 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 동안 인철은 먹고 자는 것 외
에 월급 삼천 원을 받는 것도 좋은 대우라고 만족해왔다.   그걸로 책값과 학원비를 대고도 
2년 동안에 따로 육천 원을 보아 입시 대까지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그에게 한꺼번에 주어진 
만 원은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가 원장이 써준 화제도 적잖아 인철을 감격시
켰다.  조제실로 내려간 인철이 장군에게  원장이 써준 화제를 넘기자 그새  풍월을 읊게된 
장군이 부러운 듯 말했다.
  "우와-참말로 놀랠 놀자네.  이거는 보약이라도 특A급이라.  보자,  녹용만 해도 두 냥이
나 드가네.  내 여기 온지 하마 5년이 다돼가지만 원장님이 직원 보약 지어주는 거는 또 첨 
본다.  니 어디를 그리 좋게 봤시꼬?"
  그러면서 전에 없이 정을 베풀어 지어주는 약이 스무 첩이나 되었다.  2년이나 약재 창고
에서 일한 덕분에 한약재의 귀천 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된 인철에게도 흔해빠진 보약 같지
는 않았다.  그로부터 한 20년 뒤 인철은 다시 그 한의원을 찾아가다 큰 빌딩이 들어섯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옛 건물들이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 걸 보고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
낀 적이 있다.  건물뿐만 아니라  그때 번성한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간 
뒤였다.  원장은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상처로 도합 세 번 결혼했는데, 그 때문에  복잡해
진 가계가 그같이 급속하게 쇠락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원장이 일흔여덟으로 세상을 떠
났을 때 아직 마흔둘인 젊은 후처와 배다른 여러 자식들의  상속 분쟁은 치열했다.  그리하
여 한 때 작은 그룹을 형성했을 정도로  여러 개의 기업체를 거느렸던 그 집안을 조각조각 
나누고 사람들도 서로 간 곳을 알 수 없게 흩어져버렸다는 게 인철이 들은 쓸쓸한 후문이었
다.
  저녁을 먹은 뒤 인철은 특별히 작별의  의식을 치른다는 기분도 없이 거리를  어슬렁거렸
다.  지난 3년 그곳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는  대강 작별 이사를 나눈 셈이었다.  낮에 
헌 책방을 찾은 데도 얼마간은 그런 의미가  있었고 밤 깊어 돌아올 창호와의 이별주는 그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원래 부산에는 인철이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철에게 가장 위로와 격려가 된 것은 용기와  재걸이었다.  둘 다 그곳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국민학교  동창들로, 용기와는 졸업 뒤에
도 줄곧 편지를 주고받아왔고 재걸이도 인철이가 어릴 적 친구로 특별히 꼽는 동아리 대여
섯 명에 들어있는 아이였다.  고생스러웠던 첫 일 년 인철은  그 아이들과 거리에서 맞닥드
릴까 겁냈다.  아무런 희망 없이 도회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한의원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스스로 찾아가 그
들과 어울렸고 그들도 반갑게 인철을 맞아들였다.  인철에게는 부모의  보호 아래 순조롭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  아이들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 아이들에게는  인철의 고단한 
삶이 오히려 신서하고 모험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철은 그 아이들을 통해 명문 
고교의 진학 지도를 간접적으로 전수받았고, 그들은 이미 성년처럼  살고 있는 인철을 통해 
자신의 평온한 삶 속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일탈과 긴장을  아울러 맛보았다.  그러다가 이듬
해 용기가 먼저 대학에 진학하고 그해 시험에 낙방해 재수를 하던 재걸이마저 그 여름 서울
로 가버리자 인철은 다시 혼자 남겨졌다.  하지만 그 기간 다져진 그들의 우정은 헤어진 뒤
에도 끊임없는 격려와 입시 정보의  제공이란 형태로 이어졌다.  재걸이 다시  용기가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뒤에도 그 같은 우정은 계속되었다.  지금 인철이  자신의 실력에 대한 아
무런 검증도 없이 진학은 당연히 그들이 먼저 가 있는 대학으로 작정하고 있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런 그들이 주입한 강박관념에 가까웠다.  걷다 보니  무엇에 이끌렸는지 발길
은 중앙동을 거쳐 용두산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이 부산에서 맞은  첫 아침 그가 들
렀던 곳이라는 게 무의식중에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저문 공원 가로등 아래서 
도시의 야경으 보고 있으려니 문득 3년 전 처음 그 거리에 내릴 때의 막막함이 되살아나고, 
그때 자신을 그리로 이끌었던 박달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헤어진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
만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길동무였다.  철저하게 조화되지 못한 그이 얼굴에 이어 그
와 보낸 야릇한 감동의 하룻밤, 하루  낮이 기억속에 선명히 되살아났다.  그러다가 그와의 
마지막 약속에 기억이 미치자 인철은 새삼 가슴이 뜨끔했다.
  '그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달 첫  일요일 12시에 그는 정말 사십 계단 밑으로 
나왔을까.'
  그때 한창 어렵게 거리를 떠돌고 있을 때라 인철은 까맣게  잊고 그 약속을 어겼지만, 기
억났더라도 약속 장소로 나갔을 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그 같은 배신이 미안해졌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감상이었다.  그 기묘한 길동무는 어
차피 야간 열차의 차창에 비치는 창백한 얼굴들처럼 인생에서 수없이 스쳐가고 다시 보지못
할 그런 얼굴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돌아간다.  내 또래가 가치 있는  자기 형성을 위해 마지막 노력을 쏟고 있는 
대학으로, 정예한 그들의 꿈으로.  주변인, 일탈자로서의 삶에 더 맛들이지 말아라.  그 가치 
왜곡이나 과장과 자기 미화에 더는 귀기울이지 말아라.  아직은 잘  모르지만 네가 가야 할 
길은 밝고 정대해야 하며 더욱이 너는 그 선두에 있어야 한다.'
  인철은 애써 되살린 의욕을 북돋으며 감상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러
는 동안에도 상처처럼 되살아나는 것은 이번에 무사히 진학한다 해도 또래보다 2년이나 늦
어버린 학년이었다. 스물하나의 나이를 나는 아직도 한 주변인  또는 일탈자로 넘기고 있구
나... 인철이 자신도 모르게 공원 한구석에 가스등을 밝히고 있는 포장마차 쪽으로 갔다.  우
선은 상당히 먼 길을 걸은 데다 공원까지 상당한 오르막을 오른 끝이라 달았던 몸이 식으면
서 느끼게 된 으스스함 탓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그리고 이끈 것은 의식 표면이 스스로
를 격려하면 격려할수록 내면으로는 더  짙어가는 실패의 예감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인철은 계절이 초겨울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허옇게 김이 서리는 어묵 국물과 양념으로 버무
린 삶은 돼지 껍질으 안주로 대폿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방금 저녁 식사를 하고 온 사람 
같지 않게 대포 석 잔을 거푸 마시자 머릿속이 천천히  술기운으로 젖어왔다.  그러자 그를 
음울하게 한 막연한 실패의 예감에 또 다른 어두운 감상이  더해졌다.  내일이면 그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게 까닭 모를 비감으로 다가든 것이었다.  따져보면  그곳을 떠나는 걸 인철
이 특별히 슬퍼하거나 미련을 가질 일은 그리 없었다.  용기나  재걸이와 치기에 들떠 시시
껄렁한 어른들의 타락을 흉내내며 거리를 쏘다닌  몇몇 밤을 빼면 고단하고 암담하기  짝이 
없던 나날이었다.
  인철은 뒷날까지도 '노역의 낮'과 '슬픔의 밤'이란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 시절을  떠올렸
다.  열여덟에서 스물까지, 소년기에서 막 청년기로  접어드는 그 나이에 기대되는 가장 큰 
축복은 아름다운 소녀와의 만남일 것이다.  그러나 인철에게는 그 부분이 그대로 비어 있었
다.  다른 부분의 결핍이 그쪽으로  눈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을뿐더러 그의  애매한 신분도 
그런 추구를 어렵게 했다.  소년  소녀의 만남은 또래 집단  안에서 가장 쉽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또래 집단은 대개 학생이란 신분에 바탕한다.  소년  소녀들은 그 현대적 신
분에서 서로간의 동질성을 확인한 뒤에야 또래로서 어울린다.  인철은 이미 중등 교육이 대
중화된 시대에 학생 신분을 잃음으로써 대부분이 거기에 속한 또래의 소녀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처럼 기른 머리와 나날의 일에 편리하게  입은 옷만으로도 단발머리 
여고생들에게는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길을 묻는 따위, 다른 필요에 의해 길을 막
아섰을 때조차도 그녀들의 표정은 경계로 굳어지기 일쑤였다. 
  하기는 인철에게도 또래로서의 관심과 호감을 보여주는  소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헌책방에 있을 때 드나들던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돕던 식당 주인의 여동생이나 한의원 부근
에 있던 미장원의 보조 미용사 같은 아가씨들이 그랬는데, 이번에는 인철의 별난 유적의 기
분이 그로 하여금 그녀들을 경원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나는 비록 너희들속으로 떨어졌지
만 너희와는 달라.  나는 곧 나의 성채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양쪽 모두 인철의 예민한 자
존심에 상처를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되풀이되는 그녀들과의 접촉으로 깊이 상처
입은 인철의 자존심은 마침내 그녀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스스로 닫아걸게 만들었다.  정히 
외롭거든 손이 아니라 앞발을 내밀어라.
  인철의 그 같은 일종의 자폐 증상은 명혜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자신의 편력지로 수
많은 도시들 중에 부산을 고를 때 그의 의식 밑바닥에는 틀림없이 명혜를 향한 그리움과 열
정이 깔려 있었다.  첫 일 년 애써 명혜를 찾아보지  않은 것도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소년다
운 수치감 때문이라는 편이 옳았다.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마음속의 소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순진한 결기였다.  하지만 그토록 오래, 열렬히 그리워해왔으면서도, 그리고 한 도시
에 살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찾아가볼 수 있으면서도 인철이 끝내 명혜를 찾아가보지 못
한 것은 아무래도 앞서 말한 그 자폐 증상의 일부로 해석하는 길밖에 없다.  아니, 어떤  면
에서는 오히려 명혜로 말미암아 그  자폐 증상이 굳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인철은 
떠돌이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명혜를 찾아가는 대
담한 상상에 빠져들고 했다.  특히 공부에 제법 자신을 얻게 되면서부터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보았다.  그때만 해도 명혜는 다른 여고생들과는 구분지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막바지 입시 준비에 내몰리던 용기와 재걸이 과외 수업을 빼먹고 
인철을 찾아와 셋은 밤늦도록 남포동 뒷골목을 돌며 술로 일상에서의 일탈을 즐겼다.  그러
다가 통금이 다돼서야 재걸의 하숙방으로 몰려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다시 소주잔을 나누던 
중에 용기가 불쑥 말했다.
  "명혜 그 가시나네 학교 말이라, 다음  토요일에 무용 발표횐가 뭔가 한다 카드라.   원래 
그 방면으로 유명한 딴따라 학교지만 이번에는 장난이 아닌 갑데.  공연 장소가 딴 데도 아
이고 바로 항도극장이라.  극장 중에도 일류 개봉관이니 세만 해도 얼매나 비싸겠노?"
  그래놓고 은근히 인철의 눈치를 살폈다.   명혜란 이름 하나만으로 그 동안에  마신 술의 
취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으나 인철은 짐짓 취한 척했다.  명혜를  향한 인철의 감정을 짐
작하고 있는 용기의 말이라 오히려 관심을 드러내기가 쑥스러웠다.  인철이  못 들은 척 딴
전을 피우자 용기가 이래도냐는 듯이 화제의 중심을 명혜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명혜 그 가스나 말이라. 그기 바로 얼반(거의) 주인공인 모양이라.  두 시간 공연
에 삼십 분이나 나와 춤춘다 카더라.  그것도 우리는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발레라.  [백조의 
호수]에서 여기저기 빼내 모은 긴갑던데.  가스나 그거 제법이제?"
  그러자 재걸이가 눈치 없이 말을 받았다.
  "그 가스나 춤 잘추는 거 인제 알았나?  국민학교 때도 춤 카믄 김명혜 아이래나? 학예회
마다 거장을 추던 거(혼자 설쳐대던 거) 늘 봐와놓고."
  "국민학교 학예회사 인물 빤하고 집에 돈푼 있으믄 씨게(시켜)주든 기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 따우 장난이 아이더라 카이.  프로그람에 나온 거로는 솔로가 두 번이나 있더라꼬.  뭐라 
카드라? 그래, '오데트의 솔로'하고 '오딜의 솔로'라 카던데 고등학생이 그 두 개를 한꺼번에 
하는 거는 여삿일(예삿일)이 아닌 모양이더라꼬.  거다가 그 프로그람 뒤에 붙은 명혜 그 가
스나 수상 경력이 요란뻑적지근하데.  하마 일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대회에 입상을 했고, 이
번 여름에는 뭐라 카드라, 무슨 전국 콩쿠르에 일등가지 했다꼬 나와 있더라 카이.  우리한
테는 맨날 그 가스나라도 저그들끼리는 알아주고, 또 저그 학교서는 대표 선순 갑더라."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제법 격식을  갖춰 만든 무용  발표의 프로그램 한  장을 내밀었다.  
인철을 위해 구해온 것임에 틀림없건만 굳이 티는 내지 않았다.   처음 그 프로그램을 보고 
용기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란 걸 확인한 인철은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거리가 자신과 명혜 사이에 끼여든 느낌 때문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너는 그
리도 멀리 가버렸구나.  그날 인철이  아직 까까머리인 용기와 재걸이가지 토하게  할 만큼 
술을 마셔댄 것은 아마도 거기서 비롯된 감상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튿날 술이 깨면서부터 인철의 마음은 달라졌다.  명혜가 또 한걸음 떨어진 듯한 
느낌이 어떤 다급함으로 다가든 것이었다.  더 멀어지기 전에 이제는  다시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기 전에 내 마음을 전해야  한다.  지난 다섯 해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알려야 한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조금은 잘못된  것 같기도 했지만 인철은 
명혜와 만나는 날을 바로 그 무용 발표회 날로 잡았다.
  중요 배역이라면 공연 뒤가 더 바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인철은 그때가 여러 사람이 
모이는 날이라 자신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그렇게  날을 
잡은 것이었다.  발표회가 있던 날 장씨 아저씨에게 하루를 얻은  인철은 아침부터 가슴 설
레며 명혜를 만날 준비를 했다.  구두를  새로 사고 양복을 빌려 입고 이발을  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가지 할 수 있는 한의 치장을 했다.  그런 다음 영화에서 본 대로 장미 한 다발
을 사들고 발표회가 있는 극장으로 갔다.  극장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인철은 오직 한 가
지, 이제 곧 명혜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괴로운 상상이 끼여들지 않는 것
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주체 못 할 흥분이었고 동시에 달콤한  도취이기도 했다.  설령 자신
의 마음이 명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오래 품어온 연모를 그녀에게 전하는 것만으
로 그는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만치 극장이 보이는 큰길로 들어서는 순간 인철은 갑자기 정수리에  얼음물이라
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그때까지의 흥분과 도취에서 깨어났다.  무엇보다도  극장 주변을 뒤
덮다시피 한 교복의 물결 때문이었다.  부산의 모든 남녀 고등학생들이 모여든 것이 아닌가 
싶게 여러 종류의 교복이 뒤섞여 있었다.  이미 동복을 입기  시작한 철이라 교복의 대부분
은 검은 색조였으나 인철에게는 그들이 한 무리의  백조처럼 보였다.  그러자 아마도 [백조
의 호수]에서 비롯된 연상 탓이었겠지만 느닷없는 자각이 마음 깊은 곳의 상처를 할퀴며 탄
식이 되어 흘러나왔다.
  '아직도 나는 미운 오리 새기일 뿐이다.  이곳은 내가 올 곳이 아니다...'
  인철은 갑자기 몸이 굳은 사람처럼  멈춰서서 멍하니 극장 주변을 살폈다.   하기는 다른 
종류의 복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인철의 시각이 지나치에 그쪽으로 쏠린 탓에 과
장되게 느껴서 그렇지 극장 주변에는 오히려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들도 인철이 섞여들기에는 여러 가지 별난 징표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은 출연자의 학부모들인 듯한 중년 남녀들로 그들의 격식을 갖춘 정장과 지
긋한 태도는 인철이 끼여들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인철보다 몇 살 위로 보이는 청년들도 몇 
있었지만 그들도 금세 자신과는 구별되었다.  일과 눈치에 찌들지 않은 밝은 표정과 인철의 
빌린 옷과는 맵시가 다를 수밖에 없는 양복은 그들이 대학생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
도록 했다.  거기다가 인철을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한 것은 넘쳐나는 꽃다발들이었다.  인철
에게는 고심 끝의 선택이 그들에게는 상식이었는지 관람객의 절반은 꽃다발을 든 것같았다.  
그 중에는 명혜를 위한  것도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자 인철은갑자기 자신을  잃고 말았다.  
'꽃다발을 줄 수 있는 사람도 따로 있구나.  내게는 아직 때가 아니다.'
  이윽고 인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연히 돌아섰다.  어쩌면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소녀
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뒤 2년 남짓 인철은 그 또래에게는 
거짓말로 들릴 만큼 자신의 내면으로만 움츠러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폐 상태는  그곳
에서의 추억을 삭막하게 만들었다.
  "총각이 초저녁부터 어북(제법) 마시네.  차라리 대포로 하지 말고 주전자로 하지, 그래."
  인철이 네번째로 대폿잔을 청하자 멍게를 장만하던 포장마차 주인이  그렇게 권했다.  그
제서야 인철은 실없이 취해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에 가까웠다.  인철은 용두산공원을 내려와 한의원으로 돌아갔다.  아직 창호
가 돌아올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없이  거리를 헤매이기도 피로하고 지루해서였다.   그런데 
약재 창고 문을 여니 창호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니 어디 갔드노? 나는 강의까지 두 시간 땡땡이치고 니하고 이별주 한잔 할라꼬  벌씨로 
와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품이 제딴은 그날  저녁의 이별주에 단단히 의미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창호는 인철이 이제 이렇게 돌아갈 수 있게 해준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년 남짓 참으로 좋은 동료였다.  동갑내기인 데다, 하는 일도 꿈꾸는 것도 비슷해 경
쟁심이나 시기가 끼여들 수도 있었으나, 인철은 한번도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
다.
  인철이 스스로 너무 영악스럽지 않았는가를 반문해볼 모든 종류의 다툼에서 창호는  언제
나 양보하는 편이었다.  인철도 그런 창호를 좋아했다.  하지만 용기나 재걸이처럼 정신적인 
친구로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단순함과 지나친 무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평범을 지향했고 거기에 이르면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특히 지
식과 정신적 성취 쪽에는 거의 무관심했는데  그게 그쪽으로는 거의 탐욕스런 인철에게  늘 
불만스러웠다.  그대의 인철에게는 정신적인 성장에  아무런 자극이나 격려가 되지  못하면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인철은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으나 그 이별의 
의식은 영원히 우정을 이어갈 친구 사이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직장 동료 혹은  끈끈한 
정으로만 얽힌 피붙이들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거의 12까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추
상적인 격려와 축복을 주고받다가 함께 약재 창고로 돌아와 두 사람의 마지막 밤을 취기 어
린 숙면으로 보냈다.  
  
  이튿날 자명종 소리에 깨어난 인철은 잠든 창호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약재 창고를 빠져
나왔다.  6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아직 새벽이었다.  인철은 한참이나 새벽 추위에 떤 뒤에야 
빈 택시 한 대를 만나 본역으로 향했다.  이미 확인해둔 대로 안광으로 가는 중앙선 열차는 
7시 반에 있었다.  가까운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쓰린 속을 달랜 인철은 떠나는 자의 감회에 
젖을 겨를도 없이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숙취로 흐리멍덩한 에닐곱 시간이었다.  
지난 3년 간 인철의 마음 깊은 곳에 억눌려 있는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에 대한 그리움이 과
장된 감회로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안광역에 내린 뒤였다.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3시 
가까이 되어서야 안광에 도착한 인철은 늦은 점심을 때우기 위해 국숫집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서 그곳 사람들이 '국시'라고 부르는, 콩가루 섞은 반죽을  밀어 발이 실낱같게 썬 칼국
수와 좁쌀 섞인 밥 한 공기를 받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질 만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느꼈다.
  "이게 국시라 떡가래라? 국시 발이 똑 손가락만하다.   대국년인들 이걸 어예 음식이라고 
먹을로?"
  솜씨가 서툴러 칼국수를 굵게 썬 누나를 나무라던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어 솜씨
를 자부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반죽을 얇게 밀어 잘게 썰믄 굵기가 미영(무명) 오리(올) 같으이라.   그만은 안 돼도 이
만은 돼야 국시 소리를 듣제."
  그러자 어머니와 관련된 온갖 소리와 색깔과 냄새와 맛이 일시에 되살아나며 인철을 갑자
기 급하게 만들었다.  원래 인철은 점심을 먹은 뒤 안광에서  느긋이 쉬다가 돌내골로 가는 
4시 반 막차를 탈 작정이었다.  서둘러봤자 명양이나 영덕 가는 버스를 타고 월전이나 방천
에 내려 돌내골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뿐인데 기껏해야 한 시간을 앞당길 정도였다.  그러나 
한번 불지펴진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그 한 시간 정도의 더딤조차 못 견딜 것으로 만들었
다.
  형도 옥경이도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렸다가는 다시  못 보게 될 사람들처럼 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 바람에 인철은 들이마시듯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이제는 합동 정류장으로 이
름을 바꾼 통일역으로 달려갔다.  합동 버스 정류장에는 마침 출발하는 명양행 버스가 있었
다.  인철은 하늘의 도움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 버스에 올라탔으나 실은  그게 돌내골까지 
백이십릿길을 헛걸음질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돌내골행인 경우에는 누군가 고향  사람이 
타고 있어 어머니와 형이 이미  그곳을 떠났음을 일러주었을 것이다.  버스에  오르고 나니 
이제 그리움은 다시 만날 벅찬 감회로 바뀌었다.  인철로서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늦었지만 
나름대로는 뭔가를 이루고 돌아가는 길이라 평범한 귀향보다 감회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와 함께 자신의 앞날과는 여전히 깊은 연관을  지닌 일가의 흥망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어머님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형님은, 옥경이는... 그리고 개간지는  어떻게 됐을까.  
벌써 개간한 지 6년이 되었으니 이제 땅은 많이 비옥해졌을 것이고 생산도 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소작료만 받아도 우리 식구들이 살만큼은 될지 모르지.  형님도 그리 되면 마음을 
잡았을는지 모른다. 안광의 건달들과는 손을  끊고 건강하고 성실한 농부로 돌아와  있겠지.  
옥경이도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떠날 때 돌내골에 중학교가 생긴단 말이 있었으니 
형편이 어려워도 거기는 보내겠지.'
  인철은 모든 궁금함을 자신에게 유리한 짐작으로만 채워나가면서 차가 빨리 방천에  닿기
만을 기다렸다.  마음이 급해지니 자리가 나도 앉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짖지 않는다더니 그날이 그랬다.  아무리 문중이 해체되고  아는 사람들이 적어졌다지
만 진안쯤에서는 인철에게 가족들의 소식을 알려줄 사람이 탈 만한데도 그날은 그렇지가 못
했다.  그 바람에 4시 반쯤 방천에  내렸을 때까지도 인철은 가족들이 이미  돌내골을 떠난 
걸 알지 못했다.  
  11월 중순인 데다 사방 높은 산으로 박힌 산골이어서 그런지 벌써 해는 서산으로 뉘엿했
다.  그러나 인철은 보름 전과는 달리 서글픈 감회가 별로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떠돌이
가 아니라 뚜렷하고도 달성이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객이었다.  돌내
골로 들어가는 길은 3년 전 떠나올  때나 큰 차이가 없었다.  길가 바위  중에 반반한 면이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반공'이나 '방첩' 따위가 흰  페인트로 씌여져 있는 것도 그대로였고, 
도벌과 남벌로 헐벗은 산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보다 잘 다듬어진 신작로 정도일까.  인철은  며칠 전에 자갈을 넣
고 표면을 고른 듯한 그 신작로를 따라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볍다고 들
고 있는 두 개의 여행 가방마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책이  들어 있는 
가방은 보기보다 무거워 인철은 얼마 걷기도 전에 가방을 바꿔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래도 방천에서 두어 마장 되는 솔모롱이(소나무가 난 산모퉁이)를 지난 때까지는 견딜 만했
다.  3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급한 마음이 팔과 어깨에 더해지는  여행 가방의 무게를 덜
어주었다.  먼저 힘이 풀어지는 손아귀를 달래기 위해 짐만 좌우로  바꿔쥐면 걸을 수는 있
었다.  하지만 길을 반쯤 접게 되는 애치기(어린아이 무덤)근처에 이르자 마침내 팔과 어깨
의 버틸 힘도 한계를 드러냈다.  아무리 짐을 좌우로 바꿔들어도  빠지는 듯한 팔과 내려앉
는 어깨는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책이 든 여행 가방은 갈수록 물에 젖어가는 솜짐처럼  무게를 더해왔다.  견디지 못
한 인철은 애기치 곁 작은 바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쉬어가려고 했다.  그때 애치기 곁 다복
솔밭에서 누군가 때이른 갈빗(솔가리)짐을 지고 나왔다.  부지런하기로 이름난 진규 아버지
였다.  가을걷이가 끝나기 바쁘게 겨울 땔감을 장만하기 시작한 듯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로? 인철이 아이라? 니가 어예 여다 혼자 앉았노?"
  그래놓고 인철 곁에 놓인 여행 가방들을 보더니 지레 짐작을 보탰다.
  "보이, 어디 멀리서 오는가 베.  어디서 오는 길고?"
  보지 못한 3년 사이에 진규 아버지는 많이 늙어 있었다.  인철이  떠날 때만 해도 말쑥한 
중년이었는데, 이제는 허옇게 센 머리에 후줄근한 무명 한복이며, 목에 두른 삼베 수건 같은 
것이 흔히 만나는 시골 영감 그대로였다.  무언가 말못할 풍상을 겪은 사람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아저씨. 부산에서 오는 길입니다."
  급히 일어난 인철이 꾸벅 절을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갈빗짐을 인철 곁에 부린 진규 아
버지가 담배 쌈지를 꺼내며 받았다.
  "부산에? 그럼 너어가 부산에 산단 말가? 집에는 다 편하시고?"
  "네?"
  인철이 영문을 몰라 그렇게 물었다.  담배 쌈지에서 잘게 썬  잎담배와 담배를 말기 좋게 
오린 신문지를 꺼내 담배를 말던 진규 아버지가 어리둥절해 인철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값
싼 '새마을'이라도 권련갑을 넣고 다녔는데 그새 막초(재배한 입담배  짜투리를 썬 것) 신세
가 된 게 다시 한번 그가 겪은 예사 아닌 풍상을 짐작하게 했으나 인철에게는 그런 것에 관
심둘 여유가 없었다.
  "그럼 저희 집이 여기 없단 말입니까?"
  "야가 뭔 소리를 하노?  너어 집 떠난  지 하마 재작년이따.  그라믄 니는 그  동안 너어 
집 소식도 모르고 지냈단 말가?"
  그제서야 진규 아버지도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다는 듯 그렇게 되물어놓고 다시 혼잣
말처럼 덧붙였다.
  "그래문, 그때 니가 오입갔다는 말, 그게 참말이었던 모양이쎄."
  "아, 네. 그건..."
  고향 쪽에서는 집을 나간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 인철이 그렇게 우물거리는데 진규 아버
지가 놀랍다는 눈길로 인철을 보며 물음을 쏟아놓았다.
  "그럼 어린 나이에 3년 동안이나 혼자 살았단 말이제?  집이 어디로 갔는지 모릴 만큼 소
식도 끊고..."
  "아닙니다.  편지는 종종 냈습니다."
  "그런데 왜 집이 여다 있는지 어디로 떠났는지도 모르노?"
  "그건 제가 발신인, 아니 보내는 사람 주소를 안 써서..."
  "그참, 그럼 그 동안 부산서는 뭐 했노?"
  "공부했습니다.  대학엘 가려고."
  "공부 참 별나게도 한다.  그래, 대학은 갔나?"
  "이제 갑니다.  봄이면."
  "장키(장하기)는 장타.  어예튼 혼자 나이에 집 나가 그마이 했으이."
  진규 아버지는 그쯤에서 물음을 멈추고 담배를 비벼 끄며 일어났다.
  "개간지에 가봤자 낯선 사람뿌일 께고-우리집에  가자.  장캉(된장하고) 밥캉이지만 내하
고 저녁 먹고 흙봉당이라도 내 집에서 자는 게라.  그래고 내일 두들 올라가서 알아보거라.   
거다는 일가 친척이 쌨으이(많으니) 누군강은  너어 집 소식 알겠제.  그  짐 여기 얹어라."  
그러면서 인철이 말릴 틈도 없이 가방 두개를 갈빗짐 위에 얹었다.  평생을 져온 지게라 그
런지 가방 두 개를 더  얹어도 가뿐히 일어서는 게 인철의  송구스러움을 한결 덜어주었다.  
진규 아버지가 겪었으리라고  짐작되는 풍상의 자취는  진규네 집에서도  진하게 느껴졌다.  
우선 동네 사람들에게 비둘기 같다는 소리를 듣던 남매가 다 집에 없었고, 인철네가 개간을 
시작할 무렵 새로 지어 부러움을 사던 여섯 칸 맞배집은 몇 년 내리 손을 보지 않았는지 폐
가 같았다.  그 중에 방 한 칸만을 빠꼼하게 치워 늙은 내외가 기거하고 있는데, 그 어느 쪽
에도 삶의 활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규 형은 어디 갔어요?"
  진규 아버지의 재촉에 진규 어머니가 이른 저녁상을 보러 간 사이 인철이 슬며시 물어보
았다.  아무리 내 코가 석 자라지만 모르는 척 넘길 수가 없어서였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소문난 진규 아버지가 갑자기 얼굴을 흐리며 담배 쌈지를 찾았다.
  "그놈아 지금 관밥(관청에서 주는 밥)먹고 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철은 짐작이 가면서도 짐짓 못 알아들은 척 물었다.
  "군대 갔다가 그래 됐다.  부산 군수창인가 어디 있으면서 돈 잘 번다꼬 찔락거리고 댕길 
때 하마 알아봤어야 하는 겐데.  그래다가 말뚝 박고 웬 못된 기집아 만나 살림채리디 군수
품을 차띠기로 실어내다가... 나라 물건 손댄 것도 죄가  중한데 탈영가지 했으이 지가 어예 
배기노? 한 7년은 꼽다시 살아야 되는 모양이라."
  "진옥이는요?"
  원래 인철은 그쯤에서 묻기를 그만 두려고 했으나 거기야 무슨 일 있으랴 싶어 진규의 여
동생에 대해 물었다.  인철 또래의 참하고 순박한 시골 아가씨여서  어디 알맞은 곳에 시집
이라도 갔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말똥같이 담배를 말아 허연 연기를 토해내던 진규 
아버지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그 기집아도 집 나간 지 함 일 년이 넘는다.  저 오래비 그 모양 나, 우리 내외 땅 판 돈 
싸들고 천방지방 경황 없이 뛰댕기는 사이 뭐가 잘못된 게라.   떠돌이 영화사 기도하고 눈
이 맞았다는 말도 있고, 깡패 같은 제재소 서기 따라갔다는 말도 있는데, 내사 뭐가 뭔지 모
리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카지마는 요새 같은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이기 무신 일고?"  
"아주 외고 댕기소, 외고 댕겨. 아아들 그래 된 게 뭐 큰 자랑났니껴?"
  그때 상을 들고 들어오던 진규  어머니가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  진규  아버지의 말처럼 
'장캉 밥캉'은 아니었지만 손님에게 후한 촌인심으로 비추어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밥상이
었다.  그러나 고향 특유의 마른 생선을 넣고 맵게 지진 된장이 먹음직스러웠다.
  "야, 된장에 든 마른 가자미  새끼, 참 오랜만에 먹어보네요.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인철은 얼른 화제를 음식으로 돌리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숟가락을 들었다.  그들 내외도 굳
이 이어가고 싶은 화제가 아닌 듯 불행하게 된 남매 얘기는 더  꺼내지 않았다.  진규 아버
지가 공연히 서둘러서인지 저녁상을 물렸는데도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  그새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고 군불을 땐 건넌방에 새로 호청을 간 이불까지 내주었지만 인철이 그대로 잠
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일렀다.  거기다가 이제는 남의 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개간지도 어
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방을 나섰다.
  "왜, 고단할 껜데 어딜 갈라꼬?"
  저녁상을 물린 뒤로 내처 줄담배를 말아 피우고 있던 진규 아버지가 집을 나서는 인철에
게 물었다.
  "개간지 좀 돌아봤으면 해서요."
  "하기사 그거 어예 개간한 땅이로?  보고 싶기도 하겠제.  글치만 객지  사람이 사가지고 
함 딜따보기에도 맘 편치는 않을 께라."
  인철이 개간지 등성이로 올라갔을 때는 제법 어둑어둑했다.  희망에 차 지은 토담집이 기
억 속에서보다 훨씬 작아져서 저만큼 개간지 한 모퉁이에 엎드려  있었다.  하얀 연기가 피
어오르는 게 보기에는 그지없이 평안하고 아늑했다.  처음에 인철은  먼빛으로 개간지를 둘
러보고 바로 두들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거기서 일가들에게 수소문하는 게 궁금한 집 소식
을 조금이라도 빨리 들을 수 있는 길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하얗게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를 보자 느닷없이 아이 같은 상상력이 작동했다.
  '어쩌면 진규 아버지가 나를 놀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개간지
를 팔겠다는 말은 입에도 올린 적이 없는 형이고 어머니였다.  그런데 몇  달도 안 돼 그런 
헐값에 넘기고 떠날 리가 있는가.  아닐 것이다.  저 집에는 아직 형과 어머니가 있고 옥경
이가 있을 것이다.  모두 오붓한 저녁상을 둘러싸고 안자 내  얘기를 하고 있을는지도 모르
지...'
  그러자 상상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확신으로 변했다.  인철은  진규네 집에서 보낸 시간
마저 공연한 지체로 여겨질  만큼 다시 마음이  급해져 개간지를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날 아무 일이 없었으면 인철은 아마도 토담집으로 뛰어들어 어머니와 형을 불러댔을 것이
다.  그런데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갑작스럼 고함 소리가 인철의 어이없는 상상에서 
비롯된 확신을 한꺼번에 흩어버렸다.
  "저런, 저 못된 놈! 거기 서지 못해?"
  성난 어른의 목소리였는데 분명히 형의 것은 아니었다.  이어 와당탕 판자로 짠 현관문이 
열리더니 저녁 어스름 속에 인철 또래의 청년 하나가 신발을 움켜쥐고 뛰어나왔다.  청년은 
충분히 안전 거리를 확보했다 싶은 지점에  이르자 신발을 신으며 현관까지 쫓아나온  중년 
사내를 향해 울부짖듯 소리쳤다.
  "좋아요.  이제 다시는 절 찾을 생각 마세요.  떠날 겁니다.  제 인생입니다!"
  그러고는 큰 산소 모퉁이를 돌아  마을 쪽으로 달려가버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 닫는 중년은 대머리에 훌쩍한 키가 한때는 풍신이 좋다는 말깨나 들었음직한 모습
이었다.  인철은 되도록이면 그 집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길을 돌아 저문 개
간지를 내려왔다.  그 두사람의 관계가 어떠하며 그들 불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
지마나 왠지 인철을 우울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거 인철이제?"
  인철이 막 큰길로 내려셨을 때 누가 등뒤에서 불렀다.  돌아보니 저녁어스름 속에 정식이
가 서 있었다.  개간을 도우며 거기 살 때의 지게목발 친구였다.  함께 꼴도 베러 가고 나무
하러도 다녔는데 성질이 순해  서투른 인철을 많이  도와준 까닭에 기억에  남는 친구였다.  
"정식이구나."
  인철이 그러면서 손을 내밀자 그도 익숙하게 악수를 받았다.
  "먼 일로 진규 형네 집에 갔다가 니 왔다는 말을 들었다.  니 저녁에 머할 꺼로?"  "두들 
잠까나 올라가려고 하는데, 왜?"
  "두들은 내일 올라가고 내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  군대 지원해놓고 기분이 싱숭생숭하던 
차에 잘됐다."
  "군대에?"
  "그래, 니도 내년 봄에는 신체 검사  나올 거로.  원래는 육군 입대 기다렸다가  월남이나 
한번 갔다 올까 캤디, 못 기다리겠더라.  개병대 지원해 다음달이 집결이다.  촌구석에 치박
해 있으믄 뭐 하노? 빨리 군대나 때우고 세상 구경이나 하고 돌아오는 게 안 나을라?"
  그러면서 정식은 자연스럽게 인철을 구판장으로  끌고 갔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술을 
사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인철은 그렇게 은근한 술잔을 주고받을  만큼 정식을 가깝게 느
끼지는 않았으나 매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어 다라 들어갔다.  그런데  그게 개간지의 새 주
인이 된 일가가 빠져 있는 음울한 상황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작 돌아가야 할 집이 
있는 곳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인철이 정식에게 끌려  마을 구판장 토방으로 들어가니 
방안에는 먼저 온 술손님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개간지에서 본 그 청년이었다.  제비원 
소주에 건빵을 안주 삼아 혼자 마시고 있는데 표정은 무언가 중대한 결의를 다지고 있는 사
람 같았다.
  "어, 경문이 니가 초저녁부터 웬일고?"
  호기롭게 인철을 끌던 정식이 그 청년을 보자 주춤하며 알은체를  했다.  서로 말을 트고
는 지내도 정식에게는 어딘가 그 청년을 어려워하는 눈치가 있었다.
  "응, 그럴 일이 있어."
  경문이라 불린 청년은 짧은 말을 건 정식보다 인철을 힐끗 훑어보고는 그렇게 짧게 대답
했다.  나는 내버려두고 너희들 볼일이나 보라는 식이었다.  그런 응대가 별로 낯설지 않은
지 정식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고 거처방이 이어져 있는 장지문을 열었다.
  "보시도.  여다도 소주 한 병 내주소."
  그러다가 인철에게도 낯이 익은 영감 하나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물었다.
  "할매는 어디 가고 할배 혼자 있니껴?"
  "물건 띠러 가디 아직 안 오네.  안주는 뭘 하꼬?"
  영감이 그렇게 대답하며 소주 궤짝에서 소주를 꺼내려는 듯 느릿느릿 일어났다.  무슨 까
닭인지 정식이 눈에 보이게 허세를 부렸다.
  "까자(과자) 뿌시래기말고 쏘주 안주 될 만한 거 뭐 없니껴? 아이, 동네 어디 돼지라도 잡
았다는 집 없디껴?"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니 모리는 거 내가 어예 알겠노?  니 말마따나 까자 뿌시래기 빼고
는 두부 몇 모밖에 없는데 그것도  양임 지렁(양념 간장)이 없어 파이따(안  되겠다).  고기 
안주 먹을라 카믄 장터로 올라가는게 옳을 거로."
  영감은 정식의 허세가 고까운지 그렇게 받았다.  정식이 수그러드는  가책 없이 큰소리쳤
다.
  "안 되믄 그래야 될쎄, 어여튼 꺼낸 소주이 우선 한 병 내노소.  거 뭐시로, 맛동산 한 봉
지하고."
  그렇게 되니 경문이란 청년과 크게 다를 방 없는 술자리가  되었다.  술에 까탈을 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인철은 그런 술을 제일 못 견뎌했다.  원래도  소주는 좋아하지 않는 데다
가 마른 과자를 안주로 먹는 소주는 꼭 뒤탈이 있게  마련이었다.  마지못해 술잔을 받기는 
해도 별로 생각이 없어 첫 잔부터 찔끔거리는데, 두 잔을  거푸 비운 정식이 문득 경문이란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경문이.  한 방에서 이래 따로따로 술판을 벌일 게  아이라 합치자꼬.  서로 못 볼 
사이도 아이고..."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여다는 말이라, 이인철이라고 바로 너의 땅 그전 임자라.  산을 파뒤배 개간지를 만든 명
훈이 형님 동생이라꼬."
  "이인철이? 그럼..."
  상대가 뜻밖으로 알은체를 하며 인철을  쳐다보았다.  그때 인철에게도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와 형은 떠날 때 저 사람들에게  연락처를 남겼을 지도 모른
다.  아니, 나중에라도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 주소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내가 가
장 먼저 들를 곳은 바로 그들이 사는 개간지일 테니까.
  "혹시 저에 관해 무얼 들은 게 있습니까?"
  인철은 아직 인사도 나누지 않은  사이지만 그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경문이란 
청년도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집에 편지가 몇 통 있어서... 이인철에게 온 것도 있고 이인철이 보낸 것도 있고..."
  그러면서 인철을 가만히 살피는 게 네가 그 사람이었어, 라고 붇는 듯했다.  보낸 편지는 
자신이 몇 달에 한 번씩 어머니에게 발신인 주소 없이 보낸 것일  터였다.  그런데 온 것이
라면...
 "제게 온 것은 주소가 있었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 그것도 여러 번 주소가 바뀌었지 아마."
  인철이 꼬박꼬박 존대를 쓰는 데 비해 상대는 계속 반말이었다.   그러나 인철은 그걸 불
쾌하게 여길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주소는 어딥니까?"
  "서울이고... 영등포 어디든가..."
  그때 다시 정식이 끼여들었다.
  "먼저 정식으로 인사부터 해라.  이쪽은 이인철이고오..."
  "아까 말했잖아."
  "이쪽은 윤경문이라꼬 너  개간지 사온 사람  집 아들인데,  작년에 진안 농고  나와서..."     
  "이인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철은 그러면서 고개까지 꾸벅했다.  그때 다시 정식이 끼여들었다.
  "우리하고 동갑이다.  촌에서 뭐 그래 깍듯이 말 올릴 거 없다.  니도 공부는  할 마이(만
큼) 했고..."
  정식이 진작부터 하고 싶던 말은 그거였던 듯했다.  경문도 별로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기다렸다는 듯 비로소 돌아 앉으며 희미한 미소까지 지었다.
  "당연하지.  어이, 도시 예절 티내지 말고 여기서 하던 대로  해.  우리 서로 말트고 지내
자구."
  조금 전 개간지에서 본 일로 경문을 성깔 있고 비뚤어진 사람으로 지레 짐작했던 인철은 
그의 그 같은 반응에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그리 못할 것도 없었다.
  "좋아, 그런데 조금 전 말이야.  일부러 엿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
  그렇게 받자 경문이 피식 웃었다.
  "까짓 거, 동네가 이미 다 아는 일인데 뭐."
  "조금 전에 머꼬? 너끼리 무슨 일 있었나? 뭐가 동네가 다 안단 말고?"
  인철과 경문이 자신을 제쳐놓고 얘기를 주고받자 정식이 다시  끼여들었다.  경문이 스스
럼없이 정식의 말을 받았다.
  "우리 꼰대하고 나 사이 나쁜 거.  저녁상 받고 있는데  또 일 안하고 빈둥거린다고 잔소
리잖아.  그래서 콱 받고 나와버렸지.  씨팔, 나도 자원 입대라도 하든지 해야지.  이제 이놈
의 집구석에서 더는 못 견디겠어."
  "그래믄 되나? 그래도 아부진데.  더구나 배았다는 사람이."
  "아부지는 무슨 얼어죽을... 너한테 말하기 미안하다만 사실 개간지 그게 어디 땅이야? 그
걸 산다고 몇십 년 공무원 생활로 받은 퇴직금 몽땅  털어넣은 것도 기막힌데, 그것도 모자
라 멀쩡한 집까지 팔아 그 뒷돈을 대야  하겠어?  그래도 명색 서울의 오대 공립에 다니던 
자식 놈을 생으로 이 촌구석까지 끌고  와 따라지 농고에 집어넣어야 되겠어? 친구들은  다 
서울대다 연.고대다 폼잡고 다니는데, 내 꼴이 이게 뭐야? 농사꾼 그거 농고 한 일 년  다녔
다구 아무나 되는 거야?"
  거기까지 듣자 인철은 그들 일가가 지금 어떤 처지에 떨어져 있는가를 훤히 짐작할 수 있
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자신이  떠오르며 갑자기 경문이 오래 사귀어온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땅이 그래?"
  "이건 땅 문제가 아니야.  이 개간지가 문전옥답이라도 결과는 뻔해.  농사가 천하의 대본
인 시대는 지나갔다구.  촌구석에서 썩느라 배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정부가 말하는 공업화, 
산업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쯤은 나두 안다구.  그런데  망할 놈의 꼰대.  여기 말대로 뒤비 
쪼아도(거꾸로 조여도) 한참 뒤비 쪼았지..."
  전에 어디선가 들은 소리였고 그래서 한층 경문의 처지에 동정이 갔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 그런 동정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그 마지막 편지,  그거 언제 온 거야?"  "제법  될걸.  추석 무렵인 
것 같은데."
  "지금 너희 집에 가면 그 편지 받을 수 있을까?"
  "그건 되겠지.  내가 찾아줄 테니 이 술이나 마저 마시구 일어나."
  인철이 제대로 술잔을 비우기 시작한 것을 그때부터였다.  급한 마음으로 빨리 술병을 비
우려다 보니 오히려 인철이 그들보다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셋이서 45도나 되는 제비원 
소주 두 병을 비운 뒤 은근히 따라붙는 정식을 떼어버리고 경문을 따라 개간지로 갔을 때는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인철은 그 집에서 간수하고 있던 편지 두 통을 받았다.  둘 다 추
석 무렵의 소인이 찍혀 있었는데 한 통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보낸 안부 편지였고 한 통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인철이 보아라
  너는 에미를 잊은 사람 같다만 그래도 추석이 가깝고 또 주소가 바뀌었으니 몇 자 적어둔
다.  행여 돌아오거든 밑에 써놓은 주소대로 찾아오너라.   언제 우리 식구 모두 다시 만나 
추석상이라도 같이 받게 될는지.  종적도  없이 떠다니는 너를 생각할 때마다  에미 가슴은 
무너진다.  할말은 많으나 나도 이제는 답장 없을 편지를 길게 쓰는 게 싫다.  이만 총총.
  1968년 음팔월 초아흐레 어미가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한눈에 서울의 변두리 달동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길고 복잡한 주소
가 적혀 있었다.

    제5장
  형제
  "바라, 젊은이, 참말로 말을 몬 알아묵네.  여론 조사소라 카는 기 요새 마이 설친다 소리
는 들었다.  글치만 도대체 내 죄가 뭐꼬? 멀로 터줏고 멀로 나발 불겠다는 기고?"
  들은 대로 김사장은 예삿내기가 아니었다.  내민 증거에는 눈도 깜짝 않고 나직나직한 목
소리로 그렇게 반문했다.  감정이 격해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위협하는 입장인 명훈 쪽이었
다.
  "김사장, 정말 이러기요?  공무원을 뇌물로 부패시키고 무식한  농민들을 속여 수천만 원 
사기쳐먹고도 죄가 없다는 거여?"
  "수천만 원까지는 아이라 캐도 내가 돈을 쪼매 만진 거는  맞는 말이라.  글치만 내가 공
무원을 부패시키고 농민을 속였다이, 그건 또 뭔 소리교? 보자, 누구라 캤제? 아, 그래, 이부
장.  이부장은 내가 공무원한테 뇌물 주는 거 봤소?"
  김사장이 차분하게 반문했다.  마음속의 동요를 드러내는 게 있따면  복모음을 모조리 단
모음으로 발음하는 바람에 북쪽 사람들에게는 왠지 건드러지게 들리는 남쪽 사투리가  점차 
강해진다는 정도일까
.  "그거야 문제가 되어 조사를 시작하면 나오겠지. 어느 쓸개 빠진 공무원이 아무것도 생기
는 거 없는데 말썽 많은 물건을 납품받겠소? 맨입에 되는 일이 어디 있어?"
  "그럼 함 조사시캐 보라꼬."
  김사장은 그러면서 원고개를 틀었다가 빈정대듯 물었다.
  "그라문 내가 농부들 사기쳤다는 거는 그 사람들한테 면실박을 값싸게 되산  거보고 카는 
소린 갑네.  물건 싸게 사믄 다 사긴강?"
  "안 그러면 부대당 천 원에 납품되는 물건을 삼백 원에 팔 사람이 어딨소?"
  "그라믄 낼 우리 사무실로 오소.  이럴 줄 알고 내가  그 사람들 앞앞이 받아놓은 계약서
가 있으이께는."
  명훈은 거기서 벌써 말이 궁해졌다.  그러나  한번 뽑은 칼이라 그냥 물러서기는 싫었다.    
 "좋시다. 김사장 말대로라고 해도 최소한 부당 이득은 되겠지.  삼백 원 짜리를  천원에 납
품했으니."
  "그럼 딴 사람도 말고 술집 주인들만 해도 몽지리(모조리) 부당 이득 취득죄에  걸리겠네.  
여기 주인 함 불러 물어보까?  솔직히 재료비 얼매드는지.  그래도 나는  원가만 해도 납품
값의 절반은 된다꼬.  농가에서 삼백 원에 샀다고 해도 그거 누가  일일이 모으노? 또 모은
들 지자리서 바로 팔 수 있는 물건가?  해당 군으로 옮기는 거는 면실박에 날개 달래 지절
로 날아가나? 새 포대값은 또 우짜노? 그 인건비, 운반비, 구입대만 해도 하마 이백 원이 넘
는다꼬.  그래믄 배 장사가 잘 안  되는데 그래도 부당 이득가? 세상에 배  장사를 다 부당 
이득으로 몰믄 언 놈이 장사해 묵겠노?"
  그러는 김사장은 비리가 있어 공갈당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명훈의 법률에 대한  무지를 
이죽거리는 사람 같았다.  틀림없이 뭔가 냄새가 나서 찾아왔는데 그런 김사장의 말을 듣고 
보니 더는 걸고들 데가 없었다.  명훈이 얼른 할말을 못 찾아 머뭇거리자 김사장이 다시 어
루듯 말했다.
  "바라, 젊은이.  우짜다가 이 길로 들어섰는지 모른다마는 사람을 겁줄라 카믄 멀 알고 겁
을 조야 덴데이.  잘못하믄 나(나이) 많은 사람한테 버르장머리없다는 소리밖에 못 얻어걸린
다꼬."
  "내가 알고 왔는지 모르고 왔는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기요.  어쨌든 영감님은 되 없다 
이 말이지요?  정부 농정에 혼선이 오고 국고가 낭비되었는데도 정상적인 사업을 했을 뿐이
란 말이지요?"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명훈은 거의 우격다짐으로 나왔다.  그래도 김사장은 숨
소리조차 흐트러짐이 없었다.  명훈은 거기서 조사한 사건의 개요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았
다.  정부가 농촌의 지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으로 농가에 면실박을 공급했다.   
정부 보조 6할에 자부담 4할인데 그 4할도 융자를 해주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면실박의 수량이  부족해 한꺼번에 전농가에 공급하지  못하고 
군 단위로 순차적인 배정을 했는데 그게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어떤 악덕 업자가 면실박
이 배정된 군에서 배정된 면실박을 헐값에 되사들여 아직 배정 안 된 군에 납품하고 폭리를 
취한 일이었다.  곱배기 장사인 데다 수량이 많아 보니 한 군만 납품해도 수천만 원의 이득
을 볼 정도였다.  명훈이 그 일에서  범법의 냄새를 맡은 것은 그 업자인  김사장의 엄청난 
폭리 쪽에서였다.  그러나 이제 김사장의 말을 들어보니 반드시 범법으로 몰아세울 만한 폭
리도 아니거니와 거래의 전과정도 용의주도하게  합법성을 확보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농정의 혼선과 국고의 낭비를 들먹여보았지만  명훈의 법률 지식으로는 어떻게  김사장에게 
그런 결과의 책임을 물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막막함을 다  헤아리고 있다는 듯 김사장
이 다시 이죽거렸다.
  "글치만 그걸 우째 내가 책임져야 하노?"
  "최소한 정부 보조가 들어 있는 헐값에 팔아치운 농부들과 공동 책임이라도 지셔야겠지."  
  "그래도 죄형 법정주의 사회에서 죄목은 있어야 안되겠나? 우리 죄목이 머꼬? 촌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정부 혜택을 포기한 긴데, 그라믄 우리 법에  정부 혜택 포기죄라는 것도 있나? 
면실박이 땅기운 돋우는 데 도움이 되고 정부 보조가 많으이 덥석 받기는 했지마는 뿌리기 
귀찮고 효과가 더디이(더디니) 그양 처매삐리(처버려) 났다가  살 사람 있다 카이 넘가주고 
만 긴데."
  "..."
  "법으로 걸라 카믄 몰라, 공무원법의 직무유기죄로 처음 그 따우 되도 않는 발상을 한 공
무원이나 걸어 열(넣을) 수 있이까.  땅에 좋다 카는  그 한 가지로 농촌 현실도 안 살피고 
집집이 면실박을 떠딩긴(떠안긴) 그 정책 입안자 말이라..."
  "그렇다고 자부담보다도 싸게 그걸 되사들여 농민들 손해보이고 국고 보조는 통째 들어먹
는 게 죄가 안 될까..."
  아직 명훈의 어조는  강경했지만 그 내용은  어느새 추궁이라기보다는  문의에 가까웠다.  
그때 이미 명훈은 자신의 실패를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사장의 지나친 자신감이 일을 
반전시켰다.
  "그거라믄 벌씨로 결론났다꼬.  인제잉까 말하지만 내 이 일로 법 앞에 끌래댕긴 게 한두 
번이 아이라.  돈내미(냄새)맡은 기자들이 파리떼처럼 다라들어 여러  무리(번) 훌치고 갔다
꼬.  그 바람에 나도 반변호사 다됐다 카이.  결국 나는 무죄라.  그러이..."
  그 노련한 전문가는 그렇게 말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가려다 약간 멍
해져 그대로 앉아 있는 명훈을 딱하다는 듯 내려보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어디서 내 얘기 들었는지 몰따마는  막차를 타도 한참 막차를 탄  기라.  더군다나 나는 
이제 면실박 장사 손띳다꼬.  또 할 기라믄 말썽이 귀찮아서라도  몇 푼 풀겠지마는 인제는 
그럴 필요도 없고오."
  김사장은 그 말과 함께 잡히는 대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술상 모서리에 놓았다.  "구
름 먹고 바람똥 싸던 내 젊을 때 생각하이 그양 갈 수 없어 몇 푼 놓고 가누마.  있다가 술
값 내고 남으믄 고히(커피)값이나 하라꼬.  나는 바빠서 이만..."
  어쩌면 그날 김사장이 당한 불행은  지나친 자신감에서가 아니라 부주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사장의 부주의는 두 번 있었다.  그 하나는 지갑을 꺼낼 무렵부다 험해지던 명훈
의 눈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을 너무 상가장자리에 놓아 땅바닥으로 떨
어지게 한 일이었다.  전리가 아니라 상대방의 동정으로 푼돈을 얻게  된 것이 명훈의 별난 
자존심을 건드린 데다가 다시 방바닥에 흩어지는 지전이 주는 모멸감이 명훈의 의식을 분기
시켰다.
  "어이, 영감."
  명훈이 앉은 채로 나직히 부를 때는 이미 그의 범죄적인 순발력이 작동하고 있었다.
  "?"
  명훈이 워낙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자기를 불러서인지 이번에는 김사장이 어리둥절해 
명훈을 내려보았다.  명훈은 일부러 동작을 천천히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굴 높이가 
나란히 될 만큼 일어선 뒤에야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이것도 법에 걸릴 만큼 죄가 될까?"
  "머시(무엇이)?"
  명훈의 다음 행동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김사장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길로 반문했다.   
 "이것 말이야."
  명훈은 그 대답과 함께 오른손을 재빠르게 내밀어 김사장의  울대뼈를 움켜잡았다.  그리
고 가만히 그를 벽 쪽으로 밀어붙인 뒤 손아귀에 한껏  힘을 주어 성대 부근을 짓주물렀다.  
뒤탈 없이 상대를 골탕먹일 때 쓰는 명훈의 장기 중에  하나였다.  김사장이 어떻게 벗어나
보려 했으나 명훈의 남은 왼손이 허용하지 않았다.  완력과 악력  모두 남다른 명훈이 머리
를 짜 펼친 기습이라 50대도 후반인 김사장으로서는 고스란히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사
장은 목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한동안을 버둥거리
다가 마침내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명훈은 움켜쥐었던 울대
뼈를 놓았다.
  "니, 니 이누무 새끼..."
  한참 뒤에야 숨결을 회복하고 제정신을 차린 김사장이 겨우 그렇게 내뱉고는 상 위의 접
시를 들어 명훈을 내리쳤다.  바로 명훈이 기다리던 공격이었다.  울대뼈를 잡혀 모질게 시
달린 뒤끝이라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김사장인 만큼 전혀 위험할 게  없었다.  짐작대로 
김사장이 집어든 안주 접시는 겨우 명훈에게 안주만 덮어씌우고 바닥에 굴러떨어지면서  요
란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기다리던 명훈이  짐짓 당황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항변했다.      
  "어르신, 왜 이러세요? 말로 합시다, 말루."
  그때 분을 못 이긴 김사장이 다시 명훈의 멱살을 잡았다.  역시 명훈이 기다리던 바였다.   
명훈은 기력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는 김사장의 손아귀에 멱살을 맡긴 채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 팔꿈치로 방문을 쳤다.  방문이 활짝 열리자 그새 방안의 소란을 듣고 달려나온 마
담과 아직 화장조차 하지 않은 색시들이 몇 보였다.  명훈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중인들이
었다.  명훈은 더욱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김사장, 자꾸 이러시면 저도 못 참아요.  이거 놓지 못해요? 내가 참으니까 어디 힘이 없
어..."
  그때 김사장의 위력 없는 주먹이 날라들었다.  명훈은 넉넉히 막을 수 있으면서도 그대로 
두어 대 맞아주었다.  바깥의 중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
만 너무 많이 희생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에잇! 정말 이 영감이..."
  김사장이 제법 기력을 회복했다 싶은 순간 명훈은 매달린 어린아이 떨쳐버리듯 그를 떨치
고 일어섰다.
  "저, 저 ... 누묵... 새끼가."
  분함과 고통스러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의 김사장이 숨을 헉헉 거리며 어렵게 목소리를  짜
냈다.  명훈이 성대 근처를 짓주물러놓아 말하기가  힘든 듯했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분을 못 이긴 노인의 헐떡임일 뿐이었다.  명훈은 다시  엉겨붙으려는 그를 두 손으로 
떨치며 방을 나와 구두를 신었다.  머리칼에서 짓이겨진 두부 조각이 부스스 떨어졌다.
  "김사장님, 나 오늘 많이 참은 줄 아슈.  정말이지 사장님이 40대만 되어도 이렇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요."
  그러자 김사장이 아연한 눈빛으로 명훈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자신이 당한 일이 어떤 것
인가를 짐작한 눈치였다.  그 짐작이 온몸의 힘을 뺀 듯 풀썩 주저앉았다가 그래도 분을 못 
이겨 목소리를 짜냈다.
  "이... 악질... 놈의 새끼... 내 고소 안... 하는가 바라..."
  "고소는 내가 할 거요.  내가 당신 아들이오, 뭐요?  되지도 않은 욕설에 손찌검까지... 에
잇 쌍, 성질 같아서는 정말..."
  명훈이 서울 깡패들의 말투를 끝에 덧붙인 것은 그만큼 그가 당한 것이 많다는 걸 증인들
에게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곁눈질로 파악한  증인들의 반응도 한결같이 명훈을  피해자로 
보는 눈치들이었다.  명훈은 거기에다 그들의 호감을 살 일을 하나 더 보탰다.
  "오늘 재수 옴 붙었네.  아직 본부에 보고도 안 했는데  영감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는... 아줌마, 가진 게 이것뿐이니 우선 받아둬요.  술값하고 깨진  그릇 값하고-모자라면 다
음에 갚지요."
  주머니에 있는 돈을 있는 대로 털어 넉넉한 변상까지 하고 술집을 나왔다.
  '이 여우 같은 영감, 어디  혼 좀 나봐.  아마 일주일쯤은  밥은커녕 물도 마시기 힘들걸.   
고소한다구? 잘 해봐.  정신이 나자마자 맨 먼저 진단서 끊으러  병원으로 달려가겠지만 별
로 재미없을걸.  거기는 물렁뼈라 엑스레이에도 안 나와.  의사에게 돈을 먹여도 두 주일 진
단서조차 받기 어려울 거야.  그리고 그 정도 진단서야 나도 얼마든지 끊을 수 있지.  슬쩍 
긁힌 자국만 내도 두 주일은 나올 테니까.  거기다가 증인들은 온통 내 편이구... 아니, 영감
이 누군데 그런 승산 없는 고소를 하겠어.  더구나 자기 구린 뒤도 있는데.  틀림없이 고소
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게 될 거야.'
  골목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니 명훈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소득은커녕 가지고 있던 
비상금 몇천 원마저 털리고 만 셈이지만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법도 처벌하지 못한 교활
과 간악을 멋지게 벌주었다는 자부까지 들었다.  하지만 큰길가의 양복점 쇼윈도 유리에 비
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의 통쾌함은 일시에 사라졌다.  점잔을  빼느라 한껏 
차려입고 간 미색 양복 위에 양념 간장까지 한 두부 접시를 뒤집어써 생긴 얼룩들과 한동안
의 몸싸움으로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그야말로  상갓집 개였다.  거기다가 김사장의  나이가 
자신의 곱절에 가깝다는 것까지 상기되자 한때의 통쾌함은 이내 울적함과 자기 모멸로 바뀌
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가.  법이 처벌하지 못한 간악과 교활? 그걸 멋지게 벌주었다고? 천
만에.  남의 약점을 잡고 공갈을 치려다가 안 되니까 주먹으로 화풀이를 한 것에 지나지 않
아.  그것도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이렇게, 이렇게- 어디까지 가지..."
  원래 그는 지부 사무실로 돌아가 거기 있는 패거리들과 김사장을 잡을 궁리를 할 작정이
었다.  그러나 우선은 볼썽사나운 차림 때문에라도 그리로 갈 수는 없었다.  어디를 가든 먼
저 하숙집으로 돌아가 옷부터 갈아입는 일이 급했다.  명훈은 되도록이면 사람이 적은 골목
길만 골라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숙집 부근만은 어쩔 수 없었다.   시립 도서관을 
짓는 공사가 벌어져 길이 막히는 바람에 골목길도 큰길처럼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고, 이부장.  어디 갔다 인제 오이껴?"
  명훈이 서둘러 하숙집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누가 명훈을 불러세웠다.  돌아보니  하숙집 
아주머니였다.  저녁 장보기라도 나가는 것인지 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부에서 이부장 찾는 전화가 불불이 오고 소임(손님)도 하나 와 기다리더.  하마 아까부
터 와 있는데."
  "손님요?"
  "동생이라 카는 총각인데 점심때 이부장 나가고 곧 왔니더.  마이 닮은 게 친동생인 갑디
더."
  "인철이가?"
  명훈은 그렇게 반문하다가 자신이 발음한 그  이름이 주는 감동에 절로 가슴이  먹먹해졌
다.
  '이것이, 이 어린것이 어디를 떠돌다가 돌아왔는가.  비정한 아버지와  무능한 형을 둔 죄
로 어떤 모진 고초를 겪으며 세상을 헤매다 이제야 나를  찾아왔는가.  발신인 주소를 쓰지 
않은 안부 편지가 너의 자신감과 오기를 보여주고는 있어도 지난 3년 너는 영희보다 더  아
프고 깊은 나의 상처였다.  결국 나서지는 못했지만 부산 바닥을  다 뒤져서라도 너를 찾아
오겠다고 마음 다진 일만도 몇 번이었던가...'
  먼저 명훈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핏줄의 정에서 우러난 소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
길한 상상도 있었다.
  '어떻게 나를 찾아오게 되었을까.  집이 서울로 옮긴 줄 모르고 돌내골로 갔다가 누구에겐
가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누가 하숙집까지 알려주었단 말
인가.  벌써 내 행적이 돌내골 사람들에게 환히 알려졌단 말인가.  아니면 집으로 먼저 갔다
가 어머님에게서 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어머님도 내 행적을 다 알고 계
신다다는 뜻이 된다.  어머님은 또 누구에게서 내 주소를 얻으신것일까.  지난 다섯 달 편지
조차 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레 그 아이를 내게 보낸 까닭은?   집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러자 명훈이 집을 나서기 전날 어머니의 한탄 섞인 결의가 떠올랐다.
  "다 운수지만 참말로 너무하구나.  인제 이 막막한 서울 천지에서 또 어예 헤갈데기(안간
힘, 몸부림)를 치며 살아야 하노? 글치만 할 수 없제.  고향서 뿌리뽑힌 게 어딜 간들 큰 수
가 있을로? 암만캐도 우리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뜻 같다.  이래 되믄 뿔뿔이 흩어져
서 지길이(제가끔) 길을 찾는 게따.  옥경이는 공장에라도 보내코 나는 식모 자리라도 알아
보꾸마.  니도 집은 이자뿌고 니대로 살 궁리를 해봐라.  하나님이 무심치 않으믄 우리 식구 
다시 모예 옛말하고 살 날도 오겠제.  한 3년 기한하고 새로 고생 함 해보자."
  그러면서 명훈을 보낸 어머니였다.  그게 벌써 다섯 달 전, 어머니와 옥경이는 어떻게 되
었을까... 명훈이 굳은 사람처럼 서 있는 걸 보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재촉했다.
  "퍼뜩 가보소.  사람 기다린다마는."
  "아, 네. 그러죠."
  명훈은 그제서야 혼자만의 감회에서 깨어나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어서 아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종종걸음 치게 했다.  하지만 하숙집 앞에 이르러 그는 다시 걸음을 멈
추었다.  문득 형으로서 지켜야 할 권위가 상기된 까닭이었다.
  '이 아이는 떠남과 돌아옴 모두에서 아홉 살이나 손위 형인  나와 한번도 의논한 적이 없
었다.  그리고 떠나 있는 동안에도 막연한 안부 편지뿐.  가족과는 사실상 단절하고 지냈다.  
반가움 하나만으로 이 아이가 지난 3년 간 게을리한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용서해도 되는가.  
형의 권위를 무시한 크고 작은 결정들을 이대로 추인해야 하는가.'
  명훈의 그런 자문이 아니었더라면 그날 형제의 만남은 자칫 통속극의 한 장면처럼 눈물로 
얼룩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나기 직전에 상기해낸 형의 권위가 명훈을 진정시켜 그 대
면은 자못 의젓하고 조리 있는 것이 되었다.
  "아, 형님."
  명훈이 하숙방 문을 열자 인철이 상기된 얼굴로 일어나며 소리쳤다.  금방 안기려다가 감
정을 억누른 명훈의 표정을 보고 멈칫하는 눈치였다.
  "너였구나."
  명훈은 짐짓 냉담한 어조로 알은체를 하고  인철이 알아보기 전에 안주 접시를  뒤집어써 
더럽혀진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랫목에  자리를 잡은 뒤 천천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그때까지 엉거주춤 서있는 인철에게 여전히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 앉거라."
  무언가 속으로는 벅찬 감회가 있는 듯했으나 명훈의 그런 어조가 다시 서먹하게 만들었는
지 인철이 말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님 뵙고 오는 길이냐?"
  "저어... 집주소를 몰라서.  돌내골로 바로 갔다가 거기서 겨우  집주소를 받았습니다.  하
지만 우선... 형님부터 뵙고 집으로 가려구요."
  명훈의 물음을 듣고서야 형이 추궁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인철이 그렇게  더듬
거리며 대답했다.
  "하긴 네게 무슨 집이 있고 부모 형제가 있겠어?  편지에 발신인 주소를 쓰지 않은  것은 
부모 형제라도 잘 돌봐주지 못할 처지면 네 하는 짓이나 가만히 보고 있으란 뜻이겠지.  내
가 여기 있다는 얘기는 누구에게 들었어?"
  "안광에서 형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냥 다녀가신 게  아니라 머물고 계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상두 형은 일간 형님을 찾아나설 모양이던데요."
  "뭐? 상두까지? 그래, 내가 뭘 하고 있는 줄 알데?"
  "전에 장사하시던 거 재미 못 봤다는 것까지는 알고들 있더군요.  상두 형만 형님이 어디 
끗발 좋은 기관에 취직한 거라고 떠벌렸습니다.  운전사 딸린 검은  지프를 타고 다니는 걸 
본 사람이 있다나요."
  그 말을 듣자 명훈은 가슴이  철렁했다.  명양 쪽은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꽤나 정확하게 
소문이 들어간 듯했다.
  "하숙집은 어떻게 찾았어?"
  "전에 형님께 들은 적이 있는 그 신문사 지국을  찾아... 여론 조사소로 간판이 바뀌어 실
망했는데 낯익은 분이 있더군요.  강용길씨라고."
  '얘가 언제 날치를 본 적이 있지?'
  명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국토개발단 시절의 날치가 개간지에 한두 번  찾아온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일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너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지금까지 주욱  그 한의원에 있었던  거야?"  
명훈은 더 미루지 못하고 처음부터 궁금하던 일을 물으며  비로소 인철을 뜯어보았다.  3년 
전 집을 나갈 때의 앳된 소년의  얼굴은 아니었다.  열여덟 그때는 조금 죽은  듯해 보이던 
콧대가 시원스럽다는 느낌이 들만큼 우뚝해졌고 손털을 완연히 벗은 턱에는 거뭇하게  수염
이 자라고 있었다.
  "네."
  명훈의 물음에 인철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피어나듯  밝아지는 인철의 표
정에서 명훈은 어떤 자랑 같은 것을 느꼈다.   무언가 긴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들어서 
나쁠 것 같지는 않아 우선 마음이 놓였다.
  "공부, 공부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냐? 고등학교는 마친 거냐?"
  "네.  그건 마친 셈입니다.  또 한 해 늦어지기는 했지만요."
  "마친 셈이라니? 그럼 학교를 다니지 않고 또 검정고시를 한 거냐?"
  "처음에는 어떻게 전학을 해보려 했는데 그게 잘 안 돼서.  하지만 따라지 야간 고등학교
에서 졸업장만 사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지도 모르죠."
  네 얼굴을 환하게 한 빛의 정체가 그것이었구나.  잘했다.  명훈은 그때 벌써 인철을 힘껏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정보다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대신해오는  동안에 몸에 밴 
형으로서의 권위가 명훈의 의식에 더 크게 작용했다.  아직 형인 나를 무시한 데 대한 추궁
이 충분하지 않다...
  "결국은 정상적으로 진학한 아이들보다 두 해나 늦게 되었는데도?"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과정에서 나마 소수 엘리트 
그룹에 합류할 수 있으면 두 해 늦어진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소수 엘리트 그룹? 어떻게 하면 거기 끼어드는데?"
  명훈은 말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말과 인철 사이의 관련이 너무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
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인철은 작은 머뭇거림도 없었다.
  "한국대학교에 갈 겁니다.  길은 돌았지만 거기만 들어가면 그 동안의 내 낭비는 모두 벌
충될 겁니다."
  그러는 인철의 눈빛에서는 수많은 작은 불꽃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그 대학은 명훈 자
신도 선망해본 적이 있는 대학이었다.  그러나 그 선망은 일종의  실현 불가능을 향한 동경 
같은 것이었다.  선망하면서도 한번도 자신이 그 교복을 입는 것을 꿈꿔보지 못했다.  그런
데 이 아이에게는 현실적인 지향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그 대학에 간사람이있기나 
해?"
  "그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지금 서울로 올라가는 겁니다.  두 달 남았지만 좋은 학원에 
나가 마무리만 잘하면 안 될 것도 없어요.  용기하고 재걸이란 애  기억하세요? 왜 밀양 친
구들-걔들은 벌써 작년하고 올해에 거기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애들이야 부산에서도 일류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  거기다가-서울 
가봤자 집은 아무 힘이 못 된다."
  "걱정 마십쇼.  입시 때까지는 집에 손 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준비해갑니다.  그래도 3년
이나 남의 집살이를 했는데 그 정도 비축도 없겠어요?"
  명훈이 비로소 속마음 그대로의 뜨거운 정으로 인철을 받아들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명
훈이 어린 시절의 인철에게서 걱정한 것은 몽상적인 기질과 심약이었다.  그런데 헤어져 보
낸 3년이 뜻밖으로 현실적이고 자신에 찬 아우를 길러낸 듯해 그게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웠
다.
  "아무래도 너를 착하부터 해주어야겠구나.  대학은  나중 일이고-네가 그 동안  건강하고 
현실적인 인간으로 자란 것만으로도  집에 주소를 알리지  않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겠다.  
나가자."
  명훈은 그러면서 서랍 깊이 감추어둔 돈을 찾아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에게 보내려다 
먹은 마음이 있어 따로 모으고 있는 돈이었다.
  "너도 술 좀 하지? 가서 형제간에 한잔 하는 거다.  서울은 밤차로 올라가면되고."
  그때부터는 오랜만에 만난 형제의 즐거운 잔치였다.  정육점에 딸린  식당으로 인철을 데
려간 명훈은 성년식이라도 치뤄주는 기분으로 격의 없는 술판을 벌였다.  거기서 형이 자신
을 성인으로 인정해주는 데 고무된  인철은 자신도 없는 일류 대학  합격을 거듭 장담했고, 
명훈은 명훈대로 아우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갈수록 암담한 끝이 보이는 여론 조사소의 전
망을 과장했다.  술기운이 헤어져 보낸 3년 간의 정신적인  거리를 지워버리자 형제의 대화
는 한층 속깊은 것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인철을 한 성인으로 간주하게 된 명훈은 마침
내 애써 감추려던 상처까지 드러내보였다.
  "개간지에서 실제 농사에 생계를 의지할 때조차 나는 한번도 나를 농민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이미 조상들의 전통 탓이겠지만 내게 있어서 농민은 옛날  그 양민의 다른 이름이며 
신분 상승의 바탕이자 방어의 마지막 보루였다.  나도 조상들처럼 농촌을 진취의 기회가 주
어지면 나아가고 여의치 못하면 돌아와  힘을 기르는 곳쯤으로 여겼다.  따라서  나는 소위 
배운 것들이 말하는 이농 현상의 배경이나 그 시대적 진행을  믿지 않았다.  내가 돌내골을 
떠난 것과 지금 이 나라가 추구하는  공업화, 산업화는 무관하며, 내게 예정된 운명이  도시 
빈민에로의 편입과 값싼 임금 노동자로서의 재생이라는 예언은 터무니없는 비관론으로만 들
렸다.  나는 다만 잠시 농촌에서 힘을 길러 다시 싸움터로 나온 삶의 전사쯤으로 나를 인식
했다..."
  명훈은 그렇게 지난 3년 간 자신이 경험한 좌절의 서두를 정리했다.   사실 그 동안 자신
의 문제에만 몰두해온 인철에게는 조금 낯선 화제였다.  그러나 알지 못할 불안감에 쫓기며 
닥치는 대로 읽은 책들이 그런 경우에도 대꾸할 수 있는 몇 마디는 마련해주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들이 말하는 농민도 노동과 생산 방식을 중심으로 엄격하게  정의된 신
분은 아닌 것 같던데요.  이농 현상을 따질 때도 농민 신분의 진정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이구요.  제가 이해하기로 이농민은 반드시 농촌을 떠난 농부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
라 어떤 여유에서 삶의 기반을 잃은 자들, 그야말로 뿌리뽑힌 자들을 통칭하는 말 같았습니
다만..."
  "이제 와서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그런데도 그걸 알아보지 못한 벌이 지금 우리 가족이 
떨어져 있는 비참이다.  처음 서울로 갔을 때 기꺼이 도시 빈민에 편입되고 식구 모두가 저
임의 육체 노동자로 살 각오가 있었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빨리 도회의 소시민으로 자라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구시대의 환상들이, 아무런 근거 없는 상부 구조 지향이 그나마 다른 
이농민들보다는 유리하게 확보한 도시적 삶의  기반을 잠식해갔다.  이자로 편안히  살려는 
꿈과 육체 노동 기피가 그랬다."
  "지금 같은 인플레 구조 아래서는 결국 깨어지게 되어 있는 꿈이고 턱없이 일만 벌여놓은 
산업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성향이죠.  하지만 이자를 놓을 돈이 있었다면 상업 자본이
나 산업 자본으로의 변신도 가능했을 텐데요."
  어어, 이 녀석 봐라, 명훈은 인철에게 그런 감탄을 느끼면서 더욱 추상적으로 자신의 실패
를 분석해갔다.  짧은 대학 시절과 그뒤 이따금씩 시를 끄적거리며  익힌 어휘와 표현 방식
이었다.  그래도 의식 있게 살려고 노력한 초기 개간 시절에는  더러 그것들을 활용할 대화 
상대가 있었으나 황형이 다녀간 걸 마지막으로 거의 쓰지 않고 지낸 터라 말하다 보니 기분
이 절로 새로웠다.
  "물론 시도해보았지.  하지만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기에는 내 역량이 모자랐고, 산업 자
본으로 이행하기에는 규모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상업이란 그 방면의  단련과 특별한 감각
응르 필요로 한다.  그런데 나는 나를 거기에  합당한 상인으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시도는 토자의 절반을 상실하는 것으로 끝났지.  또 산업 자본은  일정 규모를 넘어서야 생
산성과 효율성을 가지는데 불행이도 우리가 가진 돈은 그 규모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면서
도 이윤에는 욕심을 부리다 보니 터무니없는 사기에 걸리고 말았지."
  기껏 개간지를 판 돈 50만 원을 날린 과정을 설명하는 말로서는 너무 추상적이면서도 거
창했으나 그것은 명훈이 기회만 주어지면 즐겨 쓰던 표현 방식이었다.  인철도 서른을 넘겨 
세상살이에 눈뜰 때까지 그런 식의 표현을 더 좋아했고, 그래서 그것은 뒷날까지도 그들 형
제간의 진지한 얘기 방식의 하나였다.  그날도 그들 일가가 빠져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
려주는 것은 명훈의 결론 같은 마지막 한마디뿐이었다.
  "결국 나는 영등포 변두리의 단칸방에 5만원 전세금을 전재산으로 삼는  어머니와 옥경이
를 두고 서울을 떠났지..."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전하라며 인철에게 돈 2만원을 세어주었다.  그들 형제가 그 식당에
서 일어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다.  그때쯤 명훈에게는 오랜만에 만난 아우를 하룻밤 재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인철이 워낙 상경을 서두르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
  인철은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청량리역에 도착한다는  야간 열차를 타고  안광을 떠났다.  
인철을 보낸 명훈은 갑자기 휑뎅그렁하게 느껴지는  거리를 휘청이며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문득 인철과 함께 서울로 가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딱히  급한 일도 없어 며칠 
서울을 다녀와도 괜찮은 때였다.  어머니와 옥경이가 어떻게 사는지 갑자기 궁금해졌고, 주
소가 노량진으로 바뀐 까닭도 알고 싶었다.
  "보시더.  이부장 안에 있니껴?"
  하숙방으로 돌아온 명훈이 막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하숙집 아주머니가 문밖에서 불렀다.  
  "네. 방금돌아왔습니다."
  명훈이 그렇게 대답하자 하숙집 아주머니는 문도 열지 않고 말했다.
  "저녁에 또 지부 사람들이 두  번이나 전화를 했디더.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늦디라도 
꼭 연화장으로 오라 카이 그래 아소.  연화장이씨데이."
  그러자 명훈도 낮에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는  말을 떠올리고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어떤 상황이 낮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내일까지 해결을 미루어서는  안 될 
상황이.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부르는 장소가 허름한 대로 요정이라는 점이었다.   
"알겠습니다. 곧 나가보지요."
  명훈은 그렇게 대답하며 바로 나설  준비를 했다.  초겨울도 깊은 밤이라  점퍼를 걸쳐야 
할 것 같았다.  연화장에는 잇뽕 형을 비롯해 날치, 대동, 권가 해서 지부 식구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낮술이 이어졌는지 대개 눈길이 풀릴 만큼 취해 있는 게 예사롭지 않은 사태
를 직감케 했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명훈이 들어서며 잇뽕에게 묻자 좌중의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쏠렸다.
  "야 임마, 너 도대체 어디 있었어?"
  비교적 덜 취한 잇뽕이 게슴츠레해진 눈길로 물었다.  날치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덧붙였
다.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철이라고, 김사장 그 능구렝이 확실히 잡았어? 얼마 내놓대?"
  "잡기는 잡았는데 돈은 오히려 내 돈이 들어갔다. 여우 같은 영감탱이."
  명훈은 그렇게 날치의 물음에 답해놓고 잇뽕을 향했다.
  "오늘 동생이 찾아와... 오래 집 나가 있던 동생이라 고기 좀 먹여 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그때 날치가 다시 잇뽕을 대신해 끼여들었다.
  "이제 여론 조사소도 한물가는 판이니 오늘 못 잡으면 말캉 황이지.  역시 대단한 영감이
야.  이부장 구찌빤찌에도 한푼 안 뜯기고 버틴 모양이네."
  날치의 말에 명훈이 놀라 물었다.
  "여론 조사소가 한물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물간 정도가 아니라 끝장난 거지.  종친 거야."
  이번에는 잇뽕의 허탈한 목소리가 날치를 대신했다.  진작부터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너
무 갑작스런 일이라 명훈도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장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각하께서 우리 조사소 얘기 들으시고  노발대발하셨다는 거야.  그따위 사설  조사 기관 
당자아 해체시키라는 특명을 내리셨다는 말도  있어.  그렇잖으면 우리 총재님을  집어넣을 
거라더군."
  "그건 어디서 들었습니까?"
  "들을 만한 데서 들었어.  다 끝난 거야."
  그러자 대동이 끼여들었다.
  "형님, 말이 씨 된다꼬, 뭐든동 그래 당캉당캉 잘라 말하는 게 아이씨더.  다 끝나기는 뭐
가 다 끝나요.  아직 정식으로 공문이 내리온 것도 아인데.  다 뜬소문일  께시더.  각하 특
명이라이? 형님, 인제는 청와대까지 댕기는 모양이쎄.  아이, 박통(박대통령)한테 바로 들었
니껴? 어예 여게 안광에 척 앉아서 대통령 주끼는(말하는) 거까지 다 들었니껴?"
  "맞니더, 하마 대여섯 달이나 터잡아온 우리 조사소를 어예 하루아침에 문닫게 하겠니껴?  
전국에 지부만 해도 몇 갠데... 헛소문일 께씨더.  우리 총재  예비역 중장이라면서요.  글타 
카믄 각하하고도 동기 비스무리할 낀데 그 낯을 봐서라도 그래는  못 하이더.  막말하지 말
고 기다려보시더."
  권가도 풀어진 눈길로 대동의 말을 거들었다.  명훈도 솔직히 그들의 말에 동조하고 싶었
다.  정부와 무관한 사설 단체로 낙착되면 공갈의 위력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전국 백수십 
개 지부가 일시에 문을 닫게 되는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잇뽕의 말투는 조
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박통 매서운 사람이란 거 아직도 몰라?  오른팔처럼 부리던 조카 사위도 수틀리면  두번 
세번 외국으로 내쫓고 눈도 깜짝 않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한테 옛날 고랫적 군대 동기, 그
게 뭐 대단할 거 같애? 다 어림없는 희망 사항이야.  이미 끝난 거니까  모두 보따리 쌀 준
비들이나 해."
  "글타꼬 보다리는 왜요? 까짓 거, 꿩 아이믄 닭이라꼬, 여론 조사소 깃발 내룻코 언론이나 
하믄 되지.  무보수 주재 기자로 돌아가믄 되는 거 아이껴?"
  대동이 그래도 기죽지 않고 불퉁거렸다.  잇뽕은 그런 대동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동의라도 구하는 듯 명훈을 보고 말했다.
  "그 동안 각하 특명, 국정 반영, 관변 단체 내세우고 얼마나 해먹었어?  그런데 이제 그게 
모조리 거짓말이고 사실은 아무 근거 없는 사설 단체였다는 게 밝혀져봐.  그 동안 당한 것
들이 가만히 있겠어?   거기다가 우리 조사소를  해체시키라는 대통령 특명이라도  있어봐.  
중앙정보부에 경찰까지 덤벼들어 우릴 잡으려 들걸. 공갈 협박은 기본이고 사기, 폭력, 공무 
집행 방해 안 걸리는 게 없을 거라구.  특히 대동 저 새끼는  여론 조사랍시고 사람까지 잡
아다가 린치했잖아? 그쪽에서 걸고 나오면 납치, 감금까지 추가될 수도 있어."
  오래 뒷골목으르 구르다 보니 형사 사건에 관한 한 잇뽕은  반변호사였다.  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명훈 역시 잇뽕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도대체가 지나
치게 설쳐온 그들이었다.  그동안 적어도 안광에서는 그들의 여론  조사소가 어지간한 신문
보다 더 위세를 부려왔다.  잇뽕이  그렇게 떠먹이듯이 일러주자 대동도 권가도  더 뻗대지 
못했다.
  대신 갑작스러운 비감과 또 그만큼의 느닷없는  분노로 전보다 더 빨리 술잔들을  비워댔
다.  인철과 마신 술이 적지 않은 명훈도  그런 분위기에 이내 휩쓸려들었다.  이윽고 광란 
같은 젓가락 장단이 시작되었다.  가아기는 간다아마는 정처 어없는 이 바알길, 지이나아온 
자우욱마다아 누운무울 고였었소... 그렇게 악을 쓰는 날치의  노랫가락을 들으며 명훈은 음
울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여기도 파장이구나.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제6장
  받아치기
  "아니 진마담이 웬일이야? 날 다 찾아오구."
  정사장은 저만치 다방을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다방 
안에 북적거리던 손님들이 일시에 그러는 정사장과 상대편인 영희를 돌아보았다.  어지간한 
영희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되자 좀 거북했다. 하지만 정사장은 그걸 즐기는 
듯한 태도였다. 봐라, 나도 젊고 예쁜 여자가 찾아온다-그렇게 과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
다. 맞은편에 앉으면서 건네는 인사말도 다방 구석까지 들릴 만큼 컸다.
 "요즘 재미 어때? 강사장하고는 여전히 잘돼가고?"
 "그저 그래요. 강사장하고는..."
 영희는 그 사이 진전된 자신과  억만과의 관계를 털어놓으려다 말끝을  흐렸다.  어찌보면 
정사장과 억만은 한때의 연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 영희도  어느 쪽을 선택할까 진
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정사장은 강남의 부동산 경기를 타고  한몫 잡은 복덕방 영감  출신의 토지 중개업자였다.  
원래는 신사동 사거리 이면도로에 두 평짜리 '행운 복덕방'의 동업자 중의 하나였으나 제3한
강교가 개통되고 서울이 압구정과 잠원까지로  넓혀지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부동산  투기가 
구변 좋고 부지런한 그에게 한 기회가 되었다.  강북의 투기꾼들과 강남의 농사꾼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성사시킨 몇 건의 큰 거래가 그를 전화번호가 둘씩이나 있는 번듯한 사무실에 
젊은 직원과 경리까지 따로 거느린 '강남부동산'의 사장으로 만들었다.
  그에 비해 강억만은 자신을  '오대(크다는 뜻의 일본어와 한자  첩어)' 청과물 중개인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언제나 비슷한 건달 몇을 거느리고 요정에 와서 귀공자 행세를 하며 매상
을 올려주었으나 영희는 진작부터 그의  참모습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갑자기  오른 땅값에 
졸부가 된 강남의 배추 농사꾼 아들로 무식한 부모를 속여 사업 자금이랍시고 빼낸 돈으로 
흥청거리고 있는 얼간이가 억만의 참모습이었다.  영희는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
를 했으나 끝내는 강억만을 골랐다.  먼저 고려된 것은 정사장이  이미 오십대도 후반인 초
로의 나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영희가 그럴 경원하게 된 것은 세상살이에 닳고 
닳은 복덕방 영감 출신이란 점과 빈틈없는 그 성격  때문이었다. 현재의 능력에서도 장차의 
가능성에서도 억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았지만 영희에게는  그게 실격 사유가 되었다. 
당장 푼돈을 뜯어쓰기에는 정사장이 낫겠지만 영희가 꿈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일대 반격에
는 큰 힘을 빌려줄 사람 같지가 않아서였다.
  "그래, 무슨 일이야?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을 돌린 건 아니겠지?"
 이윽고 목소리를 죽인 정사장이 용건을 물어왔다.  그러나 말 속에 뼈가 있다고, 영희에게 
거부당한 서운함을 아직 씻어버리지 못한 뒤틀린 여운이 있었다.  영희는  몸이 단 그가 딴
살림을 차리자고 매달리던 때를 떠올리고 잠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으나 짐짓 담담하게 받았
다.
  "사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옛정을 봐서라도 좀 도와주세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뭔데?"
  그러자 영희는 더 변죽을 울리지 않고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핸드백에서 미리 준비해
간 부동산 등기부 사본 몇 통을 꺼내자 금세 정사장의 눈빛도 달라졌다.
  "이것 좀 보시고 어느 것이 가장 값나가고 팔기 쉬울지 골라주세요."
  영희가 사본들을 내밀자 정사장은 군말 않고 돋보기를 꺼내 그것들을 살폈다.  지번과 지
목을 꼼꼼히 살피며 한참이나 사본들을 뒤적이던 정사장이 이윽고 전문가다운 품평을  시작
했다.
  "여기 이 포이동 산 만이천 평은 덩치야 크지만 아직 큰돈이 안되고 그쪽 밭도 그래.  아
직은 임자가 흔찮을걸. 잠원동 이백 평은 거래야 쉽겠지만 덩치가 작고. 압구정동 천이백 평
이나 말죽거리 삼천 평이 덩치도 크고 거래도 쉽겠는데."
 "둘 중에 하나라면 어느 쪽이 낫겠어요?"
 "글쎄... 가봐야 알겠는데. 도시  계획과 관계된 위치가  어떤지 알아야지." "어떻게 급하게 
알아볼 길 없어요?"
 "그런데 보자. 이건 소유주가 모두 강칠복씨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진마담이 어떻게?"
 거기서 영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하나의 전략으로서 정직을 택했다.
 "저희 시아버님이세요. 강억만씨 아버님..."
 예상대로 그 말에 정사장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만났을 때 그와의 관계를 먼저 
물었듯이 정사장도 한때의 연적으로서 억만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럼 결국 강사장하고..."
 "네. 지난 12월에 결혼했어요."
 거기서 영희는 다시 한번 정직을 전략으로 써보기로 하고 짐짓 쓸쓸한 목소리를 지어 보탰
다.
 "정사장님, 죄송해요..."
 "뭘?"
 정사장이 난데없다는 듯 물었다.
 "그때 말예요, 사장님께서 다방 차려주시겠다며 마담 노릇 그만두라고 하셨을 때... 저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날로 사장님을 따라나서고 싶었죠. 하지만 그럴 수는 없
었어요. 사장님은 저 같은 화류계 인생의 한을 아세요?"
 "화류계 인생의 한이라구? 그게 어떤 건데?"
 "그 때문에 더욱 삶을 망치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남은 삶이 평범해서는 안 
된다는 앙심 같은 게 있어요. 우리가  당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 우리를 학대하고  멸시한 
세상에 앙갚음이 될 만큼 가져야 한다-이런 것이죠. 돈이든 힘이든 말이에요."
 "내게는 세상에 대한 복수처럼 들리는군."
 "어떻게 이해하시든 좋아요. 하지만 복수라기보다는 되받아치기라고  하는 편이 옳을 거예
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밀려왔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가  밀어붙이겠다는 뜻 정도로 아시면 
돼요."
 "늘 막가는 인생이란 말을 입에 달고 있어 그런 기백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랐는 걸.  그런
데 그게 나와 무슨...?"
 "물론 사장님의 사람이 되면 푼돈이나 쓰며 살기에는  편하겠죠. 그러나 내가 세상을 상대
로 되받아치는데는 큰 힘이 되지 못할 거예요. 사장님이 그걸 허용하실 리가 없어요."
 "그건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걸.  그럼  강사장은 그걸 허용하겠다던가? 그게 
뭔데?"
  "물론 억만씨는 당장은 흥청거리고 있어도 가망 없는 사람이죠. 언젠가 그 턱없는 속임수
가 아버님께 들통나면 빈털터리로 쫓겨나고 말 거예요.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제게는 가능성
이에요.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을 맡아줄 것이고 저도 그를 잘 활용하면 세상에 되받아치기
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어요. 그가 허용하고 안 하고에 관계없이 말이에요."
  어지간히 세상일에 닳고  닳은 정사장이지만 영희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신을 거부한 데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게 불쾌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알 듯도 하고..."
 영희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결혼했는데 그 집에서 절 받아주지 않아요. 말할 것도 없이 제가 술집 색시 출신
이라는 이유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꼭 그집으로 들어가야겠어요. 번듯한 가문은 아니라도 
한 정상적인 집안의 며느리로 자리를 잡는 게 제 되받아치기의 시작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 집 땅을...?"
  "땅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그 집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죠. 더구나 지금
은 강남 개발로 값이 올라 그냥 두었으면 별볼일 없는 농사꾼으로 살다 죽었을 사람들을 엄
청난 재산가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이 되었어요.  따라서 내가 그들의 거부
감을 꺾는 길은 땅밖에 없어요.  그것과 관련된 것마이 그  집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어요. 어쨌든 정사장님은 이 필지 중에 어느  것이 요즘 부동산 시장에서 말하
는 그 노른자위인지만 알려주세요."
  정사장은 꽤나 집중해 영희의 말을 듣고 속으로는 머리도 굴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당장 알아볼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어서 알아봐주세요. 제겐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면서도 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에요."  
 "그럼 기다려봐."
  정사장은 영희의 성화에 내몰린 사람처럼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 있는 데로 갔다.  등기부
등본을 들고 가 지번을 읽어주고 하는 게 자신의 사무실로 전화를 해 도시 계획과 대조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제자리로 돌아온 정사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말죽거리 쪽이 나을 것 같은데. 지금 거기 뭐 하고 있어?"
  "배밭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양재 사거리에 가까워 전망이 좋은 데다 지금 과수원이라면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는 데
도 괜찮군. 값만 적당하면 임자가 있을 거야."
  "그럼 임자 한번 알아봐주세요." 
  그러자 정사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강사장과 결혼했다지만 아직 시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어? 정식으로 며느리
가 되었다 해도 강칠복씨가 아니면 팔 수 없는 땅인데, 진마담이 어떻게 임자를 알아보라는 
거야?"
  여기서 영희는 잠시 망설였다.  다시  한번 더 정직을 계책으로 써볼까말까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정직과 거짓을 아울러 써보기로 했다.
 "정사장님, 아직도 제게 서운한 맘이 있으세요?"
 "아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믿어도 되겠어요?"
 "내 나이 내일 모레면 환갑이야. 어떻게 생각하면 그때 영희의 결정이  고마울 때도 있어." 
정사장이 제법 지긋한 감회까지 담아 그렇게 대답했다. 영희도 어조에 정성을 실었다.
 "그럼 믿고 말씀드릴게요. 한때 마음을 두었던 젊은  연인으로 보셔도 좋고 잃어버린 어린 
누이가 오래 세상 밑바닥을 헤매며 고생을 하다가 돌아와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으로 들으셔
도 좋아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정사장의 눈길에 문득 경계의 빛이 어렸다가 스러졌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고 말고."
 "억만씨는 그 집 맏아들이에요. 그 땅은 기다리면 언젠가는 그에게로 넘어오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한없이 기다릴 수 없어요."
 "그래도 땅은 어디까지나 강칠복씨 거야."
 "그래도 땅은 어디까지나 강칠복씨 거야."
 "억만씨가 그 집이 정당한 상속자라는 점을 이용하면  땅 한 필쯤은 어떻게 팔 수도  있을 
거예요. 더구나 아직은 아버님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것도 아니어서 서류 문제나 돈 관리는 
여전히 억만씨에게 맡겨놓고 있는 눈치구요. 어떻게 길이 없겠어요?"
 "말하자면 시아버지 몰래 남편을 시켜 시집 땅을  팔아먹겠다는 거군. 그것도 집안으로 들
이기조차 마다하는 시집의 땅을."
 "그 돈으로 사업해 나중에 갚아드리면 되잖아요? 제게 온 마지막 기횐데 설마 망치겠어요? 
자신있어요."
 그러나 그 부분은 거짓말이었다. 영희에게는 정말로 그 배밭을 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세
상에 대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고 싶을 뿐이었다. 거짓의  냄새를 맡았는지 나이값을 하는 
것인지 정사장이 갑자기 깐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쉬워 말죽거리 배밭이지, 요새 시세로는 도둑놈 뒷전에 가두 천만 원이  넘어.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려길래 그렇게 거금이 필요해? 강사장 놀리고 있는 자금도 있잖아?"
 "억만씨 밑천이랬자 잠원동 대지 판 돈 3백만 원이었는데,  이리저리 날리구 뜯겨 이젠 백
만 원도 안남았어요. 장사 수입 명목으로 한 달에 십만 원씩 시집에 갖다 주는 것도 시아버
님 신임 잃지 않으려고 원금 줄여가며 내는 거구요. 그  사람 맡겨두어서는 아무것도 안 돼
요. 몇 달 뒤에는 그 사람도 쫓겨나 제가 오히려 멀쩡한 알건달 먹여살려야 하는 꼴나게 생
겼다구요. 제게도 한 번은 기회가 주어져야 해요. 헛바람 들어 가출했다가 인생 망친 년으로 
세상을 끝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그러려면 제게는 큰  승부가 필요해요. 지면 정말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큰 승부 말예요."
 이 부분은 또 진실이었다. 거기다가  영희가 지그시 이까지 악물자  정사장은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영희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마음을 정했는지 나직이 말
했다.
 "하기야-영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 정말로 강사장이 아직 집안  서류일을 다 맡아하고 있
다면 말이야."
 "어떻게 하면 돼요?"
 "강사장 앞으로 시아버지 인감도장 찍힌 위임장을 만들고 또 그 인감증명을 떼올  수 있으
면 서류상으로는 하자 없이 팔 수가 있지. 물론 계약 때는 인감도장도 가져와야 하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 땅  살 사람 한번 찾아주시겠어요? 복비는 후하게 
쳐드릴게요."
 "그건 곤란한데. 내가 내막을 모른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알고서는  안돼. 자칫하면 
부동산 사기 공범으로 말려들게 돼."
 영희에 대한 정사장의 미련은 거기서 꼬리를 사렸다. 아무리 영희가 애원해도 자신이 직접 
그일을 주선하는 일은 한사코 마다했다. 하지만 영희에게는 그만한  호의도 고맙기 짝이 없
었다. 영희는 자리를 옮겨 불고기로 성의 있는 점심을 대접하고 정사장과 헤어졌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이번에는 정사장님을 위해서  제가 달리 알아보겠지만 언젠가는 
정사장님과 이런 일을 함께 해보고 싶네요."
 식당을 나서면서 영희가 그렇게 말하자 정사장이 뜻밖이란 표정으로 걸음까지 멈추고 물었
다.
 "그럼 진마담이 해보고 싶다는 사업이 부동산이야?"
 "그래요. 돈이 흐르는 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화류계  아녜요? 거기서 이 몇 년 익
힌 세상살이에서의 눈썰미예요. 그게 언제가지일지는  모르지만 이제 이 땅에서  가장 빨리 
돈을 뭉치는 길은 부동산이 으뜸일 거예요."
 그러자 정사장은 놀란 눈빛으로 영희를 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덕방 수십 년에 겨우 깨친  것을 진마담을 바로 꿰뚫어보았군. 나도  아직 확신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놈의 산업화란 것이  지금 같은 속도로 계속 진행된다면  진마담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영희가 셋방으로 돌아가니 새벽부터 청과물 시장에 나간다고 수선을 떨던 강억만이  벌써 
돌아와 있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는지 줄담배를 피워대  방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아유, 오소리 잡는 거예요? 뭐 해요?"
 영희가 가볍게 핀잔을  주며 방문을 활짝  열어제치자 억만이 멀거니  영희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집에 들어가기 겁나 대문 밖에 쭈그리고 앉은 아이 같았다.
 "그런데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영희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자살 소동에 놀라 얼떨결에 영
희와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 생활까지 시작했지만 그것도 총각 명색이라고 요즘 들어 은근히 
후회하는 눈치를 보이는 억만이었다. 영희는 그게 아니꼬웠으나 그럴수록 현숙한 아내 흉내
를 냈다. 애초부터 사랑만으로 한 결합은 아니었다.
 "음, 그럴 일이 좀 있어."
 억만도 제법 지긋한 남편 티를 냈지만 영희는 이미 그가 당한 낭패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
고 있었다.  보나마나 돈문제일 터였다. 이상스러울  만큼 아버지를 겁내는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지난 일 년 간 탕진해버린 돈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 딴은 정신차려 장사를 해
보겠답시고 청과물 시장을 기웃거렸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못했다. 경매에도 끼여보고 중간 
도매상도 해보았지만 본전 깍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경매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셨군요. 많이 깨졌어요?"
 "그게 아냐."
 억만은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젠 경매에도 낄 처지가 못 된다구."
 "그게 무슨 소리예요?"
 "겨울 채소는 단가가 높아 내 밑천으로  잡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 간혹 나오면 그때는 
나같은 쫄때기(밑천 작은 장사꾼)들이 까맣게 붙어 제 살 깍기를  하는 바람에 손해보기 십
상이구."
 영희는 생각보다 억만의 막장이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은근히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마음속에서 여물어가고 있는 계획에  억만을 끌어들이는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당신 밑천이 그렇게 줄었어? 그럼 큰일이잖아? 아버님께서 아시면 어떡해? 나 이러다가 영
영 시집 못 들어가게 되는거 아냐?"
 영희는 먼저 그렇게 억만의  마음을 흔들어보았다. 예상대로 시아버지를  들먹이자 억만은 
더욱 겁먹은 아이같이 되었다.
 "쓸데없는 걱정 마. 봄이 되어 물량이 쏟아지면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장사두 많아.  이 강
억만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구."
 입으로는 그렇게 큰소리를 쳐도 표정은 거의 울상이었다. 영희는 그런 억만을 한 번 더 혼
란시켰다.
 "아버님이 언제까지 기다려주실 눈치가 아니시던데? 점때 봐요. 하라는 장사는 안 하고 계
집질만 했다고 성화 내시지 않았어요? 언제 원금가지고 들어오라고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
다구요."
 억만이 시아버지로부터 원금 들어놓고 장사 치우란  소리를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줄  알고 
있는 영희였다. 그러면서도 시침을 떼고 억만에게는 최악이 되는 그 상태를 한 가정으로 상
기시키자 효과는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야? 그리 되면 약이라두 먹구 칵 죽어버리는 거지 뭐."
 억만이 갑자기 비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영희가 놀란 체하며 그런 억만에게 다가들
었다.
 "당신, 약해빠진 소리 마세요. 사람이 죽을 각오로 덤비면 못 할 일이  어디있겠어요? 그러
지 말고 힘을 내요."
 영희는 오래 함께 살아온 현숙한  아내처럼 억만을 위로하며 격려했다.   그럴수록 억만은 
영희에게 매달렸다.  응석부리는 덩치 큰 아이 같았다.
  "실은 다 틀렸어. 지금 몇 푼 남은 것도 여기저기 걸린 외상 갚으면 똔똔(입출이  같음)이
야. 벌써부터 죽을 생각뿐이었다구."
 그러면서 난데없이 눈물까지 흘렸다.  그걸로 미루어 억만의 상태는  영희가 생각하기보다 
더 절망적인 것 같았다.  영희는  그런 억만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자기의  제안을 유도하게 
만들었다.
  "너무 걱정마세요. 우린 백년해로할 부부잖아요. 함께 머리를 짜내보면 뭔가 수가 있을 거
예요."
  "수는 무슨 수가 있어?"
  예상대로 억만은 영희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영희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머뭇
거리며 말했다. 
  "우리 이렇게 해보는게 어때요?"
  "뭘 어떻게?"
  억만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영희를 보며 물었다.  영희는 이제  방금 생각했다는 듯 더듬 
더듬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것...  아버님 힘을 한 번 더 빌리는 게 어때요?  그래서 한꺼번에 갚으
면..."
  "그럼 아버지한테 또 돈을 얻어내란 말이야?  어림없는 소리."
  "그게 아니라--  잠시...  아버님이 가지신 땅을 좀 빌리는 거예요."
  "땅을 빌려?  땅을 빌려 뭘해?  농사라도 지을 거야?"
  "농사를 짓자는 게 아니고--  그걸 팔아 사업을 하는 거죠.  그래서 돈을 벌면 다시 사드
리면 될거 아녜요?"
  "그거 땅 팔아 사업을 하는 거죠.  그래서 돈을 벌면 다시 사드리면 될 거 아녜요?"
  "그 거 땅 팔아 돈 달라고 하는 소리나 다를 거 없잖아?  당시, 아버지 못 봤어?  손톱이
나 들어갈 것 같애?"
  "아버님이 반대해도 할 수 있어요."
  "뭐?  그럼, 아버지 몰래 땅을 팔아먹잔 말이야?"
  거기서 억만은 버럭 역정까지 내었다.  어떤 면에서는 아직 그만한 성실함과 순진성이 남
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희는 그런 억만을 참을성 있게 달랬다.
  "팔아먹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거라고 했잖아요?  돈 벌어 다시 사드리면 되잖아요?"
  "세상이 당신 맘대루야?  돈 그거 벌구 싶다구 막 벌어지는 거야?"
  억만은 그렇게 완강히 버티었다.  그래도 영희는 한 살 아래인  억만을 십 년쯤은 손위가 
되는 엄한 남편 모시듯 고분고분 달랬다.  그러다가 이제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졌지만 몸까
지 동원했다.  억만을 어르는 척 하며 성적인 자극을 주어  대낮에 방사까지 치르고서야 겨
우 억만을 설득했다.  아마도 그날 영희는 일생을 통해 익힌 성의 기교를 가장 정성들여 펼
쳤을 것이다.
  "먼저 등기소에 가서 아버님 이름으로 등기 권리증부터 신청하셔야 해요.  아버님은 그게 
바로 땅인 줄 알고 꾸욱 끌어안고 계시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잃어버렸다고 신청하면 
얼마든지 다시 나오는 거라구요.  위임장만 있으면 당신이 대신 찾을 수도 있고."
  언제나 그렇듯이 한차례 만족한 방사가 있고 한동안 멍청해져 누워 있는 억만에게 영희는 
정사장한테 들은 대로 차근차근 일러나갔다.
  "그 다음에는 적당한 핑계로 아버님 인감도장을 빼내세요.  그리고 사법서사에게 가서 부
동산 매매 일체를 위임한다는 내용의  위임장을 작성한 뒤 그 도장을  찍으세요.  어렵기는 
구청에서 인감증명을 떼는 일인데, 그때는 그 위임장과 당신 주민등록증 외에 주민등록등본
을 준비해가세요.  당신이 아버님의 맏아들이란 걸 보여주면 구청 서기도 그리 까다롭게 굴
지는 않을 거예요.  정히 까다롭게 굴면 몇 푼 집어주는 것도 좋구요..."
  그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억만을 설득하기는 했지만 영희가 마음졸일 일은 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이 서른에 가깝도록 엄한 아버지 밑에서  눈치만 보고 자란 억만
이라 아버지의 큰 재산 한 덩이를 훔쳐내는 일은 처음부터 자신없어했다.  영희가 아니었으
면 엄두조차 못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은 억만의 아버지 강칠복 영감의 일생에 걸
친 성취이자 자부였다.
  나중에 들어 안 일이지만 원래 강칠복은 여주 들 민문의 역촌에서 대를 이어 소작인으로 
살아온 집의 막내였다.  열아홉에 집을 나와 서울로 갔으나 사대문  안에는 끝내 자리를 잡
지 못하고 겨우 강남 잠실 근처에서 막노동과 소작으로 힘든  삶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해
방이 되고 토지 개혁 바람이 불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해방 전후사를 인식하는 데 토
지 개혁 문제는 주요한 쟁점이 된다.  북한의 초기 정치  공세에서뿐만 아니라 남한의 잘나
고 똑똑한 지식인들도 남한의 토지 개혁은 정의롭지도 않고 철저하지도 못했다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북한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를 실시한 데 비해 남한은 반
동 지주 세력의 방해로 턱없이 늦어서야, 그것도 유상 몰수, 유상 분배라는 어정쩡한 형식으
로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그걸 두고 은근히 북한 정권의 정통성까지 유추하기도 한다.  형식 논
리로 보면 별로 흠이 없는 논의다.  그러나 한 사회의 체제라는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수상
쩍은 고의를 감춘 몰아세우기의 혐의가 짙다.  박한은 출발부터  사회주의 정권이었고 거기
서는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할 필요도  없고 보상을 
할 필요도 없다.  또 보상을 하지 않고 거둔 토지인 만큼 당연히 무상으로 나누어주어야 한
다.  만약 북한이 유상 분배를 했다면 그것은 바로 범죄를 구성할 것이다.  거기에 비해 불
행히도 남한은 미 군정 3년이 있은  데다 사유를 존중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한  사회였
다.  관리의 태반이 미서 전쟁에서 이기고 필리핀을 넘겨받았듯 태평양 전쟁에서 이겨 한반
도를 물려받은 것쯤으로 생각하고 온 군정청에 자기 나라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토지 개혁
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도 그들이 택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유를 부인할 논리에 궁색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상 몰수와 유상 분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
도 있다.  거기다가 토지 개혁 논의에서 더 심한 몰아세우기의 혐의는 그 효과를 둘러싼 억
측과 단정들에서 드러난다.  역시 형식 논리로는 정의롭지도 못했고  철저하지도 못한 토지 
개혁이었으니 그 효과도 당연히 없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반증들이 있다.  그 산 증인이  바로 강칠복씨 같은 이
들이다.  서른이 넘도록 무릎댈 땅  한 뼘 없이 소작으로만 살아온  강칠복씨에게 처음으로 
토지 소유자의 기쁨을 맛보게 해준 것은 바로 토지 개혁의  풍문이었다.  물론 거기서도 북
한의 예가 영향을 주었겠지만 불안한 지주들이 헐값으로 땅을 내던진 탓이었다.  특히 정부 
수립 직후 제헌국회가 토지 개혁을 실시하리라는 풍문이 돌면서 지주들의 불안은 더해 그해 
강칠복씨는 그 땅의 한 해 수확을 약간 웃도는 값으로 잠원동의 땅 칠백 평을 얻을 수 있었
다.  거기다가 토지 개혁으로 얻게 된  말죽거리 싸릿재 근처의 밭 2천  평은 강칠복씨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농사에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그에게는 서울이란 거대한 소비지를 
가까이 둔 야채 농사가 논보다 나은 벌이를 주었다.  솔직히  그에게는 자신이 땅값을 물었
다는 걸 거의 기억 못 할 만큼 지가 상환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분할해 내는 상환금이 
그의 관념에 뿌리박은 소작료보다 오히려 적었기 때문에 소작에 익숙한 그에게는 몇 해 소
작료 물고 나니 땅이 거저 생겼다는 느낌 뿐이었다.  토지 개혁의 풍문에 휩쓸리기 이전 일
반적인 소작 조건은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을 반반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료와 이엉의 재료로 약간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볏짚은 으레 지주의 몫이 되고 
또 소작인에게는 가외의 노동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소작인의 분할 상환금은 수확의 
절반을 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강칠복씨가 소유한 나머지 토지는 모두  땀흘려 일하고 
피나게 절약하여 모은 것이었다.  오남매 중에서 겨우 맏아들  억만이만 중학교를 졸업시킨 
일로도 강칠복씨의 절약과 인색이 어떤 것인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토
지에 대한 집착은 유별날 수밖에 없었다.  억만은 그런 아버지의  땅을 건드리는 데 본능적
인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달래기도 하고 애원도 해보았지만  일주일이 되도록 머뭇거리기
만 하다가 영희가 다시 한번 비상 수단을 동원해서야 겨우 서류를 갖춰왔다.  그 동안의 모
든 실패를 강칠복씨에게 일러바치겠다는 영희의 위협이 억만을 몰아세운 것이었다.
  어렵게 손에 넣은 등기권리증과 매매위임장, 인감증명을  가지고 강칠복씨의 말죽거리 배
밭 3천 평을 복덕방에 내놓은 영희는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보살 마담을  찾아가 자신의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보살 마담을 아직 배운장을 지키고 있었다.  자
신의 요정을 위세 좋게 드나들던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4.19와 5.16을 거쳐 제  3공화국에 
이르는 동안 하루아침에 감옥에 던져지거나 알거지가 되고 드물게는 교수대로 끌려가는  것
을 보면서 더욱 불심이 깊어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질척한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지 않은 듯
했다.  거의 일 년 만인데도 영희가 찾아뵙겠다는 전화를 하자 보살 마담은 까닭도 묻지 않
고 기꺼이 받아들여주었다.
  "너도 내 집 드나든 지 하마 5년이 넘지? 보자-이리 가까이 와봐."
  사람들이 찾아오면 늘 그렇듯이 영희가 정한 시간에 찾아가자 보살 마담은 상을 보는 일
부터 시작했다.
  "지난 정초에도 보셨는데 뭘 또 보시려구요? 팔자 험한 년 관상 언제 봐도 그게 그거지."  
  "아니다.  상이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를 수 있는 거야."
  보살 마담은 그러면서 전에 없이 세밀하게 영희의 얼굴을 살폈다.   말투도 전과 달리 세
상일에 심드렁한 사람처럼 툭툭 던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할망구, 사람만 오면 얼굴 들여다보더니 이젠 정말로 뭘 좀 알게 된 건가.'
  영희도 덩달아 진지해져서 한동안 그녀가 하는대로 얼굴을 맡겼다가 물었다.
  "그래, 어떠세요? 정초하고 비교해서는.  무슨 좋은 수가 생길 것 같아요?"
  "글쎄다.  그것까지는 모르지만 상은 참 많이 변했다.  뭔가 새로운 게 비치기는 하는데... 
도화살이 다 걷혀가고..."
  그 말을 듣자 영희는 은근한 기대까지 품고 물었다.
  "도화살이 걷혔다면 음전한 맏며느리상이라도 나왔나요?"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화류계와의 악연에서는 벗어날지도 모르지."
  수십 년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뚜쟁이답게 비정할 때는 비정하고 음흉할 때는 음흉스럽
기 그지없는 보살 마담이었다.  전에도 불법이다, 인연이다, 상이다, 색주가 주인에게는 어울
리지 않는 소리들을 늘어 놓았지만 사실 그녀의 비범이나 탈속함을 믿어주는 아가씨들은 별
로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영희는 왠지 그녀를 믿고 싶어졌다.  그녀를 찾아온 목적에도 그 
편이 유리하기 때문인지 몰랐다.  영희는 지금 그녀에게 백만 원이란  적지 않은 돈을 별다
른 담보 없이 빌릴 작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날 보자고 한 까닭은 뭐야? 목소리가 매우 간절하던데."
  어떻게 보면 느닷없고 가망 없는 부탁이라 영희가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는데 보살 마담
이 때맞춰 물어주었다.
  "저어 사장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언니라고 불러라.  중생은 다 형제 자매니라."
  나이 차이가 이십 년에 가까워 언제나 호칭을 얼버무려오다가 겨우 찾아낸 사장님이란 호
칭을 보살 마담은 도통한 스님처럼 그렇게 바꿔주었다.
  "그럼 저... 어, 언니, 저 돈 백만원만 빌려주세요.  잡힐 것도 없고 기한도  정하지 못하지
만...꼭 갚고 이자도 힘껏 쳐드리겠어요."
  영희는 말을 낸 김이라 한꺼번에  차용 조건과 변제 방식까지 털어놓았다.   보살 마담은 
특별히 놀라거나 어이없다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만 원이라... 그거 적은 돈이 아닌데. 아무리 요샛돈이라지만 강남으로 좀  빠지면 그런
대로 살 만한 집 한 채 값이야.  그 큰돈을 담보도 기한도 없이 빌린다..."
  그렇게 보살 마담은 꼭 남의 얘기를 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보살 언니를 찾아온 거예요.  언니라면..."
  갑자기 불안해진 영희가 다급하게 말을 받아놓고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원래는 준비
한 말이 많이 있었으나 왠지 자꾸  말문이 막혔다.  보살 마담이 여전히 남의  얘기를 하는 
사람처럼 흐려진 영희의 말끝을 붙들었다.
  "언니라면... 무어냐? 어째서 내게 오면 된다고 믿게 됐지?"
  영희에게는 감동적인 말로 그녀를 설득시킬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며,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얼마나 성공의 확률이 높은가
에 대해서,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기회가 주어지자 더욱 말하기 힘들어졌다.  갑자기 자신
의 계획이 황당하기 그지없고 그걸 바탕으로 그렇게 큰돈을 빌리려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으
로 느껴졌다.
  "모르겠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어째든... 보살 언니라면 어떻게 해줄 것 같았어요."
  한참이나 망설이던 영희가 갑자기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자 보살 마담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지금 내게 그만한 돈이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그런 
애매한 돈을 빌려줄 순 없겠어."
  영희는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지레 짐작으로 맥이 빠져  대꾸 없이 
앉은 영희를 한동안 물끄러미 살피던 보살 마담의 다음 물음이 다시 일을 풀어나갔다.
  "도대체 용처가 어디야? 뭘 하려는데?"
  영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제서야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제는  돈을 빌리는 일보
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선배에게서 자신의 설계한 남은 삶을 검토받는다는 기분이 앞
섰다.  다소간 마음이 풀려서인지 영희의 얘기는 미리 준비했던 것보다 더욱 진지하고 세밀
해졌다.  거기다가 충분한 감정 이입까지 일어나 얘기를 마쳤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두 볼에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한번 마련해보지.  일주일이면 되겠어?"
  이윽고 꿈결에서처럼 보살 마담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영희와는 달리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양재동 배밭을 내놓은 부동산에서 급한 전갈이 온 것은 그러부터  사흘 뒤였다.  그날 무
슨 일인가로 밖에 나갔던 영희가 셋방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억만이 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복덕방에서 안집으로 전화가 두 번이나 왔어.  그 땅 살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럼 얼른 가봐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구, 이런 일은  꾸물거려 좋을게 하나두 없어
요."
  영희가 그렇게 받으며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자 억만이 갑자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
였다.
  "그런데 말이야, 저쪽이 여간 깐깐하지 않은가 봐.  어쨌든 아버님의 의사가 확실한 걸 증
명해야 된대.  아버님도 모시고 오라면 어떡하지?"
  "그건 제게 맡겨요.  당신은 아버님 인감도장만 들고 나올 수 있으면 돼요."
  영희는 그렇게 자신없어하는 억만을 안심시키고 그 길로 땅을 내놓은 부동산 사무실을 찾
아갔다.  마흔 줄인 부동산 중개인도 억만과 같은 걱정을 했다.
  "어쨌든 그 사람에게 연락이나 해주세요.  그 사람은 원하는 땅 얻고 우리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요."
  영희는 이번에도 자신있게 부동산 중개인을 달랬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가 나타나자 일
은 영희의 뜻 같지 못했다.  연락을 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나타난 원매자는  예상과 달리 
젊은 사람이었고 또 전문가인 듯했다.  영희 나름으로는 갖출 만큼 갖춘 서류인데도 계약은 
땅 소유주인 강칠복씨와 하기를 원했다.
  "보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이 땅만 하자 없이 가지실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녜요?  막말
로 이 땅을 우리가 아버님 몰래 팔아먹는 거라 칩시다.   우리야 아버님에게 멱살을 잡히든 
따귀를 맞든 그쪽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영희가 그렇게 달래보았지만 그 젊은 원매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부동산은 등기부주의가 아니고 사실주의에 바탕하고 있어요.  서류가 완벽하
게 갖춰졌다고 해서 그걸로 곧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 두 분께서 
부친의 의사에 반해서 부동산을 넘기셨을  경우 부친께서는 실질상의 소유주임을  증명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땅은 일단 부친께로 돌아가고 멱살잡이는 우리끼리  해야 된단 말입니
다."
  영희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중 영희가 그렇게 힘들여 부동산 관계 법령 공부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날 그 젊은 전문가가 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로 물러날 수 없는 영희였다.
  "그럼 할 수 없죠.  우리 이렇게 해요.  오늘은 계약만  우리와 하고 중도금, 막대금 때는 
아버님을 입회시키죠.  나오셔봤자 그게 그거겠지만  댁에서 하도 못 믿으시니  그렇게라도 
하는 수밖에요."
  그래도 그 젊은 원매자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때 술상머리에  앉아서 수없이 보아오는 
동안에 터득한 영희의 협상 기술이 다시 빛을 뿜었다.
  "할 수 없죠.  저, 사장님, 그럼 딴 데 더 알아봐주세요.   우리도 그리 급한 건 아니니까.  
정히 안 되면 계약금 두 배 따먹는 것도 쏠쏠한 재밀 텐데..."
  영희가 그렇게 한편으로는 밀고 한편으로는  당기면서 핸드백을 챙기고 일어나자  비로서 
그 젊은 전문가가 생각을 바꾸었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만입니다.  중도금과 막대금 때에는 반드시 강칠복씨 본인이 나와야 
돼요.  그렇잖으면 계약금의 두 배를 위약금으로 무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비로소 계약으로 들어갔다.  끝내 팔 땅이 아닌 만큼  가격 절충은 쉽게 이루어
졌다.  사는 사람이 넉넉하다고 생각할 만큼 영희가 양보해준 까닭이었다.  영희로서는 계약
서와 약간의 계약금만 수중에 넣으면  되었다.  땅값은 터무니없다고 할 만큼  싼게 오히려 
영희에게 유리했다.  결국 김사장이 일러준 최저가인 천만 원에 계약금 50만 원으로 양재동 
배밭의 매매 계약은 체결됐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당신 다음에 아버님 모시고 나올 자신 있어?"
  셋방을 돌아온 억만은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 영희에게 물었다.   영희는 여전히 속셈을 
숨기고 좋은 말로 그를 달랬다.
  "걱정 마세요.  그 사람 똑똑해 봬도 헛똑똑이라구요.  이제  우리에게 코가 꿰인 거예요.  
두고 보세요.  결국은 당신에게 도장받는 걸루 만족할테니."
  그래도 억만은 영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당신은 딴 걱정  말구 시내 목좋은 곳에 가게 
터나 하나 봐두세요."
  영희는 그렇게 억만을 달래 돈 십만 원을 쥐어주며 쫓아내듯  밖으로 내몰았다.  이제 영
희의 그 한편의 시나리오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억만이 마지못해 나간 뒤 영희는 정
성들여 분장을 했다.  화장은 되도록 옅게 하고 옷차림도 주부 티가 물씬  나게 해 그 동안 
몸에 밴 술집 색시 티를 씻어내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아랫배에 스웨터 하나를 묶어 눈여
겨보면 아이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게 꾸몄다.  영희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빈방에 앉아 생
각을 간추리고 전의를 다진 뒤에야 셋방을 나섰다.  이제 그녀는 그렇게 완강히 받아들이기
를 거부해온 시집으로 돌진하려는 것이었다.   한바탕 악전고투가 예상되지만 그녀는  애써 
자신의 승리를 믿으려 했다.  시집은 잠원동 허허벌판 가운데 있는  작은 동네인 데다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ㄱ자 옛 초가집에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꾼 
본채와 시멘트 벽돌로 덧붙인 별채가 제법 규모를 갖춰 고만고만한 마을 집들 중에는 그래
도 여유 있는 살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 사거리에 서울 사람이 새로 지은 이층 건물을 
빼면 제일 큰 집일 성싶었다.  영희는 멀리서 심호흡을 하고 그 집 대문께로 다가갔다.  그
때 대문이 열리며 전에 본 적이 있는 손아래 시누이가  나왔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농사일
을 거들고 있다는 열예닐곱의 소녀로 한눈에 영희를 알아본 듯 그 눈길이 곱지 않았다.  영
희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저어 누구시더라-전 아줌마를 잘 모르겠는데요."
  시누이가 그렇게 암팡지게 대답하고는 왼고개를 틀었다.  그대 다시  누군가가 대문을 밀
고 나왔다.  입대를 앞두고 있는 시동생이었다.  누이 동생과 함께 가까운 비닐하우스에 참
이라도 날라주려는 것인지 짐 싣는 자전거 뒤에 보자기 씌운 플라스틱 함지박을 싣고 있었
다.  영희는 구원군이나 만난 듯 사람 좋고 순해 뵈는 그 시동생에게 매달렸다.
  "도련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아, 네.  혀, 형..."
  만약 뒤따라나온 시어머니가 아니었으면 그는  아마도 형수란 말을 다  뱉어냈을 것이다.  
목덜미까지 시뻘개지는 게 그의 난감한 심리를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형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존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찬바람 도는 얼굴과 쌀쌀맞은 목소리
가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이게 누구야? 전에 억만이하고 같이 왔던 색시 아냐?"
  시어머니는 그렇게 영희를 알은체했다.  영희는  그게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졌지만  내색 
않고 공손히 허리부터 굽혔다.
  "어머님, 저 왔어요."
  그러자 시어머니의 표정이 홱 변했다.  쌀쌀맞음에서 금세 물어뜯기라도  할 듯 표독스러
움으로 잘라 말했다.
  "집을 잘못 찾아온가 보네.  나는 거기 같은 딸을 둔 적이 없는데."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긴한 일이 있어서..."
  "일 읎어.  우리는 전수(전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만 돌아가셔."
  여주 사투리까지 튀어나오는 게 길게 늘어붙으면 한바탕 퍼대서라도내쫓을 기세였다.  올 
때 이미 그만한 각오는 하고 온  영희였다.  그런 시어머니 발 앞에 금세  엎드리기라도 할 
듯 더욱 깊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어머님, 아버님 심려를 제가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일은..."
  "도대체 누가 어머니고 누가 아버지야? 일 읎으니 길이나 비켜."
  그때 영희의 기대대로 시동생이 구원을 나섰다. 
 "엄마, 무슨 일이 있다지 않아?"
  그리고는 자전거에 덜렁 몸을 실으며 영희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따라오세요.  아버지는 지금 하우스에 계세요."
  영희도 시어머니나 시누이와 실랑이를 벌여봤자 득될 게 없다  싶어 그를 따르기로 했다.  
  "그럼 아버님을 찾아뵙고 여쭙겠어요.  용서하세요."
  예의 갖춰 머리까지 숙이고 시동생을 따라나섰다.  비닐하우스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
다.  시아버지 강칠복씨는 새로 놓인 제3한강교가 저만치 보이는  곳에 외따로 지어진 비닐
하우스 안에서 토마토 순을 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쓸데없는 실랑이를 줄일 양으로 영희는 
서류부터 챙겨들었다.  특히 시아버지가 목숨처럼 아끼는 등기권리증이 맨 위였다.
  "아버님, 저 왔어요."
  영희는 자신을 쳐다보는 강칠복씨의 곱지 않은 눈길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렇게  말해놓고
는 서류부터 내밀었다.
  "근데 세상에 이것 좀 보세요.  나 참..."
  한평생 땅밖에 모르고 산 순박한  농부는 그런 영희의 술수에 이내  말려들었다.  영희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은 서류 맨 위에  얹힌 등기권리증이 일으키는 궁금증에 간단히  밀려났
다.
  "그게 뭐냐?"
  "아버님께서 한번 보세요.  애지중지하시는 땅 같은데..."
  "보니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읽어봐.  어디 땅이야?"
  강칠복씨는 영희가 오래 전부터 데리고 있던 며느리인 것처럼 재촉해댔다.
  "말죽거리 부근인데요.  삼천 평이구요."
  그러자 강칠복씨의 얼굴이 금세 험악해졌다.
  "뭐? 그럼 우리 배밭 아냐?  그런데 그 권리증이 왜 네게 있지?"
  영희는 정말로 사랑받는 며느리처럼 강칠복씨에게 착 붙어서며 이번에는 계약서를 내보였
다.
  "그럼 이게 배밭을 판 문서란 말이냐?"
  "아직 넘어간 건 아니구요.  계약서예요.   잔금 치르면 넘어가게 되죠."  드디어  사태를 
짐작한 강칠복씨의 눈에 금세 핏발이 섰다.  숨소리도 알아들을 만큼 거칠어졌다.
  "누, 누가 이랬어? 어느 놈이야?"
  "사흘 전 억만씨가 그랬나봐요.  아버님 인감까지 훔쳐서.  그날은 뭔지 몰랐는데 억만씨
가 오늘 나가고 난 뒤에 뒤져보니 땅문서하고 계약서 아니겠어요?  가슴이 떨려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거 팔아 같이 흥청거리면 깨가 쏟아질 텐데 왜?"
  그제서야 영희에 대한  악의를 되살린 강칠복씨가  의심쩍은 눈길로  영희를 쏘아보았다.  
이제 이 장벽은 눈물로 돌파해야 한다-영희는  진작부터 동원하기로 마음먹은 무기로 단순
한 농부의 완강한 악의를 녹이기로 했다.
  "아버님, 정말 너무하세요.  아버님, 어머님이야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는 이미 강씨 집안 
귀신이에요.  이 집안 구하려고 하늘 같은 남편도 저버리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짐작대로 강칠복씨는 보기처럼 완강하지는 못했다.  영희의 신파조 넋두리와 눈물이 얼마 
가기도 전에 그는 원래의 인정  많은 농부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하우스에  들어온 아내의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짐스러워하면서도 드러나게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반대는 했다마는... 그래, 어쨌든 집으로 가자.  가서 얘기하자."
  그리고 영희의 손을 끌 듯이 집으로 데려갔다.  그 다음은 모든 게 영희의 예상 이상으로 
풀려나갔다.  영희는 거기서 모든 잘못을 억만에게 뒤집어씌워 배밭이  처한 상황을 말하고 
아울러 억만의 다른 실패도 샅샅이 일러바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해결책까지 진언
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땅은 지금이라도 무르면 돼요.  계약금을 배로 물어주는 게 아깝지
만 그건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그리고 억만씨는 지금이라도 불러들이세요.  한 짓은 밉지
만 아버님 자식인데 어떡하겠어요?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집에서 아버님이나 도
우며 성실하게 일하는 농부가 될 거라구요."
  그때쯤은 시어머니의 도끼눈에도 희미한 감동의 빛이 어렸다.  그날  영희가 설득에 가장 
힘이 들었던 것은 오히려 억만이었다.  멋모르고 영희가 시키는 대로 나갔다가 돌아온 억만
은 영희에게서 일의 전말을 듣자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펄펄 뛰었다.
  "뭐야? 뭐라구? 그걸 모두 일러바쳤어? 아이쿠.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러다가 무려 두 시간이나 영희의 애원과 설득을 받고서야 겨우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
개를 끄덕였다.

    제7장
  머나먼 스와니 강
  주위가 수런거려 눈을 떠보니 벌써  창이 훤했다.  시험을 위해 재걸에게  빌려둔 시계는 
일곱시 어름을 일러주고 있었다.  인철의 흐릿한 머릿속에도 퍼뜩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철은 먼저 타는 목과 쓰린 속부터 달래볼 양으로 수도관으로 달려갔다.  난방이 
부실해 얼어 터지기 직전의 수도관으로 들어온 수돗물은 한모금으로도 정신이 확 돌아올 만
큼 찼다.  이가 너무 시려 몇 번이나 쉬어가며 한참을 마시고 나니  이내 온몸에 한기가 돌
았다.
  평소 같으면 그 독서실에 기숙하는 학생들로 붐빌 수돗가가 그날은 이상하리만큼 비어 있
었다.  입학 시험날이라 저마다 서둘러 세수들을 하고 아침을 먹으러 나간 듯했다.  인철도 
다급해져 오스스한 한기에도 불구하고 세수를 시작했다.  금세 얼굴과 두 손의 감각이 모두 
마비될 만큼 물이 찼지만 정신은 한결 맑아졌다.
  '내가 또 객기를 부렸구나...'
  자신도 모르게 후들후들 떨며 인철은 뒤늦은 후회에 빠졌다.  전날 용기와 재걸이 찾아와 
긴장을 풀어준답시고 한잔 권하는 술을 오기로 되 받아치다가 과음을 한 것이었다.  방학인
데도 밀양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준 그들의  우정 어린 격려를 공연히 삐딱하게만  받아들인 
자신이 새삼 한심스러웠다.
  텅 비어 있기는 숙사도 마찬가지였다.  숙사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게단 밑을 포함한 독서
실 한구석에 합판으로 칸막이를 쳐 만든 대여섯 평의 다다미방이었다.  그런데도 그 숙사를 
쓰기 위해 온날(전일) 입실권을 끊는 사람은 언제나 스물이 넘었다.  따로 하숙을 하거나 자
취방을 얻을 처지가 못 되는 지방 학생들에다, 백 원이면  되는 여인숙비도 비싸 학생을 가
장하고 30원에 하룻밤을 나려는 젊은 떠돌이들이 그방의 단골이었다.
  평소 숙사는 모두가 모로 눕는 칼잠을 자도 자리가 모자라 온날 입실권을 끊은 사람도 절
반은 독서실에서 의자를 이어놓고 자야 할 정도였다.  따라서 날이  밝아 하나둘 일어나 빠
져나가면 자리가 넓어지는 게 좋아 바쁘지 않은 몇몇은 해가 높이 솟도록 늦잠을 잤다.  거
기다가 독서실 의자 위에서 불편하게 밤을 새운 사람들이 다시 빈자리에 끼여들어 그 시각
엔 방이 반 이상 차 있게 마련인데 그날은 신통하리만큼 아무도 없었다.  입학 시험의 긴장
이 관계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감염된 듯했다.  사물함에서 수건을 찾아  얼굴을 닦은 인철은 
필기구와 응시표를 챙겨 숙소를 나설 채비를 했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떠들면서 숙소
로 들어왔다.
  "작년에는 말이야.  입시날이 바로 1.21사태가 있었다구.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말
이야.  시내버스로 응시장에 가는데 총소리가 나고 요란뻑적지근 했지.  나는 시험도 못 치
르고 군대부터 끌려가야 되는 줄 알았다니까."
  "맞아.  나는 학교 옆에 방을 얻어 자는 바람에 시험이  끝난 뒤에야 알았지만 나중에 들
어도 완전히 '나바론'이더만."
  목소리를 들으니 단짝으로 붙어다니는 삼수생들이었다.  둘 다 지방  명문고 출신으로 비
록 두번씩이나 낙방했지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하나는 법대를 지망하
고 하나는 문리대 정치과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이미 시험의  반은 통과한 사람들  같았다.  
처음 인철은 같은 나이란 것 때문에 남다른 기분으로 그들을 대했으나 그 턱없는 으스댐에 
단 한 번 대포 한 잔을 나눈 것으로 그들과의 개별적인 교유는 끝나고 말았다.
  "어? 그래도 일어나기는 일어났구먼."
  벌써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는지 성냥개비로 이빨을 쑤시며 들어오던 법대 지망생이 먼저 
인철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이어 정치과 지망생도 다분히 빈정거림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술을 깼어요? 수험 번호는 외울 수 있겠어요?"
 인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간밤 그들에게도 적잖이 객기를 부린 일이 떠올랐다.  평
소 인철이 자신들과 같은 대학을 지망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터무니없고 불쾌한 일로 여기
는 듯한 그들은 인철이 어젯밤 늦게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오자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
고받았고, 그들을 아니꼽게 여겨오던 인철은 짐짓 더 비틀거리며 숙소로 들어갔다.  그런 인
철의 귓가에 그들끼리 주고받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기록 하나 남기자는 거겠지.  썩어도 준치라고 떨어져도 일류 대학 아냐?"
  그렇잖아도 마시지 않아야 할 술을 오기로 더 마신 인철이었다.  용기와 재걸이 작년, 재
작년에 들어간 대학을 이제야 가게 되면서도 입시에 아둥바둥 매달려야 하는 자신을 보여주
기 싫어 대포를 주전자 술로 바꾸고 허세를 부린 끝이라 그들의 수군거림을 그대로 들어넘
길 수가 없었다.
  "설마 사람 뒤통수에다 대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고, 그거  두 분 서로간에 위로하는 소리
죠?"
  인철이 몇 발자국 되돌아가 두 사람에게 그렇게 묻자 두 사람은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을 받지 못했다.  그걸 보고 인철이 한마디 더 보탰다.
  "나는 아직 한번도 대학 입시에 떨어져보지 못해 잘 모릅니다만 떨어지고 나면 다 같을걸
요.  일류대에 떨어졌든 따라지대에 떨어졌든.  그런데 명문 고등학교 나와 두 번씩 떨어지
다 보면 어느 대학에 떨어졌느냐도 중요해지는 모양이죠?"
  그러고는 숙소로 들어가 잠들었는데 지금 정치과 지망생의 빈정거림에는 간밤 그렇게  당
한 앙금이 남은 듯했다.
  "수험 번호를 못 외면 응시표 보고 쓰면 되죠.  건투를 빕니다."
  시험 아침까지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 까닭은 없어 인철은 그렇게 얼버무리고 숙소를 나왔
다.  두 사람도 따라오며 시비할 기분은 아닌지 그정도로 인철을 놓아주었다.  인철은 독서
실을 나오다 다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한 떼의  수험생들을 만났다.  겨우 두달이
지만 서로 얼굴과 이름은 익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철에게 유달리 호감을 
보이는 수험생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레 말했다.
  "이제 아침 먹으러 가는 거야?  서둘러."
  제대를 하고 뒤늦게 대학 진학 준비를 시작해 그 독서실의 수험생들에게는 영감이란 애칭
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인철도 자신이 아침까지  굶어야 할 정도로 늦
잠을 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깨어나자마자 들이켠 차가운 수돗물로 몸이 심하게 떨리는 
데다 빈속으로 하루종일 시험을 치르는 것 또한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평소 이용하는 밥
집으로 갔다.  독서실 수험생들이 한차례 다녀갔지만 밥집은 아직도 붐볐다.  30원짜리 사구
려 밥이지만 맛이 있고 양이 푸짐해 학생들말고도 근처에 단골이 많은 까닭이었다.
  "할머니, 행장국 한 그릇만 말아주세요."
  인철이 한구석에 끼여앉으며 그렇게 소리치자 방금 시래깃국을 뜨고 있던 할머니가  솟는 
김을 피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학생은 오늘 시험 안 치나?  난데없이 웬 해장국고?"
  "그리 됐어요.  밥은 조금 말고 고춧가루나 얼큰하게 쳐주세요."
  "거참, 알다가도 모리겠네.  다른 학생들은 오늘 시험이라 카미 밥에다 달갈(달걀)이나 두
부까지 얹어 묵든데..."
  할머니는 그러면서도 더는 군말없이 해장국을 말아주었다.  선지와 콩나물을 주된 재료로 
끓인 해장국인데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하기는 간밤의 술도 내일 입시를 치를 수험생으로
는 지나쳤다는 뜻이지 해장국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과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해장
국 한 그릇을 다 비운 인철은 다소 느긋해진 마음으로 사직공원 길을 따라 내려갔다.
  내자호텔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수험장인 동숭동까지는 반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인
데도 시간은 이제 7시반으르 조금 넘기고 있었다.  9시까지 시험장  입자에는 큰 무리가 없
을 듯했다.  인철의 계산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내자호텔 앞 버스 
정류장에는 독서실에 기거하는 수험생들 몇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알음에 따라 격려를 나
가는지 그날 시험이 없는 친구들도  함께 추위에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을 
보자 용기와 재걸이도 시험장에 오기로 약속한 게 떠올랐다.   뒷날처럼 그리 유난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때도 입시날은 수험생에 대한 사회 전반의 배려 같은 게 있었다.  시험 시간 한 
시간을 전후로 하여 버스 배차 간격도  줄어들고 차 안이 복잡하면 승객들도  수험생들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그 덕분에 인철은 조금 여유  있다 싶게 수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철이 배정받은 수험 장소는 문리대 건물의 한 강의실이었다.  사전 답사란 명목으로 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날 문리대  건물로 들어서는 인철의 감회는 남다른 바가 있었
다.  삼십여 년 전 그 대학이 한성제국대학으로 불리던 시절 그의 아버지가 그 대학의 입학 
시험에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삼층 건물이 들은 대로 일제 때부터 
있어온 것이라면 그 교정에는 아버지의 발자국도 찍혀 있을 것이었다.
  만약 그때 그가 실패하지 않고 이 대학에 들어갔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  그래서 분
방한 동경 유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도 그의 삶에 다른 무게로 실리게 
되었을까-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가 다시 인철의 의식을 사로잡
았다.  추상적으로 공부를 계속한다거나 진학을 준비할 때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대학과 전
공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 입시 준비를 하게 되면서 인철은 부쩍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그들 부자의 정신적인 대면 중에서도 특히 격렬했던 것은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에 있
었다. 
 이른바 연좌제라고 하는 전근대적 법치술 때문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에 반역적이
었던 아버지로 인해 규정된 신분과 거기에 따른 지리적 공간의 제한은 인철의 전공 선택에 
고통스런 전제가 되었다.  그는 연좌제에 구애됨 없이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 분야, 남한
이란 지리적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도 비교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학문을 골라야 했다.  따
라서 그렇게 만나는 아버지의 영상은 어둡고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을 달랐다.  우연히 떠올린 아버지의 좌절이 인간적인 연민과 이해를 이끌어낸 탓일까, 인철
은 전에 없이 따뜻하고 정감 어린 아버지의 영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겪은 좌
절처럼 아버지 당신의 삶도 당신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때까지는 동정의 여지 없는 고의거나 구제할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만 이해되던  아버지의 
여러 선택들에 대해 그런 호의적인 이해가 시작되고, 나중에는  제법 고전적인 효심과도 일
치하는 다짐까지 중얼거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맛본 당신의 좌절을 이제 제가 만회해보겠습니다...'
  "경성, 경성, 경성, 얏!"
  갑자기 여럿이서 외치는 그런 구호가  감상에 빠져 있는 인철을 깨웠다.   서울의 명문고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중심으로 밑에 모여 있던 그  교 출신의 선배들이 그날 입시를 치
르는 후배들을 격려하는 구호였다.  알뜰한 수험생들은 입실 시간까지  남은 반시간 남짓을 
활용하기 위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한적한 곳에서 노트를 펼치고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
다.  그런 수험생들에게서 보이지 않게 뿜어져나오는 것은 경쟁의 열기였다.  그러나 인철에
게는 그것이 긴장으로 감지되지 않았다.
  '아아, 모스크바, 모스크바.  나는 드디어 모스크바에 왔구나...'
  인철은 그런 그들과 교정을 망연히 둘러보며 좀 엉뚱하게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국민학
교 시절에 즐겨 읽는 '학원 소년소녀  위인전집' 나폴레옹 편 삽화에 곁들여진 글귀가  불쑥 
떠오른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술통인지 화약통인지 모를 둥근 나무통  위에 앉아 불타버린 
모스크바를 내려보며 하는 중얼거림이었다.  인철에게는 자신이 거기까지 이른 것만도 나폴
레옹의 모스크바 입성만큼이나 멀고 험한 길을 거쳐온 것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바닥
에서 바닥으로 기며, 그것도 두 해나 늦었지만, 나는 드디어 이 나라 제일의 대학에  이르렸
다.  이어 그 같은 인철의 비장한 감회는 치열했던 서울에서의 마지막 두 달을 회상하게 만
들었다.
  인철이 형에게서 받은 주소를 찾아간 집은 영등포에서 노량진에 이르는 철로가에 있는 무
허가 판잣집이었다.  원체는 일여덟 평의  시멘트 블록집이었으나 서울로 사람이  몰리면서 
주택난이 빚어지자 좌우로 판잣집을 덧붙여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 된 집인데, 어머니
와 옥경은 그 중 방 한 칸을 세내어 살고 있었다.  도회의  밑바닥 삶에는 어지간히 익숙한 
인철이었지만 처음 집을 찾아들 때의 심경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근처 복덕방에서 주소
지의 위치를 대강 들은 뒤에도 한참이나 묻고 물어 집을 찾고 보니 판잣집이란 말도 과분할 
정도의 움막이었다.  서울 한구석에 아직 그런 주거지가 있다는 게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누구로? 잉이, 인철이 아이라?"
  인철이 방문을 열자 컴컴한 방안에 전등을 켜고 무언가를 깁고 있던 어머니가 그렇게 비
명처럼 소리치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인철도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의 음성에 청각
이 마비되어 설령 어머니가 말을 더 했다 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마비는 눈물로 흐
려진 시각에도 왔다.  방안에 들어설 때만 해도 분간되던 몇 가지 가재 도구와 어머니가 이
내 추상적인 영상으로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더 큰 마비는 의식에 왔다.  잠시 동안 
인철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눈물만 
흘렸다.  이윽고 먼저 눈물을 거둔 어머니가 꺼칠한 두 손으로  인철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
었다.
  "그래, 그 동안 어디 있었드노?  뭘 하며 어예 지냈노?"
  이어 그 동안의 발신인 주소를 쓰지 않은 데 대한 호된 나무람이 있고, 인철의 근황에 대
한 세밀한 물음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인철에게 남은 가족들의 근황을 물을 기회가 주어
진 것은 어머니의 나무람 섞인 물음이 거의 반시간이나 계속된 뒤였다.
  "형님은 제가 만나뵙고 왔고-옥경이는 어디 있어요?"
  "시장에 갔다.  버선 갖다 주로."
  "시장에 버선을 갖다 준다구요?"
  "아, 우리 요새 버선 깁어 산다.  바둑이 구무(구멍:여기서는 눈)마다  수라 카디, 사람 사
는 게 바로 글터라 카이.  너어 형 그래 떠나보냈코 우리 모녀 어예 사노, 카미 적정했디 다 
사는 길이 나드라꼬.  첨에는 내 식모 나가고 옥경이는 공장에라도  보낼라 캤디 우연히 남
대문시장에서 원집사를 안만냈나?  거 왜 밀양서 구제품 옷 뜯어가주고 헌옷장사하던 원집
사 말이라.  그때는 신랑이 바람이 나 젊은 첩산이 데리고  산지사방 쫓아댕기는 바람에 아
아들하고 그 고생이랬는데 인제 그 신랑이 마음 잡은  모양이라.  남대문시장에서 버선장사
를 하는데, 날 만내디마는 그거 한번 깁어보라 안카나?  그래서 쪼매  시작한 게 인제는 큰 
도꾸이(단골)가 됐다."
  "그럼 버선만 기워 생활이 돼요?"
  솔직히 그때의 인철에게는 버선을 기워 살 수 있다는 게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
니가 살이가 어려울 때는 바느질로 벌이를 삼는 걸 여러 번 보아오기는 했지만 버선은 신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시절에 버선만을 기워 살 수 있다니.
  "그게 나도 참 신기하더라 카이.  길가에 나가믄 버선 신은  사람은 눈씻고 봐도 찾기 힘
든데 남대문시장에는 그거만 신띠미(산더미)처럼  재놓고 파는 점바이 하나도  아이고 여러 
개라.  우리 눈에는 안 띄는 것도 나라 전체로 보믄 굉장한 모양이라."
  "그래도 그걸 기워..."
  "야가 뭐라 카노? 감은 저어가 대주고 소캐(솜)넣은 겹버선  한 켤레가 겨우 십 원이지마
는 그것도 물량이라.  하룻밤 새울 요량 잡으면 백 켤레는 깁는데  그기 얼매로? 옥경이 버
선 보따리 들고 시장 왔다갔다하는 품까지 나온다 카이.  이달은 설 대목을 앞두고 있어 이
만 원이 넘을 게고.  오뉴월에도 한 달 만 원 벌이는 나온다  카더라.  거다가 모도(모두)내 
버선 바느질이 곱다 카미 찾아싸이 앞으로는 괜찮을 게라.  아직은 저틀(재봉틀)값 월부 였
고(넣고) 먹고 살기는 빠듯하지마는 자리만 지대로(제대로)  잡으믄 우리 식구 살고도 옥경
이 학교는 보낼 수 있을 거 같다."
  어머니는 전에 없이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그러나 차차 시야가 밝아지면서 인철의 눈에 
점점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이미 바닥까지 갈 대로 간 살이의 피로와 궁핍이었다.  일에 골
몰해 덮어쓴 실밥이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머리칼은 삼 년 전보다 드러나게 세어 있었고 허
리마저 구부정해 보였다.  방안의 가구라고는 여전히 그들 일가의 여행 가방이자 농짝에 해
당하는 버들고리짝과 종이 바른 사과 상자 하나뿐이었다.  있다면  방안에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해 뵈는 앉은뱅이 재봉틀이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말한 대로 아직 완전한 소유물이 아니
었다.
  "그래, 나는 인제 어엘라 카노(어떡할 셈이냐)?  시험이 두 달 남았다며서 여다서(여기서) 
공부가 될라? 이웃에 어디 월셋방이라도 얻어보까?"
  형처럼 과장된 전망을 늘어놓던 어머니가 마침내 걱정스러운 눈길이 되어 인철의  문제를 
물어왔다.  그러나 인철에게는 이미 짜여진 계획이 있었다.
  "아뇨, 여긴 좀 멀어요.  조용하지도 않고,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철길 때문에 조용하지 않다는 건 알겠다마는 멀다이? 니 어디 댕기는 데 있나?"
  "그게 아니구요.  지금까지는 혼자 공부해왔는데 이제는 안 되겠어요.  제가 가려는 대학
에 가려면 일류학원에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그 학원들은 대개 종로에 있어요."
  "그럼 종로에 방을 얻는단 말가?  되게 비쌀 껜데..."
  "그게 아니구요.  친구들한테 들었는데 방을 따로 얻지 않고도  조용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답니다.  독서실이라고 하는데 잠자리는 불편할지 모르지만 방을  얻는 것보다 훨씬 
싸고..."
  "그럼 먹는 거는 어예노?"
  "역시 들은 얘긴데 매식이라고 해서 독서실  부근에는 저 같은 학생들을 위해 싸고  실속 
있는 음식을 파는 밥집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어머니의 두 눈에는 다시 눈물이 맺혔다.
  "삼 년 만에 집이라꼬 찾아온 걸 방 한 칸 못 내주고 다시 거리로 내모는  꼬라지가 됐구
나.  그래서라도 좋은 대학에 꼭 가야제.  안 그랠라믄 삼 년 고생 뭐 할라꼬 했노? 글치만 
오늘 하루는 시끄럽고 쫍디라도 여다서 자고 가래이.  내가 끼려주는(끓여주는) 밥도 한 그
릇 먹고..."
  어머니의 넋두리를 듣고 보니 인철도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날은 집에서  묵는다 쳐도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새로 시행된 예비 시험이 코앞에 닥친  데다 대입 본고사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때였다.  
다음날로 다시 집을 나온 인철은 여러 곳을 돈 끝에  체부동의 한 독서실에 자리를 잡았다.  
종로의 학원가에서는 다소 멀지만 조용하고 입실비가 싸서 있을 만했다.  입시 때까지 인철
은 되도록 집에 가지 않고 어머니나 옥경이가 이따금씩 먹을 것을 싸들고 다녀가기로 했다.  
그때부터 입학 원서를 낼 때까지 달포 남짓은 인철의 생애에서 가장 맹렬한 정진의 시간이
었을 것이다.  네댓 시간 눈을 붙이고 나머지는 공부와 학원에 나가 모의 고사를 치르는 일
로 하루를 보냈다.  인철에게는 아주 뒷날까지도 몹시 바쁘고 길었던 하루처럼 기억되고 하
던 달포였다.
  그러던 인철의 자세가 다시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은 원서를  작성한 날부터였다.  전공을 
결정하면서 겪게 된 갈등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 월북한 아버지는  그의 전공 선택에 두 
개의 전제를 두게 했다.  하나는 그 성취가 연좌제와 무관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
내에서 그 끝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엄격한 연좌제의 적용은 인철에게 군
대나 경찰에서의 출세는 물론 법관이나 행정 관료의 꿈도 꿀 수 없게  했다.  따라서 그 계
통의 전공은 처음부터 제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른 봐서는  이공계가 훨씬 선태그이 폭
이 넓어 보이지만 그것은 또 두 번째 전제에 걸렸다.  학문으로서 국내에서  그 끝을 볼 수 
있는 이공계 전공은 없었다.  외국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어는 그 언어를 모국어로 쓰
는 나라에 가서 그 학문적인 끝을 보아야 하는데, 역시  엄격한 연좌제의 적용은 인철의 외
국 유학을 전혀 불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결국 인문계인 인철에게 남은 선택은 국문과와 사학과중에서도 국사 전공밖에  없었
다.  인철은 그 중에서 국문과를 제1지망으로 하고 사학과를 제2지망으로 했다.  나중에 두
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선택이지만, 그때로서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 
인철이 정작 냉정했던 것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평가였는지도 모른다.  같은 인문계라 하더
라도 전공마다 커트라인의 격차가 있어 인철이 더 욕심을 부렸더라면 합격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철의 그 같은 선택은 그때까지 유지되어온 인철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
들었다.  에이, 그쯤이야, 하는 터무니없는 자만이 고개를 쳐들고 힘들여 해보았자 현실적으
로는 쓰일 곳이 막막해 보이는  전공이 때이른 허망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절정은 
간밤의 폭음으로 이어졌다.
  '내가 심했나...'
 회상이 그쯤에 이르자 인철에게 문득 후회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그리 절실한 것은 아니
었지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쯤은 깨우쳐 주었다.  인철은  그제서야 참고서 한 권 
가져오지 않고 어정거리는 자신이 불안해졌다.
  "저게 바로 마로니에란 나무야.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면  볼 만하지.  마론이라는 열매도 
재미있고.  우리나라에는 몇 그루 없다지 아마."
  그때 누군가 곁을 지나가며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철이 무심코  돌아보니 그 
대학 교복에 배지까지 반듯하게 꽂은 청년이 입시를 치르러 온 듯한 소녀를 안내하며 알려
주는 말이었다.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  나무를 살폈다.  인철도 덩달아 그 나무를 
올려보는데 누가 어깨를 쳤다.
  "임마, 이거 끝까지 배짱이네.  꼭 구경꾼맨쿠로."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만했다.  아직 말소리에 술기운이 짙게 남은 용기였다.  다시 
객기가 인 인철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 말을 받았다.
  "이놈의 학교를 들어가줄까 말까를 망설이는 중이다.  왜, 떫냐?"
  "아, 그라십니까? 제발 우리 학교로 들어와주십시오.  들어와주시기만 하면 제가 다  알아
서 모시겠습니다."
  재걸이 익살인지 비꼼인지 모를 소리로 인철의 말을 받았다.  그래놓고는 이내 정색을 하
며 물었다.
  "니 개얀나?  술 때메 머리는 안 아프나 이 말이라."
  "골은 좀 띵해도 어룸한 대학 입학 시험 치기에는 똑 좋다."
  인철이 농담으로 사투리를 섞어 그렇게 받았다.  용기가 좀 뾰족한 목소리롤 끼여들었다.   
  "일마, 니 술 덜 먹일라꼬 내가 어제 얼매나 마신 줄아나? 소가지  하나는 몬때(못되)가주
고... 참말로 엊저녁에 그마이(그만큼) 술 퍼먹고 여기 온 놈은 니뿌일 끼라.  니는 일마, 떨
어지믄 너헌테 댈 핑계도 없는 종내기라."
  "인제 와서 그거 따지믄 뭐하노? 내일 아침에 시험 있는 놈아가 마시자 칸다꼬  따라나선 
거는 누군데.  그래, 인철이 니 아침은 문나(먹었나)?"
  "속이 비니까 몸까지 가볍고 좋은데 뭘."
  인철이 다시 허세 섞인 능청으로  받자 재걸이 사방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스나, 이거 망긴(다 끝난) 후에 올라카나? 어디 갔노..."
  그때 용기가 핀잔처럼 말했다.
  "일마, 정아 가가 돌았나? 이 추운 새벽바람에 얼굴도 기억 몬 하는 남자 동창 속 풀어줄
라꼬 여까지 쪼차오겠나? 넉 달 빠른 사촌오래비도 오래비라꼬 그 분부 받자와."
  "정아가 누군데?"
  인철이 들은 이름 같아 용기에게 물었다.
  "절마 사촌 안있나? 6학년 때 3반에 있던 가스나..."
  그러나 인철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재걸이 변명하듯 말했다.
  "작은집이 서울에 와 있다.  내 이럴 줄 알고 가아한테 전화해 커피 한잔 끓여오라  캤지.  
마, 니 얘기하고... 틀림없이 그랜다 캤는데."
  그러면서 다시 사방을 둘러보던 재걸이 갑자기 훤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왔다.  저어기 온다."
  인철이 재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아가씨가 무언가를 싸들고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와아, 정아 니, 참말로 대단네.  이거 재걸이 절마도 오래비라꼬 오래비 명 받들고 온 기
가? 인철이 절마 만날라꼬 새벽밥 먹고 온 기가?"
  용기가 의심한 만큼 미안한지 과장스런 농담으로 그녀를 맞았다.   그녀 역시 스스럼없는 
농담으로 받았다.
  "둘 다 보고 싶어서.  입학 시험 전날 해장이 필요할 만큼 술 마신 사람하고, 친구라 카미 
그리 퍼멕인 사람하고.  아이, 보고  싶은게 하나 더 있다.  그래도  시험이 되는강, 안되는
강."
  그리고는 눈웃음 섞어 인철을 건너보았다.  인철은 그 눈길에서 예사 아닌 익숙함을 느꼈
다.  그날 처음 받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받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 바람에 인철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가 있었다.
  "커피로 해장하기는 처음이지만 왠지 효과는 있을 거 같은데..."
  실제로 그녀가 당시로는 흔치 않던 보온병에 가득 끓여온 커피는 신기하리만치 큰 각성의 
효과를 냈다.  첫 잔으로 머릿속에  자욱하던 안개가 걷혀지는 듯하더니 시험장에  들기 전 
한 잔 더 받아 마시면서부터는  전에 없던 산뜻함까지 느껴졌다.  아주  뒷날까지도 인철은 
대입 시험 하면 가장 먼저 그 날의 커피맛을 떠올렸다.  
  
  <<한 생명체가 제구실을 하는 개체로 자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
다.  대개는 고통과 시련을 내용으로 하는 그 과정은 사람에게는 통과제의란 형태로 나타난
다.  그 통과제의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내용을  가진 것은 아마도 성년식일 것이다.  어떤 
종족은 맹수와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어린 구성원의 성숙을 확인하고, 또  다른 종족은 첫 
전투에의 참가를 성숙의 기준으로 삼는다.  온몸을 뒤덮는 문신을 성숙의 징표로 보는 종족
도 있다.  문명한 사회에서의 성년식은 일견 온건한 외형을 띠고 있다.  죽음이나 재생의 상
징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숨겨져 있고 거기에 따르는 고통이나 시련이 그 의식 가운데  요
구되는 법도 없다.  서양의 성인식이나 동양의 관례는 복잡하고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저 한 
장중한 의례일 뿐이다.  하지만 문명한 사회라고 해서 한 개체가 성숙하는 데 바쳐야 할 고
통과 시련의 총량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다만 보다 오랜 기간에 조직적이고 세밀하게 배분
되어 외형상의 엄혹함이 줄었을 뿐, 길고 힘든 학문적 수련과 인격적 수양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하여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그 확인 절차는 오히려 미개한 사회보다 더 많은 노력과 주
의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한 확인 절차가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는 가는 그 사회의 가치관
에 달려 있다.  어떤 사회는 그 개체가 지식의 양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사회는 형성된 그 
인격을 중시할 수도 있다.  드물게는 육체적 단련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하지
만 그러한 확인 절차를 생략하는 사회는 없다.  대학 입시는  성년식에 전제된 능력이나 자
격을 확인하는 절차 중에 하나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축적된 지식
의 양으로 학문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늠하는 확인 절차이다.  어떤 개체가 보다 고급하고 전
문화된 지식을 습득해 그것으로 한 구실을 하는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사회
의 제도 혹은 장치이다.  그런데 요즘 대학 입시에 대한 식자들의 논의를  보면 그 제도 자
체를 악으로 몰아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심하게는 입시의 폐지로  그 당연한 통과제의 자
체를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제도의 본질을 간과하고 무책임하게  논의하거나 
젊은이들에 대한 아첨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 효율성 혹은 사
회적 생산성이다.  논의할 게 있다면 그 방식이나 절차다.  그러나 그때에도 한 미숙한 육체
와 정신이 제구실을 하는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 바쳐야 할 노력이나 고통의 총량은 불변한
다는 게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뒷날 인철은 대학 입시에 대해 그 같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어쩌면 그같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견해는 그 옛날 자신이 경험한 대학 입시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원래 인철의 
득점 계획은 국어와 영어와 사회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얻어 과학과 수학에서의 참패를 
만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국어 시험을 더욱 자신있게 만들어준 작문을 망쳐버린 일
이었다.  숙취로 인한 부주의 탓인지  엄연히 주제가 결정되어 있는 작문을  자유 제목으로 
바꿔버린 게 그랬다.  그 실패를 만회하는 길은 수학이나 과학에서의 분발밖에 없었다.  그
러나 둘째 시간인 과학마저도 실패까지는 아니지만 예상 점수에 오히려 못 미쳤다.  선택한 
생물 과목의 출제가 암기 위주에서 수식 위주로 전환된 까닭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학
이 인철을 구해주었다.  거의가 해법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에 푸는 
방식을 암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 실력이라 원래 그가 수학에서 기대한 것은 이른바 기본 점
수뿐이었다.  그러나 시험지를 받고 보니 가장 점수가 많은 대수, 기하 복합 문제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국어에서의 실패를 만회해주었다.   나중에 안 일
이지만 그는 그해 수학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그 문제의 몇 안되는  정
답자 중에 하나였다.  
  시험장에 가족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음을 인철이 씁쓸하게 떠올린 것은 과학 시험 다음에 
있었던 점심 시간부터였다.  실패의 예감이 짙은 오전 시험 때문인지 모르지만 용기네 아이
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져 시험장으로 돌아오면서 인철은 문득 어머니도 옥경이도  시험장에 
나오지 않은 게 서운해졌다.  그때만 해도 남은 시험이 있어  그랬어야만 하는 어머니와 옥
경이를 걱정할 여유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시험을 마치고, 그것도 오전의 실패를 상당히 만
회했다는 기분에서 온 여유로 그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집안일이 걱정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다녀간 옥경에게도 이상한 데가 있었다.
  "오빠, 엄마도 나도 시험 때까진 아마 못 올 거야.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하던 대로 열심
히 해. 오빠라도 꼭 합격해야 돼."
  전 같지 않게 어머니의 솜씨가 아닌 도시락과 수육을 싸온 옥경이 돌아가며 그렇게 말했
다.  어딘지  축축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다 '오빠라도'라는  표현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왜? 무슨 일이야? 집에 무슨 일이 있어?"
  "아니, 그냥 요즘 좀 바빠.  설대목이 가까워서인지 일이 많이  밀렸거든.  나까지 거들어 
밤을 새도 주문을 다 못 댈 지경이야."
  옥경은 그렇게 말하면서 좀 전의 축축한 목소리를 상쇄하려는 듯 제법 밝은 미소까지 지
었다.  인철은 그래도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으나 워낙 시험 막바지여서  옥경이 떠나자 
이내 집안일을 잊고 시험 준비만 몰두했다.  그런데 시험이 다  끝날 대까지 아무도 시험자
에 나오지 않자 불길한 느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인철은  뒤풀이를 하자는 
용기와 재걸을 뿌리치듯 돌려보내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교문께서 용기네 아이
들과 헤어진 인철이 노량진 방면의 시내버스가 서는 정류장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려할 때였
다.  갑자기 멀리서 옥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인철이 놀라 돌아보니 교문 기둥  근처에서 옥경이 손짓까지 하며 부르고  있었다.  교문 
기둥 뒤에 숨어서 인철을 살피다가 일이 다급하게 되자 달려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였구나.  언제 왔어?"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던 인철이 다가온 옥경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대답하는 옥경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인철은 까닭을 듣지 않고
도 벌써 가슴이 철렁했다.
  "아침에 왔다면 왜?..."
  "시험 볼 사람 심란하게 만들까봐.  오빠를 보고 울지 않을 자신이 없었어..."
  그러는 옥경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어?"
  그때 저만치 노량진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돌아 오는 게 보였다.
  "우선 차에 타자.  집에 가면서 얘기해."
  "그 차 탈 필요 없어.  이미 노량진에는 집이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철거됐어.  그 동네 모두... 벌써 보름 전이야.  어머니는 지금 광주계셔."
  "광주?"
  "경기도 광주 말이야.  광주대단지.  오빠는 신문도 안 봐?"
  어느새 옥경의 말투에까지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길가에서 줄줄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
는 처녀 아이가 이상하게 보이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옥경을  흘깃거렸다.  조금 민망해진 
인철은 옥경을 데려갈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길 이편은 앞뒤로  한참이나 학교 담별만 이
어져 있고 길 건너에 다방 간판이 하나 보였다.
  "우리 저기 가서 얘기하자.  길에서 이러지 말고."
  인철이 그렇게 말하자 옥경도 눈물을  씻고 말없이 따라왔다.  그러나  입시날이어서인지 
다방 안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자리 하나를 얻어  마주앉자마자 
인철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집이 뜯겼다지만 우리집이 뜯긴 것도 아니고, 왜 전세금이라도 떼였지?"
  "그건 아냐."
  "그럼 딴 데 세얻어 살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광주대단지까지는 왜 따라가?  이제 기억
나는데 거기 말만 대단지지 아직 허허벌판이라던데."
 "세를 얻어? 그 돈으루 어디서 세를 얻어?  얻어봤자 전 같은 무허가 판잣집밖에 더  얻겠
어? 언제 또 뜯길지는 모르는... 게다가 도시 미화 사업으로  우리 같은 사람이 수만 명이나 
늘어나 그런 판자집도 세가 올랐어. 지금 돈으로 서울에서는 더 갈데가 없다구."
 그제서야 인철도 무허가 건물 철거가 집주인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희미한 의분 같은 
것이 일었다. 고시의 외관을 가꾸려고 삶의  터전을 뜯어낸다? 갈 데 없는 가난한  이들의...   
"그렇지만 광주대단지로 옮겼잖아? 기한의 이익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데지  열 
평이 불하됐어."
 "공짜루?"
 "아니, 5년 뒤 평당 2천 원 쳐서 갚으면 된대나. 그런데 그때는 그곳 땅  값이 올라 되팔아
도 그 몇 배는 될 거래."
 "하지만 뭘 평 가지구 뭘 해? 그걸루 움막이나 제대로 얽겠어?"
 인철은 문득 2만 평이 넘던 개간지를 떠올리며 한심한 기분이 들어 한탄처럼 물었다.
 "그건 아냐. 오빠, 우리 전에 살던  그 방 그게 몇 평짜린지  알아? 두평이 좀 모자랐다구. 
그런데 열 평이면 부엌 빼고도 그런 방을 세 개는 넣을 수 있어. 서울에서 열 평이면 큰 거
야. 돌내골 시절하곤 달라."
  "그렇다고 서울 시내도 아니잖아? 여기서 버스로 얼마나 걸려?"
  "버스만 타면 한시간 안이야.  거기 가는 버스가 아무데서나  있지 않고 복작거려 탈이지
만."
  "광주읍이야?"
  "아니, 면 소재지에서도 한참 떨어진 시골이야.  단대리라구."
  "그럼 말대로 허허벌판이야?"
  "아직은 허허벌판도 아니구 그저 시골 들판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인구 백만이 넘는 도
시가 된대.  들어봤지? 성남이라던가.  그리고 교통편이 좋아지면 서울이나  다를 바 없대."  
거기까지 듣자 인철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슬퍼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어머니는 지금 꿈이 크셔.  딱지를 사모아 번듯한 집 한 칸을 세우실 거래."
  "딱지?"
  "응, 철거민들에게 내주는 토지 분양권 같은 거야.  대개 스무 평짜리인데 아직은 이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어.  어머니는 그걸 몇 개 더 사시겠다는 거야.  그래서 거기다가 멋진 집을 
지으신다나."
  "그럼 뭐 울고불고 할 것도 없네.  차라리 잘된 일 아냐?"
  "오빠, 지난 3년 정말로 고생하며 떠돈 거 맞아?  도회지의  밑바닥 삶이 어떤 건지 정말
로 알고 있느냐구."
  옥경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인철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어리게만 생각해온 누이동생이었
는데 그때는 꽤나 성숙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옥경이도 벌써 열여덞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는 도시의 가난뱅이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전혀 모르는 거 같애.   그게 행운일지는 
모르지만 돈 많은 사람들에게 빌붙어 험한 꼴 안 보고 그럭저럭 공부한 거 같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그래.  너무 순진하다  할까, 아무튼 없는 사람들의 사정을 너무  몰
라.  겨우 한 끼 밥과 하룻저녁 발 뻗고 누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
게 몸부림쳐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얼마나 비정하고 가혹하게 다루는지."
  어어, 얘 봐라.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감탄을 억지로 삼키고 가만히 옥경을 
살펴보았다.  3년 전보다 더 조용하고 침착해졌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둘이 정색을 하고 얘
기를 나누기는 이번이 다시 만나고 처음이었다.
  "글세...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차라리 잘됐다는 말... 그게  서울시장 김현옥씨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써대는 신문과 
너무 비슷해서."
  "실상은 어떤데?"
  "그전에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어.  서울시에서는 우리에게 이주비로 가구당  돈5천 원과 
밀가루 포.  그리고 열 가구에 대형 천막 하나를 내줬어.  그거 어떻게 생각해?"
  "것두 공짜라면 상당하네.  그게 한두 집도 아니고 몇만 가구가 된다면서."
  "그런데 우리가 짐짝처럼 부려진 대단지라는 곳이 어떤지 알아?  아까 말했듯 아직은 허
허벌판도 아니고 겨우 길만 뚫어놓은 들판과 야산이야.  직장은 물론, 막노동할 공사판 하나 
제대로 없는 데서 돈 5천원과  밀가루 두 포가 얼마나 가겠어?   그리고 주거 환경-아무리 
크다 해도 한 천막 안에서 열 집이 사는 광경 상상이나 해봤어?  수도도 없고 하수구는 물
론, 공동 변소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물은 멀리서 길어 와야 하고 천막 앞은  개숫
물로 질퍽거리지.  아침마다 공동 변소에는 배급줄보다 더 긴 줄이 서고..."
 그러면서 옥경은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무언가 심상찮은 결의를 다지고 있는 듯했다.  인
철도 그제서야 어머니와 옥경이 떨어진 상황을 짐작했다.  그러나 옥경의 속을 떠볼 양으로 
짐짓 태평스레 대꾸했어.
  "그거야 잠시겠지.  셋방을 떠돌던  이들이 집 한칸  장만하는데 그만 고생이야  없겠어?  
그리고 상하수도나 도로 같은 기반  시설은 곧 해결되는 걸루  알고 있는데.  일터도 그래.   
거기다가 무슨 공업 시설을 갖춰 일자리를 맞들어주고, 뭐라더라, 그래 단일 생활권을  형성
한다는 것 같던데."
  "잠시라고? 오빠, 지금 우리에게 분양된 땅이 어떤 건지 알아?  토지 수용으로 묶여 있는 
논밭이나 야산 비탈인데, 우리는 아직 그게 어디인지조차 몰라.  추첨을 해야 지번이 나온다
는 거야.  하지만 아직 추첨조차 언제 할는지 모르고.  거기다가 잘 정지된 대지가 있다 해
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거기다가 집을 지어.  시멘트 블록으로  대강 얽어도 5만 원이 
든다는데.  그런데 그게 잠시야?"
  옥경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길게 숨을 몰아쉬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옥경에게서 
옛날의 철부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급자족하는 단일 생활권?  그것두 그래.  언젠가는 될지 모르지만 당장 급한 이들에게
는 아무 소용 없어.  오빠, 그 얘기 알지?  하루살이랑 모기가 놀다가 모기가 헤어지면서 내
일 또 봐, 했대.  그런데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어딨어?  마찬가지야.  당장  오늘이 급한 없
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장구한 청사진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당장 급한 것은 오늘이
라니까.  추운 천막에서 떨다가 새벽같이 일어나 터질 듯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려 
천호동이나 송파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하루 입에 풀칠할 벌이라도 하려면 또 한 시간 가
까이 걸려 한가을 건너야 돼.  그게 얼마나 가겠어?  우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들은 벌써 반
이나 서울로 되돌아갔다구.  헐값에 딱지 팔아넘기구.  상하수도, 도로, 기반 시설? 다 서울
시를 문화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아니 많지도 않은 외국 관광객의 안목을 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흉측한 버리지 같은 가난뱅이들을 집단으로 추방한 거야."
  그날 옥경이 한 얘기를 요지만 이으면 대강 그랬다.  가만히  옥경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인철은 왠지 섬뜩해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그 끔찍한 진실  때문이 아니라 그 진
실을 전하는 옥경의 말투가 어른거리는 증오와 원한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거 모두 너 혼자 생각한 거니?  모두 네 생각이야?"
  옥경의 말이 대강 끝났다는 판단이 들자 인철이 정색을 하고 물어보았다.  그제서야 옥경
이 살풋 웃었다.
  "왜, 중학교밖에 못 나온 내가 너무 유식해 보여? 실은 들은것도 있고 혼자 느낀 것도 있
어."
  "듣다니? 그런 걸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어?"
  "무식한 사람들이 대개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모두 무식한 것은 아니라구.  
우리 천막만 해도 대학물 먹어본  사람이 둘이나 있었어.  하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지만 
하나는 아직 남아 있지.  월남전에서 다쳐 막노동도 못 하게 된 아저씨야."
  "조심해라.  진실을 아는 것은 좋지만 증오와 원한까지 배울 필요는 없어."
  인철은 드디어 오빠다운 충고를 시작했다.  하지만 옥경은 별로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
다.  인철이 몇 마디 더 하기도 전에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알겠어.  비뚤어지지는 않을게.  하지만 오빠도 한번  가서 봐.  보면 느껴지는 게  있을 
거야.  어쨌든 오늘은 집에 갈 거지? 집에 가려면 서두르는 게 좋아. 좀더 늦으면 버스가 미
어터져.  천호동까지 가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날 인철이 한 시간 반이나 걸려 어머니가 있는 천막으로 들어설 때는 날이 어둑해올 무
렵이었다.  가는 동안 인철이 본 것은 거의 옥경이 말한  대로였다.  도심의 철로가에서, 숭
인동. 창신동의 판자촌에서 밀려온 사람들의 비참하고 서러운 삶이 거기 있었다.  어머니가 
있는 천막도 옥경이 말한 그대로였다. 이십 인용쯤 되어 보이는  군용 천막 안의 난방 기구
는 가운데 위태롭게 설치해둔 톱밥 난로 하나가 전부였다.  그  톱밥 난로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여섯 가구의 궁핍한 삶이 아무런 숨김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태를 받아
들이는 어머니의 태도는 옥경이와 판이하게 달랐다.
  "인철이 왔구나. 시험은 잘 쳤나?"
  천막 한구석에서 실밥을 허옇게 덮어쓰고 재봉틀을 돌리고 있던 어머니가 일어서지도  않
고 인철을 맞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고  인철조차도 아침에 시험 치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아들 보듯 했다.  저녁상을 불린 뒤  펼쳐보이는 앞나르이 계획은 더
욱 긍정적이었다.
  "전에 개간할 때 나는 우리가 바닥까지 다 내려선 것이라꼬 생각했제.  글치마나  아이라.  
인제 참말로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에 내려선 게라.  그때는 개간지고 위토고 정부 보조
까지 있었지마는 인제는 내 몸뚱이 하나뿌이라.  글치만 이게 진정한 시작이라꼬.  집도 절
도 없이 떵댕기는 거 인제 여기서 끝내자.  우리 모도 양정불정, 죽기 살기로 대들믄 안  될 
게 뭐 있겠노?"  

    제8장
  중생의 여러 노래 
  <<마녀가 사나이를 놀려 유혹하는 술법이 서두른 종이 있으니, 첫째는 눈썹을 높이 걷어
올리면서 눈자위를 굴려보이고, 둘째는 아래치마를 걷어올리면서 앞으로 나가보이며, 셋째는 
머리를 숙이고 생글 웃기도 하고, 넷째는 서로 치어다보며 희롱하며, 다섯째는 눈을 곱게 뜨
고 치어다 보기도 하며, 여섯째는 아래위로 번갈아보며, 일곱째는 입술을 입에 담은 채 방글 
웃어보이기도 하고, 여덟째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아홉째는 눈을 살짝 뜨고 살며시  바
라보기도 하고, 열번째는 앞에 나와 날아갈 둣이 절을 하기도 한다. 열한번째는 치마를 들어 
머리를 덮어보이기도 하고, 열두번째는 몸을 이쪽저쪽으로 흔들어보이기도 하며, 열세번째는 
귀를 기울이고 무슨 비밀한 말을 듣는 듯이 하기도 하고, 열네번째는 앞에서 아장아장 걷기
도 하고, 열다섯번째는 볼기짝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열여섯번째는 앞가슴과 젖통을 내보
이기도 하며, 열일곱번째는 옛적에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서 침실에서 잠자던 흉내를 내보이
기도 하고, 열여덟번째는 마치 거울을 맞대고 화장하면서 교태를  부리는 시늉을 하기도 하
고, 열아홉번째는 몸을 비비꼬면서 무엇을  못 견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스무번째는  
금방 기뻐하기도 하고 금방 슬퍼하는 듯하기도 한다. 스물한번째는  잠깐 앉았다가 금방 일
어서보이기도하고, 스물두번째는 때로 시치미를 딱 떼고 정중히 서 있기도 하며, 스물세번째
는 향물을 몸에발라 이상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스물네번째는  손에 찬란한 노리개를 들
고 희롱하기도 하며, 스물다섯번째는 몸을 자라처럼 움츠려 보일락말락하기도 하며,  스물여
섯번째는 아주 조용한 태도로 물에 씻은 듯이 침착하기도  하며, 스물일곱번째는 앞으로 물
러서면서 사내를(보살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스물아홉번째는 뒤돌아 살짝  걸어가면서 
못 본 체하기도 하며, 서른번째는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귀한것은 없네!"라는 노래를 부르
기도 한다. 서른한번째는 눈을 살짝  뜨고 자세히 바라보기도 하고, 서른두번째는  할금할금 
돌아보면서 걸어가기도 한다...>>
  명훈은 거기까지 읽다가 쿡쿡 웃으며  책을 덮었다. 심심풀이로 읽기  시작한 "도해 팔록
상" 의 '수하항마상' 부분이었다. 대중용으로쓴 부처님의  전기라 어디까지가 원문이고 어디
까지가 윤색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여자에 관한 이  부분은 출가한 승려의 관찰 같지는 
않았다. 지극히 탐미적인 관찰로, 경계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도 여자의 사랑스러움이 눈앞
에 화사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만약 스스로 한 관찰이라면 그 스님은 여자로부터 자신을  끝내 지켜내기 어려웠을 것이
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자신이 그때껏 안아본 모든 여자를 오히려 더 절실한 그리움으로 
떠올리게 된 명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가벼운 헛기침  소리와 함께 누가 문
을 열었다. 씨익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은 해원이란 법명을 지닌 명훈 또래의 스님이었다. 오
래 바깥을 돌아다니다 왔는지 그에게 묻어온 한 자락의 한기가 방안에 흩어졌다.
  "오전 예불은 끝났습니까?"
  새벽 범종 소리는 꿈결에 듣고 아침 공양도 스님들과 함께 못하는 처지지만 온 지 대여섯 
되어선지 스님들과의 일과를 대강은 알게  된 명훈이 그렇게 물었다. 해원이  다시 한번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공양거리 핑계로 보살 아줌씨하고 장에 갖다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 좀 맡아주시라
고..."
   해원이 그러면서 승복 소매에서 사 홉들이 소주 두 병을 꺼냈다. 좀 전의 그 웃음은,  당
신은 이해하겠지요, 라는 뜻 같았다.  명훈은 수행하는 스님 같은 데가 별로 없는 해원을 그 
절에 처음 들던 날부터 마음 편히 대해왔다. 그가 절에서  하는 일도 불목하니라고 말할 정
도는 아니지만 주로 부엌일과 관계된 허드렛일이었는데 본인도 참선이나 예불보다는 그쪽을 
더 좋아하는 듯했다. 억지로 승복을  입혀온 속인 같은 사람으로 그가  술을 사왔다고 해서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명훈은 짐짓 놀라는 척했다.
 "스님, 웬 술입니까?"
 "가끔씩 생각날 때가 있어서. 일일이 십릿길을 오르내릴 수도  없고 내려간 김에 두 병 사
왔심다."
 해원은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한번 눈을 찡긋했다.  명훈은 마지못한 것처럼 소주 두 병을 
거두어 벽장 속에 감추었다.  명훈이 다시 자리에 앉는 걸 보고 해원이 이번에는 신중한 표
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말임다. 뭐 책 같은 거 좀 갖다 놓을 수 없습니까?"
 "책?"
 "녜, 사회책-예를 들면 건너방 학생들처럼 고시 준비 책이라든가, 옆방 아저씨처럼  공무원 
승진 시험 준비 책 비슷한 거..."
 "그건 왜요?"
 "아까, 장터에서 지서 차석을 만났는데 새로 온 사람 인적 사항 좀 알려달라길래..."
 "제가 말씀드린 대루 며칠 수양이나 하러 왔다구 하면 되잖습니까?"
 "순사들이라는 게 그렇더구먼요. 수양하러 왔다든가 몸이 나빠  쉬러 왔다구 하면 꼭 눈에 
불을 켜거든. 이 바쁜 세상에 수상스럽다 이거겠지 요만 말임다. 그래서 내 맘대루 공부하러 
오신 분이라고 그래놨는데- 혹시 누가 와서 들여다보더라도  비슷한 데가 있어야 될 것 같
아서..."
 그런 해원의 눈길에는 어딘가 말 안 해도 알 건 다 안다는 듯한 데가 있었다.
 "그거야..."
 명훈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변명하려다 그 같은 해원의 눈길을 보고 힘이 빠졌다. 돌중이
건 스님이건 한번 믿어보자- 이런 기분이 되어 솔직하게 받았다.
 "그렇다면 있다가 읍내로 나가 책 몇 권 구해오죠,  뭐." "잘 생각했시다. 서로 좋은 게 좋
은 거니까."
 그제서야 해원은 볼일 다 보았다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복 자락은 펄럭여도 거
기서 풍기는 것은  술을 감추어 달라고 할 때보다 한층 진한 속기였다.  해원이 나간 뒤 명
훈의 상념은 저도 모르게 지금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문제로 돌아갔다. 어쩌면 해원
은 속기가 애써 잊고 있었던 자신의 처지를 일깨워준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훈이 잇뽕으로
부터 새벽같이 은밀한 부름을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흔치  않게 자신의 집으로 
명훈을 부른 잇뽕은 아직 술이 덜 깬 눈으로 돈 3만 원을 내놓으며 말했다.
 "너 한동안 이곳을 떠나줘야겠다. 어제 수사과장하고 새벽까지 마셨는데,  이대로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애. 김사장 고소가 있는 데다 상부에서 여론 조사소 관계 수사 지시도 떨어진 모
양이야. 말 그대로 엄명이라더군. 누군가 하나 떠맡아 줘야하는데 너밖에 없어. 날치는 너무 
전과가 많고. 대동이나 권가로는 감당이 안 될 거야. 게다가 너는 이미 별건으로 수배가  떨
어진 모양이고... 어디 멀리 날아버려. 길어도 3년이면  될 거야. 아니, 그 고비만 넘기면  독 
흐지부지될지도 몰라. 너는 여기서 서로 봐서는 뜨내기니까. 연락처만 남기면 여기가 조용해
지는 그 즉시로 널 다시 부를게. 그떄까지 다른데서 고생 좀 하라구. 여기 있다가 빵깐 가는 
거보다야 그게 백번 안 낫겠어?"
 얼떨결에 돈을 받고 잇뽕의 집을 나서기는 했으나 한겨울 새벽 거리에서 명훈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떠오른 게 집이었지만 인철의 편지로 봐서는 돌아갈 만한 곳이 못 되었다. 
돌아갈 수 없기는 돌내골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래도 서울 어디에서 몸둘 곳을 찾아보는 수밖
에 없을 성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너무 피곤했다. 지난 여섯 달 그는 새 기반을 닦는 기분으
로 안광의 뒷골목에다 갖은 힘과 정성을 모두 쏟아부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노력은 허
사가 되고 명훈은 살아갈 방식부터 새로이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빠져들고 말았
다.
 '우선 어디가 좀 쉬어야겠다. 그런 다음 다시 시작해보자.'
 하숙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면서 명훈은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그간의 하숙비를 
치르고 하숙집을 떠날 무렵에서야 문득 떠오른 곳이 바로 그 절간이었다. 전해 가을 사찰림
의 도벌 문제로 취재차 갔다가 알게 된 어떤 큰 사찰의 말사로 거기서 스님들 외에도  대여
섯 명의 하숙생을 본 적이 있었다. 고시 준비를 하는 학생 몇과 수양을 왔다는 중년이 있었
는데, 그들의 한가로움과 여유가 부러웠던 게  새삼 기억이 났다. 원래 절이나 불교  문화는 
명훈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고향은 몇 백 년 유가적 전통을 이어온 곳이고, 그가  철들
어서 새롭게 보노 종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독교였다. 그런데  막상 절로 찾아들고 보니 
이상하게도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별종같이 느껴지던 스님들도 예상 밖으로 친정
하고 따뜻했으며, 이따금씩 주워듣는 그 가르침도 방금 속세의  진흙탕을 뒹굴다 온 명훈에
게는 새로운 데가 있었다. 거기다가 하숙비도 한 달에 겨우  삼천 원으로 조금만 아끼면 가
진 돈으로 일년은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해원의 귀뜸이 사실이라면 도피
처로는 그리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절간은 외져서 피하기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때문
에 더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미 지서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오래 
머물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내일 음내로 나가 공무원 시험 준비서나 몇 권  마련하고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
텨보자. 어딜 가나 불안한건 마참가지일 테니까.'
 명훈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더
니 누군가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객 문안니오."
 명훈이 묵고있는 방을 지객승의 방으로 잘못안 떠돌이 스님인  듯했다.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어 명훈은 못 들은 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지객일을 담당하는 해원이 맞은편 방에 
있어 그도 그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니나다를까, 해원이 문을 열고 나와 그 스님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에 거기  응
대하는 객승의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은 것처럼 들렸다.
 "가지산 청화사 에서 왔습니다. 방장은 스님을 뵈올 수 있을까 하고..."
 명훈은 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가만히 문을 열었다. 체구가 건강한 스님이 가사 자락
을 늘어뜨리고 돌아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볼 수 없어서인지 뒷모습만으로
는 눈에 익은 데를 별로 찾아낼 수 없었다. 거기다가  해원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굽신대며 
서둘러 그 객승을 안내하가는 바람에 더 자세히 뜯어보려야 뜯어볼 틈도 없었다. 명훈이 다
시 그 객승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날 점심나절이었다. 옆방의 고시생과 점심상을 받
고 있는데 해원이 달려와 명훈을 한쪽으로 끌어냈다.
 "저어 아까 그거 말입니다. 한 병만 내주시오."
 "갑자기 그건 왜 찾습니까? 별건 대낮에."
 "곡차를 대접할 일이 생겨서 ... 빨리 한 병만 내주슈."
 그제서야 명훈은 퍼뜩 그 우람한 체구의 승객을 떠올렸다.
 "그럼 스님은 마시는 게 아니고... 조금 전의 그..."
 "모르는 척해주슈. 중판에도 세상에 있는 건 다 있소. 주지 스님꼐서 갑자기 곡차를 구해오
라는데, 이 추위에 십릿길을  달려내려갈 수도 없고... 그래서  형씨에게 한 병 꿔온다고  했
소."
 "그럼 주지 스님이?"
 "그분이 마시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손님 대접으루다가."
 그렇다면 그 승객도 해원과 마찬가지로 승복만 걸쳤지  속은 여지없는 속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돌중을 주지쯤 되는 스님니  그토록 융숭하게 대접해야 되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대하지는 않았지만 주지는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타고남 스님 같은 데가 
있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슈. 나중에 틈나면 내 아는 대루 모두 일러 드리지."
 해원은 명훈에게서 빼앗  술병을 받아들고 방장실로 달려가며  그렇게 말했다, 해원이 부
른 듯 명훈의 방을 찾아온 것은 점심상ㅇ르 물린 명훈이 다시 "도해 팔상록"을 심심풀이 삼
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파순 바왕의 아름다운 세 딸이 부처를 유혹하는 노래가 명훈에게
는 아름다운 시 같았다. 봄바람 화창한  이 좋은 계절 나뭇잎 꽃향기도 한창이어라.  인생의 
즐거움도 그 한때려니 세상의 오욕락을 누리시기를. 이처럼 좋은  시절 보내고 나서 뒤돌아
서 뉘우친들 어찌 이르리... 명훈이 거기까지 읽고 있는데 해원이 기척도 없이 들어왔다.  입
에서 가벼운 술냄새가 나는 게 그도 어디서 한잔 걸친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 술 해원 스님이 마시려고 가지고 간 거 아뇨? 이거 안 되겠는데. 스님이 대
낮부터 ..."
명훈이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하자, 해원이 문득 한숨과 함께 받았다.
 "나도 얼결에 머리 깎고 가사 장삼 걸치게 되었지만 큰일은 참 큰일이야. 절이 이 꼴이 나
서야."
 "스님도 절 걱정을  다 하쇼? 나는 그런 것과는 담 쌓은 분으로 알았는데."
 "그래도 절밥 얻어먹고 산 지 하마 3년이오. 중 팔자도 괜찮다 싶어 이대로 눌러앉을까 하
는데, 왜 절 걱정이 안 되겠소?"
 "그럼 속세에 있을 때는 뭘 했소?"
 "형씨를 보니 이해해줄 것도 같아 바로 말하니다. 전쟁통에 부모 읺고 양아치로 돌다가 잠
깐 반짝하고 5.16 나자 발붙일 데가 마땅찮더군. 그래서 군대에 상좌로 받아주어 머리를  깎
고 말았소."
 "뒷골목 형님이 상좌로 받아주어?..."
 "나는 형씨가 이 바닥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군. 그럼 절에 있
는 주먹 내력 전혀 모르슈?"
 "신문에서 이따금 스님들간에 일어난 패싸움 기사 읽어본 적은 있지만  스님들도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죠. 그런데 절에 무슨 주먹 내력이 있어요?"
 "나도 들을 얘기지만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더만."
 해원은 그렇게 허두를 떼놓고 한참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놈들이 들어와 중들을 전부  대처승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어쩌면 그게  불교 폭력의 
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해방 뒤에 비구승이 불교 정화 운동을 벌일 때라고 
들었소. 절마다 들어차 있는 대처승들을 쫓자니니 비구승이 어디 힘이 돌아가야지. 그때  정
부가 편법으로 동원한 게 깡패들이었다는 거요. 이대통령 묵인하에  일종의 정치 깡패 비슷
하게... 그러다 보니 한가락 하는 주먹들은 저마다 연고가 있는 절이 생기게 되었소.  말하자
면 한번 봐준 적이 있는 절이지. 그리고 5.16 뒤에 주먹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자 그  연고 
따라 절로 숨어든 거요. 처음에는 잠시 피신한다응 기분이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바깥
에서 보기보다 먹을 게 많은 게  절이라 그냥 머리 깎고 눌러앉은 거란  말이오. 절도 어느 
면에서는 주멱들이 필요했고..."
 "사찰에서 무엇 때문에?"
 "정말 모르슈? 사찰 재산이 엄청나다는거.  세상에서는 신도들 사주나 헤아리지만 본방(노
름에서 주된 돈을 거는 곳)은  따로 있소. 여기 본사만 해도  여름철 사찰림 송이 채취권만 
얼마나 되는 줄 아슈? 모르긴 헤도 천만  원은 될걸. 거기다 좀 이름난 절이면 입장료에 경
내 영업권에 기존 토지에 ... 그렇게 먹을 게 많다 보면 뜯어멱으려고 달려드는 파리떼도 많
게 마련이고, 그걸 쫓으려면 주먹도 필요한 법이오."
 해원은 그때만은 마치 절간 사정에 통달한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명훈도 그 비슷한 얘
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 자신과는 무관한  세상의 일이라 흘려들었는데 해원
에게는 아주 실감나는 현실인 모양이었다.
 "그럼 조금 전의 그 승객이 바로 그런 주먹이오?"
 "그 사람들은 아예 큰 절 한 곳을 접수해 양산박을 차렸소."
 "양산박을 차리다니?"
 "으슥한 곳의 절간 하나를 차지해 주지부터 총무 지객까지 모두 그 동네 사람들이 차고 앉
았단 말이오. 요즘엔, 거기도 많이 맑아졌다지만 한때는 술에 고기에 여자까지 없는 게 없었
다는 말도 있어요."
 " 절이 그 모양이 되면 신도들이  찾을 리가 없고, 신도들이 찾지  않으면 시주가 있을 리 
없을 거요. 그렇다고 그 으슥한 곳에 입장료 내고 들어 올 관광객이 몰릴 것도 아니고, 그런
데 그 많은 식구가 무얼 먹고 삽니까? 그 절 기존 재산이 그렇게 많아요?"
 " 그것도 다 길이 있지. 사찰 분규란 거, 절  주도권을 두고 벌오지는 다툼, 지금도 어디선
가는 박터지게 하고 있을 거요. 그때 힘이 밀리는 쪽은  어디선가 힘을 빌려와야 하는데 그
렇다고 뒷골목 야쿠자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지 않소? 안성맞움으로 승복 입은 주먹들이 떼
거지로 몰려 있는 데를 찾겠지. 그래서  한 건만 해결해줘도 그 식구들 일  년 양식은 걱정 
없을 거요. 중들 싸움에 칼부림이 나고 가꾸목(각목), 쇠파이프가  깨춤을 추는 이치를 이제 
아시겠소?"
 "거 참 할 만한 놀음이네."
 거기까지 듣고 난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 섞인  말투로 받았다. 그러나 마음 한곳으로
는 묘하게 썰렁한 바람이 불어가는 듯했다. 속세의 번뇌로부터, 중생들의  아귀다툼으로부터 
한 발 벗어난 곳으로 여겨왔던 그곳까지도 여전히 속세의  어지럽고 사나운 꿈이, 굶주리고 
헐벗은 중생의 욕망과 애증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훈의 감
탄을 선망으로만 해석한 해원은 으스대듯 묻지도 않은 일을 덧붙여 얘기했다.
 "실은 나도 거기 갈까 했는데 그만 뒀소."
 "왜 그랬소?"
 "나를 끌어준 형님이 거기 계셔 며칠 가 있어보았는데 나는 끼어들 군번이 아닙디다."
 "끼어들 군번이 못 되다니요?"
 "모두가 하나같이 한가락 하던 사람들이라 나 같은 조무래기는 삼천만의 졸병이더라구. 넓
은 경내 소재에 술 뒤치다꺼리나 돌아오는데, 못 해먹겠더구만, 그래서 마음이라도 편하자고 
이리로 왔소."
 듣고 나니 해원이 객승으로부터 그 절 이름만 듣고도  굽신대던 까닭을 이해할 만했다. 그
러나 그 무렵부터 명훈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갑자기 귀에 익은 그 승객의 
목소리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런데 말이오. 그 스님,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디서 받았는지는 모르
지만 법자 돌림자를 쓰던데, 맞아 법현이라고 했던 거 같소." "절에서 쓰는 이름말고 속세의 
이름 말이오."
 "그까지는 모르겠는데. 왜, 알 만한 사람 같소?"
 "아니, 아까 그 목소리가 하도 귀에 익어서."
 "역시 내 벌써 알아봤지. 그래, 전에는 어디서 놀았소?"
 해원은 한잔 얻어걸친 술기운 탓인지, 자신의 얘기에 취해서인지  승복을 입고 있는 걸 까
맣게 잊고 완연히 뒷골목 건달로 돌아가 그렇게 물어왔다. 곧  어깨라도 치고 엉겨올 것 같
은 태도였다. 그게 명훈에게 약간의 경계 르 일으켰다.
 "놀었다 할 것까지는 없고, 그냥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라."
 "그럼 내 알아봐드리지. 아니, 함께 가서 인사나 드리는 게 어떻소? 아직 술이 끝나지 않았
으면 술동무도 해드리고... 실은 나를 잡는 걸 아무래도 승복 입은 몸이 돼나서 사양하고 나
왔소."
 "아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럴 것까지는 없고 이따가  떠날 때 귀뜸이나 해주십시
오."
 명훈은 그렇게 말하고 슬며시 얘기를 끝냈다. 길게 얘기하다가 쓸데없이 자신의 처지가 드
러나는 게 싫어서였다. 하지만 더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았
는지 해원이 자리를 뜰 생각을 않고  머뭇거리는데 조용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주지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원이 거기 있는냐? 손님 돌아가신다."
 그 소리에 해원이 급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명훈도 손님이 궁금했던 차라 해원을 따
라 툇마루로 나섰다.
 "어?" "혀 형님..."
 눈길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객승과 명훈은 그런 외마디소리로 서로를 알
아보았다. 얼굴의 각진 부분이 많이 깎이고 승복을 걸쳐 조금 낯설기는 해도 틀림없이 배석
구였다. 그때 주지 스님이 배석구를 보고 공손하게 물었다.
  "아는 분이십니까?"
  "녜에, 속세에 있을 때 인연이  깊었습니다.  혈육운 아니지만 혈육이나 진배없이  지냈지
요."
  그렇게 대답하는 배석구의 말투에는 한때 서울에서도  중심가 한 모퉁이를 장악했던 주먹
세계의 보스 같은 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얼굴의  불그스레한 술기운만 아니라면 누
구든 수양 깊은 스님으로 보아줄 만큼 스님 티가 배어 있었다.  명훈마저도 어떻게 말을 걸
어야 할지 망설여질 정도 였다.  그 망설임을 배석구가 노련하게 해결했다.
  "마침, 잘됐군요. 지객 스님을 귀찮게 할 것 없이 저 아이를 데려가지요."
  배석구는 주지스님에게 그렇게 말해 놓고 명훈을 돌아 보았다.
  "이 보따리는 네가 들어라.  저 아래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줘야겠다."
  그런 배석구의 목소리는 8년 만에 만나는 사람 같지  않게 자연스럽고 친숙했다.  내려가
는 산길은 지난 대설 때의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었다.  보따리를 들고 앞장
서 산을 내려가던 명훈은 그제서야 겨우 8년전 헤어지던 날의 배석구를 떠올렸다.  절로 간
다는 말을 했지만 출가의 뜻은 비추지 않던 그였다.
  "형님, 그때는 강원도 어디로 간다구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우선 깊숙히 숨는 게 급했으니까.  처음 틀어박힌 곳은 겨울철이 되면 아예 사람
의 발길이 끈이는 암자였다."
  명훈을 만난 게 가슴벅차서인지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배석구가 명훈의  물음에 
감회 섞인 말을 했다.
  "그럼 거기서 출가 하셨습니까?"
  "아니, 한 육개월 지내다 보니 좀이  쑤셔 못 견디겠더구나.  그래서 좀 위험하지만  김천 
쪽으로 내려왔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좀 조용해지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 어떻게 다시 자
리잡아볼 생각이었지.  그런데 오야붕(이정재)과 임단장(임화수)의 사형 집행이 보도되더군.  
하늘 같던 경무관님(곽영주)도...  그래서 깨끗이 머리를 깍았지."
  "그렇다면 정말로 출가하신 거구뇨."
  "출가에 정말, 거짓말이 있나?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라는데..."  "그저...  해원에게 듣
기로 지금 계신 절이..."
  "아, 그 얘길 들었군.  지객일 보던 그 돌중놈한테..."
  배석구는 그래놓고 승복 소매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행투 보니 저나 나나 갈 데가  없는 왈짜 출신이라 늦을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는 것, 
속세에 질긴 인연이 남아 바로 정진에 들지  못한다구 해서 출가 자체를 거짓이랄 수는 없
지."
 그 말에 명훈은 문득 옛날에 먼빛으로 본 적이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심부름으
로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 당시 신당동에 있는 그의 집을 찾은  적이 있는데, 그때 본  그
의 아내나 어린 남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맵시 곱고 예절바른 젊은 아낙도 그랬지만 귀공
자처럼 차려입고 란도셀을 멘 남자 아이와 당시로는 흔치 않더너 유치원복을 입은 딸아이는 
더욱 됫골목 중간 보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속세에 남아  있는 질긴 인연이라면 그들을 
가리키는 말일 듯싶었다.
 "그럼 형수님과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훈이 망설이다가 불쑥 물었다. 배석구가 씁쓸하게 웃으며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간다' 너 말귀 하나는 똑  소리나게 알아듣는구나. 하지만 그 인연도 이제 
거진 다해가는 모양이야."
 배석구가 씁쓸하게 웃으며 명훈의 옛 별명을 상기시켰다.
 "인연이 다해가다니요?"
 "큰 아이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 지금 그 등록금을 전해주려 집으로 가는 길이야.  그 녀
석이 그만큼 머리 굵어지고 에미도 마흔 줄을 넘겼으니 이제는 이 고달픈 중생 놓아주어도 
저희끼리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지. 이 짓도 마지막이라 힘대로 모아주고 나도 중다운 중이 
되어보려고 손 내밀 만한 곳은 모두 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배석구는 그래놓고 길게 담배를 빨더니 눈길 위에 던졌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얘기를 덮
어둔 채 명훈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그래, 넌 어떻게 여기 오에 되었어? 왠지 팔자 좋게 수양이나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배석구의 남다른 눈썰미는 명훈이 떨어진 처지를 어느 정도 알아차리
고 있는 듯했다.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명훈도 굳이 그에게 자신의 형편을 숨기고 싶은 마음
은 없었다. 그 바람에 나모지 하산길은 명훈의 신세 타령과도 같은 지난 8년의 신산스런 이
력이 되고 말았다.
 "예전에 같이 지낼 때 내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널 이렇게 부려서는 안 되는데. 하는 기분
이 있었다. 네게는 어딘가... 길을 잘못 든 사람, 뭔가 잘못돼서  있지 않을 곳에 와 있는 사
람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구나. 그것도 너의 인연이고 업
장이었단가..."
 다 듣고 나 배석구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명훈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헤어진 뒤의 가장 큰 
변화라면 그의 표정이 옛날보다 풍부해진 점일 듯 싶었다.  명훈도 공녕히 울적해져서 한숨
과 함께 받았다.
 "한 집안이든 사람이든 쓰러지면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래서 나는 밑바닥을 떨어지는 것을 겁내지 않았죠. 아니, 철들어서는 스스로 밑바닥
을 찾아 내려간다는 기준으로 재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헛짚고 마는군요.  제가 
짚는 바닥 밑에는 또 다른 바닥이 있어 그때마다 한 켜씩 더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밑바닥이 될지..."
 그때 배석구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보이는 갈갓집, 주막 같은 거냐?"
 "주막은 아니고 이런저런 잡화를 파는 시골 구멍가겝니다."
 "그럼 소주 같은 것도 팔겠지. 버스가 언제 지나갈지 모르지만 저기서 소주라도 한잔 나누
고 가자."
 배석구는 그렇게 결정해놓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점심 공양 때 술을 청한 것은 추운 산길을 내려가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그런데 이
제는 정말로 한잔 하고 싶구나. 이 승복만 아니라면 너와  함께 읍내로 나가 하룻저녁 퍼마
시고 싶다만."
 명훈도 마다할 기분이 아니어서 둘은 곧 길가 가겟집으로  들어갔다. 가장 빠른 버스는 봉
화 쪽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알맞게도 그들에게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허락했다. 그러나 
들어갈 때는 생각과는 달리 난방도 안 되는 썰렁한 가게 마루 방에 소주병을 까고 앉자  명
훈은 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싹 가셨다. 실제보다 몇  배나 화려하게 과장된 50년대말의 서
울 뒷골목이 떠오르며 깡소주 몇 잔으로 풀릴 것 같지 않은 영락의 감정이 흥을 깨버린  것
이었다. 배석구도 승복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처음부터 술은 명훈에게만 권했다.
 "그런데, 혹시 그때 그애들하고는 연락이 있습니까? 아이구찌, 호다이,  도치, 깡철이, 모노, 
그리고 또 누구더라... 그떄 형님 밑에만 한 서른 명 됐지요?"
 내키지 않는 술잔을 받으면서 명훈이 받으면서 명훈이  물었보았다. 배석구가 어색한 웃음
으로 얼버무렸다.
 "경찰 불심 검문 걱정하지 않고 나다니게 된 게 이제 겨우 3년이다. 거기다가 외진 절간만 
돌았으니 옛날 애들과 연락이 있을 게 뭐냐? 그저 요즘들어 만남 몇몇이 고작이다."
 "모두 어떻게 지냅디까?"
 "더러는 손씻고 선량한 시민이 되기도 했지만, 아직 그 판에서 노는 애들이 더 많은 것 같
더라. 골치 아픈 중생들이지..."
 배석구는 되도록이면 그들의 구체적인 근황은 입에 올리기를 피했다. 그 세계에 미련이 있
어선지, 그 미련을 털어버리기 위해선지 얼른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명훈이 별로  맘내켜하지 
않고 배석구마저 몸을 사리자술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소주 한 병도 비우기 전에 버
스가 와 둘은 급한 작별을 해야 했다.
 "여의치 않거든 내게로 와라, 어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죠, 형님, 안녕히 가십시오."    
                    
   
    제9장
  남은 외길
  "여보, 일어나세요. 어서요."
 영희가 깊이 잠들어 있는 억만을 깨웠다. 그러나 억만은 쉽게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잠
결같이 무어라 웅얼거리면서 귀찮다는 듯 돌아누워 버렸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보러 나가는지 시아버지가 헛기침과 함꼐 마루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신발 끄는 소리가 더욱 영희를 급하게 했다.
 "어서 일어나라이까요. 일어나요.!"
 영희가 더욱 세차게 억만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억만이 부스스 눈을 뜨며 불만스레 말했다.  
 "왜 이래? 새벽부터. 남 잠도 못 자게..."
 "아바님 일어나셨어요. 어서  일어나 나가보셔요.  아마 비닐하우스 보러  가시는 것  같은
데..."
 영희는 어린아이 달래듯 억만을 달랬다. 그러나 억만은 아직 단잠에서 끌려나온 불만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내가 새벽잠 없는 늙은이를 어떻게 다 따라해?  이따가 들어가 따라나가면 됐지. 그
냥 좀더 자게 해줘."
 그러면서 다시 내쳐 잘 기세였다. 영희는 그런 억만이 밉살스러웠으나 참고 차분하게 타일
렀다.
 "그렇지 말고 귀찮더라도 좀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아버님 따라나서세요. 벌써 저하고  한 
약속 앚으셨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석  달 이내에 아버님의 신임을 회복한다는 약속-그게 
곧 저뿐만 아니라 억만씨 고생 줄이는 길이에요."
 그러자 억만도 마침내 자기를 포기한 듯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은 결코 밝지 못했다.
 "내 참, 이거야 원, 꼭 이래야 돼?"
 "녜, 적어도 며칠은요. 그러다가 아버님께서 그만두라 하실 때 자연스럽게 그만두면 돼요."  
 "아이구, 아버지가? 어림없는 소리 마. 얼씨구나, 잘됐다고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부리려 
들걸."
 "그건 또 그때 가서 수가 있어요. 우선은 일어나 제가 시키는 대루 하세요."
 영희는 그렇게 해 억만이 옷을 걸치는 것ㅇ르 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시어머니
도 부엌에 나와 있었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찍 일어나는 재주는 있구먼..."
 시어머니가 인사를 받는 건지 빈정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로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른 
데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전날과 같은 무시의 태도였다. 영감탱이가 우기니까 집에 들이기는 
했지만 너를 우리 식구로 여길 수는 없어-  돌아서는 시어머니의 찬바람 도는 뒷모습이 그
렇게 말하는 듯했다. 시집이라고 들어온 지 벌써 닷대째인데도 그랬다. 영희는 무안하고  맥
이 쭈욱 빠졌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며 짐짓 상냥한 표정
을 지어 물었다.
 "어머니, 제가 뭐 거들 것 없어요?"
 "없다, 코딱지만한 부엌에 둘씩 셋씩 붙어 뭘 해?"
 여전히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대꾸였다. 충분히 예측하고 또  각오한 일이었지만 영희는 다
시 한번 속으로 절망했다. 과연 내가  이 완강한 적의를 녹여낼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도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기분이 그 절망감을 억누르게 했다.
 "그럼 마당이라도 쓸게요."
 영희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고  마당의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장
갑을 끼지 않아 대나무로 된 빗자루대가 몹시 차게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나곤 한동안이나 
꾸물거리던 억만은 영희가 마당을 거의 다  쓸었을 무렵에야 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내려갔
다. 마당을 쓰는 영희를 힐끗 보더니 억만은 이내 그녀의 당부가 생각나 듯 부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억지로 지어낸 쾌활함이라 듣기에 어색할 정도였다.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 니가 이 새벽에 웬일이냐? 벌써 사흘째 내리."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억만은 잘 참아냈다.
 "아버님 벌써 비닐하우스에  나가셨잖아요? 일이야 잘하든  못하든 곁에서 거들기는  해야
죠."
 그래놓고는 제법 넉살까지 부렸다.
 "그리고 자고 싶어도 저 사람 때문에 잘 수가  있어야죠. 정말로 어머니 말릴 때 장가들지 
않는 건데..."
 그래도 아들이라 다른지 시어머니도 조금 풀어진 표정이 되었다.
 "에이그, 저거 발이나 못 하면..."
 허옇게 눈은 흘겨도 영희를 대할 때 같은 찬바람은 돌지 않았다. 영희는 억만의 눈길이 자
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간밤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듯 부엌으로  다가
갔다.
 "그런데 어머니, 하우스 일 바쁘지 않아요? 저하고 같이 가소 아버님 돕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밥은 누가 짓구?"
 시어머니가 눈길도 돌리지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억만이 한 발  가까이 다가가 한층  넉살
스럽게 밀했다.
 "저 사람 있잖아요? 며느리 봤다 뭘 해요? 부엌데기로나 써먹지."
 "나는 아직 며느리 본 적 없다. 그런데 부엌을 누구에게 맡겨?"
 시어머니가 어림도 없다는 투로 받았다. 영희에게 맞대놓고 하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억만
이도 그렇게 되자 모쓱해져 영희를 돌아보았다. 그런 억만에게 영희는  한 번 더 강한 눈짓
을 보냈다.
 "에이, 어머니. 또 왜 이러세요? 그러지 말고 부엌일은 이제 저 사람한테 맡기세요. 아버님
도 허락하신 일인데..."
 "일 없어. 내 자식 못난 곤 못난 거고 며느리는 또 며느리야. 그래도 한 집안의 맏며느린데 
근본도 없는 걸... 느이 아부지가 덥석 받아들였으니 느이 아부지나 데리구 살라고 해라."
 예전의 영희 같으면 그걸로 한바탕을 해도 크게 하고 짐을 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
니었다. 오히려 더 냉정한 기분으로 사태를 바라보다가 속도 밸도 없는 여자처럼 억만을 말
렸다.
 "억만씨- 그만둬요. 어머님이 싫다잖아요? 전 괜찮아요. 억만씨나 너서 나가보세요."
 시어머니도 영희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약간은 서슬이 무뎌진  느낌이었다. 영희의 그 말에
는 아무런 핀잔이나 퉁이 없었다. 그때 억만이 뜻밖의 순발력을 발휘했다.
 "그래, 그럼 당신 나 따라와. 같이 가서 아버님이나 거들자."
 억만이 어떤 계산을 하고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지만 시어머니에게서 거둔 성과는 컸다. 
갑자기 부엌에서 떨그럭거리던 소리가 뚝 그치더니 성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가긴 어딜 가? 동네 사람 다 보는데... 그리구 느이 아버지한테 가선 또 무슨 요사를 떨려
구?"
 그때만 해도 영희는 눈치없는 억만이 일을 그르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레 아니었다.  갑자
기 부엌문 밖으로 나온 시어머니가 앞치마를 벗으며 못마땅한 어조로 영희에게 물었다.
 "정말 밥이라두 제대로 할 줄 아는 거야?"
 "어머님두 참 시켜나 주세요. 우렁이 각시처럼 해놓을게요."
 영희가 정말로 정다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처럼 응석  기운까지 섞어 그렇게 대답했다. 
스스로 낯이 달아오를 정도로 억지스런 연출이었으나 효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어머니
가 여전히 눈은 허옇게 흘기면서도 벗어든 앞치마를 영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부엌에 들려면 소금 단지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이리 와봐."
 시집에 든 지 닷새 만에 부엌에 들게 된 영희는 낯설고 강한 적을 새로 만난 전사와도 같
은 기분으로 조리에 들어갔다. 이미 안쳐둔 밥에 시어머니가  주문하고 간 것은 시금칫국과 
된장 뚝배기, 그리고 김장 김치에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조림 한 가지를 떠놓는 정도였다. 하
지만 영희에게 그 아침의 부엌은 한 번 지면 모든 게 무너져보리는 싸움터였다. 그 며칠 눈
치로 시어머니에게 밥을 질게 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안  영희는 먼저 밥부터 손을 댔다. 
밥은 영희도 많이 지어본 것이라 자신 있었다.
 밥솥을 열어보니 쌀 밑에 안친 삶은 보리에 비해 물이 줌 많은 듯했다. 영희는 조심스럽게 
물을 조금 덜어내고 연탄 아궁이에 얹었다. 정작 시험대에 오른 것은 그쪽이란 기분으로 반
찬에는 더욱 신경을 썼다. 처음  영희는 얼른 가까운 동네 반찬  가게라도 달려나가 자신의 
돈으로라도 시장을 봐올까 했으나 곧  그만두기로 했다. 시어머니의 심술에  낭비로 비칠까 
두려워진 까닭이었다. 대신 깁 안에 있는 재료로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신기하
게도 그때 구석구석 도움이 된 것이 들을 때는 그토록 지겹던 어머니의 잔소리였다.
 "파 하나 써는 것도 정성이라. 길이는 한 치를 넘는 법이 아이라."
 "채나물 썰어논 게 똑 손가락만하다."
 "시금치는 패(푹)익하라(익혀라). 요새 영양, 영양 캐싸미 서근 서근 하게 끓여노 거사 대국
년도 못 먹을라."
 "된장은 어디든동 개(개어) 여라(넣어라). 국을 끓이든동 찌지든동 하마 장께(메주콩)이  둥
둥 떠댕기믄 초근들 음식이라."
 "음식맛은 뭐든지 지대(그 자리)에서따. 지(장아찌)빼고는 쪼린 거든  볶은 거든 지 길대로 
(원래의 요리법대로)뜨사볼(따뜻하게 만들)궁리를 해라."
 영희는 십년 저쪽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뒤늦게 감동해가며 정성을 가해 반찬을 
만들었다. 부엌에 굴러다니는 무가 있어 무생채를 한 보태고, 시아버지가 좋아한다는 멸치볶
음은 기름을 얇게 둘러 살짝 데웠다.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 중에 가장 요긴했던 기억은 그 집의 식성, 특히 음식의 간을 
알아맞히는 방법이었다. 언젠가 어머니는 갓  시집간 새댁은 어린 시누이에게  국맛을 보게 
해 간을 맞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국이 끓을  무렵 영희는 마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는 시누이를 부엌으로 불러 국의 간을 맞췄다.  국의 간으로 짐작해서는 영희네보
다 좀 싱겁게 먹는 집 같았다. 영희는 그 짐작에 따라 다른 반찬들도 간을 맞췄다. 비닐하우
스에 나갔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그런 영희가 상을 올리기  알맞을 때에 돌아왔다. 영희
는 전에 없니 막 끓어 따뜻한 음식만으로된 상을 올리면서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에게 강요
하던 천덕을 자발적으로 활용해보았다. 시집  식구들은 어린 시누이까지 모두  상에 차리고 
자신의 밥은 남은 무생채 보시기와 된장 종지만을 반찬으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도 놀
랄 만한 효과를 내었다.
  "아니-넌 왜 상에 밥을 올리지 않고..."
  시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그렇게 말했고 시어머니도 그걸 영희의 몸에 밴 천덕으로만 여기
지는 않는 듯했다. 
 "어쩌다가 팔자가 그리 풀렸는지는 모르지만 본배는 있는 집에서 자란 모양이더라."
  나중에 듣기로는 그 완강하던 시어머니도 그 일을 두고는 억만에게 영희를 그렇게 평했다
고 한다.  하지만 더 큰 성공은 식구들 모두가 영희의 반찬 솜씨를 인정해 준 것이다.
  "사람이 새로 들어오면 음식이 달라진다더니- 그렇구나.  모두 집에  있던 것들인데 이렇
게 달라질 수 있나."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아선지 그렇게 말하고 그쳤지만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턱
없이 음식맛에 감탄을 하다가 끝내는 시어머니의 핀잔을 듣고서야 머쓱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도 그 일 때문에 영희를 더 못마땅히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뒷날로 미
루어보면 영희가 제 돈으로 집에 없는 재료를 사들여 떠벌이지 않은 것도 잘한 일 같았다.
  시집 식구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간 뒤 영희는 다시 어려운 관문 하나를 통과했다는 
기분으로 설거지에 들어갔다.  이 집 식구들은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시어머니가 아직도 
뻗대고 있지만 그것도 멀지 않았다-그런 자신이 들면서 묘한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  성취감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토록 애써 
참고 힘들여서 이른 곳인데도 언젠가 한번 와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언제 어디였을
까- 영희는 아득한 기억을 되살리듯 그런 생각에 잠겼다.  옛날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기 전
에 무슨 예언처럼 들은 미래라서  그랬을까.  그때 어머니의 경계는  '시집가거든'이란 가정 
아래 이루어졌다.  시집가서 니 시어머니한테  그래라.  시집가서 니 시아버지한테  그래라.  
시숙한테 그래라.  시누이한테 그래라.  실날같이나마 돌내골 시절까지도 이어졌던 어머니의 
기대가 실제의 경험처럼 느껴져 그럴 수도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몇 년 시골에 묻혀 있다가 중매로 시집을 갔다면 아마도 억만
의 집과 비슷한 집으로 오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에 이끌릴수록 그게 아니었
다.  지금의 시아버지와 같은 시아버지, 그리고 억만과 비슷한 남편을 만나 산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랬다.  이 무슨 기억의 억지일까,  무엇 때문일까- 영희는 거의 끝난 설거지
를 멈춘 채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아득한 세월을 건너 홍사장과 정섭이 나타나고 자신이 한때 경리 겸 급사
로 일했던 그들의 고물상 같은 점포가 눈앞에 떠올라왔다.  벌써 10년이 지났는가.  어딘가 
그들이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의 모습이  어머니와 비슷해 질겁을 하고 떠난  사람들이었
다.  그들을 떠날 때 훔쳐나온 돈도 어쩌면 그들에게서 떠나기 위한 핑계였는지 모른다.  맞
아, 그때 홍사장이 시아버지가 되었으면 꼭 지금의 시아버지 같았을 것이다.  그의 기대대로 
정섭과 결혼했더라면 조금 전과 비슷한 정경이 그때 벌써 연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아무것도 닮은 게 없었다.  그때도  영희의 삶은 
상처를 입은 뒤였지만 아직은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아니, 그냥 말없이 홍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만 해도 그걸로 영희의  상처는 치유될 수도 있었다.  거기  비해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는 만신창이가 되어 마지막 반격의 교두보로 시집과 억만을 이용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왜 홍사장과 정섭이 이런 순간에  떠오르는 것인지 영희는 전
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얼굴 화끈하게 연상되는 것은 재작년에 있었던 정섭과의 뜻 아니
한 해후였다.  
  술을 매개로 한 매음을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제도로서의 요정은 그 이용자에게 대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전리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소모이다.  주어진 체제 속에서 
승자들은 전리품으로 쾌락을 획득하고 패자들은 그곳에서 자신을 소비해  위자를 산다.  한
쪽은 생산의 한 기제로 인정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대표적인  소비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
만 영희가 긴 세월 그 요정에서 더 많이 목격한 것은 전리로서의 기능이었다.
  당장은 무언가를 이기고 획득한 쪽의 잔치가 밤마다 요정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의  일반적
인 성격 같았다.  따라서 영희는  거칠고 감각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권력의 
풍향과 경제적 비교 우위의 소재를 읽어왔다.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이제 더는 자신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삶을 정상적으로 회복할 길이 없으리라 단정되면서 영희가 특히  유의한 
것은 경제적인 승자들의 행태였다.  그녀는 복수심과도 같은 조급함으로  거기서 어떤 효율
적인 지름길을 찾았다.  그리하여 오래 가해자로만 인식되어온 세상 모두의 삶과 자신의 삶
이 매겨진 자리를 단번에 역전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관찰이 진행되면서 그녀는 전리를 나
누는 자리에도 뚜렷이 구분되는 두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그 하나는 지정성이 인정되는 승리자들의 축제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쪽의 유탕이었다.  축제는 생산과 연관되어 있지만 유탕은 결국 자기 소모로 진행된다.  그
날 영희가 얼굴 마담으로 있는 요정에서 진행된 정섭의 술자리는 바로 그런 전형적인 축제
였다.  송파 쪽에 냉동기 생산 공장을 준공한 신흥 가전 제품 회사의 본사 상무와 간부들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영희는 큰 봉을 잡을 줄 알았다.  공장이라면 외자 도입을 떠올리고, 
외자라면 절로 커미션과 고급 관리를 떠올리게 된 영희에게는  당연한 기대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어 몰려온  사람들을 보니 벌써 기대와 달랐다.   간부라는 사람들이 
전부 회사 마크가 찍힌 청색 점퍼 차림인 데다 태반은  기술직으로 보였다.  뒤이어 도착한 
상무란 사람도 별특색 없는 신사복 차림에 호기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돈냄
새를 풍기는 사업가나 술판 키우는 재주 하나 유별난 브로커, 그리고 그들이 하늘같이 받들
어 모시는 '영감님'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 사람들 이거 실내 야유회하려고 모인 거 아냐?"
  입빠른 아가씨가 그래도 호기 좋게 요정문을 들어서는 그들을 보고 그렇게 빈정거릴 정도
였다.  상을 주문하는 데도 그랬다.  업소에서   려주는 대로의 흥청거리는 술상이 아니라 
사람 몇 명이니까 어떤 술 몇 병에 어떤 안주 몇 접시하는  식으로 규모를 따졌다.  아가씨
도 넣어주는 대로가 아니라 손님 무엇에  하나꼴로 끼여앉아 술이나 따를 정도로  해달라고 
처음부터 머릿수를 정해주었다.  그리 되면 자리에서 나올 팁도 불을 보듯 뻔해 아가씨들은 
벌써부터 그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서로들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영희는 그래도 찾아온 
손님이고 워낙 규모가 커서 괄시할 수가 없었다.  달갑잖아하는 아가씨들 몇을 달래가며 자
리라도 어울리게 해줄 양으로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좌상격인  본사 상무 곁에 앉은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긴장할 일이 생겼다.  바로 그 상무란 사람 때문이었다.  직함이 그
런 데다 얼핏 보기에도 나이가 들어 보여  전혀 그런 예상을 하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틀림없이 정섭이었다. 영희가 처음 정섭을 만났을 때는 이미 신체의 성숙이 끝난 뒤라 십년 
세월도 그의 외모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그때는 생김에서 하는 짓까지 하나하나가 
못마땅하고 그래서 그의 은근한 순정이 징그럽게만 느껴졌는데, 그런 자리에서 다시 대하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한 일이 새삼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워지는 
한편 애특한 사연으로 헤어진 철부지 시절의 연인을 다시 만난 듯 가슴 짜릿함마저 느껴지
는 것이었다.  정섭은 처음에는 영희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 사이 무뚝뚝한 일꾼의 인상을 말끔히 씻어내고 본사 간부로서의 위엄과 아울러 그런 자
리에서 아랫사람들을 다룰 줄 아는 세련됨과 유연함을 보였다.  때맞춰 술잔을 돌리고 차례
가 되면 최신의 유행가로 분위기를 살려가는 그를 보며 영희는 문득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 바람에 영희는 원래의 계획보다 오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정
섭을 살폈다.  술판이 무르익어가면서 그의 근황이나 그가 상무로 있는 회사의 정보가 보다 
풍성하게 쏟아져나왔다.  직함이 상무일뿐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현장의 기술직이며, 그 부
친인 사장은 궁상맞을 만큼 검소하고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 등, 들을수록 틀림없이 이 상무
가 정섭이고 그 사장은 옛날의 홍사장임을 단정할 수 있었다.  영희가 고물상이나 다름없이 
기억하고 있는 그 허름한 점포는 생각보다 오래 유지되었고 지금도 그 변형은 남아 있는 듯
했다.  거기서 키운 자본과 기술 또한 영희의 생각보다 훨씬 실속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
다가 3년 전에야 자신들의 공장 설립에 들어갔는데 수천 평 부지는 벌써 십 년 전에 마련해
둔 것인 데다 그 설립 과정 역시  홍사장다운 신중함과 치밀함이 뒷받침되어 이제 그 어떤 
기업체보다 내실 있게 준공된 걸 자축하고 있었다.
  새로 설립된 그 공장이 외자나 따먹기 위해 겉만 번지르르하고 지은 그 무렵의 공장들과 
다르다는 것은 공장장 이하 직원들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들은 진심으로 홍사장과 
정섭에게 승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을 다행스러우면서도 자랑
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걸 보자 영희는  문득 십 년 전의 어느 밤인가  홍사장이 자신을 
데리고 그려보이던 청사진이 기억났다.
  "장사, 물론 그것도 잘하면 얼만큼은  벌갔디.  길티만 닥쳐오는 세상에서 정말로  큰돈은 
못 만들어야.  나는 또 알디.  논밭이나 고깃배, 어장 같은 걸루 다  큰 부자 행세하던 시절
도 지나갔다는 걸.  광산이니 뭐니 하는 것도 금노다지가 펑펑  쏟아지지 않는 담에야 한물
갔디.  닥쳐올 세상은 공장만이 진짜 큰 부자를  만들어낼 거이야.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을 
강물처럼 쏟아내는 공장... 하기야 지금도 그 비슷한 공장과 돈쟁이들은 있디.  방직공장, 설
탕공장, 밀가루공장-겉보기엔 그럴듯해 뵈디.  길티만 기건 아니야.   좀 통큰 장사치, 아니 
질 나쁜 노름꾼들뿐이야.  야바위같이 장사해 번  돈으로 와이로(뇌물) 써서 원조로 들어온 
원면, 원당, 통밀, 많이 빼돌리는 눔이 이기는 노름판이라구.  자본도 기술도 원료도 모두 정
치에만 목을 매고 있고, 생산이라는 것두 따지고 보면 조립이나 가공에 지나지 않아야.  그
걸 상품이라구, 혼자 차고 앉았거나 몇몇이서 갈라먹기로 나눠개지고  있는 시장에 아무 경
쟁 없이 퍼앵기는 거디.  것두 두배 세배 바가지루다가... 길티만 아니디.  그래서는 안 되디.  
국회의원, 장관은 갈리고 정권도 바뀌지만 기업은 그렇게 갈려서는  되는 게 아니잖네?  그
런데 기업이 정치에 목을 매 어떡하갔다는 거야?  기업가가 무슨 기생이간? 양갈보간?  기
업하는 그놈들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를 위해서도 기래서는 안 된다 이기야.  생각해보라우.   
정권 바뀌고 장관 갈린다구 기업이 망했다 흥했다 해서 쓰가서?  기업이 누구 혼자서 하는 
거이야? 그 밑에서 밥 빌어먹는 숱한 일꾼하고  거기서 나온 물건 사다 쓰는 일반 국민  다 
어쩌가서?  기업하는 눔들은 말할 것두 없구...  나는 달라야.  진정한 생산, 진정한  산업을 
하겠다 이기야."
  "기술도 내실 있게 차근차근 쌓아가구  있디.  우리 부자 맨날 고물  냉장고 뜯어놓고 뭐 
하는지 아니?  뭣 대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폐품까지 받아닥 밤낮없이 뜯어보고 꿰맞추는
지 알간?  모두 기술을 내 것으로 익히기 위한 거디.  우리 정섭이 공업학교  보낸 것두 마
찬가지야.  난들 왜 귀한 자식  좋은 대학 보내 편한  월급쟁으로 보내는 거 보기  싫갔네?  
까짓 기술이야 최신 외국 기계 비싼 값으로 터억  사다놓으면 모든 게 다 제대로 될 것  같
디?  길티만 안 그래야.  기곌 부리는 건 사람이구,  길케 하자면 만들려구 하는 것부터 내 
몸처럼 알아야 한다구.  기라구- 까놓고 말하자면 이제 이 마당에서는 기술 하면 우리 부자 
따라온 눔 하나도 없을걸.  벌써 작년부터 양코배기들까지 냉동기라믄  우리한테 수리를 부
탁하니까니..."
  옛날 그때처럼 그의 말을 구절구절 다 기억해낸 것도 아니고 그 말 뒤에 숨은 진정한  산
업화의 원리를 다 알아들은 것도 아니지만 영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장님, 결국 뜻을 이루셨군요...'
  그러나 다시 가슴이 뭉클해와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거북해졌다.  영희는 적당한 기회를 
보아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정섭임을 확인하고 그들 부자의 성공을 확인하자 자신을 감추
고 싶은 마음도 더욱 간절해졌다.  영희는 정섭이 자신을 몰라볼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었
다.  실제로 목소리만 조심하면 십 년 저쪽의 사람들은 거의 자신을 몰라보았다.  그때는 죽
어 있던 콧날이 미간까지 오똑 서고  눈은 두 번의 수술을 거쳐 딴  사람의 눈같이 되었다.  
까맣게 윤기나던 단발머리는 잦은 고데와 파마로  붉고 푸슬푸슬 요정 마담의 얹은  머리가 
된 데다 얼굴에는 만만치 않은 십 년  세월의 풍상이 더해졌으니 영희가 그렇게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영희가 몸을 일으키자 곁엣사람과 이야기
를 나누고 있던 정섭이 문득 얘기를 멈추고 영희를 쳐다보았다.
  "잠깐, 진마담이라고 했던 가요? 내 물어볼 말이 있는데..."
  그 말에 가슴이 철렁해하면서도 영희는 애써 내색 않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저에게요? 상무님이 제게 뭘 물어보시려구? 호호, 공연히 가슴 떨리는데요."
  그런 영희의 목소리도 오래 습관이 된 가성이었다.  정섭이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
다.
  "물어봐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절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상무님을요? 글쎄요.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영희는 더욱 쉰 목소리로 그렇게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가슴속은 누가 알아들을까 민망
스러울 만큼 쿵덕거리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은  정섭이 끝내 자신을 몰라봐주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하게 그래도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일이었다.
  "그럼 성이 정말로 진입니까?"
  "건 비밀인데요.  네, 좋아요.  아녜요."
  "그럼 혹시-이영희씨..."
  거기서 하마터면 영희는 자신을 드러낼 뻔했다.  그가 그토록  오래 그를 기억해주었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동만큼이나 느닷없는 자존
심이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감추게 했다.
  "건 아녜요. 저는 김인데요."
  영희는 그 자리에 자신의 본명을 아는 아가씨들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그렇게 둘러
대었다.  워낙 미소조차 잃지 않고 하는 부인이라 이번에는 정섭도 흔들리는 눈치였다.
  "하긴 진마담 같은 미인은 결코 아니었는데...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들지.  기껏해야  확실
한 건 귀밑의 점 하나뿐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웃기웃했다.  그러나 귀밑의  점 하나, 란 말에 영희는 다시 
묘한 감동을 느꼈다.  영희에게는 왼편 귀밑으로 점이  하나 있었다.  별로 크지 않아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인데 정섭이 뜻밖으로 그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추
억 속에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영희가 갑자기 생긴  그런 궁금증에 자리를 뜨지 못하
고 있는데, 곁에 있던 그 공장 간부 하나가 때맞추어 정섭에게 그걸 물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진마담 귀밑에도 점이 하나 있네.  누굽니까? 상무님같이 무뚝뚝한 분이 귀
밑의 점까지 기억하실 정도로 그리워하는 분이.  여자 같은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별것 아뇨."
  직위에 따른 위엄을 지키려 함인지 정섭을 처음 그렇게 얼버무리려했다.  그러나 두번 세
번 조르듯 묻자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옛날 우리가 청계천에서 중고품을 취급할 때 경리로 일하던 아가씨였소."
  "그런 아가씨가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 아가씨들 귀밑에 점까지 다 기억하시려면  상무
님 머리칼 다 세었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는 듯 그렇게 거들었다.  갑자기  술기운이 오르는지 정섭의 얼굴
이 드러나게 붉어지며 받았다.
  "아버님이 며느릿감으로 탐을 내셨지.  그래서 나도 눈여겨보았을 뿐이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상무님이 좋아하셨으니까 사장님도 그리  마음 내신 것 아닙니
까?"
  다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짓궂게 물어놓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뒤 어떻게 되었어요?"
  "달아나버렸어요.  수금해온 돈을 가지고."
  정섭이 질문이 귀찮았는지 그렇게 솔직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영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걸 다시 한번 다행으로 여겼다.
  "굴러온 복을 내차고?  그럼 그거 도둑년 아냐?"
  다시 누군가 그렇게 경박하게 받았다.  갑자기 정섭의 얼굴에 침중한 기운이 어렸다.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고-실은 가난한  고학생이었는데 대학 등록금이 없었던  모양이
오.  돈을 가져가도 용도와 갚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쪽지를 남기고  떠났으니 기한 없는 차
용이 된 셈이지.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도 나도 그런 그 여자의 야심과 억척을 좋아했는지
도 모르겠소.  허영이라고 나무라면서도 그 여자가 공부하는 걸 대견스럽게 여겼으니까.  미
안해요, 진마담.  내가 엉뚱한 곳에서 그 사람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소."
  영희가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그뒤로  영희에게 일어난 일련
의 변화도 어쩌면 그 부끄러움과  함께 받은 충격에서 비롯되었을는지 모른다.   그 변화란 
영희가 지금 온몸을 던져 시도하고  있는 받아치기를 말한다.  정섭이 보여준  성취를 통해 
이제는 모두 글러버렸다는, 점차 의식 속에 고착되어가는 실패의  단정을 씻어내고 다시 한
번 세상을 상대로 싸워볼 의욕이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억만을 골라 십 년을 몸담았
던 질척한 밑바닥 삶과 작별하고 치열한 싸움과도 같은 나날로 시집에 자리잡고 있는 중이
었다.  영희는 그게 정섭과 같은 사람들의 세계로 복귀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아침에 그들 부자가 이토록 강렬한 인상으로  되살아나는 것일까.  내가 그
들의 세계로 복귀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뜻일까-설거지를 끝내고 마른 수건으로 손
을 닦으면서 영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그 느닷없는 연상을  해석해보았다.  하지만 선뜻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기에는 개운치 않은 데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 그들 부자는 
더 멀어지고, 영희를 향한 미소는 갑자기 조소로 바뀌었다.  그러자 영희는 묘한 혼란에 빠
졌다.
  '그러면 이 길로는 아무리 가도 그들의 그 당당함과  자족스러움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
인가.  궁극적으로 부를 획득한다는 데는 그들이나 나나 다름이 없는데도, 왠지 그들의 세계
로는 끝내 복귀하지 못할 것 같은 이 예감은 무엇 때문일까.'
  영희는 제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홀로 자문해보았다.  그러나  끝내 그 까닭은 알 
수가 없었다.  공업화, 선진화란 이름으로 초기 자본주의와 후기 산업 사회적 특성이 뒤얽혀 
밀려들던 60년대말의 이 땅에서 하부 구조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을 상승시키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천민 자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산업 정신이다.  다소 주
관적이고 거칠게 이해되기는 해도 홍사장이나 정섭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산업 정신
이었다.  아직 공리나 후생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없지만, 홍사장은 틀림없이 다가오는 시대
에서의 가장 효율적인 생존 양식을 체득한 사람이었고 정섭도 그걸 이어받았다.  그러나 영
희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녀에게는 그들처럼 절제된 삶에서 자란 근면한 절제도, 공존에 대
한 이해나 윤리성에 대한 경외도  없었다.  이윤의 극대화란 이름은 같지만  그걸 추구하는 
것은 복수욕에 들뜬 벌거숭이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가 무사히 그곳에서 교두
보를 확보하고 상승의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그 길은 남은 외길, 곧  천민자본주의뿐이었다.  
어쩌면 그날 아침 영희가 빠진 묘한 혼란은 그 두 길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에서 온  것일는
지도 모른다.
  
    제10장
  되찾은 봄
  "자, 그럼 지금부터 69년도 상견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방 방송은 일체 꺼주셨으면 합니
다."
  조심스러운 탐색도 거의 끝나 제법 왁자해진 실내를 그런 사회자의 목소리가 진정시켰다.  
낯설으면서도 가슴 벅찬 분위기와 그 동안 돈 몇 잔술에 얼얼해진 머리로 좌중을 살피던 인
철은 그 소리에 이끌려 사회자쪽을 바라보았다.  학과 총대표인 4학년 선배였다.  그를  보
자 인철은 다시 한번 자신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했다.  처음 보게 되
었을 때부터 눈길을 끌던 차림의 부조화와 이질감 때문이었다.  그의  머리는 학생 같지 않
게 깔끔하게 깎인 데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가르마지어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눈부시
게 흰 와이셔츠에 까만 넥타이까지 매어져 있었다.  거기까지만 아무 흠 없는 신사였다.
   그런데 그 아래로 내려가면 느낌은 사뭇  달라졌다.  그의 별로 크지 않은  체구를 둘둘 
감고 있는 듯한 것은 검은 물  들인 미군용 바바리 코트였다.  아마 공군  장교용인 듯한데 
그것도 크기를 고를 여유가 없었던지 길이가 거의 발목까지 내려와 허리띠를 졸라매면 엉치
에 걸렸다.  그리고 그 아래는 또  목을 자른 군화로 언제나 정성들여 닦아  머리 못지않게 
반들거렸다.  그를 위에서부터 훓어보면 깔끔하고 단정한 신사로 시작해 변조한 구호품이나 
미군 용품이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멋이 되는 마지막 세대로 끝이 났다.
  만약 아래서부터 훓어본다면 그 반대의 느낌을 줄 것이다.  거기다가 그런 묘한 이질감과 
부조화는 그가 항시 들고 다니는  두 개의 소도구에도 이어진다.  그의  오른손에는 당시의 
대학생들과는 달리 책이 가득 든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누가 보아도 일제 때 
것쯤으로 여겨질 만큼 낡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른손에 든 바이올린 케이스는 또 달랐다.   
당시로는 귀한 악기였던 바이올린이 주는 서구적 이미지도 그랬지만 구두처럼 약을 발라 닦
은 듯한 가죽 케이스의 반들거림은 오른손의 책가방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움과 낯설음을  강
조했다.
  그가 그런 차림으로 시장거리를 걷는다면 사람들이 틀림없이 숨어 킥킥거리거나 수군거릴 
것이다.  하지만 교정 안에서는 누구도 그를 별나게 보는 것 같지 않았고, 그 자신도 태연하
기만 했다.  인철은 그를 볼때마다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게 대학이다, 하는 느낌을 아울러 
가지곤 했다.  그날도 그 명물 가죽 가방과 바이올린 케이스는 나란히 그의 발치에 놓여 있
었다.  그리고 따뜻한 실내인데도 그의 엉치에 걸린 바바리의  허리띠조차 풀지않고 사회를 
보고 있었는데 반듯한 이마에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실은 그의 말투도  종잡을 수 
없는 데가 있었다.  이전 순서인 회식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먼저 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각자 앞에는 쇠고기 1인분에다 막걸리 반되,  소주 
한병이 선택으로 나오고 다시 냉면이 나올 것입니다.  막걸리는 여유가 있지만 불고기와 냉
면은 여유가 없으니 각자의 정량에 유의하시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빈약한 과경비를 반영하는 그 같은 부탁이면 얼마든지 농담 섞어 말 할 수도 있는 일이었
다.  그런데 정숙을 하고 정중히 당부하는 게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는 식이었다.  그간에 주
고받던 잡담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총대표 다시 말했다.
  "그러면 신입생들을 위하여 학과 교수님들  소개가 있겠습니다.  입학식 및  전체 신입생 
환영회 때 일부 소개되신 바 있으심니다만 지극히 추상적이고  간략한 것이었습니다.  평생
의 은사로 모실 분들이니 만큼 이 자리는 여러분이 그분들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에 다가설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빕니다."
  여전히 냉정한 보고 같은 말투로 식순을 알린  총 대표는 이어 같은 말투로 과에서 가장 
원로가 되는 교수를 소개했다.
  "냉면에는 고춧가루를 넣고 안 넣어도 좋다는 해방이후 일관된 지론(持論)이신 이한윤 교
수를 소개합니다.  조혼으로 회혼식을 5년 앞두고 계시며 저희  학교에서는 교수로 25년 재
직하셨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문학개론'과 '현대문학' 특강을 맡고 계십니다.  부업으로는 시
와 수필을 하셨는데 (독서광)이라는  수필은 신입생 여러분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도 
읽었을 것입니다.  또 한때는 잡지도 편집 하셨는데 대입용 국문학사에 나오는 ((외국문학))
이라는 1930년대의 동인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사회적인 성취와 사적인 이력을 묘하게 뒤바꿔 놓은 소개였다.  사회자의 억양 없는 말투
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뒤바꿔 놓은 재치로 받아들인 신입생 몇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인철은 야릇한 긴장으로 그 노 교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국문
학사 속에 편입된 인물을 가까이서  보는 국문과 신입생의 긴장이었다.  이미  일흔을 넘긴 
듯한데도 주름없는 이마와 하얗지만 숱 많은 머리칼이 자못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땀 때문
인지 이상하게 번들거리는 넓적하고 못생간 얼굴과  비만기 있는 몽땅한 몸매는 활자로  그 
이름을 읽으면서 상상한  것과는 너무  달랐다.  거기다가 인사말도  은근히 실망스러웠다.   
"에--또, 내가 이한윤이다.  신입생에게 당부하는 말은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온 만큼 열심
히 공부 잘 하라는 것으로 작년과 같다.  그리고 냉면에 고춧가루를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좋다는 내 지론도 작년과 변함없다.  이상."
  그런 자리에서 무슨 거창한 명강의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 심각하고 진지
한 경구한 구절쯤은 듣게 될 줄 믿었던 인철이었다.  그런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으로 인사
말을 때우는 것이 왠지 못마땅했다.
  "술과 여자와 담배를 모두 멀리한다  해서 삼불이란 아호를 가지신 임용준  교수님이십니
다.  술과 담배는 즐기실 형편이 못되고 여자는 즐기실 능력에  이상이 있다는 분석이 있으
나 검증된 바는 없습니다.  소학교 2년 중퇴 후  순전히 독학으로 경성사범학교를 들어가셨
고 우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신 지 올해로 19년이 되시며 어학 쪽이십니다.  우리과의 학과
장님이시기도 한데 요즘은 소쉬르로 우리를 괴롭히는  취미가 생기시어 원성이 자자합니다.  
내용이 지루해서 지은이의 이름까지 기억하지 못할 분이 많으시겠지만 고등학교 국어  교과
서에서는 (말의 뜻과 소리)라는 제목으로 논문의 일부가 실려있습니다..."
  사회자가 다시 한 중년 교수를 소개했다.  소개말로 그 내용이 지루해서인지 지은이 이름
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 제목의 글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게 다시 인철을 기대로 긴장시켰으나 결과는 이번에도 비슷했다.   이번에는 중등학교 교
원 같은 지루하고 고지식한 훈시였다.  그래도 인철에게 약간 인성을 남긴 것은 다섯번째로 
소개된 신임 교수였다. 
 "술에 취하시면 신발을 잊어버리시는 게 장기이신 고용환 교수님을 소개해드립니다.  일설
에는 술만 취하시면 발부터 마비되어 신발이 벗겨지는지 모르시게 되기 때문이라 하기도 하
고, 다른 일설에는 신발을 비행 무기  활용하시는 바람에 그렇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교수님께서는 한사코 확인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30대로는 후반의 전임강사는 신예의 패기로 짧지만  인상 깊은 한 구절을 인철의  기억에 
남겼다.
  "신입생 여러분, 문학은 사랑입니다.  불 같은  사랑만이 문학을 평생의 일로 알고 갈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먼저 그 사랑부터 기르싶시오."
  다음 순서는 신입생들의 자기소개였다.  인철은 이제 남은 생애 동안 동기 동창이란 이름
으로 묶이게 될 서른명의 자기 소개를 주의 깊게 들었다.   짐작대로 대부분은 지방이든 서
울이든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에서 올라온 모범생들이었다.  특히 다섯명이나 되는 여학생은 
하나같이 반듯한 명문고 출신이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동기들도 몇 있었다.  대개는 재수생으로  이름없는 지방고등학교 출신
이었는데, 치기와 패기를 혼동한 자기소개가 공통점이었다.  인철은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  한 사람은 육군을 만기 제대한 뒤 입학시험을  쳐 들어왔다는 나이든 신입
생이었고, 한 사람은 벌써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삼수생이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인
철은 되도록이면 평범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앞선 아이들의 치기 넘친 자기 소개들이 그를 
억눌러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위쪽 교수님들이   왁자한 웃음과 함께  상급생 하나
가 막걸리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이인철씨, 이 술 받아요.  임용준 교수께서 특별히 내린 술이야."
  자기 소개를 마치고 막 자리에 앉으려는 인철은 조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전 교수 소개 때  전혀 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들은 교수가 내린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철의 어리둥절해하는 까닭을 알아차린 상급생이 술잔을 내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놀랍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요.  당신도 안 드시는 술을 신입생에게 이렇게 내리기는 처음
이니까."
  그때 그리 높지 않은 임용준 교수의 목소리가 몇 개의 테이블을 건너 인철의 귓전에 전해
왔다.
  "나처럼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애썼다는 뜻이다.  마실 수 있으면 마셔라."
  그 말에 인철은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잖아도 옆자리에 술을 못하는 친구가 앉
고 맞은편에도 여학생이 하나 끼여  있어 평균치가 훨씬 넘게 마신  인철이었다.  거기다가 
급하게 들이켠 막걸리 한 사발이 더해져 정말로 자신이 걸어온 먼 길이 한 순간 눈앞에  펼
쳐지는 듯했다.
  "지금부터 과가전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과가는 (진주난봉가)입니다.  신입생  여러분은 
선배들이 하는 노래를 듣고 빠른 시일 내에 습득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주문처럼 느릿느릿 하게 (진주난봉가)가 식당 안에 울려퍼졌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진주낭군 
오시었으니 진주 남강 빨래가라...>
  얼얼해오는 머리로 그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인철은 특히 입학시험으로부터 발표 때까지의 
마음졸임과 합격의 감격, 그리고 등록을 전후한 우여곡절들을 까마득한 옛일처럼 감회 깊게 
떠올렸다.  하지만 슬픈 감회는 아니었다.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교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
고 사회자가 바뀌었다.  이른바 여흥의 시작이었다.   먼저 신입생들을 향해 술이 퍼부어졌
다.
  "신입생들 중에서 인재를 찾습니다.  인재를 찾습니다.  이 소주를 단번에 들이켤 수 있는 
인재..."
  냉면 대접에 가득 부은 소주를 쳐들면서 사회자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보기에는 엄청나
지만 기실은 냉면 사발에 25도 진로  한 병을 부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방을 떠돌면서 
40도가 넘는 소주도 마셔보았고,  막노동판에서는 30도짜리 막소주도  맥주컵으로 들이켜본 
적이 이 있는 인철이었다.
  "제가 한번 마셔보지요."
  인철이 자원하고 나서는데 같이 일어나는 친구가 있었다.  보니 얼굴에 벌겋게 술이 오른 
늙은 신입생이었다.  인철은 알지 못할 오기로 숨소리 한번 흩뜨리지  않고 냉면 대접을 다 
비웠다.  비슷한 시간에 술잔을 다 비운 늙은 신입생이 인철을 보고 싱긋 눈웃음을 보냈다.   
두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냉면대접을  비우자 더 많은 인재들이 지원하고  나섰다.  그리고 
자리는 더욱 활기를 더해갔다.
  "인재를 찾습니다.  신입생중에서 인재를 칮습니다.  노래로 이 자리를 화끈하게 달구어놓
으실 분..."
  사회자는 계속 인재를 찾아댔다.  원래 노래에는 자신없는 인철이었으나 이번에도 자원했
다.  늙은 신입생이 제대병답게 음담패설 섞인 노래로 갈채를 받는  걸 보자 인철도 자신이 
생긴 까닭이었다.  인철은 등록부터 입학식때까지 나갔던 공사판에서 배운  처량한 옛 군가
를 목청껏 뽑았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까마귀 우는 곳에 저는 갑니다.   삼팔선을 돌파하여 태
극기를 날리고 이 몸은 백골 되어 돌아오리다...>
  이어 한 바탕 소란스런 노래의 축제가 이어졌다.  사회자는 계속 인재를 찾았다.  노래 이
외의 장기로 이 자리를 흥겹게 하실 분 ... 인철의 온전한 기억은 그 부름에 달려나가 '배암'
을 팔던 삼수생과 언제부터인가 불안하게 술자리를 힐금거리다 자리를 뜨기 시작하는  여학
생들로부터 끝이 났다.  그 다음 그들은 마음에 들어하는 선배들이 2차를 옮겼다는 것은 기
억하지만 그 상세한 전말은 알 수 없고, 마지막은 늙은  신입생과 삼수생 셋만 남아 어디론
가 갔다는 것뿐이었다.
  다음날 인철이 눈을 뜬 것은 문화촌 근처에 새로 들어서는 주택단지 한 모퉁이에 있는 여
관에서였다.  창이 훤히 밝은 데다 타는 목과 쓰린 위로  잠에서 깨어났는데 곁에서 홀짝거
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소?"
  인철이 깨어난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돌아보며 그렇게 묻고 있는 늙은 신입생의 손에는 여
관의 물컵이 쥐어져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문화촌 근처의 여관이요.  어제 통금  무렵해서 여기 사는 친구 집에  신세좀 질까 하고 
찾아왔더니 그 친구가 하필이면 당직이라  그냥 여관에 든거요.  친구 마누라만  혼자 있는 
집에 술꾼들을 몰고 들어갈 수는 없잖소?"
  그렇게 경과를 말한 늙은 신입생은 들고 있던 물컵을  홀짝 비우더니 인철에게 내밀었다.  
 "한 잔 하시겠소?"
  그러면서 머리맡의 사 홉들이 소주병을 잡는게 그동안 깡소주로 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
이었다.  인철도 술깨나 마셨지만 아직 그럴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물컵에 따라
지는 차고 투명한 빛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한 방구석에 말려나 있는 물주전자를 
잡았다.  주전자를 반이나 비우고서야 제대로 잡는 시선을 맞춰  방안을 둘러보니 벽쪽으로
는 삼수생이 아직도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지금 몇 십나까? 오늘 첫 강의가 2교시 아닌가요?"
  "지금 서둘러도 그건 이미 틀렸고오--  저친구 깨기를  기다려 오후의 세 시간짜리 연강
이나 건집시다."
  늙은 신입생은 인철에게  권하려던 잔을 자신이  다시 홀짝거리면서  태평스럽게 말했다.  
첫 강의를 빼먹게 되는게 갑자기 인철의 마음에 걸렸다.  형식적인  개강은 사흘 전에 시작
되었지만 대부분은 출석부 정리와 교재 소개로 끝난 터여서 본격적인 강의는 그 날이 시작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격적인 수업은 오늘이 시작인데..."
  인철이 그걸 상기시키자 늙은 신입생이 씁쓸히 웃었다.
  "월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으로 대학 온 놈도 이렇게 늠름하잖소?  아마 오늘 강의는  제
대로 되기는 틀렸을 거요."
  그래놓고는 인철의 발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보다 이형은 먼저 신발부터 구해 신어야  할 텐데.  맨발의 아베베가 되지  않으려면."   
  "신발을?"  인철이 어리둥절해 묻자 그가 까닭을 일러주었다.
  "이리로 오는 택시 안에서 구두를 비행 무기로  썼잖소?  창문을 열고 마구 던졌단 말이
오."
  그러고 보니 발이 말이 아니었다.  양말은 신고 있었지만 양말 바닥은 흙투성이였다.  고
용환 교수의 주벽을 그대로 흉내낸 듯해 멋쩍기 그지 없었다.  인철이 가진 돈을 털어 겨우 
백고무신 한 켤레를 사 신고 여관으로 들어오니 심수생도 깨어  있었다.  그도 어지간한 모
주꾼인지 늙은 신입생을 거들어 남은 소주를 비우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자 인철도 오기가 
일어 그들이 주는 대로 몇잔을 마셨다.  세 사람이 택시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12시
가 넘어 있었다. 해장술에 다시 얼큰해져 교문을 들어서는데 맞은편에서 걸어나오던 여학생 
하나가 까딱 인사를 했다. 누군가 싶어 살펴보니 어제 삼수생  앞자리에 앉았던 앳된  여학
생이었다. 그녀는 얼굴도 앳될 뿐만 아니라 키도 국민학생만큼이나 작았다. 그러나 병신스런 
난쟁이가 아니라 균형있게 고루 작은, 그래서 작은 인형같이 예쁜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쟤 말이야 ……초조는 있었을까?"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늙은 신입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삼수생이 널름 받았
다.
 "나도 그런 의심을 해봤는데 그 나이는 틀림없이 넘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궁금한 게 
있어"
 "그게 뭐요?"
 "쟤 거기도 털이 났을까?"
 "그거 정말로 궁금하네"
 늙은 신입생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순결한 어린아이한테는 너무 외설스런  농담 같아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인철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그거 연구해볼 만한 과젠데"
 그때 삼수생이 건들거리며 돌아섰다.
 "노형, 어디 가요?"
 늙은 신입생이 그렇게 물었으나 삼수생은  대답도 없이 교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달려나갔
다. 늙은 신입생과 인철은 어리둥절해 그런 삼수생을 눈으로 뒤쫓았다. 교문 앞에서 그 여학
생을 따라잡은 삼수생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빠안히 삼수생을 돌아보았다. 다가간 삼수생이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얼 묻는 것 같았
다. 잘못 알아들은 듯한 그녀가 더욱 빤히 쳐다보다 삼수생은 손가락질까지 하며 다시 한번 
물음을 반복했다. 그러자 여학생이 갑자기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싸안더니 그대로 길바닥에 
폭삭 주저앉았다.
 "아니, 노형. 도대체 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요?"
 한동안 그런 여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건들건들 돌아온 삼수생에게 늙은 신입생이 물었
다.
 "나는 궁금한 건 못 참아. 그래서 본인에게 직접 물어봤죠, 뭐."
 "뭐야? 푸웃-"
 늙은 신입생이 그래놓고 웃으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그런데 손가락질은 뭐요?"
 "내가 물어도 얼른 알아듣지 못하길래 손가락으로 정확히 그곳을 가르쳐준 겁니다."
 삼수생은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건들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늙은 재수
생은 그야말로 파안대소했다. 인철도 그때는 아무 거리낌없이 따라 웃었다. 돌아서서 수군거
릴 때는 외설스러운 느낌이 있었지만 삼수생이 일을 거기까지 벌여놓고 나니 오히려 신선한 
익살같은 게 느껴졌다.
 "안 되겠어. 이왕 낮술에 취한 거 그대로 뻗칩시다."
 갑자기 무슨 치기가 발동했는지 늙은 신입생이 웃다 말고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 교문 쪽으
로 나갔다. 인철은 다시 그 여학생을 놀리러 가는게 아닌가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교문  밖 
가까운 가게로 달려간 그는 주머니를 톡톡 털어 사 홉들이 소주 세 병을 샀다.
 "이거 한 병씩 감추쇼. 보나마나  처음 마셔본 술에 낙태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등교했을 
우리 모범생들을 해장시키려는 거요."
 그리고 그들은 무슨 개선장군처럼 교정을 가로질러 어린  동급생들을 찾았다. 예상대로 동
급생들은 대부분 다음 강의가 있는 건물  근처의 풀밭에서 도시락을 펼쳐놓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순한 양떼를 덮치듯 그들을  덮친 세 사람은 거기 있는  여남은 명의 동급생들에게 
잔이 없어 도시락 뚜껑으로 나누어 마셔야 하는 소주를 떠안겼다.  모두 전날 마신 술이 있
어서인지 사 홉들이 세 병을 나누었는데도 곧 얼굴들이  벌개졌다. 일탈과 도취의 분위기는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다. 멀쩡하게  등교해 오전 강의까지 들은  동급생들이지만 전날의 
폭음에 이은 낮술로 어지간히 돌아 있는 그들 세 사람의 분위기에 쉽게 휩쓸려들어왔다. 거
기서 바로 술집으로 옮기자는 소리들이 나왔으나 오히려 늙은 신입생이 그들을 말렸다.
 "집단으로 강의를 빠지면 수강 거부 같은 걸루 말썽이  날 수도 있으니까, 우리 차라리 휴
강을 유도합시다. 마침 다음 시간이 '문학 개론'이니 한번 시도해볼 만하기도 하고, 여러분은 
그저 우리가 제안할 때 열심히 동조나 해주쇼."
 그리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그들을 이끌고 다음 강의가  있는 강의실로 갔다. 이한윤 교
수는 오 분이나 늦어 강의실로 들어왔다. 나이가 있어선지 간밤 일찍 자리에서 떴지만 숙취
의 기색이 역력했다. 교양 과정이라 60명이 넘는 수강생들의  출석을 확인하는 태도에도 억
지로 시간을 끄는 듯한 데가 있었다. 이한윤 교수가 출석부를  덮는 걸 보고 늙은 신입생이 
일어나 물었다.
 "선생님 냉면에는 고춧가루를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좋다는 지론에는 아직 변함이 없습니
까?"
 영문을 모르는 다른 학과 수강생들이  그 엉뚱한 질문에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한윤 교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대꾸했다.
 "그런데 그걸 수업 시간에 왜 묻나?"
 이번에는 삼수생이 일어났다.
 "개강 첫 주 수업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러자 처음부터 동조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동급생들이 왁자하게 거들었다.
 "냉면에는 고춧가루를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좋고."
 "개강 첫 주 수업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그런 분위기는 멀쩡한 다른 학과 수강생들에게도 재빨리 전염되었다.
 "좋습니다. 휴강합시다아."
 그런 수강생들을 보던 노교수의 얼굴이 갑자기 엄해졌다.
 "요놈들, 아직 작취미성에 홍몽천지구나. 내  수럽 시간에 감히 야료를  부리다니. 이태 전 
불문과 아이들이 이런 짓 하다가 전원 유급한 거 알아, 몰라?"
 그렇게 일갈을 해놓고는 방긋 웃으며 출석부와 교재를 싸들었다.
 "좋다. 오늘은 휴강이다."

    제11장
  교두보에서
"네가 둘어오고부터는 우리 집 밥상이 달라진 것 같구나. 잘 먹었다."
 늘 그랬듯 달게 밥그릇을 비운 시아버지가 영희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억양 없는 
목소리였지만 과묵한 농부의 표현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었다.  그 말에 상머리에 앉
았던 시어머니의 눈길이 실쭉해졌다.
 "아지노모도(조미료)하고 설탕 범벅에다 기름, 마늘 안 아껴 이 맛 못 낼 사람 어딨어?  새
애기, 너 양념 좀 아껴라. 당장 입에 달다고 음식  사치 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러다
가 다음에는 삼시 세 끼 고기 타령 나오겠다."
 시어머니의 그 같은 핀잔애 영희는 찔끔했다. 시아버지가 칭찬한 음식 솜씨의 비결은 옛날 
집을 뛰쳐나오기 전 어머니로부터 받은 혹독한 단련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말대로 많은 부분 미원과 설탕, 참기름 따위 양념을 아끼지 않은 데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푹푹 줄어드는 양념 단지를 제 돈 들여 몰래 벌충해놓았지만 시어머
니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동생이 다시 구원자로 나섰다.
 "에이, 어머니두.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양념 아껴 음식맛 버려요? 이제 그럴 때는 지
나갔다구요."
 "맞아요, 엄마. 삼심 세 끼 고기는 몰라도 우리 이제 양념 가지구 인색 떨지 말아요."
 시누이도 시동생을 거들고 나섰다. 영휘는 시동생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시누이가 영희  편
을 들고 나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희가 어렵게 그 집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그 어린 시누이의 차가운 눈길이었다.  영희는 그 눈길을 녹이기 위
해 먼저 그녀의 약점을 살폈다. 오래갈 것도 없이 그 약점은 곧 짚여왔다. 바로 집과 농사일
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녀의 갈망이었다.  그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네 해째 
궂은 농사일을 거들며 집 안에 붙들려 있었다. 영희는 먼저 시어머니부터 설득했다.
 "어머니, 요즘 세상은 여자라도 배워야 해요. 아가씨 저대로 그냥 두어서는 제대로 시집 보
내기 어려워요."
 "걔가 왜 배우는 게 없어. 집안일 배우고 농사 거들고...  여자가 그거면 됐지 배우기는  뭘 
더 배우냐?"
 "아녜요, 어머니. 그래봤자 농사꾼이나  만나 살면 모를까,  다른 데 가서  큰 도움 되겠어
요?"
 "농사꾼이 어때서? 그래, 너는 많이 배워 무슨 큰 수 났냐?"
 그때까지만 해도 영희 말이면 무엇이든 바로 듣지 않는 시어머니가 그렇게 삐딱하게 나왔
다. 예전 같으면 거기서 벌써 욱하고  치미는 성깔을 이기지 못했을 영희였다. 그러나  애써 
속을 삭이며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농사꾼이 어때서가 아니라 앞으로 그런 농사꾼이 많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특히 아가씨
의 결혼 상대로는요. 우리 마을만  해도 농사짓는 총각이 얼마나  왜요? 그렇다구 아가씨를 
일부러 시골에 시집 보내시겠어요?"
 아무래도 딸의 일에는 어머니가 더 자상하게 마련이었다.  시어머니도 영희가 거기까지 말
하자 더는 어깃장을 놓지 않았다.
 "그럼 너는 진숙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학교를 보낼 수 있으면 가장 낫겠지만 그건 이미 늦은 것 같구... 기술 학원에라두 보내는 
게 어때요?"
 "기술 학원? 무슨 기술을 배우는데?"
 "미용 기술도 있고 편물이나 요꼬도 있고, 양재도 있고, 타자와 부기도 있고."
 "그걸 배워 멀 하는데?"
 "미장원도 차릴 수 있고 양장점이나 편물점도 차리고, 경리루 취직두하고... 길은 아주 많아
요."
  "진숙이 걔가 정말 그런 일을 배울 수 있을까?  공연히 집 밖으로 내돌렸다가 기술  배운
답시고 헛바람만 나 아이 버리는거 아닐까?"
  "그런 걱정하지 미세요.  그건 시골에서 가출해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을 때나  그렇죠.  
하지만 아가씨야 같은 서울에 있는 집에서 통학하고 엄하신 아버님 에 범 같은 오빠가 둘이
나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오히려 위험하기는 마음에도 없는 농사일이나 거들며 집에 
쳐박혀 있는 일이에요."
  시누이가 집에 처박혀 지내는 것을 못 견뎌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시어머니였
다.  이제는 완전히 의존조가 되어 받았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옳은  것도 같다만 네 시아버지가 걱정이구나.   그 냥반이 워낙 
엄해놔서.  여자하고 사기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는게 그 냥반의 철석같은 믿음이
니..."
  그렇게 되면 일은 거지반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번 말죽거리 배밭을 지켜낸 공로와 
시집에 들어온 뒤 두 달 가까운 힏든 연출로 엄하고 고지식한 시아버지도 영희의 말이라면 
대개는 들어주었다.  힘은 들었지만 마침내 시아버지를 설득시켜 시누이가 처음으로 양재학
원에 나가게 된 날 그녀는 눈물까지 똑똑 흘리며 영희에게 감사했다.
  "언니, 고마워요.  이 은혜 정말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시동생은 영장을 받아놓고 있어서 영희가 당장은 어떻게 도우려야 도울 수가 없었
다.  기껏해야 틈틈히 용돈이나 쥐어주는 정도였는데, 어찌 된 셈인지 영희가 들어오던 날부
터 수호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제 입대가 열흘 밖에 남지  않았으니 오늘 나가면 쇠꼬리
라도 하나 사와 보신이나 시켜주어야겠구나.  시어머니도 시누이까지 영희를 편들고 나서자 
더는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딸의 밝고 즐거워하는 얼굴리 상기시킨  것이 있는 데다 그날
은 그녀 자신도 영희에게 적잖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네 아낙들과의 
창경원 벚꽃 구경과 괄련된 일이었다.  인색한 남편에게는 그 놀이에 참가하는 허락조차 받
아내기 힘들었는데, 며느리는 마을에서도 몇 사람 입어보지 못한  최신 유행의 반짝이 비단
으로 한복 한 벌을 나들이옷으로  마련해준 것이다.  이제 아침상만 물리면  그걸 차려입고 
마을 사람들 앞에 보란듯이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벌써 가슴 설레올 지경이다.  강칠복
이 마누라구 언제나 다 해진 무명 쪼가리만 걸치고  다니는건 아니여...  시어머니가 그렇게 
물러서자 영희도 선선히 승복했다.
  "예, 알았어요.  조심하겠습니다, 어머니."  만약 그 자리에 억만이 갖춰  있었다면 달란하
기 그지없는 일가의 아침상이었을 것이다.  억만은 전날의 외출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
었다.  영희는 그 일 때문에 밤새 속울 끓였지만 나머지 식구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시
누이는 학원으로 가고, 시어머니는 스스로 황올해하며 비단옷을 휘감고 벚꽃놀이를  떠나고, 
입대를 코 앞에 둔 시동생도 무슨일인가로 시내에 나가 그날은 영희와 시아버지만 집에 남
게 되었다.  못마땅한 표정속에 흐뭇함을 감춘 채 그들을  배웅한 시아버지와 비닐하우스로 
나갈 채비를 할 때까지도 집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풍파가 닥쳐왔
다. 
 "계세요?  여기가 강칠복씨 댁입니까?"
  대문께서 누군가 부르는 사람이 있어 영희가  나가보니 요란하게 화장을 한 중년  여자가 
시아버지를 차고 있었다.  화장과 차림만 보아도 한눈에 어떤 종류의 직업에 몸담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 여자였다.
  "맞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맞게 찾았구먼.  그런데 새댁은 누구세요?"
  "이 집 큰며느리인데요."
  영희는 그녀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새댁이라고 불러주는 데 야릇한 기쁨을 느꼈
다.
  "그럼 강억만의 부인...?"
  차림새 요란한 아주머니가 무엇 때문인지 말끝을 흐렸다.  그때  차비를 마치고 뒤따라나
오던 시아버지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누굴 찾아왔는데?"
  그 무렵 영희는 일생에서 가장 긴장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넉까지 오관을 
예민하게 열어놓고 자신과 관계된 일이면 무엇이든  세밀하게 수용하고 분석하고 반응했다.  
들릴 듯 말듯 한 시어머니의 혀차는 소리나, 시아버지의 내뿜는 담배 연기의 형태도 그녀에
게는 놓칠 수 없는 관찰의 대상이었다.  세상을 향한 반격을  결의하면서 영희는 처절한 전
사가 된 심경으로 삶을 관리했다.   이제 그녀는 개발 예정지의 땅이라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강칠복씨의 집을 그 아들 강억만 이라는 적응 불능자를 인질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했
다.  교두보란 전진을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한지만  더 물러날 곳이 없는 진지란 뜻도 있다.   
따라서 그런 그녀에게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 마리의 외로운 짐승의 그것과 같은 관찰에
서의 놀라운 예리함과 반응에서의 눈부신 순발력이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술집 마담임
에 분명한 그 아주머니의 흐린 말끝과 시아버지의  물음에 있는 몇십 초 동안에 그 상황에 
대한 분석을 끝낸 그녀는 는부신 순발력으로 그 다음 상황을 장악했다.
  "아, 네 절 찾아오신 분이세요."
  영희는 그렇게 답해놓고 그 아주머니를 향해 애원하듯 눈을  깜박였다.  그녀도 오랬동안 
술장사를 해온 여자답게 눈치 하나는  빨라서 영문도 모르고 영희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녜, 이 새댁에게 볼일이 좀 있어서..."
  그 말에 영희는 고맙다는 깜박임을 보내놓고 생글거리며 시아버지에게로 돌아섰다.
  "아버님, 먼저 하우스에 가계세요.  곧 뒤 따라갈게요.  십 분이면 돼요."
  순박한 농부인 강칠복씨에게도 그 아주머니의 차림에서 마뜩하지 못한 느낌을 받은 듯 했
다.  그러나 아끼는 며느리의 생글거림이 그런 느낌을 지워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받
았다.
  "알았다.  그 씨갑(씨앗) 잊지 마라."
  그리고는 먼저 비닐하우스로 나갔다.  그가 골목을 돌아 살아지기를 기다려 아주머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고맙습니다.  저를 도와주셔서..."
  "그런데 새댁, 내가 어떻게 온줄 알고 그런 거야?"
  그제서야 그 아주머니가 궁금하다는 눈길로 물었다.
  "억만씨 술값 때문에 오신 것 아녜요?"
  "아니, 새댁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지 색시지만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집에 
와 떠벌렸을 리두 없구..."
  이번에는 좀 놀랍다는 눈치로 그녀가  반문했다.  정직이 최선이라는게 양키들의  헛말이 
아니야, 영희는 그런 기분으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실은 저도 물장사 일이라면 좀 알아요.  백운장에서  시작해서..."  "호오.  그래? 하기야 
눈에 익다 싶었더니."
  그러는 그녀는 말투뿐만 아니라 표정까지도 다분히 우호적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내 걱
정스러운 투로 보탰다.
  "그런데 하필 그런 망나니를 ..."
  "그 바닥에서 환갑 진갑 다 보내고 그래도 어떻게 물장사 팔자 면하고 살아볼까  이 잡에 
터를 잡았어요."
  "하지만..."
  이제 그녀는 동정하는 눈길이 되어 영희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알아요.  그런데 밀린 술값이 얼마나 되죠?"
  "좀 많아.  백 만원이 넘어."
  억만이 이것저것 다 정리하고 집에 겨우 들어앉은 지 석 달이었다.  자주 술을 마시고 더
러 외박까지 해도 2,3년 몸에  밴 버릇이려니 해서 오히려 김싸고  돌았는데 그새 저질러도 
엄청나게 저지른 셈이었다.
  "아니, 그렇게나 많이?  무슨 술을 어떻게 마셨기에 두어 달도 안  돼 백만 원이 넘는 빚
을 져요?  술 마시고 온 날 다 합쳐도 보름이 안되는데...?"
  "술뿐이 아니야.  빌려간 것도 있고..."
  거기서 다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진상을 밝혀야 할 때의 그런 망설
임이었다.
  "빌려갔다구요?  외상으로 술먹으면 됐지, 또 무슨 돈을 빌려요?"
  "우리끼리니까 말해주는데-- 색시도 거기서  환갑 진갑 다 지났다면서  몰라? 남자들 술 
먹으면 그냥 술로 끝내?"
  말하자면 화대까지 빌려간 모양이었다.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일이라 저도 모르
게 영희의 목소리가 높아 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 무얼 믿고-- 전부터 드나들던 사람도 아닌데..."
  "강남 배추장사한테 술 안 팔면 누구한테 팔아?  거기다가 여기 이렇게 땅문서까지 맡겨
두고 마시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핸드백을 뒤적여 등기권리증을 꺼내보였다.  압구정동에 있는 논이었다.   
그 등기권리증이 새로 발급된 것임을 알아본  순간 영희의 입에서는 겁잡을수 없는  욕설이 
터져나왔다.
  "이 병신새끼, 이 새끼가 증말..."
  자신이 쥐어준 칼에 자신이 베인 꼴이 났다는 데소 온 분노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거
의 본능처럼 되어버린 영희의 상황 분석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일이 내게 미칠 영향은 어
떤 것인가.
  "하지만 까짓 종이 쪽지 무얼 믿고--  그거야 등기소에  가서 몇천 원만 주면 새로 떼는
데."
  아직 상황 분석이 끝나지 않아 몰아세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우호적인 분의기는 끝이났
다.  적지 않은 돈이 걸린 일이라 상대방도 본능적인 자기 자세를 드러냈다.
  "아무렴 차용증서 노릇도 못 하겠어?  이보다 더 확실한 차용증서가 어딨어?  색시도 잘 
알면서."
  그때 비로서 영희의 상황 분석이 끝났다.  수습이 어렵겠지만 이것도  앞날의 힘이 될 수 
있다.  이 한심한 인간을 내게 묶어두는.  그리고 이
여자를 건드려서는 안된다.  이 일을 쉽게 수습하기위해서는 이 여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결론이 내려지자 영희의 목소리는 이내 달라졌다.
  "미안해요, 언니.  언니를 원망하는 게 아니고-- 하도 기가 막혀서."
  영희는 그렇게 사죄해놓고 갑자기 넋두리처럼 말했다.
  "겨우 화류게 팔자 면하고 사람 대접 받으며 살아볼까 했는데, 이 인간이.  이 몹쓸  인간
이.  날 다시 그리루 내몰고 말았네..."
  그러자 상대도 다시 동정하는 눈길로 돌아갔다.  그걸 알아본 영희가 넋두리의 강도를 더
욱 높였다.
  "언니, 아까 보셨죠?  시아버님께서 절 얼마나  아끼시는지.  피눈물을 사키면서 겨우 이 
집에 자리 잡아가나 했는데-- 지가 그러면 난 어떻게?  아무리 며느리가 입의 혀같이 논다 
해도 아들 쫓아내고 며느리만 데리고 사는 시잡 봤어요?"
  모질게 살아 모질어진 것같이 보이지만 정 많고 눈물 많은 것도 물장사 세계의 특성이 된
다.  아주머니는 영희의 넋두리에 이내 눈시울이 불그레해졌다.
  "그러게 아무리 급해도 될성부른 가지를 골라 앉아야지."
  술집 마담이 그러면서 혀까지  끌끌 차는 걸  보고 영희가 이번에는  매달리듯 부탁했다.    
  "언니 우리 전에 만난 인연은 없었지만 가여운 후배하난 살려주는 셈치고 절  좀 도와 줘
요,네?  은혜 결코 잊지 않겠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자넬 돕는데?"
  약간 경계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할 수 있는건 다해주겠다는 듯 마담이 물었다.
  "고마워요, 언니.  먼저 이 일이 시아버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줘요.  돈은 제가 어떻게 
해볼께요.  한꺼번에 다 갚지는 못하지만 떼어먹는 일은 없을 꺼예요."
  "그래 너무 늦어서는 안되는데...  빌려간 돈에는 급전도 있단 말이야.  하긴 나도 심했지. 
큰 봉 물었다는 심사루다..."
  "너두 그 바닥 알 만큼은 아니까 언니 곤란하게는 만들지 않을게요.  그리구-"
  "그리구?"
  "지금 그 사람 어딨어요? 엊저녁에 나가 아직 안들어왔어요.  언니는 알고 계시죠? 그 사
람 어디있는지."
  그러자 특유의 직업 의식이 발동했는지 마담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남의 일을 봐주려면 삼년상까지 차려주랬다구, 이왕 절 도와주시는 거 끝가지 좀 돌봐주
세요.  그 사람 지금 어딨죠?"
  "그래도 그건..."
  "언니, 이건 제 인생이 걸린 일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 있는 곳 알려주셔도 언니  장사에 
지장 있게는 하지 않을게요. 저도 이 세상 대꾸보꾸 겪어볼 만큼 겪은 년이에요.  그 인간하
고 같이 붙어 자는 애 잡아 족치겠다는 게 아니라 남은 인생 함께할 제 남편, 이 기회에 좀 
길들이려는 거예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어제 저녁에 우리 이양하고 함께 나갔는데, 우리 집에서 외박 나갔
다면 대개 뻔하지.  가까운 데는 여관이 그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이 하마 열신데 아직 있을
까."
  "그 인간 성질, 나 잘 알아요.   계집하고라면 낮 한시고 두시고 여관에서 쫓아낼  때까지 
붙어 있는 게 그 인간이라구요.  어디예요? 언니 업소하고 그 여관 좀 알려주세요."
  영희는 그래놓고 얼른 속주머니에서 반격 작전의 군자금으로 항시 준비하고 있는 돈을 있
는 대로 털었다.
  "여기 십만 원 있어요.  적지만 우선  받아두세요.  그리고 나머지도 절반은 사흘 안으로 
해드릴게요."
  그러자 다시 마음이  열리는지 마담이 머뭇거리면서도  영희가 원하는  곳을 알려주었다.  
술집도 동네도 영희에게는 낯설었다.  억만이 제딴은 영희의 추적을  따돌린다고 새로운 거
래처를 만든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아무리 화류계가  의리 빼면 시체라지만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
요."
  "하지만 내가 말해줬따는 거 알게 하지마.  소문나면 이 장사도 못 해먹어."
  마담은 그렇게 다짐까지 받고서야 겨우 얼굴을 폈다.  하긴 그녀도 반드시 손해보는 거래
를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변제 여부가 불확실한 채권을 확실한 것으로 바꾼 게 오히려 
득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담을 보낸 영희는 뛰듯이 시아버지가  있는 비닐하우스로 돌
아갔다.  강칠복씨는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고 비닐하우스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무슨일이더냐? 억만이 그놈 일이지?"
  강칠복씨도 짐작이 간다는 듯 그렇게 물어왔다.  영희는 잠깐  망설이다가 필요한 만큼의 
정직을 방책으로 골랐다.
  "네.  술갑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잡혀 있는가 봐요."
  "저런 저 쳐죽일 놈.  장가간 지 며칠 된다구.  내 이놈을 그냥..."
  금세 얼굴이 시뻘개진 강칠복씨가 주먹을 부르쥐고 나섰다.  영희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시아버지를 말렸다.
  "아버님, 너무 역정내지 마세요.  그이도 답답하니까 그러는 거겠죠."
  "답답하기는 뭐가 답답해? 장사한다고 펄럭거리고  다니며 이백만 원 돈이나  저질렀으면 
됐지 얼마나 더 털어먹어야 한에 찬다는 거야.   하라는 일은 않고.  이건 자식놈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그래, 그 술집이 어디야? 술값은 얼마나 되구?"
  "아버님은 모르는 척하고 계세요.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
  "벌써 눈이 뒤집힌 놈을 네가 가서 어떻게 데려와?"
  "저도 조금은 그 사람을 알아요.   천성은 순한 사람이에요.  이번만은  제게 맡겨주세요.  
정히 안 되면 그때 아버님께서 나서셔도 늦지 않아요."
  영희는 영락없이 가여운 며느리가 되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시아버지를 말렸다.   금세 
떨치고 일어날 것 같던 강칠복씨도 그렇게 간곡히 말리자 분기를 조금 삭였다.
 "알았다.  하지만 술값은 못 대줘.  제놈이야 영창을 가든 말든..."
  "그건 제가 알아서 어떻게 처리해볼게요.  이번만은 모른 척해주세요."
  영희는 그렇게 시아버지를 달래놓고 집으로 돌아와 외출 채비를  했다.  이번에도 세심한 
연출이 들어간 차림이었다.  집에서 허드레로 입는 월남치마와 수수한  스웨터에 굽이 없는 
비닐 구두로 누가 보아도 여염집의 수더분한 아낙 같은 차림을 했다.  억만이 끼고 자고 있
을 술집 아가씨와 최대한의 변별을 염두에 둔 연출이었다.  마담이 가르쳐준 여관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천호동 벼두리의 아직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큰길가에 덩그렇게 지어놓은 
여관이었다.  머리를 쓴다고 가명을 적었는지 숙박인 명부에서 억만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
었으나 그가 든 방을 찾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12시 가까운 그 시각에  사람이 들어 
있는 방은 몇 안 됐는데, 그나마 아직까지 남녀가 함께 있는 방은 둘뿐이었다.  영희는 먼저 
이층에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아직 술기가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안에서 물어왔다.  억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희는 
얼른 둘러댔다.
  "네, 조바 아줌마예요. 청소 좀 하려구요."
  "알았시다. 곧 나갈 테니 너무 몰아대지 마슈."
  남자의 그런 퉁명스런 대답을 뒤로하고 영희는 얼른 충계를 올라갔다.
  "누구세요?"
  영희가 거의 확신에 차 방문을 두드리자 이번에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받았다.  어딘가 
반가워하는 듯한 음색이 있었다.  영희는 대꾸 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남자의 짜
증 섞인 목소리가 젊은 여자를 대신했다.
  "누구야?  시간 넘으면 차지 물면 될 거 아냐?"
  틀림없이 억만의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영희가 조용히 말했다.
  "문 좀 열어주세요.  강억만씨 찾아왔어요."
  그 말에 잠시 방안이 조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황급하고 분주한 움직임의 기척이 한동
안 문 너머로 전해져오더니 이윽고 억만의 떨리는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저예요, 억만씨.  문 좀 열어주세요."
  영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통할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깊은 정보다는 필
요에 따른 결혼이었지만 명색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을 리 없었
다.  그러나 영희는 애써 침착을 가장했다.
  "다, 당신이 어, 어떻게 여길..."
  이윽고 반쯤은 얼이 빠진 것 같은 억만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서 문이나 여세요."  영희는 목소리를 더욱 차고 차분하게 가라앉혀 말했다.
  "그, 그러지 뭐."
  억만도 더는 별수가 없다는 듯 문을 열었다.  방안은 영희가 예상한 광경 그대로였다.  맥
주병 몇 개와 마른안주 접시가 어지럽게 흩어진 방 한구석에는 황급히 개어놓은 이불이 있
었고, 그 곁에는 역시 황급히 옷을 걸친 듯한 젊은 아가씨가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겁먹
은 눈길이나 화장이 지어져도 얼굴이 지저분하지 않은 것이 술집에 나온 지 오래되지는 않
은 아가씨 같았다.
  "저, 아가씨.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영희는 절로 그 아가씨의 머리께로 뻗어지는 두 손을 억지로 등뒤에 붙인 채 예절바르게 
말했다.  그게 오히려 겁나는지 아가씨가 몸까지 부르르 떨며 영희를 바라보다가 겨우 말뜻
을 알아듣고 황급하게 방을 나갔다.  영희의 차분한 태도나 예절바른 말투에 더욱 질려하기
는 억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억만이 영희를 겁내온 것은 오히려 그녀의 거세고 억척스런 
성격쪽이었다.  영희는 그런 억만의 반응을 모르는 체 여전히 침착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
다.
  "당신 정말로 왜 이러세요? 저 죽는 꼴 보시려고 이래요?"
  영희가 한 발 다가들며 호소하듯 그렇게 말하자 억만은 한  팔을 들어 막는 시늉을 했다.  
아마도 그는 영희의 차분함이 더 격렬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 같았
다.  그러나 아무런 공격의 징후가  보이지 않자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느닷없이 변명조가 
되었다.
  "오, 오해하지마.  어제 내가 너무 심하게 마신 거 같아.  정말로 누가 여기 데려다준지도 
모르고 잤다구.  아까 그 아가씨는 아침에 내가 어떻게 되었나 보러 온 거구..."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이란 그보다 더한 현장에서 들켜도 잡아떼게 마련이라
는 것 또한 영희는 알고 있었고, 그녀 자신 그런 남자의 외박 상대가 되어 실제로 경험해본 
적도 있었다.
  "좋아요.  남자가 바람 한번 핀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저두 과거가 깨끗한 년이 
못 되구... 하지만 어쩌실 거예요? 앞으로 어떡하시려구 이러세요?"
  영희는 목구멍까지 치미는 욕설을 억지로 삼키며 목소리를 더욱 차분하게 해 호소하듯 물
었다.  억만은 영희의 그 같은 반응이  못 미더우면서도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돌출적인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제법 남편의 권위를 내세워 설득조로 나오기도 했다.
  "어쩌하긴 어찌해?  뭐, 내가 집을  나오기라도 했어? 집안 살림을 말아  먹었어? 어쩌다 
친구들 만나 술 한잔 먹고 하룻밤 외박한 거 가지구 너무 심각하게 나오지 말라구."
  그러는 억만의 천연덕스런 얼굴을 보며  영희는 이 새끼 따귀를 한  대 후려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다시 꾹꾹 눌러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내가 좀더 자리를  잡은 뒤에... 
하지만 그렇게 참아야 하는 자신이 갑자기 처량해지면서 영희의 다음 연기를 훨씬 수월하게 
해주었다.  문득 치솟는  눈물에 목소리까지  울먹이면서 영희가 그런  억만에게 매달렸다.      
 "여보,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6.25에  부모 잃고 갖은 고생 다하다가 겨우  당신 만나 
새 출발하려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전 누구 믿고 사냔 말예요.  절 기어이 그 지긋지긋한 
화류계로 다시 내몰아야겠어요?"
  영희가 그렇게 신파조로 매달리자 억만은 더욱 뻣뻣해졌다.
  "내가 뭘 어쨌다구 그래? 남자가 술 한잔 먹은 걸 가지구..."
  역시 이런 새낀 처음부터 호되게 몰아쳐야 되는 건데... 그런 기분과 함께 다시 욕설이 목
가지 치밀었으나 영희는 울먹임을 계속했다.
  "세상 사람 다 속여도 절 속일 생각일랑 마세요.  아까 천호동 능라도집 아줌마가 다녀갔
단 말예요.  그리구 얘기 죄다 들었어요."
  "뭐? 그 연대장년이? 그럼 여길 알고 찾아온 것두 그년의 고자질 때문이겠네.  그년 그거 
술장사 걷어말 작정이야 뭐야?"
  억만은 제법 성까지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연대장이라는 마담의 별
명이 뜻하는 바를 잘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희는  그 한마디로 아침에 다녀간 
술집 마담의 과거를 대강 짐작했다.  젊을 때는 주로 전방 술집을 돌았고 그녀가 일생 상대
한 남자는 연대 병력인 3천 명이  넘는다.  영희는 그 와중에도 유난히  요란스럽게 그녀의 
옷차림을 떠올리고 야릇한 모멸감을 느꼈다.  같은 화류계라도 서울의 고급 요정을 돈 자신
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미천한 출신의 그녀에게 동정을 구하고 도움을 빈 일이 새삼 한심하
게 느껴졌다.  거게 다시 울화로 치밀었으나 영희는 거의 초인적인 인내로 억눌렀다.
  "그 아줌마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울며  불며 애원해 들어준 것뿐이니까.  그보다는 그 
많은 빚 다 어쩌실 작정이에요? 그 아줌마가 아버님께 땅문서... 디밀고 돈 내놓으라고 덤비
면 당신 성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또 어떻게 돼요.  이제 와서  우리 부부 다시 길바닥
에 나앉아야겠어요? 당신 꼭 늙은 색시 기둥서방 노릇 한번 해보려고 그러세요?"
  "당신 모슨 소리를 그렇게 해? 아무렴 내가 까짓  돈 백만 원 처리 못할 거 같아?  걱정 
마.  일남이 걔 알지? 요즘 잘 나간다구.  일간 몇백 봐주기로 했어.  나두  다시 장살 시작
해봐야지.  맨날 꼰대 밑에서  되지도 않는 농사에  매달려 빌빌거리고 있을 수도  없잖아?  
술값이야 그때 얼마간 떼주고 나머지는 장사하면서 슬슬 갚아도 되는  거라구.  사실 그 술
값도 나 혼자 마신 거 아냐.  사업 자금 빌리기 위한 교제술이었다구.  두고 봐.  이제 장사 
시작하면 그 몇 배로 벌어들일 테니..."
  영희가 약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억만은 기가 살아 이제는 뻔한  허풍까지 쳐댔다.  이 새
끼 이거 정말... 영희는 그런 소리가 튀어나올까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남이라는 친구라면 영희도 잘 알고 있었다.  억만과 같은 중학교를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자금 규모로 청과물 중간상을 시작했으나 억만과는 달리 적잖은 재미를 보는 눈치였
다.  그러나 술집에 오면 언제나 봉은 억만이었고 그는 아가씨들 팁 한번 제대로 주는 법이 
없었다.  몇백만 원은 커녕 몇백 원도 그냥은 빌려주지 않을 친구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
희는 자신의 감정을 죽을힘을 다해 억눌렀다.
  "일남씨가요? 정말 의리 있는 친구네요.  하긴 저도 당신이 아무ㅜ 생각없이 그랬다구 보
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어.  이번 봄장사 끝나면 한번 봐주겠댔어."
  그래, 그럼 이 새꺄, 이제 그 되잖은 허풍에 코  한번 꿰어봐라, 영희는 그런 심경으로 억
만의 말에 넘어가주는 척했다.
  "알겠어요.  근데 모레까지 절반이라두 갚지 않으면 바루 땅문서 가지구 아버님게 덤비겠
다는데 어쩌죠?  일남씨에게 우선 얼마만이라두 빌릴 수 없겠어요?  어차피 빌려줄 거라면 
그대로 상관없을 텐데."
  다급한 깁에 되는 대로 허풍을 치던 억만도 영희가 그렇게 나오자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
냈다.
  "그, 그건 좀 곤란한데... 명색 사업 자금인데 술빚부터 갚자구... 그, 그럴 수는 없지."
  "그럼 어떡해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영희는 네가 어떻게 나오는가 보자는 심경으로, 그러나 정말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제서야 급한 김에 허풍으로 둘러대던 억만도 막막한 모양이었다.  한동안 쥐어짤 
것도 없는 머리를 쥐어짜는 체하다가 멀뚱히 영희를 건네보며 말했다.
  "당신이 좀 어떻게 해보지 않을래? 당신 친구들 많잖아?  거 왜 혜라라구 자기 업소까지 
가진 여자두 있다면서."
  안 그래도 걜 찾아갈 작정이었다, 이 병신아.  하지만 그전에 좀더 네 코를 단단히 꿰어야
겠다.
  "그런 애들일수록 돈에는 짜다구요.  더구나 그 아줌마 입  막으려면 적어도 오십만 원은 
있어야 하는데, 그런 큰돈을 옛정 하나루다 척척 헤아려 내놓겠어요? 자신없어요."
  "이젠 옛날의 이영희가 아니잖아? 강남 땅부자 강칠복씨  맏며느린데 없다면 모를까.  그
리구, 정 안되면 네 등기권리증 하나 더 만들어줄게.  그걸루 어떻게 해봐."
  '좋은 거 하나 배웠다구 조자룡이 헌 창 쓰듯 하는구나.  좋다, 이 병신아.  내 한 번 속아
주지.  아니 열 번이라두 속아주지.  대신 일생을 내게 코 꿰어살며 그 벌을 받아라.'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 해불게요.  대신 빨리 갚아주셔야 해요.  안 그러
면 나 정말 어려워져요."
  "걱정 마, 한 달 안으로 갚아줄게.  내가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얼빠진 봉이지.  네 주제에 갚긴 뭘 갚아.'
  하지만 영희는 끝까지 현숙한 아내로 그 일을 매듭지었다.
  "알겠어요.  그럼 전 혜라에게 들렀다 갈  테니 당신 먼저 집으로 돌아가세요.  방안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바로 하우스로 가 아버님 거들어드리란 말예요.   아버님이 뭐라구 하시더
라도 대들지 말고..."
  그러자 무딘 억만도 조금은 감동이 되는지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고마워, 이 못난 놈을 이해해줘서.  그래, 당신 시키는 대로 할게.  아버님이 몽둥이찜질
을 해도 가만히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와."
  그리고는 제법 힘찬 포옹까지 해주었다.  영희가 종로에 있는 혜라네 카페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를 넘긴 뒤였다.  술집을 열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혜라는 카페에 나와 있었다.  
허드렛일 돕는 어린 계집애와 함께 가게 안팎을 거울처럼  반들거리게 쓸고 닦는 중이었다.  
그런 악착스러움이 술집 아가씨 출신으로는 드물게 그녀를 서른도 안 돼 종로 대로변의 스
무 평 가까운 카페 여주인으로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웬일이냐? 강남 알부잣집 맏며느님이 이 험한 곳에 다 행차하시구."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투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영희는 이미 그런 말투에 개의치 않았다.  
모니카의 소개로 처음 만난 뒤로 벌써 6년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맞는 데라고는 전혀 없는 
사이였으나 창현의 배신 이후 그녀는 영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
다.  어쩌면 영희가 도회의 밑바닥에서  흐물흐물 녹아 스러지지 않고 다시  세상에 반격을 
시도하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도 혜라였을 것이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매섭게 관리된 자신의 삶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체험으로 보완된 나름
의 철학으로 영희를 자극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그뒤 영희의 삶을 이끈 천민자본주의
적 이데올로기의 제공자라 할 수도 있었다.
  "말 마라.  그래도 한세상 보자니 당장이 영 죽을 맛이다."
  영희는 별로 감출 기분도 아니어서 느낌대로 털어놓았다.  혜라는 여전히 하던 일을 멈추
지 않을 채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그 병신이 이제 몇 달 된다고 벌써 또 한 건 저질렀다."
  "니네 신랑이? 무슨 일인데?"
  그제서야 혜라는 닦고 있던 장식용 도자기 인형을 탁자 위에 놓으면서 정색을 했다.  "나
한테 배운 재주로 백만 원도 넘게 저질러놨어."
  "너에게 배운 재주?"
  "아버님 몰래 재발급받은 등기권리증을 잡히고 술에 계집에 흥청망청한 거야."
  "너 땅장사는?"
  "아직 시작도 못 해봤어.  여의도로 갈까 하다 광주대단지 쪽이  나을 것 같다는 말이 있
어 이러저리 재고 있는데 그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지른 거야."
  "그 사람은 무시하고 네 계획대로 밀고 나가면 되잖아?"
  "그게 안 되니까 그러지.  내 밑천  너도 알다시피 다 끌어모아봐야 얼마  되니?  그것도 
시집 들어가는 데 태반이 잘리고 지금은 몇십만 원 안돼.   마침 시아버님이 압구정동 자투
리땅 판돈 이백이 있어 그걸 놀리고 있는데 그 인간이 일을 저지른  거야.  세상에 술집 마
담이 땅문서 들고 집으로 쳐들어왔더라구.  그걸 잡히고 외상술도 마시고  돈도 빌려 쓴 모
양이야.  잘못하면 둘 다 쫓겨나게 됐어."
  "그럼 어쩔 거야? 보기엔 뭔가 생각이 있어 날 찾아온 것 같은데."
  "급히 오십만 원만 만들어줘.  그걸루 술집 마담 입부터 막아야겠어.  내가 가진 돈으로도 
그 정도는 막을 수 있지만, 그러면 땅장사 시작할 때 아버님께 내보일 밑천이 없어져."
  그러자 혜라는 잠깐 무엇을 계산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계산이 섰는지 그녀가 담담
하게 물었다.
  "네다바이를 쳐도 미끼 되는 돈은 있어야겠지.  그런데 언제까지 필요해?"
  "마담에게 사흘 뒤로 약속했어.  그건 내 돈으로 막는다 해도  열흘 안으로는 내 손에 돈
이 돌아와 있어야 해.  정사장은 벌써부터 여의도에 좋은 물건  봐둔 게 있다고 성화였지만 
내가 광주 쪽을 살펴보고 결정한다고 미뤘지.  하지만 이 인간 때문에 서둘러야겠어.  시아
버님께 점수 따놨을 때 일을 벌여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자칫하다간  이 인간하고 같이 쫓
겨날판이라니까."
  "알았어.  그렇지만-"
  혜라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뭔데?"
 "그냥 빚놀이는 하고 싶지 않아.  또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도 투자를 하고 싶어지네.  왠지 너한테 걸고 싶어져.  돈을 만들어줄테니 더도 말고 두 
배루만 만들어 돌려줘.  단, 너무 오래 끌어서는 안돼."
 "망할 기집애.  욕심은... 알았어.  하지만 망하면 한 푼도 없는 거다."
 "이 윤혜라 이래두 원금 잘릴 곳에 돈 박아넣지는 않아.  내 돈이 그런 돈두 아니구."
 그 시절로 보아서는 남이 들었으면 무서운 여자들이란 말도 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영희는 다시 그 누구보다도 착한 며느리요, 아내
요, 형수였다.  시내 정육점에서 주머니를 툭툭 털어 쇠꼬리 한 개와 사골을 싸들고 돌아와 
마루에 부려놓자 그새 창경원 벚꽃놀이에서 돌아와 있던 시어머니가 영문도 모르고  반색을 
했다.
 "이게 뭐냐?"
 "아, 네.  도련님 군대 가기 전에 보신 좀 시켜드리려구요.  푸줏간 하는 친구가 있어 싸게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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