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 11 제3부 떠도는 자들의 노래
이문열
제 25 장 치고 빠지기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신문을 뒤적이던 영희는 한군데 박수기사에 눈길이 머물렀다. '냇가
에서 신음하는 철거민들'이란 제목의 광주대단지 관련 보도였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 영
희는 찬찬히 그 기사를 읽어나갔다.
<식수 등 생활의 터전이 될 환경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서울 난민촌의 철거민들이 살
아가는 광주대단지(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 탄리)에 대장염이 집단적으로 발생, 한은
성(여,3)씨 등 281명이 3일까지 5일째 앓고 있다. 이들 중 약 한번 써보지 못했다는 송숙
(여,64)씨는 2일 하오 동부시립병원에 옮겨졌으나 중태에 빠져있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달
30일에 내린 비로 더러워진 웅덩이의 물을 그대로 마신 뒤 설사와 열이 나며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웅덩이(깊이 50cm, 지름 70cm 가량)는 주민들이 가뭄으로 메마른 단대리 앞 개
천 바닥에 27개 가량 파놓고 식수로 써온 것인데, 30일의 비로 주변의 시궁창물이 스며들어
물 속에는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벌레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곳에는 작년 3월의 서울 용산
구 이촌동 철거민과 지난 4월의 용두동 판잣집 화재 이재민 등 4천 8백 가구 2만여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중 4천 가구는 집에, 8백 가구는 천막에 살고 있는데, 특히 천막에 살이하는
이들은, 낮에는 찌는 듯 덥고 밤에는 추워 천막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해가 지면 모닥불을 피
워놓고 밤늦게까지 지내는 형편이다. 그러나 약한 어린이들과 노인들은 습기가 많고 온도의
차이가 심한 천막 안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환자는 노인과 어린이가 대부분이고, 그 밖의 많
은 주민들도 피부색마조 까맣게 변색, 이질 증세의 병울 앓고 있다. 임시 진료소 하나 없어
서 환자가 생겨도 방관만 하고 있다는 주민 박석홍(남, 45)씨는 정착을 시켰으면 최저한도의
음용수와 진료소쯤은 마련해주오야 할 것이 아니냐면서 급수차 한번 나온 적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영희가 그쯤 읽었을 때 방문을 빼곰 열어본 시어머니가 끌끌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박사 났제, 박사 났어. 아침마다 처억 눈을 내리깔고 신문을 들고 않은 그 모양새 정말
혼자 보기 아깝네."
하지만 말을 그래도 공격 심리를 동반하지 않은 악의였다. 석 달 전 영희가 신문 정기 구
독을 신청했을 때 시어머니는 펄펄 뛰다시피 반대했다.
"읽을 사람도 없는데 비싼 신문을...당장 끊어."
그 때 사전에 승낙을 했던 시아버지가 나서서 그런 시어머니를 막았다.
"시아기가 필요해서 그런 모양인데, 늙은 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둬. 나나 억만이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 하고, 또 다 보고 난 뒤에는 뒤지라도 쓰면 된 거 아냐?"
'눍은 게 알지고 못하면서'란 한마디는 시어머니의 부아를 건드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를
죽이는 말이기도 했다. 그 무렵은 이미 시어머니도 영희의 수완에 한풀 꺾여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며느리는 남편과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데 그게 잘돼가는 눈치였고, 노랭이로
소문난 남편이 압구정 알짜배기 논 새 마지기 값을 한푼 내놓지 않고 며느리에게 The아부
으면서도 사뭇 흡족해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봄이 되자 다시 바람이 나 일을 저지르고 집을 나갔던 억만이도 며느리가 무슨 수를 썼는
지 사흘 만에 끌려들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끽소리 않고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거기다가 더욱 흐뭇한 일은 며느리의 배가 어느새 동네가 다
알아볼 만큼 불러가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기다려온 손자를 안겨줄 듯 했다. 영희
도 그런 시어머니의 심사를 잘 알고 있어 얼핏 듣기에는 가시 돋친 말이라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신문 기사에만 매달렸다. 사실 그 보도 내용은 영희로서는 일찍부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광주대단지의 실정이었다. 영희가 그간 사모은 스무 장이 넘는 딱지(토지분양권)는 바
로 그런 천막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산 철거민들이 헐값에 내던지고 간 것
이었다. 하지만 기사를 다 읽고 난 뒤에도 영희는 처음에 느꼈던 까닭 모를 불길함을 지우
지 못했다. 그전에도 광주대단지 철거 이주민의 열악한 생활 환경은 더러 보도된 적이 있었
다. 그러나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공동 우물이나 공동 변소의 개수나 따지는 추상적인 보도
였음에 비해 이번의 것은 그로 인해 발생한 참상의 구체적인 고발이었다.
'좋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변칙도 관리
소홀로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여기서는 다른 철거민 이주지와는 달리 모
든 게 원칙대로 시행되게 될지 모른다.'
아직 그렇게 말로 조직할 능력을 없었지만 영희의 감각에 걸려온 불길함의 내용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은 그런 참혹한 정착 환경 때문에 영희가 손댄 딱지장사도 양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작년에만 해도 먼저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중심으로 거의 음성적으로 거
래되던 딱지들이 그해 봄 들어서는 대량으로, 그리고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이제는 전문 '꾼'
이 아니라 일반 투자자와 실수요자까지 몰려들어 천막 복덕방 골목의 길이만도 거의 배가
되게 늘어났을 정도였다. 영희의 땅장사에 사부격이 된 정사장은 말했다.
"어디 손을 대든 말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까지 돈벌이 된다는 소문 듣고 그
리로 몰려들면 그때는 손떼라구. 그게 바로 막차야. 꾼은 막차가 되기 전에 치고 빠져야 돼.
생선을 꼬리부터 머리까지 다 먹으려 들지 말라는 말도 실은 막차를 경계한 거야."
작년 여의도 땅에 손댔다가 겨우 본전 뽑고 나온 것도 어쩌면 그 막차를 잘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남들이 더 오를 거라는 말을 하고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가 일차 상승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물론 기다리면 더 오를 것은 틀
림없었지만 다음번 오를 때(2차 상승)까지 돈을 묶어둘 여유가 없는 영희는 겨우 은행 이자
나 붙이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맞아, 지난번에 갔을 때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어. 어렵게 몇만 원 모은 봉급쟁이며 곗
돈 탄 아줌마까지 모여든다고 했지. 그 동안 악착스레 사모으던 꾼들은 슬슬 내던질 궁리를
하는 눈치구. 그럼 막차가 된거야. 거기다가 신문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덤벼들었으니...'
그러자 영희는 다급해졌다. 앞 뒤 생각살 것도 없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방을 나
왔다. 수돗가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든 시어머니가 이번에는 정말로 못마땅해하는 얼굴이 되
어 있었다.
"아니, 어딜 갈라구? 오늘 하우스 오이 따는 날인 거 몰라? 일꾼들까지 있는데 참 내갈
생각을 않구 어딜 가려는 거야? 더구나 그 몸을 하구...."
"어머니, 죄송해요.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겼어요. 급히 광주 나가봐야 해요. 아버님께는 제
가 가다가 들러 말씀드릴게요. 실은 아버님께서 잠깐 집으로 돌아와주셔야 할 일도 있구요.
어머님께서 좀 수고해주세요. 힘드시면 옆집 재식 엄마, 반나절 품 사셔도 좋구요."
영희가 한껏 목소리를 공손하게 해 시어머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그러자 시어머니의 눈
길이 알아보게 샐쭉해졌다.
"품을 사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런데 얘, 나도 좀 알자. 너 광주, 광주 하
는데 도대체 뭘 하는 거냐? 뭣 땜에 사흘도리로 거길 왔다갔다하는 거냐구?"
"네, 거기 일이 좀 있어요. 아버님 허락 받은 건데..."
"그건 나도 안다. 그런데 그 일이 뭐냔 말이야."
시어머니는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불만스러운 듯했다. 영희고 진작
시어머니한테는 일의 전말을 대강 설명해줄까 생각해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알아들
을 것 같지 않은 데다 헤픈 입이 걱정돼 미뤄오고 있는 터였다.
"그건 저... 어쨌든 다 우리집을 위한 일예요. 조금만 더 계시면 아버님께서 말씀하실 거예
요."
"동전 한푼에 벌벌 떠는 네 시어버지가 돈주머니를 네게 맡긴 거며, 그 일이 땅과 관계된
다는 것쯤은 나도 눈치로 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일이냐? 광주 어딘지 모르지만 느이 시아
버지 그 산골짜기에 논밭 사서 물러나 앉을 생각은 아니냐?"
"그건 아녜요. 그냥 싸게 샀다가 이문 많이 남기고 파는 물건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
요."
"나도 못된 복덕방 영감들이 하는 그런 야바위가 있다는 소린 들었다. 그런데 네가 어떻
게 그걸... 너 혹시 친정집이 복덕방 했냐?
"그런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두 좀 배워둔 게 있고 뒤를 봐주는 분도 있어요.
실은 억만씨를 시키면 남 보기에도 좋고 저도 이몸으로 이렇게 나다니지 않아도 되는데-어
머님두 아시잖아요? 뭉칫돈이 왔다갔다하는 일이라..."
영희가 그렇게 억만을 끌어내자 시어머니도 금세 기가 죽었다.
"아니다. 그런 아니야. 억만이 그놈한테 뭉칫돈 맡겨 어쩌려구? 그런거라면 네가 해라. 곧
우리 강가 성 가진 자식까지 낳을 네가 허투루 하겠니?"
그러면서 손사래까지 쳤다. 엄하고 인색한 남편과 장사 핑계로 술과집에 흥청망청 돈을
뿌리는 자식 사이에서 마음 고생한 지난 몇 년이 새삼 끔찍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영희가 멀지 않은 비닐하우스로 가니 시아버지는 따모은 오이를 정성스레 상자에 담고 잇
는 중이었다. 온상 재배로는 한창인 오이 수확이었다. 억만은 하우스 한쪽 구석에서 동네 아
주머니 둘과 오이를 따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시아버지가 일손을 멈추고 영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덤덤한 얼굴에 별억양 없는 말투였
지만 그게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님을 잘 아는 영희는 별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상글거리
며 대답했다.
"성남에 급히 가봐야겠어요. 그전에 아버님께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
"저 아버님, 우리 딱지 이번에 모두 넘겨버리는 게 어떼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거 가지고 있을수록 값이 불어난다고 해놓구선."
"그런데 그게 아닐 것 같아서요.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에요."
"좋지 않다니?"
"신문들이 자꾸 거기 얘길 떠들어대고 있어요. 거기 무슨 전염병이 돈대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전염병이야 요즘처럼 약 좋은 세상이 금세 숙어들거구... 옛날같이
호열자(콜레라) 피난이라두 가는 시대라면 모를까."
그러는 시아버지의 표정에는 어떤 집착 같은 것이 의미하게 드러났다.
"그건 그렇지만 세상 이목이 그리로 집중되면 안 좋아요. 사실 우리가 산 딱지, 원래는 사
고 팔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그제야 강칠복씨의 얼굴에도 걱정하는 빛이 스쳤다.
"네, 하지만 걱정은 마세요. 그렇다고 본전 날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만 값이 되떨어질
수는 있어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일은 네가 시작한 거니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그 때 영희가 온 것을 멀리서 보고 있던 억만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강칠복씨가 갑자
기 눈길을 험하게 해 꽥 소리쳤다.
"일하다 말고 여기는 뭣 하러 와? 애기 어디 볼일 있어 잠깐 나가는 모양이다."
그러자 억만이 찔끔하여 그 자리에 섰다. 그런 억만이 측은하게 느껴져 영희가 다정하게
한마디 던졌다.
"저 잠깐 병원 다녀올게요. 수고하세요."
그리고는 시아버지에게 돌아섰다.
"그런데 저 아버님. 딱지, 아니 그 서류들 좀 내주셔야 하는데... 오늘 우선 한 열 장만 들
고 나가 팔아볼까 해요."
"알았다. 같이 들어가자."
시아버지가 하던 일을 미뤄놓고 선선히 앞장은 섰다. 그리고 자신의 방 문갑에서 그 동안
모아둔 토지분양증을 꺼내 영희가 원하는 만큼 헤아려주었다.
택시를 대절했는데도 영희가 성남 출장소 부근 복덩방 골목에 이른 것은 정오가 다돼갈
무렵이었다. 그 골목은 말 그대로 흥청거리고 있었다. 복덕방 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거
기에 따른 술집과 상점의 증가로 거리의 모양도 여기가 바로 그 일 년 전의 그 천막 골목일
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대부분이 천막 건물이어서 그렇지 유동 인구나 물
류의 양과 질은 어떤 유흥가 골목에도 뒤지지 않을 듯했다.
영희는 먼저 늘 거래하던 부동산 사무실에 들렀다. 점심 시간인데도 사무실 안에는 후끈
한 열기가 넘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복덕방에 붙어사는 젊은 건달 둘이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고객용 소파에서는 그 봄부터 상무 직함을 쓰는 김아무개하는 젊은이가 역시 그곳
바람잡이인 중년의 도음을 받아가며 어떤 아주머니를 상대로 계약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이거 정말 잘하신 겁니다. 올 연말만 돼보십쇼. 적어도 곱은 뛸 겁니다"
돈을 헤아리고 있는 사십 초반의 여자를 향해 바람잡이 중년이 아첨섞인 목소리로 말했
다. 영희가 보기에 돈이라면 억척을 떨 것 같은 인상이기는 하지만 특출난 이력은 없는 가
정주부 같았다. 그녀는 증년의 추켜세우는 말에 갑작스레 경계심이 이는지 공연히 사방을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정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한 이십만 원이면 집 지을 터는 골라 산다고 들었는
데..."
"그건 지난달 얘깁니다, 아주머님. 우리 박부장님 말이 맞아요. 정말 잘 사실 겁니다."
김상무가 그렇게 안심시켜놓고 그제서야 영희가 들어온 걸 알았다는 듯 과장스레 반가움
을 나타냈다.
"어이구, 누님 오셨네. 어서 오십쇼, 누님.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셨수?"
그리고는 역시 과장스레 영희를 그 아주머니에게 소개했다.
"여기 우리 단골 누님이신데 한번 들어보십쇼. 누님은 우리집에서만도 열 장 넘게 거둬두
셨다구요. 나중에 말죽거리에서 벼락부자 났다면 여기 이 누님인 줄 아세요."
그러나 그녀가 영희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색시, 증말여? 증말 이거 돈 될 장사여? 몇 장이나 사모은 겨?"
"몇 장 안돼요. 공연히 김상무님이 허풍치시는 거지. 하지만 뭐 사서 손해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영희가 그렇게 말해주자 그녀는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이미 헤아려 쥐고 있던 돈
뭉치를 탁자 위로 내밀었다.
"세봐유. 이십육만원."
그러자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아주머니는 큼지막한 봉투에 든 토지분양증을 소중하게
안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를 배웅한 김상무가 돌아와 그새 소파에 않은 영희에게 탐색하
는 눈길로 물었다.
"그런데 누님, 오랜만이우. 오늘은 웬일이슈? 아직도 딱지 더 사모으시게?"
"아냐, 팔러 왔어. 요새 여긴 얼마에 거둬?"
나이를 속여 누님이 된 영희가 버릇이 된 반발로 그의 말을 받았다. 주민등록증으로도 한
살 아래인 감상무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영희를 보았다.
"그야 대중없죠. 아직 십만 원 안팎에서 주워먹는 수도 있고... 빡빡하게 나오면 한 십오
만 원 앵길 때도 있고..."
"지독하네. 방금 이십육만 원에 넘긴 건 뭐야?"
"그야 물건 나름 아뇨? 그건 8메타하고 소방도록가 만나는 지번이라구요."
"뭘, 그 아주머니 말 들으니 그냥 집텨인 모양이던데, 이젠 나한테까지 구라칠 거야?"
그러자 김상무가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토했다.
"다 알면서 뭘 그러슈? 한데 그렇게 열심히 사모으시더니 한창 값 오르는데 왜 파슈? 몇
장이나 판 건데?"
"한 열 장만 맏아줄래? 갑자기 몫돈 들어갈 일이 생겨서 그래."
"열 장씩이나? 그럼 이제 빠지는 거유?"
갑자기 긴장한 표정이 된 김상무가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이번에는 영희가 과장스런
목소리로 받았다.
"빠지긴. 우리집 병신 때문이야. 밥값이나 하라구 트럭 한 대 사줬더니 보름도 안 돼 사
람을 잡아놨어. 지금 달려(잡혀) 들어가 있는대 합의를 못 하면 콩밥깨나 먹어야 될 모양이
야."
"안됐수. 하지만 열 장씩이나..."
김상무가 아무래도 못 미덥다는 듯 영희를 살피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사람을 잡아놨다구 하잖았어? 죽었단 말야. 합의보는 데만 백오십만 원 내놓으래."
영희는 한숨까지 쉬며 그렇게 말했다. 미리 준비한 거짓말도 아닌데 술술 잘도 나왔다. 그
래도 김상무는 곧이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 장당 얼마에 넘기실 거유?"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십육만원만 내놔. 이것두 급해서 내던지는 거야. 어이구, 그 병
신..."
"그래두 십육만 원은 너무 했수. 더구나 열 장씩 한꺼번에 넘기는데..."
그러는 말투에는 영희의 불행을 믿고 동정하는 데가 전혀 없었다.
"그럼 얼마에 받을래?"
"누님 물건이라면 누구보다 원가는 내가 잘 알잖수? 내 집에서 5만 원도 안 주고 거둔 것
만두 몇 장인데. 너무 욕심내지 말구 곱장사만 하슈."
"그럼 십만원?"
"것두 열 장씩은 부담돼요. 실은 요즘 우리도 뭔가 좋잖은 낌새를 느끼고 있다구요."
"좋잖은 냄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영희가 긴장하며 물었다.
"뭔지 모르지만 여기서도 슬슬 막차 냄새가 난다구요. 도대체가 너무 요란스러워. 이제는
도떼기 시장이 되었다니까. 돈푼 쥐었으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몰려드는 거, 이거 영 기분 안좋아요."
"그게 왜 나빠? 원래 장은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큰 장이 서는 거 아냐?"
"그게 아니라구요. 장도 장 나름이지. 이렇게 되면 무슨 탈이 나게 돼 있다니까요. 실은
그래서 요즘 우리도 전처럼 물량 탐내지 않는다구요. 재고를 많은 쌓아두기가 불안하다니
까."
"그거 별일이네. 하지만 십만 원에는 안 되겠어. 생빚을 냈으면 냈지, 그런 헐값에 어떻게
던져? 복덕방 구전에, 오면 가며 차비에, 한 해 이자 떼면 남는 게 없잖아."
영희는 그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상무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눈치더니 가만히
영희의 옷깃을 잡았다.
"이건 모험인뎨... 2만 원 더 얹어드릴게. 이왕 말 난 김에 우리에게 넘기슈. 얘들 풀어 오
늘 내일 다 흩어버릴 셈 잡고 한 번 해보지."
"합의 보는 데만 1백 50만 원이 필요하다니까. 정말 큰 일이야. 아무래도 생빚을 내야 할
모양이네. 아이구 그 병신, 웬수 같은 인간. 뱃속의 핏덩이만 아니라도..."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팔 생각이 아니었던 영희는 정말로 낭패한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며
그 사무실을 나왔다. 김상무도 더는 모험할 생각이 없는지 그런 영희를 잡지 않았다.
"누님, 미안함다. 그 이상은 저희들도 받기가 불안해서... 그냥 몇장 맡겨주시면 저희가 힘
대로 팔아드리죠."
"내일 아침까지는 합의를 봐야 구속 영장 떨어지는 걸 막아. 흩어서 질끔질끔 팔 처지가
못 돼. 그만 갈게."
그런 말이 도가기는 했지만 서로가 거의 건성에 가까운 말이었다.
거리에 나오자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 영희는 가까운 국밥집에서 설렁탕을 시켜놓고 갑자
기 걱정되는 자신의 상품을 어떻게 처분할지 궁리를 거듭했다.
'이것들도 무슨 낌새를 느끼고 있구나. 아무래도 빠꼬미(눈치빠른 전문가)들에게는 어렵겠
다. 그렇다고 난전을 펼 수도 없고... 저쪽 새로 들어선 복덕방 골목에서 한두 장씩 쪼개 파
는 수밖에 없겠어.'
이윽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영희는 점심을 먹은 뒤 단대천 위쪽에 새로 난 복덕방 골목으
로 가서 마땅한 거래 상대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영희가 첫 번째 집에서 15만원에 두 장을
넘기고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소리없이 길가에 붙어서는가 싶더니 거기
서 있던 어떤 여자의 핸드백을 나꿘채고 다시 속도를 냈다.
"내 핸드백, 내 핸드백... 도둑이야!"
여자가 미친 듯 소리치는 사이에 오토바이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멀어지더니 천막 골목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비명 소리에 몇 사람이 주위에 몰려들었으나 그저 오토바이가
사라진 쪽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특별하거나 놀라운 일을 목격하고 있다는 표정을 전
혀 없었다.
"아이구, 내 핸드백, 아니 우리집, 우리집..."
그 사이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여자가 그런 울음 섞인 외마디소리를 내질렀다. 영희는
그 핸드백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아주머니,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파출소에 신고하세요. 다른 건 몰라도 분양증은 찾
을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돈처럼 누구 것이란 표시가 없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아주머니가
분양맏은 거라면 아주머니 이름이 있을 거고, 전매한 거라두 원주인 이름은 알고 있으실 거
아녜요? 얼른 가서 신고부터 해두세요."
영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위로 삼아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쉽진 않을걸. 전매한 거라면 물 건너간 거고... 직접 분양받은 거라도 두어 손 건너
버리면 그만이야. 어느 놈이 암까마귀고 어느 놈이 수까마귄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 해먹을
길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라구. 어떤 놈들인데..."
누군가 구경꾼 중에서 빈정거리듯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핸드백을 날치기당한 아주머니
는 더욱 상심해 눈물까지 줄줄이 The았다.
'정말로 무서운 판외 되었구나. 이것도 토지 문서인데 날치기로 임자가 바뀔 수 있다니. 이
건 원가 잘못되었어...'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분양증들이 든 핸드백은 겨드랑이로 깊이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
래도 미련이 남아 끝까지 버텨보려고 남겨둔 나머지 여남은 장의 분양증들까지 처분할 결심
을 굳힌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복덕방에서의 딱지 경기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영희가 두장
석장씩 나눠 내놓자 복덕방들은 대개 받아주었다. 어쩌면 영희가 내놓은 값이 워낙 시세보
다 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복덩방 네 곳을 돌아 딱지 열장을 다 처분하고 나
니 어느덧 해가 뉘엿해지고 있었다. 잇달이 붙어 있는 곳들이라 몇 집 건너뛰어도 복덕방
상이의 이동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원래 말이 성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거래라 그런
지 한군데에 한 시간 가까이 먹힌 셈이었다. 그들이 말이 많아진 데는 그들을 통해 그곳의
실태를 가늠해보려는 영희의 충동질도 원인이 있었다.
'나나 김상무나 너무 앞질러 보고 있는 거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별로 걱정 없는 눈치잖아.'
마지막 복덕방을 나올 때 영희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게 다시 김상무를 찾게 했
다. 김상무는 한눈에 영희의 성과를 알아보았다.
"누님 다 처분하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긴 뭘, 사정이 급해 싸게 내던지고 오는 길인데."
영희는 굳이 속일 까닭도 없어 그렇게 대답하고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런데 말야. 여기도 막장이란 말, 그거 정말이야?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늙은 영감들도
잘 모르는 눈치던데 이제 겨우 시작인 김상무가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죠. 때가 되면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구요."
김상무가 무엇 때문인지 벙글거리며 대답했다.
"누가?"
"누님 같은 전문가들요."
"정말 김상무 사람 잡겠네. 내가 무슨 전문가야? 땅장사라고는 여의도에 멋모르고 들어갔다
가 본전도 귀 뜯기도 나온 것밖에 없어. 누가 여기가면 괜찮을 것 같다기에 본전이라도 찾
아볼까 해서 딱지 몇 장 사본 거라구. 지금 내놓는 것두 정말로 애아버지 사고 때문이라니
까. 사람 말 되게 안 믿네."
"누님 말을 안 믿는 게 아니라... 실은 말예요. 어제 그제 성북동 아주머니가 벌써 사오십장
뿌리고 갔어요. 난곡동, 상계동 다 거친, 여기서는 제법 큰 손으로 알려진 아줌만데... 처음이
라 나 같은 장사꾼도 모르고 열 장이나 받았죠. 값도 시세보다 싸고. 그런데 오늘 누님이 또
나오셨잖아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구나... 영희는 속으로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굳이 시치미를 뗐다.
아직 처분해야 할 딱지들 때문이었다.
"그 아주머니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아니면 그래서 값을 떨어뜨린 뒤에 다시 사모을 생
각이거나."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나는 그게 더 수상쩍단 말입니다. 값은 떨어뜨릴 생각이라면
당연히 나쁜 헛소문을 내야죠. 그런데 성북동 아줌마뿐만 아니라 알려진 큰 손들은 하나같
이 좋은 소리들만 하고 다니거든요. 그러면서 또 뒤로는 자기가 가진 물건을 슬슬 내놓는
눈치란 말예요."
그게 아마도 김상무를 뒷날 강남에서도 괜찮다는 빌딩의 주인으로 만들어준 눈썰미였을
것이다.
"그럼 저쪽 동네는 왜 아무런 눈치가 없어?"
"낱장 들고 왔다갔다하는 쫄때기들 상대로는 그게 잘 안 보일 겁니다. 그리고 설령 감 잡았
다 해도 누가 손님에게 그 눈치보인답니까? 그러면 당장 파장이 되는데..."
거기서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솔직해지고 말았다.
"그럼 나 아직 여남은 장 더 처분해야 되는데-괜찮을까?"
"그 여유야 있겠죠. 아직은 판은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걸요."
김상무도 갑자기 솔직한 어조가 되어 그렇게 대답해놓고 당부하듯이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티는 내지 마세요. 특히 실수요자 상대로 싸구려 부루지 마시구요. 저도 힘닿
는 대로 몇 장을 거들어드리죠. 왠지 누님하고는 다음에도 만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
다."
잠시 흔들렸던 영희의 마음을 거기서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이틀에
걸쳐 시아버지에게 남아있던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몴으로 제쳐놓았던 노른자위 분양증까지
모두 처분했다. 길게 보아 꼭 잘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로부터 꼭 한 달 뒤 영희는 신
문에 난 다음과 같은 전매 행위 금지 공고를 보고 수없이 가슴을 쓸었다.
<당 시에서는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고 철거민에게 이주 정착지로 분양한 광주대단지에
입주, 정착한 자와 현재까지 입주치 않았거나 제3자에게 전매한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하였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1. 기 입주자에 대하여
가. 입주자가 본인인 자는 1970년 80월 30일까지 전부 분양 계약을 체결하여야 합니다.
나. 1970년 7월 11일 현재 건물이 건축되어 있고 전매하여 제3자가 입주하고 있는 것은
1970년 8월 30일까지 토지 매수 계약을 체결하여야 합니다.
1. 토지 대금은 계약시 시가로 일시불하여야 합니다.
2. 매매 계약에 불응하는 자는 무단 점용으로 퇴거 조치합니다. 단, 분양 계악 후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는 여하한 형태로도 정당한 사유로 사전 승인인 득하여 주거를 이전할 때에는
예외로 합니다.
2. 비입주자에 대하여
가. 1970년 7월 11일 이전 입주 자격자 둥 미입주자는 다음 1,2호에 의하여 본인이 입주하
지 않은 때에는 입주 자격을 무효로 하고 해당 토지를 제3자에세 재분양합니다.
1. 입주지 분양을 받은 자는 1970년 7월 25일까지 본인이 입주, 정착해야 합니다.
2. 현재까지 입주 분양을 받지 않은 입주 자격자는 1970년 7월 25일까지 주민등록을 이전하
고 본인이 분양을 받아 입주, 정착하여야 합니다.
3. 앞으로 이주할 자에 대하여
광주단지 철거민 분양에는 철거민 본인에 한하되 지정 기일까지 이주 및 주민등록을 필하
지 않으면 자격을 무효화합니다. 1970년 7월 11일 서울특별시장
제 26 장 아버지를 찾아서
"아직 멀었어?"
인철이 이마에 땀을 훔치며 광석에게 물었다. 광석은 과장된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
러본 뒤 대답했다.
"응, 다돼가."
인철도 무심코 광석과 함께 주위를 돌아보았다. 옛날 강북에서 철거민들을 이주시키기 위
해 열 평 남짓씩 쪼개준 집터 위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블록집 사이로 난 고갯길에는 한여
름 뙤약볕만 내리꽂힐 뿐 특별히 수상한 사람이 뒤따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광석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뻔한 길을 돌고 있는 눈치였다. 인철은 그런 광석의 태도가 왠
지 못마땅했다. 미행을 경계하는 게 마치 무슨 대단한 직업 혁명가라도 된 것 같았다. 그게
과장이라면 그 과장이 우스꽝스럽고, 정말로 그래야 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걱정이었다.
대학에 들어온 첫해 한 학기를 인철은 노광석과 붙어 살다시피 했다. 동급생들은 거기에 한
형을 보태 '막걸리 삼총사'라고 부르고 자기들은 주가삼현이라 자칭했지만 감정적으로 더 가
까운 것은 동갑내기인 그들 둘이었다. 아무래도 한형과는 세 살의 아니 차이가 주는 거리감
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뒤로 광석은 사람이 달라진 듯 변했다. 주가
삼현의 술자리에 어울리는 횟수가 줄고, 어울려도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에 회
의적이던 태도는 철저한 부정으로 바뀌었고, 때로는 앞 뒤 없은 공격성까지 드러냈다. 특히
화제가 정치나 사회적인 것이 되면 그 공격성은 듣고 있기가 으스스할 정도로 극단적이 되
었다. 대신 인철이 모르는 또 다른 세계돠의 거래를 시작해 날이 갈수록 인철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인철이 실존 쳘학을 통한 자아 찾기에 나서면서 노골적인 빈정거림을 서슴
지 않았다.
"존재란 무엇보다도 유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역사나 사회로무터 단절된 존재는 없거나 무
의미해. 그런 존재는 주관적 관념론의 변형이 아니면 말기적 위기 의식에 빠진 부르주아 철
학이 조직한 허구야."
그런 말로 인철의 실존을 간단히 비웃었다. 그리고 인철이 문학회에 나가게 된 것을 알고
나서는 실망하고 분노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
"나는 너도 나처럼 아버지 찾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좋은 길동무가 될 줄 믿었는데 이
제는 우리 길이 달라졌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데는 적지 않은 노고와 아울러 투쟁이 필요해. 그런데 네가 고
른 문학의 길은 그 투쟁의 효율성이 너무 낮은 것 같아서."
그리고 그때부터는 인철과 추구 방법은 비슷해도 구체적으로는 무얼하는지 전혀 짐작이
안 되는 어떤 길로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때로 그도 밤새워 뭔가를 읽은 듯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등교했지만 읽은 게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고, 인철의 문학회처럼 그도
누군가와 모여 공통된 관심을 논의하는 것 같았지만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는 알 길
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의 어느 날이었다. 광석이 인철을 학교
앞 대폿집으로 불러내더니 들을 사람도 없는데 소리 죽여 물었다.
"너 아직 그 책 가지고 있어?"
"무슨 책?"
"예전에 헌책방 점원으로 일할 때 사두었다는 그 사회주의 사상 전집말이야."
"그건 일본어로 되어 있는 건데..."
인철은 공연히 으스스해져서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다. 작년 어느 날 술김에 그 책 얘기를
할 때의 은근한 자부심은 어느새 후회로 바뀌어져 있었다. 4년 전 그 책들은 손에 넣은 뒤
로 인철은 용하다 싶을 만큼 그것들은 잘 보관해두고 있었다. 여섯 권은 두 권씩 겹쳐서 두
터운 시멘트 포대 종이로 싼 뒤 인철이 가지고 다니는 큰 가방 바닥에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을 쑤셔담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게 책인지 원래의 가방 바닥인
지 알아도기 어렵게 위장한 채였다. 하지만 형사들이 주기적으로 자신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은근히 짐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알아. 그런데 그 책 좀 빌려주지 않을래? 그걸 우리에게 읽어줄 만한 형이 있어."
"그건 좀 곤란한데... 그건 막 내돌릴 책이 아니잖아."
"막 내돌리는 게 아니야. 소중하고 뒤한 원전이지. 그걸 연구하려는 거야."
"뭐? 누가?"
인철이 더욱 긴장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광석이 엄중한 눈짓을 하며 말했다.
"쉿, 소리 낮춰. 내 전에 말했지? 아버지 찾기라고. 나는 그 사상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는
아무것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요즘 그쪽을 공부하는 중이야."
그리고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달래듯이 말했다.
"너도 점원 자리에서 쫓겨나면서까지 그 책을 산 건 그런 뜻 아녔어? 지금은 소설 나부랭이
에 미쳐 돌아가도 있지만 작년만 했어도 그쪽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해 보였는데..."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야. 여럿이서 모여 요란스럽게 연구할 생각은 없어. 곧
일본어를 시작해 한번 읽어볼 생각뿐이었다구."
"어느 세월에? 그러지 말고 우리와 같이 공부하자. 그걸 바로 강독해 줄 좋은 선배도 있어."
"우리라면 어떤 사람들이야?"
그새 두어 잔 마셨지만 인철은 야릇한 긴장 때문에 조금도 취기를 느끼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광석은 인철의 의심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변명처럼 말했다.
"그 선배말고는 모두 재학생들이야. 서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사상 연구회 같은.... 지
금은 사회주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을 뿐이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사회주의란 게 몇 달 혹은 일 년 안에 떼고 다시 다른 사상 연구로 들
어 갈 수 있는 그런 게 아닐텐데... 그리고 그 선배 어떤 사람이야? 무얼 한 사람인데 일어
판 사회주의 원전을 너희들에게 강독해줄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남파 간첩은 아니니까. 문리대 철학과 58학번 형이야. 또 우리도 그렇다고 무
슨 엄청난 지하 조직을 꾸민 불온 단체도 아니구."
광석이 그러다가 다시 한번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그러지 말고 너도 한번 나가보는 게 어때? 우리하고 같이 학습하지 뭐. 어차피 너도 아버
지 찾기를 위해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아냐? 어쩌면 네가 지금 마움두고 있는 그
문학을 위해서도 필요할지 모르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인철을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떤 본눙적인 공포감
때문에 되도록 이면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런데 인철이 거절할 알맞는 구
실을 찾느라 잠시 말이 없는 사이에 광석이 다시 덧붙였다.
"때로 피는 논리를 우선하는 거야. 거의 요란뻑적지근한 실존도 결코 피에서 자유롭지는 못
할걸."
사르트르는 일찍 죽은 아버지를 정액 몇 방울의 의미로 축소시켜 자신의 실존 탐구에서
제외해버렸다. 나중에는 인철도 세 살 때 월북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의미를 그렇게 축
소시켜보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피는 어쩌면 사유보다 체험에 가까운 개념이고, 한
국적인 연좌의 논리에 자극되면 보다 절실한 실존의 일부가 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
다. 그 때는 더욱 그랬다. 광석이 상기시킨 피의 문제는 인철이 오래 잊고 있던 아버지를 다
시 떠올리게 했다.
'그래, 아버지 찾기는 나를 찾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제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걸 위해서는 먼저 그의 이데올로기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이 그렇게 바뀌자 좀 전의 본능적인 공포가 가라앉으며 그 모임에 대한 호기심이 살
아났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자. 회원들이 모두 학생들이고 연구도 비교 사상 차원이라면 말이야."
인철이 마음을 바꾸어 다가들자 이번에는 광석이 멈칫 물러났다. 그제서야 그들 모임의
엄한 계율이 생각난 듯 했다.
"아마 선배님이나 다른 회원들도 네가 온다면 반길거야. 가족과 안락한 삶을 송두리째 통일
의 제단애 바친 투사의 아들을 누가 의심하겠어?"
자신있는 권유와는 달리 어딘가 머뭇거리는 투로 그렇기 말했다. '통일의 제단'이나 '투사'
한 낱말이 다시 인철의 경계심을 자극했으나 이미 해버린 말을 되거둬들일 정도는 아니었
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한 달이나 지난 그날 아침에야 간밤 늦게까지 원고지에 매달려
있다가 늦게 잠이 든 인철에게 광석의 전화가 왔다.
"회원들이 너를 보고싶대. 사당동 쪽으로 나올래?"
"저기야. 저기 저 파란 대문이 열려 있는 집 보이지?"
시멘트의 복사열로 숨이 훅훅 막혀오는 좁은 시멘트 골목 한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 광석
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철도 덩달아 긴장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응."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너는 이 골목을 지났다가 한 번 더 주위를 살펴보고 되돌아와.
안쪽으로 발이 쳐진 방문이 있는데, 거기 와서 노크해. 똑, 똑똑, 똑똑똑... 알지?"
광석이 그렇게 속삭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인철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나
무 대문 앞에서 잠시 안을 살피다가 스며들 듯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광석의 긴장한 목소리
와 표정 때문에 인철을 시키는 대로 했다. 찌는 듯한 더위도 잊고 꼬블꼬불한 골목길을 한
참이나 오르다가 역시 아무도 없는 그 골목을 되짚어 내려와 파란 대문 앞으로 갔다. 마당
이라기보다는 좁은 복도 같은 공간을 두고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방 한 칸이 있었는데, 그
방문 앞에는 햇살을 가리기 위함인 듯한 대나무 발이 쳐져 있었다.
광석에게 들은 방식대로 노크를 하자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어둠속에서 나이든 목소
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시오. 발 앞 조심하시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인철을 방안을 둘러보았다. 넓어야 세 평이나 될까, 그
것도 한구석은 함무로 쌓아둔 책과 여러 용도로 쓰이는 듯한 사과궤짝, 그리고 이불 보퉁이
가 점령하고 있는데도 방안에는 사람이 일곱 명이나 앉아 있었다. 출입구에는 인철이 들어
온 그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인철은 먼저 출입구가 하나뿐이라는 것을 보자 피식 웃음이 터
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렇다면 광석이 말한 그 암호와도 같은 노크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혹은 이들은 암호 편지와 암호 해독법을 한 봉투에 넣어 태연
히 우편으로 부쳤다는 얼치기 혁명가들의 후예가 아닐까. 있지도 않은 혁명군단으로 허풍을
떨며 한밤을 지새곤 했다는...
"여러분께 새로 온 예비 회워 한 분을 소개합니다. 이름과 인적 사항은 정식 회원이 된 후
에 서로 알기로 하고 당분간은 학습만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광석이 문득 몸을 일으켜 인철을 소개했다. 낯선 분위기 때문에 잠시 멍해 있던 인철은
서둘러 그런 광석의 소개를 부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회원이 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그냥 한 옵서버로서 제가
진작부터 궁금하게 여겨온 것을 여러분이 공부하고 계시다기에..."
그러자 다시 나이든 쪽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받았다.
"우리도 찾아온다고 해서 모두 회원으로 맞아들이지는 않소. 귀하는 여기 노동지... 아니 노
후배가 보증했기 때문에 바로 학습회에 올 수 있게 된 거요. 어쨌든 좋소. 앉으시오."
그 말에 인철은 문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노광석이 공연히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
에게 인철을 설명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우리 학교 문학 서클에 열성적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
래는 열렬한 애국지사의 아들로 매판 독재의 탄압을 많이 받고 자란..."
"됐어. 하지만 먼저 본인에게서 얘길 듣고 싶은데..."
실세적으로 그 모임을 조종하고 있는 듯한 그 선배라는 사람이 그렇게 광식의 말을 끊고
인철을 향했다.
"이걸 뭐 고깝게 듣지 마시고... 내가 묻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해주시오. 먼저 아버님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겠소?"
처음 인철은 그 요구에 적잖이 기분이 상했다. 말하자면 어떤 자격 부여를 위한 절차 같
은데, 거기에 낡아빠진 혈통주의라니... 싶자 솔직히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말
없이 앉아 인철이 하는 양을 살피고만 있는 나머지 다섯의 진지한 표정과 선배라는 사람에
게서 풍겨나오는 묘한 카리스마가 은근이 인철을 압박했다.
"한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전우주를 다 말한다는 것과 같을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에 대해서라지만 어디서 어디까지, 그리고 어떤 면을 중심으로 말해야 될지 막연하군요."
그래도 바로 답하기가 마음내키지 않아 인철이 그렇게 뜸을 들이자 그 선배가 다시 짤막
하게 받았다.
"보통의 이력서를 참고로 하면 될 것이요. 학력과 경력, 그리고 사회적 직함을 위주로 하되
상벌관계와 출신 성분도 가급적 소상히 밝혔으면 좋겠소만..."
"출신 성분은 봉건 지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현실 권력에서는 2백년 이상 소외된 영남
남인이지만 대대로 몇백 석은 유지한 재지사족의 후예니까요. 그런 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
명에의 투신은 어떻게 보면 한국판 도약 이론으로 설명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도약 이론은 그런 데 갖다 붙이는 게 아니고... 어쨌든 좋습니다. 성장 환경 및 교육 관계
는?"
"천석꾼 집안의 외아들이었으나까 물적 환경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실 것이고, 심
적 환경은 아마도 유가적 인의에 바탕한 영웅주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구식 사회주의, 곧 집산주의나 무정부주의 같은 사상들과 단편적인 조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의 출발은 원래 아나카즘에서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상한 용어을 쓰는군. 동경 유학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교육 과정은 어떻게 되오?"
"자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일찍부터 서울로 나와 신식으로 받았습
니다. 곧 여덟 살 때 교동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
러나 6,10 만세 사건에 관련되어 10월형을 받고 퇴학당하는 바람에 졸업은 휘문보고에서 했
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은 한성제대를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일본대학교에서 농업 경제학을
정공했습니다. 아마도 한국판 도약 이론이 형성된 것은 그 시기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뒤 동척 농장장 노릇을 했는데, 일제의 대표적인 착취 기관에 몸담았으면서도 조직 상부의
양해 혹은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그 경력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인철은 되도록 객관적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뭇 심문적인 태도를 버리
지 않고 묻기를 계속하는 그 선배라는 사람의 대꾸가 인철의 심기를 건드려왔다.
"철모르고 한 만세 운동을 빼면 처음부터 가망 없는 출신 성분과 경력이군. 자본주의 혁명
단계를 생략한 점만 가지고 '도약 이론'이란 말을 붙인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거야말
로 비약이야. 어쨌든 계속해보시오."
꼭 자신을 심뭄하는 것 같은 그런 말투가 인철의 혀를 더욱 뒤틀리게 했다.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딱한 영웅주의는 가망 없는 추구를 계속하지요. 해
방 뒤에는 전농(전국농민대표자협의외)에 관여하며 경북 일원의 추수 폭동을 배후 조종하고,
아마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짐작되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그를 가벼운 형으로 풀려나게 만든 것은 그가 거물이어서 누가 죄를 대신 써준 게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던 수백 석지기 전답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6,25 직전 해
서는 이름을 바꾸고 농부로 위장해 하계리에 잠복하게 되지요."
"귀하께서는 아버님을 존경하지 않는군. 오히려 그 부분은 회개한 부르주아의 적극적인 투
쟁 경력이 되겠는데."
"저도 그렇게 믿었지요. 그런데 그뒤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그를 딱하게 여
기게 되었구요."
"그뒤가 어찌 됐소?"
"듣기로 그가 6,25를 맞은 것은 하계리에서 감자를 캐던 도중이었다고 합니다. 산 밑 밭에서
감자를 캐고 있는데 갑자기 한떼의 인민군이 들이닥친 거지요. 그걸로 미루어 그는 정말 아
무것도 모르고 숨어 산 심파(심정적 동조자)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런데 남로당 계열이 서울인민위워회를 장악한 7월 중순까지의 과도기 정국이 다시 그를 턱
없는 환상에 빠지게 한 겁니다. 이승엽 일파의 조급한 세력 확장욕과 핵심 간부들이 죽거나
숨어버려 생긴 인물난이 맞물려 그에게 출,퇴근 때 호위병이 붙을 정도의 과분한 직책이 주
어진 일이 그렇습니다."
"그건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도 않군. 과분한 게 아닐 수도
있잖소?"
"나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보름도 안 돼 북쪽에서 내려온 새 지도부에 의해 서울
시인민위원회가 장악되면서 그는 하루아침에 철질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
들 순혈의 프롤레타리아가 맨발로 만주 벌판은 헤매며 투쟁할 때 동경의 따뜻한 하숙방에서
됭군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쫒아보낸 게 이름만 거창한 지방 농대의 학장자
리였습니다. 학생도 선생도 없는 그 대학 학장 관사에서의 첫날밤은 그의 부인 증언에 의하
면 악몽 같았다고 합니다. 지붕은 새고 구들을 내려앉고 거기다가 밤새 모기에 뜯겨야 했다
더군요. 그래도 그는 학장이란 이름 하나에 매달려 그 대학을 재건했지요. 꼬박 두달에 걸쳐
교수들을 모으고 학생들은 달래 개강이랍시고 하려는데 유엔군의 인천 상륙이 있게 됩니다.
그들이 내려오는 걸 까맣게 몰랐던 것처럼 밀리는 것 역시 까맣게 모르고 있던 그는 오래잖
아 다시 돌아온다는 상부의 다짐만 믿고 노모와 어린 자식들, 그리고 젊은 아내를 불구덩이
에 팽개쳐둔 채 그들이 내준 군용 트럭 한구석에 끼어 앉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끝입니
다. 여러분께 애국지사 혹은 열렬한 투사로 알려진 얼치기 사상가의 이력은."
인철이 그렇게 말을 맺자 방안이 한동안 보이지 않게 술렁거렸다. 거기 있는 모두가 반대
든 찬성이든 인철의 말에 나름의 견해를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눈치였다. 선배란 사람
이 가벼운 손짓으로 그런 술렁거림을 가라앉힌 뒤 한층 엄한 심문의 눈길이 되어 인철을 쏘
아보며 물었다.
"귀하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은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멸하는 것 같소. 그 이상 미워하거
나... 그렇다면 아버지 찾기는 이미 끝난 거요. 그런데 그의 사상은 알아서 무얼 하겠소?"
"피는 논리로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아버지를 지운 논리도 다분히 일방적이구요.
재가 불평하고 있는 것은 한 이념의 본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한국적 적용 과정에서 몇
몇 인간들이 한 실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그에게 대의를 향한 진정한 자
기투척이 있었다면 나의 부인은 언제든지 궁정과 시인으로 전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 투척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길이 바로 그의 대의, 혹은 이념 그
자체의 온당함과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념을 알고 싶은 겁니
다. "
그러자 그 선배라는 사람의 얼굴에 잠시 어떤 망설임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인철을
그쯤에서 내쳐버릴 것인가, 어떻게든 다랠 받아들일까를 얼른 결정짓지 못해 생긴 표정같았
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어조를 바꾸어 물었다.
"그렇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없군. 하지만 그전에 또 궁금한 것이 있소. 그건 귀하의 현실 인
식이오. 귀하가 보기에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소? 특히 박정
희 군부 파쇼 정권의 행태와 관련해서 느낀 대로 말해보시오."
"솔직히 저는 그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종의 원죄 의식이라 할까,
왠지 내게는 애초부터 발언권이 없는 것 같아서요."
"별난 원죄 의식도 있군. 하지만 그래도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아무 느낌이 없다면 이
상한데."
"굳이 말하라면 이렇다 할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는 권력이 경제 개발을 통해 한 보상적 정
권으로 자리를 잡아사는 중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이제는 상당히 자신을 가져 장기 집권까
지 꿈꾸게 된 단계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인철은 전해 삼선 개헌을 반대하는 데모가 대학가를 휩쓸 때 한번도 데모대에 끼지 못하
는 자신을 변명하듯 읽었던 그 방면의 글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대답을 끼워맞췄다. 그러나
군사 정부의 보상적 기능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스토가 말한 도약 단
계란 것도 저희 쪽에서는 한물간 이론가의 질 낮은 아첨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김지하가 쓴 <오적>이란 시는 어떻게 보았소? 정인숙 여인 피살사건은? 와우 아파트
붕괴는?"
그가 댄 그 사건들은 모두 그해 일어난 것들로 <오적>이란 담시를 빼고는 인철의 의식에
그다지 강하게 와 닿지 못했다.
"솔직히 그 <오적>이란 시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걸 읽은 우리 문학회 시인 지
망생들에 의하면 문학적으로는 그리 세련된 작품이 아니라더군요. 그래도 그걸 쓴 사람의
용기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있습니다. 정인숙 여인이 죽은 것은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저 배
후가 좀 복잡한 치정 살인 사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와우아파트는 부실 공사로 무너진 거
아닙니까?"
인철이 짐짓 대한할 것도 없다는 투로 그렇게 반문하자 갑자기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
해졌다.
"짐작은 했지만 이건 좀 심하군. 이봐요. 사회적 현상들은 얼른 보아 별개로 일어나고 있는
듯하지만 종합하면 한 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읽을 수가 있는 거요. 정인숙 여인의 피살
사건은 군부 파쇼 정권의 갈데까지 간 도덕적 부패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고, 와우아파트
붕괴는 그들이 면죄부로 삼으려는 경제적 보상의 허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오. 그
리고 <오적>은 그런 군부 파쇼 독재에 지성인들의 저항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소. 종합
적으로 박정희 군부 독재는 이제 말기적 상황에 빠져들오 있다는 것이오."
그러자 인철은 문득 그해 봄 수락산에 갔다가 주워 읽은 불온 삐라의 내용이 떠올랐다.
제목은 '색마의 결혼식'으로 되어 있고 두 사람의 결혼 사진이 합성되어 있는데, 남자는 박
정희였고 여자는 죽은 정인숙이란 여인이었다. 곁들여 씌여진 글의 내용에는 박정희가 정인
숙을 데리고 놀다가 "제놈을 쏙 빼어 닮은 새끼를 낳자." 그녀를 죽였으나 이제 멀지 않아
그도 죽으리라는 저주였다. 그때 인철은 거기서 남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나 어떤 정치적
조짐을 읽기보다는 북한 대남 선전의 치졸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또 인철은 그 얼마 전 어
떤 유명한 가수가 '신고산이 우르르...'를 '와우산이 우르르...'로 바꾸어 부르다가 사법적 제재
까지 논의된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도 그게 남한 사회의 어떤 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기보다는 사법 당국의 호들갑으로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들이 김지하의 <오적>
과 같은 선상에 놓이는 사회적 사건들로 논의되는 것을 보고 은근한 위축을 느꼈다.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같은 남한의 현 상황과 사회주의 사상 연구와는 어떤 관계를 가집니까?"
인철은 처음부터 안고 있던 불안을 누르며 짐짓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에 더
욱 열기가 실렸다.
"단순히 관념적인 인식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행동으로 전화되어야 할 신념 체계가 되
어야 한다는 것이오. 거기까지 동의해야먄 본 사상 연구회의 회원 될 자격이 있소."
"그렇다면 전 사양하겠습니다. 힘들고 더디겠지만 혼자 가보지요.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에
소도 한번 무릎 꿇은(쓰러진) 언덕은 조심해서 걷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아버지 세대가 한
번 실패한 그 길을 다시 반복해 걷고 싶지는 않군요."
인철은 듣기에도 차갑다 싶은 목소리로 그렇게 잘랐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
래도 그 선배란 사람은 열기 섞인 설득조를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이미 실패했다는 단정은 지나친 단견이거나 패배주의적 독단이오. 공화국은 아직 건재하고
모든 것은 진행중일 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소. 있다면 귀하의 아버님이 겪은 개인적인
비극과 좌절인데, 그것도 우리 이념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하오. 귀하의 말마따나 그 이데올
로기의 '한국적 적용'에서 빚어진 '비극적인 소모'의 한 예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
"비극적 소모라구요?"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희생과 낭비 말이오. 거기다가 그 경황 없는
가족의 이산에 동정은 가지만, 그게 바로 그분의 최종적인 실패를 단정할 근거는 되지 않
소."
"아버지처럼 월북했다가 54년에 간첩으로 남파된 친척의 증언은 그가 해주 초대소(남파 거
점) 소장으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일본에 있는 친척이 가져온 소식은 농림성의
관료라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원산농대 평교원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다가 월북자로 64년
에 남파되자마자 자수한 친척 아저씨는 행불되었다고 하더군요."
"행불이라면 행방 불명이란 뜻이오?"
"그렇습니다. 간첩으로 남파되기 전에 마치 죽음을 앞둔 자에게 베푸는 관용처럼 몇 가지
청을 들어주는 관례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아저씨는 아버지와 고보 선후배가 될 뿐만 아니
라 전쟁 전에도 각별한 사이라, 아버지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
칠 뒤에 내려온 소식은 행불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수선한 우리 사회와는 달리 모든 것이 잘
조직되고 통제되어 있는 그 사회에서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것은 아버지가 남에게
보여주기 어려울 정도의 처참한 상황에 빠져 있거나, 최악의 경우 이미 처형된 뒤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피의 작용일까, 아버지의 전락을 얘기하는 인철의 목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축축하
면서도 격앙된 것으로 변해갔다. 그러다가 얘기를 그렇게 맺을 무렵에는 콧마루마저 시큰거
렸다. 더 이어가다가는 눈물까지 쏟게 될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인철은 안간힘을 다해 냉정
을 회복하려고 애쓰며 결론을 서둘렀다.
"어쨌든 저는 혼자 아버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곳에 잘못 온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들 계십시오."
인철은 그렇게 말해놓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제 27 장
벽에 달아맨 선풍기가 앞 뒤 두 곳에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다방 안은 후텁지근하
기 그지없었다. 지하실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담배 연기에 커피향이 뒤섞인 공기고 불쾌하
게 후각을 자극했다. 명훈은 카운터 곁에서 한참이나 그런 다방 안을 돌아보다가 구석진 곳
에 있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간밤에 마신 술이 다시 위와 머리를 역하게 자극했다. 모니
카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부터 시작돼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지는 폭음이었다.
"무슨 차를 드시겠어요?"
명훈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뛰어와 차주문을 재촉했다. 예쁘
긴 하지만 경망스런 느낌은 주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가 공연히 거슬려 명훈은 퉁명스럽
게 받았다.
"올 사람이 더 있어. 찬 물이나 한잔 가져와."
그러자 아가씨도 새침한 얼굴이 되어 홱 돌아섰다. 입수링 달싹거리는 게 뭔가 좋지 않은
소리를 입 속으로 쫑알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들리지도 않은 말을 꼬투리 삼이
시비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명훈은 불쾌한 대로 참아넘겼다.
잠시 후에 돌아온 아가씨는 소리나게 물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물이 잔 밖으로 튀지 않
은 게 신통한 정도로 거친 손놀림이었다. 이번에도 명훈은 욱하고 속이 치밀었으나 화를 내
기에는 구실이 약해 그냥 참아넘기고 말았다. 물은 소독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수돗물이
었다. 얼음 한 조각 띄우지 않아 한 모금 마시자 구역질이 나려 했다. 그런 위를 다스리기
위해 명훈은 급하게 담배를 물었다. 그때 등뒤에서 나이든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 참...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김영삼은 등신이고 김대중이가 똑똑한거야, 아니면
김영삼이 순진하고 김대중이는 사기꾼이라고 해야 되는 거야?"
목소리에 이어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신문을 보며 하는 말 같
았다. 역시 비슷한 연배인 듯한 상대가 뒤틀린 목소리로 맏았다.
"그게 정치지, 뭐. 김대중이가 똑똑한 거야."
그 말에 명훈은 딴 세상은 떠올리듯 그 전날 요란스럽던 라디오 보도를 기억했다.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 투표, 김대중 후보 역전승...
"그렇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1차 투표 때 그렇게 큰 표차로 이겼는데, 2차 결선에서
되레 지다니."
"아직도 몰라? '이총재 부탁합시다.'..."
"이총재 부탁합시다? 그게 무슨 소리야?"
"김대중이가 이철승에게 명함 뒤에 써보냈다는 메모야. 2차 결선 들어가기 전에... 나를 대통
령 후보로 밀어주면 당신을 신민당 총재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지."
"그것 참 절묘하네. 그런데 이봐, 이철승계 대의원 표 몽땅 그리로 갔다 쳐도 이상하잖아? 2
차 투표에서 얻은 표와 이철승계 합친 것보다 더 많다구."
"그러니까 김대중이가 똑똑하다는 거야. 듣기로는 전날 밤 대의원들이 자는 여관을 밤새 돌
았다더군. 그리고 그 잘 드는 입으로 진산계(유진산 계보)까지 흔들어놓은 거야. 영삼이는
축하 파티에 쓸 맥주상자나 챙겨놓고 늘어지게 자는 사이에 말이야. 영삼이 편인 자네나 보
기에는 그게 사기 같겠지만 이번에는 사기가 아니라 전략아고 열정이라구."
"그런 일이 있었어? 좋아. 그랬다 쳐도 나는 마뜩찮아. 몰래 남의 발밑이나 파고... 아마 이
철승이한테 총재 자리 준다는 약속도 거짓말이 되고 말걸. 술수야, 사기나 다름없는. 정치가
그런 식으로 되는 거 나는 싫어."
명훈이 듣기에도 억지스러울 만큼 신문을 들고 있던 중년은 모든 걸 감정적으로만 이해하
려 했다. 상대는 그에 비해 논리적이었으나 그런 투표 결과에 대해 느끼는 기분은 비슷한
듯 했다.
"실은 나도 그래. 하지만 영삼이 그 펴어신... 어이구우."
그렇게 말끝은 흐렸으나 우회적아나마 공감을 표시했다. 그들이 하는 얘기 중에는 명훈이
듣거나 읽어서 아는 것도 있고 처음 듣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게 비숫한
의미로만 전해져왔다. 자신과는 아득히 먼 세계의 일로서였다. 그때까지 엿듣게 된 것도 꼭
무슨 훙미나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귀에 들어오는 유일한 소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하지만 그 소음이 정치적인 것임을 알아차리자마자 명훈의 의식은 이내 두터운 창을 닫
고 습관처럼 된 둔감과 마비에 잠겨들었다. 그들은 그뒤로도 한동안이나 더 그 전날의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떠들었으나 그 이상 명훈의 의식을 파고든 말은 없었다. 간밤의 지나친
술 때문에 여태껏 메슥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는 그런 마비와 둔감은 자연스럽게 도왔
다. 인철이 나타난 것은 자신이 거기에 왜 왔는지조차 모를 만큼 멍해져 있을 때였다.
"형님."
귀에 익은 그 목소리에 명훈은 몽롱한 잠에서 깨어나듯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검은 혼방 바지에 갈색 체크무늬 티셔츠를 걸친 인철이 입구 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를 마지막 보았을 때보아 십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어머니가 다라오고, 다시 그 뒤에는 경
진이 명훈에게 눈길을 고정시킨 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와 경진을 알아본 명훈은 일순
그대로 일어나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다방이 지하라 입구가 유일한 출구었다. 그들을 밀
치고 달아나고 싶어도 이중 삼중으로 입구를 막아선 꼴이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바람에
명훈을 풀썩 주저앉듯 의자에 다시 앉았다. 뒤이어 인철과 경진, 어머니가 다가와 명훈을 에
워싸듯 빈자리를 채웠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지- 명훈은 한층 심하게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으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
인철의 전화를 받은 것은 전날 저녁 무렵이었다.
"형님, 접니다. 좀 뵈었으면 하는데요. 내일 시내로 나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무슨 일이냐?"
이미 얼큰해 있던 명훈이었으나 전화를 거는 인철의 목소리에 어딘가 긴장의 기색이 느껴
져 그렇게 되물었다.
"매우 중요하고 급한 일이에요.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지난달 등록금과 하숙비를 전해줄 때만 해도 어떤 몰두의 기색뿐 별다른 일이 없어 보이
던 인철이었다. 도무지 잡혀오는 게 없어 대꾸를 늦추고 있는데 인철이 넌지시 덧붙였다.
"왜, 나오시기 불편하십니까? 제가 그리로 찾아갈까요?"
인철이 알고 하는 소린지는 모르지만 그 말은 명훈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다. 왠지 인철에
게는 자신의 진창 같은 현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명훈은 전화번호조차 망설이고 망설이다
지난번에야 마지못해 일러주었던 터였다.
"찾아오긴 어딜 찾아와? 알았어, 내가 나가지. 지난번에 만났던 그 다방으로 가면 돼?"
공연히 다급해진 명훈은 그 이상은 캐묻지도 않고 그렇게 약속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명훈은 중대한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인철을 노려보았다. 인철이 움찔하면서도 물러날 기색 없는 얼굴로 그런 명훈의 눈길을 받
았다. 그때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야, 니 얼굴이 왜 글노? 꼭 죽구재비(죽을상)따. 요새도 그래 술 마이 마시냐?"
"아뇨, 그저 좀..."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얼굴을 들던 명훈은 무심코 경진의 얼굴에 눈길을 보내다 갑자기 심
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맏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경진의 두 눈 가득 괸 눈물도 그
러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눈길에 어린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한의 그늘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의 당부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하도 경진 누나의 말씀이 간절해서... 그
리고 어머님을 모셔온 것은 경진 누납니다. 제가 아니에요."
그제서야 인철이 띄엄띄엄 변명을 늘어놓았다. 명훈은 그 말에 앞 뒤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다시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경진의 눈길과 마주친 순간 그 분노는 그저 아득하기
만 한 자포자기로 변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경진이 이미 자신의 모든 걸 다 알고 있
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철씨를 나무라지 마세요. 좀더 늦어졌을지는 모르지만 전 반드시 명훈씨를 찾아갔을 거
예요. 인철씨는 다만 그 시간을 절약시켜준 것뿐이에요."
이윽고 경진이 애써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목소리가 격한 것은
어머니 쪽이었다.
"참말로 니도 어지간하다. 어예 나이 서른이 넘어가지고 에미 애간장을 이래 녹이노? 그래
그 동안 어딨었노? 뭐 한다꼬 에미 한번 딜따볼 틈이 없드노? 니 그전에 인철이 나무랬지
만 인철이보다 니가 나을 게 뭐로? 내가 언제 돈 못 벌어오믄 내 자식이 아이라 카드나?
어째 사람 염량이 그 모양이로?"
그렇게 따지는 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조금 전 정치 얘기를 주고받던 사내
들이 의자 등받이 너머로 명훈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 눈길이 명훈에게는 심심한데 좋은 구
경거리를 만났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게 그저..."
명훈이 막막한 기분으로 그렇게 변명하려는데 다시 경진이 끼여들었다.
"어머니, 안되겠어요.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해요."
오래 한 집에 살았던 며느리처럼 그렇게 어머니를 달래놓고 한동한 명훈을 빤히 쳐다보더
니 나지막하면서도 또렷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전에 먼저 약속 하나 해주실 수 있겠어요?"
"뭘?"
"이젠 비겁하게 달아나지 않겠다는 걸. 두렵다고 숨어버리지 않겠다는 걸."
"내가 언제..."
"어쨌든 약속하실 수 있어요, 없어요? 정 약속하지 못하시겠다면 여기서 모든 걸 결정지을
수밖에 없구요."
"그거야 뭐, 그러지. 까짓 거..."
다시 힐끗 뒤를 돌아보는 앞자리 사내의 눈길에 쫓기듯 명훈이 그렇게 약속했다. 그제서야
경진이 핸드백을 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라 일어나는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러고 보니
경진도 못 본 일년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어버린 듯 했다.
다방을 나온 그들이 자리를 옮겨 잡은 것은 근처의 깨끗한 한식집이었다. 점심때가 지나
서인지 빈방이 많아 그들은 두 사람분의 식사 주문만으로도 조용한 방 한 칸을 차지할 수
있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가고 그들만 남게 되자 어머니가 대뜸 말했다.
"인철이한테 니 얘기 들었다. 돈은 쪼매 보는지 몰따마는 왠지 마뜩한 돈 같잖다. 거다가 니
한테 맡기놨다가는 밑도끝도없고 죽도 밥고 될 같잖아 자(저애)하고 우리끼리 의논해 정한
게 있니라. 그 얘기 하자꼬 이래 니를 불렀다."
그런 어머니의 말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명훈은 아직 멍한 중에도 그 결정의 내용이
궁금했다.
"무슨... 일입니까?"
"니 결혼날 잡았다. 음력으로는 구월 초이래이고 양력으로는 시월 오일이다. 촉박하기는 하
다마는 이만 하믄 서울 와 사는 일가 친척들한테 청첩장 돌릴 시간은 된다. 자들 집도 좋다
카드라. 밤이 길믐 상그러운(좋지 못한) 꿈도 길다꼬, 이런 일 원래 오래 끄는 법이 아이라.
거다가 너새(사이)도 너무 오래됐다. 자가 돌내골 와서 자고 간 것만 쳐도 이기 하마 몇 년
이로? 서른을 넘긴 니 나이도 글치마는 스물일곱 드는 자 나이도 처자 나이로는 만만찮다."
"그렇지만..."
"니는 더 긴말 할 거 없다. 하마 자하고 의논한 게 많다. 니는 잔말 말고 내 하라 카는 대로
따라하믄 된다.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몰따마는 거다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마라. 인제부
터는 우리하고 같이 지내야 한다. 아이, 자가 니하고 인제부터는 꼭 같이 있을라 카드라. 두
번 다시 니를 안 띄울라(놓칠라) 카드라..."
어머니의 말은 한결같이 단정적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딘가 자신의 의사라
기보다 누구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전달하거나 통보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몸 하나 까닥 않
고 자신만을 바라모고 있는 경진이 의심스러웠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야?"
명훈이 만난 뒤 처음으로 스스로 경진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나도 돌연스런 결정들이 준
충격 때문에 그녀에게 느끼는 죄의식을 잊게 해준 것이었다.
"들으신 대루예요. 왜, 뭐 잘못된 거 있어요?"
경진이 눈 한번 깜박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명훈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갑자기 숨이
콱 막혀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결혼이란 것이..."
"그래요.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거죠.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
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명훈이 별생각 없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경진이 명훈을 매섭게 쏘아보며 되물었다.
"정말 몰라 물으세요?"
그러는 그녀의 두 눈에서는 언젠가처럼 새파란 불길이 이는 듯 했다. 이 여자가 내 현재
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언뜻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명훈을 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모
든 걸 그녀의 결정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어. 너하고는 더욱."
명훈을 억지로 오기를 일으켜 만난 뒤 처음으로 강한 어투를 썼다. 그 때 마친 시킨 음식
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명훈은 내친 김이라 더욱 거침없이 나갔다.
"어이, 여기 맥주도 두 병 가져와!"
명훈이 그렇게 술을 주문하자 경진이 차갑게 말했다.
"안돼요. 우선 술부터 줄이세요. 이봐요, 여기 맥주 필요없어요!"
그렇게 되면서 방안은 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터로 변해갔다. 경진과 어떤 묵계
가 있었는지 어머니도 인철도 말없이 그런 명훈과 경진을 바라만 보고 있은 뿐이었다.
"야, 너 뭘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데... 나 정말 결혼할 마음 없어. 특히 너하고는. 그렇게도
몰라? 그때 너희 집에 가지 않고 바로 사라진 거, 그게 바로 너와 결혼할 수 없다는 뜻이었
다구."
그녀에게는 쓰지 않던 거친 말투였다. 술이 그리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였지만 자신
의 의사가 경진에 의해 저지된 게 난감하기 그지없어 그렇게 그녀의 결정을 흔들어보려 했
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명훈의 충동질에 흔들리지 않았다.
"좀 조용히하세요. 잘한 것도 없으면서... 지금 어머님과 인철씨가 식사하고 계시잖아요?"
오래된 아내처럼 그렇게 핀잔을 주어놓고 명훈은 아예 무시한 채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
것저것 어머니와 인철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들과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담소를 나
누는 게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명훈은 까닭모를 소외감까지 느끼며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애꿎은 보리차만 비워대다가 그들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해서야
그도 전략을 바꾸었다. 경진을 무시한 채 어머니를 대화 창구로 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어머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뭘 말이로? 우리가 노량진 철길가에 세들어 사는 꼴은 니가 보고 있고- 경기도 광주대단
지강 어딘강 갔던 얘기는 인철이한테 대강 들었을 게고, 내 식모살이 나서고 옥경이 공장
간 일도 알 게고... 야 만나게 된 일 말가?"
"그 일도 그렇지만 이 뚱딴지 같은 결혼 얘기는 뭡니까?"
"야는 인철이 한테 듣고 내 일하는 집에 찾아왔대. 그래서 보이, 내 하마 돌내골서 볼 때부
터 알았다마는, 갈 데 없는 우리 사람이라. 그래고 똥딴지 같다이, 어째 니 결혼이 뚱딴지
같노? 니 나이가 적나? 저 만난게 어제 아래(그저께)라? 남은 밤잠 안 자가며 어예믄 산지
사방 흩어진 이 집 다시 세워볼꼬 궁리해 짜낸 겐데..."
"우리집 망한 거 벌써 이십 년이 지난 일입니다. 이제 갈 데까지 다 가 어머니까지 식모살
이 나선 마당에 저 하나 마음에도 없는 결혼한다고 다시 일어섭니까?"
어머니의 말이 하도 태평스러워 명훈은 울컥 짜증이 났다. 거기다가 경진에게서 느껴지는
까닭 모를 억눌림 같은 것이 짜증을 더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집이 망했다는 거는 사람이 망했다는 뜻이다. 글치만 니나 모를까, 우리는 아무도 망한 사
람이 없다. 인철이 어엿한 일류대 학생이고, 내나 옥경이 남의 밑에서 험한 일 한다꼬 해서
망했다고는 못 칸다. 새로 올 이 사람도 소학교 선생이니 망한 사람은 아이고... 그러이 니만
지자리에 돌아오믄 된다."
어머니는 무슨 속셈에선지 여전히 태평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명훈은 짜증을 넘으 화까지
났다.
"집도 절도 없는데 돌아가긴 어디로 돌아가요?"
"집이 없기는 왜 없어? 너만 돌아오믄 집은 곧 생긴다. 나도 설만 나믄 다 때리치우고 그
집에 돌아갈 게고 옥경이을 공장에서 불러들이는 것도 너어 하기에 달렸다."
그 때 경진이 끼어들었다.
"어머님, 그 얘기는 제게 맡겨주세요. 저 사람하고 정말 할 얘기가 많아요."
그러자 어머니는 잊고 있었다는 듯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맞다. 그래기로 했제. 하기는 나도 인제 들어가봐야 한다. 남의 집 사는 사람이 하루종일
나와 어예 이래 오래 천연시리 앉아 있을 수가 있겠노? 그럼 나는 드가볼란다. 인철이 니는
어옐래?"
"저도 들어가봐야 해요. 시험 준비가 있어서..."
사전에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는지 인철도 따라 일어났다. 자신을 그 곳으로 불러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명훈으로서는 이용 가능한 정보원인 그들이 한꺼번
에 일어서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험한 눈길로 인철을 따라잡으며 다시 자신도 모르게 목
소리를 높였다.
"가긴 어딜가?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이나 일러주고 가야 할 거 아냐?"
그러자 어머니가 느긋하게 둘아보며 인철을 대신해 받았다.
"야가 뭘 아노? 지사 우리가 시키는 대로 했제. 얘기는 거기 새사람한테 듣거라."
그러는 폼이 이미 경진을 며느리로 보고 하는 소리 같았다. 거기 화답하듯 경진이 상냥하
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제가 곧 다시 찾아뵐게요."
명훈은 어이가 없어 엉거주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주저앉혔다. 경진이 어머니를 마당까지
전송한 뒤 돌아왔다.
"이거 정말 무슨..."
다시 방안으로 들어서는 경진을 향해 거칠게 따지려던 명훈은 갑자기 입이 얼어붙는 느낌
으로 말을 삼켰다. 명훈 맞은편에 살풋 앉으면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경진의 눈길
때문이었다. 이어 새어나온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 남아 있는 술기운을 한꺼번에 싹 씻어내
는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있었다.
"이제부터 무엇이든 묻거나 따지려 들지 마세요. 변명하려 들지도 말고."
그리고는 상 위에 놓인 핸드백을 들며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앞장서 나가 계산을 마친 경진은 곧장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
은 명훈이었다. 이를 악무는 듯한 그녀의 당부가 무슨 깨지 못할 암시라도 된 듯 명훈은 행
선지조차 물어보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 택시에 올랐다.
"성남으로 가요."
무슨 중죄인이라도 호송하듯 명훈은 뒷자석 안쪽으로 밀어넣고 뒤따라 택시에 오른 그녀
가 짤막하게 행선지를 말했다. 아직은 성남보다는 광주대단지로 더 잘 알려진 그곳으로 왜
자신을 데려가는지 궁금했으나 이번에도 명훈은 묻지 못했다. 명훈을 아예 무시하듯 창밖으
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그녀의 찬바람 도는 옆모습 때문이었다.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차는 금세 시내를 빠져가가 제3한강교를 넘었다. 그
리고 아직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강남을 지나 천호동 쪽으로 빠졌다. 그때 명훈을 혹시
그녀가 자신을 모니카의 요정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으나 아니었다. 차는
내처 천호동을 지나 광주대단지를 향했다. 성남이 이를 때까지 거의 한 시간을 경진은 어떤
표독스러움가지 풍기면서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차가 대단지에 들어서서야
이리루요, 저리루요 하면서 가야 할 방향을 지시했다. 명훈이 보기에는 그곳 지리에 익숙한
것 같았다. 경진은 천막이나 거친 블록집으로 이루어진 중심 상가에서 서너 골목 안으로 들
어간 어떤 갈랫길 앞에 택시를 세웠다. 자동차 두 대가 엇갈리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길을
중심으로 구획지어진 주택가인 듯한데, 이제 한창 집들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더러는 천막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판잣집이나 성의껏 지은 집들이었고, 개중에는 제법 멋을 부려 지은 블
록집도 있었다. 천막들이 걷혀지고 아직 남은 공터가 제대로 된 집들로 채워지면 그런대로
아담한 서민 동네가 될 듯 싶었다.
"들어오세요."
그 중에 한 블록집으로 들어간 경진이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며 짤막하게 명령했다. 명
훈은 여전히 암시에 걸린 사람처럼 그런 그녀를 따라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경진은 대여
섯 평도 안되는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애초부터 세를 주기 위해 지은 듯한 구석방 앞으로
가더니 자물쇠를 열었다.
방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중에 낯 익은 어머니의 재봉틀과 종이를 바른 버드
나무 고리짝이 있는 걸 보고 명훈은 그게 자기들 일가와 관련 있는 방임을 알아차렸다. 그
러나 아무도 와 살지 않는 그런 방이 왜 필요한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여기가 당분간 명훈씨가 머무를 방이에요. 이쪽은 부엌이고."
먼저 방으로 들어간 경진이 방 한쪽의 미닫이를 열어보이며 말했다. 거기에는 한 평 남짓
한 좁은 부엌이 딸려 있었다. 몇 개의 취사 도구가 역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게 보였다.
모두가 새로 마련한 것들 같았다.
"이게 무슨 도깨비 장난인지 모르겠네. 그럼 날더러 여기 와 살란 말이야?"
명훈이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경진이 그 말에 문을 하얗게 흘기더니 다시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따라오세요."
방을 나온 경진은 꼼꼼히 자물회를 채운 뒤 다시 명훈을 끌고 그 집은 나왔다. 이번에 그
녀가 간 곳을 다시 한 블록쯤 안으로 들어간 골목길의 한 공터 앞이었다.
"잘 보아두세요. 여기가 우리 집터예요. 어머니가 마련해두신..."
이미 앞뒤로 집이 들어서인지 명훈에게는 실망스러울 만큼 좁은 대지였다.
"스무 평이에요. 원래 어머니가 노량진 집 세입자 자격으로 받은 분양증을 열 평 짜리였
는데, 돈은 보태 키우셨다더군요. 대지로 있어서 좁아 보이지만 잘만 지으면 당분간 우리 몇
식구가 살 집으로는 넉넉할 거예요."
명훈의 눈치를 읽었는지 경진이 서울을 떠난 후 처음으로 설명조의 말을 했다. 그러자 명
훈은 더 듣지 않아도 어머니와 경진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지만 있다고 집이 저절로 지어지는 거야?"
명훈인 돌내골에서 겨우 열 평 남지한 토담집을 얽느라고 그토록 고생했던 일을 문득 떠올
리며 이 아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하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투가 되
어 받았다.
"그리고- 집만 있다구 살아?"
"그 얘긴 돌아가서 해요."
경진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고 명훈을 다시 셋방으로 끌었다. 그때는 명훈도 경진이 오
래 함께 산 아내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은연중의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려면 시장을 봐와야겠어요."
방으로 돌아간 경진은 부엌에서 헌 장바구니 하나를 찾아들고 집은 나서며 말했다. 그러
다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불확실한 처지가 떠올랐는지 다시 차게 굳어진 얼굴로 덧붙였다.
"방안에 그대로 계세요. 만약 여기서 한 발자국만 나가면- 그 때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지만 명훈의 가슴에 와 닿은 단속의 효과는 컸다. 명훈은 다시 그 어
떤 무서운 위협을 당한 사람보다 더 충실히 그녀의 당부를 지켰다. 한참 뒤 돌아온 그녀가
부엌에서 부스럭거릴 때까지 정말로 방안에서 꼼짝 않고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필연이나 우연으로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연분이라고도 하고 운명이라고도 부르는 어떤 것. 그런데 저
아이와 나를 이렇게 맺으려 드는 것은 무엇일까- 경진이 다시 방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
면서 명훈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만큼 그녀와 자신의 결혼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게 조금씩 실감으로 다가온 것은 조촐한 저녁 식사 뒤 경진이 다시 집 얘기를 꺼내고부터
였다. 그녀는 핸드백을 뒤져 봉투 하나와 저금통장, 그리고 도장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 든 것을 어머님께서 마련하신 십만 원이에요. 원래 가지고 계시던 것에다 이번에
주인집에서 연말까지의 월급을 당겨 채우신 거예요. 그리고 그 저금통장은 제 것이에요. 이
십만 원에서 조금 모자라요. 거기서 5만 원을 우리 결혼 비용으로 제쳐놓고 나머지는 집 짓
는 데 보태 쓰세요. 잘은 모르지만 명훈씨만 노력하면 여남은 평 집은 참하기 지을 수 있을
거라더군요."
"서울에서도 한 시간은 달려와야 하는 이 허허벌판 같은 철거민 이주지에다 집 한 채만
지으면 삶이 모두 해결된다는 식이군. 여긴 멱지 않고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곳이야?"
"저 전출원 냈어요. 이곳은 취학 아동이 많이 기존의 학교 시설로는 어림도 없어요. 신설
국민학교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 생길 거고 제 전출원은 어렵잖게 받아들여진 테지요. 어머
니도 돌아오시면 예전에 하시던 바느질로 이제는 어느 정도 생활이 되실 거구요. 이곳은 벌
써 이주해온 인구만도 십만이 넘고 앞으로 또 얼마나 올지 몰라요. 많게는 육십만 이상의
대도시를 예측하는 사람도 있어요. 명훈씨도 이곳에 진득이 터를 잡고 찾아보면 무언가 할
일이 있을 어예요."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멀리도 내다보았네."
감동을 숨긴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빈정거림이 되어 흘러나왔다.
"명훈씨이-"
경진이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훈을 블러놓고 한참은 가만히 쏘아보았다. 아득히 오
래되었지만 기억에 있는 눈빛이었다. 몇 년 전인가, 그녀가 돌내골로 찾아왔을 때... 명훈은
그 옛 기억을 떠올리며 절로 움찔했다.
"이렇게 태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나- 실은 그리 태연스럽지 못해요. 아시겠어요? 나도 죽
는 것보다는 낫다는 심정으로 어렵게 결정한 거라구요."
경진이 다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명훈은 거기서 하마터면 모든 저항을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문득 자신의 참담한 전락에 생각이 미치자 아무래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분이 들
었다. 자신보다는 그녀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왜 했어?"
명훈은 억지로 짜낸 빈정거림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며 물었다.
"또, 또... 제발 그놈의 허세 좀 버리세요. 때가 되고 필요하면 정직할 줄도 아시라구요."
경진이 이제는 대들 듯 그렇게 말해놓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명훈으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는 마음속의 고통을 잠시 울음으로 가라앉히려는 듯했다. 하지
만 그때까지만 해도 명훈은 그녀가 자신이 모니카와 지낸 몇 달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명훈이 그렇게 버티자 경진이 바로 흐느낌으로 받았다.
"그럼 술집 마담의 기둥서방으로 사는 게 정직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진창을 구르다가 흐
물흐물 썩어가는 게 정직한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명훈은 문득 발 밑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그 일만은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바로 그녀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까
닭이었다. 아마도 인철에게서 들은 전화번호로 모든 걸 추적한 듯 했다.
"저도 이 말을 하지 않고 모든 게 끝나주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기어이 내 입으로 말하게
해야겠어요? 꼭 당신을 상하고 나를 상하게 해야겠어요?"
경진은 두 볼을 줄줄이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않고 명훈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미 더는 저항하기 어렵다는 걸 느끼면서도 명훈은 마지막 힘을 짜내 버텨보았다.
"그래서 우리 결혼은 안 된다는 거야. 나는 이미 네 남편 될 자격을 잃은 사람이야. 아니,
네가 알던 이명훈은 이미 죽었다구. 혼은 죽고 고기만 어찌어찌 살아남아 움직일 뿐이야. 그
고기나마 편하게 살다가 썩게 두라구."
"안 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제 더 말하지 마세요."
"여자는 신데렐라의 꿈이 아니면 평강공주의 꿈을 꾼다고 하더군. 혹시 너 나를 상대로
평강공주의 꿈을 꾸는 거 아냐? 그렇다면 제발 꿈 깨. 여긴 그 온달고 없어. 죽어서도 썩지
못한 온달의 시체가 있을 뿐이라구."
"그만 하시라니까요. 제발 그말 하세요! 때로는 위악이 위선보다 훨씬 역겹다구요."
그녀가 두 손까지 저어가며 명훈의 말을 저지하려다가 갑자기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명훈
에게로 몸을 던지며 외쳤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잖아!"
제 28장 움트는 싹
어머니가 그려준 약도대로 따라가면서 인철을 어딘가 그 동네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오류동 야산 비탈에 온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옥경의
자취방에 이르는 마지막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인철은 비로소 왜 그곳이 낯악어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한 달 전인가, 노광석과 함께 갔던 사당동 달동네 때문이었다. 동네는 달라도 힘
겹게 서울특별시에 편입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거가 가지는 공통성이 그런 느낌을 준 것임
에 틀림없었다.
옥경이가 세들어 사는 집은 뒷날 '닭장집'으로 알려진 그런 집이었다. 처음부터 세를 놓기
위해 좁은 공간에 넣을 수 있는 한 많은 방을 넣어 그런 이름을 모르는 인철에게도 닭장을
연상시켰다. 옥경의 방 앞에 가지런히 벗어둔 운동화 두 켤레가 일요일이라 옥경이 없을지
도 모른다고 은근히 걱저해온 인철을 안심시켰다.
"옥경아, 옥경이 있어?"
같이 자취하는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인철은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문 앞에서 그렇게
먼저 옥경을 불렀다. 그러나 방안에 인기척이 느껴지는데도 대꾸가 없다가 인철이 두 번 세
번 되풀이한 뒤에야 우가 웅얼거렸다.
"으, 으응. 누구야?"
"나야. 오빠다. 문 열어도 되겠니?"
"으응, 오빠? 오빠..."
그러나 그 목소리는 옥경의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아들은 인철이 물음을 바꾸었다.
"저 여기 옥경이 없어요? 이옥경이."
그러자 잡에 취한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오빠? 오빠야?"
이어 방안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기자 걷힌 옥경의 목소리가 새어나
왔다.
"오빠가 왠일이야? 잠깐 기다려."
그래놓고 함께 있는 친구들 깨우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 뒤에 문이 열렸다. 딸그락 하는
소리로 보아 안에 별도로 잠금 장치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새 이불은 개켜져 있었으나 둘의 얼굴을 아직도 단잠에서 깨어난 흔적을 다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자 인철은 가슴이 아팠다. 반가움을 못 이겨 밝게 웃고 있
어도 옥경의 얼굴에는 푸른 그늘처럼 피로가 얼룩져 있었다.
"뭐야? 말만한 처녀들이 열시가 넘도록 늦잠이나 자고..."
"어제 야근을 했어. 아침 여섯시에 교대하고 돌아왔거든."
옥경이 숨기지 않고 이유를 밝혔다. 그 말을 듣자 인철은 옥경에게보다 함께 있는 친구
때문에 뒤늦은 사과를 했다.
"그랬어? 미안하게 됐다. 내가 좀 있다가 올걸."
"아니,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야. 차라리 잘 깨워줬어."
옥경이가 그렇게 대답해놓고 그제서야 친구를 돌아보았다.
"인사해. 우리 오빠야. 내 접때 얘기했지? 우리 작은 오빠."
"안녕하세요? 옥경이하고 같이 지내고 있어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만큼이나 순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옥경이 그런 그녀를 소개했다.
"보은에서 올라온 앤데 기숙사에서 나올 때부터 함께 방을 쓰고 있어. 별명이 부처님 가
운데 토막이야."
그래놓고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너 참, 시내에서 열두시 약속이라구 하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아가씨는 얼른 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세면 기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
다. 둘이 남게 되자 인철이 먼저 말했다.
"너두 나가자. 아침도 먹어야 하고..."
"나는 새벽에 참을 먹어 생각 없어. 오빠가 먹지 않았다면 모를까."
"나는 하숙집에서 먹고 왔어."
"그럼 여기서 얘기해. 나가봐야 어디든 돈이야. 그런데- 방금 하숙집이나구 그랬어?"
"응, 그거? 형님 덕분에 몇 달 호강하고 있어."
"큰 오빠가? 그럼 큰오빠가 돌아왔어?"
거기서 인철은 잠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 명훈이 빠져 있던 상태 때문이었
다. 그러나 확실치도 않은 일로 옥경의 기분을 언짢게 하기보다는 바로 찾아온 용건으로 들
어가기로 했다.
"실은 그 때문에 왔어. 형님이 돌아오셨을 뿐만 아니라 시월 초순에 결혼하시게 됐어. 엄
마가 널 찾아오려 하시다가 아무래도 남의집살이라 몸을 빼기 나빠 내게 알리랬어."
"그래? 색싯감은? 갑자기 누구랑 결혼해?"
"너 기억나니? 전에 우리 개간할 때 돌내골에 한번 내려온 적 있는 아가씨. 경진 누나."
"그럼 오빠가 그 언니와 같이 있었던 거야? 그러면서 지금껏 우리한테 아무 연락도 안 한
거야?"
옥경의 목소리에 가볍게 원망의 어조가 실렸다. 인철이 다시 난감해 하면서도 형을 변호
했다.
"그건 아니야. 형님도 그간 고생이 않으셨던가봐. 당분간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으셨
던 것 같았는데, 경진 누나가 억지로 끌고 온 셈이야."
그래도 옥경은 선뜻 마음이 풀리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큰오빠 명훈울 워낙 아버지처럼
의지해온 터라, 그 동안 자신을 버려둔 데 대한 원망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큰오빤 어디서 뭘 하셨는데? 결혼해서 어떻게 살려구?"
"이것저것 하신 모양이야. 하지만 중요한 건 앞날이지 뭐. 지금 광주대단지에서 집을 짓고
계셔. 우리집."
"우리집?"
"그래. 전에 어머니가 사두었던 분양증 있지? 그걸루 받은 땅에다 짓는데, 방만 해도 세
개야. 경진 누나가 선생이니 그 집만 되면 당장은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야."
그 사이 세수를 마친 옥경의 동숙생이 들어와 나갈 채비를 했다. 자신이 방안에 있는 걸
거북해하는 것 같아 인철이 다시 옥경에게 말했다.
"어쨌든 우리 나가자. 아무래도 숙녀들 방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게 실례인 것 같애."
"하긴... 그렇지만 누가 오기루 되어 있는데."
"누가?"
그러자 옥경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두 알 사람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라구?"
"그래.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구- 올 때가 다돼가는데. 좋아. 그럼 잠깐
오빠는 나가서 기다려."
생각보다 옥경의 외출 채비는 오래 걸렸다. 인철이 낮은 처마 아래서 점점 뜨거워져오는
햇볕을 피하고 있는데 세수를 하고 전기 다리미를 빌리고 하며 들락날락하던 옥경을 거의
십오 분이 넘어서야 방을 나왔다. 별나게 꾸민 티는 안났지만 나름대로는 갖춰입은 차림 같
았다. 그런 옥경이 굽 낮은 구두를 신는 걸 보고 있는데 등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어..."
인철이 돌아보니 몹시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상대편도 같은 느낌인지 움찔하는 것 같았
다. 그때 옥경의 밝은 목소리가 소리쳤다.
"왔어? 지석 오빠. 안 그래도 오빠 때문에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왔어."
옥경이 방금 들어선 청년을 보고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인철을 보았다.
"오빠. 이사람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못 알아보겠어?"
그 말에 인철은 다시 그 청년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자신과 같은 또래로 보이는데 약간
각진 턱이며 반듯한 이마가 눈에 익으면서도 누군지는 얼른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인철을 먼
저 알아본 것은 오히려 그 청년쪽이었다.
"혹시, 인철 형..."
그제서야 인철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지석이, 권지석이... 옛갈릴리고아원 시절의 형제
였다. 또래도 아니고 같은 방을 쓰지도 않았는데 인철이 그를 그렇게 잘 기억할 수 있는 것
은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초여름이었던가, 하루는
옥경이 울며 인철의 교실을 찾아왔다. 짝꿍인 남학생이 괴롭혀 오빠에게 이르려고 온 것이
었다. 인철이 옥경의 교실로 달려가니 지석은 겁내지도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제자리에 버
티고 앉아 있었다. 학년이 셋이나 아래라는 것만 믿고 달려간 인철은 먼저 그의 차림을 보
고 멈칫했다. 검은 광목 팬티와 갈색 줄이 있는 시마지 천으로 성의없이 지은 러닝- 차림만
보고도 고아원 아이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때는 누구도 고아원 아이와 시비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 안에 고아원 형제들이 있어 잘못 건드렸다간 벌떼 같은 고아들의 공격을
받게 되게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인철을 흠칫하게 한 것은 그가 해놓은 짓이었다. 둘이
쑤는 책상에는 정확하게 책상을 반분하는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 선을 넘어간 옥경의 물
건은 무엇이든 예리한 칼로 선을 넘어간 만큼 잘려나가 있었다. 삼분의 일쯤 잘려나간 연필,
귀퉁이가 삼각형으로 날아간 공책, 그리고 절반쯤 잘려나간 책받침은 단면의 정확함 때문에
더욱 섬뜩했다.
"야 임마, 너 왜 이랬어?"
그래도 달려간 기세가 있어 인철이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녀석은 눈도 깜박않
고 말했다.
"이 선은 넘으믄 뭐든 똥갈랐(짤라)뿐다꼬 캤는데, 저 가스나가 남의 말을 안 듣고..."
"아냐. 변소 갔다 오는 사이에 누가 책상을 밀어 선을 넘어갔는데 쟤가 저렇게 만들어놨
어."
옥경이 울면서 경위를 설명했다. 그 말을 듣자 인철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붙이고 발길질은 했다. 2학년이면서도 녀석의 덩치는 인철만 했다. 그런데도 어찌
된 셈인지 그 녀석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거기다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홧
김에 주먹질을 하고 오기는 했지만 언제 그의 고아원 형제들이 몰려들지 몰라 인철은 그 날
오후 내내 불안했다. 그런데 그날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누구도 인철을 찾아
오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나중 인철 남매가 그 고아원으로 갔을 때 그들 주위
를 돌며 가장 은근하게 대해준 것을 녀석이었다. 세 학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나이는 인철보
다 한 살밖에 적지 않았는데도 깍듯이 형이라고 부르며 흔히 있을 수 있는 조무래기들의 텃
세를 막아주었고, 옥경에게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 역할까지 하는 눈치였다.
"너였구나. 여기 있었어?"
"같은 공장은 아니구. 2공단 합성수지 쪽이야."
옥경이 지석은 대신해 그렇게 대답했다. 지석은 반가움 때문인지 수줍음 때문인지 얼른
말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머뭇거리며 말했다.
"옥경이한테 형 이바구를 듣기는 했지마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을 또 몰랐네. 참말로
세상 살다 보이..."
"그렇구나. 밀양은 언제 떠났어?"
"인자 삼 년 쪼매 넘었는 갑네. 중학교 졸업하고 막바로 갈릴리에서 나와뿌랬으이..."
그때 다시 옥경이 끼어들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하며 얘기하는 게 어때?"
인철도 오래 바깥에 서 있은 뒤라 두말없이 옥경의 말을 따랐다. 달동네여서 그런지 한참
을 걸어 내려와도 세 사람이 들어가 앉을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앞서거니뒤서거니하
며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인철이 문득 물었다.
"너회들 무슨 약속 있었던 거 아냐?"
"응, 그거? 사실은 교회레 가는 약속이었어. 지석 오빠가 가보자는 교회가 있어서."
"교회? 너 그럼 교회 나가?"
인철이 약간 뜻밖이란 느낌으로 지석에게 물었다. 고아워 시절의 강요된 예배에 질려 원
생들이 교인으로 남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석도 왠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짜다 보이 작년부터... 그런데 왜 이상하나? 형도 옛날에는 교회깨나 끌리댕깄는 같은
데."
"갈릴리를 떠난 뒤로는 교회를 돌아본 적이 없어. 그런데 네가 다시 나가게 되었다니.."
"나도 뭐 예수를 억시기 믿는 뜻은 아이고오- 그양 의지 삼아."
그러다가 갑자기 무얼 생각했는지 눈빛을 달리해 물었다.
"형, 수원이 기억하나?"
"물론. 그런데 그 형 소식 알아?"
인철도 무슨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가 갑자기 되찾은 사람처럼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목
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하면 수원이 형은 한번 헤어지고 나서는 인철의 의식 표면이 별로
떠오른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 뒤 인철의 삶이 너무도 거칠고 고단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언뜻 보았지만 너무 황홀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빛무리처럼 수원이 형은 인철의 의식 깊은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제는 그저 길고 추었던 겨울처럼만 기억나는 갈릴리
에서의 3년 가까운 세월 동인 그가 인철에게 베푼 것은 많았다. 먼저 그는 인철을 익숙하지
도 않고 아무런 의의도 느끼지 못하는 그곳의 성가신 노역에서 빼내 책과 함께 있을 수 있
도록 해주었다. 또 생존 환경이 척박할수록 내부 규율도 강화되게 마련인 수용 시설의 특성
대로 엄격함을 넘어 가혹하기조차 했던 길릴리의 위계 질서에서도 구해주어 약간은 외롭지
만 그 폭력과 억압 때문에 그의 정신이 손상당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날
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은 그런 개인적인 호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가
몸으로 보여준 어떤 고귀함, 혹은 거룩함의 빛 같은 것이었다. 그가 백오십 명 갈릴리 형제
들에게 쏟은 사랑과 그때만 해도 곳곳에 남아 있던 문둥이촌과 거지 움막들을 제집같이 드
나들며 쏟던 기이한 열정은 아직 어린 인철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거기다가 식사는 되
도록 이면 원생들과 같이하고, 아무리 추운 겨울도 겹옷을 입는 법이 없던 그의 자학에 가
까운 금욕과 절제를 떠올리면, 그에 관한 기억은 어느새 눈부신 광배를 두르는 것이었다.
"바로 오늘 만날 끼라. 소식을 아는 정도가 아이고- 실은 옥경이를 델꼬(데리고)가려 하
는 교회가 바로 수원이 형이 세운 교회라꼬. 있는 사람들이 보면 아직 교회라 칼 것도 없지
만."
인철이 알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수원이 형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지석이 그렇게 일러
주었다. 그런데 그 말이 다시 인철에게 알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수원이 형은 옛날에도 주
일학교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반사였고, 인철은 그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열렬히 기도
하는 것도 본 적이 있었으나 왠지 교회와 연관지어 기억되지 않았다. 인철에게 인상지어진
교회는 턱없이 웅장하기만 한 건물과 과장된 기도와 연보 주머니와 때로 어린 그에게까지
들키곤 하던 장로들의 싸움, 그리고 구호품 밀가루와 헌옷가지 같은 것이 뒤범벅이 되어 있
는 어떤 것이었다. 수원이 형이 그런 교회의 사람이었다니, 아니 목사가 되어 있다니- 당시
는 휴학중이었지만 그가 신학생이었던 것만 떠올려도 당연한 일이 인철에게는 낭패스러운
기분이 들 만큼 난데없었다. 그 바람에 얼른 대꾸를 못 하고 있는데 옥경이 만가움 표정으
로 한곳을 가리켰다. 나중에 케이크점이나 베이커리 따위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생과자점이
었다.
"우리 저 빵집에 가, 저기 가서 잠깐 앉아 얘기해."
"맞다. 그기 좋겠다. 내는 다방에 갈라 카믄 당최 돈이 아까바서. 차 한잔 값이믄 빵이 얼
매로."
인철 남매를 따라 생과자점으로 들어오며 지석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잠시 화제를 수원
이 형에게서 떠나게 했다. 그 틈을 타 옥경이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래, 집은 무슨 돈으로 지어? 나 아직 몇 푼 모으지 못했고, 엄마도 집 지을 만한 돈은
어림없을 텐데."
"경진 누나가 모은 돈이 좀 있는 모양이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집 짓구두 얼마간은 남겨
야 한다구 의논들 하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집 지을 돈은 되는 모양이던데."
"그래. 그건 반갑네. 서울 올라와 당한 집 없는 설움만으루두 눈물이 막 나오려고 그래.
그런데 남겨야 한다는 건 또 뭐야?"
"택지 분양 대금. 어머니가 산 것은 딱지에 붙은 권리금일 뿐이잖아. 그게 우리 땅이 되려
면 서울시에서 공고하는 분양가를 납입해야된다나."
"그건 몇 푼 되지 않을 걸루 알고 있는데. 원래가 철거밀들을 서을시가 억지로 끌어다놓
은 거 아냐? 거기서 제발 살아만 주면 고맙겠단 식으루..."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 전매 금지 공고가 났는데- 자칫하면 호된 값을 물게
될지도 몰라. 우리 분양증, 그거 어머니가 딴사람한테서 산 거잖아? 좋잖은 소문도 있고-"
그러다 보니 내막도 모르고 남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지석에게 신경이 쓰였다. 예의라기
보다는 식구도 아닌 사람에게 집안 사정을 시시콜콜히 드러내고 있는 꼴이었다. 인철이 잠
시 말을 끊고 지석을 힐끗 바라보자 그 뜻을 알아차린 지석이 말했다.
"내는 없는 심(셈) 잡고 둘이서 얘기하라꼬. 보이, 억시기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보다는 우리집이 워낙 변화가 심해서 그래. 그런데 엄마는 어쩌실
거래? 그냥 식모살이 계속하길 거래?"
옥경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인철에게는 상처처럽 느껴지는 식구들끼리의 비밀한 얘기
까지 끌어냈다. 그제서야 인철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집 다 짓고 형님 결혼할 때까지는 그대로 계실 모양이야. 그런데 너 어머니 식모살이하
는 게 무슨 큰 자랑이냐? 그렇게 동네방네 다 듣게 떠들게."
그러면서 지석을 바라보자 옥경도 인철의 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겁내거나 당
황하는 기색 없이 받았다.
"지석 오빠 때메 그래? 지석 오빤 한때 우리 식구였잖아? 갈릴리 형제. 그런데 식구끼리
못 할 얘기가 어딨어?"
"맞아, 인철이 형. 내는 신경쓰지 마라 카이. 내는 식모살이를 할 어무이도 없는 게 서글
픈 놈이라꼬."
지석이 다시 거들었다. 그러나 인철에게는 옥경이 말한 식구라는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
렸다. 갑자기 둘의 관계가 궁금해져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참 너희들은 어떻게 만났어? 같은 구로공단이라 해도 그 넓이가 얼마야? 더구나
단지까지 다르다면서?"
"응, 그래 됐어. 석 달 전인데- 근기법 공부하다 만났어."
옥경이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근기법?"
"근로기준법 말이야."
"근로기준법? 그걸 너희들이 공부해?"
인철은 벌써 짐작이 가면서도 짐짓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석이 대답했다.
"면장을 해먹어도 알아야 한다꼬- 형, 그거는 이래 된 기라. 이것도 취직이라꼬 한 몇 년
공돌이로 돌아보이 작업 환경이고 근로 시간이고 하도 개판이라 우째 한마디 해볼라 캐도
멀 알아야 하제. 그래서 전부터 쪼매쓱 모예 우선 우리 권리가 뭐고 의무가 뭔지부터 알아
볼라꼬 시작한 기 바로 근기법이라. 글치만- 아무리 알아보이 뭐 하노? 지지끔 따로 얘기를
할라 카이 통 맥을 출 수 있어야제. 공장이 달라도 필요한 때는 서로 힘을 합치믐 사용자한
데 말이라도 지대루 함 부치볼 낀데 말이라. 그래 생각다 못해 우선 이웃에 있는 공장끼리
라도 우째 이어볼라꼬 모옐 구실을 마련한 긴데, 생각도 못 한 옥경이가 거다 봉제 쪽의 대
표로 터억 안나왔나?"
그 말을 듣자 인철은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긴장이 되었다.
"뭐, 네가 봉제공장 대표라구? 이제 겨우 일 년도 안 되는 게 네가 뭘 알아?"
인철은 완연히 오라비다운 나무람을 섞어 옥경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옥경은 별로 움츠러
드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오빠, 모든 일이 다 아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 아냐. 특히 섬유나 의류쪽의 사용자 횡포
는 일 년 아니라 한 달만 일해봐도 넉넉히 알 수 있어. 오빠 같으면 아마 하루만 슬쩍 와바
도 담빡 뭐가 잘못돼고 크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잘못되긴 뭐가 잘못돼?"
인철은 역시 짐작가는 데가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 때문에 다시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데도 그렇게 억지를 써보았다. 윽경이 갑자기 달라진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 정말 몰라? 아까 우리 자는 거 안 봤어? 지금 우리 봉제공장 어떤지 알아? 재단사
고 미싱공이고 시다바리고 모두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야. 하루 여덟 시간씩 삼교
대에 두 번씩 들어가느라 낮밤 모른 지 하마 삼주일째야."
"너희 공장 아주 잘 되는 모양이구나. 더군다나 거기서는 수출품만 만든다면서. 그럼 그렇
게 수출이 많이 되는 거야?"
"지금 우리 얘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출이 아냐. 나는 지금 근로 조건을 얘기하고 있는 거
라구. 오빠 생각에는 바쁠 때는 그럴 수도 있다 싶겠지? 하루 여덟시간이면 잠은 잘 것 같
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작업장에서 작업복 입은 채로 깜박 넘어간다면 모를까. 여덟 시간
가지고는 아무리 쥐어짜도 다섯 시간 이상 잘 시간은 안 나와. 우리에게도 생활이란 게 있
잖아? 그 시간 동안에는 밥도 지어 먹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속옷이라도 빨아 입어야
해. 그 여덟 시간은 다 잘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열여섯 시간 노동으로 들어갈 정비
시간까지 포함된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게 하마 삼주일째야. 오늘같이 일요일 쉬는 것도 한
달에 한 번이 안 돼."
그 말을 듣자 인철을 가슴부터 아파왔다. 내가 대학에서 공허한 관념속을 헤매는 사이, 삶
의 현장으로 내몰린 이 아이는 그토록 가혹한 조건 속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구나- 그
런 생각에 잠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옥경이도 인철의 표정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힘드는 일이었니? 그런 일을 벌써 일 년째나 하고 있었어?"
이윽고 인철이 혼잣말을 하듯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아직 거의 반응은 사회적 의식과는
멀었다. 틀림없이 그에게도 치미는 격한 감정이 있었으나 그것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까웠
고 그것도 철저하게 자신의 내부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그럼 그만둬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 우리집도 네가 일하지 않는다고 굶어죽지는
않을 게다."
그런데 옥경의 반응을 뜻밖이었다. 금세 새파랗게 화가 난 얼굴이 되어 덤비듯 물었다.
"오빠, 정말 대학생 맞아? 이 땅의 지식인 맞느냐구?"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인철이 옥경의 갑작스런 변화를 이해 못 해 그렇게 반문했다.
"하도 분통이 터져서 그래. 그건 꼭 이 소리 같잖아? 이 기집애들, 하기 싫으면 그만둬.
느이들 아니라두 일할 사람은 많아!"
"그게 그렇게 들렸어?"
"좋아. 그럼 나는 그렇다 쳐. 하지만 오빠, 여기서 일하는 많은 아이들은 나같이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어. 아니, 아예 돌아갈 집 자체가 없는 아이들도 많아. 그들은 이보다 더한
조건이라도 여기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런 아이들이 하마 이 구로공당에만 해도 5만
이 넘어. 앞으로는 더 늘어날 거구. 정부가 말하는 공업화, 선진화가 이루어지면 몇십만 몇
백만으로 늘어날지 몰라.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해? 돌아갈 집이 없으면 살가죽을 벗기더라도
여기서 참고 일해야 해? 겨우 세 끼 밥 얻어 먹는 걸루 노예처럼 혹사당해야 해?"
물론 인철은 옥경의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옥경이 같은 아이들이 해결
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어쨌든 세 살 터울의, 보다 많이 배운
오빠였다.
"목소리 낮춰라. 남이 보면 다투는 줄 알겠다. 너 집 나가 있더니 많이 똑똑해졌구나. 하
지만 이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우선 그렇게 옥경의 입을 막아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논리를 재빨리 구성했다. 그때는 관
념적으로 읽어넘긴 영국 산업 혁명 초기의 노동 실태를 쓴 책이 떠올랐다. 노동자들에게 동
정적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보수적 자본주의 관접은 지녔던 것으로 보이는 그 저자의 견
해를 인철은 슬쩍 끌어왔다.
"어디든 산업화 초기에는 그 같은 불합리가 있었다. 영국은 훨씬 가혹했지. 물론 앞선 나
라들을 참고로 해서 그 불합리를 줄일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네 일이 아니다. 네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돼."
"그럼 나는 집에 들어가 밥이나 얻어먹고 있으라는 거야?"
"좀 더 준비를 갖춘 뒤에 다시 일터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 좋은 기술을 배우거나 공부를
더해 보다 대우가 좋은 곳에 취직하는 거 말야."
"인철 형,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때껏 말없이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석이 끼어들었다. 조심하고는 있어도 그 또한
무엇엔가 격앙되어 있었다.
"실은 나도 말이라. 처음에는 형맨치로 그래 생각했다꼬. 그래, 이래 살면서 공부나 쪼매
더해 펜대 놀리는 직장으로 옮기던가 좋은 기술 배아 월급 많이 주는 자리로 올라서믐 그마
이라꼬. 그런데 그게 아이라. 가마이 보이 여기도 무신 틀 같은 게 있어 한번 거 꼭 끼옛뿌
믄(끼어버리면) 옴쭉달싹 못 하는 기라. 내도 이 삼 년 동안 코피까지 쏟아가며 야학도 댕기
고 학원도 나가봤다꼬. 그렇지만 파이라. 하나 이 구덩이에 처박하가지고는 지가 아무리 용
을 써도 여다서 빠져나갈 재주는 없는 기라. 기술을 배운다 카지마는 이렇게 기계화된 시대
에 몸으로 배거는 기술이 아이라 세월값이고, 백명 천명 중에 하나 있는 자리라. 있다믄 대
학 가서 배우는 길뿌인데 그거는 더 꿈도 못 꾸는 일이고오- 검정고시 절반쯤 따논 거뿌이
라. 그것도 남은 과목은 쎄(혀) 빠지게 해봐도 가망 없는 걸로..."
"오빠는 아마 오빠 경험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있을거야. 그게 얼마나 드문 예외고 행
운인지도 말해줘."
옥경이 마치 지석과 손발이 잘 맞는 한 조처럼 그렇게 거들었다. 지석도 충실히 옥경의
말을 받아들였다.
"내도 형 얘기를 들었다꼬. 글치만 그거는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는 예외고 행운이라. 전
근대적 전원 문화시대나 가능했던 꿈이라꼬. 특히 우리 조선 시대맨쿠로... 그때는 아주 드물
기는 하지만 주경야독이라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믄 관리로 출세하
는 길도 있었제. 바로 상층부에 편입되는 길이라. 글치만 노동이 비바람이나 추위에 관계업
싱 이루어지고, 노동량 자체가 엄청나게 많아진 이런 세상에서는 처음부터 틀린 일이라꼬.
거다가 자본이란 게 사회를 움직이는 힘으로 요사를 부리기 시작하믄 한분 이 구딩에 빠진
놈은 마 파이라.(틀렸다, 안 된다). 이리저리 꽁꽁 올가(옭아) 놔두지를 않는다꼬. 그뿌이 아
이라. 사람이 몽지리 형맨치로 공부하기 좋은 머리로 태어난 것도 아이고- 그 중에는 책 속
에 파묻어놔도 안 되는 머리도 있다꼬. 내맨치로 천생 노동자로 늙어야 할 팔자 말이라. 그
것도 도로시(오히려) 그쪽이 훨씬 더 많을 끼라. 그런데 형같이 예외적인 경우을 들이대면
그 많은 사람을 우짜노? 옥경이 말마따나 앞으로 우리같은 도시 노동자는 점점 많아질 낀
데. 언제까지 이 모양 이 꼴로 밟히고 조뜯기미(쥐어뜯기며) 살아야 되노? 형, 참말로 이런
우리 이해 못하겠나? 이런 세상을 안 바꾸믄 사람같이 살길이 없는 우리 말이라. 벌써 괴물
같은 정체를 드러내는 이 자본을 초장부터 길들이놓지 않으믄 거기 눌리 일생을 착취당하
다 죽어야 할 노동자 말이라."
그 말에 섬뜩해진 인철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빵집 안에는 그들 외
에 손님이 없었고, 주인도 하나뿐인 점원과 함께 딴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인철을 자
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며 정색을 했다.
"지석이 너도 목소리를 좀 낮춰야겠다. 어떤 경로로, 누가 네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감옥 가기 십상인 생각이야."
"하, 참. 형도 와 그라노? 꼭 순사맨쿠로. 미안하지만 내한테는 그런 거 배아줄(가르쳐줄)
사람도 없다. 어디서 호븐차(혼자) 찾아 읽을라 캐도 그런 책은 벌씨로 씨가 말랐고... 그러
고 형도 예수꾼들이 뻘갱이 아인 거는 잘 알제? 그런데 목사인 수원이 형도 내 생각 안 나
무래드라. 오히려 잘해보라 카미 힘 닿는대로 도와줄라 카드라."
그때 옥경이 다시 끼어들었다.
"오빠, 정말 왜 그래? 오빠는 우리나라에도 근로기준법이라는 게있는지 몰라? 지금 지석
오빠가 하는 일은 더도 말고 그 근로기준법이라도 지켜달라는 거야. 대한민국 국회에서 정
한 법을 그대로 지켜달라고 요청할 뿐이라구."
그런 옥경의 말투에는 인철의 무지 혹은 의식 없음을 나무라는 투까지 있었다. 그게 묘하
게 기분을 건드려 인철은 먼저 충격을 준 수원이 형 일은 잠시 제쳐두고 옥경을 향했다.
"좋아. 지석이 네 말이 맞다 치자. 그래도 옥경이 너 내 말 잘 들어. 넌 앞으로 그런 데
나가지 마. 잊었어? 아버지 일. 네가 아무리 무관하다 해도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네
뒤에서 아버지가 끌려나올 거야. 월북한 북한 골수 빨갱이 말이야. 근로기준법이 어디까지
어떻게 규정하도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노동 운동은 사회주의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그러면 너는 꼭 알맞는 희생감이야. 일이 터지면 너는 꼼짝없이 아버지의 지령을 받은 주모
자가 되고, 너하고 함께 일한 사람들도 순수한 노동 운동이 아니라 북한과 선이 닿은 반국
가 활동 또는 이적 행위가 되고 만다구."
"오빠, 나는 그것도 못마땅해. 어머니와 큰오빠에, 이제는 작은오빠까지 왜들 이래? 내가
듣기로는 살인죄도 십오 년이 지나면 재판이 면제 된대.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 하마 얼마
야? 이십 년이 다 돼가. 그런데 우리 죄도 아닌 걸루 왜 그렇게 주눅들어 살아야 해? 나는
싫어. 그러지 않을 거야. 지레 짐작으로 움츠러들지 않을 거라구. 오빠도 이제는 좀 거기서
벗어나봐.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책임을 한없이 떠맡으려 드는
오빠가 더 문제 있는 것 같애."
"맞아. 인철이 형은 연좌제부터 맞붙어야 한다꼬. 그것도 신분 아닌 신분이 된 것 같은데,
그기 불합리하믄 그부터 깨부사야지. 언제까지 거다 맥살(멱살) 잡히 끌리댕길 기고? 남보
다 배운 기 적나? 머리가 나뿌나? 지 죄도 아인데- 내 같으믄 택도 없다."
지석이 다시 그렇게 끼어들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빈정거리는 것 같아 인철이 저도 몰래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 이것들이... 어쨌든 옥경이 너 말야. 몸은 공순이가 돼도 정신까지 공순이가 되지
는 말아. 먹는 것 가지고 천박하게 다투는 데 끼여들지 말라구."
"오빠, 그것도 이상한 말이네. 공순이가 공순이 정신을 가져야지, 그럼 공주 정신이라도
가지라는 거야? 그게 뭐야? 공주도 아닌 게 공주처럼 구는 거. 현실을 아예 무시하란 말이
네. 그래서 뭐가 된다는 거야?"
"그건 현실을 아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지향을 가진다는 뜻이야. 고개를 땅에다
처박고 있으면 먹이밖에 찾지 않게 돼.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자신을 묶어두지 말고 보다 높
은 곳을 바라봐."
"그래서 큰오빠나 언니처럼 되란 말이지. 꿈만 거창해서 몸은 한층 더 진창을 구르게 되
는.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은래. 아무리 초라해도 이 현실에서 발바닥을 떼지 않을 거야."
옥경의 말투로 보아 그런 방향의 논리화가 진행된 지 꽤 오래인 것 같았다. 그게 어떤 계
기에서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짧을 시간의 설득으로 되돌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인철
이 다시 오빠의 권위에 의지했다.
"무식한 사람의 위험은 함부로 철학을 선택하는 것이고, 또 잘못되어도 바꿀 줄 모르는
것이다.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오빠로 생각한다면 잘 들어라. 나는 네가 악을 쓰는 여공들과
한 덩어리가 돼 노동 쟁의를 하다가 경찰에 개 끌려가듯 끌려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
꼴을 보느니보다는 차라리 너를 보지 않겠다."
그때 무엇 때문인지 생각을 바꾼 지석이 조금 전의 격앙을 툴툴 털어버린 말투로 인철을
편들었다.
"맞다. 그거는 생각해보이 글타. 안직은 우리끼리 모예 책쪼가리나 돌려보는 정도지만 뭐
시든지 알믄 언젠가는 써먹게 되었는 기라.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믄 저쪽에서도 힘대로
나올 끼고, 그래 되믄 싸움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그 난판에 옥경이 니가 낑게(끼어) 있
는 거는 우째 어불리지(어울리지) 않을 것 같네."
그래놓고는 빙긋 미소까지 지으며 인철에게 말했다.
"형도 그런 걱정을 하지 마라. 내가 안있나? 그래도 한때 한지붕 아래서 오빠 동생 카미
지냈는데, 내가 우째 그걸 보고 있겠노? 그냥 재미로 알 꺼 쪼매 알아두는 거로 생각해도라.
옥경이를 더는 깊이 안 끌고 가꾸마."
그런 지석의 말에 정말로 핏줄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진정이 담겨 있었다. 옥경이도 그
쯤에서 순순히 물러났다.
"오빠, 그것까지는 걱정 마. 나 그럴 간도 없어. 오빠가 잘 알잖아? 나 겁 많은 거."
인철은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석을 보고 정색을 했다.
"나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옛날에 네가 옥경이 물건들은 칼로 자른 일 말야. 그때 정
말로 섬뜩했지. 세상을 향한 네 증오심을 보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너에게 물어본다. 혹시
네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 그건 그런 증오에서 자유로운 거냐?"
"에이, 형도... 그걸 안죽도 기억하나? 글치만 그걸 증오로 해석한 거는 잘못이라. 내가 그
때 그런 거는 옥경이가 미워서가 아이라꼬, 서울서 전학온 얼굴 핼간(해말쓱한) 가스나가 내
같은 거한테는 천사같이 비더라꼬. 우째 운좋게 내 짝지(짝꿍)가 됐지만 그때 내한테는 관심
을 표시할 길이 없드라꼬. 하다못해 고무(지우개) 동가리 하나 줄 힘만 있어도 그래는 안 했
을 끼라."
지석이 알아보게 불그레해진 얼굴로 그렇게 말해놓고 힘주어 덧붙였다.
"지금 이 일도 미움으로 시작한 거는 아이라. 앞으로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우리
는 쥐짜(쥐어자)먹는 사람이 미워서가 아이라 쥐짜예 고생하는 사람들이 마음 아파 그럴 꺼
라꼬.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 푸석한 얼굴에 비칠거리는 걸음걸이로 돌아댕기는 그 사랍들
은 못 잊어 그랠 꺼라꼬."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데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
은 책 속에서 관념적으로만 읽는 사회 현상이 우리에게도 한 실제적인 조짐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십 년 뒤에 겪게 될 우리 사회의 진통을 예감한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전혀 무력하고 그래서 무의미해 보이던 이들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움트고 있음은 충분
히 느낄 수 있었다. 인철이 수원이 형을 꼭 만나야겠다는 기분이 든 것은 그때였다. 인철은
아득한 추억 속의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기능하는 존재로서의 그를 만나고 싶었다. 갑
자기 지석의 등뒤에서 수원이 형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참, 너희들 수원이 형 교회로 간다구 하지 않았어?"
앞선 화제를 마무리하는 몇 마디가 오간 뒤에 인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지석이
힐끗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으응, 실은 예배를 함께 보고 청년부 모임에 갈라 캤는데, 예배는 하마 틀릿뿌렜네. 지금
가봤자 축도나 듣고 말 끼라. 뭐 여다서 쫌더 얘기하다 점심 먹고 가가(가서) 청년부 소조
활동에나 끼옛지(끼지) 뭐."
"청년부 소조 활동?"
"아, 그거? 말하자믄 그 교회 청년부 활동의 한 갈래라. 거다 청년부는 신앙을 중심으로
모이는 구미가 있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함께 짚어보는 구미가 있는데, 뒤에 끼는 여기가
공단 근처라 그런지 암만캐도 노동 문제가 중심이 된다꼬."
"교회에서 노동 운동을?"
진작부터 짐작은 했지만 그때의 인철에게는 너무도 연결이 안 되는 말이라 그렇게 묻지
않은 수 없었다. 지석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받았다.
"뭐 글타믄 교회가 직접 나서서 하는 것은 아이고-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게 있으믄 아
는 대로 갈캐(가르쳐)주는 정돈데, 인철이 형은 그기 뭐 이상하나? 신교는 아이지만 중남미
에서는 벌써부터 신부들이 노동 문제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카던데. 또 일본 같은 데서
는 하마 40년 전에 목사가 항만 파업을 주동하기도 하고. 그 혹독한 군국주의 시절에 말이
라. 그게 고베 항이라 카던강, 목사 이름은 가가와라 카지 암매."
"그거 모두 수원이 형이 가르쳐준 거야? 그 소조란 그런 걸 배우는 모임이구?"
"그것도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근로기준법 같은 법조문뿐만 아이라 우리 같은 무식
쟁이들이 일깅 어려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먹물들도 있고... 긍금하믄 인철
이 형도 오늘 함 가보자꼬. 하기는 나도 수원이 형 처음 만나서는 쪼매 이상하데. 뭐 이런
거 하는 목사도 있나 싶었제. 그런데 댕기보이 그게 아이라. 깊이는 모르지만 잘 해석해보믄
성경 가르침에도 어긋나지 않는 모양이라. 우리 어릴 때 생각한 거맨치로 교회가 똑 돈 많
은 장로들만 위한 거는 아는 갑더라꼬."
"그래, 오빠도 함께 가. 우선 수원이 오빠 그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미소부터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인철은 목회자의 일요일이 어떤가를 잘 알고 있었다. 유년부부터 장년부까지의 예
배 집전에다 곁들어진 여러 가지 사목 활동만으로도 숨돌릴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거기
다가 지석의 말대로 다른 교회에는 없는 활동까지 더 하고 있다면 설령 수원이 형을 만난댔
자 몇 마디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 것 같았다.
"다음에 한번 조용히 찾아가 뵙지. 오늘은 그 교회 약도나 좀 그려주고 수원이 형 만나거
든 일간 찾아뵙겠다고 말씀이나 드려줘. 아니, 그 교회 전화 있지? 그 전화번호 일러주면 내
가 말할게."
인철은 그렇게 말한 다음 옥경이를 향했다.
"집은 다음달말이면 다될 것 같애. 그때 식구들이 한번 모일 건데 너도 시간 내봐라. 어머
니한테 전화해 날을 맞추면 될 거야.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한다.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마라."
그날 지석, 옥경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헤어진 인철은 며칠 뒤 시간을 내 수원이 형을 찾
아보았다. 지석이 그려준 약도대로 찾아가보니 옥경의 자취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산 비
탈의 천막 교회였다. 미리 전화를 넣어선지 기다리고 있던 수원이 형이 반갑게 맞았다. 헤어
진 지 7년이나 되었고 그의 나이도 서른을 넘겼건만 변함없는 예전의 그 동안이었다.
"앉거라. 보자, 몰라보게 변했구나. 우리 나이로 이제 스물둘? 셋?"
튼 군용 천막 들을 이은 듯한 천막 안은 잘해야 스무 평이 넘지 않을 듯 했다. 그 한 모
틍이에 휘장을 내려 목사관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인철을 인도한 그는 거기 놓인 낡은 소파
를 권하며 그렇게 물었다.
"쓸데없이 나이만 먹어 스물셋입니다. 학교도 또래보다 2년이나 늦었고."
인철은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묻지도 않은 일까지 앞질러 고백했다.
"옥경이 편에 네 얘기 대강은 들었다. 길을 좀 돌기는 했지만 가야 할 곳에 간 것 같더구
나."
수원이 형이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감회 어린 눈길이 되어 인철을 살피며 덧붙였다.
"더구나 네 속에 갇히지 않고 건강하게 자란 걸 보니 반갑구나."
덧붙인 말에는 조금 알아듣기 어려운 데가 있어 인철이 대꾸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층 더 짙은 감회를 드러내는 어조로 물었다.
"나를 만난 첫 날을 기억하니?"
"옛날, 갈릴리에 들어가기 전... 주일학교 반사로서가 아니었습니까?"
"그것말고 내 정신이 한 특이한 개성으로 널 처음으로 감지하게 된 때 말이다."
"글쎄요..."
실은 인철도 가끔씩 그게 궁금했었다. 갈릴리에서 머물렀던 3년 내내 그가 베푼 아무 조
건 없는, 그러나 유별난 호의의 원인이.
"너희 남매가 우리 갈릴리 식구가 된 첫해 겨울이었을 거다. 너도 기억하겠지만 너희들의
방은 밤에만 불을 때기 때문에 낮에는 추워 아무도 있으려 하지 않았다. 모두 추위를 잊을
놀이를 하거나 양지 쪽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아니면 좀더 따뜻한 원내 예배실에서 모여 오
글거렸지.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너희들의 방을 돌아보고 있는데, 열여섯 개의 방
에 아무도 없고 딱 한곳 너희 바들로매실에 네가 있더구나. 찬 시멘트 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몸을 덜덜 떨면서도 내가 들여다보도 있는 줄도 모를 만큼 너
는 책에 빠져 있었다. 나는 처음에도 어쩌다 재미있는 책을 구해 그러고 있는 줄 알았다. 그
런데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인철은 으스스한 기분으로 보낸 갈릴리에서의 첫 겨울을 떠올렸다. 그 때 말입
니다. 세상은 내게 칼날의 숲처럼 느껴졌습니다. 조심해 지나치려 해도 어딘가 베어 상처입
고 마는. 고아원 밖을 나서면 멸시나 동정의 눈길에 영혼이 베었고, 안에서는 비뚤어진 형들
이나 총무 선생님의 원인 모를 미음과 폭력이 내 몸을 통해 또 영혼을 베었습니다. 그 방-
그 추위 속에 숨어 있는 게 가장 적게 상처입는 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책은 한 핑계구요...
"나는 처음 자폐를 의심했다. 이 가엾은 영혼을 깜깜한 자신의 감옥에 갇히게 해서는 안
된다.- 문득 그런 기분이 들어 그 다음부터는 너를 유심히 보게 되었지."
"사시르 형님이 아니셨으면 저는 그곳에서 그리 오래 배겨나지 못했을겁니다."
"그런데 좀더 가까이서 너를 보며 느낀 것은 타고난 상처 같은 것이었다. 너는 무엇 때문
인지 어린 나이에 벌써 깊이 상처받고 있었다. 내가 너무 감상적으로 얘기했나?"
"그것도 어쩌면 정확히 보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아원에 수용되면서 내 유년의 낙
원은 모두 상처가 되었습니다."
인철도 절로 감상적이 되어 대답했다. 하지만 그래놓고 보니 다시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얼른 평상의 말투로 바꾸었다.
"그런데 형님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도 네가 떠난 이듬해에 갈릴리를 떠나 신학교로 돌아갔지. 그리고 졸업 후 전도사로
한 몇 년 떠돌다가- 재작년에야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았다."
"형님 같으면 보다 좋은 교회에서 사목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네게는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냐?"
그런 그의 반문에 인철은 문득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제가 너무 속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실은 형님께 신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던 겁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생각나는 거지만 그때 형님이 우리 갈릴리에 돌아와 몇 년씩이나 머무
른 것은 꼭 신병때문만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방황하고 계셨어요."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때 실은 네가 관념적으로 상정한 신과 그리스도를 일치시키지 놓
해 헤매고 있었다. 왜 신은 이런 세계를 보고만 계시는가. 정말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면
어찌하여 선악을 불문하고 우리에게 재난이 닥쳐오는가- 그런 회의가 일더구나."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열정은 잃지 않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저희들에게도 그
랬지만 문둥이촌이나 거지 움막에서도..."
"아, 그거. 회의는 해도 지울 수 없는 그리스도의 한 신성만은 믿고 있었기 때문이지. 바
로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그럼 지금은 일치시키셨습니까?"
"일치시켜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 왜 선, 악을 불문하고 인간에게 재난이 닥쳐오는 것입니까? 왜 신께서는 이 부조리
한 세상을 한없이 방관하고만 계십니까?"
"네가 아직도 하느님과 교회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더니 정말이구나. 하지만 하느님께서
는 잠시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다. 다만 우리를 믿고 모든 것을 우리 손에 부치셨
을 뿐이다."
"하지만 그 바람에 세상은 더욱 참혹해지는데도?"
"오랜만에 만나 우리가 이상한 얘기를 하고 있구나. 너 도대체 무얼 묻고 싶은 거냐?"
"공원들에게 근로기준법은 가르치시는 것도 그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섭니까?"
인철도 약간 멋쩍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내친김이라 바로 물었다. 그가 표정없는 얼굴
로 받았다.
"그건 바로 본 것 같다. 나는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정당하게 줄 건
주고 받는 것도 인간을 통해 그러내시는 하느님의 신성이다."
그는 그래놓고 갑자기 손님을 맞는 주인의 예절은 갖추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교회라 차도 한잔 내지 못한다. 이걸로 목이나 축여라."
그가 무슨 소중한 물건이나 건네듯 내미는 것은 드링크 한 병이었다. 가난한 신도들이 낱
병으로 사온 걸 서랍 속에 갈무리해둔 것인 듯했다. 이어 한동안 두 사람의 얘기는 오랜만
에 만난 사람들의 통상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찾아와 다른 약속을 상
기시키자 갑자기 실무적인 어조가 되어 말했다.
"실은 네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반가웠다. 내가 대강 들은 너희 형편으로는 네 공부하기
도 힘든 줄 안다만 나를 위해 시간 좀 내줄 수 없겠니?"
"제가요? 신자도 아닌 절 어디 쓰시려구요?"
"여기서 네가 할 일은 많다. 네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자 인철을 갑자기 난처해졌다. 그는 그 무렵 자신의 무게에 조금
씩 지쳐가고 있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모처럼의 부탁인데... 하지만 지금 저는 저 자신을 지고 가는 일만도
힘에 부칩니다. 남을 거둘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가 한동안 찬찬히 살피는 눈으로 인철을 보았다. 그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가
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기는 몹시 피로해 뵈는구나. 그렇지만 때로는 남의 짐을 지는 것이 자신의 짐을 더는
일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내키거든 언제든지 아는 찾아오너라."
그리고 헤어질 때까지 두 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시저의 칼을 빌려 세계를 석권한 이래 기독교는 여러 번 역사의 동반자를 바꾸어왔다.
황제 막센티우스를 타도하려고 일으킨 콘스탄티누스 부황제의 군기에 십자가 문양이 들어가
면서부터 한동안 교회는 황제 편이 서 있었다. 로마 제국이 해체되어 황제가 부재하던 시절
에는 '카놋사의 굴욕'에서 그 절정을 보이듯 교황이 황제의 권위를 대신하기도 했고, '아비뇽
의 유수' 뒤에는 왕들의 교회가 되었다. 세계가 봉건 영주들에 의해 분할된 시절에는 그들의
교회로 기능했으며, 귀족들이 집단으로 힘을 가진 계급을 이루고 있을 때는 어김없이 그들
과 함께였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이후 펑민들이 사회 전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그 다
양한 대두의 양태만큼이나 교회의 동반자 선택도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의
연히 왕들과 귀족들의 편에 서있고, 나머지는 나름으로 파트너를 바꾸었다. 한자 동맹이 위
세를 떨칠 때는 이른바 농민 전쟁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일부는 새로운 계
급을 형성해가는 브르주아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신, 구교의 분리는 그 혼란의 와중
에서 일어난 춘사였을는지는 모른다. 다소간의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다음 시대의 주인은
결국 부르주아가 되었고 교회도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 뒤 백 년, 교회는 새로운 동반자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번성했다. 교회는 교의에다 부르주아의 이상을 첨가하고 때로는 그 첨
병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길을 닦았다. 하지만 한 천재적 독학자가 찾아내
고 결속시킨 새로운 계급이 지난 세기말부터 그 강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음 부르주아
에 대한 그들의 도전은 어림없어 보였다. 생산 수단을 독점해 축적한 부와 그 부를 배경으
로 얻어낸 국가의 무력으로 부르주아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한동안은 성공적으
로 그들을 분쇄한 듯도 보였다. 그런데 금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폐허에서 한 이변이 일어
났다. 산업화의 기반이 미약하고 그래서 아직도 그 계급의 형성 자체가 불확실하던 곳에서
그들의 제국이 태어난 일이다. 아마도 보다 산업화된 옛 서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서처럼 정
예하고 조직화된 부르주아 계급의 부재가 원인이 된 듯도 싶지만, 어쨌든 그 뒤 그들의 성
공은 놀라웠다. 그들은 단숨에 옛 동로마 제국의 판도를 복원하고 부르주아의 세계를 반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부르주아 세계의 심장부에서도 한 유력한 계급으로 번성하였다.
부르주아들은 그들 다수의 힘과 욕구의 절박함에 밀려 여러 이름으로 굴복하고 패퇴하였다.
회개, 양보, 관용 같은 객관적 설득 장치로 자본주의의 틀은 겨우 유지되고 있지만, 그 실질
에 있어서는 두 세계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만큼 이 세기는 그들이
세기가 되었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로 교회와 그들의 제휴
는커녕 한동안은 양립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자신들이 파괴한 바알의 제
단을 성전 안에 다시 세우고 불태운 우상도 성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기독교의 생존술과,
도대체 소화불량을 모르는 제설 합일주의적 특성은 진작부터 그들과 제휴의 고리를 찾아내
었다. 원시 기독교의 공동 생활과 사유의 부인 같은 것이 그런 고리 중에 하나가 될 것이지
만, 교회가 더욱 우선해 고려한 것은 그들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명백하다면 이제는 옛 동반자와 작별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역사의 동반자를 바꾸
려는가...
뒷날 인철은 기독교의 노동 쟁의 개입에 대해 그렇게 문의한 적이 있다. 진보와 좌파의
폭력적인 논의에 시달리고 있던 때라 다분히 악의를 품은 듯 보이지만, 그게 처음부터 해방
신학을 보는 시각을 아니었다. 오히려 수원이 형을 통해 본 그 한국적 원형을 은근히 감동
적인 데마저 있었고, 실제로도 그의 출세작의 한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제 29 장 진창을 건너는 법
거실에서는 후라이보이의 다급한 코맹맹이 소리에 이어 가족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억만이와 시어머니, 시누이에다 이웃에서 텔레비젼을 보러 온 아줌마가 어울려 내는
소리였다. 웃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아버지도 그들 속에 끼어 있는 성싶었다.
"역시 잘했어..."
영희는 방바닥을 닦다 말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실이란 것도 실은 옛날의 중간
마루였다. 대여섯 평 되는 마룻바닥에 비닐 장판을 깔아 밑에서 올라오는 찬바람을 막고, 다
시 트여 있는 앞마담 쪽에 이중의 유리 미닫이를 달아 실내로 바꾸었다. 작은 십구공탄 나
로 한 대만 설치하면 겨울이 와도 그리 춥지 않은 공간이었다. 영희는 거기에 헌 소파 한
벌을 구해다 놓고 거실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식구들도 저항 없이 따라주었다. 하지만 텔레
비젼과 전화를 들여놓을 때는 적지 않은 저항이 있었다.
"어멈아, 이건 너무 과하지 않니? 우리 같은 집에 테레비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 거기다
가 비싼 전기료까지 물어야 한다며? 이웃을 들러봐라. 테레비 있는 집이 몇 집이나 된다
고..."
시아버지는 텔레비젼을 보며 그렇게 걱정했다. 흑백 텔레비젼을 국산이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조립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서민에게는 엄청난 고가였다. 거기다가 대개는 조명
용인 전기료도 부담이 되던 시절이라 노랭이로 소문난 시아버지에게는 텔레비젼의 엄청난
전기 소모가 걱정스러울 법도 했다.
"편리야 하겠지만 전화 오고 갈 일이 얼마나 있다고..."
텔레비젼을 보러 이웃 마실을 가야 하는 시어머니는 전화를 놓고 그렇게 타박을 주었다.
실제로도 그 백색 전화(개인끼리 팔고 사는 게 허용된 전화)는 시어머니가 들으면 깜짝 놀
랄 만큼 호된 값을 물고 들인 것이었다.
"아버님두 참, 허락하셨잖아요? 50만원은 집치장에 쓴다는 거. 텔레비젼은 이제 필수품이
에요. 사치품이 아니라구요. 앞으로는 신문보다 더 흔할 거예요. 그리고 어머님, 이 전화 그
리 비싼 거 아녜요. 지금은 전화 올만한 데도 걸 곳도 많지만, 두고 보세요. 집에 있으면 다
그만큼 쓰게 돼요. 우선 아가씨 편물점만 해도 그렇잖아요? 전화 거실 때마다 가게 공중전
화까지 가셔야 하잖아요?"
영희는 대강 그렇게 두 사람을 달랬으나 속셈은 따로 있었다. 텔레비젼은 거실 꾸미기와
마찬가지로 시댁 가족들은 구슬리기 위한 것이었고, 전화는 자신을 위한 장비로서였다.
광주대단지에서 일차로 손을 털고 보니 영희에게 남은 것은 5백만 원 남짓의 현금과 두
장의 분양증이었다. 분양증 두 장이 남은 것은 워낙 요지라 영희가 원하는 값을 받기 어려
운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잊은 듯 묻어두어도 좋을 것 같은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16미터
도로와 8미터 도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이어진 두 필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40평에 건물
을 지어 활용할 수도 있었다. 그 밖에 더 계산해야 할게 있다면 중간에 빠져나간 보살 마담
의 원금 백만 원과 원금을 곱으로 쳐준 혜라의 백만 원이 더 있었다. 그 중에서 광주대단지
에 자금으로 쓰인 돈은 혜라의 원금 50만 원뿐이라 결국 영희는 이미 백 50만 원의 과실을
밖으로 빼돌린 셈이었다. 거기다가 억만이 저지른 50만 원이 더 있어 결국 영희가 빼돌린
돈은 2백만 원이 넘었다. 그렇게 빼돌린 돈까지 셈한다면 영희는 그 한차례 투기에서 현금
만으로도 곱장사는 되었고, 남아 있는 분양증을 넣으면 이익의 폭은 더 컸다. 영희는 그 이
익의 분배를 놓고 한동안 고심했다. 처음 생각 같아서는 분양증을 숨기고 현금에서도 자신
의 몫을 챙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영희는 곧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 시작이다. 여기서 내 앞으로 더 빼돌려봐야 기껏 백만 원이다. 설령 분양증을 돈으
로 바꾼다 해도 그 돈만으로 혼자 무엇을 해보기에는 너무 적은 돈이다. 한걸음 늦추자. 앞
으로도 이 집의 잠재력은 내 자금으로 활용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신임이
필요하다. 내 몫은 따로 빼돌려둔 분양증만으로 충분하다. 현금으로 들어온 이익은 모두 이
집안에 돌려주자.'
영희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시아버지와의 정산에 들어갔다. 원래도 자본의 원리에 어두
운 강칠복씨였다. 거기다가 평생을 순박한 농부로 살아온 그에게 그 병리에 가까운 투기의
과일이 잘 이해될 이 없었다. 영희가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하고 대강 계산을 맞춰 보이자
강칠복씨는 겁부터 먼저 냈다.
"결국 압구정 논 판 돈 2백 60만 원이 일곱 달 만에 5백 30만 원이 되었다는 거냐? 중간
에 억만이 놈 일 한 번 저지르고, 너 그 비싼 하이야(택시)타고 사흘도리로 광주 오락가락한
비용 다 물고도……"
"그런 셈이에요."
"네가 무슨 몹쓸 짓을 할 것 같지는 않다만 이거 이래도 되는 거냐? 야바위도 아니고 깡
패 사다 딸라변 놓은 것도 아닌데 일곱 달 만에 곱장사라…… 나는 무슨 조화 속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정말 이래도 괜찬겠어?"
"걱정 마세요. 아버님. 요즘 땅장사 하룻밤에 두곱 세곱 뛰는 곳도 얼마든지 있어요. 이번
에 크게 해먹은 사람들한테 비하면 전 아직 조막손에 불과하다구요. 것도 지금 한창 배우는
중이라 겁이 많아 이 정도밖에 안 됐어요."
영희는 그래놓고 짐짓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런데 아버님, 여기서 한 50만 원 제가 쓰면 안 될까요?"
"그거야 뭐, 네가 번 돈이니까. 얼마를 쓰든……"
시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 쓰려고?"
"집치장 좀 해야겠어요. 들여놓을 것도 좀 들여놓고. 허락해주실 거죠?"
"집치장? 지금 이 집이 어때서? 갑자기 집치장은 왜?"
"사실 저 요즘 식구들한테 은근히 몰리구 있다구요. 무슨 장사 한다구 아버님하고만 쑤군
대다가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비우구……"
"그거야 억만이 그놈이 제 구실을 못 하니 그렇지. 할망구도 그래. 지가 뭘 좀 알면 왜 너
하고 나하고만 쑤군대고 말겠냐?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그게 왜? 너한테 뭐라든?"
"그건 아니지만, 뭘 하든 식구들한테도 떨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돈을
앞앞이 나눠줄 수도 없고…… 아무 말 마시고 제게 한 50만 원만 맡겨주세요. 모두 좋아하
게 집을 바꿔놓을게요. 아버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 돈으로 한 일이 부엌을 입식으로 바꾼 것과 거실을 꾸민 일이었다.
코미디 프로가 계속되는 거실에서는 연신 웃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저녁마다 좀이 쑤셔 못 견뎌하던 억만이에게도 텔레비전이 적잖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늦도록 그 앞에 앉았다가 건너와서는 영희가 챙겨준 소주 한 병에 만족하며 잠들곤 했다.
아랫목에는 백일이 가까워오는 태복이가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난산 끝에 낳은 첫아이였
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자 영희의 마음도 평온하고 아늑해졌다. 그래서 이제 그만 아이
곁에 누워버릴까 하는데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시누이의 목소리가
영희를 찾았다.
"언니, 전화 받아요."
영희가 전화를 받아보니 대망 부동산의 김상무였다. 젊은 남자의 전화란 게 왠지 시집 식
구들한테 부담이 돼 영희는 짐짓 말소리를 높였다.
"아니, 김상무가 웬일이야? 이 밤중에."
"진작에 전화 드린다는 게 늦었슴다, 누님. 그래도 절 잊지 않고 전화 번호를 주셨는데."
"응, 그거. 실은 이제야 집에 전화를 놓게 되었길래. 요새 거기는 어떻게 돼가나 하고."
"파장이죠, 뭐. 다 떠나고 오갈 데 없는 저희 같은 것들만 남아 파리 날리고 있습니다."
"그럼 정말로 신문 공고대루 되는 거야? 그 많은 사람들 다 휴지 조각 산 셈이냐구?"
영희는 남겨둔 분양증이 걱정되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김상무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서울툭별시장이 낸 공고니 그냥 헛말이 되지는 않겠죠. 하지만 돈 주고 산 게 휴
지 조각이야 되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이젠 정말 여기 발 끊으신 모양이죠. 어째 한번도 안
나오십니까?"
"거긴 파장이라며? 파장에 가봐야 뭘 해?"
영희는 전화가 길어지는 게 눈치가 보여 억만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억만은 새로 시작된
연속극에 정신이 팔려 있고 오히려 전화를 건네준 시누이가 이따금 영희 쪽을 할금거리는
눈치였다.
"파장은 막차와 달라요. 꾼은 오히려 파장에서 좋은 물건을 줍는다는 말 못들었어요."
"나는 꾼이 못 돼서 파장은 자신없어."
"실은 오늘 이상한 손님을 맏아서 그래요. 전에 일찍 손털고 간 영동 아줌마 있죠? 그 아
줌마가 다시 떴더라구요. 아직 물건을 거두지는 않았는데 여기저기 묻고 다니는 게 다시 거
둘 마음도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래?"
"다른 데 들어가지 않으셨으면 누님도 한번 나오세요. 나도 뭔가 보이기는 하는데 통 감
이 안 잡혀서..."
"내가 뭘 아는 게 있어야지. 알았어. 내 틈나면 한번 갈게."
영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성남에서 손을 씻은 게 벌써 석 달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시아버지에게 당부해 현금을 은행에 묶어두고 다시 손댈 만한 곳을 진
행중이라 땅값의 추가 상승이 예상되고는 있었으나 워낙 일차 상승이 가팔라 추가 상승폭에
자신이 없었고, 강남은 너무 광범위해 어디다 손을 대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다만 연
초에 기공식은 가진 잠실 지역이 좀 확실한 편이었는데 아파트 단지라 경험이 없어 아직 살
피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서 온 전화야?"
그래도 남편이라고 아주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던지 영희가 수화기를 놓자 억만이 화면에
서 눈을 떼며 물었다. 영희는 긴 설명이 귀찮아 반은 졸며 소파에 앉아 있는 시아버지를 향
해 말했다.
"아버님, 저 내일 성남 한번 다녀올까 해요."
"응? 성남? 거긴 또 왜?"
"제가 잘 아는 복덕방이 있는데, 거기서 절 좀 보자네요. 한번 손턴 곳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대답해놓고는 억만에게 눈짓으로 알았느냐는 말을 대신했다. 억만도 더는 캐묻지
않고 텔레비젼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튿날 영희가 성남에 도착한 것은 11시 조금 넘어서였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출발한
데다 버스를 타고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대망부동산으로 가는 동안
영희는 면한 겨리의 모습에 섬뜩한 기분까지 들었다. 거리 양편으로 줄지어 들어섰던 천막
이나 가건물 복덕방들은 태반이 사라지고 남은 것들도 안에 사람이 있나 싶을 만큼 조용하
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사이사이 들어섰던 술집이나 식당들도 마찬가지로 줄어들어 여기
가 석 달 전만 해도 그렇게 붐비던 바로 그곳인가 싶을 정도였다. 건물들이 천막이거나 가
건물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건 아니잖아? 완전히 죽은 거리야...'
영희는 속으로 은근히 실망하며 대망부동산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누님, 어서 오십쇼. 기다렸습니다."
그 많은 동생들 다 어디 갔는지 낯선 소녀 하나와 텅 빈 사무실을 지키던 김상무가 반색
을 하며 맞았다. 그만은 아직도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듯한 차림이요 표정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느라 좀 늦었어. 그런데 모두 어디 갔지?"
"누구 말예요? 아,. 걔들? 나와봤자 할 일도 없으니 모두 쉬고 있죠. 저쪽 당구장이나 다
방에 죽치고들 있을 거예요. 아주 뜬 놈들도 있고. 사장님도 요즘은 띄엄띄엄 나오세요."
"오다 보니 정말 파장이네. 아러다가 여기 개발 중도 포기되는 거 아냐?"
"그러기야 하겠어요? 하지만 걱정은 걱정입니다. 중도 포기야 않겠지만 기세란 게 있으니
까. 신도시건 뭐건 결국 사람이 몰려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몰리는 기세를 꺾어
놨으니... 어쨌든 여기 앉으세요."
김상무는 그렇게 자리를 권해놓고 멍하는 서 있는 소년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임마, 뭘 해? 손님이 오셨는데 박카스도 한 병 안 내오고."
그러자 소년이 펄쩍 놀란 표정으로 사무실 구석 캐비닛으로 달려가 박카스 한 병을 꺼내
왔다. 너덜너덜한 상표에다 먼지까지 껴 있는 병이라 영희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받
아놓고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앉은 김상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느껴진다는 거지? 내가 보기엔 영 가망 없어 보이는데."
"바로 그겁니다. 영 가망 없어 보이는 거. 하지만 어차피 이곳은 신도시로 개발되어야 할
곳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만약 서울시가 돈이 많다면 사람이 모이건 안 모이건 개발을 계속하겠죠. 그러나 가진
것 없이 개발하려면 결국 사람이 꾀게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야 자본도 몰릴 테니."
거기까지 듣자 영희도 김상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김상무가
말한 그 '감'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다시 판을 차려줄 거다 이 말이지. 사람들은 떠나게 한 그 규제를 풀어주어..."
영희가 그렇게 말하자 김상무가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았다.
"역시 누님이셔. 척하면 삼천리라니까."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어. 관리들이란 거 이상하게 생각들이 꼬이면 영 삼천포로 빠지는
수도 있다니까. 고집도 아리고 뭐랄까- 그걸 경직된 사고하고 하나..."
"하지만 여긴 그럴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거예요."
갑자기 김상무의 표정이 굳어지며 그렇게 힘주어 대꾸했다.
"그건 또 어째서 그래?"
"실은 말입니다. 어제 영동 아줌마가 무얼 묻고 다녔는지 아세요? 지금까지 전매된 딱지
가 얼마나 될까 하는 거였습니다. 나는 무심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돌
아서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꼼꼼히 그 동안 우리가 거래
한 것에다 다른 업자들은 감안해 계산해보았죠. 줄잡아 2만 장은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보다 많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2만 장밖에 안 된다 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건
그 전매가 무효가 되거나 그에 가까운 불이익을 맏는다면 2만 명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이죠. 그 2만 명도 대게는 한 집안의 대표가 실제적인 이해 관계인은 줄잡아 10만이
되죠. 그런데 과연 뒤늦은 공고문 한 장으로 그들이 가진 전매 딱지를 모두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도 내 집 마련의 절실한 염원으로, 그들로서는 거의 전재산을 들여
사들인 딱지를... 아마도 영동 아줌마가 재고 있는 게 그거 같습니다."
"하지만 김상무도 알다시피 딱지장사를 한 건 대게 외지 투기꾼들 아냐? 막말로 돈 놓고
돈 먹기 하다 막차 탄 사람들, 2만 아니라 20만인들 무슨 할말 있겠어?"
"그건 그렇잖죠. 영동 아줌마도 그랬고 누님도 그랬지만 그 사람들은 이미 서울시장 공고
이전에 거지반 빠져나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직 가지고 있다 쳐도 그래요. 여차직하면 실
수요자에게 헐값으로 내던질테고, 그리 되면 서울시가 마지막으로 상대할 사람은 실수요자
2만이 된다구요."
대답하는 폼으로 보아 김상무는 이미 여러 날 그 일로 앞뒤를 재어 본 사람 같았다. 하지
만 그래도 영희는 김상무의 논리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발상 자체가 섬뜩할 뿐이었다.
"까짓 2만... 어릴 적에 들은 말이지만 6,25때는 남로당이 백만이나 되었어도 별로 맥을 못
췄어."
영희는 문득 희미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받았다. 그게 정말 어릴 적의 기억인지
자라면서 듣게 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6,25 때 얘기고, 지금을 달라요. 무슨 빨갱이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들어가 살
집 하나 지키자고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 그거 정말 감당하기 힘들걸요. 누님은 군대에 가보
시지 않아 잘 모르시겠지만 2만, 그거 알마나 많은 건지 아세요? 2개 사단입니다, 2개 사단.
거기다가 직접적인 이해 관계인 합치면 금세 10만으로 불어날 텐데. 그거 무섭습니다."
"나는 김상무 얘기가 더 으스스한데. 어쨌든 그거 믿고 다시 들어가보잔 말이야?"
"아니죠. 그건 최악의 시나리오고... 실은 그전에 얼마든지 다른 조치가 나올 수 있다는 겁
니다. 사태를 아직 유동적으로 본다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는 전매
딱지를 다시 한번 거두어볼만도 하지 않은가, 하는 뜻이죠."
"그래도 난 그건 자신없어."
"영 누님답지 않으시네. 위험이 크면 이문도 많다는 거 몰라요? 저번에 먹은 것도 있으신
데 한번 크게 걸어보시지 않고..."
"내 돈이라면 그래볼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굴리고 있는 돈은 내 것이 아냐. 한번 실패
하면 그대로 끊겨버리고 마는 돈줄이라구. 그리고 그걸로 내 인생도 마감이야. 하기야 이런
내 속사정 김상무가 어떻게 알겠어..."
영희는 그렇게 말해놓고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그러지 말고- 바람이 다시 돌아도거든 내 꺼 남은 거 있지? 단대동코너 요지 말이야. 그
거나 좀 처분해줘."
"그건 남겨두었다 나중에 건물이라도 얹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김상무 말 듣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어. 최소 평당 5만 원은 받
으려고 했는데 3만 원이면 넘길게."
"것도 지금으로 봐서는 과한데요."
김상무는 금세 거간꾼으로 돌아가 그렇게 받아놓고 몸을 일으켜 사무실 벽에 걸린 지도
쪽으로 갔다.
"보자, 그 따이 어디드라? 지번이 얼마죠?"
영희는 외고 있지 못한 지번을 대는 대신 몸을 일으켜 김상무 가까이 다가간 뒤 지도 한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잖아? 이 코너."
"이건 이면도로와 소방도로 코너잖아요? 뭐, 별로 대단한 코너 같지도 않은데..."
"소방도가 아냐. 한쪽은 16미터고 한쪽은 8마터 도로라구. 거기다가 시청 부지하고도 멀지
않고..."
"보자... 이 근처에 뭐가 들어서드라?"
김상무는 부근 이곳저곳을 짚으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표정이 그리 신통치 못한
것으로 보아 의지가 될 만한 큰 건물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나하고 한번 가보는 게 어때? 하직 한번도 안 가봤지?"
"가보나마나죠 뭐. 이 바닥 눈감아도 훤해요."
"그래도 가보는 것과는 달라. 가보면 감이 다를 거라구."
영희가 다시 한번 그렇게 권했다. 김상무가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손가락 마디
를 두둑 꺾으며 시원스레 말했다.
"그럼 한번 가보죠. 하긴 지금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는 사무실 구석에 멀뚱거리며 서 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나 좀 나갔다 올 테니 사무실 잘 봐. 형들 중에 누구 돌아도거든 나 대신 사무실 지키라
고 잡아두고."
김상무는 아직 자가용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코로나 구형이지만 건사가 잘돼 제법 반질거
리는 차였다. 하지만 전에 있던 운전사는 내보냈는지 자신이 직접 끌고 나왔다. 차창을 통해
훑고 지나가 그런지 그곳의 경기 침체는 얼마 전 걸어들어오면서 볼 때보다 훨씬 진하게 느
껴져왔다. 군데군데 짓다 만 건물둘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고 문을 닫은 점포들이 드문 인
적과 어울려 유령의 마을을 연상케 했다.
"참 큰일났어요. 7,10조치가 부동산 경기만 잡아둔 게 아니라구요. 건축 경기까지 잡아놔
없는 사람들 밥줄까지 끊어놨다구요. 여기 건축 경기가 흥청거릴 때는 날품팔기도 수월했는
데 지금은 다시 서울로 가야 할 판이니... 그래도 분양증 지키자면 여기 주민등록뿐만 아니
라 실제로 거주까지 해야 하고, 겨울을 닥쳐오는데...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운전을 하면서 김상무가 제법 진지하게 철거민들 걱정을 했다. 어쩌면 뒷날 그의 성공에
는 그런 따뜻한 마음오 한몫을 했는지 모른다. 그와 영희의 인연이 그토록 길게 이어지게
되 데도.
"저기야, 저 코너."
차가 언덕길을 오른 지 얼마 안 돼 영희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두 알아요. 그렇지만 한바퀴 휘둘러봅시다. 뒤로 동네가 얼마나 뻗어갔는지. 동네로 보
아 다른 출구가 몇 개가 되는지..."
"건 왜?"
"동네가 찼을 때 유동 인구를 계사해보려는 거죠. 사람이 얼마나 들락거리는 길목이 될
건지 말입니다. 저기 건물을 짓는다면 값은 그게 되지 않겠습니까?"
김상무는 천천히 차를 돌아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어 건축 경기까
지 주저앉았다고는 하지만, 전매 금지 공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실수요자들 중심의 소형 건
축은 그래도 이어지고 있었다. 별로 길지 않은 골목 하나를 지나는데도 공사중인 주택이 세
군데였다.
"이리루 쭉 나가면 다시 큰 길이 나오지, 아마."
김상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거기서도 몇 군데 주택
공사가 있었다. 이미 짧아진 해를 의식해서인지 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매우 빨랐다. 영
희는 조수석에 앉아 김상무가 동네를 다 돌기를 기다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건성으로 바라보
았다. 그런데 가장 등성이가 될 성싶은 안동네를 돌아나올 때였다. 무언가 강한 빛처럼 영희
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영희가 주의를 기울여 그쪽을 보니 특별날 것도 없는 주택 공
사장이었다. 겨우 판잣집이나 면할 정도의 블록집인데, 시멘트 기와로 지붕을 마무리하기 위
해 목수와 인부 몇 명이 바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인부
들 중의 하나가 힐끗 영희 쪽을 돌아보았다.
"오빠다. 오빠로구나..."
영희는 하마터면 그렇게 탄성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영희는 지그시 입술을 사려물어 터
져나오는 소리를 죽였다. 예전의 영희 같으면 그대로 차를 세우게 하고 달려나가 명훈을 얼
싸안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받아치기를 시작한 그때의 영희는 달랐다. 명훈
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얼른 고개를 돌린 그녀는 무턱대고 감정의 충동에 따르는 대신
냉정하게 앞뒤를 따져보았다.
'오빠가 왜 여기에 오게 됐을까? 그새 막노동자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일하는 것이 너무도 당당했다. 막일하는 인부 특유의 찌들리고
지친 몸짓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럼 여기 우리집을 짓고 있는 걸까?'
그렇게 보기에는 또 명훈의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곁의 인부들이나 다름없이 허름한 차
림에 방금 들고 있는 건자재도 직접 인부의 하나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게다
가 영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 밖에도 더 있었다. 돌내골에서 개간지를 경작하던
명훈이 거기에 집을 짓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상상 속에서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일이었다.
영희도 가족들이 돌내골을 떠난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뒤의 전전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거니와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도회의 뒷골목 진창에서
흐물흐물 녹아 사라져버릴 것같은 불안에 빠져들면서, 그래서 살아남기 위한 표독스런 결의
를 굳히면서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기로 한 까닭이었다.
"왜, 아는 사람입니까? 차 세울까요?"
눈치 빠른 김상무가 그러잖아도 천천히 몰던 차의 속도를 더욱 떨어뜨리며 물었다. 영희
가 줄곧 명훈에게 눈길을 주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뇨, 그냥 지나가요."
영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시 차분하게 헤아려보았다. 자신이 오빠 앞에 나타나도 좋을
때인지 아닌지를. 가슴에 뭉클하는 혈육의 정으로 봐서는 어찌 됐든 오빠를 부여안고 한바
탕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김상무의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오빠가 한 노가다로 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서로간의 고통을 더할 뿐이다. 나
는 아직 오빠를 도울 힘이 없고, 오빠는 부끄러운 삶의 현장을 내게 들킨 꼴이 된다. 오빠가
어렵게 터를 장만하고 우리집을 얽고 있는 중이라도 결과는 크게 다를 바 없다. 적어도 오
빠가 여유있게 보이지는 않고, 목표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내 결심만 흔들리게 할 것이다. 그냥 지나가자. 좋은 다음날 옛말로 돌리기로 하고...'
영희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언젠가 가족들 걱정을 하는 영희에게 혜라가 해준 말
도 한몫을 했다.
"피니 정이니 하는 것, 때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질퍽한 진창과도 같은 것이야. 진창을 가
장 마뜩하게 건너는 법은 피해가는 것이지. 길을 좀 돌더라도..."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명훈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영희는 속으로 눈물을 삼
키며 중얼거렸다.
"오빠, 미안해. 좋은 다음날 꼭 찾을게."
제30장 한 작은 종말
"너는 거짓말을 했어. 봐, 메뚜기는 한 마리도 없잖아?"
명혜가 토라진 얼굴로 빈 사이다병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말간 병 안에는 메뚜기 두어 마
리가 힘없이 비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인철을 억울했다.
"아니야. 지난 토요일은 여기서 한 됫병을 채우고도 남아 강아지풀 줄기에 메뚜기를 줄줄
이 꿰어왔다구. 너희도 그때 다 봤잖아? 그러지 말고 저쪽 논으로 가보자. 거기 가면 틀림없
이 메뚜기가 우글거릴 거야. 따라와봐."
인철은 그렇게 말하고 곁의 논으로 옮겨 누런 벼포기를 들쳐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버
린 것일까. 그렇게 많던 메뚜기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진땀이 솟을 지경이었
다. 그때 명혜가 다시 나타나 인철의 발 앞에다 빈 병을 내던지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난 이제 갈거야. 가서 다 이르고 말 거야."
"아니야, 아니라니까. 정말..."
인철이 다급해서 그렇게 소리치며 명혜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나 명혜는 아무 말 없이
인철의 손을 뿌리치고 논둑길로 달려가버렸다. 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인철을 더욱 괴롭
게 했다. 안 돼, 안 돼... 그러면서 허겁지겁 명혜를 뒤따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라기보다는 방금 본 한 토막의 영화처럼 모든 정경이 생생하게 눈
앞에 되살아났다. 무의식에 잠겨 있던 것이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있었던 일의 기억이었다.
아마도 사라호 태풍이 있었던 그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수해를 입은 셋집은 복구되지 않아
아직 명혜네 집에 더부살이할 때였는데 어느 토요일인가 인철은 다른 아이들과 선불이란 것
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늦가을이라 돌아올 때는 메
뚜기를 됫병으로 하나 가득 잡아오게 되었다. 그걸로 영남여객 아주머니에게 잔뜩 칭찬을
들은 인철은 그 다음 토요일 명혜와 병우, 그리고 옥경을 데리고 다시 선불로 갔다. 어른들
로 보면 그들이 잡아올 메뚜기보다 집 안에서 복닥거리며 소란을 떠는 아이들을 멀리 내보
내는 구실로 더 요긴했겠지만, 어쨌든 인철은 그 나들이에 주장 격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아
이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 무슨 변괴일까. 막상 선불에 가보니 벼포기만 건드려도 사방으
로 뛰고 날던 메뚜기는 어디로 갔는지 넓은 논바닥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녀도 통 보이지가
았다. 그러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몇 마리 잡아도 건드리면 툭툭 쓰러지는 이상한 메뚜기들
뿐이었다. 메뚜기떼가 그렇게 자취를 감춘 까닭은 아마도 그 주일에 있었던 된서리에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국민학교 5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철에게는 그 까닭을 설
명할 길이 없었다. 아이들 셋에게 거짓말쟁이로 몰려 곤욕을 치르면서도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좀더 먼 논으로 그들은 이끌다 깜깜해진 뒤에야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
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일이 그렇게 된 까닭을 알아차리고 얼마나 억울해했던지. 그런데 그
오래된 기억이 잡자기 꿈으로 나를 찾아왔을까... 인철은 머리맡을 더듬어 담배를 찾으며 속
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남향으로 난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이 감은 눈으로도 한낮이 다돼
감을 짐작케 했다.
아주 뒷날, 거의 중년이 될 때까지 그랬지만 명혜의 꿈을 꾼 날은 이상하게도 온몸이 나
른해지고 감정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한동안을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인철이었다. 그날도 담
배를 붙여물어 그런 기분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동안을 무슨 자우룩한 안개 속에라도 홀로
선 기분으로 꿈의 잔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담배 한 개비가 거의 다 타서야 느닷
없이 후회스런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오래 너를 잊고 있었다..."
그런 중얼거림이 실마리가 되어 의식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몸을 일으킨 인철은 새삼스런
눈길로 방안을 돌아보았다. 어제와 달라진 게 별로 없는 하숙방의 정경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개는 법 없이 펼쳐져 있는 이부자리, 읽다 던져둔 책들, 뭔가를 휘갈겨둔 노트들, 그
리고 방 한구석을 나뒹구는 막걸리 주전자와 김치 조각이 말라붙은 접시... 새벽에 취해 잠
들 때 그대로였다. 방 한구석 앉은뱅이책상 위의 탁상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부
자리를 빠져나온 인철은 파자마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수돗가에서 아무렇게나 목을 축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하숙집 아주머니가 부엌 미닫이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학생, 또 술마셨구나. 아침은 어떡할 거야?"
"좀 있다 점심 겸해거 먹죠."
인철이 그렇게 대답하고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아주머니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뒤따라
왔다.
"아무리 젊지만 몸을 그리 함부로 쓰는 거 아냐.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야지. 그리구... 술
도 학생으로는 너무 심한 거 같은데."
인철은 대꾸 없이 문을 닫았으나 아주머니의 그 같은 주의는 잠시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그래,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무언가 어디선가 헝클어진 것 같은데...'
하지만 휑한 머리에는 그 이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인철이 다시 자리에 누우려고
몸을 수그렸을 때였다. 문득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
의 얼굴이 한지를 바른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철은 엉거주춤 거울 앞에 앉으면서 별생각 없이 그 안에 비
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강한 빛을 받아 희게 빛났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니 불면과 술의
악순환에 멀겋게 뜬 피부였다. 거기에 이제 겨우 스물셋의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게 굵은 주
름들이 파여 있었는데, 그 주름들은 또 푸르스름한 그늘은 드러내고 있었다. 그 중에도 베개
를 잘못 베어 난 일시적인 주름이 특히 짙은 그늘을 드러내고 있어 보는 인철을 섬뜩하게
했다. 인철은 놀라 다시 한번 자신을 천천히 살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얼굴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한번도 용모에 자신을 가져본 적은 없지
만, 그래도 언제나 넉넉해 보이던 그 얼굴은 이제 바래고 깎이어 막 부스러져내리는 석상
같았다. 인철이 참으로 오랜만에 주관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은 바로
그 거울 속의 모습이 준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자신을 그렇게 변화시켰는가에 의
문이 미치면서 그 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몰입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게 되었다. 한
형이 '운명의 첫 키스'하고 이름한 그 합평회 이후 인철이 앞뒤 없이 빠져든 것은 문학이었
다. 그는 소설로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지만 시에 대해서도, 수필과 희곡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어쩌면 오래 분출을 갈망하던 그의 정신을 문학이란 장르 전체에 탐욕을 부리고 있
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철은 여름 동안에 여섯 편의 단편 비슷한 산문과 열다석 편의 시 비슷한 운문을 썼다.
그는 한형을 중요한 자문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이 하나씩 형체를 갖출 때마다 비평을 구했
는데, 한형은 무엇보다도 인철의 그런 생산성에 감탄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감탄은 다시 격
려가 되어 인철의 새로운 생산을 자극했다. 그런데 곧 최초의 좌절이 왔다. 인철의 글은 틀
림없이 화려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관념도 그 또래의 폭과 깊이을 훨씬 뛰어넘는 데가 있
었지만 현실감과 핍집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무언가 공소하고 낯선 것이 있어 가능성 있는
습작임을 인정할 수 있어도 현실의 문단에서 통용되고 있는 작품둘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
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철은 곧 그 원인이 자신의 문학 수업이 주로 의지한 불완전한 번역
의 세계 명작 전집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댔던 시절은 거의
가 60년대 초, 중반으로, 우리 번역 문화의 수준은 아직 보잘것없었다. 특히 해외 문학 번역
은 책임있는 외국 문학 전공자의 직역보다는 일본어판 중역을 더 흔했다는 편이 옳다. 따라
서 그것들은 텍스트로 삼은 만큼 어휘나 관념은 화려하고 거창해도 섬세한 이해나 적용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은영중에 인철의 문장에 침전된 인구어 번역 문체의
특수성도 표현에거의 핍진성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놀란 인철은 그 동안 근거없는
경멸로 소흘히 했던 한국 문학으로 덤벼들었다. 다행히도 그때는 전후 20년의 경제적 축적
을 노린 문학 전집물이 범람하던 시절이었다. 인철은 세 종류의 한국 문학 전집을 구해 그
특유의 독파력으로 맹렬히 읽어제쳤다. 석 달이 지나자 좀 억지스런 대로 국문학사에 제목
을 들은 현대소설은 대강 섭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인철의 섣부른 좌절감은 지워지
지 않았다. 오히려 그 탐독은 새로운 막막함을 불러냈은 뿐이었다. 인철이 그렇게 나이들도
록 한국 문학에 무시와도 다름없는 편견을 품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교양주의 전통의 결여
때문이었다. 좀 특이한 분류법이지만 그 이전의 인철은 문학 작품의 고전성 혹은 진지성을
주가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하였다. 대개 본문과 활자의 크기를 달리한 그 주들은 인철에게
는 문학을 통한 인문적 교양의 확대란 의미를 띠었는데 우리 문학에서는 그런 재미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기야 우리 문학 작품에 주가 없는 것은 우리끼리의 얘기에서 특별히 그
게 필요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서구 문학도 자기 나라에서 출간될 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를 달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한국 문학이 교양주의적 전통 축적에 소흘했던 것을
주가 있고 없고에서 찾을 수는 없겠지만 어찌 된 셈인지 인철은 일찍부터 그걸 한 중요한
잣대로 삼았다. 그런데 인철이 새롭게 다가가본 한국 문학은 그런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씻
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주가 달려 있지는 않지만 그걸 이해하기 위해 다른 지적 보충이 필요
한 작품을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특히 60년대에 결실을 맺은 전후 문학 작품들은 그 확인은
넘어 은근한 감탄으로까지 다가왔다. 그는 <소시민>에서 제법 세련된 교양주의를 찾아냈고,
<광장> <회색인> <원형의 전설>에서는 그릐 또 다른 문학적인 기호인 관념성까지 확인하
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 중에서도 <광장>은 그의 의식에는 아직도 벗어날 수 없는 원죄로
만 작용하는 이데올로기가 한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우쳐준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졌다. 그가 다시 아버지 찾기를 시도하게 된 것도 거기서 받은 자극 때문으
로 해석해야 한다. 마침내 아버지를 지워버리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길은 찾았다.- 그 책
의 독후감에서는 그런 구절가지 보인다. 물론 그때도 서구 문학 일변도로 연마된 그의 문학
적 감수성이 시건방을 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쭙잖은 이데올로기, 혹은 그것에 바탕한
제도나 권력에 희생된 인간상을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25시>를 들고 나와 <광장>을 의식
적으로 깎아내릴 적도 있었다. 구성과 인물의 배치에서 저쪽은 얼마나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가. 이야기의 방식은 생생하면서도 잔잔하고, 관점이나 배겨의 설정에서도 어떤 총체성을 획
득하고 있다. 그런데 이쪽은 얼마나 빈약하고 단조로운가. 평면적이고 작위적인가... 하지만
그런 폄하는 발표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유지되는 감탄과 감동의 분위기에 대한
반발이자 이제 막 출발하는 자의 치기였다. 겉보기에는 도저한 문학적 자존심으로 세상의
견해를 거역하고 있어도 인철의 진심은 그렇지가 못했다. 혼자가 되어 다시 그 책을 떠올리
면 알 수 없는 불안과 위압감에 내몰렸고, 나아가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시작된 그 위대한
전통의 축적에 가담하고 싶은 열망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자신 한 중견 작가가 되어서야 인철은 좀 객관적인 되어 왜 <광장>이 그 자신뿐만 아니
라 우리 문학사에서도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결과
는 가벼운 작품론 형태로 어떤 문학지에 실렸는데 그 서두는 대강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한국의 관념소설, 특히 6,25를 소재로 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소설의 계보를 훓어보면 우
리는 거기서 정치적 차단 장치를 가진 프리즘으로 분광된 문학사를 만나게 된다. 6,25는 헷
볕처럼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적 색상을 가진 사태였고, 문학은 거기에 포함된 여러 갈래의
색상을 분석하기 위해 들이댄 유효한 푸리즘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정치적 차단 장치가 그
분광에 개입함으로써 그 모든 색상이 다 드러나는 데는 오랜 세월에 걸친 단계적 전개가 필
요하였다. 반공이란 차단 장치가 엄격하게 작동되던 시절, 문학의 프리즘을 통과해 나온
6,25는 푸른색 계통의 색조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엇다. 50년대 초, 중반, 뒷남 반공 소설로
비하되기도 한 일군의 작품들이 바로 그러하다. <카인의 후예>에서 <깃발>까지의 전개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청색 시대'라 할 만하다. 그 다음은 4,19의 세례를 받으면서 느슨해진
차단 장치의 틈새로 붉은색이 스며나오기 시작한 시대다. 처음 그것은 푸르므이 한 대비, 혹
은 배경으로 활용되었으나 나중에넌 꽤 짙은 농도로 푸른색에 개입했다. 60년대 초반의 일
로 이 시절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광장>이다. 하지만 그 '보라 시대'는 너무 짧게 끝나버
려 이후의 전개로 볼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군사 정권의 대두와 함께 한국 이데올로기 문
학은 한동안 청색 시대로 환원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가 열리면서 다시 한 색
상이 겹겹의 차단 장치를 뚫고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유보의 노란색이었다. 판단이 유보되거
나 필요없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6.25 문학이다. 나는 그때 이런 걸 보았지만 어려서 어
느 편이 옳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식인데- 여기에는 아직도 겹겹이 막혀 있는 붉은색에 대
한 용인의 태도가 은연중에 숨겨져 있었다. <장마>는 그런 '황색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다가 정당성과 정통선의 기반이 한층 취약해진 80년대의 군사 정권 아래서
보다 강경해진 반공 이데올로기의 외양과는 달리 이변이 일어났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버스를 갑자기 우로 몰면 승객은 오히려 좌로 쏠리듯 폭발적인 사회 의식의 좌경화로, 이저
느이 정치적 차단 장치가 제어 기능을 상실하자 6,25의 마지막 색상이 마침내 쏟아져 나왔
다.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붉은 시대'의 전개로, 그 절정에는 이른바 '빨치산 문학'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단순하게 적용하면 <광장>은 우리 이데올로기 소설의 네 경향 중에
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오래 잊혀지지 않는
것은 간색의 총체성, 혹은 종합성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인철을 감동시킨 것은, 이미 말했듯, 그 작품이 바탕하고 있는 교양주의와
관념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은 곧 자기 점검의 계기로 작동돼 갑자기 자신의 인문
교양적 축적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뒷날 인철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란 표현을 즐겨
썼는데, 실은 그때 찾아낸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아, 나는 모든 책을 읽었어라...'
인철도 흥이 오르면 곧잘 그런 허풍스런 탄식을 되뇌었다. 그리고 또래들과 둘러앉은 대
폿집에서는 저항 없이 그런 탄식이 먹혀들기도 했다. 정규의 교육 과정에서 일탈함으로써
벌어들인 시간을 유용한 결과이겠지만, 절대적인 독서량으로 보면 또래들을 은근히 압도할
수도 있었다. 그랬는데- 엄밀히 되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축적된 것은 정연한
인문 교양이라기보다는 뒤죽박죽의 잡학에 가까웠고, 그나마 독학자의 편견과 독단에 뒤틀
려 있기 일쑤였다. 산주의 엉터리 도사처럼 도통한 것은 그 자신과 그에게 홀린 얼치기 제
자에게일 뿐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한번 그런 기분이 들자 그것은 점점
과장되어 마침내는 혼란으로 자라갔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읽고 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자각이 먼저 체계와 일관성을 요구했고, 이어 그 요구는 감당하기 어려운 절박감으
로 인철을 짓눌렀다.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늘어나는 데 비해 시간은
터무니없이 헤프게 건너뛰다 소스라쳐 정독으로 들어가면 금세 아득한 절망이 기다렸다. 읽
어야 할 책이 너무 많구나... 한번 그런 혼란에 빠지자 그 여름 스스로도 놀랄 만큼 샘솟던
발들은 일시에 막혀버린 듯 말라붙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말에 자신이 없어지면서 이미
읽어둔 것까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이 다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란마저도 의심스러워졌다.
'뭐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어...'
인철은 거울 속의 누렇게 뜬 얼굴과 푸릇푸릇해 뵈는 주름들을 보면서 홀로 그렇게 증얼
거렸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때 아련하게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하숙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마루방을 건너왔다.
"학생, 학생 있어? 전화 받아."
인철이 송수화기를 넘겨받고 보니 정숙이었다.
"뭘 해? 또 하숙방에서 궁상 썩이고 있어?"
그렇게 들어서 그런지 정숙은 애써 지은 듯한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봤다. 지난번 헤
어질 때를 떠올리고 멋쩍어진 인철이 더듬거리며 받았다.
"응, 실은 방금 일어났어."
"거 참, 고약한 병이네. 나두 문청(문학 청년)병 앓는 애들 여럿 봤지만 너처럼 고약하게
앓는 애는 또 첨이다. 그럼 오늘 약속도 까맣게 잊고 있었겠네."
"약속? 무슨 약속?"
인철은 얼른 기억이 안 나 그런 물음으로 자신이 잊고 있었음을 그대로 실토하고 말았다.
정숙이 나무람의 어조를 비꼼으로 바꿔 인철의 기억을 일깨웠다.
"나이도 많지 않으신 분이 벌써 건망증이 있으시군요. 오늘 친구 생일파티..."
그제셔야 인철도 퍼뜩 그날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러나 마지못해 승낙하던 때의 성가신
느낌와 함께였다.
"아, 그거? 그랬지. 하지만 정말 꼭 가야 하나?"
"네가 그러고 들어얹았으니까 더욱."
"내가 뭘 어쨌다구..."
"몰라서 물어? 학교도 안 나오구, 사람도 안 만나구... 너 무슨 자폐증이라도 걸린 거 아
냐? 하여튼 나와. 나와서 사람들하고 어울려. 너하고 썩 잘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좋은 아이
들이야. 술도 좋은 술로 실컷 마시게 해줄게."
정수그이 목소리는 사뭇 설득조였다. 지난번 만났을 때가 한층 선명하게 기억나 인철은
더 마다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런데 우리 어디서 안나기로 했지?"
"약수동 종점. 오후 네시야. 시간 어기지 마라."
정숙이 그러면서 전화를 끊었다. 인철도 전화를 끊고 나니 꼭 나쁘지도 않을 것 같은 생
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중간고사 끝난 뒤로는 거의 학교도 나가지 않았고, 한형이나 광석
은 물론, 용기네 아이들 같은 옛 친구들마저 만나지 않은 지가 보름을 넘은 듯 했다. 정숙이
말한 자폐증이라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은 정도로 자신 속에 갇혀지낸 보름이었다.
"학생, 어디 나갈 거야?"
전화 내용을 듣고 있었는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인철에게 그렇게 물었
다.
"아, 네. 아따가 세시쯤엔..."
"그럼 밥상 차려줄까? 보니, 이발도 좀 해야 될 것 같은데."
"그건 아니지만... 편한 대로 하십쇼. 뭐 어차피."
인철은 그렇게 우물거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새삼 그날의 외출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그 동한 한쪽으로 밀려나 있던 정숙의 존재가 갑자기 부풀어오르며 책에 대한 탐욕
과 실망 사이을 오락가락하던 의식이 조금씩 현실감을 되찾았다.
나흘 전인가, 정숙이 갑자기 인철의 하숙방을 찾아온 것도 그 시간 무렵이었다. 방도 치우
기 전에 들어온 정숙은 먼저 코부터 감싸쥐었다.
"뭐야? 이건 썩는 것두 아니구, 쉬는 것두 아니구... 어디 아파?"
"아니, 그냔 느긋하게 지내다 보니..."
그러자 정숙이 더는 몸 참겠다는 듯 일어나면 말했다.
"미안해. 내가 이런 일에 익숙하면 어떻게 방이라두 좀 치워줘야겠는데, 난 자신없어. 이
런 데선 우선 견디기나 힘들어. 차라리 요 앞 골목 어귀에 있는 다방에서 기다릴게. '향수'던
가. 하여튼 세수하고 빨리 그리루 나와."
인철이 다방으로 나가니 정숙은 그새 커피를 시켜 혼자 마시고 있었다. 다방 출입문을 들
어서던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네 다방이라 요란
한 실내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트로이메라이> 선율이 잔잔히 흐르는 다방 안은 커피
를 마시고 있는 그녀와 어울려 묘한 이국 정취를 풍겼다.
'참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것은 감탄이 아니라 서먹함이었다. 자신의 하숙방에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던 그
녀가 고전 음악과 커피향에는 녹아들 듯 편안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뭘 해? 앉지 않고."
인철을 발견한 정숙이 잔을 탁자에 놓으면서 고개를 까닥했다.
"뭐 내 얼굴에 묻은 거라두 있어?"
"아니, 그저..."
"그저 뭐야? 뭣 땜에 그렇게 멀거니 사람을 바라보았지?"
"멀거니가 아니고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
"뭐가 잘 어울려?"
"글세... 저 <트로이메아리>, 켜피향, 소파- 이런 것들과 네가."
그러자 정숙이 문득 정색을 하며 받았다.
"실은 나도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너를 두고 말이야."
"나를 두고?"
"응, 네가 왜 그런 하숙방하고 어울리지 않는지. 왜 네가 그런 방안을 뒹구는 게 이렇게
싫은지."
"그런 하숙방이라면?"
"김치 쪼가리가 말라붙은 양재기, 땟국 흐르는 이불, 홀랑홀랑 벗겨져 나뒹구는 옷가지며
양말짝, 그리고 그 퀴퀴한 냄새... 그게 다 너와 연관있는 것인데도 도무지 그 연관을 인정할
수 없단 말이야. 네가 그냥 시궁창에 내뎐져져 있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이미 헤어져 있을 때는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된 그녀였으나 그 말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
다. 그 사이 자라난 그녀와의 거리가 새삼 씁쓸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너는 이걸 또 돼먹잖은 서구 취향이라구 하겠지?"
"'밑바닥 출신을 역시 할 수 없어.'라는 말보다는 덜하겠지."
인철도 별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받았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에 감출 길 없는 서글픔이
떠올랐다.
"우리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아. 열흘 만에 만나서 겨우 주고받는 말이 이런 거라니.
이렇게 서로 할퀴고 있다니..."
그녀가 그래놓고 도리질이라도 치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싫어. 우리 만남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거."
"나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아."
거기서는 인철도 진심이 되어 그렇게 받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야 할지는 막막했다.
"그런데 정말 뭐야?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정숙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인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타까운 것은 인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빠져 있는 상황도 그랬지만 둘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설명할 길이 없
었다.
"일은 무슨... 책은 좀 읽고 있어."
"무슨 책이야? 무슨 책을 읽는데 그리 요란해? 학교두 안 나오구, 사람두 안 만나구."
"이것저것... 실은 나 지금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야. 사람은 그 때문에 만나기 싫은 거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책 읽는다며? 책 읽는데 왜 비참해? 요즘 뭐 쇼펜하워하고 읽는
거야?"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내게는 심각해."
"뭐가 그리 심각해? 답답해서 그러니까 알아듣게 말해줘. 나한테두 그만 것 물을 권리는
있잖아?"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자 인철도 더는 얼버무릴 수가 없었다.
"실은 말이야. 요즘 아주 막막한 기분이야. 모처럼 내가 할 말한 일을 찾아냈다고 생각했
는데 갑자기 자격 미달이란 판장을 받은 기분이거든."
"너 글쓰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그렇게 실을 정했다고 말했잖아? 그리구 실제로
여름 내내 썼구. 그런데 자격 미달이란 소린 또 뭐야? 글쓰는 데도 무슨 자격이 있어?"
정숙은 바르게 핵심을 찌른 셈이지만 거기서 인철은 다시 마음이 닫히기 시작했다. 묘한
자존심에다 그 무렵 인철이 조금씩 절망해가고 있는 그녀의 몰이해가 새삼스럽게 상기된 까
닭이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실은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하는, 합리적이
란 구실의 상식.
"있은 수도 있지.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누굴 독자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인철은 그렇게 대답해놓고 짐짓 가벼운 말투로 바꿨다.
"야, 우리 딴 얘기 하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모든 게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이해되지
는 않아."
"또 그 소리... 나는 그럴 때 네가 정말 싫더라. 갑자기 우리 사이가 천리나 몰어진 듯해."
정숙이 새침해져 그렇게 받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꾼 듯 다시 표정을 풀었다.
"맞아. 우리 그런 얘기 그만 하자. 실은 나도 이러려고 널 만나러 온 게 아닌데. 네 시에
널 만나게 되어 있으면 세시부터 행복해지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어서였는데..."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애절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
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어찌 된 셈인지 잘 어울려 보였다.
"야, 우리 사랑하는 거 맞아?"
정숙이 갑자기 인철을 빤히 쏘아보며 도전적으로 물었다. 누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인
철이 공연히 난감해져 어물거렸다.
"글세, 내가 그렇게 말한 것도 같고... 하지만 네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영 기억이 안 나
네."
"나는 그 반대룬데, 나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한 것 같아. 그런데 너에게서 그 말을 들은
기억은 없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오면서 생각했는데-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나를 말이야. 나는 문제 없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믿어왔지만 갑자기 아닌 것 같았어. 그 비슷하지만 무언가 다른 놀이를 하고 있다
는 기분, 아마도 겉보기에 비해서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내용의..."
정숙이 그래놓고 다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주는 절실한 느낌 때문일
까. 그 쓸쓸함도 그대로 인철에게 전해져왔다. 그러자 느닷없이 그녀가 애처로워지며 오랜만
에 감상적인 연애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네 말마따나 우리가 사랑을 너무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까?"
그녀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단정적으로 말했다.
"맞아. 그걸 거야. 맨날 술집이나 다방에서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정의해둔 관념에 우리
사랑을 꿰맞추려 한 거. 머릿속의 상대는 서로 휘황하기 그지 없는데, 마주보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따로 있고..."
"아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 사랑했어. 터무니없는 내 관념에 지치고 신물나서."
인철이 그렇게 받았으나 진심으로 자신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때 정숙이 발딱 몸을 일으
키며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말고 나가자. 어디 교외선이라도 타고 밖으로 나가보자. 사방 벽으로 막힌
공간말고 어디 시원한 곳엘..."
그날 인철과 정숙이 저물 무렵 해서 교외선을 타게 된 것은 그런 정숙의 즉흥적인 발상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다니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철도 그날은 마지못해 그런 그녀를
따라나섰다. 목적 없이 교외선이 오른 그들이 역시 즉흥적인 결정으로 송추에 내린 것은 저
물 무렵이었다.
"오늘은 어려운 말 하지 말고 그냥 서로를 느끼며 걸어봐."
계곡 입구에서 인철의 겨드랑이 깊숙이 팔을 찔러넣어면서 정숙이 말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숙에게는 인철을 찾아올 때부터 뭐가 불안정한 정서가 있었던 것 같다. 말과
말이 연결 없이 비약하고 행동도 돌발이 많았는데 그렇게 깊이 팔을 찔러넣은 것도 그랬다.
뿐만 아니라 계곳을 오를 때는 걸음을 과장스레 비틀거려 인철에게 전에 느낀 적 없는 묘한
자극까지 주었다.
"이걸 모디 랭귀지라고 하나. 괜찮은데, 지성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과 무관한 너를 이렇
게 느끼는 것도. 넌 아주 따뜻한 남자 같애. 손도 부드럽고..."
이제 더는 따라온 점포마 식당이 없이 이미 어둑해지는 계곡 입구에 들면서 정숙은 더욱
대담하게 말했다. 그때는 인철도 묘하게 들뜬 기분이 되어 비슷한 말투로 받았다.
"너도 괜찮은 여자네. 보들보들하고 향긋하고..."
그러자 정숙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제 뭐가 제대로 되는 건지 몰라."
그러더니 한군데 바위 뒤쪽으로 인철을 잡아당겼다.
"한번 하는 힘껏 안아주지 않을래? 키스해도 좋아."
그때는 제법 뜨거운 입김까지 느껴졌다. 인철도 분위기에 이끌려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나
키스는 언제나처럼 이마에 하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랑을 너무 관념적으로
키워온 탓일까, 아니면 '욕보는 것'에 강박관념 같은 공포를 느끼며 3,40대를 생과부로 보낸
어머니의 영향 탓일까. 아직 인철에게 몸으로 하는 사랑은 거북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정숙의 실망스러워하는 듯한 한숨 소리가 한층 인철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정숙은
여전히 자신의 열정에 취해 있는지 계속해서 돌발적인 행동을 했다.
"우리 저 집에 가서 저녁 먹자. 방이 있을 거야. 방을 얻어 둘만 들어가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편하고 맛있게 먹는 거야."
날이 저물어 더는 계곡을 오르지 못하고 되짚어 내려오는데 정숙이 한 식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호화롭게 꾸며져 있어 학생인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성싶은 한식집이었다.
정숙이 말없는 인철을 할끔 보다가 오금을 박듯 말했다.
"오늘 또 궁상맞데 비싸니 사치니 하는 소리 하면 나 화낼 거야. 엉뚱한 데 자존심을 걸
어 네가 내겠다구 나서두. 내게 맞겨줘. 오늘이 서울 아버지한테 용돈 받은 날이야."
하지만 그녀가 한 돌발 행동의 절정은 아무래도 서울로 돌아온 뒤에 있었다. 그들이 서울
역에 내린 것은 밤 10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는데 정숙이 갑자기 인철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
다.
"우리 오늘밤 들어가지 말고 같이 지낼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깨끗한 여관이 있어.
대전 아버님 어머님이 함께 상경하시면 묵으시는 곳이야."
아직도 남녀의 성관계를 '잔다'는 말로 표현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돌한 말을 듣자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달아오르는 곳은 아랫배 쪽이었다.
정확히 어디랄 것도 없이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확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고 뜨거운 불꽃이라 욕정으로까지 달아오르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돌연히 당한 기
습 같은 느낌에 까닭 모르게 가슴이 뒤틀려왔다. 이어 그것은 무슨 참지 못할 모욕이나 도
전처럼 인철의 정념을 비뚤어지게 했다.
"꽤 익숙해 뵈는구나. 여관에서 남자하고 같이 자재는 거."
인철이 별로 깊은 생각도 없이 그렇게 잣니의 불붙은 정념을 그렇게 비뚤어진 방식으로
나타냈다. 여자를 몸으로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그날 인철이 느낀 욕정은 참으로 별난 데가
있었다. 만약 유혹해온 것이 낯모를 창녀였고 그가 화대를 감당할 수 있는 처지였다면 인철
은 그대로 따라나섰을 것이다. 정숙이 화들짝 놀라며 인철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제서야
자신의 말에 담길 수 있는 그 같은 의미에 의식이 쏠린 듯 했다.
"너, 너... 사람의 말을 그렇게밖에 들을 수 없어?"
그러면서 인철을 쳐다보는 눈에 금세 눈물이 어렸다. 입술마저 꼬옥 깨무는 게 슬픔보다
는 분함 때문인 듯했다. 기로등이 반사돼 반짝이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서야 인철은 아차, 했
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뒤이어 그녀의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너 정말 나쁜 애구나. 몸만 세상 밑바닥을 헤맨 게 아니라 정신까지 함께 뒹굴었어. 어쩌
면 그렇게 사람을 모욕할 수가 있어..."
그대로 두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홰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인철이 당황해 그런 그
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허덕이며 그녀를
달랬다. 정숙이 흐느낌이 잦아든 것은 인철이 겨우 그녀를 달래 데리고 들어간 다방에서였
다. 그 동안 인철이 한 말 중에 어떤 것이 위로가 됐는지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며
운 자욱을 세심하게 지운 그녀가 다시 한번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우리 사이가 이상하게 말라 비틀어지는 것 같아 불아하고 초조해. 뭐가 다른 애들
과 다른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만나는 방식을 바꿔보자고 한 소린데. 그냥
하룻밤 네 곁에서 편안히 쉬어봤으면 했는데..."
"미안해."
"너도 사는 태도를 좀 바꿔봐. 아무도 너같이 사는 애는 없어. 뭐가 그리 심각해? 아니면
무슨 불만이 있는 거야?"
"그런 아니고- 그저 내 삶의 모든 것이 결정되기 전에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는 정도
야. 아니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다고 할까."
"그게 바로 네가 터무니없이 심각하단 증거야. 때가 되면 모든 건 절로 확실해지고 결정
도 거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라구. 미리 그렇게 주눅들 거 없잖아? 제발 부탁인
데, 우선 그놈의 냄새나는 하숙방부터 나와. 어디 여렷이 함께 있는 기숙사로 가든지, 차라
리 독서실이라두 얻든지..."
정숙이 그러다가 갑자기 꺼낸 말이 그 초대였다.
"참, 너 다음 금요일 나하고 어디 가지 않을래?"
"어딜?"
"지금 네 분위기하고 전혀 다른 곳."
"글세, 그게 어디냐니까."
"실은 친구 생일에 초대받았어. 쌍쌍 초댄데- 나하고 같이 가."
"그게 어떤 친군데?"
"고둥학고 때 봉사 활동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인데... 맞아, 저 성겸이라구 한번 만난 적
있지? 얼굴 보얗고 얌전하던 친구 말이야. 걔하고 어울리는 애들인데, 이번에 우릴 초대했
어."
"아, 그 부잣집 자식- 아니, 저희 아버지가 무슨 회사 사장이라던 그 친구?"
"맞아. 접때 너도 보았겠지만 예절바르고 교양 있는 애들이야."
이성 친구는 아직 인철에게는 익숙한 개념인 아니었다. 케케묵은 놈이 되기 싫어 이해하
는 척하고는 있어도 언제라 불쾌한 게 정숙의 남자 친구들이었다. 그 때문에 인철은 내심
그 초대를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날 밤의 분위기가 그렇게 못했다. 자신의 부주의 혹은 둔감
으로 그녀를 한 번 울린 뒤라 마지뭇해 웅하고 말았는데, 벌써 약속한 날이 닥쳐온 것이었
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세수를 하고 인철이 하숙집을 나선 것은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4
시에 약수동 버스 정류장에서 정숙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 만큼 그리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
니었으나, 인철은 한껏 늑장을 부리는 기분으로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은 어느새 낙엽 날리
는 늦가을이었다.
"오늘은 제법이네. 정시 도착이야. 복장도 단정하구."
정류장에 내리자 진작부터 와 기다리던 정숙이 환하게 웃으며 인철을 맞았다. 그러나 인
철은 어색할 것임에 분벙한 그 저녁의 모임이 걱정돼 정숙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
을 지경이었다. 일부러 골라 뽑은 듯 한결같이 알 만한 집 자식들로 이뤄진 그들 패거리의
성분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몸에 밴 느끼한 교양과 예절이 더욱 부담스
러웠다.
"팔자에도 없는 신사들을 만나자니 긴장한 모양이지."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기분이 되어 인철이 그렇게 대답했다. 정숙이 굳이 그걸 모르
는 척하고 한층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걔네들 집- 실은 여기서 꽤 멀어. 택시를 잡아타고 갈 수도 있지만, 우리 그냥 걷자."
"그럼 거기서 가장 가가운 버스 정류장이 멀어 불편해서 어떡해?"
인철이 이제는 드러내놓고 불평스런 말투로 나왔다.
"자가용이 있으면 불편할 것도 없지 뭐, 공기 맑고 전망 좋고... 요즘은 달동네만 산 위로
올라가는 게 아냐."
"그럼 산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걱정 마. 그렇다고 걷다가 다리 부러지는 일은 없을 거야."
인철이 계속 삐딱하게 받자 드디어 정숙도 새침한 얼굴이 되어 쏘아 붙였다. 그제서야 지
나쳤다는 느낌이 들어 인철도 쓸데없는 심술을 억눌렀다.
"저기야. 저기 산 위에 큰 양옥 보이지? 푸른 지붕에 차이 많고..."
한동안 말없이 언덕길을 오르던 정숙이 산중턱 한곳을 가리켰다. 초라한 판잣집 동네와
한참 떨어진 고급 주택가였는데, 그 한편이 높은 축대 위에 푸른 지붕의 커다란 저택이 눈
에 들어왔다. 최신의 공법으로 한껏 멋부려 지은 집이었다.
"저 집 저래봬도 굉장한 집이다. 원래 삼풍 재벌 큰사위 집으로 지었대. 그런데 뭐가 맞지
않아 한번 살아보지도 않고 내놓을 걸 걔네 아버지가 사들인 거야."
아무래도 인철과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종전과는 달리 사근사근해진 목소리였다.
인철도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어 부드럽데 받았다.
"걔네 아버지는 뭘 하는데?"
"일제 가전 제품 한국 총판. 요즘은 좀 그렇지만 몇 년 전만해도 대단했던가 봐. 그때 번
돈으로 큰 공장을 지었을 정도니까."
"전형적인 매판 자본이군."
다시 무엇 때문인지 기분이 뒤틀어진 인철이 그렇게 확실하지도 않은 혐의를 씌우자 정숙
이 발끈했다.
"자꾸 그러지 마. 이따가 너두 보겠지만 걔네 아버지 매너 좋은 신사야. 어디서 어디까지
를 매판으로 봐야 할지 모르지만 저만큼 되기 위해 노력도 할 만큼 한 모양이구."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그녀도 굳이 인철의 심사를 건드릴 마음이 없어보였다. 인철이 무어
라고 받기도 전에 이내 배려하는 목소리가 되어 덧붙였다.
"너 혹시 저기 가고 싶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해. 지금이라도 전화해주고 안 가면 돼."
"실은 왠지 자신이 없네. 아무래도 나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인철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한동안 말가니 인철을 바라보더니 억지스런 웃
음과 함께 달랬다.
"때로 난 토옹 알 수가 없더라. 너란 사람- 그 도도한 자존심을 어디가고 그렇게 자신없
어져? 네가 어디가 어떻게 모자라 걔네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지나친 자의식
이야. 네가 정말로 걔네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내가 널 데려가지 않아. 나도 걔네
들에게 너 때문에 무시당하기는 싫거든. 그런데- 난 지금 너를 자랑하려고 데려가는 중이란
말이야."
위로가 되지 않은 말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인철의 마음은 종내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때 이미 그날의 비극적인 결말이 어떤 예감으로 인철에게 와 닿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
다. 거의 이십 분 가까이 걸이 그 집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인철은 다시 한번 자신도 모를
위축을 경험했다. 한 길은 될 성싶은 축대 사이에 세워진 철문의 위용 때문이었다. 굵은 쇠
창살에 품위 있는 조각 주물 장식을 입혀둔 것인데, 영화에서 본 외국의 대저택 철문 그래
로였다. 정숙이 초인종을 누루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또래의 젊은 남
자 목소리였다. 정숙이 자신을 밝히자 이번에도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지잉, 하는 소리와 함
께 철문 옆의 쪽문이 열렸다. 한길 정도의 돌계단을 오르자 갑자기 시계가 트이며 꽤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서양식으로 잘 손질된 향나무를 중심으로 몇 그루 잎진 활엽수들이 늦은
가을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외래종이어서 그런지 잔디밭에는 아직 푸르름이 남아 있었다. 잔
디밭 사이에 깔린 포석으로 이어진 현관으로 쭈뼛쭈뼛 걸음을 떼어놓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와 소리쳤다.
"정숙이구나. 어서 와."
그러면서 보기에도 귀공자 같은 인철 또래의 젊은이가 나와 정숙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내
밀었다. 넥타이까지 맨 와이셔츠 위로 받쳐입은 털실 조끼 때문에 어른스럽게 보이기는 해
도 앳된 얼굴이었다. 그는 이어 인철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박승수라고 합니다. 정숙이 얘 편에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인철이라고 합니다."
인철도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와 정숙의 자연스런 악수를 보고 심사는 벌써
뒤틀어진 뒤였다. 박승수의 안내로 넓은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벽 한쪽에서 문이 열리
며 안주인인 듯한 중년 부인이 나왔다. 그 안쪽에서 무언가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음식
냄새가 풍겨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쪽이 주방인 듯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정숙이 까닥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자 안주인이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받았다.
"이게 누구야? 정숙이 학생 아냐? 요즘 어째 통 안 들르더니... 하지만 잘 왔어."
그렇게 보여서 그런지, 그런 그녀에게서는 왠지 며느리를 대하는 시어머니 같은 살가움이
느껴졌다. 그게 다시 인철의 심사를 건드렸다. 그녀가 다시 인철을 향했다.
"이 학생은 누구야? 전에 못 본 것 같은데,"
그러자 박승수가 다시 인철을 소개했다.
"손님이에요. 정숙이가 파트너로 데려왔는데, 대학 동급생이랍니다."
"그래? 잘 왔어요. 반가워요."
안주인은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환영해주었으나, 인철에게는 어딘가 경계하는 듯
한 기색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이인철입니다. 불청객이 되지나 않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껏 예절바르게 대답했지만 기분은 한층 어색하고 거북해졌다. 다행히도 안주인을 무엇
이 바쁜지 오래 그들은 잡고 있지 않았다.
"그럼 이층 승수방으오 올라가 놀아요. 상이 다 차려지면 부를게."
그렇게 말하고는 종종걸음 쳐 주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인철은 말없이 승수와 정숙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으나 느낌은 마치 두 번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 같았다. 승수의 방은
작은 거실을 낀 두 개의 방 중에 하나였다. 인철의 가늠으로는 하숙방의 네 배는 넘어보이
는 큰 방이었는데 방안은 낯익으면서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낯익다는 것은 영화나 외국 잡
지에 흔히 본 것이었기 때문이고 낯설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과 너무 먼 내용들 때문이었다.
침대, 외제 오디오 세트와 다방 음악실만큼이나 많은 레코드 판들, 원목 가구와 역기 보통
앉은뱅이책상의 네 배는 됨직한 입식 책상같은 것이 그랬다. 인철은 시비라도 거는 기분이
되어 방안을 꼼꼼히 살폈다. 부가 주는 위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을 찾은 것인데- 다
행히도 이내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인철의 하숙방에서 가
장 부피가 많고 중심이 되는 것은 책이었다. 그러나 그 방에서 책은 책상 한 모퉁이에 두
즐로 꽂혀 있는 대학 교재와 사전 몇 권이 전부였다. 숭수의 전공 서적인 듯했는데, 그 빈약
한 서가가 비로소 인철의 기분을 안정시켜주었다. 별 것 없는 졸부의 자식...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찾은 안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인철과 정숙이 방안을 둘러보는 동안 방석을 찾아
내오던 승수가 갑자기 방석을 제자리로 갖다놓으며 말했다.
"야, 우리밖에 나가 소파에 앉자. 어차피 애들이 다 오면 방은 좁은 테고 또 니네 여자애
들은 방바닥에 앉기도 거북할 테니."
그래서 바깥 작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담배를 태워도 될까를 생각하며 거실을
둘러보고 있는데 거실 양쪽 벽을 대신하고 있는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원목 가구로 잘 짜맞춘 책장인데다 유리문까지 달아 들어올 때는 그저 벽이거나 가구의 일
부거니 하고 지나쳐버린 것이었다. 드런데 이제 자세히 살펴보니 적어도 천 권은 넘어 보이
는 책이 그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그 책 중에는 졸부들이 장식용을 겨냥하
여 쏟아져나온 브리테니커나 표지에 영어 제목을 도안해둔 <역사의 연구>완역질, 그리고
금박 글씨의 이런저런 호화 전집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책장은 한권 한권
필요에 따라 사모은 것임에 분명한 단행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인철의 안목으로는 어
지간한 도서관에 못지않은 장서들이었다.
"문학을 공부하신다지요? 참 부럽습니다."
인철이 책장을 둘러보는 동안 정숙과 무언가 자지들만의 얘기를 주고 받던 승수가 갑자기
인철의 옆구리를 꾹 찌르듯 그렇게 말했다. 책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인철이 얼른 대꾸가 생
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다시 승수가 제법 어른스런 한숨까지 곁들이며 덧붙였다.
"저두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처지가 남 같잖아서... 부모님 성화로
딴 전공을 하고는 있어도 언제나 애틋한 기분은 있습니다."
"뭐 저두 결정한 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국문과에 들어갔고, 가까이 문학이 있으
니 기웃거리는 정도지요."
"그래도 그거 어디 아무나 하는 겁니까? 축복받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승수는 그렇게 말했으나 인철에게는 왠지 그게 반어적으로 들렸다. 거기다가 문학까지 다
아는 척한다는 느낌에 비위가 상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겠지요. 저도 실은 도망갈 수만 있다면 그 저주로부터 도망갈 생각입
니다."
인철이 그렇게 받자 인철의 기분을 눈치챈 정숙이 농담조로 끼여들었다.
"글쎄 얘가 이렇다니까. 거기 미쳐 벌써 몇 달째 사람도 잘 안 만나고 하숙받에만 틀어박
혀 있으면서 뭐 그 저주로부터 도망갈 생각이라고? 누가 배배꼬인 문청 아니랄까봐서."
하지만 인철에게는 그 말에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인철이 앉은 소파는 계단 쪽을 마주하
고 있었는데 방금 그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사람이 준 충격때문이었다. 간단하게 차린 다과
상을 들고 층계를 올라온 그 집 식모는 다름아닌 인철의 어머니였다. 먼빛으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친 순간 인철의 잠시 정신이 아뜩해 굳어 있었던 것처럼 어머니도 얼굴빛이 변
해 굳어버란 듯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뜻밖의 상황이 준 충격에서 먼저 깨어
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찻잔을 받쳐든 채 인철에게 눈은 깜짝였다. 그때서야 깨어난
인철은 쉽게 그 뜻을 알아차렸다.
'서로 모르는 척하자는 뜻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거기서 짧은 순간이지만 인철은 묘한 갈들에 빠졌다. 떳떳하게 어머니임을 밝힐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눈빛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버릴 것인가가 얼른 판단되지 않아서였다. 그
사이 소파 쪽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찻잔을 테이블 위로 옮기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승수에게
말했다.
"아니고, 큰 학생 친구들인 모양일세. 우선 차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소. 그래고- 사모님이
달리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 카디더."
그러자 승수는 어머니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인철에게 물었다.
"들으니 술 잘하신다던데 식사 전에 맥주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아뇨, 됐어요. "
그때까지도 갈등에서 헤어나기 못하고 있던 인철이 펄쩍 뛰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결정은 나버린 셈이었다.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떳떳하게 밝힐 기회는 사라져버
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럼 알았니더. 재미있게 노소."
어머니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어 그런 말을 남기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실로 알 수 없는 일은 어머니의 늙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인철이 느낀 느닷없는 종말감이
었다. 끝났다.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이 끝났다. 지적 허영과 탐욕도, 문학도, 그리고 정숙이와
의 사랑놀이도...
제31장 길은 다시 시작되고
"내 아들이라 카는 소리가 아이라, 인물 하나사 어디 내놓은들 빠질로? 그런데 참 알 수
없제. 저 인물에 복은 왜 그런동..."
결혼 예복으로 쓸 양복으로 갈아입자 어머니가 부신 듯한 눈으로 명훈을 쳐다보며 말했
다. 옥경이도 옆에서 거들었다.
"옛날부터 신성일보다 낫단 소리 들은 인물 아녜요? 하긴 새언닌 오빠 얼굴만 가지구두
속았단 말은 못할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가 금세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여자 속골병이들이는 게 사나 인물만 번지르르한 거라. 명훈이 니 참말로 정신차리거래
이. 인자 더는 시대가 어떻고, 팔자가 어떻고 해싸미 함부로 처신 마라. 너어 아부지같이 기
집 자슥 다 잊아뿌고 지 생각만 하는 사람 되지 마란 말이따. 새사람이 야무이(야무지니) 한
번 믿어는 본다마는 결국은 모든 게 가장인 니 할 노릇이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해놓고 옥경에게 물었다.
"시계 몇 시로? 시간 다 안 됐나?"
"아직 한 시간 남았어요. 예식장이 여기서 가까우니까 지금 나가면 되 거예요."
옥경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인철이는 잘하고 있는동 몰따. 그게 아가 물렁해서... 자, 그래믄 나가자."
어머니는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철은 예식장 사람들 상대와 부조
기를 맡아 미리 나가 있었다.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날은 아침부터 은근히 들
떠가던 명훈도 그런 어머니의 표정에 잊고 있었던 인철의 일을 떠올렸다. 일요일도 공휴일
도 아닌데 인철이 느닷없이 성남아로 명훈을 보러 온 것은 지난 주였다.
"형님, 하숙은 우리 처지에 아무래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이제 방도 생겼으니 여기서 통
학을 하죠. 곧 기말고사만 치면 방학도 되고."
인철은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으나 명훈에게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어 보였
다. 인철의 말대로 그곳에서 통학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버스만 제때 만나면 두
시간 안 걸리는 거리라 실제 통학하는 대학생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 자리잡히지 않
은 신도시에서 배차가 고르지 못하고 결행이 잦아 자칫하면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학교에서
의 수업 시간보다 많아질 우려도 있었다.
"그게 잘 될까. 방학 때까지라도 그냥 있지 그래..."
명훈을 그렇게 인ㅊ러을 달래 돌려보냈다. 하숙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려는 이유를 묻
고 싶었으나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두어 달 전보다 몇 살은 더 먹은 듯 보이게 짙어진
얼굴의 음영과 깊어진 눈빛에서 풍기는 어떤 고뇌의 빛 같은 것 때문이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다. 어쩌면 나로서는 이해하지도 못할... 그런 느낌 때문에 그날 명훈은 아우가
돌아간 뒤에도 못내 가슴이 무거웠다. 어머니와 함께 예식장에 도착하니 벌써 성미 급한 하
객들 몇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측은 예식장이 집 부근이라 그런지 부조기 부근에 제
법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예식장과의 여러 가지 성가신 절충들이 다 끝났는지 인철은
신랑측 부조기 곁에 단정하게 서 있었다. 부조기 책상에 앉은 것은 명훈에게도 낯익은 인철
의 오래된 친구 하나였다. 둘 모두에게 처음 어른들의 일을 맡아 한몫을 하고 있다는 자부
심 같은 게 엿보여 명훈을 은근히 안심시켰다. 이제 드디어 결혼을 하는구나- 미리 온 친척
들과 수인사를 나눈 뒤 예식홀 출입구에 서서 하객들을 기다리며 명훈은 묘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어머니와 경진이 서둘러 잡은 날짜를 두 달이나 미뤄 그날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명
훈은 전날까지도 자신의 결혼이 실감나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결혼해도 되는가. 나도 아내
와 자식을 가질 수 있는가.
"여어, 이명훈. 너도 결국 할 건 다 하게 되는구나."
누군가 아플 정도로 세게 명훈의 어깨를 치며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명훈이 퍼뜩 정신
을 차리고 돌아보니 황석현이 등뒤에 와 있었다. 인철이 청첩장을 보낸 건 알고 있었지만
오리란 확신을 없었는데 오히려 남보다 일찍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 황형. 황형이 어떻게 다..."
"아무리 바쁜 사쓰말이(경찰 출입 기자)지만 이명훈이 결혼식에 내가 안 오고 누가 오
나?"
만난 지 일 년이 넘는데도 어제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황이 그렇게 너스레를 떨어놓고 함
께 온 말쑥한 신사를 팔꿈치로 밀어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 이 사람 낯익지 않아?"
"안녕하시오? 이형."
명훈이 미처 그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 신사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명훈도
그를 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받았다.
"김형, 아니, 김박사가 어떻게 여길 다..."
겨우 사람은 알아봐도 십 년 전과 너무 달라져 절로 말이 더듬거렸다.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의 그는 살갑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요령꾼의 인상이 더 짙었다. 그런데 명훈 앞에
나타난 것은 누가 봐도 그의 예사 아닌 성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된 신사였다.
"이번에 귀국했어. 황기자가 연락해주길래 시간을 냈지. 결혼 정말 축하해."
오랜 미국 생활 탓인지 발음에 낯선 억양이 있었지만 말투는 옛날이나 다름없었다. 거기
다가 얼굴에 드러나는 깊은 감회가 옛정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분주할 텐데. 고마워."
명훈이 겨우 옛날의 말투를 회복해 그렇게 받자 곁에 있던 황석현이 거침없이 김형의 근
황을 알려주었다.
"미국 박사가 됐다고 옛날 뺀질이 어디 가냐? 저 친구 저래도 미국에 앉아 있으면서 여기
정치할 거 다 해 국립 대학교 교수 자리 보장받고야 귀국한 거야."
그 말에 김형의 얼굴에 좀 거북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거기서 뿌리내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데... 그래서 유학 선배를 통해
이력서를 보냈지. 황가, 너, 사람 그렇게 모함하는 거 아니다."
굳이 그렇게 해명하고 황에게 항의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유지되는 자신의 옛 인
상에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명훈도 굳이 김형의 옛 인상에 매달려 있고 싶지는 않았다. 십
년이면 강산도 면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하는 기분과 더불어 오히려 그의 변화 쪽에 더
기대와 호감이 갔다. 황석현도 본인이 달가워하지 않는 옛 인상으로 굳이 김형을 짓이겨놓
어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이거, 내가 우리 귀한 박사님을 너무 함부로 말했나. 그런 그렇고 오늘 이명훈이 결혼식
날만 아니라면 어디 가서 코가 비뚤어지게 한번 마셔야 하는 건데..."
그렇게 선선히 물러섰다. 하기는 명훈도 30분 후가 결혼식이 아니라면 근처 대폿집에라도
끌고 가고 싶을 정도로 그들이 반가웠다. 대학교수와 최대일간지의 기자. 어떻게 보면 그 자
신과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마주보는 느낌은 10년 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당장 함께 나가 대포 한잔 하고 싶은데. 김형 꿀꿀이죽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거든. 어쨌든 신혼 여행 갔다 오면 바로 한번 만나자구. 나 같은 밑바닥 인생에겐 하는 같
은 교수님이고 대 기자님이지만 옛날얘기로 술 한번 제대로 취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돌아오는 대로 연락해."
황석현이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양해를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야. 오늘은 예식은 끝까지 못 볼지도 몰라. 이눔의 기자질이란 게 일요일도 없
다니까. 어디 들러야 할 곳이 있는데 예식 끝다는 걸 보자면 거기까지 이동 시간이 안 나와.
여기 김박사도 들러야 할 데가 있는 모양이고."
그 사이 시간이 흘러 하객들이 줄지어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느 지역 출신 어떤 성씨이건
마찬가지지만 동향인이나 집안 사람들이 가장 많이사는 곳은 서울이게 마련이었다. 뒷골목
도 밑바닥을 헤매며 느끼던 외로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많은 일가 친척들이 용케 알고
예식장을 찾아주었다. 그들이 밀려들자 황과 김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 예식장 한구석으
로 가버렸다. 명훈도 오랜만에 만난 일가 친척의 축하를 받느라 더는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명훈의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노인들이 있어 결혼을 더욱 실감나
게 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10여 분 남기고 있을 때였다. 점점 더 예식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종내 사라지지 않던 불안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
"어이, 이서방. 나 좀 봐."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명훈에게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사람 사
이를 헤집고 나타난 것은 모니카의 어머니였다. 어디서 마시고 왔는지 벌써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심장에 차가운 얼음이라고 갖다댄 듯 오싹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명훈은 애써 침착을 가장
하며 물었다. 갑자기 모니카의 어머니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웬일이라니? 야, 너 정말 몰라서 물어? 좋다. 그럼 내 대답해주지. 장모가 사위 장가가는
날에 안 올 수 있어? 그래서 왔다, 왜?"
그 말에 명훈은 갑자기 다 틀렸다. 는 기분이 들며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결혼
날을 받은 뒤로 가장 걱정해온 것은 바로 그런 사태였다. 여기서 더 망신당할 것 없이 이대
로 자취 없이 사라져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 이러지 마십쇼. 누가 장모고 누가 사위란 말입니까?"
명훈이 무너저내리기 전의 마지막 안간힘으로 그렇게 버텨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
는 더욱 높아졌다.
"야, 이서방. 너 정말 그렇게 뻔뻔하게 나올래? 정말루 줄줄이 증인 세우고 결혼 사진까지
내놔야 바로 댈 거야?"
주위에서 막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바로 덤벼들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그때 희끗
신부 화장을 마치고 신부 대기실로 들어가는 경진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명훈은 그대
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나야 어찌 되든 저 아이는 구해야한다---- 명훈은 그런 결의
로 자신을 다잡았다.
"이보십시오, 모니카 어머니. 뭘 잘못 알고 오신 것 같습니다. 구차스런 인연은 있으나 나
는 댁 같은 사람의 사위가 된 적이 없으니 좋은 말로 할 때 물러가십시오. 아니면 경찰을
부르겠소."
명훈은 짐짓 목소리를 차갑게 해 쏘아붙였다. 그게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는지 모
니카의 어머니가 이제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 악을 쓰고 나왔다.
"뭐? 경찰? 오냐. 당장 경찰 불러와. 여기서 끝은 보자구. 나는 그래도 일 년 가까이 사위,
장모 하며 한솥밥 먹은 정을 생각해 조용히 타이르려 했더니... 가서 경찰 불러와. 그게 혼인
아니면 어떤 게 혼인인지 알아보자구!"
그렇게 되자 온 예식장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옥경이 달려오고 인철도 허
옇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힘으로 그녀를 끌어내보려 했지만
그녀가 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바람에 소동은 커지기만 했다. 그런데 뜻밖의 구원이 왔다. 명
훈이 이젠 정말 더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 되어 예식장 밖으로 뛰쳐나가려 할 때였다. 갑자
기 날카롭고도 처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예식장 안의 소동을 일시에 정지시켰다.
"엄마- 엄아앗!"
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나는 쪽으로 쏠렸다. 눈이 뒤집혀 있던 모니카의
어머니도 멀건 시선을 모아 그쪽을 보았다. 소리를 지른 것은 방금 층계를 올라온 모니카였
다. 끔찍하게 들리던 목소리와는 달리 옷차림은 화사하기 그지없었고 얼굴도 짙은 화장으로
요염한 빛까지 띠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노려보는 그녀의 두 눈에서는 새파란 불길이
쏟아지는 듯 했다. 그녀 뒤로는 시녀처럼 따라온 젊은 아가씨 둘이 있었는데 둘 다 명훈에
게 낯 익은 얼굴이었다.
"이게- 누구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옷깃을 놓은 모니카의 어머니가 제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중얼거리
듯 말했다. 그런 그녀를 쏘아보며 모니카가 다시 한번 날카롭고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엄마, 정말 나 죽는 거 보려구 그래애?"
그러자 모니카늬 어머니는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어머닐 놔주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모니카가 그걸 보고 사람들에게 차분히 말했다. 말리던 사람들이 말없이 그녀의 옷깃을
놓고 모니카의 어머니는 금세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얘들아, 어머니 좀 부축해드려. 빨리!"
모니카가 이번에는 단호한 명령조로 데리고 온 아가씨들에게 말했다. 아가씨들은 표독스
런 눈길로 명훈을 노려보다가 모니카의 재촉을 한 번 더 듣고서야 모니카의 어머니를 부축
했다.
"어머니 모시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고- 집으로 데려가라구."
모니카는 표정 한번 찡그리는 법 없이 아가씨들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명훈에게로 돌아섰
다.
"명훈씨, 죄송해요. 어머니가 좀 취하셨나봐요. 깜박하는 사이에..."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예절을 갖춘 사죄에 이어 축하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결혼 축하드려요. 부디 행복하세요."
아가씨들이 넔빠진 듯한 모니카의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고 다시 모니카가 공손한 목례까
지 보낸 뒤 조용히 층계로 내려가버리자 식장은 이내 평온을 회복했다.
"곧 결혼식이 시작되겠습니다. 복도에 계신 하객들은 식장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복도에 걸린 스피커에서 그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일시 영화의 정지 화면
처럼 굳어 있던 명훈 주위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와서 명훈의 팔을 끌며
말했다.
"시간이 다됐습니다. 입장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신부 대기실로 가시죠."
그 뒤 예식은 신통하리만치 별다른 사고없이 진행되었다. 무엇에 쫓기는 둣한 사회였지만
실수는 없었고 주례사도 길이에서나 내용에서나 흠이 없었다. 신부의 태도에는 좀 전의 소
동이 준 충격의 흔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랑이 명훈은 그날의 예식이 거의
기억에 없을 만큼 다른 두가지 방향으로 신경이 쏠려 있었다. 하나는 모니카나 그의 어머니
가 다시 나타나지나 않을까를 살펴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진의 표정을 훔쳐보는 일이었
다. 그러다가 신랑 신부의 행진이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부터 약속대로 신혼 여행을 뒷날로 미뤄지고 신랑 신부는 성남의 새집에 꾸민 신방으
로 향했다.
"그래도 평생에 한 번 있는 일인데 경주라도 하루 안 갔다 오고..."
아무래도 신혼 여행이 없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식장 앞에서 택시에 오르는 명훈과 경진
을 보고 어머니가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경진이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소곳한 신부의 어조
로 받았다.
"저희는 신혼 여행을 안 가는 게 아니고 미룬 것 뿐이에요. 너무 마음쓰시지 마세요, 어머
니."
그런 경진의 태도에 명훈은 다시 속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리고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날은 모니카의 일을 없었던 일로 치려는 듯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그래도 택시 안에 둘만 남게 된다 싶자 까닭 모를 불안이 일었다. 그때 무슨 구
원 요청이라도 받은 듯 옥경이 달랑 택시 앞자리에 오르며 말했다.
"택시 자리 비워서 뭘 해? 어차피 나두 그리루 가야 하니까 큰오빠하고 같이 갈게요."
그 바람에 자칫 굳어질 뻔했던 둘만의 자리는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새집에 이르자 예식
장에 오지 못한 친척과 집을 짓는 동안에 알게 된 그곳 사람들 몇이 기다리고 있어 둘만의
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철과 어머니도 가까운 집안 아주머니 두 분과 택시로 뒤따라
와 낮 동안은 제법 잔칫집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갈 사람은 가도 대는 이래 이러지는구나. 너어 아버지 그래 훌훌히 떠나뿌고 어맴(시어
머니)까지 세상 베리실(버리실) 때는 눈앞이 다 캄캄하디... 이 어린것들 데리고 어예 한세상
사노 싶디."
어머니는 옷고름으로 눈물은 찍으면서도 명훈의 결혼을 못내 감격스러워했다. 집안 아주
머니들도 덩달아 목메어하면 경진의 손을 쓸었다.
"참마로 이게 어떤 큰 집 새댁이로? 너 시어마이 돌내골 신행들 때만 해도 소를 잡아 상
것들까지 풀어먹일 정도로 큰 잔치했디라. 그런데 이 콩짜가리만한 집에... 글치만 잊지 마래
이. 자손이 남아 있고 근본만 지키믄 언제든 집은 다시 일라선다. 옛말 하며 살 날 온다."
그러다가 명색 신방이라고 꾸민 방에 둘만 남게 된 것은 밤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둘만이 남게 되면서 명훈은 다시 긴장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동안도 모
니카의 일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뜨끔거려오던 터였다. 그런데 둘이 되어서도 경진은 종내
그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부부가 되긴 된 건가요?"
둘이 되어 처음 그녀가 한 말은 그런 물음 아닌 물음이었다.
"법적으로는 아직도 혼인 신고가 남았지."
긴장이 명훈의 목소리를 본의 아니게 퉁명스럽게 했다. 그녀가 별뜻 없는 말간 눈길로 명
훈을 건너보다가 다시 앞서와 같은 말투로 물었다.
"이젠 제가 아내 같은가요?"
"아내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아내잖아? 그러려구 그렇게 사람을 몰아댄거구."
그러자 그녀가 뜻 모를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말했다.
"좀 피곤하군요. 일찍 주무시지 않겠어요?"
"아직 안방에 어머니와 손님들이 그냥 계시는데- 하지만 피곤하면 일찍 자리보고 누워.
불만 안끄면 되지 뭐."
명훈도 익숙한 남편처럼 그렇게 대답하고 공연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양복 욋도리를
벗었다. 경진이 옷을 받아 벽에 걸린 옷걸이에 거는 사이 방 윗목에 놓인 상이 눈에 들어왔
다. 밥상보를 젖혀보니 격식을 갖춘 합환주는 아니었지만 술 한 병과 안주 몇 가지가 정갈
하게 차려져 있었다.
"잘됐군. 이부자리 봐두고 우리 술이나 한잔 하지. 이건 첫날밤 예식에도 있는 거 아냐?"
경진은 이번에도 고분고분했다.
"그러죠. 하지만 과음하시지는 마세요."
그러면서 알루미늄 상자에 얹힌 이불 보퉁이를 풀어 새 이불과 요를 펴기 시작했다. 명훈
은 그녀가 다가와 마주앉기를 기다려 술병을 땄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모니카의 일은 여전
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의식 깊숙한 곳을 찔러댔다. 어쩌면 당연히 그 일을 꺼내야 할 경진
이 제때에 꺼내주지 않아 더 아프게 따끔거리느지도 몰랐다. 명훈이 술이 채 오르기도 전에
먼저 그 일을 꺼낸 것은 그 은근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였었을 것이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명훈은 첫잔을 받아 조심스럽게 비운 뒤로 자신의 잔만 내려보고 있는 경진의 손을 잡으
며 죄를 자복하는 범죄자의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뭘 말예요?"
"낮의 그 여자. 그리고 당신의 초연한 태도."
그러자 경진이 명훈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언저리에 갖다 대며 타이르듯 말했다.
"아이 듣는데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녜요. 우리는 오늘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요. 힘들여
단절한 어두운 과거에 더는 가위눌리지 마세요."
제32장 악몽
천장의 백열구 촉수가 낮아서인지 이상이 생긴 시력 탓인지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희미해지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입술만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청각이 마비된 듯 그
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 인철에게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보다는 자포자기적인 열망이 더 컸다. 깨어나서는 무
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제발 한숨 푹 잘 수 있었으면...
"어어, 이 새끼 봐. 자고 있잖아.?"
갑자기 그런 고함 소리와 함께 목이 홱 뒤로 젖혀졌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세
게 머리를 뒤로 젖힌 것이었다. 인철에게는 머릿가죽을 벗기는 듯한 아픔이나 갑자기 거칠
게 젖혀진 목에 오는 충격보다 방금 아슴아슴 의식을 덮어오던 졸음이 싹 달아난 게 더 고
통스러웠다.
"자지 않았습니다. 전 자지 않았..."
인철이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움직여 그렇게 변병하는데 다시 눈어름에 번쩍 불이 일었
다. 누군가 따귀를 후려친 것이었다.
"그럼 임마, 사람의 말이 말 같지 않아? 왜 묻는데 대답이 없어?"
"무얼... 뭘 물으셨습니까?"
그래도 금세 의식을 덮어도는 졸음을 걷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인철이 황급히 되물었
다. 일어나서 따귀를 때리고 다시 제자리에 앉은 상대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차갑게 낮추어
받았다.
"말했잖아. 1966년 1월부터 6월가지의 행적을 대라구. 그때 어디 있었고, 뭘 했어?"
"부산에 있었습니다. 부산에..."
"부산 어디야? 무슨 동네 몇 번지에 있었느냔 말이야?"
그제서야 인철은 그 물음의 중요성을 섬뜩하게 상기했다. 이 부분을 증명하지 못하면 나
는 꼼짝없이 월북자가 된다. 북한으로 넘어가 아버지를 만나고 여섯 달의 밀봉 교육울 받은
뒤 다시 남파된 간첩이 되고 만다..."
"4월쯤인가 남부민동 헌책방을 나와 한 보름 서면 쪽의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다시 광
복동 중국집에서 두 달 쯤 있었고... 부산진 가구공장에서도 한 달쯤 일했고- 그러다가 토성
동 낙화 공방에..."
"그 거짓말은 벌써 열 번도 더 들었어. 그러지 말고 위장 전향해 출소한 장기수의 위장
사업체에 인도되기 전에 여섯 달을 바로 말해. 네가 말한 중국집도 광복동에 없고, 가구공장
도 공사장도 확인되지 않았어. 그 헌책방에서 불온 서적을 입수하고 난 뒤 사라진 그 여섯
달을 대란 말이야."
위장 전향한 장기수란 말이 다시 인철의 의식을 위기감으로 일깨웠다.
'안돼, 내가 여기서 지면 그 마음씨 좋은 털보 아저씨도 함께 당하고 만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의심스러우면 저와 함께 찾아보시죠. 함께 가서 확인해보시면 될 거
아닙니까?"
인철은 그렇게 말해놓고 위기갑에 자극된 순발력으로 새로운 제안을 보탰다. 인철은 이미
수십 번도 더 되풀이한 그 말을 절규처럼 외쳤다. 그때 정강이에 뜨끔한 통증이 왔다. 곁에
서 인철이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빼지 않고 꼼꼬히 기록하고 있던 사내가 어느새 일어나 다가
와 인철의 정강이를 걷어찬 것이었다.
"이 간첩놈의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악을 써? 중정(중앙정보부)으로
안 끌고 이리 모시니까 경찰이 아주 물렁해 보이는 모양인데, 정말 한번 해볼까? 우리도 임
마, 하려고 들면 육해공 다 할 수 있어. 학생이라고 신사적으로 대해주니까 간땡이가 부어
서..."
아픔보다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의 무력감이 인철을 위축시켜 말문이 막히게 했다. 가만히
인철을 보고 있던 취조판이 한 번 더 달래듯 말했다.
"우리가 증거가 모자라 너를 송치하지 못하는 거 아냐. 또 중정으로 넘겨 그들이 마무리
짓게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처지가 너무 딱해 도와주려고 이렇게 잡고 있는 거야. 그러니
우리에게 협조해. 네가 받고 있는 것은 간첩 혐의지만, 협조만 잘 하면 빠져나갈 수도 있어.
첫째로 너는 법적으로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고 이 방면의 전과나 특별한 이력도 없어. 거
기다가 네 아버지에 의해 포섭됐다면 충분히 작량 감경의 여지가 있지. 그래서 우리 손에서
매듭지으려고 이러는 거야."
제법 정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인철은 본능적으로 거기에 담겨 있는 더 무서운
악의를 읽어내고 긴장을 잃지 않았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호소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진작부터 사정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만 절 데리고 부산에 가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그때 제가 거기 살았다는 걸 증명해내겠습니다."
취조나 고문은 인철의 경험에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의 경험을 핏
줄을 통해 물려받은 것일까, 그의 대처는 꽤나 의연한 데가 있었던 듯했다. 상대가 다시 한
번 인철을 관찰하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곁에 있는 취조 보조원에게 눈짓을 했다. 취조 보조
원이 알아듣고 필기구룰 놓더니 방을 나갔다. 무언가 상부의 지시를 구하러 가는 듯 했다.
그가 방을 나가자 취조관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양복 상의에서 담배를 꺼냈다. 최고
급 '청자'였다. 그가 담배를 빼어물다 말고 힐끗 인철을 보더니 갑을 내밀었다.
"담배 피워?"
"네."
"그럼 한 대 피워."
그제서야 인철은 지난 이틀 밤낮 동안 한 개비의 담배도 피지 못한 걸 떠올리고 갑자스런
구걸 심리까지 느끼며 공손하게 담배 한 개비를 뽑았다. 그 순간 코를 찔러오는 담배 냄새
가 세상의 그 어떤 향기보다 더 향기로웠다.
"천천히 피워."
취조관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도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을 빨았다 내뿜은 취조관이 만난 뒤 처음으로 인간적인 어조가 되어 말했다.
"나도 법적으로는 겨우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을 간첩 혐의로 취조해보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인철은 방금 담배 연기와 함께 빨아들인 니코틴의 일시적 마비 작용 때문에 그 말
에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 불시의 타격를 받은 것처럼 휑한 머릿속과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책상 모서리를 한 속으로 잡았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하던 취조관이었으
나 그 말을 끝으로 사적인 감정을 더는 토로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혈관에 공급된 것이라
그랬는지 니코틴이 강렬한 각성 효과를 내어 인철도 잠시 졸음을 잊고 다음 전개를 나름대
로 추측해보았다. 갑작스런 취조 중단이 무엇을 뜻하는지 문득 궁금해진 까닭이었다. 기록을
맡고 있던 사내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나쁘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으로 인철이 스스로를 격려하며 기다리는데, 돌아온 그가 취조관에게
다가가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취조관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윗도리를 벗겨입
으며 사무적인 어조로 그에게 지시했다.
"그럼 저녁 먹이고 재워."
인철은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들었다. 아마도 자
신이 가서 그때 거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듯했다. 취조 보조수
겸 기록을 맡았던 사복은 직속 상관인 듯한 취조관의 지시에 따라 인철에게 저녁을 먹인 다
음 구내의 어떤 방으로 데려가 재웠다. 이따금 그런 용도로 쓰이는 듯 창문은 굵은 쇠창살
이 박히고 출입구는 밖에서만 여닫을 수 있게 설비된 방이었다. 인철은 그날의 나머지가 거
의 기억에 없을 정도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그 방의 냄새나는 이부자리에 고꾸라졌
다. 그리고 꿈조차 없는 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누가 세차게 흔들어서야
눈을 떴다.
"가서 세수하고 외출 채비해."
겨우 눈을 떠 쳐다보니 어제의 기록 담당이었다. 인철은 가까운 화장실로 가 대강 세수를
했다. 내주는 수건으로 닦다 보니 어느새 감시자 하나가 늘어 있었다. 역시 사복 차림으로,
보기에도 사건 전문 형사 티가 났다. 가까운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택시에
오른 그들이 서울역에 이른 것은 9시경이었다. 개찰구로 가기 전에 새로 감시역을 맡게 된
형사가 슬쩍 양복 윗도리를 젖혀보이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인철은 저
도 모르고 있었지만 십여 년 전 그의 형 명훈도 겪어본 적이 있는 방식의 경고였다.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고 딴 생각 말아. 저분도 마찬가지야."
인철이 그가 열어준 윗도리 안쪽을 들여다보니 겨드랑이 쪽에 가죽 케이스에 든 권총이
차가운 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007'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띠를 어깨에 메게 해둔 권총 케이
스였다. 원래도 도주 같은 것은 생각해본 바 없었으나 그들의 숨겨진 무장을 보자 오히려
인철은 그 충동을 느꼈다. 자신이 그토록 엄중한 호송을 필요로 하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두렵고 불안해진 까닭이었다. 이건 할머니의 말씀대로 우선 피하고 보아야 하
는 홍수의 첫 물머리가 아닐까. 그런데 그 충동을 억누른 것이 서울역에서 받은 또 다른 종
류의 대우였다. 인철을 가운데 세운 형사가 이제 막 개찰이 시작된 개찰구를 지나면서 각기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였다. 그러자 달갑잖은 눈으로 신분증을 확인한 개찰원이 가운데
있는 인철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뒤따라오던 형사가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상범이오! 수사상 필요해 임의 동행중이고."
그 말에 개찰원일 흠칫하며 인철을 보더니 누구에겐지 모르게 고개까지 가볍게 숙이며 공
손하게 받았다.
"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인철은 오래오래 그때 그 개찰원의 눈길을 잊지 못했다. 말 그대로의 경외, 곧 우
러름과 두려움이 얽힌 눈길이었다. 그가 한 말도 어쩌면 인철에게 한 말이 아니었을는지 모
르지만 인철은 왠지 자신을 향해 하는 말로 들었다. 그들 앞뒤에서 형사의 말을 들을 수 있
었던 여행객들의 눈길과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끕찍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까닭 모를 경외를 느끼는 눈길과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사상범..."
기차에 오르면서 인철은 새삼스런 느낌으로 그렇게 되뇌어보았다. 유년의 추억 속에서 그
말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가. 아버지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 그 말은 또한 불행
과 재앙의 동의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경외심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인철은 그걸 핏줄의 몫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날 사람들의 눈길과 표정에서 읽은 것은 그게
아버지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사상범 일반에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된 감정이라
는 점이었다. 어쩌면 한 혁명가를 길러내는 정신적 기제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람들의 그 같
은 반응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무겁게 인식시킨다는 것만큼 인간의 허영에
유혹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상범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지름길이 된다. 이미 아버
지대에서 피와 불의 세례룰 받은 뒤라 인철에게는 내처 그 길을 가도록 하는 효과까지 내지
는 못했지만, 그 같은 사람들의 반응이 준 변화는 컸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바라보는 보이지
않는 눈길을 의식하게 된 것이 그러했다. 어쨌든 이번 일에 대처하는 데 결코 천박하거나
비겁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기차에 오르면서 인철을 그런 돌연한 결의까지 다졌다. 인철의
그 같은 결의를 강화시켜 준 일은 기차 안에서 한 번 더 있었다. 기차는 인철로서는 처음
타보는 당시 최고 등급의 통일호였는데 그러다 보니 좌석이 지정돼 있어 앉을 데가 없었다.
그러자 주위를 살피던 형사가 때마침 다가오는 여객 전무를 불러세우더니 신분증을 보이며
말했다.
"나 시경 대공계 요원인데 자리 좀 부탁합시다. 지금 중대한 사상범을 호송중이라..."
그러자 금세 긴장한 표정으로 형사들과 인철을 번갈아보며 여객 전부가 싹싹하게 일러주
었다.
"여기서 뒤쪽으로 객실 두 칸을 더 지나치면 특실이 나옵니다. 거기 비어있는 자리로 적
당히 쓰십시오."
인철이 형사들과 특실로 가보니 거기에는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받이를 자
주색 비로드로 감싸고 윗부분에 하얀 시트를 댄 의자며 산뜻한 커튼으로 분위기부터 보통
객실과 달랐다. 거기다가 당시로는 가장 고급한 교통수단의 가장 비싼 자리를 산 사람들이
란 것 때문에 품게 된 선입견인지도 모르지만, 좌석의 반쯤을 채우고 있는 여객들도 인상부
터가 달랐다. 통일호도 처음으로 타보는 인철에게는 갑자기 낯선 세계에 떼밀려 들어온 듯
한 느낌까지 들었다.
"저기 앉아."
뒤따르던 형사가 익숙하게 의자를 돌려놓아 네 좌석을 마주보게 한 뒤 창문 쪽을 가리키
며 인철에게 말했다. 인철이 말없이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자 통로 쪽 자리에 마주앉은 게
나름대로의 고려가 있는 자리 배정인 것 같았다.
"자고 싶으면 의자 젖히고 자. 아무리 통일호라도 부산까지 대여섯 시간을 걸릴테니."
그래도 그 동안 낯이 익었다고 취조실에서 기록을 담당하던 형사가 그렇게 인심을 썼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터라 간밤의 예닐곱 시간으로는 잠이 모자란다고 본 듯했다. 인철에게
도 잠의 유혹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인철은 거의 반사적으로 의자를 젖히고 몸을 뉘었다. 그
낯선 안락감이 다시 인철에게 엉뚱한 성취감 같은 걸 느끼게 했다. 사상범이 됨으로써 갑자
기 자신의 신분이 한 단계 상승했다는 어이없는 착각과 함께.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있
고 누운 자리가 편안하다고 해서 금세 잠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받
으면서도 힐끔힐끔 인철에게 주의의 눈길을 던지는 형사들이나 악몽처럼 퍼뜩퍼뜩 떠오르는
취조실이 느슨해졌던 인철의 긴장을 되살렸다. 자신이 받고 있는 엄청난 혐의가 원래의 무
게를 되찾고 취조실을 떠나면서 잠시 잊었던 공포와 불안이 다시 의식을 짓눌러왔다. 인철
은 자는 척 눈을 감은 채 자신이 거기까지 끌려오게 된 경위를 세삼 더듬어보았다. 연행되
는 순간부터 단절된 현실 인식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날 정숙을 따라 생일 잔치에 갔다가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를 본 인철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거짓되고 허영에 찬 것으로 규정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
들어 몰두해 있던 문학까지 경원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있는 그에게는
그 어느 쪽도 어머니의 그같은 처지를 용인할 권리를 갖지 못한 것으로 단정되었다. 시들한
대로 이어져오던 정숙과의 사랑도 사치스럽고 가망 없는 놀이가 되었다. 용돈의 차이로만
인식되던 빈부의 차이는 본질적인 신분의 문제로 확대되어 갑자기 그녀가 자신과는 전혀 어
울리지 않는 계층의 사람처머 서먹하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박승수네 집에서 어머니를 만나
게 된 일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그때껏 그녀에게 쏟은 동경과 열정을 순식간에 거두어버렸
다.
"왜그래? 무슨 일이야?"
인철이 갑자기 일어나자 난처한 얼굴로 그렇게 묻던 정숙은 대문께까지 따라나오면서 인
철을 잡아두려 애썼다.
"뭣 때메 맘 상했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아니면 승수 걔?"
인철이 갑작스레 떠나려는 까닭을 알려고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벌써 이제 더 잡을 수
없다는 결의 같은 것을 다지고 있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인철이 끝내 이유를 밝히기 않고
대문을 나서자 그녀는 대문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알았어. 이유는 나중에 들을게. 하지만 난 여기 남겠어. 나라도 남아 주는 것이 오래된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어?"
그녀는 그러면서 습관적인 미소를 떠올렸으나 인철은 그게 이를 앙다문 것보다 더한 경멸
과 적의의 표정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순간적이지만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까
지 들 정도였다. 며칠 뒤에 어쩔 수 없이 진상을 밝혔을 때도 그랬다.
"겨우 그거였어? 그게 어때서? 나 처음부터 네가 부잣집 아들이라고 좋아한 거 아니다.
니네 엄마 그러셔야 할 사정이 있으면 남의 집살이도 하실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요즘 세
상에 직업에 귀천이 어딨어?"
정숙은 한없이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사람처럼 받았으나 인철은 바로 그런 그녀에게서 그
때까지도 두 사람을 잇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무참히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진정한 이해도,
같이 아파할 연민도 없는 그런 종류의 너그러움은 아직 날카롭게 살아있는 인철의 자존심에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주었다. 겨우라구, 아니다, 아니다, 세 번 아니다. 너는...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기분으로 정숙과 헤어진 인철을 그날부터 다시 하숙집에 틀어박혔
다. 그러다가 학기말 시험이 가까워 출제 범위를 알아두려고 오래만에 등교한 날이었다. 한
형을 만나는 바람에 낮술을 한잔 걸치고 오후 늦게야 하숙집으로 돌아왔는데, 기다리는 사
람들이 있었다. 사복 형사들로 인철이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수색을 끝낸 뒤였다. 그
들이 무슨 대단한 증거물처럼 인철의 책상 위에 쌓아둔 것은 바로 일본판 사회주의 사상 전
집이었다. 여섯 권 중에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 재축적론>이 빠진 나머지였는데, 인철은
그걸 보자 이내 일의 발단을 알 것 같았다. 노광석의 간청에 못이겨 그 책을 내준 게 한 달
전이었던가.
"이인철 맞아?"
방안에 앉아 기다리던 형사가 앉은 채로 그렇게 물었다. 심장에 갑자기 찬 얼음 조각이
와 닿는 듯한 느낌으로 엉거주춤 서 있던 인철이 냉정을 회복하려고 애쓰며 태연을 가장했
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시경에서 나왔어. 나 이런 사람이야."
형사가 대답과 함께 신분증을 내보였다. 하지만 인철에게는 그 신분증의 글씨도 사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인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퇴로를 막고 있던 다른 형사가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위압적으로 말했다.
" 우선 앉아. 먼저 협조를 받아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인철이 앉자 두어 발자국 떨어진 등뒤에 앉았다. 미리 앉아서 기다리던 맞은편 형
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 우린 수색 영장이 없어. 말하자면 자네가 없는 동안에 방안을 뒤진 것 위법이지. 먼
저 그 수색에 사후지만 자네의 동의가 필요하네. 또 우리는 압수 영장이 없어. 하지만 저 책
들은 참고로 가져가야겠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동의해 주어야겠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행
인데... 역시 구속 영장은 없어. 임의 동행 형식으로 우리를 따라와줬으면 좋겠어. 내가 이렇
게 특별히 양해를 구하는 것은 자네가 학생 신분이기 때문이야."
그의 차분한 어조가 인철에게도 진정의 효과를 주어 비로소 반발할 여유룰 가지게 했다.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뭐,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 자네를 강제 구인하고 차차 하자를 보완하면
되지. 그렇게 되면 자네 고생이 더 심해질 거야. 어쩌면 수사 자체가 중정으로 넘어가게 될
지도 모르고."
그 말에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증앙정보부란
말은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 바람에 대꾸가 늦어지자 형사가 기다리지 않고 이었다.
"그럼 우리와 함께 가기 전에 몇 마디 묻겠어. 저 전집의 나머지는 어디다 감췄나?"
"애초부터 완질을 구한 건 아닙니다. 어쩌다 아니, 서점에서 일할 때..."
인철은 갑자기 다급해진 마음이 들어 그 책들을 손에 넣게 된 경위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러잖아도 다음으로 입수 경위를 믈으려던 참이었는데 미리 말해주니 문항이 하나 줄었
군. 그럼 우리가 어떻게 자넬 찾아오게 되었는지 짐작은 가나?"
"짐작 가는 데가 있습니다."
인철은 무턱대고 시치미를 떼보려다가 솔직하게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대답했다.
상대가 반짝 관찰의 눈길을 내비치다가 다시 물었다.
"말해줄 수 있겠나?"
"제가 이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최근 저
책들 중에 한 권을 빌려갔는데, 그가 소속된 단체가 좀 불온한 데가 있어서..."
"호오- 그럼 적어도 노광석이 불온 서클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는 뜻이군,"
"그 이상 직접 옵서버로 참가해본 적도 있습니다."
인철은 선수라도 치는 기분으로 그렇게 묻지 않은 것까지 앞질러 대답했다. 부인할 수 없
을 바에야 사실대로 말해 상대의 의심을 줄이겠다는 나름의 계산이었다. 상대가 다시 관찰
의 눈길이 되어 인철을 살피다가 변화없는 어조로 물었다.
"옵서버? 그건 무슨 뜻이지?"
"구경꾼으로 참석했다는 뜻입니다."
"불온 서클인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불온 서클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그때까지는 그렇게 위험한 불온 서클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사상 연구 단체로 알고..."
"위험한 불온 서클인지 알고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럼 책은 왜 내주었나?"
형사의 말투가 깐깐해지며 심뭄조가 되어졌다.
"노광석은 대학에 와서 사귄 친구 중에 가장 친한 녀석이라..."
"그 책의 내용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저는 일본어를 몰라서..."
거기서 인철은 다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호기를 만났다는 기분이 되어 조금 여유를 되
찾았다. 형사가 한동안 말없이 인철을 살피다가 일어날 채비를 하며 함께 온 형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이, 이형사, 그럼 가지. 저기 책 싸들어."
그리고 인철에게도 어느새 명령조가 되어 말했다.
"협조해줘 고마워. 아까 말했지만 우리와 함께 가줘야 되겠어."
제법 길고 까다로운 심문을 예상하고 있던 인철은 그 갑작스런 심문 중단이 공연히 당황
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인철은 그 서클의 모임에 갔을
때 받은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자기 변호를 발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
인철이 다급한 김에 그렇게 스스로 못다 한 얘기의 서두를 꺼내보았지만 형사는 별로 관
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가서 얘기해. 아직 얘기할 기회는 많아."
하지만 그 형사는 예민한 수사 감각을 지닌 사람 같았다. 인철을 가운데 태우고 택시 뒷
자석에 앉으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이거 태산명동에 서일필 아냐? 아무래도 헛다기 짚은 것 같은데..."
형사들이 인철을 데려간 곳은 시경 청사가 아니라 어떤 낯선 동네의 오래된 이층 건물이
었다. 택시를 탈 때 그들이 운전사에게 뭐라 행선지를 대기는 했다. 그러나 서울 지리에 밝
지 못한 데다 처음 겪는 갑작스런 연행으로 제정신이 아닌 인철은 자신이 끌려가는 곳을 종
잡을 수 없었다. 일제 때 무슨 관사나 기숙사로 지어진 듯한 그 건물을 꽤 넓은 마당으로
이웃집들과 격리되어 있었다. 지프 두어 대가 주차돼 있는 썰렁한 마당을 지나 왠지 음습하
게 느껴지는 건물로 들어서자 현관 오른편으로 작은 사무실 같은 게 있었다. 책상과 의자는
여러 개 놓여 있었으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몇 안 됐다.
"무슨 일이야?"
입구 쪽에 다른 것들보다 좀 큰 책상에 앉아서 원가 서류룰 보고 있던 중년이 인철을 데
리고 들어서는 두 형사에게 반말로 물었다.
"뭐 특별한 거 없었어?"
그러자 인철에게 주로 질문을 던졌던 형사가 인철이 듣기에도 놀랄 만큼 세밀하게 하숙집
에서 있었던 인철과의 대화를 보고조로 반복했다. 어떤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래에?"
다 듣고 난 중년이 까닭 모르게 오싹해지는 눈길로 인철을 훑어보더니 두 형사에게 명령
했다.
"305호실로 데려가."
인철은 그 와중에도 305호실이란 말에 의아한 느낌을 들었다. 그 건물은 이층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형사들이 인철을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지하실이었다.
붉은 백열들이 켜져 있는 지하로 내려서자 인철의 불안과 공포는 갑자기 배가 되었다. 기
껏해야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된 불온 서적 몇 권을 소지한 죄밖에 없다는 걸 떠올리고
당당해지려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방음 장치 때문인지 유별나게 중후해 보이는 문을 열
고 방안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온몸에 소름이 돋고 팔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나무로
된 커다란 방안에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문초를 담당하고 한 사람으 기
록을 담당하게 되어 있는 듯 했다. 형사들은 좀 전 사무실에서와 비슷한 형태로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인철을 인계한 뒤 방을 나가버렸다.
"앉아."
인철을 인계받은 사람이 책상 맞은편의 비어 있는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인철에게 말
했다. 인철이 품고 있는 문초 형사에 대한 선입견과는 다른 인상에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였
다. 그 바람에 다소 여유를 되찾은 인철이 천천히 방안을 들러보며 앉았다. 인철의 정면, 시
멘트 미장으로 마감된 벽에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시경의 별동이든 분실이든 관공서의 일부라는 점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었으나 인철
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거기 시선이 머물러 있는데 갑
자기 눈앞이 번쩍했다.
"이 쎄끼가 어디서 거물 티를 내고 있어? 어딜 한눈을 팔아, 순 빨갱이 간첩놈의 새끼가."
본능적으로 맞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소리나는 쪽을 보니 기록을 위해 종이와 팬을
준비한 채 한 모서리에 그림자처럼 붙어앉았던 형사가 그새 제자리로 돌아가 앉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뒤로도 주로 폭력을 쓰는 것은 그 취조 보조 겸 기록 담당이었다. 대답
이 성의 없다고 느끼거나 졸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그가 일어나 호된 손찌검을 하고 제자리
로 돌아갔다.
그에 비해 취조를 담당한 쪽은 오히려 느긋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못 본 사람
처럼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이인철이. 1948년 6월 22일생. 맞아?"
"네 그렇습니다."
"고생깨나 하며 자랐군. 그래도 머리는 있는 놈 같고-하지만 여기서 잔머리 굴릴 생각은
말아. 보자, 뻔한 질문은 생략하고……"
그러면서 그는 서류 몇 장을 건성으로 넘기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이 되어 인철을 쏘
아보았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그래 일본은 어떻게 건너갔나?"
"네에? 일본요?"
인철은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저도 몰래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밀항(密航)이겠지. 그 밀항을 누가 주선했나? 어떤 조직이야? 누가 어떤 방법으로
널 일본에 데려갔어?"
"일본으로요?"
그때 다시 기록을 담당하던 형사가 소리없이 다가와 발로 허벅지를 호되게 걷어찼다. 그
타격이 얼마나 세찼던지 인철은 의자에 앉은 채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있는 인철의 귀에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 그의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쌔끼가 한국말도 모르나? 대답은 않고 왜 자꾸 남의 물음을 반복해?"
"이, 일본은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인철의 다급한 대답에 취조를 맡은 쪽은 여전히 아무것도 본 게 엇다는 듯 느그하게 말했
다.
"그래애? 그럼 평양에도 가본 적이 없겠네. 밀봉 교육도 받은 적이 없고, 학원 침투 지령
을 받은 적도 없고……"
"네에? 뭐라구요?"
"잘 들어. 너는 66년 부산에서 네 아버지가 보낸 간첩단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밀항했어.
먼저 네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조총련 간부 집에 며칠 머물다가 북송선을 탔지. 그리고
평양에 도착해 네 아버지와 만난 뒤 6개월에 걸친 밀봉 교육을 받고 다시 남파되었어. 어
때? 우리 수사가 틀렸나?"
"아닙니다. 저는 결코 일본도 평양도 간 적이 없습니다. 뭘 잘못 알고 계신겁니다."
인철은 새로운 종류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를 덜덜거리면서도 힘을 다해 부인했다. 상대가
별 변화없는 어조로 받았다.
"그럼 일본어판 사회주의 사상 전집은 어디서 구했나?"
"그건 제가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할 때 - 우연히, 정말로 순전히 우연히 ……"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군. 잘 들어. 이건 소화 32년판으로 국내에는 원래 많지도 않았지
만 그나마 6·25를 전후해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어. 그런데 어느 간땡이 부은 놈이 17년이
나 목숨 걸고 지켜? 그리고 그걸 헌책방에 가져와?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건 책방 주인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남부민동 청림서적이라구 아
직도 그 헌책방이 남아 있을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조사해보지. 그건 그렇고. 그럼 66년 4월부터 9월까지는 어디 있었나? 위
장 전향(轉向)해 형 감면을 받고 나온 정윤기에게 인계되기 전까지는?"
"정윤기요?"
"모르겠다고 잡아뗄 거야? 인두로 목판을 지져 그림을 그리던 그 털보 말이야. 거기서 다
시 여섯 달이나 사상 학습을 받은 거야 말 못 하겠지만 밥 빌어먹은 일은 부인할수 없겠
지?"
인철은 그제서야 그 낙화방 주인의 이름이 기억났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어두운 경력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절로 소름이 끼쳐왔다.
"제가 그분 밑에서 점원으로 일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사상법으로 복역
(服役)한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이었을 뿐입니
다. 사상 학습 같은 것은 정말로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사상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인철은 이제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취조관이 살피는 눈길로 그런 인철을 바라보다가 변화없는 목소리로 물
었다.
"네 말대로 청림서적에 있었다 치자. 그럼 그 서점을 나와 정윤기에게 갈 때까지 육개월
의 행적을 대봐."
"서면의 공사장에서 노가다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배겨내지를 못하고 보름 만에
그만두고 ― 며칠 일자리를 구해 돌아다니다가 전봇대에 붙은 쪽지를 보고 광복동에 있는
중국집으로 가서 일했습니다. 이름이 산동반점(山東飯店)이었는데, 진씨(陣氏) 성을 쓰는 화
교가 경영하는 중국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고된데 월급은 적고, 또 잠자리도 식당문을
닫은 뒤 의자를 모아놓고 자야 하는 곳이라……"
그때만 해도 인철은 일본 밀항과 월북이란 터무니없는 혐의만은 벗을 자신이 있었다. 그
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인철이 대는 증거를 확인하는 눈치면서도 그들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꼬박 이틀 낮과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이제야 선심쓰듯 사실 확인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어이, 일어나. 다 왔어."
누가 옆구리를 찌르며 나직이 말하는 소리에 인철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곁에 붙어앉
아 있던 형사였다. 그새 기차는 도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속도를 떨어뜨린 기차의 차창에
비친 풍경으로 미루어 범일역(凡一驛)에서 부산진역 사이거나 부산진역에서 본역 사이쯤 되
는 것 같았다. 본역을 나올 때 다시 한번 서울역에서와 같은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이번에
도 인철의 승차권을 요구하던 검표원은 사상범이란 말 한마디에 군소리 없이 물러섰다. 그
의 위축과 경외를 드러내는 눈길이 인철의 의식에 긴장과 고양을 아울러 주었다.
"청림서적으로 가기 전에 일러줄 게 있어.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 서점 주인 작년에 죽
었어. 그리고 부인은 아무것도 몰라. 너를 기억조차 잘 못 하더라구.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너를 증명할 수 있는지 미리 생각해놔. 널 위해 미리 일러주는 거야."
역 앞에서 택시를 잡으며 문초에 참여했던 형사가 그렇게 귀띔해주었다. 인철은 그제야
왜 그 뻔한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렇게 오랜 반복 심문이 필요했던가를 이해할수 있을 것 같
았다. 주인 아저씨가 죽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 책을 구하게 되었는지를 증명해줄 사람은 없
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일면으로는 맥이 쭈욱 빠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팽팽한 긴장을 느
꼈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 밀항과 월북 및 남파(南派)로 이어진 저들의 시나리오를 부정할
수 있는 길은 그때 내가 부산에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인철은 그 증명에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보름 간격으로만 존재 증명
을 할수 있어도 밀항이니 월북이니 하는 터무니 없는 혐의는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
다. 그런데 그게 뜻밖으로 어려웠다. 서점 주인 아저씨는 흔히 '주당 맞았다'고 표현되는 일
종의 뇌일혈로 죽었고, 그 충격 때문인지 반쯤은 얼이 빠진 듯한 아주머니는 인철을 잘 알
아보지 못했다. 그보다는 인철이 대놓고 밥을 먹었던 근처 국밥집 아주머니 쪽이 유리했는
데, 그녀도 겨우 인철을 알아보았을 뿐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머니― 내가 저 책방을 그만둔 뒤에도 여기 몇 번 왔잖아요? 중국집 그만두
고 여기 와 막걸리를 마신 적도 있고― 서면 공사장에서 첫 간조(임금)받은 날도 여기 왔는
데……"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주는 것에 감격한 인철이 그렇게 그뒤의 존재증명까지 구하자 아주
머니는 갑자기 질린 얼굴이 되어 발뺌을 했다.
"그거는 잘로 모르겠는데. 밥집이라는 게 총각 하나만 왔다갔다하는게 아이이…… 거다가
그기 하마 몇 년이고? 보자, 사 년이 넘었는데 내가 우째 무시로 들락거리는 손님들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겠노? 말이사 바른말이따마는 총각이 하도 쎄워(우겨)싸이 글치, 지금 여기
이 대학생이 그때 안죽 애리애리하던 그 점원 아이가 맞는지도 아사무사(아리송)하다."
그뒤는 더욱 어려웠다. 중국집은 한국 사람 손에 넘어가 도대체 인철이 거기서 일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조차 없었고, 근처 대폿집도 주인이 바뀌어 인철에게 유리한 증언을
기대해볼 길이 없었다. 공사장도 그들이 말한 그대로였다. 봉제공장인가 뭔가를 짓는다고 들
었는데 공장 대신 이런저런 사무실이 들어선 오층 건물에 가서 4년전 그 건물을 지을 때 거
기서 한 보름 남짓 일했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을 찾기는 쉽지가 않았다. 다행이 인철이
한 달 남짓 몸담았던 가구공장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온전한 존재증명(存在證明)을 받아내기는 어려웠다. 인철이 친하게 지냈던
호마이카칠 기술자나 맘씨 좋던 공장장은 없고 그새 눈에 띄게 형편이 좋아진 듯한 사장만
그대로였는데 , 사복 형사가 신분증을 들이밀고 인철이 받고 있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은근
히 암시해서인지 사장의 대답이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글세…… 당사자가 여기서 일했다 카이 일하기는 한 모양입니더마는…… 전(前) 공장장
이름도 알고 고 사기꾼 같은 호마이카 칠쟁이도 아는 걸로 보아서는…… 근데 솔직히 말씀
드리믄 지는 저 학생 별로 기억에 없어예. 명색 사장이라 저끼리 들락날락하는 허드레 일꾼
들까지 눈영겨봐두지 않아서. 글타꼬 무신 대단한 월급쟁이라꼬 이력서 받고 채용한 것도
아이고오……"
그렇게 말끝을 흐니는게 되도록 인철이 거기서 일했다는 걸 부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러다가 형사가 더욱 꼬치꼬치 캐묻자 앞 뒤 없이 짜증까지 냈다.
"내사 참말로 이기 무신 난린지 모리겠다. 내가 알고 빨갱이를 일꾼으로 썼겠는교? 아매
그때 일손이 딸래(딸려) 이것저것 깊이 몬 따지고 허드레 일꾼 쓴 모양인데 참말로 저 총각
이 여다서 일했는지 아인지는 똑 부러지게 말할 자신 없구마."
"한번은 사장님게서 제가 책을 읽고 있다고 야단까지 치지 않으셨습니까? 한 가지라도 기
술이나 똑똑히 익혀 입에 풀칠할 궁리는 않고 책은 무슨, 하시면서 절 걷어차셨는데요."
인철이 그렇게 기억을 상기시켜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되도 않은 기 공부한다꼬 책 처억 펴고 앉았는 꼴 내 몬 보지. 글치만 그런 또달(등신)이
가 어디 한둘이래야지. 눈에 띄믄 한마디쓱 따꼼하게 했지마는 자네한테 그런 거는 기억 안
나는데…… 그래고 그게 바로 66년 8월이라꼬는 더 확인해줄 자신 없고오……"
그렇게 냉정하게 발뺌을 했다. 그때쯤은 인철의 위기감도 갈 데까지 가 있었다. 여기서 명
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나는 꼼짝없이 밀항자가 되고 월북자가 되고 만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푸라기라도 끌어쥐고 싶은 심경이었다. 인철은 안간힘을 다해 쥐어짠 기억력
으로 그때 일을 떠올리다가 문득 한가지를 더 기억해냈다.
"그때 사장님, 저 아래 진역 쪽 역마차 다방 마담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한번
은 사모님이 그 마담 머리끄덩이를 쥐고 싸우신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사장은 버럭 화까지 냈다.
"그거는 넘의(남의)사생활 아이가? 그래 그때 마담하고 쪼매 친하다가 마누라쟁이가 게거
품 물고 나서는 바람에 내 우새(창피당함) 한번 크게 했다. 와?"
그래놓고는 갑자기 사람이 변한 듯 차게 잘라 말했다.
"어디서 조(주워)들었는지 모리겠다마는 그걸로는 안 될 꺼로. 그거사 내뒤를 쪼매만 캐믄
금방 나오는 얘기이까는…… 미안하지만 내는, 내 기억에는 당신 같은 사람 일꾼으로 쓴 적
없다꼬, 형사님들도 그래 아이소."
인철은 그 말을 듣자 온몸에서 진땀이 솟았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뻔한 여섯 달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재(所在)조차 분명찮은 기간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
어서도 인철은 되도록 명백한 소재 증명을 남겨두려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북한 대사관이
나와있는 제3국을 여행할 때가 그랬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때의 그 막막하고 공포스런 체험
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날 인철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 것은 토성동의 그 한의원이었다. 비록 문제가 된 기간
이후지만 2년 넘게 그 집에 있었고, 함께 지낸 사람도 많아 거기 가면 유리한 방증(傍證)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택시 안에서 본 극장 간판 하
나가 무슨 계시처럼 인철의 눈길을 끌었다. '항도극장'이란 외화 재개봉관(再開封館)이었다.
"저어― 형사님, 만약에 말입니다. 저 극장에서 사 년 전 상영환 영화 프로들을 제가 알아
맞힐수 있다면 제가 그때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까?"
"뭐? 그게 무슨 증거가 돼?"
형사가 성의 없이 그렇게 받았다. 인철은 한층 간절하게 매달리는 기분으로 말했다.
"제가 그 기간 일본에 가고 월북까지 했다면 어떻게 부산 변두리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프로를 알고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건 나중에 이럴때를 대비해 따로 알아두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알리바이를 조작하려면 그보다 더 확실한 것도 많은 데 하필이면 극장 프로를 외
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다시 인철에게 유력한 증거 보강 자료가 떠올랐다.
"제 하숙방에 가면 옛날 일기가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은 뒤에는 일기에
그 감상문을 쓰는 버릇이 있는데, 그걸로 증명이 되지 않을까요? 일기까지 조작했다면 할말
은 없지만……"
그러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형사가 비로소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차를 돌려 그
극장앞에 세운 뒤 인철에게 먼저 물었다.
"그때 여기서 본 영화 제목 기억나는게 뭐, 뭐야?"
인철은 그 물음에 벌써 반은 구원받은 기분으로 옛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할지 모르지만 그 무렵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간 화이타의 초대(招待)」란 것이
있습니다. 율브리너가 총잡이로 나오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였습니다. 「로드 짐」이란 영화
도 그 무렵에 본 것 같은데 인상 깊었습니다. 「롱 십」이란 바이킹 영화도 있었구요. 히치
콕 감독의 영화도 한 편 기억납니다.「지난 여름 갑자기」였던 것 같은데요."
형사는 인철이 댄 영화 제목들을 꼼꼼하게 수첩에 받아적더니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이것들이 제대로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
그런 중얼거림에는 인철을 위해 걱정하는 울림까지 있었다. 한참 뒤에 극장에서 나온 형
사는 묘한 눈빛으로 인철을 보다가 슬쩍 물었다.
"너 정말 영화 한 편 보면 날짜까지 다 기억해 두냐?"
"그건 아니지만 그때의 어떤 상황과 얽혀 날짜를 기억하는 수도 있습니다."
"「간 화이타의 초대」란 영화가 66년 5월에 상영되었던 것은 어떻게 기억했어?"
"그때 날이 따뜻해 남방 셔츠만 입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극장 안이 추워 몹시 떨었거든
요"
그러자 형사가 다시 한번 인철을 살피다가 비로소 호의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어쨌든 상부에 보고는 드려보지. 하지만 일기 같은게 확실한 증거가 될지 몰라."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운 파출소로 인철을 데리고 갔다. 아마도 서울 시경
으로 전화를 넣으려는 것 같았다. 조금 자신을 회복한 인철이 그에게 새로운 주문을 보탰다.
"일기는 66년부터 있을 텐데요, 전부 가져왔으면 좋겠습니다. 또 66년 4월에는 제가 그 책
을 사게 된 경위가 소상하게 적혀 있을 겁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왜 그 책을 가지고 싶
었는지두요. 그것도 그 책이 일본이나 북한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제가 어쩌다 사게 된 것
이란 증거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인철을 구해준 것은 그의 기억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일기들이 되었
다. 기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와 그날 밤 늦게 시경분실로 돌아갔을 때 인철을 맞는 사람들
의 태도부터가 전과는 아주 달랐다.
"앞으로 조심해. 그리고 친구 주위해서 사귀구. 짜식들 말이야, 사상연구회면 사상이나 연
구할 것이지 난데없이 인공기(人共旗)는 왜 걸고 단파(短波) 방송은 왜 들어? 그러니 배후
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 거기다가 일본어판 사회주의 사상 전집이라― 너두 용궁 갔다
온줄 알아."
책임자인 듯한 중년이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인철을 대하는 태도는 이미 간첩 용의자
를 대하는 대공부서(對共部署)의 그것은 아니었다. 별다른 심문 없이 간단한 조서만 받고 그
밤 안으로 인철을 내보내주었다. 문제가 된 책만은 돌려주지 않았는데, 그것도 압수가 아니
라 소유권 포기 각서를 받는 형식이었다.
제 33장 나는 누군가
"엊저녁부터 새초롬한(흐리고 쌀쌀한)날이 똑 무신 일낼 같디, 참말로 일냈더라, 일냈어."
아침상을 물리기 바쁘게 실을 사러 시장 거리에 내려갔던 어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런 말과 함께 혀를 찼다.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명훈이 무심코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밖에 무슨 일 있어요?"
"사람이 얼어죽었다 안카나? 저짝에 탄리(炭里)라 카등강, 왜 세입자(貰入者)들 모예 있는
데…… 글세, 거다 있는 움막에서 알라(아기)가 하나 얼어죽었다 카드라."
어머니가 아랫목 이불 속으로 언 손을 디밀며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혀를 찼다. 그래도
명훈은 어머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로 아직 방밖을 나가보지 않아
바깥의 추위를 느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에이, 어머니두. 아직 동짓달도 다 안 갔는데 벌써 사람이 얼어죽어요? 그것도 집 안에
서. 잘못 들으셨을 겁니다. 어린애라니, 무슨 급성(急性)병이겠죠."
"아이라 카이. 시에서 대책을 늦가 세와조(줘) 그래 됐다꼬 세입자들이 난리라. 출장소(성
남출장소)에서도 쫓겨나오고……"
그제서야 명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탄리 근처를 상기해보았다. 그곳은 주로 동대문 쪽에
서 집을 철거당하고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판잣집이라고 내 집을 가졌던 사람들
은 진작에 20평씩 대지를 분양받아 집을 얽어나갔지만 세입자들은 서울시의 방침이 정해지
지않아 처음 실려온 제자리에 움막을 치고 대책을 기다렸다. 그런데 움막도 움막 나름이었
다. 그나마 돈이 있는 사람들은 판자와 거적으로 움막을 얽어 닥쳐올 겨울에 대비했다. 하지
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각목 몇 개와 거적을 걸어 겨우 바람이나 피했고, 더욱 심한 경우에
는 비닐로 하늘만 가려 비와 이슬에 젖는 거나 막을 뿐이었다. 기억이 거기에 이르자 비로
소 명훈도 어머니의 말이 사실일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명훈이 그렇게 어정쩡한 시인을 하며 담배를 달아 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있
었구나, 하는 막연히 딱한 기분뿐이었다. 하지만 담배 한 개비가 다 타기도 전에 명훈의 마
음에 알지 못할 변화가 일었다. 난데없이 갈수록 뚜렷이 불러오는 경진의 배가 그 사이에
끼여들기도 했다.
"아이, 니 어디 갈라꼬?"
담배를 끈 명훈이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걸치자 그새 뭔가 딴 생각에 잠겨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막연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던 명훈이 어머니의 물음에 무슨
암시라도 받은 듯 얼결에 대답했다.
"거기 좀 가보려구요. 탄리……"
"거다는 왜? 거다 니 아는 사람 있나?"
그 물음이 갑자기 명훈을 곤혹스럽게 했다.
"아뇨, 그저 남의 일 같잖아서……"
명훈은 기분대로 그렇게 대답해놓고 비로소 물었다.
"어머니도 가보셨어요?"
"갔다 온 사람한테 얘기 들었다 자봉틀(재봉틀) 실 사로(사러)간 점방에 그쪽에서 보고 온
사람이 있어 저어끼리 그래 떠들대."
어머니가 그래놓고 허술한 차림으로 나서려는 명훈의 주의를 주었다.
"그것도 뭔 구경 났다꼬 가볼라 카나? 가디라도 옷 든든히 입고 가래이. 바깥 날씨가 여
간 쌀쌀하지 않다."
그 바람에 명훈은 진작 꺼내놓기는 해도 아직은 철이르다 싶은 점퍼를 걸치고 방을 나왔
다. 밖은 어머니의 말처럼 찬 날씨는 아니었다. 명훈은 긴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걸음
을 빨리해 탄리 움막촌으로 갔다. 현장은 구경꾼이 몰려있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명
훈이 걸음을 빨리해 다가가보니 짐작대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움막이었다. 손가락만한 각목
몇 개로 까치집처럼 얽어 뼈대를 세우고 비닐을 덮어 겨우 비와 이슬이나 피할 수 있을 정
도였는데, 그곳에서는 출장소 직원들과 이웃 주민들간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출장소 직원들이 거적으로 움막을 감싸려 하고 있고 주민들은 그걸 말리고 있었다.
"사람 죽은 뒤에 뭐 하는 거여? 눈가림만 하면 되는 겨?"
"그 거적 절반만 미리 나눠줬어도 이런 꼴은 안 봤을 것이고마잉."
"순 나쁜 놈의 새끼들, 언제는 두 손 처매놓고 구경만 하다가 이기 무슨 짓들고?"
주민들이 저마다 출장소 직원을 나무라며 그들이 이고 온 거적들을 나꿔채 땅에다 패대기
쳤다. 출장소 직원들이 벌건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물거렸다.
"지금이라도……"
"촤롸(치워라),고마.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들기다. 어다서 얄팍한 수작 할라꼬?"
그러는 동안에도 움막 안에는 기척이 없었다. 벌써 시체를 옮겼나 싶어 명훈이 힐끗 들여
다보니 비닐이 너풀거리는 움막 안에는 삼십대 중반의 젊은 여자가 넋빠진 얼굴로 무언가를
꼭 안고 있었다. 아마도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의 시체 같았다. 그녀의 등에는 원래 그녀의
것이 아니었던 듯한 새 담요 한 장이 덮여 있었다.
열두 살에 6.25를 겪었고, 그뒤로도 험한 세상에서 끔찍한 꼴 많이 보아온 명훈이었다. 그
런데 그 무슨 감정의 과장인지 그날 명훈은 태어나서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고 있다는 기분
이었다.
"신랑은 며칠 전에 노가다 하러 서울 가고 아직 안 왔다며?"
"죽은 애도 애지만 그냥 두면 어른까지 죽겠다. 빨리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뭐 하는 거
야?"
"앰블란스 오믄 실어갈라꼬 기다린다 카네, 그냥 업고 갈라 카이 앙정 불정 죽기살기로
꼼짝 않을라 칸다꼬."
모인 아낙네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난데없이 한 불행한 젊은 남자의 얼
굴을 연상시켰다.
'저들의 죄는 무엇일까. 무엇이 저들의 불행에 원인이 되었을까.'
명훈은 습관적으로 그들의 개인적인 책임 혹은 불행을 추측해보았다. 역시 습관적으로 가
능한 여러 원인이 나왔다. 남편의 불성실이나 무능일 수도 있고, 아내의 낭비벽 혹은 치료에
비용이 많이 드는 질병일 수도 있었다. 명훈은 다시 한번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허름한 한
복을 걸친 채 넋을 놓고 있는 순박한 아낙의 얼굴에서는 그 불행과 관련된 어떤 특별한 혐
의도 찾아낼 수 없었다. 만약 책임이 있다면 아내와 자식을 그 허술한 움막에 팽개쳐두고
막일을 나가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 쪽에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다시 들려온 이
웃 아낙네들의 주고받는 소리가 있었다.
"애기 엄마도 애기 엄마지만 애기 아버지가 더 걱정이야. 돌아와 이꼴 보고 그냥 참아낼
까."
그렇다면 이제 그 움막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은 명훈이 알 수 없는 개인적인 불행이 그
원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명훈은 이상한 발상의 전환을 경험했다.
'아니, 이 끔찍한 일을 개인의 책이이나 예외적 불행으로 치부해버릴수는 없다. 어떤 이유
에서건 이런 일이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런 발상의 전환은 그 무렵 명훈이 겪고 있는 혼란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 명훈은 당연히 일자리부터 찾았다. 하지만 두달이 넘
는 그때까지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사무직 쪽을 기웃거렸다. 그
러나 중등(中等)과정이 거의 비어 있는 삼류대 야간부 일 년 중퇴로는 어림도 없었다. 학력
(學歷)을 보는 데서는 학력에 밀리고, 실력을 중시하는 데는 시험에 자신이 없었다. 또 공무
원이나 군속(軍屬)은 연좌제로 신원 조회에서 걸렸다. 다음으로 생각해 본 것은 기술직이었
다. 그 역시 기술이 없는 데다 새로이 기술을 익히기에는 너무늦은 나이였다. 기껏해야 싼
임금의 미숙련 노동자로 일하는 길밖에 없는데, 아직 그렇게까지 자신을 내던질 각오는 되
어 있지 않았다.
경진이 교원으로 나가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조금씩 거들어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명훈은 갑작스런 불안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직(無職)상태
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 같은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지금 이 사회 구조는 그 자체로도 생산력을 가진 자본에 의지할 수 없으면 지식으로 살
거나 노동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난느 머리로도 손발로도 살 수가 없고, 이윤을 추구할
자본은커녕 구멍가게를 열 밑천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암담해졌다. 그러다가 그 무렵 들어 전에 없던 의문이 일었다.
'물론 이렇게 되고 만 데는 나의 개인적인 책임도 있고 예외적인 불행도 있다. 하지만 그
렇다고 나 홀로 모든 걸 책임져야 할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이 구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생산해낸 것은 아닐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이 구조를 위해 나를 이렇게 몰
아온 것은 아닐까.'
명훈이 잠시 자기만의 어두운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와서 움막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차림이나 움직임으로 보아 인근에 사는 지방 주재 기자인 듯했다. 뒤이어 어딘가
한군데 몰려 있다가 달려온 듯 대여섯 명의 기자가 더해졌다. 그들은 생선 썩는 냄새를 맡
은 쉬파리떼처럼 움막 주변에 들어붙어 죽은 아기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여자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 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기자들은 취재원(源)을 구경꾼들 속에서 찾
기 시작했다.
"누구 이 집 주인 이름 아는 사람 없어요?"
"바로 옆집 주인은 누구죠?"
그들이 그렇게 외고 다니는 바람에 잠시 움막 근처가 소란해졌다. 그들의 행태를 잘 아는
명훈이었지만 그날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들의 시선은 사건의 외양에만 머물러 있을
뿐 누구도 의미에 관심을 가지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기자 하나가 다시 움막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명훈이 보니 방금 사진
을 찍고 있는 펜탁스 카마라 외에도 특별한 렌즈까지 부착된 카메라를 몇 개 더 목에 걸고
있는게 날라리 주재 기자가 아니라 본사에서 온 사진 기자 같았다. 사진을 찍는 방식도 그
전의 날라리들과는 사뭇 달라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예사롭지 않은 전문성을 짐작할 만했
다. 하지만 명훈을 참을 수 없게 한 것은 바로 그런 촬영 방식이었다. 다른 기자들이 움막
사람 합쳐 두어 장 찍는 시늉만 하고 취재에 들어간데 비해 그는 사진만을 목적으로 한 듯
각도와 배경을 달리해 거듭 셔턴를 눌러댔다. 그가 죽은 아이의 얼굴을 찍기 위해 포대기를
슬쩍 젖히자 그때껏 굳은 듯이 아이의 시체를 안고 있던 여자가 움찍하며 몸으로 렌즈를 막
았다. 그런데도 그 사진 기자는 이리저리 렌즈를 돌려대며 죽은 아이의 얼굴을 잡으려고 애
를 썼다.
"아주머니, 잠깐만요. 잠깐이라니까요"
보다못한 명훈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보쇼. 아무리 취재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거 아뇨? 죽은 애를 두고 뭐하는 짓이오?"
명훈이 등뒤에서 그렇게 나무라듯 따지는데도 사진 기자는 여전히 촬영에 열중해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까닭 모르게 치솟는 분노로 쭈그리고 있는 그의 등짝을 냅다 차버릴까 하
는데 누가 명훈의 등을 쳤다.
"명훈이 아냐? 여기서 뭘 해?"
명훈이 움찔하며 돌아보니 황석현이었다. 왼손에 두툼한 노트와 볼펜을 들고 있는게 그도
취재차 나온 듯 했다. 명훈으로서는 전혀 뜻밖이었다.
"황형이야말로 여기까지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데스크 특명이야. 사건 보도는 주재 기자가 보내는 대로 나가지만 박스 기사가 따로 하
나 필요하다나?"
"경찰청은?"
"출입처 갈렸어. 지금은 허울 좋은 기동 취재반이야."
"하지만 겨우 세 살바기 어린애 하나 죽었는데― 천하의 대동일보가 기동 취재반을 보
내?"
명훈이 짐직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받자 황이 정색을 했다.
"그건 아니지. 세 살바기 어린애야 어젯밤에도 수없이 죽었겠지만 노숙(露宿)이나 다름없
이 허술한 움막 안에서 얼어죽은 애는 얘뿐일걸. 그것도 서울에서 밀려나 철거민 가족은. 그
리고 이 사건에는 서울시의 도시 계획뿐만 아니라 신도시 건설 계획 전반에 걸친 문제점이
얽혀 있어. 아니 , 점점 늘어나는 도시 빈민 문제가."
"역시 대동일보구나."
명훈은 솔직하게 감탄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움막에 바짝 붙어 있는 사진 기자가
어깨에 멘 가방에도 대동일보의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런데 집이 이 근처야?"
"저기 언덕 쪽이야. 실은 우리도 이번에 철거민 분양증 사서 한 칸 얽었어."
"그럼 여기 산지 제법 됐겠네."
"이제 한 네댓 달 되나― 그런데 왜?"
"그만하면 이 바다 실정 훤하겠군. 잘 됐어. 그럼 여기서 인적(人的)사항 좀 취재한 뒤 나
하고 얘기 좀 하자. 기다려."
황석현이 그래놓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주민들을 상대로 취재를 하고 있는 기자들 중 하나
에게로 다가갔다. 대동일보의 광주 지국 기자 같았다. 그에게서 몇 가지를 자신의 취재 수첩
에 옮겨적은 황은 이내 명훈에게로 돌와왔다.
"어이, 박기자. 여기말고도 취재할 데가 몇 군데 있다고 했지? 어쨌든 신개발지 전모를 보
여주는 셈 치고 구석구석 잘 찍어봐. 나는 이 친구하고 가서 따로 심층 취재를 좀 해보겠어.
이따― 한시쯤 보자. 성남 출장소 앞에서 만나 점심이나 같이해. 나머지 스케줄은 그때 다시
의논하구."
황은 그제서야 움막에서 떨어지는 사진 기자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명훈을 바라다보았다.
"어디 가서 얘기좀 해. 아니. 집에 어머님 모시고 계셔?"
"그래."
경진이 우겨 어머니가 식모살이 그만두고 돌아온 것이 겨우 지난달이라 떳떳하지는 못하
대로 명훈이 그렇게 대답했다. 황이 그렇다면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집으로 가. 어머님게 인사두 올리고……"
그러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구급차 한 채가 근처 공터로 들어왔다. 황과 함게 자리를
뜨려던 명훈이 마무리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발길을 멈췄다. 사람들이 그제서야 죽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곁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여자도 한 번 경험이 있어선지 말은 없었지만 명
백히 경계를 드러내는 자세로 웅크렸다.
"정석 어머니, 이제 가시지요."
다가갔던 허름한 차림의 남자들 중 하나가 그렇게 여자에게 말을 붙였다. 여자가 포대기
를 꽉 껴안으며 비로소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돼! 우리 애야!"
"알라를 뺏을라 카는 게 아이라요. 같이 퍼뜩 병원으로 가입시다. 빨리 가믄 알라를 살릴
수 있을 동 모르잖습니꺼?"
"우리 애긴 안 죽었어. 정석이는 잠들었다구. 애기 아버지 돌아오면 깨날거야."
그러자 처음 말을 붙였던 사람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달랬다.
"정석 아버지도 병원에 있어요. 기다리니까 어서 일어나십쇼."
다른 사람들도 달려들어 그녀를 움켜잡았다. 여럿이 힘으로 들어서라도 구급차로 옮길 생
각인 듯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그녀의 눈길이 획 바뀌더니 갑자기 온몸으로 저항하기 시
작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안 그랬어! 새벽에 하도 추워 깨어보니 그때 벌써 애가 이상했어. 흔
들어도 깨지 않고 자꾸자꾸 볼이 식어갔어! 그래도 날만 밝으면, 하고 있었는데 영 깨나지
않아. 하지만―여기 귀를 대고 들어봐. 가슴도 뛰고 숨소리도 들려. 가끔씩은 몸도 움지락거
려. 우리 애기는 깊이 잠든 거야. 깊이. 깊이. 그래서 깨우지 않고 있는 거야. 그냥 재워두고
있는 거라구……"
여자가 죽은 아기를 안은 채 앰뷸런스에 들려 올려질 때까지 비명처럼 외친 말들을 조리
있게 연결시키면 대강 그랬다.
"아이고, 이기 누구로? 그때 그 학생 아이가? 그때만 해도 애리애리해비디(보이더니) 그새
어른이 다됐네. 인제 뭐라꼬 부르노, 어예튼 들어온나."
명훈이 황과 함께 돌아가자 어머니가 한눈에 황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황도 생각 밖으
로 깊은 감회를 드러냈다.
"그간 고생 많으셨지요?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바쁜 사람이, 내가 해준 기 뭐 있다꼬……"
"아닙니다. 어쩌면 이렇게 햇볕 보고 사는게 어머님 덕분인지도 모르죠. 그때 제가 받은
돈도 어머님 형편으로는 아주 큰돈이었을 텐데……"
"별소리를…… 내가 해준 기 뭐 있다꼬. 결혼할 때 부조한 거만 해도 그때 준 돈 몇 곱은
될따."
"아닙니다. 사실은 그때 돌아와 바로 자수(自首)하고 다시 이길로 들어서게 된 겁니다. 더
숨어다녔다면 혐의만 키우고 지금쯤은 정말로 감옥 깊숙이 처박히게 되었을는지도 모르지
요. 그쪽으로는 거물(巨物)이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누구 공(功)이든 그거는 잘된 일이따. 사상 그거 암만 쫓아 댕기봐도 남을 거
별로 없다."
"뭐 사상이랄 것도 없지만……"
둘이 그렇게 주고받는 걸 보고 명훈은 묘한 감동을 받았다. 단 한 번 만난 사람들끼리도
저렇게 깊은 친분이 맺어질 수 있구나, 싶으면서 황과의 지난 인연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미군 부대에 함게 근무할 때로부터 4.19 직전부터 한방에서 지낸 몇 달, 그리고 단속적이
기는 하지만 2년을 넘기는 법이 없었던 만남들로 채워진 둘의 십여 년이었다. 그러나 그 동
안도 명훈은 한번도 그에게서 대등한 친구로서의 기분을 느껴보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혈
연과 같은 끈끈한 정뿐 정신의 교류를 나누고 있다는 기분은 없었다. 아마도 만날 때부터
존재했고 그뒤로도 끝내 좁혀지지 못한 학력과 지식의 격차에다, 갈수록 벌어지는 사회적
신분의 격차를 명훈이 너무 예민하게 의식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어쨌든 너는 내 친구다, 오래된 친구― 그런 기분이 명훈으로 하여
금 전보다 훨씬 대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게 했다.
"보자, 기자질 한다 캤제. 무슨 신문이라꼬?"
지난 감회는 이만하면 풀 만큼 풀었다는 듯 어머니가 불쑥 물었다. 명훈이 민망한 기분으
로 황을 대신해 말을 받았다.
"어머니두 참 기자질이 뭡니까? 기자질이…… 대동일보라고 하잖았어요?"
"대동일보― 일제 때부터 대단한 신문이랬제. 해방 뒤에는 우익으로 돌아섰지마는…… 그
라믄 황기자라 부르꾸마. 황기자, 뭐 해주꼬? 우리 집에는 차나 술이나 지금 가서 사다 준비
해야 되긴 마찬가지따. 오랜 만이이 고마 술 한잔 할래? 그래고 점심이나 먹고 가라."
"대낮부터 무슨 술은― 황형은 지금 일하는 중입니다."
이번에도 명훈이 나서서 그렇게 막았으나 황은 생각이 달랐다.
"아닙니다. 술 한잔 주십시오. 대신 막걸리루. 조금만요. 점심은 사진기자와 함께하기루 했
으니 번거롭게 준비하지 마시구요."
"사진 기자라고? 그럼 같이 데리고 오지 왜? 어디 있노? 내 불러오까?"
"지금 취재중이에요. 사진 찍어야 됩니다. 저도 여기 오래 앉아 있을 시간은 없구요. 그냥
옛날 처럼 막걸리나 한잔 주시라니까요."
황석현이 그렇게 말려 자리는 둘만의 낮술자리로 낙착을 보았다. 어머니가 주전자와 장바
구니를 찾아들고 집을 나간 뒤에 황이 두툼한 취재 노트를 펼치면서 말했다.
"술상 들어오기 전에 취재나 좀 하자."
"내가 뭐 아는게 있어야지. 그건 이따가 밖에 나가서 딴 사람에게 알아보고 옛날얘기나
좀 하지."
명훈이 그렇게 사양하자 황이 농담 비슷하게 받았다.
"아냐, 네가 가장 적절한 취재원(源)일 수도 있어. 네 아는 것만 물을게. 이집 짓는 데 얼
마 들었어?"
"그거야 알지. 그렇지만 어떤 표준은 되지 못할걸. 내가 인부들하고 같이 일해 지은 집이
라서."
"그렇다면 그런 형태의 표준 건축비라도 되겠지. 그래. 얼마 들었어?"
"건축비만?"
"그럼 집 짓는데 건축비말고 뭐가 더 있어?"
"땅값도 있고 세금도 있지."
"땅은 분양증 사서 지은 거라며. 그리고 여기서 집 짓는데 세금이 있어?"
"분양증을 샀다는 것은 철거민들한테서 분양받을 권리를 샀다는 뜻이야. 아직 서울시에
내야 할 토시 분양 대금은 책정되지도 않았어. 그리고 아무리 철거민 이주 지역이라지만 집
을 지으면 취득세를 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고."
"그건 얼마나 돼?"
"그것도 아직 나와봐야 돼. 법대로라면 꽤 될걸."
"설마 서울의 일반 주택하고 같기야 하겠어? 분양 대금도 그렇고, 좋아. 어쨌든 순 건축비
만 말해봐."
"집은 담장까지 끝내고 나니 한 12만원 남짓이었어. 다른 사람들 시키면 이런 규모는 15
만 원에서 20만 원까지 들 거야."
"몇 평이지?"
"건평만 열두 평. 그러나 눈치 보아가며 달아낸 게 있어 실제는 열다섯평쯤 될꺼야."
"골조는?"
"벽돌이야. 시멘트 벽돌."
무엇 때문인지 황은 한동안 집 짓는 일만 꼼꼼히 물어 보았다. 그러다가 신개발지 일반의
문제점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술상을 들여올 무렵이었다.
"마이 먹지 못할 꺼라 카이 간단히 채렸다. 술은 오이(온전히)두 되고."
어머니는 황이 뭔가를 노트에 옮겨 적는 걸 보고 술상만 들인 뒤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곳의 불결한 위생 문제라든가 모자라는 공동 시설, 후생 복지 등은 이미 여러 번 보도
되었고, 나도 좀 들은 게 있어. 부동산 투기도 몇 번 다뤄줬지. 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아직
석연찮은 게 있어. 혹시 그 쪽 좀 알아?"
그 말에 명훈을 좀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두 달 일 없는 나날은 보내면서 명훈이
눈여겨보게 된 것은 줄지어 들어선 천막 복덕방이었다. 그때는 이미 서울시의 전매 금지 공
고가 나 많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명훈의 본능적인 후각은 거기서 부패한 돈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덕방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건달들 때문이었다. 이른바 퇴역 주
먹들이었는데 그들 나름으로는 몇 갈래 계보까지 형성하고 있는 듯 했다. 주먹이 꾀는 곳은
무언가 먹을 게 있다-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명훈은 짐짓 복덕방 쪽을 외면해오고
있었다.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자발적인 결의 이상의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쪽은 솔직히 별로 신경 안 써 아는 게 없어."
"그래도 너는 바로 이해 당사자 아냐? 그것도 가장 예민한 이해 당사자?"
"내가?"
"분양 권리증, 여기 말로 따기 사서 집 지었다며? 그런데 전매 입주자 불하 가격은 아직
미정이고..."
"아 그거, 그거야 서울시에서 하는 일이라..."
"그렇지 않아. 내가 궁금한 것은 그래도 아직 은밀하게 살아 움직이는 부동산 경기야. 가
격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딱지는 전매되고, 돈 있는 사람들이면 모두 이곳을 기웃거린다는
거야."
"모르고 막차 타는 사람들이겠지 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니까. 뭔가가 이곳 부동산 경기를 되살리려는 움
직임 같은 게 느껴진다구. 첫째로는 서울신데- 막상 전매 금지 공고를 내놓고 보니 이곳 경
기가 말이 아니잖아? 부동산 경기만 죽은 게 아니라 건축 경기까지 죽어 이곳 영세민들의
생계까지 떠맡아야 할 처지가 되었단 말이야. 거기다가 따로이 개발비를 확보하지 못한 서
울시로 보면 처음부터 이곳의 도시 개발은 전매 입주자, 특히 중산층 전매 입주자에 기대하
고 있었는지도 몰라. 철거민들이야 뻔하잖아. 설령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 해도 이곳에 설 것
은 판잣집과 움막밖에 없어. 결국 이 신도시가 재대로 개발되려면 돈 많은 전매 금지 공고
로 그걸 막아놨단 말이야.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조처라지만 그건 자가당착이야. 어떤 식
으로든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 살이 있는 부동산 경기의 한 흐름은 그 당착을 꿰뚫
어본 데서 나온 것인지도 몰라."
"다른 것은?"
"역시 내가 유심히 보고 있는데- 도시 빈민 문제의 출발일 수도 있는 가난의 권리화 현상
이야,"
"가난의 권리와?"
"그래, 내가 붙여본 이름인데- 다수의 조직된 가난이 가지는 힘을 말해. 원래 자본주의 논
리로 가난은 불행이고 치욕이야. 그러나 자본주의가 가지는 부의 집중 경향 때문에 그들 가
난을 도시 주변에 모음으로써 이제 다수가 된 가난은 불행과 비참으로 남겨지기를 거부하고
있어. 가난은 사회에 대해서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힘이 되고 권리가 된 거야. 어쩌면 사
회주의는 그 권리가 가장 논리적이고 성공적으로 조직된 예의 하나일지도 모르지. 가난을
가장 고귀한 신분의 징표로 삼고 있으니까."
"그럼 여기서도 사회주의 의식이 자라간다는 뜻이야?"
"그렇게 자라갈 수도 있겠지. 아니, 반드시 그렇게 자라갈 거야. 하지만 아직은 6,25 때 받
은 혹독한 불의 세례가 기억에 남아 있어 곧장 그리고 가지는 못할 거야. 다만 그때그때 활
용할 수 있는 한 권리는 될 수도 있을 거란 추측이야."
"설마..."
명훈은 아무래도 황석현의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석현은 흔들림 없는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네가 보기에 전매 입주자가 얼마자 될 것 같애?"
"글쎄... 세 집에 하나? 아니면 절반?"
"그들은 살이들이 어떤 것 같애?"
"비슷비슷하지 뭐. 어렵게 어렵게 살다가 겨우 집 한 칸 마련한 사람들이 태반이야. 그것
도 서울서 한 시간이나 떨어지고 아직은 허허벌판인 위성 도시에다..."
"역시 생각대로야. 서울시는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어. 지금 전
매 입주자들은 부동산 투기꾼들이 아니라 마지막 실수요자야. 철거민이나 크게 다를 바 없
는 처지의. 투기꾼들은 그전에 차익을 빼먹고 이미 손을 씻은 상태라구. 또 아직 남아 있다
해도 마찬가지야. 마지막으로 집을 지을 사람들은 결국 실수요자들이니까. 돈 있는 사람들이
미쳤다구 이런 곳에 겨우 열 평, 스무 평짜리 대지 사서 집을 지어?"
"그건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힘이 돼?"
"생각해봐. 15만 가구의 삼분의 일이면 5만 가구. 그것도 이 집이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빈
민층 5만 가구를 어떻게 함부로 대해? 그것도 언제든 그들 편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빈민층
10만 가구가 그들과 붙어 있는데. 바로 그거야. 아직까지도 분양증 전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힘을 믿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만 명훈에게 실감나지 않기는 매일반이었다. 어쨌든 전매 금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원칙이었고, 그것은 금지 공고로 재확인되었다. 그런데 명백히 규정을 어긴 사람들이
아무리 다수인들 무슨 힘이 있겠는가.
"우선 너부터 생각해봐. 만약 서울시가 네게 전매 금비 법규를 어겼다구 엄청난 분양 대
금을 납입하라고 한다면 가만히 있겠어? 또 실제로 그걸 물 힘은 남아 있는 거야? 다른 사
람도 같다구. 한 배를 타고 있는 같은 계층이야."
황석현의 그 같은 말에 명훈은 묘한 충격을 받았다. 말의 내용보다는 계층이라는 단어 때
문이었다. 그 동한 여러 계층 사이를 떠돌며 살았지만 명훈은 한번도 자신이 그들과 같은
계층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떠돌다가 잠시 이곳에 들른 사람, 곧 떠날 사람- 그런 기
분으로 그들와 어울리고 헤어져왔다.
"그런데 그 계층이란 말, 그거 무슨 특별한 용어야?"
명훈이 불쑥 그렇게 묻자 황석현이 의아한 얼굴로 명훈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니고- 그저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층이라는 뜻이지."
"사회적 지위라면?"
"글쎄... 이 사회에서는 경제력과 관계된 것이 가장 우선으로 고려되지 않을까?"
황석현이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시 한번 명훈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마도 계층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특히 네가 여기 이들과 같은 계층이
라는 말이."
"실은 그래. 나도 벌써 넉 달째 이들과 함께 살고 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들 속에 있
게 될 거야. 실제 삶의 환경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지식과 경력도 이들과 나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잣대는 못 돼.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한번도 이들과 내가 같은 부류라고 생
각해본 적은 없어."
그러자 황석현은 갑자기 중요한 것을 상기했다는 듯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러보 보니 나도 오래 궁금하게 여겨온 것이 있어. 도대체 너는 누구야? 옛날 미군 부
대에서 만날 때부터 그랬어. 네게는 어딘가 뒷골목의 타락과 범법의 냄새 같은 게 배어 있
었어. 그런가 하면 이해 못 할만큼 순수한 이상과 열정이 아울러 느껴지고. 너와 함께 보낸
4,19 때도 그래. 깡패들의 패싸움판에서 진정한 너를 보았다 싶으면, 의거 부상 학생에, 대한
문예반의 시인 지망생이 되어 나타나고, 부패한 정치꾼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게 안타깝다
싶으면, 어느새 지난 시대의 체험으로 곰삭은 아나키스트의 충실한 제자야. 심지어는 군대에
가서도 그랬다며? 5,16 날 반란 진압군으로 출동했는데 중앙청 앞에 이르러 보니 혁명군이
되어 있더라구? 출신도 그래. 어김없이 날 때부터의 도회지 사람이라고 보았는데, 알고 보니
사백 년 유서 깊은 문중의 큰 집 장손이야. 그것도 네 말마따나 상것들 같으면 종손 소리를
듣고도 남을 12대 장손. 그래서 고색창연한 기분으로 바라보려 하면, 어느새 월북한 골수 남
로당의 맏이가 되어 경찰의 감시 아래 있는 거야. 여자도 마찬가지야. 프로스트의 시를 주고
받으며 사귀다가 미군 고급 장교에게 빼앗긴 여대생 애인이 있는가 하면, 한눈에도 화냥기
가 철철 넘치는 백치같은 여자와 싸구려 여관에서 뒹굴어. 정신적인 부분은 더하지. 어떨 때
는 그야말로 몽매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어둡다가 어떨 때는 뜻밖의 예민함으로 시대를
읽어. 마비된 의식을 안타깝게 여기다 보면 놀랄 만한 감수성으로 사회 현상들을 소화해내.
실은 말이야, 원래부터 공통점이 별로 없고 그나마 갈수록 그 공통점이 줄어가는 우리 사이
를 이토록 길게 이어가게 한 것도 그런 네게 내가 느끼는 신비감에 가까운 혼란 때문인지도
몰라. 한참 너를 만나지 못하면 그뒤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그랬었나?"
명훈은 황석현의 혼란을 인정하기보다는 그가 뜻밖으로 세밀하게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해 그렇게 말을 받았다. 무엇이 그를 자극했는지 황은 원래의 주제를 잊은 듯 한
층 감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뒤도 그래. 개간을 끝내고 겨울에 나는 찾아왔을 때 너는 신선한 충격까지 주는 '상록
수'였어. 하지만 그해 가을 너를 찾았을 때는 이미 네 말마따나 '시드는 대지'의 비틀거리는
주인이 되어 있더군. 말은 여전히 농촌 재건의 기수였지만 내가 느낀 것은 머지않은, 불가피
한 이농이었지. 그런데 이 년 뒤 너는 또 전혀 예상 밖의 인물로 서울에 나타났어. 봉급보다
이자 수입이 많은 도시의 예비 소시민이랄까. 어쨌든 아주 성공적인 서울 편입을 보여주더
군. 반년도 안 돼 네가 떼인 돈을 찾기 위해 내 힘을 빌리러 왔을 때도 그렇게 급속한 탈락
을 예상하지는 못했어. 그러나 어느 날부터 다시 소식이 끊어지고, 이년 뒤 대낮부터 술 냄
새를 푹푹 풍기며 나는 찾아왔을 때는 다른 분위기였지.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옛날
에 맡았던 그 뒷골목의 썩는 냄새가 났어. 그러다가 이 가을의 갑작스런 결혼과 이 철거민
이주지에의 정착- 도대체 너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해? 너는 누구야?"
"글쎄, 나도 모르겠어. 왜냐하면 그 어떤 나도 내가 결정했던 것은 아니니까. 듣고 보니
나도 꽤나 요란한 변화를 겪으며 산 것 같은데- 실상 그 주체인 내게는 모든 게 한 끝에
이러진 흐름이었어. 순간 순간의 결정은 있었겠지만 지나고 보면 나는 그저 떼밀려올 것 같
은 기분이라구. 어떤 구조가 저항 못 할 힘으로 나를 자기 속에 우겨넣고 있는 과정이랄
까..."
"그렇지만 내가 너를 지금의 외양만 가지고 도시 빈민 계층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때 너는
단호하게 부인하지 않았어? 그건 네가 누구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야. 도대체 너는 누구
야?"
황석현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거듭 물었다. 원래 명훈은 그런 물음에 대해 생각
해둔 게 없었다. 그러나 황의 질문을 받는 사이에 문득 답이 떠올랐다.
"떠도는 자- 이것도 계층이 될는지 모르지만."
"떠도는 자? 말뜻대로라면 부랑민, 혹은 부랑 인구라는 게 있기는 하지. 그러나 그것은 어
떤 계층이라기보다는 일시적 상태를 가리키는데."
"비슷한 말일 수도 있는데 그대로는 아니야. 내 이해가 옳은지 모르지만 부랑은 어떤 사
회적 사건 혹은 물리적 사태에 의해 떼밀린 상태로, 그 원인이 되는 사태가 해결되면 그런
상태도 해소돼. 그런데 내가 말하는 떠돎에는 의식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 의식을 획득한
의도적 부랑이라고나 할까."
"그럼 그 떠돌이 의식은 뭘까?"
"도달 불가능한 것에의 지향? 그 때문에 떠돎이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현상이
되게 하는..."
명훈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으로, 그리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눈부신 언어적 순발
력으로 나신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정확하게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것도 의식의 내용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도달 불가능한 지향이란 무얼 말하지?"
"이 세상에서는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말이 될까?"
"그건 또 왜 그래?"
"내리고 싶은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나 아직 오지 않는 미래 이상향에 있으면 그
렇게 되겠지."
명훈 속에 있는 시인은 조금 전까지의 자기 해석을 잊고 감성적인 미화와 변명에 빠져들
기 시작했다. 황석현이 그 모순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너는 번번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잖아? 그 달성에 꽤나 집
착했고. 거기다가 조금 전에는 그저 어떤 흐름에 떼밀려온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어? 어떤
구조가 저항 못 할 힘으로 널 우겨넣고 있다고도."
따지고 보면 명훈의 그런 모순은 그 무렵 들어 분열을 시작한 자아에 있었다. 자기 내부
에 갇혀 있는 의연이 자신의 실패를 자신에게서만 찾았다. 욕망과 능력의 부조화에 혐의를
걸고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을 한탄하기보다는 욕망이 지나치게 컸음을 나무라는 식으로. 그
러나 사회와 접촉을 시작한 자아는 자신의 실패를 전과는 다르게 설명하고 싶어했다. 어떤
음험한 구조가 있어 그 필요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몰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출
발한 일종의 사회적 자기 변명이었다. 하지만 명훈은 아직 그 모순의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의 반문에 잠시 당황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어떻게든 부랑민과 나를 변별시키고 싶은데- 다르다면 그렇게밖에 구별할 수 없어
서. 하지만 내가 어떤 구조에 끼여 점점 그것에 원하는 형태로 확정되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사실이야. 내겐 아무 선택도 없이 비자발적으로..."
"나는 네 삶에서 기본 계급으로 편입되기는 희망하면서도 끝내 편입에 실패한 주변 계급
의 한 양태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부르주아에도 프롤레타리아에도 편입될 수 없는
봉건 영주와 농민과 수공업자를 버무려놓은 듯한."
낯선 용어들이긴 했으나 명훈은 황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뜻
정확히 자신을 파악한 듯도 했지만- 아직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설명하는 한 방식은 되겠지. 하지만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네. 그 설명에는 정
신적인 요소가, 특히 주관적인 의식의 부분이 너무 무시되어 있어. 나는 그냥 떠도는 자로
남겠어. 아직은 나 자신을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논의를 얼버무렸다. 그제서야 황도 너무 길을 돌았음을 느꼈는디 다시 취재로 돌
아가 단지 내의 다른 문제점을 묻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인가- 황이 돌아간 뒤에도 명훈은 그대로 술상머리에 앉아 조금 전에 얼버무린
논의를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이미 낮술이 올랐는지 정연한 사고는 이어지지 않고 아슴아슴
잠만 왔다.
"명훈아, 명훈아이. 여 쫌 나온나 보자."
갑자기 어머니의 절박한 부름이 명훈을 막 빠져들려는 낮잠에서 끌어냈다. 놀라 문을 열
고 내다보니 장바구니를 들고 마당에 서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시퍼랬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니."
"얼른 옷 입고 함 나와바라. 이거는 참말로 그양 넘어갈 일이 아이라. 이것들이, 이것들이
참말로- 아무리 사람이 망해 저어하고 한 구딩에 산다 캐도..."
"글쎄 무슨 일인데요?"
"암만캐도 황기자 점심은 끼려(끓여) 먹이야 될따 시퍼 장에 갔다 오는데, 아이, 세상에
요런 못된 쌍놈들이 있나? 조 앞 길모팅이 복덕방 천막 있제? 고 앞은 지나오는데, 아이 고
놈들이, 고놈들이..."
어머니는 분해서 숨이 막히는지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고 복덕방 살짝곰보하고 얌생이 쐼지(암소 수염)하고 염감탱구 몇이 술을 처먹고 있길래
못 본 척 지내오는데 말이라- 그 중에 한 눔이 길을 척 막으면서 술 한잔 하고 가라 안카
나. 하도 어척(어처구니)이 없이 그양 피해 올라 카는데 그기 주척주척 길을 막고... 장다래
끼(장바구니)를 부뜰고... 참 이거, 세상이 어예 될라꼬 이래노?"
어머니는 밖에서 당한 일은 그렇게 늘어놓다가 아직도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명훈에게 화
를 냈다.
"자가 얼릉 옷 입고 나오라 카이, 워 하노? 에미가 이 꼴을 당했는데 그래 뻘쭈미(멀거니)
내다보고 구경만 할라 카나?"
그제서야 명훈도 벗어두었던 점퍼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새 마루에 걸터앉은 어머
니는 분을 못 이겨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도 뿌들고 안 놔줘, 쌍놈도 아이고 대낮에 왜 이래노, 카미 좋은 소리로 나무랬디- 아
이, 그 쌍놈들이 입에 못 담을 소리를 마구 안퍼대나? 지보고 욕하고, 말 놨다꼬... 이거 참
말로 세상이 어예 될라 카노? 아무리 세상이 망했지마는 지가 어예 내보고 호년('년'이라고
하는 것)을 하노? 니 얼릉 가봐라. 가사 내한테 와 비라(빌라) 카고, 말 안 듣거든 고놈의
매떼기(메뚜기) 같은 영감탱구 땅에 태기(태질)라도 쳤뿌래라! 고 자발없는 주딩이를 문땠부
든동(문질러버리든지)..."
어떻게 보면 억지스럽기조차 한 어머니의 결벽이요 자존심이었다. 네 아이들 거느린 홀어
머니로서 전쟁 뒤의 험한 이십 년을 헤쳐왔고, 마침내는 식모살이까지 경험한 터였다. 그런
데도 반상의 문제, 특히 계급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에는 도무지 참지를 못했다.
"우리가 여기 와 이래 사이 저하고 똑같은 줄 아는 모양이제. 어디서 씰레(쓸려)왔는지 씨
도 성도 모르는 것들이, 사람을 어예 보고... 숭악한 개똥 통천이들이. 눈 코 붙었으믄 다 같
은 사람인 줄 아나..."
어머니와 같은 논리 구조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자기들을 다르게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하기는 명훈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감쟁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명훈도 그렇게 내뱉으며 신발 끈을 조였다.
제34장 떠나기 전날
"변경의 개념은 이만하면 거친 대로 정리되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 땅의 상황을 규정
하는 데 그런 개념이 필요한지는 아직도 애매한 학생일 있을 것 같아 그 현실적, 구체적 적
용을 살펴볼까 합니다."
김시형 교수의 특강은 이제 마무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보다 더 세련되고 정밀하기는 하
지만 변경의 개념은 전에 황석현에게서 이미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라 느슨한 자세로
듣고 있던 인철은 거기서 조금 긴장했다. 황석현에게 들을 때 느꼈던 추상적으고 애매하다
는 느낌이 이제 덜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두 제국의 변경이 이 땅에서 맞닿아 있다는 것은 경제 구조건 정치 행태건 남과 북 모두
에게 어떤 기본틀을 주게 됩니다. 먼저 경제 구조를 살펴보면 남과 북은 기본 구조를 피원
조 경제 혹은 지지 경제란 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들로 분열되
면서 남과 북은 모두 하나의 독립되고 자족한 경제 단위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
기다가 체제 경쟁이 강요한 우의는 두 제국 모두에게 원조란 이름의 투입을 불가피하게 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에 있어서는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입니
다. 피원조든 지지든 거기에는 핵심과 변경간의 강한 연계 혹은 예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거
기서 벗어난 자립을 추구할 경우 두 제국을 그 속성상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
제적 잉여 가치의 착취가 목적이 아니고 그걸 위한 구조도 갖추지 못한 소비에트 제국에게
는 북의 경제적 자립 노력에 당분간은 우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일방적인 되어 있
는 원조나 증여를 줄이면서도 제국의 변경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확인된 바
로는 자립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의 경제는 상당한 성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궁극
적으로 국제적 잉여 가치의 획득이 목적인 아메리카제국은 남의 경제적 자립에 반드시 우호
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소비에트 제국과의 경쟁 때문에 최소한 변경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서는 번서으이 외양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협조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언젠가는 국제적 잉여 가치의 착취 구조로 기능할 여러 교환 구조, 곧 국제 시장의 존
재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남에게 추구되고 있는 여러 경제적 자립의 노력은 열에 아홉
하청 경제나 마름 경제의 형태로 이룩된 공산이 큽니다. 하청 경제나 마름 경제는 국제적
교환 구조를 통해 당장은 자립한 듯이 보이지만 언제든 국제적 착취 구조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경제 구조를 말합니다.
정치적 행태에서도 두 제국의 변경이 맞닿아 있는 이 땅에서는 특이한 표출이 예견됩니
다. 맹방 혹은 동지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제국와 변경간의 기본틀은 종속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소비에트와 아메리카 두
제국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모범적인 측면에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그 종주권을 승인하며 소제국 혹은 핵심 편입을 지향하는 형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변경
이란 특수한 주변은 특별한 왜곡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변경의 지도자들이 가지는 권력도
권력이며, 그것은 도취하기 쉬운 미각과 부패하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
패한 권력, 치욕에 빠진 권력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을 일인 독재와 장기 집권입
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이미 25년 집권으로 그 모두가 현실화한 감이 있고, 남도 실패는 했
지만 그 시도로 이어져왔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것은 부패한 남과 북의 권력이 두 제국 모드 싫으면서도 용인할 수밖에 없는 변경적인 상황
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적대 제국에는 둘을 보태게 되는 변경의 특수
한 산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정치적 자주성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핵심과
주변의 문제인 경우, 주변의 정치적 자주성은 그 권력의 정당성과 비례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제국의 변경이 맞닿아 있는 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정치적 자주성이 오히려 그 권력의 부
패나 타락과 정비레할 수도 있습니다. 사악한 종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주인의 약점
을 잡고 대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떤 제국의 이데올로기도 변경 권력의 부패와 타락
에 우호적일 수는 없지만, 또한 그들은 자극해 자신은 잃고 적대 제국에게 보태 결과적으로
둘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상태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가정이지만 한 가지 예측을 하겠습니다. 남, 북 어느 쪽이든 정치적 자주성을 그
체제 선전의 맨 앞머리에 놓게 되는 말이 오면 그때는 그 권력의 부패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북에서 수정주의 이론이 나오거나 나아가 주체적인 이데올로
기가 창안되어 선전되기 시작하면 북은 심각한 '권력의 치욕'에 빠져들고 있다고 보아도 크
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남에서 우리식 혹은 토착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거나, 나
아가 독특한 민족주의 이론이 자유민주주의에 대치되는 날이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적 재앙의 예고가 될 것입니다."
김교수의 특강은 대강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러나 아직 후기 자본주의롸 산업화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인철에게는 하청 경제, 마름 경제란 말이 주는 어두운 인상
뿐, 그가 말한 경제 구조가 변경 상황이 반영된 구체적인 현실 해석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또 북한의 정권 세습도 가시화되지 않고 남한의 유신의 기도 또한 그 당사자에게까
지도 하나의 막연한 구상이던 시절이어선지 마지막에 덧붙인 예측도 절실한 경고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에, 이로써 한국 현대사 특강 마지막 시간을 마치겠다. 지난 시간과 이 시간의 변경 논의
에 대해 특별히 의문이 있는 사람은 지금 질문하도록-"
강의를 마친 김교수가 교탁을 정리하며 말투를 바꾸어 질문을 유도했다. 원래 그 강의를
들으려고 마음먹을 때 인철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황석현을 통해서 들은
것이나 김교수가 어떤 계간지에 발표한 변경론을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들이었다. 뭉뚱그려
말하면, 그들의 논의에서 보이는 결정론적인 구조와 역사적 비관주의 관점에 대해서일 것이
다. 하지만 자신의 정규 수강생이 아니라는 게 인철을 머뭇거리게 했다. 그 때 한 학생이 손
을 들고 일어섰다.
"먼저 지난 한 학기 열강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마지막 두 시간 변경에 관한 논의는 여러
가지로 저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
것은 변경로느이 관념 체제가 어딘가 닫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떤
상황도 고착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마치 두 개의 제국과
그 변경은 어떤 확정된 불변의 세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경과적, 한시
적인 게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한 관리 가능한 영역 안에 한 제국이라는 상태, 곧 하나의
핵심과 그 주변으로 편성된 세계가 더 보편적인 구조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통합
과 분열의 변증적 과정으로 진행하거나..."
바로 인철이 묻고 싶은 것을 물어준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인철이 궁금하게 여겨오던 것
이었다. 김교수는 별로 난처해하는 기색 없이 받았다.
"지난 시간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나도 시장에 있는 일물일가의 원칙처럼 한 관리 가능한
권역 안에서는 하나의 제국만 존재하는 게 역사에서 훨씬 더 보편적으로 나타남을 전제로
했다. 또 이런 변경이란 특수한 상황이 완결되고 고착된 역사의 국면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다만 지금 분석되고 활용되어야 할 틀로 변경을 강조하다 보니 논의가 그 상황 안으로 제한
된 것 뿐이다. 군의 말대로 두 제국 중 한 제국이 소멸하고 세계가 한 제국의 질서로 재편
되는 날은 틀림없이 온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으로 봐서는 가늠조차 서지 않는 불확실한 미
래에 속하고, 따라서 그 논의도 불요불급한 조망이라고 보아 뒤로 미뤘다."
"하지만 변경적인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우리에게 올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 반드시 불요
불급한 조망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변경일수록 어떤 제국이 소멸하고 어떤 제국이 남
는가에 예민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에 대한 대비도 지금 현재의 선택에 봇지않
게 중요할 수 있습니다. 좀 엉뚱한 질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교수님께선 두 제국 중 어
느 제국에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또 그렇게 보신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그 학생이 정작 궁금했던 것은 그 부분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걸 위한 서두의 질
문이 완곡하게 거절당한 뒤에도 그렇게 덧붙여 물었다. 김교수는 잠깐 쓴웃음을 짓다가 이
내 정색이 되어 말했다.
"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냉정항 예측을 말한다면 어떤 학생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역시
아메리카 제국 쪽이다. 그러고 그 근거는-"
거기서 그는 다시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로마가 망한 데는 천 가지 이유가 있고 그게 다 옳을 수도 있다. 만약 소련이 망한다면
로마가 망한 것보다 더 많이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 우선 한 가지만 말하겠다. 그
것은 제국을 제국답게 유지시키는 힘, 특히 경제력이다."
그렇게 시작된 김교수의 대답은 그러나 즉흥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잘 알다시피 제국의 발흥은 먼저 내부적 잉여 가치의 축적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노
예나 예속 농민 따위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생산에서 재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소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축적하여 대외 진출의 물질적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나 제국의 성립과 유지는 약
탈이건 조공 형태이건 교환 구조를 통한 기술적 착취이건 국제적 잉여 가치의 획득에 더 많
이 의지한다. 어떤 세계 제국도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착취 없이 성립되고 유지된 적은 없다.
그런데 소련은 특히 스탈린 시대에 가장 노골적이었던 그 제국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잉여 가치를 획득한 착취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이념상 국제적 교환 구조로 위장된 신식민
주의의 현대적 착취 구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제국사에서 유일한 국제
적 잉여 가치 획득의 예는 2차 대전 직후 점령지에서 있었던 기계 설비 등의 약탈이었으나,
이도 미국과의 경쟁을 의식해 대부분 되돌려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뒤 확인되
는 것은 오히려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우의 표시 혹은 선물로 일컬어지는 내부적 잉여 가
치의 유출이다. 물론 내부적 잉여 가치의 축적만으로 제국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그 좋은 실례를 바로 소비에트 제국이 보여주고 있다. 소비에트가 축적할 수 있는 내부적
잉여 가치를 크게 두 종류였다. 그 하나는 스탈린 시대에 특수하게 발생했던 신노예 제도가
생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가 자본가를 대신해 독점한 다수 인민들의 노동 잉여
가치였다. 그런데 내가 소비에트 제국의 앞날을 비관하는 것은 바로 그런 내부적 잉여 가치
의 크기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점에 있다. 스탈린 시대에는 최고 삼천만의 정치범이 있었다
고 한다. 이들은 재산이 몰수되고 강제 노역에 부쳐졌다. 그 몰수는 전비가 안 드는 약탈의
효과를 낼 수 있었고, 그 강제 노역에서 얻어진 잉여 가치는 아메리카 제국의 국제적 착취
구조보다는 효율성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소비에트 제국에는 없는 국제적 잉여 가치의 많은
부분을 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개혁 이후 그 방면의 내부적 잉여
가치 생산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앞으로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다수 인민들의 노동이 생산한 잉여 가치도 감소의 추세는 마찬가지다. 혁명 초기 인민들
이 이념으로 고양되어 있을 때의 높은 생산성과 순수한 열정으로 자율된 소비 사이의 폭넓
은 차익은 국제적 잉여 가치의 유입 없이도 소비에트 제국화를 감당할 만했다.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소비'란 이상적인 모토는 필요의 극소화를 유도함으로써 소비에트의 잉
여 가치 축적을 극대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 뒤 반세기가 지나면서 그 고양과 열
정은 현저하게 감소한 대신 소비의 욕구는 더 이상의 인내를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자랐다.
그렇게 되면 인민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 있는 잉여분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제국의 유지에
전용될 그 축적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더욱 비관적인 것은 혁명 2세대에서 3세대
로 내려갈수록 사정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란 점이다. 머지않아 생산성과 소비 욕구의 비례
가 역전될 수조차 있다. 거기에 비해 아메리카 제국은 교환 구조로 위장된 신식민주의적 착
취 구조를 통해 줄곧 국제적 잉여 가치를 축적해왔다. 이 땅처럼 특수한 변경적인 상황에서
는 그 작동이 멈추거나 미뤄지는 수도 있지만 아메리카 제국이 그 구조 자체를 포기한 적은
한번도 없고, 지금도 상대적으로 안정된 제국의 주변에서는 왕성하게 작동중이다. 따라서 소
비에트 제국이 국제적 잉여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획기적 기제를 마련하지 않는 한 이
경쟁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거대 담론이란 말이 유행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도 후반에 이르러서였을 것이
다. 그러나 우리 대학에는 그 훨씬 이전부터 거대 담론을 즐겨 하는 전통이 있었다. 어쩌면
그날 인철이 우연히 끼여든 것도 그런 전통의 현장인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럼 그때 이 변경적 상황은 어떻게 변합니까?"
김교수가 무엇 때문인지 힐끗 손목시계를 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전개가 있겠지만- 고립된 아이덴티티와 마름 또는 하청 의식이 경쟁이 있겠
지. 고립된 아이덴티티는 북의 의식 상황이고, 마름 또는 하청 의식은 변경 상황의 종료와
더불어 남이 아메리카 제국으로부터 강요받게 될 의식을 말한다. 정지하고 있던 국제적 착
취 구조가 작동을 시작하면서."
"고립된 아이덴티티란 말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마름 의식이란 말은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마름이란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있는 존재다. 중간 계급이지. 벌거숭이 국가 이기주의로
세계가 재편될 때 남한이 빠져있는, 혹은 꿈 꿀 수 있는 국제적 층위를 그렇게 가정해보았
다."
김교수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시계를 보더니 출석부를 집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런 변경 논의가 너무 결정론적이고 역사적 비관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불만일 것이다. 실은 나도 불만스럽다. 하지만 불만스러우면 몇 번이고 함께 다시 고쳐 토론
하고 보와해나가는 데서 모든 논의는 가치를 가진다.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다시 한번 얘기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그리고는 강의실을 나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인철을 손짓해 불렀다.
"어이, 거기 학생. 잠깐 이리 와봐."
그러잖아도 가서 인사를 할까말까 망설이던 인철은 그 부름에 용기를 얻어 그에게로 다가
갔다. 그러나 그는 인철이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해도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이 시간 수강생은 아니고- 누구지?"
"저, 지난 시월 형님 결혼식장에서... 형님 이름은 이명훈입니다."
"맞아, 그래. 우리 학교에 다닌다고 했지. 명훈인 잘 있고?"
김교수는 기대 이상으로 반가운 눈빛을 했다. 형의 안부를 묻는 어조도 형이 그럴 말할
때보다는 훨씬 다감했다. 그게 인철의 어색한 기분을 많이 풀어주었다.
"네."
"여긴 무슨 일로 왔니? 전공이 문학 쪽이라고 들을 것 같은데."
김시형이 바로 용건을 묻는 바람에 인철은 잠시 당황했다. 새삼 그를 찾아보려 한 것이
엉뚱하고 당돌하게 느껴져 얼굴부터 화끈해왔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왔다가- 특강이 있으시다길래. 변경론은 황석현 기자님께 한번 들은
적도 있고... 지금처럼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 인철을 살피던 김시형이 갑자기 특별난 생
각이 났다는 덧 인철의 어깨를 쳤다.
"네게 뭔가 할말이 있는 모양인데-마침 잘 됐다. 같이 가자. 부근에서 점심 약속을 한 사
람이 있다. 그 사람이 너는 만나면 특별한 감회가 있을 여자라..."
너무 갑작스런 제의라 인철이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한번 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당연한 걸 지시하듯 말했다.
"길 건너 상아탑다방에 먼저 가서 기다려라. 나는 연구실에서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내가
열두시 반까지 도착하지 못하거든 손님 중에 미국에서 오신 경애씨를 찾아 네가 말상대라도
돼줘라. 이명훈의 동생이라고 하면 그 여자도 너는 모르는 척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는 인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갔다.
미국서 온 경애씨란 말을 듣자 인철도 금방 그게 누군지를 알 것 같았다. 형의 오래된 일
기 속에 그렇게도 자주 나오던 이름. 그리고 형의 수고 시집 속에 그토록 많은 만가를 남기
게 한 여자- 그걸 떠올리자 인철은 자신이 왜 학교에 나오게 되었으며, 김시형은 무엇 때문
에 만나고 싶어했는지를 까맣게 잊고, 묘한 설램까지 느끼면 상아탑 다방으로 향했다.
시경 대공분실에서의 닷새는 그러잖아고 블만과 회의로 비틀거리던 인철의 대학 생활에
마지막 통렬한 일격이 되었다. 그날 자신에게 덮씌워진 엄청난 혐의를 어렵게 벗고 하숙집
으로 돌아온 인철은 남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먼저 그를 괴롭힌 것은 취조를 받는 중에 느꼈던 모멸감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사죄 섞
인 호의 속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취조실에서 보낸 사흘은 평생 잊지 못할 끕직한 악몽으로
기억에 새겨졌다. 어쩌면 그런 곳에서는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손찌검이나 욕설이
그가 태어나 당했던 그 어떤 폭행이라 모욕보다 몸서리쳐지는 기억으로 되살아나고, 막연한
공포와 절박감에 짓눌려 저항다운 저항조차 없이 그들의 취조에 끌려다닌 자신을 세상의 어
떤 굴욕보다 더 참담한 굴욕을 당한 듯 느껴졌다. 그리하여 새삼스런 분노로 온몸을 떨다가
다시 아득한 무력감 속으로 잦아들면서 풀려나온 첫날밤은 잠든 듯 깬 둣 지새웠다. 하지만
날이 밝고 자신의 위험을 벗어났다는 게 확연해지면서 갑작스런 충격으로 혼란스러웠던 의
식도 논리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때까지는 그야말로 프로그램적으로만 흘려들어온
여러 근대적 인권 개념이 실질적인 의미로 다가들었다. 인신 구속의 절차, 불리한 진술을 강
요당하지 않을 권리, 죄형 법정주의... 국민학교 때의 '사회생활' 과목부터 중학교 때의 '공
민', 그리고 고등학교 과정의 '일반사회'에 이르기까지 인철은 참으로 많은 권리와 의무를 배
워왔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그런 원칙과 절차가 자신과 어떤 실질적인 연관을 가진 것이
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흠 없는 사람들은 대상으로 한 이상적인 국민 형성
의 과정으로, 자기처럼 원죄를 지고 태어난 인간에게는 하나의 예시적인 나열일 뿐이라고
여겨왔다.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 아래서는 내게 아무런 몫이 없
다- 그게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푸념과 한탄을 통해 주입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채험을 통해
길러간 인철의 사회적 의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의식에 변화가 왔다.
'지난 며칠 나는 그런 원칙이나 절자 밖으로 밀려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바로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절차와 원칙이라는 것조차 상기하지 못했다. 그럼 이 국가, 이 사
회 안에서의 나는 무엇인가. 나는 대한민국 정부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이 정부가 부여한
교육 과정에 따라 국민 형성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으며, 되도록 이면 이 사회의 규범에 맞
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이 나라의 국적법 어디에도 나를 이 나라 국민에서 배제시킬 조항은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는 이 나라 한 법이 규정한 기본권 조차 주장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시작된 의문은 이내 연좌제로 번져갔다.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봉건적인 통기 기술의 잔재에 대해서도 이제는 따져볼 때가 되
었다. 이 정부, 이 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죄를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한
독립된 개체에게 핏줄의 연관만으로 그에게 책임 없는 죄를 물을 수 있는가. 그것도 주범은
이 나라의 공소권 밖으로 도피한 지 이미 이십여 년이 지나 공소 시효가 만료되었는데 이
종범같지도 않은 종범은 언제까지 이 같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까지 이 터
무니없는 체제 방어를 수단을 불문과 타성으로 받아들였고 나아가서는 일종의 원죄의식을
품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아니다. 그 정당성과 유효성을 의심해볼 때가 되었다.'
한번 물음이 시작되자 물음은 다시 물음을 낳아 끝내는 그때껏 거의 본능적으로 피해온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되돌아보기에 이르렀다. 원죄 의식은 한 연장이겠
지만, 이미 말한 대로 인철은 일찍부터 남한 사회와 정치에서 자신의 지분을 포기했다. 그것
은 다만 그들, 아버지를 초라하게 패퇴시킨 그들의 몫이었다. 인철의 정치적 실존은 승리자
의 관용에 의해 그들과 더불어 생존하는 게 아니라 그들 주변에 잔존이 허용되었을 뿐인 어
떤 존재였다. 특히 인철의 대한 초반은 시월 유신 전야의 여러 정치적 파행이 진행중이던
시기였다. 삼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등의 정치, 사회적 이슈들이 대학가를 휩쓸어 급우들
과 공권력의 충돌이 눈앞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그는 충돌을 강 건너 불
보듯 무감동하게 보아넘겼고, 때로는 '초월파' 또는 '초연파'란 있지도 않은 이름 뒤에 숨어
오히려 빈정거림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스크럼을 짜고 기세를 올리며 교문을 뛰쳐나가는
동급생들을 보면서 인철이 기껏 느낀 것은 시기로 뒤틀린 선망뿐이었다. 저기 대한민국 경
찰과 군대에 대해 감히 돌을 던질 멋을 부릴 수 있는 겁 없는 놈들이 몰려나가는 구나. 정
부에 대해 당당히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고, 자기가 저지른 일 이외에는 책임지지 않
아도 되는 행복한 놈들이... 하지만 그날 밤 하얗게 날을 지새면서 그가 드디어 품게 된 의
심은 자신의 원죄 의식이란 것도 실은 뒤진 사회 의식이나 타고난 의지의 결함을 감추기 위
한 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나 사회에 대한 내 의식이나 둔감이나 마비를 변명하는 부적으로 꼭 그래야 할
까닭도 없는 원죄의 개념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원죄란 아버지의 불행한 선택과 실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의 비겁과 무력감이 키워온 지극히 편의적인 개념이었다. 그리하여 그 부
적 뒤에 숨음으로써 정작 필료한 싸움과 그에 따른 소모를 피해왔다. 패배의 물리와 고통이
두려워 외면과 유예로 초라한 자존심을 지켜가려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내게 걸려온 싸움
을 외면하고 유예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게는 아직도 이 체제 밑에서 살아야 할 날이 많이 남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의 몇 배
과 되는 세월이. 그런데 언제까지고 그들의 자랑하는 그 휘항한 이상과 원리 밖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언제까지고 국외자, 소외자로 이 체제 밖을 맴돌면서,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변칙에 순응하고 그 불리를 감수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두렵고 자신없더라도 이
제는 응전할 때다.'
이윽고 하얗게 밝아오는 창을 바라보며 인철의 결연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응적의 구체적
인 방안에 이르면 다시 막막할 뿐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가지고 저들과의 싸움을 시작할 것
인가... 삶이 불가피한 싸움이라면 전공이나 직업은 그 싸움의 수단이요, 근거라 할 수도 있
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그 가장 세련된 수단과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단련장으로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미의 대학이라면 인철의 대학은 처음부터 구멍을 잘못 끼운 단추와
도 같았다. 그는 전공의 선택부터 스스로 재단한 불공정 경쟁 체제 아래 자신의 전공을 선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인철과 전공과의 불화는 학교 안에서도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특히 문학에 빠져
보낸 그 학기는 당시의 그 헐거운 출석 일수조차 채우지 못해 시험을 잘 쳐도 태반은 학점
이 나오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형과 노광석을 뺀 과우들에게 그는 진작부터 제외된 사람이
었고, 강의를 들은 지 2년이 지났건만 과 교수들에게조차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지 않는 학
생이었다. 그렇다고 문학이, 글쓰기가 그의 전공을 대신할 수도 없었다. 정숙과 함께 초대받
아 간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된 그 날로 문학은 그의 일차적 지향
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때 받은 충격도 컸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면 문학과의 만남과 그 앞
뒤 없는 몰입 자체에도 의심스러운 구석은 많았다.
인철의 기억 속에 과장되어 그렇지 기실 인철과 문학의 만남은 '운명의 날카로운 첫 키스'
라고 할 만큼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규의 교육 과정에서 벗어나 있었던 긴 세월 동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학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다. 오히려 진작부터 그가 품어온
불안 중에 하나는 자신이 마침내는 그 특이하게 전용된 말과 글의 사람으로 끝장을 보게 되
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문학 특히 소설은 결코 그렇게 눈부신 '새로운 하
늘과 새로운 땅'일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도 처음 한동안 문학이 그토록 인철을 깊이 끌어들
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오해한 문학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자율, 타율의 엄격한 사상적 통제 아래 형성된 그의 고답적 문학관은 절로 예술 지상주의
또는 탐미적 경향을 띠었다. 그리하여 그가 그토록 혼쾌히 문학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문학관이 보장하는 현실에서의 국외자적 입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
떻게 보면 어머니가 빠져 있는 비참한 현실이 문학을 향한 인철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게 된
것도 그렇게 편향된 문학관과 연관이 있다. 예술의 본질을 현실로부터의 초월 내지 둔피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현실적인 무력함을 승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으로는 어머니를
비참한 현실에서 구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지켜낼 수 없으리라는 단정이 그를
그토록 황급히 문학에서 물러나게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나. 아아, 이제 나는 무엇을 하나...'
인철은 갑자기 길을 잃은 사람처럼 막막해져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돌아갈 곳도 없고 떠
날 곳도 없다- 날이 밝은 뒤까지도 한동안 그런 기분으로 줄담배만 피워댔다. 하지만 또래
보다 먼길을 돌고 그래서 좀 지쳐 있는 편이긴 해도 인철은 아직 스물 셋의 젊은이였다. 무
엇이든 새로 시작해볼 기력이 남아 있었고, 힘들고 고단한 살이로 단련된 투지도 뜨거운 불
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특유의 오기와 어울려 돌연한 결정으로 인철을 몰아갔다.
'지난 2년은 스스로 설정한 관념 속의 방황이었고 소모였다. 노래부르기 위한 노래, 꿈꾸
기 위한 꿈으로 열정과 세월을 낭비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의 소모와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 또래 속의 자족도 집단 곳의 안주도, 삶은 이렇게 해서 때워낼 수 있는 안일한 놀
이가 아니다. 효율 높은 장비와 든든한 근거로 헤쳐가야 할 싸움이다. 그런데 지금 이 학교
는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다시 떠나겠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새로 시작해
보고 싶다. 다시 한번 '권력에서의 의지'를 불붙여야겠다.'
그날 해뜰 무렵 인철은 그렇게 니체까지 끌어대어 중얼거리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
고 학기말 시험도 다 치르지 않은 채 오랜만에 새로 생긴 집으로 돌아갔다. 형과 어머니, 그
리고 새로운 가족이 된 형수는 그렇게 돌아온 인철을 별의심 없이 맞았다. 그해는 교련 반
대 데모 때문에 부족한 수업 일수를 보충하기 위해 기말고사가 늦어졌을 뿐, 예년으로 봐서
는 겨울 방학에 들어가도 이르지 않은 때라 그랬을 것이다. 인철이 하나 남은 방을 차지하
고 밤낮 없는 망상에 젖어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인철이 돌아와 함께 있다는 사실
에만 감격할 뿐 점점 흔들림 없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인철의 결의는 눈치채지 못했다. 깊은
동면과도 같은 그 겨울의 망상 속에서 인철이 처음 한동안 진지하게 검토한 것은 또 한번의
재수였다. 새롭게 입시 준비를 해서 아무런 전제 없이 전공을 고름으로써 세상과의 싸움에
서 보다 효울적이면서도 유력한 수단과 근거를 확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곧 포
기되었다. 이미 또래보다 2년이 늦어진 데다 다시 대학에서 2년을 허비한 터라 운좋게 이듬
해 입시에 합격한다 해도 남보다 4년이 늦어지는 셈이었다. 그러자 다시 문학에 대한 미련
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이 방면의 재능과 열정은 근래에 드물게 남의 인정을 받
았다. 비록 그들이 같은 지망생들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생판 문학과 관계없는 사람들과는
안목이 다를 것이다. 세상도 그들처럼 나는 인정해주어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단할 수만 있
다면 현실적으로도 무력하기만 한 문학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어 태우다 남은
원고지를 뒤적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30분마다 한 번씩 자만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결국은 성취의 불확실성과 여전희 의심스런 성취 뒤의 무력갑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사법 시험 준비였다. 그 자질이나 성향에 상
관없이 가난한 수재들을 곧잘 유혹하던 그 시험은 인철에게도 진작부터 유혹이 되었다. 그
러나 연좌제 때문에 쓰라리게 포기했던 것인데- 이제 연좌제에 반발하게 되면서 다시 한
유혹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성취의 불확실성은 문학에 못지않았으나, 성취 뒤의
무력감은 분명 덜할 것 같았다.
"공개 시험이니까 열심히 하면 필시 시험은 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무
슨 소용이겠어? 경찰이나 장교는 물론 일반직 공무원도 임용이 안 되는데 판, 검사를 시켜
주겠어?"
인철이 슬그머니 그 뜻을 내비치자 형은 대뜸 그렇게 받았다. 오래된 상처와도 같은, 근원
적인 좌절감이 형의 표정까지 우울하게 만든 것 같았다. 전 같으면 인철은 형의 그 같은 말
을 현실적인 선고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달랐다.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격
앙된 어조로 말했다.
"변호사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허용되지 않으면 사법 시험 준비에서 익힌 바로 그 법으로
이 제도와 싸우는 겁니다. 지금 아는 것만으로도 연좌제는 명백히 헌법의 기본 정신에 어긋
납니다. 만약 고시에 합격했는데도 임용시켜주지 않으면 남은 세월 정부 상대로 행정 소송
이나 벌이며 보내죠, 뭐."
그러자 형이 다시 깊숙한 한숨과 함께 받았다.
"그렇게 사치한 삶이 네게 허용될 수 있을까? 황석현이 말마따나 이곳은 제국의 변경이
다. 이념도 법도 여기서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왜곡되어버리고, 대항 제국이 소멸할 때까
지는 누구에게 그 왜곡을 따져볼 수도 없다..."
인철에게 변경이란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든 것은 그때였다. 전에도 인철은
황석현에게서 변경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독특하고 재미있어 선명하게 기억은 하지만
그 개념은 지극히 추상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혀으이 짧은 한마디에 그게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규정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인철이 김시형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다시 망상아니 다름없는 몇 날 밤을 지새운 인철은 그날 아침 문득 함부로 어질러놓고 떠
나버린 듯한 학교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훌쩍 떠나온 지 보름 만에 등교해보니 이미 기말고
사가 끝난 과우들은 하나도 만날 수가 없었다. 먼저 버리고 떠난 것은 그 자신이었음에도
막상 아무도 만날 수 없자 인철은 갑자기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더욱 절실하게 그
들은 그립게 해 강의실을 돌며 어쩌다 학교에 남은 아이들을 찾게 만들었는데, 그러는 동안
에 알게 된 것이 김시형 교수의 특강이었다. 그런데 김교수의 이름을 듣자 인철은 갑자기
자신이 만나려 한 것이 아이들이 아니라 그라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변경의 선택'이란 특
강 제목을 알았을 때는 자신이 애초부터 그걸 듣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선 것이라는 착각
까지 일었다.
방학이 시작되어 그런지 '상아탑'안은 전처럼 붐비지 않았다. 아지 12시도 되지 않아 인철
은 주의를 살필 것도 없이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자리를 찾을 때 벌써 인철의
예감을 자극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피 깃 달린 토퍼에 바지 차림이 어딘가 이국적이
고 화장도 좀 짙은 듯하지만 결코 야하거나 천박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젋은 여자였다.
'저 여자다...'
인철은 그렇게 직감했으나 내색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무언가 딴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제서야 인철을 보았는지 반짝 그녀의 눈길에 쏘아져왔다. 인철이 가만히 그
눈길을 받자 황급히 거두어지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어던 동요가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그제
서야 인철은 좀더 대담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미군 장교와의 결혼이란 게 인철에
게 칙칙한 선입견을 주어선지 모르겠으나 상상처럼 화려한 얼굴의 미인은 아니었다. 수수한
한복을 입혀놓으면 오히려 새침한 새댁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은 갸름하고 단정한 얼굴이었
다. 그녀도 다시 인철을 훔쳐보다 잠깐 사이에 몇 번 둘의 눈길이 가볍게 마주쳤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인철에게 조금도 쑥스럽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이었다. 아
마도 그녀의 눈길에 담긴 어떤 따스한 빛살 같은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시형 교수가 말
한 12시 30분을 20분이나 남겨두고 인철이 먼저 그녀를 찾은 것도 바로 그 따스한 빛살에
이끌렸다고 보는 편이 옳다.
"저어... 미국에서 오신 분 아니십니까?"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인철이 조금 쭈뼛거리며 그렇게 묻자 그녀도 일순 당황하
는 기색이었다.
"네에, 그런데요..."
"그럼 김시형 교수님은 만나러 오신 분..."
인철이 그녀의 이름을 묻기가 쑥스러워 그렇게 말하자 비로소 그녀가 평온을 되찾은 얼굴
로 받았다.
"맞아요. 그런데 김교수님께서 보내서 왔어요?"
"네, 교수님은 정리하실 게 있어서 좀 늦으시겟다고..."
"많이 늦어지실 것 같대요?"
"아뇨, 한 삼십 붕이나 그보다 조금 더."
"그럼 그냥 기다리게 하면 되지 일부러 사람까지 보내... 그런데 이 학교 학생이세요?"
그녀가 살풋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십 년이나 위가 되고 한때 형의 연인이었던 여자지만
묘하게도 매혹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인철이 당황하여 얼결에 자기 소개를 했다.
"네, 그런제, 저... 저는 이인철이라고 합니다. 이명훈이 저의 형님입니다."
그러자 일순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다가 묘한 미소로 풀어지며 이어 감회 어린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랬구나. 그래서 아까부터 낯익게 느껴졌구나. 김교수도 하필이면 너를 보내고..."
"저도- 왠지 금세 알아봤습니다."
그녀가 말은 낮춰주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해 인철이 이번에는 별로 더듬거리지 않고 대답
했다.
"나를 알아봤다고? 그럼 집에 아직도 내 사진 같은 게 있어?"
"아뇨. 모습은 그냥 상상 속에서 그려봤을 뿐입니다. 그렇제만 제게는 뵈온 것보다 더 익
숙한 분이죠."
"그럼 명훈씨가 자주 내 얘기를 했어?"
"그것도 아닙니다. 다만 형의 옛 일기장에서, 그리고 시집에서 자주 만나..."
"시집? 그럼 명훈씨가 시집을 냈어?"
"아뇨. 그냥 수고 상태의 시집입니다. 제가 되는 것도 있는데- 한 편 들려드릴까요? 다 외
지는 못하지만..."
인철이 자신도 알지 못한 감정의 충동으로 그렇게 제안했다. 그녀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말 상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 상상하지도 못한 시를 듣게 되네. 그래, 어떤 거였지?"
"형님이 황무지를 개간한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그때 집에 아무도 없는, 비오는 날 같은
때 몰래 형의 서랍을 열어 훔쳐보는 옛 일기며 한편 한편 늘어가던 수고 시집은 제게 좋은
읽을거리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떠나버린 사랑은 노래한 것 같은 이 시는 특별히 애잔해 외
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흥이 살아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이 시가 바쳐진 대상이신
것 같아 들려드립니다.
산길을/들길을/ 먼 하늘가/ 구름길을.
널 찾아/ 널 찾아/ 한없이/ 헤매어도
산새도/들꽃도/바람도
주인 없는/상여는/보지 못했노라.
아스라한 /노을녘에/무거운 지팡이를 던지면
아 발갛게/반짝이는/장마다
잃어버려/애태운/얼굴들이
그렇게도/많은 것을...
그리고 결구가 있었는데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하도 여러 해 전에 외웠던 것이
돼서."
듣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어렸다. 인철은 그걸 그리움과 회한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감회는 생각보다 쉽게 스러졌다. 곧 다감하기는 하지만 그리 어
둡지 않은 미소로 그녀가 말을 맏았다.
"그 시집은 남아 있지 않겠구나. 김교수에게 들으니 명훈씨도 이제 평강공주를 만났다
며?"
"저는 왕자의 마차를 타고 화려한 성안으로 들어간 신데렐라의 그뒤가 궁급합니다."
그녀의 감회가 깊지 않음에 실망해 뒤틀어진 인철이 그렇게 받았다. 그녀가 그런 인철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정말 명훈씨에게 사랑받는 동생인 모양이네. 그 얘기도 해줬어? 그럼 로마군 백부장 얘
기도? 은성한 제국의 수도와 변경 원주민 출신의 귀부인도?"
"형님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모든
걸 이루셨습니까?"
"그럴 때는 말투까지 비슷하네. 좋아, 뭐. 다 말해주지. 신데렐라까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세월이었어. 본국으로 돌아간 이듬해 백부장은 대령으로 예편해 가능성 있는 대통령
후보의 정책 보좌관이 되었지. 나중에는 지역 기반을 닦아 하원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이었는
데, 내게는 원주민 왕년의 역할이 맡겨졌어. 모든 게 잘돼나갔지. 그런데-머지않은 미래의
하원의원이 지난해 갑자기 죽어 그 동화는 엉망이 되었지."
그 말에 뒤틀려 있던 인철의 기분이 일시에 원상을 회복했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꺼내려
는데 그녀가 담담한 어조로 이어갔다.
"폐암이었지. 정말 용감하게 죽어가더구나. 죽어가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어."
인철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 경우에 합당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그녀가 자연스럽게 연기를 빨아들이며 툭툭 던지듯 말했
다.
"뭐 그렇다고 나는 동정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그는 잘생긴 아들 하나에다 내가 탕진하
지만 않으면 일생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과 연금은 남겨주고 갔어. 이
제 머지않아 내 마음속의 그만 떠나면 새로 시작할거야. 아니 벌써 시작했어. 대단한 건 아
니지만 이번 여름 학기부터 마스터 과정에 등록했거든."
"형님도 그 뒤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결혼도 형님에게는 새로 시작하는 의미
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철은 혹시라도 위로가 될까 하여 그렇게 말하다가 스스로 후회스헌 기분이 되어 말을
끊었다. 그런 인철의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그녀가 쓸쓸하게 웃으며 받았다.
"열등감과 자의식으로 뒤틀리지 않고 잘 자란 명훈씨를 만난 기분도 나쁘지는 않네. 그래,
공부는 뭘 해?"
"국문학이였는데- 이제 그만둘까 합니다."
인철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무엇 때문인지 살풋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또 왜?"
"처음부터 구멍을 잘못 끼운 단추 같은 것이었어요.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공부가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거야말로 근거 없는 열등감과 자의식에 뒤틀린 단
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부당하게 규정한 걸 아무런 저항 없이 한 고정관념으로 맏아
들인 거 말입니다."
그래놓고 앞뒤 없이 불쑥 물었다.
"살아보신 제국은 어땠습니까? 정말 들은 것처럼 그렇게 위대하던가요? 태평양 건너 이
구석진 곳에 우리 모두의 운명까지도 좌우할만큼?"
실은 인철에게는 절실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잎엣말과 뒤엣말이 얼른 연결외
안 돼는지 한동한 멀거지 인철을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너에게도 열등감과 자의식이 있다구?"
"변경의 원주민 중에는 불행한 소수에게만 있는 특별한 원죄 의식 같은 거죠. 제국의 논
리가 강요한."
"그게 뭐지?"
"상대편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한 사람이나 그런 사람의 후예가 갖게 되는 특별한 심
정 상태인데, 특히 연좌제란 이름으로 강요되면 십중팔구 거기 사로잡히게 되고 맙니다."
"아아, 그 얘기-"
그제서야 그녀가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쓸쓸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나도 김교수한테 그 얘기 들었어. 그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그런데 나는 그걸
변경 의식이라고 하지. 실은 변경이란 말 자체가 열등감과 자의식에 찬 자기 규정일 수도
있어. 아직 내가 미국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김교수가 말하는 그런 전능하고
전지한 제국을 솔직히 나는 보지 못했어. 변경이 변경인 것은 제국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변경이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봐. 방금 네가 말한 그 원죄 의식이란 것은
바로 그런 변겅 의식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자기 규정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거야말로 넉넉하고 편안한 제국 신민의 논리가 아닐까요? 우리가 이러니까 너
희도 그렇겠지, 하는. 방금 말씀하신 가장 조악한 자기 규정이란 것도 이 땅의 원주민에게는
절실한 현실입니다. 이를테면 나나 형님이 두 달만 자신들의 감시밖에 있어도 불안한 게 이
나라의 경찰이거든요. 그런데도 그 때문에 강요받는 원죄 의식을 조악한 자기 규정이라고만
하시겠습니까?"
"또 제국의 신민 같은 발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이상해. 왜 거런 불합리와 부
조리가 있으면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피성의 논리를 끼워맞추지? 내
가 보기에 이 땅이 변경의 불행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그런 변경 의식의 극복에서 시작될
거야."
"그러면 두 제국의 충돌에서 우리가 맛본 그 끕직한 피와 불의 세례는? 그 엄청난 제국의
물량과 화력은?"
"그게 변경 개념의 결정론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은 것 같은데. 일본처럼 다가가는 수도
있고 월남처럼 맞서보는 수도 있고... 어느 쪽도 끝난 것 같지는 않지만 내 보기에는 들 모
두에 미국은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어."
그때 누가 인철의 어깨를 쳤다. 퍼뜩 정신을 차려 돌아보니 김교수였다.
"햐, 이 사람들 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피라도 나는 오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네.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김교수가 그렇게 말해놓고 경애와 인철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어이구.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학년말을 처음 맞는 신출내기 교수라... 이것저것 기일
에 맞게 교무과에 제출할 게 많아서. 그리고 인철이라구 했나? 고마워. 나 대신 귀한 손님을
잘 모셔줘서."
"대리인치고는 확실한 사람을 보냈더군요. 그 궁상스런 변경론도 꽤나 숙지하고 있고..."
경애가 웃으며 그렇게 받았다. 김교수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손짓으로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 자리 옮기지요. 점심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런, 벌써 한시가 다돼가네. 너도 일어나.
내게 할 얘기 있으면 같이 식사하면서 하지."
김교수가 그렇게 재촉해 두 사람을 데려간 곳은 혜화동 쪽의 가정집 같은 한식당이었다.
지주 드나드는 곳인지 주인 여자가 유별난 친절로 그들을 한적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
펼쳐진 상 위에는 이미 마른반찬류가 차려져 있었다.
"호텔에서 사드시는 음식 이젠 신물나셨을 게고- 뭐 전통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여기
서 짭짤한 한식이나 하자고 보셨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김교수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변명 비슷이 이었다.
"한국엔 이제 아무도 안 계시니까 저희 집에라도 한번 모셔야 하는 건데... 집사람이 통
음식 솜씨가 시원찮아서."
"전 별루 해드린 것두 없는데 이렇게 신경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저 온 김에
얼굴이나 한번 뵙자구 한 것뿐인데."
그녀가 그렇게 받자 자리는 한동안 두 사람의 추억담으로 이어졌다.
"해주신 게 없기는... 가난한 유학생 시절, 버터워스 보좌관댁 주말 가든 파티는 더할 나위
없는 영양 보충의 기회였죠. 더군다나 거기는 김치까지 나왔으니까."
"정말 억척스러우시더니. 그리고 세상 인연 참 묘하죠? 선거 캠프에서 일할 동향계 유학
생 하나를 추천 받는데 거기 김시형씨, 아니 김교수님이 오시다니..."
그 사이 상이 차려져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말로 그녀가 반가운지 김교수가 상기된 얼
굴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 술 잘 못하는 거 아시죠? 그런데 오늘은 맥주 한잔 곁들이고 싶군요. 괜찮으시겠습니
까?"
그리고는 맥주를 청해 인철에게도 한잔 권했다. 하지만 얘기는 그뒤로고 한동안 두 사람
의 미국 시절을 맴돌았다.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인연인 친밀감의 정도를 가늠하는 재미가 없
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오래 소외되자 인철은 그 자리가 조금씩 멋쩍어졌다. 그 기미를
알아차린 것일까, 경애가 갑자기 화제를 세 사람에게로 넓혔다.
"그런데 그 궁상맞은 변경론은 아직 그대로예요? 아니 더 세련되게 정리되셨는가봐. 인철
이 같은 수제자도 거두시고."
"세련되기보다는 글로 대강 정리해보았죠. 발표했더니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많고... 하지만
쟤는 내 학생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오늘 내 마지막 특강을 들은 것뿐이고. 특강 내용의
변경 이야기가 된 것은 정규 강의 끝이라 여흥 삼아 색다른 걸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철의 의식은 이미 변경 콤플렉스 중증이던데요. 변경적 결정론, 변경적 허무주
의, 변경적 열패 의식까지. 그래서 이제는 이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대학까지 집어치우고 본
격적으로 떠돌 모양인데요. 결국에는 어디에도 소속 못 할 이웃사이더가 될 공산이 커보이
지만."
"공부를 시작하셨다더니 정말 제대로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미래의 하원의원 부인 때와
는 말투부터 달라지셨네요. 어쨌든 반갑습니다. 그런데-인철이 너 학교를 그만둔다니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 길을 찾아가보려
구요."
그가 교수라서 그런지 인철이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며 말했다.
"제 길... 이라면 공부를 그만둥다는 거냐?"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학교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정말로 오늘 내 특강을 들은 게 우연은 아니었던 모양이구나.무언가 내게 물을 게
있어 온 것 같은데. 그거 여기서 말할 수는 없어?"
김교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대화의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이미
받은 질문이라 인철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실은 전에 황석현 기자님을 찾아간다가 변경이란 개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는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는데, 지난번 어떤 계간지에 실린 교수님의 글을 보고는 다른 느낌
이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자인하셨듯이 그 논의가 너무 결정론적이고 닫혀 있으며 역사
적 허무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뭔가 나와도 깊은 연관이 있
는 것 같아, 다시 말해 나의 삶도 크게는 그 변경이란 틀 속에 갇혀 있고, 결정되어 있는 것
같아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은 이미 교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여기 이 누님에게서 들은
것 같습니다."
인철은 누님이란 말이 좀 쑥스러웠지만 달리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경애를 그렇게 지칭
했다. 경애가 이상스레 감동적인 어조가 되어 받았다.
"내가 그렇게 거창한 질문에 답한 건가..."
"호오, 그래? 그게 뭔데?"
김교수가 흥미있다는 듯 인철에게 물었다.
"그 같은 변경론이야말로 변경의 여러 특징적인 의식 중에서 가장 조악한 변경 의식이며
변경을 언제까지고 변경으로 묶어놓는 불리하기 짝이 없는 자시 규정이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나도 변경을 그렇게 규정하지는 않았는데. 변경의 선택이란 말은 곧 변경이란 틀
이 깰 수도 있고 변모시킬 수도 있는 어떤 거라는 의미로는 들리지 않던가?"
"하지만 그 선택도 이미 변경이란 틀리 결정해둔 몇 가지 중의 택일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말씀하신 선택은 그 틀 자체에 대한 부인이고 저항이었습니다. 승인할 때도
그저 그 틀 속에 편입되기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자신의 것으로 전화, 발전시
키는 계기로서였습니다."
"아니, 그 사이에 그렇게 깊은 얘기들을 했어?"
김교수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경애 쪽을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새삼 어색해하
며 겸양했다.
"전 그저 인철이의 쓸데없는 열등감과 자의식이 안타까워 미국식으로 몇 마디 했을 뿐인
데... 역시 시인의 동생이라 그런지 꿈보다 해몽이 좋아."
"실은 네가 말한 것은 모두 전부터 지적 받아온 것이고 나도 아직은 인식틀로만 유용한
변경론을 보다 활용도가 높은 실천틀로 전환시키는 걸 과제로 삼고 있다."
뒷날 제3세계론과 절충되어 80년대 초기 운동권의 한 흐름을 지도하게 될 이론가답게 김
교수의 태도는 유연성이 있었다. 아직은 더듬어가는 소장 학자의 패기에 찬 겸양으로 자신
의 난점을 시인한 뒤, 다시 친구의 아우를 보는 자상한 눈으로 인철을 보며 물었다.
"그래, 그게 나를 찾아올 만큼 네게 절실했던 까닭은 뭐였지?"
"이제는 저도 변경 의식에서 놓여나고 싶어서요. 특히 내 터무니없는 원죄 의식을 벗어던
지고 싶어서요. 그래서 그것들에 주눅들어 잘못 이루어진 선택들을 바로잡고 싶어서요."
"그런 거라면 진자겡 네 형 명훈에게도 권하고 싶던 것이었다. 나도 변경이란 인식틀이
터무니없고 불리하기만 한 자기 규정으로 기능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 네가 새로 떠나려는
길이라면 불안하더라도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고 싶다."
그걸로 그날 인철의 외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대화를 끝이었다. 그 뒤 다시 찻집에서
헤어질 때까지 인철이 기억할 만한 말은 김교수가 명훈을 만날 거냐고 물었을 때 경애가 한
대답 정도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오래 전에 내 가슴에 묻은 아도니스예요. 그냥 며칠 서울에
더 머물다 내 나라로 돌아갈 거예요. 인철이 너도 형님에게 날 만났단 소리는 하지 마."
제35장 뜬 구름, 혹은 거품
"무슨 일이야?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사람을 부르고, 전화로는 말 못하고 직접 와서 봐야
된다는 게 뭔데?"
부동산 사무실로 발은 들여놓으면서 영희가 물었다. 그때쯤 영희가 도착할 줄 알고 기다
리고 있었던 듯한 김상무가 담배를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우선 여기 앉으시죠. 숨이나 돌리고 얘기합시다."
김상무가 세련된 손짓으로 자기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이 궁금하잖아. 척하면 삼천리인 김상무가 이렇게 뜸을 들이니 말이야."
영희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김상무는 늘 그렇듯 영희
에게 드링크 한 병까지 대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운을 뗐다.
"실은 말입니다. 지난 가을부터 눈여겨보고 있는 게 있는데- 영 감이 안 잡혀서요."
"그게 뭔데?"
"그 동안 여긴 발 끊다시피 하셨지만 얘기는 들어셨겠지요? 누님, 모란단지라고 대규모
개발 사업이 벌어진다는 거."
"글쎄... 들은 것도 같구..."
영희는 그 말과 함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모란우체국이 있고 모란시장이 있어 모란이란
말은 귀에 익었지만 막상 모란단지가 무얼 뜻하지는지 얼른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러지 말고, 김상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치고 그냥 계솔 얘기해봐."
"하긴... 아직은 이 바닥에서의 소문이니까. 그런데 그게 엄청나단말임다. 말하자면 광주대
단지의 열두 배가 넘는 신도시가 광주대단지의 투자 규모 열다섯 배가 넘는 대자본을 들여
개발된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자급자족이 될 만큼 크고 많은 산업체와 공장을 가진 250만
인구의 신도시가."
"뭐? 그것 참 굉장하네. 그런데 왜 아직 홍보가 되지 않아? 고시도 없고."
"정부가 하는 게 아니라서 그렇답니다. 순전히 민간 차원에서 하는 개발이라... 하지만 오
늘 정식 기공식이 있습니다."
"아니 민간인이 무슨 돈이 있어 그렇게 엄청난 투자를 할 수 있어? 광주대단지 열다섯 배
가 된다며?"
"거기 또 기막힌 얘기가 있습니다. 투자의 50프로가 넘는 7백억은 일본에서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그게 일제 때 유명한 친일파였던 송병준의 돈이랍니다. 송병준은 한일 합방에
앞장선 공으로 일본 천황에게서 북해도에 엄청난 땅을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7백억은 바로
그 땅을 판 돈인데, 자손들은 그걸 조국에 투자함으로써 조상의 죄를 속죄하려 한다는 겁니
다. 그리고 마루베니라는 일본 기업도 개발에 참가하는 모양이던데요."
"글세, 얘기를 그럴듯한데, 뭐가 좀..."
영희는 일본이라는 나라도 그렇거니와 들먹여지는 돈의 액수도 너무 엄청나 솔직히 믿음
이 가지 않았다. 그러자 김상무가 팸플릿 하나를 내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기 고문진을 한번 보세요. 고문이라는 게 뒤에서 봐주는 사람
들이란 뜻이라면 이 사람들, 상당하지 않아요?"
영희가 받은 팸플릿의 펼쳐진 쪽을 보니 바로 '모란개척단 고문진' 명단이었다. 현역 국회
의원 둘에 예비역 장성이 셋이나 되었다. 거기다가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뒤에 곁들여진 일
본인들의 이름이었다. 다히다케라는 공학 박사를 비롯해 대학교수가 둘이었고 도시 계획 전
문가도 끼여 있었다.
"그건 그렇군. 하지만 이 사람들이 진짜 모란단지 고문이란 건 믿을 수 있어?"
"진짜가 아니라면 이렇게 버젓이 팸플릿을 만들어 돌리겠어요? 게다가 실은 며칠 전 주식
회사 모란개척단 본사도 구경하고 왔습니다. 퇴계로 4가에 있는 일흥빌딩은 빌려쓰고 있었
는데 광장합디다. 복도에까지 양탄자를 좌악 깔아놓고 삐까번쩍한 황동 간판을 걸어놓은 게
그냥 눈가림으로 처발라둔 거 같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말야. 그 모란단지가 나나 김상무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야 땅장사죠. 여기서도 분양증을 팔 모양인데 철거민 딱지만큼은 아니겠지만 떨어질
게 있을 것 같아서요. 더군다나 이건 정부가 하는 게 아니니 전매 금지 같은 조치가 있을
리도 없고."
"그렇지만 값이 높게 매겨져나오면 헛일이잖아? 민간인들이 하는 거라면 오죽이나 셈판을
굴린 거겠어?"
"것두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여기 딱지값모다 크게 높지 않은 거
라던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말 복지 사업이라도 하는 거래?"
"그게 아니라 아무리 일본에서 자본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절반은 자체에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자본 유치 차원에서 일차분 분양증은 거의 개발 원가로 나올 거랍니다."
거기서 다시 영희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삶의 밑바닥을 구르면서 본능적으로
익힌 감각이었다.
"그거 참 이상하네. 본사 가보니 그렇게 으리번쩍하더라면서? 그런 사람들이 자본금이 없
어 헐값으로 땅을 내주고 시민들 푼돈 끌어모아야 한단 말이야?"
영희는 그렇게 반문해놓고 들고 있던 팸플릿에서 단장으로 표기된 사람의 이름을 짚으며
덧붙였다.
"단장이면 이 사람이 총책임자인 모양인데,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
"아, 그분요? 그분이라면 좀 알죠. 김창숙씨라구, 전에 광주군수까지 지내셨던 분이세요.
예비역 대령이구."
"전에 뭐 했냐가 중요한 게 아냐.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구?"
"그것두 알 만큼은 알아요. 실은 여기 관심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조사해봤거든요. 꽤나 감
동적인 사람이더라구요."
"감동적인 사람? 그게 어떤 사람인데?"
김상무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고향이 평양인데 월남하여 군대에 투신했다가 서른두 살 되던 50년대 말에 대
령으로 예편되어 여기 하대원리에 자리잡고 황무지 개간 사업을 시작했답니다. 그때는 대원
천이나 단대천이 치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버려진 땅이 많
았다더군요. 그 사람은 갈 데 없는 제대 군인들을 모아 그 땅들을 농토로 일구어나갔는데,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나중에는 50명이 넘었다는 겁니다. 이에 그는 그 집단의 명
칭을 재향군인개척단이라 하고 그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모란시장 일대를 일궜다는군요.
5,16 직후에 광주군수를 지냈는데 그것도 얼마 안 돼 그만두고 다시 돌아와 황무지 개척에
만 전념해왔대요. 모란이란 그곳 지명도 평양에 있는 모란봉에서 따와 그 사람이 붙인 거라
고 합디다. 모란시장을 연 것도, 모란우체국을 끌어들인 것도, 모란학원을 세운 것도 모두
그 사람 힘이구요."
거기까지 듣자 영희는 왠지 김창숙이란 사람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돌내골에서의 개간 시
절과 오빠 명훈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하지만 오빠의 외롭고 고단하던 싸움을 떠올리자 경
제적으로는 다시 불신이 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게 뭐야? 뭘 믿고 그 엄청난 사업에 손을 댔냐구?"
"사람들의 신망은 받는 편이지만 딱히 내놓을 만한 재산은 없어요. 실은 저도 그 때문에
맘을 정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형편만 살피구 있는 거라구요."
그제서야 김상무도 그렇게 실토를 했다. 영희가 그의 다음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오늘이 기공식이니 한번 같이 가서 살펴보자 이거지? 그래서 될성부르면 함께 딱
지장사 다시 시작해보자 이거야?"
"이래서 누님이라니까. 그래요. 이따가 기공식에 그 감창숙이란 사람하고 고문진들 모두
온다니까 감으로 한번 때려잡아봐요. 행정 관청에서도 어떻게 나오는지들 잘 살펴보시고..."
그때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헬리콥터 한 대가 낮게 날아갔다. 김상무가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가 돌아오며 말했다.
"오늘 무슨 별짜리가 헬리콥터를 타고 직접 기공식장에 내릴 거라더니 그 헬리콥턴가?"
"헬리콥터를 타고 온다구? 거 쉽지 않은 텐데. 정말 끗발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네."
"국회의원 둘도 올 거랍디다. 그뿐만 아니라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까지 모두 올거라던데
요. 중앙에서 장관이 뜬다는 말도 있어요. 교수, 박사도 오고."
그 말에 영희도 마음이 움직였다. 반드시 그 개발 주체를 믿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무렵
의 자금 사정이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게 했다. 지난 여름 잠실에 넣었던 돈이 그새 적잖은
이익이 붙어 되돌아온 까닭이었다.
"기공식이 몇 시야?"
"열한시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시계를 들여다보던 김상무가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갑시다. 아직 사십 분이나 남았지만 미리 가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
어요. 사람들 모여 왁작거리고 국회의원, 장관, 장군 다 뜬 뒤엔 거기 눈이 부셔 볼 걸 못
보는 수도 있으니까."
영희가 김상무와 함께 기공식이 있는 공터로 가니 아직 시간이 이십분이나 남았는데도 공
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곳곳에 늘어진 현수막과 확성기 성능을 시험하는 소리가 분위기
를 한층 고조시켰다. 공터 한쪽에는 김상무의 말대로 헬리콥터 한 대가 내려 있었고 또 다
른 쪽에는 번들거리는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저 사람들 모두 여기 사람들이야?"
행사 관계자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영희가 물었다. 선전과 동원이 있었겠지
만 아무래도 지나쳐 보이는 열기였다. 김상무가 그들을 훑어보는 척하다 말했다.
"근처 땅주인 같은데요. 멀리서 구경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 예민한 이해 관계자는
그 사람들일 테니까."
"땅주인들? 땅주인들이 왜? 이런 개발의 경우 통상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게 원래 땅임자
들 아냐?"
"아니죠. 이번엔 경우가 달라요. 저 사람들이 개발을 바라게 생겼다구요."
"그건 왜 그래?"
"생각해보세요. 단대천 하나를 두고 저쪽을 개발이다 어쩌구 해서 하루가 다르게 땅값이
치솟는데 모란 지역은 그대로 헐값 농토로 남아 있으니 땅주인들로서는 당연하죠. 게다가
대단지 쪽은 환지가 20프로밖에 안 되지만 모란단지는 52프로난 환지해준다는데, 땅주인치
고 누가 솔깃하지 않겠어요? 땅을 내놓으면 저들이 개발한 뒤 반 이상을 되돌려준다는데,
다시 말해 가진 땅의 절반을 개발 뒤의 오른 값으로 처분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럼 모란단지 쪽은 뭐야? 개발 뒤에 땅을 절반이나 그냥 내주면 뭘로 들어간 돈을 뽑
아? 개발 차익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셈인데 그걸루 뭐가 돼냐구?"
"계산상으로야 되죠. 워낙 덩치가 크니까. 말씀드렸잖아요? 광주대단지의 열두 배가 넘는
대개발이라니까요. 다되기만 하면 그 덩치 때문이라도 엄청난 차익이 남죠."
그때 다시 확성기를 조정하는 소음이 삐익삐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더니 전문 사회자인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내빈 여러분. 잠시 후부터 역사적인 모란단지 개발 기공식
을 거행하겠습니다. 초청 받으신 귀빈들은 단상의 지정된 자리에 앉아주시고 일반 내빈들도
준비된 자리에 차례로 앉아주십시오. 안내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식이 끝난 뒤 따로이 본부
석 동쪽으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곧 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그 말에 영희는 연단 쪽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연단 주위에는 적잖은 의자들
이 놓이고 먼빛으로 보기에도 거물같아 뵈는 사람들이 차례로 자리를 메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식이 시작되기까지는 그와 같은 안내방속이 서너 번은 더 되풀이되었다.
식은 거창하기 그지없었다. 군대식에 가까운 삼엄한 국민 의례도 그랬지만 귀빈 소개는
더욱 휘황했다. 현직 국회의원에 예비역 장성이 둘이고 일본인이 서넛에 서양인도 있었다.
마뜩찮은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영희에게도 은근히 믿음이 가는 주최였다. 사업 계획 보고
는 더했다. 영희로서는 도저히 실감나지 않는 거액의 투자 계획도 그랬지만 제시되는 신도
시의 모양도 상상 밖이었다. 이렇다 할 산업체가 없어 벌이는 서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광주대단지와는 달리 그곳은 외국 기업체가 유치될 국제 공단이 계획되고 있었다. 곧 일본
의 마루베니 주식회사가 30억 원을 투자하고 국제개발협의회 주택자금 5천만 달러가 미 국
무성을 통해 개발 자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광주대단지와 합치면 여기가 서울보다 더 커지겠네? 광주대단지도 백만 가까이 불
어날 모양이고, 거기다가 여기 신도시 250만을 보태면 인구만 해도 서울과 비슷하잖아?"
지루한 사업 계획 보고서가 끝날 무렵 영희가 김상무에게 물었다. 그때껏 입 한번 떼는
법 없이 사업 계획만 귀기울려 듣고 있던 김상무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셈이죠. 좀 허황되기는 하지만..."
"좀이 아니라 많이 허황된 것 같은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러자 김상무도 심각한 표정이 되어 받았다.
"하기는 따져봐야 할 데가 많군요. 여기 오면 뭘 좀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더니."
그때 영희의 눈길에 무언가 강하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쪽으로 흘깃 눈을 돌리니 저
만치 명훈의 옆모습이 보였다. 몇 달 전보다는 말쑥한 차림에 표정에 궁상도 보이지 않았다.
'오빠...'
영희는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명훈에게 다가갈 뻔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진 결의가 되살아났다. 영희는 얼른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가볍게 김상무의 옷
깃을 끌었다. 김상무가 뜻밖이라는 눈길로 영희를 보며 물었다.
"왜, 벌써 가시게요? 다 들어보지 않고..."
"그럴 일이 있어. 조용히 따라와요."
영희는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를 앞서 빠져나왔다.
'오빠, 아직은 우리가 만날 때가 아닌 것 같애. 내가 준비가 덜 되었거든.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미안해, 오빠.'
영희는 속으로 가만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뒤따라오던 김상무가 영문을 알 수 없다
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누님, 또 누굴 만나셨어요?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도."
"그건 아니구... 더 들어보았자니까."
영희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들어봤자라니요? 무슨 감 잡으셨어요?"
김상무가 긴장하며 영희를 바라보았다. 영희는 김상무가 자신의 직감을 너무 믿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워졌다.
"감이라기보다...그렇잖아? 일이란 게 이 일에서 저 일로 옮아갈 때 비슷하게 이어지는 부
분이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여기서는 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그게 맘
에 걸린다구."
"어떤 점이 그러세요?"
"그 단장이란 사람, 김상무 말대로라면 지금까지의 그는 전형적인 개척자의 인상이야. 나
도 그런 사람 하나 알고 있어. 5,16 직후 우리 오빠. 선산 발치를 개간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턱없는 일을 용감하게 밀어붙이더군. 이를테면 권력이나 돈과는 상관없이 오직 신념과 이상
만으로 밀고 나가는 게 개척자란 말이야. 그런데 재향군인개척단과 주식회사 모란개척단 사
이에는 비슷하게 이어지는 부분이 없어. 김상무가 서울서 봤다는 것이나 오늘 기공식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청송받는 그 사람의 경력과는 전혀 달라. 어딘지 빽이라든가 자본의 위
세를 과장하는 듯한 데가 있어. 그 사람이 변했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할 상황이 그를 그
렇게 몰아갔든 하여튼 앞뒤가 맞지 않아."
"그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오랜 세월 쌓아올린 신용과 명예가 그 사람에게 힘과 돈을
모이게 했을 수도 있잖아요?"
"설령 그렇더라도 이 사업은 그리 미덥지 않아 보이는데. 뭔가 이상해. 왜냐하면 이 방식
은 지금까지 성공해온 그 사람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럼 누님은 투자할 생각이 없으세요?"
"글쎄, 기분은 그런데... 김상무는 어때?"
"저는 좀더 지켜봤으면 해요. 기공식이 있었으니까 곧 무언가 눈에 보이는 진척이 있지
않겠어요? 그걸 보아가며 손은 대든지 말든지 하죠, 뭐."
표정으로 미루어 김상무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영희의 마음
이 흔들렸다. 거래를 시작한 지는 일 년밖에 되지 않지만 부동산에 관한 그의 감각은 다른
어떤 전문가보다 믿을 만한 데가 있었다.
"하긴 요즘 땅장사 위험 없이 어떻게 해? 살피다가 손댈 생각이 들면 그땐 내게도 연락
해. 크게 걸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한번 생각은 해보지."
영희는 그쯤 해두고 김상무와 헤어졌다. 실은 마땅한 곳이 없이 돈을 묶어두고 있자니 적
잖이 좀이 쑤셨다. 너무 서둘러 팔아치운 감이 없지 않지만 연말 잠실단지에서 빠지면서 얻
은 차익은 거의 영희가 빼돌려 이제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굴릴 수 있는 돈만도 3
백만 원을 되엇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영희는 잠시 오빠의 일로 마음이 흔들렸
다. 문득 지난 가을 오빠가 일하던 주택공사작이 떠오르며 그게 엉뚱한 추리로 이어진 까닭
이었다.
'혹시 오빠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그 집이 바로 우리집은 아닐까.'
그렇지만 영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이 어려서부터 오빠네게 품어온 기대와는
너무도 맞지 않은 느낌이었다.
'역시 그냥 가는 게 좋겠어. 설령 오빠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더라도 아직은 만날 때가 아
니야.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서는 안돼.'
이윽고 영희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마침 멈춰선 송파행 버스에 올랐다.
김상무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과 되지 않아서였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억만과 시아버지가 일하는 비닐하우스로 일을 거들러 나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엎어지든 자빠지든 저는 들어가볼랍니다. 누님은 어떠세요? 같이 들어가보지 않으시겠습
니까?"
"그쪽에서는 벌써 물건이 나온 모양이네. 그건 그렇고 장사하는 사람이 엎어지든 자빠지
든은 또 뭐야?"
"20평짜리가 3만 8천원에 나왔는데 날개 돋친 듯 다 나갔어요. 다음번엔 좀더 올릴 모양
이지만 요새 이자 따지면 작년 서울시 분양가보다 크게 높은 것두 아니라구요."
"그렇지만 문제는 개발이야. 개발은 확실하게 되는 거야? 정말 그게 집 지을 땅이 되는냐
구?"
"그렇게 크게 공사는 벌이는데 아무 탈 없는 걸 보면 선전대로 맞는가봅니다. 그런 일 관
장하는 행정 관청이구 그 지역 땅주인들이구 아무 말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뭐야?"
"이번에소 사람 머릿수 한번 믿어보는 거죠, 뭐. 접때 말했잖아요? 머릿수만 많으면 모든
게 보장된다구."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사람이 몰려?"
"모르긴 하지만 이대로 가면 여기로 몇 만을 몰릴 것 같아요."
"그래애?"
영희는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을 따져보았다. 민간 개발이고 여러 가지로 광주대단지 쪽보
다 조건이 좋은데도 값이 생각 외로 싼 게 좀 마음에 걸렸으나, 아무 일 없다면 적잖은 투
자 이익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 장 샀어?"
"이번에는 곱장사만 되면 넘길 생각으로 오른을 우선 다섯 장 거뒀어요. 괜찮다 싶으면
한 스무 장 거둬볼랍니다."
"김상무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나도 생각을 달리해야지. 그런데 정말 물건 되겠어?"
"아니면 사무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판이니 저야 걸어볼 수밖에 없지만 누님은 다시
한번 따져보세요."
김상무가 제법 생각해주는 말투로 받았다. 그게 오히려 영희의 마음을 굳혀주었다.
"좋아, 그럼 나도 한 열 장만 들어가보지. 지금이라도 물건 나오거든 5만 원까지는 받아
줘. 다음은 또 다음대로 값은 매기기로 하고..."
제 36장 날은 다하고
아직 3월인데도 교정의 나뭇가지에는 겨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벌써 봄기운이 가지
끝마다 퍼렇게 맺혀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쳐다보는 인철의 마음은 어둡고 쓸쓸
하기 그지없었다. 몇 날 밤을 다지고 다져 드디어 실행으로 나선 마음속의 결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떠난다...
그러고 보니 그날이 바로 2년 전의 입학식 날이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큰 기대와 흥분
으로 이 교문을 들어섰던가- 인철은 아득한 옛일을 회상하듯 그날을 떠올리며 속으로 가만
히 중얼거렸다. 탄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리움에서 우러난 것도 아니었다. 교무처의 창
구는 추가 등록과 이런저런 학사 업무로 붐비고 있었다. 인철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용지를
찾기 위해 창구 앞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2학년 때 과대표를
하던 친구였다.
"야, 이인철 너 여기서 뭐 해? 추가 등록이러도 하는 거야?"
"아니, 그냥 볼일이 있어서..."
인철은 그렇게 우물거렸으나 속으로는 자신이 등록하지 않은 걸 그가 알고 있는 게 궁금
했다. 그때 그가 또 뜻밖의 말을 했다.
"너 마침 잘 만났다. 그러잖아도 찾았는데 통 연락이 되야지."
"내게? 무슨 일로?"
"실은 학과장님이 네가 이번 학기에 등록하지 않은 걸 아시고 넌 만나고 싶어하셨어. 지
금이라도 연구실로 가봐. 틀림없이 거기 계실 거야. 삼십 분 전에도 거기 계신 걸 봤어."
창구가 혼잡해 수속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던 인철을 그 말에 잠시 일을 뒤로 미루고 학
과장의 연구실로 올라갔다. 그러잖아도 학과장은 그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작별 인사쯤은 반드시 치러야 할 사람이었다. 같은 호감으로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그가 입
학 때부터 자신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있음을 인철을 진작부터 느껴오고 있었
다.
지난 초여름의 일이었다. 인철이 문학회에 들어가 처음 시작하는 자의 열정으로 소설에
몰입해 들어가던 때의 어느 강의 시간이었는데, 좀체 강의 시간에는 잡담이 없는 그가 강의
중에 인철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것도 또 다른 가치일 수 있겠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 우리 과에 왔다면 효율성에서 문
제가 있을 것 같다. 여기는 학문 연구를 위한 기초과정을 다지는 곳이지 문학 작품 생산을
지도하거나 장려하는 곳은 아니다. 따라서 창작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처음부터 그쪽을 지
해 설립되었거나, 그렇지는 않아도 그쪽을 장려해주는 과로 옮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
를테면 신라예술대학 문창과나 삼국대 국문과 같은 곳이. 혹시 이 중에서 전학아니 전과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주선해줄 수도 있다."
말투는 빈정거림에 가까웠으나 인철은 그게 특별히 자신에게 해주는 충고임을 직감했다.
그것도 잡담 없기로 유명한 그의 강의로 미루어보면 예사 관심, 나아가서는 호의일 수도 있
었다.
한번은 인철을 직접 부른 적도 있었다. 지난 가을 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
는데, 그날도 며칠인가 점심때부터 얼큰해 있는 인철을 그가 연구실로 불렀다.
"들으니까 요즘 계속 술만 마셔댄다는데... 무슨 일 있어?"
그렇게 제법 자상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로서는 파격적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했다.
"그 원인이 가난과 피로라면 제안할 게 있다. 내 연구실에 조교로 일해 보는 게 어때?"
그때 조교로 일한다는 것은 등록금이 면제된다는 뜻이고 연구실에서 숙식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곧 라면값만 있으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어서 공부에
뜻을 둔 시골 유학생들에게는 선망의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이미 인철의 정신은
학과장의 전공인 언어학과는 멀어도 너무 먼 곳에 가 있었다. 그 바람에 거절은 해도 그 호
의만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2학년 때 과대표가 말한 대로 학과장은 연구실에 있었다. 테가 넓고 좁은 안경 둘을 겹
쳐 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책을 보고 있던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인철에게 흔하지 않
은 반가움의 표정을 드러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그날따라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절 찾으셨습니까?"
"그래, 이번에 등록하지 않았다면서? 왜 그랬냐?"
그가 성격대로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오래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학과장이 맞대놓고 물어오자 인철은 한마디로 자신의 결심을 밝히기가 어색했
다.
"네, 저어..."
"군대인가? 그거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추가 등록을 권하고 싶은데. 공부하는 사람은 단
절이 있어서는 안 돼. 가더라도 한 과정을 마쳐놓고 가는 게 옳을 듯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 자신의 경험으로 하는 말이야."
"군대도 가야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실은..."
"그럼 형편이 어려워서인가? 그거라면 전에 말한 대로 내 연구실을 써. 그래도 형편이
어렵다면 일주일에 한두 번 나가는 시간제 가정교사 자리라도 마련해주지."
그러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못 간절한 데가 있었다. 그 예사 아닌 호의가 새삼 감격스러
웠으나 인철의 마음을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대로 있다가는 더 난처해질 것 같은
예감에 인철은 서두르는 기분으로 받았다.
"저 오늘 실은 자퇴 원서를 내러 왔습니다. 그러잖아도 선생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
려던 참이었는데..."
"뭐? 자퇴? 휴학이 아니고?"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에도 평소 볼 수 없었던 마음의 동요가 그대로 드러나는 게 다시
한번 인철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내친 걸음이었다.
"네.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길을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길은 잘못 들었다고? 그럼 결국 소설하러?"
"그것도 아닙니다. 거기도 역시 잘못 든 길이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선생님 말씀대로 그 역시 한 가치는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너무 사치한 추구
였습니다."
그러자 학과장은 조금 짜증난 표정이 되었다. 사치한 추구라는 말이 명료성을 으뜸으로
삼는 그의 언어적 결백은 건드린 듯했다.
"그럼 뭔가?"
"제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자퇴까지 할 건 없지 않은가? 휴학이란 것도 있은 텐데... 잠시 쉬면서
생각을 가다듬을 수도..."
"물러날 곳을 만들어놓고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물을 등지고 싸우는 병사가 가장 용감
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수진을 친 군대가 싸움에 지면 전멸하는 수 밖에 없지."
학과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감정이 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이내 평소의
메마른 목소리로 돌아가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자신과 유사한 점을 보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네. 우호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지. 나
는 아마 우호적인 쪽일 거야. 그래서 자네가 당장은 흔들리고 있어도 일단 자리만 잡으면
좋은 학자로 자라갈 수 있다고 기대했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나와 달라질 모양이군. 자네가
어딜가서 무얼 하려는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더 할말도
없네. 잘 가게."
그리고는 다시 읽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철은 그제서야 일제 때의 소학교를 마지막
학력으로 고학으로만 국립대학의 교수에 이른 학과장의 이력을 떠올리고 자신에 대한 그의
별난 관심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인철이 다시 교무과로
내려오니 한차례 썰물이 지나간 듯 창구가 조금 한산해졌다. 자퇴 원서 용지가 없어 교무과
에서 내준 백지에 대충 맞춘 양식으로 써내려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살며시 다가와 팔을
건드렸다. 정숙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글씨가 흔들려 짜증난 눈길로 돌아보는 인철에게 그녀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왠
지 가슴이 싸늘해왔다. 그러고 보니 못 만난 지 벌써 석 달이었다.
"자퇴 원서를 내고 있어. 이제 여길 뜨려고."
인철이 담담히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감동을 받을 때, 혹
은 인정을 쓸 때 그녀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었는데, 인철에게 새삼 그런 걸 느끼는 게 난처
하다는 기분까지 아울러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호기심으로 인철이 쓰고 있는
원서를 곁눈질하는 게 까닭 모르게 안쓰러워졌다.
"너는 뭘 하러 왔지?"
인철이 자퇴 원서를 쓰다 정숙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쩌면 이 여자애를 다시 애틋하게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인철의 목소리를 다소 정감있게 했다. 정
숙도 다시 연인으로 만나지 않기로 하고 헤어진 여자의 것으로 듣기에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성의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수강신청 변경 할 게 있어서. 나는 전공을 현대 문학 쪽으로 생각하고 수강신청을 했는
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아니야. 어학 쪽으로 바꿔야겠어."
"그래? 좀 뜻밖인데..."
인철은 그렇게 말을 받다가 전혀 예정에 없던 제의를 덧붙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녀
와 전혀 다른 전공 선택에서 받은 자극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 있다가 좀 만날까?"
그 말에 정숙이 한동안 가만히 인철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망설임을 뿌리치는
말투로 받았다.
"그러지 뭐. 그런데 어디서?"
"교문 앞 목마다방 어때? 서류 제출하고 곧장 거기 가 있을게. 삼십 분이면 되겠지?"
그러자 정숙이 묘한 눈길로 잠깐 인철을 살피다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갈 수 있을거야. 그럼 거기서 기다려."
그리고는 다른 창구 쪽으로 갔다.
목마다방의 삐걱거리는 나무 층계를 오르면서 인철을 비로소 왜 그녀가 그런 눈으로 나
신을 쳐다보았는지를 알 듯 했다. 둘이서만 처음 마주 앉은 다방이 바로 거기였다. 그녀는
인철이 그곳을 선택한 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를 탐색했음이 분명했다. 정숙은 삼
십 분을 조금 넘겨 다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석 달만에 둘만이 호젓하게 마주앉는
자리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인철이 그렇게 묻자 정숙이 문득 비난하는 눈길이 되었다가 이내 평상으로 돌아가며 담
담한 반문으로 받았다.
"넌?"
"나야 뭐, 언제나 그렇지. 네 말마따나 되지 않을 일만 꿈꾸며 겨울잠을 자듯이..."
"그럼 이번에 굳이 자퇴까지 하며 꾸는 꿈은 뭐지?"
그녀가 무엇에 자극받았는지 다소 비꼬는 어조가 되어 물었다.
"글세, 권투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거나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둘 중 하난데, 아직 결정은
못했어. 다만 이 학교에서 졸업을 하는 것은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만 확실
해서 우선 그것부터 그만두는 것 뿐이야."
그녀의 갑작스런 악의에 자극된 탓일까. 인철도 그렇게 삐뚜름하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둘 다 안 되겠지만 발상만은 너답군. 용케 네가 할 수 없는 것만 골랐네."
"그건 그때 가봐야 할 일이고, 그래 너는 이 겨울 어떻게 났어?"
자기들이 헤어진 연인 사이란 걸 갑자기 상기한 인철이 뒤틀린 말투를 고쳐 그렇게 물었
다. 정숙이 또 한동안 인철을 살피다가 역시 원래의 담담함으로 돌아가 말했다.
"유행가 가사가 그 어떤 진지한 진술보다 더 절실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걸 느끼며 한겨
울을 보냈지. 경구도 싸구려가 더 절실하다는 걸 깨달았고. 이를테면 사랑은 여자에게는 운
명의 전부지만 남자에게는 다만 일부이다, 따위..."
인철을 그게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들을 것 같았다. 너는 지금 헤어진 뒤의 쓸쓸함을 말
하고 있구나... 그러자 때늦은 상실감이 가슴을 쑤셔왔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골방에 틀어
박혀 보낸 자신의 지난 겨울도 어쩌면 그런 쓸쓸함이 한 원인이 되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
이 퍼뜩 들었다.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지도 몰라, 어쩌면 아직도...
"그래, 왜 보자고 했지? 석 달 동안 전화 한 통 않길래 나는 네가 영 나를 잊은 줄 알았
는데?"
인철의 표정을 살피던 정숙이, 그나마 별로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인철은 공연히
속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은 기분에 가슴 철렁해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계획이 있었던 일은 아닌데... 너를 만나니까 문득 부탁할 게 있어서..."
"그게 뭔데?"
"나는 지금 떠나. 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아마 내 또래들이 통상으로 가는 곳은 아
닐 듯해. 그런데 옛날과는 달리 이번에는 왠지 겁이 나네. 다시 또래들과 떨어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나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게 말이야.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그
거 들어줄 수 있겠어?"
"말해봐. 들어보고."
"내가 아주 불안하거나 혼란에 빠져 내 또래들이 돌아보고 싶을 때 네가 그 통로가 되어
주지 않을래? 내가 너희들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는가를 알고 싶을 때..."
"그게 무슨 뜻이야?"
"이렇게 떠날 때 나는 늘 용감했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라. 혼자 길을 가도 너희들과
온전히 단절된 채는 어려울 것 같아. 그래서 너희들이 어디쯤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를 알고 싶은 때 내가 다시 여기까지 돌아오지 않고도 그걸 알 수 있게 해달란 말이야."
"또 어딘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하다가 갑자기 자신이 불안해져 과장된 문장으로
편지 같은 거라도 보내면 답장이나 해달라는 얘기야? 위로나 격려 비슷한 투로..."
"대개 비슷하게 맞혔는데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아. 감히 위로나 격려까지는 바라지 않으
니까.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만 성의 있게 답해주면 돼. 그리고 어떤 때는 이 부근에 와서
서성거릴지도 몰라. 그때는 지금처럼 나를 만나 차라도 한잔 같이 마셔주고 묻는 것에 아는
대로 대답만 하면 돼."
"거절하겠어."
듣고 있던 정숙이 갑자기 싸늘해져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인철은 거절당한 무안
함보다는 더 확연해지는 상실감으로 콧마루가 시큰해왔다. 자칫 눈물이나 보이지 않을까 당
황하며 대꾸를 못 하고 있는데 그녀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너와의 지난 일 년만으로 나는 충분히 피곤했어. 좀 전 어떻게 겨울을 났느냐고 물었는
데 대답에 빠뜨린 게 하나 있어. 잠- 겨울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 얼마나 잤는지 알아? 처음
한 열흘 틈만 나면 잤는데 그건 바로 너와 사귀면서 쌓인 피로 때문이었을 거야. 내 자신도
막연한 그 관념의 유희에 장단을 맞추느라, 네 비뚤어진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네 편
견과 독단에 베이지 않으려고, 그 변덕과 허영에 아첨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피곤했는지 너
는 모를 거야. 그래서 거기거 놓여났다 싶자 그렇게 잠이 쏟아진 걸 거라구.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그 피로 속으로 날 되돌리라구?"
그러는 그녀의 두 눈에는 새파란 불길 같은 것까지 엿보였다. 그게 다시 인철을 당황슿
럽게 해 인철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런 게 아니구..."
"세상에는 가끔씩 비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아. 또 어쩌면 너도 그 비상한 사
람 중에 하나일지 몰라. 하지만 비상함이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권리는 아냐. 이제 더
는 그런 근거 없는 권리에 피곤해지기 싫어."
"나는- 다시 시작하자고 한 건... 아니었는데..."
"것두 알아. 우리 사이를 예전처럼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필요로 하는 통로가 돼
달라는 거겠지. 그래도 마찬가지야. 너는 아주 겸손한게 또래들을 궁금히 여기는 척하겠지.
하지만 나는 알지. 그때도 나는 내가 본 진실이 아니라 네가 바라는 답을 해주기를 강요당
하리라는 걸. 모두 그렇겠지만 특히 너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하
는 사람이니까."
그 말을 듣자 인철을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버리는 기분이었다. 설득이나 해
명은커녕 최소한의 감정 표현조차 힘들 만큼 입이 얼어붙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
다. 정숙은 그로부터 몇 분 안 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준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인
철은 마지막 인사말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그녀를 보내고 홀로 자리에 남았다. 한동안 그는
막연한 슬픔에 젖어 그녀가 규정한 자신의 참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내 자
신을 그날로 이끈 그의 지난 겨울의 기억들로 가득 찾아왔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나는 무슨 결의를 하였던가. 이제 무엇이 나는 기다리는가.
"아직 여기 있었구나."
누가 세게 어깨를 치는 바람에 인철은 우울한 상념에서 깨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노광석
이었다. 그도 등록을 안 한 것으로 미루어 모진 고초를 겪고 아직도 구속중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나타난 것이었다. 모습도 그리 고생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너- 나와 있었어?"
인철이 놀라움과 반가움을 섞어 그렇게 묻자 광석이 씨익 웃으며 받았다.
"왜? 내가 무기징역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
"그래도... 들이니 엄청나던데."
"뭐가? 책상물림들끼리 둘러앉아 마르크스 책 몇 권 읽은 거? 물감으로 서투르게 그려
규격에도 맞지 않은 인공기 걸어놓고 실속도 없는 만세 몇 번 부른거?"
광석이 거침없이 말했다.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일 없이 풀려난 거야?"
"그거야 데모 주동으로만 몰려 달려가도 당하는 일이고... 기소유예야. 그 선배만 일 년
받았어."
거기서 무얼 상기했는지 광석이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회복해 말을 이었
다.
"하긴 네 얘기 얼핏 듣긴 했는데- 너도 꽤나 당한 모양이군. 우리에게는 병도 되고 약도
됐다."
"병도 되고 약도 되다니?"
"접선, 지령, 사상 학습 같은 것은 우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네가 나타나면서 덮씌 진
혐의야. 그런데 네가 용케 그걸 벗고 풀려나니까, 우리에게도 그 방향으로 추궁은 더 없더
군. 자생적 공산주의 운동으로 한 건 크게 엮을 듯하더니 곧 얼치기 사상 서클로 떨어뜨려
내보내 주더라. 집안 배경도 사상 범죄 같은 전력도 없는 것들이라 정신이 번쩍 나게 따귀
한번 올리고 엉덩이를 호되게 걷어차 내쫓는 걸루 충분하단 식이지."
"언제 나왔어?"
"한 달쯤 고생하고 나서. 지난 연말이야."
"그럼 등록은 왜 안했어?"
그러자 광서그이 얼굴에서 묘한 거드름기와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가 사라졌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하고는 있어도 그 또한 이번 사건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임에 틀림
없었다.
"실은 나도 조금 지쳤어. 좀 쉬고 싶어."
"그럼 휴학?"
"군대에나 갔다 왔으면 해. 어차피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곳이고, 그들도 그런 암시를 했
고..."
"그들?"
"경찰 말이야. 처음에는 은근한 강요같이 들렸는데, 지금은 나도 기꺼이 동의하게 되었
어. 실은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다는 기분이 못 견디겠어. 감시란 게 이토록 효과적인 억압의
수단일 줄은 몰랐어. 차리리 잘됐지 뭐."
인철에게도 군대가 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맞아, 거기서 한 3년 파묻혀 있다
가 나오면 무언가 할 만한 일이 보일지도 모르지...
"너 신체 검사 연기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당장 신체 검사를 받은다 해도 입대까지
일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텐데."
"실은 해병대에 지원했어. 가장 빨리 입대할 길은 그 방법밖에 없어서. 보름 후에 입대
해."
"그랬구나..."
"그런데, 넌 자퇴를 한다구? 정말 마주 떠날 거야?"
"그건 어디서 들었어?"
"학과장님이 인사차 들렀더니 그러시더군. 정숙이한테도 들었고... 이유가 뭐야?"
인철은 그제서야 그가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올 수 있었던 까닭을 알 듯 했다. 자
신의 마지막 요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고 떠난 정숙을 떠올리자 갑자기 말투가 뒤틀어졌다.
"여긴 잘못 끼어든 놀이판이었어. 나 같은 놈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숙이 걔가 그
건 말해주지 않았어?"
"참, 그것두 궁금하네. 니네들은 어떻게 돼? 군대에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도 아니고 영영
떠난다는 건데, 정숙이 걔는 뭐래?"
"뭐라구 할 것도 없어. 우린 벌써 지난 연말에 끝났으니까. 그냥 허영에 찬 작별의 의식
이랄까, 마지막으로, 그것도 우연히 학교에서 부딪쳤으니까 차 한잔 나눈 것뿐이야."
인철이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받았다. 광석이 그런 인철을 한동안
살피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지도 않던데. 정숙이 걔 그렇게 심각하고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혼자 있는거 입
학하고 처음 봤어. 너 혹기 너무 네 기분에만 취해 후회할 소리 한 건 아냐?"
광석이 전해준 정숙의 표정이 뒤틀린 인철의 기분에 묘한 진정의 효과를 나타냈다. 인철
은 공연히 찌르르해오는 가슴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목소리에 어리는 감상까지 감
출 수는 없었다.
"쓸데없이 미련만 들켰어. 한번 돌아섰으면 되돌아보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네가 본 것
은 슬픔이 아니라 경멸이었을 것이야."
광석이 그런 인철을 물끄러미 건네보다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미련만 들켰다니? 화해하려다가 거절당한 거야?"
"그건 아니지만 걔는 그렇게 들었을지도 몰라. 실은 떠나면서 한 가닥 너희들과 이어지
는 통로를 남겼으면 했거든."
"그래? 그런데 어디로 갈 작정이야?"
"그건 잘 모르겠어. 지금 확실한 것은 여기 더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수 틀리
면 너처럼 군대나 다녀올지도 모르지. 아직까지는 계획에 없지만."
광석이 다시 심각한 눈빛으로 인철을 살폈다.
"너도 결국은 그 찬연한 예술 지상의 이데아에 머물지 못하게 된 모양이군. 무언가가 네
철판 같은 둔감의 벽은 뜷은 거야. 네 아버지로부터 피로 전해진 어두운 열정을 너도 문학
만으로는 삭이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런 목표 없이 학교부터 그만둔다
니 좀 뜻밖이네."
그래놓고는 몸을 일으키며 인철의 어깨를 쳤다.
"나가자.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게 됐
으니 이별주 한잔이 없어서야 쓰겠어? 비록 각기 다른 길로 갈라서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
우리는 누구보다 좋은 길동무였으니까."
아직 밖은 정오도 안 된 한낮이었지만 인철을 두말없이 따라 나섰다. 어찌 된 셈인지 늘
궁상을 부리던 광석이 그날따라 앞장서 깃발을 들었다.
"오늘은 우리 '알타미라'로 가자. 낮이지만 왜지 불빛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싶네."
알타미라는 동굴 술집으로 그들이 늘상 가는 학교 앞 대폿집보다는 비싸게 먹히는 곳이
었다. 그러나 인철도 오랜만의 외출로 용돈은 전에 없이 넉넉한 편이어서 그대로 따라나섰
다. 교문을 벗어나기 전에 광석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발걸음을 멈췄다.
"이게 이 학교를 끈으로 삼는 우리들의 마지막 술자리라면 당연히 한형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너는 모르지만 비록 동급생이라도 한형은 내게 정신적인 형이었어. 내가 이 길로
접어들 때 가장 염려하면서도 잘 이해해주었고... 문학에서는 네게도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한 것으로 아는데?"
"어느 정도가 아니라 그가 바로 날 눈뜨게 해주었지. 그런데 어디 가서 찾지? 오늘 학교
나오기는 한 거야?"
한형을 떠올리자 인철도 갑자기 감상적이 되었다. 정숙 때문에 잠깐 잊기는 했지만 아침
에 집을 나설 때 꼭 만났으면 했던 사람을 기실 한형이었다.
"찾아서 함께 가자. 그 형 원래 무엇에든 열심인 형 아냐? 강의가 없어도 도서관에는 있
을거야. 거기도 없다면 근처 대폿집 어디에 있을 거고. 맘 좋은 양반이 실없이 낮술 마시자
고 들어붙는 얼치기 뿌리치지 못해..."
광석이 그러면서 인철의 팔을 끌고 다시 교정으로 돌아갔다.
도서관으로 올라간 그들은 어렵잖게 한형을 찾아냈다. 그러나 한형을 끌어내기 위해 다
른 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한형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주섬주섬 책가
방을 싸더니 앞장서 열람실은 빠져 나왔다.
"나는 둘 다 못 보고 영영 헤어지마 했더니... 실은 누가 봤다는 사람이 있어 조금 전까
지 교정을 뒤지다시피 했소. 그래도 안 보이길래 무정한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지. 하도 심란
해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참이었소."
그래서 셋이 알타미라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직 12시가 되기 전이었다. 착실한 집에 가
정교사로 입주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한형이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
놓으며 말했다.
"여기 특주란 게 막걸리에 도라지 위스키 섞은 거니 미리 속을 채워놓는 게 좋을 거요.
우선 이걸로 안주 삼고 파전 몇 장 곁들입시다."
그리고는 앞장서 술을 시켰다. 아마도 보내는 자의 몫으로 준비해온게 있는 듯 했다. 이
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온 인철과 광석이라 머뭇거림이 있을 리 없었다. 이에 셋은 입학
이래 가장 혼쾌하고 넉넉한 기분이 되어 술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가 너 말이야. 입대 그거 괜찮겠어?"
먼저 술잔을 비운 한형이 물들인 군용 바바리 코트 자락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뒤
따라 술잔을 놓던 광석이 멀거니 한형을 바라보았다.
"뭘?"
한형은 어찌 된 셈인지 세 살 아래인 인철에게는 경어를 쓰면서도 두 살 아래인 노광석
에게는 말을 놓았다. 광석도 한형에게 반말로 응수했지만 인철에게는 그런 말의 질서가 늘
혼란스러웠다.
"요즘은 군대도 옛날 같지 않다는 말이 있어. 옛날에는 웬만한 사고 치고도 군대만 가버
리면 그만이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야. 특히 데모하다가 간 녀석들은 월남 직행이라던데."
"월남? 그거 잘됐네. 한형 폼 절반은 월남 갔다 온 거 때문 아냐? 이왕가는 군대 월남이
나 갔다 와서 후배들한테 폼이나 잡지 뭐."
"그건 살아 돌아온 뒤의 얘기고 노가 너 우선 월남 가는 것 그 자체부터 받아들일 수 있
겠어? 이 시대의 사상가를 자처하던 주제에 아무리 민족이 달라도 명색 사상의 동지들이 벌
이는 게릴라전을 진압하러 갈 수 있겠느냔 말이야. 그것도 니네들 말대로라면 아메리카 제
국의 용병으로..."
"어쭈, 이제 떠나는 판이라고 날 제법 봐주네. 언제는 자각한 사회주의자리 어쩌고 빈정
대더니? 그렇지만 어쩌겠어? 가라면 가야지. 이미 몽고족한테 항복한 고려 군사가 되었는데,
쿠빌라이의 명을 거절할 수 있겠어? 가미가제를 만나 목이 날아가더라도 여몽 연합군의 배
를 타야지. "
광석이 뜻밖으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평소와는 달리 먼저 흥분의 기색을 드러낸 것은 오
히려 한형 쪽이었다.
"그럼 지난 일 년 그렇게 열올리며 물려다닌 게 그저 한번 해본 거였어? 마르크스가 어
떻고, 레닌이 어떻고, 하던 거 네 말마따나 폼이었냐구?"
한형의 그 같은 물음에도 광석은 느긋하기만 했다.
"형, 그러고 보니 뜻밖으로 순진한 데가 있었네. 제작년에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와서 홧
김에 한 소리 죄다 믿은 모양이지? 솔직히 내가 박정희 정권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렇다고 코뮤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건 아냐."
"그럼 인공기 걸어놓고 김일성 만세 불렀다는 건 뭐야?"
"그건 그러면 이 정권이 싫어할 거라는 것 때문이었을 거야. 그가 독자노선을 걷는다는
게 멋있어 보였어. 아메리카 제국이라면 소비에트도 제국이야. 나는 제국의 논리에는 관심이
없어."
"거 참, 이상한 사상가도 있네. 달동네 하꼬방에 모여 일 년 가까이나 열올린 게 겨우 그
런 유치한 감정 놀음이었단 말야?"
한형은 그러다가 갑자기 흥이 빠진 사람처럼 화제를 인철에게로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형을 또 웬일이슈? 작년 겨울 일은 저 얼치기 노가네 패거리들 파편 맞
을 거라며? 그런데 왜 갑자기 학교는 때려치우구? 무슨 일이오?"
원래 인철은 한형을 만나면 진지하게 속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광
석의 태도에서 받은 자극일까, 어느 새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없었다.
"국어 선생 노릇은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문학합네 하며 밑
도끝도 없이 빈둥거릴 팔지도 못 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어슬렁거리다가 어디 적당한
곳에 퍼질러앉아 마음 편하게 살려구요."
"이거 오늘 내가 낮도깨비한테 홀렸나? 둘 다 뭔가 심상찮은 일을 저질렀는데, 대는 이
유들은 하나같이 엉뚱하니. 하기야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한들 이해받겠어? 그리고 무슨
짓을 한들 이해해주지 않겠어? 알아서들 하슈."
한형도 마침내 캐묻기를 단념하고 정작 할 일은 이거라는 듯 한동한 술잔만 벌컥벌컥 비
워댔다. 하지만 끝내 그렇게 덤덤하게만 이어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세 번째 특주 항
아리가 비워질 때가지도 시답잖은 얘기로 킬킬거리던 노광석이 어느새 혀 굳은 소리가 되어
한형에게 물었다.
"실은 나 월남에나 다녀오려구 일부러 해병대에 지원했는데... 형 허풍 빼고 말해봐. 정말
전투병 선발 부대로 갔다 온 것 맞아? 다낭 들어갈 때 여자 머리 베어 허리에 하나씩 차고
들어간 거냐구? 그리구- 거기 어땠어? 콩까이들 정말 그리 예뻤어?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돈두 벌 수 있구?"
그러자 조금 전가지도 몽롱해지던 한형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싹 걷혔다. 한참이나 광석
을 관찰하던 눈길이더니 차갑게 말했다.
"왜 월남을 가려고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겠는데..."
"말했잖아? 덕분에 외국 구경도 좀 하고... 콩까이도 안아보고, 돈도 벌 수 있으면 벌고..."
광석이 과장된 말투로 한형을 말을 받았다.
"허세 부리지 말고 말해. 그래야 정말로 대답을 할 수 있어."
"정말이라니까. 나라 바깥 구경도 하고, 돈도 좀 벌고, 월남의 잔느 뒤발(보들레르의 정
부)도 안아보고,,,"
노광석이 그렇게 흥얼거리자 한형이 문득 정색을 했다.
"뱃멀미로 지난 설에 먹은 떡국까지 게워내고 비실거리며 낯선 항구에 내려보면 숲이 좀
무성하긴 해도 우리와 비슷한 땅과 적어도 양키들보다는 훨씬 우리와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진지를 구축하고 들어앉거나 작전을 나가거나 이국 정취 같은 사치한 감상을 느낄 겨
를은 없어. 돈? 하기야 국내보다는 하루 1달러의 생명 수당이 더 붙지. 하지만 그뿐이야. 좋
은 보직 받아 목숨 걸고 군수품 도둑질을 않는 한 국군 사병의 월급뿐이라구. 예쁜 콩까이?
월남의 잔느 뒤발? 나중에 그런 얘기를 그럴 듯 하게 써갈기는 놈이 나오겠지만 그건 소설
일 뿐이야. 천막보다 못한 얇은 휘장을 내려치고 드러누워 하루에도 수십 명씩 받아내는 작
고 새까만 납작코의 매춘부가 콩까이의 참모습이라구. 한번 갔다 오면 일주일은 국제 매독
걱정으로 잠을 설쳐야 하는..."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전에도 한형은 더러 월남 얘기를 했다. 그때 인철이 받은 인
상 중에는 틀림없이 프랑스 외인 부대와 흡사한 것도 있었다. 그것도 영상으로 아름답게 해
석된, 그러나 그날 한형이 보여준 월남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거기다가 머리에 든 먹물도 가끔은 사람을 짓이겨놓지. 특히 월남 지식인들을 만날 때
느끼는 그 싸늘한 눈초리... 심지어는 월남군 장교에게서조차 그걸 느낄 때도 있지."
"어어, 한형 왜 이래? 아메리카 용병으로 월남 가 한 몫 잡으렸더니 재를 뿌려도 너무
심하게 뿌리잖아?"
광석이 이죽거리며 받았다. 그제서야 한형도 광석의 뒤틀린 심사를 알아차린 듯 인철 쪽
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형은 말하자면 다시 한번 닻을 올리는 거요? 하지만 그래도 대강의 방향은 있을 거
아뇨?"
"권투 미들급 세계 챔피언을 먹거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정오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
인철은 정숙에게 써먹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광석이 킥킥거렸으나 한형은 웃지 않
았다.
"그럼 정말로 다시는 여기 올라오지 않을 생각이오?"
"그건 아마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문학으로도? 소설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지금 거기서 달아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저주받은 운
명으로부터. 나야말로 길을 잘못 든 속인이었습니다."
그러자 한형이 술 한잔을 성급히 비우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약함 또는 힘 너 거기 있구나. 힘이어라. 너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모른다.
너는 아무데나 들어가고 모든 것에 대답한다. 네가 시체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결코
너를 죽일 수 없으리..."
인철은 그게 그가 한때 미쳐 지냈다는 랭보의 구절임을 알아차렸다. 술기운과 함께 이상
한 흥취가 일어 역시 나직한 읊조림으로 받았다.
"틀림없이 방탕은 어리석다. 악덕은 어리석다. 썩은 부분은 멀리 던져버려야 하리라. 그
러나 시계가 마침내 순수한 고통의 시간만을 울리게 되는 법은 없으리."
그러자 한형이 취한 사람답지 않게 깊숙한 눈으로 인철을 바라보다가 무슨 예언처럼 말
했다.
"이형도 '체형을 받으면서 노래하는 족속이지...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작별일지는 모르나 이형은 받드시 문학으로 돌아올 것이오."
그리고 인철이 그의 말뜻에서 어떤 불길함을 찾아내기도 전에 한숨과 함께 광석을 돌아
보며 덧붙였다.
"떠날 수 있는 너희들이 오히려 부럽구나. 사람의 아들이여. 이제 우리는 더 머물 곳도
떠날 곳도 없어라..."
한형이 감상적이 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순식간에 광석과 인철에게도 옮아붙었다. 광석이
어울리지 않게 축 처진 목소리로 한형의 시를 받았다.
"그래도 이제 날을 다하였고 우리는 떠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 다음은 그야말로 이취였다. 정말로 그곳 특주가 막걸리에 도라지 위스키를 섞은 것이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정 도수가 막걸리의 배를 넘어 그들이 우울한 작별의 의식을 마치고
술집을 나섰을 때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해 있었다.
인철은 어디가 어딘지 모를 길을 걷고 차를 갈아탔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젊은 덕분인지
저녁 9시 무렵에는 성남의 집 앞에 이르렀다. 무슨 일인가로 마침 대문께에 나와 있던 형수
가 벽을 짚고서 비틀거리는 인철을 보고 놀라 형을 불러냈다. 그런데 그 사이 어떤 감정의
굴곡을 가진 것일까, 인철은 형에게 부축되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기세 좋게 선언했다.
"형님, 저 결국 사법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쨌든 시험을 합격해놓고 볼 겁니다.
그들이 정히 저를 판사나 검사로 임용해주지 않으면 전에 말씀드린 대로 평생 정부 상대로
행정 소송이나 벌이며 보내죠, 뭐. 그것도 해볼 만한 일 같지 않습니까?"
그러자 못마땅하게 굳어있던 형의 얼굴에 갑자기 애처로워하는 빛이 어렸다. 부축하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인철을 꽉 껴안으며 한숨처럼 받았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해봐라. 나는 언제나 저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한 발 앞서 스스로
를 진창에 내굴렸지만, 너는 달라야겠지. 너를 한층 높이 끌어올려 저들에게 맞서는 것도 좋
은 방법이 될 거다. 나도 힘껏 도우마." (12권에 계속)
책,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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