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미 슌야 지음 / (주)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이 책은 일본의 헤이세이 시대 실패를 분석한다. 저자는 헤이세이 시대의 실패는 갑자기 벌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70년대 말부터 세계사적 대전환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지만, 일본은 오일쇼크를 무난히 극복한 데 따른 안도감에 사로잡혀 변화를 직시하지 못해 1980년대 경제 버블의 형성과 붕괴를 가져왔고, 1990년대 이후 전개된 글로벌화의 위험과 도전에 대한 응전에서 실패했다는 진단이다.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 저자 요시미 슌야
1957년 도쿄 출생. 도쿄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도쿄대학 신문연구소 조교수, 사회정보연구소 교수를 거쳐,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정보학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사회학ㆍ문화연구ㆍ미디어 연구이다. 저서로는 『시각도시의 지정학-시선으로서의 근대』, 『포스트 전후사회』, 『친미와 반미-전후일본의 정치적 무의식』, 『트럼프의 미국에 살다』, 『대예언-‘역사의 척도’가 나타내는 미래』, 『전 후와 재후의 사이-응용하는 미디어와 사회』 등 다수 있다.
▣ Short Summary
일본의 헤이세이(平成, 1989~2019) 시대는 두 차례의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대참사 외에도 정치개혁 실험이 좌절하고 샤프, 도시바 등 기업들도 글로벌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속속 무너 지던 ‘잃어버린 30년’이었다. 사회적으로도 비정규직 증가, 인구감소, 지방 소멸위기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고,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같은 엽기적인 사건들도 충격을 가했다.
이 책은 일본의 헤이세이 시대 실패를 분석한다. 저자는 헤이세이 시대의 실패는 갑자기 벌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70년대 말부터 세계사적 대전환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지만, 일본은 오일쇼크를 무난히 극복한 데 따른 안도감에 사로잡혀 변화를 직시하지 못해 1980년대 경제 버블의 형성과 붕괴를 가져왔고, 1990년대 이후 전개된 글로벌화의 위험과 도전에 대한 응전에서 실패했다는 진단이다.
한편 ‘헤이세이’의 30년을 일본의 단계적인 쇠퇴과정으로 본다면, 4개의 ‘쇼크’가 이 과정에 박차를 가했는데, 제1의 쇼크는 1989년에 정점을 찍은 버블경제의 붕괴이고, 제2의 쇼크는 1995년의 한신ㆍ아 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이며, 제3의 쇼크는 2001년의 미국 동시다발테러와 이후 국제정세의 불안 정화이고, 제4의 쇼크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들 쇼크가 헤이세이사의 시대적 경향성에 변화를 부여하지만, 그 변화의 표출은 영향이 발생하는 사회의 차원에 의해 달라졌다면서, 이 책에서는 크게 경제(제1장), 정치(제2장), 사회(제3 장), 문화(제4장)의 4개 차원에서 각기 다른 변화의 표출방식을 고찰한다.
▣ 차례
머리글 ‘헤이세이’라는 실패 - ‘잃어버린 30년’이란 무엇인가
- 2 ?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실패의 박물관 / ‘헤이세이’라는 실패 / 정치의 좌절, 회복없는 소자화(小子化) / ‘쇼와’의 반전 / 네 가지 쇼크 / 세계사 속의 ‘헤이세이’
제1장 몰락하는 기업 국가 - 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벼랑 앞에서 우쭐거리던 일본 / 2년 반 지연된 금리인상 / 일본호, 모로 쓰러지다 / 야마이치증권 ‘자 진폐업’의 충격 / 야마이치증권 파탄을 잉태한 쇼와사 / 반도체시장에서의 일본의 참패 / ‘가전’의 저주와 신화의 종말 / 도시바의 실패를 검증한다 / 카를로스 곤 신화에 취한 일본 사회
제2장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 - ‘개혁’이라는 포퓰리즘 버블 속의 액상화 - 리쿠르트 사건 / 정치극장의 시스템을 바꾸다 - 소선거구제 도입 / 일본신당 붐이 남긴 것 / 선거제도 개혁의 전말 - 개혁파와 수구파 / 노조의 변절 사회당의 곤경 / 자멸로 치닫는 사회당의 혼란 / 자민당을 때려부순다 - 고이즈미 극장의 작동 방식 /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정치주도’ / 국가전략국 구상의 오류와 전말 / 아베 정권 - 액상화하는 정ㆍ관계와 ‘관저(官邸)주도’
제3장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 - 사회의 연속과 불연속 ‘실패’와 ‘쇼크’ 사이 / 두 차례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 옴진리교 사건과 미디어의 허구 / 헤이 세이 첫해에 상실한 자아 / 확대되는 격차 - 미래에 절망하는 청년들 / 격차의 제도화, 계급사회로 가는 헤이세이 일본 / 멈출 줄 모르는 초소자고령화 / 소멸하는 지방 - 일본의 지속불가능성
제4장 허구화하는 아이덴티티 - ‘아메리카닛폰’의 행방 ‘종말’의 예감 / ‘부해(腐海)’와 ‘초능력’ / ‘미국’이라는 타자=자아 / 허구로서의 ‘일본’ / 아무로 나미에와 여성들, 그리고 오키나와 / 절정 속의 주역교체 - 두 명의 여성 스타 / 10년 후의 절정과 붕괴 - 1989
년과 1998년 / 코스프레하는 자아 퍼포먼스 / 1990년대 말의 전환 - 환경화하는 인터넷 세계 / 자폐 하는 넷사회
마침글 세계사 속의 ‘헤이세이 시대’ - 잃어버린 반세기의 서곡 ‘헤이세이’를 시대로서 생각한다 / 다시, 올림픽으로 향하다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올림픽인가 / 후텐마기지 이전과 오키나와의 분노 / 오키나와에서 헤이세이 일본을 바라보다 / 발흥하는 아시아 홀로 뒤처진 일본 / ‘잃어버린 30년’의 인구학적 필연
후기 역자 후기 연표 주요 인용ㆍ참고 문헌
- 3 ?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몰락하는 기업 국가 - 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벼랑 앞에서 우쭐거리던 일본
1980년대 말 시점에서 일본은 자신감이 절정에 달했다. 경제는 호조였고, 그 기반도 약하지 않았다.
내수도 상승하고 있고, 실업률은 최저수준, 학생의 취업전선도 공급자에게 대단히 유리한 시장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투자자나 기업가뿐 아니라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긴 방대한 ‘보통 사람들’ 이 ‘재테크’에 매달렸고, 브랜드상품이나 고급차, 리조트 회원권을 사들였다. 은행과 언론, 상업자본도 내수확대를 명목으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했다. 젊은이들은 아직 1990년대 이후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었고, 미래는 과거와 다름없이 밝고 풍요로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2년 반 지연된 금리인상 물론 지나친 호조세의 경제에는 큰 리스크가 잠복해 있음을 전문가들이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1985년 9월 선진 5개국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회의(G5)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모든 것의 출발 점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비대화했던 만큼 미ㆍ일이 협조해 엔화강세 달러약세 노선을 취하는 것에 합의했는데, 이 합의를 거치며 엔ㆍ달러 환율은 불과 1년 만에 달러당 235엔에서 150엔대로 하락하는 등 급격한 엔화강세로 치달았다. 당연히 이로써 일본의 수출산업은 대타격을 입을 터였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투입이나 금융완화 같은 경기부양책이 기대됐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은 이듬해인 1986년 1월에 기준금리를 5.0%에서 4.5%로 내리고, 이후 4월에 3.5%, 11월에 3.0%로 잇따라 인하했다. 일본은행은 1987년 2월 기준금리를 2.5%로 역대 최저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린다.
이렇게 금리가 대폭 하락한 만큼, 시장에서는 보다 많은 자금이 쉽게 유통됐고, 반쯤 필연적으로 인플 레이션이 우려됐다. 그러나 과거 금리인하의 영향과 달리 이번에는 넘쳐나는 돈이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몰렸다. 이리하여 1986년 4월 도쿄도심의 땅값이 1년 만에 53.6% 상승했다. 땅값 상승으로 도쿄 도심을 중심으로 부동산업자들의 ‘땅투기’가 횡행했고, 각지에서 난개발이 성행했다. 한편 1987년 1월의 닛케이평균주가는 1984년 1월부터 3년 만에 2배인 2만대에 올라섰고, 1988년 12월에는 3만대에 도달했다. 이처럼 1988년 시점 일본 경제가 ‘버블’로 불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는 1987년 2월에 또다시 0.5% 인하됐다. 일본은행 간부는 1986년 가을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금리인하가 아니라 금리인상이라고 판단했지만, 대장성과 대장상인 미야자와 기이치의 강경한 판단에 저항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와 일본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선 것은 버블이 제어불능 단계로 확대되어버린 1989년 5월부터였다.
1980년대 말의 일본경제를 되돌아보면 한편으로는 엄청난 기세의 엔화강세로 국내 제조업은 대타격을 입었고, 이는 특히 중소 제조업에서 심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수 확대를 위해 금리가 대폭 완화됐고, 시중에는 대량의 자금이 풀렸지만, 이들은 엔화강세로 이윤이 감소한 제조업을 활성화시키기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벌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다.
- 4 ?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일본호, 모로 쓰러지다 결국, 1989년 리쿠르트 사건이 발생해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이 붕괴되고 대장상도 미야자와 기이치에서 하시모토 류타로로 교체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방침도 엔고억제 중시에서 버블억제 중시로 전환이 꾀해졌다. 1989년 5월부터 12월에 걸친 금리인상도 그중 하나지만, 또 하나는 대장성 국장 명의 2건의 통달이었다. 하나는 1989년 12월 26일에 대장성 증권국장 명의로 나온 ‘가도타니 통달’(‘증권회사 영업자세의 적정화 및 증권사고 미연 방지에 대해’)이고, 다른 한 가지는 1990년 3월 27일 대장성 은행국장 이름으로 발표된, 총량규제 통달 ‘토지관련 융자의 억제에 대해’다. 전자는 버블경기 속에 흠뻑 빠져 있던 증권회사를 요동치게 했으며 야마이치 증권 파탄의 계기가 됐다. 후자는 부동산 매매에 대한 은행 융자를 재검토하도록 해 땅값거품이 장대 쓰러지듯 꺼지는 요인이 됐다.
반도체시장에서의 일본의 참패
1990년대 버블붕괴가 도달한 것은 야마이치증권, 홋카이도척식은행 등 거대 금융기업의 파탄이었다.
그런데 이런 파탄과 수많은 은행의 합병통합을 거쳤음에도 일본경제는 회복할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 파탄의 중심은 금융계에서 과거 ‘재팬 애즈 넘버원’의 주역이던 제조업의 붕괴로 향해갔다. 그중에 서도 일본의 실패를 두드러지게 드러낸 것은 전기산업이다. 이 쇠퇴는 1990년대 반도체의 글로벌 경쟁에서 일본 기업이 미국과 한국, 대만 기업에 차례로 패배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1990년대에 세계의 반도체 메이커의 매출에서 상위 10개사 중 6곳이 일본 기업이었다. 1위는 NEC, 2
위는 도시바, 3위는 히타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반세기 후인 2012년의 상위 10개사에 남은 것은 도시바뿐이다. 1위는 인텔(미국), 2위는 삼성(한국), 3위는 퀄컴(미국)이다. 이 시점에서 간신히 5위였던 도시바도 얼마 후 자취를 감췄다. 실패의 제1요인은, 일본의 주요 전기산업이 TV시대의 종언과 모바일형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다른 하나는 1990년대부터 글로벌한 규모로 전개된 수평 분업 구조에 일본기업이 적응하지 못했던 점이다.
‘가전’의 저주와 신화의 종말 2000년대 반도체 경쟁에서 한국, 미국, 대만에 패배한 일본의 전기 대기업은 설욕전을 기약하며 액정 TV에 기대를 걸었는데, 그 대표가 샤프였다. 2001년 내놓은 액정TV의 히트로 상승기류를 단 샤프는 고품질 액정TV의 생산에 회사의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액정TV에서 대담한 승부에 나선 배경에는 반도체 경쟁에서의 쓰라린 경험 때문으로 여겨진다. 반도체에서는 각 기업이 소규모 투자를 계속한 탓에 거액투자로 일거에 승부에 나선 한국이나 대만의 기업에 패배했다. 때문에 일본기업은 “우물쭈물하 다간 또 한국, 대만, 중국 기업에 추월당한다”며 사운을 건 대담한 투자로 승부를 건 것이다.
그러나 이 승부는 역효과가 났다. 2008년 리먼쇼크 후 그때까지 액정을 중심으로 한 박막형TV의 주전 장이던 선진국 시장에서 TV 판매가 급감했다. 샤프는 자금회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고, 사업부문을 매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경제산업성은 산업혁신기구가 2000억 엔을 출자하도록 해히타치, 도시바, 소니의 액정 디스플레이 사업을 통합한 조직에 샤프도 합병시키려 했지만, 샤프는 응하지 않았고, 결국 대만기업 홍하이에 매각됐다. 실은 샤프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의외로 단순했다.
요컨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잘못됐던 것이다. 그들은 TV시대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잘못된 전망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이 가메야마시에 최초의 액정TV 공장을 세웠을 때 이미 인터넷의 극적인 확대로 TV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 5 ?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 - ‘개혁’이라는 포퓰리즘
버블 속의 액상화 - 리쿠르트 사건 버블시대의 일본 정치에서 생겨난 것은 썩어 문드러져 가던 55년 체제의 액상화(液狀化)였는데, 헤이 세이 직전인 1988년 발각된 리쿠르트 사건은 헤이세이 정치의 액상화를 가속화하는 쇼크로 작용했다.
리쿠르트 사건의 특징은 제공된 것이 미공개 주식이라는 종래 법적 규제의 바깥에 있던 금융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양도대상도 극히 넓었다. 주식을 건네받은 정치가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오부치 게이조 등 자민당 실력자 대부분이 포함됐고, 야당에까지 미쳤다. 뇌물 목적도 그저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미공개주식을 대량으로 건넨 것이어서, 그 일탈성 때문에 1988년부터 1989년에 걸쳐 여론과 언론, 정계 전체를 빨려들게 한 거대한 스캔들이 되었다.
리쿠르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정권이 무너지자 후임 총리로 선택된 우노 소스케는 여성스캔들 등으로 2 개월 만에 퇴진했고, 후계인 가이후 도시키도 걸프전 대응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소선구제 도입도 달성 하지 못한 채 사임하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총리가 된다. 다케시타 정권 붕괴 후 일본의 총리가 어지 러울 정도로 속속 교체된 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권력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니고, 형편에 맞아 총리 자리에 오른 ‘장식물’에 불과했음을 입증한다. 당시 정국을 움직이는 권력의 실질적인 중심은 구 다나카파 세력을 승계한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을 중심으로 한 게이세이카이(經世會)에 있었다.
정치극장의 시스템을 바꾸다 - 소선거구제 도입 리쿠르트 사건이 일본 정치에 던진 충격의 마이너스 효과가 이런 정치 혼란과 일탈이었다면, 플러스 효과는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정치개혁’이 최대 과제라는 공통인식이 생겨난 것이었고, 정치개혁의 중심에 위치한 것이 중의원 선거제도의 소선거구제로의 전환이었다.
선거제도 개혁의 전말 - 개혁파와 수구파 오자와 호소카와 정권은 자민당 비판여론을 배경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최대목표로 내걸며 생각도 입장도 다른 여러 당파를 오자와가 솜씨 좋게 하나로 모아 성립한 정권이었다. 그런 만큼 권력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특히 최대의 불안정 요인은 사회당에 있었다. 사회당은 자민당 정권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신정권에 참가했지만, 정작 중요한 선거제도 개혁에는 부정적인 정치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포진 속에서 호소카와는 선거제도 개혁법안의 연내 처리를 꾀했고, 1993년 11월에 중의 원에서 법안을 여당만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참의원에서는 사회당의 조반(造反)으로 부결되고 만다. 그러자 호소카와는 자민당 내 개혁추진파 의원들까지 참여하는 궐기집회를 열었고, 1월말에는 호소카와와 자민당 총재인 고노 요헤이와의 영수회담을 통해 양당이 법안처리에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정치개혁 관련 법안은 1994년 3월 성립하게 되었다. 이 법안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그 후의 고이즈미 정치도, 민주당 정권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인 만큼 엄청난 성과였다.
자민당을 때려부순다 - 고이즈미 극장의 작동 방식 사회당을 디딤돌로 되살아난 자민당 정권은, 하시모토 내각에서 주센 문제와 야마이치증권을 비롯한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한편 오키나와 후텐마기지 반환에 관한 미국과의 합의를 마무리 지었다. 1996년 10월에는 소선거구비례대표병립제에 의한 첫 중의원선거에서 승리하며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했
- 6 ?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다. 하시모토는 제2차 내각에서 행정개혁에 본격 착수해 성청(한국의 부처에 해당하는 중앙관청) 재편 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재정구조개혁법을 통과시키고, 적자국채를 삭감해 재정재건으로 향하는 길을 열려 했다. 그러나 1998년 7월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면서 하시모토 내각은 2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뒤이어 등장한 오부치, 모리 등 두 내각은 모두 인기가 없었고 자민당에 대한 불만은 커졌다. 이 변화에 대한 열망 속에 재등판을 꾀한 하시모토 튜타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대결에 나섰으나 언론의 관심과 대중적 인기를 거머쥔 고이즈미가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과거의 어느 자민당 정권과도 다른 포퓰리즘형 정치를 전개했다. 고이즈미 정권에서 정책운영의 주축은 다케나카 헤이조를 좌장으로 한 경제재정자문회의였다. 기획의 주체인 경제재정자 문회의에서 다케나카는 우선 일부 재무성, 경제산업성의 전 관료와 정무비서관 등 측근과의 ‘비밀회의’ 를 열어 전략목표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해서 2001년 6월에는 ‘경제재정에 관한 기본 방침 2001’이 각의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경제자산을 효율이 낮은 부문에서 성장분야로 돌리는 ‘구조개혁’ 단행과 우정 분야 3개 사업의 민영화, 국채발행 30조 엔 이하 억제, 공공투자의 대폭삭감, 사회보장제도와 지방 재원의 전면 재검토 등 고이즈미 개혁의 주축이 될 정책 대부분이 담겼다.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정치주도’ 2009년 8월 30일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기존 115석에서 308석으로 의석수를 3배 가까이 늘리며 압승했다. 자민당은 고이즈미 정권 때 획득한 300석에서 119석으로 줄어들며 완패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당시 하토야마는 이 선거를 ‘혁명적’이라고 형용했지만, 그 ‘혁명’은 혁명에 의해 탈취된 것이 아니라, 국민이 못난 꼴을 거듭 보이던 자민당에 정나미가 떨어지면서 거저 얻은 것이었다. 하토야마는 “메이지유신 이래 관저주도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주도로 바꾼다”고 선언했고 관저주도의 정치에서 시민주도 정치로의 전환을 정권의 축으로 내걸었다.
문제는 정치주도의 알맹이였다. 성청 관할주의 행정과 업계의 기득권익, 이를 정치의 장에서 수호하는 족의원 등을 타파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대체해 소통이 잘되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동시에 국가의 장기적 운영이라는 관점에서도 지속가능한 정책결정 구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고이즈미 정권이 내놓은 답은 다케나카 헤이조를 중핵으로 한 경제재정자문회의를 성청 관료시스템에 대항토록 하고, 중대 국면에서는 총리의 연기력을 전면에 내세운 퍼포먼스 정치가 떠받치는 구조였다.
반면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것은 국가전략국 구상과 매니페스토(종래의 선거공약과 달리,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일정 등을 갖춘 정책목표) 정치였다. 즉 민주당은 고이즈미 시대 경제재정자문회의를 대신해 국가전략국을 창설하여 이를 정치주도의 기둥으로 하는 한편, 고이즈미 정권의 극장정치를 매니페스토에 의한 언론정치로 대체하려 했다. 확실히 방침은 고이즈미 정권보다 훨씬 진지했다. 고이즈미 정권의 전략에는 어딘지 모를 허세와 괴이함이 느껴졌지만, 민주당의 방침은 정공법이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증명된 성과는 외견상의 우열과는 정반대로 고이즈미 정권의 완승, 민주당 정치의 참패였다.
아베 정권 - 액상화하는 정ㆍ관계와 ‘관저(官邸)주도’ 2012년 12월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기존 118석에서 294석으로 3배 가까이 의석을 늘리며 압승했다. 민주당은 지난 중의원 선거에서 획득한 308석의 5분의 1 이하인 57석을 얻는 데 그쳤다. 3년간의 민주당 정권운영이 얼마나 국민을 실망시켰는지를 상징하는 결과다. 수차례 정치주도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베 정권은 민주당이 내건 래디컬한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이를 교활한 관저주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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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했다. 실제로 관저가 성청의 관료들을 뜻대로 움직이고, 예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내각인사국과 경제재정자문회의로 충분했다. 관방장관은 성청의 국장급 인사를 관리함으로써 성청 전체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고이즈미 정권처럼 포퓰리즘과 경제재정자문회의의 민간인 활용을 솜씨 있게 조합하면 여론에 ‘정치주도’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자체는 1990년대부터 추진된 구조개혁을 한층 앞으로 밀고 나가는 새로운 기축이 라곤 할 수 없었다. 아마 아베의 본심은 헌법 개정을 포괄한 보다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한 방향이었겠 지만, 이는 국민들 사이에 폭넓은 반대여론이 존재한다. 그런 한편으로, 헤이세이 시대를 관통한 정치 주도 조류에 휩쓸리면서 중앙성청 관료들 사이에는 관청의 전통이나 방침을 지키기보다, 관저의 의향을 촌탁(忖度)하는 태도가 침투했다. 정관의 긴장관계에 액상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현상의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 것은 2017년부터 2019년에 걸쳐 관저 및 총리주변과 문부과학성, 재무성, 후생 노동성이 주고받은 의사록과 공문서, 데이터 등 ‘기록’의 신빙성이 문제가 되면서부터였다.
제2차 아베정권은 민주당 정권의 실패를 뒤집고 관저주도의 기본형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그 최대 위험은 관저와 성청의 관계가 액상화하는 가운데 공적기록에 기반한 정치의 공정성이 뿌리부터 손상되면서 전체가 허구화한 것이다. 우리들은 정보와 기록, 데이터,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식하고, 점점 경계 없이 유통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이런 사회에서는 이런 기록을 폐쇄된 조직 내에 남겨두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동시에 그들의 신뢰성이 근본부터 문제시되고 있다. 바로 정치주도 문제에 앞서 공적기록과 지적소유권, 정보공개가 문제인 것이다.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 - 사회의 연속과 불연속
확대되는 격차 - 미래에 절망하는 청년들 1995년과 2011년 일어난 두 차례 지진과 사회 인프라의 결정적인 파괴, 특히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는 개발과 성장에 매진해온 우리들의 사회에 자연이 앙갚음이라도 하듯 일어난 심대한 쇼크였다. 한편 옴과 미야자키 사건은 우리 사회 자체가 내부에 ‘역겨운 타자’를 안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는 의미에서, 내부에서 발생한 쇼크였다. 바꿔 말하자면 두 차례 지진이 던진 질문은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이다.
반면 옴 사건 등이 던진 물음은 우리와 ‘타자’와의 관계이다. 지진을 통해 헤이세이 일본은 발전에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후자의 사건이 제기한 것은 고도로 균질화, 정보화한 사회에서는 자신과 타자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질돼버렸다는 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모든 사건이 한 순간에 엄청난 충격을 가한 쇼크였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한편 헤이세이 시대를 뒤흔든 쇼크에는〈권투〉의 보디블로처럼 보다 지속적으로 사회를 변모시켜온 것도 있는데, 바로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의 조류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류 속에서 헤이세이 일본 사회에는 균열이 생겼으며 격차가 거스를 수 없게 확대됐다.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앞으로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리고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 으로 자신은 하층에 속한다고 답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1980년대 말은 계층 면에서 일본인들 의식에 균열이 확실히 생기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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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격차가 있다고 해도 미래에는 작아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버블 이후 사람들은 미래에도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확대될 것 같다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절망은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화시켰다. 그리고 버블 붕괴 후인 1990년대, 격차 확대는 수입이나 커리어 면으로도 확대되어갔다. 불황이 이어지고 기업 도산이 증가하는 가운데 청년 취직난이 극적으로 심화됐다.
청년들의 인생 불안정화와 장래 기대소득 수준의 하락이 극점에 달한 것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였다. 이 무렵에는 자산뿐 아니라 소득에서도 격차가 확대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70%를 넘었고, 자신을 ‘승자그룹’과 ‘패자그룹’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이 확산됐다. 일본은 다행증적인 소비사회에서 불안투성이의 격차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
야마다 마사히로는 2000년대 초 프리터(파트타이머나 아르바이트, 무직상태의 청년)나 취직이 안 돼진학한 대학원생, 취직을 위해 유학한 학생, ‘히키코모리’ 상태의 청년 등 수입기반이 불안정한 청년을 400만 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한편 야마다는 1990년대 이후의 사회변화를 ‘리스크화’와 ‘양극화’라는두 가지 모멘트의 복합작용으로 파악한다. 리스크화란 인생 플랜의 안정성 상실이다. 미래는 직선적으로 내다보이지 않게 됐고, 개개의 인생도 단편적이고 유동적이고, 예측 불능한 것이 되었다.
양극화란 격차 확대가 불가역적으로 진행돼 사회가 일부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분열해가는 것이다. 같은 연령, 학력, 분야에서도 몇 가지 우연적인 요소로 두드러진 격차가 발생하게 됐다. 게다가 이격차는 수입만이 아니라 보다 질적인 것이라고 야마다는 지적한다. 정사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프리터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사람 간에는 ‘입장의 격차’가 발생한다. 정사원은 수입의 안정성은 물론 사회보험이나 업무 연수 등 유형무형의 혜택이 있지만, 프리터는 수입만이 아니라 장래의 전망도 불안정하다. 이는 요컨대 정치, 경제의 실패에서 비롯된 사회의 실패이다.
능력이나 의욕에 의해 수입에 격차가 생기는 것 자체는 ‘실패’는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즉 버블 붕괴와 정보화나 글로벌화의 진행에 의한 경제구조 변동 속에서 대기업의 비교적 높은 지위나 전문직 직종은 여전히 보호된 반면, 그 악영향이 청년층이나 주변 적인 노동자에게 집중됐다. 게다가 신규졸업자 일괄채용 등 정사원 고용에 대한 종래 관행은 유지됐던 만큼, 역사의 우연에 의해 발생한 차별이 고정화하는 경향을 낳았다. 미국처럼 노동자가 보호되지는 않지만 실패해도 재기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도 아니고, 북유럽처럼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노동자의 권리가 보호되는 사회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인 채 격차가 부쩍 확대되는 딱한 상황이 심각해져 간 것이다. 이 변화의 끝에 있는 것은 사회불안의 심화다.
1980년대까지 일본에서는 “생활기반이 안정돼 있고 예측가능성이 높고, 생활목표가 뚜렷하고,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이 목표에 도달가능”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있었고, “높은 저축성향도, 미래에 대한 신뢰라는 의미에서 일본인의 심리적 안정”의 증표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 불안정과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장래의 생활 파탄이나 생활수준 저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도 보상받지 못하고, 보다 좋은 생활을 위해 노력해도 헛일이라고 체념하기 시작한다. 희망의 상실에 의한, 의욕의 포기”라고 야마다는 지적했다. 즉 경제적 격차의 불가 역적인 확대는 ‘스테이터스’의 격차를 낳고, 그것은 인생에 대한 ‘희망’의 격차가 되어갔다.
불안과 절망에 의욕을 잃은 나머지 선을 넘어 흉악한 범죄로 치달은 예가 2008년 발생한 아키하바라 도오리마 사건(도쿄시내 아키하바라에서 발생한 무차별살상 사건으로, 7명이 죽고 10명이 중경상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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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이다. 범인인 가토 도모히로는 1982년생, 버블 붕괴 후 사회에 나온 포스트 단카이 주니어 세대 이다. 문제의 근본은 가토 같은 인물의 특이한 사고에 있는 것도, 청년들의 히키코모리나 타자공포에 있는 것도, 또한 청년의 일상에 침투한 인터넷 사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제기한 문제 들을 ‘자기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헤이세이 시대, 버블붕괴와 글로벌화의 격랑 속에서 일본 사회는 자기불황에 대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신규졸업자 일괄채용이나 대학에서의 면학의 경시, 정사원과그 외 피고용자에 대한 차별, 젠더차별, 즉 기존 시스템들을 줄줄이 남겨둔 채 임시방편적 대응을 거듭했다. 그 결과 청년들에게 가혹하고 뒤틀린 질서가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초소자고령화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양극화로 나아간 것은 인구구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초소자화(超少子化) 가 멈추지 않게 된 것이다. 여성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낳는 아이 수인 일본의 합계특수출 생률은 전후 베이비붐 때 4.00을 넘었다가 1975년 2.00을 밑돌았고, 헤이세이가 시작된 1989년 1.57 이 됐다. 헤이세이 기간 중 이 비율은 하강곡선을 그리며 2005년에 1.29까지 떨어졌다.
합계특수출생률이 연속해서 1.50을 밑돌고 있는 것은 그 국민의 인구가 자력으로 회복가능하게 되는 선을 넘었다는 것, 즉 사회의 기반이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인구동향에는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출생률 저하는 장기적인 추세로 유지된다. 실제로 합계특수출생률이 2.00을 밑돌기 시작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이 추세는 이미 장기화되고 있다. 지금 당장 소자화에 근원적인 대책이 마련돼 출생률이 회복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인구가 회복기조로 바뀌는 것은 적어도 반세기 이상 지난 뒤의 일이라는 것이다. 21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대폭적인 인구감소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구가 감소를 거듭하면 할수록 보다 적은 청년이 보다 많은 고령자를 떠받칠 수밖에 없게 된다. 고령자는 계속 증가하므로 간병이나 연금문제는 물론, 조직 상층에서 고령자가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사회의 혁신적인 변화가 어려워지는 마이너스 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멸하는 지방 - 일본의 지속불가능성 고령화 사회 그 자체가 ‘쇼크’는 아니지만 초소자화와 결합한 초고령화는 쇼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초소자화와 동반해 초고령화가 진행되고 마침내 사회로서 존속이 불가능하게 되는 미래 일본의 모습을 지방 중소도시는 이미 실현하고 있다.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소자화와 인구유출이 겹치며 지역 으로서의 존속이 곤란해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방소멸’은 그 끝에 있을 ‘일본소멸’ 의 예고라는 점이다. 일본 인구는 근원적인 개선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21세기 중엽에는 1억 이하가 되고, 그로부터 급격한 인구감소가 시작돼 22세기 초 5000만 명을 밑돌 가능성이 있다. 1억 3000만명인 인구가 5000만 명이 되는 것이니 일본사회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허구화하는 아이덴티티 - ‘아메리카닛폰’의 행방
‘종말’의 예감 헤이세이 경제가 버블 붕괴로 시작했고, 헤이세이 정치가 55년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헤이세이 사회가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취직빙하기와 조우함으로써 초소자화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고하듯, 헤이세이 문화는 ‘종말’의 예감을 이어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종말’관의 기원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일쇼크로 고도성장기 시대의식이 크게 흔들리던 1973년, 두 권의 초베스트셀러가 일본 전역을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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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한 권은 고토 벤의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인데, 이 예언서는 1999년 7월에 인류의 종말이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 권은 고마쓰 사쿄의 『일본침몰』이다. ‘종말’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성장에 대한 ‘꿈’이 성장의 끝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에 부상한다. 1970년대 초는 바로 이런 불안감이 분출하던 시대였다. 이런 불안감은 1980년대의 다행증적인 시대를 넘어 재부상했고, 불안은커녕 현실 속의 다양한 붕괴가 사회 전반에서 분출하던 것이 헤이세이 시대였다.
허구로서의 ‘일본’ 사사키 아쓰시는 1970년대 초의 전공투 세대인 네 사람, 호소노 하루오미, 오타키 에이이치, 마쓰모토 다카시와 스즈키 시게루에 의해 결성된 ‘해피엔드’가 전후 음악사를 단절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선, “그들의 악곡에는 1960년대의 기조였던 ‘정치=운동’적인 것, 즉 ‘저항’적인 스탠스가 거의 전무”했다. 게다가 작사를 맡은 마쓰모토 다카시의 가사는 “공동체나 토포스(공론 또는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에 대한 귀속의식이나 생활감 같은 실감도 없을 뿐 아니라 실존적, 관념적인 고뇌와 절망 같은 요소도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결여돼 있다. 있는 거라곤 “거의 능동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이른바 텅빈 풍경”이었다.(사사키 『닛폰의 음악』)
사사키는 이 ‘텅빈 풍경’에서 등장한 것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음악이라는 3자 관계의 구조적 전환 이었음을 간파했다. ‘텅빈 풍경’은 전후의 대중적 기억에 잔존해온 ‘불탄 자리’의 풍경과도, 태평양의 저편에서부터 패전국인 자신을 이끄는 ‘꿈’의 풍경과도 단절된 것이다. 즉 “영어로 불러져야 할 록을 일본어로 부르려 하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록’이라는 것 자체가 영어이든 어떤 언어이든 ‘뒤틀린 모국어’로서만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갖는, 그 정보론적인 작용에 포인트가 있었다.
이 음악의 정보양식론인 잠재력에 대한 집착은, 호소노가 그 후에 밟아가는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결성으로의 전개도 예언했다. 호소노는 1970년대 후반에 낸 앨범에서 오키나와와 카리브해, 중국, 옛 일본 등을 다루지만, 이들은 역사문화적인 대상이라기보다 어디까지나 가공의 시공으로서 도입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곡 안에 복수의 장소성과 시간축을 넣는 것조차 가능”해진 것이다. 즉, 그가 지향했던 것은 “일종의 안티 리얼리즘인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 시간적으로는 ‘지금이 아닌 언젠가’”였다.
아무로 나미에와 여성들, 그리고 오키나와 1970년대 초 일부 음악문화에 부상한 ‘텅빈 풍경’, ‘어느 곳도 아닌 공간’, ‘어느 시점도 아닌 시간’, ‘타 자로서의 나’라는 감각은, 1980년대 들어 대중문화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가요와 홈드라마를 구성해온 미디어적 지평을 대체했다. 당시 전후의 가요, 홈드라마 세계를 방향지은 것은 ‘꿈’의 끝자락에 있는 ‘미국’, 그 꿈을 반전시킨 나의 시간 및 일본의 공간(고향) 사이의 다이나미즘이었다. 물론 이 다이나미 즘은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는 NHK 아침 연속드라마나 나쓰메로(추억의 옛노래)의 가요프로그램에서 계승되고 있지만, 1980년대 이후 일본 대중문화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한 것은, 그와는 다른 감각과 리얼리티의 지평이다. 이 지평의 전환이야말로 결국 헤이세이 문화를 관통하는 것이고, 이 전환 후의 세계에서 ‘해피엔드=YMO’적인 것은 주변적이 아니라 문화의 지배적 조류가 된다.
1990년대 말의 전환 - 환경화하는 인터넷 세계 문화계에서 헤이세이 시대에 다양하게 일어난 변화의 밑바탕에는 TV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에서 인터 넷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로의 불가역적인 전환이 깔려 있다. 인터넷이 일본에서 사람들의 일상에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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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즉 헤이세이 후기 일본은 불과 십수 년 만에 TV사회에서 넷사회로 패러다임 전환을 달성한 것이다. 변화를 최초로 주도한 것은 다양한 재해지원 활동이었다. 일본의 재해 자원봉사 활동에서 인터넷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은 1997년 1월 일어난 나홋카호의 침몰에 의한 대량의 중유유출 사고부터다. 동해 연안에 표착한 대량의 중유를 전국에서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이 수작업으로 제거했는데, 인터넷에서 자원봉사 신청방법과 작업일정, 활동장소, 오염정보 등이 차례로 전달됐다. 또한 1999년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의 핵연료 임계사고와 2000년 우스산 분화에서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정보제공, 자원봉사 조직, 피해기록 보존에서 근간적 미디어가 됐다. 또 1990년대 말이 되면 지방 공공사업과 개발계획을 둘러싼 행정기관과 주민 간 갈등 속에서 인터넷, 전자메일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폐하는 넷사회 헤이세이 후기, 2000년대에서 2010년에 걸쳐 인터넷에는 지금까지 언급해온 것과는 반대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사회를 보다 자폐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부작용이 있음도 분명해졌다. 본래 당초부터 메일링 리스트를 통한 논의에서는, 만나 이야기하면 조정할 만한 차이가 확대 해석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상대를 혹독한 말투로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기 쉬워졌다.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가 특정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경향도 지적돼왔다. 일부 인터넷에서는 액세 스의 익명성이 악용되면서 특정 개인에 대한 비방 중상이나 근거 없는 소문, 괴이한 정보가 공공연히 유포됐다. 아울러 인터넷 범죄, 포르노 유통, 악덕 상행위, 해커의 활동, 민폐 메일에 이르는 많은 문제들도 표면화했는데, 이들의 근본에는 넷사회의 익명성이 존재한다.
이상, 헤이세이 시대를 문화 차원에서 훑어보면 ① ‘종말’의 실현 ② 허구로서의 ‘일본’ ③ 새로운 집합 성이라는 3가지 조류가 이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보다 자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1970년대부터 부상한 ‘종말’의 예감은 헤이세이 시대 들어 두 차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의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된다. 버블 붕괴와 급격한 경제적 쇠퇴, 격차사회화와 인구감소 등에 의해 장기적으로도 ‘종말’은 이 나라에서 실현되고 있다. 두 번째로, 역시 197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소비사회화는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일본’의 자아인식을 근저에서 변화시켰다.
1980년대 등장한 것은 현실성이 존립할 지평의 상실이고 헤이세이의 리얼리티 전체가 이 변화의 연장 선상에 있다. 세 번째로 1990년대 말 이후 인터넷의 일상 침투는, 우리들의 집합성을 근본부터 바꿨다.
인터넷은 다른 입장을 연결하는 대화의 매개에서, 얼마 안 가 배제의 매개로 반전해가지만, 동시에 각유저들을 ‘수용자’에서 ‘발신자’로 변모시켰다. 모든 사람이 정보발신의 주체가 되는 인터넷 사회에서 사회는 자신을 연출하는 집합적인 장으로 조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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