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 하퍼 지음 / 더봄
이 책은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저자는 최근에 갖추어진 과학적 도구의 도
움을 받아, 로마의 운명은 황제와 침략자인 야만인, 원로들과 장군들, 병사들과 노예들에 영향을 받았
을 뿐만 아니라, 기나긴 에피소드를 거쳐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화산 폭발과 태양 주기가 결정적 역할
을 했다고 말한다. 즉, 로마 제국의 몰락에 대해 인간의 야심을 무너뜨린 자연의 승리로 묘사한다.
로마의 운명
카일 하퍼 지음
▣ 저자 카일 하퍼
오클라호마대 역사학과 교수이자 수석 부총장이다. 오클라호마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2007년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출간된『서기 275-425, 후
기 로마 시대의 노예 제도』는 미국역사협회에서 선정하는 ‘제임스 헨리 브레스티드상’을 수상했고,
2013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발행된 두 번째 책 『수치에서 죄에 이르기까지: 성적 도덕의 기독교적
변화』는 미국종교학회로부터 우수역사도서상을 수상했다. 세 번째 책, 『로마의 운명: 기후, 질병, 그
리고 제국의 종말』은 2017년 가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출간되었으며, 미국출판인협회 우수학술
도서상으로 성과를 인정받았다. 하퍼의 연구는 로마 제국과 중세 초기의 사회와 경제사에 걸쳐 있다.
▣ Short Summary
서기 400년에 로마에는 28개의 도서관과 856개의 대중목욕탕, 그리고 4만 7000개의 아파트 블록이
있었고, 7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래서 로마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였고, 지구 인구
의 4분의 1의 삶을 지배하는 제국의 보석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만에 이 놀랄 만큼 번
창하던 제국은 무너졌고, 로마 시의 인구는 2만으로 줄어들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개화를 이루고 오래 지속한 로마 제국이 몰락한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인간의 의사결정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사
회구조와 정치 현상에 시야를 고정하여, 로마라는 거대한 구조물이 스스로의 규모를 견디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이런 해답이 진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일 하퍼가 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그는 사회구조와 정치 현상 같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시야를 더 넓게 확장하여, 기후 변
화와 감염병이라는 자연 재해가 로마의 붕괴에 재앙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카일 하퍼는 로마의 엄청난 힘을 아무도 꺾을 수 없던 2세기의 전성기부터 정치적으로 분
열되고 경제적으로 황폐해져 몰락해가던 7세기까지를, 최첨단의 기후학과 유전학적 발견의 도움을 받
고 추적해, 로마의 운명이 단지 황제나 병사나 야만인들의 침략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화산
폭발과 태양의 주기, 불안정한 기후,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등에 의해서 좌우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저자는 최근에 갖추어진 과학적 도구의 도
움을 받아, 로마의 운명은 황제와 침략자인 야만인, 원로들과 장군들, 병사들과 노예들에 영향을 받았
을 뿐만 아니라, 기나긴 에피소드를 거쳐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화산 폭발과 태양 주기가 결정적 역할
을 했다고 말한다. 즉, 로마 제국의 몰락에 대해 인간의 야심을 무너뜨린 자연의 승리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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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 차례
지도
연대표
프롤로그 : 자연의 승리
1장 환경과 제국
2장 가장 행복했던 시대
3장 아폴로의 복수
4장 세계의 노년기
5장 운명의 수레바퀴
6장 분노의 포도 착즙기
7장 심판의 날
에필로그 : 인류의 승리?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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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로마의 운명
카일 하퍼 지음
환경과 제국
로마 제국의 형성
로마의 발흥은 놀랄 만한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지중해 지역의 정치권력 가운데 로마가 상대적으로 후
발주자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고대사를 군주제, 공화제, 제국주의 세 가지 시대로 나누는 것은 관행처
럼 이루어지고 있다. 수백 년 동안의 군주제 시대는 시간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훗날 로마인들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그 기원을 전하는 신화로만 남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청동기 시
대에 로마 근처에서 일시적으로 살았던 인간의 흔적을 발견했다. 로마인들 스스로는 도시가 세워진 시
기를 기원전 8세기 중반 첫 번째 왕 로물루스 때로 추정했다.
초기 고대 세계의 지중해 지역은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패권을 잡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문맹인 가
축도둑들에 불과할 때, 그리스인들은 서사시와 서정시를 쓰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그들의 연극,
철학, 역사를 창안했다. 가까운 해안에서는 카르타고의 포에니족이 야심찬 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인들
이 돛을 조작하는 법을 알기도 전의 일이었다. 25킬로미터쯤 내륙으로 들어가 티베르강의 축축한 강둑
에 자리 잡은 로마는 뒷전에 있는 존재였고, 고대 초기 세계의 창조성을 구경만 했다.
기원전 509년 즈음, 로마인들은 왕을 쫓아내고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즈음부터 로마의 정치와 종교
제도들은 토착적인 것과 유입된 것이 서로 섞이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남의 것을 잘 빌리는 사람들이
었다. 최초의 로마법인 12동판법조차 아테네의 법을 표절했다고 공공연하게 고백하곤 했다. 로마의 공
화제는 시민권을 기본으로 하는 고전적 지중해인의 정치적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표면적-평등주의 정치조직체라는 개념에 강조점을 두었다.
로마가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에 지정학적인 무질서가 넓게
펼쳐진 시기와 일치한다. 적절한 역사적 순간에 로마인들은 공화정과 군국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채 전례 없는 국가 폭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제국의 건설은 피로 얼룩진 사업이었다. 병사들은 지중
해 전역에 직선형으로 늘어선 로마의 식민지에 주둔했다. 잔혹한 폭력으로 침략한 곳들이었다.
로마 제국의 성립은 전례 없는 일로, 인류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부와 발전을 이루었고, 불안정한
공화제 헌법은 자유, 미덕, 공동체의 의미에 대한 반성을 촉발시켰으며, 제국주의 권력을 어떻게 적절
히 행사할 것인가에 대한 소통이 이루어졌다. 한편 로마의 법은 통치의 표준을 탄생시켰으나, 권력의
급격한 확대는 격변을 불러올 국가 폭력에 기름을 부어 독재의 시대가 시작되도록 만들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BC 27 ~ AD 14)에는 로마가 지배하는 해안선이 확장되었다. 지중해를 ‘우리 바
다’(nare nostrum)라 부르는 것이 허세가 아니었다. 로마의 성취를 평가하고 고대 제국주의의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의 삶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삶은 느리고 유기
적이었으며, 무너지기 쉽고 제한적이었다. 수로는 제국의 진정한 순환 시스템이었으나, 폭풍이 몰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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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고 바다가 닫히는 추운 계절에는 모든 마을이 섬으로 변했다. 에너지는 당연히 부족했다. 힘은 인간과
동물의 근육에서 나왔으며, 연료는 통나무와 덤불이었다. 육지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삶이었다. 열 사
람 중 여덟 명은 도시 밖에서 살았고 마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시골 같았다. 네발 달린 짐승
의 울음소리와 코를 찌르는 배설물 냄새가 마을에 진동했다. 생존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제때 내리
는 비에 좌우되었다. 대다수에게 먹을 것은 곡물뿐이었다. 죽음은 늘 곁에 있었다. 이런저런 전염병들
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평균 수명은 20대, 20대 중반 정도였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제약들은 중
력과 같이 현실적이었고, 로마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을 규정하는 운동 법칙이었다.
이러한 제약들로 인해 로마 제국의 수직적 공간적 성취가 뚜렷해졌다. 전기 통신이나 엔진이 달린 운
송 수단도 없이, 로마인들은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들을 연결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제국의 북단은
북위 56도를 넘어섰고, 남쪽 경계선은 북위 24도 아래였다. 로마만큼 오래 지속되고 중위도 이상과 열
대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린 제국은 없었다. 제국의 북부와 서부는 대서양 기후였다. 그러
나 제국의 생태학적 중심에는 지중해가 있어 비교적 온화한 기온을 배경으로 건조한 여름과 축축한 겨
울이 나타나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이 뚜렷했다. 제국의 남부와 동부 가장자리를 둘러싼 아열대 기후
의 압박으로 인해 육지는 사막 전단계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사막으로 변해갔다. 제국의 식량 창고였던
이집트는 완전히 다른 기후 체제와 로마를 연결시켰다. 로마인들은 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
로마인들이 폭력만으로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것은 아니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힘이
필요했고, 로마 국경 안의 사람들과 그 너머 사람들이 끊임없이 협상해야 했다. 제국이 오래 유지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국의 권력, 그리고 경제와 협상의 내적 논리가 여러 차례 형태를 바꾸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로마 제국이라고 알려진 정권을 인수했다. 그는 공화체제의 종말을 주도했다. 그
가 통치하는 동안 정권을 탈취하려는 엘리트들의 경쟁으로 인해 공화국 말기에 불붙었던 정복의 열기
가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치세는 평화로운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시민들로만 이루어진
군대를 해산시키고 직업 군인으로 대체했다. 공화국 말기는 여전히 무상 약탈의 시대였지만,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정복한 영토에서 통치와 정의의 규범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약탈은 일상적인 세금으로
변했다. 저항이 폭발할 때는 유대나 영국에서처럼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새로운 시민들
은 처음에는 지방으로 서서히 흘러 들어갔으나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첫 이백 년 동안 제국의 체제를 규정한 거창하고 결정적인 타협은 제국과 ‘도시들’ 사이의 암묵적인 합
의였다. 로마인은 도시와 그곳의 귀족 가문을 지배했는데, 로마인은 지중해 세계와 시민 귀족 계급을
그들의 제국주의적 책략으로 구슬렸다. 지방 귀족들에게 세금 징수를 맡기고,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
했다. 그러면서 로마인들은 3개 대륙에서 선택한 엘리트들을 지배계급으로 편입시켰고, 그 결과 수백
명에 불과한 로마인 고위 관료들로 광대한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제국의 지속은 위대한 타협의 성과에 달려 있었다. 그것은 초반의 첫수였고, 효과가 있었다.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약탈이 통치로 바뀌면서 제국과 함께 많
은 민족도 번성하게 되었다. 도시는 원래의 경계를 넘어 확대되었고, 거주지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숲
을 베어내고 새로운 농토를 경작해 농장들은 언덕 위로 확산되었다. 로마제국의 햇살 아래 모든 유기
체가 번성했다. 이 시기의 첫 세기 즈음, 로마시 자체의 인구가 백만 명을 넘어서는 정점을 찍었다. 2
세기 중반에 이르렀을 때, 7천5백만 명의 사람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는 전 지구상 인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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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1/4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성장이 강요되면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사람들은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점점 더 강압적으로 얻어내기 위해 유한한 땅으로 몰려갔다.
토마스 맬더스는 인간 사회와 식량 공급의 모순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이해했다. “집단의 힘은 인간
의 호구지책을 공급하는 땅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죽음이 조급하게 인류를 찾
아오기 마련이다. 인류의 악덕은 적극적이며, 쉽사리 인구 감소를 야기한다. 그들은 파괴의 선봉에 서
며, 그 무시무시한 작업을 직접 끝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소멸이 실패하면 질
병의 계절, 유행병, 역병, 전염병이 대열을 짓고 진군해 와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것으로도 불완전하다면, 피할 수 없는 엄청난 기근이 몰려와 식량 부족이라는 강력한 한 방으로 인
구를 후려칠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대규모의 기아에 굴복하지 않은 게 확실하다. 여기서 제
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숨겨진 논리를 찾을 수 있다.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불행으로 가라앉기는커녕, 1
인당 경제의 측면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달성했고, 곧바로 심각한 인구 팽창이 일어났다. 제국은 맬더
스학파의 암울한 논리를 거스르거나, 최소한 유예할 수 있었다.
느리지만 꾸준히, 로마의 통치는 그 지배하에 있는 사회를 변화시켰다. 상업, 시장, 기술, 도시화가 그
것이었다. 제국과 동시에 많은 민족이 발전의 지렛대를 붙잡았다. 제국은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광
범위한 지역에서 강력하고 폭넓게 성장했다. 로마 제국은 맬더스의 예상을 피해 갔고, 의도치 않은 정
치적 자본을 얻었다. 이런 번영은 대제국이 성립한 조건이자 결과였고, 그런 순환은 매혹적이었다.
제국의 안정성이 인구증가와 경제적 성장의 배경을 제공했다. 인구와 부는 이제 제국의 권력이 지닌
근육이 되었다. 병사들은 차고 넘쳤다. 과세율은 높지 않았으나, 세수는 넉넉했다. 황제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도시 엘리트들과의 타협은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어디에나 부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
다. 로마군은 모든 전선에서 적과 비교해 전술, 전략, 물류의 이점을 누렸다. 예상보다 더 무너지기 쉬
울 가능성은 있어도, 로마인들은 일종의 긍정적인 평형 상태에 도달했다.
기번의 역작 『로마제국 쇠망사』는 2세기의 찬란한 날들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유명한 말, “세계사에
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대를 선택하게 한다면, 누구라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AD
96)에서부터 코모두스 황제 즉위(AD 180)까지의 시기를 꼽을 것이다.”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전근대 사회의 유기적 조건에서 가능한 것의 한계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기번이 ‘이
끔찍한 혁명’이라고 불렀던 거대한 제국의 몰락이 사람들을 영원히 매혹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변덕스러운 우리 행성
서기 650년 즈음의 로마 제국은 번성했던 과거는 그림자로만 남아 콘스탄티노플, 아나톨리아 그리고
바다 건너 몇몇 낙후된 소유지 속에서 쓸모없어진 비잔틴으로 줄어들었다. 서유럽은 게르만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예전 제국의 절반은 아라비아에서 온 다른 신앙의 군대에 의해 신속하게 쪼개졌다. 한때
7천5백만에 이르던 지중해 지역의 인구는 대략 절반 정도에서 정체된 상태였다. 로마에는 약 2만 명이
거주했다. 그들은 이전보다 부유하지 못했다. 7세기 무렵에는 좁은 간선도로 하나가 바다를 가로질러
동서를 간신히 연결하고 있었다. 통화 체계는 중세 초기의 모자이크 형태로 분열되어 있었다. 유명무
실한 재정기관 외에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과 이제 형성되어 가는 중인 이슬람교
인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종말론의 공포가 지배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느껴졌다. 물질적인 관점
으로 보면 로마 제국의 몰락은 개화의 과정을 역행하는 것이다. 즉 에너지 획득과 교환이 후퇴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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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다. 로마의 몰락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논쟁하는 이론들도 산적해 있다. 독일의 한 고전
주의자는 210개나 되는 가설을 제시했다. 넓은 시야로 선두주자의 위치를 차지한 두 가설은 제국이라
는 체제가 태생적으로 지속이 불가능한 메커니즘이라는 것, 그리고 제국의 최전방을 따라 가해지는 외
압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군주제의 틀을 확립했지만, 왕위 승계의 규
칙은 확정하지 않았기에 운명 같은 우연이 위험할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권력과 정통성을 얻기 위한
경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군대를 통솔하기 위한 자기 파괴적 전쟁으로 치달았다. 그와 동시에 제국의
행정 전문 관료 집단이 점점 커져가면서 제국을 운영하던 지역 엘리트의 조직망을 대체했다. 관료가
많아질수록 국가는 무너지기 쉽다. 재정 압박이 커져서 시스템이 과열되기 때문이다.
한편 제국의 국경은 영국 북부까지 뻗어나갔으며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프라테스강과 사하라의 경계선
에 걸쳐 있었다. 그 너머에는 질투심에 찬 굶주린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꿈꾸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
는데,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이제 우리가 2차 국가의 형성이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로마의 적들은
수 세기에 걸쳐 점점 더 복합적이고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위협은 전선과 국가 심장부의 자
원 양쪽 모두를 가차 없이 고갈시켰다. 왕위 다툼과 함께 제국의 운명에 치명적인 것이었다.
로마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역사들 대부분은 배경이 되는 환경을 안정적이고 비활성화된 상태로 가정하
고 전개된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가정이 틀렸음을 안다. 지구 시스템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
성과 고대기후와 게놈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 진보한 덕분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암묵적 가정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리고 지금도 지구는 인간사의 요동치는 발판이다.
격렬한 돌풍 속에 휘말린 배의 갑판처럼 불안정한 발판이다. 물리적, 생물학적 지구 시스템은 끊임없
이 설정을 바꿔왔고, 우리 인간은 내내 존 브룩이 ‘험난한 여정’이라고 불렀던 일을 겪어야 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이 지구의 대기를 전례 없는 속도로 변화시킨다
는 사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인위적인 기후 변화는 최근의 문제이며, 큰 그림의 일부분일 뿐이다.
인간이 대기에 열을 가하는 화학물질을 안겨 주기 훨씬 전부터 기후 체계는 자연적 원인에 의해 흔들
리고 변화해 왔다. 인류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 선조들은 기후가 들쭉날쭉 진동하는 플라이스토세에
살았다. 지구 궤도의 작은 변화들, 그리고 지축을 중심으로 지구가 기울고 회전하는 작은 변화들이 우
리로부터 가장 가까운 별에서 도달하는 에너지의 양과 분포를 끊임없이 바뀌게 했다.
플라이스토세를 지나오면서 궤도 강제력이라 불리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는 빙하기
를 만들었다. 그런데 1만 2000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기후는 홀로세라고 알려진 따뜻하고 안정된
간빙기로 들어섰다. 홀로세는 농업의 번성과 복잡한 정치 질서의 성장에 필수적인 배경이었지만, 인간
의 입장에서 보면 극적이고 급격한 기후 변화의 시기였다.
지구라는 행성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인들은 운이 좋았다. 제국은 로마기후최적기(RCO)라고 불리는
후기 홀로세 기후 시대의 경계선에서 최대의 영토와 번영을 누렸다. RCO는 제국의 중심인 지중해 연
안에 걸쳐서 따뜻하고, 습하며, 안정적인 기후였음이 밝혀졌다. 정치적 경제적 타협의 피라미드로부터
농경 제국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었다. 교역과 기술이나 마찬가지로, 기후 체제는 겉으로 보기
에는 제국의 번영에 선순환적이면서 조용하고 협조적인 힘이었다. 로마인들이 그 한계까지 제국을 밀
어붙였을 때, 그들은 환경적 토대가 자신들이 건설한 제국에 위태롭고 가변적임을 알지 못했었다. 2세
기 중반부터 로마인들의 행운은 바닥에 떨어졌다. 수 세기에 걸쳐 홀로세에서 가장 극적인 기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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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의 장면들이 나타났다. 우선 서기 150~450년에 걸친 기간 내내 혼란스러운 기후가 도래했는데, 이를
로마 과도기라고 부를 것이다. 기후가 불안정해지자 결정적인 고비마다 제국은 비축된 힘을 쥐어짜야
했고, 기후는 여러 사건의 진행에 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부터 기후가 결정적으로 재
편성되는 소용돌이가 시작되었고, 고대 후기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절정에 이른다. 530년대와 540년
대의 화산활동으로 후기 홀로세는 전반적으로 냉랭한 날씨가 지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태양에서 지구
로 도달하는 에너지의 수준은 수천 년 만에 가장 낮은 지점으로 떨어졌다. 물리적 기후 조건이 악화되
면서 남아 있던 로마 제국을 휩쓸어버리는 전례 없는 생물학적 재앙이 함께 일어났다.
물리적 기후가 요동을 치면 생태학적 또는 진화적 변화가 촉발되어 질병이라는 사건이 벌어지기 마련
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탐구할 수 세기 동안, 기후 변화와 질병은 서로 어우러져 로마 제국의 운명
을 결정했다. 기후 변화와 감염병 사이에는 단언할 수 있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최근까지 기후 시스
템은 인간의 영향력에 상관없이 자체적인 속도와 주기로 진동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감염병의 역사는
좀 더 밀접하게 인간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 인간 사회는 치명적인 미생물들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로마 제국이 야심차게 사회를 발전시킨 결과는,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미생물이 번성할 환경을 여러 방식으로 배양한 것이었다.
후기 로마의 역사는 여러 세기에 걸친 팬데믹의 시대로 볼 수 있다. 165년에는 천연두로 추정되는 이
른바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유행했다. 그리고 541년에는 부보닉(서혜 임파선종) 페스트의 원인균인 예
르시니아 페스티스의 첫 번째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무려 이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처럼 로마
제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살해자들은 자연에서 왔다. 그들은 제국 밖의 먼 곳에서 온 이국적이고 치
명적인 침략자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제국의 역사를 지역에 한정하여 보는 것은 터널처럼 좁은
시각이다. 로마의 번성과 몰락 이야기는 지구 환경의 역사와 얽혀 있다.
로마 시대에 세계의 연결성은 획기적 도약을 이루었다. 로마인들은 향신료와 노예, 상아가 필요했으며,
그로 인해 국경을 제집 문턱처럼 넘나들었다. 상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렀고, 실크로드를 따라갔
으며, 인도양을 건넜다. 그리고 제국의 힘으로 홍해에 항구를 건설했다. 잠깐의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로마까지 끌려와 학살당한 이국의 동물들은 마치 거시적인 추적기처럼,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질병의
최전선에 로마인이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는지의 경로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인간의 이야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의 시대처럼 사회가 통합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번창했으며 화려했던
한때를 누렸던 제국이 5세기가 지난 뒤에는 알아볼 수조차 없이 쇠퇴하게 된 중대한 변화, 그 일련의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것은 한 국가가 몰락하고 침체하는 과정의 얽히고설
킨 이야기다. 로마 제국은 맬더스 학파에서 말하는 에너지 제약의 시대에 건설되었으나, 교역과 기술
의 진보가 그러한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제국의 힘은 인구 팽창과 경제 성장의 전제이자 결과
였다. 국가와 사회의 발전은 나란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분기점이 되는 기후 변화와 전염병의 등장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이 복잡한 시스템에 끊임없이 작용했다.
로마 제국의 종말은 피할 수 없는 파멸을 향해 쇠퇴해 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길고 우회적이
며,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이야기다. 회복력이 강한 정치 구성체가 그 과정을 견뎌내고 스스로 재편성
되었다가, 마침내 둘로 나뉜다. 처음에는 서로마 제국이, 그리고 다음에는 동로마 제국이 몰락한다.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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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화의 패턴은 언제나 자연, 인구통계, 경제, 정치 사이에서 강력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제시
된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탐구를 시작하면서, 이런 서사의 윤곽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4번의 결정적 전환점이 있다. 추진력을 얻어서 사건들의 속도가 빨라졌을 때와 파괴적 변
화가 뒤를 바짝 쫓을 때이다. 고대 제국에서 중세 초기로 변천하는 동안 각각의 전환점에서, 우리는
자연계와 인간계 사이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연결의 맥락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① 첫 번째 전환점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발생한 전 세계적 팬데믹으로 경제와 인구증가가
위축되는 다면적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여파로 제국은 몰락하거나 해체되지는 않았으나 예전과 같
은 위용을 잃었고, 전성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② 그러고 나서 3세기 중엽에 가뭄과 역병, 정치
적 도전이 이어지면서 갑작스럽게 제국이 해체되었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몰락’이라고 불리는 과정
에서, 통합된 제국 시스템이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재편성을 위한 의도적 조치였다. 제국은 재건되었
으나 새로운 외양으로, 즉 새로운 황제, 행정부, 화폐가 나타났고, 새로운 신앙이 뒤를 이었다.
③ 새로운 제국은 다시 포효했다. 그러나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걸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두 세대
동안 제국의 통일성이 깨지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난다. 지탱하기 어려운 새로운 방식으로 유라시아 스
텝 지역 전체가 로마 권력 체제에 도전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렵 우연히도 제국
의 서쪽 절반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세기경에 로마 제국의 서쪽이 잘려 나갔다. 그러나 그것이
로마 제국의 대미를 장식한 피날레는 아니었다.
④ 동쪽에서 부활한 로마 제국은 새로운 권력과 번영을 누렸으며, 인구도 증가했다. 이러한 중흥의 시
기는 역사상 최악의 재앙인 부보닉 페스트와 소빙하기에 의해 두 차례 큰 충격을 받으면서 마침내 비
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인구통계학적 충격은 제국이 서서히 몰락하는 데 한몫했고, 이슬람 군대에 영
토를 빼앗긴 것이 결정적으로 정점을 찍었다. 로마 제국의 잔해는 허울뿐인 비잔틴 제국으로 줄어들었
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은 적은 인구, 부족한 부(富), 그리고 종말론적 신앙을 경쟁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끊임없는 분쟁 속에 시달리게 되었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이야기가 하나부터 열까지 환경과 관련된 드라마임을 일깨워준
다. 제국이 번영을 누렸던 2세기의 황금시대, 로마 세계 너머 저 멀리에서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 유
입되어 팬데믹이 돌고 난 뒤, 제국의 위대한 타협의 파탄, 3세기 무렵 기후와 전염병이라는 재앙의 협
공 속에서 제국의 붕괴, 새로운 유형의 황제에 의한 제국의 부활, 4세기에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대규
모의 민중운동 발발, 고대 후기에 일어난 동양 사회의 부흥, 부보닉 페스트라는 핵폭탄, 은밀히 시작된
새로운 빙하기, 로마 제국으로 인식되던 실체가 최종적으로 무너지면서 성전(jihad)에 임하는 이슬람
군대에 의해 재빨리 정복되는 과정들 모두가 그러하다.
가장 행복했던 시대
위대한 의사와 위대한 도시
페르가몬 출신인 의사 갈레노스는 129년 9월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기간의 중기에 태어났
다. 갈레노스는 최상류층은 아니었지만, 상류 중산층에 속했다. 따라서 제국은 그에게 번영과 기회를
의미했다. 갈레노스는 162년에 로마로 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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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더불어 통치를 시작한 첫해였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한 철학자의 열병을 치료했다. 겨울에 노
인을 치료하는 척한다는 비웃음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시리아 출신 집정관 플라비우스 보에투스는 갈레노스가 ‘말과 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시
범을 보이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관중이 집중하는 가운데 갈레노스는 돼지 한 마리를 생체
해부했다. 그리고 신경을 묶어서 돼지의 비명소리가 났다가 그쳤다가 하게 하는 고도의 기술을 선보였
다. 갈레노스는 보에투스의 아들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의 아내를 치료했다. 그 권력자는 갈레노스
에게 약속한 금을 하사했고 후원자가 되었다. 갈레노스는 최상류층으로 진입했다. 엄청난 성공 하나가
다른 성공을 불러왔다. 유명 작가의 노예가 다쳐서 흉곽 아래 치명적인 농양이 잡혔다. 갈레노스는 감
염된 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면서 고동치는 심장을 사람들 시야에 드러나게 했다. 노예는 목숨을
건졌다. 불과 서른 살 중반에, 갈레노스는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갈레노스는 우리에게 안토니누스 페스트라고 알려진 대규모의 사망 사건
에 대비하지 못했다. 166년 갈레노스가 로마에 온 지 4년째 되던 해에 동쪽으로부터 안토니누스 페스
트가 도시로 침입해 왔다. 갈레노스는 그 병을 완화하는 처방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키운
소의 젖, 아르메니아의 흙, 소년의 소변 같은 목록들은 절망적일 뿐이었다. 그가 겪은 대규모 사망 사
건은 인류 역사 최초의 팬데믹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이 파탄에 이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장의 목적은 갈레노스를 키워낸 제국이 직면한 팬데믹의 전야를 조망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기번
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번영한 시기’라고 규정했던 때이다. 그러한 평가에는 머나먼 로
마 세계의 거장들에 대해 품은 매혹이 깃들어 있는 게 사실이다. 제국은 그 자체가 이러한 발전의 전
제조건이자 결과이다. 제국의 정치적 틀과 사회적 메커니즘은 상호 의존적이었다.
제국의 개요
갈레노스가 제국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수많은 돌과 입 상들이 앞다투어 그의 눈
길을 사로잡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로마의 30개 군단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기둥도 보았을 것이다.
로마의 권력집단을 안심시키는 이름들이 제국의 북서쪽 구석에서부터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지리적
순서에 따라 나선형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서쪽으로는 3개 군단이 영국을, 4개 군단이 라인강을, 10개
군단이 알프스와 흑해 사이를 지키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카파도키아에서 아라비아까지 8개 군단이 주
둔하면서 속주와 적을 똑같이 감시했다. 아프리카에는 이집트와 누미디아에 각각 하나씩 2개의 군단만
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에 하나, 알프스 산맥에 2개의 군단까지 모두 30개 군단이었다.
그러나 전쟁과 전염병의 폭풍이 몰아치기 전 평온한 시기에도 제국은 과업을 미처 완수하지 못했다.
로마 제국은 언제나 국경 너머의 새로운 부족을 정복하고자 하는 원초적 의지와 핵심 구역 안에서 안
전을 유지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 이 모순된 두 힘 사이에서 제국은 결코 완전한
균형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2세기 무렵 세 개의 대륙을 가로지르며 로마의 군대가 보호하
는 광대한 영토 전역에는 평화의 공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로마 제국은 지리적 요소와 정
치적 기술이 어우러져 그 형태가 결정되는 군사 패권주의의 틀을 지녔다.
30개 군단의 병사는 약 16만 명에 달했다. 군단은 원래 시민의 지위를 가진 이들 중에서만 모집한 시
민군이었으며, 때로는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재향 군인 출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군단은 전체 군대
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들의 군사력을 보완하는 것은 보조 부대들이었다. 지방에서 모집한 보조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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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대 병사들은 제국의 지휘 구조와 전반적인 전략 설계에 통합되었다. 장기근속은 시민권이라는 특권을
얻기 좋은 길이었다. 여기에 해군과 부정기적 군대를 더하면, 로마 제국군의 전쟁기계는 50만 병사에
이르렀다.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일에는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다. 방위비는 국가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었다. 전체적으로 2세기의 군대 급여 예산만 1억 5000만 데나리(로마의 은화
단위)로 제국 전체 GDP의 2~3퍼센트 수준이었을 것이다(미국의 현 방위비 분담액 정도). 순전히 규모
로만 보면, 군대와 그 예산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규모는 세 대륙에 걸쳐
있는 엄청난 군대를 조직하는 지구 물리학적 현실, 군대를 통제하는 계급을 유지해야 하는 책무, 그러
한 규모로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 이 세 가지로 규정되었다. 절정기일 때 로마의 군사적 지배는 오랜
기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속주민과 시민 모두에게 보상이 돌아갔다.
인구와 번영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서기 14년) 이후 150년 동안 제국 내에서는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다가, 안토니누
스 페스트의 유행으로 증가세가 꺾이는 지점에서 정점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절대적 수치는 추측으로만 남았다. 가장 신뢰할 만한 주장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었을 때 로마제
국에는 6천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뒤로 1세기 반이 흐른 뒤 갈레노스가 로마에 도착했을 무렵에
는 7천5백만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삶과 죽음 사이의 좁은 여백 속에서 면도날처럼 미
세한 변화가 수없이 일어나면서 생기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고대 세계에서 인구는 길항작용을 하
는 강력한 힘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사망률은 극도로 높았다.
사망률이 높은 환경에 대응하려면 출산을 높여야 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로, 국가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강력한 정책을 펴서, 자식이 없으면 벌을 주었고 다산한 이에게는 상을 줬다. 다산은 로
마 세계의 현실이었고, 폐경기까지 살아남은 여성은 평균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르쿠스 아우렐
리우스 황제와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가 황실에서 집무를 시작할 무렵, 로마인은 인류의 1/4을 지배했
다. 어떤 제국도, 철기 시대의 어느 국가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그러한 위업을 성취하지 못
했다. 유라시아에서는 중국의 한(漢)나라가 로마와 평형을 이루었다. 중국의 한제국은 여러 측면에서
적절한 비교 대상이지만, 인구의 측면에서는 로마제국의 절정기인 7천5백만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로마 제국의 생산, 소비, 복지의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지수를 살펴보는
일이다. 현대 국가에서 수집한 것과 같은 정확한 경제적 통계를 바랄 수는 없다. 그래서 로마의 성장
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종종 경제적 성과에 상응하는 고고학적 대리증거물로 눈을 돌린다. 난파선,
철 제련 기술, 주택 보급량, 공공건물 그리고 생선 염장 작업 등등이 로마의 생산성을 추적할 수 있는
지표로 언급되었다. 그것들 모두 후기 공화국과 고대 제국의 탄탄한 경제적 성과를 시사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육류 소비의 광범위한 증거인 수만 마리의 양, 돼지, 소뼈를 보면 사회가 위축되었다고 예측하
기 어렵다. 자원을 기반으로 인구가 현저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수많은 도시에 기념비적인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도 로마가 지배했던 사회가 정말
로 부유했음을 말해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높은 수준의 진정한 도시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제국은 천 곳이 넘는 도시들이 모여 있는 은하계였다. 로마라는 도시
는 전체 경제의 연결고리였고, 쓸모가 많은 활동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도시의 위계질서는 지나치게
상류층 중심도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카르타고 그리고 다른 대도시들에도 수십만 명이
살았던 게 확실하다.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로마 제국의 도시들은 정치적 임대료와 자격을 소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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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기생적 위치가 아니라, 공예품 생산, 금융 서비스, 시장 활동 및 지식 교환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가치
창출의 연결점이었으리라는 상상에 더 비중이 간다. 결론적으로 제국의 시민 다섯 명 중 한 명은 도시
에 살았을 것이다.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발전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비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하다. 로마 제국은 전례 없는 규모의 도시 생활을 발전시켰으며, 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규모는 또다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이 가져다 준 평화라는 보상은 이렇게 널리 퍼져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과물을 균등하게
나눴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의 분배는 오히려 매우 불평등했다. 부와 형식적인 법적 지위는 복잡한 아
치형 구조의 사회적 위계를 형성했다. 법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저층에 넓
게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복잡한 노예제도가 시작된 곳이었다. 노예
제도가 굳건히 지속된 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잉인구로 인한 무료 노동의 가격이 노예 노동이 불필요할
정도까지 낮아지지는 않았다는 또 다른 간접 신호이다.
신분이 낮고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대중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도시와 시골에서는 탄탄한 ‘중
간’ 계층의 성장을 위해 매매와 이동의 자유가 열려 있었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에서는 재산을 기준으
로 시의원, 기사, 원로원 의원 같은 귀족 등급의 형식으로 나뉘었다. 분할 상속이 일반적이었으나, 엄
청난 규모의 부동산을 분할하도록 제도적으로 압박했다. 제국 초기의 사유 재산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
서 최대 규모였을 것이다. 로마가 성장하면서 주로 수혜를 입은 이들이 부유층과 중류층 엘리트들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엘리트들이 경제 성장 수익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숙련 노동자
들이 임금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면 로마 경제가 특별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부는 그 지배하에 있던 거대한 인구의 효과일 뿐이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로마 경제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생산성이 증가하면서 과잉 노동력의 과열 없이 수천만의 새로운 일손
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숙련 노동자가 증가했음에도 경제가 일정한 수준으로 크게
성장했다는 것에도 한층 더 주목해야 한다. 경제가 이렇게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고전적 메커니즘인 기술과 교역 덕분이다. 기술개발은 새로운 도구가 노동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면서
슘페터적 성장에 이르게 한다. 교역은 고전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 분화와 비교우위의 힘을
촉발하여 스미스적 성장을 촉진한다. 두 가지 성장은 상호보완적이며, 인간의 노동에서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추출하여 생산적으로 사용하게 만든다. 교역과 기술 발달로 인해 로마인들은 사회 발전의
국면이 확장되는 것을 누렸고, 전근대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개화에 다다랐다.
심판의 날
제국의 몰락
인구통계학적 측면에서 인구가 많을수록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인구의 압력은 한정된 시골 지
역으로 사람들이 몰려가서 자원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구자원이 풍부해지면 거의 언제나
국가는 호황을 누린다. 국가는 일회용 신체들을 공급받으며 지탱한다. 동로마 제국은 첫 팬데믹이 도
래하기 전까지 장기적으로 인구가 성장하여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6세기 초까지만 해도 로마 군대는
어렵지 않게 신병을 보충했다. 세습 입대와 자발적 입영만으로도 충분히 인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직
업이 없거나 할 일이 충분하지 않은 이들, 그리고 일부는 땅이 없는 농민들로 이루어진 입영대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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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이 많아 제비를 뽑아야 했다. 그러나 페스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구통계 상의 출혈은 로마의 국정 운
영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은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부딪혔다. 제
국의 지리적 여건이 요구하는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고, 파견할 군대를 소집해도 비용을 지불할 수 없
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부터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맞이한 마지막 재앙 사이의 기간에 이러한 드
라마가 전개되는 동안, 사건들이 일어난 순서는 우발적으로 정해졌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개혁은 제국의 재정-군사 능력을 신장시켰다. 페스트의 절정기 이전에 시도한 아프
리카 원정은 재정 관료들에게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동쪽과 서쪽 상황 모
두를 수습할 수 있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렀지만, 542년의 충격으로 그는 근거지를 발밑으로 옮겼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중단되었고, 벨리사리우스는 544년에 서방으로 다시 보내졌다. 적은 숫자의 동
로마 제국 병사들로는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벨리사리우스는 트라키아에서 모병을 했고 4천 명을 모
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어떻게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느냐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군대와
돈을 간청했고, 그가 거느렸던 몇 안 되는 병사들도 국가가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주장하면서 싸
우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 운영의 새로운 위기가 시작되는 징조에 불과했다.
로마 제국의 권력은 계속 제약을 받았으며 그러면서 7세기까지 국가 조직의 모든 형태를 조용히 점검
했다. 국가는 대규모로 돈을 빌리는 능력을 상실했다. 채권에 의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재정은 위
축되었다. 은화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황제들이 통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6세기 즈음에는 병사
들이 현물과 금으로 급여를 받았다. 최후의 절박한 수단인 통화 가지 절하는 시행할 수 없었다. 재정
난 타개를 위해 황제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거나, 납세자들
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540년대부터 로마 제국은 종종 두 가지 선택을 모두 동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언제나 병사들에게 봉급을 늦게 지불했고, 그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라고 알
고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병사들의 봉급 일부를 속여서 지급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를 지급하지 않고
오랜 뒤로 미루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사들이 5년마다 금으로 받는 상여금을 취소했다고도 전
해진다. 상여금은 최초의 군인 황제들 이래 상호 충실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전방
에 주둔해 있는 국경 부대가 받는 수수료를 모두 박탈한 것 같다. 로마 역사의 기나긴 연대기에 이런
일은 유례가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돈을 떼어먹은 최초의 황제였다.
군대는 긴장했다. 세금 납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세금 체납을 용서하지 않
았다. 이따금씩 돌아오는 기념일에 황제의 사면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무자비했다.
553년에는 마지못해 첫 번째 페스트 발병이 끝난 해까지 소급해서 세금을 감면했는데, 양보는 미미했
다. 구역마다 세금평가액이 부과되었는데, 노동자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었음에도 부과된 총액이 조정
되지 않았다. 따라서 생존자들이 부담해야 할 실제 비율이 치솟았다.
유스티니아누스 정권이 전복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통치 초기에 정치적 쿠데타에서 살아
남았고, 새로운 반란의 열정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한 충실한 장군인 벨리사리우스
를 무자비하게 대한 것은 충격적일 정도이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불만을 지닌 신하들의 관심이
마땅한 후보자에게 집중되는 위험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장군은 개처럼 충직했다. 황제는 놀라운
재능으로 씁쓸한 종말이 올 때까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반대파는 그의 맞수를 찾지 못했다. 로
마법의 개정, 행정의 정비, 건축 사업 그리고 무엇보다 지중해 제국의 회복이라는 높은 포부로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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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정권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서 끝났다.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었을 때, 국가는 완전히 소진되
어 있었다. 그를 계승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회수 불가능한 빚더미에 빠진 국고를 인수했다. 그는
즉시 체납을 무효화했다. 자신이 인정한 군대의 통솔권을 받았고, 대중을 향해 말했다. “필수품 부족으
로 황폐해진 상태에서, 공화국은 야만인들의 무수한 공격과 급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은 둑에 생긴 구멍은 틀어막았을지 모르겠으나, 밀려오는 조수를 막아내
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재위 565~574)는 야만인들에게 외교적 배상금 지
불을 멈추었으나, 그로 인해 국경선을 따라 벌어지는 폭력적 분쟁이 배가되었다. 페스트가 한 번씩 재
발할 때마다 국가는 목이 죄어갔다. 573년의 발발로 인한 즉각적인 여파로 티베리우스 2세(재위
574~582)는 동방과 서방에서 절박한 신병 모집 운동을 벌였다. 발칸 반도에 대한 통제는 흔들렸고,
이탈리아에 있는 영토는 줄어들었다. 황제의 보라색 옷을 입었던 이들 중 가장 유능하던 마우리스(재
위 582~602)는 공격적으로 징병제를 밀어붙였다.
절박했던 시기의 분투에 힘입어 제국은 상당수의 야전군을 파병할 수 있었고, 마우리스가 집필한 군사
안내서는 1만 5천 명을 편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 체제는 재정적으로 지속하
기 힘들었다. 마우리스는 운명적 결단을 내려 병사의 급여 규모를 삭감했다. 예전 로마 황제들은 주화
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같은 일을 했으나, 적어도 위장된 삭감이었다. 어떤 황제도 감히 직접
적으로 급여를 삭감하지 못했다. 결국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마우리스는 타도되었고,
그를 밀어낸 자도 곧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 제국은 다시 내란이라는 오래된 재앙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제는 한계점을 넘어섰다. 헤라클리우스 황제(재위 610~641)는 제국의 몰락을 주재하게 될 것이다.
그 시대를 겪으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마지막 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결정적 순간 - 무함마드의 세계가 열리다
7세기 초에 정치적 사건의 영향으로 종말론적 사고에 불안정한 자극이 가해졌고, 로마와 페르시아의
끝없는 전쟁에 기름을 부었다. ‘세계의 양쪽 눈’으로 알려진 거대한 두 제국의 충돌은 극단적 대립이었
다. 분쟁은 종교적 전쟁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마우리스 치하의 로마 군대는 이미 ‘동정녀 성모’를 표
어로 삼고 있었다. 602~628년에는 폭력적 분쟁이 관습적인 전선 전체를 무너뜨리고, 전면전에 돌입했
다. 페르시아 군대는 제국의 조직 깊숙이 파고들었다. 성지가 함락되었다.
시리아는 610년에, 팔레스타인은 614년에 빼앗겼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도덕적 충격을 주었고,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성 십자가 유물은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갔다. 예루살렘 함락의 ‘심리적 충격’은 오로
지 서기 410년에 로마가 봉쇄되었을 때 로마인들이 겪은 트라우마와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의
시계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이집트가 함락되었고, 다음 차례는 아나톨리아였다. 이후
로 소아시아 같은 몇몇 장소들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파괴는 광대하게 자행되었고, 최악의 상황이 눈에 보였다. 626년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콘스탄티노플 성
벽 앞에 이르렀다. 동시에 아바르족의 군대가 수도로 진격했다. 가장 어두운 시간 속에서 성안의 사람
들은 성모에게 의지했다. 성모의 성상이 거리를 행진했고, 거대한 성벽으로 향했다. 도시가 구원된 것
은 초자연적인 현상 같았다. 한편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공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와 성모의
상상을 로마 군대(그리고 상당수의 터키 동맹군)의 포장마차에 싣고, 그는 628년까지 동방 지역의 황
폐해진 나머지 지역들을 되찾았다. 아주 잠시, 옛날의 정치적 평형을 회복했다. 성 십자가는 의기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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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하게 예루살렘에 있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정치적 사건들은 종말론적 의미를 담아 창조적으로 해석
되었다. 다니엘서에 예언들이 기록된 이후로 유례가 없는 방식이었다. 이제 전 세계는, 종말론적 희망
의 숨을 줄여가면서, 정치적 사건들을 주시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우주적 중요성을 지닌 인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그가 돌려놓은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속도는 놀라
웠다. 로마와 페르시아가 피비린내 나는 대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안, 남쪽에서 무엇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아랍의 침략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중추로부터 동로마의 상
권 지역을 간단하게 분리시켰다. 아라비아에서 온 신앙의 군대가 레반트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의 가장
자리를 정복하고 통제하게 되면서, 로마 제국을 분할했다.
정복은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엄청난 규모의 강탈 행위를 실현하면서
도 대규모 파괴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야르무크 전투(636)에서 패한 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군대를
후퇴시켰다. 역병, 기후 변화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이 연속적으로 밀어닥치면서 로마 제국의 생명력이
고갈되었다는 신호였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십 년 동안 빼앗겼다. 당대 사람들이 극
적인 변화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렸다.
630년대와 640년대에 계시적 종말론 운동이 동방 지역을 정복한 것이 로마 제국 몰락의 마지막 장면
일 것이다. 동쪽 영토가 분리되면서, 제국은 마지막으로 활력이 남아 있던 대부분 지역을 잃었다. 지중
해 세계는 분해되었다. 로마 제국은 비잔틴의 잔재로 축소되었고, 남겨진 영토는 허약하고 가난했다.
이슬람의 칼리프가 지배하는 지역은 이제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과학적 성과에서 가장 활기찬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렇게 남을 운명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문명의 핵심이자 교차로라는 지위
를 다시 한 번 획득했다. 라틴 서부의 분열된 지역은 유라시아의 뒷골목이 되었다. 그들은 문명의 바
깥 궤도에서 기나긴 순환을 거칠 것이다. 다시는 구대륙의 에너지를 연결해 하나의 권력으로 통합하는
범지중해 제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로마 제국은 언제나 허약함과 회복 탄력성 사이에서 불안정한 상태였고, 마침내 해체의 힘이 우세해졌
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서 요동치는 기후 변동과 질병이라는 요소는 로마의 종말을 부른 숨겨진 발
톱이나 치명적 선택을 찾고자 하는 유혹을 조금이나마 제거해준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시간이 되면
저절로 드러나는 본질적 결함으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다. 혹은 더 현명한 조취를 취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경로로 잘못 들어선 불필요한 결과도 아니었다. 로마의 운명에 대한 통찰 끝에 기번은
제국이 멸망한 것에 놀란 게 아니라 오히려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던 것’에 경탄하고야 만다.
그 뒤에 이제까지 우리가 로마에 대해 알게 된 모든 것은, 오직 그러한 인간적 정서를 확인하고 심지
어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최근의 발견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기는 했다. 어쨌든 제국은 끊이지 않
는 역경과 마주하면서 굳건히 버텼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제국의 사람들은 견뎌냈다. 마침
내 제국의 뼈대가 더는 견뎌낼 수 없는 필멸의 운명을 맞이할 때까지, 그리고 잿더미 속에 남은 풍요
로운 토양 속에서 자랑스러운 새 문명이 자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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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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